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세가(1) 대륙의 서(序) 신화(神話). 그것은 천년대륙(千年大陸)을 지배해 온 피(血)와 죽음(死)의 율법 가운데에서 만들어졌다. 가공전율한 신화를 남긴 절대자, 절대지(絶代地)들. 그 위대한 폭풍은 천 년(年)을 두고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신화는 이제 시작된다. 피와 죽음의 율법 가운데에서 날아오르는 군룡(群龍)의 야망에 가득 찬 승부의 이야기는 이제 아무도 중지시키지 못한다. 중원(中原)의 전설… 장검(長劍)으로 대륙(大陸)에 신화를 새겨 넣은 절대자, 절대방파들의 위대한 전설이다. 선혈로 이룩되고, 죽음의 율법으로 군림의 길에 오르고, 승부의 기록 가운데 절대자라는 이름으로 천추에 길이 남을 이름들. 소림사(少林寺), 무당파(武當派), 곤륜파(崑崙派), 화산파(華山派), 아미파(峨嵋派), 전진파(全眞派), 공동파(攻洞派), 청성파(靑城派), 점창파(點蒼派), 그리고 개방(蓋幇). 세칭 구파일방(九派一幇 )은 신화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신화를 이룩하기 위해 천 년에 걸쳐 진전(眞傳)을 후대에 전하는 중원의 도전문파들이다. 그들은 대륙천하가 시산혈해에 뒤덮이는 대혈겁의 승부를 피해 왔기에, 절대의 신화는 한 번도 이룩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의 율법은 승부를 피하는 은둔자(隱遁者)의 율법이기에, 그들은 정신적인 군림으로만 만족하는 전통을 이룩했다. 반면, 위대한 두 개의 가문(家門)은 다르다. 그들은 가공할 피의 율법 가운데 천하를 상대로 한 도전을 거듭해 왔다. 천년밀가(千年密家) 단리세가(段里世家), 천년마가(千年魔家) 우문세가(宇文世家). 가장 가공할 혈통(血統)이고, 승부의 첨단에 새겨져 있는 이름들이다. 또한, 이들에게는 천 년을 두고 꺾이지 않는 위대한 고집이 있다. 피와 죽음의 율법들로 이룩된 천 년의 혈사(血事). 천 년의 이대가문은 언제나 대립해 왔고, 그들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의 기록이야말로 중원천하의 가장 처절한 승부의 기록이 되어 왔다. 두 종류의 혈통(血統)은 바로 살아 있는 신화들이다. 그리고 천외(天外)에도 신화는 존재하고 있다. 변황사천(邊荒四天). 전통적인 새외변황(塞外邊荒)의 명가(名家)들. 그들 역시 장구한 遍셀廈� 걸쳐 신화를 이룩해 왔다. 천축(天竺) 황교(黃敎), 천방국(天方國) 천금세가(天金世家), 대달단국(大疸檀國) 모용왕가(慕容王家), 동영(東瀛) 무혼류(武魂流) 혈검가(血劍家). 이들은 뿌리 깊은 신화를 이룩했고, 언제부터인가 이들의 신화에 도전한 여섯 가문이 있었다. 일컬어 해외육가(海外六家). 중원에서는 너무나도 머나먼 변황의 땅에 이룩된 살아 있는 전설들. 북원(北元) 철왕대가(鐵王大家), 외몽고(外蒙古) 와자국(瓦刺國) 첩목세가(帖木世家), 천방무가(天方武家), 천축홍교(天竺紅敎) 태양가(太陽家), 천축배교(天竺排敎) 환희가(歡喜家), 부상(扶桑) 신풍가(神風家). 새롭게 일어난 여섯 개의 하늘, 여섯 개의 전설, 여섯 개의 피의 기둥들!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천 년 무림사상 가장 가공스러운 혈풍이 십팔만 리에 걸쳐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외(天外)의 천(天), 하늘 밖의 하늘! 인간의 지혜(智慧)로는 측량하지 못한다는 가장 위대한 무림의 하늘은 세월과 승부의 대하(大河) 가운데 언제나 혜성(彗星)이 되어 존재했다. 절정천(絶頂天), 일백팔주(一百八柱), 천 년의 영웅(英雄)! 아무도 이룩하지 못했다는 가장 위대한 전설. 절정의 길 그 끝에 존재하고 있다는 위대한 전설의 대지.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신화라고 할 수 있었다. 승부(勝負). 그것은 천 년의 혈사(血事)를 이루게 한 가장 가공할 무림혼(武林魂)이다. 검을 쥔 자는 승부를 두려워하면 아니 되고,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라면 그 길에서 꺾여 풀 위의 이슬이 되어 쓰러지는 것을 공포스러워하면 아니 된다. 야망(野望)과 대망(大望), 위대한 무인(武人)의 꿈이여! 천 년, 아니 그 이전부터 승부는 시작되었고… 승부의 기록은 바로 피와 죽음의 율법을 이룩해 왔다. 군림의 길에 오르는 무수한 도전자(挑戰者)들. 그들의 일생은 바로 무림의 강(江)을 이루는 하나의 물방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천 년을 두고 가장 위대했던 세 명의 은둔자(隱遁者)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암흑(暗黑)의 절대자(絶代者) 흑천야황(黑天夜皇), 자객(刺客)의 제왕(帝王)… 밤의 번뇌 야뇌(夜惱) 일점화(一點花), 대륙제일뇌(大陸第一腦)… 대은사(大隱士) 창룡천뇌(蒼龍千腦) 사마곡(司馬曲). 절정의 길을 끝없이 걸어가다가 사라진 이름들. 대륙에 야망의 비를 내리게 하고, 피의 사계(四界)를 이룩한 위대한 승부사들!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신화(神話), 이루어지지 않은 전설(傳說), 나타나지 않은 절대의 우상(偶像)이 하나 있다. 모든 길에서 절정(絶頂)을 이룩하고, 모든 율법을 파괴하는 절대의 신위로 이룩되며, 천 년의 모든 승부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승부의 기록을 대륙에 새겨 넣은 가장 신비한 절정의 대지. 절정세가(絶頂世家). 그 곳은 꿈(夢)이고, 이루어지지 않은 신화였다. 천년혈통(千年血統) － 본가(本家) 위에는 어떠한 존재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본가의 제자는 패배라는 단어를 몰라야 하며, 본가의 적(敵)은 천 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절대로 용서해 주어서는 아니 된다. 철(鐵)－ 검(劍)－ 혈(血). 세 가지 천년율법(千年律法)을 지키지 아니 하는 자는 천년밀가(千年密家)의 후예일 수 없다. * * * 중원대륙(中原大陸). 무수한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거대한 야망의 대지이고, 모든 인간이 절대절명의 승부를 거는 운명의 대지이다.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명멸(明滅)되고, 패기는 풀잎의 이슬이 되어 스러져야 하며, 승자는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하는 처절한 승부의 대지. 천 년을 두고 그러한 율법은 바뀌어지지 않았다. 천 년을 두고 무사들의 승부는 계속되었고, 그리고 천 년을 두고 무수한 세력의 대립은 이어져 왔다. 여명(黎明)의 산(山). 어둠의 장막이 흩어지면서 새벽 안개로 뒤덮인 거대한 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대륙의 눈이라 불리는 천목산(天目山). 언제부터인가 두 개의 흐릿한 눈망울이 발 아래 일망무제로 펼쳐진 천목산(天目山)을 굽어보고 있었다. 깎아지른 정봉(頂峯) 위. 흑포(黑袍)로 전신을 휘감은 그림자(人影) 하나가 이상하게도 고독스러운 눈빛을 삼라만상에 던지고 있었다. 피를 바른 듯 짙붉은 입술에 지혜(智慧)로운 인상이다. 나이는 십칠 세(歲) 정도 되었을까? 그는 달빛(月光)이 다 스러질 때까지 정봉을 떠나지 않았다. 저 머나먼 곳, 꿈길의 백옥경(白玉京)처럼 떠오르고 있는 하나의 성(城)이 있지 않은가! 아스라한 안개의 막(幕)이 산비탈을 따라 흰 치마가 되어 흘러내리자, 거대한 성의 웅자는 진군하는 천만대군(千萬大軍)의 병영(兵營)과도 같은 가공(可恐)할 기세로 준용을 드러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십 장 벽(壁)의 성곽(城廓)은 이미 산을 똬리 틀어 버린 한 마리의 흑색장룡(黑色長龍)이다. 천하에서 가장 거대하고 웅장한 석성(石城). 안개는 장막이 흘러내리듯이 성곽을 타고 흘러내리며, 천 년에 걸쳐 이룩된 웅장무비한 성의 정경이 드러난다. 백 보(步)마다 철전(鐵殿)이 세워져 있고, 천 보(步)마다 연무장(練武場)이 만들어져 있다. 내외성(內外城)의 구분이 현격하며, 오색무복(五色武服)으로 질서정연한 차림을 한 무사(武士)들이 여명을 깨고 움직이고 있다. 전풍검단(電風劍團)! 회색장포(灰色長袍)를 걸친 청년층 무사로 이루어진 총인원 일만(一萬)의 조직이다. 저력에 있어 이미 소림(少林)이나 무당(武當)의 모든 저력을 능가하고 있는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의 집단. 그러나 이들은 성내에서 최하위 서열에 불과하다. 만리풍운대(萬里風雲隊). 총인원 일천(一千), 대부분이 중년의 나이이고 이미 백여 번의 격전 경험이 있는 완전한 무인들로 이루어진 단체이다. 이들은 명만 떨어진다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케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청포(靑袍)로 몸을 휘감고, 삼 척 장검(長劍)의 자루에 청색 수술을 달아 신분을 나타낸다. 하나같이 완숙한 무예를 지니고 있는 그들이지만, 성내에서는 평범한 무사들에 불과할 뿐이다. 밀검위(密劍衛). 총인원 오백(五百), 이들은 황색전포(黃色戰袍)를 걸치고 있다. 나이는 천차만별이고 성별 또한 그러하다. 단 하나 특징이라면 하나같이 가공할 무공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미 초범입성(超凡入聖)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안광(眼光)이 안으로 갈무리될 정도로 가공할 내공을 지닌 자들, 이들은 거대한 성의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다. 이들의 눈을 피해 성내로 잠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칠십이(七十二) 표기령주(杓旗令主). 각향(各香) 각타(各舵)를 책임지고 있는 위대한 무인(武人)들. 이들은 자색전포(紫色戰袍)로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고 있다. 천살령주(天煞令主). 총인원 삼십육 인,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의 어떤 장소에서도 일대 패자(覇者)가 될 수 있는 절대고수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지위는 군림의 지위가 아니라, 당주(堂主) 지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천살령주의 지위에 불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이 곳이 다름아닌 천년밀가(千年密家)의 대아성(大牙城)이기에……! 드넓은 연무장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십 겹의 원형진(圓形陣)이 중앙의 목대(木臺)를 향해 겹겹이 포진(布陣)되어 있었다. <척마멸사(拓魔滅邪)> <검진중원(劍鎭中原)> 두 종류의 문구를 써 넣은 기번(旗幡) 수천 개가 어린장창(魚鱗長槍), 자오탈극도(子午奪極刀)의 끝에 걸려 나부끼고 있고… 수천 줄기의 무시무시한 눈빛이 연무장 가운데로 모아지고 있었다. 수천 명이 운집해 있었으나 장내엔 죽음보다 더한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둥－ 둥－ 둥－! 돌연, 삼엄한 북소리가 새벽 안개를 뚫고 천목산 하늘 아래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십 리 밖으로 퍼져 나가는 북소리로 인해 새벽의 고요는 한순간에 깨어졌다. 흩어지기 시작하는 아침 안개를 뚫고 일흔두 명의 죄인들이 휘청거리며 목대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죄수들은 모진 고문을 당한 듯 온몸에 자흔(刺痕)이 가득하고, 걸치고 있는 가죽 옷에는 이미 피의 내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공포에 떠는 눈빛들, 그리고 갈라 터진 입술 사이에서는 애절한 목소리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제… 제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단 한 번 밀가에 죄를 지었거늘… 어이해 가차없이 참수(斬首)하려 하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밀가인 줄 알았다면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오. 오오, 제발… 저의 한 번 실수를 용서해 주십시오……!" 애절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안개를 흩트린다. 가죽이 터지고, 뼈가 끊어지고, 몸이 만신창이로 부서진 자들에게도 한 줄기 생명의 불꽃은 강하게 타오르고 있다. 목대 위로 끌려 올라가는 사람들은 절규를 했고, 목대 위에서 그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는 칠십이 검기원(劍機院) 참수자(斬首者)들은 천천히 장도(長刀)를 쳐들고 있었다. 천 년의 전통을 갖고 있다는 단말마도(斷末魔刀). 천 년 전 악마의 연합세력이 붕괴되는 가운데 부러졌던 무수한 고검(古劍)이 용광로에 녹아 다시 만들어진 서슬이 파란 장도이다. 길이는 사 척(尺). 단말마도는 사백 년 전에 일흔두 자루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만든 사람은 단리자도(段里子都)라는 사람으로, 그는 절대장인가(絶代匠人家)인 천황검가(天荒劍家)의 연검술에 버금가는 연검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츠으－ 읏－ 츳－! 단말마도(斷末魔刀) 일흔두 자루가 천천히 쳐들려진다. 장도를 쥔 사람들의 얼굴은 석고처럼 경직되어 있다. 개처럼 끌려오는 사람들의 절규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츠으－ 읏－ 츳－! 단말마도에서는 살기(煞氣)가 폭사되고, 사위가 한기에 휘감긴다. 그리고 애절한 비명 소리는 더욱 고조되었다. "제, 제발…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이 있거늘… 어이해 속죄의 기회도 주지 않고……!" "으으, 그들이 마가(魔家)이고 그들이 바로 밀가의 숙적인 마가 쪽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오!" 애절히 외치는 사람들. 이들은 지난 사 년간 강호천하에서 잡혀 온 거효흑마(巨梟黑魔)들이다. 일컬어 중원칠십이패(中原七十二覇). 이들은 천하를 종횡하며 악행을 저질렀고, 결국 붙잡혔다. 발목에 쇠사슬을 찬 채 개 몰 듯 몰려드는 사람들은 각각 한 가지씩의 죄명을 지니고 있다. 색마(色魔)였던 사람, 신투(神偸)였던 사람, 중원인으로 변황무림계의 문파와 손을 잡으려 했던 사람……. 그러나 지금의 이들은 살고자 하는 한 명의 생명체일 뿐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싸늘한 도광을 흘려대는 단말마도에 고정되어 있다. "제발… 오오, 제발……!" "흐으으, 피… 피의 율법(律法)은 정녕 한 번도 깨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너, 너희들도 약자(弱者)의 설움을 알 날이 있으리라. 으으…!" 절규 소리는 원망하는 소리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보라! 칠십이 단말마도가 일제히 쳐들리는 광경을. "참(斬)!" "피의 율법에 따라 본가에는 용서가 없다!" 치리리리－ 릿－ 치릿－! 일사불란한 발도(發刀). 도극(刀極)은 하늘로 내어 뻗쳤다가 정확히 같은 순간, 도신(刀身)이 수직으로 세워진 채 내리쳐진다. 일흔두 줄기 현란한 칼무지개가 새벽 하늘을 갈기갈기 찢기 시작하며, 일순 일흔두 줄기의 섬뢰(閃雷)와 함께 일흔두 곳에서 피의 분수가 치솟아 올랐다. 파－ 파－ 팟－ 팟－! 수급이 떨어져 날아오르고, 사지(四肢)가 뚝뚝 끊어져 훌훌 날아오른다. 가슴이 갈라져 심장이 쏟아져 나오고, 아랫배 근육이 쪼개지며 오장육부가 쓰레기처럼 흘러내린다. 새벽의 참형(斬刑). 이것은 천 년간 거듭되어 온 전통이다. 천 일에 한 차례, 마도세력이 극강해진다면 백 일(日)에 한 차례 참형이 벌어진다. "피는… 피로 씻을 뿐이다!" "우리 가문은 천 년 전, 악마집단에 의해 멸문당할 지경에 이르렀었다. 그 때 우리 가문을 도운 방파는 전무했다!" 단말마도를 따라 피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검기원(劍機院) 무사들은 집행자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들의 소매에 수놓고 있는 혈화(血花)는 이 곳 청년들이 꿈에서도 바라 마지않는 살인기호였다. "마의 무리는 하나도 남지 못한다!" "변황의 무리 또한, 하나도 살지 못한다." 도(刀)! 일흔두 자루 도는 일제히 쳐들렸고, 수많은 청년들의 환호성이 아침을 일깨운다. "으아… 천년율법(千年律法)이여! 만만세!" "와아아! 누가 우리 가문을 꺾으랴!" 목대는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되어 버렸고,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강호흉마들의 눈에는 그들이 마지막 본 장도의 그림자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안개(霧)는 여인의 손이다. 여인의 손은 모든 구석을 남기지 않고 어루만지며 뒤덮는다. 어떤 때에는 어머니의 손이고, 어떤 때에는 애인의 손이다. 쓰으으… 쓰으으……! 안개는 바람을 타고 흐르고, 먼 곳에서 피의 살륙제를 구경하던 그의 눈에는 아주 기이한 허무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입가에 고독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자. 그는 늘 이 곳에서 성을 바라본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시선은 지금 격하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야수(野獸)들! 큿큿……!" 정봉에 선 흑포소년은 묘하게 웃고 있었다. 하얀 이가 붉은 입술 사이에서 드러나며, 막 떠오르는 조양(朝陽)에 의해 찬연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극치의 아름다움을 이룬다. "저들의 모든 것은 선혈과 죽음 위에서 이룩되었다." 스산하게 불어닥치는 바람은 검은 머리카락을 수술처럼 펄럭이게 하고, 구깃구깃한 장포자락은 위쪽으로 휘몰아쳐 올라간다. "큿큿… 세월이 밉다. 저들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가장 가공할 악마의 군주(君主)로 태어났다는 것이……!" 누구일까? 그는 누구이기에 천하백팔파(天下百八派)를 암중 장악하고 있으며, 세력을 사천 리(里)에 뻗치고 있는 천년밀가를 비웃는 것인가? "저들이 강호의 낭인(浪人)들을 어떻게 다루고, 저들의 무위(武威)가 어떠한 과정에 의해 이룩되었는지 알고 난 후 저들은 내게 인간(人間)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들은 단지 피에 굶주린 야수들일 뿐이다." 흑포소년은 묘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 아주 강(强)해 보이는 인상, 또 하나는 지극히 미려하고 온화해 보이는 인상. 두 가지 상반되는 기질이 한 사람의 몸에 나타났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 두 눈에 고독한 빛이 아스라하게 피어 올랐다. "내가… 고뇌(苦惱)해야 한다는 것이 짜증난다. 큿큿, 어이해 내게는… 무인혈(武人血)이 없단 말인가? 큿큿, 지난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바람과 더불어 한숨을 토하다니……!" 그는 느릿느릿 신형을 틀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떠오르는 태양의 빛이 작살이 되어 그의 등에 떨어져 내린다. 그의 그림자는 안개 위로 흐릿하게 떠올랐고, 바람이 건듯 부는 듯하더니 그의 모습은 천야만야한 벼랑 위에서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나의 환상이었을까? 소년이 보낸 고뇌(苦惱)의 여명(黎明)은……? 그의 입가에 떠올랐던 의미 깊었던 한 줄기 고졸한 미소는 꿈이었을까? * * * 철전(鐵殿)이다. 습기가 별로 없는 철전의 바닥은 질이 좋은 흑오석(黑烏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덕분에 흑오석 바닥은 하나의 흑경(黑鏡)이 되어 철전 안의 모든 것을 정연하게 투영시키고 있다. <천년제일(千年第一)> <천년밀가(千年密家)> 두 개의 편액(遍額)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기이하게도 본래의 크기보다 십 배나 더 커 보이는 어떤 그림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태사의(太獅椅)에 유난히도 고집스러운 인상을 가진 사람 하나. 그의 뒤, 십 인의 거한(巨漢)이 포검(抱劍)한 자세로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도열해 있다. 십대천장(十大天將). 금강(金剛)의 거령신(巨靈神)들. 이들은 철로 만든 인간인 듯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가공할 패기(覇氣)가 충만해 있는 이 곳에는 형언하지 못할 힘이 스며 있었다. 너무나도 오래되어 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가공할 힘. 그것은 바로 이 곳에서 살고 죽은 무수한 사람들의 혼(魂)에서 우러난 하나의 거대한 전통이었다. 천년혈통(千年血統). 천하에서 가장 지독하다는 피의 율법에 따라 이루어진 밀가의 모든 것은 거대한 철전 안에 있다. 반개되어 있는 두 눈의 시선(視線)은 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 그는 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좌하(座下), 두 명의 계피학발 노인이 장읍한 상태로 서 있었다. 이들은 꽤나 진중한 기세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상태였다. "지난밤에도 은밀히 연공관(練功關)을 빠져 나가시었습니다. 최근 들어 번뇌(煩惱)가 심하신 듯합니다!" 침중히 말하는 노인. 그는 학창의를 걸쳤고 손에 옥골선(玉骨扇)을 들고 있다. 그의 몸에서는 텁텁한 노인의 내음과 더불어 짙은 묵향(墨香)이 흐른다. 백이십 세 나이인데도 이빨이 희고, 주름살이 전혀 없는 노인. 그는 중원일뇌(中原一腦)라고 불리고 있는 사람으로 천년밀가의 문상(文相), 천뇌노야(天腦老爺)였다. "아무래도 피에 대한 거부감을 씻지 못하신 듯합니다. 모르긴 해도 모계에서 자상한 성품을 이어받으신 듯합니다. 속하, 천뇌노야로서는… 어찌해 볼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문상 천뇌노야는 그런 말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정적. 정말 깊고 깊은 정적의 순간이 오랫동안 흘렀다. 그리고 반개되어 있던 두 개의 눈에서는 차디찬 빛이 흘러나왔다. "못난 녀석, 궁(弓)!" 버언－ 쩍－! 두 눈에서는 가공할 정광이 혁혁히 폭사되어 나왔다. 강철이라도 녹여 버릴 듯한 안광. 하지만 그것은 곧 사라졌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가 다시 한 번 달싹거렸다. "무상(武相)의 의견은……? 무상! 그는 십팔반무예에 두루 정통하고, 고금명파의 제반절기를 줄줄 암기하고 있는 위대한 무림인이다. 다른 곳이라면 이미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랐을 인물, 천검노야(天劍老爺). 그런 그 역시 천년밀가의 가신(家臣)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강호에 나간다면 일약 맹주(盟主)로 군림할 수 있는 무공과 경륜을 지니고 있다. 그는 묻는 말에 고개를 약간 숙인 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속하, 천검노야… 두 분 소가주(少家主)께 각기 천일연공(千日練功)을 시키는 입장이옵니다!" "흠……!" 나직한 한숨 소리. 그것은 지존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의 한숨 소리였다. 천검노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속하의 소견은 이러하옵니다. 두 분 소가주님 중 무공성취가 뛰어나신 분은 둘째 소가주이신 우(雨)이십니다!" "……!" "대종손(大宗孫)이신 궁(弓)나으리는… 불행하나, 성취가 희박합니다!" "희박? 어느 정도인가?" "백 일 전부터… 궁나으리의 무공은 퇴보하고 있습니다!" "퇴보?" 그의 눈빛은 또 한 번 강렬해졌다. "예, 현격히 퇴보하고 있습니다. 이미 암기하고 계시던 백팔검경(百八劍經)을 통째로 망각하신 듯, 십이교두(十二敎頭)들을 자꾸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 "십대연공관 가운데 마지막 하나 남은 철혈무관(鐵血武關)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으로 사려되옵니다!" "철, 철혈무관을 뚫지 못할 것 같다고?" 그의 눈빛은 또다시 강해졌다. "예!" "으음……." "총사(總師)가 한 번 만나심이 현명한 일로 아뢰오. 그 이유는… 그 분의 삐뚤어진 마음을 다스릴 분이 바로 총사밖에 없기에!" 무상은 그런 말로 자신의 말을 마감했다. － 그 분은 사흘 내내 취하시어 온갖 장난을 하시었습니다. － 후기지수들 가운데 종손(宗孫)께서 광인(狂人)이 되시었다는 말이 무서운 속도로 번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 그 분은 심마(心魔)에 드신 듯합니다. － 지난번 본가(本家)의 숙적인 마가(魔家)의 비밀외단(秘密外壇)으로 밝혀졌던 남도검맹(南道劍盟)을 격파하고 남도검맹의 칠십사 교두(敎頭)를 모두 잡아 사지를 끊어 죽이는 처형을 하는 것과, 칠십이 패의 참형을 보신 후로는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 그 분은 체질적으로 피를 혐오하십니다. 피를 보면 구역질을 하십니다. * * * 달빛(月光)이 심연(深淵)에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죽간(竹竿)을 두 손에 모아 쥔 채 묘한 시선으로 은사(銀絲)와 수면이 만나는 부분을 보고 있었다. 동그랗게 퍼져 나가는 파문이 달빛에 반짝거린다. 그의 등 뒤, 달빛을 어깨에 받으며 서 있는 노인이 하나 있었다. 그는 꽤나 괴롭다는 신색으로 소년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가시지요." "……." "어서 가십시다, 대종손(大宗孫). 새벽부터 시작되는 비무에 빠지시면 아니 되십니다." "……." 소년은 말이 없다. 그는 암울한 시선을 심연에 던지고 있을 뿐이다. "대종손, 가법(家法)을 어기시면 아니 되십니다!" 노인은 소리쳤고, 소년은 그제서야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돌렸다. 두 눈에는 유성(流星)의 빛이 떠오르고 있다. 미련하게도 떨어질 줄만 아는 유성의 그 빛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신비했다. 그는 묘하게 웃고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치기 어린 웃음이고, 그러면서도 매력에 가득찬 웃음이었다. "달빛이 좋지요, 대교두(大敎頭)?" 그의 입가에는 더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 미소는 무사(武士)의 미소가 아니었다. "대종손, 해도 너무하십니다!" 대교두는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늘 이런 식이었다. 대종손이라 불리는 소년은 언제부터인가 삐뚤어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묘한 기운이 떠오르고 있었다. 밝고 강하며 아름다운 빛, 그 빛은 운명처럼 그에게 기이한 야망을 심어 주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금린어(金鱗魚)가 잘 물립니다. 큿큿, 바라신다면 제가 술안주를 만들어 드리지요." 궁(弓), 그는 가공할 혈통을 지니고 태어났다.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무사의 혈통이라는 단리세가(段里世家)의 대종손(大宗孫)이라는 혈통. 그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미 휘하(麾下)에 칠만 제자(弟子)를 거느릴 수 있고, 천년밀가에 모인 천오백 권의 무경(武經)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영약을 수없이 복용할 수 있고, 하나하나의 수법에 달관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을 교두로 삼아 천하각파의 절예를 능숙히 연마할 수 있다. 무림에 야망을 둔 소년이라면 꿈에서라도 되고 싶어하는 그러한 지위. 밀가대종손(密家大宗孫). 한데, 얼마 전부터 무엇인가가 틀어지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가 묘하게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숙명(宿命)의 덫처럼……. 천년밀가, 그들은 산(山)이고 바다(海)였다. 천 년 동안 수천 번의 대소격전을 치르며 가공할 힘의 원리를 터득한 천년밀가는 힘으로 천하의 대세를 좌지우지해 왔다. 그들은 적을 철저히 응징하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고, 원한이 생긴다면 백여 년이 걸리더라도 추적대를 파견해 복수를 하는 무서운 전통을 이룩했다. 동영(東瀛)의 제검류(帝劍流)가 도전했을 때에도, 외몽고(外蒙古)의 마족(魔族)이 중원천하를 넘보고 도전했을 때에도, 천축국(天竺國)의 유가종(瑜伽宗) 라마고수들이 중원을 업신여기고 도전했을 때에도 천년밀가는 늘 중원의 벽(壁)이 되어 왔다. 소림사(少林寺)도 막지 못했던 강호의 대혈풍(大血風)과 개방도 어찌하지 못했던 겁륜야(劫輪夜)를 천년밀가는 처절한 싸움으로 막아냈다. 무수한 제자가 죽고, 수많은 보검(寶劍)이 부러지고, 자금이 유실되어도 천년밀가는 단 한 번도 적에게 굴복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숨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천년저력(千年底力). 천년밀가에는 천 년간 모아진 저력이 있다고 했다. 천년밀가의 뿌리는 소림사보다도 오래 되었다고 하며, 구파일방중 어떤 방파보다도 오랜 연원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 힘의 비밀은……? 그 가공할 저력의 비밀은……? 밀가(密家)의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 밀가에는 오히려 비밀이 없다. 그들은 철(鐵)이 만들어지는 이치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것이 철(鐵)이고, 부러지면 더욱 단단하게 굳는 것이 골(骨)이다. 천년밀가의 비밀은 오직 그것뿐, 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천 년간 허물어지지 않았던 위대한 혈통(血統), 단리종혈(段里宗血)! 그 위대한 무사의 피는 무수한 영웅혼(英雄魂)을 이룩했고, 처절한 투혼의 기록을 이룩했다. 숙명에게서 한 번도 시험받지 않았던 천 년의 저력. 그런데 아주 깊은 데에서부터 묘한 깨어짐이 있었다. 알(卵)이 깨어지는 아픔 같은 숙명의 깨어짐이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종손(大宗孫) 궁(弓) 아침 안개는 연보랏빛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다. 동천목(東天目)과 서천목(西天目)을 잇는 태극분지(太極盆地) 가운데, 햇살은 작살이 되어 안개의 막(幕)을 찢어 내린다. 환하게 부서져 내리는 아침녘. 삼라만상이 오월(五月)의 생명력 가운데 살아나고 있을 때 천년밀가(千年密家)의 천년성(千年城)은 천 년을 두고 거두어지지 않았다는 위대한 전통과 내력을 가진 풍뢰대진(風雷大陣)의 폭풍(暴風) 가운데서 깨어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사마외도(邪魔外道) 방문좌도(傍門左道)와 타협하지 않았다는 위대한 전통의 무사가문. 변황(邊荒)의 세력과도 공존하기를 거부했고, 강호계의 기라성 같은 명문거파(名門巨派)와도 맹(盟)을 이루기를 거절했던 완고하고 보수적인 집단. 이들은 천 년을 두고 같은 복장을 했고, 천 년을 두고 예의범절을 바꾸지 않았다. 대지 백오십만 평(坪), 내성(內城) 십이 궁(宮), 외성(外城) 칠십이 전(殿), 호성 백팔 채(寨)……. 모든 장소에서 아침이 시작된다. 최근 들어 천년밀가의 규율은 개가(開家) 이래로 엄해진 상태였다. 음주(飮酒)와 가무(歌舞)가 금지된 지 오래이고, 제자들의 강호출입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통제되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습습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깔려 있다고나 할까? 하여간 천년밀가는 위대한 전설의 대지였다. * * * 내성(內城)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다. 다른 건축이라면 의당 가산(假山)이 있고, 내정(內庭)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곳에는 철강석(鐵剛石)의 벽돌로 뒤덮인 연무장(練武場)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움츠린 철룡(鐵龍) 같은 전각(殿閣) 하나. 철혈검관(鐵血劍關). 그 곳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장소였다. 그 깊은 곳, 언제부터인가 두 줄기의 호흡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하나의 호흡은 피에 굶주린 야수의 숨결같이 차고 폭발적인 야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심연(深淵)의 안개처럼 흐릿하고 가라앉은 호흡이었다. 그리고 두 쌍의 시선이 있다. 차디차게 빛나고 있는 혜성(彗星)의 눈빛. "……." "……!" 두 소년이 일 장 거리를 두고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방향으로 앉아 있다. 한 소년은 백포(白袍)를, 또 한 소년은 흑포(黑袍)를 걸쳤다. 백포를 걸친 소년의 체격은 흑포를 걸친 소년보다도 월등히 장대(壯大)했다. 유난히도 억세어 보이는 인상의 소년. 그러나 그의 나이는 허무하고 고독해 보이는 흑포소년에 비해 오히려 한 살이 아래였다. 우(雨), 궁(弓). 천 년 동안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위대한 혈통의 가문 천년밀가에서도 가장 순수한 혈통을 지닌 두 소년이다. 이들은 모두 서열 일품(一品)의 계층에 올라 있다. 특히 궁(弓), 그는 가장 완벽한 혈통을 타고 태어났다. 대종손(大宗孫). 그는 천년밀가의 가장 위대한 혈통을 지녔으며, 차기(次期)의 총사(總師)로 지목받고 있었다. 나이 십칠 세. 태어나자마자 바로 벌근세수(伐筋洗修)의 대법(大法)을 시전받았고… 칠 세 때까지는 십대학사(十大學士)에게서 삼교구류(三敎九流),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후 십오 세 때까지는 육예(六藝)에 대한 모든 것을 육대사범(六大師範)에게 완전히 전수받은 장래의 풍운아(風雲兒). 그는 이 년 전부터 철혈검관에서 극한의 훈련을 받아 왔다. 말수가 적고, 웃는 모습이 해맑은 미소년. 그는 천년밀가의 대공자(大公子)답게 보이지 않는 가운데 타인을 압도하는 어떠한 기세(氣勢)를 지니고 있었다. 단리우, 그는 배우 거친 감성(感性)을 격렬하게 흘리는 인상이었다. 그 역시 천년밀가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혈통이고, 궁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순수한 혈통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세는 야수(野獸)처럼 거칠고 폭풍처럼 격정적이었다. 그는 천년밀가 삼십사대(三十四代) 후손으로, 천옥(天玉)의 아들이다. 단리천옥은 태상가주(太上家主)의 둘째 아들로, 출가(出家)한 지 일 년 만에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의 모든 고수를 격파한 것으로 이름을 날렸었고… 천년밀가의 외단주(外壇主)가 되어 천년밀가의 힘을 남칠성(南七省) 쪽에서 북육성(北六省) 쪽으로 이전시키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하다가 신비세력이 보낸 십칠 인(人)의 자객(刺客)에게 척살(擲殺)된 사람이었다. 우는 바로 단리천옥의 친아들이다. 그는 외단이 모두 불타는 가운데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마침 달려간 밀가의 십대천장(十大天將)에 의해 구함을 받고 오 세 때 본가(本家)로 들어왔다. 그 후 그는 외부집단에 대한 가공스러운 복수심을 무공에 대한 집념으로 승화시켜 불철주야 노력했으며, 이미 완숙에 가까운 성취를 이루었다. 그가 좋아하는 유일한 친구(親舊)는 한 자루의 검(劍)! 그는 잘 때에도 검을 껴안고 잘 정도로 무공에 미친 소년이었다. "가문의 혈통에 도전한 자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바로 마가(魔家)의 후예(後裔)들. 그들은 천 년에 걸쳐 본가의 저력에 도전해 왔다. 내가 청년이 되는 날, 천 년에 걸쳐 본가의 아성에 도전하고 나의 아버지를 죽인 그 자들의 구족(九族)을 마지막 하나까지 천참만륙(千斬萬戮) 찢어져 죽일 것이다!" 우는 그런 말을 잠꼬대로 중얼거릴 정도로 피에 굶주린 상태였다. 천년마가(千年魔家). 저력(底力)에 있어서는 밀가에 뒤지는 악마의 가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처세술에 있어 밀가를 월등히 능가한다. 그들은 연형합종책(連衡合從策)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무수한 집단으로 변신(變身)해 밀가의 아성에 도전했다. 무려 백칠십여 해에 걸쳐 그들은 밀가에 도전했고 밀가는 그 때마다 피를 흘려야 했다. 이 곳 천년성이 시산혈해(屍山血海)로 쌓이기 수십 차례, 가주(家主)가 암살되기도 수 차례, 가신(家臣)들의 강호 친구가 타살되고 가신들의 강호 터전이 초토화되기 수천 회. 그러나 밀가는 그 때마다 승리했다. 희생자가 크기는 했으나 밀가는 대대로 승리를 해 왔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후예(後裔)들에게 가공스러운 단련을 시키는 위대한 유산을 천 년에 걸쳐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리석(大理石) 바닥. 십이 교두(敎頭)라 불리는 원로원(元老院)의 집사(執事)들이 고풍(古風)스러운 차림새로 근엄하게 도열해 있다. 십이 교두는 밀가의 비밀이다. 종혈(宗血)이 아니라면 평생을 밀가의 가신으로 산다 해도 십이 교두의 얼굴조차 구경할 수가 없다. 이들은 바로 천년밀가의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었다. 이들 십이 인은 각기 한 가지에 정통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알고 있는 학문과 무공은 능히 일개대파를 세울 만한 정도이다. 가히 십이 개의 장경고(藏經庫)라고나 할까? － 밀가에서는 가전비급(家傳秘 )이 유실되어 가문무공이 외부세력에게 드러날까 우려한 나머지, 비급을 만들지 않는다. 밀가의 모든 것은 말과 행동으로 전수된다. 그러한 소문이 떠돌고 있을 정도로 밀가의 가전무공은 장막에 감추어져 있다. － 상대를 징계하는 것으로 싸움을 마칠 때에는 가전무공 중 서열 일 위(位)에 속하는 무공을 써서는 아니 되고, 내공의 우세로 승리를 해야 한다. － 서열 일 위에 속하는 무공을 시전할 경우에는… 필히 상대를 격살시켜야 하고, 목격자가 있다면 목격자마저 죽여야 한다. 천년밀가의 무공은 십 단계로 구분된다. 그 중 오 단계까지는 피의 근원이 단리씨가 아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충성심을 인정하고, 가신의 역할을 대대로 하겠다는 맹세를 한 후 전수받을 수 있으나, 육 단계 위쪽의 절기는 전수받을 수 없다. 육 단계부터는 단리씨(段里氏)만이 전수받을 수 있다. 그리고 팔 단계 서열 삼 위(位)의 무공 철자류(鐵子流), 구 단계 서열 이 위(位)의 무공 검자류(劍者流), 십 단계 서열 일 위(位)의 무공 혈자류(血者流). 이상의 삼 단계는 종손으로부터 육촌(六寸) 이내에 있는 자만이 전수받을 수 있으며… 최후 최고인 절정위(絶頂位)는 오직 한 사람, 종손의 피를 타고난 사람들만이 전수받을 수 있다. 우(雨), 그는 궁(弓)과 사촌(四寸)의 인척관계가 있는 소년이었다. 그는 무서운 승부사(勝負士)의 기질을 갖고 있는 소년이고, 무공 익히기를 목숨보다도 사랑하고 있다. 반면, 궁(弓)… 그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데가 있는 소년이었다. 말로는 형언하지 못할 미묘한 기질. 그것은 유난히도 고독해 보이는 눈빛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옷차림 역시 꾸밈의 흔적이 없고, 늘 짓고 있는 고졸한 미소에는 타인에 대한 군림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말수가 적고 늘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소년 궁(弓). 그는 언제부터인가 문제아(問題兒)로 불리고 있었다. 제일교두(第一敎頭) 만검생(萬劍生). 그는 백파비전검학(百派秘傳劍學)을 전수하고, 그것의 가장 효과적인 파해법(破解法)을 전수한다. 제이교두(第二敎頭) 만금생(萬金生). 그는 천하 각 지역 지리풍속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천하각지에 산재한 강호방파의 내력에 대한 것을 상세히 전수한다. 제삼교두 만천생(萬天生). 주로 변황(邊荒)의 사(史)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는 천축(天竺) 최초의 인간이 누구이며, 몽고(蒙古) 최후의 국왕(國王)이 누구였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다. 능숙하게 말할 수 있는 언어의 수가 십이(十二), 문자를 풀이하는 언어의 수가 이십사(二十四). 그는 가히 새외(塞外)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제사교두 만독생(萬毒生). 그가 전하는 것은 용독(用毒)과 피독(避毒), 해독법(解毒法)이다. 밀가의 후예가 독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밀가의 천년숙적(千年宿敵)이라 할 수 있는 천년마가(千年魔家)가 밀가 후예를 독으로 암살하는 일이 역사상 백이십여 차례나 벌어졌기 때문이다. 밀가는 법으로 용독을 금한다. 밀가는 싸우더라도 정당한 방법으로 싸워야만 하는 무사의 전통을 갖고 있다. 반면, 마가의 인물들은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밀가사람들은 해독법을 능숙히 터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제오교두 만묘생(萬妙生). 장안술(藏眼術), 사술(邪術)을 격파하는 수법을 전수하는 교두이다. 제육교두 만심생(萬心生). 철혈검관에 든 서열 일품의 후예들에게 무사의 투혼(鬪魂)을 전수하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 최고의 가혹한 인내력을 전수하는 입장으로, 그의 손에는 늘 채찍이 쥐어져 있다. 채찍은 피부를 가르는 데 쓰이고, 피부의 갈라짐은 정신을 단련하는 첩경으로 이용되곤 했다. 제칠교두 일극자(一極子). 후예의 내공(內功)을 기르는 데 전념하는 사람이다. 그는 내공초식과 연단술에 있어 절정의 성취를 이룬 사람이다. 제팔교두 일원생(一元生). 강호집파의 무공 중 도가무공에 두루 정통한 사람이다. 그는 무당(武當)과 전진(全眞), 공동(攻洞)에 비전되어지는 도가 정종무공의 비결과 파해법을 후예들에게 전수하는 사람이다. 제구교두 일불생(一佛生). 소림(少林)의 비밀을 알기 위해 소림사에서 승려 생활을 사십 년이나 했다는 인물로, 그는 현재 소림사 방장보다도 소림비기에 능통한 기적적인 인물이다. 제십교두 일혼생(一魂生). 천 년에 걸쳐 내려오는 예법을 전하는 사람. 그는 무공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천년밀가의 후예가 지녀야 할 예법에 대한 잡다하고도 난해한 수천 가지의 규범뿐이었다. 제십일교두 일마생(一魔生). 그는 밀가의 숙적, 마가에 대해 수집된 갖가지 정보를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가 마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만 해도 이미 이십 권의 책을 이루고도 남을 분량이다. 하지만 마가는 정체가 드러날 때마다 변신하여 밀가의 추적을 뿌리치고 지하무림(地下武林)에 가공할 아성을 이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총사를 천마대종사(天魔大宗師)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마가의 힘은 천 년 이래 가장 미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의 활약이 없다는 것은 역사상으로 보아 가장 긴장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폭풍 전에 적막이 있듯, 마가는 준동(蠢動)하기 이전에 힘을 숨기고 활동을 중지한다. 결국 마가가 준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가가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십이교두(第十二敎頭) 일법생(一法生). 그는 계피학발의 노인이고, 가장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천년밀가의 개가(開家)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기록을 머릿속에 암기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천년밀가의 내력에 대해 가주보다도 더 상세하게 알고 있다. 그는 원로원의 평의회에서도 꽤나 중대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고, 천년밀가에서 가장 고루한 사람이었다. 이 날… 십이 교두가 한자리에 모이고 독자적인 장소에서 연공하던 우와 궁이 한자리에 모인 이 날은 실로 의미 깊은 날이었다. 철혈무관에서 베풀어졌던 아홉 가지 무관이 끝나고, 마지막 하나의 관문인 십대관문이 시작되기 직전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궁과 우는 십이 교두들 앞에서 자신들이 배운 모든 것을 시전해서 교두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천년밀가의 가법은 지극히 냉혹하다. 혈통이 좋다 하더라도 무공이 뒤떨어지거나 지휘력이 없다면 고위(高位)에 오르지 못한다. 천년밀가가 무수한 도전 가운데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렇게 지독한 가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雨), 그에게 있어 오늘은 흥분과 격동의 순간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교두들에게 인정받는 역사적인 순간이고, 소년에서 장부(丈夫)로 인정을 받게 되는 순간이다. 반면 문제아 궁(弓), 그는 몹시 짜증스럽고 권태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써 세 시진 동안이나 그는 교두들이 우에게 묻고 우가 대답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오백 년 전 본가의 순찰당주(巡察堂主)를 죽인 후 순찰당 이백사 인을 강시독(彊屍毒)으로 죽이고, 새외로 도망갔다가 추적대에 잡혀 멸망한 방파는? － 하북신마궁(河北神魔宮). － 소림달마검(少林達麻劍) 칠초(七招) 세존지로(世尊之路)가 일위도강(一葦渡江)과 동시에 쓰여졌을 때 피해야 하는 지름길은? － 소림의 절기인 십단금(十段金)에 이어, 역시 소림절기인 탄지신통(彈指神通)을 시전하는 것입니다! 우는 격한 숨소리를 흘리며 교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 순간은 숙명이 갈라지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교두들의 말에 대답한다. 그런데 단리궁에게는 모든 것이 권태로운 듯, 그는 졸린 듯한 시선으로 교두들의 머리 위쪽 천장만을 보고 있었다. '피로 이루어진 피의 대지. 훗훗, 나는 안다. 우리 가문이 그 얼마나 많은 피바람 가운데 일어섰는지를! 그리고 우(雨)란 녀석은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단리궁은 입가를 가볍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나는 결정해야 한다. 피의 길에 오를 것인가, 아니면… 나의 길을 갈 것인가? 그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다. 우(雨)는 무수한 질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을 한다. 더듬거리기는 하나, 대답은 정확했다. 그의 성취는 십이 교두조차 놀랄 정도였다. 적어도 몇 가지는 틀릴 줄 알았는데, 우는 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완전무결하게 대답한 것이다. 우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매달려 있다. 난해한 질문에 대답하느라 신경이 곤두선 듯, 눈에는 핏발이 곤두설 정도이다. 간간이 그의 시선이 궁을 향하는데, 그의 시선에는 미묘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왜? 그의 시선은 무슨 연유로 흔들리는 것일까? "……!" 우는 매우 미묘한 눈빛을 던졌고, 궁은 그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예법에는 저촉되는 풋내 나는 웃음소리를 낸다. "큿큿……!" '녀석, 고마워할 것 없다.' 궁은 따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이리도 묘한 눈빛일까? '녀석, 나를 부러워하지 마라. 네녀석에게 전음(傳音)으로 몇 가지를 알려 주었다고 내가 너보다 지혜로울 것은 없다.' 궁은 콧구멍이 근질거리는 듯 손가락으로 코를 후빈다. 그러는 사이에도 교두들의 질문은 소나기처럼 퍼부어지고, 우는 머뭇 머뭇하면서도 교두들의 질문에 하나 막힘 없이 대답을 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학문과 천하각파의 비급에 대한 무수한 질문, 그것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에 불과하다. 바로 궁(弓), 대종손 궁만이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는 교두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궁의 전음(傳音)을 듣고 있단 말인가? "잘했다, 우! 축하한다. 너는 네가 가장 두려워했던 이론의 평가를 완벽하게 통과한 셈이다. 이제 너는 문제 없다. 남아 있는 무공 시험은… 네게 아주 쉬운 것일 테니까! 좋아, 우! 한 번은 내가 너를 도왔다. 이제는… 네가 나를 도울 차례다. 잊지 마라! 아직까지는 내가 대종손(大宗孫)이니까!" 궁은 코를 후비며 전음을 보내고 있다. "내게 고마워할 것은 없다, 우! 모든 것은… 바로 나를 위한 짓이니까! 큿큿……!" * * * 우에 이어 궁이 시험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쉽게 끝이 났다. 궁은 교두들의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질문에 단 하나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반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교두들의 얼굴은 썩은 콩빛깔로 화했고, 궁의 시선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꿈의 빛깔이 칠해지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가문의 길이 아닌, 진짜 길! 내가 걸어야 할 머나먼 길은…….' 단리궁(段里弓), 그는 의식적으로 무예(武藝)를 익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십이 교두는 단리궁을 어린 시절부터 관찰해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리궁이 문일지십(聞一知十)의 지혜(智慧)에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인내(忍耐),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승무공에 대한 오성(悟性)을 겸비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대종손이라는 지위는 천년밀가의 운명(運命)을 좌지우지하는 지위이다. 천년밀가의 종손은 자연스럽게 총사(總師)가 되며, 칠만여 가신(家臣)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니게 된다. 총사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리고 그는 아성(牙城)을 지키기 위해 무수한 혈풍(血風)을 일으켜야만 한다. 사실 단리궁이 싫어하는 것은 무공이 아니라, 선혈(鮮血)이었다. * * * 그 다음 날 단리궁과 단리우는 십이 교두가 보는 앞에서 비무(比武)를 해야만 했다. 단리우는 나이 십육 세이나, 체격에 있어서는 단리궁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얼굴에 떠오르고 있는 표정의 깊이는 단리궁이 단리우에 비할 수 없이 깊고 심오해 보였다. 두 사람은 필히 승부를 내야만 한다. 승자는 제십관(第十關)에 자연 입관하게 되고, 패배자는 재훈련을 받은 다음 입관을 하게 된다. 단리우는 훗날의 태상호법(太上護法)으로 키워지고 있고, 단리궁은 총사로 키워지고 있었다. 둘을 함께 연무시키는 이유는 나이 비슷한 소년들끼리의 경쟁심을 자극시켜 빠른 성취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것 역시 가법(家法)에 따른 것으로, 나이가 비슷한 소년을 동시에 연공관에 넣어 같은 교두들의 지도 아래 무공을 익히게 한다는 것은 천 년 동안 깨어지지 않고 지켜지는 전통이었다. 석도(石道), 단리궁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걷고 있고… 단리우는 키만 컸지, 치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단리궁을 따라가고 있었다. 저벅… 저벅……! 단리궁은 늘 그러하듯 보법(步法)을 쓰지 않고 걸었고, 그 덕에 유난히도 큰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리우는 단리궁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시선을 흘렸다. '형(兄)은… 여전하외다.' 그는 단리궁의 뒷모습에서 형언하지 못할 신기(神氣)를 느끼고 있었다. 내공도 쓰지 않고 평범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단리궁. 그의 옷자락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검은 나비의 날개처럼 펄럭이고 가끔 가다가는 흑삼이 흘러내리며 소수(素手)가 드러난다.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자욱한 신기(神氣), 그 기운은 단리우의 가슴을 찌릿하게 하고도 남았다. '형은 지난 십 년간 나의 하늘이었소. 나는 불철주야 형을 이기려 했으나, 형은 늘 나보다 한수 위였소.' 단리우의 허리에는 철목도(鐵木刀)가 한 자루 걸려 있다. 단리궁은 느릿느릿 비무장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아아, 형! 그대는 고금에서 가장 완벽한 수업자(修業者)요. 그대는 이미 검의 혼(魂)과 마음을 하나로 이을 경지에 이르렀소. 나는 그것을 알고 있소. 형이 이미 가공할 절세고수라는 것을……!' 단리우의 얼굴에는 부러움의 빛이 가득해졌다. 그 순간, 단리궁이 오랜만에 신형을 틀었다. 그는 흰 손을 들어 이마를 덮는 검은 머리카락을 조용히 빗어 넘기며 단리우를 바라봤다. "네게 고뇌(苦惱)가 있나 보구나, 우(雨)!" 그의 눈빛은 아름답고 순수했다. 그것은 무사(武士)의 눈이 아니었다. 단리궁의 눈은 하늘의 눈이었다. 적어도 단리우에게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형!" 단리우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리고 단리궁의 입가에는 예의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는 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소수(素手), 너무나도 희어 석도 벽에 걸린 궁등(宮燈)의 불빛이 손을 뚫어 버릴 듯하다. 어떤 여인의 손보다도 아름다운 흰 손이 강철같이 단련되어 있는 우의 어깨에 놓여졌다. 손에서는 따사로운 온류가 통했다. "너의 호흡이… 매우 거칠다!" "으음……." "후후… 그렇게 격동하면… 네녀석과 내가 짠 연극이 교두들에게 발각당하고 만다." "형(兄), 나는 할 수 없을 듯하외다!" 단리우의 볼은 소녀의 볼처럼 붉어졌다. "녀석, 덩치값도 못하는구나." 단리궁은 단리우의 듬직한 어깨를 불끈 거머쥐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뇌전(雷電)이 통하는 듯했다. "녀석, 너는 숙명적인 무도자(武道者)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형의 개인지도 때문입니다!" 개인지도라니……? 그럼, 단리우를 이렇듯 강하게 키운 사람이 다름아닌 지난 저녁 비문(比文)에서 패한 단리궁이란 말인가? "후후… 그런 말은 영원히 잊기로 하지 않았느냐?" "그, 그렇습니다… 형!" "녀석, 너는 늘 당당한데… 내 앞에서만은 꼼짝도 하지 못하는구나." "형은… 대종손(大宗孫)이시니까요." "후후… 하여간 너는 좋은 녀석이다. 네녀석이 아니었더라면 매우 불행한 사건이 터졌을 테니까!" "불행한 사건이오?" "가주(家主)의 자리(座)가 단맥(斷脈)되는 불행!" 단리궁은 신묘하게 웃는데, 그의 웃음에는 현오한 느낌과 소년의 치기가 동시에 들어 있었다. 단리궁은 아직도 단리우의 어깨를 거머쥐고 있다. "너는… 이미 많은 사람을 죽여 봤다지?" "그렇습니다. 삼 년 전, 한 달 여유를 얻어 비밀리에 강호를 떠돌며 흑도무림계의 십대고수를 차례로 죽인 바 있습니다. 그들의 수하들까지 친다면… 적어도 이백은 될 것입니다!" "후후… 피(血)의 맛이 어떻더냐?" "글쎄요. 저는 피를 보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상대의 허점(虛點)뿐이었습니다!" 단리우는 순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어떤 사람도 다스리지 못하는 야수의 맹폭함을 가진 단리우이나, 단리궁 앞에서는 늘 꼬마에 불과했다. "선혈(鮮血), 그것은 본가의 유일한 법이다. 후후, 내가 위대한 이유는 피로 이루어진 가문의 종손이기 때문이고… 후후, 내가 떠나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피의 전통이 싫기 때문이다!" 떠나다니……? "나는… 피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체질이다. 그래서 떠나야 한다." 대종손의 입에서 그러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다니……. "형, 정말 떠날 거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는 없소?" 단리우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녀석, 나는 이미 백 일 전, 네게 나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으음……." "후후… 중요한 것은 소란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형, 천지개벽의 소란이 있을 것이오!" 단리우가 우려하는 표정으로 말하자, 단리궁은 자신있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에!" "무슨 묘안이 있습니까?" "후후… 나는 선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네가 모르는 사이 이미 백방으로 조사를 했고… 후후, 밤을 세워 가며 가보(家譜)와 가법서(家法書)를 통독했다!" 단리궁은 이 순간 하나의 개구쟁이였다. 그는 단리우가 어깨에 통증을 느낄 정도로 손에 힘을 가하고 있었다. '역시… 하늘이다. 아아, 형이야말로 본가에서 배출한 청년고수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단리우의 눈에서는 묘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는 강철보다 단단한 신체를 지니고 있다. 도검에 맞는다 해도 그의 신체에는 상처가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단리궁이 어깨를 쥐자, 그는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가문의 혈통이 아무리 엄하다 해도, 천하의 문제아인 나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 물론, 앞으로 내게 닥쳐 올 고련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은 아니다. 너라면 내 마음을 알 것이다!" "압니다, 형의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하나……!" "알면 된다. 이해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아직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으음……!" "나는 늘 꿈을 꾼다. 꿈은 나를… 멀리 날게 한다. 아마도 내게는 천 년 조상들에게는 없던 한 가지 살(煞)이 있나 보다!" "살이오?" "역마살(驛馬煞)!" 단리궁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그가 지은 어떠한 웃음보다 아름다웠다. 피(血)를 싫어하고, 검(劍)을 혐오하고, 타인 위에 군림하는 것을 역겹다 여기는 낭인(浪人)……. 단리궁은 이미 낭인이 되어 있었다. 칠 년 전, 그의 모친은 가문에 도전하는 인물에게 무자비한 응징을 가하는 그의 아버지를 기다리다 못해 고질병이던 태음절맥(太陰絶脈)이 도져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단리궁의 결심은 바로 그 날 발아(發芽)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문 사람들이 마가에서 잡혀 온 수천 명의 포로들을 단 하나도 남김없이 천참만륙 죽이는 것을 숨어서 보며 낭인 기질은 날개를 달았고, 밤(夜)과 달(月)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의 운명은 정해진 듯했다. '형은… 다른 사람이오. 그러하기에 타인이라면 고뇌하지 않을 절대의 숙명마저 거부해 버리는 것이오.' 단리우는 단리궁의 얼굴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형, 꼭 하나 물을 것이 있소!" "뭐냐?" "만에 하나, 만에 하나… 우리가 꺾이게 된다면 어찌하겠소?" "꺾인다고? 후후, 우리 가문이 꺾인다고?" "만에 하나의 경우를 가정하는 것이지요." "후후… 그럴 확률은 전혀 없다. 마가가 막강하다 하나, 그들은 본가만 못하다." "그러나… 만에 하나의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있다. 해외육가(海外六家)가 마가와 하나로 합한다면 본가는 백 일 안에 도륙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단리궁은 고집스럽게 이야기했고, 단리우는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재촉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형은 어찌하겠소?" "글쎄……?" 단리궁의 얼굴에 묘한 음지(陰地)가 떠올랐다. 그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신다. 그의 몸에서는 신비한 느낌이 전해진다. 산의 그림자가 던지는 그러한 암영(暗影) 같은……. "글쎄, 그렇다면… 돌아와야지!" 단리궁은 중얼거리듯 말했고, 단리우는 찡그리다 말고 단리궁의 돌아온다는 말에 명절을 맞은 개구쟁이처럼 활짝 웃기 시작했다. "푸핫핫…됐습니다. 형의 그 말 한 마디면 됐습니다. 푸핫핫…!" 그리고 어둠 깊은 곳에서 하나의 눈빛이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녀석, 된 놈이다.' 언제부터일까?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한 명의 신비인이 있었다. 숨소리조차 감추고 맥박 소리마저 호신강기로 차단해 버린 채 그늘 가운데 숨어 있는 사람. 그는 너무나도 늙어 얼굴이 진물로 되덮여 있었으나 기도만은 장대하고 웅장했다. 거산(巨山) 같은 인물. 그는 단리궁의 뒷모습을 보고 묘한 시선을 쉬지 않고 던졌다. '어쩌면 너로 인해 천 년의 알력이 풀어질지 모르겠다. 아아, 화(華)라는 꼭지 덜 떨어진 녀석의 말과 원로원(元老院) 꼬마들의 말만 믿고 혈통(血統)이 끊어질까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군.' 그림자는 천천히 자취를 감췄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다. 물이란 흘러가는 대로 버려 두어야 한다. 물은 흘러흘러 결국 바다(海)에 도달한다. 물이 바다에 이르게 하려면, 물을 가로막아서는 아니 된다. 더 거대한 운명(運命)에 순응하기 위해, 버릴 것은 버려야만 한다. * * * 단리화(段里華), 그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표정 변화가 전혀 없던 인물. 그는 천년밀가의 삼십삼대(三十三代) 총사(總師)이고, 천년밀가의 세력을 사상 가장 거대한 범위로 확장한 인물이었다. 그는 태상가주(太上家主)인 단리군(段里君)의 장남이다. 단리궁에게는 친부(親父), 단리우에게는 백부(伯父)이고 삼십삼대의 대종손이었던 사람이다. 그가 손을 떠는 이유는 한 장의 쪽지 때문이었다. 원로원에서 전해진 한 장의 첩지 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적혀 있었다. <패자(敗者)는 대종손 궁(弓)나으리로 판가름났습니다. 원로원의 모든 추측을 깨고 우(雨)공자가 이겼습니다! 단 십 검(劍)에……. 원로원은 천년가법(千年家法)에 따라 궁나으리의 연무자격을 백 일(日) 안에 박탈하기를 합의했고, 서열 일품(一品) 중에서도 서열 삼 위(位)이신 궁나으리의 지위에 대한 재평가를 심의하는 대평의회를 개최하기로 의결을 보았습니다! 태상가주께서는 친히 원로원에 납시어, 모든 것은 가법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백팔원로(百八元老)의 수결(手訣)이 있는 첩지. 그것은 가주라 하더라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는 가장 큰 권위를 지닌 원로원의 결정이었다. 원로원은 가주와 동등한 지위에 있다. 사실 천년밀가의 최고자는 가주가 아니라, 태상가주였다. 척천제군(拓天帝君) 단리군(段里君). 강호계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소문난 인물인 그야말로 천년밀가의 주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단리궁을 유난히도 총애했던 인물로, 단리궁은 십사 세가 될 때까지만 해도 단리군과 함께 기거했다. 한데, 연무관에서의 일로 인해 단리궁은 단리군에게마저 눈 밖에 난 듯했다. "못난 놈! 못난 놈!" 단리화는 고개를 휘휘 젓다가 손을 쳐들었다. 한순간, 그의 손이 푸른 번개가 되어 떨쳐진다. 파삭－ 팍－! 청동으로 만들어진 태사의의 용두(龍頭) 팔걸이 하나가 일순 쇳가루가 되어 형체도 남지 않고 으스러졌다. "감히, 감히… 천 년의 전통에 도전하려 하다니… 제놈이 고집을 부려 대체 무엇을 어찌하자는 말이야!" 단리화는 노화가 치밀어오르는 듯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바닥의 오금석이 만 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유리알처럼 갈라져 버렸다. 그가 이렇듯 흥분하기는 실로 오랜만이라 할 수 있다. "어이해… 네놈에게는 그 고약한 낭인기질(浪人氣質)이 배어 있단 말이냐? 못난 놈, 제놈이 고금제일뇌임을 모든 사람이 다 아는데… 감히 꾀를 부려 도망치려 하다니……!" 단리화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이렇듯 부동심을 잃고 흥분하는 이유는 단 하나, 유일한 아들인 단리궁에게 자신의 일생에 걸었던 기대보다 더 큰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단리궁의 방황은 더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또한, 그의 아들에게 낭인의 혼이 자리한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던져 주었다. 낭인(浪人)의 혼(魂), 마음의 고향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부평초의 기질이다. 천년밀가 사람들은 혹독한 수련 가운데 그것을 잊고 만다. 하지만 단리궁에게만은 그것이 짙게 배어 있었다. "못난 놈! 우보다 세 배는 뛰어난 놈이 우에게 패했다면, 누가 속을 줄 알았더냐? 고약한 놈! 감히, 감히… 천년혈통을 부정하고 뿌리 없는 부평초(浮萍草)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려고 하다니……!" 단리화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말로는 표현 못할 어떤 기쁨이 떠오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녀석, 고집은… 본가의 전통 그대로구나. 네게는 절대로 남과 타협하지 않는 본가의 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녀석, 네게는 천 년의 가법이라도 금제하지 못할 위대한 혼이 있나보다. 녀석, 너의 고집과 젊음이 부럽다. 하지만 너는 절대 내곁을 떠날 수 없다.' 단리화는 입술을 질겅질겅 물고 있었다. '아마도 지루한 연무가 짜증스러워 그런 쇠고집을 부리고 있으리라. 녀석, 아비가 오랜만에 말을 한다면 곧 마음을 돌이키리라.' 단리화는 애써 냉정을 회복했다. 그가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으려 할 때였다. 스읏－ 슷－! 돌연, 대전의 문을 통해 거영(巨影) 하나가 번개보다도 빨리 태사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거붕이 내려앉듯이 떨어져 내리는 팔 척 거한. 그는 철갑포(鐵甲袍)를 걸치고 있고 허리에 장검(長劍)을 걸고 있다. 제일천장(第一天將). 그는 평소에는 태산처럼 진중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놀라지 않는 자인데, 이 순간만은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격동해 있었다. "총사, 큰일입니다!" 십대천장의 제일인이자 지난 이십오 년간 단리화의 그림자가 되어 단리화를 따라다녔던 제일천장은 사지를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무엇인가? 자네가 이리 경동하다니? 무슨 일인가?" 단리화는 애써 침착하게 말하는데……. "종손께서……." "궁(弓)이? 그 아이가 어떠하단 말이냐?" "종손께서… 패륜의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비위대(臂衛隊)의 급전입니다!" "패… 패륜의 짓이라니?" 단리화의 얼굴은 석고처럼 굳어졌고……. "취해서… 여검대(女劍隊)의 젊은 고수의 치맛자락을 낚아채 찢어 버렸다 합니다!" "뭐, 뭐라고……?" 단리화의 얼굴은 한순간 타다 남은 목탄처럼 잿빛으로 물들었다. 우르르르－ 릉－! 그의 몸에서는 무시무시한 강기가 흘러나왔고, 거대한 철전의 모든 것은 그로 인해 지진을 만난 듯이 뒤흔들렸다. "궁(弓), 그 놈이… 그 놈이……?" 파문(破門) 소매에 피어난 붉은 꽃 한 송이. 펄럭이는 진홍의 한 송이 혈화는 밀가의 중추세력인 검기원(劍機院)의 상징이다. 보무도 당당히 걷는 팔 인의 검기원 무사들. 이들은 드넓은 연무장(練武場)을 가로질러 갔고… 그 때마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포권지례를 취한다. 밀가의 외성(外城)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연무장 일대에는 밀가의 전통을 숭상하여 피로써 밀가의 영원한 가신이 되기를 맹세하고 입가(入家)한 강호의 고수들이 허다하다. 밀가는 신입자를 선발할 때 매우 혹독한 조건을 제시하여,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이 천(千)이라면 뽑히는 사람은 셋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하나. 밀가는 피의 인연으로 이룩된 일개의 가문이지, 방(幇)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밀가 사람들은 눈빛부터가 다르다. 눈빛이 차고 날카로우며, 언행에 절도가 있다. 일거수 일투족이 정확하며 예법에 있어 지극히 까다롭다. 지독히 배타적인 전통 가운데 천 년간 독자적인 전통과 가법을 이룩해 온 천년밀가의 영웅들. 이들은 꽤나 흥분하고 있었다. － 대체 어떤 망나니냐? － 어떤 자이기에 감히 풍기를 문란시키느냐? 그 자를 일벌백계로 다스려 밀가의 가풍(家風)을 이룩해야만 한다. － 감히 여고수를 희롱하는 파락호(破落戶)가 있다니? 그것은 밀가의 천년전통에 먹칠을 하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대노해 있었다. 금지되어 있는 술(酒)을 마시고, 금지되어 있는 허무의 노래를 부르고, 금지 되어 있는 색(色)을 탐한 자가 하나 누워 있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듯, 양 볼에는 화색이 좋다. 흰 손에는 진흙이 묻어 있는데, 손아귀 안에는 검은 치맛자락 한 조각이 걸려 있었다. 그는 검기원의 팔대교두(八大敎頭)가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지도 모르고 취해서 노래하고 있었다. 바람(風)이여! 하늘을 삼키고, 큿큿, 봄(春)이여! 모든 꽃을 활짝 피어나게 하라. 오호, 세월은 유전하는 법. 그대여, 어이해 나의 잔(盞)에 독주를 채우지 않는가! 나의 벗이여! 내게 봄의 노래를 불러 다오! 취해 소리치는 소년의 얼굴은 머리카락에 감추어져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사이에서 오똑한 콧날이 나타나고, 너무나도 짙붉은 입술이 떠오를 때마다 근처에 숨어서 취한 소년을 보고 있는 소녀무사들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친다. '세상에, 저런 미남자가 있다니……!' '본가에 저런 미남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아아, 너무도 수려한 사람이다. 그리고 고귀한 기품이 있어 보이는데… 어이해 죄를 지을까!' 소녀들은 괜히 가슴을 졸인다. 아마도 봄이기 때문이리라. 봄은 청춘을 끓어 넘치게 하는 묘한 계절이 아니던가! 팔대교두 중 여섯. 이들은 정연한 보행으로 다가서다가 육합진세(六合陣勢)로 갈라져 소년의 모습을 중인에게서 격리시켰다. 검기원은 서열 삼품(三品)의 무사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원로원 다음의 권위 있는 장소이다. 그 곳의 지존(至尊)은 무상(武相) 천검노야(天劍老爺). 지금 여기 온 여덟 교두는 천검노야의 의발전인(衣鉢傳人)들로,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백검홍(百劍虹) 웅고(熊古), 천사비검(天獅秘劍) 웅탁(熊卓). 세가 내에 얼굴이 쫘악 알려져 있는 서열 백위권의 두 고수는 육합진세가 펼쳐지자마자 천천히 시립했다. "대종손(大宗孫), 어이해 이러하십니까?" "대종손, 가주의 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어서 속하들과 더불어 가주 앞으로 나아가시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십시오!" 두 사람은 곤욕스러운 표정이었다. 취해 노래하던 소년. 그는 바로 단리궁(段里弓)이 아닌가? 그는 연공관을 나선 직후 제주(祭酒)를 훔쳐 마셨고, 곧바로 연무장으로 나와 작은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그가 대종손 단리궁이라는 것이 알려졌더라면 아마도 천년밀가의 모든 것은 정지되고 말았을 것이다. 단리궁의 얼굴은 일반 고수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적어도 서열 삼품은 되어야 단리궁의 정체를 알고 있다. 단리궁은 검기원의 두 고수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키득키득 웃었다. "큿큿… 술을 마신 것은 난데… 왜 하늘이 도느냐? 그리고 술을 마신 사람은 난데, 어이해 땅이 비틀거리느냐?" 그는 횡설수설하며 흐릿한 눈빛을 던졌다. 두 고수는 슬쩍 눈짓을 교환하며, 전음으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단리궁은 그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노래를 계속한다. "탈 줄만 아는 태양(太陽), 다가설 줄만 아는 바람(風)아, 떨어질 줄만 아는 유성(流星)아! 큿큿……!" 고약한 술 냄새를 풍기며 노래하는 단리궁. 그는 노래하는 가운데 속으로는 절규하고 있었다. '하늘이여, 천 년의 전통이여! 나를 욕하고 벌하셔도 좋소이다. 하지만 나란 녀석은 이렇게밖에 되어 먹지 않는 놈이라오.' 단리궁은 취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술에 취했다기보다 자신의 두 어깨에 지워진 선혈의 굴레에 휘청이고 있는 것이다. 피로 일어난 무사가문, 철혈(鐵血)의 단리세가(段里世家). 단리궁, 그는 밀가의 대종손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비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거부했고, 피의 행로(行路)에 올라야 하는 자신의 굴레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숙명의 문제아였다. * * * 단리궁의 사건은 삼품 이상의 고수들만이 쉬쉬하는 비밀로 막을 내렸다. 사품 이하의 제자들은 단리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처지이기에, 정오의 일을 가벼운 사건 정도로 웃어 넘겼다. 외성의 총교두(總敎頭)는 젊은 제자들의 정신이 해이해졌다며 연공시간을 매일 일개 시진(時辰)씩 늘리기를 결정했고, 젊은 제자들은 지독한 수련이 일개 시진씩 늘어났다는 통지에 혀를 내두르며 이름 모를 소악동에게 욕을 해댔다. 밤(夜). 단리궁에게는 의미가 있는 밤이었다. 그는 원로원과 연해 있는 기밀원(機密院)의 밀금부(密禁府)에 임시 연금된 상태였다. 그는 대종손, 그의 서열은 칠만 명 중에서 삼 위이다. 그의 위에 있는 사람은 태상가주와 가주뿐이다. 그 이외의 사람은 그에게 종이 되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대종손의 사건은 원로원에서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일이다. 단리궁은 어떠한 결정이 있기를 기다리며 창을 통해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쏴아아… 쏴아아……! 비(雨)다. 오월의 산은 비에 젖고 있었다. "후후… 비란 녀석을 이리도 심각하게 바라보기도 오랜만이군. 어머니께서 혈전을 치르러 떠나신 아버님을 기다리다가 피를 토하시며 쓰러지던 그 날 밤처럼… 후후……!" 단리궁의 이가 하얗게 드러났다. 그는 종손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죄를 지은 처지인데도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쾌재연하고 있었다. 원로원은 불야(不夜)의 장소가 되었고, 백팔 원로들은 천 년의 가법을 놓고 갑론을박하기에 여념이 없으리라. 그리고 우(雨)는 십대무관으로 들어가 새로운 무도의 길을 시작하리라. 단리궁은 처음으로 고독(孤獨)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가슴 안이 허전해 왔다. 그의 두 눈, 비의 막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묘한 빛이 떠오르고 있다. 유성(流星)의 빛이랄까? － 너의 눈 안에는 유성(流星)의 혼(魂)이 스며 있구나, 나의 아들아! 유성이란 녀석은 영원히 흘러가기만 한다! 네 눈에 스며 있는 그 빛이 흐려지기 전에는… 너는 바람(風)일 뿐이리라! 오래 전에 죽은 어머니의 말이다. 그 말은 문득 단리궁의 뇌리로 촉촉이 젖어들었다. 천하제일 미인이라 불렸던 황보령(皇甫令). 그녀는 단리세가에 병탄된 황보세가(皇甫世家)의 여인이었다. 사실, 단리세가는 무림계에서 지탄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단리세가 사람이 아닌 강호인으로 단리세가를 욕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가공할 저력으로 군림하는 천년밀가. 이들의 보수성과 잔혹성은 중원무림계의 고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년밀가는 늘 대란을 막아 왔기에 구파일방이 주도하는 정파무림은 천년밀가를 필요악으로 여기고 수수방관하는 전통을 유지했었다. 그런데 일 갑자 이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마가(魔家)의 활동이 지하(地下)로 숨고 난 후 천년밀가는 고독한 거인(巨人)상으로 중원천하에 비춰지기 시작했고, 자연히 적이 많아졌다. 밀가가 반공적이 되면서도 태연자약해 하는 이유는 천 년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국법(國法)보다 가법을 숭상한다. 이들은 가문을 위해 죽기를 초개로 여긴다. 설사 타파에 잡힌다 하더라도 가문의 비밀을 엄수한 채 웃으며 죽어 간다. 그리고 잡혀 죽은 자의 복수는 백 년이 걸리더라도 완벽히 이행된다. 무서운 근성의 가문 단리세가. 이들의 힘은 바로 고집과 패기(覇氣)라고 할 수 있었다. "내게… 고집은 있으되, 패기가 없는 것은 불행이다!" 단리궁은 슬쩍 웃었다. 그의 미소는 이 순간따라 조금은 고독해 보였다. "나를 위해서라도, 가문을 위해서도… 나같이 무림에 어울리지 않는 허무주의자는 파문(破門)되어야만 한다!" 단리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머니 황보령의 그림자가 떠오르고 곧 사라진다. 그에게 추억이라면 어머니의 잔영(殘影)과, 십칠 세 가운데 십 년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연공관의 벽돌과 십팔반병기(十八班兵器)들뿐이다. 더 있다면 수도 헤아리지 못할 비급의 곰팡내이리라. '천 년의 가법이라도… 나의 고집은 꺾지 못한다. 나는 가법에 따라 만리유형(萬里流刑)에 처해질 것이다.' 단리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버리는 뜻은… 삶을 알기 위함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나, 내게는 그것에 대한 동경이 있다.' 단리궁은 조용히 상념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별이 비가 되어 퍼붓는다. 비는 일순 한 마리 천룡(天龍)이 되고, 그것은 단리궁의 몸을 한순간 불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단리궁은 불새(火鳥)가 되고, 거대한 날개가 만들어지며 붉은 불의 날개가 펄럭인다. 단리궁은 십 일 정숙의 벌에 처해졌다. 대종손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일 년 폐관의 중벌이 내려졌을 것이다. 한데, 단리궁은 대종손이기에 십 일 정숙의 가벼운 벌만 받았을 뿐이다. �* * * 초막(草幕). 가주가 별재(別齋)로 쓰고 있는 초막이다. 단리궁은 이 곳에서 열흘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초막 주위에는 십대천장 중 용반오장(龍班五將)이 서 있고, 그 둘레에는 십팔천살령주(十八天煞令主)가 매복해 있다. 마치 천 년의 적을 포위하는 양. 철혈재(鐵血齋)라는 초막 둘레에는 가공할 진세가 펼쳐져 있었다. 단리궁은 창을 통해 밖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의 환한 웃음에는 타인이 상상하지 못할 묘한 매력이 있었다. "대숙(大叔)들! 후후, 나와 바둑을 두고 싶다면 서슴없이 들어와 바둑판 맞은편에 앉으시오." 단리궁은 꽤 크게 말했고……. "종손, 그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가법서를 정독하시고 마음을 정리하셔야 합니다. 그런 언행을 하신다면 노원로들은 점점 더 회의를 하게 됩니다!" "속하들을 곤란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오대천장은 착잡하다는 표정이고, 동시에 비웃는 기색을 흘리고 있었다. '종손의 지위에 오르지 못할 심약한 성격이다.' '하늘이 무심하시다. 철혈의 가문에 저리도 나약한 혼백의 소유자를 종손으로 떨어뜨리시다니…….' '어쩌면… 이 일로 인해 천 년의 법통이 흐려질지 모른다.' '아아, 종손을 비웃으면서도… 종손의 고집이 부럽다.' 오대천장은 석상이 되어 오행진을 구축한 채 시간을 보냈다. 비는 여전히 억수로 퍼붓는다. 투둑－ 툭－! 퍼붓는 빗속, 단리궁의 눈에서 반짝 혜광(彗光)이 일어났다. '어차피 떠날 바에야… 일찍 떠나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그는 입술을 꽈악 악물었다. '힘과 선혈, 그리고 칼만을 숭상하는 이 곳에서 가장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버리는 길뿐이다.' '나의 가문은 패도(覇道)로 천하에 군림했다. 그리고 나는 왕도(王道)를 찾아 떠나야만 한다. 두 가지를 함께 이룰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 가지는 완전히 버려야 한다. 완전히…….' 그는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질겅질겅 물고 있었다. '원로들이 실망하고… 우, 그 녀석도 괴로워하리라. 비록 무정(無情)하시다 하나, 내게 큰 기대를 걸고 계신 아버님도 슬퍼하시리라. 하지만 대세(大勢)를 위해 나를 희생해야만 한다.' 단리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철혈가법(鐵血家法)의 한 가지 조항이 떠오르고 있었다. － 종혈(宗血)은 의당 무공으로 만인을 지배해야만 한다. 특히 종손은 동배분의 무사 중 가장 강해야 한다. 무공을 잃은 자, 모든 것을 잃는다! 그는 암울한 고독 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나의 가문은 힘으로 약자를 괴롭혔다. 물론 대의(大義)에 따른 일이라고는 하나, 힘으로 타인을 격파하고 무수한 무림인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다. 운명아, 그 모든 죄를 내가 씻게 해 다오!' 단리궁의 얼굴은 밀랍처럼 희어졌다. 자야(子夜), 단리화(段里華)는 한 장의 쪽지를 건네 받고 몹시 흡족해 하고 있었다. "녀석, 그러면 그렇지!" 그는 흐뭇한 눈길로 쪽지의 글을 보고 있었다. <종손은 운기조식에 들었음. 내공을 십이 성 극도로 끌어올린 듯, 팔만사천 모공에서 자무(紫霧)가 일어나 몸을 휘감고 있음.> 아직 먹물도 마르지 않은 글이다. 단리화에게는 며칠간의 깊은 번뇌를 말끔히 씻어 내게 하는 청량제와 같은 글이다. "훗훗… 무사혈(武士血)이 어디 가겠느냐? 훗훗, 젊은 시절 이유 없는 반항을 한 번 정도 해 보는 것도 사실은 좋은 것이지. 이 아비도 한때는 피의 가법이 싫어 떠나고자 한 때가 있었다. 후후,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나……!" 단리화는 오랜만에 미소지을 수 있었다. 철(鐵)－ 혈(血)－ 검(劍). 천 년간 가문을 지배해 온 세 가지 법칙. 수많은 사람이 도전했고, 모든 사람이 패한 가장 위대한 전통이다. 억조창생이 치를 떠는 가공할 힘의 원리, 한 인간으로 그 가공할 가법에 도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그가 종손이라면……! "본가의 왕도(王道)는 패(覇)다. 그길은 영원히 이어져야 한다. 영원히! 그리고 어떤 천재(天才)도 그길을 바꾸지 못한다. 궁(弓), 네녀석은 이제야 그 길의 숙명을 느낀 듯하구나. 헛헛, 사실 가문의 세력확장에 신경을 쓰느라 네게 아버지의 면모를 보여 주지 못했구나. 그러는 사이, 너도 아마 청년(靑年)이 된 듯하구나!" 단리화는 창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어느 새 비는 완전히 개었다. 뚝－ 뚝－ 뚝－! 그리고 공활한 하늘 가득 유성우(流星雨)가 내리고 있었다. "유난히도 지는 별이 많군!" 단리화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하늘빛이 유난히도 짙붉고, 유성우의 흐름이 기이하게도 천년밀가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지 않는가? "무엇인가 벌어진다는 천기이다. 으음, 유성우가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떨어질 때 유성혼(流星魂)은 천 년의 하늘로 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날의 천기와 그것이 연관이 있을까?" － 유성우(流星雨)가 하늘을 뒤덮고, 유성혼(流星魂)이 천 년의 하늘로 웅비한다. 그리고 운명의 하늘은 열리니, 억조창생은 그 숙명의 수레를 가로막지 못하리라! 춘추전국시대부터 유래가 된 전설이다. － 유성혼이 웅비하는 날, 천년혈로(千年血路)는 무너지리라! 전설은 그렇게 끝나고 있다. 뚝－ 뚝－ 뚜－ 욱－! 유성은 침묵으로 떨어지나, 유성의 비를 보고 있자면 유성의 신음 소리가 폐부로 파고들게 된다. 같은 하늘 아래, 단리궁의 전신은 여전히 짙은 자무(紫霧)에 휘감겨 있었다. 모공을 통해 뻗어 나온 자무는 무형의 진원진기가 유형화 된 것으로, 그것이 짙을수록 내공력이 강함을 의미한다. 짙은 안개 속, 그는 합장(合掌)을 한 상태였으나 이상하게도 눈에서 물막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그것은 저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시산혈해 가운데 이룩된 가문의 숙명에 도전하는 길이 이 길뿐이기에… 저로서는 제 자신의 피로 제 자신을 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여!' 단리궁은 천천히 진기를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해 왔던 진기운용이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공력을 끌어올리도록 훈련받지 않았던가. 그가 세상에 나와 처음 배운 게 바로 내공의 운용법이었다. 또한, 그는 대종손의 특권으로 인해 지금껏 무수한 영약과 영단을 복용했기에 임독맥이 막히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단리궁의 성취는 천년밀가 내에서도 독보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단해(丹海)에서 뻗어 나간 진기가 임독양맥(任督兩脈)으로 갈라지며 더욱 맹렬한 기세로 퍼져 나갔다. 우르르르－ 릉－! 한순간 두 줄기의 기운은 격한 노도가 되어 그의 천령지혈(天靈之穴)을 향해 소용돌이치며 모이기 시작했다. 우우, 그것은 주화입마(走火入魔)로 이르는 반선천운기술(反先天運氣術)이 아닌가? 콰르르르－ 릉－ 콰앙－! 두 줄기 진기는 천령혈에서 합쳐지며 단리궁의 전신혈도가 일순 뇌전에 맞은 듯 격하게 동요하게 했고, 단리궁은 입술 사이에서 그가 그리도 싫어하던 비릿한 선혈을 뚝뚝 흘리며 천천히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되, 되었다… 이제는……!" 천 년간 단 하나의 이단자도 태어나지 않았다는 위대한 혈통이 처음으로 거부되는 순간의 하늘에는 유난히도 드센 유성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 * * 아침이 될 때, 드넓은 천년밀가의 각개밀원(各個密院)에서는 청년층 무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엇인가를 수근거리느라 바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폭우가 내리고 유성우가 떨어지던 지난밤 사이,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설명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기변(奇變)은 정녕 초유한 것이었다. －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지난 새벽 십대약왕당호법(十大藥王堂護法)이 모두 출두되었고, 내성(內城) 일대에 근자에는 펼쳐지지 않았던 풍운금쇄대진(風雲禁鎖大陣)이 펼쳐져 나는 새조차 대성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금지되었다. － 내성 안에서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다. 지난밤 유난히도 기이한 천기변화가 있었는데, 그것과 상관 있는 일인지 모른다. 아무래도 천 년의 전통에 저촉되는 어떠한 일이 벌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틀림없이……. * * * 아스라한 자무(紫霧)에 뒤덮인 곳이다. 유난히도 공기가 맑고, 보보(步步)를 내딛을 때마다 기화요초(琪花瑤草)를 밟게 되는 세외선경(世外仙境)이다. 혈잠화(血簪花)에서 금은전화(金銀錢花), 그리고 유난히도 울금향(鬱金香)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오색의 울금향(鬱金香)이 흐드러져 있는 드넓은 화원. 이 곳은 천년밀가의 내성에서도 가장 깊은 장소였다. 단리씨(段里氏)가 아니라면 밟지 못하는 단리씨의 천년제일지(千年第一地). 울금향을 가화(家花)로 삼고 천응(天鷹)을 가조(家鳥)로, 천응(天鷹) 가문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중원제일의 가문 단리세가이다. 무수한 격전을 치르는 가운데 무수한 업적을 만들었고, 그러는 가운데 무수한 강호의 적을 만든 천하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 이들의 대평의회장(大平議會場)이 바로 이 곳이라는 것은 단리씨에서도 서열 이품(二品) 이상인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사백여 개의 좌(座). 모든 자리에는 사람들이 꽈악 들어차 있었다. 이 자리에는 연무관에 머물렀던 우(雨)의 모습도 끼여 있었다. 고개를 푹 떨군 그의 입가에는 기이한 번뇌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형을 존경하나, 형을 이해하지는 못하오. 형이 그 정도로 격한 행동을 할 줄은 몰랐소.' 단리우는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사백여 개의 좌석을 꽈악 메우고 있는 모든 종친(宗親)들의 표정은 목각인형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상좌(上座), 그 자리에는 과묵한 인상의 중년인이 백포(白袍) 차림으로 앉아 있다. 그는 격한 갈등을 느끼는 듯 얼굴 표정을 몇 번이고 바꾸고 있었다. 대종친회(大宗親會). 이 회의는 단 두 가지 일이 벌어졌을 때에만 개최된다. 가주 지위에 승계 예식이 첫째, 또 하나는 파문(破門)을 결정하는 경우이다. 대종친회의는 수십 년 만에 개최되었다. 십대마류(十大魔流)가 완전 퇴거된 후, 단리군(段里君)이 단리화(段里華)에게 가주의 지위를 전수할 때 이후 처음이었고, 긴급소집이라는 데에 있어서는 정녕 수백 년 만의 일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고집이 세고 독선적이라는 단리화. 그는 이미 다 커 버려 자신의 말로써는 의사를 바꾸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린 아들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일대에는 화향이 퍼지고 있다. 단리세가의 기화라는 울금향의 내음이다. 단리궁은 무표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거산(巨山)처럼, 그는 절대 흔들리지 않고 죄인의 자리를 지켜서 있었다. "가문을… 어쩌겠다고……?" 단리화는 오랜만에 입술을 떼었다. "저는 가법이 존중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아버지!" 단리궁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그럼… 가문을 버리겠다는 말이냐?" 그의 눈에서는 배신의 분노가 폭죽처럼 튀어 나온다. 하늘이 무너졌다 해도 이처럼 노여워하지는 않으리라. 사실, 그는 단리궁에게 지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단리궁이 모르는 가운데, 단리궁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 있다. 그는 기회를 봐서 단리궁의 고집을 꺾어 볼 생각이었는데, 단리궁은 그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방법으로 자신을 파멸시킨 것이다. "아버지, 소자를 벌해 주십시오!" 단리궁은 고개를 떨군 자세를 유지했다. "궁, 너는 대종손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죽을 죄를 지은 것이나, 너는 다르다. 너는 위대한 혈통을 지니고 있기에, 특혜를 누릴 수 있다. 네가 용서해 달라고 한다면… 네게 너의 불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겠다!" "……." "너의 내공을 십 주야 안에 이전보다도 두 배 강하게 한 다음, 네 소원대로 강호로 내보내 주겠다." "으음……!" "너는… 수 년 전 우(雨)가 그러했듯이 천하를 돌며 강호난적(江湖亂賊)들을 처단하게 될 것이다! 어떠냐? 아버지의 말대로 하겠느냐?" 단리화는 천하에서 가장 고집스러운 사람이다. 그는 후예들을 무자비하게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휘하에는 하수(下手)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단리궁의 대답은 단리화의 예측을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할 말은 그것뿐입니다!" 단리궁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일순, 그의 두 눈에서는 아주 신비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단리화마저 정체를 알지 못할 정도로 신비했다. 단리궁의 인상이며 기도는 단리세가의 전형적인 인물과 판이하게 달랐다. 단리세가 사람은 극강함을 모태로 삼는데, 단리궁은 겉보기에 지극히 유약해 보였다. '고집스러운 놈.' 단리화는 저도 모르게 의자 모서리를 불끈 거머쥐었다. 그의 열 손가락이 쇳덩어리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다. '고집만은… 나를 닮았구나.'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단리궁을 노려본다. 이 때, 단리궁은 입가에 아주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저히 욕하지 못할 순수한 미소, 그것은 무사의 미소가 아니라 인간의 미소였다. '네녀석은… 너무도 거대한 야망(野望)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안다. 네놈에게 고금에서 가장 거대한 야망이 있다는 것을! 네게는… 절정(絶頂)의 하늘을 여는 꿈이 있다.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인간절정의 하늘을 여는 꿈이…….' 단리화의 숨소리는 차츰차츰 정상을 되찾았다. 그는 수많은 제자를 길렀고, 수많은 적을 처단했다. 때문에 그는 상대의 기도(氣度)를 정확하게 알아 내는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단리궁의 기도만은 그조차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신비했다. "본가(本家)는 중원의 삼분지일(三分之一)에 걸쳐 아성을 이룩했다!" "……." "너는 이십 년 정도 경륜을 쌓은 후, 그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된다. 그런데도 거부하겠단 말이냐?" "저는 가문법에 얽매이느니 강호를 떠도는 혼백이 되겠습니다, 아버님!" 단리궁의 대답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못난 놈! 정말 못난 놈이구나, 네놈은!" 단리화는 끌탕을 했고, 단리궁은 조금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무사(武士)가 되지 못할 놈입니다!" 피로 이루어진 단리세가의 종손, 그가 허무한 기질로 태어났다는 것은 불우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천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일개 후예가 반역을 해도 천지개벽할 일인데, 종손이 파문을 자청하다니……! "궁, 혈(血)을 버릴 수는 없다!" "……." "언젠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이 온다 해도 너를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겠다!" "으음……!" "너는 시련을 자초하고 있다.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는 성장했다!" "……." "좋다. 너를 보내 주겠다. 단리세가 사람은 경험하지 못했던 일반 강호로……." "감사합니다, 아버님!" 단리궁은 활짝 웃었다. "훗훗…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돌아올 때의 조건이 엄청나다는 것을……!" "예?" "할아버지를 일 초(招)에 패배시킬 진짜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되지 못한다면 돌아올 생각을 마라, 절대로!" 단리화는 힘있게 말하다가 단리궁을 뚫어지도록 바라봤다. 버언－ 쩍－! 그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정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만 근 거석을 찰나지간 녹여 버릴 듯한 눈빛. 그러나 단리궁은 그러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나의 바다(海)처럼, 그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가공할 기도를 보이고 있었다. '녀석, 철모르는 아이로만 여겼더니… 이미 다 커 버렸다!' 단리화의 입가에 여린 미소가 스치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좋아, 네 멋대로 살아 봐라. 어느 날이고 너는 네 숙명을 알리라. 그리고 강호의 숙명을 알리라. 백 년이고 천 년이고 간에, 너는 네 스스로 우리 가문이 피로 일어나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날이 된다면 네가 단리씨(段里氏)로 태어났다는 것을 혐오하지 않게 되리라!" 우르르르－ 릉－! 단리화의 목소리와 함께 대종친회 의장이 뒤흔들렸다. 결국 천년가법은 지켜진 셈이었다. 천년밀가의 대종손 단리궁, 그는 가법이 정한 바대로 파문을 당한 것이다. "떠나기 전, 할아버지를 뵙고 가라! 그것은 네가 마지막으로 지켜야 하는 대종손의 율법이다!" * * * 울금향(鬱金香)이 가득 피어난 화원(花園)이다. 언제부터인가 노인은 완고한 표정 가운데 울금향을 돌보고 있었다. 사각… 사각……! 전도(箭刀)가 흔들릴 때마다 죽은 잎이 떨어져 나간다. 천자만홍(千紫萬紅) 가운데에서도 가장 요염하게 피어난다는 울금향이 일 마장 안을 완전히 뒤덮고 있다. 울금향은 이 곳의 가화(家花)였다. 고집스러운 노인은 전도질을 하다가 한 곳을 바라봤다. 언제부터일까? 영준한 소년 하나가 노인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매우 신묘한 빛을 눈에서 흘리는 영준한 소년. 그는 고집이 세어 보이는 노인이 전도로 죽은 잎을 잘라 내는 광경을 지켜보며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은 근엄한 표정 가운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사화(死花)는 떼어 내야만 한다! 그것이 이 곳의 율법이다!" "으음……!" "언제고… 네 스스로 그것을 알 날이 있으리라!" "글쎄요." "후후… 궁(弓)! 너는 네 스스로 피의 율법을 알게 될 것이다. 언제고 그 날은 올 것이다!" "……." 입을 다무는 소년, 그는 바로 단리궁이었다. "후후… 네녀석은 야망(野望)에 대해 아느냐?" "글쎄요." "후후… 네 자신은 야망이 있다고 여기느냐?" "으음……!" "궁, 네놈에게는 가장 위대한 혼(魂)이 있다. 그것은… 운명이고, 너의 숙명이다!" "운명이오?" "울금향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죽은 잎을 떼는 절차를 밟는다. 그리고 우리 가문을 지키는 또 하나의 신물인 천응(天鷹)은 보다 멀리 내다보기 위해… 보다 높은 하늘을 난다!" 매는 높이 날고, 그 덕에 먼 곳을 본다. 전도질을 거듭하는 노인은 바로 단리군(段里君)이었다. "사실, 본가는 피의 제거를 너무도 오랫동안 거듭해 왔다. 우리 가문은 흑도마도(黑道魔道)와는 상극이 되었고, 변황문파와도 숙적이 되었다! 백도와도 알력이 심하다. 군림하기에는 힘이 약하고, 그렇다고 깨어지기에는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런 윤회가 거듭된 것이다." "……!" "그들이나 우리나, 무림인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 그리고 군림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데에서도 같다. 하나,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다. 절정(絶頂)의 길에는……." "절정이오?" "후후… 그 경지는 천 년간 존재하지 않았다!" 단리군은 허리를 구부정히 숙인 채 화단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다. 떨어지는 화(花), 그리고 밤(夜)은 깊어 간다. "정녕… 가겠다면 보내 준다!" "할, 할아버지……!" "후후… 네놈은 패배자가 아니다." "예?" "다른 모든 사람은… 특히, 너를 가르친 교두들은 네가 패배의식에 젖어 피를 두려워한 나머지 도망간다고 믿고 있다!" "으음……!" 단리궁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야망이 적기에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야망이 너무나도 거대하기에 떠나는 것이다!" "……." "좋아, 너를 넓은 세상으로 보내 주겠다. 어부(漁夫)가 되든, 농부(農夫)가 되든, 마부(馬夫)가 되든,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단리군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고집투성이의 늙은이, 그는 지극히 배타적인 성격으로 백여 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운명을 거역하지는 못할 것이다!" "……." "네 운명의 길이 어디로 뚫릴지… 할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너의 몸 안에 천 년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일이고, 너야말로 천년밀가의 가장 큰 재산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 단리궁은 석상이 되어 있다. 그는 복받치는 어떠한 충동을 꾹 눌러 참고 있는 중이었다. "궁, 괴로워하지 마라. 모두… 숙명이니까!" "죄송합니다!"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예?" "대장부라면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않아야 한다!" "으음!" "그리고 밀가의 대종손이라면 한 번 세운 고집은 절대 꺾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단리군은 한 번도 단리궁을 보지 않았다. 단리궁을 포기한 것일까? 그렇다고 여기기에는 말의 의미가 너무도 깊고 웅대했다. "너는… 위대한 도전자(挑戰者)이다! 네 운명에 거역하면서 도전했고, 아무도 도전하지 못했던 천 년의 숙명에 도전했다!" "……." "이제… 너의 길은 매우 험난해질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돌아보거나 후회해서는 아니 된다!" "……." "너는 무사로서는 가장 쉬운 길이라 할 수 있는 패도(覇道)를 애써 버린 바보 녀석이다. 너는 어리석게도 왕도(王道)를 찾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꿈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너는 꿈에 대해서도 도전을 한 것이다! 그것은 네가 용(龍)의 운명을 갖고 있기에 짊어져야 하는 운명의 굴레이다!" 단리군의 가위질은 그치지 않았다. 달빛이 조금 기울 때, 단리군은 처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떠나도 좋다!" 그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겠다는 말은 하지 마라!" "예?" "왠지 그 말이 듣고 싶지 않다. 그것뿐이다. 바보 같은 녀석!" 단리군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손자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달빛은 더욱 화사해지고, 화원 가득 울금향의 향기가 퍼져나갔다. '밀가는 대륙제일(大陸第一)인데, 너를 담기에는 부족한가 보다. 궁, 너는 밀가보다도 위대한 하늘(天)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너의 허무감이 씻어지지 않으리라.' 단리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단리궁이 서 있던 자리는 텅 비었고, 달빛에 몇 송이 떨어진 울금향화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중원에서 가장 신비한 전통을 지닌 단리세가의 유일한 이단자는 바라던 대로 파문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 * * 하부인들은 상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장차 있을 대결전에 대비해 심신수련을 하느라 분주하기만 하다. 밀가를 휘감은 진세는 천 년을 그러했듯 늘 우레 소리를 내며 검은 연기를 말아 올렸고, 저 높은 하늘에는 달이 슬그머니 나타나고 있었다. 소로(小路), 단리궁은 행장 하나를 짊어진 채 걷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달빛이 떨어져 내리고 있고, 그의 뒤에는 체격이 石榮聆� 단리우가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십 리(里)를 함께 걸었다. 이상하게도 말은 오고 가지 않았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말이면 족한 것일까? 단리궁은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을 차며 걸었다. 그리고 단리우는 단리궁의 의젓하고 탈속한 걸음걸이를 보며 한숨을 몰아 쉬곤 하였다. 길은 갈대에 뒤덮였다. 달빛은 갈대 사이로 떨어지며 황금빛 실처럼 흐드러졌고, 은잔을 뿌린 듯이 갈대꽃이 환하게 반짝였다. 길이 갈라지는 곳, 단리우는 세가를 나선 지 처음으로 입술을 열었다. "형(兄), 어디로 갈 작정이오?" "글쎄……." "마음을 돌이킬 생각은 없소, 지금이라도?" "후후후… 나 대신 네가 있지 않느냐? 천하악도들을 처단하는 데에는 너 하나만으로도 족하다." 단리궁은 소수를 들어 단리우의 어깨에 대었다. 그의 손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전해졌다. "나는 늘 마음 속에서부터 바람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가 끝나지 않는 한, 나는 가문에 돌아올 수 없다." "또 시시한 역마살(驛馬煞) 이야기요?" 단리우의 뺨에는 두 방울의 이슬이 떨어지고 있었다. "녀석, 네놈에게도 눈물이 있다니… 후후, 단리세가 사람들은 울어서는 안 된다는 가법도 모르느냐?" 단리궁, 천년가문의 문제아. 그는 뚜벅뚜벅 걸었고, 단리우는 그 뒤를 따랐다. 길의 좌우에는 갈대가 가득하다. "왜… 왜 가는지… 나에게만은 알려 줄 수 없소, 형?" 단리우는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았다. 순간, 단리궁은 처음으로 눈빛이 반짝이게 했다. "알고 싶으냐, 그 이유를? 나의 진심을……?" 그것은 그의 진실된 눈빛이었다. "알고 싶소. 진심으로……." 단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가지가 싫었다. 그래서 훌훌 털고 떠나가려 하는 것이다." "그 세 가지가 무엇이오?" "첫째, 완전히 절대군림(絶代君臨)하지도 않은 가문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예?" "가문은 강하나, 극강(極强)은 아니다. 그래서 싸워야 했고 무자비해져야만 했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그래서 박차고 떠나가는 것이다." "정녕 대단하십니다. 위대한 우리 가문을 작은 그릇이라 하다니……." 단리우는 볼을 실룩거렸다. "둘째, 나는 남자(男子)이기에 떠나려 하는 것이다. 여자였다면 여기 눌러 살았으리라." "남자이기에 떠나다니요? 남자이기에 싫어지는 것이 있습니까?" "있다!" "무엇입니까? 무사가문에서 남자가 싫어하는 것은……." "후후… 십만 휘하(麾下)와 억만 냥(兩)의 황금(黃金)!" "예?" "나는 내 손으로 이룩하고 싶지, 선조들에게서 물려받고 싶지는 않다. 선조들이 남긴 것을 물려받아 인간의 신(神)인 양 하기 싫다. 아느냐? 나는 평범하게 출발하고 싶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를 시험하고 싶은 것이다. 과연 내가 어느 정도인지……." "아아……." 단리우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단리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선조들이 물려준 것은 단 하나도 취하지 않겠다. 밀가의 무공초식은 이 순간부터 망각할 것이다. 절대로 밀가의 것은 쓰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싫어하는 것은……." 단리궁의 눈빛은 점점 밝아졌다. "글쎄, 나도 잘 모르나… 체질적으로 피가 싫기 때문이겠지." "형은… 독종 중의 독종(毒種)이오. 가장 온유한 척하나, 사실 형이야말로 가장 무자비한 사람이오. 모든 사람을 실망시키고 떠나다니……?" 단리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후후… 그렇다. 나는 독한 놈이다. 그래서 나는 떠나가는 것이다." "어디로……?" "글쎄, 길이 있겠지. 천하는 넓으니까……." 단리궁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갈대의 길이 끝나 갈 때였다. "우(雨), 호법들이 나를 집요하게 따르는 듯하구나. 부디 그들을 떨어뜨려 다오. 나를 위해서……." 단리궁은 슬쩍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는 단리세가 안에서 보였던 미소와는 판이하게 다른 미소였다. 단리우로서는 그의 웃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달빛이 사라지면… 길을 잃게 된다. 달빛이 강할 때 관도(官道)까지 나아가자면, 부지런히 가야 한다. 이제 그만… 작별하자." 단리궁은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단리우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 서서 그의 뒷모습이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형은… 모를 사람이오. 정녕 모를 사람이오." 천 년의 문제아 단리궁, 그는 그렇게 사라져 갔다. 운명으로 선택받은 모든 것을 훌훌 떨쳐 버린 채 달빛이 아스라한 갈대숲 사이로 사라진 것이다. * * * 이 날, 단리화는 십이 년 만에 처음으로 술을 들었다. "못난 자식……." 그는 술잔을 내려다보며 자꾸만 고개를 저었다. 술잔 위에는 그를 버리고 떠난 아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못난 자식……." 그는 툴툴거리며 잔을 쳐들었다. "하지만 너는 뛰어난 놈이다. 너는 알고 있다. 가문의 무공만으로는…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천천히 잔을 입가에 댔다. 잔은 빠른 속도로 비워졌다. 벌써 여러 잔째 마시는 술이다. "너는… 욕심이 많은 놈이다. 타인을 죽이고서야 굴복시킬 수 있는 단리세가의 법이 마음에 차지 않기에 떠나가는 것이다. 아마도 너는 가장 위대한 절정(絶頂)의 경지를 향해 떠나고 있을 것이다. 고집스러운 놈, 네놈의 혈기(血氣)가 부럽구나." 달 아래, 그림자 하나가 울금향 화원을 돌아다니고 있다. 등이 굽은 노인. 그는 허름한 베옷 차림으로 한 시진 넘게 화원을 돌아다녔다. 가끔 그는 발을 멈추며 중얼거리는데, 그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나직하기만 하다. "야망(野望)이란 좋은 것이다.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날개이기에. 궁(弓), 부디 실망시키지 마라. 너를 보낸 이유는 너를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를 철저하게 믿기 때문이다. 운명(運命)에게 너를 맡긴다. 운명은… 노부가 너를 강하게 길러 준 이상으로 너를 위대한 무인으로 길러 줄 것이다. 세가에서 알려 주지 못한 가장 크고 웅대한 것을 세상이 네게 일러 주기를 바란다. 네놈은… 꼭 돌아온다." 그 날 밀가의 인명부에서 공식적으로 한 사람이 빠지던 날, 꽤 많은 사람들이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외적이 쳐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깨어 있기는 극히 이례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종손의 파문이 몰고 온 파장은 이 밤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다. 천 년을 이끌어 온 밀가의 저력, 그것은 한 인간에게 있지않고 가법에 있지 않은가! 가주가 건재하고 단리우가 후계자로 공인된 이상,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일 년 후 어느 날 그리고 일 년(年)이 지나갔다. 천하(天下)는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대명조(大明朝)가 세워지고 나서 이러한 평화의 시기는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홍무제(洪武帝)가 원(元)을 막북(漠北)으로 몰아내고, 명을 세우고 어언 팔십 개 성상이 지나갔다.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제위를 찬탈한 영락제(永樂帝)의 시대도 지나갔고, 홍희제(洪熙帝)의 시대도 지나갔다. 당세는 선덕제(宣德帝)의 시대. 문(文)을 사랑하면서도 무(武)를 천시하지 않는 치세로 인해 명국은 내외(內外)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변황의 타타르(달단)나 오리아트(瓦刺：와자)의 발호는 정지되었고, 무역이 발달해 멀리는 천방국(天方國：아라비아)에까지 해선(海船)이 오고 갔다. 연경(燕京)의 밤(夜)은 밤이 아니다. 연경은 황도(皇都)가 되고 나서 밤을 잃어 버렸다. 천안로(天安路)라고 불리우는 대로를 따라 거대한 전각(殿閣)이 우뚝 우뚝 세워졌고, 십여 리를 걸어다니는 동안 신발에 진흙이 묻지 않을 정도로 모든 도로는 포장되어 있다. 칠야(漆夜), 달도 떠오르지 않는 그믐의 밤이다. 쏴아아… 쏴아아……! 비 뿌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드센 자정(子正)이다. 두우－ 두두－ 두두－! 한가로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길이 휘어지는 곳에서부터 한 대의 마차가 우막(雨幕)을 뚫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마리의 노마(老馬), 비루먹은 늙은 말 한 필이 끄는 일두마차(一頭馬車)는 비에 잠긴 연경의 밤공기 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부석(馬夫席)에는 죽립(竹笠)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유난히도 흰 빛의 손이 어자(馭者：마부)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빗물이 벽돌길로 떨어지는 소리와 말발굽이 만들어 내는 박자 소리가 하나로 엉켜 묘한 불협화음을 이룬다. 연경은 잠들었으나 환락가(歡樂歌)의 홍등(紅燈)만은 잠들지 않았고, 노류장화(路柳牆花)들의 노랫소리 또한 잠들지 않았다. 日昨夜聞潭夢落花 可燐春半不還家 江水流春去欲盡 江潭落月復西斜 斜月沈沈藏海霧 不知乘月機人歸 어제 저녁, 연못에서 꽃이 지는 꿈을 꾸었소. 봄이 절반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귀거래하지 못하는구려. 양자강의 물은 봄을 씻어 가며, 봄도 따라가려 하는데……. 강물에 비치는 지는 달도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는구려. 비낀 달빛이 안개 속으로 숨어들고……. 이 달빛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몇이나 되는고. 춘강양월화(春江夜月花)의 노랫소리가 애달프다. 기루에서는 육향이 주향과 더불어 흘러나오고 있다. 마오타이라는 독한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세상 돌아가는 소리에 열변을 토하는 젊은 서생이 있고, 타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품에 반쯤 안긴 나이 어린 기생의 살집 좋은 방둥이를 매만지는 데 정신이 없는 중늙은이도 있다. 밤은 술에 취해 떠돌고, 다그닥거리는 한가로운 마차 소리는 천안로를 지나 소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죽립 아래 감춰진 두 개의 눈이 이채롭다. 매우 권태로운 두 눈. 그 눈은 천하에서 가장 번화한 연경성의 불야경(不夜景)을 대하고도 진한 권태감에 젖어 있다. "천하를 떠돌다가 연경에 정착한 지 반 년(年). 그 사이 무수한 고서(古書)를 구해 보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나… 나의 공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죽립 아래 짙붉은 입술이 있다. 마부의 나이는 이제 십칠팔 세 정도. 목덜미가 아주 희고 손의 모양이 섬세한 미소년이었다. 일견해서 일반 마부와는 전혀 다른 품격을 갖고 있는 매우 묘한 미소년이었다. 쏴아아… 쏴아아……! 그를 실은 마차는 비의 장막을 뚫고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화려하기만 한 연경성에도 빈민가는 있다.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소옥(小屋). 그 곳에는 연경의 하류계급들이 칡뿌리가 얽히고 설키듯 멋대로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이 많고, 고향이 어디인지를 말하지 않는 유녀(遊女)들이 부지기수이다. 구리돈 구 문(文)만 쥐고 있으면 나이 지긋한 창기(娼妓)와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고, 죽엽청(竹葉淸)을 한 병만 사면 세상 사는 이야기를 밤새 해 줄 늙은 친구 다섯을 부를 수 있는 곳이다. 낭인부(浪人府). 연경성 사람들이 벌레로 취급하는 천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재주를 파는 재인(才人)의 무리가 있고, 노래를 파는 악사(樂士)가 있으며, 아무 것도 팔 것이 없어 다만 때묻은 손만 내미는 걸인(乞人)의 무리가 있는 곳이다. 비는 낭인부 일대를 진흙탕으로 만들었다. 다른 곳과 달리 이 곳은 벽돌로 포장되어 있지 않은 황토흙의 정경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천하에서 불평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노마가 끄는 마차는 낭인부의 구석진 곳을 향해 천천히 움직여 갔다. 진장서축(盡藏書築). 고서(古書)를 팔고, 파본 낙장본을 수선해 주는 허름한 서점이다. 마차는 그 입구에 이르러 멈춰 섰다. 죽립을 쓴 소년은 근처의 정황에 지극히 익숙한 듯, 즉시 말에서 내려 진장서축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가죽신으로 흙탕물을 일으키며 걸어갔고, 그가 진장서축의 문 앞에 이르기도 전에 근처에 있는 작은 가옥 안에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궁수재(弓秀才), 이번에는 사흘 만에 돌아오시는군?" "허허… 자네는 이 곳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지. 헛헛, 그래도 자네에게는 말이 한 필 있지 않는가?" "이 거리를 말발굽 소리를 내며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네그려!" 웃는 목소리에는 정(情)이 가득하다. 거리에서 피리를 불며 구걸을 하는 왕노칠(王老七), 연경제일루(燕京第一樓)의 점소이 노릇을 하는 진팔(陳八), 운비다루(雲飛茶樓) 바로 아래에서 소매치기 일을 하는 장대천(張大天). 이들은 마작(麻雀)을 하며 밤을 잊고 있다가 말발굽 소리를 들은 듯했다. 궁서생(弓書生), 반 년 전 이 거리에 정착한 인물이다. 가끔 가다가는 마차를 몰고 세상 나들이를 나가고, 시간이 있으면 청량호(淸凉湖)에 가서 죽간(竹竿)을 기울이고, 새벽이 될 때까지 읽으나마나 한 기문벽서(奇門僻書)를 보며 비싼 차(茶)만 축내는 묘한 인물. 언제부터인가 그는 낭인부의 오대괴물(五大怪物) 중 하나로 불리고 있었다. 오대괴물. 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낭인부에 눌러앉았다. 혈노(血老). 하루 종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다. 비 맞은 들개의 비린내를 감추고 있는 백발노인. 낮에는 눈을 감고 하늘을 보고, 밤이 되면 눈을 뜨고 달(月)을 본다. 그는 달(月)과 비(雨)와 술(酒)를 삼우(三友)로 삼고 있는 묘한 인물이었다. 그는 중원인(中原人)이 아니라, 부상국(扶桑國)의 인물이었다. 의복이며 머리 모양이 그의 고향이 큰 바다 건너 작은 섬나라임을 여실히 알려 주고 있었다. 전노(錢老). 늘 자기 손바닥만 보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몸에서는 지독한 쇠 내음이 풍긴다. 그의 주름진 손바닥 위에는 늘 동전(銅錢) 한 닢이 얹혀 있다. 그는 유난히도 푸른 눈으로 손바닥을 보며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곤 한다. 그 역시 중원인은 아니었다. 그는 머나먼 천방국(天方國) 사람이라 했다. 그는 한때 거상(巨商)이었다던가? 자신의 선단(船團)이 태풍에 수장되는 통에 알거지가 되어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중원에 눌러앉았다던가? 불노(佛老). 역시 이국인(異國人)이다. 귀가 매우 길고, 눈썹도 매우 길다. 그는 일반 승려들과는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으며, 늘 맨발인지라 낭인부 아이들에게 가짜 중이라고 놀림받고 있었다. 그는 라마(喇 )인데, 낭인부에 온 지 반 년이 되도록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기이한 사람이었다. 철노(鐵老). 늘 불만 지피고 있는 기이한 대장장이이다. 농기구를 만들지도 않고 도검(刀劍)을 만들지도 않는 기이한 대장장이. 그는 화로에 불을 지핀 채 늘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궁서생(弓書生). 이들 다섯이 낭인부의 오대괴물로 통하고 있었다. * * *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뜻은 정체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다시 떠나야 할까 보다!> 궁서생은 촛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일기를 썼다가는 불에 태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방 안은 매우 넓고, 곰팡 내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장서축에는 천하의 기문벽서들이 그득했다. 궁서생은 그것을 다 외우고 있는 듯, 누가 어떠한 책을 찾는다 하더라도 즉시 그 책을 갖다 주곤 하였다. 한 장의 일기가 촛불에 닿자, 화르륵 타오르며 곧 재가 되었다. 쏴아아… 쏴아아……! 빗소리가 유난히도 애달프다. 궁서생의 눈은 어둠 가운데에서 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암울하고 고독해 보이는 눈빛, 그는 어둠 속에서도 죽립을 벗지 않았다. '나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여기에 왔다. 가공할 운명의 손에 떠밀리듯이… 반 년 전 여기에 왔다. 그러나…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궁서생은 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를 훔쳐보고 있는 네 쌍의 시선이 있었다. 첫 번째 시선은 천장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완전한 암흑(暗黑)과 적막 가운데 그림자 하나가 묻혀 있었다. 그는 인간의 기척을 전혀 내지 않고 궁서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공할 힘이 흐른다. 아아, 저러한 힘이 도법(刀法)에 응용되기만 한다면 고금제일도가 이루어진다.' 시선은 거의 무(無)였다. 마음은 매우 격동하고 있는데도 시선만은 절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것은 시선의 주인이 철저한 인(忍)의 단련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온갖 고통을 참는 인의 수련, 그것은 동영(東瀛)에 비전된다는 전설이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시선, 그것은 창 너머에서 흘러들었다. 유난히도 짙고 암울한 시선. 그 시선 역시 궁서생의 모든 것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위대한 혼(魂)이 느껴진다. 저 침묵은 거대한 침묵이다. 천기(天機)대로라면 노부는 천기의 주인을 찾은 것이다. 아… 저 눈에는 위대한 지혜가 숨겨져 있다.' 쏴아아… 쏴아아……! 그는 우중(雨中)에 몸을 은잠(隱潛)하고 있었다. 세 번째 시선, 그것은 벽 속에서부터 흘러나왔다.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는 극정(極靜)의 시선. 그 시선 역시 궁서생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훑어보고 있었다. '노부의 눈이 정확하다면 저 소년이야말로 상승절기를 터득하기 가장 적당한 천년지재(千年之才)이고, 천년지성(千年之星)이다.' 그는 꽤나 흥분하고 있었다. 일신의 수양이 깊지 않았다면 벌써 격한 숨소리를 토해 냈으리라. '천하를 떠돌며 수십만 명의 소년소녀를 살펴보았으나, 저 소년처럼 위대한 근골(筋骨)은 처음이다.' '백 년을 떠돈 끝에 결국 찾은 것이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운명의 만남이다. 저 소년이야말로 밀종유가술(密宗瑜伽術)을 완전히 터득할 태양(太陽)이다.' 네 번째 시선은 궁서생이 보이는 곳에 있다. 진장서축 바로 맞은편의 대장간 안. 석상처럼 굳은 인상의 노인 하나가 매우 미묘한 눈빛으로 궁서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느낌도 없는 눈빛 가운데, 정녕 깊은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쩌면… 전설이 풀리리라. 천황검가(天荒劍家) 최후의 전설이… 저 소년으로 인해 해결된다! 노부의 눈이 정확하다면! 그러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 성검(聖劍)의 주인이 되기에는…….' 쏴아아… 쏴아아……! 빗소리가 꽤나 커지고 있었다. 이 비는 장마의 조짐을 알리는 비였다. 새벽녘,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다. 환락가는 잠이 들고 생활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 궁서생은 며칠간 각지를 돌며 모은 고서들을 정리하며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커다란 죽립은 그의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우뚝한 콧날과 아름다운 입매는 감추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아름다움이고, 그러하기에 매우 기이한 매력을 주고 있었다. '채워지지 못할 이 허무는…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붉은 실로 책을 꿰고 있는 그의 손동작은 미려하고 우아했다. '피의 율법이 혐오스러워 모든 것을 버렸는데, 이 광대한 세상마저 나의 고독을 씻어 주지 못한단 말인가?' 슷－ 슷－! 손은 미려하게 움직였고, 그러는 동안 파본(破本)은 말끔한 새 책으로 변화했다. 새벽이었건만 습습한 우막으로 인해 아직 어둠은 다 사라지지 않았다. 구질구질하게 내리는 장마비 가운데, 누군가의 걸찍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기 불빛이 있군요!" "흠, 들어가 볼까?" 어딘지 모르게 유약한 인상을 주는 중년인의 목소리가 빗소리 가운데 들려 왔다. 빗속을 뚫고 진장서축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한 사람은 키가 구 척 오 촌에 달하는, 천하에서 가장 장대한 체격이고 육중한 근골이었다. 그는 우산(雨傘)을 쳐든 채 백의를 걸친 온화한 인상의 중년인을 뒤쫓고 있었다. 매우 고독해 보이나 기품 있어 보이는 중년인. 그는 새벽 거리를 걷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저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일찍 깨어나는군." 눈빛이 맑고 인상이 극히 청수하다. 허름한 흰 옷을 걸치고는 있으나, 전신에서 우러나는 기품(氣品)만은 절대 감추어질 수 없었다. 시선과 시선. 궁서생의 시선과 중년인의 시선은 허공에서 가볍게 부딪쳤다. 우연의 일치일까? 두 사람은 각자의 시선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문득 느끼는 듯했다. 나이답지 않게 감정의 기복이 없는 궁서생도 중년인의 미묘하고 신비한 시선에는 상당히 당혹한 듯했다. 그리고 기품 있어 보이는 중년인도 죽립 안에 감추어졌던 궁서생의 시선을 보고는 지극히 놀라는 눈치였다. '하늘(天)과 같이 맑은 시선이다.' '대단하다. 이러한 곳에 저런 용(龍)이 있다니! 무수한 사람을 봤으나 한번의 시선으로 이리도 강한 인상을 준 사람은 처음이다.' 두 사람은 정말 묘하게 만난 셈이었다. 오랜 세월이라도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할 수가 있고, 일순간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남을 강한 인상을 줄 수가 있다. 두 사람은 일시에 같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저는 궁(弓)이라 합니다. 기회가 있으시면 가끔 책을 구경하러 오십시오. 책을 팔지는 않으나, 빌려 드리기는 합니다!" "헛헛… 나는… 선대인(宣大人)이라 하네. 밤길을 걷기 좋아하는 쓸쓸한 나그네라네. 헛헛……!" 구질구질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 이들이 만났다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일이라 할 수 있고, 가장 위대한 한순간의 만남이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몇 마디 나누고 있을 때, 일대의 네 곳에서는 격한 숨소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곤란하군. 저 사람은……?' '으음, 천하의 기재를 그 곳에 빼앗길지 모르겠는데? 한시라도 빨리 서두르지 않는다면… 만사가 틀어질지 모른다.' 네 줄기의 시선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궁서생과 비슷한 시기에 낭인부에 나타났던 네 사람이 일순간,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빛을 뿜어 내는 것이 아닌가? '운명을 시험하는 것을 서둘러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천하에 다시 없는 기재를 다른 곳에 빼앗기게 된다.' '궁이라는 기재를 반 년 이상 따라다닌 인간 괴물이 노부 말고도 셋이나 있는데… 또다른 경쟁자가 나타나다니…….' '골치 아프게 되었다. 천하의 기재에 또 하나의 인연이 닿게 되다니…….' '여차하면… 납치라도 하리라. 이 일은… 천하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일이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너무 늦다.' 쏴아아… 쏴아아……! 빗소리가 꽤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벽은 환하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육월 일 일, 이 날은 육월의 첫째 날, 첫째 새벽이다. 선대인은 새벽이 사라질 때까지 진장서축에서 궁서생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며 차를 세 잔이나 얻어 마셨다. 선대인은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궁서생의 학문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궁서생의 학식은 가히 만사무불통지라 할 수 있었다. 선대인은 궁서생의 신비한 기세(氣勢), 조용한 목소리로 남을 설복하는 화법, 그리고 광오한 지식에 완전히 매료된 눈치였다. "자네의 거대(巨大)함이 부럽군. 그 작은 머리에 정말 많은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 부럽네." "작은 지식일 뿐입니다!" "헛헛… 하여간… 숨은 용이로군." "글쎄요!" "헛헛… 오늘은 시간이 없구먼. 곧 다시 와서 술을 한 잔 사겠네!" 선대인은 그런 말을 남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밖으로 나갔고, 곧 사라졌다. 천하에서 가장 체격이 큰 거한의 몸이 그의 몸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비는 여전히 내린다. 궁서생은 선대인이 시종과 함께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세상은… 책이나 건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상은 수많은 인간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을 안 것만 해도 내게는 커다란 수확이다!" 그는 천천히 벽 쪽으로 걸어갔다. 벽에는 도롱이가 걸려 있고, 길다란 묵죽간(墨竹竿)이 기대어져 있었다. 희디흰 손(素手)이다. 너무도 맑아 미약한 빛살이라도 손목을 뚫고 들어갈 듯 투명하다. 사내의 손치고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오히려 흠으로 보일 정도의 손은 묵죽간 허리를 천천히 거머쥐었다. "낚시를 하며 결정하자. 이 곳을 떠나 다시 떠돌 것인지, 아니면 더 머무를 것인지를……!" 그는 느릿느릿 도롱이를 걸친다. 그는 퍼붓는 빗속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갔다. 서축의 문은 닫히지 않았다. 훔쳐 갈 것은 곰팡내 나는 책뿐이고, 근처에는 훔칠 사람도 없다. 문을 닫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궁서생은 성큼성큼 걸어 빗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가 떠나고 난 후였다. 휘리리리－ 릭－! 일순 네 군데에서 미풍이 불더니, 텅 빈 진장서축 안으로 그림자 네 개가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가히 번개처럼 서축 안으로 들어선 네 사람.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매우 미묘한 눈빛을 던진다. 가공할 경공을 발휘해 나타난 네 사람은 바로 궁서생 근처에 머물고 있는 네 명의 괴인이 아닌가? "크크… 결국은 부딪치게 되는군. 우리 네 사람 모두 싸움을 해서는 안 될 만큼 늙고, 죽지 못할 정도로 병들었는데… 큿큿, 한 마리의 용을 얻기 위해 싸워야만 하겠군!" 누군가 서투른 한어(漢語)로 내뱉는다. 비 맞은 늑대의 몸에서 일어나는 듯한 비린내를 풍기는 노인, 혈노(血老). 그의 눈에서는 암울하고 잔혹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혈무흔(血無痕), 너의 도결(刀訣) 따위는 똥개라도 배우고 싶지 않은 삼류무학이다. 그런데 천 년 만에 태어난 고금제일룡의 사부가 되겠노라 기어나오다니… 후안무치하구나. 큿큿……!" 매우 거친 그 목소리는 타락한 상인(商人) 차림을 하고 있는 전노(錢老)의 목소리였다. 그는 가공하게도 일 자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아마도 일신절기로 상대를 기죽이게 하고 싶은 듯, 그는 절정의 경공을 발휘해 몸을 한 자나 허공에 띄운 채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불노(佛老) 그는 합장을 한 채 세 사람을 보고 있고, 철노(鐵老)는 자신만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투른 한어로 이야기한다. "아해(兒骸)들은 단념하는 것이 좋아. 궁(弓)은… 후후, 반 년 전 노부가 처음 보는 순간 대달단의 후계자로 발탁이 되었으니까!" 대달단. 아아, 이미 멸망한 변황제국(邊荒帝國)이 아닌가? 철노는 그 곳의 인물이란 말인가? "고약한 것들이로군. 노납으로 말하자면… 사문의 복수가 조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반 년 전 금릉(金陵)에서 목격한 궁서생의 지혜에 반해 반 년이 지난 오늘까지 궁서생을 따라다니며 호법(護法)을 서고 있거늘……!" 불노의 목소리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가공할 진기가 서려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사자후(獅子吼) 소리만으로도 혼절하고 말리라. "빌어먹을, 배교(拜敎)에 망한 천룡달뢰(天龍達賴)! 천축에서라면 그래도 추종자가 있을 것이나, 이 곳은 네게나 내게나 이국(異國)이다. 아느냐? 우리들은… 큿큿, 개털만도 못한 처지이다!" 입이 가장 거친 사람은 전노였다. 그는 말을 할 때마다 욕을 해댄다. 아마도 상인의 기질이 뼛속까지 배어 있기 때문이리라. "훗훗… 사람은 하나인데… 사부가 되겠다는 사람은 넷이라니. 훗훗, 궁이라는 놈의 사지를 하나씩 나누어야겠는데?" "제길, 궁은 노부가 맡았다. 노부는 그를 후예로 삼고 대상국(大商國)의 전설을 이룩할 것이다!" "어리석은 소리 마라. 궁은 대달단의 후예가 될 것이다." "아미타불… 우리 넷은 반 년간이나 신경전을 벌여 왔다. 결국, 우리들은 한 명의 승자를 가려 내야 한다!" "후후… 우리들은 거의 비슷한 때에 천기의 변화를 봤고… 천기에 따라왔다가 궁을 발견했다. 그 후, 상호를 견제하며 궁의 곁을 맴돌았다. 그리고 이제 결정을 봐야 할 때가 되었다!" 네 사람은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태도들이었다. 이들 넷은 연경에 오고 싶어 연경에 온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은밀히 궁서생을 뒤쫓고 있었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궁을 봤고, 그 후 한순간도 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만에 하나, 넷이 아니고 하나였다면 궁은 이미 그에게 잡혀 중원을 떠났을 것이다. 한데,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궁과 이야기할 기회조차 만들지 못한 것이다. 팽팽한 대치, 그 누구도 이러한 대치를 깰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각 방향에서 절정(絶頂)의 지위에 있다. 혈노는 도(刀)에서, 전노는 지(指)에서, 불노는 내공(內功)에서, 철노는 검(劍)에서 절정의 경지를 이룩했다. 일당만의 고수들이기는 하나, 만에 하나 제일 먼저 손을 쓰다가는 다른 삼 인의 협공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다. "궁은 내 것이다. 아느냐, 오랑캐들?" "제길, 누가 누구를 오랑캐라 하는 게냐? 진짜 오랑캐놈아! 궁에게 손만 댔단 봐라. 당장 몸이 부서지리라!" "후후… 멋대로 찧고 까불어라. 아해들아, 궁은 자연히 노부의 휘하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 아이는 현명한 아이이니, 자신에게 전수되는 것의 비중 정도는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을 결정할 것이고… 결국 노부 휘하에 들 것이다!" "어리석은 소리. 천기는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 천기는 그 아이가 천축과 인연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넷은 여차하면 손을 쓸 기세였다. 그러나 수법을 시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눈빛이 빛나고, 호흡이 교차될 뿐이다. 미묘한 대치는 일각(刻) 넘게 계속되었다. － 궁은 천하제일의 자객(刺客)이 된다. 그는 천하의 그 누구도 암살할 수 있는 가공할 살인술(殺人術)을 터득하게 된다. 고금의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절정살(絶頂殺)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 궁은 대상인(大商人)이 될 것이다. 그는 천하의 금맥(金脈)을 두 손으로 떡 주무르듯 하는 위대한 상인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운명이다. 아무도 그 운명은 뒤바꾸지 못한다. － 궁은 달단의 왕이 된다. 무너진 달단의 후예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며 흥기할 것이다. 그것은 궁이 하늘에게서 부여받은 운명이다. － 운명은 하늘이 말한다! 네 사람의 마음에는 네 가지 생각이 떠돌고 있었다. 쏴아아… 쏴아아……! 빗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네 사람의 시선에서는 빛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주위가 부산해지는 탓에 네 사람의 은밀한 대치가 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떠냐? 서로 견제하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느니,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어떠냐?" 혈노의 말이다. 그는 지극히 날카로운 성격이고, 단 한 마디의 말이라도 낭비하지 않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촌철(寸鐵)로 살인하는 기예를 터득한 사람이다. 그는 예(藝)와 미(美)가 아니라, 기(技)의 무공을 터득했다. 그것은 바로 부상국(扶桑國) 특유의 인자병법술(忍者兵法術)에서 근원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좋아! 인자(忍者), 너의 말 중에도 재치 있는 해답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늘 은유와 수식어를 잘 쓰는 전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인(商人)의 기질을 보이고 있다. 천하에는 구장산학(九章算學)이 있는데… 그는 백장산법(百章算法)을 터득하고 있고, 일 문의 돈으로 백만 관 황금을 끌어모으는 재주를 갖고 있다. "아미타불… 서로들 비슷한 생각이로군!" 천룡달뢰(天龍達賴). 그는 중인 가운데 가장 온화한 성품이었다. 그의 말투며 표정 역시, 그의 성품을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었다. "하나마나 한 말들이다. 운명은 거역 못할 테니까!" 철노, 그는 네 사람 중 가장 괴팍한 사람이었다. 하여간 네 사람은 반 년 만에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를 본 셈이었다. "선택은 스스로가 할 것이다!" "운명에게 맡기자, 모든 것을!" "패자는 할복자살하고, 승자는 궁과 함께 이 답답한 연경을 떠나기로 하자!" 네 사람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을 때였다. 궁(弓), 운명의 풍운아(風雲兒)인 궁은 호반(湖畔)에 이르러 또 하나의 운명과 조우하고 있었다. 선택받은 운명(運命) 쏴아아… 쏴아아……! 청량호(淸凉湖)는 아름답지 않게 격랑을 이룬다. 장마비로 인해 물이 매우 혼탁해졌다. 궁서생은 죽간을 떠메고 걷다가 문득 멈춰 서고 있었다. 투둑－ 툭－! 죽립과 도롱이 위로 빗방울이 사납게 떨어져 내린다.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그의 눈빛은 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퍼붓는 비 가운데 작은 그림자 하나가 검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유난히도 갈대가 많은 호반이다. 비가 흩뿌릴 때마다 갈대가 일제히 눕혀진다. 투둑－ 툭－! 장대로 떨어지는 빗줄기 가운데, 작은 그림자는 주위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호수만 보고 있었다. 이끼 낀 돌을 깔고 앉아 갈대로 몸을 감춘 채 숨어 있는 고영(孤影). 비는 그림자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사내일까? 여자일까? 몸집으로 보아 완연한 여자아이인데, 옷차림이며 차가운 호흡은 완연한 사내아이의 그것이었다. 특히 두 눈, 꿈틀거리는 호수에 담겨지고 있는 두 눈은 정말 기괴했다. 차가운 가운데 뜨겁고, 고요한 가운데 격하게 떨리고 있는 야릇한 시선. 빗물이 고독한 그림자를 촉촉이 적시는 가운데, 궁서생의 입가에는 야릇한 일그러짐이 떠돈다. '계집아이인데… 남복(男服)을 했군.' 궁서생은 한참 만에야 그 아이가 소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가 옷에 젖어들며 옷과 살은 찰싹 달라붙었고, 그로 인해 소녀 특유한 완연한 굴곡이 나타나고 있었다. 탱탱하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앞가슴, 끊어질 듯 잘록한 개미허리, 펑퍼짐하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암사슴의 엉덩이, 미끈하게 이어져 내리는 허벅지의 탄력. 남장소녀는 보기 드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것은 오뚝 선 콧날과 유난히도 크고 슬퍼 보이는 두 눈이었다. 궁서생이 서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있던 소녀는 문득 궁서생을 보며 습관적인 듯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앙증스러운 귀가 드러나는데, 귓밥에는 귀고리 구멍이 또렷하다.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흘리는 남장소녀. 남장을 했다는 것이 오히려 매력을 더해 준다. 나이는 열일곱 정도 되었을까? 신비한 소녀는 궁서생을 위아래 쓰윽 훑어보더니, 입술을 뗀다. "술 마시고 싶은데… 술 살 돈 있나요?" "술(酒)……?" 소녀의 첫마디는 정말 미묘했다. 궁서생은 묘한 시선을 소녀의 얼굴에 던졌다. 그 순간 퇴폐적인 분위기만 만들어 내던 미소녀의 얼굴에 화사한 봄기운이 뭉클뭉클 일어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다. 아아, 많은 남자를 보았는데… 저리도 아름다운 사내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소녀의 눈에는 반항아의 기질이 있었다. 촉촉이 젖은 눈망울에선 야릇한 빛이 쉼없이 흘러나왔다. 천박하기보다는 고결한 느낌을 주는 눈빛이었다. 사실 비에 젖은 옷이기는 하나, 매우 값진 비단옷이었다. 궁서생 역시, 소녀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적이 감탄하는 눈치였다. '대단하군. 비 맞은 봉(鳳)과 같군. 나의 허무한 마음에 묘한 흔들림을 던질 미색이 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궁서생의 눈이 한 동안 소녀의 눈을 응시했다. 둘의 시선은 매우 흡사했다. 고독하고 고집이 있다는 데에서. "술? 술이 마시고 싶은가?" 궁서생의 목소리는 하나의 음률이었다. "큿큿… 술 살 돈이나 있으신지……?" 소녀는 웃으며 궁서생을 빤히 쳐다본다. 그는 궁서생을 어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일 냥(兩)은 있다. 그 돈이면 죽엽청 세 말(斗)은 산다!" "마시고 싶은데… 사 줄 테야?" "글쎄……!" "거절하겠다면……!" 신비소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 때였다. "훗훗…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한다면……!" 궁서생이 먼저 말을 끊어 버린다. "돌아가라고? 큿큿, 돌아가라고?" 소녀의 시선은 다시 퇴폐적으로 뒤바뀐다. '묘하군. 마치… 나를 보는 듯하다.' 궁서생은 너무도 격하게 빨려듬을 느끼고 있었다. 정(情)과 사람에 굶주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로서도 상상하지 못할 운명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궁은 소녀에게서 말하지 못할 강한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느낌은 소녀에게도 있는 눈치였다. "내가… 형(兄)이라 불러도 좋아?" "형? 너는 여자아이인데, 나를 형이라 부르겠다고?" "큿큿… 내 마음이지!" "형이라? 좋아, 형이라 하고 싶다면 형이라고 해라!" "좋아, 형!" 소녀는 궁서생을 형이라고 불렀다. "나는 반화(半花)야. 반쪽 꽃이지." "반… 화(半花)?" "내가 왜 그렇게 불리는지 이유는 묻지 마. 형(兄), 아무리 말해도… 형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테니까!" 반화는 꽤나 숫기 있어 보였다. 쏴아아… 쏴아아……! 비가 지독히도 퍼부어질 때 둘은 진짜 형제인 양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경풍(燕京風)이라는 술집을 향해 쳐들어가고 있었다. 연경풍(燕京風)은 폭우(暴雨) 때문에 한산했다. 점주(店主)인 진노인(陳老人)의 사촌이라는 진충(陳忠)이 관사(管事)로 있는 연경풍은 궁서생이 몇 번 드나든 바 있는 장소였다. 호주머니에 은자(銀子)가 가득한 자는 이층에 가서 기녀(妓女)의 접대 아래 명주(銘酒)를 마신다. 호주머니가 가벼운 사람은 일층의 구석진 자리에서 술을 마셔야만 한다. 궁서생과 반화는 가장 구석진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빈 주담자(酒曇子)가 다섯 개. 놀랍게도 반화(半花)의 주량은 대단했다. 그녀는 죽엽청이 가득 든 주담자 다섯 개를 비우고도 취하지 않았다. 다만 두 뺨에는 가을 하늘 아래 익어 가는 홍옥(紅玉) 능금같이 아름다운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비는 쉬지 않고 퍼부어졌다. '묘한 만남이군.' 궁서생은 잔을 앞에 둔 채 반화라는 남장소녀를 보고 있었다. 반화 역시 맹랑하게도 고개를 반짝 들고 궁서생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십전(十全)의 미(美). 깎아 세운 듯 오똑한 콧날, 핏물을 바른 듯한 붉은 입술이 너무도 도발적이다. 육감적으로 부풀어오른 입술에는 봄향기가 가득하다. "묘하군요, 형(兄)은……!" 반화는 세 시진 정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시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묘하다니……?" "큿……!" 반화는 피식 웃었고, 잔을 쭈욱 들이켰다. 소맷자락이 흘러내리며 살이 통통히 오른 손목이 드러났다. 백옥(白玉)처럼 흰 손목에는 주사점(朱砂點) 하나가 박혀 있었다. '무림녀(武林女)들이 정조의 상징으로 찍고 다니는 수궁주사(守宮朱砂)라니? 이 소녀는 무림의 여인일까? 한데, 왜… 가출(家出)했을까?' 궁서생은 팔짱을 끼고 반화를 바라봤다. 반화는 술을 거푸 세 잔을 마신 다음 소매로 입가를 닦아 냈다. 아름답고 맹랑한 소녀, 반화(半花).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다시 궁서생을 바라봤다. "큿큿… 내가 남장(男裝)을 하는 이유를 아나요?" "글쎄, 치마를 입어 보지 않아 모르겠으나… 치마는 불편한 것이기에 바지를 입지 않았을까?" 옥음(玉音)이다. 궁서생의 목소리는 정말 맑고도 순후했다. "틀렸어요." 반화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남장을 했지?" "큿큿… 빠져 나오기 위함이지요." "빠져 나오다니?" "도망치기 위해… 큿큿, 화원(花園)을 손질하던 소동을 때려 기절시키고… 그 아이의 옷을 걸치고 도망쳐 나온 것입니다. 그 아이는 저의 옷을 걸친 채 제 침상에 누웠고……!" 웃고 있으나, 웃는 것이 아니다. 반화는 묘한 소녀였다. 그녀는 세상사의 경험이 별로 없는 듯했다. 분명한 것은 궁서생이 그녀에게 신비한 매력(魅力)을 느끼듯, 반화 또한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발칵 뒤집혔을 것입니다!" "흠,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야." 궁서생은 아주 작게 말했다. "큿큿… 제 아버지는… 큿큿, 저 때문에 슬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럴까?" "큿큿… 아버지는 필경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깨질 거래(去來) 때문에 슬퍼하실 것입니다." "거… 래?" 궁서생의 말이 묘한 여운을 끌었다. "큿큿… 얕보지 말아요. 불량소녀라고… 큿큿, 이래 뵈도… 나는 천하의 반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황궁의 옹리공주(翁莉公主)가 선덕제(宣德帝)의 장중주(掌中珠)라고는 하나… 큿큿, 저만은 못하지요." 웃는 반화. 이상하게도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굴러 떨어진다. 울다니… 맹랑한 소녀 반화가 미친 듯이 지껄이며 울다니……! "변황인(邊荒人)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략결혼이지요. 큿큿, 저의 운명은 이미 야수 같은 자에게 팔아 넘겨진 것입니다. 다른 이도 아닌 아버지에 의해서,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 대진군(大進軍)을 위해서……!" 반화는 이미 취해 버린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잠꼬대처럼 알아듣기 힘들었다. "아버지는 위대한 상인(商人)이지요. 천하(天下)를 사고자 하는……!" "……." "야망(野望), 그것이 무엇이기에……!" "……." "형(兄)은… 못난 사람이에요. 요즈음처럼 격동의 시대에 한가롭게 낚시질이나 다니다니……!" 반화는 서서히 취해 갔다. 그녀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雨) 오는 분위기에 취한 것이고, 처음으로 대하는 너무나도 순수한 눈빛에 취하고 만 것이다. 다시 두 개의 주담자(酒曇子)가 비워졌다. 반화는 더위를 느끼는 듯 옷고름을 느슨하게 했다. 취한 소녀, 아직 완전한 성녀(成女)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전신의 굴곡은 그 어떤 여인이라도 부러워할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꿈의 샘물을 먹고 자라나는 암사슴 같은 소녀 반화는 잔을 쳐든 채 입술을 떼었다. "형의 꿈은 무엇이지요?" "글쎄……!" "사람인 이상, 꿈이 있지 않나요?" "있기는 하지. 하지만 그것은 진짜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 "무엇인가요?" "완전을 이룩하는 것!" 궁서생의 눈빛이 신비하다. 한번 본다면 아마도 그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바보군요. 이 세상에는 완전이란 없는데……!" 반화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글쎄, 다들 그렇다고 하지!" 궁서생은 씨익 웃고 만다. "큿큿… 나의 꿈은… 더 바보스러운 꿈입니다. 형, 저의 꿈이 무엇인지 듣고 싶지 않으신가요?" "말해 준다면……!" 궁서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의 꿈은… 남자(男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남자?" "큿큿… 이 세상은 남자들의 것입니다. 여자들이 세력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극히 미세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긴……!" "남자라면 자신의 야망(野望)에 따라 싸울 수 있습니다." "야망?" "큿큿… 이 세상에서 한 가지를 없애는 것이 저의 야망입니다!" "……." "불행히도 형에게는 그것이 없군요." "무엇?" "검(劍)……!" 반화의 눈빛이 일순 신비감을 더한다. 깊이를 모를 호수(湖水)의 눈빛이랄까? "이 세상의 모든 칼을 부러뜨리는 것이 저의 야망입니다. 큿큿… 그리고… 그 꿈은 오늘이 가면 다시는 꾸지도 못할 것입니다!" "왜?" "저는 여자(女子)이니까요." 반화는 입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 반화는 주량을 초월하는 술을 마시다가는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 안 돼요……!" 반화는 자꾸만 헛소리를 한다. "가… 가기 싫어요. 그 황량한 사막(沙漠)으로… 어이해, 어이해… 저를 그 야만의 땅으로 보내려 하십니까?" 반화는 공포에 휘감기고 있었다. 궁서생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하고 가늘게 내쉰다. "세상에는 나보다 번뇌(煩惱)가 큰 사람도 많구나. 아아, 내게도 이러한 시절이 있었지!" 궁서생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업고 가자.' 그는 측은한 마음에서 반화를 안아 들려고 했다. 그의 손이 반화의 뜨겁게 달아오른 몸에 닿으려 할 때였다. "안 돼! 멈춰!" 꽤나 급박한 목소리가 고막을 두들겼다. 그리고 또 한 줄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계집아이는 마물(魔物)이다. 손을 댄다면… 즉시 네 곳에서 검(劍)이 뽑혀 나와 너의 몸을 도륙낼 것이다!" "궁(弓), 정지하라!" "취한 척 쓰러져라! 근처에는 네 명의 살수(煞手)가 있고, 우리는 먼 곳에 있다." 도합 네 명이 은밀히 전음을 보냈다. '모를 일이군. 근처에 상승고수들이 허다하다니……?' 궁은 천천히 근처를 둘러봤다. 꽤 여러 명의 주객(酒客)들이 좌석을 차지하고 갑론을박 떠들어대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온갖 직업인이 다 모여 있는데… 매우 특이한 네 사람이 있었다. 네 명의 거인(巨人),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궁서생 쪽을 보고 있었다. 넷 다 흑포(黑袍)에 흑립(黑笠) 차림이었는데 옷자락에서 비린내가 흘러나오는, 사기(邪氣)에 가득 찬 인물들이었다. 지금 네 사람의 눈에서는 요요(妖妖)로운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기(煞氣)가 강하다. 어떤 인물일까?' 궁은 손을 멈칫했고, 바로 그 순간 그의 귓속으로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작별하기 전 형의 등에 업혀 보려 했는데 허사가 되는군요. 나의 가신(家臣)들로 인해서! 형의 등은 유난히도 넓어 잠들기 좋으리라 여겼는데……!" 바로 반화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잠깐 잠들었다가는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그녀는 여전히 자는 체하고 있었다. "형의 숨소리가 흐트러졌어요. 그로 보아 형은 무엇인가를 봤음에 틀림없습니다. 봤다면 그들은… 형과는 관계가 없는 자들일 것입니다! 나를 추적해 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궁서생의 입가는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반화의 의어전성(議語傳聲) 소리는 또렷이 이어졌다. "하여간… 때가 되었어요. 만나지 않은 듯 헤어질 때가……!" 반화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옷섶은 눈물에 축축이 젖고 있었다. "아마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곧 형의 얼굴을 잊어 버리고, 나의 가족들처럼 미친 들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럼… 안녕!" 반화는 그렇게 말한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는 듯한 동작,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아주 날카롭게 빛을 냈다. "천한 놈! 아직도 내가 너의 술상대라 여기느냐?" 반화의 목소리는 주루를 뒤흔들었다. "아, 아니……?" 궁서생은 반화의 돌변한 언행에 흠칫 놀라는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궁서생의 얼굴이 흰빛에 휘감겼다. "안녕, 형(兄)! 평생 처음으로 즐거웠어요." 스으－ 읏－! 일순, 하나의 흰 손이 얼굴을 향해 다가섰다. 짜작－! 반화의 손은 궁서생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고, 궁서생의 몸은 둥실 떠서 창 밖으로 퉁겨 나갔다. 모든 것은 거의 일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호호… 내 장난이 너무 심했나? 호호… 불쌍한 서생이었는데… 호호……!" 반화는 까르르 웃었고, 일순 네 곳에서 네 사람이 날아들었다. 슷－ 슷－ 슷－ 슷－! 네 줄기 연기가 흘러들 듯이 반화 앞으로 다가서는 네 사람은 구석진 자리에서 궁서생을 째려보던 들개 같은 자들이었다. "소가주(少家主), 속하들이 처리하려 했는데… 소가주께서 친히 처리하시는군요?" "속하들, 소가주를 찾아 나왔습니다." 네 사람은 일제히 허리를 숙인다. 이 때 네 사람의 몸에서는 뭉클뭉클 흑무(黑霧)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그들 다섯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간다고 먼저 전서구(傳書鳩)로 알려라...., 사검마군(四劍魔君)!" "잘하신 결정이십니다." 흑무 속에서 차고 악랄한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온다.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아버님 말씀에 순응하기로! 가자, 더 이상 소란스럽게 하지 마라. 내가 돌아가기로 한 이상, 소란을 피울 것은 없다. 이 곳은 황성(皇城)이다. 자칫하면 황군(皇軍)을 깨울 수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소란 떨지 말고 돌아가자!" "그 서생은?" "죽었을 게다! 십 성 공력으로 쳤으니까!" "왜 그런 자와 술을 마셨는지요?" "괜히 한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자아, 하여간 가자!" 반화의 음성이었을까? 차고 표독한 음성이 들렸고 검은 바람이 일어나더니, 주루 안이 일순 어두워졌다. 콰르르릉－ 휘리리링－! 태풍 부는 소리와 함께 주루의 문이 박살났고, 다섯 사람의 모습은 검은 안개로 화해 아주 멀리 사라져 버렸다. 饔態틴퉤� 쏴아아… 쏴아아……!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번쩍 쳐든 채 그림자 다섯 개가 다섯 개의 혜성(彗星)이 되어 흑천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묘하게 나타나… 묘하게 떠나는군." 아아, 바로 궁서생이 아닌가? 그는 죽은 것도 아니고 다친 것도 아니었다. 반화는 그를 세게 후려친 듯하면서 외공을 발휘해 부드럽게 밀어 냈던 것이다. '묘한 이별이군. 아름다운 소녀, 반화여!' 궁서생은 아득한 곳으로 사라져 가는 반화를 보고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강하다는 것이 편리할 때도 있군. 훗훗, 세상에 나와서야 강자(强者)만이 세상을 살기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군.' 웃고 있는 궁. 아아, 그는 바로 단리궁(段里弓)이 아닌가? 무공과 피가 싫어 가공할 가문의 내력을 떨쳐 버리고 스스로를 파문(破門)시켰던 고집스러운 소년 단리궁. 그는 낭인(浪人)이 되어 떠돌다가 연경성에 일시 정착했던 것이다. '반화… 착한 소녀였다. 언제고 기회가 있다면 다시 만나… 세상을 울며 살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단리궁의 손에는 무엇인가가 쥐어져 있었다. 작은 소검(小劍). 그것은 반화가 단리궁을 죽이는 척하는 가운데 단리궁의 손에 가볍게 쥐어 준 물건이었다. <나를 잊지 말아요. 혜(慧)> 아주 아름다운 장식된 소검에는 그런 글이 적혀 있었다. 폭우는 장막이 되어 단리궁을 모든 것과 차단시켰다. '너를 잊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떠돌다 쓰러지더라도…….' 단리궁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우(雨), 나의 아우. 훗훗, 내게는 또 하나의 아우가 생긴 듯하다. 아마도 그 아이의 그림자는 너의 그림자와 함께 문득 문득 생각날 듯하구나!" 단리궁은 웃으며 걷기 시작했다. 죽간(竹竿)은 이미 필요 없는 듯, 그는 주루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도롱이 자락을 펄럭거리며 길을 따라 걸어갔다. 쏴아아… 쏴아아……! 비와 바람이 드세다. 단리궁은 세가를 떠나고 처음으로 무공(武功)이라는 것에 대해서 매우 강하게 생각하게 된 듯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의 고집은 여전했다. 그는 진창를 디디며 걸어갔고, 그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장대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었다. 빗속, 길 양쪽에는 미친 귀신의 머리카락 같은 능수버들이 비바람에 춤추고 있고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덮여 있다. 드세게 뿌려지는 장마비는 검은 휘장처럼 삼라만상을 휘감았다. 길 가운데, 혈무(血霧) 한 덩어리가 사람 그림자 하나를 안고 웅크린 채 바람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단리궁이 도롱이에 죽립 차림으로 걸어갔고, 혈무덩어리는 천천히 단리궁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쓰으으－ 읏－! 피구름은 일순간적으로 단리궁 앞으로 다가섰다. 중원계에는 전해지지 않는 비공격월(飛空擊月)의 비각술법(飛脚術法). 그것은 지극히 빠르고 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 경공으로 정평이 난 전설상의 경공절기였다. 붉은 구름 덩어리 가운데, 지독하게 강한 빛을 흘리는 두 개의 눈알이 있었다. '하나의 도(刀)와 같다.' 단리궁은 걷다 말고 사지백해에 지극히 미세한 은사슬이 조여 드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고 신형을 멈춰 세웠다. 일순, 붉은빛이 강렬해졌다. "오늘은 일진이 사납군. 반쪽의 꽃에, 반쪽의 귀신을 연달아 보다니!" 단리궁은 뇌전으로 쏘아 오는 붉은빛을 접하면서도 표정의 변화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권태롭다는 표정이었다. "절하라, 정확히 아홉 번. 그것은 네녀석이 노사(老師)를 처음 대하는 것을 기념하는 최초의 배사지례(拜師之禮)이다!" 혈무 안에서는 칼이 우는 소리와 함께 웅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큿큿… 운명은 너를 노부의 제자로 내려 보냈다. 노부는… 너를 유일한 절정도(絶頂刀)의 정인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자아, 어서 절하라! 정확히 아홉 번!" 우르르르－ 릉－! 목소리로 인해 근처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혈무가 자욱이 퍼져 나가며 근처의 정광이 흐릿해졌다. 가공할 잠경(潛勁)이 실린 혈무는 비보라마저 차단해 버렸다. 두 사람은 하나의 핏빛 구름 우산을 쓴 듯한 정경 가운데 세 걸음 사이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내게… 절을 하라 했소?" 단리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큿큿… 노부는 네게 천 가지 도초(刀招)를 전수하고 백 가지 은잠술(隱潛術)을 전수해줄 계획이다. 네게는 천재일우의 기연이다!" 혈무 안의 그림자가 웃을 때였다. "흠! 주루에서 말을 한 사람이시군, 그대는?" "그렇다. 세상 모르는 애송이!" "훗훗… 그렇소. 나는 세상을 모르오. 그리고… 나는 예법도 잘 모르오!" "예법을 모르다니……?" "절하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외다!" 단리궁은 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가슴으로 파고드는 가공할 살기(煞氣)를 느끼고 있었다. 그림자는 가공할 살인도(殺人刀)를 익히고 있었다. 그는 도와 몸을 하나로 합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의 기도는 이미 하늘과 땅에 닿아 있었다. 한 자루 보도처럼 강하고 날카로운 기세. 어지간한 사람은 그러한 기세만 느끼고도 혼절하고 만다. 하지만 단리궁은 신비한 체질이기에 그러한 기세 아래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미안하오, 노인. 길을 비켜 주시오!" "으으, 네… 네놈이 감히 노부에게 배사지례를 취하기를 거부하다니……?" 괴인의 한어(漢語)는 매우 서툴렀다. 그는 부들부들 치떨며 몸을 수직으로 상승시켰다. "정녕… 동영제일도(東瀛第一刀)를 터득하고 싶지 않단 말이냐?" "일 없소, 내게는……!" "으으, 미친 놈. 천하제일도를 거부하다니… 네놈은 미친 놈이다!" 괴인의 음성이 격해졌고, 혈무가 격하게 출렁거렸다. 단리궁은 여전히 담담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혈무 속에서 한 동안 짐승의 신음 같은 호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한순간, 붉은 구름은 수직으로 상승해 올라갔다. "꼭 노부의 도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큿큿, 그것은 바로 운명(運命)이기 때문에……!" 휘리리리－ 링－! 괴인은 잠마혈비(潛魔血飛)라는 해외비학(海外秘學)을 발휘해서 일순 모습을 감췄다. 괴인이 사라지고 난 후, 다시 비가 시작되었다. 괴인이 모공에서 흘린 강기가 사라지면서 비보라가 다시 단리궁의 몸을 휩쓸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진이 사납군!" 단리궁은 중얼거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팔자걸음으로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으나, 열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다시 멈춰야 했다. 길 가운데, 거의 일순간에 나타난 하나의 금무(金霧)가 있었다. 소리도 없이 번지는 자욱한 금무. 그것은 시계를 철저히 방해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했다. 천방금무벽(天方金霧壁). 금무는 호신비법 중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해외절기였다. 도검(刀劍)을 막고 수화(水火)를 막는 강기의 벽 안에서 낮고 거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궁(弓), 오랫동안 너를 살펴본 사람이다. 해서, 너의 지혜와 처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흠……!" "떠나간 혈무흔(血無痕)은 강한 사람이나, 사람을 다룰 줄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은 살인법(殺人法)뿐이다!" "……." "하지만 노부는 다르다. 노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무엇을 바라는 것까지도 노부는 알고 있다. 노부는 네가 야망이 없는 녀석이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야망을 갖고 있는 녀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글쎄……!" "훗훗… 부정하지 마라. 네 눈이 말하고 있으니까!" "나의 눈?" "너의 눈에는 야망이 불타오르고 있다. 그것은 운명의 불이다. 네가 떠도는 이유는 그 불길을 밖으로 폭사시킬 행로(行路)를 찾기 위함이다. 자아, 이제 노부가 네게 그 수단을 일러 주겠다!" "흠……!" "천하 상술(商術)을 알려 주고 기문진학(奇門陣學), 포진학(布陣學)과 장검권지(掌劍拳指)를 알려 주겠다. 동서고금의 모든 무가진경에 기록된 가공할 절기들을 기진이보와 더불어 네게 전하겠다!" "……."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네가 노부를 사부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그 후, 노부는 너를 노부의 국가로 데리고 가겠다." "국가……?" "머나먼 곳이다. 후후, 그러나… 중원과는 인연이 많은 곳이다!" 스으으… 스으으……! 자욱이 번지는 금무가 길바닥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말하는 사람은 주루에서 충고했던 네 사람 중 하나였다. 천하제일부(天下第一富), 천하제일력(天下第一力). 무사라면 누구라도 바라는 꿈의 경지이다. 그것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질 사람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단리궁에게는 그것도 매력이 되지 못하는 듯했다. "미안하나, 내가 드릴 말씀은 하나! 길을 비켜달라는 말이외다!" "뭐… 뭐라고……?" 콰아아－ 콰아아－! 금빛 안개가 사정없이 번져 나갔다. 가공할 잠경이 단리궁의 몸을 휘감으며 단리궁의 몸은 높이 쳐들렸다. "네, 네놈을 찢어 죽이겠다!" 금무괴인은 분노해 외치며 손을 쳐들었다. 그가 단리궁의 심장을 향해 격공장(隔空掌)을 가하려는 찰나, 커다란 불호성과 함께 백무덩어리가 허공에서 둥둥 떠내려왔다. "아미타불… 멈추시오. 이제는 노납의 차례이니까!" 백무다라패엽무(白霧茶羅貝葉霧).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유가비전(瑜伽秘傳)이다. 우유가 퍼부어지듯 흰 기류가 흘러내리는 가운데, 단리궁의 몸은 금무에서부터 빠져나와 백무 가운데로 들어갔다. 마치 환상처럼…! 단리궁은 내가고수들의 가공할 진기에 의해 허공을 둥둥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것이 백무에 잠겼다. 단리궁은 전후좌우를 한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묘하군. 내게 변황무림과 인연이 생기다니… 나의 가문이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변황고수들이 나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다니…….' 단리궁의 입가에는 고졸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천년밀가의 대종손(大宗孫). 죽는다 해도 그의 뿌리는 잘릴 수 없다. 거부하며 뛰쳐나오기는 했으나, 그의 뇌리에는 천년밀가의 위대한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고집스러운 표정은 바로 천년밀가의 그것이었다. 자욱한 흰 안개 가운데, 심금(心琴)을 울리게 하는 웅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납은 천룡달뢰(天龍達賴)라고 하네." "아아, 천축의 활불(活佛)!" "헛헛… 이미 죽은 이름이지!" "……." "모든 것을 적에게 빼앗기고, 몸만 빠져 나온 비겁한 승려일 뿐이지!" "으음……!" "물론, 살기 위해 빠져 나온 것은 아니었네. 노납이 살기를 택했던 이유는… 머릿속에 있는 유가비전(瑜伽秘傳)을 전수할 전인을 찾아야 한다는 절대절명(絶代絶命)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네!" 유가비전, 그것은 삼류(三流)로 전해진다. 황교(黃敎), 홍교(紅敎), 배교(拜敎). 삼 파의 유가비전은 각기 특징이 있다. 황교의 유가비전은 정종절기로 내공을 강하게 하고, 홍교의 절기는 장안사술을 주류로 삼는다. 배교는 환술(幻術)을 주로 쓰고, 채화음적도 꺼릴 정도로 지독한 황음절기를 자유자재로 시전하고 있는 사교집단이다. 홍교, 배교는 세력이 확장되는 상태이고, 황교는 멸교 위기에 처해 있는 상태였다. 천룡달뢰는 바로 황교의 마지막 조종(祖宗)이라 할 수 있었다. "노납은 긴 말 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네." "……." 단리궁은 습관처럼 말을 하지 않는다. "유가비전은 합당한 후예에게 전해져야만 효력을 나타내네. 그리고 시주야말로 천 년에서 가장 근골이 좋은 사람이지. 물론, 내상(內傷)을 입은 듯한 흔적이 보이나 그 정도는 간단히 치료될 수 있네. 어떤가? 노납을 위해 절기의 전수자가 되어 주지 않겠는가?" 천룡달뢰는 아주 온유하게 말을 건넸다. 단리궁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듯,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기 시작했다. 해외사천(海外四天), 해외육가(海外六家). 중원에서는 너무나도 머나먼 변황에는 열 곳의 절대적인 장소가 있다. 그 중 사천(四天)이라 불리는 네 곳은 비밀스러운 가운데 단맥되었고, 천룡달뢰의 사문인 황교는 그 중 하나였다. '황교비전은 몇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본가 무공보다 뛰어난 데가 많은 절기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것을 익힐 수 없다. 변황무공을 익히는 것은 가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일이기에…….' 단리궁은 고개를 가볍게 떨어뜨렸다. "미안하나, 거절한다는 말을 드릴 수밖에 없군요!" "거, 거절? 이유가 뭐지?" "글쎄요." "으음, 시주는 정말 놀라운 사람일세. 정말로……." 천룡달뢰는 크게 실망한 듯했다. 그는 나직이 불호성을 외며 천천히 떠올랐다. 백무가 한순간 자취를 감추는 가운데,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크크… 이제야 노부 차례인가?" 위이이－ 잉－! 또다시 안개가 밀려들어 사위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네 번째로 다가서는 안개는 흑무(黑霧)였다. 먹물처럼 짙은 안개 속에는 등이 굽은 노인 하나가 있었다. 그는 허공을 저벅저벅 밟으며 단리궁 앞으로 다가섰다. "자네는 눈이 높은 청년이야. 그것이 마음에 드네!" "노인은 뉘시오?" "후후… 사람 사냥꾼!" "사, 사람 사냥꾼?" "단 한 사람을 찾아 구만 리(里)를 떠돌아다닌 사람이네. 그리고… 자네를 간절히 바라고 있네!" "왜?" "글쎄, 그 이유는 노부보다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후후, 설마, 자신의 능력조차 모르는 바보란 말인가, 서생?" "흠……."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네. 자네는 무림사상 가장 위대한 인연(因緣)의 끈을 잡은 것이네!" "끈……?" "일만 무사(武士)와 한 명의 절대미인(絶代美人)! 그리고 한 자루 천년성검(千年聖劍)이 지하(地下)에서 기다리고 있네, 주인을! 그리고 자네는 운명의 주인이네!" "어렵군!" "가 보면 알 것이네!" 안개 속의 노인. 그는 진장서축(盡藏書築) 곁에 대장간을 차린 철노(鐵老)였다. 그는 변황의 네 사람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천황신장(天荒神匠). 세외에서는 이미 전설이 된 이름이었다. "가세, 전설을 찾아서! 아니, 기다리는 인연을 찾아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는데, 단리궁은 손을 들어 죽립 끝을 기울이며 입가를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벌어졌다. "저는… 중원인입니다. 중원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죄송하외다, 노인!" "떠, 떠나지 않겠다고?" 철노의 머리카락이 치솟아 올랐다. 그는 격노했고……. "푸하하하… 결국 넷 다, 실패했군!" "궁, 역시 위대한 혼을 갖고 있다." "저 청년의 가슴에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야망의 바다가 있는 듯하다. 아미타불… 하여간 우리 네 사람은 잇따라 거절당하고 말았다!" 휘리리리－ 링－! 혈무(血霧), 금무(金霧), 백무(白霧)가 흑무 가운데로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혈노(血老), 전노(錢老), 불노(佛老), 철노(鐵老), 그리고 궁서생(弓書生). 낭인부(浪人府)의 오대괴물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단리궁은 네 사람에게 포위되었고, 네 사람은 단리궁을 힐끗힐끗 보며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지극히 오만한 단리궁과 네 명의 계피학발 노인.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집념(執念)이라는 이름의 것이었다. 유성혼(流星魂)을 갖고 태어나 가문을 떠난 단리궁은 육 개월 넘게 그를 뒤쫓았던 변황의 사대기인에 의해 포위당한 셈이었다. 단리궁은 변황의 절대자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도 전혀 동요됨이 없었다. 그는 네 명의 노인들이 어떻게 행동하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빗속의 묘한 대치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네 노인 중 누군가의 손가락이 가볍게 퉁겨졌고, 단리궁의 몸뚱이가 한순간 휘청거렸다. 이상하게도 졸음이 쏟아져 내린다. "나… 나를 잠들게 하다니? 고약한 늙은이로군." 죽음 앞에서도 휘어지지 않았던 허리가 수마(睡魔)에 의해 스르르 휘어진다. "나… 나의 몸은 쓰러뜨릴 수 있어도, 나의 고집은 꺾지 못할 거외다. 내게… 피 흘리는 수법을 강요하지 마시오." 그리고 그의 귓가로 늙은 목소리들이 스친다. "하는 수 없소. 연수(連手)할 수밖에!" "우리가 저 녀석의 주인(主人)이 될 수 없다 해도 뜻을 이룩해야 하오. 상황은 너무도 급하오. 해외육가(海外六家)는 준동(蠢動)하기 시작했소. 우리도 대처해야만 하오! 곧 대혈겁(大血劫)이 닥칠 것이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운명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서로 원수로 여기던 우리 네 사람이 하나로 합치게 되었다니……!" "헛헛… 일단 이 곳을 떠납시다. 그리고 나머지는 운명에 맡겨 봅시다!"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낭인부 오대괴물은 일제히 실종되었고, 낭인부의 가난한 사람들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새벽길로 나선다. 그들은 간밤에 고금에서 가장 위대한 협상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단리궁과 네 명의 기인,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간 것일까? 혜성의 길은 시작되다 － 타인(他人)이 내게 검을 쥐기를 강요한다 하더라도 나는 검을 쥐지 않으리라. 내가 검을 쥐지 않으려 하는 것은 겁쟁이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삼라만상이 몰라도 좋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검(劍)이 아니라, 선혈(鮮血)임을 아무도 몰라도 좋다. 단리궁은 기괴한 환경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상태인데, 그가 머물러 있는 곳은 하나의 밀실(密室)이었다. 방 안에는 습기가 별로 없었다. 단리궁은 나무 의자에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그의 전면에는 산발(散髮)한 노인이 서 있었다. 피비린내가 풍기는 피풍의(避風衣)를 걸친 노인. 그는 단리궁이 듣거나 말거나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었다. "본국(本國), 다시 말해 너희 같은 중원인(中原人)이 동영(東瀛)이라 부르는 곳에는 백 파(派)가 있다. 그들은 하나하나 장기를 지니고 있다!" "……." 단리궁은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노인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노인은 단리궁의 그러한 태도에 이미 익숙해진 듯했다. 그는 단리궁이 고막을 틀어막는다 하더라도 뇌리 속으로 파고들 수 있게끔 진기를 다해 말을 이어 나갔다. "석양류(夕陽流), 월파류(月波流), 일심도(一心刀), 월영도파(月影刀派), 제검류(帝劍流), 그리고 잔영(殘影)과 일도(一刀)의 흐름(流)… 후후, 그들은 하나하나 가공할 기예를 터득하고 있다!" 노인은 혈노(血老)였다. 그것은 그의 별호였던 혈무흔(血無痕)의 첫자를 딴 이름이었다. 호수의 달그림자를 베고, 십 장(丈) 안에 지는 모든 매화(梅花)를 일 도(刀)에 가르고, 자신의 그림자를 순간적으로 베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단 한 사람이다. 혈무흔(血無痕)! 그는 살아 있는 동영의 전설이었다. 한창 때 그는 휘하에 삼만 제자(弟子)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유구국(流球國)을 힘으로 점령하고 도주(島主) 노릇을 하며, 제자들을 부려 가공할 해상왕국(海上王國)을 설립한 바 있다. 그는 태양류(太陽流)와 무극류(無極流), 오행류(五行流), 단심혈도류(丹心血刀流), 극혼류(極魂流)를 통합한 위대한 무사(武士)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동영 무도인의 절대숙원이던 중원정벌을 감행하게 되었다. 칠십여 년 전, 해선(海船) 백오십 척에 수하들을 가득 싣고 항주(杭州)를 통해 중원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중원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쉬지 않고 싸웠고, 싸울 때마다 이겼다. 무당(武堂), 화산(華山), 전진(全眞), 곤륜(崑崙), 북망(北邙)의 명가(名家)들은 그의 일 도를 막지 못하고 쓰러졌다. 백 일에 걸쳐 그는 서른세 번 싸웠고, 서른세 번을 이겼다. 서른네 번째의 싸움은……? 어이없게도, 그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패배로 드러났다. 그는 중원제일가(中原第一家)로 불리는 가공할 가문의 포위망에 걸려들어 전 제자를 잃어야 했다. 천년밀가(千年密家)… 그는 바로 천년밀가의 총사(總師)에게 꺾이고 만 것이다. 그의 나이는 당시 스물일곱. 그는 패한 상태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외쳤었다. － 중원혼(中原魂)을 경시했기에 꺾였다! 그러나 나의 고향에는 절대 꺾이지 않을 절정도(絶頂刀)가 있다. 그것을 얻는 날, 다시 오겠다. 내가 오지 못한다면, 나의 후예라도 보내겠다! 그 날, 중원혼은 그의 일 도 아래 굴복해야만 할 것이다! 그는 할복자살하여 수치를 씻으려다가는 그렇게 외치며 떠나갔다. 그 후 칠십여 년, 그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은거해 하나의 도초를 연마하며 세월을 보냈다. "노부가 터득한 도초는 초식(招式)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本能)과도 무관한 것이다. 감각(感覺)에 따라 도초를 시전하는 것이 아니라… 훗훗, 하나의 느낌에 따라 시전하는 것이다! 바로 영감(靈感)에 따른 허무도(虛無刀)이다." "……." 단리궁은 하품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일까? 그는 혈무흔이 말하는 상승무학(上乘武學)의 심오한 내용에 깊이 빨려들고 있었다. "노부는 그 하나의 도(刀)를 얻기 위해 본국의 십대무사(十大武士)의 비결을 모조리 터득했다!" 혈무흔은 자신의 이야기에 취해 말을 이어 나갔다. 단리궁의 무관심은 이미 관심도 없다는 듯, 그는 자신의 검도수학(劍道修學) 이야기를 실전 상황처럼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도(刀)란 쪼개는 데 쓰인다! 그것이 근본적인 원리이다. 본국의 무사는 도를 들고 무엇이든 쪼개는 수련을 거듭하는 가운데, 십대도결(十大刀訣)을 천 년에 걸쳐 이룩한 것이다!" "……!" "달그림자(月影), 떠오르는 태양(太陽), 번개(閃電), 심지어 바다(海)와 하늘(天), 인간의 마음마저……." "……." 단리궁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혈무흔이 하는 이야기는 언제부터인가 단리궁이 알고 있는 무공 수준을 넘어가고 있었다. 단리궁은 문일지십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 그는 혈무흔이 빠른 속도로 하는 이야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본국의 선대무인들은 중화인(中華人)들과는 달리 중용(中庸)이라는 것을 몰랐다. 다시 말해, 자파의 무공을 고집하기만 했지. 큿큿, 타파무공의 뛰어난 점을 수련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단리궁은 처음으로 탄성을 발했다. 혈무흔은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동영무림사에 대해 정통한 사람이었다. 동영의 무사는 무식하고 야만스러운 법인데, 혈무흔은 달랐다. 그의 본 모습은 무사라기보다 학자(學者)에 가까웠다. 그는 실전도(實戰刀)를 터득하다가 이론으로 도(刀)를 터득했고, 만년에 가서는 선(禪)을 이용해 도를 터득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가 칠십여 년간 연구한 심득(心得)이라 할 수 있었다. "강자(强者)는 약자를 죽였고, 약자는 죽으며 절기를 실전시켰다. 그리고 후인들은 약자의 절기는 으레 패자의 절기라고 여겨 익히려 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바로 본국의 무공이 중원의 무공에 진 이유다! 게다가……." "흐음……!" "본국 후예들은 불행히도… 승리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편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인술(忍術)이나 은잠술(隱潛術)에만 발전하게 되었고… 유감스럽게도 당세의 주류(主流)는 가공할 인술을 사용하는 잔영일도류(殘影一刀流)이다. 그 놈들은 칼 쥐는 법도 제대로 모른다. 그러면서도 유구국(琉球國)을 피로 정복했다. 빠드득－!" 혈무흔은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잔영일도류(殘影一刀流). 그들의 이름은 아직 중원에 소문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부상국에서 일어난 그 어떤 세력보다도 가공할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십팔 인술(忍術), 구십구 살인기(殺人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을 추구하는 인자(忍者)들, 그들은 유구국을 정복하고 나서 힘을 꾸준히 모으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중원과는 싸울 뜻이 없다는 듯, 하나의 가문을 겉에 내세워 중원인을 속이고 있다. 아느냐, 고집쟁이? 너는 해외육가 중 하나인 부상신풍가(扶桑神風家)를 알고 있느냐?" 혈무흔의 눈이 단리궁 쪽으로 돌려졌다. 번－ 쩍－! 그의 눈에서는 가공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한 인간이 갖고 있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빛이었다. 단리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고 말았다. "아오, 그들을!" "훗훗… 그들이 바로 잔영일도류의 화신(化身)이라는 것도 아느냐?" "그, 그럴 리가……?" "후후…천하는 속고 있다. 타파와 협조적인 부상신풍가가 사실은…후후, 피로 일어난 악마의 집단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후후, 해외육가(海外六家)는 암중에 하나의 세력으로 연합하고 있다!" "아아, 그럴 리가……!" 단리궁의 머리카락이 빳빳해졌다. 해외육가(海外六家). 이들은 백여 년 전부터 이름을 날리고 있다. 부상신풍가(扶桑神風家), 천축쌍가(天竺雙家), 홍교태양가(紅敎太陽家), 배교환희가(拜敎歡喜家), 외몽고(外蒙古) 와자국(瓦刺國) 첩목세가(帖木世家), 새북제일가(塞北第一家) 북원(北元) 철왕대가(鐵王大家), 천방(天方) 기병무가(奇兵武家). 변황새외(邊荒塞外)의 여섯 가문. 이들 중 어떠한 가문은 일국(一國)의 황실(皇室)을 이루고 있고, 어떠한 가문은 상맥(商脈)으로 천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가공할 힘을 지니고 있는 거대한 무사집단. 이들이 하나로 뭉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뭉칠 수 있단 말인가?' 단리궁의 입가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너는 아직 천하를 모르고 있다. 후후, 고집쟁이 녀석. 너는 아직 살아 나가는 법을 모르고 있다. 피의 율법에 대해서 혐오하기만 했지… 후후, 작은 피가 큰 피를 없앤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혈무흔의 눈빛이 아스라해졌다. 지금의 그는 무사라기보다 하나의 오래 산 늙은이였다. "노부는 도를 얻다가 고국(故國)에 돌아가 제자들을 만나려 했었다. 유구국(流球國)이라는 곳이지. 물이 좋고, 공기가 좋은 곳이지!" "……." "한데, 그 곳은 이미 사라졌다. 후후, 노부를 기다리겠다고 맹세했던 수만 명의 가신(家臣)들은 모두 미친 들개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부상신풍가에 항복을 했고, 부상신풍가의 주류인 잔영일도류의 악마들은… 철왕대가(鐵王大家)의 무리가 선물한 독을 써서 모든 사람을 피에 굶주린 야수(野獸)로 만들어 버렸다!" 혈무흔의 눈에서는 핏빛이 번쩍번쩍 일어났다. 철왕대가(鐵王大家). 이들은 가장 가공할 저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철왕대가 사람들은 중원에서부터 가장 먼 곳에 머물러 있다.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위쪽, 등격리사막(騰格里沙漠)을 넘어선 머나먼 곳에서 그들은 일국을 이룩하고 북원(北元)의 위대한 전통을 되살리겠다는 호언장담만 하고 있었다. 그들이 되살아날 희망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데, 그들은 놀랍게도 부상신풍가와 사절단을 교류할 정도로 대외활동을 늘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막(沙漠)에는 하나의 별이 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모든 사람이 그를 두려워한다!" 혈무흔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가 중원에 나오는 날, 천하는 피비(血雨)에 씻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너를 택한 이유는 네가 바로 사막의 별을 꺾을 하나의 혜성(彗星)이기 때문이다!" "으음……!" 단리궁의 숨소리가 유난히도 담담해진다. "후후…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했다. 후후, 자!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자. 부상 십대비전(十大秘傳)을 포용하고 있는 완전한 도법(刀法)을 알기 위해서는 백 가지 도결을 외워야 한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혈무흔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비급으로도 남아 있지 않은 부상국의 가공할 도초가 무수히 기록되어 있었다. 월영류(月影流). 한 줄기 도섬(刀閃)을 일으켜, 호수 위의 달그림자를 가르는 쾌도(快刀). 석양류(夕陽流). 가공할 도세(刀勢)를 백 장 멀리까지 발휘해, 일순 삼라만상을 붉은빛으로 물들게 하는 도법. 태양류(太陽流). 도극(刀極)에서 무시무시한 열양진기를 일으켜 사방을 불살라 버리는 것. 그러나 부상국에는 내공수법이 탁월하지 않기에, 태양류의 위력은 중원의 열양검법(熱陽劍法)에 뒤진다. 그렇다고는 하나, 도초 자체의 위력은 열양검법보다 월등하다. 단리궁은 하나의 배(船)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 배는 바로 전노(錢老)의 소유물이었다. 배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배가 항해하는 사이, 변황의 네 기인은 단리궁을 가르치는 가운데 서로 친해져 호형호제할 정도가 되었다. 전노(錢老). 그는 천방국(天方國)의 대부(代父)라고 불렸던 천금성자(天金聖者)의 화신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예에 대한 것은 가르쳐 주려 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전수할 수 있는 무공은 다른 세 사람이 전수할 예정인 가공할 무예에 비해 지극히 보잘것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금나절기(擒拿絶技)와 환영미종보(幻影迷踪步)라는 절기는 쌍절(雙絶)이 될 수 있었다. 천금성자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자칭 고금대상인(古今大商人). 그는 단리궁이 듣건 말건 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백 가지 산학(算學)을 전수했고, 천하의 지리(地理)에 대한 것을 말해 주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단리궁이라 하더라도 난생 처음 듣는 가공할 것이었다. 천금성자, 그에게도 하나의 철천지한이 있었다. 자신의 절기를 타인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던 천금성자가 머나먼 중원까지 온 데에는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노부의 가문은 기병무가(奇兵武家)에 무너졌다. 후후, 놈들은… 후후, 바로 노부의 사촌(四寸)들이다! 놈들이 바로 노부의 천방금궁(天方金宮)을 무너뜨린 것이다, 암습으로! 빠드득－!" "으음……." "후후… 놈들은 피에 굶주렸고, 황금에 굶주렸다. 놈들은 노부를 없애고 노부의 측근 시위들을 모두 다 죽인 후 노부의 모든 것을 차지했다. 그러나 놈들이 얻은 것은 별로 없다! 그 이유는… 후후, 놈들에게 힘을 빌려 준 악마의 무리가 놈들을 노예로 부려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예?" "후후… 철왕대가(鐵王大家)의 무리는 절대 헛수고를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힘을 빌린다는 것은… 후후,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철왕대가!" "큿큿… 놈들은 아직 정체를 모두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놈들은 해외육가를 암중 통합하기 시작했고… 이미 거의 다 성공했다!" 천금성자의 눈에서 다시 한 번 핏빛이 토해졌다. 단리궁은 입술을 질끈 물며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노인네들의 말대로라면… 나의 가문이 모르는 사이, 나의 가문을 무너뜨릴 연맹이 이룩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검을 쥘 수 없다. 그들이 뭉친다 해도 나의 가문을 꺾지 못할 것이다.' 단리궁은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살피던 천금성자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궁, 너는 훌륭한 녀석이다. 네게는 어떤 무사도 지니고 있지 않는 불굴의 혼이 있다. 검을 쥐지 않으려 하는데에도 천하제일이고… 검을 쥐기만 한다면 고금제일이 될 것이다, 너는……!' 천금성자는 회심의 미소를 애써 감추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는 중원을 떠돌며 온갖 서적을 구해 본 바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중원으로 올 때 천만 냥(兩)을 갖고 왔는데, 그 중 육백만 냥을 서적 구하는 일에 썼다. 무후병진서(武后兵陣書), 귀곡무략(鬼谷武略), 중원십대진학(中原十大陣學)……. 천금성자는 사해팔황(四海八荒)의 병서를 모두 수집했고, 그것을 읽는 가운데 하나의 병법을 창안할 수 있었다. 그가 단리궁에게 말하는 모든 것은 그의 창안병법을 전수하기 위한 기초지식에 불과했다. 일컬어 십방무극병서(十方無極兵書). 그 안에는 백여 권 절전병학(絶傳兵學)이 모조리 포함되어 있다. 단리궁은 아는 것이 반, 모르는 것이 반이고… 그 중의 어떤 것은 단리궁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가공할 신비를 지니고 있었다. * * * 끝없는 여정(旅程). 사노일소(四老一少)는 하나의 거선(巨船)과 함께 북상(北上)한 지 어언 석 달째이다. 혈무흔과 천금성자의 모든 것은 이미 단리궁에게 전수되었다. 중요한 것은 단리궁이 그것을 한 번도 시전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무공(武功)의 길, 단리궁은 그 길에 오르는 것을 고집스럽게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부정하려 하더라도 그의 머릿속에는 변황무림계의 가공할 무공이 완전히 기억되고 있고, 그의 눈빛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혜광(彗光)을 더해 가고 있었다. 그는 유야무야한 가운데 천년밀가 시절보다 두 배는 강한 절대고수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천룡달뢰(天龍達賴). 그는 단리궁 앞에 와서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리궁의 폐쇄된 내공을 되살리는 일과, 단리궁의 근골을 강철같이 단단하고 구름처럼 부드러운 신비체질로 바꾸는 데에만 전력을 했다. "노납은 라마로서 현세에서의 성취보다는 내세(來世)의 해탈을 바라고 있네. 그리고 승려이기에 살계(殺戒)를 어길 수가 없네. 하지만 세월(歲月)은 노납이 불도에 정진하도록 버려 두지 않았네. 자네에게 유가비전인 이혈폐맥술(移穴廢脈術)과 불사비전(不死秘傳)을 전수하는 이유는 역시 그 때문이라네!" 천룡달뢰는 변황의 사노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는 늘 두 손을 합장(合掌)한 자세로 둔다. 그의 두 눈에서는 혁혁한 자망(紫芒)이 폭사해 나오는데, 그것은 그가 오행신강(五行神剛)을 터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천룡달뢰는 천축계에 수많은 추종자를 갖고 있다. 그는 천축의 활불(活佛)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가 오랜 칩거를 깨고 천하를 주유하기 시작한 데에는 가공할 사연이 있었다. 홍교태양가(紅敎太陽家), 배교환희가(排敎歡喜家). 천축의 흑밀류(黑密流)를 좌지우지해 왔던 양대마가가 하나로 합쳐 천룡달뢰가 이끌던 황교조직을 섬멸해 버린 것이다. "황교는 싸움을 싫어했다네. 그래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네!" 천룡달뢰는 단리궁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 안에는 장구한 세월이 안겨 준 숙명의 그늘이 스며 있었다. "아는가, 무공을 배우는 뜻을……?" "글쎄요." "아미타불… 그것은 남이 말한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네. 하지만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함이라 할 수 있네!" "으음……." "아미타불… 진짜 강자는 피를 싫어하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으니까!" 천룡달뢰의 목소리는 더욱 신비해졌다. 그리고……. "시주는 막강해져야하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기에…." 단리궁은 그의 목소리에 실려 있는 최면잠력(催眠潛力)에 의해 스스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는 길게 누웠고, 천룡달뢰는 조용히 결가부좌를 틀었다. "백 일(日)이면… 한 마리 용에게 강철 날개를 달아 줄 수 있다. 아미타불… 노납은 그 때까지 죽음조차 미루어야 한다!" "자네에게 삼 갑자 내공(內功)을 심어 주겠네. 아미타불……!" 치리리－ 릿－ 치릿－! 천룡달뢰의 장심에서 몽롱한 백무가 흘러나왔다. 흰 기류는 백사(白蛇) 떼처럼 흩어져서 단리궁의 피부를 뒤덮기 시작했다. 단리궁은 흰 기류에 의해 둥둥 떠올랐다. 그리고 한순간, 흰 기류는 그의 모공을 통해 그의 골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격체전력술(隔體傳力術). 허공을 격해 내공을 전수하는 유가비전의 대법이 시전되는 것이다. 불사비전(不死秘傳). 천룡달뢰가 천축을 떠날 때 갖고 나온 단 한 권의 천축무경(天竺武經)이다. 그것은 칠백 년간 실전되었던 불사곡(不死谷)의 비전진경이다. 불사곡(不死谷), 그 곳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장소이다. 불사곡은 하나의 전설로만 남아 있는 방파로, 그 곳에서는 무공초식이 아니라 장생주안술(長生駐顔術)이 발달했다. 연단(練丹)과 조식(調息), 도인술(導引術)이 발달했고 한 가지 비밀스러운 내공구결이 발전했다. 그것이 바로 불사비전. 그것을 터득하면 백 살이 되어도 피부에 윤택이 사라지지 않고, 머리카락이 흰색으로 물들지 않는다. 어디 그뿐이랴? 불사비전을 터득한 사람의 단해(丹海)에는 십오 세 소년의 그것 같은, 늘 순수하고 강양한 진기가 샘솟듯 솟아나게 된다. 치리리리－ 릿－ 치릿－! 흰 기류는 바로 천룡달뢰의 모든 것이었다. 천룡달뢰는 시간이 촉박함을 아는지 자신의 생명을 던져 단리궁의 몸을 탈태환골(脫胎換骨)시키는 것이다. 단리궁은 늘 누워 지내야만 했다. 그는 곡기(穀氣)를 끊은 탓에 전에 비해 조금 말라 보였다. 머리카락은 산발되어 얼굴의 반을 뒤덮었다. 우뚝한 콧날은 남자의 매력을 엿보게 했고,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매는 그가 밀가의 종손임을 알게 했다. 단리궁은 백 일 넘게 밀실에서 생활했다. 변황의 노인들은 그의 하인(下人) 이상으로 그에게 잘해 주었다. 하지만 단리궁은 아직 결심을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첫째는 그가 배워야 할 무공이 천년밀가가 천년적(千年敵)으로 삼았던 변황무림계의 절기이기 때문이었다. 단리궁은 주화입마(走火入魔)에서 왔던 내공의 폐쇄마저 완전히 회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무공을 모르는 듯, 한 번도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일까? 단리궁과 네 노인 가운데에는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단리궁의 고집을 꺾으려 하는 네 노인의 고집은 경건할 정도였다. "이제 우리는 성숙해(星宿海)로 접어들었소. 십 일(日) 안으로… 천년신비의 금해(禁海)로 들어서게 될 것이오!" 밀실이다. 여기서는 아무리 크게 떠든다 하더라도 목소리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들은 헤어져야 하오. 천황장인(天荒匠人)만 남고, 다른 세 사람은 다시 돌아가야 하오." "그렇소. 악마의 대진군(大進軍)을 막기 위해… 우리는 또 하나의 꿈을 시작해야 하오." "훗훗… 자금(資金)은 노부 천금성자(天金聖者)가 대겠소. 천하를 지킬 위대한 꿈을 이룩할 자금은……." 천금성자(天金聖者), 천룡달뢰(天龍達賴), 혈무흔(血無痕), 천황장인(天荒匠人). 네 사람은 팔선탁 둘레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대체 어디를 향해 끝없이 가고 있는 것일까? 창 밖은 이미 겨울(冬)이었다. 눈(雪)… 거위털 같은 눈이 거대한 수면을 뒤덮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눈의 호수. 이 곳은 바로 성숙해(星宿海)로 황하(黃河)의 물이 시작된다는 곳이었다. "궁아(弓兒)는 자신이 절대자(絶代者)로 성장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오." "그 날, 강호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될 것이오!" "훗훗… 만류(萬流)에서 가장 완벽한 성취를 이룩하는 절정지존(絶頂至尊)이… 후후, 운명의 손 아래서 탄생하게 될 것이외다! 우리는 그 길의 안내자일 뿐이오." "자아, 서두릅시다!" 선실은 텅 비고 말았다. 네 명의 변황고수는 차를 세 주전자 비워 가며 이야기하다가는 조용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 * * 단리궁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는 전과는 다른 표정을 지으며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모르겠군. 나를 그리도 못 살게 괴롭히던 네 노인네가… 도대체 어디로 실종했단 말인가?" 단리궁은 여러 날째 혼자 생활한 셈이었다. 그에게 무공을 배우라고 갖은 회유를 다하던 네 노인은 칠 일 동안 단리궁을 혼자 둔 채 나타나지 않았다. 완전한 고독(孤獨)이랄까? 단리궁은 등불 대신 야명주(夜明珠)로 빛을 내고 있는 꽤 큰 밀실 안에서 혼자 머물고 있는 셈이었다. 탁자(卓子) 하나, 그 위에는 몇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동영십천도법(東瀛十天刀法) 허무제일도(虛無第一刀). 혈무흔이 남긴 도경(刀經)이다. 그것은 매우 얇았고, 표지조차 없었다. 천금성자(天金聖者) 대상학비결(大商學秘訣), 천축제종무경정화(天竺諸宗武經精華), 천황철신경(天荒鐵神經). 도합 네 가지의 무록이다. 그리고 공허가 있었다. "모를 일이군. 설마, 나를 포기하고 떠나갔단 말인가?" 단리궁은 기이한 고독감에 젖어들었다. 네 노인과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탓일까? 네 노인의 얼굴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그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떠올랐다. '나를 두고 간 것일까? 나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고 여기고, 나를 내버려 둔 채 다른 후계자를 찾아 떠나간 것일까?' 단리궁은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단리궁은 느낌상으로 다시 하루가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 노인은 그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리궁은 넓은 방 안을 오락가락하며 그들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단리궁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다시 하루, 단리궁은 네 권의 책을 뒤적거리며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문(門), 바깥쪽에서만 열도록 안배되어 있는 하나의 문이 눈에 닿았다. "나가서 찾아 보자!" 단리궁은 중얼거리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걸을 때에도, 손을 내저을 때에도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껏 무공을 쓰지 않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문고리를 밀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고약하군. 문 뒤에 자물쇠가 걸려 있다!" 단리궁은 눈빛을 반짝 빛내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노인들이 나를 방 안에 놔 두고 사라져야 할 정도로 절박한 일이 생긴 것일까?' 단리궁은 묘한 불안감에 휘말리며 또다시 방 안을 서성였다. 한 시진 후, 단리궁은 굳은 표정을 하고 문 앞에 섰다. 대체 무엇을 생각했기에 표정이 이리도 단단하게 굳은 것일까? "노인들, 이러한 상태를 만든 것이 노인들의 계략이라면… 헛계략이오. 나는 무공을 쓰지 않고도 문을 열 수 있소. 후후, 가문에서 연공관을 도망칠 때 즐겨 쓰던 탈출술(脫出術)을 쓴다면 문을 파괴하지 않고도 자물쇠를 열 수가 있소!" 단리궁은 빙그레 웃기 시작한다. 그는 방 안을 뒤져 침(針) 하나를 찾아 냈다. "나도… 잔재주는 있는 놈이라오, 노인들." 단리궁은 희고 아름다운 손을 정교하게 놀리기 시작하며 피식 웃었다. "변황무공을 거절하기 위해 본가가 금기로 삼고 있던 하오문(下午門)의 탈출을 쓰게 되다니……." 그는 미묘하게 웃으며 침을 정교하게 놀리기 시작했다. 삐꺽－ 뚝－! 문고리 가운데 있던 구멍은 열쇠 구멍이었다. 단리궁은 내공을 써서 열쇠 구멍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하오문의 수법인 만시해(萬施解) 비결을 써서 문을 여는 것이다. 결국 문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일순……. "이런 곳일 줄이야? 내가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이야……?" 단리궁은 선창으로 나아가며 얼굴을 희게 물들였다. 보이는 것은 빙하(氷河)뿐이었다. 눈(雪)의 광야(曠野), 저 높은 하늘은 설마(雪魔)에 휘감기고 있고 드넓은 호수는 빙하로 뒤덮여 있었다. 파라라라－ 랏－ 팟－! 냉풍이 흘러들며 단리궁의 흑포를 휘말아 올렸다. 단리궁은 흑룡선(黑龍船)이라 불리는 거대한 범선(帆船) 위에 혼자 있는 셈이었다. 네 노인은 아무 데에도 없었다. 빙하지대(氷河地帶), 단리궁은 흰 바다 가운데 떠 있는 하나의 검은 섬과 같았다.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이 모두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었다. 흑룡선은 성숙해를 떠돌다가 금단의 바다로 들어섰고, 배는 빙하에 걸리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기가 골수 속으로 스며든다. 내공을 운용하지 않는다면 극심한 추위를 이길 수 없다. 단리궁은 몸 안에 막대한 힘을 갖고 있는 상태인데도 내공운용을 하지 않는 탓에 추위를 느껴야만 했다. "설마, 변괴가 생겼단 말인가?" 단리궁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낭인(浪人)이 되기를 자처했던 세가의 대종손. 그는 강호를 나온 지 처음으로 벽(壁)에 부딪치고 말았다. 강하고 차가운 바람이 몸을 뒤흔든다. 끼이이－ 익－ 끼익－! 빙하지대가 약간씩 이동하는 가운데 흑룡선이 기우뚱거렸고, 허공을 누비고 떨어지는 눈송이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단리궁의 어깨 위에는 눈이 수북이 쌓이게 되었다. 허무(虛無)하고 고독한 영상. 단리궁은 빙하의 지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일 각 정도를 보냈다. 언제부터일까? 단리궁의 망막에 들어오는 하나의 붉은 지대가 있었다. 일 마장도 더 먼 빙하의 평원 위, 가물가물 일어나는 붉은 아지랑이 가운데 하나의 거대한 성(城)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피로 뭉쳐 만든 듯한 거성(巨城). 그 곳에서는 가공할 힘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아, 대단한 축조물이다. 저것은 건물 자체만으로도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단리궁은 감탄하며 거성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는 백년설(百年雪)에 발자국을 찍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백 보(步) 정도 걸어갔을까? 돌연, 그의 고막 속으로 절규성이 들려 왔다. － 오, 오지 마라! 오면 우리 같은 꼴이 된다! － 궁(弓), 돌아가라! 어서! 처절한 목소리. 그 소리는 천리전음(千里傳音)에 따라 먼 곳에서 들려 왔다. "아! 노인들이 아직 살아 있군! 한데, 돌아가라니?" 단리궁은 목소리가 들려 온 곳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목소리는 빙하지대에 솟아오른 성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어서… 어서 떠나거라! 어서……! － 우리들은 실패했다. 이 곳의 진도(陣圖)를 뚫지 못했다. 갇히고 말았다. 그러니, 너는 이제 자유다. 어서 돌아가라! － 너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 듯하다. － 어서… 이 곳을 떠나라!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단리궁은 목소리를 듣는 가운데, 주먹을 불끈 쥐게 되었다. "비록 변황사람들이라고는 하나, 하나같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사경에 처해졌단 말인가? 나 때문에……?" 그는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안 돼! 그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못 본 척할 수는 없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 가지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릉－! 대하(大河)처럼 갇혔던 용암이 분화구를 통해서 터져 오르듯이 그의 사지백해(四肢百骸)에서 힘이 치솟기 시작했다. "나도 있소, 고집스런 노인들." 거의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 단리궁은 순간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렸고, 저도 모르는 사이 비룡재천(飛龍在天) 일 식(式)으로 호선을 그으며 떠올랐다. 파－ 앗－! 하나의 유성(流星)이 떠오르듯이, 그는 빙하지대의 성을 향해 선풍(旋風)처럼 신형을 폭사시켜 나아갔다. 그는 꼭 일 년 삼 개월 만에 무공을 사용한 것이었다. 성(城)은 이상하게도 붉은 얼음으로 이루어졌다. 성 안에서는 가공할 진풍(陣風)이 일어났고, 그 기운은 단리궁의 출입을 강하게 가로막았다. 가까이 다가서자, 무지막지한 암경이 그의 전신을 향해 해일 같은 기세로 몰아쳐 온다. 그의 옷자락은 검은 나비 떼가 날듯 휘날렸다. "천쇄금진도(天鎖禁陣圖)! 놀랍군, 이러한 오지에 가공할 기문진세가 펼쳐져 있다니……!" 단리궁은 중얼거리며 눈에서 강한 빛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천안통(天眼通)의 안력 중에서도 뛰어나다는 만혜신안(萬慧神眼). 그것은 그가 밀가의 대종손이기에 배울 수 있었던 천종절기(千種絶技) 가운데 한 가지였다. 그것을 시전하면 진세를 어느 정도 꿰뚫어볼 수가 있다. 단리궁은 가공할 안력을 발휘해 진세를 십 장 깊이로 뚫어보며 몸을 비스듬히 날리기 시작했다. 츠으으－ 으－ 읏－! 그는 구파일방, 그리고 강호이십팔명가(江湖二十八名家)의 절기를 거의 다 알고 있었다. 그는 각파의 비전절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해 성의 진도를 파괴하며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떤 때에는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을, 어떤 때에는 일위도강(一葦渡江), 암향표(暗香飄)를… 어떤 때에는 칠금신법(七禽身法)을 발휘해서 빙벽(氷壁)을 넘어가기 이백여 장. 연(鳶)이 줄에서 끊어지며 바람을 타고 날 듯, 그는 허공을 폭사해 나갔다. 단리궁은 한순간 가공할 빛(光)을 보며 몸을 경직시켜야 했다. 콰아아－ 콰아아－! 무시무시한 잠력(潛力)과 더불어 한 줄기의 빛이 몸을 휘어감았다. "검… 검(劍)이다!" 단리궁은 빙하의 제단 가운데 꽂혀 있는 하나의 검을 볼 수 있었다. 길이 사 척(尺), 서리(霜)를 뭉쳐 만든 듯한 흰빛의 보검이었다. 우… 웅… 웅… 웅……! 검은 미친 울음소리를 냈고, 가공할 바람이 일어나는 가운데 사방에서 기이한 환영이 일어났다. 군룡(群龍)의 춤(舞)이 있고, 봉황우비(鳳凰于飛)의 현란한 환상이 벌어진다. 거검(巨劍)은 진세의 축(軸)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 척 장검(長劍)에서 신기(神氣)가 폭사되어 나오는 가운데, 사방은 빙무(氷霧)와 오색채무(五色彩霧)에 짙게 뒤덮이고 있었다. 그리고 거검의 주위, 네 개의 빙인(氷人)이 길게 누워 있었다. 신음 소리조차 흘리지 못하고 뻣뻣이 얼어 죽은 네 사람. 그들은 바로 단리궁을 후예로 택했던 네 명의 절대자들이었다. "으으, 저 한 자루 검의 기운이 저 분들을 죽였단 말인가? 안 된다, 내가 허락치 않는다!" 단리궁의 두 눈에서는 일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피의 빛. 이제껏 그의 눈에 떠돌던 유성(流星)의 빛은 일순 사라지고 난생 처음으로 혜성(彗星)의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혜성(彗星)의 혼(魂), 그것은 하나의 운명처럼 웅비(雄飛)하기 시작했고… 단리궁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쥔 채 신형을 폭사시키고 있었다. 단리궁은 저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살기(煞氣)를 격발시키며 떠오르고 있었다. 사 척 거검(巨劍)에서 일어나는 가공할 잠력(潛力)은 네 기인의 몸을 뭉그러뜨리기 직전이었다. 절대절명(絶代絶命)! 단리궁은 저도 모르게 체내의 진원지기(眞元之氣)를 십 성 발휘하며 검망(劍芒)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한 줄기 혜성(彗星)이 흐르듯이, 그는 가공할 속도로 사 척 거검을 향해 신형을 폭사시켜 나갔다. 우… 우… 웅… 웅……! 거검에서는 심마(心魔)를 일으키는 검명(劍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인간의 가슴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살인본능(殺人本能)을 자극하는 살인음파(殺人音波)였다. 단리궁의 두 눈, 그 눈은 이전에 보이던 단리궁의 눈이 아니었다. 아아, 바로 혜성(彗星)! 단리궁의 두 눈은 검은 하늘을 찢어발기며 날아오르는 혜성처럼 가공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운명(運命)의 불처럼……!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오르는 막대한 저력(底力)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손을 쭈욱 내밀고 있었다. 팟－! 손가락이 유난히도 긴 손이 뻗쳐지며 일순, 단리궁의 손아귀에는 서리(霜)를 뭉쳐 만든 듯한 천하명검의 자루가 불끈 쥐어지고 말았다. 우… 우… 우……! 거검은 그 순간 가공할 천룡후(天龍吼)를 토하며 무시무시한 빛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검자루에서는 차디찬 기운이 흘러나왔고, 단리궁은 손바닥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움 가운데 한순간의 혼미함에서 문득 깨어날 수 있었다. 일순 그의 아름다운 검미(劍眉)는 찌푸려졌고, 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던 입가가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내… 내가 검을 쥐다니……!" 단리궁은 사지를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으으, 나도 모르게 살기를 일으켜… 영원히 검을 쥐지 않겠다고 했던 맹세를 깨뜨리고 말다니……!" 그는 땀을 주르르 흘리며 몸을 휘청였다. 그의 손에는 검이 쥐어 있었다. 절대로 검을 쥐지 않겠다고 했던 그의 맹세는 기문진세로 인해 일어난 야수성(野獸性)으로 인해 깨어지고 만 것이다. 뚝－ 뚝－! 미간을 타고 땀방울이 굴러 떨어진다. 한순간의 격정으로 맹세를 깼기 때문일까? 검자루를 쥔 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검은 운명의 주인을 만나면 울음으로 그것을 알린다던가? 검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고, 그 소리로 인해 만년 빙하지대가 뒤흔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네 개의 그림자가 그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큿큿… 네놈도 신(神)은 아니었구나. 큿큿, 결국 네놈은 맹세를 깨고 검을 쥐고 말았다." "궁(弓), 그것은 너의 운명이다. 그러니…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지 마라!" "아미타불… 아는가? 자네는 무사(武士)가 되어야만 하는 사람이네. 자네의 운명은 바로… 검에 있다네. 헛헛, 천 년간 아무에게도 뽑히지 않은 성검(聖劍) 비상(飛霜)이 자네에게 뽑혔다는 것은… 자네야말로 금천(禁天)이라 불리는 변황제일지(邊荒第一地)가 기다리던 천년영웅(千年英雄)임에 틀림이 없네!" "자네는 운명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 아니라, 운명과 손을 잡은 것에 불과하네. 그러니 자책하지 말게나. 헛헛……!" 파－ 파－ 파－ 팟－! 단리궁 곁으로 모여드는 네 개의 그림자. 전노(錢老) 천금성자(天金聖者), 혈노(血老) 혈무흔(血無痕), 불노(佛老) 천룡달뢰(天龍達賴), 철노(鐵老) 천황장인(天荒匠人). 네 사람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들은 진세에 갇힌 것이 아니라, 갇힌 척했을 뿐이었다. 단리궁은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의협심(義俠心)을 주체 못한 나머지 검을 뽑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의 안배였던 것이다. 소수(素手)가 떨린다. 검을 불끈 쥔 단리궁은 오랫동안 허공을 바라봤다. 눈(雪)… 하늘 가득 설막(雪幕)이 내리고 있다. 눈은 유난히도 굵은 함박눈이었다. 단리궁의 어깨에도, 머리 위에도, 눈이 소담스럽게 쌓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숙명(宿命)이란 말인가?'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視線)은 하늘을 베어 버리는 비수(匕首)마냥 날카로웠다. '가문율법(家門律法)마저 어기고 무공을 포기했던 내가… 변황인들에 의해 검을 쥐게 되다니……!' 단리궁은 여전히 땀을 흘린다. 그는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 마냥 옷이 축축하게 젖었다. 보라! 그의 전신을 타고 신기(神氣)가 흘러내리고 있지 않는가! 그의 두 눈에 일어나는 혜광(慧光)은 점점 강해져 변황의 사노는 감히 그의 눈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아아, 가공할 기도(氣度)이다.' "역시, 우리들의 눈이 정확했다. 저 사람은… 운명적으로 절정지존(絶頂至尊)이 될 사람이다!" "드, 드디어… 무림의 새로운 시대(時代)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마타불……!" "아아, 천 년의 꿈을 이룩한 천년영웅(千年英雄)이다. 우리들은 그의 날개(翼)에 불과하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네 사람은 하나하나 절을 하기 시작했다. 단리궁의 가공할 기세(氣勢)는 압권이었다. 하지만 네 사람은 그 기세에 굴복하여 절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리궁을 운명의 주인, 천년영웅으로 여겼기에 마음 속에서 우러난 절을 하는 것이었다. 절정(絶頂)의 율법(律法) 천년영웅(千年英雄)! 그것은 바로 새북(塞北) 변황(邊荒)의 전설이다. － 피의 강은 천 년을 도도히 흐르고, 피의 강물 가운데에서 한 마리의 용이 떠오르리라! － 그는 바로 천 년의 영웅! 그는 변황무림의 알력을 일통하고, 천하에 내리는 피비(血雨)를 거두리라! － 그가 나타나는 날, 절정(絶頂)의 하늘(天)은 열리고… 아홉 개의 하늘(九天)과, 열 개의 땅(十地)은 굴복하리라! 변황을 유량하는 무리들 사이에 신앙처럼 떠돌았던 천 년의 전설, 그것은 꿈이고 환상이었다. 한데, 단리궁이 바로 운명이 안배한 천년영웅일 줄이야! 보라! 그의 미간에 찬연히 떠오르는 일곱 줄기의 빛을! 그는 검과 하나가 되기라도 한 듯, 검광을 사지백해에서 흩뿌리기 시작했다. 단리궁의 손에 쥐어진 보검은 천 년간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한 자루 신검이었다. 검신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하늘과 땅이 천참만륙(千斬萬戮)되는 날, 검은 운명의 대지(大地)에서 뽑히리라! 검을 뽑아 내는 자, 천 년의 영웅! 그는 절정천궁(絶頂天宮)의 궁주(宮主)이고, 절정천궁에 안배된 모든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절정천궁(絶頂天宮), 그것은 천년영웅과 더불어 전해지는 변황의 마지막 전설이었다.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의 시대(時代), 천하가 패자효웅(覇者梟雄)들에 의해 조각조각 갈려 패도(覇道)가 성행하던 난세(亂世)에 한 부류의 은자(隱者)들이 있었다. 천하각지에서 일어나는 겁란(劫亂)을 개탄했던 일단의 강호인들, 이들은 천기(天機)를 보고 한 곳에 모여들었고 그 장소가 바로 이 곳 금해(禁海)의 거성(巨城)이었다. － 언제고… 또 한 번 천하가 피에 젖는다. － 그 날, 혜성의 운명을 타고난 절대자가 우리 곁으로 오리라! － 우리는 그를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안배해 두어야 한다. 다시는… 겁란이 평민을 해할 수 없게끔……! － 천기를 얻는 자, 바로 천년영웅이다! 이름도 신분도 밝혀지지 않았던 백팔 명(名)의 은자(隱者)들이 거대한 숙명에 따라 하나로 모이게 되었고, 신복학(神卜學)에 나타난 천기에 따라 두 가지의 대역사(大役事)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이들은 금해거성(禁海巨城)을 세웠고… 둘째, 백팔 은자(百八隱者)의 모든 것을 간직한 하나의 지하석부(地下石府)를 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수십 년을 필요로 했던 위대한 역사였다. 결국 이들은 하나의 성과 하나의 지하석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날, 일제히 사라졌다. 그리고 이 장소는 하나의 전설(傳說)로 유전(流轉)되기 시작했다. 중원에 소림(少林)의 전설이 있듯, 변황계에는 금해거성의 전설이 천 년에 걸쳐 떠돌았다. 무수한 사람들이 전설을 찾아 여기에 도전했고, 무수한 사람이 전설의 금지에서 최후를 마쳐야 했다. 전설은 하나의 전설로 남았고, 그것은 변황왕조(邊荒王朝)의 지배자들만이 아는 가장 신비로운 전설로 남게 되었다. "자네가 무의식적으로 뽑아 든 비상신검(飛霜神劍)은 바로 이 곳의 금지를 여는 열쇠라네!" "아아, 천 년간 변황왕조의 국왕들이 무수히 와서 그 검을 뽑으려고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를 했네! 그런데 그것이 자네에게 뽑혔군!" "헛헛… 자네는 우리들의 절기로는 만족할 수 없는 기재(奇才)이네만… 헛헛, 전설의 성역은 자네를 채워 줄 수 있을 걸세!" 네 명의 노인은 단리궁의 사방에 시립하였다. 단리궁은 차츰차츰 마음 속의 냉정을 되찾는 듯했다. 그의 입가에는 꽤 오랫동안 사라졌던 유혹의 미소가 맴돌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어깨에는 눈이 한 치나 쌓였다. "내게는 천년율법(千年律法)을 깨야 한다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깰 수 없었기에… 무공을 시전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것이오!" 그의 목소리는 전과 달랐다. 미묘하게 떨리는 가운데 사람의 심금을 자극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바로 단리궁의 진짜 목소리였다. 단리궁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추는 버릇을 갖고 있었다. 일부러 눈빛을 흐릿하게 하고, 목소리를 거칠게 한다. 그는 피로 일어난 가문의 업보(業報)에 저항하기 위해 그러한 모습으로 자신을 유랑(流浪)의 길에 몰아세웠던 것이다. 지혜가 충만된 두 눈. 견인불발의 의지가 엿보이는 입매의 강인함, 이것이야말로 단리궁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는 검자루를 불끈 쥐었고, 전신에서 가공할 기도를 흘리며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검을 쥐어야 하는 것이 숙명이라면… 검을 거부하지는 않겠소!" 순간이었다. "헛헛… 그렇게 해야 하오." "당세는 난세(亂世)를 향해 치닫고 있소. 자칫하다가는 악마의 무리가 일으키는 대혈전(大血戰)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게 되오. 우리에게는… 특히, 운명의 주인에게는 그것을 막아야 할 소명이 있는 것이오!" 네 사람은 이제 하대를 하지 않았다. 이들은 단리궁의 사부가 아니라, 시종이 되어도 좋다는 표정들이었다. 단리궁은 천 년 무림사상 가장 뛰어난 근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만이 알아보는 위대한 비밀이었다. 눈보라는 점점 강해졌다. 단리궁은 검을 두 손으로 모아 쥐며 눈길을 또다시 허공에 던졌다. 만리장공(萬里長空)! 단리궁은 공활한 하늘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 "내게는 고집이 있었소이다! 그 고집은 천하제일문(天下第一文)이 되어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것이었소!" "……!" "……." '가공할 기도다. 아아, 내공을 시전하기 시작하자. 모든 잠능(潛能)이 동시에 격발되어 사람을 압도한다.' '역시… 운명의 주인이다.' 네 사람은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들었다. 단리궁은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세월(歲月)이 내게 무(武)를 강요한다면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평범한 길로 가지는 않을 것이오. 절정(絶頂)의 길이 아니면 나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나의 가문이여! 이것이 나의 운명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운명에 따르겠소. 하지만 진 것은 아니오. 새롭게 시작하는 것 뿐이외다. 나를 조롱하는 운명의 하늘이여!' 단리궁은 여전히 고집쟁이였다. 자신의 행로(行路)를 문(文)에서 무(武)로 돌리기로 결정했을 뿐, 뿌리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고집쟁이 궁(弓), 그는 스르르 눈을 뜨며 네 사람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의 입에서 화사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다. "여러분들은… 나와 동류(同流)가 된 것을 지금부터 후회하게 될 것이오." "후회라니오?" "그런 말씀은 마시오. 허허……." 네 사람이 아연해 하며 고개를 저을 때였다. "내가 왜 고집쟁이인지 아시오? 그 이유를 안다면 아마도 나를 끌어들인 것을… 뼛속 깊이 후회할 것이오." 단리궁은 빙그레 웃으며 제일 먼저 혈무흔을 바라봤다. '왜 저런 미소를……?' 혈무흔은 단리궁의 미소 아래 쭈뼛함을 느꼈다. 아름답고 강한 미소, 그 미소는 혈무흔에게 도저히 씻지 못할 상처를 주었던 한 사람의 미소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설마, 설마… 밀가(密家)란 말인가? 저 미소를 밀가 후예 특유의 미소인데?' 혈무흔은 무엇인가를 느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때, 단리궁의 시선은 천룡달뢰에게로 집중되었다. "후후… 천룡달뢰께도 보여 드릴 것이 있소이다." 그는 아주 천천히 기이한 검결(劍訣)을 취했다. 매우 유려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수결(手訣)이다. 너무나도 많은 허점(虛點)이 보이는데, 막상 공격하려 하면 이상하게도 하나의 허점도 볼 수가 없었다. 순간, 천룡달뢰를 비롯한 네 사람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철(鐵)!" "으으, 혈(血)!" "바로, 바로… 검(劍)의 율법(律法)!" "제기랄, 그 어떤 곳에서 저런 인재가 길러졌나 했더니… 제기랄, 바로 우리들의 천년적(千年敵)인 중원제일가 단리세가였군." 네 사람의 옷자락은 일제히 풍선처럼 부풀었다. 변황의 역사를 이룩해 온 네 사람, 이들의 문파는 중원과 싸워 꼭 한 번씩 패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 싸움에서 패하지 않았다면 변황의 역사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도 중원(中原)의 패자는 그들의 선조나, 그들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에게 패배를 안겨 준 위대한 무사가문(武士家門), 그 가문은 바로 천 년의 밀가(密家), 단리세가였다. 단리궁은 손동작으로 밀가 특유의 검식(劍式)을 보였고, 네 사람은 절정고수답게 간단한 자세만으로 단리궁의 출신을 알아본 것이다. 밀가에는 퇴진(退陣)이라는 말이 없고, 밀가의 검에는 변식(變式)이 없으며, 밀가의 검사는 방어를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공격만을 위해 검식을 끌어올린다. 밀가의 검법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밀가 특유의 검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밀가와 싸워 패한 바가 있는 네 사람이야……. 침묵(沈默)은 유난히도 깊다. 단리궁은 미소를 짓는데 비해, 네 명의 기인은 벌레 씹은 얼굴이 되어 서로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이들이 후예를 구한 이유는 두 가지로… 하나는 해외육가(海外六家)를 치자는 것, 또 하나는 중원밀가를 격파해 구원을 갚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단리궁으로 인해 두 가지 중 하나가 틀어지고 만 것이다. 네 기인의 허탈감은 필설로 형언하지 못할 정도인 듯, 네 사람은 전음으로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눈(雪)은 쉬지 않고 내리고, 네 노인의 한숨 소리도 쉬지 않고 이어진다. 단리궁은 오히려 태연자약했다. 누가 먼저 말했을까? "밀가 놈들에게는 번번이 진단 말이야… 젠장!" "하지만 아직 완전히 진 것은 아니야. 아직 희망은 있다. 밀가를 능가하는 또 하나의 가문을 우리들의 손으로 이룩한다면……!" "크크… 밀가에 번번이 당했으나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크크……!" "밀가의 후예로 하여금 하나의 세가(世家)를 일으키게 하고, 그 세가의 영광이 밀가의 전통보다 뛰어나게 된다면… 밀가를 파괴하는 것보다 더 멋진 복수를 이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 "푸하하… 절정세가(絶頂世家)를 일으킵시다. 모든 방면에서 절정에 도달한 인물만이 들 수 있는 위대한 천하의 가문을……!" "허허… 절정세가(絶頂世家)! 변황인이고 중원인이고 간에 차이를 두지 않으며, 차이를 둔다면 다만 무공에만 차이를 두며……." "절정세가에 든 이상, 다시는 꺾이지 말아야 하며……." "세가사람은 어떠한 것에서든 절정이어야 하며……." "역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룩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절정세가의 제일율법(第一律法)이 되어야만 한다. 하하……!" 단리궁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다섯 사람은 이 순간, 완전히 하나로 마음을 합할 수 있었다. 절정세가의 전설은 이제 시작되는 것인가? 고금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들만이 모이게 되는 가공할 세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신화(神話), 절정세가(絶頂世家)! 신화는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설무(雪霧) 가운데 매우 조촐한 예식이 벌어졌다. 팔뚝을 베어 피(血)를 옥배(玉杯)에 담고, 오 인의 피가 섞인 피를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시고……. 한 장소에서는 절대자로 군림했던 네 사람과, 운명을 거부하던 청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만들어졌다. 단리궁은 가주(家主)로 정식 추대가 되었다. 사대기인은 사대봉공(四大奉公)이 되었고, 눈보라치는 가운데 가법(家法)이 만들어졌다. 다섯 모두 형식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만든 가법은 그 어떤 가법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기괴했다. 제일조, 적어도 한 부분에서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이어야만 입가(入家)의 자격이 주어진다. 제이조, 동시에 두 가지 사문을 지닐 수 있되, 가장 주된 연분은 절정세가로 삼아야 한다. 제삼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즉시 파문된다! 삼대율법(三大律法). 매우 간단한 세 가지 율법이 만들어졌다. 장차 천하에 군림할 절정세가의 기틀은 눈이 오는 빙하지대에서 다섯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 * * 사흘, 단리궁은 사대봉공이 된 네 명의 기인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절정세가를 일으켜 변황과 중원에 불어닥치려 하는 피바람을 제거하는 대계략의 기틀은 그 자리에서 만들어졌다. 인원과 자금은 사대봉공이 모으기로 했고, 단리궁에게는 천 일(日) 안에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졌다. 천 일 안에 천하제일 고수가 되지 못한다면 세가는 일어설 수 없다. 모든 지혜는 천금성자에게서 나왔다. 사대봉공은 단리궁을 혼자 두고 떠나가야만 했다. 그 사이 천룡달뢰는 몸이 쇠약해져서 혈무흔의 부축을 받으며 흑룡선(黑龍船)으로 올라가야 했다. "헤어진다는 말은 맙시다!" 단리궁은 만년설 위에 서서 손을 쳐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단아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정해진 그 곳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 날… 훗훗, 그 근처는 술향기에 취하게 될 것이오! 후후……!" 단리궁은 웃으며 먼저 신형을 틀었다. 그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는 듯, 성큼성큼 금해거성 쪽으로 걸어갔다. 하늘에서는 백설(白雪)이, 배를 타고 성숙해로 들어가는 네 기인의 눈에서는 정말 오랫동안 눈물이라는 물질이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출관하신다면… 달단왕녀 모용운교(慕蓉雲巧) 나으리를 찾아가십시오!" 천황장인의 목소리가 제일 늦게까지 남았다. "그 분에게는 곧 전언이 갈 것입니다. 그 분은 성깔이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만날 때에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분은 왕녀(王女)이신지라 사내대장부를 초개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분 휘하에 있는 오천비응군(五千飛應軍)은 절정세가가 꼭 얻어야 할 정예고수이니, 실수하시면 아니 됩니다!" 배는 멀리 사라져 갔다. 단리궁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그는 가슴을 가득 채우는 어떤 야망을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따라 하늘이 넓어 보인다. "밀가의 종손이란 지위마저 버린 나다.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 않는 길은… 내가 이룩하는 세가를 나의 가문보다 백 배 강하게 일으키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나의 가문으로 나의 진짜 가문인 밀가가 피의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자!" 단리궁의 얼굴 위로 햇살이 떨어져 내렸다. 새벽이 되며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단리궁의 등 뒤로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이제부터… 운명은 없으리라. 운명이 있다면… 나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운명이 있을 뿐이다!" 단리궁은 성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천 년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침묵의 성. 성의 하늘 위에는 천 년을 두고 걷히지 않았다는 설마신풍(雪魔神風)이 윙윙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 * * 전설은 어김없었다. 비상신검은 지하석부(地下石府)라는 곳으로 들어가는 열쇠 구실을 해냈다. 검신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하석부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구를 알리는 도해였던 것이다. 단리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지하석부로 접어들었다. 석부를 세운 사람은 전인을 가리기 위해 두 가지의 시험을 안배해 두었는데, 그것은 어떠한 길을 통해 가든 거쳐야만 하게끔 장치되어 있었다. 암도(暗道) 가운데, 단리궁은 흰빛이 찬연히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빛은… 온기를 지니고 있다.' 단리궁은 신중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슷－ 슷－! 그는 처녀림으로 들어가는 젊은 사냥꾼처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휘어지는 곳은 흰빛에 뒤덮였다. 가공할 흰빛을 뿜어 내는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단리궁은 성큼성큼 휘어지는 곳을 지나쳤고, 그는 태양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듯한 강한 빛의 장막에 휘감기며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아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빛이 강하다니……!" 치리리－ 릿－! 가공할 힘을 지닌 빛이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보이는 것은 모두 하얗다. 전율할 만한 밝기를 지닌 흰빛은 눈을 감는다 해도 피하지 못할 정도의 투과력을 지니고 있었다. 빛은 살갗 속으로 파고들었고, 단리궁은 몸을 뒤틀어 빛을 피하려다가 몽롱한 기분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으으, 이제 보았더니… 이것은 바로 장몽환주(長夢幻珠)라는 전설상의 물건이구나. 심마(心魔)를 자극한다는…….' 단리궁은 천야만야한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단리궁이 접한 빛. 그것은 의지가 아무리 강하고 지혜가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피하지 못할 함정이었다. 파아아－ 앗－! 백섬(白閃), 현란한 흰빛은 수천 개의 어린탈백도(魚鱗奪魄刀)가 거룡(巨龍)의 몸을 고슴도치처럼 꿰뚫어 버리듯 단리궁의 몸을 휘어감았다. 흰 번개에 난도질당하는 듯, 흰 나비 떼에 휘말려 앞을 볼 수 없게 된 듯한 환각 가운데 단리궁의 뇌리로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하아아… 악… 하아아… 악……!" 누구의 호흡 소리일까? 퇴폐적인 감각을 가득 담고 있는 숨소리. 그 소리는 지독히도 육감적이었다. "흐으으… 윽! 어서, 어서! 뜨, 뜨거워요……!" 야릇한 콧소리가 시작되며, 사박사박거리는 묘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다. 언제 나타난 작은 그림자일까? 바람에 휘어지는 갈대마냥 허리를 한들한들 흔들며 단리궁 앞으로 나서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끊어질 듯 가는 허리 아래 피둥피둥한 윤기가 흐르는 허벅지가 있고, 아름다운 손은 살포시 가슴의 능선을 덮고 있다. 하지만 가슴은 손으로 가리기에는 너무도 발달되어 있었다. 터질 듯 물이 오른 두 개의 육봉(肉峰), 젖가슴은 보보(步步)가 내딛어질 때마다 출렁거렸고… 또 하나의 손은 조용히 쳐들려져 귀밑머리를 매만진다. "나를… 취해요! 어서……!" 여인은 명령하듯 말하며 다가섰다. 앞이 너무 밝기 때문일까? 여인의 얼굴은 판단되지 않았고, 목 아래 부분의 굴곡이 완연한 여체(女體)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완전한 나신이다. 옷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다만 기나긴 흑발이 여인의 허리까지 축 늘어져 펄럭이고 있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가슴이 흔들리고, 쪼옥 올라붙은 둔부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가운데 탄력적으로 흔들린다. 매끄러운 광택의 허벅지는 연어와 같다. 거역하지 못할 욕념(欲念)의 화신. 사박… 사박……! 다가서는 여체는 동물의 본능을 강하게 자극했다. "흐으으… 응! 나를 봐요. 그리고… 나를 덮쳐요!" 유혹하는 목소리가 끈끈하게 다가선다. 단리궁은 유야무야한 가운데 허벅지 사이에서 불끈 일어나는 사내를 느끼며 입술을 가볍게 벌렸다. 격하게 타오르는 정화(情火). 그것은 수양으로는 꺾지 못할 무서운 불기둥이었다. "취… 취하라고……?" 단리궁의 눈은 빛을 잃기 시작했고, 그의 손은 다가서는 여체를 향해 서서히 쳐들리기 시작했다. 휘청거리는 젊은 몸뚱이. 그의 가슴에서는 몸을 완전히 불살라 버릴 욕망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자제하지 못한다면 순양진기를 모조리 태워 버릴 무서운 욕정은 이미 선(線)을 넘어 버린 듯했다. "하아아… 하아아…! 어서 와요… 어서……!" 고혹스러운 목소리는 이어지고, 휘청이며 다가서던 아름다운 영상은 춤을 추며 단리궁의 몸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한들거리는 두 팔은 원호(圓弧)를 그리고, 미끈하게 뻗어 나간 두 다리가 내딛어질 때마다 달콤한 비린내가 폐부를 꽉 채운다. "어서… 나를 껴안아요! 그리고… 깨물어요! 흐으으… 응!" 콧소리는 마법의 선율이 되어 단리궁의 혼을 취하게 했다. 그는 극대한의 열기에 사로잡혔고, 그의 입술 사이에서는 욕망에 못 이기는 격정의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리 와라! 어서……!" 그의 얼굴은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고, 사지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여체의 춤은 점점 빨라졌고 어지러워졌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름다운 영상, 단리궁은 그것을 잡으려 하는 가운데 가공할 열병에 휘말렸다. 혼백마저 불살라 버릴 듯한 욕념화(欲念火). 불길은 점점 드세졌고, 단리궁은 끓어오르는 욕정을 이기지 못해 옷자락에 손을 대고 찢을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손끝에 무엇인가가 걸리는 듯하더니, 찌잉 하는 한기(寒氣)가 손끝을 타고 체내로 전해졌다. 약간의 감각 변화. 너무나도 미세한 변화였으나 단리궁에는 천지개벽하는 소리보다도 더욱 큰 변화로 느껴졌다. "바, 바보같이… 간단한 미혼진(迷魂陣)에 빠지다니……!" 단리궁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을 바라봤다. 통로 가운데 하나의 나녀상이 서 있었다. 거미줄에 칭칭 휘감겨 있는 백옥의 미인상. 묘한 신비를 주는 환상적인 자태이나… 표정이 딱딱하고 살결에는 온기가 없었다. 단리궁이 그것을 보고 환각 상태에 빠진 이유는 그가 건강하고 젊은 사내이기 때문일 뿐,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깨어나게 된 이유는 한 가지 작은 물건이 손끝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작은 칼 하나. <나를 잊지 말아요. 혜(慧)> 여인의 노리개로 보이는 작은 칼. 단리궁은 그것을 보며 한 소녀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너는 내 마음에 비(雨)를 내리게 했다, 맹랑한 소녀.' 단리궁은 일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연민의 정에 사로잡혔다. 비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단리궁을 형(兄)이라고 불렀던 오만하고 맹랑한 소녀… 반화(半花). 그녀의 그림자는 이미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깊이 새겨진 듯했다. "반화, 네가 나의 뇌리 가운데 이렇게 깊이 심어져 있을 줄 몰랐다. 아아,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환각 속의 목소리는 너의 목소리였다!" 단리궁은 주먹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너를 알기 전이었다면… 이 따위 시시한 환각에 빠져들지는 않았으리라. 반화, 너로 인해 나는 정(情)을 알게 된 듯하다. 어리석게도…….' 단리궁은 소검을 불끈 쥔다. "좋아, 언제고 다시 볼 때… 서방이 없다면 내가 너의 서방이 되어 주마!" 그는 색관(色關)을 넘어 걷기 시작한다. "물론, 그 때까지 나를 기다려 준다면… 너는 나의 정실(正室)이 되리라!" 그는 광오하게 내뱉으며 쉬지 않고 걸어 들어갔다. 색관에 이은 두 번째의 관문은 인내의 관문이었다.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이 있고, 그것을 모두 다 견뎌야만 전설의 문이 열린다. 단리궁에게는 고통 대신 기다림에 불과했다. 인내란 그에게 숙명과도 같았다. 뜨겁고, 차고, 아프고… 그는 모든 고통을 숙명처럼 버티어 내면서 인내의 관문을 지나쳐 갔다. 하나의 문은 거미줄에 뒤덮여 있었다. 청동(靑銅)으로 만들어진 거대하고 육중한 문인데, 문고리에는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절정지문(絶頂之門)> 문에는 글이 파여 있다. <들어서기 이전 무(無)였다 해도, 나올 때에는 절정(絶頂)이리라! 백팔 로(路)에서… 그대는 하늘이 될 것이다!> 너무나도 가공할 약속이 아닌가? 모든 길에서 절정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은 천 년 전에 파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난세를 혐오하며 한자리에 모인 은자들, 그들은 대체 무엇을 남긴 것일까? 단리궁은 육중한 문을 안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밝다, 대낮처럼……!" 단리궁은 드넓은 광장(曠場)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바닥의 벽돌은 신비로운 빛을 내는 야광석이었다. 단리궁은 광장을 가로질러 먼 곳에 있는 하나의 거대한 석전(石殿)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절정천부(絶頂天府)> 거대한 석전이야말로 전설의 장소였다. 천 년간 한 사람에게도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던 전설상의 장소. 전국시대의 명인(名人) 백팔 명이 모여 일 갑자의 세월 내내 이룩한 위대한 전설의 땅. 백팔 개의 기둥, 백팔 구의 해골, 백팔 가지의 사연. 석전에는 비급이나 석판 대신 백여덟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대리석 기둥도 있고 쇠기둥도 있다. 옥으로 깎아 만든 기둥도 있고, 쇠도 옥도 아닌 기이한 물질로 이루어진 기둥도 있다. 절정백팔주(絶頂百八柱). 백여덟 개의 기둥이야말로 전설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 주(柱)에서 백팔 주(柱)까지는 서열(序列)이 있다. 일 주는 최하품(最下品)의 비기를 수록하고 있고, 백팔 주는 극품(極品)의 절기를 수록하고 있다. 기둥 하나의 절기를 터득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리라. 십 년의 기재라면 모든 것을 얻는 데 육십 년을 보낼 것이고, 백 년의 기재라면 백팔 주를 모두 얻는 데 십 년을 쓰리라. 일 년(年) 안에 모든 것을 이룩한다면… 그대는 명실공히 천 년의 영웅이리라!> 바닥에는 큼지막하게 그러한 글이 파여 있었다. 기둥에는 절기 하나와 병기(兵器) 하나가 있다. 일컬어 신병백팔반(神兵百八班). 난세를 개탄하여 모인 백팔 영웅의 애병(愛兵)들이고,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올바로 쓰이지 못한 비운의 병기들이다. <난세를 얻는 자, 병기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얻지 못한다면 나가지 못하리라. 식량은 바닥의 태양옥지(太陽玉芝)와 태음지균(太陰地菌)이 해결해 주리라. 그것은 식량도 되고 내공을 기르는 영약도 된다. 운명에게… 그대를 맡긴다. 우리들의 후예여! 천 년을 기다리게 될 우리를 실망시키지 말아 다오! 부디… 그대, 하나의 영웅이여!> 기둥은 삼십육천강(三十六天剛) 칠십이지살(七十二地煞)의 정교한 진세변화에 따라 세워져 있었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복지학(神卜之學), 기관토목학(機關土木學), 기문병진학(奇門兵陣學), 그 심오낙측한 조화가 백팔 개의 기둥이 세워진 위치에 모두 나타나 있었다. 제일주(第一柱), 그것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둥에는 비룡(飛龍)과 봉황(鳳凰)이 뒤엉켜 교미(交尾)하는 기이신비한 부조(浮彫)가 가득하고, 비룡의 비늘(鱗)과 봉황의 깃털은 기둥에서부터 우수수 떨어져 내릴 듯이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설립자는 구야자(歐也子). 그는 평생을 오직 한 길로만 살아온 위대한 장인(匠人)이었다. 그가 다루었던 것은 돌. 그는 돌에 혼(魂)을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돌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던 사람이었다. 그는 천하각지의 거석(巨石)을 다루는 가운데 돌을 조탁(彫琢)하는 특이한 수식(手式)을 개발하게 되었다. 미륵파혼수(彌勒破魂手)라고 이름지어진 하나의 수식. 석공(石工)이 만든 기학(奇學)이라고는 하나, 이미 무공의 절정경지에 도달한 오묘한 단 일 초(招)의 기예였다. "놀랍다. 구야자라는 분은 자신의 절기를 문자(文字)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조각으로 남겨 두었다." 단리궁은 천 년을 격(隔)하고,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전수되는 상고의 절학에 혀를 내둘렀다. 번뜩거리는 용린(龍鱗)은 하나하나가 오묘한 뜻을 담고 있다. 봉황의 깃털 역시 변화(變化)를 간직하고 있다. "아아, 단 일 초이나 가히 천 가지 변화가 안으로 갈무리 되어 있다. 이것은 어떤 부분도 변용시킬 수 없는 완벽한 초식이다." 단리궁은 경탄에 경탄을 거듭했다. 천년밀가에서 태어난 무수한 후예 중 가장 뛰어난 지혜를 지닌 단리궁. 그의 거대한 그릇을 만족시킬 만한 절기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절정천부의 절기는 전혀 달랐다. "이 곳에 절기를 남긴 분들은 고집스러운 분들이다. 그 분들은 고집이 있기에, 외길 인생을 걸었다. 결국… 그 분들은 죽기 이전, 한 부류에서는 절대자(絶代者)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단리궁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했다. 그는 상고기인들의 평생 절기를 터득하느라 시간이 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두 번째 기둥. 설립자는 화훼지존(花卉至尊). 그는 일생을 화원(花園)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기예는 얼른 보면 무공과는 거리가 먼 원예법이었다. �<도(刀)에는 두 가지 도가 있다. 하나는 사(死), 또 하나는 활(活). 죽음의 칼은 파멸을 준다. 그러나 활도(活刀)는 부활을 준다. 활도는 고대선인 만생자(萬生子)의 진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생자는 활부를 치료하기 위해 칼을 댈 때조차 한 방울의 피도 보지 않았던 위대한 신의(神醫)이시다. 노부 화훼지존은 그 분의 인간요상법(人間療傷法)을 기초로 하여, 초목(草木)을 부활시키는 하나의 술(術)을 터득했으니… 이를 활천무영도(活天無影刀)라 한다. 그것은 도법이고, 또한 의술(醫術)이다.> 세 번째 기둥. 설립자는 벽력공자(霹靂公子) 나룡추(羅龍鎚). 그는 축융화가(祝融火家)의 마지막 제자였던 사람이었다. 그의 가문은 전통적인 화기(火器)의 명가로서, 대륙(大陸)에서 최초로 화약을 개발해 낸 사람은 그의 선조였다. 그는 무공초식이 아니라, 화기제조술을 기둥에 기록했다. 네 번째 기둥. 설립자는 만금신마(萬禽神魔). 인생의 거의 전부를 야수세계(野獸世界)에서 보낸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인. 그는 금수의 영(靈)을 부리는 수법을 터득한 사람으로, 그의 천령통혼대법(天靈通魂大法)이라 불리는 금수의 조종법은 열두 가지 음파절기(音波絶技)로 구분되어 있었다. <금수(禽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금수를 지배할 수 있고, 금수를 가족처럼 다룬다면 금수를 백만 대군처럼 다스릴 수가 있으리라.> 만금신마는 추악한 인간세계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평생을 금수와 더불어 살다가 절정천부에 와서 최후를 마친 사람이었다. 다섯 번째 기둥 기환신주(奇幻神柱), 여섯 번째 기둥 환룡신주(幻龍神柱), ……, 아홉 번째 기둥 감리신주(坎離神柱), 열 번째 기둥 빙백신주(氷魄神柱)…….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우울의 암영(暗影)과 지혜의 예광이 동시에 떠오르고 있는 두 눈이 있다. 어디를 바라보는지 모를 얄궂은 시선으로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어깨에서는 기이한 기운이 흘러내리고, 창백한 얼굴에서는 남을 압도하는 기도가 엿보이고 있다. 단리궁, 그는 너무나도 무섭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천 년의 절기는 그를 웅비(雄飛)하게 하고도 남았다. 절기는 무공과 기법만 일러 주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깊이를 넓혀 주었다. 단리궁의 두 눈에 서린 뜻은 타인이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가공할 깊이를 담고 있었다. "여기 절기를 남긴 분들은 바로… 구파일방의 선조들이다. 이 분들의 절기와 내가 가문에서 배운 강호의 비기들과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다. 그리고 사대봉공의 절기와도 연관되는 것이 많다!" 단리궁은 무엇인가를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태양옥지(太陽玉芝). 크기가 엄지손가락만하고, 담홍색(淡紅色) 빛이 나는 버섯이었다. 그것은 침에 닿기만 하면 녹는 것으로, 장복(長服)하면 체질이 바뀌고 피가 백독불침의 피부로 바뀌게 된다. 하나를 얻는다 해도 감개무량해할 성약인데, 절정천부에는 너무도 많아 썩어 가고 있을 정도였다. 태양옥지의 효력은 세 가지로… 피독(避毒), 세혈(洗血), 주안(駐顔)이었다. 단리궁은 태양옥지를 식량 삼아 복용하는 가운데, 내공의 도를 급증시킬 수 있었다. 태음지균(太陰地菌). 이끼처럼 생긴 흰 식물이다. 빙하지대의 한기를 품으며 백 년에 한 치씩 줄기(莖)를 늘려 나간다는 전설상의 성약으로, 절정천부에는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태음지균은 한 냥(兩)만 복용해도 백 년을 무병장수할 수 있고, 한 근(斤)을 먹는다면 탈태환골(脫胎換骨)한다는 개세의 신약이었다. 그것 역시 단리궁에게는 꽤나 맛이 없는 식량에 불과했다. 단리궁은 영약을 우물거리며 작게 중얼거린다. "쓰군……!" * * * 다섯 명의 장인(匠人). 그들은 철(鐵)과 석(石)과 금(金)과 옥(玉)과 목(木)을 다루는 비결을 적어 두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상인(商人)은 다섯 종류의 상술에 대해 기록해 두었다. 구장산학(九章算學)보다도 한 단계 뛰어났고, 천금성자의 백장산악보다도 몇 단계 위에 있는 철저한 상인의 학문. 그것은 다섯 가지의 무공과 더불어 기둥에 남아 있었다. <내공(內功)도 하나의 재산이다. 내공을 낭비한다는 것은 상가무인(商家武人)이 할 바가 아니다. 경공(經功), 검도법(劍刀法), 장지초(掌指招)를 쓸 때에도 상술은 철저하게 발휘되어야 한다. 단 일 초라도 헛되이 쓴다면 상가무인이 아니다. 일컬어 절대살인술(絶代殺人術). 시전되면 절대 거둘 수 없는 가공할 살인술이니, 꼭 죽여야 하는 절대 악인이 아니면 시전하지 말라.> * * * 열두 명의 예인(藝人). 이들은 예와 무공을 하나로 이은 사람들이었다. 검예(劍藝), 무예(舞藝), 서예(書藝), 금예(琴藝), 소예(蕭藝), 화예(花藝), 궁예(弓藝), 환예(幻藝), 도예(刀藝), 비예(飛藝), 마예(魔藝), 그리고 살예(殺藝). 끝의 두 가지 예는 가공할 마공이고 가공할 살인초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상대는 시전자의 동작과 표정의 아름다움에 취한 가운데, 피하지도 못하고 죽어 가야만 한다. 찡그리지도 못하고 웃으며,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일순간에 그의 숨이 끊어지는 것이 마예(魔藝)와 살예(殺藝)의 최고 절정비전이었다. 도(刀)를 유일한 친구로 삼고 백 년을 산 일곱 명의 도광(刀狂)들도 일곱 개의 기둥으로 천 년을 뛰어넘는 사부가 되었다. 극섬(極閃)의 결(訣)에 미친 쾌도마(快刀魔). 그는 도의 초식변화를 배제한 인물로 그가 추구했던 것은 오직 하나, 병기(兵器)의 극한에 도달한 속도였다. 그는 특이한 발도(拔刀), 운도(運刀)의 비결을 남겼고… 그것은 천 년이 지난 강호의 어떤 방파에서도 찾지 못할 절정쾌도(絶頂快刀)였다. 두 번째 인물은 환(幻)을 추구했다. 그의 도는 빠르지 않고 지극히 느리나, 가장 변화난측했다. 변화는 내공수준에 따라 무궁무진 늘어나고, 변화가 휘감는 범위 또한 내공수준에 따라 확장되어 간다. 세 번째 인물은 천중도(天重刀). 그는 도의 내공적 깊이에 미쳐 백 년을 보낸 인물이었다. 그의 도는 느리고 변화도 없다. 다가서기만 할 뿐 멈추지 않는다. 상대는 도가 다가서는 동안, 십여 초를 시전할 수 있다. 하지만 도는 절대 멈추지 않고 결국 상대의 심장에 구멍을 낸다. 그것이 바로 천중도의 절정비결이었다. 환상도(幻想刀), 묘음도(妙音刀), 태양도(太陽刀), 천마도(天魔刀), 그리고 절정도(絶頂刀). 일곱 가지의 도결은 혈무흔이 전수한 부상도법(扶桑刀法)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았다. 단리궁은 칠대도결을 혈무흔의 인자병법도(忍者兵法刀)와 합해 또 하나의 새로운 도를 창안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절정천도류(絶頂天刀流). 그것은 도가 이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룩한 가공할 도법이고 도의 예술이었다. 그것이 시전된다면 천하의 도객(刀客)들은 도가 발전해 온 역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단리궁의 무공은 둑이 터지고 물이 거침없이 흐르는 듯 발전을 거듭했다. 그 자신조차 자신의 무공 깊이를 모를 정도로 그의 무공과 내공은 급증했고, 그와 함께 그의 미소 또한 환상의 아름다움을 더해 갔다. * * * 반 년이 지날 때, 단리궁은 오십사 개의 병장기(兵仗器)를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기둥에서 찾아 낸 오십사 종의 기문병기(奇門兵器)였다. 창(槍), 모(茅), 편(鞭), 검(劍), 도(刀), 극(戟), 탈(奪), 필(筆), 추(鎚)……. 단리궁은 이미 오십사 종 절기를 익힌 셈이었다. 절정백팔반무공(絶頂百八班武功). 절정천부에 비장되어졌던 절기는 모두 백팔 가지이고, 그것은 하나하나의 방면에서는 절정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오십오 주 통천신주(通天神柱), 오십육 주 주천신주(週天神柱), 오십칠 주 천강신주(天 神柱), ……, 칠십 주 천문신주(天門神柱), 칠십일 주 만상신주(萬象神柱)……. "이제 남은 것은… 두 개의 기둥뿐이다." 단리궁은 두 개의 기둥 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하나의 철주(鐵柱)가 세워져 있고, 왼쪽에는 하나의 목주(木柱)가 세워져 있었다. 백칠 주(柱) 제지(濟地), 백팔 주(柱) 경천(經天). 경천제지(經天濟地)의 쌍주는 바로 절정천부를 이룬 두 개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리궁은 제일 먼저 제지신주 곁으로 다가섰다. 제지신주는 이상하게도 직선이 아니라 호선(弧線)을 이루고 있고, 표면이 매끄러운 것이 아니라 울퉁불퉁했다. 설립자는 백절노사(百絶老師) 왕평(王平). 그는 서치(書痴)로서 백여 년을 보낸 일대의 기인이었다. <노부는 수만 권의 고서를 읽었고, 수천 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평생을 통해 대해 보지 못한 유파가 없을 정도로 방대하게 수업을 했다. 노부는 고금제일학(古今第一學)임을 자처했고, 노부의 지혜보다 이상가는 지혜는 전무후무하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노부는 이 곳에 이르러서야 하늘 위에 또 하늘(天外天)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경천제군(經天帝君)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노부보다 이백 년을 더 산 사람이고, 바로 이 곳 절정천부의 창건자이고 대표이다. 기실, 이 곳은 그와 노부가 뜻을 합해 이룩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둘이 이 곳을 설립한 이유는 오직 하나, 세인들이 갈등과 알력으로 두 파가 나뉘어 타파절기를 비방하고 무조건 배척한 나머지… 천하의 학문과 무공이 공전(空轉)을 거듭했다는 것을 상호 심각하게 번뇌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고, 수명에도 한계가 있다. 학문의 끝에는 또 하나의 의문이 있고, 무공의 끝에는 또 하나의 길이 있음을 죽음 직전에야 알았다. 천 년의 영웅이여! 그대에게 십천제일진학(十天第一陣學)이며 천하대진법(天下大陣法)인 만류귀종진학(萬流歸宗陣學)을 남기려 하는 이유는 그대에게 정복의 힘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난세의 갈등을 정립할 힘을 주기 위함이다. 그것을 얻는다면 동전 한 줌으로 하늘을 숨길 수 있다. 왕도(王道)는 바로 정도(正道)! 그대가 패도(覇道)가 아닌 왕도에 따라 만사를 풀어 나간다면, 그것은 바로 절대이고 절정이리라!> 그러한 글이 있고, 그 아래부터 제지신주를 남긴 백절노사가 창안한 십천제일진학 만류귀종진학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뜻은 그것이 완전한 이치라기보다 하나의 가공할 원리라는 말로, 그것은 제파의 진법에 두루 통하는 진세였다. 최후의 대주(大柱), 그것은 바로 경천대주(經天大柱)! 그 안에는 여타 백칠 개의 기둥에 기록되어 있는 가공할 절기를 압도하는 단 하나의 무공이 기록되어 있었다. <경천제군(經天帝君)이 이 곳의 진실된 후예에게 남기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에 불과하다. 그것은 바로… 절(絶)의 도(道)! 정봉(頂峯)에 오른다는 것은 산하(山下)를 버린다는 것이고, 절정에 도달한다는 것은 초식변화의 상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아래에 적는 경천무혼류(經天武魂流)는 오직 하나이나, 그 변화는 백여 가지로 갈라진다.> 경천제군이 남긴 것은 가공할 내공심법이었다. 그 안에는 단리궁이 이미 알고 있는 십여 가지 내공심법의 원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전혀 모르는 변화도 수십 가지나 담겨 있었다. <경천무혼류의 최초 변화는 허무결(虛無訣)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솟구쳐 오르는 진원지기를 말한다. 두 번째 변화는 파해결(破解訣), 세 번째 변화는 회선결(廻旋訣), 네 번째 변화는 탄자결(彈字訣), 다섯 번째 변화는 무영결(無影訣), 여섯 번째 변화는 천황결(天荒訣), ……, 마지막 변화는… 무(無)!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마지막 변화를 적지 않은 이유는 후예에게 그것을 완성시키라는 부탁을 하기 위함이다.> 여왕(女王) 사냥 칠월(七月)이 시작될 즈음, 그는 일 년 만의 외출(外出)을 시작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산만스러움과 동시에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며 어깨를 치렁치렁 뒤덮었다. 낡디낡은 흑포는 걸음이 내딛어질 때마다 펄럭거리고, 죽립(竹笠)을 눌러 쓴 머리 아래로는 흰 턱이 보인다. 그는 거대한 철상자를 메고 걸음을 내딛었다. 길(路)은 꽤나 멀리까지 한 일자로 이어졌다. 길의 좌우에는 얼음의 산이 서 있다. 그는 너무나도 느릿느릿 걸음을 내딛었다. 끝없는 길을 향해 그는 거보(巨步)를 내딛으며 빙하지대 저 너머로 사라져 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직후, 경천동지할 굉음과 더불어 근처의 지형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쩌어어… 억……! 만년빙하가 일순 갈라지기 시작했고, 천지가 개벽하는 듯 굉음이 울려 퍼지며 성(城)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백 리 안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지진은 일대의 지형지세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빙하지대였던 곳은 산(山)이 되고, 산이었던 곳은 허물어져 평원(平原)으로 변모되었다. 우지끈－ 콰앙－! 만 근 거빙(巨氷)이 떼구르르 구르는 가운데, 모든 것은 뿌연 빙무에 휘감겼다. 삼라만상이 얼음의 벽에 갇히는 듯한데, 저 머나먼 곳에서는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노랫소리. 그 소리에는 묘한 음률이 배어 있었다. 세월이여, 내게 다시는 낭인의 길을 강요하지 마오!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거대한 굉음 가운데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들려 온다. 그리고 흐르는 노랫소리도……. 피의 계절은 싫다네, 나의 친구들이여! 내게 검을 강요하지는 마오. 하나 운명은 검을 쥐게 했고, 운명은 내게 천 년의 날개를 주었고, 이제 나는 돌아가노라, 강호의 길로! 휘파람 소리, 노랫소리, 발자국 소리, 바람 소리……. 칠월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천 년의 금해는 완전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대막시(大漠市). 대상(隊商)의 무리와 유목민(遊牧民)들은 목특하(木特河) 일대의 시진(市鎭)을 그렇게 불렀다. 어떠한 국가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개념이 희박한 장소. 목특하는 수백 년을 두고 사막 가운데의 녹주(綠州)로서 하나의 거대한 상권을 형성했다. 한때는 와자국(瓦刺國：오리아트)과 달단국(疸檀國：타타르)의 끝없는 싸움 가운데 초토화되기도 했고, 위대한 전황(戰皇)이었던 영락대제(永樂大帝)의 침공 아래 수천 호의 가옥이 모조리 불타기도 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난 후, 다시 사람이 모였고 사람이 쓰는 모든 것이 거래되었다. 중화인(中華人), 몽고인(蒙古人), 색목인(色目人)들이 다 모이는 천산남북로(天山南北路)의 요충지. 이 곳에는 낮도 없고 밤도 없다. 있다면 환락과 흥정의 도박이 있을 뿐이다. 일대는 현재 달단의 최후왕녀(最後王女)라 불리는 왕녀 모용운교(慕蓉雲巧)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모용운교는 달단국을 잃은 유랑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소녀 시절 북원(北元)과 손을 잡은 와자국의 대군에 의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사막으로 나섰다. 그 후 수많은 추종자들이 그녀 곁으로 모여들었고, 그녀는 사막의 녹주(綠州) 가운데 하나의 작은 성(城)을 쌓고 칩거하기에 이르렀다. 대막제일화(大漠第一花), 얼음의 여왕(女王), 독심왕녀(毒心王女). 모용운교는 모든 사람의 꿈이고 희망이었다. 그녀의 미색은 십전십절(十全十絶), 절대의 미모라고 했다. 거리에는 그녀를 칭송하는 말이 흐르고 있고, 그녀를 안아 본다는 간절한 꿈을 안고 사문을 떠나 목특하 일대로 몰려 온 낭인무사들의 노랫소리가 떠돈다. 모용운교는 대단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잃어 버린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자신을 팔고 있었다. 그녀는 일만 대군을 모아 와자국을 섬멸할 때까지는 누구와도 혼약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바 있다. 그녀의 휘하에는 천하명가가 즐비했다. 또한, 아직도 전통적으로 모용왕가를 보필했던 양대가문의 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천황장인가(天荒匠人家), 비응신조가(飛應神鳥家). 두 부류의 가문은 모용왕가의 인척이 되는 가문이고, 동시에 최후의 저력이 되는 가문이었다. 그 외, 수 년 사이 그녀 곁으로 모인 삼 파(派)가 있었다. 마정(魔井). 사막을 떠돌며 살인청부(殺人請負)를 일삼았던 가공할 살수집단(殺手集團)이다. 총인원은 이천칠백(二千七百), 수는 적으나 하나하나 일당백(一當百)의 가공할 살수들이다. 마정제일좌(魔井第一座) 마립(魔笠). 그는 반경 삼천 리 안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고 있는 사막의 승부사였다. 거금(巨金)을 받고 살인을 해 주는 자, 오직 황금에만 움직였던 대막제일의 살수. 그가 이천칠백여 전 제자를 이끌고 달단왕국의 최후 보루인 녹야성(綠野城)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한 여인을 품어 보겠다는 간절한 소원이었고, 그 여인은 다름아닌 사막의 꽃이라는 모용운교였다. － 그녀를 안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죽이겠다! 마립은 그런 맹세를 하며 마정(魔井)을 떠났다. 그는 살인청부업에서 모은 모든 것을 갖고 녹야성 일대로 이주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사화(死花). 마정에 필적할 만한 살수집단을 이룩한 사람이다. 그는 휘하에 육천오백여 자객(刺客)을 거느리고 있었다. 마정이 천산북로(天山北路)의 거목(巨木)이라면, 사화가 이끄는 사화문(死花門)은 천산남로(天山南路)의 거성(巨星)이고 하나의 무사제국(武士帝國)이었다. － 마정은 흔적을 남기나, 사화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사화문은 마정과 더불어 살인청부업으로 이름을 날렸다. 마정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살인업을 완수한다. 반면, 사화문은 정체가 드러날 일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 마정의 뿌리는 중원인지라 정체가 드러난다 해도 별 상관이 없으나… 사화문 무사들의 뿌리는 그 일대인지라 신분이 드러나면 사화문 고수의 가족이나 친지가 보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정(魔井), 사화(死花). 하여간 두 부류의 청부집단은 가공할 힘으로 사막에 바람을 일으키다가 녹야성 일대로 모여들었다. 사화 역시, 모용운교를 눈독들이고 있었다. 두 방파는 모용운교로 인해 싸움을 할 뻔했는데, 또 하나의 세력이 등장함에 따라 싸움은 이룩되지 않았다. 전황림(錢皇林). 사막에서 가장 부유한 집단이다. 그들의 부는 일국(一國)을 능가한다고 했다. 대림주(大林主)는 전황(錢皇) 척발휘(拓拔輝). 그는 천산남북로를 종횡하는 상단(商團)을 서른여덟이나 거느리고 있다. 그의 상단은 중원의 표국( 局)과 비슷했다. 두 부류의 자객집단을 두려워한 대막 일대의 거상들은 전황림에 표물을 맡기는 것을 무상의 기쁨으로 여길 정도였다. 마정이나 사화문에 털리지 않는 대상의 무리는 전황림이 이끄는 대상의 무리뿐이라는 것이 사막의 통설이었다. 중원객잔(中原客棧). 목특하(木特河) 일대에서는 가장 초라한 객잔이다. 그 곳에 투숙하는 사람들은 가장 천한 사람들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중원객잔의 행려야말로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후정(後庭). 지난 새벽 투숙한 흑포인 하나가 옷차림에 걸맞지 않게 찻잔을 손가락에 걸고 앉아 있다. 비스듬히 죽립을 썼고, 찻물을 음미하기 위해 조금 우물거리는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맴돌고 있다. 나이답지 않게 매사를 관조하는 듯한 태도. 그러나 자세히 본다면 야수(野獸)의 감성이 느껴지는 기이한 기도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근처의 대상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것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대상들은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첫째, 모용운교라는 여인에 대해… 둘째, 그녀를 노리는 삼 파의 종주(宗主)의 알력에 대해…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 곳을 떠나 더 멀리 갈 경우 부딪칠지도 모를 두 부류의 세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철왕대가(鐵王大家). 가장 가공할 무리이다. 철류흔(鐵流痕)이라는 사막의 별이 지배하는 몽고의 후예들로서, 그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파멸해 버린다. 그들은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 또 하나의 무리는 오리아트(瓦刺：와자). 그들은 명군(明軍)에 밀려 대막 가운데까지 쫓겨났다. 그들은 숨어 저력을 기르고 있다고 했고, 그들이 나타난다면 천산남북로의 상권은 마비된다고 했다. "상인들이란… 귀가 밝지!" 청년의 목소리는 또렷한 한어(漢語)였다. "거지들과 상인들은… 귀가 밝다!" 그는 찻잔을 텅 비게 만들었다. 그는 거대한 표물 하나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꽤나 묵직한지라 객잔의 중노미들은 그것이 쇳덩어리나 고물이라고 생각하는 상태였다. "후후, 모용운교란 여인에 대해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다!" 미묘한 웃음을 흘리는 청년은 슬쩍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허공을 우러르는 것은 그의 특유의 습관인 듯했다. "오만하고 냉막하다고? 후후,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정식대로 나의 정체를 밝히고 그녀 곁으로 갔을 것이다!" 미묘한 유혹(誘惑)을 던지는 목소리였다. 지극히 초라한 옷차림이나 그는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는 천천히 팔짱을 낀다. '사냥을 하는 것이다. 왕녀 사냥을……!' * * * 목특하를 떠나 끝없이 가다 보면 푸르른 벌판에 이른다. 사막 가운데의 녹주(綠洲). 그 곳에는 수년 전에 세워진 하나의 석성이 있다. 녹야성(綠野城). 그 일대는 천 리 안에서 가장 번화로운 장소였다. 그리고 일대의 분위기는 유난히도 차고 날카로웠다. 녹야성은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첫째는 성곽 밖의 지대로, 그 곳에는 본래부터 이 곳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둘째 지대는 내성과 외성 사이의 드넓은 지대. 그 곳에는 세 부류의 무리가 군진을 치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마정(魔井), 사화(死花), 전황(錢皇). 일컬어 대막삼비(大漠三秘)라 불리는 가공할 무사집단. 이들은 모용운교라는 일대 우물을 취하고, 달단국의 유신을 취하기 위해 이 년 전부터 이 곳을 지키며 살아왔다. －나 이외의 누구도 왕녀를 품지 못하리라! －사화가 있는 한, 아무도 왕녀를 얻지 못한다! 하늘이라도……! －훗훗… 어리석은 살수무리들이 감히 고귀한 왕녀를 얻으려 하다니… 훗훗, 왕녀는 운명적으로 본좌 전황의 여인이다! 군진을 치고 때를 기다리는 자들. 이들은 상호 견제하는 가운데 정립지세를 형성했다. 이들 이외의 세력으로 달단국 왕녀를 노리는 세력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와자국이 보낸 자객을 막고, 타파에서 보내는 세력을 철저히 차단하며 모용운교의 휘하무사들을 고립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마치 귀찮은 식객(食客)들처럼, 대막삼비는 모용운교의 규방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세 마리 충견이 되어 이 년 세월을 보낸 것이다. 석루(石樓).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석루의 맨 위층에는 하나의 방이 만들어져 있다. 탄금실(彈琴室)이라 불리는 방 안, 자색궁장을 걸친 여인 하나가 칠현금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유난히도 희고 긴 목덜미로 햇살이 떨어져 내리며 은빛으로 부서진다. 코는 꽤나 뾰족했고, 입술은 손가락을 살짝 대기만 해도 터질 정도로 붉게 부풀어올랐다. 터질 듯 팽만한 가슴의 융기. 어딘지 모르게 정적(靜寂)의 분위기를 흘리고 동시에, 열정적인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일대의 우물(尤物). 그녀는 하루에 두 시진씩 탄금실에 올라 칠현금을 뜯는다. 석고처럼 굳은 인상에, 입가에는 고독과 냉막함을 동시에 흘리고……. 띠잉－ 띵－ 띵－! 그녀는 늘 같은 상심천야곡(傷心千夜曲)을 뜯고 있다. 바로 모용운교(慕蓉雲巧), 얼음의 왕녀라 불리는 여인이다. 그녀는 이 날도 탄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탄금실에는 사방 창이 활짝 열려 있어, 십 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있다. 하나의 달(月)처럼 나타나는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얼굴. 너무나도 완전하게 꾸며진 것만이 유일한 흠일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는 매우 차고 고집스러워 보였다. "저 모습이다. 으으, 저 모습으로 인해 나는 이 년이나 떠나지 못했다!" 흑의인은 검(劍)을 무릎 사이에 끼워 놓은 채 모용운교의 얼굴을 보고 있다. 차고 날카로운 눈매, 나이는 스물아홉이나 서른 정도인데… 세상을 다 산 듯한 노련함이 엿보인다. 그는 마정제일좌에 있는 마립이란 자였다. 그는 이 밤도 지난 이 년 동안의 밤과 마찬가지로 탄식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모용운교, 그대는 나의 마지막 등불이다. 그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나는 희열을 느낀다!" 백의인, 그의 가슴에는 한 송이 혈화(血花)가 수놓아져 있다. 진짜 피를 먹여 붉게 물들인 실로 수놓았다는 혈화. 그것은 바로 죽음이고 죽음의 상징이었다. 사화(死花)라는 가공할 살인자집단을 만든 대막의 거성. 그는 한 자루 도를 무릎 위에 놓고 눈빛을 이글이글 불살랐다. "마립과 전황만 없었다면 벌써 취했을 텐데……!" 그는 터져 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아예 눈을 감고 만다. 전황, 그는 수판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수판을 퉁기며 미묘하게 찡그리고 있었다. "벌써 이천만 냥을 썼다. 모용왕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 아아, 그러나… 이 거래(去來)는 포기할 수 없다. 바로, 바로… 저 얼굴 때문에……!" 전황 척발휘는 모진 사람이나, 모용운교를 볼 때마다 몸을 움찔거려야 했다. 절대뇌쇄(絶代惱殺)… 모용운교는 미모에 있어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마지막 시선. 그것은 가장 먼 곳에서 야릇하게 빛나고 있었다. 죽립을 쓴 흑의인 하나. 그는 팔짱을 낀 채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지금쯤 기병백팔좌가 당도했을 텐데… 후후……!" 그의 목소리는 신선하고 우아했다. "후후… 여왕 사냥에는 미끼가 좋아야 한다. 후후, 기병백팔좌라면 훌륭한 미끼가 될 것이다. 모용운교라는 오만한 왕녀에게 물건 보는 눈이 있다면… 그녀는 물건을 보는 찰나, 피가 끓으리라!" 자신있게 중얼거리는 청년. 그는 바로 단리궁(段里弓)이 아닌가? 그가 상인(商人) 행세를 하고 읊조리고 있다니……? 여왕 사냥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대사막 위로 노을은 핏빛의 휘장이 되어 펼쳐진다. 사막의 하늘에는 이미 편월(片月)이 떠 있다. 가득 차려면 며칠 더 있어야만 한다. 이지러진 달 아래 고집스럽게 입가를 다물고 있는 자의미인 하나가 뜨락을 걷고 있다. 뜨락에는 유난히도 달맞이꽃이 많았다. 그리고 일대에는 기화(琪花)가 울타리로 펼쳐져 있어, 그 안에 들어선다면 외부에서는 안의 정경를 볼 수가 없다. 화향(花香)이 달빛을 타고 흐를 때였다. 하늘에서는 붉은 노을이 핏빛 여아홍(女兒紅)이 흐르듯이 흘러내리고 있고, 요염하고 고집이 세어 보이는 미인의 입술 사이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늘도… 이대로 흘러가는구나!" 갈증을 느끼는 사슴의 목소리.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망의 심연(深淵)을 기다리는 암사슴의 눈빛은 핏빛 노을에 걸쳐지기 시작했다. 궁장으로 틀어 올린 운발(雲髮)이 요요(妖妖)하다.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에는 금은 장신구가 화려하다. 고귀하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여인, 바로 모용운교. 모용운교가 하오에 뜨락을 걷는다는 것은 그녀가 성녀(成女)가 된 이후 늘 해 오는 습관이다. 풀잎의 이슬을 밟고, 가끔가다가는 꽃송이를 따며 그녀는 번뇌(煩惱)를 잊곤 한다. 여인과 꽃은 아름답다는 데에서는 비슷하나, 색감이 다르다. 꽃은 정(靜)이고, 여체는 동(動)이다. 꺾어질 듯 가는 허리, 그 위에는 풍만하게 부풀어오른 가슴의 능선이 있다. 그 아래에는 올라 붙은 둔부가 출렁이고 있다. 유난히도 육감적인 미인 모용운교.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몸이 주는 느낌과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차고 날카로운 데가 많은 여인이었다. 철(鐵)의 꽃처럼……. 그녀는 냉막과 무정함을 독가시로 삼고, 외인이 따뜻한 시선을 던지는 것을 엄격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숙명적으로 뇌쇄(惱殺)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아무도 거역하지 못할 절대적인 아름다움. 그녀는 오백 년 만의 최고미인이라 불리고 있었다. 유난히도 미인이 많은 달단국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여인. 중원에 태어났다면 이미 황실에 간택되었을 정도로 출중하고도 고결한 미모였다. 왕실(王室)의 예법에 철두철미하고, 휘하의 무사들을 다루는 데에는 남아대장부보다도 지독한 여인. 그녀는 강철의 의지에 꽃의 육체를 겸비하고 있었다. 뚝－! 섬섬옥지(纖纖玉指)에 달맞이꽃 한 송이가 걸려 부러진다. "아아, 오늘따라 마음이 흔들린다. 지난밤, 나의 가슴으로 혜성(彗星)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기 때문일까?" 모용운교는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었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참고 만다. '나는 왕녀, 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표정을 바꾸어서는 아니 된다. 굴욕의 세월이나… 나는 강해져야 한다.' 모용운교는 볼이 화끈해짐을 느꼈다. 사박… 사박……! 그녀는 뜨락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럴 때 천황백부(天荒伯父)라도 있다면 위안이 될 텐데… 그 분은 내게 누군가를 보내 준다고 약속만 하시고, 실종되시었다!" 그녀는 한숨을 결국 토하고 만다. 그녀의 손. 습관적으로 쥐었다 편 탓에 낡아빠진 쪽지 한 장이 있다. <왕녀! 한 명의 영웅을 그대에게 보내니, 그는 바로 궁(弓)! 그를 기다리시오. 그는 천 일(日) 안에 거기로 갈 것이외다. 그 사이 옥체를 보중하시기 바라오!> 누가 쓴 글일까? 모용운교는 글을 보며 아미(蛾眉)를 찌푸렸다. "모두 다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아, 충신들은 죽고 노신들은 실종했다. 지금 내 곁에는 나의 육체를 노리는 야수 떼가 있을 뿐이다." 모용운교는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을 가슴에 대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하나, 둘, 셋, 넷…….' 모용운교는 격동되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여인 중의 여인. 그러나 그녀는 여인답지 않게 강하고 거대해 보였다. '휘하에 진짜 정예는 칠천뿐이고, 대부분이 늙고 병들은 신민(臣民)들이 있을 뿐이다.' 모용운교는 어느 정도 마음을 안정시킨 듯했다. '아아, 삼비(三秘)의 세력이 곁에 있다는 것조차 모욕스러우나…철류흔(鐵流痕)의 무리에게서 나를 보존하는 길은 그길밖에 없다.' 모용운교는 가벼운 숨소리를 흘렀다. 그 때였다. 팟－! 가벼운 파공성이 나며, 허공에서 누런 그림자 하나가 훌훌 날아 내렸다. 체격이 건장하고 표정이 중후한 중년인. 그는 나비가 떨어져 내리듯이 사뿐히 신형을 안정시키며 모용운교 쪽을 향해 한쪽 무릎을 세우며 앉았다. "왕녀(王女), 한 가지 전갈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웅장하다. 이 곳에서의 대화는 늘 이렇듯 고요하다. 크게 말한다면 외성 일대에 있는 자들이 도청하게 되기에, 이 곳에서의 대화는 아주 낮은 소리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비조대장군(飛鳥大將軍) 우문관(宇文冠). 달단국의 무상(武相)인 그는 달단국의 서열 삼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용운교가 가장 믿는 그녀의 충실한 수하이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요, 대장군?" 모용운교는 우문관을 하대하지 못했다. 그녀가 존칭을 쓰는 인물은 단 둘로, 중원으로 사라진 문상(文相) 천황장인과 이 자리의 무상 우문관뿐이었다. 우문관, 그는 꽤나 흥분하고 있었다. "묘한 일이 생겼습니다!" "묘하다니요?" "누군가… 정립지세를 깰 듯합니다!" "예?" "하나의 물건이 입수되었습니다!" 우문관은 꽤나 격동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건이라니요……?" 모용운교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녀의 콧날 위로 달빛이 떨어져 내린다. 우문관은 조용히 고개를 쳐들며 입술을 열었다. "하나의 도(刀)가 상자에 담겨 전해졌습니다!" "칼……?" "예." "한 자루 칼이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물건이라고… 우문대장군이 이리도 당황해하십니까?" "그것은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 "그것은 가격으로 따질 수 없으며 잠재된 힘을 알지 못할 상고기병(上古奇兵)으로, 절대백팔병좌(絶代百八兵座)에 속하는 물건입니다." "예? 절대백팔병좌요?" "변황의 전설 가운데 하나이고, 천년영웅(千年英雄)과 함께 나타난다는 위대한 병장기입니다!" 우문관이 말하고 있을 때, 그의 뒤쪽으로 두 사람이 따라붙었다. 둘 다 누런 전포(戰袍)를 걸치고 있는데, 전포 가슴으로 흰 수염을 휘날리고 있다. 전포를 입기에는 너무도 늙은 사람들. 이들은 달단국의 최후 보루라 할 수 있는 오천비조군(五千飛鳥軍)의 좌우통령(左右統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좌통령은 하나의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우문관은 두 사람이 다가서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조사했는가?" 그는 신중히 물었고……. "분명… 진품이었습니다. 전설상의 신병, 마뢰(魔雷)가 틀림없습니다!" "독이 있는가를 조사했습니다만, 흔적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깎듯이 절을 하며 보따리를 우문관에게 바쳤다. 우문관은 그것을 모용운교에게 전했다. "어디……!" 모용운교는 꽤나 긴장된 얼굴을 하고 보따리를 풀었다. 일순, 보따리가 풀리며 한 줄기 보광(寶光)이 충천하기 시작했다. 달까지 뻗쳐 월광을 무색하게 만드는 가공할 도기(刀氣). 츠으으－ 읏－ 츳－! 도기가 일어나는 가운데 일 리 안이 휘영청 밝아졌다. 도(刀), 그것은 살아 있는 혼(魂)을 갖고 있었다. 도신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데, 도신의 빛은 완전한 백색이었다. 백색의 도신은 극품(極品)의 도신이다. 반월형으로 휘어진 마뢰신도에서는 가공무비한 도기가 폭사되어 나와, 화원을 일순 대낮처럼 밝혔다. 도의 자루, 베포 하나가 걸려 있고 거기에 먹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있다. <모용왕녀가 사람과 물건을 널리 구한다는 말을 듣고 불원만리 왔음. 거래(去來)를 하고 싶다면… 부르시오. 중원객잔 후원에 있소! 죽립을 썼고, 흑포를 걸치고 있소. 이 물건은 내가 지니고 있는 물건 중 하나에 불과하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거래가 성립된 후 말하겠소. 나는 철저한 상인(商人). 대가가 적당한 경우에만 물건을 팔 것이니 신중히 결정하기 바라오!> 꽤나 거만하고 도도한 필체이다. 초서(草書)로 휘갈겨 쓴 글씨에도 성품은 나타나 있다. 우… 웅… 웅……! 마뢰신도는 가공할 울음소리를 흘렸고, 예기(銳氣)가 사방으로 뻗치며 달맞이꽃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래하자고? 나를 상대로……?" 모용운교는 심한 모욕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일대 사람들의 우상이고 살아 있는 여신이다. 그녀는 미색으로 만인을 휘어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데, 감히 그녀를 상대로 거래를 하자는 자가 있다니……. "칼장수가 나를 농락하려 하다니……!" 모용운교가 짜증스럽다는 투로 말할 때였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통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용운교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우문대장군이 정색을 한다. "보통 물건이 아니라면……?" "이것은… 거대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면 일당천(一當千)의 고수 하나를 즉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문관은 다시 손짓을 한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 두 명의 시녀가 우문관 곁으로 날아들었다. 궁궁(宮宮). 허리가 아주 가는 십칠 세 소녀. 모용운교의 침소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소녀로, 무공도 막강한 수준이다. 취취(翠翠). 모용운교와 친위대 사이의 연락을 맡아서 하고 있는 소녀로, 사실은 우문대장군의 막내딸이다. 궁궁은 단로(丹爐) 하나를, 취취는 대야 하나를 들고 있었다. 단로에서는 숯불이 파랗게 피어 오르고 있고, 대야 안에는 뜨거운 물이 펄펄 끓어 넘치고 있었다. "왜 이런 물을……?" 모용운교는 찡그린 눈썹을 펴지 못했다. "보시면… 아십니다!" 우문대장군은 신중한 자세를 하며 단로와 대야를 모용운교 앞으로 내밀었다. "시험해 보십시오. 아실 것입니다!" 파랗게 타오르던 숯불은 일순 꺼졌다. 단로에 서리가 생길 정도가 되면서……. 쨍－ 쨍－! 대야의 끓는 물은 마뢰신도가 담겨지는 찰나, 소리를 내는 얼음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도신에서는 한기(寒氣)가 흐르지 않는데, 실상 도의 운행(運行)에는 가공할 한기가 스며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것은 천외천(天外天)의 물건이로군?" 모용운교는 넋을 잃고 말았다. "길조인 듯하외다!" 우문대장군은 득의해 한다. 그리고 그의 자신만만하던 미소는 일순 경직되고 말았다. 언제 나타났을까? 화원 일대에 세 명의 괴인이 서서 마뢰신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흑포(黑袍)에 철립(鐵笠), 수중에 한 자루 장검(長劍)을 쥔자. 그는 사지를 부르르 떨며 마뢰신도를 쏘아보고 있었다. "저것은… 꿈 속의 물건이다!" 바로 마립(魔笠). 마정을 일으켰던 가공할 자객이 이상하게도 눈빛을 흩트리고 있다. 또 한 사람, 옷가슴에 핏빛 꽃을 수놓은 자… 사화(死花). 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애도(愛刀) 사화혈도(死花血刀)를 불끈 거머쥐기 시작했다. "믿지 못한다, 저런 물건이 있다는 것을! 바로 내 눈앞에 있다 해도 믿을 수 없다!" 그는 어깨선을 흔들어 댄다. 그것은 그가 살기(殺氣)를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는 인물. "저것은 값도 따질 수 없는 보도이다! 아아, 저것은 그 어떠한 마도의 호신강기라도 일 도에 끊어 버릴 그러한 물건이다." 그는 대막삼비 중에서도 가장 꿍꿍이가 많은 전황 척발휘였다. 마립(魔笠), 사화(死花), 전황(錢皇). 이들 셋은 거의 동시에 화원으로 날아들었다. 이들은 보도에서 일어나는 가공할 예기(銳氣)를 보는 찰나, 격동을 느껴 저도 모르게 금지로 뛰어든 셈이었다. '묘하게 되는군.' 모용운교는 입술을 잘강잘강 씹고 있었다. '나를 노리고 온 야수(野獸)들이 저리도 흥분하다니… 자칫하다가는… 정립의 형세가 깨어진다.' 그녀는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그녀 수중의 보도가 하나의 격동을 일으킨 것이다. 퇴색된 벽지의 방 안에서 그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중얼거리고 있었다. "물건 보는 눈이… 그리 좋지는 않군. 보도를 보내고 두 시진이 지나서야… 어느 정도 반응이 있다니… 쯧쯧……!" 그는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달빛은 그의 손등으로 떨어지는데, 손은 여인의 손처럼 매끄러웠다.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은 단 하나에 불과하다. 바로 단리궁! 그가 여왕 사냥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간… 조금은 시끄러우리라. 꽃 주위의 날파리 떼로 인해서……!" 단리궁은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손바닥 위의 일처럼 알고 있었다. 그는 누워 있는 가운데 천시지청술을 발휘해 밀원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 소리를 하나 빠짐없이 듣고 있는 것이다. "모용운교, 어떻게 생겼기에… 그리도 많은 파리가 꼬일까?" 얼마 후면 달이 꼭 차리라. 그 날이 되면 꽃은 더욱 환하게 피어날지 모른다. "달(月)이 좋군, 오늘 밤따라……!" 세 명의 무객(武客). 이들은 하나같이 욕망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을 마뢰신도에 던지고 있었다. 마뢰신도의 빛은 무사에게 있어 위대한 유혹이다. 무사라면 마뢰신도에서 일어나는 가공할 예기(銳氣)의 숨은 뜻을 안다. 그것은 바로… 천(天)! 면도날같이 얇은 입술을 가진 자, 언제나 흑색피풍의(黑色被風衣)에 피비린내를 배게 하는 자. 마립(魔笠), 그가 조용히 손을 쳐들고 있다. "내가… 결정했소이다! 그를… 끝내기로! 큿큿……!" 그의 손은 종잇장처럼 얄팍하다. 그는 도초를 예리하게 가다듬기 위해 자신의 손바닥 살을 베어내 감각을 확대할 정도로 도에는 일가견이 있는 자였다. 아주 느릿느릿… 그는 마립의 끝을 아래로 기울였다. 그리고 히죽 웃는데, 하얀 이가 날카로운 빛을 발한다. "솔직히 말해, 왕녀보다 이놈이 마음에 드외다!" 차고 살기 짙은 목소리이다. 그리고 그가 여기에 온 이후 처음으로 하는 지극히 정직한 말이었다. "클클… 여기서 무직자가 되어 허송세월했는데… 클클, 정말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졌소!"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마립. 그는 끈을 세게 졸라매고 있다. 그는 이미 피의 내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절정의 살인술(殺人術)을 터득한 대막의 자객 마립. 그는 이 년 만에 자객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죽립의 끈을 조여 쓰고 이를 드러내며 웃는 가운데, 모공에서 자욱한 한무(寒霧)를 흘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가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어느 놈이 녹야성을 상대로 괴이한 장사를 하려 하는지… 클클, 나의 두 손으로 알아 보겠소이다!" 마립은 성질이 급한 자였다. 그는 죽이고자 하는 즉시 죽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였다. 다혈(多血)질 체질이고 동시에 가공할 살인자, 그는 이미 안개가 되어 떠오르고 있었다. 슷－! 마립은 일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대단하군! 역시 빠르다!" "이 곳에서 안주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군. 그의 흑무잠형술(黑霧潛形術)은 이 년 전에 비해 한 단계 높아졌다!" 사화(死花)와 전황(錢皇)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립은 그들에게 위대한 경쟁자였다. 그가 사라진다면 두 사람은 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사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공의 손상을 입거나, 외상을 입게 되면 두 사람은 일시에 마립을 제거할 것이다. '묘하게 되어 가는군. 상인 하나가 나타나 세 마리 들개를 건드릴 줄이야…….' 모용운교는 입술을 잘강잘강 씹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볼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대체 어떤 자일까, 그는……?' 그녀의 눈에서는 정말로 오랜만에 젊음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찡그린다 해도 미인은 미인, 감추어 둔다 해도 여인은 여인이다. 그리고 봄은 책력을 찢어도 오는 법이다. 모용운교는 묘한 춘풍(春風)에 사로잡혔다. 천 년의 영웅 언제부터일까? 중원객잔(中原客棧) 일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새벽에 나타난 한 떼의 무리들. 이들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중원객잔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실상 이들의 자세한 표정과 눈빛을 본다면 이들이 보통 대상(隊商)이 아니라, 가공할 죽음의 대상임을 알 것이다. 첫번째 무리는 흑립(黑笠)을 쓰고 큰 상자를 메고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수는 오백 정도. 이들은 난주대표행(蘭州大票行)의 표기(票旗)를 앞장 세우며 중원객잔을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고 있다. 슷－ 슷－ 슷－! 말없이 다가가는 한 떼의 흑의인들은 유야무야한 가운데 팔 로(路)에서 조여 드는 하나의 일 로(路)의 진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재인(才人)의 무리, 유녀(遊女)들의 무리, 악사(樂士)들의 무리……. 꾸역꾸역 몰려가는 이천여 괴인들은 어지럽게 걸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무질서한 가운데 하나의 완벽한 질서를 이룩하고 있다. 보보(步步)가 모두 격식에 따르고 있고, 돌아보는 고갯짓이며 손을 쳐드는 간단한 동작마저도 이들은 모두 하나의 진세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아아, 바로 마정(魔井)! 이 년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공포의 집단 마정이 이 년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정은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 이들이 노리는 자는 절대 탈출시키지 않는다는 전통을 갖고 있다. 다섯 계급으로 나누어진 마정의 모든 인원이 총동원 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덟 개의 그림자. 이들은 아침 안개를 타고 객잔 후원으로 날아들고 있다. 허리를 꽈악 졸라맨 경장에 얼굴을 검은 두건으로 가리고, 쌍수에는 장검(長劍)과 단검(短劍)을 나누어 쥐고 있다. 차디차게 얼어붙은 냉혈동물의 시선. 팔 인은 지극히 가벼운 파공성을 끌며 객잔의 담을 훌훌 타고 넘어갔다. 아직 아침은 완전히 시작되지 않았다. 여덟 사람이 후정(後庭)에 도달할 때였다. "쯧쯧, 우수마발(牛修馬勃)로군! 쓸 만한 데라고는 지독한 뻔뻔스러움뿐이야!" 한 구석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청년. 그는 지극히 더러운 흑포(黑袍)를 걸쳤고, 얼굴을 흑립으로 가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마정의 인물들 같은데… 후후, 푹 쉬게!" 청년의 입가가 아름답다. 그는 천천히 손을 쳐들었고, 손바닥에 쥐어졌던 여덟 개의 흑석(黑石)이 허공을 꿰뚫는다. 핑－ 핑－ 핑－ 핑－! 희고 아름다운 손이다. 그 손이 내려지기도 전 동시에 여덟 곳에서 소리가 나며, 팔 인의 자객은 신음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허리를 꺾고 나뒹굴었다. 그들이 아주 조용히 누울 때 묘하게 웃는 청년, 그는 바로 운명의 풍운아(風雲兒) 단리궁이었다. "겁이 많은 자다, 마정의 우두머리는! 그는 본인이 오기 전에 백 명의 하수인을 내게 보냈다! 훗훗, 그렇지 않았다면… 애꿎은 수하들을 희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드디어 무림으로 돌아온 것이다. "네 차례나 잇따라 실패하다니……!" 마립의 얼굴은 격렬하게 일그러졌다. 모용운교를 보고 반한 후, 그는 어떠한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격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대체, 대체… 어떤 자이기에……!" 그는 사지를 부르르 떨다가 위로 솟아올랐다. 그는 거의 소리도 없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수하들은 그가 찰나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탄성을 발했고, 하늘빛은 유난히도 푸르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일반 자객은 낮시간을 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립은 주로 낮에 살인을 한다. 그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고 장기였다. － 밤에 살인을 하면 피가 토해지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지극히 슬픈 일이다. 나처럼 피를 좋아하는 녀석에게는……! 마립, 그는 단 한 번도 실패를 하지 않은 자였다. 그리고 그는 대막을 종횡했던 세 마리 들개 중 한 마리였다. �하얀 아래턱이다. 수염이 나지 않아 미끈해 보이는 아래턱, 거기 묘한 신비를 드리운 손이 대어져 있다. 단리궁, 그는 찻잔을 앞에 두고 있었다. 찻잔 안에서는 맑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훗훗… 내가 죽지 않는다면 세 사람이 실망을 하겠는데?" 단리궁은 가볍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는 처음 머물었던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의 모든 것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평범한 투숙객들은 완전히 소개되었고… 점소이, 중노미에서 관사(管事)까지 모두 가짜로 뒤바뀌어져 있었다. 그리고 세 곳에 단리궁을 보는 묘한 그림자들이 있었다. 첫 번째 그림자, 그는 사화문(死花門)에서 보낸 자였다. 그는 단리궁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두 번째 그림자는 전황림의 부림주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단리궁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히 살펴보는 참이었다. 단리궁은 밤 사이 신화를 만들었다. 그는 마정의 일급살수 백여 명을 너무나도 간단히 쓰러뜨린 것이다. 그가 어떠한 수법을 썼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아주 천천히 차를 마시는 단리궁, 그리고 세 번째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깊은 방 안, 창문을 조금 열어 놓고 단리궁이 얼굴을 쳐드는 것을 훔쳐보고 있는 고영(孤影)이 하나 있었다. 반짝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진 여인, 유난히도 높아 보이는 콧날에 매혹적으로 부풀어오른 입술. 아아, 너무나도 아름다운 시선(視線)의 여인. 그녀의 시선은 차를 마시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쳐드는 단리궁의 얼굴에 화살처럼 틀어박혔다. 한순간 혀를 차는 소리가 나며, 얼굴 하나가 슬쩍 나타났다. "고약하군, 너무 달였다. 차란 본시 물을 가볍게 우러내야 풍미가 나는 법인데… 쯔쯧……!" 유난히도 창백해 보이는 문사(文士)형의 인상이다. 그리고 두 개의 눈썹은 슬쩍 찌푸러진 채 절정의 곡선미를 과시한다. 태산준령을 압도하는 기개(氣槪)의 콧등, 꽈악 다문 신비로운 매력의 입가, 슬쩍 나타나는 그의 얼굴은 훔쳐보고 있던 시선을 격동시키고 말았다. "저, 저리도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니… 여자도 아니고, 남자(男子)가……!" 눈빛이 파르르 떨린다. 마치 운명(運命)의 덫마냥, 아름다운 그림자는 죽립 아래에서 슬쩍 나타나는 신비한 영상에 끝없이 빨려들고 마는 것이다. "아아, 이럴 수가……!" 그녀가 탄성을 발할 때, 여인의 뒤쪽에 서 있는 중년인의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묘하군. 왕녀가 이리도 흥분하실 때가 있다니…….' 우문관, 그가 여기 있었다. '아아,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오만하고 냉막하던 왕녀가… 떠돌이 낭인(浪人)에게 끌리다니……!' 우문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청춘이란… 묘한 것이로군, 정말 묘한 것이로군. 너무나도 자주 바뀐다. 그리고 너무나도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리리리－ 링－ 휘리리링－! 바람이 일어나며 뜨락에 있던 모든 풀과 꽃이 흔들렸다. 화르르－ 륵－! 꽃잎이 하늘 높이 말아 올라가는 대장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하늘로 돌려진다. 바로 그 때, 단리궁은 찻잔을 탁자 위에 놓으며 피식 웃고 있었다. "큿큿… 묘한 친구로군. 삼류은형술(三流隱形術)인 회풍은잠마신법(廻風隱潛魔身法)을 절기로 여기고… 큿큿,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선단 말인가?" 단리궁은 천천히 중얼거린다. 츠으으－ 읏－ 츳－! 그리고 바람이 시작되었던 그 곳에서는 순간적으로 한 줄기 검기가 일어나 분수처럼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피꽃의 수술처럼 붉고, 검은 하늘을 길게 쪼개는 번갯불처럼 예리한 한 줄기의 살인검망(殺人劍芒)! '시간과 위치상… 나는 성공했다!' 츠으으읏－ 치리리－ 릿－! 검극(劍極)은 절정의 빠르기로 단리궁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저 자는… 절대 피하지 못한다. 지금… 죽는다!' 절대절명(絶代絶命)! 단리궁은 이상하게도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친구, 자네의 살인술(殺人術)은 십이 단계의 살인술 가운데 제오단계네. 자네는 살인본능(殺人本能)을 너무 강하게 키웠네. 훗훗, 그로 인해 호흡(呼吸)이 완전히 바람과 하나로 합해지지 못하고 온기(溫氣)가 땅의 온기와 합해져… 몸의 흐름이 허무(虛無)로 숨어들지 못한 것이네!" 대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아름다운 손은 유려하고 우아하게 허공을 가로저었다. 무의식적이고 일상적인 그러한 손짓 가운데 허공에서는 급박한 숨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유, 유일한 허(虛)를 막다니……!" 허공… 빛줄기 가운데 몸을 숨기고 빠르게 다가서던 흑영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마립(魔笠). 그는 살인검초를 시전하다가 넋을 잃고 말았다. 단리궁의 흰 손손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의 사혈(死穴) 쪽으로 돌려지고 있었다. 그 손은 하나의 그물과 같았다. 마립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일순 몸을 땀으로 주룩 덮으며 허공에서 신형을 정지시켰다. "저 손은 살인의 극치라는… 살예(殺藝)의 경지에 이르렀다. 으으, 죽음의 손이 저리도 아름다울 수가……!"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는데……. "조금 아는군, 예(藝)라는 것을. 훗훗, 괜찮은 데도 있는 친구라면 굳이 죽일 것까지야……!" 팟－! 그의 목에 한기가 다가서는 가운데, 얼굴로 무엇인가가 흘러내렸다. 죽립 끈이 끊어지며 죽립은 등 뒤로 벗겨져 내려갔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대하지 않았던 햇살이 그의 파리한 얼굴로 떨어져 내리며 오관을 간질였다. 단리궁은 그의 목을 끊는 대신 죽립을 벗겨 버린 것이다. "치, 치욕이다. 실수를 하고, 목숨을 동냥받다니……!" 마립은 휘청이며 뜨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단리궁은 이미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마립 따위야 관심도 없다는 듯, 그는 묘한 음조의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마립의 얼굴은 시꺼멓게 되었고, 그의 손은 허리춤으로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이 치욕은 피로 씻을 수밖에 없다!" 그는 허리춤에 감추어 두고 있던 한 자루 혈비(血匕)를 번쩍 쳐들었고… 핏빛 단도에서 날카로운 혈홍(血紅)이 폭사되어 나오는 가운데, 비수의 끝이 그의 복부로 향했다. "죽음으로 명예를 되찾겠다. 빠드득－!" 마립이 순간적인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려 할 때였다. "쯧쯧, 살인은 죄야. 조금 늙은 친구, 진 것이 분해 그런다면 여기 들어와 왜 졌는지 알고 싶지 않은가?" 핑－! 단리궁은 또 한 번 손을 쳐들었고, 마립의 배를 가르려 하던 단도는 순간적으로 가루가 되고 말았다. 허공쇄월지(虛空碎月指) 하나만도 이미 절정이었다. 마립은 단리궁의 가공할 무공에 넋을 잃고 말았다. "하, 하늘이다… 절정의 하늘!" 마립이 단리궁의 방 안으로 들어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은 반 시진도 안 되어 사방으로 소문이 되어 퍼져 나갔다. 마립이 돌았다느니, 대상인이란 자가 사람의 탈을 쓴 요괴라느니……. 조용하던 녹야성 일대는 돌연 풍운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 마립은 실성했다. 그리도 잔혹하던 그가 길들여진 개마냥 대상인이란 자의 하인이 되기를 자처하다니……! － 대상인, 그는 대막무림계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에 관한 일은 이제 모용왕녀를 감싼 알력과는 다른 진정한 승부이다. 그는 죽거나, 죽여야만 한다. 다른 길은 없다! 그는 이틀을 기다렸다. 사화라 불리는 암울한 표정의 백포인은 자신의 휘하 제자들 사이에 끼여 이틀 내내 기다렸다. 결국 그의 입가에는 아스라하게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됐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민다. 그의 손바닥 위로 무엇인가가 흘러내린다. 보라! 허공이 완전히 어두워지는 가운데, 황사우(黃沙雨)가 이슬비마냥 흘러내리기 시작하지 않는가? "후후… 이 모래바람은 대막을 수호하는 용권풍(龍捲風)에 의해 말아 올려진 모래의 비다. 그리고 대막무림계를 무시하고자 하는 그 놈에게는 죽음의 비가 될 것이다." 사화는 천천히 손을 든다. 그리고 그가 웃기를 기다리며 초조한 나날을 보냈던 두 명의 비위가 그에게 물건을 전하기 시작했다. "여기… 도(刀)가 있습니다!" "백립(白笠)이 여기 있습니다!" 사화의 두 비위는 흑화(黑花)와 잔화(殘花)이다. 이들은 사화를 절대자로 숭배하고 있었다. 사화는 마립과는 다른 모사(謀士)이고, 위대한 승부사이다. 그는 실패할 일에는 끼여들지 않는 사람이고, 시간이 늦게 걸릴지언정 완벽한 승부를 내는 것으로 이름을 얻은 사람이다. 아주 천천히 애도(愛刀)를 허리에 차고, 살인할 때 쓰는 백립을 머리에 눌러 쓰는 자객의 재상(宰相), 사화(死花). 그는 황사풍으로 인해 자신을 얻은 듯했다. "내가 믿는 것은 나의 사부가 물려준 두 가지 수법이다. 그것이 있는 한… 그리고 나를 수호하는 천기가 있는 한, 나는 실패할 수 없다! 그 자가… 그가 아니라면……!" 사화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그는 아주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결전의 순간에 보다 많은 진기를 쓰고 싶은 듯, 지금은 진기도 쓰지 않고 평상적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가 사라져 갈 때였다. "그가 누구이지……?" 흑화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얼굴이 벅벅 얽어 마귀처럼 추악하나 두 눈만은 지극히 지혜로워 보이는 곰보노인 잔화는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란… 전설(傳說)이고, 신화(神話)이다!" "전설? 신화?" "바로… 천년영웅(千年英雄)이다!" "뭐… 뭐라고? 천년영웅? 대막의 피바람을 종식케 한다는 신화상의 인물 말이냐?" "그렇다. 그란… 천년영웅이다!" 잔화는 입술을 꽈악 다물었다. 사화문이 생긴 이후, 이번 살인은 가장 쉬운 살인이다. 상대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이고, 단 일 인에 불과하다. 더욱이 경공을 장기로 삼고 있는 사화를 돕는 자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쓰으으… 쓰으으……! 주위를 뒤덮는 모래바람. 달마저 모래바람에 완전히 감춰지는 깊은 밤이다. 마립, 그는 분명히 없는 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사막에서 그를 낳다가 죽었다. 그 때 그를 주운 사람은 전대 마정의 지존이었다. 마립은 인간의 정이라고는 모르고, 야수처럼 살아온 자였다. 인간의 미소라고는 몰랐던 자. 그런데 그가 지금 아주 묘한 표정을 지은 채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절정천무록(絶頂天武錄) 검편(劍編). 그는 소책자 하나를 탐독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공에서는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고 자부했던 마립이 소년무사처럼 비급을 앞에 두고 정신을 잃고 있을 줄이야……. 고독한 그림자 하나가 느릿느릿 뜨락을 걸어다니고 있다. "사기(邪氣)가 짙다!" 단리궁은 뒷짐을 지고 남천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저 머나먼 하늘에서는 악마의 기운이 가공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아아, 중원(中原)! 나를 기다려 다오!" 단리궁은 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마가(魔家)는 폭풍(暴風)을 자초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가공하고 악랄한 변황의 육대가문과 손을 잡았다.' 단리궁은 일대에서 알게 된 여러 가지의 일을 토대로 하나의 계략을 생각하는 상태였다. '풍운의 시작은 변황이었다. 달단국을 몰아낸 자들… 그리고 많은 착한 사람을 자객으로 몰아세운 자들은 대막에서 가공할 저력을 기른 다음, 하나 둘 중원으로 침투해 갔다.' 단리궁은 삼비 세력을 악도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기다려라, 악마의 무리들!' 단리궁은 두 눈에서 혜성의 빛을 강하게 뿜어 냈다. 그리고 한순간, 그는 무슨 소리를 들은 듯 입가에 빙긋 미소를 흘린다. "좋아, 꽤나… 절묘하다!" 그는 모래바람에 감춰진 뜨락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으으… 스으으… 스으으……! 예리하게 불어닥치는 황사풍 가운데 호흡 소리도 숨긴 채, 조용히 다가서는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다. 거의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다가서는 그림자. 단리궁은 그림자가 이십 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림자의 출현을 알아봤다. "그러나… 한 가지 틀린 것이 있다. 그것은 아직도 허공에 달이 떠 있다는 것이다. 아느냐? 달빛이 아무리 흐릿하다 해도, 완전한 어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단리궁은 묘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아니, 달빛이 없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 파－ 앗－! 그림자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으며, 한순간 십 장의 거리를 좁히며 단리궁을 향해 빛살로 날아들었다. 치리리－ 릿－! 일순, 백색예기(白色銳氣)가 분수처럼 뿜어지며 근처를 환하게 밝혔다. 환마무영보(幻魔無影步)에 구식대법을 동시에 시전하며 어기비검(馭氣飛劍)으로 다가서는 흰 그림자. 그는 바로 사화(死花)였다. 사화의 검이 허공을 난도질하며 무수한 검화송이를 피어 낸다. 단리궁은 삼엄한 검막이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입가에 걸린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자네의 경공은신술은 백구십사 종류의 수법 가운데 서열로 치면 이십오 위에 이르네." 단리궁의 몸은 빙글 회전했고……. 휘리리－ 링－! 바람 소리가 일어나는 가운데, 뜨락 가득 단리궁의 그림자가 묻어 나기 시작한다. 도처에 떠오르는 검은 그림자는 가공할 빠르기로 다가서는 흰 그림자를 일순 포위해 버렸다. 환(幻)! 너무나도 오랫동안 절전되었던 위대한 은형술이다. "어… 어… 엇?" 사화는 기절초풍 놀랐고……. "후후… 자네 나이를 생각한다면 매우 불행한 성취이지. 하지만 나의 짐을 들어 줄 어깨가 됨을 가상히 여기고 자네를 죽이지는 않겠네!" 단리궁의 목소리는 허공에서 들렸다. 그는 무수한 환영을 남긴 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사화는 석상이 되어 버렸다.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던 위대한 자객. 그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실패를 하고 만 것이다. 그는 마립보다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그… 그대는… 뉘시오?" 사화의 아래턱은 부르르 떨렸고……. "후후… 알고 싶은가?" 단리궁의 입가에는 신비한 미소가 맴돌고 있다. 위대한 영웅의 웃음. 그것은 군림의 미소가 아니라 포용의 미소였다. 미소 가운데에는 정이 흐르고 있다. 사화의 차고 사악하던 마음의 빛깔은 그러한 웃음 아래 얼음이 녹듯이 빠르게 녹아 가고 있었다. 마성을 씻어 내는 환상적인 미소. 그 역시 하나의 수법으로 백팔 주 중 열두 번째 기둥의 절기였다. 단리궁은 걸어다니는 장경고(藏經庫)와 같았다. 그의 뇌리에는 강호천년의 절기가 수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무공이 나날이 늘어나는 이유는 매일같이 몇 가지씩의 새로운 절기를 몸으로 익혔기 때문이었다. "나를 알고 싶은가, 진심으로?" "알, 알고 싶소!" "후후… 그럼… 할 말이 많겠군. 나도 귀하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조금 있는 상태이니까!" "소생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다니요?" 사화는 어른 앞의 아이 꼴이었다. 단리궁은 후리후리하고 약간 여윈 젊은이인데, 지금은 거인이었다. 사화는 단리궁의 거대한 기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자네는… 용병의 천재라더군?" "과, 과찬이십니다. 좁은 곳에서 알려진 이름에 불과합니다!" "후후… 하여간 알고 싶네!" "그럼… 다 말해 드리겠습니다." "후후… 나를 믿는가?" "믿습니다. 저를 진심으로 끌어 주시리라는 것을……!" "왜?" "영웅의 몸에서는 대륙(大陸)의 광대함이 느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거기 몸담고 싶을 따름입니다!" 사화는 무사였고, 멋진 사내였다. 그는 인물을 알지 못했기에 자객으로 방황했던 것이다. 손과 손! 두 사람의 손은 천천히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사화가 굴복한 그 다음 날, 용전(用錢)의 귀재라고 불리던 전황마저 굴복했다. 그는 꺾였다기보다 제발로 걸어들어가 절을 했다. 그는 전제자를 이끌고 단리궁 휘하에 몸을 던진 것이다. 사화와 마립과 전황, 그리고 마정(魔井), 사화문(死花門), 전황림(錢皇林)……. 대막삼비는 운명처럼 절정세가(絶頂世家)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훗날, 절정삼위(絶頂三衛)라 불리게 되는 세 명의 절정무도자(絶頂武道者)가 한 방 안에 모이게 되었다. 고집과 명예와 의기로 일어나 이루어지기 시작한 신화, 절정세가! 이제 세가의 힘은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 * * "완패다. 단 일 인(人)에게……!" 모용운교는 용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녀의 녹야성(綠野城)은 황량한 고성(孤城)으로 화하고 말았고, 삼비가 점거했던 지역은 폐허로 화하고 말았다. 대신 중원객잔 일대는 성시(盛市)를 이루었고, 삼비가 각지에 퍼뜨렸던 잔여세력이 비밀명령에 따라 꾸역꾸역 모이는 상황이었다.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은 하늘이 되고… 모용운교가 수 년간 꾸몄던 모든 것은 거의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거울(鏡), 모용운교는 거기 얼굴을 담고 있다. 유난히도 우수(憂愁)에 젖은 눈이다. 그 눈은 자색궁장에 뒤덮인 자신의 몸을 바라보면서 촉촉이 젖고 있었다. "가혹하군, 나의 운명은……!" 모용운교는 삼비를 저력으로 세력을 일으켜 실지를 회복하겠다는 꿈을 상실한 셈이었다. "하긴… 패산이 많은 싸움이었다, 나의 승부는!" 모용운교는 쓸쓸히 중얼거리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또 떠나야 하나? 머나먼 사막의 길로? 아아, 그것은 싫다. 이제부터는 머물러 살고 싶다. 나는… 여인이고 싶다.' 모용운교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위대한 무사이기 이전, 철저한 승부사다. 그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서 삼비를 포섭했고, 나의 휘하무사들의 가슴에도 하나의 영웅으로 완전히 군림하게 되었다.' 모용운교는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오천비조군(五千飛鳥軍)은 동요하고 있다. 그들은 이 곳에서 갇혀 지내느니, 비조를 타고 천지를 떠돌며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다만 전통에 따른 예법이 있기에 차마 내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여자이기에, 어느 정도의 육감은 있으니까!' 모용운교의 눈물은 풀잎의 이슬이었다. "아아, 어이해 백부(伯父)는 사람을 보내지 않는가? 어이해, 나를 위해 하나의 영웅을 보내지 않는가……!" 그녀의 백부는 천황장인(天荒匠人)이다. 모용운교는 늘 그가 소식을 보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해, 오지 않는 것인가? 흐흑……!" 모용운교가 격하게 흐느낄 때였다. "왔다오!" 돌연, 침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대체 누가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목소리는 창 너머에서 들려 왔다. 달맞이꽃이 가득 피어 있는 정원, 흑포를 바람에 펄럭이고 죽립을 비스듬히 쓰고 있는 신비인 하나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모용운교는 왔다는 말에 기겁을 하고 창가로 갔다가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 그대는……?" 모용운교의 입이 딱 벌어졌다. 뜨락에 서 있는 사람. 그는 며칠 사이에 그녀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훔쳐 갔던 위대한 상인 단리궁이었다. "왕녀에게 빚을 갚으러 왔소. 꾸어 갔던 삼비의 무사들은… 두 배 더 강(强)하게 만들어 돌려 드릴 예정이오! 일 년(年) 후에…!" 단리궁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죽립 아래로 나타나는 그의 미끈한 얼굴은 완전한 유혹이었다. "설마… 그, 그대가 바로…백부가 보낸 사람이란 말씀이십니까?" 모용운교는 상체를 휘청거렸다. "그렇소. 천황장인은 내게 모용왕녀를 추천했소. 나는 중원인이나, 모용왕녀를 친구로 여기고 있소. 바란다면… 모용왕녀를 상대로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오늘은 달이 밝으니… 낮과 같고, 이야기도 잘 될 것이오. 사실 풍문만 듣고 모용왕녀의 위대한 의지를 오해했소. 그래서… 짓궂은 장난을 했던 것이오. 미안하오!" 단리궁은 미소를 지으며 죽립을 벗었다. 모용운교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 소녀가 되어 버렸다. * * * 두 잔의 차(茶)가 식어 간다. 모용운교와 단리궁은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단리궁은 자신이 절정세가주라는 것을 밝히고 정식으로 오천 비조군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모용운교는 너무나도 흔쾌히 허락했고, 아주 묘한 뜻이 담긴 시선으로 단리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인은 눈으로 말한다. 그리고 여인은 몸으로 더 짙은 밀어를 던진다. 그녀의 볼은 술 취한 여인의 볼처럼 발그레했다. '다시는 마음을 속이며 살지 말자! 말해 버리자, 거절당할지라도……!' 방 안에는 궁등(宮燈)이 하나 밝혀져 있다. 모용운교는 입술을 잘강잘강 씹으며 단리궁을 응시했다. 유난히도 목이 길고 살결이 흰 여인, 그녀는 단리궁을 한참 응시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무엇이든… 다 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녀의 눈빛이 깜박깜박 묘광을 뿌린다. 얼음 같던 왕녀.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도 뜨거운 청춘의 불은 타오르고 있었다. "대신, 단 하나의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이라니요?" "오직 하나뿐인 소망이 있습니다!" 모용운교의 눈은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그녀의 눈은 단리궁을 얼큰하게 취하게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냉오하고 오만한 왕녀(王女), 모용운교(慕蓉雲巧). 대달단국의 마지막 왕녀인 동시에, 내몽고(內蒙古)의 여신(女神)으로 군림하고 있는 여인. 그녀의 유일한 소망(所望)이란……? "저의 유일한 소망은… 그대의 여인(女人)이 되는 것입니다!" 모용운교의 그리도 오만하던 고개가 드디어 살포시 숙여졌다. "나… 나의 여인?" 단리궁은 숨을 멈추고 말았다. 모용운교는 이미 숨을 멈추고 있다. 그녀의 볼은 사과가 익어 가듯 점점 붉어지고, 연잎처럼 미끄러운 피부에는 묘한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경련을 일으키는 그녀의 목덜미 위로, 열려진 창(窓)을 통해 화사한 월광(月光)이 흘러들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십오야(十五夜)였다. 달빛이 가장 강하다는 십오야. 달빛은 모용운교의 몸을 휘어감았고, 모용운교의 머리카락은 금빛 편린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저는 이제 하나의 여인이고 싶습니다!" 모용운교는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그녀는 이전의 모용운교가 아니었다. 대달단이 다시는 부활할 수 없다는 숙명의 힘을 안 것일까? 그녀는 왕녀가 아니라, 하나의 여인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위대한 무사(武士)라면… 저의 충장(忠將)으로 삼고 싶었을 것이나, 위대한 남자라면… 저는 그를 일개 무사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대하고 싶었습니다!" "으음……!" 단리궁은 한숨을 토해 냈다. 여인으로 행세하지 않았던 모용운교. 대막제일화(大漠第一花)라 불리며 대막영웅들의 가슴을 불지르기만 했지 꺼줄 줄은 몰랐던 오만한 여인. 그녀의 고개는 점점 더 수그러졌다. 마치 한 송이 달맞이꽃처럼……. "물론, 저를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모용운교는 입술을 잘강잘강 씹는다. 유난히도 희고 긴 목은 사슴의 목을 닮았다. 기품 있는 몸매에는 �가는 율동이 시작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안색을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빙녀(氷女)의 가슴이 일순간에 불붙어 타오르는 것이다. 그녀의 오만한 콧대를 꺾기 위해 거상(巨商) 행세를 했던 단리궁은 그녀의 볼에 떨어진 달빛을 본다. 달빛은 술과 같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고, 단리궁은 달빛의 술에 얼큰히 취하기 시작했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모용운교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단리궁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정감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방(房)이… 너무 밝구료. 월광(月光)이 좋은 이상, 등불을 밝히지 않더라도 방은 환할 텐데……!" 팟－!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퉁겨지며 궁등(宮燈)의 심지가 잘렸다. 방 안은 일순 어두워졌고……. "아아, 그럼 소녀의 청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까?" 모용운교는 주위가 어두워짐을 느끼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 달빛이 떨어져 내린다. 그녀의 얼굴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그리도 냉요(冷妖)롭던 미인. 그녀의 숨결이 지금처럼 뜨거워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개의 입술이 가볍게 벌어진다. "보… 보이지 않습니다. 소녀는 고수가 아닌지라 어둠을 뚫고 볼 수 없습니다." 모용운교는 단리궁을 자세히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두 개의 눈빛만을 볼 수 있었다. 혜성(彗星)의 두 눈, 그녀의 철저한 오만을 불살라 버린 영웅의 눈은 한 치 한 치 다가서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되오." "예?" "느끼면 되는 것이오!" "느… 느끼다니요?" "글쎄… 나도 이런 기분은 처음인 듯하오, 운교(雲巧)!" 단리궁은 모용운교의 이름을 불렀고……. "아아, 저는… 받아들여진 것입니까?" 모용운교의 볼이 와락 달아오르고 숨결이 거칠어진다. 그녀의 가슴은 기이한 융기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터질 듯 팽창되어 오른 가슴은 자색궁장을 찢을 듯하다. 그녀의 몸에서는 야릇한 향기가 흐른다. 상큼한 능금의 향기 같기도 하고, 비릿한 사향 내음 같기도 한 미묘한 육향(肉香). 방 안은 그녀의 체향과 단리궁의 텁텁한 사내 내음으로 가득 찼다. 휘이이－ 잉－! 그리고 바람이 불며, 주위는 더욱 어두워졌다. 구름이 장막이 되어 달을 가렸고, 달빛이 흐려지는 순간 창의 휘장이 끈에서 풀리며 후르르 떨어져 내렸다. "어… 어디 계세요?" 모용운교의 떨리는 목소리. "여기외다. 나는… 떠나지 않았소!" 단리궁의 목소리도 작아지고 있었다. "꼭… 그냥 가실 듯합니다. 두… 두렵습니다!" "운교답지 않군. 대막(大漠)의 삼비(三秘)를 미색(美色)과 처세술로 휘어잡은 운교가 겁내는 일이 있다니……!" "사… 사내와 한 방에 있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모용운교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피를 뜨겁게 하고, 손가락 끝을 경련케 하고, 가슴을 방망이질치게 하며, 땀을 흘리게 하는 이상한 힘. 그 힘은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안아도 되겠소?" "……!" 모용운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안아도… 되겠소?" 절정세가(2) 대야망의 장(章) 짙은 어둠 속. "마, 마음대로 하세요. 이미… 나는 그대의 여인입니다. 사실, 그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대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였습니다!" 호흡이 가빠졌기 때문일까? 모용운교의 목소리는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리궁은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고독했던 여인… 이제는 고독해 할 필요가 없소.' 단리궁은 사내 특유의 포용력을 발휘했다. 달단의 왕녀로, 만인의 머리 위에 군림했던 모용운교.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크고 당당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롱(鳥籠)을 바라는 비에 젖은 한 마리 새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의 비… 그 비는 바란다고 오지 않고, 원한다고 다가서지 않는다. 그 비는 거침없이 내리는 소나기였다. 모용운교는 사랑의 비에 흠뻑 젖은 한 마리 작은 새였다. 단리궁은 조롱이고, 조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툭－! 단리궁은 손끝으로 모용운교의 옷고름을 끊었다. 자색궁장은 안개가 흘러내리듯이 흘러내렸고, 유난히도 꽈악 졸라맨 젖가리개가 보인다. 단리궁은 천천히 젖가리개마저 벗겨 냈다. 그러자 봉긋한 두 개의 육봉이 도발적으로 솟아오르며, 달콤하고 비릿한 내음을 아주 진하게 흘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크군. 그대의 가슴은……!" 단리궁은 속삭이듯이 말했고, 모용운교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런 말은… 하시지 마십시오. 부끄러우니까요." 단리궁은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그는 바람(風)이고, 모용운교는 바람에 휘날리는 한 송이 달맞이꽃이었다. 연잎처럼 미끄러운 피부 위로 이슬 같은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히기 시작하고……. "아아아……!" 모용운교는 사내의 불 같은 손을 느끼며 기성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천천히 눕혀졌다. 바닥에 깔린 황금색 모피 융단은 침상보다 부드러웠다. 그녀는 천천히 눕혀지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사르륵… 사륵……! 웃이 흘러내리며 그녀는 냉기를 느꼈다. 칠월(七月)이라고는 하나, 사막의 야풍(夜風)은 차다. 바람이 살갗에 닿자, 몸에 소름이 쭈욱 돋기 시작한다. "으으… 음……!" 모용운교는 묘한 비성을 발했고, 단리궁은 천천히 그녀의 몸을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살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탄력적이었다. 허벅지의 살은 특히 그러했고, 위로 올라 붙은 흰 떡반죽 같은 둔부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이미 한 송이 꽃이었다. 바람 앞에서 흔들리고 낙화(洛花)되어야만 하는 한 송이 달맞이꽃. 단리궁은 훈기(薰氣)를 불어넣기 시작한다. 꽃잎이 파르르 떨리고, 어디에선가 요염한 숨결 소리가 흐른다. "하아아……!" 검은 머리카락은 물결치듯이 넘실대며 단리궁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단리궁은 머리카락이 등을 간질인다 여겼고, 두 개의 손이 천이 걸쳐지듯 어깨에 걸쳐지는 것을 느꼈다. 바람은 운명이다. 그리고 꽃이 떨어지는 것도 운명이다. 십오야(十五夜) 달은 구름에 삼켜졌고, 일대는 암흑에 뒤덮여 있다. 불이 꺼진 왕녀의 방. 오만하고 격정적으로 살아 왔던 모용운교의 참다 못해 토해 내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으으… 음……!" 모용운교는 왕녀로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녀는 감정의 기복을 참는 훈련을 받은 바 있다. 희로애락을 숨겨야만 했고, 표정을 늘 일정하게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덮치는 열정(熱情)의 밤만은 거부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격하게 다가서는 열풍. 그 바람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활(弓)처럼 휘어졌고, 그녀는 갈대(葦)가 되어 휘청거렸다. 그녀는 바람 앞의 꽃이 되어 잎을 떨어뜨려야 했고, 어느 순간 그녀는 참다 못해 꽤 큰 비명 소리를 토해내고야 말았다. "아아… 아아……!" 뜨거운 밤의 열기, 사막의 녹주(綠州)는 청춘이 불타는 열기에 활활 타 버리는 듯했다. "흐으으… 윽……!" 모용운교는 허물어짐을 느낀다. 알이 깨어나는 아픔처럼, 그녀는 여인이 되기 위한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 그녀의 다섯 손톱은 단리궁의 살 속으로 파고든 지 이미 오래였다. 단리궁은 달맞이꽃을 떨치는 바람이 되어 거듭 낙화의 순간을 이룩했다. 활이 되고, 갈대가 되는 모용운교. 또르르르… 륵……!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슬픔에 의한 눈물도 아니고, 고통에 의한 눈물도 아니었다. 다만, 작은 소망을 이루었다는 기쁨에서 우러나온 눈물일 뿐이었다. 그녀는 완전한 보금자리를 얻은 것이다. 녹야원 일대를 떠돌던 달단의 마지막 황녀가 아니라, 하나의 여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새벽까지 두 사람은 밤을 잊고 있었다. * * * 날마다 찾아오는 새벽이지만 맞이하는 느낌은 언제나 다르다. 특히 연보랏빛 안개를 헤치는 새벽 빛을 대할 때면 더욱 그러하다. 모용운교의 봉목 가득 찬연한 햇살이 들어차 있다. 자색궁장을 호드득 일어나 걸치는 모용운교. 그녀의 등과 둔부에는 수많은 손톱 자국이 나 있었다. 단리궁이 조금 느긋한 자세로 누워 싱긋 웃고 있었다. "엉덩이에 살이 약간 찐 듯하군, 이제 보니?" "피이－!" 모용운교는 혀를 샐쭉 내민다. 두 사람 사이는 이미 부부 사이가 되어 있었다. "훗훗… 운교, 한 가지 물을 게 있소!" "무엇이지요, 상공(相公)?" 모용운교는 재빨리 옷을 걸쳤다. "그것은… 내게 언제 반했느냐 하는 것이오!" "호호… 영웅에게도 짓궂은 면은 있군요. 그것을 꼭 알고 싶은가요?" "그렇소!" "호호… 그것은 그대가 이 세상에 더러운 옷을 걸치고 나타나 소란을 부리다가 죽립(竹笠)을 처음으로 쳐들었던 그 순간이랍니다!" "아……!" "그 때, 그대의 두 눈이 나를 유혹했습니다!" 모용운교는 웃음을 끊지 않았다. 아직도 밤이었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공간이 없었을 것이다. 모용운교는 머리를 치장하기 시작했고, 볼에 우물을 만들었다. "그 눈을 보지 못했다면, 저는 여자의 길을 시작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용운교는 거울을 보고 옷과 머리를 매만졌다. 거울 깊은 곳, 그녀를 유혹했던 두 개의 눈이 들어 있었다. 단리궁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았던 그러한 신비한 시선으로, 입가에는 그 때의 고혹스러운 웃음이 떠오른 채……. 새벽 안개는 더할 수 없는 유혹이다. 대막의 녹주에는 천자만홍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반투명한 능라 휘장처럼 드리워지는 안개 가운데로 그림자 두 개가 다가선다. 사박… 사박……! 앞서 걷는 것은 자색의 아름다운 그림자이다. 뒤에는 키가 조금 큰 편이고, 후리후리해 보이는 흑포청년이 따라 걷고 있다. "여인의 된다는 것은… 꽤나 밉상스러운 일입니다." 모용운교의 목소리이다. 그녀는 하룻밤 사이 완전한 여인으로 변화했다. 그녀의 눈에는 정(情)의 안개가 흐르고 있다. '그대 없이는… 나의 생명 또한 없을 것입니다.' 막 울어 버릴 듯한 눈. 그 눈은 단리궁의 웅지(雄志)마저 감추어진 절대의 영준함 앞에 아스라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제 마음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늪이 생길 듯합니다. 그리움이라는……." "그것이 나 때문이라면… 미안한데?" 단리궁은 싱긋 웃으며 모용운교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모용운교는 고개를 살포시 떨구며 낮게 중얼거렸다. "만난다는 것이 기쁜 일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합니다." 긴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모용운교는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방울을 애써 참아내는 눈치였다. '내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군. 나의 여인…….' 단리궁은 모용운교의 손을 꽈악 쥐어 주었다. 잠시 후, 그의 짙붉은 입술이 가볍게 벌어졌다. "나를… 보시오, 운교!" "예?" 모용운교는 고개를 쳐들었다. 단리궁은 그녀를 향해 묘한 시선을 던지다가 천천히 소매를 휘저었다. 팟－! 그의 손에 하나의 갈대가 쥐어진다. 갈대는 바람이 가볍게만 불어도 휘어지는 매우 연약한 식물이다. 단리궁은 어이해 갈대를 꺾어 든 것일까? "저기… 하늘을 보시오!" 단리궁의 말은 신의 목소리였다. 사랑의 열병에 걸린 모용운교에게는! 단리궁이 가리키는 곳에는 거대한 상승기류가 만들어 낸 십 장 대탑 높이의 선풍이 다가서고 있었다. 사막에는 흔한 용권풍(龍捲風)이다. 우르르르－ 릉－ 콰앙－!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내며 녹야성 쪽으로 다가서는 무시무시한 모래기둥. '왜… 저것을 보라고 하실까?' 모용운교는 눈꼬리를 치켜떴다. 단리궁은 아주 아름다운 동작으로 갈대를 쳐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우아하고, 너무나도 부드러운 손동작 가운데 흰 빛이 일어나고 있었다. 갈대 끝에서 일어난 백색의 강기는 한순간 가공할 백색 번개로 화하더니 용권선풍을 향해 폭사되어 나갔다. 환상일자혜검(幻想一字慧劍). 전설로만 알려진 가공할 상승검학(上昇劍學)이 아닌가! 보라! 치리리리－ 릿－! 갈대로 인해 일어난 환상일자혜검기와 용권풍이 하나로 뭉쳐지는 가운데, 거대한 모래기둥은 일순 수직으로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환상이었을까? 갈대는 여전히 그의 옥수에 끼여 하늘거렸으며, 그의 입가엔 멋적은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운교의 남편이 될 만하다고 믿소?" "아아, 이미… 절정의 경지시군요? 무사라면 더 이상 이를 데가 없다는 초극지경(超克之境)에 도달한!" "그것은 아니오. 천하에는 더 가공할 무공이 많다고 알고 있소. 나는 그것을 찾아다니는 승부사(勝負士)가 될 생각이라오!" 그의 입가에는 고혹스러운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일대의 풍운아(風雲兒). 그는 역마살(驛馬煞)의 낭인(浪人)이기 이전 천살성(天煞星)이고… 이전 운명의 도화성(桃花星)인 듯했다. '어떠한 선물로 당신을 떠나 보내야 할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았습니다. 제가 보내 드릴 것은 이 순간 정해졌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드릴 것은……!' 모용운교는 무엇인가 작정한 듯했다. 그녀는 일국의 왕녀다운 기품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처세술에 능했다. 그녀는 단리궁에게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권유했는데,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낭인(浪人)의 굴레가 벗어지기 이전… 이 옷을 벗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맹세라오, 운교!" 단리궁은 새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 그는 낡은 흑포차림으로 죽립을 머리 위에 썼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모용운교에게는 그것이 꽤나 불만이었으나, 입술을 뾰족 내밀 뿐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단리궁은 일신에 지닌 무공과는 어울리지 않게 소탈하고 탈속했다. 대막삼비의 우두머리들이 그에게 매료된 이유는 그의 인간적인 매력이 작용한 바가 컸다. 단리궁은 자신의 성씨를 밝히지 않았다.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현재의 모습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과거에 대하여 티끌만한 의심을 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단리궁, 그는 어느 새 녹야성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의 하늘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는 궁야(弓爺)라고만 불렸고, 대막삼비는 그를 대총사(大總師)라고 부르며 늘 뒤에서 보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변황의 정세를 단리궁에게 전했고, 단리궁은 그것을 토대로 거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십칠야(十七夜). 단리궁은 모용운교와 더불어 대막 가운데로 들어섰다. 모용운교는 오추마를 탔고, 단리궁은 핏빛보다 붉은 연지마를 탔다. 두 마리의 말 뒤에는 세 마리의 신타(神駝)가 뒤쫓았고, 그 뒤로는 천여 명의 무사들이 흑립을 쓴 채 뒤따랐다. 두우－ 두두－! 일행은 질풍을 일으키며 이글거리는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모용운교의 미모는 사막을 또 한 번 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인의 밤을 겪고 난 모용운교. 그녀는 울금향(鬱金香)의 내음을 풍겼고… 생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질 때마다 뇌쇄의 유혹을 안겨 주었다. "달단국의 영토를 찾기 위해 정비해 둔 오천 비조군을… 호호! 무림을 정복하려고 하는 들개에게 빼앗기다니… 호호……!" "운교는 아는 것이 너무 많아! 내가 큰 도적임을 알다니… 핫핫……!" 단리궁은 싱긋 웃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와 깊이를 모를 눈빛, 외모만으로 본다면 낙척서생(落拓書生)과 비슷하다. 그의 몸 안에 천년무림의 정종비가가 모두 담겨져 있다는 것은 상상이 잘 되지 않는 일이었다. 두두－ 두두－! 기마대는 하나의 정봉(頂峯)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솟아난 핏빛의 거산(巨山), 화염산(火焰山). 초목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산이다. "달단의 마지막 영토입니다!" 모용운교의 입가에는 고뇌가 떠돈다. "마지막 영토는 아마 저 산이 아니라, 운교일 것이오!" "예?" "운교의 고집이 대단하단 말일 뿐이오." "피의 굴레이지요." 모용운교는 살포시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앙증맞은 손에는 금호각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따뜻한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저는 돌아서겠습니다!" "돌아서다니, 벌써?" 단리궁은 흠칫하고……. "저는 일개 우물(尤物)에 불과합니다. 대망을 품고 계신 상공 곁에 어른거리며 심기를 산란하게 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모용운교의 미소는 슬퍼 보였다. 지금 그녀의 유난히도 큰 눈에는 이슬의 막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모용운교는 애써 울음을 참는 눈치였다. 역시 그녀는 왕녀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호각을 불면, 오천 비조군이 뜰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상공을 지존으로 섬길 것입니다!" 모용운교는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그녀는 이별(離別)을 느끼고 있었다. 이별이란 지옥의 구렁텅이같이 뼈저린 것이다. 막 사랑에 눈을 뜬 그녀에게 이별이란 죽음과 같다. 그러나 그녀는 웃는 얼굴로 단리궁을 보내 주기로 결심한 듯 전혀 슬픈 티를 내지 않았다. "비조대장군 우문관이 상공을 잘 보필하리라 믿습니다!" 모용운교의 손길이 파르르 떨렸다. '좋은 여인, 나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먼저 이별을 고하다니… 하지만 내 마음은 꽤나 허전할 것이오. 당분간은…….' 단리궁도 마주 미소짓고 있었다. 사막의 밤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상공을 안 것은 운명! 만에 하나,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소녀는 영원히 상공을 가슴에 품고 있을 것입니다!" 모용운교는 손에 서서히 힘을 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리궁이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고맙소, 운교!" "모두 운명인 걸요." 모용운교는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떨구며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렸다. "소녀를 못된 여인으로 만드시군요. 결국 이렇게 눈물을 보이게 하시다니……!" * * * 모용운교는 왕녀답게 처신했다. 그녀는 잔신(殘臣)들과 더불어 제삼의 운둔지를 찾아 떠나갔고, 단리궁은 삼비 휘하에서 절정세가로 흡수된 삼비의 정예고수 백팔 명과 더불어 사막에서 새벽을 맞이했다. 수만여 무사 중 오직 백팔 명을 고른 이유는 단 하나, 앞으로 싸워야 할 적이 지극히 강한 마도집단이기 때문이었다. 삐이이－ 삐이이－! 기나긴 호각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사막의 지평선 끝까지 퍼져 나가는 호각 소리 가운데, 화염산 하늘로 수천 개의 검은 구름이 떠올랐다. 끼이이… 끼이이……! 거대한 융단보다도 거대한 검은 새 수천 마리가 화염산 계곡에서부터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집채만한 거조들의 수는 정확히 오천(五千), 일컬어 비조군(飛鳥軍). 달단국 최후의 보루라고 불려지는 전설상의 조군이다. 하루에 이만 리(里)를 난다는 신조 오천 마리와, 신조와 영적으로 통하는 대막의 무사 오천 명으로 이루어진 최후의 결사대. 이들은 모용운교가 단리궁에 기증한 위대한 예물이었다. 밤(夜), 그리고 영웅의 눈은 빛나고 있다. "그래, 시작하는 것이다. 아픈 세월을 이룩한… 악마의 무리들과의 대결전을!" 단리궁의 눈에서는 혜성의 빛이 폭사되어 나온다. 밤은 침묵 가운데 깊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천 마리의 비조는 단리궁을 지존으로 섬기는 예식을 하는 듯, 허공에서 진열을 갖추기 시작한다. 단리궁은 거대한 날개를 오천 개 얻은 셈이었다. "그렇다. 저 새들은 절정세가의 거익전(巨翼殿) 휘하에 들리라! 저들의 날개로 인해 십팔만 리(里)에 웅풍(雄風)이 떠오르리라! 핫핫……!" * * * 중원(中原). 백 년 이래 최근처럼 평온한 시기는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군이라 불리는 선덕제(宣德帝)의 치적 때문이기도 하고, 변황의 준동이 사라진 탓이기도 했다. 칠월이 가고 팔월이 시작된다. 이제 열기가 식어 가기 시작하며 장마도 끝나 간다. 그러나 가공할 열풍(熱風)은 세인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뜨겁게 시작되고 있었다. 일대의 승부를 향해 치닫는 밤의 무리들. 십팔만 리의 패권(覇權)을 두고 처절한 승부를 시작하는 무리들은 밤 가운데 깨어나고 있었다. 첫번째 밤, 그 밤은 가장 가공할 풍운을 일으킨 밤이었다. <인원(人員)：사만오천(四萬五千). 복장：전원(全員) 황포(黃袍). 일명：전풍신검대(電風神劍隊).> 언제부터인가 밀야(密夜)가 깊어 가고 있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비밀리에 저력을 키웠던 하나의 가문이 무시무시한 규모로 커 나가고 있다는 풍문이 파다해졌다. 천년밀가에 대한 소문은 하나같이 적의에 가득 찬 것들이었다. －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들이 마각을 벗은 것이다. 그들은 이제 전 무림을 정복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모든 힘을 동원한 것이다. － 그들은 중원혼(中原魂)을 무시하고 있다. － 밀가의 고집쟁이들. 그들은 천하가 자신들의 독보천하(獨步天下)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년밀가(千年密家). 철과 혈로 무장되어 중원의 천 년을 지켜 온 하나의 가문. 이들에게 패해 혈루를 삼킨 마도, 패도의 거마 거흉들의 수가 얼마이던가? 중원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던 천년밀가. 하지만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밤의 세력으로 인정받았다. 가문의 율법이 지극히 배타적인 것이 오해를 부른 것이고, 지난 이 년간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정파요인(正派要人)의 암살극에 대한 흑막(黑幕) 때문이었다. 칠백여 일에 걸친 암살의 밤. 그 밤은 소림방장(少林方丈) 일등선사(一燈禪師)의 무참한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을 펼쳐 두고 무상경을 헤매던 고승 일등선사는 정수리에서 사타구니 사이가 두 조각이 되어 죽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위대한 무술승이자 자상한 성품으로 강호의 인망을 한몸에 받았던 일등선사의 죽음은 강호에 큰 파문을 안겨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이어, 무당장문인(武當掌門人) 함허진인(涵虛眞人)이 똑같은 모습으로 죽었다. 이어서 개방의 철검신개(鐵劍神蓋), 곤륜(崑崙)의 복마대선생(伏魔大先生) 종천행(鐘天行)이……. 밤마다 강호명숙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살해되었고, 살인의 현장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암살당해 죽은 명숙들의 시신에 남은 검흔(劍痕)뿐이었다. － 단 일검(一劍)에 죽었다, 모든 사람은! － 그러한 검은 단 한 곳에만 있다. 바로… 밀가(密家)에만 있다. 흉수는 필경 밀가의 후예들일 것이다! － 밀가의 신임가주가 된 단리우(段里雨)란 자가 자신의 이름을 천하에 인증받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실패하자, 앙심을 먹고 휘하제자들을 강호에 풀어 무참한 살륙을 저지른 것이다. － 밀가 사람들은 해답을 주어야만 한다! 강호는 천년밀가로 인해 시끄러워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밀가에 향해졌다. 비밀의 장막이라 불리는 밀가의 천 년 전통, 무수한 도전 가운데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집념의 가문 단리세가! 이들은 수많은 방파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데도 절대 해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에 따라 행동했다. 그리고 단리세가는 점점 더 고립된 단일세력으로 변화했다. 두 번째 밤, 그것은 실종의 밤이었다. 그 밤은 암중의 폭풍으로 중원을 전율시키고 있었다. － 남칠성(南七省) 일대의 고수들이 하나하나 실종되고 있다. － 북육성(北六省)의 낭인무사(浪人武士)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들은 한 곳으로 모이고 있다. － 어떠한 세력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분명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세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규모의 거대한 사건이 암흑지하에서 가공할 규모로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밤을 절정야(絶頂夜)라 했다. 그 밤은 아직 진정한 깊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밤은 가장 많은 신비와 두려움을 주는 밤이었다. 세 번째 밤, 아무도 확실한 규모를 알지 못하는 악마의 밤이다. 보이지 않는 마수를 천하 구석구석에 뻗쳐 두고, 이미 천하의 반을 집어삼킨 가공할 집단이 있었다. 천하칠가(天下七家). 이들은 이 년 전부터 세력을 일로 확장시켜 나갔다. 구파일방에 예속되어 있던 방파들과 천년밀가를 종주로 섬겼던 문파들이 하나하나 천하칠가에 합병되었다. 어떤 때에는 금력(金力)으로, 어떤 때에는 무력(武力)으로, 천하칠가는 비밀스러운 가운데 남북무림계 구석구석에 미치는 거대한 세력판도를 이룩해 나갔다. 악마야(惡魔夜)! 훗날, 천하무림인이 악마의 밤이라 부르는 가공전율한 피의 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 지 어언 이 년이었다. �* * * 혜성(彗星)이다. 밤도 아닌데, 허공을 불사르며 동쪽으로 날아가는 거대한 불의 용은 바로 혜성이었다. 천지종말을 예고한다는 혜성. 그것은 중원 일대에 드리워진 음산하고 귀기스러운 분위기에 꼭 어울리는 것이었다. 밤은 깊어 가고 혜성이 떠오르고… 무림이 모르는 가운데 무림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흑천(黑天). 언제부터인가 하늘은 먹장구름에 뒤덮였고, 기이한 마류(魔流)가 모든 성좌(星座) 사이를 누비며 흐르고 있다. 가공할 요기가 장대비와 함께 뿌려지고, 겁(劫)의 사기(邪氣)가 흑궁(黑穹)에서부터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산해관(山海關)에서 옥문관(玉門關)까지를 하나의 벽(壁)이 되어 가로막고 있는 거성(巨城). 만리장성(萬里長城). 중원(中原)과 변황(邊荒)을 차단하는 환우제일축조물(還宇第一築造物)은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세워진 이후, 지금까지 그 위대한 웅자를 과시해 왔다. 이상하게도 요기가 짙은 하늘 위로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핏빛 용이 떠오르고 있었다. 보라! 하나의 혜성이 검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것을! 혜성이 날아가는 광활한 하늘 아래, 수천 마리의 거조(巨鳥)가 떼를 지어 비행하고 있다. 하늘은 수천 마리의 거조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끄으으… 윽… 끄윽……! 놀랍게도 무수한 새 떼는 일사불란한 진영(陣營)을 갖춘 채 하나의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새 떼가 뒤덮는 검은 하늘 아래, 옥문관(玉門關)이라 불리는 거대한 관문 하나가 세워져 있다. 자야(子夜), 가장 깊은 밤이다. 그리고 혜성 하나와 오천 마리의 거조는 옥문관을 넘어 중토(中土)로 진군해 가고 있었다. "내가 돌아왔다." 그는 한 마리 금붕(金鵬)을 타고 있었다. 전신에서부터 가공할 신기(神氣)가 흘러나오고, 눈을 껌벅일 때마다 혜성의 그 빛이 폭사되어 나온다. "나는… 이단자(異端者)로 떠나갔다." 차고 맑은 목소리이다. 거대한 기품이 그 목소리에 스며 있다. "나는 피의 세월 아래서 살아나가기 역겨워, 나 자신을 부랑(浮浪)의 강(江)에 던져 버렸다." 약관(弱冠) 남짓한 나이. 한데 그에게는 절대의 기도(氣度)가 서려 있다. 그의 눈에는 하늘의 그 빛이 내려앉아 있다. "그러나 나는 돌아왔다. 나의 고향, 그리운 중원(中原)으로…!" 입가에 싱긋 웃음이 매달린다. 그와 함께 거대하고 절대적이던 기도는 일순 사라지고 천진하고 순후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제 나는 피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새 울음소리 가운데 그의 웃음은 짙어졌다. "나는 약자(弱者)들을 지키는 거벽(巨壁)이 되리라.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농락하는 악마의 무리들은, 부랑(浮浪)의 강(江)에서 무림의 하늘로 날아오른… 내게 당하리라." 눈빛은 점점 강해졌다. 그의 입가에는 고집이 있다. 그리고 그의 모습에는 견인불발의 의지가 있다. '나의 아우여, 그리고 나의 가문이여! 나는 정면으로 그대들의 아성(牙城)에 도전할 것이오! 가문이 아니라, 천하를 위해, 중원을 위해!' 아아, 단리궁(段里弓). 드디어 그가 중원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변황에서 모은 정예부하들과 더불어 자시에 만리장성을 넘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새등에는 기라성 같은 이역고수(異域高手)들이 있다. 이들은 이제 단리궁의 수족(手足)이 되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절정세가(絶頂世家)의 꿈은 이들의 여정(旅程) 가운데 노도가 되어 흐르리라. "하지만 나를 미워하지 마오. 나의 가문이여!" 단리궁은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가문을 버린 것이 아니오. 나는 완전히 취하기 위해 일단은 버리는 것이오. 어느 날, 나를 알게 될 것이오." 단리궁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금붕은 큰 울음소리를 내며 가장 빨리 허공을 가로질렀다. 하늘 위, 단리궁의 눈길을 끄는 기이한 천기가 있었다. 핏빛의 성하(星霞). 언제부터인가 암울한 적혈색(赤血色)의 별무리가 하늘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하늘이 온통 핏물에 뒤덮인 듯, 구천(九天)이 모두 피의 별무리에 뒤덮여 있었다. 단리궁은 핏빛 별무리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그리운 중원 깊이 들어서고 있었다. 마립(魔笠). 그는 단리궁의 제일위사(第一衛士) 자격으로 단리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그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전에는 지독하게도 차고 암울한 눈빛이었는데, 지금 그의 눈빛은 맑으면서도 흐릿하여 묘한 부조화를 보이고 있었다. '주인은 거인(巨人)이다, 작은 거인!' 그는 입가에 싱긋 웃음을 드리운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 간다던가? 마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단리궁의 미소를 흉내내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비할 수 없이 막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단리궁은 그에게 가공할 살예(殺藝)를 전수해 주었다. 마립은 그것을 익히며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숙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주인은 힘든 길을 자처한다.' 마립은 단리궁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분의 가슴에는 타인이 채워 주지 못할 거대한 공허가 있다. 그것은 무림절대자의 길을 시작한 대영웅(大英雄)의 고독이다.' 사화(死花), 그 역시 단리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화는 흐릿한 눈빛을 던지는데… 그것은 그의 무공이 전에 비해 약해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급증했다는 증거였다. 그는 마예(魔藝)를 전수받았다 '대총사는 일대의 풍운아가 될 것이다.' 사화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리도 잔혹하고 이기적이던 우리들을 포용하신 저분의 저력(底力)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 전황(錢皇) 역시, 단리궁을 보고 있다. 그의 손에는 장부 비슷한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그 책 안에는 하부무사들이 수집한 천하각지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대총사는 군림(君臨)하려 하지 않고, 지배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하기에 절대군림의 경지에 들어서리라!" 전황은 매우 기쁜 표정이었다. 중원(中原)이다. 무림인이라면 한번은 꿈꿔 볼 야심(野心)의 대륙(大陸). 드디어 풍운은 시작되는 것일까? * * * 완전한 어둠이다. 철전(鐵殿)에는 하나의 야명주(夜明珠)도 없고, 하나의 궁등(宮燈), 화섭자도 없다. 절대의 암흑 속에서 두 줄기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버언－ 쩍－! 가공할 마광(魔光)이 두 곳에서 폭사되었다. 그리고 웃음(笑). "후후후… 이제 모든 것은 준비되었다. 후후……!" 정적은 음사하고 잔혹한 웃음소리로 인해 깨어졌다. 어둠 속, 매우 강인한 면모를 지닌 자가 결가부좌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의 발 아래, 십여 권의 서적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천마혈사경(天魔血死經) 상중하편(上中下篇), 음시잔황록(陰屍殘皇錄) 십이책(十二冊), 귀곡자천무비략(鬼谷子天武秘略), 철왕무신경(鐵王武神經), 혈천유성록(血天流星錄)……. 십여 권의 책은 하나하나 전설상의 마경(魔經)이었다. 단 하나를 익힌다 하더라도 절대의 마공을 성취할 수 있는 암흑의 무공기서(武功奇書)들. 두 눈은 그것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이제 거의 완벽해졌다. 후후, 천 년 사상 가장 강한 마공을 수련하는 일을 구 성(成) 정도 이룩했으니……!" 어둠의 목소리에서는 비릿한 피 내음이 풍긴다. "후후… 이제 남은 것은 내부를 철저하게 정리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후후, 쟁취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의 입가에 천마소(天魔笑)가 떠오른다. 버언－ 쩍－!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더욱 가공스러워지고, 두 개의 혈수(血手)가 내밀어지는 가운데 암울한 혈기(血氣)가 자욱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파라라－ 랏－ 팟－! 혈무(血霧)가 자욱이 퍼지는 가운데, 십여 권의 전설적인 마경은 한 줌의 재로 화해 버렸다. 전설상의 마경을 태우다니? 그는 이미 그 안의 모든 것을 외우고 익혔단 말인가? "중원에는 혼(魂)이 있다고 한다. 후후, 그래서 천하각지의 고수들은 군림의 길을 중단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가공 전율한 마의 기운이 눈빛에서 폭사되어 나온다. "내게는… 나의 논리가 있을 뿐이다. 후후, 천하의 모든 무림인이 죽는다 하더라도… 나의 길은 종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중얼거리다가 벽을 바라봤다. 전면에 위치한 거대한 혈벽(血壁) 위에는 천하의 형세도가 그려져 있었다. 사해(四海), 오악(五嶽), 육합(六合), 팔황(八荒), 그리고 구주(九州). "천하… 중원… 대륙… 이제 내게 정복되리라!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대군림을 이룩하리라!" 그는 웃었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륙(大陸)! 너는 이제 겁탈당해야만 한다. 나는 이 날을 위해 청춘을 포기하며 죽음의 연무(練武)를 마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두 눈, 그리고 그의 팔만사천 모공에서는 자욱한 화무(火霧)가 일어났다. 그리고 한순간, 가공할 마기와 열기를 품은 악마의 강기( 氣)는 혈벽을 향해 폭사되어 나갔다. 콰아아－ 콰아아－! 육중한 혈벽에는 거미줄 같은 파열흔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대륙! 아느냐, 나를?" 우르르르－ 릉－! 우레 소리가 나며 혈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크핫핫! 나, 철류흔(鐵流痕)을 아느냐? 천하제일의 정복자(征服者)를 너는 아느냐?" 앙천대소와 함께 그의 몸은 수직으로 떠올랐으며, 한순간 철전의 지붕을 부수며 날아올랐다. 폭발하듯 굉음이 울렸다. 핏빛 버섯구름이 피어나는 듯하더니, 거대하던 철전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소리 가운데, 자욱한 피비린내가 번지고 있었다. 수백 구의 시신(屍身)이 돌더미에 묻히고 있었다. 벌거벗고 죽은 여인(女人)들, 가랑이를 쩌억 벌리고 하체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여인들, 눈도 감지 못한 채 손으로 무엇이가를 매만지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누운 여인들의 몸 위로 거석(巨石)이 떨어져 내린다. 우르르르－ 릉－ 쾅－! 벽력(霹靂)…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진원(眞元)을 빼앗기고 죽어 버린 여인들의 시체도, 불타 버린 전설의 마경들도, 천하지리가 그려져 있던 거대한 벽도, 사악한 빛을 뿜어 내며 웃었던 그도……! 이단(異端)의 율법(律法) 渭城朝雨餘輕塵 客舍前靑靑柳色新 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古友人 위성의 아침 비는 먼지만 축였고, 객사 앞의 버드나무, 빛만 푸르구나! 그대여! 이 술 한 잔 더 들지 않겠소? 양관을 지나면, 그대에게 술 권할 친구도 없을 테니까! 원이(元二)라는 친구를 보내며 불렀다는 왕유(王維)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다. 투툭－ 툭－! 밤새 내리던 빗발이 점점 가늘어졌다. 여명이 시작되는 가운데 오랜만에 비가 개일 것 같았다. 회색빛 사이로 푸르른 하늘빛이 들어온다. 연경(燕京) 가는 길이다. 사두마차(四頭馬車) 한 대가 진창길을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어자석(馭者席)에는 죽립을 쓴 청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옷차림이며 말하는 솜씨가 일반 마부와 같은데도, 그에게는 정말 묘한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 분위기는 말고삐를 잡은 흰 손과, 죽립 아래로 보이는 사내다운 턱의 선에서부터 풍겨졌다. "이 근처인데……?" 빗소리 가운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가(世家)는… 이 근처에 세워지기로 예정되었는데, 잘 되는지 모르겠군." 죽립 아래, 구태여 감출 필요가 없는 아름다운 얼굴 하나가 숨어 있다. "노인들은 치밀하고 재주가 많으니, 실수 없이 잘하리라. 내가 괜스레 일찍 나타나면 오히려 번잡해질 수도 있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강렬한 영상을 던지는 사내의 얼굴. 나이는 스물 정도, 고독(孤獨)한 가운데 묘한 유혹이 담긴 눈이 신비하다. 두우－ 두두－ 두우두－! 마차는 혈거봉(血巨峯)이라 불리우는 산봉우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로(小路)를 따라가기 오 리(里), 돌연한 파공성이 들려 왔다. 츠으으－ 읏－ 츳－! 세 개의 유성이 지면과 평행하게 떠오르는 듯이 세 명이 경공술을 발휘해서 마차 앞으로 다가섰다. 거의 동시에 마차 앞에 멈추어 서는 세 사람. 이들은 흑포, 백포, 회포를 걸친 복면무사들이었다. 셋 다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었으며, 먼 거리를 일순간 가로질렀는 데에도 내공이 흐트러지지 않은 듯 지극히 담담한 호흡 소리를 흘린다. 이들은 마차 앞에 이르기도 전에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마부(馬夫), 그는 세 사람이 떨어져 내리자 빙그레 웃었다. "삼위(三衛), 찾아 보았는가?" 느긋한 목소리이다. 삼위라니? 그렇다면 신색이 추레한 미청년은 세 사람의 주인이 된단 말인가? "오천 비조군과 더불어 일대를 뒤진 결과, 대총사가 말씀하신 그 장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말씀 듣던 대로 보통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장원을 어찌나 교묘하게 위장해 두었는지 찾는데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그분들은 대총사가 세가로 돌아오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하신 듯합니다. 아마도 대총사의 출관이 그분들의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져서 이루어졌기 때문이겠지요." 마립(魔笠), 사화(死花), 전황(錢皇). 이들의 한어는 전에 비할 수 없이 숙련되어 있었다. 마차를 탄 사람은 단리궁. 그는 꽤 오랜만에 중원으로 귀거래(歸去來)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약속한 대로 제일 먼저 세가를 찾았다. 절정세가(絶頂世家). 세가는 연경성 남쪽 백오십 리 되는 혈거봉 가운데 세워져 있었다. 단리궁을 운명의 주인으로 섬긴 네 명의 변황고수에 의해 이루어진 절정세가는 일 년 사이 강호도처에 거대한 뿌리를 세웠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것이 세인들이 전혀 모르는 가운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내외단(內外壇) 도합 칠단(七壇), 밀원(密院) 분향(分香)이 합쳐져서 백사십구(百四十九). 그리고 변황사천주가 심득을 다 발휘해 세운 하나의 건축물이 혈거봉 가운데 이룩되었다. 단리궁은 백일 전 삼 위사와 헤어졌다. 삼 위사는 단리궁에 앞서 일대를 수색했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절정세가의 위치를 알아 낸 것이다. "어떻던가?" 단리궁이 물었다. "위대합니다. 하지만 아직 미완성입니다!" "그분들은 비밀유지을 위해 장인(匠人)들을 대거 모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건축공사가 진척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지금 상태라면 일 년 후는 되어야 팔십일 전(殿)으로 이루어진 절정세가의 본가(本家)가 완성될 것입니다!" 세 사람이 넙죽 허리를 숙일 때였다. "일 년은 너무 길다!" "……!" "그, 그럼……?" "어이할런지요?" 세 사람은 걱정스러워 하는 눈치인데, 단리궁은 매우 담담했다. "후후… 그런 것까지 내게 묻는가?" 단리궁은 말고삐를 천천히 거머쥐었다. 그는 조금 짓궂게 웃으며 하던 말을 이었다. "보름 안에 세우게 하라!" "보… 보름이오?" 세 사람은 일제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나는 연경에 가서 짐을 꾸리겠다. 과거 네 노인이 나를 납치하는 통에, 애써 수집한 고서(古書)를 챙기지 못했다." 단리궁은 한 마디도 부연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는 일의 방향만 정해 줄 뿐이지,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며 명령하는 형의 지배자는 아니다. 두우－ 두두－! 마차는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마립과 사화와 전황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주인은 이 일을 통해 우리들의 잠재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것 같지 않소, 꾀주머니 전황?" "후후…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소!" 전황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빗속으로 사라져 가는 단리궁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대총사는 이 일을 기해 대총사가 거느리고 중원에 들어온 오천여 세력과, 일 년 사이 사대봉공(四大奉公)이 끌어모은 세력 사이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는 듯하오!" 화합이란 하나로 섞이는 것을 말한다. "아아,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 집이니, 우리들도 건축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이란 말이오?" "하긴, 우리들이 동참한다면 보름 안에 성 열 개라도 세울 수 있을 것이오. 거친 일을 하는 데는 이골이 났으니까!" "그러나……." 누군가 조금 회의하는 투로 말한다. 마립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면 일이 커지는데? 그리고 혈거봉에 절정세가가 세워진다는 것이 만천하에 소문나는데?" "오천여 고수가 일제히 나타나고, 오천 마리 거조가 오르락내리락거린다면… 천하가 발칵 뒤집힐 것이오." "그렇다면… 대총사는 성을 빨리 세우는 일보다, 세가의 이름을 빨리 소문나게 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 세 사람은 단리궁이 사라진 곳을 바라본다. － 보름 안에 세가를 완성시키게! 그는 한 마디의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있던 곳에는 비의 군무가 있을 뿐이다. 지금 삼 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오른다. "하라면… 해야지. 아암……!" "주인은 틀림없는 분이시니,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될 것이오!" "소문이 나건, 소란이 일건, 풍운이 시작되건… 우리로서는 대총사가 명한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세 사람은 그런 저런 말을 남기며 일제히 사라져 갔다. 단리궁의 심복이 된 대막삼비! 이들은 사대봉공에 비해 두 단계 아래의 무사들이었는데, 지금 시전하는 수법은 사대봉공과 엇비슷한 절정절대의 무공이었다. 그들은 단리궁과 더불어 중원으로 들어오는 가운데, 단리궁에게서 열 가지의 절기를 전수받았다. 그들 하나하나는 소림사 방장을 능가하는 절정고수로 성장한 셈이었다. * * * 다음 날부터 강호계에는 세인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하나의 위대한 건축물에 관한 것이었다. － 혈거봉(血巨峯)에 하나의 성(城)이 세워지고 있다. 그 성은 환우(還宇)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이다. － 오천 마리의 거조(巨鳥)가 고수들을 태우고 날아들었고, 팔십이 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성을 세우는 공사는 지극히 빠른 속도로 진척되었다. － 성은 무서운 속도로 쌓아지고 있다. － 그 성의 임자는……? － 성을 세우는 자들은 바로 전 무림의 모든 위계질서에 대해 도전(桃戰)하고자 하는 가공할 무리들이다. 그들은 바로 절정세가(絶頂世家)의 인물들이다! － 절정세가의 가주(家主)는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怪物)로, 이름하여 절정서생(絶頂書生)이다! 돌연, 불어닥친 한 줄기의 회오리바람. 절정세가에 대한 소문은 일거에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의 대세 판도를 뒤바꿔 버렸다. 일 년 넘게 비밀리에 추진되어 왔던 절정세가의 세력확대가 하루 아침에 백주에 공개된 것이다. 진장서축(盡藏書築)은 오랜만에 문을 열었다. 낭인부(浪人府) 사람들은 궁(弓)이라 불리웠던 그의 모습을 꽤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그는 먼지를 털고 고서를 추렸고, 간간이 그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곤 했다. "일이 있어 먼 데 다녀왔지요. 하하……!" 천진난만하게 웃는 흑삼청년, 궁. 그는 서점 안을 말끔히 정리하는 데 사흘을 보냈다. 밤이 될 때 낙척서생 차림으로 연경성(燕京城)에 돌아온 단리궁의 어깨에는 죽간(竹竿)이 걸쳐져 있었다. "달이 좋군. 이런 달밤에는… 금린어(金鱗魚)가 잘 물리지!" 단리궁은 천천히 서축을 나선다. 어깨에 죽간을 메고, 한가한 걸음걸이로 낭인부를 빠져 나갔다. 그는 한가로운 조사(釣士)와 같았고, 일거수 일투족 어디에도 상승기공을 익힌 흔적따윈 나타나 있지 않았다. 길은 달빛에 젖고 있었다. 소로(小路)를 따라, 단리궁은 달빛을 타고 부서져 내리는 야무(夜霧)를 뚫고 청량호반(淸凉湖畔)으로 다가갔다. 월광이 찬란하다. 그의 어깨며 옷자락은 반짝거리는 달빛에 빛을 발했고, 간간이 그의 미소가 있었다. "고기가 많이 물리겠는데? 밤에 물리는 고기는 입심이 좋지! 후후……!" 단리궁은 이슬을 밟으며 갈대 길로 접어들었다. 금린어(金鱗魚) 일곱 마리, 팔뚝만한 잉어 세 마리. 단리궁은 망태기 안에 열 마리의 대어(大魚)를 담아 둘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은 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새벽이 시작될 때였다. 안개가 연보라색으로 타올랐고, 단리궁의 입가에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 오르기 시작한다. "……!" 낚싯줄이 담긴 수면 위로 파문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새벽의 대기를 가르는 미세한 파공성이 귓전을 파고든다. 네 줄기의 가는 바람 소리는 점점 단리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소리 없이 웃었고……. 스슷－ 슷－!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단리궁 쪽으로 다가서는 네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조심조심 단리궁 곁으로 다가서는 네 사람 모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파－ 파－ 파－! 네 사람은 거의 동시에 단리궁의 뒤쪽으로 내려서는데, 단리궁의 다물었던 입술은 바로 그 순간 정확하게 벌어졌다. "사 봉공(奉公), 모두 오랜만이오!" 단리궁은 태연자약하게 말했고, 번개같이 나타났던 네 사람은 일제히 어리벙벙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우리들이 나타난 것을 뒤돌아선 상태에서도 알아보시다니…….' '아아, 저 여유는… 바로 뜻한 바 이상의 성취를 이룩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네 사람은 너무나도 할 말이 많은 상태인데, 단리궁의 한 마디 말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자는 말씀이시오, 가주(家主)?" "삼 위사(衛士)라는 젊은 친구들과 오천 비조군을 세가로 보내 공사를 도운 것은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시나, 그 일로 인해 천하가 발칵 뒤집혔소이다!" "주인의 행동으로 인해, 절정세가의 비밀은 유지되지 못하게 되었소이다!" "대체 어쩌자는 말이오?" 네 사람은 일제히 복면을 벗었다. 이들은 바로 변황사천의 주인들이었다. 전노(錢老) 천금성자(天金聖者), 철노(鐵老) 천황장인(天荒匠人), 불노(佛老) 천룡달뢰(天龍達賴), 혈노(血老) 혈무흔(血無痕). 네 사람의 머리는 완전한 백발이었다. 이들은 단리궁을 기다리며 절정세가를 일으켰는데, 그간의 고뇌로 인해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아니, 이들은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급작스런 소동으로 인해 가슴을 졸였기에 더욱 늙어 보이는 것이다. 절정세가는 이들의 꿈이며 염원이 아니던가? 이들의 공통점은 한 번의 처절한 패배를 겪었다는 것이고, 그 패배를 위대한 승리로 반전할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급박한 심정으로 단리궁을 찾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단리궁의 출관이 예정보다 조금 빨랐다는 것이고, 하나는 단리궁이 서두른다는 것이었다. － 절정세가는 강하나, 아직은 미숙하다. － 노련한 사냥꾼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다만 한 번의 완벽한 기회만을 노릴 뿐이다.' 젊은 주인 단리궁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 온 변황의 네 거인들. 하지만 그들은 마음 속의 말을 단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후후… 본가는 천하에 존재했던 그 어떤 방파와도 다른 방파가 되어야 하오." 단리궁은 팔짱을 끼고 웃었다. 그의 눈에서는 신광이 뿜어져 나왔으며, 전신에서는 말로는 형언하지 못할 진기가 자욱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대봉공은 한순간 단리궁의 기도에 압도당했다. '아아, 이미 산(山)이 되었다.' '너무나도 위대한 혼이 느껴진다.' '바로… 천년영웅(千年英雄)의 기도이다. 드디어 변황의 전설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다리던 보람이 있었다.' 사대봉공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리궁은 이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은 것이다. 단리궁은 폐부 가득 새벽 안개를 들이마시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본가의 원칙은… 만로(萬路)에서 절정(絶頂)!" 강인하고 웅장한 목소리이다. 그 소리로 인해 드넓은 청량호 가득 파문이 번져 나간다. "절정의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불굴(不屈)이오!" 단리궁은 강인하게 말한 다음, 소매를 흔들었다. 소맷자락 안에서 네 개의 누런 봉투가 퉁겨 나갔다. 첫 번째 봉투는 혈무흔의 손에 쥐어졌다. 두 번째 봉투는 천룡달뢰의 손에, 세 번째 봉투는 천금성자의 손에, 그리고 네 번째 봉투는 천황장인에게 쥐어졌다. <읽고 소각할 것!> 겉봉에는 그러한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이것이 무엇인지요?" "설마, 이미 모든 계략을 꾸미셨단 말씀이십니까? 변황사천의 원한을 해결하고, 절정세가의 전설을 이룩한 원대한 계획을……?" 네 노인은 흠칫 놀라며 자신들의 손에 쥐어진 봉투를 뜯었다. <천년밀가(千年密家)에 고수들을 잠입(潛入)시킬 것! 당세의 정황으로 보아 천년밀가는 역전(逆戰)의 일격을 가할 것에 틀림없음! 아래의 방법대로 잠입한다면 실수하지 않을 것임. 밀가에서 세력을 일으킬 때 함께 이동하기 바람!> 그것은 혈무흔에게 전해진 봉서 안의 글이었다. 그리고 천룡달뢰에게 전해진 봉서 안에는 더욱 가공할 내용이 적혀 있었다. <즉시 삼 위사와 더불어 숭산(嵩山)으로 떠나갈 것! 소림사(少林寺)가 목적지임. 머리를 깎은 이상, 다시 머리를 깎을 필요는 없을 것이외다.> 천금성자에게 전해진 글은 더욱 기괴했다. <절정세가의 입가(入家) 자격을 완화할 것! 절정세가가 마두집단인 듯, 천하에 소문나게 할 것! 필요하다면 막대한 자금을 사용해도 무방함.> 천금성자는 글을 보고 어리둥절해 한다. "이, 이렇게 되면… 우리들의 적이 즉시 우리들의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울 텐데! 그러면 비밀이라고는 없어지는데……?" 그는 어이없어하다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아아, 그럼… 바로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란 말인가?" 그는 무엇인가를 느낀 듯했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적의 세력을 일거에 격파할 가공할 저력(底力)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경악과 흥분이 엇갈린 표정을 지었다. 네 번째 밀지는 천황장인에게 전해졌다. 그 안에도 매우 묘한 주문이 들어 있었다. <십오 일 안에 하나의 검대(劍隊)를 만들 것! 이름은 절정척마(絶頂拓魔). 인원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나, 검대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내공 일 갑자 이상으로 한정해야 함.> 네 봉공이 글을 확인하고 경악하고 있을 때, 단리궁은 웃으며 걷기 시작했다. "그럼… 수고들 하시오!" 그리고 사대봉공의 입은 쩍쩍 벌어졌다. "가주, 어쩌잔 말이오?" "우리들은 가주가 연경성에 계심을 알고 가주를 초빙하기 위해 왔는데, 가주는 그냥 가시다니……?" "대체 무슨 꿍꿍이이시오?" "모를 일이군. 대체 저분의 뱃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단 말인가?" 네 노인은 단리궁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해 했다. 단리궁은 십여 보 걷다가 약간 멈추며 말했다. "별일 아니오. 후후, 하나의 그물(網)을 짜자는 것에 불과하오!" "그물이오?" 사대봉공은 일제히 외쳤고……. "훗훗… 그물질을 잘하기 위해서는 미리 떡밥을 던져 둘 필요가 있소. 후후, 고기 떼는 떡밥에 눈이 멀어 다가설 것이오!" 단리궁은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는 웃음 가운데 가공할 예기(銳氣)를 뿌리고 있었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敵)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이오." "아아……!" "으음……!" 사대봉공은 이제 숨을 죽이며 단리궁의 말을 경청했다. 단리궁의 눈은 샛별처럼 반짝거렸다. "현재의 정세로는 누가 마(魔)이고, 누가 정(正)인지 구분하기 힘드오. 하지만 우리들이 깨어난다면… 후후, 천하는 진창이 되고… 후후, 오랫동안 숨어 지내던 악마의 무리는… 하나하나 고개를 들게 될 것이오!" 단리궁은 미소지으며 가던 걸음을 계속 내딛었다. 그는 풀잎의 이슬을 밟으며 갈대의 길 사이로 사라져 갔으며, 새벽 안개가 그의 몸을 흐릿하게 감싸는 순간 유성이 흐르듯 그는 사 봉공의 망막에서 거의 순간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변황의 네 거인은 그가 무슨 신법을 사용해서 시야에서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무… 무서운 내공이다!" "아아, 그렇다. 저분은… 정녕 거대한 신공을 얻으신 것이다. 그러하기에 속전속결의 필승병법을 꾸미신 것이다!" "헛헛… 과거 우리는 용(龍)을 낚았다고 여겼는데… 헛헛, 이제 보니 용이 아니었소. 우리가 낚은 것은 바로… 하늘이었소!" "아아, 가주가 방금 시전한 은신술은 고금에서 가장 가공하다는 천둔지은술(天遁地隱術)이었소. 그분은 단 일 식(式)으로 자신의 무공수준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오!" 네 사람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단리궁의 일 처리방식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단리궁이 비록 절정의 신위를 보여 주었으나,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의 세력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하기에, 네 사람은 단리궁의 성취를 대견해 하는 가운데에도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주인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미완숙한 상태인데… 어이해, 성급하게…….' '상대는 오천여 명의 절정마두가 있다. 그리고 우리 측에는 단 오백여 명의 절세고수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주인 혼자 사천오백 명 정도의 고수를 상대해야 하는데……!' '적은 안개 속에 있는데 태연자약히 모습을 드러내시다니…….' '주인은 배짱에 있어 고금제일이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다. 주인의 나이와 경륜을 생각한다면……!' 네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벼운 한숨 소리를 내며 걸음을 내디디는데……. 팟－! "어엇! 내 허리띠가 언제 잘렸을까?" 동영제일고수 혈무흔이 갑자기 자지러졌다. 그의 허리띠가 툭 끊어지며 장포자락이 느슨해진 것이 아닌가? 그가 아연해 하는데, 천룡달뢰도 자지러진다. "으으, 누가 노납의 손목에 걸린 염주(念珠)를 갖고 갔단 말인가?" 그의 손목에 걸려 있던 철목염주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런… 노부의 애검(愛劍)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천황장인도 기겁을 했고, 천금성자 역시 자지러졌다. "흐으, 누가 노부의 산반(算盤)을 갖고 갔소?" 허리띠가 잘리고, 염주가 사라지고, 장검과 산반이 사라지고… 네 사람에게는 각기 하나씩의 신비한 일이 벌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 신비는 너무나도 쉽게 풀렸다. 갈대의 길 한가운데 염주와 장검, 그리고 산반이 놓여 있고 비급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비급 위에는 쪽지가 한 장 있는데……. <이제… 나를 믿을 수 있으리라 보오! 여기 비급 하나를 남기니, 오늘 안에 돌려 보고 태워 버리시오. 변황절기의 뿌리에 해당되는 상고절기인 이상, 쉽게 깨우칠 수 있을 것이오. 특히 천룡달뢰를 위해 하나의 내공심법을 첨부해 두오. 그것은 태음마가진결(太陰摩伽眞訣). 그것을 익힌다면 나로 인해 흐트러진 내공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바로 단리궁의 글이었다. "아아, 바로 가주의 솜씨였군!" "언제, 언제… 우리 네 사람의 옷을 자르고 물건을 갖고 갔는지……!" "아아, 그분은 정사(正邪) 흑백(黑白)의 절기는 물론이거니와 하오신투술(下午神偸術)마저 달통하시었다!" "그분은 위대한 성취를 이룩하셨다!" 네 사람의 표정은 그제서야 환하게 풀어졌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나를 부르시오! 내 짐작대로라면 내가 가는 날, 악마의 피로 축배(祝杯)를 들게 될 것이오. 그 때까지의 처리는 사대봉공에게 맡기겠소. 네 분은 수완가이니, 실수 없이 잘하리라 믿소. 그리고 막중대사가 있기 전에는 나를 찾지 마시오. 나는 향후 한 달, 천하를 주유할 예정이오. 나는 천하십지(天下十地)의 절대자(絶代者)들을 쫓아다니며 위대한 승부를 시작할 계획을 갖고 있소. 그들은 지하(地下)의 절대자들! 그들은 끌어들이거나, 죽여야 하는 자들이오! 그들은 암흑천하의 살아 있는 전설들이오. 세가에 들기를 거절한다면 죽게 될 것이고, 우리들과 힘을 합하기로 맹세한다면 능히 봉공들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오. 중원의 살아 있는 신화(神話)들, 암흑의 우상(偶像)들, 자객도(刺客道)의 전설(傳說)……. 그들은 이단의 율법을 지키며 배타적으로 살아왔소. 그들이 분열되었기에 천하가 어지러워진 것이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대중원(大中原)의 저력이오. 그 후 나는 돌아올 것이오. 그리고 본가는 천하를 상대로 대도전을 시작할 것이오.> 아아, 절정세가. 비밀리에 이루어진 절정세가의 가법은 가히 가공이었다. 그리고 단리궁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극한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지하(地下)의 절대자들(絶代者)들, 십지(十地)의 살아 있는 신화(神話)들, 암흑의 우상들, 죽이거나 거둬야 할 자들! 그들은 대체 어떠한 사람들일까? 단리궁이 구태여 그들을 찾아가려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단리궁의 글은 용사비등(龍蛇飛騰)한 달필이었다. 글은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결국 단리궁은 옥문관을 넘기 이전, 그 일을 결심했음에 틀림없었다. "주인은… 영원한 이단자(異端者)이시다!" "헛헛…그분으로 인해 고금에 다시 없는 풍운이 시작될 것이다!" 안개 가운데로 웃음소리가 흘렀다. 여명(黎明)이 타오르고, 청량호반 위로 안개가 걷히며 푸르른 호심이 선명히 드러나 보인다. 네 노인은 글을 보며 미소지었다. "역시… 대단한 고집쟁이시다." "후후… 위대한 영웅이시나, 체질적으로 영웅이 되시지는 못할 분이시다. 그러나… 이제 시작될 것이다. 천년영웅으로서 군림의 길을……!" "자, 어서 갑시다! 서둘러야 하오" "이제부터… 진짜 시작하는 것이오." 네 사람은 싱글싱글 웃으며 사라져 갔다. 그들은 이제야 단리궁을 완전히 믿게 된 것일까? 네 사람은 변황의 절대자들답게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갔다. "고맙소, 노인들." 갈대숲 안에서 두 줄기 시선이 묘한 빛을 뿌리기 시작한다. 단리궁, 그는 떠나지 않고 숲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노인들이 아니었다면 나의 오늘도 없었을 것이오. 그러하기에 훗날, 영광이 있다면… 모두 노인들의 것으로 돌려질 것이오. 기실, 나란 놈은 영웅노릇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쑥맥일 뿐이라오!" 단리궁의 입가에는 싱긋 미소가 매달렸다. "하여간… 질풍처럼 바빠져야 한다." 한 인간의 미소, 그리고 한 청년의 미소. 하여간 새벽은 왔다. 단리궁은 전 강호에 묘한 파문을 던질 네 가지의 일을 착수한 대영웅답지 않게 조금 큰 키를 휘청거리며 성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잡았던 고기는 모두 다 풀려 났고, 물가에는 주인을 잃은 죽간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악마(惡魔)의 밤은 깊어 가고 콰르르르－ 릉－! 뇌전(雷電)은 천둥을 몰고 천만대군(千萬大軍)의 기세로 서북(西北)의 준령(峻嶺)을 유린한다. 쏴아… 쏴아아아……! 버언－ 쩍－! 폭우가 내리며 사방은 비의 장막에 갇히기 시작했고, 유난히도 낮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번갯불이 흑궁(黑穹)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악마의 밤을 이룩한다. 뇌전과 우레로 유린되고 있는 깊은 밤. 기러기라도 날아 넘지 못할 단애(斷崖)의 암벽이 푸른 번개에 할퀴며 섬뜩한 빛을 뿜어 내곤 한다. 우르르－ 릉－ 콰앙－! 먹장구름은 유난히도 낮은 하늘에 걸려 있고, 뇌전과 더불어 천지개벽하는 천둥 소리가 요란하다. 자시(子時), 가장 깊은 어둠이 침잠되어 있다가 번갯불과 천둥 소리에 깜짝깜짝 깨어나곤 한다. 악마의 밤! 무엇인가 일어날 듯한 그러한 밤이었다. 거대한 성(城). 핏빛 돌로 이루어진 하나의 성이 서 있다. 혈무애(血霧崖) 정봉(頂峯), 마계(魔界)의 입구라는 전설이 서려 있던 악마의 대지. 성은 하나의 하늘이 되어 군림하고 있었다. 길이가 이십오 리에 달하는 성곽(城郭)이 단애를 따라 도열한 혈포(血袍)의 무사들처럼 위풍당당하게 건축되어 있다. 유난히도 요기(妖氣)가 자욱하고, 비바람이 강하게 불어닥쳐도 흐트러지지 않는 유령흑무(幽靈黑霧)가 일대에 자욱이 깔려 있다. 깊은 밤 깊은 곳. 언제부터인가 혈야등(血夜燈)이 밝혀져 자욱한 안개 사이에서 무시무시한 사광(邪光)을 폭사해 냈다. 거대한 핏빛 궁등. 그것은 대리석 아름드리 기둥 백여덟 개로 인해 떠받쳐져 있는 거대무비한 혈전(血殿)의 처마에 달린 악마의 등이었다. 천년마등(千年魔燈)! 사(死)의 율법(律法)을 관장한다는 가공할 등불이다. 무섭게 타오르는 악마의 등불, 그것은 바로 천 년을 두고도 꺼지지 않았다는 신화(神話)를 갖고 있는 마가의 상징이 아닌가! 그렇다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미광이 흐르고 있다. 대마전(大魔殿)의 깊은 곳. 모든 것이 강철로 되어 있는데 천장에는 용의 눈알만한 혈마령주(血魔靈珠) 한 알이 박혀 있었다. 스물거리는 악마의 빛이 원탁(圓卓) 위로 떨어져 내린다. 대마평의회(大魔評議會)! 암흑의 마왕(魔王)들이 일 년에 한 차례씩 모여 천하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마도의 신화적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곱 쌍의 시선(視線), 그리고 일곱 개의 좌석……. 언제부터인가 석상(石像)처럼 머물러 있는 칠 인이 있었다. 휘하에 이만(二萬)의 수하를 갖고 있지 못한다면, 감히 참가하지도 못한다는 가공할 악마의 제전. 이 자리에 참가한다는 것조차 흑도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영광이다. 죽음(死)과 피(鮮血)의 율법만 지킨다면 참가 자격이 있고, 천하를 정복할 야심가(野心家)라면 여기에 얼굴을 내밀 수 있다. 일곱 번째 자리에는 머리통이 유난히 크고 눈빛이 붉은 라마승 하나가 앉아 있다. 피로 염색한 듯 짙붉은 법포(法袍)를 걸친 체구가 당당한 홍의라마는 팔짱을 낀 채 탁자 위를 보고 있다. 그의 눈은 바로 불타오르는 태양(太陽). 이글거리는 두 눈에는 피의 야망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태양마안으로 밤을 밝히고 있는 홍포라마는 천축의 홍교태양가(紅敎太陽家)의 대교주(大敎主)가 되는 태양달뢰(太陽達賴)였다. 천축의 살아 있는 전설로 군림하는 태양달뢰, 그가 중원에 오다니……! 여섯 번째 자리에는 묘령의 사태(師太) 하나가 다리를 꼰 자세로 앉아 있다. 비구니(比丘尼)는 본시 정숙함을 근저로 삼는데, 분홍색 가사를 걸친 묘령의 사태는 음탕하고 야릇한 요기(妖氣)를 뿜어 내고 있었다. 입가에 볼우물을 떠올리는 모습이며, 살짝살짝 눈웃음치는 모습은 색정(色情)에 빠진 암캐와도 비슷했다. 가사는 반투명하다. 그로 인해 그녀의 속살은 환히 비추고 있었다. 젖가리개도 하지 않은 탓에 육봉(肉峰)의 도발적인 융기가 여실히 드러나 보이고, 사발만한 두 개의 젖덩어리 위에 하나의 앵두마냥 걸쳐 있는 까만 유실(乳實)이 들여다보인다. 옴폭 들어간 배꼽이며, 피둥피둥 살찐 기름진 허벅지 사이, 흔들거리는 해초의 지대……. 조금 바보스러워 보이는 백치미(白痴美)를 가진 요염한 사태. 그녀는 이미 나이 백오십에 달한 일대의 요니(妖尼)였다. 환희야니(歡喜夜尼) 설고(雪古). 밤의 모니(牟尼)라 불리우는 여마두. 그녀는 배교환희가(排敎歡喜家)의 대종사(大宗師)가 되는 여인이다. 나이 백오십인데도 서른 안쪽의 여인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매일 한 차례 동정남(童貞男)과 정사를 하며 채양보음술(採陽補陰術)을 펼치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순양지기(純陽之氣)로 자신의 내공을 늘이며 주안공(駐顔功)을 유지하는 희대의 악녀. 그녀는 제육좌(第六座)를 지키고 있었다. 다섯 번째 자리. 그 자리에는 금포를 걸친 육순노인 한 명이 손에 산반(算盤) 하나를 든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늘 웃는 인상이다. 그러나 그의 웃음 뒤에는 잔인한 칼날이 숨겨져 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천방마산자(天方魔算子). 그는 희대의 장사꾼이고 희대의 모사(謀士)였다. 그도 여기 자리잡고 있었다. 네 번째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은 와자국(瓦刺國)의 대족장(大族長)인 첩목특(帖木特)이었다. 그 자의 눈은 회색이었다. 이미 죽어버린 눈(死眼). 하지만 그 눈 뒤에는 천하정복의 야망(野望)이 숨겨져 있었다. 세 번째 자리. 그 자리에는 피비린내가 풍기는 피풍의(被風衣)로 상반신을 휘감고 있는 초로의 도객(刀客) 하나가 앉아 있었다. 체구가 작고 눈매가 매서운 그는 언제나 장도(長刀) 한자루를 가슴에 안고 있다. 그가 안고 있는 장도에서는 언제나 피비린내가 흐른다. 그 칼 아래, 이슬이 된 사람이 무려 칠천에 달한다. 잔검사랑(殘劍邪郞). 바로 부상신풍가(扶桑神風家)의 제일좌(第一座). 그는 유구국(琉球國)에 안주하고 있는 해왕(海王)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도 여기에 와 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자리에는 가장 당당하게 생긴 자가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관옥(冠玉) 같은 용모에 유난히도 푸른 눈(碧眼)이 두드러진 자이다. 나이는 서른 정도. 그의 입가에는 언제나 자신만만한 미소가 맴돌고 있다. 여유와 기품을 흘리는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고 가장 강한 자였다. 그가 머물러 있는 자리는 제이좌에 불과하나, 그 자리의 배열은 다분히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곳의 실질적인 종사(宗師)라고 할 수 있었다. 철대군주(錢大軍主). 그는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가장 완벽한 마공의 성취를 이룩했다는 자. 하지만 그의 진실된 무공수준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의 측근이라 하더라도 철대군주의 무공은 알지 못한다. 미끈하고 자신있는 모습, 뭇여인의 마음을 울릴 만한 영준함 모습이나… 그의 두 눈을 본다면 저도 모르게 전율감을 느끼리라. 푸르게 번쩍이는 두 눈에서는 가공할 피의 야망이 떠오르고 있었다. 철류흔(鐵流痕). 철왕대가(鐵王大家)의 대군주(大軍主)인 그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그리고… 제일좌(第一座). 그 자리를 점하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묘령의 여인이었다. 얼굴을 흑사(黑絲)로 가리고 있는 여인의 체향(體香)은 달콤하고 느낌이 부드러웠다. 또한 차가운 가운데, 숨어 있는 열정적인 분위기는 뇌쇄적이었다. 천마소종사(天魔少宗師). 그녀는 병석에 누운 천마대종사를 대신해 대마평의회(大魔評議會)을 주관하고 있었다. 제일좌… 그 자리는 구주(九州), 팔황(八荒), 육합(六合), 사해(四海)의 악마들 중 절대자로 군림하는 자들이 회동하는 이 자리를 주관하는 것이다. 피와 죽음의 습습함이 깊이 배어 있는 공포의 좌석이다. "중원마가(中原魔家)와 변황의 해외육가(海外六家)가 단결하기 어언 이 년(年)!" 천마소종사의 말이다. 차고 나직한 목소리, 그 가운데 묘한 매력이 스며 있다. 어렸을 때부터 무정(無情)의 수련을 받은 흔적이 목소리에 역력하다. 여인이기를 거부하고 청춘이기를 부정한 마도(魔道)의 젊은 여인. 그녀는 한 마리 나비라고 할 수 있었다. '너는… 역시 아름다워!' 철대군주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번진다. '너는… 내 것이야. 아직 밟지는 못했지만!' 가공할 사기(邪氣)를 품은 웃음이다. 면사마저 뚫어보는 듯한 시선. 그러한 시선은 거미줄보다 더한 답답함을 안겨 준다. 하지만 천마소종사에게는 이미 익숙한 시선인 듯 그녀는 끈적거리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천하칠가(天下七家)는 하나로 모였고, 십팔만 리(里)를 상대로 가업을 일으키기 시작했소이다!" "……." "……." 모두들 야망을 침묵에 감추고 있다. 절대자들, 이들은 이미 죽음보다 더한 침묵의 세월을 무수히 보내 오지 않았던가. 천마소종사의 목소리는 계속된다. "첫째, 천하칠가는 강호의 전통적인 세력을 상대로 암중 포섭을 하며 저력을 넓혔었소이다!" 당돌하고 야무진 목소리. 어떠한 남자라 하더라도 그러한 의지를 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결과, 구파일방과 남북(南北) 이십팔대명가(二十八大名家)에는 우리들의 손길이 뻗치게 되었고… 천하도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우리들의 이목(耳目)에 걸리게 안배되었소이다! 심지어 자금성(紫禁城) 내의 일도……!" 아아, 천하를 상대로 한 대도박이 아닌가? 천하인들이 모르는 사이, 이미 천하칠가의 힘은 백도세력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강호가 모르는 사이 피의 독버섯은 너무나도 거대하게 자라난 것이다. "둘째, 우리들은 영원한 숙적이던 천년밀가를 격파하는 기초작업을 완전히 성공시켰습니다!" 천년밀가(千年密家).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이미 전설이 된 절대의 가문이다. 또한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화를 갖고 있는 위대한 혈통의 가문이다. 한데, 그곳까지 마가의 손길이 뻗치다니……. "밀가의 편이었던 백팔 파(派)는 하나하나 밀가의 그늘에서 벗어났고, 밀가 사람을 위장한 우리 측 사람들이 도처에서 벌인 혈겁(血劫)으로 인해 밀가는 공적(公敵)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소이다!" "흠……?" "으음……!" 밀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 달라졌다. 천년밀가는 마도인들이 가장 겁을 내는 가문이다. 비록 세력이 조금은 위축되었다고 하나, 그들은 여전히 거인(巨人)의 가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는 철저히 교란되고 있었다. 이 일은 수 년에 걸쳐 벌어졌다.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천년밀가는 하나의 거대한 포위망 안으로 좁혀 들게 된 것이다. "밀가의 종주는 혈기(血氣) 넘치는 자외다. 그 자는 단리우(段里雨)! 그는 철혈폭풍검(鐵血暴風俠)이라 불리고 있소이다!" 여인의 손이 쳐들리자, 한 장의 종이가 원탁 위로 살며시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밀정이 알아낸 단리우에 대한 모든 기록이었다. <단리우(段里雨)! 나이, 약관(弱冠) 이십(二十). 천년마가를 궤멸시키는 것을 염원(念願)으로 삼고 있는 천년밀가의 최고고수. 그러나 웅지(雄志)에 비해 지혜(智慧)가 모자라는 자임. 대종손 단리궁(段里弓)이란 자가 파문당한 후, 천년밀가에는 암울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음. 단리우는 그 분위기를 깨기 위해 하부세력을 규합했음. 일컬어 전풍밀검단(電風密劍團). 그들의 총인원은 사만팔천(四萬八千). 그들은 단리우의 영도 아래 빛을 잃어 가는 밀가의 전통을 회복하려 함. 단리우는 밀가의 힘을 숭상하고 있음.> 중인이 쪽지를 다 봤을 때였다. "단리우란 자는 꾀가 없는 거인과 같소이다." "흠……!" "……!" "천 년의 밀가는 그 자의 대(代)에 이르러 궤멸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시작한 혈풍(血風)의 계(計)로 바뀔 때, 사실화될 것입니다!" 천마소종사의 음성이 대마평의회에 울려 퍼졌다. 순간, 절대자들의 호흡이 격해졌다. 잠풍과 혈풍! 그것은 천 년 사상 가장 극랄한 병법이다. 잠풍이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천하각지에 세력을 넓히는 것이고, 혈풍이란 밀가를 필두로 한 정파조직을 거의 일격에 섬멸해 버리고 일통무림을 이룩한다는 가공할 계획이다. 잠풍의 계획은 거의 다 성사되고, 혈풍의 계획 또한 시작의 그 순간을 위해 면밀하게 준비되는 상황이었다. 천마소종사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그 자는 대륙무림회(大陸武林會)가 벌어질 때, 쓰러지기로 안배되어 있소이다!" 대륙무림회! 그것은 또 무엇인가? 음모와 함께 악마의 밤은 깊어 간다. "그리고 오늘 긴급히 회의를 주최한 이유는 성공에 대한 평가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부상되는 제삼세력에 대한 대처를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제삼의 세력?" "대체 어떤 세력이?" 사람들이 약간 동요할 때였다. "보십시오. 이것입니다!" 흑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손이 또 한 번 떨쳐지며, 한 장의 양피(羊皮) 두루마리가 원탁으로 굴러 떨어진다. 쫘르르－ 륵－! 두루마리는 교묘한 내공 안배에 의해 활짝 펼쳐졌고, 그 위에 적힌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긴급 정보! 남칠성(南七省)의 상권(商權)에 도전한 하나의 세력이 있어 깊이 추적한 결과, 하나의 세력이 준동(蠢動)했음을 알게 되었음. 그리고 북육성(北六省) 일대의 낭인집단(浪人集團) 가운데 세상이 모르는 기재를 대거 끌어모아 정예고수로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단체가 있음을 알게 되어 추적한 결과, 역시 하나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음. 그들은 바로… 절정세가(絶頂世家)! 아직 그들의 수뇌부에 대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상부조직이 대강이북(大江以北) 어딘가에 건재하고 있다는 것이고, 아직 완전한 실체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임. 그들은 거대무비한 금력(金力)과 가공할 무력(武力), 그리고 절대적인 처세술을 사용하여 어마어마한 빠르기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음. 이러한 속도라면 백 일 안에 하나의 거대한 맹(盟)이 부상될 듯함. 대륙무림회(大陸武林會)를 개최하는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요망됨. 만에 하나, 절정세가 천년밀가와 연수(連手)한다면 잠풍(潛風)이 혈풍(血風)으로 바뀌기 이전에 변화가 생길 듯함! 그들이 완전히 일어서기 이전, 척살(擲殺)을 시작하는 것이 요망될 것으로 사려됨.> 중원대순찰(中原大巡察)이 보낸 밀지는 이 모임이 이루어지게 된 유일한 이유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혜성(彗星)입니다.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소이다." 천마소종사가 입술을 잘강잘강 씹으며 말하자……. "으음, 제삼세력이 나타날 줄이야!" "십 년간은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지 못할 상황인데……!" "클클… 싹은 어릴 때 잘라야지. 도전 가능한 방파라면, 모습이 완전해지기 이전에 뿌리를 잘라야 한다!" 차갑고 사악한 웃음소리 가운데, 제이좌에서 차디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작할 때요, 지금이 바로 천재일우의 기회요! 후후, 잠룡에서 혈풍의 꿈을 시작할……!" 철왕대가의 인물 철류흔(鐵流痕), 그는 팔짱을 낀 채 묘하게 웃고 있었다. 악마의 절대자로 부각되고 있는 젊은 거마(巨魔), 그의 웃음에는 거대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절정세가라는 생쥐들은… 후후, 환희야니(歡喜夜尼)가 맡아 처리하도록 하시오! 기왕이면… 포섭하시오." 이것은 회의에서의 발언이라기보다 명령이었다. 철류흔, 그는 이미 반 이상을 얻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세력은 중원마가의 힘을 능가했다. 중원마가는 그를 끌어들여 방조자로 삼으려 하다가 철류흔의 세력에 도리어 병탄당하게 된 것이다. "잔검사랑(殘劍邪郞)은 자금성(紫禁城)으로 가서 황군(皇軍)을 막는 일을 추진하고, 지옥혈마단(地獄血魔團)을 보름 안에 총소집해 악마의 바람을 천하에 이룩해야 하오!" "아아, 드디어……!" "으음, 위대한 결정이오!" "구파일방과 천년밀가는 물론, 황성(皇城)마저 유린될 절대의 마계가 드디어 시작되는 것인가? 푸하핫……! 사람들이 웃기 시작할 때, 천마소종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악마, 저 자는 바로 악마다! 이 순간 나는 중원인(中原人)이고 싶다. 그러나… 아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여인은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 그녀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저주(咀呪)라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만면에 미소를 드리운 채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류혼에게 고정되어 있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꼬옥 움켜쥐고 있었다. '저 자는… 나의 몸을 탐하고 있다. 그러나… 아니 된다. 저 자에게 유린되느니, 차라리 여자되기를 포기하겠다. 절대로 저 자의 더러운 품안에서 아파하는 한 마리 철새가 되지는 않겠다.' 천마소종사는 심한 번뇌(煩惱)와 고독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밤은 더 깊어 가고 있었다 비는 밤새 추적추적 퍼부었다. 마등(魔燈)의 불은 우막(雨幕)을 벌겋게 달구며 깜박거렸고, 대마전 일대에서는 극악한 사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서둘러라! 새벽이 되기 이전에 떠나야 한다!" 꽤 많은 무리들이 빗속을 치달리고 있었다. 빗속을 달리는데도 옷은 비에 거의 젖지 않을 정도로 잠우술(潛雨術)에 뛰어난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기이한 나막신을 신고, 유난히도 소매가 헐렁한 흑색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유난히도 체격이 작고 눈초리가 매서운 칠십이 인(人). 이들은 비가 많이 오는 곳에서 자라고 무공을 익혔다. 철저한 인자들. 이들의 몸에선 질식할 듯한 암울한 살기(煞氣)가 흘렀고 언제나 독기 서린 눈빛이 사위를 향해 던져지고 있었다. 검을 등에 메지 않고 허리에 차고 있는 기이한 내리닫이 옷차림의 칠십이 인은 지극히 빠른 속도로 한 곳에 모여들었다. 신풍(神風). 아아, 이들은 바로 동영제일(東瀛第一)의 자객집단(刺客集團)이라는 신풍칠십이인자(神風七十二忍者)가 아닌가! 차디차고 독랄한 눈빛을 가진 자들. 이들은 당조(唐朝) 때에 부상(扶桑)으로 전해져서 대대로 발전한 나머지 기이한 장안법(障眼法)으로 발달한 인술(忍術)을 터득하고 있다. 부상신풍가(扶桑神風家)의 무리인 이들은 일본 막부에 저항하는 자들이고… 언젠가는 막부의 장군가(將軍家)를 섬멸하리라 맹세하며 세력과 군자금을 모으는 상태였다. "서둘러라! 황도(皇都)는 꽤 멀다." 검은 그림자, 그는 팔짱을 낀 채 빗속에 서 있었다. 잔검사랑(殘劍邪郞)이라 불리는 그는 음사한 눈빛을 허공에 던지며 키득키득 웃었다. "큿큿… 우리들을 왜인(倭人)이라고 무시하던 중원천하는… 큿큿, 우리들로 인해 발칵 뒤집혀지리라!" 잔폭스러운 목소리이다. 인간의 이성보다는 맹수의 본능이 스며 있고, 욕망을 위해서는 무엇이고 가리지 않을 집념의 무사혼이 깃들여 있다. 스스스－ 슷－! 인자들은 일제히 한 장소로 모여들었다. 가히 질풍번개! 부상신풍가의 무명은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잔검사랑은 수하들을 앞에 불러 놓고 무엇인가를 일본어로 지시하기 시작한다. 빗속, 그는 황금색 우산(雨傘)을 받쳐 든 거한(巨漢) 앞에 서 있었다. 마치 황제(皇帝)처럼 거만하게……. "모방만 잘하지, 창조력은 없는 자들이다!" 바로 철류흔(鐵流痕). 그는 팔짱을 낀 채 잔검사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지만 나의 시대(時代)를 이룩하는 데에는 크게 쓰일 자들이다!" "천하는 이제 알게 되리라, 나의 원대한 야망을! 훗훗……!" 그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시뻘건 그림자 하나가 철류흔 곁으로 다가섰다. 혈포를 걸친 노라마 태양달뢰(太陽達賴). 그는 해외육가 고수 중 세 번째로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철류흔을 천하대천자(天下大天子)로 섬기리라 맹세한 바 있었다. 이유는 하나. 철류흔의 악마성(惡魔性)에 대해 누구라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저 눈은 악마의 눈이다! 아미타불……! － 저러한 눈의 임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천하의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 기왕 받아들일 운명이라면 제일 먼저 받아들이자! 태양달뢰는 철류흔과 동배라기보다 아랫사람에 가까웠다. 하여간, 그는 다가서며 조용히 합장한다. "대군주(大軍主), 환희야니(歡喜夜尼)가 수하들과 함께 떠나갔음을 알리러 왔소이다!" 모든 사람은 한어를 쓴다. 변황의 절대자들은 중원을 통치하기 위해 한어를 숙달시킨 것이다. "후후…그 늙은 암캐는 매사를 용의주도하게 잘 처리할 것이오!" 철류흔은 이미 거산(巨山)이었다. 그의 가공할 기도는 타인을 압도하고 남았다. 태양달뢰 또한 가공할 마공을 지니고 있으나, 철류흔의 마공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환희야니는 능히 해낼 것입니다. 남자만 밝히지 않는다면… 그러나 상대를 절대 간과해서는 아니 됩니다!" "절정세가 말인가?" "예, 대군주!" "후후… 그들은 어린 싹에 불과하다. 후후, 그 따위 세력으로 인해 시끄러워질 정도로… 우리의 기반이 약하지는 않다." "으음……!" "물론 예외라는 것은 있을 수 있겠으나,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실 당세에 있어 우리의 적이 될 만한 조직은 단 둘에 불과하다." "둘이오?" "첫째는 황실(皇室)의 금의위(錦衣衛)!" "아……." "둘째는 머지않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누울 고집스러운 무리들!" "고집스러운 무리들이오?" "밀가(密家)!" 철류흔은 팔짱을 더욱 세게 낀다. 그는 사악한 웃음을 입가에 번지게 하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회유와 타협의 법칙을 알아야만 했다. 후후, 그것을 알았다면 이미 중원은 그들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버언－ 쩍－! 철류흔의 눈빛은 더욱 가공해졌다. 쌍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은 태양달뢰도 감히 마주하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순간, 삼라만상을 불살라 버릴 듯하던 눈빛은 어느 새 담담한 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깊이를 모를 정도로 가라앉은 그의 눈이 여전히 전율스러운 것또한 사실이었다. "하여간, 대륙무림회(大陸武林會) 준비나 잘하게나." 그의 몸 안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마공이 깃들여 있었다. 철류흔은 수하들이 반역할까 두려워, 수하들 앞에서는 절기를 시전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공 비밀이 수하들에게 노출될까 두려워,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데에서만 연공을 했다. 때문에 그의 무공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그 자신 외엔 아무도 없었다. 쏴아아… 쏴아아……! 비가 유난히도 드세게 뿌린다. "좋아, 너의 모습은 언제 봐도 좋아. 후후, 너의 모습은 나의 차가운 피를 끓게 한다." 철류흔은 천천히 시선을 한 곳으로 돌렸다. 비바람에 흩날리는 도화림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석루(石樓) 하나가 서 있다. 철류흔의 시선은 석루의 창에 작살처럼 꽂혀 들어갔다. 그 곳, 창을 살짝 열어 놓고 백여 장 밖에 있는 철류흔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얼굴을 흑사(黑絲)로 가린 미인, 그녀는 철류흔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지자 얼른 주먹을 거머쥐었다. '뱀 같은 시선이다. 으으, 저 자의 시선이 내 몸에 닿을 때마다 나의 피부는 소름이 돋는다.' 여인은 지독한 혐오감을 느끼는 듯 몸을 오싹 떨었다. '철류흔, 너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다. 너는 인간의 마음마저 네 마음대로 지배하려 한다.' 여인의 어깨가 흔들린다. 철류흔은 야릇하게 웃었다. "계집이란… 훗훗, 한 번 밟는 것으로 정복할 수 있지. 훗훗…!" 철류혼의 웃음은 바로 악마의 웃음이었다. 마도의 주인인 천마소종사(天魔少宗師)마저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공포스런 악마의 웃음. '으으, 악마! 너의 시선은… 저주(咀呪)다!' 천마소종사는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곧 여명(黎明)이 다가서리라. 이 날은 매우 의미 있는 날이었다. 오랫동안 저력을 길렀던 천하칠가(天下七家)가 천하를 상대로 하나의 도박을 하기 시작하는 날이기에……! 밤 사이 천 마리 전서구(傳書鳩)가 떴고, 밤 사이 이만여 명이 강호로 떠나갔다. "아아……!" 천마소종사는 야릇한 숨소리를 내며 창을 닫아 버렸다. '악마의 시선은 싫다. 나는 그런 시선 가운데 살고 싶지 않다. 아름답고 순수한 시선을 받고 싶다.' 그녀의 냉염함이 어슴프레 타오르는 새벽 가운데 한결 돋보인다. 지금, 그녀는 누군가의 이름을 낮게 부르고 있다. "형(兄), 이런 날이면 형을 보고 싶습니다!" 형이라니……? 천마소종사는 여장 남자라도 된단 말인가? 그녀가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 * * 같은 날, 같은 밤. 노인 하나는 울금향(鬱金香)이 유난히도 많이 피어 있는 화원(花園)에서 전도(箭刀)를 들고 가위질을 하고 있다. 사작… 사각……! 전도가 흔들릴 때마다 병든 잎이 잘려진다. 다 늙어 죽게 된 노인에게는 지독한 고집과 완고, 절대로 굽히지 않을 가공할 의지가 있었다. 편협적일망정 그것은 위대했다. 노인의 눈에서는 패혼(覇魂)이 흐르고 있었다. 사각……! 노인은 전도로 꽃송이 하나를 잘라 버린다. "벌레 먹은 것은… 가차없이 잘라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한데, 어이해 대지(大地)는 자꾸만 벌레 먹은 꽃을 피운단 말인가?" 노인은 병든 울금향 하나를 쳐들었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다. "묘한군. 이놈은… 바로 그 놈 같군! 그 무정(無情)한 궁(弓)이라는 놈 같지 않은가? 병들었으나… 가장 아름다운 것이!" 노인은 낮게 중얼거리다가 시선을 슬쩍 틀었다. 비 오는 화원 한복판에는 체구가 당당한 청년 하나가 포권(袍拳)한 채 서 있었다. 부동의 자세로 지극히 오랫동안 서 있는 청년. 그는 철포(鐵袍)로 몸을 휘감았고 거검(巨劍) 하나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우(雨), 네 생각은 어떠냐?" 노인이 말하자……. "저는 믿습니다, 형이 올 것을!" 우라고 불린 청년은 입을 악물었다. 그에게도 거대한 고집은 있는 듯했다. "후후… 틀려 먹은 세상이다. 후후, 어찌 되었든 간에 세상은 틀려 먹었다. 뛰어난 자는 질시를 받아야 하고… 후후, 정녕 가문을 지켜야 할 놈은 문제아가 되어 도망가고… 후후, 시세를 모르는 백도인들은 본가가 공적(公敵)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고! 고약한 것들……!" 노인의 눈빛은 더욱 가공해졌다. 뿌려대는 빗줄기 사이로 노인의 고집스러운 인상은 더욱 굳어 보인다. "하여간 하기로 하자. 그렇게……!" "결국… 대출군(大出軍)입니까?" 우는 긴장한다. "그렇다!"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위험하다. 어딘지 모르게 함정인 듯하다. 하지만 이번의 기회야말로 본가가 명예를 회복할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으음……!" "네게 사만오천(四萬五千)을 딸려 주겠다. 그 중 반이 죽어도 좋다. 잃어 버린 명예만 찾을 수 있다면!" 쏴아아… 쏴아아……! 비는 더욱 요란스럽게 뿌려진다. '만에 하나, 형이 내 위치라면… 단 하나도 희생하지 않을 신산귀계(神算鬼計)를 낼 텐데.' 우라는 청년의 표정은 우울해졌다. 바로 그 때였다. "우(雨), 그런데 그 소식 들어 봤느냐?" "무슨 소식이오?" "제삼세력(第三勢力) 말이다!" "제삼세력이오……?" "클클… 네놈이 모자라는 재주에 무공수준만 높이느라고 연공에 빠져 강호소식은 들을 기회가 없었구나. 클클, 또 하나의 세가(世家)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또 하나의 세가요?" "바로 절정세가(絶頂世家)다!" "아아……!" "놈들은 위대하게 시작하고 있다. 놈들은 본가가 하고자 하는 그런 방법으로 시작하고 있다. 어쩐지 천하칠가(天下七家)나, 대륙무림회(大陸武林會)보다… 그들이 걱정스럽다!" 비는 억수로 퍼붓고 결국, 뇌전(雷電)이 작살처럼 내리꽂혔다. 우르르－ 릉－ 콰앙－! 우레 소리, 비가 퍼붓는 소리……. "신중히 생각해서 해라. 그리고 이 일을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기회로 삼아라. 이 일은 가문의 흥망성쇠가 걸린 일이다. 이 일이 실패한다면… 본가는 현판(懸板)을 떼어야 할 것이다!"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간다. 고집과 완고함으로 천 년을 지켜 오다가 차츰차츰 무너져가는 중원제일의 무사가문. 이들은 하나의 비장의 패를 꺼내 든 듯했다. － 실패한다면… 현판을 내려야 한다! 폭풍지대(暴風地帶) 세우(細雨) 내리는 하북(河北)의 길을 따라 죽립을 쓴 흑포인 하나가 축지성촌(縮地成寸)보다도 빠르다는 어기비행(馭氣飛行)으로 신형을 폭사시키고 있다. 그는 혜성이 허공을 가로긋듯이 비를 뚫고 치솟아 올랐다. "제일 먼저, 암흑(暗黑)의 우상(偶像)이라 불리는 자를 찾아야 한다. 지극히 배타적이고 독랄한 자. 후후, 그는 칠십 년간 강호출입을 하지 않았다." 츠으으－ 읏－! 흑포인은 공력을 배가하며 신형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 정도라면 세가의 호법좌(護法座)에 오를 만하다." 흑선이 그어지듯, 흑포인은 가공할 빠르기로 빗속으로 사라져 간다. 검은 그림자는 마치 환상처럼 사라져 갔고, 남아 있는 것은 허무(虛無), 그리고 가는 빗줄기뿐이었다. * * * 철황정(鐵皇頂). 깎아지른 천 장 절벽이 하나의 거부(拒斧)가 하늘을 향해 날을 곤두세운 형상으로 서 있다. 아무도 날아들지 못한다는 천야만야의 벼랑 위에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석옥(石屋)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세워진 지 오래 된 듯 다 무너져 가는 석옥 주변에는 해골이 널려 있었다. 날이 궂거나, 비가 오면 인광이 푸릇푸릇하게 일어나 가공할 사기(邪氣)를 자욱하게 뿌린다.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는 사라졌다. 새벽이다. 하늘 한구석은 이미 여명으로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새벽의 청신함, 특히 비가 그친 다음의 새벽은 여느 새벽보다 환하게 깨어나는 법이다. 그러나 이 곳 철황정의 하늘은 짙은 마기로 인해 울울하기 그지없었다. 깡마른 노인, 그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몸에 걸치고 있는 통에 누더기 걸레가 되어 버린 백포(白袍)자락을 걸친 채 정좌하고 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외부출입을 하지 않은 듯, 문에는 거미줄이 뒤덮였고 바닥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노인의 몸 주위에는 노인이 식량으로 삼고 살아온 황정(黃情)이며, 하수오(何首烏) 뿌리가 널려 있다. 그리고 한 권의 고서(古書). <암흑천황경(暗黑天皇經)> 낡디낡은 고서이고, 글자는 잘 쓰이지 않은 전서(篆書)였다. 노인은 이글이글 타는 악마의 눈으로 암흑천황경의 한 부분을 바라봤다. <암흑천계(暗黑天界)의 대마법(大魔法)을 터득하는 자, 천년불괴지체(千年不壞之體)에 도달하라!> <암흑천계를 여는 자, 어둠의 제황(帝皇)이 될지니… 그의 쌍수(雙手) 아래 천하가 피에 씻기리라! 혈하무한력(血霞無限力), 천마비파수(天魔琵琶手), 무극마라추(無極魔羅鎚)…….> 하나하나가 가공전율할 악마의 무공들이다. 그 중 한 가지만 익혀도 일세를 풍미하는 거마(巨魔)가 될 수 있는 마공 중의 마공이었다. "벌써 칠십 년을 이 비급과 더불어 생활했다. 크크……!" 노인의 눈에서는 벽색(碧色)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노부는 암흑제황(暗黑帝皇)이 되리라. 크크, 그 경지는 바로 불사신(不死身)의 경지이다!" 휘리리－ 링－! 사무(死霧)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먹물같이 검은 기류가 뭉쿨뭉클 흘러나가는 가운데, 흑오석(黑烏石)의 벽이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흑천야황, 그는 하나의 전설(傳說)이다. 과거, 마도천하에는 십대마류(十大魔流)가 있었다. 천하마가(天下魔家)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성적인 마도판도를 유지했던 십대세력. 혈사류(血死流), 적신류(赤身流), 음혼류(陰魂流), 혈마류(血魔流), 단천류(斷天流), 백독류(百毒流), 고루마류(古陋魔流), 파천황류(破天荒流), 대천마류(大天魔流), 암흑류(暗黑流). 이들은 천년마가와는 달리 극소수로 이루어진 방파이다. 이들은 천하를 장악하자는데 뜻을 두지 않았고, 이들은 독자적인 마공을 완성하는데 문파의 목표를 두었다. 십대마류의 마공은 하나하나 이단(異端)이고, 금단(禁端)이었다. 이들의 마공은 시전하기만 하면 상대를 필사시키는 절대의 마공이고, 한번 시전되면 거두어지지 않는 절정의 마공이었다. 백여 년 전, 십대마류는 하나의 끈질긴 집단에 의해 도전을 받아야 했다. 죽어도 죽어도 물러나지 않는 자들, 몸이 뭉그러지는 아픔 속에서도 웃으며 죽어 간 자들……. 베고, 또 베고… 쓰러뜨리고, 또 쓰러뜨려도 악착같이 도전했던 하나의 혈통(血統)이 있었다. 바로 단리세가의 무사들! 이들은 천하의 모든 마공을 멸살시킨다는 기치 아래, 백 년에 걸쳐 십대마류에 도전했다. 결국 십대마류의 종사(宗師)들은 모든 수하를 잃고 참살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흑천야황(黑天夜皇) 풍사(風邪). 십대마류에서 가장 강했던 인물이다. 그는 절정세가의 삼십일대 가주에게 패해 거의 모든 마공을 잃고 도주했다.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 풍사(風邪).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철황정(鐵皇頂) 위에 버젓이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사계(四季)를 가리지 않고서 마무(魔霧)가 퍼져 있고, 무시무시한 한기(寒氣)가 골수(骨髓)를 얼려 버리는 유형의 땅. 흑천야황 풍사는 천년밀가에 대한 복수심만을 갖고 이 곳에서 한 갑자(甲子)와 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마침내 염원하던 마도무공을 완벽한 경지로 이끄는 데 성공한 것이다. 버언－ 쩍－! 그의 두 눈에서는 적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이제… 천하의 그 누구가 노부를 이기겠는가? 크크……!" 풍사는 거칠게 웃어제꼈다. 석옥이 무너질 듯 흔들렸고, 짙은 사기에 대지가 얼어 버릴 지경이었다. "먼저, 그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자들을 찾아가리라. 그 자들을 송두리째 없애 버린 다음, 천하를 짓밟으리라. 암흑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리라!" 풍사의 눈에선 욕념의 불길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여운을 채 맺기 전, 너무나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벽을 뚫고 그의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칠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낡아빠진 비급 한 권을 갖고 허송(虛送)한 멍청한 노인이 이제는 과대망상증에 빠졌군! 쯧쯧……!" 묘한 비웃음소리,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풍사의 귀에는 뇌성벽력과도 같은 음성이었다. "어, 어어? 누가 노부가 펼친 기문진을 뚫고… 여기까지……?" 풍사의 입이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딱 벌어지는데……. "훗훗… 노인이 칠십 년 동안 익힌 암흑천황경은 천하무공 서열로 따질 때 이십사 위(位)에 불과하다. 물론, 새외변황에서 천 년 사이 새롭게 만들어진 무공까지 쳐서 판가름한다면… 서열은 이십사 위에서 백삼십 위로 떨어진다!" 대체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일까? 풍사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다. 풍사는 마도천이통(魔道天耳通)을 발휘하여 백 장 이내를 살폈으나 전혀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대체 누가 그의 이목을 속이고 다가섰단 말인가? 풍사의 낡은 옷자락이 땀으로 인해 흠뻑 젖었다. "누… 누구냐? 누가 감히 노부를 비웃느냐?" 풍사의 옷자락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그리고 한순간, 그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쌍장을 마구 흔들어댔다. 우르르르－ 릉－ 콰앙－!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시커먼 기류가 뭉클뭉클 퍼져 나갔다. 십 성의 내공진기가 실린 흑천마장(黑天魔掌)! 먹물 같은 기류는 뇌전으로 화해 그대로 석옥의 벽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쾅－! 뇌성벽력 치는 소리와 함께 석옥의 동쪽 벽이 완전히 무너진다. 자욱이 피어 오르는 먼지. 돌덩이가 너무나도 고운 모래가 되어 사방으로 부서져 내린다. 그러나 비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후후… 이제는 발광(發光)까지! 쯧쯧, 휘하제자도 없는 외톨이 처지에 거처하는 집마저 때려부수다니……!" 목소리는 이제 허공에서 들려 왔다. "빠드득－ 네놈이 감히 노부를 희롱하다니……!" 풍사노인의 얼굴은 대춧빛으로 붉어졌다. 그는 두 손을 한데 합하며 하나의 심결을 외웠다. '암흑천황마강(暗黑天皇魔剛)으로 이십 장 안을 초토화시킨다면, 네놈이 귀신이라 하더라도 타 죽고 만다.' 치리－ 릿－ 치릿－! 흑천야황의 몸에서는 오색(五色)의 마광(魔光)이 뭉클뭉클 일어났다. 혈하(血霞), 금하(金霞), 을목하(乙木霞), 경금하(庚金霞), 개토하(開土霞). 다섯 줄기의 절대마기가 일순 한 줄기로 합해지는 가운데, 암흑의 전설이라 불리는 흑천야황 풍사의 손이 본래 크기에 비해 다섯 배 크기로 부풀어올랐다. 우두둑－ 뚝－! 근골이 어긋나는 듯 역겨운 소리가 들리더니, 장심에서 오색의 환(環)이 현란한 자태를 드러냈다. 진원지기가 오색의 고리로 무형에서 유형으로 변하며, 장심을 통해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뻗어 나온다. 일순 오색환은 칙칙한 검은색으로 변하였고, 부챗살이 뻗어 나가듯 사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앙－! 번천지복의 굉음이 일며, 가공무비한 잠력이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사방육합(四方六合)을 폭풍처럼 휩쓸기 시작한다. 열(熱) 가운데 극한(極寒)이 있고, 독(毒) 가운데 독(毒)이 숨어 있는 악마의 강기. 수천 자루의 검은 도끼가 일제히 휘둘러지는 듯한 가운데, 사방 이십 장 안이 완전히 바스러졌다. 쩌어… 억… 쩍……! 석옥은 일순간에 붕괴되었고, 거석(巨石) 십여 개가 고운 모래로 무너져 버린다. 가공할 마공진기는 이십여 장 반경 안을 완전히 뭉그러뜨리고도 힘이 남아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무(無)! 일대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흑천야황 풍사는 그제서야 사방을 쓰윽 둘러본 다음 피식 웃었다. "젊은 도깨비 놈이… 크크, 진짜 악마보다 무서운 노부를 희롱하려 하다가 황천으로 떠나 버리는군!"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고……. "하지만 놈의 말도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노부가 칠십 년 몸 바쳐 헌신해 이룩한 암흑천황경은 마공인지라, 정종신공에 비해 심오함이 적다. 속성하는 데에는 장점이 있으나, 위력이 무한정 뻗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정종무공만 못하다! 강한 것은 사실이나, 극강은 되지 못한다!" 흑천야황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놈은 어떤 놈이었을까? 노부도 모르게 잠재되었던 마성이 폭발해 혼신공력을 쓰고 말았다. 아아, 정신이 맑은 상태였다면 잡아서 노부를 희롱한 자초지종을 캐물어 보았을 텐데!" 풍사노인은 못내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풍산, 그는 자신이 이룩한 마공의 성취에 남다른 자부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상대가 누구였던 혼신의 내공이 실린 일 장 아래 살아남을 리 없다고 여겼다. 폐석 덩어리로 화해 버린 석옥. 그의 눈길이 지난 칠십 년을 보낸 잔재 위를 스치고 지나갈 바로 그 때였다. "아직도 늦은 것은 아니다, 노마!" 허공에서 싱싱한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어어어, 너… 너는……?" 흑천야황은 그 목소리에 자지러지며 허공을 바라봤다. 허공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으으, 대체 어디서 들려 오는 목소리란 말인가? 인간이라면 노부의 이목을 숨기고 돌아다닐 수 없는데…….' 풍사노인의 얼굴빛은 밀랍처럼 희어졌다. 무사의 길에 든 지 어언 이백 년이다. 그 사이 겪은 싸움이 천여 번, 죽음의 고비만 해도 수백 번 넘긴 암흑의 전설. 그는 난생 처음이라 할 정도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누… 누구냐?" 풍사는 다시 합장을 하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풍사노인은 천시지청(天視地聽)을 발휘해 삼 리 안의 모든 것을 살폈으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누… 누구냐? 어떤 존재냐?" 흑천야황은 전율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암울 가운데 사로잡히고 있었다. 사위는 철저한 공허 가운데 있다. 백 장 안에 지는 낙엽 소리를 듣고, 십 리 밖을 기어가는 개미의 더듬이를 바라볼 수 있는 절대의 청력과 안력을 지닌 흑천야황이나… 그를 찾아온 신비한 목소리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적요! 질식할 듯한 침묵의 공간은 그를 더욱 당혹과 절박함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으며,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가일층 증폭시켰다. 그리고 한순간, 암울해진 동공이 격하게 요동을 친다. '설마, 전설로만 알려지고 있는 허무잠은공(虛無潛隱功)의 주인이 나타났단 말인가? 호흡 소리를 대기에 숨기고, 미광(微光) 가운데 몸의 형상을 감춰 버린다는 절대절정의 은잠술!' 흑천야황은 하나의 전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둠의 전설이고, 십대마류 사람들이 꿈에서도 찾고자 했던 위대한 꿈의 신화였다. "그대는… 뉘시오? 어이해, 십대마류의 천년종사가 시전하는 허무잠은공을 펼치시오?" 흑천야황의 목소리는 보다 진지했다. 불현듯 뇌리를 스친 전설 때문이었을까? 풍사의 눈에는 존모의 빛마저 어려 있었다. "이유는 내가… 천년종사(千年宗師)이기 때문이지." 바로 그 때였다. 츠으으－ 읏－ 츳－! 허공에서부터 뿌연 그림자 하나가 흘러내리는 듯하더니, 펄럭거리는 흑포(黑袍)에 기우듬히 쓴 죽립으로 암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신비인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아는 것이 많군. 그 점에서는 쓸 만한 데가 있군!"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듯이, 흑의괴인은 너무나도 갑자기 모습을 나타냈다. 흑의인이 돌연 나타나자, 풍사는 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흑의인에게는 어떠한 기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자연과 하나로 융화된 듯, 허허로운 가운데 신비한 기도가 풍겨 나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절정의 고수자만이 느낄수 있는 그런 절세적인 기운이었던 것이다. 풍사는 또 한 차례 뒤로 물러나야 했다. '무, 무서운 자다. 당세강호에 이러한 자가 있다니… 으으, 이 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누구도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흑천야황의 눈에서 강한 적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자기 이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전설상의 노마. 그는 제자가 자신을 배반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진전을 제자에게마저 전하지 않은 괴팍한 자였다. 결국 그러한 비밀유지로 인해 그가 이끌던 십대마류는 철저히 붕괴되고 말았다. 과거, 그가 자신의 진전을 휘하제자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했었다면 십대마류는 중원마가 이상으로 가공할 세력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바람… 바람(風)이 다가선다. 철황정 위는 한 줄기 삭풍에 휘어감겼고, 사위에서부터 검은 안개가 흘러들며 흑의괴인의 몸 주위에 장막(帳幕)이 되어 펼쳐졌다. 그는 물끄러미 흑천야황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턱의 선이 유난히도 아름답다. 본시 아름다움이란 유약한 데에서 오기 쉬운데, 그의 아름다움은 이상하게도 차갑고 강인한 데에서 나타났다. 절정뇌쇄미(絶頂惱殺美)랄까? 그에게는 허물어지지 않는 신기(神氣)가 내재되어 있었다. "훗훗… 나는 바쁜 사람이지. 천하를 주유하며 강호의 모든 절정을 찾아다녀야 하니까!" "으음, 모든 절정?" "훗훗… 진짜 강한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무슨 뜻이냐?" "세력에 연연하지 않고 황금(黃金)에 연연하지 않은 무공귀신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후후, 그들의 고집과 독선(獨善)을 존경한다고 할까!" "……?" 흑천야황의 얼굴은 참혹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훗훗… 그 이유는 간단하다. 후후, 그 이유는 고집과 독선이 바로 나의 개성이기 때문이다." 웃는 흑의인, 그는 나이 이제 약관 정도에 불과한 미남자였다. 아주 아름다운 가운데 지극한 냉악을 품고 있고, 매력적인 웃음 가운데 천살성의 살기를 함께 갖고 있는 자. 그는 바로 단리궁이었다. 그는 세가의 축성(築城)에도 개입하지 않을 정도인데, 천만 뜻밖에도 강호사(江湖史)에는 이미 죽은 자로 알려진 전대의 노마두를 찾아온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미친 자들을 좋아한다!" "……." "어떠한 것에든 미친 자! 후후, 그것이 검(劍)이든 살인(殺人)이든 황금(黃金)이든 여인(女人)이든… 단 하나의 길에 미친 자들을 나는 사랑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와 비슷하기에……!" "그… 그럼 그대는 무엇에 미쳤는가?" "나는 세월(歲月)에 미쳤다!" "세… 세월?" "피와 죽음(死)! 그리고 복수의 윤회!" 단리궁의 말은 단도직입적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흑천야황 풍사의 표정이 기괴하게 달라졌다. '아아, 천하에… 이런 위대한 승부사가 있었다니…….' 풍사는 저도 모르게 내공을 흩트리고 있었다. 그는 변황사천주보다도 일 배분(排分) 위의 인물이다. 그는 언젠가는 강호를 한 번 정복할 요량으로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칠십 년 폐관에 접어들었다. 그는 흑도마공(黑道魔功)에 미친 자였다. 그는 천하의 흑도마공은 가리지 않고 수집했고, 그것을 익히느라 지난 칠십 년을 보냈다. 흑천야황 풍사, 그는 앉은 상태이고 단리궁은 선 상태이다. 해서, 풍사는 단리궁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선이 강한 턱과 우뚝한 콧날, 유난히도 깊은 뜻과 혜지가 담긴 두 눈이 마음을 뒤흔든다. 인간의 매력, 그것은 남녀 간의 매력 이전의 매력이고… 상위자와 하위자의 충성과 복종관계와는 다른 인간적인 끌림이다. "피, 피와 죽음에 미친 그대는… 누구요?" 풍사는 조심조심 물었고……. "훗훗… 절정서생(絶頂書生)!" 단리궁은 입가에 싱긋 웃음을 매달았다. 그의 웃음은 하나의 예술과도 같았다. "천하의 모든 절정을 찾아다니는 미친 승부사. 후후, 그대 풍사에게는 단 둘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단 둘?" "나를 친구(親舊)로 삼든가, 나를 적(敵)으로 삼든가! 후후, 그대에게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이미… 절정이니까!" 단리궁은 방어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풍사는 여러 차례 그를 엄습할 순간을 맞았으나, 번번이 흘리고 말았다. 인간의 고독,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절대자의 고독이다. 승부의 길을 중지해야만 하고, 원대한 야망을 잃어 버려야 한다는 철저한 좌절… 절대자의 고독. 풍사(風邪), 암흑의 우상으로 불리던 자. 그의 입가 표정이 아주 기괴하게 달라졌다. "그대는… 멋진 승부사요." "훗훗……!" "그리고… 그대는 미치광이요. 노부가 그대의 수하가 되리라 믿고, 머나먼 곳에서 찾아오다니……!" "……!" "훗훗… 그리고 그대를 죽이고 싶도록 부러운… 그대의 인간적인 매력이… 노부를 철저하게 빨아들이는구려." 풍사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웃어 보기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서 웃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외천(天外天)의 길(路)! 풍사는 이제야 그 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이제 더 할 말은 없다. 두 사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뜻만으로도 서로를 알 수 있었다. "언제, 어디로 가야 하오?" "혈거봉(血巨峯) 절정세가로 가시오. 시간은 빠를수록 좋소. 거기 가서 세가의 호법이 되어 주시오. 그대에게 절정세가의 흑천전(黑天殿)을 맡기겠소." "그대는?" "나는… 후후, 더 고집스러운 미치광이를 찾아갈 것이오." "고집스러운 미치광이?" "자객(刺客)의 도(道)에서… 그 끝을 보았다는 자!" "그, 그가 살아 있단 말이오? 지하(地下) 절대자가?" "글쎄……!" 두 줄기 유성이 철황정의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철황정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철황정은 칠십 년 만에 절정의 고독을 되찾은 것이다. * * * 금릉(金陵)은 천 년의 고도(古都)이다. 중원최고의 요충지로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금릉엔 무수한 길들이 연결되어 있다. 군사가 이동하는 드넓은 관도와 이름조차 갖지 못한 무수한 소로(小路)들. 비록 황도 연경에 권위를 내주었다고는 하나, 금릉으로 향한 길 위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천 년의 세월과 함께 닦여진 작은 길 하나. 그 길은 천 년에 걸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잡다한 세상 사람들에 의해 가득 차 왔다. 지금 길 위에는 세우(細雨)가 흩뿌리고 있다. 그리고 펄럭거리는 흑포에 죽립이 기우듬한 청년 하나가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금릉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대로라면… 과거 자객의 전설을 이룩했던 그 자는 금릉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단리궁, 그는 금릉으로 들어가는 길 위에 있었다. 그는 또 하나의 절정을 찾아왔다. 단리궁이 찾으려 하는 자는 자객의 절정이었던 자로서, 그는 강호사상 가장 잔혹한 신화를 이루었던 자이기도 하다. 사생아로 태어나 열다섯이 될 때까지 온갖 박해를 받았고,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피의 맛을 본 자. 그리고 그 후 사십 년을 자객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자. 야뇌(夜惱) 일점화(一點花). 그는 밤의 번뇌(煩惱)로 불리웠고, 그는 가장 무자비한 전설을 중원천하에 남긴 바 있다. 일인방(一人幇)다운 무위를 과시하며 남칠성 북육성을 폭풍의 도가니 안에 몰아넣었던 자. 그는 팔십여 년 전 검(劍)을 쥐고 이렇게 외쳤다. － 이제… 내가 자객이 되어 죽일 자는 천하에 없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이룩할 자객술(刺客術)도 없다! 이제는… 번뇌의 밤도 없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을 부러뜨렸다. 그 후, 그에 대한 소문은 어디에서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너무도 사랑한 밤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광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했다고 했으며, 그의 자객술은 완전히 절전되었다고 전해졌다. 혈무흔이 부상의 제일쾌검이라면, 중원의 제일쾌검은 바로 야뇌 일점화였다. * * * 꼬박 닷새, 단리궁은 할일 없는 한량마냥 금릉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또한 그는 틈틈이 하늘의 천기를 살폈다. 내가고수라면 하루에 한두 차례 운기행공을 하게 되고, 그러면 천기를 움직이게 된다. 단리궁은 야뇌 일점화를 찾을 요량으로 온갖 장소를 다 뒤지고 다녔다. 표국(杓局)에서 시작해 객잔(客棧)으로, 관제묘(關帝廟)에서 전방(錢房)으로……. 그러나 야뇌 일점화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장 위대한 자객이라 불리는 자, 천여 명을 암살하는 가운데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자. 그는 소문대로 죽은 것일까? "그의 내공은 당시에도 사 갑자였다. 무공에 회의를 느끼고 봉검했다 하더라도, 그 정도 내공이라면 금강불괴에 반노환동이니… 필경 살아 있을 것이다." 단리궁은 고집을 갖고 있었다. 죽는다 하더라도 꺾이지 않는 고집. 그 고집에 있어서 단리궁은 천 년의 절정이라 할 수 있었다. 다시 사흘간, 단리궁은 금릉 일대를 뒤지고 다녔고… 결국 한 곳에 이르러 입가에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바로 저 자다. 후후, 저 자의 죽은 눈은… 바로 대자객의 눈이다. 드디어 찾아 냈다!" * * * 수십 년 전만 해도 황도(皇都)는 금릉이었다. 영락제(永樂帝)가 건문제(建文帝)를 쓰러뜨리고 황위를 찬탈하며 황도를 금릉에서 연경으로 옮겼고, 그 후 금릉은 남경(南京)으로 불렸고, 연경은 북경(北京)으로 불렸다. 금릉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서 주기(酒旗)가 세우발에 젖고 있다. 그리고 싸구려 주가(酒家)를 찾아 우르르 몰려와서는 온갖 잡사를 다 이야기하는 부랑의 무리들의 목소리가 떠돈다. 술이 밤을 마시는 곳, 아강추(雅江秋). 금릉의 호화로운 유곽과는 거리가 먼 싸구려 술집이다.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꽤나 천한 사람들이다. 표국의 삼류(三流) 표객들, 이들은 대표두를 따라다니며 온갖 꾸중 들었던 이야기는 빼고 대표두가 한 웅휘로운 일을 마치 자신이 한 듯 이야기한다. 공자대부(公子大夫)의 시종들은 또 그들대로 이야기를 하고… 패류잔화(敗柳殘花), 이미 시든 늙은 창기(娼妓)들은 그들을 영웅(英雄)처럼 바라보며 말이 끝날 때마다 한숨을 짓는다. 세상의 흙탕물이 다 모인 이 곳에서 떠도는 이야기는 주로 세 가지였다. 하나는 황상(皇上) 선덕제(宣德帝)에 관한 일이다. 선덕제는 미복잠행(微服潛行：변장을 하고 밤에 민심을 시찰하는 것)을 즐겨 하는 일대의 성군이다. 그리고 그는 휘하에 가공할 무사조직도 거느리고 있다. 장군부(將軍府)마저도 건드리지 못하는 황궁 친위조직. 동창(東廠), 금의위(錦衣衛). 양대조직 중 동창조직은 내시환관들의 조직으로 대신들의 비위사실을 정탐하는 일을 한다. 반면, 금의위는 가장 가공할 힘의 조직이다. 지닌 힘이 이미 무림의 거대방파를 능가했다고 알려진 금의위의 수는 일만오천(一萬五千). 그들은 황실(皇室)의 인물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담당한다. 현재, 연경에는 묘한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조정의 장래가 걸린 일이라 했고, 황실이라면 하늘로 아는 천한 무리들은 그 이야기를 침소봉대하느라 옷자락을 침으로 축축이 묻힌다. 두 번째 이야기는 역시 또 하나의 하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바로 절정세가(絶頂世家)라는, 가장 급진적으로 성장하는 하나의 무림단체에 대한 이야기였다. 억만 냥(兩)의 자금(資金)과, 오천(五千)의 거조(巨鳥), 기라성 같은 절정고수자들, 하나의 살아 있는 신화(神話)… 절정서생(絶頂書生) 궁(弓)! 네 가지 위대한 전설로 일어난 가공할 가문. 그들에 대한 소문은 머나먼 금릉에도 드넓게 확산되어 있었다. 세 번째 소문은 대륙무림회(大陸武林會)에 관한 것이었다. 구파일방(九派一幇), 강호이십팔명가(江湖二十八名家), 남도무림계(南道武林界) 칠십사 파(派), 북도무림계(北道武林界) 백육십여 파(派)…….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수한 문파들 가운데 일방의 패주(覇主)로 군림하고 있는 방파의 장교지존(掌敎至尊)들이 하나로 모이는 천 년 만의 대검회. 주최자는 소림방장(少林方丈).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형식적인 것으로 대륙무림회의 실질적인 주최자는 천마소종사(天魔少宗師)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흑백(黑白)을 일통하자는 기치 아래 무수한 세력을 모으고 있고, 강호의 이단자로 평가되고 있는 태풍의 눈을 제거하자는 기치 아래 대륙무림회를 주장했다. － 천 년에 걸쳐 강호에 파란을 일으킨 무리가 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위선자들의 가문, 단리세가(段里世家). 이제 그들을 징계해야만 한다. 단리세가에서는 수 년간 벌어진 강호혈사(江湖血事)에 대한 해명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대륙무림회에서 단리세가는 공적으로 화할 것이다! 세 가지 소문이 술 내음과 더불어 퍼지고 있는 주루 아강추(雅江秋). 그 구석진 자리, 언제부터인가 묘한 대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의 낙척서생(落拓書生), 그는 죽엽청(竹葉淸) 한 주담자를 앞에 둔 채 팔짱을 끼고 있다. 입가에는 싱글싱글 미소를 머금고, 그의 시선에는 꽤 오랫동안 단 한 사람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저 자다. 훗훗… 죽은 눈, 죽은 숨결, 죽은 마음, 자객의 전설……!' 머리가 반백이고 몸이 쇠약해 보이는 노인, 그는 회색 옷을 걸친 채 독한 화주(火酒) 잔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다. 세파에 찌든 무미건조한 표정, 취한 듯 흐릿한 두 눈, 술에 중독된 듯 늘 떨리는 열 손가락……. 금릉에는 지천으로 깔려 있는 패배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이는, 힘이 없고 쇠약한 노인. 그의 모습이 너무도 오랫동안 청년의 시선에 고정되었다. '저 눈이다. 완전한 고독(孤獨), 바로 저 눈이다.' 청년은 팔짱을 낀 채 입가의 웃음만 짙게 한다. '죽은 마음이나, 꼭 되살아난다. 후후……!' 밤(夜), 취한 노인은 비틀거리며 소로(小路)를 따라간다. 그는 송백림(松柏林)을 가로질러 자신의 거처로 간다. 그의 거처는 대장간. 그러나 그의 대장간에서 파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겹군!" 취한 노인이 휘청거리며 중얼거렸다. 달빛(月光)이 그를 따라오는 것이 지겨운 것일까? 아니면, 지칠 줄 모르고 불어닥치는 밤바람이 지겨운 것일까? 먼 뒤쪽, 휘파람을 불며 노인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벌써 나흘이다. 흑포인 하나가 노인의 뒤를 쉬지 않고 따라다니고 있었다. 술집에 갈 때도, 상점에 갈 때도, 노인이 불 꺼진 화덕 앞에 앉아 번뇌의 밤을 지샐 때에도……. 검은 그림자는 꼭 사 장(丈)의 거리를 유지한 채 노인을 뒤따라다녔다. 노인은 휘청휘청 걸어갔고, 달빛이 노인을 따라다니며 휘청이는 그림자를 소로에 뿌린다. "그림자 같은 놈!" 노인은 나흘간 집요하게 따라붙는 미행자에게 심한 짜증을 느끼는 듯했다. 들리는가? 마음 깊은 곳을 훑어내리는 휘파람 소리를……? 달빛과 더불어 흘러 퍼지는 소리는 아주 맑았다. 휘이이－ 휘이이－ 휘이이－! 기이한 휘파람 소리에는 아주 이상한 마력이 스며 있었다. 마음 속의 모든 번뇌(煩惱)를 일깨우고, 모든 심마(心魔)를 준동하게 하는 하늘 밖의 휘파람 소리. 휘이이－ 휘이이－ 휘이이－! 휘파람 소리는 나흘 간 노인을 따라다녔다. 그 소리는 노인이 침상에 누웠을 때도 끊이지 않았다. '천살유혼소(天煞誘魂嘯)다. 저 소리는…….' 노인은 나흘 만에 처음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주 자연스레 그의 손은 거머쥐어졌고, 두 눈의 흐릿하던 안개가 사라지고 한순간 너무나도 강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노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전율의 광채. 그 빛은 어둠을 밝힐 정도로 가공할 힘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번쩍 일어나는 눈빛을 스르르 안으로 갈무리하고 만다. '참자, 맹세를 지키자. 귀찮은 세상, 다시는 끼여들지 않겠다고 한 맹세를 지키자.' 그리고 그는 휘청휘청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휘파람 소리는 계속되고, 청년의 눈빛은 묘하게 반짝였다. '무조건 거둬야 할 자다. 저 사람의 인내력은… 가히 절정이다. 저 사람은 단 한 사람으로 사대봉공을 꺾을 만한 초절정고수다. 저 사람을 끌어들인다면… 세가의 저력은 무한정 늘어날 것이다.' 휘파람을 불며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청년, 그는 단리궁이었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두 사람 사이의 기이한 신경전은 계속 되풀이되었다. 청년은 달빛을 어깨에 받으며 노송의 축 늘어진 가지 위에 앉아 있다. 그는 대장간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입술을 오목하게 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는 기이한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간다. 휘이이－ 휘익－! 애간장을 녹이는 미소녀의 하소연 소리 같기도 하고, 낭군을 잃고 흐느끼는 과부의 처절한 절규 소리 같기도 한 기이한 휘파람 소리. 그 소리는 바로 천살유혼소(天煞誘魂嘯)였다. 인간의 본성 바닥에 있는 악마성을 끌어낸다는 죽음의 휘파람 소리. 그 소리는 쉬지 않고 노인의 고막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노인의 미간에는 땀방울이 흥건했다. '미치겠군. 으으, 이 휘파람 소리에는 피의 유혹이 있다. 으으, 끊어 버렸던 검을 다시 쥐고픈 충동이 일어난다.' 노인은 천살유혼소로 인해 심마에 빠지고 말았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벌써 발광을 했으리라. 그러나 노인은 철저한 인내의 관문을 거친 사람이었다. '때가 되면… 물러가겠지, 거머리 같은 놈.' 그는 터져 오를 듯한 살성을 억지로 눌러 참고 입정에 든 고승(高僧)같이 단아한 자세를 유지했다. 새벽에도 휘파람 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낮에도, 저녁에도……. 다시 달이 떠올랐다. 허름한 흑포를 걸친 청년은 노인을 집요하게 뒤따르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고집센 노인. 후후, 그 고집이 마음에 들었소.' 청년의 눈빛은 깊이를 모를 심연의 그 빛이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휘파람 소리를 쉬지 않고 불어댔고, 노인이 얼굴빛은 점점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다… 다시는 검을 쥐지 않으려 했는데…….' 그의 열 손가락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린다. '으으, 다시 밤의 번뇌를 일깨우다니… 으으, 밤의 번뇌를… 피의 번뇌를 감히 일깨우다니…….' 인간의 인내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일까? 노인의 눈빛은 불그스레한 혈광으로 물들어 갔고, 그의 모공에서는 예리한 살무가 흐르기 시작했다. 달빛이 흐려질 때였다. 노인은 불이 사라진 화로 앞에 앉아 있었다. 노인의 표정은 며칠 전과는 사뭇 달라 있었다. 입가에는 경직이 있고, 눈에는 회의가 있다. 휘이이－ 휘이이－ 휘이이－! 휘파람 소리는 저주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으으, 이제는… 이제는… 참을 수 없다.' 노인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츠으으－ 읏－ 츠－! 가공하게 폭사되어 나오는 죽음의 눈빛, 그것은 바로 절대사안(絶代死眼)에서 뿜어지는 저주의 눈빛이었다. 그것은 중원최고의 비술(秘術)이라 일컬어지던 번뇌사령술(煩惱邪靈術)을 십이 성 터득한 사람만이 시전한다는 공포의 눈빛이다. 부르르르－! 노인의 두 손은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렸다. "오냐, 네… 네놈이 노부 손에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노인의 입가에는 철저한 살욕(殺欲)이 떠올랐다. 버언－ 쩍－! 그의 두 눈은 더욱 강한 빛을 뿜어 냈고, 한순간 그의 모공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뭉클뭉클 일어나는 검은 안개는 일순 십 장 안을 완전히 휘감았다. 그러나 마성을 일으키는 휘파람 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휘이이－ 휘이이－! 콰르르릉－ 릉－ 콰앙－! 검은 안개가 해일(海溢)이 되어 근처를 휘감아 버리는 바로 그 순간, 뿌연 그림자 하나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달빛이 감추어진 밤공기 속으로 날아들어갔다. 섬유용형(閃遊龍形)에 이어 월파비행(月派飛行). 거의 소리도 없이 노인은 이십오 장을 날아올랐고, 허공에서 선회하며 손을 허리에 갖다대고 있었다. "좋아! 맹세를 깨고… 다시 검을 쥐겠다, 거머리 같은 놈!" 부러진 검(劍) 한 자루, 팔십 년간 추억 어린 장식품으로만 매달려 있던 단검이 불끈 쥐어지는 가운데… 노인의 몸은 안개와 하나로 화한다. "네놈을… 단 일 검에 죽이겠다. 빠드득－!" 극대의 마기(魔氣)가 뻗쳐 나가더니, 무시무시한 살풍(殺風)은 완전히 허무 속으로 스며 들어가고 사위는 다시 휘영청 밝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흰빛! 쩌… 억……! 극쾌의 빠르기를 지닌 흰빛이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다. 아무도 피하지 못할 절대의 빠르기. 버언－ 쩍－! 찰라의 그 순간, 달빛이 검기로 인해 올올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웃음소리(笑). "좋아, 야뇌(夜惱)! 결국 내 고집이 이겼소이다." 목소리 가운데 그는 달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흑영이 환상처럼 달빛에 가려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치리리－ 릿－ 치릿－! 달빛이 핥는 모든 장소가 검강에 유린되더니, 수백 그루의 낙락장송(落落長松)이 일제히 허리가 잘려 쓰러졌고… 노인의 몸은 달빛 가운데 스르르 나타났다. 수중에 단검을 쥔 노인. 그의 눈은 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피, 피하다니? 으으, 피하다니……." 그리고 입가에는 전에 없던 환희가 떠오르고 있었다. "크크, 이럴 수가? 노부의 야뇌 일점화(夜惱一點花) 무적살도(無敵殺刀)를 피하는 자가 있다니… 크크, 이럴 수가? 노부를 괴롭혀 오던… 절대의 고독이 꺾이다니……?" 웃는 노인, 그는 실패했는 데도 웃었다. 성공했다면 그는 오히려 담담했으리라. 그는 살인에 미쳐 수십 년을 보냈고, 허무에 빠져 팔십여 년을 보낸 강호음지의 절대자였다. 또 하나의 하늘 야뇌(夜惱) 일점화(一點花).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신화를 남긴 위대한 자객. 그는 처음으로 허공을 가르는 허초를 시전하는 실패를 한 것이다. 휘파람을 불던 청년, 그는 죽립을 쳐들며 일점화보다 더 높은 하늘에서부터 훌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微笑), 그것은 야뇌 일점화의 미소와 흡사했다. "어떻소? 술 한 잔 사겠소?" 아아, 그는 바로 단리궁이 아닌가? "우라질, 속아서 검을 빼다니… 우라질, 네놈의 격장세에 속고 말았다." 야뇌는 툴툴거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바로 단리궁의 미소와 같은 미소였다. "애송이, 네게… 졌다. 좋아, 술을 사겠다. 진짜 멋지게 사겠다. 크핫핫! 노부에게 실수를 안겨 준 위대한 괴물. 크하하! 내 소원이 무엇이건… 신명나게 들어 주마!" 팔십 년간 강호를 떠났던 야뇌 일점화, 그는 마치 운명처럼 절정세가의 가법 안으로 빨려들고 마는 것이다. 두 사람은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술의 청탁(淸濁)은 불문사항이고, 안주 역시 없으나 있으나 마찬가지이다. "궁서생의 고집에 지고 말았소!" "후후… 하루만 더 견디셨더라면, 소생은 아마 단념하고 떠나갔을 것이외다." "노부의 무엇이 궁서생을 그리도 집요하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소." "그대는 바로 중원의 전설이오. 그대가 봉검한 채 서 있다는 것은 중원천하를 위해 잘못된 일이오. 그대는 중원의 저력(底力)이오. 중원무림계가 위기에 처한 이 때, 그대는 천하를 위해 검을 쥐어야 하오!" "중원은 노부를 용서하지 않을 텐데?" "후후… 피의 빚은 피로 갚아 준다고 하지 않소이까? 살명으로 떨친 이름을… 살명으로 역전시키는 것이외다!" "길을 일러 주시겠소?" "후후… 그 길은 절정의 길이오." "절정의 길이라? 밤의 길보다 고독하지는 않겠지." 새벽이 될 때, 단리궁은 야뇌와 더불어 성 밖으로 나섰다. 야뇌는 절정세가 사람이 되기를 수락한 상태였다. 단리궁은 그에게 야뇌전(夜惱殿)을 맡겼고, 야뇌 일점화는 그러한 요청을 쾌히 받아들였다. 절정세가는 흑도의 조직도 아니고 패도의 조직도 아니다. 그렇다고 단리궁 개인을 위한 세력도 아니었다. 절정세가는 바로 전 무림인의 조직이었다. "가주는 이제 어디로 가실 작정이시오?" "꼭 한 곳, 더 갈 데가 있소이다!" 단리궁 앞에는 금붕 한 마리가 있다. 단달국의 절천신붕, 날개를 떨치면 하늘이 금빛에 뒤덮일 정도로 거대한 새이다. "또 하나의 절정을 찾아가시는 것이외까?" "그렇소이다." "허허… 가주가 눈독을 들일 절정의 고수가 누구인지 궁금하구려." "훗훗… 그는 가장 괴팍한 사람이외다!" "누구이기에……?" "대… 은… 사(大隱士)!" 단리궁의 말에 야뇌천는 진저리를 쳤다. "그 냄새나는 가짜 도사 놈이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이오?" "후후… 야뇌가 살아 있는 이상, 그도 살아 있지 않을까요?" "하긴… 그 자는 노부보다 내공이 고강한 자니까! 그 자는 바로 삼 갑자 이전 무림계의 천하제일인이니, 목숨이 부질없다 여기고 자결하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아직 살아 있을 것이외다!" 야뇌가 치를 떠는 사람, 그는 강호의 마지막 전설로 불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흑천야황 앞에서 무공을 자랑하지 말고, 야뇌 앞에서 살인을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대은사(大隱士) 창궁천뇌(蒼穹千腦) 앞에서는 지혜(智慧)를 자랑하지 말라! 백여 년 전 강호에는 그러한 노래가 불리웠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는 전대의 이야기. 단리궁은 그것을 기초로 천하를 주유하고 있는 셈이었다. 당시는 중원천하의 힘이 가장 강했던 때였다. 그 때만 하더라도 변황무림계는 중원천하를 넘보지 못했었다. 만에 하나, 위의 세 사람이 세력을 쉬지 않고 넓혀 왔더라면 오늘의 정세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 * * 십만대산(十萬大山). 강남(江南)에서도 남쪽으로 천여 리. 세상 사람들이 묘족(苗族)의 땅이라 일컫는 신비와 공포의 지대에 십만대산은 하늘이 되어 만 년을 존재했다. 그 깊은 곳, 백 년을 두고 사라지지 않았던 안개의 성이 있다. 성곽 일대에는 안력을 방해하는 기이한 환무(幻霧)가 능라마냥 휘감겨 있고……. 휘리리－ 링－ 휘리리－ 링－! 바람이 불면 안개의 성곽은 무너져 구릉으로 화하고, 그것은 일순 불어닥치는 돌개바람으로 인해 다시 성으로 변화한다. 이합집산이 빠른 가운데 묘한 규칙이 있는 안개의 절곡. 일대에는 금수의 잔해가 널려 있고, 언제 세워 놓았는지 모를 경고비 하나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절대금지(絶代禁地). 지금 돌아서지 않는다면 하나에서 백을 헤아리는 시간 안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경험하며 죽으리라!> 서명도 없는 글이 비석 양면에 적혀 있다. 안개는 도끼로 찍은 듯한 협곡 앞을 완전히 휘감고 있었다. 자욱이 퍼지는 검은 안개 속. "저곳입니다, 가주! 허허, 속하가 길잡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열흘 내내 산을 뒤지고 다녀야 했을 것입니다!" "야뇌노인이 나의 안내자가 되어 주어 고마울 뿐이오!" 스슷－ 슷－!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치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벌써 세 개의 기문진을 격파했다. 바로 야뇌와 단리궁. 두 사람은 안개로 뒤덮인 협곡을 향해 질풍처럼 치달렸다. 단리궁은 단 사 성 진력을 썼고, 야뇌는 구 성 공력을 써서 치달리는데… 두 사람의 달리는 속도는 완전히 같았다. 야뇌는 단리궁의 가공할 무공과 포용력 있는 인품, 그리고 초인적인 집념에 매료된 상태였다. 야뇌는 밤의 주인이었던 사람이다. 그는 강호정세에 대해 해박하게 알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해외육가(海外六家)의 뿌리에 대해서도 변황사천주 이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중원의 일은 중원인들이 처리해야지요." "세가에 가는 대로 사대봉공을 만나겠습니다. 그들에게 일진(一陣)에서 물러나 장기나 두고 쉬라고 말하겠습니다." "사실, 천하의 일이 그렇듯 심각한 처지인 줄 알았더라면 이미 강호로 되돌아왔을 것이외다!" 야뇌는 단리궁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전대의 지식을 두루 이야기했다. 단리궁은 그와 이야기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상호의 검결을 비교하는 가운데, 전에 비해 한 단계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어리석다, 그대는! 이제… 죽음이 있을 뿐이다!> 또 하나의 경고비가 나타났다. 야뇌는 그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제길, 창궁천뇌 애늙은이 놈의 말솜씨는 여전하군!" 그는 씨익 웃으며 소매를 가볍게 흔들었다. 펑－! 벼락 치는 소리가 나며 비석이 산산이 부서졌다. 야뇌는 과거 창궁천뇌와 겨뤄 본 바가 있었다. 그 때 야뇌는 절정의 자객술을 시전했고, 창궁천뇌 사마곡(司馬曲)은 무공이 아니라 기문진을 사용했다. 결국 두 사람은 열흘간 대치했고, 둘 중 누구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한 채 눈만 흘겨야 했다. 당시, 창궁천뇌는 치를 떨며 이렇게 말했었다. － 검로(劍路)에는 끝이 있으되, 지혜로(智慧路)에는 끝이 없다. 아마도 십 년 안에 노부는 네놈을 백 배 능가하게 될 것이다! 창궁천뇌는 그런 말을 하며 은거에 들어갔다. 그는 십오만 권의 고서를 싸들고 십만대산에 칩거했다.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지혜의 절정에 이르러, 야뇌 같은 절세고수를 지극히 간단히 제압하자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다. 야뇌는 단리궁 앞에 서서 사자후를 터뜨린다. "애늙은이! 썩 나와라!" 우르르르－ 릉－! "크핫핫… 천하제일의 암기력을 자부하던 창궁천뇌 사마곡! 설마, 노부의 목소리를 잊지는 않았겠지? 네놈의 시시콜콜한 기문둔갑진(奇門遁甲陣)은 노부에게 아무 쓸모가 없으니, 썩 나타나라!" 야뇌의 목소리로 인해 사방이 뒤흔들렸다. 돌이 깨어지고, 절벽이 뒤흔들린다. "늙지도 못하는 가짜 천재! 썩 나서라! 네놈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크핫핫……!" 그의 웃음소리가 고조될 때였다. "큿큿… 모를 일이로군. 최근 천기가 뒤숭숭해 잠이 잘 오지 않았는데… 크크, 밤의 번뇌가 노부를 찾아오다니……!" 안개 깊은 곳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금속성이 들려 오더니, 유령이 나타나듯 나타나는 사륜거(四輪車)가 하나 있었다. 황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사륜거 좌우에는 금모신후(金毛神后)라고 불리는 전설상의 괴수 여덟 마리가 버티고 서 있었다. 카아아－ 카아아－ 카아아－! 금모신후는 붉은 눈알을 번뜩거리며 울음소리를 내는데, 묘하게도 인간의 의복에 인간의 병기를 지니고 있었다. 사륜거 위, 안색이 청수한 중년문사 하나가 학창의를 걸친채 도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제갈공명 같은 차림새로 나타난 중년인의 무릎 위에는 건곤척(乾坤尺) 한 자루와, 세 자 두께의 비급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환우천문비록(還宇天門秘錄)> 8비급 겉장에는 그러한 글이 적혀 있었다, 오만하고 고고한 인상의 중년문사는 안개 속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모를 일이로군. 거만하기 이를 데 없던 야뇌가… 제자를 거두다니…….' 그는 야뇌와 함께 서 있는 단리궁을 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진의 생문(生門)에 서 있고, 야뇌와 단리궁은 사문(死門)과 휴문(休門), 상문(傷門)이 교차하는 변문(變門)에 서 있었다. 진의 이치에 따른다면 그는 두 사람을 볼 수 있고, 두 사람은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변환미영환우무진(變幻迷影還宇舞陣). 일대의 진세는 오만한 은자의 최후진식이었다. 바로 창궁천뇌 사마곡. 그는 은자의 대종사이고 나이가 이백 세에 달한 자였다. 그러나 겉보기에 그는 나이 사십 세 정도로 보였다. 그는 지난 백 년간 숨어 살며 세 가지 업적을 통독한 다음, 그 안의 정화를 모아 한 권의 고서로 꾸몄다. 그것은 바로 그의 무릎 위에 있는 세 자 두께의 비급이었다. 둘째, 그는 백 마리 금모신후를 길들여 신후검단(神后劍團)을 만들었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거소를 호법 서게 하는 기적을 이룩했다. 셋째, 그는 최근 들어 화기제조에 관심이 생긴 나머지 천하각파의 화기 가운데 위력이 강한 십팔 종 화기를 자기 나름대로 만드는 위업을 이룩했다. 천마뢰(天魔雷), 화염신탄(火焰神彈), 열화벽력탄(熱火霹靂彈), 굉천신뢰(宏天神雷), 태양뇌화전(太陽雷火箭)……. 사마곡은 취미가 다양한 자였다. 그는 무공을 제외한 모든 방면에서 천하제일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금수를 다루는 기술에서부터 화예를 가꾸는 원예술, 의술, 독술, 기문둔갑술, 화기제조술, 금기서화(琴棋書畵)을 비롯한 육예(六藝), 면구술(面具術), 역용술(易容術), 건축술(建築術)……. 그는 욕심이 많은 천재였다. － 세상의 모든 학문을 알기 전에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맹세를 한 바 있는 강호의 위대한 고집쟁이였다. 또한 그는 타인을 위해서는 지혜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는 금모신후를 병사로 거느리고 십만대산 오지의 제왕으로 군림하여 일백 년을 살아 왔다. "야뇌, 사바세계를 빠져 나오지 못하는 멍청이 자객 놈!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와서 소란을 부리느냐?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나 약간 반갑기도 하다만… 후후, 노부는 너의 응석을 받아 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읽어야 할 서적이 세 권에, 생각해야 할 화두가 여섯 개다. 그리고 집필해야 할 책이 십여 장……." 사마곡은 부채를 흔들며 느릿느릿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주 이상한 힘이 그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대, 대체 어떠한 기운이……?' 그 힘은 안개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도저히 뿌리치지 못할 절대적인 힘, 그 힘은 바로 야뇌 뒤쪽에 서 있는 허름한 옷차림의 청년의 죽립 사이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만하게 말해 나가던 사마곡은 그 시선을 느끼고 입술을 닫았다. '아아, 절대의 기세가 다가서다니… 이러한 기세는 전설로 알려진 대천강혼(大天剛魂)의 주인만이 흘릴 수 있는 것인데…….' 사마곡은 힘이 일어나는 곳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두 개의 시선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설마, 진무(陣霧)를 뚫고 노부를 보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천 년 공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사마곡의 등줄기에 땀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실, 그는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공을 익히는 시간마저 아까워하며 학문도야에 힘쓴 사람이었다. 그러한 위대한 고집이 없었더라면 오늘 같은 위대한 성취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진세가 부서지면 허수아비만도 못한 처지가 된다. 금모신후들이 그를 보호하고 있기는 하나, 야뇌 같은 초절정의 자객 앞에서는 금모신후들의 호법도 소용이 없다. "야뇌, 제자를 잘 골랐군!"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자……. "후후… 이 곳에 노부의 전인은 없다!" "뭐라고?" "후후… 있다면 노부의 상전이 있을 뿐이다!" "상… 상전? 흐으으, 그럼… 너와 함께 온 사람은 너의 전인이 아니라, 너의 주인이란 말이냐?" 고집쟁이 천재인 사마곡의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 꿰뚫어본다는 그였으나, 자객의 왕 야뇌가 하인으로 전락했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괴사였다. 그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단리궁을 바라보려던 바로 그 때였다. 단리궁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안개의 벽이 단리궁의 거보(巨步) 아래 바다가 갈라지듯 갈라졌다. 하나의 길, 단리궁과 사마곡 사이에는 하나의 길이 만들어졌다. 저벅… 저벅……! 단리궁은 큰 걸음으로 걸어갔고……. "이, 이럴 수가? 강기로 진무를 쪼개다니? 으으, 이러한 솜씨는… 꼭 한 사람, 전설상의 천년영웅(千年英雄)에게만 있다. 그렇다면 그대는 바로… 천년백팔주(千年百八柱)를 얻은 사람일 것이다. 아아, 야뇌가 그대의 부하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마곡은 과연 천재였다. 그는 단리궁의 일 식만 보고도 단리궁의 신분내력을 정확하게 알아맞힌 것이다. 저벅… 저벅… 저벅……! 단리궁은 가공할 내공으로 진세를 몰아내며 사마곡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두 눈에서는 혜성의 빛이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하, 하늘이다!' 사마곡은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그 때 단리궁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굳건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비수처럼 튀어 나와 사마곡의 고막을 자극했다. "그대의 천재성을 아는 사람이기에… 긴 말은 않겠소!" "으음……!" "할일은 단 하나, 우리를 따라가겠느냐? 아니면, 십만대산의 흙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오?" "위… 위협하는 것이오? 굴복하라고?" "후후… 그대가 위협에 꺾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소. 이것은 위협이 아니라, 제안이오. 그리고… 청부(請負)요." "청부?" "그대의 머리에 꽈악 쌓인 지혜를 빌려 주시오!" "……." "중원(中原)을 위해서!" "중… 중원!" "후후… 우리는 공통점이 많소. 그것은 타인이 가지 않는 이단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오. 그리고 어찌 되었든 간에 한 방면에서 절정이 되었다는 것도 우리들의 공통점이오!" 단리궁은 팔짱을 낀 채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는 동안 사마곡의 표정은 여러 차례 변화했다. 타인과 뒤섞여 살기를 부정했던 위대한 고집쟁이, 그리고 암기력과 오성에 있어서는 분명 단리궁을 능가하는 천하제일의 뇌(腦)를 갖고 있는 무림의 일대천재. 그는 뼛속까지 젖어드는 맑고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이 기운은 하늘의 기운이다!' 사마곡은 단리궁의 얼굴을 바라봤다. 언제부터인가 사마곡의 얼굴에는 오만한 빛이 사라지고, 대신 인간의 표정이 나타나고 있었다. "가겠소? 남겠소?" "가겠소! 진심으로……!" "힘든 일이 계속될 것이오." "사양하지 않겠소." "좋소. 그럼 한 가지만 들어 드리리다. 그것은… 절정세가에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하는 것이오!" "훗훗… 군사(軍師)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소이다!" 하늘과 하늘은 다시 겹쳐지고 있었다. 절정세가의 힘은 세 명의 절대자로 인해 가공할 수준으로 증가되었다. 흑야전주(黑夜殿主) 흑천야황, 야뇌전주(夜腦殿主) 야뇌, 대군사(大軍師) 창궁천뇌 사마곡. 세 명의 지하 절대자들은 운명처럼 단리궁 휘하에 들어갔다. 삼 인의 절대자. 수는 단 셋에 불과했으나 그들의 역량은 가히 백만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 * 단리궁은 단신으로 연경(燕京)으로 되돌아갔다. 야뇌와 사마곡은 십만대산에서 몇 가지를 정리한 다음, 단리궁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 날, 혜성은 검은 하늘을 완전히 불사르며 북천(北天)으로 떠올라 가고 있었다. 빛(光), 그것은 흰 손바닥 위에서 조용히 떠오른다. 마치 환상처럼 아련하게 시작되어 번개처럼 날카로워지는 한 줄기의 흰빛. 그 빛은 점점 더 가공하게 확대되어 갔다. 일순, 가벼운 기합 소리와 함께 흰빛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환(幻)－!" 수없이 많은 검화(劍花)가 허공을 누비더니, 그 빛은 하나의 고성(孤星)이 되어 거두어지는 가운데… 머리카락이 어깨를 뒤덮은 청년의 손바닥 위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또 한순간, 차디찬 기합 소리가 나며 빛은 또다시 사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극섬(剋閃)－!" 흰나비 떼가 떼를 지어 나는 듯하더니, 흰빛은 또다시 청년의 손바닥 위로 갈무리되었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백팔 주(柱) 위에 적힌 무공 이상의 것은 나의 지혜로는 창안될 수 없는 것이란 말인가? 벌써 칠 일째 쉬지 않고 십대검결(十大劍訣)을 되풀이해도 더 빠르고 더 강한 것은 나타나지 않다니……!" 청년의 손 위에는 비수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청년이 묘한 손동작을 하는 가운데, 하나의 반지(環)로 변화했다. 파팟－! 백섬마비(白閃魔匕)라 불리는 무적신병(無敵神兵)은 백섬탄(白閃彈)이라는 빛이 칙칙한 가락지로 화해 청년의 손가락에 끼여졌다. 바로 단리궁, 그는 십지를 주유한 후 연경(燕京)에 돌아왔다. 그리고 진장서축 안에 틀어박혀 쉬지 않고 검결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그는 강호에서 얻은 심득(心得)에 의해 무공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이다. 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줄기의 검흔(劍痕)이 남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번째 검흔, 그것은 매우 깊고 또렷하다. "세가의 철혈검(鐵血劍). 저것은 도중에 변화하지 않는, 고집으로 뭉친 혈전의 검이다!" 단리궁은 또 하나의 검흔을 바라본다. 거기엔 아주 흐릿하고 얕은 검흔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차지하는 범위는 매우 드넓다. "저것은 부상신도술의 변화를 응용하여 만든 무적신풍결(無敵神風訣)로 인해 만들어진 검흔이다! 그리고 저것은 내가 익힌 절기 중 가장 강한 절정천검결(絶頂天劍訣)로 새긴 것이다!" 단리궁은 세 번째 검흔을 바라봤다. 벽에는 방사형의 그물 하나가 파여 있었다. 동시에 일백팔 방위(一百八方位)를 뒤덮는 검기가 시전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검흔은 생겨 나지 못한다. 가히 절대적인 경지. 그런데 단리궁은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자만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무공의 길에는 끝이 없다. 후후, 백팔 주의 절기 하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도 오십 년은 걸릴 것이다!" 단리궁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이곳은 진장서축의 내실(內室)이다. 단리궁은 이 안에 머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절기를 하나로 집대성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절정세가의 일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절정세가의 대세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풍운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는… 거두는 일만 남았다.' 단리궁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대기는 며칠 전에 비해 훨씬 더 차가워진 듯했다. '벌써 가을의 문턱으로 들어섰다. 한데, 내가 바라던 대준동(大蠢動)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로 미루어 보아, 천하를 노리는 악마집단의 괴수는 나에 필적하는 병법을 지닌 자임에 틀림이 없다.' 단리궁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하여간… 기다려 보자." 탁자 위,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읽는 책이 놓여 있었다. 병법칠서(兵法七書). �천하 칠대병서의 정화만을 간추린 서적으로, 그것은 괴짜 천재 사마곡(司馬曲)이 선사한 것이었다. 단리궁은 책장을 읽으며 삼매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기침 소리는 새벽이 안 된 어둠 가운데에서 들려 왔다. "흠, 안에… 사람이 있는가?"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는 문 밖에서 들려 왔다. '들은 목소리 같은데… 내가 아는 사람 같지는 않다니…….' 단리궁은 의아해 하며 밖으로 나섰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이미 한기를 품고 있었다. 길이 축축하게 젖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거영(巨影) 하나가 서 있었다. 거탑 같은 자는 우산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단리궁이 나서는 것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가슴에 손을 대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장검(長劍)을 쥐는데……. "아서라, 내 벗이란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청수한 인상의 백의중년인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소박한 차림을 했으나 기품이 한 잔의 명차처럼 맑고, 오만한 표정은 하지 않았으나 타인에게 압도감을 주는 기이한 인상의 중년인. 그는 단리궁이 나서는 것을 보며 묘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로군!" 그리고……. "그… 그대는……?" 단리궁은 백의인의 얼굴을 보고 입을 가볍게 벌렸다. '그다. 바로… 그 사람이다.' 단리궁은 과거의 한때를 언뜻 기억할 수 있었다. 밤에 그를 찾아와 새벽이 될 때까지 차를 마셨던 문사가 하나 있었다. － 천안로(天安路)에 사는 선대인(宣大人)이라네! 자신의 정체를 그렇게 밝혔던 사람. 그가 우중에 진장서축을 찾아온 것이다. "없으리라 여기고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안에서 정말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오는지라 헛기침을 해 봤네!" 선대인은 미소를 짓는다. 온화한 가운데 기품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암울한 어떤 그림자가 미소에 드리워져 있었다. "비도 오고, 심기도 불편한데… 자네에게 차(茶)를 한 잔 대접받는 영광이 내게 있을지?" "선대인! 하하… 어찌 한 잔의 차라고 하십니까? 열 잔이고 백 잔이고 아까워하지 않겠다고 하셔야지요." 단리궁은 활짝 웃었다. "자네의 미소는… 여전하군!" 선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단리궁을 따라 서축 안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천민의 거소로 드실 때가 아닌 듯합니다!" 선대인의 호법(護法) 노릇을 하는 체구가 거대한 자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선대인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단리궁을 따라 서축 안으로 들어갔다. 차는 천지차(天池茶)로 준비되었다. 천지차는 용정차(龍井茶) 이상으로 향기가 좋은 명차이다. 선대인은 조갈이 나는 듯 차를 거푸 다섯 잔을 마셨다. '이분은… 묘한 분이다. 이분의 눈에는 강호의 상승고수도 갖고 있지 못한 거대한 혼이 스며 있다.' 단리궁은 야릇하게 해후한 선대인의 눈에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거대한 혼을 느낄 수 있었다. 선대인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그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만 마셨다. 쏴아아… 쏴아아……! 빗소리가 요란한 새벽, 선대인이 문득 단리궁의 얼굴을 응시했다. "자네, 가정은 있는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습니다!" "묘한 말이로군!" 선대인의 미소는 더욱 고독해졌다. 그에게는 깊은 고뇌가 있는 듯했다. "자네를 기다리는 여인(女人)이 있는 눈치인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인!" "흠, 자네는 인중룡이니… 자네의 여인 역시 뛰어난 미녀겠지?" "그런 편입니다. 조금 오만하기는 하나……!" "훗훗… 오만하다는 데에서는 나의 여식과 흡사하군!" "따님이 계십니까?" "있다네. 나이 십팔 세(歲)이지. 말괄량이인데, 매우 묘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네!" "묘한 처지라니요?" "글쎄, 한마디로 말하기 힘들구먼!" 선대인은 점점 깊은 우수에 빠져들었다. 바로 그 때였다. 단리궁은 빗소리와 함께 다가서는 경미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단리궁의 청력은 이미 육령통심의 경지를 초월한 지 오래였다. 그는 눈을 감고도 일대 십 리 안의 모든 움직임을 육안으로 보는 것처럼 살필 수 있었다. 답파능공으로 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는 자들, 거침없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자들, 단리궁의 귓전으로 무수한 소리들이 파고든다. '하나, 둘… 넷… 열여섯… 으음, 무수하다.' 단리궁은 귀를 쫑긋 세우며 손가락을 가볍게 구부렸다. '어떠한 자들이… 이곳을 포위한단 말인가?' 단리궁은 일순 두 눈에서 강한 빛을 뿜어 냈다. 그의 두 눈에서 한 줄기 예광이 흘러나갈 때였다. "놀랍군. 자네도… 무공이라는 것을 익혔단 말인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을 호신할 정도는 배웠습니다!" 단리궁은 빙그레 웃었다. "모를 사람이군, 자네는!" "하하… 그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흠, 이렇게 궁핍한 곳에서 호젓이 살면서도 그런 오만한 배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부럽네!" 선대인은 중얼거리듯 말하는데……. 휘리리－ 릭－ 휘릭－! 사방에서 일단의 무사들이 나타나 진장서축을 새까맣게 뒤덮기 시작했다. 가히 수천. 장검을 등에 멘 일단의 무사들은 낭인부 구석구석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선대인은 그것을 모르는 듯 태연자약했고, 단리궁은 여차하면 선대인을 안고 날아오를 작정을 하며 겉으로는 매우 여유 있는 자세를 취했다. "자네의 젊음이 부럽네!" 선대인은 아침이 되었는데도 일어설 줄을 몰랐다. 그리고 일대의 포위망은 칠천(七千) 수준에 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연경성의 오분지일 가량을 새까맣게 뒤덮은 괴무사들. 이들은 하나하나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었고……. 슷－ 슷－ 슷－ 슷－! 그들은 소리도 내지 않고 진장서축 일대에 수십 겹의 포위망을 구축하며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노리는 자들은 아니다? 그렇다면……?' 단리궁은 선대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선대인은 찻잔에 남은 찻물을 홀짝홀짝 마시며 단리궁을 쏘아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그리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는 동안 비는 더욱 드세게 뿌려졌고, 말없는 대치 가운데 정오가 지나갔다. 그 사이, 진장서축 일대의 포위망은 일만여(一萬餘) 숫자를 육박하게 되었다. 일 마장 안은 괴무사들로 새까맣게 포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꾸역꾸역 모여드는 무사집단. 이들은 하나하나 철저한 수련을 받은 듯, 뭉치고 흩어지는데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들은 포위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내가… 말괄량이 딸 이야기를 했던가?" 선대인은 찻잔을 탁자 위에 놓고 눈을 떼었다. "예." 단리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리고 그 아이가 가출(家出)했다는 이야기도 했던가?" 선대인의 표정은 더욱 암울해졌다. "그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아, 그랬던가?" 선대인은 탄식을 섞어 말을 한다. 그는 단리궁의 신비로운 용모를 새삼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는 이상한 마력(魔力)이 있네. 할일이 태산 같은데, 자꾸만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싶구만!" "바라신다면… 열흘 밤을 새워야만 다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들어 드리겠습니다!" 단리궁의 미소는 신선하기만 했다. 바로 그 때였다. "시세를 모르는 자, 이제 그만 하는 게 어떤가?" 그의 고막 속으로 아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 소리는 빗속에서 흘러나왔다. 선대인에게는 들리지 않고 단리궁에게만 들리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말을 한 사람은 깡마른 노인으로 쌍검을 메고 있었다. 그는 선대인의 호법과 함께 서 있었다. "하늘(天)을 모르는 자! 이제… 조용히 입을 다물게나!" 목소리에는 습습한 요기(妖氣)가 스며 있었다. 노인의 두 눈에서는 벽살신강(碧煞神剛)의 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퍼붓는 빗속, 일만여 무사들은 꽤나 초조한 기색으로 숨어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가공할 은형술(隱形術)을 지니고 있는지라, 낭인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겹겹이 포위되어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리궁은 협박조의 전음을 들으며 선대인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는 그답지 않게 전율한 흔적이 역력했다. '설마, 이분이… 하늘이란 말인가?' 단리궁이 무엇인가를 느꼈을 때였다. "아아, 자네를 진작 봤다면… 그 아이를 맡겼을 텐데… 그렇다면 오늘의 번뇌는 없었을 텐데!" 선대인은 탄식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단리궁은 무엇인가 말할 듯 입술을 움찔했으나, 정작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가겠네. 아마… 다시 오지 못할 걸세. 그러나 자네와 두 번 만난 기억은… 늘 잊지 않고 있을 걸세!" 선대인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단리궁의 유난히도 신비로운 손을 쥐었다. 뜨거운 열기가 손에서 손을 타고 흐른다. "자네 같은 청춘이 부럽다네!" 선대인은 암울한 표정 가운데에서 웃음을 지었다. 그가 단리궁의 손을 풀어 주려 할 때였다. "만약 폐하시라면 제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선대인의 뇌리 속으로 아주 큰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 이 소리는……?' 선대인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단리궁을 바라봤다. 단리궁은 입술을 달싹이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한 사람은 분명 그였다. "놀라실 것은 없습니다. 혜광심어(慧光心語)라는 전어술로 입술을 벌리지 않고 말을 건네는 수법입니다!" 단리궁은 불가정종의 이심전심 수법으로 말을 건넸다. "제 말이 맞는다면 눈을 한 번 깜박이시고, 틀린다면 두 번 깜박이십시오!" "……." "폐하십니까?" "……." 선대인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그는 바로 대명(大明)의 천자(天子)였다. 다름아닌 선덕제(宣德帝). 명조의 위대한 성군으로 정사에 길이 남은 선덕제였다. "미복잠행(微服潛行)중이십니까?" "……." 선덕제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밖에 대거 나타난 사람들은 폐하의 친위고수(親衛高手)들입니까?" "……." "그들은 세칭 금의위(禁衣衛)라 부르는 고수들입니까?" "……." 선덕제는 눈을 한 번씩 깜박였다. 단리궁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자시(子時)에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긴 이야기인지라 지금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를 뵙고 싶으시다면… 계신 자리에 칠성용봉등(七星龍鳳燈)을 하나 걸어 두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금의위(錦衣衛)의 고수 중, 현재 나타난 사람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을 배석시키십시오." "……." "그가 누군지 모르나 묘한 기운을 흘립니다, 폐하(陛下)." 매우 묘한 대화였다. 선덕제와 절정세가주, 두 사람의 만남은 하나의 숙명과도 같았다. 선덕제는 모르는 척 떠나갔고, 일대의 포위도 조용히 풀렸다. 구중(九重)의 번뇌 중원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라면……? 세인들은 너 나 없이 한 곳의 이름을 부르며 두 손을 합하리라. 그곳은 바로 자금성(紫禁城). 대명천자(大明天子)가 머무는 곳이고, 구중천(九重天)으로 표현되는 최절정의 장소이다. 오늘따라 야무(夜霧)가 짙다. 구중천 구석구석에는 시위대 고수들의 호흡 소리, 발걸음 소리가 나직이 퍼지고 있다. 가장 깊은 밤 삼경(三更). 자금성 일대에는 늘 그렇듯이 수 겹의 포위망이 구축되어 있어 나는 새라 하더라도 자금성의 벽을 넘지 못하게 했다. 아홉 개의 벽(壁), 아홉 개의 문(門) 너머 연화(連花)가 가득 피어난 거대한 인공호수가 하나 있었다. 수면 위에는 수많은 화방(花舫)이 떠돌아다니고 있고, 연지(連池) 위에는 궁녀(宮女)들의 살 내음이 배어 있는 전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하늘에는 달, 땅에는 바람이 유혹하고 있는 밤이다. 하나의 등(燈), 지극히 호화로운 궁등(宮燈) 하나가 거대한 전각의 처마에 내걸렸다. 만세신전(萬歲神樓). 구궁천 안에 있는 수천 개 고루거각(高樓巨閣) 가운데에서도 규모와 아름다움에 있어 두각을 나타내는 명건축물이다. 칠성용봉등(七星龍鳳燈). 등은 초저녁부터 내걸렸다. 궁녀(宮女)도, 환관(宦官)도, 어전시위(御前侍衛)들도 주상이 왜 그것을 처마에 걸라고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누구도 그것을 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천자의 일에는 이유를 달지 못한다. 그가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마는 것이다. 자욱한 밤안개가 밀려드는 밤. 위대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자금성 내부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칠현금(七弦琴) 퉁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띠잉－ 띵－ 띵－ 띠잉－! 만세신전 안에서 흐르는 칠현금 소리에는 아취와 기품이 담겨 있다. 구룡포(九龍袍)를 걸친 중년인 하나가 창문을 활짝 열어 둔 채 칠현금을 퉁기고 있다. 그는 창을 통해서 하늘의 달을 보고 있었다. '어이해 오지 않는 것일까? 어이해……?' 선덕제(宣德帝), 그는 뒤틀리는 심기를 바로잡기 위해 칠현금을 퉁기는 중이었다. 그 근처, 여덟 명의 무장(武將)이 학익진(鶴翼陣)을 펼친 채 시립해 있었다. 모두 금의위(錦衣衛) 소속의 황제 친위고수들이다. 이들의 충성심은 국조제일(國朝第一)로, 이들은 그 누구도 착검한 채 들어서지 못한다는 어전에 연검(軟劍)을 허리띠로 차고 들어서는 자격을 갖고 있다. 그 우두머리는 키가 구 척(尺)에 달하는 거한. 그는 선덕제가 미복잠행할 때 우산을 받쳐 들고 따라다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철탑천장(鐵磬天將) 백보벽력(百步霹靂) 철거(鐵巨). 그는 검의위의 제삼인자(第三人者)였다. 하지만 그의 충성심은 금의위의 일만오천 고수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주상이 어이해… 좌불안석이실까?' 철거는 못내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금강불괴지신이나, 아둔한 머리를 갖고 있다. 그는 깊은 지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자이다. 어쩌면 지극히 편안하게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가고 있는 자일 것이고, 나름대로는 고뇌하며 살아나가는 바보 거인일 것이다. 그 이외. 천룡위사장(天龍衛士長) 천룡무객(天龍武客), 백호위사장(白虎衛士長) 백호판관(白虎判官), 주작위사장(朱雀衛士長) 주작무존(朱雀武尊), 현무위사장(玄武衛士長) 현무신군(玄武神君) 하포(河浦), 황룡위사장(黃龍衛士長) 황룡대인(黃龍大人). 세칭 오호대위사(五虎大衛士)가 있고, 그 이외에도 두 명의 절정고수가 시립해 있다. 깡마른 흑포노인, 그는 언제나 흐릿한 눈빛을 허공에 던지고 있다. 그는 금의위의 부영반(副領班)이고, 별호는 천룡염후(天龍焰俟)라 불리고 있었다. 소림사 정종비기를 위시해서 강호백파의 비전절예에 두루 달통한 자로, 오대에 걸쳐 명황실을 섬긴 천룡무가(天龍武家)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 곁, 금의위의 제일인이 되는 온화한 인상의 백포인이 서 있었다. 백룡무후(白龍武俟) 위천걸(威天傑).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의 사촌이 되는 자로, 황제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황제 선덕제의 소년 시절 호법을 섰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들 팔 인이야말로 선덕제의 그림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밤이 깊어 갈 때였다. "훗훗… 역시……!" 선덕제의 입가에 자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눈에는 달빛이 들어섰고… 막 달빛을 뚫고 궁정(宮庭)으로 날아드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언뜻 들어왔다. "소생, 조금 늦었습니다. 일대를 조사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폐하!" 선덕제의 뇌리로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단리궁, 그가 달빛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 단리궁은 거의 순간적으로 만세신전의 처마에 달라붙었다. 바로 눈앞에서 바라본 선덕제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빠른 경공. 여덟 명의 절정고수 또한, 단리궁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리궁은 묘한 시선으로 만세신전 안의 구 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 가운데… 마기(魔氣)를 흘리는 자가 있다.' 단리궁은 기이한 육감을 갖고 태어났고, 가공할 기연으로 인해 절정의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타인의 마성을 알아차리는 데에 있어 가히 절정이라 할 수 있었다. 단리궁은 천천히 한 사람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 자다.' 단리궁의 망막에 가득 차는 자는 바로 천룡염후(天龍焰俟) 공야중(公冶仲)이란 자였다. 그의 흐릿한 눈, 담담한 표정 뒤에는 야릇한 마기가 깃들여 있었다. '황궁에 저런 자가 있다니…….' 단리궁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선덕제를 바라봤다. "폐하, 지금 곧 한 가지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것은 팔 인에게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저를 믿으신다면, 저의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선덕제의 귓속으로만 파고들었다. 소림사에서도 실전된 혜광심어법(慧光心語法).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완전한 전어술이다. '영웅(英雄), 짐(朕)이 어찌 자네를 믿지 않겠는가? 이래 봬도… 사람 보는 눈은 있는 사람이네.' 선덕제는 미소를 짓다가 탄금(彈琴)을 멈췄다. "밤이 으슥하군. 흠, 짐은 침전에 들어야겠으니… 제장(諸將)은 이제 자신들의 거처로 들아가게!" 선덕제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하늘이 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로서는 그가 하는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 폐하!" "소장(小將)들, 하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공주저하(公主底下) 일은 더 이상 심려하지 마십시오. 소장들, 장군부 무장들과 심사숙고하여 공주저하를 피납해 간 천년밀가의 악마들을…철저하게 징계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으니까요, 폐하!" 천년밀가가 어전에서 이야기되다니……! '어처구니없군. 나의 가문에 이런 치욕이 있다니…….' 단리궁은 입술을 악물었다. '천자를 위한 일로만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로군. 그렇다면… 나는 더 모질게 행동해야 한다. 어쩌면… 처음으로 피(血)란 녀석을 손에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 나를 떠돌게 한, 나의 가문 때문에…….' 단리궁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일순 그의 몸은 한 줄기 흑무로 화했고, 여덟 사람이 허리를 숙이는 그 순간 팔 인의 머리 위를 타넘어 선덕제 쪽으로 떠올랐다.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흑무유룡술(黑霧遊龍術). 그것은 백팔 주의 절기 가운데에서도 열 번째 안에 드는 절기이다. "무… 무엇이 흘러들었는데?" "어떤 기척이……?" 중인 가운데 희미한 기척을 알아차리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쳐든 사람은 단 두 사람이었다. 천룡염후와 백룡염후, 이들만이 고개를 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착각인 듯하군.' '그런 것이 사람일 리는 없다.' 두 사람은 평상적인 상태로 돌아갔다. 밀실(密室). 이곳은 선덕제만이 들어설 수 있는 가장 신비한 장소이다. 선덕제는 이 안에서 조정대사를 생각하곤 했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약간의 자유를 즐기곤 했다. 탁자 하나, 그 위에는 대추가 가득 담긴 옥반 하나가 놓였고 천자가 냉수 삼아 마시는 공청신유(空淸神乳)가 향차(香茶) 대신 두 잔의 잔(盞)에 담겼다. 선덕제는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일은… 천자의 권위를 무시한 강호배들의 발호사건인지라, 외부에는 소문나지 않은 것이라네!" "공주저하가 납치되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입니다!" "워낙 막중한 일인지라…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네! 최근 들어 짐에 대한 호위가 배가된 이유는 공주가 달포 전 피납되었기 때문이라네!" 선덕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품에 넣었다. 그는 손을 경련시키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네. 황궁에 풍운을 일으킨 그 물건은!" 선덕제는 작은 목갑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툭－! 목갑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단리궁은 천자가 팔짱을 끼기를 기다렸다가 목갑을 취했다. 뚜껑을 열자, 두 가지 물건이 보였다. 하나는 봉황신차(鳳凰神釵)라는 두 치 길이의 비녀, 또 하나는 네 번 접은 붉은색 첩지. 봉황신차에서는 풋풋한 체향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황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불렸던 옹리공주(翁莉公主) 주약빙(朱若氷)의 신표였다. '설마, 우란 녀석이 공주를 납치했단 말인가? 왜……?' 단리궁은 착잡해 하며 쪽지를 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천만 대군에 포위되었다 해도 이처럼 긴장하지는 않으리라. 쪽지는 활짝 펴졌다. 그 위, 간단한 글이 적혀 있었다. <공주는 위대하신 분, 결국 공주의 몸값은 위대해야만 한다고 사려되옵니다. 위대하신 폐하! 가난한 강호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기(下記) 물품을 한 달 안에 건네 주신다면 아리따운 공주님을 소문 없이 돌려받게 될 것이외다! 황금(黃金) 백만 관(貫), 화약(火藥) 천만 근(斤), 천하각지에서 통하는 칙령기(勅令旗). 소생들은 비천하고 야만스러운 강호의 무리. 조건을 거절당하면 눈물을 머금고 공주저하를 창굴(娼窟)에 팔아 넘겨 화대(花代)를 착복할 수밖에 없소이다. 위대하신 폐하께서 용단을 내리시기를…. 물품은 한 달 안에 마차 백 대에 나눠 실어 천목산하(天目山下) 관령진(關嶺鎭) 폐허에 놓아 주시기를! 만에 하나, 이 사건에 대해 황실고수를 파견하신다면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존경하옵는 폐하시여! 옹리공주(翁莉公主)는 지금 울고 계십니다. 아주 처량하게! 무면상(無面相).> 서명은 무면상이라는 자가 했다. 얼굴이 없다는 뜻의 무면상, 그는 철저하게 황제를 조롱하고 있었다. "옹리는 납치되었네. 그 아이의 거소에서 이것이 발견되었네. 그래서 금의위를 모두 풀어 조사케 했는데… 결과, 정말로 노여워할 증거를 찾아 내게 되었다네!" 선덕제의 눈에서는 맹광이 폭사된다. 나약하고 섬세해 보이는 선덕제의 몸 안에도 절정의 어떤 기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자 특유의 기품이고, 품격에서 우러나는 기운이었다. "강호정세에 정통한 백 명의 친위고수들을 파견해 신속히 알아 본 결과, 무면상이라는 신비인의 출신을 알게 되었네!" "으음……!" "감히 황궁에 난입해 공주를 납치해 간 자들은… 강호제일의 세력이라 불리는 천년밀가라는 조직이었음이 밝혀졌네!" 선덕제의 눈에서는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진심으로 노여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재 궁지에 몰렸다는군. 악행이 쌓인 나머지, 온 천하의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군!" "으으… 음……!" 단리궁의 숨소리가 묘해졌다. 그의 손바닥에는 땀이 쥐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군자금을 필요로 했던 것이네. 그래서… 무엄하게도 자금성을 타넘어 든 것이네." "……." "자금성 안을 자유롭게 출입할 세력은… 천년밀가뿐이네." 선덕제는 강호에 대해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공주의 납치사건으로 인해 강호정세에 대해 해박하게 알게 되었다. "짐은… 백만 황군을 천년밀가로 보낼 작정이네.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섬멸이오?" "짐은… 협박에 굴하지 않을 걸세. 아마도 그 자들 또한, 공주를 죽이지는 못한다고 보네!" 선덕제의 말이 여운을 맺는다. 그는 말을 다 한 눈치였고, 단리궁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단리궁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고뇌 가운데 어떤 자신을 얻고 있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천자를 노엽게 할 것입니다!" "짐을 노엽게 하다니?" "주상은… 흑백을 잘못 알고 계십니다!" "무슨 말인가, 경(卿)의 말은?" 천자는 단리궁을 경이라 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나이 든 형과 나이 어린 동생의 사이와 같았다. 단리궁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다. 그는 번뇌 가운데 어떠한 해답을 얻은 듯했다. "황군을 출동시키신다면… 천하를 멸하는 실수를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인 말인가?" "천년밀가는 고집스러운 집단이나, 강호를 지탱해 온 하나의 기둥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그래서?" "그들이 궁지에 몰린 것도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공주를 납치해 물품을 받아 낼 것 같은 발호는 하지 않을 세력입니다!" "어이해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들이 제시한 세물품, 그것은… 그들에게는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뭐라고?" 선덕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황금(黃金) 백만 관(貫), 화약(火藥) 천만 근(斤), 칙령기(勅令旗). 그것은 가공할 힘을 지니고 있다. 한데, 밀가에는 그것이 필요 없다니! "그들은 천 년간 부(富)와 저력을 모았습니다. 그들의 창고에는 오천만 냥 상당의 황금이 가득하고, 지하밀실에는 화약이 그득합니다." "그… 그럴 리가……!" 그 말에 선덕제는 회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폐하!" "으음, 경은 의인(義人)!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리라 보오. 하지만 이 일은 짐의 휘하고수 중 몇 사람이 밀가를 정탐하고 나서 말한 것이니 틀릴 수 없네! 그들은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태이네!" "틀립니다! 단리궁의 대답은 단호했다. "허, 고집 부릴 일이 아니네!" "완전히 틀립니다. 저는 그것을 확실히 압니다!" "어떻게?" 선덕제는 짐짓 화를 내는데……. "그 이유는… 제가 그곳의 대종손(大宗孫)이기 때문입니다!" 단리궁의 말은 선덕제의 숨을 멈추게 했다. 선덕제는 공청신유를 거푸 세 잔 들이켰다. 그러고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듯, 그는 다시 한 잔의 공청신유를 잔에 따라 마셨다. 침묵(沈默)… 두 사람은 침묵 가운데 일 각을 보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선덕제였다. "그럼, 경은 단리씨(段里氏)인가?" "예." "으음……." 선덕제는 한숨을 내쉰다. 그의 눈에는 우수가 그득하다. "폐하, 소생의 말을 믿지 못하시는지요?" 단리궁이 조심스레 묻자……. "아닐세, 경을 믿네. 믿지 않는다면 단독 대면을 허락치 않았을 걸세." 선덕제는 우수 가운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이해……?" "짐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반역자가 외부에 있지 않고, 바로 짐의 근처에 있으리라는 짐작이 언뜻 들었기 때문이라네!" 선덕제는 뛰어난 경륜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단리궁이 생각한 것을 지혜로 깨달은 것이다. "……!" "경이 한밤에 온 이유는 짐의 주위에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믿네!" "그렇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짐은 금의위 충신들에게 속고 살았던 바보가 아니겠는가?" 선덕제의 표정은 꽤나 어두웠다. 그는 천천히 단리궁의 손을 쥔다. 그의 손을 타고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믿을 사람은 경뿐이네! 다른 무엇보다도 경의 강하고 지혜로운 눈을 믿네! 부디 짐의 번뇌를 없애 주게. 이 순간부터 경은 짐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임시 황실제일장(皇室第一將)이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게. 다만… 짐의 번뇌만 없애 주게." 달은 핏빛 안개 속으로 침잠(沈潛)하고 있다. 사경(四更)으로 치달려 가는 밤의 깊이는 태고(太古)의 정적과 더불어 황성(皇城)의 군림(君臨)을 날줄과 얽어 짜는 가운데, 지극히 장중한 밤의 장막을 떨어뜨렸다. 혈하(血霞)가 자욱이 퍼진 자금성(紫禁城) 깊은 곳이다. 시위무사(侍衛武士)들은 석상처럼 서서 사위를 바라보고 있고, 팔색(八色)의 무수한 번(幡)이 불어오는 밤바람에 가늘게 펄럭거린다. 심야(深夜), 이 순간따라 기이한 힘이 사방으로 스며 가고 있었다. 서광이 폭사되어 나가듯 구중천의 드넓은 궁정을 가로지르며 사라져 가는 한 줄기 검은 연기. 그것은 거의 순간적으로 침잠하는 밤의 적막 속으로 사라져 갔다. 제왕전(帝王殿). 선덕제는 혼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微笑)가 떠오르고 있었다. "궁(弓), 자네는 이번 일이 어찌 되든 짐(朕)의 사람이야. 자네가 강호제일인이든 아니든, 짐은 대륙의 천자! 훗훗, 자네의 고집도 대단하나… 짐의 고집도 대단하네! 자네는 일의 성패 여하를 막론하고 짐의 그림자가 되어 주어야 하네!" 선덕제는 며칠간의 번뇌에서 벗어난 듯했다. 텅 빈 자리, 거기 앉아서 선덕제와 밀담을 나누었던 단리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풍운이 잉태시켜 태어난 한 마리 용(龍)! 자네는… 대륙의 용이네!" 선덕제는 중얼거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나저나 약빙(若氷), 그 철없는 아이에게 아무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의 면전, 당세제일의 화공이라 불리는 추령(秋令)이라는 자가 그린 하나의 벽화가 있다. 오 년 전에 그려진 거대한 벽화 안. 지금보다는 훨씬 젊어보이는 선덕제가 구룡포를 걸친 채 천추전(千秋殿) 앞을 거니는 모습이 있고… 그의 오른쪽, 콧날이 유난히도 뾰족한 미소녀 하나가 머리 위에 주렴의 관(冠) 하나를 쓴 채 서 있었다. 꽤나 요염한 티가 전신에서 흐르는 가운데, 탈속하고도 화사한 아름다움을 흘리는 어린 소녀. 소녀의 입가에는 미인점(美人點)이 하나 박혀 있다. 맑은 눈빛과 오똑한 콧날, 생긋 머금은 요염한 미소……. 소녀는 바로 옹리공주(翁莉公主) 주약빙(朱若氷)이었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무수한 시종들의 떠받듬 아래 세상 모르고 고귀하게만 자라 온 황녀(皇女). 그녀는 황실의 여인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만했다. 그리고 선덕제의 지극한 총애를 받는 선덕제의 장중주(掌中珠)이기도 했다. "약빙, 한 마리의 용이 너를 찾아 떠나갔다. 아아, 운명이 도와 네가 무사하기를……!" 선덕제는 이 순간 천자도 아니고 황제도 아니다. 그는 철부지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 명의 아버지에 불과했다. * * * 어둠 깊은 곳, 언제부터인가 두 줄기 시선이 한 곳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깊이를 모를 정도로 유심(幽深)한 두 눈은 유난히도 큰 죽립(竹笠)의 올 사이를 통해 밤안개에 휘어감긴 하나의 철루(鐵樓)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기(妖氣)는 저 안에서 흘러나온다.' 자욱이 번지는 밤안개 가운데 거대무비한 철루 주위에는 세 겹의 기문병진(奇門兵陣)이 펼쳐져 있고, 머지않아 아침이 시작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대 무사들의 대오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무사들은 삼색(三色)의 전포(戰袍)를 걸치고 있었다. 황색전포를 걸친 사람들은 외각지대에 드넓게 퍼져 있다. 지니고 있는 무기는 장창(長槍)과 대도(大刀). 이들은 산만한 가운데 일대를 광범위하게 포위하는 명진세를 구축하고 있다. 두 번째 인물들, 흑포를 걸친 자들로 수는 오백 정도. 이들은 철루 주변의 넓게 펼쳐져 있는 화원(花園) 일대에서 사위를 예리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이들의 소맷자락은 자색 빛깔을 띠고 있다. 자삼시위(紫衫侍衛), 흑포자삼의 무장(武將)들은 자금성의 첨병(尖兵)들이고 동시에 금의위의 일급무사(一級武衛)였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으나 존재하는 한 부류의 인물들이 있었다. 호흡 소리조차 감추고 있는 신비인들은 자삼시위의 뒤쪽 일대를 넓게 포위하고 있다. 수적으로는 극소수이나, 이들이 포위하는 범위는 가장 광범위했다. <천룡충렬전(天龍忠烈殿)> 거대한 철루에는 그러한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그곳은 오호대루(五虎大樓)를 관장하는 곳이다. 언제부터인가 암흑 가운데 서서 현판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의 입가에는 묘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감히 황상의 면전에서 재주를 부리는 자들이 있다니! 훗훗, 너희들은 이제 알게 되리라! 하늘(天)은… 검은빛이 아니고 푸른빛임을!" 바로 단리궁! 그는 선덕제와 밀담을 나눈 후 여기로 왔다. '진장서축에서 나는 가공할 마기(魔氣)를 느꼈다. 그 기운은 이곳을 관장하고 있는 천룡염후라는 자의 호흡에서 흘러나왔다. 내 짐작대로라면 천룡염후라는 자는 황실의 고수이기 이전, 신비 마도세력의 한 인물이다.' 단리궁은 손을 들어 죽립 끝을 슬쩍 기울였다. '너희들은 두 가지 크나큰 죄를 지었다. 첫째는 자상한 황제를 농락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천하제일의 고집쟁이인 나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단리궁의 입가에는 차디찬 미소가 매달렸다. '감히 밀가를 농락하려 하다니! 이제… 알게 될 것이다. 밀가의 고집쟁이가 어떠한 자라는 것을!' 단리궁은 절정세가주로 처신하고 있다기보다 천년밀가의 대종손으로 처신하고 있었다. 마치 운명처럼……. '나는 밀가를 버릴 수 있으되, 중원은 밀가를 버릴 수 없다!' 그는 하늘이 그에게 준 피의 율법에 따라 또 하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자, 일단 안으로 잠입해 보자! 저 안에 있는 자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 벌써 일 각에 걸쳐 안을 살펴보았으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안에 사람이 없거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 틀림없는 일이다.' 손이 가늘게 떨린다. 그리고 죽립은 완전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아래턱이라 하더라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단리궁의 몸에서는 검은 안개가 피어 오르는 가운데, 일대의 야무와 하나로 합쳐져 단리궁의 형상을 대지 위에서 지워 버리고 있었다. 절대의 장안술(障眼術)이라 일컫는 흑무잠형환(黑霧潛形幻). 그것은 절정천부에 비장되어 있던 천년절학 가운데 하나로, 정종무공과는 거리가 먼 환술의 한 종류이다. 츠으－ 읏－! 단리궁은 검은 안개와 하나로 뭉쳐져 백여 장을 폭사해 나갔다. 달빛이 흐려지고 있고 자욱한 피안개가 깔리고 있는지라, 단리궁이 천룡충렬전으로 신형을 폭사시킨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융단이 두텁게 깔려 있는 실내. 단리궁은 안개가 흘러드는 듯이 잠입해 들어섰고 입가에 차디찬 미소를 드리웠다. "자금성과 지척간이 되는 곳까지 악마의 무리가 스며 있다니…." 그는 가공할 사기(邪氣)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지하(地下)에서부터 흘러나왔다. 골수 속으로 파고드는 잔혹한 기운, 단리궁은 다시 한 번 냉소를 흘리며 죽립 끝을 기울였다. '가공할 마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마공이 이백 년 수위가 넘은 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극혼마공(極魂魔功)이다.' 단리궁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융단을 밟으며 걸었다. 자욱한 혈무(血霧)가 깔리고 있는 밀실 안이다. 언제부터일까? 아련한 숨소리가 허공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아아… 하아아……!"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호흡 소리. 그 소리는 혈무에 잠긴 하나의 침상 위에서 흘러나왔다.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는 궁장여인 하나. 그녀는 가쁜 숨소리를 내며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조금 뾰족하다 싶을 정도로 오똑 일어난 콧날, 선정적으로 부풀어오른 딸기빛 입술, 옷 밖으로 터져 나올 듯 부풀어오른 젖가슴의 능선, 끊어질 듯 가는 세류요(細柳腰)를 가진 완벽한 미인. 호리호리한 가운데 풍만하고 가냘픈 굴곡을 갖고 있는 여인은 나이가 스물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여인의 몸 주위에는 흑의인들이 서 있었다. 도합 십이 인, 이들은 못내 괴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립(方笠)을 기우듬히 쓴 이들의 몸에서는 칙칙한 죽음의 내음이 느껴진다. 피비린내가 밴 피풍의(被風衣) 자락이 돌바닥을 쓸고 있다. 이들은 한 자루 기형장도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장도에서는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고, 차가운 눈알에서도 전율스러운 사기(死氣)가 흘러나왔다. "애석하군. 저 계집을 밟지 못하는 것이!" 누군가 중얼거리자……. "미친 소리 마라. 저 계집의 몸에 손가락이라도 하나 대는 날이면… 크크, 가주(家主)의 일 도(刀)에 몸이 정수리에서 사타구니 사이까지 쪼개지고 말 것이다!" 누군가 음침히 말한다. "흐흐… 가주는 절대지경(絶代之境)에 들어서 인간의 동물적인 욕구를 끊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셨으나… 흐흐, 우리들은 다르다. 우리들은… 흐흐, 하루라도 계집의 궁둥이를 두들기지 않고서는 잠을 자지 못하는 처지이다. 한데, 이런 우라질 곳에 와서 벌써 달포나 뭉개고 있어야 하다니……." "훗훗…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본가가 하는 일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천하는 우리의 것이고… 훗훗, 머지않아 온 천하의 아름다운 계집들은 모두 다 사타구니 사이에 우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거칠게 말하는 자들, 이들은 중원검파의 무사들과는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서서, 두 손으로 장도 자루를 모아 쥐고 있는 기이한 자세. 굳은 듯한 가운데 유연하고, 정지된 듯한 가운데 절대의 변화가 감추어져 있는 운도(運刀)의 자세. 이들은 중원인(中原人)이 아니었다. 장포 자락 아래, 매우 묘한 것이 비쳐 보이고 있다. 비 올 때나 신는 나무신, 그것은 바로 게다(왜나막신)가 아닌가? 방립을 쓰고 석상처럼 서서 동물적인 눈빛을 흘리는 십이 인의 몸에서는 죽음과 피의 비린내가 풍겨 나왔다. 자욱한 혈무 가운데, 궁장미인의 숨소리가 더욱 달아올랐다. "하아아… 하아아… 견딜 수 없다!" 몸이 폭발하는 듯한 열기를 느끼는 듯, 피부에 반점을 떠올리고 사지를 경련하는 묘령의 여인. "머… 머리가 빠개지는 듯하다. 하아… 악!"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가쁜 호흡 소리, 끈끈하고 유혹적인 숨결, 그리고 십이 인의 도객은 동물적인 욕망을 참기 괴롭다는 인상으로 변화했다. "미치겠군." "우라질, 사타구니 사이에 끼고 백 번을 조여도 시원치 않을 천하우물(天下尤物)을 앞에 두고 땀만 흘려야 하다니!" "크크… 저 계집의 호법을 서는 것이 이리도 견디기 힘든 일일 줄이야!" "참게나. 저 계집은 곧 마혼지경(魔魂之境)에 빠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일은 끝나게 되니까!" "후후… 계집, 계집하지 마라. 저리 연약해 보여도… 후후, 머지않아 대진군(大進軍)이 시작되면 황후(皇后)가 될 계집이니까!" "크크… 철왕대가주는 욕심도 많다. 천마소종사도 있는데… 크크, 옹리공주마저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옹리공주라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묘령의 여인이 바로 옹리공주란 말인가? "하아아… 하아아……!" 점점 애절해지는 호흡 소리 가운데 기나긴 머리카락이 땀에 젖는다. 여인은 비릿한 땀을 쉬지 않고 흘려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은 점점 기이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아아… 악!" 여인의 숨소리가 고조될 때였다. "후후… 철왕대가주 철대군주(鐵大軍主)가 준 비약(秘藥)의 효과가 대단하군. 단약을 단 세 알 먹였을 뿐인데도 저지경이 되다니!" "크크… 저 계집의 뇌성(腦性)은 곧 마비된다. 그리고 깨어나게 된다면… 머리 속이 텅 빈 백치(白痴)가 되고 말 것이다!" "후후… 우리 칠 가(家)는 옹리공주의 지배자가 되어… 오래지 않아 옹리공주를 통해 만천하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 때쯤 선덕제는 은밀히 독살당할 것이고… 후후……!" 잔혹한 목소리가 흐르고 있을 때였다. 돌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며 석문 하나가 활짝 열렸다. 문 뒤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둥둥 떠서 안으로 날아들었다. 순간. "사랑(邪郞)이시여!" "속하들, 사랑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십이 인의 도객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세우고 손을 배에 대는 배례를 취한다. 안으로 들어선 자는 죽은 눈에 죽은 숨결을 지니고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노인. 그는 뒷짐을 진 채 방 안으로 들어서다가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氣), 그의 뛰어난 감각에 잡히는 하나의 기가 있었다. '어디서 이런 기운이 흘러든단 말인가?' 노인은 일순 손을 검자루에 댔다. 밀실 안에는 한 명의 여인과 십이 인의 도객이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순간적으로 반사작용에 따라 검자루를 거머쥐었다가 손바닥을 천천히 풀며 낮게 중얼거렸다. "모를 일이군. 노부의 신풍류(神風流)에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 걸음 내딛었다. 이럴 수가? 그는 바로 천룡염후(天龍焰俟)가 아닌가? 금의위의 제이인자이자 황실의 백년충신인 천룡염후가 자신의 거소 지하에 비밀장소를 갖고 있다니……. 뚜벅… 뚜벅……! 천룡염후는 여인이 누워 있는 침상 쪽으로 다가가다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또다시 느껴진다.' 그는 폐부를 가득 채우는 가공할 기운을 느꼈다. 아무런 호흡 소리도 들리지 않고, 인간이라면 필히 퍼뜨릴 수밖에 없는 심장의 박동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분명 어떠한 기운이 다가서고 있었다. '누군가… 있다.' 천룡염후의 얼굴 가운데 땀방울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특이한 감각단련을 한 바 있고, 그로 인해 백 장 안의 모든 움직임을 피부로 느끼는 가공할 수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지금 필설로는 형언하지 못할 기이한 기세가 사방에서부터 다가서고 있었다. 차가우면서 강인한 기운. 그것은 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면 감지하지 못할 기운이었고… 절정에 가까이 간 자일수록 강하게 느끼는 그런 기운이었다. '벽(壁)이다.' 천룡염후는 검자루를 가볍게 거머쥐었다. '누군가 있다면… 죽고 만다.' 그의 죽은 눈은 더욱 차갑게 침잠되어 갔고, 한순간, 천룡염후의 손은 슬쩍 쳐들렸고, 어느 새 검신을 드러낸 장검에서 무시무시한 검광이 한 곳을 향해 폭사되어 나갔다. 파파파－! 둔팍한 소리가 나며 이 장 밖에 있던 거벽이 거미줄처럼 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 아니? 사랑나으리! 어이해서 벽을?" "무슨 일로 멀쩡한 벽을?" "어어엇?" 십이 인의 도객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는데……. "검극(劍極)에는 아무 것도 닿지 않았다. 으으, 분명 저 곳에서부터 온기(溫氣)가 일어났는데… 설마, 내가 속았단 말인가?" 천룡염후의 눈빛은 여지없이 흐트러졌다. 살아오는 가운데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위대한 검사, 그는 처음으로 피를 보지 않는 출검(出劍)을 한 것이다. 우르르르릉－!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였다. "후후… 노괴의 일 검은 훌륭했다. 장검으로 절대도초를 완전무결하게 시전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허공에서부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희디흰 이빨이 나타나고, 턱의 선이 흔들리는 가운데 묘한 어감의 목소리가 흘렀다. "위대한 신풍제일도(神風第一刀). 후후, 묘하군. 부상신풍가(扶桑神風家) 사람이 천룡염후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황실금의위로 행세하고 있다니……!" 훌쩍 떨어져 내리는 사람은 바로 단리궁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너의 정체를 알기 위해, 조금 재간을 부렸던 것인데… 후후, 네놈은 나의 꾀에 속아 네놈의 비전검초를 시전하고 말았구나." "저… 저 놈은……?" "쳐라, 무조건!" "하아아… 앗!" 차창－ 창－ 창－! 열두 자루의 장도(長刀)가 쳐들려지고, 허공 가득 열두 줄기의 검기가 무지개처럼 피어난다. 열두 자루의 장도는 일사불란한 도막(刀幕)을 형성하여 단리궁의 백팔 혈을 일시에 점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좋아, 그러나 절정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단리궁의 손은 슬쩍 쳐들려지고… 너무나도 미려하고 우아한 손동작 가운데, 허공에는 하나의 무지개가 섬전처럼 폭사되어 나갔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가공할 수식(手式). 단리궁은 손에 보도가 쥐어져 있는 듯, 손바닥에서 이기형성검(以氣形成劍)의 진전을 발휘해 하나의 무형강도(無形剛刀)를 만들어 허공을 비스듬히 그어 내리고 있었다. 열두 자루의 장도가 모이는 그곳, 단리궁의 손바닥에서 일어난 흰빛은 너무나도 정확히 그곳을 갈랐고… 그 순간, 열두 자루 장도는 녹슨 쇳조각처럼 우수수 부서지는 가운데 열두 곳에서 피보라가 튀어 올랐다. 쩌어어억……! "크으으윽……!" "이, 이런… 참패가 있을 수가……!" "저… 저 자의 도(刀)는 혈무흔(血無痕)의 도였는데… 으으, 혈무흔이 쓸 때보다… 훨씬 빨랐다." 쿵쿵쿵쿵－! 나막신을 신은 십이 인의 인자(忍者)들은 미간(眉間)에 하나의 피꽃을 새겨 넣은 채 뒤로 벌렁벌렁 나뒹굴었다. 단리궁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고, 가짜 천룡염후는 장포자락을 풍성처럼 부풀린 가운데 아주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놀랍군. 도(刀)를 예(藝)로 변화시키다니? 그대는… 가장 위대한 도를 이룩했다." 볼을 실룩거리는 천룡염후, 그의 목소리는 차츰차츰 색다른 목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가짜였다. 그는 진짜 천룡염후를 죽이고 나서 그의 얼굴 가죽을 벗겨 인피면구로 만들어 얼굴에 뒤집어쓰고 진짜 행세를 했던 것이다. 보라! 그의 얼굴에서 인피면구(人皮面具) 한 장이 벗겨지고 있는 것을……. 찌익… 찍……! "전포는… 귀찮지. 크크……!" 금의위 특유의 전포가 찢어지는 가운데 속옷이 드러났다. 그는 내리닫이 옷을 걸쳤고, 허리띠에는 장도 하나를 비끄러매고 있었다. 턱이 뾰족하고 눈빛이 늪처럼 침울해 보이는 자, 그는 수하의 죽음 앞에서도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중원에 자네같이 위대한 수업자가 있다는 것을 보다니… 이것이야말로 행운이다. 그러나… 자네는 내게 죽고 만다. 못 볼 것을 봤고, 하지 않아야 할 짓을 했기 때문이다." 웃는 자, 그는 바로 잔검사랑(殘劍邪郞)이라 불리는 자였다. 잔검사랑, 부상의 살아 있는 전설. 그가 오래 전 혈무흔을 꺾지 않았더라면 유구국(琉球國) 일대의 주인은 변함없이 혈무흔이었을 것이다. 장도는 비스듬히 내리어진다. "도(刀)와 검(劍)은 다르지. 촉감에서부터! 클클, 중화인들은 검을 즐겨 쓰나 본국 사람들은 도를 잘 쓴다. 이유는… 예리하기 때문이다!" 잔검사랑은 오랜만에 상대를 만났다는 기쁨에 취해 웃고 있었다. 단리궁은 팔짱을 끼고 잔검사랑을 응시한다. 그의 두 눈에서 혜성의 불빛이 폭사해 나왔다. "귀하는 위대한 인자(忍者)라고 안다. 한데, 비겁하게도 황실을 이용해 황군(皇軍)을 일으키려는 짓을 하다니……!" "클클… 잘 왔다! 며칠간의 일은 노부의 철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지. 하지만 노부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왜?" "이번 일은 부상신풍가의 독자적 행동이 아니다. 물론, 네놈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 "혹, 그를 아느냐?" "누구?" "대군주(大軍主) 철류흔(鐵流痕)!" "철… 철류흔?" "그는 위대한 승부사다. 노부는 그의 가공할 승부근성에 매료되어 조건 없이 그의 수하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의 일은 그가 노부에게 이렇게 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일 뿐이다. 더 이상은 모른다. 노부는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다. 마음 속에 번뇌(煩惱)가 심하면 도결(刀訣)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잔검사랑은 장도를 쳐들었다. 한 치 한 치 쳐들리는 장도의 끝은 천천히 단리궁의 천돌혈(天突穴) 쪽으로 돌려졌다. '가공하다. 완벽한 도초다. 이미 혈무흔 노인의 경지를 넘어섰다.' 단리궁은 도망(刀網)에 빠져듬을 느꼈다. 치리리리－ 릿－! 무시무시한 예기(藝氣)가 피어 오른다. 절정도의 승부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잔검사랑은 완전무결한 도결을 이룩하며 히죽 웃었다. "크크… 그대는 묘한 자다!" "무엇이 묘하냐?" "강자인데, 두 가지가 다르다!" "……." �"첫째는 부드럽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름답다는 것이다!" "흠……!" "클클… 철류흔 대군주께서는 그와 상반되는 인상이 풍긴다. 그는 강하고 아름답다. 만에 하나, 그를 보기 이전에 그대를 보았다면 그의 종이 되기보다 그대의 종이 되었을 것이다." 잔검사랑은 두 손으로 장도를 움켜쥐었다. 그의 호흡은 완전무결하게 정지되어 있었다. 도광이 충전하며 한순간, 밀실 내부는 휘황찬란한 예광(藝光)에 뒤덮였다. 태양(太陽)이 떠오르듯이, 거대한 빛덩어리가 나타나듯 방 안은 밝아졌고… 잔검사랑은 예기를 흘리는 가운데 빛더미 속으로 사라져 갔다. 거의 완전한 무(無). 단리궁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다. '다가선다…….' 단리궁은 눈길을 내리깔고 있었다. '눈으로 보려 한다면… 늦는다. 이 자의 도는… 야뇌(夜惱)의 검보다 빠르다. 내공은 야뇌보다 약하나, 빠르기는 야뇌보다 더 하다.' 단리궁은 예민한 육감으로 살기가 다가섬을 느끼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장검에 쪼개지는 그 순간보다도 짧은 순간, 허공 가득 원호(圓弧)가 일어나는 가운데……. 고오오… 고오오……! "월(月)－ 파(波)－!" 잔검사랑의 몸이 빛줄기 가운데에서 불쑥 나타나며 거대한 번갯불 같은 검기가 섬전처럼 다가섰다. 츠으으－ 읏－ 츳－! 쭈욱 뻗어 나가는 예리한 도세 가운데……. "좋아, 일품(一品)의 도법이다! 하지만 절정이 되기에는… 멀었다!" 단리궁의 손가락이 가볍게 퉁겨지고 있었다. 일순 그의 손바닥에 비수(匕首) 하나가 쥐어졌고, 그의 손이 하나의 수결에 따라 움직이는 가운데 비수의 크기는 몸체보다 십 배나 더 길게 늘어났다. 기이한 각도를 그리며 움직이는 비수! 허공 가득 호화로운 검화가 수만 송이 피어나고 있었다. 팔만(八萬), 그리고 사천 화(花)… 허공의 모든 방위는 완전무결하게 누벼졌다. 섬(閃)… 빛과 빛이 하나로 뒤엉키는 가운데, 잔검사랑의 몸이 일순 정지되었다. "좋아, 그것은… 예술이었다!" 그는 히죽 웃고 있었다. 그의 미간(眉間), 하나의 핏빛 꽃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단 일 검(劍)에 그의 모든 것이 파괴된 것인가? 혈화(血花), 그것은 점점 커졌고 붉은 핏방울이 돌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잔검사랑의 몸뚱이는 썩은 나무토막 처럼 떨어져 내렸다. "완벽했다, 그대의 검은! 그대를 존경한다!" 잔검사랑의 미간에는 백 번의 변화가 가해졌다. 단리궁의 검초는 잔검사랑의 도초보다 다섯 배 이상 빨랐던 것이다. 쿵－! 잔검사랑은 나뒹굴었고, 한 번도 놓지 않았다는 애도(愛刀) 신풍혈(神風穴)을 스르르 놓았다. 그는 여전히 히죽 웃고 있었다. "죽어도… 애석치 않다. 가장 위대한 검을 보았으니까! 그대는 중원의 마지막 혼(魂)이리라. 그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으으, 결코 철대군주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금강불괴지체인지라 머리가 부서졌는데도 쉽게 죽지 않았다. 푸득－ 푸득－! 그의 팔과 다리는 뒤틀리기 시작했고……. "으으… 으으……!" 단리궁은 최초의 살인으로 인해 빚어진 구토 가운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리도 거부했던 피의 율법, 죽음으로 악마를 몰아낸다는 피의 율법을 그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그… 그대의 검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다!" 잔검사랑은 덜덜 떨며 물었고……. "그것은 허무마예(虛無魔藝)였다." 단리궁은 씁쓸한 표정 가운데 천천히 입술을 다물었다. "허무마예… 허무마예… 으음, 이름조차 금시초문이군. 하지만 철대군주에게는 그것을 꺾을 마공이 있으리라. 그는 악마의 절대자이니까… 그는… 이미 절정이니까……!" 잔검사랑은 다리를 뒤틀다가 숨을 끊었다. 그는 애도를 놓치며 죽고 말았다. 악마성에 사로잡힌 자이나, 위대한 무사임에는 틀림없었다. 백치공주(白痴公主) 단리궁은 묘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핏물은 그가 거부했던 운명의 실체였으며, 그를 운명의 이단자로 만든 패도의 산물이 아니었던가? 비록 더한 운명에 의해 검의 숙명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역겨운 것도 사실이었다. 단리궁이 묘한 고독감에 휩싸여 있을 때, 그를 일깨운 것은 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아아, 너무 아름다워… 그대의 얼굴은. 이것은 분명 꿈이야!" 언제일까? 침상에 누워 있던 묘령의 미인은 다소곳이 앉아 생긋 웃고 있었다. 십삼 인의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데도 미소녀는 너무나도 고혹스럽게 웃으며 단리궁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너… 너무나도… 미려합니다!" 환하게 웃는 미소녀, 그녀의 얼굴을 향해 단리궁의 시선이 돌려졌다. 단리궁은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떼었다. "공주, 이제는… 안심하시어도 됩니다!" "공, 공주?" 미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순간, 단리궁의 입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지금에서야 미소녀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오름을 정확히 알아봤다. 허무하고 너무나도 깊은 우수, 그것은 바로 백치미(白痴美)였다. '이럴 수가? 분명 옹리공주인데, 백치가 되다니…….' 단리궁의 얼굴은 밀랍처럼 희어졌다. 신풍마가의 인물들은 옹리공주를 납치해 하나의 마교대법(魔敎大法)을 시전했었다. 그것은 그들조차 모르는 것으로, 그들의 지배자인 철류흔이라는 자가 전수한 사법이었다. 뇌를 마비시키고 혼을 제거하는 악마의 비법. 그것은 수백 년 만에 중원에 나타난 새북(塞北)의 절대마공이었다. 백팔 주가 세워진 이후에 창안된 악마의 대법. 그것은 단리궁이라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할 가공할 섭혼미백술(攝魂迷魄術)이었다. 공주는 다섯 살짜리 소녀와 같았다. 마음 속에 든 말은 숨기지 못하고, 하고자 하는 일은 절대 참지 못하는 천진무구한 오 세의 소녀. "그대는… 신(神)이에요. 신이 아닌 이상, 그렇게 아름다울수 없습니다!" 공주는 마법에서 일어나며 처음으로 단리궁을 본 셈이었다. "그대를… 영원히 따라다니겠어요. 나를 버리지 말아요. 버린다면… 나는 울고 말 거예요." 바보처럼 말하는 옹리공주. 과거 그녀가 오만하고 표독스러웠던 옹리공주였다는 것은 아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나를 버리지 마세요. 제발… 제발……." 옹리공주는 단리궁에게 뇌쇄되어 버렸다. 그것은 마법 이상의 절대적인 유혹이고, 예법이며 형식이 배제된 순진무구한 마음 상태이기에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인간의 정(情)이었다. "공주가… 백치가 되다니……!" 단리궁은 넋을 잃고 말았다. 옹리공주는 앉아 있는데, 공주답지 않게 자세가 퇴폐적이었다. 두 다리를 쩌억 벌리고 앉아, 울상을 지은 채 단리궁을 바라보는 옹리공주 주약빙. 그녀의 앞가슴과 옷자락은 활짝 벌어졌고, 그로 인해 두 개의 투실거리는 젖가슴이 불쑥 튀어 나왔다. 한 손으로 쥐기에는 너무나도 큰 젖무덤 위, 익어 가는 포도알 같은 선홍색 유실(乳實)이 하나씩 매달려 있다. 우윳빛 뽀얀 피부에 요염한 자태, 그리고 사내의 폐부를 녹이는 그윽한 체향. 옹리공주는 달단국 모용운교에 필적하는 미인이었다. 백치미는 완벽미보다 절정에 가깝다. 너무나도 바보스러운 얼굴이 된 옹리공주의 유난히도 큰 눈에서는 서러운 눈물이 자꾸만 떨어져 내린다. "제발… 가지 않겠다고 해 줘요. 흑흑……!" 옹리공주는 옷가슴이 벌어지고 유방이 밖으로 삐져 나왔다는 것도 모르고 자꾸만 고갯짓을 한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흔들렸고, 풍만히 부풀어오른 몸뚱이에서 달콤한 내음이 풍겨 나왔다. 새벽이 되어 갈 때, 천룡충렬전 일대에는 아스라한 연보랏빛 안개가 퍼지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도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새벽 안개와 더불어 그림자 두 개가 다가가고 있었다. 파－ 팟－! 두 개의 그림자는 섬전처럼 빨리 궁정을 가로질렀다. 자금성(紫禁城)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신밀궁(神密宮)깊은 곳. "저곳이 분명하오. 가주의 흔적은 저 안으로 이어지고 있소!" "흠, 중원의 고금제일살수라는 야뇌노인의 추종술 또한, 동영에 전해지는 추종술을 능가하는구려! 노부 혈무흔은 약간의 흔적만 찾았는데, 야뇌노인은 가주의 흔적을 모두 다 찾아 내니!" "일컬어 만리추형(萬里追形)이라는 것이지. 백 일 전의 족적(足跡)도 판단해내는 가공할 추적술이지. 노부가 알기에는 동영에도 그러한 종류의 추종술이 있다던데?" "있습니다. 그것은 비각추적술(飛脚追跡術)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파－ 팟－! 두 개의 그림자는 소리도 내지 않고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안개 깊은 곳에서는 가벼운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헉……!" "으음……!" 두 줄기 검은 안개가 흐르는 가운데… 화원 바닥, 처마 아래,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자들이 하나하나 나뒹굴었다. "제길, 어이해… 노부 혈무흔(血無痕)에게는 손쓸 기회도 주지 않으십니까, 야뇌호법!" 툴툴거리는 소리, 그리고 창노한 목소리가 대답으로 들려 왔다. "노부는 팔십 년간 봉검을 했었다네. 그 사이 꽤나 많은 것을 깨달았는데, 한 번도 쓸 기회가 없었거던. 후후, 그래서 그것을 하나하나 써 보는 것이라네!" 두 사람은 무인지경을 들어서는 듯 천룡충렬전 안으로 들어섰다. "군사(軍師)의 예측이 자금성에도 악마집단이 손을 대기 쉽다고 했는데… 역시 그러하군!" "한데, 가주는 무엇을 하고 계시기에……?" "글쎄……." "신풍칠십이인자(神風七十二忍者), 그리고 삼십육초살수(三十六超殺手)가 다 나타난 이상… 잔검사랑(殘劍邪郞)이란 놈이 왔을 것이외다." 두 사람은 전음으로 말을 주고 받으며 전각 안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피비린내가 자욱한 밀실 안, 구깃구깃한 흑포(黑袍)에 기우듬히 덮어 쓴 흑립(黑笠). 언제부터인가 신기가 흘러내리는 불세출한 기세의 청년 하나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옹리공주는 철저한 마법에 당하고 말았다.' 단리궁, 그는 강호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옹리공주는 그의 목에 팔을 걸고 싶은 듯 몸을 뒤채고 있고, 너무나도 천진스러운 표정 가운데 자꾸만 눈물을 흘렸다. "제발… 저를 안아줘요. 제발……!" 옹리공주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말은 하나도 남김없이 내뱉고 있었다. 성인이 되면 어떠한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이성의 힘으로 자제를 하게 된다. 그러나 백치가 된 옹리공주에게는 그러한 자제력이 없었다.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으면 싫다고 한다. 깊은 지혜라는 것은 마법에 의해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공주에게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단리궁의 눈에서는 한광(寒光)이 폭사되어 나왔다. '철류흔(鐵流痕), 그 놈은 위대한 마병책(魔兵策)을 쓰고 있음에 틀림없다. 옹리공주를 이용해 황군(皇軍)을 움직여 강호의 기둥인 밀가를 포위하는 가공할 계획을 쓸 자가 있을 줄이야. 철류흔, 그 놈은… 무서운 승부사(勝負士)다.' 단리궁은 땀을 약간 흘렸다. 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천년밀가는 가공할 위난에 빠진 셈이었다. 천하가 그들을 욕하고 있고, 보이지 않는 악마의 손이 그들을 향해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밀가에서 제명(除名)당하기 이전, 우려했던 만의 하나의 일이… 사실로 드러났단 말인가?' 단리궁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다가 귀를 쫑긋 세웠다. 무엇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서고 있었다. 호흡 소리, 파공성도 들리지 않으나 사람이 다가서고 있었다. '무영풍(無影風), 그리고… 환환표(幻幻飄)!' 단리궁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돌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러한 속도로 소리 없이 다가설 수 있는 사람은 환우에서 단 한 사람만 있을 뿐이지!" 그는 다가서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낸 듯했다. 그는 문 쪽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나를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어인 일이오, 야뇌(夜惱)!" 야뇌, 중원무림계의 밤을 지배했던 절정고수. 그는 명조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강호계에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안개 한 줄기가 밀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역시 가주이십니다. 허허, 속하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고 자부했는데… 허허, 가주는 속하의 출현을 알아차리시는군요." 천하제일의 자객 야뇌, 그는 검은 안개로 몸을 휘감은 채 밀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십삼 구의 시신을 보고는 놀라지 않았으나, 단리궁의 소매를 붙잡고 늘어지는 묘령의 미녀를 보고서는 꽤나 놀라워했다. '주인이 바람둥이인 줄는 몰랐는데? 하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야뇌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속하, 보름 전에 세가에 합류했습니다." "수고했소. 한데, 어인 일로 나를 찾아왔소?" "긴급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긴급하다는 것이오?" "기다리시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럼, 마도집단이 마각을 드러냈단 말이오?" "예." "어떻게……?" "그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막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야뇌는 천천히 손을 품에 넣었다. 그는 한 장의 밀지를 꺼내 단리궁에게 전했다. 그것은 단리궁의 손바닥 위에서 펼쳐졌다. <십지에서 악마의 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주. 그리고 본가를 노리는 악마의 무리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척살(擲殺)의 순간이 된 듯합니다!> 글을 쓴 사람은 군사가 된 창궁천뇌(蒼穹千腦)였다. 단리궁이 쪽지를 보고 있을 때 자객의 왕, 야뇌는 잔검사랑의 미간에 남은 검흔을 보고 크게 놀랐다. "허무마예! 절정살예(絶頂殺藝)를 완벽하게 익히셨군요? 아아, 이제는 노부라 하더라도 주인의 검초를 흉내내지 못할 것입니다!" 야뇌는 혀를 내둘렀다. "주인의 무공은 매일 느는군요. 허허……!" 그는 경악하다가는 웃는데, 단리궁은 그의 웃음을 웃음으로 받아 줄 처지가 되지 못했다. "이… 이러지 마시오, 공주님." 단리궁의 볼은 사과처럼 붉어지고 있다. 옹리공주, 그녀는 불현듯 몸을 날려 단리궁의 목에 양 팔을 걸었다. "제발… 가지 마세요. 흐흑……!" 애절하게 말하는 옹리공주는 공주가 아니라, 한 명의 철부지 소녀였다. 옹리공주가 단리궁의 목에 매달릴 때였다. "에헴! 노부는… 아무 것도 아니 봤소이다!" 야뇌는 내숭을 떨며 미소를 지었고……. "휴우, 갈수록 태산이군. 잔검사랑이 백 명 나타났다 해도 나의 마음은 지금처럼 당혹스럽지 않았으리라!" 단리궁은 심한 낭패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네에?" 옹리공주는 단리궁의 얼굴에 입술을 갖다 대고 있었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마음의 표현, 이것은 어린아이나 할 수 있는 그러한 행위였다. 옹리공주는 오 세 소녀가 된 듯, 제멋대로 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제왕전(帝王殿). 선덕제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호화로운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의 면전, 자금성의 금의위 내부로 침투해 들어온 신풍마가 무리들을 척살한 단리궁이 계면쩍은 얼굴로 서 있는데… 그의 곁에는 응석받이같이 바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옹리공주가 서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요? 왜 저리 인상을 찡그리지요?" 옹리공주는 선덕제도 알아보지 못했다. 선덕제는 단리궁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후였다. 그는 사지를 가늘게 떨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신풍마가의 인물들이 금의위의 제이인자이던 천룡염후를 암살하고, 가짜 천룡염후 행세를 했다는 것이 그를 격노시킨 것이었다. 유연하고 온화한 기질 가운데 가공할 힘이 스며 있었다. "강호세력이 감히 제위를 노리다니……!" 그의 눈에서는 차디찬 빛이 흘러나왔다. 그는 석고처럼 굳은 얼굴로 단리궁을 바라봤다. 단리궁의 눈은 떠오르는 혜성이었다. 선덕제는 단리궁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경(卿)은… 어찌할 작정인가?" "저는 강호인에 불과합니다." "흠, 그렇다면… 짐(朕)의 곁에 남지 않겠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하긴, 이곳 자금성은 거룡(巨龍)을 잡아 두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한 새 조롱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선덕제는 매우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침묵(沈默)… 두 사람 사이에 기이한 침묵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천하를 경륜하는 천자와 강호의 혜성, 둘 다 거인(巨人)이라 할 수 있었다. 꽤 오랜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선덕제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를 생각했네만, 결론은 꼭 하나로 귀착되는구먼!" "어떠한 단안을 내리셨습니까?" "후후… 내렸네!" 선덕제는 손바닥으로 턱을 매만졌다. 용의 웃음, 그리고 그것은 거인의 웃음이었다. "황실이 강호에 개입한다는 것은 불미스러운 일이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강호가 황통에 거역한다는 것 역시, 금단의 일이네!" "그렇습니다!" "흠,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이네!" "예?" "짐은 오백만 전군(全軍)을 다 동원해서 황실권위에 도전하는 무리들을 멸살시키라는 어명을 내릴 정도로 분노한 상태이네. 그러나… 참겠네!" "……." "그 이유는… 자네를 믿기 때문이네!" 선덕제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팔짱을 끼었고, 단리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복안을 갖고 있는 것일까? "자네를 임시로 금의위(錦衣衛) 전시위(全侍衛)와 오백만 황군(皇軍)의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하겠네. 그리고 황궁의 어떠한 것도 자네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게 하겠네!" "예… 에?" 단리궁은 입을 따악 벌렸다. "후후… 자네는 강호명가의 후예이지. 자네 가문에는 거대한 부가 있고, 가공할 저력이 있다고 알고 있네. 하지만 황궁의 저력에 비한다면 백분지일에 지나지 않지. 후후, 그것은 자네라 하더라도 부정하지 못할 걸세. 후후……!" 선덕제는 환하게 웃었다. 단리궁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볼을 실룩거렸다. "기왕이면 공주도 데리고 가게! 일이 그렇게 된 이상, 공주는 자네의 안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폐하,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저런 꼴로 누구에게 출가를 시키겠나? 자네라면 개의치 않고 저 아이를 받아 주겠지" "하오나……." "훗훗… 그렇다면 짐도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네. 자네가 짐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짐은 황군을 모두 동원시킬 것이네!" 선덕제는 여전히 웃었다. 거인의 눈, 그 눈은 거대하기에 또 하나의 거인을 알아본다. 강호의 거인으로 군림의 행보를 시작한 단리궁. 거인과 거인 사이의 벽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 일은 십팔만 리에 걸친 대혈사(大血事)이기에, 짐도 수수방관할 수는 없네. 하지만 짐으로서는 길도 모르고… 할 재간도 없네." "……." "그래서 결정했네. 천하가 평화로워질 때까지 단리궁이라는 낭인(浪人)의 후견인(後見人)이 되어 주기로!" "아아, 후견인!" "물론, 자네에게는 짐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네. 하지만 꼭 짐의 도움을 받아야 하네. 왜냐하면, 싸움이란 빨리 마무리지어질수록 좋은 것이니까!" 선덕제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침묵. 이번에는 선덕제의 침묵이 아니라, 단리궁의 침묵이었다. 물경 일개 시진, 단리궁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유성의 빛이 떠도는 눈, 기이한 혜광이 거기서 흐르고 있다. "가요. 저 사람은… 싫어요!" 바보가 된 옹리공주는 자꾸만 단리궁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단리궁이 그녀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도 잔검사랑이나 철류흔이라는 보이지 않는 악마대군주의 옷자락을 잡아끌었을 것이다. "어서 가요. 이곳은… 답답해요." 치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옹리공주, 그녀를 구할 방법은 현재 존재하지 않았다. 침묵은 단리궁의 목소리로 인해 깨어졌다. "폐하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겠군요. 그러나 저는 일개 낭인(浪人)이 아니라, 하나의 세력의 대표자입니다!" "흠……." "모든 일은 그 가운데에서 이루어져야……!" 단리궁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소소한 것까지 말할 것은 없어. 간단히 말하게. 짐을 자네의 편으로 삼아 주겠는가? 아니면, 버려 두고 도망가겠는가?" 선덕제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단리궁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중원에 있는 한, 천자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군요." 단리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간, 선덕제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푸핫핫… 딸은 잃었으되, 양아들을 하나 얻었도다! 푸핫핫! 짐의 일생에서 이같이 기쁜 일은 처음이다." "공주를 잃었다고 단념하시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이르다고?" "제 휘하에는 천하의 모든 것에 정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라면 백치가 되신 공주를 전 상태로 돌릴 방법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하루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흠……!" 선덕제는 한숨 소리를 내며 옹리공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꽤 긴 침묵이 자리했다. "사실, 옹리의 지금 모습이 과거의 모습보다 더 보기 좋네. 그 오만하고 맹랑하던 아이가 저리도 순종적으로 되었으니… 하지만 저런 상태로는 두고 볼 수 없으니 자네가 알아서 고쳐 놓게. 이것은 어명이네!" 단리궁은 그 날 밤에 떠나갔다. 그리고 그가 떠난 대신, 혈무흔과 야뇌가 자금성에 남아 몇 가지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임시로 금의위의 영반(領班)으로 간택되었다. 암흑세력의 지배자들로서 천하의 대세에 거역하기만 했던 두 사람에게 있어 이번 일은 꽤나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젊은 주인 모시기 힘들군! 호법 노릇하라고 초빙해 가더니, 자금성의 청소부로 삼다니." "그렇습니다, 야뇌노인. 하지만 그리 재미없는 일만도 아닌 듯합니다!" "왜?" "이 기회에 야뇌노인이나 저나, 쓸 만한 전인을 십여 명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금의위에는 근골이 좋은 청년들이 많으니까요." "흠, 좋은 생각이로군. 하지만 그들이 관복을 벗고 세가사람으로 영입되려 할까?" "후후… 무사(武士)라면 누구든 그렇게 선택할 것입니다!" 절정십팔객(絶頂十八客). 훗날 가장 위대한 검대의 전설을 이룩하는 절정십팔객의 전설은 이렇게 조용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 * * 혈거봉(血巨峰), 그 하늘 위 편월(片月)이 떠 있다. 달빛은 혈거봉 일대의 울울(鬱鬱)한 삼림(森林) 사이로 떨어져 내리며 비파(琵琶) 소리를 흘리는 듯했다. 밤(夜), 유난히도 깊은 밤이다. 돌연, 한 줄기 유성이 포물선이 아닌 끝없는 직선을 그으며 혈거봉 깊숙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펄럭거리는 흑포에 흑립을 쓴 청년. "훗훗… 이제부터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는 거의 소리를 끌지 않고 달 아래의 허공을 꿰뚫고 신형을 폭사시켜 나아갔다. 가히 절정에 도달한 유성비행공(流星飛行功). 검은 그림자는 긴 꼬리를 끌며 떨어져 내리는 유성과 같이 밤의 허공을 깨고 사라져 갔다. 거성(巨星), 검은 바람 가운데 하나의 성이 잠자고 있었다. 아직 현판(懸板)도 달지 않은 오 장 높이의 철문. 그 좌우에는 열 아름의 강철기둥 두 개가 흑궁을 꿰뚫고 서 있다. 성의 둘레는 정확히 십 리(里), 성 내에는 팔십일 전(殿)이 세워져 있다. 야뇌전(夜惱殿), 거익전(巨翼殿), 군림전(君臨殿). 성은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첫째 부분은 환우평(還宇坪). 그곳은 광장이기도 하고 연무장이기도 했다. 환우평 일대에는 아름다운 화원(花園)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을 가꾼 사람은 원예술의 제일이라는 화예상인(花藝上人)이었다. 두 번째 부분은 무혼평(武魂坪). 언제나 안개에 뒤덮여 있는 곳이고, 혈거봉의 혈영호(血影湖)를 끼고 다듬어진 백석의 연무장이다. 무혼평은 두령급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들어설 수 있다. 무혼평에 안개가 하루 종일 끼여 있는 이유는 호수를 이용한 기문대진이 매설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장소는 절정궁(絶頂宮). 그곳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꿈의 대지였다. 창궁천뇌 사마곡노인은 학창의를 걸친 채 뜨락을 거닐고 있었다. 고금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갖고 태어났다는 일세기인. 그는 만사무불통지의 지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인데, 지금 그의 미간에는 암울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풀잎을 밟으며 절정궁 일대를 돌아다녔고, 가끔 가다가는 한숨이 터져 나오곤 했다. "만오천을 대강이남(大江以南)으로… 으음, 그리고 이만사천을 대강이북(大江以北)으로……!" 그는 중얼 중얼거리며 돌아다녔다. 대체 무엇을 그리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비조(飛鳥)를 잘 활용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소수(小數)의 힘으로 다수의 대진군을 막을 수 있다!" 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간혹 멈추어 선다. 그리고 그 때마다 무릎을 치곤 했고……. "좋아, 산동(山東)으로 갈 사람들에게는 벽력화격진(霹靂火擊陣)이 적힌 진경을 선사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혼자 웃고 괴로워한다. 그는 매우 심각한 기색이 되어 멈추어 섰다. "중요한 것은 세 곳의 푹풍지(暴風地) 가운데, 제일 먼저 어떠한 장소에 손을 대야 하느냐 것이다!" 그는 수천 가지의 일을 동시에 생각하다가는 결국, 세 가지의 가장 중대한 일에 생각을 귀착시킨 듯했다. "첫번째 장소는 소림사(少林寺). 그곳에서는 풍운천하(風雲天下)를 알리는 대륙무림회(大陸武林會)가 벌어진다. 두 번째 장소는 밀가(密家). 그들은 잃어 버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모든 저력을 일으키고… 하나의 무리가 그들을 서서히 포위하고 있다. 그것에서는 가공할 폭풍이 일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장소는 보이지 않는 마의 근원! 으음, 그 장소야말로 마의 대본영(大本營)인데… 어떻게 해야 그 위치를 알아 낸단 말인가? 그곳에서 나온 자들은 세뇌가 되어 죽는다 하더라도 그곳의 위치를 불지 않고, 그곳의 하부인물들은 그곳이 어디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는 땀을 흘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지혜와 학문으로 모든 것을 논하는 사람이다. 뚝－ 뚝－! 그는 쉬지 않고 땀을 흘렸고, 한순간 아주 나직한 숨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지금 깨어난다면 패산(敗算)이 크다. 가주가 오신다면 일 년 더 세력을 기른 다음, 악마의 무리와 싸워야 한다고 말하자!"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그것은 곤란하오! 왜냐하면, 내게는 정말 골치 아픈 장인(丈人) 영감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라오!" 어둠 속, 달빛이 안개를 뚫는 가운데 하나의 그림자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흑영은 거의 찰나적으로 창궁천뇌 앞에 이르렀다. 입가에 싱긋 웃음을 짓고 있는 미청년, 그는 바로 절정서생(絶頂書生) 단리궁이었다. "장… 장인이라니요?" 창궁천뇌는 단리궁의 출현보다 단리궁의 말에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후후……!" 단리궁은 묘한 미소를 흘리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하늘(天)이 손가락 끝에 걸리는 찰나. "오오, 천(天)! 그렇다면……?" 창궁천뇌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무엇인가를 번뜩 느낀 것이다. "그럼… 공주를 삼켰단 말이오?" 창궁천뇌는 지략가답게 단리궁의 표현을 정확히 알아냈다. "불행하게도……!" 단리궁이 중얼거리자……. "오오, 그럼… 천자가 우리 절정세가의 후견인이 되었단 말이오? 그렇다면 승과 패의 산(算)이 달라질 것이오!" 창궁천뇌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단리궁이 자기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얼른 시립한다. "가주, 오랜만이외다. 이것저것 정리한 다음, 세가에 합류한 지 어언 보름이외다. 그 사이 모든 것을 다 정비해 두었는데, 가주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소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드오. 이곳은 나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 모든 절정로(絶頂路)에 오른 사람의 장소요. 꿈의 장소… 훗훗, 무사의 야망(野望)이 도달하는 그 끝에 있는 장소인 것이오!" 단리궁은 습관적으로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관옥같이 흰 피부가 드러나고, 태산준령을 압도하는 기재가 서려 있는 콧날이 나타났다. 단아한 미소가 매달려 있는 입매, 그의 용모는 유연한 가운데 굳건한 매력을 흘렸다. "야황전(夜皇殿), 군림전(君臨殿), 거익전(巨翼殿), 군사전(軍師殿), 천금전(天金殿)… 훗훗, 그리고 야뇌전(夜惱殿)과 벽력전(霹靂殿), 신룡전(神龍殿)… 훗훗, 나는 잠입하며 일대를 둘러봤소.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극강한 세력이고 위대한 시작이오. 한데…!" 단리궁은 손을 이마에 댄 채 멈칫했다. 그의 눈빛은 흐릿해졌고 입술이 들썩거리려 했다. 한데, 창궁천뇌 사마곡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아는 듯한 표정이었다. "압니다. 가주는 이곳에 왜 마기(魔氣)가 흐르는지 그것이 궁금하단 말씀이 아니십니까?" 마기라니? "그, 그렇소. 훗훗, 역시 군사는 빠른 사람이구려. 나는 여기까지 오는 가운데 막대한 기운을 느꼈소." "압니다." "무엇이오?" "바라던… 악마의 꼬리입니다!" "악마의 꼬리?" "훗훗… 사실은 그 일 때문에 가주를 불렀습니다. 바로 이틀 전 입가(入家)하겠다고 온 유녀(遊女) 무리로 인해……!" 밤(夜), 강호의 밤은 점점 깊어 간다. "그들은 인간탑(人間塔)을 쌓고 시위하고 있습니다. 속하가 보건데 그들은… 우리에게 도전하는 듯합니다." 달빛은 뿌옇게 흐려져 갔고, 화원에는 밤바람이 다가선다. "미끼가 좋았습니다. 혈거봉에 세가를 이룩한다는 것을 일부러 만천하에 소문낸 것이 대어를 끌어들였습니다. 속하들이 제거하기에는 너무나도 가공할 마공을 지닌 자들이고, 우두머리는 묘령의 미녀입니다. 늘 면사를 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으나, 정말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하여간… 큰 고기(大魚)입니다." 창궁천뇌는 그러한 소식 이외에도 세 장의 밀지를 꺼내 놓았다. 첫번째 밀지는 소림사 근처의 밀타에서 전해졌다. <대륙무림회(大陸武林會)가 구월 십오야(十五夜)에 거행되기로 확정되었습니다. 장소는 태실봉(太室峯). 그 자리에는 구만여 명의 강호고수들이 모일 예정인데, 천년밀가는 그 자리에서 천하공적으로… 회의장의 주관자는 형식적으로 소림사 방장인데, 그의 뒷조사를 해 본 바 그는 비밀세력과 암중에 내통하고 있는 자로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바로 천하칠가(天下七家)의 모임인 환우혈맹(還宇血盟), 실질적인 주인은 철류흔(鐵流痕). 그는 강호전역에 휘하고수들을 흘려 보내어 백도인들을 포섭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척살하고 있습니다. 환우혈맹 쪽에서는 그러한 일을 소리 없이 저지르기 위해 천년밀가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천하인들의 이목이 천년밀가에 집중되는 가운데, 환우혈맹은 고금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으로 자라났습니다!> 두 번째 밀지 역시 환우혈맹의 준동에 관한 일이었다. <환우혈맹의 조직은 모두 점조직으로 되어 있어, 하부인은 상부인을 알지 못함.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독약에 중독되어 있어 상부의 명에 철저히 복종하는 상태임. 그들은 암중에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세 번째 밀지에는 단리궁의 눈시울을 화끈하게 하는 글이 있었다. <천년밀가에서 참다 못해 전풍신검단(電風神劍團)을 모조리 강호에 파견했음. 우두머리는 단리우(段里雨)라는 자! 그는 힘으로 대륙무림회을 격파할 생각으로 보이는데, 그들의 전도에는 신비한 마도세력이 수없이 매복되어 있음. 대부분은 중원마가(中原魔家)의 정예들!> 단리궁은 입술을 악물고 중얼거렸다. "기다려라, 내가… 돌아갈 날을!"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아 창궁천뇌도 알아듣지 못했다. 절정세가(絶頂勢家) 새벽이 될 때였다. 절정세가에는 또 한 부류의 무사들이 들이닥쳤다. 단리궁보다 세 시진 늦게 절정세가로 드는 길에 이른 인물들. 수는 오천(五千). 하나같이 주홍전포(朱紅戰袍)를 걸쳤으며, 등에는 십자로 교차해 묶은 쌍검(雙劍), 얼굴은 방립(方笠)으로 가렸고, 턱에는 붉은 건(巾)을 둘렀다. 두우－ 두두－! 오천 마리 신마(神馬)가 운진을 피워대며 들이닥친다. 피의 산맥이 형성되듯이, 오천 마리의 명마는 오천 명의 고수를 태운 채 절정세가로 가는 길을 가득 메우며 들이닥쳤다. 명마들 가운데에는 팔두마차(八頭馬車)가 한 대 있다. 차상(車廂)에는 주렴이 내려져 있는데, 지금 손 하나가 주렴을 살짝 제치고 바깥을 보고 있었다. "좋아, 가가의 집은. 아마도 가가는 부자인가 봐!" 바보스러운 목소리, 그러나 두 눈빛만은 아름다웠다. 마차 안에 있는 여인은 바로 옹리공주였다. 그녀는 선덕제의 뜻에 따라 오천 금의위(錦衣衛)와 더불어 혈거봉으로 반 쫓겨난 것이다. 선덕제는 단리궁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는 단리궁은 황실의 힘을 빌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먼저 단안을 내려 금의위 가운데 오천 명을 변복시켜 절정세가에 보낸 것이다. 오천 금의위는 변복을 한 채 혈거봉의 본가로 들어섰다. "대단하군, 성의 규모가 이 정도라니?" "흠, 대체 이곳의 주인은 누구일까? 어이해, 주상(主上)은 우리들을 이곳 사람으로 내던진 것일까?" "위쪽의 일은… 알 수가 없지. 늘 장막(帳幕)에 가리워져 있으니……." 변복한 금의위들은 새벽을 깨우며 치달려 갔다. 한 쌍의 봉목(鳳目), 아름다우나 요요(妖妖)해 보이는 눈이 오천 무사들의 장엄한 행진 가운데 깜박이고 있었다. "대단하군. 세가에 어떤 매력이 있다고… 무사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까?" 신비한 상아 교자 위, 얇은 능라비단이 휘장으로 드리워져 있다. 야릇한 방향이 감도는 휘장 안에는 연화대(蓮花臺) 같은 좌석이 하나 있고, 그 위 몸매가 지극히 풍만한 여인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절정서생, 그는 대군주에 필적하는 자다. 그는… 그리 큰 피보라 없이도 무수한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위대한 매력(魅力)을 가진 자다." 대체 누구일까? 여인의 몸에서는 사향노루의 음랑에서 채취한다는 사향 내음이 풍겨 나왔다. 물이 올라 터져 버릴 듯 발달된 몸이다. "그는 이미… 거성(巨星)으로 떴다." 게다가 옷은 반투명해 속살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고혹(蠱惑)의 미(美). 여인은 일거수 일투족으로 뭇사내를 자극하는 천생의 마물(魔物)이었다. "하여간 그 자는 거둬질 것이다. 호호!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내가 온 이상, 그 자는 거두어진다. 사내인 이상 나의 치마 아래!" 가슴이 출렁이고, 체향이 짙게 풍겨 나갔다. 잘록한 허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풍만하게 부풀어오른 젖가슴, 펑퍼짐하게 부풀어오른 안반만한 둔부, 앙증맞은 손과 가냘퍼 보이는 목덜미, 사내의 눈길을 자극하는 것이라고는 모두 갖고 있는 희대의 미녀. 그녀는 향기 짙은 숨결을 아침 하늘에 토해 냈다. "지금쯤 밀지(密紙)가 그에게 전해졌을 텐데. 흐흠, 어이해… 나를 부르지 않을까? 하여간… 묘한 자다!" "한 명의 여인으로서 그 자에게 호감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미 천하의 많은 부분에 군림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던 전대고수들이 그에게 굴복하고 있다. 이렇게 되다가는 혈풍대계(血風大計)가 성공한다 하더라도 천하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존전(至尊殿). 절정세가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튼튼한 건축물이다. 일대에는 세 종류의 기문화수진이 펼쳐져 있다. 자욱이 피어난 만리무화(萬里霧花). 그것은 하나의 진세였고, 동시에 한 종류의 시위고수들의 몸을 숨기게 하는 매복이기도 했다. 그리고 울금향(鬱金香)의 화원과 금잔화(金錢花)의 화원. 이곳은 꿈길처럼 아름다웠다. 이렇듯 절대적인 풍광을 지닌 건축과 조경이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설립되었다는 것도 하나의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때, 옹리공주가 내전(內殿)으로 모셔졌다. 그녀는 창궁천뇌에게 진맥을 받을 예정이었다. 단리궁은 절정세가의 자세한 것을 흑천야황(黑天夜皇)에게 세 시진에 걸쳐 전해 들었다. 흑천야황은 암흑의 절대자답게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절정세가가 정파도 아니고 사파도 아닌 하나의 새로운 세력이라는 것을 알리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고, 아무런 세력도 없이 절정세가에 들어서는 것이 미안한 듯 칠 일간 강호를 떠돌며 백 년 전 자신에게 패한 바 있는 흑도의 십마(十魔)를 자기 휘하에 끌어들였다. 사천(四川) 청의강(靑衣江) 표향신마(飄香神魔), 운남(雲南) 기환사령(奇幻邪靈), 낭산(浪山) 천유사혼(天幽死魂), 공래산(供崍山) 통천인마군(通天人魔君)……. 절정세가의 힘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현재 강호의 정세를 주도하는 인물은 들어서지 않았으나, 오래 전 절대기인들이 대거 모이며 세가의 힘은 단리궁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금의위에서 차출된 오천여 고수는 금의전(錦衣殿)이라고 불리게 된 또 하나의 작은 세력에 들어가게 되었다. 절정의 밤을 이룩하고 절정의 신화를 만들어 나가는 절정세가, 그 진실된 힘의 정체는 세가에 들어온 사람도 알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게 변모되고 있었다. 아침은 너무나도 유혹스럽게 깨어나고 있었다. 석탁(石卓). 한 잔의 차(茶)가 있고, 두 개의 흰 손이 그 위에 올려져 있다. 손바닥 사이에는 한 장의 황금색 배첩이 놓여 있었다. <절정서생친전(絶頂書生親傳).> 겉장에는 그러한 글이 섬세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무례하군. 서명도 하지 않다니……!" 단리궁은 배첩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요기(妖氣)가 흐른다. 가공할 요기가…….' 아주 천천히 그는 배첩의 봉해진 부분을 뜯었다. 찌이이… 익……! 겉봉이 찢어지며 황금색 내지가 나타났다. 분홍색 물감이 화려하게 채색된 금색 종이 위에는 또렷한 글씨 몇 자가 적혀 있었다. <절정서생을 찾아 먼 길을 온 사람이외다. 이것은 그대 한 사람만이 알아야 하는 가장 위대한 협상을 위한 준비이니, 수하들에게 알리지 마시오. 피를 볼 테니까!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협상을 하러 온 것이오! 그대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때에 일어나고 있소. 그대는 천하가 하나로 모이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를 것이오. 그대의 수하들이 가공할 능력가라 하더라도 아마도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오. 기다리고 있겠소. 기왕이면 밤(夜)에……. 지옥혈마단(地獄血魔團) 부단주(副團主) 환희야(歡喜夜)> 환희의 밤! 서명을 한 사람은 그러한 이름을 썼다. "으음, 가공할 요기(妖氣)가 필사적에서 나타났다. 게다가 봉서에는 이미 몇 가지 손이 쓰였다!" 단리궁은 두 손바닥을 천천히 쳐들었다. 내지에 발라져 있던 분홍색 물감이 아련하게 손가락에 묻어 났다. "사갈환령분(蛇蝎幻靈分). 후후, 이것은 꽤 오랫동안 쓰이지 않던 독공(毒功)이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독공의 명예를 위해!" 단리궁은 묘하게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무엇인가 타는 내음이 나더니 그의 손은 전과 같이 소수(素手)로 변했다. "실망인데? 삼매진화(三昧眞火)에 쉽게 타다니……!" 단리궁은 야릇한 눈빛을 던지며 창가로 다가갔다. 창 밖에는 화원이 그득 펼쳐져 있다. 그의 눈빛은 평상시와는 달리 지극히 강해졌다. 그의 두 눈에선 혁혁한 정광이 뿜어져 나온다. 천년영웅의 눈, 그것은 이미 절정지안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나의 모든 것을 걸 대야망의 길은… 이제부터 정식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땅거미가 깔리고 있다. 혈거봉 정봉에 세워진 절정세가는 타오르는 노을 아래 웅자를 과시하기 시작했고, 계곡과 산봉우리는 붉게 타올랐다. 노을은 피의 장막처럼 떨어져 내렸다. 세가의 일대에는 삼산오악에서 절정세가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몰려온 사람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절정세가의 창립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남칠성 북육성의 강호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절정세가는 강호일비(江湖一秘)로 통했고, 절정서생이라는 이름은 정사 중간의 무림계에서는 가장 유명한 이름으로 변했다. － 무엇이든 하나의 절정절기만 있으면 세가에 들어설 수 있다! 절정세가의 입가 법칙은 지극히 단순했다. 그 어떤 종류의 절기이든, 그 방면에 있어서 천하제일인 사람은 누구든 입가가 허용되었다. 재인(才人) 초로(草露). 풀잎의 이슬처럼 덧없이 세상을 살아가던 유랑의 재인. 그에게는 재문팔기(才門八技)라는 절정의 기예가 있는데, 그것은 강호인들이 지극히 천시하는 기예였다. 그러나 절정세가는 그를 천시하지 않았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이상한 분들입니다. 헤헤, 노부의 쓰잘 데 없는 기예마저 절정의 절기라며 소생에게 타주(舵主) 지위를 주시다니……!" 재인 초로는 강호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절정의 기예를 갖고 있기에 일약 절정세가의 재인향(才人香)에 들었고, 재인향의 향주로 발탁이 되었다. 백마노인(白馬老人) 황보숭(皇甫嵩). 명마(名馬)를 알아보는 데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백락의 명마감별 비전을 전수받은 사람으로, 말을 알아보는 데는 천하제일이었다. 그도 절정세가에 들었다. 사천당가(四川唐家)에서 파문(破門)당해 천하를 떠돌며 몸을 맡길 장소를 찾아다니던 천수마룡(千手魔龍) 당종요(唐鐘搖). 그는 너무나도 놀랍게 이천여 리 밖에서 절정세가의 인물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절정세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한 가지 절기는 독침제조술. 사람들은 그가 사천당가의 역도라는 것만 생각했지, 그가 갖고 있는 절기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데, 절정세가는 그의 탁월한 재간을 알아주고 그를 화룡당(火龍堂)의 향주급 고수로 초빙한 것이다. 흑도(黑道)와 백도(白道)의 이단자(異端者)들. 고집스럽게 인생을 걸어 왔던 음지의 절대자들은 하나하나 절정세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달(月), 그 아래 절정세가를 찾아온 강호인들은 가장 괴이한 복식을 한 일단의 괴녀들이 모여 있다. 몸에 꽈악 달라붙는 가죽옷을 걸치고 쌍검을 두 어깨에 나누어 걸친 채, 지극히 냉요한 자세로 절정세가 일대를 돌아보는 일단의 무림여인들. 이들의 몸에서는 가공할 마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구 로(路)로 흩어져 세가로 들어가는 모든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구경하고 있는 듯하나, 기실 이들은 유야무야한 가운데 하나의 기문진을 펼치고 있었다. 환희마라구변진(歡喜魔羅九變陣). 평상시에 흩어져 있고, 명이 내리면 즉시 하나로 뭉쳐 가공할 진세를 이룬다. 진세가 차지하는 범위는 무려 십 리(里). 특이할 것은 그것이 중원무림계의 절기가 아니라 변황의 절기란 점이었다. 아홉 개의 옥정(玉鼎), 수천 명의 요녀들 가운데는 키가 한 길 이상되는 아홉 개의 옥정이 있고, 그 위에는 목대(木臺) 하나가 얹혀 있다. 목대 위에는 기이한 탑(塔)이 하나 서 있었다. 아아, 그것은 바로 인간의 탑이 아닌가? 제일 아래에는 백 인(人)이 있고, 그들의 어깨에 발을 디디고 오십 인(人)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 위에는 삼십 인(人)이, 그들의 머리 위에는 아홉 명의 반나녀가 서 있다. 탑은 이틀 전에 만들어졌다. 이들 괴녀무리는 무조건 절정세가 입구에 와서 포진(布陣)했고, 그 후 인간의 탑 하나를 이룩한 것이다. 탑은 이틀이 되었는데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탑은 힘을 나타내고 있었다. 보라! 괴녀들이 지니고 있는 병장기는 하나의 상고신병(上古神兵)이 아닌가? 투명한 나삼을 비끄러매고 있는 허리에는 패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귀에도, 코에도 지극히 값비싼 보석알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달이 뜨자, 드넓은 방원을 뒤덮고 있는 요녀들의 몸에 달린 보석 장신구들이 달빛을 강하게 반사시키며 허공에 빛의 장막이 떨어졌다. 츠으으－ 으으－ 츠으으－! 섬뜩한 사기(邪氣)가 세가의 장벽을 타넘어 간다. 거만한 자태로 절정세가의 정문 앞에 나타난 오천여 고수들. 이들은 절정세가가 세워진 이래 도전한 첫번째 인물들이었다. "훌륭하군, 계집들의 진세는 환희마라구변진(歡喜魔羅九變陣)이라는 절대적인 것이오!" 단리궁은 먼 곳에서 인간의 탑을 보고 있었다. 그의 뒤, 머리 위로 달이 둥실 떠 있었다. "내가 만든 그물(網)을 찢을 수 있는 것은 대기(大氣)와 달빛, 그리고 새 소리뿐이다. 그 이외의 어떠한 것도 내가 펼친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눈길이 쳐들린다. 그리고 입술이 가볍게 달싹이기 시작했다. "철류흔이라는 자, 너는 이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면 너는 불면증에 걸리리라!" 그의 눈빛에는 가공할 힘이 담겨 있었다. 그의 모습은 차츰차츰 흰 안개에 뒤덮였다. 일순 그가 서 있던 곳은 텅 비었고, 그 자리에는 무심한 달빛만이 흘러내린다. 오만한 불청객(不請客)들이 이룩한 인간탑(人間塔)은 삼경이 되었는데도 무너지지 않았다. 거대한 탑 위,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상아교자가 얹혀져 있었다. 상아교자의 사방에는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그 안 하나의 그림자가 머물러 있었다. 고혹(蠱惑)스러운 선을 가진 여인, 얼굴을 금색면사(金色面絲)로 가리고 있는 여인의 몸은 너무나도 농염한 굴곡을 나타냈다. 덥석 쥐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풍만한 젖가슴 두 개, 터질 듯 부풀어오른 젖가슴 끝에 매달린 유실(乳實)이 반투명한 옷차림으로 까맣게 드러나 보인다. 배꼽의 우물과, 그 아래 해초(海草)처럼 흐늘거리는 비림과 터질 듯 매끄럽게 발달된 허벅지마저……. 달마저 유혹해 버리는 일대 우물,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면사 가운데에서 강한 눈빛을 폭사시켰다. 저 먼 곳, 달빛이 길을 적시고 있는데… 달빛을 깨며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검은 안개를 몸 주위에 일어나게 한 채 텅 비어 있는, 아니 달빛으로 가득 찬 길을 따라 세가의 문을 나서는 인물의 얼굴은 흐릿했고 발자국 소리만이 요란했다. 그가 달빛을 깨뜨리며 나타날 때, 상아교자 위에 있던 여인의 입가에는 매혹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오는군. 호호! 결국… 문을 나서고 말았다. 하긴, 이 정도의 시위라면 겁을 집어먹을 만하지!" 여인의 동그란 어깨가 흔들렸다. 그녀가 여기 온 지 어언 이틀, 그런데 절정세가 쪽에서는 그녀 일행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으나, 내심은 세가의 무반응으로 인해 까맣게 타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세가에서 반응이 나타났고, 한 사람이 지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거리며 다가서는 자, 그의 모습은 여전히 안개로 인해 흐릿하게 보였다. 그는 일정한 보폭을 밟으며 다가서고 있다. 저벅… 저벅……! 묘하게도 발자국 소리에는 기이한 음률이 배어 있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묘한 박자가 형성되고, 그 박자는 하나의 음파절학이 되어 십 리 안을 가늘게 뒤흔들었다. 기(氣)… 대지(大地)를 타고 거대한 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고오오… 고오오……! 가공할 기운은 흑의인이 땅을 딛을 때마다 괴녀 무리들 쪽으로 쭈욱 뻗어 나가고 있었다. "놀, 놀랍군!" 요녀의 눈알이 동그래졌다. '믿을 수 없다. 이것은 경천제지(經天濟地)라 불리는 가장 위대한 정종내공이다.' 요녀의 얼굴빛은 밀랍처럼 희어졌다. "설마, 저 자가 바로… 저곳의 지존(至尊)이란 말인가?" 여인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킬 때였다. 돌연, 그녀의 고막 속으로 맑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대가 환희야(歡喜夜)인가? 어떠한 여인이기에 환희에 가득 찬 밤의 행세를 하는가 했더니… 꿀 먹은 벙어리로군?" 목소리는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아아, 믿을 수 없다. 저기 다가서는 자는 경천제지의 대천공(大天功) 이외에도, 또 하나의 가공할 절기를 시전했다.' 요녀의 가슴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환희야, 그녀의 눈에서는 요광(妖光)이 반짝반짝 일어났다. "호호… 소인(小人)을 기다렸는데, 거인(巨人)이라니… 호호!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만남이군요. 호호……!" 환희야는 웃으며 두 손을 쳐들었다. 짜악－ 짝－! 섬섬옥수가 하나로 합쳐지며, 강한 음파를 품은 박수 소리가 두 번 연달아 치는 가운데……. "우우, 이제 제이포진(第二布陣)!" "호호호… 환희미혼진세로 돌아서라!" 여인들의 몸뚱이로 이루어졌던 거대한 탑은 와그르르 허물어졌고, 여인들의 옷소매에서 오색채무(五色彩霧)가 분출되는 가운데 이 리 안이 한순간 오색 안개에 휘감겼다. 색색의 안개 속으로 날아오르는 나비 떼처럼. 치리리릿－ 파앗－! "동(東)－ 환환무(幻幻霧)－!" "서(西)－ 감리혈(坎離血)－!" "남(南)－ 무쌍궁(無雙宮)－!" "북(北)－ 고성광(孤星光)－!" 휘리리릭－ 휘리리릭－! 인간의 탑이 무너지는 가운데, 일대의 진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인간의 탑은 사라졌고, 대신 육체의 거벽 하나가 길을 따라오던 흑의인을 중심으로 드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가공할 빠르기로 시전된 진세는 천축비전 진식이었다. 겹겹이 펼쳐진 동심원은 모두 여인들로 이룩되었다. 그리고 무수한 여인들의 머리 위에서는 오색구름이 자욱이 피어 올랐고, 그로 인해 일대와 주변은 완전한 별개의 장소로 차단되었다. "냄새 피우는 데에는 절정(絶頂)이로군. 하지만 너무 늦었다. 조금 더 빠르게 펼쳐야만 했다. 만에 하나, 내가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벌써 일 마장 밖에 가 버렸을 것이다!" 빙긋, 청년의 입가에는 웃음이 피어 올랐다. 그는 일대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듯, 태연자약하게 걸었다. 오천 쌍의 시선과, 만 자루의 검(劍), 그리고 천 개의 독통(毒筒)과 백 개의 화린비전(火鱗飛箭), 오십 개의 추살갑노(追殺匣拏)가 그를 향해 돌려졌다. 길(路), 몸매가 아름다운 미녀들로 인해 길이 하나 만들어졌다. 벌거벗은 것과 다름없는 요녀들. 유난히도 큰 젖가슴에 유난히도 고혹스러운 눈빛을 가진 계집들은 십 보(步)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육체의 길이랄까? 요녀들의 벽이 두 줄로 길게 났고, 그 사이로 길이 만들어졌다. "가세요. 밤(夜)의 길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흐응! 환희의 길, 바로 꿈의 길입니다!" 일대에는 비릿한 체향(體香)이 바람을 타고 퍼지고 있다. 동물적인 육감을 자극하는 짙은 살 내음, 그리고 청년의 미소는 더욱 짙어져 갔다. "밤의 길이라? 훗훗… 사양하지는 않겠네, 낭자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육체의 길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의 상황은 주객(主客)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일대는 절정세가의 대지인데, 이 리 방원 안만은 절정세가의 땅이 아니라 지옥혈마단(地獄血魔團)이라는 신비집단의 대지였다. 겹겹이 펼쳐진 포위망, 하나하나 가공할 무공을 지닌 오천 명의 마녀들은 살기등등하고 요염하고 미혹스러운 기세로 밤의 장막(帳幕)을 펼쳤다. "너무 쉽군!" "하긴, 강호의 풋내기들과 싸우는 일이니… 쉬울 수밖에!" "내일 새벽부터는 편해지겠지. 중원의 애송이 하나 때문에 사생결단하려 했던 것이 사실은 조금 우습다!" "하지만 풋내기치고는 묘한 풋내기다!" "그래, 그 자는 교주(敎主)의 물건이다. 호호! 그런데 감히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건드릴 수 있겠느냐?" "아마도 새벽이 되기 전 비루먹은 망아지가 되고 말 거야, 그 풋내기는!" 요녀들은 한어로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범어(梵語)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천축(天竺)… 중원에서 너무나도 머나먼 땅이다. 마녀들은 모두 그곳에서 나온 듯했다. 사실 마녀들의 체격은 중원여인들에 비해 조금 큰 편이고, 살색은 중원여인들보다 한결 희었다. 코는 더 뾰족했고, 간간이 눈빛이 파란 여인들도 더러 있었다. 어떤 여인은 금발이고 어떤 여인은 은발이었다. 여인천하(女人天下), 그리고 육체의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인간의 바다 가운데, 유난히도 텅 빈 듯 여겨지는 안개의 땅이 있다. 인간의 방책 가운데 만들어진 공지(空地)의 한가운데 상아교자는 거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상아교자 앞에는 하나의 탁자(卓子)가 있고, 그 위에는 기이한 물건이 널려 있었다. 하나의 비수(匕首), 한 잔의 독주(毒酒), 한 장의 혈지(血紙). 청년, 그는 단리궁이었다. 그는 태연자약한 걸음걸이로 마녀들의 몸뚱이 사이를 누비고 자연스럽게 공지로 들어서게 되었다. '거만한 자들. 이곳이 나의 땅인 줄도 모르고… 제 땅 행세를 하다니…….' 그는 살기를 느꼈으나 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탁자 앞에 이르렀다. 제일 먼저 그는 핏빛 종이를 바라봤다. 그 위에는 지극히 교만한 글이 적혀 있었다. <너는 이미 우리의 하인(下人)이 되었다. 여기까지 오는 가운데, 수십 종류의 독무(毒霧)에 쏘였다. 만에 하나, 네가 만독불침(萬毒不侵)일 경우도 생각했다. 그럴 경우라면 아마도 나의 제자들이 너를 가로막을 것이다. 하여간 너는 돌아가지 못한다. 네게 단 하나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지옥혈마단(地獄血魔團)에 투신하는 것이다. 독잔(毒盞)을 들라! 그것은 네게 선혈의 환희를 알려 줄 것이고, 독비로 팔뚝에서 피를 내어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의 악마에 대한 충혼(忠魂)은 인정받을 것이다! 환희야(歡喜夜)> 오만무도한 글귀. 글을 쓴 장본인은 교자 안에 팔짱을 꼬고 앉아 있었다. 단리궁과 환희야 사이의 거리는 사 장, 절정고수들 사이의 거리치고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킨다. '무서운 눈이다. 아아, 아름다운 가운데 가공할 힘이 실려 있다. 그리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눈이다. 영혼이 빨려들 정도로…….' 환희야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이상한 것은 그녀의 머리가 매끄럽다는 것이다. 파르라니 깎은 비구니(比丘尼)의 머리. 환희야는 속녀가 아니라 사문의 여인이었단 말인가? 법의(法衣)를 걸친 애물덩어리, 차라리 속인의 복장이었다면 이렇듯 마력적으로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환희야는 단리궁이 탁자 앞에 서서 글을 읽기를 기다렸다가 입술을 떼었다. "어떤가?" "글쎄……." "호호… 털도 뽑지 않고 먹는다고 섭섭해 하지 마라. 호호! 그리 무리한 요구는 아니다. 절정세가가 우리쪽으로 영입된다 해도 절정세가 안에서의 너의 지위는 여전할 테니까. 물론, 너는 그 이전 우리 쪽이 베푸는 특수한 연무를 거쳐야만 한다!" 사르르… 륵……! 아름답고 유혹적인 목소리 가운데, 휘장이 미풍에 펄럭이며 휘장 안의 풍경이 들여다보였다. 깜박깜박거리는 물기를 품은 두 눈, 도톰하게 발달된 육감적인 입술, 오똑 일어난 애교 있는 콧날, 지극히 풍만하고 퇴폐적인 몸뚱이……. 이상하게도 혼을 빨아들이는 아련한 시선을 가진 색승(色僧)은 손으로 휘장을 벗기며 단리궁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두 눈에서는 자욱한 요광(妖光)이 흘렀고, 대기 속으로 자욱한 요기(妖氣)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밤의 유혹(誘惑)은 깊어지고, 단리궁의 눈빛은 야릇하게 흐려져 갔다. "예쁜데?" "호호… 사람 보는 눈은 있군." "흠, 그대가 환희야인가?" "그렇다. 항차 너를 지배할 사람이다. 물론, 한 가지 방면에서 너는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무슨 말이지?" "호호… 침상 위에서는 네가 위쪽이라는 말이다!" 웃는 환희야, 그녀는 바로… 환희야니(歡喜夜尼)였다. 천축환희가(天竺歡喜家)의 제일고수인 그녀는 환우혈맹(還宇血盟)의 상좌에 오른 인물이고, 천하칠가의 중심인물이었다. "너는 행운아다. 내게 걸렸으니까!" 환희야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요요한 기운에 휘감겨 있는 환희야니는 밤의 꽃이었다. 핏빛보다 붉은 악마의 수술에, 장미의 내음보다 짙은 밤의 향기를 가진 밤의 꽃(夜花), 환희야니.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자에게 걸렸더라면… 아마도 이런 대접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자도 있나?" "호호… 나와 같은 임무를 띠고 주유천하하는 사람은 셋이다. 나는 여기에 왔고, 잔검사랑(殘劍邪郞)이란 자와 첩목마제(帖木魔帝)라는 자는 타처로 갔다. 그 중 잔검사랑은 심장에 꼭 한치의 구멍을 내기 좋아하고, 첩목마제는 산하(山河)를 불사르고 사람 굽는 내음을 맡기 좋아한다." "유감이군. 그들이 모두 여기 없다는 것이!" "호호… 그들을 만날 생각은 마라. 그들은 살아 있는 악마(惡魔)들이니까. 호호……!" "그럼, 그대는?" "나는 뜨거운 밤이다. 살아 있는 꽃이고, 유혹의 향기이다. 그리고… 남자들에게는 꿈(夢)이다!" 환희야니의 눈빛은 더욱 야릇해졌다. 이글이글거리는 눈빛, 그 눈빛은 마주보이는 모든 눈빛을 심마에 빠뜨리게 했다. 환희미염안공(歡喜美艶眼功). 환희야니가 장기로 삼고 있는 최심안공(最心眼功)이다. 환희야니는 철류흔이란 자의 첩 노릇을 오랫동안 했다. 그녀는 몸을 팔며 무공을 훔쳐 배울 수 있었다. 그 덕에 그녀의 절기는 천축환희가의 전통적인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고 있었다. '어서 마셔라, 악마의 잔(殘)을… 아름다운 풋내기.' 환희야니는 눈빛으로 단리궁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왠지 너를 꼬옥 품고 싶다. 너의 체취를 한시빨리 맡고 싶다.' 단리궁은 안개에 휘감겼고, 요요한 시선에 걸려들고 있었다. 흐릿한 눈빛, 조금 삐딱한 자세. 상승고수의 자세치고는 형편없이 흐트러진 자세이고 눈빛이었다. 이미 그는 걸려들고 만 것일까? "그대는 내가 잔을 마시기를 바라는 듯하군?" 단리궁이 느릿느릿 말하자……. "물론이다. 어서… 마셔라. 그리고 나를 취하라. 그리고… 가장 뜨거운 밤은 열리리라!" 환희야니는 속삭이듯 말하며 손을 어깨에 댔다. 톡－! 일순, 끈 하나가 끊어지며 옷자락이 사르륵 벗겨져 내렸다. 흰 떡반죽같이 하얀 피부가 드러난다. 무수한 사내와 교접을 거쳤는데도 유방의 탱탱함이며 배의 매끄러움은 훼손되지 않았다. 음푹 들어간 배꼽이며, 그 아래의 울울한 비림마저 완전히 드러났다. "하아아… 어서… 다가서라. 그 잔을 마시고……!" 환희야니는 암캐의 숨소리를 냈다. 그녀는 단리궁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단리궁의 흐리멍텅한 시선이며 미묘한 허무감은 그녀를 격렬히 떨게 만들었다. 누가 누구를 유혹하는 것일까? 걸려든 사람은 단리궁이 아니라, 환희야니 같았다. 단리궁은 손을 천천히 내밀어 독주와 비수를 함께 취했다. "귀한 것이군. 환상혈비(幻想血匕)와 자오천마(子午天魔), 두 가지 모두 철왕대가(鐵王大家)의 물건이군!" 단리궁의 입가에는 싱긋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잔을 번쩍 쳐들었고, 아주 묘한 투로 말을 꺼냈다. "이 잔(盞)은 신풍가주(神風家主)에게 바친다. 사실, 그를 묻어 주지 못해 마음이 답답한 상태였다." "잔, 잔검사랑에게 잔을 바친다고? 그럼 자금성에서… 그를… 그를 네가 만났고, 네가 그를 죽였단 말인가? 자금성에서?" 환희야니의 입이 딱 벌어졌다. "나… 나보다 강한 잔검사랑을… 네가 죽였다고?" 입은 어른 주먹 하나가 들어갔다 나올 정도로 딱 벌어졌고, 요염하던 얼굴 가득 땀이 축축이 묻어 나기 시작했다. "네… 네가… 네가 누구이기에… 그를……?" 그녀가 사시나무 떨 듯 떨 때였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술이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고 마시는 사람이다. 이렇게 독한 술도… 나는 잘 마신다. 훗훗……!" 단리궁은 웃으며 독주가 가득 든 수정배(水晶杯)를 입으로 가져가 한 방울 남김없이 들이마셨다. "달군. 더 없는 것이 유감이다! 이렇게 술이 달게 느껴지면 얼큰하게 취하기 십상이지." 그는 소매로 입가를 닦아낸 후, 텅 빈 잔을 허공에 내밀었다. "이… 이럴 수가? 그것을 입에 대기만 해도 기절하기 십상인데, 다 마시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다니? 으으, 너의 내공이 그 정도이냐? 으으, 너의 내공이 대군주 수준이란 말이냐?" 환희야니는 몸을 덜덜 떨며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츠으으－ 읏－! '놈은… 풋내기가 아니다. 이미… 절대자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녀는 상승기류를 뿜어 내며 오 장 높이 치솟았으며, 냉큼 회음부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호각, 환희가 여인들에게 긴급신호로알리는 호각을 다른 곳도 아닌 회음부 속에 감추고 다니고 있었다. '거둘 수 없는 자다. 힘으로 죽일 자다.' 환희야니의 얼굴이 새파래질 때였다. "쯧쯧, 소리를 내면 좋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수하들에게 소리가 나면 피바람을 일으켜도 좋다고 말해 두었기 때문에……!" 단리궁은 팔짱을 낀 채 허공만 바라봤다. 오천 마녀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태인데, 그는 이상하게도 태연했다. 그는 너무나도 작은 소리로 말했기에, 환희야니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호각을 힘껏 불어댔다. 삐이이－ 익－ 삐익－! 밤의 장막을 찢는 마음(魔音)이 퍼져 나갔고, 단리궁의 입가에는 차디찬 미소가 떠돌기 시작했다. "계집이란… 알 수가 없다.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서 하거던." 그는 고개를 약간 저으며 팔짱을 덥석 끼었다. 거산(巨山), 그는 하나의 거대한 산이 되어 있었다. 끝없이 퍼져 나가는 호각 소리 가운데, 겹겹이 펼쳐졌던 인간의 벽(壁)은 호각 소리에 따라 가공전율한 구 로(路)의 살병진세(殺兵陣勢)로 변하기 시작했다. "카아아－ 카아아－! 무조건 짓밟으라는 신호다!" "쳐라!" "크크, 진작 이랬어야 했다!" 차앙－ 앙－ 앙－ 스르르－ 릉－ 스릉－! 마녀들의 잔폭한 웃음소리 가운데 동시에 만 자루의 검이 뽑혀지며, 마녀들의 양 손에는 한 자루씩의 마검이 쥐어지며 현란한 겸광을 폭사하기 시작했다. 훌훌 날아오르는 일단의 여고수들. 이들 중 일곱 무사들은 허공에서 방향을 선회하며 단리궁이 있는 곳을 향해 섬전처럼 신형을 폭사시켰다. "저 놈을 잡아 죽여라!" "카카아아－ 카카－!" 마녀들은 마공을 일으키며 마영(魔影)으로 변해 갔다. 허공 가득 악마의 숨결이 흩어지고, 곳곳에서 악마의 그림자가 난무하는 가운데 마기가 충천한다. 그리고 단리궁은 이상하게도 태연자약했다. 그는 손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그의 손에는 환상혈비(幻想血匕)가 쥐어져 있다. 단리궁은 손가락으로 날카로운 비수의 날을 매만지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제… 시작하게들!" 나직한 목소리이나, 가공할 진기가 실려 있었다. 풍운(風雲)의 세월 － 시작하게들! 단리궁의 목소리는 일순 구 소(燒)를 뒤덮는데, 바로 그 순간 아홉 군데에서 폭화(爆火)가 터져 올랐다. 펑－ 펑－ 펑－! 밤하늘을 현란히 밝히는 불꽃 가운데……. "자아, 시작하자! 그물질을!" "어지간하면 죽이지 마라! 가주는 피를 싫어하시는 분이니까!" "귀여운 것들! 이곳에 십만정예(十萬精銳)가 도사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우 오천의 인원으로 행세하려 하다니……!" 꾸역꾸역 나타나는 무사들. 이들은 하나같이 백포(白袍)를 걸쳤다. 눈(雪)처럼 흰 전포를 걸친 무사들은 구 로(路)에 걸쳐 다가서고 있는데, 각 로(路)마다 오천(五千)이 있다. 제일로(第一路) 천금검대(天金劍隊). 전황이 단리궁이 연공하는 사이, 중원에서 이룩한 하나의 결사조직이다. 하나같이 젊고 강한 무사들인 이들은 총인원 일만으로 현재 오천은 외부에 나가 있었다. 무기로는 산반(算盤)을 쓰고, 천방무가의 정종무공예, 천하각파의 제반절기에 두루 정통해 있다. 제이로(第二路) 야뇌검대(夜惱劍隊). 가장 빠르고 가공할 무사들의 모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강호의 흑도세력으로 산만히 흩어져 온갖 방파의 멸시를 받았던 자객(刺客) 살수(殺手)들. 이들은 자객의 왕 야뇌 일점화의 비밀명령 아래 한 곳에 모여들었다. 혈마정(血魔井), 매명소소림(買命笑笑林), 혈세문하(血洗門下). 세칭 북무림삼대자객문(北武林三大刺客門). 월영만리각(月影萬里閣), 잔풍결사(殘風結社), 폭풍건(暴風巾), 죽련무방(竹聯武幇), 어행자객교(五行刺客橋). 일컬어 북무림오대살수방(北武林五大殺手幇). 이들이 야뇌 휘하에 모여 절정세가에 투신한 후 이룩한 집단이 바로 야뇌검대였다. 총인원은 이만(二萬). 이들 중 만오천은 외부에 나간 상태이고 현재 절정세가에 남아 있는 수는 단 오천에 불과했다. 싸움에는 이골이 난 이들은 역전노장들이고 피비린내에는 누구보다도 익숙하다. 이제까지는 강호의 이단자들로 공적 취급을 받고 어둠 속에 숨어 행동했던 자들이나, 절정세가에 들어오고 나서는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모두 씻고 가장 강하고 신의 있는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이들은 큰 활약을 하여 중원천하에 속죄할 생각으로 다른 검대보다도 유난히 피나는 수련을 거듭한 상태였다. 아마도 단리궁이 아닌 다른 백도인이라면 이들이 와서 절을 한다 하더라도 수하로 끌어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반역할까 겁이 나서. 그러나 단리궁은 그들을 믿고 휘하에 거두었고, 그들은 단리궁을 한 번도 못 봤으나 단리궁을 철썩같이 믿고 세가를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제삼로(第三路) 금의검대(錦衣劍隊). 자금성 금의위에서 영문도 모르고 절정세가로 영입된 사람들. 이들은 절정세가의 어떠한 세력보다도 뛰어난 무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현재 자신들이 어떠한 입장이라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는 상태였고, 단리궁이 모은 기라성 같은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금위검대가 되기를 자청했다. 제사로(第四路) 야황검대(夜皇劍隊). 흑천야황이 강호에 나가 거둔 십대마류(十大魔流)의 잔여고수들이다. 오래 전에 무림을 떠나 은자(隱者)가 된 인물들이 태반이고, 이미 마(魔)를 떠나 정(正)으로 돌아선 사람이 거의 다였다. 이들 역시 마지막으로 강호에 대해 속죄할 기회를 찾기 위해 흑천야황의 부름에 따라 절정세가에 들어섰다. 이들이 다시 검을 잡게 된 이유는 의(義)이지, 이(利)가 아니었다. 제오로(第五路) 창궁검대(蒼穹劍隊). 무공을 알지 못하는 창궁천뇌가 절정세가에 와서 꾸민 검대이다. 구성인원은 지극히 다채롭고, 너무나도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한 곳에 뭉친 탓에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걸어다니는 한림원 같은 창궁천뇌는 이들에게 여러 가지 무공비급을 나누어 주어 이들이 하나의 길에 모이게 했다. 창궁검대는 훗날 가장 가공할 세력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고, 구성인원은 대부분 철부지 소년들이다. 강호를 잘 모르는 소년들. 이들은 죽음을 모르기에 오히려 더 용감할 수 있는 듯했다. 제육로(第六路) 사화검대(死花劍隊). 과거 사화문의 후신(後身)이다. 싸우는 데에는 이미 신물이 날 정도가 된 사람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이들은 단리궁의 휘하가 된 후, 눈에서 사기(死氣)를 없애고 손에서 시전되는 무공을 사공에서 정종신공으로 바꾸었다. 이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저력이 강해지는 상태였다. 이들의 총교두(總敎頭)는 천황장인(天荒匠人)이었고, 그는 사화문 제자들이 달단왕녀 모용운교를 지켜 준 보답으로 달단국의 무공을 이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했다. 제칠로(第七路) 전황검대(錢皇劍隊). 전황림(錢皇林)의 후신으로, 경공과 암기술을 위주로 진세를 펼치며 싸우는데 숙달된 무사들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총교두는 현재 자금성(紫禁城)에 머물러 있는 혈무흔(血無痕). 그는 이들의 대부(代父)로 통하고 있었다. 제팔로(第八路) 천룡검대(天龍劍隊). 과거의 마정(魔井)! 이들은 본시 마검대(魔劍隊)라 불릴 예정이었으나, 마자(魔字)가 싫어 마검대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천축비기를 전수해 준 천룡달뢰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천룡검대라고 했다. 제구로(第九路) 절정척살대(絶頂擲殺隊). 가장 빠르고 가장 강한 무사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대부분이 초로 이상의 나이 든 고수들로서, 한 가지 길에서는 절정에 도달한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절정세가의 가장 위대한 저력이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비조군(飛鳥軍)과 합류한 상태였다. 혈거봉의 절정세가는 바로 이들을 꾸미기 위한 하나의 연무관(練武關)이라 말할 수 있었다. 하늘 위에서 땅으로, 땅 속에서 대기 속으로, 숲에서부터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사만오천의 정예고수(精銳高手)들은 거의 찰나적으로 환희가의 마녀들을 포위했다. 우르르르－ 릉－ 콰앙－! 벼락 치는 소리가 잇따른 가운데,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아아… 악! 어… 어디서 지력(指力)이!" "으으, 우리들이 시전한 진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이런 가공할 세력이 존재할 수가……!" "크으으… 윽……!" 쉬지 않고 떨어지는 꽃송이들, 환희가의 요녀들은 변변히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푹푹 나뒹굴었다. 그 중의 몇몇은 단독적으로 진세를 이탈해 구 로로 포위해 드는 세가 사람들을 향해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기세로 다가갔으나, 단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고꾸라져야 했다. 벌판 가득 몸뚱이가 널려 있다. 무수한 나비 떼의 주검처럼……. 천축을 정복했다는 신화를 갖고 중원을 넘본 환희가의 요녀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철저히 패배했다. 쓰러지고, 그 위에 또 쓰러지고… 비명 소리에 비명 소리가 겹쳐지고……. 허리를 꺾으며 나뒹구는 여인, 사리(沙利). 둔부에 일 장을 맞고 높이 떠올랐다가는 등판에 지공을 맞고 큭 소리를 내며 눈을 까뒤집는 여인, 마불화(魔佛花).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일 장에 떠오르는 여인, 지불고(池佛古). 체향과 혈향이 뒤섞인다. 피를 자제하는 싸움이나, 워낙 많은 사람이 어울려 싸우는지라 희생자가 수없이 날 수밖에 없다. 터져 오르는 피보라……. "카아아－ 악－!" "흐흑… 이것은… 꿈이리라. 우리가 이렇게 허망하게 질 수 있을까? 현실에서……." "지, 지옥혈마단이 창건된 후 이런 치욕은 처음이다!" "이들은… 중원의 저력이다!" "크으으… 윽……!" 푹푹 나뒹구는 여인들로 인해 산야가 뒤덮였다. "천, 천하의 혼(天下之魂)이다. 저들은……!" 허공, 눈빛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어기표풍술(馭氣飄風術)로 둥실 떠올랐던 환희가주 야니(夜尼)는 휘청거리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지가 파르르 떨리고, 벌거벗은 몸뚱이에 소름이 가득 돋기 시작한다. "흐으으… 이런 실수를 하다니……!" 환희야니는 아래턱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연잎처럼 매끄럽던 피부에는 차츰차츰 주름살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나머지 마공을 흩트렸고, 그로 인해 백 수십 년 참았던 나이를 한꺼번에 먹고 만 것이다. 피부는 찌글찌글해졌고, 허리는 척 휘어졌으며, 목소리는 갈라졌다. 아름답던 눈가에서는 진물이 떨어졌고, 백옥같이 희던 이빨은 싯누렇게 물들어 갔다. 한꺼번에 백 살의 나이를 먹은 환희야니. "빠드득－! 이… 이제는 천하칠가의 환우혈맹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철대군주는 무자비한 사람이다! 그는 실패자를 남겨 두지 않는다!" 그녀는 악을 쓰며 한 곳을 바라봤다.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여유 있는 시선으로 환희야니가 한꺼번에 백 살의 나이를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미청년 하나가 있다. 절정서생 단리궁. 그는 처음으로 세가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 후, 내심 흡족해 하고 있었다. '노인들의 헌신이 컸다. 모두 고마운 사람들이다. 세가는 나의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의 것이다.' 그의 눈빛은 맑기만 했지, 강하지는 않았다. "야니(夜尼), 나보다 철류흔이라는 자가 무서운가 보군?" 단리궁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빠드득－! 네놈의 머리를 부수어 버리겠다. 아니, 네놈의 목을 끊어 가지고 네놈의 머리를 불에 구워 먹겠다. 그래야 내가 산다. 너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환희야니는 악마의 폭염을 일으키며 십오 장 하늘로 떠올랐다. "환(幻)－!" 환희야니는 악을 쓰며 허공 가득 그림자를 뿌렸다. 하나, 둘… 넷… 여덟… 열여섯……. 수없이 쪼개지는 분영들은 마치 춤추는 나비 떼와 같았다. 단리궁은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호접환(蝴蝶幻)! 장안환법(障眼幻法) 가운데에서 제사단(第四段)의 장안술이지!" 그는 중얼거리며 눈을 반개했다. 그리고 아주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제삼단계는 비용환(飛龍幻)! 보여 주겠다. 네게… 그것을!" 휘이이－ 잉－! 바람 소리가 일어나며 단리궁의 몸이 표표히 떠올랐다. 그의 몸은 환희야니의 분신보다 더 높이 떠올랐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거대한 용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 비룡환(飛龍幻)! 흐으으… 윽……!" 환희야니는 용영(龍影)을 보고 넋을 잃은데… 용의 그림자는 점점 더 거대하게 변화했다. 그러는 가운데……. "제이단계, 천마환(天魔幻)!" 어디에선가 맑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 장을 누비던 거룡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흐트러지는 가운데, 허공 가득 거대한 악마의 날개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장안술은 하나의 눈속임이다. 그러나 그것에 접하는 사람에게는 꿈이 아니라, 현실로 느껴진다. 하물며 단리궁 같은 절정고수가 그것을 시전하고 있음에야…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휘이이－ 휘이이－! 뼛속으로 파고드는 휘파람 소리 가운데 악마의 날개는 끝없이 펼쳐져 나갔다. "천… 천마환마저… 오오, 그럼 너는……?" 환희야니는 이제야 무엇인가를 안 듯했다. 그녀의 눈빛이 아득해지는 그 찰나, 허공에서 비 오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마익영(魔翼影)은 일순 사라지고 말았다. 허공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단리궁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환희야니는 넋을 잃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이것은 꿈의 절기… 이것은 바로… 허공환술(虛空幻術)이다! 절정내공으로… 모습을 감춘다는……!"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하늘에 도전한 불나비인가?' 그녀는 하나의 거대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그 힘은 빠른 속도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저항하지 못할 위대한 무혼(武魂)이 다가섰다. '아아, 하늘은… 있는가?' 그녀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잡혀서 비밀을 누설하지는 않겠다. 살고는 싶으나, 구차하게 살기에는 너무도 늙었다. 차라리… 악마의 역사를 위해 나의 입을 멸구(滅口)하자.' 환희야니는 이빨을 악물었다. 뚝－! 흰 손이 그녀의 목 뒤로 다가서는 그 순간, 그녀의 이빨 사이에서 단약 하나가 깨졌고… 그녀의 주름진 얼굴은 검붉은 피에 뒤덮였다. 순간, 환희야니 바로 뒤쪽으로 단리궁이 불쑥 나타났다. "자결하다니? 으음, 내가 한 발 늦었다!" 그는 묘한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환희야니가 사로잡힐 줄 알았는데, 자결을 단행한 것이 그에게 가공할 의미를 심어 준 것이다. 환희야니는 내공이 강한지라 극독단을 깨물고도 쉽게 죽지 않았다. 그녀는 사지를 덜덜 떨며 단리궁을 올려다봤다. "이제… 노니는 그대를 안다. 그대는… 천년영웅(千年英雄)이다. 바로… 깨어난 신화이다!" 그녀는 전대기인답게 강호전설에 해박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오랜 어둠의 나날 가운데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쁜 것일까? 그녀의 미소는 완숙하기까지 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것은 아니네. 사실은 살아온 과거를 배반할 수가 없어… 숨을 끊는 걸세, 천년영웅!" "으음……." "돌이키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 많다." "……." "그리고… 내가 산다면… 천축이 철대군주에게 쑥밭이 되고 만다. 그는 고금제일마… 그는… 이미 악마의 하늘이 되었다. 어쩌면… 세상은 그대와 철대군주의 세상일 것이다. 둘 중 이기는 자가… 모든 것을 얻으리라. 지금으로 봐서는… 누가 이길지… 장담을 못하겠군!" 환희야니는 인상을 환히 펴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녀는 죽어 가며 한 마디의 말을 남겼는데, 그 말은 이러했다. "제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별로 죄가 없는 아이들이니, 살려 주기 바라네!" 환희야니는 죽었고, 그녀의 몸은 거의 순간적으로 혈수(血水)로 화했다. 자욱한 독향(毒香)이 번질 때, 일대의 싸움은 완전히 마무리지어졌다. 죽은 자 칠 백(七百), 그 나머지는 모조리 생포되었다. 그러나 일대는 아주 고요했다. '가주가 저 정도일 줄이야……!' '아아, 가주 한 분은… 세가의 나머지 모든 사람을 합한 이상이다.' '이제야 가주가 하늘임을 알겠다.' 세가 사람들은 단리궁이 잠깐 보인 절대적인 무공에 넋을 잃고 말았다. 단리궁은 아무 말 없이 세가로 돌아갔다. 그가 무슨 번뇌(煩惱)를 하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그는 피를 흘리지 않고는 천하를 평정할 수 없다는 피의 율법을 뼛속으로 깨닫고 번뇌했을 것이다. 새벽이 될 때, 일대는 깨끗하게 정돈되었다. 지난밤에 대세를 역전시키는 대접전이 벌어졌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霧)… 안개가 유난히도 좋은 아침이었다. 두 마리의 비둘기. 날개가 유난히도 크고 전신이 땀에 젖은 두 마리의 비둘기는 우는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지친 채 날아들었다. 혈무애(血霧崖) 위로, 두 마리의 전서구(傳書鳩)는 철통을 다리에 매단 채 푸드득대며 악마의 산정으로 날아 내렸다. 구월(九月)이 시작되는 그 날의 새벽에……. 좌순찰(左巡察) 감사옥(甘嗣玉). 철형마혼(鐵形魔魂)이라 불렸던 전대의 거마이다. 그는 철형방(鐵形 )의 지존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일개 순찰당 부당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의 수는 철형방주 시절보다 오히려 많다. 그는 전서구를 관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일흔넷의 나이로 숨을 마치지 않고, 서른 살은 더 살았을 것이다. 퍽－! 좌순찰 감사옥의 두개골은 단 일 장(掌)에 부서졌다. 뇌수(腦髓)가 분수처럼 피어 올랐고……. "카아아－ 악－!" 감사옥이 내지른 비명은 그의 시신이 석전 바닥에 떨어지기 이전, 허공에 단말마(斷末魔)로 메아리쳤다. "감히… 감히……!" 호통 소리가 나며 두 줄기 마광(魔光)이 폭사된다. 거대한 황금좌(黃金座). 비둘기 다리에 매달려 전해진 철통을 쥐고 있는 금포대한(金袍大漢) 하나가 있었다. 손 하나를 쳐들고 있는데, 그 손이 바로 감사옥의 단단하기만 한 머리통을 박살낸 손이었다. 부르르－! 그의 손은 바람 앞의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두 장의 밀지(密紙), 초서(草書)로 흘려 쓴 밀지가 그를 격분시켰고…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쳐져 감사옥의 천령개(天靈蓋)만 애꿎게 부서진 것이다. 기라성 같은 무사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대전 내부에는 사기(死氣)가 자욱이 퍼져 있고, 침침한 어둠이 깔려 있다. 두 개의 눈빛은 마등(魔燈)처럼 허공을 시뻘겋게 밝혔다. 각이 진 아래턱에 우뚝 일어난 콧등, 사자(獅子)의 구레나룻을 기른 인상이 강해 보이는 대한. 미인의 가슴을 울릴 뛰어난 용모이고, 매우 탄탄한 신체를 지니고 있는 자였다. 머리 위에는 보관(寶冠)을 썼고, 허리에는 파천황도(破天荒刀)라는 전설상의 마병 한 자루를 장식품으로 걸고 있었다. 이제껏 아무에게도 내심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고, 가증스러운 내심을 온화한 표정으로 감추며 만악을 저질렀던 자. 철류흔(鐵流痕), 그의 얼굴은 숯불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다. 첫 번째 밀지, 그것은 자금성(紫禁城)에서 날아왔다. <모두 실패했습니다. 퇴로마저 막힌 상태입니다. 자결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황군을 이용해 밀가를 치려 했던 계획은 무산되었고, 놈들이 도리어 황제를 등에 업게 되었습니다. 절정세가(絶頂世家), 바로 그 놈들입니다!> 두 번째 밀지, 그것은 혈거봉(血巨峰)에서 날아왔다. <완전한 실패. 모두 다 잡히기 직전임. 이 글이 대군주께 전해질 시간쯤에는 모두 포로가 되었을 것임. 지옥혈마단 최초의 실패입니다. 바로 절정세가, 놈들에게 꺾이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극강(極强) 거대(巨大)합니다. 소문보다 백 배 더 강합니다!> 철류흔은 밀지를 받아들고 격분한 나머지, 좌순찰의 머리통을 저도 모르게 박살내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하나 어김없이 이행되는 줄 알았는데… 으으, 절정세가라는 무리 때문에 가로막히다니… 백만마병(百萬魔兵)으로 천하를 장악하는 계략이, 돌부리같이 튀어 나온 절정세가 무리 때문에 틀어지다니…….' 그의 눈에서는 마염(魔焰)이 폭사되어 나왔다. "좋아, 절정세가! 훗훗, 가장 잔혹하게 밟아 주마. 너희들은… 나의 비위를 건드렸다!" 철류흔의 볼은 실룩거렸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렸고, 그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사악하게 웃기 시작했다. 가슴 깊은 곳의 욕망이 배어 나오는 죽음의 미소. "훗훗… 절정서생! 훗훗, 네놈은… 멋진 놈이다. 네놈은 내게 한 방 세게 먹이고 말았다!" 철류흔은 역시 대단한 승부사(勝負士)였다. 그는 빠른 시간 안에 냉정을 회복하고 키득키득 웃는 것이다. '좋아, 이제부터는 천년밀가가 아니라 절정세가가 바로 제일적(第一敵)이다. 그들의 붕괴를… 승부의 길 끝에 놓겠다.' 철류흔의 몸에서 일어나는 사악한 기운은 더욱 강해졌다. 대전 안에 머물러 있던 칠백여 무사들은 숨도 쉴 수 없었다. 그 중 유난히도 아름다운 눈빛이 철류흔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저 눈빛이다. 저 자의 진짜 눈빛은…….' 손등에 소름이 돋고 있는 가냘픈 체격의 미녀. 얼굴을 흑사(黑絲)로 가리고 있는 아름다운 윤곽의 여인은 철류흔의 옆얼굴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는 저 자의 가공할 야망을 모르고, 마가와 철왕대가(鐵王大家)의 연수(連手)를 꾀했다. 한데, 그것은 실수였다. 저 자는 본가를 완전히 삼키려 하고 있고, 중원을 피로 물들이려고 한다. 저 자는… 진짜 악마다.' 몸을 떠는 미녀, 그녀의 눈빛은 유난히도 슬퍼 보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푸핫핫… 별것 아니다. 푸핫핫……!" 철류흔의 웃음소리 가운데 전각이 뒤흔들렸다. 콰르르르－ 릉－! 벽력 떨어지는 소리가 나며 호법들의 몸이 뒤흔들렸다. 석판이 도끼에 맞은 듯 갈라지며, 모래바람이 피어 올랐다. "으으, 이것이야말로 대군주의 진짜 실력이다!" "아아, 살아 있는 악마의 전설이시여! 우리들은 그대를 신으로 섬길 뿐이외다!" 사람들이 겁먹으며 환호할 때였다. 철류흔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이제……!" 그의 사자후와 더불어 일대는 고요한 침묵 속으로 사라져 갔다. 멈추어진 수백 인의 숨결, 그리고 철류흔의 손에 고정된 악마의 시선들, 그 가운데 잔혹한 목소리가 사위로 퍼져 나갔다. "시작한다, 혈풍(血風)의 역사(歷史)를! 준비된 모든 것을 일제히 시작하라. 더 이상 관망하지 말고, 철저히 파괴하고 취하리라!" 철전을 뒤흔드는 사자후, 그것은 악마의 밤을 여는 지옥의 소리였다. "와아아… 와아아……!" "드디어… 진짜 시작이다! 와아아… 그간 길렀던 저력을… 일시에 터뜨려 천하를 정복하는 것이다!" "지옥혈마단(地獄血魔團) 전원을 강호로 내보내고, 철왕시위대(鐵王侍衛隊) 또한 최초로 강호로 나간다!" "후후… 결국 때가 되었다!" "마의 힘 아래, 천하가 일통될 순간이 다가섰다!"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을 때였다. "그럼… 나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머리카락이 빳빳이 일어나고 있었다. 천마소종사(天魔少宗師), 천년마가(千年魔家) 소가주(少家主) 우문혜(宇文慧). 혜(慧)라는 여인, 그녀의 호흡이 갑자기 끊어졌다. － 혈풍의 역사를 시작한다! 철류흔의 그 말이 그녀의 숨결을 끊어 버린 것이다. 보라! 철류흔의 눈빛은 그녀 쪽으로 돌려지고 있지 않는가? '너는 이제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가(兩家)의 혈풍이 시작되는 날, 우리 둘이 맺어지게끔 협약했기 때문이다.' 철류흔은 이글거리는 눈빛을 우문혜의 몸에 쏟아 부었다. '소, 소름이 끼친다. 저 눈만 보면……!' 우문혜의 얼굴은 석고처럼 경직되었다. 그녀의 얼굴이 땀으로 뒤덮일 때였다. "후후… 이제는… 나를 피할 수 없소, 혜(慧)!" 철류흔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는 환우혈맹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우문혜를 존중해 주는 것은 형식에 불과했고, 우문혜를 통해 중원마가(中原魔家) 세력을 회유하자는 속셈일 뿐이었다. "혜, 오늘 밤… 후후, 신월(新月)이 뜨는 아래에서 우리 두 사람은 하나로 맺어질 것이오!" 철류흔은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 악마의 숨결과 악마의 시선, 그것은 바로 저주(咀呪)이며 악몽이었다. "그대가 나를 혐오하고 있다는 것은 아나, 부디 웃는 낯으로 나를 맞이해 주시오. 아랫것들의 이목도 있으니까!" "으으… 으으……!" "이 일은 중원마도와 변황마도가 하나로 합해지는 성스러운 예식이오. 훗훗……!" "……." "나는 육 시진 폐관(廢關)에 들어갔다가 나올 것이오!" "……." "나는 그 사이, 두 가지 전설상의 마공을 익힐 작정이오. 그 후 나는 대종사(大宗師)에 등극할 것이고… 그대, 혜(慧)를 내 곁에 세울 것이오. 나의 부인으로!" "……." "마가와 철왕대가는 칠 가 중에서 상부 위상가가 될 것이오. 그리고 가장 위대한 나날이 우리 두 사람의 지배 아래 시작될 것이오!" "……" 철류흔은 끝없이 말하고… 여인 혜는 언제부터인가 침묵하고 있었다. '싫다. 너의 숨소리조차…….' 그녀의 피부에는 소름이 가득 돋아 올랐다. 철류흔도 그녀의 마음을 읽는 듯했다. "후후… 도망칠 생각은 마오. 이유는… 그대가 더 잘 알 것이오. 나로 하여금, 그대 가문을 잡아먹게 하지 마시오. 부탁하오!" "으으… 으으……!" "훗훗… 물론, 도망치려 해도 불가능하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니까! 과거 그대의 휘하고수도 이제는 정식으로 나를 종주로 섬기고 있소. 그대의 진짜 충신들은 파풍단(破風壇) 쪽으로 밀파되었다는 것을 그대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철류흔의 눈은 더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눈은 피에 굶주린 야수(野獸)의 눈이었다. <혈풍일령(血風一令)! 대륙무림회장(大陸武林會場)에 극독을 풀어 천하숙명(天下名宿)들 오천 명을 쓰러뜨릴 것. 이미 우리쪽이 된 인물들로 뒷처리를 하게 하고, 구파일방의 현판을 모두 떼어 낼 것.> <혈풍이령(血風二令)! 파풍단(破風壇)에 지옥관(地獄關)을 만들어 대륙무림회장으로 이동해 가는 그들을 섬멸할 것! 자세한 방법은 추후, 다시 통지하겠음.> <혈풍삼령(血風三令)! 구천구 소에 파견되어 나간 철왕시위대(鐵王侍衛隊)는 하나도 남김없이 대군주 곁에 모여들 것.> 비둘기 천여 마리가 일제히 떠올랐다. 잠풍(潛風)을 혈풍(血風)으로 뒤바꾸는 전서가 자신들의 발목에 매달렸다는 것도 모르고 전서구들은 창궁으로 떠올랐다. * * * 철류흔은 백팔 단계의 마공 중에서 백칠 단계와 백팔 단계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마공을 연마해야만 했다. 그것은 지극히 위험스러운 마공인지라, 마공에 미친 철류흔이라 하더라도 익히기를 주저했었다. 첫번째 마공 철사혼(鐵死魂). 쌍장을 통해 철기(鐵氣)를 모아 골수(骨髓) 속에 모아 두고, 내공구결과 함께 철기를 토해 내어 이십 장 안을 철사철류(鐵死鐵流)로 뒤덮어 황폐하게 하는 가공할 마공이다. 두 번째 마공 독마혼(毒魔魂). 쌍장을 통해 십 독(毒)을 흡수해 피에 모아 두는 수법이다. 한 방울로 천 명을 죽일 수 있는 지독한 독을 열 가지나 손바닥을 통해 흡수한다는 것은 철류흔에게도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를 얻어야만 했다. "궁(弓)이란 자, 그는 위대한 경쟁자이다. 후후, 나는 그 놈으로 인해… 결심하게 되었다." 철류흔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두 가지 마공마저 익히면 눈빛이 완전히 악마안(惡魔眼)으로 화해 나의 외모는 괴이하게 변하기에, 이것을 익히기 주저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익혀야만 한다. 천하제일이 되기 위해서, 나의 시대(時代)를 완벽하게 이룩하기 위해서……!' 그는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며 두 가지 마공을 속성 연마하기 시작했다. 마공은 속성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조식(調息) 운기행공(運氣行功)이 아니라, 약물이나 사이한 대법으로 연성할 수 있다는 매력도 있다. 그러나 마공을 익히는 자는 마성에 빠지게 되고, 마는 또 마를 부르는 피의 순환이 거듭되기에 마공수련은 금기로 인정되어 왔다. "마에서는… 모든 금기를 깨겠다!" 웃는 철류흔, 그도 마(魔)에 있어서는 절정이라 할 수 있다. 가주(家主)가 되기 위해 아버지와 제 어머니를 제 손으로 죽인 자. 늙은 가신(家臣)들을 수없이 목을 베어 죽이고, 자신의 마공성취를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이천사백(二千四百)이나 희생시킨 인물. 그는 웃으며 검은 안개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꽃밭에 둘러싸인 단아한 옥루(玉樓) 안. "아아, 그에게 안길 수 없다. 절대로……!" 끝없는 한숨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거울 하나, 그리고 여인 하나, 한숨 한 가닥……. "절대 안 돼. 왜냐하면 나는 그를 증오하고 있기 때문에……!" 거울 속에 너무나도 수려한 얼굴이 떠오르고 있다. 섬약한 가운데 뇌쇄의 미를 품고 있는 한 송이 수선화(水仙花). 차디찬 가운데 뜨거운 정열을 담고 있고, 열정 가운데 혜지를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자. 혜(慧), 그녀는 가쁜 숨을 토하며 손가락으로 피부를 매만졌다. "내 얼굴이 저주스럽다. 아름답게 보이지만 않는다면… 철대군주가 내게 집착하지 않았을 텐데!" 눈빛이 흐려진다. 뺨을 타고 두 줄기의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다. 머지않아 신월(新月：초생달)이 떠오르리라. "나는… 사실, 그를 짐승으로 보고 있다. 그를 죽이고 싶고, 그에게 침을 뱉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그에게 안길 수 없다. 절대로!" 혜, 그녀는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했다. '그리고… 그에게 안기지 못할 또 하나의 진정한 이유가 있다.' 눈빛은 점점 아름다워진다. "나의 가슴 속에는… 그림자 하나가 있다. 물론 그는 나를 알지 못할 것이나, 나는 그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다!" 그윽한 한숨이 흐른다. "아아, 나는… 그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반 나절만 나와 동행했는데, 나의 뇌리에는 너무나도 깊은 영상을 남겼다. 궁(弓), 나의 마지막 남자(男子). 나는 최근에야 그것을 알았다. 그가… 나의 연인(戀人)임을!" "물론,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그는 나를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 속에 그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부종사하기보다는……!" 아주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손에는 작은 비수 하나가 들려 있고, 비수 속으로 막 떠오른 달빛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비수에는 여인의 얼굴이 비쳐지는데, 너무나도 슬프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안녕, 나의 운명(運命)아… 나의 추악한 과거야! 이제는…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하겠구나. 나는… 모진 척만 했지, 모질지 못한 계집이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가장 깊은 밤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한 자루의 비수(匕首)와 한 줄기의 한숨 가운데……. 혈풍(血風) 시작되다! 월광(月光)이 만산(滿山)이다. 산정의 바람은 이미 삭풍(朔風)이 되었고, 봄꽃보다도 붉은 가을의 풍엽(楓葉), 그루터기에는 서리가 맺힌다. 달빛, 그 아래. "아름다움(美)이 저주라면… 이 아름다움을 없애리라. 그래서 내게 부여된 겁(劫)에서 벗어나리라." 떠오르는 신월(新月) 아래 흰 손이 흔들리고 있다. 검붉은 입술을 가진 여인, 유난히도 긴 목에는 신월의 빛이 떨어져 내리며 편린(片鱗)으로 반짝이는데… 그녀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나의 형(兄)! 언젠가 그대를 만나… 그 때 얻어 마신 술에 대한 보답으로 술을 한 잔 사려 했는데……." 흰 손은 천천히 들리고 봉황(鳳凰) 조각의 아름다운 비수의 날(刃)이 달빛에 반짝이는 가운데, 피의 이슬이 흰 손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흰 손은 오르락내리락거렸고, 여인의 호화롭던 옷은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같은 달빛 아래 가공할 마의 흐느낌 소리가 일어나는 가운데, 한 줄기의 검은 기류가 표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마리 흑룡(黑龍)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듯, 뇌성벽력과 함께 흑막(黑幕)에 뒤덮였다. "철(鐵)－ 사(死)－ 혼(魂)－ 류(流)! 독마혼(毒魔魂)－! 극악한 호통 소리와 함께 검은 장막은 더욱 넓게 펼쳐졌다. 휘리리리－! 검은 모래바람이 사위를 여지없이 휩쓸고 나가는 가운데… 거석(巨石)과 거목(巨木), 그리고 일대의 잡목림이 일제히 검게 물들다가는 모래처럼 부서졌다. 우르르릉－! 흑풍(黑風)은 이십 장 안을 초토화시키고도 힘이 남아 너른 범위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무시무시한 흑풍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었고, 수레바퀴가 굴러 가는 소리와 함께 검은 기류는 하나의 장(掌) 속으로 세차게 빨려 들어갔다. 활짝 펼쳐진 손바닥은 이십 장 안을 가득 뒤덮었던 검은 기류를 모조리 빨아들인 후에야 불끈 쥐어졌다. "성공했다. 후후, 본가에 전해지던 상고시대의 마공 가운데 얻지 못했던 두 가지 마공을 드디어 연성했다." 차디찬 두 눈, 유황처럼 시뻘건 두 개의 눈빛은 손바닥 위에 집중되었다. "천하(天下)는 이제 나의 손 아래 움켜쥐어진다. 후후, 고금에 유례 없던 대패업(大覇業)이 나의 손바닥 위에서 이루어지리라." 웃는 자, 그는 철류흔(鐵流痕)이었다. 마공을 익히기 위해 무자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악마의 대군주(大軍主). 그는 주먹을 꾸욱 거머쥐며 허공을 바라봤다. 신월(新月)이 그의 망막에 떨어져 내릴 때였다. "후후… 이제 나는 또 하나의 절정(絶頂)을 취할 때다. 후후, 그간 미루었던 미(美)의 절정을 꺾을 때다. 저 달빛 아래서……." '혜(慧), 너는 나를 혐오하고 있다. 나는 너의 눈빛만 봐도 너의 속마음을 알아낼 수가 있다. 하지만 혜! 너는 나를 거절할 수가 없다. 아느냐? 너는 내게 꺾일 운명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웃음은 더욱더 음침해졌다. "마가제일미인(魔家第一美人), 동시에 중원제일화(中原第一花)라는 우문혜. 후후, 그 계집은 나의 정실(正室)이 될 것이다. 후후, 옹리공주(翁莉公主)라는 계집과 더불어……." 그는 웃으며 소축(小築) 가까이 다가갔다. 일대에 뭇 그림자들이 머물러 있다. 그들은 철류흔의 직속 수하들로, 철류흔의 명에 따라 우문혜가 도망칠 수 없는 진세를 쳐 놓고 있었다. 혈풍비(血風飛)라는 자, 그는 사 척 장검(長劍)을 가슴에 안은 상태에서 절을 한다. 그는 십풍비객(十風飛客)이라 불리는 자들의 우두머리로, 전적으로 우문혜의 호법을 서는 자였다. 그는 철류흔의 신발에 입이라도 대고 싶다는 듯 절을 연달아 해대며 아주 기쁜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소종사님은…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왜?" "얼마 전, 소종사님의 거처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소리라니?" "매우 묘한 소리였습니다. 즐거워 부르는 콧노래 소리랄까요?" "소종사가 콧노래를 부른다고?" 철류흔의 입이 가볍게 벌어졌다. '설마, 우문혜가 진심으로 나의 여인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그는 웃으며 소축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하긴, 계집들이란 다 그러하지. 후후, 겉으로는 싫은 척하면서도… 후후, 속으로는 그것이 아니거든…….' 철류흔의 입가에는 당당한 웃음이 피어난다. 그 웃음, 절대자다운 완전한 웃음은 이층 계단을 따라 올라가 문 하나를 열고 난 다음 철저히 소멸되었다. 히죽 웃는 여인. 그녀는 푹신한 의자에 걸터앉아 방 안으로 들어서는 철류흔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 여인은 탈진한 듯 힘없어 보이는 가운데 어떠한 쾌락을 만끽하는 듯 아주 미묘한 눈빛이었다. "어서 와요. 호호! 원하신다면 저의 모든 것을 드리지요, 위대하신 대군주나으리! 호호……!" 여인은 웃으며 손을 쳐들었다. 흰 손 위, 비린내를 풍기는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뚝－ 뚝－ 뚝－! 여인의 면상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제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고요? 호호! 그럼 저를 어서 가지세요. 바라신다면 다 드리지요." 웃는 여인, 그녀의 얼굴 위로 월광이 떨어져 내린다. 환히 웃고 있는 긴 머리카락의 여인, 그녀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신(神)의 얼굴은 절대 아니고, 그 얼굴은 악마(惡魔)의 얼굴이었다. 긋고, 또 내리긋고, 비스듬히 베고, 여인의 얼굴은 비수에 의해 무자비하게 난자(亂刺)당했다. 여인에게 얼굴은 생명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여인에게 얼굴이란 무사에게 있어 검(劍)과 같다고 한다. 히죽－! 얼굴이 피로 범벅된 여인은 철류흔의 얼굴을 바라보며 묘하게 웃었다. 보라! 철류흔의 얼굴은 추악하게 일그러졌고, 비지땀이 얼굴을 적시며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지 않는가? "내가 그리도 미운가?" 철류흔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입술을 떼었다. 여인은 출혈(出血)이 너무 심해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호호… 그대는 신이 아닌가요? 악마의 신! 호호, 천하의 그 누가 그대를 미워하겠습니까?" 웃는 여인은 우문혜였다. 그녀는 철류흔이 연공하는 사이, 얼굴을 무참하게 뭉개 버린 것이다. "너는… 나를… 향해 복수를 했군? 내가 너의 마가를 힘으로 정복했다는데 대한 복수로… 너의 얼굴을 망쳐 버린 것이군?" "호호호… 복수라니요, 대군주저하? 호호! 소녀는 오늘밤 대군주께 몸을 맡길 생각이옵니다." "으으, 우문혜! 네가 나를 바보로 만들다니……!" 철류흔의 양 볼이 실룩거렸다. 그의 눈은 바로 천마(天魔)의 눈이었다. 번쩍－! 무시무시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사악한 기운이 쭉쭉 뻗어 나갔다. 철류흔은 손에 힘을 가하고 있었다. 손을 쳐든다면 우문혜의 머리는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손을 쳐들지 않았다. 철류흔은 꽤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는 서서히 냉정을 회복했고, 입가에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내게서… 떠나고 싶은가?" "호호… 내가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장차 천하는 그대의 것이 되는 마당에……!" "훗훗… 정직하지 않군." 철류흔은 천천히 뒷짐을 졌다. 그의 눈은 너무나도 무섭게 침잠(沈潛)되어 있었다. 화를 내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여유 있는 미소, 그것이 우문혜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노기를 순간적으로 없애고 웃다니… 으으, 역시 대단한 자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갈 데까지 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철류흔이었다. "좋아, 바란다면 바라는 대로 해 주지. 물론,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대, 우문혜는……!" 그는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그는 피에 젖은 융단을 딛으며 문을 나섰다. "아마도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나를 거부한 것을……!" "……." "그리고 네게 한 가지를 맹세하겠다. 너보다 훨씬 아름다운 계집을… 너 대신 범하겠다고. 훗훗, 그리고 너는… 가장 추한 자에게 짓밟히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리라." 철류흔은 웃으며 사라져 갔다. 새벽이 될 때, 일대에는 비밀리에 묘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 소종사가 지옥혈마단주(地獄血魔團主)로 등용되셨다. 그분은 이제 제일진(第一陣)의 선봉에 서시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매우 묘한 인사(人事)였다. － 대군주께서는 밤 사이 시녀 열다섯을 잇따라 범했다. 시녀들 중 일곱은 몸이 부서져서 죽고, 나머지 여덟은 백치가 되었다. 대군주는 시녀들을 반 으스러뜨릴 정도로 격한 밤의 열풍을 일으키셨다. － 대군주 앞에 갈 때는 조심하라. 사소한 것이라도 실수할 때에는… 그 순간 목뼈가 뒤로 꺾이게 된다. 그분은… 묘한 상태이시다. 그분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라! * * * 풍운(風雲), 십팔만 리는 너무도 돌연히 풍운에 휘어감겼다. 전율스럽게 일어난 피의 바람은 한순간 강호 십팔만 리를 공포로 휩쓸어 버렸다. 강호계란 본시 피바람이 흔한 곳이다. 그러나 이번의 혈풍은 격이 달랐다. 환우가 완전히 피에 젖어 버리는 거대한 혈풍. 삼산(三山)과 사해(四海), 오악(五嶽)과 육합(六合), 팔황(八荒)과 구주(九州), 구산(九山)과 십지(十地)가 혈우에 잠겨야 했다. 천산만수(千山萬水)가 온통 피에 젖는 거대한 피의 수레, 혈풍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동정호(洞庭湖) 군산(君山). 칠십이 수로녹림채(水路綠林寨)의 총본산(總本山)은 대대로 거기에 자리잡았다. 갈대숲 깊은 곳에 아성(牙城)을 쌓아 두고, 장강(長江)의 상권(商權)을 장악하며 배타적으로 세력을 팽창시켜 왔던 군산칠십이 채. 자욱한 야무(夜霧) 가운데, 해왕궁(海王宮)이라 불리는 거대한 성채 하나가 검은 안개에 뒤덮이고 있다. 자욱이 퍼져 나가는 안개의 깊은 곳, 언제부터인가 검은 그림자들이 유성우(流星雨)처럼 신형을 폭사시키고 있었다. 꾸역꾸역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들, 이들은 갈대의 바다를 이용해 몸을 은잠(隱潛)시키며 해왕궁의 십 로(路)를 새까맣게 뒤덮기 시작했다. 쓰으으… 쓰으으……! 밤안개를 타고 나타나는 야행인(夜行人)들, 이들의 손에는 예광(銳光)을 죽이기 위해 먹빛깔의 독(毒)을 듬뿍 바른 한 자루씩의 장도(長刀)가 들려 있다. 사삿－ 삿－ 삿－! "조용히… 다가가라!" "크크크… 피바람은 자시(子時)에 시작하는 상부의 명령이다. 그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 "군산의 피라미들 때문에 우리들이 왔다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명인 이상, 행할 수밖에 없다!" "연습 삼아 간단히 해치우자. 큿큿……!" 사삿－ 삿－ 삿－! 유성의 비가 뿌려지듯이, 검은 화살 떼가 마구 퍼부어지듯이 검은 그림자들은 해왕궁의 전역을 뒤덮어 갔다. 검은 파도처럼 다가가는 자들, 수는 일천사백 정도. 하나같이 영활한 신법을 지니고 있고, 악행술에 지극히 뛰어난 자들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해왕궁을 완전 포위했다. 교교한 월광이 가리워진 깊은 밤. 해왕궁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고적한 밤을 맞이한 가운데 몇 군데에서 피어 오르는 봉화 가운데 잠자고 있었다. 질풍노도처럼 해왕궁을 뒤덮어 가는 자들. 이들은 자시가 되는 순간 일제히 장소성(長嘯聲)을 터뜨리며 해왕궁의 철벽을 타넘어 들어갔다. "우… 우……!" "쳐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여라!" "카카－! 가장 무자비한 수단으로 죽여라! 그리고 불태워라! 카카－!" 검은 그림자들은 꾸역꾸역 해왕궁을 타넘어 갔고, 백여 개의 화탄(火彈)이 일제히 발사되는 가운데 십 리 안이 삽시간에 불더미에 뒤덮였다. "적… 적이다!" "으으, 어… 어디서 저리도 많은 자들이……?" "본궁은 타파와 원한을 사지 않았는데, 어… 어이해……?" 해왕궁의 무사들은 돌연한 소란에 기절초풍 놀라, 상의도 걸치지 못한 채 드넓은 연무장 안으로 뛰어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고……. 퍽－ 퍽－! "캐애애－ 액－!" "비… 비겁한 살인자들! 보… 보복당하리라!" "으윽, 감히 이런 만행을……." 푹푹 고꾸라지는 자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척살을 가하는 밤의 무리들. 밤은 한순간 피에 젖었다. 우르르르－ 릉－! 지축이 뒤흔들리는 굉음 가운데, 해왕궁의 본전은 불더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쓰러진 사람의 몸 위로 또 시체가 쓰러진다. 아버지가 목 잘려 죽는 것을 보고 눈에 핏발을 세우던 십오 세 어린 소년의 허리가 어디서 날아드는지 모를 장검의 날에 싹둑 끊어졌고,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 가던 시녀들의 목이 끊어져 낙엽처럼 떠올랐다. 피보라가 수천 군데에서 솟구쳐 올랐고, 연무장 가득 목 잘린 시체가 추수 후의 밭에 누운 노적가리처럼 넘어졌다. 꾸역꾸역 악마의 무사들은 연무장 가운데로 모여들고 있었다. 축시(丑時), 자시에서부터 꼭 한 시진 후이다. 무사들의 야행복은 너 나 할 것 없이 피에 물들었고, 들고 있는 장도는 날이 빠질 정도로 무뎌졌고, 손잡이 부분까지 살점이 묻어 있었다. 피에 굶주린 밤의 살인자들. 이들은 무자비하게도 쓰러진 사람들의 시신에 다시 한 번 더 칼질을 가했다. 우지끈－ 쿵－! 허리뼈가 잘리는 소리, 천령개가 발에 밟혀 부서지는 소리……. 해왕궁은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묘지로 변했다. "후후… 이제 되었다!" "자아, 어서 돌아가자! 후후, 우리 가문(家門)과 연수하기를 꺼린 군산채의 수부(水夫)들을 죽인 것으로 우리의 할일은 마무리지어졌다." "가소로운 자들!" 야행인들은 대오를 갖춰 담장을 넘어갔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밤공기를 타고 떠오르는 자들, 천여 명 살인마들의 뒷모습으로는 수백 명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내가 봤다. 너희들을…….' 마른 우물에 빠져 구사일생한 소년, 이웅(李雄).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할 줄이야! 으으……!" 치를 떠는 침모(針母) 석대부인(石大夫人), 팔 하나가 잘린 채 비틀비틀 일어나는 젊은 무사……. "네… 네놈들은… 실수했다. 으드득－! 우리들을 모조리 다 죽였으면 모를까… 으드득－! 너희들은 우리들을 다 죽이지 못했다!" 핏더미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수는 꽤 많았다. 살인자들은 혈겁을 빨리 마무리짓기 위해 확인 살해하는 것을 엉성하게 했고, 그 덕분에 육백여 명의 생존자가 생긴 것이다. 눈이 뒤집히고, 머릿속에는 복수(復讐)의 일념만이 생긴 자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었다. "밀가(密家), 네놈들임을… 내가 봤다!" "가증스러운 자들! 드디어… 위선의 탈을 벗는구나! 빠드득－!" 밀가(密家)라니? 그렇다면 천년밀가에서 고수를 파견해 해왕궁을 피로 씻었단 말인가? * * * － 군옥산(群玉山) 풍운검회(風雲劍會) 완전 괘멸. 하지만 풍운검회주 풍운대협(風雲大俠) 부영풍(扶英風)은 십구장로(十九長老)와 더불어 숭산 대륙무림회를 향해 떠난지라 혈겁을 모면했다! － 살인자는 바로 밀가다! 풍운대협은 한 팔을 자르고 복수를 맹세했다. － 사천당문(四川唐門)이 기습당했다. 칠백여 당가후예가 죽고, 오십여 명의 당씨낭자들이 겁탈당했다. 밀가가 살인자다! － 하룻밤 사이 천하 칠십이 개소에서 일제히 살겁을 저지를 정도로 거대한 세력은… 천 년의 밀가뿐이다! 그들은 대륙무림회가 거행되려 하자, 마각을 벗은 것이다! － 천하여, 하나로 뭉쳐야 한다! 천 년의 이단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중원천하(中原天下)의 모든 방파는 하나로 뭉쳐야 한다! 유성(流星)은 긴 꼬리를 끌며 떨어져 내렸다. 너무나도 높은 하늘을 반으로 끊으며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유성. 그리고 화원(花園) 가를 걸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입가에도 유성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단리궁은 뒷짐을 진 채 추국(秋菊)이 가득 피어난 화원을 거닐었고, 그의 뒤에는 혈무흔과 야뇌가 따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난밤에 절정세가로 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없는 사이, 환희야니의 수하들이 궤멸했다는 말을 듣고 꽤나 섭섭해 하는 상태였다. "야속합니다. 그런 일에 속하들을 빠뜨리시다니……!" "어이해, 속하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속하들, 그 일이 너무도 야속해서… 술 한 잔 먹으러 간다고 해 놓고 비조를 타고 급히 왔습니다!" 두 사람은 통한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일 아니었소. 독나방 떼를 잡는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소. 그리고 그 일에 두 분의 노인을 뺀 데에는 이유가 있었소. 그것은… 후후, 입가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어 보자는 것이었소." 단리궁은 허리를 숙인다. 뚝－!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달빛에 물들고 있는 노란 국화 한 송이를 떼어 낸다. "향기가 좋군." 단리궁은 중얼거리며 허리를 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훗훗… 만에 하나, 두 분 노인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다른 사람들은 손써 볼 기회도 갖지 못하고 수수방관만 했을 것이 아니겠소?" "하… 하긴, 그렇군요." "환희야니 정도야… 삼 도(三刀)감이지요." 혈무흔과 야뇌는 그제서야 수긍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단리궁은 거보(巨步)를 다시 한 번 떼어 놓았다. 부드러운 가운데 군림의 기도를 갖고 있는 난세의 풍운아(風雲兒), 그의 입매에는 굳센 의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큰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오. 이제 두 분은 툴툴댈 기회마저 찾지 못할 정도로 바빠질 것이오!" "속하들이 할일은……?" 두 노인은 허리를 숙인다. 뜨락에는 추국의 향이 가득하다. 단리궁은 눈을 들어 편월을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혈노(血老)는 파풍단(破風壇) 쪽으로 떠나 주시오." "파풍단이오?" "그곳은 파산(巴山)에 있소. 그곳은 중원제일가가 새롭게 만든 외단(外壇)이오." "아아……!" "그들은 현재 지극히 노여워하고 있소. 왜냐하면, 며칠 사이 철류흔 쪽 무리들이 그들의 이름을 빌려 일흔두 곳에서 혈풍을 일으켰기 때문이오!" 단리궁의 눈에서는 살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가 버린 그의 가문, 밀가(密家). 밀가는 며칠 사이 천하대공적으로 낙인찍혔다. '나의 가문은 천하를 위해 헌신했는데, 천하인은 그것을 아직 모른다. 과거에는 나도 그것을 몰랐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나의 혈통이 왜 무자비한 혈통이 되었는지를…….' 단리궁은 웅대한 기도를 자욱이 흘렸다. "혈노가 할일은… 폭풍(暴風)을 멈추게 하는 것이오." "폭풍이라니요?" "투혼(鬪魂)의 화신, 그리고 가장 지독한 협골(俠骨)을 가진 아이가 하나 있소. 이름은 우(雨)! 부러지기는 어려워도 꺾이기는 쉬운 녀석이오." "……."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가문에 누명을 씌운 자들에게 도전할 것이오." "으음……." "그를 그냥 놔 둘 경우, 그는 함정에 걸려들 것이오. 왜냐하면, 지난 며칠간의 혈풍은 바로… 그를 궁지에 밀어넣기 위한 계략이었을 테니까!" 단리궁은 다시 하늘을 봤다. 그는 며칠간, 강호정세에 대한 것을 치밀하게 생각한 상태였다. 잠풍(潛風), 혈풍(血風). 천하를 노리는 악마의 두 가지 계략을 뚫어보고 있는 사람은 단리궁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하는 아직 모르고 있다. 환우혈맹이라는 거대하고 극악한 집단이 천하정복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철류흔이라는 자는 마에 있어 절정을 이룩한 자요, 그 자는 밀가를 이용해 천하의 대세를 하나로 모으고 있소." "……." "천하인들은 그가 펼칠 거대한 마망(魔網)에 걸려들기 시작했고, 아마도 놈은 숭산에서 승리의 잔을 들려 할 것이고… 파풍단에서는 천 년간 중원을 위해 피 흘려 온 위대한 가문의 멸망을 기념하는 잔을 들려 할 것이오. 그러나 나의 세가가 있는 한… 훗훗……!" 단리궁은 뒷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가주는……?" 혈무흔이 조심스레 묻자……. "나는 여기서 한 가지 할일이 있소. 사실은 그 일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달구경을 하는 중이오." "어떠한 일인데요?" "글쎄!" "주인에게도… 글쎄라는 말이 있습니까?" 혈무흔은 매우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일 다경(茶頃) 후, 혈무흔은 비조를 타고 남천(南天)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야뇌(夜惱)는 단리궁에게서 하나의 양피지(羊皮紙)를 건네받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것은… 하나의 진세 같군요?" 그가 손에 쥐게 된 양피지에는 하나의 진도가 그려져 있었다. 매우 복잡한 하나의 진도, 그것은 단리궁이 친히 그린 신비로운 진식의 해법서였다. "일컬어 절정대진(絶頂大陣)이오!" "아……!" "그것을 사흘 안에 펼치시오. 그것이 야노의 할 바요." "사… 사흘이오?" "훗훗… 이 일대를 이전보다 더한 천라지망으로 만들어야 하오. 내 짐작대로라면 앞으로 불청객들이 많을 것이오. 야뇌노인은 나를 대신해 불청객들을 아주 정중히 맞이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오!" 아름다운 미소, 야뇌는 그것을 보며 따라 웃었다. "그렇군요. 큿큿, 주인이 여기 계시는 척하며 천하의 시선을 이 곳으로 모으는 가운데… 큿큿, 외부에 나가시어 묘수를 쓰실 생각이시군요.?" "훗훗… 그렇소. 이곳 세가는 다분히 형식적인 장소일 뿐이오. 이곳은 철류흔이라는 자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만든 장소에 불과하오. 그 자가 휘하고수들을 이 곳으로 분산시키는 가운데, 세가의 절정고수들은 강호각지로 퍼져 나가서…… 후후, 방심하고 있는 마도집단에게 일격을 가하게 될 것이오!" "위, 위대한 계획입니다. 한데, 성공 가능성이 있습니까?" 야뇌는 몸을 떤다. 단리궁이 세우고 있는 계획이 너무도 가공하기에 그는 저도 모르게 피부에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이다. 일컬어 만리척살계(萬里擲殺計). 만 리에 걸쳐 하나의 그물을 펼치고, 단 한 번에 모든 마의 끈을 잘라 버리는 가장 가공하고도 흔쾌한 계획. 그것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계획이었다. "한 가지만 맞는다면… 되오!" "한 가지라니요?" 야뇌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시 가주는 거침없는 성격인데, 대체 무엇을 주저하실까?' 그는 처음으로 번뇌를 보고 있었다. 절대자로 여겼던 젊은 풍운아 단리궁, 그의 미소 뒤에는 짙은 고독의 빛깔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수하들이 두려워할까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가공할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소박한 데가 많은 청년이었다. 늘 검은 물을 들인 흑포를 걸치고, 세 끼의 식사로는 맛이 별로 없는 양춘면을 든다. 절정세가(3) 다가서는 숙명(宿命) 일세의 풍운아 단리궁, 그는 대체 무엇을 염려하는 것일까? 먹궁 위로 구름에 가렸던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단리궁의 눈은 달에 고정되어 있고, 그의 망막에는 검은 안개에 휘어감긴 달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리궁은 야뇌를 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믿는 것은… 그가 천재(天才)라는 것이오!" "그, 그가 천재라니요?" "나의 경쟁자!" "오오, 그럼 악마대군주(惡魔大軍主) 철류흔이 천재이기를 바란단 말씀이십니까?" 야뇌노인은 넋을 잃고 만다. 보통 사람은 적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게 마련이다. 적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단리궁은 달랐다. 그는 철류흔이란 자를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 있는 자로 여기는 듯했다. "그가 천재라면… 나는 이길 것이오! 그가 바보라면… 나는 강호의 대역죄인이 되고 말 것이오!" "아아, 그럼 가주의 모든 병법은 악마대군주가 절정의 방법을 쓰기를 미리 예상하시고 만든 것인지요?" "그렇소!" "대단하십니다, 가주는!" "과찬이오. 나는 농부(農夫)가 되었으면… 하고 늘 생각하는 젊은이일 뿐이라오." "농부라니요? 가주는 부마도위(駙馬都尉)에, 세가주(世家主)에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신데요." "훗훗… 그 중 하나는 빼야 할 것이외다!" "하나를 빼다니요?" "부마도위!" "예… 에?" 야뇌노인은 다시 입을 딱 벌렸다. 대체 누가 단리궁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선덕제는 단리궁에게 옹리공주를 맡겼다. 공주의 남자가 된다는 것은 강호의 젊은이라면 누구라도 바라 마지않는 그러한 경지이다. 그런데 단리궁은 그것을 거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호란 본시 황실(皇室)과 거리가 있어야 하오. 이유는… 강호는… 강호이기 때문이오!" "그런 것은 속하도 압니다. 하지만 옹리공주는 백치가 되어 가주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까? 어젯밤만 해도 공주는 가주가 당신과 놀아 주지 않는다며 울고불고하셨다더군요." "아오." "아는데도 그러한 말씀을 하십니까?" "훗훗… 지금은 허상(虛像)에 불과하오." "허… 허상이오?" "나는 공주에게 정(情)을 느낄 뿐이지, 애(愛)를 느끼고 있지는 않소. 그리고 지금 나를 좋아하는 공주는 허깨비 공주일 뿐이오. 진짜 공주는… 나란 자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오!" 달빛이 맑다. 달빛이 부서져 내리듯 단리궁의 이에 부딪치며 하얗게 반짝거렸다. 단리궁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나는 공주를 소유하고 싶지 않소. 공주는 황실여인이지, 강호여인은 아니오. 사실, 그 일로 인해 며칠 동안 번뇌했소. 그리고 오늘 아침 무렵 나는 드디어 결심을 했소!" "어떤 결심을요?" "새는 하늘(天)에 풀어 주고, 용(龍)은 바다(海)에 풀어 줘야 하오." "하지만……?" 야뇌의 미간이 조금 좁혀질 때, 단리궁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단리궁은 이미 결심한 듯했다. 그가 마음을 정한 이상, 그대로 실행되리라. 단리궁은 다시 손을 들어 한 송이 국화를 딴다. "가을에는 국화가 좋지!" 그는 중얼거리며 화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야뇌노인은 단리궁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주는… 신(神)이 되기보다, 인간(人間)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우리 속하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면모이다.' 그의 어깨에도 달빛이 떨어져 내렸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밀가(密家)의 혼일지 모른다. 아아, 위세를 잃어 가는 밀가의 진짜 무서운 점은… 천 년에 걸쳐 저러한 영웅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밀가야말로 절정세가의 뿌리이다.' 그는 오랫동안 달과 함께 단리궁과 더불어 화원에 있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둘은 그렇게 화원을 거닐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이야기하다가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져 갔다. 야뇌노인은 고수들을 모아 진세를 구축하는 일을 시작했고, 단리궁은 창궁천뇌가 머물러 있는 지하 밀실 쪽으로 사라져 간 것이다. 진장서재(盡藏書齋). 고서(古書)가 빽빽이 꽂혀 있는 서가(書架)가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곳이다. 묵향(墨香)과 지향(紙香)이 곰팡이 내음과 함께 배어 있는 이 곳은 바로 절정세가주의 거소였다. 단리궁은 창궁천뇌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데, 그의 곁에는 아름다운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가가(哥哥), 저 사람은 누구인데 왜 저리 못생겼는지요? 호호! 꼴에 옷차림에는 멋을 많이 내는군요." 단리궁의 팔을 꼬옥 잡고 있는 미소녀. 피어난 한 송이 장미같이 아름다운 소녀는 치기 어린 목소리로 웃어댔다. 보통 여인은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게 마련이다. 그러나 소녀는 아주 천진스러운 자세로 웃었고, 그로 인해서 그녀의 외모는 한결 더 아름답게 보였다. 단리궁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낭자는 내가 좋은가 보군?" "가가,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섭섭합니다. 소녀는 가가 없이는 단 하루라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단리궁의 한 마디 말에 시무룩한 표정이 되는 미소녀는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었다. 황궁제일미인(皇宮第一美人) 옹리공주(翁莉公主) 주약빙(朱若氷) 황실(皇室)의 고귀한 꽃으로, 만천하 여인들의 시기의 대상이었던 여인. 하지만 그녀는 지금 천하에서 가장 불운한 신세의 여인이다. 잔검사랑(殘劍邪郞)에게 잡혀 마약(麻藥)을 먹고 백치(白痴)가 된 주약빙이 절정세가에 머무르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황제 선덕제가 단리궁을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생각하여 옹리공주를 단리궁에게 맡기고자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옹리공주가 단리궁이 떠나면 죽어 버리겠다고 울부짖었기 때문이었다. 현재로서는 주약빙이나 선덕제 모두 단리궁을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 단리궁의 망막에는 미인도에서 막 튀어 나온 미녀의 모습이 들어 있다. 가히 절대적인 백치미(百痴美)! 주약빙은 너무나도 순결한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백설(白雪) 같은 피부와 심해 바닥의 흑진주같이 영롱한 눈빛, 바보스럽고 헤퍼 보이는 표정 가운데 고혹(蠱惑)스러운 자태. 천생의 아름다움이 백치의 마음과 합해져서 하나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저 모습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깨야 한다.' 단리궁의 눈에서 알 수 없는 빛이 흘러나왔고, 주약빙은 그의 눈빛을 받고 생글생글 웃었다. �"가가가 처음으로 저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아 주시는군요. 소녀는… 너무나도 기쁩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주약빙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렸다. 여인이란 우물(尤物)이고 요물(妖物)이다.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운다. 그리고 그 헤픈 울음은 이상하게도 가장 강한 무기가 되어 대장부(大丈夫)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이었다. "아마도… 앞으로는 다를 것이오!"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영원히… 가가의 것입니다!" 주약빙의 얼굴은 발그래해졌다. 도톰하게 부풀어오른 입술이 가볍게 벌어진다.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듯 붉디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화사한 향풍(香風)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아아, 이런 상태를 깨어 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의 뇌리에는 이미 공주의 영상이 새겨졌다. 그러나 깨어나게 해야 한다. 내가 가문을 사랑하면서도 떠나갔듯, 공주에게도 나를 떠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단리궁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창궁천뇌를 바라봤다. 그는 단리궁이 자신을 바라보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음이 결정되시었습니까?" "그렇소. 나는 공주를 깨어나게 할 것이오. 오늘 밤 안으로!" "호호… 나들이 갈 이야기를 하나요? 소녀하고 죽마(竹馬)타고 놀아요. 가을은 좋은 계절이지요." 주약빙은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세밀히 조사한 결과, 공주에게 쓰인 독은 혈미환마단(血媚幻魔丹)이라는 것입니다. 묘강(苗疆)의 오풍초(嗚風草)라도 풀지 못할 마독(魔毒)입니다." 혈미환마독은 이름마저도 비밀스러운 독약이다. 그것은 철류흔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절대의 극독이었던 것이다. 철류흔은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였다.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처단하는 데 온갖 방법을 다 사용했다. 피(血), 죽음(死), 독(毒), 협박과 회유……. 철류흔은 가장 위대한 승부사가 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자였다. 옹리공주는 그가 모은 독 중에서 가장 신비하고 지독하다는 혈미환마단에 걸려든 상태였다. "하지만 백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할 방법은 결국 발견되었습니다. 속하는 그 방법을 알아 내기 위해 천 권의 의학서적을 뒤적거렸습니다!" 창궁천뇌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걸어다니는 서고(書庫). 그를 절정세가의 군사로 삼은 것은 단리궁이 세가를 위해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창궁천뇌의 눈에서 정광이 일어난다. "결국… 해낸 것이지요." "훗훗… 누가 뭐랍디까, 군사(軍師)? 훗훗, 나는 군사가 꼭 해독법을 찾아 낼 것이라고 믿고 있었소!" 단리궁은 싱긋 미소를 보내 주었다. 천궁천뇌가 애를 써서 알아 낸 해독법, 그것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일컬어 태양풍(太陽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화타(華陀)의 비전 의술법입니다!" "태양풍? 그렇다면 내가 생각한 것과 같군!" "주인도 그것을 생각하셨습니까?" "그렇소. 옹리공주를 구하는 그 순간!" "아아… 그럼 왜 그것을 이제껏 시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활술(活術)이오. 나는 그것을 알기에, 군사가 다른 방법을 찾아 내기 바랐던 것이오!" 창궁천뇌가 천 권의 서적을 뒤적인 끝에 찾아 낸 해독법 태양풍. 그것을 단리궁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단리궁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떠오른다. "그것은 최악의 수단이라 할 수 있소.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금제를 갖고 있는 수법이기도 하오. 그것은 본시 부부지간에만 쓰는 방법이오." "아아……." "그것은 합방(合房)하며 하는 것이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을 격체전력으로 시전할 길이 있소. 나는 오늘 아침 그 방법을 창안해 냈소. 일컬어 오행연환십해(五行連還十解)라는 것이오." "속… 속하보다 잘 아시는군요." "후후…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다만 더 좋은 방법이 있기를 기다리며 침묵했을 뿐이오!" 단리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있게 웃지 않고 암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뇌(苦惱)를 느끼는 듯했다. 백치가 된 공주는 그의 마음을 모른다. 그녀는 단리궁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가(哥哥), 어디 아파요?" "……." "가가가 찡그리면 싫어요." "……." 단리궁은 주약빙을 쓰윽 바라봤다. '공주는 허깨비요. 진짜 공주는 사실, 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이오.' 그의 입가에는 우수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불행한 것은… 내가 공주를 품게 되었다는 것이오. 그러나 나는 공주를 고집하지 않을 것이오. 공주를… 과거로 풀어 놓아 드릴 것이오.' 단리궁은 주약빙의 손을 꽈악 쥐었다. "아프더라도… 참을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군." "가가가 바란다면… 무엇이든 참겠어요." 주약빙은 생긋 웃었다. 활짝 핀 모란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다. 또한 그녀의 입술은 입맞추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모를 일이군, 모를 일이야.' 창궁천뇌의 머리가 갸우뚱 기울어진다. 그는 뜻 모를 시선을 단리궁에게 던지고 있다. "하여간… 하늘은 하늘이야!" 그는 중얼거렸고, 입술을 다문다. '그리고… 청춘(靑春)이기도 하다.' 그의 입가에는 노인의 미소가 떠올랐다. '젊음이란 좋은 것이지. 아암, 좋은 것이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계절이니까.' 단리궁은 인상을 경직시키고 있었고, 옹리공주 주약빙은 빙글빙글 웃었고, 창궁천뇌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여간… 진짜 걸어다니는 장경고야말로 노부가 아니라, 가주시로군. 그런데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으시다니…….' 창궁천뇌는 단리궁의 심정을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태양풍은 의가비전(醫家秘傳)이다. 단리궁도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다만 옹리공주 주약빙을 상대로 이것을 쓸 수 없기에 이제껏 주저했던 것이다. 창궁천뇌는 품안에서 작은 단합을 꺼냈다.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단합의 뚜껑이 열리자, 그윽한 향내가 퍼져 나온다. "세 가지 단약을 준비했습니다. 대환단(大還丹)과 천년화리단(千年火鯉丹), 만년삼왕단(萬年蔘王丹)입니다. 그것을 공주에게 먹인 다음, 태양풍을 일으키신다면 공주는 원기를 잃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귀한 단약을 어디서 구했소?" "황궁(皇宮)입니다!" "그럼… 주상이 보내 주었소이까?" "그렇습니다. 혈노(血老)가 갖고 왔습니다." "흠,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할 텐데!" "그분에게는 공주보다 가주가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분은 만에 하나, 공주가 사망한다 하더라도 가주에게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겠노라고 혈노(血老)에게 슬쩍 말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겠지요. 천자라는 지위는 바라면 버릴 수 있는 지위이나, 아버지라는 지위야 바란다고 해도 버릴 수 없으니까요." 그러한 말이 흐른 후, 일대는 지극히 고요해졌다. 창궁천뇌는 조용히 서재를 빠져 나갔다. 남자(男子)와 여자(女子), 두 사람 사이에는 세 자의 거리도 없었다. 서로의 호흡이 느껴지는 거리였고, 손을 내뻗는다면 상대의 얼굴을 만질 수도 있는 거리였다. "아아, 이상해요!" 주약빙의 볼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뭐가?" 단리궁이 가벼운 소리로 묻자……. "가슴이 울렁이고 손바닥에서 땀이 나와요. 왜 이렇게 숨이 가빠지는지 잘 모르겠어요." "글쎄, 왜일까?" "호호… 가가 때문일 거예요." 주약빙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녀는 백치가 된 상태에서 처음으로 만난 단리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를 또 다른 존재로 바꿔야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단리궁은 손을 쳐들고 있었다. "아마 내일부터는 괜찮을 거야." "내일이오?" "잠을 푹 자고 나면… 좋아질 거야." "음, 자면… 나는 꿈을 꿔요." "꿈?" "가가와 더불어 꽃밭을 뛰어노는 꿈. 지난밤에도 그러한 꿈을 꾸었답니다!" 주약빙은 천천히 드러누웠다. 그녀는 반듯이 눕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 단리궁이 슬쩍 손가락을 퉁겨 그녀의 혼수혈을 점한 것이다. "아마도… 내일부터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오!" 단리궁은 조용히 말하며 손가락을 퉁기기 시작했다. 팟－ 팟－! 막강한 경력이 담긴 지력이 백옥 같은 몸뚱이에 닿자, 애절한 신음성이 토해진다. "으으… 음……!" 주약빙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아, 아파요!" 그녀의 몸 속으로 다섯 줄기의 기류가 뿌려지고 있었다. 태양풍(太陽風)의 활법(活法)은 가공할 내공이 있어야만 시전할 수 있다. 금수목화토(金水木火土), 오행진기(五行眞氣)를 동시에 일으켜 극양(極陽)한 강기( 氣)로 쳐 내는 것이 바로 태양풍이다. 을목(乙木)에서 경금(庚金)… 개토(開土)… 한수(寒水)… 열화(熱火). 다섯 줄기의 지력이 주약빙의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가운데, 약빙의 몸은 비 오듯 쏟아지는 땀으로 흥건히 젖게 되었다. "더… 더워요, 가가(哥哥)!" 그녀는 지독한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몸 안에서는 가공할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毒) 대 화(火), 두 가지는 극성(剋性)이다. 단리풍은 진원지기의 태양풍을 일으켜 주약빙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을 휘어감고 있는 마독들을 태워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주약빙의 사지는 격하게 떨린다. 물 밖에 나온 인어(人魚)마냥, 그녀는 크나큰 갈증을 느끼며 사지를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끝없는 염원을 향해 흔드는 넋의 손짓처럼……. "아아… 악! 몸이 탑니다, 가가!" 그녀는 부풀어올랐고 팔다리가 꼬인다. 머리카락은 비에 젖은 검은 휘장처럼 축축해졌고, 희디흰 이는 깨질 듯 악무는 가운데, 그녀의 옥수(玉手)가 가슴 쪽으로 다가갔다. "가… 가지 마세요, 가가!" 그녀는 애절히 말하며 손을 쳐들었다. 부－ 욱－ 북－! 순간, 궁장이 찢어지며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배꽃처럼 흰 속살이 환하게 피어났다. 찌이이… 익……! 옷자락은 나비가 되어 떠올랐고, 십전(十全)의 미인상 하나가 침상 위에 반듯이 드러눕게 되었다. 터질 듯 풍만히 부푼 젖봉우리 두 개, 옴폭한 배꼽과 그 아래의 울울한 흑림(黑林), 대리석처럼 미끄럽게 뻗어 나간 허벅지의 선. 아아, 그것은 완전한 여체의 현신이었다. 백옥의 나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붉은색을 띠었다. 마치 홍옥으로 만든 미인상(美人像)이 된 듯, 정념을 가득 머금은 채 봉오리를 활짝 펴는 천년화로 화한 듯……. 대환단, 천년화리단, 만년삼왕단. 세 가지 희대의 영약이 녹으며 생긴 열류가 단리궁의 막강한 진원지기에 이끌려, 그녀의 전신혈맥을 거침없는 기세로 돌고 또 돈다. "헉……!" 거친 숨결이 토해지며 섬섬옥수가 흐느적거린다. 부유하는 해파리마냥 흐느적거리는 희디흰 소수, 갓 잡아 낸 싱싱한 생선마냥 파드득거리는 알몸뚱이. 대체 누구를 향한 애원의 몸짓일까? "더워요, 가가! 그리고… 가지 마세요, 가가!" 주약빙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가… 가지 마세요, 가가!" "나, 나를 깨우지 마세요. 이… 이대로가 좋아요!" "제발……." 주약빙의 목소리는 이제 없다. 그녀는 진짜 달콤한 잠에 빠져든 상태였다. 그리고 순수해 보이는 청년의 시선이 그녀의 나신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제 그대는… 백치가 아니라, 공주요. 황상(皇上)은 공주를 내게 맡기려 했으나, 내게는 공주의 남자가 될 자격이 없소. 왜냐하면 아직은 낭인(浪人)의 혼(魂)을 가슴 가득 품고 있는 떠돌이이기 때문이오!" 단리궁은 격하게 끓어오르는 어떤 것을 느꼈다. 마음의 벽이 굳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공주의 벗은 몸 위로 몸을 덮쳐 갔을 것이다. 보라! 백옥(白玉) 한 덩어리가 드러누워 있는 것을……. 그것은 눈(雪)의 바다였고, 유혹의 계절이었다. "……!" 옹리공주 주약빙은 새근새근 잠들었다. "안녕(安寧), 약빙(若氷). 아마 다시는 나를 찾지 않을 것이오. 며칠간… 즐거웠소!" 단리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에도 땀이 흥건하다. 옹리공주 주약빙을 구하는 일은 극심한 진기 허탈을 갖고 왔다. 마도고수 일천 명과 쉬지 않고 닷새 동안 싸운 듯한 정도의 허탈. 하지만 지금 단리궁의 입가에는 단아한 미소가 떠돌고 있었다. "처음으로… 무례한 짓을 하겠소!" 그는 특유의 미소를 허공에 던졌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낮추었고……. "그리고 이 무례는 마지막 무례가 될 것이오!" 그는 조용히 얼굴을 옹리공주의 얼굴 쪽으로 갖고 갔다. 한순간, 그의 입술은 옹리공주의 도톰한 입술 위에 얹혀졌다. 너무나도 가벼운 입맞춤. 그 순간 옹리공주의 유난히도 긴 속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가운데 눈이 살며시 열린다. 잠결처럼 몽롱한 눈빛 속에 그녀는 어떤 얼굴 하나를 봤고……. "아아, 누… 누구지요?"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가운데, 다시 의식을 잃어 버렸다. 새근새근 잠에 빠져든 옹리공주. 단리궁은 도둑 입맞춤을 한 후 허리를 쭈욱 펴며 그녀를 바라봤다. "공주는 대장군(大將軍)이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의 여인이 되어 멋대로 살아 나가야지, 나처럼 거친 자와 함께 살 수는 없소. 내가 공주를 황상 곁으로 돌려 보내는 이유는… 내가 공주를 미워함이 아니라, 공주가 나를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오. 공주가 깨어난 것을 본다면 황상도 매우 기뻐하실 것이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백치미의 화신이었던 옹리공주는 이제 없다. 그녀는 이제 단리궁의 뇌리 속에만 남아 있는 존재일 뿐이다. 공주는 자연스럽게 깨어날 것이고, 자신이 강호세력에 휘말려 악몽의 며칠과 환상의 며칠을 보냈다는 것을 새까맣게 잊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한 시진 후, 단리궁은 오랜만에 목욕을 한다. 그는 지독히 찬물로 몸을 정갈히 씻어 냈다. 그를 태울 듯하던 욕망(慾望)의 불을 완전히 잊겠다는 듯, 그는 자신의 단단한 몸을 찬물로 씻으며 침묵에 들어갔다. 그가 마음을 가다듬는 동안, 옹리공주를 태운 팔두마차(八頭馬車)는 시위들에게 뒤덮인 채 자금성(紫禁城)을 향해 떠나갔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절정세가에서 며칠을 보냈다는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한 남자를 향해 순수한 사랑을 퍼부었다는 것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마차(馬車), 거대한 차상(車廂)을 갖고 있는 팔두마차 한 대가 수천 무사들의 호위 아래 풍운을 일으키며 치달리고 있다. 두우－ 두두－ 두두－! 하늘을 말아 올리는 듯한 말발굽 소리 가운데, 주렴으로 가리워진 차상 안에서는 어느 소녀의 한숨 소리가 애달프다. "꿈이었을까? 내가 그리도 바라던 대장부의 얼굴을 본 것은…?" 고귀해 보이는 미소녀, 자색궁장에 몸을 감추고 한 마리의 작은 암사슴마냥 몸을 웅크린 채 입술을 잘강잘강 깨물고 있는 미소녀. 그녀는 손을 미간에 대고 이마를 찌푸린다. "분명 그는 나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러한 미소를……." 두우－ 두두－ 두두－! 팔두마차는 시위무사들과 더불어 자금성을 향해 폭풍우 같은 기세로 치달려 갔다. "그는 꿈(夢)이었을까?" 소녀의 한숨 소리는 더욱 짙어졌다. "꿈이 아니었다면 그는 나의 마지막 장부이리라. 아니, 꿈이라 해도 나는 영영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다정하고도 우수에 찬 미소를! 그 감미로웠던 한 번의 입맞춤을 영원히……!" * * * 마침내 혈륜(血輪)이 구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피의 수레바퀴는 거듭되는 악마의 밤을 지샌 후, 짙은 혈향을 풍겨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제 그 자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피는 피로써 갚을 뿐이다. － 혈겁을 일으킨 악마의 무리들! 결코 정(正)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았어야 했다. － 마(魔)로 일어난 무리들! 악마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악마가 될 수밖에 없다. 천지격변(天地激變)! 천지개벽(天地開闢)! 패도의 화신 천년밀가가 무림 칠십이 파를 피로 씻었다는 소식은 구월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밀가에 억눌려 왔던 강호제문파들은 단리세가가 마침내 악마의 이빨을 드러낸 것이라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급기야 천하도처에서 추적대가 형성되고, 천년밀가를 영원히 멸망시키자는 복수심에 가득 찬 소리가 구천십지에서 메아리치는 가운데 무사들은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구파일방보다 세력이 작으나 강호계의 주축세력으로 일방(一方)의 패주 소리를 듣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칠십이 개 방파의 장교지존(掌敎至尊)들, 이들은 일제히 상복(喪服)을 걸쳤다. 눈에는 핏발이 섰고, 그들의 애검(愛劍)에는 형제(兄弟)와 가족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복수심을 기리는 검은 끈이 매어졌다. 꾸역꾸역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는 이미 칠만(七萬)을 넘고 있었다. 질풍노도 같은 기세로 몰려드는 이들을 막을 명분은 이제 없다. * * * 파산(巴山) 일대에는 전운이 일고 있었다. 고집과 독선으로 버티어 온 완고하고 무자비한 철혈의 가문 단리세가, 무수한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위기와 고난을 꿋꿋하게 견뎌낸 단리세가. 그들은 지난 천 년간 단 한 번도 무릎을 꿇지 않았으며, 단 한 차례도 현판을 내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가문의 문을 연 이래 요즈음 같은 위기는 없었다. 가히 가문 일천 년의 위기. 그러나 밀가는 역시 밀가였다. 그들은 일언(一言)의 변동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주군(主軍)인 전풍신검대(電風神劍隊)를 포위해 들어오는 칠만여 강호고수들 앞에서도 태연자약했다. 파풍단(破風壇). 유난히도 바람이 강한 파령(巴嶺)의 황산(荒山)이다. 귀기 어린 바람이 사위를 휩쓸었고, 누렇게 말라 가는 고엽(枯葉)이 하늘 높이 떠오르는 가운데 구월의 하늘은 뇌정(雷霆)으로 찢겨지고 있었다. 우르르르릉－! 하늘은 거대한 악마의 북이 되어 수천 리를 뒤흔드는 우레 소리를 냈고, 가끔 섬전이 떨어져 내리면 사위가 환히 밝아졌다. 우르르르릉－! 하늘이 울고 땅이 울며, 대기(大氣)에는 장대처럼 떨어지는 비의 장막에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악령의 눈물 같은 비가 무자비하게 퍼부어지며, 파풍단 일대에는 습기와 귀기가 자욱이 번지기 시작했다. 자욱한 운무(雲霧) 가운데, 돌연 푸르른 섬광의 막이 일대를 환히 밝히는 가운데 하나의 탑(塔)과 같은 청년의 얼굴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사 척 장검(長劍)을 가슴에 안고 있는 황색전포의 거한. 나이는 갓 스물 정도인데 야성미가 유난히도 강해 보였다. 그의 옷은 장대비 가운데 축축이 젖고 있는데, 그의 두 눈에서는 고집스럽고 흉맹한 안광이 하늘을 찢어발기는 섬전보다 더 가공할 기세로 폭사되어 나왔다. "하늘이… 나의 가문을 버리다니… 천 년의 지주(支柱)로 마도세력과 싸워 온 나의 가문을 이런 식으로 버리다니……." 빗속, 청년의 얼굴은 청동상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쏴아아… 쏴아아……! 퍼붓는 빗줄기 가운데, 청년의 발 아래로 휴지처럼 널린 배첩(拜牒)이 축축이 젖고 있었다. 일흔두 장의 첩지, 일흔두 가지의 사연, 일흔두 줄기의 피……. <순순히 항복하고 소림사로 압송돼라. 대륙무림회장에서 너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내리겠다!> <저항한다면… 만 인이 죽으리라!> <너희들은 십팔 로에서 포위되었다. 전 강호인들이 너의 가문을 멸하려고 하나로 뭉쳤다. 너희 밀가는 대공적으로 화했다. 이제는… 복수의 불기둥을 피할 수 없으리라!> 배첩은 빗물에 젖으며 구겨졌고……. "좋아, 밀가가 어떠한 가문인지 알게 해 주겠다. 그 따위 협박에 넘어가지 않는 철혈의 가문임을 알려 주겠다." 체격이 장대한 청년은 발을 번쩍 들었다. 그는 일흔두 장의 배첩을 하나도 남김없이 발로 밟아 구겨 버렸고, 그러고도 분노가 삭혀지지 않는 듯 얼굴근육을 실룩거리며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일대에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는 수만여 고수들이 있었다. 소림사를 향해 밀려가던 천년밀가의 후예들. 이들은 기울어져 가는 가세를 되살리자는 구가(救家)의 일념(一念) 아래 뭉친 전풍신검대였다. 이들은 밀가의 최후 보루이다. 이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밀가는 천 년 만에 처음으로 현판(縣板)을 내려야만 한다. 번쩍－ 우르르릉－! 뇌정과 우레,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시선들이 하나로 모여들 때였다. 거대한 체격의 청년은 두 손을 높이 쳐든 다음, 천지가 떠나가도록 드세게 사자후(獅子吼)를 외쳐댔다. "모든 것은… 무시된다. 우리 가문은 천 년의 가법에 따라 외부세력과는 타협도, 연합도 하지 않을 것이다." 벽력성을 능가하는 음성이 떨어지기 무섭게, 십 리 안이 일제히 시끄러워진다. "으아… 천년혼(千年魂)이여!" "위대한 가문이여!" "일(一)－ 진(進)－ 무(無)－ 퇴(退)!" 보라! 수만 자루의 장검이 일제히 쳐들리는 것을! 환호하는 소리. 오히려 휘파람 소리가 우레 치는 소리를 침묵시켰다. 산(山)이 울부짖고, 하늘이 뒤흔들린다. "와아… 계속 가자!" "백도계의 하수들이 우리 가문을 어찌 막는지 알아 보자!" "가자!" 언제부터일까? 흑포거영(黑袍巨影) 하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전풍신검대의 환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강시처럼 메마른 몸뚱이를 지닌 자였는데, 전신이 얼음덩어리로 뭉친 듯 그의 입에서 뿜어지는 차디찬 기운에 대기가 냉각될 정도였다. 얄팍한 입술에 귀기 짙은 분위기, 지금 핏물이 그득 고인 듯한 두 개의 눈에서 혈광이 스물거리며 새어 나온다. "훗훗… 예정했던 대로다. 밀가는 분노한 나머지 더욱 강한 기세로 쳐들어갈 것이고… 훗훗, 칠십이 로(路)에서 모인 강호 백도인들 또한 죽기 살기로 밀가를 막을 것이다!" 음침한 목소리 가운데 우막(雨幕)이 유난히도 깊다. 쏴아아… 쏴아아……!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도 흑포인의 옷은 젖지 않았다. 그는 마문사천강(魔門死天 )을 모공에서 뿜어 내어 쏟아지는 빗발을 퉁겨 내고 있는 것이다. "후후… 시산혈해(屍山血海)가 이루어질 것이고, 흥미 있는 폭죽놀이가 있으리라!" 폭죽놀이라니? 그것은 또 어떠한 것을 뜻하는 것일까? 흑포괴인 뒤쪽, 언제부터인가 세 겹의 인간장벽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첫번째 장벽, 손에 갑노를 들고 허리에는 전통(箭筒)을 차고 있는 음사한 인상의 오천의 고수들이다. 유난히도 굵은 팔뚝에 털이 부숭부숭 난 강철 같은 앞가슴. 이들의 몸에서는 세 종류의 내음이 짙게 번지고 있었다. 피비린내(血香), 화약(火藥)의 내음, 그리고 죽음의 내음(死香)……. 만리신화궁수(萬里神火弓手). 지옥혈마단에서 완력이 강하고, 궁술이 뛰어난 자들이 차출되어 이룩된 하나의 가공할 집단이다. 하나하나 정예의 무공을 지니고 있으며, 일인당 지니고 있는 화기의 수만 해도 십팔 종(種)에 달한다. 이들은 십오 리(十里) 밖으로 화탄(火彈)을 날려 버릴 수 있는 가공할 궁술을 익히고 있었다. 두 번째의 인간벽을 만든 자들은 하나의 묵채죽통(墨彩竹筒)을 껴안 듯 들고 있다. 수는 역시 오천. 이들의 몸에서는 죽음의 내음과 독의 비릿한 내음이 함께 풍기고 있었다. 지옥혈마단 독왕천마수(毒王天魔手). 대군주 철류흔이 애지중지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하나 독인(毒人)이고, 그 중의 몇 명은 독신(毒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독을 밥으로, 술로, 차로 삼고 독과 더불어 살고 있는 자들. 이들은 지옥혈마단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독으로 뭉친 인간들, 독왕천마수들! 이들의 특기는 독무대진(毒霧大陣)이었다. 이들은 화탄공격이 있은 후에도 살아남을 절정고수들을 죽이는 독무를 발출하는 역할을 한다. 세 번째의 인간장벽, 그들의 수는 오천이고 하나하나 철포(鐵袍)를 걸치고 있었다. 좌수(左手)에는 핏빛 장도(長刀), 우수(右手)에는 검극(劍極)이 휘어진 사월검(死月劍)을 쥔 자들. 유난히도 체격이 장대하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고요한 침묵의 마기를 품고 있다. 이들의 얼굴엔 자신만만한 미소와 조금은 권태롭다는 듯한 표정이 함께 드리워져 있다. 철왕시위대(鐵王侍衛隊) 척살검대(擲殺劍隊). 대군주 철류흔이 가장 아끼는 자들이다. 이들은 화탄과 독부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을 골라 무자비하게 도륙내는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쏴아아… 쏴아아……! 빗소리가 애달프다. 흑포괴인은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이것은 싸움도 아니다. 후후, 우리는 구경하다가 마무리를 지어 줄 뿐이다. 너무나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만오천 고수의 우두머리. 그는 중원인이 아니라 이역의 고수였다. 첩목대제(帖木大帝). 오리아트에서 가장 강하다는 전설을 세운 자. 그는 태양달뢰(太陽達賴)와 더불어 철류흔이 가장 믿는 환우혈맹의 초특급고수였다. 철류흔의 왼팔로 불리는 자, 그는 환우혈맹에서 총순찰(總巡察) 지위를 맡고 있었다. "싸움이 아니다. 이것은… 이것은… 놀이일 뿐이다." 유난히도 짙은 안개의 밤이다. 만오천 마병(魔兵)과 한 명의 마도절대자가 전풍신검대 쪽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였다. 언제부터일까? 만오천일 인의 뒤쪽에는 네 번째 인간장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스물스물 일어나는 밤안개처럼 나타나는 흑의인영들. 이들은 거의 소리도 없이 만오천 마도고수들의 뒤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옷자락도 펄럭이지 않는 가공할 신법에 호흡 소리조차 빗발치는 소리에 감춰 버리는 은행술(隱行術)을 사용해 가며 꾸역꾸역 나타나는 밤의 그림자들. 수는 이만(二萬) 정도. 이들은 꽤 넓은 면적을 완전히 뒤덮으며 지옥혈마단과 철왕시위대의 만오천 고수의 후미를 차단하고 있었다. <야뇌(夜惱)> <야황(夜皇)> <절정(絶頂)> <비조(飛鳥)> <천룡(天龍)> 꾸역꾸역 나타나는 이만여 고수들의 옷자락에는 그러한 글씨들이 수놓아져 있다. 밤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한 마리의 금붕(金鵬) 위에는 기표가 헌헌(軒軒)한 흑포청년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자야(子夜)가 지나가고 있는 비 오는 밤. 그는 거대한 금붕을 타고 파령 깊은 곳으로 날아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금붕은 철저한 단련을 받은 듯,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청년의 뜻에 따라 정해진 장소로 사뿐히 날아 내렸다. 하늘을 덮을 듯 거대한 날개를 가진 금붕이었으나, 날아 내릴 때는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비(雨)가 돕는군. 비로 인해 우(雨), 그 녀석은 쉽게 누그러질 것이고… 나보다 앞서서 이 근처에 와 있는 세가의 사만 고수(高手)는 보다 적은 피비를 흘리게 될 것이다!" 단아한 기품의 미청년. 나이는 약관 이십 정도인데 그의 전신에는 수백 세를 산 노승려 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치고는 조금 고독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단리궁, 그가 절정세가를 떠나 파풍단으로 온 것이다. '우(雨), 내가 돌아왔다. 약속대로! 물론,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는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단리궁의 뇌리에는 체구만 컸지, 마음은 여린 고집스러운 소년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 형은 독한 사람이오! 모든 것을 버리고 훌훌 떠나 버리니까! － 형은… 돌아와야 합니다. 나는 형이 돌아오는 그 날까지, 매일 형의 이름을 부를 것이외다. － 형은… 나의 가족이오! 가문이 형을 버렸을지언정, 나는 형을 버리지 않았소. 아니, 버린 쪽은 가문이 아니라 형이오… 형(兄)! "녀석, 당장 네 앞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구나. 네놈과 술 마시기 시합을 해 보고 싶거늘!" 단리궁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 그가 있는 곳을 향해 그림자 백여 개가 빠른 속도로 다가서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서는 검은 그림자들. 그들 가운데 가장 빠른 사람은 장도를 허리에 비스듬히 차고 있는 계피학발의 노인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단리궁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백여 장을 단숨에 가로지르더니, 단리궁 앞으로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가주, 역시 정확하십니다. 제때에 당도하시었습니다!" 노인은 웃음에 서툰 사람이었다. 인상이 석고처럼 굳었고, 몸에서는 무정(無情)의 죽은 향기가 번진다. 한어에도 서툴고, 따뜻한 대화에도 서툴다. 동영제일인자(東瀛第一忍者) 혈무흔(血無痕). 그는 단리궁에 앞서 파풍단에 와 사만 고수들을 두 곳에 안배하는 일을 했었다. 쏴아아… 쏴아아……! 빗소리는 커졌고, 웃을 줄 모르던 혈무흔노인의 입가에도 싱긋 노년의 웃음이 매달렸다. "이만(二萬)으로는 백도칠십이로 고수를 막고, 또 이만으로는 일만오천 마도고수들을 은밀히 가로막았습니다. 가로막히지 않은 세력은 단리우(段里雨)라는 청년이 이끌고 있는 천년밀가 사람들뿐입니다!" "그들을 막으라 했더니, 왜 막지 않았소?" "훗훗… 그들은 이러니저러니해도 가주의 친척이요, 형제가 아닙니까? 가주께서는 우리와 그들이 다르다고는 하나, 우리들은 그들이 우리와 하나라고 여긴 지 오래입니다. 사실 아무리 가주라 하시더라도, 우리가 그들을 꺾는다면… 훗훗, 모름지기 화가 나실 것입니다." "그럴까?" 단리궁은 미묘하게 웃었고……. "가주는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속하는 그것을 눈치챘기에 조금 다른 포진(布陣)을 한 것입니다!" 혈무흔은 싸움에는 천재였다. 그는 단리궁이 만든 절정대진에 자신의 경험을 보태어 보다 지독한 진세를 구축했다. 그는 사만의 고수를 이용해서 총 십삼만에 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로막은 것이다. 밤이고 비가 유난히도 드세게 내리기에 삼분지계(三分之計)는 성공한 것이리라. "그 녀석은?" "노발대발 화가 난 상태로 백도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적토마가 들판을 달리듯이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놈이… 혹, 검을 가슴에 안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핫핫… 놈은 그런 놈이오. 놈은 화가 나면 장검이 마치 자신의 애인이라도 되는 듯, 품에 꼬옥 안고서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씩씩 숨을 내쉬며 저돌적으로 치달리는 놈이오." 단리궁은 환하게 웃었다. 그의 옷은 비가 오는데도 젖지 않았다. 그의 몸 주위로는 혜광(慧光)이 떠오르는데, 그로 인해 빗물이 안개가 되어 스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천문혜광대법(天門慧光大法), 그것을 새롭게 익히셨군. 주인은 늘 무공을 깨닫고 계신다. 강호출도한 후에도 무공이 전보다 훨씬 느셨다.' 관찰력에 예민한 혈무흔은 단리궁이 그 사이 또다시 무공에서 가일층 진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며 운을 떼었다. "그분을 어찌 하실런지요?" "물론, 예정대로 할 것이오!" "그럼… 꺾으시렵니까?" 혈무흔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소. 녀석은 꺾일 것이오, 내게! 사실, 나는 전에 놈에게 한 번 일부러 져 준 적이 있소. 오늘은 그 빚을 받아 낼 것이오!" 단리궁은 빙글빙글 웃으며 미끄러져 갔다. 스슷－! 그는 유성처럼 흘러가는 가운데 맑은 목소리를 남겼다. "장소성이 날 것이오. 그 순간, 첩목대제인지 털 빠진 늙은 닭인지 모를 자들과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하고 싶은 대로라면……?" "……!" "크크… 오랜만에 도법을 펼칠 수 있겠군. 클클, 최근 야뇌어르신네께 배운 살인술(殺人術)을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일컬어 밤의 번뇌라 불리는 대륙제일(大陸第一)의 자객술을!" 혈무흔은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그는 단리궁의 휘하에 든 후, 웃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듯했다. 대종손(大宗孫) 돌아오다 삼경이 되어 갈 때 파풍단은 유난히도 낮게 드리워진 먹장구름 안으로 파묻혀 가고 있었다. 자욱한 밤안개 가운데 장대비가 퍼붓고, 가끔 내려 떨어지는 얕은 번개는 사위를 아수라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일 인(人). 그의 눈에선 전광보다 더 강렬한 신광이 폭사되고 있다. "백도의 위선자들! 너희들이 어찌 우리들의 위대한 가문을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천하가 위기에 빠지면 자라처럼 목을 숨기고, 평화가 돌아오면 피 흘린 우리들을 살인마라고 욕해 왔던 너희들이 어찌 감히……." 가히 섬전(閃電), 그는 빛살처럼 빨리 밤의 장막과 비의 장막을 찢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먼 뒤쪽, 장검 두 자루를 십자로 교차해서 어깨에 두른 일단의 무림고수들이 질풍노도의 기세로 들이쳐 가고 있었다. "우우… 우……!" "백도의 위선자들, 어디에 있느냐!" 휘휙－ 휙－! 검은 화살이 퍼붓듯이 흑의인들은 파풍단을 까맣게 뒤덮으며 파령을 타넘어 가고 있었다. 이 무렵, 낙혼애(落魂崖) 일대에서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낙혼애 일대는 꾸역꾸역 모여든 강호계의 고수들로 발딛을 틈도 없을 정도였다. 상복을 걸치고 복수의 검을 든 사람들. 이들은 천년밀가에 대한 원한 하나로 뭉친 칠십이 로(路)의 남북무림동도(南北武林同道)들이었다. 칠만여 명의 무림고수들은 천년밀가를 섬멸키 위해 거대한 검진을 낙혼애 일대에 설치했다. 하늘마저 가두어 버린다는 장룡대진(長龍大陣)!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다. 대체 어디서 나타났을까? 이만여 흑포고수들이 칠만여 명이 펼친 장룡대진(長龍大陣) 속으로 질풍처럼 들어서고 있었다. "와아－ 누가 우리 가문을 막으랴!" "크핫핫… 어디 한번 해 보자!" "우우… 우우… 우리들이 왔다! 우우……!" 들판과 계곡, 산령을 새까맣게 덮으며 다가서는 사람들. 이들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강호인들인가? 유난히도 빠른 몸놀림에, 하나하나 뛰어난 발검(拔劍). 차앙－ 앙－ 창－! 검산도림(劍山刀林)이 순간적으로 만들어진다. 열 개의 계곡과 스물다섯 개의 협곡(峽谷) 일대에 새까맣게 몰려 있던 칠십이 로 무사들은 다가서는 자들의 가공할 기세에 넋을 잃고 말았다. 사천당가(四川唐家), 합비(哈肥) 악씨세가(岳氏世家), 동정호(洞庭湖) 해왕궁(海王宮), 북망종리가(北邙鐘里家), 운남대리왕부(雲南大理王府), 해남쾌검파(海南快劍派), 낭산검왕부(狼山劍王府), 운중천협문(雲中天俠門), 월하비곡(月下秘谷), 자운신궁(紫雲神宮), 무산신녀곡(巫山神女谷), 형산(衡山) 원공검파(媛公劍派), 장강용형방(長江龍形幇), 무적패왕궁(無敵覇王宮), 괄창산(括蒼山) 음양동부(陰陽洞府), 축용열화세가(祝融熱火世家), 적녀선자궁(赤女仙子宮)……. 대강남북(大江南北)에서 몰려왔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정파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며칠간에 걸쳐 혈겁을 만난 바 있고, 그것이 한이 되어 대륙군림회장으로 가려다가 파산으로 진로를 바꾼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이성과 지혜를 잃은 반 미친 상태였다. 칠만여 무사들은 너무나도 빠른 기세로 낙혼애 쪽으로 다가서는 이만여 검사들의 위세에 넋을 잃고 말았다. 장룡대진의 진세는 채 펼쳐지기도 전에 위축되고 말았다. 둥둥 허공을 밟으며 다가서는 자들, 호신강기로 빗물을 퉁겨 내며 다가서는 자들……. 돌연, 나타난 자들은 하나같이 전신(戰神)을 방불케 하는 자들이었다. "저… 저들은 신의 제자들이다!" "천년밀가는 소문보다 십 배나 강하다!" "아아, 사만오천이라고 알고 있는데 단 이만이어서 안심했건만… 그게 아니다. 저들은 하나하나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처럼 혈기만 있고, 무공은 약한 사람들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도 이제는 배수진(背水陣)을 친 것이나 다름없다!" 한 곳에 모여든 칠십이 파의 종주(宗主)들은 불현듯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가문이 멸문되고, 식솔들이 피투성이가 된 철천지한만 없었더라면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낙혼애로 모이는 와중에 하나를 버렸다. 목숨! 그것을 버린 이상,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칠십이 파의 종주들이 내심 사생결단의 결의를 다지고 있을 때, 이만여 괴무사들은 이들을 향해 거대한 원진을 펼치며 다가서고 있었다. 본시 중과부적이었다. 소수의 무림인은 다수의 무림인에 비해 열세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다가서는 사람들은 그러한 상식을 깨고 있었다. 스스－ 슷－! 괴무사들의 환영이 허공중에 난무한다. "저들은… 우리들보다 세 배 이상 빠르다!" "으으, 소수로 다수를 포위하다니? 천하제일가의 전설은… 여전하단 말인가?" 흐르는 땀, 퍼붓는 비, 중얼거리는 목소리들, 흔들리는 눈빛들이 이채롭다. "그런데… 어이해 저런 고수들이 암습을 했었단 말인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쏴아아… 쏴아아……! 비가 억수로 퍼붓는 가운데, 이만여 괴고수들은 칠만여 백포인들을 오히려 포위했다. 천황령(天荒嶺) 일대, 흑포괴인 하나가 뒷짐을 진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 "이상하군. 분명 이쪽으로 몰려와야 하는데… 어이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오지 않는단 말인가?" 계피학발의 노인, 강시처럼 마르고 얼음처럼 차가운 자. 그는 등 뒤에 일만오천 마병을 세 겹의 벽으로 두르고 있었다. 천황령 위에 드넓게 포진한 악마의 무사들은 산하(山下)로 모여들 예정이던 대략 십이만(十二萬) 강호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십이만은 너무나도 많은 숫자이다. 이들이 일시에 사라진다는 것은 꿈 속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년밀가, 강호칠십이로 복수추적대. 운명적으로 부딪치게 되어 있는 두 부류의 강호세력들은 악마의 각본에 따라 천황령 아래의 드넓은 분지(盆地)에서 사생결단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데, 분지에는 사경이 지나가도록 한 사람도 다가서지 않았다. 번－ 쩍－ 콰르르르－ 릉－! 비와 섬(閃)과 뇌(雷)가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대체 그들은 모두 어디로 증발해 버리고 말았단 말인가? 으으, 이 일은 절대 실패할 수가 없는 일인데……." 첩목대제(帖木大帝), 그는 악마대군주 철류흔이 천하를 얻는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있었다. '그분이 계획했던 것은 모두 다 실천되었다. 단 하나도 어김없이… 그런데, 어이해…….' 첩목대제의 이마에 땀이 끈끈히 매달렸다. 그는 철류흔이 계획한 척살대계에 따라 악마병을 이끌고 낙혼애에 은잠해 있는 중이었다. 강호제파의 세력과 천년밀가가 충돌할 때, 배후에서 그들의 세력을 파멸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대군주 철류흔은 파산의 혈겁을 기화로, 숭산과 혈거봉에서 잇따라 혈풍을 일으킨 후 무림을 정복하려 했다. 일컬어 혈풍의 계! 그런데 그 치밀한 계획이 첫발부터 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첩목대제의 눈에서 당혹스런 빛이 떠올랐으나, 그것은 곧 잔혹한 혈광으로 바뀌었다. "조금 늦어질 뿐이리라! 척살의 계는 어김없이 성공되리라!" 그는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우라질, 기다리기도 지겹군! 한시빨리 저 애송이를 죽이고, 쓴 술이라도 한 잔 먹어야 머나먼 이국(異國) 중토(中土)를 떠도는 화가 풀릴 텐데……!" 빗속에서 툴툴거리는 메마른 그림자, 웃음을 짓기 힘든 딱딱한 인상에 온기라고는 없는 냉막한 분위기. 허리에 장도를 길게 차고 있고, 조리(집신의 일종)를 신고 있는 내리닫이 옷의 노인. 그는 바로 혈무흔이었다. 그는 이만여 절정세가 인물들과 함께 숨어서 기다리고 있엇다. "가주는 단신으로 사만오천을 막으시고, 노부는 이만을 이끌고 만오천을 막고, 또 다른 이만은 가장 약한 백도의 칠만오천을 막는다. 클클, 이러한 병법은 고금에 다시 없을 게다!" 혈무흔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첩목대제와 일 마장 먼 곳에 서 있고, 그의 뒤쪽에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벌써 두 시진째 명을 기다리고 있는 절정세가의 진짜 영웅들이 버티고 있었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선천변환대진(先天變幻大陣). 단리궁은 일대에 가공할 진세를 펼치고 있었다. 단리세가와 중원백도인, 그리고 철왕시위대와 지옥혈마단 고수들은 감쪽같이 진세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고오오… 고오……! 비 뿌리는 소리가 죽어 가기 시작한다. 야우(夜雨)는 흐려져 가고, 번개는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먹구름이 유난히도 낮게 내려앉아 파령을 흑막(黑幕)에 휘감아 버렸다. 거대한 검은 장막의 구름, 그것은 단리궁이 사만여 휘하고수와 더불어 펼치고 있는 진세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천지조화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깊은 신비와 의미를 지니고 있어, 강호계의 뭇고수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 그는 갈대잎 하나를 입술 사이에 밀어넣고 잘근잘근 씹고 있다가는 길이 휘어지는 곳에서 불쑥 나타나는 거영(巨影)을 보고 피식 웃었다. "푸우－!" "빠른데? 녀석……!" 그는 숨을 토했고, 짓이겨진 갈대 줄기가 흙탕에 떨어졌다. 유난히도 기우듬히 내려 쓴 흑색방립(黑色方笠) 하나, 빗속에서도 비에 젖지 않은 채 바람에 펄럭거리는 낡은 흑포(黑袍) 하나, 싱긋거리고 있는 입가에 신비한 미소가 하나, 그리고 눈빛이 두 개. "좋아, 너는… 과거의 나보다 낫다. 녀석, 너는 역시 뛰어난 녀석이었다. 그 사이 부단히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구나. 내가 백팔 주(柱)의 기연을 얻지 않았더라면 지금 네가 다가서는 모습만 보고도 기가 죽었으리라!" 싱긋 웃는 젊은이, 나이 대략 이십 정도 되었을까? 비스듬히 쓴 흑립에도, 펄럭거리는 흑포에도 매력이 있다. 가장 큰 매력은 입가의 미소였으며, 또 하나의 매력이라면 가볍게 아래턱을 쓰다듬고 있는 무도수업자답지 않게 섬세한 손의 느낌이었다. "좋아, 하여간 오너라. 맹랑한 녀석!" 그는 일 마장 밖으로 다가선 거영 하나를 보고 있었다. 비를 뚫고, 갈대의 길을 누비며 치달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다. 치리리리－ 릿－! 허공탄월식(虛空彈月式)으로 대기를 뚫으며 신형을 폭사시키는 자. 나이 십구 세 정도 되었을까? 그러나 체격은 이미 완전한 어른의 그것이고, 턱 아래 자라난 구레나룻 역시 서른 살 먹은 사람의 그것 이상이었다. 그는 야수의 흉폭함과 동시에 무사의 강인한 기질을 함께 갖고 있는 위대한 젊은 영웅이었다. 전체적으로 고집스럽고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다. 츠츠－ 츳－! 그는 여러 가지 신법을 시전하며 한 곳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수많은 수하들을 멀리 떨어뜨리고 단신으로 적진으로 파고드는 용맹한 가세의 철혈대한(鐵血大漢), 폭풍(暴風)처럼 다가서는 패도의 화신. 그는 단리우였다. 단리우는 가공할 속도로 길을 따라 치달렸다. 그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의구심을 느꼈으나 조금 전부터는 그러한 의구심 이전, 하나의 거대한 의혹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기(氣)… 하해(河海)의 기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누가 이러한 기로 나를 부르는가?' 단리우에게는 무사의 혼이 있었다. 그는 강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절대절정의 고수였다. 휘휙－ 휙－ 휙－! 그는 질풍처럼 들이닥치다가 언제부터인가 나뭇등걸에 등을 대고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는 검은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 "……." 두 사람은 동시에 경직하며 멈추었다. 죽립을 쓴 친구(親舊), 그는 비가 흩뿌리는 산길 위에 호젓이 서 있었다. 아래턱이 약간 보이는데, 거기에 미소가 흐르고 있다. 반면, 질풍 같은 기세로 다가서던 단리우는 난생 처음으로 상대에 대한 당혹감에 사로잡히며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에! 저런 거대한 기도의 임자가 있을 줄이야…….' 그는 전율과 공포 비슷한 압박감 속에 사로잡혔다. 고오오… 오……! 소리도, 빛도, 향기도 없이 다만 한 줄기의 기가 다가서고 있었다. 절정의 고수만이 알 수 있는 가공할 기운, 그것은 내공에서 우러나는 기운이 아니라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완숙하고 절대적인 능력이었다. 비의 장막이 두 사람 사이에 펼쳐진다. 두 사람 사이는 서른다섯 장(丈)에서 차츰차츰 좁혀지고 있었다. 단리우는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단리우는 광오한 기세를 잃지 않았다. "훗훗… 나는… 너를 꺾을 사람이지!" "나를 꺾겠다고……? 단리우의 장포가 한순간 부풀어올랐다. 강호에 나온 이후, 이러한 모욕은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검하에 십 초를 견딘 사람을 찾아 보지 못했던 후기제일수(後起第一秀) 단리우. 그는 상대를 존경해 본 역사가 없는 처지였다. "으드득－! 밀가의 이름이 하락되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푸대접을 받을 줄이야!" 단리우는 눈에 불을 켜며 그가 있는 쪽으로 점점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두 사람은 운명처럼 가까워지고 있었다. '너를 꺾겠다. 너를 위해, 우리들을 위해!' 십 장(丈)에서 오 장(丈)… 두 사람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녀석, 호승심은 여전하군. 하긴, 우리 가문의 특질적인 기질은 바로 저런 굽힐 줄 모르는 투혼(鬪魂)이지.' 죽립 쓴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죽립 테두리를 약간 까딱해 보인 다음, 천천히 팔짱을 끼었다. "자네는 아직 한 번도 꺾이지 않았다면서?" 그의 목소리는 걸쭉하고 나직했다. 목소리만 따진다면 나이가 서른 정도로 여겨지는 자였다. "후후… 무사에게 패배란 바로… 죽음(死)이지!" 단리우는 장검을 품에 꼬옥 안고 다가섰다. 그는 이미 검결(劍訣)을 운용하고 있었다. 한번 꺼내면 상대가 피를 흘리기 전까지는 절대로 거두어지지 않는다는 무림사상 가장 강렬한 검법. 철혈제일검(鐵血第一劍). 천 년에 걸쳐 수정되고, 천 년에 걸쳐 원형을 바꾸지 않은 고집으로 뭉친 위대한 검법. 그것은 도합 백팔 식(式)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일초 철혈풍운(鐵血風雲), 제이초 만뢰행공(萬雷行空), 제삼초 천지개벽(天地開闢)……. 그것은 종손들에게만 전해지는 단리가의 비전이다. 슷－ 슷－! 단리우는 검자루를 힘껏 움켜쥐었으며, 이미 호흡을 멈춘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직 검은 뽑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벽을 느끼고 있었다. 나뭇등걸에 느긋이 기대어 선 흑의인은 아무런 수식(手式)도 취하지 않은 가운데, 단리우의 검을 철저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단리우는 상대에게서 무수한 허점을 느끼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운검(運劍)하고자 하면 허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팽팽한 대치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단리우는 언제부터인지 비지땀을 떨어뜨렸다. 나이답지 않게 무수한 싸움을 겪어 본 단리우이다. 그는 야수적 기질로 상대에게서 기선을 제압한 다음, 삼 초 이내에 상대의 수급을 끊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데, 흑의인에게서는 허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이 자가 이미… 절대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단리우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는 여차하면 검을 끌어 낼 자세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입술을 떼었다. "그대는… 철씨(鐵氏)인가?" "철씨? 훗훗, 왜 그런 소리를 하지?" "그대와 같은 기도를 갖고 있을 자는 천하에서 단 하나뿐이다. 그대는 바로… 철류흔이라는 자일 것이다. 오늘의 혈풍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 "잘못 짚었군" "아, 아니라고?" "훗훗… 그는 뛰어난 자이지. 하지만 나는 그가 아니다.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럼, 그대는 누구인가?" "훗훗… 천하이단자(天下異端者)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는가?" "천하이단자?" 단리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빗발이 다시 드세게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단리우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눈치였다. "설마, 제삼세력의 지배자라는……?" "아는 것이 약간 있기는 하군!" "으음, 그대가 바로… 강호일비(江湖一秘) 절정서생(絶頂書生)이란 말인가?" "후후……!" 흑의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는데에도 단리우는 그를 향해 검을 뽑을 기회도 찾을 수 없었다. '절정서생… 으으, 철류흔과 쌍벽을 이룬다는 난세의 풍운아. 그는 밀가와는 상관이 없는 자로 알고 있는데, 끼여들다니…….' 단리우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 밀가는 최근 들어 강호정세에 지극히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밀가는 철류흔이 자파를 멸망하기 위해 강호계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마저 비슷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밀가는 강호에 대해 해명을 하는 방파가 아니기에, 그리고 대화보다는 힘으로 대세를 좌우하는 전통이 있기에, 묵묵히 세력을 진군시켰던 것이다. 폭우 가운데, 단리우는 오랜만에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대가 절정서생이라면 불행히도… 나는 본가의 가장 뛰어난 수법을 써야만 한다!" "밀가제일의 수법?" "후후… 나는 그것을 익힌 후에야 출도를 허락받았다. 사실, 그것은 정말 뛰어난 어떤 사람이 익힐 예정의 검법이었는데……." "으음……." "후후… 그가 사라졌기에 내가 대신 연수받았다. 후후, 타파 사람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최고의 검법이다! 그것을 보여 주겠다. 너는 꼭 한 번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것은 쓰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후후……!" 단리우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했다. 그는 석상처럼 정지되었고, 아주 느릿느릿 눈을 반개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완고하고 차분한 자세 가운데 보이지 않는 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단리우의 몸 주위에 강풍이 일어나더니, 퍼붓던 빗물이 하늘로 다시 떠올라 가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둔팍한 소리가 잇따라 터져 나오는 가운데, 땅거죽이 뒤집히며 검은 흙바람이 치솟아 올랐다. 흑룡 떼가 춤사위를 시작하듯, 수백 개의 탑이 일시에 일어나듯, 일대가 검은 바람에 휘감기는 가운데 단리우의 모습은 일순 사라졌다. 위이이－ 잉－! 수만 마리의 벌 떼가 일시에 날아오르듯, 허공 가득 뇌명 비슷한 광음이 시작되었고……. 치리리리－ 릿－ 치릿－! 육합(六合)에서부터 섬전보다 가공할 강기가 폭사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흑의인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녀석, 내 몫 이상으로 잘 해냈다. 너는… 역시 듬직한 녀석이다!" 그는 싱긋 웃는데……. 차아아－ 앙－ 창－! 일순 강철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백팔 방위(方位) 가득 현란한 검화(劍花)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빠르고 완벽하고, 무자비한 검기. 십여 장 안이 온통 검화에 휘어감겼다. 백팔 방위에서 일제히 피어나는 극강한 검화는 위대한 검도명가 단리세가의 최후 비전식이었다. 빛이 사위를 뒤덮었고 거대한 검무지개가 일대를 환하게 밝히는 가운데, 단리우의 입가에는 자신있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대는… 이미 늦었다!" 백팔 검화는 일순 팔만사천 화(花)로 늘어났고, 무수하던 검화는 형체를 흩트리는 가운데 은사(銀絲)처럼 가는 검우(劍雨)가 되어 사위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닿기만 해도 금석(金石)이 사그라지고, 어떠한 마의 강기라도 쪼개지고 마는 가공극패의 검기. 무시무시한 검광검우(劍光劍雨)가 유린하듯 일대를 뒤덮는 가운데, 검막 속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허공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좋아, 그 정도라면… 최고다!" 소리도 없이 떠올랐다가 무수한 그림자를 뿌리며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그림자. 그림자의 환영은 삽시간에 수천만 개로 늘어났으며, 단리우가 만들어 낸 검영은 햇살에 봄눈 녹듯이 사라졌다. 치이이이－ 잇－ 칫－! 단리우의 검초는 완벽 이상이었으나, 내공이 상대에 비해 현격한 차이가 있는지라 단리우의 검세는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허물어졌다. 백여 년 만에 시전된 단리세가 최후비전, 뇌혼(雷魂)! 그것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사그라지고 말았다. 단리우는 휘청거리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졌다, 철저하게……!" 내력이 탈진한 듯 땀을 뚝뚝 흘렸고, 얼굴 가득 번민의 빛을 가득 드리우고 있었다. "수치다. 으으, 나는 가문의 명예를 더렵혔다!" 단리우의 머리카락이 창끝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몸에서 더운 안개를 뿜어 내고 있었다. 기질이 열화 폭풍 같은 강호제일의 다혈질, 단리우. 그는 난생 처음으로 패배감을 맛보고, 정신적인 좌절 가운데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나는… 가문의 천년명예에 먹칠을 했다. 으으, 철저하게 허물어지고 말다니……." 그는 애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신 가운데, 동전만한 구멍이 뚫려 있지 않는가? 상대는 그의 검식을 파괴하는 가운데, 그의 애검에다 하나의 구멍을 너무나도 가볍게 뚫어 버린 것이다. "졌다… 지… 지고 말았다!" 단리우의 거대한 몸뚱이가 천천히 꺾어지고 있었다. 그는 더운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천천히 쳐들었다. '이 수치를 씻을 길은… 자결뿐이다.' 그는 이를 악물며 검을 번쩍 쳐들었다. 격정의 지대. 단리우의 목이 자신의 검에 의해 구멍 뚫리기 직전, 가벼운 파공성이 나더니, 쇳소리와 함께 허공 가득 쇳조각의 비가 내렸다. 단리우는 텅 빈 손이 되어 흑의인 쪽을 노려봤다. "자결을 방해하다니… 네놈은 무사의 도도 모르는구나! 빠드득!" "글쎄……." "으으… 절정서생, 나를 비웃지 마라. 나는 약해 네게 졌을지 모르나, 우리 가문은 여전히 위대하다!" "안다!" "네가 안다고? 개 짖는 소리 마라. 너는 모른다. 우리 가문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그리고 우리 가문에서 천 년의 영웅이 태어났다는 것을! 그는 나의 형! 그는… 언제고 돌아올 것이다!" 단리우는 격해 소리치며 이번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쇳덩어리같이 단단한 주먹으로 자신의 천령개(天靈蓋)를 내리칠 자세였다. "내가 죽고 나면 나의 형이 올 게다. 그가 온다면… 나는 죽어도 기쁠 것이다." 그가 치를 떨며 말할 때였다. "녀석, 그가… 복수하기를 바라면 아니 된다!" "뭐… 뭐라고?" "후후… 그는 복수 못한다." "네… 네놈이 무슨 개소리를? 으드득－!" "녀석, 나는 무사의 도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은 있다. 그것은… 갈대 길의 약속이다!" "갈… 갈대 길의 약속?" 단리우의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 돌아와야 합니다, 형! － 세가가 위기에 빠진다면… 돌아와야지! － 영원히 형을 기다리겠습니다! － 바쁘다. 가겠다! 언제 죽립이 벗겨진 것일까? 갈대의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어갔던 천 년의 문제아, 그가 빗속에서 웃고 있었다. "무… 무정하구려. 형은… 여전히 무정하구려!" 단리우는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녀석, 네놈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서… 내게만 푸념이구나?" 흰 얼굴, 검미(劍眉), 그리고 매력적인 입매. 그 얼굴은 바로 단리우가 오매불망 잊지 못하던 대종손(大宗孫) 단리궁의 얼굴이었다. "형! 왔구려!" 단리우는 눈물을 흘리며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야속하게 떠났다가 소리 없이 나타난 형의 품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형! 무정하오. 어이해, 이제 왔소?" "녀석, 다 큰 녀석이 울다니……!" "형을 기다렸소. 형은… 여전히 대종손이오. 형의 자리는… 영원한 공석으로 남아 있소!" "공석?" "형이 올 것을 모든 사람이 믿고 있소. 형은 약속 하나는 잘 지키는 사람이기에, 오리라 믿고 있었소!" 피는 역시 진한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세월의 벽은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빗물이 떨어지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다 큰 녀석들이 우는 꼴을 보였을 테니까! 우는 사람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오오, 저분이시다!" "돌아오셨다, 대종손이!" "으핫핫… 절정서생이 바로 대종손이셨다. 저분은 역시… 밀가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시다!" 꾸역꾸역 나타나는 사람들, 하나같이 단리씨(段里氏)의 용사들. 전풍신검대(電風神劍隊). 현재 강호최후의 백도인들이 뒤늦게야 나타나고 있었다.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단리궁의 전설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리궁이라는 이름은 잊혀진 이름이 아니었다. 그 이름은 여전히 단리세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었다. 비다. 지금의 비는 뜨거운 비였다. "형은… 위대했소!" "우, 네놈도 다 컸구나." "아아, 형이 바로 절정세가주일 줄이야……!" "후후… 세월이 만든 것이란다. 피의 세월이!" "형은 어쩔 작정이오? 당장 세가로 돌아갑시다." "지금은 가지 못한다. 나는 갈 데가 있다." "어디에 가는 것이오?" "소림사! 먼저 너를 잡아 수레에 태우고!" "예?" "후후… 너는 나의 포로다. 후후……!" 단리궁은 웃다가 허공을 바라봤다.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를 위해 휘파람을 불어 주겠다! 너를 위해서……!" "갑자기 휘파람이라니요?" "들으면 안다!" 단리궁은 천천히 입술을 오므렸고, 돌연 지극히 예리한 장소(長嘯)가 흑궁 가득 퍼져 나가고 있었다. "휘이이이－ 휘이이－ 익－!" 천룡의 휘파람 소리, 그 소리는 수십 리 밖까지 퍼져 나갔다. 그리고 휘파람 소리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 어둠 속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혈무흔의 눈빛이 돌연,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나직이 벌어지며 지극히 차가운 음성이 새어나온다. "시작하자! 해도 된다!" 혈무흔은 이미 빗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장도(長刀)를 불끈 쥐고 오랜만에 살기(殺氣)를, 가공할 기세를 터뜨리며……. 츠으으－ 읏－! 그는 한 줄기 빛이 되어 떠올랐고, 그 순간 사방에서 단리궁의 휘파람 소리에 호응하는 휘파람 소리가 이어졌다. "휘이이－! 쳐라!" "휘이이－ 휘이이－! 우리들이 여기에 있다!" "자아아, 시작해 보자! 미루었던 싸움을!" 소리 없이 머물러 있다가 일제히 나타나는 이만여 무사들, 이들은 이만 발의 화살처럼 천황령(天荒嶺) 쪽으로 폭사되어 나아갔다. 섬전 같은 기세로 나아가는 무사들의 신위에 사방에서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온다. "아… 아니?" "으으, 언… 언제 우리가 포위되었단 말인가?" "우라질, 우리보다도 빠르고 강한 자들이 있다니… 으으, 저들은 바로… 절정세가 무리들이다!" 지옥혈마단의 만리신화궁수(萬里神火弓手), 독왕천마수(毒王天魔手), 그리고 철왕시위대(鐵王侍衛隊)는 뒤쪽을 보고 넋을 잃었다. 새까맣게 밀려 들어오는 세가의 무사들, 이들은 하나하나 일당백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마가의 마공을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수법을 완벽히 터득한 상태였다. "쳐라－!" 차앙－ 창－ 창－! 요란한 검명! 이만 자루의 검이 일제히 뽑혔고, 이만 줄기의 뇌전이 일제히 검은 하늘을 가르며 천황령을 밝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지옥혈마단의 무사들은 검이 다가서는 것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검을 느끼는 순간, 작살 같은 기세로 떨어져 내리는 검파는 이미 그들의 몸을 유린하고 있었다. 묵궁을 불태우듯 찬연하게 피어나는 검화 송이송이! "으으, 화탄이 품에 있는데……!" "피… 피하라!" "으으, 저들은… 하늘이다!" 콰아아－ 앙－ 콰앙－! 검기가 노도처럼 퍼져 나가는 가운데, 철왕시위대 뒤쪽에서는 가공할 폭발이 시작되고 있었다. 불줄기가 수십 길 높이로 뿜어졌고, 화전을 허리에 차고 있던 자들의 몸뚱이가 걸레 조각처럼 찢어져서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싸움이 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지옥혈마단은 암습을 하기 위해 왔지, 암습을 당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은 화탄으로 중무장했기에 신체의 움직임이 절정세가의 무사들처럼 빠르지도 못했다. 아니, 그들이 세가의 기습을 알았다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 천왕령 일대에 모인 절정세가의 무사들은 하나같이 경공과 자객술에 능한 사람들이 아닌가?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 시산혈해가 만들어졌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자신들이 쓰는 독탄에 의해 타서 죽고, 녹아 죽고……. 가공할 피바람이 천왕령을 뒤덮을 때, 한 곳에선 허망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아닌데, 절대로……!" 일행의 괴수였던 첩목대제는 두 손으로 가슴을 끌어안으며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한 자루의 도(刀)가, 도의 끝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혈무흔, 그는 오랜만에 자객술을 시전했고 여지없이 성공시킨 것이다. 기실, 첩목대제는 야뇌에게 중원최고의 살인술을 전수받은 혈무흔의 적이 될 수 없었다. 마의 승리를 목전에 두었는데… 죽음이라니? 첩목대제는 죽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지도 못하고 쓰러질 때, 일대의 혈전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카아아－ 아아－ 악－!" "캐액－!" 우르르르－ 릉－ 콰앙－! 철왕시위대를 비롯한 만오천 마도고수들은 정파인들을 암습하기 위해 품고 있던 화탄, 독탄이 터지는 통에 피떡이 되어 쓰러져 갔다. 가공할 겁(劫). 드디어 혈풍은 서곡(序曲)을 시작하는 것인가? 새벽까지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단 한 명도 빠져 나가지 못했다. 정확하게 만오천일 인이 천왕령 위에서 쓰러져 죽었다. 천황령 위에 모인 자들은 하나같이 마성이 골수 속으로 스며든 자들인지라 살기를 허락받지 않았다. 그들 또한 항복하기를 구걸하지 않고 악착스레 싸우다가 모조리 죽었다. 절정세가 측의 희생은 사천(四千) 정도, 대부분의 무사는 독탄의 여파로 죽었다. 하여간 절정세가는 위대한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모를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절정세가는 싸움에 끼여들지도 않은 듯 물러났고, 너무나도 가공할 싸움을 먼 곳에서 바라보던 칠만여 백도인들이 엉거주춤한 기세로 다가서고 있었다. 경악과 전율! 말이 필요 없는 피의 폭로가 아닌가? 너절하게 흩어져 있는 살점과 옷 조각, 부러진 병장기들, 그리고 매캐한 초연과 비릿한 피 내음. 지난밤은 너무나도 길었다. 이 새벽이 유난히 싱그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밤이 너무나도 길었기 때문이리라. 거대한 파문이었다. 천년밀가의 단리우가 잡혀 압송되고 있다는 것은! 밀가의 정예고수들이 모두 잡히고 말았다는 것은 강호사상 가공스러운 소문이 되어 퍼져 나갔다. 전 무림은 들끓기 시작했고, 대륙무림회라 명명된 태실봉의 집회는 열기를 더하기 시작했다. 풍운(風雲)은 이제 막바지에 이른 듯했다. "형(兄)은 어쩔 셈이오?" "나는 소림사에 가야 한다, 한시빨리!" "섭섭합니다. 형과 다시 헤어진다는 것이……!" "녀석, 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의 가신(家臣) 혈노가 자세한 것을 일러 줄 테니, 그렇게 해라!" "가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타파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녀석, 나도 가법은 안다!" "예?" "하라면… 하는 게다. 너는 내가 대종손 자격을 여전히 갖고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핫핫! 그렇게 말한 이상, 너는 내 말대로 해야 한다!" "형은… 못 당할 분입니다!" 단리우도 웃고, 단리궁도 웃었다. 그리고 새벽은 맑게 깨어나고 있었다. 구월 십이 일… 그리고 이틀이 다시 지나갔다. 구월 십사 일… 대륙무림회가 개최되는 십오 일이 이제는 목전으로 다가섰다. 천 년의 거인(巨人), 그리고 일 인(人) 중악(中嶽) 숭산(嵩山)의 정봉에는 가는 구월을 애달파하는 듯 짙게 찌푸리고 있는 먹장구름이 흐르고 있다. 대숭산(大嵩山). 천 년(年)을 두고 천하(天下)를 군림(君臨)해 왔던 무림제일지(武林第一地). 무수한 검호(劍豪)와 영웅(英雄)이 소림의 천년혼(千年魂) 아래 신룡(神龍)이 되어 강호의 하늘로 웅비했었다. 달마(達磨) 이후, 소림은 대대(代代)로 천하백도(天下白道)의 대종주(大宗主)이자 총본산(總本山)이었다. 하지만 소림은 엄격한 사법(寺法)에 따라 강호정세에 끼여드는 것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소림은 천 년을 두고 참아 왔다. 그들은 사지(四肢)가 마비된 거인(巨人)마냥 강호계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깨어나지 않았다. 대강남북(大江南北)이 피에 씻기는 혈겁사(血劫事)에도, 천하가 폭풍에 휘말리는 풍운천하(風雲天下)에도 소림은 언제나 묵묵히 참았고… 소림은 그 때마다 저력(底力)으로 버티어 왔다. * * * 태실봉(太室峰) 정상(頂上). 소림사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태실봉의 거대한 목대(木臺)가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천 개의 누대(樓臺)가 동시에 세워졌고, 만여 개의 대번(大幡)이 오색(五色) 찬란한 기폭을 숭산의 하늘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대륙무림회(大陸武林會). 무림 오백 년 이래 가장 거대한 집회라고 일컬어지는 대륙천하 전 무림도의 집회가 무르익고 있었다. 삼산오악에서 몰려든 영웅들, 십팔만 리 대륙천하에 위대한 전설을 남기기 위해 삼 척 장검을 메고 강호의 강에 들어선 군검(群劍)들. 꾸역꾸역 태실봉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의 수는 십 일 전부터 이미 십만(十萬)을 넘고 있었다. 태실봉 일대에는 가공할 전운(戰雲)이 일어났고, 하늘에는 약간 이지러진 십사야(十四夜)의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일대는 풍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천 개의 임시 군막(軍幕)에서는 갑론을박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모든 이야기는 하나로 귀결되고 있었다. － 혈풍의 장본인인 천년밀가의 도당들을 모조리 생매장해야 한다! － 생매장하는 것으로도 복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놈들을 모조리 능지처참시키고, 시체의 가죽을 벗겨 이부자리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시체는 황산(荒山)에 버려 들개가 뜯어먹도록 해야 한다! 우(雨)가 잡혔다는 것은 이미 대륙무림회에 참가하기 위해 온 군협(群俠)들에게 알려졌다. 대륙에서 가장 고집스럽고 폐쇄적이었던 중원제일가(中原第一家) �단리세가(段里世家). 그들이 완전히 꺾였다는 것은 회오리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 그리고 환우혈맹(還宇血盟)이 난세(亂世)를 구하리라! － 대륙무림회장에서는 환우혈맹을 남북무림계(南北武林界)의 일대종주(一代宗主)로 추대하는 예식이 벌어져야 한다. － 환(還)－ 우(宇)－ 혈(血)－ 맹(盟)! 그 아래 뭉치자! － 대군주(大軍主)여! 그대는 강호의 살아 있는 신(神)이오! － 환우혈맹의 대군주는 가장 완벽한 무림인(武林人)이고, 고금제일의 현자(賢者)이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만천하는 피에 잠겼으리라! － 대군주님을 천하대종사(天下大宗師)로 추대한 다음, 밀가의 잔당(殘黨)을 척멸시키고 강호에 제삼세력(第三勢力)으로 일어난 절정세가(絶頂世家)를 산산이 궤멸시키자! 환우혈맹이라는 이름은 위대한 구원자로 평가되고 있었다. 천하각지에서 모여든 자들, 형형색색의 옷을 걸치고 십팔만 병기(十八萬兵器)를 자유롭게 갖춘 천하각로(天下各路)의 패주(覇主)들, 구천십지(九天十地)에서 모인 위대한 승부사(勝負士)들……. 이들은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듯 환우혈맹을 부르고 있었다. 달빛이 아름답다. 그리고 달빛을 어깨에 촉촉이 받고 있는 약관서생의 미소 또한 아름다웠다. 그는 십사 일의 달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철류흔, 그 놈은 위대한 병법가(兵法家)이다. 그 놈은 적(敵)을 멸하는 동시에, 자신을 상승시키는 계략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후후, 물론 보기에 불과하나… 한 명의 젊은이로 놈의 대야망(大野望)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웃는 청년, 그는 바로 또 하나의 풍운아로 소문나고 있는 절정서생 단리궁이었다. 가장 위대한 저력으로 일어난 위대한 무림의 세력 절정세가. 그들은 환우혈맹이 펼치는 하나의 거대한 그물 뒤에 또 하나의 가공하고 거대한 그물을 펼치고 있었다. "내일, 그 놈은 알게 되리라!" 맑고 차가우며 아름다운 미소가 흐른다. 망막에는 달그림자가 떠오르고, 입가에는 매혹스러운 미소가 깊어져 간다. "하늘이 살아 있고, 중원혼(中原魂)이 살아 있다는 것을……!" 단리궁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지극히 경미한 파공성이 나며 네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거의 빛살처럼 빨리 허공을 꿰뚫고 나타나는 사람들. 이들은 바로 절정세가의 사대봉공(四大奉公)들이었다. 혈노(血老) 혈무흔(血無痕), 철노(鐵老) 천황장인(天荒匠人), 전노(錢老) 천금성자(天金聖者), 불노(佛老) 천룡달뢰(天龍達賴). 이들은 단리궁을 무림에 끌어 낸 장본인들이었다. 스스－ 슷－ 슷－! 네 사람은 단리궁 앞으로 일제히 나타나며 무릎을 땅에 댔다. "지존(至尊),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 다섯이 모이기도 오랜만입니다. 핫핫……!" "가주, 속하들 왔습니다!" "속하들, 맡은 바 밀명을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네 사람은 정중히 오체투지(五體投地)했다. 단리궁은 그들에게 자신을 만날 경우 배례를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으나, 그들은 꼬옥 그런 식으로 예우를 취하는 것이다. 다섯 사람 사이에는 정(情)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헤쳐 나왔다는 데에서 형성된 남자와 남자 사이의 유대감이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천금성자였다. 그는 절정세가 쪽의 정세를 수집하라는 명을 받은 바 있었다. "기다리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럼… 그들이 그쪽으로 가고 있소?" 단리궁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예." "얼마 정도?" "조금… 많습니다!" "오만(五萬)이 넘는 게로군. 조금 많다고 하는 것을 보니?" "예. 도합 구만(九萬)입니다." "흠, 구만이라? 약간… 많군!" 단리궁은 고개를 끄덕였고, 천금성자는 말을 이었다. "지옥혈마단 전 십만(十萬) 가운데 팔만오천이 가고 있고, 철왕시위대가 오천 끼여들었습니다!" "……." "환우혈맹에서 이룩한 세력 가운데, 가장 거대합니다!" "우두머리는?" "그것이 생각 밖입니다!" "그럼… 철류흔이 아닌 게로군요?" "예." "흠, 그럼 누가 선봉에 섰소?" "여기 적어 왔습니다!" 천금성자는 하나의 밀지를 꺼냈다. 그것은 비조순찰(飛鳥巡察)에 의해 머나먼 혈거봉(血巨峯)에 있는 절정세가에서 날아 온 것이다. 네 번 접은 밀지, 일컬어 절정첩(絶頂牒)이라 불리는 흰 종이는 단리궁의 손바닥 위에서 활짝 펼쳐졌다. <지존(至尊)께! 본가(本家)는 십팔 로(路)에서 차단되고 있습니다. 구만 정예(精銳)가 조심스레 다가서고 있습니다. 대륙무림회가 벌어지는 가운데, 본가 또한 궤멸시키겠다는 듯 지옥혈마단이 대진군(大進軍)을 시작했습니다. 우두머리는 우문혜(宇文慧). 나이 십구 세(歲)이나, 중원마가(中原魔家)에서 가장 가공할 마공을 익혔다고 소문난 여종사(女宗師)입니다. 사대검마왕(四大劍魔王)이 끼여 있고, 마왕이십팔숙(魔王二十八宿) 칠십이천살혼(七十二天煞魂) 등, 악마의 주력(主力)이 대거 나타났습니다! 생각하신 대로 철류흔이라는 자는 지존에게 두 번 잇따라 당한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휘하에서 가장 뛰어난 자를 본가로 파견했습니다. 속하들의 준비는 완벽합니다. 적을 깨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나, 지키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백 일(日) 정도는…….> 글을 쓴 사람은 창궁천뇌(蒼穹千腦) 사마곡(司馬曲)이었다. "됐어. 훗훗, 구만이라면 환우혈맹의 세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오. 후후, 파풍단(破風壇)에서의 소리 없는 궤멸에 이어 그들은 네 번째의 패배를 맞이할 것이오!" 단리궁은 쪽지를 불끈 쥐었다. '나는 철류흔이라는 자가 천재(天才)일 것을 가정해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고뇌(苦惱)를 많이 했었는데, 완벽히 들어맞았다. 철류흔, 그 자는 위대한 지략가이다. 그러하기에 나의 손바닥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그의 머리 위로 달빛이 떨어져 내린다. 두 번째로 말한 사람은 혈무흔이었다. 그는 대륙무림회장으로 압송되어 오는 단리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만사 여의행(如意行)입니다! 우공자(雨公子)가 잘하고 있습니다." 그는 웃고 만다. 그는 머리를 긁적거렸고 미소를 지었다. 더 할 말은 없다. 그의 얼굴 위에도 달빛이 화려하게 흘러내렸다. 세 번째로 말한 사람은 천황장인. 그는 오천 명의 순찰고수(巡察高手)와 더불어 일대를 자세히 조사하는 일을 맡은 바 있었다. 그는 할 말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한 장의 지도를 준비해 가지고 있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그것을 땅에 쫘악 펼쳐 놓고 말했다. "여기, 그리고 여기… 그리고 이곳에 핵(核)이 있습니다!" 천황장인은 일곱 군데를 지적했다. 청운애(靑雲崖)에서 풍벽(風壁) 사이에는 오천 명의 독강시(毒彊 屍)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명이 내릴 경우, 독운고성릉(獨雲孤星陵) 쪽에서부터 시작해 척살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준극봉(峻極峰) 비사곡(飛師谷), 그곳에는 철왕시위(鐵王侍衛)들이 머물러 있다. 그들 역시 혈풍을 일으킬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등마령(登摩嶺), 월광벽(月光壁), 천불벽(天佛壁), 오죽곡(烏竹谷), 황사평(黃沙坪)……. 천황장인은 일곱 군데의 지명을 지적한 다음에 고개를 들었다. "일컬어 칠성역천대진(七星逆天大陣)이지요." "흠, 철류흔의 무리는 백도인들을 살려 줄 생각이 아니로군? 그러한 진세를 펼친 것을 보니……!" "그들은 전과 다릅니다. 전에는 회유책을 썼으나, 얼마 전부터는 완전한 섬멸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훗훗, 파풍단에서 대승(大勝)을 거두었다고 오해한 나머지 마각(馬脚)을 완전히 드러내도 좋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는 빙그레 웃었고, 그의 주름진 얼굴 위로 달빛이 흐른다. 단리궁의 머리카락 위에도, 두 어깨 위에도, 팔짱 낀 손등에도, 싱긋 웃어 보이는 입매에도 달빛이 화사하게 내려앉았다. "내부에도 꽤 많은 자들이 들어갔을 텐데?" "물론입니다! 대략 사만(四萬)입니다! 철류흔이 사자(使者)를 보내 도처에서 끌어들인 자들이 거의 다 모였습니다. 모두 지독한 위선자(僞善者)들입니다! 그들은 천하일통이 된 후, 영지를 분할받을 예정으로 있습니다. 내일 정오(正午) 우(雨)공자가 참수(斬首)되는 순간, 그들은 일제히 혈번(血幡)을 꺼내 들 것이고… 그 순간 멋모르고 온 백도명숙(白道名宿)들은 수없이 쓰러지고 많은 사람들이 독(毒)에 당할 예정입니다." "훗훗… 내일은 재미있겠군!" 단리궁의 입가에 살기가 흘렀다. 태실봉 일대에 온 철류흔 휘하세력의 총인원은 팔만(八萬)에 달한다. 그들은 내일 정오를 기해 일제히 일어나 구파일방을 선두로 한 천하백도의 명파를 완전히 장악할 예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말한 사람은 천룡달뢰였다. 그는 바로 저녁까지 소림사(少林寺)의 승려로 은신해 생활했었다. 그가 했던 일은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어떻소, 불노(佛老)?" 단리궁은 가장 의미 있는 표정이었다. 다른 세 곳의 일은 단리궁의 짐작대로 되어 갔다. 단리궁이 모르는 것은 천룡달뢰에게 맡겨진 일뿐이었다. "묘합니다!" "묘하다니……?" "알지 못할 것이 많습니다. 소림(少林)은…정말 묘한 곳입니다!" "무슨 뜻이오?" "그들은… 잠자는 거인(巨人)입니다!" "흠……." "철류흔의 세력이 소림사 깊이 침투해 들어갔다고는 하나, 역시 소림의 주된 세력은 진짜 소림인(少林人)입니다!" "한데……?" "그런데 현재 소림의 방장은 법광선사(法光禪師)라는 자로, 그는 본시 소림방장이 될 수 없는데… 철류흔에게 혼(魂)을 판 보답으로 소림사의 방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륙무림회의 주관자 중 하나입니다!" "……." "그러나… 소림은 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로?" "소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소림, 고요하고 온화하며 나약해 보이는 승려들의 집단! 또 하나의 소림은 강(强)하고 신비(神秘)하여 깨어나지 않는 침묵(沈默)에 빠져 있는 절대(絶代)의 하늘(天)!" 대소림사, 천 년에 걸쳐 무수한 희롱을 당한 거인이다. 하지만 천년거인(千年巨人) 소림사는 늘 웃음으로 모든 것을 맞이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인간성에 돌렸다. 혈겁(血劫)도 복수(復讐)도……. 그들에게는 불법(佛法) 이상으로 존귀한 것이 없는 듯, 고결한 존재로 행세했다. "그들의 주된 세력은 면벽(面壁)중입니다. 천하정세에는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면벽?" "겉보기에는 너무나 태평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철류흔이 소림사의 이름을 빌려 대륙무림회를 개최하는데도 태평하기 그집없습니다!" "흠, 정말 묘하군!" "그들은 영영 깨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깨우기만 한다면 내일의 싸움은 너무도 쉽게 끝날 것입니다!" "깨워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혼(魂)이지요. 세칭 소림혼(少林魂)이라 하는… 중원에서 가장 위대한 혼(魂)을 깨워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난다면……?" "글쎄요, 현재 지존과 속하들이 힘을 합해 이룩한 절정세가를 다섯 개 합한 것만큼의 대방파(大幇派)가 세 개 정도 깨어날 것입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가장 가공하고 거대한 방파는… 잠자는 소림사란 말인가? 그들은 절정세가보다도 거대하고, 환우혈맹보다도 가공하단 말인가? "내가 깨워야 할 것을 추천한다면?" "그것은… 천년혼(千年魂)입니다!" "천년혼?" "소림혼(少林魂)입니다!" "어디에 있소?" "글쎄요, 그것은 소림사 사람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설입니다. 천년영웅의 전설보다도 신비한… 깨어난다면 모든 것을 바꿀 가장 가공할 전설입니다!" 다섯 사람, 다섯 쌍의 눈빛, 그리고 하나의 달은 하나가 되고 있었다. * * * 달마가 역근경을 전한 이래, 천년무림(千年武林)의 정신적인 지주로 군림해 왔던 대소림. 그러나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거인의 대지이다. 십사야(十四夜). 월광이 대지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화려한 밤에 소림사 도처에서는 기이한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육합에서 뻗어 오르는 극렬(極烈)한 기운, 골수 속으로 파고들며 뜨거운 피를 차게 식힐 듯 잔혹스러운 냉기(冷氣)와 더불어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마기(魔氣)가 동시에 흐르고 있었다. 자욱이 피어 오르는 혈무(血霧)와 함께 소림의 밤은 천 년 이래로 가장 깊어 보였다. 소림사에서 가공스러운 악마의 기운이 일어나다니……! 드넓은 밀실(密室) 안이다. 언제부터인가 사광(死光)이 뇌전(雷電)처럼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차디차게 폭사되어 나오는 밤(夜)의 빛깔과 같은 눈빛, 그것은 포단에 결가부좌를 틀고 있는 백팔 노승의 두 눈에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세 치 장미(長眉)에, 쭈욱 찢어진 독응(毒應)의 눈, 매부리 코에 사자의 입매, 유난히도 흉맹해 보이는 인상의 백발 노승은 입가에 매우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 너의 율동(律動)은 더욱 좋아지는구나!" 입술 사이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의 무릎 위, 언제부터인가 눈덩어리처럼 흰 몸뚱이 하나가 흰 뱀이 눈 위를 기어가듯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좌우로, 위아래로……. 아아, 노승의 무릎 위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미인 하나가 있지 않은가? "흐으… 응… 정력도 좋으십니다요, 이단주(二壇主)님!" 나이 스물일곱 내지 여덟 살 정도, 풍만한 몸매에는 요요(妖妖)한 기운이 가득하고 고혹스럽게 찌푸리는 아미(蛾眉)에는 색정(色情)이 가득하다. 아픈 듯, 간지러운 듯, 여인은 야릇한 표정 가운데 비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아아… 하아아……!" "오, 오냐… 으음……!" 노승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매달렸다. 그의 두 팔은 여인의 복부를 휘어감고 있었다. 구름(雲), 그리고 비(雨)……. 두 사람은 승려와 속세인의 사이라기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이였다. "세… 세군요, 이단주?" 여인의 얼굴 표정은 너무나도 미묘했다. "큿큿… 낡아빠진 소림진경(少林眞經)만 외우다가 파계(破戒)한 후, 노납은 몽고(蒙古)로 갔다. 큿큿, 노납은 그곳에서 대군주(大軍主)를 배알하게 되었고… 대군주의 심복이 될 수 있었다. 대군주는 노납에게 절대마경(絶代魔經)을 전수하셨다. 크크.... 그것을 익힌 후 노납은 하루라도 우물(尤物) 없이는 밤을 지낼 수 없게 되었다!" 계집의 가슴을 더듬는 노승, 그의 머리 위에는 아홉 개의 계인(戒印)이 선명하다. 아아, 이럴 수가? 그는 바로 당세의 소림장문인(少林掌門人)이라고 천하에 널리 알려진 법광선사(法光禪師)가 아닌가? 그가 선방(禪房) 안에서 환락야(歡樂夜)를 보내고 있을 줄이야? 끈끈히 번지는 땀의 비린내, 묘한 곡조로 울려 퍼지는 야성(野性)의 숨소리……. 소림의 한밤은 이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달마동(達磨洞) 일대, 언제부터인가 묘한 옷차림의 속인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밤의 눈빛들, 그리고 사악한 호흡 소리. 달마동부 앞으로 모이는 일단의 무리들은 가공할 마기(魔氣)를 품고 있었다. "준비는 철저하다. 남은 것은… 실시하는 것뿐이다!" 누군가 잔혹하게 말했고……. "후후… 소림, 소림하여 변황에 머물 때에는 소림을 위대하게 평가했는데… 막상 대하고 보니… 후후, 폐가(廢家)가 아닌가?" "클클… 승려들은 피를 겁낸다. 그래서 클클, 우리들이 법광이라는 땡땡이중을 허수아비로 내세워 소림사를 암중에 정복하는데도… 흐흐, 이제껏 저항 한 번 하지 않은 것이다!" "하여간 묘한 곳이다. 소림사라는 곳은……!" 밤의 무리들, 이들은 옷자락에 수실로 다섯 글자를 수놓고 있었다. <지옥혈마단(地獄血魔團)> 번뜩이는 악마의 눈빛들, 차갑게 이어지는 살기 어린 숨결들. 그리고…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야천(夜天)에 시선이 멈추어진다. 위풍당당한 체격에 핏빛의 법포(法袍), 눈빛이 푸르스름한 백 세 노승 하나가 뒷짐을 진 채 숭산의 하늘을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있었다. '혜성(彗星)이 다가선다. 아아, 미묘한 기분이 든다.' 하나의 혈탑(血塔)처럼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노승, 그는 일반 승녀가 아니라 천축국의 라마승(喇魔僧)이었다. 태양달뢰(太陽達賴). 천축마가비전(天竺魔伽秘傳)에서 가장 가공할 마도수법이라 불리는 절대마공을 터득한 자. 동시에 그는 천축의 패주(覇主)였고, 환우혈맹의 천축단주(天竺團主)였다. 그는 천하칠가(天下七家)의 태상호법(太上護法)이었고, 철류흔이 오른팔로 삼고 있는 위대한 마도의 기인이었다. "대군주를 종주(宗主)로 섬길 때, 노납은 그가 천명(天命)을 이어받았다고 확신했었다!" 그는 끝없는 흑천장공(黑天長空)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의 별무리가 천궁(天穹) 가득한데,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붉고 거대한 수레가 자오선(子午線)을 타고 다가서고 있었다. 마왕성좌(魔王星座) 쪽으로 파고들고 있는 거대한 화륜(火輪),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나타난 하나의 혜성(彗星)이었다. 혜성은 천중(天中)을 치달리고 있었다. 태양달뢰의 뒷짐진 손바닥에 진땀이 촉촉이 흘렀다. "중원혼(中原魂)은 하나하나 무너져 갔고, 천하는 암중으로 마가에 차례차례 정복되었다. 몇 가지 가벼운 실수가 있기는 하나, 대세에 있어 본맹을 압승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런데… 마음이 불안하다!" 그는 비지땀으로 법포를 적시고 있었다. 그는 천(天)과 지(地)를 아는 자였다. 그가 천하칠가에 들기로 맹세했던 이유는 대군주 철류흔이 천기를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노납은 소림사를 맡았고, 우문혜 소종사는 절정세가를 맡았다. 그 일은 실패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짜여진 척살대계(擲殺大計)였다. 첩목대제가 내일 노납과 합류하게 된다면, 환우혈맹은 동서고금에 없는 무림대일통의 위업을 이룩한다. 그러나…….' 태양달뢰는 언제부터인가 번뇌(煩惱)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이곳이 소림사 안이기 때문일까? 아니라면, 기나긴 싸움의 길 끝에 도달했기에 허무감이 이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이 밤이기에 번뇌가 일어나는 것일까? 일평생을 패업(覇業)에 바친 천축제일의 승부사(勝負士), 그는 두 가지를 모르고 이 갑자(甲子)를 살아왔다. 번뇌(煩惱), 한숨. 그는 이단의 길에 들어선 마도의 마승이고, 이제껏 단 한 번밖에 패하지 않은 절정의 승부사였다. "절대군주 이외의 그 누구도 노납에게 번뇌를 주지 못하리라 여겼는데… 어이해, 오늘 밤은 번뇌가 심할까?" "내일이면… 모든 것이 판결난다. 천하백도는 완전히 패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흔들린다. 이유는……!" 그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망막 안으로 붉은 용(龍)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저 하늘을 누비고 달리는 대혜성(大彗星) 때문이다!" 밤(夜)이다. 소림사의 밤은 이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네 번째의 밤은 침묵(沈默) 가운데 익어 가고 있었다. 소림의 하원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모옥(茅屋), 다 쓰러져 가는 볼품 없어 보이는 모옥이었으되, 이곳은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비제일지였다. <용맹선원(勇猛禪院)> 모옥에는 글씨가 희미해진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다. 그 일대, 언제부터인가 괴영(怪影)이 움직이고 있었다. 쓰으으… 쓰으으……! 가벼운 파공성을 끌며 빙글빙글 원을 이루며 움직이는 일단의 무리들, 수는 오백(五百) 정도. 이들은 하나의 검은 벽(壁)을 이룩하고 있었다. 흐릿한 달빛 아래 마치 짙은 안개가 몰려들어 안개의 성벽을 이룩한 듯, 흐릿한 인영(人影)의 장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일 자정까지는 이런 진세를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대군주의 천명(天命)이다!" "천황무벽쇄(天荒霧壁鎖)를 절대 흩트리지 마라!" "만에 하나라도, 소림의 혼이 살아나게 해서는 아니 된다!" 나직한 음성이다. 하지만 지옥의 밑바닥에서 흘러나온 듯 마기가 짙게 배여 있는 사악한 음성이다. 가공할 신법으로 치달리며 모옥 일대에 천리지망을 설치한 자들. 이들은 하나하나 구파일방의 절정고수를 능가하는 신법과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철왕시위대(鐵王侍衛隊), 지옥혈마단과 함께 환우혈맹을 구축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이다. 철왕시위대는 지옥혈마단에 비해 십분지일도 되지 않으나, 잠재된 저력에 있어서는 지옥혈마단을 능가한다. 철왕시위대의 최말단 검사라 하더라도 지옥혈마단에서는 타주(舵主) 정도의 지위에 도달할 수가 있다. 쓰으으… 쓰으으……! 자욱이 퍼지는 마무(魔霧), 그리고 용맹선원 쪽으로 집중되는 악마의 눈빛들. 소림의 밤은 악마의 숨결과 더불어 깊어만 갔다. 달(月) 하나, 그리고 허무하고 고독한 가운데 묘한 신기를 띠고 있는 눈빛이 두 개 있다. 언제부터일까? 천황무벽쇄라고 일컫는 가공할 마도기문대진을 바라보고 있는 미청년 한 명이 있다. 오죽(烏竹) 그 아래, 그는 미끈한 얼굴 가득 의혹의 기색을 떠올리고 있다. "가공할 장소가 허다한 곳이 소림인데, 하필이면 저 초라한 모옥 일대에 가장 완벽한 절진을 펼쳐 놓다니……!" 월광(月光)에 얼굴이 반짝거린다. 그는 너무나도 신묘한 매력(魅力)을 지니고 있었다. 얼른 보면 평범하고, 두 번 보면 입을 딱 벌릴 정도로 신비스러우며, 눈을 감고 뇌리에 떠올리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절대의 완벽임을 알게 되는 소박함 속의 절대미(絶對美). 그 아름다움은 여성의 온유하고 작은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의 아름다움은 거대(巨大)가 감추어진 남성의 아름다움이었다. "용맹선원이란 장소, 저 장소는 소림사의 노승들이 용맹정진(勇孟精進)한다는 면벽지(面壁地)이다!" 용맹정진이란 벽곡(蘗穀) 철야(轍夜)의 선(禪)을 말한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이루지 않는다. 불경(佛經)을 읽는 것도 아니다. 다만 벽(壁)만 본다. 그러한 가운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이 바로 용맹정진이다. 달마대사는 구 년(年) 동안 했고, 역대고승들 또한 모두 다 그러한 과정을 거쳤다. 용맹선원은 달마조사가 용맹정진하던 장소에 세워져 있었다. 그 안, 낡디낡은 가사(袈裟)에 깡마른 노신(老身)… 반개된 허무한 눈빛을 지닌 노승 백팔 명이 언제부터인가 정좌하고 있었다. 현재 소림사의 최고배분은 공자배(空字拜)이다. 공자배 아래에는 불자배(佛字拜), 그 아래에는 천자배(天字拜)가 있다. 철류흔이 세운 허수아비 장문인 법광(法光)의 법자배(法字拜)는 천자배 아래의 배분이다. 법자배 아래에는 무자배(無字拜), 무자배 아래에는 묘자배(妙字拜)가 있다. 그 아래에는 성자배(聖子拜)가 있다. 그 아래 비자배(非字拜), 오자배(吾字拜), 등자배(燈字拜), 계자배(戒字拜). 계자는 사미승들이고, 등자배는 중년의 승려들이다. 그 위는 대부분이 노인이다. 하지만 배분과 나이가 같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의발(衣鉢)을 전수받는 과정에 있다. 법의(法衣)와 동발(銅鉢)! 나이는 의발전수에 의해 무시되는 곳이 유서가 깊은 소림사이다. 다물린 입술들, 영원한 고뇌에 빠져 있는 표정들, 그리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눈빛들. 이곳은 밤을 잊고 있었다. 벌써 천 일(日)이다. 아니, 오늘은 천 일의 밤을 향해 다가가는 밤이었다. 천 일 전, 소림사에서 가장 높은 배분의 일백팔 승(僧)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옥에 들어섰으며… 들어선 그 순간 면벽에 들어갔다. 일백팔(一百八) 번뇌천(煩惱天). 이들은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배분이 낮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천자배(天字拜)이다. 다시 말해, 일백팔 번뇌천 가운데 말석(末席)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진짜 장문인 법광보다도 배분이 높다는 것이다. 흰 벽, 눈(雪)보다도 흰 완전한 벽은 번뇌벽(煩惱壁)이라 불린다. 소림의 무수한 선승들이 득도를 위해 무념의 눈길을 보내던 무아의 벽이다 일백팔 번뇌천은 지난 구백구십구 일 내내 번뇌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면벽이 시작되는 날은 혜성이 뜬 날이고, 가짜 장문인 법광이 철류흔의 휘하고수들과 함께 소림사에 난입해 소림의 구대중지(九大重地)를 힘으로 정복한 날이기도 하다. 방장선원(方丈禪院), 장경각(藏經閣), 달마동(達磨洞), 계도원(戒導院), 면벽굴(面壁窟), 조사전(祖士殿), 약왕당(藥王堂), 천수모니전(千手牟尼殿), 천불전(千佛殿). 소림사에서 가장 중요한 아홉 장소는 철왕시위대에 정복되었다. 그런데 일백팔 번뇌천은 기이하게도 모든 일을 침묵으로 받아넘겼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웃고, 방장실에서 술향기가 넘쳐도 웃고, 계집의 콧소리가 흘러도 웃고, 금은보화가 약탈당해도 웃고, 그들은 소리 없는 웃음 가운데 구백구십구 일의 밤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일천일째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번뇌의 밤은 가고 천년사혼(千年死魂)이 부활(復活)할 때, 오오! 천년소림(千年少林)은 웅비(雄飛)하리라. 사리자(沙利子)여, 사리자여! 그 날, 위대한 새벽은 시작되리라. 소림사에는 천 년의 전설이 있다. 아무도 도전하지 못했던 강호의 마지막 전설. 그 전설이 신비 가운데 간직되어 있는 소림사의 밤은 이제 사경(四更)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하여간… 찾아 보자. 천 년의 무엇인가를……!" 그는 중얼거리며 죽립 끝을 약간 내렸다. 달빛이 흰 손에 화사하게 내려앉았고, 손가락 끝에서 빛이 반짝거렸다. 그것은 소림의 마지막 밤 이야기였다. 잊혀진 전설(傳說)을 찾아서 달빛이 기울기 시작할 때였다. 백팔 번뇌불 가운데 산좌승(上座僧)으로 불리는 서른여섯 노승들 가운데에서 기이한 숨소리가 흘렀다. "다… 다가선다!" 일컬어 불종삼십육관주(佛宗三十六關主) 중 한 사람. 삼십육 관주는 소림비전(少林秘傳) 칠십이 종 절기(絶技)를 각기 한 가지씩 일평생에 걸쳐 터득한 칠십이 존자(尊者)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들이다. 삼십육 관주는 칠십이 종 절기를 세 가지 이상 터득하고 있으며, 장경각(藏經閣)에도 남아 있지 않은 구전(口傳) 불가무공(佛家武功)을 대대로 전해지는 의발에 따라 전수받은 계피학발의 노승들이다. 천(天)을 알고, 지(地)를 알고, 사대(四大)의 공(空)을 알고, 마음의 모든 번뇌를 끊고 산방(山房)에 숨어든 일세의 양심들. 이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하고 있었다. "오오, 벽이… 전설에 따라 무너지려 한다!" "천일면벽(天日面壁)이 끝나려 하는데… 천년벽(千年壁)에 금이 가기 시작하다니……!" "막대한 기운이 다가선다. 거산(巨山)이 무너지는 듯한 기세(氣勢)가 덮쳐 든다." 노승들의 눈빛은 여지없이 흐트러졌다. 마도세력이 소림사 안까지 들어와서 황음한 짓을 일삼아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이들이었다. 소림의 장경각을 뒤져도, 환마혈맹이 소림의 이름을 빌려 마맹을 창건해도 달관으로 일관한 이들이 아니었던가? 대체 무엇이 이들을 향해 다가서고 있길래? 소림사 내부에서는 살아 있는 부처로 불리고 있는 일백팔 번뇌천.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한 줄기 잠력이 다가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대기 중에 가공할 잠능으로 퍼져 나가는 신묘한 기운. 우… 우… 웅……! 이것은 소리가 아니다. 이것은 범인이라면 귀를 쫑긋 세운다 하더라도 들을 수 없는 심령(心靈)의 부르짖음(吼)이었다. 우… 우… 우… 웅……! 가공할 기세로 다가서는 천룡후(天龍吼). 백팔 번뇌불은 장심(掌心) 두 개를 하나로 합하기 시작한다. 합장(合掌), 그것은 염원(念願)이고 소망(所望)이다. 번뇌불은 마음 속에서부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산사에 은거해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가운데, 마음의 눈을 열고 마음의 귀를 연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강자(强者)가 아니겠는가? 이들이 패업(覇業)을 시작했다면 강호는 이미 쑥밭이 되었을 것이다. '다가선다!' '전설이 가리킨 혜성의 주인이 가까운 곳에 와 있다. 우리들의 고된 기다림은… 이루어졌다.' "아… 미… 타… 불… 드디어……!" 번뇌불들의 입가에는 자비스러운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고 있다. 허무(虛無)에 숨어서……!" "곧… 다가선다!" 노승들의 눈에서 혜광이 일어나는 가운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번뇌불들의 뒤쪽으로 사뿐히 떨어져 내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깨 위에서부터 신기(神氣)가 흘러내리고, 단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가에는 알지 못할 깊은 뜻이 비쳐지고 있다. 두 눈빛이 죽립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 것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몸을 선실 바닥에 떨어뜨리는 찰나였다. "되었다!" 태상좌(太上座) 공공천불이 외쳤고……. "이제 쪼개져도 된다, 천 년의 벽은!" 부상좌 공아선사(空我禪師)가 진물 가득한 눈에서 자애스러운 섬광을 흘리기 시작했다. 단리궁, 그는 번뇌불이 돌연 기이한 빛을 뿌리며 중얼거리자 말할 수 없이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은형술(隱形術)을 써서 소리 없이 나타났는데… 저들 모두는 내가 나타나는 것을 정확히 알아봤다.' 단리궁은 등골이 쭈삣해짐을 느꼈다. 백팔 주의 절정연공을 터득하고 나서 그의 일 초(招) 일 식(式)을 받아낸 상대는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그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본 사람 또한 하나도 없었다. 한데, 이 안에 머물러 있는 일백팔 명의 승려는 너 나 할 것 없이 단리궁이 나타난 것을 알아낸 것이다. '소림은… 역시 큰 곳이다.' 단리궁은 또 하나의 하늘과 만나는 심정이 되었다. '이곳이야말로… 가장 많은 비밀이 있고, 가장 위대한 고수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나는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 그는 감탄해 마지않는데……. "기다리고 있었소. 천기가 내린 일대신협(一代神俠)을!" "아미타불… 천 년 세월이 잉태시킨 한 마리의 천룡(天龍)! 우리는 혜성의 출현 이후, 늘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아아, 가자! 위대한 하늘이여! 그 하늘은 정(正)의 하늘도, 악마의 하늘도 아니라… 진실의 하늘이오! 아미타불……!" 승려들은 일제히 입을 연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는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았다. 용맹선원 내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외부에서 용맹선원 안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철왕시위대들은 승려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하나의 강기벽(剛氣壁)이 펼쳐졌다. 승려들의 합장된 손바닥에서 일어난 진기의 힘이 허공에서 뭉쳐지며, 하나의 원통형 강기벽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음파를 차단했고, 그로 인해 외부로 목소리가 흘러나가지 않았다. 소림은 역시 위대한 무림의 하늘이었다. 소림사 안에 숨겨져 있는 절기는 강호에서 가장 강하고, 신비롭고, 광명정대한 수법들이었다. 대승반야격체전력진기(大乘般若隔體傳力眞氣). 백팔 번뇌불은 그러한 절기를 시전해 내부와 외부를 신비한 안개의 벽으로 휘감아 버렸다. "나를 기다리다니요?" 단리궁은 어이없이 외쳤다. 그의 앞에는 소림사 승려 중에서 배분이 가장 높은 공공천불(空空天佛)이 합장한 상태로 서 있었다. 입가에는 자애스러운 미소, 두 눈에서는 예지에 가득 찬 섬광이 흘러나온다. "시주는… 혜성의 기운과 함께 나타났소. 우리 노승들은… 언제부터인가 그 기운을 지닌 대영웅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아……!" "우리들은 심령안(心靈眼), 심령이(心靈耳)로, 하늘과 땅의 기운을 보고 듣던 중이었소.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지혜의 경지이고,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교감(交感)이오! 우리들은 동정지체이고, 불도에 정진하는 노행자(老行者)들이기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오!" 공공천불은 막대한 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공은 단리궁에 비해 약간 뒤지는 수준이었다. 백보신권(百步神拳), 십단금(十段金), 연화모니인(蓮花牟尼印), 대금강장(大金剛掌), 항마나한수(降魔羅漢手), 연대구품(蓮臺九品), 무상금강진기(無相金剛眞氣), 천수모니인(千手牟尼印)……. 공공천불은 무수한 소림절기를 터득했고, 지금으로부터 이 갑자 이전에 모든 무공구결(武功口訣)을 스스로 잊어 버린 바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림인이라기보다 승려였다. 그는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을 바라기보다는 한 명의 승려가 되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이 공(空)이다. 태어남도, 사랑하고 헤어짐도, 죽음도… 모두 공이다. 천하를 정복한다 해도 불가인이라면 기쁠 것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소림은 가공할 힘을 지니고서도 늘 은둔자(隱遁者)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소림사에는 천 년의 전설이 있소. 그것은 우리들도 모르는 가장 신비한 전설이오. 그것은 천지가 피로 씻길 때 열린다는 전설이오! 아마도 천 년의 전설은 시주를 기다린 듯하오!" "제가 전설의 주인이라고요?" 단리궁은 몸을 경직시킨다. "아미타불… 노승도 그 이치는 모르오. 다만 노승은 혜성을 기다렸고, 시주는 바로… 바로… 혜성이오!" 공공천불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눈에서 천광이 스며 나온다. 그의 눈빛은 번뇌와 심마를 일거에 씻어 버리는 듯했다. "보아하니 시주는 이미 절정고수이오. 그러나 노승이 보건대, 시주의 마음에는 번뇌의 벽이 있소!" "그, 그렇소!" "아미타불… 시주는 너무나도 뛰어난 분이오. 그러하기에 강호의 모든 사람을 위해 번뇌하는 것이오. 자아, 따라오시오! 시간이 없소이다." 공공천불의 사자후(獅子吼)는 유난히도 컸다. 그는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그와 함께 합장되었던 두 손바닥이 펼쳐졌고, 그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흰 벽을 가리켰다. "저기… 문(門)이 있소. 잃어 버린 전설의 문이!" 벽 위, 언제부터인가 거미줄 같은 금이 그어지고 있었다. 쩌어어… 억… 쩌억……! 벽은 갈라졌고,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는 기이한 기운이 흘러나왔는데, 그 기운은 따뜻하고 온화하지 않았다. 차고 강했고, 살기에 넘쳤으며, 골수를 얼게 할 정도로 섬뜩했다. 소림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극살(極殺)의 기운. 그 기운이 흘러나오는 공간은 신비롭게 허물어졌다. 언제부터일까? 단리궁은 공간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 우… 우……! 카아아－ 카아아－ 카아아－! 악령의 울부짖는 소리일까? 그 소리는 절정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악한 소리였다. '악마후(惡魔吼)다. 어이해 소림의 전설적 장소에… 악마의 부르짖음이 흐르고 있단 말인가?' 단리궁이 멈칫할 때였다. "아미타불… 소림사 최고의 것은 비살(非殺)이 아니라 살(殺)이니…그것은 바로 영원히 사바세계에 남도록 저주받은 일천 혼(魂). 아미타불… 그것이 깨어나 영웅의 날개 아래 들어가는 날……." "아미타불… 아미타불……!" 백팔 번뇌불은 입을 모아 불호를 외운다. 그 소리는 아주 멀리까지 울려 퍼졌고, 철왕시위대는 그 소리를 알아듣고서 입을 삐죽거렸다. "우라질 중놈들! 허구한 날 불경이라니… 제기랄, 불경을 외운다고 황금이 생기느냐? 미인이 품에 안기느냐? "클클… 모른 척하게. 괜히 자극하면 좋지 않으니까!" "하여간 재미나는 것들이야, 승려라는 족속들은!" 휘이이－ 익－! 철왕시위대는 밤도 잊고 빙글빙글 돌았다. 악마의 기운이 뭉클 일어난다. 하늘마저 가두어 버린다는 천황무벽쇄. 그러나 한 사람이 달빛과 더불어 그 안으로 들어갔고… 낭랑히 울려 퍼지는 불호성 속에서 천 년의 비밀이 벗겨지는 것을 철황시위대 무사들은 알지 못했다. * * * 단리궁은 자신도 모르게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너무나도 어두운 절대암흑(絶代暗黑). 아무리 안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세 자 이상을 볼 수 없었다. 다만 느낌만으로 걸어야 하고, 어디서 일어나는지 모를 가공할 흡력(吸力)에 따라 걸어야만 한다. 단리궁은 끝없이 지하로 내려갔다. 이끼 가득한 계단이 천여 개, 단리궁은 한 계단 한 계단 모두 딛어 가며 지하광장(地下曠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악취가 가득하고, 너른 돌바닥에 인골(人骨)이 흩어져 있고, 골편(骨片)들이 나뭇조각같이 뒹굴고 있었다. "아아, 소림사 내부에 이런 장소가 있다니……!" 단리궁은 넋을 잃고 말았다. 소림사는 신성과 권위와 평화의 장소이다. 그런데 소림사 지하에 악마의 장소가 존재하고 있을 줄이야……. 단리궁은 인골 무더기 속에 서 있는 하나의 석비를 보게 되었다. 세워진 지 오래 된 듯한 석비에는 금강지로 파 내려간 듯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천년마궁(千年魔宮) 팔만사천복마전(八萬四千伏魔殿). 여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마가 모여 있다. 소림사의 법력(法力)으로 마를 잡아들여 복마전(伏魔殿)을 꾸몄도다. 그러나 소림사는 삼계를 어길 수 없는지라 그들을 잡아 가두기만 했을 뿐, 죽일 수는 없었다.> 글은 석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석비를 가득 메운 글귀는 오랜 세월을 두고 쓰여진 듯, 각양각색의 필체였고 쓴 사람의 내공에 따라 조금씩 깊이를 달리했다. 세월을 뛰어넘어 쓰여진 글귀들. 가장 최근의 것이라도 백 년은 족히 넘어 보였다. <여기 갇힌 자들은 스스로의 마음에 따라 참회(懺悔)해야만 한다. 이 안에 팔만사천 마혼(魔魂)이 갇힌 이후에야 이곳을 완전히 밀봉(密封)한 것이고, 이곳은 전설의 장소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이고 천기가 변화하는 날, 이곳의 주인이 나타나리라. 그는 바로 혜성의 천기를 이어받은 불세출의 대협객! 그대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중토(中土)의 운명(運命)을……! 팔만사천 마혼(魔魂) 중 살아남은 자들은 지극히 가공할 절기를 터득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이미 인성(人性)을 잃어 버렸다. 그들을 거둔다면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를 그들 손으로 씻게 되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참회하지 않았다면… 살해하길 바란다. 그대는 속인(俗人)일 것이니, 살계를 어길 수 있으리라!> 이곳은 세월이 잊혀진 곳이었다. 당세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곳을 알지 못한다. 이곳은 백 년 전 패쇄된 기억 밖의 장소였다. 만든 사람은 놀랍게도 달마조사(達魔祖士). 그는 살계를 어길 수 없다는 불가의 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강호를 종횡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마의 무리들을 두고 볼 수 없어 이곳을 만들었다. 천년마궁(千年魔宮). 이 안에는 전대미문의 거마들이 잡혀 있었다. 소림사는 수수방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고시대의 마종(魔宗)들을 일백 년에 걸쳐 추적해서 잡아 이 안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팔만사천 명이 잡힌 이유는 이 안의 기관토목학(機關土木學)이 팔만사천 명의 거마(巨魔)를 제압할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십 장 두께의 철벽(鐵壁), 열 가지의 불가정종진세, 가공할 매복과 기관이 천년마궁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마도고수를 영원히 금제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이상은 금제할 수가 없었다. 천년마궁의 한계는 그러한 데에 있었다. 천 년 전부터 백 년 전까지, 당시 중원천하의 강호계는 악마의 세력이 유난히도 강하게 준동했었다. 무수한 방파가 명멸했고, 천년밀가 역시 그 즈음에는 강호 마도세력에 의해 형편없이 눌리기도 했었다. 만에 하나 강호의 팔만사천 마왕이 팔백 년에 걸쳐 하나하나 잡히지 않았더라면 강호세계는 이미 악마의 왕국으로 화했을 것이다. 살인과 방화, 강간, 약탈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던 전대의 거마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죽어 버렸다. 그러나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강시(彊屍)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사람은 한철삭(寒鐵索)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너무 잔혹한 금제라고 볼 수 있는 비파골(琵琶骨)에 한철삭을 꿰어 벽에 묶어 버리는 금제 방법도 보였다. 몸이 반쯤 썩은 자들, 이미 해골이 되어 죽은 자들, 끝없는 영어의 신세를 한탄하다 못해 마성이 폭발해서 제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린 마도인들……. 이곳은 바로 마도가 멸한 곳이기도 했고, 강호의… 특히 중원의 마도가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이 없었다면 중원마도계는 변황을 능가하는 전성기를 구가했을 것이다. 한 권의 서적이 있다. 팔만사천마록(八萬四千魔錄). 단리궁은 그 앞으로 다가가 얼굴 가득 경이의 빛을 띠고 있었다. "수인명단(囚人名單)이라? 아아, 그렇다면 이 안에는 여기에 갇힌 사람들의 별호가 적혀 있겠구나!" 단리궁은 일순, 천 년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천년마궁(千年魔宮)은 중원의 최후 전설이라 불리는 곳이다. 지난 백여 년간 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곳. 자욱이 퍼진 사무(死霧), 독무(毒霧) 가운데서 두 개의 빛인 유성이 밤하늘을 가르고 흘러가듯이 폭사되고 있었다. 단리궁은 신광이 흘리며 팔만사천비록이라는 고서를 응시했다. 천년마궁에 잡힌 마도인의 이름이 기록된 팔만사천비록. 그것은 바로 중원의 모든 비사(秘史)를 간직하고 있는 강호계가 잊어 버린 강호역사의 전부였다. 현재 중원의 힘은 변황무림계에 비할 수 없이 거대하고 웅장하다. 다만 너무나도 오랫동안 문파가 갈리고 세력이 갈리어, 서로 싸우고 죽이는 통에 무수한 절기가 실전되고 세력이 분산되어서 오늘날 해외육가(海外六家)의 준동에 휘청이게 된 것이다. 단리궁이 서적을 취하려 할 때였다. 어둠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큿큿… 백 년(年) 만에 외부사람 구경을 하는군. 큿큿……!" 어디서 들려 오는 목소리일까? 귀기(鬼氣), 요기(妖氣), 살기(殺氣)가 겹쳐서 묘한 음률을 이루어 내는 악마의 중얼거리는 소리. 그 소리는 해골산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거대한 한철주(寒鐵柱) 하나, 아래 부분은 골편(骨片)에 뒤덮여 있는데… 그 가운데 사람 형체 비슷한 검은 물체가 있었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강시처럼 깡마른 자,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는 대머리이고, 피부며 모든 것이 완전한 묵광(墨光)을 뿌리고 있는 자였다. 그의 복부에는 철삭(鐵索)이 꿰어져 있었다. 소림사의 선대고승들은 강호악마들을 차마 죽일 수 없었기에 그들을 가두었지만, 갇힌 자들의 마공은 너무나도 강한지라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그들을 금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림사 승려들은 고뇌했고, 결국 천륜을 어기는 가장 잔혹한 금쇄삭(禁鎖索)의 금제법을 천년마궁 안에 시전하게 되었다. 금쇄의 사슬, 그것은 비파골(琵琶骨)을 꿰뚫어 버린다. 하단전(下丹田) 기해혈(氣海血)을 관통하는지라, 마공이 제거되고 내공운용이 불가능해진다. 이 안에 갇힌 자들은 하나하나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금쇄삭같이 가공할 금제술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웃는 자, 그는 이상하게도 태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크크… 이 안은 따분한 곳이란다. 크크, 환우에서 목숨줄이 가장 질긴 늙은 괴물들이 머물러 있을 뿐… 크크, 다른 것은 하나도 없는 곳이다. 소림의 땡땡이 중놈들은 우리들이 사람을 몇 천 명 죽였다는 것을 기화로… 크크, 우리들을 이런 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대머리 노인, 그는 정말 기이한 신체상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의 양미간(兩眉間)에는 하나의 점(點)이 박혀 있는데, 얼른 보면 눈알이 세 개 있는 듯이 보였다. 과거, 가장 극랄한 전설을 이룩했던 자가 있다. 시산혈해를 수십 군데에서 이룩하고, 대강남북의 모든 강호세력과 단신으로 격돌해 가며 독보천하(獨步天下)했던 전설상의 기인. 삼안마불(三眼魔佛) 마뢰(魔雷). 반승반인(半僧半人)이라 불린 그는 세 가지 절대안(絶對眼)을 터득했다. 사안(死眼), 요안(妖眼), 미안(迷眼). 그는 세 가지 안공을 갖고 백사십여 년 전의 강호천하를 피의 계절로 만들었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천년밀가마저도 건드리지 못했던 절대의 악마였다. 사람들은 그가 마성이 격렬해진 나머지 자결했다고 역사에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은 달랐다. 그는 자의에 따라 사라진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영어의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크크… 어서 와라, 얘야!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그립다. 크크, 말만 잘한다면 네게 사안공, 요안공, 미안공을 전수하겠다!" 삼안마불 마뢰는 단리궁을 보고 자꾸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는 처절한 고독(孤獨)이 스며 있었다. "얘야, 어서 노부 곁으로 오너라. 큿큿, 늙어서도 죽지 못하는 괴물들만 보다가 너같이 어린아이를 보니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그래, 무슨 죄를 지었기에 흉악한 소림의 중놈들에게 잡혀 여기에 빠졌느냐? 네 아비를 죽였느냐? 네 어미를 죽였느냐? 아니면, 옆집 사는 계집을 건드려 애를 배게 하고 그 계집의 서방을 죽였느냐? 크크, 세상이 싫어 방화를 했느냐? 표물을 털었느냐? 어지간한 죄로는 이 장소에 올 리가 없는데……!" 삼안마불, 그는 한때 마도의 절대자로 군림했던 사람이다. 그는 지독하게도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마공은 잡히기 전보다 세 배는 강해진 상태였다. 이 안에는 하나의 불문이 있다. 먼저 잡힌 사람은 나중에 잡힌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강호절기를 전수해 주고 죽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시 말해, 삼안마불은 자신보다 앞서서 여기 잡혀 온 전대거마들의 초절정마공을 두루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내공을 금제당하고 있기에, 초절정마공을 시전하지도 못하고 비파골에 한철삭이 꿰인 채 키득키득 웃기만 하는 것이다. "크크… 얘야, 어서 오너라!" 삼안마불이 크게 말할 때였다. "카카－ 카카카－! 대체 누가 왔기에 그러느냐?" 깊은 안개 속에서 더 흉폭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자욱한 죽음의 안개 가운데, 삼안마불 이외의 생존자가 있었다. "카카－ 설마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기라도 했단 말이냐? 백 년이나 폐쇄되었던 이곳에 신참자가 들어왔단 말이냐?"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자, 그는 전신을 쇠사슬로 칭칭 동여매고 있는 난쟁이 노인이었다. 어찌나 늙고 말랐는지 몸이 한 줌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옷은 삭아 문드러졌고, 오관은 쭈글쭈글한 주름살에 뒤덮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거대한 기도가 스며 있었다. 그 기도는 현재의 중원마도계에서 활약하는 어떠한 인물도 갖고 있지 못한 절대적인 기도였다. 죽음의 안개가 흐르고, 악취가 피부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생존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면역이 되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투였다. 사 척 단구의 난쟁이 노인, 그는 삼안마불이 이 안에서 의형(義兄)으로 모시게 된 사람이었다. 천살파천황(天煞破天荒) 종리무극(鐘里無極). 그는 이백 년 전의 절대기인이다. 그는 중원흑맹(中原黑盟)이라는 지하결사를 조직해서 천하의 삼분지일을 장악하고, 강호천하를 질타했던 사람이었다. 세력이 절정이었을 때에는 휘하에 절정고수만 해도 칠천(七千). 그는 무당(武當)과 곤륜(崑崙)의 장문인을 마음대로 바꿀 정도로 무림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수천 명을 학살했고, 수천만금의 부를 이룩하며 진시황 이상의 환락을 누리며 살다가 어느 날 사라졌다. 그는 소림사의 백팔 고수에 의해 심야에 납치되어 여기 들어오게 된 것이다. 콰르르르릉－ 콰르릉－! 기문진도의 영향 탓인지 안개를 휩쓰는 바람은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를 내었다. 세월이 잊혀진 곳, 이 안은 중원마도의 모든 것이 남아 있는 장소였다. 천혼귀자(天魂鬼子), 만사진인(萬邪眞人), 지옥대존자(地獄大尊者), 고루천존(古陋天尊), 혈사대제(血死大帝)……. 지난 일천 년의 천하마도계를 좌지우지하던 인물들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팔만사천(八萬四千)이 들어왔고, 다만 천 인(人)만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었다. 그들이 바로 소림사혼(少林死魂)이었다. 소림사혼의 비밀이란 정(正)의 비밀이 아니라, 마(魔)의 비밀이었다. "웃지 마라, 이녀석들아! 거기 와 있는 녀석은 우리들 같은 포로가 아니다. 그래, 네녀석들은 수백 년 고행(苦行)하고서도 마도인물과 정도인물을 가리는 법조차 알지 못한단 말이냐?" 또 하나의 목소리, 그 소리 역시 안개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네 번째의 목소리도 들려 왔다. "호호… 가주(家主)의 혜안(慧眼)은 역시 훌륭하십니다. 호호… 신첩 또한, 저 새파란 녀석이 협골(俠骨)이라는 것을 저 놈이 안개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알아봤습니다요." 뜻밖에도 맑고 고운 목소리였다. 목소리만 듣는다면 이제 나이 이십 세 정도이다. 자욱한 안개 속,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일 장 거리를 격하고 앉아 있었다. 둘 다 비파골에 한철삭이 꿰어진 영어의 신세인데도 난쟁이 노인이나, 대머리 노인과는 달리 당당한 면모를 갖고 있었다. 중년문사(中年文士),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은 하나도 썩지 않았다. 천잠사(天蠶絲)로 된 옷이기에 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훼손되지 않은 것이다. 마룡(魔龍)의 두 눈, 금제된 신체인데도 굽혀지지 않은 불굴의 정신력, 그는 마중마(魔中魔)의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가히 마의 하늘, 그는 너무나도 마공이 강한 나머지 반노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들어선 상태였다. 그는 이곳의 주인이고, 이곳의 대형(大兄)이었다. 마혼(魔魂), 그는 이곳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 일천 명의 생존자들이 대형(大兄)으로 섬기는 인물! 그는 이 안에 남겨진 천종마공을 두루 익힌 사람이고, 잡히기 이전에도 이미 마도의 하늘이라 불렸던 사람이었다. 악마의 천자(天子), 그는 마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룩한 사람이었다. "후후… 일 년만 더 고생하면 폐쇄된 혈도를 뚫고 자력으로 살아날 수 있는 판인데…후후, 외부에서 애송이 하나가 기어들다니…!" 마혼의 눈은 지극히 잔혹했다. 반면 그를 가주(家主)라고 불렀던 묘령의 여인은 아주 아름답고 고혹스러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미혼(美魂). 일명 비파겁(琵琶劫)! 언제나 동경의 눈망울로 허공을 응시하는 일대우물. 나이가 이미 이백여 세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마혼과 미혼은 부부 사이인 듯했다. 그들은 야뇌(夜惱)가 활동하기 이전의 강호계에서 마도의 절대자로 군림했던 사람들이었다. "훗훗… 하여간 반갑군. 훗훗, 자유로운 사람을 본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마혼의 눈빛은 단리궁의 눈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혼은 내공이 필요 없는 마공을 시전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은 그의 눈만 보고도 의식을 잃게 된다. 핏물이 그득 고인 듯한 두 개의 눈, 묘한 허무와 우울을 머금고 있는 아름다운 두 눈. 시선과 시선은 한 곳에서 오랫동안 교차되었다. 한순간, 마혼의 시선이 묘하게 흐트러졌다. "이상하군. 네놈의 인상은… 노부가 강호에서 활약하던 시절, 노부가 숙적으로 여기고 있던 자와 흡사하군!" "훗훗…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흔하지 않은데." "흠, 그 놈은 천하제일미남(天下第一美男)이고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었다. 노부가 소림사 승려들에게 갇혔던 이유는 그 전날, 바로 그 놈과 비밀리에 비무하다가 중내상(重內傷)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요?" "크크… 단리천(段里天)!" "단리천?" 단리궁은 입을 딱 벌렸다. '설마… 그분과 동배란 말인가?'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워하지 않는 단리궁이었으나, 마혼의 그 말에는 경악하고 말았다. 단리천! 강호는 이미 잊은 상고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단리궁에게는 골수 속으로 스며들어 있는 이름이었다. － 전국시대(戰國時代) 화(花)가 계시었다. 그분은 가문(家門)을 세우시었고, 일세가주(一世家主)가 되시었다. 그분은 뇌(雷)를 낳으시고, 그분은 무(武)를 낳으시고, 무는 진(震)을, 표(飄)는 웅(雄)을… 석(石)은 천(天)을 낳으시고, 천은 검(劍)을 낳으셨고, 검은 군(君)을, 군은 화(華), 화는 궁(弓)을 낳았다! 단리궁의 뇌리에는 그러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너무나도 어렸을 때부터 쉬지 않고 들어왔던 말이고, 노래였다. 그것은 바로 천년혈통의 계보였다. 단리천(段里天), 그는 천년밀가(千年密家)의 한 사람이다. 그는 단리군의 조부이고, 단리궁에게는 고조부(高祖父)가 되는 사람이다. 마혼, 그는 단리천과 동배의 인물이란 말인가? "묘하군. 중원의 마도계에서 절정을 구가했던 인물들을 소림사 지하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단리궁은 경악을 애써 속으로 갈무리하며 팔짱을 끼고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안개 속을 걸어가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대들은 미완성의 악마들이다. 훗훗, 그리고 바란다면… 절정의 길을 계속 할 수 있게 해 주겠다." 그는 팔짱을 끼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미… 미쳤군, 저 어린 녀석은……." "카카카－! 배짱 한 번 좋군. 수백 년 갇혀 살았으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던 우리들을 정도로 돌이키려 하다니!" "호호호… 귀여운 녀석. 호호……!" 사혼은 일제히 웃었다. 단리궁도 따라 웃고 있었다. "훗훗… 바라지 않는다면 나도 강호로 나가지 않겠다. 그렇게 된다면… 훗훗, 중원의 마도계는 자연히 해외육가(海外六家)에게 무너지겠지!" 그가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찰나였다. "해, 해외육가?" "그 오랑캐들이… 중원에 나타나기라도 했단 말이냐?" "설마, 그 야만스러운 족속들이 중원천하의 마도계를 농락하고 있기라도 한단 말이냐?" "이녀석, 대체 무슨 소리냐? 현재 천하가 어찌 되었기에 그런 소리를 하느냐?" "다,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네 사람은 일제히 웃음을 멈추었다. 해외육가는 그들이 가장 증오하는 이름이다. 그들은 백도를 미워하는 이상으로 변황의 마도계를 미워하고 있다. 수백 년을 갇혀 산 중원마도계의 전대 지배자(支配者)들,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숨소리를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단리궁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역시 이들도… 중원혼(中原魂)을 갖고 있다. 그런 이상… 후후, 이들은 절정세가의 호법이 될 수 있다.' 그는 거대한 불기둥이 가슴 속에서 치솟는 것을 느꼈다. 중원은 너무나도 그리운 이름이다. 사혼의 뇌리 속에도 그 이름은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천 년의 침묵과 신비 가운데, 단리궁의 눈에서는 혜성의 그 빛이 뿜어지기 시작한다. "중원의 마가는 변황육가(邊荒六家)에게 정복되었다. 불행한 사실이나, 그것이 바로 당세의 현실이다!" "으으, 노부의 후예들이 변황무리에게 정복되었다고? 믿… 믿을 수 없다!" 마혼의 옷자락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두 눈은 밖으로 튀어 나올 듯이 확대되었고, 두 주먹은 불끈 쥐어졌다. 설마, 그가 중원마가(中原魔家)의 인물이란 말인가? 마가대종사(魔家大宗師) 우문마가(宇文魔家). 천 년에 걸쳐 중원마도계의 종주방파(宗主 波)로 군림(君臨)해 왔고, 현재에는 몽고 철왕대가(鐵王大家)와 더불어 중원천하를 피로 씻는 대혈사(大血事)에 선봉이 된 방파이다. 패도(覇道)에는 단리(段里)의 밀가가 있었고, 마도에는 우문의 마가가 있었다. 이들 양대 가문은 중원천하를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支柱)라고 할 수 있었다. 마혼(魔魂) 우문무(宇文武). 그는 가공할 신분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과거 한때 중원마가의 대종사(大宗師)로 군림했던 사람이었다. 벽력마천자(壁靂魔天子)라고 불렸던 일세의 마도패자. 그는 우문마가의 삼십대(三十代) 총가주(總家主)였던 사람이었다. "마가가 변황육가에 정복되었다고? 그… 그럴 리가? 어이해, 위대한 나의 가문이 그 따위 시시한 오랑캐 족속들에게 농락당할 수 있단 말인가?" 우문무의 눈빛은 새파래졌다. 전광을 방불케 하는 신광이 한순간 폭사되었다. 무공이 금제되지 않았다면 그 빛으로 인해 십 장 안이 한순간에 불타올랐으리라. 츠으으－ 읏－ 츳－! 섬뜩한 사문기광(邪門奇光)은 우문마가 비전식인 벽력뇌혼수(霹靂雷魂手)에 따른 것이었다. 우문마가에는 십대마공이 있다. 그것을 모조리 터득한 사람은 현재까지 삼십사대에 걸쳐 자손을 퍼뜨린 우문마가에 있는 오직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바로 우문무. 그는 벽력뇌혼수 이외에도 아홉 가지 절정마공(絶頂魔功)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비파혈옥수(琵琶血玉手), 천마혈황참(天魔血皇斬), 음시구령장(陰屍拘靈掌), 창궁혈영표(蒼穹血影飄), 조화여의마공(造化如意魔功), 천폭멸겁수(天爆滅劫手), 쌍뇌심결(雙腦心訣), 마가마혼백팔검무식(魔家魔魂百八劍舞式), 이화천마강풍(離花天魔剛風). 우문무는 아직도 살아 있는 중원마가의 전설이었다. 그가 존재했을 때, 중원마가의 저력은 천 년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전통을 남긴 바 있었다. 그는 천하제일부(天下第一富)를 이룩했고, 마가십대사법(魔家十大死法)의 기초을 이룩했으며, 마도조직의 전서구 통신(傳書鳩通信)을 사해팔황(四海八荒) 도처에 퍼지도록 안배했다. 그는 마가의 거대한 기초을 다진 인물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지대한 위업을 이룩했는데, 그 중 하나는 당시만 하더라도 마가에 굴복하지 않았던 이대세력을 합병한 것이다. 비파미염교(琵琶美艶敎), 천살마궁(天煞魔宮). 두 가지 세력은 우문무에 의해 중원마가에 합병되었다. 그 중 비파미염궁의 교주는 그 당시 우문무의 사내다움에 반해 그의 여인이 되기를 자청했다. 비파겁(琵琶劫) 냉화영(冷花影). 그녀는 과거 강호제일화(江湖第一花)로 불린 바 있었다. 술을 잘 먹고, 욕도 잘했으며, 금기서화(琴碁書畵)에 능한 팔방미인(八方美人)이자, 희대의 요화(妖花). 그녀는 비파미염교를 이끌고 중원마가에 투신했고, 그 날 이후 중원마가의 세력은 불같이 일어났다. 그 때 중원마가를 저지하기 위해 칠천 결사대를 이끌고 삼경에 그들을 찾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단리천(段里天). 그는 우문무와 일대 접전을 벌였고, 마가제자와 밀가제자는 칠 일에 걸쳐 싸웠다. 결과는 철저한 양패구상으로 끝이 났다. 마가는 위축되었고, 밀가도 무수한 희생자를 내었다. 그 후 마가는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극(極)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가의 삼십일대(三十一代) 가주, 그는 밀가가 우문무를 죽였다면서 밀가를 영원한 적으로 지목한 사람이었다. 마가와 밀가의 원한은 그 때부터 극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데, 우문무는 단리천과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소리 없이 강호로 나갔던 소림사 고승들에 의해 생포되어 천년마궁에 갇혔던 것이다. 우문무는 오백 혈왕검대(血王劍大)와 더불어 생포되어 여기에 갇혔다. 쓰으… 쓰으으……! 자욱한 사무(死霧)가 격하게 출렁인다. 지금, 천 쌍의 시선이 단리궁에게 집중되고 있다. 중원최고의 거마들, 그리고 백 년 이상 지하뇌옥에서 참회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사실은 고독하고 불우한 사람들. 이들은 단리궁의 말에 격동하고 있었다. "감히… 마가가 변황에게 꺾일 수 있단 말인가?" "아랫것들이 변변치 못한 탓이다. 빠드득－!" "우라질, 대체 요즈음 마도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기에… 그래, 중원백도계도 아니라 변황의 방문좌도(傍門左道)들에게 꺾인단 말인가?" "제기랄, 그러고 보면 우리 같은 노선배들이 여기 갇히면서 진정한 마공이 실전되었기에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당장 나아가 변황육가를 궤멸해야 한다!" "크으으… 이곳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저 어린 놈의 말은 마의 가슴에서 사라졌던 야망의 불을 다시 불질렀다!" "우우… 우우……!" "카카카－ 카카－!" 일백여 성상을 침묵으로 지내 왔던 천년마궁이 한순간 흥분과 지독한 마기로 들떠 오른다. 일순. "휘이이－ 익－!" 아주 예리한 휘파람 소리와 함께 뭇사람의 흥분하던 시선이 일제히 차갑게 가라앉았다. 골수 속으로 파고드는 휘파람 소리. 천룡신소(天龍神嘯)! 그 소리에는 지극히 묘한 신비력이 실려 있었다. '이상하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던 악마의 불이 저절로 꺼지다니? 저… 저 놈이 누구이기에?' '나, 나이답지 않게… 이미 절정의 절대자란 말인가?' '아아, 저 눈을 보라! 저 눈을 보면… 마혼이 눈빛에 의해 사그라지지 않는가?' '설마, 저 사람이 바로… 운명의 주인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단리궁은 팔짱을 낀 채 주위를 쓸어보는데, 그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微笑)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모두 인물(人物)들이다. 일을 함께 할 만한 기인들이다.' 나이답지 않게 군림의 기도를 전신에서 흘리고 있는 단리궁. 그는 여러 사람의 신분을 알게 되자 한 가지 멋들어진 계획을 하게 된 듯 신비한 안광의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 자신의 절기에 대해 자신있는 게로군?"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퍼져 나갔다. 그의 눈빛을 보고 그가 몸 안에 가공할 내공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측량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흐릿하고, 고독하고 암울한 눈빛이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마공이라면 자신있지!" "후후…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 게냐? 혹, 우리들에게 마공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냐?" 우두머리 네 사람이 툴툴거릴 때였다. "후후… 나는 무엇이든 절정의 단계까지 수련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훗훗……!" 단리궁은 미소로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의 미소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차라리 고약한 표정이었다면 천혼(千魂) 중의 지배층에 올라 있는 네 명의 전대거마를 승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유능제강(柔能制强)인 양, 단리궁은 온화하고 온유한 미소로써 마성이 무궁무진한 네 사람의 혼백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나는 중원천하에 고금에서 가장 위대한 세가(世家)를 건설하고 있는 사람이다!" "……." "……." 소림사혼은 단리궁의 말에 빨려들고 있었다. 느릿느릿 이어지는 단리궁의 목소리는 그의 흐릿하고도 지혜로운 눈빛과 더불어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바로… 절정세가(絶頂世家)! 그 안에는 그 누구든 신분내력을 가리지 않고 들어설 수 있다!" "아아, 조그만 녀석이 꿈도 야무지군." "으음, 절정세가… 절정세가……!" 네 사람은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단리궁은 여유만만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세가의 인원은 거의 다 찼다. 하지만 불행히도 네 좌석이 비었다." "네 자리……?" "무슨 자리냐?" 네 사람 모두 흥미진진해 하는데……. "그 자리는 바로… 사대교두(四大敎頭)의 자리이다!" 단리궁은 빙그레 웃었고……. "사… 사대교두?" "으으, 이제 보았더니 저 놈이 우리를 희롱하는군." "우리들은 과거 일맹을 지배했던 사람들인데… 으드득－! 네놈은 우리들을 일개 교두 정도로 본단 말이냐?" "우라질, 애송이 놈! 크크, 우리들이 영어의 신세라고 마음대로 찧고 까부는구나." 소림사혼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훗훗… 절정세가에는 하나의 법이 있다. 그것은… 강한 사람은 강자로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강한 사람이라면 어떠한 사람이든 세가의 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리궁의 눈에서는 혜광이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벽력마천자 우문무 쪽으로 걸어갔다. 우문무는 그를 노려보기 시작하는데, 그의 눈빛은 바로 악마의 눈이었다. 번－ 쩍－! 푸른빛으로 부서져 내리는 얼음처럼, 우문무의 눈에서는 잔폭한 사광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갔다. 하지만 단리궁은 그러한 시선을 받고도 입가의 미소를 흩트리지 않았고,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우문무가 심령상의 제압을 느끼고 눈을 꿈쩍해야만 했다. "애송이가 이미… 거인(巨人)이 되었군." 우문무는 단리궁의 눈에서 무수한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미 조화지경(造化之境)이다. 아아, 이 어린 녀석은 정녕 위대한 무사혼(武士魂)을 지니고 있다.' 우문무가 땀을 약간 흘리기 시작할 때였다. "중원은 분열되었다. 그 덕에 변황이 중원을 쳤다. 만에 하나, 중원이 한시빨리 뭉친다면 변황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 단리궁은 우문무에게서 일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섰다. 그는 후리후리한 체격에 섬약한 인상의 약관청년이었다. 낙척서생(落拓書生)을 방불케 하는 허약한 몸체.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의 인상일 뿐이고 그의 내면에는 정녕 강인한 무사의 혼백이 드리워져 있었다. 우문무도 그것을 알아보고 경탄해 마지않았고, 다른 세 사람 역시 거인의 기도를 느끼고 숨을 죽였다. 단리궁은 천천히 손을 풀었다. "바란다면… 기회를 주겠다! 같은 중원인(中原人)으로……!" "기… 기회? 무슨 기회?" 우문무의 살이 부들부들 떨린다. "강호정세에 끼여들 수 있는 기회!" "뭐… 뭐라고?" "훗훗… 금제를 풀어 주겠다는 말이다. 쉽게 말한다면……!" "금제를 풀어 주겠다고?" "후후… 기실, 이 근처에는 변황마도계 고수들이 수만 명 모여 있고, 마가출신 무사도 이만여 명이 모여 있다!" "아아……." 우문무가 넋을 잃을 때, 단리궁은 차분한 어투로 이 년간의 강호정세에 대한 것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특히 변황육가가 힘을 합해 중원마가 자리를 강점한 것에 대해……. 침묵, 그리고 떨리는 눈빛이 있다. "고약한 것들. 노부가 피땀 흘려 이룩한 가문을… 그리도 쉽게 철왕대가에 팔아먹다니……!" 우문무는 발을 쿵쿵 굴러댔고, 콧구멍에서 더운 김을 푹푹 뿜어 낼 정도로 노여워했다. 그는 마도인이기 이전 중원인이었고, 중원인 이기 이전 자신의 가문을 사랑하는 한 인물이었다. 그의 마성은 백여 년 참회하는 가운데 한결 가라앉은 듯했다. 겉보기로는 가공할 마기를 뿌리고 있으나, 그의 내면은 백여 년의 좌정(坐靜) 가운데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말도 아니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우문무는 이를 빠드득 갈다가 단리궁을 바라봤다. "만에 하나, 일이 그렇게 되어 간다면 결과가 어찌 되리라 보느냐?" "승패의 산(算)은 반반(半半)이고, 하여간 분명한 것은 수십만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다는 것이다!" "으음, 마가는?" "그들은… 사흘 후, 무너지게끔 되어 있다!" "사흘 후?" "후후… 바로… 나로 인해서!" 단리궁은 자신의 가슴을 툭 건드린다. "네… 네가?" 우문무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후후… 마가와는 각별한 원한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무슨 원한이냐?" "나의 성씨를 안다면 별로 이상하지 않을 그러한 원한이다." "너의 성씨가 무엇이기에, 마가와 각별한 원한이 있다는 것이냐? 설마, 네가……?" 우문무의 얼굴이 밀랍처럼 희어졌다. 그는 차츰차츰 단리궁에 대해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렇군. 너는… 단리씨(段里氏)로군?" 그가 차게 내뱉자, 단리궁의 미소는 문득 짙어졌다. "제대로 봤소. 나는 단리밀가의 대종손(大宗孫), 궁(弓)이오!" 단리궁은 꽤나 부드럽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고, 이번에는 우문무가 아주 차고 고집스러워졌다. "괴팍하고, 악독하고, 잔혹한 단리씨의 후예. 빠드득－ 이제야 네놈의 속셈을 알겠구나. 절정세가 운운하더니, 그것은 헛것이고… 사실은 노부를 협박해서 네놈의 종으로 쓰겠다는 것이었구나?" "글쎄!" "닥쳐라, 단리씨의 냄새 나는 놈!" "후후… 나는 스스로를 파문시킨 사람이오!" "파… 파문시켰다고?" "후후… 그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겠소. 후후, 그것은 나의 사생활에 관한 일이니까!" "으으… 음……!" 우문무의 눈빛은 점점 묘하게 흐트러졌다. "하여간… 그대들의 손이 필요한 때요. 물론 풀어 준다는 조건 아래, 그대들을 하수인으로 삼는다는 치졸한 짓은 하지 않겠소!" "그, 그렇다면?" "정당한 비무를 합시다!" "비… 비무(比武)?" "훗훗… 이기는 사람이 주인이 되기로 합시다. 그리고 바란다면 넷이 한꺼번에 덤벼도 좋소!" "미… 미쳤군, 너는……?" 우문무는 입을 딱 벌렸다. "믿지 못할 놈이다, 저 놈은!" "하여간… 세상은 달라졌다. 저런 녀석이 강호에 나타날 줄이야……!" 웅성거리는 소리 가운데, 일대는 차츰차츰 침묵의 바다로 빠져 들어갔다. 물경 한 시진. 우문무는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고 한 시진에 걸쳐 고뇌했다. 그는 이곳의 주인이고 비파겁(琵琶劫), 척살파천황(天煞破天荒), 삼안마불(三眼魔佛)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다. 그의 절정은 바로 사 인의 결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네 사람의 결정은 일천 생존자의 결정이기도 했다. 우문무는 심각히 생각하다가는 단리궁을 바라봤다. "너는… 미친 놈이 아니라면… 대영웅이다!" "훗훗… 나는 바쁜 사람일 뿐이오." "으음, 하여간 좋다. 어차피 노부에게는 손해가 없는 거래이니, 승낙하겠다." "좋소. 장부일언(丈夫一言)……!" "중천금(重千金)! 푸핫핫……!" 이번에는 우문무도 웃었다. 득의만만하고 자신있게……. 그리고 그의 웃음은 단리궁이 손을 쳐드는 찰나, 씻은 듯이 사라졌다. 보라! 단리궁의 손이 쳐들리며 오색기류(五色氣流)가 일제히 뿜어지는 것을! 파－ 파－ 팟－ 팟－! 네 줄기의 무지개가 일제히 뿜어지는 가운데 네 군데에서 쇳소리가 났고, 백여 년간 한 번도 풀리지 않았던 한철삭이 동시에 잘려졌다. 보검(寶劍)도 아닌 강기에 의해, 그것도 백도의 수법이 아닌 사문기공(邪門奇功)에 의해서! 네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들이 입을 벌리고 눈빛을 흩트리며 옷을 땀으로 축축이 물들이는 이유는 단리궁의 수법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바로… 절정천궁(絶頂天宮)의 주인이군." "으으, 속았다. 저 자는 바로 천년영웅(千年英雄)이다. 그렇다면 이미 마공에 있어서도 절정이다!" "싸우나마나… 지고 말았다!" "저 자가 한철삭을 끊은 수법은 오행살마력(五行煞魔力) 대천마연쇄인(大天魔連鎖印)이었다! 아아, 마공에서도 저 자는 이미 절정이다!" 소림사혼은 역시 뛰어난 거마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단리궁의 수법을 알아보고 넋을 잃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도 비무는 형식상 베풀어졌다. 단리궁은 십 초(招)를 예의상 피해 준 다음, 단 일 권(拳)의 수법으로 네 사람의 무릎을 꿇게 했다. 그 수법은 바로 모든 마공에는 극성이라는 영웅신권(英雄神拳)! 소림사혼은 무릎을 꿇었고, 그 순간 절정세가의 사대교두가 될 수 있었다. 기실 그들은 만 초, 천 초까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싸워 봤자 진다는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을 형식적인 절차로 마무리지은 것이다. 단리궁도 단리궁이나, 소림사혼 역시 위대한 중원의 괴물들이었다. 그들이 단리궁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중원마가가 절정세가와 합쳐졌다는 것 이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 * 팔만사천복마전(八萬四千伏魔殿). 소림사 승려들도 알지 못하는 전설의 장소이다. 지상에서 오백 장(丈) 지하에 파여진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지하동부. 그 안에서는 아주 묘한 예식이 베풀어졌다.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모를 천일 인(人).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은 근 삼백 세에 달했고, 가장 나이 적은 사람은 바로 단리궁으로 약관 이십 세였다. 천년마궁 안에는 이미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었다. 우문무(宇文武)가 대형(大兄)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있고, 그 아래 미혼(美魂) 비파겁(琵琶劫)이 있었다. 그 아래, 구천신마령주(九天神魔令主)가 있다. 이들 역시 한때 중원천하를 좌지우지하던 전설적인 마도 영웅들이다. 강호에 시산혈해를 이룩하다가 소림사 고수들에 의해 은밀히 제압되어 그 후 백여 년을 영어의 신세로 보낸 사람들. 이들은 이미 악마성(惡魔性)을 잃었다. 천년마궁의 기문진도는 마성이 무너지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여기서 백 년 이상을 머무른 사람은 누구이든 간에 마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 단리궁은 팔만사천마록(八萬四千魔錄)을 펴 보고 있었다. 맨 뒷장, 그의 눈길을 끄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인연자(因緣者)여! 이곳은 바로 그대를 위해 세워졌도다! 이제 남은 것을 하늘과 땅에서 버림받았던 마도고수들을 이끌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일뿐이다. 그들 모두를 위해 안배를 남겨 두었다. 이 안에 갇힌 사람들은 내공이 허탈한 상태에 있다. 해서, 언제고 그들이 정도로 돌아섰을 때 복용할 수 있도록 태환보단(太還寶丹)을 남겨 두었다. 팔만사천 마도고수를 제압한 우리들은 고금에서 가장 불우한 승려들이다. 인연자여! 그대에게 천하의 저력을 맡긴다. 이제… 천년마궁은 무너지리라. 태환보단이 들어 있는 장소는 천년마궁 중앙의 대철주(大鐵柱)이다. 그 안에는 약갑(藥匣)이 있고, 비급(秘給)이 있다. 모든 것을 그대, 영웅에게 남긴다!> 글을 적은 사람은 혜량선사(慧亮禪師)라는 사람으로, 천년마궁을 폐쇄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소림사상 달마대사 이후 가장 강했다고 불렸던 사람이었다. 대철주(大鐵柱)는 열 아름의 거대한 무쇠기둥이다. 그것 하나를 세우기 위해 한철(寒鐵) 팔만사천 관(貫)이 소모되었고, 청동(靑銅)이 천만 관(貫) 소모되었다. 그 일대에는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다. 단리궁은 우문무와 더불어 대철주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우문무는 팔짱을 끼고 단리궁을 따르는데, 그의 입가에는 자애스러운 미소가 떠돌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노부는…….' 그는 마성이 아니라, 강한 인간애(人間愛)를 느끼고 있었다. '노부와 노부의 수하들, 노부의 가문은 천하에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그 빚을 갚지 못하고 죽는다면 천하역사가 노부와 노부의 가문을 영원한 마(魔)로 낙인 찍었을 것이나,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문무는 단리궁에게서 강한 신기(神氣)을 느꼈다. 고손자뻘밖에 되지 않는 약관서생, 그러나 그는 이미 강호의 절대자였다. '저분은… 거성(巨星)이다!' 우문무는 단리궁의 사람이 된 것을 몹시 흡족히 여기는 눈치였다. 한순간, 단리궁은 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모두 멀리 물러나라고 하십시오!" 단리궁은 우문무를 수하로 대접하기보다, 연장자이자 원로고수로 대접하고 있었다. "헛헛… 알겠소이다!" 우문무는 미소지은 다음, 뒤로 물러났다. 파앗－! 그는 유성만리추(流星萬里鎚)라는 경공을 발휘해 뒤쪽으로 날아오르는데, 이상하게도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장대같이 뻣뻣이 서서 뒤로 물러났다. "뭣들 하느냐? 어서 물러서라! 으핫핫! 대총사(大總師)께서 하신 말씀이 들리지 않느냐?" 우문무는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우우, 명령에 복종하외다!" "카카－! 이제부터는 신명나는 일이 계속되겠는데?" 휘휙－ 휙－! 쇠사슬을 몸에 두른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계단이 있는 쪽으로 몰려들었다. 꾸역꾸역 나타나는 사람들, 너무나도 오랫동안 갇혀 살면서 마성을 씻으며 참회했던 인물들. 이들은 바로 소림의 비밀이고, 중원의 비밀이었다. 복마일천혼(伏魔一千魂). 훗날 고금에서 가장 강한 세력으로 평가된 가장 강한 무사집단, 소림사혼(少林四魂). 천 명의 거마 중 마혼(魔魂), 미혼(美魂), 살혼(煞魂), 불혼(佛魂)만을 말하는 이름이고… 복마일천혼의 지배자들이다. 모든 사람이 뒤쪽으로 물러날 때였다. 단리궁은 천천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자아……!" 그는 눈에서 혜광을 폭사하며, 영웅신권(英雄神拳)을 발휘해 냈다. 콰르르르－ 릉－ 콰르르르－ 릉－! 사막(沙漠)의 회오리바람처럼, 태풍(颱風)처럼 일어나 대철주 중단을 향해 몰려가는 태산 같은 권풍.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대철주가 나무젓가락 쪼개지듯이 쪼개지는 가운데, 하나의 거대한 철괘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단리궁의 팔 위로 떨어져 내릴 때였다. 쩌어어… 억… 쩌억……! 허공에서 집채만한 바윗돌이 떨어져 내리는 동시에, 바닥이 갈라지며 벽이 와그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산이 뒤집히고, 땅이 쪼개지듯 천년마궁은 천지개벽하는 폭음 가운데 함몰되기 시작했다. 용맹선원(勇猛禪院) 바로 아래의 지하공간이다. 흑포를 걸친 미청년이 팔짱 끼고 있고, 그의 뒤쪽에는 천 명의 흉측한 노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번들거리는 눈빛과 씩씩거리는 호흡 소리,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짓뭉개 버릴 듯한 흥분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일천 마혼(魔魂)은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단리궁이 조금 전 침묵을 명했기 때문에. 단리궁 앞쪽에는 그에게 천년문을 일러 주었던 공공천불(空空天佛)이 합장한 채 서 있었다. 공공천불은 자애스러운 눈빛 가운데 지극히 경동하는 얼굴이었다. '아아, 저 정도일 줄이야! 마혼을 가진 자들이 잡혀 있을 줄은 짐작했으나, 저 정도일 줄이야…….' 공공선사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 때였다. "이들은 모두 의협이 될 것이외다, 노선사!" "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기실, 이들은 나오는 대로 소림사를 박살내어 수백 년간 갇혀 지낸 원한을 풀겠다고 했으나… 소생이 만류했소이다!" "으음……."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인연(因緣)이기에!" "아… 미… 타… 불……!" "이제 노선사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외다!" "어떻게 도와야 하오?" "일천 마혼이 정도로 돌아섰다는 것은 천하를 위해 거대한 행운이올시다. 이제 백도는 힘에서 마도를 능가했소이다!" 단리궁의 눈빛은 신비하다. 그는 무수한 기연을 얻은 끝에 더욱 가공할 무공수준에 이른 듯했다. "나는 삼동지계(三動之計)를 생각하고 있소이다. 한날 한시에 철대군주 휘하세력을 세 곳에서 격파하는 것이 계획이오!" "……." "그 중 한 곳은 대륙무림회! 한 시진 후 개최될!" "으음, 다른 두 곳은?" "또 한 곳은 혈거봉, 또 한 곳은 화염산(火焰山)!" "혈거봉이라면 절정세가가 있는 장소. 그곳은 알겠소만, 화염산이라는 곳은 어떠한 곳인지?" 공공천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염산(火焰山), 그러한 이름은 중원의 인물은 알지 못하는 지명이다. 그곳은 대체 어떠한 곳일까? "후후… 그곳은 바로 철왕대가(鐵王大家)가 있는 곳이외다." "철… 철왕대가?" "그렇소이다. 화염산은 외몽고(外蒙古) 깊은 곳에 있는 악마의 땅이오. 그 곳에는 천하를 상대로 도박을 하고자 하는 악마의 무리들이 모여 있소. 그들 중 많은 자들이 중원에 나왔다고는 하나, 아직도 수많은 자들이 거기 몰려 있소이다." "아아……!" "그들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중토(中土)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불 것이외다." "그럼… 노납은 어이해야 하오?" "저는 일천 마혼 중 오백을 외몽고로 보낼 예정입니다." "……." "소림사에서도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그래도 중원에서는 가장 강한 고수들이 소림사 승려들이니까." "얼마나?" "백팔(百八) 번뇌천(煩惱天) 모두!" "으음……." 공공천불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는 번뇌가 심한 듯, 주름살을 지었다. 공공천불은 일다경(茶頃)이 지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불타의 뜻이라면 하는 수 없지요. 노납이 친히 외몽고로 가겠소이다." "고맙소이다." "아미타불… 하오나, 육백여 명 정도로 철왕대가가 무너질지?" "후후… 육백이 아니라, 육천이외다." "또 갈 사람이 있소?" "달단국에는 저의 지인(知人)이 있습니다. 달단왕녀(達檀王女) 모용운교(慕蓉雲巧)입니다. 그녀의 휘하고수와 힘을 합한다면, 열흘 안에 철왕대가를 괴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열… 열흘?" "후후… 그것도 넉넉히 잡은 것입니다." "어… 어이해서?" "비조군(飛鳥軍)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리궁이 활짝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은 정말 밝고 아름다웠다. 일 식경(食頃) 후, 숭산(嵩山) 도처에서 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일은 제사세력(第四勢力)의 신비한 활약으로 인해 나타나고 있었다. * * * 천불벽(千佛壁). 천 개의 마애불(磨崖佛)이 살아 있는 부처마냥 자애스럽고 성스러운 모습으로 천 장 벼랑에 걸려 있다.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석공(石工)들이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천 개의 부처상 아래쪽, 난석곡(亂石谷)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일대에는 언제부터인가 가공할 포진(布陣)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대에 모여든 일만여 무사들은 뜻도 없는 허무한 시선에, 습관적으로 독검(毒劍) 자루를 쥐고 권태롭다는 듯 주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자색 두건으로 가렸고, 전신을 자포로 휘감은 사람들인데… 이들의 옷가슴에는 하나의 마등(魔燈)이 붉은 수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 독비천마(獨臂天魔) 우문장산(宇文長山)이라는 자! 그는 십팔 검마왕(劍魔王)을 대동하고, 소실봉 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사흘을 보낸 자였다. 독비천마 우문장산은 지옥혈마단의 제칠부단주(第七副壇主) 지위에 올라 있는 자였다. 오만하고 흉폭하기만 했던 우문장산, 그가 지금 사지를 벌벌 떨며 절을 꾸벅꾸벅 하고 있었다. "백조(伯祖), 정녕 백조이십니까?" 그는 엉거주춤 섰고……. "무례한 놈, 노부가 네놈을 친히 찾아와 마가의 영부(令符)를 보여 주었거늘… 감히 노부의 정체를 의심하다니!" 방금 전 그의 눈앞으로 나타난 대나무같이 마른 중년인. 얼굴빛은 밀랍처럼 희고, 살색은 흰눈처럼 은은한 흰빛을 띠고 있었다. 두 눈은 혈지(血池)마냥 시뻘건데, 그 눈빛을 보기만 해도 어지간한 사람은 의식을 잃으리라! 그의 손에는 하나의 패가 쥐어져 있었다. 천년마등령(千年魔燈令). 패는 우문장산 코앞으로 내밀어졌다. "네놈의 이름이 장산이라고?" "예… 예… 예……!" 우문장산은 어른 앞의 아이였다. "네놈은 가법을 아느냐?" "압니다." "그래, 얼마나 아느냐?" "소싯적부터 줄줄 외우고 있습니다." "그런 놈이 천년마등령을 보고도 노부의 정체를 의심한단 말이냐?" "너… 너무나도 꿈 같은 일인지라……!" 우문장산, 그는 중원마가의 제이인자였다. 그는 우문혜를 제외하고는 서열이며 배분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중원마가의 전통을 누구보다 신봉하고, 우문가의 피를 타고난 것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였다. 그리고 마가의 몰락을 누구보다도 치욕스럽게 여기는 자였다. 그가 마음 속의 지주로 여기는 사람은 무신도 아니고, 소림의 대달마도 아니었다. 중원 마가사상 가장 강했던 무사, 마가의 모든 무공을 완벽하게 터득했던 무사. 바로 벽력마천자 우문무가 그의 신이요, 우상이었다. 그런데 죽었다고 알려진 우문무가 돌연, 그의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우문장산은 너무 놀란 나머지,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만다. 우문무의 눈에선 벽력화 같은 신광이 뿜어지고 있다. "고얀 놈, 감히… 변황육가와 손을 잡다니……." "제… 제가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결정했느냐?" "우문추(宇文鎚) 가주께서……." "추? 그 놈은 어디에 있느냐?" "마가 안에 계십니다." "어리석은 놈, 정녕 어리석은 놈……." 우문무는 한순간 노화를 참지 못하고 발을 쿵 굴렀고, 순간 일대의 지반이 지진을 만난 듯 쩌억 갈라지고 만다. 일대에 서 있는 사람은 없다. 우문장산이 무릎을 꿇음과 동시에, 모든 마가무사들이 사지를 바닥에 대었던 것이다. 벽력마천자 우문무, 그는 단리궁의 명령에 따라 여기에 나타났다. 단리궁은 시산혈해를 이룩하기보다 조용한 승리를 이룩하기 위해서, 마가사람들을 암중에 사방에 내보낸 것이다. 대풍운(大風雲) 대륙무림회장의 열기는 정오(正午)가 되어 감에 따라 흥분의 극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다. 보라! 만여 자루의 검이 일제히 뽑히는 것을. 차앙－ 창－ 창－! 검산도림(劍山刀林)이 산상을 누비는 가운데. "우우, 온다." "저기… 그들이 온다." "천하의 공적 단리우(段里雨)를 제압한 강호칠십이로(江湖七十二路) 고수들이 저기서 오고 있다." 중인이 환호하는 가운데, 산로(山路)를 그득 메우며 인간의 성(城)이 행진해 오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전포를 걸친 무사들, 이들의 수는 사만을 육박하고 있다. 두우－ 두두－ 두두－! 천지를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 가운데, 사만여 기마고수들이 한 대의 철차(鐵車)를 호위하며 무림회장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되었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 되어 간다. 후후, 저들은 바로 첩목대제(帖木大帝) 휘하의 고수들이다." "저들은 우리들이 신호를 하는 순간, 본래의 복장으로 회복하며 근처의 강호백도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척살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때 혈번(血幡)을 꺼내 신분을 밝히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마(魔)의 세상이다." 거대한 철차(鐵車), 오리알 굵기의 철주(鐵主)들이 세 치 간격으로 촘촘히 박혀 있는데… 전체적인 모양은 정방형(正方型)이었다. 그 안, 하나의 석상(石像)처럼 머물러 있는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하나 있었다. 머리는 산발(散髮)이고, 걸치고 있는 옷에는 핏물이 묻어 있었다. "형(兄)은 위대하오. 과거나, 지금이나." 그는 팔짱을 낀 채 태실봉의 대륙무림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우－ 두두－! 철차 둘레에는 십팔 기(騎)의 거마(巨馬)가 따르고 있는데, 거마는 하나하나 천마(天馬)였다. 천마란 몽고 특산의 명마를 말한다. 달리다가 지칠 경우, 핏빛 땀을 흘린다고 해서 한혈마(汗血馬)로 불리는 대륙제일의 명마. 열여덟 마리의 한혈마 위에는 전포(戰袍)를 걸친 노년배 고수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천년밀가를 무찌르기 위해 한데 모였던 강호칠십이파 가운데에서 명문거파(名門巨派)로 불리는 십팔 파의 수로(首老)들이었다. 사천당문(四川唐門), 월하고죽장(月下孤竹莊), 한당세가(寒塘世家), 육지거룡방(陸地巨龍幇), 음산파(陰山派) 모산검파(茅山劍派),천리무영궁(千里無影宮), 악씨세가(岳氏世家), 공래파(供崍派)…. 십팔 인의 노고수들의 손에는 복수검(復讐劍)이 들려 있었다. 검자루에 백건(白巾)을 질끈 동여맨 사 척 거검(巨劍), 그리고 황진을 일으키며 움직여 가는 철차……. 태양달뢰(太陽達賴), 그는 철차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단리세가는 오늘로서 무림사(武林史)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훗훗, 일통천하(一通天下)가 시작된다!" 태양달뢰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환우혈맹의 태양호법 자격으로 여기에 왔다. 그는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입장이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사악한 광망이 폭사되어 나왔다. '저기 오는 자들은 모두 가짜들이다. 저들은… 후후, 첩목대제가 이끄는 대척살단(大擲殺團)의 철왕시위(鐵王侍衛)들이다.' 태양달뢰의 눈빛은 더욱 밝아졌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일대에는 그의 휘하고수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일대의 전통적인 주인이던 소림사는 잠자는 거인(巨人)이고, 삼산오악에서 몰려온 백도인들은 정황을 잘못 알고 있다. "후후… 오늘은 중원혼(中原魂)이 구천(九泉)을 떠돌기 시작하는 날이다!" 그는 법포 속에 손을 넣었다. 그곳, 하나의 삼각기(三角旗)가 들어 있었다. "이것을 꺼내 흔드는 찰나… 후후, 이곳은 피바다(血海)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위대한 시대(時代)가 시작된다." 태양달뢰는 삼각소기를 거머쥐었다. 그러는 사이, 단리우를 태운 거대한 수레는 대륙무림회의 한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그것이었다. "죽여라! 죽여라!" "우우, 만악의 괴수인 밀가의 후예를 죽여라! 우우……!" "저 놈을 당장 참형(斬刑)하라!" 유난히도 요란하게 소리치는 사람들, 그들은 흑포(黑袍)를 걸치고 있고 맨바닥에 포단이나 방석도 없이 털썩 걸터앉아 있었다. 옷차림이 수수하고 눈빛도 흐리멍덩하다. 강호낭인(江湖浪人)들의 전형적인 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유난히도 키가 헌칠한 청년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사방을 쓸어보고 있었다. "정오가 되면… 훗훗, 시작되겠군!"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그리고 턱을 매만지고 있는 흰 손에는 가는 경련이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그의 둘레로 네 사람이 은밀히 다가서고 있었다. 깡마른 네 명의 노인들, 이들은 무공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마냥 휘청거리며 흑포인들 한가운데 있는 청년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는 가운데, 중인은 알아듣지 못할 혜광심어(慧光心語)에 의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일천 혼(魂)이란 사람들은 정말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들로 인해 속하들은 할일을 잃어 버렸소이다, 가주(家主)! 주인은 해도 너무한 분이외다. 그래, 대체 어디서 그리도 강하고 신비한 사람들을 천 명이나 데리고 오셨소이까? 그들로 인해, 속하들은 가장 중요한 싸움에서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하게 되었소이다!" "소림사 사람들이 조용히 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림사 일대에 퍼진 철류흔의 수하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가운데, 세 겹이나 포위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명(下命)뿐입니다!" 네 사람은 절정세가의 사대봉공(四大奉公)들이었다. 그리고 허름한 흑포을 걸친 사람은 바로 단리궁이었다. "수고들 했소, 네 분!" 그는 입술도 벌리지 않고 말을 전했다. "그리고 내가 찾으라고 한 일은 찾아 봤소?" 그는 팔짱을 낀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동영제일인 혈무흔이었다. "오셨습니다. 말하던 그분은!" "으음, 어디에?" "서쪽입니다. 그분은 일천 밀수(密手)와 더불어 변장을 하시고 오셨습니다. 아마도 최후의 순간, 어기비검(馭氣飛劍)으로 철차를 부수어 버리고 우공자(雨公子)를 꺼내실 것 같습니다!" "으음, 수고했소!" 단리궁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한 사람, 그는 대륙무림회장에서 가장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포(靑袍)를 걸친 황면(黃面)의 중년무사. 그는 학자(學者)들처럼 보이는 일천여 청의인들과 더불어 대륙무림회장의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철차가 다가서는 것을 보며 주먹을 꽈악 쥐고 있었다. '어리석은 녀석. 그래, 그런 꼴이 되다니……!' 그의 손바닥은 땀에 축축이 젖고 있었다. '아아, 천하가 우리 가문을 완전히 버렸다. 우리 가문은 천하를 위해 천 년 세월을 바쳤거늘, 그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대접하고 있다. 한데, 붙잡힌 저녀석은 태평스럽게만 보이니…….' 사지를 부들부들 떠는 사람, 그는 유난히도 고집스러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허리에는 장검 하나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괘씸한 녀석, 이런 때마다 그 비정(非情)하고 지독한 놈이 생각난다. 그 놈은 천하가 이 지경이 되고, 가문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정녕 가문을 버린 양, 모르는 척하고 있다. 궁(弓)! 그 놈은 대체 어느 하늘 아래 있단 말인가?' 중년인의 볼이 실룩거리고 있을 때였다. 츠으으－ 읏－ 츳－! 돌연, 그가 있는 곳을 향해 가공할 기운이 다가서고 있었다. 그 기운은 청의중년인 일대를 휩쓸었고, 그로 인해 대륙무림회장을 바라보고 있던 청포인들의 진열에 파란이 벌어졌다. "어엇, 어디서 이런 기운이?" "묘하군. 갑자기 바람이 불다니……." 휘청이며 상체를 흔드는 사람들. 그 중에는 막대한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한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 중인 가운데로 다가서고 있었다. 펄럭이는 흑포에, 얼굴의 반을 가리는 커다란 흑립(黑笠), 지니고 있는 병장기는 하나도 없고 수하도 거느리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 그는 중인들 틈으로 다가섰고, 일대는 삽시간에 바쁜 그림자들로 분주해졌다. 어느 새 검을 뽑아 들고 다가서는 자들. "막아라! 살수(煞手) 같다!" "설마, 우리들이 우공자를 구출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무리가 있단 말인가?" 일대에는 살막(煞幕)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검은 그림자로 인해 일대에는 살기가 자욱이 깔렸다. 청포인은 흑포인이 다가서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고집스럽고 완고한 표정은 차츰차츰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정녕 묘한 그늘이 매달리고 있었다. "녀석, 끝까지 무심한 것은 아니로군!" 그는 상체를 휘청이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는 흑포인을 향해 비밀스러운 검진 하나가 시전되고 있는데, 돌연 중인 가운데에서 몇 마디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로… 그분이시다!" "아아, 궁(弓)이시다!" "대… 대종손(大宗孫)이시다! 오오, 대종손이시다!" 눈가를 시뻘겋게 달구는 노년의 고수들,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모든 사람이 단리씨(段里氏)라는 것이었다. "너……!" 만감이 교차되는 표정을 짓는 중년인, 그는 바로 단리화(段里華)였다. 몰락해 가는 가문의 가주(家主)이고, 문제아를 아들로 둔 탓에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지금 그는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제가… 왔습니다!" 단리궁, 그는 아버지를 보고 허리를 숙였다. "녀석, 네가… 왔구나……!" "아버님, 오시리라 여겼습니다!" "네놈은… 어떻게 지냈느냐? 신색을 보니, 고생이 심한 듯하구나?"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으음, 하필이면 이런 때에 네놈을 보다니……!" 단리화는 아들을 수 년 만에 만나는 감회와 함께, 조카를 향해 참수자(斬首者)들이 다가서는 것을 보는 아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검을 불끈 쥐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지금은 급한 때다!" 그가 나직하고 고집스럽게 말할 때였다. "손쓰실 것 없습니다!" 단리궁의 대답은 아주 태평했다. "없다니? 너는 이곳의 사정을 모른단 말이냐? 네 동생 우가 죽기 직전이고, 천하무림인이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을 모르느냐?" "훗훗… 그것은 그림자입니다. 진짜는 다릅니다!" "진짜? 그것은 또 무엇이냐? 네놈은 예나 지금이나, 아비가 통 알지 못할 말만 지껄이는구나?" "아버님이 할일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서 천하맹주(天下盟主)로 등용하시는 일입니다!" "뭐… 뭐라고?" 단리화가 허리를 꺾을 때였다. "훗훗… 소자, 약간 이룬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무… 무슨 소리냐?" "보시겠습니까?" 단리궁은 느릿느릿 손을 쳐들었다. 너무나도 흰 손이다. 그 손은 정오의 하늘로 쳐들려지는데……. 바로 그 순간. "이제… 시작이다!" "자아, 너무나도 오랫동안 참았다. 훗훗……!" "드디어… 풍운은 시작인가?" 단리궁의 손만 보고 있던 무수한 사람들의 눈빛이 번쩍였고……. "훗훗… 이제 백도를 역사에서 사라지게 하라!" 언덕에 선 노라마 태양달뢰(太陽達賴), 그는 득의만만한 표정 가운데 소매 속에서 삼각기를 꺼내 번쩍 쳐들었다. 삼각소기가 흔들리는 찰나, 철차 주위에 있던 십팔 인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천하에 고한다! 이제 천하를 어지럽혔던 악마의 세력은 환우천하에서 사라져야만 한다!" 차앙－ 창－ 창－! 번쩍 번쩍거리는 검광(劍光), 무수한 깃발과 기치들……. "이제 백도천하는 하나로 뭉치리라! 그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중원이여, 이제 깨어나리라!" 열여덟 자루의 보검은 철차 쪽으로 일제히 내뻗쳐졌다. 파파팟－ 팟－ 팟－! 파공성에 이어 강철음이 요란하더니, 철차의 무수한 철주들이 하나 남김없이 끊어지는 가운데 철차 안에 앉아 있던 단리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강직해 보이는 얼굴 가운데, 싱긋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맙소이다, 십팔명숙(十八名宿)!"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헛헛… 이제는 흑과 백이 가려질 것이외다!" "이제 천년밀가와 백도계의 오랜 알력은 말끔히 씻어질 것이외다!" "단리공자, 그간 무례를 저지른 것을 용서하시오!" 십팔 인은 단리우를 향해 일제히 장읍(長揖)을 취했다. 그들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다. 그들은 진짜면서도 가짜행세를 한 것이다. 그리고 사방에서는 경악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저… 저 자의 목이 잘려야 하는데……?" "어엇,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대, 대체… 무슨 일이냐?" 입을 딱딱 벌리는 사람들, 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태양달뢰가 삼각기를 쳐드는 찰나, 그것과 비슷하고 크기만 작은 혈번(血幡)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는 것이다. <마(魔)> 쳐들려진 깃발은 사만여 개, 깃발을 꺼내는 사람은 암중에 환우혈맹에 입맹했던 백도의 위선자들이었다. "어어… 엇, 이제 보니 우리들만 한자리에 모였구나!" "으으, 지옥혈마단은 어디에 갔느냐?" "으으,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무래도……!" 뭇고수들이 새파랗게 질리는 이유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만여 무사들, 이들은 자신들의 벗이 누구인지 이제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이들은 깃발을 꺼낸 후, 깃발을 꺼내지 않은 사람들을 골라 척살하고자 맹세한 바 있었다. 한데, 일대에 있는 사람은 모두 혈번을 꺼내는 사람들이지 않는가? 보라! 언제 나타났을까?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수들이 혈번을 쳐든 지옥마검대(地獄魔劍隊) 일대로 들이닥치고 있지 않은가? 꾸역꾸역 나타나는 무수한 고수들, 이들의 가슴에는 수실로 네 개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절정세가(絶頂世家)> 회오리바람과 함께 나타나는 삼만여 고수들, 이들은 대륙무림회장 한가운데로 모여들었고… 그들이 모여드는 찰나, 숭산 전역에서는 피보라가 일어나고 있었다. 등마령(騰摩嶺), 월광벽(月光壁), 오죽곡(烏竹谷), 황사평(黃沙坪)……. 풍운(風雲), 풍운(風雲)……! 오십 리 방원 이내가 삽시간에 회오리바람에 휘감겼다. 심지어 이제껏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소림고수들마저도 대거 나타나 풍운에 동참하고 있었다. 무려 십오만(十五萬). 태실봉과 소실봉, 그리고 준극봉으로 이어지는 산령에서는 일제히 전운(戰雲)이 일어나고 있었다. "와아아! 변황의 무리들은 척살하라!" "우리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참아 왔다!" "핫핫… 변황의 무리들보다 더 나쁜 자들은 위선자들이다. 그들만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우우… 우우… 아느냐, 중원의 혼을?" 숭산은 전운에 휘말렸고, 하늘은 이 순간따라 더욱 높고 푸르러 보였다. 끝없이 일어나는 바람과 구름, 그리고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 쓰러지고, 베고, 쓰러지고… 구월십오 일은 풍운의 날로 화하고 있었다. 일천 명, 이들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신속하게 동심원을 이룩했다. 하나같이 옷차림이 허름하고 머리는 봉두난발이다. 게다가 이들의 목에는 흉칙한 철삭이 둘러져 있다. 천 명의 고수들은 탄지지간(彈指之間)에 태양달뢰가 서 있는 근처를 완전무결하게 뒤덮었다. 복마일천혼(伏魔一千魂). 단리궁에게 충성을 맹세한 천년마궁의 고수들, 이들은 절정세가의 인원 가운데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강했다. 태양달뢰는 삼각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손가락에서 힘이 빠짐과 동시에 스르르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대체, 대체… 누구지?" 태양달뢰의 얼굴은 시꺼멓게 물들었다. 그는 측근 수하들과 함께 복마일천혼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꾸역꾸역 나타나 인간의 벽을 쌓아 버린 복마일천혼. 이들 하나하나는 최하 이백 년 수위의 내공을 지니고 있다. 과거 중원의 마도흑도계를 주물렀던 암흑의 고수들, 이들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진세를 이룩한 다음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애송이들, 이제 중원이 넓다는 것을 알겠느냐?" "큿큿… 네놈들의 수하들은 모조리 제압되었다. 큿큿, 새벽부터 지금까지 소리 없이 잡힌 자들만 해도 일만사천이다!" "그리고 마가의 아해(兒骸)들은 모두 항복했다." "후후… 하늘 밖의 하늘(天外天)이 있지. 훗훗, 그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복마일천혼은 천천히 벽을 좁혔다. 그들은 대지를 짓뭉개는 기세을 일으키며 다가섰고, 태양달뢰는 몸을 휘청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혜성(彗星)이었다. 지난밤에 본 천기대로 오늘은… 혜성의 그 날이다!" 복마일천혼은 느릿느릿 진세를 압축시켜 나아갔다. 그들의 모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류는 허공에서 하나로 뭉쳤고, 그로 인해 반경 삼 리 안이 먹물같은 검은 장막으로 뒤덮였다. 격체전력(隔體傳力)에 의한 허공합벽강(虛空合劈剛). 태양달뢰와 그를 추종하는 철왕시위대(鐵王侍衛隊), 태양라마대(太陽喇魔隊)는 막대한 잠경에 휘말려 몸을 휘청거려야 했다. 꽈르르르－ 릉－ 콰앙－! 천지개벽하는 폭음 소리, 태양달뢰는 눈가를 찡그리며 볼을 실룩거렸다. "그것은 절정마공인 허공합벽강이다. 그대들은 마도인들 같은데, 대체 어떤 자들인가?" 그는 내공을 모아 외쳤고, 중년인 하나가 진열 한가운데서 피식 웃고 있었다. "후후… 노부로 말하자면 사연이 복잡한 사람이다, 아기 중!" 겉보기로는 나이가 오십 전후인데, 그는 태양달뢰를 아기 중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네놈은 믿지 못할 것이다. 훗훗, 우리 늙은이들이 그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갖고 있는지를!" 우문무, 그는 복마일천혼의 대표자 자격으로 태양달뢰를 맡고 있었다. 우르르르－ 릉－! 폭음 소리가 요란할 때, 태양달뢰는 입술을 악물었다. "누구인지 모르나, 우리의 허점을 노려 대역전을 시켰군. 하지만 이미 싸움은 중단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늘이 어찌 되었든, 철대군주는 운명이 정한 천하의 절대지존이시다." 그는 손을 쳐들었고, 양 손목에 걸려 있던 두 개의 환(環)이 태양비발이라 불리는 두 개의 바퀴가 되어 그의 손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시위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우우, 진세를 뚫어라!" 태양달뢰는 혈광 속으로 사라지며, 상승기류를 타고 십여 장 위쪽으로 훌훌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치리리리－ 릿－ 치릿－! 무시무시한 핏빛 기류가 일어나는 찰나. "쳐라!" "저 괴물들을 짓밟아라! 카카－!" "우리들을 막지는 못하리라!" 오천여 자루의 독검이 뽑히는 가운데, 일대는 수천 줄기의 검세(劍勢)에 난도질되기 시작했다. 빗살처럼 뻗어 나가는 예광(銳光) 가운데, 복마일천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일제히 외치고 있었다. "요즘 어린 것들은 정말 독하군!" "상대가 되지 않는 줄 뻔히 알면서도 저항하다니!" "고약한 것들! 감히 중원의 무공을 능멸하려 하다니……!" "크크… 우리도 시작합시다!" "일인당 다섯 이상을 해치워서는 아니 되오. 한 사람이 너무 많이 해치우면 뒷사람이 적적할 테니까!" 휘휙－ 휙－ 휙－! 가공할 기세로 다가서던 복마일천혼은 부챗살처럼 흩어졌고, 검은 그림자가 검광 사이로 언뜻언뜻 지나쳐 가는데… 수십 군데에서 무시무시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따당－ 땅－! 요란한 쇳소리가 일어나며 불똥이 튄다. 복마일천혼은 똑같이 병기를 쓰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목에 걸고 다니던 한철삭이었다. 따당－ 땅－! "어이쿠우! 내공이 이리도 강하다니! 중원에 이런 자들이 있다니……." "으윽, 하나하나 사신(死神)들이다!" 퍽－ 퍽－ 퍽－! 둔팍한 소리가 나며 무수한 사람들이 잇따라 쓰러졌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복마일천혼이 이동하는 동시에, 철왕시위대는 여지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고금에서 가장 강한 무사집단으로 평가받았던 철왕시위대는 걷잡지 못할 기세로 허물어졌다. 복마일천혼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진중을 누비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철황시위대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백 년 이상 무공을 쓰지 못했던 과거의 중년거마들. 이들은 둑이 터지고 장강의 물이 일제히 흘러 넘치는 기세로 철왕대진(鐵王大陣)을 허물어뜨렸다. 허공, 그곳에서는 더 가공할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발을 꺼낸 태양달뢰, 그는 허공을 사선으로 가르며 날아든 그림자 네 개에 포위되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 그대들마저……?" 태양달뢰의 살색은 아예 백지보다 희었다. 나타난 네 사람, 이들은 바로 절정세가의 창업공신들이고 단리궁과 가장 친한 변황사천(邊荒四天)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태양달뢰를 바라보며 합장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태양, 오랜만이로군!" 자비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노승의 눈에서는 깊이를 알지 못할 혜광이 뿜어져 나갔다. "그… 그대는 천룡(天龍)?" 태양달뢰는 사지를 뒤틀었다. 그가 보고 있는 사람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갖고 있었다. "아… 아직 살아 있었느냐?" 바로 천룡달뢰(天龍達賴). 태양달뢰에게 천축의 기반을 빼앗기고, 중원을 떠돌았던 천축제일인. 그는 합장한 채 자비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태양, 천축무림계에서의 배분으로 따지자면 그대는 노납의 후배이다!" "으음……." "그대는… 본시 선한 사람이었다. 한데, 철류흔이란 악마의 유혹에 빠져 돌이키지 못할 겁로(劫路)에 끼여든 것이다." "닥… 닥쳐라! 네게는 노납을 향해 충고할 자격이 없다!" 태양달뢰는 더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네 사람은 사상진(四象陣)으로 태양달뢰를 포위한 채, 태양달뢰와 같은 속도로 떠올랐다. 태양달뢰가 동으로 가면 동으로 움직이고, 몸을 뒤틀며 사선으로 떠오르면 똑같은 동작으로 따라 움직인다. 태양달뢰는 어디로 가던 진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려 백 초(招). 태양달뢰는 갖은 방법을 다해 진세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천룡달뢰가 주축이 되어 있는 항마사상대진세 안에 갇혀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대체… 대체 누구냐?" 태양달뢰는 허공에서 일시 정지했다. 그는 역시 마도의 절대자였다. 그는 허공에서 몸을 정지시키고도 흔들림 없이 입술을 벌리고 말했다. 마가층층공(魔伽層層功). 태양달뢰를 환우혈맹의 제이인자로 만든 수법이다. "그대들 뒤에… 누가 있지?" 그가 눈가를 찡그리고 말할 때였다. "별사람 아니오." 그의 고막 속으로 젊은 목소리가 또렷이 파고들었다. 소림사 쪽 언덕 위, 소림사의 공공천불이 오랜만에 용맹선원을 떠나 서 있는데… 그의 곁에는 얼굴이 신비한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말을 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절정서생이오, 나는……!" "절, 절정서생? 그… 그대가… 천하의… 인물인가? 이 모든 일은… 그대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졌는가?" 태양달뢰는 볼을 실룩이다가 사방을 둘러봤다. 절정세가의 사대봉공은 손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태양달뢰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노납은… 죽일 가치도 없다는 것인가?" 그는 천천히 손을 들었고, 그의 손에 들린 태양비발은 햇살을 받고 핏빛으로 반짝거렸다. "으으, 그러나… 악마는 이긴다. 꼬옥……!" 그는 울컥 치미는 마성을 이기지 못하고 태양비발로 천령개를 내리쳤다. 순간. 꽈앙－! "……." 폭음과 더불어 태양달뢰의 머리통은 사라졌고, 허공에는 뽀얀 피안개가 흘렀다. 허연 뇌수가 뚝뚝 떨어졌고, 목이 없는 시신은 절벽 아래로 돌이 떨어지듯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천룡달뢰는 괴로운 듯 합장을 했고, 단리궁도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탄식을 하였다. "아아, 붙잡히느니… 자결을 택했군. 환우혈맹의 마두들은 골수까지 마성에 젖어 도저히 정도로 돌이킬 수 없는 자들이란 말인가? 그는 조용히 눈길을 내리깔았다. 그는 단리화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슬쩍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는 중인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모든 사람이 단리화와 단리우 곁으로 달려들어 사죄의 말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몸을 슬쩍 빼낸 것이다. '내가 단리씨라는 것은 비밀이어야 한다. 여차할 경우, 철류흔이 세가를 이용해 나를 위협할 수도 있기에…….' 그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하나의 죽립이 유난히도 무겁게 느껴졌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일대는 수만 명의 시체로 뒤덮였다. 산령을 뒤덮은 무수한 시체들, 마가가 은밀히 항복했다 해도 싸움의 규모는 고금에서 가장 거대했다. 지옥혈마단은 광인들로, 동료들이 죽어도 공포심도 갖지 않고 싸우다가 모조리 죽었다. 피비린내가 유난히도 역겹다. 구월 하늘은 핏빛과 대비되어 이상하게도 푸르고 높아 보였다. "눈이 오기 전,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힘들겠다." 단리궁은 죽립 끈을 묶으며 공공천불을 바라봤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공천불을 본다. "남은 일은… 대사께 맡깁시다!" "시주는 떠날 것이오?" "예." "아미타불… 천기가 아직도 어둡소!" "압니다!" "알다니……?" "이곳의 싸움은… 앞으로 있을 싸움의 오분지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오……!" "철류흔은 모든 휘하조직을 점조직으로 꾸민 자입니다. 태양달뢰는 그의 직속부하로 환우혈맹에서는 제이인자이나, 철왕대가 쪽 인물이 아니기에 대임을 맡지는 못했습니다!" "그럼… 또 다른 조직이 있소?" "무수합니다!" "아… 미… 타… 불……!" 공공천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단리궁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 있습니다. 소림사의 공기가 좋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도 힘이 나는군요." * * * 우(雨), 그는 영악스럽게도 단리궁이 슬쩍 빠져 나가리라는 것을 눈치채고 먼저 금붕(金鵬)이 있는 곳에 나타나 있었다. 그는 철포(鐵袍)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뒤쪽에는 밀가의 수천 고수 중 가장 강하다고 일컫는 밀천친위대(密天親衛隊)가 도사리고 있었다. 우, 그는 단리궁의 미소를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님, 가시지요." "이 녀석, 네놈을 숭산에 떼어 놓고 가려 했더니……!" 단리궁은 활짝 웃고 만다. "핫핫… 이제는 형님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아버님의 말입니다!" "아, 아버님?" "아버님은 강호명숙들이 절을 하자, 기분이 좋아지신 듯합니다. 보십시오!" 단리우는 빙그레 웃으며 이제껏 허리에 차고 있던 길다란 헝겊더미를 단리궁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검(劍)이었다. 헝겊으로 둘둘 만 장검, 철혈(鐵血)! 세상에서 가장 강한 한철(寒鐵)에 자금사(紫金砂)를 섞어 백만 번 담금질해 만든 무적신병(無敵神兵). 그것은 바로 단리세가의 가주 지위를 상징하는 보검이었다. 검신에는 끈이 묶여 있었다. <너는 이제 밀가주이다. 네녀석은 이제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우가 내내 너를 따라다닐 것이다. 네가 밀가로 돌아오는 그 날까지! 지난 일은 이야기하지 말자! 우리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가족이니까! 여기 구결(口訣)을 적는다. 네가 배우지 않은 본가의 비전이다. 일컬어 철혈무(鐵血舞)! 짧은 구결이나, 깊은 뜻이 있다. 밀가에서 너를 만나겠다. 이 겨울이 가기 전 혈겁을 진정시킨다면 도망쳐 나간 죄를 용서해 줄 것이고, 진정시키지 못한다면 호된 꾸중을 들을 줄 알라! 천하제일인이라 하더라도, 가문 안에서는 최연소자이다!> 애정으로 기록한 글이다. 그리고 단리궁이 처음으로 대하는 천년밀가의 최후검결(最後劍訣)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철혈무(鐵血舞). 한번 펼쳐지면 다시는 거두어지지 않고, 검무지개가 백 장 길이로 늘어나는 가운데 만사만악(萬邪萬惡)이 타 버린다. 그 가공할 패도적 기운은 고금에서 가장 강하다. 단리궁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무공수준을 가일층 높일 수 있었다. '이것이라면… 마지막 비결이 될 수 있다. 아아, 나의 가문에서 이것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 있었다면… 강호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단리궁은 선 채 검결에 빠져들었고, 단리우는 형의 얼굴을 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형은 여전하군. 무엇이든 한번 손에 쥐면 미치도록 빠져드는 것은……!" 그리고 일대의 혈겁이 진정되는 가운데, 백도인들의 환호성이 창궁을 깨뜨리고 있었다. 운명(運命)아, 여인(女人)아… 혈거봉(血巨峰)은 월광(月光)에 물들고 있었다. 유난히도 차가운 밤바람이 일대를 휘감는 가운데, 얼마 전부터 혈거봉을 휘감은 흑무(黑舞)가 더욱 짙어졌다. 자욱이 퍼진 검은 안개…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흐트러지지 않고, 대낮이라 하더라도 사그라지지 않는 아주 기이한 안개였다. 그 짙은 안개 속,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무사들이 오락가락 거리고 있었다.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에서 모여든 무수한 고수들의 수는 대략 헤아려 보아도 구만(九萬)을 넘었다. 꾸역꾸역 나타난 마도고수들. 이들은 팔십일 로(路)로 흩어져서 혈거봉 쪽을 향해 한 치씩 한 치씩 이동해 가고 있었다. "제기랄, 어이해 안개를 뚫지 못한단 말인가?" "벌써 이틀째다. 이 지겨운 안개의 바다를 헤치며 돌아다닌지도……." 쓰으으… 쓰으으……! 유령처럼 움직이는 자들은 바로 지옥혈마단(地獄血魔團)의 주군이었다. 대륙무림회장에 왔던 자들은 하위의 무사들에 불과하다. 철류흔은 백도는 싸울 상대가 아니라고 여겨, 최상급의 고수는 대륙무림회장에 파견하지도 않았다. 진짜 막강한 마도고수들은 모두 다 혈거봉에 모여들었다. 안개 속을 헤치고 움직이는 구만여 고수들. 이들은 한 지점을 축(軸)으로 삼고 무수히 많은 동심원을 만들며 혈거봉 쪽으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칠십이 인의 혈포인들, 이들은 유난히도 사악하고 침침한 안색을 흘리고 있었다. 호흡마저도 멎어버린 듯, 숨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히 머무르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칠십이천살혼(七十二天煞魂)이라 불렸다. 이들 가운데, 이십팔 인의 체격이 장대한 거한들이 서 있는데… 이십팔 인의 병기는 보통 사람들은 들지도 못할 정도로 육중한 낭아곤(狼牙棍)이었다. 늑대의 이빨 같은 쇠침이 숭숭 박혀 있는 철봉을 어깨에 맨 자들. 마왕이십팔숙(魔王二十八宿). 마도외공(魔道外功)을 한 가지씩 익히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의 신체는 도검(刀劍)으로 쳐도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이들이 익힌 마포삼(魔布衫)은 금종조(金鐘早) 철포삼(鐵布衫)과 같은 외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력이 강했다. 피부가 철갑(鐵甲) 같은 자들, 마왕이십팔숙은 하나의 연자(輦子)를 포위하고 있었다. 상아(象牙)와 산호(珊瑚), 그리고 호박(琥珀), 마노(瑪瑙)로 이루어진 화려한 연자. 달빛을 받고 영롱히 반짝이는 연자의 주렴은 진주(眞珠)이다. 츠으으－ 츠으으－! 강한 빛이 사방으로 폭사될 때, 연자에 걸린 붉은 등(燈)은 귀기 어린 빛을 뿜어 낸다. 핏빛 섬뜩한 마광 아래, 언제부터인가 부복해 있는 네 사람의 얼굴이 시뻘겋게 번쩍거렸다. 동이검마왕(東夷劍魔王), 서융검마왕(西戎劍魔王), 남만검마왕(南灣劍魔王), 적지검마왕(狄地劍魔王)! 유난히도 사기(邪氣)가 강한 자들이다. 모두들 백 세 이상 산 사람들로 이들은 어기비검(御氣飛劍)을 자유롭게 시전할 수 있고, 검을 뽑아 들고 허공으로 떠오른 어검비행(馭劍飛行)의 절기마저 완전히 깨우친 상태였다. 일파의 종주가 될 수 있는 사 인의 거마두, 이들은 천신 앞의 장수들마냥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부복해 있었다. 좌르르－! 주렴은 반으로 쪼개진다. 앙증맞은 손 하나가 진주 주렴을 가볍게 열고 있었다. 주렴 사이로 검은 얼굴이 하나 보였다. 흑면사(黑面絲)로 가려진 얼굴. 면사는 너무 짙어 얼굴의 윤곽마저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유난히도 요기가 강하게 흘렀고, 면사가 가늘게 떨리며 차디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도 진세를 알아내지 못했단 말이오?" 감정이 없는 목소리이다.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입마지경(入魔之境)이랄까? 번쩍－! 면사를 불사를 듯한 혈광이 유난히도 강하다. "단주(團主), 절정세가가 펼친 기문진은 강호 어떤 방파의 기문진보다도 위력적입니다!" "절정세가에는 창궁천뇌(蒼穹千腦)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 자는 고금제일의 기문술사(奇門術士)입니다!" "속하들은 별의별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허사였습니다!" "이렇게 지체되다가는 철대군주의 문책을 피할 수 없겠습니다." 사대검마왕은 허리를 숙였다. 안의 여인은 너무나도 어렸을 때부터 연자 그들의 보호를 받았다. 남녀가 구별되기 전의 아이 시절에서, 몸에서 향기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소녀 시절에도, 목욕을 혼자만이 하게 된 처녀 시절까지… 연자 안의 여인은 사대검마왕의 호법을 받고 있었다. 파르르르－! 아름다운 손이 가늘게 떨렸다. 천마소종사(天魔少宗師) 우문혜(宇文慧). 그녀가 지옥혈마단주가 되어 절정세가를 괴멸시키기 위해 친히 나와 있는 것이다. 벌써 여러 날째다. 그녀는 절정세가의 입구도 발견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았다. "들어갈 방도가 없단 말인가?"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들어가야 한다. 절정세가를 한시빨리 처단해야 한다. 그래야 마가의 전통이 다시 세워진다. 나는 이 일을 기회로, 철류흔 그 자의 마수에서 벗어나고 말리라.' 그녀는 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그녀 머리 위의 달이 밝다. 한데, 그녀는 달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간… 들어가야 한다. 어떻게 하든……!" * * * "진세를 슬쩍 열어 주게나, 군사(軍師)!" 그는 성곽에 서서 주위를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그리고 무려 반 시진에 걸쳐 일대의 전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 나가던 군사 창궁천뇌는 그 말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진세를 열라니요, 가주? 그것은 어불성설이십니다!" "훗훗… 겁나오?" "적은 구만에 달합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수는 이만에 불과합니다. 가주가 척살검대를 거느리고 왔다면 문제가 다를 것이나, 가주는 척살검대를 머나먼 변황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보냈소!" 어깨에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청년, 그는 아주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운명처럼 검을 쥐게 되었던 일세의 기린아 단리궁, 그는 반 시진 이전 금붕을 타고 절정세가에 돌아왔다. 절정세가는 지옥혈마단의 주된 세력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창궁천뇌가 전개한 기문대진이 없었더라면 세가는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싸운다면 새벽이 되기 전 압승할 수 있소!" 단리궁이 자신있게 말하자, 창궁천뇌는 진저리를 쳤다. "가주, 가주는 단 이천의 무사만 대동하고 왔습니다!" 성곽 아래, 아주 태연한 자세로 단리궁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이천여 고수가 있었다. 그들 중 반은 노년층 고수, 나머지 반은 지극히 젊은 고수들이었다. 그들 중 천 명 정도는 창궁천뇌도 아는 본래의 절정세가 사람들이나, 다른 일천은 그도 모르는 신입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불결한 차림이었고 태도도 정갈하지 못했다. 등을 성벽에 대고 하품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며 뭐라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인 듯한 오합지졸, 단리궁은 그들을 이끌고 절정세가로 왔다. 단리궁이 무수한 응원군을 거느리고 오리라 기대했던 창궁천뇌에게는 지극히 불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이만여 고수를 이끌고 세가를 지키고 있었다. 그 숫자로는 세가를 지키기에도 약간 부족한 숫자였다. 가장 강한 자들은 단리궁을 따라 나갔다. 한데, 단리궁은 그들을 거느리고 세가로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강호전역으로 넓게 흩트린 것이다. 그들은 천류흔의 지하조직을 차례차례 격파하는 밀명을 갖고 각지로 흩어졌으며, 단리궁의 괴이쩍은 고수들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창궁천뇌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사대봉공(四大奉公)과 야뇌 휘하의 일천여 자객들이 있었다. 나머지 일천 명, 그들은 대체 어떠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들 중 오백은 늙고, 오백은 지극히 젊었다. 늙은 오백은 아주 더럽고 고약한 차림이었고, 젊은 오백은 매우 거만하고 고집스러워 보였다. 기질이 지극히 다른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합치 되었다는 것은 절정세가 안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었다. "후후… 너무 크게 말하지 마오, 군사!" 단리궁은 빙그레 웃었다. "예? 크게 말하지 말라니요?" 창궁천뇌가 얼떨떨해 하자……. "나와 함께 비조를 타고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괴팍하오. 자칫 군사가 자신들을 오해한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죽일 수도 있소." "설… 설마……!"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저들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소. 나라 하더라도 저들을 종 다루듯 하지는 못하오." "저… 저들이 누구이기에……." 창궁천뇌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후후… 자네는 보아하니, 백절대학(百絶大學)이라고 불렸던 위지목(尉遲木) 노선생(老先生) 휘하로구먼! 그의 제자인가?" 누군가 창궁천뇌를 보고 말했다. 한 사람이 느릿느릿 허공으로 떠올라 오고 있었다. 창궁천뇌는 알지 못하는 입술이 얄팍한 중년인. 그는 능공허도를 이용해 성 위로 날아올라 단리궁 바로 곁으로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그… 그대는 뉘시오? 어이해, 조사(祖士)의 이름을 함부로 대시오?" 창궁천뇌의 얼굴은 숯불처럼 달아올랐다. 백절대학(百絶大學) 위지목(尉遲木). 과거 강호제일학(江湖第一學)이라 불렸던 일대현자(一代賢者)이다. 그는 창궁천뇌 사마곡이 어렸을 때 글을 일러 준 사람이기도 했다. "훗훗… 그를 조사라고 하다니? 그럼, 그의 사손이로군." 웃는 중년인, 그는 아주 이상하게도 마기를 흘리고 있었다. "뉘… 뉘시오?" 창궁천외라 하더라도 이러한 경우에는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다. "훗훗… 과거, 자네 사조 백절대학의 멱살을 잡아 그를 십 장 밖으로 내동댕이쳤던 일세거마 이야기를 아는가?" "그 일을 어찌 아시오? 그 일은 강호일대의 비밀인데." "후후… 노부는 그와 상관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으음, 그 일은 거의 이백 년 전에 벌어진 일이오. 당시, 천하제일마였던 벽력마천자(壁靂魔天子) 우문무(宇文武)가 백절대학이 마음에 안 든다며 백절서원(百絶書院)을 불살랐소. 그리고 백절대학 사조를 집어 내동댕이쳤소!" "그렇네!" "그… 그대는… 뉘시오?" "바로… 우문무라네!" 우문무… 세 마디 이름이 창궁천뇌의 입을 딱 벌어지게 했다. 창궁천뇌는 무림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자부했던 사람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보아 온 것으로 자위하며 살아 나갔던 고집스러운 늙은 괴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조상을 만난 작은 아이 꼴이 되고 말았다. "우… 우문무? 그… 그대가……?" 창궁천뇌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다가는 우문무와 단리궁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달빛이 화사했다. 창궁천뇌의 얼굴에 비지땀이 흘러 떨어지는 것이 또렷이 보인다. 한순간, 파공성이 나면서 또 한 사람이 단리궁 곁으로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체격이 장대한 젊은이, 그는 만인이 신처럼 우러러보는 단리궁의 바로 곁에 아주 자연스러운 자세로 내려서고 있었다. 그는 창궁천뇌를 보며 피식 웃는데, 체구에 비해 웃는 모습이 천진스러웠다. "어서 여시오. 우리들은 성질이 급한 사람들이외다!" "그… 그대는 뉘시오?" "핫핫… 나는 절정서생의 아우외다!" 웃는 청년은 단리우였다. 그는 천년밀가의 수석고수 겸 단리궁의 의동생이었으며, 천년밀가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대표자 자격으로 단리궁 휘하에 들어왔다. 단리우가 웃고 우문무가 웃자, 창궁천뇌는 고개를 휘휘 젓고 말았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세상에는 정말 모를 일 투성이다. 앞으로는 공부를 보다 더 많이 해야 하겠다!" 그는 고개를 저었고, 그 모습에 단리궁마저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우두머리를 제거하겠소. 그 사이, 지옥혈마단을 궤멸하시오." 단리궁은 오랜만에 검을 등에 걸었다. 철혈검(鐵血劍), 밀가의 상징적인 보검이다. 단리궁은 검을 매고 죽립을 쓴 다음 위로 솟구쳐 올라갔고, 그가 떠오르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혈거봉 일대의 기문대진은 완전히 풀렸다. * * * 달빛이 유난히도 밝다. 꽤 오랫동안 검은 안개의 성에 갇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던 지옥혈마단은 안개가 사라지자, 함성을 지르며 혈거봉 쪽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카아아－ 카아아－!" "짓밟아라, 절정세가를!" "크크… 피가 그립다, 뜨거운 피가!" 휘리리리－ 링－ 휘리리－ 링－! 해일처럼 산령을 덮어 가며 산상으로 치솟아 가는 구만여 고수들, 이들은 화산이 터지고 용암이 산비탈을 적시듯 핏빛 의복으로 산령을 시뻘겋게 뒤덮이며 일제히 치솟아 올랐다. 피의 바다가 산상으로 흘러가듯, 구만여 마도고수들은 절정의 신법을 발휘해 저 먼 산정(山頂) 위로 나타나는 비밀의 성을 향해 치솟아 올라갔다. 무수한 사람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솟구쳐 올라갈 때, 또다시 진주 주렴이 열리며 아름다운 눈빛이 반짝거렸다. "갑자기 진세가 걷히다니……!" 약간 떨리는 목소리, 바로 천마소종사이자 지옥혈마단 주인 우문혜(宇文慧)의 목소리였다. "모를 일이군. 절정세가가 이리 쉽게 무너지다니……?" 우문혜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달빛이 떨어지는 가운데, 아주 신비한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기다리느라 지루했을 게요. 그래서… 문을 연 것이오!" 누구의 목소리일까?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우문혜뿐인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누… 누가… 육합반성술(六合返聲術)을 쓸까?' 우문혜는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검을 불끈 쥐었다. 마검(魔劍) 멸혼(滅魂). 그것은 철류흔이 그녀에게 준 세 가지 물건 중 하나이다. 독단(毒丹), 영기(令旗), 그리고 마검 멸혼. 우문혜는 그 세 가지를 받고 지옥혈마단주가 되어 여기에 왔다.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데, 목소리가 이어졌다. "후후… 먼 데 있지 않네, 낭자(娘子)!" 웃음소리와 더불어 안개를 뚫고 흘러내리는 연(鳶)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자세로 허공을 비스듬히 타고 떨어져 내리는 흑의인영이 하나 있었다. 그가 불쑥 떨어져 내리는 찰나, 사방에서 쇳소리가 일어났다. 칭－ 칭－ 칭－ 칭－! "살수다! 죽여라! 소종사를 보호하라!" "핫－! 어림없다." 치리리리－ 릿－! 네 곳에서 검기가 일어나는 가운데, 죽립으로 가려졌던 흰 얼굴 아래쪽에 묘한 파문이 일어났다. "절정이 되려면 더 오랫동안 검법을 연마해야겠다. 자네들의 마검초는 하품(下品)에 불과하다!" 검은 그림자는 검이 다가서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입가에 싱긋 미소를 떨군 채 검이 다가서는 것을 바라보는 흑삼청년, 그는 바로 단리궁이 아닌가? 파－ 파－ 파－ 팟－! 네 자루의 마검은 찰나적으로 그의 가슴으로 다가섰고, 거의 일순간 네 자루가 동시에 가루가 되어 사그라졌다. 대체 이럴 수가? 네 자루의 마검이 한순간 허공에서 먼지로 화하다니……? "이… 이럴 수가……?" "네… 네놈은 요괴(妖怪)다!" "흐으으… 윽…! 절대군주라도 이렇게는 못한다!" "으으, 너는 누구냐?" 사대검왕은 넋을 잃고 마는데, 연자 속에서 차디찬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 자는 방금 전 오행무적강(五行無敵剛)과 더불어 천지연환쇄(天地連環鎖)를 써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강기를 흘려냈소. 사대호법, 그는 노인들이 막지 못할 자 같소. 아무래도… 절정서생 같소!" 진주 주렴이 세 번째로 갈라지며, 여윈 그림자 하나가 걸어나왔다. 유난히도 선이 아름답고 가냘픈 그림자는 붉은 천으로 전신을 칭칭 휘감고 있었다. 사박… 사박……! 보보를 내딛으며 요염한 기운을 흘리는 붉은 그림자는 바로 우문혜였다. 금편(金片)처럼 부서져 내리는 달빛, 그 화려한 빛은 단리궁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고… 막 걸어나오는 우문혜의 머리카락 위에도 금빛 새털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일대에서는 아홉 발의 폭화(爆火)가 터지고 있었다. 퍼엉－ 펑－ 펑－ 펑－! 잇따라 터지는 아홉 개의 폭화와 더불어, 아홉 군데에서는 요란한 장소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우우, 이제 모습을 나타내도 좋다!" "푸핫핫… 놈들 중 마가 아이들은 죽이지 말라! 푸하하……!" 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것일까? 사방에서부터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 구만여 마도고수들 후미 쪽으로 섬전처럼 신형을 폭사시켜 나아갔다. 갖가지 색다른 경공술을 발휘해서 폭사되어 나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두드러진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검도 쓰지 않고 강기를 일으켜 몸을 비스듬히 날리며 팔짱을 낀 채, 다만 휘파람 소리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흑포중년인. 그리고 거검 한 자루를 풍차처럼 휘둘러대며 철왕시위대들의 중심으로 떨어져 내리며, 피보라를 일으키는 체격이 장대한 젊은이 하나. 파파－ 파－ 팟! "카아아－ 악!" "으으으… 윽! 이… 이런 고수가 있다니?" "어… 어디서 이런 고수들이 나타난단 말이냐?" 삽시간에 오천여 명이 피구덩이 속으로 나뒹굴었다. 어지간한 자들은 힘도 채 끌어 내지 못하고 음공절학에 당해 고막과 입에서 피를 뿜고 나뒹굴었고, 어디서 날아드는지 모를 지공(指功)에 당해 점혈되어 쓰러지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허리를 꺾으며 나뒹구는 자들, 그들의 몸 위로 또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한다. 일천마혼 가운데 오백 명, 이들은 갇혀 지냈던 한을 풀기라도 하는 듯 지옥혈마단을 도륙내었고… 단리우가 이끄는 일천 친위대 고수들 역시, 미친 사람들마냥 검무를 추며 진열을 흩뜨려 나갔다. 콰르르－ 릉－ 콰앙－! 폭음 소리가 잇따르는 가운데, 혈거봉의 밤은 혼란에 휘말려 들었다. 삽시간에 지옥혈마단의 팔십일 로 대진세는 격파되었고, 지옥혈마단 무사들은 머리 잘린 거망(巨網) 꼴이 되어 좌충우돌하다가는 저희들끼리 베고 찌르는 일을 저지르곤 했다. "크아아－ 악!" "으윽, 네… 네놈은 우리 편이거늘, 어이해 내게 암기를 던지느냐?" "크으으… 윽!"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요란할 때였다. "호호… 위대한 승부사로군. 호호! 마도에 철류흔이 있듯, 백도에도 절정서생이 있었군!" 주위를 쓸어보고 살을 파르르 떨던 우문혜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손길이 부들부들 떨린다. 아예 광기에 떨어져 버린 듯, 면사를 뚫고 두 줄기의 혈광이 잔폭하게 퍼부어졌다. "승부! 호호… 그리고 야망(野望)! 호호! 흑도건 백도건 모두 그 두 가지에 미쳐서 악마가 되지!" 사방에서 뿜어지는 피보라가 우문혜를 반 미치게 만든 듯했다. 단리궁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유심히 바라봤다. '너무나도 낯익은 체취다.' 그는 아주 묘한 흥분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는 품안에 들어 있는 소검 하나를 매만지고 있었다. "나를 잊지 마세요!" 언제나 그의 귓가를 떠돌았던 목소리이다. '설마, 설마…….' 단리궁의 눈에서는 신광이 뿜어졌다. 최근 들어 지금처럼 흥분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우문혜의 웃음소리는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호호… 이제는 끝장이다. 호호!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것도, 피바람을 멈추게 하는 것도 모두 끝장이다!" 우문혜는 악에 받쳐 외치며 단리궁을 쏘아봤다. 섬뜩한 악마의 눈빛이 단리궁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호리호리한 몸 그 어디에 그리도 강한 힘이 숨어 있을까? 그녀의 눈빛은 강하고 잔혹했다. "절정서생, 너는 분명 절정서생이다!" "맞다." 단리궁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너는 위대한 승부사다!" "승부를 좋아하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남자이니까!" "빠드득－! 미친 들개 같은 자." "훗훗… 그대 또한, 나와 비슷한 것 같은데?" "닥… 닥쳐라!" 우문혜는 악을 쓰며 손을 휘저었다. 수라혈옥지(修羅血玉指)가 시전되며, 허공이 다섯 줄기 지력으로 쪼개어졌다. 소리도 없는 마공지력은 그대로 단리궁의 가슴 부위에 격중되었다. 묘한 것은 그 어떠한 음향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 근 거석을 모래로 부술 정도의 위력을 가진 지력은 노도에 휩쓸린 낙엽마냥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리궁은 등을 나무에 기대어 선 자세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았고, 우문혜가 오히려 상체를 휘청이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호… 호신강기로 수라혈옥지를 녹이다니……." 그녀의 지력은 여지없이 무산되었다. 단리궁은 선천강기(先天剛氣)의 힘만으로 우문혜의 지력을 녹여 버린 것이다. "훗훗… 무림은 험한 곳이지. 이 험한 곳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강해질 필요가 있다!" "으으… 으으……!" "그래서 나는 기왕 무사가 된 바에야 강한 무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너는 위대한 승부 기질을 갖고 있다. 으으, 이제까지는 철류흔이야말로 고금제일인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네가 더 지독한 승부사였다!" 우문혜는 몸을 휘청거렸다. 그녀의 휘하고수들은 쉬지 않고 괴멸되고 있었다. 이곳에는 절정세가의 십분지일 저력이 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지옥혈마단과 철왕시위대는 산산이 괴멸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너… 너는 어떤 자냐?" "무사(武士)!" "무… 무사?" "조금 지겨운 직업이지. 늘 떠돌아다녀야 하고,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은 피와 죽음뿐인 권태로운 직업!" "모… 모를 일이군. 너 같은 강호절대자가 그런 말을 하다니?" "후후… 절대자가 아니었던 시절도 있었지. 그 때는 한 잔 술을 마시고도 얼굴이 시뻘겋게 취하곤 했었지!" 단리궁은 웃으며 얼굴을 쳐들었다. 일부러일까? 그는 흰 이를 많이 드러내고 웃었다. 그가 웃을 때, 우문혜의 시선이 격하게 흔들렸다. 달빛이 반짝이는 하얀 이빨, 영웅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섬약한 얼굴이다. '그다. 바로 그다!' 우문혜는 화살에 놀란 암사슴마냥 교구를 틀었고… 그녀가 자지러지는 그 찰나, 단리궁의 손이 가볍게 떨쳐졌다. 우회금룡수(迂廻擒龍手). 그는 허공을 비스듬히 그어 나가는 금나수 일 식을 썼고, 거친 소리와 함께 우문혜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가 찢어졌다. 그리고… 단리궁의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저… 저럴 수가……?" 달빛 아래, 누가 보더라도 구역질을 느낄 만큼 추악한 얼굴이 나타났다. 칼로 무수히 난도질한 상처투성이의 얼굴. 코도 일그러졌고, 입술도 너덜너덜했다. 오관 가운데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흑진주마냥 반짝거리는 두 개의 아름다운 눈뿐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두 개의 눈, 그 눈이 지금 묘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우문혜는 면사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눈에서 뿌연 물막을 떠올리고 있었다. 강철같이 강하고 다부졌던 여인 우문혜. 철류흔의 열정적인 구혼마저 거절하고, 자신의 미모를 지켜 가면서 결백을 지켰던 독녀(毒女) 우문혜. 그녀가 울다니……? '고마워요, 형(兄)!' 우문혜는 묘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는 일 장 정도, 그러나 두 사람 사이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이제는… 미련이 없습니다. 이 추악한 세상에… 아아, 나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형을 보는 일마저 이루어진 이상, 이제는… 죽을 수 있습니다.' 우문혜는 천천히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단리궁은 나뭇등걸에서 등을 떼어 내며 우문혜 쪽으로 다가섰다. "묘, 묘하게 만나… 다시… 묘하게 만나게 되는 것같지 않은가?" "그… 글쎄, 나는… 귀하를 처음 보는데?" 우문혜는 상체를 휘청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녀가 단리궁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반화(半花)!" "반… 반화?" 우문혜의 어깨가 격하게 떨렸다. "비 오는 날, 연경에서 나를 취하게 한 남장소녀!" "으으… 으으……!" 우문혜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 때, 나의 머릿속에 남아 아직도 떠나지 않는 소녀!" "아… 아니예요. 나는… 나는 아니예요!" 우문혜는 자지러지고 있었다. "왜 아니라고 하지? 그 때의 인연은… 이미 잊었단 말인가? 나는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는데?" 단리궁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에게는 남성의 힘이 있었다. 우문혜는 그것을 질식할 만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잊을 리 있나요, 그 일을? 하지만…….' 우문혜, 그녀는 바로 과거의 반화(半花)였다. 빗속에 쪼그리고 있다가 단리궁에게 매달렸던 남장소녀, 그녀가 바로 오늘날의 우문혜였다. 저벅… 저벅……! 단리궁은 쉬지 않고 다가갔고, 우문혜는 자꾸자꾸 뒤로 물러났다. "제발… 제발, 저를 이대로 놓아 줘요!" 달빛이 두 사람을 따른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휘청 휘청 거리며 따라가고 있었다. "제발… 제발……!" "왜, 나를 뿌리치려 하지? 이미 타인의 여자인가?" "그… 그것은 아닙니다, 형(兄)!" 우문혜는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물론, 수긍하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그럼, 왜지?" "너… 너무 멀어요. 우리 두 사람 사이는……!" "어리석군. 나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절정서생이다!" "그… 그 정도로 안 돼요, 우리의 인연은!" "여전히 어리석군, 과거처럼!" "아아, 너무 늦었습니다. 너무……!" 우문혜는 이를 악문다. 뚝－! 순간, 그녀 입 안에서 무엇인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살색이 순간적으로 푸르뎅뎅하게 물들었다. 단리궁은 다가서다 말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또 바보짓이군. 독단(毒丹)을 물고 있다가 깨물다니?" "그… 그래요. 저는… 백치에요." 우문혜는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최후를 대비해 지니고 있던 독단을 깨물어 버린 것이다. 벼랑 끝의 여심이랄까? 우문혜는 완전히 무너지고 만 것이다. 너무나도 추악한 얼굴 가운데 박혀 반짝이고 있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눈동자, 그것이 단리궁을 애달프게 했다. "반화(半花)… 아니, 혜(慧)! 나는 너를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다!" 그는 다시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는 우문혜가 독단을 깨무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태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산(山)이 되어 있었다. 뚜벅뚜벅 다가서는 단리궁, 그리고 우문혜는 독에 의해 의식을 잃어 가며 오공에서 피고름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운명이… 버렸어요!"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넘어질 때였다. "운명은 없다. 너와 나 사이에는!" 단리궁은 우문혜를 반듯이 잡아 눕히며 바로 곁에 섰다. 너무나도 가공하고 패도적인 기운이 일어난다. 그것이야말로 단리궁의 진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천하가 너를 버리더라도……!" "제… 제발……!" 우문혜는 화살에 맞은 암사슴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버리세요. 모르는 척!" "안 돼!" "……." "그 때 연경에서 너를 잡았어야 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내가 보내 주었기에 오늘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지금은… 보내지 않겠다!" "제… 제발……!"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듣지 않겠다. 분명한 것은… 네가 내 앞에 누워 있다는 것이다!" 단리궁은 강철보다도 강해 보였다. 우문혜는 그의 혼을 느끼면서도 쉬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제발… 저를 이대로 죽게 놔 두세요." 우문혜의 눈에서는 맑은 이슬방울이 하염없이 굴러 떨어졌다. 모진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수선화(水仙花)마냥, 그녀의 몸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단리궁은 천천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혜, 너는 나를 두고 떠나갈 수 없다. 네가 진짜 악마라 하더라도… 나는 너를 버릴 수 없다." 단리궁은 천천히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아주 작고 정교한 소검(小劍)이었다. "이것을 기억하느냐? 이것은 네가 그곳에서 내게 준 것이다." "아아, 그것을 아직 버리지 않으셨군요?" 우문혜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독(毒)을 깨물고 죽어 가는 우문혜, 그녀의 얼굴빛은 점점 시꺼멓게 물들어 갔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화사해 보였다. 단리궁에게만은……. "여기 언제나 나의 뇌리 속에 기억되어 있던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단리궁은 소검을 우문혜 얼굴 쪽으로 내밀었다. 소검 위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나를 잊지 마세요. 혜(慧)> 우문혜는 그 글을 봤고, 살포시 웃었다. "그 때는… 착했지요. 마가전통(魔家傳統)에 저항하느라 꽤나 애도 썼고, 나름대로 도망치려고도 해 봤지요. 참 좋은 시절이었어요, 형(兄)!" 우문혜는 단리궁을 다시 형이라 불렀다. 그녀는 연경 교외(燕京郊外)에서 단리궁과 술을 나누어 마시던 시절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갖고 있던 추억 중에서 가장 아름답던 추억이었다. "그 때는… 정말 좋았어요. 그 때의 반 나절은… 그 이후의 이 년(年)보다도 길고 아름다웠습니다." 눈물방울이 더욱 커졌다. 그녀의 극독에 타 들어가는 얼굴은 눈물바다로 축축해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대가 신(神)이라 하더라도! 왜냐하면 그대는 정파(正派)이고, 소녀는 마가의 주인이기에……." 우문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혜(慧), 다른 사연은 필요 없다. 무조건 너는 나의 여자(女子)다. 나는 맹세했었다. 네가 나를 기다린다면, 너를 정실(正室)로 삼겠다고." "아아……!" "그 맹세을 지키겠다." "이루어질 수 없는 맹세입니다." "아니다. 이미… 이루어졌다." "예?" "너는… 나의 여자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아… 아니 됩니다." "세상에 대고 말하겠다. 내가 공을 세운 것과, 네가 죄를 지은 것을 바꾸겠다고! 아마도… 만인이 수긍할 것이다." "그… 그것은 꿈에서나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마가의 전통에 따라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결해야 할 뿐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우문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의식은 자꾸만 희미해져 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연잎마냥 그녀의 살결이 파르르 떨린다. "혜! 만에 하나, 마가전통이 인정한다면 나의 여자가 되기를 거부하지 않겠느냐?"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묻는 말에 대답하기만 해라, 혜!" "으음, 그렇다면……." 우문혜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멈추었다. 여자의 침묵(沈默)은 긍정이라고 한다. 침묵한다는 것은 바로 수긍한다는 것이다. 단리궁은 우문혜가 거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이제 네게 알려 주겠다, 내가 누구인지를. 내가 절정세가주인 동시에, 마가와도 인연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마, 마가와도 인연이 깊다니요?" "훗훗… 구만마병(九萬魔兵)을 격파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흑포(黑袍)의 남녀를 아느냐?" "기억합니다. 형만큼이나 강했던 두 사람을……!" "후후… 그들이 누구인지 아느냐?" "그… 그들이 누구입니까?" 우문혜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한순간, 두 줄기 검은 안개가 흘러들더니 허공에서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야, 네가 마가의 삼십사대손(三十四代孫) 중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아이냐?" 답허능공(踏虛凌空)으로 나타나는 한 사람, 그는 바로 벽력마천자(霹靂魔天子) 우문무(宇文武)였다. 그의 곁에는 아주 요염한 여인이 떠 있는데, 그녀는 비파겁(琵琶劫)이었다. "호호… 자세히 보니, 나와 닮은 데가 많구나. 호호……!" 비파겁은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반노환동지경에 이르른 벽력마천자와 비파겁 부부. 자세히 본다면 그들의 용모와 우문혜의 용모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우문혜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눈가를 찌푸렸다. "뉘… 뉘시지요? 낯익은 얼굴인데……?" 우문혜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푸하하… 네 고조부(高祖父)라면 믿겠느냐?" "호호… 나는 너의 고조모(高祖母)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이가 들지 못해 이런 몰골이다만… 호호! 계보상으로 볼 때 나는 너의 고조모다." 벽력마천자와 비파겁은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기실, 이들은 단리궁에게서 밀명을 받고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리궁은 마가를 무너뜨릴 생각이 아니었다. 마가는 기실, 변황세력에 이용당하고 있는 방파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중원혼(中原魂)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단리궁은 마가를 절정세가에 끌어들이리라 결심한 지 오래였다. 그 결심은 천년마궁(千年魔宮) 안에서 이룩되었다. 여지없이 흔들리는 눈빛은 아름답다. 우문혜는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돌연, 고조부와 고조모가 나타나다니? 그리고 그들이 다름아닌 단리궁의 속하(屬下)들이라니……! "아아아,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우문혜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음이 너무나도 격동된 나머지, 독기가 치밀어올라 의식을 잃고 만 것이다. 그녀의 작고 아름다운 손은 단리궁의 희고 섬세한 손에 꼬옥 쥐어져 있었다. "혜, 이제 알겠군. 내가… 너를 취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단리궁은 우문혜의 손을 힘있게 꼬옥 쥐었다. 바람이 다가설 때, 단리궁은 흑포자락을 펄럭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두 팔 위에 우문혜의 몸을 걸쳐 놓은 상태였다. "나머지는… 여러분들께 맡기겠소. 되도록 선혈(鮮血)을 덜 흘리고 마무리짓는 쪽으로 하시오. 강자(强者)에게는… 도량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단리궁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새벽이 오기 전, 일대는 조용해질 것입니다." "매각(每刻)마다 만여 명이 제압되고 있습니다." "우리 두 늙은이가 다시는 끼여들 필요조차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삼안마불(三眼魔佛)과 천살파천황(天煞破天荒)도 대단하고, 주인 휘하의 고수들 또한 대단합니다. 특히 야뇌(夜惱)란 노인과, 우(雨)라는 소공자(少公子)는 정말 대단한 고수들입니다. 그들은 각기 일당만(一當萬)입니다." 두 사람은 허리를 숙였다. 그들이 다시 허리를 들었을 때 단리궁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절정세가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어쩌면… 고손녀를 가모(家母)로 모시게 될지 모르겠군." "호호… 계면쩍은 일이기는 하나, 무림대세를 생각한다면 일부러라도 일을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긴……." "호호… 하여간, 이제 중원쌍가(中原雙家)는 하나가 되었군요." "후후… 언제 시간을 내어 천년밀가에 가야겠소. 거기 가서 마가의 대표자 자격으로 지난 일을 사죄한다면, 아마도 일이 쉽게 풀릴 것이오." 바람이 유난히도 강하다. 그리고 거대한 절정세가는 밤안개에 휘감기고 있었다. 절정(絶頂)의 길 우(雨), 그는 폭풍(暴風)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일 검(劍)마다 십 인(人)을 쓰러뜨렸다. 그는 야뇌노인과 나란히 경쟁이라도 하는 듯 지옥혈마단을 괴멸시키고 있었다. 파파파－! 우는 폭풍검결(暴風劍訣)이라 불리는 밀가의 전통적인 검법을 썼다. 검극에서 폭풍 같은 강기가 일어날 때마다 수십 명이 휘청거렸고, 십여 명의 고수들이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으하하… 밀가를 아느냐? 밀가는 바로 절정세가의 본가(本家)이다. 으하하……!" 단리우는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치달렸다. "훗훗… 이가주(二家主)의 말이 고약하구려. 절정세가가 밀가의 본가이지, 어이해 밀가가 절정세가의 본가란 말이오? 노부와 장차 장기라도 한 판 두며 검법 이야기를 하려 하신다면 아예 그런 이야기는 마시오!" 츠으으－ 읏－! 밤의 번뇌, 중원 천하제일의 자객이자 환우제일의 살수인 야뇌노인은 검은 안개로 몸을 휘감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칠 성 공력만을 사용해서 움직이는데, 그의 일 검을 제대로 막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밤이 깊어 가며 절정세가 일대는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혈당해 쓰러진 자들이 무사들에게 쳐들려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고, 사위에서 포위진세를 차츰차츰 압축해 나가는 가운데… 한 곳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독수리의 다리에는 나무갑이 하나, 그 안에는 지옥혈마단의 총검사(總劍士)인 자가 죽어 가며 적은 밀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완패했소이다, 대군주! 아마도 하늘이 택한 운명의 주인은 대군주가 아닌 듯하오! 아마도……!> 끄으으－ 윽－! 독수리는 수직상승해 날아올랐다. 하늘빛은 점점 뿌옇게 터 오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새벽이 올 듯, 밤의 기운은 엷어져 가고 있었다. * * * "너를 위해… 나의 가장 뛰어난 요상대법(療傷大法)을 쓰겠다. 내 비록 다른 여인을 취하기는 했으나, 너야말로 나의 첫여인이기에……!" 단리궁은 서재에 딸린 방 안에서 입술을 꼭 다물었다. 침상 위, 지옥혈마단의 대단주(大壇主) 자격으로 왔다가 꺾인 여인 우문혜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기 싫을 정도로 추악했다. 철류흔도 그 얼굴을 보고는 구역질을 느끼며 등을 돌렸었다. 하지만 단리궁은 그러한 얼굴 이면에 숨어 있는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었다. "너는… 내게 영원한 꽃(花)이어야 한다!" "으음……!" "나의 방법이 실패하여 너의 얼굴이 원상태로 회복되지 않더라도, 나는 너를 정실로 취할 것이다. 내가 사랑한 것은 너의 얼굴이 아니라, 너의 모든 것이기에!" 단리궁은 두 손을 합치고 있다. 그는 천년마궁에서의 기연 이후, 가일층 무공진보를 경험했다. 그는 자신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측량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두 손은 합장되었고 흰 안개가 장심에서 피어 오르는 가운데, 두 손은 기이하게도 백색으로 투명(透明)해지기 시작했다. 뼈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해지는 손은 마치 수정(水晶)과 같았다. 절정투옥수(絶頂透玉手). 단리궁이 창안한 수법이다. 백파구류(百派九流)의 제반요상법을 두루 알고 있는 단리궁이 창안한 요상법 절정투옥수는 막대한 진기소모를 요구하는 수법이다. 구결대로 한다면 적어도 십 인(人)의 절세고수가 격체전력(隔體傳力)으로 진기를 한데 모아야만 시전할 수가 있다. 하지만 단리궁은 그 자신의 진원지기만으로도 그러한 절기를 완전한 상태로 시전해 낼 수가 있었다. 쓰으으… 쓰으으……! 투명해진 손에서 은은한 백무가 피어 올랐고, 그것은 차츰차츰 붉은빛으로 변했다. 화르르르－ 륵－ 화르르르－ 륵－! 고요히 퍼져 나가는 붉은 안개에는 막대한 축용화력(祝融火力)이 실려 있었다. 홍무가 뿜어지는 가운데, 우문혜의 옷은 재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검은 안개가 허물어지고 옥산(玉山)이 나서듯이, 피에 젖은 옷이 불살라지는 동시에 남자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아름다운 나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발적으로 솟아오른 육봉(肉峰)이 두 개, 그 위에는 연홍색(軟紅色) 유실(乳實)이 하나씩 얹혀 있다. 그것은 바람에 휘날리는 포도송이마냥 파르르 떨린다. "아아, 뜨거워요!" 우문혜는 비몽사몽 간에 중얼거리는데, 그 모습은 술 모르는 소녀가 화주를 처음 마신 모습을 연상시켰다. 붉은 안개는 더욱 짙어졌고, 우문혜의 몸은 완전한 나체로 변했다. 기름기가 하나도 없는 아랫배 가운데에는 옴폭한 배꼽이 있다. 그 아래에는 열리지 않았던 처녀의 성을 지키는 해초의 숲이 있고, 그 아래에는 대리석으로 미끄러지는 영원의 아름다움이 다리로 뻗어 내리고 있다. 팽팽한 피부에는 검은 반점이 가득했다. "흐으으… 흐으으……!" 우문혜는 격렬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극대한 열류를 버티기 힘든 상태였다. 오랫동안의 번뇌는 그녀를 쇠약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무공에 혐오감을 느끼고 내공연마를 게을리했던 것이다. "아아… 아… 악……!" 그녀는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를 냈다. "혜, 안심해라. 내가 곁에 있다!" 단리궁은 오랜만에 말소리를 흘려 냈다. 그는 천천히 우문혜와 몸을 하나로 합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하늘을 믿어 보는 것뿐이다. 하늘이 이 여인을 내게 주려 한다면… 그렇게 되리라.' 단리궁으로서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는 태양화옥강(太陽火玉剛)이라는 수법과 동시에, 천왕승천비기(天王昇天秘技)라는 절기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둘 다 백팔 주의 절기였다. 다른 사람은 두 가지 절기를 동시에 사용할 수가 없다. 함께 사용할 경우, 주화입마에 들어 오장육부가 분열되기에……. 그러나 단리궁에게는 주화입마 상태가 나타날 수 없었다. 그는 양심신공(兩心神功)이 아니라, 분심신공(分心神功)을 익혀 동시에 대략 열 가지 수법을 생각하고 시전할 수 있는 단계였다. "너를… 다시 꽃으로 피워 내리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입술로 우문혜의 입술을 막았다. "……!" "으으… 음……!" 매우 묘한 파문이 번진다. 고요하게 머물러 있던 빙지(氷池)로 한 마리 천룡의 그림자가 떨어지는 가운데, 빙지의 물은 무섭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열풍(熱風)으로 타오르는 얼음 연못, 그 가운데 천룡의 몸뚱이는 얼음 연못 안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나… 나는 너무 천합니다!" 우문혜는 언제부터인가 의식을 되찾았다. 그녀는 단리궁을 느꼈다. 단리궁은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늘 꿈에서만 만날 수 있고, 환상 가운데서나 대할 수 있었던 첫사랑의 남자. 그의 숨결이 뺨을 간질이고, 그의 손짓이 피부를 애무하고 있었다. "제발… 나를 버리세요." "혜, 너는 내게 빚을 지고 있다. 너는 그것을 갚아야 한다!" "빚이오?" "그것은 세월의 빚이야." "으음… 그럼, 나를… 생각했었나요?" "물론이지." "아아, 부끄럽습니다!" 우문혜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이럴 수가? 그녀의 피부는 옥처럼 매끄럽지 않은가? 너무나도 흉칙하게 난자되었던 얼굴은 언제부터인가 미끄럽고 맑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우문혜는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단리궁은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매만지고 있었다. 우문혜는 간지러움을 느낄 때마다 몸을 가볍게 움찔거리는데, 그 때마다 단리궁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살아났군? 꽁무니를 빼려는 것을 보니?" "얄궂으십니다." "훗훗… 나는 세월의 이단자이지. 후후……!" 단리궁은 손을 정교히 놀려 도자기를 빚는 도공(陶工)과도 같았다. 여인은 매우 연약하며 여체는 매우 보드랍다. 거칠게 다루는 사람은 여인을 모르는 사람이다. "혜,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너의 운명이다. 거역하지 마라!" "송구스러운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나 미천합니다!" "미천하지 않다!" "미천합니다!" "왜……?" "저는 추합니다!" "훗훗… 너는 아름답다. 나를 능히 유혹할 정도로……!" "추합니다, 저는……." "훗훗… 나의 눈을 잘 봐라!" "예?" 우문혜는 깜짝 놀라며 단리궁의 말대로 단리궁의 눈을 바라봤다. 단리궁의 눈은 우문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눈빛 가운데, 그의 영롱한 망막 위로 하나의 얼굴이 그림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결한 여인의 얼굴, 그 얼굴은 우문혜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 얼굴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제… 제가… 제가……?" 우문혜는 울상이 되었다. "후후… 너는 여자(女子)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취하고자 하는 사내이다. 두 가지만 정확하면 된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게 다 맡겨라." 단리궁은 우문혜의 허리를 꽈악 끌어안았다. "아… 아파요." 우문혜는 얼굴을 찡그리는데, 그 모습은 더욱 고혹스러웠다. 그녀는 아프다고 하면서도 몸을 빼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단리궁 쪽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타오르는 정(情)… 그것은 하늘이라도, 운명이라도 막을 수가 없다. "아아… 아아……!" 우문혜는 너무나도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땀에 비 맞은 듯 젖었고, 매끄러운 피부 위에는 용의 발톱 자국이 푸르게 남기 시작했다. 터질 듯 부풀어오른 둔부가 흔들리고, 그녀의 몸은 활(弓)이 되어 꺾이며 비파(琵琶)가 되어 소리내기 시작한다. "으으… 음……!" "……." 단리궁은 집요한 추적자가 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산(山)에 들어왔고, 사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이미 사슴을 향해 화살을 쏘고 있었다. "하아아… 악……!" 메아리도 되지 못하는 암사슴의 노랫소리인가? 연잎의 피부 위로 옥구슬의 땀방울이 매달리고, 섬섬옥수(纖纖玉手)는 무엇을 쥘 듯 자꾸만 허공에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속눈썹 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우문혜의 전신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이… 여자가 가야 하는 길인가?' 그녀는 고통의 길과, 희열의 길 위에 함께 서 있는 사슴과 같았다. "으으… 음……!" 우문혜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참으려 하나, 신음 소리 비슷한 비음은 쉬지 않고 입술 사이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추적자에 걸린 한 마리의 암사슴처럼, 그녀는 눈길을 어디다 둘지 모르고 자꾸만 몸을 떨며 눈빛을 흩뜨리고 있었다. 바람과 구름처럼, 구름과 비(雲雨)처럼, 그리고 열풍이 쉬지 않고 다가서는 사막처럼 두 사람은 하나의 숨결이 되어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처음 본 그 순간, 너는 나의 여인으로 정해졌다!" "지독하군요, 형은……!" "훗훗…너는 나를 유혹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때나 지금이나…!" "으으… 음……!" "너는 미에 있어, 절정이다." "……." "물론, 그렇지 않았더라도 너를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리궁은 우문혜를 사정없이 불사르고 있었다. 타오르고, 또 타오르고… 밤이 깊어 가는 동시에, 환희의 열풍 또한 더 지독한 기세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우문혜는 너무나도 격한 아픔과 희열을 함께 느껴야 했다. "아아… 아… 악……!"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 가운데 터질 듯 물이 오른 이십 세 미녀의 고개가 옆으로 푹 꺾인다. 유난히도 희고 긴 목덜미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고, 아픈 듯 찡그리는 얼굴 가운데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기… 기쁩니다. 여자로 만들어 줘서……!" 우문혜는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 기쁩니다, 형(兄)!" "혜, 이제는 형이라 하지 마라!" "그… 그럼……?" "다른 이름이면 무엇이든 좋다!" 단리궁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다시 우문혜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는 불나비(火蝶)였고, 우문혜는 불나비를 유혹하는 안개의 꽃(花)이었다. 다시 열풍은 시작되고… 밖에서는 유난히도 공기가 청신한 늦가을의 새벽이 깨어나고 있었다. * * * 혈거봉 일대의 풍운은 새벽이 되기 전, 잠식되었다. 중원마가의 후예들은 우문무가 정체를 밝힘과 동시에 모두 절을 했는지라, 싸움은 의외로 쉽게 끝이 났다. 하지만 산야(山野)가 피에 젖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명(黎明)이 될 때 단리궁은 우문혜의 수혈을 점해 단잠에 빠뜨린 다음, 오랜만에 머리를 단정히 빗고 뜨락으로 나섰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정세가의 인물들, 그들은 바로 중원천하를 지탱하는 사람들이었다. 단리궁은 그들에게 미소를 보냈고, 그들은 단리궁의 미소를 미소로 응답했다. 그리고 여명은 진정으로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정오가 될 때, 단리궁은 오랜만에 곤혹감을 느끼고 몸을 움츠려야 했다. "그분이 그런 명을 내렸다고……?" 그는 묘한 당혹감을 느끼고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주위에는 오랜만에 단리궁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기쁨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삼 인의 고수가 있었다. 마립(魔笠), 사화(死花), 전황(錢皇). 이들은 단리궁의 밀명을 받고 황궁에 가 있었다. 이들은 방금 전에 돌아왔는데, 이들의 품에는 천자가 친히 쓴 칙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단리궁은 그것을 활짝 펴 보고 있었다. <경(卿)은 죄인이네. 어이해, 짐의 장중주(掌中珠)를 그리도 박대할 수 있는가? 옹리(翁利)는 상사병에 걸려 침식을 잊고 사네. 이대로 둔다면 말라 죽고 말 걸세. 백치(白痴)로 내버려 두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어이해, 백치상태에서 풀게 하여 이러한 곤욕을 치르게 하는가? 당장 데려가지 않는다면 옹리를 비구니로 만들어 버리고, 짐은 강호를 토평하기 위해 오백만 황군(皇軍)을 강호로 내보낼 걸세!> 선덕제(宣德帝), 그는 강한 필체 뒤에 따사로운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절정세가의 가공할 후견인(後見人), 그는 물심양면에서 절정세가를 도왔고… 그로 인해 절정세가는 관군과 충돌 없이 큰일을 쉽게 수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옹리공주 주약빙(朱若氷)이었다. 그녀는 한 번 본 단리궁의 얼굴을 잊지 못하고 상사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은… 여복이 많으십니다!" "공주는… 늘 비파를 타시는데, 그 때마다 한숨이십니다. 아마도 머릿속에 가주의 얼굴이 가득 찼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 위사는 빙글빙글 웃었다. "가주는 얼굴을 숨기느라 숨기셨는데, 공주는 얼굴을 보신 듯합니다. 그래서 상사의 염원이 생긴 듯합니다!" 삼 위사는 몹시 부러워하는 눈치였으나, 단리궁에게는 곤욕인 듯 검미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어이할까요?" "……." "주상이 회답을 기다리시는데요?" "……." "무슨 말이든 해 주셔야 합니다." "자네들이 부럽네그려." "예에? 속하들이 부럽다니요?" "몰라도 되네, 나의 마음 속은! 하여간 황상(皇上)께는 모든 일이 끝난 후, 공주를 데리러 가겠다고 전하게." 단리궁은 그렇게 말한 다음, 총총히 서재로 들어갔다. 대체 그는 무슨 꿍꿍이일까? 그는 연공관 안으로 들어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궜다. 우문무도, 사대봉공도, 창궁천뇌도, 야뇌도, 단리우도, 반화 우문혜도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연공관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 * * 달빛이 화사한 뜨락이다. 이미 대기는 한기를 품게 되었다. 단리궁이 지하에 들어간 지 벌써 두 달째였다. 뜨락… 우문혜가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고, 단리우가 탁자 곁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들고 있었다. 그는 우문혜와 꽤 친근해진 상태였다. 밀가와 마가는 거의 하나가 된 상태였고, 그 일은 밀가의 원로들에게마저 거의 용인받은 상태였다. 단리우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고개를 쳐들었다. "형수(兄嫂)는… 형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십니까?" "글… 글쎄요." "훗훗… 그분이 틀어박힐 때는 승부가 있지요." "승부요?" 우문혜는 흠칫했다. "후후… 아마도 그분은… 싸우고 계실 것입니다!" "대체, 누구와 싸우는지요?" "그분은 타인과의 싸움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보다 힘있게 여기시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아마도 어떠한 것을 이룩하신 후에야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래봬도 형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지요." 단리우는 씨익 웃었다. "승부……?" "마지막 승부랄까요? 후후, 휘하고수들이 강호전역을 휩쓸며 철류흔의 세력을 격파하는 사이… 형님은 가장 극렬하고 위대한 승부의 길에 오르시는 것입니다!" 단리궁은 그 날로부터 보름이 지난 후에야 나왔다. 그는 아주 탈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맑고 신선한 웃음을 입가에 짓고 있었다. 그는 뭇고수들의 환영을 받고는 미소를 지었고, 휘하제자들이 일일이 고하는 여러 가지 일을 묵묵히 받아넘겼다. 그의 눈빛은 완전히 흐릿해, 내가기공을 익힌 사람 같지 않았다. "자네들을 믿었지. 이기리라고……!" 그는 느릿느릿 팔짱을 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나서야 할 때이지. 훗훗, 아마도… 그자 역시 나를 기다릴 걸세!" 그란 누구일까? 단리궁은 야릇하게 말하며 눈길을 천천히 쳐들었다. 단리궁은 단아한 미소를 머금다가 허공을 응시했다. "철류흔을 잡을 거망(巨網)은 그대들에게 맡기겠소. 그리고 나는 미루어 두었던 하나의 승부(勝負)를 시작해야 할 듯하오!" 미루어 두었던 승부라니……? 철류흔과의 운명적인 대결에 앞서, 또 하나의 승부가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타인과의 승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과의 승부요." 단리궁은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그는 자욱이 깔리는 검은 안개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막 눈이 내릴 듯 하늘은 어두워졌다. "그것은 남이 대신 싸워 줄 수 없는 그러한 싸움이라오!" 단리궁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걸어갔고, 결국 하늘에서는 거위털 같은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평원(平原) 쪽으로 쉬지 않고 걸어갔다. 그의 수하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단리궁이 이길 것을 장담하고 있었다. 그 싸움이 어떠한 종류의 싸움이건 단리궁은 꺾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하늘과 땅에 알리는 일뿐이리라! "저분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지. 그것은 술(術)도, 법(法)도 예(藝)도, 기(技)도 아닌… 하나의 절정검도(絶頂劍道)를 이룩한다는 것이지. 저분의 길(路)은 바로… 그러한 승부의 길이다!" "악마대군주는 천하와 싸우고 있으나, 저분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그 싸움이야말로 가장 힘든 싸움이다! 모든 사람이 도중에 포기하고 마는 그러한 싸움!" "그런 종류의 싸움은 천만 대군이라도 도움이 될 수 없다. 그 싸움은… 오직 일개인이 하는 것이니까!" 목소리들이 흐르는 가운데, 무수한 그림자들이 흩어져 갔다. 마지막 한바탕의 풍운을 향해……. 그리고 겨울을 향해 뭇고수들은 흩어져 가기 시작했다. 대륙에 신화를 이룩한 강호기인들, 이들은 안개가 흐트러지듯이 사라졌고… 대신, 펄펄 눈이 날려 대지를 하얗게 뒤덮기 시작했다. 초설(初雪)이었다. 만산(萬山)과 천수(千水)를 온통 설국(雪國)으로 만들어 버리고, �선혈(鮮血)의 갈등과 애욕(愛欲)의 여로(旅路)를 어머니 젖가슴처럼 뽀얀 순결의 장막으로 덮어 버린 것은 흰눈이었다. 소리 없이 퍼붓는 함박눈 가운데, 그는 어깨 위에 눈을 수북이 쌓아 둔 채 언제부터인가 고공(高空)을 응시하고 있었다. '취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마음 속 야망(野望)마저도!' 그는 설천(雪天)을 한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단리궁(段里弓), 그가 아닌가? '얻기 위해서는… 탐욕스럽게 추구하기보다 놓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왕도(王道)이고, 검(劍)에 있어서는 최후절정식(最後絶頂式)임을 알았다.' 그의 입가에 단아한 미소가 떠오른다. 번뇌(煩惱)의 여로(旅路)는 그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일러 주었다. 퍼붓는 눈 가운데, 단리궁의 지혜(智慧)롭고 신비(神秘)하던 눈빛이 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혜광(慧光)은 깊이 침잠(沈潛)되어 눈빛이 흐릿해졌고, 너무나 오랫동안 그의 매력으로 쌍안에서 흘러나왔던 혜성(彗星)의 빛마저 아스라하게 사그라졌다. 다만 남아 있는 것은 묘한 허무(虛無), 그러나 그것은 바로 가장 진실된 의미의 빛이기도 했다. "이제… 쓰여지지 않았던 최후비검결(最後秘劍訣)을 고공(高空)에 적으리라!" 아주 천천히 그는 손을 쳐들었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아도 좋다." 미려하고, 우아하고, 소박한 수식(手式)… 그것은 한 점의 살기(煞氣)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손은 느릿느릿 눈 오는 허공으로 쳐들려졌다. "그것은 검술에서 검예(劍藝)로, 검예에서 검흔(劍魂)으로, 검흔에서 검백(劍魄)으로, 검백에서 절대절정의 검로(劍路)로 통하는 �검의 왕도(王道)! 바로… 내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절정최후식(絶頂最後式)이다!" 손은 아주 천천히 그어지고, 일대의 설원(雪原)은 뇌정(雷霆)에 두들겨맞은 듯 흔들리기 시작한다. "철(鐵)－ 혈(血)－ 무(舞)!" 우… 우… 웅… 웅……! "천(天)－!" 보라! 그의 소수(素手)에서 일어나는 자욱한 강기(剛氣)를! 소리도 없이 일어나는 백색강기(白色剛氣)는 안개가 호수 위를 덮듯이 그의 몸 주위를 뒤덮었다. "지(地)－!" 그리고 그것은 백 장 안을 뿌옇게 휘감는 가운데, 허공에서부터 눈보다 흰 백색주(白色柱)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릉－! 지진(地震)이 일어나는 듯한 굉음(轟音)이 일어나며, 백색의 강주(剛柱)는 잇따라 거대한 크기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인(人)－!" 하나, 둘, 셋… 무려 일백팔 주(一百八柱). 그것은 인체의 기궁(氣宮)에서 뿜어지는 내공정화(內功精華)를 일백팔주천(一百八週天) 동시에 운용하기에 벌어지는 기현상이었다. 백팔 주는 하나하나 잠경(潛勁)으로 뭉쳐져 있다. 그것은 거대한 대리석전(大理石殿)을 받치는 아름드리 기둥 백팔 개마냥 단리궁의 주위에 형성된다. 단리궁은 두 손을 합장(合掌)하는 가운데,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위이이－ 잉－ 위이－ 잉－! 막대한 진기에서 일어나는 강풍이 무공에서부터 일어나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가운데……. "이제 술(術)도, 예(藝)도, 기(技), 법(法), 식(式)도 아닌 하늘과 마음과 땅이 하나로 합한 최후의 검을 보이겠소. 내게 검식을 전한 선대기인들이여!" 하늘과 땅이 일시에 무너지는 듯한 굉음 가운데, 단리궁의 몸은 백팔 강기 기둥과 더불어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천(天)－ 지(地)－ 개(開)－ 벽(闢)－! 경(驚)－ 천(天)－ 동(動)－ 지(地)－! 번(蒜)－ 천(天)－ 지(地)－ 복(覆)－! 콰르르르－ 릉－ 콰앙－! 우레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이 흰빛에 꿰뚫린다. 퍼붓던 초설(初雪)의 장막(帳幕)이 돌연 거꾸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는 가운데, 일 장 안이 일제히 뒤흔들렸고……. 쩌어어… 억… 쩌억……! 백색광이 사방으로 폭사해 나가는 가운데, 설원(雪原)이 거북이 등가죽 쪼개지듯이 균열되기 시작했다. 하늘(天)마저 일자(一字)로 끊어지고… 산(山)이 울고, 땅(大地)이 울고, 하늘이 눈보라에 휘말려 감추어지는 가운데……. 쉬이이이－ 잉－! 돌연, 눈보라의 거세고 차가운 장막을 뚫고 한 마리의 신룡(神龍)이 충천(沖天)해 오르기 시작한다. 아니, 그것은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하나의 유성(流星). 그것은 일순, 호선(弧線)을 끌며 머나먼 지평선(地平線)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눈(雪)은 쉬지 않고 퍼부었다. 대륙(大陸)에 가득하던 시산혈해(屍山血海)를 모두 덮어 버릴 듯이, 눈은 며칠을 두고 쉬지 않고 퍼부었다. 검정(劍情) 십이월 일 일. 이 날 천하(天下)의 대부분은 설국(雪國)으로 변했다.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눈이 쉬지 않고 퍼부었고… 천산(千山)과 만수(萬獸), 그리고 길이란 길은 모두 대설하(大雪下)에 파묻혔다. 무너지지 않을 위용을 자랑하는 한 채의 거대한 성(城)도 퍼붓는 눈에 포위되었고, 언제부터인가 그는 애검(愛劍)이 된 가전보검(家傳寶劍)을 다정히 매만지고 있었다. "검에는… 느낌이 있다. 그것은 검을 목숨 이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전해진다." 허무해 보이는 시선이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본다면 그의 두 눈 아래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어떠한 열류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야망(野望)과 천하(天下)를 소유하고 있을 때는 폭풍우(暴風雨)치는 소리로 들리고……!" 매우 섬세한 손길이다. 그는 다정하게 검신을 매만지고 있었다. 연인(戀人)의 속살을 보드랍게 애무할 때처럼, 그는 고금에서 가장 날카로운 인(忍)을 지니고 있는 고검(古劍)을 오랫동안 매만지고 있었다. "야망마저 버릴 때 그것은 아름답고 온유한, 그러나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웅장한 소리로 들린다." 가냘픈 웃음이다. 사내의 웃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영원히 머물러야만 할 듯한 숙명의 미소… 그러한 미소는 인고(忍苦)와 선혈(鮮血), 죽음의 세월(歲月)을 거친 후에야 입가에 지을 수 있다. 바로 단리궁(段里弓). 그는 최절정검도(最絶頂劍道)를 얻은 상태였다. 이상한 것은 그가 무도(武道)에 있어 보다 지고한 성취에 오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눈빛은 매우 부드러웠고, 싱긋 짓고 있는 웃음은 늘 대하는 친구(親舊)의 상냥한 웃음처럼 온화한 데가 있었다. 또한, 검신에 투영(透影)되고 있는 미려하고 준수한 얼굴에는 전에 없던 웅장한 기품이 떠오르고 있었다. 섬세한 가운데 스며 있는 거대한 기도, 그것은 이제 하나의 길이 끝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낭인(浪人)의 길, 끝없이 허전하기만 했던 텅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해 쉬지 않고 대륙(大陸)을 떠돌았던 젊은 낭인. 이제 그의 계절은 마무리지어진 것일까?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피의 사슬은! 불행하게도 나는 또 한 번 피비를 뿌려야 한다." 단리궁은 눈길을 쳐들었다. 창(密)… 활짝 열린 창이 있고, 월동형의 창틀을 통해 창틀과 똑같이 잘린 고공(高空)의 일편(一片)이 담겨진다. 회색으로 찌푸려진 하늘, 단리궁은 언제부터인가 가공할 마기(魔氣)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다가서고 있다!" 단리궁의 짙붉은 입술이 꼭 다물려졌다. "위대한 승부사(勝負士)! 후후, 그리고 이런 세월만 아니라면 만나서 비검(比劍)이 아니라… 한 잔 술을 함께 마시고 싶은 자!" 그는 누구를 부르고 있는 것인가? "그는… 피에 굶주려 다가서고 있다. 아마도… 그는 잔여세력을 모두 다 동원할 것이다!" 단리궁은 철류흔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무림최후(武林最後)의 승부사, 그 모든 것보다도 승부에 가치를 두고 있는 피에 굶주린 늑대. 그러나 그는 모든 강호인 가운데 단리궁과 가장 비슷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불굴의 투혼(鬪魂), 무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의 집념(執念). 단리궁과 철류흔은 두 가지에 있어 흡사했다. "그는 마성(魔性)이 폭발하기 직전일 것이다. 그는 나의 삼동지계(三動之計)에 걸려 모든 기반을 잃었다." 눈이 오는 소리는 여인이 옷을 벗는 소리라고 한다. 들릴 듯 들리지 않는 아스라한 소리, 단리궁의 미소는 그 소리 가운데 익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로 인해 중원천하(中原天下)가 흑도백도(黑道白道)의 천 년 갈등에서 하나로 뭉치게 되었는지 모른다. 훗날 다시 깨질지 모르나, 현재로서는 하나로 뭉쳤다고 할 수 있다." 단리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창가로 다가갔고, 보보를 내디딤에 따라 하늘은 더욱 커다랗게 다가섰다. 창 바로 앞에 서자,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섬세하고 연약해 보이는 그림자, 그 그림자는 언제부터인가 얼어붙은 정원(庭園)에 서서 그가 없는 우수의 그늘만 깊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 아래 다구(茶具)가 놓여져 있고, 지금 뜨거운 김이 찻물에서부터 솟아오르고 있었다. 우수에 가득 찬 두 눈, 그리고 휘어질 듯 가는 허리에 섬약한 듯한 가운데 농염한 교구로, 눈 오는 하늘을 유혹해 버리고 있는 섬세한 여인. 반화(半花) 우문혜(宇文慧), 그녀는 무공을 모르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무공을 잃었고, 동시에 마성(魔性)도 잃었다. 현재의 우문혜는 과거의 그늘을 앓는 한 명의 가슴이 여린 소녀에 불과했다. 희디흰 얼굴과 온화한 인상, 한 점의 미조차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깨끗한 피부. 그녀가 과거의 천마소종사(天魔少宗師)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기실, 중원마가(中原魔家)의 마공은 신공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이 마공으로 화한 이유는 위대한 실종사건에 기인한다. 바로 우문무(宇文武)의 실종, 그는 중원마가의 최후비결(最後秘訣)을 갖고 소림사 천년마공의 포로가 되어 잡혔다. 그로 인해 마가는 수많은 구결을 잃어야 했고, 그로 인해 중원마가의 무공은 익히기만 하면 마성이 폭발하는 극악한 마공으로 변한 것이다. 우문무가 돌아온 이상, 이제 중원마가의 마공은 하나의 신공으로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우문혜는 한숨을 내쉬었고, 지켜보고 있던 단리궁은 조금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우문혜를 볼 수 있으나, 우문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지금, 우문혜는 단리궁을 위해 차를 끓이는 중이었다. 우문혜를 침소에 놔 두지 않는 이유는 만에 하나, 그녀가 과거의 잘못에 괴로워한 나머지… 자결(自決)을 할까 우려되기 때문이었다. 단리궁은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대는 죄인이 아니오! 아시오?" 그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우문혜도 들을 수 없고, 단리궁이라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 그 목소리는 차가운 대기 가운데로 이어졌다. "죄인은… 세월(歲月)이오! 세월은 중원을 조롱했고, 특히 그대를 철저히 조롱했던 것이오!" 단리궁은 철혈검을 꽈악 쥐었다. '중원마가가 백도천하에 용서를 받는다면 그대의 얼굴에 떠올랐던 우수의 그늘 역시, 사라질 것이오.' 단리궁은 또다시 입술을 질끈 물었다. '철류흔은 중원마가뿐 아니라, 온 천하를 조롱했다. 중원마가는 피해자이지, 가해자가 아니다. 이제 천하는 그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단리궁은 천천히 손을 든다. 일순, 탁자 위에서 거무튀튀한 것이 떠올라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방립(方笠). 먹물을 발라 검게 칠한 흑색방립은 단리궁의 머리 위에 천천히 씌워졌다. "중원마가는 바로… 나의 처가(妻家)!" 그는 끈을 조이며 계속 우문혜를 바라봤다. 우문혜는 물이 완전히 끓기를 기다리는데, 그녀의 머리 위로 눈이 내렸고 동그스름한 능선을 이루는 어깨 위로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등에도 눈이 내린다. 단리궁은 그 아름다운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사흘 안에 마가는 천하인들이 갈채를 보낼 대업(大業)을 이룰 것이고, 그로 인해 마가는 중원에 진 빚을 갚았다고 인정받게 될 것이오!" "나의 여인, 내가 있소. 이제 한숨은 쉬지 마오!" 우문혜는 문득 들리는 소리에 얼굴을 번쩍 들었다. "아… 이 목소리는?" 우문혜는 깜짝 놀라며 신형을 돌렸다. 진장서재(盡藏書齋)의 창, 텅 빈 창문이 그녀의 망막에 고스란히 가라앉았다. "그… 그분의 목소리였는데……?" 우문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바람(風), 그리고 눈(雪), 그리고 우문혜의 머리카락은 갈대밭이 바람에 흔들리듯 흔들린다. * * * 우문무, 그는 무엇이 그리 화가 나는지 볼을 불룩하게 하고 뜨거운 콧김을 겨울하늘에 뿜어대고 있었다. "가주가 너무하시군. 그러한 중차대한 일을 하시는 마당에 어이해, 노부를 빼고 야뇌(夜惱)를 집어넣으신단 말인가?" 그가 뒷짐을 지고 후정(後庭)을 오락가락거릴 때였다. "노야(老爺),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우문노야가 여기서 하실 일이야말로 정녕 귀중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핫핫… 이곳에서 철류흔의 일만 결사대를 가로막을 병진(兵陣)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중차대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삼 위사(衛士), 이들은 절정세가 사람들 특유의 흑색무복(黑色武服)을 걸치고 있었다. 중원혼(中原魂)을 아는 자만이 걸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의복. 삼 위사는 황실(皇室)에서 돌아와 절정세가에 머물며 지인(知人)들과 검(劍)을 논(論)하며 지내는 것이 즐거운 듯, 말할 때마다 웃음이었다. 절정세가는 타방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역전노장들과 강호 노기인들로 이루어진 방파답게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절정세가는 위축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단리궁을 구심점으로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이곳의 율법(律法)은 인간(人間)이었다. 피와 죽음의 길 위에서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수십 년을 지내 온 강호인들인지라 인간애의 깊은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영어의 신세였던 우문무, 그는 한 시진 전에 절정세가로 돌아왔다. 그는 부상신풍가(扶桑神風家)의 일급무사들이 해로(海路)를 통해 도망가는 것을 철저히 분쇄한 상태였다. 지난 보름간, 철류흔의 거점은 하나하나 제거되었다. 대륙무림회 이후, 철류흔의 거대한 아성(牙城)은 폭풍(暴風)처럼 절정세가의 기세 아래 하나하나 무릎을 꿇었다. 철왕대가(鐵王大家). 악마의 대본영(大本營), 그 곳은 가장 무자비한 공격 아래 초토화된 상태였다. 달단왕녀와 중원의 세가고수들이 힘을 합해 철왕대가를 붕괴해 버렸고, 철류흔의 막후인물들은 죽거나 잡혔고, 철류흔이 훗날을 위해 비장해 둔 화탄(火彈)과 독약(毒藥)은 하나 남김없이 불타 버린 상태였다. 어디 그뿐이랴? 천축쌍가(天竺雙家). 태양가(太陽家), 환희가(歡喜家). 지존을 잃은 천축의 양파 역시, 비조를 타고 날아간 절정세가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부상신풍가(扶桑神風家). 그곳 역시 주인이 뒤바뀌는 상황이었고, 중토(中土)에서는 얻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배를 타고 돌아가려 했던 자들 또한 우문무에 걸려 완전히 철살(鐵殺)되었다. 가히, 질풍노도! 단리궁의 휘하는 타방파가 십 년에 걸쳐 할일을 단 십오 일 만에 해치워 버린 것이다. "변황의 잔여세력은 모두 처단되었다는 것을 노부는 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부류일 뿐이다. 그런데 노부를 빠뜨리다니……!" 우문무는 꽤나 속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일만 결사대(結社隊), 중원총영(中原總營). 철류흔은 이제 단 두 가지 조직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백만(百萬)으로 시작했고, 단리궁과의 격전 가운데 구 할 이상을 잃어 버린 것이다. "주인은 필경 그곳에 가셨다. 가셨다면… 이미 일은 마무리지어졌을 것이다." 그곳 , 우문무가 말하는 그 곳이란 어떠한 곳일까? "그곳은 노부가 태어난 곳이거늘… 그 곳을 청소하러 가는데, 노부를 빠뜨리다니……!" * * * 야(夜), 눈이 내리고 있으나 밤은 희어지지 않는다. 밤에 내리는 눈은 흑설(黑雪)이다. 혈무봉(血霧峯) 기슭, 비연(飛鳶)도 날아오르지 못할 깎아지른 듯한 험봉단애(險峰斷崖). 휘리리리－ 링－ 휘리리리－ 링－!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만 장 절벽을 덮치며 거벽은 당장 무너질 듯 우레 소리를 내었고, 바람은 거벽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지며 무수한 흑설화(黑雪花)를 비처럼 퍼부었다. 깊은 밤 깊은 곳, 언제부터인가 두 개의 그림자가 섬전처럼 흐르고 있었다. 둘 다 소리를 내지 않고 나는 듯 달리고 있다. 이기형허(以氣形虛), 어기충허(御氣沖虛)의 절대적인 야행술(夜行術). 두 사람은 모두 흑포(黑袍)를 걸치고 있었다. "우문노인이 속상해 하겠는데요? 자신의 가문을 정리하는 일에 자신을 빠뜨렸다고?" "후후… 그를 데리고 온다면 일이 한결 쉬워질 것이나, 이번 일에는 그가 끼여서는 아니 되기에 일부러 그가 오기 이전, 노인과 단 둘이서만 온 것이오." "그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가 와서 한다면, 매우 상식적인 해결이 될 것이오! 사실 이곳은 무너져 가고 있고, 우문노인이라면 쉽게 이곳을 허물어 버릴 수 있소!" "……." "굳이 내가 온 이유는 항차, 중원천하에 이곳이 나의 가문(家門)임을 명백히 밝히고자 함이오." "가주의 가문이오?" "처가(妻家)는 가문이 아니오, 야뇌(夜惱)?" "훗훗… 그렇군요. 가주께서는 친히 이곳을 경비하시어 훗날, 천하인이 마가를 죄인시하지 못하게 안배하시는 것이군요?" "비슷하오!" "속하, 또 잘못 말했습니까?" "후후… 내가 직접 할일은 없소. 나는 수수방관할 것이고, 대사는 그들 스스로가 행할 것이오!" 절정서생 단리궁, 야뇌(夜惱). 두 사람은 백 리 먼 곳에서부터 이곳까지 충허표풍비행술(沖虛飄風飛行術)로 쉬지 않고 치달려 왔다. 수만 쌍의 눈이 빛나고 있다. 이글이글 마광(魔光)으로 빛나는 악마의 눈빛들,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장벽을 겹겹이 펼친 채 혈무봉 정상을 죽음의 지대로 만들고 있었다. "그분은 꼭 오신다!" "중원의 시시한 분타와 변황의 사대외단이 격파되었다고 위축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분은 중토(中土)로 들어서고 계신다. 그분은 최후의 마공을 연성하기 위해 잠시 중토를 떠나셨을 뿐이고, 절정세가의 조무래기들은 그 틈을 이용해 사소한 승리를 얻었을 뿐이다!" "크크… 그분은 일당만(一當萬)이고, 우리들 또한 하나하나 일당천(一當千)의 살수(殺手)들이다." "중원, 네놈들은 최후의 몸부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번뜩거리는 눈빛들, 이들의 몸에서는 노린내가 유난히도 짙게 풍겼고 매캐한 초연이 풀풀 흘러 넘치고 있었다. 천마친위대(天魔親衛隊). 수는 사천(四千), 철왕시위대(鐵王侍衛隊) 바로 아래의 조직이다. 마공에 있어서는 철왕시위대보다 일 단계 아래이나 화기암기술(火器暗器術)을 철저히 익히고 있어, 실전에서의 활약은 철왕시위대에 필적한다. 이들은 철류흔이 중원마가에 고정 배치시킨 무리들이었다. 흑사령(黑司令).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악마군단(惡魔軍團). 강호의 하오잡배(下午雜輩)들 가운데서 철류흔을 종주(宗主)로 모시기로 충성하고, 혈배(血杯)를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본시 내공이 약한 자들인데, 철류흔이 친히 제조한 마단(魔丹)을 열 알씩 먹고 가공할 마공을 몸에 지니고 철류흔의 팔다리가 되었다. 이미 인성(人性)을 버린 자들, 이들은 가슴에 화탄을 한 주머니씩 품고 있었다. 강남무림(江南武林) 천살풍운검대(天殺風雲劍隊), 강북무림(江北武林) 비천악령대(飛天惡靈隊), 삼대순찰당(三大巡察堂), 비혼(飛魂), 비전(飛箭), 비풍(飛風), 흑살추적대(黑殺追跡隊), 호접별부(蝴蝶別府), 지주암살단(蜘蛛暗殺團) 철검시위(鐵劍侍衛)……. 천하도처에서 모여든 자들, 이들은 바로 최근 들어 잇따라 무너진 철류흔 휘하조직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한 장소로 모인 자들이었다. 유난히도 마성이 강하고 철류흔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들, 이들은 철류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중원마가의 본가(本家)였다가 환우혈맹의 총타(總舵)가 되어 버린 마등성(魔燈城)을 휘감고 있었다. "주인의 생각대로입니다. 만천하에 흩어졌던 철류흔의 심복들이 세가의 폭풍 같은 기세에 놀라 한 곳에 모였습니다." "후후… 나방을 잡으려면 불을 피워야만 하오. 불을 피우면 나방이란 놈은 절로 날아들게 마련이기 때문에!" 단리궁은 웃으며 신형을 폭사하고 있었다. 야뇌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쾌속한 신법. 단리궁은 천하제일의 추종술을 터득한 야뇌마저도 알지 못할 신법을 발휘해 인간의 장벽을 넘고 있었다. 열 개의 마진(魔陣), 스물다섯 개의 기관매복(奇關埋伏)이 있었으나 단리궁을 막지는 못했다. "후후… 주인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 야뇌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합하고 있었다. '흑무잠형(黑霧潛形)과 둔석공(遁石功)으로 들어가서 주인을 돕자, 노부도 강호에서는 가장 빠르다는 소리를 듣는데… 주인에게 비한다면 비룡 앞의 자라꼴이로군' 야뇌는 손을 합하려 하는데, 문득 그의 눈길을 끄는 하나의 글이 있었다. "아… 이런 글을 남기시다니? 정말 빠르시군. 턱을 쓰다듬는 듯하시더니, 언제 빙벽에 글을 남기셨단 말인가?" 야뇌의 시선이 머무는 곳, 막 떠나간 단리궁의 필적이 커다랗게 남아 있었다. 세 치 깊이에 칼로 깎은 듯 정교한 글씨. 단리궁은 소매를 떨치고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는 듯한 가운데 벼랑에 글을 크게 새겨 놓은 것이다. 일컬어 탄허공공지(彈虛空空指). 글은 그러한 절학 아래 쓰여졌다. <지금부터 시작하시오! 피의 춤(血舞)과, 밤의 번뇌를! 기왕이면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게!> 야뇌는 그런 글을 보고 피식 웃고 만다. "훗훗… 성동격서(聲東擊西)라? 훗훗……!" 암흑천공(暗黑天空)은 돌연히 폭사되어 나오는 칠 장 길이의 도섬(刀閃)에 의해 난자(亂刺)당했다. 쩌어어… 억……! 가공할 기세로 일어나는 한 줄기 도홍(刀虹), 그곳은 인간의 장벽 가운데로 파고들었고……. "어어… 엇?" "피… 피하라!" "으으, 대체… 대체 어디서 갑자기 저러한 것이……?" 산하를 굽어보며 살기등등하게 버티고 있던 자들의 살색은 일순, 밀랍처럼 희게 물들었다. 손이 쳐들려 검자루를 향해 가고, 머릿속으로 보법구결이 떠올려지는 그 찰나. 치리리리－ 릿－! 가공할 기세로 치솟아 오른 일 섬(閃)은 인간의 장벽 가운데 거대한 동혈 하나를 파 놓고 있었다. "캐애애－ 액－!" "으윽……!" "이… 이것은… 신(神)의 도초(刀招)이다!" "크으으… 윽! 적이 목젖 아래까지 와 있을 줄이야……." 푹푹 고꾸라지는 자들, 그리고 핏물이 분수처럼 피어 오르며 하늘을 시뻘겋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적이다!" "수천 명이다! 어서 막아라!" 삐이이－ 익－ 삐익－! 요란한 호각 소리, 그리고 수만 명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움직이는 가운데 일대는 풍뢰(風雷)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기관이 돌아가며 지하의 함정이 쩍쩍 입구를 드러냈고, 사방육합(四方六合)에서부터 군영(群影)이 솟구쳐 오르며 지상과 허공에 인간의 그물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디냐?" "대체 무슨 일이냐? 우라질!" "산하의 순찰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는데, 대체 어디에서 고수들이 나타났단 말이냐?"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자들, 꾸역꾸역 나타나 설봉(雪峯)을 새까맣게 뒤덮는 자들……. 옷자락이 눈보라에 뒤집혀지는 소리가 요란했고… 휘파람 소리, 호각 소리가 밤의 정적을 짓이겼다. 백 갈래에서 천 갈래로 흩어지는 무서운 도세. 눈이 수북이 쌓인 빙원을 쪼개고 솟아오르는 수천 줄기의 무지개 같은 도세는 또 한 번 파란을 일으켰다. 보라! 허공에 흩어지는 수많은 그림자들. 하나, 둘… 넷… 여덟… 열여섯… 서른둘……. "우아아아……!" "카카카－ 카카－!" 사방에서 호통치는 소리,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육합에서 가공할 도세가 작렬하기 시작했다. 파－파－ 파－! "크윽, 이… 이게 무슨 조화냐?" "으… 대체 몇 명이냐? 그리고… 어디서 나타나는 것이냐?" "우우… 욱……!"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자, 그리고 가공할 도세에 겁에 질려 도망가려다가 들이닥치는 동료의 몸뚱이에 밀려 절벽에서 떨어지는 자. 삽시간에 일대는 폭풍보다 더한 소란에 휘말렸다. "어디냐?" "누가… 어디서 온 것이냐?" 삐이－ 익－! 호각 소리는 더욱더 급박해졌고, 설무(雪霧) 가운데 그는 단 이 도(刀)로 인해 일어나는 거대한 소란이 오히려 싱겁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겉보기로는 흉악한 아해들이 사실은 겁이 많지. 큿큿, 노부의 이 검에 저리도 당황하다니……!" 밤의 번뇌라 불리는 자, 절정세가에서는 제삼인자의 무공수위를 자랑하고 있는 중원제일의 쾌수(快手). 그는 바로 일대의 폭풍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뚝－ 뚝－! 허공에서 찬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거대한 지하광장(地下曠場), 이곳은 언제부터인가 살이 썩는 내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보라! 수천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고, 몸이 썩어 가는 사람들이 수백 명 겹쳐 누워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을 저주하고 있는 것을! 그리고 천오백에 달하는 사람들이 석상이라도 된 듯, 꼼짝 않고 앉아 시간과 공간을 잊고 있었다. 한 노인, 그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눈을 감지 않은 듯했다. 그의 망막에는 먼지가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무슨 한이 있기에 살아 있는 사람으로 눈도 껌벅이지 않고, 눈이 먼지에 덮이도록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일까? '이제… 영광도, 지옥도 없다.' 그는 매우 미약한 숨결을 흘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천 년의 굴복을 갖고 왔다. 이제 길은 하나, 죽음으로 참회하는 것뿐이다!" 노인은 우두머리로 보였다. 어깨 위에 곰팡이가 피었고, 반백의 머리카락에는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석상 같은 사람, 본시 장대한 체구였으나 너무나도 오랫동안 곡기를 끊은지라 지금은 강시처럼 메말랐다. 우문추(宇文鎚), 그는 바로 우문추였다. 한때는 천마대종사(天魔大宗師)라 불렸던 인물이다. 그는 중원에 철류흔의 터전을 쉽게 마련해 준 위대한 패배자였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아니, 세월을 보는 눈이 없었다." 우문추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그의 몸 근처, 그의 가신(家臣)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자세로 머물러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중원마가의 수뇌부 인물들이었다. 기실, 이들은 이 년 전에 여기 잡혀 왔다. 철류흔은 이들과 동맹(同盟)을 맺는 척하다가, 이들을 모조리 잡아 지하뇌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이 일은 우문혜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철류흔은 우문혜가 자결할까 두려운 나머지, 이 일을 철저한 비밀 속에 파묻어 둔 것이다. 자신의 가문에서 포로가 된 우문추, 혀를 깨물 힘만 있었다면 그는 벌써 시신이 되어 지옥의 대지에 몸을 눕혔을 것이다. "삶이란… 치욕이다!" 그가 고개를 저을 때였다. 문득, 어디에선가 너무나도 맑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글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외다." 어디서 흘러드는 목소리일까?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신비한 목소리. 우문추는 그 목소리가 현실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아아, 마음 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다니!" 그가 가볍게 고개를 저을 때였다. "후후… 세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어찌 생각하면……."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언제 나타났을까? 고검(古劍)을 손에 든 미장부 하나가 뇌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거의 다 죽게 된 마가의 가신들, 이들은 환상처럼 다가서는 청년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누… 누구냐?" "참수자냐? 이제는 우리들이 필요 없다고 여기고, 참수자가 와서 우리들을 목 베는 것이냐?" "……!" "……!" 무반응인 자가 태반이었다. 말을 하는 자는 그래도 기운과 독기가 남아 있는 자들이었다. 이 년이 넘는 영어의 나날, 그 처절하고 포악한 세월은 천오백여 생존자들의 잔혹하던 마성을 거세해 버린 것이다. 청년, 그는 싱긋 웃으며 다가서고 있었다. "혹, 다시 날고 싶다면 그렇게 해 볼 수도 있소. 단, 그 하늘은 검은 하늘이 아니라… 흰 하늘이어야 하오!" "누… 누구인가, 그대는?" 우문추는 바로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청년을 바라봤다. 거인의 걸음으로 대지를 밟고 허공을 쪼개며 다가서는 풍운아, 단리궁. 그는 야뇌가 소란을 일으키는 틈을 타서 마가인물들이 잡혀 있는 뇌옥 안으로 다가선 것이다. 두 사람, 이들 사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만에 하나, 단리궁이 유랑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아마도 지금쯤 장검을 맞대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단리궁은 가문을 버렸기에 천하를 얻는 셈이었다. 그는 꽤 큰 걸음으로 다가섰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 필요 없소이다!" "으음……." "지금 중요한 것은… 결정이오." "결정?" "무림사상 대륙에 강호계가 생긴 이후, 가장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오. 마도로 계속 가느냐, 정도로 가느냐?" "묘하군. 철류흔이 노부를 시험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우문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빛을 볼 수 있었다. 완전한 어둠을 가르는 그 빛은 단리궁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혜광(慧光)이었다. 그리고 우문추는 기이한 느낌을 골수 속으로부터 느끼고 있었다. '따뜻하다. 아아, 누구이기에… 이러한 기운을 흘릴까? 나이로 보아 이제 약관에 불과한데.' 우문추는 입가를 벙긋거렸다. 그리고 단리궁은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한, 기회는 있소!" "으음……." "기회는 가까운 데에 있소." "……." "왜냐하면, 노인이나 나나 살아 있는 사람이기에……." "기, 기회?" "훗훗… 다시 한 번 강호라는 아름다운 대지에 살아갈 수 있는 기회!" "으음……?" "물론, 길(路)이 달라야 하오." "길?" "마(魔)의 길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따라가야 하오." "왕… 왕도!" "그렇소. 그리고 그것은 남이 결정해 줄 일이 아니오. 그것은 노인이 스스로 해야 하오!" 단리궁은 말을 맺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일대에서는 너무나도 기이한 흥분이 시작되고 있었다. 조용하게 시작되어서 거대하게 일어나는 폭풍의 기세. 그것은 정(正)도 사(邪)도 아닌 인간 본연의 기운이었다. "다시 살 수 있다면……!" "이후에는 밝은 대지 위에서 살겠다. 이제 죽음의 율법은 거부하고 싶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좋다. 당당한 무사로 철류흔과 싸울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 "으으, 다시 한 번… 시작하게 해 주시오, 대영웅!" "우우… 우우……!" 일대는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마성에 빠져 일생을 허비했던 사람들의 눈에서 처음으로 의혼(義魂)이 폭사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주인인 우문추는 단리궁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대답은… 저들이 하는구려!" 그의 눈에서는 이슬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굴복의 눈물이었다. 단리궁도 따라 웃고 있었다. "그대는… 패자가 아니오. 그대는 위대한 승자요." "승자?" "그렇소. 이긴 것이외다, 장인(丈人). 그리고 이제는 그대의 증조부 역시, 고민을 덜은 것이오!" "증… 증조부라니? 그럼, 그분이 살아 계시단 말이오!" 우문추가 입을 딱 벌릴 때였다. "자아, 시작합시다!" 단리궁은 천천히 위로 치솟고 있었다. 그는 상승기류를 타고 허공으로 치솟으며 결가부좌에 들어갔고, 두 눈은 스르르 반개(半開)되는 가운데 단아하게 꼬아진 무릎 위로 천년고검(千年古劍)이 놓여졌다. 우… 웅… 웅……! 그의 등 위로 오색배광(五色背光)이 형성되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가공할 기운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섬세한 손가락은 날카로운 검신에 닿고 있었다. 장엄한 기도, 그리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손동작 가운데 철혈검은 휘어졌다가 바로 퍼지며 너무나도 기이한 음률을 흘리기 시작했다. 띠－ 딩－! 탄검의 소리는 차갑지 않고 따스했다. 그 소리는 공포스러운 살명(殺鳴)이 아니라, 혼백에 힘을 주는 대자비음이었다. 따당－ 땅－! 탄검은 쉬지 않고 이어졌고, 일대는 탄검의 여파로 인해 일대벽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오, 바로… 탄천탄지(彈天彈地)의 위대한 활술(活術)!" "가장 위대한 요상대법(療傷大法)이다! 한 자루의 검으로 만 인을 구한다는 전설상의 술법!" "아아, 저 사람은 이미 하늘(天)인가?" 중원계를 팔아 넘기려 했던 천년마가 인물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은 모든 욕망(欲望)을 맑게 씻어 준다. 끝없이 이어지는 검음(劍音), 그리고 마가의 인물들은 하나하나 정좌(定座)하기 시작했고… 가공할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가운데, 천장과 바닥을 잇는 아름드리 석주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우르르르릉－ 쩌억……! 돌더미들이 떨어지고, 바닥과 벽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도 중인의 몸 위로는 아무 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심전력(以心傳力), 이음격체전력(以音隔體傳力). 단리궁은 마음과 소리로 자신의 내공을 흘려 보내고 있고, 그로 인해 천오백 명의 마음과 몸은 하나로 뭉쳐지는 가운데 강기벽이 형성된 것이다.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희디흰 안개의 성. 아아, 그것은 고금에서 최초로 이루어지는 절대의 성이고… 바로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성이었다. "이제… 이겼다! 나는… 아니, 중원이 이긴 것이다. 설사, 내가 최후의 대결에서 철류흔에게 패하더라도 나는 승자로 기록될 것이다!" 단리궁은 새벽과 함께 있다. 그의 곁에는 야뇌가 있고, 두 사람의 전면에는 천오백 대 삼만(千五百對三萬)의 가공할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쳐라!" "와아아! 이제 우리는 마가인(魔家人)이 아니라, 중원인(中原人)이다!" "우우, 다시 검을 쥐어 본 이상… 이제는 죽어도 좋다!" 우르르릉－ 콰앙－! 벽력 소리가 잇따르는 가운데 시체가 튀어 오르고 끊어진 팔과 다리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혈무봉은 진정으로 피에 씻기고 있었다. 갇혔다가 풀린 마가의 인물들은 그들을 농락한 철류흔의 휘하고수들에게 철저한 응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사람, 그는 기쁨을 애써 참는 표정을 지으며 단리궁과 야뇌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역시 주인이십니다. 어리석은 아해들을 중원의 의협으로 만드는 데 단 하루가 걸리시다니……!" 머리를 긁으며 다가서는 노인, 그는 우문무였다. "우리 가문은 천 년 만에 제 길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의 등 뒤에는 한 소녀가 있는데, 바로 우문혜였다. 두 사람은 차마 그냥 있을 수 없어 단리궁을 따라온 것이었다. "고마워요……." 우문혜는 차마 단리궁을 마주볼 수 없는 듯, 단리궁의 발끝만 봤다. 그녀는 살포시 미소지으며 눈물을 흘렸고, 너무나도 작은 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강호의 여인이 아니라… 상공(相公), 오직 한 분의 영원한 그림자가 되겠습니다!" 작은 목소리와 함께 새벽은 열리고 있다. 무너지는 혈무봉 일대, 절정세가 사람들이 단리궁의 명도 없는데 와서 마가 사람들과 힘을 합해 싸우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쉬지 않고 눈이 퍼부어졌다. 단리궁, 그는 아직도 검을 불끈 쥐고 있다. 이유는 하나, 진짜 위대한 승부는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꼭 온다. 나를 찾아서!" 이제 검(劍)을 묻으리! 암울한 두 눈이 설야(雪夜)를 본다. 핏빛 연지(蓮池)마냥 붉게 일렁거리는 마(魔)의 눈빛, 그것은 눈을 바라보는 가운데 격동(激動)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으드득－!" 입술을 질겅질겅 씹는 금포대한… 얼굴은 숯으로 뭉친 듯 검었고, 두 눈은 핏빛 노을을 태우는 마염(魔焰)처럼 시뻘겋다. "백대마공(百大魔功)을 익히느라, 나의 용모마저 없앴거늘… 그 놈에게 다 잃어 버렸다!" 악마의 눈은 땅을 보고 있다. 그곳, 언제부터인가 종이(紙)가 불살라지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를 피우며 타 들어가는 누런 종이는 하나하나 외부에서 전서구(傳書鳩)로 날아든 비서(飛書)였다. 화르르르－ 륵－ 화륵－! 불살라지는 종이 위, 글씨도 종이와 함께 사그라진다. <중원마가(中原魔家)가 완전히 돌아섰음. 중원마가의 최고배분인 벽력천자(霹靂天子) 우문무(宇文武)란 자가 나타났음. 그는 우문혜(宇文慧)의 고조부(高祖父)인 자. 그는 중원마가를 절정세가(絶頂世家)에 병탄시킬 것을 결정했고… 중원마가는 천 년간 강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이후, 마도의 잔여세력을 소탕하는 데 선봉을 서야 한다고 대마평의회(大魔評議會)에서 결정을 내렸음. 중원마가는 백도로 돌아섰고, 백도의 힘은 이제 절대적임. 대군주(大軍主)가 암중에 만드신 비밀분타(秘密分舵) 지하조직(地下組織)은 차례차례 부서졌고, 피할 방법은 전무(全無)!> 중원비단(中原秘壇)에서 날아온 비합전서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배첩, 그것은 너무나도 머나먼 외몽고(外蒙古)에서부터 날아왔다. <철왕대가(鐵王大家) 멸망. 절정세가의 인물들이 비조(飛鳥)를 타고 와서 이틀 동안의 혈전 가운데, 본가를 무너뜨렸음! 이제 희망은 없는 듯함. 속하는 이 글을 대군주께 날려 보낸 다음, 자결할 작정임! 이미 와자국(瓦刺國)의 마가(魔家)도 무너졌고, 유구국(琉球國)의 부상신풍가(扶桑神風家) 역시 본 주인인 무혼류(武魂流)에게 정복되었으며, 천축쌍가(天竺雙家)인 태양가(太陽가)와 환희가(歡喜家) 역시 철저히 붕괴되었습니다 이제는 희망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대군주여!> 그리고 다시 한 장의 밀지, 그것은 대군주 철류흔(鐵流痕)을 가장 격하게 만든 밀지였다. <대군주가 최후역전계(最後逆戰計)로 생각하시었던 비장의 수단이 완전 실패되었소이다. 경쟁자로서 이 소식을 전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고 글을 보내오. 이 글은 그대의 속하가 보내는 것이 아니외다. 이 글을 쓰는 장본인은 천하제일인이신 절정서생을 바로 곁에서 모시는 창궁천뇌(蒼穹千腦)라는 사람이오. 절정세가에서의 지위는 대군사(大軍師). 철대군주, 그대의 세력과 조직은 완전히 격파되었소. 물론, 그대는 거대한 저력을 지닌 사람이니… 구십여만 휘하세력을 잃었다 하더라도 얼마 정도의 잔여세력을 갖고 있으리라 믿소. 하지만 이제 알기 바라오. 중원혼(中原魂)과 중원천(中原天)을!> 철류흔이 중원에서 이룩한 모든 것은 거의 부서지고 만 것인가? 눈(雪)! 철류흔의 머리 위에서도 눈이 흩뿌려진다. "좋아, 단리궁! 너는… 나보다도 위대한 승부사(勝負士)였다!" 마기가 가득 실린 목소리가 흐른다. "너는… 멍청한 척하며 천하를 얻었다. 그리고 나는 뛰어난 척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의 두 눈은 바로 섬전(閃電)이었다. 극악한 빛이 폭사되어 나오는 가운데, 철류흔의 입매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런 이상… 훗훗, 이제껏 잃은 것 정도는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를 으드득 갈다가 손을 품에 넣었다. '내게는 백한 번째의 마공이 있다. 그것은… 절대로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환우제일마공이었다. 바로… 사(死)!' 죽음의 마공, 그것은 철류흔이라 하더라도 겁이 나서 익히지 못했던 최후의 마공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의 손은 품을 빠져 나왔다. 나무갑 하나, 철류흔의 손에는 나무갑이 하나 쥐어졌다. "후후… 이 안에는 천마사혼단(天魔死魂丹)이 있다. 그것을 복용하면 나는 완전한 마성(魔性)에 빠져들게 되며, 나의 무공은 급증한다. 후후, 나는 절대마종(絶代魔宗)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철류흔의 눈빛은 차츰차츰 살아나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어리석었기에 한 사소한 실수에 지나지 않는다. 단리궁이 무성(武聖)이라 하더라도, 그의 휘하에 천하(天下)가 있더라도 이제는 나를 막지 못한다. 후후, 그가 절대자(絶對者)가 아닌 한 나를 막지 못한다! 나의 최후저력(最後底力)을 중원은 막지 못한다!" 그는 목갑을 열었고, 단환 한 알을 꺼냈다. 용안(龍眼)만한 핏빛 단약… 그것을 만들기 위해 천인뇌(千人腦), 천인혈(千人血), 천인혼(千人魂)이 허무하게 바쳐졌다. 천마사혼단(天魔死魂丹). 이름을 읊는 것마저 금기로 불리는 가장 극악한 악마의 단약. 철류흔은 결국 그것을 꺼내고 말았다. "자, 이제 마지막 승부(勝負)를 시작해 보자. 둘이 가고, 하나만이 올 수 있는 철저한 승부의 여로를! 훗훗, 내게 패배심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 중원의 경쟁자… 단리궁!" 그는 웃었고, 유난히도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휘리리리－ 링－ 휘리리리－ 링－! 그러는 가운데 사위는 회색 장막에 뒤덮이는데, 언제부터인가 다섯 부류의 무리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카아아－ 카아아－!" "끄으으… 끄으으……!" 악귀의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몰려드는 일만여 무림인들. 이들은 바로 철류흔이 측근에게도 말해 주지 않고 암중에 길러 오던 가장 가공할 마도인들이었다. 철류흔은 그들을 기르기 위해 강호계의 일에 나서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철류흔의 최후 저력, 그것은 다섯 줄기 세력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피가 적셔진 듯한 혈포(血袍)에, 얼굴을 휘감은 혈건(血巾), 나뭇조각같이 마른 사지(四肢)에 음사한 냉기(冷氣)를 뿌리는 이천 마군(魔軍). 제일혈사령(第一血死靈). 이들은 마혼(魔魂)으로 뭉쳐진 반인반마(半人半魔)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호흡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섰다. 두 번째 무리 역시 이천(二千)인데, 그들은 가장 거친 호흡 소리를 내며 다가섰다. 흑포(黑袍)에 흑건(黑巾), 그리고 칠흑 같은 피부빛. 묵철강시(墨鐵彊屍). 강시가 되기 위해 혼(魂)은 죽어 버린 자들. 이들에게는 백(魄)만이 있고 금강불괴의 육체가 있을 뿐이다. 이들은 철류흔과 심령으로 통하고 있다. 그것은 세 번째 세력과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전신에서 화무(火霧)를 뿜는 거대한 불덩어리들. 설원을 녹이며 치달려 드는 이천 악마는 가공스럽게도 오백 년간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적인 집단이었다. 화령강시(火靈彊屍). 화혼(火魂)으로 뭉친 무리들. 이들 역시 철류흔과 심령으로 서로 통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네 번째 무리 독마비단(毒魔匕團). 다섯 번째 무리 철갑인자(鐵甲忍者). 철류흔이 지하에서 기른 독버섯들, 피를 먹고 자라난 악마의 무리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있었다. 하늘은 눈에 뒤덮였고, 대지는 악마의 호흡 소리에 뒤덮였다. 마지막 풍운(風雲)의 밤(夜)은 이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눈(雪)과, 악마안(惡魔眼)과, 무조건 다가서기만 하는 설풍(雪風)의 잔혹한 소리와 함께……. 십이월(十二月)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폭설(暴雪)이다. 산(山)과, 들(夜)과, 강(江), 하늘(天)… 모든 길(路)이 눈에 파묻혔고 모든 곳이 눈에 휘감겼다. 열흘을 두고 퍼부어지는 눈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일만(一萬)의 그림자가 혈거봉을 향해 선풍처럼 움직여 가고 있었다. 밤을 택해 혈거봉을 찾은 일만의 그림자. 혈사령(血死靈), 묵철강시(墨鐵彊屍), 화령강시(火靈彊屍), 독마비단(毒魔匕團), 그리고 철갑인자(鐵甲忍者). 지옥혈마단과 철왕시위대마저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가장 가공스러운 마도의 첨병(尖兵)들이다. 오대밀지에 흩어져 가공할 마공을 수련했던 일만 마병은 한날 한시에 혈거봉을 향해 움직여 가고 있었다. 가공할 빠르기로 절정세가를 향해 가는 일만의 마병들. 그들은 눈보라 가운데 모습을 감춰 가며 쏘아진 화살처럼 움직여 나아갔다. "정확하군, 가주의 예측은!" "시작하세, 마지막 그물질을!" "하나하나 가공할 거마들이오. 그러니… 방심해서는 아니 되오!" "저들은 일만, 그리고 우리 측도 오직 일만이오!" "다른 사람은 수수방관할 뿐, 절대 끼여들어서는 아니 되오. 설사, 우리들이 진다 하더라도……!" "일천 마혼(魔魂)이 선봉에 서고, 야뇌검대(夜惱劍隊)가 뒤에 선다. 그리고 일천 검대가 그 뒤에, 삼 위사가 고르고 고른 무사들이 그 뒤에 선다!" "예정대로 시작하라!" 쓰으으… 쓰으으……! 설풍 가운데 뭇고수들이 흩어져 나아가고 있었다. 절정세가에서도 정예급에 속하는 일만 고수들이 오대마병이 다가섬과 동시에, 질풍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금관(金冠)에 금포(錦袍), 구슬을 꿰어 만든 신발을 신은 자. 그는 붉은 구름을 주단처럼 대지에 깔면서 빠른 속도로 혈거봉 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짙은 혈무 가운데, 인간의 육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악마의 신이 들어 있었다. 쭈욱 찢어진 두 눈에서는 핏빛이 스물스물 흘러나왔고, 매부리코와 독사자의 아래턱에서는 요기가 가득했다. 철류흔(鐵流痕), 그는 천마사혼단(天魔死魂丹)을 먹고 용모를 훼손하는 동시에 내공을 급증시킨 것이다. 언제부터일까? 그는 너무나도 막대한 기운이 다가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은 꽤 먼 곳에서부터 그를 잡아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고, 철류흔만이 느낄 수 있는 가공할 기운. "절대의 기도이다!" 철류흔은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봤다. 저 높은 산정(山頂), 눈이 펄펄 날리고 있는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서 철류흔이 다가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는군!" 팔짱을 끼고 있는 청년, 그는 한 자루 장검을 아기 안 듯 안고 철류흔이 다가서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시선과 시선… 십 마장 먼 곳에서부터 시선은 작렬하고 있었다. "저 자다. 바로… 저 자다!" 혈사령(血死靈), 이들은 가공할 속도로 세가의 북성(北城) 쪽으로 치솟아 올랐고… 묵철강시들은 정문 쪽으로 치솟아 올라갔다. 화령강시들은 서쪽으로, 독마비단은 남쪽으로 다가갔다. 철갑인자들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몸을 눈보라에 감춰 가며 절정세가 쪽으로 다가서고 있는데, 그들의 맡은 바 임무는 나타나는 자들을 암살하는 일이었다. 하나하나 일파의 맹주가 될 수 있는 사람들… 이들은 천하를 정복한 다음, 영주(領主)로 봉해질 자들이었다. 꾸역꾸역 몰려가는 거마들, 사기가 폐부를 답답하게 하고 눈보라마저 얼려 버릴 가공할 악마의 기운이 장막이 되어 절정세가를 뒤덮을 때였다. 휘리리리－ 링－ 휘리리리－ 링－! 돌연 눈보라 속에서, 설원에서, 나무 숲에서, 허공에서 무수한 그림자들이 훌훌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고했다. 오느라……!" "오랫동안 기다렸다. 자네들을……!" "일 대 일(一對一)이다, 모두! 그러니, 훗날 지옥에 가서라도 다수로써 소수를 공격하는 비겁자들에게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말기로 하자." 일만 자루의 검이 일제히 뽑혀졌고……. "카카카－ 카카－!" "꺼이이－ 꺼이이－ 꺼이이－!" "끄끄－ 끄으으－!" 일만 마병의 움직임은 일시에 둔화되는 가운데, 십 마장 이내는 돌연 가공할 진풍(陣風)에 휘말렸다. 마지막 풍운, 일만 대 일만(一萬對一萬)의 대접전이 십 마장 이내에서 두루 벌어졌다. 퍽－! 제일 먼저 싸움을 끝낸 사람, 그는 벽력마천자 우문무였다. 그는 건곤쇄혼인(乾坤碎魂印)이라는 최근의 창안수법을 써서 화령강시 하나의 골을 부수어 버렸다. 그는 단 일 초도 제대로 쓰지 않고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소리가 났다. 우라질, 소리가 나지 않아야 제대로 되는 것인데……." 그가 툴툴거릴 때였다. "큭－!" 두 번째로 결판이 나는 동시에, 피보라가 치솟고 있었다. 철갑인자의 우두머리인 동시에 도태랑(刀太郞)이라는 자. 그는 중원제일의 자객야뇌(夜惱)에게 걸려 미심(眉心)에 혈화(血花) 하나가 찍힌 채 쓰러지고 있었다. "노부의 솜씨가 이제야 제대로 살아나는군!" 야뇌노인이 어깨를 으쓱거릴 때였다. "크아아… 악……!" 또다시 폭음이 일어나며, 한 사람의 마도고수가 형체도 없이 부수어지고 있었다. 쓰러뜨린 사람은 단리우, 그는 혼신내공을 다해 독마비단주의 몸을 산산이 부수어 버린 것이다. "푸핫핫… 바로 본가비전의 천뢰용형권(天雷龍形拳)이지. 형님 덕분에 겨우 깨우친 것으로 철혈무 다음의 수법이다!" 단리우 역시, 간단하게 적을 꺾은 것이다. 콰르르르－ 릉－ 콰앙－! "크으으… 윽……!" "캐애애… 액……!" 잇따라 비명 소리가 터지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다. 마병들이 속속 쓰러졌고, 그 중에는 절정세가 사람도 끼여 있었다. 마지막 혈풍(血風), 대세는 절정세가 쪽으로 기울었으나 싸움이 끝나려면 오랜 시간이 지날 것 같았다. 두 사람, 이들은 일각(刻) 이전부터 팽팽한 대치를 시작했다. 산하(山下)의 폭음과 혼란이 보이지 않은 듯, 이들은 두 개의 석상이 되어 대치하고 있었다. 악마대군주(惡魔大軍主) 철류흔(鐵流痕). 그는 전신을 땀으로 뒤덮고 있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내공의 범주를 넘어서는 마공을 익히고 강호로 나타난 철류흔. 그는 강기의 장막(帳幕)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상대는 단리궁, 그는 흐릿한 시선으로 철류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雪)이 흩뿌린다. 철류흔은 얼굴이 뻣뻣이 굳고, 사지가 저릿저릿해지는 압박감을 내공잠력으로 겨우 이겨 내며 입술을 떼었다. "큰 싸움에서는… 네가 이겼다!" "내가 한 것은 없다, 대군주! 한 사람은 네게 당한 강호전역의 흑백도 고수들일 뿐이다!" 단리궁도 처음으로 입술을 떼었다. "후후… 좋아할 것 없다. 최후의 승자는 나니까!" "글쎄……!" "후후… 네놈은 너무도 거만하다. 네놈에 대해 알고 싶다. 대체, 네놈은 어떤 놈이냐?" "나는 단리궁(段里弓)이다. 밀가의 대종손이지!" "으음, 그랬군. 바로 천년밀가의 후예였군. 훗훗, 진작 그것을 알았다면 보다 쉽게 일을 풀어 나갔을 텐데!" 철류흔은 손을 느릿느릿 쳐들고 있었다. 그리고 일대의 싸움은 거의 다 마무리지어졌고, 중인의 시선은 두 사람 쪽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손에 땀을 쥔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진짜 이기는 자이다. 이것은 바로 무림최후, 최고의 승부라 할 수 있었다. "나는 백한 가지 마공을 익혔다. 모든 것을 완벽히 익히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하여간 나는 모든 것을 익혔다. 그런 이상, 너는 내 위에 있을 수 없다!" 철류흔의 몸은 천천히 떠올랐다. 우… 우… 웅……! 팔만사천 모공(八萬四千毛孔)에서 막강하고 강맹한 흑룡(黑龍)이 일어나며, 그의 몸을 거대한 흑풍(黑風)으로 변화시키는 듯했다. 검은 바람이 일어나며, 일대는 자욱한 안개에 휘감겼다. 하나, 둘… 넷… 여덟… 열여섯… 서른둘… 예순넷……. 철류흔은 흑무 가운데에서 몸을 쪼개고 있었다. 모든 것이 허상(虛像)이고, 동시에 모든 것이 실체(實體)이다. 검이 쳐들리고 검은 빛도, 소리도 내지 않고 드넓은 장공(長空)을 가득 메워 버렸다. 고오오… 고오오……! 천지를 휘감는 검류(檢流).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악마검은 일대를 허물어뜨리기 시작했고, 일 마장 안을 흑막에 휘감았다. 하지만 단리궁은 처음이나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 다가서건 움직이지 않았다. 영원히 머물러 있는 하늘(天)마냥, 그는 검을 비스듬히 떨어뜨린 채 철류흔의 마공 변화에 대처해 나갔다. 백팔마현(百八魔現)에 이어 잔폭멸천류(殘爆滅天流), 천마파천황(天魔破天荒), 귀전비린장(鬼箭飛鱗掌), 혈천유성은(血天流星隱)……. 치리리리－ 릿－ 치릿－! 가공할 기세로 퍼붓는 마우(魔雨). 그러나 단리궁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마공을 잠력으로 받아 넘기고 있었다. 음혼천리(陰魂千里), 통천열지(通天裂地), 벽력마인(霹靂魔印), 천지흡혈수(天地吸血手), 탄천마왕수(彈天魔王手), 음양마화인(陰陽魔火印), 천황마라패엽진결(天荒魔羅貝葉眞訣), 철사혼(鐵死魂), 독마혼(毒魔魂)까지……. 잇따라 백 가지 마공이 시전되었다. 꽈르르르－ 릉－ 우르르르－ 릉－ 콰앙－! 일대는 번천지복할 폭음에 뒤덮였고, 흙보라가 눈보라를 집어삼키며 백 장 높이로 치솟기 시작했다. "하아아－ 앗－! 최후마식(最後魔式)－ 절대사(絶對死)!" 철류흔은 기합 소리를 내며 높이 떠올랐다가는 몸을 꺾으며 신검합일(身劍合一)에 들어섰고, 단리궁은 처음으로 눈을 부릅뜨며 그를 보고 있었다. "위대하다, 너의 마공은! 그러나… 길을 잘못 들었다!" 그는 중얼거리며 철혈검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손동작이다. 그리고 하나의 검이 소리도 없이 검집을 빠져 나왔다. 술(術)도 아니고, 기(技)도 아니다. 일정한 법(法)에 따른 것도 아니고, 예(藝)를 위한 미학의 검도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웅장한 기품 가운데, 다만 하늘을 향해 끝없이 뻗쳐 오르기만 했다. 마치 하늘(天) 그 자체인 양, 검기는 끝없이 늘어나기만 했다. 우르르르－ 릉－! 하늘과 땅, 그리고 허공이 하나로 뭉치듯 하더니… 팔만사천 검영(八萬四千劍影)을 흩뜨리고 떨어져 내리던 철류흔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내… 내가… 내가……?" 벽(壁), 그는 벽이 다가섬을 느꼈다. 우두둑－ 뚝－! 그의 전신근골은 걷잡지 못할 경기에 의해 산산이 끊어졌고, 바로 그 순간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꾸었다. "지… 지다니? 내가… 단 일 검(一劍)에… 이것은… 꿈이다!" 그는 백일 번째 마공을 끊으며 파고든 절정천결(絶頂天訣)에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그는 피를 게우며 대지로 떨어져 내렸고, 더운 피를 금빛 장포에 게워 내며 몸을 휘청거렸다. "내…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지?" 철류흔은 천천히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마사혼단(天魔死魂丹)에 의한 전신의 요기(妖氣)는 사라지고, 그의 본래 얼굴이 나타났다. 각이 진 아래턱에 유난히도 뾰족한 콧날, 일그러진 입술에서는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나 매우 영준하고 강인한 인상을 주는 미남자였다. "내… 내게… 무엇이 부족했기에… 백만 마병(魔兵)을 이끌고도, 강호계 하나 정복하지 못했단 말인가?" 철류흔은 울컥 피를 게우며 단리궁을 바라봤다. 단리궁은 이상하게도 승리자의 표정이 아니라, 슬픈 눈빛이었다. "철대군주! 그대에게 부족한 것은 없었소. 오히려… 그대에게는 넘치는 것이 있었을 뿐이오!" 단리둥은 천천히 철혈검을 땅에 꽂았다. 푹－! 검은 얼음덩어리 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눈보라가 유난히도 심하다. 철류흔은 단리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대는… 하늘(天)인가, 그대는?" 그는 막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지라, 오장육부가 산산이 으스러진 상태에서도 쉽게 죽지 않는 것이었다. 단리궁의 얼굴은 아주 흐릿하게 보였다. 단리궁은 철류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야망(野望)이 너무 컸소, 철대군주! 그리고… 그것은 왕도(王道)가 아니라, 마도(魔道)를 따라 움직였기에 오늘 내게 진 것이오!" "그… 그대가 부럽군." "과찬이오!" "으음, 하늘이 어이해… 나, 철류흔을 낳고 또 그대를 낳았는지 모르겠다!" 주루루룩……! 철류흔의 얼굴은 핏물에 씻겼다. 그는 천천히 뒷머리를 눈바닥에 대며 흐려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마지막 하나의 소원이 있다. 그것을… 들어 주겠는가?" "무엇이오?" "그것은… 나를… 그대의 가문, 위대한 절정세가(絶頂世家)에 기록해 달라는 것이오!" "세… 세가에 이름을 올려 달라고?" "훗훗… 그대 가문이 부럽기에, 죽어서나마 영웅(英雄)들의 가문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오. 그리고 나의 가슴에 있는 십여 개의 영부는… 모두 그대 가문, 절정세가에 바치오. 내가 죽게 되면… 그것으로 그들을 부려… 이제부터는 혈로(血路)가 아니라, 인간의 길을 걷게 해 주기 바라오. 가주, 그대라면 능히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철류흔은 느릿느릿 말하다가 단리궁을 봤다. 그는 흐려져 가는 눈빛으로 애처롭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가 절정세가 사람이 되기를 바랄 줄이야! 단리궁은 그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를… 허락하오!" 순간, 철류흔의 입술 끝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간의 웃음이 매달렸다. "고… 고맙소. 진심으로……!" 그는 중얼거리듯 말하며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악마의 대군주 철류흔, 그는 눈을 감았고 그의 얼굴 위로는 흰눈이 소담스럽게 쌓이기 시작했다. 단리궁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어깨 위에도 눈이 한 치 정도 쌓여 있었다. "이제… 나의 길(路)도 끝이 난 것인가?" 그는 설원을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눈이 유난히도 희어 보였다. "이제는… 검을 버려도 좋을 때인가?" 그는 보법을 쓰지 않고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그는 술 취한 사람마냥 휘청휘청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그나저나 할아버지가 애지중지 기르시는 울금향화(鬱金香花)가 눈보라에 다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단리궁은 끝없는 그림자를 만들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언제 따라붙었는지 모를 그의 심복들이 그의 좌우로 달라붙어 환호성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복마일천혼(伏魔一千魂), 사대봉공(四大奉公), 야뇌(夜惱), 그리고 우(雨)… 모든 사람은 빙글빙글 웃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당사자인 단리궁만은 허탈하다는 표정이었다. "길은 계속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이 정도로 끝을 내서는… 절정세가주가 될 수 없다. 무엇이고 할일이 있으리라. 그것을 시작해야지. 그러나 지금은 지치고 힘들기만 하구나. 봄이 돌아올 때까지는 어디든 가서 죽간(竹竿)을 벗삼고, 세월을 잊고 지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