제목: 절대쌍웅 제1권 (전3권)
지은이: 군옥당
- 차례 -
백화촌(百花村)의 소년
천랑곡(天狼谷)
환락도(歡樂島)
밤의 지배자, 야우혼(夜雨魂)
광화서생(狂花書生)
천의장 비무대회(天意壯 比武大會)
파멸(破滅)
천외약관(天外藥館)
용(龍)의 길



백화촌(百花村)의 소년
방(房), 이 작은 방은 실로 괴이했다.
사방 너비가 삼 장(丈) 남짓한 이 방은 도대체 문은 물론이거니와 조그만 바람구멍 하나 나 있지 않았다. 더욱이 으레 방에 있어야 할 침상이나 주전자, 찻잔, 심지어 방을 장식하는 장식품 하나 없었다. 
다만 밀폐된 공간 중앙에 탁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 탁자엔 지금 한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다.
방도 이상했지만 사람은 더욱 이상했다. 
일신에 걸친 것은 무릎까지 덮는 긴 회색장포였다. 
표정 하나 없이 밀납처럼 창백한 얼굴과 얼굴 위로 길게 그어진 검흔(劍痕)은 섬뜩한 공포감마저 일게 했다. 
그는 탁자의 일부분인 양 오랫동안 돌조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섬뜩한 빛을 뿌리며 움직이는 그의 두 눈만 아니라면 아무도 그를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눈은 탁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탁자에는 주사빛 장검 한 자루가 흐릿한 유등(油燈) 불빛 아래 을씨년스런 귀기(鬼氣)를 뿜어 내고 있었는데, 그 옆에는 글씨가 빽빽이 채워진 양피 첩지(帖紙)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회포중년인의 눈은 지금 양피지의 글씨를 훑고 있는 중이었다.
<밀명(密命) 제이천사백칠십삼호(第二千四百七十三號).
천하지로(天下支路) 이십사 호에 관한 건(件).
내용：소천존(小天尊) 천하출도(天下出道) 명분을 위한 인물 천거를 승낙함.
대상：백운향(白雲香).
나이：십칠 세 가량.
거처：낙양성(洛陽城) 백화촌(百花村).
내력：버려진 고아(孤兒)로 백화촌의 유노대(柳老大)가 데려다 키움. 
성격：외유내강(外柔內剛). 그러나 불의(不義)를 보면 참지   못함. 
개요：소천존의 천하출도 명분을 세우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인물로 판정됨. 그를 회유할 것. 
단 본문의 행적이 드러날 요소는 모두 완벽하게 제거할 것.
기타：자금, 인원은 무한대 제공.
천문(天門) 제삼태상(第三太上) 친서(親書)> 
회포중년인이 양피지에 시선을 둔 채 중얼거리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태상께서 만족하실 줄 믿었다. 백운향, 그놈이야말로 일천 명의 대상자 중 나 귀제갈(鬼諸葛)이 고르고 고른 최고의 적임자이니까."
그의 음성이 방 전체에 나직이 퍼져 나갔다.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가뜩이나 스산한 밀실의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그의 시선이 양피지에서 떨어져 섬뜩한 안광을 번뜩이며 허공으로 옮겨졌다.
"잔혼(殘魂), 제이단계(第二段階)의 실행에 들어간다."
"존…명!"
허공에서 삭막한 음성이 울렸다. 그 음성은 들렸다 싶은 순간 어느새 길게 꼬리를 물며 아득히 멀어져 갔다.
자칭 귀제갈이라 부른 회포중년인이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파지지직－!
회포중년인의 두 손에서 새파란 불꽃이 피어 오르더니 삽시간에 양피지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삼매진화(三昧眞火)! 
일 갑자(甲子) 이상의 순양내공(純陽內功)을 지닌 절정고수(絶頂高手)만이 펼칠 수 있다는 내가수법(內家手法)이 펼쳐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회포중년인은 내공이 노화순청(爐化純淸)의 경지에 이른 절정고수임에 틀림없었다.
양피지의 재가 탁자 위로 눈처럼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회포중년인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가느다랗게 떠올랐다.
음모(陰謀)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그런 미소였다.
백화촌(百花村). 
이곳은 꽃의 마을이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수십 채의 가옥들, 수십만 평의 대지를 가득 메운 채 향기를 진동시키고 있는 기화이초(奇花異草)들, 그리고 주위에 은은히 깔려 있는 안개. 
선경(仙境)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정경이다.
그러나 백화촌의 그 아름다움 속엔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참혹한 고통이 숨겨져 있었다. 그 이유는 이곳이 나병(癩病：문둥병), 악창(惡瘡), 혈종(血腫) 등의 불치병자(不治病者)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백화촌은 천형(天刑)의 저주로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여 일구어 낸 곳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백화촌에 불치병자들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건강한 신체를 지녔음에도 불치병자들과 어울려 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백운향(白雲香)이라는 이름의 소년이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아침 햇살은 눈이 부실 듯 찬란했고, 바람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청량했다.
백운향은 심호흡을 하듯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미풍에 묻어 오는 은은한 꽃향기가 그의 심신을 절로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행색은 매우 남루했다. 
일신에 걸친 갈의(褐衣)는 낡을 대로 낡아 허름하기 이를 데 없었고, 얼굴은 제대로 다듬지 않아 거칠고 거무튀튀했다. 
그러나 그의 이목구비만은 보기 드물게 뚜렷했다.
한 쌍의 짙은 검미(劍眉) 아래 아침 햇살처럼 밝게 빛나는 두 눈, 우뚝한 코, 한 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 등… 거칠고 거무튀튀한 피부만 아니라면 여인의 심금을 울릴 만한 용모였다.
그의 손엔 한 자루 검(劍)이 들려 있었다. 
두 자 남짓한 그 검은 무딜 뿐 아니라, 이마저 듬성듬성 빠져 예리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기수식(起手式)의 자세로 그 검을 바라보는 백운향의 두 눈은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팔랑! 나뭇잎 하나가 공중에서 떨어져 내렸다. 
순간, 그의 발끝이 땅을 박찼다.
"유성추혼(流星追魂)!"
파파팟! 비록 무딘 검이었지만 검은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떨어지는 나뭇잎을 종횡(縱橫)으로 연신 베어 갔다.
푸스스… 나뭇잎은 정확히 여덟 조각으로 베어져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놀라운 쾌검초식(快劍招式)이었다.
하지만 백운향의 얼굴엔 조금도 기쁜 기색이 없었다.
"또 여덟 개.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
그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한 줄기 너털웃음이 들려 왔다.
"허허헛, 너란 녀석은 정말 욕심이 많구나. 난 유성추혼을 수련한 지 십 년 만에야 겨우 여덟 조각을 낼 수 있었는데, 이제 고작 일 년 수련한 후에야 그런 놀라운 성취를 보였는데도 만족하지 못하다니……."
두 사람이 느릿하게 공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백발이 듬성듬성 빠지고 얼굴엔 누런 딱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흉한 몰골에 지팡이를 짚은 백포노인과, 눈만 내놓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흑포(黑布)를 뒤집어쓴 건장한 체구의 흑포인이었다. 
모습과 행색으로 보아 백화촌의 나병환자들임에 틀림없었다.
백운향이 흑포인을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일 년을 배우든, 십 년을 배우든 기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팔숙(八叔)처럼 단 일 초식에 열여섯 조각을 내는 겁니다. 그런 빠르기라면 어제 같은 날도 그놈들을 따끔하게 혼내 줄 수 있었을……."
말을 잇던 백운향이 갑자기 말꼬리를 흐리며 백포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백포노인은 백화촌의 촌장인 유노대라는 인물로서, 십이 년 전 추위와 동상으로 죽어 가던 어린 백운향을 살려 준 구명(救命)의 은인(恩人)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유노대는 백운향에게 친조부(親祖父) 이상의 존재가 되었고, 백운향에 대한 유노대의 사랑 또한 몹시 지극했다. 
그러나 백운향을 바라보는 유노대의 노안(老眼)엔 지금 은은한 노기가 떠올라 있었다.
"놈! 또 사고를 쳤구나."
"전 다만 나약한 아녀자들을 괴롭히는 그놈들을 두고 볼 수가 없어……."
"네가 천하대협(天下大俠)이라도 된다드냐? 네가 아니라도 그런 놈들을 혼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백운향이 어깨를 으쓱했다.
"소위 강호인이란 작자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던데요."
유노대가 지팡이로 땅을 찍으며 두 눈썹을 칼끝처럼 곧추세웠다.
"이놈이 그래도……!"
백운향은 움찔했다. 
여지껏 유노대가 이토록 화내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노대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네놈에게 무예를 가르친 건 오직 심신(心身)을 단련하고 일신(一身)을 보호하게 하기 위함이었지,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
백운향은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중요한 건 네가 익힌 무공이 고작해야 삼류무공(三流武功)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네가 익힌 무공만을 믿고 함부로 남의 일에 참견하고 나섰다가는 비명횡사하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흑포인이 걸걸하게 웃으며 나섰다.
"허헛, 삼류무공이라니요? 저도 왕년엔 저 녀석이 익히고 있는 칠성검법(七星劍法) 하나만 가지고도 천하를 주유(周遊) 했었습니다. 아마 나 칠성검객(七星劍客) 뇌곤(雷坤)의 이름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닥치게! 저 녀석이 저 모양이 된 건 다 자네가 헛바람을 불어 넣은 탓이네."
유노대의 추상 같은 호통에 흑포인 뇌곤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실 뿐 더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노대가 냉엄한 시선으로 백운향을 돌아보았다.
"오늘부터 무공수련을 금한다."
백운향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유노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곤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마디도 항변(抗辯)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무릎에 대고 힘을 주었다.
뚝! 검이 반 토막 나며 부러졌다.
백운향이 유노대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용서하십시오, 할아버지. 다시는 할아버지의 심려를 끼쳐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유노대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차갑게 돌아섰다.
"또다시 불상사를 일으킬 시에는 백화촌으로 돌아올 필요도 없다. 백화촌은 널 받아 주지 않을 테니까."
퇴촌령(退村令). 
유노대는 최후의 경고로 퇴촌령이란 극약 처방까지 내린 것이다.
유노대와 뇌곤의 모습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그러나 백운향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르고 망연히 부러진 검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뇌곤은 불만스런 얼굴로 연신 툴툴거렸다.
"전 아무리 생각해도 촌장 어르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아이가 의협심이 강하다는 건 칭찬받을 일이지, 전혀 나무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유노대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더구나 퇴촌령까지… 촌장 어르신께서 얼마나 운향일 아끼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심할 것 없네." 
유노대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뇌곤이 정색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그 아일 떠나 보낼 생각으로 그러시는 거라면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그 아이가 절세기재(絶世奇才)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삼류무공에 지나지 않는 칠성검법이라지만 일 년 만에 저토록 능숙하게 시전하는 사람은 여태 보지 못했으니까요. 차라리 이곳에서 가까운 무당(武當)이나 화산(華山), 아니면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로 보내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해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유노대도 백운향의 기재됨을 안다. 
사서삼경(四書三經)뿐 아니라 각종 기서(奇書)들, 심지어는 백화촌에서 기르는 수천 종의 화명(花名)과 그 꽃들의 특성(特性) 등 꽃에 관한 한 적수가 없다고 자부하는 유노대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 줄줄 외워대던 백운향이 아니든가.
유노대가 무겁게 말을 받았다.
"내가 그 아일 아끼는 것도 사실은 그런 연유 때문인지도 모르네. 하지만 자넨 모르네."
"제가 뭘 모른다는 겁니까?"
뇌곤은 다소 화가 난 듯 따져 물었다. 
그러나 유노대는 앞을 응시한 채 묵묵히 걷기만 했다.
뇌곤이 답답하다는 듯 다그쳤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도대체 제가 뭘 모른다는 건지."
선뜻 대답을 못하고 걸음을 옮기던 유노대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그늘을 드리우며 허공을 향해 던져졌다.
"자네도 알다시피 노부는 관상(觀相)을 조금 볼 줄 아네."
"누가 그걸 몰라서 드리는 말씀입니까? 제가 알고 싶은 건……."
말을 잇던 뇌곤이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흠칫했다. 그는 긴장된 눈빛으로 유노대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 아이에게 무슨 불길한 조짐이라도.……?"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아이에겐 살(殺)이 끼어 있네. 그 살이 사라지기 전에 공연히 강호에 나섰다간 그 아이에게 닥칠 건 오직 죽음뿐이네."
뇌곤은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불신에 찬 눈으로 유노대를 바라보았다. 
유노대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유노대의 예언이 그토록 빨리 백운향에게 닥치리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덜거덕－ 덜거덕－! 
누런 황소가 끄는 마차 한 대가 낙양성으로 향하는 대로(大路)를 느릿하게 가고 있었다.
향기로운 꽃바구니가 가득 실려 있는 마차에는 죽립을 깊숙이 눌러 쓴 마부가 고삐를 발끝에 건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문득 마부가 죽립을 슬쩍 들어올리며 낭랑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누렁아, 항상 오가던 길이니 너 혼자서도 잘 갈 수 있겠지? 난 잠시 눈 좀 붙일 터이니 성에 도착하면 깨우거라."
마부는 다름아닌 백운향이었다.
백운향은 다시 죽립을 얼굴에 덮어 쓰는가 싶더니 이내 잠이 든 듯 코를 골아대기 시작했다.
황소는 백운향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터벅터벅 대로를 따라 걸어갔다.
백화촌에서 키운 국화(菊花), 장미(薔薇), 부용(芙蓉) 등의 꽃은 탐스럽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짙은 향기로 인하여 하남(河南)뿐만 아니라 하북(河北)까지도 그 명성(名聲)이 자자했다. 비록 천형의 불치병자들이 가꾼 꽃이긴 하지만 그 꽃의 품질 하나만은 천하에서 아무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뛰어났던 것이다.
자연 많은 꽃 애호가(愛好家)들이 백화촌의 꽃을 보기 원했다. 그리하여 낙양성의 한 도매상포(都賣商鋪)의 주문에 의해 백화촌의 꽃은 천하 각처로 팔려 나가게 되었다.
원래 백화촌의 사람들은 낙양성 내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백화촌 사람들이 꽃들을 십 리 밖에 놔 두고 가면 장사꾼들이 와서 가져 가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운향이 마차를 몰고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백운향이 직접 낙양성까지 꽃을 갖다 주었으며, 그 일은 백운향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하지만 오늘은 유노대는 다른 날과는 달리 백운향에게 어떤 일에도 절대 나서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고삐를 내주었다. 
물론 백운향도 자신과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어떠한 분란(紛亂)에도 결코 말려들지 않겠다고…….
낙양(洛陽).
중원(中原)의 대읍(大邑)일 뿐 아니라 주(周)나라를 위시하여 역대의 제왕(帝王)들이 도읍으로 삼았던 고성(古城). 
넓고 좁은 길이 종횡(縱橫)으로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깔린 성 안은 역시 대읍답게 오가는 길손과 장사치, 그리고 무림호걸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백운향의 마차가 낙양 성내에 들어선 것은 사람들이 점심 식사를 하려는 정오(正午)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백운향이 탄 마차가 백화촌에서 온 마차인 줄 아는지 슬슬 피했다.
덕분에 백운향은 그 복잡한 대로를 쉽게 가로질러 도매상포인 대흥상국(大興商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운향은 마차에서 내려 꽃바구니를 품에 가득 안고 대흥상국 안으로 들어섰다.
점원들을 감독하고 있던 화복 차림의 뚱뚱한 대흥상국 주인 왕구삼(王丘三)이 백운향을 발견하고는 대뜸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이제서야 꽃을 가져오면 어떡하나? 꽃은 한번 시들면 팔 수 없다는 걸 몰라서 이러는 건가?"
백운향이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빨리 오려는데 그만 마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으니 더 시들기 전에 어서 꽃이나 옮겨!"
"알겠습니다."
백운향은 품에 안고 있던 꽃바구니를 내려놓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이윽고 백운향이 마차의 꽃바구니를 모두 옮겨 놓자 왕구삼이 은자 꾸러미 하나를 내던지듯 건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아예 거래를 끊어 버릴 테니 알아서 해!"
"염려 놓으십시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아니면 백화촌 꽃을 팔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명심하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됐으니 가 봐."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백운향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왕구삼의 퉁명스런 얼굴을 뒤로 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아악!"
돌연 어디선가 소녀의 비명 소리가 울려 왔다. 
순간, 백운향은 뭔가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사람처럼 움찔 몸을 떨었다. 
'상관하지 말고 어서 가자.'
백운향은 자신을 재촉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악! 공…공자님 제발……!"
이번엔 늙은 여인네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백운향은 비명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온 신경이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노대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얼른 마차 위로 올라갔다.
바로 그 순간, 처음에 났던 소녀의 비명 소리가 다시 울렸다.
"아…아악! 어머니!"
그 뒤로 흉물스런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흐흐흐! 고것 참, 속살 맛이 나긋나긋한 게 사내 깨나 밝히겠구나. 어떠냐? 이 도련님과 운우지정(雲雨之情)의 회포를 풀어 봄이……."
"핫하하!"
순간 백운향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백운향은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백운향은 마차에서 다시 내려서며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용서하십시오, 할아버지. 딱 한 번만 할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겠습니다.'
진대공자(秦大公子) 진옥기(秦玉麒).
그는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낙양 제일갑부(第一甲富) 진노태야(秦老太爺)의 두 아들 중 첫째로서, 제 아비의 금력(金力)을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특히 제법 반반한 여자를 보면 여염집 처녀이든, 유부녀이든 상관치 않고 욕을 보이는 통에 탐화태세(貪花太歲)란 악명(惡名)으로도 유명했다.
진노태야가 황금의 힘을 이용해 뒤를 무마해 큰 소동이 벌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에게 피해를 본 여인네는 수를 헤아릴 셀 수 없이 많다.
해서 사람들은 아예 여인들이 밖으로 나다니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정도였다.
오늘도 그는 성내를 헤집고 다니며 쓸 만한 계집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오전 내내 허탕만 치던 그는 허기도 채우고 술도 한 잔 할겸 해서 대흥상국 맞은편에 위치한 귀빈루(貴賓樓)라는 주루에 들어섰는데, 때마침 그곳에서 노래를 팔던 소녀가 그의 마수에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진옥기는 지금 노래를 파는 소녀를 억지로 자기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있었다.
십칠팔 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는 비록 옷 차림새는 남루하기 그지없었지만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진옥기의 오른손이 소녀의 상의 옷자락을 헤집고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아악!"
그의 손이 소녀의 어디를 만졌는지 소녀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흐흐흐! 좋아, 아주 좋아……."
진옥기는 만족스런 얼굴로 음탕한 미소를 연신 흘려냈다.
그의 곁에 있던 같은 또래의 대여섯 명의 한량(閑良)들 역시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탐욕스런 시선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주루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진옥기의 추잡한 작태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노태야의 막강한 금력(金力)과 영향력 때문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수치심과 치욕으로 연신 비명을 질러대며 혼절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으흐흑! 어…어머니……."
그녀 앞에는 비파를 든 소박한 행색을 한 오십대 청의부인이 울상이 된 채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었다.
청의부인은 연신 진옥기를 향해 굽신굽신 절을 했다.
"공자님, 용서해 주십시오. 이 늙은것이 어린 딸년을 데리고 타향에 왔다가 친척을 만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노자가 떨어져 하는 수 없이 딸년의 목소리 품이나 팔아 여비를 마련할 요량이었을 뿐입니다. 제 딸년은 그런 여자가 아니니 제발……."
하지만 진옥기에게 그녀의 말 따위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오히려 그의 두 눈은 더욱 더 뜨거운 열기(熱氣)로 타오르고 있었다.
쩔렁! 진옥기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족히 이삼십 냥쯤 되어 보이는 은자 뭉치를 청의부인 앞으로 내던졌다.
"이걸 여비(旅費)에 보태 써라. 대신 네 딸은 내가 보살펴 주마."
"공…공자님! 어찌 딸년을 팔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절대로 아니 될 말씀입니다."
청의부인의 안색이 충격으로 하얗게 질리며 황급히 진옥기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량들에 의해 그녀는 이내 떼어졌다.
청의부인은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사람들아!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제발 내 딸 좀 구해 주오. 아이고!"
하지만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옥기는 청의부인을 뒤로 하고 이미 혼절해 버린 소녀를 양팔로 들쳐안은 채 이층 객잔(客棧)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한 줄기 음성이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멈추시오!"
"감히 어떤 놈이 본 공자의 일에 나서……."
진옥기는 흠칫하며 음성이 들려 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층 객잔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허름한 갈의를 걸친 소년 하나가 단호한 눈빛으로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다름아닌 백운향이었다.
순간, 주루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또 저 녀석이군."
"도대체 보통 오지랖이 넓은 게 아니군. 일이 생기는 곳마다 빠지지 않고 나타나다니 말야."
중인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사태를 주시했다.
진옥기는 어이가 없었다.
"백화촌의 문둥이 새끼가 감히 뉘 안전이라고 함부로 나서는 거냐? 당장 꺼지지 못해!"
백운향은 그의 엄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냉엄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어서 그 여자를 놓아 주시오."
"뭐야? 이 문둥이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진옥기는 혼절한 소녀를 한 한량에게 건네기가 무섭게 일격에 요절을 내버리겠다는 듯 백운향을 향해 버럭 일 장을 갈겨 왔다.
우우웅! 살벌한 경풍이 백운향을 향해 폭사해 왔다.
그러나 백운향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오숙(五叔)에게서 배운 난화십삼장(蘭花十三掌) 중 마지막 초식인 난화탈명(蘭花奪命)을 펼치며 쌍장을 마주쳐 갔다. 
휘이잉! 난화십삼장이 비록 누구나 아는 삼류무공(三流武功)이긴 했지만 그걸 펼치는 백운향의 손속은 사뭇 매서운 위세를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주루 한 구석. 
어둠의 한 부분인 듯 싶을 만큼 온통 흑색 일색(一色)인 흑의죽립인 하나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진옥기의 뒤통수에 무형(無形)의 지풍(指風)을 날렸다. 
하나, 그 동작이 너무도 빠르고 은밀하여 이를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아앙! 진옥기와 백운향이 발출한 두 줄기 경풍은 허공에서 맹렬히 부딪쳤다.
백운향은 가벼운 충격을 느끼며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와는 달리 진옥기의 몸은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뒤로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쾅! 와당탕! 진옥기의 몸이 탁자를 박살내며 나뒹굴었다. 
그는 두 눈을 허옇게 뒤집어 뜨고 있었는데, 그의 뒤통수에선 붉은 선혈(鮮血)이 뭉클뭉클 배어 나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백운향에게 있어서도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한량 하나가 진옥기의 상태를 살피더니 혼비백산하며 소리쳤다.
"죽…죽었다! 진대공자가 죽었다!"
주루 안에 있던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일제히 백운향에게 쏠렸다.
'죽었다고……?'
백운향은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죽이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순 장내에는 숨막힐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이때 조금 전 진옥기에게 암수(暗手)를 날렸던 흑의죽립인이 조용히 주루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저 문둥이 새끼가 진대공자를 죽였다!"
"살인자……!"
진옥기와 함께 있던 한량들이 미친 듯이 백운향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백운향은 비로소 황망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래를 팔던 모녀는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싸움이 벌어진 틈을 타 몸을 피한 것이 분명했다.
백운향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는 무작정 몸을 돌려 주루 밖으로 뛰어나갔다.
"저놈을 잡아라!"
"살인자를 잡아!"
어수선한 외침 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그러나 백운향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누런 황톳물이 넘실대며 흐르는 대하(大河), 황하(黃河)였다.
백운향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추적해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운향은 망연히 황하를 돌아보았다.
강물 위로 죽은 진옥기의 시신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내가 살인을 하다니……!'
백화촌. 
그 입구에 세 사람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인사건이 났던 귀빈루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던 흑의죽립인과 노래를 파는 소녀, 그리고 소녀의 모친인 청의부인 등 세 사람이었다.
한데, 소녀와 청의부인의 모습은 주루에서 보았던 그 나약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냉혹한 살기가 살얼음처럼 깔려 있었다.
문득 검은 죽립 사이로 흑의죽립인의 시퍼런 안광이 서릿발처럼 뻗어 나왔다.
"죽여라!"
소녀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
"모두 말인가요?"
"그렇다."
말을 받는 흑의죽립인의 음성은 단호했으며, 이미 진득한 피내음을 싣고 있었다.
파파팟!
"커억!"
"윽!"
소녀와 청의부인의 독수(毒手)가 뿌려질 때마다 밭에서 꽃을 가꾸고 있던 백화촌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갔다.
칠성검객 뇌곤을 비롯한 무공을 아는 몇몇 백화촌 사람들은 미처 무기를 마련하지 못해 곡괭이와 호미를 들고 대항해 봤지만 무력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백여 명의 백화촌민. 그들이 모두 불귀(不歸)의 객이 되는 데는 일 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백화촌에선 이제 꽃향기 대신 피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백화촌장 유노대는 엄청난 참상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잔혹한 살수(殺手)를 펼치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서 있는 흑의죽립인을 비롯한 삼 인을 노려보며 부르르 전율했다.
"천…천벌(天罰)이 무섭지 않느냐? 저들은 무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늘……."
흑의죽립인이 스산한 어조로 말했다.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유노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백화촌이 당신네들에게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없다. 잘못이 있다면 백운향이라는 아이를 키웠다는 것뿐……."
유노대는 망치로 뒤통수를 강타당하는 듯한 충격에 몸을 비틀거렸다.
살(殺)! 그가 백운향의 얼굴에서 보았던 살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났음을 그는 직감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가?'
유노대는 나병 딱지로 흉측해진 얼굴에 비장한 기색을 띠우며 짚고 있던 지팡이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노부도 죽일 테지?"
"물론."
"허허! 그토록 기다려 온 죽음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왠지 허무하군."
유노대는 한 줄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노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흑의죽립인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팔방풍우(八方風雨)!"
콰아아아－! 지팡이가 만들어내는 돌풍은 가히 태산(泰山)을 쪼갤 기세였다. 
수십 수백의 지팡이 그림자는 부챗살처럼 퍼지며 흑의죽립인을 박살낼 듯 쏘아져 갔다. 
그러나 흑의죽립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본래의 자세 그대로 서서 냉소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천풍십팔곤(天風十八棍)! 후훗, 죽은 줄 알았던 백농초자(白農草子) 유백겸(柳栢謙)이 문둥이가 되어 백화촌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유백겸, 당신이라면 내 검을 받을 자격이 있지."
그는 허리춤에 찬 검을 천천히 뽑았다. 지극히 느린 손놀림이었다.
그러나 검을 뽑았다 싶은 순간, 검은 이미 한 줄기 섬광으로 화해 무섭게 덮쳐 오던 지팡이 그림자를 뚫고 유노대를 향해 폭사되어 갔다.
팟－! 단지 그것뿐이었다. 
흑의죽립인은 어느새 검을 검집에 꽂으며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유노대는 미심혈(眉心穴)에 실낱 같은 핏줄기를 흘리며 두 노안에 불신의 빛을 가득 떠올리고 있었다.
"당…당신은… 섬전…마…신(閃電魔神)……."
쿵! 그의 몸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벼락 맞은 고목처럼 허물어졌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천랑곡(天狼谷)
백운향은 넋이 나간 얼굴로 백화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유노대의 엄명을 거역한 것이 몹시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백화촌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자초한 화(禍). 퇴촌령이 아니라 그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다.'
백운향은 굳은 얼굴로 백화촌으로 들어섰다. 순간, 백운향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항상 갖가지 꽃들에 둘러싸여 선경(仙境)을 방불케 하던 그 백화촌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곤 잿더미뿐이었다.
타다 남은 초옥과 화목(花木)에선 아직 불꽃이 내비치고, 살 타는 냄새인 듯 싶은 역겨운 노린내가 바람결에 물씬 실려 왔다.
백운향은 이 믿을 수 없는 참상에 백화촌의 폐허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두 손으로 잿더미를 마구 헤집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 자신을 친손자처럼 대해 주던 유노대도, 불치의 병으로 버림받은 삶을 살아가던 백화촌 사람들도, 자신의 땀냄새가 배인 조그만 초옥도, 항상 자신을 반기며 활짝 웃던 갖가지 꽃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모두 타 버린 것이다. 
백운향은 이것이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참상이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잿더미 한가운데에 서서 넋을 잃고 주위를 둘러보던 백운향의 신형이 그 자리에 힘없이 허물어졌다.
"으…으으……!"
그는 양손에 아직도 불씨가 남은 잿더미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뜨겁다는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그 동안 자신에게 정을 쏟아 준 유노대의 헝클어진 백발이 눈물처럼 다가들 뿐이었다.
백운향은 잿더미를 헤치고 유노대를 향해 기어갔다. 돌연 그의 두 눈이 격정으로 파르르 떨렸다.
칠채 꽃신. 
유노대의 왼손에는 일곱 가지 색깔이 은은히 빛나고 있는 앙증맞도록 조그마한 꽃신이 완강하게 쥐어져 있었다.
그 꽃신은 백운향에게 있어 신부(神符)와도 같은 물건이었다. 
그 꽃신은 백운향의 아버지가 죽기 직전 그에게 남겨 준 유일한 유물이었던 것이다.
백운향은 와락 꽃신을 감싸안았다. 
문득 백운향의 뇌리로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아득한 어린시절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두운 밤하늘로 치솟는 거대한 불기둥과 처절한 비명성, 그리고 흉폭한 광소성…….
그것은 백운향의 행복했던 어린시절을 빼앗아 간 참혹한 추억이었다.
"우욱!"
백운향은 고통스런 신음성을 흘리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지난 과거의 기억은 물론, 눈앞의 참혹한 현실을 애써 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문득 백운향의 처절한 얼굴 위로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삭막하도록 메마르고 공허한 미소였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섬뜩하리만치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유노대의 손에서 가까스로 꽃신을 빼내 품 속에 갈무리한 후,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 하나를 집어 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집어 든 검은 팔숙인 칠성검객 뇌곤의 애검인 칠성검(七星劍)이었다.
그는 칠성검을 든 채 비틀비틀 어둠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가장(秦家莊).
구중궁궐(九重宮闕)을 방불케 하는 진노태야의 이 거대한 저택은 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무겁기 이를 데 없었다. 바로 진옥기의 죽음 때문이었다.
진노태야는 대청 앞에 서서 충격과 분노에 찬 얼굴로 대청에 안치된 관(棺)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노태야에게 있어 진옥기는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비록 파락호나 다름없는 망나니에 불과했으나, 진노태야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한데, 진옥기가 다른 사람도 아닌 천형의 불치병자들이 모여 사는 백화촌에서 자란 비천한 소년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진노태야가 어찌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진노태야는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모르고 관만 바라보다 이윽고 몸을 돌렸다.
대청 앞 너른 뜰에는 무기를 하나씩 든 오십여 명의 건장한 장한들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 운집해 있었다.
진노태야가 분노에 찬 음성으로 장한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부터 백화촌으로 간다! 놈을 발견하면 사정 볼 것 없으니 가차없이 죽이도록! 놈을 가장 먼저 죽이는 자에게 황금 십만 냥을 포상하겠다!"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던 장한들이 일제히 탐욕스럽게 눈빛을 빛냈다. 
황금 십만 냥이라면 삼대(三代)에 걸쳐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는 엄청난 거금이 아닌가.
장한들은 행여 뒤질세라 앞다투어 대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처 대문을 나설 새도 없이 일제히 멈춰 서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뜻밖에도 백운향이 스스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도 손에 한 자루 검을 잔뜩 움켜쥔 채 원한과 분노에 사무친 얼굴로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백운향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며 장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푸욱!
"으윽!"
섬뜩한 둔음과 함께 백운향과 가장 가까이 서 있던 황의장한의 입에서 참혹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운향의 느닷없는 공격에 황의장한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검에 의해 가슴을 깊숙이 꿰뚫리고 말았던 것이다.
백운향은 황의장한의 몸에서 검을 쑥 뽑아냈다. 순간, 한 줄기 피분수가 백운향의 얼굴로 흩뿌려졌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없다는 듯 계속해서 장한들을 향해 검을 휘둘러대며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나 백운향은 오늘 이 검으로 과연 몇 명이나 죽일 수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
백운향의 살기등등한 외침에 장한들은 선뜻 공격을 못하고 피하기에 급급했다. 절로 간담이 서늘해진 것이다.
그들은 이미 황의장한이 백운향의 단 일격에 피를 뿌리며 죽어 간 것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이때 돌연, 한 줄기 분노에 찬 외침이 싸늘하게 울려 퍼졌다.
"한심한 놈들 같으니……!"
파악! 동시에 한 줄기 음유(陰幽)한 장력(掌力)이 백운향을 향해 노도처럼 덮쳐들었다. 
진노태야가 참지 못하고 공격해 온 것이다.
비정한 살기를 피워 올리던 백운향의 안색이 더욱 차갑게 굳어지며 허공에 검풍(劍風)을 일으켰다.
휘이익! 
하나, 부질없었다. 
겨우 삼류무공을 익히고 있는 백운향이 무림고수인 진노태야의 장력을 받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펑! 격타음과 함께 백운향의 몸이 낙엽처럼 날아가 쿵, 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우욱!"
백운향은 한 사발이나 됨직한 핏덩이를 왈칵 토해냈다. 그러나 백운향은 떨어질 때보다 더욱 빨리 일어났다.
그는 재빨리 진노태야를 바라보았다. 
진노태야가 치를 떨며 버럭 소리쳤다.
"어서 놈을 죽이지 않고 뭣들 하고 있는 거냐?"
추상 같은 호통에 서로 눈치만 살피던 장한들이 백운향을 향해 일제히 덮쳐들기 시작했다.
"우와아!"
"죽어라, 이 문둥이 새끼!"
퍽! 퍽! 퍽! 피가 튀고 살이 튀어 올랐다. 
그것은 대부분 백운향의 피였고 살점이었다.
백운향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을 베이면서도 손에 든 검을 마구 휘둘러댔다. 
하나, 백운향의 검에 베이거나 찔리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운향은 진노태야의 노도 같은 장력에 이미 엄중한 내상을 입고 난 후였으니까.
눈(眼). 
그 눈은 차갑게 빛을 발하며 어둠 속에서 은밀히 백운향의 혈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의 임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혈조공(血爪功)에 격중당하고도 저토록 버텨내다니… 진정 용(龍)이다. 한 마리 잠룡(潛龍). 크ㅋ, 저 정도 놈이라면 소천존의 천하출도를 수 년 앞당길 수 있다."
그 눈은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혈투를 벌이고 있는 백운향을 주시하더니 어느 한순간 냉혹하게 굳어졌다.
"잔(殘), 혼(魂), 랑(狼)… 보고 있느냐?"
"보고 있습니다."
대답하는 음성은 감정이 일체 배제된 무심냉막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모두 죽여라. 최선의 비밀은 죽음으로써 지켜진다."
"존명(尊命)!"
백운향의 전신은 이미 단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다. 
무참히 베이고 찢기어 전신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운향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댔다. 그런 그의 모습은 흡사 피 먹은 악귀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의 몸놀림은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띄게 둔해졌다.
그는 의식이 가물거림을 느끼며 무너지듯 털썩 쓰러졌다.
빈사상태… 그는 이제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장한들이 황금 십만 냥을 떠올리며 앞다투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돌연 서로 다른 세 종류의 검광(劍光)이 무지개 빛살처럼 장한들을 향해 폭사되었다.
번쩍! 츠츠츠츳! 파파파팟!
"으악!"
"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허공 가득 피와 살점들이 흩뿌려졌다. 그것은 장한들의 입과 몸에서 터져 나온 것들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난도분시되어 모조리 주검으로 돌변해 버린 것이다.
진노태야는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짧았다.
파아악! 어디선가 한 줄기 검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그의 몸을 반으로 갈라 놓고 있었던 것이다.
쿵! 그는 고목이 무너지듯 쓰러지며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른 장본인을 가까스로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자신의 앞에 한 회포중년인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당…당신은……?"
진노태야의 두 눈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그는 두 눈에 불신의 빛을 가득 떠올린 채 먼저 간 아들의 뒤를 따라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백운향은 눈을 떴다. 
별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까만 천 위에 황금사(黃金沙)를 뿌려 놓은 듯 찬란한 별무리가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백운향은 한동안 망연히 밤하늘을 응시하다가 문득 갈잎처럼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정말 오랜만이군. 이렇게 누워 별을 바라보는 것도……."
그의 두 눈에 언뜻 미미한 회상의 빛이 떠올랐다. 
아련한 그리움이 어린 빛이었다. 그러나 그 빛은 떠올랐을 때보다 더욱 빨리 사라졌다.
백운향은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려내며 몸을 일으켰다.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가 우두둑, 하고 들렸다. 
그러나 백운향은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몸에서 나는 소리인 양 한 올의 고통스런 기색조차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더욱 놀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게도 잿더미로 변한 백화촌의 폐허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불신과 의혹이 엇갈린 시선으로 망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춰졌다. 
밤의 어둠과 함께 밤을 닮은 한 사람이 소리 없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밤을 닮은 사내는 이내 백운향의 앞에 다가와 섰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리고 온유하게 백운향을 향해 내밀어졌다.
"몹쓸 운명이로군."
"……."
"그 운명을 내게 팔지 않겠느냐?"
"ㅋ……!"
백운향은 황량한 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희고 투명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섬섬옥수인 듯,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자아낼 정도로 깨끗한 손이었다.
밤을 닮은 사내가 다시 말했다.
"이것은 거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백운향은 자신이 한없이 빨려든다고 느꼈다. 
그러나 백운향은 자신의 그러한 감정을 굳이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밤을 닮은 사내가 말을 이었다.
"거래 기간은 이 년. 그러나 그 거래는 네가 날개를 다는 오 년 후부터 시작된다."
백운향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날개를 단다는 것은……?"
"오 년 안에 널 절세의 고수로 만들어 주겠다. 이건 거래에 대한 대가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떠냐? 네 운명을 내게 팔겠느냐?"
"좋소. 지금의 내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한번 내 운명을 당신에게 맡겨 보겠소."
밤을 닮은 사내의 입가에 언뜻 가느다란 회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거래엔 비밀을 지켜야 하니까."
밤을 닮은 사내의 희고 투명한 손이 백운향의 수혈(垂穴)을 가볍게 짚었다.
백운향은 갑자기 졸음이 밀려옴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애써 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구름을 탄다고 생각하며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워우…! 워우…우…우!
늑대의 울음 소리가 암천(暗天)을 귀기(鬼氣)롭게 흐르는  밤이다.
팽산(彭山)의 깊은 산중에 위치한 이곳은 늑대들만이 사는 곳이라 하여 천랑곡(天狼谷)이라 불리운다.
천랑곡의 늑대들은 보통 늑대보다 그 덩치가 크고 흉폭하기 이를 데 없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닌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감히 접근할 엄두조차 못 낸다.
한데, 그 천랑곡 입구에서 한 줄기 냉막한 음성이 울렸다.
"넌 이곳에서 수천 마리의 늑대와 세 달간 살아야 한다. 이 감각관(感覺關)은 장차 네가 이 년의 계약기간 동안 활동하는데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훗훗, 재미있겠구려."
뒤를 이은 것은 소년의 음성이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우리의 거래도 끝이라는 걸 명심해라."
냉막한 음성이 끝나자마자 회의인영 하나가 어두운 암공(暗空) 속으로 번뜩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러자 천랑곡 입구로 한 사람이 느릿하게 들어섰다. 
백운향이었다. 
일신에 짙은 흑의를 걸친 그의 허리춤에는 두 자 길이의 작은 소도(小刀) 하나가 달랑 매여 있었다.
밤하늘엔 한 조각 잔월(殘月)만이 떠 있다. 
잔월의 빛은 미처 대지를 밝히기도 전에 허공에서 흩어져 버렸다.
백운향의 모든 신경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의 사만팔천 모공(毛孔)으로 쏠렸다. 언제 어디서 늑대들이 덮쳐들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우우우! 워우우우!
낯선 침입자를 경계라도 하듯 늑대의 울음 소리는 사방팔방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백운향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움직임과 함께 수많은 인광(燐光)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와 함께 코끝에 느껴지는 비릿한 노린내.
어느새 늑대들이 백운향의 주위를 포위한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한 올의 허점만 있어도 늑대들은 가차없이 공격해 올 것이다.
그것을 아는 백운향은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더욱 긴장했다. 
너무 긴장한 탓인가? 발끝이 나무 등걸에 걸리며 그의 몸이 쓰러질 듯 기우뚱했다. 
그 순간이었다.
카우우우! 기회를 노리던 늑대 한 마리가 흉폭한 포효성(咆哮聲)을 토해내며 백운향을 향해 빛살처럼 덮쳐 왔다.
백운향은 몸의 중심을 바로 잡을 겨를도 없이 우수(右手)를 뻗어 허리춤의 소도를 잡았다. 
이어 바닥으로 몸을 굴림과 동시에 덮쳐 오는 늑대를 향해 소도를 찔러 갔다.
푸욱! 
커엉! 
짜릿한 감촉이 백운향의 손목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역겨운 피비린내가 코를 아릴 듯 확 끼쳐들었다.
백운향은 자신의 옆에 널브러진 늑대의 거대함에 놀라며 한편으론 위험을 벗어난 것에 대해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었다.
카우! 카우우웅!
일단 공격이 시작되자 늑대들은 물불을 안 가리고 전후좌우에서 백운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위 틈에서, 풀 숲에서, 절벽 위에서, 시퍼런 안광과 검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나타나는 늑대들. 가히 공포스런 분위기였다.
파앗! 백운향은 앞뒤 잴 겨를도 없이 맹렬히 소도를 휘둘렀다.
그가 지닌 바 무예는 불치환자로 백화촌에 들어온 몇몇 무림인들에게 배운 삼류무예(三流武藝)에 지나지 않는다.
당랑권(螳螂拳), 팔괘권(八卦拳), 복호장(伏虎掌), 난화십삼장(蘭花十三掌), 원앙각(鴛鴦脚), 칠성검(七星劍), 용형십이보(龍形十二步) 등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펼칠 수 있는 평범한 기초무예들뿐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지닌 무공으로 천랑곡의 늑대들을 모두 벤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그가 초절정 무공을 지녔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실 백운향은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소도를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초식도 없었다. 그저 베고 또 벨 뿐이었다.
캐앵! 캥! 늑대들의 비명 소리가 메아리처럼 계속 이어졌지만 늑대들은 끝도 없이 달려들었다.
백운향의 넙적다리에선 한 움큼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고, 그의 전신은 땀이 아니라 피로 목욕한 상태로 변해 있었다.
늑대의 발톱에 깊숙이 할퀸 무수한 상흔(傷痕)의 화끈거림은 차라리 아득한 쾌감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헉헉!"
백운향의 입에서 불 같은 숨결이 토해졌다. 그의 기력은 거의 탈진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늑대들의 공격은 더욱 흉폭해져 갔다. 피냄새를 맡은 야수 특유의 잔혹성이 늑대들의 공격을 부채질한 것이다.
"으윽!"
백운향은 오른쪽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통증에 고통스런 신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한 마리의 늑대가 그의 어깨를 물고 늘어진 것이었다.
'끝…끝장이다!'
그때였다.
카우우우! 자칫 정신을 놓치려던 백운향의 귓전으로 홀연 한 줄기 긴 포효성이 천둥처럼 파고들었다.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끄응! 끄으응! 궁지에 몰린 먹이를 덮치듯 앞다투어 백운향을 공격하던 늑대들이 일제히 겁에 질린 신음성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백운향의 어깨를 물고 있던 늑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천 마리의 늑대들이 하나같이 꼬리를 말고 아쉬운 듯 백운향의 주위를 두세 바퀴 맴돌다가 이내 천랑곡 절벽 위를 향해 치달려 가기 시작했다.
백운향은 이 돌연한 괴변에 의아함을 금치 못하며 누운 자세 그대로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절벽 위로 새벽 여명(黎明)이 부챗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여명 속에 한 마리 거대한 늑대가 환상처럼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덩치가 다른 늑대의 배나 컸고, 눈이 아릴 정도로 눈부신 은빛 털을 지닌 늑대였다.
그 늑대를 발견한 순간 백운향의 뇌리에 한 가지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천랑(天狼)! 천랑곡엔 모든 늑대들을 지배하는 천랑곡의 제왕(帝王) 천랑이 살고 있다더니… 한데, 왜……?'
백운향은 내심 의혹이 일었다. 
천랑이 늑대들을 불러 모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의혹은 이내 풀렸다.
'그렇군. 늑대는 야행성(夜行性) 동물이었지. 여명이 나를 살렸어.'
백운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은 어느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백운향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치가 어딘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천랑곡 깊숙이 들어온 것만은 분명했다.
천랑곡은 수목이 거의 보이지 않고 회색빛 바위들로만 이루어져 있어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서 세 달을 보내라고? 도대체 여기서 뭘 먹고 살라는 거지?"
백운향은 어이가 없었다. 
늑대도 늑대지만 먹을 것도 없는 이런 황량한 곳에서 삼 개월 동안 도대체 어떻게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곡 깊숙한 안쪽에 방원 삼 장 정도의 물 웅덩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백운향은 먹을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주위를 다시 살펴 보았다.
백운향은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늑대들의 시체가 훌륭한 식량이라는 것을.
백운향은 불현듯 허기를 느끼며 소도로 옆에 누워 있는 늑대의 다리를 잘라 냈다. 
허벅지 살이 매우 통통했다.
고기를 익힐 겨를도 없이 백운향은 늑대의 살덩이에 입을 가져 갔다. 비릿한 피냄새가 숨막힐 듯 왈칵 풍겨 왔다.
백운향은 욕지기를 억지로 참으며 허벅지 살점을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백운향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짐승이 따로 없군.'
기실 이 순간 그도 늑대와 다름없는 야수였다.
천랑곡에서의 백운향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 날 밤, 천랑곡 물 웅덩이 주위가 돌연 불야성(不夜城)을 이루었다.
야수는 불에 약하다. 특히 야행성일 경우는 더더욱 불에 약한 법이다.
그 사실에 착안한 백운향은 낮 동안 천랑곡을 샅샅이 뒤져 나뭇가지들을 주워 와 물 웅덩이 옆에 불을 피운 것이다.
그때 그는 자신이 죽인 늑대를 구워 이미 배를 채운 후였다.
"친구들, 수고들 하시게."
백운향은 불가에 편히 누워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우우우…! 크크르르릉!
늑대들은 불가 십여 장 주위를 맴돌며 포효만 내지를 뿐 더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그 중 용기 있는 몇 마리의 늑대가 불 가까이로 질주해 왔지만 결코 삼 장 이내까지 다가서지는 못했다.
결국 늑대들은 졸지에 백운향에게 물을 뺏기고 만 것이다.
백운향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새벽녘이었다.
"동이 트려면 반 시진쯤 남았겠군. 나로선 아직 반 시진을 버티기란 힘들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불꽃을 피우며 타고 있는 모닥불을 투덕투덕 끄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아직 사위가 깜깜한데 불이 꺼지면 늑대들이 공격해 올 건 뻔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백운향은 늑대들이 자신을 공격해 주기를 바라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는 지금 대범하게도 늑대들을 상대로 자신이 배웠던 기초무예(基礎武藝)들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 불꽃이 사그러지자, 백운향은 소도를 뽑아 들고 늑대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늑대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크르르! 카오오!
기다렸다는 듯 수백여 마리에 달하는 늑대들이 무시무시한 포효성을 발하며 앞다투어 백운향에게 덮쳐들었다.
백운향은 맹렬히 소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인간(人間)과 야수(野獸)의 처절한 싸움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켕! 케엥!
"으윽……!"
야수의 비명과 인간의 고통스런 신음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기초무예를 바탕으로 맹렬히 휘둘러지던 소도는 점차 본래의 흐름을 잃어 갔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물을 빼앗겨 하루 온종일 갈증에 시달려야 했던 늑대들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흉폭해졌으며, 그러한 늑대들의 공격을 기초무예만으로 막기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백운향의 공격엔 초(招)도, 식(式)도, 도(道)도 없었다. 그저 감각에 따라 반사적으로 소도를 휘두를 뿐이었다. 
찍고, 돌려 치고, 쑤시고, 베고…….
그것은 실로 마구잡이였다. 
하지만 도광(刀光)이 한 번 일 때마다 어김없이 한두 마리의 늑대가 피를 뿌리며 죽어 갔다.
그러나 백운향의 예상대로 그는 채 반 시진이 되기도 전에 그는 절대절명(絶代絶命)의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체력은 이미 거의 소진된 상태였고, 언제 소도를 놓쳤는지 그의 손은 빈손이었다.
카오오오! 늑대들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겠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백운향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카우우우! 갑자기 천랑의 예의 그 굉렬한 포효성이 천랑곡에 울려 퍼졌다. 
여명과 함께 어김없이 천랑이 나타났던 것이다.
늑대들은 일제히 공격을 멈추고 천랑이 서 있는 절벽을 향해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카우우우! 천랑은 여명에 은빛 털을 찬란히 빛내며 절벽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다시 한 번 긴 포효성을 발한 후 늑대 무리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백운향의 몸은 첫날 밤보다 더욱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완전히 탈진한 그는 늑대들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렀다. 
해가 지고 달이 뜨기를 수십 차례. 
이제 백운향은 늑대를 쫓기 위해 불을 지피지 않아도 되었다. 
자연스레 늑대들과 사투(死鬪)를 벌이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졌다.
며칠 전부터는 늑대들이 겁을 먹고 그를 슬슬 피하는 상황이 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어느덧 그는 늑대들을 아랑곳 않고 마음껏 코를 골며 잘 수 있게 되었고, 늑대들과 싸워도 몸에 늑대의 발톱자국을 남기지 않게 되었다.
늑대들과 싸우며 그는 변(變)도, 식(式)도, 초(招)도 없는 그 나름대로의 도법(刀法)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것은 감각의 도법이자 본능의 도법이었다.
"이제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기필코 천랑을 굴복시키리라."
백운향은 오 일 전부터 천랑곡 늑대 무리의 제왕인 천랑을 굴복시키고자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천랑, 그놈은 예사 늑대가 아니다. 호랑이도 한 발에 쳐 죽일 수 있는 힘이 있고, 인간조차 따를 수 없는 지혜가 있다. 그놈을 파악한 게 엊그제였으니……."
백운향은 오랜만에 물 웅덩이 주위에 불을 지펴 놓고 천랑곡 정상 높은 절벽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늑대와 언어를 소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역시 한 마리의 야수로 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가파른 절벽을 마치 늑대처럼 날렵하게 뛰어 올라갔다. 
그가 절벽 정상으로 오르는 데는 결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돌연 백운향의 눈빛이 야수의 그것인 양 예리하게 번뜩였다.
살기(殺氣)!
천랑곡 전체의 늑대들이 뿜어 내는 것보다 더욱 강렬한 살기가 절벽 위에 깔려 있음을 감지했던 것이다.
'훗훗, 천랑. 너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느냐?'
천랑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살기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절벽 정상. 
이곳은 천랑 그 자신만의 고유 영역이다. 다른 어떤 늑대도 감히 이곳으로 접근하지 못한다. 이곳에 올라온다는 것은 곧 천랑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으니까. 
백운향은 그 자리에 굳은 듯 선 채 전신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놈은 영악해서 내가 허(虛)를 보인다고 해도 결코 쉽사리 덤벼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놈을 끌어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 놈을 자극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뿐이다.'
그는 입을 오므리더니 느닷없이 긴 장소성(長嘯聲)을 불어 냈다.
"카우우우!"
그 소리는 놀랍게도 천랑의 포효성과 똑같았다.
그러자 절벽 아래에서 대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워우! 우우우!
절벽 아래의 모든 늑대들이 일제히 절벽 위를 향해 울부짖더니, 백운향의 장소성에 뭔가 혼란을 느낀 듯 미친 듯이 천랑곡 전체를 이리저리 광폭하게 내닫기 시작했다.
"카우우우!"
백운향의 장소성이 계속 이어지자, 천랑곡은 날뛰는 늑대들의 발소리로 인해 마치 거대한 지진을 만난 듯 웅웅거렸다.
이때 돌연, 한 줄기 거대하고도 눈부신 은영(銀影) 하나가 절벽 위 십여 장 높이로 살처럼 치솟아 올랐다가는 그대로 백운향을 향해 빛살처럼 내리꽂혔다.
결국 천랑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백운향에게 공격을 가해 온 것이다.
"기다렸다, 친구!"
백운향은 급격히 몸을 뒤로 젖힘과 동시에 옆으로 빙글 몸을 회전시켜 사오 자(尺) 밖으로 피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파악! 백운향이 있던 단단한 절벽 바닥이 천랑의 앞발에 의해 무려 두 자 깊이나 움푹 패였다. 실로 도검(刀劍)을 능가하는 무시무시한 힘이 아닐 수 없었다.
백운향은 등줄기가 축축이 젖어듬을 느꼈다. 
그는 몸을 피하기가 무섭게 비호같이 신형을 날려 재차 도약하려는 천랑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카오오오! 천랑은 고막을 터뜨릴 듯한 굉렬한 포효성을 내지르며 허공으로 비상(飛上)했다.
천랑은 백운향이 등에 달라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여 장 높이로 치솟아 오르더니 곧바로 지면으로 급강하했다.
지면으로부터 삼 장 아래까지 떨어져 내린 순간, 돌연 천랑은 허공에서 몸을 반 바퀴 홱! 뒤집어 등을 지면 쪽으로 돌린 채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야수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귀신 같은 임기응변이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백운향은 천랑의 등에서 배 쪽으로 전광석화처럼 방향을 틀었다.
천랑이 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놀라운 임기응변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백운향이 두 팔로 천랑의 목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천랑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늑대가 인간에게 물린 것이다.
카오오오! 
파파파팟!
천랑은 백운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물고 늘어지자,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절벽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바위들이 천랑의 발 아래 불똥을 튕기며 바스라져 나갔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천랑곡 안을 미친 듯이 치달리던 천랑은 급기야 탈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탈진하기는 백운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위와 나무에 부딪치고 긁혀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천랑 옆에 길게 드러눕고 말았다.
절벽 위로는 어느덧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백운향은 잠시 숨을 돌린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랑은 백운향의 앞에 꼬리를 말고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결국 천랑은 백운향에게 굴복하고 만 것이다.
백운향은 천랑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천랑, 그 동안 즐거웠다. 잘 있거라. 언젠가 다시 찾아오마."
천랑은 백운향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끄응, 하며 나직이 울었다.
백운향은 다시 한 번 천랑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몸을 돌렸다.
끄으응…! 천랑은 아쉬운 듯 나직이 울부짖으며 백운향의 뒤를 따라갔다.
이윽고 백운향이 천랑곡 입구를 나서자, 천랑의 구슬픈 울부짖음이 천랑곡을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워우우우……!
백운향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울부짖음이었다.
환락도(歡樂島)
당신은 상상해 보았소? 
끝간 데 없이 펼쳐진 불타는 열사(熱沙)의 사막을 단지 물 한 통과 건량(乾糧) 한 봉지만으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오.
그것이 극기관(克己關)이라던가……?
제기랄, 그것은 정말 지옥이었소. 
살인적인 폭염이 작렬하고 모래바람이 태풍처럼 거세긴 해도 그건 그런대로 견딜 만했소.
진정 무서운 것은 이 사막이 보통 사막이 아니라, 바람의 방향에 따라 지형(地形)이 수시로 변하는 유사지대(流沙地帶)라는 사실이었소.
그런 유사지대를 지도 한 장에 의지하고 통과하라 했으니, 차라리 유사에 뼈를 묻으라는 말이나 다를 게 뭐 있겠소?
솔직히 말해 이곳에 비하면 천랑곡은 양반이었소. 
죽을 고비를 넘긴 게 수십 번이었으니 말이오.
나는 맹세할 수 있소. 내가 그 사막을 통과한 것은 실로 기적이었다는 것을…….
섬(島).
과연 그것을 섬이라 부를 수 있을까?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녹주(綠洲：오아시스)에 어찌 섬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엄밀히 말해 그것은 섬이라고 할 수 없었다. 
지형(地形)이 수시로 변하는 유사지대(流沙地帶)에 환상처럼 부유(浮遊)하듯 떠 있기에 사람들이 그냥 섬이라 부를 뿐이었다.
일견하여 그 섬은 별유천지(別有天地)인 듯, 무릉도원(武陵桃源)인 듯 싶었다.
기실 그 섬에는 범인(凡人)들로서는 실로 상상도 하지 못할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둘레가 십만여 리(里)에 달하는 그 거대한 섬은 수천여 채의 누각(樓閣)들로 꽉 들어찼으며, 그 누각들은 하나같이 각종 주루(酒樓), 기루(妓樓), 도박장들이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환락(歡樂)이란 환락은 모두 다 그곳에 모여 있는 듯했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그 섬을 환락도(歡樂島)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환락도 내의 어느 밀실 안. 
백운향은 자칭 환락도주(歡樂島主)라는 화의중년인과 마주앉아 있었다.
"넌 환락도의 귀빈이다. 따라서 네겐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
"도박을 하고 싶다면 돈을 신청하고, 계집을 안고 싶다면 마음에 드는 계집을 골라 품어도 좋다. 또한 네 검이 녹스는 것을 막기 위해 살인이 필요하다면 누구든 죽여도 좋다."
묵묵히 듣고 있던 백운향이 불쑥 물었다.
"당신을 죽여도 좋소?"
"능력만 있다면……."
"대답 한 번 시원해서 좋구려."
백운향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환락관이라는 게 이렇게 신나는 곳인 줄 진작 알았다면 한 십 년쯤 지내게 해 달라고 떼를 썼을 텐데, 겨우 여섯 달이라니… 이건 정말 애석하군. 더이상 할 말은 없소?"
"없다."
"그럼 나중에 다시 봅시다."
백운향은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켜 느릿하게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그가 문 밖으로 사라지자, 환락도주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거 혹시 골칫덩이가 하나 들어온 건 아닌지……."
환락도에 돌연 한 가지 화제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열흘 전에 이곳에 들어온 한 명의 소년으로 인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을 가리켜 필패공자(必敗公子)라 불렀다.
필패공자라는 이 우스꽝스런 이름은 도박장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순식간에 환락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필패공자란 다름아닌 백운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탁－!
"소백검(少白劍)이오."
백운향은 자신 있게 검패(劍牌)를 펼쳤다. 
하나, 상대는 득의에 찬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패를 내보였다.
"후후, 필패공자란 그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되어 다행이군. 난 대백검(大白劍)이네."
"축하하오."
백운향은 이 한 판으로 수만 냥짜리 전표(錢票)를 상대에게 넘겨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가 환락도에 들어온 이후 지금껏 잃은 돈만도 족히 수백만 냥은 넘을 것이다. 해서, 그는 도박장의 봉(鳳)으로 통했고 도박꾼이라면 누구나 그와 도박하기를 원했다. 
패가 다시 돌려졌다. 
탁!
"대백검이오."
"핫핫, 난 오천왕(五天王)이네. 필패공자, 새로운 연패 기록의 작성을 축하하네."
언제나처럼 이번 도박에서도 백운향은 수십만 냥의 판돈을 모두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시종일관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중년 도박꾼 하나가 안타깝다는 듯 백운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불쌍한 친구, 자넨 속았네. 아니 모두가 자넬 속이고 있다네."
백운향은 싱긋 웃었다.
"속이는 것도 실력이오. 당신도 나와 한 판 붙어 보겠소?"
"나 역시 자넬 속일 거네."
"상관없소. 사실 속임수 없는 도박이란 제 맛이 안 나는 법이잖소."
백운향은 도박장 주인에게 다시 삼십만 냥을 대출하고는 자신에게 귀띔을 해 준 사람과 도박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반 시진 만에 그 돈을 모조리 상대에게 헌상(獻上)하다시피하여 또다시 새로운 연패 기록을 세웠다. 
한데, 그의 연패는 기이했다. 
검패는 물론 주사위, 마작 등 모든 도박에서 늘 상대에게 한 끗 차이로 졌던 것이다. 
하지만 백운향은 상배방의 패를 보며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가가대소를 떠뜨리곤 했다.
마침내 사람들은 백운향이 백치 아니면 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천하갑부(天下甲富)의 아들일 거라는 추측을 하기에 이르렀다.
"놈이 지금까지 쓴 액수는 얼마냐?"
"이백팔십만 냥입니다."
"좀 많군."
"한데, 놈은 어제까지 매일 살다시피하던 도박장을 떠나 오늘은 기루(妓樓)로 자리를 옮겼다 합니다."
"빠르군."
"예……?"
"환락도 안에서 도박으로 놈을 이길 사람은 이제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 줄 알고 놈의 신변 보호에나 신경 써라. 감시는 필요 없다."
"만약 놈이 금지(禁地)로 들어서면……."
"신경쓸 것 없다. 막는다면 오히려 놈에게 의혹만 심어 줄 뿐이다."
등운루(登雲樓). 
이곳은 환락도 내의 제일기루이다.
백운향은 등운루 후원(後園)에 위치한 아담한 정실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술상을 사이에 두고 절세의 미소녀 한 명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름은?"
"연화(蓮花)이옵니다."
은쟁반에 옥(玉)이 구르는 듯 맑은 음성이었다.
연화는 등운루 내에서, 아니 환락도 내에서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기녀(妓女)였다.
백운향은 천천히 한 잔의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어 그는 도무지 입을 열 생각을 않고 연화의 몸 구석구석을 핥듯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연화는 백운향의 그런 태도에 어리둥절해 하였다. 
설마하니 필패공자라 불리우는 이 괴소년은 기녀를 처음 보기라도 한단 말인가?
답답했다. 기녀란 본래 손님의 술 시중을 들어 주고 주흥을 북돋워 주는 것이 본분이거늘, 자신을 핥듯 바라보는 이 괴소년을 도대체 어떻게 시중 들어 줘야 하는 것일까?
급기야 연화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백운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녀란 것이 이런 것이었군. 잘 봤다."
그는 한 장의 전표를 술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연화는 자신의 귀와 눈을 의심했다.
"벌써 가시겠다는 건가요?"
"오늘 볼 것은 다 봤는데 더 보여 줄 것이 남아 있었단 말이냐?"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내일 다시 올 테니 미리 준비하고 있거라."
백운향의 마지막 음성은 어느새 문 밖에서 들려 왔다.
연화의 망연한 시선이 다급히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다음날. 
다시 연화와 술상을 마주하고 앉은 백운향은 한 잔의 술을 마신 후 느닷없이 말했다.
"벗어라."
"네?"
"벗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연화는 백운향의 돌연한 요구에 일순 아연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직한 탄식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사르륵… 옷고름이 풀어지며 여인의 상의가 방바닥에 나풀 떨어져 내렸다.
순간, 방 안이 환해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뽀얀 우윳빛 살결의 유연한 어깨 호선(弧線)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연화의 손길이 계속해서 치마로 향하자, 백운향이 그녀를 제지했다.
"돌아서라."
"네?"
"돌아서라고 했다."
연화는 어리둥절해 하며 엉거주춤 뒤로 돌아섰다.
한 장의 전표 하나가 술상 위로 떨어져 내린 것은 그 직후였다.
"잘 봤다. 내일 다시 오겠다."
백운향은 또다시 망연해 하는 연화를 뒤로 한 채 어느새 문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다음날도 백운향의 기행(奇行)은 계속됐다.
"오늘은 치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연화의 저고리와 치마가 나비처럼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어? 치마를 둘씩이나 입느냐?"
백운향은 연화의 속치마를 보며 의문성을 토해 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즉시 이어졌다.
"돌아서라."
"……!"
"됐다. 내일 또 오겠다."
"오늘은 무엇을 벗을 차례냐?"
"속…속치마이옵니다."
대답하는 연화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그녀의 기녀 생활 중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녀는 백운향을 대하기가 두렵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야릇한 감정마저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속치마가 앙증맞은 여인의 발등 위로 눈처럼 소복이 쌓였다. 
대리석처럼 곧게 뻗어 내린 두 다리가 현란하게 드러났다.
연화는 백운향이 입을 열기도 전에 스스로 몸을 돌렸다.
"잘 봤다. 내일도 잊지 말아라."
백운향의 음성과 함께 전표 한 장이 술상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문 밖으로 나서고 있는 백운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연화의 두 봉목이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이제 그녀에게 만 냥짜리 전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분홍빛 젖가리개로 향하던 연화의 손끝이 멈칫했다.
부끄러움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이거늘, 지금 마음 한 구석에 이는 이 부끄러움은 도대체 무엇인가?
백운향이 재촉했다.
"답답하겠다. 어서 풀어 줘라."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젖가리개를 몸에서 떼어 냈다.
터질 듯 팽팽한 두 개의 수밀도가 황촉불 아래 튕겨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로 수줍은 듯 파르르 떨고 있는 두 개의 자줏빛 열매는 차라리 앙증맞기까지 했다. 
이제 그녀의 몸에 남은 것은 오직 손바닥만한 고의 하나 뿐으로, 전라(全裸)나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은 아찔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됐다. 나머지는 내일 보겠다."
백운향은 서둘러 일어섰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까 겁이 난 사람처럼 서둘러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언제 성숙한 여인의 속살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던가.
"이게 마지막인가?"
"공…공자……!"
"뭐냐?"
"이…이것만은……."
"갑자기 무슨 말이냐?"
"소녀가 비록 하찮은 계집이지만 소녀에게도 여인의 자존심이란 게 있사옵니다. 소녀는 아직까지 남자에게 그것을… 보여 준 적이……."
"여인의 자존심이라? 여자에게 그런 것도 있었더냐? 그렇다면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군."
"공자께서 원하신다면 소녀의 몸을 드리겠어요. 하오나 이런 장난은 이제 제발 그만……."
"닥쳐라! 누가 장난으로 이러는 줄 아느냐? 내가 누구더냐? 지지 못해 안달하는 필패공자가 아니드냐! 내가 할일이 없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 가며 너와 장난이나 치고 있는 줄 아느냐?"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던 백운향의 입에서 추상과도 같은 호통성이 터져 나왔다.
"그 동안 고마웠다."
백운향은 차갑게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연화가 다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인의 좁은 소견으로 장부의 뜻을 그릇 헤아렸나 보옵니다. 바라옵건데 노여움을 푸시고 자리에 앉으시지요."
"네가 내 뜻을 알기라도 한단 말이냐?"
"비록 공자님의 깊은 심중을 헤아릴 수는 없으나 결코 장난이 아님을 믿사옵니다."
백운향은 묵묵히 연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화는 백운향과 시선이 마주치자 황망히 고개를 떨구었다. 
백운향의 눈은 어떤 욕망도 담겨 있지 않은 맑디 맑은 눈이었기에 감히 마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운향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이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연화는 그를 향해 공손히 대례(大禮)를 올린 후 조심스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르륵… 매미가 허물을 벗듯, 옷이 하나 둘 벗겨져 나감에 따라 눈부신 여체(女體)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깨의 유려한 호선, 그 아래 폭발적인 유혹의 열기를 뿜어 내는 팽팽한 두 융기, 한 손에 잡힐 듯 가는 세류요(細柳腰), 펑퍼짐한 둔부, 기름을 바른 듯 미끈한 두 다리…….
한 마디로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뿐인가? 마지막으로 손바닥만한 고의가 낙엽처럼 방바닥에 떨어져 내리자, 방 안을 비추고 있던 황촉불이 소스라치게 놀란 듯 파르르 떨었다.
원시적 본능이 뜨겁게 숨쉬는 여인의 그 은밀한 신비(神秘)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음, 시원하겠군."
백운향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숨기려는 듯 상 위의 술잔을 들어 단숨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연화, 오늘은 한 가지만 더 해 줘야겠다."
"하겠어요. 공자님께서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추어라. 춤을……."
"춤을?"
연화는 일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아, 나신! 나신이 춤을 춘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성숙한 여인의 나신이 춤을 춘다.
허공을 스치는 흔적 없는 바람인 양, 그 바람에 실려 오는 노을빛 구름인 양…….
뻗는가 하면 오므리고, 뒤집는가 하면 스르르 미끄러진다.
현란한 나신이 만들어내는 춤, 그것은 차라리 환상이었다.
환상의 춤, 환무(幻舞)!
그렇다. 뼈가 없는 듯 부드러운 소수(素手)가 허공을 젓고, 자지러진 두 옥주(玉柱)가 방향 없이 디뎌 갈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환영(幻影)이었다.
춤사위를 따라 은은히 번지는 그윽한 방향(芳香)과 함께 환영은 하나가 둘로, 둘은 넷으로 마치 폭죽이 터지듯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숨소리마저 잦아든 방 안은 온통 백옥빛 환영의 꽃밭이었다. 
한데, 백운향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이 가진 정력(定力)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기라도 한단말인가?
'제기랄, 이건 정말 참고 보기가 힘들군.'
백운향은 점점 열기가 고조되자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늘로 모든 걸 끝내려 했으나 내일 다시 와야겠다."
여인의 나신이 서서히 그 현란한 움직임을 멈췄다.
흠뻑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여인의 나신은 더욱더 뇌쇄적인 유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연화는 문 밖으로 나서고 있는 백운향의 뒷모습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원망의 기색도 서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미미한 안도와 기쁨의 기색이 서려 있었다.
다음날, 또 다음날…….
백운향은 계속 연화를 찾았고, 연화는 백운향 앞에서 나신의 춤을 추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을까? 
백운향은 어느덧 평온한 신색으로 현란한 나신의 춤을 볼 수 있었고, 나신의 춤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그의 밝은 미소도 다시 되살아났다.
"됐다. 그 동안 애 많이 썼다."
"하오시면……?"
"핫핫! 이젠 볼 것을 다 보았다는 말이다."
"하…하례드리옵니다, 공자!"
연화는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나신의 몸 그대로 날아갈 듯 대례를 올렸다.
백운향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맙다, 연화. 내 언젠가 너를 다시 찾을 것이다."
"공…공자……!"
연화의 눈길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백운향의 모습을 쫓았다.
그러나 그녀는 황망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이때만큼 자신이 기녀라는 사실에 비참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백운향이란 존재가 그녀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연화는 바닥을 짚은 두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안녕히……!'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손등을 적셨다.
백운향은 이미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놈의 현재 위치는?"
"등운루에서 나와 금지(禁地)로 향했습니다."
"진정 무서운 놈이군. 놈의 진전은 완전히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
"이제 놈은 마음이 일지 않는 한 어떠한 유혹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금지는 우리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곳이라는 게 문제 아닙니까?"
"놔 둬라. 이제 놈에겐 더이상의 신변 보호 따위가 필요치 않다."
"……!"
"이곳은 항상 안개에 뒤덮여 있다. 마치 안개에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는 듯… 아무튼 이곳만 알아내면 환락도의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셈이다."
백운향은 환락도의 북쪽 끝에 위치한 송림(松林) 속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순간, 백운향의 전신으로 야수의 감각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이건 천랑곡에 들어설 때와 같은 기운이다.'
그는 살기를 느낀 것이다. 하나, 이번에 느껴지는 것은 야수의 날카로운 발톱이 아니라 창검(槍劍)에 의한 살기였다.
백운향은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좁다랗게 난 소로(小路)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무섭도록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고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며, 한 올의 흐트러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의 그런 발걸음은 은연중에 고수만이 가질 수 있는 무서운 기(氣)를 느끼게 했다.
그것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살기는 그의 주변 십 장 주위를 감싸고 돌 뿐 더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반 시진쯤 걸어갔을 즈음, 갑자기 전면이 확 트이며 수십 채의 모옥(茅屋)이 눈에 들어왔다.
백운향의 두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났다.
'저것은 중원(中原)의 가옥 형태가 아니다. 언젠가 들었던 인자(忍者)들의 집구조다!'
인자라 함은 동영(東瀛：일본)의 전문살수(專門殺手)를 말함이다. 
동영의 인자들이 환락도 내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백운향은 수십 채의 모옥 중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모옥의 문을 열었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문 안쪽 바닥으로부터 길게 깔려 있는 다다미였다.
그 뒤로 살과 살의 간격이 좁고 긴 또 하나의 문이 보였다.  그 문의 좌우에는 검은 하까마(치마류의 무사복)를 걸친 두 명의 동영무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백운향이 다다미 위로 올라서자 두 명의 동영무사가 안쪽의 문을 좌우로 넓게 열었다. 
이미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은 듯한 행동이었다.
백운향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다시 다다미가 길게 깔려 있고 새로운 문이 또 하나 나타났다. 그 문 앞에도 역시 검은 하까마 차림의 동영무사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그가 다가서자 그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런 식으로 백운향은 다섯 개의 문을 통과했다.
그렇게 여섯 번째의 문이 열린 순간, 갑자기 한 줄기 서툰 한어(漢語)가 들려 왔다.
"어서 오시게, 중원의 소년이여!"
문 안에는 이국적(異國的)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여덟 폭짜리 산수화(山水畵) 병풍이 뒤쪽에 둘러쳐져 있었는데, 그 병풍 앞에는 백색 하오리(동영여인의 실내복) 차림을 한 동영미녀 두 명의 부채질을 받으며 한 명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동영무사의 표본(標本)이라고나 할까?  
중년인의 모습에선 중원의 무림인들과는 색다른 강인함과 예리함이 느껴졌다. 마치 한 자루 칼날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중년인의 앞에는 조그마한 소탁(小卓)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소탁 옆에는 기모노(和服) 차림을 한 앙증맞도록 귀여운 십오 세 남짓된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백운향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느긋하게 중년인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중년인의 묵직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자, 앉게. 용기 있는 소년이여."
백운향은 묵묵히 소탁을 사이에 두고 중년인과 마주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모노 차림의 소녀가 백운향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한 개의 찻잔을 올려 놓았다.
"쓰루(鶴)라 하옵니다."
유창한 한어(漢語)였다. 
기모노 밖으로 드러난 뽀얀 목이 유난히 길어 이름 그대로 학을 연상시키는 미소녀였다.
그녀는 한쪽 옆의 화로(火爐) 위에서 끓고 있는 찻물을 대나무 국자로 떠 조심스레 백운향의 찻잔에 따라 주었다.
동영은 본래 다도(茶道)를 숭상하는 나라다. 중원이 다예(茶藝)를 중시 여긴다면 동영은 다도를 중시 여기고 있었다.
소녀의 손놀림은 조심스러우면서도 경건함이 깃들어 있었다. 가히 다도를 숭상하는 나라의 여인다운 모습이었다.
백운향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자, 중년인이 서툰 한어로 다시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 마쓰나미 아까시(松葉明石). 이도류(二刀流)를 창시한 미야모도 무사시(宮本武藏)의 후계자로서 초청을 받고 중원에 왔네."
백운향은 묵묵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실 그는 동영무도계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그는 이 중년인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본래 동영무예는 일도류(一刀流), 이도류(二刀流), 원월류(圓月流), 무상류(無常流) 등의 다양한 유파(流派)가 난무하고 있었다. 그것을 통일해 무영도류(無影刀流)를 창안한 사람이 미야모도 무사시의 후계자인 마쓰나미 아까시였다.
무영도류가 비록 미야모도 무사시의 이도류에서 파생된 도류(刀流)이긴 하나, 무영도류는 현재 동영의 최대도류(最大刀流)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백운향은 담담한 얼굴로 마쓰나미 아까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쓰나미 아까시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그대는 진정 놀라운 소년이네. 그대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대의 심후한 기(氣) 때문이었네. 우리는 기를 제일로 꼽는 터. 그대는 기로써 우리를 꺾었네. 그러나……."
마쓰나미 아까시의 안색이 돌연 무겁게 굳어졌다.
"그대는 이곳에 들어온 이상 절대로 나갈 수 없네. 그대는 우리가 찾던 중원 인물이기 때문이네."
"……."
"단, 그대가 우리의 조건을 하나 들어 준다면 이곳을 나갈 수도 있네."
백운향은 계속 묵묵히 듣고 있기만 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선 어떤 표정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하지만 마쓰나미 아까시란 존재는 백운향에게 있어 하나의 거대한 산(山)이었다. 백운향은 그 거대한 산을 담담히 대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마쓰나미 아까시는 백운향을 똑바로 주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을 척살해 주게. 우리 일만여 인자(忍者)가 삼 년에 걸쳐 제거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일이라네."
"……!"
"내가 그대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지금의 나로서는 한 사람과의 거래로 인하여 이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네."
"……."
"이름은 미요시노(深芳野). 여인이네. 그녀는 동영의 제일밀문(第一密門)인 은밀류(隱密流) 최후의 후계자이네. 비록 그녀의 세력은 작으나 은밀류의 인자술은 동영제일(東瀛第一)이네. 그녀는 나를 노리고 있는지라 아마 중원 어딘가에 잠입해 있을 것이네."
백운향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대가는……?"
"동영의 인자술을 전수해 주겠네."
"기한은……?"
"무제한이네."
"그녀에 대한 신상명세는……?"
"그런 것이 있었다면 난 이미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제거했을 것이네."
말을 하는 마쓰나미 아까시의 안색이 일순 침중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그가 미요시노라는 신비여인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백운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거절하오."
마쓰나미 아까시가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이유는……?"
"내가 받을 대가가 너무 적기 때문이오."
"인자술을 전수해 주겠다는데도 적다는 말인가?"
"인자술이 비록 경이적인 동영무공이긴 하나, 미요시노란 여인이 당신들조차 상대하기 힘든 인물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판. 나는 인자술 하나에 목숨을 내걸 수 없소."
"으음……!"
"하지만 만약 당신이 또 하나의 대가를 치뤄 준다면 나는 당신의 제의를 받아드리겠소."
"또 하나의 대가란……?"
"미요시노를 제거해 주는 대신 당신도 나의 목숨을 한 번 구해 주시오."
마쓰나미 아까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백운향이 일개 소년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용담호혈(龍潭虎穴)에 빠진 것과 같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분위기를 묘하게 반전시키는 백운향의 놀라운 지혜와 언변에 마쓰나미 아까시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한 것이다.
한데, 백운향은 무슨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한 번 구해 달라는 조건을 내건 것일까?
백운향은 자신의 앞날에 어떤 불길한 예감을 품고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어쨌든 마쓰나미 아까시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떡이며 입을 열었다.
"좋네. 나 마쓰나미 아까시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네. 반드시 그대의 목숨을 한 번 구해 주겠네."
백운향은 비로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쓰루라는 이름의 소녀를 돌아보았다.
"낭자, 이 차는 맛이 정말 좋구려. 한 잔 더 부탁해도 되겠소?"
쓰루는 귀엽게 볼우물을 지으며 우아한 몸짓으로 백운향의 찻잔에 찻물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백운향은 쓰루의 안내를 받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영의 추적술과 인자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환락관에 주어진 여섯 달의 기간 중 정확히 다섯 달을 남기고 일어난 일이었다.
괴변(怪變), 환락도 내에 돌연 괴변(怪變)이 일어났다.
그 괴변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는데, 그 괴변이란 근 다섯 달 동안 도박장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필패공자가 나타나 일으킨 것이었다.
도박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랍게도 필패공자는 밤새도록 벌인 모든 도박판에서 단 한 판도 패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박에 미치고, 도박의 귀신이라 불리우며, 도박의 사기술로 천하제일을 자부하던 모든 도박꾼들이 필패공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필패공자가 하룻밤 새에 딴 액수는 그가 일전에 잃었던 이백팔십만 냥의 두 배인 오백육십만 냥이었다.
사람들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 
필패공자는 넋을 잃은 그들에게 히죽 웃어 보인 후 도박장을 나섰다. 아니, 그 즉시 그는 환락도를 떠났다.
그 괴변이 환락도 내에 요원(僚原)의 불길처럼 순식간에 번지자, 사람들은 모두 그 괴변을 가리켜 신비(神秘)라 일컬었다.
그렇다. 필패공자 백운향! 
그는 환락도 내에 영원히 풀 수 없는 일대의 신비를 남겨 놓은 채 사라져 간 것이다.
백운향이 떠나던 날 한 여인이 울었다. 남이 볼세라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오열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등운루의 제일기녀인 연화였다.
밀실(密室).
목소리 한 점 새어 나갈 수 없이 완전히 밀폐된 밀실이다.
문득 한 줄기 냉막한 음성이 밀실 안에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네게 일 초의 검법을 전수해 주겠다."
백운향은 그 음성이 들린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앞에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서 있음을 깨달았다.
백운향은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흑의복면인이 언제 나타나 언제 말을 한 것인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했던 것이다.
흑의복면인의 복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은 마치 귀화(鬼火)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유령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백운향은 히죽 웃었다. 웃으면서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왕이면 제일 강한 놈으로 골라 전수해 주시오."
"검초명(劍招名)은 무영살(無影殺)! 두 번 반복은 없다. 잘 들어라."
흑의복면인은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백운향이 듣든 말든 검결(劍訣)을 읊기 시작했다.
일 초의 검법 무영살(無影殺). 
그것은 이름 그대로 보이지 않는 죽음의 초식이었다. 
오로지 빠름을 위주로 한 극쾌(極快)의 검법으로서, 전문적인 살수(殺手)의 검법이었으며, 피를 보아야만 거둬지는 죽음의 검법이기도 했다.
흑의복면인은 검결을 읊고 난 후 냉소 어린 시선으로 백운향을 쏘아보았다.
"범인(凡人)이라면 평생을 수련한다 해도 이 일 초의 검법을 익힐 수 없다. 천하에서 짝을 찾을 수 없는 재질을 지닌 너라 해도 이 일 초의 검법을 익히는 데는 최소한 일 년은 걸릴 것이다."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그러나 백운향은 담담히 웃기만 했다. 
그리고 흑의복면인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백운향은 단 석 달 만에 흑의복면인보다 더 완벽하게 무영살을 펼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흑의복면인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러간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흑의복면인이 찾아온 건 다음날이었다.
"나는 네게 일 초의 도법(刀法)을 전수해 주겠다."
"이왕이면 제일 강한 놈으로 골라 전수해 주시오."
첫번째 흑의복면인과 똑같은 식의 대화였다.
두 번째 흑의복면인이 냉소 어린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도초명(刀招名)은 파천멸(破天滅)! 두 번 반복은 없다. 잘 들어라."
두 번째 복면인은 지체없이 구결(口訣)을 읊어 나갔다.
일 초의 도법 파천멸(破天滅).
그것은 파멸(破滅)의 도법이었다. 
빠름에 있어서는 무영살보다 뒤떨어지나 패도적(覇道的)인 면에 있어서는 무영살의 열 배 이상의 강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대한 산악은 물론 하늘이라 해도 능히 일 도에 양단시킬 수 있는 위력을 지닌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도법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복면인은 구걸을 읊고 나자, 첫번째 복면인과 똑같은 말을 했다.
"장담하건대 이 도법을 일 년 안에 익힐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서 아무도 없다. 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의 예상도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백운향은 무영살을 익힐 때와 마찬가지로 단 석 달 만에 파천멸을 두 번째 흑의복면인보다 더 완벽하게 펼쳐 보였던 것이다.
파천멸을 익힌 다음날 세 번째 흑의복면인이 나타났다.
"나는 네게 신법(身法)을 전수해 주겠다."
백운향은 습관인 양 대꾸했다.
"이왕이면 제일 강한 놈으로 전수해 주시오."
"훗훗, 물론이다. 노부가 네게 전수해 줄 신법은 귀풍무영환(鬼風無影幻)이라 한다."
귀풍무영환의 요결(要訣)도 역시 빠름에 있었다. 
너무도 빠르기에 펼치는 순간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펼쳐 낼 수 없다고 여겨지는 환상의 신법이었다.
더욱이 귀풍무영환의 구결은 난해하기 그지없었다.
"훗훗, 어떠냐? 일 년 안에 익힐 수 있겠느냐?"
"두고 보시오."
백운향은 태연히 대꾸했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나자, 그는 자유자재로 귀풍무영환을 펼치며 세 번째 흑의복면인을 한바탕 골려 준 후 밀실을 떠나게 만들었다.
네 번째 흑의복면인은 눈빛이 요사스러우리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는 네게 노래를 하나 가르쳐 주겠다."
"노래? 그것 참 재미있겠구려. 이왕이면 제일 부르기 좋은 것으로 골라 가르쳐 주시오."
"호호호! 물론이다! 곡명(曲名)은 요혼사심곡(妖魂死心曲)! 반드시 일 년 안에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요혼사심곡을 다 익히기도 전에 요혼사심곡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그건 더욱 더 재미있구려. 어서 시작해 보시오."
복면여인은 싸늘히 냉소를 터뜨린 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요혼사심곡은 천상(天上)의 음률인 양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천하에 이 노래를 듣고 넋을 잃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미로움 속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독(毒)이 숨겨져 있었다. 
요혼사심곡은 듣는 이를 황홀한 죽음으로 몰아넣는 극악한 음공(音功)이었던 것이다.
백운향은 무려 두 달 동안 매일 피를 토하며 혼절했다.
하나, 석 달 후 복면여인은 백운향이 부르는 요혼사심곡을 채 반도 듣지 못하고 기겁을 하며 밀실을 빠져 나갔다.
무영살(無影殺)!
파천멸(破天滅)!
귀풍무영환(鬼風無影幻)!
요혼사심곡(妖魂死心曲)!
그 사대개세지공(四大蓋世之功)을 익힌 후 백운향은 계속하여 기문진식(奇門陣式), 추적은신술(追跡隱身術)은 물론 투도술(偸盜術)까지 익혀야 했다.
사실 백운향에게 익히라고 한 추적은신술은 이미 그가 익힌 동영의 인자술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지만 백운향은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익혔다.
그리고 다시 세 달 후. 
백운향은 사 년의 기한이 주어진 제사관문(第四關門) 연공관(鍊功關)을 일 년 반도 채 안 되어 유유히 나섰다.
밤비의 지배자, 야우혼(夜雨魂)
<이제 마지막 관문인 현세관(現世關)이다.
현세관에선 네게 자유가 주어진다. 그러나 넌 네 스스로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는 정신력을 단련해야 한다.
기한은 반 년. 반 년 후부터 너와의 이 년 계약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안다. 내가 살수수련(殺手修鍊)을 받아 온 것임을… 훗훗, 좋아. 당신들이 원한다면 완벽한 살수가 되어 주지.'
번쩍－! 일순 도광(刀光)이 번뜩이며 피분수가 허공으로 뻗쳐올랐다. 
그와 동시에 몸을 떠난 한 개의 수급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망나니… 일명 도부수(屠夫手)!
백운향은 사형장(死刑場)의 망나니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혈천광인(血天狂人)이라는 무시무시한 외호(外號)의 망나니가……. 
망나니 생활 다섯 달 만에 얻은 별호(別號)였다.
하지만 그에게 처음부터 혈천광인이라는 별호가 붙여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사형수라 해도 어찌 사람의 목을 베는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거도(巨刀)를 들어올린 손을 차마 내려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베기가 일쑤였다. 
죽은 사형수의 애절한 눈빛이 어른거려 삼 일 동안 밤잠을 설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백운향은 이제 눈을 감지 않고도 거도를 내리칠 수 있었으며, 죄수들의 마지막 눈빛을 기억하지 않고도 잠들 수 있게 되었다.
백운향의 앞으로 또 한 명의 사형수가 끌려 왔다. 
이십 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 사형수였다.
사형수는 대개 모진 고초를 겪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건강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눈빛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심했다. 
자신의 앞에서 거도를 휘두르며 망나니 춤을 추고 있는 백운향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극히 무심했다.
여지껏 어느 사형수를 막론하고 이토록 무심한 눈으로 죽음을 기다린 사람은 결코 없었다. 
사형수들은 거의 모두가 애걸과 구원, 증오의 눈빛을 띄곤 했던 것이다.
백운향은 그런 청년 사형수의 눈빛을 본 것인지 못 본 것인지 한동안 망나니 춤만 추어댔다. 이어, 그는 입 안 가득 물고 있던 물을 백 근 거도에 힘껏 뿜어 냈다.
푸우…! 때마침 번지기 시작한 붉은 저녁 노을과 번쩍이는 거도 위로 뿌려진 물보라는 섬뜩한 죽음의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번쩍－! 급기야 거도가 사형수를 향해 빠르게 내리쳐졌다.
한데, 정작 있어야 할 피보라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 줄기 낭랑한 웃음 소리가 허공을 진동시켰다.
"하하하! 네 눈이 마음에 들어 널 살린다."
백운향은 어느새 젊은 사형수의 몸을 안고 이십여 장 높이의 아득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젊은 사형수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난 당신에게 어떤 대가도 치를 능력이 없는 처지다."
"핫핫! 그럼 너도 나와 같은 경우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
백운향의 마지막 음성은 노을 속으로부터 들려 왔다.
사형장에는 백여 명의 위사들이 있었으나 누구 하나 움직일 줄 몰랐다. 
그저 망연자실한 채 백운향이 사라져 간 노을 속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혈천광인이 사형수를 구해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돌연한 사태는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손 쓸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早恐啼復歇
殘燈滅又明
隔密知夜雨
芭蕉先有聲
귀뚜라미 자꾸만 울어예고,
꺼질 듯 등불이 다시 밝아라.
창 건너 구슬픈 밤비 소리,
파초에 흩뿌리며 지나가누나.
비가 내린다. 
어두운 야공(夜空)을 소리 없이 가르며 내리는 비는 밤비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밤비는 대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애잔한 상념(想念)에 젖어들게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귀기롭게 느껴지는 것이 밤비이기도 하다. 
상가(喪家)에서 보는 밤비는 더더욱 그러하다. 
비록 상객(喪客)들이 장막 아래에서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마작을 벌여 가며 귀기로움을 떨치려 하지만 역시 귀기로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밤(夜)에 내리는 비(雨), 밤비(夜雨)였다.
병풍 앞에는 조화(弔花)가 가득하다. 
향로에서는 문상객들의 향연(香煙)이 푸르게 피어 오르고 있다. 
병풍 뒤에는 시체가 누운 관(棺)이 놓여 있을 것이다.
상주(喪主)는 외아들인지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서럽게 느껴지는 곡(哭)소리가 밤비 속으로 쉬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초저녁에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던 문상객들의 발길은 어둠이 짙어지자 뜸해져 갔다. 
하지만 그 동안 다녀간 문상객들만 해도 하나같이 대강남북(大江南北)을 쩌렁쩌렁 울리는 인물들이었다.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장로급(長老級)들을 비롯하여 각 대소문파(大小門派)의 지존(至尊)들, 그리고 천하명숙(天下名宿)들, 심지어는 무림을 위진시키고 있는 사마(邪魔)의 거두(巨頭)들까지 문상을 다녀갔다.
이 상가의 상주(喪主)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천하의 고수들이 그리도 구름처럼 문상을 온 것일까?
금룡신도(金龍神刀) 위후광(尉吼曠)!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로 추앙받고 있는 도객(刀客)인 그가 바로 이 상가의 상주였다.
그는 무당의 전대장로(前代長老) 고목진인(古木眞人)의 속가제자(俗家弟子)로서, 나이 삼십에 세운 금룡방(金龍幇)은 그의 나이 사십에 이른 지금, 자타가 공인하는 정도제일방(正道第一幇)의 명예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그가 자랑하는 절기인 칠십이 초 금룡패황도법(金龍覇皇刀法) 중 이십 초 이후는 아직 햇빛조차 구경하지 못한 터였다.
따라서 그의 상고(喪故)에 천하고수들이 줄을 잇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내리는 밤비와 함께 상가의 밤은 깊어만 갔다. 
시각은 자시(子時)를 훨씬 지나 축시(丑時)로 접어든 꽤나 깊은 밤이었다. 
그 깊은 밤에 한 명의 흑의인이 금룡방에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비를 막기 위해 온몸에 뒤집어쓴 시커먼 사립(蓑笠)으로 하여 나이는 물론 용모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인물로, 그의 허리엔 한 자루 검은 묵도(墨刀)가 비스듬히 매어져 있었다.
문상을 하려는 듯 그는 곧바로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느릿하게 제단 앞으로 다가선 그는 세 개의 향(香)을 향로에 꽂은 후 망자(亡者)를 향해 사배(四拜)를 올렸다.
푸른 향연이 망자의 넋을 위로하듯 머리를 헤쳐 풀고 뽀오얗게 피어 올랐다.
문상객은 계속해서 상주 금룡신도 위후광과 마주섰다.
본래 상가에선 문상객을 가려 받지 않는 법이다.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데에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룡신도는 눈앞의 문상객이 누군지 몰랐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단지 슬픔이 역력한 표정으로 격식에 따라 일배지례(一拜之禮)를 나누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바로 그때였다.
번쩍－! 돌연 밑으로부터 한 줄기 시커먼 도광(刀光)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번뜩였다.
금룡신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천하제일도인 그로서도 이토록 빠른 도법(刀法)이 천하에 존재하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 시커먼 도광이 자신의 두 눈 사이 미심혈(眉心穴)로 예리하게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눈앞에 아른대는 향연 속에서 엊저녁 돌아가신 노모(老母)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때 문상객은 어느새 금룡신도를 뒤로 하고 느릿하게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한 점도 흐트러짐이 없는 걸음걸이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한쪽 옆에 마련된 탁자로 다가갔다. 
흰 종이를 덮은 탁자 위에는 두꺼운 방명록(芳名錄)이 십여 권 쌓여 있었으며, 탁자 앞에는 두 명의 중년인이 앉아 문상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축시를 지나면서부터 문상객들의 발길이 뜸해진 터라 그들은 금새 그 문상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립으로 전신을 뒤덮다시피한 문상객의 기이한 행색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이건 문상객으로서의 예의를 무시한 차림새가 아닌가.
그들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상객은 느릿하게 탁자로 다가섰다. 이어 그는 탁자에 마련되어 있는 벼루 위의 붓을 들어 방명록에 빠르게 서명했다.
<야우혼(夜雨魂)>
두 명의 중년인은 동시에 움찔했다.
그 세 글자의 이름을 본 순간 왠지 모를 섬뜩함이 전신으로 싸늘하게 파고듬을 느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중년인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문상객을 다시 쳐다보았다. 
문상객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하늘로 사라졌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명의 중년인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일어 서둘러 봉투를 뜯었다. 
봉투 속에는 예물 대신 한 장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그 쪽지를 펼친 순간, 두 중년인의 안색이 경악과 불신으로 돌변했다.
"이…이게 도대체……!"
"어…어찌……!"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던 것이다.
<금룡신도의 목숨을 밤비의 제물로 삼노라.
야우혼(夜雨魂)>
두 명의 중년인은 대경실색을 금치 못하며 황급히 제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들은 제단에 채 이르기도 전에 부르르 몸을 떨며 신형을 멈추고 말았다.
금룡신도 위후광은 절을 하는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는데, 그의 두 눈 사이 미심혈에는 콩알만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미심혈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치명적인 사혈(死穴)이다.
그렇다. 금룡신도 위후광은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청천벽력(淸天闢靂)! 
중원대륙은 금룡신도 위후광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충격에 휩싸였다. 
더불어 단 한 건의 살인으로 금룡신도가 누렸던 명성만큼이나 유명해진 인물이 탄생했다. 
다름아닌 야우혼이었다.
마치 폭풍과도 같은 충격을 몰고 온 사나이 야우혼!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이런 류(流)의 청년을 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나이는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약관(弱冠)이나 되었을까?
일신에 칠흑 같은 흑의를 걸친 그는 마치 비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먼 하늘의 구름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데, 그런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참으로 기이했다.
고독한 듯한가 하면 담담하고, 담담한 듯한가 싶으면 공허로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이 산 언덕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십 일 전부터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가끔 갈잎을 입에 물고 무슨 생각엔가 잠기는 것 외에는 거의 시선을 먼 하늘을 향해 던지고 있었다.
그의 발 아래 산중턱에는 한 채의 초라한 모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옥에는 모옥보다 더 초라한 한 명의 도인(道人)이 살고 있었다.
무우도객(無友道客)!
그는 천하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명호 그대로 그는 아직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 있다면 고독이 그의 유일한 친구라고나 할까?
하지만 세인(世人)들은 결코 그를 외롭다거나 괴팍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세외신선(世外神仙)으로 여기고 있었다.
더불어 세인들은 그가 무공을 펼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음에도 그가 초절정무공을 지닌 절세고수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氣度)가 지극히 무심하고 고요했기 때문이었다. 
기실 무우도객 정도의 기도는 최소한 삼화취정(三花聚頂), 오기조원(五氣朝元)의 경지를 넘어서야 가능할 정도로 심유했던 것이다.
한데, 무우도객에게는 한 가지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그의 유일한 낙, 그것은 바로 산책이었다.
그는 산책 삼아 흑의청년이 앉아 있는 산 아래에 위치한 약수터에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들리는 것이었다.
그의 산책 시간은 늘 같았다. 그는 항상 해가 질 무렵인 신시말(申時末)에 약수터에 들렸다.
그가 약수터에 들리는 것은 물론 약수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단지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을 하곤 했던 것이다.
열흘 전부터 흑의청년이 약수터 바로 위쪽에 계속 앉아 있었음에도 무우도객은 약수물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언제나처럼 오랫동안 음미하듯 약수물을 천천히 마시고는 흑의청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히 몸을 돌려 모옥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부터 가늘어진 빗줄기는 초저녁이 되면서 세우(細雨)로 변했다.
무우도객은 오늘도 어김없이 약수터에 모습을 나타냈다.
싸늘한 밤비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 것인지 멀리서 처량한 새들의 울음 소리가 간간이 들려 오고 있었다.
문득 무우도객은 처음으로 흑의청년이 앉아 있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흑의청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는 빗줄기만이 덧없이 그가 늘 앉아 있던 자리를 촉촉이 적셔 주고 있을 뿐이었다.
"좋은 녀석 같았는데… 비가 오니 가 버린 모양이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무우도객의 음성은 무심했다. 그러나 그 무심한 음성 속에는 미미한 아쉬움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
무우도객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허리를 숙여 조롱박을 약수물에 드리웠다. 
바로 그때였다.
푸악! 돌연, 약수물 속으로부터 하나의 검이 뻗어 나와 조롱박을 꿰뚫는가 싶더니, 그대로 무우도객의 이마 위 신정혈(神庭穴)에 섬전처럼 꽂혔다.
푹! 
소리는 짧았다.
검은 어느새 약수물 속으로 사라져 이미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은 무우도객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 놓고 말았다.
무우도객의 신정혈에서 뻗은 핏줄기가 그의 손에 들린 조롱박을 통해 약수물 위로 주르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녀석인 것… 같았는데……."
풍덩! 그는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주검으로 화해 약수물 위로 엎어졌다. 
한 줄기 또 다른 음성이 약수물 속으로부터 새어 나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제기랄! 무공도 모르는 평범한 도사였다니……!"
방금 살인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지극히 담담한 음성이었다.
그 음성과 함께 물 속으로부터 한 줄기 흑영(黑影)이 솟구쳐 올랐다. 
흑의청년이었다.
한데, 무우도객이 무공을 모르고 있었다니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세인들은 세속을 잊고 살아 가려는 그를 두고 은거한 고인(高人)으로 엉뚱한 추측을 했던 것이란 말인가?
일생을 통해 누구에게도 정(情)을 주지 않았던 무우도객.
그는 최초로 이름도 모르는 흑의청년에게 정을 느끼려는 순간, 그 청년은 무정하게도 그에게 검을 찔렀다.
이때 흑의청년은 약수터 가에 서서 약수물 위에 엎어져 있는 무우도객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장, 비록 내가 당신을 죽이긴 하였으나 당신에게 죽음을 내린 것은 천하의 가벼운 입이었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실례를……."
휘리릭! 흑의청년의 손에 들린 검이 무우도객의 등판을 한 차례 휘돌았다. 
순간, 무우도객의 등판에 세 자의 글자가 새겨졌다.
<야우혼(夜雨魂)>
바로 그 세 글자였다.
구주신협(九州神俠) 황염충(黃炎沖)!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천하에 그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그는 침상에서도 그의 아내를 확인한 후에야 겨우 잠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의심만큼이나 큰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효성(孝誠)이 지극하다는 것이다. 
천하에 그보다 효성이 지극한 사람 또한 결단코 없을 것이다.
오늘은 그의 모친이 별세한 지 오 년째 되는 날이다.
그는 지난 오 년 동안 각종 명절과 기일(忌日)에 하루도 빠짐없이 모친의 묘를 찾았다. 설사 그 일로 그가 죽는다 해도 그의 효심은 그를 모친의 묘로 향하게 했을 것이다.
"지금 떠나면 밤이나 돼야 돌아오겠군."
구주신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그는 우선 준비된 열 대의 마차를 손수 한 대 한 대 주도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열 대의 마차는 모양이나 크기, 색깔, 말들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심지어는 마부의 생김새나 체격, 옷차림까지 같았다.
구주신협은 그 중 한 대에 탄다. 
그런데도 그는 손수 열 대의 마차를 세세히 살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심이 많은 그에게 있어 이것은 당연한 행동이었고, 그의 행동에 만성이 된 그의 수하들은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잠시 후 열 대의 마차가 일렬로 신주제일장(神州第一莊)을 떠났다.
어느 마차에 구주신협이 타고 있는지는 구주신협 자신 외엔 아무도 몰랐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열 대의 마차는 차례로 배 위로 오르고 있었다. 
이내 마차들이 모두 배 위로 올랐다. 그러나 그 중 다섯 대의 마차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다시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배는 서서히 강심(江心)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던 구주신협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군.'
한데, 그때였다.
번쩍! 우르릉－! 쾅! 쏴아아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맑기만 하던 하늘에서 느닷없이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울리며 때아닌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구주신협은 갑작스런 날씨의 변화에 어떤 불안감을 느꼈다.
'갑자기 소나기라니… 왠지 기분이 좋지 않군.'
"헉!"
내심 염두를 굴리던 그의 입에서 돌연 숨가쁜 헛바람이 토해졌다. 
가슴 부위에서 화젓가락에 데인 듯한 뜨거움을 느끼며 그는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불신과 회의로 얼룩진 표정이었다.
"어…어떻게……!"
지극히 담담한 음성 하나가 그의 의혹을 풀어 주려는 듯 울려 왔다.
"지나친 의심은 왕왕 목숨을 재촉하는 경우가 되지. 당신의 실수는 강가에서 마차를 분산했다는 거야. 스무 개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워도 열 개의 눈을 피하기는 한결 쉬운 일이니까."
구주신협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그는 이미 시체로 변해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 시체의 가슴 한복판에는 검으로 휘갈겨 쓴 듯한 세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야우혼(夜雨魂)>
바로 그 세 글자였다.
돌연 중원에 두 개의 거대한 장원(莊院)이 생겨났다.
<천의장(天意莊)>
<백화장(百花莊)>
그 두 장원은 불과 삼 개월 전에 각각 역대(歷代)의 천년고도(千年古都)인 금릉(金陵)과 낙양(洛陽)에 그 웅자(雄姿)를 드러냈다.
한데, 규모라든가 화려함에 있어서 그 두 장원은 고금의 그 어떤 문파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아마 당금 대명황제(大明皇帝)의 거처인 자금성(紫禁城)조차도 그 두 장원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단지 진시황이 세웠던 아방궁만이 그 두 장원에 필적할 만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두 장원이 유명해진 것은 그 규모나 화려함 때문이 아니었다. 
두 장원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신룡(神龍)처럼 머리는 있으되 꼬리는 드러내지 않은 두 장원 장주(莊主)들의 후덕(厚德)함 때문이었다. 
두 달 전 황하의 대홍수로 백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그들 두 장원의 장주들은 각각 황금 삼백만 냥을 선뜻 구호금(救護金)으로 내놓았다. 
그들은 절강(浙江), 광동(廣東), 광서(廣西) 등지의 가난한 어부들에게 수백 척의 배를 마련해 주는가 하면 산동(山東), 감숙(甘肅), 청해(靑海) 등지의 변방 화전민이나 유목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뿐인가? 
두 장원이 위치한 금릉과 낙양 주변의 오백 리 안에서는 거지를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인의대협(仁義大俠)!
사람들은 그들 두 장원의 장주를 가리켜 인의대협이라 칭송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 장주의 정체는 여전히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양으로 비쳐져 그들의 공덕(功德)을 칭찬하는 소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사람들은 아예 천의장과 백화장 주위 십 리 밖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두 장원을 성역화(聖域化)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천하이대장원(天下二大莊院)!
누구의 입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그 두 장원을 천하이대장원이라 일컬었다.
한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그들 두 사람의 인의대협에 대한 송가(頌歌)가 한창 드높게 울려 퍼지고 있을 때, 천하는 한 명의 신비살수(神秘殺手)로 인해 그야말로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야우혼! 
바로 그의 출현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미 천하제일도라 일컬어지던 금룡신도 위후광을 필두로 하여 무우도객, 구주신협 황염충 등이 그에게 희생을 당했다.
그의 가공할 살수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 여보게, 들었는가? 무림성수(武林聖手)께서 당하셨네.
－ 아! 그 광명정대하신 분마저…….
－ 무당의 무기자(無己子)께서도 당하셨다네.
－ 무기자라면 이미 삼십 년 전에 은거하신 무당의 전대장로(前代長老)가 아니신가? 이미 신선의 경지에 이르신 그분까지…….
－ 무악상인(無惡上人)께서도 돌아가셨다네.
－ 으… 야우혼! 아예 정도무림의 씨를 말릴 작정이란 말인가?
야우혼이 출현한 지 고작 이 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 개월 동안 비가 온 밤에는 여지없이 그의 살수가 펼쳐졌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 이슬로 사라진 무림고수의 수가 무려 십일 인.
하나, 진정 가공스러운 것은 그의 제물로 희생된 인물들이 각기 다른 병기에 의해서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검(劍), 도(刀), 창(槍), 암기(暗器) 등등…….
특히 소림의 속가제자인 항마신권(降魔神拳) 상관악(上官嶽)의 죽음은 사인(死因)마저 제대로 밝혀 내지 못했다.
항마신권은 가부좌를 튼 자세로 내장이 온통 가루가 된 채 죽어 있었다. 
아마도 불문(佛門)의 사자후(獅子吼)를 발하다 죽은 것 같다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야우혼!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무슨 이유로 비 오는 밤만 택해 정도의 무림고수들에게 가공할 살수를 펼치는 것인가?
모른다. 아직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심하라! 비 오는 날 밤을…….
밤비의 지배자, 야우혼을!
광화서생(狂花書生)
광화서생(狂花書生).
그는 꽃에 미친 자다. 그리고 그는 도박에도 미쳤다.
그는 오늘도 일신에 걸친 화려한 비단 화의(華衣)가 무색할 정도로 전신에 온갖 꽃을 달고 만면에 바보 같은 웃음을 띤 채 천원도방(天元賭坊)으로 들어섰다.
천원도방은 낙양 최대이자 천하제일의 도박장이었다.
천원도방의 분위기는 여느 도박장과는 달리 매우 엄숙했다. 그것은 천원도방의 엄격한 규칙 때문이었다. 
일단 도방에 들어오게 되면 일체의 말을 할 수 없다는 규칙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서로 상대를 찾아 도박을 해야 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광화서생이 도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조소와 경멸에 찬 시선이었다.
그러나 광화서생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을 향해 바보 같은 웃음을 실실 흘렸다.
그는 대뜸 중앙의 도박대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명의 청의중년인이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대 위에는 이미 검패(劍牌)가 한 벌 놓여져 있었다.
광화서생의 전신에 꽂힌 갖가지 꽃으로부터 뿜어지는 짙은 화향(花香)이 도방 안을 가득 채울 듯 퍼져 나갔다.
그 꽃향기에 끌리는 벌나비 마냥 사람들은 그의 주위로 빽빽하게 모여들었다. 
사실 이런 일은 광화서생이 도박을 벌일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도박은 상대가 누가 되었건 판이 몹시 큰지라 도박꾼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흥미거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역시 이번에도 광화서생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은자 만 냥짜리 전표 한 장을 대 위에 올려놓았다.
기본 판돈을 만 냥으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질세라 청의중년인도 은자 만 냥짜리 전표를 지체없이 내놓았다. 
비로소 판이 성립된 것이다.
이윽고 첫번째 판의 패가 돌려지자, 광화서생과 청의중년인은 한차례 눈빛을 교환했다.
다음 순간, 돌연 주위에 몰려 있던 구경꾼들이 아연 눈을 부릅떴다.
기본 판돈인 은자 만 냥도 보통 사람이 몇 년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거금인데, 지금 광화서생은 그의 열 배나 되는 은자 십만 냥짜리 전표를 재차 내걸었던 것이다.
십만 냥! 그것은 보통 사람이 평생을 모아도 모을 수 없는, 아니 살아 생전에 한 번 만져 보기조차 힘든 거액(巨額)이다.
그런 거액을 광화서생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내건 것이다.
청의중년인 역시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은자 십만 냥짜리 전표를 대 위에 올려놓았다.
여유로울 정도로 담담한 두 사람의 신색으로 보아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패에 자신이 있는 듯싶었다.
긴장하는 것은 오히려 구경꾼들이었다. 
도방 안은 숨소리마저 죽은 듯 정적에 휩싸였다. 그 정적을 깬 것은 검패가 대 위에 펼쳐지면서 난 소리였다.
탁! 탁! 광화서생과 청의중년인의 패가 거의 동시에 펼쳐졌다.
삼재검(三才劍)과 사상검(四象劍). 
광화서생은 삼재검을, 중년인은 사상검을 잡은 것이다. 
승리는 한 끗 차이로 청의중년인에게로 돌아갔다. 
중년인은 판돈으로 걸린 이십이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유유히 거둬들였다. 
하나, 광화서생은 바보 같은 웃음만 흘릴 뿐 아깝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두 번째 판이 다시 벌어졌다. 
첫번째 판과 똑같은 액수의 판돈이 걸린 판이었다.
탁! 탁! 검패가 이내 펼쳐졌다.
광화서생은 양의검(兩儀劍), 청의중년인은 삼재검이었다.
두 번째 판도 청의중년인의 승리였다.
광화서생은 자신이 돈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재미있기라도 한 듯 예의 그 바보 같은 웃음을 여전히 흘리고 있었다.
주위의 구경꾼들은 광화서생의 그런 모습을 이미 여러 번 보아 왔기에 어처구니 없다기보다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실 광화서생과 같은 도박꾼이 있다는 것은 천하 괴사(怪事)요,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희한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다시 세 번째 판이 벌어졌다. 
판돈은 역시 똑같은 액수인 은자 이십이만 냥이었다.
탁! 탁! 드러난 검패는 사상검(四象劍)과 오천왕(五天王). 
이번에도 청의중년인의 승리였다.
탁! 탁! 네 번째 판은 광화서생이 삼재검(三才劍)을, 청의중년인이 사상검(四象劍)을 잡음으로써 역시 청의중년인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다섯 번째 판.
탁! 탁! 청의중년인은 양의검(兩儀劍)을 잡았으나 광화서생은 아예 검패 중 가장 낮은 패인 일원검(一元劍)을 잡는데 그쳤다.
결국 광화서생은 다섯 판 만에 은자 오십오만 냥이라는 거금을 잃고 만 것이다.
그제서야 광화서생은 청의중년인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만하겠다는 표시였다.
광화서생은 지금껏 다섯 판 이상의 도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꼭 다섯 판의 도박이 끝나면 바보 같은 웃음을 실실 흘리며 미련없이 자리를 뜨곤 했던 것이다.
광화서생은 이내 천원도방을 나섰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에 한 줄기 기광(奇光)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후후, 십팔(十八)이라… 십팔이면 십팔번가(十八番街)… 정육점이로군."
광화서생은 뜻을 알 수 없는 독백을 흘리고는 행인들 틈으로 사라져 갔다.
한데, 십팔(十八)이라니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바로 방금 그와 도박을 벌였던 청의중년인이 잡았던 다섯 번의 패의 숫자를 합친 숫자였다.
첫째 판 사상검, 둘째 판 삼재검, 셋째 판 오천왕, 넷째 판 사상검, 다섯째 판 양의검…….
그 패들이 의미하는 숫자를 모두 합하면 정확히 십팔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화서생과 청의중년인이 벌인 일련의 도박은 단순한 도박이 아니었단 말인가?
낙양성 십팔번가의 정육점.
채노인은 길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밤 이 늦은 시각이라 가게 문을 닫으려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코끝으로 한 줄기 진한 화향(花香)이 물씬 풍겨왔다. 그는 그 화향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즉시 문으로 들어서는 광화서생을 향해 시선을 주며 반색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
"다행히 아직 문을 닫지 않았구려. 오늘은 다섯 근만 잘라 주시오."
"예에, 알겠습니다."
채노인은 말을 마치자 아무렇게나 우육(牛肉)을 다섯 근쯤 베어 냈다. 
그 모습에 광화서생이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너무하오. 그래도 난 단골손님인데 어찌 그런 질긴 부분만 주려 하오. 이왕이면 저기 저 등심으로 잘라 주시구려. 값은 후하게 쳐 주겠소."
"허어, 이를 어쩐다? 미리 말씀하셨다면 이걸 자르지 않았을 텐데… 잘라 놓은 걸 다른 사람에게 팔 수도 없고……."
"그것도 내가 함께 가져갈 테니 어서 등심이나 잘라 주시오."
"이거 너무 죄송해서……."
"괜찮소. 저 부분을 잘라 주시오."
채노인은 광화서생이 가리키는 등심 부위을 잘랐다. 
이어 그는 먼저 자른 고기와 등심을 함께 싸서 미안한 얼굴로 광화서생에게 내밀었다.
광화서생은 고기를 받아 들고 금화 한 닢을 채노인에게 건넸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소. 내 자주 들리리다."
"고맙습니다, 공자."
광화서생은 허리를 굽히는 채노인에게 씨익 웃어 보인 후 몸을 돌려 정육점을 나왔다.
그는 천천히 대로를 가로질러 낙양성 남문을 향해 걸어갔다.
멀리 유난히 휘황한 불빛이 보였다. 
그것은 요즈음 명성을 날리고 있는 천하이대장원의 하나인 백화장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었다.
그 불빛을 바라보던 광화서생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백화장… 저것은 촌장 할아버지와 백여 명 백화촌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세운 백화촌의 후신(後身)이다.'
광화서생, 그는 다름아닌 백운향이었다. 
백화장의 장주 또한 그였다.
그는 백화장주로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며 백화촌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운향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백화장을 향해 걸음을 옮겨 갔다.
이윽고 백화장으로 십여 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 돌연 백운향의 신형이 허공으로 번쩍 솟구쳐 올랐다. 순간, 그의 모습도 더이상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천진암(天盡庵) 천불선사(天佛禪師).
나이：구십구 세.
출신：소림사.
일신절기(一身絶技)：대반야현공(大般若玄功).   
일과：인시(寅時)에 일어나 묘시(卯時)까지 불공. 
불공 후 암자 뒤 폭포에서 목욕. 이어 술시(戌時)까지 면벽참선(面壁參禪). 
다시 해시(亥時)에 불공을 시작하여 자시(子時)에 취침.
주의사항：이토록 상세한 밀지(密旨)를 내리는 것은 그가 불문의 최고기인(最高奇人)인 고해대성불(苦海大聖佛)과 함께 달마(達磨) 이후 대반야현공을 십 성까지 이룬 초절정고수이기 때문임.
각별히 유의하기 바라며 언제나처럼 비가 오는 날을 택해 제거할 것.>
양피지로 된 서찰. 
그것은 채노인이 싸 준 등심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누군가가 광화서생에게 은밀히 살수 명령을 내린 탈명첩(奪命帖)임이 분명했다.
한데, 서찰의 마지막 부분인 비 오는 날을 택해 제거하라는 그 글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광화서생, 아니 백운향 그가 바로 야우혼이었단 말인가?
삭…! 삭…! 
노승은 천진암(天盡庵)으로 들어서는 소로(小路)를 쓸고 있었다.
그는 가슴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린 눈처럼 흰 백염(白髥)에 일신에는 역시 백색 승복을 걸치고 그 위에 홍색 가사(袈裟)를 비스듬히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는 아홉 개의 계인(戒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홉 개의 계인은 불문(佛門)에서 배분이 지극히 높은 신분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 노승은 바로 현 소림장문인(少林掌門人) 패룡옥불(覇龍玉佛)의 사백(師伯)이자, 살아 있는 생불(生佛)로 숭앙받는 소림사대신불(少林四大神佛) 중 수좌(首座)인 천불선사(天佛禪師)였다.
까악! 까악! 한 마리 까마귀가 이른 새벽부터 천불선사가 소중히 돌보는 보리수(菩提樹) 위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울어대고 있었다.
문득 천불선사는 비질을 멈추고 금방 비(雨)라도 쏟아질 듯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납의 고해(苦海)도 오늘로서 마지막인가? 구십여 성상(星霜)을 불도(佛道)에 몸 받쳤으되 진실로 깨우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는 오로지 불심(佛心)이 부족했던 탓. 부처님을 뵈올 면목이 없도다. 아미타불……!"
그는 잠시 하늘을 우러러보다 이내 몸을 돌려 암자를 향해 걸어갔다.
한데, 이때 천불선사를 은밀히 살피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그 한 쌍의 눈은 소롯길 옆에 우뚝 솟은 한 그루 거목(巨木) 위,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간신히 드러나 있었다.
바람에 착각을 일으킨 것일까? 
천불선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 두 눈이 일순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선사… 미안하오. 오늘이 당신의 열반(涅槃)날일 줄은 미처 몰랐구려. 하지만 당신은 내게 한 가지만 남겨 주고 떠나야겠소. 당신의 몸에 한 치의 검자국… 오늘 밤은 분명 비가 오는 밤이 될 것이니, 그것을 내게 남겨 주시오.'
두 눈의 임자는 바로 야우혼이었다. 
한데, 실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야우혼이 천불선사에게 살수를 가하려는 오늘 뜻밖에도 천불선사는 자신의 열반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천불선사는 오늘 밤 야우혼이 자신에게 살수를 가할 것임을 안 것이 아니라, 천수(天壽)가 다했음을 스스로 직감하고 이 사실을 소림에 알리려 어제 자신의 시중을 들던 소사미(少沙彌)를 소림사로 보낸 터였다.
그러나 진정 공교로운 것은 천불선사가 암자로 들어서는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비는 밤까지 이어져 야우혼이 그에게 살수를 가할 수 있는 절대절호(絶對絶好)의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야우혼은 비 오는 밤만을 택해 살수를 펼치지 않았던가!
천불선사는 먼저 목욕재계를 마쳤다. 
이어 그는 자신이 불문에 귀의(歸依)한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써온 참수기(參修記)를 써 나갔다.
오늘 참수기의 맨끝 글자는 종(終)이었다.
천불선사는 조용히 붓을 내려놓고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참수기를 덮었다.
이제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그가 할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열반에 드는 일만 남은 것이다.
천불선사는 자세를 가다듬고 조용히 입정(入定)에 들어갔다. 
백팔 개의 염주가 주름 잡힌 손가락 사이에서 한 개 한 개 헤아려지며, 나직한 독경 소리가 불당 안을 은은히 맴돌기 시작했다.
한데, 독경 소리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연 천불선사의 또다른 창노한 음성이 불당 안을 침중하게 울렸다.
"시주, 부처님을 욕보이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네."
혜광심어(慧光心語)!
천불선사는 놀랍게도 불문의 전설적인 전음술(傳音術)이라 알려진 혜광심어를 펼쳐 낸 것이다. 그것도 열반 직전에 있는 그가 말이다.
그러자 불당 정면의 석가모니 좌불상(座佛像) 뒤에서 한 명의 흑의청년이 환영처럼 걸어나왔다.
야우혼, 아니 백운향이었다.
그는 동영의 신비술인 은신술을 이용해 석가모니 불상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백운향의 두 눈에는 경악과 긴장의 빛이 은은히 떠올라 있었다. 
천불선사가 너무도 쉽게 자신의 존재를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불선사는 백운향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신이 독경하던 반야바라밀다심경(般若波羅密多心經)을 계속 읊어 나갔다. 
백운향은 천불선사의 일 장 정도 앞에 멈춰 서서 그를 예리하게 주시했다. 
어느새 그의 두 눈은 일말의 감정조차 배제된 채 무심으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불선사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모두 읊은 후에야 비로소 눈을 들어 백운향을 바라보았다.
무저(無底)의 바다인 양 고요하고 심유(深幽)하기 이를 데 없는 눈이었다. 
돌연 그의 두 눈에서 한 줄기 격동의 빛이 번뜩 떠올랐다. 하나, 그것은 떠오를 때보다도 더 빠르게 사라졌기에 백운향으로선 미처 알아챌 수가 없었다.
천불선사는 어느새 본래의 눈빛을 회복하고 담담히 말했다.
"닷새 동안 수고가 많았네."
백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천불선사의 말대로 그가 이곳 천진암에 잠입해 들어온 것은 오늘로서 꼭 닷새째인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야우혼? 노납은 준비가 되어 있네."
백운향은 내심 거듭 놀라고 말았다.
'이…이럴 수가! 이 노승은 이미 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것은 내가 실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실수했다. 그들은 이 노승의 진면목의 반조차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능력으로는 이 노승의 발끝에도 못 따라간다. 하물며 죽인다는 건…….'
백운향은 자신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살수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실패도 허용치 않는 대살수(大殺手)다.
그는 재빨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 살수 본연의 무심냉막함이 이슬처럼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묵묵히 등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살수는 말이 필요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목한 인물을 베어야 하는 것이다.
'무영살(無影殺)!'
번쩍－! 백운향이 검을 뽑아 든 것과 발초(發招)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무영살! 
오로지 빠름을 위주로 한 살수 전문의 극쾌지초(極快之招)다. 그리고 그것은 피를 보아야만 거둬지는 필살지초(必殺之招)이기도 했다.
"아미타불……!"
천불선사의 입에서 장중한 불호성이 토해졌다. 
순간, 백운향은 안색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그가 살검을 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불선사는 여전히 백팔염주만 헤아릴 뿐, 무방비 상태로 백운향의 검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영살은 일단 발초하면 결코 거둬들일 수 없는 초식이다. 
더구나 백운향은 이 일초에 혼신의 공력을 다하고 있었다.
파악! 천불선사의 신형이 일순 뒤로 기우뚱했다. 
그의 두 눈 사이 미심혈에서 한 줄기 가는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래의 입정한 자세를 흐뜨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엔 아무런 고통의 빛조차 떠올라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얼굴엔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하고 평온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백운향은 불신과 회의에 찬 시선으로 천불선사를 바라보았다.
'왜……?'
그는 내심 묻고 싶었다. 아니, 눈으로 묻고 있었다.
도대체 천불선사가 자신의 검을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인 까닭이 무엇인가 말이다.
천불선사가 백운향의 눈을 지그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시주의 능력으로는 절대 노납을 죽이지 못하네."
"……!"
"하지만 시주가 아니더라도 노납은 오늘 열반했을 것이네."
백운향은 그의 말이 결코 허언(虛言)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본래 노납은 열반에 들기에 앞서 천하를 위해 살계(殺戒)를 범하려 했었네. 아미타불……."
'그런데 왜 손을 쓰지 않은 겁니까?'
백운향은 다그쳐 묻고 싶었다.
"하지만 노납은 조금 전 시주를 보고서야 그 생각을 바꾸었네. 시주가 비록 지금은 마수(魔手)의 조종을 받고 있으나 노납이 보기에 시주는 결코 살수 야우혼으로 끝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네……."
'운명……?'
백운향은 더욱 알 수 없는 의문에 휩싸였다.
천불선사의 숨결이 급격히 가빠졌다. 그의 안색은 죽음이 임박한 듯 창백하게 굳어져 갔다.
그러나 오대사혈(五大死穴)의 하나인 미심혈에 검이 관통됨은 즉사(卽死)와도 같거늘, 천불선사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시주, 명심하게. 시주는 천하와 함께 할 운명을 타고났음을… 따라서 시주는 한시도 천하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도대체 무슨 말이오?'
백운향은 하마터면 그 말을 입 밖으로 토해 낼 뻔했다. 하나, 그는 그 말을 억지로 되삼켰다.
천불선사가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깨달은 듯 가쁜 숨을 몰아쉴 겨를도 없이 계속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주, 노납은 이미 시주의 모든 것을 분석하여… 어제 소사미를 통해… 소림사에 전했네. 이제 시주는 소림의 추적을 면키 어려울 것이네."
"……!"
"천하에 알려지길… 당금의 소림이 과거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소림을… 진정으로 몰라서 하는 얘기네. 소림의 잠재력은… 노납으로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네. 노납과 함께 사대신불로 불리는 금불(金佛), 왜불(矮佛), 광불(狂佛) 등… 노납의 세 사제(師弟)만 하더라도… 시주는 그들 개개인의… 백초지적(百招之敵)이 못 되네."
천불선사는 손에 들고 있던 백팔염주를 백운향에게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게. 시주가 소림의 추적에서… 살아나는 길은… 이것을 간직하는 것…뿐이네."
차르륵…! 백팔염주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천불선사는 더이상 염주를 들고 있을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시…시주… 한 가지 부탁이… 목탁… 목탁을 쳐 주게."
그 말을 끝으로 천불선사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제 그의 입에서는 더이상 그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미 열반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백운향은 넋을 잃은 듯 망연히 천불선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왜 아직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조차 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천불선사의 앞에 놓여 있는 오광(烏光)이 감도는 커다란 목탁을 집어 들었다. 
이어 그는 생전 만져 본 적도 없는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 똑! 똑……!
오오, 무엇인가?
내게 목탁을 집게 하고…….
내게 목탁을 치도록 이끄는 이 무형(無形)의 힘은 도대체 무엇인가?
언제 내가 불경 한 번 읽은 적이 있었던가?
언제 내가 부처의 형상 한 번 떠올린 적이 있었던가?
그렇듯 나에게는 생소한 것일진데…….
조금도 낯설지 않고,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전해 오는 이 느낌은 또한 무엇 때문인가?
마치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사슬처럼 내게 와 닿는 목탁 소리여……!
패룡옥불(覇龍玉佛).
소림장문인인 그는 천불선사의 열반을 보기 위해 천 리 길도 마다 않고 천진암으로 달려왔다.
그의 본래 법명(法名)은 명경(明鏡)이었으나 세인들은 법명 대신 패룡옥불이라 불렀다.
나이는 불과 이십오 세. 
외모는 아름다우리만치 준수했지만 지닌 바 심성(心性)은 지극히 패도적이었다.
또한 세인들은 그를 소림 역대 제자 중 달마 이래로 가장 자질이 뛰어났다던 고해대성불과 견줄 만한 절대기재(絶代奇才)로 꼽았다.
그가 다른 연장자(年長者)를 물리치고 소림의 장문인이 된 후로 소림의 힘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과거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로서의 명성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악독하도다, 야우혼! 열반에 드시는 분께 살수를 펼치다니……."
패룡옥불의 시선은 천불선사가 평생을 두고 쳐온 목탁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목탁에는 야우혼이란 세 글자가 검흔(劍痕)으로 뚜렷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패룡옥불은 천불선사의 유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사백(師伯)을 지켜드리지 못한 제자의 불충을 용서하소서. 하오나 이 죄는 기필코 씻겠나이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천불선사의 세 사제인 금불, 왜불, 광불 등 세 고승을 비롯한 일백여 명의 소림제자들이 일제히 침통한 불호를 토해 내며 천불선사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패룡옥불은 한동안 무릎을 꿇고 움직일 줄 모르다 이윽고 몸을 일으켜 밤비가 쏟아지는 암천(暗天)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림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기필코 야우혼을 잡고 말리라!"
단호한 음성엔 미미한 살기마저 배어 있었다.
"아미타불……."
"나무관세음……."
금불, 왜불, 광불 등 세 고승은 절로 침중한 불호를 발하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그들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한 곳에 고정되었다.
그것은 바로 천불선사의 발 앞에 놓인 백팔염주였다. 
그 백팔염주는 소림장문인마저 제지할 수 있는 무상(無上)의 권위를 지닌 소림의 최고신물(最高信物)로, 천불선사가 한 번도 몸에서 떼어 낸 적이 없었다.
세 고승의 눈에 언뜻 의혹의 빛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천불선사가 그 백팔염주를 함부로 다룬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그들이 어찌 천불선사가 소림의 추적에서 백운향을 살리기 위해 그 염주를 백운향에게 주려 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백운향은 그 백팔염주를 가져가지 않았던 것이다.
광화서생. 
그는 낙양성 십삼번가의 꽃집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가 꽃집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의 몸에는 항상 수십 종의 꽃이 꽂혀 있으니 말이다.
"아화(雅花), 꽃을 꽂아 다오."
광화서생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아화라 불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화라 불린 소녀는 몸매가 가냘프나 그런대로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그래왔듯 광화서생의 몸에 꽂혀 있는 시든 꽃들을 뽑아 쓰레기통에 버린 뒤 광화서생의 몸을 새로운 싱싱한 꽃으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후후, 아화. 너는 갈수록 꽃을 닮아 가는구나."
"……."
"아니, 어깨에는 저기 저 모란이 좋을 것 같구나."
아화는 입을 다문 채 광화서생이 가리킨 탐스런 모란을 광화서생의 어깨에 꽂아 주었다.
그녀는 광화서생을 본 순간부터 벙어리가 된 듯싶었다.
그녀는 광화서생의 이런 남자답지 못한 행각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광화서생은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지껄였다.
"어제 꽃들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향기가 적었어. 나는 정신이 몽롱할 만큼 향기가 짙은 꽃이 좋거든. 역시 꽃은 아름다움보다는 향기가 있어야 제격이지."
"됐어요. 닷 냥이에요."
아화는 더 듣기 싫다는 듯 차갑게 내쏘았다.
"허어, 찔리겠다."
광화서생은 히죽 웃으며 금화 한 닢을 아화에게 건네주었다. 은자 백 냥도 넘어 보이는 크기의 금화였다.
아화는 안으로 들어가 거스름돈을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광화서생은 이미 흥얼대며 가게 문을 나서고 있었다.
"병신 같은 자식! 누굴 거지로 아나!"
아화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내쏘며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꽃가게로 술이 잔뜩 취한 걸인 하나가 다가서더니 냄새나는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광화서생의 몸에서 떼어 낸 시든 꽃 한 송이를 주워 들었다. 
걸인은 꽃의 냄새를 맡는 듯 킁킁거리더니 광화서생을 흉내 내듯 옷깃에 시든 꽃을 꽂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행인들 틈으로 사라졌다.
거리엔 많은 행인들이 오고 갔지만 아무도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없었다.
귀기가 감도는 밀실이었다. 
하나의 시든 꽃가지가 예리한 소도(小刀)에 의해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자 시든 꽃가지에서 조그만 쪽지가 하나 나왔다.
<밀명(密命) 육십육호(六十六號) 완수.
소림의 추적이 예상됨.
야우혼(夜雨魂)>
깨알 같은 글씨로 간단한 내용이 적힌 쪽지였다.
밀지를 손에 든 회포중년인의 입에서 득의의 괴소가 새어 나왔다.
"훗훗,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지금까지 야우혼의 활약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했다. 덕분에 시일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기다려야 한다. 무르익혀 터뜨려야 한다."
회포중년인은 삼 년 전 백운향과 이 년간의 거래를 맺었던 바로 그 신비인이었다.
"하나, 놈에겐 진정 미안하게 되었다. 이는 나 귀제갈이 평생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무슨 말인가? 
그의 말에는 뭔가 깊은 내막이 숨겨져 있는 듯한데…….
"어차피 그것이 놈의 운명인 것. 다음은 천음신군(天音神君)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비단 냉막할 뿐 아니라,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띵－ 띠딩－! 한 줄기 금음(琴音)이 비 내리는 밤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길게 길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밤비는 정자(亭子) 지붕의 처마를 타고 내려 넓은 화원(花園)의 꽃잎 사이로 녹듯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금음의 가락은 그 비 속에 아련히 녹아들고 있었다.
<천음신군(天音神君) 종리학(鍾離鶴)>
그는 세속의 명리(名利)를 초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애기(愛器)인 봉황신금(鳳凰神琴) 하나만을 벗하며 만년(晩年)을 보내는 노기인(老奇人)이었다.
가슴 아래까지 드리운 희디흰 백염에, 무아지경에 빠진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봉황신금을 타는 그의 모습은 차라리 신선인 듯싶었다.
탄주(彈奏)에 쏟는 그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었다.
띵! 띵－띠디－딩! 
금음은 천상(天上)의 음률인 양 삼라만상을 포용하듯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이때 돌연, 어디선가 금음 가락에 맞춰 한 줄기 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질펀한 물은 구름 끝에 젖어 있고,
내(川)와 안개(霧)는 먼 마을을 덮고 있다.
물새 돌아간 모래 위엔 발자국이 남아 있고,
돛단배 지난 물결에는 흔적이 없다.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인생을 알겠고,
산을 바라보노라니 고달픈 심혼(心魂)이 달래진다.
경물(景物)에 흠뻑 취해 떠날 수 없는데,
말고삐를 돌리자 날은 이미 저물었다.
홀연 하늘이 먹장구름에 가리우고,
혼(魂)을 실은 밤비가 이슬처럼 대지를 적시나니…
오호! 뉘라서 그를 막을 수 있으랴!
지극히 맑고 청아한 노래 소리였다. 
그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 금을 탄주하던 천음신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혼을 실은 밤비라면 그것은 다름아닌 신비살수 야우혼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띵! 띵! 띵－띠디－띠이잉－!
금음 소리는 순식간에 음공(音功)으로 돌변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쾅－ 쾅－ 우르르－릉! 
천둥이 하늘을 찢고 뇌전이 대지를 강타했다.
바로 천음신군의 독문절기(獨門絶技)인 뇌음탈명쇄심공(雷音奪命碎心功)이 가공할 위력으로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청아한 노래 소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금음의 변화에 따라 고조되어 갔다. 
노래 소리 또한 은연중에 음공으로 변해 있었다.
음공 대 음공. 
그 대결은 오래 가지 않았다.
따앙－! 봉황신금의 현(絃)이 돌연 끊어졌다.
"으…으헉!"
이어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과 함께 천음신군은 입에서 피분수를 뿜어 냈다.
그는 백염을 시뻘겋게 피로 물들이며 자신이 탄주하던 봉황신금 위로 서서히 엎어져 갔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어디선가 장중한 불호성이 울려 왔다.
"아미타불… 소림의 제자들은 세존(世尊)의 이름으로 천하살성(天下殺星) 야우혼을 처단하라!"
순간, 화원이 크게 일렁이며 이십여 줄기의 장소성이 장중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우우……!"
"우우……!"
무림의 태두(泰斗) 소림이 야우혼을 잡기 위해 천하 도처에 그들의 전세력을 깔아 놓았던 것이다.
천불선사가 야우혼에 관해 파악한 것을 토대로 금불, 왜불, 광불 등 세 고승은 야우혼의 무공파해초식(武功破解招式)을 한 달 정도에 걸쳐 완성했다. 
그리고 기승(奇僧) 패룡옥불은 스스로 야우혼의 입장에 서서 야우혼이 노릴 만한 곳에 소림의 세력을 깔아 놓았다.
결국 천년소림(千年少林)의 안배는 한 달 만에 비로소 그 실효를 거두게 된 것이다.
지금 화원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장소성은 보리항마후(菩提降魔吼)였다.
보리항마후! 
이는 모든 사마음공(邪魔音功)의 극성(極性)이었다.
야우혼, 아니 백운향은 언젠가 밀실에서 복면여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요혼사심곡(妖魂死心曲)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두 종류의 개세음공(蓋世音功)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순간, 백운향은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눈앞에 불똥이 튐을 느꼈다.
'으흑! 끝…끝장이다!'
울컥! 백운향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한 모금 토해졌다.
그는 그 와중에도 재빨리 화원을 예리하게 살폈다.
'열여덟 명. 그렇다면 저들은 소림의 십팔나한(十八羅漢)!'
그렇다. 야우혼을 척살하기 위해 소림의 십팔나한이 출동한 것이었다.
소림이 무림의 태두로 부상하게 한 가장 큰 근원은 바로 무림사에 불패(不敗)의 신화를 기록한 십팔나한과 백팔나한일 것이다.
특히 십팔나한은 수천여 소림제자 중 가장 자질이 뛰어난 열여덟 명의 재승(才僧)을 뽑아 상상불허의 가혹한 수련 끝에 이루어지기에 가히 일파의 지존 못지않은 신력(神力)을 지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한 십팔나한에 의해 펼쳐지는 보리항마후의 위력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으랴!
백운향은 사력을 다해 보리항마후에 대항했다.
그의 전신혈맥(全身血脈)은 당장 터져 버릴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 상태로 일 각만 지나면 그의 전신은 산산이 파열되고 말 것이다.
하나, 소림 십팔나한도 결코 성하지는 못했다. 
그들도 밀납처럼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가에 실낱 같은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더이상 견딜 수 없었음인가?
파아악－! 백운향의 신형이 섬전처럼 밤비 속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이 한 동작에 혼신의 공력을 다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어두운 밤비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시뻘건 핏줄기가 호선(弧線)을 그으며 이어지고 있었다.
"쫓아라! 놈은 부상당했다!"
한 소리 우렁찬 외침과 함께 열여덟 줄기의 인영이 백운향이 사라져 간 방향으로 쏘아져 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백운향은 신형을 비틀거리며 겨우 천음신군의 거처를 빠져 나와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십팔나한의 추적을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얼마쯤 달려갔을까? 
그의 눈에 하나의 장원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 폐장(廢莊)인 듯 낡을 대로 낡은 장원이었다.
백운향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장원의 담을 뛰어넘었다.
그는 너른 뜰을 지나 후원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의 아담한 소축(小築)이 그의 시선으로 파고들었다.
백운향은 유령처럼 소축의 창문 안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그의 코끝으로 향긋한 사향 냄새가 확 끼쳐 왔다.
백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했다. 
그 방은 뜻밖에도 여인의 침실이었다. 
하나, 그는 지체없이 안쪽의 분홍빛 휘장을 향해 일지(一指)를 튕겨 냈다.
"흐윽……!"
휘장 안으로부터 가녀린 여인의 신음성이 울렸다.
백운향은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가 휘장을 들추었다. 
백의소녀 하나가 보였다. 
나이는 대략 십 칠팔 세쯤 되었을까? 
아름다웠다. 이런 폐장에 어찌 이토록 아름다운 미소녀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 정도로 그녀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폭포수처럼 길고 탐스런 검은 수발(秀髮)은 베개를 감싸듯 풀어 헤쳐져 있었으며, 당혹에 찬 시선으로 백운향을 바라보는 두 눈 봉목은 한 쌍의 보석을 보는 듯했다. 
거기다 고즈넉한 코에 붉은 꽃잎을 문 듯한 입술, 빙기옥골(氷肌玉骨)처럼 희고 투명한 피부,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굴곡이 완연한 뇌쇄적인 몸매…….
숨이 막힐 듯 지극히 아름다운 미소녀였다. 
백운향은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여기는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의 폐장이다. 그렇다면 저 미소녀는 말로만 듣던 여우의 변신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하나, 백운향은 재빨리 그런 생각을 떨쳐 버렸다. 
이제 곧 소림십팔나한의 추적이 이곳까지 뻗쳐 올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죽을 수 없다! 천하의 탕아(蕩兒)라 낙인 찍히는 한이 있어도 아직은 결코 죽을 수 없다. 내겐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낭자, 부디 용서를…….'
백운향은 미소녀의 엷은 잠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미소녀는 혈도를 제압당한 터라 꼼짝도 못하고 공포에 질린 눈망울을 휘둥그래 뜬 채 백운향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몸은 이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裸身)으로 변했다. 
그러자 백운향은 서슴없이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미소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순간 미소녀의 입에서 소리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신 사만팔천 모공(毛孔)이 느닷없는 사내의 침입에 공포를 참지 못하고 아우성을 쳐댔다.
미소녀는 어처구니 없게도 졸지에 겁탈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내의 우람한 동체가 여인의 가냘픈 몸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인은 아혈(啞穴)마저 제압당한 터라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사내의 손길에 몸을 내맡겨야 했다.
여인의 두 봉목에 물안개가 가득 피어 올랐다.
꿈이련가? 아니, 제발 꿈이기를……!
그러나 애써 현실이 아니길 바랬던 미소녀의 간절한 소망은 이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하복부를 예리한 칼로 도려 내는 듯 전해지는 통증에 미소녀는 아예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뇌리는 거센 파도에 휩쓸린 듯 백지장처럼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백운향은 규칙적으로 몸놀림을 계속하는 와중에도 방 밖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일순 그의 두눈에 한 줄기 기광(奇光)이 번뜩 스쳐갔다.
'인기척! 십 장 밖이다!'
갑자기 그의 몸놀림이 집요하게 돌변했다. 
운(運)을 하늘에 맡긴 채 그는 이름도 모르는 한 미소녀와의 정사(情事)에만 온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미 여인에 관한 한 환락도 등운루의 연화(蓮花)를 통해 거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직접 여인의 몸에 살을 접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비록 그것이 살기 위해 저지르는 겁탈이라고는 해도…….
백운향은 이때 미소녀의 눈빛이 달뜬 열기를 머금으며 흐릿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순간, 그는 점(點)했던 미소녀의 마혈과 아혈을 동시에 풀어 주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녀의 미끈한 두 팔이 백운향의 목을 휘감아 왔다. 그녀는 이미 백운향의 집요하고도 능란한 행위에 이성을 잃고 있었다.
"흐윽… 아하……."
백운향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뜨거운 교성이 터져 나왔다. 듣기만 해도 황홀경에 몰아넣고 말 듯한 달뜬 교성이었다.
"흐으윽…! 허억……!"
"으…으음……!"
각기 다른 두 종류의 열락에 찬 신음성이 뜨겁게 엉켜 흘렀다.
이때 돌연, 밖으로부터 당혹스런 불호성이 연이어 들려 왔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백운향을 추적해 온 십팔나한들의 불호성임이 분명했다.
"기이한 일이다. 그 자는 분명 이쪽으로 도망쳐 온 것이 분명하거늘, 어느새 다른 곳으로 피했단 말인가? 아미타불… 어쨌든 이곳은 아닌 듯싶으니 어서 이곳을 떠나자!"
기척도 없이 다가왔던 그들은 방 안의 뜨거운 상황에 몹시 당황한 듯 발소리를 남기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불자(佛者)의 몸이었으니…….
백운향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부부 간에나 있을 행위를 벌임으로써 소림십팔나한의 추적을 따돌리고자 했던 것이었다.
결국 그의 예상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십팔나한이 이곳 폐장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운향은 두 손으로 터질 듯 팽팽히 부풀어 오른 미소녀의 두 젖가슴을 가득 움켜쥐며 계속 집요하게 몸을 움직였다.
"흐으윽…! 하악……!"
고조될 대로 고조된 미소녀의 교성이 방 안을 녹일 듯 자지러졌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비명에 가까운 교성을 터뜨렸다.
"하…악!"
그녀는 이내 전신의 힘이 모조리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몸이 축 늘어졌다.
백운향의 몸이 미끄러지듯 그녀의 몸에서 떨어진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는 극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로 과도한 행위를 벌인 터라 입에서는 연신 붉은 핏덩이를 토해 내고 있었다.
백운향은 이내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이때 미소녀는 얼이 빠진 듯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 너무나도 일순간에 무너져 내린 고귀하고 순결했던 처녀의 성(城)! 
그것이 깨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미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그녀의 바로 옆에 피거품을 물고 죽은 듯 엎어져 있었던 것이다.
미소녀는 도리질을 쳤다. 
이슬처럼 순수했던 순결이 너무도 억울하게 짓밟혀졌음을 애써 부인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미소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붉디붉은 입술에서 그보다 더 붉은 핏물이 미려한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 자신에 대한 증오였다. 
그녀는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다. 그리고 그 증오는 똑같은 비중으로 백운향에게로 향해졌다.
미소녀의 두 눈이 새파란 독기(毒氣)를 품고 백운향을 향해 돌려졌다.
'죽이겠어! 이토록 나를 비참하게 만든 너를 죽이고 말겠어!'
그러나 그녀가 죽이지 않더라도 백운향은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미소녀는 한동안 흑빛으로 죽어 가는 백운향의 준미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운향의 얼굴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으나 고통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무언가 알 수 없는 처절한 한(恨)과 고독만이 얼굴 가득 앙금처럼 깔려 있을 뿐이었다.
불현듯 소녀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죽여야 한다는 사실만은 변할 수 없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그녀는 잠시 무슨 생각엔가 잠기는 듯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한쪽에 놓여 있는 잠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물이 가득 담긴 세수대야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희디흰 무명천에 물을 적셔 백운향의 입 언저리와 목 주위의 흥건한 피를 닦아 냈다. 
이어 그녀는 한쪽에 있는 서탁(書卓)에서 목갑(木匣) 하나를 꺼내 왔다.
목갑이 열리자 청량한 약향(藥香)이 방 안 가득 퍼져 나갔다. 
목갑 안에는 붉은 단약(丹藥)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미소녀는 그 중 한 알을 꺼내 자신의 입으로 녹인 후 백운향의 입에 입술을 갖다 댔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백운향을 살리려 하고 있지 않은가.
죽이겠다던 백운향을 살리려 하는 그녀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목갑에서 금침(金針)을 꺼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백운향의 전신 삼백육십대혈(三百六十大穴)에 금침을 꽂기 시작했다.
침을 다 꽂고 나자 미소녀는 잠시 백운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뒤쪽에 있던 거울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녀는 거울 앞에 놓인 칠보옥합(七寶玉盒)을 앞으로 당겨 뚜껑을 열었다. 
옥합 안에는 분을 비롯한 화장품들이 들어 있었다.
향긋한 분향(粉香)이 방 안에 은은히 퍼져 나갔다.
미소녀는 거울을 보며 정성스레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본래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소녀이다. 하나, 눈물자국이 지워지고 다듬어져 가는 그녀의 용모는 이미 좀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화용(花容)! 그녀의 모습은 한 마디로 미와 품위, 고결함이 함께 어린 화용이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전신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꽃의 기품이 서려 있었다. 
필경 예사롭지 않은 신분을 지니고 있는 듯싶었다.
화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화장을 마친 미소녀는 다시 백운향의 옆으로 돌아와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가 백운향을 바라보는 눈길은 기이하게도 아내가 남편을 바라보듯 온유로웠다. 
하지만 그녀의 눈 저 깊은 내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여인 특유의 독기였다. 
비가 내리는 이 밤.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이 순결을 무참히 짓밟힌 후 정성스레 화장을 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안에는 황촉불이 타오르는데…….
백운향은 차라리 깨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가 범한 여인은 그토록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화장을 할 수 있는 여인이기에…….
두 쌍의 눈(眼).
몽롱한 듯 무심한 눈동자와 한없이 온유롭고 따사로운 눈동자.
그 두 쌍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얽히자, 온유로운 눈동자가 스르르 아래로 떨구어졌다.
무심한 눈동자가 물었다.
"낭자의 이름은?"
"설추련(雪秋蓮)."
온유로운 눈동자는 떨구어진 상태 그대로 대답했다.
무심한 눈동자가 말을 이었다.
"몹쓸 운명이로군."
"당신의 운명은 기구하구요."
"후후, 기구? 지금 생각하니 그대의 운명도 그런 것 같군."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이 기구한 셈이로군요."
"우리……?"
"그래요. 너와 내가 아닌… 이미 우리지요. 낭군님."
"낭군…? 그렇던가?"
백운향의 무심하던 눈동자에 미미한 물결이 일었다.
미소녀 설추련은 그림 같은 자태로 앉아 찻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범하군. 그대는……."
"당신께선 더 대범하셨지요."
"그건 대범이 아니었소."
"아니예요. 당신은 누구한테도 영원히 지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저의 낭군이시니까요. 적어도 저만은 그렇게 믿고 싶어요."
"……."
"그보다… 당신은 이제 당신의 행위에 대한 보복을 받으셔야 해요."
말은 보복이라 했으나 설추련의 음성은 지극히 부드러웠으며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품 속에서 조그만 봉지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당신의 잘못만은 아니예요. 우리 두 사람의 공통된 잘못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살아야 해요."
"……?"
"당신은 이미 저의 낭군이기에… 낭군의 잘못은 아내의 부덕(不德)이 책임지는 것이라 저는 배웠고, 또한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 동감하고 있어요."
"……!"
"이것은 학정홍(鶴頂紅)이에요."
설추련이 봉지를 열며 말을 잇자, 백운향은 흠칫 안색을 굳혔다.
"그대는 지금……?"
설추련은 학정홍을 찻잔에 털어 넣었다.
"당신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다만 한 가지 바라옵건대… 차후로 이 못난 하룻밤 지어미의 한(恨)을 잊지 마시고 부디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대인(大人)의 길을 걸어 주세요."
설추련은 희다 못해 투명한 약지손가락으로 찻물을 저으며 간곡하게 말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던가?
그렇다. 설추련은 지금 백운향이 보는 앞에서 극독(極毒)인 학정홍을 탄 차를 마시고 자결함으로써 백운향의 가슴에 못을 박으려 하는 것이다.
백운향은 절로 탄식했다.
"내게 독배(毒杯)를 먹이는 것보다 더 가혹한 복수로군."
"듣기 민망한 말씀이에요. 낭군께 복수라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저는 단지 우리 중 누군가가 두 사람의 공동된 짐을 지면 된다는 것뿐이에요. 우리 둘 중 한 사람만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어제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되는 것이니까요."
"한데, 왜 그대가……?"
"당신은 저의 하늘과 같은 낭군이시기 때문이에요."
설추련은 독배를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이었다.
백운향이 다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잠깐!"
"더 하실 말씀이라도 남았다는 건가요?"
"나는 그대의 남편으로서 그대의 행동을 중지시키고자 하오."
설추련은 잘게 교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엔 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
"호호!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여인이라 해도 모든 것을 지아비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백운향은 곤혹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런 묘한 곤경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묘한 여자를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독배가 설추련의 꽃잎 같은 입술에 닿았다.
백운향은 탄식 어린 음성으로 다시 그녀를 제지했다.
"잠깐! 내 그대의 뜻을 잘 알겠소. 그러나 부탁이 하나 있소. 죽기 전에 그대의 신분 내력과 남길 말을 듣고 싶소.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시오."
설추련의 두 봉목에 언뜻 우수의 빛이 스쳤다.
"이 이상 낭군의 심기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군요. 그것이 지어미로서 마지막으로 해드릴 수 있는 도리라고 생각해요. 단지……."
"단지……?"
"언젠가 혹시 칠절신의(七絶神醫)를 만나시면 제가 머리를 깎고 출가(出家)했다고만 전해 주세요."
말을 하는 그녀의 두 봉목엔 흐릿한 물안개가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인해 그녀는 백운향이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음을 미처 보지 못했다.
"칠절신의라면……."
"낭군께서 더이상 저의 갈 길을 지연시키지……."
그때였다. 
돌연 백운향의 신형이 앉은 자세 그대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내 몸이 이토록 가볍다니 그대의 의술은 실로 기가 막히군."
"……!"
"칠절신의를 만나면 나의 아내가 착하고 현숙하며, 여인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다고 전할 것이오. 아울러 조만간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안게 해드리겠다고도 전하겠소."
백운향의 모습은 이미 방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음성은 전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 낭군의 이름은 야우혼… 야우혼이오. 아마도 내가 그대를 다시 만나게 되면 나는 그대를 사랑할 것 같소." 
전음은 그 말을 끝으로 끊겼다. 
설추련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망연히 백운향이 빠져 나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실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백운향의 내상은 너무도 극심해 비록 치료를 했다고는 하나 겨우 회복단계였으며, 만약을 위해 점혈(點穴)까지 했었다.  
한데도 그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유유히 사라져 간 것이다.
설추련의 손에서 독배가 떨어졌다.
쨍그랑! 복수의 대상이 사라졌듯 독배도 산산조각 깨어졌다.
그녀는 백운향에게 또 한 번 당한 셈이었다.
백운향은 그녀를 말려도 소용이 없음을 간파했다. 독배를 빼앗는다고 해도 그녀는 혀를 깨물고서라도 자결할 것이 분명했다.
백운향은 일단 말로써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어떻게 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를 모색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삼십육계(三十六計) 줄행랑이었다. 그녀의 의도는 백운향 앞에서 자결함으로써 백운향의 가슴에 못을 박으려고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운향은 자신이 보지 않은 상황에서는 설추련이 결코 자결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해서 그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즉시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며, 결론적으로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설추련은 언제부터인가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흐흐흑……!"
그리고 잠시 후, 백운향이 빠져 나간 창문으로 또 하나의 인영이 쏘아져 나왔다. 
다름아닌 설추련이었다.
"찾아야 해.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찾고 말겠어."
찾아서 어쩌겠다는 건가? 
반드시 백운향이 보는 앞에서 자결을 하고 말겠다는 것인가?
모른다. 지금 설추련은 단지 백운향을 꼭 찾아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천의장 비무대회(天意壯 比武大會)
낙양성.
성내가 새로운 활기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아침 나절. 
백운향은 광화서생의 모습으로 거리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허어, 광화서생. 안색이 어찌 그리 창백하오?"
지나가던 황의거한이 아는 체 하면서 묻는 말에 백운향은 광화서생 특유의 바보 같은 웃음을 머금은 채 대꾸한다.
"어제 저녁 먹은 것이 체해서… 어휴, 측간을 열네 번이나 다녀왔더니 이렇다오."
"한데, 어찌 오늘은 꽃을 반쪽만 달고 있소?"
"아, 어찌나 뒤가 급했던지 측간 문을 들이받았지 뭐요. 그래서 지금 부랴부랴 아화한테 가는 길이라오. 아아, 좀 멀찍이 떨어지시오. 아직도 내 몸에서 측간 냄새가 날까 두렵소."
백운향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황의거한의 조소에 찬 눈길을 받으며 달아나듯 휘적휘적 걸어갔다.
얼마 후, 백운향은 낙양성 십삼번가의 꽃집에 들렀다.
아화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그의 몸에 꽂힌 꽃을 갈아 새롭게 치장해 주었다.
<천음신군 척살 시 소림의 기습을 받음.
천음신군의 생사(生死)는 불명(不明). 확인하지 못했지만 실패했을 가능성이 큼.
현재 부상 중. 공력을 완전히 운용할 수 없음.
야우혼(夜雨魂).>
귀기가 감도는 밀실에서 밀지를 펼쳐 든 귀제갈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 갔다.
그로서는 처음 받아 보는 야우혼의 실패 통보였던 것이다.
"으음, 반신화(半身花)의 소식을 받았을 때는 설마했거늘… 소림, 소림이라… 야우혼이 당할 정도라면 소림의 잠재력은 우리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강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귀제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돌연 그는 두 눈에서 섬뜩한 광망(光芒)을 폭사시켰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 계획을 앞당기는 수밖에… 소천존(小天尊)께서 출관하신 지도 벌써 일 년여… 결코 빠른 게 아니다."
말을 잇는 귀제갈의 두 눈에 언뜻 애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백운향… 진정 아까운 놈이다!"
백운향은 낙양성 이십육번가 철물병기점(鐵物兵器店)으로 들어섰다.
쇠 달구는 소리와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백운향은 평범한 장검(長劍) 한 자루를 골라 들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마치 귀한 보검처럼 보이는 청색 장검이었다.
백운향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은근한 기대에 차 있던 병기점 주인 주칠(朱七)은 짐짓 놀랍다는 듯 호들갑스럽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아이구! 광화서생께서 꽃과 도박에만 명인(名人)이신 줄 알았더니 검을 보시는 안목도 출중하십니다 그려."
백운향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안목까지야… 내 엊그제 친구의 초청으로 친구 집에 가보니 그 집 대청마루에 턱하니 반월보검(半月寶劍) 한 자루가 걸려 있지 않겠소."
"호, 그래서요?"
"그것이 어찌나 운치 있어 뵈고 한편으로는 든든해 보이던지… 나도 우리 집에 괜찮은 보검 하나를 걸어 둘까 하는데… 이건 어떻소?"
"아주 잘 고르셨습니다. 그것은 원래 신검(神劍) 중의 신검이니까요."
"얼마요?"
"신검이라 오백 냥은 받아야……."
쨍그랑! 백운향은 검을 바닥에 떨구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오백 냥이라 했소?"
"원 성미도 급하시기는. 오백 냥을 받아야 하는데 광화서생께는 특별히 반을 뚝 자르고 거기다 또 반을 뚝 더 잘라서 백이십오 냥만 받겠다 이거지요."
"백이십오 냥? 백 냥이면 백 냥이지, 남자가 쩨쩨하게 백이십오 냥이 뭐요? 차라리 이백 냥을 부르든지… 옛소."
백운향은 백 냥을 재빨리 주칠에게 안겼다.
"허, 이거야 원……."
주칠은 짐짓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백운향이 몸을 돌린 순간, 주칠의 얼굴은 수지맞았다는 듯 희색이 만연해졌다.
백운향이 사간 검은 사실 열 냥의 값어치도 안 되는 보잘것 없는 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주칠이 정색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양심이 있는 편이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오백 냥이 아니라 오천 냥을 부르고도 남지. 암암……."
딸칵! 검의 손잡이를 돌리자 손잡이가 검신(劍身)과 분리되었다.
그러자 손잡이 안에서 기름종이로 싼 둥근 물체 하나와 쪽지 한 장이 나왔다.
백운향은 먼저 쪽지를 펼쳐 들었다.
<전번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다.
또한 이번 일만 성공하면 잔여 기간에 상관없이 이 년 거래 계약을 완수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그 증표로 칠절신의의 태령활명신단(太靈活命神丹)을 보낸다.>
"칠절신의!"
백운향은 흠칫 안색을 굳혔다. 
설추련의 모습이 절로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제기랄! 일이 사납게 꼬이는군."
백운향은 투덜대며 기름종이에 싸인 둥근 물체를 보았다.
칠절신의의 태령활명신단이란 쪽지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단환은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천하명약(天下名藥)일 것이다.
그의 시선은 다시 쪽지로 옮겨졌다.
<척살자：천의장주(天意莊主) 사도천(司道天).
나이：이십이 세.
출신：불명.
무공：불명.
특징：미간(眉間)에 홍점(紅點). 준수한 용모에 백의를 즐겨 입으며 여인은 멀리한다고 함. 
만학(萬學)에 통달하고 바둑을 즐김. 아침 저녁으로 백팔미로진(百八迷路陣)이 설치된 천의장 내의 화원을 산책함.
주의사항：그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호법(護法)이 있으나 호법의 숫자나 무공수위는 밝혀지지 않고 있음.
거사일：중추절(仲秋節) 전후 닷새 사이.
비 오는 밤을 잊지 말 것. 무운(武運)을 빔. >
"젠장! 걸려도 된통 걸렸군. 차라리 백화장주를 죽이라고 했으면 자결이라도 할 텐데, 하필이면 천의장주라니……."
푸스스…! 백운향은 밀지를 손 안에서 삼매진화로 태워 버렸다.
그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천의장주는 천하인들이 자신과 함께 인의대협으로 칭송하는 진정한 의인(義人)이 아니든가?
자신이야 거짓 인의대협 행세를 하고 있지만 천의장주야말로 진실된 사람이라 믿고 있었는데……. 
그 믿음이 더욱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사실 그가 무악상인(無惡上人)을 척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 노인장, 사람은 본래 죄도 좀 짓고 나쁜 일도 가끔 해야 사람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이오. 한데, 노인장은 악한 데라고는 조금도 없는 선인(善人)이라니. 에이, 고얀!
그러나 천의장주에게는 그런 가벼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살수였다. 
살수는 어떠한 감정도 배제시켜야 한다. 
팔월 중추절이라면 정확히 보름 후.
그 날 백운향은 자신이 지닌 최고의 필살지검(必殺之劍)을 펼칠 것이다. 
자신의 검 아래 천의장주가 피를 쏟으며 죽어 갈 것임을 백운향은 자신하고 있었다.
"비가 오느냐, 안 오느냐… 그것이 문제다. 그러나 천하에서 나만큼 밤비에 대해 아는 사람은 결코 없다. 비는 반드시 올 것이다. 그것도 중추절 날 밤에. 후훗! 사도천 장주, 이건 당신의 운명이자 나의 운명인 것이오."
신비에 싸여 있던 금릉 천의장(天意莊)이 돌연 그 동안의 신비를 벗고 거대한 대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 누구든지 신분 여하를 불문하고 천의장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 누구든지 천의장주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천의장의 만성전(萬星殿)으로 오라!
－ 인의대협 사도천장주께선 천하의 공론(公論)을 듣고 싶어하신다!
그것은 실로 파격적인 처사였다. 
한데, 그것이 세상에 공표된 것은 공교롭게도 백운향이 천의장주의 척살명령을 받은 칠월 그믐이었다.
아무튼 그 날 이후, 금릉의 천의장 주변은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천의장의 웅대한 시설을 구경하러 온 사람, 천의장주에게 받은 은덕을 감사하러 온 사람, 천의장주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온 사람, 천의장주와 천하세론(天下世論)은 물론 만학(萬學)을 논하러 온 사람 등으로 천의장 주변은 발 딛을 틈도 없었다.
한편, 천의장주 사도천은 매달 풀어 온 자선금을 세 배로 늘리고 참석하는 모든 손님에 대한 숙식도 모두 제공했다.
이렇듯 후덕한 그의 인의지심(仁義之心)은 그를 더욱 칭송하게 했고, 마침내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중원대륙의 살아 있는 신(神)이라고까지 떠받들기에 이르렀다.  
때를 같이하여 그는 천하의 무림명숙들에게 친필로 초청장을 보냈다.
<중추가절(仲秋佳節)을 맞이하여 천하동도(天下同道) 여러분을 초청코자 하오니, 부디 사양치 마시고 왕림해 주시면 사모(査某)는 필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미진한 후배를 위하여 채찍의 말씀을 준비해 주시면 더욱 영광스럽겠습니다.
천의장주 사도천 앙배(仰拜)>
실로 겸손이 극에 달한 문구(文句)요, 가히 사도천이란 사람의 인간됨을 알게 해 주는 초청장이었다.
누가 그 초청을 마다할 수 있으랴!
팔월 초하루의 날이 밝기가 무섭게 금릉으로 이르는 모든 관도(官道)는 무림인들의 인파(人波)로 줄을 잇기 시작했다. 
짐작컨데 아마도 이번 중추절의 천의장 회동(會同)은 무림 역사상 초유의 대성황을 이룰 것이 틀림없었다.
눈. 웃음기 머금은 눈이 샛별처럼 반짝인다.
그 눈에는 바람에 밀리듯 떠오르는 노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눈 위의 두 검미(劍眉)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昇天)하듯 힘차게 휘둘러 쳐져 대장부의 기상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뿐인가! 
그 아래로 굳세게 내리뻗은 우뚝한 코, 한 일자로 굳게 다물었으되 잔잔한 미소가 감도는 입술, 게다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인 양 두 미간 사이에 난 콩알만한 붉은 점, 고결한 풍도(風度)마저 보여 주는 백의유삼(白衣儒衫)…….
그것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사내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不成說)이기는 하나 그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누군가. 이 아름다운 사내는……?
그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내인 천의장주 사도천이었다.
그는 지금 바둑을 두고 있었다. 중반전에 접어든 바둑은 백(白)을 쥔 사도천이 몹시 불리한 형세였다.
탁! 그의 희디흰 옥수(玉手)에 의해 한 수가 두어졌다.
순간 관전하던 중인들은 일제히 탄성을 발했다.
지금껏 불리하던 형세가 그 한 수로 인해 완전히 반전되었고, 더욱이 흑(黑)의 대마(大馬)를 횡사(橫死)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기 때문이었다.
"오! 기막힌 묘수(妙手)로다!"
"아무리 기문(奇門)의 만묘신군(萬妙神君)이라 해도 이 시점에서 판을 뒤집기는 힘들 것이다."
"인의대협은 이미 흑을 쥐었던 첫판에서도 이겼으니, 이렇게 되면 바둑의 천하명인은 이제부터 사도천 대협이다!"
사도천은 좌중을 돌아보며 겸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들의 판단은 아직 이르십니다. 바둑은 이제부터일 뿐입니다."
그때 심각하게 반상을 주시하던 만묘신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분들의 말이 맞소. 그 수를 막을 방법이 노부에게는 없소이다. 그런 묘수가 존재하다니… 노부가 졌소이다. 그러나 유쾌한 패배였소. 헛헛헛!"
그는 진정으로 유쾌한 듯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도천은 정중히 목례했다.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실력이야 신군께서 저보다 월등히……."
"아니오. 바둑에선 운도 실력이오. 실력이 없으면 그런 운도 따르지 않는 법이니까. 하나, 노부는 이미 알고 있소. 사도대협이 노부의 체면을 생각해 수를 늦추어 주었음을. 앞으로 바둑의 진정한 천하명인은 바로 사도천 대협 당신이오이다."
사도천은 멋적은 듯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인의대협이 당대(當代) 최고의 바둑 달인인 만묘신군을 상대로 수를 늦추고도 여유 있게 승리할 줄이야!
동곽대선생(東廓大先生) 동곽유(東廓儒).
그는 당금 황제인 영락제(永樂帝)가 인정한 천하제일의 대석학(大碩學)이다.
사도천과 밤새 담론을 벌인 그는 한순간의 막힘도 없는 사도천의 박학다식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놀라움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천하의 근본은 무엇이라 생각하오?"
"옛 성현(聖賢)께서 가르치시기를 천하의 근본은 사람이라 했지요. 하나, 소생은 감히 천하의 근본이란 결코 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음……."
"찻잔에 차가 담기면 물론 찻잔이지요. 만약 찻잔에 차가 담겨 있지 않으면 그 잔을 무엇이라 불러야 옳겠습니까?"
"그래도 찻잔은 찻잔인 게지."
"바로 그렇습니다. 천하는 어떠한 상태에서도 천하일 뿐입니다. 바다가 육지로 변하고, 도도한 장강(長江)의 줄기가 거꾸로 흐른다 해도… 설사 천하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천하는 천하일 뿐, 달라지는 것은 없지요. 그런 천하를 어찌 근본을 따질 것이며, 그 근본이 어찌 인간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실로 조리정연한 논리(論理)였다. 
또한 사실이 그러했기에 동곽대선생은 아예 할 말을 잃었다.
동곽대선생은 천하제일이라 자부하던 자신의 학식이 이제 막 약관을 넘긴 젊은이를 따르지 못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길로 천의장을 떠났다.
이후 천하에서 그를 다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추절의 아침이 밝았다. 그러나 이번 중추절에는 보름달을 보기 힘들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제법 차가운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더니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평원을 연상시키는 일만여 평의 천의장 정원에도 가을비는 어김없이 내리고 있었다.
정원 정중앙. 
그곳에는 비무대(比武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비무대를 빙 둘러 수십 동의 거대한 천막이 병풍처럼 쳐져 있었는데, 천막 속엔 천하 각 대소문파의 모든 주요 인물들이 거의 총망라해 있었다.
천막 동쪽 상단(上壇)에 천의장주 사도천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좌측에는 소림장문인 패룡옥불을 대신해 참석한 왜소한 체구의 왜불선사가, 우측엔 무당장문인(武當掌門人) 옥현자(玉玄子)가 좌정해 있었다.
또한 그들 옆으로는 개방노장로 대취신걸(大醉神乞) 등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나 장로들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외에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문파인 기문(奇門)의 문주(門主) 만묘신군(萬妙神君), 정사(正邪)를 분간할 수 없는 신비고수 냉심마영객(冷心魔影客), 전 마도인(魔道人)들의 우상이며 현재 마도맹주(魔道盟主)인 혈마검존(血魔劍尊) 등에서부터 강호 하류잡배들의 집단인 하오문(下五門)의 인물들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삼류무사들까지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번 비무대회의 목적은 단순히 현 무림의 평화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참가 자격에 제한은 없었다. 
천막 상단의 각 대소문파의 지존급들을 제외한 모든 무림인들에게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역대의 모든 비무대회가 그러했듯이 비무대회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개인은 물론 사문(師門)에 크나큰 영예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이번 비무대회는 어떤 의미에서 각 파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각 파에서는 자파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내놓으라 하는 후기지수(後起之秀)를 참가시켰다.
참가자 수는 무려 일천여 명.
대(臺) 위에선 이미 비무대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새벽부터 이루어진 일차 예선은 이미 끝나고 지금은 본선에 오른 백이십 명의 젊은 고수들이 두 조(組)로 나뉘어 비무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번 비무대회에서는 진검승부(眞劍勝負)를 하기는 하나 살상은 금지되었다. 
천의장주의 호법이라는 금의노인(金衣老人)이 피를 보기 전에 냉정한 심판을 내려 사전에 불상사를 막고 있었다.
천막 상석에 위치한 사도천은 여유롭게 봉황선(鳳凰扇)을 폈다 접었다 하며 비무를 관전하고 있었다.
비무대 위에서는 화산파 제자인 옥룡검객(玉龍劍客) 상운천(尙雲天)과 동해 도화도(桃花島)의 소도주(小島主) 도화신룡(桃花神龍) 모극랑(毛克浪)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무당과 더불어 무림양대검파(武林兩大劍派)로 불리우는 화산파의 태을검법(太乙劍法)과 신비의 섬 도화도의 삼십육초도화비류검법(三十六招桃花飛流劍法)이 비가 내리는 비무대 위에서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두 사람의 접전을 관심 있게 관전하던 사도천이 옆에 앉은 왜불선사를 향해 나직이 말을 건넸다.
"선사께서는 지금의 접전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아미타불… 겉으로 드러난 상황은 막상막하이나, 도화도의 모소시주는 자신의 본래 실력을 감추고 있는 듯하구려."
"소생도 동감입니다. 도화신룡은 지금 자신의 실력을 삼 성도 제대로 발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대 위에서 심판격인 금의노인의 우렁찬 음성이 울렸다.
"그만! 도화도 소도주 도화신룡의 승리요!"
삼십이 초 만에 화산파의 옥룡검객이 검을 떨구고 만 것이다.
사도천은 비무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다시 왜불선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한데, 소림사에선 왜 이번 비무대회에 제자들을 출전시키지 않았는지요?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아미타불… 송구하오."
왜불선사는 합장한 후 말을 이었다.
"실은 장문인의 뜻이… 그분은 본래 명리(名利)보다는 실질적인 힘을 중요시하는 분인지라……."
"흐음……."
사도천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가히 패룡옥불이란 외호에 걸맞는 분이십니다. 소생이 생각컨데 소림은 그분으로 인해 개파 이래 가장 막강한 힘을 구축하리라 믿습니다." 
"아미타불… 빈승이 장문인을 대신하여 감사드리오. 그보다 오늘은 진정 뜻깊은 날이외다. 이 모두가 천하의 홍복(洪福)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하하하! 감당키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저 소생이 좋아서 하는 일일 뿐인 것을……."
사도천의 말에 우측에 앉아 있던 무당장문인 옥현자가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렇기에 더욱 홍복이라는 것이외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사도대협과 함께 천하이대장원으로 꼽히는 백화장의 장주께서 함께 참석하지 못한 것이오. 그분마저 참석했더라면 이번 대회가 더욱 빛이 났을 텐데……."
그 말에 사도천이 정색했다.
"소생이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지만 사제(師弟)도 곧 올 것입니다. 또한 사제도 곧 백화장을 만천하에 개방할 것입니다."
"사제……?"
"오! 백화장 장주께서 사도대협의 사제였던 말이오?"
"그…그럴 수가!"
"아미타불… 진정 홍복이로다!"
좌중은 일시에 경악으로 술렁였다.
천하이대장원이라 칭송이 자자한 천의장과 백화장의 두 장주가 사형제였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 그들이 진정 놀라워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백운향이 오늘 밤 사도천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인들의 술렁거림에 사도천은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제는 이 일을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소생이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군요. 하지만 어차피 곧 밝혀질 사실. 소생의 출신문파(出身門派)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으나 백화장 장주가 소생의 사제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진정 놀랍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오."
"경하드리오, 사도대협!"
주위에서 찬사가 잇따르자 사도천은 듣고 앉아 있기가 민망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일일이 포권지례로 답했다.
이 순간 그의 입가에 한 줄기 가느다란 미소가 스쳐 지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미소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상의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무대 위에선 여전히 비무가 계속되고 있었다.
정오 무렵이 되자, 일조(一組)의 최종 결선 진출자 네 명이 가려졌다.
도화도의 소도주 도화신룡 모극랑,
무당파의 청년도인 태양자(太陽子),
여인문파(女人門派)인 자하문(紫霞門)의 자운옥봉(紫雲玉鳳) 하궁란(河宮蘭),
무명객(無名客)이라 자처한 이십삼사 세 가량의 갈포청년.
그들 사 인이었다.
비무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사도천은 유독 도화신룡과 무명객을 눈여겨 보았다.
네 명의 진출자가 선포되자, 비무대회는 일단 중지되고 성대한 오찬이 벌어졌다.
사도천은 상석에서 여러 무림명숙들과 오찬을 같이한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외인의 출입을 금한 채 운기조식(運氣調息)에 들어갔다.
"도화신룡과 무명객에 대해 소상히 조사하라."
"존명!"
"그들은 분명 오 성 이상의 공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결선까지 올랐다. 특히 무명객이란 자는 내력마저 감추고 있다. 내가 알기로 당금 무림에는 그와 같은 인물이 결코 없었다. 혹시……?"
의문의 말꼬리를 남기던 그 음성은 다음 순간 스스로를 부인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들은 이미 죽었다."
마지막 말은 자르듯 단호했다.
오후에 속개된 비무대회는 한층 열기를 더해 갔다. 
이번에는 오전과는 달리 구파일방의 분전(奮戰)이 특히 돋보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끈 인물은 개방의 호취아(好醉兒)라는 이름의 거지소년이었다.
그가 첫번째로 비무한 상대는 철탑거웅(鐵塔巨熊)이라는 구 척 장신의 거한이었다.
호취아는 술호로를 잠시도 입에서 떼지 않은 채 연신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가까스로 철탑거웅의 공격을 피해 내곤 했다. 
그러다 종래에는 누워서 한 발길질이 철탑거웅의 사타구니를 걷어차는 기막힌 우연으로 장내의 폭소 속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로 그는 여섯 번이나 비무대에 더 올랐지만 그때마다 믿을 수 없는 우연을 연출해 내며 승리를 낚아챘다.
지금 호취아는 여덟번 째 비무를 앞두고 있었다.
"이번에는 개방의 호취아와 벽력신추(霹靂神鎚) 막거병(莫去兵)의 대결이오! 두 사람은 어서 대 위로 오르시오!"
금의노인의 호명이 끝나자, 호취아가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비무대 위에 먼저 모습을 나타냈다. 
하나, 벽력신추 막거병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금의노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우렁차게 소리쳤다.
"벽력신추 막거병은 어서 출전하시오! 열을 셀 동안 출전하지 않으면 기권으로 간주하겠소! 하나, 둘……."
바로 그때였다.
"잠깐!"
어디선가 다급한 음성이 들려 왔다. 
군웅들은 일제히 음성이 들려 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자는 낙양의 명물인 광화서생이 아닌가?"
"저 자가 그 유명한 광화서생? 한데, 저 자가 왜……?"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었다. 
뜻밖에도 금의노인을 제지하고 나선 인물은 최근 괴이한 행각으로 낙양뿐만 아니라, 인근에까지 화제거리로 등장한 광화서생이었던 것이다.
수만의 군웅들 중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그는 유명했던 것이다.
광화서생이 나타나자 단상에 앉아 있던 사도천의 두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빛은 떠올랐을 때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한편, 광화서생은 뜻밖에도 벽력신추가 사용하던 오백 근짜리 철추(鐵鎚)를 등에 진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비무대 위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벽력신추 막대협께서 심한 부상을 입으셨소! 한데 말이오! 그가 내게 자신을 대신해 비무를 해 달라고 부탁했소. 그것이 가능하오?"
금의노인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예상도 못한 듯 한동안 대답을 못하더니 이내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이런 경우는 규칙에도 정해진 바가 없소. 따라서 노부는 당사자가 아닌 대리 참가는 허락할 수 없는……."
호취아가 손을 내저으며 불쑥 끼여든 것은 이때였다.
"아니오! 상관없소! 애쓴 보람도 없이 왔다가 그냥 가면 섭섭할 테니 참석하게 해 주시오. 커…억!"
길게 트림을 한 그는 술호로에 입을 틀어막으며 술기운으로 몽롱해진 시선으로 광화서생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바라보았다.
광화서생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뭘 보는 거냐, 꼬마야? 세수도 안 한 얼굴에 역겨운 술냄새. 내 꽃들이 몽땅 기절해 죽겠다."
호취아는 대꾸하지 않고 오히려 신기하다는 듯 그의 요모조모를 뜯어 보기만 했다.
잠시 생각하던 금의노인이 광화서생을 향해 말했다.
"좋소. 상대가 좋다 하니 그대가 벽력신추를 대신하는 걸 허락하겠소."
"진작 그럴 것이지……."
광화서생은 히죽 웃으며 철추를 끌다시피 등에 짊어진 채 비무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곧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사다리도 없는데 어떻게 저 위로 올라가지?"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비무에 참석한 사람치고 삼 장 높이의 비무대에 오르는 일로 고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화서생은 이러저리 돌아보더니 비무대 위로 기어오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핫핫핫!"
"와하하하!"
장내는 그만 폭소로 뒤덮이고 말았다.
광화서생은 한참 동안 비무대를 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계속 실패만 하자, 체념한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어 그는 비무대 위의 호취아에게 소리쳤다.
"어이, 거기 술 좋아하는 거지 꼬마야! 나는 도저히 안 되겠으니 네가 이리로 내려오너라."
평소 장난을 좋아하는 호취아의 두 눈에 그 어느 때보다도 짙은 장난기가 감돌았다.
"좋아! 넌 정말 이 호취아의 마음에 들었다."
"아서라, 꼬마야! 내가 너의 그 더러운 옷 속에 있는 마음에 들었다면 내 꽃들이 울고 말 거다."
휙－! 호취아는 사뿐히 비무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히히, 그런가? 아무튼 난 널 보니 왠지 함께 술을 실컷 마시고 싶어지는데, 너는 어떠냐?"
"너야말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렇지 않아도 꼬마 네가 술에 자신이 있는 듯해서 술로 승부를 낼까 하고 있었는데……."
"술로 승부를…? 끄…윽! 그렇다면 우린 여기에 더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겠군. 내가 좋은 주루를 알고 있지. 말만 잘하면 공짜로도 마실 수 있고. 자, 가자!"
"좋지!"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광화서생과 호취아는 서둘러 장내를 벗어났다.
군웅들은 이 광경에 아연해지고 말았다. 
명물 대 명물이라고나 할까?
이때 상석에 앉아 있던 개방장로 대취신걸은 줄곧 호취아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조차 안 쓰고 술만 마셔대더니, 호취아가 사라지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도천을 돌아보았다.
"사장주, 미안하구려. 저놈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놈인지라……."
말이 미안이지, 정작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애제자의 행동에 흐믓해 하는 표정이었다.
사도천 역시 개의치 않는 듯 낭랑하게 웃었다.
"하핫! 과연 대취신걸 노선배님의 제자답습니다."
이어 그는 대 위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금의노인을 향해 나직하나 웅후한 음성을 발했다.
"호취아와 광화서생은 나름대로 승부를 내기로 했으니, 그들의 승부를 인정하는 게 좋겠소. 팽호법(彭護法)은 계속 진행하시오."
"와아!"
군웅들은 일제히 사도천의 의향에 찬동한다는 듯 함성을 터뜨렸다.
비무는 다시 속개되었다.
인시(寅時)로 접어들 무렵, 이조(二組)의 최종 결선 진출자도 윤곽이 드러났다.
곤륜(崑崙)의 운룡일현(雲龍一賢) 곽창란(郭蒼鸞).
청성(靑城)의 비천신도(飛天神道).
남해 보타신니(普陀神尼)의 속가제자인 소수관음(素手觀音) 강옥령(江玉玲).
호취아와 광화서생 중의 승자(勝者).
그들 네 명과 일조의 결선 진출자 네 명 등 팔 인 중에서 최후 승자를 가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여기저기에 야등(夜燈)이 밝혀졌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 비는 밤비였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바야흐로 비무대회의 최후 승자를 가리는 최종 결전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호취아와 광화서생은 그때까지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의 승자를 제외한 나머지 칠 인의 비무가 먼저 시작되었다.
맨처음 비무를 시작한 것은 동해 도화도의 도화신룡 모극랑과 곤륜의 운룡일현 곽창란이었다.
그들의 승부는 일찍 끝이 났다. 도화신룡의 검이 곤륜신법의 일인자를 자처하던 운룡일현의 앞가슴 옷자락을 베어 버린 것이다.
운룡일현은 패배를 자인하고 황망히 떠나 갔다.
다음 비무에서 무명객은 청성의 비천신도를, 보타신니의 속가제자 소수관음 강옥령은 무당의 태양자를 각각 꺾고 정상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이제 벌어질 비무는 호취아와 광화서생 중에서 결정날 승자와 자운옥봉 하궁란과의 대결이었다.
자운옥봉은 이미 비무대에 올라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는 노리개 마냥 조그만 소금(小琴)이 걸려 있어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호취아와 광화서생은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자 금의노인은 열을 셀 동안 나타나지 않으면 기권으로 간주하겠다고 선포한 후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여섯, 일곱……."
금의노인이 막 여덟을 세려는 순간, 어디선가 혀 꼬부라진 음성이 다급하게 들려 왔다.
"꼬마야, 늦겠다! 끄윽! 어서 나를 저 대 위로 던지거라!"
쿵－! 금의노인이 열을 헤아린 것과 동시에 비무대 위로 하나의 인영이 요란하게 떨어져 내렸다.
"아이고! 저 소취귀(小醉鬼), 좀 살살 던지지 않고… 끄…윽!"
비무대 위에 볼썽사납게 나뒹군 사람은 다름아닌 광화서생이었다.
하궁란은 고운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광화서생의 몸에서 화향(花香)과 주향(酒香)이 한데 뒤엉켜 역겨운 냄새가 물씬 풍겨 왔기 때문이었다.
광화서생은 비틀비틀 일어서더니 간신히 몸을 가누고 취기 어린 눈으로 장내를 쭈욱 둘러보았다.
"천하무림… 꺼…억! 동도 여러분. 본인은 광화서생이라고 하며… 낙양에서… 끄윽! 왔소이다."
그의 두 다리는 중심을 잡기 힘든 듯 휘청이고 있었다.
"본인과 저 호취아와의 시합은… 본인이 당당히 승리를… 끄…윽! 저놈이 오줌을 못 참아… 먼저 쉬를… 했기 때문에… 끄…으…윽!"
단상 아래에서 호취아가 나직이 장탄식을 터뜨렸다.
"상대가 저토록 미인인 줄 알았으면… 내 꼭지를 잡고서라도… 양보하지 않는 건데. 끄…윽!"
광화서생이 삿대질을 하며 우습다는 듯 호취아에게 소리쳤다.
"이놈아! 끄…윽! 네가 언제 꼭지를 안… 잡았더냐?"
"우히히! 그건 형님도 마찬가지 아니었수? 끄…윽! 좀 억울하지만 어쨌든 잘해 보슈. 난 먼저 가서 거기서 기다리겠수. 끄윽!"
"너무 마시지 말고… 내 몫도 좀 남겨 놔라! 끄으윽!"
군웅들은 광화서생과 호취아의 기상천외한 대화에 아예 할 말을 잊었다.
그 점은 광화서생의 상대가 된 자운옥봉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금의노인이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 이제부터……."
"잠깐!"
광화서생이 갑자기 금의노인을 제지하고 나섰다.
"본인은 저 어여쁜 낭자와… 꺼…억! 좀 특이하게 겨루고 싶소만……."
광화서생은 금의노인이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하궁란을 향해 말을 이었다.
"본인이 보건데… 끄윽! 낭자는 음공(音功)에… 조예가 깊은 듯하구려."
자운옥봉의 입가에 냉소가 피어 올랐다.
"설마하니 당신은 소녀와 음공으로 겨루겠다는 건가요?"
"물론이오. 끄윽! 본인의 말이 끝나는 대로 낭자가 한 곡조 뜯으시오. 본인은 낭자의 음에 맞춰… 끄윽! 노래를 부르겠소. 먼저 멈추는 사람이 패하는 것이오."
"호호! 좋아요!"
자운옥봉은 말을 마치자마자 희디흰 옥수(玉手)를 목에 걸린 소금으로 가져갔다.
띵! 띠디－딩－ 띠띵－!
금음이 빗속을 가르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여린 듯 날카롭고, 부드러운 듯 강렬한 금음이었다.
광화서생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하나, 그의 입에서는 지체없이 낭랑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대 같은 여인은… 천상(天上)의 여인……."
띵! 띠딩－!
"자의경장(紫衣經裝)이 빼어나구려."
띠이잉! 띠－잉!
"자의경장 속에… 으윽! 걸친 분홍빛 나삼(羅衫)은 더욱 아름답고……."
띵! 띠딩－ 띵－!
소금을 뜯던 자의옥봉은 불현듯 이상한 예감에 아미를 살포시 찡그렸다.
광화서생의 노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한데, 백옥빛… 헉! 속치마는 또 무엇인가……?"
하궁란의 옥용이 일순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소금을 뜯는 손끝에 진기를 더욱 불어넣었다.
띠－잉! 띵－띠－딩－!
"어허, 답답해라. 속치마 속에 또 분홍빛 헝겊이라니……."
띵－ 띠딩－띵－!
"허리도 가늘거늘 배마저 가늘어지려고… 으흑! 홍단(紅緞)으로 옥죄어 매었는가……?"
진정 기막힐 노릇이었다. 
광화서생은 지금 자운옥봉이 입고 있는 옷을 겉에서부터 속에 이르기까지 훤히 보듯 차례로 읊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운옥봉은 수치심에 그만 울상을 짓고 말았다. 
무림의 여걸(女傑)인 그녀로서도 이런 상황에서는 여인의 본능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탄금을 포기하지 않았다.
띵－ 띠띠띵－!
"어허, 눈부시도다. 연분홍 속의 백옥(白玉)이여. 으으윽! 한데, 왜 그곳만 검단 말……."
"그만!"
돌연 금음 소리가 끊기며 자운옥봉의 뾰족한 교갈이 터졌다.
그녀의 두 눈 봉목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광화서생은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낸 뒤, 창백한 얼굴에 천연덕스런 웃음을 떠올렸다.
"낭자, 낭자가 먼저 탄금을 멈췄으니 낭자가 졌소."
"너, 이 야비한 자식!"
자운옥봉은 분을 참지 못하고 느닷없이 광화서생을 향해 일장(一掌)을 뻗어 왔다.
펑－!
"으윽!"
광화서생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거센 장력에 밀려 비무대 아래로 날아가 떨어졌다.
자운옥봉 하궁란은 수치심에 더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었는지 전광석화처럼 비무대에서 사라졌다.
금의노인은 재빨리 신형을 날려 비무대 아래로 내려가 잠시 광화서생의 상세를 살피더니 이내 다시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애석하게도 광화서생은 깊은 내상을 입고 실신했소. 이 불상사에 대해 여러분의 넓은 아량을 바라오. 아무래도 광화서생은 다음 비무에 참가하기 힘들 것 같으니 일단 탈락한 것으로 하겠소!"
"쯧쯧, 너무 까불더니만……."
"그러게 말일세.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제까짓 게 감히……."
"하지만 광화서생 그녀석, 뜻밖에도 보통은 넘던데."
"어쨌든 재미있었어!"
장내가 한동안 술렁거렸다.
어느덧 장내가 조용해지마 다시 비무대회가 속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무대회는 도화신룡과 무명객의 최종대결로 압축되었다.
광화서생은 그때까지도 비무대 아래에서 실신한 채 치료를 받고 있었다.
"와－!"
"우와아－!"
우렁찬 함성이 터져 오르며 도화신룡과 무명객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접전은 백 초(招)를 넘어섰다. 
실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치열한 대접전이 아닐 수 없었다.
군웅들은 손에 땀을 쥐고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대략 오백여 초의 공방이 벌어졌을까?
상석에 앉아 두 사람의 비무를 관전하던 사도천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중단시키시오, 팽호법! 저들의 승부를 가리자면 동귀어진(同歸於盡)뿐이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의노인은 유령처럼 신형을 움직여 대접전을 벌이고 있는 도화신룡과 무명객 사이로 끼여들어 그들을 갈라 놓았다.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삼 장여 간격으로 갈라섰다.
이때 사도천이 발끝으로 가볍게 바닥을 박차며 신형을 뽑아 올렸다.
휘－익! 그의 신형은 신룡출해(神龍出海)의 절정신법으로 유유히 비무대 위로 날아오르더니 비룡번신(飛龍飜身)의 신법으로 날렵하게 몸을 뒤집었다.
"와－!"
"신기(神技)다, 신기!"
"과연 사장주이시다!"
장중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도천은 두 사람의 최후 승자를 직접 격려하기 위해 비무대 위로 오르며 자신의 무공을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었다.
이내 그는 비무대 위에 내려섰다. 
바로 그때였다.
파파팍－! 돌연 비무대 아래로부터 한 줄기 묵광(墨光)이 사도천을 향해 폭사되었다.
묵광은 빛살과도 같은 검광(劍光)이었다.
"헉!"
사도천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황급히 옆구리를 움켜쥔 채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아앗!"
"사장주가 당하셨다!"
"한데, 저…저 자는 광화서생!"
군웅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검합일(神劍合一)의 자세로 사도천을 향해 재차 검을 휘둘러 가고 있는 인물은 놀랍게도 광화서생이 아닌가?
가까스로 치명적인 사혈(死穴)을 피한 사도천은 재빨리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네놈의 정체는……?"
"야우혼! 이번엔 실수하지 않겠다!"
말과 함께 광화서생의 신형이 빛살처럼 사도천을 향해 폭사해 갔다.
이 순간 장내는 그야말로 경악의 폭풍에 휩싸여 버리고 말았다.
"야…야우혼……!"
"그럴 수가! 광화서생이 야우혼이었다니……!"
그들이 미처 놀랄 겨를도 없이 광화서생과 사도천의 신형이 검과 하나가 되어 비무대 위에서 한 차례 교차되었다.
번쩍! 파파파팟－!
"허억!"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 비명은 광화서생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의 앞가슴은 길게 베어져 심장이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한데,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고통의 기색이 아니라 짙은 경악과 불신의 표정이었다.
'이…이럴 수가! 저 자가 어떻게 무영살의 파해법(破解法)을……?'
무영살이라면 그가 어느 밀실에서 익힌 살수 전문의 극쾌지검(極快之劍)이다. 
한데, 사도천이 그 검초의 파해법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광화서생의 의혹은 몹시 컸다. 
그러나 그는 극심한 중상을 입은 터라 의혹을 느낄 새도 없이 이내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상석에 앉아 있던 각 파의 지존급들이 황망히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비무를 관전하던 군웅들도 분분히 비무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광화서생을 유심히 살피던 만묘신군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아! 이 자는 인피면구(人皮面俱)를 착용하고 있소!"
그는 말과 함께 손을 뻗어 광화서생의 얼굴에서 매미 날개보다 얇은 인피면구를 벗겨 냈다. 
그러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지극히 준수한 얼굴이었다.
사도천의 용모가 아름다운 준수함이라면 드러난 광화서생의 용모는 일점 가식(假飾)도 찾아볼 수 없는 해맑은 준수함이었다.
소림의 고승 왜불선사의 두 눈에 누구도 눈치 챌 수 없는 기광이 번뜩 스쳤다.
'오오, 이럴 수가! 어찌 살수의 얼굴이 이토록 해맑을 수 있단 말인가? 아미타불… 기이한 일이로다. 진정 기이한 일이로다!'
이때 사도천이 옆구리의 상처를 지혈시키고 광화서생에게로 다가왔다. 
순간, 그는 안색을 창백하게 돌변시키며 쓰러질 듯 몸을 휘청였다.
"오오, 사제! 자네가……?"
그의 외침에 군웅들은 다시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뭣이? 사제라고?"
"그렇다면 이 자가 바로 백화장주……?"
"맙소사! 야우혼이 백화장주였다니……."
군웅들을 이 뜻밖의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인의대협으로 칭송받던 백화장주가 공포의 살수인 야우혼이었을 줄이야 그들이 어찌 감히 상상이라도 하였겠는가?
하나, 그것이 엄연한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소문은 발보다 빠르다. 
천하는 한 가지 소문으로 하여 그야말로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 야우혼! 그가 바로 천하이대장원의 하나인 백화장주의 분신이었다.
－ 그 동안 팔십이 명의 영웅협사(英雄俠士)들을 살인해 온 그는 그의 사형마저 시기하여 살해하려 했다.
－ 천의장주는 그 사건 후, 천의장을 폐쇄하고 사제의 잘못을 사과하는 방문(榜文)을 천하에 돌렸다.
그와 더불어 또 하나의 소문이 천하를 진동시켰다.
－ 영웅원(英雄院) 대집회가 백 년 만에 열린다!
－ 영웅원에서 야우혼을 심판할 것이다! 
－ 천의장주 사도천대협도 자진하여 영웅원 심판대에 자신을 올려 놓는다고 한다!
천하대경동(天下大驚動)! 
그것은 문자 그대로 천하대경동이었다.
파멸(破滅)
<달마대사(達磨大師)>
<불사마존(不死魔尊)>
<천마대제(天魔大帝)>
<조화선옹(造化仙翁)>
이름하여 무림사대무성(武林四大武聖).
그들은 무림의 시조(始祖)로 각기 정도(正道)와 마도(魔道)의 도(道)를 깨우쳤다고 전해지는 인물들이다.
그것은 절대 전설이 아니었다. 
그들에 대한 근거는 엄연한 현실로 아직까지 이 땅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우산(伏牛山) 천황봉(天皇峯) 정상.
그곳에는 무려 넓이 백여 장, 높이 오십여 장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탑(巨塔)이 하나 우뚝 치솟아 있다.
천하영웅대탑(天下英雄大塔)!
그 거탑은 바로 무림사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거나 정(正), 사(邪), 마(魔)를 불문한 무도를 깨우친 인물들의 이름과 업적을 새겨 놓은 무림보탑(武林寶塔)인 것이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치고 천하영웅대탑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으랴!
한데, 그 천하영웅대탑의 첫번째 서열(序列)로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 인물들이 다름아닌 무림사대무성인 것이다.
무림사대무성!
그들은 바로 천하영웅대탑을 세운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천하영웅대탑 앞에서 천하대사(天下大事)를 논하거나 천하공적(天下共敵)을 심판하는 것을 바로 영웅원(英雄院) 대집회(大集會)라 일컫는다.
영웅원 대집회!
여기서 결정되는 사항은 곧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무림의 절대법(絶代法)이오, 심판이다. 그러한 중대성으로 하여 영웅원 대집회가 열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그 영웅원 대집회가 한 인물로 인해 백 년 만에 다시 개최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천하를 미증유(未曾有)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신비대살수(神秘大殺手) 야우혼(夜雨魂)으로 인한 것이었다.
구름처럼 천황봉을 꽉 메운 천하 무림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파일방의 지존급들로 구성된 배심원(陪審員)들은 백운향에게 사지단근(四肢斷筋)이라는 중형(重刑)과 함께 영원한 무림추방령(武林追放令)을 내렸다.
사지단근!
그것은 두 팔과 두 다리의 근육을 모조리 잘라 내는 형벌로 인간으로서의 살 가치를 박탈당하는 형벌이다.
손발을 전혀 쓸 수 없으니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밥조차 짐승처럼 입으로 먹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은 실로 죽음보다도 더한 가혹한 형벌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판결을 지켜보는 수많은 군웅들은 일제히 흥분하여 열화와도 같은 불만을 터뜨렸다.
군웅들을 진정시키고자 나선 사람은 바로 사도천이었다.
사도천!
백운향과 더불어 스스로 영웅원 심판대에 오른 그는 이미 배심원들에게 백운향의 죽음만은 사해 달라고 눈물로서 간곡히 호소한 바 있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참으로 놀라운 설득력을 보였다. 
물경 한 시진에 걸친 장황하고도 정중하며 비탄에 찬 그의 열변을 군웅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경청했다.
사도천은 백운향이 기실 죽어 마땅하다는 말로서 말문을 열었다. 
그 자신도 본래 사문(師門)의 문규(門規)로 그를 죽이려 했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백운향이 아무리 크나큰 중죄(重罪)를 지었다고는 하나, 자신은 차마 백운향이 죽는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사문의 독문수법(獨門手法)으로 백운향의 공력을 폐(閉)하고 백운향을 사문에서 축출했으며, 영웅원 집회에서 백운향에게 죽음만 사해 준다면 천의장을 일 년간 봉문(封門)하고 이후 자신의 사문은 백운향이 천하에 지은 죄업(罪業)을 씻고자 천하를 위해 총력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사문을 밝혔다.
천문(天門)!
그의 사문이 밝혀지는 순간, 숨을 죽이고 듣던 군웅들은 일제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밝힌 그의 사문은 무림사 이래 가장 신비롭고 전설적인 문파(門派)로 일컬어지는 천문이었던 것이다.
天下離萬武 皆不反天門
不識天門武 誰取論策
천하에 무예가 많다 하나 천문에 미치지 못하고,
천문의 무예를 알지 못하고 어찌 감히 제일을 논할 수 있으랴!
아직 천하에 단 한 번도 실체를 드러낸 적이 없는 천문!
그래도 세인들이 항시 경외하여 마지않았던 천문!
한데, 사도천과 백운향의 사문이 바로 그 천문이었다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군웅들의 경악은 이내 감탄과 찬사로 변했다. 
그리고 군웅들 중 백운향의 죽음을 거론하고 나서는 자는 더이상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백운향은 사지단근이란 가혹한 형벌만은 면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에게 그 형벌을 가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사람은 뜻밖에도 소림사대신불 중 세째인 왜불선사였다.
뚝－! 팔의 근육이 끊기며 피가 튀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악문 백운향의 입술에서 시뻘건 핏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때 그의 귓전으로 천불선사로부터 들었던 예의 그 절정전음술(絶頂傳音術)인 혜광심어(慧光心語)가 파고들었다.
"아미타불… 시주, 어떤 기미도 보이지 말고 듣기만 하시오. 본사의 장문인과 노납은 필시 이 일에 어떤 흑막이 있을 것이라 단정짓고 있소."
고통 중에서도 백운향은 조소하듯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후후, 똑똑들 하시구려. 그렇소, 이 일엔 분명 흑막이 있소. 사도천이 진정 나의 사형이라면 내가 어찌 그를 죽이려 하였겠소?'
뚜뚝－!
'으윽! 사도천, 그는 나를 철저히 이용했소. 한 마디로 내가 지난 일 년 반 동안 야우혼으로 산 그 자체가 나를 희생물로 삼으려는 사도천의 음모였던 것이오.'
뚝－! 뚝－!
'헉! 다시 말해 사도천은 나를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을 천하에 부각시키려 했던 것이오.'
뚝－! 백운향의 안색은 사지단근의 고통으로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왜불선사의 혜광심어가 다시 들려 왔다.
"아미타불… 시주, 본사의 장문인께서는 지난 천의장 비무대회 때 시주가 펼치는 무공을 은밀히 지켜보셨소. 그리고 시주의 무공으로는 결코 천불사형을 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소. 즉, 천불사형께선 스스로 시주의 검을 받으셨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오. 장문인께선 그 사실에 큰 의혹을 가지고 계시오."
뚝－!
"왜냐하면 본래 천불사형께선 시주를 제거할 결심이심을 입적(入寂) 전날 소림에 알려 오셨기 때문이오. 한데, 천불사형께선 스스로 죽음을 달게 받으신 것이니… 시주, 소림을 찾으시오. 장문인께선 이미 시주를 위한 어떤 안배를 해 놓으셨을 것이오."
뚝－!
'후후, 진정 고맙구려. 그리고 귀장문인의 놀라운 안목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구려. 하나, 난 결코 소림을 찾지 않을 것이오. 이 일은 어차피 나의 일이니 내 손으로 해결할 것이오.'
뚝－!
'으윽! 중요한 것은… 사도천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했다는 사실이오. 사도천이 나를 극구 살리려 한 건 나라는 인간이 살아 있음으로써 사도천이라는 인간이 어떠했음을 증거로 남기려는 것이지만…….'
뚝－!
'허억! 그러나 바로 그것이 사도천의 실수인 것이오. 비록 오늘 저 태양이 진다고 해도 내일이면 어김없이 다시 떠오르는 법! 후후, 그것이 바로 나요! 사도천은 미처 그것을 생각지 못한 것이오.'
뚝－! 뚝! 뚝! 뚝－!
마지막 오른쪽 발목의 인대가 끊어짐으로써 사지단근형은 끝이 났다.
치직…치지직……!
살 타는 냄새가 역겹게 사위로 번졌다.
이미 사지단근을 당해 완전히 폐인으로 전락한 백운향의 등에 지울 수 없는 낙인(烙印)이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야우혼(夜雨魂)>
그 세 글자가 그의 등을 태우며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리고 영웅원은 천하에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고(告)하노니, 오늘로서 야우혼을 무림에서 영원히 추방하노라!
차후 그에게 동정을 베푸는 자나 그의 목숨을 끊는 자는 삼족지멸(三族之滅)을 면치 못하리라! 
단, 야우혼이 죽음을 당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그에게 어떤 형벌을 가해도 무방하노라!
야우혼은 이후 영웅원 십이사자(十二使者)의 감시하에 놓이게 됨을 아울러 밝혀 두노라!
영락제 이십이 년 팔월 이십오 일.
영웅원 대집회 배심원 일동(一同)>
 
백운향을 감시하게 될 영웅원 십이사자는 각 대문파에서 선발한 초일류급 고수들이다.
그들의 수좌(首座)엔 천의장 비무대회에서 동해 도화도의 도화신룡 모극랑과 최종 결전을 벌였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던 무명객이 임명되었다.
휙－! 휘이익－! 
한 올의 힘조차 쓸 수 없는 흐물흐물해진 육신으로 영웅원 심판대 위에 벌레처럼 널브러져 있는 백운향에게로 무수한 흙덩이와 나무토막들이 우박처럼 날아들었다.
야우혼이 죽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어떤 형벌을 가해도 무방하다고 선포된 터라 천황봉을 가득 메웠던 군웅들은 그 선포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에게 분노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군웅들은 백운향이 죽을 것을 염려해 돌이 아닌 흙덩이나 나무토막 등을 던져댔다. 
그러나 군웅들은 거의가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 아닌가!
더구나 백운향은 사지단근을 당해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는 처지이다.
퍽－! 퍽－! 퍽－! 살점이 찢기고 핏물이 터져 올랐다.
하나, 백운향의 입에선 한 점의 신음성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아니, 한 올의 고통스런 표정조차도 떠올리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든가 해서 군웅들의 공격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백운향은 꼿꼿하게 고개를 세운 채 그들의 공격을 모조리 몸으로 받아 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군웅들의 분노를 더욱 가중시켰다.
"독…독종(毒種)…! 천하의 독종 같으니……!"
"좋다, 이놈! 죽어 봐라!"
"네놈이 원한다면 아예 죽여 주마!"
사실 지금 이 순간 백운향이 죽는다고 해도 그 책임을 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많은 군웅들 중 누가 그를 죽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수만여 명에 달하는 군웅들에게 책임을 물어 모조리 삼족을 멸할 수도 없지 않는가?
퍽－! 퍽－! 퍽－! 군웅들은 이제 돌을 던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백운향의 전신에서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확 솟구쳤다. 
그의 온몸은 피로 뒤덮인 채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부들부들 떨렸다.
문득 백운향은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이고 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그리고 내리쪼이는 온유로운 햇살…….
그 속에서 백운향은 자신의 몸에서 터져 오른 피와 찢겨진 살점들을 보았다.
그리고 피와 살점들이 터져 오르는 허공에서 백운향은 하나의 영상을 보았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명의 중년인의 모습이었다.
"아버님……!"
백운향의 입에서 가슴 저미는 음성이 아프게 새어 나왔다.
퍽－! 퍽－! 퍽－!
그 중얼거림이 끝난 순간, 그의 몸은 날아드는 돌과 흙덩이 속에서 서서히 앞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퀴퀴한 시궁창 냄새가 코가 아릴 정도로 진동했다.
백운향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까 낮에 이곳 무창성(武昌城)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여 혼절한 그가 지금은 시궁창 속에 처박혀 있었다.
그는 시궁창 속에 누운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물을 뿌려 놓은 듯한 암천(暗天)에선 무수한 군성(群星)들이 보석처럼 반짝였고, 조금의 이지러짐이 없이 둥근 보름달은 은은한 은빛 월광(月光)으로 대지를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그 날 밤도 이렇게 달이 밝았었지. 제기랄… 그놈의 불기둥!'
백운향은 다시는 생각지 않겠다던 과거를 더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생각을 돌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백운향은 사지(四肢) 이곳 저곳이 바늘에라도 찔린 듯 뜨끔함을 느꼈다.
백운향은 흠칫하며 끌리듯 고개를 들어 맞은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 파고들었다.
몹시 추할 뿐만 아니라 꾀죄죄하기 이를 데 없는 흉한 몰골의 노파였다. 
그녀는 백운향의 삼 장여쯤 떨어진 곳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가 백운향의 앞에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은 이십 일 전이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하루에 한 번씩 빠짐없이 백운향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그것도 반드시 밤에만 나타나곤 했다.
백운향이 낮 동안 온갖 멸시와 고역을 치르다 혼절한 후 깨어나 보면 그녀는 언제나 먼 발치서 백운향을 마주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이다.
기이한 것은 백운향이 그녀를 발견할 때쯤이면 항상 사지에 참을 수 없는 뜨끔한 통증을 느끼곤 한다는 사실이었다.
백운향은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다시 암천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불현듯 둥근 달 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준수한 사내, 사도천의 얼굴이었다.
"미안하다, 백운향. 어쩌면 이것은 너와 나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운명? 훗훗! 그놈의 운명은 지금까지 너무도 네 편만을 들고 있군."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지난 일 년 반 동안 너를 쭉 지켜보며 한 인간으로서 솔직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너의 그 감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너는 무엇인가 착각을 하고 있군, 백운향. 너는 네 몸에 천인달리쇄락공(天忍疸痢碎落功)이 주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느냐?"
"훗훗, 너로선 물론 헛된 망상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가 백운향이란 사실을……."
"그렇군. 어쩌면 너라면 또 한 번 나를 감탄시킬 수도 있겠지."
"……."
"어쨌든 너는 이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일 년 후, 너는 모든 고통과 함께 생(生)을 끝내게 될 것이다. 남기고 싶은 말은……?"
"글쎄… 편안하다고나 할까? 어찌되었든 나의 이 년 거래가 끝났으니 그저 홀가분할 뿐이다."
백운향은 달 속의 사도천의 얼굴이 흠칫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후후, 그래도 네놈에게는 일말이나마 양심이 있었지. 하지만 네겐 당황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그런 의미에서 너는 좀 더 철저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너는 나 백운향의 진면목을 보게 될 테니까.'
백운향의 입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차디찬 조소가 섞인 미소였다.
이때 백운향의 귓전으로 한 줄기 실낱 같은 전음성이 파고들었다.
"백운향, 한수(漢帥)다. 듣고 있느냐?"
'한수……!'
백운향의 두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오늘로서 십이사자 중 팔 인을 바꿔치기했다. 인자(忍者)들은 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있다. 이제 사흘 후면 난 네게 진 빚을 모두 갚게 될 것이다."
'후후! 한수, 훌륭하다. 하기사 난 이미 사형장에서 널 알아 보았지.'
그렇다! 한수라는 인물은 바로 백운향이 망나니 노릇을 할 때 구해 주었던 그 눈빛이 남달랐던 젊은 사형수였다.
그리고 한수가 말한 인자들이란 바로 백운향이 환락도에서 만났던 동영의 인자들을 말함이었다. 
한데,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모두 백운향의 주위에서 은밀히 모종의 구원(救援)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음은 더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문득 백운향의 시선이 여전히 꾸벅꾸벅 졸고 있는 괴노파에게로 다시 던져졌다.
'한데, 저 노파는 도대체 누구인가? 저 노파는 나를 알고 있는 듯한데, 나는 저 노파가 누구인지 도저히 추측조차 할 수 없으니…….'
백운향은 마치 벌레가 꿈틀대듯 우물 가로 기어갔다. 목이 타는 듯 몹시 말랐던 것이다.
물을 긷던 아낙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측은한 듯 잠시 바라보다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떴다. 이어 그녀는 나뭇잎을 하나 따서 물 위에 띄웠다. 
백운향이 급히 물을 마시다가 사레들 것을 염려한 시골 아낙의 소박한 배려였다.
그녀는 백운향이 우물 가에 당도하기도 전에 백운향에게 다가가 물 바가지를 내밀었다.
그러나 아낙은 다가서기가 무섭게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백운향이 물 바가지를 입에 댈 새도 없이 바가지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악!"
그녀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더니 황망히 몸을 돌려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그녀는 백운향의 등판에 패인 듯 깊게 찍혀 있는 야우혼이란 낙인을 발견하고 놀라 달아난 것이었다.
야우혼에게 어떤 형태이든 동정의 손길을 뻗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선포를 그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ㅋㅋ……."
백운향은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손등에 튄 물방울을 음미하듯 핥았다. 
그때 그의 귓전으로 가느다란 전음성이 파고들었다.
"백운향, 이제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 십이사자 중 나를 제외한 열한 명은 모두 동영의 인자들로 교체되었다."
한수의 음성이었다.
"내일 널 천랑곡으로 데려가겠다. 네 말대로 천랑이 너를 구하든 말든 그 이후의 일은 더이상 관여치 않겠다."
'고맙다, 한수. 내가 비록 너를 사형장에서 구해 주긴 했지만 나는 결코 이런 보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네가 자진해서 나선 것. 지금 네가 손을 뗀다 해도 난 너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백운향은 염두를 굴리며 여전히 손등의 물기를 핥았다. 
한데, 돌연 그의 두 눈에 미미한 의혹의 기색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괴노파가 오늘은 뜻밖에도 대낮에 그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녀는 세파에 몹시 찌든 듯 등을 구부정하게 굽힌 채 힘겹게 걸어오더니 그대로 백운향의 앞을 지나쳐 갔다.
백운향의 앞으로 노란 국화잎 하나가 나풀 떨어져 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백운향은 무심히 국화잎으로 시선을 던졌다. 
순간 그의 무심한 두 눈이 파르르 잔떨림을 일으켰다.
국화잎 위에 깨알 같은 글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낭군, 추련이옵니다.
낭군의 모습은 천첩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옵니다.
천첩은 낭군의 몸이 쾌차한 후에나 죽을 수 있기에 그 동안 낭군의 몸을 돌봐 왔습니다. 
이제 천첩이 할일은 끝났습니다.
국화잎 속에 세 개의 금침(金針)이 숨겨 있으니 천돌(天突), 한부(寒府), 극천(極泉)의 세 혈(穴)에 하나씩 꽂으십시오.  
그리하시면 낭군의 의지 여하에 따라 걸을 수 있으며 손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하오나 그 이상은 천첩의 능력으론 어쩔 수 없사옵니다. 
그것은 천첩의 아버님이신 칠절신의가 보셔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다만 낭군께서 천운(天運)이 닿아 전설의 천외약관(天外藥館)에 드실 수 있다면 혹시 완치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천첩은 먼 발치서나마 낭군께서 완쾌하시길 두 손 모아 빌겠습니다.
부디 빠른 시일 내에 완쾌하시어 천첩의 염원을 풀어 주시길 바라오며…….
설추련 상서(上書)>
백운향은 한동안 국화잎 위에서 망연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두 눈이 서서히 붉어져 갔다.
'추련, 그대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나인가 보오. 내 그대에게만은 천하에서 가장 값지고 고귀한 행복을 안겨 주고 싶구려. 정말 미안하오, 추련…….'
백운향이 소림십팔나한에게 쫓길 때 궁여지책으로 겁탈했던 미소녀.
백운향 앞에서 자결하여 백운향의 가슴에 못을 박고자 했던 바로 그 미소녀 설추련.
백운향은 뜻밖에도 또다시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진정 모를 게 여심(女心)이라 했던가?
두두두－!
검은 휘장을 친 한 대의 마차가 폭우가 쏟아지는 밤길을 치달리고 있었다.
마차가 달리고 있는 곳은 팽산(彭山)이었다. 
마차는 팽산 깊은 심곡(深谷)을 향해 굉렬한 기세로 치달려 갔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우…우…우……!"
돌연 마차 안으로부터 한 줄기 늑대울음과 같은 장소성이 길게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소리에 답하기라도 하듯 마차의 전면으로부터 늑대들의 귀기스런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워…우…우…! 워우우우……!
마차가 멈춰 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멈춰 선 마차 앞에는 귀기스런 분위기를 물씬 자아내는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나는 새도 피해 간다는 천랑곡이었다.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있던 영웅원 십이사자의 수좌 무명객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랑곡 입구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늑대들이 일제히 네 발을 굽히고 땅바닥에 납짝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늑대들의 맨앞에는 온통 눈부신 은빛 털로 전신을 뒤덮고 있는, 덩치가 보통 늑대의 배는 됨직한 한 마리의 거대한 늑대가 엎드려 있었다.
'천…천랑!' 
무명객은 절로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 은빛 늑대야말로 백수(百獸)의 제왕(帝王)인 천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때 마차 안으로부터 한 사람이 천천히 내려섰다. 
다름아닌 백운향이었다. 
그는 아직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무명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수, 그 동안 수고가 많았다."
무명객, 그는 바로 한수였던 것이다.
무명객 한수는 애써 놀라움을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천만에, 자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다행일 뿐이네."
"다시 만나면 우리 술이라도 한 잔 멋지게 나누세."
한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린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일세. 나는 어차피 죽었어야 했을 목숨. 나는 이 길로 속세를 떠날 작정이네."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이네. 운향, 부디 완쾌하길 빌겠네."
"나로 인해 자네가 사도천에게 배알마저 빼 주는 욕을 보았는데, 내 어찌 자네를 실망시키겠나."
"내가 천의장 비무대회에 참가한 것은 내게 자네를 도우라는 하늘의 계시였던 것 같네."
"사실 자네는 너무도 공교롭게 나를 돕게 되었지."
한수는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백운향의 손을 꼭 잡았다.
"헤어짐의 시간이 길면 아쉬움만 남는 법. 이제 떠나겠네."
"잘 가게. 난 영원히 자네를 잊지 못할 걸세."
백운향은 그렇게 말하며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얽혔다.
휘익! 다음 순간 한수의 신형이 번뜩 폭우를 가르는가 싶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백운향은 잠시 아쉬운 눈으로 한수가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십이사자 중 나머지 열한 명을 쭉 둘러보았다.
"여러분도 수고가 많았소. 마쓰나미께 전하시오. 나는 반드시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고."
십일 인, 그들은 동영의 인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정중히 말을 받았다.
"마쓰나미 아까시님께서 이번에 소협을 도운 것은 미요시노의 제거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단지 마쓰나미 아까시님께서 소협을 진정으로 좋아하시기 때문이었을 뿐이오."
"……!"
"마쓰나미 아까시님께서는 이후로도 기꺼이 소협을 돕겠다고 하셨으니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연락을 취하시오."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여러분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소협의 완쾌를 빌겠소. 그럼……."
스스슷…!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영의 인자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서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다.
백운향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이내 몸을 돌려 천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끄으…응! 천랑은 눈빛을 빛내며 몹시 반갑다는 듯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백운향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천랑 앞으로 다가가 천랑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오랜만이구나, 천랑."
끄으…응! 천랑은 낮게 울부짖으며 백운향의 얼굴을 혀로 핥았다.
백운향은 근 사 년여 만에 천랑을 만남에도 천랑이 아직까지 자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그는 천랑에게 인간 이상의 뜨거운 정이 느껴짐을 어쩔 수 없었다.
"자, 나를 곡 안으로 데려가 다오."
백운향이 말과 함께 천랑의 등에 오르자, 천랑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천랑곡 안으로 바람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백운향과 천랑이 곡 안으로 사라지자,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조용히 엎드려 있던 늑대들이 앞다투어 마차를 덮쳤다.
커어엉! 크－르－릉!
마차 안에는 열세 구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그 시체의 수는 백운향과 십이사자를 합친 수와 똑같았다.
늑대들은 아귀처럼 열세 구의 시체를 뜯기 시작했다.
히－히－힝! 공포에 질린 말의 울부짖음이 폭우를 뚫고 암천으로 스산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야우혼과 영웅원 십이사자가 천랑곡 입구에서 뼈만 남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일대사건(一大事件)!
그 소식은 요원(僚原)의 불길처럼 번지며 천하를 다시 한 번 경동시켰다. 
세인들은 하나같이 예기치 않은 그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야우혼을 호송하던 영웅원 십이사자가 천랑곡으로 길을 잘못 들어 굶주린 늑대 떼의 밥이 되고 마는 실수를 범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영웅원 십이사자는 각 대문파에서 선발된 초일류급의 정예들이 아니든가?
하나, 세인들은 그 사건이 터지던 날 밤 무시무시한 폭우가 몰아쳤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인들은 그 사건이 폭우로 인해 영웅원 십이사자가 방향을 잃은 때문이라 단정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이제 야우혼에 관한 모든 것은 일련의 과거사로 회자(膾炙)되기 시작했다.
"분명 확실히 확인했느냐?"
"확실하옵니다! 비록 뼈만 남았다 하나 골격(骨格)으로 보아 분명 야우혼과 십이사자였습니다."
사도천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으음, 천랑곡은 놈이 삼 개월 동안 머문 곳이거늘 너무도 기이한 우연이 아닌가? 또한 천랑곡의 늑대들이 비록 흉폭하기 이를 데 없다 하나 무명객 그가 그토록 쉽게 당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오면……?"
사도천은 오체복지(五體伏地)한 채 입을 여는 흑의인의 말을 싸늘하게 가로챘다.
"섣불리 판단하려 들지 마라!"
흑의인은 그렇지 않아도 바짝 숙이고 있던 이마를 소리가 나도록 쿵! 하고 바닥에 찍었다.
"속하가 감히 경망을… 용서하십시오!"
사도천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후후, 사실 신경쓸 일은 조금도 없다. 설사 백운향이 살아 있다 해도 그 자의 몸에 천인달리쇄락공이 주입된 이상 천하에서 그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전무하다."
"하오나 천외약관(天外藥館)이……."
"천외약관? 하하하! 천외약관은 단지 전설일 뿐이다. 아니, 그것이 실존한다 해도 천인달리쇄락공을 제거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더냐?"
"소…소천존, 아니 이젠 천존(天尊)이십니다!"
"그렇다. 나는 천존이다. 천하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그러하옵니다."
사도천의 눈에서 번갯불이 작렬하는 듯한 신광이 뻗어 나왔다.
"천존의 이름으로 명한다. 이제 천존패업(天尊覇業) 제일령(第一令)을 시행하라!"
흑의인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천존패업 제일령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으, 존명을 받드옵니다!"
흑의인의 모습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도천의 두 눈은 야망의 불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도천! 그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천존패업 제일령이 뜻하는 바는……?
동굴. 
야수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천랑곡 내의 이 동굴은 천랑곡의 성역(聖域)이다.
바로 천랑의 거처였던 것이다.
동굴 안에는 백운향이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천랑이 매일 어디선가 물어다 주는 이름모를 약초로 상처를 치료한 끝에 그의 외상은 거의 완치된 상태였다. 
천랑이 인간 이상의 충성과 지성으로 백운향을 보살핀 결과였다. 
그렇지만 아직은 천인달리쇄락공은 물론이고 사지단근으로 인한 내상은 어찌 손써 볼 방도조차 없었다. 
있다면 단 하나. 
바로 설추련이 말한 천외약관을 찾아 기적(奇蹟)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크－르－릉! 커－엉! 
돌연 찢어지는 듯한 늑대의 울부짖음과 날카로운 포효성이 혼란스럽게 들려 왔다.
펑! 펑! 펑! 
캥! 캐－애－액!
계속해서 둔중한 격타음과 더불어 늑대의 비명 소리가 어지럽게 이어졌다.
백운향은 흠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침입자……!'
그 소리로 미루어 누군가가 천랑곡에 침입해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백운향의 안색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천랑곡은 아무리 절정고수라 해도 감히 침범할 염두를 못 내는 곳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침입자는 필시 범상치 않은 무공의 소유자임이 분명한 것이다. 
더구나 침입자의 수효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백운향은 절로 초조감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혼란스럽던 소리는 일 각쯤 계속되더니 갑자기 뚝 그쳤다. 
대신 백운향은 자신의 시선 속으로 파고드는 두 개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섬전처럼 동굴 안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그 두 개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순간, 백운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당…당신은……?"
은영(銀影)은 다름아닌 천랑이었다. 
한데, 회영(灰影)은 바로 백운향과 이 년간의 거래를 맺었던 회포중년인 귀제갈이었던 것이다. 
귀제갈의 전신은 여기저기가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백운향과 시선이 마주치자 격동성을 발했다.
"역시 살아 있었군. 나는 믿었다. 네가 그리 쉽게 죽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오랜만이구려."
백운향은 냉정을 회복하며 말을 받았다.
백운향의 전신을 한 차례 훑어보던 귀제갈의 눈자위가 미미하게 붉어졌다. 
그는 그것을 감추기라도 하듯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나는 이곳에 와서 또 한 번 너에게 감탄을 하고 말았다. 너를 향한 천랑의 충정이 어찌나 깊고 굳은지 나는 천랑에게 너를 만나게 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을 정도였으니까."
"……."
"천랑은 내가 너를 해칠 마음이 없음을 확신한 후에야 나를 이곳으로 안내했으니… 나는 천랑이 이토록 놀라운 영물(靈物)일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귀제갈은 날카로운 광망(光芒)을 예리하게 번뜩이며 엎드린 채 동굴 입구를 지키는 천랑을 돌아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너를 찾아온 것은 진실을 말해 주기 위해서다. 너의 죽음이 진짜였다면 네 영전 앞에서라도 난 진상을 말해 줄 참이었다."
"진실……?"
"천문은 오랫동안 널 주시했었다. 그것은 오로지 소천존 사도천의 강호출도(江湖出道)의 명분을 세우기 위한 희생물로서……."
백운향은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소."
"하지만 넌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것이 더 많다. 진옥기의 죽음만 해도 그렇다."
백운향은 흠칫했다.
"그럼 내가 진옥기를 죽인 게 아니었단 말이오?"
"물론이다. 그건 널 살인자로 만들어 거래에 끌어들이려는 음모였으니까."
"……!"
"백화촌 사람들의 죽음 역시 결코 진가(秦家)와는 상관이 없다. 그 또한 음모의 일환으로 네가 진가의 소행이라 믿고 그곳으로 달려가게끔 유도한 것이었다. 즉, 우리는 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이다."
백운향은 충격과 분노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분노를 삭히려는 듯 백운향은 어금니를 악문 채 허공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다 백운향의 냉엄한 시선이 추궁하듯 귀제갈의 얼굴에 꽂혔다.
"한데, 이런 얘기를 해 주는 이유가 도대체 뭐요?"
귀제갈이 씁쓸히 웃었다.
"나를 인간으로 대접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음모와 귀계(鬼計)로 점철된 나의 생을 돌이켜보게 해 준 것이다. 인간이 인간임을 아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군. 적어도 나로서는……."
"아니오."
백운향은 나직이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오히려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소. 단지 당신 스스로가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뿐이오."
"그런가? 내가 과연 그러했던가?"
귀제갈은 회의어린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백운향이 다시 탄식했다.
"당신답지 않게 약해지셨구려."
"너의 몸에 천인달리쇄락공만 주입되지 않았어도 나의 마음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인달리쇄락공은 인간 최후의 형벌이다."
"……!"
"나는 네가 천외약관을 찾으려 고심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실 그 방법뿐이다. 너는 기필코 천외약관을 찾아야 한다. 확실한 것은 아니나 내가 알아낸 바로는 천외약관이 실존할지도 모른다."
"……?"
"성도성(成都城)의 천도관(天道館)을 찾아가거라. 천도관이 천외약관을 찾는 실마리일 가능성이 크다."
귀제갈은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 백운향 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검집에 두 마리의 용이 용트림하고 있는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검은 대나무로 만든 손바닥 크기만한 오죽검(烏竹劍)이었다.
"이걸 가져가라. 성도성 저잣거리에서 옷을 파는 장사꾼들 중에 내가 안배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에게 이걸 내보이거라. 그러면 그 사람이 너를 도와 줄 것이다."
백운향은 선뜻 오죽검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제갈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귀제갈은 간절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운향은 마지못해 오죽검을 받아 들었다.
귀제갈이 다시 품 속에서 한 개의 커다란 단환을 꺼냈다.
청아한 단약 향이 동굴 안으로 은은히 퍼져 나갔다. 
"이것은 칠절신의의 맥근접인단(脈筋接引丹)이다. 이것을 복용하면 사지단근의 치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백운향이 의혹 어린 얼굴로 말을 받았다.
"당신의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오?"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날 돕는 이유가 도대체 뭐요?"
귀제갈이 공허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다 너를 잘못 만난 탓이다."
"……!"
"사도천은 분명 내가 존경할 만한 주군(主君)이다. 하지만 난 너에게 끌리는 정(情)으로 하여 그를 배반하고 말았다. 그러니 내가 너를 잘못 만난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백운향은 할 말을 잊고 멍하니 귀제갈을 바라보았다.
귀제갈이 안색을 굳히며 백운향을 향해 정색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네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
"지금부터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너는 일체 참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다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곧 알게 될 테니 어서 약속이나 하거라."
백운향은 내심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귀제갈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한지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이고 말았다.
귀제갈은 일순 잔잔한 미소를 짓더니 돌연 비장한 표정을 떠올렸다.
휘익! 그의 신형이 돌연 동굴 밖으로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이것으로 네게 지은 죄값을 갚겠다. 또한 나는 이미 주군을 배반한 몸. 더이상의 삶은 치욕일 뿐이다. 잘 있거라."
"잠깐!"
백운향은 비로소 귀제갈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고 다급히 동굴 밖으로 달려나갔다. 
귀제갈은 지금 스스로 늑대들 틈에 몸을 던져 늑대밥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운향에게 지은 죄와 사도천을 배반한 죄를 한꺼번에 청산하려는 것이었다.
백운향이 짐작한 대로 귀제갈은 이미 늑대들에게 뒤덮여 있었다.
"우…우…우…! 모두 물러서라!"
백운향은 천랑의 포효성과 같은 장소성을 발하며 다급히 소리쳤다.
순간, 귀제갈의 육신을 뜯어 대던 늑대들은 일제히 꼬리를 말며 주춤주춤 사방으로 물러섰다.
귀제갈 앞으로 달려나가던 백운향은 돌연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아니 멈추었다 싶은 순간 그는 귀제갈을 외면하듯 황망히 몸을 돌렸다.
늑대들에게 살점을 뜯겨 온통 피투성이로 변한 귀제갈의 참혹한 몰골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서야 백운향은 귀제갈의 진정한 의도를 깨달은 때문이었다.
귀제갈이 이토록 참혹한 자결을 택한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오로지 백운향을 위한 배려였다는 것을 백운향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바로 백운향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가능성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귀제갈의 의도였던 것이다.
즉, 귀제갈은 천랑곡에 자신의 뼈를 남김으로써 사도천의 세력으로 하여금 자신이 백운향의 생사(生死)를 직접 확인하려다가 늑대 떼에게 잡혀 먹혔다는 추측을 하게끔 유도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백운향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의 입에서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먹…어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다시 동굴 안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젖은 눈을 들어 망연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잘 가시오. 누가 뭐래도 당신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인간다운 분이셨소. 당신의 깊은 배려 결코 잊지 않으리다……."
천외약관(天外藥館)을 찾아서
－ 아아! 촉중(蜀中)의 길은 멀고도 험하여라!
누군가 한 그 말처럼 사천(泗川) 땅은 실로 여행하기가 힘들 정도로 험준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겨울의 사천 땅은 더더욱 그렇다.
성도성(成都城).
촉한(蜀漢) 유비의 황성(皇城)이자 제갈공명의 유허지(遺墟址)가 남아 있는 천년고도(千年古都)가 바로 이곳이다.
휘이잉－! 초겨울의 삭풍(朔風)을 몰고 서서히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성도성의 저잣거리에는 주루(酒樓), 기루(妓樓), 객잔(客棧)은 물론 각종 상점들이 즐비했다. 
한데, 유독 사람의 눈길을 끄는 장사꾼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삼십대의 평범한 장한으로서 길게 벌려 놓은 좌판 위에 옷가지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님을 끌고 있었다.
"자! 옷들 사요, 옷! 일단 구경이라도 한 번 하세요. 쌉니다! 싸!"
장한은 쉴 새 없이 소리쳤다. 그 덕분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몰려 있었다. 
이때 한 명의 죽립인이 좌판 앞으로 다가섰다.
"형장, 내가 추워서 그러니 옷 한 벌만 외상으로 삽시다!"
실상 죽립인이 걸친 마의는 추위를 느끼고도 남을 만큼 낡고 초라했다.
그러나 장한은 당치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이구, 손님! 농담이 심하시구려. 나는 손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떠돌이 장사꾼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형장, 내 이래뵈도 신의(信義) 하나로 살아 온 몸이오. 그러지 말고……."
"에이, 여보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딴데 가서 알아 보슈."
장한은 턱도 없다는 듯이 죽립인의 말을 일축했다.
죽립인은 난처한 듯 다소 주저하더니 품 속에서 조그만 오죽검을 꺼내 들었다. 
"정히 그렇다면 이것이라도 받고 대신 옷을……."
장한은 오죽검을 엉겹결에 받아 들었다. 이어 그는 오죽검을 감정이나 하듯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이런 겨우 두 냥짜리도 안 되는데… 쩝쩝……."
"도와 주는 셈치고 싸구려 옷 한 벌이라도 주구려.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사례하리다."
장한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잠시 죽립인과 오죽검을 번갈아 보더니, 좌판에서 가장 허름한 솜옷 한 벌을 죽립인에게 집어 주었다.
"에이, 나도 젊은 놈! 자, 가져가시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죽립인은 거듭 치사를 한 후 몸을 돌렸다.
이어 그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방금 산 솜옷 주머니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냈다.
<성도성 성주(城主)를 찾아가 바둑을 청하시오.>
간단한 내용의 쪽지였다. 
그것을 읽고 난 죽립인은 그 쪽지를 입 안에 넣고 씹어 삼켰다.
죽립인. 그는 다름아닌 백운향이었다.
그리고 백운향에게 옷을 판 장한은 바로 귀제갈이 안배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성도부(成都府).
백운향이 성도성주의 집무처인 성도부의 웅장한 대문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석양이 드리워질 무렵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대문을 지키고 있던 건장한 체격의 이십대 텁석부리 무사가 대뜸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냐?"
"성주와 바둑이나 한 수 두러 왔소."
"바둑……?"
무사는 눈꼬리를 치켜 뜨더니 백운향의 요모조모를 뜯어 봤다. 
백운향은 허름한 솜옷에 낡아빠진 죽립을 쓰고 있었다.
무사는 백운향을 한 차례 쭉 쓸어본 후 같잖다는 듯 호통을 쳤다.
"돌아가거라! 성주께서 아무리 바둑을 즐기신다고 하지만 어찌 너 따위가 감히 성주님과 바둑을 두겠다는 것이냐? 경을 치기 전에 어서 썩 물러가거라!"
백운향은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당당하게 말을 받았다.
"나는 성주께서 바둑 상대의 신분 고하를 따진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소만."
"닥쳐라, 이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찌 그 주제에……."
이때였다. 
안쪽으로부터 노인의 근엄한 음성이 무사의 말을 끊어 놓았다.
"무슨 일이기에 그토록 언성을 높이느냐?"
대문 안쪽에서 청수한 풍모의 금의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무사는 황망히 몸을 돌려 금의노인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지부대인(支府大人)을 뵈옵니다!"
"무슨 일이냐?"
"저 자가 성주님과 바둑을 두겠다고 찾아왔는데, 지부대인께서도 보시다시피 저 자의 행색이 어디 바둑을 둘 만한 위인으로 보이십니까? 분명 딴 속셈으로……."
금의노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어허, 네가 성주님의 인품을 깎을 셈이냐? 언제 성주님께서 수담(手談)을 논하심에 있어 사람을 가리시는 것을 보았더냐?"
"하…하오나……."
"허, 그래도 또!"
"송…송구하옵니다!"
금의노인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잔뜩 숙이는 무사를 싸늘하게 바라보다 이내 백운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협, 이 자가 실례를 범한 듯하구려. 노부가 대신 사과하겠소."
백운향은 가볍게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천만의 말씀을… 그는 자신의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허허, 도량이 넓은 젊은이로군. 자, 어서 드시구려. 마침 성주께서 수담을 나눌 상대가 없어 적적해 하시던 참이었소."
"고맙습니다."
백운향은 다시 한 번 금의노인에게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성도성주 양만휘(楊萬輝)>
그는 바둑에 미친 사람이다. 
그는 업무 외의 시간은 오로지 바둑판과 마주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바둑을 둘 때 항상 단 한 푼의 은자라도 내기를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관부(官府) 일이 끝난 시간인지라 그는 간편한 백의 차림이었다. 
사십대 중반의 그는 대춧빛 얼굴에 부드러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눈에서는 간혹 예리한 안광(眼光)이 뻗어 나오곤 했다.
백운향은 공손히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성주를 뵈옵니다."
"수담을 나누려는 사사로운 자리인데, 그 무슨 예인가? 자, 어서 좌정하시게."
양만휘의 음성은 조용하고 온유로웠다.
백운향은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그의 앞에 단정히 마주앉았다.
그러자 한 명의 홍의미소녀가 소리없이 옆에 앉아 조심스레 차(茶)를 끓이기 시작했다.
"소생이 흑(黑)을 잡겠습니다."
백운향은 말과 함께 흑돌이 든 통을 잡았다.
양만휘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짐짓 손을 저어 보였다.
"허허, 치수도 모르는데……."
"아닙니다. 소생이 어찌 입신(入神)에 이르신 성주님을 능가하겠습니까?"
"흠, 정히 그렇다면 그렇게 하게. 소홍아, 어서 차를 올리거라."
"예."
홍의미소녀는 그윽한 옥음과 함께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먼저 양만휘에게 찻잔을 올린 후, 백운향 앞에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백운향은 가볍게 목례를 취한 후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순간 그의 두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였다. 하나, 그 빛은 떠올랐을 때보다도 더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 그의 시선이 굳은 듯 머문 곳은 찻잔이 놓여 있던 차반(茶盤) 위였다. 
그곳에는 짤막한 글귀가 쓰여 있었다. 
물로 쓴 글귀였다.
<궁지에 몰리면 차를 청하도록 하세요.>
백운향은 왼손으로 차반 위의 글귀를 가볍게 문질러 없애며 태연히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소홍이라는 이 소녀도 귀제갈의 안배였군.'
그는 내심 귀제갈의 치밀한 안배에 감탄과 고마움을 느꼈다.
차는 예사 차가 아닌 듯 한 모금을 마신 순간 입 안에 향기가 배일 듯 감돌았다. 
백운향은 찻잔을 입에서 떼며 입을 열었다.
"소생으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용정차(龍井茶)로군요."
"허, 자네의 식견이 놀랍구먼. 단숨에 용정차를 알아보다니……."
"그저 풍문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허허, 그런가? 한데, 자네는 내가 내기 바둑을 즐기는 것을 알고 찾아왔으리라 믿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자넨 무엇을 내기로 걸 건가?"
"소생은 본래 빈한한 가문의 출신인지라 가진 것이라고는 이 몸뚱이 하나뿐입니다."
"몸뚱이 하나뿐이라……?"
"소생은 이 한 몸을 내기에 걸까 합니다. 소생이 지면 평생 성주님의 몸종이 되겠습니다."
양만휘는 일순 흠칫했다. 
자신의 평생을 내기로 건다는 것은 실로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나, 그는 이내 침착을 되찾고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면, 자넨 내가 내기에 무엇을 걸기 원하는가?"
"소생은 원래 지병을 앓고 있는 몸입니다. 천하의 용하다는 의원을 다 찾아다녔으나 모두가 괴질(怪疾)이라 하며 고개를 내저었지요."
"흐음……!"
"소생이 듣기로 성주께선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다 하시니 소생을 치료해 주셨으면 합니다."
백운향은 직접적으로 천도관을 얘기하지 않고 말을 돌린 것이다. 
양만휘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좋네. 내가 만약 자네에게 바둑을 지면 자네를 한 번 진맥(診脈)해 보겠네."
그 말에 백운향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한 말씀이나 소생은 확실한 약조(約條)를 받고자 합니다."
"……!"
"소생은 성주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으음……!"
양만휘는 나직한 침음성을 흘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이윽고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자네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네. 자네의 병을 고쳐 주는데 최선을 다할 것임을 약속하겠네."
"감사드립니다."
"자, 이제 시작하세."
"그럼 먼저 실례를……."
백운향은 말을 마치자 흑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탁! 반상(盤上)에서 경쾌한 마찰음이 일었다. 
순간 양만휘의 두 눈에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첫번째 흑의 착점은 바둑판의 정중앙에 위치한 천원(天元)이었던 것이다.
잠시 미간을 좁히던 양만휘는 우상귀 소목(小目)에 착점했다. 
그러자 백운향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양만휘가 착점한 위치의 정반대 쪽인 좌하귀 소목에 두 번째 돌을 놓았다.
그렇게 이십여 수가 교환되는 동안 백운향은 계속해서 양만휘가 착점한 위치의 정반대 쪽에 착점했다. 
그것은 영락없는 흉내 바둑이었다.
그렇다. 바둑을 못 두는 항우(項羽)를 위해 그의 막장(幕將)들이 고안해 냈다는 흉내 바둑! 
백운향은 본래 바둑을 못 두는지라 지금 저 유명한 유방과 항우의 바둑으로부터 유래된 흉내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흉내 바둑은 상대가 둔 착점의 대각선 방향으로 똑같은 위치에 계속 정확히만 따라 두게 되면 종국(終局)에는 딱 한 집을 이기게 된다.
양만휘도 그 흉내 바둑을 모를 리 없었다. 아니, 그는 그 파해법까지도 알고 있었다.
하나, 그는 첫번째 착점을 백운향의 첫번째 착점인 천원 옆에 붙이지 않고 우상귀 소목에 두었기 때문에 이제는 도저히 흉내 바둑을 파해할 수 없는 판이 되고 말았다.
그는 백운향이 흉내 바둑을 두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반상엔 백여 개의 돌이 놓여 있었다. 
설마 설마하던 양만휘는 계속 백운향이 흉내 바둑으로 나가자 이젠 완전히 백운향의 의도를 깨닫게 되었다.
양만휘는 일시 안색을 무겁게 굳히더니 나직이 탄식했다.
"졌네."
"……!"
"자네가 흉내 바둑을 두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네. 하지만 그것도 엄연한 바둑인 것. 내가 깨끗이 졌네."
실로 성주다운 대인(大人)의 풍도(風度)였다.
백운향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송구스럽습니다."
"허헛, 톡톡히 당한 셈이지. 내겐 오히려 좋은 교훈이었네. 한데……."
"……?"
"나는 아직 자네의 이름 석 자도 모르고 있었군."
"소생은 낙…낙화생(落花生)이라고 합니다."
백운향은 엉겁결에 가명(假名)을 대고 말았다.
"낙화생이라… 기이한 이름이로군. 어쨌든 좋네. 나는 잠시 준비할 것이 있으니 먼저 실례하겠네." 
양만휘는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소홍아, 낙소협을 밀실로 안내해 드리거라."
"예."
양만휘는 이내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때를 같이하여 백운향은 홍의미소녀 소홍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낭자, 차 한 잔 더 부탁해도 되겠소?"
소홍은 묵묵히 찻잔에 차를 담아 백운향의 앞에 놓아 주었다.
백운향은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차반을 내려다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차반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물로 쓰여 있었다.
<우선 축하드려요.
성주는 결국 당신을 천도관(天道館)으로 보낼 거예요. 그때부터는 우리의 손길이 닿지 못해요.
천도관이 어딘지는 성주만이 알고 있어요. 그는 분명 약속을 지킬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사람이지만 조심해야 해요.
행운을 빌겠어요.>
여유가 있었음인지 이번엔 좀 긴 내용이었다.
백운향이 차를 다 마시고 몸을 일으키자, 소홍은 곧바로 그를 밀실로 안내했다.
밀실.
문조차 없는 듯 은밀한 이 밀실의 중앙에는 돌침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돌침상 옆에는 선반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각종 침구류(針具流) 외에 예도(銳刀), 삭도(削刀), 세도(細刀), 첨도(尖刀), 겸자도(鉗刺刀) 등 하나같이 예리하기 그지없는 수술 도구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양만휘는 먼저 와서 백운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신의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고 살아온 사람이네. 최선을 다해 자네의 병을 치료하겠네. 자, 옷을 벗고 침상에 똑바로 누워 보게."
백운향은 묵묵히 몸에 걸친 옷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밀실 한가운데 놓인 돌침상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그러자 양만휘는 빠르게 손을 움직여 백운향의 전신 맥을 짚어 갔다.
계속 맥을 짚어 가던 양만휘의 안색이 갑자기 바윗덩이처럼 무겁게 굳어졌다.
"음…! 누가 이런 잔인한 중수법(重手法)을……."
양만휘는 예리한 시선으로 백운향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자넨 무림인이었군."
"그렇습니다."
"어차피 자네의 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더이상 묻지는 않겠네."
"……."
"지금 자네의 모든 신체 기능은 완전히 역행(逆行)하고 있네. 이는 백이면 백, 즉사를 면치 못하는 엄중한 상태이네. 한데 기이하게도 자네의 몸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잠재되어 있어 그로인해 자네가 아직 살아 있는 듯하네. 더욱이 삼십육대혈(三十六大穴)마저 회복 불능으로 파괴되었는데도 말이네. 도대체 자네가 사람인가?"
"……!"
"나로서는 자네를 어찌 손써 볼 수가 없으니 어서 옷을 입게."
"하오면……?"
"자네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겠네. 하나, 이런 상태라면 나로서도 장담은 못하네. 더구나 자네를 보내려는 곳은 내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네."
"……!"
"나는 단지 자네를 그곳으로 안내해 주는 다리 역할밖에 할 수 없는 입장이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이것뿐이네."
그 말을 들은 백운향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양만휘가 지금 자신을 천도관으로 보내려 하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양만휘가 백운향을 데리고 간 곳은 성도부 후원의 울창한 숲 속이었다.
숲에 들어서자 양만휘는 백운향을 허리에 끼고 걸음을 이리저리 옮겼다. 숲 속은 전체가 하나의 절묘한 진세(陣勢)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양만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백운향을 내려놓았다.
"이제부터는 자네의 운(運)에 맡길 수밖에 없네."
그의 말이 막 끝나는 순간, 어디선가 한 줄기 웅후한 음성이 울려와 숲을 뒤흔들었다.
"양만휘, 무슨 일이냐?"
양만휘는 그 음성이 들려 온 방향을 향해 황급히 부복했다.
"가공할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에 당한 자를 데려왔습니다."
"그깟 일로 통보도 없이 함부로 이곳에 들어왔단 말이냐?"
"황송하옵니다! 하오나, 제가 감히 이 자를 허락도 없이 데려온 것은 이 자의 몸엔 저도 모르는 기이한 잠력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력?"
"그러하옵니다. 그 잠력은 이 자가 당한 공력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알았다. 독관(毒關)으로 들여보내라."
"분부 받자옵니다."
양만휘는 부복한 자세로 대례를 올린 후,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백운향을 돌아보았다.
"됐네. 어서 가세."
백운향은 묵묵히 앞서 가는 양만휘의 뒤를 따라갔다. 하나, 그는 내심 의혹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방금 숲 속에서 들려 온 음성의 주인이 누구기에 한 성(城)의 성주에게 거침없이 하대(下待)를 한단 말인가?
또한 양만휘는 그 음성의 주인에게 지극히 공경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던가?
앞서 가던 양만휘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일견하여 폐정(廢井)인 듯한 몹시 낡은 우물이었다.
양만휘는 잠시 우물을 바라보다가 긴장 어린 표정으로 백운향을 돌아보았다.
"이 우물은 독관(毒關)으로서 죽은 자만이 통과할 수 있다는 만년극한독정액(萬年極寒毒精液)이 들어 있네. 이 우물을 통과해야만 자네가 마지막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네. 자네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네."
백운향은 묵묵히 고개를 끄떡인 후 포권지례로 양만휘에게 사의를 표했다. 
이어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우물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졌다.
풍덩－!
'헉!'
순간 백운향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신음성을 다급히 되삼켰다. 
뼛속마저 얼릴 듯한 극렬한 한기(寒氣)가 전신에 폭풍처럼 밀려 들었던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그는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백운향은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돌아옴을 느꼈다.
"관주(館主)께 알려라. 정신을 차렸다고."
백운향은 누군가의 다소 긴장된 음성을 들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그 뿌연 시선 속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리듯 파고들었다. 
사십대 중반의 준수한 화의중년인(華衣中年人)이었다. 
그는 백운향의 전신을 세세히 살피고 있었다. 매우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알 수 없군. 이 잠력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천인달리쇄락공을 압도하고 있단 말인가? 휴우!"
화의중년인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불어 냈다.
스르르르…! 이때 소리 없이 문이 열리며 궁녀(宮女) 차림의 두 시비를 대동하고 자색(紫色) 망사로 얼굴을 가린 한 명의 자의소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방 안이 눈부신 광휘로 뒤덮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자의소녀는 아름다웠다. 하나, 그 아름다움은 결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싶었다.
천상(天上)의 선녀가 저러할까?
지금은 겨울이나 자의소녀의 주변은 온통 봄이었다. 
아무리 시린 한풍(寒風)도 그녀의 옆에선 온화로운 봄바람이 되고, 아무리 어두운 공간도 그녀가 들어서면 그대로 빛과 밝음으로 뒤덮일 것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전신에는 고아한 성결함이 서려 있었다. 그 성결함은 모든 파괴와 배덕(背德), 원한과 무질서, 죄악을 그대로 포근히 감싸 줄 듯했다.
도대체 자의소녀는 누구인가?
자의소녀가 들어서자 화의중년인은 황망히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를 향해 부복대례를 올렸다.
"관주님을 뵈옵니다."
"예를 거두세요."
자의소녀는 담담히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환자의 용태는?"
"아직 확실한 상태를……."
화의중년인은 말을 잇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의소녀는 이미 백운향 앞에 다가가 스스로 진맥을 해 보려는 듯 손을 뻗어 백운향의 손목을 잡아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명하리만치 희디흰 섬섬옥수가 백운향의 완맥(腕脈)을 부드럽게 감아 쥐었다.
코끝을 감미롭게 자극하는 그윽한 방향이 전해져 온다. 
백운향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망사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두 눈은 추수(秋水)처럼 맑고 영롱했다. 
백운향은 자신이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황홀하고도 편안한 기분이었다.
자의소녀가 백운향의 완맥에서 손을 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 가득 의혹의 빛을 머금었다. 
그녀는 잠시 무슨 생각엔가 잠기더니 이내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당신이 야우혼임을 부인하지 않겠지요?"
"물론이오."
백운향은 히죽 웃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등에 낙인이 찍혀 있으니 이미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을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다.
자의소녀는 백운향이 너무도 태연히 대답하자 일순 멈칫했다.
"당신은 매우 솔직한 사람이군요."
"나는 본래부터 그렇소."
자의소녀는 가볍게 의미 있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 인피면구도 본래부터 착용한 것이겠군요?"
백운향은 멈칫했다. 
자신이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다는 걸 자의소녀가 한눈에 간파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자의소녀가 다시 말했다.
"일단 이곳에 들어온 이상 굳이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드리겠어요."
"나는 본래 얼굴이 몹시 추한지라… 하지만 낭자가 원한다면 보여드리겠소."
"아니, 됐어요."
자의소녀는 화의중년인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만영반(萬領班), 천도관 팔대약사(八大藥師)를 들라 이르세요." 
"그들 전부를 말씀이옵니까?"
"그래요. 모두 들라 하세요."
"명을 받자옵니다."
화의중년인은 공손히 부복대례를 취한 후 물러갔다.
그러자 자의소녀는 다시 섬섬옥수를 뻗어 백운향을 진맥하며 간혹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멈칫하며 아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당신은 무엇이 그리도 우습죠?"
백운향이 그녀가 옆에 앉은 이후 계속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별것 아니오. 난 단지 한 가지 재미있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오." 
자의소녀는 진맥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을 발했다.
백운향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미소를 지은 채 백운향이 말을 이었다.
"그 재미있는 생각이란 게 나란 놈에게나 재미있지, 낭자에겐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오."
"……?"
"다름이 아니라, 나는 낭자가 필시 사랑이라는 걸 한 번도 못해 봤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소."
"……!"
"아마 틀림없을 것이오. 낭자는 늘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듯한데, 천하의 어떤 남자가 얼굴 한 번 볼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하겠소? 그러니 설사 낭자가 마음에 든 남자가 있다 해도……."
"말을 삼가해라!"
어디선가 갑자기 들려 온 여인의 뾰족한 교갈이 백운향의 뒷말을 잘랐다.
입을 연 여인은 자의소녀의 뒤에 조용히 시립하고 있던 두 궁장소녀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얼굴 가득 싸늘한 노기를 띠고 있었다.
백운향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돌려졌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 주인을 사랑한 남자가 있었단 말이냐?"
다짜고짜 반말이었다. 하긴 백운향에게 먼저 반말을 한 건 궁장소녀였지만 말이다.
궁장소녀는 백운향의 질문에 선뜻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백운향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이제 보니 네가 네 주인을 사모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어쩌다 여인의 신분으로……."
"네…네가 감히……!"
궁장소녀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파르르 떨었다. 
하나, 그녀는 자의소녀 앞에서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는 듯 더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이때 자의소녀가 조용히 끼여들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당신 자유예요. 하지만 당신은 너무도 엉뚱하군요. 그런 몸으로 쓸데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어차피 두 번 죽었을 목숨이었소. 한데도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 역시 인명(人名)은 재천(在天)이 아니겠소?"
"그래요.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구하는데도 분명 한계가 있어요."
"낭자는 제법 똑똑하구려. 그 정도의 똑똑함이라면 여기서 내 몸을 치료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것이오. 나는 마지막으로 내 운(運)을 시험해 보고 싶으니 어서 천외약관으로나 보내 주시오."
"천외약관……?"
자의소녀는 미미하게 말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다 돌연 그녀는 망사로 가려진 입술을 다시 섬섬옥수로 가리며 잘게 부서지는 듯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우아하면서도 교태로운 몸짓이었다. 
백운향은 하마터면 넋을 잃을 뻔했다.
'사랑스럽다!'
그렇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솔직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기도 했다.  
하나, 그는 짐짓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투덜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거요? 웃다니, 제길!"
자의소녀는 교소를 멈추더니 정색 어린 눈으로 백운향을 바라보았다.
"잘 들으세요. 천외약관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있다면 천도관이 있을 뿐이에요. 다시 말해서 천외약관은 천도관을 와전(訛傳)시켜 퍼뜨린 헛소문인 거죠."
"일부러 퍼뜨렸다는 거요?"
"그래요.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들로 하여금 최후로 찾게 하려는 의도였지요. 하지만 아무도 이곳을 찾지 못해요. 우리가 데려오기 전에는… 물론 당신은 최초로 예외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말예요."
"영광이구려. 한데,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런 짓을……."
"그것은 말할 수 없어요. 당신이 살아 나갈 수 있으면 몰라도. 그러나 지금까지 천도관에서 살아 나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백운향은 내심 흠칫했지만 태연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모두 죽었단 말이오?"
"아니예요.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거의가 완치되었죠. 하지만 외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어요. 애석한 일이지만 우리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요. 이곳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기랄! 그렇다면 내가 살아난다 해도 나 역시 예외일 수는 없겠군."
자의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리 속단하진 말아요. 세상엔 언제나 예외란 게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나라고 뭐 별 수 있겠소? 낭자가 특별히 선심을 써 준다면 모를까……."
자의소녀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백운향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때 문이 열리며 여덟 명의 청수한 백의노인이 들어섰다.
그들은 들어서기가 무섭게 일제히 자의소녀를 향해 부복대례를 올렸다.
"팔대약사가 관주님을 뵈옵니다."
"어서들 오세요."
"하명하오실 일은……?"
"노사들께서도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이 사람은 한때 무림에서 살겁(殺劫)을 일으켰다가 무림의 공적으로 심판을 받은 야우혼이에요."
이미 알고 있는 듯 여덟 명의 노인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묵묵히 백운향에게 시선을 보냈다.
자의소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은 천인달리쇄락공을 치료하고자 이곳에 왔어요."
순간 백의노인들은 일제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천인달리쇄락공!"
"천인달리쇄락공을 주입당하면 몸이 겉에서부터 내부로 서서히 썩어 들어가게 되거늘, 아직까지 저토록 온전하게 살아 있다니……."
"진정 저 자가 천인달리쇄락공에 당했단 말씀입니까?"
자의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사실이에요. 내가 노사(老士)들을 부른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어서들 진맥해 보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몸을 일으켜 한쪽 옆으로 물러섰다.
백의노인들은 조심스레 백운향에게 다가가 백운향을 빙 둘러싸고 앉았다.
그들은 백운향을 진맥을 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들의 진맥수법은 모두 다를 뿐만 아니라 진맥 부위도 각기 달랐다.
어떤 이는 마혈(痲穴)만을, 어떤 이는 사혈(死穴)만을, 또는 임맥(任脈)이나 독맥(督脈)만을, 그런가 하면 근골(筋骨)만을…….
그렇게 여덟 명의 백의노인은 서로 다른 부위를 동시에 살피고 있음에도 마치 한 사람이 보는 듯 일사불란(一絲不亂)했다.
한동안 실내에 알 수 없는 긴장이 감돌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백의노인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손을 뚝 멈추었다.
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은 왠지 하나같이 격동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의소녀가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다소 긴장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어떤가요?"
백의노인들은 일제히 그녀를 향해 부복대례를 취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기이하게도 뽀얀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들 중 나이가 가장 지긋해 보이는 백발백염의 노인이 격동성을 토해 냈다.
"기뻐하소서! 어쩌면 황제폐하(皇帝陛下)의 원대한 계획이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 사료되옵니다."
"그…그게 정말인가요?"
자의소녀의 교구가 흥분으로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관주님, 잠시 자리를……."
백발백염의 노인이 그 말과 함께 문을 가리켰다.
자의소녀는 일시 넋을 잃은 듯 망연히 서 있더니, 백운향을 한 번 돌아본 후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백의노인들이 일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문 밖으로 걸어나가는 자의소녀와 백의노인들을 바라보며 백운향은 내심 깊은 의혹에 빠져들고 말았다.
황제폐하의 원대한 계획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가?
설마 이곳 천도관을 만든 장본인이 당금 황제인 영락제였단 말인가?
이때 문이 열리며 만영반이라 불리웠던 화의중년인이 들어섰다.
"약황전(藥皇殿)으로 모시라는 분부가 계셨소이다."
태도가 사뭇 정중했다. 
영반이라는 그의 칭호로 미루어 그가 결코 범상치 않은 신분임이 분명함에도 그는 예를 다해 백운향을 대하는 것이었다.
백운향은 필시 자신에게 뭔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닥칠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몸을 일으켜 만영반의 뒤를 따라나섰다.
천도관 약황전(藥皇殿).
그곳은 일백여 평은 됨직한 거대한 대전이었다.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 맨 처음 느껴지는 것은 코가 아릴 정도로 강렬한 약초(藥草) 내음이었다.
약황전의 사방 벽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질서정연하게 들어찬 백여 개의 탁자 위로 수도 없이 많은 약병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만영반은 그곳을 지나 십여 개의 문을 통과한 후 어느 거대한 석문(石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석문을 향해 공손히 입을 열었다.
"백공자를 모셔 왔습니다."
스르릉…! 미세한 기음(奇音)이 울리며 석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문이 열리자 만영반은 옆으로 물러서며 백운향을 향해 말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고맙소."
백운향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쿠웅! 백운향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석문이 다시 닫혔다.
백운향은 석실 안을 쭉 둘러보았다. 
대략 십여 평 남짓이나 될까? 
천정에는 어른의 주먹만한 야명주(夜明珠)가 하나 박혀 있어 실내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석실 중앙에는 대형 석탁(石卓)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자의소녀와 팔대약사라 불리운 여덟 명의 백의노인들이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은은한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안쪽에 자리한 자의소녀였다.
"이리 와 앉으세요."
백운향은 느릿하게 석탁으로 다가가 자의소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의소녀가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당신을 청한 것은 당신과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예요."
"중대한 문제라고 했소?"
"그래요. 당신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니까요."
"계속해 보시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당신의 병은 고칠 수 있어요."
순간 백운향의 전신이 한 차례 미세한 떨림을 일으켰다. 
그 동안 그 말을 듣고자 내심 얼마나 초조함을 금치 못했던가?
한데, 자의소녀가 돌연 나직한 탄식성을 흘려 냈다.
"하지만… 당신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해요."
"두 가지 길……?"
"한 가지 길은 평범하게 생(生)을 살아가는 거예요. 당신은 천수(天壽)를 다 할 수 있으나 평범한 사람으로서 이곳에서 생을 마쳐야 해요.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또 한 가지 길은……?"
"그건 당신이 공력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초절정(超絶頂)의 고수로 키워져 황제폐하의 밀명(密命)을 수행(遂行)하는 길이에요."
백운향의 눈빛이 굳어졌다. 
황제의 밀명이라니…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문득 백운향의 입가에 고소가 떠올랐다.
"당신들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구려. 당신들은 내가 야우혼임을 벌써 잊었단 말이오? 도대체 나를 어찌 보고……."
"그 말로 충분해요. 당신이 만약 다른 마음을 먹을 인물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함축성 있는 말이었다. 
자의소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신이 후자의 경우를 택할 경우 당신은 시한부(時限附) 생을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백운향의 눈빛이 급격히 굳어졌다. 
시한부 생이라면 일정기간 동안밖에 살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 기간은?"
"이 년이에요."
"음……!"
"후자의 길을 택한다면 천도관의 모든 것이 당신에게 투입될 거예요. 하지만 이는 강요할 수 없는 일.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어요."
백운향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 수가 없었다.
생(生)과 사(死)!
삶과 죽음의 극단적인 그 양 갈래 길 중 어찌 한 길을 선뜻 선택할 수 있으랴!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물론 드려야지요. 시간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차분히 결정하세요."
"고맙소."
백운향의 음성은 여전히 침중했다. 
문득 그의 입가에 쓰디쓴 고소가 떠올랐다.
"만약 두 가지가 알맞게 배합된 길이 있었다면 나는 서슴없이 그 길을 택했을 텐데……."
용(龍)의 길
"한데 말이오. 나는 바둑을 전혀 둘 줄 몰랐소. 바둑을 못 두는 놈이 바둑의 대가를 이겨야 하니 얼마나 난감했겠소. 바둑이라는 게 하루 이틀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때의 암담한 심정은 정말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오."
"으음, 그렇겠지."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릿속에 기가 막힌 묘책이 하나 떠올랐소. 그게 뭔지 아시오? 내 다행히 들은 풍월이 있어 항우바둑을 생각해 냈던 것이오."
"호오!"
"그래서 항우바둑으로……?"
"그 방법밖에 없으니 어찌하겠소. 나는 즉시 양성주를 찾아가 바둑을 청했소. 결국 난 항우바둑으로 양성주를 상대했고, 설마하던 양성주는 내 의도를 알고 돌을 던지고 말았소. 하하하!"
백운향의 입에서 통쾌한 대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지금 양만휘와 바둑을 둘 때 있었던 일을 입에서 침을 튀겨 가며 팔대약사들에게 얘기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팔대약사들은 백운향의 얘기에 완전히 빠져들어 저마다 감탄과 탄성을 자아냈다.
이때 문이 열리며 자의소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팔대약사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꺾었다.
"관주님을 뵈옵니다."
백운향이 반색하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관주.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을 텐데.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나면 따로 얘기해 주리다."
그의 입가에는 시종 밝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자의소녀는 처연한 아픔이 깃든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백운향은 비록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삼 일 전보다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던 것이다.
자의소녀는 절로 소리 없는 탄식을 불어 냈다. 
그녀는 백운향이 지난 삼 일 동안 겪었을 심적인 고뇌와 갈등, 번민이 얼마나 컸던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백운향의 웃음은 오히려 자의소녀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와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의소녀는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백운향의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결정을 내렸나요?"
백운향의 입가에 씨익, 한 줄기 미소가 그어졌다.
"별것도 아닌 일을 결정이고 자시고 할 게 뭐 있겠소?"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본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운명이란 게 있는 법이며, 그 운명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것은 허망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뿐… 나는 내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소.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말이오. 단언하건대 내게 평범한 삶이 주어졌다면 나는 차라리 태어나기를 거부했을 것이오. 용(龍)으로 살겠소. 그것이 바로 나의 운명이오."
"아……!"
"오오……!"
자의소녀와 팔대약사들은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자의소녀의 두 봉목에 감격의 기색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솔직히 난 당신이 그런 결심을 해 주길 내심 간절히 빌었어요. 당신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미안해 할 것 없소. 관주가 황제폐하에 대한 충정(衷情)이 깊은 때문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해해 주시니 정말 고마워요. 한데, 이젠 그 인피면구를 벗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인피면구를……?"
백운향은 멈칫했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나 역시 갑갑해지던 참이었소."
백운향은 그렇게 말하며 얼굴에서 매미날개처럼 얇은 인피면구 한 장을 떼어 냈다.
다음 순간, 자의소녀와 팔대약사들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탄성이 토해졌다.
"아……!"
"오오.……!"
드러난 백운향의 진면목이 너무나 준수했던 때문이다. 
일순간 넋을 잃고 있던 자의소녀는 갑자기 피식 실소를 지었다.
"역시 당신 말대로 몹시 추하군요. 나는 당신처럼 추한 사람을 처음 봐요."
백운향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관주는 대단히 아름다울 거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소."
일순 자의소녀의 두 봉목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백운향은 그녀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 봐도 되겠소?"
"무슨……?"
"도대체 관주는 누구요? 나는 관주의 진정한 정체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오."
"그게 그렇게도 궁금한가요?"
"물론이오. 관주는 여인의 신분임에도 황제폐하께서 직접 관여하고 계신 이곳 천도관을 이끌고 있으니까."
자의소녀는 왠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팔대약사들을 돌아보았다.
팔대약사 중 백발백염의 노인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
"이제는 관주님의 신분을 밝혀도 무방하다고 사료되옵니다."
자의소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발백염의 노인이 백운향을 돌아보며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근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잘 듣게. 이분은 바로 황제폐하의 천금(千金)이신 혜량공주(慧亮公主)님이시네."
순간 백운향의 안색이 빠르게 일변했다.
오오, 혜량공주 주약란(朱若蘭)!
그녀는 바로 당금 황제인 영락제의 금지옥엽(金枝玉葉)으로서 어려서부터 재기(才氣)가 이를 데 없이 총명하여,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왔다는 일대재녀(一代才女)가 아닌가?
백운향은 황망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히려 했다.
"초민(草民)이 지금껏 감히 무례를……."
하나, 그 순간 백운향은 또다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밑으로부터 뻗어 오르는 한 줄기 부드러운 무형강기(無形剛氣)로 인해 그는 조금도 허리를 굽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주께서 무공을… 그것도 절정의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은가?'
혜량공주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새삼스레 예의를 차린다면 오히려 어색하니, 전과 다름없이 대해 주기 바래요. 이건 부탁이에요."
"어찌 감히……."
백발백염의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백운향의 말을 가로챘다.
"공주님께선 격식을 싫어하는 분이시네. 공주마마의 분부대로 하게. 그보다 이제 이곳 천도관이 생긴 유래에 대해 얘기해 주겠네."
백운향은 백발백염의 노인이 말머리를 돌리자 묵묵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백발백염의 노인은 천도관이 생긴 유래에 대해 천천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영락제(永樂帝).
대명(大明)의 사대황제(四代皇帝)이자 유사 이래 가장 뛰어난 성군(聖君)이다.
중원은 그가 보위(寶位)에 오름으로 해서 최고의 부흥기를 맞는다. 
본래 그는 무림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관(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무림일 뿐만 아니라, 그 무림으로 인해 천하는 한 시도 조용한 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무림으로 인해 천하의 흥망성쇠(興亡盛衰)마저 좌우될 지경이었으니…….
마침내 영락제는 무림을 영원히 종식시키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은밀히 황궁세력을 풀어 무림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영락제가 보위에 오른 지 일 년 만의 일이었다.
한데, 그로부터 다시 일 년 후 영락제는 실로 놀라운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무림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이 은밀히 도사리고 있으며, 그들은 천하무림을 제패하고 나아가서는 황궁마저 전복(顚覆)시킬 음모를 품고 있음을 알아냈다는 보고였다.
영락제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보고는 계속 날아들었다. 
신비세력의 조직은 천하 도처에 거미줄처럼 깔려 있으며, 그들의 무공은 가히 절정경지를 넘어선 것이라는 등 하나하나가 영락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보고들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직 세력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은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의 세력을 의식한 때문이라는 보고를 아울러 받았다.
영락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교두보(橋頭堡)가 무림 내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락제는 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의 세력이 없었다면 사태는 어찌되었을 것인가?
그 보고에 영락제는 무림척살계획(武林剔殺計劃)을 백지로 돌리기에 이르렀다. 
무림의 중요성을 인정한 때문이었다.
대신 영락제는 무림척살계획을 신비세력의 척살계획으로 돌렸다. 
더불어 천하 각처에서 자질이 출중한 기재(奇才)들을 은밀히 뽑아 황궁 내의 절대금지(絶代禁地)인 금역(禁域)을 비밀연무장으로 하여 그들을 수련시키기 시작했다.
유사 이래 최대최강(最大最强)의 황궁고수(皇宮高手)들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합적인 보고에 의하면 신비세력의 무공은 너무나 가공한지라 그들만으로는 신비세력에 대항하기가 불가능했다. 
즉, 그들을 이끌 천고(千古)의 대기재(大奇才)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천도관이었다.
역대 황궁어의(皇宮御醫) 중 가장 뛰어났던 여덟 명의 신의(神醫)를 팔대약사로 봉(封)해 불세출(不世出)의 대기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재를 찾기란 바닷가의 모래알 속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십여 년.
다행인 것은 그 신비세력이 왠지 아직까지 그들의 야욕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영락제로서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숨가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일촉즉발의 폭풍전야(暴風前夜)와도 같은 나날들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던 차에 뜻밖에도 백운향이 스스로 천도관을 찾아 들어왔고, 그는 팔대약사들이 그 동안 몽매에도 찾고자 갈망했던 천고의 대기재임이 밝혀진 것이다.
백발백염의 노인의 얘기를 모두 듣고 난 백운향은 절로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천하가 그토록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을 줄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다.
백발백염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자네는 우리가 안배한 모든 것을 거쳐 천인달리쇄락공에 당한 자네의 몸을 탈태환골(脫胎換骨)시켜야 하네."
오오, 탈태환골! 
그것은 무림인이라면 꿈에도 그리는 극상지체(極上之體)에 이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백발백염의 노인이 갑자기 안색을 침중하게 굳혔다.
"그렇다고 천인달리쇄락공이 자네의 몸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네. 단지 장문혈(長門穴) 한 곳으로 몰아넣어 일시적으로 혈(穴)을 봉쇄함으로써 천인달리쇄락공을 제압하는 것뿐이네."
"……!"
"그 기간은 정확히 이 년이네. 그리고 이 년이 지나는 순간, 자네는 전신이 파열되어 즉사할 것이네. 후회는 없는가?"
백운향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비록 약관에 불과한 짧은 세월을 살아온 몸이나 아직 후회라는 것은 해 본 적이 없소. 난 단지 답답할 뿐이오."
"뭐가 답답하다는 건가?"
"나는 본래 잠시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삼 일 동안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소."
"알겠네."
백발백염의 노인은 고개를 크게 끄떡였다. 그것은 감탄의 표시이기도 했다.
백운향의 방금 한 말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일체의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는 것을 백발백염의 노인은 잘 알고 있었다.
백발백염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앞으로 삼 개월 동안 여덟 관문(關門)을 통과해야 하네. 그래야만 비로소 탈태환골에 이르게 되네. 자, 어서 가세."
말과 함께 백발백염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나머지 약사들도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혜량공주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이만 물러가옵니다."
"수고들 하세요."
백발백염의 노인을 선두로 팔대약사들이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백운향도 팔대약사들의 따라 나가다 문득 혜량공주를 돌아보았다. 
혜량공주도 백운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얽혔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곳에서 한 차례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 백운향은 혜량공주에게 가볍게 목례를 취한 후 이내 팔대약사들을 따라 밖으로 걸어나갔다.
세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ㅉ은 세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그 동안 백운향은 여덟 개의 관문을 통과했다.
제일관(第一關), 약초벌모세수(藥草伐毛洗髓)!
제이관(第二關), 독초벌모세수(毒草伐毛洗髓)!
제삼관(第三關), 약물벌모세수(藥物伐毛洗髓)!
제사관(第四關), 독물벌모세수(毒物伐毛洗髓)!
제오관(第五關), 영약취음(靈藥取飮)!
제육관(第六關), 독물취음(毒物取飮)!
제칠관(第七關), 태허무극금침대법(太虛無極金針大法)!
제팔관(第八關), 태허무극개정대법(太虛無極開頂大法)!
그리고 백운향은 탈태환골(脫胎換骨)을 이루었다. 기적의 탈태환골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하나, 백운향의 등에는 아직도 희미하나마 야우혼이란 낙인이 남아 있었다.
<자네는 이제 황궁으로 가야 하네. 자네를 위한 황제폐하의 안배가 있을 것이네. 그리고 무림에 나가면 칠절신의를 찾게. 그는 우리가 신비세력에 잠입시킨 사람이네. 이 역시 황제폐하의 안배이네. 자네는 이제 자네 한 사람만의 몸이 아니네. 국태민안(國泰民安)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천하의 사활(死活)이 자네에게 달려 있음을 명심하도록 하게!>
동짓달 그믐날 아침.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네 마리의 오추마(烏騶馬)가 끄는 한 대의 호화로운 마차가 성도성을 떠났다. 
그것은 성도성 성주 양만휘가 신년하례(新年賀禮)차 황제를 배알(拜謁)하러 가는 입궁(入宮) 행차였다.
마차는 일천여 명의 호위무사가 호위했다. 
그리고 그 호위무사들의 틈에는 변장한 백운향이 끼어 있었다.
북경성(北京城).
당금 황제인 영락제가 등극(登極)하여 십구 년 만에 남경(南京)인 금릉(金陵)에서 천도(遷都)한 현 대명(大明)의 황궁이다.
금칠홍장(金漆紅粧)의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빽빽이 들어찬 광대무비(廣大無比)한 북경성은 크게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분되는데, 황제의 거처인 자금성은 내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성도성주 양만휘는 북경성에 도착하자마자 황제를 배알하러 갔다. 
그 동안 그의 일천여 명의 호위무사들은 외성에 머물며 외성주(外城主)가 베푸는 간단한 연회로 그 동안의 여독(旅毒)을 풀고 있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 호위무사들 틈에 끼여 있던 백운향은 배탈이 났는지 고통스런 표정으로 배를 부여잡고 황급히 측간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백운향이 연회장으로 돌아온 바로 그 무렵, 또 한 명의 백운향이 황궁 내성(內城)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무사복이 아닌 산뜻한 백의 차림을 한 백운향이었다.
내성 구중심처(九重深處).
고관대작이라 해도 감히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이곳에 한 채의 단아한 전각이 교교한 달빛 아래 은은한 아취(雅趣)를 드러내 놓고 있다.
<자봉각(紫鳳閣)>
바로 당금 황제 영락제의 금지옥엽인 혜량공주의 침소였다.
스스슥…! 한 줄기 백영(白影)이 유령처럼 전각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다름아닌 내성에 모습을 드러냈던 백운향이었다.
'으음, 나 자신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치밀한 안배였다. 이토록 사태가 심각하단 말인가?'
그의 얼굴에는 은은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때 전각 창문에 드리워진 휘장 사이로 그윽한 옥음이 바람결처럼 들려 왔다.
"어서 오세요."
백운향은 망설이지 않고 신형을 번뜩여 휘장 안으로 스며들었다. 
내실에는 여전히 흰 면사로 얼굴을 가린 혜량공주가 팔선탁(八仙卓) 앞에 앉아 있었다.
"황궁 내에도 첩자가 깔려 있어 부득이 당신을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는 안전하니 어서 이리 와 앉아요."
백운향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공주님을 뵈옵니다."
일순 혜량공주의 서늘한 두 봉목에 가벼운 실망의 빛이 스쳤다.
"당신은 벌써 나의 부탁을 잊은 모양이군요. 전처럼 스스럼없이 대해 달라는 말을 벌써 잊은 건가요?"
"하오나……."
"운향, 나는 애당초 공주의 신분으로 당신을 만난 게 아니었어요. 천도관 관주로서 만난 것이에요. 따라서 나는 당신이 본래 천도관 관주에게 대했던 것처럼 날 대해 주길 바래요."
백운향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묵묵히 팔선탁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무언(無言)의 승낙. 
그것은 입을 열어 대답하는 것보다 오히려 적절한 승낙의 표시였다. 말보다는 행동이 자연스런 경우라고나 할까?
혜량공주는 만족한 듯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한 가지 밝혀 둘 게 있어요. 이 일은 당신도 알다시피 중차대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라 본래는 부황(父皇)께서 직접 나서시려고 했어요."
"황제폐하께서……?"
"그러나 부황께서는 이 일을 극히 은밀히 추진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아무래도 행보가 자유롭지 못한 위치에 계신 까닭에 내가 그분을 대신하는 거예요."
백운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혜량공주는 잠시 여유를 둔 후 말을 이었다.
"이제 당신은 황궁제일금지(皇宮第一禁地)로 가야 해요. 그곳은 역대 황실의 비전절예(秘傳絶藝)와 천하개세신공(天下蓋世神功)이 비장(秘藏)되어 있는 황궁무고(皇宮武庫)예요."  
"황궁무고……!"
백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놀란 음성을 발하고 말았다.
혜량공주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사람들은 금릉에서 이곳 북경으로 천도해 올 때 부황께서 황궁무고를 불살라 없앤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부황께서는 천도에 앞서 황궁무고를 이곳 북경성에 이미 옮겨 놓으셨던 거예요. 이는 나와 몇몇 사람만 아는 비밀이지요."
"그랬었구려. 하지만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꽤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겠구려."
혜량공주는 나직이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신비세력의 이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으음……."
백운향은 나직이 신음했다. 
도대체 그 신비세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공한 조직이기에 대명제국의 황제마저 고육지계(苦肉之計)를 감수하며 비밀을 지키려 했단 말인가?
백운향의 안색이 저절로 굳어졌다.
"하지만 내게는 앞으로 칠백여 일밖에 여유가 없소."
혜량공주의 교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탈태환골을 한 순간부터 시한부 생에 돌입한 그이기에 무슨 일이든 촌각(寸刻)조차 지체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혜량공주는 나직이 아픔 어린 탄식을 흘리며 교구를 일으켰다.
"따라오세요."
백운향은 묵묵히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백운향을 안내해 간 곳은 뜻밖에도 그녀의 침실이었다.
백운향은 일순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침실 내부는 의외로 몹시 간소했다. 
한 나라의 공주가 거처하는 침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상 하나와 경대 하나만이 단촐하게 놓여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백운향의 두 눈에 일순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능히 혜량공주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침실로 들어선 혜량공주는 곧장 침상으로 다가가 나무로 깎아 만든 한쪽 침상다리를 지그시 누르며 한 바퀴 돌렸다.
그그긍－! 순간 경미한 음향과 함께 침상이 뒤로 스르르 밀려 나가며 지하로 뻗은 암도(暗道)가 나타났다.
"들어가세요. 여기가 황궁무고로 통하는 입구예요."
"아……!"
백운향은 절로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황궁무고가 공주의 침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실로 아무도 예상치 못할 교묘한 안배였다.
백운향은 천천히 암도 속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혜량공주의 기대 어린 시선이 백운향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백 일… 이곳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난 백 일 이상을 여기서 허비할 수 없다.'
백운향은 염두를 굴리며 전면을 응시했다.
황궁무고! 
그곳은 지하석실이었다. 
그것도 끝을 가늠할 수 없이 펼쳐진 석실과 석실의 연속이었다. 대충 어림 잡아도 족히 수천여 칸은 됨직했다.
따라서 그 안의 책은 수십만 권에 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한데, 백운향은 황궁무고에 백 일 이상 머물지 않겠다니,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아무튼 백운향은 지체하지 않고 첫번째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 벽면 상단에 걸려 있는 현판(懸板)에 고정되어 있었다.
<불문팔대무고(佛門八大武庫)>
그리고 그 현판 아래에는 각기 다른 자세의 여덟 개의 불상(佛像)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고, 그 불상들 앞에는 양피지로 된 얇은 책자가 각각 한 권씩 놓여져 있었다.
백운향은 맨 좌측으로부터 책자와 함께 불상을 차례로 살피기 시작했다.
<제일상(第一像), 달마역근현공(達摩易筋玄功)>
책자의 겉표지에 쓰여진 제자(題字)였다. 
한데, 그것은 바로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의 정수(精髓)라 알려졌지만 오백 년 이상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는 소림사의 최상승내가심법(最上昇內家心法)이 아닌가?
그렇다. 책자는 바로 달마역근현공의 구결이었으며, 불상은 그 기수식(起手式)이었던 것이다.
백운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계속해서 책자와 불상을 살펴 나갔다.
<제이상(第二像), 보리항마신공(菩提降魔神功)>
<제삼상(第三像), 범천패엽신공(梵天貝葉神功)>
<제사상(第四像), 탄지신통(彈指神通)>
<제오상(第五像), 금강반야선공(金剛般若禪功)>
<제육상(第六像), 천수관음장(千手觀音掌)>
<제칠상(第七像), 천룡대라인(天龍大羅印)>
백운향은 일곱 번째 상 앞에서 잠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천룡대라인!
이는 천축제일(天竺第一)의 고찰(古刹)인 천룡대사원(天龍大寺院)의 실전비기(失傳秘技)였던 것이다.
백운향은 다시 마지막 여덟 번째 불상 앞으로 다가갔다.
<제팔상(第八像), 달마삼검(達摩三劍)> 
오오, 새삼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소림의 시조(始祖)인 달마대사가 면벽 구 년 만에 만들어낸 소림칠십이종절예(少林七十二種絶藝)의 정화(精華)만을 모아 마지막으로 창안한 신검삼초식(神劍三招式).
아직까지 달마대사 자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달마삼검을 펼친 적이 없기에 전설로만 여겨 온 소림최고의 신비무공이 바로 달마삼검인 것이다.
한데, 그 달마삼검이 이곳 황궁무고에 엄연히 존재할 줄이야!
백운향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달마삼검의 구결을 읽어 내려갔다.
책장의 마지막 장을 덮던 백운향은 돌연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말았다. 
그것은 책자의 맨 뒷장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첨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달마사검(達摩四劍)을 터득하라!>
무슨 말인가? 달마삼검 후에 달마사검이라니……?
더구나 초식이나 구결도 없이 스스로 터득하라니……?
백운향은 그런 글이 쓰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달마사검도 그렇거니와 하필이면 왜 책자의 맨 뒷장에 이 글을 남긴 것일까?"
그렇다. 보통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맨 뒷장은 그냥 소홀히 넘어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분명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일까?
의혹이 밀물처럼 몰려 왔지만 백운향은 애써 의혹을 떨쳐 버렸다. 
지금 그에게는 그것에만 매달릴 만큼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미련없이 곧바로 불문팔대무고를 나왔다. 
단지 여덟 개의 불상과 책자를 한 번씩 살펴본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낸 것이다.
'지금은 일단 암기로 만족한다. 연공은 차후 시간을 내면 충분하다.'
바로 그것이었던가? 
그가 황궁무고에 머무는 기간을 불과 백 일로 잡았던 까닭은…….
백운향은 실로 바람처럼 황궁무고의 수천여 석실을 차례로 돌았다. 어찌 보면 그냥 들락날락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나, 그가 한 번 석실을 빠져 나올 때마다 그의 뇌리엔 상상을 불허하는 개세신공의 구결들이 뚜렷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는 지금 또 하나의 석실에 들어서서 책자를 펼쳐 보고 있었다.
<불사비록(不死秘錄)>
그것은 백여 장 남짓한 몹시 낡은 책자였다.
본래 백운향이 그 책자에 관심을 가진 것은 불사(不死)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복우산 천황봉의 천하영웅대탑을 세운 네 명의 절대기인인 무림사대무성(武林四大武聖) 중 일 인인 불사마존(不死魔尊)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나 해서였다.
그러나 그 책의 내용은 실망스럽게도 평범한 마공(魔功)의 계속적인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백운향도 그냥 책을 덮어 버릴까 생각할 정도였다.
한데, 불사비록을 대여섯 장 넘긴 순간 백운향은 실로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마공이 갈수록 가공스러워질 뿐만 아니라, 앞에 나열한 마공들과 묘한 연계(連繫)가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불사비록엔 천하의 온갖 마공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 모든 마공은 마치 초식과 초식의 연속인 양 하나의 맥(脈)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수천 종의 온갖 마공이 점차 가공지세를 치달리며 일시에 발초(發招)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실로 통천가공할 일이 아닌가?
하지만 백운향은 그런 마공들의 연속성이 나타내는 오의(奧意)를 깨닫지는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사비록은 천하마공들을 한 권의 책자로 집대성(集大成)한 개세마공(蓋世魔功)이라는 사실이었다.
백운향은 불사비록을 내려놓고 또 다른 책자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 책은 그가 이미 한 번 본 책이었다.
<무명자참수기(無名子參修記)>
이것은 황궁무고의 모든 책 중 백운향에게 가장 큰 놀라움을 가져다 준 책이었다.
단지 열 장으로 된 얇팍한 책자로 필자(筆者)는 자칭 무명자(無名子)란 신비인이었다. 
지금 백운향은 그 책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펼쳐 보고 있었다.
그 책은 다른 책들과는 달리 서언(序言)이 언급되어 있었다.
<노부는 성(姓)도 이름(名)도 없다.
세월이 노부의 모든 것을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하늘을 지붕 삼아 떠돈 지 어언 백여 성상(星霜). 그 동안 노부는 천하의 무공을 모두 섭렵했다.
그 중 가장 강하고 패도적인 무공 열 개를 선별하여 이 참수기에 적고자 한다.
무명자(無名子)>
순서없이 나열된 무공들엔 간단한 주해(註解)가 달려 있었다.
<망혼일접(亡魂一蝶)：바람결에 한 마리 나비가 나타나매 혼은 벌써 구천(九泉)을 떠돈다.
사령마후(死靈魔吼)：소림의 보리항마후(菩提降魔吼)를 제(制)하며 천하를 혈운에 잠기게 한다.
벽라독강(碧羅毒疆)：독중지독(毒中之毒) 앞에서 독을 입에 올리지 마라.
태청검법(太淸劍法)：무당의 비전검법으로 도가(道家)의 사대검법(四大劍法) 중 으뜸이다.
쾌도살(快刀煞)：이 이상 빠른 도법은 결단코 창안될 수 없다.
달마역근현공(達摩易筋玄功)：불세제일심공(不世第一心功)으로 인간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심공이다.
천인달리쇄락공(天忍疸痢碎落功)：인간이 만들어 낸 지상최후의 형벌, 오직 죽음뿐이다.
천룡대라인(天龍大羅印)：천축제일신공(天竺第一神功)으로 달마삼검과 쌍벽을 이루는 불문신공이다.
칠채서기(七彩瑞氣)：이것에 대해서는 노부도 자세히 모른다. 
단지 노부가 천산(天山)을 지나다 우연히 이상한 일곱 색의 가공할 서기를 발견하고 달려가 보았지만 노부가 본 것은 끔찍한 시체들뿐이었다. 
시체의 수는 일백이십 구였으며 시커멓게 탄 채로 죽어 있었다. 더욱이 주위 사방 삼백여 장은 완전히 초토화(焦土化)되어 있었다. 
칠채서기는 노부가 명명한 초식명임을 밝혀 둔다.
취록혈강(翠綠血 )：이 무공 또한 노부도 모른다. 단지 인간이 만든 무공 중 가장 강하다고 구전(口傳)되어질 뿐이다.>
하나하나가 당금의 무림인들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절세신공들이었다. 
하나, 무명자는 참수기 마지막 장에 더욱 경천동지할 말을 남겼으니…….
<끝으로 노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칠채서기 앞의 모든 무공이 한데 합쳐도 칠채서기를 당할 수 없고, 만약 취록혈강이 나타나면 칠채서기와 가히 견줄 만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 노부가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파천무(破天舞)>
조화선옹(造化仙翁)이 창안했다는 전설의 파천무가 나타나면 능히 칠채서기와 취록혈강을 깰 수 있으리라 단언한다.
무명자 서(書)>
백운향은 두 번을 읽는 것임에도 넋을 잃고 말았다.
도대체 무명자란 노인은 무슨 근거로 그토록 광오한 결론을 내린 것인가?
또한 조화선옹이 창안했다는 파천무는 과연 어떤 무공이기에 무명자가 최고의 신공으로 뽑은 것인가?
차라리 한 마디 한 마디가 신비스럽기만 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화선옹이 달마대사, 불사마존, 천마대제(天魔大帝) 등과 더불어 복우산 천황봉의 천하영웅대탑을 세운 무림사 최고의 절대기인이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어쨌든 오늘은 백운향이 황궁무고에 들어온 지 정확히 백 일째 되는 날이었다.
백운향은 무명자 참수기를 덮고 천천히 석실을 나섰다.
2권으로 이어집니다.


제목: 절대쌍웅 제2권 (전3권)
지은이: 군옥당

- 차례 -
미혼환락무(迷魂歡樂舞)
춘야우래(春夜雨來)
잔 속에 술, 그리고 우정과 천하(天下)가
살수(煞手) 대 살수(煞手)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천룡승천무(天龍昇天舞)
쌍웅재회(雙雄再會)
대월국(大月國)의 왕녀
환상신기루(幻想蜃氣樓)



미혼환락무(迷魂歡樂舞)
그 문은 매우 특이했다. 
핏빛인 양 섬뜩한 주사빛의 그 문은 두께가 한 자는 족히 되어 보이는 한철(寒鐵)로 만들어져 있었다.
쿠르르릉－! 둔중한 굉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길고도 좁은 회랑(回廊)이었다. 
회랑의 양쪽으로는 자죽(紫竹) 창살의 칸막이가 쳐진 방이 쭈욱 늘어서 있었다.
백운향은 그 중 첫 번째 방 안으로 무심히 들어섰다. 
한 개의 자단탁자가 보였다. 탁자 위에는 향긋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벽옥배(碧玉杯) 찻잔과 쪽지 한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동안의 성취를 진심으로 경하드려요. 
당신은 이제 마지막 무고(武庫)에 발을 디딘 거예요.
누구도 알지 못하고, 그 내재(內在)된 극강함은 가히 고하(高下)를 따질 수조차 없는 희대(稀代)의 절공(絶功)이 이 안에 숨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어쩌면 형편없는 하류잡배의 무공이 있을지도 몰라요.
다만 이제 당신과 나는 가지고 있는 서로의 모든 것을 이 한 곳에 걸어야 해요.
모든 것은 당신의 의지대로…….
또한, 삶과 죽음을 초월한 당신께서 지금까지의 성공을 마무리 짓는 최초의 대공(大功)을 이루길 진심으로 빌겠어요.
혜량(慧亮)>
글의 내용으로 보아 혜량공주는 줄곧 백운향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당신과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백운향은 쪽지에 쓰인 그 의미심장한 귀절을 음미하듯 나직이 읊조렸다. 이어 그의 시선이 쪽지 옆에 놓인 찻잔으로 옮겨졌다.
차는 연한 갈황(葛黃)빛의 황정벽향(黃精碧香)이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찻물엔 한 잎의 장미화엽(薔薇花葉)이 둥실 떠 있었다.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던 백운향의 두 눈에 문득 정색 어린 기색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지금 조금도 지체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조급함은 대공을 이루는 데 있어 오히려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법. 
찻물 위에 한 잎의 꽃잎을 띄움은 천천히 그것을 불어 마시며 마음을 다지라는 뜻일 것이다.
백운향은 한 여인의 따뜻한 배려에 깊은 정(情)을 느끼며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일각이 지난 후에야 백운향은 두 번째 방의 칸막이 앞으로 다가갔다. 
막 방 안으로 들어서던 백운향은 흠칫하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나신(裸身)!
그의 시선을 파고든 것은 뜻밖에도 기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인의 벌거벗은 나신이었다.
서늘한 두 봉목은 노을을 보듯 하늘로 향하고, 섬연한 우수는 가볍게 하늘 한 구석을 떠도는 한 점 구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왼발은 구궁(九宮)을 딛고, 오른발은 중궁(中宮)으로부터 구궁에 위치한 왼발의 발등 위로 살포시 옮기려는 현란한 여인의 나신이었다. 
하나,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신화가 그려진 벽화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백운향의 가슴이 뜨겁게 울렁거림은 어쩔 수 없었다. 
여인의 나신화는 비단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살아 움직일 듯 생생했던 것이다.
'저 여인은 지금 춤(舞)을 추려 하고 있다. 저 자세는 바로 환락도의 연화가 추던 춤사위의 시작과 비슷하다.'
백운향은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며 나신화의 자세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눈동자와 입술의 벌림, 손과 허리의 위치, 뇌쇄적인 두 발의 보폭 등…….
여인의 전신 구석구석을 살피는 사이 백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무아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나, 무아지경 속에서도 그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백운향은 끌리듯 세 번째 칸막이로 날아들었다. 그곳에도 똑같은 여인의 나신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자세는 달랐다. 
여인의 얼굴은 하늘 정면을 향하고, 오른발은 왼발의 발등 위에 호선(弧線)을 긋듯 걸쳐 있었으며, 오른손의 변화 없이 왼손이 박속처럼 희고 풍만한 둔부를 가로질러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덧 백운향의 전신은 땀으로 축축이 적셔지고 있었다.
백운향은 홀린 듯 네 번째 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번 나신화의 여인은 두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있었다. 
고개는 뒤로 활짝 젖혀지고, 탐스런 수발은 둔부 아래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으며, 양손은 활짝 편 채 무엇인가를 갈구하듯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이어 다섯 번째 방. 
여인의 두 손은 나비가 나래를 펴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데, 여인의 오른발 바닥은 백운향을 향해 곧게 들려져 있었고 탐스런 수발은 여인의 두 앞가슴을 보일 듯 말 듯 가리운 채 은밀한 신비지대로 스치듯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도발적인 유혹의 자세였다.
백운향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숨결도 언제부터인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미끄러지듯 회랑을 돌았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놀랍게도 무려 사십구 폭의 나신화가 각 방마다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춤의 연계 동작이었다.
보는 이의 넋을 그대로 앗아 갈 듯한 현란한 나무(裸舞)!
만약 이 순간 백운향이 무아지경을 벗어나 조금이라도 마음을 준다면 그 즉시 불길처럼 타오르는 정염(情焰)에 전신혈맥이 파열당하고 말았으리라.
그의 전신에 흐르는 흥건한 땀은 바로 스스로의 정염을 억제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회랑은 오십 번째 칸막이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백운향은 오십 번째 칸막이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는 다시금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을 파고드는 하나의 글귀 때문이었다.
<오대파천무(五大破天舞) 중 미혼환락무(迷魂歡樂舞)!
춤은 춤이되 춤이 아닌 춤… 무공(舞功).
색(色)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만이 남을 뿐…….>
"파천무……!"
백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그가 어찌 잊었으랴! 파천무는 무명자참수기에 이름만 언급되었던 조화선옹의 전설적인 신공이 아니든가?
한데, 오대파천무(五大破天舞)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파천무는 하나의 춤이 아니라, 다섯 가지의 춤으로 이루어진 다섯 가지의 무공이었단 말인가?
또한 미혼환락무가 색으로 이루어진다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죽음만 남는 무공이라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지금까지 나는 색을 보았다. 그럼에도 새삼 색을 운운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백운향은 일순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미 미혼환락무에 빠져 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오십 번째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지막 나신화, 그것은 다른 것과는 달리 미끈한 등을 보인 자세로 서 있었다. 
한데, 돌연 백운향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보라! 나신화 위에 또 하나의 나신화가 환상처럼 겹쳐지며 서서히 백운향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그림이 움직이다니…….
그러나… 또 하나의 나신화는 그림이 아니었다.
완전히 돌아선 나신의 앞모습은 속이 은은히 비치는 엷은 망사의로 가려져 있었으며, 얼굴에는 자색 면사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면사 사이로 드러난 꿈결처럼 그윽한 시선을 머금은 두 봉목!
오오! 그것은 백운향이 너무도 익히 알고 있는 한 여인의 눈빛이 아닌가?
"공…공주……!"
그렇다. 그녀는 놀랍게도 혜량공주였던 것이다.
그녀는 백운향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자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벗겨 냈다.
"아……!"
백운향의 입에서 경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드러난 혜량공주의 얼굴은 고아한 듯 성결하고, 성결한 듯 요염했다. 
아름답다는 말 또한 그녀에게는 모욕이었다. 아름답다는 의미 자체가 바로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부셔 차라리 현기증을 불러일으키고 말 절세의 미모. 
백운향은 일순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그의 뇌리로 섬전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 미혼환락무는 색(色)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만이 남을 뿐…….
'오오, 그렇다면……?'
그 순간이었다.
"헉……!"
백운향의 입에서 돌연 숨가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그만 무아지경에서 벗어나고 만 것이다.
그의 전신으로 참을 수 없는 격렬한 정염의 불길이 노도(怒濤)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물…물러나시오!"
백운향은 혜량공주를 향해 끌리듯 다가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혜량공주는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애써 감추려고는 하나 그녀의 옥용은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여기서 당신과 나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해요."
백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말은 바로 그녀가 첫번째 방에 찻잔과 함께 놓아 둔 쪽지에 쓰여 있던 말이 아닌가.
"당신의 욕화(慾火)는 이미 돌이킬 수 없어요. 나는 내 스스로 이 길을 택한 것. 당신은 조금도 자책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시한부 생명이오."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렇다면 공주도……?"
"아니예요. 다만 당신이 죽는 날 나 역시 죽을 뿐이지요." 
"당치도 않소! 우리는 결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운명이오."
"설사 하늘의 뜻이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할 수 있어요."
"이…이런! 일국(一國)의 공주라는 사람이 어찌 그리도 생각이 좁단 말이오!"
"누차 말했지만 나는 공주 이전에 한 여인이에요. 여인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에요. 나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사…사랑……?"
넋을 잃은 듯 그 말을 뇌까릴 때, 백운향은 이미 혜량공주의 코앞에까지 다가서고 있었다. 
혜량공주의 두 봉목에 뽀얀 물안개가 번졌다.
스스로 사랑을 고백한 여인, 너무도 아름답고 성결하기에 더없이 사랑스러운 여인. 
백운향은 욕정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뼈마디조차 없는 듯 나긋한 교구가 힘없이 안겨들었다.
"으읍……!"
뜨겁고 두툼한 입술이 물면 터질 듯 여리고 보드라운 꽃잎 위로 내려앉았다.
파르르…! 여인의 교구가 물을 벗어난 은어처럼 잔떨림을 일으켰다. 
백운향은 그녀를 안은 채 그 자리에 무너지듯 몸을 던졌다. 밑에는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었다.
따사롭다. 모든 것이 따사롭다. 여인도, 사랑도, 융단도… 아니, 그것은 이미 뜨거운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백운향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정신없이 여인의 입술을 탐닉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고, 혀와 혀가 뒤엉켰다.
그의 깊은 입맞춤에 혜량공주의 희디흰 두 팔이 화사(花蛇)처럼 그의 목을 휘감았다. 
입술과 입술이, 혀와 혀가 그들만이 아는 은밀한 밀어(密語)를 속삭였다.
백운향은 한 손으로 그녀의 몸에 드리워진 망사를 찢듯이 벗겨 냈다. 굴곡이 완연한 여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백운향은 자신의 옷마저 찢듯이 벗어 던졌다.
백운향이 불처럼 뜨거운 동체를 접해 오자, 혜량공주의 몸도 이내 뜨겁게 달아올랐다. 
혜량공주의 몸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누르면 누르는 대로 튕겨 나올 듯 탄력이 있었다.
백운향은 그녀의 몸 위에 체중을 실었다. 
그녀의 작은 육체가 일순 화들짝 놀라며 움츠려드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전신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서로의 혀와 서로의 손이 서로의 몸을 뜨겁게 스쳐갔다. 
사내의 입술이 섬세한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다 문득 여인의 예쁜 조롱박 위에서 멈추었다. 
사내의 혀가 조롱박 위에 달린 탐스런 유실(乳實)을 삼키듯 베어 물었다.
"하아……!"
여인은 자지러지는 비음을 토해 내며 두 손을 사내의 흑발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름다운 여체가 사내의 입술과 손길로 인해 성숙한 여인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스치면 스치는 대로, 만지면 만지는 대로 여인의 나신은 경련을 일으키고 활처럼 휘어지며 청량한 소리를 튕겨 냈다.
사내는 본능적으로 여인이 더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진 것을 느꼈다. 
급기야 사내는 여인의 몸 속 깊숙이 자신의 실체를 들이 밀었다.
"헉……!"
여인은 다급한 교성과 함께 사내의 몸을 억센 힘으로 조였다. 
감당할 수 없는 뜨거움과 격정이 두 사람에게로 몰아닥쳤다.
사내는 한 마리 야수처럼 여인을 탐닉하며 그녀의 육체 속으로 더욱 더 깊숙이 침몰해 들어갔다.
"하아…학……!"
"헉……!"
그들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문득 핏빛 노을을 보았다. 
여인은 의식의 마지막 한 가닥 줄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힘겹게 허덕였다.
"당신… 당신을 사랑해요……!"
그것은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사내도 아마 그렇게 외치고 있으리라.
뱃길도 아득한 먼 하늘 가,
그대는 이렇게 찾아왔구려.
구름이 첩첩한 머언 산길,
그대는 이렇게 와 주었구려.
사립문 앞 길고 긴 길 쓸고 또 쓸어,
멀리 온 그대를 맞아들이니…
나 이제 여기 사랑의 씨를 뿌려라.
영원히…….
중년인(中年人). 일신에 연꽃 무늬가 새겨진 말끔한 청포(靑布)을 걸치고 선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용사비등(龍蛇飛騰)의 웅후한 필체로 영세무궁(永世無窮)이라 쓰여진 편액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유자적하듯 뒷짐을 진 자세였다. 
하나, 그의 뒷모습만 보더라도 그가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평범한 청포를 걸치고 있었으나 그의 전신에는 어딘지 모르게 귀인(貴人)의 풍모가 물씬 서려 있었다.
백운향은 그 중년인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신형을 꼿꼿이 세웠다. 
그러나 그는 이내 청포중년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청포중년인은 백운향이 다가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벽에 걸려 있는 편액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백운향은 청포중년인의 뒤로 일 장 정도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조심스럽게 걸음을 멈추었다. 
정실(精室) 안은 일시에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윽고 청포중년인이 백운향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대추빛 홍안(紅顔)에 윤곽이 뚜렷한 용모를 지닌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그의 전신에는 천하웅주(天下雄主)로서의 장중한 기개와 위엄이 구름처럼 서려 있었다. 
봉(鳳)을 닮은 두 눈에서는 상대의 폐부를 송두리째 꿰뚫을 듯한 강렬한 시선이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똥을 튕겨 냈다. 
하나, 그것도 일순… 백운향은 지체없이 청포중년인 앞에 부복대례를 취했다.
"신(臣) 백운향, 삼가 폐하를 뵈옵니다!"
그렇다. 청포중년인은 바로 당금의 대명황제인 영락제였던 것이다.
영락제의 입가에 언뜻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는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정실 한가운데 있는 자단목 원탁(圓卓) 앞으로 다가가 의자에 몸을 앉혔다.
"예를 거두고 어서 이리 와 자리하도록 하라."
"신이 어찌 감히……."
"짐은 사사롭게 그대를 만나고자 함이니라."
백운향은 일순 흠칫했다. 
사사롭게 만나고자 한다는 그 말은 이미 혜량공주와 자신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신이… 감히 불경을 범하겠나이다."
백운향은 조심스레 원탁으로 다가가 영락제 앞에 마주앉았다. 
영락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백운향을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으로 탄식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인중룡(人中龍), 용중지룡(龍中之龍)이거늘… 참으로 애석하도다."
"……!"
"운향!"
"예, 폐하!"
"사사로이 따지자면 그대는 이미 짐의 사위. 사위 또한 자식이나 다름없으니 자식을 험지(險地)로 보내야 하는 아비의 심정을 이해 바라노라."
"폐…폐하!"
백운향은 뜨거운 무엇인가가 목구멍으로 왈칵 치밀어오름을 느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감정인가? 
어린시절의 추억 속에 아스라이 묻혀 있던 부정(父情)이 아니든가?
영락제는 백운향의 심정을 아는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백운향은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는지라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영락제는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며 또다시 탄식 어린 어조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인간지사(人間之事) 영세무궁(永世無窮)이라… 하나하나가아쉽기만 하도다."
"……."
"운향!"
"예, 폐하!"
영락제는 돌연 신색을 무겁게 굳혔다.
"짐은 새삼 더 얘기할 게 없도다. 모든 것은 그대도 익히 알고 있을 터."
"……!"
"태조(太祖) 선황(先皇)폐하 이전 우리 한민족(漢民族)이 이백여 년이란 세월을 이민족(異民族)에게 지배당했음은 그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신이 어찌 모르겠나이까."
"물론 그렇겠지. 그러나 짐이 이 얘기를 굳이 거론하는 것은 그들 신비세력이 단순히 황실을 넘보는 것만이 아님을 알아낸 때문이니라."
"하오면 그들이 다시 부흥을……?"
"바로 그렇도다. 그들은 다시 중원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야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니라."
순간 백운향의 두 눈에 번갯불 같은 노광(怒光)이 솟구쳤다.
"감히 한낱 오랑캐 무리들이 또다시……!"
영락제는 일순 흠칫했다. 
그는 백운향에게서 천하패황인 자신으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살기를 피부로 느꼈던 것이다.
백운향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황망히 머리를 조아렸다.
"신이 감히 경망하였나이다! 용서하소서!"
영락제의 입가에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한 미소가 어렸다.
"짐은 괘념치 않노라. 오히려 짐은 그대의 장한 기상(氣像)에 뿌듯함을 느끼노라."
가히 일국의 제황다운 면모였다. 
백운향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신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반드시 그들의 야욕을 분쇄하겠나이다! 폐하께서는 더이상의 심려를 거두소서!"
"믿노라. 짐이 어찌 그대를 믿지 않으랴."
영락제는 감동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어 그는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운향, 손을 내밀라."
백운향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영락제를 바라보았다. 
영락제의 용안(龍顔)에는 범접치 못할 위엄이 가득 서려 있었다.
백운향은 조심스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영락제는 손을 들어 백운향의 왼손 중지에 벽광(碧光)이 일렁이는 옥지환(玉指環)을 하나 끼워 주었다.
"이것은 일당천(一當千)의 황궁고수들인 금궁천위대(禁宮天衛隊) 십만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신물(信物). 짐은 그대를 금궁천위대 통령(統領)에 임명함과 아울러 황실의 왕야(王爺)와 동등한 신분인 연환공(延換公)에 봉(封)하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실로 파격적인 책봉(責封)이었다. 황궁의 신비세력인 금궁천위대의 통령만 해도 엄청난 직책이거늘, 왕과 동일한 연환공이란 직위까지 하사(下賜)하다니…….
영락제는 엄숙한 표정을 풀고 백운향을 잡은 손에 부드럽게 힘을 주었다.
"그대에게 책봉의 술이라도 한 잔 권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깝도다. 마음으로나마 짐의 잔을 받기를 바라노라."
"감읍하옵니다!"
영락제의 손에 잡힌 백운향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 올랐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뿌듯한 정감이 흘렀다. 
이윽고 영락제는 아쉬운 표정을 못내 감추지 못하며 백운향의 손을 놓아 주었다.
"이제 그대에게 모든 것을 맡기노라. 차후 짐은 그대의 일에 일체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그대 또한 짐에게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아도 좋으니라. 어서 떠나라."
그의 마지막 음성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운향은 순간 허전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두 번 다시 영락제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백운향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뒷걸음으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이어 그는 영락제를 향해 공손히 대례를 올렸다.
"부디 옥체 보존하시어 만수무강하소서!"
격정에 떨리는 음성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그 자리에서 언제까지고 움직일 줄 모른 채 백운향이 사라진 텅 빈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奇事). 
천하에 홀연 두 가지 기이한 기사가 발생했다. 
세인들을 경악 속에 몰아넣은 기사들이었다.
그 첫번째 기사는 한 가문의 출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무적신방(無敵神幇)>
그 신비방파가 출현한 것은 불과 삼 개월 전이었다. 
세인들이 그 방파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전무(全無)했다. 위치도, 인원도, 세력도…….
그러나 무적신방은 출현한 지 단 백 일 만에 대강남북십삼성(大江南北十三省) 중 북육성(北六省)의 상권(商權)을 팔 할 이상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당시까지 중원의 상권을 쥐고 있던 수많은 상벌(商閥)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스스로 상권을 포기하거나 자청해서 무적신방의 휘하로 들어왔던 것이다. 
세인들은 이 고금 미증유의 놀라운 사건에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무림에 기사가 많다 하나 어찌 이토록 엄청난 기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기세로 나간다면 무적신방은 마음먹기에 따라 반 년 안에라도 천하상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신비(神秘)! 무적신방의 출현은 한마디로 신비 그 자체였다.
단목세가(端木世家).
한때 중원제일세가(中原第一世家)로 천하에 영명(英名)을 떨쳐 울리다 이십 년 전에 돌연 의문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던 일대명가(一代名家)이다. 한데, 그 단목세가가 부활(復活)했다.
그것도 원래 단목세가가 위치했던 호남(湖南)의 형양성(衡陽城)에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리고 부활한 단목세가의 현 가주(家主)는 약관의 미청년이라 했다. 
그러나 정작 세인들을 경악시킨 것은 그런 사실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목세가로부터 터져 나온 하나의 포고령(布告令) 때문이었다.
<천하에 세가(世家)라 칭할 수 있는 가문은 오직 단목세가뿐이다! 따라서 남궁(南宮), 황보(皇甫), 북궁(北宮), 종리(鍾離) 등 모든 제가(諸家)들은 오늘을 시점으로 세가 대신 가(家)라는 명칭만 사용해야 한다!
이를 어기는 가문은 그 즉시 멸문을 면치 못하리라!
단목세가주 백(白)>
실로 광오하기 이를 데 없는 선포였다. 
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포고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궁, 황보, 북궁, 종리 등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던 명문세가들이 스스로 현판을 떼고 포고령에 따라 현판을 새로 달았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찌 그들 명문세가들이 스스로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일을 행한 것일까?
두 번째 기사! 
이 또한 신비라 아니할 수 없었다.
무적신방! 
단목세가!
과연 그들 두 세력의 돌연한 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야우혼이 사라진 이후 조용하던 무림은 다시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그들 두 세력의 출현이 새로운 풍운(風雲)의 예고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춘야우래(春夜雨來)
빛(光), 그것은 두 줄기의 빛이었다. 
밝은 성월(星月)이 홀연 사라진 암흑천지에 느닷없이 암천으로부터 작렬한 두 줄기 광채였다.
그 두 줄기 광채는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그 두 줄기 광채는 대륙의 두 곳으로 동시에 내리꽂혔다. 
금릉(金陵)과 난주(蘭州)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나 세인들이 그것을 감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일촌광음(一寸光陰)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고나 할까?
그 모든 것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천기(天機)의 움직임은 다 뜻이 있다고 하는데, 그 두 줄기 광채가 의미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일검객(射日劍客) 곽대로(郭大路).
중원오대검파(中原五大劍派)의 하나인 화산파의 속가제자(俗家弟子) 출신인 그가 칠십이로사일검법(七十二路射日劍法)으로 강호에서 활동한 지 어언 이십여 년. 
어느덧 그는 강호의 절정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화산파의 도룡검법(屠龍劍法)을 바탕으로 해서 그가 스스로 창안한 사일검법은 가히 일파(一派)를 이룰 만큼 명성이 자자했고, 그에 대한 곽대로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엔 당혹스런 표정이 은은히 떠올라 있었다. 
급히 밤길을 가고 있는 그의 앞을 느닷없이 한 사내가 가로막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곽대로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드러난 사내는 이십대 초반의 새파란 흑의청년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허름한 한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는데, 분을 바른 듯 창백하기 그지없는 안색이 무덤을 빠져 나온 시체를 연상시켰다. 
더욱이 그의 눈빛은 시체의 그것처럼 공허한 회색빛이었고, 그의 전신에서도 뭔가 섬뜩한 기운이 스물스물 피어 오르고 있었다.
곽대로는 그것이 죽음의 기운이라 생각하며 절로 등줄기가 쭈뼛해지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새파란 젊은이에게 두려움을 가졌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낀 곽대로는 그러한 감정을 전혀 내색치 않고 당당한 어조로 물었다.
"자넨 누군가?"
"냉천(冷天)!"
대꾸하는 흑의청년의 음성은 지극히 메마른 것이었다. 한 점 온기(溫氣)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싸늘하다거나 냉막하다는 의미와는 달랐다. 
말하는 것조차 싫다는 듯한 권태로움, 바로 그것이었다.
곽대로는 그의 음성이 지극히 귀에 거슬린다는 느낌을 받으며 재차 말했다.
"나는 바쁜 몸.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하라."
"용건은… 당신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오."
곽대로는 일순 흠칫했으나 이내 냉정한 얼굴로 물었다.
"우린 일면식도 없는 처지거늘 도대체 내게 무슨 원한이 있는가?"
흑의청년의 회색빛 두 눈이 짜증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원한은 없소."
"그렇다면 왜……?"
"나는 하루에 한 번씩 피를 보지 않으면 잠을 편히 잘 수 없기 때문이오."
곽대로는 어이가 없었다. 
잠을 편히 자기 위해서 살인을 하다니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흑의청년이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방금 당신은 바쁘다고 하지 않았소. 한데, 날 계속 기다리게 만들 셈이오?"
곽대로는 절로 화가 치밀었다. 그는 이 자리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얼굴 가득 노기를 떠올린 채 벼락처럼 소리쳤다.
"미친놈… 좋다! 내 사일검법을 보는 게 그토록 소원이라면 똑똑히 보여 주마!"
푸드득! 그의 노기에 찬 외침에 놀란 듯, 주위 숲 속에 있던 한 무리의 새 떼가 암천으로 날아오르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이었다. 
쐐애애액!
"사일단심(射日斷心)－!"
곽대로가 검을 뽑기가 무섭게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리며 태양을 쪼개듯 비스듬이 검을 내리쳐 왔다. 
명성에 걸맞게 사일검법의 기세는 사뭇 위력적이었다. 
삽시간에 예리한 검광이 흑의청년의 정수리를 쪼개듯 짓쳐 왔다. 
하나, 흑의청년은 한 올의 움직임도 없이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다만 그의 오른손만이 허리춤에 찬 검을 검집에서 천천히 뽑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지극히 느렸다. 
검이 채 반도 뽑히기도 전에 곽대로의 검이 그의 몸을 반으로 쪼개 버릴 것만 같았다.
예상은 사실대로 나타났다. 
흑의청년의 검이 반쯤 뽑힐 즈음 곽대로의 검은 이미 흑의청년의 정수리를 막 쪼갤 찰나였다.
곽대로는 일순 앞길이 창창한 새파란 젊은이가 자신의 손에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리치던 손을 멈칫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곽대로는 돌연 왼쪽 가슴에 섬뜩한 충격이 전해져 옴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분수를 보았다.  
곽대로는 불신에 찬 시선으로 흑의청년을 바라보았다. 
흑의청년의 회색빛 동공은 핏빛을 드리운 채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찰칵－! 흑의청년은 반쯤 뽑던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그는 곽대로를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돌아섰다.
쿵－! 그의 등뒤로 곽대로의 동체가 고목이 넘어지듯 허물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부릅떠진 곽대로의 두 동공은 이미 생기를 잃고 있었으나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불신과 의혹의 표정을 가득 떠올리고 있었다.
반면… 흑의청년은 방금 살인을 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권태로운 몸짓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암동(暗洞). 
냉천이란 이름의 흑의청년이 귀물(鬼物)의 아가리마냥 깎아지른 단애(斷涯)의 뻥 뚫린 암동(暗洞)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한 시진 후의 일이었다. 
잠이라도 자러 온 것일까?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암동 앞에 서서 지극히 권태로운 시선으로 암동의 어둠을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암동 깊숙한 곳으로부터 돌연 한 줄기 얼음장 같은 음성이 울려 왔다.
"냉천, 때가 왔다! 너의 이십 년 한(恨)을 풀 때가… 가라! 난주(蘭州)로……."
냉천은 예의 메마르고 권태로운 어조로 물었다.
"무엇을 해야 하오?"
"죽여라!"
"누구를……?"
"난주제일인(蘭州第一人)! 네가 보기에 난주에서 제일 뛰어난 자를 없애라."
"그러면 내가 할일은 끝나는 것이오?"
"물론이다. 그 후의 네 삶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좋다."
냉천은 더이상 들을 말이 없다는 듯 천천히 암동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어두운 암천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휘이익!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절벽 아래로 까마득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암동 속에서 그 괴음성이 다시 울려 왔다.
"흐흐, 난주제일인!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냉천의 일검(一劍)만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냉천은 살인을 위한 도구, 즉 살인병기(殺人兵器)로 키워졌으니… 이로써 천존패업(天尊覇業)의 대계(大計)는 시작되는 것이다. 크하하핫!"
죽음처럼 음산한 광소가 암동을 무너뜨릴 듯 울려 퍼졌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난주제일인은 도대체 누구이며, 천존패업은 또 무슨 뜻인가?
모를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난주제일인을 죽이기 위해 살인병기라는 흑의청년 냉천이 난주성을 향해 떠났다는 사실뿐이었다.
항주(杭州). 
예로부터 항주가 천하제일색향(天下第一色鄕)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항주가 요즘처럼 유명한 적은 없었다. 항주의 홍등가(紅燈街)가 전보다 더 번창했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요즘 들어 항주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홍등가로 항시 불야성(不夜城)을 이루는 진회하(秦廻河)의 한 기루, 그것도 한 기녀(妓女)로 인한 것이었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진회하에 홍등이 하나 둘씩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이 시각 진회하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진회하 초입에 자리한 홍복객잔(洪福客棧)이다. 
이곳의 투숙객은 진회하의 미희명기(美姬名妓)를 만나러 천하 각처에서 온 부잣집 공자나 풍류객들이 대부분이다.
객잔은 오늘도 수많은 한량들로 발 딛을 틈조차 없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 삼삼오오 술잔을 기울이며 기루들이 문을 여는 시각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여인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제법 돈푼 깨나 있어 보이는 화복중년인이 무료한 듯 동료들에게 화제를 던졌다. 
그러자 그의 앞에 앉은 딸기코에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주 색 깨나 밝히게 생긴 청의중년인이 헤벌쭉 웃으며 대꾸했다.
"눈은 보석처럼 영롱하고, 시선은 달콤하며, 살결은 투명하고, 입술은 붉고 윤기 넘치는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옳거니!"
"뿐인가? 음성은 온유롭고, 행동은 우아하며, 기품은 고귀가 넘칠 때 여인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지."
"맞네, 맞아! 역시 자넨 천하미녀들을 섭렵한 까닭에 안목이 높구먼. 그렇다면 그런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닌 여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이 사람이 누굴 놀리고 있나? 그야 항아루(姮娥樓)의 몽몽(夢夢)이 아닌가!"
"몽몽! 으,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라도 한 번 보았으면……."
청의중년인이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꿈 깨게. 천하제일기화(天下第一妓花)인 몽몽이 어찌 자네와 같은 범부에게 얼굴을 보이겠는가? 항주제일장(杭州第一莊)인 천풍장(天風莊)의 소장주(小莊主) 천풍미랑(天風美郞)마저도 이미 수백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하지 않던가?"
화복중년인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댔다.
"제기랄, 제까짓 게 예쁘면 얼마나 예쁘다고 기녀 주제에…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녀는 바로 몽몽이니까."
그의 말 속에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몽몽(夢夢)!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색향 항주의 진회하로부터 천하로 메아리친 여인의 이름이었다.
 
항아루(姮娥樓).
진회하에 있는 수백 개의 기루 중 항주제일기루로 꼽히는 곳이다.
그 항아루의 후원에는 날아갈 듯 유려한 한 채의 소축(小築)이 서서히 떠오르는 달빛 아래 그린 듯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환몽소축(幻夢小築)!
바로 천하제일기화인 몽몽의 거처이자 그녀가 손님을 받는 곳이다. 
몽몽이 손님을 받는 데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었다.
하룻밤 새에 세 번 손님을 받되 한 번에 한 명씩만 손님을 받으며, 한 번 마주한 손님에게는 단 한 잔의 술만 따라 줄 뿐, 그 외의 접대는 일체 하지 않는다는 규칙이었다.
기녀치고는 실로 오만무도한 규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규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만나 본 사람은 비록 아쉬움을 느꼈을지는 모르나 누구나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여인은 품어야 맛이라고 했으나 몽몽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사내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그런 여인이었던 것이다.
손, 잔을 든 사내의 손이 불쑥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 손은 이미 한 잔의 술을 받은 손이었다. 
그러자 달콤하기만 하던 여인의 두 봉목이 갑자기 냉담한 빛을 띠었다.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된다고? 내가 그 동안 네게 받은 숱한 박대로 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거늘, 너는 굳이 이렇게 한 잔 술로 끝내겠단 말이냐?"
"저의 규칙은 저의 절개(節槪)와도 같은 것입니다. 천풍미랑께서는 부디 한 잔 술로 인해 한낱 아녀자의 절개를 꺾으려 하지 마옵소서."
"몽몽, 나는 내가 두 번 다시 너를 만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니 이별주라 생각하고 딱 한 잔만 더 따르려므나."
몽몽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천하의 천풍미랑답지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리하면 소녀는 앞으로 규칙을 고쳐 모든 사람에게 두 잔의 술을 대접해야 하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제발 이대로 물러가 주십시요."
"이…이……!"
쨍그랑! 천풍미랑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술잔를 집어던졌다. 애원은 이미 분노로 돌변해 있었다.
"네 이년! 감히 기녀 주제에… 내가 언제 네년더러 합환주(合歡酒)를 따르라고 했더냐?"
몽몽이 당혹스런 얼굴로 말을 받았다.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는 규칙인지라……."
"닥치거라! 네년의 그 오만한 콧대를 꺾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기필코 네년이 따라 준 한 잔 술을 합환주로 삼겠다!"
천풍미랑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몸을 날려 몽몽의 가냘픈 몸을 덮쳤다.
찍…! 찌익…! 얇은 나삼이 마구 찢겨져 나가며 눈부신 여인의 속살이 황촉불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몽몽은 발버둥쳤다. 단지 여인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반발이었다. 
하지만 천풍미랑은 더욱 난폭해졌다. 
그의 무자비한 손길에 몽몽은 졸지에 속곳 하나만 걸친 나신이 되고 말았다.
천풍미랑의 우악스런 손길이 봉긋한 여인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순간, 몽몽의 두 눈에 고통스런 기색과 함께 싸늘한 살광이 번득였다. 하나, 그 살기의 빛은 나타날 때보다도 더 빨리 사라졌다. 
대신 그녀의 두 봉목에 차오르는 것은 회한에 찬 눈물이었다.
'이십 년을 기다려 왔거늘…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천풍미랑의 손은 마침내 그녀의 몸에 걸쳐진 마지막 속곳 한 장마저 뜯어 내고 있었다. 
한 줄기 음산한 전음성이 몽몽의 귀를 파고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몽몽, 때가 왔다. 난주로 가라! 가서 난주제일인을 죽여라!"
순간 몽몽의 두 눈에 가득 담겼던 물기가 가슴 섬뜩한 살기로 변해 버렸다.
퍽!
"으악!"
쿠－웅!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음향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최초의 음향은 몽몽의 희디 흰 섬섬옥수가 천풍미랑의 심장을 꿰뚫는 소리였고, 두 번째 음향은 천풍미랑의 비명성이었으며, 세 번째는 시체가 된 천풍미랑이 방구석에 처박히는 소리였다.
그리고 몽몽의 모습은 어느새 방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두 번째 살인병기는 여인이었다.
패(牌)가 돈다.
일소일노(一少一老). 한 명은 이제 약관의 미청년이었고, 그와 맞서 도박을 벌이고 있는 사람은 칠순 남짓해 보이는 고리눈의 화복노인이었다.
이곳은 천원도방(天元賭坊). 한때 백운향이 화랑군으로 변장하고 들락거리던 낙양의 바로 그 침묵의 도박장이었다.
<초훼(草卉)>
화복노인과 도박을 벌이고 있는 미청년의 이름이다. 
잡초라는 뜻의 초훼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이 미청년은 화랑군이 사라진 뒤에 등장한 새로운 낙양 명물이었다.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밝은 모습의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도박을 했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십만 냥씩을 따는 도박의 귀재(鬼才)였다. 
또한 그는 도박에서 딴 돈을 다음 날로 낙양을 비롯한 인근 빈민가에 모조리 풀어 버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지금 초훼의 앞에는 이미 오만 냥이라는 거액의 전표(錢票) 다발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초훼는 그 오만 냥 전액을 앞으로 밀어냈다. 한꺼번에 걸겠다는 뜻이었다.
화복노인은 일순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으나 망설임 없이 오만 냥을 마주 걸었다.
탁! 탁! 탁! 침묵 속에서 패가 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주위의 시선을 받으며 초훼의 패가 먼저 뒤집어졌다. 
검패 중 으뜸인 오천왕(五天王)의 다음 패인 사상검(四象劍)이었다.
초훼는 손을 툭툭 털며 승리를 자신한 듯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한데, 다음 순간 그의 두 눈이 충격으로 부릅떠졌다. 
그의 놀란 시선은 막 펼쳐지고 있는 화복노인의 패를 향해 던져지고 있었다.
오천왕(五天王). 
화복노인의 패는 오천왕이었다. 
초훼로서는 최초의 패배를 당하는 순간이었다.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초훼의 시선이 화복노인에게로 옮겨졌다. 
화복노인은 만면에 득의에 찬 미소를 머금은 채 초훼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훼는 노인의 눈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난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패배의 충격이 몹시 컸던 듯 그는 굳은 얼굴로 천원도방을 빠져 나왔다.
천원도방을 나선 그는 한동안 걷다가 인적이 드문 어느 허름한 초가의 담벼락을 잡고 소피를 보기 시작했다. 지극히 자연스런 동작이었다. 
하나, 담벼락을 잡은 그의 손에는 담벼락 사이에 교묘하게 감추어졌던 쪽지 하나가 은밀히 쥐어져 있었다.
그는 바지춤을 치켜올리며 암암리에 손바닥 안에 있는 쪽지를 펼쳐 보았다.
<때가 되었다. 
난주로 가서 난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자를 제거하라. 
성공하면 너의 금제(禁制)는 그 즉시 소멸된다.>
서명(書名)도 없는 밀서였다. 
하나, 초훼는 누가 그것을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꽤 오랫동안 이 밀서를 기다려 온 그이기도 했다.
그는 하품을 하는 척하며 쪽지를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꿀꺽! 초훼는 단숨에 쪽지를 삼켜 버렸다.
'난주제일인? 훗, 누군지 몰라도 몹쓸 운명이로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길가의 풀잎을 하나 따 입에 물었다. 
풀입을 입에 무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하는 묘한 습관이었던 것이다.
초훼, 그는 바로 세 번째 살인병기였다.
꽃을 사랑하는 사내, 꽃을 닮으려는 사내, 그래서 얼굴 또한 여인의 얼굴처럼 오밀조밀하며 홍조마저 드리운 사내. 
그는 십만 평 대지에 온갖 꽃을 심어 놓고 살고 있었다. 
꽃을 심을 자리가 좁아지는 게 두려웠던지 그의 거처인 초가는 삼 칸도 안 되는 한 칸짜리로 지어졌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화랑군 이후 꽃에 미친 자가 또 나타났다고 하여 그를 만화공자(萬花公子)라 불렀다. 
하지만 그의 본명은 무환(無幻)이었다.
아화(雅花), 낙양성 십삼번가의 꽃집 소녀인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꽃을 받기 위해 무환을 찾아왔다.
무환을 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과거에 화랑군을 경멸했으되 만화공자 무환은 진정으로 좋아했다. 
화랑군이 꽃을 좋아하는 것이 맹목적이었다면 무환은 꽃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꽃을 가꾸는 일 이외엔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무환을 보고 그녀가 느낀 생각이었다.
아화가 웃자 무환도 싱긋 웃어 보였다. 
이어 무환은 미리 준비해 둔 꽃들을 아화의 꽃바구니에 가득 담아 주었다.
아화는 얼굴을 살포시 붉히며 무환에게 보퉁이 하나를 내밀었다.
"전번에 부탁하신 옷이에요.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복의점(多福衣店)의 옷이에요."
"고맙소, 아화."
"한데, 공자님께서는 언제까지 이렇게 꽃과 함께……."
"글쎄, 사람의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또 다른 일을 할 때가 되면 그 일을 하며 살아가겠지만 어디 나 같은 놈이……."
"아니예요. 전 공자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 공자님이 꽃이나 가꾸며 일생을 보내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하! 그 말은 농담으로 받아 들이겠소."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야망이 크다고 하던데, 특히 남자는……."
"아화, 농담은 그만두고 어서 가서 나의 꽃들에게 새 주인이나 찾아 주시오. 하하핫!"
무환은 당치않다는 듯 웃어 넘기며 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화의 아쉬움이 담긴 시선이 언제까지고 그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무환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아화에게서 받은 보퉁이를 신속하게 풀었다. 
보퉁이 속에서 나온 것은 한 벌의 깨끗한 백의장삼(白衣長衫)이었다.
쫘악! 무환은 느닷없이 상의(上衣)의 앞가슴 단을 쭉 찢었다. 그러자 그 안쪽에서 깨알 같은 글씨가 나타났다.
<난주제일인을 척살하라!>
 
무환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마침내… 마침내 이십 년의 한(恨)을 풀 때가 되었다!"
파앗!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모습은 방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네 번째 살인병기였다.
한 가지 목적을 품고 일제히 난주로 향한 네 사람.
냉천(冷天), 몽몽(夢夢), 초훼(草卉), 무환(無幻).
그들은 하나같이 이십 년 동안 갈고 닦여진 살인병기들이었다. 
한데, 과연 그들이 하나같이 노리는 난주제일인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쏴아아…! 비가 내린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밤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밤비(夜雨)였다.
초향(草香). 
낙양의 귀빈루(貴賓樓)에서 노래를 팔다 진대공자 진옥기에게 욕을 당할 뻔했던 미소녀. 
백운향이 야우혼이라는 운명의 길을 걷는 데 있어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던 여인이다.
그녀는 경대를 마주하고 앉아 화장을 하고 있었다. 여인은 본능적으로 잠자는 모습조차 아름답게 보이려 한다. 특히 초향 같은 아름다운 여인은 더더욱 그러하다.
초향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화장을 마쳤다. 
이어 그녀는 스르르 교구를 일으켜 반월형(半月形) 창가로 다가섰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자 밖의 풍광(風光)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밤비 속에 촉촉이 젖어드는 정원의 꽃과 나무들, 그리고 몇 채의 전각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불현듯 그녀의 입에서 애상 어린 중얼거림이 나직이 새어 나왔다.
"밤비……."
밤비만 보면 그녀는 두 사람이 생각난다. 
귀제갈과 야우혼이었다. 
귀제갈은 고아인 그녀를 키워 오늘의 자신이 있게 한 양부(養父)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불러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신뢰했고 그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살인을 하라 하면 살인을 했고, 사내를 유혹하라 하면 아낌없이 몸을 던져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 사이에는 명령과 순종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한데, 그가 자신을 찾아와 간곡히 한 가지 부탁을 했을 때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언제고 야우혼이 널 찾아올 것이다. 그때 그를 도와 주거라.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부탁이다.
그것이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얼마 후 그는 천랑곡에서 늑대들에게 잡아 먹혀 뼈만 남은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초향의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그 부탁이 강한 의문과 함께 가슴에 와 닿았다.
'귀제갈… 그분의 말뜻은 무엇일까? 야우혼 역시 천랑곡에서 늑대밥이 되고 말았다던데…….'
그러나 그녀는 더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저 야우혼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밤에 화장을 하기 시작한 것 역시 야우혼을 기다리다 생긴 버릇인지도 몰랐다.
기다림은 묘한 그리움이 되어, 어느덧 초향에게 있어서 야우혼은 연인(戀人)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쏴아아…! 
밤비는 그칠 줄 모르고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유난히 야우혼을 생각나게 하는 밤이었다.
"야우혼… 진정 내 앞에 나타날 건가요? 아니면……."
초향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한데, 그때였다.
"후후, 날 기다렸소?"
한 줄기 낭랑한 음성이 빗소리를 뚫고 그녀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초향의 두 봉목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느새 왔는지 유난히 맑은 눈빛을 지닌 한 사람의 영상이 환상처럼 빗속에 서 있었다. 
그 영상은 그녀를 향해 밝고도 해맑은 웃음을 싱긋 지어 보였다.
초향은 그 웃음이 비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이젠 환청(幻聽)에 환시(幻視)까지……."
그녀는 앞에 보이는 한 사람의 영상이 자신의 염원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날 기다렸다면서 계속 이렇게 세워 둘 참이오? 밤비를 맞기엔 내겐 아직 이른 계절인 듯하오만……."
이번엔 그 환상이 말까지 걸어 왔다. 
초향은 넋을 잃었다.
"환상이 아니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녀의 이지(理智)는 판단력을 잃은 채 혼란으로 뒤엉켰다. 
지금 그녀의 앞에 죽었다고 알려진 야우혼이 나타난 것이다.
충격이 너무나 컸음인가?
"아……."
초향의 교구가 힘없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꿈이었나? 
잠에서 깨어난 초향는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그래, 그건 꿈이었어……."
그녀는 어젯밤의 일을 애써 꿈으로 돌리려 했다. 
하나, 막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베갯머리에 놓인 한 장의 서찰을 발견하는 순간 어젯밤의 일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서찰의 전면에 쓰인 야(夜)라는 한 자의 글자로 인해 더욱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초향은 침착하려 애쓰며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집어 들었다.
<귀제갈이 낭자를 만나 도움을 청하라 일러 주었소.
미리 밝혀 두지만 그는 나를 위해 장렬한 죽음을 택했소.
나는 낭자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진 않겠소. 
칠절신의를 만날 수 있는 방법과 천존 휘하의 난주성 분타주(分舵主)를 만날 수 있는 방법, 이 두 가지뿐이오.
그리고 낭자는 내가 다시 돌아왔노라고 그대의 천존에게 전하기 바라오. 열흘 후 다시 오겠소.
야우혼(夜雨魂)>
초향은 망연자실을 금치 못했다. 그저 언제까지고 서찰을 바라볼 뿐이었다.
"환우와 율향이 요즘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도 그 검법을 익히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는 모양이군."
"그들은 오늘 아침에 떠났어요."
"떠났다고……?"
"그들은 대공(大公)께 너무 심려 마시라고 전해 달라 했어요. 대공을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다는 말도 아울러 남겼어요."
"허, 무심한 사람들 같으니……."
"대공, 그들은 비가 오는 밤이면 대공을 생각하며 마음의 술잔을 올린다 했어요."
"하기사 나도 비가 오는 밤이면 꼭 한 잔 술을 마시곤 하지. 그들도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야."
백운향은 말을 마치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는 소홍은 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소홍, 그녀는 귀제갈이 백운향을 위해 안배했던 삼 인 중 한 명이었다. 
백운향이 성도성주 양만휘와 바둑을 둘 때 옆에서 시중을 들던 바로 그 홍의미소녀가 소홍이었던 것이다.
환우는 성도성 저잣거리에서 옷을 팔던 옷장수였고, 율향은 환우의 사형이자 귀제갈이 안배한 마지막 세 번째 인물이었다.
한데, 백운향이 회상에 잠겨 있는 바로 그 시각. 
난주성으로 들어오는 동서남북의 사대문(四大門)에 각기 다른 네 명의 인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연 이틀째 밤비가 내리는 초경(初更) 무렵이었다.
동문(東門). 
흑의를 걸치고 사립(蓑笠)을 깊숙이 눌러쓴 그는 등에 세 자 길이의 장검을 메고 있었다. 
사립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그의 두 동공은 지극히 암울한 회색빛이었다.
그는 난주성을 한 바퀴를 돈 후, 저잣거리의 어느 주루로 들어섰다. 
무료한 듯 하품을 하던 점소이가 그를 발견하고 반색을 하며 쪼르르 그의 앞으로 달려 왔다.
"헤헤, 어서 오십시오. 손님……."
흑의사립인은 묵묵히 안으로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러자 점소이가 연신 헤픈 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난주에서 최고 명물은……?"
"그야 본루의 오향장육(五香漿肉)이 단연 제일입죠. 두말 하면 잔소리입니다요."
"아니, 사람……."
흑의사립인의 음성은 한 점 온기도 없이 메말랐으며 짧았다.
점소이는 흑의사립인의 말뜻을 언뜻 이해하지 못한 듯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식 실소를 지었다.
"손님께서는 사람들 중 명물이 누구냐고 물으신 것이었군요. 사람들 중 명물이라면 두 사람이 있습죠. 연환공과 호취아. 그들 두 사람이야말로 난주성의 명물들입지요."
"네가 보기엔 누가 더 까다로우냐?"
그 질문에 점소이는 두 손을 한꺼번에 내저었다.
"어이구, 말씀도 마십쇼. 둘 다 골칫거리지요. 한 마디로 말해 미친 사람들입니다요. 하지만 연환공은 자칭 황손(皇孫)이라 하여 미친 것도 품위 있게 미친 편이고, 호취아는 아예 사람을 골탕먹이기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 같습니다요."
"흠, 그래?"
"한데, 정작 미친 사람은 호취아에게 골탕을 먹은 사람인 셈이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사람들은 호취아에게 골탕을 먹어도 재미있어 한다 이겁니다. 난주성 사람들은 모두가 이런지도 모릅니다."
점소이는 사람들이 미쳤다는 듯 손가락을 머리 위에서 한 바퀴 돌려 보였다.
흑의사립인이 예의 그 메마른 음성으로 불쑥 말했다.
"이곳 오향장육 맛이 그렇단 말이냐?"
"네?"
신나게 침을 튀겨 가며 떠들어대던 점소이는 느닷없는 그의 말에 그만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때 흑의사립인은 어느새 문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호취아, 바로 그 자다! 그는 나 냉천의 손에 죽는다. 검아, 이십 년 동안 기다려 온 피맛을 네게 흠씬 맛보여 주마.'
냉천, 흑의사립인은 바로 살인병기 냉천이었다.
서문(西門). 
그곳으로 들어선 것은 요사스런 기운마저 풍기는 한 대의 붉은 마차였다. 
그 마차는 곧장 난주제일루라 일컬어지는 가화루(嘉華樓)로 진입해 들어섰다.
가화루로 진입해 들어서는 마차 안에서 한 줄기 요염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주(樓主)에게 전해라. 몽몽이 왔다고……."
가화루 내전(內殿)의 어느 밀실. 
몽몽은 가화루주(嘉華樓主) 만요부인(萬妖夫人)과 마주앉아 있었다.
만요부인은 지극히 요염한 삼십대 초반의 미부(美婦)였다.
그녀는 몽몽 앞에서 매우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몽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 가화루 기녀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은……?"
"연환공이옵니다."
"연환공……?"
"그 자는 미친 자이옵니다. 하지만 때론 미쳤다기보다는 좀……."
"소상히 말해 봐라."
"그 자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본루를 출입하는데, 일단 오면 정확히 한 시진 동안 단 석 잔의 술만 마시고 기녀들에게 옷을 벗고 춤을 추게 하옵니다. 그 동안 그 자의 얼굴에는 미친 듯한 웃음이 가시지 않으나, 춤이 끝난 후에는 잘못된 점을 정확히 꼬집어 내곤 합니다."
"그 자의 정체는……?"
"자칭 황손이라 하지만 스스로 천하제일인이라고도 떠들고 다니니 영 종잡을 수 없는 자입니다."
"너도 그 자 앞에서 옷을 벗은 적이 있느냐?"
만요부인의 얼굴이 가볍게 붉어졌다.
"이곳 가화루의 기녀라면 모두 한 번씩은… 그 자 앞에 서면 백이면 백, 그 자의 말에 따르고 마옵니다. 그 자의 실성한 듯한 미소가 너무 기이하여……."
"알았다. 지금 당장 가화루의 기적(妓籍)에 내 이름을 싣고 소문을 내도록 해라. 가화루에 항주의 몽몽이 들어왔노라고……."
"즉시 시행하겠사옵니다!"
만요부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몽몽에게 허리를 숙인 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문득 몽몽의 시선이 천정을 향해 들려졌다. 학처럼 희고 긴 목덜미가 눈부시게 드러났다.
"연환공, 그는 한두 사람도 아니고 가화루 기녀들 모두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그것은 그가 아무리 미친 듯한 행동을 해도 그 스스로도 감출 수 없는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것. 그는 필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숨기고 있는 자가 분명하다."
남문(南門). 
그곳을 통해 들어온 사람은 여인처럼 아름다운 백의사내였다.
그는 남문을 들어설 때부터 각양각색의 꽃을 가슴에 가득 안고 있었다. 만화공자 무환이었다.
"훌륭하군, 훌륭해."
그는 지금 백화가 만발한 어느 거대한 화원을 쭉 돌아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삼십대 여인 하나가 따르고 있었다. 
여인은 이곳 화향원(花香園)의 여주인이었다.
무환은 감상하듯 꽃들 사이를 천천히 돌았다. 
가는 세우(細雨) 속에 여기저기 화등(花燈)이 켜진 모습은 화원의 운치를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흠, 이제는 매화가 난초에게 자리를 물려 줄 시기. 하지만 아무래도 매화 향기 그윽하고 철 이른 국화 향기마저 지극하니, 역시 천화제일의 화원이로고……."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때아닌 봄에 꽃송이를 활짝 피어올린 국화군(菊花群) 앞에 섰다.
"국화는 일찍 심어 늦게 피니, 이는 군자지덕(君子之德)을 뜻함이오. 서리를 이겨내니 선비의 지(志)를 깨닫게 하며, 물 없이도 피니 한사(寒士)의 기(氣)를 말함이라. 이곳에서 너를 다른 이보다 먼저 보게 되니, 국화삼륜(菊花三輪)이 새롭구나."
"아……!"
화향원주의 입에서 절로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무환은 계속해서 매화 앞으로 다가섰다.
"눈 속에 홀로 피어 아취고절(雅趣高絶)하던 네가 뭇꽃 속에 핀 모습은 더욱 냉염(冷艶)하고 고고한 기품이 돋보이는구나."
"아, 어찌 공자께서는 연환공과 그리 똑같은 말씀을……."
"연환공……?"
화향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그를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나 저는 여지껏 그 분보다 꽃을 사랑하고 제대로 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한데, 오늘에서야 그분과 필적할 만한 분이 나타나셨으니… 화향원으로선 가히 영광입니다."
무환의 두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나, 그의 입가엔 어느새 지극히 자연스런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하! 별 말씀을… 과찬이오. 내 어찌 연환공을 따르겠소. 구경 잘했소."
"좀 더 보시지 않으시고……."
"아니오. 내 오늘은 갑자기 들린 터라… 나중에 또 들리리다."
무환은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인 후 천천히 화향원을 나섰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고로 야망이 큰 법. 그것은 감출 수 없는 천성(天性)이다. 연환공, 그의 피도 분명 꽃을 닮아 향기로우리라.'
그는 서서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북문(北門).
딸랑! 딸랑! 따각! 따각!
방울 소리를 울리며 성내로 들어서는 것은 한 필의 비루먹은 나귀였다. 
나귀 위엔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제 막 약관이 지난 듯한 미청년이었다.
그는 나귀 등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나귀가 움직일 때마다 이러저리 흔들리기만 할 뿐 떨어지지는 않았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는 졸고 있음에도 습관인 듯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그 입가의 미소와 더불어 묘한 매력을 자아내는 풀잎 하나가 입에 물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따각－! 따각－! 주인이 졸고 있기 때문인지 나귀는 제멋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난주성 내를 한 바퀴나 터덜터덜 돌았을까? 
이윽고 나귀가 제풀에 지쳤는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도박장 앞이었다.
오천왕(五天王).
도박장의 이름은 기이하게도 오천왕이었다.
나귀 위의 미청년이 눈을 뜨며 기지개를 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함……!"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후 나귀의 목덜미를 툭툭 쳤다.
"이젠 네놈이 잘 차례다. 수고했다."
이어 그는 나귀에서 내려 도박장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와! 또 사상검이다!"
"벌써 여덟 번째 사상검이다!"
미청년이 도박장으로 들어간 직후부터 탄성과 함성이 연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탄성과 함성은 인근 길가에까지 질펀하게 들릴 정도로 요란했다.
푸르르…! 미청년을 태우고 온 나귀는 한 차례 콧김을 불어낸 뒤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더니 노곤한 듯 도박장 앞에 아무렇게 주저앉았다.
도박장 안에서는 계속해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또 사상검!"
"우와! 이번엔 오천왕이다!"
"아아, 열 번의 사상검에 세 번의 오천왕이라니……!"
"귀신이다! 도박의 귀신!"
"한데, 그 미친 주정뱅이 연환공은 오늘따라 왜 여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지?"
"글쎄 말이야! 연환공만 있으면 저 낯선 자도 꼼짝 못할 텐데……."
"연환공이 아무리 미친짓을 하더라도 도박이라면 어떤 종류이든 천하무적이지!"
"암암, 그렇고 말고……."
미청년이 도박장을 나온 것은 얼마 후였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귀의 배를 툭툭 걷어찼다.
"이놈아, 교대시간이다."
푸르르릉－! 나귀는 콧김을 훅훅 불어 내쉬며 말도 안 된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미청년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허, 이놈이 정말 날이 갈수록 게을러지네."
푸르릉－! 미청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피어났다.
"후후, 네놈도 이젠 나이를 좀 먹더니 나는 안중에도 두지않겠다 이거렸다? 좋다, 이놈! 내 다음 번 도박엔 네놈을 걸겠다. 나 초훼가 일구이언(一口二言) 하지 않는 사람임은 누구보다도 네놈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귀는 이미 벌떡 일어서서 초훼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아양을 떨고 있었다. 
그러나 초훼는 일없다는 듯 나귀의 머리를 밀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후후, 연환공! 그가 바로 난주제일인이다. 도박이란 승부사(勝負師)의 기질이 발휘되는 법. 후후, 이제 내 묵혈도(墨血刀)에 승부사의 피맛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겠다!'
그는 허리에 찬 묵도를 은연중에 쓰다듬으며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나귀는 무정한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쫄랑쫄랑 그 뒤를 쫓고 있었다.
잔 속에 술, 그리고 우정과 천하(天下)가…
쏴아아……. 
비는 삼 일째 계속 내리고 있었다. 
백운향은 비 내리는 밤길을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그는 방금 가화루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가화루에 몽몽이 들어왔다는 소식은 난주성을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난주의 한량(閑良)들이 너도 나도 몽몽을 보기 위해 몰려든 터라 가화루는 아예 누각이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백운향은 몽몽이 아닌 다른 기녀를 불러 나무(裸舞)를 추게 하고 석 잔 술을 마신 후, 전과 다름없이 정확히 한 시진 안에 가화루를 나선 참이었다.
석 잔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백운향의 걸음걸이는 눈에 띄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막 가화루 돌담길을 돌아서던 백운향은 돌연 멈칫 걸음을 멈추고 전면을 응시했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쩍 스쳐 지나갔다.
기사(奇事), 아니 기사 이전의 해괴한 일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求人買我氷女> 
나 빙녀(氷女)를 사 갈 사람 구함.
밤비 속에, 그것도 밤 늦은 이 시각에 드러난 하나의 푯말!
푯말 뒤엔 한 사람이 비를 맞고 앉아 있었다. 
비를 맞아 옷이 착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황홀하리만치 완연하게 드러내 놓고 있는 이십여 세 정도의 미소녀였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백운향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추우냐?"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미소녀가 서늘한 시선을 들어 백운향을 바라보았다.
백운향은 그녀가 뭐라고 입을 열 새도 없이 말을 계속했다.
"배가 고프냐?"
다정스럽고도 염려스러운 듯한 어조였다.
"내가 그러게 뭐라더냐? 집을 나오면 고생이라 했거늘… 쯧쯧……."
미소녀는 맑고도 깊은 눈으로 백운향을 지그시 응시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얼마냐?"
말을 돌리던 백운향은 비로소 거래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입과 눈에는 능글맞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러자 미소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옥구슬이 쟁반에 구르는 듯한 영롱한 옥음(玉音)이 흘러나왔다.
"소녀의 무엇을 사려고 하시는지요?"
"그야 물론 네가 걸치고 있는 옷이지."
기상천외한 대답이었다. 
만약 미소녀가 옷만 판다면 그녀는 어찌되겠는가?
"어떠냐? 팔겠느냐?"
"물론 팔지요."
대답하는 미소녀의 표정은 뜻밖에도 태연했다.
백운향은 여전히 능글맞은 얼굴로 물었다.
"가격은 얼마냐?"
"당신의 옷이면 되어요."
장군 멍군인가? 
하나, 백운향의 미소는 오히려 짙어지고 있었다.
"만약 내가 옷 속의 네 몸뚱아리를 산다고 한다면… 그 가격도 내 몸으로 칠 것이냐?"
"물론이에요."
"흠, 그럼 너는 옷만 이곳에 벗어 두고 나를 따라야겠구나."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러나 당신의 몸으로 과연 내 몸을 살 수 있을지 그 가치가 문제로군요."
조금도 막힘이 없는 응수였다.
"네 몸에는 아마 금칠홍장(金漆紅粧)이라도 한 모양이구나. 그런 몸뚱아리라면 일없다."
백운향은 손을 내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미소녀가 가볍게 목례를 취했다.
"살펴 가시어요."
막 몸을 돌리려던 백운향의 눈이 일순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몸을 돌리며 무심히 한 마디 더 했다.
"오냐, 많이 팔아라."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하나뿐인 몽뚱아리이거늘 많이 팔라니, 도대체 어떻게 팔아야 많이 파는 것이란 말인가?
이때 백운향은 내심 저으기 감탄하고 있었다.
'굉장한 계집이로군. 저런 계집이라면 천하가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백운향이 다시 멈칫 걸음을 멈춘 것은 자신의 거처로 가는 소로 입구에서였다.
소로 입구에는 예의 그 푯말과 미소녀가 앞서의 모습 그대로 그를 기다리는 듯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백운향은 일순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까와 같은 능글능글한 미소를 얼굴 가득 피워 올렸다.
"귀신이었나?"
"미인이옵니다."
자화자찬(自畵自讚)인가? 
그럼에도 미소녀의 표정은 천성인 양 태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백운향은 빙그레 웃었다.
"난 이미 두 명의 미인을 알고 있지."
혜량공주와 설추련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나, 솔직히 그녀들은 너보다 빼어나지 못하다."
"저 역시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사옵니다."
"말 한 번 유수로구나. 그럼 그 말하는 입이 예쁘다 치자. 하여간 우린 아무래도 무슨 인연이 있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가는 길도 같으니……."
"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하지만 이는 악연(惡緣)이 아닌가 합니다. 저같이 마음이 꽉 찬 여인이 당신같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한 방향이니 말이에요."
"내가 마음이 가난하다고……?"
"그럼 저는 한 발 앞서 갈 테니 천천히 살펴 오시어요."
백운향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 발 앞서 갈 테니 살펴 오라는 말은 또 무엇인가?
그 말의 어감이 몹시도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연환소축(延換小築).
연환공, 즉 백운향의 거처이다.
백운향은 느릿하게 소축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본래 이 소축에 홀로 기거한다. 
한데, 대청에 그가 아닌 또 한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인이었다. 
바로 자신을 팔겠다던 그 빙녀라는 이름의 미소녀가 언제 갈아입었는지 비 맞은 옷 대신 산뜻한 남의(藍衣)를 걸치고 대청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은 아직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녀는 대청 한가운데의 통나무 탁자 앞에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그 탁자 위에는 조촐한 술상까지 차려져 있었다.
백운향은 무심히 대청으로 올라가 그녀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소녀가 술병을 집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백운향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듯 낚아챘다.
"너는 술을 따를 여인이 아니다. 자고로 어떤 경우이든 술을 따르는 여인은 격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술병을 빼앗는 남자는 격이 올라가는지요?"
"최소한 떨어지지는 않는다."
"남자이기 때문인가요?"
"그렇다. 그보다……."
백운향은 한 잔 술을 따라 마신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동안 많이 팔았느냐?"
"그 장사는 이미 끝났사옵니다."
"호오, 축하할 일이로구나. 그래 누구에게……?"
"이 집에게 팔기로 했사옵니다. 저는 본래 집 없이 자란데다가 이 집이 마음에 들어 이 집에게 판 것이지요."
백운향은 노골적으로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하면, 너는 이 집 문 위의 현판에 무어라 쓰여 있는지 보기나 했느냐?"
"연환소축이라 쓰여 있더군요."
"다시 말해 연환공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연환공이 바로 나다."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너는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듯하구나. 나는 고래힘줄 같은 내 돈 삼만 냥에 이 집을 샀다. 한데, 너는 내 허락도 없이 이 집에 몸을 팔았단 말이냐?"
미소녀는 지극히 고요한 표정에 지극히 조용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은 마치 제가 당신의 집을 빼앗기라도 하는 줄 알고 계시군요. 누가 당신 집을 빼앗겠다고 하였습니까? 저는 단지 대가 없이 이 집에 몸을 판 거예요."
"뭐라고……?"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제가 오히려 손해가 아닌가 합니다만……."
"이거야… 그래, 네가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밑졌다, 밑졌어!"
벌컥! 벌컥! 백운향은 말로서 당할 수 없음에 화가 치민 듯 술을 병째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러다 돌연 그는 입에서 병을 빼며 불쑥 물었다.
"한데, 너의 이름은……?"
미소녀는 그의 질문에 살포시 웃었다. 무엇인가 의미가 담긴 그런 웃음이었다. 
웃으며 그녀는 말했다.
"빙월교(氷月嬌)라 하옵니다."
개방 난주성 분타. 
인적이 거의 닿지 않는 난주성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낡은 관제묘(關帝廟)인 그곳이 바로 천하제일방(天下第一幇)이라 일컬어지는 개방의 난주성 분타이다.
관제묘 안은 누추하다 못해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겹겹이 쌓인 먼지에 여기저기 나뒹구는 나무토막과 헝겊 조각들, 그리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술병들이 즐비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그 정중앙에는 지금 지저분한 누더기를 걸친 한 명의 거지소년이 대자(大字)로 벌렁 누워 있었다. 
호취아였다. 
개방의 노장로인 대취신개의 애제자(愛弟子)로 온갖 기행(奇行)을 일삼아 온 그가 호로병을 거꾸로 문 채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호로병은 이미 술 한 방울조차 흘러나오지 않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쨍그랑! 돌연 호취아는 신경질적으로 호로병을 벽에다 냅다 집어던졌다.
"아니, 이 자식들은… 끄윽, 상전(上典) 대하기를… 제 놈들 배때기에 붙은 이의… 끄윽,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젠장할! 형님, 형님은 차라리 잘 죽었소. 이 호취아가 술이 없어… 끄윽, 쩔쩔매는 꼴을 형님이 보았다면… 가슴이 찢어지고 말았을 테니까 말이오. 끄윽……."
그의 음성 속에는 진득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에이구! 끄윽, 차라리 나도 형님 뒤를 따르던가 해야지. 이거야 원 서럽고 더러워서… 끄윽, 술 없는 세상은 고해(苦海)가 아닌가! 고해주미타불(苦海酒美陀佛)… 젠장할!"
그의 넋두리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으나 이 순간 그의 두 눈은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이때 한 명의 왜소한 젊은 거지가 관제묘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황망히 호취아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꺾었다.
"사…사숙(師叔)……!"
"응? 이놈아, 사숙은 뭐 말라 비틀어진 사숙이냐? 네놈은 지금… 끄윽, 내가 술을 기다리다 지쳐서 죽기를 바라는 거냐?"
왜소한 거지는 호취아를 몹시 두려워하는 듯 안색이 대변하여 황망히 손을 저었다.
"제…제자가 어찌 감히……."
"그렇다면 어서 술이나 이리 내놓아라!"
"황송하옵게도 제자는 술을 가져온 게 아니오라……."
"뭐라고? 네놈은 지금 나를 놀리는 게냐? 에이, 꼴도 보기 싫다. 경을 치기 전에 어서 썩 꺼지거라! 젠장할, 아미주육타불(阿彌酒肉陀佛)……!"
왜소한 거지는 찔끔하더니 조심스레 두 손으로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저, 사숙… 이…이런 것이……."
"응? 이놈아, 그게 무엇이든 간에 값나가는 거라면 당장 술로 바꿔 와야 할 것… 엉?"
왜소한 거지를 듣기 민망할 정도로 나무라던 호취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다음 순간, 호취아는 누운 자세 그대로 유령처럼 신형을 번뜩여 눈 깜짝할 새에 왜소한 거지의 손에 든 물건을 낚아챘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속한 행동이었다.
<오죽도(烏竹刀)>
호취아가 낚아챈 물건은 한 뼘 길이의 검은 오광(烏光)이 발하는 한 자루의 죽도(竹刀)였다.
호취아의 두 눈에 경악과 회의의 빛이 엇갈려 스쳐 지났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 그는 왜소한 거지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다급히 다그쳤다.
"어디냐? 어디……?"
"저……."
왜소한 거지는 돌변한 호취아의 행동에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놈아! 저라는 곳도 있느냐? 비키거라! 차라리 내가 찾아가는 게 낫지!"
호취아는 왜소한 거지를 내동댕이치듯 밀치며 관제묘 밖으로 몸을 날렸다.
왜소한 거지가 다급히 소리쳤다.
"사…사숙……!"
"이놈아! 바쁜데 왜 부르고 야단이냐?"
"그것은 연환공이 준……."
"멍청한 녀석! 천하의 호취아가 그것 하나 생각해 내지 못할 것 같아 바쁜 사람을 불러 세웠단 말이냐?"
"사숙! 그쪽이 아니오라……."
"이놈아, 알고 있다고 하지 않느냐? 천하가 둥근데, 아무 데로나 가면 어떠냐?"
정작 방향을 바꾸면서도 호취아는 큰소리였다.
<연환소축(延換小築)>
호취아는 소축 문 위의 현판에 쓰여진 그 글씨를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한동안 바라보더니 돌연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ㅋ, 형님이 연환공? 그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이렇게 미치려면 차라리 살아 돌아오지나 말지."
꽝!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문이 부숴지도록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으로 바람처럼 뛰어든 그는 대청을 연한 문들을 차례로 사납게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형님, 술값 물어 내슈! 내 형님 때문에 십수 년 먹은 술이 한꺼번에 확 깨어 버렸단 말이오."
그의 음성은 몹시도 큰지라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이때 내실로 통하는 휘장이 소리 없이 젖혀지며 한 명의 아름다운 남의미녀가 차반(茶盤)을 들고 사뿐히 걸어나왔다.
빙월교였다.
호취아의 시선이 사람보다 먼저 차반을 향해 던져졌다.
"아니, 술이라니까 그까짓 차는……."
말하는 중에서야 비로소 그의 시선이 빙월교의 얼굴로 향했다. 
순간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탄성을 질렀다.
"우와! 이쁘다!"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빙월교는 가벼운 교소로 말문을 열었다.
"호호호! 소협께서는 먼저 다도(茶道)의 예법부터 익히셔야겠군요. 술은 차 이후입니다. 그것도 귀한 손님일수록……."
"아아, 내가 뭐라 했소?"
호취아는 손을 내저어 얼버무리면서도 빙월교의 얼굴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빙월교의 옥용 가득 화사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순간 호취아는 자신의 눈이 부셔옴을 느꼈다. 그는 빙월교가 손짓으로 권하는 대로 끌리듯 통나무 탁자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빙월교는 그런 그의 모습에 소리 없는 실소를 흘렸다.
"소협께서는 아직 차조차도 안 드셨거늘, 이미 취하신 듯하군요."
"어험, 험! 아…알겠소. 마시리다. 험, 험……."
호취아는 무안함에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억지로 토해 내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제정신을 차린 것이 아니었다.
차는 금방 끓인 것이었기에 무척이나 뜨거웠다. 한데, 그것을 호취아는 무심코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헉! 앗, 뜨거!"
쨍그랑! 기겁을 한 그는 그만 찻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빙월교의 교소가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호호호! 소협께서는 어찌 무덤에도 가기 전에 백골이 되려 하십니까?"
"험… 험……!"
호취아는 억지 헛기침만 토해 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항상 남을 골탕먹이길 즐겨 온 그가 언제 이런 수모를 당해 보았던가?
'으이그! 사부님 말씀이 꼭 맞는군. 계집과 마주앉는 것이 죄악이라는 말씀이…….'
그는 내심 스스로를 원망하며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차고 뭐고 다 싫으니 그 구렁이나 좀 만나게 해 주시오."
"소협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요? 이곳에서는 그런 흉측한 것은 아니 키웁니다."
말을 하는 빙월교의 표정은 자못 놀랐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이구, 이거 오늘 호취아가 죽는 날이 아닌지 모르겠군. 어쩌다 저런 여자를 만나 가지고…….'
그때 빙월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 구렁이를 닮은 사람은 살고 있사온데… 소협께서는 혹시 그분을 말씀하시는 게 아닌지요?"
"왜 아니겠소? 그 차는 그만두고 빨리 그를 만나게 해 주시오."
빙월교가 다시 차를 끓이며 말했다.
"한데… 어쩌죠? 소협의 형님께선 소협이 다도의 예(禮)를 배운 후에야 만나 주겠다고 하셨으니……." 
"뭐요?"
"무릇 다도란 정신수양의 지름길. 형님께서는 소협의 수양이 부족함을 탓하셨습니다."
"제기랄! 이건 미쳐도 아주 고상하게 미쳤군. 나는 못하오. 형님께 그렇게 이르시오."
"어떻게 말씀인가요?"
"정히 형님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형님이 거지의 생활을 익힌 후에나 형님을 만나겠다고 말이오."
적절한 임기응변이었다. 
하나, 빙월교는 어이없다는 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소협께서는 농담도 잘하시고 자가당착(自家撞着)에도 잘 빠지시는군요. 지금 누가 누굴 만나려고 하시는 건지요?"
호취아는 일순 멈칫했다. 이어 그는 혼자 투덜대듯 중얼거렸다.
"형님이 난주 명물인가 했더니 진짜 명물은 따로 있었군."
빙월교는 생긋 웃으머 못 들은 척 다시 말했다.
"어찌하시렵니까? 다도를 배우시겠습니까, 아니 배우시겠습니까? 아니 배우신다면 그냥 돌아가시는 걸로 알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만……."
"할 수 없지. 내 뱃속을 일단 찻물로 채우게 한 다음 술시합을 벌여 또 나를 이기겠다는 수작임을 내 이미 알지만……."
"호호! 소협께서 물러설 때를 아시는 걸 보니 형님의 칭찬이 모자랐던 것 같군요."
"에이그, 그 칭찬 두 번만 들었다가는……."
"호호! 어쨌든 이제 다도를 배워 보시지요."
"어서 시작해 보시오. 뭐 거지라고 해서 다도를 배우지 말란 법은 없으니……."
"그럼 시작하겠어요. 우선 찻잔을 대함에 있어서는……."
빙월교는 마침내 다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후, 호취아는 빙월교에게 무려 두 시진 동안이나 다도를 배우며 무려 오십여 잔의 뜨거운 찻물을 마셔야 했고, 그 동안 그가 쏟아 낸 땀은 족히 마신 차의 세 배는 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빙월교는 백운향에게 다녀온다며 내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이제 곧 형님께서 만나 주시겠답니다."
"이거야 어디 힘들어서……."
"그런데……."
빙월교는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께서는 우선 소협을 목욕부터 시키라고 하셨는데……."
"뭐…뭐요? 이런 제기랄! 이젠 내 재산목록 일호(一號)인 때까지 트집을 잡는군."
"당치도 않으신 말씀을… 소협의 재산목록 일호는 바로 형님과 맺으신 우정이 아니었던가요?"
호취아는 일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공연히 투덜댔다.
"제길, 계집도 아닌데 목욕재계까지 하고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예?"
"아…아니오! 좋소. 다 벗겨 내라 하시오. 으이그, 십 년 동안 키워온 때가 운다, 울어."
호취아는 연신 투덜대며 우물 가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빙월교의 얼굴에 한 줄기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다 그녀는 어둠이 밀려드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윽고 호취아가 목욕을 끝내고 다시 대청으로 돌아왔다.
빙월교가 기다렸다는 듯 한 벌의 청의(靑衣)를 그에게 내밀었다. 
"갈아입으세요."
"난 거지가 좋은데… 휴우, 그 고상하게 미친 사람 때문에……."
호취아는 이미 빙월교에게 당할 대로 당한 터라 거절해 봤자 소용 없음을 알고는 순순히 청의를 받아 들었다.
잠시 빙월교가 자리를 피해 주자 호취아는 한동안 주저하다가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을 불어 내고는 청의로 갈아입었다.
이내 다시 모습을 나타낸 빙월교의 입에서 탄성에 찬 교소가 터져 나왔다.
"호호! 멋있군요. 마치 귀공자 같으시니……."
사실 청의를 갈아 입은 호취아의 모습은 말끔할 뿐만 아니라 준수하기 이를 데 없어 이미 좀전의 호취아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호취아는 침통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다 듣기 싫소. 만약 이 사실을 사부님이 아신다면 나는 앞으로 영원히 거지노릇을 못할 것이오. 자, 이제 되었소?"
빙월교는 갑자기 초조한 기색을 띨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호취아는 또 무슨 꿍꿍이 속이냐 싶어 안색을 싸늘히 굳히며 버럭 고함을 쳤다.
"아직도 부족한 게 있단 말이오?"
빙월교는 왠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되었어요. 한데, 사실은……."
바로 그때 연환소축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호취아와 빙월교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문 쪽을 향해 쏘아졌다. 
순간 그들 두 사람은 일제히 반가운 표정을 얼굴 가득 떠올렸다.
한데, 빙월교의 반가운 표정 속에는 한 가닥 안도의 빛이 서려 있었다.
들어선 사람은 다름아닌 백운향이었다. 
그는 일신에 기품이 넘쳐 흐르는 금의화복(錦衣華服)을 걸치고 있었다.
호취아가 반색 어린 탄성을 터뜨렸다.
"야! 멋있다!"
백운향은 일시 호취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싶었다. 하나, 곧 상대가 호취아임을 알아본 백운향은 호취아의 뜻밖의 복장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취아, 이놈. 너 언제 개방에서 쫓겨났느냐?"
그는 호취아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말을 이었다.
"여하간 옷이 날개다. 네겐 그 비렁뱅이 옷이 가장 잘 어울리는 줄 알았는데……."
호취아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지금껏 그 고생을 시켜 놓고 이젠 뭐 비렁뱅이 옷이 어쩌고 어째요?"
백운향은 호취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에 의혹의 빛을 띠었다. 
하나, 자기가 없는 동안 어떤 상황이 벌어졌었는지 이내 짐작한 그의 시선이 빙월교를 향해 돌려졌다. 
순간 빙월교는 호취아가 눈치 채지 못하게 은밀히 백운향에게 눈을 찡끗해 보이고는 태연히 몸을 돌렸다.
"술상 준비하겠어요."
그녀가 내실 쪽으로 모습을 감추자, 백운향은 빙그레 웃으며 은근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취아, 된통 걸렸던 모양이구나. 내가 좀 늦은 사이에……."
"으이그, 사람 같지도 않아."
호취아는 백운향을 외면하고 돌아앉았다.
"내가 여우한테 홀려도 단단히 홀렸지. 한데……."
호취아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돌아앉았다.
"누구요? 난 지금까지 숱한 여인들을 보아 왔지만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이오."
"호취아가 아니라 호색아(好色兒)로 변했군."
백운향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나도 모르니 궁금하면 네가 직접 물어 보거라."
"예……?"
"저 여자 얘기라면 나도 머리가 아프니 그만두자."
호취아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빙월교가 술상을 갖고 들어와 통나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그녀는 호취아를 향해 나긋한 허리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소협, 소녀는 어쩔 수 없이 소협을 그리 대했음을 이해해 주세요. 소협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앞으로 자주 이곳을 드나들게 되면 남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기에……."
"험, 험! 내가 언제 뭐라 했소?"
호취아는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그러자 백운향이 빙월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한데, 오늘 하루만 글공부를 생략하면 안 되겠소?"
"물론 아니되지요. 당신은 아직도 논어(論語)의 첫구절인 학이(學而)……."
백운향이 다급히 말을 가로챘다.
"알았소, 알았어! 하면 되지. 굳이 그런 것까지 밝힐 게 뭐 있소?"
백운향은 행여 빙월교가 뭐라 입을 열 새라 호취아를 돌아보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자, 취아. 마시자."
"쯧쯧, 형님은 어쩌다 이렇게 불쌍한 처지가 되었소?"
"자, 자, 그런 얘긴 그만두고……."
"좋소! 하지만 오늘은 어림없소."
"후후, 취아. 너는 오늘 또 질 것이다."
백운향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밖으로 던졌다.
호취아도 부지중 백운향을 따라 시선을 밖으로 던지며 투덜대듯 입을 열었다.
"어이구, 저놈의 밤비는 벌써 나흘째 계속이군."
그의 말을 받는 백운향의 음성은 아련히 젖어들었다.
"그래, 비다. 밤비……."
"청승… 또 시작이오?"
"나로선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저 밤비이지. 그리고 또 하나, 저 비로 인해 맺어진 우정."
"형…형님……."
호취아의 음성이 격정으로 미미하게 떨려 나왔다.
백운향은 싱긋 웃으며 잔을 들었다.
"자, 마셔라. 이 술로 너의 마음을 사려 한다. 물론 나의 마음도 이 잔 속에 담겼다."
술잔을 집어 드는 호취아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드시오. 이 잔에 나의 마음이 담겼소."
한 순배, 두 순배… 두 사람 사이에 술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사나이들의 깊은 뜻이 담긴 술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의미 있는 대화가 오고 갔다.
"자, 마셔라. 내 믿음을 담은 술이다."
"드시오. 나의 믿음이 담긴 술이오."
쭈욱! 쭉…! 두 사람의 표정은 방금 전과 달리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셔라. 너의 두 귀와 두 팔을 내게 달아 줄 수만 있다면……."
"드시오. 이 잔에는 두 귀, 두 팔 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이 머리와 두 발을 덤으로 담았소."
쭉! 쭈욱…! 
"마셔라. 너를 통해 나를 도울 사람을 찾고자 하는 잔이다."
"드시오. 나는 개방은 물론 내 나름대로의 세력 모두를 이 잔에 담았소."
쭉! 쭈…욱!
"한 잔 더 드시오. 이 잔은 도화도의 도화신룡이 금릉의 천의장(天意莊)에서 보내는 잔이오."
쭈욱! 쭉…!
"한 잔 더 들어야겠소. 이 잔은 형님께 말씀드릴 수 없는 한 신비인(神秘人)이 올리는 잔이오."
"신비인? 너를 믿으니 마셔야지."
쭉! 쭈…욱!
"좋소, 좋아! 역시 형님이오."
"마셔라. 이 잔은 황제폐하를 대신해 너를 치하하는 잔이다."
순간 호취아는 안색을 일변시켰다. 그러나 그는 지체없이 잔을 비웠다.
쭉! 쭈욱…! 그 잔을 마신 후 백운향은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어 그는 아직도 의혹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호취아에게 천천히 자신이 사지단근형을 당한 이후의 경과를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얘기가 영락제와의 만남에 이르자, 호취아는 물론 빙월교까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중원무림은 물론 황궁마저 전복시키려는 야욕을 품은 신비세력의 얘기를 듣고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윽고 모든 경과를 얘기한 후 백운향이 굳은 표정으로 호취아를 바라보았다.
"어떠냐? 이것이 나의 일이냐, 아니면 너의 일이냐?"
"우리 모두의 일이오."
호취아의 음성은 그답지 않게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운향은 두 눈에서 예리한 신광을 뿜어 냈다.
"그렇다. 우리 모두의 일이다."
"……!"
"취아, 너는 이제부터 나를 대신해 몇 가지 일을 처리해라. 그리고 아울러……."
"……?"
"이건 내 개인의 일이나, 한 사람을 찾아 다오. 너희 개방의 세력이면 능히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사람이 누구요?"
"여인이다. 미요시노라는 동영의 여인. 그녀는 동영의 제일밀문(第一密門)인 은밀류(隱密流)의 최후 후계자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뿐이다."
"알겠소. 쉬운 일은 아니나 최선을 다하겠소."
"고맙다."
백운향은 이어 한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빙월교를 돌아 보았다.
"너는 이제부터 네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취아에게 말해주고 네 나름대로 명령을 내려라. 나는 네가 이미 그런 적절한 준비책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
"나는 이제부터 세력을 키울 것이니 그것을 네가 맡아야 한다. 나는 이미 너를 처음 본 순간 네가 능히 이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빙월교의 두 봉목이 경이로 빛났다. 
백운향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그녀조차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흘째 밤비가 내리는 날 밤,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천하를 논(論)한 밤이었다.
살수(煞手) 대 살수(煞手)
벼락! 
그것은 천하대륙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엄청난 벼락이었다.
야우혼 재출현!
경동천하(驚動天下). 천하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야우혼이 최초로 재출현한 것은 한 달 전인 지난 사월 십육 일. 과거와 다름없이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그 밤에 낙양성에서 야우혼에 의해 한 명이 이슬로 사라져간 것이다.
최초의 희생자는 강북무림의 거마(巨魔)인 혈룡마도(血龍魔刀) 독고천(獨孤天)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야우혼은 대강남북이 신출귀몰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가공할 살수를 펼쳤다. 
그리하여 단 한 달 동안 야우혼에게 죽어 간 초절정고수의 수는 정사(正邪)를 막론하고 일백여 명이 넘었다.
그 사실에 세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숫자는 과거의 야우혼이 일 년 넘게 살상한 숫자보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 야우혼! 오오, 야우혼이 다시 출현했다!
－ 그는 검흔(劍痕) 외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살수로 변모했다!
－ 영웅원 대집회 때 그를 죽였어야 했다!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 이제 누구도 야우혼을 막지 못한다! 있다면 오직 천의장주 사도천대협뿐이다!
－ 그러나 사도천 대협께선 아직도 천의장에 칩거한 채 나서지 않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사도천 대협의 재출도(再出道)가 이루어져야 한다.
－ 오오, 장차 천하무림은 사도천 대협과 야우혼의 대결로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회오리 광풍(狂風)인가? 몰아치는 노도(怒濤)인가?
사도천. 
야우혼.
그들 두 사람의 이름은 순식간에 두 개의 거봉(巨峯)으로 천하 위에 우뚝 치솟았다.
세인들은 하루 빨리 사도천이 재출도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사도천은 세인들의 그런 바램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사도천.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내의 용모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한 명의 백의미청년.
세인들로부터 인의대협(仁義大俠))이라 불리는 천하유일의 인물. 
바로 사도천이다.
그의 앞에는 야우혼의 소식이 담긴 각종 첩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나, 그 첩지들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는 지극히 담담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후후, 나 역시 심랑(心娘)의 말이 아니었다면 스스로 천의장을 뛰쳐 나갈 뻔했다. 심랑, 가히 뛰어난 재녀(才女)다. 나까지 탄복할 만큼… 내게 천하제일미, 천하제일재녀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심랑 그녀를 꼽을 것이다."
심랑, 그녀는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천하의 사도천이 이토록 탄복한단 말인가?
"백운향, 너는 역시 훌륭하다. 죽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지만 그토록 무서운 신위(神威)로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쨌든 인간 최후의 형벌인 천인달리쇄락공에서 재기한 네게 진심으로 탄복을 보낸다. 하지만……."
사도천의 입술이 강팍하게 휘어졌다.
"나 사도천이 있는 이상 너는 범부(凡夫)의 생을 택하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조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너는 지금 내게 정면으로 도전하기 위한 명목을 찾으려 조호이산지계(調虎離山之計)를 펴고 있지만, 그것은 역으로 타초경사(打草警蛇)를 초래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하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도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유유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완연한 봄이었다. 
정원의 푸르른 초록빛 속에 온갖 꽃들이 뽐내듯 만발해 있었다. 
천의장에도 봄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사도천은 그 꽃들을 완상하듯 둘러보며 독백을 이었다.
"내게는 심랑이 있고, 또한 강남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단목세가의 단목수(端木秀)가 있다는 사실이다."
잠시 회심 어린 미소를 머금던 사도천은 몸을 돌려 수북이 쌓인 첩지 중 유독 눈에 띄는 홍색(紅色)의 붉은 첩지를 집어 들었다.
"이것만이 진짜다. 진정 야우혼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이것뿐이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사도천의 시선이 첩지를 쭉 읽어 내려갔다.
<야우혼 상면(相面).
인명, 재산 피해 전무(全無).
그는 자신의 출현을 속하를 통해 천존께 알리길 스스로 원했음.
난주 분타주 초향, 배상(拜上)>
실로 놀라운 일!
초향, 그녀가 바로 천존 휘하의 난주성 분타주였단 말인가?
백운향은 초향에게 난주성 분타주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초향은 정성스레 화장을 끝마쳤다. 
오늘 그가 올 것이다. 지금 그는 이 밤과 함께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오늘 밤에도 비가 오니까.
초향은 정성껏 쓴 한 장의 서찰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모시던 주공을 이미 배신한 몸."
그녀는 탁자의 한쪽에 놓여 있던 날이 시퍼런 비수를 집어 들었다. 
자결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손에 든 비수를 바라보는 초향의 두 눈에 회한의 빛이 어렸다.
'귀제갈께서는 어떤 기분이셨을까?'
아이야, 죽음이 무엇인지 아느냐?
아이야, 땅 속이 얼마나 차가운지 아느냐?
네 스스로 죽음과 입맞추려 하는 어리석은 아이야.
아니예요.
어차피 가야 할 길.
언제 가든 가야 할 길.
힘들면 쉬어라도 가야 할 길.
구천(九泉)길 멀고 먼데 지체할 수 없어요.
그리움에 살다가 회한에 죽어 가는 몸.
이젠 그리움도 회한도 구천에나 묻어 두겠어요.
초향의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 왔던가? 
이 순간을 위해……?
그녀의 손에 들린 예리한 비수가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잔인한 미소가 그녀의 목을 향해 싸늘히 다가들었다.
푹! 그 잔인한 미소는 그녀의 여린 살갗을 뚫고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시뻘건 선혈이 비수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번－쩍! 한 줄기 인영이 전광석화처럼 방 안으로 쏘아져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인영은 날아들기가 무섭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서서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초향의 몸을 감싸안았다.
"초…초향, 왜… 이런 짓을……?"
"오셨군…요. 기다렸…어요. 저…기… 탁자 위에… 서찰이……."
"내 부탁이 그토록 부담스러웠더냐? 그렇다면 거절해도 되었을 것을……."
"마땅히… 해드려야 할 일…이었어요. 그래야 귀제갈… 그분도… 기뻐하실 것. 그리고 당신이 겪은 고초에 비하면… 죽음은 오히려 홀가분한… 것이에요. 그리고 용서하세요.. 백화촌 사람들… 그 죄없는… 사람들을 무참히… 죽인 저를… 부디 용서……."
초향의 머리가 힘없이 아래로 꺾였다. 
멀고 먼 구천길을 떠나기에는 너무도 여리고 힘없는 몸이었다.
"내가… 내가… 너를 죽인 것이다……."
백운향은 망연히 중얼거리며 한동안 초양을 안고 있더니  그녀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돌연 벽을 향해 일검(一劍)을 휘둘렀다.
파파팟－! 야우혼, 그 세 자의 글자가 벽면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백운향은 초향의 죽음을 자신의 살수에 의한 것처럼 스스로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만큼 초향의 죽음은 그에게 심적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가화루, 그곳에도 밤비는 어김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기사… 감숙성(甘肅省) 일대가 밤비로 젖어들고 있거늘, 어찌 유독 난주의 가화루만 비가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굳이 가화루에도 밤비가 내리고 있음을 언급한 것은 한 여인 때문이었다.
몽몽. 그녀는 지금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 가화루에 온 지도 어언 한 달 정도가 지났다.
그 동안 그녀가 가화루에 들어왔다는 소문은 난주는 물론이고 감숙성 일대뿐만 아니라 주위의 섬서(陝西), 청해(靑海), 사천(泗川)에까지 파다하게 퍼진 터였고 그로인해 가화루는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런데도 정작 그녀가 난주제일인이라 지목하고 기다리는 연환공은 그 동안 가화루를 제집 드나들듯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또한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런 기분에 밤비까지 내리니 몽몽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불현듯 그녀의 뇌리로 그녀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하는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그것은 며칠 전에 가화루주 만요부인을 통해 들은 어느 기녀와 연환공과의 대화였다.
－ 연환공께서는 왜 남들이 보지 못해 안달하는 몽몽을 한 번도 찾지 않으시는지요?
－ 얼굴이 예쁘다고 춤까지 잘 춘다더냐?
－ 몽몽은 가무(歌舞)도 일품이라 하옵니다.
－ 그래도 일없다. 여자는 아무리 잘나야 오십 보 백 보. 더구나 나는 그토록 까다로운 계집은 딱 질색이다. 설사 그녀가 날 찾아와 애걸한다 해도 난 달갑지 않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몽몽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져 갔다.
"좋아."
무엇이 좋다는 건가?
휘이익－! 그녀는 돌연 자신의 침실에서 밖을 향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빗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뜻하지 않은 초향의 자결에 백운향은 허탈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비 내리는 밤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초향, 너는 죽음이라는 것을 네 지친 영혼을 포근히 감싸주는 영원한 안식처라고 생각했더란 말이냐? 죽음을 그토록 초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네가 정말 부럽구나.'
백운향은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고, 다시 두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는 어느덧 연환소축 부근의 숲 속 소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딩－딩－딩－! 이때 돌연 숲 속으로부터 한 줄기 금음 소리가 울려 왔다.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금음 소리였다.
하나, 백운향은 그 금음 소리를 듣는 순간 내심 냉소를 흘려 냈다.
'나를 노리는 첫번째 눈동자다. 셋 중 하나. 그들 셋은 모두 살기마저 감춘 지 오래된 초살수들. 하나, 그들이 살수라면 나 또한 살수다.'
백운향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여전히 소로를 따라 걸어갔다.
금음 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달콤한 듯하면서도 살기가 서린 금음 소리였다.
딩－딩－딩－!
'소혼곡(消魂曲)…….'
백운향은 어느새 숲 속으로 십여 장쯤 들어서고 있었다.
딩－ 띠디딩－!
'멸혼곡(滅魂曲)…….'
다시 십여 장을 더 들어서며 백운향은 서서히 안색을 굳혔다.
띵－ 띠딩－ 띵－ 띵디띵－!
'으음, 이건 망혼곡(亡魂曲)……!'
백운향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숲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그의 보폭은 한 점 흐트러짐도 없이 일정했다.
띠이이잉－ 띠이잉－!
'실혼곡(失魂曲)…! 누군지 대단하군.'
백운향은 오 성의 공력을 끌어올리며 숲 속의 어느 공지로 들어섰다. 
그 순간 금음 소리가 끊기듯 뚝 멈추었다. 대신 여인의 청아한 교성이 이어졌다.
"어서 오시와요. 기다렸사옵니다."
백운향은 묵묵히 공지 한가운데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아담한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정자 위에는 한 사람, 마치 그린 듯 수려한 미모의 여인이 백운향을 맞기 위한 듯 섬연한 교구를 살풋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백운향은 정자로 다가가 느릿하게 계단을 밟고 그 위로 올라갔다. 
홍등이 밝혀진 그곳에는 조촐한 술상이 하나 차려져 있었다.
홍등과 술상과 여인, 그리고 밤비가 내리는 인적이 끊긴 정자… 절로 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백운향은 묵묵히 술상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여인은 소리 없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서더니 돌연 백운향을 향해 날아갈 듯 대례를 올렸다.
"몽몽의 청에 응해 주시어 진심으로 하례드리옵니다."
백운향은 무심히 몽몽을 응시했다.
몽몽은 다소곳이 앉아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일견하기에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오랜만에 해후(邂逅)하는 한 쌍의 연인인 듯싶었다.
문득 백운향은 손을 뻗어 상 위의 술잔과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몽몽은 백운향에게 술병을 건네 달라는 듯 섬섬옥수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백운향은 자작자음(自酌自飮)하며 말했다.
"네 술잔은 단 한 잔뿐이라 들었다. 나는 오늘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네 잔을 받겠다."
"그렇다면 소녀는 대공께 영원히 잔을 올릴 기회가 없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두 사람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하나, 그 부드러운 음성 속에는 서로의 의중(意中)이 담겨 있었다.
몽몽은 가볍게 정색하며 말을 받았다.
"하온데… 대공께선 끝내 소녀가 청한 이유를 묻지 않으시려는지요?"
"알고도 물음은 어리석은 일. 또한 아녀자와 쓸데 없는 말을 오래 논함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다. 자, 어서 시작해라."
몽몽은 일순 흠칫했다. 
그녀는 비로소 백운향이 자신의 목적을 이미 알고도 이곳까지 왔음을 깨달은 것이다.
불현듯 그녀는 자신의 앞에 하나의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더불어 자신이 한없이 왜소하고 초라한 존재로 느껴졌다. 
그것은 남과 여의 차이가 아닌 백운향이라는 한 인간의 대범함에 대한 그녀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살수 본연의 자세를 되찾았다.
그녀는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녀는 이제부터 대공께서 즐기시는 춤을 출까 하옵니다. 그 춤은 일 각 동안 계속되며 춤이 계속되는 중에는 대공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사옵니다."
백운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조건 없는 승부라 홀가분하군. 이 밤은 언제까지고 너와 나를 잡아 둘 수 없는 것이니 어서 시작해라."
"부디 성의 있는 승부를……."
몽몽은 백운향을 향해 목례를 취한 후 사뿐히 교구를 일으켜 세웠다. 이어 그녀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풀나풀……! 
노을빛 구름 위를 날아오르는 한 마리 나비인 양, 그 나비가 저어 내는 날개짓인 양 백의나삼이 불어 오는 습한 밤바람에 하늘하늘 일렁인다.
섬세한 두 손은 그리운 무엇인가를 쫓으려는 듯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오르고, 앙증맞은 두 발은 구름 위를 걷듯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인의 숨결에는 그윽한 단내가 감돌았다.
도화빛 두 뺨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진주이슬이 맺힌다. 
이슬은 미끄러지며 섬연한 목덜미의 고운 선을 타고 흐른다.
이어질 듯 끊기고, 끊길 듯 이어지는 유연한 몸놀림.
"후우……!"
여인의 입에서 단내 짙은 긴 숨이 불어 나왔다. 
몸의 움직임으로 열기가 일어 답답했던 것인가?
여인의 몸에서 백색 꽃잎 하나가 지면으로 살랑 떨어져 내렸다. 
잔잔히 굽이쳐 흐르는 물결인 양 유연한 어깨의 호선(弧線)이 눈부신 순백(純白)을 띠고 홍등 아래 환상처럼 드러났다.
계속해서 꽃잎이 위로부터 아래로 차례차례 떨어져 내렸다. 실로 미묘하고도 야릇한 움직임이었다.
일순 백운향의 두 눈이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자신의 앞에서 점차 나신으로 변해 가는 여인의 몸이 어찌 단순한 여인의 나신이겠는가? 
그것은 보는 이의 넋을 송두리째 앗아갈 듯 눈부신 나신이었다.
뿐인가! 그 나신이 빚어 내는 춤사위는 요사하리만치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타인의 손길을 접해 본 적이 없는 두 가슴이 튕기듯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부러질 듯 가는 세류요(細柳腰)는 차라리 감싸 주고 싶을 정도로 애처롭다. 
갑작스레 확산되는 펑퍼짐한 둔부는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기름이라도 바른 듯 미끈하게 뻗어 내린 두 다리는 잡고 싶은 충동마저 일으키게 하는 한 마리 은어(銀魚)였다.
그리고 보일 듯 말 듯 수줍음에 떠는 신비의 근원(根源)이여!
돈다. 그 황홀한 나신이 춤사위를 따라 돌고 돈다.
다가올 듯 달아나고 달아날 듯 다가온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백운향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옷은 어느새 땀으로 축축이 젖어들고 있었다.
나무(裸舞), 그것은 춤이되 춤이 아니었다. 춤 그 자체가 무공이었다.
섭혼나무미염공(攝魂裸舞迷艶功)!
현혹당하면 오로지 죽음뿐이라는 섭혼나무미염공이 그녀에게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백운향은 이미 몽몽이 추어 대는 나무 속에 깊이 몰입해 들었는지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현란한 춤사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번뜻번뜻 내비치던 땀방울은 가는 도랑을 이루고 있었다.
몽몽이 약속한 일 각의 시간이 거의 지나 가고 있었다.
이때 돌연, 백운향의 두 시선 속으로 한 줄기 일섬 섬광이 빛살처럼 파고들었다.
쐐애애액－! 그것을 본 백운향은 손에 든 술잔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손놀림으로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순간 일섬 섬광이 술잔에 격중되더니 술잔이 박살났다. 그 바람에 술잔의 파편들이 백운향의 전신을 향해 덮쳐 들었다.
푸우－! 백운향의 입에서 분수처럼 주전(酒箭)이 뿜어져 나왔다.
파파파팍－! 허공에서 불꽃이 튀며 술잔 파편은 주전에 격중되어 더욱 잘게 부숴졌다. 
동시에 그 무수한 파편 조각들은 원래 날아왔던 곳으로 방향을 돌려 섬전처럼 격사되어 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몽몽의 섬연한 교구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우우우웅…! 순간 가공할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그에 따라 그녀가 한 장 한 장 벗어 버렸던 백색 꽃잎들이 회오리바람을 타고 둥실 떠올랐다.
백운향이 주전으로 되돌려 보낸 술잔 파편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불꽃을 튕기며 바스러져 버렸다.
백운향은 감탄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취리리릭－! 그의 귓전으로 날카로운 파공성이 파고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느샌가 몽몽의 주위로 둥실 말아 올려진 옷가지 하나하나가 철편(鐵片)으로 화해 허공을 가득 메운 채 가공할 기세로 백운향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우지직! 쿵! 쿠쿵!
정자 밖의 사방 거목(巨木)들이 굉렬한 태풍을 만난 듯 힘없이 허리를 꺾으며 눕기 시작했다.
백운향의 신형이 번개처럼 일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일어선 순간, 그의 발은 이미 중궁(中宮)과 구궁(九宮)을 밟고 오른손을 좌에서 우로 길게 내리긋고 있었다. 마치 춤을 추는 듯 부드럽고 유려한 자세였다. 
카카캉! 최초의 옷가지가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며 정자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백운향의 발이 겹쳐지고 왼손이 어깨 위로부터 길게 호선을 그으며 둔부 뒤까지 휘둘려졌다.
카앙! 또 한 차례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몇 조각인지 모를 옷가지가 정자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백운향의 몸놀림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캉! 캉! 캉! 그와 함께 몽몽의 옷가지가 연이어 정자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백운향은 실상 지금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비틀고, 때로는 내젓는가 하면, 또 어느 때는 되쳐 민다.
미혼환락무(迷魂歡樂舞)! 
드디어 조화선옹의 전설적인 신공 오대파천무(五大破天舞) 중 미혼환락무가 그의 몸에서 천 년의 세월을 격하고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일순 정자 안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춤이 겹쳐지고, 그 사이로 몇 번인가 수를 셀 수 없는 격한 음향이 일었다.
여인의 나무가 황홀하다면, 사내의 춤은 요요로운 듯하면서도 정대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위로 열기가 물씬물씬 피어 오르는 가운데 하나의 춤사위가 그 도를 더해 감에 따라 다른 하나는 서서히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그러들던 춤은 점차 자신에게 짓쳐드는 상대편 춤사위의 기세에 질려 버리기라도 한 듯 일순간 뚝 멈춰 버렸다.
"아……!"
춤추기를 멈춘 몽몽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향해 다가드는 전설의 파천무를 취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과 도화빛 두 뺨에 열기가 일렁였다.
몽몽은 입술에 피가 나도록 질끈 깨물었다. 죽여야 한다는 이지(理智)가 고개를 발딱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 뿐, 그녀의 몸은 더이상 그녀의 생각을 따라 주지 않았다.
이때 사내가 한 꺼풀 두 꺼풀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사내는 여인을 허공으로 부웅 띄워 올렸다.
이미 나신 상태인 여인은 본능적으로 발버둥쳤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몸짓에 불과했다. 
어느새 사내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위에서 토해졌고,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뜨거워져 가는 자신의 육체를 느낄 수 있었다.
사내의 손이 스치면 스치는 대로 그녀의 몸은 불꽃을 작렬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억제하는 고련(苦練)을 겪은 살수(殺手) 중의 살수다.
'죽여야 해!'
그 일념이 그녀의 뜨거워지는 정신 속에 숙명처럼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녀는 매끄러운 두 팔로 꽃뱀이 휘감듯 사내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녀의 손이 사내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중극혈(中極穴)에 기척 없이 닿았다.
사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몸 위에서 한 줄기 뜨거운 바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달아오른 여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이제 한 치만 파고들면 그는 숨을 끊을 것이다.
여인은 더이상 자신의 몸이 뜨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 한순간을 위해 살아온 그녀였다.
'지금이다!'
여인이 내심 외치며 손끝에 공력을 몰아넣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헉……!"
고통스런 외마디 비명은 여인의 입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그 고통은 하복부를 찢는 듯한 통렬한 고통이었다.
여인은 비명과 함께 사내의 중극혈을 찍어 가던 손으로 사내의 머리를 부둥켜안고 말았다.
너무나도 진하고 아련한 고통에 여인은 아무것이라도 잡고 매달리지 않으면 그대로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아아, 그것은 바로 파과(破瓜)의 고통이었다.
사내는 여인이 자신의 중극혈을 찍으려는 순간, 그녀의 비성(秘城)의 문을 강하게 밀치고 안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사내는 여인의 성을 완전히 함락시키려는 듯 온 힘을 다해 돌진하고 또 돌진했다.
"으흑……!"
"학… 하악!"
때아닌 춘풍(春風)이 정자 안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어느 한순간, 여인은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경험했다. 
그와 함께 그녀는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자신을 느꼈다.
이어 밀려드는 참을 수 없는 허탈감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흘려내고 말았다.
한 줄기 진득한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파고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살수가 살수에게 느끼는 정으로 하여 너를 살려 준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자기의 인생을 살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다. 이제부터라도 부디 너만의 생을 살아가길 바란다."
백운향의 음성이었다. 
그는 어느새 의복을 차려 입고 그녀를 뒤로 한 채 정자 난간에 서서 밤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나신으로 누운 채 눈물을 흘리는 몽몽을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계단을 밟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몽몽, 네가 내 말뜻을 모른다면 너는 내 손에 죽을 자격도 없다. 명심하거라."
그의 음성은 이미 정자 밖 밤비 속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흐흑……!"
몽몽의 입에서 오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흐느낌은 무척이나 애절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조차도 무슨 의미로 자신이 흐느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살수로 자라온 그녀가 살수에 실패했음에도 아직 자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 연환공께서 또 일원검(一元劍)을 잡으셨어."
"초대협은 또 양의검(兩儀劍)이다."
도박대를 빽빽이 둘러싼 사람들의 입에서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연환공 백운향과 초훼.
그들이 마침내 도박대에 마주 앉아 도박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데, 그들의 도박은 좀 기이했다.
지금까지 다섯 판을 하는 동안 백운향은 계속 검패 중 가장 낮은 점수인 일원검만 잡았고, 초훼는 두 번째로 낮은 점수인 양의검만 잡았던 것이다.
마치 그들은 끝까지 서로 그 두 패만 잡기로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했다.
사실 억지로 그렇게 패를 잡으려 해도 그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매번 그렇게 패를 잡는다는 건 확률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도 두 사람은 계속 일원검과 양의검 패만을 잡으니 이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결국 백운향은 다섯 판의 도박으로 가지고 있던 은자를 몽땅 털리고 말았다.
초훼가 자못 유쾌한 듯 대소를 터뜨렸다.
"하핫! 대공, 대단한 양보이셨소."
"헛헛! 별말씀을… 운이 없었을 뿐이오. 내 오늘따라 은자를 십만 냥밖에 가져오지 않았는지라 그럼 이만……."
백운향은 손을 툭툭 털며 미련 없이 일어섰다.
초훼는 아쉽다는 듯 백운향을 바라보았다.
"벌써 가시려구요? 그럼 이번 판엔 대공의 그 화복(華服)을 걸어 보심이 어떠실지?"
백운향의 두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태연히 말을 받았다.
"좋소. 이것도 받아 준다면야……."
그는 화복을 훌훌 벗어 도박대 위에 올려 놓았다.
"얼마를 쳐 주겠소?"
"천하제일인 연환공의 의삼이니 당연히 십만 냥은 쳐 드려야지요."
"작지만 할 수 없구려."
의삼 한 벌에 십만 냥이라니? 
실로 어이가 없는 액수였다. 그럼에도 백운향은 작다는 투로 받아넘겼다.
장내가 술렁거리며 소란스러워졌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불쑥 소리쳤다.
"연환공, 체통 좀 지키시오. 대공은 지금 속고 있는 것이오. 황손이라는 분이 어찌……."
백운향은 담담히 입을 열어 그 음성을 제지했다.
"아니오. 속이는 것 또한 도박의 기술이거늘, 속는 자가 바보지 속이는 자를 어찌 나무랄 수 있겠소. 도박의 묘미(妙味)란 바로 그 점에 있는 곳이오. 안 그렇소, 초대협?"
"하하! 역시 연환공이십니다."
초훼는 대소를 터뜨리며 패를 돌렸다.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백운향은 일원검, 초훼는 양의검. 똑같은 패가 연거푸 여섯 판째까지 이어진 것이다.
너무도 기이했다. 
어찌 두 사람이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같은 패만 잡는단 말인가?
"어떻소? 한 판을 더 하심이……."
초훼가 은근한 어조로 의양을 물어 왔다. 말을 하는 그의 입에는 언제 물었는지 새파란 풀잎 하나가 물려 있었다.
백운향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젠 더이상 걸고 싶어도 걸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는 안색을 굳히며 도박대를 탕! 하고 쳤다.
"이번엔 내 목이오. 내 목을 걸겠소. 쳐 주시겠소?"
순간 주위의 구경꾼들은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도박에 손이나 손목 등 인체의 일부를 거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나, 자신의 목을 거는 도박사를 그들은 여지껏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훼는 풀잎을 문 입가에 짙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안 쳐 주겠소? 한데, 내겐 천하제일인의 목과 견줄 만한 물건이 없는데……."
"물론 초대협에겐 내 목을 상대로 걸 만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 없을 것이오. 하지만 초대협의 허리에 찬 도(刀)가 꽤 쓸 만해 보이는구려. 그 도에다 초대협의 도혼(刀魂)을 함께 걸면 나로서도 불만이 없을 것 같소만……."
"내 묵혈도(墨血刀)와 도혼이라……."
초훼는 뜻밖이라는 듯 고심 어린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결심한 듯 묵혈도를 풀어 도박대 위에 올려 놓았다.
"좋소! 멋진 승부가 될 것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순서에 따라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패를 돌리는 그의 손길에는 자신감이 역력해 보였다. 
승리를 확신한 듯 힘이 있었고, 입에서는 풀잎이 잘근잘근 씹히고 있었다.
이윽고 패가 모두 나누어졌다. 
초훼는 자신검 넘치게, 백운향은 무심하게 서로의 패를 지체없이 뒤집었다.
"아! 저럴 수가?"
"오오.……!"
순간 장내는 경악과 탄성으로 뒤덮혔다.
패는 이번에도 역시 일원검과 양의검이었다. 하나, 이번에는 그 주인이 달랐다. 
백운향이 양의검을, 초훼가 일원검을 잡았던 것이다.
"이…이럴 수가!"
초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패와 백운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허허, 이번엔 내게 운이 따랐구려. 미안하지만 덤으로 내 옷을 붙여 주시오."
백운향은 주섬주섬 화복을 걸쳐 입은 후 초훼의 묵혈도를 집어 들었다.
"꽤 좋은 도인 것 같구려. 내 비록 도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고맙게 받아 두겠소."
스르릉…! 그는 말을 하며 묵혈도를 뽑았다.
순간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오광(烏光)이 장내를 섬뜩하게 휩쌌다.
휙! 휙! 백운향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묵혈도를 휘젓다가는 이내 칼집에 도로 집어 넣었다. 
이어 그는 초훼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보낸 후 천천히 도박장을 걸어나갔다.
이때 초량의 입에서 신음성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나직이 새어 나왔다.
"패…패가 바뀌었다."
그는 패를 조작하기 위해 그만이 아는 표식을 미리 패에 해 놓았었다. 한데, 그 패의 표식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패를 만진 두 사람뿐…….
초훼는 그제서야 비로소 백운향이 마지막 승부를 위해 지금까지 일부러 속임수에 넘어가 주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초훼는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백운향이 바로 저 유명한 환락도의 필패공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때 돌연, 망연함을 금치 못하던 초훼의 두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 떠올랐다.
조금 전 백운향이 아무렇게나 묵혈도를 휘둘러대던 벽면에 세 개의 글자가 쓰여 있었던 것이다.
<청우림(靑雨林)>
순간, 초훼의 신형이 다급하게 도박장 문을 밀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청우림. 그 숲은 연환소축으로 향하는 소로 중간에 자리한 숲 속 공지를 말함이다.
쏴아아…! 봄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숲을 적시고 있었다.
백운향은 정자에 올라 뒷짐을 지고 푸르른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경치를 감상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젯밤의 연사를 회상하는 것일까?
부러지고 넘어진 나무들의 잔해 외엔 어젯밤 몽몽과 그와의 격전의 흔적은 빗물에 씻기운 듯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초훼가 공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그는 정자에 오르지 않고 백운향의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백운향은 그에게 묵혈도를 던져 주었다.
초훼는 묵혈도를 받아 들며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백운향을 쳐다보았다.
"지상 최대의 도법이 무엇인지 아느냐?"
입을 여는 백운향의 음성은 지극히 무심했다.
초훼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묵혈수라삼도(墨血修羅三刀)!"
"좋은 도법 같구나. 그렇다면 파천멸(破天滅)의 패강함과 무영살의 빠름, 도가사대검법(道家四大劍法)의 현묘함이 일도(一刀)에 실린다면 어떠하겠느냐?"
"물론 천하 최고의 도법이 될 것이오. 패강과 빠름, 부드러움이 함께 깃든 도법이기 때문이오. 하나……."
초훼의 음성은 돌연 격앙되었다.
"그것은 불가능하오!"
그렇다. 무림 역사상 그러한 도법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러한 도법을 펼쳐 낸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백운향의 무심한 얼굴 위로 미미한 미소가 안개처럼 피어 올랐다.
"그럼 한번 견식해 보겠느냐?"
그는 정자에서 내려와 정자 옆의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아무렇게나 꺾었다.
어느 사이엔가 초훼의 입술에는 또다시 풀잎 하나가 물려 있었다.
"내 이미 당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소. 하나, 지난 이십 년 동안 오로지 당신의 피맛을 그리며 울어댄 묵혈도에게 당신의 피맛을 단 한 방울이라도 맛보게 해 주기 위해……."
스르릉…! 묵혈도의 오광이 빗줄기를 뚫고 눈부시게 사방으로 뿌려졌다.
묵혈도를 빼는 순간, 그의 손은 가볍게 떨렸지만 일단 빼든 후에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도신합일(刀身合一)!
그의 기수식은 도신합일의 자세이나 좀 특이했다. 도를 가슴 앞에서 수평으로 내뻗은 자세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 일도로 상대를 찌르고 자신도 찔리겠다는 필살필사(必殺必死)의 자세였다.
반면, 백운향의 손에 잡힌 물이 밴 나뭇가지는 지면을 향해 비스듬히 내리뻗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순간 묘한 긴장감과 일촉즉발의 팽창감이 감돌았다.
기(氣)와 기(氣)!
심(心)과 심(心)!
도(道)와 도(道)!
시간은 흐름을 망각한 듯 두 사람 사이에서 접혀지고, 쏟아지는 봄비는 그 위에서 아우성 치며 부서졌다.
가슴 답답한 정적이 잠시 흘렀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번－쩍! 파앗! 
번갯불 같은 묵광(墨光)과 예리한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한 차례 교차되자 빗줄기가 전율하듯 갈라졌다.
두 개의 완강한 등판이 마주섰다.
"고맙소. 당신의 피는 진정 달콤하다고 나의 묵혈도가 말하고 있소."
초훼의 음성이 칼칼하게 터져 나왔다. 
"너의 도도 되지만 나의 도이기도 하기 때문이지."
백운향의 옆구리에 미미한 혈흔이 번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습한 바람이 살랑 불었다. 
순간, 등을 돌리고 선 초훼의 몸에서 옷조각이 바람결을 따라 흩어져 날리기 시작했다.
초훼는 이내 벌거숭이로 서 있었다.
"졌…졌소! 이제야 깨닫다니……."
"너는 잘랐지만 난 베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뿐이다."
백운향은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말을 받았다.
한데, 자른 것과 벤 것의 차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것은 이러했다. 
초훼는 강맹한 극패(極覇)의 도법을 단지 도법으로 펼쳤기 때문에 자른 것이고, 백운향은 극패의 도법을 부드러운 검법에 연결시켜 펼쳤기에 벤 것이었다.
이유제강(以柔制强)!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할 수 있음의 묘리(妙理)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백운향은 돌아선 상태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초훼의 힘겨운 음성이 백운향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당신은 가히 천하제일인이오. 나는 당신이 천하제일인이기에… 홀가분하구려……."
푹! 털－썩! 
음성에 이어 두 종류의 둔음이 잇따라 들려 왔다.
살수의 실패는 죽음. 초훼는 살수답게 상대를 베지 못한 데 대한 대가를 죽음으로 치른 것이다.
백운향의 두 눈에 아픔처럼 빗물이 스며들었다.
"너를 살리려 했다면 그건 오히려 너를 욕보이는 것이었겠지."
초훼의 주검을 뒤로 하고 백운향은 이내 빗줄기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때였다.
스슷…! 돌연 극미한 파공성과 함께 초훼의 주검 옆에 검은 인영 하나가 땅에서 솟은 듯 모습을 나타냈다.
검은 사립에 묵검(墨劍), 흑의(黑衣)…….
흑색 일색인 그는 바로 네 명의 살인병기 중 최초로 난주성에 들어섰던 냉천이었다.
무료한 듯 권태감이 깃든 회색빛 그의 두 눈이 느릿하게 주위를 살폈다.
"잠시 나의 눈이 멀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제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으니 승률(勝率)은 십 할. 놈은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번쩍! 그의 신형이 번갯불이 쏘아지듯 사라져 갔다.
지금까지 느릿하던 그의 행동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난주제일인으로 호취아를 지목했었던 초검살수(超劍殺手) 냉천(冷天). 
이제야 그는 진정한 난주제일인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새롭게 검을 갈기 시작한 것이었다.
쏴아아…! 
비가 내린다.
몰아칠 대추적과 피의 대장정을 예고하듯 음울하고 끈적끈적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이것이 그 동안 접수된 것이에요."
"난 지금 그것을 볼 시간이 없소."
"당신이 안 보면 누가 보죠?"
"당신이 보고 있잖소."
백운향은 책자로부터 시선도 떼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빙월교의 손에는 책으로 엮으면 한 권의 책자가 족히 될 만한 전서(傳書) 꾸러미가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그 동안 호취아 이하 개방의 문도들이 수집해 보내 온 첩보(諜報)였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알 수가 없군요."
"이제 더이상 한낱 여인에게 지기 싫어졌다고나 해 둡시다."
빙월교의 수려한 아미가 곱게 휘어졌다.
"사도천의 옆에는 분명 누군가가 있어요. 누군가 그의 호승심(好勝心)을 자제시키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우리의 조호이산지계(調虎離山之計)에 빠져 문을 열고 나섰을 텐데… 바로 사도천의 뒤에 있는 그 자가 변수(變數)예요."
빙월교는 백운향이 듣든 말든 말을 이었다.
"이러다간 우리가 오히려 타초경사(打草警蛇)의 우(愚)를 범하고 말 거예요."
백운향의 시선은 좀처럼 읽고 있는 책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봐요!"
빙월교의 음성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세워졌다.
"우린 지금 타초경사의……."
순간 백운향의 얼굴이 사납게 쳐들어졌다.
"아, 거 조용히 좀 해요! 타초경사고 뭐고 머리에 든 게 있어야 대책을 세우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오?"
백운향은 서탁 위의 책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싫다고 할 땐 억지로 끌어다 앉혀 놓더니, 이젠 책 좀 읽으려니까 방해를 하니… 젠장, 대청으로나 가서 읽든지 해야지 원……."
그는 투덜거리며 방문을 밀고 나갔다. 
잠깐 아연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빙월교의 얼굴 위로 온묘로운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그토록 책을 싫어하고 글이라면 고개를 휘휘 내젓던 백운향이었다. 그런 그가 변했다. 
천하의 재녀(才女) 빙월교의 얼굴에 대견스런 미소를 떠올리게 할 만큼 변한 것이었다.
학문, 그것만큼 고리타분하고 지겨운 것도 없다. 평생을 배워도 끝이 없는 게 바로 학문이다.
하나, 일단 빠져 보라. 
깊이 들어서면 설수록 현묘한 이치와 오묘한 조화에 스스로 혀를 내두르는 것이 곧 학문이다. 
사람의 삶이 그 속에 있고, 천하의 이치가 숨쉬며, 우주의 섭리가 숨어 있는 곳이 곧 학문이다.
백운향은 비로소 그 이치를 깨닫고 끝없이 그 속으로 침몰해 가고 있었다.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
침침한 실내 공기와 사면을 장식한 갖가지 꽃들, 그리고 책이 얹힌 통나무 탁자 등 그것들 모두가 백운향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고요한 정적을 뛰어넘어 차라리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한데, 돌연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던 백운향의 눈길이 책의 중간 부분에서 우뚝 멈추어지는가 싶더니 실내를 한 바퀴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갖가지 화향(花香)이 물씬 나는 꽃의 장식들이 눈에 들어 온다. 
그것들은 백운향이 들고 오는 꽃들을 빙월교가 정성들여 화병에 담아 대청 곳곳에 배치한 것이었다.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본 백운향의 시선이 다시 책 위로 던져졌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책의 내용 중 난해한 부분에 부딪쳐 잠시 고뇌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것이 분명했다.
하나, 아무도 몰랐다. 
백운향 그가 지금껏 어떤 책을 읽으면서도 결코 한 번도 책에서 눈길을 거둔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 쌍의 눈동자의 주인. 
그는 꽃과 하나가 되어 꽃향기 속에 숨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꽃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내는 오직 한 사람, 만화공자 무환뿐이다.
후후, 벌써 십 일째다.
그래, 오늘은 끝내는 거다. 나는 그 동안 또 다른 꽃향기를 맡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기다렸다.
이제 준비는 철저히 끝났고, 실행만이 남았을 뿐이다.
무환은 이미 진한 혈향(血香)을 맡은 듯 전신에 아련한 쾌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는 흥분되는 자신을 달래기 위해 그 동안 숨어 있던 곳에서 백운향의 동태를 살피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소리 없이 자리를 이동했다.
자, 일단 허점만 보여라. 완벽한 살인을 위해 나는 또 잠시 기다리마.
후후, 내겐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아름다운 꽃잎은 차가운 비수로 변해 너의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孔)으로 쑤셔 박힐 것이다.
그리고 너는… 죽을 것이다.
처절하도록 날카로운 죽음의 칼날을 갈며 염두를 굴리던 무환의 눈빛이 돌연 잔살스럽도록 냉혹한 한기를 머금으며 번쩍였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허점이 나타난 것이다.
"아함……."
백운향이 머리를 의자 등받이 너머로 한껏 젖히고 두 팔을 활짝 벌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허점투성이였다. 
이 순간 백운향의 전신 어느 곳으로 검날이 짓쳐든다 할지라도 백운향은 도저히 몸 한 번 틀지 못하고 당하고 말 것이다.
살수에게는 단 한 올의 허점도 완벽한 기회가 된다.
또한 살수가 지금과 같은 이런 절대절호의 기회를 만나기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무환으로 말하자면 자타가 인정하는 뛰어난 살수가 아닌가. 그런 그가 이런 호기를 놓칠 리 없었다.
'끝났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그보다 백 배는 더 빨랐다.
파츠츠츠츳－! 수백 수천의 꽃잎들이 갈라지고 터지며 수만 수십만 개의 조각으로 폭사되었다.
후각마저 마비시킬 듯한 강렬한 화향(花香)이 순식간에  실내를 진동시켰다.
전신에 꽂고 있던 모든 꽃잎들이 산산이 비산(飛散)되어 쏘아져 나간 순간, 무환은 가볍게 진저리를 치며 자신이 이루어 낸 걸작을 향해 흡족한 미소를 띄워 보냈다.
'후후, 꽃잎 하나하나가 강철편보다 더 강한 파편이고, 그 빠름은 빛만이 피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잘 가라, 난주제일인!'
무환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거사를 성공시켜 준 대청의 꽃들로 시선을 돌렸다. 
한데, 그때였다.
탁! 백운향의 발이 탁자 밑을 가볍게 걷어찼다.
휘리리릭! 순간 그의 발길에 따라 좀 전까지 그가 보고 있던 책의 백여 매나 되는 책장들이 산산이 분해되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마치 백운향을 보호하듯 순식간에 백운향의 주변에 동그란 막을 형성하였다. 그것에 꽃잎들이 충돌한 것은 막이 형성된 것과 거의 동시였다.
채챙챙챙－! 고막을 터뜨릴 듯한 수천 번의 굉렬한 금속성과 함께 아름답도록 찬란한 불꽃이 솟아올랐다.
"헉!"
혈향(血香)을 기대하던 무환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마치 고무공에서 바람이 빠져 나가는 듯한 경악성이었다.
그리고 그의 경악 어린 동공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어찌 피해 볼 도리가 없는 가공할 빛살이었다.
무환은 여지껏 이토록 빠른 빛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순간 그는 코끝으로 전해 오는 비릿한 향기를 맡았다. 
혈향이었다. 
자신이 기다리던 피냄새가 아니라 어이없게도 자신의 피냄새였던 것이다.
무환은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쓰며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제기랄, 저 자는 인간도 아니다!'
빙월교는 망연한 얼굴로 백운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본래대로 합쳐진 책을 보고 있었다.
무환이 발출한 꽃잎 암기들을 막아 낸 책장은 본래대로 다시 합쳐져 백운향의 앞에 놓여 있었고, 그는 그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빙월교의 시선이 대들보 위에 멎었다. 
그곳에는 눈으로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가늘디 가는 혈선(血線)이 점차 핏방울로 매달리고 있었다.
또…옥…! 한 방울의 진한 혈선이 그녀의 하얀 모시버선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대들보로부터 바닥에까지 긴 혈선이 이어졌다.
"당신은 해내셨군요. 옆집 화공자(花公子) 화원의 작약은 냄새가 심하니 작약은 없어도 좋다고 하시더니……."
무환의 빠져 나가는 영혼 속으로 그녀의 음성은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려 왔다.
'제기랄, 그 흔한 꽃 중 작약만 빠져 있었다니…….'
천려일실(千慮一失)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작약도 꽂고 있었으나 대청 어디에도 작약만은 없었던 것이다.
무환은 소리 없는 절규를 처절히 토해 내며 마지막 의식의 줄을 놓고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어맛!"
빙월교가 아무리 천하의 재녀라 한들 어찌 길게 베어진 복부로부터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내장과 흰자위만 희멀겋게 까뒤집은 시체를 태연히 대할 수 있으랴.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백운향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봐요!"
그러나 백운향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묵묵부답 책만 읽을 뿐이었다.
"이봐요! 어떻게 좀 해 보란 말예요!"
순간 백운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허…참! 거 좀 조용히 해요. 제길, 어디 이래서야 책을 읽을 수 있겠나? 에이, 방에서 읽든지……."
백운향은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외면한 뒤 다시 책들을 챙겨들더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시체란 어떤 형상으로 누워 있든 보는 이들에게 공포심을 준다. 그것이 처참하면 처참할수록 그 공포의 색깔은 더욱 짙어지는 것이다.
잠시 어쩔 줄 몰라하며 무환의 시체를 바라보던 빙월교는 다급히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봐요!"
"아, 거참!"
"저 시체 좀 어떻게……."
"시체든 뭐든 책을 보아야 어떻게 하든 말 든 할 것 아니오? 난 머리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뭘 어쩌겠소? 당신이 나보다 백 배는 똑똑하지 않소?"
"아, 당신 정말……?"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그 호칭도 좀 고치시오. 그대가 좋다고 한 이 논어(論語), 맹자(孟子), 예기(禮記) 어디에도 여자가 남자에게 이봐요니, 당신이니, 부르라고 써놓은 곳은 한 줄도 없습디다."
"내가 당신에게 학문을 강요한 것이 겨우 나를 놀리기나 하라고 한 것인 줄 알아요?"
"아이구, 알았소. 내 아직 학문의 깊이가 모자라는 것 같으니 좀 조용히 하시오. 다시 대청으로 나가든지… 어디 책을 한 줄이나 읽을 수 있나."
"당신 정말… 흑……!"
빙월교는 급기야 울음보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독살스러울 정도로 백운향에게 학문을 강요하고 그의 일에 빠짐없이 간섭하던 이 천하의 재녀도 역시 여인은 여인이었다.
백운향의 얼굴에 한 줄기 득의의 미소가 엷게 떠올랐다.
'후후, 이젠 좀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겠군.'
그는 다시 보던 책으로 시선을 던졌다.
도대체 무엇인가? 
처절한 한(恨)과 대업(大業)을 앞에 두고 그가 이토록 학문에 심취하고 있는 까닭은 도대체 뭔가?
사실 그것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분류된다. 
어쩔 수 없어 스스로 가라앉히려는 때와 모종의 결심을 굳히려는 때가 그것이다.
탁! 문득 백운향이 읽던 책을 소리나게 덮었다. 이어 그는 아직도 빙월교의 오열소리가 들려 오는 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월교……."
방금 전까지의 짓궂고 퉁명스럽던 음성과는 달리 차분하고 심유한 음성이었다. 
하나, 빙월교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흐흐흑!"
백운향이 다시 말했다.
"때가 되었다. 월교, 떠나자."
순간,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던 그녀의 울음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잠시 후, 그녀는 퉁퉁 부은 눈두덩이를 훔치며 방을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듯 커다란 보퉁이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운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빙월교는 그런 그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후후, 내가 좀 심했나? 자, 가자."
백운향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순간 빙월교는 그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앞서 소축 문을 나섰다.
백운향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길, 더 어렵게 생겼군."
동(東)에서 죽고 서(西)에서 떨어졌다.
덧없는 목숨들이…….
남(南)에서 사라지고 북(北)에서 피를 쏟았다.
허무(虛無)한 생명들이…….
야우혼의 재출현에 천하는 절규했고, 세월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오월(五月)은 저물어 어언 유월(六月). 
햇살은 온묘로운데 천하는 암울한 죽음의 어둠으로 짙게 뒤덮여 있었다.
－ 이보게, 어제는 대륙 전체에 비가 내렸는데 어찌 소식이 잠잠한가?
－ 아니, 이 사람… 자네 천축(天竺)에라도 다녀왔나?
－ 무슨 소리인가?
－ 벌써 보름째네.
－ 엉……?
－ 유월 들어 아직 한 번도 야우혼의 살수가 펼쳐지지 않았단 말이네.
－그렇다면 유월 들어선 아직 한 번도 야우혼의 살수를 받은 사람이 없단 말인가?
－물론이네. 한데, 이상해? 자신이 당했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더 날뛰어야 할 놈이 갑자기 죽기라도 한 듯 잠잠해졌으니…….
－ 누가 알겠나? 혹시 더 큰 꿍꿍이 속이 있을지…….
－어쨌든 사도천 대협께서 한시라도 빨리 재출도하셔야 할 텐데…….
－당연하지. 이제 야우혼을 대적할 사람은 오직 사도천대협밖에 안 계시네.
그렇다. 복수의 칼날을 천하 도처에서 휘두르던 야우혼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하나, 세인들은 그 사실에 더 큰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그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이에 세인들은 또다시 사도천을 떠올렸고 천의장 문이 다시 열리기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유월 열엿새.
<사도형(司道兄). 
나는 지금 대륙 남단 형양(衡陽)에서 술에, 미녀에, 그리고 밤비에 흠뻑 취해 있다오.
문득 사도형이 옆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이렇게 글을 드리오.
내일은 남악(南嶽)까지 갈까 하오.>
사도천, 그의 얼굴에는 한 올의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이 의문의 서찰을 읽은 것인지 안 읽은 것인지조차 분별하기 힘들 만큼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수하에게 이 서찰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접수되었는지조차도 묻지 않았다.
유월 열이레. 
<사도형.
남악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구려. 물론 밤비가 내려서 더욱 좋은 듯하구려.
내일 도착하는 녹구(綠溝) 또한 좋을 것이라 생각하오.>
또 서찰이 날아왔다. 
그러나 사도천은 이 의문의 서찰을 두 번째로 받아 들고도 어제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단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손에 든 섭선을 딱 한 번 가볍게 폈다 접었다는 것뿐이었다.
유월 열여드레.
<사도형.
녹구에 도착했소. 하루에 천 리를 걸으려니 심신(心身)이 곤하여 더이상 긴 글을 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시오.
나 역시 밤비를 즐기지 못해 한숨만 쉰다오.>
세 번째 서찰이다. 
사도천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 없었고, 잠깐 동안 섭선으로 탁자를 몇 차례 토닥거렸다.
유월 열아흐레.
<사도형.
장사성(長沙城)은 참 운치가 있는 성입디다.
아마도 내가 밤비를 좋아해서 그렇게 보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오. 
내일 상음(尙陰)까지 가려면 일찍 쉬어야겠소.>
네 번째 서찰을 받았을 때 비로소 사도천의 얼굴에 한 가닥 표정이 떠올랐다. 
미소, 실같이 가는 미소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빠르게 사라진 경멸과 조소의 미소였다.
유월 스무날, 상음(尙陰).
유월 스무하루, 악양(岳陽).
유월 스무이틀, 주안(周安).
네 번째 서찰을 받을 때부터 떠오른 사도천의 미소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를 거치면서 짙어지더니 마침내 여덟 번째에 이르러서는 박장대소(拍掌大笑)로 변했다.
"와하핫! 진정 우스운 장난을 하고 있군. 와하하핫!"
한번 터진 그의 웃음은 그칠 줄 모르고 한동안 계속되었다.
한데, 그 동안 한 번도 표정의 변화를 떠올리지 않던 그가 미친 듯 웃어댄 파안대소의 의미는 실로 컸다.
그는 이미 이 서찰을 누가 보냈는지 알았고, 서찰을 보낸 인물은 형양에서부터 천의장이 위치한 금릉을 향해 계속 오고 있다는 것, 또한 그 동안 그의 내면에 이는 격정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대소였던 것이다.
도대체 누구인가? 
천하의 사도천에게 감히 이 같은 장난스러운 연서(連書)를 계속 보내 오는 인물은?
유월 스무사흘.
 
<사도형.
이제 그대의 금릉이 온 길만큼만 더 가면 된다는구려.
밤비 속에서 만난 어떤 주정뱅이가 가르쳐 주었소.
내일은 여삼(如三)에 들러 시골노인의 구수한 옛이야기나 들어 볼까 하오.>
아홉 번째 서찰이었다.
사도천의 표정은 다시 첫번째 서찰을 받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하나, 표정은 같았지만 그 표정이 의미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랐다.
이제 이 아홉 번째 서찰로 그것을 쓴 사람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금릉을 가리켜 그대의 금릉이라 했고, 아홉 통의 서찰 중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은 말은 바로 밤비였다.
사도천의 입술이 방향도 없이 열렸다.
"심랑을 들라 해라."
대답도 없이 바람 스치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사도천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최대의 비밀병기(秘密兵器)인 심랑을 찾은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읽고 웃고 했지만 그는 이미 마음 속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있었던 것이다.
희다는 것의 정의는 어디까지인가?
방금 빻아낸 밀가루? 아니면 밤새 소복이 쌓인 눈(雪)?
그것들은 분명 희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흰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진정 희다고 정의 내려질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이 여인의 살결밖에 없다.
한 점 눈가루가 이 여인의 볼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분명 검게 보일 것이고, 이 여인이 분을 바른다면 스스로 검둥이가 되고 싶어서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감히 직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피부는 너무나 희어서 일체의 시선마저 모조리 튕겨낼 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다.
한데, 그 투명한 흰 피부와 대조적으로 그녀의 일신에 걸쳐진 옷은 온통 흑색 일색이었으며, 칠흑 같은 수발은 뒷꼭지에서 질끈 동여매어져 물오른 엉덩이까지 덮은 채 검은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흑(黑)과 백(白)의 기막힌 조화라고나 할까?
흰색은 더 희고, 검은색은 더 검었다. 
더욱이 그 속에서 피어 오르는 뇌살적인 아름다움은 감히 필설(筆舌)로 형언하기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희어서 우아했고, 검어서 고고한 여인.
그녀는 지금 길 옆에서 장엄하게 그늘을 짓고 서 있는 거대한 노송(老松) 등걸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연갈색 노송 등걸에는 육안으로 쉽사리 분별하기 어려운 미세한 상흔(傷痕)이 있었다. 손가락 두 개를 벌린 듯한 형상의 기묘한 상흔이었다.
여인의 흑백이 선명한 눈동자가 서서히 여러 가지 표정의 색깔로 바뀌더니, 종래에는 진하디 진한 희열의 색깔로 정착했다.
"무영도류(無影刀流)!"
원래는 차분했으리라 생각되는 그녀의 음성은 가볍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마쓰나미 아까시(松葉明石)… 그 동안 잘도 숨어 다녔다. 무영도류가 은밀류의 하수임을 나 미요시노(深芳野)가 보여 주겠다."
이제 여인은 흑의 속의 교구마저 파들파들 떠는지 흑의자락이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데, 미요시노라면 환락도에서 동영 최대의 검파인 무영도류의 지존인 마쓰나미 아까시가 백운향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했던 바로 그 신비여인이 아닌가?
한동안 무영도류의 검흔을 살피던 미요시노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는 작은 격투가 있었던 것으로 예상되는 흔적이 이곳 저곳에 남아 있었다.
미요시노는 그 작은 상황을 하나하나 떠올리듯 하며 오감과 육감을 최대로 곤두세웠다.
'풀이 북쪽 방향으로 꺾여졌다. 따라서 진행 방향은 북쪽. 발자국의 깊이로 보아 이십 전후의 남자. 그의 체취는 은밀추적(隱密追跡) 천이백사십이류(千二百四十二類) 중 팔십오류(八十五類). 이것만으로도 그 자는 이제 내 수중을 빠져 나갈 수 없다.'
실로 놀라운 관찰력과 안력(眼力)을 지닌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미요시노가 두 번째 흔적을 발견한 것은 녹구(綠溝)에서 장사(長沙)로 이어지는 관도(官道) 옆 숲 속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된 시체가 바로 그녀가 발견한 두 번째 흔적이었다.
"신도류(神刀流)… 입화(入化)의 기(氣)에 이르러 있군. 놈이 이곳을 지난 지는 이틀이다."
미요시노는 시체의 악취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주도면밀하게 살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의 손에 긴 머리카락 한 올과 찢겨진 갈의조각이 들려졌다.
"갈의에 녹피화(鹿皮靴), 그리고 머리는 묶지 않은 상태. 비록 신도류를 썼지만 동일인물이다. 점차 체취가 강해지고 있어. 이제 닷새면 놈은 내 시야에 들어 올 것이다."
그녀의 처연하도록 흰 피부가 격동으로 미세하게 홍조를 띠었다. 흥분이었다.
중원의 살수이든, 동영의 인자이든 그들에게 있어 흥분이란 금물(禁物)이다. 
하나, 이 순간 그녀는 흥분하고 있었다. 
오직 하나의 일념으로 낯선 이국땅을 헤맨 지 어언 오 년. 이제 그 인고(忍苦)의 세월에 대한 대가를 치룰 때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만큼이나마 자제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유월 스무닷새.
<사도형.
중도(重都)의 밤비는 유난히 좋았소. 나의 발길을 하루씩이나 잡아 놓을 만큼 말이오.
오늘 하루 더 중도에 머문 후 내일이나 강포(江浦)로 떠날까 하오.>
그것은 열 번째 서찰이었다.
아홉 번째 서찰을 받아든 이후 이미 철저한 대책이 마련되었다.
사도천의 얼굴에 일 점 가식도 섞이지 않은 소탈한 미소가 싱긋 떠올랐다.
"이것을 심랑에게 보내라."
그의 말과 함께 서찰은 방향 없이 방 안을 한 바퀴 맴돈 후 연기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후후, 그 동안 수고했네. 자네는 아직 심랑 하나로도 충분해."
사도천은 창 밖을 내다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몸에는 지고함을 뛰어넘어 탈속함이 안개처럼 서려 있고, 그것은 충만된 자신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무당장문인(武當掌門人) 친전(親前).
내일 오시(午時) 전, 오강(烏江) 나루터를 점하면 야우혼은 무당에 의해 잡힐 것이오.>
<개방방주( 幇幇主) 친전.
내일 오시 전, 대파벽(大波壁)을 점하면 야우혼은 개방에 의해 잡힐 것이오.>
<곤륜장문인(崑崙掌門人) 친전.
내일 오시 전, 탄현(灘縣)을 점하면 야우혼은 곤륜에 의해 잡힐 것이오.>
서명도 없는 짤막한 서찰이었다. 
그것은 유월 스무닷새 어둑어둑한 초저녁 어스름을 몰고 천하 각처의 정대문파 지존들 앞으로 전달되었다.
시간은 한결같이 오시를 가리켰지만 그들이 점거할 지명은 각기 달랐다. 
오강 나루터를 비롯하여 대파벽, 탄현, 해심천(海心川) 등등…….
하지만 그 일단의 지명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중도(重都)로부터 강포(江浦)로 이르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찰에는 하나같이 야우혼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서찰을 띄운 장본인은 누구인가?
어쨌든 갑자기 사라진 야우혼에 대해 전전긍긍하며 암중모색(暗中摸索)을 서둘던 정파인들에게 있어 이것은 어둠 속의 빛이었다.
각 문파에 의문의 서찰이 전해진 무렵. 
중도와 강포 사이의 한 지류(支流)인 오강 나루터에 한 척의 나룻배가 띄워지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을 헤치며 물살을 가르는 작은 나룻배에는 단 한 명의 손님만이 타고 있었다. 
긴 흑발을 멋들어지게 휘날리는 갈의미청년이었다.
그는 지금 뱃머리 앞에 우뚝 선 채 어스름에 덮인 저 앞 어딘가로 조용히 시선을 두고 있었다.
"사도형, 미안하구려. 하나 속고 속이는 것. 이것은 분명 그대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이오."
그는 뱃전의 포말이 흰거품을 몰고 자신의 발등을 적시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올의 감정도 억양도 없는 목소리를 뱉어 냈다.
점차 검게 변해 가는 강물과 그 검은 천을 쪼개며 나가는 뱃전 위에 그린 듯 우아하고, 자른 듯 단아하고, 얼은 듯 차갑게 서 있는 갈의미청년. 
그는 다름아닌 백운향이었다.
한데, 그의 얼굴에 구름처럼 덮혀 있는 저 비장함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잃어 버린 세월을 찾으러 나 이렇게 간다오.
그것이 내 가슴 속에 한(恨)으로 억눌려진 이 상태로선, 나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오.
스스로 붙들어 꿇어앉히고, 뜨겁게 타오르고, 차가운 한을 달래기 위해 허벅지 살을 저며 내며 삭인 밤이 몇 밤이었소.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
하지만 나는 가야 하오. 아직도 내게서 떨쳐지지 않는 그를 잊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흩날리며 차가운 검날을 의식하며… 이렇게 나는 가야 하오.
우리의 승부는 그 다음일 게요. 내가 그를 잊고, 그가 나를 의식하는 그 순간부터 말이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도대체 그는 지금 무엇을 목적으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어쨌든 야우혼을 쫓아 내일 오시에 이곳 오강에 당도할 무당의 도사들은 헛탕을 칠 것이다.
야우혼은 오늘 오강을 건너고 있으니 말이다.
추적술은 천 리든 만 리든 쫓는 자의 능력 여하에 따라 결판난다. 그곳이 인적 끊긴 산이나 들이라면 더욱 좋다.
하나, 추적술의 최대 약점은 인파가 붐비는 곳으로 추적의 대상자가 사라졌을 때 야기된다.
추적 대상자의 발자국은 뭇사람들의 발자국에 의해 지워지고, 추적 대상자의 체취는 여러 사람들의 체향(體香)에 섞여 방향을 잃게 되니 자칫하면 십 년 추적공이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중도(重都)의 저녁 저잣거리는 무척 붐볐다. 
각색의 복장과 갖가지 체향을 풍기는 사람과 사람으로 발 딛을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한데, 그 많은 사람들 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여인이 있었다. 흰 것은 너무 희고 검은 것은 너무 검은 여인. 
은밀류의 미요시노였다.
그녀는 이 닷새 동안 한잠도 자지 않고, 한 끼의 식사도 하지 않으며 추적을 벌여 이곳 중도까지 오기에 이른 것이다.
한데, 지금 그녀는 흰 얼굴 위로 다급한 빛을 떠올린 채 쉴 새 없이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좀 전까지 점점 가까워지던 추적의 자취를 놓친 것이다.
사람 사이를 누비는 그녀의 흰 얼굴 위로 아득한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실망에서 오는 허탈감이 그녀의 인내를 한계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거의 포기상태로 인파 사이를 뚫고 객점들이 줄지어 선 길을 걷고 있었다. 
푹 수그러진 고개와 축 늘어뜨린 가냘픈 어깨는 차라리 애잔한 동정심을 자아내게 했다.
이로써 평생 숙원의 실마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한데, 그때였다. 
그녀의 고개가 번쩍 쳐들려지는가 싶자 그녀의 섬세한 교구는 이미 지면을 박차고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글쎄요? 갈의을 입은 흑발의 젊은이가 어디 한 둘이어야지요?"
십팔구 세 가량의 점소이는 미요시노의 유난히 흰 얼굴을 눈부신 듯 바라보며 말했다.
미요시노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잘 생각해 보거라. 무엇을 시켰다거나, 아니면 눈초리가 무서웠다거나……."
"아, 손님도 참 딱하십니다. 어디 그런 것을 가지고……?"
미요시노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나이는 이십대 전후, 신발은 녹피화, 표정은 차가울 것이며……."
미요시노는 이미 한 번 본 사람을 이야기하듯 숨쉴 겨를도 없이 인물의 특징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찬찬히 그녀의 말을 듣던 점소이의 얼굴이 들려지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혹시……."
"생각났느냐?"
"손님께서 말씀하신 분과 비슷한 사람이 있긴 있었습니다요."
"자세히 말해 보거라."
미요시노는 기대에 찬 얼굴로 다급하게 재촉했다.
"지필묵(紙筆墨)을 시켰는데… 그 사람 꼭 죽으러 가는 사람 같았죠. 참, 오강이 어디냐고 묻기에… 엇?"
점소이는 말을 하다 말고 경악성을 토해 냈다.
그의 입에서 오강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는 눈앞이 허전함을 느꼈고, 그때는 이미 그녀의 모습이 그곳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미요시노는 다시 추적의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방향은 오강이었다.
풀잎, 새파란 풀잎 하나가 주사빛 입술에 물려 있었다.
백운향은 오시의 온묘로운 햇살 아래 풀잎을 입에 물고 언덕의 풀밭 위에 팔베개를 한 채 누워, 언덕 아래의 오강 나루터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후, 드디어 환영인사를 하러 나타나시는군. 역시 사도천, 그답다. 스스로는 구름 속에 감추고 격장지계(激奬之計)를 써 남의 손으로 상대를 하려 하다니… 그러나 나도 그 동안 컸다는 걸 그는 너무 간과해 버렸다."
풀잎 새로 차분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언덕 밑 오강 나루터. 
그곳은 지금 평소와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한결같이 도사 차림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한 마리 늑대를 사냥하기 위해 몰려든 사냥꾼들이었다. 
의문의 서찰을 받고 야우혼을 잡기 위해 급파된 일당백(一當百)의 무당파 절정고수들이었던 것이다.
하나, 그들은 헛탕을 쳤다. 
영리한 늑대에 의해…….
백운향이 풀잎을 씹으며 오강 나루터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시각. 
천의장의 사도천은 웃고 있었다.
뜻 모를 웃음이었다. 유쾌한 듯하면서 허탈하고, 허탈한 듯하면도 대견하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가 이만큼이라도 표정을 밖으로 드러내 놓은 것은 하루에 한 장씩 어김없이 날아드는 서찰을 마주할 때뿐이었다.
<사도형.
미안하게 되었소. 어제 갑자기 밤비가 그쳐 서둘러 발길을 떼어 놓고 말았구려.
지금 이 글은 오강을 벗삼아 한 잔 술을 기울이며 쓰고 있다오.
오늘은 강포(江浦)에서 하루 묵고 내일은 마휘(馬煇)에서 저녁을 먹게 될 것 같소.>
"후후, 컸군. 많이 컸어."
사도천은 뜨거운 찻물을 후후 불어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하듯 마시며 칭찬인지 조소인지 모를 말을 뱉어 냈다.
그의 음성이 방향도 없이 허공을 향해 이어졌다.
"심랑에게 전해라. 주먹을 쥐라고……."
"그는 이곳에서 두 시진 동안 머물렀다. 내일이면 그는 내 시야 속에 잡힌다."
미요시노는 주위를 다시 한 번 세세히 살핀 후 총총히 사라졌다.
한데, 흑백이 선명한 미요시노라는 이 동영 미녀가 쫓는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가 누가 되었든 그녀의 집요함과 권토중래(捲土重來)의 한(恨)은 가공하게 그를 덮칠 것이다.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추적의 대단원의 막은 과연 어디서 막을 내릴 것인가?
천룡승천무(天龍昇天舞)
<사도형.
금릉은 좋구려. 항마령(降摩嶺)에서 내려다보니 더욱 좋고, 밤비가 내리니 그 또한 좋은 듯하구려.
이제 사도형의 옥체금안(玉體金顔)을 우러러 술 한 잔 따라 올릴 날이 목전에 다가선 것 같아 벌써 가슴이 뛰는구려.>
장의(長衣), 단삼(短衫), 장포(長袍), 경장(輕裝) 등의 수많은 옷가지가 널려 있다.
물건을 파는 점포의 종류가 많다 하나 의복점만큼 화려한 곳도 드물다. 각양각색의 모양과 색깔이 그렇고, 걸어 놓고 눕혀 놓고 쌓아 놓은 진열 상태가 그러하다.
백운향은 빠르게 십여 평 남짓의 의복점 내부를 훑어보더니 한켠에 금박무늬가 수놓인 백의를 집어 들었다. 
일견해 보기에도 대가집 귀공자들이나 입을 듯한 예복(禮服)이었다.
그는 지금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가는 길은 험난했지만 사도천에게 있어 그는 어떤 의미로든 귀빈(貴賓)이었고, 그 또한 최고의 격식과 최고의 예우로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눈(目), 그 눈은 항상 졸음이 가득한 눈이었다. 
한데, 그 눈이 돌연 신선한 광채와 함께 생기를 되찾고 점차 희열을 띄어 간 것은 백운향이 의복점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였다.
'한 치의 빈틈도 찾아볼 수 없는 저 몸가짐. 심유무구한 시선. 저것은 일부러 꾸민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로 피어나는 저 대인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어.'
그 눈은 백운향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살피며 연신 감탄을 불어 내고 있었다. 
그 눈의 주인은 의복점의 주인인 갈노인(葛老人)이었다.
갈노인은 깡마른 몸집에 대머리가 벗겨졌다는 것 외에는 한 점 특징도 찾아볼 수 없는 장돌뱅이의 전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하나, 지금 이 순간 노인의 눈은 내쏘듯 신광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운향은 묵묵히 자기가 고른 금박무늬의 백의를 갈노인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두 눈에는 얼마냐고 묻는 눈빛 이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갈노인은 재빨리 신광을 갈무리했다.
"험, 그것이… 그러니까 은자 열두 냥은 받아야 하는 건데 특별히 열 냥으로……."
하나, 갈노인의 음성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쩔렁…! 그의 앞에 어느새 은자가 떨어져 내린 것이다. 정확히 열두 냥이었다.
"받아야 하는 거라면 받으면 되는 것이오."
그 말은 백운향이 의복점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갈노인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림을 느꼈다.
아무런 특징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내뱉어진 그 말 한 마디에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백운향은 볼일을 다 보았다는 듯 이내 의복점 문을 나섰다.
좌판 위에 걸터앉아 있던 갈노인이 후다닥 뛰어내리며 다급히 백운향을 불러 세운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공자!"
갈노인의 다급한 부름에 백운향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는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갈노인은 은자를 내밀었다.
"공자, 이 돈은 받고 싶지 않구려."
백운향이 비로소 돌아섰다.
갈노인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간절히 말을 이었다.
"대신 이 늙은이와 차 한 잔만 마셔 주겠소?"
백운향의 시선이 일시에 갈노인의 전신 구석구석으로 틀어박혔다. 
무심한 시선과 애원 섞인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묘한 침묵이 흘렀다.
백운향의 고개가 정확히 한 번 끄덕여졌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모든 이야기가 끝난다면……."
"고맙소. 자, 뒷문으로……."
갈노인은 눈으로 뒤쪽의 쪽문을 가리켰다.
백운향은 서슴없이 갈노인이 가리킨 쪽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갈노인은 서둘러 점포 문을 닫아 걸고 한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철웅(鐵雄).
그는 웃통을 벗어젖힌 채 시뻘겋게 달구어진 쇳조각을 풀무질하고 있었다.
이제 사십을 갓 넘어 보이는 그의 상체는 근육으로 똘똘 뭉쳐져 일견해 보기에도 건강미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탕! 탕! 그의 억센 풀무질과 함께 달구어진 쇳조각은 휘어지고 다져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여보게, 명검(名劍)을 한 자루 만들게."
갑자기 대머리 노인 하나가 철물점으로 뛰어들며 느닷없이 소리쳤다. 
대머리 노인은 다름아닌 의복점 주인 갈노인이었다.
순간 철웅은 풀무질하던 망치와 쇳조각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철물점 문을 걸어 잠근 후, 망치 소리와 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석수장(石手莊) 쪽으로 바람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삼형(三兄), 용(龍)을 제작할 때가 왔소."
턱에 숨이 차도록 달려오던 철웅의 말에 오십대 후반의 각석수(角石手)는 부처의 눈알을 새기던 정(釘)을 쨍그랑! 떨구더니 철웅이 사라져 간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각석수가 찾아간 곳은 금릉제일의 만서고(萬書庫)였다.
아직 아침이라 그런지 한 사람의 손님도 보이지 않는 만서고 내 수백 개의 서대(書臺) 앞에서는 한 명의 청수한 노인이 서적을 정리하고 있었다.
만서고 주인 만통노인(萬通老人).
이미 수대에 걸쳐 가업(家業)으로 이어져 내려온 만서고를 지키며 살아온 이 노인을 금릉 사람들은 만통노인이라 불렀다. 
그는 그만큼 각 분야에서 박학달통(博學達通)한 인물이었다.
만통노인은 서고를 정리하다 급히 뛰어드는 각석수를 바라보았다.
"대형(大兄), 이 책들이 진정 필요하게 되었소."
각석수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람처럼 휑하니 사라졌다.
만통노인의 노안이 가볍게 떨리며 서대를 훑어보았다.
"부디 아우들의 눈이 정확했기를……."
만통노인은 앞의 세 사람과는 달리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만서고 문을 천천히 내린 뒤 각석수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가는 방향은 갈노인의 의복점 쪽이었다.
한 칸의 단촐한 방. 
장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은은한 아침 햇살이 비쳐 드는 좁은 창문과 그 햇살을 마주한 조그만 탁자 하나가 전부였다.
지금 그 탁자 앞에는 백운향이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듯한 빈 의자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백운향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무심한 시선으로 탁자 중앙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 기다리라던 노인은 이미 일 각이 지났음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네가 젊은 사람을 데리고 실없는 장난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노인의 눈빛은 그만큼 진지했었다.
백운향은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또 일 다경(茶更)의 시간이 흘렀을까? 
백운향은 무료함을 느끼며 팔짱을 끼고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그때였다. 
돌연 한 줄기 웅장한 소성(嘯聲)이 방 안을 쩌르릉 울렸다.
"만마(萬魔)가 회동함에 천룡(天龍)이 잠을 깨고……."
 그 음성은 밖에서 시작되었으나 어느새 백운향의 왼편에 놓인 의자 위에서 끝을 맺었다. 실로 귀신 같은 현신(現身)이었다.
음성을 토해 낸 장본인은 바로 철물점 주인 철웅이었다.
가슴에 한 마리 날아오를 듯한 천룡(天龍)이 수놓아진 금의를 걸친 그의 모습은 좀 전에 보았던 일개 대장장이 철웅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눈에서는 예리한 광망이 줄기줄기 폭출하고 전신에서는 태산과도 같은 위엄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백운향은 그 기세에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한데, 철웅의 장중한 외침이 끝나는 순간 그 뒤를 잇는 웅대한 음성이 또다시 방 안을 뒤흔들었다.
"천룡은 잠을 깨자 승천의 몸부림을 쳐대니……."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철웅과 똑같은 복장을 한 각석수였다.
"천룡의 몸부림에 천하가 진동하고……."
"만마가 잠들고 천하가 광휘(光輝)롭도다!"
마지막 외침은 만통노인이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내지른 것이었다.
모두 모습을 드러낸 그들 네 사람의 복장은 하나같이 천룡이 수놓아진 금의였고, 풍기는 기도는 갈수록 더욱 가공스러워졌다.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뛰어나도 너무 뛰어난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신분을 숨긴 기인(奇人)들이었단 말인가?
좁은 방 안은 때아닌 광풍노도를 만난 듯 팽만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백운향은 자신을 향해 쏠리는 무형(無形)의 압력에 절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멋모르고 허공을 주유하던 먼지들이 파삭파삭 소리를 내며 흩어져 날렸다. 
그리고 이 모든 분위기는 침묵을 깨고 들려 온 만통노인의 음성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소협, 본의 아니게 실례했소."
백운향은 묵묵부답이었다.
"지금부터 노부가 말하는 대로 공력을 운용해 보아 주시오."
백운향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일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만통노인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무한한 현기(玄氣)가 서려 있었다.
"전신공력을 단전(丹田)으로 모으시오."
백운향은 마치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만통노인이 시키는 대로 공력을 단전으로 끌어모았다.
"단전에 모인 공력을 이번에는 일시에 십이중루(十二重樓)로 퍼뜨리고, 노부의 기합성과 때를 같이하여 십이중루로 퍼졌던 모든 공력을 천령혈(天靈穴)로 일시에 내치시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만통노인은 지금 백운향으로 하여금 자결을 하라는 것인가?
수 갑자에 달하는 전신공력을 십이중루로 퍼뜨렸다가 일시에 머리 위 천령혈로 쳐낸다면 백이면 백,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아닌가!
백운향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재론(再論)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생면부지인 자신에게 어찌 자결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만통노인 이하 사 인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에 떠오른 신광을 더욱 빛내며 유심히 백운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운향은 내심 소리 없는 탄식을 발하고 말았다. 
악의(惡意)도, 가식(假飾)도 전혀 없는 그들의 열망 어린 시선에 약해지는 자신을 도저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제길, 도처에 죽음이로군. 후후, 나란 놈은 죽음의 굴레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운명을 타고난 것인가? 그래, 어차피 이런 운명이라면…….'
운명아, 운명아, 죽음의 운명아.
네가 항상 나를 따르니 차라리 내가 너를 맞으러 나가리라.
그래, 우리 멋지게 싸워 보는 거다.
나를 위한 네가 아니듯, 너를 위한 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백운향은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진기를 단전 가득 끌어모은 후 팽팽히 차오른 공력을 십이중루로 분산시켰다.
"갈(喝)!"
만통노인의 폭갈이 방 안을 쩌렁하게 울렸다.
슈르르르… 파파파팍－!
그의 외침에 따라 십이중루로 분산되었던 백운향의 전신공력이 노도처럼 거침없이 혈도를 타고 치솟아 올랐다.
퍼퍼펑－! 쩌－쩍!
백운향은 하늘이 쪼개져 버리는 듯한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순간 의식이 아득해지면서 백운향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만통노인의 흥분에 들뜬 물음에 나머지 삼 인은 하나같이 격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흥분을 감출 수 없다는 듯 붉은 홍조가 떠올랐으며, 천룡이 아로새겨진 가슴 부위가 크게 들먹거리고 있었다.
한데,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그들이 본 것은 하나의 용(龍)의 형상이었다.
백운향의 전신 공력이 천령혈로 몰아친 순간 눈 깜짝할 새에 나타났다 사라진 용의 형상을 그들은 보았던 것이다.
"오오, 드디어 천룡문(天龍門)의 천년유시(千年遺示)가 풀리는구나!"
만통노인은 격정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의자 밑에 널부러진 백운향의 몸을 끌어안고 격한 음성을 터뜨렸다.
"대형!"
나머지 삼 인도 끓어오르는 격정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진한 격동성을 발했다.
한데, 천룡문이란 또 무엇인가? 
어느 하늘 아래, 어느 세월에 생긴 이름인가?
모른다. 그것은 소문조차, 전설조차 일언(一言)의 회자(膾炙)를 회피해 온 생소한 문파의 이름이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이들 사 인이 그 천룡문의 후예이고 그들은 천 년 동안 대를 이어 누군가를 기다려 왔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백운향을 말이다.
백운향의 시체처럼 창백한 알몸이 탁자 위에 반듯하게 눕혀졌다.
그를 바라보는 사 인의 얼굴은 이제 흥분 대신 비장한 결의가 감돌고 있었다.
"자, 아우들 수고를……!"
만통노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그 말에 따라 철웅이 맨 먼저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나섰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 묵도(墨刀)가 들려 있었다.
"천 년의 세월도 모자랐소. 이십팔 대를 걸쳐 두드려 온 한 조각 쇠붙이와 일 초의 도법(刀法)을 문주(門主)께 바치오."
철웅은 말이 끝나자마자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묵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다. 빛도 없다. 공기도 바람도 숨을 죽였다.
도광(刀光) 속에 천룡이 춤추니, 사해(四海)가 눈을 감고 구주팔황(九州八荒)이 돌아눕는다.
그것은 도법이로되 도법이 아니었다.  
빛처럼 빠르고 바람처럼 표홀(飄忽)하니, 흔적 없는 그림자련가?
철웅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곤두서고 어느새 금의가 축축이 젖어들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야－합!"
푸욱－! 굉폭한 기합성과 함께 그의 손에 잡힌 묵도가 죽은 듯 누워 있는 백운향의 심장을 꿰꿇고 들어갔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사람의 심장에 도를 꽂다니…….
하나, 그들은 이미 예상한 일인 듯 아무도 경악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묵도에 심장을 관통당한 백운향의 왼쪽 가슴에서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대형, 소제는 무영혈라도법(無影血羅刀法)을 이미 문주께 전수시켰으니 나머지는 대형들께 부탁하오."
철웅은 갑작스레 초췌해진 얼굴로 만통노인을 바라보았다.
"사제여, 수고했네. 아우가 한만큼 천하는 웃을걸세."
만통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철웅의 모습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삼제여, 자네 차례일세."
만통노인은 각석수를 바라보았다.
"천 년 동안 깎아 왔소. 한데도 열 개를 못 채워 아홉 개의 흑호접(黑胡蝶)과 일 초의 호접무(胡蝶舞)를 바치나이다."
각석수의 손에는 새까만 아홉 마리의 나비가 들려 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새까만 묵광(墨光)이 섬뜩할 만큼 눈을 아리게 했고,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고 창천(蒼天)으로 훨훨 날아오를 듯 정묘한 아홉 마리의 흑호접이었다. 
살아 있는 생물인 듯 생생한 생명력마저 느끼게 해 주는 그것은 진정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휘리리릭－! 각석수의 손이 횡(橫)에서 종(縱)으로, 다시 종에서 각(角)으로 쉴 새 없이 휘둘러졌다. 
순간, 그의 손길에 따라 천천히 나비가 하나 둘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방 안은 일순간 나비의 세상이 된 듯 싶었다. 
휘류류류－! 어느 한순간 한가로이 날던 아홉 마리의 나비가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환상처럼 나비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홉이 팔십일 개로, 팔십일 개가 일천육백이십 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일순간 방 안은 흑호접의 무수한 그림자로 완전히 암흑 일색으로 변해 버렸다.
번－쩍! 그 암흑 사이로 찬란한 하나의 비늘(鱗)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나타났다 싶은 순간 어느새 거대한 한 마리 천룡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착각인가? 아니면 가공절륜한 신공의 위력인가?
환상적인 나비의 춤이 만들어낸 장엄한 천룡의 용트림, 그것은 이제 호접무가 아니라 천룡무(天龍舞)였다. 내치는가 하면 뻗어들고, 굽어 도는가 하면 어느새 내갈긴다.
"헉헉……!"
각석수의 입에서 마침내 거칠 숨결이 토해지더니 쩌렁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천룡호접무(天龍胡蝶舞)－!"
그의 외침이 이는 순간 허공을 수놓던 천룡이 무영혈라도를 가슴에 꽂은 채 누워 있는 백운향에게 쏘아져 내렸다.
파파파팍－!
아홉 개의 음향이 일어남과 동시에 천룡의 형상도 호접의 그림자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마치 꿈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땀에 젖은 각석수의 거친 숨결만이 결코 꿈이나 착각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헉헉! 대형, 후의 일을……."
"수고했네, 삼제."
만통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각석수 또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러자 갈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육각으로 접힌 한 벌의 흑의가 들려 있었다.
"오백 년 동안 실을 뽑고, 삼백 년 동안 옷을 지었으며, 이백 년 동안 단련시켰소. 삼가 천잠만병보의(天蠶萬兵寶衣)를 바치나이다." 
말을 마친 갈노인의 흑의를 든 손이 앞으로 가볍게 내밀어졌다.
스르르르…! 순간 눈으로 분별하기 힘든 가늘디 가는 실이 갈노인의 손으로부터 백운향의 몸을 향해 뻗기 시작했다.
천잠만병보의를 이루고 있는 천잠사가 한 올 한 올 풀리며 백운향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날아간 천잠사는 백운향의 몸에 닿기가 무섭게 다시 원래의 흑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며 백운향의 몸을 감싸 갔다.
이내 갈노인의 손에 들린 천잠만병보의는 거의 다 풀어졌고, 그와 반대로 백운향의 몸은 점차 검은 천잠으로 둘러싸여지고 있었다.
이 순간 갈노인의 안색은 마치 밀납을 바른 듯 창백했고, 입가로는 한 줄기 혈선이 번져 가고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그 일이 얼마나 엄청난 내력 소모를 필요로 하는지 능히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천잠사 올 끝이 갈노인의 손을 떠나자, 그는 허탈한 기색으로 만통노인을 돌아보았다.
"그럼, 뒷일은 형님께서……!"
"아우여, 수고했네."
갈노인은 만통노인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히고는 이내 바람처럼 방을 떠나 갔다.
이제 방 안에 남은 사람은 만통노인과 전신에 무영혈라도와 아홉 개의 흑호접을 꽂고, 천잠만병보의라는 흑의를 입은 채 죽은 듯 누워 있는 백운향뿐이었다.
만통노인은 천천히 백운향 앞으로 다가섰다. 이어 그는 두 손을 평평하게 들어올렸다.
손바닥이 백운향과 마주본 순간, 그의 손이 일순 금빛을 띠었다 사라졌다. 
그와 함께 열 개의 검은 물체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것은 철웅과 각석수가 꽂은 무영혈라도와 아홉 개의 흑호접이었다.
한데, 그것들이 뽑힌 백운향의 몸에서는 놀랍게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일단 열 개의 병기를 뽑아 낸 만통노인은 품 속에서 한 권의 얄팍한 책자와 한 마리 천룡이 수놓아진 금색 깃발을 꺼내들었다. 
잠시 감회 어린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만통노인은 그것을 백운향의 머리맡에 놓았다. 
그리고 그는 잔잔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문주, 지금부터 노부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지금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죽은 듯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람을 향해 잘 들으라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하나, 무림이란 곳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한 곳이다. 
그 중 하나가 잠혼섭령대법(潛魂攝靈大法)이다.
귀를 통해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뇌에 직접 말을 전달하는 신공이 바로 잠혼섭령대법인 것이다.
일단 잠혼섭령대법을 펼치면 듣는 자는 영원히 그 말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법을 펼치는 시전자는 공력소모가 극심해 자칫 잘못하다간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위험성이 커 웬만하면 시전하길 꺼린다.
한데, 지금 만통노인은 서슴없이 잠혼섭령대법을 시전해 백운향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 문주, 천룡문에 대해 알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 네 가문은 단지 오늘을 위해 존재해 왔던 것이니 이 순간부터 천룡문에 대해선 잊으십시오. 이 안배는 우리도 모르는 어떤 한 분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분의 안배에 따라 천룡문은 천 년에 걸쳐 천룡지체(天龍之體)를 찾아 헤맨 것이며, 이제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하나, 문주께서는 잊으셔야 되지만 우리는 항시 문주의 부름을 기다릴 것입니다. 여기 천룡승천기(天龍昇天旗)를 남기니, 정히 우리의 미진
한 힘이라도 쓰일 때가 있으시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천룡승천기를 꽂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천룡문의 유시를 남기신 그분의 안배에 따라 오대파천무(五大破天舞) 중 천룡승천무(天龍昇天舞)를 남기오니 호협(豪俠) 협걸(俠傑)이 되시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보람을 느끼게 해 주시옵소서.
만통노인의 유장한 말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아, 그들 사 인! 
그들은 오직 이 한순간을 위해 천 년을 기다려 왔다니, 실로 눈물 겨운 숭고한 희생이 아닐 수 없었다.
한데, 오대파천무의 하나인 천룡승천무가 그들에게서 나타날 줄이야.
절대기연(絶代奇緣)!
백운향은 운명처럼 미증유(未曾有)의 절대기연을 얻은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전부터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닷새 전부터라고 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사흘 전부터라고 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사흘 전부터였다.
갈노인의 의복점 앞, 그곳엔 사흘 전부터 한 송이 흑부용(黑芙蓉)이 피어 있었다. 눈보다 흰 살결에 삼단보다도 검은 옷차림의 흑부용.
발 낮은 평상 위에 푹신한 융단을 깔고, 연두색 차일로 햇빛을 가린 채 사흘을 하루같이 갈노인의 의복점 앞에 진을 치고 굳은 듯 앉아 있는 여인. 
그녀는 죽음의 추적을 서두르던 미요시노, 바로 그녀였다.
한데, 그녀는 추적을 포기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었다. 미요시노는 결코 추적을 쉽게 포기할 그런 여인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자기가 추적해 온 사람이 있는 곳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추적과 잠입에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영밀문의 인자술로도 그가 있는 곳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수십 번 시도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이에 그녀는 그가 언젠가는 그 장소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확신하에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아마도 추적하던 그 인물이 그 장소를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면 그녀 역시 호호백발 할망구가 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기다릴 것이다.
미요시노의 이 기행(奇行)은 금릉 전체에 커다란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그로인해 갈노인의 의복점 주위는 그녀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에 참다 못한 갈노인은 그녀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퍼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갈노인의 장사가 그녀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녀의 표정은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갈노인을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다. 
갈노인은 이제 제풀에 지쳐 욕하는 것마저 중단하고 있었다.
번쩍! 항상 반개(半開)해 있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지면서 빛을 발했다. 
그리고 흑백 선명한 두 개의 눈동자가 빠르게 앞으로 향했다.
그 두 개의 눈동자는 지금 막 갈노인의 의복점 안으로 들어서는 흑의미청년의 완강해 보이는 어깨에 딱 고정되어 있었다.
'그다!'
눈동자는 그렇게 외쳤다. 
그 동안 추적해 보며 맡았던 체취, 생각과 사실로 유추(類推)해 냈던 한 인물의 형상과 어김없이 맞아 떨어지는 그였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갈의가 흑의로 바뀌어졌다는 것뿐이었다.
미요시노의 감각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곤두섰다.
'침착해야 돼. 오 년을 기다려 온 나다. 침착하자.'
그녀는 스스로 타일렀다. 
이내 그녀의 반짝이던 두 눈이 감겨지고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의 수양과 자제력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의복점 안으로 들어선 흑의청년의 시선이 멈춘 곳은 좌판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갈노인이었다.
갈노인은 아직도 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듯 고개를 아래 위로 사정없이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당신은 왜……?"
갈노인을 바라보던 흑의청년의 입에서 밑도 끝도 없는 말이 나직이 새어 나왔다.
순간 갈노인이 깜짝 놀라며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쿠! 그 의삼은 열 냥이고, 저 경장은 열여섯 냥인데 특별히……."
갈노인은 정말 졸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경황없이 평소에 하던 말을 잠꼬대처럼 주절댔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흑의청년을 바라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 원래가 장돌뱅이인지라… 한데, 어떤 옷을 드릴까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흑의청년의 깊고 심유한 눈동자 저 밑에서 무엇인가가 번뜩 피어 올랐다.
"당신들……."
"아이구, 손님! 왜 자꾸 이러십니까? 자, 이왕 오신 김에 마음에 드시는 옷 한 벌 골라 보십시오. 손님께서 입고 계신 그 흑의장삼은 최상품이 분명하지만 너무 이목을 끄는 것이라… 자, 이 평범한 갈의가 어떠신지……."
갈노인은 아무렇게나 잡히는 갈의 하나를 흑의청년 앞으로 내밀었다.
"보십시오. 저 바깥의 백여우 같은 계집도 자꾸 힐끔힐끔 손님을 쳐다보고 있지 않습니까?"
흑의청년은 아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면 갈노인은 그보다 먼저 입에서 침을 튀기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저런 계집은 항상 조심해야지요. 생긴 것하곤 꼭……."
갈노인은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밖의 미요시노에 대해 갖은 악담을 다 늘어놓았다. 그의 주접은 끝이 없을 듯 이어졌다.
"자, 열 냥이오."
갈노인은 한참을 떠들어대다 불쑥 갈의를 흑의청년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흑의청년의 얼굴에 여때까지와는 달리 치기 어린 미소가 어렸다.
"아이구, 이거 어디 열 냥짜리나 되겠소? 옛소, 여덟 냥만 받으시오."
"아이구! 안 됩니다. 그건 본전도 안 되는 가격인데……."
하나, 갈노인의 음성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흑의청년은 이미 여덟 냥의 은자를 그의 앞에 던지고 문을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를 바라보는 갈노인의 노안 가득 뿌연 물안개가 어리기 시작했다.
'오오, 문주께선 진정 대인이시다. 그토록 빨리 노부의 뜻을 간파하시다니… 진정 여한이 없는 생을 살았어.'
눈에 고이던 액체가 주름진 볼을 타고 점점이 흘러내렸다.
흑의청년은 바로 백운향이었던 것이다. 
의식을 잃은 지 삼 일 만에 깨어난 그는 구름처럼 이는 의혹을 참을 길 없어 제일 먼저 갈노인을 찾은 것이었다.
한데, 갈노인은 아예 그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갈노인은 자신이 그냥 입고 나온 천잠만병보의를 가리라는 암시의 말과 함께 밖의 여인이 그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지극히 평범하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의복점을 나선 백운향은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월도 저물어 가는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렀다. 그 푸르른 하늘 가득 네 명의 얼굴이 어렸다. 
처연한 한을 품고 천 년을 기다려 온 끝에 자신에게 모든 것을 전해 준 네 사람…….
이 순간 그는 울고 있었다.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의 대의(大義) 앞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 속에서 일고 있는 진한 장부의 오열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만통노인이 잠혼섭령대법으로 말한 잊으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하늘에서 거두어 내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자신을 주시하는 한 시선과 무심코 마주쳤다.
파파팟－!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극렬한 불똥을 작렬시켰다. 
하나, 그것도 잠시 두 개의 시선은 마주칠 때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거두어졌다.
그리고 하나의 시선은 또 다른 시선 앞을 무섭도록 일정한 보폭으로 스쳐 지나갔다.
"헤헤, 손님. 무엇을……?"
철웅은 병기대 위를 살피고 있는 백운향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장사꾼 특유의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백운향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보자기에 둘둘 말려 있는 물건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도(刀)요. 그러나 갖고 다니기가 불편해서……."
"아! 칼집을 만들어 달라시는 거군요. 어디……."
철웅은 생소한 것이라는 듯 보자기를 끌러 내고 묵도를 이리저리 살폈다.
"어이구! 이거 쇠가 가히 상품(上品)이군요. 하지만 칼집이 없으니 정말 볼품없군요."
철웅은 그렇게 말하면서 병기대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칼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침 맞는 놈이 있군요. 새로 만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그냥 이것을 쓰시지요."
백운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르릉－! 철웅의 말대로 정말 묵도는 제 집을 찾아들 듯 칼집 속으로 미끄러지듯 쏙 들어갔다.
"스무 냥만 내십시오."
철웅은 묵도를 백운향에게 내밀며 간사한 웃음을 지어 냈다.
백운향은 무심코 묵도를 받아들다가 흠칫했다. 
묵도와 마찬가지로 새까만 오광(烏光)이 감도는 칼집에 선명하게 양각된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이다.
<천룡무영혈라도(天龍無影血羅刀)>
'당신들… 정말 돌아가면서 나를 울리는구려.'
백운향은 정말 철웅을 얼싸안고 크게 울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그들 네 사람의 대의를 어찌 일개 감정으로 그르칠 수 있으랴.
이내 정색을 되찾은 백운향은 스무 냥의 은자를 내밀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깨나 정성들여 만든 것 같구려."
"헤헤, 말도 마십쇼. 지난 삼 일을 꼬박 새워 겨우 만든 것입죠."
"정말 명품(名品)이오. 내 성의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닷 냥 더 드리리다."
철웅의 몸이 흠칫했다. 
닷 냥, 그에게 있어 그 닷 냥의 의미는 실로 컸다. 그것은 비록 액수는 적으나 백운향의 진심 어린 뜨거운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닷 냥을 더 건네주고 문을 나서는 백운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철웅의 마음은 뜨겁게 용솟음치고 있었다.
'아! 나는 먼저 가신 선조들의 노고까지 한데 묶어 받는구나.'
만통노인,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백운향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백운향은 한 차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시선을 돌렸다. 
그뿐이었다.
그리고 백운향은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고서 한 권을 뽑아 회계대 앞으로 다가와 계산을 한 후, 만서고를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만통노인의 고개가 방향도 없이 끄덕여졌다.
"날아올라도 높이 날아오를 용이로다."
만통노인은 그 말 한 마디만을 나직이 내뱉더니, 읽고 있던 춘추가례(春秋家禮) 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탕! 탕! 쨍! 쨍! 
각석수는 자신의 정 소리와 합창하듯 함께 울리는 또 다른 정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석수장 한켠에서 열심히 돌을 다듬고 있는 준수한 용모의 갈의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는 돌을 다듬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쨍! 째앵－! 날렵하고 섬세하며 우아한 손동작을 따라 돌조각이 튀어 올랐다.
그의 몸에서 범인에게선 느낄 수 없는 석수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고 각석수는 생각했다.
각석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정 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그에 따라 돌은 어떤 형상을 이루어 갔다.
문득 각석수의 두 눈이 휘둥그래 떠지기 시작하더니 종국(終局)에는 입마저 헤벌레 벌어지고 말았다.
갈의청년의 정 끝에서 피어나는 신기(神技). 
그것은 평생 돌과 함께 벗하며 살아온 각석수를 능가할 만한 신기였던 것이다.
갈의청년은 하나의 정교한 입상(入像)을 새기고 있었다.
문득 각석수는 그 돌의 입상이 누군가를 닮았다고 느꼈고, 이내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느낀 순간 왈칵 치밀어오르는 감격에 얼른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말았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정 소리가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정 소리가 멎는 것과 동시에 두 줄기 서로 다른 음향이 각석수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딸랑!
"돌 두 덩이의 값으로 닷 냥이면 되겠소?"
갈의청년은 닷 냥의 은자를 각석수의 앞에 던져 놓고 휘적휘적 저만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각석수의 시선이 또 하나의 돌덩이를 옷깃에 갈무리하는 갈의청년의 뒷모습에서 은자가 떨어진 자신의 발 앞으로 옮겨졌다.
"문…문주……!"
각석수의 몸이 허물어지듯 한쪽의 돌 위에 얹혀져 있는 입상조각(彫刻)을 감싸안았다. 
그것은 얼굴에 패인 주름살과 군데군데 삐죽이 솟은 수염과 얼굴의 상흔까지 한 치의 오차도 찾아볼 수 없는 또 다른 자신의 형상이었다.
각석수는 영원히 그렇게 있을 듯 일어날 줄을 몰랐다. 
검은 구름이 몰려드는 하늘은 어느덧 어둠을 머금어 가고 있었다.
백운향, 그의 이 조그만 행동 하나하나는 어떤 면에서는 유치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의(大義)를 앞에 두고 조그만 잔정에 이끌린다는 것이 말이다.
하나, 무엇이 대의(大義)이고 무엇이 소의(小義)인가?
어찌 사람이 조그만 일을 외면하고 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결탄코 그는 잘못된 사람일 것이다.
<사도형.
미안하구려. 천의장의 밤비를 벗삼아 한 잔 술을 나눔이 당연하거늘, 사람이 살다 보니 피치 못할 일이 왕왕 생기는구려.
그 동안의 무례를 양해하시고, 오늘 밤 밤비와 더불어 한 잔 술로 긴긴 회포나 풀어 봅시다.>
쌍웅재회(雙雄再會)
그는 강하다. 
하나, 나 또한 약하지 않다.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만용(蠻勇)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의 몸은 이미 한 줌 재가 되어 푸석푸석 날리고 있을 것이다.
강하든 약하든, 그것이 만용이든 아니든, 또 그것으로 인해 죽든 살든… 나는 가야 한다.
그를 만나러 가야만 한다.
왜……? 
버려진 세월이 아까워서……?
이제 더이상 처절한 한을 쓸어 안고 밤을 삭힐 수가 없어서……?
아니다. 내가 굳이 그를 만나려 하는 것은 서로 지난 세월을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자 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가는 것뿐…….
자, 가자!
요리로 말하자면 가히 산해진미(山海珍味), 팔진미(八珍味)가 모두 여기에 있다.
장백산(長白山) 흑웅(黑熊)의 발바닥, 해남(海南)의 상어 지느러미, 절벽에만 집을 짓는 우럭제비의 제비집도 보인다.
어디 그뿐인가? 
연경(燕京)의 별미인 오리구이, 사천(泗川)의 맵고 짠 음식 등 오 척의 넓은 반상 위는 온통 음식들로 꽉 들어차 있다.
젓가락… 그 젓가락은 천천히, 그리고 완만하게 그 오 척 반상 위의 각종 음식들 위를 빠짐없이 떠돌고 있었다.
젓가락에 의해 날라진 음식은 두툼한 입술 사이로 빠져들고, 가지런하고 흰 치아는 천천히 음식을 씹어 혀에게 그 미각을 음미시킨다.
그는 진정 음식을 음미하듯 오래 씹어 맛을 보고 있었다.
목줄을 타고 넘어갈 것이 아예 없을 듯 이빨과 혀에서 음식이 산화되어 버릴 정도의 긴 음미였다. 
그의 이 일련의 음식 먹는 행위를 보건데, 오늘 이 순간이 지나면 그는 영원히 음식 맛을 보지 못할 사람처럼 느껴졌다.
또한 음식을 먹는 그의 자세 하나 하나엔 지극히 성결한 예식을 앞 둔 사람의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앉은 자세는 물론이고 젓가락을 놀리는 손의 동작 하나하나는 모두가 극상(極上)의 예법(禮法)을 기초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황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식사예법이었다.
누군가? 
저토록 예를 차려 가며 식사를 하는 사람은……?
그는 백운향이었다. 
그에게 있어 이 식사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식사였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음식, 최고의 술, 최고의 예법으로 이 한 끼의 식사를 성스럽게 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넓고 호화로운 반점(飯店)에는 최고의 미락(味樂)을 즐기는 그 외에 세 명이 더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백운향은 온 신경을 식사하는 행위에 쏟으면서도 가끔 가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스치듯 바라보았다.
너는 나를 난주에서부터 쫓아왔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이미 느낌으로 알고 있다.
후후, 살수가 살수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이 아닌가.
너는 아직 멀었다. 모름지기 살수란 완벽한 살인을 위해 죽음의 냄새마저 감춰야 한다. 
하나, 네게선 너무 진한 죽음의 냄새가 피어 오르는 있다.
사립을 깊숙이 눌러쓴 흑의인. 
그는 독한 죽엽청(竹葉靑)을 이미 세 병째 비우고 있었다.
사립 끝에 매달린 두 개의 눈빛은 한 번 보기만 해도 그대로 동결될 듯 차가웠다. 또한 전신에서 이는 냉기(冷氣)는 모골마저 시리게 파고들 정도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흑의사립인의 몸에서는 회색빛이 감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회색빛, 그것은 죽음의 빛깔이었다. 
흑의사립인은 저주 받은 운명을 타고난 또 하나의 생명이었다.
냉천. 그 운명이 그를 그렇게 불렀고, 그 운명 속에 그는 살수로 키워졌다.
난주제일인을 척살하기 위해 보내졌던 네 명의 살인병기 중 마지막으로 남은 살인병기인 그는 다른 삼 인과는 달리 집요하게 완벽한 허점을 찾아 난주로부터 이곳 금릉까지 백운향의 뒤를 미행해 온 것이다.
국화무늬가 새겨진 화사한 황의를 걸친 청년. 
붉은 홍안을 지닌 그는 목에 어린애 주먹만한 자청색 염주알을 걸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뭔가 모를 깊은 묵상(默想)에 잠겨 있었다.
저 자 역시 난주에서부터 느껴 온 또 다른 그림자다.
저런 류의 사람은 대개 극강(極强)이 아니면 극유(極柔)이다. 
저들 세 사람 중 가장 강할 수도, 가장 약할 수도 있는 자가 바로 저 자이다.
저 자에게선 다른 사람과는 달리 색깔과 냄새가 없다. 단지 그에게선 일체를 초월한 무심(無心)만이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그녀는 백의소부(白衣少婦)였다.
살결도 희고, 의복도 희며, 길고 섬세한 손가락 사이에 노리개처럼 돌아가고 있는 백옥적(白玉笛) 또한 희다.
그녀는 식사를 하면서 가끔 고개를 들어 추수(秋水)처럼 맑은 시선으로 백운향을 언뜻언뜻 바라보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의 여인답지 않은 서늘한 그녀의 두 봉목에는 뭔지 알 수 없는 애틋함이 깃들어 있었다.
저 여인에게는 살심(殺心)이 없다. 오히려 강한 보호본능이 느껴지는 여인이다. 
나를 생각해 주는 월교와 같은 그런 여인인 것이다.
백운향은 그 동안 자신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붙었던 삼 인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목적으로든, 어떤 연유로든 따라오는 것은 그들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백운향과 그들 삼 인은 누구도 입을 열어 말을 하거나 조그만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지만 반점 내에는 알 수 없는 긴박한 긴장감이 떠돌고 있었다. 
한데, 돌연 그 긴장감을 산산이 부숴 버릴 만큼 반점 내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것은 칠채주렴이 양쪽으로 살풋 젖혀지며 들어선 한 여인으로 인한 것이었다.
검어서 검고 희어서 흰 여인.
시선이 튕겨 나올 듯한 검디검은 흑의경장에 뼈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듯 투명한 살결을 지닌 여인.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이 어찌 저토록 흰 살결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흰 살결 위로 떠올라 있는 표정은 차고 날카로웠다. 
닿으면 얼어 버릴 듯, 스치면 베어질 듯…….
냉천의 차가움이 회색빛으로 얼어붙는 것이라면 그녀의 차가움은 백색 얼음 그 자체였다.
한데, 차고 날카로운 표정 위로 떠오르는 또 다른 표정은 비장한 결의의 빛이었다. 
자기가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듯한…….
그녀는 반점으로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정중앙의 탁자를 향해 무섭도록 일정한 보폭으로 다가섰다. 
그곳은 바로 백운향이 앉아 식사를 하는 탁자였다.
탁자 위에 술잔을 내려놓는 백운향의 시선이 무심으로 굳어 갔다.
"ㅋ……!"
그의 입에서 바람결 같은 괴소가 나직이 새어 나왔다.
그의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백운향이 불쑥 입을 열었다.
"미요시노."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그녀의 손이 앉은 자세 그대로 허리 어림에 얹혀졌다. 
눈알이 쪼개져 날아갈 듯 희디흰 옥수(玉手)였다.
동영밀문 은밀류의 최후 후계자 미요시노! 
그녀는 지금 그의 앞에서 가공할 살심에 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지금 그녀가 노리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다. 
이 차갑고 냉막하며 가공할 신위의 중원 청년이 배운 무영도류와 신도류 및 각종 인자술의 출처(出處)를 알아내려는 것이다.
"좋아."
백운향은 딱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백운향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동시에 미요시노의 허리 어림에 붙었던 손이 불끈 쥐어진 바로 그 순간!  
탁! 냉천은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탁자 위에 사납게 내려놓았다.
독한 죽엽청이 술잔을 넘쳐 그의 옷으로 쏟아져 내렸다.
때를 같이 하여 의자 하나가 우당탕! 뒤로 넘어졌다. 
백의소부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선 것이다. 
하나, 그녀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일어섰을 뿐 굳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또한 황의청년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직 한 번도 뜨지 않고 있던 눈이었다.
지금껏 단 한 올의 표정마저 거부하던 그들 삼 인!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없었다. 사실 그들이 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의청년은 눈을 감고 있어 보지 못했다 치더라도 냉천과 백의소부 두 사람은 눈을 멀쩡이 뜨고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단지 모든 것이 끝난 후의 결과뿐이었다.
검(劍), 그것은 당장 핏물이라도 배일 듯 새파랗게 날이 선 검이었다.
검신은 좁고 가늘어 비연검(飛燕劍)이라 불리우는 검이었다.
그 검의 손잡이는 마디 없는 듯한 흰 손에 잡혀 있고, 차갑게 빛나는 뾰족한 검봉(劍峯)은 완강한 목젖에 닿아 있었다.
스멀스멀…! 비연검의 검신을 타고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려 탁자 위로 떨어져 내렸다.
미요시노는 어느 한순간 허리에 차고 있던 비연검을 발검(拔劍)했고, 백운향은 피하지 않은 것인지 피할 새도 없었는지 목젖에 검을 받고 있었다.
미요시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에 따라 백운향의 목젖에 살짝 닿은 검끝이 좀 더 큰 상처를 만들어냈다.
하나, 백운향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보이지 않은 채 처음 그대로였다.
"검 따위는 버려라. 쓸모없는 장난감이니까."
백운향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뜻밖에 미요시노의 얼굴 위로 하얀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대를 추적하길 수만 리……."
"그건 네 사정이다."
백운향은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그녀의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당신은 죽어요."
"그건 내 사정이다."
"죽기 전에 한 가지만 묻겠어요. 당신은 어디서 그것을 배웠지요?"
"나는 배운 적이 없다. 샀을 뿐이지."
"샀다고요?"
"동영에선 두 번씩 묻는 게 예의였던가?"
도대체 누가 검자루를 잡고 있는가?
검자루는 분명 미요시노가 잡고 있고, 검날은 백운향의 목을 점차 압박해 들고 있다. 
한데도 백운향은 자신의 말대로 검 따위는 정말 필요 없는 장난감이라도 된다는 듯 한 마디 한 마디를 껄끄럽게 내뱉고 있었다.
미요시노의 표정 역시 한 올의 동요도 내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왜 그들의 표식을 남겼지요?"
"너를 죽이기 위해서……."
"흥, 당신은 꿈을 꾸고 있군요?"
"살다 보면 꿈이 현실로 드러나는 수도 있지."
처음으로 백운향의 얼굴 위로 차가우나마 미소가 떠올랐다. 얼음처럼 투명한 미소였다.
순간 미요시노는 검을 잡은 손목에 힘이 빠져 나가려는 것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보일 듯 말 듯한 백운향의 미소가 너무나 깨끗하고 맑았던 때문이다.
"너는 포기하는 것이 좋다."
"허튼소리 말아요. 그는 어디에 있죠?"
"너의 마음 속에 있지 않느냐?"
느닷없는 그의 말에 미요시노의 아미(蛾眉)가 길게 호선을 그었다.
"너의 목숨으로 무영도류의 모든 것을 샀다."
"흥, 무영도류 따위로 내 목숨을? 어리석군요."
"죽는다."
백운향은 그녀가 말문을 열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너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 나를 죽일 수 없지만 나는 아무 부담 없이 너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 네가 죽는 이유 중의 하나다."
그의 말은 묘하게 미요시노를 자극시켰다.
미요시노의 하얗디 하얀 얼굴로 은은히 노기 띤 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리고 검을 잡은 하얀 손에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그녀의 손에 힘이 가해지려는 순간. 
백운향의 상체가 돌연 앞으로 확 달려들었다. 진정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백운향은 스스로 검날에 자신의 목숨을 던져 버렸던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냉천을 비롯한 삼 인의 입에서 동시에 소리 없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한데, 정작 경악성을 터뜨린 사람은 뜻밖에도 미요시노였다.
"안 돼!"
무엇이 안 된단 말인가? 
그것은 그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터뜨린 음성이었다.
하나, 실상 그녀의 행동은 음성의 의미와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그것은 고도의 인자 훈련이 가져다 준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그녀는 검을 뒤로 빼고 싶었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을 잡은 손은 힙차게 앞으로 쭉 뻗었던 것이다.
한데, 그때였다. 
탕－! 쇠와 쇠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반점 내의 긴장된 공기를 갈기갈기 찢으며 울려 퍼졌다.
뒤를 이어 또 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쨍그랑! 그것은 비연검이 부러져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아……!"
미요시노 이하 그 광경을 지켜보던 네 사람의 입에서 똑같은 크기, 똑같은 의미의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냉천을 비롯한 삼 인은 분명히 보았다.
하나의 흰 선이 허공 중에 환상적으로 호선을 긋고, 경악에 질린 채 주저앉아 있는 미요시노의 삼단 같은 흑발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환상적으로 호선을 그은 것은 상아 젓가락의 그림자였고, 그 상아 젓가락은 백운향의 손에 잡힌 채 탁자에 깊숙이 꽂혀지고 있었다.
"너는 죽었다. 비명을 질러라."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허공에 떠올랐던 머리카락이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미요시노는 망연한 시선을 이 냉막한 듯 무심한 승부사의 얼굴에 박은 채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머리카락 끝부분이 마치 가위로 정성들여 자른 듯 반듯이 베어져 있었다.
그때 다시 백운향의 음성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너는 혼(魂)만 죽었다. 내가 너를 다시 찾기 전까지 너는 죽어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너를 찾지 않는다면 이곳에 쓰인 대로 해라."
백운향의 손끝에서 팔랑 한 장의 쪽지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앞으로 백운향의 완강한 등이 돌려졌다. 
이어 그는 느릿하게 반점 밖으로 사라졌다.
미요시노의 상체가 부러진 검과 백운향이 남기고 간 쪽지 위로 엎어졌다.
"졌어……!"
절규성과 함께 그녀의 가냘픈 등은 파랑(波浪)이 일듯 들먹여지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던 냉천 등 삼 인의 안색이 평온하게 잦아들었다.
그들 삼 인은 이내 미요시노를 남겨 둔 채 반점 밖으로 하나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가 왔다. 
영웅원 대집회의 이슬로 사라졌다가 밤비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네게 준 아픔을 잊은 지 오래건만 밤비와 함께 온 너를 보니 문득 감회가 새롭구나.
너는 갈았겠지만 내 앞에서는 아직 무디다. 
너는 태웠겠지만 나는 영원히 타지 않을 거석(巨石)임을 잊었단 말이냐?
가엾은 늑대야! 
이제 네가 돌아갈 산은 없단다.
나라는 황야(荒野)는 너무나 넓기에 너는 그 황야를 영원히 헤맬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 마리 늑대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툭! 허리 꺾인 난초(蘭草)가 연신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난초를 꺾는 손은 이렇듯 잔인하게 낙화(落花)의 슬픔을 줄 것 같지 않은 성스러움이 깃든 손이다.
그러나 꺾는다. 계속해서 꺾는다.
그리고 눈(眼). 난폭하지도 않고 날카롭지도 않은 눈, 항상 그럴 것 같은 온유로움이 찰랑거리고 있는 눈.
그 눈은 지금 한 벽이 몽땅 창문으로 되어 있는 유리벽을 통해 그 온유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
보고 있는 것이다. 
밤비와… 그리고 그 밤비를 타고 들어서는 한 마리 늑대를…….
붉어서 아름답고 두툼해서 강퍅한 입술이 열렸다.
"그를 막으려 설치한 관문을 철폐시키고 극빈(極賓)의 예우로 은월정(銀月亭)에 인도하라."
청량감이 뚝뚝 흐르는 음성에 이어지는 대답은 없다.
그럴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내린 명령에 대한 대답조차 거부하는 그런 사람이니까.
한 대의 마차는 곧게 뻗은 천의장 대로를 서서히 굴러 들어왔다.
넓이 십 장에 길이 오백여 장에 이르는 곧게 뻗은 대로.
그 길 양옆으로는 푸르른 잔디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고, 한 아름이 넘는 회양목이 적당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그 사이 사이엔 각색의 유등(油燈)이 밤비 속에서 길을 밝혀 주고 있었다.
또한 그 길의 끝에는 웅장무비한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따각－ 따각－! 네 필의 말발굽 소리만이 이 조용한 밤비 속에서 울리고… 마차는 소리 없이 굴러간다.
한 마리의 늑대를 태운 마차. 
결국 늑대는 스스로 이곳에 들어선 것이다.
굽어 휘어져 흐르는 처마의 선은 흐느끼듯 유려하다.
휘어져 흐르는 청홍백 운교(雲橋)는 연못 위로 떨어져 내리는 밤비를 애태운다.
초하(初夏)의 밤바람이 이슬 맞은 주향(酒香)을 듬뿍 실어다 주고 떠나는 정자 안.
그곳에는 그린 듯 고아하고 다진 듯 우아한 한 사람이 정자의 일부분인 양 뒷짐을 진 채 서서, 내리는 밤비가 연못 위에서 파문을 짓는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데, 가슴 저리게 피어 오르는 저 고독은 왜일까?
그리고 저 고독의 저편 사이로 언뜻언뜻 서리는 한 서린 기운은 무엇인가?
치렁치렁한 흑발은 갈의로 감싸인 굵직한 어깨 위에 부서져 내리는데…….
"으음……."
한 줄기 침음성이 그의 입술 사이를 뚫고 메마르게 흘러나와 밤비 속으로 애잔하게 번져 갔다.
그때다. 
운교 저편으로부터 청아한 음성이 시작되었고 그 음성은 그의 뒤에 이르러 끝이 났다.
"밤비의 주인이 그토록 밤비 속에서 애상(哀想)에 젖는 모습은 실로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구려."
음성의 주인공은 아름다우리만치 준수한 백의미청년이었다. 
바로 천의장주 사도천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백운향의 몸이 서서히 돌려졌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사납게 뒤엉켰다. 
하나도 사나워 보이지 않는 시선의 흐름이었다.
드디어 한 시대를 풍미하는 두 마리의 용(龍)… 그러나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의 두 사람의 영웅(英雄)이 재회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두 사람은 용은 용이로되, 풍기는 멋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하나가 탈속(脫俗)하다면 하나는 고귀하고, 하나가 서민적 취향이라면 또 하나는 귀족적이며, 하나가 무심하다면 하나는 온유로웠다.
바둑판 위에 질서 없이 늘어진 흑과 백의 기석(棋石)을 보듯 명쾌한 차이다.
그들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정자에 마련되어 있는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사도천이 먼저 온유로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강산이 변한 만큼 그대도 변했구려."
백운향이 변하긴 변했으되 그리 크게 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백운향의 입가로 실낱 같은 미소가 번졌다.
"달빛이 있어야 할 은월정에 밤비가 이리도 내리니 섭섭하겠구려."
이 말이 사도천을 만난 그의 첫인사였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르고 사도천의 손이 술병을 잡아 갔다.
"하하! 자, 백형 받으시오. 권주례(勸酒禮) 삼배(三盃)로 우선 지난날 악연(惡緣)으로 맺어진 우리 사이의 회포나 풀어 봅시다."
백운향은 마다하지 않고 옥배(玉杯)를 들어 올렸다.
권주례 삼배.
그들은 아무 말없이 정확히 석 잔씩의 술을 마셨다.
그들은 은연중 서로를 회피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들추기 싫은 과거의 이야기와 폭탄처럼 터져 나올 앞으로의 이야기를…….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묘한 상황을 조성하며 마주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것을 깬 것은 하나의 손이었다.
"사도형, 주시오."
백운향이 사도천 앞으로 불쑥 손을 내밀며 억양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느닷없다. 
백운향은 도대체 무엇을 달라는 것인가?
하나, 사도천은 조금도 의아한 표정을 떠올리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물론, 드려야지요."
"지금……."
"당연한 말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겠는다는 건가?
"백형이 세월의 한을 지워 버린 이 마당에 그대의 이름 하나 돌려드리지 못한데서야 말이 되겠소?"
사도천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백의자락을 쭈욱 찢어 냈다.
이어 백의조각을 상 위에 펼쳐 놓더니 약지를 상 모서리에 가볍게 부딪쳤다.
손가락 끝에서 피가 솟았다. 투명할 만큼 선명한 선혈이었다.
<석중리(石中利)>
세 자의 혈서(血書).
사도천은 자신의 피로 백의조각에 석중리라는 그 세 글자를 쓴 후 백운향에게 내밀었다.
"오늘부터 야우혼의 이름은 천하에서 없어질 것이오. 대신 석중리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겨날 것이오."
주고 받는 대상이 바로 이것이었던가?
"석중리… 마음에 드는 이름이오.."
백운향은 백의자락을 받아들며 나직이 대답했다.
이 순간 희대의 살수 야우혼은 영원히 천하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혈서를 한 차례 살피던 백운향은 품 속에서 하나의 정교한 석상을 꺼내 들었다.
"사도형, 나도 이 마지막 의식으로 그대와의 과거를 모두 끝낼까 하오. 그리고 진정한 승부를 겨룹시다."
사도천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손에서는 백옥섭선이 유유히 접혔다 펴졌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운향이 손에 든 석상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시종 평온을 잃지 않던 사도천의 얼굴 위로 한 줄기 경악이 떠올랐다.
석상, 어찌 사람의 손으로 저토록 정교하게 조각해 낼 수 있을까?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흰 살결과 백의, 심지어 미간에 선명히 찍혀 있는 홍색 반점까지도 여지없이 닮았다. 
그것은 바로 사도천 자신이었던 것이다.
백운향은 그의 표정에 신경쓸 것 없다는 듯 석상 옆에 조그만 흑관(黑棺) 하나를 올려놓더니 석상을 그 관 속에 넣고 관 뚜껑을 닫았다.
순간, 관뚜껑 위에 드러난 흰색 글자들!
백색 유등빛에 반사된 글자 하나하나엔 섬뜩함이 감돌고 있었다.
<고(故) 사도천지관(司道天之棺)>
사도천의 관.
무슨 의도인가? 
사도천도 이제는 과거를 죽음처럼 묻어 버려야 한다는 뜻인가?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것을 바라보는 사도천에게 있어서는 실로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그는 웃는다. 그것도 아주 온유롭게 웃는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는 남의 일을 보고 있기라도 하듯…….
백운향의 눈길이 사도천을 향했다.
"사도형, 우습소?"
"하하! 죽은 자가 어찌 자신의 관을 향해 곡(哭)을 할 수 있겠소?"
"그렇구려. 그렇다면 내 마음이 더욱 편안해지는구려. 나는 부담 없는 마음으로 사도형의 지금까지 지나온 세월의 잔재를 고이 장사 지내드리겠소."
백운향의 끝말은 실로 의미심장했다.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는 과거의 너를 잊고, 그리하여 과거의 너와 나의 관계는 아예 없었던 것으로 하겠으며, 이제는 지금의 너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백운향은 느릿하게 흑관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잠깐."
사도천이 재빨리 그의 동작을 멈춰 세웠다. 
그의 얼굴에 피어 오르는 미소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시종 여유로운 미소였다.
"가기 전에 먼저 이것을 봐 두고 가는 게 좋을 것이오."
백운향의 시선이 사도천의 손에 무심히 가 닿았다. 순간, 백운향의 안색이 돌연 홱 돌변했다.
무엇인가? 
그토록 태연하고 무심하기만 하던 그의 표정이 저토록 돌변한 까닭은……?
사도천의 손이 지금 백운향 앞에 놓여 있던 옥배를 지그시 붙잡고 있었다. 
한데, 번쩍이는 취록빛 광채가 그의 손에서 이는가 싶은 순간 그의 손에 들렸던 옥배는 흔적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취…취록혈강(翠綠血 )!'
백운향은 하마터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를 뻔했다.
취록혈강!
그것은 바로 백운향이 황궁무고에서 보았던 무명자참수기(無名子參修記)에 언급된 신비의 광세신공(曠世神功)이 아닌가?
번쩍－! 취록색 광채는 계속해서 뇌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며 일순간 사위로 번개가 치는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술병과 접시들이 하나하나 증발되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취록혈강은 점차 백운향을 향해 다가들고 있었다.
문득 백운향은 갑자기 자신의 손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조그만 흑관이 자신이 느낄 새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물체를 선별하여 제거시키다니…! 무명자참수기에서 읽은 이상의 가공함이다!'
백운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계속 번쩍이고 있는 취록혈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광채 속에 드리워진 악마의 미소도 보았다.
한데, 백운향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돌연 취록혈강의 광채 대신 번뜩인 일곱 색깔의 광채는 또 무엇인가?
파－앗! 귀청을 찢는 예리한 파공음이 작열했다고 느낀 것은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파공음도 없었다. 그 일곱 색깔의 광채는 밤의 정적을 갈가리 찢어 놓고 소리 없이 허공으로 뻗었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그것은 지극히 짧은 찰나지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백운향은 보았다. 
그 광채가 은월정으로부터 연못을 격하고, 무려 백여 장 밖에 위치한 삼십 장 높이의 거암(巨岩)에 격중된 것을…….
그리고 소리가 있었다. 
푸스스스…! 그것은 일곱 색깔의 광채가 거두어진 한참 후에야 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놀랍게도 거암이 산산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소리였다.
"칠채서기(七彩瑞氣)!"
백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입 밖으로 토해 내고 말았다.
칠채서기.
그것 역시 무명자참수기에 언급된 바 있는 것으로 그 위력은 취록혈강보다 한 수 위의 경천신공(驚天神功)이 아니든가?
그러나 사도천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틀렸소. 칠채천마혼(七彩天魔魂)이오."
사도천은 그토록 가공경이(可恐驚異)한 무공을 펼쳐 내고도 숨 한 점 흐트리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나는 마음먹기에 따라 백형을 보내지 않을 수도 있소. 그러나 나도 어느 한순간만큼은 진실해지고 싶소. 나 역시 장부이니 말이오. 그 순간이 바로 백형과 마주앉은 지금이오."
"……!"
"나는 방금 백형이 보셨다시피 취록혈강과 칠채천마혼을 익혔소. 그러나 난 그 두 신공을 단순히 익힌 것이 아니오. 전설의 파천무(破天舞)를 능가하기 위해 그 두 신공을 하나로 합쳐 새로운 신공을 창안해 냈소. 물론 이것을 믿고 안 믿고는 백형의 자유지만 말이오."
"……!"
"그럼에도 나는 미흡한 감을 느꼈소. 오대파천무를 한 사람이 모두 익혔을 경우 과연 그 사람과 대적할 때 승산이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소."
"……!"
"한데, 나는 아마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인가 보오. 취록혈강과 칠채천마혼을 합친 것보다 더 고절한 절예(絶藝)를 얻었으니 말이오. 물론 오대파천무도 능히 견줄 수 있는 절예를 말이오."
오오! 도대체 무공의 끝이 어디란 말인가?
사도천의 말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 아닌가?
백운향은 절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오대파천무 중 미혼환락무와 천룡승천무 등 두 가지만을 간신히 익히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가 만약 지금 당장 사도천과 격돌한다면 과연 승자는 어느 쪽이겠는가?
그러나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서는 그 고하(高下)를 따지기가 실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백운향으로선 사도천의 말이 충격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하나, 백운향의 충격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사도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사실 나의 사문(師門)인 천문(天門)은 본래 오대파천무를 취하고자 오랜 세월을 두고 심혈을 기울여 왔었소. 그로인해 본문(本門)은 과거 몇몇의 혈겁(血劫)을 일으킨 바도 있소."
"……?"
"한데, 본문은 본의 아닌 실수로 두 가문을 멸문(滅門)시킨 적이 있소. 하나는 이십 년 전 멸문되었던 호남(湖南)의 단목세가(端木世家)이고, 다른 하나는 십오 년 전 멸문당한 하북(河北)의 백씨세가(白氏世家)였소."
"……!"
"그 두 가문은 가주(家主)들이 오대파천무의 전인(傳人)들이라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어처구니없이 화를 당했던 것이오."
백운향은 이미 사도천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뇌리 속에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날 밤의 사나운 불기둥과 참혹한 비명성, 그리고 흉폭한 광소성만이 빙글빙글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으으윽……!'
그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거세게 떨렸다. 내심에 이는 극렬한 격동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사도천은 그런 백운향의 모습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켜 천천히 은월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남겨 놓은 채.
"이제 우리는 홀가분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오."
사도천,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백운향이 왜 저토록 격동하는가를…….
아니, 사실 그는 백운향의 격동을 유발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마차는 간다. 
천의장 넓은 대로를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내리는 밤비 탓인가? 
말은 처량하게 머리를 푹 수그리고, 마차의 휘장은 밤비에 후즐근하게 젖어 늘어진 채 마차는 밤비 속을 힘없이 간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도천의 입술이 가볍게 열렸다.
"심랑, 그를 너에게 맡긴다. 이제부터 네가 그를 책임져라. 너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도천은 자신의 뒤쪽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그림자를 향해 그 말을 내뱉었다.
한데, 그 음성에는 심랑이라는 여인을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쉽다는 듯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사도천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를 단목세가로 보내라."
이 말은 방향없이 내뱉듯 한 말이었다. 
심랑이라는 여인의 그림자는 그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이미 방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사도천이 단목세가로 보내라는 그라는 인물은 과연 누구이며, 그 이유는 또한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도대체가 모를 일인데…….
"우욱!"
한 덩이의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 냄과 동시에 그 동안 꼿꼿이 앉아 있던 백운향의 몸이 휘청했다.
"크윽……!"
또 한 차례 고통스런 구역질과 함께 핏줄기가 화살처럼 뿜어졌다. 
그 핏줄기는 마차의 휘장을 섬뜩하게 적셨다.
그의 앞섶은 핏물에 흥건히 적셔져 있었음에도 그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피를 연신 토해 내고 있었다.
백짓장처럼 창백한 핏기 가신 얼굴, 사시나무 떨듯 떠는 몸뚱이…….
심마(心魔)!
그의 지금의 모습은 내면에 이는 고통을 참지 못해 심마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왜? 도대체 무슨 일로 그가……?
그것은 감당키 어려운 심적(心的) 타격 때문이었다. 
바로 조금 전 사도천의 말을 듣는 순간 뇌리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 몰아친 심적인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사도천의 천문이 과거에 실수로 멸문시켰다는 두 가문 중 하나인 백씨세가(岳氏世家)!
그것은 백운향이 지난 십오 년간 애써 잊으려 몸부림쳤던 사나운 불기둥과 참혹한 비명성, 그리고 흉폭한 광소성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백씨세가는 바로 백운향의 가문인 것이다.
그렇다. 백운향의 가문은 천문에 의해 멸문되었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천문의 후예 사도천의 입을 통해 밝혀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천은 왜 굳이 자신의 입으로 그 비사(秘事)를 백운향에게 밝힌 것일까?
그것은 백운향의 격동을 유발시키기 위함이었다. 나아가서 백운향이 격동을 참지 못하고 내심의 격동을 행동으로 격발시키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실패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한 셈이었다.
백운향은 호랑이 굴로 스스로 걸어들어온 한 마리 외로운 늑대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그가 격동을 못 참고 행동을 격발시켰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하나, 백운향은 실로 무서운 인내를 발휘했다. 
그는 폭발할 듯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자제하며 태연히 마차에 올라 천의장을 나섰다.
하지만 천의장을 나서는 순간, 그때까지 참고 참았던 격동이 일시에 몰아닥쳤다.
그도 인간이기에 끝내 감정을 억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크ㅋ……!"
연신 핏덩이가 토해지는 입술을 비집고 한 올의 감정조차 실리지 않은 삭막한 괴소가 새어 나왔다.
그의 시선은 목표물도 없이 그저 허공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극도의 허탈감에 빠진 모습이라고나 할까?
'모진 운명이여! 너는 끝내 사도천과는 공존(共存)할 수 없는 운명이었드냐?'
"우욱!"
백운향은 엎어질 듯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또다시 피화살을 뿜어 냈다. 
바로 그때였다.
백운향은 머리가 핑핑 도는 혼미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시선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검광(劍光)이었다. 
빛살처럼 번뜩이는 차디찬 한 줄기 검광!
평상시의 그였더라도 결코 손쉽게 피해 낼 수 없을 만큼 쾌속절륜한 검광이었다.
'제기랄, 끈질긴 놈이군!'
백운향의 뇌리에 사립을 깊숙이 눌러쓴 냉막한 회색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운명이 냉천이란 이름을 지어 준 살인병기!
그는 결국 가장 완벽한 순간의 기회를 잡아 일검(一劍)을 펼쳐 낸 것이다. 
그것도 백운향의 머리와 마주한 마차 밑으로부터…….
진정한 살수란 완벽한 기회를 잡을 줄 알아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로 냉천같이…….
그리고 그 기회를 잡았으면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바로 지금 냉천이 검을 떨쳐 낸 것같이…….
피할 여유나 시간은 티끌만큼도 없다. 
백운향은 본능적으로 공력을 발동해 전신을 호신강기(護身剛氣)로 감쌌다.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비책이었다.
파파팟!
"으윽!"
한 소리 날카로운 격타음이 터지는가 싶자, 백운향의 몸이 고통스런 신음성과 함께 입에서 피분수를 내뿜으며 뒤로 벌렁 젖혀졌다.
호신강기가 미처 다 펼쳐지기도 전에 냉천의 검기(劍氣)에 의해 파해되며 백운향은 극심한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냉천의 검은 조금도 기세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백운향을 향해 섬전처럼 짓쳐들었다.
푸욱－! 섬뜩한 음향이 마차 안을 진동했다.
살은 쇠보다 부드럽다. 그러므로 끝이 예리한 쇠는 살가죽을 자유자재로 파고들 수 있다.
백운향은 검이 자신의 천돌혈(天突穴)에 깊숙이 파고든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상한 일이다. 
아무런 감각과 고통도 없었다.
백운향은 고소를 지었다. 
죽음이라는 게 이리 편안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 나온 고소였다.
한데, 그런 일련의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 줄기 처절한 비명성이 터졌다.
"아악－!"
그것은 뜻밖에도 비단폭을 찢는 듯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 소리였다.
번쩍! 뒤를 이어 찬란한 금광(金光)이 마차 안을 휩쌌다 싶은 순간 자비로운 미소를 띤 장엄한 석존(釋尊)의 형상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범천패엽신공(梵天貝葉神功)……!'
그것은 흐릿하게 꺼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백운향이 내심 토해 낸 경악성이었다.
"크악!"
또 한 번의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은 마차의 밑으로부터 터져 나온 것이었다.
범천패엽신공에 격중된 마차의 바닥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 순간 마차의 천정으로부터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백운향이 천의장에 들어가기 전, 식사를 했던 어느 반점에서 목에 어린애 주먹만한 자청색 염주알을 걸고 반듯한 자세로 묵상에 잠겨 있던 황의청년이었다.
그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백운향과 백운향의 앞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한 여인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는 여인의 몸을 뒤집어 바로 눕혔다. 
한데, 그녀는 바로 황의청년 자신과 마찬가지로 반점에서 식사를 하던 그 백의소부였다.
"어…어서… 저분께……."
백의소부의 가슴에서는 그녀가 말할 때마다 핏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백의는 이미 시뻘건 혈의(血衣)로 변해 있었다.
사태는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냉천이 완벽한 기회를 잡아 첫번째 검을 쳐내 백운향의 호신강기를 파괴하고, 두 번째 검을 쳐낸 절대절명의 순간 언제 나타났는지 백의소부가 다급히 몸을 던져 그 검을 자신의 몸으로 막은 것이며, 거의 동시에 황의청년이 냉천을 향해 불문팔대무공(佛門八大武功) 중 하나인 범천패엽신공을 펼쳐 냉천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여 없앤 것이다.
황의청년은 급히 백의소부를 안고 백운향의 앞으로 다가갔다.
백의소부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백운향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은공(恩公), 몽…몽몽이…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신 은혜를… 갚고자……."
오오, 몽몽이라니!
백의소부는 바로 몽몽이 변장한 모습이었단 말인가?
뿌옇게 흐려 가던 백운향의 눈이 번뜩이며 반짝 이슬이 맺혔다.
"몽몽,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아…니예요. 은공께서 말씀하신… 나의 삶… 나만의 삶을 한순간만…이라도… 살아 보고 싶…었을… 뿐……."
"어리석구나, 몽몽. 너무나 어리석구나. 누가 너에게 내 목숨을 부탁했더냐? 누가……."
하나, 몽몽은 그의 말을 더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이미 죽었으므로……. 
죽은 자는 산 자의 말을 들을 수 없으므로…….
몽몽, 태어나서 꽃다운 나이에 이르도록 오로지 살업(殺業)을 위한 살인도구로만 키워졌던 여인. 그리하여 자신의 뜻대로 살 수도 없었던 여인.
한데, 그녀가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택한 것은 죽음이라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오오, 가련한 여인이여! 
운명은 정녕 그녀에게 그토록 모질 수밖에 없단 말인가?
"가엾은… 것……."
백운향의 입에서 고통스런 중얼거림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그 동안 안간힘을 써가며 붙잡고 있던 의식의 줄을 놓치고 말았다.
쓰러지는 그의 몸을 재빨리 안아 든 것은 황의청년이었다.
대월국(大月國)의 왕녀(王女)
죽음의 냄새. 
그것은 흑의와 흑방립(黑方笠), 흑묵검(黑墨劍)으로부터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흑방립 새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살기 없는 눈빛, 그 아래 매달린 강퍅한 턱, 검을 꾹 움켜잡은 희고 섬세한 손.
이런 류의 사람은 살수(殺手)로서 적합하다.
사내는 신화(神話)처럼 등장해 버린 단목세가의 십여 장 담장을 끼고 열흘 동안 똑같은 행동을 취해 왔다.
흑방립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그의 시선이 단목세가의 모든 것을 훔쳐보고 있어도 자신의 모습을 가려 주니 말이다.
이때 돌연 밤을 까맣게 물들이고 있던 먹구름이 하나 둘 빗방울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순간 검을 잡고 있던 사내의 손이 엷게 떨렸고, 방립 안이 환해질 만큼 죽음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분의 대역(代役)으로 그를 죽이려고 열흘을 기다려 왔다.
바로 오늘 밤같이 비 오는 밤을 말이다.
단목세가주! 
너는 이제 죽는다. 
나의 이름이 아닌 야우혼의 이름으로…….
너를 완벽하게 파악한 그분이 나를 보낸 이상 너는 죽는다.
사내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그가 말한 그분으로부터 단목세가주의 모든 것을 들었다. 
사내에게 있어 그분은 신(神) 이상의 존재였다.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사내의 발이 가볍게 땅을 찍었다.
순간 암천고공(暗天高空)을 비류직상(飛流直上)하는 사내의 신형은 한 마리의 거조(巨鳥)가 되어 단목세가의 높은 담장 너머로 번뜩 사라졌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마도 비오는 밤이라 그런가 보다.
－ 자네, 들었나?
－ 이 사람이 누굴 송장으로 아나?
－ 이제 밤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네.
－ 한데, 놈이 단목세가주를 노렸다니 실로 대단했어.
－ 간이 부은 거지. 제가 감히 단목세가주를 노려?
－ 그래도 역시 야우혼은 이 시대가 낳은 희대의 대살수였어.
－ 하하, 이 사람아. 그놈을 잡은 단목세가주는 어떻고…….
여기를 가도 그 말, 저기를 가도 그 말. 
천하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 말을 입에 담았을 것이고, 천 번 이상 들어야 했다.
야우혼.
처절한 한을 몰고 다시 나타났던 야우혼 백운향. 그가 이번에는 단목세가주에 의해서 잡혔으니 말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그 동안 정사(正邪)를 분간키 어려웠던 단목세가주는 강호무림에 또 하나의 거대한 태양으로 떠올랐다.
천하는 천의장주 사도천에게 했던 온갖 미사여구(美辭麗句)가 실린 칭송을 이번에는 단목세가주에게 와르르 쏟아붓기 시작했다.
진정 천하의 귀는 얇고 혀는 가볍단 말인가?
이 땅은 야우혼이란 불세출(不世出)의 대살수를 낳았고, 그에 따라 두 명의 청년 영웅을 잉태시킨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상처 받은 늑대는 자신이 또 한 차례 그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아픈 가슴을 쓸어 안고 긴긴 절규를 토해 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워 준 대신 한 명의 영웅을 탄생시켜 놓았으니 말이다.
 
야우혼(夜雨魂).
아직도 검상 자국이 미세한 흉터로 굳어져 있었다.
백운향은 동경(銅鏡)을 통해 보이는 그 글자 하나하나를 뚫어질 듯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자신 대신 영웅원 심판대 위에 올라서 있을 그가 죽는다 해도 이 검상 자국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ㅋㅋㅋ!"
갑자기 그는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하나, 그 웃음은 목소리로만 울리고 있었다.
이십 일 동안 몰라보게 수척해진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때 방문 앞에 쳐진 비단 휘장이 걷어지며 한 여인이 들어섰다. 
깨끗한 백의에 우수에 잠긴 듯한 눈빛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한데, 그녀의 얼굴은 보기 안스러울 정도로 한 올의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낭군, 약이옵니다."
여인은 두 손에 받쳐 든 약탕기를 백운향의 앞으로 내려놓았다.
낭군이라니…? 
천하에서 백운향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여인이라면 단 한 명밖에 없다. 
설추련, 바로 그녀이다.
억세게도 재수없게 정조를 유린당하고 그의 앞에서 죽겠다며 쇠신발이 닳도록 그를 쫓던 여인 설추련.
지금 백운향의 앞에 약탕기를 다소곳이 밀어 놓는 여인은 어김없는 설추련이었다.
한데, 이곳이 어디기에 그녀가 백운향의 병간호를 해 주고 있단 말인가?
하나, 백운향은 아직 한 번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열흘 동안 단 한 번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
단지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황의청년에게 구출되어 깨어난 곳이 이곳이었고, 그때부터 설추련은 이미 그의 앞에 있었다.
그 순간 백운향은 또 한 번 자신과 그녀 사이에 얽힌 악연을 저주하고 말았다. 
그와 그녀의 만남은 정녕 불가사의하게도 백운향이 큰 곤경에 빠졌을 때만 만나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첫 만남이 그랬고, 두 번째 만남이 그랬으며, 세 번째 만남 또한 그렇지 않은가?
"낭군, 약이옵니다."
설추련의 말에 백운향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나, 설추련은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졌는지 표정 한 번 바꾸지 않았다.
"낭군, 약이옵니다."
똑같은 말, 똑같은 억양의 음성. 
설추련은 정확히 그 말을 세 번 반복했고, 백운향은 단 한 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설추련은 세 번째 말을 마친 뒤 미련없이 약탕기를 들고 일어섰다. 
이런 일에 매우 익숙한 듯한 행동이었다.
"야우혼이 참수(斬首)되었다고 하옵니다."
약탕기를 들고 나가던 설추련은 감정 없는 말을 뱉아 내고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ㅋㅋ! 미쳤어! 모두 미쳐 버렸어! 크크ㅋ……!"
그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백운향은 크게 키들거리며 외쳤다.
설추련은 들고 나온 약탕을 약탕기에 부으며 백운향의 키들거림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동요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약탕기 앞에 쪼그려 앉아 새빨갛게 달구어진 숯불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저 미친 듯한 웃음은 그녀에게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그는 의식을 찾자마자 저렇게 한 시도 빠지지 않고 키들거렸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서서히 미쳐 가고 있는 듯했다.
설추련의 부채질을 따라 숯불은 빨갛게 피어 오르고, 이내 약탕기는 더운 김을 무럭무럭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채질을 하는 동작에는 지극한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백운향이 거부할 것임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과 때가 되면 으레 약과 밥상을 그의 앞에 차려 놓는 것이다.
이때 돌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키들거리던 백운향의 웃음 소리가 뚝 끊겼다. 
온 집 안이 떠나갈 듯한 고함 소리가 백운향의 방으로부터 터져 나온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설추련의 부채질이 문득 멈췄다. 하나, 그녀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일지 않았다.
"추련, 이 계집애야! 너는 서방을 아예 굶겨 죽일 작정이냐? 때가 되면 밥을 가져와야 할 것 아니냐!"
고래고래 고함치는 그의 음성은 실로 가관이었다.
설추련의 부채질이 멎고 고개가 들려졌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조그만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그녀는 아직도 고래고래 고함이 터져 나오는 백운향의 방을 힐끗 바라본 다음 주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진정 감정이란 단어를 잊어 버린 사람같았다.
"아이고, 밥아! 너 본 지 오래로다."
백운향은 설추련이 들고 들어서는 밥상을 빼앗듯 나꿔채더니 아귀처럼 퍼먹기 시작했다.
설추련은 무표정하게 그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끄윽! 추련, 너는 아직도 내 식성을 모른단 말이냐? 빨리 가서 한 그릇 더 가져오너라."
한 그릇의 밥이 게눈 감춰지듯 그의 입 속으로 사라지자, 백운향은 밥주발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설추련은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설추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운향의 두 눈에 문득 여린 아픔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밥그릇을 들고 설추련이 방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토록 무심을 가장하던 그녀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방안에 있어야 할 백운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한 장의 쪽지만이 밥상 위에 놓여 있었다.
<추련, 정녕 미안하구료.
내 추련에게 무심했던 건 결코 본심이 아니었소. 
추련은 내게 있어 이미 떨쳐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여인이기에…….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소. 추련은 결코 내게서 달콤한 말을 듣고자 나를 돌본 것이 아님을…….
추련, 나는 요 며칠 사이 나 자신이 너무도 부족한 인간임을 절실히 깨달았소. 해서, 나는 떠나오. 
아직 세상 모르고 살아온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잠시 낭인(浪人)으로 살까 하오.
다시 만날 때는 달라진 나를 보게 될 것이오. 진정 성숙해진 나를…….
그리고 이제 우리 죽음이란 말은 하지 맙시다.
죽음은 슬픔인 것이오. 특히 내게 있어 이제 추련 당신의 죽음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오.
그럼…….
운향(雲香)>
또옥…, 한 방울의 눈물이 아픔이 되어 설추련의 백색 치마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가냘픈 그녀의 등은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으려는 듯 오랫동안 들먹거리고 있었다.
백운향이 빠져 나간 창문으로는 저토록 햇살이 아름답게 비춰 들건만 설추련은 그렇게 언제까지고 소리 없는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일혼(一魂)의 검광(劍光)은 죽음이오,
이협(二俠)은 일혼을 능가하니,
사기(四奇)가 이협의 뒤를 쫓도다.>
누구의 입으로부터 비롯되었나?
어떻게 전해지기 시작했는가?
일혼이협사기(一魂二俠四奇).
세인들은 언제부터인가 그들 칠 인을 그렇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야우혼(夜雨魂). 
한 번의 크나큰 좌절을 딛고 또다시 공포의 살업(殺業)을 불태우다 영웅원의 이슬로 사라져 간 야우혼.
이 기구한 운명의 대살수가 바로 일혼의 장본인이었다.
불세신협(不世神俠) 사도천(司道天).
불세의협(不世義俠) 단목수(端木秀).
더 설명하면 무엇하랴!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야우혼의 혈겁을 종식시킨 두 사람이 아닌가.
단목수는 뒤늦게 밝혀진 단목세가주의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들 두 사람을 이협으로 칭송하니, 그들의 영명(英名)은 곧 찬란히 떠오르는 두 개의 태양이었다.
매혼재녀(買魂才女).
천상미화(天上美花).
패룡옥불(覇龍玉佛).
여래공자(如來公子).
매혼재녀!
혼(魂)이란 글자가 찍힌 백색 마차를 타고 다니며 사람들의 혼을 사는 신비의 기녀(奇女).
그녀가 무슨 방법으로 뭇 사람들의 혼을 사는지 당사자 외엔 아무도 모른다. 
또한 지금껏 그녀가 얼마나 많은 혼을 샀는지도 그녀만이 알고 있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 그것은 그녀가 여자라는 것뿐이다.
천상미화!
그녀는 여덟 명의 꽃 같은 미녀가 든 차일 큰 가마를 타고 다닌다. 
그녀는 단지 그렇게 발 닿는 대로 다닐 뿐, 지금껏 그 어떤 사건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나, 그녀는 사기(四奇)의 대열에 당당히 끼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다.
한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요안(妖顔)을 가졌으며, 한번 시선을 부딪치기만 하면 그대로 혼이 빨리고 만다는 섭안(攝眼)을 지녔다는 미녀 중의 미녀. 
천상미화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다.
패룡옥불!
소림(少林)이 다시 일어섰다. 
다시 일어선 소림은 어쩌면 무림패업(武林覇業)을 꿈꿀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소림을 이끄는 인물이 야망과 독선적 기질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달마(達摩) 이후 소림이 탄생시킨 최고의 기재(奇才)라는 고해대성불마저 능가하고 있을지 모른다.
승려이면서도 특유의 패도적(覇道的) 기질로 인해 무림사기에 당당히 낀 인물. 
현 소림장문인 패룡옥불이 바로 그다.
여래공자!
항상 화사한 황의와 알 굵은 염주알을 목에 걸고 다니는 신비청년.
한 번이라도 그를 보면 마음이 편해질 정도로 그의 얼굴은 늘 평온하다고 한다. 
하나, 그는 살인을 잘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나 죽이지는 않는다.
비마영(飛魔影) 동악비(董岳丕), 탐화일랑(探花一郞) 구운수(具雲水), 흑사귀검(黑殺鬼劍) 풍갈(馮蝎) 등 그의 손에 죽어간 자들은 모두가 극악한 사마(邪魔)의 고수들뿐이었다.
여래공자, 그는 갑작스레 부상하기 시작한 신비 청년고수였다.
일혼이협사기(一魂二俠四奇). 아니, 죽은 일혼을 제외한 나머지 이협사기.
세인들은 그들을 주목했다. 
그들은 분명 이 시대를 주도해 나갈 인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것은 별로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니까.
하나, 그가 술을 마시는 방법은 좀 특이했다. 특이할 정도가 아니라 괴이했다.
그는 우선 술을 입에 대면 그것을 결코 떼지 않는다. 
그것이 잔이건, 주전자이건, 항아리건, 그 크기에 관계하지 않고 단숨에 마셔 버리는 것이다.
그는 술을 쏟아 가며 마셔댔다. 말하자면 그는 입과 코, 그리고 옷과 온몸의 숨구멍으로 한꺼번에 술을 마시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한 항아리의 술을 단숨에 삼킨 후에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혼자 술을 마시는 사람은 대개 사색을 즐긴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사색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사색 대신 주어진 것은 국을 푸는 국자가 안겨 준 번갯불이 이는 듯한 고통이었다.
퍽!
"욱!"
그는 답답한 신음 소리와 함께 주방 안을 정신 없이 나뒹굴었다. 
주방장 전칠(田七)의 손에 든 국자가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것이었다.
"이 거지새끼가 주방까지 기어들어와 술을 훔쳐 먹다니! 좋아, 오늘 네놈을 살려 보낸다면 우리 십대조 할아버지가 개다, 개!"
전칠은 말이 끝나자마자 억센 힘으로 국자를 내리쳤다.
퍽! 
이번에는 그의 이마 위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의 머리 앞과 뒤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는 또다시 저만큼 나가떨어져 사지를 허우적거렸다.
그의 이마에 멋지게 한 방 먹인 전칠은 국자를 내팽겨치고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어, 그는 오른손 주먹으로 그의 면상에다가 가장 멋진 일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옷은 너무 낡아서 멱살을 채가기가 무섭게 부욱 찢겨져 나갔으며, 결과적으로 전칠의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이 새끼!"
전칠의 몸이 또다시 사납게 그를 향해 덮쳐 들었다.
킬킬대며 지켜보던 다른 점원들도 장난스런 표정으로 각기 나무몽둥이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퍽! 퍽! 퍽! 육중한 격타음이 무자비하게 울렸다.
우둑! 우－두둑－!
그의 몸에서 뼈가 부서져 나가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처음엔 가냘픈 신음이라도 내뱉던 그는 이내 그 신음마저 삼켜 버렸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신음하는 법마저 잊어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쾅－! 주루의 주방으로 통하는 조그만 뒷문이 사납게 열렸다.
들어갈 때는 기어들어가던 그의 몸이 나올 때는 날아 나왔다. 
걸레 조각인지 피곤죽인지 그의 몰골은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눈에 띄는 날에는 아예 모가지를 부러뜨리고 말겠다!"
사나운 일갈이 엎어진 그의 등판 위로 일시에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가 엎어진 곳은 미친 개도 십 리는 돌아갈 만큼 각종 오물 찌꺼기가 산처럼 쌓여 있는 곳이었다.
"크ㅋ……!"
그는 생선 뼈다귀와 국수가락 찌꺼기에 코를 처박은 채 한 동안 괴소를 터뜨렸다. 
한데, 그는 또다시 엉금엉금 기어 금방 자신이 날아온 주방을 향해 기어드는 게 아닌가?
그는 술에 미친 자란 말인가?
<혼(魂)>
이 섬뜩할 만큼 붉은 글씨는 그의 그러한 일련의 행동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한 마차의 백색 휘장에 쓰여 있었다.
눈처럼 흰 순백 일색의 설리총(雪璃 ) 네 마리가 끄는 마차는 보는 이의 혼마저 빨아갈 듯 희다. 아니, 너무 희어서 순결하다는 느낌을 지나 귀기(鬼氣)마저 풍기는 마차였다.
저런 마차라면 대륙천하에 단 한 대밖에 없다.
그렇다. 저 마차야말로 무림사기 중 매혼재녀가 타고 다닌다는 매혼거(買魂車)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기 중 가장 강렬한 신비와 의문을 지닌 매혼재녀의 매혼거.
그 매혼거는 아까부터 오물장의 이십여 장 밖에 멈춰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데, 그의 벌레 같은 꿈틀거림을 지켜보면서 휘장 새로 간간이 흘려 내는 저 신음과도 같은 침음성은 무엇인가?
특히 마부석에 앉아 있는 마부 차림의 십팔구 세 남짓된 소년은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외면한 채 자주색 술호로를 입에 거꾸로 세워대고 있었다.
"제길, 이번엔 미쳐도 정말 더럽게 미쳐 버렸군."
마부소년은 텅빈 술호로를 신경질적으로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울분을 토하듯 투덜거렸다.
"호취아, 그만 가요."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 휘장을 뚫고 흘러나왔다.
한데, 호취아라니……?
매혼거를 모는 저 마부소년이 호취아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차 안의 여인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 천하의 골칫덩이를 자신의 마부로 부린단 말인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단언하건데 이 천하에 단 두 사람밖에 없다. 
백운향과 빙월교!
그 중 여인은 빙월교뿐이니, 마차 안의 여인은 필시 빙월교가 아니겠는가?
이때, 그녀의 가자는 말에 호취아의 몸이 멈칫했다.
"형님이 저 모양인데 그냥 가자는 겁니까?"
지극히 공경스런 말투였지만 망설임이 역력했다.
한데, 호취아가 형님이라고 떳떳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백운향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 지금 오물더미를 뒤집어쓴 채 벌레처럼 꿈틀대며 주방으로 다시 기어들어가고 있는 그는 다름아닌 백운향이었다.
그는 산산이 찢긴 영혼과 처절히 쌓인 한을 끌어안고 이렇듯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호취아의 망설임을 눈치 챘음인지 마차 안으로부터 빙월교의 추상 같은 싸늘한 교갈이 터져 나왔다.
"뱁새의 좁은 뜻으로 봉황의 깊고 큰 뜻을 헤아리려는 것은 그분을 욕되게 할 뿐이에요. 자, 어서 가요."
호취아의 땟국물 자르르한 안면 근육이 푸르르 경련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럇!"
철－썩! 호취아의 채찍이 말등 위로 사납게 떨어졌다.
그리고 마차는 질풍처럼 치닫기 시작했다.
그 달리는 마차 속에서 빙월교의 음성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다음은 누구죠?"
"사천당문(泗川唐門)의 천수귀재(千手鬼才)와 신비각(神秘閣)의 무명초자(無名草子)요."
호취아는 연신 채찍을 사납게 휘둘렀다.
"여래공자께서는 특별히 무명초자를 지목하셨소."
"여래사형의 눈이라면 틀림없겠지요."
여래공자라면 그녀와 함께 무림사기의 일 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한데, 여래공자가 빙월교의 사형이었단 말인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일인데…….
"우선 사천당문의 천수귀재의 혼부터 사고 싶군요. 그라면 봉황이 나래를 펴는데 큰 힘이 될 거예요."
빙월교의 말이 떨어지자 마차는 더욱 속력을 내며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또다시 술을 훔쳐 먹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다시 오물장에 처박힌 백운향은 문득 고개를 들어 매혼거가 사라져 간 방향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ㅋㅋ……!"
그의 입술 사이로 황량한 괴소가 아프게 새어 나왔다.
어두운 골목 밖에는 햇살이 찬란히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 햇살 한구석에 놓인 분홍색 꽃무늬 신발을 향해 그는 무섭게 몸을 날려 두 손으로 신발을 부둥켜안았다.
"크ㅋ, 한 푼만… 한 푼만 적선합쇼.."
"끼아악!"
신발의 임자인 여인은 무심히 서 있다가 까무라칠 듯 놀라며 비명을 질러댔다.
여인이 놀라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의 몰골이라는 게 온통 피로 물든 데다가 더러운 음식 찌꺼기가 더덕더덕 붙고, 거기에 코를 쥐게 하는 구역질나는 냄새까지 풀풀 풍기니 귀신도 보면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들고 있는 검집을 사납게 내리쳤다.
퍽－! 머리통이 깨지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벌레처럼 꿈틀대는 그를 향해 침을 뱉고, 아이들은 장난스레 돌을 던졌다. 실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한데, 이때였다. 
짤랑－짤랑－! 어디선가 은은한 풍경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그의 바로 앞에서 뚝 멈추었다.
그의 잔뜩 풀린 흐릿한 시선이 게슴츠레 앞으로 향했다.
먼저 발이 보였다. 도합 열여섯 개의 꽃신을 신은 발이 보였고, 그 발들은 홍의차림의 여덟 명의 아리따운 소녀로 떠올랐다.
그리고 소녀들의 어깨 위에는 크고 화려한 가마가 얹혀 있었다.
연자주색 지붕에 칠채주렴이 그림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사이 사이로 박아 놓은 황금색 풍경(風磬)들로 하여 가히 인간 세상에서는 다시 보기 힘든 화려한 가마였다.
희어서 서럽고, 부드러워서 성결스럽게 느끼지는 섬섬옥수가 칠채주렴 사이로 내밀어지며 하나의 금덩이를 그의 앞에 떨어뜨렸다. 
이어 천상의 선음(仙音) 같은 음성이 가마 안에서 흘러나왔다.
"가자."
일순 주위가 온통 선계(仙界)에 빠져든 듯 황홀경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은 입을 헤 벌린 채 움직일 줄 몰랐고, 부릅뜬 그들의 눈에 금빛 서광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이미 가마가 자리를 떠나 저 멀리서 은은한 풍경 소리를 자아내는지도 모르고 넋이 달아난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보았다.
'요안(妖眼)이었다!'
칠채주렴 사이로 이따금씩 비쳤던 가마 속의 시선은 보는 이의 혼을 빨아들일 듯 강력한 요안이었음을 그는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천상미화(天上美花)!'
그는 내심 그 말을 뱉어 내며 천천히 그곳을 벗어났다.
사람들은 아직도 넋을 잃고 있는지라 그가 떠나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한데, 천상미화라면……?
그렇다. 조금 전 여덟 명의 아름다운 미녀들에 의해 움직이던 그 화려한 가마는 바로 무림사기의 또 한 사람인 천상미화의 가마였던 것이다.
 
나이나 세월이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뼈를 깎는 고통과 가슴 저미는 인내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정말 배고픔이 무엇인지, 진정한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스스로 자신의 몸을 형극(荊棘)의 고난 속에 던져 버린 그 사람.
두 어깨에 짊어진 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스스로 고난의 멍에를 짊어진 그 사람.
그는 오늘도 이 밤을 질질 끌며 그렇게 또 기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항상 패기만만했다. 그 패기와 자신감이 구릿빛 강인한 얼굴 위에 냉엄한 미소로 나타나 있다.
자신의 한 마디가 곧 법이요, 그 법은 항상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되었다. 
그는 사천의 절대자였다.
한데, 그의 얼굴에 항상 감돌았던 그 패기와 자신감에 찬 냉엄한 미소가 지금은 구릿빛 살갗 속으로 침잠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들고 있었다.
누가… 무엇이 그 오만한 미소를 걷어 가 버린 것일까?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걷어 가 버린 것은 한 여인이었다.
눈덩이처럼 희고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는 여인. 
매혼재녀 빙월교였던 것이다.
"당가주(唐家主)께선 지셨어요. 하지만 천수귀재(千手鬼才)라는 별호에 손색이 없을 만큼 탁월한 능력이었어요. 본녀도 오늘같이 힘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그녀는 지금 이긴 자의 오만함이나 의기양양함 없이 오히려 패자(敗者)를 치켜세워 주고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오. 떳떳한 패배임도……."
천수귀재.
현 사천당문의 가주로 무림이 어수선한 당금을 기화로 당문을 구파일방의 대열에 올려 놓고자 했던 야망의 인물이었다. 
한데, 그가 사내도 아닌 한 여인에게 진 것이다.
"가주께서는 이것을 기억해 주세요."
빙월교는 손에 든 삼각 깃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정 가운데에 혼(魂)이라는 한 자가 흰색으로 쓰여 있는 흑색 깃발이었다.
천수귀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패자임에도 실로 의연한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 나타나면 가주는 본녀가 부탁드리는 일을 한 가지 해 주셔야 해요."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수귀재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아니,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그의 혼을 매혼재녀 빙월교에게 판 것이기에…….
한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모른다. 이곳은 외인이 출입할 수 없는 사천당문 최고의 금지(禁地)였으니까.
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매혼재녀가 사천의 패자(覇者)인 천수귀재의 혼을 샀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낚시란 참 좋은 것이다. 
잔잔한 수면과 푸른 하늘을 맞대고 낚시를 하는 것은 진정 상쾌한 일이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야망이 크고, 바둑을 즐기는 사람은 치밀하다면 낚시를 즐기는 사람은 속이 깊다.
여하간 낚시하는 풍경은 좋다. 
하물며 강심(江心)에 낚싯대를 드리운 태공이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녀라면 그것은 더욱 좋은 풍경이다.
베면 피라도 배일 듯 짙푸른 초여름의 하늘이 장엄하게 버티고 선 강변의 우거진 갈대숲 사이로 샛강이 흐른다.
그 샛강에 미소녀는 죽간(竹竿)을 드리우고 있었다. 꾼인 듯싶을 정도로 매우 진지한 모습이었다.
백의를 산뜻하게 차려 입은 미소녀는 일체를 망각한 듯 죽간 위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시선은 오색 찌에 고정시킨 채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뽀얀 손등이 맑은 수면에 반사된 햇살을 받아 인상적이다.  
한데, 지금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치고 진지한 표정으로 죽간 앞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늘어진 윤기 있는 백발백염(白髮白髥), 입정(入定)한 듯 꼿꼿한 자세, 전신에서 은은히 풍겨 나오는 탈속(脫俗)한 기품…….
신선이 현신(現身)했으면 필시 저런 모습이리라.
한데, 선녀처럼 아름다운 조사(釣士)와 신선처럼 탈속한 태공 사이에는 살을 에일 듯한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낚시터의 분위기치고는 너무도 기이한 분위기였다.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하나의 모래시계가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기이하게 만들고 있었다. 
위로부터 아래로 계속 일정한 양의 모래를 흘러보내고 있는 모래시계…….
이들 두 사람은 지금 시간을 정해 놓고 무슨 내기라도 하는 것이란 말인가?
"합!"
노인의 입에서 돌연 짤막한 기합성이 터지며 손이 번개처럼 죽간을 잡아챘다.
휘청! 죽간이 활처럼 휘어져 가는 낚시줄이 거문고의 현처럼 팽팽히 당겨졌다.
크다! 노인은 손에 전해져 오는 감촉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첨벙－! 첨버덩! 은빛 비늘이 햇살 아래 찬연한 빛을 발했다. 
팔뚝만한 은린어(銀鱗魚)였다.
노인의 행동은 신중했다. 
일단 은린어의 입을 수면 밖으로 내놓게 하여 공기를 들이마시게 한 후, 은린어가 아가미 이상을 수면 밖으로 내놓지 못하게 하며 서서히 죽간을 들어올렸다. 숙련되고도 노련한 솜씨였다.
이내 은린어의 그 찬란한 비늘이 뭍에서 퍼덕이며 반짝였다. 
족히 두 자 반은 됨직했다.
미소녀는 잠깐 노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노인은 벌써 네 마리째 저만한 놈을 건져 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피라미 한 마리조차 낚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모래시계는 십에 이 푼만을 남겼을 뿐이다.
노인은 다시 낚시를 드리우기 위해 죽간을 들어올렸다.
한데, 보라! 
낚시줄에는 정작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게 아닌가? 
바늘이 없었다. 그럼에도 노인은 그 바늘 없는 낚시로 벌써 네 마리의 대어(大魚)를 낚아 올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노인은 지금 단지 공력만을 이용해 고기를 낚는 것이란 말인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미소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미하게나마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모래시계는 이제 십에 일 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다.
표정은 진지했지만 아마도 그녀는 낚시를 처음 해 보는 듯했다. 
조사는 어떤 경우에든 초조해 해서는 안 된다. 
극강의 살수가 적을 앞에 놓고도 숨결 하나 흐트리지 않는 침착성을 유지해야 하듯이 낚시 또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였다. 
그 동안 한 번도 입질을 않던 그녀의 오색 찌가 돌연 물 속으로 모습을 쑥 감추었다.
그녀는 다급해지려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속으로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뾰족한 음성과 함께 낚싯대에 얹혀 있던 그녀의 뽀얀 손등 위에 푸른 힘줄이 섰다.
패앵! 낚싯줄이 비파음을 내고 죽간이 부러질 듯 거칠게 휘어졌다. 
그 순간 모래시계가 멈췄다.
그와 함께 허공 높이 떠오른 금빛 찬란한 황금빛 광휘!
노인의 눈에 기광이 일었고 입이 딱 벌어졌다.
한데, 노인의 시선은 지금 막 떠오르고 있는 고기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붉은 반점(斑點)! 
죽간에 공력을 주입시킨 순간 미소녀의 손 완맥(腕脈) 부위에 언뜻 떠올랐다 사라져 버린 붉은 반점을 노인은 보았던 것이다.
노인의 몸이 일순 부들부들 떨렸다. 왠지 격한 감정을 참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미소녀의 낚시줄 끝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이미 낚은 고기를 물 밖으로 꺼내 온몸으로 덥썩 감싸안고 있었다. 행여 애써 잡은 고기를 놓치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허헛……!"
노인은 그 모습에 실소를 터뜨렸다.
미소녀는 고기를 감싸안은 자세 그대로 급히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모래시계가 멈춰졌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본 것이었다.
마치 노인에게 모래시계가 멈춰진 순간을 환기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얼굴이 노인을 향했다.
그녀의 옥용 가득 배시시 미소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진정 깜찍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노선배님, 이 고기는 유효하죠?"
"물론이오.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그놈의 얼굴을 구경했으니… 자, 어서 크기를 재어 봅시다."
"호호! 그럼 제가 이겼군요."
이기다니…? 노인은 벌써 두세 자 짜리 고기를 네 마리나 걷어 올렸거늘, 어찌 그녀가 이겼다는 것인가?
미소녀는 비로소 방금 잡은 고기를 노인을 향해 들어 보였다. 
크기는 그녀의 몸의 반이 넘는 네 자는 족히 넘어 보이는 초대형 금린어(金鱗魚)였다.
대저 낚시승부의 규율은 마리 수의 다수(多數)에 있는 것이 아니다. 크기의 대소(大小)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소녀는 자신 있게 자신의 승리를 말한 것이었다.
미소녀가 계속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 마리를 낚은 것도 사실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구려. 허허! 노부가 졌구려."
노인은 담담히 웃으며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미소녀의 하얀 손이 노인의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자, 그럼 노선배님의 혼을……."
노인의 얼굴에 어려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가셨다.
"물론 주겠소. 하나, 여기선 곤란하외다."
"곤란하다고요?"
"오늘 저녁 엽산(燁山) 초은암(草隱庵)으로 오시오."
미소녀의 서늘한 시선이 노인의 청수한 노안(老顔)에 유심히 머물렀다. 
그녀는 이내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말을 믿겠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느새 미소녀는 갈대밭 사이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노인의 시선이 사라져 가는 미소녀의 등뒤로 빠르게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노안(老眼)에서는 돌연 격한 감정의 물결이 노도처럼 떠올랐다.
"이게… 이것이 사실이길……."
그 날 저녁, 엽산 중턱에 자리한 쓸쓸하고 초라한 암자인 초은암으로 한 대의 백색 마차가 어둠을 가르며 들어섰다. 
매혼재녀의 매혼거였다.
노승(老僧)의 회색가사는 몹시 낡아 건드리기만 하면 풀풀 먼지로 흩어져 날라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 어린애 머리통만한 묵빛 목탁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그의 앙상한 두 손등 위로는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현의도복(玄衣道服)을 걸친 노도사는 숯처럼 검은 얼굴을 한 채 손에 든 불진을 쉴 새 없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낮에 매혼재녀 빙월교와 낚시내기를 벌였던 어옹(魚翁)의 탁자 밑에 감추어진 손은 땀으로 흥건히 젖을 만큼 굳게 움켜져 있었다.
뭔가 중대한 결정을 목전에 둔 듯 그들 삼 인의 눈빛과 행동에는 심각하고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한데, 그들 앞에는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한 명의 미소녀가 있었다. 
다름아닌 매혼재녀 빙월교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단지 맑은 얼굴 위로 잔잔히 떠오른 하얀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돌연, 폐포노승의 손이 불쑥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의 쭈글쭈글 주름진 손엔 자개가 박힌 청자색 찻잔이 들려 있었다.
"노납도 여시주께 혼을 팔 기회를 갖고 싶소이다."
"빈도도……."
노승 옆에 앉아 있던 노도사도 따라 말하며 뽀얀 숯불 위에서 바글바글 끓고 있는 차주전자를 들어올렸다.
빙월교의 섬섬옥수가 망설이지 않고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노승은 숯불 위에서 또 하나의 차주전자를 들어 노도사와 동시에 빙월교가 손에 든 찻잔에 찻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쪼르르…! 김이 펄펄 나는 두 줄기의 찻물이 찻잔에 부어졌다.
"절대 찻물이 넘치는 우를 범하시지 말기를……."
옆에 앉아 있던 어옹이 미미하게 긴장된 음성으로 말했다.
빙월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내 두 개의 주전자에서 부어진 뜨겁기 이를 데 없는 물이 찻잔 목까지 찰랑찰랑 차올랐다.
그 순간부터 삼 인의 여섯 개의 눈이 신광을 이글거리며 찻잔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 완맥으로 쏠렸다.
쪼르르…! 찻물은 계속 부어졌다.
한데, 빙월교의 손에 잡힌 찻잔은 물이 가득 차오른 이후에는 더이상 차오르지 않았다.
노승과 노도사는 차주전자를 큰 각도로 기울였다. 
뜨거운 두 줄기 물은 찻잔 속으로 밀물처럼 떨어져 내리며 금방이라도 넘칠 듯 찻잔 목에 넘실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던 미소녀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아마도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강도 높은 내력을 끌어올리려는 듯싶었다.
순간 그들은 보았다. 그녀의 오른손 손목 완맥 부위에 떠오른 투명한 듯 선명한 붉은 반점을…….
"헉! 대월혈맥점(大月血脈點)!"
"오오.……!"
물을 토해 내던 주전자가 똑바로 세워졌다.
다음 순간 세 노인의 신형이 일제히 바닥으로 허물어지듯 부복지례를 취했다.
"대월국(大月國)의 삼대무군(三大武君)이 삼가 왕녀(王女)를 뵈옵니다." 
"……?"
"잠시나마 왕녀를 시험한 소신들의 무례를 용서하옵소서!"
자칭 대월의 삼대무군이라는 노승, 노도사, 그리고 어옹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격정 어린 음성을 토해 냈다.
빙월교는 돌연한 그들의 태도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당신들은……?"
"오른손에 삼 성의 진기를 주입시켜 보십시오."
노승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빙월교를 바라보았다.
빙월교는 아직도 찻잔을 들고 있는 오른손에 삼 성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또다시 그녀의 완맥에 홍색 반점이 떠올랐다.
그러나 빙월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되물었다.
"이게 어쨌다는 거죠?"
그녀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것은 바로 대월국의 혈맥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소신들 삼 인은 그것을 찾기 위해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중원천하를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노승은 그래도 의혹을 참지 못하는 빙월교에게 천천히 한 가지 비사(秘事)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월국(大月國).
장성(長城)과 옥문관(玉門關)을 넘어 중원과 서장(西藏)의 사이에 사방 수만 리, 인구 십만여의 조그만 나라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곧 대월국이다.
대륙과 서장에 해마다 조공(朝貢)을 바쳐 가며 역사를 이루어 온 지 어언 천 년.
한데,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중원에서 보기에 조그만 문파로밖에 보이지 않던 이 자그마한 나라에 변란(變亂)이 발생했다.
그것은 대월국의 제사십이대 형문왕(衡文王)의 금지옥엽인 월화공주(月花公主)로 인해 기인된 것이었다.
당시 형문왕은 슬하에 자식이라고는 월화공주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월화공주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월화공주의 나이가 십팔 세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부왕(父王)을 졸라 평소 그녀의 꿈이었던 중원 여행을 허락받았다. 
그 당시 대월의 황손(皇孫)이 중원으로 나가는 것은 국법(國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화와 끈질김으로 인하여 형문왕 이하 모든 대신들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만 것이다.
한데, 사건은 그녀가 중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일 년 후 바로 그 날부터 생겼다.
중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옆에는 헌앙함과 준수함을 동시에 지닌 한 명의 사내가 있었던 것이다.
빙기하(氷奇河).
사내의 이름으로 보아 그는 전형적인 한족(漢族)이었다.
그러나 대월국의 국법은 이민족과의 혼사(婚事)를 금지하고 있었기에 월화공주의 혼사는 이윽고 대내(對內)의 파문으로 번졌다. 
하지만 누가 있어 그 당시 월화공주의 고집을 꺾을 수 있겠는가?
결국 형문왕은 대월국의 노대신(老大臣)들로 구성된 구대무군(九大武君)을 소집해 그들 앞에서 월화공주와 빙기하와의 혼사에 관한 가부(可否)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구대무군의 권위는 국왕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구대무군의 의견이 모아졌다. 
결과는 반대 셋, 찬성 여섯으로 결국 월화공주와 빙기하와의 혼사가 결정되었다.
월화공주와 혼사를 성공시킨 빙기하.
그가 야욕의 발톱을 은밀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후였다. 
차츰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생겨났고, 이내 대월국 십오 개 성 중 십 개 성의 성주가 그와 결합하기에 이르렀다. 
대월국은 이미 그의 수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칠흑처럼 어두운 밤. 
마침내 빙기하는 그 동안 축척해 온 모든 세력을 일시에 동원해 모반(謀叛)을 성공시켰다.
우선 형문왕이 시해(弑害)되었고, 형문왕의 어영군이 무참히 도륙되었으며, 그 화살은 마지막으로 빙기하의 혼사를 거부했던 삼대무군에게 돌려졌다.
하나, 항상 빙기하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풀고 있지 않던 삼대무군의 대비는 신속했다.
그들은 먼저 월화공주를 은밀히 탈출시킨 후, 자신들도 월화공주와 반대방향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빙기하의 이목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한 그들은 월화공주의 행적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월화공주가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장안제일기녀(長安第一妓女) 취월(翠月)이라는 여인으로 변신해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삼대무군은 장안의 화운루(華雲樓)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그녀를 찾았을 때는 취월이 몇 달 동안 기녀 생활을 한 뒤 여아(女兒)를 낳자마자 죽고 난 후였다.
삼대무군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이제부터는 얼굴도 모르는 여자아이를 찾아 다시 천하를 떠돌아야 하는 것이다.
단지 대월혈맥점이라는 증표 하나만을 갖고…….
빙월교는 더이상 듣지 않아도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청천벽력이 그녀의 전신으로 몰아쳤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출신내력이 아닌가?
그녀는 오열했다. 자신의 운명이 이토록 가혹할 줄은 그녀 자신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뇌리 속으로 비운의 한을 움켜쥐고 삶을 끝내야 했던 한 여인의 모습과, 자신을 욕망의 제물로 탄생시켜 놓은 비정한 사내의 형체 없는 모습이 한 영상으로 겹쳐진 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교구는 끝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져 내렸다.
환상신기루(幻想蜃氣樓)
전신을 태울 듯이 이글이글 작렬하는 폭염(暴炎)과 사열(砂熱)의 열풍을 동반한 무시무시한 모래바람이 몰아친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은 끝간 데 없이 아득하다.
사막,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폭염과 폭열의 사막 위로 삼백여 마리의 낙타 떼가 걷고 있었다.
딸랑－ 딸랑－ 딸랑－!
낙타 목에 걸린 방울 소리가 지루하게 울린다. 
서역상인(西域商人)들의 행렬이다. 
그들은 사막을 통해 중원과 서역 사이를 왕래하며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사막에 들어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모험(冒險)임에 분명하다. 하나, 그들에게 있어 사막은 일상로(日常路)에 불과할 뿐이다. 
녹주(綠洲：오아시스)의 위치, 유사(流沙)의 흐름, 태양광선으로부터 보호받는 방법 등 사막에 관한 한 그들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긴 낙타 떼의 행렬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사막의 중심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선두에서 일대(一隊)를 지휘하는 두 명의 노인은 이렇듯 뜨거운 태양열과 사열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땀 한 방울 내비치지 않고 묵묵히 지평선 너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낙타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대추빛 홍안에 벽안(碧眼)을 지닌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태양광선을 막기 위해 백색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좌측의 노인은 한 손에 곤옥도(昆玉刀)를 들고 있었으며, 우측의 꼽추등을 한 노인은 작은 벽안을 잠시도 쉬지 않고 사방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길고 긴 행렬이 질서정연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달뢰(達雷), 이번 중원행은 만족한 것이었어."
곤옥도를 든 노인이 꼽추노인을 돌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내 보였다.
"대주(隊主)의 뛰어난 상술(商術) 덕이었습니다. 그리고 날씨마저 사막을 건너기에 적합하고……."
"모든 것이 그분을 돕고 있네."
대주라 불리운 곤옥도를 든 노인은 뜻 모를 말을 뱉아 내고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꼽추노인이 입을 열며 물었다.
"대주, 천룡대사원(天龍大寺院)의 미타활불(彌陀活佛)께서 천룡대라인(天龍大羅印)을 찾으러 중원행을 결심하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쉿! 언성을 낮추게. 그분의 일에 대해 우리 같은 사람은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네."
대주의 작지만 준엄한 호통에 달뢰라는 꼽추노인은 움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네의 말이 맞네. 진정한 천룡대사원의 활불이 되기 위해선 천룡대라인이 꼭 필요한 것이네."
달뢰노인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가 도착하는 대로 그분의 중원출정(中原出征)이 시행될 것이네."
대주는 시선을 한 차례 낙타 행렬에 주었다가 거두어 들였다.
삼백여 낙타와 이백여 명의 상인들은 얼굴에 어떤 표정도 없이 그저 묵묵히 대열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잠시 쉬도록 해라."
대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방을 정신없이 살피던 달뢰노인이 목에 걸고 있던 뿔고동을 입에 대고 길게 불었다.
뿌－우－웅! 은은한 고동 소리가 열사의 사막을 꿰뚫고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고동 소리가 울리자 묵묵히 행진하던 낙타 행렬이 이내 멈춰졌다. 
그러자 달뢰노인이 낙타에서 내려 손수 낙타 떼를 돌아보며 외쳤다.
"모두 짐을 점검하라!"
그의 명령은 우렁차고 짧았다. 
순간 상인들은 지체없이 그의 명령대로 자신들의 짐을 세세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때였다.
"엇! 이게 뭐야?"
돌연 대열의 중간쯤에서 외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달뢰노인은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신형을 쏘아 날렸다.
"무슨 일인가?"
대주가 뒤이어 사람들이 터준 길로 들어서며 물었다.
"대주, 저길 보십시오."
달뢰노인은 즉시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대열의 중간쯤에 풀어 헤쳐져 있는 짐보따리, 그 속에는 약초인 듯한 기이한 풀들과 함께 한 사람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이곳저곳 찢기고 터지고 전신에는 피멍이 낭자하고, 검은 흑발이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얼굴을 덮은 이십대 초반의 갈의폐포인. 
그는 다름아닌 스스로 고행의 길을 자처한 백운향이었다.
본래 그는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청해(靑海)의 한 객잔 창고에 몰래 기어들었었다. 
한데, 그 창고에는 마침 서역상인들의 물품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 중 가장 편안하고 푹신한 약초 더미 속에 들어가 잠이 든 것이었는데, 상인들은 그것도 모른 채 약초 더미와 함께 그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이었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나 할까?
백운향 역시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졌고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터였다.
"죽었느냐?"
대주의 물음에 백운향의 몸을 살피던 달뢰노인이 대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숨결은 붙어 있습니다."
"뭣이라고? 구엽독령초(九葉毒靈草) 속에서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이냐?"
구엽독령초라면 살갗에 살짝 닿기만 해도 즉사하고 만다는 극독초(極毒草)이다.
한데, 백운향은 그 구엽독룡초 속에 파묻혀 하루 반 나절을 자고도 아직 살아 있다니…….
대주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달뢰노인에게 명했다.
"그에게 해독단(解毒丹)을 먹이고 깨워라!"
"어쩌시려고……?"
"구엽독령초 속에서 살아난 놈이라면… 어쩌면 환상신기루(幻想蜃氣樓)의 의문을 풀어 줄지도 모른다."
대주의 말이 떨어진 순간,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헉……!"
"환…환상신기루!"
그들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아예 노랗게 질려 있었다.
도대체 사막을 평원 걷듯 하는 그들이 환상신기루라는 말을 듣자 저토록 놀라는 까닭은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그들은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백여 장 밖에서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은은한 경악과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사막의 전설(傳說)이었다.
<환상신기루의 신비를 푸는 자, 사막의 제왕(帝王)이 되리라! 
어느 달빛 푸른 밤, 찬란한 오색서기와 함께 신비는 풀릴 것이고 그를 마중 나오는 자 있으리라!>
모래가 돌고, 땅이 돌고, 하늘이 돌며, 그와 함께 산처럼 거대한 모래기둥이 치솟아 오른다.
모래기둥은 가공할 빠름으로 회전을 일으키며 수천 척 높이로 치솟고 있는 것이다.
사막의 소용돌이!
흔히 강이나 바다에서 볼 수 있는 소용돌이 현상이 사막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휘루류류－! 쿠쿠쿠쿵－!
무시무시한 사풍(沙風)과 엄청난 굉음, 흩날리는 모래가루…….
천지가 온통 혼돈(混沌) 그 자체였다.
그는 보고 있었다. 곧 자신의 몸뚱아리가 던져질 저 환상신기루의 장엄하도록 잔인한 기세를 그는 지켜볼 뿐이었다.
"크ㅋ……!"
그의 부어 터진 입술 새를 환상신기루의 사풍보다 더 황량한 웃음이 꿰뚫었다.
그는 해독단을 먹고 정신을 차린 뒤 아직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주라는 사람은 그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위협도 해 보고 회유도 해 보며 별별 수단을 다 썼지만 결코 그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단지 벙어리가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 주듯 한시도 쉬지 않고 자학적인 괴소만을 흘려 낼 뿐이었다.
대주는 일찌감치 그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이상 헛된 수고를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말을 하건 그를 환상신기루 속으로 던져 넣으려는 마음에 변화는 없을 테니까.
무릇 인간이 호기심을 가지면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는 법이다.
"저 자의 옷을 벗겨라!"
대주의 명령에 따라 상인 하나가 그의 낡은 폐포를 벗겨 냈다. 아니, 벗겨 낼 것도 없었다. 그의 옷은 벗겨 낼 만큼 새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잡으면 잡는 대로 먼지가 일며 찢겨져 나갔다. 
옷을 벗기는 이유는 유사의 흐름에 저항을 줄이려는 것이었다.
이내 옷이 다 벗겨졌다. 
순간 대주의 눈에 한 줄기 경악지색이 떠올랐다. 
그는 백운향의 등판에 새겨진 세 개의 낙인을 보고 만 것이다. 
모두의 눈에도 경악의 빛이 서렸다.
하지만 놀람의 빛을 띠우고 있던 대주의 시선은 어느새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야우혼은 분명 죽었다고 들었거늘… 어쨌든 상관없다."
그는 백운향을 마주서게 했다. 백운향은 해약을 먹이기 전에 마혈(麻穴)을 점혈당한 터인지라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혈도는 반 각 후면 저절로 풀릴 것이다."
"……!"
"사흘을 기다리겠다. 네가 만약 환상신기루의 신비를 풀면 너는 사막의 제왕(帝王)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대주는 그 말을 마치자 웃통을 벗어 젖힌 한 명의 건장한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확히 환상신기루의 눈에 떨어뜨려야 한다."
"알겠습니다!"
건장한 사내는 우렁차게 대답한 후 백운향의 몸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다다다다닷－! 그는 맹렬히 돌진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속도와 탄력을 이용하여 백운향을 던지려는 것 같았다. 
모래가 무릎까지 푹푹 빠져들었으나 사내의 달리는 속도는 그야말로 쏘아 낸 화살처럼 빨랐다.
백운향은 사내의 두 손에 치켜들린 채 이제 잠시 후면 자신을 집어삼킬 거대한 모래기둥을 바라보았다.
과연 저 속에 던져지고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만약 저 악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난다면……?
문득 습관처럼 백운향의 입가에 감돌던 자학적인 미소가 싹 가셨다. 
그리고 그 동안 이 한순간을 위해 살아 왔던 것처럼 두 눈에서 강렬하기 이를 데 없는 두 줄기 광망을 폭사시켰다.
만일 이 순간 누가 그의 눈빛을 보았더라면 아무리 강철심장을 지닌 자라 해도 자신의 몸이 녹아 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이제 끝내자. 
만약 저곳에서도 살아날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비로소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검(劍)을 잡는 것이다. 처절한 한과 차가운 복수로 다져 놓은 그 검을…….
후후, 마지막 관문치고는 근사하군.
바로 이때였다. 
건장한 사내가 달리던 탄력을 이용해 백운향을 모래 소용돌이를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백운향의 몸이 긴 호선을 그으며 허공을 섬전처럼 날았다. 
다음 순간 백운향은 지금껏보다 수백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자신의 몸이 모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우드드득－! 답답하다는 압력을 느낄 틈도 없이 온몸이 짓이겨지는 듯한 끔찍한 충격에 백운향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
뜨거운 폭염과 열사 사이를 뚫고 사흘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사막의 황혼은 아름답다. 핏빛 노을이 아스라이 모래 위에 금빛 융단을 깔고 누우며 환상신기루의 모래기둥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틀렸다! 떠날 준비를 서둘러라!"
대주는 허탈하게 모래기둥을 한 차례 바라본 다음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뿌우우우－우－웅!
달뢰노인의 고동 소리가 핏빛 노을 속으로 애잔하게 깔렸다. 
환상신기루 속으로 들어간 백운향에 대한 미련을 포기한 것이다.
이백여 상인들은 일제히 짐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한데,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핏빛 노을을 등지고 천지가 떠나갈 듯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울렸다.
짐을 챙기던 상인들의 신형이 돌조각처럼 얼어붙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피해라! 모두 흩어져라! 사막십팔환영대(沙漠十八幻影隊)다!"
지금껏 평온을 잃지 않던 대주의 음성이 긴장을 감추지 못하며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하나, 그의 말에 따라 도망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아니, 도망치지 않는 게 아니라 누구도 도망칠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불신, 경악, 공포…….
한데,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저렇듯 망연자실하고 있단 말인가?
보라! 은빛 피풍의(避風衣)를 걸친 십팔 인의 혈의인(血衣人)을 태운 열여덟 필의 대완구(大腕驅)가 질풍처럼 치달려 오고 있었다.
사막십팔환영대!
그들은 이 당고라사막(唐枯羅沙漠)의 환상신기루와 함께 또 하나의 전설로 통하는 가공할 피의 집단이었다. 
사막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서역상인들이 유독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막십팔환영대뿐이었다.
"끼럇!"
"차앗!"
두두두두두두두－! 
방금 핏빛 노을 속에 자취를 드러낸 사막십팔환영대는 어느새 넋을 놓고 있는 상인들의 코앞에 이르렀다.
"모조리 죽여라!"
십팔 인의 혈의인 중 가장 우측의 혈의인이 핏빛 채찍을 휘두르며 피를 부르듯 폭갈을 터뜨렸다.
츠츠츠츳…! 파－아－앗－!
기다렸다는 듯이 대완구 위의 혈의인들이 서역상인들을 향해 짓쳐들었다.
"으악!"
"크－아악!"
처참한 도륙(屠戮)! 
상인들은 손 한 번 움직이지 못하고 대완구의 억센 발길에 채이고 혈의인들의 각종 병기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애당초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사냥이며 무차별한 살륙, 바로 그것이었다.
"크하하핫! 환상신기루를 건드리면 곧 죽음이다!"
"크악－!"
"카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성이 마치 줄을 잇듯 연이어 울려 퍼졌다.
가공할 열기를 내뿜던 열사 위로 핏물이 스며들고 말랐다가는 또다시 떨어져 내린 핏물로 작은 도랑을 이루며 모래 위를 흘렀다.
살륙의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죽은 생명은 너무도 많았다.
이백여 명의 상인과 삼백여 마리의 낙타가 한꺼번에 시체로 변했다. 졸지에 몰살당하고 만 것이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열풍은 혈풍(血風)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형체조차 분간할 수 없는 천참만륙(千斬萬戮)의 참혹한 시체더미뿐…….
그렇게 모든 것이 피바람이 되어 노을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있는 게 있다면 단 하나, 사막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을 듯 소름끼치도록 섬뜩하게 울려 퍼지는 피의 광소뿐이었다.
"크흐흐흣! 누구라도 환상신기루에 접근하는 자는 가차없이 죽인다! 환상신기루의 비밀은 우리 사막십팔환영대에 의해서 유지되어야 한다. 언제까지라도……."
백운향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눈을 떴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환상신기루 속으로 던져졌었다는 사실만이 기억날 뿐이었다.
그의 피부는 한 꺼풀인지 두 꺼풀인지 모르게 벗겨져 있었고, 벗겨진 살갗과 흐르는 핏물 위로 모래가루가 범벅이었다.
"크ㅋ, 내가 생각해도 지겹도록 끈질긴 생명이로군."
백운향은 스스로에게 감탄을 터뜨리다 이내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이것은 나란 놈이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 이제 다시 일어서는 거다. 이왕 일어서는 김에 멋지게 검을 휘두르는 거다."
백운향은 누운 자세 그대로 몇 번인가 그 말을 되뇌었다.
문득 그의 두 눈 깊숙한 곳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백옥보다 더 아름답고 봄바람보다 더 온유로운 미소를 배어문 한 사람.
다름아닌 사도천이 높은 곳에 오만하게 앉아 그에게 조소에 찬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 백운향, 이제 시작해 보겠다는 거냐? 이미 늦었다. 아니, 애초부터 너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너보다 강했으니까.
순간, 백운향은 자신의 귓청마저 찢어 버릴 만큼 큰 소리로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사－도－천－!"
이어 그는 환상신기루 속을 마구 치달려 가기 시작했다.
통로, 그것은 하나의 좁은 지하 통로였다.
적당한 간격으로 주먹만한 야명주가 박혀 있고, 용암이 굳어서 된 듯 바닥과 벽과 천정은 우둘툴한 검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운향은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며 통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환상신기루 안에 이런 지하가 있으리라곤 실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얼마나 밑으로 내려갔을까? 
툭! 돌연 무엇인가가 발길에 채이는 소리와 함께 백운향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그의 발에 채인 것은 백골이었다.
"나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니……."
백운향의 시선이 빠르게 백골 주위를 살폈다. 문득 그의 시선에 의혹이 일었다. 
살아 생전에는 장대했으리라 여겨지는 백골의 손가락이 딱딱한 돌바닥에 깊숙이 박혀 있었는데, 그 바닥엔 금강지력(金剛指力)으로 쓴 글씨가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백운향의 몸이 굽혀지고 시선이 글귀에 가 닿았다. 
처음에는 세 치 깊이를 꿰뚫었던 금강지력이 끝으로 갈수록 점차 엷어지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 이 백골의 주인공은 점차 기력이 탈진해 가는 와중에 금강지력으로 글을 남겨 놓은 것이 분명했다.
<천하의 천흘문(天屹門)이 나 미무위(美武偉)의 대(代)에서 끊기다니……. 
천문(天門)의 힘은 너무도 가공했다. 이제 천하는 천문을 막을 수 없다. 
천 년 동안 잠자 온 천문을 견제하기 위해 본 천흘문도 잠자 왔거늘, 오히려 천문에 당하다니……. 
하늘을 원망할 뿐이다.>
백운향은 순식간에 이곳까지 읽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가 이곳에서 천문에 얽힌 또 하나의 비사를 접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계속 글을 읽어 나갔다.
<천흘문이 무너졌으니 천문을 줄곧 견제해 온 나머지 세력들도 무너졌으리라. 
천문을 견제하기 위해 비전(秘傳)해 온 본문의 뇌정태양무(雷霆太陽舞)가 깨어졌으니 그들이 갖고 있는 파천무 또한 천문의 힘에 깨어졌으리라. 
조사(祖師)의 유시대로 오대파천무가 합쳐지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단지… 임신한 아내의 탈출은 나 개인으로선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금강지력으로 파여진 한서(恨書)는 힘이 다했음인지 거기서 끊겨 있었다.
글을 다 읽은 백운향의 눈에 커다란 경악지색이 떠올랐다.
그의 시선은 백골 옆에 놓여 있는 양피지로 된 책자를 향해 못박힌 듯 던져지고 있었다.
<뇌정태양무(雷霆太陽舞)>
그것은 섬뜩한 핏빛 글씨로 쓰여진 다섯 장 남짓의 얄팍한 책자였다.
그는 이미 황궁무고(皇宮武庫) 내에서 미혼환락무를 익혔으며, 천룡문이 간직해 온 천룡승천무도 익혔다.
한데, 이번에는 뜻하지 않게 환상신기루 내에서 뇌정태양무를 얻게 된 것이었다.
<환상부(幻像府)>
백운향이 뇌정태양무를 읽지도 않고 손에 든 채 도착한 통로 끝의 석문(石門) 위에는 주사빛 글씨로 그 세 자의 글자가 선명히 쓰여져 있었다.
백운향의 얼굴이 미미한 긴장으로 굳어졌다. 
이제 막 이 동굴의 신비가 벗겨지려는 순간이었다.
잠시 석문을 예리하게 살피던 백운향은 돌연 환상부라 쓰여진 세 글자를 향해 식지를 연달아 세 번 튕겨 냈다.
팟! 팟! 팟! 스르릉……!
석문이 좌우로 갈라지며 안으로부터 강렬하기 이를 데 없는 찬란한 빛이 와르르 폭사되어 나왔다.
백운향은 일순 흠칫하는가 싶더니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석문이 열렸을 때와 똑같은 소리와 함께 저절로 닫혔다.
백운향은 긴장된 얼굴로 석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수정으로 만든 관(棺) 하나가 그의 시선으로 파고들었다.  
그 관은 이십여 장에 달하는 석실의 사방 벽에 무수히 박힌 야명주로부터 뿜어지는 갖가지 색깔의 광채를 일시에 받으며 석실 정중앙의 석대(石臺)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
백운향은 황홀하기까지 한 그 광경에 절로 탄성을 자아냈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는 천천히 석실 중앙의 수정관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내 관 앞으로 다가서서 관 속을 들여다보았다. 
속이 훤히 비치는 관 속에는 한 명의 노인이 잠자듯 드러누워 있었다. 이미 죽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난 듯한 시체였다.
한데, 수정관 위에는 먼지를 수북이 뒤집어쓴 누런 책자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백운향은 손을 뻗어 그 책자를 집어 들었다.
<환상무제혈한기(幻像武帝血恨記)>
누런 바탕에 핏빛 선명한 붉은 글씨로 쓰여진 책자의 제목이었다. 한데, 그것은 놀랍게도 혈서(血書)로 된 책자였다.
<나는 사부(師父) 조화선옹(造化仙翁)을 뵐 면목이 없어 스스로 수정관 속에 혼(魂)을 가둬 구천(九泉)에 가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다섯 사형제는 모두 사부의 유시를 어기고 천문을 쳤다가 사부의 명예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으니 말이다.
아아, 그것은 천추(千秋)의 한이었다.
천문의 취록혈강(翠綠血 )과 칠채천마혼(七彩天魔魂)!
그 두 무공은 진정 가공했다. 우리는 손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철저히 패했다.
오대파천무가 합쳐질 때를 기다려 천문을 치라 하신 사부님의 유시를 그때서야 통감하다니…….
우리 오 인의 사형제는 땅을 치고 통곡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겨우 천문의 추적을 벗어난 우리 오 인의 사형제는 후일을 기약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한 가지씩의 파천무를 간직한 채 흩어져 천문의 눈을 피해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환상무제혈한기는 하나의 충격적인 천년비사(千年秘事)로 이어지고 있었다.
달마대사(達磨大師),
불사마존(不死魔尊),
천마대제(天魔大帝),
조화선옹(造化仙翁).
바로 이 땅에 무림 창세(創世)의 기원을 이룩한 사 인의 절대자이다. 
이름하여 무림사대무성(武林四大武聖)!
복우산(伏牛山) 천황봉(天皇峯)에 천하영웅대탑(天下英雄大塔)을 세우기도 한 그들이다.
한데, 시대의 비극이련가? 
그들은 동시대(同時代)에 태어났다. 
또한 걷는 길과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으니 자연 그들은 숙명처럼 은연중에 서로를 견제해야 ㅎ다.
그러나 불사마존 외의 삼 인은 느끼고 있었다. 무공과 깨달음의 경지, 그 모든 것에 있어 불사마존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그들은 느꼈을 뿐만 아니라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사마존이 갑자기 그들 삼 인을 초청했다. 
그들과 진정한 승부의 비무를 신청한 것이다.
달마 등 삼 인은 정면으로 도전해 오는 불사마존의 도전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사람씩 불사마존과 승부를 가리기에 이르렀다.
한데, 불사마존보다 한 수 정도 뒤진다 생각해 왔던 그들 삼 인의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었다. 
불사마존은 약속이라도 한 듯 삼 인을 칠백이십일 초 만에 똑같이 패배시켰던 것이다.
칠백이십일초 동안 근근히 그들의 공격을 막아 오던 불사마존의 진가는 바로 그 순간 나타났다. 
불사마존의 비장의 가공절초 불사경혼수(不死驚魂手)가 펼쳐진 것이었다.
삼 인의 절대자는 한결같이 그 불사경혼수 앞에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만약 불사마존이 첫번째 초식으로 불사경혼수를 펼쳤다면 그들은 단 일초 만에 그에게 패퇴를 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불사마존이 떠난 후에야 불사마존이 그들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칠백이십일 초 동안이나 승부를 끌어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데, 문제는 그런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사마존에게 칠백이십일 초 만에 패한 천마대제에게 문제가 있었다.
불사마존이 마도인(魔道人)이면서도 유난히 호승심이 강했고 진정한 마도(魔道)를 추구한 반면, 천마대제는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그는 천하를 한 손아귀에 움켜쥐고 말겠다는 야욕을 남모르게 불태우고 있었다.
그가 불사마존에게 패한 것은 사실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스스로 패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교묘하게 불사마존의 호승심을 이용해 일생일대의 난적 하나를 제거한 것이었다.
－ 크하핫! 나는 이제 무림에 일말의 미련도 없다. 너희들은 전인(傳人)을 키우겠지만 나는 불사마존이라는 이름과 함께 영원히 전설로 남으리라. 크하하핫!
천마대제가 예상한 대로 불사마존은 제일인자라는 명예만을 간직한 채 영원히 은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불사마존이 잠적하자 드디어 야망의 인물 천마대제가 야욕의 발톱을 세웠다. 
그는 우선 그 동안 숨겨 온 세력을 확장시켜 천문(天門)을 세웠다.
이에 가장 당혹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달마대사와 조화선옹이었다.
조화선옹은 다급히 천하를 주유하기 시작했다. 그가 창안한 오대파천무를 익힐 수 있는 기재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나, 오대파천무를 한 몸에 익힐 수 있는 기재가 당시에는 없었다. 
결국 조화선옹은 고심 끝에 다섯 명의 천하기재를 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대파천무를 각각 한 가지씩 나누어 전수해 주며 유시를 남겼다.
－ 오대파천무가 하나로 합쳐질 때까진 어떤 수모가 닥쳐도 결코 천마대제의 천문과 맞서지 말라.
그러나 오 인의 제자는 조화선옹으로부터 전수받은 파천무 일 초씩에 너무도 큰 자부심을 느꼈다. 하늘 높은 줄 몰랐다는 말이 적합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익힌 일초 파천무보다 강한 무공은 천하에 없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한편, 그 동안 천문의 힘은 더욱 강해져 이미 천하의 팔 할을 잠식해 들고 있었다.
그들의 힘이 뻗치지 않고 있는 곳이라고는 황궁과 소림사, 그리고 조화선옹이 창시한 조화신문(造化神門)뿐이었다.
더불어 천문의 횡포는 날로 흉악해져 갔다.
급기야…….
천룡승천무제(天龍昇天武帝),
뇌정태양무제(雷霆太陽武帝),
파천군림무제(破天君臨武帝),
환허환상무제(幻虛幻像武帝),
미혼환락무후(迷魂歡樂武后).
조화선옹의 다섯 제자인 그들은 사부의 유시를 깨고 조화신문의 모든 것을 동원해 천문을 치기에 이르렀다.
한데, 천문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공했다. 
오대파천무가 천마대제의 칠채천마혼과 취록혈강에 의해 여지없이 깨져 버린 것이다.
비로소 그들 오 인은 사부가 왜 그런 유시를 남겼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그들은 겨우 목숨만 유지한 채 피눈물을 뿌리며 후일을 기약하고 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한데, 천마대제는 조화신문의 습격을 일격에 패퇴시킨 후 곧바로 소림으로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소림만 손에 넣으면 천하무림은 그대로 그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나, 무슨 운명인가?
－ 크으으…! 하늘이 원망스럽다. 천하를 목전에 둔 나를 시기한 저 하늘이… 하나, 언젠가 보여 주리라. 나 천마대제의 후예가 천하를 제패하는 것을… 크하하핫!
인간은 결코 천수(天壽)를 거역할 수 없음인가?
무림의 절대자 천마대제도 하늘의 부름만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천하를 목전에 두고 비운의 절대자인 천마대제는 하늘을 원망하며 죽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천문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마대제가 없는 천문으로서는 달마대사의 소림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천마대제의 유시에 따라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백운향은 아예 넋을 잃은 듯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이 엷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비사(秘事)……."
그의 말은 그 말 외에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 비사였다. 천하에 아무도 알지 못했던 엄청난 비사였던 것이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그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구절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하나, 나는 결코 사부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사부의 오대파천무를 믿는다.
사부께서 오대파천무로 불사경혼수에 패한 것. 그것은 사부께서 오대파천무를 창안하셨을 뿐 결코 그것을 합치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대파천무의 위력이 너무 가공해 그것이 쓰여질 날이 영원히 없으리라 믿으셨던 때문이다.
나의 이 말은 오대파천무가 합쳐지는 날 실지로 증명될 것이다. 
나의 이 생각은 한낱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이 글이 읽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을 위해 이 글을 남긴다.
이 글을 읽는 자가 있다면 오대파천무를 합쳐 조화선옹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바란다.
그리고 출구는 그대가 들어온 곳밖에 없다. 사면 벽에 남긴 환허환상무(幻虛幻像舞)를 익히면 능히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일련의 무리들이 그대를 마중 나올 것이니… 그대는 그들 앞에서 환허환상무를 펼쳐 보여라. 그리하면 그들은 그대를 따르게 될 것이다.
부디 나의 안배를 옳은 일에 써주기 바란다.
송무제(宋武帝) 원년(元年)
환허환상무제(幻虛幻像武帝) 절필(絶筆)>
환상무제혈한기는 그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밝혀졌다. 
무림사대무성도, 천문도, 오대파천무도…….
그 놀라운 비사는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밝혀졌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백운향에 의해서…….
운명인가? 
백운향과 사도천과의 관계는 오대파천무와 천문으로 하여 더욱더 상극(相剋)의 관계로 치닫게 되는 것이니…….
어쨌든 백운향은 치솟아 오르는 경악과 흥분을 지그시 가라앉히며 환허환상무가 새겨진 벽면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3권으로 이어집니다.


제목: 절대쌍웅 제3권 (전3권)
지은이: 군옥당
- 차례 -
사막십팔환영대(沙漠十八幻影隊)
음모(陰謀)의 밤
누구든 사랑할 수 있는 여인
숨겨진 계략(計略)
허허실실(虛虛實實)
생(生)을 정리하며
옛날 이야기
비련(悲戀)
귀거래사(歸去來辭)


사막십팔환영대(沙漠十八幻影隊)
사막의 꽃인가? 
소녀는 오늘도 열사(熱沙)의 땡볕에 앉아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가 이 황량한 사막에 앉아 이렇게 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벌써 백오십 일 전부터였다.
어젯밤 사막을 휩쓴 돌개바람으로 인해 그나마 햇빛을 가려 주던 연자줏빛 차일도 바람에 날려 갔다.
물론 아끼고 아끼던 물과 식량마저도 몽땅 날아가 버렸다.
우르릉－! 쿠쿵－!
소녀는 또 하나의 돌멩이를 거대한 환상신기루 속에 집어 던졌다.
돌맹이는 폭염을 가르고 모래의 소용돌이 속에 떨어져 이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아름다운 소녀는 이 돌 던지는 재미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무료함을 달랠 수 없어 벌써 죽어 버렸을 것이다.
한데, 비록 모래바람에 까칠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혼백마저 빨아들일 듯 뇌살적인 미(美)를 풍기는 이 미소녀가 백오십 일을 하루같이 이 환상신기루 앞에 앉아 돌을 던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가 이곳에 나타난 것은 사실 서역상인의 무리와 함께였다. 
백운향이 환상신기루에 던져진 후 사막십팔환영대가 이백여 서역상인들을 천참만륙 짓밟을 때 그녀는 모래 속에 몸을 숨기고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벌써 백오십 일째다. 
오늘도 석양이 지고 모래 속으로부터 서서히 어둠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아! 이제 모든 것이 끝이야. 하지만 나의 책임은 끝났어. 그는 죽었으니까."
소녀는 자신이 던진 마지막 돌맹이를 바라보며 체념한 듯 모래 바닥 위에 몸을 눕혔다.
그것은 그녀가 이곳에 앉아 있은 뒤로 처음 누워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잔뜩 경계심을 품은 채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 보름이었나?"
소녀는 누운 채 하늘 높이 걸린 만월(滿月)을 바라보았다.    문득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아무리 보아도 싫지 않은 그 영상을 향해 소녀는 담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존, 심랑은 당신을 위해 준비된 셈이었고 당신을 위해 산 인생이었어요. 심랑은 지금 죽는다 해도 당신의 그 따뜻함을 잊지 않을 거예요."
여인의 두 볼을 타고 사모(思慕)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데, 심랑이라고 했는가?
우리는 심랑이라는 사람은 보지 못했어도 그 이름은 들어 왔다. 그것도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다.
사도천은 항상 곤경에 처하면 습관처럼 심랑을 불렀지 않은가?
그리고 사도천은 백운향이 천의장을 떠날 때 그녀에게 백운향을 맡기지 않았던가?
한데, 심랑이라는 사람이 바로 이 미소녀였다니…….
그녀의 눈에 어리던 해맑은 영상은 바로 사도천의 영상이었다. 
그녀는 비록 사도천과 주종(主從) 관계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를 사모해 왔다.
당연하리라. 천하의 어떤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게 되면 영원히 사모의 정염(情炎)을 불태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소녀의 눈에 비치던 영상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반딧불처럼 깜박깜박 명멸하기 시작했다. 
돌연 소녀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눈을 크게 뜬 소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보름달마저 그 빛을 잃을 만큼 그녀는 정녕 아름다웠다.
툭…! 허공에 들렸던 그녀의 손이 차가워진 모래 바닥 위에 한 송이 낙화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끝으로 그녀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환상신기루의 굉음은 산모(産母)의 진통처럼 더 크게 울리고, 휘영청 만월은 그 빛을 사위로 더욱 푸르게 토해 놓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그녀의 죽은 듯 누워 있는 홍의자락 위로 흘렀을까.
번쩍! 고오오……!
가공할 기세로 돌던 모래기둥이 내친 듯 허공으로 모래가루를 뿜어 올리며 그 사이로 찬란한 오색서기가 하늘 높이 퍼져 올랐다.
무려 삼십여 장 높이로 곧장 뻗어 올라간 오색서기는 어느 한순간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뻗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소녀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곳이었다.
이어 오색서기 덩어리는 소녀의 옆에서 서서히 한 사람의 형상으로 신비의 형체를 풀어 헤쳤다.
온몸에 은은한 광채가 서린 나신의 사내, 그는 바로 백운향이었다. 
환상신기루의 신비를 풀고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소녀의 몸을 내려다보더니 허리를 굽혀 거침없이 소녀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으음……."
어느 한순간 소녀의 입에서 가냘픈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백운향은 몸을 일으켜 소녀의 옆에 선 채 무심한 눈으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일이군. 이 여인이 어찌 이곳에 쓰러져 있단 말인가?"
마치 그녀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듯한 중얼거림이었다.
그의 벌거벗은 건장한 나신은 달빛 아래에서 계속 신광을 뿜어 내고 있었다.
"으음……."
또다시 소녀의 입술 사이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백지장같이 창백하던 얼굴에 은은한 혈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꺼풀을 몇 번 껌벅이더니 이내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악!"
돌연 그녀는 두 봉목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성을 토해 냈다.
일시 영문을 몰라하던 백운향은 부지중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벌거벗은 나신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왜 소녀가 비명을 질렀는지를 알고는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다.
"훗, 우린 초면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놀랄 건 없잖나?"
그의 얼굴에 오랜만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치한, 어서 저리 비키지 못해요!"
소녀는 백운향을 외면한 채 송곳처럼 날카롭게 소리쳤다.
백운향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짓궂게 변했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딴판이로군. 난 천상미화라 해서 삼두육비(三頭六臂)의 괴물인 줄 알았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여염집 규수 흉내나 내는 흉물이었군."
"뭐예요?"
소녀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순간, 그녀의 시야 가득 사내의 건장한 육체가 파고들었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눈을 가렸다.
"여하튼 언젠가 네가 그 멋진 가마를 타고 내게 던져 준 금덩이는 정말 고마웠다."
백운향은 가마에 타고 있던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를 상기했다. 
그때 그녀는 주렴 사이로 하나의 금덩이를 벌레처럼 기어가던 그에게 던져 주지 않았던가.
심랑이라는 이 소녀의 또 다른 신분은 천상미화라는 강호 요화(妖花)였던 것이다.
백운향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지금 자신을 위장하고 있구나. 손으로 눈을 가림은 손가락 사이로 상대를 훔쳐보기 위함이겠지. 눈을 가리고 실눈을 떠도 상대는 그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사람 사이에는 왕왕 있지. 후후, 그런 사람을 가리켜 음흉하다느니 흉물스럽다느니 하지 않느냐."
천상미화가 지지 않고 앙칼지게 대꾸했다.
"흥, 당신은 그 잘난 몸뚱이에 칠보은갑(七寶銀甲)이라도 씌운 듯 자랑이로군요."
"그야 당연하지. 천하의 천상미화가 손가락 사이로 훔쳐볼 만큼… 엇?"
백운향은 말을 하다 말고 헛바람을 토해 냈다.
천상미화가 사나운 기세로 일어서더니 무지막지한 일 장을 쳐낸 것이었다.
펑! 그녀의 일 장은 그대로 백운향의 앞가슴을 강타했다.
백운향의 몸은 가랑잎처럼 날아가 모래 속으로 처박혔다.
천상미화는 그의 말에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 장을 쳐낸 것인데, 그는 피할 생각도 않고 장력(掌力)을 그대로 몸으로 받은 것이었다.
천상미화의 눈에 의혹이 일었다. 
만약 그가 피하고자 했으면 능히 피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일 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그런 것이 안 어울려. 그런 손으로 빨래를 하면 빨래가 다 찢어질 것이고, 밥을 하면 밥을 솥째 태워 버릴 테니까."
그 비아냥거림은 그녀의 등뒤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천상미화는 부지중 음성을 따라 몸을 돌렸다. 
그녀에게 일 장을 격중당해 모래 속에 처박혔던 백운향이 모래 밖으로 얼굴만 내밀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천상미화는 그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죽여 버릴 거야!"
"호, 훌륭한 천마표흘의 수법이로군. 이크!"
백운향은 그의 머리를 쪼갤 듯 덮쳐 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모래 속으로 머리를 쏙 감추었다.
펑! 목표물을 잃은 장력이 커다란 구멍을 모래 위에 새기자, 백운향의 음성이 그녀의 뒤에서 들려 왔다.
"훌륭하긴 하지만 그 정도 천마표흘의 수법으로는 내 머리를 박살내긴 내 머리가 너무 아까워. 이크!"
말을 하던 그의 머리가 또다시 모래 속으로 쏙 들어갔다.    천상미화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음성을 따라 손을 휘둘렀던 것이다.
"너, 아주 죽여 버리고 말 거야!"
그녀는 계속 허탕치는 자신의 손속에 바짝 약이 올라 두 손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이는 암경은 진정 가공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예 이성을 잃을 만큼 약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펑－! 콰쾅－! 갑자기 사막의 달빛 아래에서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쏙 내밀어졌다가 쏙 들어가는 백운향의 머리와 사납게 휘젓는 천상미화의 어마어마한 강기살이 술레잡기하듯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아이쿠! 내가 졌다. 밖으로 나갈 테니 손을 멈춰라."
이리저리 다급하게 모래 속을 피해 다니던 백운향이 숨가쁘게 소리쳤다.
"나오지 말아요!"
천상미화는 백운향이 나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백운향보다 더욱 다급히 소리쳤다.
"이런 제길! 모래 속에 있으면 죽이려 하고, 손 들고 나가겠다고 하면 나오지 못하게 하다니… 천상 나는 오늘 죽어야 할 운명이로구나. 제길, 죽을 때 죽더라도 너도 이거나 한 대 먹어라."
연신 그녀의 손속을 피해 모래 속을 헤매던 백운향의 손이 모래 밖에서 한 차례 비스듬히 휘둘러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손 장심(掌心)으로부터 달빛 속으로 터져 오른 것은 수천 수만 개의 현란한 태양이었다.
번쩍! 쿠쿠쿵!
"악!"
가공할 광채와 굉음, 그리고 비단폭을 찢는 듯한 여인의 비명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백운향은 환상신기루 속에서 우연히 얻은 뇌정태양무(雷霆太陽舞)를 불과 일 성의 공력으로 쳐냈던 것이다.
한데, 그것이 이토록 가공할 줄이야?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인 듯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천상미화는 허공으로 오 장 정도나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모래 위로 떨어져서도 한동안 비틀거린 후에야 간신히 신형을 바로잡을 정도였다. 
그녀의 눈에 확연한 당혹감이 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운향의 얼굴 위로 또다시 그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백운향은 예전의 활기를 다시 찾은 것이다. 무섭도록 밀려드는 암울과 한(恨)을 스스로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선 것이다.
이때 돌연 천상미화의 당혹한 시선이 경악으로 잔뜩 물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아! 이…이봐요. 오고 있어요."
그녀는 하얗게 질린 옥용을 들어 백운향의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운향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로 돌려졌다.
"후후, 이제야 오는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어조였다.
한데, 그때다. 
경악에 질려 떨고 있던 천상미화의 신형이 돌연 빛살처럼 백운향의 돌려진 머리를 향해 덮쳐 갔다.
펑! 
하나,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그의 머리는 이미 모래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속임수를 쓴 것인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짜였다.
허탕친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의 표정이 미미하게 떠올랐다.
'분하다! 이번엔 꼭 성공시킬 수 있었는데… 한데, 어쩌지?'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앞을 응시했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섬뜩한 피 냄새가 훅 끼쳐든다.
은빛 피풍의가 달빛 속에 펄럭이고, 열여덟 필의 대완구는 한 번의 도약으로 무려 오 장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먼지가 말발굽으로부터 뽀얗게 휘말려 올라가 달빛을 가렸다. 
십팔 두의 대완구 위에는 십팔 인의 혈의인들이 기세등등하게 앉아 있었다.
사막십팔환영대(沙漠十八幻影隊)!
눈 깜짝할 새에 이백여 서역상인들을 사막의 고혼(孤魂)으로 만들어 버렸던 그들이 사위를 죽음의 기운으로 물들이며 무시무시하게 몰아쳐 오고 있었다.
죽음의 사신(死神)이 저토록 노도처럼 짓쳐오는데도 천상미화는 자신의 뜻을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제 환상신기루와의 거리는 삼십여 장 정도이다. 대여섯 번의 말발굽이면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한데, 이때였다.
번－쩍! 돌연 수만 줄기의 백광(白光)이 그들의 십여 장 앞 모래 속에서 허공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 광채는 사막 전체를 대낮처럼 밝히며 사막십팔환영대를 향해 덮치듯 몰아쳤다.
히히힝－! 히힝－!
"워워!"
"워워워!"
다급한 말울음 소리와 함께 말을 멈춰 세우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그러자 그들을 향해 작열하던 백광이 홀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천상미화는 그 광경에 절로 놀라고 말았다.
이때 그녀의 시야로 모래 속으로부터 사막십팔환영대의 앞으로 솟아오르는 벌거벗은 사내의 모습이 파고들었다.
백색 광채를 누가 쳐낸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당고라 사막의 공포로 통하는 사막십팔환영대를 홀로 막아 선 것이다.
"저…저 사람이 도대체 어쩌려고……?"
천상미화는 자신도 모르게 염려의 말을 흘려 냈다.
그녀는 이미 사막십팔환영대의 끔찍하고도 가공할 살륙 장면을 보지 않았던가?
사막십팔환영대의 앞을 가로막고 선 백운향은 무슨 말인가를 그들에게 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천상미화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와하하핫!"
백운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막십팔환영대 전체가 느닷없이 웃음바다로 변했다.
천상미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백운향은 계속 무슨 얘기인가 사막십팔환영대에게 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크하하핫!"
이번에도 또다시 박장대소가 들려 왔다. 정녕 우스워서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사막십팔환영대는 배를 잡거나 말안장을 두드리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둘!"
천상미화의 입에서 둘이라는 숫자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지금 웃음 소리가 터져 나오는 수를 세고 있었던 것이다.
"우하하핫!"
"셋!"
"카하하핫!"
"넷!"
그녀는 웃음이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수를 셌다. 
네 번의 웃음이 터진 것을 끝으로 사막십팔환영대는 백운향에게 한 벌의 백의를 던져 주었다.
백운향은 백의를 서둘러 입고 손을 흔들었다.
"노형들, 고맙소. 그럼 살펴들 가시오."
그의 말에 따라 사막십팔환영대는 서서히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정녕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천상미화의 얼굴 가득 떠올랐다. 하나, 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은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졌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백의를 산뜻하게 차려 입고 등에 커다란 보퉁이를 짊어진 백운향이 천상미화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너는 어디로 갈 것이냐?"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흥, 당신은 말 끝마다 내게 너니 뭐니 하며 반말이로군요."
"난 본래 내게 당신이라고 부르는 여자에겐 반말을 쓰지. 그런 류의 여자들은 은근히 반말해 주길 기다리는 여자들이거든."
천상미화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의혹 어린 그녀의 눈길 속으로 신발이 날아올랐다.
툭! 이내 신발은 모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이 신발 끝이 가리킨 방향으로 갈 것인데, 너는 어찌하겠느냐? 나를 따라오면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있어 최소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는 보퉁이를 짊어지고 느릿하게 신발 끝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천상미화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너도 신발을 던져 봐. 어차피 인생은 운이니까."
그는 걸으면서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천상미화는 잠시 주춤하다가 다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백운향이 무엇인가 우물우물 씹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 신발도 이쪽을 가리키던?"
"그래요."
천상미화는 얼굴을 굳힌 채 차갑게 대답했다.
"자, 너도 먹어 봐. 보기보단 맛있어."
백운향은 건량 한 조각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그러자 백운향은 내밀었던 건량을 자신의 입에 덥썩 털어 넣었다.
"여자라는 게 며칠씩 굶고도 배고프지 않은 동물인지는 미처 몰랐군."
'바보 자식!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어떻게 선뜻 받아 먹을 수 있겠어?'
그녀는 사실 무지무지하게 배가 고팠으나 여인의 자존심이 그것을 못 받게 만든 것이다.
"한데, 당신은 무슨 말을 어떻게 했기에 그들이 그렇게 웃고 간 거죠?"
"얘기해도 되겠느냐?"
"호기심이 생기는군요."
"정말 얘기해도 되겠느냐?"
"당신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요?"
"정말 듣고 싶다는 거렸다?"
"그래요. 듣고 싶어 미치겠으니 어서 말을 해 봐요."
그녀는 정녕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너도 보았다시피 내가 조금 전 옷을 홀랑 벗고 있었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들이 나보고 자꾸만 나오라고 성화를 해대는 것이었다."
"그래서요?"
"그러나 내 몸이 어디 예사 몸이냐? 천상미화가 단 한 번 보고 홀딱 반한 몸."
"뭐예요?"
"그럼 그만둘까?"
"……."
"그들은 내가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자꾸 나오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내가 말하길 네가 바로 내 아내인데 내 아내는 내가 남 앞에서 옷을 벗으면 나를 백 일 동안 굶긴다고 했지. 그랬더니 웃더구나."
"굶기다니요?"
천상미화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꼭 대답해야 되겠느냐?"
"흥, 내 오늘 당신에게 어떤 봉변을 당해도 듣고 말 거예요. 당신은 이미 나를 아내라고 하며 내게 수치를 주었으니까요."
"그래. 내가 수치인지 네가 수치인지 모르겠다만… 굶는 것이란 말이다. 에이, 그만두자."
천상미화의 눈이 또다시 사납게 그를 할켰다. 
백운향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좋다. 굶는 것이란 아내가 남편과 동침을 거부하는 걸 말하는 것이다."
"어머!"
천상미화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하나, 백운향의 말은 봇물 터지듯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첫번째 웃음이었고, 두 번째는 내가 그들에게 옷을 요구했더니 그 대가로 무얼 주겠느냐고 묻더구나. 그래서 내가 저기 있는 내 아내를 주겠다고 했더니 그들의 눈이 너에게로 쏠리더구나. 그러더니 그들이 말하길 저런 썩은 감을 가져다가 무엇에 쓰겠느냐고 하면서 웃었고, 세 번째는……."
"그만두지 못하겠어요?"
천상미화는 고함을 꽥 질렀다.
"이제 그만 듣겠느냐?"
"이…이런 치한……!"
"다음 얘기가 더 재미있는데……."
백운향은 더 얘기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 천상미화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오른손을 벼락같이 휘둘렀다.
"이크!"
백운향은 두 손을 허위적거리며 뒤로 피해 사막을 달리기 시작했다.
웃음의 수를 세던 그녀는 결국 백운향의 교묘한 언변으로 인해 그 진정한 이유를 캐내지 못하고 봉변만 당하고 만 것이다.
야우혼이 사라진 천하에 두 번째 환호성이 터졌다.
첫번째 환호성은 금릉의 천의장이 봉문 이 년 만에 그 문을 활짝 열어 젖힘으로써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천의장주 사도천은 아직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 아직 내 죄를 씻기엔 이르다. 우선 천의장의 봉문을 풀고 자선(慈善)의 손길로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리라.
다만 그 말만을 한 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아직 사도천이 면벽(面壁)을 풀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두 번째 환호성은 불세의협 단목수가 그 동안 계속 거부해 왔던 무림맹주(武林盟主) 자리를 승낙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복우산 천황봉에 무림맹의 총맹(總盟)이 세워지고 천하의 천이백여 대소문파(大小門派)가 무림맹에 가담하니, 단목수는 이제 실질적인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세인들 또한 이제 천하에 다시는 야우혼 같은 살성이 출현할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누가 있어 감히 불세신협 사도천과 불세의협 단목수가 공존(共存)하는 당금 무림에서 혈겁(血劫)을 자행할 수 있겠는가?
세인들의 이 생각이 적중했음인가? 
천하에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때아닌 봄바람이 일고 있었다.
－ 영락제가 패왕의 피를 이어 받았다면 그의 여동생 천혜군주(天慧君主)는 절대요부(絶對妖婦)의 피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행한 일이다. 만약 그들 두 사람의 피가 바뀌었다면 황실 역사상 최초로 절대여걸과 절대색마가 등장했을 테니까 말이다.
이것은 황궁 전체가 알고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은 천요궁(天妖宮)의 천요군주 때문에 생긴 말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천혜공주는 천혜 대신 천요군주라 불려지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하룻밤 사이에 다섯 명의 남자를 자신의 배 위에 올려 놓아야만 잠을 잘 수 있다는 절대요부였던 것이다.
천요궁(天妖宮).
천요군주는 지난 수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건장한 사내 셋으로 하여금 남만(南蠻) 특유의 옥피향유(玉皮香油)로 자신의 몸을 씻게 하고 있었다.
은은한 황촉 불빛을 받고 있는 그녀의 몸은 진정 아름다웠다. 
이제 사십에 가까운 여인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탄력 있는 피부와 윤기 흐르는 속살은 십팔 세 소녀의 그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푹신한 오리털 베개를 가슴에 댄 채 옆드려 있었다.
떠오르는 달을 닮은 희디흰 둔부가 유혹적이다.
그녀의 양다리는 살짝 벌려져 있어 사내들은 그녀의 허벅지 안까지 골고루 옥피향유를 바르고 있었다.
이 의식은 그녀가 잠자리에 들기 전 꼭 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영원히 윤기 있고 탄력 있는 피부를 간직할 수 있다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살결은 탄력적일 뿐만 아니라 청초함마저 느껴졌다.
"그놈은 아마 내게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해 줄 거야."
천요군주는 오늘 새로 헌납(獻納)된 사내를 생각하고 있었다. 
해맑은 살결과, 한 점 웃음기가 감돌던 눈하며, 꽉 다문 입술에 키도 후리후리한 미청년이었다.
그의 코가 유난히 높고 오똑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천요군주는 몸을 슬쩍 옆으로 눕히며 향유를 골고루 바를 수 있게 했다. 두 개의 터질 듯한 육봉이 도발적으로 드러났다. 
사내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사내의 생각으로 천요군주의 아랫도리는 이미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잘 문질러라."
그녀의 음성에 따라 사내들은 두 손 가득 향유 범벅을 한 채 서로 그녀의 소중한 부분을 문지르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를 벌였다.
'이 재미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랴?'
그녀는 반듯하게 몸을 눕히며 벽 한 면을 차지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발바닥과 무릎, 두 다리 사이로 무성한 비림(秘林), 그리고 앵두를 닮은 가슴 위의 유실이 몹시 탐스럽다.
'훌륭한 몸이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두 손으로 풍만한 두 육봉을 감싸안았다. 
이어 두 손이 대리석을 깎듯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언제나 촉촉한 비소를 매만지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비록 강호의 천상미화와 매혼재녀란 계집의 미색이 훌륭하다 하나, 일단 내가 강호에 나가면 그 꼭지도 떨어지지 않은 계집들은 쥐구멍을 찾을 거야. 호호!"
사내들은 아예 침을 질질 흘리며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수고들 했다. 나가 봐라."
천요군주가 누운 자세 그대로 말하자, 사내들은 아쉬운 듯 다시 한 번 그녀의 몸을 샅샅이 훑어본 후 물러갔다.
"그래. 그놈은 우선 아꼈다가 가장 음욕(淫慾)이 왕성한 자시(子時)에 부르는 거다."
그녀는 지금껏 뇌리에 떠올렸던 그 사내를 되도록 아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웅(大熊)을 불러라."
대웅이라는 사내는 물건이 유난히 크다 해서 그녀가 붙여 준 이름이었다. 
덕분에 대웅은 다른 사내들이 한 달에 한 번 올라가기도 힘든 그녀의 몸 위를 하루가 멀다 하고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잠시 후, 일견하여 준수한 청년이 들어왔다. 
이미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는 듯 그의 눈가에는 연신 음침한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대웅이라는 자였다.
대웅은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안고 뒹굴기 시작했다.
"아이, 처음도 아닌데 서둘긴……."
천요군주는 대웅의 볼을 꼬집으며 끈적한 음성을 불어 냈다. 그녀의 숨결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웅은 몸에 걸친 옷을 거칠게 벗어 던지고 나신으로 변했다.
"그대의 몸은 볼수록 본후(本后)를 미치게 만드는군. 자, 어서……."
천요군주는 몸을 넓게 벌리고 사내의 몸을 끌어안을 듯한 자세를 취했다.
"헉!"
대웅의 숨결이 그 도발적인 자세에 거칠게 토해지며 그녀를 사납게 덮쳐 갔다.
얼굴은 두 육봉 사이를, 한 손은 귓볼을, 또 한 손은 이미 진득한 액체가 고인 그녀의 비소를 미친 듯이 더듬기 시작했다.
애무는 짧았다. 
이내 대웅의 엉덩이가 하늘을 향해 들려졌다가 그녀의 몸 속을 거칠게 찍었다.
"하악!"
그것을 시점으로 대웅의 몸은 광풍노도처럼 사납게 휘둘려졌고, 그녀의 입에서는 악을 쓰는 듯한 교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눈, 두 쌍의 눈은 이 낯뜨거운 장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중 무심한 눈이 물었다.
"보았느냐?"
분홍색이 어린 눈이 대답했다.
"이미 보름 동안 보아 왔습니다."
무심한 눈이 또다시 물었다.
"자신 있느냐?"
분홍빛 눈에 물씬 요기로움이 풍겼다.
"호호! 물론이에요. 저 정도는 어린애 장난에 불과해요."
"천면환용술(千面幻容術)은 완전히 터득했겠지?"
"물론이에요. 저 계집이 천요군주의 역을 훌륭히 해내고 있듯 저 역시 자신 있어요."
무슨 얘기인가? 
지금 정신 없이 열정의 교성을 지르는 침상 위의 여인은 천요군주를 위장한 여인이란 말인가?
다시 무심한 눈이 말했다.
"잠시 후부터 너의 팔린 혼은 저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중 바꿔치기라는 것을 명심해라. 이제부터 잘 보아라."
무심한 눈의 말을 끝으로 그들 사이의 대화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여인은 더욱 자지러지고 사내의 행동은 더욱 광폭해졌다.
한순간 여인은 자신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허탈감에 두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사내가 여인의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꿇고 동작을 멈춘 것이다.
"대…대웅… 어서… 아음……."
천요군주는 대웅의 상체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대웅의 몸은 꼼짝도 안 했다.
"말해라."
대웅의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 나온 말이었다.
"당…당신… 헉!"
천요군주의 눈이 경악으로 변했다가 일순 짤막한 교성을 내질렀다. 
의미 모를 말을 던진 사내의 몸이 또다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또다시 여인은 일체를 망각한 듯 신음을 흘려 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사내의 몸이 우뚝 멈춰지고 여인은 절정을 향해 치달리다 또다시 아득하게 굴러 떨어졌다.
"말해라. 네게 지령(指令)을 내린 사람이 누구냐?"
"너…너는 대웅이 아니… 아흑!"
또다시 그녀의 음성은 이어지지 못하고 사내의 몸은 광풍처럼 그녀에게 휘몰아쳐 갔다.
사내의 행동이 다시 멈춰졌다.
"무(武)…성(成)…군(君)……."
드디어 여인은 사내에게 매달리며 흐느끼듯 그 말을 토해 내고 말았다.
"좋아."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그녀의 몸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내가 다시 물었다.
"또 다른 사람은?"
"모…몰라요. 무성군밖에는……."
여인은 절규하듯 사내에게 매달렸다.
"믿겠다. 네게 마지막 선물을 주겠다."
사내는 여지껏과는 달리 거센 동작을 일으켰고, 자지러지는 신음성과 함께 여인은 끝내 까무러치고 말았다.
이내 사내는 몸을 일으켜 옷을 걸쳤다.
그때 그의 앞에 두 명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일남일녀(一男一女)였다.
"낙화추혼(落花追魂), 수고했다. 이제 네가 판 혼을 다시 돌려 준다."
나타난 사내는 막 옷을 걸친 사내에게 말했다.
낙화추혼, 그는 색(色)에 있어 강호일절이었다. 
여래공자에게 죽은 탐화일랑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어 온 무림 최대의 색한(色漢)이었다.
무심한 얼굴의 사내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까무라친 천요군주의 몸을 슬쩍 건드렸다.
"너…너는……?"
일단 정신을 차린 천요군주가 무심한 사내를 보는 순간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아껴 두었던 바로 그 사내였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살아가기란 실로 힘든 일이지. 그러나 아무리 힘들다 하지만 한족(漢族)의 피를 지니고 이민족을 돕다니……."
천요군주가 경악에 찬 얼굴로 몸을 떨었다.
"죽음이란 슬픈 것. 하나, 고통 없이 죽는 것은 복이다. 잘 가거라."
무심한 사내의 손이 경악으로 부릅떠진 천요군주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관추대혈을 세 치 깊이로 파고들었다. 
순간 천요군주는 조용히 숨을 끊었다.
무심한 사내의 시선이 같이 나타난 여인을 향했다.
한데, 그녀는 또 하나의 천요군주가 아닌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쏙 빼닮은 모습에… 입가에 머금은 음탕한 미소까지 여지없는 천요군주였다.
"도화요녀(桃花妖女), 너는 이 일을 마친 후 언제든지 네 혼을 찾아갈 수 있다. 하나, 너는 알아야 한다. 이 일은 나의 일도 너의 일도 아닌 우리 한족 모두의 일이라는 것을……."
"잘 알겠어요."
"낙화추혼, 너의 일은 끝났다. 혼을 거두어 가거라."
무심한 사내가 낙화추혼을 돌아보며 말하자, 낙화추혼이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대…대협, 이제서야 대협의 높으신 뜻을 알 것 같습니다! 대협께서 다시 제 혼을 사 주신다면 열 번이라도 다시 팔겠습니다!"
"한족의 의무로서 말이냐?"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해라. 내가 네게 시킬 일은 이곳에 남아 계속 대웅으로 활약해 주는 것뿐이다."
"하오리다! 무엇이든 하오리다!"
낙화추혼은 연신 이마를 바닥에 찍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심한 사내는 품 속에서 하나의 장부를 꺼내 천요군주라는 이름을 지우고 무성군이라는 이름을 새로 써 넣었다.
이미 장부에는 수십 명의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사령마보(死靈魔步), 제천검보(制天劍譜), 용천신하장(龍天神花掌) 등… 이 중 하나만 강호에 유출된다 해도 천하가 발칵 뒤집히고 말 개세의 비급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무성군은 하루에 한 권씩 쥐도 새도 모르게 전해지는 이 비급들로 인해 겁이 더럭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벼슬 한 자리 부탁하려고 보내 온 비급들인 줄로 알고 무심히 받았었다.
그는 사실 누군가 이 비급들을 가지고 와서 구문제독(九門提督)이라도 시켜 달라고 하면 일의 성사 여부도 생각지 않고 무조건 비급부터 받고 볼 만큼 무공광(武功狂)이었던 것이다.
여하간 무성군은 일체의 생각을 접어 둔 채 오늘 아침 전해진 파라광천지(破羅狂天指)라는 비급을 펼쳐 들었다.
무공광답게 그는 즉시 비급 속에 정신이 빨려들었으며, 탁월한 재능 덕분에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다.
이내 그의 눈길이 마지막 장에 머물렀다. 그 순간 그는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만큼 놀랐다.
<비급은 앞으로도 하루에 한 권씩 꼭꼭 전해질 것이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그대를 하수하는 사람의 것보다 열 배 나을 것이오.
부디 황실(皇室)의 본문을 잊지 마시오. 그대가 마음을 돌린다면 용서하겠노라는 황제폐하의 친서를 동봉하오.
차후 그대의 마음이 돌려진다면 그대를 하수하는 하수자의 이름을 연무장의 각 나무에 한 획씩 그어 알려 주시오.
부디 현명한 판단으로 흔들리는 대명 황실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길 바라오.>
다음 장에는 영락제의 친서가 있었다.
<무성군, 너마저 가짜일 것 같아 짐은 깨나 마음을 졸였노라.
이제 모든 것을 용서하고 보국충정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하노라.
대명 천황 영락 친서>
무성군의 신형이 바닥으로 무너지듯 허물어져 내렸다.
번쩍! 
무성군이 검술을 연마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점이 없다. 그것은 그의 일상생활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연무장을 바람처럼 날며 검술 연마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 한순간, 무성군의 신형이 이어분수(鯉魚分水)의 수법으로 떠올라 유성추월(流星追月)의 신법을 펼쳐 연무장 주위의 수목(樹木)들 사이를 어지럽게 날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예리한 검풍(劍風)이 어지럽게 일었다. 그것은 신기(神技)였다.
비룡번신(飛龍飜身), 맹룡승천(猛龍昇天), 유운요일(流雲遙日) 등 갖가지 경신술과 그에 따라 이는 오묘한 검법은 가히 신기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허공을 날며 검광을 작열시키던 무성군의 신형이 땅에 가볍게 내려섰다.
"오늘은 그만 한다."
한쪽 옆에서 입을 벌리고 서 있던 내관이 황급히 달려가 무성군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무성군은 비단 수건으로 번진 땀을 닦으며 의미 있는 시선을 수목들을 향해 던졌다가 이내 연무장을 떠났다.
경문왕(慶文王).
그는 영락제의 다섯째 동생으로서 영락제가 보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한데, 무성군이 수목들 위에 남긴 검흔(劍痕)을 한 획 한 획 모아서 이루어진 글자는 놀랍게도 경문왕이라는 세 글자였다.
음모(陰謀)의 밤
백운향이 처소로 삼은 이곳은 온갖 기공비서(奇功秘書)로 둘러싸인 석실(石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린다. 이곳은 황궁 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하다. 
영락제와 혜량공주만이 아는 비밀 석실이며, 또한 천하의 가장 큰 힘이 숨겨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백운향은 바로 황궁무고(皇宮武庫)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제일 먼저 황궁의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천요군주를 바꿔치려 할 때 나타났던 무심한 사내는 바로 백운향이었다. 
그리고 무성군에게 무공비급을 보낸 사람도 그였다. 
그 외에도 그는 신비세력의 점조직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
그는 웬만한 일이 아니면 결코 이 황궁무고를 떠나지 않았다. 
우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 권의 책자 때문이었다.
<불사비록(不死秘錄)>
그가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가장 유심히 보았던 바로 그 책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그것에 대해 한 자도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
한데도 그는 또다시 읽고, 또 읽고, 수백 번 고쳐 읽고 있었다.
불사비록을 읽는 그의 습관은 이 수십 일 동안 한결같았다. 
우선 비록 안의 칠백이십여 마공(魔功) 기초를 세심하게 읽은 다음 책장의 맨 마지막에 머무는 것이다.
소우주(小宇宙)라 제목 붙여진 그 아래, 하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둥근 원 안에 선명한 점이 찍혀 있는 그림이었는데, 그의 눈길을 가장 오랫동안 잡아 끈 것은 바로 그 소우주라 제목 붙여진 그림이었던 것이다.
다른 것들은 이미 이해가 갔고,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유독 그것만은 감도 잡히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칠백이십 가지의 마공절초가 어떤 일련의 연계동작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지만 서로 다른 초식인 양 전혀 이어지지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이 소우주라는 그림이 해독되면 불사비록의 진가가 드러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그가 이미 과거에 한 번 본 그 불사비록을 붙들고 늘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그것은 환상신기루 내에서 본 천년비사에 불사비록과 불사경혼수가 언급되어 있었고, 그것을 보는 순간 어쩌면 불사비록 안에 불사경혼수가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영감(靈感) 이 그의 뇌리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파라락! 백운향은 수도자와 같은 자세로 책장을 넘겼다. 
좁은 석실 공간은 그의 탐구열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삐끄덕! 그 열기 속에서 석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선 한 명의 백의궁장 미소녀, 바로 혜량공주였다.
그녀의 받쳐든 두 손에는 황금색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백옥 찻잔이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백운향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그윽한 시선으로 백운향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정이 담뿍 담겨 있었으며, 은근히 염려의 기색마저 떠돌고 있었다.
"어려운 모양이로군요. 너무 고뇌하시는 것 같아요."
혜량공주는 백운향의 앞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애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비로소 백운향의 시선이 앞자리에 앉는 그녀를 향해 돌려졌다.
"아니오. 나란 사람은 원래 고뇌하고 갈등을 겪으며 단련되어 왔소. 내게는 오히려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소."
"당신은 오히려 저를 위로하시려 하는군요."
"나 자신을 자위한다는 말이 더 적합하지. 한데, 경문왕은 어찌되었소?"
백운향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혜량공주의 안색이 무겁게 변했다.
"그는 가짜였어요."
"흠……."
백운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가 실수를 가장해 찻잔을 엎질렀을 때, 무심결에 저를 오른손으로 부축하려 했어요. 경문왕께선 원래 왼손잡이셨거든요."
백운향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품 속에서 하나의 책자를 꺼내 들었다.
그의 시선이 책자의 인명(人名)을 쭉 훑어 갔다. 그리고 경문왕이라 쓰인 이름 옆에 조그맣게 화살표를 했다.
"가공할 점조직이오. 누구든 자신을 하수하는 사람 한 명만 알고 있을 뿐이니… 이 정도라면 이십 년 이상의 음모였소. 특히 천요군주 이후에 이뤄진 점조직은 모두 황족들로 연결되어 있소."
"하면, 진짜 그분들은 어찌되었을까요?"
혜량공주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십에 십, 모두 죽었을 것이오."
백운향의 음성은 확신에 차 있었다.
"당신은 쉽게 말할 수 있어 좋으시겠군요."
"마음 속의 근심을 밖으로 나타낼 인물이라면 결코 대계(大計)를 견지할 수 없지."
백운향은 독백하듯 나직이 중얼거린 후 다시 혜량공주의 숙연한 얼굴로 시선을 던졌다.
"그보다 월교로부터는……?"
혜량공주의 아미가 곱게 찌푸러졌다.
백운향은 항상 빙월교의 이름을 말할 땐 표정이 진지해진다. 
그 정도로 빙월교는 백운향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가?
혜량공주는 일순 씁쓸한 표정을 짓다 이내 평소의 신색을 회복하고 말을 받았다.
"사람이 왔어요. 그들은 지금 무성군의 처소에 있어요."
"몇 명이오?"
"열다섯 명이에요."
"그들에게 천면환용술(千面幻容術)을 터득시키고 한 사람을 뽑아 경문왕의 시비와 바꿔치기하시오. 그리고 내가 데려온 여인도 눈여겨 주시하시오."
혜량공주의 아미가 또 한 차례 살풋 좁혀졌다.
그녀는 지금 백운향을 따라 이곳까지 온 여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슬프리만치 아름다움과 요염함을 겸비한 미소녀 천상미화 미심랑이었다.
그녀는 백운향의 명에 따라 지금 황제의 시비로 바꿔쳐져 있었다.
"후후, 나중에 내 뜻을 알게 될 것이오."
혜량공주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백운향은 이미 준비했다는 듯 한 꾸러미의 책을 그녀 앞으로 밀어 놓았다.
"월교에게 전해 주시오."
혜량공주는 한 권 한 권이 개세적인 무공비급인 책꾸러미를 바라보며 가벼운 이채를 떠올렸다.
"그녀에게 전하면 그녀가 알아서 사용할 것이오."
빙월교를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혜량공주의 여자 본연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당신은 그녀를 항상 최고로 생각하고 말하는군요."
"그녀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소."
"그건 저도 인정해요. 그녀의 지혜와 재치로 인해 거두어진 실혼인(失魂人)들이 계속 황궁으로 보내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제 앞에서 유난히 그녀 자랑을 하시는 것 같군요."
혜량공주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녀는 내가 아는 누구 앞에서도 그렇게 말해질 것이오."
백운향은 웃지 않았다. 비단 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표정은 몹시도 진지했다. 
그것이 혜량공주의 자존심을 더 크게 건드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제가 그녀보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백운향의 손이 그녀의 탐스런 수발을 어루만졌다.
"그대는 무엇인가 오해하고 있소. 나는 지금 그대와 월교, 둘 다 내게 있어 소중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혜량공주는 멈칫하고 격정의 눈길로 백운향을 바라보았다.
잠시 격정의 눈길을 백운향에게 던지던 혜량공주의 몸이 한 마리 나비처럼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백운향은 한 손으로 그녀들 보듬어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백운향은 가볍게 그녀를 떼어 놓았다.
"혜량, 이제 내겐 삼백 일의 시간도 남지 않았소."
혜량공주의 눈에 뽀얀 이슬이 가득 고였다.
"그렇…군요."
곧 오열이 터져 나올 듯 쓰라린 음성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찻잔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 짧은 생에서 무엇인가 하나라도 더 거머쥐려는 백운향을 더이상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녀가 일어서자 백운향은 이내 불사비록의 첫 장에 다시 시선을 던졌다.
그 모습을 처연히 바라보던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당신의 모습은 마치 맞지도 않는 톱니바퀴를 억지로 꿰어 맞추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요. 아예 차라리……."
하나, 그녀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돌연 백운향의 고개가 번개처럼 그녀에게 돌려진 것이다.
"혜량, 당신 방금 뭐라고 했소? 뭐라고 했냔 말이오!"
그의 음성은 격앙되었고 다급했다. 
혜량공주의 몸이 무엇을 훔쳐 먹다 들킨 아이처럼 핼쑥하게 변했다.
"저…저는 단지 당신의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
"그 전의 말 말이오."
"당신… 어쩜……."
백운향의 다그침에 혜량공주의 안색이 더욱 핼쑥해졌다.
"당신의 모습이 마치 맞지도 않는 톱니바퀴를 억지로 꿰어 맞추려는 사람 같다고 했어요. 그 말이 그렇게도 당신을 서운하게 했나요?"
그녀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얼른 말을 마쳤다. 
백운향의 표정이 마치 자신을 한 대 때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기우(杞憂)였다. 
백운향의 입가에 문득 미소가 어리더니 그는 손에 잡고 있던 불사비록을 내팽개치고는 수천 권의 기서가 꽂혀 있는 서대(書臺)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아무 기서나 뽑아 들고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혜량공주의 눈에 의혹의 기색이 잦아들었다.
자신의 말을 들은 후 백운향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책장을 넘기고, 비급들을 뒤로 마구 내팽개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내 등뒤로 던져진 책들이 작은 산을 이루었다.
혜량공주는 그 책의 산더미 옆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계속 날아드는 책을 차곡차곡 간추렸다.
검황마경(劍皇魔經), 쇄심마혼(碎心魔魂), 금강인백공(金剛引魄功), 혈옥마지(血玉魔指)…….
수십 권의 책이 날아들고, 어느 한순간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날아들던 비급의 행렬이 뚝 멈추었다. 
어쩌면 하루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혜량공주는 책의 행렬이 끊기자 문득 백운향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풋……."
그녀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백운향은 수북한 책더미 속에 전신의 반 이상을 파묻은 채 정신 없이 코를 골고 있었던 것이다.
"속이 깊으신 분이니까……."
혜량공주는 백운향의 곯아떨어진 모습을 처연한 눈길로 바라보다 이내 석실을 빠져 나갔다.
백운향의 해괴한 기행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눈만 뜨면 서고 내의 비급들을 마구 읽고, 그 중 몇 권인가를 따로 추려 놓고는 이내 잠에 빠져들곤 했다.
칠 일 만에 그가 따로 골라 놓은 책의 숫자는 무려 칠백여 권이었다. 즉, 하루에 일백여 권이라는 셈이었다.
이제 더이상 서고에는 단 한 권의 책도 꽂혀 있지 않았다. 대부분은 바닥에 흩어져 있고 나머지는 탁자 위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칠백여 권의 책자가 추려지자, 백운향은 또다시 그 책들을 미친 듯이 읽기 시작했다. 
백운향은 혜량공주의 잘 맞지도 않는 톱니바퀴라는 한 마디 말로 그 동안 안개 속에 묻혀 있던 실체를 잡은 것이었다.
불사비록, 그것은 그 말과 같이 초식과 초식이 잘 들어맞지 않는 톱니바퀴 같은 것이었다. 
즉, 불사비록은 미완(未完)의 불사경혼수(不死驚魂手)가 실린 책자였던 것이다.
잘 맞지 않는 톱나바퀴를 돌게 하려면 적당한 기름과 크고 작은 톱니를 적당히 연마해야 한다.
한데, 불사비록 내의 칠백이십 가지 절초에는 그 기름이 없었고 들쑥날쑥 균형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천 년을 잠자 온 미완의 불사비록이 백운향에 의해 다듬어지고 첨가되어 사상 최강의 무공 불사경혼수로 탄생하려는 것이다.
백운향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오대파천무를 합치는 비결도 바로 이것이다."
그의 얼굴 가득 득의의 미소가 넘쳐 흘렀다.
아아! 이제야 비로소 백운향에게 크고 굳센 황금빛 날개가 달리려고 하는 것이다.
황금 날개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 
홍등가려(紅燈佳麗). 
원앙축수(鴛鴦祝壽).
무릇 혼인(婚姻)은 경사다. 
구문제독부의 화려한 처마에는 색색의 축등(祝燈)이 걸려졌다. 
바로 대명의 병권(兵權)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구문제독 궁정방(宮正邦)의 독녀(獨女) 궁서예와 황실 경무왕(慶武王)의 일남(一男) 무령군(武靈君)이 백년가약을 맺는 것이다.
대명의 최고 실권자와 황실의 결혼이었기에 그 넓은 구문제독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조정의 내노라 하는 대신들과 유생들, 노학사(老學士)들, 변방의 태수에 이르기까지 구문제독부의 넓은 뜰은 하객(賀客)들로 발 딛을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윽고 홍촉(紅燭)이 밝혀지자, 천지신명께 혼약을 맹세하는 예식이 진행되었다.
성혼복을 입은 무령군과 궁서예는 실로 천생연분인 듯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신랑이 임풍옥수(臨風玉樹)라면 신부는 화용월태(花容月態)라고나 할까?
그들의 맞절에 이어 천지신명께 백년해로를 맹세하는 예식이 황실 어사대부에 의해 진행되었고,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과 박수 소리가 천지가 떠나갈 듯 울렸다.
한데, 그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금의화복(錦衣華服) 중년인이 있었다. 
바로 구문제독 궁정방이었다.
그는 시종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띄운 채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두 사람의 성혼예식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명을 떨어 울리는 구문제독 궁정방이라는 이름과 대조적인 겸손과 온화함이 그의 몸에 서리서리 감겨 있었다. 
누구든 지금 그의 이 모습을 본다면 그가 구문제독 궁정방임을 믿지 않을 것이다.
외면으로 풍기는 온화함은 누구든 그를 어렵지 않게 따르도록 했고, 내면에 잠재된 강인과단함은 천하가 좁다 할 만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양보할 때는 한없이 양보하고 들이칠 때는 질풍노도와 같이 실행하는 성격으로 하여, 삼십이 갓 지나 제수된 구문제독의 자리를 영락제가 혜제를 폐위시키는 격변의 와중에서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영락제의 은총은 모두 그의 한 몸에 쏠린 듯 두터웠고, 사람들은 대명 황실이 오늘의 영화를 누리는 것도 패왕지도의 영락제 뒤에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구문제독 궁정방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여하간 구문제독 궁정방은 시대를 탈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이곳에 모인 하객들만 해도 황실의 경사라는 의미보다 구문제독의 경사였기에 참석한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가히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세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짧은 혼인가례는 끝이 났고, 하객들은 한 잔 술을 마신 후 각기 발길을 돌렸다.
밤, 합환주(合歡酒)가 뜨겁게 넘어갈 밤이 되었다.
화촉이 밝혀진 방에서는 황촉대 세 개가 자신의 몸을 소신공양(燒身供養)하며 두 남녀를 축복해 주고, 침상 위에 준비된 원앙 비단금침도 곧 있을 꿈결 같은 순간을 기다리며 날개를 접고 있다.
여인의 술병을 잡은 두 손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굳건한 사내의 손에 잡힌 옥배 속으로 연분홍빛 액체가 길게 호선을 그었다.
"부인도 한 잔……."
무령군은 그녀의 손에서 술병을 받아 들고 정이 담긴 시선을 자신의 여인에게 주었다.
궁서예는 얼굴을 사르륵 붉히며 수줍게 잔을 들어올렸다.
드디어 그녀의 잔이 채워지고 두 개의 잔이 조그만 소성을 몰고 부딪쳤다. 
합환주가 교환된 것이다.
쨍그랑!
한데, 돌연 술잔을 들어올리던 무령군이 술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배를 싸잡으며 신음성을 토해 냈다.
"우욱!"
"대…대가……!"
궁서예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하게 무령군의 몸을 부축했다.
무령군의 준수한 얼굴 위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령군을 부축한 궁서예는 때아닌 변고에 잠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다 무령군을 침상에 기대 앉혔다.
"시의(侍醫)… 시의를 부르겠사오니 잠시만……."
무령군이 서둘러 일어서려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결사적으로 잡았다.
"아…아니오. 첫날밤부터 남에게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소."
"추태라니요?"
"단지 속이 좀… 잠시 측간에라도 다녀오면 괜찮아질 듯하니……."
무령군은 고통스럽게 말하며 겨우 일어나서 문을 밀치고 나갔다.
사내가 측간을 가는데 따라갈 수도 없는지라 궁서예의 눈에 황망함이 어렸다.
도대체 꿈같이 달콤해야 할 초야(初夜)에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사 인(四人).
일 인은 상석(上席)에 앉아 서릿발 같은 위엄을 풍기고, 삼 인은 하석(下席)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바닥에는 자단피가 푹신하게 깔려 있고 대낮같이 환한 실내에는 어린애 팔뚝만한 촛대가 몸을 불사르고 있었으며, 벽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검(古劍) 세 자루가 나란히 걸려 있다.
실내는 밝았지만 분위기는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일 인 아래 꿇어앉은 삼 인 중 이 인은 상석에 앉은 사람을 몹시 어려워하는 듯한 빛이 역력히 떠올라 있으며, 그 옆에 앉아 있는 흑의청년의 표정은 무심했다.
그들은 바로 현 대명의 삼승상(三承上) 중 우승상어사대부(右承上御使大夫)와 좌승상어사대부(左承上御使大夫)였다.
그렇다면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황제 영락제인가?
아니었다. 무상(無上)의 신위로 굳어진 표정의 중년인은 바로 구문제독 궁정방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무상의 권위와 실권을 잡고 있는 구문제독이라지만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위치에 있는 좌우승상어사대부가 그의 앞에서 어찌 저토록 굽신거릴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황손이라 할지라도 일차 양보한다는 구문제독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밀납 같은 표정의 흑의청년은 또 누구란 말인가?
실내에는 칙칙한 긴장이 휘감아 돌았다.
문득 구문제독 궁정방이 입을 열었다.
"이제 영락의 패황지도(覇皇之道)는 종말이 다가왔소."
실로 무시무시한 반역의 언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말을 하는 궁정방의 태도는 태연할 뿐만 아니라, 말을 함에 따라 그의 얼굴에는 더욱 강인한 의지가 깃들고 있었다.
"경무왕께서 무령군을 내 사위로 주신 것은 곧 승락의 뜻이오. 그대들은 천추의 한을 안고 소사(少死)하신 혜제(惠帝)폐하의 한을 아직 잊지 않았을 것이오. 태상황(太上皇)께서 특별히 그대들과 나에게 부탁하신 혜제폐하를 끝까지 보필치 못한 죄를 이제라도 씻어야 할 것이오."
그의 음성은 점차 격앙되었고, 그와 함께 가공할 살기마저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좌우승상의 노안에 언뜻 물기가 돌았다.
한데, 혜제라면 영락제에 의해 폐위된 전대(前代)의 어린 황제가 아니든가!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모반이라도 꾀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 경무왕의 친자 무령군을 앞세우기 위해 자기 딸과 정략결혼까지 시키면서 그들은 일대의 패황 영락제를 향해 반기(反旗)를 높이 쳐든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배짱과 반역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이들의 말대로라면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는 시작되어 왔고 이제 실행단계만 남았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가공할 음모를 바탕으로 한 대반역의 조짐이었다.
"영락제를 밀어내고 내 사위가 된 무령군이 등극한다 해도 아무도 우리를 욕하지 못할 것이오."
"그렇소이다! 영락제 또한 나이 어린 조카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영락제의 패도에 천하는 이미 그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소이다!"
"이는 천하만민을 복되게 하는 당연지로(當然之路)라 사려되오이다!"
궁정방의 말에 좌우승상은 앞다투어 타당성을 역설했다.
"으하하핫! 이것은 시대의 흐름이오. 나는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도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소. 이미 황궁은 우리 손에 들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터.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이오. 이 모두가 사심(私心)없이 우리를 돕고 있는 천존의 은혜임을 말이오."
천존은 또 누구인가? 
천하에 언제 사도천 말고 또 다른 천존이라는 인물이 있었던가?
만약 이들이 말하는 천존이 사도천, 그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 아닌가?
이때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흑의청년의 입가에 감정이 배제된 미소가 가늘게 떠올랐다.
"감사드리오. 천존을 향한 제독의 마음이 그토록 깊으셨다니……."
차갑고 삭막한 음성이었지만 격식을 갖춘 말이었다.
"하하핫! 별말씀을. 삼비목(三秘目)께선 부디 오늘의 일을 그대로 천존께 보고해 주셨으면 하오."
"그야 이를 말씀이오. 천존께선 대단히 기뻐하실 것이오."
삼비목이라는 청년은 말을 끝내고 가볍게 목례를 취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은 말씀들 나누시길……."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와 절도가 배인 말과 행동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궁정방은 하나의 두루마리를 이 인의 승상 앞에 펼쳐 놓았다.
그곳에는 사람의 명단이 수없이 나열되어 있었고, 궁정방은 명단을 하나 하나 집어 가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음모와 반역의 밤은 이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파다다닥! 힘찬 날개짓과 함께 한 마리의 은색 비둘기가 야공(夜空)을 꿰뚫고 빠르게 날아올랐다.
하나의 냉막한 눈동자가 그 비둘기를 전송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의 주인은 좀전에 궁정방 일행과 마주앉아 있던 삼비목이라는 흑의청년이었다.
한데, 그는 허공으로 날아오른 비둘기가 후원의 측간 지붕 위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구문제독부의 건물은 높았고 밤의 색깔은 너무 짙었기 때문이었다.
궁서예의 한숨 소리와 함께 황촉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첫날밤부터 예기치 못한 무령군의 배탈은 그녀의 심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때 문이 열리며 두 손으로 아랫배를 싸잡은 무령군이 들어섰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 부인……."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고통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첫날밤인데 옷고름 정도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 앞에 간신히 쪼그리고 앉아 예복의 옷고름을 당겼다.
예복의 옷고름이 스르르 풀리고 앞섶 사이로 박속같이 흰 속살이 현란하게 드러났다.
잠시 취한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령군은 또다시 배를 부둥켜안고 나뒹굴었다.
"어이쿠우!:"
"아…아무래도 시의를 부르심이……."
"아…아니… 되었소, 부인. 내 체면을 봐서라도……."
"정 그러시다면… 어서 누우시지요."
"미안하오. 초야부터… 내 나중에 후히 사과하리다."
무령군은 이내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정작 난처한 사람은 궁서예였다. 비록 혼례는 올렸다지만 어찌 신음하는 남편 옆에 누울 수 있겠는가?
결국 그 날 밤 그녀는 무령군의 얼굴에 솟아나는 땀방울을 비단 수건으로 찍어 내며 그렇게 꼬박 밤을 새웠다. 
진정 서러운 초야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 날도 무령군의 병이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궁여지책으로 부른 시의마저 석연치 않게 가벼운 배탈이라 하며 사라졌다.
하나, 그 날 밤도 무령군은 배를 싸잡고 몇 번인가 측간 나들이를 해야만 했다.
원래 혼례를 올리면 처가에서 사흘을 머무는 것이 이 시대의 관습이다. 
뜬눈으로 이틀을 새운 궁서예는 어느덧 사흘째 밤을 맞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얼굴과 차림새, 표정마저 똑같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둘 다 무령군이었다.
그들은 측간의 어두운 구석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왼쪽의 무령군이 오른쪽의 무령군에게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소, 연환공."
"저하, 이젠 저하께서 하실 일만 남았소."
오른쪽 무령군, 즉 연환공 백운향의 말에 진짜 무령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향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궁소저는 착하고 아름다우며 현숙한 여인이오."
백운향은 그렇게 말하며 품 속에서 한 통의 봉서(封書)를 꺼내 무령군 앞으로 내밀었다.
"그 동안 알아낸 것과 처리 방법은 모두 이 안에 적혀 있소."
그의 말에 무령군은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그럼 연환공께선 이제 이 일에서 손을 떼시겠다는 말씀이오?"
"그런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일 뿐이오. 그리고 내가 굳이 황궁에 남아 있지 않을지라도 궁정방은 이제 혼자나 다름없소."
"그래도……."
무령군은 도저히 백운향 없이는 안심이 안 된다는 듯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안심하시오. 혜량공주에게 마지막 패를 남겨 놓겠소. 또한 궁정방과 연결된 신비세력은 직접적으로 그를 돕지는 않을 것이오."
"음……!"
무령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백운향은 짙은 어둠 속으로 돌아섰다.
돌아서는 그의 입에서 그의 마지막 말이 나직이 이어졌다.
"저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오. 궁소저는 아비와는 달리 진정 현숙한 여인이었소."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신형은 어둠 속을 가르기 시작했다.
"내 공(公)의 말뜻이 무엇인지 잘 알겠소. 심려하지 마시오."
무령군은 독백처럼 중얼거리더니 배를 싸잡고 궁서예가 한숨과 근심으로 기다리는 신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화촉의 불이 드디어 밝혀질 것인가?
전서를 펴든 사도천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활짝 개어 있었다. 
상아를 조각해 만든 듯한 그의 얼굴에는 싱싱한 활력이 안개처럼 번져 갔다. 그것은 그가 습관처럼 짓던 온유롭고 따사로운 표정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방금 그에게 전서를 전한 흑의사내의 송장 같은 얼굴도 그의 표정에 따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영원히 한 올의 표정도 어릴 것 같지 않던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차라리 음산하기조차 했다.
흑의사내의 시선이 사도천의 얼굴에서 탁자 위에 놓인 백목련이 꽂혀 있는 화병으로 돌려졌다.
그가 사도천에게 전서를 전한 후 으레 하는 행동인 듯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동작이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화병에 꽂힌 목련 잎새는 다 떨어지고, 소담스런 하얀색 꽃봉오리 밑에 단 하나의 잎새만이 달랑 붙어 있었다.
목련의 꽃봉오리는 곧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잎새는 혼자 남은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려는지 취록색 물방울을 떨구듯 새파랗게 매달고 있었다.
'이제 저 꽃잎마저 떨어지면 대명(大明)의 운명은 끝장이다!'
흑의사내는 확신에 찬 염두를 굴렸다.
그는 수 년간 숨어서든 나타나서든 사도천을 지켜보아 왔다. 
그가 지금껏 지켜보아 온 사도천은 십 할의 승률이 서지 않으면 때를 기다리는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도천이 생각하는 십 할의 승산에 대해 흑의사내는 지금껏 한 번도 정확히 맞춘 적이 없었다.
흑의사내가 생각하기에는 거의 성사 불가능한 일도 사도천은 과감하게 추진시켰고 멋지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것이 사도천이 생각하는 십 할의 승산이었던 것이다.
이번 일은 흑의사내 자신이 보아도 십 할 이상의 승산이 있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절대자에게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그것은 우는 아이 젖 먹여 달래는 것보다 쉬운 일일 것이다.
'저 꽃잎은 곧 떨어질 것이다!'
사도천은 가능한 한 거의 말로 명령하지 않는다. 
단지 가위를 들어 꽃잎 하나를 잘라 내느냐 않느냐로 명령의 가부(可否)가 결정된다.
흑의사내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생각이 적중한 것으로 생각했다.
새파랗게 날이 선 가위가 목련화를 향해 다가갔다.
싹둑! 경쾌한 음향과 함께 흑의사내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생각은 이번에도 틀려 버렸던 것이다.
가위의 쌍날에 의해 탁자로 떨어져 내린 것은 흑의사내가 예견한 이파리가 아닌 목련의 꽃봉오리가 아닌가?
사도천의 그윽한 눈길에서 가공할 기광이 줄기줄기 뻗었다.
'헉……!'
그 눈길을 받은 흑의사내는 내심 다급한 헛바람을 토해 내고 말았다.
"일비목(一秘目), 너의 아우 삼비목(三秘目)은 참으로 잘해 주었다."
앉은 자세 그대로 말하는 사도천의 음성은 차라리 담담한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 가위가 쌍날을 시퍼렇게 세운 채 들려져 가끔 철컥철컥 소리를 냈다.
"일비목, 나는 너를 천하제일의 무인(武人)이라 생각한다. 지모(智謀) 또한 결코 심랑의 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천…천존!"
일비목의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 그는 사도천이 보통 때와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일비목, 너는 나의 지금 이 처사를 내게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줄 수 있겠지?"
사도천의 눈이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으으, 천존은 지금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나는 그의 손길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
일비목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결코 무능한 자를 수하로 두지 않는다. 일비목, 네가 할일은 모두 끝났다. 그래서 너는 내게 있어 무능한 수하로 변한 것이다."
사도천은 말하면서 가위를 서서히 들어올렸다.
'으, 천존의 심계(心計)를 알아맞춘 것이 내 죽음이란 말인가?'
번쩍! 일비목의 생각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가위가 취록색 광채를 일으키는가 싶더니 곧바로 일비목의 심장을 향해 틀어박혔던 것이다.
"너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한족인 네가 나의 일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못 되지. 심랑조차 알지 못하는 일을……."
핏빛 노을 속으로 들리는 음성은 일비목의 귓전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제길, 나는 한족이었군.'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 그의 몸은 형체도 없이 증발하고 있었다. 
사도천이 가위에 취록혈강을 가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핫! 이제 대원제국(大元帝國)의 부흥이 눈앞에 도래했다. 크하하핫!"
사도천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오오, 사도천!
그는 바로 천문의 문주 천존이었고, 한족이 아닌 멸망한 몽고 황실의 후예였으며, 대명황실을 전복시키고 몽고의 부흥을 꿈꾸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천하에 누가 있어 사도천의 이러한 신분을 알고 있단 말인가?
불세신협이라는 광휘로운 허울 아래 그의 야망은 차곡차곡 쌓아 올려졌고, 이제 바야흐로 그 야망의 탑 위에 그는 우뚝 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는 그 원대한 대계를 눈앞에 두고 영원히 그치지 않을 듯 거센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그의 앞에 귀신인 양 삼 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왕의 대계 성공을 미리 앙축드리오!"
세 명의 노인이었다. 
그들은 눈처럼 흰 백두(白頭)를 깊숙이 숙였다.
"그 동안 수고들 하셨소. 산하(山河)를 떠돈 지 어언 백여 년. 그대들과 전 몽고인의 한이 지금 풀리고 있소."
"오오, 천왕이시여!"
다시 허리를 굽힌 그들을 향해 사도천은 좀 전 자신에게 접수된 전서를 내밀었다.
<모든 것 완벽. 천존의 도움 불요(不要).
구문제독 궁정방 이하 어영군과 황실 주요 인사 구 할 매수 성공.
거사일 팔월 중추(中秋). 윤허 요망.
삼비목 배상.>
짤막짤막한 글귀였다. 그러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반역의 음모였다.
구문제독 궁정방이 이미 모반을 꾀하고 있는 터에 그것을 눈치 챈 사도천은 궁정방을 이용해 대명황실의 전복과 대원제국의 부흥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든 사랑할 수 있는 여인
이제 거사일은 불과 한 달 남짓이다.
사도천은 대원제국 패망 이후의 백여 년 세월을 떠올리는 듯 잠시 묵상에 잠겨들었다.
삼태상이라 불리운 세 노인은 그의 묵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윽고 사도천의 음성이 잔잔히 흘러나왔다.
"나를 기르신 그대들 삼태상(三太上)과 나를 낳아 준 대몽고에 내 보상해 주리라."
"오, 천왕이시여!"
삼태상의 노안(老眼) 가득 감회의 빛이 일렁였다. 
그들은 사도천이라는 이 절대자의 부모이자 사부였으며 신하였던 것이다.
"대원부흥군(大元復興軍)의 현 상황은 어떻소?"
사도천의 감겨 있던 눈이 뜨여지며 잔잔히 삼태상을 굽어보았다.
그의 물음에 가장 좌측의 현의노인(玄衣老人)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대원부흥군은 이십만 명을 이끌고 중토(中土) 접경지역인 방강(滂江) 변에 머물며 명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행로는?"
"일단 명이 떨어지면 중토의 북단 도포(倒包)를 거쳐 장안(長安)을 점령한 후 곧장 연경(燕京)으로 진격해 들어올 것이옵니다!"
"시간은?"
사도천은 숨쉴 겨를도 주지 않고 물었다.
삼태상 중 수석태상인 현의노인도 미리 준비된 이야기인 듯 서슴없이 대답했다.
"열흘이 소요되옵니다!"
"열흘이라……."
사도천은 나직이 읊조리며 생각에 잠겨드는 듯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그때까진 구문제독 궁정방 이하 반정군(反政軍)은 승리의 기분에 들떠 있을 시간이어서 우리의 진격을 막고 어쩌고 할 여유도 없을 것이옵니다!"
수석태상의 확신에 찬 어조에 사도천은 눈을 번쩍 떴다.
"좋소. 그대로 시행하시오. 전군(全軍)에게 특일령(特一令)을 하달하시오."
사도천의 음성은 굳강했으며 신념에 차 있었다.
"존명(尊命)!"
삼태상은 동시에 대답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도천은 자꾸 들뜨려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후후, 오랜 세월이었지."
그는 회한에 찬 음성과 함께 탁자 위에 놓인 목련 가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목련은 꽃봉오리마저 떨구고 한 장의 잎새만 달랑 달고 있었다.
"석중리, 저 잎새가 떨어지는 순간 너도 죽는다. 하지만 너란 놈은 역시 훌륭한 놈이었다. 내가 유치한 감정의 한 가닥으로 사랑한 나의 심랑을 너에게 보내야 할 만큼……."
사도천의 표정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색깔로 굳어졌다.
그에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었던가?
물론 그도 사람이니 있을 것이다.
하나,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단어는 지극히 사치스런 단어였다. 
그의 가슴에는 그 진한 사랑의 빛깔보다 천 배 만 배 더 진한 대야망이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 느낀 사랑의 대상을 석중리, 아니 백운향의 견제책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자신의 흔들리는 감정에 대한 경계와 일생의 숙적을 묶어 놓기 위한 일거양득의 심계였다.
그의 얼굴에 확신에 찬 기색이 떠올랐다.
이제 그의 야망은 찬란한 꽃봉오리를 터뜨릴 것인가?
"운향……."
심원처럼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듯한 그 음성에 돌아서던 백운향의 몸이 흠칫 멈춰 섰다.
백운향의 몸이 불빛 속에서 천천히 돌려졌다.
혜량공주는 침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앉은 채 돌아서는 백운향에게 심유한 시선을 박고 있었다.
"혜량, 지금껏 내가 한 말에 뭔가 의심이라도 있소? 이번 일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거늘, 그토록 유약하면……."
"운향, 당신 정말 너무 하시는군요."
말을 하면서 혜량공주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혜량, 이제 내겐 삼백 일의 시간도 채 남지 않았소."
"당신은 마치 그 적게 남은 인생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혜량공주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밉다는 듯 이불자락을 잡고 작게 흐느꼈다.
백운향의 눈에 아픔의 기색이 배어 들었다.
"혜량……."
예전에 없던, 진득한 감정이 배인 음성이었다.
그는 그 동안 너무 많은 감정을 감추어 왔다. 그러나 그라고 해서 왜 구태여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만 싶었으랴.
그 역시 인간이기에 울고 웃고 까불어도 보고 싶고, 한 남자로서 스스럼없이 여인을 안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세월은 결코 그에게 눈 돌릴 새도 없이 머리를 헤쳐 풀고 그렇게 스쳐 날아 갔다.
그래서 세월에 목을 맨 그의 생(生)은 더더욱 고달픈 것이었다.
백운향의 신형이 서서히 굽혀졌다. 
한 손으로 치렁한 흑발을 쓸어 올리고, 다른 한 손은 혜량공주의 뺨 위에 흐르는 눈물을 향해 뻗어 갔다.
"저리 가세요. 가시란 말예요. 혜량은 당신이 생각하시듯 그렇게 약한 여자가 아니란 말예요. 가… 가 버리란 말예요."
혜량공주는 백운향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며 침상 위에 엎어져 오열을 터뜨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백운향은 굽힌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혜량, 그대는 강한 여자요. 내가 아는 그 어떤 여자보다도……."
"물론이지요. 그러니 어서 가세요."
"그렇지 않아도 가려 하고 있소. 나는 혜량 그대를 굳게 믿소."
그의 말은 어느새 고적한 밤바람과 함께 들려 오고 있었다.
침상 위에 엎드려 진한 오열을 토하던 혜량공주의 몸이 튕기듯 일으켜 세워졌다.
이어 그녀는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찻주전자가 날고 벼루가 날았으며 베개도 날았다.
와장창! 쿵쾅! 탕!
거울이 깨지고 창문이 부서졌으며, 자개문갑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바보! 그래, 너는 며칠밖에 못 살 바보야!"
더이상 집어 던질 것도 없고 깨어질 것도 없이 엉망진창이 된 방 안에서 그녀는 미친 듯이 방문을 밀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시원한 야풍(夜風)이 옷섶을 스쳤다.
"흐흐흑……!"
한 그루 회양목을 부둥켜안고 무너져 내린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사정없이 들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예요.
한 남자 밑에서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여자란 말예요.
당신의 모습은 늘 내게 있었지만 당신은 붙잡을 수 없는 한 줄기 바람이었어요.
당신의 그 바람결이 한순간만이라도 그윽하게 감싸 주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아아!
이미 떠나 가신 당신이여!
세월에 목을 매고 있는 당신의 아픔.
이 여심(女心)이 나눠 가질 수 없어 이렇게 슬피 우는가 봅니다.
얼마나 그렇게 울었을까?
혜량공주는 퉁퉁 붓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다시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어깨는 축 늘어지고 가냘픈 등에는 밤 빛깔보다 더 진한 애수가 매달려 있었다.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베개가 터져 오리털이 사방으로 날고, 제멋대로 깨지고 부서진 가구와 창문들이 발 딛을 틈도 없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데, 방 안으로 들어서던 혜량공주의 신형이 벼락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한 줄기 음성이 파고들었다.
"방이 너무 어둡군."
그 음성은 침상 위에서 들려 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침상 위에 슬쩍 걸터앉아 싱긋 미소짓고 있는 백운향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이었다.
혜량공주는 그의 미소에 박혀 있던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그가 다시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는 좀 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 하나하나를 몽땅 보고 있었을 것이다.
혜량공주는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에 당혹스런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이 너무 지저분하군요."
혜량공주는 백운향의 시선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손에 닿는 대로 조금 전 자신이 마구 집어 던진 것들을 줍기 시작했다.
또다시 흐르는 눈물을 그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허리를 숙이는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혜량공주의 손이 일그러진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들려짐을 느꼈다. 
그녀는 이미 백운향의 억센 품에 안겨져 있었다.
눈물이 샘물처럼 솟아 났다. 
뜨거운 물체가 눈물이 흐르는 볼에 닿았다. 뜨거운 물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물은 끝이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복받쳐 흘러나왔다.
"혜량, 그 주전자를 언제까지 들고 있을 작정이오?"
"방이 너무 지저분해요. 이것들을 좀 치우고……."
"안 되오. 내가 그대를 놓으면 그대는 영원히 날아가 버릴 것만 같소."
혜량공주를 안은 백운향의 팔에 힘이 가해졌다.
"아, 그래도 너무 지저분한데 흡……!"
혜량공주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아니, 그녀의 말은 우리가 듣지 못할 뜨거운 동굴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그녀의 손에 굳게 잡혀 있던 일그러진 주전자가 그녀의 손에서 스르르 풀려 나가며 덜커덩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황촉불이 일렁이고 있는 가운데 일그러진 주전자의 반짝이는 면 위로 두 남녀의 모습이 여울져 퍼져 흐른다.
아마도 이 밤은 좋은 밤이 될 것이다. 
달콤하고, 뜨겁고, 달디달게 이 밤은 익어 갈 것이다.
"심랑, 보았느냐?"
백운향은 일 장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오는 미심랑을 향해 말했다.
"보았어요."
질문과 대답은 짧았다.
강가에는 소슬바람과 더불어 무성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와사삭…! 사사삭……! 
두 사람의 발길을 따라 갈대가 아우성을 치며 갈라져 누웠다.
"무엇을 느꼈느냐?"
또 얼마를 걷던 백운향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또다시 이 갈대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도 숙인 머리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백운향은 자신의 발에 밟히는 갈대를 바라보았다.
갈대는 강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풀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늘상 짓밟힌다.
어부에게도, 꼬마들의 장난에도, 그리고 다정한 연인들의 애정 행각에도 그렇게 짓밟히고 또 짓밟힌다.
그러나 일단 짓밟인 갈대는 다시 일어선다. 갈대에게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백운향은 한족을 갈대에 비유했고, 한족은 밟히고 밟혀도 또 일어설 수 있지만 다시는 이민족(異民族)에게 밟히는 수모의 세월은 없어야 되겠다는 말을 한 것이었다.
"잘 보았구나."
백운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그들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사내가 걷고, 사내가 걸으니 여인도 따라 걷는다는 듯 그렇게 끝없이 걷기만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갈대밭이 끝나고 왼쪽으로 끼고 돌던 강물이 급하게 오른쪽으로 꺾였다.
그 꺾이는 중간 지점에 하나의 허름한 나루터가 보였다.
나루터에는 세 척의 조그만 목선(木船)이 찰랑이는 물결을 따라 건들거리고 있었다.
늙은 사공이 부두의 판자 바닥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극히 한산한 분위기였다.
"하늘 밖까지 태워다 주시오."
백운향의 말에 꾸벅꾸벅 졸던 사공이 한 점 특이함도 없는 눈을 들어올렸다.
사공은 묵묵히 세 척의 목선 중에서 가운데에 묶여 있는 목선을 가리켰다.
미심랑은 내심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늘 밖이라니? 그곳은 도대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들이 배 위에 오르자 사공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노를 잡았다.
이내 목선은 천천히 물결을 가르며 강심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살은 거세었다. 그로인해 목선은 비스듬히 기운 상태로 나아가고 있었다.
"꽉 잡아라. 이곳은 열흘에 한 번 정도 지나가는 거대한 여울목이 있다."
미심랑은 가슴 가득 치밀어오르는 어떤 열기를 느꼈다.
지금껏 백운향은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듯 무심했고 던지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가시 박힌 말뿐이었다.
한데, 지금 그의 말은 언뜻 듣기에도 자신을 염려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의 자존심은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당신은 이곳을 어찌 그리도 잘 알지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평상시의 말투였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르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어찌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이냐?"
미심랑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그저 꽉 잡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또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그녀의 손이 목선 난간을 굳게 움켜잡았다. 
강물은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콰쾅－!
뱃전 위로 노도와도 같은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왜 이런 곳에 나루터를 만들었지요?"
미심랑은 악을 썼다. 그렇게 악을 쓰지 않으면 강물의 포효성으로 인해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가 모르는 것을 물으려고 깨나 애쓰는구나!"
백운향도 마주 악을 썼다. 그도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말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말을 그토록 핀잔을 주며 말하는 그를 보며 미심랑은 다시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겠노라고 내심 다짐했다.
한데, 그때였다.
쏴쏴쏴－ 우르르르릉－!
미심랑은 돌연 기겁을 하며 놀라고 말았다. 
느닷없이 거대한 굉음을 휘몰고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의 놀란 시선이 재빨리 사공과 백운향을 돌아보았다.
한데, 그들은 그런 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예 눈까지 감고 평온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아니, 사공은 오히려 소용돌이를 향해 노를 젓는 듯하지 않는가!
'끝장이야!'
미심랑의 음성은 터져 나오지 못했다. 
일단 소용돌이에 휘말린 목선은 무서운 속도로 수십 바퀴나 돌더니, 물 속으로 빨리듯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입 안 가득 물이 들어오고 정신이 혼미해져 왔다.
결사적으로 손발을 허위적거렸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물살은 결코 그녀의 작은 몸뚱이가 저항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이 아득하다. 그녀는 점차 의식의 줄을 놓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이때 누군가 그녀의 손을 움켜잡는가 싶자, 다음 순간 뜨거운 공기가 입 속으로 훅 밀려들었다. 비릿하고 뜨거운 공기였다.
그녀의 뇌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이다 겨우 눈을 떴다.
순간 그녀는 기절할 듯 놀랐다. 
백운향이 자신을 두 팔에 안고 자신의 입에 그의 입술을 포갠 채 공기를 주입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이 치한!'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이미 소용돌이는 지나갔는지 물 속은 잠잠했다.
그녀의 반항으로 둘의 포개졌던 입술이 떨어졌다.
그 순간 그녀는 아득히 물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수공(水功)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無知)인 그녀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는 수없이 물을 마셨다.
'이…이게 아닌데……!'
그때 그녀의 몸을 낚아채며 또다시 입술이 포개졌다. 
이제 더이상 그녀는 반항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운향은 그녀를 안은 채 저만큼 앞서 가는 사공의 뒤를 쫓아갔다.
대략 일 각여 동안 헤엄쳐 가자 입을 시커멓게 벌리고 있는 거대한 수중 동굴이 나타났다.
사공은 돌맹이를 주워 한쪽 동굴 벽을 길게 세 번, 짧게 두 번 두드렸다.
딱－! 딱－! 딱－! 딱! 딱!
소리는 대기에서보다 물 속에서 더 빠르고 멀리 전달된다.
잠시 후 동굴 안쪽에서 응답하는 듯한 음향이 들리자, 사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굴 속으로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십여 인의 눈동자가 갑자기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웅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뜻한 남의(藍衣) 차림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눈은 경외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글…부글…! 삼 장 너비의 짙푸른 물이 넘칠 듯 한동안 끓어올랐다.
어느 한순간,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치며 웅덩이 속으로부터 두 개의 신형이 솟구쳐 올랐다.
슈파악－! 파악－!
정확히 말하자면 세 개였다. 하나는 서로 포개진 두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미심랑은 서늘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직 자신이 물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귀로 갑자기 한 줄기 전음성이 파고들었다.
"너는 언제까지 내 입술을 물고 있을 셈이냐?"
그녀는 황급히 눈을 떴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물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황망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거대한 암동(暗洞)이었다. 
천정은 까마득했고, 삼십여 장 넓이의 장방형 벽에서는 횃불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자신을 잊은 듯 저만큼 걸어가는 백운향의 모습이 보였다.
"백대야(白大爺)를 뵈옵니다!"
정연한 대열을 짓고 서 있던 십여 명의 남의인들이 장엄하게 외치며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미심랑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백운향에 대해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한데, 이것은 또 무엇인가?
"우리가 그를 잘못 알고 있었어……."
그녀의 음성이 지극히 나직하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천천히 백운향 곁으로 다가섰다. 
백운향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잘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곧 나타날 여인 정도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는 여인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이어 그는 그의 앞에 아직껏 부복해 있는 남의인에게 추상 같은 호통을 쳤다.
"그 계집은 무얼하고 있기에 내가 왔는데도 아직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단 말이냐?"
"저… 그것이……."
그의 서슬에 남의인들은 엎드린 채 감히 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 계집이 요즘 팔자가 늘어진 모양이로구나. 그저 계집들이란!"
이때 암동 모서리로부터 일장 교소가 들려 오며 한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호호호! 당신은 그 동안 성미만 급해져서 돌아오셨군요."
흰 모시적삼에 무명 치마를 입은 촌부(村婦) 차림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는 수수한 차림으로 인해 오히려 처절하리만치 아름다웠다. 
그녀는 다름아닌 빙월교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정녕 기쁜 듯한 미소가 활짝 피어 있었다.
백운향의 눈빛이 짙은 조소와 경멸로 변했다.
"그 동안 세도 좀 부리더니 코가 하늘마저 꿰뚫겠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는 당신의 코는 제 코 위에 올라 있군요. 경하드려요."
빙월교는 백운향의 비아냥거림에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에이그, 그 동안 입만 더 살았구나."
"당신의 입은 여전히 사납구요. 한데… 저 낭자는 누구죠?"
빙월교는 비로소 미심랑을 돌아보았다.
백운향은 돌아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왜? 예쁘냐? 내 색시다."
'색시……?'
미심랑의 얼굴에 당혹감이 일었다. 백운향이 자신을 그렇게 소개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축하드릴 일이로군요. 혜량공주가 눈물을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정도면 삼처사첩(三妻四妾)은 거느려야지요."
미심랑은 두 사람의 대화에 아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백운향의 터무니 없는 트집도 그렇지만, 그보다 그 트집을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넘기는 빙월교에게 감탄하고 말았던 것이다.
도대체 저들이 지금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인지, 사랑놀음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백운향의 얼굴이 떫은 감을 씹은 듯 일그러지며 언성이 더욱 고조되었다.
"너는 나를 이곳에 세워 놓고 아예 굶겨죽일 작정이냐?"
백운향이 트집을 잡으면 잡을수록 빙월교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마치 백운향의 이 억지 시비와도 같은 말이 듣기 감미롭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미심랑에게 있어 극도의 신비감으로 와 닿았다.
"정말 그렇군요. 당신이 너무 투정을 부리시는 바람에 연자탕(蓮子湯)이 다 식었겠어요."
빙월교가 예쁘도록 하얗게 웃었다. 그 음성과 어투는 마치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와 같았다.
"나는 연자탕 안 좋아한다."
"호호호! 그새 식성이 변하셨군요."
백여 장의 암도를 따라 걸으면서도 그들의 말씨름은 계속 되었다. 
백운향은 어떤 식으로든 트집을 잡았고, 빙월교는 시종 여유로운 미소 속에 사근사근 그의 트집을 받아넘겼다.
그들이 화려한 원형 석실로 들어섰을 때 백운향은 뒤따라 들어오는 미심랑을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너란 계집은 좀 더 보아야 철이 들 거야."
미심랑이 뭐라 할 새도 없이 백운향은 석실로 들어갔다.
원형 석실 내에는 이미 팔척반상(八尺盤床)이 좁다 할 만큼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윽고 의복을 갈아입은 후 식사가 시작되었다.
백운향의 트집은 여기서도 계속되었다.
"누가 만든 음식이냐?"
"저와 아랑(兒浪)이 만들었어요."
"음식을 만드는 데까지 시비를 혹사시키다니… 팔자 늘어졌구나."
그는 계육반(鷄肉飯)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이건 누가 만들었느냐?"
"맛이 괜찮지요? 제가 만든 거예요."
일순 백운향의 얼굴이 똥 씹은 듯 일그러졌다.
"에이그! 이것도 음식이라고 만들었느냐?"
그는 제육반을 삼키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미심랑은 도대체 왜 그러나 의아해 하며 그가 트집 잡은 제육반 한 조각을 먹어 보았다.
한데, 입에 너무 잘 맞았다. 이토록 잘 만든 음식을 여지껏 먹어 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백운향이 이번에는 완자를 씹으며 물었다.
"이건 누가 만들었느냐?"
"아랑의 솜씬데 꽤 쓸 만하죠?"
"어쩐지 맛이 기가 막히더라니……."
백운향은 완자를 꿀꺽 삼킨 후 서둘러 물그릇을 찾았다.
한데, 미심랑이 완자를 맛보니 완자는 비단 짤 뿐만 아니라 이를 데 없이 매웠다.
미심랑은 이제 자신의 입맛이 그와 거꾸로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트집이 도가 지나친 것인지 분간을 못할 만큼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식사는 온갖 트집과 고함 속에 계속되었다.
백운향은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맛이 없다고 투정하는 음식에만 젓가락을 대고 있었다.
숨겨진 계략(計略)
거대한 장방형의 공간.
사면 벽의 삼 장 높이에는 중원 및 새외변황(塞外邊荒)과 남만(南蠻), 동영(東瀛)의 전도(全圖)가 걸려 있었다.
그 지도 위에는 청색, 홍색, 흑색, 갈색 등 각양각색의 표시가 되어 있었고, 지도 밑으로는 조그만 서랍이 다닥다닥 붙은 책상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 공간 속에서 남의를 단정히 차려 입은 팔십여 명의 사람들이 뭔가 열심히 그리고, 쓰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또한 한쪽의 통풍구로는 쉴 새 없이 전서구(傳書鳩)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탁자 위에 쌓인 두루마리를 분류하고 전서로 띄울 내용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장내의 분위기는 엄숙한 가운데 기이한 열기가 일고 있었다.
가운데 위치한 태사의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백운향의 표정은 이 장엄한 광경과 함께 엄숙하게 굳어 있었다. 
빙월교의 얼굴에도 그 진했던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한시도 쉬지 않던 입을 다물고 그 대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 보아도 이곳의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되고도 남으리라.
"이것들이 모두 당신의 아성이에요."
"그대도 나의 아성이라 해 두지."
처음으로 차분하게 흘러나온 그의 말에 빙월교의 옥용에 한 줄기 격동의 빛이 언뜻 스쳐갔다.
미심랑은 잔뜩 호기심 어린 눈길로 쉬지 않고 공간의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있었다.
백운향이 서서히 태사의에서 일어나 우측 벽면에 붙은 지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적색은 적의 총타급, 흑색은 분타급이며, 청색은 우리의 총타급, 백색은 분타급이에요."
빙월교의 음성은 진지했다.
백운향의 지도를 따라 움직이는 속도는 지극히 완만했다. 
그의 시선은 표시된 지명과 문파 하나하나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것은 마치 아예 머릿속에 집어 넣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의인들은 그와 빙월교가 지나가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지도를 따라 움직이던 미심랑의 표정은 점차 경악의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치밀하고 세세한 상대방의 정보망이 지도 위에 확연히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도천의 총분타는 거의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었다.
그들이 사면 벽의 지도를 모두 돌아본 것은 거의 한 시진이 지난 뒤였다.
문득 백운향이 빙월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월교, 한 가지 부탁을 해야겠다."
"당신에겐 그런 말이 안 어울려요."
이번에는 진정한 대화인 듯했다. 
미심랑은 호기심을 잔뜩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저 계집을 네가 맡아서 여인으로 만들어 보아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심랑의 전신으로 모욕감이 불길처럼 치달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화를 내고 어쩌고 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나 혼란스런 그들의 대화와 질려 버린 이 신비스런 세력의 규모에 그녀는 아예 넋을 잃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사도천의 신임을 받고 있는 몸이라 해도 이 호흡이 잘 맞는 백운향과 빙월교 사이에 끼인다면 누구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고 말 것이다.
지금껏 버티고 있다는 것만도 미심랑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백운향의 뜻밖의 말에 빙월교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미낭자의 의사에 따라 이곳에 머물게는 할 수 있어도 어찌 제가 미낭자를 가르치고 말고 할 게 있겠어요?"
미심랑의 자존심을 생각해 준 사려 깊은 말이었다.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내가 하라면 하는 것이다."
백운향의 음성은 지극히 완강했다.
빙월교의 시선이 미심랑을 향했다.
미심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일단 이곳에 머물러 보지요."
그녀는 순순히 응낙했다.
백운향이 다시 말했다.
"그 계집은 이제 네 머리 위에 올라앉고 말 거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빙월교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저는 피곤해서 그만 쉬어야겠어요."
미심랑의 말에 빙월교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동안 너무 큰 변화를 접해서 그럴 거예요. 우선 쉬도록 해요."
빙월교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처소로 안내하게 한 후 백운향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쓸데 없이 저 여자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지요?"
말 자체는 힐난하는 말이었지만 어조는 부드러웠다.
"나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신경을 쓰다 보니 피곤하기만 하고……."
"호호호! 부부 사이가 그렇게 피곤하면 안 좋은데요?"
빙월교의 얼굴 가득 장난기 서린 미소가 어렸다.
"부부 사이란 그런 거다. 너라고 안 그럴 것 같으냐?"
빙월교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다 갑자기 말문을 돌렸다.
"방주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당신도 일단 뵙는 게 예의일 것 같아요."
그것은 황금빛 화살이었다. 
그 화살은 불빛 아래 찬란한 황금색을 번쩍거리며 마디 굵은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었다.
"음……."
화살을 잡은 손가락의 임자는 나직이 침음성을 터뜨렸다. 
화사한 황의와 구릿빛 얼굴, 그 얼굴 위에 그어진 긴 상흔이 굳강한 인상을 풍기는 초로의 노인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언뜻언뜻 문 쪽을 바라보며 습관인 듯 화살을 쓰다듬고 있었다.
문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눈에 어리는 신광은 폐부마저 꿰뚫어 버릴 듯 날카로웠다.
이윽고 자단목 반월 방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백운향과 빙월교였다.
순간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황의노인이 강인한 몸을 다급히 일으켜 세웠다.
"무적신방(無敵神幇)의 임시방주 무륭(武隆)이 삼가 백대야를 뵈옵니다!"
그는 커다랗게 외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일순 멋모르고 들어서던 백운향의 얼굴에 해연히 놀람의 빛이 일었다.
빙월교가 나직이 속삭였다.
"어서 답례를 하시고 자리에 앉으세요."
그녀는 이미 이 상황을 예견한 듯했다.
백운향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곧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인 후 방 중앙에 위치한 팔선탁 앞에 앉았다.
그제서야 부복하고 있던 노인 무륭이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백운향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륭이 굵직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이 모든 것은 제 아들놈 원강이 안배한 것이었습니다. 소림사에서 무공을 수련하던 그놈이 어느 날 갑자기 무적신방에 나타나 무조건 백대야를 돕자며 우선 빙소저를 보내 왔던 것입니다."
"무원강……?"
백운향은 생소한 이름인지라 빙월교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벌써 여래공자(如來公子)를 잊으셨나요?"
"잊다니… 그가 아니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인데……."
그렇다. 그가 어찌 일혼이협사기(一魂二俠四奇) 중 사기(四奇)의 한 사람인 여래공자를 잊을 수 있으랴!
살수 냉천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 낸 여래공자가 아니었던가?
"여래공자 그분이 바로 무원강이에요."
"……!"
"그리고 그분은 저의 사형이기도 해요. 말하자면 무적신방은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방파예요. 무대협께서 임시방주라 하심은 아직 진정한 방주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무적신방의 진정한 방주는 바로 당신이에요."
"나……?"
차분히 듣고 있던 백운향이 눈이 크게 떠졌다.
놀라는 백운향의 앞으로 무륭이 한 권의 책자를 내밀었다.
"백대야께선 이미 전설의 오대파천무 중 사대파천무를 익히고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부디 오대파천무를 합쳐 천하에 광명을 주소서."
백운향의 눈이 이번에는 찢어질 듯 커졌다.
<파천군림무(破天君臨舞)>
책자의 남색 표지에는 그 다섯 글자가 핏빛으로 아로새겨진 듯 쓰여 있었다.
오오! 그것은 바로 오대파천무 중 마지막 파천무인 파천군림무였던 것이다.
무륭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백대야께선 이미 오대파천무의 전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파천군림무제께서 천문의 살수를 피해 파천군림무를 보존하신 곳이었습니다. 부디 대성(大成)을 이루시길……."
무륭은 말을 끝내고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방을 나갔다.
탁자 위에는 파천군림무가 불빛 아래 놓여 있었다.
백운향은 이 뜻밖의 기연에 한동안 얼떨떨함을 금치 못했다.
"그것을 보시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보아 주세요."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빙월교가 한 장의 봉서를 그의 앞에 밀어 놓았다.
백운향은 묵묵히 그녀가 내민 봉서를 펴들었다.
<만악수사(萬惡秀士).
현 개봉부(開封府) 만수골동품점(萬數骨董品店) 주인.
일 년 전 미심랑이라는 여제자를 출도시킴.>
<마검혈편(魔劍血鞭).
대파산(大巴山) 사신곡(死神谷)에 은거 중.
일 년 전 단목수 출도시킴. 단목수는 현 무림맹주이자 단목세가 가주.>
백운향이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단지 고개만 몇 번 끄덕였을 뿐이다.
"만악수사, 역시 기인이군. 마검혈편 또한… 그들은 이미 명리를 벗어 버렸어. 자신들의 제자를 통해서……."
한데, 이러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는 백운향의 세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한 번도 천하에 비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그 세력은 소림과 개방, 무적신방, 그리고 빙월교가 매혼재녀로서 혼을 사 온 수를 알 수 없는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었다.
또한 황궁의 모든 힘이 곧 그의 힘이지 않은가!
특히 여래공자의 사형이자 현 소림장문인 패룡옥불이 이끄는 대소림사의 힘은 가히 천하대세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백운향은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파천군림무의 첫번째 장을 열었다.
이제 비로소 오대파천무가 그의 한 몸에 모이게 된 것이다.
최초에 황궁무고 내에서 얻은 미혼환락무를 위시하여 천룡승천무, 뇌정태양무, 환허환상무에 이어 이번에는 우연치 않게 파천군림무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조화선옹 이후 어언 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합쳐질 수 없었던 오대파천무가 최초로 한 사람의 신공(神功)으로 집약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백운향은 어느새 자신을 잊었다. 
파천군림무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이미 그는 그 속에 깊이 빠져들었던 것이다.
<하늘을 깨뜨리니(破天) 천하에 홀로 군림(君臨)하리라!>
파천군림무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앞의 네 파천무에 비해 지극히 패도적이었다.
미혼환락무가 요요로웠다면 천룡승천무는 장중했고, 뇌정태양무가 현란하다면 환허환상무는 표흘했다. 
그러나 파천군림무는 극도의 패강지학(覇强之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운향은 책을 덮었다.
빙월교는 초췌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월교, 이제 잠을 좀 자고 싶구나."
빙월교의 얼굴이 새침해졌다.
"당신은 낮잠을 즐기는 버릇이 생겼나요?"
"낮잠……?"
"이곳은 낮과 밤이 따로 없지만 바깥 세상은 지금 벌건 대낮이에요."
백운향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 책을 보는 동안 무려 사흘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단 말예요."
기실 백운향은 파천군림무의 심오함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백운향이 빙월교의 안색을 살피며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월교의 얼굴이 어찌 그렇지?"
"저는 그냥 잠이 안 오기에……."
"제길, 다른 때는 똑똑하더니 이번엔 지극히 멍청한 짓을 했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백운향의 눈에 어린 정은 빙월교 자신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백운향은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계속 엉뚱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난 낮잠이라도 자야겠다. 하지만 여자는 될 수 있으면 낮잠 자는 습관을 들이지 않는 게 좋다. 왜냐하면 돼지처럼 살이 찔지도 모르니까."
빙월교의 얼굴에 희미하게 어렸던 은근한 기대감이 일시에 사그러들었다.
"당신은 당신의 감정을 그 정도로밖에 표현할 줄 모르나요?"
체념 어린 음성이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
"좀 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 보세요."
뾰족한 그녀의 말에 백운향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런 너는 왜 솔직하지 못하느냐?"
그의 날카로운 다그침에 그녀는 일순 멈칫했다.
"저…저는 그래도 대월국(大月國)의 왕녀라구요."
"대명국의 공주도 내 앞에서는 솔직했다."
빙월교의 얼굴이 점점 처연해지며 눈에 한 방울의 이슬이 맺혔다.
항상 강했고 지혜로웠던 여인 빙월교도 남녀 사이의 감정 앞에서는 결국 나약한 여인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때 침중하게 굳어 있던 백운향의 얼굴에 서서히 미세한 미소가 번지더니 그 미소는 이내 짓궂게 변해 갔다. 마치 이 묘한 분위기를 스스로 털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한 미소였다.
빙월교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애증, 갈등, 번민 등 한 사람의 얼굴에 어찌 저토록 많은 표정이 일시에 떠오를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것도 그녀가 빙월교이기에 가능한 것인가?
빙월교의 봉목에 맺혔던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나…난 말이죠. 당신의 그 미소가 좋단 말예요."
천하에서 가장 현명하고 아름다우며 비범한 그녀가 겨우 그런 말로 사랑을 고백해 버렸던 것이다. 세상 어느 여자도 쉽게 할 수 있는 평범한 말로써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정녕 그녀답지 않게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백운향이 그녀의 굽혀진 몸을 조용히 감싸 갔다.
"그리고… 말이죠. 전 가끔 당신의 품에 안겨 보고 싶을 때도 있다구요."
그녀의 두 어깨를 감싸 쥔 백운향의 손에 힘이 주어지며 그녀의 작은 몸이 그의 넓은 품 속에 감춰질 만큼 파묻혔다.
"월교, 너는 웃는 모습이 훨씬 아름다워."
그는 가만히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나라고 해서 왜 나의 감정을 감추고만 싶겠느냐? 나 역시 다른 사람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빙월교는 그의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그의 품 속에 머리를 묻고 눈물만 흘려대고 있었다.
울지 않던 사람이 일단 울음보를 터뜨리면 끝없이 운다. 가슴이 후련해질 때까지 운다.
"원래 꽃이란 꺾고 싶은 꽃과 꺾지 않고 오랫동안 보고 싶은 꽃이 있는 법이다. 월교, 너란 여인이 바로 꺾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꽃이다."
백운향의 입술이 빙월교의 두 쪽 꽃잎에 가만히 내려앉았다가는 떠났다.
"월교, 너와 나는 이런 분위기가 역시 안 어울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탓일 게다. 한잠 푹 잔 다음 사도사대지주(邪道四大至主)를 만나겠다."
그는 이미 백운향 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말했고, 마지막 음성은 어느새 문 밖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때……?"
빙월교는 꿈결처럼 내려앉았다가 바람결처럼 떠나간 그의 입술 여운을 생각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소중한 꽃을 꺾고 싶을 때란 과연 어떤 순간을 말하는 것인지…….
<광혈마존(狂血魔尊)>
<냉심일괴(冷心一怪)>
<금필적혈수(金筆赤血手)>
<옥적불혈마(玉笛不血魔)>
이름하여 사도사대지주(邪道四大至主)이다.
광혈마존(狂血魔尊).
그는 미친 사람이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이다. 피에 미치고 살인에 미쳤다. 
그는 하루라도 살인을 하지 않으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살인을 한다.
그래서 그는 항상 붉은색 옷을 입는다. 피가 튀어도 결코 표가 나지 않아 또 살인을 하고 싶어지게끔 말이다.
냉심혈괴(冷心血怪).
그는 웃는다. 웃으며 사람을 죽인다. 그의 뻣뻣한 얼굴 가죽 위로 한 줄기 웃음이 스칠 때 상대의 혼은 이미 그의 수중에 있다.
그가 익힌 냉심섭혼안(冷心攝魂眼)이라 불리는 가공할 섭혼마공(攝魂魔功)은 부처도 견디지 못하고 돌아눕는다고 했다.
금필적혈수(金筆赤血手).
빠르다. 무지무지하게 빠르다. 단지 일점 혈광만이 점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살업(殺業)은 모두 끝나 있다.
그보다 더 빨리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는 단지 자신의 빠름을 시험하기 위해 살인을 한다.
그는 전의 것보다 느리다고 생각되면 스스로를 열흘 동안 굶긴다 했다. 
오로지 가장 빠른 것만이 아름다우며 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옥적불혈마(玉笛不血魔).
그는 피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의 흰 백의에 피가 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옥적(玉笛)을 분다. 옥적은 결코 피를 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를 보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옥적불혈마이나, 그가 살인한 수는 사도사대지주 중 으뜸이다. 그는 주로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검혈편과 만악수사 이후 최고의 마도지로(魔道之路)를 걷고 있는 사도사대지주가 지금 한 자리에 모였다.
온통 핏빛 일색인 장포와 핏빛 수염의 혈의인이 광혈마존. 
차갑게 굳어진 표정에 먹물처럼 검은 흑의를 걸친 자가 냉심일괴. 
이따금씩 손에 든 금필로 바닥을 찍어대고 있는 금빛 찬란한 장삼의 중년인이 금필적혈수. 
백옥적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아름답도록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이 옥적불혈마이다.
한데, 또 있다. 
그들의 한켠에 소금(小琴)을 목에 걸고 있는 자의미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여인문파(女人門派)인 자하문(紫霞門)의 문주(門主) 자운옥봉(紫雲玉鳳) 하궁란(河宮蘭)이었다.
언젠가 천의장 비무대회에서 광화서생으로 변신한 백운향에게 수모를 당했던 그녀도 사도사대지주와 함께 석대 위 태사의에 앉아 있는 백운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도사대지주와 자운옥봉이 경직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백운향의 얼굴에는 담담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의 미소는 특이했다. 처음에는 눈가에서부터 두 볼로 번지더니 마지막에는 입술 위로 번져 이내 뚜렷한 윤곽의 미소로 얼굴 전체에 은은히 감돌았다.
치렁한 흑발과 헐렁한 갈의와 어울린 그 미소는 차라리 신비였다.
"그대들이 떠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떠날 수 있소."
영문 모를 말이 그의 입에서 잔잔히 흘러나왔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백운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매혼재녀에게 판 혼을 돌려줄 수 있다는 소리요."
그렇다면 그들도 매혼재녀, 즉 빙월교에게 혼을 판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그렇다. 광혈마존은 일 각 동안에 누가 더 사람을 많이 죽일 수 있나 하는 내기에서 빙월교에게 무참히 져 버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수도 헤아릴 수 없는 개방의 거지들에게 삼일실명단(三日失命丹)을 먹여대는 그녀를 어찌 당할 수 있겠는가?
냉심일괴는 그의 독문절기 냉심섭혼안을 일 각 동안 펼쳤지만 빙월교는 피를 토하면서도 끝내 생글거리고 웃었었다.
금필적혈수는 빠름으로 제압하고, 옥적불혈마는 피리 불기로 제압했다. 
빙월교가 그들의 혼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성명절기에 정면승부를 걸었던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빙월교에게 실지로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녀 자신밖에 몰랐다. 
또한 자하문주 하궁란의 혼을 산 것은 그녀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으로만 이루어진 자하문은 충분한 활용가치가 있었다. 
한 예로 사내들이 헤어나기 힘든 미인계(美人計)가 그렇지 않은가?
잠시 장내에는 짧고도 긴 듯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광혈마존이었다.
"네놈의 이름이라도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니냐?"
그의 음성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하핫! 언제부터 광혈마존께서 예의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셨던가?"
백운향의 비웃는 말에 광혈마존의 안색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사도제일고수(邪道第一高手)인 그가 언제 이런 수모를 받아 보았겠는가?
그의 발이 세차게 바닥을 굴렀다. 청석 바닥에 다섯 치 깊이로 선명한 족적(足跡)이 새겨졌다.
실로 가공할 공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과시였다.
그러나 백운향의 시선은 그것을 담담히 외면했다.
"길게 말하지는 않겠소. 그 동안 호취아에게 모든 것을 소상히 들었을 것이오. 그대들이 승낙하면 이 대업에 한몫 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지단근(四肢斷根)에 벙어리가 되어 이곳을 나갈 수밖에 없소."
안하무인 격인 말이었다.
순간, 사도사대지주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각기 다른 음향과 광채가 고막을 터뜨릴 듯이 석실을 가득 메웠다.
촤아아－! 쐐－애－액!
광혈마존의 광혈장(狂血掌), 냉심일괴의 냉심사혼검(冷心死魂劍), 금필적혈수의 쾌도탈명수(快刀奪命手), 옥적불혈마의 쇄혼적(碎魂笛)이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백운향의 전신으로 바람 한 점 새어 나갈 틈도 없는 천라지망이 펼쳐졌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카캉! 퍼펑! 태－앵! 파라라락!
각기 다른 네 가지 소성과 함께 백운향의 몸이 앉은 채 약간 기우뚱했다. 
그는 몸으로 그들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것이다.
광혈마존의 광혈장이 왼쪽 가슴을, 냉심일괴의 검이 아랫배에, 금필적혈수의 금필은 옆구리에, 옥적불마혼의 옥적은 오른쪽 가슴에 틀어박혔다.
한데, 백운향은 잠깐 기우뚱했을 뿐 이전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오히려 낭패를 당한 쪽은 사도사대지주인 듯 각자 손목을 거머쥐고 경악지색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백운향이 도대체 손을 쓴 것인지 안 쓴 것인지조차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 조용히 앉아 있던 백운향의 두 손이 춤추듯 천천히 움직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오른손이 왼손 위에서 가볍게 내저어지며 왼손이 길게 대각선으로 움직였다.
"우욱……!"
"헉……!"
"으으……!"
"크……!"
바람도 없었고 소리도 없었다. 
한데, 네 줄기 혈선이 돌연 허공으로 뻗어 올랐다.
쿵! 쿵! 쿵! 쿵!
사도사대지주는 일제히 피를 토하며 청석 바닥 위에 긴 족적을 파고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백운향이 휘두른 그 단순한 손놀림으로 인한 결과였다.
사도사대지주는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아예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망연히 백운향을 바라보았다.
"으, 어찌 이런 일이……!"
"믿…믿을 수 없다! 이것이 진정 인간의 무공이란 말인가?"
경악과 회의에 찬 음성이었다.
백운향의 입에서 그들의 의혹을 풀어 주듯 나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파천군림무(破天君臨舞)!"
순간 사도사대지주는 눈을 휘둥그래 뜨며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오오, 파천군림무! 
그들이 비록 파천군림무는 모른다 하나 어찌 파천무라는 세 자를 듣지 못했으랴!
"하겠소, 안 하겠소?"
백운향은 그들을 몰아붙였다. 
이미 웃음기 사라진 그의 시선이 예리한 빛을 발하며 그들을 휘감았다.
"으……!"
사도사대지주는 똑같이 전신을 떨었다.
"하겠소."
그 와중에 금필적혈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금필이 빠르다더니 결정도 빠르군."
옥적불혈마도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도 하겠소."
"옥적의 음률만큼이나 상쾌하구려."
"제길! 나도 해 버리지."
광혈마존의 거친 음성이었다.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 것 같소."
백운향은 사도사대지주가 승복을 할 때마다 어김없이 한 마디씩 던졌다.
끝으로 냉심일괴가 나섰다.
"좋소!"
"좋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지. 하나, 그대에게 그 이상의 대답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한 일."
백운향은 그렇게 말하며 소리없이 사태를 주시하고만 있는 자운옥봉 하궁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운옥봉은 지금까지의 광경에 질린 듯 즉시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백운향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행동에 맞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 목운동을 하자는 게 아니다."
"하…하겠어요."
자운옥봉이 억지로 대답했다.
일순 장내에 기묘한 열기가 흘렀다. 
무엇인지 몰라도 백운향으로부터 떨어질 명령이 가공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열기였다.
그 열기 속으로 백운향의 음성이 심혼(心魂)처럼 파고들었다.
"광혈마존은 호남성(湖南省) 안화(安華) 천무귀검장(天武鬼劍莊)을, 냉심일괴는 호북성(湖北省) 남담(南潭) 기절신문(奇絶神門)을, 금필적혈수는 사천성(四川省) 선양(仙陽) 삼원비룡각(三元飛龍閣)을, 옥적불혈마는 하북성(河北省) 마수구(馬水口) 칠성도룡보(七星刀龍堡)를, 자운옥봉은 하남성(河南省) 광양(廣陽) 유절서원(儒絶書院)을 책임지고 궤멸시키시오."
백운향은 사도사대지주와 자운옥봉 하궁란이 공격할 곳을 지명(地名)까지 곁들여 가며 차례로 지시했다.
그들 오 인은 한결같이 자신에게 명이 내려질 때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섰으나, 백운향의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백운향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지명은 그들에게 있어 전혀 생소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운향은 일사천리로 명을 하달한 후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말한 곳은 적의 구대총타(九大總舵) 중 다섯 곳이오. 이 다섯 곳이 그대들의 손에 궤멸되면 적은 오 할의 세력이 무너지는 것이오. 그리고 나머지 사대총타는 내가 직접 궤멸시킬 것이오."
그의 말은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차 있었다.
옥적불혈마가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띠운 채 입을 열었다.
"한데, 지명이 너무 생소해서 난 그곳을 알지 못하오."
"물론 그럴 것이오. 생소한 지명일 뿐만 아니라, 위치 또한 외지(外地)와 거의 격리된 곳들이오. 그들의 무서움은 바로 여기에 있소. 그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감추고 힘을 기르고 있는 중이오."
"음……!"
"으음……!"
오 인의 눈에 경이로움이 차올랐다.
"절대 만만하게 보지 말고 전 세력을 동원해 철저히 궤멸시키시오."
백운향의 음성에는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는 태사의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이 사도사대지주를 향해 뻗어 갔다.
"봉서(封書)에는 각 총타의 위치와 세력 등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소. 그럼 수고들 해 주시오."
그들은 자신들에게 날아든 누런색 봉서를 들고 허리를 굽혀 보였다. 
다음 순간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석실 문 밖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잠시 그들이 사라진 석문을 바라보던 백운향은 지친 듯 다시 태사의에 몸을 앉혔다.
그때 방금 전 그들이 사라져 간 문이 열리며 빙월교가 사뿐히 들어섰다.
"수고하셨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들을 그렇게 쉽게 굴복시킬 수는 없었을 거예요."
백운향이 시선을 들어 빙월교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네가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구나."
"……?"
"저런 자들의 혼을 샀으니 하는 말이다."
빙월교의 얼굴에 한 줄기 어두운 기색이 떠올랐다.
"사도사대지주가 무척 불쌍해 보이는군요."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죽여야 한다.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대의(大義)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로선 다행한 일인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도사대지주는 방금 그의 명을 받고 떠났지 않은가?
한데, 백운향과 빙월교는 그들의 죽음을 기정사실처럼 말하고 있으니…….
"월교, 너도 어서 길을 재촉해야 되겠다."
"지금 작별인사를 하러 온 거예요."
"제길, 영원히 못 볼 것처럼 말하는군."
빙월교의 얼굴에 애잔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백운향이 석대의 계단을 내려서며 품 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천룡승천기(天龍昇天旗)는 천 년 동안 잠자던 천룡승천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고, 이 환영패(幻影佩)는 사막십팔환영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너의 대월국을 찾는 데는 무적신방과 소림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빙월교의 얼굴에 격정의 빛이 노도처럼 흘렀다.
"천룡승천기는 청해성(靑海省) 청도(靑都)에 도착하는 대로 성문 위에 꽂을 것이며, 환영패는 지당협(地塘峽)을 통과하며 하늘 높이 던져라. 그들의 힘이 합세되면 대월국을 되찾는 일이 능히 가능할 것이다."
백운향은 황금색 바탕에 천룡이 수놓아진 천룡승천기와 말 탄 사람의 모습이 양각된 묵옥(墨玉)의 환상패를 빙월교의 손에 쥐어 주었다.
빙월교는 언제부터인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월교, 서둘러라. 늦어도 팔월 중추절까지는 사도천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줘야 되지 않겠느냐?"
"물론이에요. 물론 그래야지요."
"그때는 콧대가 하늘 끝까지 뻗을 여왕님이 돼 있을 테니 몸조심하고……."
"흑……!"
빙월교는 갑자기 흐느끼며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녀의 격정이 너무 컸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백운향이 했던 위로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빙월교는 그렇게 대월국을 되찾기 위해서 떠났다.
또한 사도사대지주와 자운옥봉 하궁란도 적의 오대총타를 괴멸시키기 위해 떠났다.
거사일(巨事日)은 모두 한결같이 중추절 하루 전날인 팔월 열나흘! 
팔월 십사 일이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물론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간 속에 부여된 상황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바로 이 여인, 이 여인이 그 표본이리라.
그녀는 항상 순수한 청초함을 갖고 자의궁장(紫衣宮裝)을 즐겨 입는다. 목에는 조그만 소금(小琴)을 걸고 유난히 큰 눈이 서럽게 보이는 여인이다. 
한데, 그녀가 변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자의임에 분명했다. 하나, 그 자의는 속살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자의였다.
눈은 크게 떠져 있지만 그 눈에는 서늘함이 없다. 대신 뜨거운 열기가 일렁인다.
너무나도 철저히 변한 이 여인은 바로 자하문의 문주 자운옥봉 하궁란이었다.
광화서생의 음담에 비무(比武)마저 포기하고 흐느끼던 여인이었다. 
백운향으로부터 하남 유절서원(儒絶書院) 척살 명령을 받은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사내의 무릎 위에 앉아 몸을 기대고 있다.
자운옥봉 하궁란을 살포시 끌어안고 다정스런 눈빛을 그녀의 눈에 던지는 사내의 미간에는 홍옥 반점이 선명하다. 
다름아닌 사도천이었다.
오오,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궁란, 수고했다. 네가 내게 큰 선물을 주었구나."
사도천의 음성은 포근하고 달콤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하궁란은 고개를 떨구었다.
사도천의 손이 다정스레 그녀의 전신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
"아! 당신께 아직도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소녀가 슬퍼집니다."
하궁란의 음성은 들떠 있었다. 그녀는 정녕 사랑의 노예가 되어 버린 듯 한없이 사도천의 품을 파고들었다.
누가 있어 사도천에게 감히 당신이라는 말을 이렇듯 쓸 수 있겠는가?
없다. 결단코 없다. 
그를 친자식처럼 키운 삼태상들도 그를 깎듯이 대하지 않았던가?
그로 미루어 사도천과 하궁란 사이는 보통 사이를 뛰어넘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사도천은 백운향에게 모욕당한 하궁란이 천의장을 떠나려 할 때 그녀를 천의장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일단 사도천의 모습을 본 하궁란의 방심(芳心)은 여지없이 흔들려 버리고 만 것이다.
사도천의 아름다운 미소 앞에 그녀는 타올랐고, 그의 손길이 스침으로 해서 한 줌 재가 되고파 몸부림치기에 이르렀으니, 그녀는 어느새 깊은 사랑의 늪에 빠져든 것이다.
하나, 사도천 또한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사도천이라는 인물은 결코 겉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자신을 죽도록 사랑하는 여인 하궁란을 그녀의 자하문과 함께 매혼재녀 앞에 던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때 당시 매혼재녀라는 이름은 사도천을 그만큼 고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일련의 처사는 백운향의 견제책으로 미심랑을 떠나 보낸 것과 같은 결단이었다.
한데, 하궁란은 사도천에게 기대 이상의 정보를 가져다 주었다. 그가 가장 고심하던 문제가 그녀의 말에 의해 구름 걷히듯 싹 걷혀 버린 것이다.
매혼재녀의 정체, 백운향의 거처, 또 그들의 후원자가 무적신방이라는 사실과 위치, 그리고 그들이 꾀하고 있는 계획마저 이제는 사도천의 손바닥 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백운향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임은 너무나도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진정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구주 총타 중 다섯이 깨지면 우리의 힘은 분명 오 할이 줄어든다. 후후, 하나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모두가 궁란 너의 덕이다."
사도천은 하궁란의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어루만졌다. 세세한 손동작이 역력하다.
"후후, 석중리. 또 안됐네. 팔월 열나흘과 열닷새는 내게 있어 최고의 길일(吉日)이 될 것이다. 물론 그대에겐 악몽의 날이 될 테지만……."
사도천의 득의에 찬 독백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돌연 사도천의 고개가 들려졌다.
"일혼(一魂)!"
"천마일혼(天魔一魂), 존명을 받드옵니다!"
사면 벽 전체가 대답했다.
"천마십혼(天魔十魂)이 휘하 세력과 함께 움직이면 어찌되느냐?"
"대강(大江) 남이든 북이든 열흘 안에 피바다로 만들 수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삼태상 중 일 인의 세력이 합쳐지면……?"
"천하를 보름 안에 손에 넣을 수 있사옵니다!"
정녕 소름 끼치는 질문과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사도천의 질문은 자르듯 단호했고, 일혼이라 불리운 껄끄러운 음성의 대답은 공포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사도천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럼 가거라! 삼태상과 그대들 천마십혼에게 결전의 술잔을 내린다. 명(命)은 척살 석중리!"
사도천의 손이 가위를 집어 들었다.
싹뚝! 단 한 장 남았던 목련잎이 떨어져 내렸다.
황궁 모반 계획을 승인할 때 꽃봉오리가 떨어진데 이어 이제 마지막 남은 잎새마저 떨어졌다. 
목련 가지는 이제 아무것도 매달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사도천 그에게 있어 적이 없다는 의미였다. 
아울러 모든 계획과 대업은 그의 생각대로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잠시의 침묵 동안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일혼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천존! 어찌 삼태상까지 친히… 이 일은 우리 십혼의 힘만으로도 능히……."
"일혼, 너는 갑자기 말이 많아진 듯하구나."
사도천의 음성은 서릿발 같았다. 그는 어떤 경우든 말 많은 사람을 싫어했다.
"부…부디 용서를……!"
"모든 것은 삼태상께 별도로 지시해 놓았다. 그분을 따르도록!"
"존명!"
힘찬 대답을 끝으로 일혼의 꺼칠한 음성은 더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사도천의 차갑게 굳어진 시선이 조금 떨어져 앉아 있는 자운옥봉 하궁란을 향해 던져졌다.
"궁란……."
하궁란의 눈이 그의 얼굴로 돌려졌다.
무심한 듯한 시선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궁란에게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의 눈에 또다시 기이한 열기가 서렸다. 그녀는 으레 이런 일이 있은 후 그가 그녀를 불덩어리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데, 그녀는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사도천의 시선은 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전의 그것은 무심했지만 열기가 느껴졌었다.
한데, 지금의 그것은 열기 대신 냉기가 돌고 있었다. 
그의 입 또한 차갑게 열렸다.
"난 한 여자를 알고 있다."
"무…무슨……?"
"그녀는 자신의 아비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들어왔다. 그녀는 그것을 위해 죽음을 불사했으며 자기가 은혜를 진 자기 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하는 여인이었지."
"도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궁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도천의 말은 막무가내로 이어졌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든 결코 추하지 않았고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여인이었으며, 자신의 육욕(肉慾)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파는 여인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아……!"
그제서야 사도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하궁란의 입에서 실낱 같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너는 이제 알고 있다. 내가 너와 같은 핏줄이 아니며 나의 야망이 무엇인지를… 그 동안 수고했다."
"으……!"
하궁란의 악문 입술 새로 피가 흘렀다.
사도천의 손이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뻗었다. 그 손은 이미 취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궁란은 잘 알고 있었다. 저 손에 닿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다…당신 정말로……?"
"후후,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애원 같은 것은 안 하지."
사도천의 얼굴 가득 미소가 하얗게 부숴져 내렸다.
하궁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싫어!"
"잘 가거라."
악을 쓰며 고개를 젓는 하궁란의 정수리에 취록혈강이 쏟아 부어졌다. 비명도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설추련이었다."
취록색 광채가 하궁란의 정수리에 닿는 순간 사도천은 그 말을 나직이 뱉어 냈다.
하나, 하궁란은 결코 그 이름을 듣지 못했다. 사도천이 그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주검으로 변해 있었으니까.
사도천의 시선이 문득 허공을 향해 던져졌다.
"설추련이라는 여인, 그녀의 성의와 절개에 내가 졌어. 그녀를 그녀의 아비가 있는 곳으로 보내 버리고 말았어. 후후, 나란 놈도 아직 정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설추련과 설추련의 부친 칠절의선이 사도천의 수중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도대체 왜 사도천은 칠절의선을 잡아 놓고 있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커다란 계략 뒤에 음모가 흐르는 밤이었다.
허허실실(虛虛實實)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밝고 둥근 원월(圓月)이다. 그러나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밝고 더 둥근 달이 떠오를 것이다. 
내일은 중추절(仲秋節)이니까.
오늘은 중추절 하루 전날인 팔월 십사 일이었다.
"으,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한 명의 혈의인이 혈하(血河)의 시산(屍山) 위에서 만월을 올려다보며 처절한 비탄의 절규를 토해 내고 있었다.
바로 사도사대지주의 일 인인 광혈마존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수백여 구의 시체가 피를 쏟으며 참혹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체는 혈의인들이었다.
이제 혈의를 걸친 사람 중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하나 광혈마존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백여 명의 청의인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광혈마존은 비감에 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남성(湖南省) 안화(安華)의 오지(奧地)에 위치한 천무귀검장(天武鬼劍莊)이라는 이 조금만 장원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달빛 아래 고요한 자태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광혈마존을 겹겹이 에워싼 청의인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청광을 번뜩이는 비검(飛劍)이 들려 있었다.
"크, 편액마저 달기 초라한 이곳에 너희들 같은 고수들이… 석중리, 그분의 착각이었다."
이때 청의인들 중 매부리코에 눈매가 몹시 날카로운 중년인이 음침한 미소를 날리며 다가섰다.
"크흐흐, 광혈마존. 마인(魔人)은 마인의 길을 걸었어야 했거늘, 네놈은 실수했다. 그것은 최초의 실수이나 대가는 죽음뿐이다."
광혈마존의 전신은 이미 어디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온몸이 찢기고, 터지고, 베어져 아직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라 싶을 정도였다.
청의중년인의 살기에 찬 음성이 다시 터졌다.
"얘들아! 사도지주(邪道至主)를 무덤 속으로 모셔라!"
파파파팟! 말이 떨어진 순간, 수백 개의 비검이 달빛을 가리며 광혈마존의 전신으로 섬전처럼 날아들었다.
"크하하핫! 그래도 후회 없는 삶이었다! 나는 마땅히 이곳에서 죽겠다!"
파－악! 광혈마존의 신형이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드는 비검을 향해 폭사되었다.
일순 그의 신형은 비검 속을 가르는 한 줄기 혈섬(血閃)처럼 느껴졌다. 
하나, 시간은 결코 그를 오래 잡아 두지 않았다.
"크악!"
"으아악!"
사방에서 터져 오른 비명 속에 필시 그의 비명도 섞였으리라.
쿵! 지면에서 거암(巨岩)이 떨어지듯 곤두박질치는 그의 몸을 보라.
오오! 목불인견이었다. 
쏟아져 내리던 달빛이 소스라치듯 놀라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이미 인간의 모습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마치 고슴도치인 양 수백여 개의 비검을 깊숙이 꽂고 있었던 것이다.
피가 흘렀다. 아니 흘렀다 싶은 순간, 돌연 그의 몸이 폭죽 터지듯 산지사방으로 산산이 파열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이었다.
퍼－펑! 
"크아악!"
"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비명은 청의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광혈마존의 파열된 전신의 피와 살, 조각난 뼈가 암기처럼 청의인들을 향해 맹렬히 폭사되었던 것이다.
파신혈진공(破身血盡功)!
광혈마존은 최후의 순간, 자신의 몸을 죽음의 초식으로 산화시켰던 것이다.
오오! 장렬한 최후!
그는 이미 죽어 간 삼백여 수하들과 죽음으로 운명을 같이 한 것이다.
모두가 똑같았다. 
냉심일괴, 금필적혈수, 옥적불혈마도 광혈마존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똑같은 죽음을 당했다. 
미리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적들에 의해 손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죽어 간 것이다.
사도사대지주의 죽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몰고 올 여파는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백운향은 이미 그런 결과를 예견했다는 사실이었다.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서쪽에서 인 바람은 동쪽으로 흘러갔다. 강가에 우거진 갈대숲이 동쪽을 향해 허리를 꺾었다.
그 바람 사이로 휘영청 밝은 팔월 열나흘의 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름 없는 샛가 나루터. 
무적신방으로 통하는 입구이기도 한 이 나루터에 언제부터인지 수백여 명의 흑의인들이 박쥐처럼 날아들었고, 그들은 수십 척의 배에 나눠 탄 채 소리 없이 나루터를 떠나 갔다.
달빛은 강물 위로 파랗게 쏟아졌다. 
그 달빛 속에 흑의인들이 나눠 탄 선단(船團)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 중 선두를 지키는 큰 배 안에는 십일 인이 둘러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저마다 살기를 품은 날카로운 눈매의 흑의인 십 인과 금의곤룡포(錦衣袞龍袍) 차림의 청수한 노인 한 명이었다.
노인은 사도천을 길러 대원제국의 부흥을 이루려 한 삼태상 중 제삼태상(第三太上)이었으며, 십 인의 흑의인은 강호무림의 반을 열흘 내에 피로 씻을 수 있다고 자신한 천마십혼(天魔十魂)이었다.
그들은 지금 그들의 천왕이 하사한 어주(御酒)를 마시고 있었다.
천마십혼 중 가운데 앉은 흑의인이 입을 열었다.
"태상! 굳이 태상께서 거동치 않으셔도 될 일 같사온데, 천왕께서는 석중리라는 작자에게 공연한……."
"일혼, 그런 소리 마라. 천왕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그분이 결정하신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삼태상의 음성은 추상 같았다.
"하지만 저희 십혼만으로도……."
"너희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둘러앉은 십혼들의 안색이 일제히 빳빳이 굳어졌다.
"이 술잔의 의미를 그대들은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삼태상은 옥배를 높이 들어 보였다.
"이 술잔에는 그분의 눈물이 담겨 있다."
십혼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삼태상은 술잔을 내려 놓으며 서릿발 같은 기운을 풍겼다.
"천왕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분의 계산으로는 지금 석중리를 치러 가는 우리의 세력이 간신히 그의 한 수 위라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치러 가는 곳에 석중리 본인이 없을 때에 한해서……."
삼태상의 말에 일혼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그곳에 석중리가 있다면……."
"닥쳐라, 일혼! 언제 그분께서 틀린 적이 있으시드냐? 석중리는 저 안에 없다."
삼태상의 손가락이 강물을 가리켰다. 
그들이 말하는 석중리는 분명 백운향을 말하는 것이리라.
"자, 들어라. 천왕의 눈물이니까."
천마십혼은 정중하게 잔을 들어올렸다.
십 인이 동시에 잔을 비우고 다른 모든 배에도 일제히 한 잔 술이 돌았다.
삼태상은 달이 떠도는 강물 위로 시선을 던졌다.
"허허, 후회 없는 생이었다. 인세(人世)에 다시 없을 거룡(巨龍) 한 마리를 키워 놓았으니… 허헛헛……!"
삼태상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지극히 공허로웠다. 
천마십혼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는 듯 비장한 표정을 자아냈다.
그들은 지금껏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서 공허롭게 웃고 있는 이 거인은 그들이 합친 힘을 능가한다. 
한데, 그는 지금 자신의 생을 정리하는 듯하지 않은가.
이윽고 수십 척의 선단은 강심(江心) 부근에 이르렀다.
물살이 거세어지며 뱃전을 넘나들었다. 거대한 소용돌이는 십 장 앞에서 굉음을 토해 내며 맴돌고 있었다.
강심에 박혀 있던 삼태상의 시선이 들려졌다. 
순간, 그의 신형이 망설임 없이 갑판을 박차고 올랐다.
피유유윳－! 쏘아낸 화살처럼 삼태상의 몸은 삽시간에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삼태상의 뒤를 이어 수십 척의 배 위에 있던 흑의인들이 천마십혼의 지휘 아래 벌 떼같이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날렸다.
콰콰콰－! 쿠쿠쿠쿵－!
일순간에 소용돌이는 수백 명의 인간을 삼키고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여전히 굉음을 내며 돌았다.
주인을 잃은 소용돌이 밖의 수십 척의 배들은 물결을 따라 서서히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한데, 맨앞에 떠 있는 배 위로 돌연 유령처럼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는 십일 인이 앉아 술을 마시던 주석(酒席)에 턱 자리를 잡고 앉아 술잔에 술을 따라 자음자작(自飮自酌)하고 있었다.
강물은 거셌지만 그가 탄 배는 조금도 요동치지 않고 있었다. 
새파란 달빛이 그의 어깨 위로 하얗게 쏟아져 내렸다. 헐렁한 갈의와 치렁한 흑발은 달빛 속에서 고혹적인 애수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바로 백운향이었다.
"후후, 사도천의 하사주라……."
백운향은 술병을 들어 삼태상이 마시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저런 수하들을 가진 그가 부럽군."
손에 들린 술잔이 비워졌다. 그리고 또다시 한 잔이 채워졌다.
"이제 당신과 나, 아니 석중리와의 첫번째 승부. 비록 백운향은 그대에게 졌지만 석중리는 그대와의 도박에서 오천왕(五天王)만 잡을 것이오."
무심한 음성과 함께 다시 잔이 비워졌다. 이번으로 석 잔째이다.
"사도형, 이 세 잔의 술이 그대가 맞을 파멸의 전주곡이 되는 것 같구려."
백운향은 무심한 시선을 격탕노도와 같이 날뛰는 강물 위로 던졌다. 
튀어 오른 물보라가 달빛 속에서 하얀 포말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사도형, 지금까지는 그대가 그리된다면 그리되었지만 이제부턴 이 석중리가 그렇다고 그러면 그런 줄 알아야 할 것이오."
그의 무심하던 시선이 차디찬 냉기를 품을 때였다.
하나의 손이 물 속에서 뻗어 나와 뱃전을 턱, 움켜쥐었다. 
그와 함께 물 속에서 떠오른 얼굴은 호취아였다.
"내 그 말을 보장하지. 우히히힛! 형님, 나도 한 잔 주실라우?"
호취아는 이미 백운향 앞에 놓인 술병을 병째 들이키며 능청을 떨었다. 
병 속의 술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호취아는 뱃전에 기대며 강물 속을 바라보며 악을 썼다.
"이놈들아, 밀어라!"
그때였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던 배가 돌연 강변 쪽으로 움직여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물 속에 들어가 배를 끌어 주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백운향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방향이 틀렸다."
"뭐…뭐요?"
"우회해서 저 산과 백 장 떨어진 곳에 배를 대어라."
백운향의 손이 강 건너 달빛 속의 거대한 산 그림자를 가리켰다.
"아니, 형님 미쳤소? 이곳은 곧 대폭발이 일어날 텐데… 묫자리가 없어서 그런다면 내가 지금부터라도 십팔만 리 중원대륙을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명당 자리 하나를 잡아드리겠소."
"취아, 아직 할일이 남았다. 어서 뱃머리를 돌려라."
백운향의 음성은 무심했지만 지극히 완강했다.
"에잉, 저놈의 고집. 이놈들아! 뱃머리를 돌리란다! 서둘러라!"
호취아는 또 한 차례 강물 속을 향해 악을 쓴 다음 조심스레 강 건너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는 이내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우히히힛! 아이고 고소해라. 저놈들이 빈 집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다가 폭약 세례를 받고 허둥댈 꼴을 생각하면… 우히히힛! 모르긴 몰라도 몽땅 뒈져 버릴 거다."
호취아는 통쾌해 죽겠다는 듯 연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휴우, 형님. 도화신룡(桃花神龍) 그놈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소이다."
백운향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호취아의 말대로라면 백운향은 이미 사도천의 계략을 알고 무적신방의 모든 것을 옮긴 후, 그곳에 폭약을 매설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방금 호취아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나오는 길이었다. 
아마 지금쯤 도화선은 칠 푼 정도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배는 쏜살같이 물살을 갈라, 이윽고 산과 백 장 거리를 두고 정박했다.
백운향과 호취아는 뭍으로 올라가 거대한 산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정들었던 곳이다. 이제부터 열을 세면 터진다. 세어라."
호취아는 백운향을 힐끗 바라보더니 고래고래 고함을 치듯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아…! 두울…! 세엣…!"
호취아의 고함 소리가 달빛을 갈랐다.
호취아가 세는 숫자가 늘어 감에 따라 백운향의 무심하던 안색이 차츰 굳어져 갔다.
"여서엇…!"
"그들은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들……."
그의 음성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여더얼……."
호취아의 고함 소리가 급격히 작아졌다.
순간, 백운향의 얼굴 근육이 잘게 파동쳤다.
"아호…옵……."
호취아의 음성이 아주 작게 아홉이라는 숫자를 셌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수를 세기 때문에 대폭발이 일어나고, 그것으로 인해 수백의 목숨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듯한 그런 음성이었다.
"죽음이란 어쨌든 슬픈 것……."
언뜻 백운향의 눈에 아픔이 스쳤다. 
그리고 그 눈은 자신을 바라보는 호취아의 공포에 젖은 눈과 마주쳤다.
호취아는 더이상 수를 셀 용기가 없었던지 나직이 그를 불렀다.
"형님……."
"세느라 수고했다."
두 쌍의 눈빛이 부르르 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쾅－! 우르르릉－! 꽈꽈꽈꽝－!
가공할 대폭발이 일어났다. 천번지복(天飜地覆)의 굉음과 함께 하늘 가득 혈광(血光)이 솟구쳐 올랐다. 
산을 이루고 있던 암석(岩石)들이 수백 장 상공까지 비산(飛散)해 올랐고, 강물은 해일(海溢)을 만난 듯 허공 가득 넘쳐 흘렀다. 
폭발음은 수십, 수백 차례나 연이어 터져 울렸다. 그것은 한 마디로 천지개벽(天地開闢), 바로 그것이었다.
우르르릉! 콰콰쾅－! 쩌어어억－!
집채만한 바위 덩어리들이 그들 주변으로 마구 날아와 떨어졌다.
"형님, 어서 피하시지요!"
호취아는 발악적으로 악을 썼다.
하나, 백운향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시선은 이미 초점이 풀려 있었다.
"나 자신도 죽음이란 말 앞에서 수십 번이나 통곡했는데… 내가 어찌 저들을 저렇게 무참히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자격으로……."
"형님!"
호취아는 백운향을 잡아 끌었다.
"저들은 형님이 죽인 게 아니오! 천하의 불한당 같은 놈인 사도천 그놈이 죽인 거란 말입니다!"
호취아의 고함은 폭풍과 굉음 속으로 삼켜져 버렸다.
더이상 기다리지 못한 호취아는 급기야 백운향의 몸을 감싸안으며 호신강기(護身剛氣)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파파파팟! 크고 작은 바위 조각들이 호취아가 펼친 호신강기막에 부딪치며 불꽃을 튕겨 올렸다. 
그때마다 호취아의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졌고, 종내는 악문 입술로 가느다란 핏물마저 뿜어 내기에 이르렀다. 내상(內傷)을 입은 게 틀림없었다.
"야, 이놈들아! 그만 좀 터져라! 에고, 호취아 죽는다!"
그 와중에서도 호취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쌓이는 바위를 밟고 위로 위로 올라섰다. 
그의 품에는 여전히 백운향이 안겨 있었다.
폭발은 무려 반 시진 동안이나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거대했던 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푸르디 푸른 물이 도도히 흐르던 강물은 이제 흐르는 길마저 바꾼 채 누런 흙탕물이 되어 흘러갔으며, 주위의 아름답던 경관마저 모조리 사라지고 난석군(亂石群)의 폐허로 변해 있었다.
초토화(焦土化)! 그 말은 아마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죽…었군……."
얼이 나간 듯 망연히 서 있던 백운향이 공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형님, 어서 갑시다. 더 보기도 싫으니……."
"취아… 할일이 남았다고 하지 않았더냐?"
"도대체 무슨 할일이 더 남았다는 거요?"
호취아는 입가의 피를 손등으로 쓰윽 문지르면서 불만스런 어조로 물었다.
"대장부가 이왕 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끝까지 독해야 하는 법."
호취아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백운향의 말에 더이상 묻지 않았다. 이미 정상으로 돌아온 백운향의 냉엄한 표정에 감히 무엇을 물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휘이잉! 바람이 매캐한 화약 냄새를 싣고 불어 왔다.
백운향은 폐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일 각… 이 각… 그렇게 무려 반 시진이 흘렀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답답함을 더이상 참지 못한 호취아가 막혔던 숨결을 토해 내듯 한숨을 발했다.
"휴우, 이럴 땐 그저 술이 최고인데… 술병도 깨지고 제기랄! 어? 저게 뭐지?"
호취아는 폭발의 중심부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그림자들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검은 그림자들의 수는 여섯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코도, 입도, 눈도 없었다. 또한 사지(四肢)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그들의 새카맣게 탄 몸은 일견 숯덩이를 연상시켰다.
"크으으, 이…이럴 수가……."
"철…저히… 당했다. 으으……."
여섯 중 다섯이 바위 틈을 헤치고 나오자마자 돌무더기 위에 벌렁벌렁 나자빠졌다. 
그러나 하나만은 여전히 꼿꼿이 서 있었다. 비록 전신은 와들와들 떨고 있었지만 지면을 당당히 밟고 서 있었다.
그는 하나만 남은 외눈에 원독(怨毒)의 빛을 담고 백운향을 노려보았다.
백운향은 그를 향해 차가운 웃음을 보냈다.
"후후! 역시 천문의 태상답군."
숯덩이처럼 탄 육신이면서도 꼿꼿한 신형을 잃지 않는 한 사람은 바로 사도천의 삼태상이었던 것이다.
백운향의 시선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숯덩이 같은 괴인들을 흘낏 훑어보고는 다시 삼태상에게 향해졌다.
"대단하군. 내 예상에는 당신 하나만 살아 나올 줄 알았는데 십혼 중 다섯씩이나 살아 나오다니……."
"으, 잔인한 놈……!"
"잔인하다고? 이건 바로 그대의 주인에게서 배운 수법이란 걸 모르시오?"
"크으으……."
삼태상은 시커멓게 타 버린 입을 겨우겨우 움직이며 괴성 같은 소리를 발했다.
이때였다. 
백운향의 손이 삼태상의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그 손에는 한 통의 봉서(封書)가 들려 있었다.
"사도천에게 전하시오."
삼태상은 백운향의 기세에 질린 듯 한동안 원한 어린 외눈만 껌벅이다가 마지못해 봉서를 받아 들었다.
그의 손가락은 모두 잘리고 짓이겨져 있었다. 실로 처참지경이었다. 
하나, 그 대폭발 속에서 살아 나온 것만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백운향의 시선이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천마십혼 중 다섯을 향해 돌려졌다. 담담한 눈빛이었다.
"너희들은 더 살아 봐야 고통일 뿐……."
파파팟! 한순간 백운향의 손끝에서 칼날 같은 다섯 줄기의 지풍(指風)이 폭사되어 나오며 다섯 명의 사혈(死穴)을 찍어 버렸다.
"카아악!"
"캐－애액!"
다섯 줄기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이어 퍼져 나왔다.
공포의 빛을 담은 삼태상의 외눈이 일순간에 다섯 명의 생명을 영원히 잠재우고 빙글 몸을 돌리는 백운향의 모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취아, 달이 지려면 아직 멀었구나……."
백운향의 무심한 음성에 한켠에서 넋이 나간 듯 서 있던 호취아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형님은 이미 신(神)이야 신… 이젠 그 누구도 형님을 당할 수 없어. 사도천 그일지라도…….'
달이 진다. 
서산마루에 걸려 있던 달은 어느덧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지금껏 느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공포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삼태상의 시선은 한동안 멀어지는 백운향과 호취아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태산(泰山). 삼태상은 백운향에게서 거대한 태산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으, 졌…졌다. 철…저히 졌다. 하나, 천왕의 대세는 절대 꺾을 수 없다. 빨리 이 사실을…….'
그의 신형이 번쩍 허공을 갈랐다. 도저히 다 죽어 가던 사람이 펼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쾌무비한 신법이었다.
오로지 사도천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그의 집념이 그를 그토록 강하게 만든 것이다.
달은 어느덧 서산마루를 완전히 넘어갔다.
새벽 여명이 희뿌옇게 밝아 왔다. 
드디어 팔월 중추, 그 운명의 날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아마도 오늘이야말로 장구한 무림혈사(武林血史)에 한 장(章)으로 기록될 운명의 날일 것이다.
팔월 십오 일. 천하이대명절 중의 하나인 중추절(仲秋節)이다.
궁정방, 바로 당금 대명의 구문제독이다.
그는 자신의 키만한 동경(銅鏡)에 자신의 몸을 비춰 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아직은 노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떡 벌어진 어깨에 팔 척의 장신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름기 도는 혈색이 오늘따라 유난히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껏 피로 점철된 그의 생은 어쩌면 오늘을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 피를 감추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힘들게 위장해 왔던가? 
실로 가슴 졸인 세월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세월도 오늘로서 끝이다.
궁정방은 동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향해 좀 더 위엄 있고 엄숙한 모습을 지어 보이다 이내 동경을 옆으로 밀었다.
스르르…! 동경이 벽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순간, 동경이 있던 안쪽으로 조그만 석실이 나타났다. 하나의 영정(影幀)이 안치된 석실이었다. 
갓 동안(童顔)을 벗어난 소년의 영정이었다.
한데, 영정의 소년은 금의곤룡포(錦衣袞龍袍)에 황제의 신분임을 말해 주는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궁정방은 관대를 바로잡은 다음 영정을 향해 정중히 삼배(三拜)를 올렸다. 이어 그는 오체투지의 부복한 자세로 격동성을 토해 냈다.
"상황(上皇)이시여, 오랜 세월을 기다리셨습니다. 미천한 신(臣)이 이제서야 상황폐하의 한(恨)을 조금이나마 갚아 드릴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이제는 더이상 어둠 속에 계시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상황(上皇)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상황이라면 전대(前代)의 황제를 말함이다. 
그렇다면 영정 속의 인물은 영락제에 의해 죽음을 당한 비운의 황제 혜제(惠帝)였단 말인가? 
궁정방은 영정 앞의 흑오석(黑烏石)으로 된 탁자 위에서 하나의 붉은색 삼각 깃발을 집어 들었다.
<천명(天命)>
깃발에는 찬란한 황금빛으로 두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궁정방은 그 깃발은 품 속에 갈무리했다. 
이어 그는 늘 비밀스럽게 감추어 왔던 혜제의 영정을 동경으로 가리지 않은 채 당당히 문을 나섰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어떤 기대와 확신의 빛이 가득 서려 있었다.
자황전(紫皇殿).
정사(政事)를 논의하던 이곳에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황제에게 명절인사를 하기 위해 모인 황족 및 문무백관들이었다.
청명한 날씨만큼이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당금황제인 영락제는 패황의 신위(神威) 속에서 시종 온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어전 상단의 용상(龍床)에 앉아 있었다.
황족과 문무백관들은 차례로 영락제를 향해 대례로 명절인사를 올렸다.
이윽고 명절인사가 끝나자 영락제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장내를 쭉 둘러보았다.
황족들의 자리에는 황궁의 골칫거리 천요군주를 비롯하여 경문왕, 경무왕, 무성군, 무령군 이하 수많은 황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문무백관들 앞에는 좌우승상어사대부를 중심으로 이부(吏府), 호부(戶府), 예부(禮府), 형부(刑府), 공부(工府)의 육부시랑(六府侍郞)이 도열해 있었고, 그 뒤로 오위도총관(五衛都總官), 구주팔황(九州八荒)의 영반(領班) 등 당금황궁의 주요 고관대작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한데, 무반(武班)의 수좌격(首座格)인 구문제독과 금위어영대장(禁衛御營隊將)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영락제는 그들을 쭉 둘러본 후 흐뭇한 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모두들 입시(入侍)해 주어 짐의 마음이 실로 기쁘오. 가일층 명절 기분이 드는구려. 한데, 구문제독이 안 보이는데 오늘같이 좋은 날 무슨 탈이라도 난 게 아닌가 모르겠구려."
바로 그때였다. 
밖으로부터 환관의 음성이 공손하게 울려 나왔다.
"구문제독 궁정방 입시(入侍)요!"
영락제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하핫!"
그의 웃음은 가가대소로 변했다.
하나, 그와는 달리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은 하나같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어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궁정방이 어전 입구로 들어섰다. 전신에 활기가 가득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는 이내 황제 앞에 부복대례를 취했다.
"폐하, 미추한 신의 늦음을 용서하옵소서."
"오늘 궁제독을 못 볼까 염려했는데 보게 되어 다행이오. 그런데 표정을 보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보구려."
"그러하옵니다."
"허허, 좋은 일이 있다니 짐도 기쁘오. 자, 무슨 일인지 즐거움을 같이 나눕시다."
"황공하옵니다. 실은……."
궁정방은 품 속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다름아닌 천명(天命)이라는 글씨가 쓰인 홍색 삼각 깃발이었다.
문득 궁정방의 입가에 한 줄기 의미 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이것이옵니다."
영락제의 눈에 의혹의 빛이 짙게 피어났다.
"천명이라… 그것이 도대체 무슨……."
"신이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사옵니다."
궁정방은 무엄하게도 황제의 말을 가로챘다.
"폐하, 이제 영락의 시대는 운이 다했다 사료되옵니다."
순간 장내는 경악으로 휩싸였다. 
그 말이 감히 황제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그 말은 황제를 모독함이요, 나아가서는 대역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 궁정방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진퇴(進退)를 분명히 가려 오신 일대의 패웅. 지금이 폐하 스스로 물러날 때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실로 엄청난 말이었다. 감히 신하가 황제에게 보위를 물러나라고 하다니? 
아무리 하극상(下剋上)이라고 해도 이토록 엄청난 하극상이 언제 한 번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하나, 영락제는 다소 안색을 굳혔을 뿐 조금도 노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궁제독, 그대가 무슨 연유로 짐의 퇴유를 요구하는지는 몰라도 짐은 천명을 따를 것이오. 저들 만조백관 중 반 이상이 그대와 같은 생각이라면 짐은 스스로 야인(野人)으로 돌아가겠소."
순간 궁정방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진정 천명이라 하시었사옵니까? 그럼 천명을 보여드리겠사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홍색 삼각 깃발을 번쩍 쳐들고 장내를 향해 외쳤다.
"만조백관들은 들으시오! 운이 다한 황제를 폐하여 비분에 승하하신 상황폐하의 한을 풀어 주시오! 이것이 곧 천명인 것이오!"
천둥처럼 자황전 전체를 쩌르릉 울리는 음성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궁정방이 평생을 통하여 가장 크고도 장중하게 토해 낸 처음이자 마지막 포효(咆哮)일 것이다.
궁정방은 그 말을 토해 낸 후 스스로 감격해 지그시 눈을 감으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드디어… 드디어 해냈다! 상황이시여, 보고 계시옵니까? 저들은 거의가 상황을 따를 것이옵니다. 저들은 이미 신의 뜻을 따를 것을…….'
내심 격정에 떨던 궁정방은 문득 기이한 분위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궁정방의 안색이 홱 돌변했다. 비단 돌변했을 뿐만 아니라 몸마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만 것이다.
보라! 좌우승상어사대부 두 사람만이 몸을 반쯤 일으킨 상태로 엉거주춤하고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백관들은 조금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어떻게…? 이…이런 일이…….'
궁정방의 얼굴은 충격으로 파랗게 질린 채 식은땀을 주르륵 떨구었다.
영락제의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웃음 소리가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하핫! 궁제독, 아무리 명절이라지만 농담이 좀 지나치구려. 아무튼 재미있었소. 짐은 피곤하니 이만 내전으로 들어가 쉬어야겠소. 하하핫!"
영락제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용상에서 일어나 환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숨막힐 듯한 정적이 감도는 자황전 안에는 영락제의 웃음 소리가 한참 동안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궁정방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으, 뭐가…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는 미친 듯이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는 다급히 천요군주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궁장자락을 붙잡았다.
"왜…왜 배반을……?"
"흥, 어리석은 자! 민족을 팔아먹으려 하다니……."
말과 함께 천요군주의 발이 궁정방의 턱을 매섭게 돌려찼다.
퍽! 
"으윽!"
궁정방의 몸은 어전 바닥에 무참히 나뒹굴었다.
하나, 그는 나뒹군 모습 그대로 황망히 경문왕 앞으로 기어갔다.
"왜……?"
"……."
경문왕은 보기 싫다는 듯 그를 외면했다.
궁정방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 무릎걸음으로 경무왕에게로 다가갔다.
"너…너도냐?"
"……."
경무왕마저 외면해 버리자, 궁정방은 이리저리 길길이 뛰며 아무나 붙잡고 매달렸다.
"너도냐?"
"……."
"너도……?"
발악인가, 아니면 미친 자의 발작인가?
궁정방은 자신의 신분도 잊은 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태(狂態)를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와아－!"
챙! 챙! 챙! 자황전 밖으로부터 우렁찬 함성과 함께 병기 부딪치는 금속성이 연이어 울려 왔다.
순간 궁정방의 안색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밝아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에서 득의에 찬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핫! 너희들은 후회할 것이다! 이제 곧 금위어영대가 들이닥칠 테니까. 아직 늦지 않았다. 어서들 내 사위 무령군을 따라라!"
한쪽에서 지금껏 궁정방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던 무령군의 안색이 무겁게 굳어졌다.
문득 무령군은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을 불어 냈다.
"대승상어사대부, 어서 끝내시오."
"예!"
대답과 함께 팔순 가량의 홍의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문제독 궁정방, 좌승상어사대부 조천영, 우승상어사대부 유천극 등 삼 인을 삭탈관직(削奪官職)함과 아울러 모반죄(謀叛罪)로 체포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디서 나타났는지 십여 명의 자의인들이 그들 삼 인에게 포박을 가했다.
궁정방은 포박을 벗어나려고 발악을 했다.
"너희들은 반드시 후회한다! 저 밖의 함성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금위어영대가 황궁을 장악했다! 어서 이 자들을 없애고 나를 풀어라!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시산혈하(屍山血河)!
때아닌 혈우(血雨)가 뿌려지며 중추가절의 황궁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우와와와－!"
"카아아악!"
찌르고, 베고, 날고, 비명 지르고, 죽고…….
수천여 명의 금의인들과 자의인들이 대난전(大亂戰)을 벌이고 있었다.
한데, 지금 황궁을 점령하고자 공격을 가하는 쪽은 놀랍게도 삼천여 명의 금의인들로 구성된 금위어영대였다. 본래 황궁의 모든 경비와 황제의 신변보호 임무를 맡고 있던 그들이 황궁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실로 고강한 무공으로 오백여 명의 자의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나, 그들을 막고 나선 자의인들은 숫자로는 열세였으나 기괴막측한 무공과 잘 훈련된 진법(陣法)으로 맹렬한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짓 하나 발짓 하나는 모두 성루 꼭대기에서 시시각각으로 색깔을 바꾸며 펄럭이는 깃발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데, 성루 위에서 깃발을 흔드는 사람은 뜻밖에도 혜량공주였다. 
그녀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혈전장을 냉정히 주시하며 계속 깃발을 바꾸고 있었다.
자의인들은 그 깃발에 따라 빠르고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그런 그들의 움직임에 수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금위어영대의 금의인들이었지만 제대로 힘도 못 쓰고 지리멸렬하게 무너져 갔다.
어느덧 혈전은 종반으로 치달렸다. 
시체는 점점 더 쌓이고 쌓여 발 딛을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시체로 누운 자들은 거의 모두가 금의인들이었다. 자의인들의 시체는 오십여 구도 채 못 될 정도였다.
혈전은 근 한 시진이 지난 후에야 끝이 났다. 금위어영대는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전멸당한 후였다.
문득 혜량공주의 시선이 푸르디 푸른 하늘을 향해 들려졌다.
"운향, 보고 계신가요? 저 금궁무사(禁宮武士)들의 용맹함을… 결국 당신이 이 황궁을 지키신 거예요."
그렇다. 자의인들은 영락제가 무림척살계획에 따라 은밀히 키우던 금궁의 십만 고수들, 바로 금궁천위대(禁宮天衛隊)였던 것이다.
한데, 그들의 힘이 이토록 가공할 줄이야.
쾅! 문이 부숴지며 구문제독부 정원지기의 방문이 열렸다.
십 인의 자의인은 방문을 여는 순간 흠칫 놀라며 방 안을 주시했다. 
한 구의 시체가 방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궁정방이 삼비목(三秘目)이라 불렀던 신비인으로 궁정방과 천문의 천존을 연결하던 유일한 선이던 흑의청년이었다.
그는 스스로 천령개(天靈蓋)를 부수고 죽어 있었다.
방바닥에는 그가 자신의 피로 쓴 듯한 혈서(血書)가 쓰여 있었다.
<책임을 못 다 한 죄, 죽음으로 천존께 용서를 빈다.>
봉화(烽火), 중원의 마지막 접경지대인 촉석(燭石)의 봉화는 이미 피어 올랐어야 했다. 오시(午時) 이전에 반드시 피어 오르기로 되어 있던 봉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오시를 훨씬 지났음에도 그 봉화는 결코 피어 오르지 않았다.
방강의 갈대숲을 메운 이십만 대원부흥군(大元復興軍)은 어느덧 초조, 좌절, 체념 등의 갖가지 표정을 떠올렸다.
실패인가? 
하지만 백 년의 한을 지닌 그들이 아니든가?
그들의 눈은 한시도 봉화대로부터 떨어질 줄 몰랐다. 
그때였다. 
슈파파팍!
"크아악!"
돌연 갈대숲 정중앙에서 한 줄기 핏줄기가 솟구쳐 오르며 단말마의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을 향해 돌려졌다.
한데, 그들의 시선이 돌려지기도 전에 최초의 비명 소리의 꼬리는 또 다른 비명 소리와 피무지개 속으로 가려졌다.
파파팍! 퍼펑! 콰앙!
"아악!"
"크아악!"
대원부흥군 이십만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비명 소리와 선혈은 전후좌우 사면팔방에서 방향을 가리지 않고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잠깐 동안 수백여 명의 무사들이 피를 토하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일순간에 전열은 풍지박산되고 말았다. 앞인가 하면 옆이고, 옆인가 하면 뒤인 이 예고 없이 들이친 죽음 앞에서 그 누가 태연히 전열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대원부흥군의 전열은 썰물과 밀물처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렸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의 손길은 계속 땅 속에서부터 잔혹한 살수를 퍼부어댔다.
그것은 일방적인 도살극(屠殺劇)이었다.
이때 한 줄기 쩌렁한 대갈이 허공으로부터 날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오랑캐들이 감히 대명의 본토를 넘보다니… 한 놈도 살려 두지 말고 모조리 도륙하라!"
이제 대원부흥군은 아예 혼마저 날아 갈 지경이었다.
"와아아－! 와아－!"
"죽여랏!"
천둥 같은 함성과 함께 죽음의 군단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땅 속에서, 언덕 너머에서, 강물 속에서 물밀듯이 모습을 나타났다. 근 십만에 가까운 자의무사들이었다.
일단 그들이 나타나자 더욱 처참한 살륙이 시작되었다.
"아아악!"
차차창－!
자의무사들의 일신절기(一身絶技)는 가히 공포지경이었다.
"후퇴하라! 파미읍분지(巴彌邑盆地)로 후퇴하라!"
그 와중에 피를 토하는 듯한 퇴각령(退却令)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이미 전의를 상실한 대원부흥군은 질서 없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쫓아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말고 척살하라!"
"와아아－!"
"우와아아－!"
한쪽은 쫓고, 다른 한쪽은 쫓기며 일방적으로 도륙당했다.
아수라 지옥의 참상이 이러하랴?
지옥유부(地獄幽府)가 이러하랴?
자의무사들은 피에 굶주린 야수들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금궁무사 십만이었다. 
금궁십만군은 일부를 황궁에 남기고 곧바로 이곳으로 진격해 왔던 것이다.
이것 또한 백운향이 혜량공주에게 남긴 마지막 패였다.
피의 축제는 무려 하루 반나절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대원부흥군은 거의 전멸했다. 
이것으로 본토 황실을 넘보던 대원제국(大元帝國)의 꿈은 산산이 부숴져 버린 것이다.
생(生)을 정리하며
<사도형.
내가 왔소. 처절한 한(恨)을 씹어 문 채 황량한 들판으로 쫓겨 난 한 마리의 늑대가 이빨을 갈며 돌아왔소.
우선, 사도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나 자신에 대해 하늘에 감사드리며, 몇 가지 감사의 말과 아울러 서운한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구려.
첫째, 자운옥봉 하궁란을 본인에게 보내 주신 사도형의 처사에 감사하오.
둘째, 천하를 어지럽히던 사도사대지주(邪道四大支柱)라는 악의 씨앗을 제거한 척마멸사(刺魔滅邪)의 의기(義氣)를 높이 찬양하는 바이오.
이상과 같은 사도형의 의협심에 힘입어 본인은 사도형의 작은 세력 중의 하나인 대월국(大月國)을 취했음을 용서하시오.
한데, 어찌 사도형같이 고명한 분이 친부(親父)나 다름없는 삼태상과 천마십혼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는지 실로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이것들에 대해선 좀 더 시일을 두고 생각키로 하고, 곧 사도형이 받을 소식에 대해 미리 귀띔이라도 해 두고자 하오.
사도형의 야망은 모두 실패로 돌아갈 것이오. 대원부흥군 또한 전멸할 것이오. 이제 남은 것은 사도형 자신뿐이오.
부디 검을 놓고 천하인 앞에 사죄한 후 그대의 땅으로 돌아가시오.
그 동안의 정을 생각하며…….
석중리(石中利)>
당했다. 당해도 철저히 당했다. 
비밀은 밑 빠진 독처럼 술술 새어 나갔고, 급기야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다.
사도천이 이 서찰을 받은 것은 중추절 새벽이었다. 처참한 몰골의 삼태상의 죽음과 함께였다.
어떤 변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정심(精心)의 소유자인 사도천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큰 충격에 전신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푸스스…! 서찰이 그의 손 안에서 구겨지는가 싶더니 한 줌의 재로 화했다.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 처참할 만큼 창백한 살갗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지금 최대의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읽은 서찰의 내용과 정반대의 소식이 오기를 말이다.
넓은 정실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죽음 같은 긴장만이 거문고 현의 마지막 떨림처럼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숯덩이처럼 타 버린 삼태상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던 수좌태상(首座太上)과 이태상(二太上) 역시 그 긴장의 정적 속에 죽음처럼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황금빛 햇살이 찬연히 비쳐 들더니 어느새 백광(白光)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오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부터 오시까지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기다린 것이다.
아마도 그들에게 있어 그간의 시간은 억겁과도 같이 긴 시간이었으리라.
초조와 긴장, 그리고 막연한 기대감 속에 한 마리 은빛 비둘기가 날아들었다. 비둘기는 황궁과 사도천을 잇는 직통 연락망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 속에 전서가 펼쳐졌다.
그러나… 혹시는 역시였다.
<모든 거사(擧事) 폭로, 실패……!>
푸하악……! 
피, 피는 붉다. 사도천의 피는 더욱 붉다.
그 붉은 피가 뿜어졌다. 자단목 팔선탁 위에, 청옥색 융단 위에, 그리고 사도천의 눈보다 흰 백의장삼 앞자락 위에 마구 끼얹어졌다.
그것은 일순간 일어난 대폭발이었다.
"오! 천…천왕……!"
"천왕이시여……!"
주름진 눈가죽을 찢으며 혈루(血淚)를 뿌려대던 수좌태상과 이태상이 다급히 일어섰다.
그와 함께 새우등처럼 굽혀졌던 사도천의 신형도 꼿꼿이 펴졌다.
"와하하하핫! 크핫핫핫!"
두 명의 노태상(老太上)은 갑작스런 사도천의 광소에 내뻗던 손을 흠칫하며 멈추었다.
한데, 선혈을 줄기줄기 배어 물고 앙천광소를 토하는 사도천의 모습을 보라!
변했다. 먼저 백옥보다 흰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고, 여인보다도 아름답던 얼굴이 제멋대로 마구 일그러지며 변형되고 있었다.
"으, 천왕의 마성(魔性)……."
"천왕의 마성이 드디어……!"
그렇다! 사도천이 그 동안 심성으로 억누르고 있던 온갖 마공(魔功)의 정화가 충격으로 인한 격동을 참지 못해 일시에 격발되고 만 것이다.
이윽고 미친 듯한 광소성과 함께 사도천의 얼굴은 아수라(阿修羅)의 가면을 뒤집어쓴 듯 흉신악살(兇神惡殺)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으으, 천왕이시여……!"
두 명의 노태상은 아예 하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사도천의 광소는 멎지 않았다.
"크핫핫핫! 모두 죽었다. 카카카! 나의 동포가 모두 죽었다. 카카! 죽이리라! 모두 죽이리라! 크카카캇!"
음성도 변했다. 이미 아수라의 형상으로 화한 그의 모습보다도 한층 더 공포스러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그의 웃음이 우뚝 멈추고 그의 핏빛 혈안(血眼)이 하얗게 질린 두 태상을 향해 돌려졌다.
"천의장을 포기하고 단목세가로 옮기시오."
"천…천왕?"
"천년지옥갱(千年地獄坑)! 천년지옥갱에 들 것이오."
그의 음성은 진정 아수라의 그것인 양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케 만들었다.
두 노태상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천왕, 그건 아니 되옵니다."
"천왕이시여! 그 저주의 마역(魔域)을 밟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조사(祖師) 천마대제(天魔大帝)께서도 꺼려 하시던 곳이옵니다."
천년지옥갱이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두 노태상이 저토록 만류하는 것인가?
"크크ㅋ! 어차피 대원(大元)의 부흥이 실패한 이상, 본좌가 할일은 오직 하나! 천하를 피로 씻는 것뿐이오."
사도천의 신형은 이미 그들 두 노태상의 사이를 뚫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으, 아니 되옵니다!"
"천왕! 천년지옥갱은 저주……!"
두 노태상은 노구를 허물어뜨리며 절규를 토했다.
한 사람, 일신에 흑의를 걸친 준수한 미청년이 비둘기장에서 전서구 한 마리를 꺼내 전서구의 다리에 죽통을 매단 후 밖으로 띄워 올리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전서구를 바라보는 청년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하나, 그 미소는 나타날 때보다 빠르게 사라지고 청년은 몸을 돌렸다.
'헉!'
청년은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다급한 헛바람을 삼키며 주춤 뒷걸음질쳤다.
그는 보았던 것이다. 
흉신악살과 같은 아수라가 자신을 향해 전율스런 기세로 다가드는 것을.
"크ㅋ……!"
사도천, 바로 그였다.
"으으……!"
청년은 너무나도 흉악한 사도천의 모습에 질려 버렸음인지 계속 뒷걸음질쳤다.
"크크ㅋ! 모극랑! 내 지금에서야 도화도(桃花島)에 도화이체양심공(桃花離體兩心功)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배교(拜敎)의 이환공(離幻功)을 능가하고, 밀문(密門)의 법체이환술(法體離幻術)마저 능가하는… 크크ㅋ!"
사도천은 다가들며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한데, 모극랑이면 바로 천의장 비무대회(比武大會)에서 제일좌를 차지했던 도화도의 소도주 도화신룡이 아니던가!
"도화신룡 모극랑… 아니, 삼비목(三秘目) 중 이비목(二秘目). 나는 백운향, 그에게도 졌지만 우선 너의 도화이체양심공에 철저히 졌다."
사도천의 두 눈에 어린 핏빛은 이제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도화이체양심공은 몸(體)과 영(靈)을 분리시키는 무공이다. 어떻게 보면 사술(邪術)이었지만 그것은 엄연한 광세기학(曠世奇學)이었다.
몸은 그대로 있고 혼(魂)만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니 누가 있어 그것을 분간할 수 있으랴?
백운향의 모든 것은 도화신룡 모극랑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극랑의 등이 벽에 닿았다. 이젠 더이상 뒷걸음칠 공간도 없었다.
사도천은 무섭도록 일정한 보폭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으으……."
모극랑은 사도천의 손이 들려지는 것을 바라보며 절망의 신음을 토해 냈다.
한데, 사도천의 입에서 뜻밖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가라!"
순간, 모극랑의 얼굴이 망연해졌다. 
그 말은 사도천을 패망의 구렁텅이로 끌고 간 자신을 살려 준다는 말이 아닌가!
"가서 전해라! 정확히 백 일 후 탄허평(彈虛坪)에서 만나자고. 그에게 그렇게 말하면 내 뜻을 알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사도천의 공포스런 신형이 빙글 돌려졌다.
"아……!"
모극랑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는 탈진한 듯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백운향은 대나무로 엮어 만든 울타리 사이의 쪽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높은 대나무 울타리의 울 안에는 한 채의 초옥이 자리하고 있었다.
초옥으로부터는 이국적인 취향이 느껴지고 있었다. 
갖가지 무늬를 넣어 만든 중원의 창살과는 달리 일률적으로 곧게 뻗은 창살, 좁은 안마당에는 우물과 빨래터가 하나씩 자리해 있고, 댓돌 위에는 나무로 만든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백운향은 문고리를 잡고 몇 번인가 창을 두드렸다. 
이내 문이 살며시 열리며 시리도록 흰 얼굴 하나가 내밀어졌다. 
미요시노였다.
그녀는 문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탄성부터 질렀다.
"아! 당신께서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미요시노의 들뜬 음성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물론입니다."
기모노 차림의 미요시노는 얼른 뜰로 내려서더니 백운향을 안내해 들였다.
백운향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한 칸 정도에 불과했다. 
방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고, 조그만 나무 침상과 몇 권의 고서류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어 좁지만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방의 한켠에서는 동영 특유의 화로에 찻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백운향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다다미 위에 앉았다.
미요시노는 습관처럼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대나무 국자로 정성스레 찻물을 찻잔에 담았다.
그 모습을 잔잔히 지켜보는 백운향의 가슴에 알 수 없는 향수가 일었다. 이 감정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회상의 감정이었다.
이 순간 미요시노의 모습은 은밀(隱密)의 인자(忍者)도 아니고 투혼을 불태우던 집념의 승부사도 아닌 그저 평범한 한 여자였다.
미요시노는 조그만 자개 소탁에 찻잔을 받쳐 백운향 앞에 정중히 내려놓았다.
물 흐르듯 온유롭고, 앙증맞도록 오밀조밀한 동작이었다.
"그 동안 많은 성취를 본 듯하구나."
"덕분에……."
"좋은 현상이야."
"드시지요."
백운향은 왼손을 오른편 가슴에 댄 채 찻잔을 든 오른손을 각도 있게 꺾어 올려 가볍게 입술을 댄 후 두 손을 합쳐 정중히 내려놓았다. 지극히 무사적인 다도(茶道) 예법이었다.
"당신도 그 동안 많은 깨달음이 있으신 듯하군요."
"그렇게 보이느냐?"
"당신의 동작과 표정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피(血)로 인한 깨달음이겠지……."
미요시노의 서늘한 봉목 위로 한 줄기 아픔의 기색이 스쳤다.
"너도 듣고 있었느냐? 난 그 동안 한 마리 이리에게 불화살을 먹였다."
"알고 있사옵니다. 은밀의 몇 안 되는 수하들이 소식을 전하지요."
백운향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당신을 만난 이후로 제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젠 여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지금까지의 생을 그저 무의미하게 흘려 보내기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집니다."
백운향의 고개가 쉬지 않고 끄덕여졌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찾아 왔다. 그를 만나게 해 주겠다."
"아!"
"너는 그와 단판승부를 건낸 후 승부야 어찌되든 동영으로 돌아가거라."
미요시노의 눈빛이 애잔하게 굳어 갔다.
"아닙니다. 저는 이제 승부 같은 것은 어찌되든 미련이 없습니다. 분명 승부를 내긴 하겠지만, 만일 제가 살아난다 해도 중원에 머물 것입니다."
"음……!"
"중원엔 당신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종으로라도 머물 것입니다."
미요시노의 희다 못해 푸른 피부에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볼을 타고 미세한 눈물 자국이 그어졌다.
"울고 있구나. 승부사에게 있어 눈물이란 독이다."
"아닙니다. 저는… 승부사 이전에 일개 여인이옵니다."
여인의 몸이 벼락같이 백운향의 품 속에 안겨들었다.
백운향의 손이 그녀의 등을 몇 번인가 토닥였다.
그녀의 등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우는가?
그렇다. 미요시노는 울고 있었다. 너무 늦게 자신을 알아 버린 생이 한스러워 울고 있었다. 
기실 그녀는 밤마다 그의 영상을 떠올리고 몸부림쳐 왔던 것이다.
백운향의 두 팔이 그녀의 두 어깨를 감싸안고 상체를 젖혔다.
너무나 희었기에 눈물 자국마저 선명한 그녀의 얼굴이 가슴 떨릴 정도다.
"준비해라. 종인지 뭔지는 그 후에 말해도 될 것 같구나."
백운향의 시선이 그윽하게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일시에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심유한 눈빛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종은 원래 그런 것인가 보다. 준비하고 나오너라."
백운향은 문을 밀치고 방을 나섰다. 그는 안마당에 선 채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도 참 곱군."
새파란 하늘에 양털구름이 떼 지어 흘러가고 있었다.
이때 돌연, 백운향의 신형이 비틀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역한 현기증이 뇌리를 강타해 왔다. 요 며칠 전부터 시작된 증세였다.
"아직 일백 일이 남았건만 천인달리쇄락공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
그의 몸에 잠재해 있던 천인달리쇄락공이 서서히 마(魔)의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백운향은 이것을 오래 전부터 느껴 왔고, 모극랑이 전한 사도천의 말을 듣는 순간, 이제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생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마쓰나미 아까시의 이도류(二刀流)와 미요시노의 은밀류 사이의 구원(久怨)을 해결해 주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백운향는 뒷짐을 진 채 오락가락 안마당을 걸었다.
"비록 짧지만 후회 남는 생은 살지 말아야지. 추련을 만나고 싶군."
문득 그의 뇌리에 비운의 여인 설추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떠오른 일이 있었다.
"초향이 전해 준 칠절의선(七絶醫仙)의 거처는 옮겨져 있었다. 추련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 일은 꼭 해결해야 될 일이야. 그리고……."
백운향은 자신이 정리해야 할 일을 되뇌이며 서성였다.
이때 방문이 열리며 흑의경장 차림에 은월도(銀月刀)를 비스듬히 거머쥔 미요시노가 나왔다.
치렁한 흑발을 질끈 동여맨 그녀의 모습은 한 떨기 흑요화(黑妖花)를 연상시킬 정도로 현란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나, 그녀의 눈빛은 비단 칼날같이 서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장함마저 가득 차 있었다.
미요시노는 이제 여인에서 특유의 승부사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결전뿐이었다.
숲 속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키 작은 잡목림(雜木林)과 나무보다 키 큰 억새풀이 바람결에 휘청휘청 전신을 흔들고 있다. 
일견하여 황량해 보이는 잡목림의 공터였다.
그러나 이 잡목림의 공터 한 구석에서는 한 줄기 가공할 기운이 줄기줄기 풍겨 나오고 있었다.
죽음보다 짙은 살기가 자욱이 서린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그것은 서로 마주본 두 사람으로부터 피어 오르고 있었다.
사십대 중년인은 알록달록한 무늬의 소매 넓은 동영 무복을 걸쳤고, 흑의경장의 여인의 얼굴은 눈보다도 더 하얗다.
마쓰나미 아까시와 미요시노였다.
그들은 만나는 순간부터 단 한 마디의 말도 내뱉지 않았다. 검(劍)은 항상 말보다 앞서는 것이니까.
파파팟! 마주한 두 쌍의 눈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쓰나미 아까시의 파풍도(破風刀)가 머리 위로 들려져 햇살을 반사시키고, 미요시노의 은월도가 가슴 앞으로부터 얼굴 위로 꼿꼿이 선 채 햇빛을 흡수하고 있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일시 정지된 듯싶었다.
본토(本土)를 버릴 만큼 긴 세월의 도주와 추적이 이 한순간을 끝으로 마무리 지어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긴장의 순간은 그 긴 세월에 비해 너무나 짧게 이루어졌다.
"타앗!"
"핫!"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두 개의 선이 빛살처럼 엇갈렸다가 번개처럼 서로를 향해 돌아섰다.
그들의 자세는 처음 그대로였다.
"음……!"
"음……!"
그제서야 똑같은 신음성이 동시에 새어 나왔다.
숲속 어느 구석에선가 음성이 들려 왔다.
"형님, 여자가 졌어요."
약간 취기가 감도는 음성이었다.
그 말대로 마쓰나미 아까시의 파풍도가 미요시노의 왼쪽 어깨로부터 내려와 단전을 축으로 길게 올라 쳐져 오른쪽 어깨에서 끝을 맺었다.
마쓰나미 아까시의 이도류였다.
미요시노의 흑의자락 사이로 핏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또다시 숲 속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아니다. 여자가 이겼다."
좀 전 음성보다는 극히 무심한 음성이었다.
하나, 그 말을 반박하기라도 하듯 미요시노의 몸이 그 순간 앞으로 쿵! 엎어졌다.
여인의 패배인가?
아니었다.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던 마쓰나미 아까시의 모습을 보라!
그의 이마 끝에서부터 두 가랑이 사이로 서서히 피가 내비치고 있지 않은가!
마쓰나미 아까시의 얼굴에 그제서야 당혹의 빛이 스쳤다.
"졌……."
하나, 그 음성은 이어질 수 없었다.
어찌 두 조각으로 갈라진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촤아아악! 피가 튀었다. 내장이 산산이 흩어져 잡풀더미에 너저분하게 걸렸다.
결과는 나중에 말한 음성대로 여인의 승리였다.
이때였다. 
차가운 대지 위에 배를 깔고 엎어졌던 미요시노의 고개가 힘겹게 들려졌다. 
애원 어린 눈빛이 음성이 들려 온 곳을 향했다.
"형님, 좀 나가 보슈!"
"취아, 너는 모른다. 스스로 독해지려는 내 마음을……."
그 음성을 끝으로 음성은 더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아……!"
안간힘으로 고개를 쳐들었던 미요시노의 입에서 가냘픈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툭…! 그녀의 모시버선처럼 흰 목이 힘없이 꺾여졌다.
그녀의 눈은 아직도 소리가 들려 온 방향을 향한 채였다.
숲 속은 조금 전의 그 긴장된 공기를 잊었다. 온묘로운 햇살은 또다시 예전같이 비춰졌고, 숲 속에는 다시금 정적이 찾아 들었다.
두 개의 주검과 멀리 떨어진 숲 속에서는 이따금씩 두 개의 음성이 햇살 속에 퍼졌다.
"형님, 해도 정말 너무 하슈!"
"너는 모른다."
"젠장, 모르긴 뭘 모르오? 인간사 정(情)이라는 것이 그게 아니오. 형님도 그 정에 얽매어 재녀(才女)를 눈 빠지게 기다리면서도 말이오."
"취아, 너 계속 내 속을 긁을 참이냐?"
"한데, 재녀는 정녕 대월국의 여왕으로 눌러앉을 모양이오."
"취아."
"안 그렇소? 거사 성공 소식만 전하고 종내 캄캄이니 말이오."
"그 계집은 진작 그렇게 마음잡을 계집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마시오."
잠시 대화가 멎었다. 키 큰 잡풀들이 푸석푸석 갈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아니, 갑자기 왜 서시오?"
"취아, 너는 가거라."
"뭐…요?"
"가라고 그랬다."
"갑자기 웬 노망이오?"
"귀찮다."
"형님, 그 말 진정이오?"
"그래, 진정 귀찮다."
"형님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소?"
"가서 술을 마시든지 백 일 후 결전 준비를 하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챙그랑! 요란한 술병 깨지는 소리와 함께 이름 모를 산꽃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제길! 어디 한 번 잘해 보슈. 나 없인 십 리도 못 가서 발가락이 썩어 빠질 거요."
풀숲의 한 곳이 크게 일렁였다.
"너는 그래 놓고 나를 따라올 것이다. 하나, 개방의 취리취선보(醉狸醉仙步)가 환허환상무를 따라잡긴 힘들 것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갈색 인영 하나가 창전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풀잎과 산꽃들이 갈색 인영을 따라 허공 높이 치솟다 떨어져 내렸다.
인영은 떠올랐다 싶은 순간 이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한 줄기 빛살인 양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때 풀숲이 부스럭 젖혀지며 초라한 거지 소년이 고래고래 악을 쓰며 나왔다. 
호취아였다.
"제기랄! 제기랄! 내 다시 그 얼굴을 보면 내가 호취아가 아니다! ㅌㅌ!"
호취아는 인영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햇살이 웃었다. 그리고 산꽃들도 까르르 웃었다.
밤 하늘의 달빛이 교교롭다.
달은 중추의 둥근 원월(圓月)에서 반쯤 기운 모습이다.
구름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정경이 몹시 평화롭다. 그러나 그 달빛을 받고 있는 이 거대한 폐장(廢莊)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차라리 귀기스럽기까지 했다.
폐장의 규모는 대단했다. 한때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린 듯 삼백여 칸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만여 평에 달하는 폐장의 드넓은 마당은 온통 무성한 잡초들로 뒤덮여 있고, 아무렇게나 깨져서 나뒹구는 기왓장은 불에 그을린 듯 시커멓다.
일견하기에도 폐장은 깨나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방치되었던 것 같았다.
문득 그 폐장 안 어디선가 한 줄기 시구(詩句) 읊는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北邙山上列墳塋 
萬古千秋對洛城
城中日夕歌鍾起
山上惟聞松柏聲
북망산 무덤들이여
몇천 년이고
낙양을 바라보는구나.
해 지면
그곳에는 노래 소리.
그러나 여기서는
솔바람 소리 들릴 뿐.
몹시도 처량하여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릴 듯한 음성이었다.
그 음성이 들려 온 곳은 폐장의 대청 쪽이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대청 중앙에 앉아 술호로를 입에 물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치렁한 흑발에 허름한 갈의를 걸친 백운향이었다.
그는 술호로를 떼어내며 대청 앞 넓은 마당을 바라보았다.
온통 잡초로 뒤덮이다시피한 마당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깊은 상념에 젖은 듯 애수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혀 올랐다.
"아버님, 어머님……."
그의 볼을 타고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슨 일인가? 호취아를 떼어 놓고 혼자 어디론가 발길을 돌렸던 그가 이 폐장에 와서 상념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머지않아 저도 아버님 어머님 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두 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았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제 생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모든 은원도, 모든 사랑도……."
꿀꺽! 꿀꺽! 그는 다시 술호로를 거꾸로 물고 술을 마셨다. 목이 메인 듯 술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나왔다.
백씨세가(白氏世家).
이곳은 한때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영명(榮名)을 떨치다 십팔 년 전 사도천의 천문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멸겁(滅劫)을 당한 백씨세가였다. 
백운향이 태어나고 동심을 키웠던 백씨세가가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백운향의 입에서 다시 애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저로 인해 너무 많은 생명이 죽어 갔다는 겁니다. 제가 죽이고, 저를 살리기 위해 죽어 가고… 아버님, 어머님의 주검 앞에서 결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고 맹세한 저였거늘……."
그는 술호로를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로 인해 죽어 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한 모금 더 마시겠습니다."
꿀꺽! 꿀꺽! 술이 넘어가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술호로를 입에서 떼고 잡초가 무성한 마당 구석구석을 쭉 훑어보았다. 
마지막으로 뇌리에 깊이 각인(刻印)시키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돌연, 그의 두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은 마당 정면을 향해 던져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파고든 것은 세 명의 자의노파의 호위를 받으며 아리따운 열여덟 명의 자의소녀들에 의해 들려진 채 잡초를 헤치며 대청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한 채의 가마였다.
가마는 형형색색으로 치장되어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단 한 번 시선을 주면 선뜻 시선을 떼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백운향의 두 눈에 가느다란 의혹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폐장에, 그것도 자시(子時)를 넘긴 이 야심한 시각에 느닷없이 여인들이 떼를 지어 나타났으니 어찌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마는 대청 앞 이 장 앞에까지 다가와서는 멈춰 섰다.
두 명의 자의소녀가 재빨리 가마의 주렴을 양쪽에서 열어주었다.
가마 안에는 한 명의 자의미소녀가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녀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백운향은 그녀가 자신이 알고 있던 한 여인과 몹시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운옥봉 하궁란과 빼어 박은 듯 닮았던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달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이 너무 고독해 보이는군요. 제가 대작을 해드릴까 하는데 어떠신지……."
다분히 유혹적인 음성이었다.
백운향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궁란과는 어떤 관계냐?"
"호호호!"
그녀의 입에서 옥이 구르는 듯한 교소가 짤랑짤랑 터져 나왔다.
"당신은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군요. 처음 보는 여자에게 대뜸 반말이라니……."
백운향을 비난하는 어투였지만 음성은 여전히 달콤했다.
백운향이 무심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난 네가 하궁란과 어떤 관계냐고 물었다."
"동생이에요. 이번에 언니의 뒤를 이어 새로 자하문의 문주가 된 하궁설(河宮雪)이라고 해요."
"그랬었군. 한데, 여기까진 웬일이냐?"
"물론 당신을 만나러 왔지요. 언니의 복수를 위해서 말이에요."
"복수라고?"
"설마 언니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는 건가요?"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궁란을 죽인 건 내가 아니라 사도천이지 않느냐?"
"그러나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당신만 아니었다면 언니가 사도천에게 죽음을 당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테니까요. 말하자면 사도천이 언니를 직접 죽였다면 당신은 간접적으로 언니를 죽인 거예요. 해서, 난 당신과 사도천 두 사람 모두에게 복수하겠다고 결심한 거예요. 당신이 먼저 복수의 대상으로 선택된 건 안됐지만 말이에요."
백운향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렇군. 따지고 보면 하궁란의 죽음은 나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하궁설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난 당신을 본 순간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건 또 무슨 뜻이냐?"
"복수를 포기하기로 했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에요."
백운향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온 여인이 갑자기 사내가 마음에 들어 복수를 포기하겠다니, 이게 도대체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하궁설은 요염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우고 손짓을 했다.
"거긴 너무 지저분하군요. 이리 오세요. 이 안은 우리 두 사람이 타기에 결코 좁지 않으니까요."
하늘거리는 자의를 입고 검푸른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자태는 요기롭도록 매혹적이었다.
백운향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사양하겠다. 네가 복수를 포기했다면 난 그만 가 봐야겠다."
"당신은 너무 화를 내시는군요. 기왕 이렇게 만났는데 나와 함께 다정하게 이야기나 나누는 게……."
백운향이 말을 가로챘다.
"난 너와 할 얘기가 없다."
"그렇지만 난 당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매우 중요한 얘기예요."
백운향은 일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무슨 얘긴지 들어 보도록 하지. 난 여기서 들을 테니까 어서 해 보거라."
하궁설이 두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속삭이듯 나직이 물었다.
"당신은 이 하궁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녀의 음성은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말을 하는 사이 그녀는 이미 가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백운향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물론 넌 아름답다. 그러나 지금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이냐?"
하궁설은 백운향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나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있나요?"
백운향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너는 분명 보기 드문 절세의 미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인의 미색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이 쉽사리 여색에 미혹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세상의 영웅호걸들은 모두 미녀를 차지하길 원해요. 당신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지요?"
백운향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떠올랐다.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부정하지 않겠다면 됐어요."
말을 잇는 하궁설의 음성이 더욱 은근하고 부드러워졌다.
"난 당신에게 이미 여자가 있든 없든 그건 상관하지 않겠어요. 난 당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까요."
말을 하는 사이 하궁설은 백운향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 있었다.
그녀는 숨결이 뺨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서는 또렷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난 당신의 여인이 되어 줄 수 있어요. 나에게는 아직 혼약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난 첫눈에 당신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복수심을 버리고 당신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거예요."
백운향은 일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여자에게 대범하기 짝이 없는 그로서도 세상에 이런 류의 여인이 존재하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궁설이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백운향을 응시하며 다시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가 아름답다면서 설마 날 뿌리치지는 않겠지요? 당신이 날 사랑해 준다면 난 복수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지닌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겠어요. 나는 물론이고 자하문까지도 말이에요."
하궁설은 백운향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섬섬옥수를 뻗어 백운향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조금도 망설일 필요가 없어요. 내 말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녀는 백사(白蛇) 같은 팔을 뻗어 백운향의 목을 휘감아 왔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백운향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추태를 멈추고 당장 뒤로 물러서라!"
하궁설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서더니 만면에 음산한 한기를 떠올렸다.
그녀는 백운향을 무섭게 노려보며 싸늘하게 힐문했다.
"당신은 나의 호의를 끝까지 거절할 셈인가요?"
"난 너 같은 요사스러운 계집은 좋아하지 않는다."
"흥! 그렇다면 난 결코 당신을 살려 둘 수 없어요."
"좋을 대로 해라. 그러나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당신은 이미 미약(迷藥)에 중독되어 피가 끓고 있을 텐데도……?"
백운향은 흠칫했다. 
사실이었다. 그의 몸 속에서 미약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궁설이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은연중 미약을 쓴 것이다.
백운향은 절로 화가 치밀었으나 비참하게 죽어 간 그녀의 언니 하궁란을 떠올리고는 나직이 탄식했다.
"넌 지금 날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군. 미약 따위로 네가 날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의 오산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널 죽일 수 있다. 그러니 쓸데 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물러가라."
하궁설은 노기가 치미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좋아요! 당신이 끝내 내 호의를 거절하겠다면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어요!"
그녀는 뒤로 신형을 날리며 뽀족한 음성으로 버럭 소리쳤다.
"자하삼기(紫霞三奇)!"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세 노파가 백운향을 향해 몸을 날려 왔다.
세 노파는 순식간에 백운향의 삼 장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도대체 네가 얼마나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기에 그토록 큰소리를 치는지 우리가 한번 시험해 보겠다."
세 노파 중에서 안색이 푸르죽죽한 노파가 백운향의 앞으로 나섰다.
"본 귀조신파(鬼爪神婆)가 먼저 네 재주를 시험해 보겠다."
노파는 두 손을 치켜올리며 백운향에게로 다가섰는데, 그녀의 손은 마치 갈고리처럼 보였고 길다란 손톱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백운향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당신들의 뜻이 정 그렇다면 가르침 받기를 사양하지 않겠소"
귀조신파는 갈고리 같은 손을 번개처럼 뻗어 오며 소리쳤다.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그녀의 길다란 손톱은 백운향의 요혈을 찍으려고 가슴으로 뻗어 왔다.
백운향은 재빨리 몸을 틀어 그녀의 살수를 피하며 양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귀조신파의 손톱이 백운향의 옷자락을 간발의 차이로 스쳐 갔다.
그녀의 귀신처럼 빠른 공격에 백운향은 흠칫 놀랐다.
백운향은 그녀가 절정고수라는 것을 깨닫고 경계심을 돋우었다.
귀조신파가 다시 살수를 펼쳐 오자 백운향은 번개처럼 일수를 쳐내어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귀조신파는 백운향의 반격을 가볍게 피해 낸 뒤 양팔을 활짝 벌리고 그림자처럼 덮쳐 들어왔다.
비수처럼 날카로운 열 개의 손 가락이 전광석화처럼 뻗어 왔다.
백운향은 피하려 하지 않고 귀조신파를 향해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파파팍! 귀조신파와 백운향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넓은 대청을 비조(飛鳥)처럼 누비며 살초를 연속으로 펼쳐 냈다.
귀조신파의 무공은 기괴하고 독랄했다. 그녀의 공격은 하나같이 백운향이 여지껏 본 적이 없는 변화무쌍한 기공(奇功)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요혈(要穴)만을 노리고 있는지라 백운향은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더욱 강맹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귀조신파는 점차 수세로 몰리며 두 눈에 놀라움의 기색을 떠올렸다. 
백운향의 무공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공했던 것이다.
이때, 또 한 명의 노파가 싸움의 와중으로 뛰어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본 귀소신파(鬼簫神婆)가 잠시 가르침을 베풀어 줄 테니 주의하라!"
그녀는 굵다란 퉁소를 사납게 휘두르며 백운향에게 공세를 취해 왔다.
쉭쉭! 퉁소에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극맹한 강기가 방출되어 살처럼 뻗어 왔다. 
귀소신파라 불리운 노파의 무공은 귀조신파보다 더욱 독랄하고 기괴했다.
두 노파를 상대하게 되자 백운향은 이내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두 노파의 연합공격은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백운향은 마침내 노기가 충전하여 우렁차게 호통을 쳤다.
"당신들은 끝까지 분수를 모르고 날뛸 셈이오?"
백운향은 쌍수를 전광석화처럼 연속적으로 휘둘러 강기를 부챗살처럼 뿌려 냈다.
백운향의 살기등등한 공세에 두 노파는 차츰 뒤로 밀려났다. 
두 노파는 초인적인 공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백운향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세 사람의 치열한 격전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던 나머지 한 명의 노파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몸에서 붉은 허리띠를 풀어 냈다. 그녀는 붉은 허리띠를 휘두르며 백운향을 향해 덮쳐들었다.
"본 귀영신파(鬼影神婆)가 홍라대(紅羅帶)의 조화를 보여 주겠다!"
붉은 허리띠는 살아 있는 뱀처럼 구불구불 뻗어 와서 백운향의 목과 팔을 휘감으려 했다.
백운향은 홍라대의 붉은 그림자가 눈앞으로 닥쳐오는 순간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길다란 홍라대는 계속 백운향의 시야를 가리고 어지럽게 하늘거리며 뻗어 왔다.
이 틈을 이용하여 귀조신파와 귀소신파의 연합공격이 다시 재개되었다.
백운향은 귀영신파의 홍라대 때문에 공수(攻守)를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그는 쌍수를 맹렬히 쳐냈으나 홍라대의 붉은 그림자는 점점 더 가까이 그에게로 덮쳐들었다.
어느덧 세 노파는 백운향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급속히 좁혀 오고 있었다.
백운향으로서는 더이상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입에서 돌연 하늘을 쩌렁 울리는 일갈이 토해졌다.
"천룡승천무(天龍昇天舞)!"
순간 한 줄기 검은 광채가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가 싶더니 세 노파를 동시에 쓸어 나갔다.
다음 순간, 눈부신 검은 광채 속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비명은 한 줄기였다. 
그러나 세 노파는 모두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서더니 선혈 한 모금씩을 울컥울컥 토해 냈다.
그들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고, 휘몰아치는 장력 속에 길다란 백발을 어지럽게 휘날리며 금새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수레 앞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하궁설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세 노파가 백운향의 하수(下手)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백운향은 비로소 공세를 멈추었다. 처음부터 세 노파를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손속을 멈춘 것이다.
그러나 세 노파는 쉽게 쓰러지지 않고 이를 악문 채 다시 백운향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들의 얼굴에는 소름끼치는 살기가 떠올라 있었다.
귀소신파가 돌연 퉁소를 입으로 가져가더니 이상한 음률을 흘러내기 시작했다. 
퉁소의 음률은 넓은 뜰을 가득 채우고 밤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백운향의 신색에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백운향은 기혈이 세차게 끓어오르고 전신의 진기가 흩어지는 것을 느끼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귀영신파가 백운향을 향해 홍라대를 번개처럼 던져 냈다.
쐐애액! 홍라대는 단숨에 백운향의 목과 팔을 칭칭 휘감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귀소신파가 열 손가락을 번쩍 치켜들더니 백운향을 향해 덮쳐들었다.
백운향은 퉁소의 이상한 음률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렸다. 실로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백운향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져 갔다.
"끝내 피를 보고 싶다는 건가?"
그의 손이 허공을 한 번 쓸어 내자 눈부신 백색 광채가 세 노파를 향해 노도처럼 쏘아져 나갔다.
세 노파는 자하문의 장로급에 속하는 절세의 고수들이었지만 백운향의 이 공격을 피해 내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세 노파는 백운향이 펼쳐 낸 무공이 어떤 무공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하기야 세 노파가 어찌 천 년 전에 불사마존이 완성해 낸 불사경혼수를 알아볼 수 있으랴?
"으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귀소신파의 퉁소는 허공으로 날아가고, 귀영신파의 홍라대는 갈가리 찢기어 사방으로 흩어져 날렸다.
쿵! 쿵! 쿵! 세 노파는 전신에서 피분수를 뿜어 내며 대청 앞마당에 맥없이 나뒹굴었다.
하궁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당혹과 공포의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 가득 살기를 드리우며 사갈처럼 소리쳤다.
"십팔무녀(十八舞女)들은 어서 자하선무진(姿霞仙霧陣)을 펼쳐라!"
말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날렵하게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그녀의 옆에 시립해 있던 소녀들이 미끄러지듯 백운향의 앞으로 쏘아져 나온 것과 거의 동시였다.
하궁설을 한가운데에 두고 소녀들은 호적(胡笛)과 호파(胡琶)를 연주하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수중 속에서 하늘거리는 해초(海草)를 누비며 헤엄치는 인어들인 듯, 음률은 점점 요기를 띠고 흐르더니 순식간에 폐장 안을 뜨거운 열기로 충만시켰다.
하궁설과 소녀들은 흐느적거리듯 미끈한 사지(四肢)를 움직이며 백운향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소녀들이 연주하는 신비한 선율은 마치 들끓는 육욕(肉慾)을 주체하지 못해 꿈틀거리는 여인의 신음인 듯,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환희의 교성을 지르는 여인의 요염함인 듯 점점 요기를 띠고 격렬하게 변해 갔다.
드디어 소녀들의 연주가 극에 이르렀다.
음률은 육체의 끈끈한 욕망의 소리인 듯 점점 더 요염함과 황홀지경의 신비를 드러냈다.
그러자 흐느적거리던 하궁설과 열여덟 소녀들의 몸에서 겉옷이 한 풀 한 풀 벗겨지며 엷은 망사가 드러나더니 망사마저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르륵…! 여체가 그대로 드러나 비치도록 얇은 망사의가, 그것도 거의 반나의 조각이었던 것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이다.
얼굴에는 춘심(春心)이 일어 발그레한 홍조를 띠고 사람을 녹일 듯한 자태로 요염하게 몸을 비틀어대니, 망사옷이 미끈한 어깨 곡선을 타고 잘룩한 허리로, 다시 발밑으로 껍질처럼 벗겨져 나갔다.
망사의는 마치 날개짓인 듯 하늘하늘 바람을 일으키며 여체를 따라 흔들리더니, 이윽고 소녀들의 몸은 완전한 나신으로 변해 버렸다.
완전한 나체로 변한 하궁설과 소녀들은 진정 신(神)의 손 끝에서 빚어진 듯 아름다웠다.
홍조 띤 얼굴은 부드러운 월광(月光)과 살랑이는 밤바람에 살며시 번지는 도화(桃花)였다.
특히 소녀들의 가장 중심 자리에 있는 하궁설의 자태는 진정 인간의 육신이 아니오, 잠시 눈을 혼란시키는 요괴의 몸짓인 듯싶었다.
명장(名匠)의 열정이 담긴 조탁(彫琢) 끝에 빚어진 듯 은은한 상아빛 광채가 황홀하게 어린 나신이 진정 눈부셨다.
요염한 나신은 마치 뼈가 없는 듯 하늘거리며 교태를 자아냈다.
아미를 곁들인 부용(芙容)인 듯 아름다운 얼굴, 희고 미끈한 목덜미, 거기서 흘러내린 우아한 선이 신비를 담은 원구(圓丘)로써 빨갛게 상기된 가슴으로 솟았다.
세류요(細柳腰)의 교치(巧緻)를 지나면 풍요한 둔부, 그 둔부의 조화에 신운(神韻)의 정적을 안은 검은 비림, 옥을 깎아 세운 기둥인 양 미끈하고 날씬한 두 다리.
아아, 이 아름다운 여체에 흐르는 신비로운 정감의 황홀함이여!
더구나 꽃을 피울 듯 붉은 입술가에 살아나는 녹을 듯한 미소는 절로 욕정을 불러 일으키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수같이 검고 깊은 두 눈에서는 짙은 살기가 푸른 광채로 살아나 백운향을 향해 쏘아 갔다.
하지만 살포시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는 황홀경에서 지르는 교성과 사랑의 정욕을 자극하는 신음이 뒤섞여 흘렀다.
"하아……!"
"흐윽……!"
미끈한 나녀들은 더욱 자극적으로 흐느적거리며 괴이한 음률에 따라 백운향을 향해 다가갔다.
터질 듯 부풀어오른 젖가슴과 이슬이 맺힌 듯한 검은 비림이 백운향의 두 눈 가득 파고들었다.
백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목석이 아니고서야 이 농염한 미태를 앞에 두고 어찌 쾌락의 나락 속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진기로 억누르고 있던 미약이 발작하듯 일시에 전신의 피를 타고 온몸으로 번져 갔다.
백운향은 절로 숨결이 가빠졌다. 그의 얼굴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흐려진 눈에는 음탕한 빛이 서려 있었다.
점점 이성을 잃고 황홀지경으로 빠져드니 정신은 아득하고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헤어날 수가 없었다.
하궁설의 해초처럼 부드러운 나신이 백운향의 몸을 감싸듯 안겨 왔다.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여인의 짙은 육향(肉香)이 머리를 어지럽히며 훅 끼쳐들었다.
나신의 소녀들은 백운향의 욕망을 자극하듯 백운향과 하궁설을 에워싼 채 더욱더 자극적인 몸놀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궁설은 단향을 뿜어 내며 백운향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댔다. 
그녀의 허연 둔부는 백운향의 하복부에 바짝 밀착된 채 원을 그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백운향은 하복부가 절로 뻐근해져 옴을 느꼈다. 그의 하복부는 언제부터인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하궁설의 오른손 섬섬옥수가 백운향의 하복부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녀의 왼손은 백운향의 오른손을 잡은 채 자신의 비소로 인도해 내려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수림이 손에 느껴졌다. 그녀의 비소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허억……!"
하궁설은 자신의 비소를 덮고 있는 백운향의 손에 힘을 가하며 달뜬 교성을 토해 냈다.
그녀의 오른손이 백운향의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하복부를 덥썩 움켜쥐었다.
백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었다.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백운향과 하궁설의 주위를 맴돌던 나녀들이 백운향의 옷을 벗기기 위해 일제히 손을 뻗어 왔다.
백운향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떠올랐다. 돌연 그의 두 눈에 섬뜩한 살기가 번쩍 스쳐 지났다.
그는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에 퍼져 있던 미약을 오른손 장심(掌心)으로 모았다.
순간, 하궁설은 자신에게 비소로 한 줄기 차가운 한기가 뿜어져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흠칫 몸을 떨었다.
백운향의 입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요망한 계집!"
퍼억!
"아악!"
하궁설은 두 가슴 사이에 선명한 장흔(掌痕)을 남긴 채 비명을 지르며 가랑잎처럼 뒤로 날아갔다. 
백운향이 미약을 오른손 장심에 모아 삼매진화(三昧盡火)로 소진(消盡)시킨 후 하궁설에게 벼락 같은 일 장을 쳐낸 것이다. 
쿵! 하궁설의 벌거벗은 나신이 무성한 잡초 더미에 볼썽사납게 곤두박질쳤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잡초 더미에 곤두박질친 채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백운향의 분노에 찬 일격이 그녀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 놓고 만 것이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이건 어디까지나 네가 자초한 화이니까."
백운향은 섬뜩한 시선으로 하궁설을 일견한 후 나녀들을 돌아보며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나녀들이 창백한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공포의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백운향은 막 일격을 가하려다 문득 탄식 어린 얼굴로 손을 내렸다.
"너희들의 잘못이라면 주인을 잘못 만난 것뿐. 너희들 주인의 시신을 수습해 어서 이곳을 떠나거라."
나녀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더니 황망히 하궁설의 시신을 향해 달려갔다. 
이어 나녀들은 옷을 걸칠 새도 없이 하궁설의 시신을 가마에 싣고 재빨리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백운향이 어두운 시선을 들어 암천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만은 살상(殺傷)을 피하려 했거늘……."
파악! 돌연 백운향의 신형이 한 마리 야조(夜鳥)처럼 허공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솟구쳐 올랐다 싶은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폐장 안에는 을씨년스러운 적막만이 귀기스럽게 감돌 뿐이었다.
"우리 아씨께서 청하십니다."
산허리를 돌아들던 백운향은 갑자기 들려 온 앳된 소녀의 음성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팔구 세나 되었을까?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눈동자가 유난히 검다. 
양쪽으로 땋아 내린 댕기머리에는 노란색 댕기가 앙증맞게 붙어 있는 계집아이였다.
계집아이는 백운향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생글거렸다.
계집아이의 웃음은 천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세상의 모든 근심이 일시에 가실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백운향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 올랐다. 그것은 계집아이의 생글거림보다 더 진한 치기 어린 웃음이었다.
"내 이름은 단영(丹英)이에요."
계집아이는 백운향의 치기 어린 미소에 친근감을 느꼈음인지 백운향의 팔에 매달리며 입술을 나풀거렸다.
백운향은 문득 아련한 옛날 속의 자기 모습을 찾듯 단영이라는 계집아이를 바라보았다.
"참 좋은 이름이로구나. 그런데 영아의 아씨는 누구지?"
"저도 몰라요."
단영은 깜찍하게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영아는 아저씨를 놀리는구나."
"아녜요. 우리 엄마가 그렇게 전하랬어요, 뭐."
백운향의 눈에 문득 의혹의 빛이 일었다.
"그럼 영아의 집은 어디지?"
"가까워요. 영아가 이렇게 아저씨 손을 잡고 가도 되지요?"
단영은 그렇게 말하며 백운향의 몸에 바싹 안겨들었다.
백운향은 피식 웃었다.
"아니, 이 아저씨가 영아를 안고 가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느냐?"
"엄마가 보면 혼나는데……."
단영은 약간 망설였다. 그러나 이미 단영은 백운향의 품에 안겨들고 있었다.
"아저씨 가슴은 참 따뜻해요."
백운향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단영의 나이가 부러웠다.
"아저씨 저 꽃 예쁘지?"
"그래, 그래. 아저씨가 꺾어 주마."
"머리에 꽂고 다녀야지."
백운향은 꺾은 안개꽃을 단영의 머리에 수북이 꽂아 주었다.
"아저씨, 나 이뻐?"
"안개공주 같구나."
"정말……?"
숲길은 한동안 짤랑짤랑한 단영의 음성으로 가득 찼다.
"아저씨, 그만 내려 줘. 엄마가 보면 아저씨한테 예의 없이 굴었다고 꾸중 듣는단 말야."
단영은 백운향의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그래, 그래……."
"저기가 우리 집이야."
단영은 백운향의 품 속에서 깡총 뛰어내려 토끼처럼 뛰어갔다.
저만치 한 채의 단촐한 모옥(茅屋)이 보였다.
왕골을 엮어 만든 지붕의 곳곳에는 비가 내려 생긴 홈이 파여 있었고, 아름드리 나무가 몇 겹인가 모옥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듯한 모옥이었다.
"엄마, 아저씨 오셨어요!"
단영이 소리치며 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때를 같이하여 사십대 중년 미부가 모옥 안에서 나왔다. 하얀 백의소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한데, 여인은 이런 산중에서 한낱 촌부(村婦)로 지낼 것 같지 않은 기품이 엿보이고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십시오."
백운향의 표정은 언제부터인가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군.'
백운향이 미부의 뒤를 따라간 곳은 모옥 뒤채에 자리한 또 하나의 조그만 모옥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씨께선 지금 화장 중이십니다. 그 동안 한 잔 들고 계십시오."
미부는 방 안의 소박한 술상을 가리키며 앉기를 권했다.
"그럼……"
미부는 허리를 굽혀 보인 후 물러났다.
'훌륭한 법도 속에 자라 온 여인이다.'
방 안은 깔끔하고 소박했다.
그 중에 여인의 향기가 은은히 풍기고 있는 내실로 통한 미색 휘장 너머로부터 간간이 여인의 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부가 말한 아씨라는 여인이 화장을 하고 있는 듯했다.
백운향은 은주전자에 담긴 술을 따라 쭉 들이켰다.
'달군. 그 동안 마셔 본 술 중 가장 명주(名酒)다.'
술은 혀끝을 감칠나게 감아 올렸다.
백운향이 석 잔째의 술을 들이켰을 때 내실로 통한 휘장이 들춰지며 한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유백색 나삼에 분 바른 얼굴이 어울려 잘 익은 사과 같은 여인이었다. 
천 년 세공이 정성들여 깎은 듯 선명한 이목구비와 틀어올린 머리결에 길게 꽂은 봉황금잠이 여인의 고아한 기품을 나타내 주는 듯싶었다.
그러나 여인을 향해 돌려지던 백운향의 얼굴은 못볼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가볍게 찌푸려졌다.
"몰라보겠구나."
백운향은 차갑게 말을 내뱉더니 고개를 돌렸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여인인 듯한 행동이었다.
그렇다. 지금 나타난 여인은 백운향이 알아도 너무 잘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천상미화 미심랑이었다. 
무적신방 대폭발 당시 홀연히 사라져 버렸던 미심랑이 지금 백운향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백운향은 네 번째 술잔을 채우려고 은주전자를 들었다.
"제가 한 잔 따라 올리지요."
미심랑이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주전자를 건네 받았다.
"후후, 이제 제법 계집티가 나는군."
그의 말에 아랑곳없이 미심랑은 정성껏 그의 술잔을 채웠다.
백운향은 서슴없이 잔을 들이켰다.
미심랑이 또다시 주전자를 내밀었다.
백운향은 받았다. 그리고 마셨다.
일 배, 이 배…….
계집은 따르고 사내는 마시고…….
둘 사이는 대화를 잊은 듯 저물어 가는 황혼을 맞았다.
조그만 창 틈으로 황금색 햇살이 찬연히 퍼져 들었다.
술에 의해 벌겋게 물든 백운향의 얼굴과 노을빛을 받은 미심랑의 얼굴색이 하나가 되었다.
계속 여인의 앞으로 내밀어지던 사내의 잔이 문득 더이상 내밀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 같구나."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내뱉는 말에는 차가움이 배여 있었다.
"기다려 왔어요."
미심랑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백운향의 시선이 무심으로 뭉쳤다.
"당신은 사막에서부터 저를 알고 있었어요."
미심랑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백운향을 바라보았다.
백운향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당신은 저의 존재를 아시고도 황궁까지 데리고 갔어요. 그것은 저 자신을 깨우치시기 위한 것이었어요."
미심랑의 음성은 확신에 차 있었다.
백운향의 고개가 계속 끄덕여졌다.
"당신의 그 처사는 정(正)과 마(魔)의 도(道)를 떠나 맥(脈)을 깨우쳐 주시려 한 것이었어요. 저 역시 당신의 뜻과 같이 천존께 그 사실을 알리지 못했어요. 그것은 제 몸에 흐르는 피가 한족의 피였기 때문이에요."
미심랑은 잠시 말을 끊고 백운향을 건너다 보았다.
백운향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녀의 다음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제 맥(脈)의 일은 끝났어요."
백운향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래서……?"
그의 음성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미심랑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보상해 주세요!"
그녀는 외치듯 그 말을 뱉았다.
"내 인생은 당신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까지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그녀는 말하면서 품 속에서 밀납에 싸인 조그만 약덩이를 꺼내 들었다.
"이미 지나 버린 세월을 이것으로나마 의미를 찾고 싶어요."
"……!"
"이것은 만독(萬毒)의 정화(精華)인 마화독정(魔火毒精)이에요. 하지만 약방의 감초 격인 구엽독초(九葉毒草)가 빠져 있어요. 그 동안 당신과의 정을 생각해서 구엽독초를 뺏어요."
"음……!"
백운향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마화독정(魔火毒精)!
천하에는 백이십오만 종의 독초와 독물이 서식한다.
마화독정은 그 모든 독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채집해 정확한 비율에 따라 섞어야만 독의 효능을 발휘한다.
마화독정을 만드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천하의 모든 독을 모두 채집한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만들어지면 천하의 금강불괴(金剛不壞)도, 그 윗단계인 불사지체(不死之體)도 아무 쓸모가 없다. 단지 독정 한 방울이면 독수로 녹아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마화독정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면서도 일단 실현되면 천하제일의 절독(絶毒)이 되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백운향의 물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께 담겨 있었다.
그 많은 독물을 어떻게 채집했고, 누가 그것을 조합시킬 수 있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천마대제의 천문(天門)은 이미 천 년 전부터 천하의 독을 채집하여 백 년 전 이백오십오만 종의 독을 모두 채집하는데 성공했어요. 그것을 칠절의선이 배합했어요."
"뭐라고? 칠절의선이……?"
백운향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의 놀람은 당연했다. 
그의 남은 생 중 꼭 처리해야 할 일이 바로 칠절의선의 행방을 찾는 일이 아니던가?
미심랑은 밀납을 벗기고 마화독정을 은주전자에 넣었다.
술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고 은주전자의 색깔이 일시에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파스스스…! 은주전자가 마구 부식되었다. 실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미심랑은 한 가닥 미소를 띠고 주전자를 들어올려, 옥배 가득 시커먼 액체를 쏟아 놓았다.
푸스스스…! 독정에 닿는 옥배 또한 부식되기 시작했다.
백운향은 아연한 표정으로 술잔과 미심랑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람이 이것을 먹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죽지요."
미심랑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살 수 있을 거예요. 구엽독초가 빠졌기 때문에 마화독정은 가진 바 효능의 삼 할밖에 발휘하지 못하니까요."
"그럼 내가 이것을 마시리라고 생각하느냐?"
"물론이에요. 당신은 결코 한낱 여인에게 겁먹을 분이 아니니까요."
백운향의 심기를 묘하게 건드리는 말이었다.
백운향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전! 이것은 천상미화 미심랑의 명백한 도전이었다.
'어디를 가도 죽음의 문턱이로군.'
백운향은 또 한 번 자탄을 금치 못했다.
"당신은 안 마셔도 좋아요. 하지만 그것을 안 드시려면 스스로 검을 놓으세요. 당신은 이 승부에 승복하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미 승부에 몰입했으니까요."
미심랑의 흰 손가락이 끓어 넘치는 술잔을 가리켰다.
백운향은 이제 어찌해 볼 방도가 없었다.
마시고 죽느냐? 안 마시고 검을 놓느냐?
한낱 여인의 집념이 만들어 놓은 승부였지만 그에게 있어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백운향의 시선은 마화독정으로 끓어 넘치는 잔에 멎어 있었다.
'마시자. 천하의 천인달리쇄락공도 극복한 나다. 한(恨)과 업(業)이 나를 붙잡고 늘어져도 나의 운명은 마시기를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죽지는 않는다. 천하의 독정일지라도 나를 죽이진 못한다. 나의 몸은 마화독정의 독물의 가지 수보다 더 많은 약초와 독초에 벌모세수(伐毛洗修)된 몸이다.'
백운향은 끓어 넘치는 마화독정의 독잔을 덥썩 집어 들고는 서슴없이 잔을 비웠다.
너무나도 일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약 미심랑이 연극을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결코 말릴 틈이 없었을 것이다.
미심랑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입도 벌어졌다.
"당…당신… 정녕 대단하시군요!"
백운향은 눈을 감았다. 마치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독기운을 만끽하는 듯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미심랑의 입이 다시 조용히 열렸다.
"당신은 죽지 않아요. 당신은 이제 편안히 쉴 때가 되었어요. 당신이 하실 일은 이미 끝난 거예요. 당신은 그만큼 했으면 충분해요. 이제 무림의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평생 종으로 당신을 모시겠어요. 어디 한적한 바닷가 같은 곳이 좋겠지요?"
그러나 백운향은 미심랑의 말을 어느 순간부터인가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꼿꼿이 앉은 자세 그대로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심랑의 눈에 눈물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과연 누구의 승리인가? 
미심랑은 이제 잃어 버린 삶을 보상받은 셈인가?
황혼이 저문다. 
그리고 한 대의 포장마차가 초옥을 떠났다. 덜컹거리며 동해 바닷가를 향해 그렇게 떠났다.
옛날 이야기
팔월 중추의 혈사(血事)가 지난 지 팔십 일.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십일월이다.
그녀는 항상 웃었다. 
그가 술에 잔뜩 쩔어 그녀를 때리고 걷어차도 그녀는 웃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고 상을 엎어도 그녀는 웃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이후 십 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숙명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언덕 아래의 어촌(漁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면 그는 으레 그녀를 두들겨 팼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위해 정성껏 저녁을 지었고, 옷을 만들었으며, 그를 조금이라도 잘 먹이기 위해 어촌에 내려가 그물을 손질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물질까지 서슴없이 나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재지에 감동하면서도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두덩이는 항상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고, 몸의 이곳저곳에는 피딱지가 가실 날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어찌 그녀를 정상이라 생각하겠는가?
그만한 재색을 갖춘 그녀가 그토록 매를 맞으면서까지 술주정뱅이 서방과 사는 것이 사람들이 그녀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속에서도 그녀는 늘 백치같이 하얗게 웃고만 있었으니 사람들의 생각은 확실한 것으로 굳어졌다.
한데, 지금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비단 웃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허름한 베옷 속의 섬연한 교구를 마구 떨고 있었다. 
꼭 쥔 손아귀에서는 핏물이 배어 마룻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참고, 웃음으로 받아넘기던 그녀를 이토록 전율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방 안의 정경이 그녀를 이토록 분노케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헉헉……."
판자를 이어 만든 방문을 쉴 새 없이 두드리며 달뜬 신음성과 거친 숨결이 방 안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는 오늘 저녁 술이 지나치게 취해 이 어촌에 단 하나밖에 없는 창녀(娼女)를 집으로 데려 왔다.
그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창녀의 옷을 벗기고 난폭하게 침상 위로 던졌다. 
연후 그의 나신이 푸르뎅뎅한 창녀의 몸 위로 엎어졌다.
"호호홋! 성급하시긴… 부인이 보고 계신데……."
엎어진 그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씹어 뱉듯 말했다.
"저까짓 것 상관없어."
그는 미친 듯이 창녀를 탐하기 시작했다.
그의 두 손이 거침없이 창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입은 창녀의 목덜미를 핥고 있었다.
"으음… 아……."
창녀는 희열에 찬 교성을 토해 내며 하체를 교묘하게 비틀었다.
그의 오른손이 끌리듯 창녀의 하체를 향해 내려갔다.
"하악……!"
그의 손이 창녀의 어디를 만졌는지 창녀가 파르르 몸을 떨며 비명에 가까운 교성을 터뜨렸다.
그와 창녀의 몸은 이미 온통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한 쌍의 짐승이 뒤엉킨 듯 그와 창녀는 더욱 더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낯뜨거운 광경이 그녀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예 할 말을 잃었다. 뛰쳐 나갈 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그가 그녀를 향해 땀이 범벅된 얼굴을 돌리며 사납게 소리쳤다.
"꺼져 버렷!"
이미 두 개의 희뿌연 나신은 뱀처럼 엉겨붙어 있었다. 
야수의 신음 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발기발기 찢어 놓았다.
그녀가 어떻게 그곳을 빠져 나왔는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허탈한 숨결과 나른한 신음성이 방 안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이어 퍼렇게 뜬 창녀의 얼굴이 밖으로 나섰다.
창녀의 만족한 눈빛에 짙은 조소와 경멸이 떠올랐다.
"흥, 얼굴만 반반하다고 다 계집인 줄 아나?"
창녀는 그녀를 석녀(石女)쯤으로 생각해 버린 듯했다. 
"화대(花代) 줘요!"
창녀의 핏기 없는 손이 그녀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녀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때 방 안에서 그가 악을 썼다.
"열 냥이다!"
그녀는 머뭇머뭇 열 냥을 창녀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창녀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조소 어린 눈빛을 던지더니 유난히 큰 엉덩이를 뱅글뱅글 돌리며 사라졌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흐흐흑……!"
마침내 오열이 터졌다.
또 한 차례 그가 악을 썼다.
"야, 이 계집애야! 초상 났냐?"
그녀는 찔끔 오열을 속으로 삼켰다.
"밥 굶길 셈이냐?"
또 한 차례 그가 버럭 소리쳤다.
그녀는 베옷 자락으로 눈물을 찍으며 부엌으로 들어가 밥상을 차려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벌거벗은 채 침상 위에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어제 바꾼 침대의 홑이불이 얼룩얼룩 무늬져 있었다.
그녀는 역한 구토를 느끼며 방을 뛰쳐 나갔다.
그는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격렬한 정사의 뒤끝답지 않게 밥만 입에 퍼넣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창녀는 또 왔다.
그녀는 그들이 엉켜 있는 시간 내내 바닷가 백사장 위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이 야색(夜色)을 뚫고 그녀의 엎드린 몸을 애무하듯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그녀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두들겨 팼다.
그리고 또 그녀는 울었다. 
이제 그녀는 웃는 여인이 아닌 우는 여인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세 번째 날, 네 번째 날…….
그녀는 마치 실성한 듯 울며 그렇게 바닷가 백사장을 걸었다. 그녀는 문득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가 부럽다고 느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또 맞았다.
다섯 번째 날, 그녀는 바닷가로 나가지 않았다.
저녁 무렵이 되자 창녀가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창녀의 눈에는 예의 그 경멸의 기색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눈이 새파랗게 변했다.
철썩! 창녀의 고개가 크게 돌아갔다. 퍼런 살결 위에 다섯 줄기의 혈선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그러나 창녀는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흥, 계집 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창녀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퍽! 창녀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이고……!"
창녀가 자지러지듯 비명을 질렀다.
볼썽사납게 바닥에 널브러진 창녀는 오만 가지 소리로 핏덩이를 토해 냈다.
창녀는 엉금엉금 기어 일어났다. 창녀의 얼굴에는 공포가 극한까지 어려 있었다.
그녀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다시 나타나면 죽여 버릴 테다."
독기가 풀풀 날렸다.
"흥, 네가 계집 구실을 해 봐라! 서방 단속도 못하는 주제에!"
창녀는 공포 속에서도 악을 썼다. 
그녀의 손이 다시 들려졌다. 
창녀의 몸이 구르다시피 허겁지겁 사립문 밖으로 사라졌다.
철썩! 돌아서는 그녀의 두 눈 가득 번개가 쳤다.
철썩! 또 한 차례 번개가 일었다. 
머리를 산발한 그가 그녀의 양쪽 뺨을 난타한 것이다.
단내와 함게 코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못된 계집……."
그의 주먹이 그녀의 아랫배에 꽂혀 들었다.
"으윽……!"
그녀의 몸이 새우처럼 굽어졌다.
그의 발이 굽혀진 그녀의 등을 짓밟았다. 그녀는 아주 바닥에 엎어졌다. 
마룻바닥 가득 피가 배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래, 꿩 대신 닭이다."
그녀의 안색이 핼쓱하게 질려 버렸다.
그는 그녀를 질질 끌 듯 방 안으로 끌고 들어오더니 침상 위로 그녀를 내던졌다.
철렁! 침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요동을 쳤다.
이어 그가 늑대처럼 덮쳐들었다.
찌익! 찍! 억센 삼베 조각이 마구 찢겼다.
순식간에 적삼 밑의 한 겹 젖가리개와 치마 속의 고의 한 장만을 달랑 남긴 채 우윳빛 살결이 현란하게 빛을 발했다.
탄력 있는 피부는 광적인 윤기로 번들거리고, 이곳 저곳에 든 피멍조차 찬란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악물었다.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체념한 것이다.
그의 눈에서는 핏빛 광기가 넘쳤다.
오른손 왼손의 손길을 따라 젖가리개와 고의가 마른 나뭇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오오! 아름답다! 진정 천상의 걸작이 침대 위에서 파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그 아름다운 조각품에서 눈길을 떼고 훌훌 옷을 벗어 던졌다.
나신으로 변한 그의 우람한 동체가 그대로 가냘픈 여체를 찍어 눌렀다. 애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랑이가 넓게 벌려진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의 체중이 자신의 몸에 얹힌다고 생각한 순간, 닥쳐 올 일에 대한 공포조차 느낄 사이 없이 그녀는 비단폭 찢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악!"
이미 그의 황금 창날은 빨간 과녁을 깊숙이 뚫어 버린 것이다.
뻐근함을 동반한 고통이 엄습해 온다. 그 고통은 전신으로 치달려 뇌에까지 이르렀다.
그녀는 잇몸이 근질거린다고 생각했다. 두 이빨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악물려졌다.
한 번, 두 번…….
그녀는 점점 배가되는 고통의 수를 헤아렸다.
황금 창날은 더욱 예리해졌다. 
그녀는 어떤 희열이라든가 쾌락 같은 것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살을 저미는 아픔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칼을 휘어 잡았다. 그녀의 눈에 높이 들린 자신의 다리가 보였다. 수치심이 일었다.
하지만 그 다리는 그녀 마음대로 내려지지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그녀는 차라리 고통마저 체념했다.
하나, 어느 한순간 잊었던 고통이 앞의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수십 배의 위력으로 그녀의 깊은 곳에서 터져 올랐다.
"악!"
그녀는 단 두 번 소리를 질렀다.
시작과 끝!
그리고 그녀의 고개가 베개 밑으로 떨구어졌다.
다음 날, 또 다음 날…….
그녀는 밤을 세워 가며 그의 노예가 되어 몸부림쳤다.
다섯째 되는 날, 어촌에 내려갔던 그가 돌아왔다.
한데, 그는 한 방울의 술도 마신 흔적이 없었다. 대신 그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딱딱하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무거운 충격이 내려앉았다.
그는 그대로 휑하니 그녀의 곁을 지나더니 방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구었다.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그의 이 며칠 동안의 행동으로 보아 그는 지금 그녀를 침상 위에서 초주검으로 만들어야 당연했다.
그녀는 다급히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이봐요!"
아무리 두드리고 불러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그녀는 방문을 부수려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그가 자살을 기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였다.
"시끄럽다."
방 안에서 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는 악을 쓰지 않았다.
그 의문은 다음날 아침 그녀가 어촌에 내려갔을 때 풀어졌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 거대한 방(枋)이 나붙어 있었다.
<고(告)하노니, 금번 섣달 초하루, 천하웅주(天下雄主) 집회(集會)가 있노라.
장소는 하남(河南) 탄허평(彈虛坪).
천하대협들은 뜻에 따라 정(正)이든 마(魔)든 참석할 자격이 있으며, 초민(草民)들은 뜻 있는 자 참관할 수 있다.
이를 탄허평 영웅집회(英雄集會)라 이르고, 아울러 영웅집회의 결과에 따라 승자가 영원히 천하무림을 독패할 것이노라.
대명(大明) 황제(皇帝) 영락칙령(英樂勅令)>
오늘은 동짓달 스무하루이다. 
영웅집회는 꼭 열흘 남은 것이다.
무림 일에 끼여들지 않는 것이 황궁의 불문율(不文律)이었건만 영락제가 친히 무림 일에 나섰다.
자신은 대륙의 민생(民生)을 다스리고, 골칫거리 무림은 하나의 또 다른 패주(覇主)에게 맡겨 버리자는 안일한 심사란 말인가?
아니면 어떤 변수가 작용했단 말인가?
이유야 어찌됐든 그것은 실로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갈 곳은 뻔하다. 그가 갈 곳은 이 좁은 어촌에서 단 한 곳 뿐인 술집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술집에도 없었다.
그녀는 바닷가로 나왔다. 
그 파격적인 포고문을 읽고 그는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급하게 백사장을 치달렸다. 
그때였다. 
그녀의 눈에 연기가 보였다.
바닷가를 직접 맞대고 선 까마득한 벼랑 위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다급하던 눈에 연기는 구명(救命)의 줄처럼 보였다.
그는 헐렁한 갈의와 헝클어진 흑발을 나부끼며 벼랑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앞에는 모닥불이 바위 위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새파란 바닷가 수평선에 박혀 있고, 손에는 앙증맞은 칠채 꽃신이 들려 있었다. 
그가 어느 때부터인가 생명의 신부(神符)처럼 간직해 온 그 꽃신이었다.
"모두 부질없는 것. 불 속에서 꺼내 온 것이니 다시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의 음성은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하늘을 닮았음인지 암울하기만 했다.
꽃신을 막 불구덩이 속으로 던지려던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문득 뇌리 속으로 그의 앞에 피어 오르는 모닥불보다 굉렬한 불기둥의 영상이 어린 것이다.
사도천의 천문에 의해 백씨세가(白氏世家)가 멸문당하던 그 참혹했던 순간순간의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그의 고개가 세차게 저어졌다. 물기 밴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운명이었어. 이젠 아무리 생각해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과거지사로 흘러가 버렸어."
툭…! 음성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뭔가 신비를 품은 듯했던 꽃신이 모닥불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불꽃의 혓바닥은 이내 꽃신을 집어 삼켰다.
그의 눈에 또다시 그 날 밤의 일이 생각났다.
죽음을 불사하고 꽃신을 전해 주던 그 피 묻은 손,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손이었다.
"분명 무엇인가 있겠지. 하나, 지금 이 상태에서 더이상 연연하면 무엇하랴?"
그는 빙글 몸을 돌렸다.
"아!"
여지껏 그의 행동과 말을 숨어서 듣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눈이라도 펑펑 쏟아져 버려라!"
그는 악을 쓰며 벼랑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시선은 모닥불을 향하고 있었다. 
모닥불 속에선 그녀조차 모르고 있던 꽃신이 산화해 가고 있었다.
한데, 어느 한순간 돌연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보라! 모닥불 속의 꽃신을…….
변한다. 무릇 모든 물건은 불 속에서는 쭈그러들기 마련이다.
한데, 퍼진다. 그리고 늘어난다.
두 배, 세 배……!
화르륵…! 그렇게 늘어나고 펴지던 꽃신이 어느 한순간, 불꽃을 따라 한 장의 종잇장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종이를 잡았다.
그녀의 시선이 종이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펄쩍 뛰어올랐다.
"이봐요!"
그녀는 뛰었다. 불 속에서 건져 올린 종잇장이 그녀의 손에서 펄럭였다.
"이봐요!"
그녀는 또다시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인가? 그녀를 이토록 경악시킨 꽃신 속에서 나온 비밀은……?
때마침 눈발이 흩날린다.
백운향, 미심랑.
그와 그녀는 백운향과 미심랑이었다.
<불사마존(不死魔尊)의 불사경혼수(不死驚魂手), 조화선옹(造化仙翁)의 오대파천무(五大破天舞), 달마대사(達摩大師)의 달마삼검(達摩三劍)을 익히지 않은 자가 이 비밀을 풀었다면 즉시 물에 던져라. 
모든 것은 무(無)로 돌아가노니, 헛된 야욕은 일신의 재앙이니라.>
꽃신이 풀려 이루어진 화면사(火面絲)의 첫 글귀는 엄중한 경고와 아울러 다음에 이어지는 글귀를 읽을 자격에 대해 적혀 있었다.
미심랑은 그곳까지만 볼 수 있었고, 백운향은 무심한 시선으로 다음 글귀를 따라 시선을 던졌다.
<천마(天魔)를 막아라. 
천마는 불사(不死)와 조화(造化)…….>
글의 전반부는 백운향이 이미 알고 있는 무림사대무성(武林四大武聖)에 대한 언급과, 천마대제의 계략과 혈사(血史)에 대한 설명이었다.
<천마는 사라졌으나 천마의 후예는 또다시 피의 깃발을 올릴 것이다. 
이에 노납(老納)의 삼십 년 남은 천수(天壽)를 후세 무림에 헌납함은…….>
백운향은 글 속에 있는 노납이라는 말에 의혹이 일었다.
그는 아직 이 글을 남긴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곳까지 읽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의문은 다음 글귀에서 풀렸다.
<노납은 남은 삼십 년의 세월을 단 한 가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노납의 지우(知友) 조화의 오대파천무(五大破天舞), 영원한 절대자 불사의 불사경혼수(不死驚魂手), 그리고 노납의 달마삼검(達摩三劍)을 한 가지로 묶는 심공(心功)을 창안하는 것이었다.>
달마대사(達摩大師)!
이 글은 바로 천마의 후세 혈사를 염려한 달마대사의 고심이었다.
<노납의 달마사검(達摩四劍), 조화의 오대파천무는 천마의 칠채천마혼(七彩天魔魂)과 취록혈강(翠綠血 )과 겨우 견줄 만한 것이고, 불사의 불사경혼수는 그들보다 겨우 반 수 정도 위다.
그러나 천마에게는 최후의 보루로 천년지옥갱(天年地獄坑)이 있다. 그 신비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는 분명 천하를 양단할 수 있는 가공할 광세신공(廣世神功)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노납이 남기고자 하는 우리 삼 인의 삼대신공(三大神功)을 합치는 심공을 연성하면 능히 그것을 깨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역시 달마대사다운 호언이었고 장담이었다.
달마대사의 글은 심공 이전에 짤막한 추서가 더 이어졌다.
<결국 노납은 성공했다. 이에 노납은 노납의 마지막 제자 법광(法光)에게 노납의 모든 것을 화면사에 기록하여 꽃신으로 만들어 전한 후 환속시켰다.
그러나 법광도 모른다. 단지 그는 평범한 초인(草人)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땐가 그의 후손에 의해 화면사의 비밀은 우연히 풀릴 것이다.
노납이 천기(天機)를 헤아려 보건데 그때는 천하의 마성지체(魔星之體)가 기세를 올릴 때이리라. 
부디 노납이 제거하지 못한 무림의 화근을 뽑아 주길 간절히 기원하노라.>
이곳에서 달마대사의 모든 서언(序言)은 끝을 맺고, 뒷장에 난해한 범어(梵語) 구결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백운향은 뒷면의 내용은 볼 생각도 않고 미심랑에게 화면사를 내밀었다.
"내가 허락하니 너도 읽어 봐라."
미심랑은 주저 없이 화면사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점차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얼마 후, 그녀의 시선이 화면사에서 떼어졌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내가 옛날 이야기 하나 해 줄까 한다."
백운향은 중턱쯤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눈발이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드넓은 바다의 해풍(海風)을 따라 눈발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미심랑은 그와 어깨를 맞대고 앉았다.
그의 음성이 한 점 동요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도 보았겠지만, 천 년의 세월 이전에……."
백운향은 달마대사의 유시(遺示)와 환상신기루 내의 환상부(幻像府)에서 본 이야기를 쭉 했다.
그는 조화선옹의 다섯 제자와 그에 얽힌 비사(秘事)에 특히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었다.
미심랑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내가 환상신기루 내에 떨어졌을 때였다. 나는 한 구의 시체를 보았다. 그 시체는 미무위(美武偉)라는 사람이었다."
"미무위……?"
미심랑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백운향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눈발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심랑, 너는 천흘문(天屹門)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느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심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운향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가 다짐하듯 다시 물었다.
"천흘문이 너의 생가(生家)이지?"
"그…그걸 어떻게……?"
백운향은 이제 모든 생각이 정리되었다. 미심랑이 천흘문의 혈손(血孫)일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환상신기루에서 죽은 미무위라는 사람은 죽기 전에 사력(死力)을 다해 통한의 유서를 돌바닥 위에 새겨 놓았었다."
백운향의 말머리가 천흘문에서 환상신기루 쪽으로 돌아갔다.
"당신은 왜… 제게 그런……?"
하얗게 질린 미심랑의 표정 위로 두려운 빛이 가득 어렸다.
"이것을 우선 바다 속에 던지고 이야기하자꾸나."
백운향은 수중의 화면사를 들어올렸다. 달마대사의 천 년 고심이 읽혀지지도 않은 채 바다를 향해 들려졌다.
미심랑은 뛰듯이 그의 팔을 잡아챘다.
"안 돼요! 달마대사의 천년혼(千年魂)이 잠자고 있는 것을 어찌……."
화면사는 그녀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백운향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것을 무엇하겠느냐? 나는 이미 일개 범부(凡夫)로 살아가기로 했거늘……."
말을 이어가는 백운향의 표정은 평온했다. 이미 마음의 결심을 굳힌 듯한 표정이었다.
미심랑이 아프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운향은 떨어져 내리는 눈발을 손으로 받았다.
천하는 온통 백설(白雪) 천지로 화해 가고 있었다. 바다도, 하늘도, 섬도 모두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가고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바위도 모두 하얗게 변했다. 
그 눈발 속으로 백운향의 음성이 흘렀다.
이번에는 환상신기루 속에서 죽은 미무위라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미무위가 남긴 유서에는 자신의 가문이 천문(天門)에 당했다는 것과 그 와중에서도 임신한 아내가 탈출한 것 등에 대한 것이 쓰여 있었다."
음성은 낮았으며 느렸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미심랑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빽, 질렀다. 
백운향이 핵심을 피해 말을 돌리고 있는 것에 그녀는 터질 듯 답답함을 느낀 것이었다.
하나, 백운향은 그 핵심을 쉽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확실한 그 무엇을 그녀에게서 찾는 듯 또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심랑, 앉거라."
그녀는 앉았다.
"내가 알아 본 바에 의하면 너의 사부 만악수사(萬惡秀士)는 너를 황하의 한 지류(支流)에서 건져 올렸다고 들었다."
"당신은 도대체……?"
미심랑은 자신의 신분내력에 대해 이토록 소상히 알고 있는 백운향을 아연 경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백운향의 시선이 굳어졌다.
"그게 맞느냐?"
확인하는 듯한 물음이었다.
"맞…맞아요."
미심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천흘문의 후예이며, 물살에 떠내려온 임산부의 몸에서 태어났다."
"……?"
"환상신기루에서 죽은 미무위, 그가 바로 천흘문의 마지막 문주(門主)였다."
드디어 이야기는 귀결되었다.
백운향는 지금껏 미심랑의 확실한 신분을 확인한 후, 미심랑의 진정한 가문의 흉수가 사도천의 천문이라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미심랑의 얼굴 전체가 눈이었다. 그녀의 눈은 그만큼 크게 떠졌다. 그 크게 떠진 눈을 통해 그녀의 혼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갔다.
오오! 하늘이여! 그녀는 지금껏 가문의 흉수를 도와 왔다는 말이 아닌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녀의 귓전에 예의 백운향의 음성은 칼 끝처럼 파고들었다.
"아버지는 흉수의 칼에 맞고 사막의 한가운데서, 어머니는 적도(敵徒)를 도울 씨앗을 잉태한 채 강물에 떠내려왔으니… 진정 불행한 운명들이지."
"그만, 그만!"
미심랑은 절규하듯 악을 썼다. 그녀의 두 손이 귀를 틀어막았다.
그녀의 몸이 눈 속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운명의 수호신은 또 하나의 가련한 운명이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고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백운향은 그녀를 외면했다. 
그는 한켠에 떨어진 화면사를 주워 들었다.
달마대사의 천 년 고심은 과연 태동할 수 있을 것인가?
눈(雪)은 희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희다.
하나, 그들은 그 눈을 보고 있지 않았다. 계집은 울고, 사내는 눈을 감고 정좌해 있을 뿐이다.
눈은 자신을 보지 않는 그들이 미웠든지 그들 위에 마구 내려 퍼부었다.
서서히 바람이 불고 눈 내리는 절벽 중턱에는 두 개의 눈 사람이 생겨 나기 시작했다. 
하나는 엎드리고 하나는 앉은 채, 굳은 듯 그렇게 눈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백운향은 차갑게 얼어붙은 저녁 노을 속에서 눈을 떴다.
미심랑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운향은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계집들이란 금방 누가 죽은 듯 울어대고 또 금방……."
"뭐라고요? 당신은 사흘 동안 우는 사람 봤어요?"
미심랑이 가시 돋친 음성으로 소리쳤다.
백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사흘? 그럼 오늘이 며칠이냐?"
"내일이 스무나흘이에요."
백운향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화면사를 벼랑 아래로 던졌다.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린 화면사는 바닷물에 닿는 순간 형체도 없이 녹아 들었다.
"천 년 억겁이 녹는구나. 가자."
"어디로요?"
"어디긴, 집이지."
백운향은 당연하다는 듯 절벽을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미심랑의 얼굴에 결의의 기색이 서렸다.
그녀는 지면을 박차고 어렵게 바위 사이를 내려가는 백운향을 안아들었다.
"무공이 좋긴 좋아. 나도 왕년엔 펄펄 날았지. 어? 한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집은 뒤쪽인데……."
"이젠 집에 안 가요. 집에 가면 당신은 저를 또 두들겨 팰 것이고, 전 이제 죽으면 죽었지 더이상 못 맞아요."
미심랑의 달리는 속도는 화살과도 같았다. 
이미 그들이 석 달 동안 살았던 집은 그들의 시야 속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몇 개의 산을 넘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백운향이 입을 열었다.
"지당혈(地堂穴)로 통하는 진기의 흐름을 옥당(玉堂)으로 돌리면 좀 더 빠르고 쉽게 달릴 수 있을 텐데……."
"시끄러워요! 당신에게 맞은 자리가 쑤시고 결려서 그래요!"
미심랑은 백운향이 일러 준 대로 진기의 흐름을 돌리면서도 백운향에게 무안을 주었다.
"제길, 두어 대 톡톡 친 걸 가지고 말도 못 붙이게 하는군."
미심랑이 팔에 힘을 바짝 주었다.
"아이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렸다.
백운향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하나, 무학에 있어 백운향은 이미 신(神)의 경지가 아닌가?
미심랑은 어쩌면 백운향이 계속 말하기를 원하는지도 몰랐다. 
시간은 없는데 갈 길은 너무 멀었던 것이다.
"왜 너는 중극(重極)으로 진기를 삼 할씩이나 밀어 넣느냐? 이 할이면 땀도 안 날 텐데."
"당신에게 맞은 자리가……."
"그곳은 아냐! 난 그곳을 때린 적이 없어. 그건 네가 처녀가 아니기 때문이야."
미심랑의 손이 그의 몸 어딘가를 세차게 꼬집었다.
"아이쿠!"
백운향은 그녀의 몸을 와락 감싸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워낙 외진 어촌이었기에 수 개의 산과 들만이 연이어질 뿐 어디에도 인가(人家)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 같은 불구를 어디에 쓰려고 이 고생이냐?"
"당신을 고칠 수 있어요."
미심랑의 외길 고집은 드디어 꺾였다.
사실 그녀는 절벽 위에서 백운향을 지켜보며 사흘 밤낮을 꼬박 갈등과 번민에 시달렸었다.
지금껏 자신이 추구한 도(道)를 구현하기 위해 그를 이곳에 계속 잡아 두느냐?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이 지경으로 만든 흉수에게 검날을 돌리느냐?
그것은 진정 힘든 선택이었다.
하나, 그녀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했을 때 그 해답은 쉽게 나왔다.
즉,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가?
그것은 따지고 보면 결국 자신의 가문이 혈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생(生)을 이분께 보상받았듯, 이번엔 내 운명을 보상받고 말 테다.'
한데, 그녀는 어떻게 마화독정(魔火毒精)을 해독시키려 하는 것일까?
모른다. 그것은 미심랑 그녀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동짓달 스무닷새. 
천하의 대부분 사람들이 행장을 꾸렸다.
동월(同月) 스무엿새. 
사람들은 집을 나섰다.
동월 스무이레. 
사람들은 번잡한 하남 땅 탄허평(彈虛坪)으로 통하는 길목을 걷기 시작했다.
동월, 스무여드레…….
탄허평(彈虛坪) 영웅집회!
대명황제 영락제가 발기하고 천하무림이 경동하니 고금유일무이(古今唯一無二)의 대결전이 드디어 내일로 다가왔다.
아직 누가 누구를 향해 검을 들이댈지, 누가 누구를 도와 천하 무림의 패권을 장악할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황제인 무림황제가 태어나는 날이 내일이다.
힘이 있는 자는 상대를 찌를 것이고 그보다 더 힘센 자에게 찔릴 것이다.
그리고 탄생하는 것이다. 영원한 무림의 황제는…….
비련(悲戀)
흥망(興亡)은 세월에 목을 매는가?
웅장하고 화려했던 고루거각은 어디로 가고 쓸쓸한 폐허 위로는 황량한 바람결을 따라 검은 잿가루만 날리누나.
과거 화려했던 금릉 천의장의 열망은 한 줌 재를 이불삼아 덮고 누워 있었다.
그 폐허 위로 때아닌 밤비가 구성지게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밤비와 더불어 한 대의 마차가 들어섰다.
마차가 폐허 한 구석에 세워지고 두 사람이 내려섰다.
일남일녀, 동해의 바닷가를 떠나 온 백운향과 미심랑이었다.
이들이 도대체 이곳에 온 것은 무엇 때문일까?
미심랑은 도둑 고양이처럼 폐허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백운향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윽고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화목(火木)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폐허의 중간이었다.
그녀는 힐끗 백운향을 돌아보았다. 
백운향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미 안다는 듯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의 눈길을 받았다.
눈길을 돌린 그녀의 손이 무겁게 치켜올려졌다.
번쩍! 한 줄기 홍광(紅光)이 밤비 속에 을씨년스럽게 퍼졌다.
쾅! 콰쾅! 잿가루와 돌조각이 튀어올랐다.
미심랑은 쉴 새 없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장력(掌力)을 퍼부었다. 
그녀의 얼굴에 빗물 섞인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텅! 덜커덩! 
어느 한순간 삼 장 깊이로 패인 구덩이 속에서 요란한 굉음이 일었다.
미심랑이 활짝 웃었다.
"됐어요."
"수고했다."
미심랑의 행동을 무심히 지켜보던 백운향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순간, 그녀가 그의 몸을 재빨리 안아들고 구멍 속으로 몸을 날렸다. 
둘 다 아득히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미심랑의 두 발이 소리 없이 지면에 닿았다.
희미한 야명주 불빛 속에 수없이 얽히고 설킨 미로(迷路)의 암도(暗道)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암도는 거미줄 형상으로 수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도 이곳은 처음이에요. 이 많은 석실 중 어디서 그를 찾지요?"
"내게 물으면 내가 알겠느냐?"
백운향은 이 일이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듯 체념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미심랑은 곱게 그를 흘겨보더니 신발을 벗어 들었다.
백운향이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가르쳐 주었잖아요. 이제 신발을 던져서 신발 끝이 가리키는 곳의 암도를 쫓아갈 수밖에 없어요."
미심랑은 그렇게 말하며 신발을 높이 던졌다.
그녀의 신발은 천정까지 닿은 후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몇 바퀴 굴러 정면의 암도를 가리키고 멈추었다.
"가요."
백운향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미소를 흘렸다.
하나, 그는 이미 그녀의 손에 끌려 정면 암도를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암도는 축축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로 숨결을 가쁘게 만들며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양측 벽에는 석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미심랑은 석실을 지나칠 때마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데, 석실 하나하나에는 진정 목불인견(目不忍見)의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썩어 가는 시체가 수북이 쌓여 있는가 하면, 어느 곳에는 실험용 토끼와 쥐가 거대한 철장 속에 갇힌 채 죽어 있고, 또 어떤 석실에는 각종 독물(毒物)들이 서로의 몸뚱이를 뜯으며 우글거리고 있었다.
미심랑의 몸에서 뽀얀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한지를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백운향은 그녀의 모습에 진한 연민의 정을 느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웠다.
"오늘이 며칠이냐?"
"스무여드레예요."
"시간이 없군. 어차피 이것은 도박이다."
백운향의 음성은 침중했다.
"이런 식으로는 열흘이 걸려도 그를 찾지 못한다. 내가 이곳의 구조를 보건데 모든 암도는 한 곳을 향해 이어져 있는 것 같다. 그냥 쭉 가보자."
미심랑은 그 말에도 일리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안아들더니 빠르게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아……!"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수십 장 넓이의 장방형 지하광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는데, 수백 개의 야명주(夜明珠)가 휘황찬란하게 그 지하광장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천의장 밑이 모두 지하 석실이로군. 역시 천 년 동안 안배해 온 곳답다."
"아!"
두 사람은 아연 경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지하광장의 맞은편으로부터 돌연 한 줄기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또 무엇을 더 얻으러 왔느냐? 이 천하의 역도(逆徒)야!"
창노한 노인의 음성은 지하광장을 웅웅 울리게 만들었다.
백운향과 미심랑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찾았어요."
미심랑은 그의 손을 와락 잡았다.
"이젠 나를 죽여라. 더이상 줄 것도 가져갈 것도 없다."
창노한 음성은 계속 악을 써댔고 그들은 음성이 들려 오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음성은 문 없는 조그만 석실 속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백운향과 미심랑은 성큼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번쩍! 먼저 고양이 눈을 연상시키는 두 개의 광망(光芒)이 그들을 흠칫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원독(怨毒)과 처절한 한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눈빛이었다.
백운향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원래 단약 제조의 마지막 공정을 하는 곳인 듯 제법 넓은 공간에 십여 개의 단약로(丹藥爐)가 있었고 그곳에서 약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 사이의 석대 위에 폐포노인이 앉아 있었다.
한데, 노인의 두 다리는 이미 절단된 지 오래인 듯 뭉텅 잘려 있었다.
"당신이 칠절의선이오?"
백운향은 무심히 물었다.
번갯불같던 한망(寒芒)을 뿜어대던 노인의 눈이 더욱 섬뜩하게 빛을 발했다.
"이놈이 이제는 또 무슨 연극을 꾸미려고……."
백운향이 더 큰 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은 눈이 없소? 내가 도대체 누구로 보인단 말이오?"
"이놈! 네놈이 섭안술(攝眼術)로 노부의 눈을 흩뜨려 놓고 무엇을 보란 말이냐?"
백운향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비록 강렬한 빛을 발하긴 했지만 노인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백운향이 노인 앞으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만져 보시오. 내가 그놈인지……."
실로 대담한 행동이었다. 
백운향은 자신을 곧 쳐죽일 듯한 기세로 욕설을 퍼붓는 노인 앞에 선뜻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미심랑은 당혹한 표정으로 백운향의 행동을 말리려 했다.
하나, 노인의 행동은 전광석화와도 같았다. 백운향의 손목은 이미 노인의 손에 거머잡혀 있었다.
노인은 득의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이놈, 이제야 분을 풀게 되는구나."
노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강철 같은 힘이었다.
"으윽!"
그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미심랑이 노인을 향해 덮쳐들었다.
한데, 그 순간 노인이 경악성을 터뜨리며 손의 힘을 풀었다.
"아니… 이…이게… 네놈이 언제 천인달리쇄락공과 마화독정에 당했느냐?"
노인의 안면 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으, 그리고 네놈은 누구이기에 천도관(天道館)의 의술이 네놈 몸에 베풀어져 있단 말이냐?"
노인의 손이 전광석화처럼 백운향의 전신을 훑듯 매만지기 시작했다. 
노인은 정녕 칠절의선이었다.
백운향이 처음부터 그토록 찾고자 했던 비운의 여인 설추련의 부친 칠절의선이 지금 폐허가 된 천의장 지하에서 폐인으로 썩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백운향은 이내 격정의 소용돌이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영락제의 안배로부터 황궁 모반과 지금껏 무림과 천하의 대소사(大小事)에 걸쳐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칠절의선의 표정이 오만 가지로 바뀌었다.
이윽고 그가 모든 이야기를 마치자 칠절의선의 가랑잎같이 마른 체구가 엎어졌다.
"오오! 대공(大公)……!"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동안 고생하시었소."
백운향은 칠절의선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그토록 험악하던 칠절의선의 표정은 공경의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칠절의선은 바로 천외약관, 즉 천도관에서 파견된 사람이지 않은가?
원래 황궁어의(皇宮御醫)였던 그에게 있어 백운향은 단연 윗사람이었던 것이다.
칠절의선의 손이 다시 백운향을 향해 뻗었다.
"우선 대공께서 공력을 되찾을 수 있는지부터……."
백운향은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의 몸을 더듬는 칠절의선의 얼굴에는 한 올의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 손을 거둔 칠절의선이 입을 열었다.
"대공, 독정(毒精)만 해독할 수 있습니다. 구엽독초(九葉毒草)가 빠져 있으니 그것은 쉽습니다. 하나, 대공의 몸에 그 동안 잠재해 있던 천인달리쇄락공이 이미 전신에 퍼져 버렸습니다."
"음……!"
"어떻게……?"
정작 다급한 것은 마화독정을 백운향에게 먹인 미심랑이었다.
칠절의선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뭔가 어려운 고심에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닫혔던 칠절의선의 입이 다시 열렸다.
"대공, 노부가 마화독정을 만들 때 그것에 한 가지 계략을 부려 놓았습니다."
"계략이라 하심은……?"
"만독(萬毒)을 해독할 수 있다는 곤령신엽(昆靈神葉)이 그것입니다."
"곤령신엽……?"
"곤령신엽은 독정의 효력을 어느 정도 저해합니다. 하나, 천하의 마화독정은 그것 하나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면……?"
"그것은 노부만이 해독할 수 있습니다. 우선 대공께선 옆의 석실로……."
백운향은 더이상 묻지 않고 석실을 나섰다. 
미심랑이 그 뒤를 따랐다.
칠절의선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낭자, 낭자는 노부를 도와 주어야겠소. 몸이 불편한 늙은이라……."
"예, 그러지요."
미심랑은 선뜻 돌아서며 대답했다.
옆의 석실은 칠절의선이 거처하는 침실인 듯 돌침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백운향은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초조하다. 이제 밖은 새벽 여명이 터올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 결전이다. 
그 안에 모든 공력을 회복하고 탄허평으로 달려가야 한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시간이거늘, 단 하루라는 시간이 이토록 귀중한 것인가?
어차피 죽음은 눈앞에 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다. 
이제 하루를 위해 살아야 한다.
백운향은 처음으로 하늘에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감은 두 눈꺼풀이 푸스스 잔떨림을 일으켰다. 
이 처절한 승부사가 하루라는 시간을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칠절의선도 몹시 서두른 듯 얼마 안 있어 약탕관을 들고 미심랑에게 안겨 들어왔다.
한데, 백운향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미심랑이 고개를 깊이 떨군 채 칠절의선을 침상 위에 내려놓은 뒤 얼른 돌아섰다.
"대공, 어서……."
칠절의선은 아직도 펄펄 끓는 약탕관을 백운향에게 내밀었다.
백운향은 앉은 자세로 뜨거운 약을 불지도 않고 후르륵 마셨다.
뜨겁다. 하지만 뜨겁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내 약탕관은 바닥까지 비워지고 칠절의선은 의미 있는 눈길로 미심랑을 바라보았다.
"낭자, 부탁하오."
말을 끝낸 칠절의선이 석실을 나왔다.
순간, 백운향의 눈에 의혹이 일었다.
미심랑이 몸을 돌렸다. 눈에 눈물이 솟고 있었다.
"아니, 웬 눈물이냐?"
백운향은 입 언저리에 묻은 약물을 닦으며 그녀는 바라보았다.
"울긴요, 기뻐서……."
미심랑은 그의 머리결을 쓰다듬어 올려 주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백운향은 깊은 의문을 느꼈다.
그때였다.
쏴아아…! 그의 단전으로부터 한 줄기 열기가 파도처럼 번지는가 싶더니 일순간 전신으로 퍼졌다.
백운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약…약에… 무엇을……?"
미심랑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손이 앞섶 단추 위로 올려졌다.
툭! 툭! 몇 개의 옷조각이 그녀의 몸을 떠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미심랑은 순식간에 나신으로 변해 백운향의 앞에 서 있었다.
"심…심랑… 너는… 도대체……?"
백운향의 음성은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혈맥이 시퍼렇게 툭툭 불거져 튀어 오르고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춘약(春藥), 칠절의선이 그에게 먹인 약에는 춘약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칠절의선이 의도적으로 섞은 것이라 그 강도가 대단했다.
나신으로 다가선 미심랑이 백운향의 의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백운향은 손을 들어 그런 미심향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의 육체는 그런 백운향의 의지를 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만큼 춘약의 힘은 강력했던 것이다.
미심랑의 나신이 서서히 다가왔다.
"심…심랑……."
백운향의 핏발 선 두 눈이 찢어질듯 부릅떠졌다.
'안 돼, 이건……?'
백운향은 가물거리며 그의 뇌리에서 벗어나려는 한 가닥 이성의 줄을 혼신의 힘을 다해 거머쥐었다.
미심랑의 매끄러운 나신이 그런 백운향의 이성을 안간힘을 다해 밀어 내기라도 하듯 백운향의 가슴 위로 미끄러지며 안겨 왔다.
미심랑의 살갗 위에 작은 돌기들이 일었다.
백운향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잡으려는 듯 입술을 힘차게 깨문다.
"심랑… 이…건……."
백운향의 입술은 더이상 아무런 말도 이어내지 못했다. 매끄러운 미심랑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어 버린 것이다.
헤엄치듯 미심랑의 혀끝이 백운향의 혀를 찾아 밀려 들어왔다. 
미심랑의 구름 같은 머리채가 쏟아지듯 운향의 얼굴을 간지럽히며 흘러내리자, 운향의 뇌리 한 구석에서 힘겹게 저항하던 그의 의식이 마지막 가닥을 놓고 멀어지고 있었다.
"운향……."
꿈결인 듯 심랑의 젖은 음성이 들려 왔다.
그 음성이 마치 도화선이라도 된 듯 백운향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미심랑의 매끄러운 나신을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미심랑의 나신 구석구석마다 작은 돌기들이 일어났다. 
아무리 작은 돌기라도 일단 백운향의 몸에 닿기만 하면 불에 지진 듯한 자국이 났다.
'언제나… 떨쳐 버리려고 했었는데… 내 몫이 아니라고… 그냥 어디서든 지켜보고만 있으려고… 혀를 깨무는 아픔 속에서도 그냥 그렇게 멀리서만 보고 있으려고… 운향, 내게도 하늘은 늘 무심하지만은 않았군요…….'
미심랑의 눈가로 한 가닥 물기가 비쳤다. 행여 백운향의 볼에 닿을까 그녀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백운향의 입술이 서서히 미심랑의 목을 타고 아래로 선을 긋듯 내려왔다.
미심랑은 어지러웠다. 
백운향의 혀가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미심랑의 고개가 활처럼 뒤로 꺾였다.
백운향의 어깨를 쥐고 있던 미심랑의 열 손가락이 자국을 내려는 듯 살갗 깊숙이 파고든다.
백운향의 혀가 더욱 아래로 향하자 떨리는 손이 백운향의 어깨를 힘껏 그러쥐며 미심랑의 몸이 새우처럼 굽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백운향의 억센 힘을 당해 내지 못하고 이내 사그러들고 만다.
백운향의 어깨를 놓친 미심랑의 손이 얼굴을 가리듯 감싸안는다. 마치 벼락맞은 참새처럼 미심랑의 전신이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백운향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미심랑의 나신 위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미심랑은 두 눈을 꼭 감고 백운향의 어깨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하마 님일까, 등불 밝혀 나갔더니
님은 안 오시고 배꽃만 피어 있네.
옥피리 잦은 가락에 가을 밤 샐 줄 몰라
달아, 나오지 마렴.
더딘 님 걸음 배꽃이 붙잡을라…….
미심랑의 허리가 휘어지듯 허공으로 솟았다.
백운향은 행여 놓칠세라 그 허리를 억세게 휘감는다.
파도가 밀려 오듯 미심랑의 전신으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몰아쳐 왔다.
어쩌면… 이렇게 그냥 끝이었으면…….
더이상 무엇을 더 바라랴?
그냥 이대로 세상의 끝이었으면…….
미심랑의 볼 위로 또르륵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운향의 숨결은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미심랑은 그것을 놓치면 영영 붙잡을 수 없기라도 하듯 백운향의 어깨를 힘껏 그러쥐고 있었다.
당신의 죽음 앞에 저의 죽음을 깔아드리옵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날을 번뇌 속에 보내시었습니까?
이제서야 안 저이기에 더욱 안타까울 뿐이옵니다.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일진데,
사랑한단 말 한 번 못했던 당신이었기에…
죄만 짓고 살았던 이 생이기에…
머리카락 뽑아 신을 삼아 영원히 당신의 종으로 살려 했던 여인이…
죽음으로 천하에 속죄하옵니다.
이 길만이 소녀의 한 맺힌 사랑을 승화시키는 길이오리다.
죽었다. 
한 줌 독수(毒水)로 녹아 사그러졌다.
그녀의 한도, 사랑도 그렇게 한 줌 혈수(血水) 속에 묻힌 채 참혹하게 죽었다.
그것은 찬연한 승화(昇華)였다.
자신이 뿌린 마화독정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 내고 그녀는 그렇게 죽었다.
곤령신엽을 마화독정 속에 넣었다는 칠절의선의 말은 거짓이었다. 
천인달리쇄락공이 전신에 퍼진 백운향을 해독시키는 방법은 천인달리쇄락공을 건드리지 않고 독정만을 그대로 빼내는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서, 칠절의선은 의도적으로 백운향을 속이고 약에 춘약을 탔던 것이다.
백운향의 인품으로 보아 백운향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자신이 죽으려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칠절의선의 말을 들은 미심랑은 그녀의 몸으로 마화독정을 받아 내길 자청했던 것이다.
아아! 숭고한 여심(女心)이여……!
백운향의 신형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의 얼굴은 어떠한 표정도 찾아볼 수 없이 굳어져 있었다.
"대공, 대공을 속였습니다. 그 길만이 천하를 위한 길이었기에……."
칠절의선은 그의 앞에 오체복지하고 열혈의 음성을 터뜨렸다.
"됐소."
음성은 나직했지만 떨리고 있었다.
"대공, 어서 떠나십시오. 밖은 벌써 스무아흐레 저녁 무렵입니다."
"의선께선……?"
"하늘과 땅에 죄를 지은 이 늙은이가 무슨 면목으로 밝은 빛을 볼 수 있겠습니까? 노부는 염두에 두지 마시고 어서 떠나십시오."
칠절의선은 자의든 타의든 마화독정을 제조한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백운향의 손이 그의 손을 잡았다.
"의선, 그것은 의선의 본의가 아니지 않소?"
"아닙니다, 대공. 그 경과야 어떻든 그것은 노부가 열 번 다시 태어나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의선……."
"노부는 그것으로 인해 또 하나 천추의 한을 남겼습니다."
또 무슨 한이란 말인가?
칠절의선의 초점 없는 노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맞잡은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노부가 뿌린 씨앗을 노부의 여식(女息)이 거둔 것이 그것입니다."
"추련이……?"
"대공께서 어찌 노부의 여식을……?"
몸을 떨고 있던 백운향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그녀가……."
"대공……?"
오히려 놀란 것은 칠절의선이었다.
백운향의 경악한 표정은 무엇을 말함인가?
칠절의선이 말이 이어졌다.
"노부의 여식 추련이가 어찌 알았는지 이곳까지 숨어 들었습니다. 크흐흐흑! 그 아이가 마화독정을 삼켜 버렸기 때문에 이젠 그들에게 마화독정이 없습니다."
백운향의 귓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추련이 죽다니… 영원히 죽지 않고 칼을 뽑아 들고 내 앞에서 자결하려 할 것 같던 그 추련이…….'
어허, 모두 죽는구나.
내가 제일 먼저 죽을 것 같더니,
그들이 먼저 가는구나.
그들은 나를 위해 죽어 갔는데,
나는 무엇을 해 줄꼬.
내 앞길에 깔린 죽음이 너무나 성결하기에,
이 길은 이리도 더디단 말이냐……?
섣달 초하루.
운명의 날이고 유난히 청명(淸明)한 날이다.
그러나 저 푸른 하늘은 곧 핏빛으로 물들 것이다.
탄허평(彈虛坪).
운명의 장소다. 피와 절규로 뒤범벅이 될 장소다. 
처절한 검광(劍光) 아래 배가 갈라질 장소다.
북으로 몇 개의 야산을 두르고, 남으로 장강(長江)의 푸른 물이 굽이쳐 흐른다. 
동과 서로 빗대어진 거대 광활한 공지는 지평선 속에 갇혀 있다.
탄허평의 너른 바닥은 길고 누렇게 퇴색된 잡초가 제멋대로 차가운 바람을 따라 흩어져 날고, 꽁꽁 언 땅에선 죽음의 비정함이 풀풀 일고 있었다.
항상 고요 속에 잠자 온 이 광활한 대지는 수억 년의 억겁을 털고 일어섰다.
중원의 구주팔황(九州八荒)과 변황(邊荒)의 십삼천(十三天), 서역(西域)의 이십사맥(二十四脈) 등 온 천하가 이곳 탄허평에 모였다. 
그야말로 탄허평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격전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대전(大戰)의 주역들이 동과 서로 나뉘어져 대치하고 있었다.
갖가지 복장으로 갖가지 병기(兵器)를 든 그들의 시선 하나하나가 번개가 치듯 굉렬하다. 
몰아치는 살기는 단연 장내를 압도하며 동에서는 서로, 서에서는 동으로 서로를 향해 휘몰아쳐 갔다.
아직 오시가 되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동서 양측의 중간 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핏줄기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그 살기에 눌렸음인가? 장내는 숨소리 하나 크게 내는 사람이 없었다.
숨막힐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를 짓누를 듯 도도히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동, 거대한 홍색 차일이 쳐져 있고 차일의 중앙부에 높은 석대(石臺)가 설치되어 있다.
석대의 좌우에는 도합 삼만여의 사람들이, 석대의 좌측으로 흑색 일색의 천마흑살대(天魔黑殺隊)가, 번뜩이는 일월쌍륜(日月雙輪)을 한결같이 어깨에 건 천마흑살대로부터는 가공할 묵빛 마기(魔氣)가 창천을 찢어발길 듯 피어 오르고 있었다.
석대의 우측은 반은 백색이고 반은 적색이다.
백색 무리의 가슴에는 흉측한 아수라 형상의 문장이 공포스럽게 찍혀 있고, 병기는 섬천거치도(閃天巨齒刀)를 들었다. 
이름하여 아수마령단(阿修魔靈團)이었다.
적색 장포인들의 가슴에는 단목(斷木)이라는 백색 글자가 선명하다. 
그들은 편액을 떼어 낸 천하사대세가(天下四大世家)가 합류한 단목세가(斷木世家)의 인물들이었다.
적색 장포의 흩날림과 청강어린도(靑剛魚鱗刀)의 번쩍임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섬뜩한 살기를 물씬물씬 풍겨 올리고 있었다.
석대의 중앙에는 단 이 인이 거대한 태사의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었다.
백의미청년과 적포미청년, 바로 사도천과 단목수였다.
동쪽 진영은 바로 이들 사도천과 단목수의 연합세력이었다.
바람이 분다. 차가운 바람이다. 차가운 바람은 서쪽과 동쪽을 가로질러 북에서 남으로 불어 내린다. 차가운 북풍(北風)이었다.
서, 차일은 없다. 그러나 서쪽 진영으로부터 피어 오르는 황금빛 광채는 동쪽 진영의 홍색 차일보다 더욱 광휘로와 보인다.
석대도 없다. 그들은 맨바닥에서 비장한 결의의 빛을 피우고 동쪽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영의 정중앙에 아름다운 여인 빙월교가 보였다. 
옥같이 깎인 얼굴에 한 겹 얼음막이 씌워진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좌로는 소림의 패룡옥불 이하 백팔나한과 수천 소림 승인(僧人)들이 자리해 있고, 우측으로 염주를 목에 건 미청년 여래공자 무원강과 그의 부친 무륭(武隆)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만여 무적신방(無敵神幇)의 방도(幇徒)들을 이끌고 있었다.
개방의 거지들 앞에는 대취신걸(大醉神乞)과 호취하가, 금색 바탕에 천룡(天龍) 문양이 수놓아진 깃발 아래 천룡승천문(天龍昇天門)의 문도들 앞에는 만통노인이, 무시무시한 은빛 대완구 위에는 은빛 피풍의(被風衣)를 휘날리는 사막십팔환영대가 자욱한 살기를 내뿜으며 동쪽 진영을 쏘아보고 있었다. 
한데, 백운향의 모습은 어디를 찾아 봐도 보이지 않았다.
빙월교의 표정이 초조하게 변했다. 그녀는 손을 채양처럼 눈 위에 올려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은 오시(午時)를 향해 일 각을 남겨 놓고 있었다.
일 각의 시간은 그녀의 바램만큼 길지 않았다.
둥－둥－둥－! 어디선가 스물네 번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확히 오시를 알리는 북소리였다.
"와와! 우와!"
북쪽 산등성이 위에 모여 있는 수십만의 군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 환호성에 답하기라도 하듯 동쪽 진영으로부터 한 떼의 무리가 노도처럼 턴허평 중앙을 향해 달려나왔다. 
섬전거치도의 아수마령단이었다.
언 땅 위에서 뽀얀 먼지가 풀석풀석 일었다. 실로 가공할 기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서쪽 진영에서 대갈일성이 터져 나왔다.
"천룡승천문도들은 천 년 동안 잠자 온 힘을 보여 줘라!"
항상 인자했던 만통노인의 수염이 빳빳이 섰다.
그의 음성이 끝나자 천 명 정도의 천룡승천문도가 대열을 박차고 뛰쳐 나왔다.
"와와－! 우와－!"
거대한 두 개의 세력이 광풍노도와 같이 휘몰아쳐 나갔다.
꽝! 우르릉! 꽝! 
두 개의 세력이 정중앙에서 맞부딪쳤다.
대접전의 서막(序幕)!
최초의 피는 두 개의 세력이 마주친 직후 정중앙에서 튀어 올랐다.
하나, 그 피는 또 다른 피에 감춰졌고, 비명성은 연이어지는 비명성과 병기 부딪치는 소리에 감춰졌다.
천룡승천문의 잠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거의 세 배에 가까운 적과 어울리면서도 평수(平手)를 유지하며 버티고 있었다.
둥둥둥－! 양쪽 진영에서는 싸움을 돋우는 요란한 북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리고 함성과 비명성은 점차 높아졌다.
천룡승천문의 기세가 하늘마저 꿰뚫을 듯 높았지만 역시 다수의 힘은 강했다.
섬천거치도를 휘두르는 아수마령단은 사악한 마공과 함께 힘으로 천룡승천문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만통노인이 서릿발처럼 휘두르던 천룡승천기가 너덜너덜 걸레처럼 찢기우고, 각석수가 철웅에게 안겨 급히 진영으로 돌아오는 도중 죽었다.
빙월교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그분이 올 때까진 최대로 힘을 아껴야 돼."
그녀는 이 상황에서도 백운향이 틀림없이 나타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때 성질 급한 호취아가 그녀 곁으로 다급히 달려왔다.
"재녀! 천룡승천문을 생으로 죽이려 하는 거요? 빨리 다음 대책을……."
호취아의 말대로 천룡승천문의 대열은 거의 흩어지고 있었다.
"호취아, 북을 쳐요."
그녀는 호취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여래공자의 손에 들려 있던 은색 깃발을 받아 들었다.
둥－둥－둥－! 북소리가 울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천룡승천문도들은 황급히 철수를 시작했다.
아수마령단은 도주하는 천룡승천문도들을 쫓아 벌 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거의 서쪽 진영 오십 장 밖까지 아수마령단이 몰려들었을 때, 빙월교의 손이 은색 깃발과 함께 힘차게 들어올려졌다.
"사막십팔환영대!"
짤막하고 날카로운 교갈이 떨어지고 일순간 대완구의 말굽소리가 천지를 개벽시킬 듯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투투투투투－!
약 이천여 두(頭)의 은빛 대완구와 은빛 피풍의인들이 아수마령단을 향해 짓쳐들었다. 
천여 두가 넘는 대완구와 대완구 사이 사이에는 거대한 통나무들이 말을 따라 구르고 있었다.
그 통나무들은 아수마령단의 십여 장 전면에 이르렀을 때 돌연 쾅, 하며 터져 버렸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불길이 일었다.
화－르－륵! 새카만 연기가 천지를 감쌌고, 그 연기 속에서 독사의 혓바닥처럼 이글거리는 불길들이 수십 장 높이로 치솟아 올랐다.
"와와와－!"
콰콰콰콰콰－! 
사막십팔환영대의 화염 공세에 놀란 아수마령단이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나, 어찌 사람이 말보다 빠를 수 있으랴?
파파파파! 우지끈! 툭툭!
아우성 소리, 비명 소리, 뼈 부러지는 소리, 뛰는 놈, 나는 놈, 짓밟히는 놈, 죽는 놈…….
아아! 그것은 목불인견의 지옥의 참상이었다.
일순간 전장(戰場)은 불바다로 화했다.
그때 동쪽 진영에서 또 다른 함성이 일며 한 떼의 무리들이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어 귀를 찢는 소성이 불바다 속에서 일었다.
팽－! 피융－!
"으아악!"
"아아악!"
수천 수만의 암기들이 불바다 속을 누비며 사막십팔환영대를 대완구 위에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손 한 번 써 볼 틈도 없이 사막십팔환영대는 속절없이 거의 반수가 불꽃 속에 나뒹굴었다.
빙월교의 손이 번쩍 들렸다. 청색 깃발이 햇살 아래 펄럭였다.
그러자 금빛 화살 하나가 허공 높이 솟구쳐 올랐다.
"무적신방의 무적강궁대(無敵强弓隊)는 나를 따르라!"
금빛 도포를 입은 무륭이었다. 
그의 뒤를 쫓아 손에 손에 금빛 강궁을 든 무적신방의 방도들의 일부가 파도처럼 밀려 나갔다.
피융－! 핑－! 이미 황금빛 화살이 창천을 뒤덮고 있었다.
"크아악!"
"으아악!"
한 대의 화살은 정확히 백의인들의 가슴에 한 대씩 꽂혀들었다.
격전은 실로 예측불허였다. 밀고 밀리고, 아우성치고, 피 토하며 죽고, 급전에 급전을 거듭해 갔다.
하늘의 태양은 오시를 지나고 미시(未時)를 지나면서 차츰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쪽 차일 석대 위, 가공할 마기(魔氣)를 뿌리며 앉아 있던 사도천의 핏빛 혈안이 단목수에게로 돌려졌다.
"싸움은 끝났다."
음성에서마저 을씨년스런 사기(邪氣)가 풀풀 날렸다.
"천존, 이번만은 천존의 대계(大計)가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적포미청년 단목수는 격전장에서 시선을 돌려 사도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진정 존경의 빛이 가득 서려 있었다.
"크크ㅋ! 심랑이 제 몫을 했다."
"그는 오지 못할 것입니다."
"추련, 그 계집만 아니었다면 이런 구차한 싸움조차 필요 없었을 텐데… 지독한 계집, 독정을 삼키다니……."
설추련이 마지막으로 완성된 독정을 먹어 버린 것에 대한 말인 듯했다.
또다시 사도천의 입이 열렸다.
"더 볼 것도 없다. 그는 못 올 것이고, 만약 온다 해도 수좌태상(首座太上)과 이태상(二太上)이 지키는 길목을 뚫지 못할 것이다. 수아, 네가 마무리를 짓도록 해라."
사도천은 이미 이 대공방의 결말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핏빛 괴기가 흘러 넘쳤다.
한데, 그가 말한 그란 누구인가? 
그건 바로 백운향을 말함이리라.
푹! 세 치 길이의 대나무 침이 허벅지 살을 파고들었다.
푹! 퍽! 연이어 두 개의 대나무 침이 양쪽 종아리에 깊숙이 꽂혔다.
그는 벌써 다섯 대의 죽침(竹針)을 마비되는 하체의 구석구석에 자신의 손으로 쑤셔박았다. 
그것은 점차 감각을 잃어 가는 하체의 감각을 되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휴……!"
신음 한 번 내지 않던 갈의 흑발인의 창백한 이마 위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길게 한숨이 불어 나왔다.
그는 일어섰다.
"제길, 조금만 더 참아 다오. 천인달리쇄락공이 나를 막는다면 나는 기어서라도 간다."
갈의 흑발인은 바로 백운향이었다.
백운향은 고개를 들어 함성과 비명이 이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하나의 산이 가로막혀 있었다.
점차 잃어 가던 하체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시간은 이미 신시(申時)로 접어들고 있었다.
백운향은 어젯밤부터 꼬박 한 시도 쉬지 않고 장장 천여 리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하나, 그도 사람인지라 반나절 만에 이곳에 도착하기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만큼의 시간에 도착한 것도 환허환상무(幻虛幻像舞)를 지닌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한 줄기 괴소가 백운향의 귓전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크흐흐……!"
백운향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무려 오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앞을 꽉 가로막고 있었다.
"너희들은……?"
맨 앞쪽에 선 흑의인이 살기 어린 눈으로 싸늘하게 외쳤다.
"천마탈혼대(天魔奪魂隊)!"
"나를 막기 위해 사도천이 보낸 자들이로군!"
"잘 알았으면 어서 목숨이나 내놓거라!"
흑의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백운향을 향해 덮쳐들었다.
백운향의 두 눈에서 섬뜩한 살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너희들은 나를 막을 수 없다! 나의 앞길을 막는 자들에겐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
말과 함께 백운향의 오른손이 흑의인들을 향해 맹렬히 휘둘러졌다.
"으악!"
"아아악!"
소름끼치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백운향에게 덮쳐들던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이리저리 날아가서 거꾸러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백운향은 지체없이 몸을 날려 앞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흑의인들이 대경하여 소리쳤다.
"진로를 차단하라!"
"놈을 보내서는 안 된다!"
한순간 주춤하고 있던 흑의인들은 재빨리 백운향의 앞을 막아서며 사나운 공세를 펼쳐 왔다.
순간, 백운향의 두 손이 또 한 차례 둥근 원을 그려 내자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흑의인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져 앞길이 어느 정도 트이자 백운향은 비호처럼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흑의인들의 봉쇄는 집요했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백운향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휘둘러 왔다.
파파파파팟! 무수한 검광이 허공 가득 번져 올랐다.
백운향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양손을 휘둘렀다.
"크아아악!"
또다시 단말마의 비명이 긴 꼬리를 물고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백운향은 흑의인들을 닥치는 대로 주살하며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그의 양손이 한 번씩 허공을 쓸어 낼 때마다 선혈이 비처럼 뿌려졌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 해!'
백운향은 천인달리쇄락공이 발작하기 전에 탄허평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에 흑의인들에게 가공할 살초(殺招)를 연신 퍼부어댔다.
"천존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 죽음으로써 놈을 막아야 한다!"
백운향을 막고자 하는 흑의인들의 일념 역시 놀라운 것이었다.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 그들은 서슴없이 목숨을 버리고 있었으니…….
'사도천! 그대는 진정 잔인하구려. 그래도 난 그대가 영웅이라 믿었거늘, 자신의 야욕을 위해 수하들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백운향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돌연 그의 입에서 하늘을 쩌렁 울리는 대갈이 터져 나왔다.
"뇌정태양무(雷霆太陽舞)－!"
그 순간이었다. 
그의 손 장심(掌心)으로부터 수천 수만 개의 현란한 태양이 터져 나왔다.
번쩍! 쿠쿠쿵!
"으아아아악!"
가공할 광채와 굉음, 그리고 지옥유부에서 울리는 듯한 참혹한 비명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벌 떼처럼 덮쳐들던 흑의인들이 번개라도 맞은 듯 사방으로 날아가더니 썩은 고목처럼 거꾸러졌다.
백운향의 몸이 비틀하는가 싶더니 털썩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무너졌다.
"헉헉……."
그의 입에서 가쁜 숨결이 토해졌다.
'빌어먹을! 천인달리쇄락공의 기운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지고 있어.'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가야 한다. 여기서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그때였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백운향의 귓전으로 한 줄기 자상한 음성이 파고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이야, 너는 진정 영웅이로구나.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백운향은 음성이 들려 온 방향으로 빠르게 시선을 던졌다.
그의 전면 십여 장 앞 노송 아래 두 명의 회의노인이 바위 위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일견해 보기에도 탈속한 풍도를 지닌 노인들이었다.
허연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져 있고, 눈썹마저 백미(白眉)였다.
굳이 두 노인을 분간하려 한다면 좌측의 노인은 얼굴색이 대추빛 홍안(紅顔)이고, 우측 노인은 하얀 백면(白面)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와 술 한 잔 하지 않으련?"
홍안노인이 다정하게 말했다.
백운향은 신형을 번뜩여 그들의 앞에 내려섰다.
백면노인이 표주박을 내밀었다.
"유치한 장난은 치워라!"
백운향이 힘있게 소리쳤다.
두 노인의 신형이 똑같이 삼 장 밖으로 날아 내렸다.
"너는 못 간다."
홍안노인이 표정 없이 말했다.
"물론 너의 조금 전 기세로 보아 우리는 죽는다. 하지만 우리가 죽을 때는 이미 천하는 천존의 손에 들어간 후다."
백운향의 귓전으로 함성과 함께 노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대들은……?"
백운향의 심유한 눈길이 두 노인을 번갈아 보았다.
"천문 태상호법(太上護法)!"
백면노인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백운향의 갈의가 부풀어올랐다. 그의 전신에 금광(金光)이 어렸다.
두 노인은 빠르게 양쪽으로 갈라섰다.
장심(掌心)을 가슴까지 치켜든 노인들의 눈이 짙은 녹광(綠光)을 띠기 시작했다.
"그대들도 역시 사도천의 사주를 받았군."
음성의 뒤를 이어 백운향이 손이 벼락같이 내뻗었다. 
검(劍)을 갖지 않고 심력(心力)으로 검을 펼쳐 낸 것이었다. 
그것은 달마사검(達摩四劍)이었다. 검이 없이 펼쳐지기에 달마무검(達摩無劍)이라 칭하기도 하는 달마사검이 천 년의 세월을 격하고 드디어 백운향의 손에 의해 펼쳐진 것이었다.
"헉!"
"헉!"
두 노인은 똑같이 헛바람을 불어 냈다.
전설의 달마사검은 진정 가공 경이했다. 변식도 없이 펼쳐진 평범한 달마사검이었건만 사위는 순식간에 살을 에일 듯한 찬란한 금광(金光)으로 자욱이 뒤덮였다.
두 노인의 신형이 번개처럼 갈라지며 두 손을 나란히 뻗었다. 
취록색 광채가 황금색 빛살 사이로 내리꽂혔다. 바로 취록혈강이었다.
카카카캉! 격한 불꽃이 튀어올랐다.
그때였다. 
세 개의 신형 사이에서 섬뜩한 오광(烏光)을 발하는 두 개의 물체가 솟아 올랐다. 
그것은 백운향의 몸에서 튀어 나온 것이었다.
천룡승천문의 두 개의 흑호접(黑蝴蝶)은 흑선(黑線)이 되어 두 노인을 향해 날아갔다. 
흑호접이 너무도 빨리 날아온 탓에 두 노인은 흑호접이 면전으로 날아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아챘다.
그 순간 두 노인은 급격히 신형을 비스듬히 띄워 올리며 취록혈강을 발출했다.
캉! 캉! 취록혈강에 맞은 흑호접은 바닥을 향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으헉!"
"헉!"
두 노인은 겨우 흑호접을 쳐내고 신형을 안정시킬 때 환상처럼 다가오는 묵광(墨光)을 보았다.
백운향은 어느새 허리에 차고 있던 무영혈라도(無影血羅刀)를 뽑아 들고 그들을 쓸어 오고 있었다.
두 노인은 완전히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주름진 얼굴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들은 취록혈강을 펼칠 사이도 없이 바닥 위로 납작하게 엎드려 겨우 무영혈라도를 피해 냈다.
한데, 그때였다. 
파팍! 허공에서 취록혈강과 맞부딪쳤던 흑호접이 바닥에 닿으며 불꽃을 튕겼다.
"으억!"
"커억!"
피하고 어쩌고 할 새도 없었다. 
두 마리 흑호접은 이미 두 노인의 정수리를 그대로 관통하고 지나간 것이다.
"그대들과 오래 어울리고 싶었지만 내겐 시간이 없었다."
백운향의 음성은 이미 함성 속에 묻혀들고 있었다.
"으, 끝…끝장……."
"처…천…존… 끄르륵!"
두 노인의 안간힘을 따라 뻥 뚫린 정수리에서는 허연 뇌수와 함께 핏물이 뭉텅뭉텅 솟구쳤다.
그리고 죽었다. 열혈과 충정의 일념으로 살아온 천문의 삼태상 중 이태상은 먼저 간 삼태상의 뒤를 따라 그렇게 죽었다.
함성 속에 저녁노을이 죽음 위로 깃들고 있었다.
귀거래사(歸去來辭)
피(血), 피가 튀었다.
살(肉), 살이 분분이 날았다.
뼈(骨), 뼈 부서지는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탄허평은 그야말로 아수라지옥도(阿修羅地獄圖)였다.
불꽃이 타오르고 연기가 자욱한 속에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성이 합창처럼 들렸다.
오시부터 이어지던 팽팽한 접전의 균형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목세가와 천마흑살대가 일시에 전장으로 뛰쳐나오면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힘을 아끼고 어쩌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드디어 핏빛 노을 속에 동서의 양 진영은 피 튀기는 총력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쪽 진영의 차일 밑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석대 높이 앉아 있는 사도천과 그를 호위하는 백여 명의 흑의인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크크크ㅋ……!"
사도천은 연신 만족의 괴소를 흘려 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싸움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낙관이 가져다 준 괴소였다.
그와 반대로 서쪽 진영에는 암울한 기운이 덮여 있었다. 
빙월교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으며, 호취아는 연신 술호로를 거꾸로 세우고 있었다. 
서쪽 진영에는 오직 그들 두 명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빙월교는 쉴 새 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호취아가 술호로를 입에서 떼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 양반이 어디서 무얼 하기에… 젠장, 그놈의 모극랑놈만 끝까지 도와 주었어도 한숨 돌릴 여유는 생겼을 텐데……."
"그를 탓하지 마세요. 그의 심정으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도대체 무엇이 어쨌다는 것인지……."
호취아는 또다시 벌컥벌컥 술을 마셔댔다.
모극랑은 탄허평 결전을 전한 뒤 스스로 도화도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는 돌아가기 전 빙월교에게 모든 사실과 함께 자신은 이제 더이상 사도천에게 칼을 들이댈 수 없노라 했다.
그 말을 들은 빙월교는 말없이 그를 보내 주었던 것이다.
싸움은 급전직하를 달리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승자와 패자가 엇갈리는 급전으로 치달리는 것이었다. 
서쪽의 세력은 거의 흩어졌고, 소림의 패룡옥불이 이끄는 백팔나한진과 대취신걸이 이끄는 개방의 자죽연환진(紫竹連還陣)만이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목수와 여래공자 무원강의 일대 접전이었다.
혈검(血劍)과 혈편(血鞭)으로 마기를 몰아치는 단목수와 항마백팔염주(降魔百八念珠)로 박대정심한 불문(佛門) 무학의 정화를 피워 올리는 여래공자는 가히 무림 최고 고수들다운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아가서 그들의 대결은 정(正)과 사(邪)의 도(道)를 건 한판 승부였다. 
그렇기에 그들의 결전은 더욱 경천동지할 대접전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결전을 벌이는 사십여 장 밖에 있는 것들이 모두 가루로 바스라져 날았다.
하지만 그들의 결전 이외의 싸움에서는 이미 결판이 나고 있었다. 
천마흑살대의 일월쌍륜(日月雙輪)은 태양같이 몰아치며 어김없이 허공으로 수급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빙월교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이제 더이상 백운향을 기다린다는 것은 헛된 생각이었다.
호취아의 투덜거림은 여전했다.
"제길, 콱 죽어 버렸어라! 재녀, 아직도 그 양반을 기다리시오?"
빙월교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이제 마지막 남은 희망을 포기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때였다.
"월교, 너는 틀렸다. 나는 왔다."
음성과 함께 백운향이 그녀의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당신, 도대체……?"
빙월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호취아가 들고 있던 술병을 냅다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에이그! 꼴도 보기 싫어."
백운향의 굳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취아, 철수 명령을 내려라."
"예?"
"싸움은 곧 끝난다. 저렇게 많은 피를 나는 원치 않는다. 정이든 사든 죽음이란 슬픈 것이다. 어서……."
잔잔히 흘러나오는 음성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호취아는 자신도 모르게 북채를 주워 들었다.
"월교, 그 동안 수고했다."
"괜찮아요. 당신이 오셨으니……."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빙월교의 음성은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그때 호취아의 북채를 쥔 손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쿵－쿵－쿵－! 북소리가 탄허평 핏빛 노을 속으로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목숨을 불사하고 적을 맞아 싸우던 서쪽 진영의 사람들이 서둘러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나, 천마흑살대의 추격은 집요하고 악랄했다.
"으아악!"
"아아악!"
둘아서던 사람들의 등에서 피분수가 쉴 새 없이 솟구쳐 올랐다. 
백운향의 안면 근육이 파랗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사－도－형－!"
불문의 창룡신후(蒼龍神喉)였다.
창룡신후는 처절히 튀어 오르는 피무지개를 격하고 동쪽 진영으로 날아갔다. 
순간, 동쪽 진영에서도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둥－! 철수의 북소리였다.
북소리가 울리자 처참한 도륙을 벌이던 천마흑살대는 질서정연하게 썰물같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백운향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주위로 온통 피에 얼룩진 서쪽 진영의 사람들이 겹쳐 지나갔다.
백운향의 겉옷이 날아가며 갈의 밑에 감춰져 있던 천잠보의(天蠶寶衣)가 찬란한 오광(烏光)을 드러냈다. 
허리에 찬 무영혈라도가 웅웅거리며 도성(刀聲)을 토해 냈다.
저벅! 저벅!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의 발걸음이 동쪽을 향해 계속 옮겨졌다.
그때 동쪽 차일 밑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사도천이었다. 
석양의 노을을 정면으로 받으며 백운향을 향해 마주 걸어오는 사도천의 백의가 노을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보였다. 그 위로 가공할 기류가 퍼져 흘렀다.
하루 종일 광란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던 탄허평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곧 터져 버릴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서로 마주보고 걷는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까지 들릴 듯한 정적이었다.
거리를 좁히며 걸음을 옮겨 가던 두 사람은 드디어 탄허평 정중앙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멈춰 섰다.
한 줄기 혈향(血香)을 실은 바람이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사도형, 오랜만이오."
백운향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크ㅋ!"
사도천의 입에서 핏빛 괴소가 흘러나왔다.
"많이도 죽였구려."
"석중리… 아니 백운향, 너는 나를 너무도 많이 놀라게 하는구나. 크ㅋ……!"
"당신은 역시 영웅이오. 아직도 내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 주다니……."
"크ㅋ! 그럼 오직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이름을 몰라서야 되겠느냐?"
사도천의 음성은 담담했다. 마기마저 갈무리되어 있었다.
백운향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사도형, 나는 곧 죽소."
사도천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사도형, 우리 같이 갑시다."
백운향의 말은 그가 오늘 사도천을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크크카카캇……!"
그 말을 들은 사도천은 당치않다는 듯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광소에 따라 핏빛 마기가 치솟아 올랐다. 살을 에일 듯한 극한 마기였다.
백운향의 천잠보의가 바람도 없는데 심하게 펄럭였다.
백운향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도천의 광소는 가공할 음공(音功)의 정화였던 것이다.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다.
"크카카카칵!"
광풍노도와 같은 음공에 맞서 백운향의 손이 앞을 향해 곧게 뻗어졌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손이었다.
번쩍－! 짤막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달마무검(達摩無劍) 중 인검(人劍)이었다.
광채는 핏빛 음공의 막을 향해 부딪쳐 갔다.
파바박! 중간 지점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사도천의 광소가 뚝 멈추었다.
"달마사검을 익혔군! 하나, 그것으론 안 된다!"
사도천의 얼굴이 번쩍번쩍 청동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가슴 앞에 세워진 손에는 취록색 광채가 스산하게 어렸다.
'음! 두 노인의 십 배 위력이다!'
백운향은 방심하지 않고 전신 공력을 두 손에 모았다.
"취록혈강(翠綠血 )－!"
"뇌정태양무(雷霆太陽舞)－!"
두 개의 쩌렁한 외침이 탄허평의 긴장된 공기를 산산이 깨뜨리고, 그보다 더 큰 굉음이 뒤를 이었다.
쾅－! 콰르르르릉－!
두 사람의 몸이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지면에서 한 자 위로 떠올랐다.
"칠채천마혼(七彩天魔魂)－!"
눈알을 터뜨려 버릴 듯한 무지개빛 강기살이 극렬하게 뻗어 왔다.
"환허환상무(幻虛幻像舞)－!"
눈부신 백광(白光)이 수백 줄기 일었다.
카카카캉－! 금속음이 울리며 그들의 몸은 두 자 위로 떠올랐다.
떠올랐으되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고 떠 있는 것만도 가히 경악할 만한 신기였다. 
그들은 연신 인간 이상의 무학을 펼쳐 내고 있었던 것이다.
"으, 오대파천무가 네게 모이다니……."
"후후, 오대파천무뿐만이 아니지. 자, 불사경혼수(不死驚魂手)를 받아 보시지."
"불사경혼수……?"
사도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미 백운향의 손이 기이한 각도에서 도끼로 장작을 패듯 휘둘러졌다.
소리도 없다. 빛도 없다. 단 한 번의 평범한 손놀림이었다.
한데, 사도천은 일순간 그의 전신이 백운향의 손 그림자에 둘러싸여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불사경혼수의 한 초 속에 칠백이십 초가 숨겨 있었던 것이다.
하나, 사도천은 역시 사도천이었다. 또한 불사경혼수를 잘 알고 있는 천마대제의 후예였다.
"천마회선강(天魔廻旋 )－!"
화르르륵! 그의 몸이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핏빛 강기살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뻗었다.
일순간 그의 전신으로 짓쳐들던 불사경혼수가 천마회선강의 혈강에 모두 차단되고 말았다.
'으음! 불사경혼수에 철저히 대비했군.'
백운향은 내심 탄성을 불어 내며 벼락같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한데, 사도천의 얼굴은 이미 백운향의 코 앞에서 웃고 있었다.
백운향은 이빨을 악물고 전신 공력을 장심(掌心)으로 몰아쳤다.
"천룡승천무(天龍昇天舞)－!"
금빛 강기살을 따라 천룡이 춤추듯 날아올랐다.
"천마일심혼(天魔一心魂)－!"
꽝－! 꽈꽝－! 쾅쾅－!
"윽!"
"헉!"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나직한 신음이 터지며 허공에서 일 장씩 튕겨났다가 빛살처럼 다시 맞붙었다.
우르르르릉－! 콰쾅－! 번쩍!
쉴 새 없이 쏟아지던 절세기학(絶世奇學)과 광세기학(曠世魔功)들…….
"아아! 인간의 무학(武學)이 아니다!"
"오오! 헛살았도다!"
"어찌 인간의 몸으로……!"
땅이 갈라지고, 백 장 밖 혈수로 인해 붉게 변한 핏빛 강물이 끓어 넘쳤다.
북쪽 산등성이에 멋모르고 앉아 있던 참관자들 중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날아드는 광풍에 날려갔다.
진정 경천동지할 대격전이었다.
빙월교는 도저히 볼 수 없다는 듯 언제부터인지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호취아의 불끈 쥔 손아귀를 타고 핏물이 주르르 떨어져 내리고, 패룡옥불과 여래공자 무원강은 죄 없는 염주를 연신 바스러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변했다.
"오오……!"
"내…내공(內功)을……!"
보라! 두 사람은 지금 허공에서 두 손을 맞붙인 자세로 꼿꼿이 지면을 향해 서서히 떨어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의 입이 커질 대로 커지고 부릅뜬 눈꼬리에서는 핏물이 흘렀다.
두 사람이 지면 일 장 높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백운향의 신형이 허공으로 쭉 떠올랐다.
그것은 자살행위였다. 내공을 겨루다 먼저 손을 떼는 것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금기(禁忌)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백운향의 입에서 한 줄기 피화살이 뿜어졌다.
사도천이 득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그는 백운향을 쫓아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쳐 올랐다.
"아!"
"저…저……!"
서쪽 진영에 포진해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고막을 터뜨릴 듯한 일성 고갈이 굉렬히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도천! 가라!"
천지가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아득했다.
백운향은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흑색 흑호접이 날고, 천상의 선음(仙音)이 은은히 울려 퍼졌으며, 그의 몸에 걸친 천잠사가 한 줄로 풀어져 내렸다.
오오! 전설의 오대파천무!
그 전설의 신공(神功)이 지금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달마사검과 불사경혼수마저 합쳐지니 천하에 누가 있어 이것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없다. 단연코 아무도 없다.
사도천의 얼굴은 밀납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반항의 몸짓으로 오른손을 극렬히 쳐냈다.
"지옥천마살(地獄天魔殺)－!"
푸화아악－! 사도천의 신형이 백운향의 춤 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푸스스스…! 무엇인가 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
"크아아아악－!"
사도천의 신형이 쏘아져 나갈 때보다 더 빨리 뒤로 튕겨져 나왔다.
쿵! 그의 신형이 고목이 쓰러지듯 바닥을 굴렀다.
그의 옆으로 백운향이 비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잘 가시오."
무심한 음성을 따라 겨우 들려지던 사도천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화르르륵! 그가 고개를 꺾는 순간 그의 몸은 일시에 불길에 휩싸였다.
죽어서 결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그는 마지막 남은 공력으로 삼매진화(三昧眞火)한 것이다.
아아! 허무한 생(生)이여!
일세의 효웅 사도천은 그렇게 죽었다.
백운향의 신형이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그의 전신에서 피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정신이 아득하다.
그의 귓전에 커다란 음성이 들려 왔다.
"천존의 원수를 갚아라!"
단목수의 음성이었다.
"와와! 죽여라!"
"죽여라!"
주인을 잃은 천문의 문도들이 벌떼처럼 백운향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들을 막아라!"
"모조리 주살하라!"
동쪽 진영에서도 함성이 일었다. 
또다시 격전인가?
한데, 그때였다.
"모두 멈추어라!"
차가운 여인의 교갈이 함성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중앙을 향해 치닫던 사람들의 시선이 음성이 들려 온 곳을 향해 돌려졌다.
탄허평 위로 무려 십만여에 달하는 금갑인(金甲人)들이 유령처럼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황궁의 비밀 세력인 금궁천위대(禁宮天衛隊)였다. 
그들 앞에는 혜량공주와 승상어사대부(承相御使大夫)의 모습이 보였다.
승상어사대부는 관복 차림에 두 손으로 무엇인가를 정중히 받쳐 들고 탄허평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혜량공주는 그와 달리 서둘러 백운향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백운향을 조심스럽게 안아 일으켰다.
"당신 이제 쉬셔야겠어요."
"그래야 될 것 같구려."
"뒷일은 제게 맡기세요."
"안 그래도 그래야겠구려."
"당신을 월교 곁으로 데려다 주겠어요."
백운향은 피범벅이 된 얼굴에 실낱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빙월교가 다가섰다.
백운향의 풀어진 시선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월교… 애썼다."
"당신 좀 다치셨군요."
빙월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백운향을 부축해 일으켰다.
"혜량……."
백운향이 혜량공주를 불렀다.
혜량공주의 얼굴에 처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잘 가세요. 당신이 죽는 날 저도 죽어요."
"죽음이란 말… 하지 맙시다."
백운향은 빙월교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섰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승상어사대부가 영락제의 칙서를 읽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내린다. 바람이 분다.
백운향과 빙월교는 서로에게 몸을 의지한 채 강물 속으로 들어섰다.
강물은 차다.
"월교, 너의 아버지를 어찌할 생각이냐?"
"……."
"용서해라."
"……."
"세상에 용서란 말보다 따뜻한 것은 없지."
"저는 이미 그분을 용서했어요."
강물이 가슴까지 차올랐다. 이제 강물이 차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월교, 죽음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죄악이에요."
"후후, 너는 또 틀렸다."
"아니예요. 이번엔 당신이 틀렸어요."
빙월교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월교, 죽음은 숙명이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나 그렇지요."
"그럼 너는……?"
"당신의 숙명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저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죽는다."
"안 죽어요."
"천인달리쇄락공은 이미 나를 죽이고 있다."
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당신은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천하에서 제일 똑똑한 계집이지."
"그래요. 저는 똑똑해요. 그래서 당신을 살릴 수 있는 방법 또한 알고 있어요."
"후훗……."
백운향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실소를 흘려 냈다.
바로 그때 빙월교는 돌연 두 팔로 백운향을 힘껏 부둥켜안고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대화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문득 강 건너로부터 한 줄기 시구를 읊는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자, 돌아가리라.
이제껏 자신의 존귀한 정신을 천한 육체의 노예로 삼았으나, 어찌 슬퍼 탄식하여 홀로 서러워할 것이랴.
지나간 인생은 후회해도 이미 쓸데 없음을 깨달아,
장래 인생을 쫓아갈 수 있음을 알았다.
실상 내가 인생길을 갈팡질팡한 것은 오래지 않았으나,
지금이 바른 삶이오, 어제까지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다.
고향 가는 배는 흔들흔들 움직여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솔솔 옷깃에 불어 온다.
길손에게 고향이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새벽빛 아직 희미하여 길 떠나지 못함을 한스러워한다.
마침내 우리 집 지붕을 보고,
기뻐서 뛰어갔다.
술이 독에 가득 담겨 있다.
항아리와 잔을 끌어당겨 자작하며,
정원의 나무 바라보고는 웃음짓는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무릎이나 들어갈 좁은 방이라도 편안히 있을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았다.
동산은 날마다 취향 있는 경치로 바뀌고,
때때로 머리 들어 주위를 살피며 즐긴다.
구름은 산 속에서 나와 흘러가고,
새는 날기가 싫증나 둥지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저녁 햇빛 그늘져 서산에 지려 하고,
나는 마당의 외솔을 쓰다듬으며 거닐고 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