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공자 제1권 검궁인 저 1 이상한 징조(徵兆) 괄창산(括倉山) 중턱에 있는 마골곡(魔骨谷)은 늘 안개에 뒤덮여 있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 계곡의 이름이 언제부터 마골곡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 그대로 마골곡은 마의 기운이 산자락을 뒤덮고 있어서인지 일 년 삼백예순닷세 중에 삼백예순날은 온통 자욱하고 눅눅한 운무가 산자락을 뒤덮고 있었다. 온통 바위 투성이의 마골곡이 제 모습을 밝은 햇빛 아래 드러내는 것은 1년에 고작 서너 번으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때 마골곡은 이름 그대로 마귀의 뼈와도 같은, 온통 음침한 바위 투성이의 산봉우리를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놓는 것이다. 아무리 무덥고 화창한 날씨더라도 사람들은 마골곡 계곡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등허리에서 식은 땀을 주루룩 흘리고는 했다. 무서움을 모르는, 지금까지 수십 명에 가까운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마골곡을 탐험하겠다고 떠나갔으나 육신을 이끌고 살아 돌아온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멋모르고 마골곡 계곡으로 접어 들었던 나그네들에 의해 세월의 흐름에 풍화되고 삭아내린 해골이 발견되곤 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러나 세상 온갖 풍파를 경험하고 헤쳐온 나그네라 할지라도 풍화된 해골과 함께 마골곡의 바위산을 한 번 쳐다 본다면 머리카락이 쭈빗 일어서는 듯한 공포심에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기가 일쑤였다. 사람들은 어느새 마골곡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멀리서 마골곡을 바라다보는 것조차 꺼려했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의 말을 빌리면 원래부터 마골곡이 바위투성이의 산은 아니라고 했다. 어느 핸가의 가을에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이 생긴 것이 문제의 시초였다. 마골곡 주변에 15주야 동안 폭우가 쏟아져 내리더니 온갖 나무와 흙들이 씻긴 듯이 떠내려가 버린 것이다. 이런 자연의 조화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다 주기에 충분했다. 그 이후로 세상의 종말에 대한 두려운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했고 인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조화십팔보(造化十八步) 중 제 십보 신선유화보(神仙遊花步)!" 약간 쉰 듯한 노인의 음성이 청량하게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함께 계곡에 울렸다. 노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촤라락' 하는 경쾌한 음향과 함께 청년은 옥빛 섭선을 펼쳤다. 눈부신 백색 유삼(儒衫)자락 아래로 옥잠화(玉潛靴)를 신은 발이 서서히 옥보(玉步)를 내딛었다. 갓 스물이 넘었을까? 옥으로 빚은들 그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존재한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준미한 청년이었다. 청년이 섭선을 흔들며 몇 보인가를 옮겼을 때 계곡을 스치던 바람소리도 숨을 죽였다. 아마도 청년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자태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옥류가 흐르는 계곡을 서서히 거니는 청년의 자태는 선계(仙界)에서 하강한 신선을 보는 것 같았다. "허어......." 청년을 바라보는 백 살에 가까워 보이는 노인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에 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노인의 주름진 눈가에 감격의 물기가 어렸다. "됐다. 되었어......!" 노인의 얼굴에는 기쁨과 감격의 물결이 번지기 시작했다. "환인(幻仁)아. 이제 되었다. 헛헛...... 너는 이제 더이상 배울 것이 없다." 그 말에 청년의 서늘한 눈이 상큼 떠지며 의아로운 듯 물었다. "아닙니다. 사부님.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더 보지 않아도 된다. 허허......! 이리 오너라. 너에게 할 말이 있느니라." 그 말에 청년은 걸음을 멈추고 두 눈에 의문의 빛을 띄었다. 청년은 노인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노인이 들어간 곳은 계곡 안쪽의 동굴이었다. 노인이 동굴 안쪽에 자리잡고 앉자 청년은 겸손하게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노인은 한동안 감개가 무량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노인이 눈을 떴다. 청년을 바라보는 노인의 두 눈에는 제자에 대한 사랑스러움과 믿음이 물씬 묻어나고 있었다. "허허...... 벌써 십여 년이 지났구나. 네가 나에게 무공과 보법(步法)을 배운 지가 말이다." 노인의 말에 청년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의 표정이 드러났다. 무척이나 순진한 청년이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제자가 아둔하여......." "아니다. 나야말로 너무나도 고맙다. 세상에 너만한 자질을 지닌 훌륭한 제자가 또 어디 있겠느냐?" 정말 노인의 얼굴에는 대견스러워 하는 빛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 청년은 그저 겸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허허......! 그나저나 너는 궁금한 것이 많겠지?" "......." 청년은 대꾸없이 노인을 응시할 뿐이었다. "왜 지난 십 년간 너에게 집중적으로 조화십팔보를 가르쳤는지....... 그리고 무엇때문에 너를 무림제일고수로 키우지 않고 그런 풍류제일객(風流第一客)으로 이끌어 왔는지를 말이다." 말을 끝마친 노인이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청년은 그것이 늘상 궁금했다. 그가 노인에게 배운 것은 천하를 재패하거나 악인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라 고작 미려하게 걸음을 옮기며 천하의 여인들의 가슴을 흔들게 하고 방심을 휘어잡는 그런 공부였던 것이다. 노인이 다시 눈을 떴다. 흔들림이 없던 노인의 눈에는 어느새 우려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부좌를 풀지 않은 노인이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아! 그것은 장차 무림의 엄청난 혈겁(血劫)을 방지하기 위함이니라. 이제 머지 않아 무림은 삼패(三覇)의 출현으로 인해 공포와 죽음의 회오리가 일어날 것이다. 네가 할 일은 바로 삼패를 막는 일이니라." "......?"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청년은 더욱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패가 가공할 악마라면 어찌하여 무공을 가르치지 않고 겨우 여자들의 마음이나 뒤생숭거리게 만들 보(步)만을 가르친단 말인가? 그가 지금껏 배우고 익힌 미려한 걸음걸이는 바람든 여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무림에 피와 죽음의 공포를 함께 가져올 것이 분명한 삼패의 검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것이 분명했다. 청년이 정작으로 노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지금껏 가지고 있던 의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삼패는 미증유의 거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의 힘은 이백 년 이상을 키워온 것이고, 인간의 경지를 초월했다. 노부가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 너를 가르치더라도 너는 삼패를 이길 수 없다." "......." 말은 없었지만 청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청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내처 말했다. 이제 더 꺼리낄 것이 없다는 투가 역력했다. "네가 할 일은 삼패를 저지시킬 사성(四聖)을 모으는 것이다." 청년의 의아로워하는 시선을 마주 쏘아보는 노인의 눈에 신비한 기운이 뻗어나왔다. "사성이란 네 명의 여인을 말하는 것이다. 너는 출도(出道)한 후 네가 배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사성녀(四聖女)를 얻어야 한다. 그것만이 삼패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라." 준엄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또다시 청년, 남궁환인(南宮幻仁)의 준미한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고작해야 사나이 대장부가 네 명의 여인을 얻기 위해 지난 십 년 간 피나는 걸음걸이의 연무를 하였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의 다음 말은 그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환인아. 진정한 장부란 하늘의 도를 어찌 따르느냐에 있는 것이다. 비록 여자를 얻는다고 하지만 그 일이야말로 천하무림의 안녕을 위하는 숭고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 사부가 지난 세월을 그리 고심하면서 지내왔겠느냐?" 노인의 말에는 더욱 뜨거운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명심하거라. 네가 사성녀를 얻지 못하는 한 무림은 영원히 피와 죽음의 도탄에 빠진다는 것을, 자! 이제 하산 하거라. 네가 할 일은 하루빨리 사성녀를 네 여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면 필히 삼패를 물리칠 수 있으니 일말의 의혹도 품지 말고 하루 속히 뜻을 이루거라." 마지막 노인의 말은 준엄하기 그지없었다. 말을 끝마친 노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느새 깊은 삼매(三昧)에 빠져든 것 같았다. 청년 남궁환인은 한동안 멍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렇게 갑자기 스승이 자신에게 하산을 명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하산이라니. "스승님......." 그는 나직이 스승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스승은 영원히 눈을 뜨지 않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궁환인은 가슴 속에 무한한 감회가 일어났다. 마침내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어 서서히 스승에게 큰 절을 올렸다. "알겠습니다. 제자 꼭 스승님의 뜻을 이루겠습니다." "......." 스승은 여전히 말이 없다. 남궁환인의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영면(永眠)에라도 든 듯 입정한 고승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남궁환인은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곧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가지고 갈 것은 없었다. 그가 지니고 갈 것은 단 하나였다. 그는 한 자루의 섭선만을 지닌 채 마침내 스승의 곁을 떠났다. 그의 출도(出道)는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즉 사성녀라고 불리우는 4인의 여자를 얻기 위해 무림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산을 반 쯤 내려오던 남궁환인은 곧 중대한 실수를 깨닫게 되었다. 어이없게도 그는 사성녀가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 여인들인지를 물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시작이었다. 날씨는 음습(陰濕)했다. 겨울의 문턱을 예고하는 듯 한낮인데도 한랭한 공기가 주점(酒店) 안에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이런 날씨라면 바람막이 문을 닫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산동주점(山東酒店) 주인 장우백(張牛白)은 감히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 주점은 장우백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온갖 고생 끝에 이 주점을 사들인 그로서는 이 주점에 전 인생의 희망을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주점의 주인이 이토록 험난하고 한랭한 날씨에도 바람막이 문을 닫지 못하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 장우백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주점 안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주점 한 가운데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박도(薄刀)를 탁자에 기대놓은 채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장우백이 문을 닫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사나이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 산동(山東) 노룡구(魯龍丘) 일대의 소문난 파락호였다. 때문에 잘못해서 그의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그날로 장사는 끝장을 볼 것이 자명한 일이 아니던가. 조금 전 장우백이 문을 닫으려 했을 때 그 사나이가 한 마디 던졌다. "그냥 놔 둬."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는 그가 제발로 나갈 때까지는 좋든싫든 문을 열어 놓아야 했다. 그것이 싫다면 두 번 다시 주점의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설사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장우백의 눈길이 이번에는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철탑(鐵塔). 그렇다.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하나의 싸늘한 철탑같아 보이는 흑포 사나이가 채반의 채소를 안주삼아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손님은 이들 두 사람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동주점 안은 납덩이같은 무거운 공기가 칙칙하게 깔리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밖으로부터 음습한 바람이 사정을 두지 않고 주점 안으로 휘몰아쳐 분위기를 한층 황폐하고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만일, 철탑같은 사나이가 문을 닫는 것을 원했다면 정말 곤란한 일이 생겼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가 문이 열려 있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 한 가지 다행한 것이 있다면, 소문난 파락호인 황대웅(黃大雄)이 철탑같은 사나이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만만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었으리라.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주점 주인 장우백은 두 사나이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내심 똥줄이 타는 기분이었다. 꼭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자기의 주점이나, 자기 목숨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만 같았다. 장우백의 소원이 있다면 가슴이 쓰리지만 오늘은 술값을 안 받아도 좋으니 어서 그들이 나가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무사히 오늘이 지나 가기만을 빌고 빌 뿐이었다. 평소에 잔술의 푼돈도 아낌없이 받아 챙기기로 소문이 난 장우백이 벌써 다섯 병이 넘는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작심을 하다니, 그건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만큼 주점 안의 두 사나이가 풍기고 있는 분위기가 살벌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만약 저자들이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고 그냥 나가버린다면......? 난 저들에게 공짜로 다섯 병의 술을 퍼먹인 꼴이 되는 게 아닌가?' 장우백의 생각은 이어졌다. '다섯 병의 술값이라면...... 어휴! 자그만치 하루 매상이 아닌가? 안 돼! 절대 공짜로 줄 수는 없어!' 장우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의 생각은 자꾸만 오락가락하면서 얄팍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저들은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고 술값을 계산하고 갈 지도 몰라. 그래! 그러기만을 천지신명께 빌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오늘 매상은 다른 날보다도 월등히 많아지니까!' 장우백은 두 사나이를 힐끔거리며 공포 속에서도 속으로 열심히 득실을 따지고 있었다. 그러나....... 신의 조화든 자연의 섭리든, 인간의 운명이란 엉뚱한 곳에서 반전이 일어나는 법이다. 주점 안의 적막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깨어졌다.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손님이 들어온 것이다. 찬바람을 맞으며 들어서고 있는 손님은 둘이었다. "......!" 장우백은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바로 한 쌍의 봉황(鳳凰)을 보는 것 같았다. 주점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젊은 남녀였다. 여자는 17∼8세 가량의 꽃같은 미인이었고, 남자는 20세 가량의 영기발랄한 청년이었다. 그들은 마치 천상에서 하강한 한 쌍의 신인과도 같은 자태였다. 아닌 게 아니라 장우백이 보기에도 그들의 기도는 결코 범속하지 않았다. 용모만 준수할 뿐만 아니라 둘 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어 보통 사람이 아닌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아! 사형. 결혼식을 앞둔 운하(雲霞) 언니의 심정이 어떨까요?" 여인은 다소 흥분한 듯 총기어린 눈망울을 반짝이며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여인의 말을 받은 청년이 싱긋 웃었다. 그 바람에 바람막이 문을 닫지 못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던 주점 안이 일시에 환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장우백은 받았다. "후후...... 아마 잠을 이루지 못하겠지. 더욱이 이번 낙성장(落星莊)과 무당문(武當門)의 맺어짐은 전 무림이 축복하는 가화이니 하객들도 많겠지." "호호...... 아무튼 무당 속가제자 중에 발군이라는 군사언(君司彦) 사형은 복도 많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게 되니 말이에요." 청년은 문득 여인을 지그시 응시하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부럽지 않은걸?" 여인은 긴 속눈썹을 치켰다. "아니...... 왜요?" "후후...... 내게는 임매(林妹)가 있는걸." "어머......!" 여인의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었다. 그것은 추위 탓만은 아니었다. 이들 청춘남녀의 가슴은 뜨겁게 타고 있었다. 그들은 종남파(終南派)의 젊은 사형매지간으로 이번에 노산(老山)에 있는 낙성장의 혼인식에 참관하기 위해 나란히 여행을 하게된 것이었다. 고래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동행은 달콤한 꿈이 있는 법이 아닌가. 그들은 동문 사형매간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특히나 이번 여행에서 은밀한 애정을 몇 차례에 걸쳐 확인까지 한 사이었으므로 더더욱 밀착되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음식이 날라져왔다. 음식을 드는 동안에도 그들의 눈길은 서로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도란거리는 모습은 주인 장우백이 보기에도 눈부실 정도로 부러웠다. 그러나 장우백의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파락호 황대웅의 눈에서 질투와 탐욕의 사나운 눈빛이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씨발......! 이거 눈 꼴 시려서 못보겠군! 누군 왕년에 사랑타령 한 번 안해 봤나? 퉤엣......!" 주점 안의 공기가 불현듯이 그의 욕지거리로 파동치며 흔들렸다. 장우백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색이 굳어진 청년이 홱 고개를 돌려 황대웅을 쏘아 보았다. 청년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흐르더니 차차로 경멸의 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에 청년은 고개를 가로 젓더니 시선을 돌려 버렸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장우백은 철렁 내려 앉았던 가슴을 가까스로 쓸어 올렸다. 청년의 행동으로 보아 싸움은 더이상 크게 번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속단에 불과했다. 파락호 황대웅의 시비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뭘 봐?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어르신을 꼬나보다니, 눈깔을 확 뽑아줄까?" 제 풀에 화가 치민 황대웅이 느닷없이 탁자에 있던 술병을 냅다 집어 던졌다. 와장창! 술병은 바닥에 팽개쳐져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퉁겨 나갔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 여인이 재빨리 그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참으세요. 사형! 저런 하류배를 상대할 필요가......." "뭐라고? 하류배? 이런 찢어죽일 년......!" 휘익! 그렇지 않아도 꼬투리를 잡지 못해 안달이 나있던 차에 잘 되었다는 듯이 황대웅은 벌떡 일어나 냅다 남녀가 있는 탁자로 몸을 날렸다. 사실 오늘 그는 기분이 몹시 나쁜 상태였다. 마작을 하여 무려 은자 300냥을 잃어버린 것이 불과 서너시간 전의 일이었다. 가뜩이 솟아 있는 울분을 술로 달래고 있는 판국에 제법 반반해 보이는 계집과 빤들거리는 사내 놈이 히히덕거리는 것을 보니 눈알이 뒤집힐 지경에 빠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더욱이 계집은 깔아 뭉개면 맛이 기가 막힐 것 같은 몸매를 하고 있지 않은가? "잘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아랫도리가 근질거리던 차에......." 그는 한 걸음에 달려가 청년을 향해 솥뚜껑만한 주먹을 냅다 뻗었다. 위잉! 황대웅의 주먹은, 비석은 못 깨어도 한 자 두께의 담장에 구멍을 냈던 자랑스런 주먹이었다. 청년의 면상이 떡가루가 되는 것을 상상하며 황대웅은 큰 입을 떡 벌렸다. "으헤헤......." 그러나 그의 웃음은 도리어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으로 바뀌고 말았다. 펑! "크웨에에엑......!" 꽈당탕...... 탕!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장우백이 보기에는 그랬다. 소문난 파락호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던 황대웅이 청년이 슬쩍 흔들어 보인 손짓에 저만치 붕 떠서 날아가더니 주점 벽을 뚫고 밖으로 내팽개쳐진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황대웅은 청년의 작은 손놀림에 기절을 했는지 넋을 놓아 버렸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죽어 버렸는지 쭉 뻗어 다시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우백으로서는 뜻밖에도 아주 후련한 싸움을 구경한 셈이었다. 이때 청년이 손을 툭툭 털며 코웃음을 쳤다. "흥! 같잖은 놈 같으니." 그때 여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형. 우리 떠나요. 이곳은 기분이 나빠요." 청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낙성장이 멀지 않았으니 차라리 지금 떠나서 일찍 당도하는 것이 낫겠어. 이런 곳에서는......." 그는 여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닌 게 아니라 청년도 이미 음식 먹을 기분은 잡친 후였다. 그들은 의자를 뒤로 하고 몸을 빼냈다. 바로 그때였다. "잠깐. 여자는 두고 가라." 어디선가 으스스한 음성이 청년의 귀를 파고 들었다. "......!" 자신의 귀를 의심한 청년이 뒤돌아 섰다. 주점 안은 적요할 뿐이었다. 조금 전의 싸움으로 넋이 빠진 주인이 계산할 생각도 않고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때려눕힌 놈은 아직도 움직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청년은 싸늘한 눈초리로 구석진 곳에서 딴 곳을 응시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흑포의 사나이를 힐끗 쳐다 보았다. 첫눈에도 상당히 기분 나쁜 분위기를 가진 사나이였다. 하지만 그 사나이가 자신에게 말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사나이는 여전히 다른 곳을 응시하며 술잔을 비우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보군.' 고개를 가로저으며 청년이 여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자, 어서 갑시다." 그때였다. 예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린 것은. "여자를 두고 가라고 하지 않았나?" 청년은 휙! 고개를 돌렸다. 그 음성은 분명 그의 등 뒤에서 울려나왔던 것이다. 그곳이라면 오직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 바로 구석진 자리의 흑포 사나이. "형씨. 지금 우리에게 한 말이오?" 청년이 날카롭게 물었다. 흑포인은 여전히 딴 곳을 보고 있었으나 입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청년은 볼 수 있었다. 바로 흑포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쏟아졌다. "네 놈에게 명령한 것이다." "뭐...... 뭐라고? 명령......?" 놀란 청년은 하도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년의 인내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흑포인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 전 황대웅과의 일전이 청년에게 무모한 용기를 불러 일으켰는지도 몰랐다. "뭐라고? 명령?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감히 어디서.....?" 청년이 화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도발적인 걸음으로 흑포인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흑포인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청년이 흑포인을 향해 두어장 반 정도의 거리를 남겼을 때였다. 문득 흑포인이 청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은 전혀 가당치도 않은 동작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손짓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헉!" 돌연 청년의 입에서 경악에 찬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그와 동시에 청년의 몸은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에 묶인 듯이 주르르 흑포인의 손 안으로 딸려가고 있었다. 청년은 공포에 질린 채 안간힘으로 끌려가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힘 없는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청년은 흑포인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흑포인의 커다란 손이 청년의 목을 움켜잡았다. 우드득...... 뚝! 실로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흑포인이 간단히 손아귀를 틀자, 청년의 목은 힘없이 한 바퀴 빙글 돌아가며 꺾여버린 것이었다. 청년의 입에서는 비명이 나올 틈도 없었다. 한순간에 그의 눈알이 툭 튀어 나오더니 혀가 한 자나 삐어져 나왔다. 아주 간단히 청년의 목을 꺾어버린 흑포인은 슬쩍 손을 저었다. 휙! 청년의 시신은 곧장 일직선으로 날아가 문 밖으로 내던져졌다. 어찌나 멀리 날아갔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아이쿠......! 저럴 수가...... 사...... 사사...... 사신(死神)!' 혼비백산한 장우백은 머리를 회계대에 파묻었다. 그때였다. "아아아악!" 귀청을 찢는 듯한 여인의 비명 소리가 울려 장우백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다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찌된 셈인지 혼자 남게 된 여인이 흑포인에게 안겨 있는 것이었다. 흑포인은 여전히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대체 여인이 일부러 흑포인을 향해 걸어간 것이 아니라면 이것 또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장우백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북......! 부욱...... 북! 눈 깜짝할 사이에 흑포인의 손에 의해 여인의 옷이 모두 뜯겨져 나갔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것이었다. 여인은 전라가 된 채 공포의 비명을 질렀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느샌가 알몸의 여인이 탁자 위에 눕혀져 있었다. "아아악...... 아악...... 아악......!" 외마디 비명이 여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흑포인이 그녀의 두 다리를 벌린 것이다. 장우백은 그만 고개를 돌린 채 귀를 틀어 막았다. 그러나 여인의 비명은 계속 고막으로 파고들어 왔으며, 그는 마왕(魔王)처럼 여인을 유린하는 흑포인에게로 홀린 듯이 눈길을 다시 돌리고 있었다. 여인의 다리 하나는 허공으로 쳐들리고 다른 하나는 탁자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흑포인의 몸이 앞뒤로 흔들릴 때마다 여인의 늘어진 새하얀 허벅지 사이로는 새빨간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아아악...... 아악......!" 여인의 눈이 부릅떠지고 입에서는 연신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흑포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억겁(億劫)의 시간이 흘렀다. "으....... 으음!" 어느 순간에 흑포인의 입에서 쾌감이 섞인 탄식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에 흑포인의 몸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여인의 목이 비틀어져 꺽이고 있었다. 장우백은 넋이 빠진 채로 보았다. 사정(射精)을 끝낸 흑포인이 옷을 추스르는 것을. 장우백은 완전히 혼백이 달아난 표정이었다. 그의 바지는 어느샌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마침내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있었다. 뚜벅, 뚜벅....... 흑포인이 장우백을 향해 걸어왔다. 장우백은 멍청히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온통 하얀 동공 일색이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말의 사건이 그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던 것이다. 잠시 장우백을 내려다 보던 흑포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짐은 불쌍한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흑포인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문 쪽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삭풍이 불고 있었다. 삭풍은 떨어져 나뒹굴고 있던 낙엽을 쓸어모아 주점 안으로 몰아쳤다. 주점 안을 휩쓴 삭풍이 열린 채로 삐걱거리는 문을 한 번 후려치고 쏟아져 나가면서 물씬 피비린내를 풀어놓았다. "......!" 장우백은 부르르 떨었다. 그는 주점 안을 돌아 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왠지 정기가 없었다. "헤헤......." 어느 순간 장우백의 입에서 바보같은 웃음이 헤프게 흘러 나왔다. "헤헤헤헤......." 목이 부러진 여인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면서 장우백은 연신 바보같은 웃음을 흘렀다. "헤헤헤! 아, 아름다운 아가씨야. 추워! 추우니까 어서 옷 입어, 응? 그리고 우리 같이 살자." 장우백은 연신 헤헤거리며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하는 여인의 시신을 흔들어 깨우려 애쓰며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음산한 바람이 바람막이 문을 한차례 흔들며 지나갔다. "헤헤헤......!" 어느새 밤이 되었으나 장우백의 바보같은 웃음 소리는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었다. 2 패도(覇刀) 낙성장(落星莊)은 북적대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이 혼례일이기 때문이었다. 대문 앞에는 축등(祝燈)이 걸리고 여러 사람들의 웃음소리, 환담하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담장 밖까지 흘러나왔다. 지금도 많은 하객들이 줄을 이어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대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총관인 듯한 중년인이 대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하객들의 선물을 접수하고 방명록을 적고 있는 아랫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는 하객들은 대부분이 인근 무림명문의 고수들이었다. 낙성장과 무당문은 원래 무림에서 이름이 드높은 명문이었다. 서로 파가 다른 무림파끼리 혼인을 맺어 사돈지간이 된다는 것은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자파의 세력 확대와 능력의 증대를 위해서 서로 반목하고 싸워야만 하는 무림계의 상황으로 보아 이번 혼사는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아랫것이 방명록을 적는 것을 지켜보다가 눈을 들어 앞을 바로보던 총관은 흠칫했다. 멀리서 한 사나이가 낙성장을 향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자는 축하객의 옷차림에는 어울리지 않게 일신에 온통 검은 옷을 걸쳤으며 키가 팔 척이 넘는 거구였다. 흡사 하나의 철탑을 연상케하는 우람한 몸집을 지녔다. 더군다나 한 손에는 사나이의 몸집에 어울리는 거검(巨劍)을 쥐고 있었는데 그 검의 길이는 무려 육 척에 가까운 것이었다. 자그마치 일반적인 장검보다도 두 배는 족히 긴 것이었다. 그런 거검을 어깨에 멘 것이 아니라 손에 들고 있다니....... 하객으로 오는 차림으로서의 그런 모습은 어딘가 불경했을 뿐더러 기분 나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총관은 그가 다가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방면에서 오신 고인이신지......?" 끝말을 얼버무리기는 했으나 총관은 일단 예를 지켜서 겸손하게 물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총관은 찌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펴면서 다시 물었다. "저어 실례지만 초청장은 가지고 오셨......?" 하지만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총관은 흠칫했다. 흑포의 사나이가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그는 딴 도리가 없었다. 오늘 같은 길일(吉日)에 소란은 금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성대로 하자면 당장에 칼을 뽑아 뜨거운 맛을 보여주는 것이 상책이었으나 오늘 같은 날 피를 부르는 일은 피해야 했다. 어떻게든 총관은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사나이를 설득하려 했다. "저어...... 초청장을 주셔야......." 마침내 걸음을 멈춘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차가운 음성이었다. "짐은 초청장이 필요없는 사람이다." "......?" 총관은 어이가 없었다. 짐이라니....... 그는 그런 칭호를 쓰는 인물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짐이라면 황제가 스스로를 부를 때 쓰는 자존의 칭호가 아닌가? '미친 놈.' 총관은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깨물며 그렇게 단정했다. '만약 녀석이 정말로 미친 놈이라면......?' 그렇다면 달래어 돌려 보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는데 흑포의 사나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곳이 낙성장이 분명한가?" 사나이의 질문은 미친 사람답지 않게 명확했다. "예. 폐장은 분명 낙성장이 맞......." 그는 입을 다물었다. 사나이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는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엄한 것!" 철탑 사나이의 손이 움직임과 동시에 총관의 목이 댕강!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으악!" 접수를 보고 있던 아랫것이 상황을 판단하고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을 때는 사나이는 이미 장 안으로 몸을 날린 후였다. 성대한 혼례식이 진행 중이었다. 하객의 숫자는 500인이 넘었고, 그들은 모두가 싱글벙글하며 신랑신부를 향해 박수를 치고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일각에서 소요가 일어나더니 물결이 갈라지듯 사람들이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으악!" "아아악......!" 즐겁고 유쾌해야 할 혼례식장에 느닷없이 처절한 비명이 울림으로써 하객들의 안색은 급변하고 말았다. 이곳에 모여 있는 하객들의 대부분은 무림에서 내노라하는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한 명의 철탑같은 거한이 앞을 가로막는 무사들을 한 손으로 휙휙 내저으며 대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더욱이나 놀라운 것은 그가 가볍게 손을 저을 때마다 한꺼번에 4, 5명의 무사들이 손 한 번 내젓지 못하고 붕 떠서 날아간다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낙성장주 낙성신군(落星神君) 교번두(交燔斗)는 크게 놀랐다. 휙! 그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판단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어느새 대청 가까이 괴사나이가 나타났다. 휘휙! 교번두는 본능적으로 신형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여보시오. 대체 무슨 일로 신성한 혼례식장을......?" 사나이는 대답 대신 교번두를 노려볼 뿐이었다. 교번두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나이의 철나한 같은 각진 얼굴에서 번개처럼 번뜩이는 안광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비수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저년이 필요하다." 사나이의 짧은 말이었다. 교번두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무례한 놈!" 일성을 내지르며 교번두는 손바닥을 펼쳤다. 위잉! 낙성장법으로 알려진 무림의 고수가 교번두가 아닌가? 교번두의 장력이 열여덟 개의 수강을 이루며 뻗어 나갔다. 그러나....... 펑! 분명 교번두의 낙성장력이 사나이의 가슴에 적중되었으나 사나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으으...... 이럴 수가......!" 금강불괴가 아닌 이상 그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위기를 느낀 교번두가 몸을 비틀었다. 바로 그 순간 사나이의 검집이 교번두의 몸을 긋고 지나갔다. "으아악!" 단지 칼집으로 그었을 뿐인데도 교번두는 처참한 비명과 함께 저만치로 날아갔다.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침착한 걸음걸이로 사나이는 뚜벅뚜벅 걸어 혼례복을 입은 신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멈춰라!" 신부에게 다가서는 사나이를 가로막은 것은 신랑인 무당 속가제자인 군사연이었다. 그러나 용기는 가상했지만 그도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휙! 그저 눈앞에 검집이 가볍게 찔러왔을 뿐인데도 항거 한 번 변변히 못하고 그 역시 저멀리로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한편, 오늘 이후로 자신의 남편이 될 남자가 번번히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괴인의 칼에 목이 날아가는 것을 본 신부 교운하(交雲霞)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아악......." 산동일미(山東一美)라는 미명으로 불리울 정도로 아름다운 교운하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공포 그 자체의 비명이었다. 더군다나 괴사나이가 자신을 필요로 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녀는 그말을 분명히 들었다. 사나이가 지척에 이르자 교운하의 얼굴이 백지장같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너무나 창졸지간의 일이었고, 사나이의 패도적인 기세에 눌려 수백 명의 하객들조차 아무도 감히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교운하의 앞에 다가 선 사나이의 손이 움직였다. "악!" 교운하는 비명을 질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엔가 그녀는 두 다리를 잡혀 거꾸로 쳐들린 것이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혼례복을 입은 채 혼례식장에서 낯선 사나이에게 거꾸로 들리다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무림 고수들이 대청으로 뛰어 들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그들은 사나이에게 사로잡혀 거꾸로 들린 신부 때문에 가까이 가서 공격도 하지 못하고 포위한 채로 맴돌 뿐이었다. 사나이는 무사들의 행동을 추호도 개의치 않고 교운하에게 물었다. "남일주(南一周)란 자를 아느냐?" 사나이의 손에 다리를 잡혀 거꾸로 들려 피가 몰린 탓인지, 아니면 공포와 수치스러움 탓인지, 얼굴이 홍당무가 된 교운하는 문득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한 청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남일주. 그는 과거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청년이었다. 그녀 자신도 남일주란 청년을 좋아했고, 남일주도 목숨바쳐 그녀를 사랑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남일주를 버린 것은 무당 출신의 군사언이 더욱 조건이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운하가 남일주를 배신한 것이다. 교운하는 이 일의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남일주의 그녀에 대한 사랑이 이토록이나 엄청난 결과를 낳을 줄이야. 이제야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된 교운하는 일말의 가책감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잘못......."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곧 사나이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청부(請負)했다. 너같은 더러운 계집년의 가랑이를 찢어 달라고!" 그의 말을 하객들은 모두 들었다. 그리고 설마...... 하는 사이에, 누가 말리거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엄청난 참변이 벌어졌다. "아아아아악......!" 파아아아....... 오오! 일찍이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렇게 잔인한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혼례복을 입고 성장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것도 거대한 체격의 사나이에게 거꾸로 들린 채 정말로 믿어지지 않게 가랑이가 찢겨 죽은 것이었다. 교운하를 목숨바쳐 사랑한다는 남일주라는 청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목숨을 청부의 댓가로 주었다면 그 청년도 이미 죽은 목숨일 것이 아닌가? 하객들은 머리가 띵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잠시 동안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분노가 터졌다. "죽여라!" "이...... 인간도 아닌 악마를 죽여라!" 수백 명이 일제히 신형을 날리며 철탑 사나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유유히 걸어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나이가 낙성장을 완전히 빠져 나갔을 때는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공포의 시작(始作)....... 그것은 다만 시작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사천당가(四川唐家)는 420년 간이나 무림 제일의 암기가문(暗器家門)으로 명망을 떨쳤다. 당가의 인물들은 어릴 적부터 각종 암기를 다루는 법을 배우며 또 스스로 갖가지 암기를 제작하는 습관을 키운다. 당가가 무림에서 꺼림칙한 존재로 아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이유는 당가의 암기가 절대로 타인에게 파악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이 항상 사용하는 암기를 계속 사용한다면 당가도 그리 무서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당가의 인물들은 언제나 새로운 암기를 개발하고 무서운 암기술을 창안하므로 영원히 암기에 관한한 당가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제18대 사천 당가가주(唐家家主) 당문표(唐文票). 그는 당대에 이르러 28종의 새로운 암기를 개발함으로써 더욱 더 명성을 떨친 위인이었다. 그로 인해 사천당가가 무림사가(武林四家) 중의 하나라는 굳건한 위치에 들게 된 것이다. 당문표는 지금 자신의 침소에서 암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한 시각이었다. 창을 닫았으나 어디로부터인지 새어 들어온 바람에 황촛불이 파르르 흔들리면서 그으름을 피워 올리다가 잠시 후에 불꽃이 곤두섰다. 사위는 적요할 정도로 고요했다. "......." 당문표는 문득 암기를 만지던 손을 놓고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가 들린 듯해서 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그저 창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짓인 것 같았다. 당문표는 물끄러미 손에 쥐고 있던 암기를 내려보았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것이 바로 암기였다. 암기만 손에 쥐면 천하에 겁날 것이 없었다. 그는 비장의 암기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피로 된 포단을 깔고, 그 위에 수백 종의 암기를 늘어 놓은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손수 개발한 암기를 보고 어루만질 때마다 새삼 가문의 자랑스러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허어!" 문득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화전표(花箭飄)때문이었다. 화전표를 보는 순간 한 여인이 머리속에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화전표를 집어 들었다. "으음......!" 다시 탄식에 가까운 신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소중한 물건을 어루만지듯, 그는 잘 닦여진 화전표를 어루만졌다. 그것은 바로 죽은 아내가 사용하던 암기였다. 죽은 아내를 떠올리는 순간 쓸쓸함이 가슴을 저미고 지나갔다. "너무...... 일찍 갔어......." 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당문표의 나이 어느듯 42세. 불현듯 삶이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무엇을 위해서 살아온 것일까 하는 일말의 회의감이 쓸쓸하게 가슴을 저미는 것이었다. 천하 무림을 주름잡는 무림사가 중의 하나인 사천당가의 가주가 사소한 감정에 빠져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한참 인생의 음양 이치를 깨닫고 그 오묘한 맛을 즐길 수 있는 나이가 아니던가. 그는 곧 고개를 흔들며 죽은 아내를 떨쳐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또 하나의 얼굴이 아내 얼굴 위에 겹쳐지며 떠올라 오는 것이었다. 아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얼굴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그에게 속삭이던 음성이 귓전에 울리는 듯했다. '사랑해요.......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전...... 당신이 버리면 아마 죽을 거예요.......' 당문표의 눈 속에 아쉬움이 잠겨들었다. "몹쓸 짓을 했어." 낮게 중얼거리는 당문표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어쩌면 쓸쓸해지는 감정에다가 고즈넉한 가을밤의 분위기가 그의 생각들을 과거의 여인들에게로 휘몰아 가는 것인 줄도 몰랐다. 당문표는 잠시 그녀와 불태웠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아주 잠깐 동안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그가 젊었을 때에 사랑을 속삭이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당가 가주라는 체면 때문에 그는 그 사랑을 한때의 불장난으로 돌리고 여인을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든지 그녀를 한 번 찾아 보아야겠어.' 그는 눈을 감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난 시절의 사랑이 더욱 애틋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바로 등 뒤에서 한가닥 차가운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대가 당문표인가?" 화들짝 놀란 당문표가 끝없이 뿌리를 뻗어나가던 사념을 추스린 것은 일순간의 일이었다. "......!" 그리고...... 당문표는 꿈에도 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바로 등 뒤까지 오는 동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그는 부르르 떨면서 뒤돌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팔 척(八尺). 그렇게 큰 사람을 지금껏 보아온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비쩍 마른 몸에 일신에는 청포(靑袍)를 걸치고 있었다. 손에는 한 자루의 섭선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귀신이 아닌 분명한 사람이었다. 창백한 얼굴은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든 듯하고 두 눈빛은 투명한 수정이었다. 으시시한 한기가 당문표의 가슴을 찔렀다. "누...... 누구냐?" 사나이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메마른 입술만을 움직였다. "숙하(菽河)의 부탁을 받고 왔다. 너의 목에 구멍을 내달라는군." "수...... 숙하라구?" "그렇다." 당문표는 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숙하는 바로 그가 사랑하다가 버린 여인이었다. 당가 가주라는 체면 때문에 차버렸던 여인이 자기 목에 구멍을 내달라고 청부를 했다면 분명하지 않은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그녀가 복수를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생각은 짧았다. 그러나 그의 다음 행동은 그보다 백 배는 더 빨랐다. 당문표는 마침 손에 들고 있던 화전표를 상대방을 향하여 날렸다. 그것은 죽은 아내가 사용하던 암기였다. "......!" 그러나 그는 멍해지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서 있었던 상대방이 유령같이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 당문표는 목이 따끔한 것을 느껴야 했다. "......!"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당문표는 급히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만져 보았다. 무엇인가 뜨끈한 액체가 목젖 아래로부터 분비되고 있었다. "이것은...... 말도...... 안 돼......!"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소리치려 했으나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의식이 희미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몸은 모로 쓰러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방을 정리하러 들어온 침모에 의해 당문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당문표의 죽음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온몸을 샅샅이 살펴 보아도 칼자국이나 암기의 흔적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로지 그의 목젖 바로 아래에 나 있는 국화 모양의 상흔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 간 유일한 흔적이었다. 아니, 상흔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자세히 본다면 그것은 바로 국화 꽃잎이었다. 사천당가의 가주. 천하제일의 암기명인인 당문표가 어이없게도 누군가의 절묘한 암기술에 정확히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당가는 발칵 뒤집히고야 말았다. 암기의 천하제일가에서 그것도 가주가 누군가의 암기에 죽음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정작으로 놀랄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바로 그 직후에 밝혀진 것이지만 희생자는 당문표만이 아니었다. 즉 당가 서열 18위까지에 해당하는 고수들이 몽땅 암살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침실에서, 혹은 측간에서, 혹은 회랑에서 발견되었다. 그들 역시 목에 오직 한 장의 국화 꽃잎이 박힌 채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폭풍! 그것이 바로 폭풍의 시작이었다. 강남 7우(江南七友). 세상에서 가장 우의(友義)가 좋은 의형제들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들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많은 강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다시 없는 우의(友義)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각자 태어난 날이 다르고, 가문이 다르고, 사문도 틀렸다. 그러나 그들이 한 날 한 시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피로써 천지신명께 맹세한 의형제였기 때문이다. 단 한명의 진정한 지기(知己)만 사귀어도 남아의 일생은 참으로 행복하다 하였다. 그런데 강남 7우는 도합 일곱 명의 의형제로서 서로를 자신보다 더 아끼고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웃음이 그치지 않았고, 때문에 타인들의 질시섞인 부러움을 사기까지 했다. 만일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세상에서 못할 것이 없었으리라. 그들의 우정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어느날, 이들에게 한 명의 서생(書生)이 찾아왔다. 서생이 찾아온 목적은 단순했다. 시론(詩論)을 담소하기 위해서 였다. 그로부터 여러날이 흘러갔다. 7우는 특히나 시서금기예(詩書琴棋藝)를 즐기는 인사들이었으므로 이 서생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재능에 반하여 그만 사흘 밤낮을 담소하며 고담준론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원인이 되어 끔찍한 비극이 일어날 줄을 누가 예측이나 했겠는가. 그로부터 사흘 후 엄청난 비극이 강남 7우에게 닥쳤다. 서생이 그들에게서 떠난 직후, 하늘도 그들의 우애를 가를 수 없다고 한 강남 7우가 서로 싸우고 죽이는 참극을 벌인 것이었다.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 한 명의 서생. 그가 대체 어떤 말을 했길래 그들이 서로 상잔하는 사태가 벌어졌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그 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강남 7우와 담소를 나누고 떠나간 서생의 신분 내력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측근 사람들이 기억하는 유일한 것은 그의 키가 무척이나 크고, 일신에는 백의문사의를 입고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7우의 죽은 모습은 너무나 극명하게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다. 두 명은 바둑을 두다가 바둑판을 엎고 서로의 가슴에 손을 박아 넣은 채로 죽었다. 두 명은 시(詩)를 쓰다가 벼루로 서로의 머리를 으깨어 버린 모습이었다. 다른 두 명은 한 권의 경서(經書)를 놓고 토론하는 모습으로 죽었다. 마지막 한 사람은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죽어 있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7우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풍류를 논하다가 말다툼이 벌어져 서로 상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들을 찾아온 자가 대체 누구이길래 다만 세 치 혓바닥만으로 소문난 우정의 강남 7우로 하여금 서로 상잔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이것은 강남 무림을 한동안 의문과 공포로 몰아넣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한동안 전 무림을 시끄럽게 달구었던 이런 불가해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건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멀어져 갔다. 어쩌다가 할 일이 없이 늙어가는 사람들이 가끔씩 기억의 창고를 뒤지다가 그 때의 일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에 담기도 했으나 곧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왠지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공포감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소리없이 4년이라는 세월이 다시 흘렀다. 3 담간랑(膽肝郞)이라 불리우는 사내 태양이 몇 날을 두고 불덩이처럼 이글거렸다. 세상을 온통 태워버리기라도 할 듯이. 하남관도(河南官道)는 끓다 못해 익어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관도를 오가는 행인들은 뙤약볕에 지쳐 나무 그늘을 찾아 쉬었으나 헐떡거림을 멈출 수가 없었고, 몸에서는 쉴 사이 없이 땀방울을 흘려야만 했다. 더위에 지친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마실 나가던 제 주인을 따라 촐랑거리며 앞장서서 뛰던 여염집 똥개란 녀석은 채 100보를 뛰지 못하고 혓바닥을 내놓고 헐떡거리며 병든 개 마냥 늘어지는 것이다. 들판의 마소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관도의 나무들까지도 무성한 잎들을 축 늘여뜨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겠는가. 축 쳐져버린 숲의 나뭇잎을 흔들기 위하여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조차도 뜨거운 열풍이었다. 이런 날씨에 관도를 오간다는 것은 정말 미친 짓거리였다. 만일 적당한 때, 신선하고 청아한 여인의 교성(嬌聲)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관도 옆 나무들도 지쳐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사형! 제발 좀 쉬었다 가요." 어쩔 수 없이 애원이 가득 담기긴 했으나, 듣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청량한 음성이었다. 일남일녀. 관도에 나타난 그들은 용(龍)과 봉(鳳)에 다름 없었다. 그만큼 수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한 쌍이었다. 쨍쨍 내려쪼이는 불볕 더위의 관도를 걷고 있는 그들은 20세 초반의 준수한 청년과 18, 9세 가량의 대단히 아름다운 화의(花依) 여인이었다. 등에 멘 장검으로 미루어 그들이 평범한 남녀가 아닌 무림인이라는 것이 대번에 드러났다. 그때 여인의 애정 가득한 애원을 들었는지 약간 앞서 걷던 청년이 힐끗 뒤돌아 보았다. 사오 보쯤 뒤처져 여인이 날씬한 허리에 두 손을 짚고 토라진 듯이 서 있었다. "사형! 전 여자란 말이에요. 몸도 무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구요. 그러니 좀 쉬어요. 네?" 서서히 땀이 솟기 시작하는 청년의 얼굴에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청년은 사매의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사매. 조금 전에 쉬었잖아. 그리고 대회일까지 숭산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돼. 그러니 조금 더 가자구." 그러나 여인은 막무가내였다. "칫! 그까짓 무림대회가 저보다 중요하단 말이에요? 더군다나 앞으로도 보름이나 남았잖아요." 입술을 삐죽이는 여인의 모습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매......." 그러나 그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여인은 길 옆의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무튼 전 죽어도 더이상 못가요. 정 가실려면 혼자 가셔요." 마침 바위 옆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어 시원한 그늘이 형성되어 있었다. 여인은 바위에 앉아 소매로 이마의 구슬땀을 닦았다. 반듯하고 깨끗한 이마였다. 청년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여인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로서는 지금까지 여인의 고집을 꺾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 자신이 사매를 아끼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사랑에 빠진 모든 남자들의 마음이 자기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며 청년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일 각만 쉬자구." 여인은 혀를 날름 내밀었다. "흥! 누구 맘대로요? 아예 여기서 푹 쉬었다 갈 거예요." 여인의 천진난만한 행동을 바라보던 청년이 소리없이 싱긋 웃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던 간에 그의 눈에는 여전히 그녀가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백수범(白秀範). 공동파( 派)의 후기지수로 차기 장문인감으로 내정되어 있는 유수한 장래를 안고 있는 자로서, 아주 어릴 적부터 공동에 입문하여 공동의 비전절기를 한 몸에 익힌 재능 있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사랑하고 있는 여인의 이름은 하영화(夏英花). 공동 장문인 신기일사검(神技一死劍) 하국령의 무남독녀였다. 워낙 늦게 본 딸에다가 장중보옥으로 자라나 그녀의 성격은 그야말로 멋대로였다. 그러나 백수범이 보기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만 보이는 그런 여인이었던 것이다. 백수범은 진정으로 하영화를 사랑했다. 아니, 죽을 때까지도 사랑하겠노라고 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다만 그는 그것이 맹목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아직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언젠가는 그녀와 혼인하고 공동의 장문인 자리를 물려 받을 날이 오리라는 것을 기다리는 그는 오직 장미빛 미래만을 설계할 수 있는 행복한 젊은이였다. 이번 무림대회는 전 무림, 특히 구파일방이 중심이 된 중요한 회합이었다. 따라서 공동에서 숭산까지 가는 길은 엄청나게 멀었으나 그는 사매와 단 둘이 동행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더위는커녕 힘이 드는 지조차 몰랐다. 이번 여행에서 그는 사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두 사람이 언젠가는 결합하리라는 말은 있어 왔으나 정작 백수범은 자신이 직접 그녀에게 마음을 밝힌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여행 길에 그녀에게 구혼(求婚)할 셈이었다. 성공을 눈앞에 둔 앞길이 창창한 그는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러나 24년간을 무공만 익혀온 젊은 쑥맥인 그는 아직도 말꼬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어야 하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위 위의 나무 그늘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하영화를 바라보는 백수범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은 참으로 고혹적이었다. 약간은 방심한 듯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유혹적이란 말인가. 앙증맞은 장미 봉오리처럼 봉긋한 가슴이 숨을 쉴 때마다 약간씩 움직이고 있어 보노라면 숨이 절로 막힐 지경이었다. "사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여인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어느 정도 백수범의 기분을 전달받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눈을 뜨지는 않았다. 곧이어 나올 상대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백수범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가슴만 두방망이질을 칠 뿐 어떤 말을 해야 좋을 지 몰라 쩔쩔 맬 뿐이었다. 그는 참으로 이런 일에는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기다리고 있던 다음 말이 들리지 않자 하영화는 감았던 눈을 조용히 떴다. 가벼운 실망의 빛이 역력한 눈길이었다. "왜 말씀을 안 하세요?" "으응? 이...... 이제 그만 가자구......." 그 말에 하영화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백수범은 당황했다. "아...... 아니 사매가 원한다면 더 있다 가고......." 백수범은 횡설수설했다. 그는 정말 쑥맥이었던 것이다. 여자의 마음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무예에서 배울 수가 있었으면 이런 낭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은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관둬요!" 마침내 얻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없었던 하영화는 발딱 일어서더니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단히 토라졌다. 백수범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잔뜩 치민 것이다. '칫...... 내가 힘들어서 그런 줄 아나? 멍청이 바보...... 목석 같으니라구!' 실상 그녀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을 그가 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영화! 사랑하오.' 이 한 마디만 그가 해주었어도 그녀는 수범에게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사실 그녀는 길을 떠나기 전에 예감했다. 이번 여행길에 반드시 그가 자신에게 어떤 달콤한 말을 하리라고. 그러면 자신은 그를 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줄 것이라고. 그런데 길을 떠난 이후 아직까지도 그는 아무 언질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하영화는 속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한편, 백수범 또한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하영화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한 번 잘못 건드려 놓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한 번 토라진 하영화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설사 돌이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로서는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전전긍긍 할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로지 하영화의 마음이 저절로 풀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참으로 시간이 약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도움이었을까? 백수범에게 구원의 손길이 뻗치고 있었다.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토라진 하영화의 뒤를 따라 쭈빗거리며 갈림길로 들어섰을 때였다. 일단의 젊은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 그에게는 바로 천우신조였다. "아니? 백형 아니시오?" 십여 명의 젊은이들 가운데 그를 알아보는 자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거의가 백수범이 아는 자들이었다. "백형!" "하하하하......! 이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영기발랄한 청년들로서 얼굴에는 정기가 흐르고 검을 찼으며, 기상이 헌앙(軒昻)한 이들이었다. 바로 무당(武當), 개방( 幇), 청성(靑城) 등의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이었던 것이다. 백수범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대부분은 한두 번은 본 적이 있는 청년들로서, 마찬가지로 숭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젊은이들 뿐인 것은 여로를 선배 고인과 가는 것보다는 경험을 쌓을 겸 청년들끼리 모여가는 것이 즐거움을 더하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일행은 쉽게 합류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숭산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으므로 목적지까지는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다행이군.......' 백수범은 내심 한숨을 쉬면서 사매를 돌아보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녀의 표정도 이미 풀어져 있었다. 그녀 역시 젊은이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을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 같았다. 일행은 시끌벅적 담소하며 길을 걸었다. 낙양(洛陽)에서 멀지 않은 곳. 전양현(前陽縣)이란 이름이 붙은 객점에 일행은 묵게 되었다. 숭산이 그다지 멀지 않은 탓인지 연도에는 제법 많은 무림인들이 눈에 띄었다. 더군다나 길을 걷다 보면 젊은이들끼리 아는 사람도 만나게 되는 법이었다. 그로 인해 알음알음으로 만나 객점에 투숙하게 되었을 때는 인원이 이십여 명 정도로 불어 있었다. 객점에 들어 식사를 하는 동안 하영화는 여러 사람을 둘러 보았다. 사실은 많은 남성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던 것이다. 뛰어난 미모의 그녀는 자연히 뭇 청년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백수범에게 가 있었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강호에 나오게 된 그녀는 호기심도 많았다. 분주히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한 많은 청년들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그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주위를 살펴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니? 저분은......?" 젊은이들 중의 하나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오......!" "바로 그분이시다. 자비장원(慈悲莊園)을 운영하고 계시는 무량애(無量愛) 대선사님이시다." "그렇구나. 저분이 바로 중원에서 살아 있는 자비로운 부처님으로 통하시는 바로 그분이시다." 젊은이들이 일제히 한 마디씩 했다. 그렇다. 객점 안으로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분명히 일신에는 잿빛 승복을 입고 있었으나 그 사람은 여느 스님들과는 달랐다. 이제 나이 서른을 갓 넘겼을까? 대단히 미려(美麗)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흑단보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하나로 묶어 어깨 뒤로 넘기고 있었다. 이런 차림은 정말 파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무량애라 불리우는 스님은 올망졸망한 아이들 다섯 명까지 앞세우고 지금 객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세 명은 여아(女兒)였고 나머지 둘은 사내였다. 나이들은 대충 열 살 미만임이 분명했다. 아이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지저분하기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소승이 젊은 군자분들께 문안드립니다." 객점 안으로 들어서던 무량애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는 허리를 숙이며 합장했다. 일체의 가식이나 권위적인 위엄을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행동이었다. "어...... 어서 올라 오십시오. 평소 말씀만 듣던 무량애 대선사님을 이런 곳에서 직접 뵙게 되다니...... 오히려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젊은이들 중의 하나가 황송스럽다는 듯이 일어나며 그를 반겼다. "자! 어서들 올라가려므나. 오늘 너무 많이 걸은 것은 안다만은...... 간단한 요기나 하고 어서 집으로 가자꾸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저 아이들도 역시......?" 귀공자풍의 청년 하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들자 이상한 냄새가 진동했던 것이다. "허허! 그렇습니다. 저의 가장 소중하고 이쁜 자식들이지요." "아하......!" 무엇인가를 알겠다는 듯이 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에는 멸시(蔑視)가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부모와 가족을 잃고 거리를 떠도는 거지아이들이 아닌가. 무량애는 중원 곳곳을 떠돌면서 그런 아이들을 데려다가 보살피는 일을 자청해서 하는 스님이었다. 그러니 세인들의 칭송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은 천자(天子)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에 자신의 부귀나 명예를 돌보지 않고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선사님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저희같은 소졸들이야 감히......." 다른 청년 하나가 알랑방구를 뀌듯이 나섰다. "허허......! 무슨 말씀을요. 사람들이란 저마다 타고 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하도록 타고 났을 뿐인걸요. 공자님은 공자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가만 보아하니 숭산회합에 참석하시러 가는 길인 것 같은데......." "마...... 맞습니다." 청년이 황송하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나무아미타불....... 그럼 그곳에서 훌륭한 솜씨를 빛내시는 것이 공자님이 하실 일인 것 같습니다. 소원을 이루십시오. 그럼 이만......." 무량애는 아이들을 이끌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영락없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식사를 바로 마친 무량애는 아이들을 이끌고 나가며 청년들에게 합장을 했다. "나무아미타불! 여러 공자님들...... 소원성취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무량애는 떠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영화는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무량애라는 인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다. 중원에서 유일하게 남을 위하여 사는 인간. 자비로운 부처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말 훌륭한 분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의 어느 순간 그녀의 눈이 살짝 찡그러졌다. "사형. 저 자는 누구죠?" 그녀가 가리키는 쪽은 무량애가 저녁을 먹고 떠난 바로 그 구석 진 자리였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식사를 하고 있는데 유독 구석 자리에는 한 젊은이가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일신에는 평범한 갈삼(褐衫)을 걸친, 이십 세가 약간 못미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비록 동안(童顔)의 얼굴이기는 했으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 평범하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었다. 다시 한 번 청년을 관찰하던 하영화는 콧등을 찡그리고야 말았다. 그녀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상이기 때문이었다. 청년의 얼굴은 지나치게 어두웠으며, 특히나 젊은이 특유의 신선감과 패기가 전혀 엿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타인과 섞이는 것이 두려운 듯 혼자 떨어져 식사를 하면서 그저 쥐새끼처럼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오관이 제법 또렷한 편이나 미간에 어린 그늘과 우울한 표정 등이 한창 발랄한 나이인 하영화에게는 밥맛이 없게 느껴졌다. 백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자......?" 그는 음성을 낮추었다. "아마 사매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걸? 담간랑(膽肝郞)이라고......." 그말에 하영화는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담간랑......." 담간랑이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서 하영화도 언젠가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담간랑이란 별호를 지닌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었다. 그는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 천하의 어떤 문파라도 떠돌아 다니며 제자로 삼아 달라고 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렇게 볼성 사나운 외호가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실 평범한 자질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 어떤 문파에서도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온갖 아부와 굴욕적인 일을 감수하면서 무공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똥이고 오줌이고를 가리지 않고 매달린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의 이름이 결정적으로 담간랑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그에게 사나이다운 충심(忠心)이 없다고 판단한 무림인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수치스럽고 낭패스런 이름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담간랑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고 다니는 것이 문제였다. 한때 그는 백파보(白派堡)란 정사지간의 문파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백파보는 산서에 있는 문파였다. 그런데 황룡방(黃龍幇)과 싸움이 붙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싸움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백파보가 현저한 열세를 보인 것이었다. 마침내 백파보는 황룡방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자 담간랑은 언제 백파보의 제자였냐는 듯 황룡방에 넙죽 엎드려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물론 그는 웃음거리만 되고 깨끗이 거절당했다. 그 이후로 그는 외호는 물론 이름까지도 담간랑이 되고 말았다. 만일 그가 뚜렷한 악행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큰 잘못이나 악행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 단지 담간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식으로 여러 문파를 기웃거리고 다녀서 무림계에서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하영화는 코웃음쳤다. "흥! 알고보니 그런 작자였군요. 그런데 설마 이번 숭산회합에 나가려는 건 아니겠죠? 호호....... 이번에는 또 어떤 문파에 엎드려 절하고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할까요?" "사매." 백수범은 당황했다. 그녀의 음성이 예상 외로 컸기 때문이었다.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이만한 거리에서는 사매의 음성은 틀림없이 담간랑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았다. 백수범은 흘깃 담간랑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담간랑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담간랑은 화를 내기는커녕 멍하니 하영화를 바라볼 뿐이었다. "흥!" 담간랑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하영화는 불쾌한 듯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청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하영화는 그런 그가 더욱 보기 싫었다. "흥! 용기도 없는 작자......! 난 저런 위인이 제일 밥맛 없다구요." 백수범은 담담히 타일렀다. "사매. 우리와는 상관없는 자이니 그럴 것까지는 없잖아." "흥!" 하영화는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쳤다. 멋대로 자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판단하기를 사물을 바로 볼 수 있는 정확하고 칼날처럼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터였다. 이때, 객점 안의 청년들도 대부분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힐끔거리며 담간랑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그들의 얼굴에도 경멸의 빛이 떠올라 있었으며 어떤 자는 내놓고 노골적으로 비웃는 자도 있었다. "저 작자가 바로 담간랑이란 말이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박쥐 같은 녀석!" "그래! 생긴 것을 보라구. 낯짝이라구 어깨에 붙이고 다니는 것도 박쥐 형상이로군." "낮에는 새고, 밤에는 짐승이란 말이지?" "맞네! 맞아! 으하하하!" 노골적으로 젊은이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어도 담간랑은 아무 소리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놀림을 당하는 쪽도 반격을 해 와야 재미있는 법이 아닌가. 당사자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는 데야 그런 놀림거리도 자연 시들해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담간랑이라는 친구는 이곳의 다른 청년들과는 많은 차이가 나는 그런 위인이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화제는 자연히 이번 숭산회합으로 이어졌다. 이번 숭산회합의 주 목적은 최근 들어 무림을 공포와 전율로 몰아넣고 있는 삼패천(三覇天)에 대한 대책이었다. 사실 삼패천은 무림뿐만이 아니라 온 중원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낙성장의 혼인식을 피로 도배한 일지겁천(一指劫天), 암기로 유명한 사천당가의 가주를 유유히 암기로 살해했던 무영비마(無影飛魔), 강남 7우로 하여금 상잔케 했던 삼촌살인설(三寸殺人舌). 그들 삼패천이 본격적으로 무림을 장악하기 시작한 지금의 무림은 완전히 그들에 의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이대로 대책없이 기다리다가는 천하는 삼패천의 발아래 무릎 꿇어야 할 판국이었다. 삼패천이 무림에 등장한 이후 닥친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한편, 왕조의 운명이 다한 것인지 아니면 세기 말의 징조인지 자연의 순환섭리가 궤도를 잃어버린 것이다. 몇 해 계속되는 냉해와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중원 곳곳의 농토마저 황폐화된 지 이미 오래였다. 뿐만 아니라 관리들의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곳곳에서는 때도 아닌 시절에 눈이나 비가 내리기까지 했다. 곳곳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때를 같이 하여 중원 무림의 질서는 그야말로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삼패가 무림을 유린하는 동안 왕조의 무능을 틈타 작은 힘이나 권력을 훔쳐 가지게 된 세력들은 야비하게 얻은 권력을 이용해 더 많은 권력을 수탈하고 재산을 쌓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검객을 사사로이 길러 삼패의 흉내를 내면서 뭇 백성들을 위협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여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삼패의 등장 이후 중원 무림은 그야말로 쑥대밭에 가까웠던 것이다. 급기야 구파일방이 중심이 되어 삼패천을 상대할 묘안을 세우고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숭산에서 회합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객점 안은 온통 그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삼패천이야말로 무림에서 완전히 지워져야 할 이름이 아니오? 우리가 이번 숭산회합에 참가하는 목적도 바로 그것이오. 무림의 흉적 삼패천을 깨부수기 위한 것이오." "맞소! 미약한 힘이나마 우리 중원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쓰여진다면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 아니겠소? 명색이 남아라면 세상의 정의를 위해 목숨 하나쯤은 던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지요. 으흠!" "아마도 이번 회합이 끝나면 공적 선포와 함께 대대적인 무림연합맹이 결성되어 삼패천의 소탕전을 벌이게 될 것이오. 그때는 이 몸도 한 몫 단단히 하게 될 터이니 지금부터라도 잘 모시는 것이 좋을 거요." "하하하! 그렇게 허풍만 떨지 말고 어디 사형의 그 무술이라는 것을 좀 보여나 주시오." "으하하하! 그럽시다. 내 우리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장의 검법 하나를 여러 사형들께 보여 드리겠소." 이렇게 우쭐대며 자리에서 일어선 청년은 사잇길에서 백수범을 맨 처음 알아 보았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그때였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서로의 무예나 뽐내고 있을 때가 아니오." 얼굴이 무척이나 날카롭게 생긴 청년이었다. 통성명을 나눌 때 자신을 개방사람이라고 소개하던 청년이었다. 그자의 명호는 일진풍(一陣風)이라고 했다. 놀란 좌중이 무슨 일인가 하고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백수범이 말문을 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개방 출신의 젊은 고수 일진풍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분위기에 취해 경거망동하려던 청년들을 일시에 긴장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여러분은 아직도 소식을 못 들으셨단 말이오?" "......?" "숭산회합으로 가는 도중 수많은 무림인들이 살해되고 있다는 소식 말이오." "......!" "어떤 조직이 우리들을 중도에서 가로 막고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는 것이오. 말도 마시오. 분방의 소식통을 접수한 결과 이미 칠, 팔백인 이상이 희생되었다는 것이오. 이대로 가다가는 숭산에 모이기도 전에 반 이상이 죽을 것이라는 것이오." "아니...... 그럴 수가......!" "그들이 대체 누구란 말이오?" "혹시......?" "오! 맙소사!" 무공을 자랑하려던 청년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사람들이 신음을 내지르며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거의 동시에 공포스런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삼패천(三覇天)! 그들이 아니고 또 누가 있어 무림, 그것도 전 무림을 상대로 그런 무서운 일을 벌이겠는가? "어쩌면 우리에게도 살수(殺手)가 뻗칠 지 모르오. 사숙이신 신풍만리객(神風萬里客)께서 특별히 전신을 보내셨소이다. 노정에 만난 사람끼리 합류하여 조심스럽게 동행하라고." 일진풍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경거망동하여 그들의 목표가 되지도 말거니와, 절대로 개별행동을 하지 말라는 엄명이셨소이다." "......." 청년들은 입을 다물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이곳에는 젊은 청년들밖에 없었다. 패기와 용맹성은 어떨지 모르나 하나하나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그들보다 몇십 배 강한 삼패천을 상대하기에는 지혜와 경험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은 거의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남은 길을 서로 도와가며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마음을 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삼스럽게 자신들의 처지를 깨우치게 된 청년들의 그런 무언의 합의와는 달리 담간랑이란 치욕적인 외호로 불리우는 소년은 시종 우울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인을 만나 출중한 무공을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될 지는 그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미지수였다. 이미 백도의 대부분의 문파를 한 번쯤은 방문한 적이 있는 그가 아니던가? 게다가 설혹 방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담간랑이란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는 그런 자를 제자로 받아들일 문파는 없는 것이다. 담간랑은 우울했다. 그는 저물어 가는 회색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치 노을이 걸린 선홍빛 구름이 시커먼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구름이 밀려드는 것이 소나기라도 한 차례 퍼부을 듯한 날씨였다. 쏴아아......! 무성한 파초잎들을 흔들며 바람이 불었다. 파초잎들은 억센 바람의 애무를 견디지 못하고 허리가 꺾일 것처럼 한쪽으로 쏠렸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곤 한다. 파초 잎들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이번에는 반대 방향에서 폭풍이 쳐와 파초잎들을 연신 두들겨 대고 있었다. 쏴아아......! 낮에는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밤이 되자 폭풍이 불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리 여름 날씨가 변덕스럽다고는 하나 급변한 기후임에는 틀림없었다. 객점의 방에는 저마다 황촛불이 켜져 있었다. 하영화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번 여행길에 그녀의 가슴은 바람을 맞는 파초의 잎처럼 막무가내로 흔들리고 있었다. 더구나 바로 지척에 마음을 주고 있는 사내가 있는데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던 그녀는 끝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폭풍우와도 같은 바람이 그렇게 시원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객점의 화원에 무수히 핀 꽃들이 줄기가 부러질 것 같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나 그녀에게는 오히려 바람이 풀지 못한 가슴 속의 애틋한 열병을 식히는 것만 같았다. "......." 그녀는 야릇한 낭만을 느끼면서 폭풍 몰아치는 화원을 유유자적 걸었다. 바람은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비가 올 낌새는 아니었던 것이다. 공동산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녀로 하여금 한껏 젊음을 구가하게 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 문득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는 눈동자를 의식했다. 그 눈동자는 담장 아래쪽에서 아까부터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영화는 그 눈동자가 자신의 온몸을 훑는 것을 느끼며 으스스 몸을 떨었다. 기분이 불쾌했다. 마치 곤충이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치잇......! 더러운 작자.'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담간랑이었다. 어둠 속이었으나 한눈에도 그의 우울한 얼굴이며 비굴스런 자세 등이 담간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영화는 그가 결코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그의 시선을 마주 쏘아보는 순간 그 쪽에서 고개를 푹 숙였기 때문이었다. '날 바로 볼 자신도 없으면서! 정말 같잖은 작자로군.' 그녀는 그런 인간이 가장 싫었다. 비굴하고 패기없는 인간을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아무리 마음이 좋고 이해심이 바다와 같은 여인일지라도 비굴하고 패기없는 사내를 좋아할 여인은 없는 법이다. 어쨌든 담간랑 같은 작자야말로 뭇 여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일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하영화는 더이상 그의 눈길을 받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방으로 혼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회랑 하나를 돌아 사형이 자고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아니...... 사매?"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연 백수범은 깜짝 놀랐다. 느닷없이 한밤중에 그의 방문을 두드린 것이 여자라니. 그것도 그가 사랑하고 있는 사매라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놀라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한없이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던가? 하영화는 방 안을 슬쩍 둘러 보며 물었다. "들어가도 돼요?" "무...... 물론이지." 백수범은 얼른 몸을 비켜 주며 그녀를 들어오게 했다. 하영화는 방 안으로 들어서며 약간 쑥쓰러움을 느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처녀였다. 처녀가 야심한 시각에 남자의 방으로, 그것도 총각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남이 보기에 이상하게 보일 우려가 충분히 있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어찌 나겠느냐고 묻는다면 참으로 대답이 궁색한 행동을 그녀는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영화가 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백수범은 방문을 닫았다. 그것은 바람에 꺼질듯이 흔들리는 촛불을 보호하려는 것 같은 행동으로 보였으나 기실은 백수범도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정말이지 밥맛 없는 작자에요." 하영화는 자신의 어색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백수범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영화가 속이 탄다는 듯한 표정을 만들었다. "담간랑인가 뭔가 하는 자 말에요." 백수범은 흠칫했다. 난데없이 담간랑의 이야기를 왜 꺼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에 비친 담간랑은 결코 악인이 아니었다. 천성이 그래서 비굴한 행동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에게 해를 끼칠 위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백수범은 담간랑을 처음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동정심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왜?" "흥! 산책을 하는데 그 작자가 소매를 계속 바라보잖아요. 내 참 같잖아서......." "......?" 백수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뭐가 기분이 나쁘단 말인가? 그는 사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영화는 곧 눈치를 차리고는 코웃음쳤다. "왜 있잖아요. 아래 위를 훑어보는 시선이 꼭......." 문득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 백수범도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깨달았다. 웃음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는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어 헛기침을 몇 차롄가 했다. 그녀가 남의 시선에서 자신을 발가벗기고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를 느꼈다면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당연한 본능일 터였다. "흠....... 그건....... 아마도 사매가 워낙 예뻐서....... 으음......." 백수범은 더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평소 성격이 대범하고 군자풍의 인물이었다. 정색을 짓고 나서 젊잖게 한 마디 했다. "사매. 비록 그의 소문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문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아. 어쩌면 그에게도 각별한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르잖아?" 하영화는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흥! 이유는 무슨 이유에요! 아무튼 소매는 그런 인물이 세상에서 가장 싫다구요." 이때였다.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더니 문 밖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백형! 우리 젊은 사람들끼리 술이나 마십시다!" 문을 여니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호기방장하고 활달한 젊은이들로서 한 데 모여 밤새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할 그런 나이였다. 백수범은 내심 쓴 입맛을 다셨다. 그들과 어울려 술잔을 주고 받는 것보다는 호젓한 시간에 사매와 단 둘이서 있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럿이서 몸소 처소까지 찾아와 자신을 초청하는 이상 내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방 안에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우물쭈물 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결코 이로운 일이 못되었다. 설사 그 여인이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하....... 좋소이다. 사매도 함께 가도록 하지." 그는 하영화와 함께 방을 나섰다. 회랑을 돌자 담장 아래쪽에 담간랑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백수범에게는 몹시 측은하게 보였다. 똑같은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담간랑은 어디에고 발을 붙일 수 없는 천애고아를 연상케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동정심이 일어난 백수범은 담장 그늘 아래 서 있는 담간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보시오. 이쪽으로 와 함께 어울리는 것이 어떻소?" 그러나 담간랑은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이더니 도망치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흥! 사형은 무엇때문에 저런 작자를 부르는 거예요? 우리끼리 그냥 가요." 하영화의 독촉에 백수범은 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지. 다음에 또 인연이 있다면 같이 할 수 있겠지." 그들은 회랑을 돌아 주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편, 그들이 화원을 벗어나자 담간랑은 담장 그늘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눈빛은 괴롭고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후우......!" 담간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괴감이 벌레처럼 스멀거리며 내부에서부터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탓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용기없고 비굴하기만 한 자신이 스스로에게도 좋을리가 없었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언제나 그런 자신을 개탄하고 자책하는 것뿐이었다. 설사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격만은 고칠 수가 없는 법인지 늘상 타인의 눈 밖에 나는 그런 모습으로 오늘까지 살아 온 것이었다. "아아......." 담간랑은 한숨을 쉬며 담장을 따라 걸었다. "종리연(鍾里連)아....... 종리연....... 너는 어찌 그런 모양이냐?"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리며 담장의 그늘을 따라 걷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그의 부모가 보아도 한심하고 처량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는 그의 그런 모습은 그 자신에게는 언제나 익숙한 것이라는 사실을. 철이 들면서 깨닫게 된 것은 양지보다는 언제나 음지가 그에게 편안하다는 사실이었다. 양지로 나서기에는 늘 자신이 없고 불안하기만 했다. 그러한 습성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더해가는 것만 같았다. 종리연은 담장의 어두운 그늘을 밟으며 조용히 걸었다. 밤이 이슥한 시간이 되자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바람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람마저도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지친 육체를 쉬기 위해서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종리연, 그에게도 이제 방으로 돌아가 잠자는 일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는 어두운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며 잠깐 하영화란 여인에 대하여 생각했다. '아름다운 낭자야. 나같은 것은 곁에 설 자격도 없는.......' 어느샌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종리연은 하영화가 자신을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흥! 용기도 없는 작자......! 난 저런 위인이 제일 밥맛 없다구요!' 그녀가 그의 면전에서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때에, 그래도 화를 낼 수 없는 것은 그 자신도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었다. '흥! 용기도 없는 작자......! 난 저런 위인이 제일 밥맛 없다구요!' 하영화의 그런 음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히 울리고 있었다. '그래...... 난 용기도 없는 작자....... 아아....... 종리연아.......' 그때였다. 종리연이 그렇게 자책하고 걷고 있는데 문득 옷자락 날리는 음향이 들렸다. 처음에는 바람소리인가 하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휙휙휙! 담장을 연이어 뛰어 넘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 담간랑 종리연은 자신도 모르게 어두운 담장 벽 아래 납짝하게 엎드렸다. 어찌나 급하게 엎드렸는지 코에 흙이 묻을 정도였다. 그의 간은 바짝 오그라들고 있었다. 엎드리자마자 그의 등 뒤를 날아가는 인영(人影)들의 신법이 너무나 가공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신법으로는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인영들은 쾌속하게 날아갔다. 어느새 식은 땀이 종리연의 등을 척척하게 적시고 있었다. 공포!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번에도 그는 너무나 공포스런 나머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인영들은 삼십여 명은 족히 넘었다. 하나같이 밤처럼 검은 흑포를 두른 자들로서, 눈빛이 화광(火光)처럼 불길을 뿜고 있었다. 종리연은 그들의 모습이 각 객방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온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악......!"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심장을 파고 드는 처절한 비명을 듣는 순간 종리연은 본능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담장을 뛰어 넘었다. 정신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담장을 넘었는지 조차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절박한 관념! 도망가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그의 몸을 달리게 했을 뿐이었다. 마구 달렸다. 어떻게든 객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산다는 생각이 두 다리를 쉴 사이 없이 움직이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로 두 다리 사이에서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날 지경으로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얼마나 달렸던 것일까? 더이상은 숨을 몰아쉴 힘도 없을 무렵에 그는 무엇엔가 부딪치고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종리연이 부딪친 것은 한 그루의 작은 나무였다. 숨을 헐떡거리며 하늘을 올려다 보자 청청 하늘에 많은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적어도 다섯 마장 이상은 도망을 친 것 같았다. "이만하면......?" 그는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리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청청 하늘에 수없이 많은 별들이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숲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어두운 숲속에서 납작하게 몸을 움츠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츰 의식을 사로잡고 있던 공포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찾아든 것은 자신의 비굴함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었다. "아아! 종리연아...... 너는 결국 또 하나의 비겁한 짓을 저질렀구나....... 그들이 습격한 것을 본 이상 당연히 소리쳐 경고를 했어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는 혼자서 도망치기에 바빴으니...... 아아!" 종리연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울부짖었다. 죽고 싶은 느낌 뿐이었다. 자책은 자책을 낳고 그 자책은 또다시 그의 의식 속에 자괴감을 심어주었다. "정말 이렇게 살아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는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이렇게 평생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이 사나이로서 떳떳할 것만 같았다. '기왕에 목숨을 끊어버릴 작정이라면...... 죽어버릴 작정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무서운 것이지? 내가 무엇을 무서워 해서 이렇게 비굴해지는 것이지? 도대체 무엇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종리연은 입술을 깨물며 일어섰다. 그런 그의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한 순간 종리연의 비장한 각오는 일시에 두려움으로 뒤바뀌었다. 그는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저쪽 어둠 속으로 일단의 흑영들이 바람처럼 달려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 그들이다!" 바로 얼마 전에 주점을 덮쳤던 흑포인영들이었다. 그는 다시 땅에 코를 박고 엎드렸다. 방금 전의 비장했던 결심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지, 그는 어느덧 또다시 엎드려 벌벌 떠는 것이었다. 바람을 타고 나르는 옷자락 소리가 그의 등을 스치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득의에 찬 괴소가 긴 여운을 끌며 어두운 밤하늘을 퍼져 나갔다. 참으로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괴소에 뒤이어 어렴풋이 어떤 여자의 비명도 들리는 듯했다. 한참 후, 주위가 조용해지자 종리연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식은 땀 투성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기척은커녕 아무도 없었다. 서산으로 넘어 가는 여름밤의 달만이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한 월광을 흩뿌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새벽이 다가오는 시각이었던 것이다. 종리연은 두려움을 억누르며 객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그의 발길은 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쿵쾅쿵쾅....... 주점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담간랑 종리연의 심장이 더욱 크게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어댔다. "주...... 죽었다...... 모두......!" 종리연은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객점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살해된 것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담소하며 자신있게 떠들어대던 각 파의 젊은이들이 모두 피를 흘리며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는 것이다. 주청에도, 객방에도, 그리고 화원 곳곳에서도 시신은 말없이 누워 있었다. 어떤 시신은 머리가 으깨어져 있었고, 어떤 자는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허리가 끊긴 자, 어깨가 잘려져 나간 자, 목이 떨어져 나간 자....... 실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이었다. 어떤 사신(死神)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가 이보다 더할 것인가? "......!" 종리연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이렇게 엄청난 살육의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으으음......." 문득 어딘가로부터 한가닥 신음이 들려왔다. 종리연은 급히 신음이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백...... 백형!" 그는 깜짝 놀랐다. 신음을 흘리는 자는 바로 백수범이란 이름의 청년이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자기를 술자리에 초대하던 청년. 종리연은 얼른 백수범을 안았다. 그러나 이미 그는 회생불능의 상태였다. 오른쪽 복부가 찢기며 터진 내장이 반이나 삐어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사매를....... 사매를...... 형씨...... 사매를......부탁......!" 백수범은 그 말을 간신히 남기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종리연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자명했기 때문이다. 숲속에서 퇴각하는 놈들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엎드려 있을 때, 그는 희미하게나마 여인의 비명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그 여자가 백수범의 사매 하영화라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모든 정황으로 보아 하영화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괴인들에게 납치된 것이었다. 백수범의 유언을 듣는 순간 종리연은 진저리를 쳤다. "내...... 내가 어떻게......?"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하는 시체를 향해 그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었다. 그렇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영화를 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죽은 자는 더이상의 말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자신의 품속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원한에 찬 표정으로 죽어있는 백수범의 시체를 본 순간 종리연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백수범은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한 유일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가 어제 오후에 주점에서 하영화와 나누는 대화를 종리연은 들었었다. 그때 그는 마음 속으로 백수범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종리연아! 종리연아, 너는 최소한 노력은 해보아야 하지 않느냐?' 종리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섰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대책은 서지 않았으나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흑포인들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는 자명했다. 한참을 달린 그는 마침내 숲에 당도했다. "......!"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숲은 여전히 암흑이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칠흑같은 어둠이 숲속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종리연은 숨이 막힐 듯한 느낌 속에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숲은 생각보다 넓고 깊었다. 한 식경을 종리연은 흑포 사나이들을 찾아 숲속을 헤매고 다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아악......." 오른쪽 비탈진 등성이 너머로부터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 것은 새벽 기운이 숲속에 박명(薄明)의 양탄자를 깔 시각이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는 종리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도 남았다. 머리털이 쭈빗 서며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만 같았다. 솔직한 심정이라면 이대로 멀리 달아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나 종리연은 이를 악물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접근해 갔다. "......!" 그는 나무에 몸을 은닉한 채 눈을 크게 떴다. 등성이 바로 아래, 숲 한가운데 작은 공지가 있었다. 밝기 시작하는 새벽 빛으로 인해 공지의 광경이 선명하게 노출되는 찰나였다. 바로 하영화였다. 그녀는 십여 명의 흑포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겁탈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악...... 악! 차라리 죽여라...... 죽여...... 으흐흑!" 처참한 비명은 새벽 하늘을 찢을 듯이 울렸다. 그러나 그녀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흑포인들은 그녀가 반항을 하고 울부짖으면 짖을수록 더한 쾌감을 느끼는 듯 차례로 그녀를 윤간하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이미 찢겨져 나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2인의 흑포인이 그녀를 나무에 기대게 한 뒤 나무 뒤에서 손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정면이 노출된 채 그녀의 다리는 활짝 벌려져 있었다. "흐흐......." 한 사나이가 일을 끝내고 떨어져 나가자, 다른 흑포인이 엉겨붙기 시작했다. 그 흑포인은 그녀의 다리를 쳐들고 공격하고 있었다. "아...... 아악!" 흑포인이 하체를 움직일 때마다 하영화의 입술이 딱딱 벌어지며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 죽일 놈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종리연은 치를 떨었다. 어느새 그는 나무를 마구 긁었다.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몸의 반응이 뜻밖에도 나무를 긁는 상황으로 나타난 것이다. 설사 종리연이 의협심을 발휘하여 뛰쳐나갔다면 결과는 뻔했으리라. 그의 무예로는 흑포인을 단 한 사람이라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그의 행동은 옳은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종리연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음은 종리연을 이렇게 부추겼다. '종리연아.....! 어서 나가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비겁하게 도사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그것이 사나이의 삶 아니더냐?'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마음의 유혹이었을 뿐이다. 사실 종리연은 너무나 겁이나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다리를 떨며 손으로 나무를 마구 할퀼 뿐이었다. 그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제는 그녀의 비명조차 간간히 울릴 뿐이었다. 종리연은 차라리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하고 후회했다. 어느덧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비겁자다...... 난 비겁자...... 비겁자!" 소리없는 흐느낌이 그의 가슴을 마구 헤집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런 천인공노할 더러운 놈들......!" 문득 분노에 찬 음성이 종리연의 귀를 파고 들어왔다. "......?" 그 와중에 종리연은 흠칫 놀라 소리가 울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 그루의 나무 위에서 휙! 하고 백색 인영이 흑포인들을 향해 쏘아져 내려가고 있었다. 종리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백색 인영의 신법은 어찌나 빠른지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흰 광선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직후에 벌어졌다. 백색 인영이 흑포인들 사이를 전광석화처럼 누빈 것이다. 미처 흑포인들이 상대방의 정체를 판단하기도 전이었다. "큭!" "켁!"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이어 터지고 있었다. 실로 경악할 만한 사태였다. 십여 명의 흑포인들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한순간에 쓰러져 나갔다. 가공한 것은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상대방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백색인영의 신법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다. "......!" 인영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 여명에 비친 백의 미서생(白衣美書生).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옥으로 빚은 옥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필설로는 어떻게 형언할 길 없는 관옥같은 얼굴의 미남자였다. "아아...... 세상에 저런 분이 있다니......." 숨어 있던 종리연은 같은 남자면서도 저도 모르게 미서생의 고아하고 단아절륜한 용모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일컬어 임풍옥수(臨風玉樹)라던가. 미서생의 눈은 한 쌍의 영롱한 보석이었고, 코는 장인이 정성을 다해 빚은 것 같았다. 입술은 붉게 타오르는 진달래의 한 쌍 꽃잎이었으며, 이마는 반듯하고 넓어 그가 대인의 기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나이는 25, 6세쯤 되었을까? 붓으로 그은 듯이 미려한 눈썹하며, 다만 한 번 슬쩍 스치기만 해도 천하의 미녀가인들이 한숨을 쉬면서 방심을 끌어안고 상사병이 걸릴 정도였다. 일신에 걸치고 있는 백색 문사의조차 미서생의 관옥같은 피부보다는 덜 희어 보일 정도였다. 미서생은 흑포인들을 눈 깜박할 사이에 해치운 후 돌아섰다. 어느 순간에 그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하영화의 주검을 발견한 직후였다. 그녀는 스스로 혀를 깨물고 자결했던 것이다. 이미 더럽혀진 청백(淸白)이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조차 죽은 이 마당에 더 살아 무엇하겠느냐는 생각이 그녀로 하여금 혀를 깨물고 자결하도록 만든 것이리라. "아아! 조금만 빨리 왔어도......." 미서생은 하영화의 시신을 내려보며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득 그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누구냐?" 그는 빙글 돌아서면서 낭랑하면서도 날카롭게 물었다. 돌아본 쪽은 바로 종리연이 숨어 있는 쪽이었다. 종리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으나 잠시 망설이다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나타나자 미서생은 한참 노려보더니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종리연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 소인은 종리연입니다." "종리연?" 미서생은 눈쌀을 찌푸렸다. "이들과 한 패냐?" "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숨어 있는 것이냐?" 종리연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건 저 여인을 구하기 위해......." 미서생의 안색이 약간 풀렸다. "형장께서 아시는 여인이오?" 어느샌가 종리연을 부르는 그의 호칭이 존칭으로 변했다. 예의 바른 군자지도를 느끼게 하는 태도였다. 종리연은 심히 부끄러웠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예...... 아는 사...... 사형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뒤를 ㅉ다가...... 그러나 내가 왔을 때는 이미 늦어 구하지 못했습니다." 종리연이 끝까지 말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미서생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아는 사형이란 어떤 분이오?" "배...... 백수범이란 공동파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객점에 있다가 저들에게 죽음을......." 그가 말을 잇지 못하자 비로소 미서생의 안면이 부드럽게 변했다. 미서생은 언뜻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아, 난 또, 적도인 줄 알고. 이거 실례 많았소이다. 의협을 흉적으로 잘못 취급하였으니......." 종리연은 엉겁결에 마주 포권했다. 인사가 끝나자 미서생은 그에게 다가와 손을 덥썩 잡았다. "만나뵈어 반갑소이다. 이 사람의 졸명은 남궁환인(南宮幻仁)이라 합니다. 하하......! 의협을 만나뵈니 정말 기분이 좋소이다." "아...... 아닙니다. 전...... 그저......." 종리연은 몸둘 바를 몰라했다. 미서생 남궁환인은 빙그레 웃었다. "정말 반갑소이다. 형씨같은 의협이 많아야 오늘날의 난세무림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오." 그는 말을 마치고는 돌아섰다. "......?" 종리연이 의아해 하는 순간 미서생 남궁환인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종리연은 비로소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구덩이 두 개를 만들었다. 하나는 하영화의 시신을 묻었고, 하나는 흑포인들의 시신을 묻었다. 남궁환인의 그같은 모습에 종리연은 감동을 금치 못했다. '정말 이분이야말로 훌륭하신 분이야. 아아....... 나같은 것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남궁환인은 무덤을 완성한 후 한동안 하영화의 무덤에 묵념을 드리더니 돌아섰다. "자, 그럼 또 봅시다. 종리형." 남궁환인은 낭랑하게 말한 후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종리연은 다급하게 남궁환인을 불렀다. "......?" 남궁환인은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흠칫했다. 갑자기 종리연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종리형! 이 무슨 짓이오?" 종리연은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대협을 따르겠습니다." 멍해 있던 남궁환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하하......! 이것 참. 나 역시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하는 몸인데 어찌 종리형을 거두겠습니까? 이러지 마시고 일어서시오. 종리형." "아....... 아닙니다. 저는...... 대협을 따르겠습니다. 청컨데 부디 절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종리연의 표정은 절박한 것이었다. 남궁환인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제발......!" 종리연의 애절한 당부에 남궁환인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자신과 나이차가 얼마 되지도 않는 종리연을 거둘 수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마침내 좋은 생각이 떠오른 남궁환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소? 우리 서로 젊은 나이이니 의형제(義兄弟)를 맺는 것이 말이오?" 그 말에 종리연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아...... 아니...... 어떻게 그런....... 저는 감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남궁환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럼 나는 이만 가겠소. 종리형이 나같은 것을 형제로 여길 수 없다면 말이오." "대...... 대협!" 기쁨과 놀라움으로 종리연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남궁환인과 종리연은 흙을 쌓아 제단을 대신하고 맞절을 한 후 하늘과 땅,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맹세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나지는 못했어도 죽을 때는 함께 하는 피를 나누는 형제가 되겠노라고, 절대로 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나이를 따져 보니 남궁환인이 다섯 살이 많았다. 종리연은 기꺼이 남궁환인을 형으로 모셨다. 오히려 내심 그가 바라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 종리연은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이제 자신에게도 든든하기 그지없는 형이 생겼으니 앞으로는 결코 외로운 일이 없을 것이 아닌가. 이런 기쁨이 그의 눈에서 자꾸만 눈물을 솟구치게 했다. "하하하하! 아우. 왜 그렇게 계집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나? 이렇게 기쁜 날에 말이야." "혀......형님! 전...... 정말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핫핫핫! 이제부터 우리는 형제야. 슬플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는 그런 사이가 되는 거야. 오늘 같이 기쁜 날 눈물을 보이다니, 아우답지 않구먼. 자, 연 아우. 이제 눈물을 거두고 떠나자." 종리연은 소매로 눈물을 훔친 후 물었다. "어디로요?" "서주(西州)!" 남궁환인의 음성은 단호했다. 종리연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당연히 숭산회합이 열리고 있는 소림으로 갈 줄 알았던 것이다. 그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남궁환인을 보았으나 그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왜 서주로 가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종리연은 내심 중얼거렸다. '어디를 가든지 무슨 대순가? 어쨌거나 형님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자. 설사 그곳이 지옥이라고 할 지라도.' 이윽고 졸지에 의형제가 되어 버린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남궁환인과 종리연은 서주로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숭산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어느새 아침 햇살이 무성한 나뭇잎들을 간지럼 태우며 환히 펴져나가기 시작했다. 4 천상제일루(天上第一樓) 강소성(江蘇省)의 성도 서주(西州)를 오가는 사람이라면, 아니 남녀가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면 모두가 후회할 뻔한 일이 생겨나고 있었다. 특히나 여자를 대동하고 가는 남자들은 더더욱 후회했을 법한 일이었다. 이유는 오로지 한 사내. 자신의 여인이 자기에게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으면서도 어떤 한 사람을 바라보며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채로 한숨을 쉬고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길을 가면서도 넋이 빠진 채 그 사나이를 쳐다보고 있는 뭇 여인들의 눈동자에는 온통 연모와 뜨거운 정뿐이었다. 아무리 콧대가 쎈 여인일지라도 그 사나이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고는 못 배길 성싶었다.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저분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으면........ 아아! 그때 난 죽어도 좋겠어.' 사나이를 발견하고 엉겹결에 걸음을 멈춘 여인들이 속으로 울부짖는 바람이었다. 거리를 지나는 여인들 뿐만이 아니라 여인의 남자들도 한 번 이상을 그 미남자에게 눈길을 던지는 것이었다. 즉 거리의 시선이란 시선은 온통 한 남자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동행인 것 같은 두 남자, 그 중에서 오로지 한 남자에게 집중되었던 것이다. 서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두 청년이 활보하고 있었다. 한 명은 백색문사의를 입은 절세준미한 미서생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보다는 약간 어려보이는 인물로 얼핏 미서생의 서동 같았다. 미서생은 걸음걸이부터가 특이했다. 바로 그 걸음걸이가 특히나 여인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었던 것이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옥수의 가지인 양....... 또는 달콤한 풍류남아의 산보행인 양....... 또는 왕자의 잠행(潛行)인 양....... 그 걸음걸이 하나만 해도 여인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 내리며 뜨거운 숨을 억제하지 못했다. 청년의 걸음걸이는 참으로 뭇 여인들의 애를 태울만 했다. 그 청년은 다름아닌 남궁환인이었다. 종리연은 신바람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찬사 가득한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춥고 음습한 그늘에서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아온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바뀐 것이다. 그것도 아주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끔이나 뒤바뀌게 되리라고는 꿈 속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는 곳이나 머무는 곳 그 어디서나 사람들의 부러움에 찬 시선이 그를 에워쌌다. 물론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뭇 사람들의 눈길들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곁의 의형 남궁환인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그래도 좋았다. 어쨌든 어둡고 처량하기만 했던 자신의 어제에 비한다면 오늘의 이 화려한 등장은 일백 배, 아니 일천만 배나 나은 것이다. 종리연은 슬쩍 남궁환인을 보았다. '정말......! 같은 남자인 내가 보아도 형님은 멋있어.' 그는 어개를 으쓱 치켜 올렸다. 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던 탓이었다. 섭선을 흔들며 남궁환인은 유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걸음걸이는 천하를 주유하는 것처럼 여유롭고 한가로워 보였으나 사실 그는 적지 않게 긴장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여행이 아니라 중차대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행선지가 정해진 걸음걸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전 무림의 운명이 이번 길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행보(行步)이지 않은가. '사부님. 저에게 힘을.......' 사실 남궁환인은 속으로 피를 토해내는 듯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무심해 보였으나 서늘한 그의 두 눈에 한 가닥 불안의 고뇌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으리라. 한편, 종리연의 얼굴에는 끊임없이 자부심에 가득 찬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남궁환인이 아무리 불안에 처해 있기로서니 종리연의 그러한 마음상태까지 모르겠는가. 남궁환인은 종리연에게서 애정에 가까운 동정심을 느꼈다. '녀석! 오죽이나 고생을 많이 하였으면....... 참으로 귀엽고 순진한 구석이 있는 놈이다.' 저만치 주루가 보이자 남궁환인은 입을 열었다. "연 아우. 우선 저곳에 가서 요기를 하자." 종리연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색했다. "좋습니다. 형님!" 얼굴이 뚫어질 지경이었다. 그들이 주루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남궁환인에게 퍼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치자 종리연이 불현듯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런데...... 형님. 대체 이곳 서주에는 무슨 일로 온 것입니까? 전 아무래도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숭산회합이 열리는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 반대 방향인데 말이죠." 종리연은 사실 지금까지 그것이 가장 의문이었다. 그는 본래 숭산회합에 참가할 생각이었다. 전 무림인들이 노리는 숭산으로 가다보면 어떤 기연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였다. 혹시 아는가. 그곳에서 진짜로 무공이 뛰어난 스승을 만나 그가 가진 모든 절기를 전수받는 일이 생겨날 지를. 그런데 중도에서 남궁환인을 만나 서주로 방향을 바꾸게 되어 내심 아쉬운 느낌이었다. 만약 남궁환인을 만나 의형제를 맺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이면 숭산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알고 싶으냐?" 종리연의 질문에 남궁환인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종리연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기루인 천상제일루(天上第一樓)로 오기 위해서 였다." "예? 뭐라구요? 천상제일루에 오기 위해서요?" 종리연은 어리둥절했다. 그도 강호를 떠돌아 다닌 경력이 있어서 천상제일루라는 기루를 알고 있었다. 천상제일루는 천하에서 가장 이름난 호화로운 일급 기루다. 황금 일천 냥이 없으면 처음부터 아예 문에 들어서지도 못하는 곳, 거금 삼천 냥을 주어야 겨우 기녀의 손목 한 번 잡아 볼 수 있는 곳이 천상제일루였다. 무엇보다도 천상제일루의 주인이야말로 천하제일의 우물(尤物)이라는 설이 그토록 그곳을 유명하게 했다. 누구든지 한 번 보기만 하면 영원히 잊지 못해 상사병이 걸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천상제일루의 주인이라는 소문은 전 무림에서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루주(樓主)를 직접 보았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루주를 찾는 손님이 황제든 무왕(武王)이든 간에, 루주 스스로 선택해야 얼굴을 볼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종리연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우거지상이 되고 말았다. 기껏 숭산회합까지 취소하고 이곳에 온 이유가 기껏 기루 때문이라니....... 사실 그는 남궁환인이 좀더 큰 뜻이 있어 서주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불평없이 따라온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기껏 일개 기루를 보기 위해서....... 남궁환인은 종리연의 얼굴에 떠오르는 실망의 빛을 읽고는 피식 웃었다. "녀석......! 자, 이제 그만 가자." 종리연은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또다시 가슴이 뛰었다. 남궁환인의 미소는 같은 남자라도 한순간에 매료시킬 수 있는 그런 웃음이었던 것이다. 남궁환인의 미소를 대하는 순간 어느새 불만이 싹 가신 종리연은 서둘러 남궁환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남궁환인의 뒤를 따르던 종리연은 그만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어느새 말로만 듣던 천상제일루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서였다. 사실 종리연은 말만 들었지 이곳은 처음 와 보는 것이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했다. 아니, 일천 번을 듣는 것보다 한 번 보고 확인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입구부터 너무나도 호사스런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천상제일루의 화려한 모습을 전해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상상력이 빈약했던 탓인지 지금까지 그가 머리 속에 꾸며 상상해 보았던 천상제일루는 실물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대문만 하여도 금박을 입혀 놓아 왠만한 사람은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대문 안쪽으로는 값비싼 대리석을 깔아놓아 걸어갈 때마다 사람의 모습이 거울처럼 투영되고 있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으나 남궁환인은 스스럼없이 기루로 들어섰다. 종리연은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 그들이 입구로 들어서자 한 명의 기녀가 달려 나왔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기에 통고도 없이......." 본래 이곳은 철저한 예약제로 손님을 받는 곳으로 미리 요금을 지불하고 예정일에만 오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녀는 들어서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는 입을 다물었다. 놀란 듯한 기녀의 두 눈이 멍청하게 떠 졌다. 아니나 다를까? 곧 기녀의 눈은 남궁환인의 얼굴에 고정되어 버렸다. "허...... 헛흠!" 남궁환인은 가볍게 헛기침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손님......! 어...... 어서 안으로......." 정신을 차린 기녀는 얼굴을 붉히며 급히 허리를 굽혔다. 어찌나 놀랬는지 머리가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남궁환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그럼......?" "루주를 뵈러 왔소." 음성마저 기가 막혔다. 기녀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천상의 선음(仙音)을 방불케 하는 멋진 미서생의 옥음에 그녀는 음악을 듣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하마터면 정말 루주에게 안내할 뻔 하다가 그녀는 후다닥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해요. 공자님. 루주께선 지금 출타중이시라......." 항상 하는 말이었다. 천상제일 루주가 아무도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는 핑계가 바로 '출타중'이라는 핑계였다. 그러나 남궁환인의 반응 역시 자연스러웠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점잖게 말했다. "음, 그렇다면 기다리리라. 천하제일의 미인을 만나는데 어찌 기다림을 아끼겠소? 그러니 나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겠소?" 기녀는 서둘러 말했다. "물론이에요. 천녀를 따라 오시와요." 잠시 후 그들이 안내된 곳은 아늑한 별원이었다. 본시 예약 없이는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곳이었으나 남궁환인의 기도와 용모가 그런 번잡스런 절차를 생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만 해도 상당히 파격적인 예우가 아닐 수 없었다. 별원의 규모만 해도 능히 한 채의 장원이나 다름 없었다. 인공연못과 가산이 소담스럽게 꾸며져 있는 곳을 낮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어 그야말로 독립적인 장원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편히 쉬시와요. 공자님. 불편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나 이 천비를 불러 주시와요." 기녀는 공손히 절을 하고는 물러갔다. 그러나 가기 전에 그녀는 아쉬운 듯 남궁환인의 얼굴을 훔쳐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종리연은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남자인 자신도 반할 용모이거늘 기녀라고 오죽 하겠는가 말이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하......! 아마 그 콧대 높기로 유명한 천상루주라고 해도 형님을 한 번 보면 반하지 않고 배기지 못할 것이다.' 폭포수 같은 여인의 머리칼이 비단 침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필설로 형용하는 것은 시가(詩歌)의 대가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로만 여겨졌다. 피가 돌고 향기로울 뿐 아니라 투명한 살결을 고스란히 빚어 낸 예술작품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여인을 두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그녀의 육체의 선은 태초의 생명을 잉태했던 바다의 만(灣)처럼 완전한 곡선을 이루며 능려하게 뻗었고, 굽이치는 굴곡의 완만급사(緩慢急斜)는 절묘한 배합을 이루어 들어갈 곳에 적당히 들어가고, 나올 곳에 적당히 나온 형국이었다. 지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여인의 육체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예술품에 다름없었다. 여인은 상아로 깎은 네 기둥의 침상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침의(寢依)로서, 속살이 은은히 투영되어 보이는 얇은 망사의로 되어 있는 옷이었다. 그러하되 조금도 욕념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여인은 완벽했다. 그런 여인의 폭포수 같은 흑발을 침상에 펼쳐놓고 빗질을 하는 여인은 중년의 여인이었는데, 그녀 역시 은은한 기품을 풍기는 미인에 속했다. 그러나 침상 위의 미녀에 비한다면 많이 떨어졌다. 침의미녀(寢依美女)는 눈을 감고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그늘을 이룰 정도로 길었다. 어느 순간에 그 속눈썹이 들려졌다. 그러자 티없이 투명하고 맑은 추수(秋水)가 일렁이는 듯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위인이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란 말이냐?" 빗질을 하던 중년 여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제가 보았는데 정말이지...... 전대의 전설적인 미남자 반안(潘安)이나 송옥(宋玉)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만큼 준수하지는 못할 거예요." 중년 여인은 자신의 청춘이 다시 돌아간다면 하는 심정인 듯 한숨을 쉬었다. 침의여인은 옥으로 빚은 듯한 콧등을 약간 찡그렸다. "백화랑(白花娘)이 반한 걸 보니 만나보고 싶은데......?" "그...... 그럼 모실까요?" 백화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겉보기에 35, 6세쯤으로 보였으나 아직도 뭇 남성들을 현혹시킬 만한 풍염한 몸매와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침의미녀의 말은 지극히 실망적이었다. "아니야. 놔 둬. 지금 그 끈질긴 괴물만 해도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 백화랑은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생각난 듯이 침의미녀가 다시 물었다. "참, 그 괴물은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나?" "예. 벌써 보름째...... 떠나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 래?" 침의미인의 눈동자에서 야릇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너무나 완벽한 미색으로 인해 영원히 늙지 않는 미인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를 만나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왠지......." 중년 여인이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바로 그 순간 침의미인이 무엇을 떠올렸는지 눈빛을 반짝였다. "참, 아까 말한 그 사람의 인물이 출중하댔지?" "예.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운 분이셔요." "호호...... 그렇다면 무공도 꽤 쓸만 할까?" "아니...... 루주님께선 어떤 생각을.......?" 백화랑이 얼굴에 은은히 놀라움이 떠올랐다. 일순 침의미인의 입술 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번져났다.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말이 있어. 돌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잡는다....... 잘하면 그 두 사람을 모두 쫓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게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루주님......." 백화랑은 그녀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하지만 말리려고 해 보았자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중년 여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침의미인은 일어서고 있었다. 출렁....... 폭포수같은 흑발이 춤추듯 물결쳤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미발이었다. 침의와 기나긴 흑발! 몸을 가볍게 흔들자 흑발이 춤추며 더욱 야릇하고 폭발적인 미태를 자아냈다. 백화랑은 그 모습에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같은 여인의 입장에서 볼 때만도 저렇게 마력적인데 하물며 사내들이 볼 때는 어떻겠는가? 경험이 풍부한 백화랑으로서는 루주의 장래가 어떻게 될 지 눈에 보이는 듯하여 괴로웠다. "아아......! 어쩌자고 자꾸만 저리 변해 가시는지...... 참으로 앞날이 걱정이로구나." 지금 백화랑은 루주가 하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잔인한 짓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말려야 소용이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어쩔 수 없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밤이었다. 밤이었으나 별원의 정실에서 종리연은 아까부터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남궁환인에게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종리연의 가슴 속에는 하나의 의혹이 뱀이 또아리를 틀 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여기까지 오면서 느끼게 된 남궁환인에 관한 것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남궁환인에게는 어떤 근심이 있는 듯했으나 아무리 물어도 그는 대답해 주지를 않았다. 조금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다 못하여 종리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생명을 같이 하기로 한 이 아우에게도 말하지 못할 걱정거리가 무엇입니까?" 남궁환인은 종리연의 말귀를 못알아 들었는지 대답 대신 이따금 한숨을 쉴 뿐이었다. 어떤 깊은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남궁환인은 창 밖의 어둠 한 곳을 응시하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언뜻 비치는 그의 서늘한 눈에도 근심과 초조함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종리연은 지금까지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기분이나 눈치를 보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그는 필시 남궁환인에게 큰 걱정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내게 힘이 있다면 형님을 도울 수 있을 텐데.......' 그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마음뿐이다.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싶은 심정이 들었을 때였다. 그때였다. 문득 어디에선가 한 가닥 맑은 옥음이 들려왔다. 맑은 봄 깊은 밤 술잔을 드니 등불 앞엔 가는 비 처마 끝엔 지는 꽃 "......!" 종리연은 꿈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아......! 정말 아름다운 음성이다. 대체 누가?" 그는 남궁환인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남궁환인도 부르르 몸을 떨더니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홀연 남궁환인의 입술이 움직임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낭랑한 시음(詩音)이 흘러나왔다. 오직 고답한 노래에 귀신 든다면 굶어 죽어 구덩이에 묻혀도 좋으리...... 종리연은 그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화답(和答)이 바로 두보(杜甫)가 지은 취시가(醉詩歌)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은연중 그도 감염된 듯 눈빛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다시 어딘가에서 예의 옥류에 물방울 소리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다고 처량하게 실망하진 마시고...... 남궁환인이 즉시 받았다. 살아서 서로 만나 술이나 듭시다. 화답이 끝나자 남궁환인은 문득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형님. 어디로......?" 놀란 종리연이 뒤ㅉ아 가며 묻자 남궁환인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가 날 부르고 있다. 잠시 다녀오겠으니 너는 먼저 자거라."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말을 끝마친 남궁환인은 종리연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종리연의 마음 속에는 더욱더 강한 의혹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건 참으로 당연한 의혹이었다. '미녀가 달밤에 시를 불러 유혹을 한다면 당연히 기뻐해야거늘. 형님은 어째서 저렇게 긴장하는 걸까?' 망연자실한 시선으로 남궁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종리연은 급기야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남궁환인의 뒤를 밟기 시작한 것이었다. 남궁환인이 먼저 자라고 한 말은 이미 그 효력을 상실한 뒤였다. 종리연이 가장 참지 못하는 것이 바로 호기심이라는 것을 남궁환인은 몰랐던 것이다. 그로 인해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5 운명(運命)의 시작점 남궁환인은 소리가 났던 곳으로 걸어갔다. 심혼을 흔드는 듯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온 곳은 처소에서 별로 먼 곳이 아니었다. 얼마쯤인가 걸어 나가자 하나의 인공호수가 나타났다. 그를 유혹한 여인의 음성이 들린 곳은 바로 호수 한가운데 위치한 정자 속이었다. 이곳은 천상제일루의 중앙이었다. 두보의 취시가를 읊던 여인의 그림자가 정자 안에 그림처럼 들어 있었다. 문득 여인의 음성이 멈추었다. 호숫가에 남궁환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잠시 바라보았을 뿐 다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중양절(仲陽節)에 홀로 든 술잔 마시지 못하고...... 바로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남궁환인은 정자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시구의 뒤를 이었다. 병든 몸 간신히 강기슭 정자에 올랐노라. 바로 그 일탄지간의 순간 정자 안의 여인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죽엽청(竹葉淸) 술도 나와는 인연이 없으니 앞으론 국화꽃도 피어나지 말라. 여인과 남궁환인은 계속해서 시를 주고 받았다. 타향(他鄕)에서 해지니 검은 원숭이 슬피 울고 고향(故鄕)의 흰 기러기 서리 앞서 오건만 동생 누이 어디 있나? 아득한 따름이라! 전란(戰亂)과 노쇠에 더욱 이 몸만 조이네. 참으로 완벽한 조화였다. 주고 받는 낭송이 끝나자 남궁환인과 여인의 시음은 똑같이 멈추었다. 의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똑같이 서로를 모르는 가운데 하나의 시를 주고 받으며 화답한 것이었다. 여인의 시선이 자기를 샅샅이 살피고 있음을 남궁환인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자 안은 어둠에 쌓인 그늘이라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인의 눈빛이 느껴지는 순간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오로지 눈빛 하나만으로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들 수 있는 여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그러나 남궁환인이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장차 사성녀를 취하여 삼패로 인해 도탄에 빠질 무림을 구할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곧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이윽고 정자 안의 어둠 속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상공께선 뉘시길래 이토록 늦은 밤 이곳까지 왕림하셨습니까?" 역시 사나이의 가슴을 뒤흔드는 옥음이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도 그런 소리는 나올 성싶지 않았다. 참으로 뭇 사나이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 만한 음성이었다. 남궁환인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실례를 했다면 그 무례를 용서하시오. 예의가 아닌 줄은 아오만 노래에 취하여 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부디 소저의 아취를 방해한 죄, 벌 내리시기를." 남궁환인은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참으로 공자대부의 몸가짐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도 비굴해 보이지 않고, 또한 오만해 보이지도 않는 부드러웠으나 기품 넘치는 자세였다. "훗......!" 문득 정자 안으로부터 가볍게 입을 가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의 아름다운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남궁환인의 긴장감이 눈 녹듯 풀어졌다. 그때 여인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왜 서 계신가요? 기왕 발걸음을 하셨으니 들어 오세요. 이곳에는 오향주(五香酒)도 준비되어 있사오니 목이라도 축이시지요." 마다할 남궁환인이 아니었다. 일부러라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온갖 계책을 세우지 않았던가. 남궁환인은 즉시 정자 안으로 올랐다. 어느새 준비해 놓았던지 여인이 황촛대에 불을 밝혀 남궁환인을 도왔다. 정자에 오르는 순간 그는 코끝을 기분좋게 스치는 여인의 체향을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의 체향은 물처럼 은은하고 들풀처럼 향기로웠다. 가인(佳人)의 체향은 사나이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누가 일렀던가. 남궁환인은 다시 흔들리려는 자신을 억제해야만 했다. 놀라고 놀라고 또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천하의 여인을 흔들리게 하는 그가 고작 얼굴도 마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도리어 한 여인의 체향만으로 마음이 동요되다니, 그 어찌 놀랄 일이 아니란 말인가. 어느샌가 정자 안에는 두 개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석탁 위에는 간단하지만 정갈해 보이는 주안상이 주인과 객의 손길을 기다렸다. 여인은 섬섬옥수를 들어 빈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상공." "송구스럽소이다." 남궁환인은 여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여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 순간 그는 잠시 놀랐다. 여인의 얼굴이 반쯤 면사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러나 있는 눈빛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고혹적인지를 능히 알 수 있었다. 여인은 그윽한 눈으로 남궁환인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시가(詩歌)에 조예가 깊은 분이시군요? 실례지만 학파(學派)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남궁환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사성녀를 얻어야만 하는 일은 처음부터 비비꼬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일이 잘 풀릴 것인지 아니면 죽을 쓸 것인지가 판가름나는 것이었다. "학파는 무슨....... 경치좋은 곳을 떠돌다가 그저 귀동냥하여 익힌 것에 불과할 따름이오." 여인이 말을 받았다. "훗......! 무척이나 겸손한 분이시군요. 그러나 지나친 겸손은 미덕이 되지 못하는 법이에요. 자신을 과장할 필요가 있는 이들이 때로는 겸손의 가면을 쓰기도 하죠. 자, 잔을 받으세요." 여인이 섬섬옥수를 들어 술을 따랐다. "......." 여인이 따르는 술을 잔에 채우며 남궁환인은 자신이 여인의 화술에 말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봉황성녀(鳳凰聖女) 화안봉(華雁鳳)이라는 이 여인이 바로 사부인 무한진인(無限眞人)이 말하던 사성녀 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필히 그가 취해야 할 여인이건만 천하의 남궁환인은 여인을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쪼그라드는 듯한 위축감을 느끼고 말았다. 대화라면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여인을 대하는 찰나에 그는 직감적으로 한 수 밀리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딪쳐보기도 전에 위축될 필요는 없었다. "어흠!" 남궁환인은 가라앉기 시작하는 자신감을 만회하려는 듯이 대범하게 술잔을 비운 후에 헛기침을 했다. 그런 남궁환인의 모습을 여인은 내쳐 주시하고 있었다. 여인이 잠시 후에 잔을 채우며 다시 물었다. "혹시 무공은 익히셨는지요?" "그저 장난 정도일 뿐이오. 그저 내 앞가림이나 할 수 있는......"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으나 면사 위에 드러난 눈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일 뿐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아아! 그럼 곤란하겠군요. 소녀는 혹시 또...... 상공을 뵙는 순간 한 가지 부탁을 드릴까 했었는데......." 여인의 안타까운 듯한 한숨은 남궁환인의 가슴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그는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성급하게 되물었다. "도움이라면......? 한 번 말해 보시오. 내 재량껏 할 수 있는 일이라며 기꺼이 도우리라." 여인은 애간장이 타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아아......! 요즘 절 괴롭히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워낙 무공이 고절한 분이 되어서...... 소녀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남궁환인은 내심 생각했다. '이 여인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라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겠다. 마침 잘된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에게 어떤 가능성을 엿보이게 만들었다. "내 비록 가진 무공은 보잘 것 없지만 내 한 몸 지키기에는 충분하오이다. 낭자를 괴롭히는 작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겠소?" 그 말에 여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그러 하오시면 절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내 비록 재주 미천하나 어찌 연약한 여인의 위경을 모른 척 할 수 있겠소이까? 힘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할 용의가 있소이다." "아아! 정말 고마워요. 상공." 여인은 기쁜 듯이 술잔을 따랐다. "소녀는 지금껏 위경에 처해 있었는데, 이제서야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에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마치 지옥에서 구출되는 듯한 느낌이에요." 이렇게 말하며 바짝 붙어서 술을 따르는 여인의 몸에서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체향이 났다. 남궁환인은 그녀의 체향에 아찔한 느낌이었다. 오래지않아 정자 안의 분위기는 달콤하게 익어갔다. 두 사람은 오향주를 반 넘게 비우며 친밀감을 나누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호수의 수면 위에 떨어져 출렁거리는 달빛은 교교한 기운을 더하며 사람을 유혹했다. 아름다운 여인과 술, 그리고 호수의 달. 달은 호수 속에만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술잔 속에서도 떠서 부드러운 월광을 풀어내고 있었다. 남궁환인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멋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나이라면 어느 누가 이러한 자리를 마다하랴. 그러나 남궁환인은 수없이 자신을 다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신차려야 한다. 환인......! 네 목적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제 너는 겨우 사성녀 중 하나를 만났을 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 가득 찬 술잔 속의 월광에 취해 있는데 여인의 낮은 탄식이 들렸다. 그것은 아름다움 때문에 나오는 탄식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불안감이 뒤섞인 듯한 탄식이었다. "......?" 남궁환인은 의아함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마침...... 그자가 오는 군요." 남궁환인은 흠칫하고 여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달빛 일렁거리는 호수 저편으로부터 한 사나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남궁환인은 그 인영을 보는 순간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호리했으나 팔 척에 가까운 키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 흑포처럼 보이는 옷을 입은 인영. 왠지 멀리서부터도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괴인이었다. 정자로 다가올수록 인영의 정체는 또렷하게 드러났다. 마침내....... 남궁환인의 시력은 정확했다. 정자 앞으로 바짝 다가온 흑포인은 비쩍 말랐으며 손에는 섭선을 쥐고 있었다. 거기다가 온몸에서 풍겨나오는 음산스러움이라니....... 순간 남궁환인은 이상한 예감에 가슴을 떨었다. '혹시...... 저자가?' 사나이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남궁환인은 더이상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소저....... 혹시 저 사람은 바로 삼패천의 하나인 무영비마(無影秘魔)가 아니오?" 순간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아는 사이인가요?" 남궁환인의 예감은 적중했다. "......!" 바람도 없는데 그의 몸이 어둠 속에서 크게 진동했다. 그것은 엄청난 진폭의 떨림이었다. '하...... 하필이면......?' 만약 대낮이었다면 여인은 남궁환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밤이었다. 그것도 짙어가는 밤. 남궁환인으로서는 아직까지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현듯 남궁환인의 뇌리에 사부가 한 말이 떠올랐다. '강호에 나가 사성녀를 얻기 전에 결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세 명이 있다. 그 하나는 일지겁천(一指劫天)이요, 두 번째는 무영비마(無影飛魔)다.' 남궁환인은 온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던가? 단순히 운이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여인. 더군다나 그가 얻으려고 했던 사성녀 중의 첫번째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는 자가 바로 일지겁천이었다니.......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아니,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기가 막혔다. '아아! 내 운명은 여기서 끝장나게 되어있었단 말인가!' 남궁환인은 내심 그렇게 부르짖었다. 한편, 여인은 비지땀을 흘리는 남궁환인을 보고는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다. '알고 봤더니 겉보기보다 형편없는 작자로군.' 남궁환인의 그런 모습은 여인에게 동정심보다는 불쾌감을 유발하고 있었다. '기껏 미려한 외모와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를 홀리려 했단 말이지? 이 봉황성녀를 얕보아도 너무 얕보았군. 어디 혼 좀 나 보아라.' 여인은 독한 마음을 품었다. 여인은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상공. 어이하여 식은 땀을 흘리시나요? 어디 아픈 데라도 있으신가요?" 부드럽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오로지 여인만을 유혹하기 위해서 덤벼들었던 사나이라면 그 목소리에 홀려서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비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죽음 속으로 뛰어들 것이 틀림없었으리라. 남궁환인은 그야말로 진퇴유곡이었다. 앞으로 나가지도 돌아설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그는 다급한 김에 주위를 둘러 보다가 문득 호수로 연결되어 있는 돌다리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다가오고 있던 흑포인이 사라진 것이다. 그때였다. "나를 찾느냐?" 한가닥 차가운 음성이 바로 뒤에서 들렸다. "......!" 남궁환인은 부르르 떨었다. 어느새 사나이가 정자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흑포가 아니었다. 정자 안의 불빛에 드러난 사나이는 청포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깡말라 마치 얼음으로 깎아 빚은 듯하고, 눈도 투명한 한광을 발하고 있었다. 사나이가 안으로 들어섬에 따라 정자 안이 갑자기 겨울로 바뀌는 듯한 기분이었다. 남궁환인은 즉시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이 사나이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얼마나 참담한 직시(直視)인가? 그는 창백한 시선으로 청포인을 바라보았다. 당금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삼패천의 하나인 무영비마를.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러나 이미 싸움은 끝나 있었다. 남궁환인은 끝내 사나이의 눈길을 받아내지 못했다. 아니 받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먼저 눈길을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만일 자신이 이 자리에서 속절없이 무릎을 꿇는다면 그 길로 무림은 끝장인 것이다. 그는 다만 그를 두려워하여 피하는 것뿐이었다. 굳이 옛 성현의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현자는 어려움을 피해갈 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궁환인은 현자였다. 잠시의 어려움을 피해갈 줄 아는 지혜를 가진 현자. 남궁환인은 비겁함과 후일을 도모함이 분명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때의 만용이나 오기로 대사를 그르친다면 그건 용기있는 자의 행동도 아닐 뿐더러 현자의 지혜로움도 아닌 것이다. 무모한 행동거지로 천추(千秋)의 한을 남길 현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때였다. "형편 없는 놈이군." 남궁환인의 귓전을 때린 것은 바로 무영비마의 빈정거리는 음성이었다. 그가 대꾸하지 않자 그의 음성이 잔인하게 울렸다. "어서 꺼져라! 오늘은 날씨가 좋아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으니......" 남궁환인은 시선을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눈에는 한가닥 기대가 어려 있었다. 그 기대에 찬 눈길을 확인하는 순간 남궁환인의 가슴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여인의 눈은 호소하고 있었다. 어찌 그 호소를 모르겠는가. 여인은 그가 나서서 멋지게 무영비마를 해치우기를 바라는 눈길을 남궁환인에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大)를 위해서는 소(小)를 희생할 줄 아는 것 또한 사내 대장부의 할 일이 아니던가. 남궁환인은 여인의 눈을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난 겁을 내서가 아니라 무림을 위해서 이 치욕을 참는 것이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인에게 포권을 취한 후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때였다. "흥......! 꼴에 사내라고......." 귓전으로 여인의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로 그때였다. "기어서 나가라!" 무영비마의 잔인한 주문이 떨어졌다. 남궁환인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그로서도 더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 모욕적인 주문이었다. 마음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을 참는 것이 인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무영비마의 주문은 사나이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짓밟자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남궁환인의 두 주먹에 힘이 주어지고 두 눈에서는 무서운 불길이 활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남궁환인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위인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니다. 장부는 최후의 순간까지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바로 여기서 나의 정체를 드러내고 만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 아닌가? 사부님의 기대와...... 무림의 평안...... 그 날을 위해 참자.' 울분을 억누르며 남궁환인은 눈을 감았다. 등 뒤로 여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기어 나가기 위해 그는 허리를 숙였다. 바로 그때, "누구냐!" 문득 무영비마가 호통을 치더니 숲속을 향해 소매를 날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순간적인 일이었다. 어느새 무영비마의 소매 속에서 푸른 빛이 폭사되었다. 푸른 광선은 정확히 10장 밖에 떨어진 나무 위로 폭사되었다. 실로 전광석화의 순간이었다. "아악!" 나무 위에서 한가닥 비명이 울리며 누군가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아니......?" 남궁환인은 깜짝 놀랐다. 동시에 그는 바람처럼 신형을 그 쪽으로 날렸다. "......!" 놀라운 신법이었다. 나무 위에서 떨어진 인영은 다름 아닌 종리연이었다. 그는 호기심에 끌려 이곳까지 따라와서는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실수하여 작은 소리를 내게 되었고, 그 바람에 무영비마의 암기에 적중된 것이었다. 남궁환인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독암기다.' 종리연의 오른쪽 어깨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옷을 찢고 안을 보니 국화 문양이 찍혀 있는데 그 부분은 이미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치명적인 급소를 피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즉사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 이미 종리연은 의식을 잃은 후였다. 남궁환인은 다급해졌다. 이대로 두면 그의 숨이 끊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무영비마는 여전히 정자 안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나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다만 섭선을 조용히 흔들며 계속 여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남궁환인은 종리연을 안고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정자 아래에 서자 그는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해약을 주시오. 이 소년은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오." 그러나 무영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여인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어떤 집 개가 짖느냐는 식이었다. 이번에는 여인 쪽을 바라보며 남궁환인은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예상밖으로 여인 역시 무심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남궁환인은 다급해졌다. 마침 종리연이 눈을 뜨며 힘겹게 신음했다. "혀...... 형님......! 살려주세요...... 으음......!" 종리연은 몇 마디 내뱉고는 다시 혼절했다. 어느새 그의 온몸은 검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남궁환인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났다. "어서 해약을 주시오. 천하의 삼패가 한낱 어린 아이를 독암기로 공격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오?" 그제야 무영비마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네가 직접 가져가라." "......!" 그 말에 남궁환인은 안면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품안의 종리연을 내려다 보다가 종리연을 내려 놓았다. 그의 눈에는 비장함이 어리고 있었다. "......!" 그가 자세를 잡자 무영비마도 방심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는 남궁환인의 정체에 대하여 무척 궁금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잠깐 펼친 경공술 하나만 해도 놀라운 것이었다. 쉬운 상대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한편 여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두 눈에 흥미로운 빛을 띨 뿐이었다. 이들 중 어느 쪽이 이기던 지던 그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이윽고, "해약을 주시오!" 남궁환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무영비마의 장대한 신형도 그를 향해 날아갔다. 한쪽은 빛살같은 신법이었으며, 다른 한쪽은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는 듯한 비쾌한 신법이었다. 두 사람의 신형은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그저 두 개의 인영이 허공에서 교차하는 것으로 비칠 뿐이었다. 남궁환인은 필생의 공력을 쏟았다. 자신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윽!" 땅에 착지하는 순간 남궁환인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겨우 몇 보나 물러나고서야 간신히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다. 다만 무영비마의 가공할 장력에 떠밀린 것 뿐이었다. 이때 맞은편에 떨어진 무영비마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것은 정자 안에서 구경하고 있던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여인의 호기심이 발동했을 때, "너는 누구냐?" 무영비마의 느닷없는 질문이 떨어졌다. 그러나 남궁환인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내밀 뿐이었다. "해약을...... 주시오." "크흐흐......!" 무영비마는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다가갔다. 찰나지간 그의 두 눈에서는 무서운 살광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 남궁환인은 부르르 떨었다. '이제 끝인가?' 그는 체념 반, 각오 반의 심정으로 온몸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비록 자신이 그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어쩔 수 없었다. 이때였다. "잠깐만요!" 옥음과 함께 정자 안에서 걸어 내려온 것은 바로 면사여인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 막으며 영롱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좋은 밤에 두 분께서 다투시면 흥취가 깨어져요. 그러지 말고 서로 화해해요. 네? 저를 보아서라도 말이에요." 여인의 부탁은 살벌한 공기를 일시에 녹이기에 충분했다. 무영비마는 잠시 살기를 거두었다. 그는 남궁환인에게서 어떤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이 나서는 순간 마음을 바꾸고 있었다. '급할 건 없지.' 그는 순순히 걸음을 멈추었다. 여인의 눈에 만족의 빛이 흘렀다. 여인의 등장은 남궁환인을 죽음에서 구해주는 꼴이었다. 온몸의 공력을 끌어올려 최후의 일격으로 맞서 싸울 작정이던 남궁환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풀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고마운 분이세요. 소녀의 말을 들어 주니 말이에요. 그렇다면 기왕 양보하시는 김에 해약도 주세요." 무영비마는 눈빛을 번뜩였으나 순순히 품속에서 약병을 꺼내 한 알의 환약을 꺼냈다. "호호호....... 고마워요." 여인은 섬섬옥수로 환약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당신도 매우 뛰어난 분이에요.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래요." "......." 남궁환인은 얼굴을 붉혔다. 어쩐지 여인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인 것이 크게 부끄러운 심정이었다. 그는 말없이 환약을 받았다. "그럼......."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남궁환인은 종리연의 안색이 완전히 검게 변색된 것을 보고 그를 안고 신형을 날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그의 모습은 여인과 무영비마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여인은 그윽한 눈으로 무영비마를 바라보았다. "당신...... 정말 끈질긴 분이군요?" 무영비마는 그녀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그대는 황후(皇后)가 되어야 할 몸이오. 승낙하실 때까지 떠나지 않겠소." 여인은 그 말에 한숨을 쉬었다. "아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 당신을 미쳤다고 할지...... 아니면 가상하다고 해야 할 지......." "......." 달빛이 기울고 있었다. 여인은 호수 위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면서 승낙하기를 바라는 이 사내. 도대체 이 사내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여인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무영비마는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지났을까? 그의 메마른 입술에서 다시 예의 말이 흘러 나왔다. 차고 무뚝뚝하긴 했으나 확신이 가득찬 음성이었다. "백 번 천 번을 말하지만 그대는 황후가 되어야 하오." 6 한심한 제자(弟子) 창공에 뜬 푸른 달빛만이 자는 바람 사이로 월광을 세상에 흩뿌릴 뿐 시위는 고즈넉하기 짝이 없었다. 병야(丙夜)도 반이나 지난 시각, 인적 없는 관제묘(關帝廟) 바깥의 풀섶에서는 날벌레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구애(求愛)와 교미(交尾)의 울음을 울어댔다. 바로 그 시각, 관제묘(關帝廟) 안에서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으음...... 음......." 고열(高熱)로 시달리는 자에게 신음이 나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그것은 또한 이제 위험한 고비를 어느 정도 넘겼다는 뜻도 된다. 남궁환인은 관제묘 바닥에 누워 있는 종리연의 이마를 소매로 닦아주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묘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종리연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다. 어쩌면 그의 비굴하면서도 한심한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자신의 과거를 보는듯 하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는 종리연의 이름을 들었을 때 이미 그가 담간랑이라는 별호로 불리우는 소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그와 의형제를 맺은 것은 남달리 어떤 정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혀...... 형님......!" 이제 제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종리연은 눈을 떴다. 황급히 눈을 뜬 그는 주위를 둘러 보다가 바로 옆에 남궁환인이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그가 자신을 버리고 가지 않았나 해서 였다. "걱정 말아라. 나는 여기 있으니. 그리고 너의 몸도 곧 회복될 것이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남궁환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고마워요. 형님......." 어느샌가 종리연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녀석......." 짜안한 감정을 억누르며 남궁환인은 종리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종리연은 이제야 안심이 되는 듯 안색을 펴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무언가를 생각해 낸 종리연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혀......형님! 그런데 그 무서운 자는......?" "여기는 너와 나밖에 없다." 남궁환인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허공 속으로 던졌다. 그런 그의 눈 속에는 왠지 불안함이 서리고 있었다. 눈치가 비상한 종리연은 덩달아 불안을 느꼈다. "형님. 무슨 걱정이라도......?" 그러나 남궁환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업었다. "이제 가자. 여기는 오래 있을 곳이 못된다." 종리연은 비로소 아직도 위험이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말 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아직은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무영비마가 시전한 독은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해약을 투약한 지 두 시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몸 속의 독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종리연은 미안함을 금치 못했다. "미안해요. 형님. 공연히 저 같은 것 때문에......." "녀석. 형제끼리 그런 말을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형제라는 말에 종리연의 눈에는 다시금 눈물이 핑 돌았다. 누가 이 둘을 인위적으로 맺어진 형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입술이 터지도록 앙다물었지만 종리연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에게 그렇게 따스하게 대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내심 결심했다. '앞으로 형님을 위하는 길이라면 무엇이든지 목숨을 걸고 할 테다.' 그들이 막 관제묘를 나갔을 때였다. "......!" 밖으로 나서려던 남궁환인은 부르르 떨며 멈추고 말았다. 그의 눈에는 금새 경악이 어렸다. 창백히 부서지는 월광을 받으며 한 그루의 나무 아래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한 탓이었다. 사나이는 팔 척에 가까운 키를 가졌고 청포를 입고 있었다. '무......무영비마!'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기어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영비마가 입을 열었다. "네 놈은 도대체 누구냐?" 남궁환인은 머리를 굴렸다. '최상의 방법은 바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 방법만이 지금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공격법이자 수비책이었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하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요? 귀하는 어째서 나에 대해 알려 하는 것이오? 나는 다만 평범한 무객일 뿐이오." 그러나 무영비마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허튼 소리! 네가 얼마전 사용한 신법(身法)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이얍!" 남궁환인의 신형이 빛살처럼 허공을 차고 날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진 못했다. 종리연을 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무영비마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고 해도 최소한 자신의 몸을 빼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등에 한 사람을 업은 상황은 홀몸일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남궁환인은 전력으로 신형을 날렸다. '아차!' 한순간 무영비마는 당했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경공술이 무엇이라는 것을 안 이상 방심해서 틈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서라!" 무영비마는 자신의 신법으로는 결코 상대방을 쫓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이얍!" 기합과 동시에, 파파파파팟! 그의 소매가 남궁환인을 향해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양 손을 동시에 떨친 것이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쏴아아! 양 소매로부터 수십 개의 빛살이 한꺼번에 품어져 나왔다. 그것은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남궁환인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남궁환인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달아나는 것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단 일 호리(毫釐)의 차이라도 벌리면 벌릴수록 안전한 것이 삼십육계(三十六計)의 법칙이다. 남궁환인은 전신으로 수십 개의 암기가 쏘아오는 것을 느끼며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참으로 눈부신 경신술이 전개되었다. 그의 신형은 허공에서 72번이나 회전했다. 어찌나 빠른지 단 한 바퀴 밖에 돌지 않은 것 같았다. 72번의 회전으로 모든 암기는 거의 옷자락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윽!" 허공에서 신음이 울렸다. '맞았다!' 암기를 던진 무영비마의 얼굴에 쾌감이 어렸다. 무영비마의 자랑은 바로 암기술이었다. 그는 암기로 수백년의 전통을 이어온 당가(唐家)를 단신으로 무너뜨린 적이 있었다. 단 하나만 적중시켜도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의 입가에 승리의 스산한 미소가 어릴 때였다. "아니......?" 무영비마의 입이 일그러지며 외마디 비명같은 놀라운 탄식이 터졌다. 무영비마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래로 뚝 떨어지는 듯하던 상대방의 몸이 돌연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속았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는 발을 굴러 허공으로 솟았다. 전광석화처럼 솟아오른 그가 단숨에 이십 장을 날았을 때, 이미 남궁환인의 모습은 시야에서 감쪽같이 증발한 후였다. "정말 빠르군...... 역시 예상대로였다. 녀석이 시전한 것은 표풍신법(飄風身法)이다! 그 영감탱이가 어디로 숨었나 했더니...... 저런 제자를 키우고 있었단 말인가?" 바닥에 내려서는 무영비마의 안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곧 그의 두 눈에는 한 가닥 냉소가 어렸다. "흐흐......!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야 이젠 소용없다. 천운(天運) 은 이미 돌아섰으니...... 결국은 너도 우리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가 있으리라." 무영비마의 입술이 괴이하게 이지러지고 있었다. 암기(暗器).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암기가 있다. 개중에는 모래 형상(形狀)으로 뿌리는 암기가 있는가 하면 못 모양의 자오정(子午丁)도 있고 화살 형태의 것도 있다. 또는 종이처럼 얇은 유엽비도(柔燁秘刀)가 있는가 하면, 탄환모양의 환(丸)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남궁환인이 맞은 암기는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백 배나 무서운 암기였다. 한 번 적중되기만 하면 적중부위가 어디이든 간에 도저히 목숨을 구할 수 없는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암기였다. 우선 그 형태부터가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외형은 대체로 삼각뿔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뾰족한 부위에는 소라처럼 골이 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팔이건 다리건 맞기만 하면 회전력에 의해 살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든다. 뿐만 아니라 일단 혈관 속에 닿으면 그 즉시 녹아 독혈(毒血)이 되어 심장으로 침투하는 성질을 가진 가공할 암기였다. 따라서 아무 곳이건 맞기만 하면 일각도 지나지 않아 중독현상을 일으켜 목숨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혀...... 형님! 형니임! 흐흐흑......!" 종리연은 울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지금 남궁환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종리연의 얼굴은 온통 눈물 범벅이었다. 그는 알았다. 만일 자신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행동이 기민하지 못했고, 더더구나 자신이 맞아야 할 암기를 남궁환인이 일부러 몸을 돌려 자신의 어깨로 받아냈다는 것을 등에 업혀 있던 종리연은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형님......! 흐흑....... 왜? 그런 짓을 하셨나요? 이 보잘 것 없는 놈을 위해...... 흑흑......!" 종리연은 심장이 터질 것같은 기분이었다. 비굴하고 어리석은 자신 때문에 영준하고 비범한 남궁환인이 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펑펑 눈물을 쏟으며 자꾸만 골수가 녹아들고 있는 남궁환인을 잡고 흔들 뿐이었다. 그 이상 어떤 방법을 취한단 말인가. 무서운 화혈독(化血毒)의 기운은 먼저 골수를 녹였다. 골수가 흐물흐물 녹고, 나중에는 살이 녹고...... 종내에는 아예 머리칼까지 녹여 한 줌의 핏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화혈독의 가공한 위력이었다. 이제는 설사 대라신선이 나타난다 해도 그를 살릴 방법은 없었다. 죽어가는 남궁환인을 지켜보고 있는 종리연은 하늘을 향해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제발......! 형님만 살려 주신다면 이 종리연의 목을 바쳐도 좋습니다. 제발...... 천지신명이시여......!" 이때였다. "연제(連弟)....... 연 아우......." 종리연은 부르르 떨었다. "형님......!" 그는 덥썩 남궁환인을 안았다. 그러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남궁환인의 몸은 뼈가 없는 듯 흐물거렸기 때문이었다. "혀...... 형님!" 남궁환인은 이제 일각의 숨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꺼져가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우....... 내...... 말을 잘 듣게. 시간이 ...... 없으니......." 미칠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도 종리연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귀를 귀울였다. 남궁환인의 음성은 너무나 작았다. "너무...... 슬퍼할 것 없네. 어차피 인간이란...... 언젠가는 죽는 법......." 종리연은 부르짖었다. "안 됩니다! 어째서...... 어째서 형님같은 분이 돌아가신단 말이오? 차라리 나...... 나같은 놈이 없어지는 것이 낫소." "아우......! 잘 듣게. 어쩌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니...... 부탁이 있네......." "......!" 비록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는 없었지만 종리연도 그렇게 철부지는 아니었다. 그는 남궁환인의 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칫하다가는 그의 유언도 듣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종리연은 눈물을 억누르며 귀를 곧추 세웠다. "나는...... 무림을 구하기 위해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가네. 부디...... 그 일을 자네가 맡아주게......! 그것이 나의......마지막 부탁......."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유언이었다. 종리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혀...... 형님!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악을 쓰듯 종리연이 흐느꼈다. 그러나 남궁환인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오직 그가 이루지 못한 하나의 뜻만을 종리연에게 전하기 위해 필사의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종리연은 의형의 마지막 뜻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는 울음을 참으며 계속 들었다. "약속... 해 주게! 나의 부탁을 들어 주겠노라고......." 종리연은 자신도 모르게 힘껏 말했다. "약속해요! 약속...... 크흐흑!. 형님......." "그래....... 그래....... 자네의 마음을 아네....... 어쩌면 자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주고가...... 미안...... 하군......." "형님......!" "이 길로...... 나의...... 사부님을 찾아가서...... 나의 죽음을 알리고...... 그분께...... 무공을...... 배워...... 이 못난 제자가 못다한 일을...... 자네가 대행(代行)해 주게...... 그것이 나의 부탁......." 남궁환인의 음성은 점점 잦아들었다. 종리연은 더욱 바짝 귀를 그의 입술에 대어야만 했다. "나의 사부는...... 괄창산(括蒼山)...... 마골곡(魔骨谷)...... 무한진인(無恨眞人)...... 부디...... 부디......." 그것으로 끝이었다. 종리연은 다시는 남궁환인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남궁환인의 몸은 녹고 있었다. "형님......!" 종리연은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공포스런 눈으로 점차 그의 눈앞에서 한 줌의 혈수로 화해가고 있는 남궁환인의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잠시 후에는 머리칼은 물론, 옷자락조차 남지 않고 남궁환인의 몸은 한 줌의 피로 소멸되어 버렸다. "......!" 종리연은 넋을 잃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미소를 짓던 남궁환인의 모습이 영원히 지상에서 소멸되어 버리다니! 그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형님......!" 종리연은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친동생 이상으로 보살펴 주었던 사람. 남궁환인은 그에게 있어 친형이었고 아버지였으며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죽은 것이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종리연은 마치 백치가 된 듯 그런 말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의 눈에서 이제는 눈물마저 말라 버렸다. "나 때문에...... 형님이 나 때문에......." 그는 한나절이 다 가도록 이 말만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떼를 입히지 못한 봉분(封墳)이 생겼다. 그러나 봉분 안에는 시신이 없었다. 다만 핏물로 녹아버린 한 줌의 흙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시신이 없는 봉분을 세운 사람은 바로 담간랑이란 외호로 불리우는 일개 낭인 소년 종리연이었다. 그리고....... 그는 꼬박 9일간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9일 동안 물 한 모금, 음식 하나 취하지 않고 봉분 앞에 무릎 꿇고 있던 그가 몸을 일으킨 것은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떠나기 전 그의 말라 터진 입술에서는 다음과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을 뿐이었다. "형님! 기필코 형님의 부탁을...... 이행하겠습니다.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비가 내렸다. 그가 떠난 직후에 폭우가 쏟아졌고, 그 폭우로 인해 생긴 지 9일밖에 되지 않은 봉분은 얼마 후 흔적도 없이 비에 떠내려가 버렸다. 한 인간의 덧없는 죽음은 이렇게 완전한 무(無)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 이루어 낸 또 하나의 운명(運命)은 비로소 시작점을 찍고 있었으니. 노인의 입에서는 격렬한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제어하기 힘든 기침이었다. 마치 내장을 쏟아내기라도 할 듯이 상체를 흔들며 노인은 연신 기침을 쏟아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기침을 계속할 것 같았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는 법, 그토록 격렬하던 기침도 마침내 서서히 잦아 들었다. 울컥! 노인은 무엇인가를 토해냈는데 바닥에 떨어지기 전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피(血)! 응어리진 검은 핏덩이가 그의 두 손 가득히 얹혀 있었다. 그로 미루어 노인의 죽음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허...... 하긴 꽤나 오래 살긴 살았어...... 이젠 갈 때도 되었지. 그러나 아직은 할 일이 남았는데 말이야......." 손바닥 안으로 쏟아져 내린 핏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인이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노인이 있는 곳은 침침한 어둠이 항상 가라앉아 있는 동굴 안이었다. 이런 동굴 속에서 일 년만 산다면 아마도 건강한 사람이라도 침체되어 얼마 안 가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더구나 노인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어서...... 죽기 전에 좋은 소식이 와야 할 텐데......." 잠시 후 노인은 다시 중얼거렸다. "환인(幻仁)....... 그 녀석이 출도한 지 팔 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무리일 테고....... 최소한 녀석이 무사히 일을 마칠 때까지 만이라도 살아 있었으면...... 하긴 쓸데없는 바람인지도 모르지....... 인간의 운명이란 하늘의 뜻에 달린 법이니......." 노인은 다시 기침을 했다. 봉두난발은 손을 보지 않은 지도 벌써 몇 개월 째인지 모를 정도였다. "쿨럭...... 쿨럭...... 쿨럭......." 노인의 입에서는 연신 그칠 줄 모르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때마다 노인은 핏덩이를 한 솜뭉텅이씩 쏟아냈다. 가까스로 기침이 멎자, 노인은 삐걱이는 뼈를 추스려 벽을 향해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을 때였다. "무한진인님...... 무한진인님......." 노인은 어렴풋이 들려오는 어떤 낯선 부름에 눈을 떴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곳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명호(名呼)가 아닌가? 더구나 그의 명호를 아는 이라고는 세상에 몇 되지 않았다. 노인은 귀를 기울였다. "무한진인님...... 무한진인님......." 생전 들어 본 적이 없는 음성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앳되 보이는 소년의 음성이었으나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에 노인의 불안은 더해졌다. 마침내 그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동굴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노인의 눈에 비친 것은 한 명의 어깨가 축 처진 소년의 그림자였다. 그것을 본 순간 노인은 왠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밖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와 시야가 트이지 않아서인 듯했다. 그러나 곧 동굴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는 이내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무한진인님......! 으흐흑!" 절규처럼 노인의 이름을 불러대던 소년은 마침내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 노인은 어리둥절했다. 알지도 못하는 소년이 찾아와 하는 짓이 울음이라니? 노인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동안 서럽게 통곡하던 소년은 마침내 주먹으로 눈주위를 훔치더니 입을 열었다. "뭐...... 뭐라고?" 소년의 이야기를 듣던 노인은 실성한 듯 중도에서 부르짖었다. 얼마나 놀란 탓인지 노인의 두 눈이 부릅떠지고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눈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을 향해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다...... 다......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벼락치듯 하는 노인의 외침에 소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년은 다름아닌 종리연이었다. 종리연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애써 울음을 삼키며 상세히 이제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되풀이했다. 어떻게 남궁환인을 만났으며, 또 어떻게 하여 그가 죽었는가를. 더불어 자신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오오......! 어찌 이럴 수가....... 하늘이 무심하다! 어찌하여 그런 일이......." 무한진인은 일순간에 모든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환인이 그토록 어이없게 가다니......! 하늘이 이렇게 무심할 수가.....!" 노인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 아이......! 남궁환인......! 내가 어떻게 키운 제자인데 하늘이 먼저 데려간단 말인가? 참으로 무심하다!" 노인의 두 눈은 피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가 남궁환인을 키울 때는 심혈을 다 쏟았었다. 뿐만 아니라 온 희망을 그에게 걸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어이없게 죽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는 꿈에서도 자신보다 제자가 먼저 죽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일순간에 온몸이 분해된다한들 이렇게 큰 충격을 느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 다시 한 번 말해봐라. 환인이...... 환인이 어떻게 되었다고?" "악!" 갑자기 종리연은 비명을 질렀다. 무한진인이 손을 뻗자 그는 무형의 기운에 빨려가 그의 손아귀에 멱살을 잡혔기 때문이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엉? 환인이 죽다니...... 말도 안 된다!" 무한진인의 발악에 가까운 외침은 금방이라도 동굴을 무너뜨릴 듯했다. 종리연은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모두...... 저...... 저의 잘못입니다. 절...... 죽여 주십시오. 으흐흑!" "이...... 이이이......익!" 무한진인은 비통한 외침을 발하며 종리연을 집어 던졌다. 쿵! 종리연은 저만치 날아가 돌벽에 내동댕이쳐 지면서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뒷머리를 부딪친 것이었다. "허...... 허허...... 허허헛헛헛헛......!" 무한진인은 넋나간 듯한 헛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정말로 피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수십 년에 걸친 기원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 마당에. 새벽 여명이 희미한 빛살을 동굴 바닥에 길게 뿌리고 있었다. 희미한 빛살의 끝머리에 노인은 누워 있었다. 벌써 열흘째 노인은 하늘이 무너진 듯한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노인에게 있어 남궁환인은 하늘이나 다름없었다. 그 하늘이 죽은 이상, 이제 그에게는 어떤 것도 무의미할 뿐이었다. 설사 남궁환인과 같은 제자를 다시 만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설혹 그런 자질의 제자를 만난다해도 이제 생명이 꺼져가는 마당에 어느 세월에 다시 가르친단 말인가? 노인은 숨을 쉬고 있었으나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몸이었다. 그의 쾡한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었다. 노인의 가슴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는 지난 열흘 동안 생각해 보았다. 제자인 남궁환인의 죽음이 떠오를 때마다 그의 가슴은 미어지는듯했다. 그런데....... 남궁환인이 죽으면서 남겼다는 말이 불현듯 노인의 뇌리를 스쳤다. 바로 그 순간 무한진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어 서둘러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제까지 곧 죽을 것만 같았던 그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 동굴 밖으로 걸어나가려던 무한진인은 흠칫했다. 동굴 앞에는 한 소년이 엎드려 있었다. 벌써 열흘째. 이제는 지치기도 했으련만 소년은 끈질기게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빌고 있는 것이다. 소년을 바라보던 무한진인의 눈에서 문득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왔다. "얘야......!" 노인은 소년을 부드럽게 불렀다. "......."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무한진인은 의아했으나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소년은 허기와 피곤 그리고 슬픔이 겹쳐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마침내 무한진인은 허허 웃었다. "하긴......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있다면 인연이 악연이었다는 것 뿐...... 허허헛" 무한진인은 허탈하게 한 번 웃은 다음 기절한 종리연을 안았다. 그는 동굴 안으로 종리연을 안고 들어갔다. 괄창산 마골곡에는 산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중원은 겨울이나 중원의 남쪽 땅인 이곳은 그다지 춥지 않은 것이다. 성(盛)하면 쇠(衰)하고 쇠하면 성하는 것이 우주의 이치다. 언제부턴가 온통 바위 투성이인 마골곡(魔骨谷), 험산 준령마다 안개에 뒤덮여 있는 날이 대부분이던 마골곡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어느새 바위 투성이인 마골곡에도 수목(樹木)이 자라고 새들이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바위 틈에선가는 생명의 물이 졸졸거리며 흐르기 시작했다. 동굴 앞. "......." 무한진인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한 채 괴상한 표정으로 한 곳을 보고 있었다. 노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곳에 지금 한 청년이 손에 섭선을 든 채 흔들며 걷고 있었다. 그는 지금 연공(練功) 중이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걷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바로 종리연이었다. 그는 1년 전에 비해 성숙한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자신이 없어 보였다. 골격과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자랐으되 눈과 얼굴 표정에는 여전히 지난날의 자신 없는 모습과 기죽은 모습이 남아 있었다. 종리연은 걸음을 멈추고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주눅 든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부님. 교, 교정(矯正)을......." 그러나 무한진인의 이마에는 더욱 깊은 골이 패일 뿐이었다. 그는 기운 없는 음성으로 귀찮은 듯이 말했다. 실망의 빛이 역력히 묻어나고 있었다. "계속해라." 종리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에는 장부(丈夫)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나타내는 군웅보(群雄步)를 써 보겠습니다." 종리연은 다시 섭선을 흔들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솔직히 표현한다면 그것은 호연지기의 기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기적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노인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휴우......!" '그게 군웅보냐?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개 걸음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 사부의 심정을 모를 리가 없는 종리연. "저어...... 그럼 보법을 바꾸어 볼까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라." 노인 역시 힘없이 답했다. 그야말로 알아서 하라는 투였다.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버린 무한진인이었다. "그럼 인품과 학식을 드러내는 군자보(君子步)를......." 종리연은 다시 걸었다. 섭선을 접었다 폈다하며 걷는 모습이 언뜻 그럴 듯하긴 했으나 곧 얼마가지 않아 신체의 균형이 풀어지며 어기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는 노인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종리연은 노인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의식하기만 하면 호흡이 흐트러지고 동작이 굳어졌다. 그건 곧 노인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와 과거 일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다. 노인은 눈을 아예 감아 버렸다. '엉덩이를 빼고 걷는 군자보라......? 허허헛...... 이거 참! 소가 하품을 할 일이군.' 무한진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벌써 일 년이 지났건만 진보하기는커녕 저 놈은 나날이 퇴보하기만 하니.......' 그는 심화가 북받쳤다. 그러자 격렬한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콜록...... 콜록...... 콜록......." 기침할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덩어리진 핏덩이가 튀어 나왔다. 순간 종리연은 걷다 말고 노인에게 날아왔다. "사...... 사부님!" 그는 얼른 노인을 부축했다. "놔...... 놔 두어라." 노인은 손을 저으며 종리연을 만류했다. 종리연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노인은 그것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도 심성은 고운 놈인데...... 재질이...... 재질이 없는 것이 문제로다.' 또다시 겉잡을 수 없는 기침이 터져나왔다. 무한진인은 이제야 말로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아아! 끝내 무림의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떠나야 한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해진 무한진인이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렸다. 7 악연(惡緣) 두 쌍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치며 안타까운 의미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두 쌍의 눈동자에는 기운(氣運)이 없었다. 그저 슬픔과 회한이 가득 담겨 있을 뿐이었다. 무한진인의 눈에는 어느새 죽음이 깃들고 있었다. 한편 사부의 임종을 지키고 있는 종리연의 눈에는 안타까운 슬픔이 가득했다. "사부님......." 종리연이 울먹였다. 무한진인은 손을 저으며 그의 슬픔을 만류했다. 잠시 후 그의 입에는 메마른 음성이 흘러 나왔다. "슬퍼하지 말아라. 어차피 인간이란 왔다가 가는 것, 다만 끝내지 못한 인연이 아쉬울 뿐이다." "흐흑......." 종리연은 급기야 오열을 터뜨렸다. 그는 직감했다. 최근 들어 사부의 기색이 나날이 흰빛이 되어 가고, 기침을 할 때마다 나오는 핏덩이도 더욱 양이 많아졌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종리연이 열심히 연공(?)을 하는데 노인은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겨우 저녁이 되자 노인이 그를 부른 것이다. 이미 무한진인의 눈동자에는 생기라고는 찾아 볼 길이 없었다. "연아. 잘 들어라...... 네 사형은 세상의 마지막 등불과 같은 존재였었다. 그런 네 사형이 없는 지금은 네가 등불이 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사...... 사부님......!" 종리연은 덜컥 겁이 났다. 그로서는 사부 하나만을 의지하고 지난 일 년 반을 살아온 셈이었다. 그런데 사부의 말로 미루어 지금이야말로 또다시 그가 혼자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무한진인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마지막 남길 말을 당부하기 위해 제자를 부른 것이었다. 종리연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스승과의 사별을 눈치채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잘들어라. 그들은 지난 수 년간 더욱 강해졌다. 나날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영원히 그들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숨이 찬듯 무한진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사성녀(四聖女)를 손에 넣는 것뿐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허허...... 네 사형이 살아있었더라면 지금쯤은 사성녀를 모을 수 있었을 텐데......." "사부님......!" 종리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사형인 남궁환인의 얘기만 나오면 그는 죄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연아...... 어렵겠지만 너는 목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사성녀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 길만이 삼패천(三覇天)의 횡포와 패업을 막는 길이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아아! 그러나 돌아가시진 말아 주세요." "못난 놈......." 무한진인은 눈을 감았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이 두 번째 제자의 재질은 남궁환인에 비한다면 열 배는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남궁환인조차 하지 못한 일을 그에게 맡기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삼패천을 막지 못하면...... 무림은 물론...... 천하가 피에 잠길 것이다. 아아...... 그들을 아는 이 사부가...... 너에게 더이상 방책을 일러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 무한진인의 눈에는 어느 틈엔가 이슬이 어리고 있었다. 비록 선경에 들 경지를 이룬 고인이었으나 세상을 뜨는 것이 아니라 종리연을 남겨두고 가는 것이 아쉬워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네 사형이 당했듯이...... 삼패천은 무서운 자들이다. 그들을 만나면...... 무조건 피해라. 네가 사성녀를 손에 넣을 때까지는...... 상대할 생각을 말고......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니라...... 알...... 알겠느냐?" "예...... 사부님." "허허...... 이제...... 갈 시간이 다 되었나 보구나. 그럼 너도...... 떠나거라. 네 비록 공부가 부족하긴 하지만...... 천지신명께서 보살필 것이다......." 무한진인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혼은 늙은 육신을 벗어나 한 많은 이 세상을 두둥실 떠올랐다. 무한진인은 영원히 눈을 감고 만 것이다. 다시는 눈을 뜨지 않으리라. "사부님......!" 종리연은 크게 울부짖었다. 너무나도 큰 슬픔이 밀려드는 바람에 그는 어헝! 하는 한소리를 울부짖으면서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이제 그는 또다시 천애고아가 된 것이다. 남궁환인이 그에게 짧은 순간 동안 정을 주었다가 떠나더니 이제 홀연히 사부가 또한 그렇게 떠났다.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어서 만날 기약이 있는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이별, 철저한 고독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이별을 남겨 두고 말이다. 종리연은 정말 운이 없는 인간인지도 몰랐다. 담간랑(膽肝郞). 사람들이 그토록 미워하고 벌레 보듯 하는 별호를 운명처럼 지니고 다닌 것도 어쩌면 하늘이 부여한 운명의 멍에이듯이....... 그가 가장 가까이 느꼈던 두 사람의 선인은 너무나도 빨리 그의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괄창산의 여름이 짙어지는 것처럼 종리연의 가슴 속에는 슬픔이 짙어지고 있었다. 삼패천(三覇天)! 중원에 살고 있는 자라면 며칠 전 관(棺)에 들어간 사람이나 오늘 아침 태어난 느릅나무집 딸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있는 이름. 그것이 바로 삼패천이다. 5, 6년 전부터 갑자기 강호에 등장한 세 명의 패도(覇道)적인 인간들을 이름하는 것이 바로 삼패천이었다. 또한 삼패천은 그들 3인이 만들어낸 거패조직의 이름이기도 하다. 처음에 한낱 녹림도적에 불과했던 황하 36채(黃河三十六寨)를 정복한 뒤 그 자리에 삼패천이란 조직을 세웠을 때만 해도 무림인들은 별 대수로운 일로 보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가히 공포의 상징이 되고 말았으니....... 황하의 한 귀퉁이에서 시작한 삼패천의 힘은 이제 강북무림 전체를 관장하면서 전 무림을 위협하고 있었다. 더더구나 몇 년 전 그들의 조직을 규제하기 위해 가졌던 구파일방(九派一幇)이 중심이 된 숭산회합(嵩山會合)이 채 열리지도 못하고 도중에 삼패천에 궤멸됨으로써 그들은 명실공히 강호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구파일방은 숭산혈겁을 당한 이후 급격히 침체일로를 걸어 당금에 이르러서는 아예 봉문(封門)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그들의 행동이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청부업(請負業)을 일삼는 것이다. 그들의 청부업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이행되었다. 또한 단 한 번의 어떤 청부의 거절도 하지 않았다. 가히...... 공포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무림은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었으며 흑도가 설치고 마도가 기고만장하며, 백도 정의는 바닥을 헤매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삼패천의 목적이었다. 그들은 무림을 아예 말살하려는지 뚜렷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패도적인 살상을 벌이는 것이었다. 만일 무림통일이 목적이라면 각 파로 하여금 굴복하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설득이나 협박보다는 먼저 피를 뿌림으로써 엄청난 혈살풍(血殺風)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제 무림인들 뿐이 아니라 전 중원의 사람들에게까지 삼패천은 악마의 집단으로 알려지게끔 되었다. 갈홍정(葛洪井). 이 우물은 절강성(浙江省)의 서호(西湖)라는 매우 아름다운 호수 근처에 있는 우물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아주 오랜 옛날에 이 우물 속에서 마름열매와 비슷하게 생긴 갈색의 열매가 몇 갠가 발견되었다고 전하여지는 곳이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갈홍정은 여느 우물과 다를 것이 없다. 갈홍정이 다른 우물과 다른 점은 바로 갈색의 열매 때문이다. 몇 사람인가가 그 열매를 맛보았으나 별다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별다른 맛을 느낄 수가 없기보다는 아무런 맛도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야기일 것이다. 처음 그 열매의 효능을 발견한 사람은 시어옹(施漁翁)이라는 사람이었다. 시어옹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그 열매를 모두 주워먹고 이갑자(二甲子)를 살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후로 갈홍정 우물은 차를 끓이는데 있어서 최상의 물로 호평을 받았다. 그런 이유탓인지는 몰라도 절강성 서호(西湖) 부근에는 이름난 찻집이 많다. 수향각(壽香閣)은 서호에서도 이름난 찻집 중의 하나였다. 수향각에서는 중원의 온갖 차들을 모두 맛볼 수가 있다. 안휘성(安徽省) 육안현(六安縣)에서 나는 육안차(六安茶)를 비롯하여 용정차(龍井茶), 복건성 남쪽의 무이산에서 산출되는 무이차(武夷茶), 오룡차(烏龍茶), 차잎에 하얀 털이 붙었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백모차(白毛茶), 작설차, 응조차, 쌍정차( 井茶)......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또한 수향각에서는 차만 파는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술도 맛볼 수가 있었다. 귀주(貴州)의 모태주(茅台酒)를 비롯하여 노주(盧州)의 대맥주(大麥酒), 경지(景芝)의 고량주(高梁酒)를 비롯하여 사평주, 목향주, 죽엽청, 백화주, 천일취, 오향게, 백로홍 등 이루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술을 파는 것이다. 또한 수향각에는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비롯한 각종 문방구(文房具)가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내노라하는 문필가(文筆家)나 무사(武士)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무창성주(武昌城主) 제갈탄(諸葛彈)은 때마침 서호(西湖)에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수향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갈탄의 옆에는 중원 여인이 아닌 작은 키에 매우 아름다운 동영(東瀛:日本)의 여인 하나가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동영에서 건너온 동영 제일의 기생 중의 일인(一人)으로서 이름을 하나꼬(花子)라고 했다. 얼마 전 우연히 기루(妓樓)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제갈탄은 그녀에게 반해 가히 만금(萬金)을 주고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 지금 그녀는 제갈탄과 바람을 쐬러 나선 것이었다. "저곳이 수향각이라고 하는 찻집이다. 절강성 서호에서 가장 유명한 집이라고 할 수가 있지. 허헛! 자! 한 번 들어가 보자꾸나." "하이! 아리갓또오 고자이마스!" 여인은 귀엽게 웃으며 짧은 동영어를 구사했다. 동영 여인의 깜찍한 웃음을 대하는 순간 제갈탄은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 은밀한 한 부분이 불끈 솟아올랐다. '어휴! 정말 미치겠구나. 저걸 칵......!' 그녀는 중원의 여인과는 전혀 달랐다. 같이 온 동영의 여인들과도 달랐다. 한 마디로 그녀는 생기발랄(生氣潑剌) 그 자체였다. 그녀와 동침을 한다면 자그만치 20년은 젊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무창성주로서의 지위와 체면이 있었다. 마음 속에서는 아무리 그녀에 대한 탐욕이 일어도 겉으로 내색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수향각으로 올라간 제갈탄은 서호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동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를 잡고 앉은 제갈탄은 성주로서의 권위를 지키면서 최고급 차를 시키고 지필묵을 요구했다. 문방사우가 앞에 놓이자 제갈탄은 잠시 동영의 여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무엇인가 생각을 가다듬는 듯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이윽고 눈을 뜬 제갈탄은 붓에 듬뿍 먹물을 묻히고는 화선지 위에다 한 수의 시를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일황중색사경국(一皇重色思傾國) 어우다년구부득(御宇多年求不得) 양가유여초장성(楊家有女初長成) 양재심규인미식(養在深閨人未識) 천생려질난자기(天生麗質難自棄) 일조선재군왕칙(一朝選在君王則) 회모일소백미생(廻眸一笑百媚生) 육궁분대무안색(六宮粉黛無顔色) 한 황제가 사랑을 중히 여기고 절세미인을 그리워하며 우주를 다스리는 몸으로 수 년간을 찾았으나 못얻었노라 양씨네 집에 때마침 장성한 여식이 있어 깊은 규중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라났으나 천생의 아름다움 그대로 버려지지 못하리 하루 아침에 뽑히어 임금 곁에 올랐노라 돌아보며 방긋 웃는 폼에 싱싱하니 미태가 넘치고 분으로 화장한 육궁의 미녀들이 무색하게 되었노라! 정말이지 교묘하기 짝이 없는 시(詩)였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추켜 세우면서 제갈탄은 자신을 황제로 격상(格上)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하룻밤의 정분(情分)을 은밀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 어떠냐?" 제갈탄은 동영 여인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에는 감탄의 표정이 역력했다. "훌륭하군요. 정말이지 대단히 훌륭한 시에요." 동영 여인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아양을 떨고 있었다. "오늘밤 내 너와 천상의 열락(悅樂)을 맛보리라. 허락해 주겠느냐?" "아이......! 호호..... 이 이러시면......?" 여인은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달려들지도 않고 있었다. 그녀는 사내를 다루는 데 이골이 난 동영의 기생이 아니던가? 그것이 제갈탄을 더욱 감질나게 만들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제갈탄은 어느새 동영 여인의 은밀한 곳에 손을 넣었다. "아으......음!" 여인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이러시면......." 여인은 눈웃음을 치며 살짝 뒤로 몸을 빼내고 있었다. 그것이 제갈탄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어허......! 자 그러지 말고......!" 군침을 삼키며 제갈탄은 여인을 향해 몸을 밀착시켰다. 그들은 어느새 수향각의 밀실(密室) 안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연거푸 비운 모태주(茅台酒)에 제갈탄은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은 동영의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오르는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여인은 어느새 반라(半裸)의 차림이었다. 앙증맞은 분홍의 젖가리개는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유방의 유실(乳實) 만을 겨우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비림(秘林)을 겨우 가린 비단 헝겁 쪼가리 사이에 숨어 있을 것이 분명한 깊은 계곡은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뿐인가?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질 것만 같은 허리 아래로 만월(滿月)처럼 뻗어나간 둔부의 곡선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릴 곳만 겨우 가려서 더욱 신비스럽게 여겨지는 여인의 육체는 제갈탄의 음욕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리 오라니까......?" 더는 참지 못한 제갈탄은 급기야 술상을 차며 여인을 덮쳤다. 그리고....... 한동안의 엎치락뒤치락 하는 몸싸움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수향각 밀실 안에 뜨거운 신음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음...... 하아...... 흐응......!" 여인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마치 고양이 울음 소리와 같은 교성(嬌聲)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제갈탄은 연신 가쁜 숨을 내쉬며 아래에서 위로 허리를 쳐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뜻밖에도 그들은 여성상위(女性上位)의 체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 허억...... 헉!" 밀실 안은 한순간에 뜨거운 공기로 가득차고 있었다. 여인이 둔부를 들어올렸다가 내릴 때마다 비림 속에 들어있는 제갈탄의 양물이 우람한 기둥을 드러내고 있었다. 벌써 반 식경이 흐르고 있었으나 제갈탄의 그것은 어느때보다도 우람하게 발기해 있었다. 그는 사실 여인 몰래 최음제(催淫劑)를 술에 타 마셨던 것이었다. 그것은 서역(西域)으로부터 들어온 천락단(天樂丹)이라는 약으로서 마음먹은 대로 발기와 사정을 조정할 수 있는 명약(名藥) 중의 명약이었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독성(毒性)이 강해서 다량을 사용할 시에는 중추호흡이 멈출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제갈탄은 여인에게 자기의 무한한 힘과 권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으..... 아...... 아악!" 여인의 교성은 점점 더 높아만 갔다. 상하로 움직이는 허리운동도 점차로 빨라져만 갔다. 마침내, "아...... 아악!" 절정에 다다랐는지 여인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교접을 나누던 상태 그대로 제갈탄의 몸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실신한 듯이 제갈탄의 몸 위에 뻗어 있는 여인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 여인은 취한 듯이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아...... 아니?' 상체를 일으켜 몸을 떼려던 그녀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 정도로 했으면 당연히 시들어야 할 남자의 그것이 아직도 꼿꼿하게 자신의 비지(秘地) 속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 정말 대단한 힘이다! 어...... 어쩌면 이렇게나......?' 여인은 눈을 감은 채로 다시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시들었던 욕정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아......! 아으윽......!" 여인은 다시 감탕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감탕질이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절정을 맛본 여인이 아니던가? 여인은 한시라도 빨리 남자의 사정을 끌어내기 위한 거짓 교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학......! 학......!" 여인의 아래에 깔려 있는 제갈탄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쉴 사이 없이 허리운동을 하면서 여인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는 밑에 누워 있는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질끈 감은 눈과 사정을 억제하기 위한 것인 듯 앙다문 입술이 드러났다. 그것은 역력하게 쾌락을 즐기는 표정이었다. 아니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극단적인 쾌락과 극단적인 고통은 같은 것이다라고 누가 말을 했던가? 어쨌거나 여인은 남성의 사정을 빨리 이끌어내기 위해 허리 운동에 가속도를 붙였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사정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 아악!" 이제 여인은 속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비림에서 나오는 애액은 말라 버린 지 이미 오래 전이었다. "아악! 도...... 도저히 못하겠어요. 그...... 그만 해요." 그러나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없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여인은 남자 위에서 내려오려고 몸을 들었다. 그때였다. "아...... 아악!" 놀란 듯이 비명이 새어나오는 입을 여인은 황급히도 자신의 주먹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비명이 터지려는 입술을 틀어막고 제갈탄을 바라보던 여인의 얼굴은 어느새 먹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 이럴수가......? 이게 꿈이 아닐까......? 내......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꿈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여인을 열락에 도달하게 해 주었던 사내. 무창성주 제갈탄은 어느새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복상사(腹上死)가 아니라 복하사(腹下死)였다. 제갈탄은 여인의 배 아래서 사정(射精) 직전에 숨이 넘어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 다급한 상황임에도 여인은 어느덧 냉정해지고 있었다. 숨이 넘어간 제갈탄을 바라보면서 여인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여인은 재빠르게 옷을 찾았다. 급한대로 젖가리개를 하고 겉옷은 찾아 입었으나 비림을 가리는 헝겊 쪼가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여인은 그것을 포기했다. 보이지 않는 헝겁 쪼가리를 찾아 이 기분 나쁜 방을 두리번거리느니 한 시라도 빨리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이제 어떻게 여기를 빠져 나가느냐가 문제다!' 문 앞에 바짝 다가앉은 여인은 밖의 인기척을 살피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으아악!" "부...... 불이다! 불이야!" "카아악!" 갑작스레 문 밖으로부터 요란한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어서 사람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여인의 의식 속으로 번개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좋은 기회다!' 여인은 재빨리 밀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향각 지하 밀실의 복도에는 어느새 연기가 가득차 있었다.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린 일이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떠밀면서 여인은 출구가 나 있는 쪽으로 달리듯이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욱한 연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여인은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지하 밀실을 빠져 나왔다. 아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젠 살았어!' 여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급히 몸을 일으켰다. 가능하면 이곳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 순간, "하하하! 하나도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려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남겨서는 안 된다. 삼패의 세력을 무시하는 놈들에게 우리의 위대한 힘을 마음껏 보여주어라!" 말을 탄 거한의 사내가 칼을 뽑아 들고는 불길 한가운데서 소리치고 있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차창! 창! 피우웅......! 곳곳에서 칼과 창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어둠 속으로 불화살이 날고 있었던 것이다. "으악!" "카아악!" "켁!" 비명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뿐만 아니라 서호(西湖) 부근은 완전히 불바다였다. 얼마 전까지 호수 속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던 저녁 별들은 어느새 화마(火魔)로 변해 시뻘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여인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빗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악!"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었다. 어느 순간엔가 말을 탄 거한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달려와 여인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겼던 것이다. 여인은 발버둥치며 끌려올라가 흑포장한(黑袍長漢)의 옆구리에 채이고 말았다. "칼칼칼칼......!" 여인을 옆구리에 매단 흑포장한이 징그러운 웃음을 밤하늘로 날렸다. 이어서 그는 말을 박차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절강성(浙江省)의 서호(西湖)에서 호북성(湖北省) 제일의 도시인 무창(武昌)까지는 너무나 먼 길이다. 말(馬)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 그 중 날래기로 이름난 쾌재풍(快哉風)을 타고 주야(晝夜)를 달린다고 해도 열흘은 족히 걸리는 거리이다. 바로 그러한 거리를 혈혈단신으로 걷는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는 다름아닌 종리연이었다. 그의 얼굴은 굳은 결의로 가득차 있었다. 지금 사부 무한진인(無限眞人)의 임종을 지켜본 종리연은 곧바로 괄창산(括倉山) 마골곡(魔骨谷)을 내려와 무창으로 향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무한진인이 숨을 거두자 생각 같아서는 사십구제라도 지내고 싶었으나 종리연은 그럴 수가 없었다. 사부의 유언(遺言)이 워낙 단호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내 무덤을 만들거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너는 내가 숨을 거두는 즉시 내 시체를 조그만 구덩이 속에 파묻어라! 그리고 떠나란 말이다. 떠나서 하루빨리 사성녀(四聖女)를 취하는 것만이 이 사부를 기쁘게 하는 길이다.' 무한진인이 숨을 거두자 종리연은 양지바른 곳을 골라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는 사부의 시신을 묻었다. 눈물로 절을 올린 후 돌아서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 사부님! 도저히 이대로는 못떠나겠습니다. 으흐흑......! 사부님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는 불충한 제자를 용서하십시오. 으흐흑......!" 종리연은 하루를 더 소비하며 봉분(封墳)을 쌓아 올리고 폭우에 봉분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정성들여 떼를 입혔다. 그러고나자 한나절이 후딱 가버린 것이었다. 종리연이 멈추지 않고 차륜맹전법(車輪猛轉法)으로 괄창산을 떠나 서호(西湖) 부근에 도달한 것은 갑야(甲夜) 무렵이었다. 그때 종리연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비쳤다. 서호를 끼고 영업중이던 많은 주점과 찻집에서 일시에 불이 치솟아 오른 것이다. 아직까지 거리는 멀어 제대로 분간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예감이 이상했다. '이상하다! 한두 집도 아니고...... 일시에 많은 집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다니...... 필히 도적떼의 습격이 분명하다!' 무창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서호를 지나야 했다. 종리연은 보법(步法)을 바꾸어 더욱 빠른 속도로 걸었다. 그가 막 관도(官道)로 들어섰을 때였다. 히이이-잉! 요란한 말울음 소리와 함께 서호 쪽으로부터 달려오는 흑포장한이 있었다. 두두두두......! 말을 요란한 바람소리와 함께 발굽소리를 내며 종리연의 곁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 "낄낄낄낄낄......!" "아악! 사...... 살려줘요!" 음산한 웃음 소리에 뒤이어 종리연은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음성을 바람결에 들을 수 있었다. '웬 여인이?' 종리연의 눈이 번떡였다. 말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는 흑포장한의 옆구리에 떨어질 듯이 매달려 있는 여인의 형체를 보았다. '이놈들은 필시 중원의 여인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먹는 자들이로구나. 그렇다면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끼이익! 종리연의 가죽신발이 타는 냄새를 내면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어느새 사부의 유언을 망각하고서는 멀어져 간 말을 뒤쫓기 시작했다. "낄낄낄......!" 흑포장한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바지춤을 까내리고 있었다. 서호에서 20리 떨어진 자그마한 숲속이었다. 여인은 정신을 잃고 있었다. 말을 멈춘 흑포장한이 여인을 내려놓는 순간 여인은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무쇠같은 장한의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무지막지하게 가격했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여인은 혼절하고 말았다. "낄낄낄! 어제 밤 꿈이 뒤숭숭하더니 네 년을 만나려고 그랬던 모양이로군. 낄낄낄......!" 흑포장한은 징그럽게 웃으면서 여인의 아랫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서는 우악스럽게 치마를 찢어발겼다. 순간, "헉!" 흑포장한은 가쁜 숨을 토했다. 흐릿한 달빛 아래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인의 비림(秘林)이었다. 달빛을 받은 여인의 비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더군다나 살폿 돋아오른 둔덕 아래로 보일락말락하는 비지(秘地)의 입구는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호오......!" 흑포장한의 눈이 일순간 동전만해졌다. "꿀-꺽!" 목구멍을 넘어가는 요란한 침소리가 났다. 더이상 망설일 필요가 뭐 있겠는가? 흑포장한은 다자고짜 여인을 향해 덮쳐갔다. 바로 그때였다. "어험! 그 무슨 못된 짓이오? 명색이 사내 대장부로서 정신을 잃은 여인을 농락하려 들다니......! 그게 군자(君子)가 할 마땅할 도리오?" '으잉?' 흑포장한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어두운 숲속에서 나는 목소리는 정말 황당했다. "누......누구냐? 네 놈은...... 썩 꺼져라!" 하초를 덜렁거리며 일어선 장한은 재빨리 칼을 거머쥐며 소리쳤다. 그러자 숲속에서 또다시 요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정말 사내 대장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려! 칼을 거머쥔 솜씨는 분명 중원의 무사임이 분명한데...... 무사가 덜렁거리는 하초를 내놓고 칼을 잡다니...... 그게 요즘 새로 유행한다는 거 뭐시라는 검법이오?" "네...... 네 놈은 사람이냐 귀신이냐? 귀신이면 썩 물러가고 사람이면 어서 모습을 보이거라!" 흑포장한이 소리쳤다. 사실 그는 검이라면 어느 정도는 자신있다고 자부하는 위인이었다. 만약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한 칼에 목을 날릴 셈으로 모로 세운 칼을 잔뜩 꼬나들고 있었다. 그때 숲속에서 예의 그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나는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오. 다만 사내 대장부의 탈을 쓰고도 군자 구실을 못하는 놈들을 혼내주기 위해 숲속에 사는 작은 무사(武士)요. 하지만 내가 쓰는 무기는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것이 아니지! 자, 내 무기의 공격을 한 번 막아 보시겠소?" "......?"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휘휙! 숲속으로부터 날카로운 나뭇가지들과 솔방울들이 무지막지하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정확하게 흑포장한의 몸뚱이를 가격하고 있었다. "악! 아악......!" 따끔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흑포장한이 비명을 내질렀다. "네...... 네 놈이 정말! 이야얏......!" 더이상 참지 못한 흑포장한이 칼을 세우고 숲속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쿵! 거대한 망치가 나무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흑포장한의 눈에서 몇 개의 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칼을 겨누고 덤벼들었던 그는 목표물을 찌르지도 못하고 머리로 거대한 나무를 들이박았던 것이다. "하하하! 어리석기는 곰보다 더하군! 악을 물리치고 세상을 바로 잡으라고 만들어진 칼을 아무 곳이나 겨누다니! 아직 정신이 덜 들은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더 따끔한 맛을 보여주리라." 휘휘휙!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뭇가지와 솔방울들이 날아왔다. 그것들은 엄청난 위력으로 쉴 사이 없이 날아들며 흑포장한의 몸뚱이를 파고들었다. "으악! 네...... 네 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이 다음에 필히 네 놈의 목을 따겠다. 으아아앗!" 더는 견딜 수가 없었는지 흑포장한은 하초를 덜렁이며 줄행랑을 쳤다. 그가 아랫도리를 걸치지도 못하고 말을 타고 사라진 직후 숲속으로부터 나뭇가지를 든 하나의 인영이 걸어나왔다. 그는 다름아닌 종리연이었다. "......." 종리연은 물끄러미 정신을 잃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찢긴 치마와 드러난 하체(下體). 모든 것이 생경스럽다는 듯이 어리둥절해 하던 종리연은 곧 여인을 들쳐업고 어디론가 신형을 날렸다. 8 이상한 초대(招待)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맴맴맴맴....... 맴, 매앰, 맴....... 단지 2주일을 울기 위해서 8년이라는 긴 세월을 땅 속에서 나야 하는 매미의 울음소리도 어느덧 잠잠해진 지 오래였다. 여름 내내 무성했던 나뭇잎들이 청청한 푸른 기운을 잃어가며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계절. 계절의 변화를 제일 먼저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여인의 옷차림에서부터일 것이다. 여인의 옷에는 어느샌가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무창(武昌). 대도(大都)답게 무창의 거리에는 인파가 항상 북적댄다. 밤이나 낮이나 무창 거리가 북적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사꾼이나 떠돌이 여행자, 관인들, 또는 하다못해 거지들에 이르기까지 거리를 메우는 것은 인파, 인파였다. 그런 무창 거리를 한 사나이가 폼나게도 섭선(攝扇)을 흔들며 걷고 있었다. 그는 언뜻 보면 이상할 것이 없는 매우 평범한 서생에 불과한 위인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가 매우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같은 거리를 계속 오락가락 하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특히 여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눈은 힐끗힐끗 여인의 표정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때로는 일부러 여인의 곁을 스치며 여인의 반응을 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건달같기도 했으나 적극적으로 여인을 집적거리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듯한 위인이었다. 이 사나이가 무창에 나타난 것은 꽤 오랜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어느정도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 사람들은 그 사나이가 지난 여름의 무더운 햇살 때문에 돌아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수근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나이의 정신은 말짱하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그러나 참으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은 서생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리를 가로지르며 똑같은 행동을 하는 이유였다. 분명하게 미친 사람은 아닌데 오로지 여인들을 향해 섭선을 흔들며 이상한 걸음걸이로 보란 듯이 걷는 것은 무슨 연유 때문일까?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서생이 그토록 신경을 쓰는 여인들의 반응이 있기는 있었다. 그것은 그가 접근할 때마다 여인들은 입을 손으로 가리며 키득거렸다. 그만큼 서생의 행동은 우스웠다. 무창 거리에 나타나 뭇 여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사나이. 그는 다름아닌 종리연이었다. 그는 괄창산 마골곡에서 배운 공부를 시험하기 위해 이 대도시 무창에 온 것이었다. 벌써 한 달째였다. 그러나 그동안 종리연이 얻은 것은 온통 실망 뿐이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여인들이 자신에게 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인들은 그의 걸음걸이에 반하기는커녕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종리연. 그는 여인들이 그를 보고 웃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이 거리 저 거리 떠돌며 눈치밥만 10년 이상을 빌어먹었던 그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기다려라! 언젠가는...... 여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휘어잡으리라.' 그는 복잡한 거리를 일부러 걸으며 걸음의 종류를 바꾸었다. '이번에는 풍류옥선보(風流玉旋步).......' 그는 휘적휘적 걸으며 섭선을 손가락으로 탁탁 쳤다. 그가 제대로만 풍류옥선보를 시전했다면...... 분명 길가던 여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넋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볼 것이었다. 더군다나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간다면 이후로는 온통 그의 생각에 사로잡혀 상사병을 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 가던 여인들이 걸음을 멈추긴 멈추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에 홀려 멈춘 것이 아니었다. 홀리기는커녕 손가락질까지 해대가며 비웃는 것이 다반사였다. 다행한 것이 있다면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통념을 그녀들이 들먹거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종리연은 한숨을 쉬었다. '큰 일이야...... 아직도 반응이 없으니...... 언제쯤이면 사형 남궁환인처럼 뭇 여인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나도 걸을 수 있을 것일까?' 그는 어제 저녁에는 강변을 거닐며 시를 읊기까지 했다. 마침 가을의 밤공기를 즐기러 나온 낭자들이 많았다. 일부러 그녀들의 곁을 스치며 시를 읊고 군자보까지 걸어보았으나 별무신통이었다. 아니 도리어 다섯 번째로 그녀들의 곁으로 접근하였을 때는 미친 놈 취급을 받아 돌멩이 세례를 받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밤새 걸음을 연습한 뒤 오늘 다시 나왔다. 그런데도 나아진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종리연의 얼굴을 알아본 낭자 중의 하나가 그가 걸음걸이를 시전하기도 전에 대뜸 돌멩이를 주워 들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종리연은 조화십팔보(造化十八步)를 시전할 생각을 포기할 뻔 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들아....... 어째서 나를 보고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단 말이냐?' 그는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형 남궁환인의 유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성녀를 만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완벽한 기술(?)을 닦아 두어야 했다. 그러나 벌써 두 달이 넘도록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어느새 종리연은 이곳 거리에서 명물 중의 명물로 통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별호까지 생긴 판국이었다. 광서생(狂書生), 월하산보객(月下山步客), 몽유서생(夢遊書生), 소소공자(笑笑公子) 등등....... 그에게 붙여진 별호는 무려 이십 여개를 육박했다. 그러나 종리연은 꿋꿋하기만 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만일 이곳에서 여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아예 사성녀에게는 가볼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종리연은 오늘 하루도 열심히 그야말로 지성으로 이곳의 여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도합 18종의 보법을 밟았던 것이다. 어느새 해가 서산 마루를 붉게 물들이며 떨어졌다. 종리연은 이제 지치고 말았다. 하루종일 보법을 시전했기 때문에 배도 고팠거니와, 무엇보다도 다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번화가의 거리를 빠져 나갔다. 그의 처소는 무창 외곽에 위치한 객점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종리연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 무창의 객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 때문이었다. 바로 서호 근처에서 구한 동영 여인이었다. '휴! 이게 무슨 악연인지 모르겠군. 내가 얻어야 할 여인들...... 아니 이 곳에 사는 여인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안면도 없는 동영 여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종리연은 객점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곳이 아니면 숙식을 해결할 때가 없었던 것이다. 무창에 온 이래 종리연은 지금까지 동영 여인의 도움으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기랄! 사성녀를 얻어야 하는 내가 기생오라비처럼 동영 여인에게 얹혀 살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을 어쩌겠어? 자, 가자구!' 가는 동안에도 그는 군웅보(群雄步)를 시전하기를 잊지 않았다. 작금의 상황에서는 생생불식(生生不息)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스승이므로. 얼마나 걸었을까? "저...... 여보세요." "......?" 뒷통수를 치는 아리따운 여인의 음성에 종리연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거리에 인기척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아리따운 여인의 음성이 들렸는데......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일까?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하루종일 되지도 않는 걸음걸이로 여인들을 유혹할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후훗......!' 너무나 힘들고 피곤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던지라 자괴감이 든 종리연은 쓴웃음을 깨물었다. 종리연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채 열 걸음도 못가서 다시 여인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다. "여보세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틀림없는 여인의 음성이었다. 종리연은 걸음을 멈추고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여전히 종리연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날은 이미 저문 지 오래였다. 가을 바람만이 소슬하게 종리연의 옷깃을 스쳤다. 불을 밝힌 어느 주점에선가 비파소리가 은은하게 들리고 있을 뿐 주위는 참으로 고즈넉했다. '......?' 그가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문득 한 대의 마차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종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너무나 허기진 탓에 환청을 들었는지도 모르지. 후훗! 중원무림의 안녕을 구하기 위해 출도한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사성녀는 커녕 여염집 여인 하나도 못 꼬신 주제에 허기져서 배는 꼬르륵거리고, 팔다리는 녹초가 되었고...... 스타일 더럽게 구겨졌군! 쳇!' 종리연은 골목을 꺾어 돌았다. 이제 10장 정도만 더 걸으면 숙소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따각, 따각, 따각.......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리지 않던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따각, 따각, 따각....... 말발굽 소리는 전혀 바쁠 것 없다는 듯이 한가로웠다. 한가로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종리연의 보폭에 맞추어 걸으면서 뒤를 따라 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보법(步法)을 시전하느라고 걸음을 늦추거나 빨리하면 마차도 똑같은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 이상한 예감에 종리연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마침내 마차가 다가왔을 때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부도 없는 마차였다. 더군다나 안에는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두터운 휘장이 쳐져 있었다. 종리연의 앞을 지날 듯하던 마차는 문득 앞을 가로 막으며 멈추었다. "......?" 종리연은 기다렸다. 그런데 마차로부터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날 부른 것이 당신이오?" 그러자 마차 안으로부터 예의 그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예."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아름답기는 했으나 아직은 나이가 어려 보이는 소녀의 음성이었다. "무슨 일로 날 부른 것이오? 귀신처럼." 종리연이 의아해하며 묻자 마차 속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정체를 감추고서. "저...... 외람된 부탁인지는 모르오나 시간이 있으시면 함께 동행을 해 주셨으면 해서요." 종리연은 눈썹을 말아 올렸다. "그렇다면 용건부터 말씀하셔야 할 것이 아니오? 명분도 없이 내 어찌 따라 나설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자 마차 안의 음성이 대답했다. "공자님을 뵙고 싶어 하는 분이 있어서랍니다." "나를? 무슨 이유로?" 종리연은 흠칫하며 되물었다. 그러나 곧 마음 속으로 짚이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내 걸음걸이에 반한 여인인지도 모른다.' 싸아한 흥분이 종리연을 핥고 지나갔다. 그의 걸음걸이에 반한 첫번째 여인이 그를 보려고 하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그는 느긋하게 가슴을 펴면서 물었다. "날 찾는 사람이 남자요, 아님 여자요?" "예?" 마차 안의 음성은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하는 것 같았으나 곧 깨달은 듯 말했다. "아하......! 여자에요. 여자." "......!" 종리연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마침내 기다리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좋소이다." 언제 허기지고 피로했느냐는 듯이 종리연은 쾌활하게 말했다. 그러자 휘장이 반쯤 열리고 손 하나가 나와 그를 불렀다. "그럼 이리 오르세요." 종리연은 득의만만하여 성큼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은 상당히 호사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마차 안에는 그의 예상대로 나이가 16 7세 가량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가 타고 있었다. 한 눈에 시비임을 알 수 있는 복장이었다. 종리연의 눈치는 이미 고차원적인 수준이었다. '아하......! 아마도 이 시비의 여주인이 날 보자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제야 군웅보의 위력이 드러나는가 보다.' 두두두......! 마차는 그의 희열에 찬 기쁨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론가로 힘차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내리시죠. 공자." 소녀의 말에 종리연은 호기심을 가득 안은 채 마차에서 내렸다. "......!" 꽤나 큰 장원이었다. 종리연은 장원을 둘러 보았다. 정원 중간중간에 석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마차가 도착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한 명의 중년인이 대문 안으로부터 나와 그를 맞이했다. "어서오시오. 공자. 장주(莊主)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시오. 나를 따라 오시오." 그 말에 종리연은 고개를 돌려 시비(侍婢)를 보았다.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시비는 종리연의 시선을 무시한 채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까와는 달리 차가워진 표정이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지?' 종리연은 의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여자가 자신을 만나고자 한다고 했는데...... 약속이 틀린 것이다. 그러나 내친 걸음이었다. 중년인이 그를 안내하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종리연은 할 수 없이 그를 따라가며 내심 투덜거렸다. '정말 되는 일이 없군.' 넓고 호사스런 대전의 대청을 지나 그는 한 칸의 넓은 거실로 안내되었다. 거실 안에는 호안(虎眼)의 금포인(金袍人)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앉으시오. 공자." "......?" 종리연은 의문을 느끼며 그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호피를 씌운 의자는 어찌나 푹신했던지 그는 뒤로 넘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는 간신히 자세를 잡은 후 호안의 금포인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기가 질리는 기분이었다. 금포인의 부리부리한 호안이 자신을 노려 보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는 사형인 남궁환인이 떠올랐다. 그러자 용기가 나 가슴을 자연스럽게 폈다. 그가 막 뭐라고 입을 열려는데 금포인의 음성이 들렸다. "허허......! 공자께선 왜 이곳에 초대되셨는지 궁금하실 것이오."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포인의 인사는 정중하고 기품이 있었다. 그는 수염을 손으로 꼬면서 말을 이었다. "공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생겼소. 그래서 내 공자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일부러 공자를 모시고 오게 한 거요. 아이들이 실례나 범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료. 도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시오." "......?" 뜻밖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종리연은 더욱 궁금해졌다. 자신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기에 이 사람이 특별히 자신을 찾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포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아아! 노인에겐 불행하게도 불미한 여식이 하나 있소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만 어릴 때 받은 충격으로 실어증(失語症)과 함께 심한 우울증에 걸렸소이다. 그래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을 뿐더러 웃음마저 잃어버렸소이다." "......?" "그런데 얼마 전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소이다. 바로 공자 때문에 말이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금포인의 여식이 잃었던 웃음을 되찾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 때문이라니?' 종리연의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을 주시하던 금포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금포인 또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글쎄 얼마 전부터 바람이나 쏘일까 하여 여식을 데리고 저자거리를 산보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곳에서 우연히 공자를 보고는 여식이 그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겠소?" "으...... 음......!" 금포인의 말을 듣는 순간 종리연의 입에서 실망에 찬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비로소 모든 상황이 환히 짐작되었다. 실어증의 여인이 웃음을 되찾은 것은 바로 그가 시전한 보법 때문이었다. 종리연은 그만 참담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급기야는 사성녀를 취하여 중원 무림의 평화를 이룩해야 하는 자신의 보법이 얼마나 형편없이 우스웠으면 우울증에 빠진 여인이 웃음을 되찾는단 말인가. 정말로 황당무계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종리연은 깨달을 수 있었다. 금포인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그것은 바로 실어증과 우울증에 걸린 자신의 딸을 그가 위로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동시에 분노마저 들었다. '기껏 나를 납치하다시피 데려와 놓고...... 뭐 딸의 동무나 해달라고?' 종리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금포인은 빙그레 웃으며 종리연을 설득했다. "부디...... 여식의 곁에 있어 주시오. 내 공자께 사례는 충분히 해 드리겠소." 단호히 거절해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종리연의 생각이 180도로 바뀌었다. '아니다. 어쩌면...... 이건 하늘이 내게 베푸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런 바보같은 여자를 대상으로 시험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닌가? 오히려 내 마음이 편할 수도 있으리라.'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럽시다. 까짓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 준다고 했는데 산 사람의 소원을 못 풀어 주겠습니까? 마침 그것도 선행이니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시키는 사람이나 이렇게 이론까지 달아가면서 생색내며 승낙하는 사람이나....... 아무튼 종리연은 이상한 일이 인연이 되어 장원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몇 마디 더 이야기를 하다가 곧 아까의 시비에 의해 금포인의 딸이라는 여자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9 백치여인(白痴女人) 회랑(回廊)은 생각보다 길었다. 온갖 꽃들이 잘 가꾸어진 뜰이 내다 보이는 회랑을 걸으면서 생각보다 회랑이 길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회랑을 걸으며 종리연은 왠지 쑥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더더군다나 자신을 안내해가는 시비가 계속 힐끔거리며 킥킥 웃어대는 까닭에 얼굴마저 붉어질 지경이었다. 하긴 무리도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생각해 보아도 웃기는 일임에는 틀림없었으므로. '그래! 나는 지금 광대놀이를 하러 간다.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종리연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광대놀음이라도 이젠 어쩔 수 없다. 사나이 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찔러야 하는 법! 혹시 모르지 않는가? 내가 만나러 가는 여인이 비록 백치이긴 하지만 사성녀 중의 하나일런지도...... 아니, 사성녀보다 더 빼어난 여인일지도.' 종리연은 내심 이렇게 헛된 환상까지도 품어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환상을 꿈꾸어도 지금 광대놀음을 하러 가는 것이라는 현실적인 자괴감에서 헤어날 수는 없었다. 그런 자괴감이 그를 수치심에 빠지게 하고 얼굴을 붉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헤어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뿐이었다. 바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던지, 망각하던지 하는 것이다. "헛흠!" 종리연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물론 긍정적인 시각 쪽이었다. "험,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무게를 잡고 근엄하게 종리연은 물었다. 종리연의 일문이 너무나 황당했던지, '어쭈그리! 별꼴이네!' 하는 표정을 짓던 시비는 혀를 낼름 내밀며 톡 쏘았다. "힝, 다 큰 여자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게요?" 맹랑한 소녀였다. 거칠 것 없다는 소녀의 대꾸에 그만 무게를 잡으려던 종리연은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소녀가 또 한차례 까르르 웃었다. 세상에! 서른 살 가까이나 먹은 청년이 일개 소녀의 말에 수줍음을 느끼고 얼굴이 붉어진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참으로 무(武)를 익히는 공자님의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소녀의 웃음 소리에 종리연의 얼굴은 더욱 새빨개졌다. 그 모습이 더욱 소녀를 재미있게 만드는가 보았다. 그러나 너무 웃기가 미안했던지 소녀는 곧 정색을 하고 쫑알거리듯이 읊조렸다. "제 이름은 영령(英玲)이에요." 그러나 시비 영령은 내심 투덜거렸다. '흥, 지가 날 언제 봤다고 초면에 막 반말을 하고 지랄이야?' 사실 종리연의 행동은 어딘가 모자라는 티가 역력했다. 그 어처구니 없는 모습이 시비인 영령으로 하여금 자존심을 세우게 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해 보자. 서른 살의 젊은이가 이제 갓 소녀티를 벗어나려는 아가씨한테 반말로 이름을 물었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한다고 느끼겠는가? 어쨌거나 종리연의 일거수일투족은 누구의 눈에도 이상스럽고 우습게 보이고 있었다. 어쨌든 잠시 후 그들은 한 채의 별원에 당도했다. 별원의 월동문을 지나 얼마쯤 더 들어간 그들은 또 하나의 문 앞에 다가섰다. "다 왔어요." 종리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그녀는 안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영령이에요."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종리연이 보기에는 그 방은 비어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방은 불이 환한데 반해 이 방만은 불이 꺼져 있는 것이다. '불이 꺼져 있다면...... 벌써 잠자리에 들었단 말인가?' 의아해 하는 종리연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영령은 멋대로 문을 열더니 종리연에게 말했다. "들어가세요. 귀하신 분이니 잘 모셔야 해요." 이제까지와는 달리 마치 아랫사람에게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더군다나 종리연이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등을 떠밀다시피 하기까지 했다. 종리연은 절로 욕이 나올 것 같았으나 꾹 참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렇게나 아름답다니? 혹시 천궁(天宮)은 아닐까? 이거 내가 꼭 무엇인가에 홀린 기분이로군.' 불이 꺼져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실내는 참으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놓인 황촛대가 사방으로 불빛을 던지고 있었다. 게다가 촛불의 수가 10개는 족히 되리라 싶었다. 그러나 왠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방 안이 어두웠다. 두터운 휘장이 문이란 문마다 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칠흑색의 두터운 휘장이 불빛을 흡수하는 것 같았다. 방은 예상 외로 넓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것! 까짓거 까무라칠 때 까무라치더라도 끝까지 가보기나 하자.' "어헛! 흠......!" 종리연은 인기척을 내며 걸음을 옮겼다. 내실인 듯한 곳을 지나 안으로 좀더 들어갔다. 그때까지 어디에고 인기척은 없었다. 방 안에 장식된 가구들은 그야말로 비까번쩍이었다. 살림살이에 문외한인 종리연의 눈으로 보기에도 엄청났다. '이거...... 내가 정말 여우한테 홀린 거 아니야?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란 놈이 잡술을 부려 나같은 미남자를 호린다고 하더니......' 중얼거리면서도 종리연은 내처 걸었다. 까짓거 사나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하는 심사였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희미한 불빛 아래 침상이 있고, 침상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종리연은 조심스럽게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 그리고...... 어떤 충격이 종리연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 충격은 종리연에게 몹시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순수(純粹)함의 이미지를 어떻게 필설로 형용할 수 있단 말인가. 입이 천 개가 있어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감을 여인은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 종리연은 여인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가는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산산조각으로 깨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말문을 열기는커녕 한 점 미동도 없었다. 보이지 않는 한 곳으로 시선을 집중하고 미동조차 않는 것으로 보아 깊은 명상의 세계에 든 것 같기도 했다. 그러한 모습이 어찌 신비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신비스러움을 감상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태산같지 않은가 말이다.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내게는 없다. 사부의 유언과 못다 이룬 사형의 책무를 대신할 의무가 내게는 주어져 있다. 하루빨리 조화십팔보를 터득해 사성녀를 취한 후, 삼패천을 물리치고 도탄에 빠진 무림을 구해내는 것이 내 임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저 여인에게 시범을 보여야 한다.' 한참을 기다린 종리연은 마침내 어색하게 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험, 소저. 나는 종리연이란 사람이오." 그때서야 보이지 않는 한 곳을 응시하고 있던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목구비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또렷했고, 창백한 피부는 투명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그녀의 동공에는 아무런 표정이나 빛이 담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혼을 잃어버린, 아니 혼을 어디다가 보내버린 사람과 같은 눈을 여인은 가지고 있었다. 그 눈이 무감동한 채 종리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종리연은 그녀의 눈을 대하는 순간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신비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조금 전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天上)의 신비감이었다면, 이번의 것은 세상 속에서의 신비감인 셈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의 것이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여인이 무척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것이었다. 잠시 멍청해져 있던 종리연은 어느 순간에 무엇을 깨달았는지 마침내 세상 속에서의 신비감에 이름을 붙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백치(白痴)?' 뎅뎅뎅....... 삼경을 알리는 인경소리가 희미한 바람 속으로 들려왔다. 침상에 누워 있는 종리연은 아무래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도무지 모든 것이 꿈만 같은 기분이었다. 불과 한 시진 전에 만난 여인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비록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지금 그의 머리 속은 텅 비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백치 여인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무엇이 여인을 백치로 만들었을까? 아니...... 무슨 수로 여인의 백치를 뚫고 들어갈 것인가?' 의문을 품으면 품을수록 머리 속은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다. 잘못 얽힌 실타래를 풀다가 더욱 엉키게 만드는 것처럼. '참으로 갑갑한 일이 아닐 수가 없구나. 백치를 상대로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종리연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는 일단 이 장원에 남아 있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수중에 이제 단 한 푼도 없기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다. 이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는 것이다. 일단 자자. 내일이면 또다른 태양이 떠오르듯이, 또다른 방법이 생겨나겠지.' 종리연은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잠이 비오듯 쏟아졌다. 사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너무나 무리한 하루였던 것이다. 그는 깊은 수면 속으로 자신을 맡겼다. 어제와 똑같은 회랑을 걸으면서 짐작한 것이지만 장원의 규모는 의외로 컸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종리연의 상상력을 초월하고 남을 정도였다. 하나의 별채에서 딴 별채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것이 한 시진(時辰)을 손가락 다섯 개로 삼아, 그중 손가락 하나의 시간이 걸리고는 했다. 그러나 참으로 기이한 것은 이 넓은 장원에 기거하는 사람이 불과 4, 5인(人)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하루 종일을 가야 만나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처음 종리연이 만났던 호안의 중년인의 모습도 더이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종리연이 이곳에 기거하게 된 지도 어언 일 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그 일 주일 동안 그는 별로 하는 일이 없이 그저 시간을 죽이기만 했을 뿐이다. 하루에 한 번씩, 그것도 저녁 무렵에 잠깐 백치여인을 만나는 것만 제외하고는 주어진 일이라곤 없었다. 백치 여인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꾸 한 번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쳇! 아무리 목석같은 사내라도 이만큼 공을 들였으면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사내도 아닌 계집애가 눈하나 깜박거리지 않으니...... 이 여인은 그렇다면 석녀(石女)란 말인가? 아...... 앗차! 실수다. 석녀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계집을 일컫는 말이 아닌가? 이 여인은 석녀가 아니라...... 에이, 모르겠다. 도대체 입을 열어야 속내를 알기라도 하지. 젠장할!' 종리연도 이제는 지쳤다. 그도 양심적인 인간이었다. 자신의 성과가 없는데 밥만 축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원에 머문 지 8일째 되는 오후. 그는 점심을 마치고 나서 행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더이상 이곳에 머물 건덕지가 없었던 것이다. '제기랄! 이곳에 머무는 동안 보법이라도 시전을 했다면 걸음걸이가 한층 세련되었을 텐데....... 이거 완전히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게 되어 버렸군.' 바로 그때였다. "저......, 공자님." 시비(侍婢) 영령이 들어와 그를 부른 것이다. 영령은 그가 짐을 꾸리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무엇 하는 거죠?" "나, 나가려고......." 이상하게 여자가 먼저 말을 걸면 종리연은 늘 떠듬거리는 것이었다. 영령의 얼굴에는 야릇한 표정이 어렸다. 영령은 한동안 종리연에게 동정어린 눈길을 주었다. "주인님께서 청하셔요. 어서 가보세요." 전과 같지 않게 영령의 말투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뿐만 아니라 살짝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왜 그랬을까? 영령 그녀도 자신의 갑작스런 마음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자거리에서 처음 보았을 때에는 왠지 바보같고 멍청해 보이기만 하던 사내가 오늘따라 동정심과 야릇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실상 영령은 종리연에게서 때묻지 않은 순수함과 열정을 발견하고 호감이 간 것이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한편 종리연은 벌레씹은 얼굴이 되었다. "......!" 내심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성과가 없으니 나가 달라는 것이겠지. 하긴 나가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나갈 생각을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만..... 왠지 씁쓸하군! 바라던 일도 못해주고 결국은 무위도식(無爲徒食)한 꼴이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종리연은 이미 각오한 일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영령을 따라갔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는가? 그가 장주를 만났을 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금포인의 부탁은 종리연의 예측과는 반대로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허허......! 집안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선생께서 여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어 주시오. 그러면 아무래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소." "뭐...... 뭐라구요?" 종리연이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허허......! 왜 그리 놀라시오? 내가 선생께 과분한 부탁이라도 한 거요?" "......." 대꾸할 말이 없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금포인의 부탁은 종리연으로써는 도리어 흔쾌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료함과 답답함을 느끼던 차가 아닌가? 더더군다나 무위도식하는 기분이 들어 떠나려던 차에 금포인의 제의는 종리연을 곤궁에서 구해주는 셈이었다. 백치 여인과 밖으로 나돌아 다닐 수만 있다면 그로서는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그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망설여졌다. 백치 여인을 데리고 저자거리를 나가서 보법이나 제대로 시전을 할 수 있을 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단 한 사람의 관중이 그를 내처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 성싶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마지못해 승낙하는 듯이 말하고 숙소로 돌아온 종리연은 서서히 짐을 풀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는 영령의 눈길을 종리연은 알 턱이 없었다. 마차에, 그것도 아름다운 여인과 단둘이 타는 기분은 세상 남자라면 누구나 즐거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지금 종리연의 기분이 그러했다. 여인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 기대 앉은 채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창 밖을 스쳐 지나가는 사물 너머의 보이지 않는 어떤 형상을 바라보듯 촛점이 없었다. "......." 종리연은 넋을 잃고 그녀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흐릿한 촛불 사이로가 아니라 백주 대낮에 보는 얼굴은 밤의 그것과는 또다른 신비감을 가지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옥(玉)에도 하나의 흠이 있듯이 여인의 얼굴은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불균형적인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종리연은 곧 그 이유를 발견했다. 여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나 그 아름다움에는 생명이 없었던 것이다. 즉 여인의 눈이 초점을 잃고 죽어 있는 관계로 그 아름다움은 죽은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마치 조화(造花)의 아름다움이라고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종리연은 마차를 함께 타고 가는 동안에 무슨 말이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사 말을 건넨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일로 보아 대답을 들을 리도 만무했다. 꽤나 이름이 나 있는 네 마리의 백설총(白雪寵)이 끄는 마차는 저자거리를 벗어나 한적한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동안 여인의 표정없는 얼굴과 밖의 경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종리연은 불현듯 이렇게 허비하고 있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 시간에 연공(?)이나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게는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침내 종리연은 여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하고 품속에서 섭선을 꺼냈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마차의 리듬을 따라 섭선을 좌우로 흔들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이백형, 그대는 시에서 무적이요, 표일한 정신은 뭇 군상과 같지 않소? 청신한 맛은 유신과 같고 준일한 품은 포조와 같소 따가닥, 따가닥....... 마차는 한가롭게 달렸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기고 종리연은 섭선을 흔들며 계속 시를 읊었다. 그가 읊는 시는 두보(杜甫)의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이었다. 이곳 위수가엔 봄나무가 싹트나 그곳 강남에는 해가 구름에 지리니, 어느 때 만나 함께 술잔을 나누며 다시 한 번 마냥 글을 논하리 종리연의 표정은 실로 엄숙(?)하기만 했다. 두보의 시가 끝나자, 종리연은 다시 계속 시를 읊었다. 하나같이 당대 문장가의 시였으나 어쩐지 그의 표정과 시의 내용과는 걸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음률(音律)을 맞춘다면서 섭선을 흔들흔들 하는 것도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킥......!"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울렸다. 제 흥에 겨워 시를 읊던 종리연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러나 어쩐지 시흥(?)이 깨진 듯하여 그는 더이상 연공할 마음이 일지 않았다. 산사(山寺)는 한가로웠다. 아니 좋게 말하여 한가로운 것이지 실제로 그들이 도착한 산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낡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처량하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절이었다. 명색이 대웅전(大雄殿) 지붕 위에는 이름모를 풀들이 뿌리를 내려 무성히 자라고 있었으나 오른쪽은 그나마 기와라는 것도 다 깨진 채였다. 산신각(山神閣)이라고 명색만 남아 있는 건물은 일백 년 묵은 여우가 꼬리를 감추고 살 정도로 폐가(廢家)의 모습이었다. 그 외에 조사전(祖師殿)이라거나 참선각(參禪閣) 같은 사찰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부속건물은 아무리 눈을 씻어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종리연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함을 느꼈다. 벌써 두 시진째 였다. 여인은 산사에 도착하자마자 절의 후면으로 돌아가더니 그 곳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여인이 마차에서 내려 절의 후면으로 걸어가는 동안 종리연은 적잖이 놀란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백치로만 알고 있었던 여인이 절 뒤를 돌아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는 동안은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여인은 걸음걸이 하나도 흐뜨리지 않고 걸었으며 시선도 또렷했다. 실로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바위 위에 앉기가 무섭게 여인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의 그 백치의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틀림없이 백치는 아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정상적이었다.' 그렇게 확신한 종리연은 여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몇 번 말을 붙여 보았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결국 지쳐버린 종리연도 여인의 곁에 앉고 말았다. 이따금 소슬바람이 불어 여인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표표히 나부끼는 백의와 함께 여인의 모습은 가슴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종리연에게 그 모습은 결코 아름답게 비치지는 않고 있었다. 지금 그의 심정은 조급하기 그지 없었다. 삼패천의 위력은 나날이 강성해지기만 하는데 자신은 여전히 무력했다. 어떻게든 빨리 사성녀를 만나 삼패를 쳐부술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도 그는 계속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 하다가 마침내 중얼거렸다. "그래....... 차라리 이 시간에 연무나 계속하자." 그는 여인이 듣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지 않고 중얼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섭선을 펼쳐들고 흔들며 가슴을 한껏 앞으로 내밀었다. 이윽고 자세를 가다듬은 종리연은 군웅보(群雄步)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군웅의 웅장한 걸음걸이를 시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군자보(君子步)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막 신선비연보(神仙飛燕步)를 펼치고 있는데 갑자기 엉뚱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후후후후훗......!" 정말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하도 웃다가 배꼽을 빼먹어도 정신이 없을 정도의 웃음이었다. "......?" 종리연은 깜짝 놀라 바위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졌다. 백치 여인이 허리를 잡고 깔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눈을 크게 치떴다. 이때 여인이 웃음을 그치더니 하지만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연신 낄낄거리느라 말을 채 잇지도 못하며 그를 향해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 당신....... 정말이지 호호......!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웃기는 사람이군요?" "아...... 아니......?" 놀란 종리연은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의 눈이 한껏 크게 떠졌다. 어느새 웃음을 멈춘 여인도 그를 향해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몽롱하던 눈빛이 결코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고 맑았다. 어떤 여인의 눈보다도 더욱 맑고 투명하게. "다...... 당신은 백치가 아니었소?" 종리연의 경악에 찬 말에 여인은 바위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개탄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때문에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어요!" 그 말을 내뱉은 후 여인은 미끄러지듯 바위에서 내려왔다. 일학충천(一鶴沖天). 마치 학이 하늘을 나르는 듯한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놀란 종리연은 어리둥절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니...... 어디로 가는거요?" "어디긴요? 들통이 났으니 돌아가야죠. 그리고 당신도 당신의 임무를 훌륭히 마쳤으니 돌아가서 상금을 받아야죠." 여인은 그렇게 말하고 앞장 서 내려갔다. 종리연은 재빨리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여인은 눈을 치뜨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왜 그래요?" "마...... 말을! 말을 해 주어야 할 게 아니오?" 종리연은 따지듯 대들었다. 그의 안색은 어느 순간엔가 굳어져 있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자신이 놀림을 당했다는 기분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인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정말 어이가 없다는 쪽은 이 쪽이라는 듯한 표정을 만들며 여인은 쌀쌀맞게도 톡 쏘듯 반문했다. "뭘 말해 달라구요?" 종리연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실상 그도 막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무엇인가 들어야 할 말이 있기는 있을 것만 같은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자신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무엇인가를 듣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듣는단 말인가? 답답한 것은 오직 전후사정을 모르는 종리연일 뿐이었다. 여인은 피식 웃고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종리연은 정말로 자신이 멍청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사정을 덮어두었다가는 정말이지 죽도 밥도 안 되는 꼴이었다. 마침내 몸을 날린 종리연은 여인의 소매를 잡았다. 여인은 돌아서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종리연은 내처 물었다. "아니...... 사람을 이렇게 놀리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종리연은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엄벙덤벙 덮어두지 않고 전후사정을 꼭 알아야겠다는 각오가 가득했다. 여인은 종리연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그럼 아무 것도 모른단 말인가요?" "도대체 뭘 알고 뭘 모르고 있다는 말이오? 난 지금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일 뿐이오. 낭자도 그렇거니와......" 이번에는 여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언뜻 그녀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어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요." 다짐이라도 하듯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오. 뭔지는 모르나 나는 지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소." 여인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그럼 저기로 가서 앉아요." 두 사람은 나란히 바위 위에 걸터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지나갔다. 침묵은 상당히 길었다. 뱀 한 마리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새알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목구멍 속으로 완전히 삼킬 정도의 시간이었다. 종리연이 참다 못해 다시 입을 열려는데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요?" "모르오." 종리연의 퉁명스런 대답에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요." "......?" "이상해요. 탁총관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탁총관이라니 누굴 말하는 것이오?" 여인은 더욱더 이상하다는 듯이 빤히 보며 물었다. "그럼 탁총관이 보내서 온 사람이 아니었단 말인가요?" 종리연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그 호안의 금포를 입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오? 그 사람은 자신을 낭자의 아버지라고 했는데......?" 그 말에 여인의 얼굴에 언뜻 싸늘한 빛이 어렸다. "뭐라고요? 흥! 탁가가 많이 건방져 졌군!" "......?" 여인은 불현듯 종리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지척이었으므로 가까이 보게 되자 종리연은 자연 어색함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복사꽃마냥 붉어졌다. 여인은 그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고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의외로 순수한 사람이군요." "......?" "저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겠어요?" 뜻밖이었다. 종리연은 뚫어져라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여인은 남의 시선에 꽤나 익숙한 듯이 표정하나 바꾸지를 않았다. 여전히 여인은 아름다웠다. 오히려 감정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종리연이었다. "무...... 무슨 약속을 말이오?" "제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떤 누구에게든 밝히지 말아 달라는 것이에요." 종리연은 잠시 생각했다. '하긴 내가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알 까닭이 없지.' 그는 잠시 후에 물었다. "그런데 낭자는 무엇때문에 백치 흉내를 내는 것이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여인의 대답은 뜻밖에도 단호했다. 종리연은 끝까지 캐물으려 하다가 그만 두었다. 지신의 일도 처리하지 못하는 터에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여인이 다시 물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왜 바보 흉내를 내고 다니죠?" 그녀의 질문에 종리연은 기가 막혔다. "아니...... 내가 언제 바보 흉내를 냈단 말이오?" 여인은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전부터 무창 거리를 돌아다니며 바보 흉내를 냈잖아요. 그래서 제가 우연히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이렇게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구요." "그...... 그건 바보 흉내가 아니오." "예? 그럼 뭐죠?" 여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종리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막상 말을 하려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인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계속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그건......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건 연무(練武)요." "예? 연무라니요?" 밑도끝도 없이, 미친 짓거리로 보이는 행동이 연무라는 종리연의 말에 처음 여인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배꼽을 잡고 웃는 것이었다. "호호호호......! 그 바보같은 짓거리가 연무라고요? 섭선을 흔들며 다리를 이상하게 꼬아 걷는 것이?" 여인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종리연은 화가 치밀었다. 안색을 바꾸며 종리연은 소리쳤다. "비꼬지 마시오. 내 걸음걸이는 보법의 일종이란 말이오. 장차 도탄에 빠진 무림계를 구하는 데 유용하게 쓰여질 것이......." 말 도중에 종리연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기의 비밀이 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얻은 것은 있었다. 진지한 종리연의 태도가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으음......! 그렇군요. 하지만 말이에요. 무예도 아니고 기껏 보법이나 익혀서 무엇에다 쓰려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여인의 태도는 종리연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사...... 사실은......." 종리연은 할 수 없이 자신이 왜 그런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연습이오." "뭐...... 뭐라구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여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로 어이가 없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종리연은 그녀가 계속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여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못들은 척하고 있었지만 종리연은 조금 전에 분명히 도탄에 빠진 무림계를 구하기 위해서 연무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겨우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보법을 시전한다니....... 아무래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청년이 아닌가 싶었던지 여인은 한동안 종리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종리연의 정신은 말짱해 보이기만 했다. "좋아요.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여인의 환심을 사서 무엇 하시게요?" 여인의 질문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종리연은 단호히 말했다. "그건 말할 수 없소." "......?" 여인은 멍해졌다. 그가 이제껏 바보같이 굴다가 그 말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확고한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당신은 천부적인 광대로군요." "광대라니!" 종리연은 화를 벌컥 내었다. 그의 표정은 비장함이 서렸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이번 연습은 완전히 생사를 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광대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나도 모욕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여인은 그가 이렇게 화를 내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 마디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종리연의 정체는 더욱더 오리무중처럼 여겨졌다. "좋아요. 아무튼...... 그렇지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 "......?" "정말 당신의 그런 행동을 보며 여인들이 당신에게 반할 거라고 생각 하시나요?" "......." 정곡을 찌른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종리연의 표정은 대뜸 우울하게 변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해야 하오.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그의 눈에는 비장함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 여인은 눈을 빛냈다. 그녀는 종리연에게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헤아렸다. 여인의 예감이란 정말이지 얼마나 정확하고 빈틈 없는 것인가. 그녀는 마음이 움직였다. "좋아요. 그럼 당신이 나의 비밀을 지켜 주시는 대신 내가 당신의 일을 도와주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종리연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저... 정말이오?" 여인은 침착하게 말했다. "약속을 한 이상 틀림없이 지켜요. 단, 당신이 내 비밀을 지켜줄 수 있을 때 까지만이에요." "트...... 틀림없이 그럭하리라!"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종리연은 대답했다. 10 이상한 인연(因緣) 그날 이후. 종리연과 여인의 묘한 생활은 계속 되었다. 종리연은 이전보다 훨씬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가슴을 절이는 여인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시비 영령이었다. 언제나 바보스럽기만 하던 종리연의 순수함을 발견하고는 마음을 빼앗긴 영령은 멀리서나마 종리연의 뒷 모습을 훔쳐볼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여의치가 못했다. 종리연이 하루의 대부분을 여인과 함께 보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영령의 주인인 여인의 방에서 말이다. 알게 모르게 영령의 가슴 속에는 상사병이 깊어지고 있었다. '잊자! 제발 잊어버리자. 공자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참으로 바보스럽지 않았는가? 그런 바보 천치를 내가 사모하고 있다니...... 참 못난 년이다. 제발 잊어버리자.' 영령은 입술을 깨물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종리연의 순수한 얼굴이 더욱 크게 확대되면서 그녀의 눈동자를 가득 채워오는 것이었다. 한편 종리연이 여인의 방에서 하는 것이라고는 계속 걸음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여인은 침상에 앉아 그의 걷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여러 가지로 지적을 하고 교정하는 데 성의를 다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이 형편 없었는지는 몰라도 종리연의 보법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보법에 임하는 종리연의 성실성 하나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결과는 정말로 잼병이었던 것이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건만 밤잠을 자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종리연의 보법은 제자리 걸음의 연속으로만 보였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면 퇴행(退行)의 징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인은 싫어하는 내색없이 지치지 않고 계속 지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여인의 가슴에는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위인이야. 탁류와 같은 세상에 아직도 저토록 순수한 인물이 남아 있다니.......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저토록이나 순수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여인은 지금도 연공에 진땀을 흘리고 있을 종리연을 떠올리며 계속 생각했다. '그런데...... 내 앞에서 온갖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한 가지 일에 전력투구하는 그 사람...... 그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틀림 없을지도.......' 여인의 얼굴에는 일말의 안타까움이 맺혔다. '아!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저 사람을 만났더라면.......' 여인은 그를 대하면 대할수록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도 판단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절대로 의문을 묻어 두고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계속 탐구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 바로 그거였어. 사람들은 흔히 이런 감정을 모성애(母性愛)라고 표현하지.' 비록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깨달은 종리연에 대한 감정은 바로 모성애였다. 여인은 종리연의 순수한 모습에서 모성애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여인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어쩌면 언니에게도......?' 그녀는 종리연이라는 사람이 어쩌면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렇다면 더이상 생각하고 망설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여인은 일단 생각이 떠오르자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급히 종리연의 처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 종리연은 자신을 방문한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방 안에서 종리연은 열심히 보법을 연마하던 중이었다.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었다. 오로지 침의(寢依) 차림으로 군자보를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풋......! 또 그 보법이에요?" 여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본 종리연은 문득 그녀가 무척이나 귀엽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곧 자신의 그런 감정을 스스로 꾸짖었다. '종리연아, 종리연....... 바보같이 여자를 홀려야 할 네가 도리어 여자에게 빠지면 되겠느냐?' 곧 그는 표정을 엄숙하게 바꾸어 말했다. "이제 곧 밤인데 여염집 낭자가 어인 일로 남자의 방으로 온 것이오?" 참으로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 그것이 바로 종리연의 순수성을 한층 빛내주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여인은 그의 구태의연한 태도에 다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무슨......?" 의아해하는 종리연을 뒤로 하고 여인은 스스럼 없이 침상가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종리연의 눈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인의 음성은 한결 부드러웠다. "지금까지...... 종리 공자님은 아직도 저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어요. 궁금하지 않나요?" 종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낭자의 방명(芳名)은......?" 여인은 킥킥거리며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소녀의 이름은 방여경(方如鏡)이라고 해요." "아, 방 낭자셨구료. 소생은 종리연이라고 하오." 종리연은 정중히 포권했다. 침의만을 걸친 채로 정중히 포권의 예를 취하는 종리연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가 없었다. 방여경의 눈에는 종리연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우습기 그지 없게만 비쳐졌다. 하지만 상대방이 이토록이나 진지하게 나오는데 어떻게 웃을 수가 있겠는가. 방여경 또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진지하게 물어볼 일이 있어요." "무엇이오? 어서 물어 보시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속시원히 털어 놓으리라." 잠시 뜸을 들이던 방여경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대체....... 아니 공자께서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토록 고심을 하는 이유는 알겠는데 그 대상이 누군지 말해 줄 수 없을까요?" "......!" 바로 그 순간 종리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로 말해 줄 수 없소.." "왜죠?" "그건...... 아무튼 안 되오." "하지만 저는 알아야 겠어요." 방여경도 절대로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종리연은 흠칫해서 되물었다. "어째서요?" 방여경은 생긋 웃었다. "병법(兵法)에도 이르기를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하였어요. 상대를 모르고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길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아요. 그러니 공자를 제가 도우려면 그 대상을 알아야 하잖아요?" "......!" 종리연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기 때문이었다. 종리연의 고민을 눈치 챈 방여경이 한 마디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염려마세요. 공자께서 저의 비밀을 지켜주시는 것처럼 저 역시 공자의 비밀을 결코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요." 종리연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긴....... 사성녀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그 이유는 밝히지 않으리라.' 잠시 후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환심을 사려는 대상은...... 바로 사성녀(四聖女)요." "......!" 순간 방여경의 안색이 급변했다. 사실 종리연의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성녀란 말은 무림에 그다지 알려진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부류의 인간에게는 그야말로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기도 했다. 방여경은 사성녀를 알고 있었다. 아니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기실 그녀야말로 사성녀에 대하여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사성녀를...... 그들을 만나서 무엇을 하려고요?" "결혼을 해야 하오." 마치 그러한 질문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막힘 없는 대답이었다, "......!" 방여경은 들으면 들을수록 놀랐다. 아니 어이가 없다 못해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종리연의 재주로 사성녀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모두를 상대로 결혼을 한다면 그야말로 천하가 웃을 일이 아닌가 말이다. "공자......! 혹시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그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실례의 말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종리연의 표정은 비장하기만 했다. "나는 사성녀와 혼인을 해야 하오. 이 목을 걸고서라도 말이오......!" '맙소사!' 방여경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그런 말을 삼켰다. "왜죠? 왜 사성녀 모두와 결혼을 해야 하는 거죠?" 종리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할 수 없소." 방여경은 입을 다물었다. 계속 물어 보아야 그가 결코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사연이 많은 사람이야.' 그녀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분이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니에게도 결코 해가 될 사람은 아닐 터........ 어쩌면 오히려 잘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마침내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더 묻지는 않겠어요. 마침 잘 되었어요. 저는 그 사성녀 중의 한 사람을 잘 알아요." 종리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이오?" "호호...... 알다 마다요. 사성녀 중 하나가 바로 저의 언니인걸요." "......!" 종리연은 그야말로 기절할 뻔했다. 인연도 보통의 인연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토록 공교로운 일이 일어나겠는가. 종리연으로서는 마음 깊이 희열이 솟아나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아! 하늘이 도와 주는구나." 종리연은 탄성을 질렀다. 방여경은 그런 종리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어쩌면 하늘이 꼭 필요로 해서 내린 사람일지도 몰라요." 잠시 말을 멈춘 방여경은 곧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아쉬움 같은 것이 언뜻 스몄다 사라지는 것을 종리연은 보지 못했다. 뜻밖으로 찾아온 천운(天運)에 종리연은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요....... 언니에게는 도리어 당신같은 분이 필요할 지도 몰라요. 그러니 당신은 이곳을 떠나 언니를 찾아가 보세요." "물론이오." 방의경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종리연은 힘차게 말했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에요. 당신의 뜻을 이룬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도 나는 해야 하오." 방여경의 눈이 빛났다.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에요. 설혹 당신이 아무리 완벽한 보법을 연마한다 해도 적어도 사성녀만은 그런 수법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도리어 당신 본연의 순수함만이 일 푼의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을 거에요" "......?" 종리연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만일 사부에게서 익힌 조화십팔보를 완벽하게 시연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사성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종리연의 마음은 아랑곳 없이 방여경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실이 가장 중요해요. 당신의 진실을 사성녀가 알아볼 수 있다면 그녀들은 당신을 배척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 대답 대신 종리연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조화십팔보만 완벽하게 익히면 된단 말이오.' "그럼 언니가 있는 곳을 가르쳐 드리겠어요. 언니는 바로......." 물(水)에도 색(色)이 있다. 물의 색, 즉 수색(水色)은 계절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지금 푸르름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낙수(洛水)의 물결을 바라보며 종리연은 씁쓸한 기분에 젖고 있었다. 낙양(洛陽)이라 했던가? 그는 무창부를 떠났다. 방여경의 말을 듣고 사성녀 중의 일인(一人)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끝내 방여경은 자신의 내력이나 그녀가 백치 행세를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부탁한 것은 놀랍게도 그녀의 언니인 하오방주(下午幇主) 방의경(方義慶)을 유혹해 달라는 것이었다. 실로 기이한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종리연은 방여경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방의경을 손에 넣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는 쾌히 응낙하고 무창을 떠나 일로 북상(北上), 낙양으로 흘러가는 낙수에 몸을 실었다. 무창을 떠나기 전, 종리연은 실로 예측할 수 없었던 난관에 봉착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방여경의 시비인 영령 때문이었다. 종리연이 방여경과 작별을 고하고 막 장원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불현듯 종리연의 앞을 가로막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다름아닌 영령이었다. "공...... 공자님!" 영령의 목소리에는 울먹거림이 진득했다. "아니......? 소저가 어인 일이오?" 놀란 종리연이 되물으며 그녀의 행색을 살폈다. 영령은 뜻밖에도 보따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먼 길을 떠나는 폼이 역력했다. "어디 심부름 가는 길이오?" "......." 고개를 숙인 채로 영령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으나 종리연은 곧 자신의 질문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인의 심부름을 간다면 틀림없이 마차나 가마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뭐가 잘못돼서 ㅉ겨나기라도 했단 말이오? 도대체 그 보따리는 무엇이고.....?" 어안이 벙벙해진 종리연의 물음에 영령은 모기소리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 공자님을 따라가고자 합니다." "뭐...... 뭐라구요?" 언뜻 영령의 말귀를 이해하지 못한 종리연이 고개를 숙이며 되물었다. 그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로 발 끝만 내려다 보고 있던 영령이 고개를 쳐들었다. 코와 코가 거의 맞닿을 만한 거리에 두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공자님을 따라가고자 소녀가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영령의 목소리는 상당히 뚜렷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종리연은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처들었다. "뭐...... 뭐라구?" "왜 그렇게 놀라시옵니까? 소녀가 공자님을 따라 가겠다고 했을 뿐인데요." 열에 들뜬 얼굴로 영령이 중얼거렸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허헛......! 허허헛.....!"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던지라 종리연은 실소(失笑)부터 나왔다. "허허헛......! 아니 낭자가 무엇때문에 나를 따라간단 말이오?" "소녀......, 공자님께 오래 전부터 연정(戀情)을 품고 있었사옵니다. 제발 뿌리치지 말아 주시옵소서." "여...... 연정?"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이것이야말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알 수 없는 것이 한 길 사람의 속마음이라고 하지만 이건 정말로 뜻밖의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종리연은 곰곰 생각을 떠올렸다. '내가 저 소녀와 얼굴을 마주친 것이 언제였던가?' 그건 바로 한 달이나 전의 일이었다. 그때의 일이 정확하게 종리연의 뇌리에 떠올랐다. 기나긴 회랑을 따라 걷던 종리연이 그녀를 향해, "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고 물었을 때, "어쭈그리! 별꼴이네!" 하는 표정을 짓던 시비가 바로 영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혀를 낼름 내밀며 이렇게 쏘아붙였지. "힝, 다 큰 여자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게요?" 그토록 거칠 것 없는 소녀의 대꾸에 그만 무게를 잡으려던 종리연은 얼굴이 붉어지고 만 것까지 기억해 냈다. 그런 모습을 본 소녀가 또 한 차례 까르르 웃었고. 그것이 종리연이 기억하는 그녀와의 만남의 전부였다. 그날 이후로 종리연은 그녀와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영령이 그에게 연정을 품기 시작했단 말인가?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 이것 보시오 낭자!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오?"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종리연이 반문했다. "제 정신은 말짱하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공자님을 따라갈 생각을 하겠사옵니까?" "도대체 날 따라나서서 무엇을 할 셈이오?" "......." 종리연이 이렇게 되묻는 순간 영령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어서 장원으로 돌아가시오. 보아하니 장 주인께 한 마디 말도 없이 빠져나온 모양인데...... 그건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오. 그리고 나로서는......." 종리연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나는 여인네의 사랑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오." 그때 영령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녀의 두 눈이 초롱하니 빛났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공자님께서 걸음걸이를 연습하시는 까닭을 소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여인들을 사로잡기 위한 까닭이 아니옵니까? 그러나......." 영령은 잠시 입을 다물었으나 마침내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어차피 물은 엎질러졌다는 이판사판이라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 공자님의 그 보법은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는커녕 오히려 여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기에 꼭 알맞은 것입니다." "......!" 종리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영령은 계속 숨가쁘게 종알거렸다. "어찌 영준하고 순수한 공자님께서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하여 뭇 여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려 하시옵니까? 부탁이오니 제발 그리하지 마옵소서. 오직 소녀의 연정으로 만족하시고......." 영령은 말을 하다 말고 흘깃 종리연의 눈치를 살폈다. 느낌이 이상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듯 종리연의 표정은 똥을 밟은 형상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영령은 자신이 이야기를 잘못 꺼냈음을 직감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갈 작정은 아니었던 것이다. 종리연이 어디를 가든지 그이의 곁에 따라다니며 사랑을 받고자 했다. 아니 사랑은 받을 수 없을지라도 그이의 곁에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말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넘지 않아야 할 선까지 넘어버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요...... 용서하시와요. 소녀 제 정신을 잃어 공자님께 실언(失言)을 하고 말았습니다. 으흐흑!" 바로 그때였다. "으하하하......!" 영령은 종리연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종리연의 음성이 영령의 귀를 파고 들었다. "맞소. 그건 낭자의 실언이 아니오. 낭자가 보기는 바로 보았소. 내 보법은 천하의 여인들을 홀리기 위한 것이오." "......!" 이번에는 영령이 멍해졌다. 종리연은 계속 말했다. "낭자가 내게 연정을 품었다고는 하나 나는 천생이 한 여인으로서는 만족하지 못하도록 태어났소. 그런 내가 어떻게 낭자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소?" 종리연은 영령이 듣거나 말거나 계속 얘기했다. "내 비록 보법을 시전하다가 천하 여인의 조롱거리가 될지언정, 그것이 내게는 더 어울리는 삶이 될 것이오. 그러하니 낭자는 마음을 돌려먹고 장원으로 돌아가시오. 기다리다 보면 나보다 더욱 영준하고 성실한 사람을 만나게 될 터이니......." 말을 마친 종리연은 영령을 비켜나서 걸음을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영령은 쓰러지면서 종리연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것이었다. "아니 되옵니다! 제발 소녀를 버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공자님이 어디를 가시던지 곁에 있게만 하여 주신다면 소녀 성심껏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종리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야흐로 스승의 명을 받들어 사성녀 중의 첫번째인 방의경을 만나러 가는 첫 길목에서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물론 생각 같아서는 영령을 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지금 당장 영령을 취하였다가는 사성녀는커녕 보법의 보(步) 자도 제대로 실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일이 그렇게 된다면 종리연으로서는 삶의 가치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또한 그것은 종리연의 삶 뿐만이 아니라 중원 무림계에 엄청난 불행을 몰고 올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오로지 사성녀 이외에 어떤 여자도 마음에 두지 않았던 종리연은 차디차게 영령의 손길을 뿌리쳤다. "이 손을 놓으시오! 사내 대장부가 큰 뜻을 품고 천하의 여인들을 홀리려고 하거늘 일개 소녀가 어찌 대장부의 큰 뜻을 막으려 한단 말이오." 뜻밖에도 얼음같이 싸늘한 음성이었다. 종리연의 돌연한 변화에 잠시 넋을 잃은 영령이 흘깃 바짓가랑이를 놓았다. 바로 그 순간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순간에 종리연이 10장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빛처럼 빠른 보법이었다. 영령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오.....! 공자님!" 넘어진 채로 영령은 탄성에 가까운 놀라움을 표시했다. 환영분광보법(幻影分光步法)! 종리연이 영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전한 보법은 바로 환영분광보법이었다. 환상적인 그림자가 빛을 가르듯이 걸어나가는 보법이었다. 그것은 조화 18보의 가장 기초적인 보법이었으나, 종리연은 지금까지 그것을 시전하려고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기에는 그처럼이나 빠른 보법은 일말의 사용가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령은 정말이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종리연은 그녀의 시야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오오! 정말 대단하신 분이로구나. 내 기어코 저분의 사랑을 받아내고 말리라." 종리연이 사라진 곳을 향해 영령은 일어날 생각도 않고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하오방(下午幇). 일명 하오문(下午門)이라고도 불리우는 단체. 그들은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썩은 도배(徒輩)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기 일쑤인 무리들이었다. 그것은 하오방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건달이거나 파락호, 사기꾼, 떠돌이 약장수, 또는 도박사나 도적(盜賊)들 따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하오의 부류들이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방대한 조직을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호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로써 무림계의 인물들마저도 모르고 있기가 일쑤였다. 사성녀의 하나인 방의경은 바로 그 하오방의 방주(幇主)였다. 만일 방여경으로부터 방의경의 소재지를 알아내지 못했다면 종리연으로서는 그녀를 찾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야 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지금 종리연으로서는 방의경을 만나기 위해 나룻배에 몸을 싣고 있었다. "......." 낙수의 푸른물을 바라보며 종리연은 쓸쓸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바로 이 낙양 근처에서 만났던 의형(義兄) 남궁환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담간랑이라는 치욕스런 외호로 불리웠을 때, 남궁환인은 그를 배타하지 않고 의형제로 맺어 주었을 뿐더러 아낌없이 정을 주었던 것이다. '형님......! 형님의 유언을 받들어 제가 다시 이곳에 왔습니다. 이 동생 기필코 형님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종리연은 뱃전을 스치며 흘러가는 물살을 내려보며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뱃전이 심하게 흔들리며 몸이 한 쪽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종리연은 고개를 돌려 원인을 찾다가 눈을 크게 떴다. 나룻배의 선미(船尾) 부분에서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용서해 주십시오! 나리들....... 이 아이만은 제발......." 강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노인의 음성은 간절하기만 했다. 보니, 칠순노인의 옆에는 16, 7세 가량의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바로 4인의 험상궂게 생긴 장한들이 소녀를 희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낄낄......! 이리 오너라! 어르신네들이 널 즐겁게 해주겠다는데 왠 앙탈이냐?" 수염이 덥수룩한 흑의장한이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오......!" 노인이 결사적으로 그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장한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노인은 비명과 함께 고물 쪽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 반동으로 나룻배가 또 한차례 뒤집힐 듯이 출렁거렸다. 노인의 얼굴은 금새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흐흐흐......! 이리 오라니까. 어여쁜 아가씨." 장한은 동료 3인이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더욱 흥이 나는지 덥썩 소녀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아악...... 살려 줘요!" 소녀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연약한 소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객들은 눈을 멀뚱히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볼 뿐 아무도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 4인의 장한들이 워낙 험상궂게 생겼을 뿐더러 그들의 소매에 난 독특한 표식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한들의 표식은 바로 황하 36채(黃河三十六寨)의 독문표식이었다. 지금은 강호를 공포에 떨게 하는 삼패천의 조직으로 변모한 수채의 표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선창에는 몇몇의 무림인이 보였으나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털투성이 장한은 소녀의 몸을 끌어당기자 거칠게 손을 그녀의 가슴 속으로 쑥 집어 넣었다. "헤헤헤...... 제법 익었는걸?" 소녀는 너무나 공포에 질린 나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종리연은 분기가 치솟았다. '연약한 소녀를 중인환시(衆人環視)에 희롱하다니.......' 그는 입술을 깨물며 뱃전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였다. "흥! 인간 쓰레기들 같으니라구......!" 지극히도 차가운 여인의 음성이 강바람을 가르며 이물(船頭) 앞에서 들렸다. 그리고 뱃전을 타고 앞으로부터 한 명의 검사(劍士)가 걸어 나왔다. 놀라운 것은 전신에 흑삼(黑衫)을 입은 검사는 남자가 아닌 여인이라는 것이었다.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등뒤로 넘긴 여검사(女劍士)였다. 싸늘했다. 마치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것같은 얼굴은 냉기 그 자체였다. 자세히 보면 그녀의 용모는 절세미인이었으나 너무나 차가운 표정과 한성(寒星)같은 눈빛 때문에 도리어 으스스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녀의 키가 육 척(六尺)이나 된다는 것이다. 일개 여인의 키가 왠만한 장부의 키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씬한 체격은 묘한 육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등 뒤에 장검(長劍)을 메고 있었다. 그 장검의 길이만 해도 능히 5자가 넘었다. "헤헤......! 이건 또 뭐야? 호오...! 이거 멀쩡한 계집 아냐?" 3인의 장한은 몹시 흥미가 당기는 눈치였다. "와핫핫핫! 계집이 검을 차고 사내 흉내를 내다니....... 낄낄낄! 오늘은 참으로 재수가 좋은 날이로구나. 한꺼번에 두 계집이라니! 이년 겉 모습은 이래도 벗겨 놓으면 아주 쓸만해 보일 것같은데?" "흐흐......! 장형, 이 계집은 내가 먼저요."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순간이었다. "으아악!" 나중에 음탕한 말을 흘리던 세모꼴 눈의 장한은 무엇인가 번쩍 하는 것을 느꼈을 뿐인데 수급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촤아아악......! 선혈이 분수처럼 치뻗었다. 그는 어이없게도 고혼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억......!" 나머지 3인의 장한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그녀의 무공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목숨이 위급하면 피해 갈 줄 아는 것이 진정 현명한 사람의 행동이거늘 3인의 장한들은 그리 현명한 편이 못되었다. 똥통 속에서 생활하던 똥파리들은 똥통 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감히...... 네 년이.......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냐? 여기는 본 삼패천의 관할......." 그러나 그렇게 말한 자의 운명도 먼저 세모꼴 장한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 검광이 번쩍한 순간 처절한 비명이 강바람을 가로지르며 퍼져나간 것이다. 여검사의 단 일획에 그의 허리는 절단이 나버리고 말았다. "으아악......!" 남은 두 명의 장한들은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동시에 낙수로 뛰어 들었다. 더 상대해 보아야 승산은커녕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날리기 안성마춤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풍덩!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하여 물로 뛰어들었다. 다행인 것은 여검사가 더이상 그들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애당초 검을 뽑지도 않은 듯 처음 그 자세 그대로였다. 다만 냉정한 눈으로 바닥에 누워 있는 두 구의 시신을 바라보더니 발로 툭 찼다. 그러자 두 구의 시신은 아주 가볍게도 물로 날아가 빠졌다. 간단히 시신을 처리하는 모습에서는 도저히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장한에 의해 맞아 기절하였던 노인이 엉금엉금 기어 오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구......! 정말 감사하오. 여협...... 선인님......!" 그러나 여인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돌아섰다. 애초부터 그녀에게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해 보였다. 한편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종리연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녀야말로 사부가 일러주던 사성녀 중의 하나가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틀림없는 그녀다. 오오......! 이 자리에서 사성녀를 만나게 되다니, 이것이야말로 정녕 하늘의 도우심이리라.' 정말 뜻밖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꿈에도 그리던 사성녀의 하나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었다. 여인은 노인의 인사를 무시하고 아까의 제 자리로 돌아가 앉고 있었다. 앉을 때 등에 메었던 장검을 가슴 쪽으로 옮겨 세운 것을 제외하고는 석상이 된 듯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틀림없다. 틀림없이 그녀다. 마검성녀(魔劍聖女) 단리사영(段里沙英)......!' 종리연은 마음이 달아 올랐다. 정말이지 우연히 그녀를 만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 짰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 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더욱이 방금 전 본 마검성녀의 가공할 검공에 종리연은 기가 질린 상태였다. '어떻게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 종리연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런데....... 얼마가지 못해 그의 생각은 단절되고 말았다. "수...... 수적(水賊)이다!" 뱃전이 떠들썩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황하 36채의 깃발을 단 한 척의 커다란 배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뱃전에는 수십 명의 무사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멈추어라!" 저쪽 뱃전에서 누군가가 우렁찬 음성으로 외쳤다. 종리연은 어떻게 된 것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얼마 전 물 속으로 뛰어들었던 두 명의 장한의 모습이 그쪽 배에서 보인 것이다. 그들이 동료들을 이끌고 마검성녀를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마검성녀는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곧 그녀는 뱃전으로 걸어갔다. 쏴아아! 강바람이 그녀의 흑삼을 날리고 하나로 묶은 머리칼을 휘날리게 했다. 그 모습은 아름답기보다는 아주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녀는 맞은편 배를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좀도적들 같으니....... 그래, 네 놈들이 나를 찾는 것이냐?" 그녀가 뱃머리에 서자 저쪽 배에서 두 명의 수적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보였다. "저 계집이오! 채주(寨主)! 저 년이 바로 동료를 둘이나 죽인 년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휘익! 마검성녀 단리사영의 신형이 강물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이쪽 배와 저쪽 배의 간격은 10장이 넘었다. 그런데 단숨에 그녀는 그쪽 배로 날아간 것이었다. 종리연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저쪽 배로 떨어진 순간 벌어진 가공할 활극(活劇)을! "으아아악!" "크아악!" "켁......!"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검성녀 단리사영은 수적들에게 뛰어들자마자 인정사정 보지 않고 장검을 휘둘렀다. 번쩍! 번쩍! 검광이 춤추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검광이 춤을 출 때마다 무더기로 수급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살아 도망온 두 명의 수적들이 그들 전체의 궤멸을 가져다 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치 못했다. 물론 살아 돌아갔던 두 명의 장한은 제일 먼저 고혼이 되어 물고기의 밥이 되었다. 단리사영의 검공은 가히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수적들은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배의 인원은 전멸하고 말았다. 애당초 종리연은 수적들이 나타나자 자신에게 기회가 생겼다고 좋아했었다. 즉 여인을 도와주면서 접근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일시에 공염불이 되었다. 단리사영은 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짧은 시간 안에 혼자서 깨끗이 수적들을 쓸어 버린 것이었다. 도적들을 소탕한 단리사영은 다시 이쪽 배로 날아왔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자리로 가 앉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옷자락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과연...... 과연...... 마검성녀다!' 종리연은 속으로 소리쳤다. "저......." "저어......." "잠시만......." "......." 벌써 열일곱 번째였다. 종리연은 단리사영에게 말을 걸어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바람에 머쓱해져서 물러나곤 했다. 그러나 종리연도 끈질긴 데가 있는 위인이 아니던가? '내 사전에 실망이나 실패란 단어는 없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번 부딪쳐 보는 거지! 제기랄! 실패하든 성공하든 사나이 목숨 오직 한 번 뿐인 것이니.......'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한 채 걸어가고 있는 단리사영의 뒤를 열심히 따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일언반구(一言半句)의 대화도 통하지 않는 이토록 괴상한 동반은 배가 강언덕에 닿고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 시각 이후로 종리연은 단리사영을 한눈 팔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마치 주인을 충실히 따르는 충견처럼. 단리사영은 그저 힐끗 그를 한 번 쳐다 보았을 뿐, 다음부터는 아예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길이 좁아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낙양성 근처의 하늘에 붉은 빛 노을이 깔리더니 어느새 짙은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바야흐로 낙양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다. 종리연의 말에는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단리사영은 마을이 나타날 기미를 보이자 방향을 바꾸어 길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들어섰다. '......?' 종리연은 의아했으나 계속 따라붙었다. 마침내 걸음을 멈춘 여인이 자리를 잡고 앉은 곳은 낙양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어느 산등성이었다. '참으로 매서운 눈을 가지고 있구나.' 종리연은 새삼 여인의 안목(眼目)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리를 잡고 앉은 곳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천혜의 요새였던 것이다. 여인은 자리를 잡고 앉더니 등에 멘 보자기를 끌렀다. 그리고는 화섭자를 꺼내어 모닥불을 피우는 것이었다. 모닥불이 보기 좋게 타오르자 그녀는 무엇인가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건량(乾糧)의 일종이었다. 고기를 얇게 저민 후 음지에서 바짝 말린 종류의 이런 건량은 오래 씹을수록 영양이 잘 흡수되고 열량도 풍부했다. 단리사영은 언제나 객점의 음식을 피했다. 그런 음식은 그녀의 체력유지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필요로 하는 음식이란 양이 작고 열량이 많이 나며 간단히 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평생 검도(劍道)에 몸을 바친 그녀로서는 불필요한 것들로 인해 시간을 빼앗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리연은 그녀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저....... 실례 하겠소이다." 그러나 여인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단리사영 앞에서 그는 언제나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그녀가 철저히 그를 무시하고 있는 데에는 별다른 수가 있겠는가? 종리연은 낭패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형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 보아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여인은 문득 그를 바라보았다. 여인의 싸늘한 눈빛을 접한 순간 종리연은 으스스한 한기(寒氣)를 느껴야만 했다. 싸늘한 눈빛이 풍기는 한기는 종리연으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천리 밖으로 달아나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한 번 부딪쳐야 하는 일이 아닌가?' 종리연은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저어...... 실례......." 그는 또다시 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의 싸늘한 눈빛이 계속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용기를 내고 말았다. "나...... 난 종리연이란 사람이오." 그러나 여인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도대체가 숨이라도 쉬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종리연의 온몸에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긴장(緊張) 때문이었다. 차라리 아까처럼 여인이 그를 못본 척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의 눈에 포획이라도 당한 듯이 그는 팔 하나를 올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얼어 있는 상태였다. 곤욕스럽기 그지 없는 순간이었다. 종리연은 내처 땀만 흘릴 뿐이었다. 마치 뱀의 시선 안에 가두어진 먹이처럼 말이다. 한동안 종리연을 응시하던 여인이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바로 그때였다. 종리연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 것은. 11 하오방주(下午幇主) "나와 결혼해 주시오!" "......!" 여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종리연의 말에 그녀는 한동안 정신이 멍한 듯 말도 못한 채 종리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편 종리연은 더더욱 멍청한 표정이었다. 조금 전 스스로조차 예기치 않았던 엉뚱한 말을 뱉어 낸 다음이었다. 등허리에서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실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막상 자신이 무슨 말을 떠벌렸는지를 깨닫는 순간 종리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행여 단리사영이 그 긴 장검으로 자신의 목을 날려 버리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러나 단리사영은 곧 애초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이어 담담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이나 눈동자 그 어디에서도 감정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것이 더욱 종리연으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하는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기왕 내친 걸음이었다. 종리연은 몸을 일으켰다. "......?" 그가 갑자기 일어서서 앞으로 다가가자 단리사영은 비로소 차가운 눈에 의아한 빛을 띄웠다. 그런데....... 이건 또 한 번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느닷없이 종리연이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말을 단리사영은 들어야만 했다. "결혼해 주신다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소!" 무릎을 꿇은 종리연이 단리사영에게 한 말이었다. 정말이지 기절초풍하도록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였다. 단리사영은 순간적으로 반응을 보이긴 보였다. 피식......! 놀랍게도 영원히 보이지 않을 것같은 웃음을 그녀가 희미하게나마 보인 것이었다. 눈칫밥이라면 절간에 가서도 비린 생선을 얻어먹을 종리연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희미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녀의 웃음을 이끌어 내는 것에 성공한 종리연은 용기를 얻었다. 어쨌든 무표정하고 싸늘하기가 칼날 같았던 단리사영이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정말이오. 뭐든지 하겠소. 설사 불 속으로 뛰어들라면 뛰어들고...... 팔 하나를 자르라면 자르겠소. 그러니 제발......! 나랑 결혼해 주시오." 그러나 잠시 희망을 느끼게 했던 여인의 얼굴은 어느샌가 또다시 본연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실패다!' 종리연은 급해졌다. 그는 얼른 일어나 이번에는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곳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다시 사정하기 시작했다. "제발 나와 결혼을 해 주시오. 그러면......." 두 번 다시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단리사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단리사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몸을 일으켰다. "낭자......!" 종리연은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그녀의 소매를 붙잡았다. 바로 그 순간, 번쩍! 그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검광이 날아온 것이다. "으악!" 종리연은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려하던 사태가 현실적으로 벌어지고야 만 것이다. '이젠 죽었구나......!' 최후의 생각을 떠올리며 종리연은 눈을 감아 버렸다. 선상(船上)에서 보았던 단리사영의 검술이라면 자신의 목이 백 개가 있어도 살아날 가망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목숨이 떨어졌다면 분명히 오감이 사라져야 할 터인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가슴이 서늘한 것을 느낄 수가 있다니....... 그렇다면 내 목숨이 아직 붙어 있다는 이야긴가? 아니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서 염라대왕이 날 돌려보낸 것일까?' 부시시 눈을 뜬 종리연은 일어나서는 자신의 앞가슴을 살폈다. 그렇다. 가슴 옷자락이 예리하게 잘려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종리연은 새삼스럽게 단리사영을 바라보았다. 단리사영은 그를 죽일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았다. 단지 검으로 위협을 주기 위해 옷을 벤 것 뿐이라고 종리연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단리사영의 일획에 그가 살아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여인의 등에는 여전히 검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아니 아예 뽑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윽고 단리사영이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더이상 귀찮게 굴면 용서하지 않겠다." 그 말을 끝으로 단리사영은 어둠이 짙어가는 산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 돼......!' 종리연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혹 죽는 한이 있어도 사성녀를 얻어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가 아니던가. 그것이 바로 사형의 죽음에 속죄하는 길이며, 사부의 영령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종리연은 서둘러 단리사영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저도 모르게 신형을 날린 것이었다. 그런데 종리연이 자신도 모르게 시전한 유성추월(流星追月)이라는 신법은 너무나도 빠른 것이어서 그는 어느새 단리사영을 앞지르고 있었다. '아차차......! 실수닷!' 종리연은 급히 걸음을 틀어 각도를 바꾸었다. 그 순간에 단리사영의 얼굴이 코 앞으로 확대되어 다가왔다. "으아아악......!" 그는 자신의 걸음에 제동을 거느라고 상체를 뒤로 잡아당기며 발에 힘을 주었다. 바로 그 순간에 여인이 정말로 검을 뽑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으악!" 쏴악! 어둠을 가르며 한 줄기 검광이 종리연의 안면을 갈랐다. 종리연은 눈이 멀어버릴 듯한 현란한 광채를 느끼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종리연이 정신을 차린 것은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 때문이었다. '여...... 여기가 어딜까? 내가 말로만 듣던 저 세상에 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곳은 모든 이치(理致)가 거꾸로 도는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그의 시선에 보이는 모든 것이 거꾸로였다. 하늘과 땅이 거꾸로 서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무도, 바위도, 하다못해 어둠을 밝히고 있는 창공의 은하수도 거꾸로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리연이 저세상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이 허공에 떠 있는 까닭이었다. 즉 온몸이 밧줄에 묶인 채 나뭇가지에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것이다. 단리사영이 그를 묶어 나무에 매달아 둔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아 묶인 몸뚱아리가 저려왔기 때문이었다. "후우.....!" 종리연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살아 있군. 난 또 내가 저 세상에 있는 건지 알았지." 그리고 그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째서 나는 하는 일마다 이 모양일까?" 스스로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종리연은 곧 하늘의 별 하나를 응시하더니 무어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참으로 기이쩍은 일이 일어났다. 스스스......! 그의 몸이 서서히 응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후 그는 몸이 반으로 줄어 간단히 밧줄 속에서 빠져나와 땅으로 가볍게 내려섰다. 만일 누군가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매우 놀랐음에 틀림없었으리라. 종리연이 올가미에 걸린 몸을 빼낸 수법은 일반적인 축골공(縮骨功)과는 차원이 다른 부광약영술(浮光掠影術)이라는 것이었다. 바닥에 내려선 그는 여인이 사라졌음직한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할 수 없지. 우선은 하오방으로 가는 수밖에......." 그는 낙양을 향해 칠흑처럼 짙어진 밤길을 터덜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장인(匠人)이 옥(玉)을 깎은들 이리 고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천하 미여인의 손이 본시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어딘가에는 반드시 결함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탁자에 가득 쌓여 있는 서류를 뒤적이고 있는 손은 완벽하기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었다. 그 손의 주인 또한 아름답기로 치자면 둘째 가라고 해도 서러워할 정도였다. 여인은 호사스런 취미를 갖고 있었다. 여인이 앉아 있는 의자만 해도 각종의 보옥(寶玉)이 촘촘이 박혀 있는 것이다. 탁자도 진귀한 단향목(檀香木)으로 짠 것으로 값비싼 고급품이었다. 서류로 사용하고 있는 종이의 질도 황궁(皇宮)에서나 쓰임직한 상등품이다. 가만히 둘러보면 대전의 장식들도 매우 신경을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유일하게 여인이 장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몸 뿐이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여인의 몸 자체야말로 가장 고귀한 특품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만일 다른 장식을 첨가한다면 도리어 물건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 틀림없다. "방주님. 방문객이 오셨습니다." 여인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한 켠으로 밀고 다른 서류를 집어들 때였다. 누군가 문 안으로 들어서며 여인의 행동을 방해했다.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약간은 오만하게 느껴지는 눈이 보고자를 쏘아보았다. "방문객? 굳이 나에게 보고할 정돈가요?" 보고자는 4순 가량의 중년이었다. 그는 진중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봉황옥잠(鳳凰玉簪)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말에 여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놀란 것이 분명한 표정이었다. 새빨간 입을 앙다물고 잠시 생각하던 여인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를 주작전(朱雀殿)으로 안내해요." "속히 거행하겠습니다." 중년인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음......! 봉황옥잠(鳳凰玉簪)을 가지고 왔단 말이지? 그렇다면....?' 알듯모를듯 중얼거린 여인이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흑단처럼 검고 부드러운 머릿결이 춤을 추듯이 일렁거렸다. 뿐만 아니었다. 언뜻 보아도 굴곡이 뚜렷한 참으로 빼어난 몸매를 여인은 가지고 있었다. 주작전으로 안내된 종리연은 어리둥절 할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었다. 그곳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으리으리했다. 처음 하오방을 찾아 그가 들어온 곳은 낙양 교외에 있는 폐장원(廢蔣院)이었다. 그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규모만 덜렁하니 큰 곳이었으나 초라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마치 폐가처럼 대문 안으로도 잡초가 무성했다. 그런데 주작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종리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작전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던 것이다. 그때였다. 한 명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일신에 자의(紫衣)를 입은 여인으로 이십 대 미녀였다. 한눈에 그녀가 바로 하오방주 방의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방여경과 흡사한 용모 때문이었다. "으음......!" 처음 그녀를 보는 순간 종리연은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취해야 하는 여인이 너무나도 오만하고 고결하게 보인 까닭이었다. 종리연이 일시에 주눅이 들 정도로 방의경은 오만하게 생긴 것이었다. "당신인가요? 여경의 옥잠을 가지고 온 사람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방의경은 차갑게 물었다. 상대방을 쏘아보는 눈길 속에는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동생의 신표(信慓)를 가지고 왔으니 그나마 만나주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어림도 없을 성싶었다. "그...... 그렇소." "용건은? 동생이 보내서 왔나요?" "그...... 그렇소, 아...... 아니오." 종리연은 갈팡질팡했다. "......?" 방의경의 얼굴에 의혹스런 표정이 스쳤다. 방금 전에 그렇다고 했다가 또 아니라는 것은 뭔가? 그녀의 눈살이 찡그러졌다. "무슨 뜻인가요?" "여......, 여 낭자의 부탁도 있었고....... 또 내 스스로 오기도 했소." 방의경은 짜증이 울컥 솟았다. 보도듣도 못한 청년이 처음부터 정신 산란하게 만드는 것에 화가 치민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꾹 참았다. 자신이 죄의식을 지니고 있는 동생이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면 벌써 손이 날아가도 골백 번은 날아갔을 것이다. "대체 무슨 말이에요?" "나...... 나는......." 종리연은 내처 떠듬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스스로에게 아무리 긴장을 풀자고 골백 번을 다독거려도 이상하게 소용이 없었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가 생각해도 갑갑할 지경인데 남은 오죽하겠는가. 더이상 참지 못한 방의경이 선수를 쳤다. 다짜고짜 종리연을 내치지 않은 것은 일말의 동정심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가 묻겠어요. 여경은 잘 있나요?" "무...... 물론......! 그러나 약간은 이상하고 몸은 건강하오." "......?" 방의경은 그야말로 화가 치밀고 있었다. 사실 종리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방여경은 건강하지만 그녀가 백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단단히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가짜로 미친 척한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한편 방의경은 도대체 이 멍청한 위인을 동생이 보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보낸 이유도 짐작할 수 없었다. '많고 많은 인물 중에 하필이면 이런 위인인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으나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여경과 어떤 사이죠?" "아무 관계도 없소." 처음으로 똑똑하게 대답하는 종리연이었다. 방의경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아무 관계도 없다......? 좋아요. 그럼 이곳에 온 것은 무엇 때문이죠?" 종리연은 비로소 본론에 도달하게 되자 기쁜 듯 히죽 웃었다. "당신과 결혼하기 위해서요." "......?" 방의경은 멍해졌다. 그녀는 설마 상대방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너무나 어이없어 그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서. "지, 지금 뭐라고 했죠?" "결혼을 하러 왔다고 했소. 바로 당신과!" 종리연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여...... 여경이 그렇게 하라고 했나요?" "물론이오. 뿐만 아니라 나도 그렇게 할 생각이오." 방의경은 머리가 혼란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곧 자신이 놀림을 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벌컥 화를 냈다. "너...... 지금 감히 날...... 희롱하는 거냐?" 바르르 눈썹을 떨며 분노하는 그녀의 태도는 도리어 종리연이 볼 때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리연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소? 나의 말은 진심이오. 나와 결혼해 주시오." "......!" 종리연의 너무나도 멀쩡한 태도에 방의경은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호호......!" 기가 막히다 못해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여인은 종리연의 표정을 보고 그가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천하에서 가장 오만한 여인으로 불리우는 자신에게 그렇게 어리숙하게 청혼을 하는 사내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문득 그녀는 장난스런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이, 도리어 그를 봐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여경이 이 사람을 보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옥잠은 그 아이가 죽기 전에는 내놓지 않는 것이니. 그렇다면 정말 이 사람의 말대로 여경은 날 이 사람과 결합케 할 생각이란 말인가?' 그녀는 종리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멍청한 것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봐요. 내 말을 잘 들어요." 종리연은 엄숙하게 말했다. "세이경청 하겠소이다." 그의 선비같은(?) 태도에 방의경은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웃음을 지었다. "나도 여자에요. 언젠가는 혼인을 해야 할 몸이에요. 그러니 결혼을 하는 것에는 이의를 달지 않아요. 그러나 내 위치가 위치니 만치 함부로 아무하고나 혼인을 할 수는 없어요. 그러므로 여러 가지 조건을 구비한 남자에게만 시집을 갈 수 있어요." 종리연은 엄숙하게 말했다. "방법을 알려 주시오. 내 목을 걸고서라도 당신과 결혼을 하겠소." 방의경은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비록 정신병자같은 사나이 이긴 했으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신과 혼인을 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싫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첫째, 반드시 하오문(下午門)의 인물이어야 해요. 둘째는 공(功)을 세워야 하며, 셋째는 타문도의 신망을 얻어야 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누가 뭐래도 내 마음에 들어야 해요." "......." 종리연은 깊은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이윽고 그는 가슴을 펴며 말했다. "좋소. 그 조건에 맞도록 한 번 경주해 보겠소.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하오문에 가입하겠소이다." 웃어야 옳을지...... 아니면 울어야 할 지...... 방의경은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는 기분이었다. "조... 좋아요. 그럼 당신은 오늘부터 하오문도에요." 그녀가 손뼉을 치자 곧 한 명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이 사람을 데려가요. 그리고 아무 단(團)이나 입단시키세요." "......!" 중년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묻지는 않았다. "따라 오시오." 종리연은 미련없이 자리를 일어섰다. "잠깐!" 방의경의 부름에 문턱을 넘어서던 종리연이 돌아섰다. "혹시...... 당신은 어릴 적에 머리가 아픈 적이 없었나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근심된다는 표정으로 방의경이 물었다. 12 흑막(黑幕) 대전(大殿). 중앙에 거대한 석탁(石卓)이 있고 석탁을 둘러싸고 12인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다른 조직체와는 달리 하나 특이한 것이 있다면, 모여 있는 그들의 복장이 모두 각양각색이라는 점이다. 늙은이, 젊은이, 노파, 중년인....... 조금의 눈썰미라도 가진 인물이 대충 일별해 보면 시정의 온갖 잡배들이 모인 것으로 여길 것은 틀림없는 것만 같았다. 그런 판단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들은 도박사, 점장이, 건달, 사환, 광대패, 사기꾼 따위의 인물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바로 하오문(下午門)의 부류들이었다. 틀린 것이 있다면, 일개 떠중이 무리들 속의 개개인이 아니라 12단주(十二團主)라는 신분을 가진, 무리들을 통솔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석탁에서 조금 떨어진 상단에는 구슬이 박혀 있는 태사의가 있었다. 태사의에는 아름다운 이십 대의 미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바로 하오방주 방의경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높은 자리에 앉았다. 천성적으로 배어버린 그녀의 오만하고 도도한 기운은 높은 자리를 한결 돋보이게 만들었다. 타인에게 멸시받고 천대받는 무리들인 하오문을 오늘날 전 중원에서 가장 방대한 조직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그녀의 선대(先代)였다. 방주의 지위를 물려 받은 그녀가 도도하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반발하는 자는 일인도 없었다. 그녀는 차갑고 오만한 시선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어느 틈엔지 도박사(賭博士)로 보이는 중년인이 일어나 보고를 시작했다. "보고 드립니다. 삼패천(三覇天)의 힘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 않아 전 중원이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입니다." "......." 방의경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다행히도 아직은 본방과 정면 충돌을 한 적은 없습니다만,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보건데 우리 측에서도 대비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 중년인의 말에 이어 이번에는 장사꾼 차림의 노인이 일어섰다. "염업(鹽業) 장사를 하는 조직으로부터 흘러 나온 말에 의하면 그들은 최근 들어 각종 상권(商權)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고 합니다. 조만간에 우리 쪽의 사업에도 그들의 손이 뻗쳐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듣고 있던 방의경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잘 알았어요. 저에게도 생각이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주로 본 방의 조직을 강화하고 문도들을 단속하는데 최선을 다해 주세요.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알아서 하겠어요." 12인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기실 처음 방의경이 하오방을 맡았을 때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었다. 보다 경험이 많은 인물이 방주( 主) 자리를 맡아주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없었다. 그만큼 방의경은 놀랄 만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오방의 결속은 나날이 더해갔으며, 사업 측면으로도 큰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모두가 방의경의 탁월한 지도력의 결과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방의경은 손을 흔들었다. "되었어요. 오늘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겠어요." 그러자 한 명의 청삼노인이 일어섰다. "방주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방의경은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알았다. 그녀는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로구나!' "알겠어요. 그럼 청담우사(靑潭羽士) 님만 남고 모두 자리로 돌아 가세요." 11인은 예를 표하고는 대전 밖으로 나갔다. 커다란 대전에는 이제 두 명만이 남게 되었다. 청담우사. 그는 나이가 68세로 하오문의 군사(軍師)격인 위인이었다. 그는 방의경과 단 둘이만 남게 되자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방주! 다시 귀찮게 하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더이상 시일을 지체해서는 안 될 것 같소이다. 하오문의 규칙상 혼인을 하지 않는 방주는 있을 수가 없습......." 청담우사는 말을 끊었다. 얼핏 본 방의경의 얼굴에서 차가운 빛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방의경은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누가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했나요? 다만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라고 했잖아요." "그러나 방주께서 마음만 먹으신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찾을 수는 있을 것 아닙니까?" 청담우사도 지지 않았다. "흥! 누가 우사님의 뜻을 모를 줄 알아요? 현재 청혼을 신청한 열 명의 청년 문도들 사이에서 고르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 그렇소이다. 허허......! 그들은 본문의 기재들로서...... 물론 방주와는 많은 차이가 있으나 그래도 개중 훌륭한 청년이 없는 것은......." "시끄러워요. 나는 그들 중 마음에 드는 자가 없단 말이에요." 방의경은 단호했다. 그런 방의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담우사는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길게 탄식했다. "아아......! 선대 방주님께서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방주님께서는 너무 고집이 강하십니다. 아무튼 더 시일을 끌다가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 방의경은 울컥 짜증이 났다. 평소 오만하고 도도하기로 이름난 방의경에게 마음에 차지도 않는 청년 중에 하나를 골라 서둘러 혼인을 하라는 청담우사의 간곡한 부탁은 지겹기만 한 것이었다. 물론 하오문의 법규상 방주는 방내 인물과 필히 결혼을 하여야 했다. 그것은 하오문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자 규칙이었다. 만일 다른 부류의 인물과 혼약을 할 경우 하오문의 고유성을 잃기 쉽기도 하거니와 만에 하나 잘못되는 경우에는 하오문의 존재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방의경도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혼인을 미루어 온 것은 자신의 눈에 차는 인물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처에서 헛소문이 나고 있었다. 그녀가 외부(外部) 명문가의 공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느니....... 아니면 하오문을 무시하고 있다는 둥, 소문은 끊이질 않고 방의경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한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혼인을 하는 것밖에는 딴 도리가 없었다. 그러한 해법(解法)을 뻔히 알면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방의경이야말로 더더욱 난처한 입장이었다. 최근 들어 방 내의 가장 쓸만한 청년 10인이 그녀에게 서류상으로 청혼을 했다. 방의경은 그들을 모두 보았으나 그 중 어느 누구도 마음에 드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미루고만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힘이 드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일은 제게 맡기세요. 제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요." "끌끌끌......!" 청담우사는 혀를 찼다. 그러나 더이상 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어느 정도 방의경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방주님 같은 기재의 눈에 들 만한 신랑감을 찾기는 힘들지.......' 청담우사가 나가자 혼자 남게 된 방의경은 의자에 몸을 묻고 생각에 잠겼다. 머리가 어수선했다. 문득 그녀의 뇌리에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확히 석 달 전 자신을 찾아와 느닷없이 청혼을 했던 청년의 얼굴이었다. 이상한 것은 청년을 본 지가 석 달을 넘기고 있는데 바로 얼마 전에 본 것처럼 그의 얼굴이 또렷이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방의경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본문에 입문한 지 한 달이 지났을 텐데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줄을 잡아 당겼다. "부르셨습니까?" 은은한 종소리가 울리며 시종이 들어와 부복했다. "가서 종리연이란 인물에 대해 알아 오도록 해요." 시종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일다경 후. 시종과 함께 온 것은 총관(總官) 하진령(夏眞令)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골머리를 싸매는 시늉을 했다. "아이구......! 말도 마십시오. 그놈 때문에 이만저만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닙니다." "......?" "마침 그 문제로 방주님께 상의를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죠?" 방의경은 강한 의문을 느꼈다. "처음에는 놈을 도방(賭房)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사흘 만에 자리를 옮겼습니다." "아니...... 왜죠?" "말도 마십시오! 놈이 그만 도박으로 은자 육만 구천 냥이나 잃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덤벼들기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도박장의 문을 닫을 판국이었습니다." 방의경은 어이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본방이 운영하는 대회루(大會樓)에 사환으로 넣었는데 글쎄......." 너무나 기가 막히다는 듯이 하진령은 다시 이마를 짚었다. "놈이 그동안 깨뜨린 접시며 망친 음식의 값만 해도 엄청난데다 단골손님들이 끊겨 할 수 없이 그곳에서도 일 주일 만에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습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글쎄 말도 마십시오. 놈은 여자손님만 오면 환심을 산답시고 그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오락가락하는 통에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 "세 번째로 옮긴 곳은 점방(占房)이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나가 역시나 입니다." 그는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방의경이 계속 바라보자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점방이 4일 만에 문을 닫았으니까요." "......?" "오는 손님마다 흉살(凶煞)이니, 역마살이니, 사신(死神)이 내렸다느니 하고 말해주었으니 어찌 손님이 들겠습니까?" 방의경은 정말 기가 막혔다. "정말이지 방주님의 명이 없었다면......" 총관은 방의경의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덧붙였다. "놈을 벌써 작살을 냈거나 쫓아내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그 후로도 여러 번 자리를 옮겼으나 한 군데서도 며칠을 버티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 방의경은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웃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가끔씩 이렇게 불편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녀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지금 그는 어디있죠?" 총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아차......! 하필이면......." "......?" "빨리 가보아야 겠습니다! 놈이 갈 만한 곳은 순서상으로 투방(偸房)인데...... 지금쯤 아마 남의 집 담을 넘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엔 전보다 더 큰 말썽을......! 자칫하다가는 관가에 투옥되기 십상일 겁니다." 놀란 방의경이 상체를 들썩이며 소리쳤다. "그럼 어서 데려와요!" 아닌 게 아니라 그 시각에 종리연은 남의 집 담장 아래서 머뭇거렸다. 이미 동료들은 담장을 뛰어 넘은 후였다. "......." 그러나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런 일은 옳지 않은 짓이다.' 담장을 노려보면서 종리연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랬다. 처음부터 군자(君子) 자가 붙은 것을 좋아했던 종리연이 아니던가. 그래서 조화십팔보를 연습하면서도 특히나 군자보(君子步)를 집중적으로 연습하고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군자를 좋아하는 그였으나 양상군자(梁上君子 :도둑을 일컫는 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기 위해서 월담을 하는 것은 참으로 비열한 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얼른 넘어오지 않고?" 담장 위에서 동료들이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종리연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꾸물거렸다.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 심정을 이제서야 알 것만 같았다.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면 동료들을 배신해야 하고, 동료들을 배신하지 않으려면 그들처럼 담을 넘어야만 하는데....., 도대체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 지 정말로 막막한 심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때 멀리서 딱딱이를 치는 소리가 다가왔다. 그것은 순라꾼들의 소리였다. "빨리......." 담장 위에서 다급해진 동료들이 급히 재촉했다. 그러나 종리연은 땀만 흘릴 뿐 움직일 생각도 않고 있었다. 이때였다. "종리연!" 느닷없이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웬 구세준가 싶어 종리연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총관 하진령이었다. 그는 저쪽 골목길에서 그를 향해 다급히 손짓을 하고 있었다. "빨리 이리 오게!" 종리연은 흘깃 담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순라꾼들의 딱딱이 소리에 질겁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다가오던 총관이 월담을 못하고 있는 종리연을 맡아 주리라 생각했는지 동료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더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딱! 딱! 딱! 어느새 순라꾼이 골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종리연은 의젓하게 행동을 바꾸며 총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보는 사나이의 모습은 무척이나 초췌했다. 처음 볼 때와 달리 얼굴이 꺼칠하고 핏기가 없었으며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어 방의경은 아래로 걸음을 옮기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할 만 한가요?" 종리연은 대답대신 입술을 깨물며 고개만을 끄덕였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맺힐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오.' 이것이 실제로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동안 종리연의 행색을 살피던 방의경이 자리로 돌아가며 입을 열었다. "견디기 힘이 든다면...... 지금 그만 두어도 좋아요. 본래는 하오문에 입문한 이상 임의로 탈퇴할 수는 없으나 당신이라면 특별히 관례를 깨고 보내 드리겠어요." 십중팔구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방의경의 귓가에 뜻밖의 말이 메아리쳤다. "차라리 죽으라고 하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방의경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상한 기분을 맛보았다. 마치 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듯한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사나이의 진실된 마음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제자리로 걸어가던 방의경은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 섰다. 그녀의 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열리고 가지런한 치아가 보기 좋게 드러났다. "그렇게도 나와...... 혼인하고 싶나요?" "그렇소." 서슴없이 입을 여는 종리연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왜죠?" "당신이야말로 내 삶의 목적이기 때문이오." "목적......? 이유가 뭐죠?" "말해 줄 수 없소." "이유를 모르는 한 나는 결코 허락하지 않아요." 종리연은 흠칫하다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당신이 나와 결혼하면 말해주겠소." 방의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백 년을 가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에요. 그만 그 꿈에서 깨어나세요." 그러나 종리연은 완강했다. "아니오. 반드시 나와 결혼하게 될 것이오. 아니....... 꼭 해야 하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종리연은 내친 걸음이었다. 그는 비장한 음성으로 최후의 유언인 양 말했다. "나도 물론 죽겠지만...... 아울러 중원 무림도 끝장이기 때문이오." "......!" 마지막 말에 방의경의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중원 무림이 끝장이라는 말은 세상의 종말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방의경은 종리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어디에도 장난기라거나 실성기는 보이지 않았다. 방의경은 입술을 적시며 다시 물었다. '설마..... 저자가?' 하는 심정으로. "중원 무림이 끝장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좀더 자세히 말해봐요." "싫소! 결혼한 후에 말해 주겠소." "......." 종리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방의경은 그의 고집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리 물어도 그가 대답하기 싫다면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에서 오만하고 도도하기로 유명한 방의경이 이토록 변할 수가 있다니....... 그녀는 뚫어져라 종리연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리연의 눈빛에는 순박한 기운과 비장한 기운이 동시에 스며있었다. 그녀는 불현듯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어차피 결혼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면 차라리 이런 자와......'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어느틈엔가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한 번 그런 생각을 한 이상 그녀의 마음은 기이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녀의 뇌리에는 자신 때문에 불행해진 동생 방여경이 떠올랐다. 방여경은 자신 때문에 그렇게 자폐(自閉)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팠다. 당시는 당연하다고 한 일이었으나 지금와서 생각이 날 때마다 그녀는 자책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동생이 종리연을 보냈다는 것, 그것은 그녀로서는 거역하여 물리칠 수 없는, 어쩐지 숙명적인 느낌만 같았다.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는 배제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 마침내 방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뒤돌아 섰다. "좋아요......!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그러나 반드시 그 전에 거쳐야 할 관문이 있어요. 당신이 그 관문을 통과해야만 결혼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것은 하오문의 문도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종리연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 그 말 진심이오?" "저는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너무 좋아할 건 없어요. 어쩌면 당신은 그 일로 인해 죽을 지도 모르니까요." 엄포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기실 그가 통과해야 할 관문은 살아서 명계(冥界)를 통과해야 하는 것 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명계와 다른 것은 고통스러움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 뿐. "상관없소! 상관없소...... 나는 당신과 결혼하기만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소!" 크게 기뻐하는 종리연을 바라보는 방의경의 눈 속에서는 이상한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누각(樓閣). 폐장원에서도 별로 특이한 것도 없는 삼층 누각 안을 오락가락하는 노인이 있었다. 퀘퀘묵은 서적들로 가득차 있을 뿐인 누각을 오락가락하는 사람은 바로 청담우사 안빈(安彬)이었다. 안빈은 초조하게 실내를 배회하고 있었다. 가끔씩 한숨을 쉬고 인상을 찡그리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심사가 그다지 편치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허허......! 참!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해서 방주께서 그런 일을 하시려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로고!" 그랬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방주의 주도 아래. 지금 그 일 때문에 그는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듯이 가끔씩 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쯧쯧쯧......! 소식을 알아보러 간 사람은 왜 이렇게 늦는단 말인가?" 그때였다.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중년인이 들어섰다. 그는 바로 총관 하진령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안빈은 급히 물었다. "어찌 되었나?" 안빈과 같은 심정이었는지 하진령의 안색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다. 하진령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현재 제 사관(四關)에 돌입하였습니다." "아니......? 벌써?" 안빈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모르겠습니다. 삼관(三關)을 통과한 것은 저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 놈...... 아니 그자는 첫번째 관문인 도관(賭關)에서 연속 십팔승을 올려 황금 일백만 냥을 땄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그가 본문에 끼친 손해를 상쇄하고도 남는 액수입니다." 하진령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관(二關)에서는....... 사십 명의 미녀를 노예상인으로부터 싼 값에 거래함으로써 역시 통과했고요. 삼관은 하룻밤에 열 곳의 고관집을 터는 것이었는데 그 역시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안빈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그것은 도저히 그자가 해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닌데......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지......." 총관 하진령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글쎄 말입니다. 이런 상태라면 그가 아무래도 방주님의 낭군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하진령은 입을 다물었다. 안빈이 눈을 부릅떴기 때문이었다. "닥치게!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흑막이 있을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흑막(黑幕). 그랬다. 안빈의 지적대로 흑막이 있기는 있었다. 사실 방주의 신랑이 되기 위해 시험관문을 제시 받았을 때, 종리연은 눈앞이 캄캄했었다. 그는 첫번째 관문인 도박관에서부터 자신이 없었다. 도박이라면 문외한인 그가 어떻게 해서 백만 냥이라는 거금을 딸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는 연속 18승을 올린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방이 일부러 져주었던 것이다. 그와 상대한 자는 하오문 제일(第一)의 도박사인 도귀(賭鬼) 헌원륭이었는데 그는 하루 전날 방의경에게 불려갔다. 그리고 18판의 도박을 모두 져주었다. 그가 방의경에게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었다. 두 번째 관이야말로 종리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본래 노예상인들의 지독함은 유명하기로 천축국까지 알려져 있는 것이었다. 그런 노예상인들을 어리숙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종리연이 어떻게 요리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옛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길고 짧은 것은 직접 대봐야 한다는 명언(名言)은 정말 명언이었다. 종리연이 미녀 40인을 사기 위해 노예상인과 담판에 들어갔을 때, 노예상인은 뜻밖으로 헐값에 넘기는 데 수긍한 것이다. 이 이유도 알고 보면 참으로 간단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마누라를 납치 당한 노예상인이 누군가로부터 언질을 받았던 것이다. 세 번째 관문인 투관(偸關). 고관의 담장을 가슴 졸이며 넘었을 때, 종리연은 어이가 없었다. 왜냐면 고관의 집을 지키는 호장무사들이 모두 수면약을 먹고 곯아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순히 걸어서 금고를 털어 나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방의경의 보호하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종리연은 알지 못했다. 이제 종리연은 제4관에 들고 있었다. 그러나 4관 만큼은 녹녹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방의경으로서도 도와줄 수가 없는 관문이었다. 하오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공은 경신술(輕身術)이었다. 따라서 4관은 신법(身法)을 시험하는 곳이었다. "......!" 긴장감을 억누르며 종리연은 사관으로 지정된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안으로 든 순간 그의 입이 함박만하게 찢어졌다. 기관(機關)으로 이루어진 대전 안을 빠른 신법을 구사하여 18 종류의 함정을 통과하는 것이 시험이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종리연은 입가에 득의만만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가 배우고 익힌 조화십팔보가 이런 곳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줄은 그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사부......! 그리고 남궁 형! 참으로 고맙습니다. 지하에서까지 이 제자와 아우의 성공을 빌어주시니.....! 기필코 성공해서 사성녀를 취하고 무림의 안녕을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린 종리연은 곧 시전에 들어갔다. 조화십팔보를 익힌 그로서는 경신법이나 보법이야말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숨에 4관을 통과했다. 종리연이 18개의 함정을 통과하는 시간은 고작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 보고를 받은 안빈은 넋을 잃고야 말았다. 사실 그는 종리연이 3관까지 통과한 이유가 어쩌면 방주의 농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4관만큼은 종리연이 통과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보법이나 경신술이라는 것은 남이 도움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빈의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종리연은 단숨에 4관까지 통과하고 만 것이었다. 그것도 놀랄 만한 빠른 속도로 말이다. '대체......! 종리연이란 자는 사람인가? 아니면 귀신이란 말인가? 도대체가 모를 일이로고......!'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지 안빈은 한동안 넋을 잃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 다음 권에 계속 - 조화공자 제2권 검궁인 저 13 첫번째 혼인(婚姻) "와아아......!" "와와......!" 마치 잔칫집과 같은 분위기였다. 방원(方圓) 세 마장이나 되는 넓은 공간의 연무장(練武場)에는 지금 수백 명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연신 뜨거운 함성을 올리고 있었다. 연무장 한가운데에는 대(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 위에는 술항아리 열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대 아래로는 화염이 활활 타오르는 기름솥단지가 깔려 있었다. 기름솥에는 불길이 치솟는 기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백 개의 기름솥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이 놓여 있어서 약간만 건드려도 기름솥이 엎질러질 것같았다. "......!" 아무리 긴장을 풀려고 해도 기가 질리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종리연은 긴장한 채로 지금 막 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관문이었다. 이 관문만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그는 하오방주와 혼인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와......!" "휘-익! 휘리릭!" 환호성과 휘파람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종리연은 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보라! 수백 쌍의 눈길이 자신을 지켜 보면서 함성을 울리고 있는 것을. 그 환호성과 휘파람소리는 광적(狂的)이라고 할 만큼 뜨거운 것이었다. 그는 시선을 옮겼다. 차일이 쳐진 중앙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방의경의 모습이 보였다. 12인의 단주들은 방의경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석하고 있었다. "......!" 종리연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어차피 피해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자! 종리연. 나가자!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일뿐이다. 나머지 일은 천지신명께 맡기는 수밖에.......' 종리연은 다짐하고 다시 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이제 최후의 순간이었다. 방의경이 제시한 5관의 마지막 관문을 뚫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은 결딴이 나느냐 마느냐에 처한 것이었다. 대 위의 독한 화홍주(花紅酒) 열 항아리를 다 마시고 기름솥 사이를 걸어 나와야 하는 것. 그것이 최후의 관문이었다. 맨정신으로도 기름솥단지 사이를 빠져 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조심스럽게 그 사이를 통과한다 해도 끓어오르는 기름의 열기로 인해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물며 화홍주 열 단지를 마시게 되면 보통 사람은 즉사를 하고, 술고래라 해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법인데 술을 마시고 기름솥단지 밭을 빠져나오라니....... "......." 사실 대 위에 선 종리연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번 시험을 통과할 확률은 전무했다. 4관까지는 어떻게 운이 좋아 통관되었다고 해도 이번 관문만큼은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행동을 재촉하는 신호였다. 종리연은 다시 한 번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 어차피 죽을 각오를 하였으니......!' 그는 굳게 마음 먹고 첫번째 술 항아리를 들어올렸다. "......!"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는 주량이 과히 센 편이 아니었다. 열 항아리는커녕 한 항아리도 제대로 마실 지...... 항아리를 드는 순간 불현듯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한편, "......?" 차일 안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방의경의 얼굴에도 불안의 기색이 역력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이번 관문만은 자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술 속에 다른 약물을 넣어 술을 깨게 하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일에 의문을 품고 있던 안빈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감시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길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과연 성공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불안감 속에서도 일말(一抹)의 기적(奇蹟)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전혀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던 제4관도 종리연은 무사히 통과해 내지를 않았던가 말이다. 그러한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바랄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었다. '제발......! 그런 기적이 한 번만 더 일어나 주기를......!' 그녀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빌고 또 빌었다. 한편, 예의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안빈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번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후후......! 내 생각이 맞긴 맞았다. 지금까지 녀석이 관문을 통과한 것은 방주의 도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어림도 없다. 방주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내가 결국은 이겼다. 후후! 하오방도에도 훌륭한 청년이 많거늘...... 굴러 들어온 돌에게 박힌 돌이 자리를 내어 줄 수야 없지!' 청담우사(靑潭羽士) 안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화홍주를 바꿔치기 하려던 하오방주의 음모(?)를 막은 이상 더 신경 쓸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일어선 것은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도 조금의 가책은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방주 때문이었다. 방주가 원하는 것을 막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녀가 괴로워 하는 것을 지켜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청담우사 안빈은 그만큼 하오방주 방의경을 아끼며 존경했던 것이다. "꿀꺽...... 꿀꺽...... 꿀꺽......." 종리연은 어느덧 세 항아리째의 술을 비우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술항아리를 아예 목구멍에다가 들이붓고 있었다. 천천히 마시다가는 중도에서 거꾸러질 것같은 기분이 들어 가능한 한 빨리 마시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장 용량에는 한계가 있는 법. 세 항아리째의 술을 마시고 나자 종리연은 마침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취기는 둘째 치고라도 배가 불러 더이상 마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끄으윽......!" 트림을 하다가 하마터면 마셨던 것을 게워 올릴 뻔했다. 토하면 실격이었으므로 종리연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술을 억지로 참고 다시 네 번째의 항아리를 들었다. "꿀꺽...... 꿀꺽......." 대여섯 모금을 마셨을 때는 벌써 머리가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이상 들어 가지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도...... 도저히 더는 마실 수가 없다. 차라리 포기하고 죽는 것이 나으리라!' 종리연이 이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기적과도 같은 구원(救援)의 음성이 종리연의 귀에 들려왔다. '바보같이! 위장이 터져 죽고 싶나요? 일단 술을 마신 후 술독을 내리는 순간에 토해요. 그대신 눈치채지 않게 해야 해요. 나중에 술독의 처리는 내가 하겠어요.' 그것은 바로 방의경의 음성이었다. 방의경이 전음술(傳音術)을 이용해 종리연의 귓가에 속삭인 것이다. 종리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구나!' 정말이지 구원의 여신이 따로 없었다. 방의경의 말은 참으로 일리가 있는 충고였다. 충고가 아니라 메마른 대지에 내리는 단비같은 것이었다. 아니 술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고양이를 건져내는 마음씨 좋은 여주인이었다. 술독을 내리는 순간에 토해놓는다 해도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눈치채기가 힘들 것이다. 단지 술독을 번쩍 들어 입 안으로 흘려 넣는 것만 사람들에게 보이면 되는 것이다. "......!" 종리연은 새삼 기운이 솟았다. 네 번째 술을 다 마시는 것이 고역이었으나 종리연은 간신히 술독을 비웠다. 그런 후에 비틀거리는 듯하면서 내리는 순간 먹은 술을 고스란히 토해 놓았다. 이어 다섯 번째 술 항아리를 집어 들었다가 놓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마침내 종리연이 열 번째의 술 항아리를 내려 놓았을 때, "와아아아......!" 일제히 함성이 일어나면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종리연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비록 먹은 술을 전부 토해 놓기는 했으나 그것은 단지 일곱 항아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처음 마신 세 항아리의 술은 그대로 위장 속에 들어 있어서 그를 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화홍주가 어떤 술인가? 그것은 독하기로 천하에 둘째 가라면 서럽다고 할 정도의 독주(毒酒)가 아닌가 말이다. 그는 비틀거렸다. 아무리 중심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눈을 뜨고 보려 해도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사물이건 사람이건 제대로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딛고 있는 땅은 갑자기 한 자 높이로 솟았다가는 한 길 아래로 푹 꺼져버리는 것이었다. 눈에 아른거리기만 하는 사람과 사물들은 괴기하기 짝이 없는 형상으로 자꾸 변모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정신은 말짱한 것 같았으나 주위의 형상들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비틀...... 비틀...... 종리연은 갈짓자 걸음으로 화염이 치솟고 있는 곳까지는 걸어갔다. 그의 의식은 그 어느때보다도 뚜렷했다. 자칫 잘못해 아차 하는 순간이면 솥을 엎지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온통 불바다가 되어 한순간에 불고기 신세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종리연은 전신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글거리는 화염에 살이 익을 것같은 기분이었다. 더더군다나 위장 속으로 들어간 독하디독한 화홍주(花紅酒)가 내는 열은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종리연은 이를 악물고 걸어 들어갔다. 어차피 물은 엎질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솥단지 사이는 간신히 지나칠 정도로 비좁았다. 아차 하는 순간이면 기름이 가득 담긴 솥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는 눈을 부릅떴으나 도무지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아무리 보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대여섯 걸음을 옮기는 동안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목적지의 십분지 일에도 도착하지 못하고 종리연은 머리가 하얗게 비어가는 것을 느끼며 쓰러질 뻔했다. 바로 그때였다. 예의 방의경의 다급한 전음이 다시 귓전을 파고 들었다. '눈을 감아요. 호흡을 가다듬고......! 그래요. 잘 하고 있어요. 이제부터 제가 시키는 대로 걸어요. 좌로 이 보....... 우로 삼 보....... 다시 좌로 오 보.......' 종리연은 이글거리는 화염을 보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걸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 내세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다시 좌로 이보.......' "와아아...... 와아!" 하늘을 찌르는 듯한 함성이 들렸다. 그러나 종리연에게 그 함성은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들리는 것같았다. 그는 온 정신을 기울여 오직 방의경이 지시하는 대로 걷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할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뜨겁던 열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종리연은 땅이 거꾸로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와아아아아아!" 의식 저편으로 거대한 함성이 밀물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천당인지 지옥인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온몸이 붕 뜨는 듯하다가 다시 구천지옥(九泉地獄)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마(魔)의 손아귀가 있어 그의 발목을 나락으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런 상태가 영원인 듯 계속되었다. 하지만 영겁(永劫)의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때가 이르렀는지 마침내 종리연은 혼돈(混沌)의 의식세계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 그 순간 종리연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악!"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황금으로 치장된 욕실(浴室)이었던 것이다. "대...... 대체 이게 어찌된......?" 종리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째서 자신이 욕실에 있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똑같이 벌거벗은 여인들이 자신을 목욕까지 시켜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머리가 깨어질 것같은 와중에서도 다급히 손을 저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남녀가 유별한데......." 그러나 여인들은 환성을 울리며 조잘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제야 깨어나셨군요!" "호호호......! 오늘도 깨어나지 못하시면 어쩌나 하고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호호...... 정말 대단하신 분이셔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종리연은 연신 어리둥절했다. 그런 종리연의 눈앞에 낯선 여인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다...... 당신은 누구요? 왜 여기에 있는 거요?" 그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여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호호호......!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태상장로(太上長老)께서는 보름째나 의식을 잃고 계셨어요. 그리고 오늘이 바로 방주님과의 혼인식 날이에요." "태상장로? 호...... 혼인식?"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종리연은 여인이 내뱉은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머리를 치고 들어오는 어떤 기억 때문에 그만 충격을 받았다. 그 순간 다시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듯하다가 그는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와아아......!" 고막을 진동하는 함성에 종리연은 다시 의식을 되찾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부축되어 잘 꾸며진 대청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 아직도 그의 머리는 으깨어질 듯이 아팠다. 목도 탔다. 술이 채 깨지 않은 탓이었다. "무...... 물 좀 주시오. 제발.....!" 그는 애타게 호소했다. 그 순간 미리 준비라도 해놓았다는 듯이 누군가가 까르르 웃으며 물대접을 내밀었다. "여기 있사옵니다. 호호홋......!" 누군가의 손에 부축되어진 채로 종리연은 한 사발의 물을 다 비워냈다. 그럼에도 목은 여전히 타들었다. "하...... 한 바가지 더 주시오." 누군가가 다시 물그릇을 내밀며 소근거렸다. "태상장로님!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시지요. 오늘 같이 기쁘고 즐거운 날, 이 무슨 추태이십니까?" "추...... 추태라고?"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천하의 군자라고 자부하는 자신이 추태를 부리고 있다니?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종리연은 무거운 머리를 몇 차롄가 흔들었다. 바로 그 순간 종리연은 자신의 몸에 혼례복이 걸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 모든 사실이 그때서야 확연히 깨달아졌다. 종리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붉은 주단이 그의 발 앞에 길게 깔려 있었다. 주단이 끝나는 대청 위에는 아리따운 신부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내...... 내가 드디어......?" 종리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뭘 망설이고 계세요? 어서 오르시와요. 아름다운 신부님이 기다리다 지쳐 도망갈 지도 모르니까요." 종리연을 부축하고 섰던 여인들이 벙글거리는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이게 꿈은 아니란 말이지?' 종리연은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따끔했다. 정녕 꿈은 아니었다. 종리연은 걸음을 옮겼다. 주단을 밟고 대청으로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박수를 치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대청 중앙에 혼례복을 입은 신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정말로 내가 사성녀 중의 하나와 혼인을 하게 되었구나.' 종리연은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손들 놓으시오!" 그는 호탕하게 소리치며 자신을 부축하는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순간 만큼은 걸음걸이가 흔들리지 않았다. "와아! 멋지다." "신랑 최고다! 오늘밤 신부는 천당에 서너 번은 갔다 오겠구나!" 웃음 소리와 함께 많은 하오방의 사람들이 그가 혼자 걸어가는 것을 보고 다시 박수를 쳤다. 종리연은 곧바로 걸어가 혼례상 위에 놓인 혼례주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단숨에 비웠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몸을 핑그르르 무너뜨리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보름 전에 마셨던 세 항아리의 화홍주의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쓰러지기 직전의 종리연을 안은 것은 신부이자 하오방주인 방의경이었다. 방의경은 그를 안고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즐거운 잔칫날이 연 사흘 계속 되었다. 하오방은 그 동안 떠들썩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오로지 한 사람 때문이었다. 다름아닌 태상장로라는 직위를 가지게 된 종리연이라는 하오방주의 신랑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두 명 이상의 사람만 모이면 화제는 하나로 모아졌다. 그것은 이번에 새로 임명된 태상장로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방주와 혼인을 하기 전까지는 무명(無名)의 일개 장정에 불과했던 위인이다. 그런 그가 방주와의 혼인을 위해 지옥보다 무섭다는 5관의 시험을 무사히 치뤄 낸 후부터는 수많은 화제를 뿌리고 다닌 꼴이었다. 그가 방주와 혼례를 올리는 날. 그녀에게 청혼을 했던 10인의 젊은이들은 너무나 슬프고 상심한 나머지 머리를 박박 깎아버렸다고 했다. 그뿐 아니었다. 12인의 단주(團主)는 자신들의 판단이 틀린 것을 가책하여 아직도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혼례청에서 쓰러져 버린 태상장로에게 구 배(九拜)를 올렸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런 유언비어(流言蜚語) 속에는 어쨌든 찬사와 질시(疾視)가 동시에 숨어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새로운 태상장로는 행운아 였다. 하오방주 방의경이야말로 희대의 미인인데다가 그녀와 혼인을 함으로써 태상장로는 명실상부한 하오방의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종리연의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그로서는 요즘 피골이 상접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나의 고민 때문이었다. 뜻밖에도 그의 고민은 아주 유별난 것이었다. 아니, 보통 사람이라면 행복해서 죽을 지경인 고민이기도 했다. 바로 여자 때문이었다. 혼인을 한 사람이 신부되는 여자와 함께 지내는 것이 당연한데 무슨 고민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정말로 종리연의 사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실상 종리연은 신부는 재켜놓은 채로 다른 여인,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무려 40명이나 되는 미모의 여인들에게 묻혀 있었던 것이다. 실로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여자와 혼인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종리연은 혼인을 한 후 이렇게 많은 여인들과 잠을 자야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 모든 것이 방의경의 명령이었으니....... 지금도 그는 막 7인(七人)의 여인들을 치뤄내야 했다. 참으로 쌍코피가 터질 지경이었다. "......." 침상에 늘어져 있는 종리연은 풀려 버린 눈으로 7인의 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바로 그가 얼마 전에 노예상인으로부터 사들인 40명의 미인들 중에 한 부류였다. 그녀들은 나체였다. 아무도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종리연이 있는 방으로 들어설 때는 옷을 입지 않도록 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종리연은 이제 여자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지긋지긋하도록 여자의 육체를 접했고 또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녀들과 중노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7인의 여인들이 절을 하고 물러났다. '제...... 제발 영원히들 사라져라!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말란 말이다.' 종리연은 잠을 자고 싶었다. 오로지 잠이었다. 이제는 여자고 뭐고 간에 그저 한잠 늘어지게 자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 여인들이 나간 지 반의 반 식경이나 되었을까? 피곤에 쩔은 종리연이 선잠이 들어 코를 드르렁거리기 시작하던 차에 똑똑똑......! 하고 또다시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종리연은 퍼뜩 눈을 떴다. 그리고는 이마를 찡그리며 울상을 지었다. "또란 말이냐......?" 종리연은 진절머리가 났다. 아닌 게 아니라 문이 열리며 다시 아름다운 여체가 이번에는 한꺼번에 10인이나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이쿠......! 난 죽었다." 누군가 듣던말든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종리연은 침대 속으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배를 째든지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세상에 이런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다니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은 종리연으로서는 목숨이 걸린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종리연은 혼인을 한 이상 매일 방의경과 한 방을 써야 했다. 그러나 방의경은 애당초 그를 진정한 낭군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12단주들이 끈덕지게 강요하던 혼인 이야기를 피하기 위해서 청혼한 10인들의 청년들을 무시하고 차라리 안중에도 없는 종리연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사랑이라거나 연정(戀情)같은 것이 끼어들 게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부인 이상 한 방을 써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그래서 그녀가 생각한 것이 그가 자신의 몸 가까이 접근할 엄두도 못 내도록 진을 빼어놓는 것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밤이 되기 전에 종리연의 방으로 수많은 여인들을 들여놓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종리연은 하루 종일 여인들에게 파묻혀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도 남자인 이상 어찌 여색을 싫어하겠는가 말이다. 첫날밤에 종리연은 이게 웬떡이냐 하며 미녀들에 둘러싸여 환성까지 질러댔었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여자란 존재는 생각만 해도 끔찍할 지경이었다. 결국 방의경의 계략(?)은 적중한 셈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참으로 오묘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천지(天地) 간의 음양(陰陽)의 조화(調和)였다. 14 뜨거운 밤 어느덧 일 주일이 지났다. "휴...... 이젠 올 때가 되었는데......." 화려하게 꾸며진 신방(新房). 갓 혼례식을 올린 신부는 곱게 화장을 한 채 침상에 앉아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팔뚝만큼이나 굵은 황초가 그런 신부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 듯이 노란 불꽃을 파르르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발...... 이제는 그만 했으면......!" 파르르 흔들리며 빛을 사방에 던지는 불꽃을 바라보며 신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느덧 시간은 8일째의 삼 경(三更)을 넘고 있었다. 그때까지 신랑은 한 번도 신부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신랑은 신방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쓰러져서는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았다. 지금 이 순간도 신부는 그가 어디 있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 꾸민 것이었다. "휴우......!" 신부는 길게 한숨을 내뱉았다.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기분이 들 줄은 몰랐는데......." 여인은 한숨을 쉬며 원앙금침(鴛鴦衾枕)을 바라보았다. 아직 한번도 제대로 사용해 보지 못한 침구였다. 정작 침구를 함께 사용해야 할 사람은 지금 엉뚱한 곳에서 다른 여인과 몸을 섞으며 뒹굴고 있었다. "휴......! 자승자박(自繩自縛), 자업자득(自業自得)이로군......!" 아직까지 손목 한 번 잡혀보지 못한 여인의 입에서 탄식과 함께 쓸쓸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온몸이 풀어진 솜만 같았다. 종리연은 넓은 침상에 사지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 지금 그는 천정을 보고 있었으나 눈빛이 탁하고 몽롱하여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벌써 며칠째인가? 그는 매일 여색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하루에 수십 명의 여인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자 견디기 힘든 노동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또다시 5명의 여인들이 그를 지나갔다. 아니 짓밟고 지나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여인들은 차례대로 종리연의 몸을 찍어 누르고는 기기묘묘한 동작으로 종리연의 정기(精氣)를 몽땅 뽑아가 버렸던 것이었다. 종리연은 이제 손가락 하나 치켜들 힘도 없었다.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그는 눈을 뜨기도 귀찮아졌다. 보나마나 새로운 여인일 것이다. 새로운 여인이건 한 번 스쳐간 여인이건 간에 종리연에게는 이제 모든 여인이란 피를 빠는 거머리와 같은 존재였다. '으으...... 차라리 날 죽으라고 해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도대체 언제까지 시달림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더는...... 정말이지 더이상은.......' 종리연은 눈을 감은 채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뜻밖의 음성이 종리연의 귀를 어지렵혔다. "공자님! 공자님은 무척이나 어리석으신 분이셔요." 정말이지 뜻밖의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 나직하고 달콤하게 들려온 음성에 종리연은 의아했다. 그는 힐끗 실눈을 떴다. 한 명의 귀엽게 생긴 얼굴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나체였다. '으으으......! 그럼 그렇지!' 종리연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 여자는 또 어떤 방법으로 내 진을 빼려고 한단 말인가? 차라리 날 죽여다오!' 계속해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 이름은 아화(雅花)예요. 역시 공자님의 노예(奴隸)랍니다." 아화고 야화고 간에 도무지 귀찮기만 했다. 피곤에 찌든 종리연으로서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으나 그럴 힘도 이제는 남아있지 않았다. "공자님께서 이대로 가다가는 폐인이 되거나 불구(不具)가 될 것같아 드리는 말씀이에요. 공자님께서는 혹 옥방비요(玉房秘要)란 말을 들어 보셨나요?" "......?" 뜻밖의 말에 종리연은 게슴츠레한 눈을 들어 아화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화는 조금 틀렸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뭍 여인들과 어딘가 달랐다. 대부분의 여인들이 아름답기는 했으나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닳고 닳은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아화는 달랐다. 비록 같은 색노(色奴)에 불과했으나 어딘가 앳띠고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 종리연은 멍청히 아화를 바라보았다. 아화는 그의 눈길을 받으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침상으로 다가왔다. 걸어올 때 한 뼘밖에 안 되는 하느적거리는 세류요(細柳腰), 동그란 둔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두 개의 유방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묘한 색감을 불러일으켰다. 종리연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을 나무랐다. '종리연아, 종리연! 질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 저 여자라고 다를 게 뭐냐?' "호호! 왜 눈을 감으세요, 상공. 저는 지금까지 상대한 여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답니다." 종리연은 눈을 떴다. "대체 뭐가 다르단 거냐?" "그야 시험해 보면 아실 거예요." 아화는 스스럼없이 침상으로 올랐다. 종리연은 그만 시큰둥해져 돌아누워 버렸다. '다르긴 뭐가 달라? 똑같지.......' 문득 등 뒤에 묻어날 듯 부드러운 여체가 닿았다. 아화는 그의 등 뒤에 누워 부드럽게 자신의 육체를 밀착시키고 있었다. 종리연은 여전히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그의 뿌리는 시달릴 대로 시달려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보나마나 아화도 그의 진을 빼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할 것이다. 문득 종리연은 내심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봐야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난 그저 자고 싶을 뿐이란 말이다.' 등 뒤에 누운 아화는 부드럽게 자신의 육체를 밀착시킨 채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참으로 묘한 자극이었다. 그녀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 다만 몸 만으로 종리연의 전신을 가볍게 자극할 뿐이었다. 들어갈 곳과 나올 곳이 기묘한 요철(凹凸)을 이룬 여체가 종리연의 등을 문질렀다. 풍만하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성숙한 여체였다. 피부 또한 이제까지의 색노들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침내 종리연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조금씩 하체가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화가 그의 등을 묘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 오직 혀(舌)로만 애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음......." 결국 이를 악물었지만 이빨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아화의 집요한 혀의 애무가 종리연의 시든 뿌리에 생생한 샘물을 부어넣은 것이다. 마침내 종리연의 몸이 꿈틀거렸다. 아화는 부드럽게 종리연의 몸을 돌려 세웠다. 종리연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천장을 보고 누웠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아화의 몸이 그의 몸 위로 올라왔다. 부드러운 여체가 틈 하나 없이 그의 몸을 덮었다. 팔과 다리가 한 마리의 뱀(蛇)처럼 그의 몸을 휘감아왔다. 게다가 고개를 들어 혀로 애무하자 긴 머리칼이 그의 몸을 스쳐지나가는 자극은 또 어떠한가! 종리연은 그만 가늘게 전신을 떨고 말았다. "......." 종리연의 몸은 이제 뚜렷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아화는 상반신을 약간 들어 자신의 긴 머리칼로 종리연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틀린 구조를 지니고 있답니다. 남자는 화(火)의 성질을 지니고 있어 쉽게 달아오르는 체질이에요. 반면 여자는 수(水)의 성질을 지니고 있답니다. 따라서 쉽게 끓지는 않으나 일단 끓게 되면 오래 간답니다. 그래서 남자는 한 번 사정(射精)하고 나면 그만이지만 여자는 지칠 줄 모르고 요구하게 되는 거랍니다." "......?" 종리연은 어리둥절했다. 색노치고는 꽤나 유식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라도 아화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아화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합방(合房)의 묘미를 모르는 사람이 계속하여 색(色)에 빠지게 되면 결과는 뻔하답니다. 남자는 정력을 해치게 되어 수명이 짧아지고, 나중에는 여러 가지 병(病)이 들게 된답니다. 또한 여자도 올바른 색도(色道)를 취하지 않게 되면 골병이 들지요." 종리연은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아화의 말은 하나같이 처음 듣는 신기한 것이었으나 왠지 그녀의 말이 옳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올바른 색도(色道)를 알고 그에 따라 즐거움을 취하게 된다면 인생은 무궁무진(無窮無盡)한 낙(樂)를 얻게 되고 건강 또한 증진되죠." 종리연은 눈을 크게 떴다. "도리어 건강해 진다고?"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사실 이 며칠 동안 여색에 빠져 있는 사이 그는 눈에 띄이게 수척해졌고 전신의 힘이란 힘은 모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이에요. 색도를 알게 되면 색을 취할수록 더욱 힘이 나고 피부도 윤택해지며 정력(精力) 또한 갈수록 강해진답니다." "모, 못 믿겠어. 어떻게 그런......." 아화는 생긋 웃더니 섬섬옥수를 뻗어 종리연의 어떤 물건을 가볍게 쥐었다. "음......!" 종리연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나긋한 여인의 손이 신체의 한 부분을 움켜쥐자 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양물(陽物)은 쉽게 흥분하여 봇물을 흘리기가 십상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본격적인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한 채 자폭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랍니다." "그...... 그럼......?" "서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법도(法度)에 따라 여체를 요리해야 해요. 마치 산해진미를 맛보듯이......!" 아화의 말은 그야말로 기이한 것이었다. 그녀는 계속 종리연의 욕망을 자극하며 나긋나긋하게 주절거렸다. 아화는 본시 대리국(大里國)에서 팔려 온 여인이었다. 그녀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남자들의 노리개가 되었으나 우연히 선도(仙道)를 익힌 이인(異人)을 만나 방중술(房中術)의 묘방인 옥방비요(玉房秘要)를 배우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다른 색노와 달리 지금까지 건강과 싱싱한 육체의 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아화는 종리연의 처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순박한 마음에 반해 스스로 자신의 비법을 전수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종리연으로서는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팔천이심(八淺二深), 사왕생환(死往生還)의 도리를 잊어서는 안되어요. 여덟 번을 얕게 찌르고 두 번을 깊이 심는 것을 말하죠....... 뿐만 아니라 들어갔을 때 긴장된 양물을 빼내어 유연하게 한 후 다시 반복하는 것을 사왕생환이라 하며......." "......!" 종리연은 그야말로 여 사부(女師父)를 만난 셈이었다. 종리연은 즉시 아화의 말에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화는 친절하게도 종리연의 율동을 이끌었다. 상부상조(相扶相助). 서로 도와가면서 두 사람의 육체가 하나의 악기가 되고 현이 되어 함께 오묘한 방중비법에 따라 합주하기 시작했다. "호흡도 빼놓을 수 없는 요결의 하나예요. 토고납신(吐故納新)에 따라 탁해진 공기는 내뿜고 새로운 기(氣)를 들여 마시는 것으로 합방 시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어 침상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기 시작했다. 종리연이 분출(噴出)의 욕망을 느낄 때마다 아화는 스스로 몸을 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쉽고 짜증이 났으나 곧 그 방법이 체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고 기운을 잃지 않는다는 효험이 있다는 것을 종리연은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진작 그가 이런 비법(秘法)을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곤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화가 말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합방 시 사정을 하지 않는 것이랍니다. 그러므로써 남자는 횟수와 무관하게 여자를 즐겁게 할 수 있을 뿐더러 정기를 지킬 수가 있답니다. 또한 그러한 도리를 지켜가면서 행하는 자세로는......." 아화는 직접 자신의 몸을 여러 가지 자세로 틀어 가면서 종리연으로 하여금 하나하나의 자세를 시도하도록 도와주었다. 용번(龍飜)...... 호보(虎步)...... 원박(猿搏)...... 선부(蟬附)....... 등등의 구법(九法), 팔익(八益), 칠손(七損)을 차례로 시연해 보였다. 물론 종리연은 그녀와 함께 자세를 차례로 취해 나갔다. 그의 탈진했던 몸에 언제부턴가 활기(活氣)가 살아나고 있었다. "이...... 이런 것이었구나! 이렇게 오묘한 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종리연은 억울해 했다. 비로소 그는 합방비요의 효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궁한 즐거움과 강인한 정력. 종리연은 짧은 시간에 새롭게 변신하고 있었다. 아화와의 만남은 그로 볼 때는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제야 오다니......!' 홀로 신방에 기다리고 있던 방의경은 발자국 소리를 듣자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벌써 10일째였다. 지난 구 일(九日) 동안 종리연은 곤죽이 되어 신방에 들었으므로 눕자마자 곯아 떨어진 것이었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방의경은 문득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 만큼은.......' 과연 방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종리연이었다. 방의경은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슴을 설레면서 기다렸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여심(女心)이라더니, 그녀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애당초 스스로 원해서 만든 상황이었으나 이젠 마음이 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밤마다 종리연이 미녀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장면을 상상하기만 하면 심장이 뛰고 이상한 질투심마저 끓어 오르는 것이었다. '오늘이야 설마.......' 방의경은 고개를 숙인 채 기다렸다. 그러나 혹시나가 역시나 였다. 종리연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신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침상 위에 쓰러지더니 이내 코를 곯며 잠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방의경은 왠지 가슴이 텅 비는 듯한 심정을 맛보았다. 바로 곁에서 잠에 떨어진 종리연을 보는 그녀의 시선은 복잡하기만 했다. "휴우......!" 그녀는 한숨을 쉬며 그의 곁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천정만 바라보고 있는 방의경은 그런 자신에 대해 왈칵 짜증이 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그녀는 사나이의 체취를 느꼈다. 그것은 매우 생소한 내음이었으나 왠지 그다지 싫은 느낌이 아니었다. 드르렁- 쿨! 드르렁....... 종리연은 어느덧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한 동안 그런 종리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방의경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으로 향했다. "......!" 유난히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가슴이었다. 여자와 달리 사나이의 가슴은 넓고 든든한 기분을 주었다. 예전에는 꿈에도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이 없는 방의경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은 온몸이 후끈 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더 가까이 몸을 밀착시키며 손을 종리연의 옷자락 속으로 밀어 넣었다. 뜨겁고 단단한 가슴팍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 느껴졌다. "으...... 음......!" 뜻밖에도 신음이 흘러나온 것은 방의경의 입에서 였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내...... 내가......?' 그러나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더 오래도록 사나이의 맨살의 감촉을 느끼고 싶어하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방의경은 그런 자신에게 놀라면서도 더욱 대담하게 손을 사나이의 옷 속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깨어나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종리연은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두려웠다. 방의경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난생 처음 느끼는 야릇한 감정이 두려워졌다. 이때였다. "으응......." 종리연이 잠결에 뒤척이면서 돌아누웠다. "......!" 화들짝 놀란 방의경은 얼른 손을 빼고 숨을 죽였다. 종리연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잠꼬대였던 것이다. '어서 날이 밝았으면.......' 방의경은 넋을 잃은 듯이 중얼거렸다. 새삼스럽게도 이 밤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결국 기나긴 밤을 그녀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하얗게 세워야만 했다. 자신이 만든 덫에 자신이 걸린 것이었다. "뭐...... 뭐라고?" 시녀의 보고를 듣는 순간 방의경은 화가 치밀며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태상장로님께서는 한꺼번에 색노들과 어울려......." "시끄럽다!" 느닷없는 방의경의 고함 소리에 시녀는 움찔했다. 시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보고를 하라고 지시한 것은 바로 방주가 아닌가? 그런데 짜증을 부리다니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보고가 불충분해서 그런가?' 시녀는 좀더 자세히 보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술을 열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태상장로 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여인들을 상대하고 있어요. 오늘만 해도 무려 스물한 명이나 상대를 하셨다니까요?" "닥치라니까!" "......?" 순간 시녀는 방주의 눈에서 표독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쳇....... 자기가 보고하라고 해 놓고는...... 이제 와서 무슨 변덕이지?' 시녀는 내심 투덜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잠깐!" 예의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고 방의경이 시녀를 불러 세웠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음성이었다. "......?" 시녀는 돌아서며 방의경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도도하고 콧대 높은 그녀가 왜 화가 나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무슨 일이시온지......?" 그녀는 하명을 기다렸다. 순간 방의경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 더러운 계집들을 모두 쫓아내라!" "예......?" "쫓아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오늘부터는 태상장로께서 어떤 계집들과도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해라." "......!" 시녀는 한 동안 멍청한 눈으로 방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러나 방주의 명이 지엄하니 이행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 알겠사와요. 방주님." "......?" 스무 명이 넘는 여인들을 상대로 옥방비요(玉房秘要)를 실습하고 돌아오던 종리연은 신방에 들어서는 순간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방의경의 옷차림이 완전히 달라진 탓이었다. 그녀는 혼례복을 벗고 속살이 은은히 투영되어 보이는 얇은 망사의(網紗依) 만을 입고서는 해맑은 웃음을 띤 채 종리연을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아...... 아니......?" 종리연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방의경이 고혹스러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이, 왜 그러세요? 제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아...... 아니...... 그......그게 아니라......." 종리연은 더듬거리며 침상에 앉았다. 그는 사실 방의경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싸늘함과 오만함, 그리고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고함. 그것은 비록 방의경이 자신의 아내이긴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모종의 벽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감히 그녀에게 눈길조차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결혼은 했을망정 여전히 그에게는 어려운 하오방의 방주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 한편, 방의경은 애가 탈 대로 탔다. 그녀는 자신의 파격적인 옷차림을 보고도 그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만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나...... 나를 원하지 않는단 말인가?' 방주이기 이전에 한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 "......." 시간이 흘렀다. 어색한 시간이 한참 흘러갔으나 두 사람은 침묵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종리연은 눈을 꿈벅거렸다.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지면서 졸음이 쏟아져 온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종일 스무 명이 넘는 여인들과 상대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는 아화로부터 옥방비요를 배운 이후로 장족의 방중술에 관한 진보를 보이고 있었다. '여자와 교접할 때에는 상대방을 마치 깨진 기왓장이나 돌멩이처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흥분을 삭일 수 있으며 오래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아화의 충고는 그에게 금과옥조(金科玉條)요,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그만 자...... 자야겠소." 마침내 종리연은 그렇게 말하고 침상에 누웠다. "......!" 방의경은 그만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를 위해 망사야의까지 준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는 자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자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보다 더한 모욕과 수치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종리연의 그 한 마디 말은 그녀에게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분노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 들었다. 다만 자존심만은 아직 살아 있었다. "흥! 잘 테면 자요! 누가 자지 말라고 했나요?" 마음과는 달리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싸늘한 음성이었다. "쩝!" 종리연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 누웠다. 며칠을 시달린 탓인지 그는 쉽게 잠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그날밤도 뜬 눈으로 보낸 방의경은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해진 것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껏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그녀였으나 이번 일 만큼은 치욕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엄청난 짜증이 밀려 들었다. 더구나 이런 사정을 어느 누구에게 털어 놓고 호소한단 말인가? 그런 그녀의 짜증은 도처에서 징후(徵候)를 보이고 있었다. 다음날 밤도 역시 종리연은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먼저 잠이 들었다. "......." 방의경은 이제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바보! 멍청이! 목석......!' 이제는 몸이 달아 오를 대로 달아 있었다. 이대로 더 버티다가는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다른 계집들에게는 그렇게 뜨거운 관심을 가지면서 왜 나에게만은......? 야속한 사람!' 마침내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모종의 중대한 결심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서슴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태초의 나신이 되었다. 방의경의 나신은 더이상 익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익어 있었다. 두 개의 유방은 만지기만 해도 터져 버릴 것처럼 부풀었고 두 알의 유실은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뚝 떨어질 듯 성나게 돌기되어 있었다. '으음......!' 그녀는 스스로의 육체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손끝이 스치는 곳마다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야릇한 쾌감이 그녀의 혈관을 따라 빠르게 흘렀다. 급기야 방의경은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꼈다. 그것은 남성! 바로 강인한 남성의 욕망이 자신을 범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의 하오방주가 여염집 여인에게나 있는 감정이 솟아날 줄이야! '당신이 싫다면 내가 라도......!' 마침내 방의경은 타오르는 욕망을 더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교족(嬌足)을 움직여 침상 위에 올랐다. 한 쪽 다리를 침상에 올리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튀어나올 듯이 뛰기 시작했다. 종리연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깰 것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르르....... 방의경은 손을 떨면서 종리연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찌하여 자신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종리연은 나신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같았다. "......!" 방의경은 눈을 크게 떴다. 처음이었다. 남자의 육체를 보는 것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종리연의 탄탄한 가슴에서부터 근육이 이어지는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부르르 떨었다. 남자의 하반신! 그곳에는 이제까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어떤 거대한 것이 힘차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주체할 수 없이 가빠지는 호흡과 함께 방의경은 온몸이 이상하게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가슴에 엎드렸다. 그녀의 온몸이 억제할 수 없는 어떤 욕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남자가 응하지 않는데 어찌 혼자서 그 한을 풀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무작정 종리연의 몸을 안고 움직여 보았으나 더이상의 진전을 볼 수가 없었다. 마침내, "흐흐흐흑......!"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편 이미 오래 전에 잠에서 깨어나 있었던 종리연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평소에 그토록 도도하고 오만하던 방의경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갑자기 방의경이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는 어리둥절해 졌다. 이때, "바보! 멍청이!" 돌연 방의경이 소리치며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는 깜짝 놀랐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일이 한참이나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리연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때였다. "잘못했어요! 날...... 날...... 용서해 주세요...... 으흐흑......!" 느닷없이 방의경이 그의 목을 끌어 안으며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 종리연은 더더욱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쯤되면 생각하고 말고가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아......!" 방의경은 감동(?)의 신음을 발하며 그의 가슴에 녹아들 듯 안겨왔다. 그녀의 몸은 이미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순간 종리연의 뇌리에 아화의 말이 떠올랐다. '여자가 남자를 원하게 되면 먼저 오징(五徵)의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첫째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으로 서서히 합방을 시도해도 되는 단계입니다. 둘째는 유실이 단단해지고 코 끝에 땀방울이 맺히게 되며, 셋째는 목이 말라 침을 삼키게 되며....... 넷째는 음문(陰門)에 반응이 나타나.......' 옥방비요의 도리는 마음이 밝지 못한 사람이 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종리연은 천성이 순후하고 단순한 위인으로 아화에게 배운 것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불측한 마음을 먹지 않고 아화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시행했던 것이다. "흐흐흥......!" 그러니 천하의 방의경이라 한들 어찌 배겨나겠는가? 어느덧 그녀는 오징을 벗어나 오욕(五慾)이 일었으며, 종내에는 십동(十動)의 현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만일 종리연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억제하면서 아화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면 도도한 방의경이 그토록이나 자신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방의경은 혼절 직전이었다. 그녀는 두 다리로 종리연의 다리를 감으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종리연은 침착하게 옥방비요의 요결(要訣)을 시행해 나갔다. "아..... 아아......!" 방의경은 우주(宇宙)가 자신의 몸과 일치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이토록 사나이에게 음태(淫態)를 보이리라고는 상상한 적도 없었다. 입술이 딱딱 벌어지고 허리가 좌로 우로 요분질을 치며 때로는 한껏 아랫배를 퉁겨 올리는 그녀의 몸짓은 방의경이 아닌 다른 여인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침실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찼다. 종리연은 그녀가 열두 번이나 의식을 잃는 것을 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한 번도 자신을 풀지 않았다. 어느덧 긴 밤이 지나고 새벽 기운이 창을 적시고 있었지만 방의경에게는 너무나 짧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15 패왕(覇王) 삼형제(三兄弟) 천하에서 가장 도도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여인이기 마련이다. 만일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생긴다면 그때부터 그녀는 도도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방의경은 변하고 있었다. 이전의 그녀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을 사랑하는 낭군 종리연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요 며칠 그녀는 종리연의 몸에 안긴 채 만사(萬事)를 접어두고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그녀는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종리연은 세상의 모든 것이요, 모든 의미요, 삶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다만 하오방의 다른 방도들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하오방을 이끄는 방의경의 모습에서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단 둘 만이 있는 자리거나 침실에서의 방의경의 모습은 백팔십도로 바뀌었다. 종리연은 그녀의 변화에 어리둥절하고 있었으나 방의경의 태도가 변한 것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럽다 못해 귀엽기까지 했다. 방의경은 다소곳한 아내가 되어 그의 온갖 시중을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제왕(帝王)처럼 모시는 것이었다. 방의경같은 절세미인이 그토록 섬기는 것을 싫어할 남자가 뉘 있으랴! "떠나야겠소." "네?" 방의경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마침 두 사람은 한바탕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고 난 후였다.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방의경의 이마에는 머리칼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며 눈을 크게 떴다. "떠나신다니......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이세요?" 의혹에 찬 눈빛으로 그녀는 종리연을 응시했다. 방의경은 알몸이었다. 그녀의 팽팽한 유방은 그의 가슴에 얹혀 터질 듯이 찌그러져 있었다. 종리연은 당당히 말했다. "찾아갈 사람이 있소." "대체 누구를요?" "......." "말씀해 보세요. 누굴 찾아야 하는지......." 그러나 종리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의경은 애가 탔다. 이제 겨우 여인으로서의 기쁨을 알게 되고 새 삶을 찾았는데 떠나다니?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절대로 보낼 수 없어! 절대로!' 방의경은 내심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종리연이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지성녀(多知聖女) 궁단향(宮丹香)." "......!" 방의경의 눈에 불꽃이 확 일었다. "여...... 여인이잖아요......?" "그렇소. 여인이오. 다지성녀라는 별호를 가진......." "다지성녀...... 궁단향......?"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종리연이 여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는 것부터가 기분이 나빴다. 더구나 그녀를 찾아 떠나겠다니....... 대 놓고 화를 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방의경은 억지로 질투심을 억누르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그녀는...... 예쁜가요?" 종리연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모르다니요?" "아직 한 번도 본 일이 없으니까." "저...... 정말이세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방의경이 되물었다. 동시에 그녀는 종리연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해서 였다. 그러나 종리연은 진지했다. 어느 구석에서도 거짓의 기운을 엿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틀림없이 모르는 여자란 말이죠?" 종리연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렇소." "그럼...... 왜 만나려고 하는 거죠?" "그건......." 종리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에게 볼 일이 있기 때문이오." 종리연도 눈치는 있었다. 아니 눈치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십년 경력의 고단수가 아닌가. 그는 여인의 무서운 점의 하나가 질투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질투심으로 인해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무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그러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성녀를 얻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가 강호에 나온 목표였으며 의형과 사부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아닌가. 방의경도 만만치는 않았다. "전에 연랑이 말한 적이 있죠? 결혼을 하면 말해 주겠다는 것 말이에요." 종리연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오. 이제 속시원히 밝히리라. 내가 당신과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삼패천(三覇天)을 무찌르기 위해서라오." "......!" 한 순간 방의경의 안색이 급변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같았다. 곧이어 뭔 가를 골똘이 생각하던 방의경이 종리연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그 여인도......?" "그렇소.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내가 만나야 할 사성녀(四聖女) 중의 하나요." "사성녀라구요?" 방의경이 자지러지듯 놀랐다. 사성녀! 방의경도 그 이름만은 알고 있었다. 다만 자기를 제외하고 사성녀가 구체적으로 누구누구인지를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사성녀라......." 이렇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일어났다. 종리연은 가슴이 덜컥했다. '호...... 혹시?' 그러나 방의경은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비록 한때 도도함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적이 있었으나 그녀도 일문의 방주였으며 무림을 위해 큰 일을 하리라 마음 먹고 있는 여걸이었다. 다지성녀 궁단향에게 느꼈던 방금 전의 질투심은 말끔히 털어 버린 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리연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제야 당신이라는 사람의 진면목을 알겠군요. 당신이야말로...... 큰 뜻을 지닌 분이군요. 오! 정말 사랑스럽고 훌륭한 분이에요. 당신이란 사람은......." "......?" 종리연은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서 존경과 흠모의 빛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방의경은 그의 가슴에 쪽! 소리나게 입술을 맞추었다. 이어 그윽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제가 보는 눈이 모자랐어요. 당신을 그저 바보로만 알았으니 말이에요." 방의경은 통이 큰 여인이었다. 사소한 여자의 질투심 따위에 대사를 그르칠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비로소 종리연이 다지성녀 궁단향을 만나려는 이유를 알았다. 틀림없이 종리연은 그녀와도 결혼을 하려 들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그녀 또한 삼패천을 무찌르는 데 있어서 종리연에게 큰 힘이 되어 줄 여인같았다. "후후훗!" "......?" 종리연은 느닷없이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자 어리둥절했다. 한 동안 방의경은 웃음을 멈출 줄을 몰랐다. "후훗......! 당신은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 사성녀 모두를 아내로 삼겠다는 건가요?" "그렇소." 종리연의 대답은 확고했다. "호호홋...... 그게 잘 될까요?" "날 도와 주시오." "뭐라고요? 저더러 다른 여자들을 당신에게 바치란 말인가요?" "무림을 위해......." 그 순간 방의경이 종리연의 가슴을 꼬집었다. "아얏......." "당신은 무척 응큼해요." 방의경은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종리연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화를 내는 건지 아니면 즐거워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리연은 그녀의 몸에 또다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름아닌 오징(五徵)의 현상이었다. 그는 입맛을 다셨다. "또 하란 말이오?" "나...... 나빠요!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다니......." 방의경은 종리연의 귓불을 이빨로 물어 뜯으며 온몸을 비벼댔다. '끄응...... 대체 여자들이란.......' 할 수 없었다. 종리연은 다시 그녀를 수차례에 걸쳐 만족시켜 주고나서야 가까스로 놓여날 수 있었다. "결코...... 절 버리시는 것은 아니시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종리연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물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하오방의 전 문도들을 동원해서라도 당신을......" 방의경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문도들을 모두 동원해서 날 어떻하겠다는 거요?" 종리연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방의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을...... 당신을...... 아이, 몰라요." 하오방 문도들이 이런 방주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틀림없이 기절초풍 하였을 것이다. 종리연과 단 둘이 있을 때 그녀는 이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하오방주 본연의 도도하고 오만한 기색은 눈을 씻고 찾아볼 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염려마시오. 누가 뭐래도 당신은 나의 본부인이 아니오? 내가 무림의 평안을 위해서 사성녀를 취하러 가기는 하지만......." "하지만 뭐죠?" 이번엔 방의경이 물었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사랑이오." "아......!" 방의경은 너무나도 달콤한 기분에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만약 결혼하기 전에 남자에게 이토록 진부한 말을 들었더라면 방의경은 틀림없이 화를 냈을 것이다. 물론 말을 꺼낸 당사자는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방의경은 종리연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아득히도 먼 옛날. 고래(古來)로부터 전해오는 진리(眞理)에 속하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랑이 여인을 눈멀게 한다는 금언(金言)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 이보다 더 정확하고 값어치 있는 진리의 말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되었던 방의경은 종리연의 품속에서 마냥 행복하고 마냥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정말이지 조금 더 일찍 이런 행복감을 맛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까지 하면서. 그리하여...... 드디어 종리연이 하오방을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잠깐 이쪽으로 오세요." 종리연이 떠나기 전날 밤. 방의경은 종리연을 이끌고 하오방의 비밀 장소로 데려갔다. 그곳은 하오방의 중앙에 위치한 장서각(藏書閣) 아래의 지하 석굴(石穴)이었다. 장서각에 그런 비밀스런 석굴이 있다는 것을 종리연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르릉......! 방의경이 장서각 오른쪽 벽의 한 곳을 누르자 벽을 따라 놓여 있는 책장이 밀려나더니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정말 놀랍소. 장서각 아래 이런 비밀 장소가 있다니!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치 못했소." 놀란 얼굴로 종리연이 말했다. "이곳이 바로 하오방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에요. 하오방의 모든 비기(秘技)와 절정무학(絶頂武學)의 고서(古書)를 모아 둔 곳이죠. 비록 무림(武林)의 무학(武學)과는 다른 것이지만 하오방만의 특이한 비기를 모아 둔 곳이에요." "그럼...... 날 이곳으로 데리고 온 목적이......?" 종리연이 감격했다는 듯이 방의경을 쳐다 보았다. 일순 그녀의 얼굴에 분홍빛 홍조(紅潮)가 어렸다. "그래요. 연랑께 하오방의 모든 비기를 드리겠어요. 제가 연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죠? 연랑은 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분이에요. 제가 아낄 것이 뭐가 있겠어요? 뿐만 아니라......." 방의경은 홍조 띤 얼굴을 들면서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연랑은 이제 명실공히 하오방의 태상장로(太上長老)예요.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하오방도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답니다. 이것이 그 신패(信牌)랍니다." "고맙소." 종리연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고맙다니요? 그런 말씀일랑 제발 마세요. 오히려 제가 송구스러울 따름이랍니다. 당신께 더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 "당신을 막지 않겠어요. 무림을 위해 일하는 거인(巨人)이 되세요. 당신의 의경은 그런 당신이라면 무엇을 하든 따르겠어요. 다지성녀 궁단향의 행방을 저도 알아보겠어요. 건투를 빌어요. 연랑. 당신을 사랑해요!" 이별하는 날 방의경이 한 말이었다. 그로 인해 종리연은 발걸음도 가볍게 정든(?) 하오방을 떠날 수 있었다. 이제 그의 앞에는 남은 삼성녀(三聖女)를 얻는 일이 남아 있었다. 비록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첫번째 여인 방의경은 무사히 정복한 셈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녀에게 조화십팔보(造化十八步)를 한 번도 써먹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땅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얼굴이 모두 틀리다. 코가 다르며 입이 다르고 눈이 다르다. 설사 코와 입이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고 쳐도 눈이나 귀 아니면 머리통이라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심지어는 사고방식(思考方式)까지 다르다. 그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의미일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 태사의에 앉아 있는 사람의 눈빛이 남다르다고 해도 하등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암갈색 동공(瞳孔) 깊숙한 곳에서 푸르게 발산되는 청광은 마주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목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5평이 조금 넘는 방이었다. 결코 크다 할 수 없는 이 방 안의 장식은 고아(高雅)했다. 그러나 소박한 방에 어울리지 않게 큰 태사의에는 지금 손에 상아로 된 홀(笏)을 쥐고 있는 유삼(儒衫) 차림의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스물여덟이나 아홉쯤 되었을까? 보기만 해도 유려한 분위기는 그가 절세의 미남임을 짐작케 하고도 남았다. 피부도 희었다. 오관도 뚜렷하고 준미하였다. 한 가지 옥(玉)의 티를 끄집어 낸다면 준미한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 키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팔 척에 가까운 신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창백한 눈(目)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발산되는 청광(靑光)은 뭇 사람들을 질식케 할 것만 같은 창백하면서도 기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당금 천하를 공포로 몰아넣는 삼패천의 세 번째 인물인 삼촌살인설(三寸殺人舌)이었다. 성(姓)은 조(趙)요, 이름은 문백(文伯)인 사내. 그는 이제까지 상대방을 향해 한 번도 무공(武功)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무공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 번도 무기나 병기(兵器)를 몸에 지닌 적이 없었다. 그런 조문백에게 사람들이 속속들이 죽임을 당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암기술(暗器術)을 사용하거나 무기를 사용해 살인을 한다면 흔적이라도 남겠지만, 조문백에게 당한 사람들은 도대체가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삼촌살인설의 가장 무서운 병기는 바로 세 치 혀(三寸舌)였던 것이다. 다만 삼 촌(三寸)밖에 되지 않는 혀로 그는 벌써 일천오백인 이상을 죽였다. 또한 달리 심살(心殺)이라는 외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계략이 그만큼 무섭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지금 태사의에 앉아서 조문백은 한 장의 서류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푸른 안광이 더욱 무섭게 쏘아져 나왔다. "으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상인이 챙긴다더니...... 완전히 당했군." 서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하오방주의 혼인식을 조사한 결과 사실로 판명되었음. 현재 배우자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 알아내는 즉시 보고 올리겠음.> 불현듯 홀이 움직였다. 그가 손으로 만지작거렸기 때문이었다. 서류를 씹어 삼킬 듯이 노려보고 있는 조문백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때,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팔 척의 신장을 지니고 있는 사나이로서 어딘가 조문백과 많이 닮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비쩍 말랐으며, 청포(淸泡)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섭선을 들고 있었는데 전신에서 한기와 음산함이 흐르고 있었다. 조문백과는 달리 피부가 얼음장 같았고 눈에서도 투명한 기운이 흘러 나오는 인물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조문백은 급히 일어서서 예를 취했다. 들어선 사람은 다름아닌 무영비마(無影飛魔)였다. 삼패천의 두번째 서열의 인물로서 이름을 조천백(趙天伯)이라고 하는 자였다. 물론 천하에서 그 이름을 제대로 아는 자는 없었다. 들어선 조천백은 음산한 안광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음......! 삼황후(三皇后)가 바람을 피웠다고?" "예. 그렇지 않아도 그일 때문에 지금 난감해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음......! 미리 손을 쓰는 건데...... 우리가 너무 늑장을 부렸다." 조천백의 음성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참으로 기이쩍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였다. 황후(皇后)라니? 그것은 황제의 부인에게만 쓰는 호칭이 아닌가? 하기는 삼패천이 자신들을 칭할 때는 '짐'이라는 호칭을 즐겨 쓴다는 것은 이미 무림에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들이 자신들의 칭호를 황(皇)으로 연결시키는 지에 대해서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조문백은 담담히 말했다. "예상 외의 사태였습니다. 관련자들은 모두 처벌토록 지시했으나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격입니다." 조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실수는 다시 없어야 한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문득 근심스럽다는 듯이 조천백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건 조문백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모르고 계시나...... 걱정입니다. 아시는 날이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으음......!" 조문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천백의 얼굴에는 언뜻 두려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 조천백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조문백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사황후(四皇后)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조천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것이...... 쉽지가 않다. 계속 시도하고 있으나 잘 먹혀들지 않고 있으니......." 조천백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표정에는 근심스러움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순간 조문백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형님! 차라리 강제로 집행하는 것이 어떨까요?" 당장이라도 일을 벌리려는 듯 설쳐대는 조문백을 향해 조천백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곧 그의 입에서 차디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 된다. 그런 일을 억지로 한다면 반드시 훗날 물의를 빚을 소지가 있다. 그러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중히 하는 것이 도리다. 더욱이 그 일은 종사(宗師)에 관한 일이니 어찌 졸속으로 처리하겠느냐? 더군다나 우리 조씨 왕가(趙氏王家)의......." 채 말을 끝맺지 못하는 조천백의 표정은 더더욱 우울해지고 있었다. 그런 조천백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조문백은 몸을 흔들며 쾌활하게 말했다. "형님. 너무 걱정마십시오. 이제 이 년 후면 무림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그때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입니다. 사인(四人)의 황후를 맞아들이는 일도 그때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런데 삼황후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황상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찰나지간 조천백의 눈이 번쩍 빛났다. "버리긴 아까우니...... 후실(後室)로 쓰는 것이 어떨까?" 조문백이 반색을 했다. 조천백의 생각이 자신의 의도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형님이시군요. 저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 "황상의 음식을 먼저 시식한 놈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일순 조천백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맞다. 놈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안심하십시오. 이미 조치를 취해 놓았습니다." 조천백은 돌아섰다. 그가 나가자 조문백은 한 동안 방 안을 오락가락 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고 알 일이니 미리 알리는 것이 낫겠어.'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회랑은 미로(迷路)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회랑을 걸어가는 조문백의 안색은 침중하기만 했다. 조천백과 함께 있을 때 보였던 패기(覇氣)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긴 회랑을 걸어가는 동안 수없이 마주친 여인들이 그를 향해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허리를 숙였다. 조문백은 그런 여인들에게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회랑을 지나는 동안 남자는 한 명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남자라고는 조씨 삼 형제를 제외하고는 접근이 불허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절륜한 미모의 여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궁장(宮裝)으로 황궁(皇宮)의 나인들과 같은 차림이었다. 여인들은 조문백을 볼 때마다 옆으로 물러나며 허리를 깊숙이 꺾어 절을 하고 있었다. "삼왕야(三王爺) 님......." 그것이 조문백을 대하는 정식 칭호였다. 회랑이 끝나는 곳에는 월동문(月洞門)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한 명의 늘씬한 미인(美人)이 서 있었다. 그녀는 자색(紫色)의 궁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구름처럼 틀어 올린 형태였다. 왼쪽 뺨에 하나의 작은 점이 찍혀 있는 인상이 깊은 미인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조문백의 눈이 빛을 냈다. "......!" 여인은 조문백을 보자마자 안색이 변했다. 그녀의 호수같이 푸른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비애(悲哀)가 깔려 있었다. "오셨습니까? 삼왕야?" 조문백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 앞에 설 때마다 느끼는 감정 때문이었다. "으음...... 설화(雪花)..... 황상께서는?" "제의(祭儀)...... 중이십니다." 나지막이 말을 전하는 설화의 표정에는 가득 슬픔이 고여 있었다. 순간 조문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시에 싸늘한 시선이 되었다. "설화! 앞으로 내 앞에서는 그런 표정을 짓지 말아라." 쌀쌀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예......." 설화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같은 음성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 조문백은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나 채 다섯 걸음도 옮기지 않았을 때 설화의 당황해하는 음성을 들어야만 했다.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폐하께선 삼왕야께서 오시면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조문백은 걸음을 멈추었다. "음." 그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윽고 조문백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돌렸다. 그는 시선을 회랑의 기둥에다 던지며 말했다. "그럼...... 내가 왔다고 전해라!" 그것은 의도적으로 설화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동작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월동문 안으로 들어서며 설화는 슬픈 가슴을 억눌렀다. 태황신전(太皇神殿)이라고 적힌 화려한 거실 문 앞에 당도한 설화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안에서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설화는 그 비명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어느덧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으며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순간 안으로부터 한가닥 굵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누구냐?" "저어......." 설화는 잠시 멈칫거렸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삼왕야이십니다." "들라 일러라." 설화는 물러서며 뒤에 서 있는 조문백을 돌아 보았다. 조문백의 눈썹이 언제부턴가 일그러져 있었다. "......." 생각대로라면 설화는 그의 품으로 뛰어 들어 한껏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신분과 삼왕야의 입장 때문이었다. 삼왕야는 그녀에게 하늘보다도 높은 존재였다. 그의 윤허(允許)가 떨어지기 전에는 눈길이 마주쳐도 안 되는 것이다. 하물며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울음을 터뜨리고 싶다니....... 설화가 한 걸음 비켜서 길을 틔워주자 조문백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조문백은 코 끝에 짙은 혈향(血香)이 풍기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의 가슴이 이상하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혈향을 맡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무척이나 기분 나쁜 일일 것이다. 물론 처음에 조문백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차츰 그것에 길이 들여져 이제는 혈향을 맡는 것을 즐기기까지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안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안이 은은히 들여다 보이는 휘장 속. 침상이 있고 그 침상 위에 철탑(鐵塔)을 연상케 하는 거인이 앉아 있었다. 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장본인 일지겁천(一指劫天)이었다. 바로 삼패천의 우두머리이며 조씨 삼 형제 중의 첫째인 조황백(趙皇伯)이라는 인물이었다. 일지겁천 조황백은 가부좌를 틀어 앉아 있었다. 그는 구리빛의 근육을 그대로 내놓고 있었다. 평소 즐겨입는 검은색의 곤룡포(袞龍袍)는 침상 아래 떨어져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 알몸의 여인이 얹혀 있었다. 설화가 제의(祭衣) 중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은 정사(情事) 였다. 조황백을 상대할 여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양물(陽物)이 무섭도록 큰 위인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한 번 결합한 여인은 이후로 여자 구실을 할 수 없게 되기에 이를 정도였다. 오히려 목숨을 잃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실내에 혈향이 흐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폐하......!" 조문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셋째." "말씀 드릴 일이......." 순간, 휙! 하는 파공성에 이어 쿵...... 하는 둔중한 소리가 났다. "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조문백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황백의 무릎 위에서 시달리던 여인이 내팽겨쳐저 벽에 부딪친 후 절명한 것이다. "치워라. 설화!"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었다. 문 밖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설화는 명령을 받고 죽은 여인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설화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머리가 으깨어져 죽은 여인. 비록 생전에는 누구 못지 않게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지금은 고혼(孤魂)이 되어버린 것이다. 설화는 이를 악물고 여인의 몸을 안아들었다. 이때였다. 문득 분노에 찬 조황백의 노성이 벼락처럼 울렸다. "뭐......뭐라고......?" 16 흑점(黑店)에서의 조우(遭遇)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같았다. 종리연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즐거운 휘파람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는 흔쾌한 심정으로 하오방을 떠났다. 더구나 방의경은 그가 편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온갖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러나 즐거운 마음도 오래 가지 않았다. 하오방을 떠난 지 얼만 안 되서 그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지성녀 궁단향의 행방을 모르지 않은가. "쩝! 이거야말로 낭패로군. 대체 어디가서 찾는단 말인가?" 종리연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낭패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하오방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침 나절에 하오방을 떠난 놈이 겨우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되돌아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종리연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머리를 굴렀다. 그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옳다! 서주(西州)로 가자! 그곳에 있는 천상제일루(天上第一樓)로 가자. 거기에도 사성녀 중의 하나가 있지 않은가? 사형 남궁환인이 얻으려다 실패를 한 여인...... 봉황성녀(鳳凰聖女) 화안봉이 있지 않는가!' 더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종리연은 곧 신형을 솟구쳐 달리기 시작했다. 가을 저녁의 해는 빨리도 떨어진다. 종리연이 무창(武昌) 교외의 변두리에 당도한 것은 해가 완전히 떨어진 후였다. 어느새 하늘 한 쪽에 이지러진 초생달이 은하수 사이를 떠가고 있었다. 가을 달빛이 환히 비치는 주변의 풍경은 그야말로 교교(皎皎)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은가루를 뿌리는 듯한 달빛이 마을과 산야(山野)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했던가? 남빛보다 더 밝은 가을 하늘. 반짝이며 흐르는 은하수 사이로 유성(流星) 하나가 창백한 꼬리를 끌며 사라지고 있었다. "야호......!" 관도(官道)가 발 아래 내려다 보이는 작은 산마루에 당도한 종리연의 입에서는 저절로 감탄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가슴까지 뿌듯해지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살아가고 숨을 쉬는 이 세계가....... 정말 오묘하고 신비로운 일이다!' 종리연은 넋을 잃은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풍경에 취해 있는 사이 잠시 울음을 멈추었던 가을 풀벌레들이 합창이라도 하듯이 일시에 울어대기 시작했다. 똑...... 또르르...... 똑... 또르르......! 찌...... 찌...... 찌르르......! 이름을 알 수 없는 수십 종류의 풀벌레들의 합창이 교교한 달빛 과 어우러지며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혼자 보고 혼자 듣기가 너무나도 아까운 노릇이었다. 순간, "......!" 어떤 깨우침이 종리연의 마음을 일깨우고 있었다. "그렇구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사실을 너무 늦게야 깨닫게 되다니......." 종리연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그는 하늘을 향해 다짐이라도 하듯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알겠다. 하늘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를.......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의 삶을 피로 씻으려는 삼패천의 무리를 막으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것이 사부님과 사형이 목숨을 잃어가면서 내게 부탁한 일이다. 이제 나 종리연은 기필코 사성녀를 얻어 삼패천을 중원에서 쓸어낼 것이다!" 종리연의 얼굴에는 짐짓 엄숙한 기운이 충만해지고 있었다. 옥구슬 이슬에 단풍잎 시들고 무산(巫山) 무협(巫峽)에 가을 기색 소슬하다. 사방에 겨울 옷 마련하기 바쁘고 국화 거듭 보니 옛 일이 눈물겹구나. 두보(杜甫)의 추흥(秋興)이란 시다. 백설이 쌓여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산중에 낭랑한 시가 울려 퍼진 것은 막 해가 질 무렵이었다. 죽립을 쓴 한 사나이가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름아닌 종리연이었다. 정작 입으로는 낭랑하게 시를 읊고 있었으나 종리연의 마음은 그다지 편하지가 못했다. 사실 그는 좀 지쳐 있었던 것이다. 입으로 연신 흰 김을 뿜으며 힘겹게 산을 오른 지 어느덧 한 나절이었다. 더군다나 산의 밤은 더욱 빨리 오는 법이 아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겨울의 해는 서산으로 숨어버릴 것이었다. 그 전에 민가(民家)라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엄동설한(嚴冬雪寒)의 겨울에 꼬박 산에서 노숙을 해야 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관도(官道)로 오는 건데......." 종리연은 지기 시작하는 노을을 보며 초조한 듯이 중얼거렸다. 물론 관도를 버리고 산길을 택한 것은 그였다. 그 이유는 모두가 하오방 때문이었다. 천하 어디에도 하오방의 무리는 퍼져 있었다.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는 과거와 달리 하나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하오방의 태상장로라는 신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종리연이 하오방을 떠난 이후로 그는 귀찮을 정도로 하오방도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 지경이니 마음 놓고 잠을 자지도 밥을 먹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곳곳마다 하오방도들이 새로이 방주의 남편으로서 태상장로가 된 그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관도를 버리고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산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만만하게 보고 접어 든 산길이 생각보다 험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곳에서는 길을 잃어서 금쪽같이 귀한 시간을 허비까지 해야 했다. 겨우 제 길을 찾았지만 가도가도 백설이 쌓여 있는 산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빨리 서둘러야 했다. 잠시 후면 해가 떨어질 것이고 그는 꼼짝없이 눈 속에서 노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옥구슬 이슬에 단풍잎 시들고 무산(巫山) 무협(巫峽)에 가을 기색 소슬하다. 사방에 겨울 옷 마련하기 바쁘고 국화 거듭 보니 옛 일이 눈물겹구나. 정말 눈물겨운 발걸음이 아닐 수가 없었다. 종리연은 쉴 사이 없이 하나의 시조만을 계속 중얼거리며 걸었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그 시조만 벌써 스무 번 이상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할 지경이었다. 내리막인 줄로만 알았던 산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변했다.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어느새 노을이 스러짐과 동시에 칠흑같은 밤이 되고 말았다. 바람은 또 얼마나 차가운가. 코와 귀가 얼어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볼따구마저 시퍼렇게 얼어붙었다. "사...... 사방에...... 겨...... 겨울 오...... 옷 마련하기 바 바 바쁘고......." 이제는 입까지 얼어붙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구...... 국화 거 거 거듭....... 보 보니....... 예...... 옛 일이..... 누...... 눈물겹구나." 바로 그때였다. 달빛과 눈빛에 의지해 산 등성이를 올라 서는 순간 구세주가 나타났다. 불과 삼십 장 저쪽에서 노르스름한 불빛이 보인 것이다. "사...... 살았다. 하늘에 계신 형님께서 나...... 나를 돌보시는 구나." 어느덧 종리연의 입에서 기쁨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탄성보다 더 빠르게 종리연의 몸은 불빛을 향해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그 시각 산중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종리연 혼자만이 아니었다. 얼어버린 눈을 밟으며 달빛 사이로 걷던, 흩날리는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검은 옷의 여인 역시 길을 잃고 있었다. 등에는 오 척이 넘는 긴 장검을 메고 키만 해도 육 척에 가까운 여인으로서 늘씬한 체격이었으나 부드러움보다는 강인한 느낌이 앞서는 여인이었다. 창백한 달빛을 받아서인지 어둠을 뚫고 솟아나는 듯한 맑은 눈동자마저 차가운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여인이라면 전 중원을 통틀어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 그건 다름아닌 마검성녀 단리사영이다. 지금 그녀가 산길을 헤매고 있었다. 만일 며칠 전 엄청난 폭설이 내리지 않았다면 그녀가 길을 잃는 따위의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살을 에일 듯한 매서운 바람과 달빛을 머금은 창백한 어둠이 주위를 휩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도 안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광경은 그녀가 길을 잃은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급한 일 때문에 시간을 아껴가며 밤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얼어붙은 눈처럼 싸늘하기만 하던 그녀의 눈이 문득 반가운 동무를 만난 것처럼 빛났다. 그건 다름아닌 한 점 노르스름한 불빛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샌가 그녀의 눈빛은 예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천락점(天樂店). 이런 산중에 주막이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빛은 바로 천락점이라는 주기(酒旗)가 펄럭이고 있는 이 주점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 단리사영은 주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맞는 것은 한 쌍의 노부부였다. "어서 오시오." 허름해 보이는 주점 안은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구석에 놓인 아궁이에서는 젖은 솔가지를 태워 물을 끓이는지 매케한 연기가 쉴 사이 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단리사영은 연기를 피해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검으로 단련된 그녀로서는 대충 바람만 피할 수만 있다면 오늘과 같은 날씨도 별로 무리가 되지 않았다. "뭘 드시겠수?" 단리사영은 본래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노인이 다가와 묻자 그저 간단하게 말했다. "소채와 소면." 건량(乾糧)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런 주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겨울이라 소채는 곤란합니다요." "그럼 있는 대로!" 노인의 눈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의 아래 위를 ㅎ었으나 단리사영은 개의치 않고 창 밖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부엉! 부부엉......! 어느새 밤이 짙어 있었다. 기나긴 겨울밤을 독수공방으로 지새우는지 부엉이 한 마리가 처량하게 울음을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참으로 서글프게 들려왔으나 단리사영은 그런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잠시 후 노인이 단리사영 앞에 들고 나온 음식은 술 한 병과 김이 모락거리는 만두 한 접시였다. "허허...! 마침 이것밖에 마련이 되지 않았소. 하지만 다행으로 아시오. 이것이라도......." "......." 노인은 왠지 모르게 말이 많았다. 단리사영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노인의 참견을 무시하며 젓가락으로 만두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바로 그때 노인의 눈빛이 이상하게 빛을 발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득 단리사영은 만두를 입에 가져가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싸늘하게 노인을 쏘아보았다. "......?" 단리사영의 눈빛에 지레 놀란 노인이 어깨를 움추릴 때였다.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지?" 순간, "쌍년!" 하는 외침과 동시에 파파파팍! 노인은 별안간 옆에 있던 즙기를 들어 단리사영에게 던졌다. 쨍그랑! 즙기가 벽에 부딪치며 산산조각났다. 때를 같이하여 문 쪽에 있던 노파도 가세해서 단리사영에게 덤벼들기 시작하였다. "크크크! 요년 죽어봐라!" 노파는 계산대 위의 주판을 그녀를 향해 던졌다. 주판알이 한꺼번에 수백 알이나 탄환처럼 퉁겨져 나갔다. 언뜻 보기에 그것은 주판알처럼 생겼으나 실은 기묘한 암기였던 것이다. 퍼퍼펑.......! 주판알은 사방으로 튀며 벽에다 손목이 빠져나갈 정도의 구멍을 만들어 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임자를 잘못 만난 셈이었다. 날아드는 암기를 피하며 단리사영은 침착하게 옆에 놓아 두었던 장검을 뽑아 가볍게 한 번 그었을 뿐이었다. "으아아악......!" "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보라가 일어났다. 노부부는 분명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거의 동시에 수급이 날아갔다. 한꺼번에 떨어진 팔다리가 주막 안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단리사영은 어느샌가 검을 집어넣고 몸을 일으켰다. "역시 수상한 냄새가 났어......." 이렇게 중얼거린 단리사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향한 곳은 주방 쪽이었다.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안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방의 벽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 어느 순간 그녀의 눈에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이 어렸다. 천장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어떤 물체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발가벗은 어떤 사나이의 몸뚱이었다. 죽은 고기처럼 축 늘어진 몸. 단리사영은 거꾸로 매달린 사나이의 얼굴을 보고 갑자기 쿡! 하고 웃었다. "이런 곳에서 또 만나다니......." 단리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청년을 단리사영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낙수의 배 위에서 만났다가 결혼을 하자고 조르며 따라왔던 멍청한 청년이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자는 바로 종리연이었다. 불쌍하게도 종리연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채 손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단리사영은 조금도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발가벗은 모습을 본다 해도 그녀에게는 단지 사물의 하나로 보일 뿐이었다. 정신을 잃은 종리연을 끌어내린 그녀는 잠시 망설였으나 곧 종리연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혈도를 풀었어도 그는 깨어나질 못했다. 미약을 먹였기 때문이었다. 종리연은 재수없게도 흑점(黑店)의 계략에 걸린 것이었다. 흑점이란 인육방(人肉房)을 말하며 사람 고기를 내다 파는 조직의 일원이었다. 단리사영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종리연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바보같은 놈이로군......." 그녀는 구석에 팽개쳐져 있는 옷을 집어 그의 몸에 던져 주었다. 그리고는 한 쪽 구석의 의자에 가 앉았다. 이어서 검을 가슴에 품은 그녀는 곧 눈을 감았다. 아무 곳에서나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무인(武人)이면 당연히 가장 초보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이었다. "......!" 새벽 여명이 창 밖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낀 단리사영은 눈을 떴다. 어느새 겨울 새벽의 어슴프레한 미명(未明)이 성애가 얼어붙은 창으로부터 밀려들고 있었다. 눈을 뜬 그녀의 시선은 자연히 종리연에게 향했다. 그 순간 피식 절로 입가에 미소가 흘러 나왔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인간의 감정이 전혀 없을 정도로 매정하기만 한 그녀가 왜 유독 종리연만 보면 웃음이 나오는 것인지. 그때였다. "으...... 으음......!" 정신이 들었는지 종리연의 몸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순간 단리사영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그녀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 정신을 차린 종리연은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더군다나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을 깨닫는 순간은 정말이지 너무나 황당하기만 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을 더듬어 나갔다.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산길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발견한 불빛을 보고 찾아온 것이 주막이었다. 이곳에서 얼어붙은 몸을 녹이다가 사람 좋아 보이는 노부부에게 술 한 잔을 얻어 먹고는 기억이 두절된 것까지만 생각이 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그는 주위의 풍경이 삭막하다는 것을 느끼고 기이해 하다가 곧 깨닫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인육(人肉)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어 파는 흑점이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주점 안에는 노부부의 시체가 있었다. "......?" 그는 강한 의문을 느꼈다. '대체 누가 나를 구했을까?'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으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해도 알 수가 없자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침 해가 동쪽 산봉우리에 쌓인 눈 위로 창백한 빛을 던지며 장엄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17 봉황성녀(鳳凰聖女) 화안봉(華安鳳) 서주(西州). 대도시(大都市)답게 흥청거리는 것이 비단 한두 곳일까마는 예나 지금이나 서주의 번화로움에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서주 제일의 아니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기루 천상제일루(天上第一樓)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천상제일루의 하늘 위로 초봄의 따사롭던 황혼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혼을 받으며 한 명의 청년이 황금빛으로 물든 천상제일루의 편액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드디어...... 형님의 일을 대신해서 내가 왔다." 이렇게 중얼거리는 청년은 다름아닌 종리연이었다. 그는 회한에 잠기고 있었다. 과거의 슬프면서도 어이없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의형 남궁환인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라 그는 잠시 감회에 잠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니 콧등이 시큰거려왔다. '이 종리연이...... 형님이 못 이룬 큰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 이곳을 찾아 왔는데 이게 무슨 주책이란 말인가? 지하에 계신 형님도 기뻐하지 않으리라. 주책없는 나의 이런 모습은.......' 종리연은 마음을 바꾸기 위해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후 섭선을 흔들며 천하제일루 안으로 들어섰다. 취선(翠仙). 그녀는 천상제일루에서는 아직도 어린 기녀(妓女)였다. 그녀가 하는 일은 문 안에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일이었다. 취선의 소원은 하루 빨리 자신도 명기(名妓)가 되어 자신도 호사한 방 안에서 문사들을 모시고 화답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밤이란 정말 짜증스러운 시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오늘도 그녀는 문루에서 서성이며 꿈을 꾸고 있었다. 유명한 기녀가 되어 내놓으라 하는 사대부의 귀공자들과 시를 읊고 사랑을 나누는 그런 꿈이었다. 그러한 꿈은 꾸고 또 꾸어도 지치지를 않는다.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황당하게 빠져드는 묘미가 있는 것이다. 지금 그녀는 서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귀공자와 사랑을 나누는 꿈을 꾸고 있었다. 바야흐로 귀공자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려고 허리를 숙일 때였다. "이리 오너라!" 어디선가 들리는 뚝배기 깨어지는 듯한 목소리 하나가 그녀의 달콤한 꿈을 산산조각 내었던 것이다. "......!" 그녀는 재빨리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꿈이란 언제든지 꿀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급히 옷매무시를 매만지며 문 앞을 살펴 보았다. 그 순간 취선은 이상한 생각과 함께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 문으로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여느 공자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혹시 미친 사람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확실히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사람이었다. 술에 취한 것같이 엉덩이를 이리 저리 흔들며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주제에 섭선까지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더더군다나 섭선을 접었다 폈다 하는 동작도 엉성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공자대부들을 많이 접해 본 그녀는 귀공자들의 섭선을 흔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청년은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멍하니 보고 있는데 사나이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실례하겠소이다. 이곳이 혹시 천상제일루가 맞소?"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일부러 무게를 더하려는 음성으로 도리어 듣기가 매우 역겨운 것이었다. 취선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킥 하고 웃고 말았다. "마...... 맞아요. 공자님!" "......?" 종리연은 의아했다. 그녀가 자꾸만 자신을 힐끔거리며 웃기 때문이었다. 종리연의 눈치를 알아차린 취선은 얼른 사과했다. 기루밥 삼 년이라면 맹물로 술을 만드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그녀도 눈칫밥이라면 종리연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시...... 실례 했어요. 공자님 어서 안으로......." 취선은 허리를 급히며 사내를 안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 이상하게 생각한 취선이 몸을 똑바로 세웠을 때였다. 사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아니오. 나는 이곳의 루주를 만나러 왔소." "......!" 취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루주를 만나러 왔다니?' "......?"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종리연을 바라보았다. 천상제일루의 루주는 아무나 만나주지 않는다. 설혹 억만금을 가지고 온다 해도 그녀 자신이 내키지 않으면 결코 만나지 않는 것이 불문률이다. 그런데 사전에 통고도 하지 않고 루주를 만나겠다는 자가 있다니....... 그 사람은 십중팔구 머리가 어떻게 된 작자이거나 노름을 하든지 도적질을 하든지 해서 하루아침에 일확천금을 거머쥔 사람이 틀림없는 위인이었다. 취선은 이미 많은 경험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 루주께서는 지금......." 그러나 종리연은 취선의 말을 더이상 듣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아오. 루주가 출타중이란 것을...... 그러니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겠소." "......!" 방망이로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취선은 멍청해지고 말았다. 선수(先手)도 그런 선수는 없었다. 넋을 잃은 취선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종리연은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기실 종리연은 예전 남궁환인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남궁환인의 방식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옳은 것이라고 믿는 그였기에. 취선은 안으로 제 집처럼 걸어 들어가고 있는 종리연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자꾸만 멍청해지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누가 멍청한 것인지....... 한 동안 자신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기루(妓樓)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뚱기둥...... 땅! 떠들썩하던 노랫소리 풍악소리도 늦은 밤이 될수록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벌써 3일째, 종리연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따금 귀를 기울였으나 그가 원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노랫소리가 들려올 때가 되었는데....... 아니 훨씬 지났는데...... 왠 일이지?" 정말이지 종리연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껏 그는 과거 남궁환인과 함께 왔을 때의 장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목매어 기다리는 것은 바로 천상제일루주가 부르는 시가(詩歌)였다. 실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종리연으로서는 그의 사형인 남궁환인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런 누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밤이 지나면 어느덧 나흘째였다. 그러나 종리연은 까맣게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천상제일루주가 종리연이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종리연이 마침내 좋은 꾀를 생각해 내고 무릎을 친 것은 이 경(二更)도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종리연은 마침내 창문을 열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지! 그래! 문도 두드려야 열리는 법이 아닌가?" 지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인이 고운 아미를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요 며칠 통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 들려오는 노랫소리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차라리 악을 쓰는 것이었다. 아무리 듣지 않으려 신경을 다른 데로 돌려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얼마나 정력이 대단한 위인인지는 몰라도 노랫소리는 밤새 악을 쓰듯 울리는 것이었다. 거울을 보는 미녀의 얼굴은 온통 짜증이 어려 있었다. 하늘이 차고 서리와 눈이 내리네. 나그네는 오직 가고 또 가야만 하네. 이 해도 저물어 세모인데. 에헤라 다시는 기약 못할 길이라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노랫소리는 천상제일루주의 귓전을 자꾸만 파고 들고 있었다. '아아! 제발...... 제발 좀!' 천상제일루주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밤새도록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귀에서 손을 떼기만 하면 그 엉터리 노래는 영락없이 계속 들려오는 것이었다. 뜬 구름 종일토록 오락가락 하건만 나그네 그대는 내게 오지 않더라 사흘 밤을 계속 그대 꿈에 보이니 그대의 정애(情愛)가 두터운 줄을 알겠네 정말이지 여인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것은 벌써 일 주일째를 계속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좋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노래의 가사를 들어보면 그것이 자기를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으나 루주의 체면 때문에 무턱대고 만나 줄 수도 없었다. "대체 누구길래......?" 여인이 잔뜩 짜증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한 중년 여인이 걱정스러운 투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루주님. 빨리 무슨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벌써 일 주일째랍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본루의 문을 닫아야 할 판국입니다." 그렇다. 며칠째 그 미친 작자가 고래고래 악을 쓰는 바람에 기루에 찾아왔던 손님들이 인상을 쓰고 나가 버리는 불행한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수입에 이만저만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한 동안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던 여인은 마침내 결단을 내리듯이 중얼거렸다. "좋아. 그를 봉황각(鳳凰閣)으로......." 며칠째 미친 녀석의 악쓰는 소리에 잠도 재대로 못 잤는지 천하제일의 미녀라고 불리우는 그녀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는 것이 거울 속으로 드러났다. '으윽! 목이 부어올랐나 보군.' 종리연은 벌써 목이 쉬어 있었다. 며칠을 쉬지 않고 노래를 불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 그도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공자님! 나오시지오. 루주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때마침 종리연의 방문을 들어 선 중년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어험......!"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종리연은 헛기침을 한 번 내뱉고는 섭선을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제 까짓 게 나를 만나주지 않고 배기지 못할걸.' 종리연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중년 여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길은 남궁환인이 걷던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왜 이런 곳으로 가는 것이오?" "......?" 종리연의 뜻하지 않은 질문에 도리어 여인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종리연을 안내하고 있는 곳은 바로 봉황각이었다. 화려한 대청과 회랑을 걸어가고 있는데 종리연이 항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또 잘못 건드렸다가는 이 괴물같은 손님이 어떤 태도를 보일 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편 종리연이 기대한 곳은 연못가의 정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가 안내받아 가고 있는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다 왔습니다." 중년 여인이 그를 안내한 곳은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방이었다. 방 안으로 통하는 문은 월동문이었다. 문 앞에 선 종리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섭선을 펼쳐 흔들었다. 그러더니 그의 입에서는 다시 예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흐느껴 우는 용두강에 칼을 갈다가 종리연은 한 소절을 읊은 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화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본래는 다음 소절인 '칼날에 손을 베고 붉은 피를 흘렸네' 라는 구절을 여인이 화답해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무엇하는 거예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중년 여인이 재촉했다. 그러나 종리연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반문했다. "분명 루주가 안에 있소?" "그럼요." 중년 여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연은 알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로군." "......?" 첩첩산중(疊疊山中). 정말이지 갈수록 태산이었다. 중년 여인은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종리연은 더이상 묻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종리연은 눈을 두리번거리며 누구인가를 찾았다. "......!" 방 안에는 은사로 꾸며진 휘장이 드리워진 침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휘장 너머로 은은히 한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종리연은 잠시 심호흡을 하다가 성큼성큼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 순간 여인이 상체를 일으키며 휘장을 걷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미색(美色)이 뛰어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당신이 아니오!" 종리연은 느닷없이 차갑게 말하며 돌아서는 것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걸어나가며 또다시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소양전의 으뜸 미인 양귀비가 옥련을 함께 타고 황제 시중 들었다고...... 그를 안내했던 중년 여인은 깜짝 놀랐다. "고...... 공자님......! 대체......." 그러나 종리연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계속 악을 쓰며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어디에선가 한 가닥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여인의 옥음이 들렸다. "놔 두어라. 보통 사람이 아닌 것같다." "하...... 하지만 루주님......."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그는 날 만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없이 만나주어야겠다." "......!" 고래고래 악을 쓰며 저만치 사라지고 있는 종리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년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왠 괴물같은 사내가 나타난 이후로 요즘 천상제일루는 말이 아니었다. 장사도 엉망이거니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모두가 그 악을 쓰는 노랫소리 덕분이었다. 방으로 되돌아온 종리연은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당사자는 알 수 없을 지 몰라도 그는 이미 천상제일루주와는 구면이었다. 남궁환인이 그녀를 만날 때 나무 위에 숨어서 몇 시간이고 훔쳐 본 그가 아닌가 말이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멀리서 풍기는 염기(艶氣)만 보고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종리연의 뇌리에 천하제일루주는 그만큼 깊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방금 전 본 여인은 명백히 아니었다. 바로 가까이 대했는데도 당시의 루주와는 전혀 틀린 감흥이었다. 그는 이제 과거의 종리연이 아니었다. 어쩌면 얼마 전이라면 침상 위의 그 여인만 보고도 눈이 뒤집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사성녀 가운데 한 명을 아내로 얻은 후였다. 이제 그 어떤 미인을 만난다 해도 그가 넋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종리연은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는 자신이 우직하게 노래를 부른 데 대한 효과를 보았다고 자부했다. '후후...... 얼마 버티지 못할걸?' "어헛...... 흠......!" 종리연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다시 노래를 시작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종리연은 자신의 귀를 활짝 열었다. "......?" 찰나지간 멀리서 은은한 옥음(玉音)으로 시를 읊는 소리가 창문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어느덧 종리연은 기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꿈결같은 비파음이 울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파에 맞추어 은은한 노랫소리가 합주되고 있었다. 달빛이 쏟아지고 있는 연못의 정자 안이었다. 꽃향기 간직한 바람이 불어 연못가의 버드나무는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네 개의 달이 떠 있었다. 하나는 하늘에, 하나는 호수에, 나머지 하나는 정자 안에서 비파를 탄주하고 있는 여인의 눈에. 그리고 또 있었다. 맞은편 버드나무 아래서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사나이의 흔들리는 동공에도 떠 있는 것이다. "......!" 종리연은 정자 안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그날도 그랬었지.......' 어느덧 종리연은 남궁환인의 생각 때문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된다. 종리연아, 종리연아...... 형님께서 지하에서 보고 계신다!' 종리연은 굳게 마음먹고 섭선을 꺼내 손바닥에 한 번 탁!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자 이제 시작이다! 제일 먼저 군웅보(群雄步).......' 종리연은 군웅보를 시전하며 정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정자 안의 여인은 눈에 이채를 띄고 있었다. 저쪽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는 동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비파음이 틀려지고 노래를 하던 입술에서는 웃음이 배시시 번지는 것이었다. 비파를 타고 있던 여인은 다름아닌 천상제일루주 봉황성녀(鳳凰聖女) 화안봉(華安鳳)이었다. 그녀는 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마침내 비파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호호호......!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다니.......' 이윽고 정자 아래까지 종리연은 다가왔다. "......."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한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오고갔다. 종리연은 먼저 입을 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공은 뉘시죠?" "......."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로 봉황성녀 화안봉이었다. 순간 종리연은 가슴은 졸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궁리했던 대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순간 깡그리 까먹은 것이다. 미리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떠올리기 위해서 그는 속으로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겨우 한 소절이 떠올랐다. '난 소저의 옥음(玉音)...... 다음이 뭐더라......? 어이쿠! 이거 정말.......' "상공은 도대체 누구신가요?" 화안봉이 다시 물었으나 종리연은 대답을 못했다. 이미 그는 주눅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 매사가 그랬다. 종리연은 일단 기가 죽으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었다. 그가 강호에서 담간랑이라는 별호로 불리웠던 것은 처음부터 비굴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없는 일이면 겁부터 집어먹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그에게 담간랑이라는 별호를 붙여준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어느덧 그의 이마에서는 쌀알같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 애간장이 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그윽한 눈으로 종리연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맑은 눈은 더욱더 종리연의 가슴을 뒤흔들고 있었다. 마침내 종리연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나...... 난 당신의 노랫소리가 쓸 만하고...... 또...... 좌우간 그래서 왔소." 화안봉의 눈이 한 순간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의 입에서는 교소(嬌笑)가 흘러 나왔다. "호호호호...... 참 재미 있는 분이시군요. 아무튼 칭찬해 주시니 고마워요." 그녀는 화사하게 웃었다. 백화(百花)가 일시에 피어난다 해도 그녀의 웃는 모습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같은 느낌이었다. "상공께서는 어쨌거나 이곳까지 오셨으니 일단 올라 오시죠. 마침 이곳에 오향주(五香酒)도 준비되어 있으니......." 종리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오향주......!' 그는 다시 기억이 되살아 났다. 남궁환인이 왔을 때도 똑같은 술을 준비했다고 했었다. 그는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냥 오르지는 않았다. 종리연은 여러 가지 보법을 계속 바꾸어 가며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이한 동작이었다. 엉덩이를 흔드는가 하면 어깨를 둥싯거리는 폼이 너무나 이상하고 황당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그러면서도 섭선은 줄기차게도 계속 흔들어 대고 있었다. '크크큭......!' 화안봉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써야만 했다. 이윽고 그가 정자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자 그녀는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상공께서는 천 첩을 보고자 오셨다고 들었는데......?"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무슨 연유이신지요?" 언제 떨었느냐 싶게 종리연의 음성은 명확했다. 그 또한 화안봉으로서는 놀랄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부탁이 있어서요." "......?" 화안봉은 어리둥절했다. 느닷없이 부탁이라니? 그녀는 고개를 귀엽게 갸웃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저같이 미천한 것에게 부탁이라니요?" 종리연은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에서 오직 낭자만이 들어 줄 수 있는 부탁이오." "......?" 화안봉은 더더욱 궁금했다. "대체 어떤 부탁이기에 이 미천한 것만이 들어줄 수가 있나요? 아무튼 말씀해 보세요.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들어드려야지요." 종리연이 화안봉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 화안봉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나 의심했다. "다......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지금...... 뭐라고 하셨죠?" "나와 결혼해 달라고 했소!" 화안봉의 눈이 한껏 크게 떠졌다. 18 전대비사(前代秘史) 휘익! 쨍그랑! 찻잔이 날아가 벽에 부딪치며 박살이 났다. 그러나 여인의 화는 풀어지기는커녕 더욱 북받치기만 했다. "뭐 그따위 자식이 있어? 그 꼴상을 해가지고는 뭐 결혼을 하자구? 그것도 모자라 나의 옷을 찢어 놓다니......." 화안봉은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다. 처소로 돌아온 그녀의 옷차림은 아닌 게 아니라 엉망이었다. 아끼는 값비싼 비단옷이 흐트러지고 그나마 길게 찢겨져 나간 분홍빛의 젖가리개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낭패를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 그녀의 앞에서 중년 여인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어이가 없기는 화안봉 못지 않았다. "이...... 이놈을 그냥......." 생각 같아서는 종리연을 대번에 쳐 죽이고만 싶었다. 그러나 화안봉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이제까지 한 번도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힌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 자비로워서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인을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그 어떤 무기보다도 무서운 색(色)이라는 무기가 있었던 것이다. "......!" 어느 순간에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백화랑. 지금 그자는 어디있지?" 중년의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네?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요?" "왜 날보고 황후인지 뭔지를 하라고 조르다가 시간을 준다면서 수하 하나를 남겨두고 갔잖아?" 울컥하니 짜증이 치미는 음성이었다. 여인은 움찔하는 기색이었으나 곧 말문을 열었다. "아...... 그분......!" 생각이 났다는 듯이 백화랑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바로 국화원에 있어요." 화안봉의 눈에서 일순 차가운 빛이 흘러 나왔다. "그자가 국화원에 있단 말이지......? 호호......! 좋아. 그럼 화풀이는 그자에게......?" 화안봉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백화랑은 몸을 떨었다. 화안봉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각, 종리연은 머리를 감싸쥐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었다. 실수를 해도 이만저만 실수를 한 것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이 화안봉의 옷을 찢은 것이다. 막무가내로 결혼을 하자고 조르다가 그녀가 짜증을 내며 일어서는 것을 붙잡는다는 것이 그만 옷을 길게 찢어놓은 것이었다. 그는 뺨을 만졌다. 아직도 그녀에게서 맞은 뺨이 얼얼했다. 분노한 화안봉의 눈망울이 떠오르자 종리연은 완전히 저 세상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의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곧 나와 자게 되면 방의경처럼 다소곳해질 텐데.......' 종리연이 하나 자신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토록 도도하고 쌀쌀하던 방의경이 그와 합방한 후에 놀랍게도 부드러워 졌다는 것. 그것이 자신의 옥방비요 기술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은 참으로 멀고 험했다. 그녀를 침실로 끌어들이기도 전에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으니 말이다. 어쨌던 지금 이런 식으로는 화안봉을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리연은 방 안에 홀로 앉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한다. 그녀가 화를 내고 가버렸으니 이젠 노래를 불러도 날 찾지 않을 테니.......' 머리를 짜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럴 때 형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미 고혼이 된 남궁환인을 종리연은 떠올렸다. 하지만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지 오래인 남궁환인이 별 수가 있겠는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때였다. 펑! 느닷없는 폭음과 함께 문짝이 통째로 부서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 종리연은 깜짝놀라 벌떡 일어섰다. 다음 순간 방 안으로 한 사나이가 뛰어 들고 있었다. 전신에 흑포를 입은 사나이였다. 두 눈은 칼로 그은 듯이 가늘었는데 두 눈에서 무서운 살기를 흘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종리연이란 미친 놈이냐?" "......?" 종리연은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 그렇소. 헌데 형씨는 누구시오?" 스르릉! 사나이는 대꾸도 없이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르른 검광이 방 안을 살벌하게 비추었다. "......!" 종리연은 그가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칼을 피하기 위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방 안이 비좁았기 때문이었다. 어디로도 피할 구멍이 없었다. 종리연은 다시 달아날 궁리를 했다. 그러나 어쩐단 말인가? 유일한 탈출구인 방문이 칼을 든 흑포 괴한에 의해 이미 막혀버린 후였다. "......!" 탈출로가 없음을 알게 되자 종리연은 그만 심금이 떨려왔다. "혀...... 형씨!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형씨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그러나 종리연은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사나이가 그를 향해 검을 겨누었기 때문이었다. 다급해진 종리연은 급히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도......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소." 그것은 하오방을 떠날 때 방의경이 여비로 쓰라고 준 것이었다. 그러나 흑의인의 입가에는 괴이한 미소가 흘렀다. "이제 보니 형편없는 놈이군. 난 또......." 번쩍! 검광이 날았다. 사나이는 단숨에 종리연의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다.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어억......?" 사나이는 경악했다. 당연히 일검으로 상대방의 목을 날릴 줄 알았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칼을 휘두르기 직전에 벌써 상대방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 있던 자리에 검을 박고 있었다. 그러나 종리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놀란 사나이가 주춤했다. 그러나 정작 놀란 사람은 종리연이었다. 그는 검이 날아오는 순간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자신도 모르게 보법을 써서 피한 것이었다. 일단 몸을 움직이자 그는 여유 있게 검을 피해 사나이의 등 뒤로 돌아간 것이었다. 사나이는 그것도 모르고 여전히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종리연은 흑포괴인의 등을 노려보았다. 손만 뻗으면 사나이를 제압할 수 있는 거리였다. "......!" 그와 동시에 종리연에게 사부의 말이 떠올랐다. '적어도 신법(身法)에 있어서는 너를 따를 자가 천하에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종리연이 그야말로 유일무이하게 확실히 배운 것은 바로 경신법(輕身法)이었다. 남궁환인도 다른 무학은 몰라도 경신법 하나만은 자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 어떤 상황이라도 자신의 한 몸 지키는 데는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종리연은 어깨를 폈다. '그렇지. 경신술이 천하제일인데 여차하면 달아나면 그만이지 겁날 것이 없다!' 그는 손을 뻗었다. "큭!" 그가 흑의괴인의 명문혈(命門穴)을 가볍게 치자 흑의인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가볍게 쳤다고는 하지만 명문혈은 무림인의 숨통이 아니던가. 종리연의 일격에 흑포괴인은 즉사(卽死)를 하고 만 것이었다. "......?" 종리연은 멍해졌다. 설마 가볍게 손을 댔을 뿐인데도 상대가 즉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입과 코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는 흑의인을 내려다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첫 살인을 한 것이었다. 종리연의 기분은 착잡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나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지난날 담간랑이란 치욕적인 명호로 불리우며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했던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눈앞에 죽어 있는 흑의인의 모습을 보는 동안 그의 잠자던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제 어깨를 늘어뜨리며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제일의 경신술을 가진 이상 좀더 당당히 행동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래......! 형님도 그랬다. 형님의 무학이 비록 천하제일은 아니었어도 형님께서는 결코 비굴한 분이 아니셨다.' 마침내 종리연은 서서히 어깨를 펴고 있었다. 문득 쓰러져 있는 흑포괴인을 내려다 보던 종리연은 그를 어깨에 메었다. 이어 신형을 날렸다. 팟! 꺼지듯 연기처럼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었다. 봉황성녀 화안봉은 방 안을 초조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아무리 여인의 마음이 갈대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분을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리연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흑의 사나이를 시켜 그를 죽이도록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한 짓을 했어.' 그녀는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종리연이 다소 그녀를 귀찮게 했어도 그가 자신을 좋아하여 청혼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를 죽인다는 것은 심한 짓임에 틀림이 없었다. 화안봉은 어느덧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종리연의 순수한 눈동자가 떠올라 왔다. '정말이지 실수였어......! 어쨌던 무척 재미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때였다.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돌연 가까운 곳으로부터 악을 쓰는 듯한 노랫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할 판국이었다. 그러나 노랫소리는 틀림없이 그녀를 귀찮게 하고 잠 못 들게 했던 종리연이란 사내의 음성이 아닌가? "......!"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빠른 손놀림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노래가 들리는 곳은 바로 연못가였다. 정자 안에 과연 종리연의 모습이 보였다. 달빛을 등지고 있는 그는 어깨에 무엇인가를 둘러메고 있었다. 가까이 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등에 멘 것이 흑의인의 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종리연은 그녀가 나타나자 흑포괴인의 시신을 내던지며 호통을 쳤다. "아무리 노류장화(路柳墻花)의 신분이라지만 이럴 수가 있소? 찾아온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살인의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오?" "......." 화안봉은 멍해졌다. 그녀는 흑의인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 지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도리어 당한 것이다. '어쩌면 이럴 수가......?' 화안봉은 경이(驚異)의 눈으로 종리연을 바라보았다. 종리연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튼 당신은 나와 결혼을 해야 하오. 이건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오." 화안봉은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녀도 만만치는 않은 여인이었다. 한 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할 수 없군요. 당신이란 사람은...... 어쨌거나 따라오세요. 밤 바람이 차니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해요." 종리연은 빙긋 웃었다. "진작 그런 말이 나왔어야 했소." 화안봉의 뒤를 따르는 종리연은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묻겠어요. 왜 저를 원하시는 거죠?" 화안봉의 질문이었다. 대답 대신 종리연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화안봉은 얼굴의 아랫부분을 면사로 가리고 있었다. 과거에도 그는 생각했었다. '단지 눈만을 보고도 저리 아름다운데 면사를 벗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만일 그가 방의경과 맺어지지 않았다면 화안봉과 같은 미녀의 유혹에 쉽사리 넘어 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화안봉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심정은 단순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사성녀를 얻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선 것이었다. 화안봉의 침소(寢所) 안에서 두 사람은 찻잔을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종리연은 그녀에게서 보통 여자에게서 느낄 수 없는 강한 염기를 느끼고 있었으나 그 때문에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는 대단한 여인임에는 틀림없었다. "왜 대답을 않죠?" "......." 화안봉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종리연은 우물거릴 뿐이었다. 사실 그가 사성녀를 얻고자 하는 것은 본인의 뜻이라기보다는 사부의 유언 때문이 아닌가. 사부 또한 사성녀를 얻어야 삼패를 무찌를 수 있다고만 했지,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는 눈썹을 모으며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모르오." "......?" 화안봉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아무튼 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얻어야 하오. 그것뿐이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한 순간 화안봉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종리연으로부터 놀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는 한 동안 종리연을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훗......! 당신이라는 사람...... 정말이지 웃기기 짝이 없는 사람이군요. 하지만......." 화안봉의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당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종리연에게 화안봉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똑똑히 들으세요. 전 당신이 생각하듯 그리 만만한 여자가 아니에요. 아마 그 꼴같지 않은 무공으로 절 놀리시려는 모양인데 제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쉬워요." "......." 종리연은 움찔했다. 그는 화안봉을 바라보았다. 문득 눈앞의 여인이 더 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 이제까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여인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들게끔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화안봉은 차가운 음성으로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용서하겠어요. 그러니 어서 이곳을 떠나요." 종리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나약한 마음의 결과였다. 그러나 곧 그의 뇌리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그와 의형제를 맺었던 죽은 남궁환인의 얼굴이었다. 그는 불현듯 외쳤다. "난 갈 수 없소!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당신과 결혼해야 하오!" 순간 화안봉의 눈썹이 곤두섰다. "좋아요!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는 말이죠?" "어쨌든 난 당신과......." 바로 그때였다. 화안봉은 벌떡 일어서더니 싸늘하게 말하고 있었다. "정 죽고 싶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화안봉의 다음 행동은 기이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한 번도 타인 앞에서 벗은 적이 없었던 면사를 벗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숨겨왔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 종리연은 넋을 잃었다. 인간의 얼굴이란 묘한 것이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미묘한 차이 때문에 각기 다른 느낌을 받기가 예사다. 화안봉도 비록 얼굴의 반 면을 보지 못했어도 그다지 유별나리라곤 생각되지 않았었다. 아름다운 것이 기정 사실인 이상 또 어떤 사태가 나겠는가? 그러나 아니었다. 분명 화안봉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일반적인 미(美)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에 가까웠다. 입술은 살아 있는 붉은 화편(花片)이었고 약간 들어간 보조개는 웃을 때마다 기묘하게 춤을 추어 사나이의 심혼을 빼앗았다. 어디 그뿐이랴? 마늘쪽같은 콧날의 선은 보면 볼수록 그녀의 얼굴이 안개 속에서 아른거리는 듯한 환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어쨌던 화안봉의 얼굴은 그저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한 순간 종리연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미의 가치 기준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였다. "상공......!" 문득 화안봉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종리연을 부르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였고 애소하는 듯한 모양이 종리연의 심금을 걷잡을 수 없이 뒤흔들고 말았다. 종리연은 가슴이 진탕하고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소저......!" 종리연은 마치 무엇에 홀린 것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손을 벌렸다. 마치 자상한 오라비처럼 화안봉을 안고 위로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러나 다음 순간 화안봉의 눈은 이상한 광채를 발하는 것이었다. 다가가던 종리연이 무엇에 찔린 듯이 부르르 떨었다. "호호...... 내 눈을 보아요." 화안봉의 눈동자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찰나지간 종리연은 가슴에 무엇이 꽉 막힌 듯한 기분이 들더니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고 말았다. 스스스....... 때를 같이하여 화안봉의 백옥같은 손이 종리연의 심장을 향해갔다.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화안봉의 손이 종리연의 심장을 가격하는 순간이었다. "안 된다!" 문득 어디선가 한 가닥 창노한 노파의 음성이 들렸다. "사...... 사부님!" 화안봉은 깜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휘잉! 방 안에 바람이 일어났다. 동시에 쓰러지던 종리연을 부축하는 노파가 있었다. 노파의 모습은 괴이했다. 머리가 백발(白髮)이었으며 일신에는 채의(彩衣)를 입고 있었다. 노파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백발이 된 머리칼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노파의 얼굴 피부는 고작해야 삼십 대 정도의 미부의 그것이었던 것이다. 과거에 그녀가 얼마나 미인이었던가 하는 것은 능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얗게 센 머리칼이며 눈가의 약간의 주름은 풍상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사...... 사부님! 언제 도...... 돌아오신 것입니까?" 화안봉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물었다. 그렇다. 정신을 잃은 종리연을 부축한 노파는 바로 화안봉의 사부였던 것이다. 그녀는 어디론가 멀리 출타중이었는데 어느 샌가 돌아온 것이었다. 노파는 한숨을 쉬더니 곧 그녀를 꾸짖었다. "잠시 외유를 갔다 왔더니...... 네가 감히 살인을 한단 말이냐? 어쩌자고......?" 화안봉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사부님! 실은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제자는......." 노파는 더이상 화안봉의 변명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한 쪽에 종리연을 눕히고 정색을 했다. "이 아이는 대체 누구냐?" 그녀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했다. "제...... 제자도 모르는 사람이옵니다." "뭐라고? 그럼 정체도 모르는 젊은이를 죽이려 했단 말이냐? 내 너를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거늘 함부로 살인을 하다니......." 화안봉은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용서를......." 화안봉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는 사실 노파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무서워 하는 사람이 바로 사부였던 것이다. 노파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튼 이 일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사정이 어찌하였던......." 노파는 쓰러져 있는 종리연에게 다가갔다. "내가 한 발만 늦었어도 이 아이는 너의 미령심안(迷靈心眼)에 걸려...... 설사 죽지 않는다 해도 백치(白痴)가 될 뻔했다." 노파는 종리연의 맥을 잡았다. 그때였다. "아...... 아니? 이럴 수가......?" 노파의 안색이 크게 변하는 것이다. 노파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종리연을 멍하니 내려다 보는 것이었다. "이건...... 이럴 리가......? 이 아이가 만유신공(萬柔神功)을 익히고 있다니......?" 노파의 놀라움은 차라리 경악에 가까운 것이었다. "백련교(白蓮敎)의 정종심법을 어찌하여 이 아이가 익히고 있단 말이냐?" 한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화안봉은 그말에 부르르 떨었다. '공...... 공자가 본교의 신공을?' 노파가 갑자기 종리연을 안아들며 급히 말했다. "금부(禁府)의 문을 열어라." "넷?" 화안봉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사부의 안색이 심각한 것을 보고 그녀는 급히 침상으로 걸어갔다. 침상 모서리 한 부분을 누르자 침상이 빙글 돌아가고 아래 쪽에 통로가 시커먼 입을 벌리며 나타났다. 종리연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는 어느덧 밤이었다. 야명주(夜明珠) 불빛 아래서 처음 보는 노파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누구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노인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왜 낯선 곳에 누워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종리연은 한 동안 두리번 거리다가 일어나기 위해서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서야 종리연이 정신을 차린 것을 알고 노파가 가까이 다가왔다. 종리연의 얼굴에 한 점 의혹이 서렸다. "......?" 바로 그 순간 종리연으로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너무나도 자상한 음성으로 노파가 묻는 것이었다. "아이야. 너는 무한진인과는 어떤 사이냐?" 종리연은 흠칫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노인의 시선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사부님을 아십니까?" 백발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나의 대사형(大師兄) 이시란다." 종리연은 얼른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그만 머리가 어지러워 쓰러지고야 말았다. "왜 그러느냐?" 노파가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저...... 절을 드리려고......." 이마를 짚으며 종리연이 말했다. 순간 백발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 아이는 멍청한 것같으나 무척이나 충직한 아이구나.' 종리연을 보고서 처음에는 무척이나 실망했던 노파였으나 종리연의 또다른 일면을 발견한 탓인지 그녀는 다소 기분이 나아지고 있었다. "움직이기에는 아직 이르단다. 너는 미령심안공에 당하여 진기가 흩어진 상태이므로 아직은 더 요양해야 한다." 종리연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언제 내가 다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물론 그는 화안봉의 미령심안공에 당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직 미덥지 못한 듯이 노파가 다시 물었다. "아이야. 너는 틀림없는 무한사형의 제자냐?" "그렇습니다." 그때 노파의 얼굴에 한줄기 상심의 표정이 지나갔다. "아아......! 믿을 수가 없구나. 그럼 지난 십 여 년 동안 사형이 너를 키웠단 말이냐?" "......?" "지난 십 여 년의 결과가 이 정도에 불과하다니...... 사형께서는 정말......." 노파의 만면에는 실의의 빛이 역력했다. 종리연은 그녀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모두가 제 탓입니다." "네 탓이라니?" 노파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종리연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본래 사부님께서는 저 말고 다른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완벽한...... 기재였습니다." "......?" 일순 노파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저 때문에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노파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던 노파가 다시 물었다. "그...... 그럼 네가 그 대신......?" 종리연은 더욱더 기어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는 모자란 놈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형을 따라 가지 못합니다." 순간적으로 노파의 얼굴에는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노파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뇌었다. "내가 알기로는...... 너는 이미 사성녀 중 하나를 얻은 것으로 아는데......?" 종리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 노파의 눈썹이 기이하게 움직였다.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눈썹 역시 하얗게 세어 있었으므로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아니 실상 그녀는 노파가 아니라 여인이라고 불리워야 마땅했다. 그녀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아이는...... 몹시 기이하다. 멍청한 듯하면서도 인간적인 푸근함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 방가 계집애가 넘어간 것도 이때문인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운명을 건 도박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거나 진배없다.' 그녀는 한참 후 다시 물었다. "너의 사부는 어떻게 되었느냐?" 종리연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타계하셨습니다." "아아...... 큰 별이 떨어졌구나." 긴 탄식과 함께 여인은 눈을 감고 한 동안 묵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종리연은 멍하니 그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서히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알 수 없는 정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종리연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종리연의 어머니는 그가 15세가 되던 해에 타계했다. 종리연은 본시 명조(明朝)의 호부시랑(戶部侍郞)을 하던 고급관료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부친을 아버님이라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부친의 연인이었으나 공명(功名)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던 아버지는 종리연의 출생과 어머니의 존재를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신병으로 타계한 후 부친은 종리연에게 평생을 편히 살 수 있는 재물을 주었다. 그러나 종리연은 어머니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장원에서 한 시도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을 풀어 가난한 자들에게 모두 베풀고 최소한의 은자만을 가지고 살고 있는 연경(燕京)을 떠났다. 그 이후. 종리연은 출생의 문제로 평생 관(官)에 진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관습과 제도에 얽매임 없이 홀가분하게 살기 위하여 강호무림으로 떠돌았던 것이다. 그가 담간랑이라는 치욕의 외호를 갖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종리연은 처음에는 팔괘문(八卦門)이라는 강호의 삼류문파로 찾아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삼천 냥의 은표를 내고 무공을 배우기로 했다. 그러나 팔괘문에서 무공을 배우기는커녕 바보 취급을 당하고 돈을 착취당한 후 말로 할 수 없는 냉대만 당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 종리연은 강호의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며 무공을 배울 수 있는 일이라면 자존심을 팔면서라도 무엇이든 하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종리연은 따스한 백발 여인의 얼굴을 대하게 되자 문득 어머니가 떠오른 것이었다. 한편 백발여인은 처음과는 인식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사형인 무한진인이 키우고 있는 제자에 대해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 전에 언약을 했던 사형의 말을 떠올렸다. '사성(四聖)의 힘을 모아야 삼패(三覇)를 꺾을 수 있네. 사매! 이 사형은 사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아이를 키우겠네. 따라서 사매가 할 일은.......' '어쩌면.......' 백발의 여인이라서 백미성모(白眉聖母)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여인은 묘한 운명의 반전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인간이 아무리 날뛴다 해도 결국은 하늘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법...... 사형께서 십 년 이상 심혈을 기울여 키웠던 제자가 이 아이로 인해 불의의 죽음을 당한 것도 알고 보면 하늘의 오묘한 섭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 아이의 일면 허술해 보이는 모든 것이 도리어 난국(難局)을 타개하는 데 가장 알맞은 재질일런지도.......' "휴우......!" 백미성모는 한숨을 쉬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광명14로(光明十四老)도 일시의 판단 착오로 인해 오늘날의 비극을 초래하지 않았던가?' 백미성모의 눈에는 안개가 뿌옇게 일어났다. '삼패는 나날이 강성해지고...... 그들을 꺾을 만한 힘은 천하 어디에도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일의 성사(成事)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백미성모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야......! 너는 무한사형의 유업을 과연 이룩할 자신이 있느냐?" 백미성모의 질문에 종리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없으나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이룩하겠습니다." "목을 걸고라도?" "물론입니다." "그건...... 어째서지?" 종리연의 눈에 한 가닥 이슬이 어렸다. "저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능하며 훌륭하신 형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전 그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으음......!" 백미성모의 입에서 의미를 알 듯 모를 듯한 신음이 흘렀다.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제 사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리연의 음성은 단호했다. 백미성모는 종리연의 음성에서 결코 꺾을 수 없는 불굴의 투지를 읽었다. "으음......!" 백미성모는 다시 한 번 신음을 발했다. 무공이야 형편없는 아이였지만 보면 볼수록 믿음이 가는 아이였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봉아야. 안으로 들어 오너라. 내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그러자 석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쟁반에 무엇인가를 받쳐 든 화안봉이 들어왔다. 그것은 달인 약(藥)이었다. "우선 원기를 보(補) 하도록 그것을 먹어라." 화안봉은 그릇을 종리연에게 넘겼다. 종리연의 두 손은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약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탕약은 몹시 썼다. "너희들이 필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먼저...... 봉아에게 묻겠다." 백미성모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화안봉에게 시선을 주었다. 손으로 다듬은 것처럼 윤이 나는 자연석탁 위에서는 야명주가 밝은 빛을 던지고 있는 가운데 몇 권의 비서(秘書)가 펼쳐져 있었다. 백미성모는 한 동안 비서들을 주시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는 이 사부가 무엇 때문에 너에게 그 동안 그 어려운 미령심안공을 전수하였는지 아느냐?" 화안봉은 느닷없는 사부의 질문에 의혹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자는 아직...... 그 이유를 모르옵니다." 사부와 제자 사이라서 그런가? 화안봉의 태도는 이미 천하제일루주로서의 태도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말 잘 듣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종리연으로서는 갑자기 변한 화안봉의 태도가 신기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미 종리연도 백미성모의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백미성모는 양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힘겹게 말했다. "아아......! 그 모두가 삼패(三覇) 때문이란다. 봉아야. 네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바로 당금 무림을 패도로 군림하고 있는 삼패천이란다." "......!" 화안봉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까지 그녀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사부에게서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듣는 그녀의 가슴은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했다. 종리연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사부인 무한진인과 백미성모는 바로 삼패천을 무찌르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다. 아직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백미성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정확히 알자면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애당초 이 사부는 백련교(白蓮敎)의 십사 대 장로의 한 명이었다." 과거 이야기를 하자니 감회가 새로운 지 백미성모는 자꾸만 말을 끊었다. "우리는 대명제국(大明帝國)이 창건되기까지는 주원장과 더불어 한족의 땅을 회복하기 위한 혈맹의 동지였단다. 그러나......." 백미성모의 입에서는 나지막이 과거비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백련교와 대명제국! 그것은 사서(史書)에도 기록되고 있는 바와 같이 대명제국을 세웠던 주원장이 백련교도이기에 뗄 래야 뗄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주원장은 백련교의 힘을 얻어 대명제국을 창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훗날 명태조 주원장은 건국 직후 백련교를 사교(邪敎)로 몰아 배척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혈맹의 동지였던 백련교도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배척당해 지하로 숨어들고 만 것이다. "이후...... 우리 백련교는 복수를 다짐하게 되었지. 만일...... 그가 일말의 생로(生路)나마 열어 주었더라면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지나치게 잔인했다. 그는 백련교의 씨를 중원에서 말려버리려 했던 것이다. 더더욱 결정적인 것은 그가 본교의 총교(總敎)를 폐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 종리연과 화안봉은 그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들로서는 처음 듣는 비사요,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본교로서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지. 천수백 년간을 이어내려온 백련교가 영원히 사라지느냐의 절벽에 서게 된 것이야. 일각에서는 주원장을 치자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지.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왜냐면 당시는 대명이 창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원에서 내분이 일어날 경우 변황으로 달아난 원(元)의 잔당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숨 끝에 백미성모가 덧붙였다. "우리...... 역시 한족이었기에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종리연은 백리성모의 말을 듣고 내심 중얼거렸다.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태조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한족의 안위를 걱정했다니...... 내가 알기로 백련교는 사교(邪敎)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그렇다. 무릇 사물이란 어떤 식으로든 왜곡되어 있기 마련이고 그 진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판단이 아닌 왜곡된 판단을 일방적으로 쫓게 되는 법이다. 백미성모의 말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본교는 영원히 대가 끊기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침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가 왔다." "......?" 화안봉과 종리연은 아연 긴장했다. 곧이어 나올 백미성모의 말은 두 사람에게 참으로 중요한 듯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백미성모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바로 조씨 왕가(趙氏王家)가 우리에게 접근한 것이다." '조씨 왕가?' 뜻밖의 말에 종리연은 어리둥절했다. 그것은 화안봉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19 제9의 봉인(封印) 백미성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조씨 왕가의 마지막 후예인 조씨 삼 형제(三兄弟)의 접근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희망이었고, 기회였다. 어쩌면 대사(大事)를 도모한 이후 본교가 천수백 년 만에 날개를 얻어 중원의 정통 정교(正敎)로 인정받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부푼 희망을 가지기도 했으니......." "......!" "당시 본교의 중원 정교에 대한 희망은 차라리 하나의 대명제 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눈을 감고 말을 이끌어 나가는 백미성모의 얼굴에는 깊은 환란의 그늘이 지고 있었다. 지난 과거의 상처가 얼마나 쓰라린 것이면 그러하겠는가? 백련교. 그들은 중원에 전파된 이래 수없는 환란을 당해야 했다. 그것은 그들이 사교 집단이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義)를 숭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권력을 독점하려거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역대 왕조의 미움을 받아왔던 것이다. 체제를 유지하려는 권력자들에게는 백련교가 언제나 눈에 가시였다. 그런 백련교를 탄압하고 씨를 말리는 방법은 백련교를 사교나 이교로 몰아 배척하는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삼패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신분은 바로 이백 년 전 몰락한 송조(宋朝)의 조 왕가였다." "그...... 그럴수가?" 화안봉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경악이 터져 나왔다. "......!" 종리연 또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백미성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송조가 무너진 것은 금국(金國)의 끊임없는 침공 때문이었으나 실제로는 대원(大元)이 중원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송조는 후예들에 의해 중원 수복을 끊임없이 시도했으나 뚜렷한 기재가 출현하지 않아 암중으로 힘을 키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운(運)이 지독히도 없었다. 왜냐면 한의 땅을 되찾은 것이 바로 주원장이었기 때문이다." "아......!" 종리연은 비로소 어렴풋이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기대했다. "송조는 무너졌으나 그 후손들은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멸망한 것이 힘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강한 힘(力)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국을 유지하는 근원이 바로 힘이라고 보았던 것이지. 그것이...... 다름아닌 부성(父性)의 제국이다. 다른 말로는 태양(太陽)의 신전(神殿)이라고도 하고......." 백미성모의 말이 이어졌다. "그 이후 송조의 후예들은 선대의 유언에 따라 힘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송조가 숨겨 둔 엄청난 양의 재물이 있었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힘을 사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결국 수대를 걸쳐 내려오며 그들이 찾은 힘의 근원은 바로 무(武)였다."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화안봉은 그 아름다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들은 무림(武林)을 장악해야만 자신들이 꿈꾸었던 가장 완벽한 부성의 제국을 얻어 과거의 영화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불행히도 주원장이 한 발 앞서 대명제국을 세운 후였다." "......!" 숨겨진 비사(秘史)! 그것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대에 이르러 조씨 삼 형제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대명제국을 자신들이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멸망한 송 왕조만이 정통의 중원 패주(覇主)가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너무나도 엄청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듣는지라 혹시 꿈이 아닌가 하고 종리연은 자기의 허벅지를 꼬집어보기까지 했다. 정녕 꿈은 아니었다. "그들은 제국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그런데 마침 우리 백련교와 끈이 닿은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명분이 필요했었다. 만일 다른 쪽이었다면 완성된 명조와 싸울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 왕가와 손을 잡고 중원의 정통 왕조를 세운 다음 본교를 정교로 인정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아!" 말을 잇지 못하는 백미성모의 입술에서는 탄식이 흘러 나왔다. 얼굴 또한 심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건 과거의 상처가 지금까지 남아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는 무언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종리연은 불현듯 백미성모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종리연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그것이 중대한 오류였을 줄이야....... 결국 한때의 판단 착오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엄청난 비극이 파생된 것이다." "......!" 두 눈을 감고 입술을 파르르 떠는 백미성모의 이마에는 어느덧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백련교의 모든 힘을 받아들인 후 우리를 배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백련교의 힘이 필요했을 뿐이지 그 이상의 힘을 나누어 가질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야!" 한숨을 내쉬며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패의 내력에 그런 비밀이 숨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이 송조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정말이지 뜻밖이었다. 비로소 그들의 그토록 오만하고 패도적인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우리들의 오류를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일순 백미성모의 안색이 한가닥 두려움을 떠올렸다. 그녀는 장탄식을 발했다. "아아! 만일 그때 본교의 금법(禁法)이었던 제9의 봉인(封印)을 열지 않았더라면 더욱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진전되었을 것이다." "제9의 봉인......?" "......?" 종리연과 화안봉이 다같이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백미성모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제9의 봉인이란 본교 밀법(密法)을 일컫는 것으로 천기누설(天機漏洩)의 대법(大法)을 말하는 것이다. 그 대법은 본교의 존망(存亡)이 걸렸을 때 외에는 열지 않는 것으로 만일 봉인을 떼야 할 때라면 십사 대 장로 중 구인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 실로 괴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종리연은 왠지 가슴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제9의 봉인을 떼고...... 천기를 들여다 보았을 때...... 아아! 우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삼패가 결코 우리 백련교의 구성(求星)이 아니라...... 천하를 혈세(血洗)할 대흉마(大兇魔)로 내정되어 있다는 천기였었기 때문이었다." "......!" 종리연과 화안봉은 동시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백미성모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만약 백련교의 장로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봉인을 열어보지 않았더라면 일은 겉잡을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함께 봉인을 열었던 삼패는 물론 그 비밀을 알 수 없었지. 왜냐면 봉인의 천기누설을 지칭하는 문자(文字)가 범어(梵語)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내용을 물었지. 우리는 적당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 "삼패가 혈성(血星)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으나 그 내용중의 일부는 그들에게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납득할 만한 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말을 끊은 백미성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종리연도 덩달아 한숨을 뱉아냈다.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라서 듣기만 해도 온몸이 긴장될 정도였던 것이다. 잠시 후 백미성모의 말이 계속되었다. "하늘은 반드시 상대적인 것을 안배해 놓는다...... 천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삼패를 억누를 수 있는 극성이 안배되어 있노니 사성(四聖)이라고...... 그리고 삼패가 양(陽)이며, 사성은 음(陰)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성이란 말이 나오자 종리연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화안봉의 안색도 변하고 있었다. "양이란 남자를 말하며 음이란 여자를 말하지. 결과적으로 삼패를 막을 수 있는 네 명의 여인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란다. 그러나 우리는 조씨 삼 형제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지. 다만 이렇게 말했었다. 삼패는 패성(覇星)이며, 사성은 그를 보좌하는 황후지성(皇后之星)이라고...... 만일 삼패가 사황후를 얻게 되면 조씨 황조는 천 년을 번성한다는 말을 했었다." 종리연은 크게 깨달아 지는 바가 있었다. 비로소 그는 사성녀가 왜 존재하고 있으며, 어째서 사형이 사성녀를 얻기 위해 무림으로 출도 했는지를 말이다. 또한 그가 사성녀와 혼인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다. 화안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미성모는 한 동안 침묵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천기누설을 한 후유증은 심각했다. 금법(禁法)을 깼기 때문에 경고대로 구 장로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대사형인 무한사형께서는 어떻게든 그릇된 판단으로 삼패로 하여금 날개를 달게 한 우리들의 업보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사형께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했다. 그 목적은 바로 사성녀를 하나로 모으는 묘책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 이제 모든 것이 확실히 드러난 셈이었다. 결국 사형 남궁환인은 바로 사성녀를 하나로 모으는 임무를 떠맡은 것이다. 그러나 어이 없게 죽음으로써 예기치 않게 종리연 자신이 그 모든 일을 대행하게 되었으니....... 불현듯 종리연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아......! 그러니 사부님께서 사형이 죽고 내가 찾아갔을 때 기분이 어떠하셨을까? 일장으로 나를 때려 죽이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구나!' 종리연은 새삼 무한진인의 고마움이 뼈에 사무치도록 새겨지는 것이었다. 이때 백미성모의 눈길은 화안봉에게 향해졌다. "대사형께서는 그런 일을 도모하는 동안 나도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성녀를 찾는 일이었다. 다행이랄까? 세 명의 여아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아이들에게 남다른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중 하나만은......." 백미성모는 백미를 떨었다. "아무리 천하를 헤매도 찾을 수 없었을 뿐더러 천기와 역리(易理), 성복술(星卜術)로 짚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고...... 대체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찾아낼 수가 없었단다.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어쩔 수 없이 나는 대안을 생각하게 되었단다. 그것은 천리를 타고 삼패의 균형을 깨뜨릴 운세의 색혼미성(色魂美聖)을 대행할 아이를 직접 인위적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 화안봉의 안색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백미성모는 그런 화안봉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짐작을 하고는 있었겠지만...... 실은 그 아이가 바로 봉아 너란다." "......!"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사부로부터 직접 그 말을 들은 화안봉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서운함이랄까, 아니면 허탈함이랄까...... 대충 그런 것이었다. 이제 백미성모는 눈을 지그시 내려 감고 있었다. "이 사부는 너에게 미령심안을 심어 색혼미성의 일을 대행토록 한 것이다. 그 동안 네가 배운 모든 공부가 바로 그것이란다. 너는 타고난 미염의 기운이 비록 사성보다는 떨어지지만 인위적으로 노력한 결과 이미 그 수위에 올랐다." 화안봉은 불안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진짜 색혼미성이 나타나면...... 소녀는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백미성모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어렸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이 사부가 그 동안 아무리 천기를 짚었어도 색혼미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아예 태어나지 않았거나 혹은...... 그보다 더욱 강한 기운에 눌려 그 빛을 잃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삼패가 가장 극성의 기운을 뿌리는 지금이야말로 사성이 합쳐져야 하는 때이다. 설사 지금 그 아이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 "......!" 사부의 말이 자기를 위로하면서 자기의 가치를 확실히 해 주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안봉은 그저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릴 뿐이었다. 사람이란 어떤 경우이던 대역(代役)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법이다. 하물며 그것이 재주가 뛰어난 여인일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는 법이다. 화안봉 역시 자신이 색혼미성이 아니라는 말에 서운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상심한 화안봉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백미성모의 음성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이야. 너는 이미 이 사부로부터 미령심안공을 십성 이상 배웠다. 너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백미성모의 눈길이 이번에는 종리연에게 향했다. "그 동안 네가 완벽한 미령심안을 얻지 못한 이유는 아직 네가 인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이 천상제일루를 세워 많은 화류객들을 모은 이유도 그들로 하여금 네게 간접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같다. 이 아이가 있는 이상......." 백미성모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애매모호한 웃음부터 떠올렸다. '왜 웃는 걸까?' "......?" 종리연은 의아해 했다. 영문을 모르기는 화안봉도 마찬가지였다. 종리연이 나타난 것과 자기가 인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아리송하기만 할 뿐이었다. 백미성모는 곧 정색을 하며 덧붙였다. "이제...... 너는 마지막 수련을 넘어야 할 때이다." "마지막 수련이라 하오시면......?"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화안봉이 되물었다. 백미성모의 얼굴에는 조금 전에 사라졌던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하하하......! 걱정할 것 없다. 그것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바로 이곳에 그 대상이 있지 않느냐?" "......?" 화안봉은 자신도 모르게 종리연을 바라보았다. 종리연도 영문을 몰라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기를 이용하여 마지막 수련을 완성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백미성모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터져나왔다. "봉아야. 너는 이 아이와 결합해야 한다." "......!" 화안봉의 안색이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종리연은 또 어떤가? "겨...... 결합이라면 저와 결혼을......?" 손도 안 대고 진미를 먹게 되었다는 기쁨 때문인지 종리연의 얼굴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일그러졌다. "그렇단다. 그것만이 화안봉이 아직 이루지 못한 미령심안의 십이단공을 완성하는 길이란다. 이 아이의 양기를 받아 들여야만 너는 비로소 완전한 미령심안체(美靈心眼體)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 화안봉은 새삼 종리연을 바라보았다. 한편 종리연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둘 사이를 휘돌아 감싸며 지나가고 있었다. 화안봉은 묘한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막상 눈앞에 떨어지고 보니 그녀는 왠지 두려움같은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화안봉은 알고 있었다. 이미 계획된 운명이란 피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 있어 백미성모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의 말을 어떻게 거역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것이 중원 무림의 평화를 위하고 나아가서는 백련교의 부흥을 위한 것일 진데....... 화안봉의 출신은 기루(妓樓)다. 그녀의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도 관(官)의 기녀였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백미성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도 노류장화의 신세를 면할 수 없었으리라. 화안봉은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의 하해와 같으신 은혜...... 어찌 갚겠습니까? 사부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백미성모는 부드럽게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봉아야. 비록 험한 길이긴 하다만은 결코 너에게 놀라움은 있으되 살은 없을 것이니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드러운 눈길이 종리연에게로 향했다. "저 아이의 인품은 순후하다. 어쩌면 너에게 가장 걸맞는 배필이 될 것이다." "......." 화안봉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원앙촉이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스스로 옷을 벗고 있었다. "......." 종리연은 침상에 앉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침울하였으며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이렇게 한 사내 앞에서 옷을 벗기 위해 존재했다고는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원치 않는 상황에서 옷을 벗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사르락....... 손가락이 옷섶을 끄르자 그녀의 미려한 몸에서 능라의가 떨어져 내렸다. 고의가 드러나고 있었다. 오직 젖가리개와 아슬아슬하게 둔부와 삼각비역을 가리고 있는 붉은 고의만 입고 있어 그녀의 전라가 거의 드러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화안봉의 눈에서는 어느새 이슬이 흘렀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젖가리개를 떼어 냈다. 손가락만 대도 현의 울림이 날 것같은 유방이 드러났다. 완벽한 곡선(曲線)이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리라. 유방의 선은 상향으로 둥그릇이 떠오르는 보름달 같았으며, 잘록한 세류요 아래로는 급격한 선을 이루며 둔부(臀部)의 원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랫배도 군살하나 없는 동산의 원이었다. 이제 붉은 고의를 약간만 내려도 처녀림(處女林)인 삼각주가 그 신비를 드러낼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고의로 가져갔다. 그 순간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며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만두시오" 사나이의 낮았으나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때 들려왔다. 그녀는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바로 종리연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의아한 듯 눈물 그렁한 눈으로 침상에 앉아 있던 종리연을 바라보았다. "......?" 왜? 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말 대신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침상에 걸터앉은 종리연이 그녀의 시선을 응시하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원치 않으면 나와 결혼하지 않아도 되오." "......?" 뜻밖의 말이었다. 놀란 화안봉의 눈이 한껏 커졌다. 입을 반쯤 벌리고 그녀는 의혹에 가득찬 눈으로 종리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리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이지...... 나는 내 스스로가 결코 낭자의 배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나같은 못난 인간이 어떻게 낭자같은 미인과 결혼을 하겠소?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 말을 얼버무리는 종리연의 얼굴에는 어느샌가 자조(自嘲)의 빛이 떠올랐다. 어느새 눈물을 지운 화안봉이 이상한 듯이 물었다. "당신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그렇소. 하지만...... 당신이 싫다거나 억지로라면 그럴 수는 없는 거 아니오?" "그러면 당신은 사부의 유업을 저버리겠다는 건가요?" 그 말에 종리연은 흠칫 놀라는 듯했다. "그...... 그것은......." 그는 한 동안 생각하더니 좋은 묘안이라도 생각해 낸 듯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 두 사람이 거짓으로 혼인을 하는 것이?" 정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종리연의 얼굴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 화안봉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군요?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어째서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 차려고 하는 거죠?" 그 말에 종리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운이 없는 놈이요....... 그리고 나에게는 정말이지 당신과 결혼을 할 만한 자격도 없소." "어째서 자신을 과소평가 하나요?" 화안봉의 질문에 종리연은 쓴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날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나는 원래 담간랑이었소." "......?"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고...... 강호에서 비웃음을 받으며 업신여김의 대상이 되었던 못난 놈이 바로 나란 말이오. 이제 알겠소?" "......!" 화안봉의 눈에서 이채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 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까지 그녀는 많은 남자들을 보았다. 천상제일루를 경영한 것은 사부의 명에 따라 남자들의 생리를 알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본 남자들이란 거의가 위선과 가식에 찬 부류들뿐이었다. 그들은 여자를 쾌락의 수단이나 도구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게다가 여자에게 거짓말 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사나이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어리숙하기는 했으나 진실되고 성실한 인간이었다. 화안봉은 그윽한 눈으로 종리연을 바라보았다. "......." 종리연은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감응을 받은 탓이었다. "당신은 저를 보고도 아무 감정이 일어나지 않나요?" 봉황성녀 화안봉의 도발적인 말에 종리연은 얼굴을 붉혔다. "나도 남자요.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화안봉은 흠칫 놀라며 그를 가로 막았다. 일신에 걸친 것이라고는 오직 아슬아슬하게 여인의 삼각주만을 가린 위태로운 고의뿐이었다. 그런 상태로 종리연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녀의 유방이 몸을 움직이는 데 따라 아래 위로 춤추었다. 그것은 덜렁거리거나 늘어지지 않고 도리어 반발을 하는 듯이 퉁겨오르고 있었다. "......!" 종리연은 가슴에 불이 붙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길은 자신도 모르게 화안봉의 가슴으로 향했다. 화안봉은 손으로 자신의 유방을 받쳐 올렸다. 그것 또한 무척이나 도발적인 행위가 아닌가?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눈앞의 유방을 바라보는 순간 종리연의 목에서는 어느새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꿀꺽! 하고 들려왔다. "정말로 당신은 나를 안고 싶지 않단 말인가요?" 짖궂게도 화안봉이 묻고 있었다. 어느덧 그녀의 얼굴에도 홍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종리연은 말까지 더듬었다. "그럼......?" "나는 단지...... 낭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었던 종리연이 마침내 시선을 떨구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놀랍게도 화안봉은 서슴없이 한 장 남은 고의마저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종리연의 눈은 어느덧 여인의 삼각주에 닿았다. 그리고는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양 그는 부르르 떨었다. 화안봉의 그곳은 달랐다. 종리연은 이제까지 하오방에서 많은 여인들을 상대해 보았으므로 세상의 여인들이란 거의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관념이었다. 화안봉의 삼각주는 전혀 틀린 것같았다. 그 부분에 신비하게도 안개가 몽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종리연의 착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다. "......!" "자, 가지세요. 이제부터 저의 몸은 당신의 것이에요. 당신이 원하던 대로...... 마음껏 가져도 좋아요." "왜...... 왜......?" 종리연은 눈길을 그녀의 하반신에서 떼지 못하며 멍청하게 물었다. 화안봉이 달콤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이제 스스로 선택하게 되었어요. 당신이라는 사람을 나의 부군으로 말이에요. 이건 결코 강요나 사부님의 명 때문이 아니에요. 제 스스로의 선택이라구요. 자! 어서......!" 종리연은 이미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인내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전신이 폭발할 것같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확실히 화안봉에게는 방의경과는 또다른 엄청난 마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미령심안공이 빚은 결정이었다. 화안봉은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천부적인 염기에 미령심안공이라는 비법(秘法)을 체득하여 이미 마물(魔物)에 가까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만일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의 어떤 사나이라도 미혹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종리연은 취할 듯이 비틀거렸다. 그 순간에 종리연은 환상으로 빚어진 듯한 여체가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품에 안겨드는 것을 느꼈다. 제1도(第一圖). 그것은 하늘에 달이 떠 있는 그림이었다. 부드러운 현과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조각달이었다. 들판에 흑의수사가 그 달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제2도(第二圖). 달이 사라지고 없었다. 달은 어느새 흑의수사의 손에 잡혀 있었다. 달을 거머 쥔 흑의수사는 전면의 고목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제3도(第三圖). 고목이 깨끗이 잘려 있는 그림이었다. 흑의수사의 손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보이지 않은 날개를 가졌던가? 조각달은 수사의 오른쪽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제4도(第四圖). 수백 마리의 혈랑(血狼)이 으르릉 거리며 흑의수사를 공격하는 그림이었다. 흑의수사의 양 손이 좌우로 춤추듯 움직여지는 듯했다. 제5도(第五圖). 혈랑이 꺼꾸러지는 그림이었다. 혈랑 사이로 두 개의 달이 창백한 빛을 발하며 날아가고 있었다. 제6도(第六圖). 두 개의 달이 나란히 낮게 풀 위를 스치고 있었다. 흑의수사는 멀리서 달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제7도(第七圖). 천공에 두 개의 달이 선회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흑의수사는 두 손을 모은 채로 합장하고 있었다. 제8도(第八圖). 흑의수사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벌판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그러나 그 달은 보름달이었다. 자세히 보면 수사의 발은 지면에 닿지 않고 있었는데 그의 두 발에는 조각달 두 개가 붙어 있었다. 흑의수사는 조각달을 밟고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 "......?" 아무리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종리연은 백미성모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림입니다. 제 아둔한 머리로서는....... 어떤 내용인지 설명을 좀 해 주십시오." "으하하핫....!" 종리연의 말에 백미성모가 파안대소했다. 아름답게 생긴 것과는 달리 영락없는 대장부의 웃음이었다. 그녀는 한 동안 웃어제끼더니 말문을 열었다. "이 여덟 장의 그림은 나의 사형 중 가장 무공이 강했던 여덟째 사형 혈월객(血月客)이 남긴 유급이란다. 그분은 평생 고독하게 살았는데 남긴 것이라곤 이 여덟 장의 혈월도경(血月刀經)뿐이다." 어느덧 백미성모의 목소리는 엄숙해져 있었다. "불행히도 사형은 삼패에 의해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해 아쉬워 하던 사형은 이것을 나에게 넘기며 후인에게 전하라는 부탁을 남기셨던 것이다." 종리연은 다시 여덟 장의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백미성모는 계속했다. "너는 대사형의 진전을 이어 받아 경신술만은 천하에서 거의 따를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림의 일이란 역시 무공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법......! 너는 이 혈월도경을 익혀 힘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 종리연은 눈썹을 모아서는 여덟 장의 그림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 보아도 그림 속에 숨어 있는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백미성모는 빙그레 웃었다. "그림만으로는 물론 혈월팔천도법(血月八千刀法)을 익힐 수가 없지. 그러나 구결(口訣)을 알게 되면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 "구결은 사형께서 외인에게 흘러나갈 것을 염려하여 나에게만 전했단다. 그것은 반드시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해야 한다." 이어, 백미성모는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 종리연은 그녀가 암송하는 구결을 외웠다. 다행이랄까, 그는 암기력만은 자신이 있었다. 백미성모는 그가 단지 한 번만 듣고도 구결을 암송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본 도식(刀式)은 여덟 가지에 불과하지만 모두 시전될 경우 도합 팔천 가지의 변화를 내포하는 것이 혈월도법의 진수이다." 종리연은 방금 자신이 전수받은 구결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일시적으로는 그 오의를 깨닫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그 중 몇 가지는 어느 정도 진전이 있는 것같았다. 종리연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며 오의를 깨닫기 위해 열심히 수련했다. 어느날 백미성모는 한 쌍의 기병(奇兵)을 내놓았다. "이것은 혈월객 사형께서 사용하시던 혈월도다. 특수하게 제작된 것으로 만년한철(萬年寒鐵)과 오금사(烏金絲)로 배합되어 어떤 신병이기로도 깨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 너무나도 황송한 일이었다. 종리연은 크게 기뻐하며 한 쌍의 병기를 두 손으로 받았다. 그것은 조각달 모양의 예리한 병기였다. 어찌 보면 륜(輪)과도 같았다. 안쪽에는 날(刃)이 없으며 바깥쪽으로 날이 나 있어 회전하게 되면 무서운 살상력을 지니게 될 것같았다. 크기는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였다. 만일 혈월도를 소매 속에 감추게 된다면 아무도 눈치챌 수가 없을 것이다. 백미성모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천하는 넓고도 광활한 것이다. 기인(奇人)이나 이사(異士)가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단다. 네 비록 천하제일의 경공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항상 조심해야 한다. 특히 너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내공의 화후가 미천하다는 것이다." 종리연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아아......! 하늘의 가호가 있다면 너에게 광명비전(光明秘傳)을 얻을 수 있는 복연이 있으련만......." "......?" 종리연은 의아했으나 묻지는 않았다. 백미성모 역시 더이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마침내 때가 되자 그녀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종리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너는 떠날 때가 되었다. 봉아는 이제부터 마지막 미령심안공의 수련에 들어가게 된다. 당분간은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이 천상제일루는 문을 닫는다." 종리연은 부복(俯伏)하고 난 후에 길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무척이나 성숙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이제 사성녀 가운데 두 명의 성녀와 결합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것은 어찌 보면 꿈만같은 일이기도 했다. 종리연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종리연아, 종리연......! 너는 정말 운이 좋은 놈이다.' 20 혈월팔천도법(血月八千刀法) 삼촌살인설 조문백은 태사의에 깊이 파묻힌 채로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울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 있었다. 계획했던 모든 것이 예상을 빗나간 탓이었다. . 첫번째 빗나간 예상은 하오방(下午門)에 관한 것이었다. 하오방의 방주 방의경은 그의 대형인 조황백의 삼황후로 내정되어 있던 여인이다. 그런 방의경이 멋대로 엉뚱한 사내와 혼례를 올렸으니 그로선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뒤늦게나마 어떤 조치를 내리려고 궁리하던 차였다. 그런데....... 뜻밖의 보고를 받은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그 보고의 내용은 낙양의 하오방의 본거지가 갑자기 폐쇄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하오방쯤이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조문백이었다. 그런데 예상밖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하오방의 본거지가 폐쇄되다니..... 그로서는 전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오방은 천하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다. 그들은 개개인의 힘은 무력하나 전체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일면을 가진 세력이다. 그런 세력의 본거지가 폐쇄된 것이다. 두 번째 빗나간 예상은 방의경과 혼인을 한 사내에 대한 척살(刺殺) 건이었다. 그는 살업전문가의 하나인 냉사빈(冷史彬)이란 수하를 보냈다. 무조건 그자를 찾아 죽이라는 살명(殺命)과 함께. 그런데 그 건도 실패했다는 보고였다. 조금 전에 돌아온 냉사빈은 추적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올리다가 조문백의 일설(一舌)에 그만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종리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나이가 간 행선지는 조문백에게 이상한 예감을 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상한 예감이 서주(西州)의 천상제일루에서 날아온 전서와 연결되어 세 번째의 빗나간 예상을 만들고 있었으니....... 세 번째의 빗나간 예상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오방에 이어 이번에는 천상제일루가 문을 닫았다는 것. 그와동시에 루주인 봉황성녀 화안봉의 행방도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천상제일루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사실을 조문백은 꿈에서조차 생각해 보지 않았다. 천상제일루는 어디까지나 삼패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또한 믿을 만한 수하들이 늘 머물면서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기루의 특성상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불상사들을 삼패의 사람들이 도맡아 처리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조문백은 이 일련의 사태가 종리연이라는 괴 사나이와 알 수 없는 이상한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확실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뭔가가 있다. 종리연이라는 사나이와 이번에 일어난 일과는.......' 그는 두 번째의 전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천상제일루가 문을 닫은 경위를 상세히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만 같았다.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문 밖에서 그가 기다리던 것이 당도했다는 전갈이 왔다. "이리 가져와라." 조문백은 덜썩거리려는 엉덩이를 가까스로 태사의에 붙이며 소리쳤다. 문이 열리며 접시에 한 장의 전서가 담겨져 왔다. "......!" 서둘러 전서를 펼쳐 읽은 조문백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또...... 종리연! 이럴 수가?" 조문백은 넋이 빠진 것처럼 중얼거렸다. 천상제일루를 보름여 동안이나 뒤흔든 종리연이란 자에 대한 보고서였다. 종리연이 천상제일루를 방문한 것에서부터 그 동안의 모든 일들이 상세히 일지(日誌) 형식으로 보고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천백이 손수 파견해 놓았던 한 명의 수하까지도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아닌가? "종리연이라...... 종리연......." 조문백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이건 뭔가 있다.' 그의 눈에는 청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어쩌면 하오방주 방의경을 유혹한 것과 이번의 천상제일루의 건은 그자의 의도적인 일일 지도 모른다. 그가 노리는 두 명만 하여도 이미 사황후로 내정된 사성녀 중의 이인(二人)이 아닌가? 이대로 가다가는......!' 조문백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도 수하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지금 서주 근방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객 중 특급(特級)이 있느냐?" 수하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있습니다." "명호는?" "탈명육신(奪命六神)이란 자들입니다. 그자들은 독자적인 청부업을 하다가 반 년 전 본전에 입교하였습니다." 조문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꽉 다문 그의 입이 벌어졌다. "그럼 명을 내려라. 그들로 하여금 종리연이란 자를 척살하라고 일러라. 지금 즉시!" "복명!" 수하는 조문백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는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갔다. 괜히 거기서 어정거리다가는 성미가 불같은 조문백의 일설에 목숨이 날아갈 것같기 때문이었다. 신속한 행동! 그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명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한편, 조문백은 내내 찜찜한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임시조처를 취하긴 했으나 어딘가 미진한 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태사의에서 일어나 뒷짐을 진 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불안해!" 잠시 멈춰서서 허공을 노려보던 그가 마침내 그렇게 중얼거리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서주(西州)에서 서쪽으로 80리 가량 떨어진 시진. 저자거리는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혼잡한 가운데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틀린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개중, 점(占)을 치는 노인은 이 바닥에서 이미 수십 년간을 살아왔다. 그의 점이 맞고 안 맞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점을 치면서 먹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아부를 잘한다는 것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의 안색과 눈빛, 그리고 기분을 헤아려 적절하게 대응함으로써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기술자였다. 그는 장님이었다. 장님이기에 언제나 같은 거리, 같은 장소에서 거적을 깔고 복채통을 놓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의 직업의 특성이기도 했다. 신시(申時)쯤 되었을까? 지는 해가 장님 노인의 얼굴에 황혼의 빛을 던지는 시간쯤에 한가닥 서늘한 음성이 가까이서 들려왔다. 20대 말부터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의 음성이었다. "점을 치러 왔소이다." 점장이 노인은 히죽 웃었다. 그러자 드물게 박혀 있던 이가 싯누렇게 드러났다. "어떤 점을 원하오?" "그야 맞는 점을 원하는 게 아니오?" 서늘한 음성의 청년은 보기와는 달리 입심이 걸걸한 듯했다. "헤헤......! 그럼 복채를 듬뿍 내시오." 이제까지는 점장이 노인도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딸랑! 통속으로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소리가 틀렸다. '앗......! 이건 은자 떨어지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점장이 노인은 의심이 많았다. 때로는 복채통에 돌멩이를 놓고 가는 자가 더러 있기 때문에 그는 항상 복채를 먼저 받고 손으로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 점장이 노인이 손을 더듬어 은자를 확인한 순간, "헉!" 숨이 멎는 소리와 함께 점장이 노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바로 그 순간 점장이 노인은 이미 땅바닥에 엎드리고 있었다. "태...... 태상장로님을 뵙습니다!" 동시에 그의 허연 동자가 빙그르 돌더니 까만 자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온 소식은......?" 장님 행세를 하던 점장이 노인을 향해 이렇게 입을 연 사람은 다름아닌 종리연이었다. 그는 깡통 속에 하오방의 신패를 내던졌던 것이다. "도박장에 그렇지 않아도 향주님께서 장로님께 드릴 소식을 갖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종리연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언제 그랬느냐는 둥 점장이 노인의 꺼먼 동자가 사라지고는 하얀 동자가 눈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이 귀밑에만 붙어 있는 중년인은 체격과는 달리 눈알이 작고 매우 교활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소문난 도박사였으나 그가 바로 하오방의 요직에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별로 없었다. 그는 지금 종리연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는 두 손으로 한 장의 전서(傳書)를 올리고 있었다. "......." 아무런 대꾸없이 종리연은 그가 내미는 전서를 받아 읽었다. 아주 눈에 익은 서체가 들어 있었다. <축하해요. 사성 중의 미성(美聖)을 얻었으니 말이에요. 그러나 제가 첫째임을 잊지는 않으시겠지요? 당신이 부탁하신 다지성녀 궁단향의 행방을 알아냈답니다. 그녀는 왕옥산(王屋山) 석담사(石潭寺)에 있어요. 조심하세요. 삼패천에서 당신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천첩은 본문의 모든 정보망을 동원하여 계속 삼패의 동정을 탐지하고 있답니다. 무운을 빌어요. 추신: 보고 싶어요. 당신의 제 일부인(第一婦人)으로부터.> 그때서야 종리연의 입가에 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아련히 방의경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참으로 도도했던 여인. 그러나 지금은 그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다정하고 사려깊은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배어 있는 전서를 보자 종리연은 가슴이 달콤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서의 구석구석에는 방의경의 애정이 송이송이 배어 있는 것만 같았다. 만약 중년인이 보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종리연은 그 전서에 수십 번 입을 맞추었을 것이다. "왕옥산 석담사라......." 이때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태상장로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한결 부드러워진 안색으로 종리연이 물었다. "이 지역에 탈명육신(奪命六神)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혹시 그 일이 장로님과 연관이 있지나 않을까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탈명육신?" 뜻밖의 말에 종리연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전문 살인청부업자들로 매우 위험한 자들입니다. 최근에 삼패천에 입교했다고 알려진 이후 일체의 청부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 조심하리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곳은 도박장 후면의 밀실이었다. 마방(馬房) 앞이다. 중원은 넓다. 따라서 여행객들은 타지로 여행할 때 주로 마방을 이용하게 된다. 마방은 각 구간을 나누어 여행 및 수송 업무를 맡고 있는데 구역에 따라 요금이 틀리고 또 원하는 고객에 따라 호사스런 여행을 할 수도 있다. 마방에는 수시로 많은 손님들이 드나든다. 시각이 되면 출발하는 자들, 그리고 마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마청(馬廳)에는 대개 여러 명이 대기하기 마련이다. "......." 종리연도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가 굳이 마방을 택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삼패천의 추적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후 어떻게든 가장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마방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지금 그는 마청에 앉아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다소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 그가 마방에 들어 섰을 때 여행객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장사꾼이나 선비들, 그리고 부녀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차례로 마차를 타고 떠났다. 종리연의 행선지는 왕옥산이었으므로 노정이 멀어 좀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그의 눈에 거슬리는 인물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예감이 좋지 않다.' 이렇게 느끼던 찰나에 그는 어느새 자신이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후좌우로 안광이 심상치 않은 인물들이 분포되어 자리를 잡은 것이다. 만일 그들이 동시에 공격을 가한다면 종리연은 꼼짝없이 합공을 받게 되는 위치였다. '저자들이 바로 탈명육신일까?' 종리연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그는 궁리하고 있었다. 최소한 어떤 경우이던 그는 혼자라면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소매 속의 혈월도를 가만히 만졌다. 최근 들어 그는 밤마다 혈월팔천도식의 오의(奧義)를 깨달아 가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써본 적은 없으나 그 위력은 능히 짐작되고 있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제 더이상 도망만 다니는 종리연은 아니다. 너희들이 먼저 칼을 뽑는다면 나 역시 피하지는 않겠다.' 이때였다. 그가 주위를 은근히 포위한 형세의 사나이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데 또다른 손님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들어서는 손님들을 보는 순간 종리연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한 쌍의 노부부와 그 가족들이었다. 아들 며느리인 듯한 중년부부와 손자로 보이는 이십 대 청년 두 사람이 들어섰던 것이다. 겉보기로 그들은 시골의 순박한 일가(一家)로만 보였다. 그들은 종리연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았다. '만일 놈들이 공격하게 되면 저들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 텐데......' 그는 슬쩍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사나이들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더욱더 안광(眼光)이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칼을 뽑고 달려들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렇다면......?' 종리연은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소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때였다. 노인 일행이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종리연은 흠칫했다. 거의 동시에 6인의 사나이들이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그는 다급히 외치며 노인 일가를 가로막았다. 사나이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6인의 사나이들이 멍청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종리연은 노인 일가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슈파악---! 등 뒤에서 파공성이 일어났다. "헉!" 종리연은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꼬꾸라질 듯 비틀거렸다.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그가 경계한 것은 6인의 사나이들이었다. 꿈에도 그들 이외의 인물이 자신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의표를 찌르는 공격은 바로 그의 등 뒤에서 일어난 것이다. 왼쪽 옆구리를 불로 지지는 듯한 격통이 왔다. 그러나 그의 반응도 신속했다. 전광석화처럼 몸을 회전하는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뜨면서 놀라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렇다. 평범한 노인의 일가로 보았던 자들이 모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띄며 그에게 가공할 공격을 퍼붓는 것이 아닌가? "죽어라!" "뒈져라!" 암팡진 괴성과 함께 시작된 그들의 대공세는 잔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파파파파팟! 피피웅......! 노부부는 그에게 좌우에서 동시에 강모철사(强耗鐵絲)를 뿌려댔으며, 중년부부는 각각 언제 숨겨두고 있었는지 장도(長刀)와 오구검(五句劍)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두 명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아래쪽으로 몸을 굴리며 종리연의 다리를 노리고 쇠갈고리로 공격한 것이다. 핑! 절대절명의 순간에 종리연의 신형이 팽이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순간 놀랍게도 그의 두 발은 이미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 손이 좌우로 펼쳐지자 빛살처럼 빠른 혈월도가 찰나를 가르며 비스듬히 누운 채 날아갔다. "으악!"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무는 순간에도 종리연의 두 발이 청년들의 안면을 강타하고 있었다. "퍽!" 수박통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청년의 머리통이 터지며 뇌수가 품어져 허공을 적시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종리연의 소매 속에서 두 개의 반달이 날아가 중년부부의 몸을 베었고 그것은 눈깜박할 사이에 돌아와 다시 노부부의 뒤통수를 긋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일섬 탄지간(彈指間)에 일어난 일이었다. "......!" 장내는 한바탕 경악이 휩쓸고 지나갔다. 종리연은 비로소 신형을 멈추며 돌아섰다. 이때 6인의 사나이들은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새 병기를 꺼내들고 있었는데 미처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종리연은 차갑게 내뱉았다. "이제 자네들 차례인가?" "태...... 태상장로님......!" "장로님......!" 종리연의 싸늘한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6인의 사나이들은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사나이들의 행동은 전혀 뜻밖이었으나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삼패천이 보낸 자객들이 아니라 오히려 종리연을 암중으로 보호하기 위해 방의경이 보낸 하오방의 고수들이라는 것을. "......!" 종리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를 해도 엉뚱한 오해를 한 것이었다. "자...... 자네들 정말 운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종리연이 중얼거렀다. "장로님께서...... 사...... 상처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묻는 수하들의 질문에 종리연은 담담히 말했다. "괜찮소. 그보다도......." 종리연은 쓰러져 있는 6구의 시체를 둘러 보며 말했다. "그대들이 저들을 처리하시오." 짤막하게 지시한 종리연은 성큼성큼 마방을 걸어 나갔다. 마차를 탈 기분이 싹 가셨기 때문이었다. "장로님......!" 수하들이 이구동성으로 종리연을 불렀다. 종리연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보호할 필요는 없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 사나이들은 그를 따르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종리연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오방의 무공 수준으로는 종리연을 보호하기는커녕 도리어 방해될 우려가 더욱 많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종리연은 어느덧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경악하고 있었다. 비록 얼떨결에 시전한 혈월도법이었으나 그 위력에 스스로도 놀란 것이다. 그는 새삼 자신이 터득한 무공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그는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의 대결은 그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 있었다. 그건 진정한 용기이기도 했다. 새삼스럽게도 지금까지 상황에 쫓기기만 하고 살아온 자신에게 연민이 일었다. 길을 걸으며 종리연은 각오를 되새기듯이 중얼거렸다. '삼패라......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역시 인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종리연아...... 어차피 부딪쳐야 할 일이라면 더이상 도망다닐 필요는 없다.' 종리연. 그는 차츰 변하고 있었다. 만일 지난날 그를 가리키며 담간랑이라고 손각가락질 하였던 자들이 지금의 그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고개를 갸웃거릴 것임에 틀림없을 정도로. 21 빗나간 애정(愛情) 관도(官道). 한창인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아침부터 관도를 달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도 상에는 적지 않은 행인들이 걷고 있었다. 유난히 사람이 많은 것은 표차 행렬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표차는 표물을 호송하는 것으로 행인들은 대부분 그 표차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적의 흉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종리연도 그 일행에 섞여 있었다. 종리연은 지금 왕옥산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방에서의 기습 사건 이후 그는 더욱 주의를 하고 있었다. 왕옥산에 있다는 다지성녀 궁단향을 만나기 전까지는 시끄러움을 피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표행을 하는 표사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표사들은 언제나 목숨을 걸어놓고 사는 직업이다. 따라서 표행은 언제나 긴장되어 있고 표정이 굳어 있기 마련이었다. 얼굴이 굳어있는 표사들과 걸음을 같이 하며 종리연은 반나절 동안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표차 행렬을 따라온 것이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삼패천의 무리들이 자신을 척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그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아직 날씨는 무더웠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덥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표사들의 굳어버린 행동 때문에 느끼는 마음 탓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더운 날씨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짜증나게 하던 예감은 옳았다.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전혀 예기치 않았던 방향에서! 왕옥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황야를 지나야 했다. 그 황야는 제법 넓었으며 기형의 바위들이 널려 있었다. "멈춰라. 표물을 내놓아라!" "크핫핫핫핫......!" 표차 행렬이 언덕에 이르렀을 때 언제 나타났는지 녹림 도적들이 기습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표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착하게 병기를 뽑아들고 표물을 지키며 자위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경험으로 미루어 표사들은 녹림 도적쯤은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차장...... 창! 파팟! 병기와 병기들이 부딪쳐 불꽃을 토해내며 싸움이 벌어졌다. 빼앗으려는 자나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나 억척스럽기는 매 한 가지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녹림 도적들은 비록 대단한 무리들은 아니었으나 표사들은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도적들의 숫자가 워낙 많았던 것이다. 한편 종리연은 그 일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크핫하하하......!" 일진광소를 울리며 두 명의 도적들이 한 대의 표차를 공격했다. 순간, "아아악......!" 의외로 표차 안에서 가냘픈 여인의 비명이 울린 것이다. '여자?' 표차 안의 표물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 그것도 여인이라는 사실은 종리연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더군다나 상황이 이미 표국 쪽에 크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표사들의 숫자는 어느덧 반으로 줄어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른다면 모두 전멸할 것이 틀림없었다. 스팟...! 어느새 종리연은 신형을 날렸다. 그와 함께 표차를 따라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달아나거나 숲속에 엎드려 있었다. 도적들은 그저 눈앞에 무엇인가 스쳐갔다는 것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흑!" "큭!" 그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종리연의 경공술은 천하제일이었다. 그것은 무한진인의 독문절학으로 수백 년간이나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있는 개세절학이었다. 도적들의 무공은 그리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종리연은 간단하게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가...... 가자!" "모두들 후퇴하라!" 도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것을 본 도적들의 우두머리는 크게 외쳤다. 그 즉시로 그들은 나타났을 때보다 더욱 빨리 사라졌다. 종리연은 그들의 잔혈(殘穴)을 찍었다. 잔혈은 한 번 찍히게 되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앞으로 영원히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게 된다. 잠시 후 도적들이 물러나자 그는 표차 쪽으로 걸어갔다. 표차는 반 이상 부서져 있었다. 표사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거나 비틀거리고 있었다. "대협......!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소이다." 살아 있는 몇몇 표사들이 그에게 다가와 감격의 표정을 지으며 예를 표했다. 그러나 종리연은 인사를 대충 받는 둥 마는 둥하고 표차의 문을 열었다. "......!" 과연 표차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여인이었다. 언뜻 보기에 아름다운 삼십 대의 미부였으나 표차가 부서지는 충격으로 혼절을 한 것같았다. 입과 코로도 실낱같은 가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종리연은 안된 생각이 들어 그녀를 부축해 끌어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윽!" 종리연은 짧은 비명을 토하며 여인을 밀었다. 여인을 안는 순간 놀랍게도 여인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비수로 그의 심장을 찍은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고육계(苦肉計)로 종리연을 유혹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종리연의 반응은 빨랐다. 비수는 오른쪽 어깨쪽으로 빗나갔다. 만일 조금이라도 동작이 늦었다면 그는 황천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 종리연의 눈에서 일순 무서운 분노의 광망이 뻗었다. "교활한 작자들......!" 번뜩! 소매 속에서 핏빛 광망이 뻗어 나갔다. 막 몸을 날려 도망가려던 여인의 등에 일직선으로 혈월도가 관통해 지나갔다. "캬아아아악!" 찰나지간 여인은 자신의 앞가슴으로 뚫고 지나가는 혈월도를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생명이 절단나는 순간이었다. 종리연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지혈할 생각도 않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삼패천의 악랄함에 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표차 공격이 하나의 계략이었단 말인가?' 문득 떠 오른 생각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표사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종리연은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종리연은 더이상 이곳에 머물러 보아야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신형을 날렸다. 그가 사라진 직후, 휙휙! 두 개의 그림자가 떨어졌다.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죽은 여인에게 달려갔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할 정도로 거침없는 동작이었다. "셋째야!" "아우......!" 처절하리만치 안타까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는 그들은 여인이었다. 죽은 여인과 놀랍게도 똑같이 닮아 보이는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여인이 죽어 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죽일 놈...! 두고 보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이를 갈고 있는 여인들의 눈에서는 원독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표사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저 멍하니 두 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인들은 세 쌍둥이였던 것이다. 잠시 후 그녀들은 죽은 여인을 들쳐 업더니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 표사들은 그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로서는 이번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녀(裸女).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고 무려 수십 명이었다.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여인들이 대전(大殿)에 도열해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녀들이 모두 아름답다는 것이었으며, 한결같이 젊은 여인들이라는 것이었다. 구름같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는 여인들의 피부는 백옥같이 희었으며 사지는 가늘고 균형이 잡혀있었다. 두 개의 젖가슴은 상향으로 솟아올라 싱싱한 탄력으로 빛나고 있었다. 대리석 같은 다리와 군살 하나 없는 아랫배, 그 아래로는 은은한 삼림이 여체의 신비를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들은 떨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녀들의 안색은 창백했으며 두 눈에는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들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선택 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대전 안은 붉은 주단이 깔려 있었으며 기둥 마다에는 황룡의 조각이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어 자금성(紫禁城)을 방불케 하는 규모였다. "......." 나녀들을 둘러보고 있는 중년인, 그는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과거 그는 탐화태세(探花太世)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유명한 채화음적(採花淫賊)이었다. 손주랑(孫朱郞)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는 지금은 삼패천의 일개 향주급 인물이었다. "......." 그는 지금 여인들을 훑듯이 둘러 보고 있었다. 언뜻 입가에 교만한 미소가 흐르다가도 곧이어 불안의 기색을 드러내곤 하였다. 손주랑은 자신의 여인을 보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는 위인이었다. 지금 대전에 도열해 있는 28인의 여인들은 자신의 뛰어난 안목으로 직접 발굴한 미녀들이었다. 중원의 곳곳을 돌면서 여러 가지 엄격한 기준에 따라 고르고 고른 빼어난 미인이었다. 만일 그가 미녀 감식가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정도 수준의 미녀들을 모으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언뜻 초조한 기색이 보여졌다가 사라지곤 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으음......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계집이 나와야 할 텐데.......' 그렇다. 그는 지금 누군가에게 미녀들을 선 보여야 할 입장이었다. 잘만 한다면 그로 인해 그의 운명은 커다란 전기를 맞을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지난 수 년간에 걸쳐 수집한 미인들의 나신을 둘러 보았다. "......!" 자신이 보기에도 침이 넘어갈 정도였다. 게다가 이 미녀들은 아직까지 순결한 처녀들이었다. 이때였다. "들여 보내라. 하나씩." 문득 대전의 휘장 안으로부터 한가닥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손주랑은 급히 부복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는 급히 손짓했다. 그러자 맨 앞의 나체 여인이 두려운 듯 부르르 떨더니 마치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양 휘장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휘장 안. 그다지 크다고 할 수는 없는 방이었다. 방 한 가운데는 커다란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 여인은 바들바들 떨면서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다. 여인은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걸음을 걸을 수도 없었다. 더욱이 전라의 몸으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걸어간다는 것은 여인에겐 죽음보다 더한 수모이기도 했다. "나가라." 문득 여인의 귓전에 얼음보다도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공포와 알 수 없는 안도감으로 주저앉을 듯했으나 그러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여인은 간신히 돌아섰다. 돌아서는 여인의 뒷모습은 슬퍼 보였다. 태사의에 앉아 싸늘하되 가라앉은 한 음성을 발하는 인물. 그는 바로 무영비마 조천백이었다. 지금 조천백의 얼굴에는 은은한 분노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는 찾고 있었다. 어떤 한 여인을. 그것은 그의 마음을 오랫동안이나 괴롭히고 있는 여인을 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지난 수 년간 그는 천하의 미인이란 미인은 거의 다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가 사랑하고 있는 한 여인을 대신할 만한 여인을 찾지 못했다. 때로는 그 여인을 잊거나 부정하기 위하여 숱한 여인들을 가학하고 짓밟아 보았으나 그때일 뿐, 그는 또다시 괴로움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나가라." "모두 내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이다! 더러운 것들......! 가랑이를 찢어버리기 전에 썩 꺼져 버리란 말이다." "크핫핫핫핫...... 안 돼......! 안 돼...... 모두 틀렸어!" 광소에 뒤이어 통한의 부르짖음이 조천백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모...... 모두들 꺼지란 말이다. 크흐흐흐!" 조천백은 미친 듯이 외치고 있었다. 벌거벗은 28명의 여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옷을 껴입을 사이도 없이 달아났다. 대전에는 손주랑이 벌벌 떨고 있었다. 곧 휘장이 걷히며 조천백의 팔 척 거신이 나타났다. "이...... 이왕야......!" 놀란 손주랑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어대던 몸을 부복했다. 조천백의 눈에는 어느새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으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놈의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냐?" 손주랑은 가까스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은 엄청난 두려움으로 인해 흰자위만 보일 뿐이었다. "와...... 왕야......!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바로 그때였다. "으아악!" 말을 미처 끝내지 못한 손주랑의 입에서는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딱 벌어진 입 속에는 혓바닥 대신에 무엇인가가 꽂혀 있었다. 그것은 한 자루의 혈전(血箭)이었다. 어느새 조천백이 혈전을 날린 것이다. "쓸모없는 놈......!" 조천백은 홱 돌아서 휘장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대전 바닥에는 손주랑의 시신만이 눈을 부릅뜨고 누워 있을 뿐이었다. 황하(黃河)는 언제나 도도하게 흐른다. 비록 탁류(濁流)이긴 해도 그 누런 빛깔은 도리어 황하의 장대함과 유구함을 잘 나타내주는 살아 있는 증거일 것이다. "......." 한 사나이가 있었다. 팔 척 장신의 백의(白衣) 문사는 손 안에 상아로 만든 홀(笏)을 쥔 채 멍하니 황하를 굽어 보고 있었다. 이곳은 황하수로 18채 중의 하나인 수상 누각으로 이곳에 서면 황하의 흐름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삼촌살인설이라는 공포의 미명으로 불리우고 있는 백의문사 조문백은 벌써 한 시진째나 그런 자세로 황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가닥 미혹의 표정이 어려 있었다. 무엇인가 깊은 상념에 빠진 듯도 했다. 어찌보면 고뇌에 빠진 표정같기도 했다. 바로 그때였다. "보기 좋구나." 문득 그의 바로 뒤에서 한가닥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 조문백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서서히 몸을 돌렸다. 누각으로 어느새 한 사나이가 올라와 있었다. 역시 팔 척 장신, 그러나 그 느낌은 조문백과 완전히 틀렸다. 비쩍 마른 몸에 청삼을 입었으며, 손에는 섭선을 쥐고 있었다. 얼굴은 얼음을 조각하여 만든 듯하였으며 영원히 풀릴 것같지 않은 북극의 빙산(氷山) 전체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형님......." 조문백은 공손히 인사했다. 고개 만을 끄덕이던 조천백은 난간에 걸터 앉았다. 잠시 황하에 눈을 주고 있던 그는 힐끗 조문백을 바라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대단히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의 입에서 이런 음성이 흘러 나오는 것은 아우인 조문백을 대할 때뿐이었다. "시라도 한 수 읊어 보렴. 난 네가 읊는 시가 가장 듣기 좋더구나." 그 말에 조문백은 흠칫했다. 뜻밖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얼마 만의 일인가. "......." 조문백은 곧 시선을 강물로 돌리더니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수중의 홀을 어루만졌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리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바람 일렁이는 숲에 조각달 지고, 옷엔 이슬이 맺혀 작은 거문고를 타네. 어둠 속 강물 꽃밭 사이로 흘러가고, 봄하늘 별들 초당 둘러 반짝인다. 장서를 뒤적이니 촛불 타서 짧아졌고, 보검 앞에 보며 술잔들어 심각하다. 시 읊고 홀로 노래 듣고 있자니, 배타고 놀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네. 시가(詩歌)가 끝났다. "......." 그러나 조천백은 아직도 시의 여운이 귀에 남아 있는 듯 난간에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시 읊기를 끝낸 조문백은 그를 바라보았다. 조천백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강물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형님...... 외로우시구려.' 조문백은 그의 기분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같았다. 형제이기에. 아니 그 이전에 같은 남자로서. 그리고 똑같은 상흔을 지닌 인간으로서 그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아픔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조천백은 여전히 시선을 강물에 둔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좋구나......." "......." "이 얼마 만이냐? 오 년...... 아니 십 년......?" "......." 조문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조천백의 입에서 이런 감상적인 말이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랄까? 왠지 침울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무겁게 휘감고 있었다. 조문백은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다간 숨이 막힐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때 조천백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 종리연이란 자는 어찌 되었느냐?" 조문백은 고개를 저었다. "예상보다 강한 놈인 것같습니다. 얼마 전 세 차례의 공격을 했는데 모두 실패했을 뿐더러 최근에는 좀처럼 실수가 없다는 유령삼매(幽靈三妹)의 일차 공격마저 실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유령삼매까지......?" 조천백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렇습니다. 소제도 유령삼매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었으나 그렇지 않은 것같습니다." 유령삼매란 사도(邪道)의 유명한 세 쌍둥이 여인을 일컫는 것이었다. 유령삼매는 특유의 귀기로운 기술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들은 어릴 적 동영에서 인자수업(忍者修業)을 받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녀들이 마음 먹은 살해 대상물은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으음...... 제법 있는 놈인 것같군." 그는 문득 눈빛을 번뜩였다. "하긴 그러기에 삼황후를 차지했을 테지만." 그때 조문백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쩌면 사황후까지도 놈의 농간에 넘어 갔는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조천백의 안색이 변했다. "그게 사실이냐?" "아직은 정확한 사실은 아니나...... 소제의 예감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 순간 조천백의 눈에서 무서운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너는 어쩔 셈이냐?" "소제도 더이상 방치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지옥혈사대(地獄血死隊)를 보낼 생각입니다." "......?" 조천백의 눈에 언뜻 놀라움이 떠올랐다. "지옥혈사대......? 아직 연공(練功)이 끝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그렇긴 합니다만...... 일 차로 연공이 끝난 자들을 보낼 생각입니다." "으음......." 조천백은 신음을 발했다., "예상 외로 놈의 비중이 커지는군." "소제도 예감이 좋지 않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만일을 위해서라도 잡초는 뿌리째 제거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조천백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번쩍 뜨며 입을 열었다. "아우....... 내 잠시 다녀와야겠다." 언뜻 조문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 "허허......! 별 일은 아니다. 답답한 기분을 풀 겸 외유라도 하고 와야겠다." 조문백은 흠칫했다. "형님, 혹시......?" "허허......! 미리 짐작하지 마라. 우선은 아무 생각없이 나가는 것이다. 이후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 이미 조천백은 돌아서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하나의 거대한 빙산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멀어져 가는 조천백의 모습에서 조문백은 서글픔을 느낄 뿐이었다. '잊으셔야 하오, 형님. 천하에 여인은 얼마든지 있소이다.' 조문백은 내심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으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조문백의 눈에서도 환상처럼 떠오르는 여인의 모습이 있었으니....... 쏴아아...... 황하의 물결이 뱃전에 부딪쳐 갈라졌다. 조각배였다. 조천백은 수채를 떠나고 있었다. 그는 사공도 없이 한 척의 작은 배를 타고 있었다. 그렇다고 노를 젓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배에 우뚝 선 채 진기(眞氣)로 배를 조종해 가는 것이었다. 물살을 가르며 배는 유유히 황하를 건너고 있었다. 문득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쪽 그가 막 떠나온 강 언덕에 한 여인의 모습이 그림처럼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천백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 설화(雪花)......." 그러나 갑자기 조천백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촤아아아아아! 갑자기 조각배는 놀랄 만한 속도로 물살을 가르고 나가기 시작했다. 배는 눈깜짝할 사이에 황하 속의 작은 점이 되고 있었다. 22 지옥혈사대(地獄血死隊) 적룡산(積龍山) 중턱. 사냥꾼 정우백은 벌써 이틀째 범을 쫓고 있었다. 그는 유능한 사냥꾼이다. 산서(山西) 일대에서는 그가 범사냥꾼 가운데 제일로 꼽힌 지가 벌써 13년째였다. 그는 오늘도 범을 쫓고 있었다. 범 특유의 냄새와 발자국.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트...... 틀림없다!' 그가 쫓는 범은 보통 범이 아니었다. 백호(白虎)인 것이다. 백호 피는 보통 범가죽의 50배는 받을 수 있는 거금이 아닌가. 그러나 백호는 영리했다. 벌써 그의 추적을 15회나 따돌리고 있었다. 정우백은 범을 단숨에 맞추어 꿰뚫을 수 있는 강전(强箭)과 장창, 그리고 가능한 한 상처없이 포획할 수 있는 그물 등을 준비하고 이 일대를 뒤지고 있었다. '옳지...... 여기다.' 그는 눈을 반짝였다. 경험 많은 사냥꾼 특유의 직감이었다. 비록 희미하게 지워져 있는 발자국이었으나 그것이 그가 사활을 걸고 뒤쫓았던 범의 발자국이 틀림없었다. 그는 투지가 끓는 것을 느꼈다. '후후......! 놈은 정말 영리한 놈이군. 자신의 발자국을 지워가고 있으니.......' 이런 경우 그는 몹시 흥미가 당길 뿐더러 보이지 않는 사냥감과 대결을 벌이는 승부사적 쾌감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날이 지기가 무섭게 노련한 사냥꾼인 그도 다소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 산중에서 해가 떨어지면 아무래도 인간과 동물의 싸움에서는 인간이 불리한 법이다. 맹수란 밤에 활동하기가 더욱 수월한 반면 인간은 어두워지면 여러 가지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할 수 없지. 일단은 하루 더 노숙을 할 수밖에. 그러나 내일쯤이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이면 네놈도 틀림없이 내 손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안타깝다는 듯이 잠시 어두워져가는 산중턱을 노려보던 정우백은 자리를 잡아 불을 피울 생각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아앙......! 문득 온 산이 진동하는 듯한 포효가 울리는 것이 아닌가? 정우백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놈이다!' 당겨진 시위와 같은 긴장을 느끼며 정우백은 장창을 꼬나잡고 일어섰다. 소리가 들린 곳은 그다지 먼 곳이 아니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 고작해야 두 마장 정도 떨어진 곳이리라. 그는 조심스럽게 짙어져 가는 어둠을 헤치며 그쪽으로 접근해 갔다. 얼마나 갔을까? "헉!" 그는 부르르 떨었다. 주변에서 범 특유의 비린내가 강렬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으으...... 이럴 수가......!'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도사렸다. 섣불리 접근한 것이 후회가 될 정도였다. 범의 냄새가 이렇게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지척에 범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 전신에서 식은 땀이 주루루 흐르고 있었다. 어느 방향 어느 쪽에서 범이 날아올 지 몰랐다. 그는 장창을 꼬나들고 한 바퀴 돌았다. 그때였다. "허억!" 그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백호! 과연 아주 가까운 곳에 백호가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의 좌측이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분명했다. 그저 한 번만 도약하면 그를 충분하게 덮칠 수 있는 거리에 백호란 놈이 엎드려 있었다. "......?"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사람의 냄새를 맡았음이 분명한 백호는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백호의 눈. 본래 범의 눈에서는 화등잔같은 광채가 나야 정상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호의 눈은 마치 꺼진 등불처럼 깜깜했던 것이다. 일시에 머리가 혼란해지는 것을 느끼며 정우백은 조금씩 백호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놈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이었다. 슉!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장창을 날렸다. 이어서 푹!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장창은 백호의 목에 박혔다. 그런데도 마땅히 들려야 할 비명이나 포효가 울리지 않았다. '이럴 수가......?' 정우백은 귀신에 홀린 것같은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흐흐흐......." "후우우우우우......." 문득 주변으로부터 음산한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돌려 본 정우백은 기절초풍할 뻔했다. 눈(眼)! 수백 쌍의 핏빛 눈들이 사방으로부터 그를 향해 조여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으아아아악......!" 한 순간 정우백은 그것이 귀신의 눈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눈이 어찌 시뻘걸 수 있으며 악마의 눈인 양 타오를 수 있단 말인가? "으아아악......!" 엄청난 공포심이 끝내 정우백을 미쳐 버리게 만들었다. 그는 아무 곳이나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번뜩! 무엇인가 창백한 빛이 그의 목을 휘감고 다리를 휘감고 허리를 휘감았다. "으아아아악!" 정우백, 그날 이후로 명 사냥꾼인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몸은 아주 잘게 난도되어 적룡산에 흩어져 버린 것이다. "가자......." 휘우우우우! 장우백의 몸이 난도질 당해 적룡산에 흩어져 버린 직후 수백 개의 인영이 마풍인 양 적룡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정검산장(正劍山蔣). 이곳은 무당(武當)의 속가인물 환천도군(幻天刀君) 여량천이 세운 장원으로 산서일대의 명문으로 30여 년 간 명망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하룻밤 사이에 정검산장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백의 인영들에 의해서 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옥혈사의 무리라고 지칭했다. "우우우우......! 쓸어 버려라. 지옥혈사대(地獄血死隊)의 첫 희생물이다!" 찰나지간에 눈이 시뻘건 수백 명의 인영이 쓸고 간 자리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지옥혈사대! 그들에 의해 일으켜진 혈풍(血風)은 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기 시작했다. 시작(始作). 그렇다.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아주 작은 불씨에 불과한 일이었다. 삼패천의 가공할 죽음의 병기(兵器)! 그들은 바로 인간병기들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연공과정에서 이미 인성이 말살된 지 오래였기에 출도하자마자 무서운 겁란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삼왕야라고 불리우는 삼촌살인설 조문백의 명을 받고 무림에 정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목적은 오직 한 사나이를 척살하기 위해서. 단 일인. 그 일인을 척살하기 위해 지옥혈사대 277인을 출정시키다니. 지옥혈사대는 자신들이 겨우 단 한 명 때문에 출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큰 불만을 느꼈다. 동시에 그 불만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미친 듯한 살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물론 조문백이 그런 것을 예견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그는 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삼패천이 이제까지 웅크린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츰 중원의 제문파들은 준동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조문백은 이번 일을 기화로 중원의 무림계는 물론이고 명조(明朝)에도 쐐기를 박을 셈이었다. 새벽 햇살이 숲 사이를 뚫고 떨어져 내렸다.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던 사람이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 눈부신 햇살이 검광처럼 그의 얼굴을 비쳤기 때문이었다. 눈을 뜬 사람은 바로 여인이었다. 하지만 겉 모양은 전혀 여인이 아니었다. 무사들이 즐겨 입는 길다랗고 검은 장포, 옆에 기대어 놓은 장검 따위가 그녀를 여인으로 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지니고 있는 장검의 길이는 무려 오 척에 가까웠다. 마검성녀 단리사영.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어젯밤에도 노숙을 했다. 그녀는 검도(劍道)를 깨닫기 위해 천하를 유랑하고 있었다. 따라서 노숙은 그녀에게 있어 도리어 객점에서의 편안한 잠보다도 익숙한 것이었다. "......?" 불현듯 이상한 냄새가 후각을 스쳤다. 단리사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빈틈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볼 래야 볼 수가 없었다. 단리사영은 눈을 가늘게 오무렸다. 멀리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불?' 이상한 예감 때문에 그녀는 옆에 세워 두었던 검을 집어 들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단리사영의 눈에 비쳐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장원(莊院)이었다. 이 장원이 무엇하는 곳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강호의 한 문파라는 것이다. 그것은 장원의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의 복장이 똑같다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 단리사영의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으...... 으음......!"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죽어 있었다. 그것도 치가 떨릴 정도의 참상으로. 싸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며 후면으로 들어서던 단리사영은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벽 앞이었다. 장원의 후면으로 들어섰을 때 단리사영은 벽 한가운데 서 있는 나체의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나이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 삼십 대의 미부였다. 그런데....... "......!" 단리사영의 미간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바로 나체로 서 있는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손과 발이 벌려진 채로 그 위에 날카로운 검이 꽂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활짝 개방되어 있는 여인의 하체에는 유린 당한 흔적이 역력한 채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왠만한 일에 놀란 적이 없는 단리사영이 아니던가? 그런 그녀의 입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아직 숨이 미약하게 붙어 있었다. 단리사영이 그녀의 단중혈(壇中穴)에 가볍게 장심(掌心)을 대고 진기를 불어 넣자 여인이 눈을 떴다. 그러나 여인이 살아 있은 것은 극히 일 순간에 불과했다. "무...... 무서운 일......! 모두...... 주...... 죽...... 지...... 옥...... 혈...... 사......." 그뿐이었다. 여인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끝내 들지 못했다. ".......!" 단리사영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어렸다. 이제까지 그녀는 어떤 현상이건 관심 밖이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검도를 깨닫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장원에 일어난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장원 후면은 여인들이 기거하는 곳인 듯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많은 여인들이 유린 당해 숨져 있었다. 그러나 그 광경은 같은 여인으로 엄청난 분노를 느끼게 하고도 남았다. 사지가 찢어져 있는 여인....... 눈 뜨고 볼 수 없는 난행의 흔적을 남긴 여인....... 개중에는 임신을 한 여인도 있었다. 단리사영은 돌아섰다. 돌아서는 그녀의 눈에서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무시무시한 살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리사영은 장원을 벗어났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선택한 방향은 한 차례 무시무시한 혈풍을 일으키고 사라진 지옥혈사대가 지나간 방향이었다. 종리연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 저쪽 숲에선가 한가닥 비명 소리같은 것을 들은 듯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왕옥산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다. 그 동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아 그로서는 다소 긴장이 풀려진 상태였다. '잘못 들었나?' 종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길을 산등성이로 주었다. 산중은 적막하고 평화로운 정경을 보이고 있었다. 종리연은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걷기 시작했다. 손수 심은 도화 오얏 어엿이 주인 있고 늙은이집 담장 얕아도 역시 집이거늘 흡사 춘풍이 나를 무시한 듯 밤 사이 꽃가지를 불어 꺾었네 "허헛......! 이거 참, 오랜만에 풍월을 한 번 읊어보려니까 잘 안되네. 확실히 나는......." 종리연은 머리를 긁적였다. 투명한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과 투명할 정도로 맑은 계곡물. 거기다가 한가롭게 떠서 흐르는 흰구름은 분명 시흥(詩興)을 일으키고 있었건만 그 다음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그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사형인 남궁환인이 주절거리는 것을 들은 것 외에는 생각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가만있자......! 또 하나가 있었는데.......' 마침내 생각이 났던지 목을 가다듬은 종리연이 다시 읊조리기 시작했다. 장안의 베옷 입은 나를 누가 알아 주리오 오히려 일각문 닫고 울타리 지킨다 늙은이 안 나가니 다북쑥이 논밭에 무성커늘 어린 놈은 겁없이 빗속을 뛰네 비는 좍좍 쏟아져 겨울 재촉하고 기러기 날개 젖어 높이 날지 못하네 올 가을 들어 햇빛 못 보았으니 진흙에 엉킨 땅이 언제 마를고 다 읊고 난 종리연은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음...... 이건 가을의 쓸쓸함을 노래한 시로군. 조금 전의 것은 봄을 읊은 것이고......." 그가 이렇게 한가하게 시가를 읊으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돌연 일성 비명이 울려왔다. "아아아악......!" 바로 산등성이 아래쪽이었다. 게다가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비명소리였다. 종리연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의 한가했던 심정은 한 순간에 달아나 버렸다. 일단 마음이 움직이자 그보다 더 빨리 그의 신형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숲으로 들어간 종리연은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숲의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많은 여인들의 시신들. 더구나 여인들은 한결같이 전신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나신의 여인들이 나뭇가지 위에 걸린 채, 또는 바닥에 사지를 벌리고 죽어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젊은 여인들로 유린 당한 흔적을 보이고 있었다. 뿌드득! 종리연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처참한 여인들의 시신에 절로 이가 갈렸다. '대체...... 어떤 악마가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는 방금 전 들린 비명으로 미루어 아직 범인이 숲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휙! 종리연은 절정의 경공술을 발휘하여 더욱 숲속 깊이 들어갔다. 얼마쯤 갔을까? "으음...... 사...... 살려 주......!" 한가닥 가느다란 여인의 신음소리가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 마침내 종리연은 두 여인을 보았다. 그런데 그녀들의 얼굴은 어딘가 닮아 보였다. 한 여인은 나무에 묶여 있었는데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분명 죽어 있는 것같았다. 또다른 여인은 숲에 엎드려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여인은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서고 있었다. 놀랍게도 여인의 아랫배에는 한 자루의 검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종리연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때문에 그는 나무에 묶여 있는 여인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가 막 여인을 부축하려는 순간이었다. "죽엇!" 슉! 여인이 느닷없이 자신의 복부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그를 찌르는 것이었다. 빙글! 종리연의 신형이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아아악!" 여인의 목에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그어졌다. 간발의 차이로 종리연의 소매 속에서 혈월도가 날아간 것이다. 하마터면 계락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이었다. 종리연은 치를 떨었다. '이것도 계략이었구나.' 그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그는 한가닥 의혹을 느끼며 몸을 훽 돌렸다. 그것은 바로 나무에 묶여 있는 여인 때문이었다. 여인은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으나 방금 전 그를 공격하던 여인과 몸매가 완벽하게 닮아 있었던 것이다. "......?" 종리연은 멈칫하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보시오......." 이때였다. 여인이 고개를 치켜듬과 동시에 입 속에서 무엇인가를 품어내는 것이었다. "헉!" 종리연은 경악성을 발했다. 다급히 신형을 날렸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놀랍게도 여인의 입에서 독침이 쏘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 독침은 특수한 장치에서 쏘아진 것으로 석 자 안팎의 거리에 서 있었던 그로서는 아무리 빠른 경공술을 펼친다 해도 피하기가 불가능한 거리였다. 가슴에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 교활한 계집......." 마침내 분노를 금치 못한 종리연의 입에서 욕설 아닌 욕설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소매자락이 무섭게 떨쳐졌다. 쐐액! "카아악!" 여인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다. 여지없이 가슴을 관통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인은 그를 보고 태연히 웃고 있었다. "호호호...... 죽는다! 네놈도 이제 나를 따라 올 것이다! 우리 유령삼매는...... 겨... 결코 혼자 가지 않아......." 유령삼매(幽靈三妹). 그녀들은 전문 살수(殺手)들이었다. 동영에서 인자술을 배운 이후 그녀들은 온갖 악랄하고 귀기어린 수법으로 수많은 무림인들을 해쳤다. 얼마 전 유령삼매의 막내가 종리연에게 죽은 이후 그녀들은 이를 갈고 준비한 것이다. 종리연은 멍하니 여인을 바라보았다. "......." 그는 한숨을 쉬고 다가가 그녀의 가슴을 뚫고 나무에 박혀 있는 혈월도를 거두었다. 웬지 처량한 느낌이 가슴을 스치고 있었다. 비록 간악하고 잔악한 유령삼매였으나 살인을 즐기지 않는 그의 순후한 성품으로서는 결코 개운한 기분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종리연은 다시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겉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가슴 옷자락을 찢어냈다. "......?" 순간 종리연은 흠칫했다. 그는 감각으로 가슴에 두 대의 독침을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침은 독침이되 보통 독침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령삼매가 날린 독침은 제거하기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특수한 미세침(微細針)으로 몸에 박히는 순간 순식간에 혈액에 용해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가슴에는 단지 두 개의 붉은 혈점(血點)이 찍혀 있을 뿐, 독침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방심했다.' 종리연은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침에 어떤 독이 발라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체내의 진기를 일주천(一週天)해 보았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아무런 이상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독침임에는 틀림없으니 요상(療傷)할 곳을 찾아야겠다.' 종리연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가 막 숲으로 접어든 순간 또다른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줄을! "쳐라!" "크하하하하하하.......!" 슉! 슈슈슈......! 바로 그곳에 지옥혈사대란 이름의 살인병기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낱낱이 종리연의 행동을 보고 있었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신에 혈포를 입었고 하나같이 똑같은 눈빛을 가진 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똑같이 인성(人性)을 망각한 자들이었다. 어느새 종리연은 그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빠져나가야 한다.' 그에게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신형을 최대한으로 빨리 움직였다. 전면에서 대여섯 자루의 검이 그를 난도질하듯 날아왔으나 무시하고 달렸다. 검이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손을 저었다. 쨍! 쩌엉! 쩡! 불꽃이 퉁겼다.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피핏! 핏! 피잇! 양 소매 속에서는 붉디 붉은 달이 쏘아 나갔다. 달리면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혈월팔천도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완전히 오의를 깨닫지 못한 도식이었으나 혈전의 와중에서 그는 놀랍게도 꽉 막혀 있던 오의가 하나하나 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손을 뻗을 때마다 두 개의 혈월이 전광처럼 쏘아 나갔다. "으악!" "크아아악!" 앞을 가로막는 혈포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종리연은 자신감을 얻고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는 혈월도를 날리고, 오른손으로는 혈월도를 움켜쥐고 도식을 전개했다. 쐐애애애액! 파츠츠츳! 핏빛 광망이 춤추듯 일어나며 십여 명의 인영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핏빛의 아수라무(阿修羅舞).......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운데 종리연은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서야 유령삼매의 독침이 위력을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조금도 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지옥혈사대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오직 죽이는 방법 만을 익힌 자들이었다. 무더기로 혈월도에 의해 거꾸러지고 있어도 그들은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종리연은 차츰 의식이 가물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이젠 끝인가?' 그는 눈앞에 다섯 자루의 검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지막이었다. 이젠 도무지 손가락 하나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흐흐흐......!" 지옥혈사대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사방으로부터 밀려들고 있었다. 그를 공격한 지옥혈사대는 277인이었다. 그러나 이미 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이라는 숫자는 그에게 있어 불가항력의 숫자였다. 종리연은 이미 두 개의 혈월도 중 하나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것은 진기가 이어지지 않아 그의 손을 떠난 후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남아 있는 혈월도는 그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었으나 아무리 휘둘러 보아야 제 위력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 최후의 순간이었다. 그는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죽여라!" 어디선가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열다섯 자루의 검이 그의 전신에 우박처럼 떨어졌다. 그러나 종리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쓰러지면서 우수에 쥐고 있던 혈월도를 던졌다. "으아아악!" "카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지옥혈사대가 우르르 쓰러졌다. 그들의 발목이 일제히 잘려 나간 것이었다. 스팟! 종리연은 눈앞이 뚫리자 필사적으로 신형을 날렸다. 살 기회는 이번뿐이었다. 아차하는 날이면 그는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될 판국이었다.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서도 그는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하늘은 종리연을 구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흐흐흐흐......!" "크크크ㅋ...... 어딜 가느냐? 가더라도 목은 두고 가라." 문득 괴소와 함께 앞을 가로막는 인영들이 있었다. 종리연은 절망을 느꼈다. 이제 그는 신형을 멈출 래야 멈출 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수중에는 병기조차 없었다. 파파팟! 쐐애애액! 바로 그 순간 십여 자루의 도(刀), 판관필(判官筆), 륜(輪) 등이 그의 전신을 향해 폭사되었다. 종리연은 눈을 감았다. '이젠 끝이군.......' 그는 차라리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아집이나 오기(傲氣)....... 이런 것도 따지고 보면 살아 있기 때문에 이어지고 있으며, 인간은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지도 모른다. 지금 종리연은 자신의 몸을 난자하듯 떨어지고 있는 지옥혈사대의 병장기들을 느끼며 도리어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난 최선을 다했다. 이제 여한은 없다......! 후후훗......!' 쓰러지기 직전 종리연은 자신을 향해 이렇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물론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과거 그는 담간랑이라는 치욕의 별호로 불리우던 못난 사나이가 아니던가? 그는 쓰러졌다. 아주 편안한 세계를 꿈꾸며....... 23 검녀(劍女)와 마인(魔人)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이것은 자연의 정한 이치다.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있으면 한쪽에서는 꺼져가는 생명도 있는 법. 이것 또한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죽음. 그것은 어떤 인간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부류의 인간은 죽어서는 안되는 수도 있다. 종리연의 목숨은 그가 가볍게 여길 수는 있되 타인이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는 목숨이다. 오직 그 자신만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지는 몰라도....... 신(神)은 어떤 면에서는 생(生)과 사(死)의 중재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휘이이이잉! 1천 년 묵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뿌리째 뽑아 던질 듯이 바람이 불었다. 그건 바로 피의 바람이었다. "우후후후.......!" 지옥혈사대는 자신들의 척살 대상이 눈앞에서 거꾸러지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면 이미 그들의 병장기가 척살대상의 몸에 떨어졌으므로....... 그러나 정작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그들의 입에서 였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누군가가 뛰어 들었고, 그 순간 모든 것은 반전되었다. 쏴아아....... 바람! 피바람이 다시 중원의 하늘 한 곳을 흽쓸며 지나갔다. 그 속으로 오 척의 장검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춤은 사혼무(死魂舞)였다. 기나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사신(死神)처럼 지옥혈사대 사이에서 검무를 추는 인물은 놀랍게도 여인이었다. 육 척의 장신을 지닌 여인의 검무는 아름다움보다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왜냐면 그녀의 검이 환상의 피보라를 그을 때마다 지옥혈사대의 허리가 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혼무를 추고 있는 여인. 그녀의 이름은 다름아닌 마검성녀 단리사영이었다. 그녀는 지옥혈사대의 종적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녀는 하나로 묶은 흑발을 날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 휘두른다기보다는 검무를 춘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녀의 검법은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고수라도 그녀를 대한다면 느낄 것이다. 그녀가 결코 자신을 베고자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단리사영의 검식(劍式)은 무위검식(無爲劍式)이었다. 그녀는 본능에 따라 움직였으며, 직감적으로 가르고 찌를 공간을 찾아 검을 긋고 있었다. "퇴각......! 퇴각하라......!" 어디선가 쥐어 짜는 듯한 외침이 울렸다. 그러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멈추고 말았다. 단리사영은 어느 순간 대상물을 잃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장검이 동작을 멈추었다. "......." 사라지고 없었다. 인영은 이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날아오르던 피바람만이 무게를 잃어버린 듯이 서서히 단리사영의 주위로 가라앉고 있었다. 지옥혈사대는 수십 명의 시신을 남기고 달아난 것이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른다는 지옥혈사대였으나 그들은 퇴각하고 만 것이다. "......." 긴 장검을 늘어뜨린 채 수수로이 서 있던 단리사영은 문득 망연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보았다. '아직...... 멀었어......!' 그녀가 원하는 검도(劍道)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과 검이 완벽하게 일체가 되는 검식. 마음 하나로 모든 것을 베어 낼 수 있는 검도. 그것을 터득하기가 이토록이나 힘이 드는 것인지....... "......." 잠시 하늘을 망연히 올려다 보던 단리사영은 곧 검을 거두며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눈에 낯이 익은 얼굴 하나가 다가왔다. 최선을 다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늘에 얼굴을 들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나이. 그는 다름아닌 종리연이었다. 순간 단리사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또...... 이자인가?" 기분이 묘했다. 질긴 운명인지 아니면 인연인지....... 단리사영은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고 있는 사내를 이번으로 세 번째 조우하는 것이었다. 첫번째는 결혼을 하자고 조르면서 귀찮게 쫓아왔으며, 두 번째는 흑점에서 죽을 뻔한 그를 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를 다시 본 것이다. 단리사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한다? 그냥 두고 갈 수도 없고.......' 평소의 그녀였다면 어쩌면 그냥 지나쳐 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종리연의 맥을 짚어 보았다. 그녀의 안면이 굳어졌다. '이건......?' 불덩어리였다. 종리연의 전신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화로(火爐)이기라도 한 양 그의 몸은 펄펄 끓고 있었다. 단리사영은 다시 한 번 맥을 짚어 보고는 흠칫했다. 부욱! 어느 순간 그녀는 종리연의 상의를 찢었다. 그리고는 발견했다.가슴에 난 두 개의 홍점(紅點)을. 그 홍점 주위로 온통 피부가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건...... 혈음갈미침(血陰蝎尾針)......!" 단리사영은 대뜸 그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혈음갈미침이란 음악(陰惡)한 자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전갈의 꼬리에서 분비되는 독, 그것도 음성이 강한 독을 바른 특수한 침이었다. "......?" 단리사영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하늘을 보고 땅을 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아주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 하는 습관이었다. 한 동안 그렇게 서 있던 그녀는 어느 순간 입술을 굳게 깨물더니 의식을 잃은 종리연을 어깨에 둘러 메고 신형을 날렸다. 그녀가 사라진 직후였다. 슉!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듯 나타난 인영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조천백이었다. "......!" 그는 시신으로 뒤덮힌 주위를 둘러 보더니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평소 얼음같기만 하던 그의 안면이 기이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지옥혈사대의 시신들이 가공할 검식에 당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천백의 얼굴이 곧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건......?" 다음 순간 그는 바람처럼 어디론가로 날아갔다. 낡은 사당(祠堂) 안. 평생을 검도에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던 한 여인이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찌할거나.......' 여인은 다름아닌 단리사영이었다. 단리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당의 부서진 격자창으로부터 구름에 가려진 으스름한 달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구름에 가려진 달이 제 빛을 찾자 사당 안이 일시에 환해지는 것이었다. "......."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고독(孤獨) 그 자체였다. 그녀는 두 무릎 사이에 검을 안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진 격자창 아래 종리연이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도화꽃이 피어난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단리사영은 시선을 돌려 종리연을 바라보았다. 일순 그녀의 서늘한 눈이 잔잔한 파도처럼 흔들렸다. '이대로 두면 저자는 죽을 것이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 단리사영은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그러나 사영아. 너는 세상의 인연을 끊어야 할 몸이 아니더냐? 어째서 저 사람과 너는 자꾸 마주친단 말이냐?' 단리사영의 눈에서는 기이한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검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할 뿐더러 나 자신이 여자라는 것도 잊어야 한다. 검각(劍閣)에서 배출한 수만 명의 검사들 중 검도를 완성한 사람은 그 몇이던가? 그들이 검도를 달하지 못한 것은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지. 너는 여자이기에 결코 검도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단리사영의 눈에서 일순 차가운 빛이 흘러나왔다. "여자이기에 검도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단리사영은 문득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것은 곧 자신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여자! 여자란 무엇이기에......?"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월경을 하는 여자인 것이다. 또하나 틀림없는 사실은 자신이 처녀라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남자를 만나 성혼을 하고, 그를 위해 밥을 지으며 빨래를 하고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통념이었다. 그러한 모든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검도에 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리사영은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함과 동시에 여자로서의 제약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녀는 마음이 헛도는 것을 자주 느껴야만 했다. 검도는 어떤 무형의 벽에 가로막혀져 있었다. 더이상의 진전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천애를 돌며 유랑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벽을 허물 어떤 계기를 만나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 일고 있는 알 수 없는 감정의 물결....... 그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내가 아직도 처녀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시선을 다시 종리연에게 향했다. '처녀라...... 처녀이기 때문이라면......?' 찰나지간 어떤 결심이 그녀의 눈빛에 나타났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 주어 버리자! 까짓것...... 어짜피 검도를 달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면 아무에게건 주어 버린들 어떠랴.' 단리사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슴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종리연이 당한 것이 혈음갈미침이란 것을 해독(解毒)하는 유일한 방법은 음양(陰陽)의 교합이었다. 만일 음양교합을 하지 않는다면 죽음밖에는 딴 도리가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정사(情事)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투... 툭. 단리사영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장삼이 떨어졌다. 이윽고 그녀의 벗은 육체가 달빛 아래 표연히 떠올랐다. 육 척에 가까운 여자로서는 지나치게 큰 키였으나 그녀의 육체는 나름대로 특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늘씬한 몸매에 유방은 그다지 크지는 않았으나 단단해 보이는 질감이었다. 약간은 말라 있는 듯한 몸이었으나 둔부에 이르러서는 여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 듯 급격히 굵어지고 있었다. "......." 창 밖으로 흘러드는 달빛에 단리사영은 한기를 느꼈다. 아직껏 한 번도 타인의 눈에 드러내 보이지 않은 육신이 아니던가. 이제껏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남자와 여자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검각에서 14세 때까지는 남자들과 함께 잠을 자고 목욕을 했으며, 함께 생활도 했었다. 그러나 월경이 시작되고 부터는 그들과 떨어져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 단리사영은 입가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녀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일순 종리연을 보는 순간 자신의 육체가 보이지 않게 떤다는 것을 느끼고는 당황했다. "바보같이......."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종리연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종리연은 혈도를 짚힌 상태였으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옷을 벗기는 사이 단리사영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게도 자신의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나무랐다. '단리사영아! 이것은 단지 검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일 뿐이야.' 이윽고 그녀의 손에 의해 종리연도 알몸이 되었다. 남자의 알몸과 여자의 알몸. 그것은 구조부터가 다른 것이다. "......!" 단리사영은 눈썹을 떨었다. 애초부터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종리연의 몸이 자신의 몸과 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여자라는 강한 수치감을 느꼈던 것이다. "으음......." 단리사영은 입술 사이로 괴이로운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눈길은 종리연의 하반신에 멎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곳에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그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단리사영은 가슴이 콱 막히는 듯한 두려움을 맛보았다. 그 두려움은 남자를 모르기에 발생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사람이건 사물이건 두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느낌은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일순 그녀의 손이 그 모든 느낌에 항거라도 하려는 듯 신속하게 움직였다. 부르르....... 그녀의 전신이 화살맞은 듯이 떨렸다. 뜨거워서 손이 데일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사나이의 꿈틀거리는 육체의 일부가 그녀로 하여금 엄청난 두려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안 돼......! 내가 흔들리다니.......' 단리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악물며 그녀는 서서히 종리연의 나신 위에 올랐다. 그녀의 고개는 허공으로 향해졌다. 부서진 창문으로 구름 사이로 흐르는 달이 보였다. 그 달을 노려보면서 단리사영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모든 것은 한 순간이었다. 종리연은 깊은 수면에 빠져 있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전갈의 음독으로 인해 단리사영과 격렬한 정사를 나누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 단리사영은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피어난 한 송이의 혈화(血花)를 보았다. 일순 가슴이 텅 빈 듯한 허무함이 그녀의 표정에 나타나고 있었다. 버렸다. 그녀를 이제까지 괴롭히고 있는 어떤 멍에를 벗어버린 것이다. '이제부터야...... 후후......! 사영아, 넌 이제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어. 검도로 가는 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을 거야.' 내심 그렇게 자위하고는 있었으나 이상하게 슬픈 감정이 북받치고 있었다. 그녀는 옷을 입었다. 하반신 깊은 곳에 은은한 아픔이 느껴졌다. 처녀의 몸으로 종리연과 무리한 정사를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종리연은 음독(陰毒)의 강렬한 음성으로 인해 그녀와 무려 일곱 번의 정사를 나누어야 했었다. 그것은 처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단리사영은 아직도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종리연을 보았다. 그녀는 무심하게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바보같은 놈......." 그녀는 옷을 던져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문득 부르르 떨면서 본능적으로 검을 잡았다. "누구냐?" 그녀는 차갑게 소리치면서 밖으로 퉁겨나갔다. "......!" 밖으로 나간 단리사영은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사나이. 얼음장같은 얼굴을 가진 팔 척 장신의 비쩍 마른 청삼인이 서 있었다. 손에는 섭선을 쥔 채. 그는 다름아닌 조천백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란 말인가? "너는......?" 단리사영은 입을 열다가 끝까지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반쯤 뽑았던 장검도 멈추어졌다. "......!" 한편 조천백은 상대자가 여인이라는 것에 놀랐다. 그는 지옥혈사대를 거의 몰살시키다시피한 자의 흔적을 따라 이곳까지 추적해 온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상대는 여자였다. 여자를 우습게 아는 것은 그의 성격이자 조씨 왕조의 전통이 아닌가 말이다. '이럴 수가.......' 놀라움과 경악의 신음을 조천백은 발했다. 비단 상대자가 여인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없었다. 단리사영에게서 한 점의 허점도 발견하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를 놀라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암기로써는 천하무적이었다. 어떤 방향, 어떤 상태에서도 그는 암기에 관한 한 자신이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는 75종의 암기를 발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상대방을 바라보아도 암기를 날릴 만한 헛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고수들을 만나서 그들을 죽음으로 처리해 왔지만 이런 여인을 만난 적은 없었다. "......!"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본 채 마치 석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한편 단리사영은 심장이 멎는 것같은 충격을 느꼈다. 상대방은 마치 만년빙산(萬年氷山)이 내품는 것같은 질식할 분위기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검을 반쯤 뽑았으나 더이상 뽑을 수가 없었다. 만일 억지로 검을 뽑는다면 그 즉시 자신이 구멍투성이로 화할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호적수(好敵手). 세상에는 많은 호적수가 있다. 그러나 하늘이 일부러 짝이라도 지운 듯한 운명적인 호적수는 없다. 설사 있더라도 그것은 먼 전설(傳說)에서나 나옴직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이 두 사람이 바로 운명적인 호적수랄 수 있었다. "......."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도 감히 서로 먼저 움질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느덧 달이 기울었다. 바람 또한 멎었다. 시공이 정지한 것같은 느낌 속에서도 어느덧 여명이 트고 있었다. "그대가 바로 마검성녀라고 불리우는 사람인가......?" 홀연히 조천백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는 서서히 돌아서고 있었다. "당신은...... 무영비마!" 돌아서는 조천백을 바라보며 단리사영의 입에서도 그런 말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덧 조천백은 여명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한 번도 뒤돌아 보는 법이 없이. 그가 사라진 직후. 휘청......! 단리사영은 온몸의 진기란 진기는 모두 빠져 온몸이 텅 비어버리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바로 그때 그녀를 부축하는 손이 있었다. "낭자." 다름아닌 갓 잠에서 깬 종리연이었다. 24 다지성녀(多智聖女) 궁단향(宮丹香) 딸그락.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한 개의 패(牌)가 뒤집어졌다. "......." 자연석으로 다듬어 만든 조그마한 탁자 위에는 어느덧 수십 개의 패가 뒹굴고 있었다. 황혼의 붉은 햇살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면서 패들의 한 부분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일 것처럼 아름답고 작은 손(手) 하나가 뒤집어진 패를 집어든 것은 그때였다. <래(來)> 패에 나온 글자는 올 래(來)자 였다. 이윽고 패를 든 가는 손이 떨리는 듯하더니 한가닥 청아한 옥음이 흘렀다. "래......? 온다? 어찌된 일일까? 열 번을 던져도 똑같은 패가 나오니......." 모옥의 작은 방 안에서 패를 던지고 있는 인물은 18, 9세 가량의 가냘픈 몸매를 지닌 소녀였다. 그녀는 일신에 평범한 마의(麻衣)를 입고 있었다. 절세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그저 수수한 용모를 가진 낭자였다. 그러나 얼굴 가득히 스며 있는 지혜로운 빛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특히 먹빛처럼 검은 눈동자는 만물을 빨아들일 듯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대체 누가 온다는 말일까?" 패를 보며 중얼거리던 소녀는 곧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온다는 사람을 마중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모옥은 바로 도도히 흐르는 황하 연변에 있었다. 따라서 모옥 밖은 강물이었다. 막 지기 시작하는 노을을 전면으로 받으며 소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혼이 떨어지고 있는 황하의 풍경은 온통 황금천지였다. 소녀는 멍하니 황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난세(亂世)를 구할 길은 오직 사성이 합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미 삼성이 합쳐졌으니...... 어찌된 걸까? 그들이 스스로 움직였단 말인가? 스스로는 결코 융화할 수 없는 기질들이건만......."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삼패를 누를 새로운 구성(求星)이 패에 자주 나타나더니...... 이제는 또 그가 온다......?" 소녀는 먹물같은 검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대체 온다는 그는 누굴 말하는 걸까......?" 황하를 바라보는 소녀의 약간은 창백한 듯한 뺨에 홍조가 어리고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궁단향(宮丹香). 다지성녀(多智聖女)라는 별호를 가지고 태어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소녀다. 4세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읽고, 7세때 육도삼략(六韜三略), 손오병서(孫吳兵書)를 깨우쳤으며, 13세때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모두 이해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후로 궁단향은 늘상 자신의 머리 때문에 고심해야만 했다. 왜냐면 모든 사람들의 심리를 모두 읽을 수 있기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파생했기 때문이었다. 한때 그녀가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의 사람들 에게 지나가는 한 마디를 던졌는데 바로 그 일로 인해 서로를 죽이고 마는 엄청난 비극이 발생한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이 궁단향의 장난어린 이간질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궁단향은 그 일이 일어난 후로 자신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제 길을 찾았던 것이다. 다름아닌 천하를 구하는 쪽으로. 그런데 요즘 들어 그녀는 자신의 판단이 자꾸만 빗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래(來)...... 대체 누가 온다는 것일까?' 황금빛이었다가 어느덧 핏빛으로 변하는 황하의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궁단향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하 연변의 포랑진(包浪鎭) 마을에서 해노인(海老人)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그만치 해노인은 황하에서 50년 인생을 보내며 살아 온 사람이었다. 그런 해노인이 황혼이 지는 나룻터에서 그물을 지고 걸어나오고 있었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는 해노인의 오른손 안에는 꽤나 묵직해 보이는 대나무 광주리가 들려 있었다. 다른 곳으로 고기잡이를 나갔다 돌아오던 전홍(鈿紅)은 해노인을 보고 인사했다. "아이구...... 많이 잡으셨습니까? 어르신?" "허허...... 별로일세." "헤헤...... 무슨 겸손의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도 어르신처럼 고기잡이에 능한 분이 없습죠." "허허헛......! 그렇던가?" "그렇구말구요. 오늘도 꽤나 묵직해 보이는데요?" "자네 바구니도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구먼 그래! 오늘 수고한 보람이 있군." "감사합니다요. 어르신!" "허허헛......! 별 말을....... 어서 가 보게나 자네 부인이 눈이 빠져라 기다리겠네. 이제 팔 개월짼가? 몸조리를 잘 해야지?" 해노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 사실 해노인은 이곳에서 존경과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많았다. 그 중의 하나는 그가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는 장소를 귀신같이 알아맞추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해노인과 함께 고기잡이를 나가면 허탕을 치는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어르신! 고기들이 어르신 가는 곳으로만 졸졸 따라 다니는 모양입니다. 고기란 놈들도 어르신을 대단히 존경하는 모양입니다요." "그렇구말구요. 정말이지 어르신이야말로 진짜 어부입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감히 고기를 잡아 먹고 산다고 이야기도 꺼내지 못합니다요."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진 채로 찢어질 것같은 그물을 잡아당기며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이었다. 또한 해노인은 성격이 대범하고 인정이 많아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해노인이 촌장(村長)을 맡은 이후로 마을에서는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어려운 이웃을 돕는 미덕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해노인이 마을 사람으로부터 칭송을 한 몸에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해노인이 나루를 지나 마을 초입에 이르렀을 때였다. 얼굴이 검게 그을은 청년이 지나가다가 넙죽 절을 하는 것이었다. "헤헤......! 촌장 어른. 이제는 손녀를 시집 보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벌써부터 해노인의 손녀를 눈독 들이고 있는 마을 젊은 어부의 하나였다. "그렇게 되었나?" 청년의 말에 노인이 해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렴입쇼? 그러니 제게......." 청년이 얼굴을 붉혔다. 순간 해노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헛......! 아무리 그래도 자네는 안 될 것일세. 그 아이는 눈이 너무 높단 말이야. 내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거든? 허허헛......!" 노인은 껄껄 웃으며 청년을 지나쳤고 청년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잠시 후 해노인이 모옥 앞에 당도했다. "할아버지!" 모옥 안에서 마의소녀가 반가운 듯이 뛰어 나왔다. 그리고 노인의 어깨에 걸린 그물을 받아 내리는 소녀의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빛이 가득했다. 노인은 빙긋 웃으며 소녀를 앞세우고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간 순간 상황은 뒤바꼈다. "어찌 되었나요? 소식은......?" 소녀가 정색을 하며 묻자 뜻밖에도 해노인은 공손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조금 전 조천백이 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관계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왕녀와 시종의 관계로 뒤바뀌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녀 행세를 하던 소녀는 바로 궁단향이었다. 궁단향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다른 소식은요?" 해노인은 진중하게 답했다. "황하 36신(黃河三十六神)이 점차 수궁(水宮)에 접근하고 있는 듯합니다. 오늘 그들 중 우두머리인 수룡왕(水龍王)이 수채로 들어갔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궁단향은 그말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궁단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천백의 표정은?" "글쎄...... 워낙 얼음같은 자가 되놔서......." 해노인은 말 끝을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가씨께서 유독 요즘 들어 조천백의 행동에 유난히 신경을 쓰시는 것같아.......' 해노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아가씨. 빨리 손을 쓰던 지 해야....... 이대로 가다가는 어쩌면 기회를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가씨도 알다시피 저들이......." 궁단향은 고개를 저었다. "답답한 것은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아직 우리의 힘이 부족해요.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엄청난 비극을 당할 거예요. 천기로 봐서도 아직은 일러요. 아니 어쩐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요즘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그들도 어느 정도 침체된 것같은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궁단향은 잘라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궁단향의 단호한 말에 해노인은 입을 다물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가씨.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소이다. 구파일방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오.......' 궁단향은 문득 해노인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경고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해노인. 다른 생각 말아요. 저에게도 생각이 있으니까요." 뜻밖에도 무척이나 위엄이 서린 음성이었다. "......!" 찔끔 놀란 해노인이 입을 다물긴 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데 어째서 구파일방의 정예고수들이 아직 당도하지 않는지 모르겠군......." 해노인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던 궁단향은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해노인의 심중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와도 소용 없어요. 삼패의 운세는 너무나 강하여 그들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걸요...... 아아, 패에 나타난 구성이 누구인지 알기라도 한다면.......' 창 밖에 석양이 떨어지며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밀려들기 시작하는 어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한가닥 동요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잠시 궁단향과 함께 서 있던 해노인이 부시럭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얼마 후에 모옥 안이 환하게 밝아지며 여느 집들과 마찬가지로 저녁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용(龍)이 비늘을 번쩍거리는 등허리로 들보를 받치고 있는 대전(大殿) 회랑의 천장은 꽤나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다른 집보다 낮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팔 척 장신의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홀을 쥔 준미한 서생이었으며, 한 사람은 얼음같이 찬 인간이었다. 두 사람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회랑을 지나 깊숙이 걸어들어갔다. 얼마나 갔을까, 그들의 발길이 동시에 멈춘 곳은 월동문 앞이었다. "......."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월동문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또......?' 동시에 두 사람의 가슴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 것같았다. 그들은 바로 조천백과 조문백 형제였다. 문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여인. 그녀는 두 사람이 나타나자 급히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왕야님을 뵈옵니다......." 여인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조천백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런 조천백의 모습을 지켜보던 조문백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곧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설화. 폐하는 안에 계시느냐?" 여인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여인의 모습은 한없이 나약하고 수척해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왔다고 전해라!" "저어......." 설화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눈물이 가득 담긴 눈을 들었다. "왜 그러느냐?" "지금은 뵙지 않는 것이 좋을 것같사옵니다." 조문백은 눈이 번쩍 빛났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어서 전해라." "예." 설화는 가늘게 대답을 하며 곧 안으로 들어갔다. 조황백의 눈은 활활 타는 등불같았다. 그는 상반신을 벗고 있었는데 철탑을 연상케 하는 우람한 가슴에는 털이 수북이 나 있었다. 그의 뒤에는 알몸의 두 여인이 엎드려 있었다. 조황백, 즉 일지겁천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 아우를 노려보았다. "......." 조천백과 조문백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단 말이냐?" 조황백의 질문에 조천백은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바로 그 순간, "으핫핫핫핫핫......!" 느닷없는 광소가 조황백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조황백은 미친 듯한 광소를 발하더니 한참 만에야 뚝 그쳤다. 터질 때와 마찬가지로 광소가 그치는 것도 한 순간의 일이었다. "둘째야!" 문득 그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예." 조천백은 여전히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가 미친 것이냐? 아니면 내가 미친 것이냐?" "......." "그래, 명색이 천하의 조 황가의 왕야인 네가 그래 계집 하나가 두려워 도망을 와?" "......." 조천백은 말이 없었다. 이때 조문백이 나섰다. "폐하! 그것이 아닙니다." "아니라면 무엇이냐? 어찌하여 그 계집을 죽이거나 데려오지 않고 그대로 물러났단 말이냐? 그게 있을 법이나 한 일이냐? 입이 있다면 말을 해 보아라!" 조문백은 홀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상인은 손해나는 장사는 하지 않으며, 소 잡는 칼로 닭잡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우리의 적이 될 지 아니면 일가(一家)가 될 지 모르는 상황이옵니다. 또 한가지...... 승패가 확실하지 않은 승부를 가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녀를 제압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 역시 손해가 나는 일입니다." 조문백의 유창하고도 장황한 말에 조황백은 눈을 부라렸다. "무슨 뜻이냐? 너는 언제나 말이 너무 많다. 요점만 추려 설명해라." "폐하! 그녀는 검각(劍閣) 출신입니다. 검각은 대대로 수많은 검사들을 배출하였으며 그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그들 비록 구파일방이나 일반 무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검도 만을 추구하는 무리들이긴 하지만 만일 그들과 원한을 산다면 그만큼 새로운 적을 만들게 됩니다." "뭐라고......? 그래서 천부(天父)이자 황제인 내가 한낱 계집애를 두려워 하란 말이냐? 그년이 기껏 검각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한 제국(帝國)을 세울 때까지는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삼촌살인설(三寸殺人舌)답게 조리가 있는 말이었다. 조황백의 노기가 잠시 누그러지는 것같았다. "그뿐이냐?" "또 있습니다." 조천백과는 달리 조문백은 꺼리낌이 없었다. 그는 해야 할 이야기는 기어이 다 하겠다는 작정이었다. "뭐냐?" "비록 허구일 수도 있으나...... 십사장로가 말한 제9의 봉인(封印). 그걸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폐하! 벌써 잊으셨습니까? 봉인의 천기에 따르면 삼패와 사성이 하나가 되어야 천년제국을 이룰 수 있다 하지 않습니까?" 그말은 꺼져가려던 조황백의 노기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았다.조황백의 두 눈 속에서 노기가 솟아 올랐다. "짐은 그런 잡술(雜術) 따위를 믿지 않는다. 뿐더러 이미 그 계집년들을 다른 놈이 채 가지 않았느냐?" 조문백은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최후의 승부는 이긴 자가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는 법입니다." "......?" "그년들을 첩으로라도 삼으면 되지 않습니까?" 순간 놀란 조문백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침상에서 우드드득, 하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분노한 조황백이 뒤에 엎드려 있던 두 여인의 허리를 각각 양손으로 잡아 부러뜨렸기 때문이었다. "갈!" 그는 벌떡 일어나 노성을 질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래...... 짐이 고작 남이 먹다 버린 음식을 취하란 말이냐? 내가 거지새끼인 줄 아느냐? 크핫핫핫...... 그래 대륙의 천자(天子)가 기껏 남의 뒤치닥거리를 해야 한단 말이냐?" "폐하......! 그게 아니오라......." 당황한 조문백이 허리를 조아렸으나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었다. 조황백의 등잔같이 커다란 두 눈에서는 어느덧 살기(殺氣)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시끄럽다! 조잡한 놈들....... 너희들을 동생들이라고 지금껏 믿고 있었으니...... 어서 군사를 집합시켜라!" "폐하......! 어찌 하시려고......?" "출동이다! 더이상 못 참겠다!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냐? 천하를 정복하겠다! 무림이건 황궁이건 모두 쓸어 버리겠다. 이제 기다리는 건 지쳤다!" 조황백은 폭탄 선언을 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무시무시한 패도적 경기(勁氣)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 아...... 아니 됩니다. 폐하!" 놀란 조문백이 홀을 내팽개치고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런 행동이 일단 효력이 있기는 했다. "왜 안 된단 말이냐?" "처...... 천하를 정략하는 데는 시운(時運)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비켜라!" 조황백은 침상에서 내려섰다. 이번에 조문백은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엎드렸다. "아니 됩니다! 초패왕 항우를 보십시오...... 그가 힘이 약해 쓰러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도 시운을 타지 못해 쓰러진 것입니다." 그러나 조황백은 이제 꿈쩍도 안 했다. "시끄럽다. 나를 막지 말아라! 이 황백을 막을 자가 누가 있단 말이냐?" "안 됩니다......!" "황명(皇命)이다. 비켜라!" "차라리 저를 죽이고 가십시오." "좋다! 그게 네놈의 소원이라면!" 휘익! 조황백은 솥뚜껑같은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 순간 미동도 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조천백의 눈이 반짝 빛났다. 순간 조황백은 손으로 조문백의 머리를 내리치려다 벽 쪽으로 돌렸다. 꽈아아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청석으로 쌓아 만든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무서운 힘이었는지 벽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린 것이었다. 조황백은 허물어져 먼지가 뽀얗게 솟아나고 있는 벽 쪽으로 걸어 나가며 중얼거렸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하겠다. 그러나 난 오래 기다리지 않겠다. 서둘러라." "어...... 어디로 가십니까?" "바람이나 쐬러 나갔다 오겠다. 그러지 않으면 속이 가라앉지 않을 것같다." 조황백은 성큼성큼 걸어 사라져 갔다. "......." 조문백은 부복한 채로 멍하니 조황백이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여전히 마른 먼지가 무너진 벽 위에서 풀썩거리며 날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 왕조의 멸망을 예측이라도 하는 듯했다. 이때 조천백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어디로 가실 것같으냐?" 조문백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딘 지는 몰라도...... 아마 며칠 후면 강호가 진동하는 소문이 날 것입니다. 그것도 공포스러운 혈풍에 관한......." 조천백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음울한 빛이 어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그는 하나의 왜소한 인영이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보았다. '설화.......' 조천백이 마음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렇다. 설화였다. 그녀는 문 저쪽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모습을 감춘 것이었다. '아아!' 안타까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조천백은 눈을 감고야 말았다. 그런 사실을 조문백이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었다. 그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조천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잊어야 할 일을 어찌 그리 못 잊는단 말이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중얼거리는 조문백도 그 문제만큼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니....... 25 기다리는 여인(女人) 등룡12식(騰龍十二式). 난파풍검법(亂波風劍法). 중원사대검파(中原四大劍派). 이것은 수백 년 동안을 그 빛나는 이름 하나로 중원 무림에 군림하여 온 힘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쯤되면 누구나 한 문파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대화산파(大華山派)! 화산파는 위의 세 가지 검식을 면면히 이어 받으며 무림계에서 정통검파(正統劍派)로 군림해 온 것이다. 화산 기슭의 천여 평 대지 위에 우뚝 선 장원. 문하생은 많지 않아도 언제나 이백여 명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화산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검을 갈고 닦아 출도하기를 손꼽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봉(封)> 지금 화산파의 문루에는 그 같은 큼직한 글씨가 담긴 깃발이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봉문(封門)의 표식이었다. 이 봉기가 내려지지 않는 한 화산 제자는 단 한 명도 강호출도를 할 수 없었다. 종(鐘). 거종이었다. 5인 이상이 손을 둘러야 간신히 맞잡을 수 있는 거대한 청동으로 만든 종이었다. 그 종은 한 번 울리면 인근 수백 리까지 그 울음을 전했다. 그러나 종이 언제 울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종루로 오르는 계단은 오래 전에 막혀 있었다. 계단을 막은 나무는 삭은 지 오래였다. 곳곳에 누르스름한 버섯이 독화(毒花)처럼 피어 있었다. 바위로 박아 만든 계단 층에는 사람의 발길이 오래 전에 끊겼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온갖 잡초로 무성했다. 층계를 이루며 박힌 바위가 없었더라면 종은 폐허 위에 그냥 버려진 것으로 여겨졌을 지도 몰랐다. 그 층계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안타까운 눈으로 울리기를 멈춘 거종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군자검(君子劍) 악천상(岳天相). 그는 제18대 화산파의 장문인(掌門人)이었다. 종을 올려다 보는 그의 표정은 상당히 우울한 것이었다. 그것이 얼굴에 더 짙은 주름살을 만들었다. "아아......! 언제나 봉파(封破)의 힘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악천상은 당대 화산파의 장문인으로서 봉문의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파일방이 봉문한 것은 스스로의 결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삼패천의 막강한 힘을 막을 수 없기에 내려진 조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언제 봉파를 할 지 기약이 없었다. 악천상은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돌아섰다. 바로 그때였다. 우연히 문루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그는 흠칫 놀랐다. 사나이. 처음에는 하나의 점이었다가 눈깜빡할 사이에 거대한 체구를 가진 흑포인으로 허공을 날아 다가 온 사나이가 거짓말처럼 가공할 속도로 문루에 떨어진 것이다. '......?' 악천상은 그가 어떻게 화산파의 문루까지 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비록 봉문하고 있기는 했어도 화산은 아무나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까지 오르기에는 최소한 십여 곳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흑포인이 인기척도 없이 이곳으로 날아 올 수 있단 말인가. 다음 순간 그는 커다란 굉음을 들었다. "아... 아니......?" 곧이어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흑포의 철탑같은 사나이가 손을 한 번 들어올린 순간 거대한 문루가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것이었다. "크핫핫핫핫핫......!" 그리고는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광소가 화산의 장원을 뒤흔들었다. 그 바람에 잠자듯 정적에 싸여 있던 화산파가 일제히 진동했다. 마치 고요한 연못의 수면에 돌이 던져진 듯한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뭐...... 뭐냐?" "무슨 일이냐?" 다급한 고함을 내지르며 여기저기서 우르르 화산 제자들이 뛰어 나오고 있었다. 종루에서 보면 화산의 전경이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인다. 악천상은 눈을 크게 뜨고 눈 아래 벌어지고 있는 믿어지지 않는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럴수가......!' 한 순간 경악이 악천상의 얼굴을 훑으며 지나갔다. 물결이었다. 화산제자들이 물결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유영을 하듯 지나가는 흑포거인은 유유히 전진하고 있었다. 전진하는 그가 양손을 가볍게 저을 때마다 수십 명의 제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피떡이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흑포거인의 행동은 물살 잔잔한 바다를 가로지르는 거선(巨船)처럼 여유만만했다. 아니, 물보라를 치고 나는 제비같기도 했다. "으으...... 저럴 수가......? 녀석은 이...... 인간도 아니다......!" 악천상은 두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떴다. 그는 눈앞의 현실이 현실로 믿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천지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듯한 어지럼증을 그는 맛보아야 했다. 어느새 발밑으로 피의 안개가 자욱이 서리기 시작했다. '저...... 저자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지옥에서 온 염라대왕이란 말인가......?' 그가 넋을 잃고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에 제자들이 검진(劍陳)을 펼치며 흑포거인을 가로막았다. "......?" 그러나 역시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나이가 손을 흔들면 검진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있었다. 벌써 눈 깜빡할 사이에 연무장에는 백 명도 넘는 시신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오오......! 종사(宗師)시여......."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하나의 태산같은 인영이 그의 앞에 떨어져 있었다. "귀...... 귀하는 누구이길래 본파에......?" 악천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나이는 철탑이었다. 그는 단지 철탑 아래 짓눌리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했다. "너는 물어 볼 자격도 들을 자격도 없다. 그러나 말해 주지. 짐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제왕이시다!" 그뿐이었다. 철탑거인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악천상은 검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미처 이어지기도 전에 그의 몸은 주르르 항거할 수 없는 엄청난 흡인력에 의해 사나이를 향해 딸려갔다. 흑포거인이 그의 목을 움켜 쥐었다. "헉!" 어느샌가 악천상의 두 눈이 튀어 나왔다. 우득...... 뚝! 목이 꺾어졌다. 사나이의 억센 손아귀 속에서 악천상의 목은 힘없이 꺾여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으핫핫핫핫......!" 희미해져 가는 악천상의 의식 저 편으로 들리는 웃음소리는 분명 악마의 웃음이었다. 그리고....... 꽈아아앙! 종(鐘)이 깨어졌다. 사나이의 단 한 번 주먹에 두께가 한 자가 넘는 거대한 청동종이 산산조각나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것이 종이 울은 최후의 울음이었다. 그것은 또한 479년간무림을 이끌어 온 대화산파의 종말의 울음이기도 했다. 왕옥산(王屋山)은 본래 단풍이 유명한 곳이다. 가을이면 온 산이 불타듯이 타오르는 것이다. 중원에서는 왕옥산의 가을 단풍을 구경하지 않았으면 진정한 풍류객이라고 자랑하지 말라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였다. 단풍철이 되기만 하면 수없이 많은 문사(文士)와 협사(俠士)들이 왕옥산을 찾는다. 그들은 장만해 간 술에다가 왕옥산의 불타는 듯한 단풍을 띄워 마시면서 가무(歌舞)를 즐겼다. 물론 계곡을 타고 흐르는 곡류(谷流)에 세파의 온갖 때를 씻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이었다. 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녹음이 우거진 왕옥산의 열여덟 봉우리는 가을 단풍과는 또다른 저마다의 절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날카롭지는 않되 수려한 산세와 계곡마다 흘러내리는 맑은 옥류는 정녕 신선(神仙)이 살 만한 아름다운 산이었다. 그런 왕옥산을, 섭선을 든 한 백의 유생 차림의 청년이 헤매고 있었다. "이런....... 석담사가 왕옥산에 있다고 하길래 쉽게 찾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줄이야......." 그렇게 투덜거리며 이마의 땀을 훔치는 청년은 바로 종리연이었다. 그는 다지성녀 궁단향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벌써 사흘째 그는 왕옥산 일대를 뒤지고 있었으나 석담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종리연도 어느 정도 지치고 있었다. 목도 마르고 땀으로 인해 온몸이 끈적거렸다. "휴,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은근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어디에다 대놓고 짜증을 부릴 데도 없었다. 어쨌거나 내처 찾는 수밖에 딴 도리가 있겠는가? 들어줄 사람도 없는 짜증을 길동무 삼으며 종리연이 막 산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쏴아아아! 문득 시원한 물소리가 그의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앙증맞다고나 할 폭포수였다. 하얀 물보라를 튕기며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곡의 물. 어쨌든 반가웠다. 달려가 우선 물을 몇 모금 마시자 해갈이 어느 정도 되었다. "기왕에 물을 만났으니 목욕이라도?" 그렇게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우르릉......! 하는 굉음이 불현듯 머리 위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근처에 더 큰 폭포가 있나?' 종리연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마장쯤 거슬러 올라가자 웅장한 폭포가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폭포 옆의 공지에는 한 채의 자그마한 암자까지 있는 것이었다. 종리연은 암자를 보자 언뜻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혹시 저곳이 석담사(石潭寺)가 아닐까?' 폭포는 바닥에 떨어져 수만 년간에 걸쳐 담(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래 쪽의 담을 석담이라 부를 만한 풍경이었다. 종리연은 반가운 마음이 들어 암자 쪽으로 접근해 갔다. 암자에 접근한 종리연은 문득 생각난 듯이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행색을 살펴 보았다. 그의 눈길이 절로 찌푸려지고 있었다. 긴 여행을 한 끝이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먼지로 더럽혀지고 머리칼도 엉망이었다. 그는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섭선을 꺼내 보았다. 그러나 섭선 역시 엉망이었다. 몇 군데가 찢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구멍까지 숭숭 나 있었다. 종리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 다음 한 번 휘저어 보았다. 너덜너덜하는 것이 보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 연속하여 흔드니 다소 모양이 가려졌다. 종리연은 잠시 궁리했다. '이번에는 어떤 보법을 쓸까?' 그가 아는 보법은 모두 열여덟 가지였다. 이름하여 조화십팔보(造化十八步)! "다지성녀 궁단향은 지혜가 뛰어난 여인이니 풍류공자보(風流公子步)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고...... 역시 학문을 아는 여인이니 시성군학보(詩聖君學步)를 시전하는 것이 낫겠군......!" 이어 종리연은 섭선을 흔들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목청을 돋운 시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가을이 서러워 흰 머리 돌리고 지팡이에 기대어 성을 등지고 보니 강물 줄어 성과 모래 솟아났고, 텅 빈 하늘과 풍물이 말쑥하여라 종리연은 한층 목청을 돋우면서 암자로 접근해 갔다. 그러나 암자로부터는 아무런 기척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다. 아무도 없는 것일까?' 고개를 젓던 종리연은 더욱 목청을 돋우었다. 창해에 숨고자 하나 노쇠함이 한스럽고 평소의 뜻과 달리 붉은 인끈 받았노라 황혼의 새들 날개 가벼이 숲으로 돌아오는 양이 부럽도다! 한 귀절의 시가 끝났으나 암자로부터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종리연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때 쯤이면 어느 정도 반응이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반응이 없는 것이라면....... '이상한 일이다......!' 종리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그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성녀 중 벌써 세 여인을 얻지 않았는가? 과정이야 어찌되었든지....... 이제 남은 것은 다지성녀뿐이었다. 다지성녀만 손에 넣으면 그의 임무는 완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혹시 잠 들었나?' 그럴 수도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목청을 돋우어 시를 읊었다. 그러나 아무리 목청껏 읊어도 암자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실 그는 많은 작전을 세워두고 있었다. 시를 읊는 소리에 문을 열고 나오면 어찌어찌 해야 한다는....... 그러나 사람이 있어야 그것도 실행해 보지 않겠는가? 아무런 반응도 없는 데야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어흐흠......!" 다시 인기척을 내며 종리연은 암자 가까이 다가갔다. 암자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종리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순간 그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아...... 아니?" 바로 그 순간 암자 안으로부터 달콤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호호호......! 놀란 토끼눈을 하고 뭘 그리 보세요? 어서 들어오시지 않고......." 뜻밖이었다. 방 안에는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여인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 종리연은 눈을 크게 뜨고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 그녀는 바로 하오방주 방의경이었던 것이다. 종리연은 아연실색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건지...... 꼭 여우한테 홀린 기분이구려." 방의경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왜 안 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곳은 본래......." "호홋... 이곳은 당신이 마지막으로 정복해야 할 다지성녀 궁단향의 거처란 말이죠? 알아요. 왜 제가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녀는 벌써 오래 전에 이곳을 떠났어요." "......?" "그녀의 소재를 파악한 후로 수하를 시켜 이곳을 찾게 했답니다. 한데 그녀가 이미 수년 전에 이곳을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 뭐예요. 그래서 직접 이리로 달려 왔어요. 당신에게 전할 것들이 있기도 했구요." "전할 것이라니?" 종리연이 되물었다. 순간 방의경의 발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에 한가닥 근심의 빛이 어렸다. "삼패가 움직였답니다." 종리연은 흠칫했다. "움직이다니......?" "화산파가 무너졌어요. 그것도 단 한 사람....... 삼패의 첫째인 일지겁천의 손에 말이에요. 그것도 단 반 나절 만에......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멸했어요." "그럴 수가......." 종리연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진동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단 일인. 오직 한 사람의 힘으로 수백 년 전통의 검파가 하루아침에 몰살하다니....... "으으음....... 일지겁천의 능력이 그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종리연은 전율이 이는 것을 금치 못했다. 방의경은 초조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로 인해 무림은 흉흉해지기 시작했어요. 각 파에서는 더이상 앉아만 있다가는 언제 자신들에게 혈풍이 닥쳐올 지 몰라 암암리에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어느 순간 종리연은 신중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빨리 폭풍이 불겠군!" 그런 종리연의 모습에 방의경은 다소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멍청한 듯한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 동안 종리연은 어딘가 모르게 성숙한 분위기로 돌변해 있었던 것이다. 종리연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각 파의 움직임은 어떻소?" 방의경의 앵두처럼 빨간 입술이 벌어졌다. "구파일방이 중심이 되어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어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림사(少林寺)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갖는다는 말이 있더군요"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소림으로 가야겠군." 언뜻 방의경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어렸다. "당신이 소림으로 가신다구요? 소림으로 가서...... 어떡하시려고요?" 종리연의 대답은 간결했다. "막아야 하지 않소?" "막다니요? 뭘?" "작금의 무림의 위기를 어찌 보고만 있겠소?" 방의경은 어이가 없었다. "다...... 당신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종리연의 두 눈에서 일순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한 빛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엄숙하면서도 경이로운 빛이었다. 방의경은 문득 종리연이 딴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말했다. "저도...... 가겠어요." 그러라고 할 줄 알았으나 종리연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안 되오. 당신은 하오문으로 돌아가시오." "아니....... 왜요?" 놀란 방의경이 되물었다. "소림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하오문으로 돌아가 조직을 정비하시오. 언젠가 하오문이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오." ".......?" 방의경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까지는 모든 일들을 그녀가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역전이 된 듯한 기분이 든 것이었다. "하지만...... 저는......."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이 종리연은 빙그레 웃었다. "걱정마시오.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 점입가경(漸入佳境)이 아닐수가 없었다. 방의경은 점점 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런 방의경을 보며 종리연은 피식 웃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것이오?" "아...... 아니에요. 다만...... 너무 변한 것같아...... 마치 딴 사람 같아요. 당신이 분명 제 낭군이 맞나요?" 종리연은 빙긋 웃으며 팔을 벌렸다. "이리 가까이 오시오." "예?" "당신을 안고 싶소." 방의경의 얼굴이 빨개졌다. 설마 그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방의경은 문득 자신이 한없이 나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종리연의 가슴에 안겼다. 넓은 가슴이었다. 평원에 사슴 한 마리가 평온하게 쉬고 있는 듯한 그런 안식감이 느껴졌다. 종리연은 그녀를 힘차게 끌어 안으며 귓전에 속삭였다. "사실 그 동안 나도 무척이나 그대가 보고 싶었소." 종리연의 뜨거운 숨결이 귓불에 닿자 방의경은 온몸이 녹아나는 듯한 기분으로 응, 하는 콧소리를 낼 뿐이었다. 온몸이 붕붕 뜨는 듯하고 나른하기만 했다. 폭포수의 굉음도 멀어져 가고 없었다. 오직 그녀의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자신의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종리연이 의복을 하나하나 벗길 때마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몸을 틀어가면서 그의 손길을 은연 중 돕고 있었다. 콰르르릉......!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음악으로 삼으며 두 사람의 육체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26 두 여인(女人) 일박서산(一泊西山). 석양이 떨어지고 있는 강(江)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바다처럼 넓은 강을 말이다. "......." 여인은 언제부터인가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빛을 받은 여인의 몸은 육 척에 가깝도록 늘씬한 체격이었다. 치렁치렁한 흑발(黑髮)은 하나로 묶어 허리까지 드리우고 있었으며, 오 척에 이르는 장검을 메고 있었다. 이런 인상의 여인이라면 오직 천하에서 단 한 명밖에 없다. 단리사영.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온통 붉게 물든 강물을 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벌써 이틀째 그녀는 움직임을 정지하고 있었다. 아니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이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어느샌가 단리사영의 서늘한 이마에 절망의 구름이 끼어들고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릴 것같지 않은 철혈녀(鐵血女)의 의지견정함도 뒷통수를 치며 갑자기 닥쳐든 회오리 앞에서는 중심을 잃으며 흔들리고 말았다. "욱!" 문득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허리를 꺾었다. "우욱!" 헛구역질이었다. 그것은 한 동안 계속 이어졌다. 단리사영은 한참 후에야 눈물 그렁한 눈으로 허리를 폈다. 그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사물을 분별하지도 못할 나이에 검을 잡았고...... 검을 잡은 지 10년 만에 도(道)를 느꼈다. 그리고 그 뒤 숙명인 듯 검을 안고 살아왔다. 이제는 검도를 추구하는 것만이 생의 목표가 되어버린 여인이 바로 단리사영이 아니던가? 단리사영은 이제 간신히 실날같은 검의 오의(奧意)를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완전한 검도의 길을 달리기 위해 얼마전 자신이 검 외에 소중히 여기던 것을 버리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말이다. '임신을 하다니......!' 그렇다. 며칠 전부터 자꾸 구역질이 나 의원을 찾아가 본 그녀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어야만 했다. 종리연이라는 사나이를 구하기 위해 가볍게 던져버린 몸이었다. 그런데 그 단 한 번의 정사로 인해 설마 임신을 하게 될 줄이야. "어찌하여 이런 일이......?" 그녀는 하늘을 원망했다. 버리고자 한 일이 더더욱 그녀의 발을 묶어 놓다니....... 단리사영은 바위에 서서히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곤 조용히 자신의 검을 풀었다. 오 척 장검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서슬 푸른 검날이 석양빛을 튕겨내고 있었다. "......." 단리사영은 희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검날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좋았다. 언제나 검날을 어루만질 때면 느끼는 것이지만 검날의 감촉은 그녀로 하여금 이상한 희열을 느끼게 하곤 했다. '그래서 평생을 너와 함께 하려고 했는데...... 했는데.......' 문득 아랫배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단리사영은 부르르 떨었다. '싫다!' 미친 듯이 부르짖고 싶은 말이었다. 자신의 몸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또 하나의 생명은 그녀로 하여금 증오의 감정 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검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검은 지금까지 배신을 모르며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좋아 너를 선택한 지 20년이 가까워 오거늘.......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어느덧 사위가 어둠의 장막으로 뒤덮히고 있었다. 그러나 단리사영은 바위 위에 앉은 채 일어설 줄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저편 산으로 달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단리사영의 눈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겐 방법이 없다." 단호하지만 왠지 허허로운 한 마디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팔 척 거신의 형제인 조천백과 조문백이었다. 조문백은 답답하다는 듯이 강하게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래도 막아야 합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계십니다. 지금 큰 형님께서는......." 조천백이 주의를 주었다. "형님이 아니라 폐하이시다." 조문백은 흠칫하더니 수긍했다. "좋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지나치게 서두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이백 여 년 간을 준비하고 참아온 모든 대업이 물거품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조천백의 눈에서 일순 무시무시한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말 삼가하라!" "......!" 조문백은 흠칫했다. 조천백은 한 동안 동생을 노려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의 안색은 여전했으나 음성은 다소 수그러져 있었다. "해도 될 말이 있고, 해서는 아니 될 말이 있다." "용서하십시오. 그만......" 조문백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막아야 합니다. 폐하께서 서두르시는 것은 그만큼 많은 누를 범할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약한 적이라 해도 꿈틀거리는 저력은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나 구파일방은 무시할 수 없는 전통을 가진 가문이 아닙니까? 그들이 합심하여 들고 일어선다면 상황은......." 조천백은 눈을 감았다. 그도 알았다. 조문백의 우려가 무엇 때문인지 환하게 알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가만히 기다려도 제풀에 쓰러질 것을 굳이 쫓을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 조문백은 다시 말을 이었다. "더욱이 얼마 후면 광명비전(光明秘典)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어서 움직여도 늦지는 않습......." 이때 조문백은 입을 다물었다. 조천백이 눈을 뜨며 고개를 가로 저었기 때문이다. "물론, 네 말이 틀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내리신 결정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설사 나라도 말이다. 나로서도......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조천백은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형님." 조천백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사실은 나도 지쳤다. 이제 기다리는 것은 신물이 난다. 폐하의 심중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같다." 조문백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설마 조천백까지도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조천백이 나간 후 조문백은 털썩 태사의에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휴우......." 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밖으로부터 조천백의 차디찬 음성이 들렸다. "그들이 모이는 곳이 소림이라고 하였느냐?" "......?" 조문백은 귀를 기울였다. 수하인 듯한 녀석이 게거품을 물고 말하고 있었다. "틀림없습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여러 문파가 모인다는 정보입니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조문백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며 밖으로 몸을 날렸다. "형님께서 설마 그곳으로?" 그때 조천백의 억양이 없는 음성이 들렸다. "사실 너무 오래 쉬었다. 그 곳은 내가 맡으마. 그렇게만 알아라." 어느덧 조천백의 음성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조문백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참 후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새벽인데...... 조금만 기다리면 해(日)가 뜰 텐데 어찌하여 기다리지를 못하는가 말이다. 아아! 참으로 답답한 일이로구나." 아닌 게 아니라 창 밖이 뿌옇게 밝아지고 있었다. 새벽은 강에도 오고 있었다. 황하의 물은 밤 사이 변함이 없었다. 도도한 강물의 파도는 새벽이 되자 약간 높아졌을 뿐이었다. 바위. 땅 속 깊이 뿌리를 박은 바위처럼 밤새도록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단리사영이었다. 그녀는 막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 문득 그녀는 그 해가 누군가의 눈(眼)과 같다는 생각에 잠시 빠졌다. 많이 눈에 익은 눈이었다. '사부인가......?'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럼......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님의 눈인가?' 여전히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눈이 저 해를 그리도 닮은 것일까?' 바로 그 순간 비로소 단리사영은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그 사람이야...... 종리연이라고 했던가?' 문득 단리사영은 강하게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자존심이 상한 때문이었다. 여인임을 부정하며 평생을 검도에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한 사내의 영상이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와 있었다니....... 단리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나는 무사다. 만일 이것이 검도의 마지막 관문을 가로막는 장벽이라면?' 굳은 결의의 빛이 단리사영의 얼굴에 감돌았다. 단리사영은 무릎에 놓여 있는 검을 잡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퉁겨나오고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눈에 떨어졌다. 슥! 그녀는 검을 거꾸로 잡고 자신의 아랫배를 겨누었다. '아이야....... 너는 애당초 나의 뱃속에 생기지 않았어야 했어!' 검 끝이 서서히 그녀의 아랫배로 내려갔다. 마침내 검 끝은 옷에 닿았다. 이제 순간적인 힘만 주어도 검은 아랫배를 파고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그녀를 그토록 고민하게 했던 것이 한 순간에 소멸될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막 그녀의 손목에 힘이 주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어리석어요!" 느닷없이 한가닥 청아한 소녀의 음성이 뒤에서 울려온 것이 아닌가? "윽!" 느닷없이 울린 음성 때문에 잔뜩 끌어올렸던 진기가 거꾸로 역류했다. 그 때문에 목구멍으로 한 덩이의 울혈이 치밀어 올라왔다. 울컥! 단리사영은 한 모금의 울혈을 토해내며 비틀거렸다. 하늘이 빙빙 돌고 있었다. "주......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단리사영은 필사적으로 멀어지려는 의식의 끈을 잡으려 애썼다.그러나 그녀는 그 끈을 기어이 놓치고야 말았다. 어촌(漁村)의 하루는 미명이 트기 전부터 시작된다. 밤새 널어놓은 그물을 다시 걷어 배에 싣는 동안에 해가 뜨면 안 되는 까닭이다. 진정한 어부라면 해 뜨기 이전에 이미 강상에 그물을 뿌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전에 그물을 걷어 배에 실어야 하고 조타를 살펴야 하고 배의 장치에 이상이 없나를 점검하여야 한다. 포랑진(包浪鎭) 마을의 전홍(鈿紅)도 예외는 아니었다. 늦장가를 들어 나이 서른 다섯에 임신 팔 개월의 아내를 둔 그는 신혼 재미가 남달랐다. 원채 성실하기로 이름난 그에게 시집을 온 것은 15세의 진여랑(眞如良)이라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일찍이 중원을 휩쓸었던 괴이한 질병으로 부모형제를 여의고 거리를 떠돌던 소녀였다. 그녀가 포랑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불과 3년 전이었다. 당시 그녀의 모습은 비루먹은 강아지나 진배 없었다. 산발한 머리에는 이가 득시글거렸고, 신발은 신어 본 적도 없는 듯이 온 발이 상처 투성이었다. 그뿐인가? 걸치고 있던 옷이라는 것은 넝마보다도 더한 것이었다. 그것은 몸을 가리기보다는 드러나는 곳이 더욱 많았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시체를 싸서 내버리는 거적대기를 걸치고 있었겠는가. 처음 그녀를 발견한 것은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들개들이었다. 어스름 저녁.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돌아오던 전홍은 마을 입구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대여섯 마리의 들개들이 거적대기를 덮어쓰고 있는 어떤 물체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쉬잇! 이놈의 개새끼들아! 저리 꺼져라!" 작대기를 들어 들개들을 쫓은 다음 전홍은 거적대기를 살며시 들춰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꺼져가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나이 어린 소녀였기 때문이었다. "얘야! 정신차려라." 지독한 냄새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소녀를 흔들었다. 그러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던 소녀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큰일이다 싶었던 전홍은 거지 소녀를 들쳐업고 집으로 냅다 뛰었다. 그날 이후로 거지 소녀를 살리기 위한 전홍의 눈물겨운 간호가 시작되었다. 하늘도 감동을 했는지 의원을 모신다 침을 놓는다 하며 온갖 법석을 다 떨어도 깨어날 줄을 모르던 소녀가 겨우 눈을 뜬 것은 달포 만이었다. 그리고 문 밖 출입을 하게 된 것은 다시 반 년이 경과한 후였다. 그 동안 전홍이 들였던 수고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홍은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전홍은 거지소녀를 보살폈다. 그로부터 또다시 한 해가 지나갔다. 소녀는 가히 밉상은 아니었다. 오랫동안의 굶주림과 병고로 파리하게 깡마르긴 했으나 수수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의 파리한 얼굴이 가여워 전홍은 온갖 영양식을 장만해 소녀에게 먹였다. 하지만 워낙 고생을 해서 그런지 소녀의 얼굴에는 좀체로 살이 오르질 않았다. 전홍은 또 그런 소녀의 모습이 가여웠다. 그렇게 2년여가 지난 어느날 밤이었다. 잠든 전홍의 귀에 소녀의 음성이 들렸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는 목소리였다. "저...... 주무세요?" 처음에 전홍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소녀가 잠시 후 다시 한 번 그를 불렀을 때 선잠에 빠졌던 전홍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이번에는 소녀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들었던 것이다. "네...... 네가 날 부른 것이냐? 난 이제껏 네가 벙어린 줄 알고 있었는데?" 소녀는 잠시 얼굴을 숙이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나 내일 해가 밝거든 하면 안 되겠느냐? 오늘은 왠지 피곤하구나. 너도 잠을 자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그만 자자꾸나." 이렇게 말하고 전홍은 다시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올 리가 만무했다. 지금껏 벙어린 줄로만 알았던 소녀가 말을 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사실 소녀를 보살펴 온 지난 2년 동안 궁금한 것이 많기도 했다. 그러나 전홍은 한 번도 소녀에게 물어보지 않았었다. 오히려 소녀가 집에 있으므로 해서 신이 나는 것은 자신이었다. 천애고아로 자라나 서른이 넘도록 혼자 생활해 온 그에게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소녀로 인해 자신의 집이 이전보다 훨씬 따뜻하고 아늑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지난날에는 초라하고 남루하게만 느껴지던 호롱불도 이제는 고관대작의 공명등(孔明燈)이나 진배 없었다. 아니 황궁에서나 쓴다는 야명주(夜明珠)보다도 더 밝은 것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홍은 소녀를 한 번도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오래 전에 잃었던 동생을 찾았다는 기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밤이었다. 한 번 깬 잠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는 사이 문득 누군가 그의 품으로 기어들었다. 놀랍게도 소녀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녀가 어느새 알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전홍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호롱불을 밝혔다. 불빛 속에서 소녀가 두 팔로 상체를 가리며 흐느끼는 것이었다. "지...... 지금까지 소녀를 보살펴 주신 은혜를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소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몸뚱아리밖에 없습니다. 죽어 백골이 될 지라도 지금까지의 은혜는 갚을 길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흐흑......!" 소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신세라니......? 무슨 가당찮은 말이냐? 어서 옷을 입어라. 난 지금까지 네게 베푼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너에게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그러나 소녀는 막무가내였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를 잃고 천하를 떠돌기 시작한 이후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인식을 깨우쳤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몸으로라도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면서 오히려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전홍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소녀를 달래어 잠이 들게 한 다음 전홍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소녀를 구한 것이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소녀의 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만일 소녀의 청을 거절했다가는 어쩌면 소녀를 영원히 잃을 수도 있을 것같았다. '이 아이를 잃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제 그는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어진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생각다 못한 전홍은 해노인을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해노인은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 가득히 띄우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혼인을 하지 그러나?" "호...... 혼인이라니오?" 놀란 전홍이 물었다.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는 듯이 해노인은 서슴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 말대로 하게나.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네. 마침 자네도 홀몸이 아닌가? 자네 말대로 그저 친동생같이 데리고 산다고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럼 그 아이는 더욱 빚진 기분이 들 테고...... 사람들의 이목도 그리 좋치는 않을 걸세. 자네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말이지......." "......!" 맞는 말이긴 했다. 전홍은 묵묵히 앉아서 생각을 곰씹었다. 그때 쐐기라도 박듯이 해노인이 일어서면서 덧붙였다. "말이 나온 김에 일 치뤄야겠네. 오늘이 그믐이니 새달 보름에 혼인을 올리기로 하지. 내가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되어 줌세." 이런 사유로 인해 전홍이 마을 사람들 앞에서 15세 소녀 진여랑을 신부로 맞아들인 것이 어언 십 개월 전의 일이었다. 비록 20년이라는 나이차가 있었지만 둘의 금술은 참으로 좋았다. 전홍은 진여랑을 불면 꺼질 듯이, 놓으면 날아갈 듯이 아꼈다. 진여랑 또한 전홍을 생명의 은인답게 존경하며 사랑했다. 하지만 임신 팔 개월째로 접어든 지금 전홍은 딱 한 가지 고민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그것은 바로 진여랑의 몸이 허약한 관계로 유산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하혈을 하곤 했다.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일을 마치기 무섭게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간 전홍은 뜻밖의 광경을 보고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진여랑이 하혈을 한 채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그가 없는 사이에 기어이 유산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 여보! 이게 도대체 어...... 어떻게......?" 전홍은 말을 잇지 못했다. 덥썩 진여랑을 안아 올렸으나 그녀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굳은 지 오래였다. 그녀는 혀를 깨물어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던 것이었다. 임신을 했을 때 전홍이 얼마나 기뻐하였던가! 그는 이제나 저제나 그녀가 아이를 낳기 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산을 했던 것이다. 진여랑은 그만 더이상 남편을 볼 면목이 없어 혀를 물어 자진(自盡)하고 만 것이었다. 실로 비운의 소녀가 아닐 수 없었다. "으아아아악......." 진여랑의 시신을 안은 전홍의 입에서 처절한 절규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날따라 더욱 고요히 파도치는 강물 소리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밤이 새도록 전홍은 어린 아내의 시신을 안고 놓을 줄 몰랐다. 그의 절규는 잦아들었으나 도리어 슬픔은 더욱더 진해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홍의 텅 빈 동공에 문득 무서운 증오의 광기(狂氣)가 일어났다. "그래......! 그놈 때문이다. 여랑을 폭행하고 온갖 악독한 짓을 저질렀다는 그놈......! 소림사를 등에 엎고 보살 행세를 하고 있다는 그놈..... 내 필히 그놈의 살을 갈아 먹으리라." 어렵게 혼례를 치루었던 초야(初夜). 여랑은 전홍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며 피눈물로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어린 시절 겪었던 인간 이하의 놀라웠던 수모(受侮)의 사연을! 놀랍게도 그녀는 부처의 탈을 쓴 악마(惡魔)에게 채 여인의 모습을 갖추기도 전에 능욕을 당했던 것이었다. 결국 참지 못해 악마에게서 달아나다가 허기와 병마에 쓰러졌던 것이었다. 당시 전홍은 여랑의 고백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평생 선량하게 어부로만 살아왔던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는 본성이 순후한 위인이었다. 이제는 아내가 된 여랑을 부둥켜 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어린 아내는 채 피지도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하고 만 것이었다. 마침내 전홍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기다려라 무량애(無量愛)! 네놈의 뼈를 갈아 마시기 위해 내가 가겠다." 밤새 충혈된 전홍의 눈에서는 주먹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포랑진의 여느 어부와 마찬가지로 포천강(鋪泉降)은 출어(出漁) 준비를 끝내고 새벽 어스름이 가실 무렵 닻을 올리려다 문득 이상한 광경을 목도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강상(江上). 자욱하게 깔리는 강안개 사이로 수 척의 배가 기척도 없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전체가 검은 흑선(黑船)이었다. 뱃전에는 표식이 있었다. 그 표식을 본 포천강은 안색이 변했다. 동시에 오늘은 출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포천강은 직감했다. 이런날 배를 띄웠다간 고기를 잡기는커녕 물고기 밥이 될 것이 분명했다. 배 위에는 흑의인들이 타고 있었다. 아니, 멀리서 보았기에 흑의인이었으나 그들은 실제로는 혈포(血袍)를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선두의 한 흑선의 선수(船首)에는 팔 척 장신의 비쩍 마른 청포인이 우뚝 서서 새벽 강바람에 옷자락을 날리고 있었다. "어...... 어르신!" 포천강은 떨리는 음성으로 해노인을 외쳐 불렀다. "무슨 일인가?" 선실 안에서 그물을 정리하고 있던 해노인이 상체를 들었다. "저, 저기 좀 보십시오." 포천강은 긴장된 얼굴로 강의 상류 쪽을 가리켰다. 흑선을 발견하는 순간 고기잡이 배들을 주도하는 해노인의 눈이 이상한 빛을 발했다. 해노인은 한 동안 흑선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늘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네." 그의 말에 반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기잡이를 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보전하는 대가로 하루를 공치는 것이 더욱 현명하기 때문이었다. "자! 어서들 내리자구. 오늘은 그냥 쉬는 것이 낫겠어." "아무렴! 그래야지. 아무리 우리들 목숨이 헐값이더라도 고깃밥이 될 수야 없잖겠는가?" "그러세!" 어부들은 도구를 챙겨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해노인은 그물도 두르지 않고 서둘러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자기 일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27 머나 먼 소림사(少林寺) 해노인은 모옥으로 돌아왔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모옥의 문 앞에서 음성을 낮추어 불렀다. "궁 소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목소리에는 긴장이 역력했다. 모옥 안으로부터 궁단향의 음성이 낮게 깔려 흘러 나왔다. "아직 출어하지 않으셨나요?" "일이 생겼습니다." 문이 열리며 궁단향이 나타났다. 그녀는 해노인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듯 미미하게 눈썹을 떨었다. "무슨 일인가요?" "조천백이 이백여 명의 지옥혈사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습니다." 궁단향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그가 직접 갈 줄은 몰랐군요. 물론 행선지는 소림이겠지요?" 해노인은 부르르 떨었다. "그, 그렇다면 큰 일이 아닙니까? 어서 무슨 대책을 간구해야지요. 소저께서 떠나시던가......." 그러나 궁단향은 고개를 저었다. "노인께선 떠나세요. 저는 여기 남겠어요." "어... 어찌하여? 소저께서는?" "아아, 저는 여기 남아야 해요. 그 이유는......." 궁단향은 잠시 말을 끊었다.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에요." "......?" 해노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군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노인은 마음이 불에 타는 듯 급했다. "하지만 어찌 소저를 이 호굴에 놓아두고 떠난단 말입니까?" "상관없어요. 저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할 방책이 있으니까요. 걱정말고 노인께서 어서 소림으로 가세요. 가능하면 소림회합을 중지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일 거예요." 해노인은 탄식했다. "아아! 노부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노부의 말을 들을 지나 모르겠군요." 궁단향의 눈빛이 신비하게 일렁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술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몇 개의 지낭(智囊)을 준비해 둔 것이 있어요. 그 중 하나를 가지고 가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궁단향은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 개의 작은 비단 주머니를 가지고 나왔다. "그분들이 믿지 않으면 이것을 열어 보게 하세요. 지금은 피하는 것만이 상책이에요. 부딪치는 것은 가장 하책이며, 자멸만이 그 결과로 드러날 거예요." 해노인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소이다. 궁 소저." 그는 정중히 읍하고는 돌아섰다. 바로 그때였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막 모옥으로 들어서고 있는 한 명의 육 척에 가까운 키를 지니고 있는 여인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순 압도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 강하다! 세상에 저렇게 강한 기도를 지닌 여인이 있다니?' 모옥으로 들어서고 있는 여인은 바로 단리사영이었다. 그녀는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가 걸어오자 해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비켜 주었다. 단리사영은 말없이 그를 지나쳐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소저. 저 여인은......?" 궁단향은 담담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궁단향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말하고 나서 손을 흔들었다. "그럼 해노인의 무운을 빌겠어요." 해노인은 다시 한 번 읍하고 나서 돌아섰다. 그는 마음이 타는 듯이 급했다. 지금부터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적어도 조천백보다는 빨리 소림사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모옥을 빠져나와서 열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어르신! 저도 가겠습니다."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화원 옆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해노인은 놀라 걸음을 멈추며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 무성하게 자란 꽃밭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은 뜻밖에도 전홍이었다. 그의 얼굴은 언제부터인가 굳어져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해노인은 조금 전까지의 표정을 일시에 바꾸며 물었으나 눈빛만은 대단히 날카로웠다. "죽을 죄를 지었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고의적으로 들으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르신께 상의를 드릴 일이 있어서 왔다가...... 그만 엿듣고 말았습니다." 전홍은 더듬거렸으나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결연한 빛이 어려 있었다. "어르신께서 손녀와...... 아니......." 전홍은 무슨 커다란 실수를 범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전홍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그때서야 해노인이 발견했다. "아니... 그 높으신 아가씨와 나누는 이야기를 그만 엿듣고 말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해노인의 눈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마치 무쇠라고 녹일 듯한 눈빛이었다. 노인은 전홍을 쏘아보며 반문했다. "그래서 자네가 날 따라가겠다는 말인가? 무슨 이유로?" 해노인의 음성은 이제까지의 사람 좋은 우두머리 어부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의 어조는 냉엄했다. 한 순간에 전혀 딴 사람이 된 듯 했다. "으흐흑......!" 문득 전홍은 닭똥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쿵, 하고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뜻밖의 일에 해노인의 안색이 다시 한 차례 변했다. 그는 지금 다급한 처지였다. 배를 타고 떠난 조천백보다 한 발 먼저 소림사에 도착해야만 했다. 그러니 전홍에게 잡혀 시간을 허비할 겨를이 없었다. 비록 전홍의 뜻하지 않은 행동이 의아스러웠으나 일의 경중(輕重)에는 순서가 있었다. 그는 잘라 말했다.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노부는 지금 시간이 없네. 내 다녀와서 자네 얘기를 듣겠네." 그러나 전홍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땅에 세게 부딪치며 울부짖는 것이었다. "어르신! 절 버리지 마십시오. 어르신께서 절 거두어 주시지 않는다면 이놈은...... 차라리 죽어 버리겠습니다!" "......!"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해노인은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한 시가 화급한 이때 엉뚱한 복병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도 기본적으로 선량한 인물이었다. 마침내 해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네. 그럼 일단 함께 가면서 얘기하세......." 감읍(感泣)하던 전홍이 고개를 들었을 때, 해노인은 벌써 십 장이나 앞서 걷고 있었다. 전홍은 벌떡 일어서더니 죽을 힘을 다해 해노인을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평범했던 한 어부 사나이의 운명이 새롭게 시작된 것이었다. 한편 방 안으로 돌아온 단리사영은 모옥에서 단 두 개밖에 없는 평범한 나무의자에 앉았다. 모옥은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철들어 검을 잡은 이후로 이토록 한가하게 보냈던 적이 있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녀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편안한 마음으로 모옥 안을 둘러보았다. 모옥 안은 결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초라해 보이지도 않았다. 곳곳에 놓이거나 걸린 물건들이 꼭 제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균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또한 참으로 정결했다. 모옥 안을 장식하고 있는 물건들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무언의 대화를 시도하는 듯했다. "......." 그녀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음으로 이야기 했다. 이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휴식이요 평안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입을 열지 않고도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저쪽 방에서 궁단향이 다기(茶器)를 받쳐들고 건너오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단리사영의 눈에는 그러나 아무런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궁단향이 아주 특이한 소녀라고 느끼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그녀가 스스로 아이를 제거하기 위해 검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만일 그때 궁단향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묘한 법이다. 어떤 일이던 간에 완전한 정도(正道)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인생이며 사람은 보이지 않는 미로(迷路)를 헤매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단리사영은 어느 쪽이 옳았던 것인가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드세요. 차가 식겠어요." 궁단향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차를 권했다. 단리사영은 그녀가 권하는 차를 바라보았다. 무슨 차인지는 몰라도 향기가 은은했다. "......." 단리사영은 약간 망설이다가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평생 차라고는 마신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차를 마신다는 것은 사치스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모금 마시니 입 안이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차란 이런 것인가......?' 다시 한 모금을 마시려 할 때였다. "전 당신을 알아요." 돌연 궁단향이 입을 열었다. 순간 단리사영의 손이 떨리면서 찻물이 약간 흘렀다. '나를 안다고?' 단리사영의 눈이 치켜지며 궁단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눈빛이었다. "......."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순간 마음과 마음이 진동자처럼 떨었다. 잠시 후 궁단향의 종잇장같이 얇은 입술이 또다시 움직였다. "그뿐만이 아녜요. 당신이 걸으려는 길과 지금 당신이 처한 입장까지도요." 그때서야 단리사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울러 가장 중요한 사실도 있죠. 어제 새벽 당신이 하려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에 대하여......." 이번에는 단리사영이 입을 열었다. "낭자는 누구지?" 거암처럼 굳게 닫혀 있던 단리사영의 입술이 결국 떨어진 것이다. 단리사영이 입을 여는 순간 궁단향의 입술에는 살포시 미소가 어렸다. "저를 알고 싶으신가요?" "......." "저도 결국은 당신과 같은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러니 저를 알고 싶으면 동경(銅鏡)에 비친 당신 자신의 모습을 보면 되는 거예요." "......?" 궁단향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고 있었다. "제 이름은 궁단향이라고 해요. 그리고 당신의 이름은 단리사영, 그러나 알고 보면 한 사람이죠." "......." 이해될 것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말. 단리사영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궁단향의 존재가 더욱더 신비스럽게 느껴지기만 했다. 이때 궁단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찻잔을 들고 방 안을 서서히 거닐었다. "전 당신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보고도 싶었고요. 할 말이 많기도 했죠....... 그러나 지금의 제 심정이 어떠한 지 아세요? 오직 실망뿐이에요." 왠지 단리사영은 가슴이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문득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낭자는 나를 몰라!" 그러나 그녀의 말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궁단향은 깊은 눈으로 단리사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벌써 잊으셨군요. 당신과 저는 하나예요. 그래서 당신을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죠." "......." "물론 당신과 제가 틀린 점도 조금 있어요. 가령 나는 아직 처녀라는 것과 또 아직 임신 경험이 없다는 것이라던가......." 순간 단리사영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벌떡 의자에서 일어섰다. 같은 순간 등을 돌리고 있던 궁단향이 빙글 돌아섰다. 그 바람에 두 여인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 단리사영은 왠지 자신이 없어졌다. 그녀는 먼저 눈길을 피해버렸다. 아직 한 번도 타인의 눈길을 접했을 때 자신이 먼저 피한 적이 없는 그녀였다. 문득 단리사영은 씁쓸하게 말했다. "잔인하군. 낭자는......." 그러자 궁단향은 채찍질하는 듯한 눈길을 거두며 부드럽게 다가와 단리사영의 손을 잡았다. 궁단향의 손은 무척이나 작고 따스했다. 그녀는 손을 잡고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전 당신을 질책하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니예요. 다만 당신같은 사람이 흔들리는 것이 보기 싫어 그랬을 뿐이에요." 단리사영은 문득 울고 싶은 기분을 받았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왠지 궁단향이, 나이가 자신보다도 더 어린 궁단향이 문득 어머니와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궁단향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용기를 내세요. 당신은 강한 사람이에요." 단리사영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한 따스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관념들이 한꺼번에 봄눈 녹듯이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간직해왔던 오만함이라던가 검도에의 집착, 세상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같은 것들이 지금 이 순간 궁단향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조금씩 용해되어 가고 있었다. 그 부분들이 단리사영을 지탱하고 있기도 했으며 또는 그릇되게 오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궁단향은 속삭이듯 부드럽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람들은 때때로 심한 착각에 빠지죠. 특히 무작정 강해지려고만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말이에요. 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또 진리란 무엇일까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천상에? 아니면 죽은 다음에?" "......." 단리사영은 그저 듣는 것밖에는 자신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검을 쓰는 일이라면 자신이 궁단향보다 천 배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면에서 궁단향이 자신보다 어른이었다. "꿈을 꿀 때처럼 행복한 것은 없지만 또 꿈처럼 깨고 났을 때 허망한 것이 없죠. 사람이 만일 꿈만 그리며 산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단리사영은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어떡하란 것인지......?" "풋. 어리석은 질문이에요." 궁단향의 대답은 간단했다. "......?" "당신은 잘 알고 있어요. 당신 스스로가 내리는 결정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또한 그것을 믿고 있기도 하죠. 그러니 그런 질문을 나에게 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죠." 단리사영의 안색에 변화가 일어났다. '내가 내린 결정이 가장 현명한 것이라고......? 내가......?' 단리사영은 그말이 심한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나 어쩐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궁단향은 이제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단리 언니. 나는 믿어요. 당신은 곧 깨어나게 될 거예요. 지금까지 언니를 괴롭히던 모든 굴레를 스스로 벗어던지게 될 것이라고요. 그리고 만일...... 마음이 정해진다면 소림(少林)으로 가세요." '소림!' 단리사영의 눈 속에서 빛이 일어났다. 그 빛은 이제까지 그녀의 내부에서 보이지 않았던 그런 새로운 불꽃이었다. - 다음 권에 계속 - 조화공자 제3권 검궁인 저 28 연정무한(戀情無限) 하남(河南)을 지나는 여행객들의 한결같은 공통된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숭산(嵩山)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이다. 바로 그곳에 소림(少林)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소림사란 어떤 절(寺)인가? 소림사는 아주 오랜 옛날에는 외방(外方)이라고 불리던 숭산(嵩山)에 자리잡고 있었다. 숭산은 원래 오악(五岳) 중 하나로 중악(中岳)이라고 불리웠다. 숭산에는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세 봉우리의 이름은 각각 준극(埈極), 태실(太室), 소실(小室)이라고 불리운다. 소림사는 그중 소실봉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웅장하고 거대한 고찰(古刹)이다. 원래 소림사는 임제종의 대가람이었다. 그러나 중원에 선종(禪宗)을 전파한 달마대사가 면벽수련을 한 후에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그로 인해 소림사가 있는 숭산은 여행객들에게 존경과 흠모의 장소가 되었다. 성지를 찾아 떠도는 순례객뿐만이 아니라 천하를 주유하는 여행객들도 소림사를 참배하는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여행객들의 당연한 습관은 바뀌었다. 그들은 숭산쪽을 향하되, 예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침을 뱉고 눈을 흘겼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숭산 소림사가 불의(不義)를 보고도 눈을 감고 모른 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웅장한 소림사의 산문(山門)에 붙여져 있던 봉인(封印)은 언제부터인가 떼어져 있었다. 그것은 소림이 수년 만에 스스로 봉문(封門)을 해제한 것을 뜻했다. 그렇다. 소림은 삼패천이 중원에 나타난 직후 스스로를 봉문했다. 그리하여 삼패천이 무림을 횡행하면서 엄청난 악행을 저지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림의 승려들은 봉문이라는 미명하에 산문 안에 웅크리고 앉아 밤낮없이 불경만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봉인이 떼어진 것이다. 그것은 불과 한 달여 전의 일이었다. 그 즉시로 소림사로 찾아드는 무림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첩지(帖紙)를 받은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인물들이었다. 소림사를 찾아드는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어려 있었다. 삼패의 세력이 도를 넘어서는 것을 더는 방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원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고 할 수 있는 소림사에서는 비밀리에 각 파에 첩지를 날렸다. 화산파(華山派)의 참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화산파 멸문 이후 구파일방(九派一幇)은 한결같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화산파의 다음 순서가 누가 될 지 어떻게 알겠는가? 더이상 봉문만 하고 앉아 있다가는 참화가 자파에 닥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달리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앉아서 당하느니 대책을 강구하는 편이 백 번 옳았다. 그로 인해 실로 오랜만에 숭산을 오르는 무림인들이 줄에 줄을 잇고 있었다. "......." 소림 방장실(方丈室)에는 무거운 공기가 깔리고 있었다. 선종 불문의 요지답게 별다른 장식이 없이 정갈한 실내에는 하나의 원탁을 두고 5인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한결같이 기도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초조함과 불안의 빛이 역력했다. 문득 불진을 어루만지고 있던 늙은 도인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무진(無盡)......! 그들은 아마 더이상 오지 않을 모양이오." 도인은 소림과 쌍벽을 이루는 무당파(武當派)의 장문인 태허진인(太虛眞人)이었다. 그 말에 팔순 가량의 홍색 가사를 입은 얼굴이 붉은 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당금 소림사의 장문방장인 무진대사(無盡大師)였다. "아미타불....... 좀더 기다려 봅시다. 무슨 사정 때문에 조금 늦어지는 일도 있으니......."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으나 무진대사도 내심으로는 불안했다. 이미 모이기로 한 시각에서 두 시진이나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반대 편에 앉아 있던 늙은 거지가 화를 벌컥 내었다. "빌어먹을! 사정은 무슨 사정! 이만큼 기다렸으면 됐지, 얼마나 더 기다리잔 말이오? 그들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오. 비열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자라목처럼 움츠리고 있으면 삼패가 잘 보아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렇게 쏘아대는 거지는 바로 개방의 방주인 걸왕(乞王) 오운천(吳雲天)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 성격이 불길같은 위인으로 바른 소리 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는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덧붙였다. "흥흥! 화산의 최후를 보고도 그런단 말이지? 쥐새끼같은 작자들...... 그러고 있느니 차라리 삼패를 찾아가 발을 씻어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텐데! 그렇다면 썩어나갈 목숨 하나 보전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일 테니......!" 그야말로 악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푸른 도복을 입은 인물, 즉 청성(靑城)의 장문인 천운자(天運子)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들을 탓할 수 만은 없소. 자파의 안위를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니......." 그러나 걸왕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떴다. "흥! 자파의 안위? 아니 이 자리에서 자파를 중시하지 않는 사람이 있단 말이오? 내 문파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중원무림의 정의와 질서가 개판이 되어도 좋단 말이지? 그게...... 그런 생각에 빠진 작자들이 무림의 지도자들이라니! 참으로 가당찮은 일이오! 하늘이 노해도 이만저만 노할 일이 아니오." 맞은편의 곤륜파(崑崙派) 장문인 곤륜우사(崑崙羽士)는 그저 눈을 지그시 감을 뿐이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미(峨嵋)만은 올 줄 알았는데...... 아미타불......." 소림 장문인 무진대사의 기분은 씁쓸하기만 했다. 같은 불도로써 아미파(峨嵋派)만은 꼭 와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섯 시진이 지나도록 열려 있는 소림문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왠 파리가 이렇게 극성을 부릴까? 정말이지 되게 성가시게 구는군......!" 아까부터 종리연은 왱왱거리며 허공을 나는 파리떼를 쫓느라 걸레가 다 된 섭선을 힘들게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란 놈들은 섭선을 흔들 때뿐이었다. 물론 이제 완연한 여름이라 파리가 없을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이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종리연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온통 파리의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리떼들이 설치고 있었던 것이다. "......?" 고개로 이어진 숲길을 걸으며 종리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공기좋고 맑기만 한 숲속에 이토록이나 많은 파리떼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다니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숭산으로 가는 길은 이제부터 그렇게 힘든 길이 아니었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바로 관도가 나올 것이고 관도를 따라 한 나절만 걸으면 되는 것이다. 얼마나 갔을까? 문득 그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잔뜩 콧등을 찡그렸다. 뿐만 아니라 파리떼는 더욱 극성스럽게 날고 있었다. '웬 냄새일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종리연은 비탈진 숲속으로 방향을 옮겼다. 아닌 게 아니라 냄새가 나는 곳과 파리떼가 날아가는 방향은 같았다. 얼마나 갔을까? "헉! 저게 뭐지?" 종리연은 부르르 떨었다. 한 그루의 나뭇가지에 무엇인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물체에 까맣게 파리떼가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냄새의 진원지도 바로 그곳이었다. 그는 코를 막고 파리떼를 쫓았다. 수만 마리의 파리가 날아가자 종리연은 물체를 똑똑히 파악할 수가 있었다. "으윽...... 이...... 이럴 수가!" 종리연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시신!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물체는 바로 사람의 시신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여인의 시신으로 발가벗기운 채 죽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여인이 머리를 깎은 여승이라는 점과, 유린당한 채 복부가 날카로운 칼에 갈라져 있다는 것이었다. 갈라진 상처는 이미 썩어들어가기 시작했으며 구더기들이 우글거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실로 인간으로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종리연이 주위로 눈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 숲의 여기저기에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몸을 도사리며 좀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결국 발견하고야 말았다. 한두 명도 아닌 수십 명의 여승들의 시신(屍身)을! 정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여승들은 하나같이 유린당한 채 참혹한 형태로 죽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비참한 시신은 가장 안쪽에 있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승이었는데, 여승의 사지(四肢)가 없는 것이었다. 얼굴은 잔주름이 어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꽤 나이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사지만 잘린 것이 아니라 유방마저도 도려 내어져 있었다. "......!" 종리연은 구역질을 느꼈다. 자세히 보니 눈도 파헤쳐지고 혀마저 잘려 있었다. "으으...... 대체 어떤 자들이 이런 짓을......?" 종리연은 분노를 느꼈다. 그는 좀체로 분노할 줄 모르는 성품이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문득 여승의 피부가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종리연의 눈에 들어왔다. '사...... 살아 있단 말인가?' 그는 놀라 여승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이때였다. "아아......! 소용없는 일이오. 그녀는 이미 죽은 몸이오. 경련을 일으키는 건 햇살에 근육이 수축하는 현상일 뿐이오." "......?" 종리연이 놀라며 돌아서자 뒤쪽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부 차림의 노인이 있었다. 노인 옆에는 젊은 청년도 한 명 서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해노인과 전홍이었다. 해노인은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떨리는 손으로 여승의 시신을 끌어 안았다. "오오......! 숙원(叔願)......! 우리가 헤어진 지 어언 사십 년이건만...... 이런 꼴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럴 줄 알았다면 그때......." 해노인은 피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종리연은 노인이 죽은 여승과 과거에 연인(戀人) 사이였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의아함은 여전했다. '이 노인은 누구이며, 여승은 또 누구일까? 또 아무런 말 없이 노인 뒤에 서 있는 청년은......?' 해노인은 눈물을 머금고 땅을 파고 있었다. 종리연도 가만 있을 수 없어 그를 도와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가 파지자 해노인은 여승의 시신을 소중하게 묻었다. 해노인은 여승의 무덤 앞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느새 저녁 해가 시뻘건 노을을 서산 하늘에 깔고 있었다. "......?" 종리연은 노인을 돌아보고 또 젊은이를 돌아 보았다. 젊은이는 종리연과 눈길이 마주치자 잠시 쏘아보는 듯하더니 힐끗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종리연은 젊은이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파악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구나. 아무래도 그 원한을 풀지 않는 한 말을 잃고 지내리라.......' 종리연은 한참을 기다렸으나 노인은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저어...... 노인장. 외람된 말씀이긴 합니다만...... 누가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해노인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 하늘 아래 또 누가 있어 이런 짓을 하겠나? 삼패를 제외하고는 말일세!" "삼패......!" 노인의 입에서 삼패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종리연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 쥐었다. 그때서야 노인이 종리연의 실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종리연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 인물만이 인물을 알아보는 법이다. 찰나지간에 짧은 눈빛을 교환했지만 이미 두 사람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삼패를 물리치는 것. 불현듯 노인은 종리연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젊은이. 노부의 부탁 하나를 들어 주겠나?" "......?" "아아......! 죽은 여인은 바로 아미파의 장문인인 운암신니(雲岩神尼)일세. 나와는......." 해노인은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지난 시절의 광경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옛날 연인이었지." "......." 종리연은 그의 노안(老眼)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았다. "허허......! 노부는 공동파( 派) 출신의 은퇴한 늙은이라네. 이번에 소림으로 급히 소식을 전하러 오다가 이처럼 과거의 연인을 만나게 되었다네. 그러나 내가 이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린 후였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나는 결심했네. 어차피 소림으로 간다고 해도 이미 살 희망을 잃어버린 몸! 그러니 나 대신 자네가 이것을 소림사에 전해 주었으면 싶네." 종리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노인장께서는 어디로 가시려고요?" "그들을 찾아 가겠네." 종리연은 깜짝 놀랐다. "아니......? 노인장께서 혼자 삼패를 찾아 나서겠다는 말씀입니까?" 일순 해노인의 얼굴에 초연한 빛이 떠올랐다. "허허허헛......! 이 나이에 무엇이 두렵겠나? 늙은이라고 정열이 죽은 것은 아니라네. 과거의 우유부단했음을 지금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네. 그때 둘이서 과감하게 무림을 떠날 것을...... 헛된 명예욕과 자존심 때문에...... 헛헛....... 이제는 깨달았네. 내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가를......." "......?" 종리연은 노인의 다음 말을 기대했다. 그러나 노인은 종리연의 기대를 무시했다. "자, 이것을 부디 소림에 전해주게." 해노인은 품속에서 하나의 비단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전했다. "노인장......." "껄껄......!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나? 나는 차라리 놈들을 하나라도 죽이고 연인을 따라 가겠네......." 말을 끝마친 해노인은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무엇이 걸렸던지 노인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종리연에게 또 한 가지의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허허허......! 사람의 인연(因緣)이란 참으로 묘한 것인가 보군. 내가 젊은이를 만나지 않았던들...... 어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겠나? 다름이 아니라......." 해노인은 이번에 안타까운 눈빛으로 전홍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진랑포 마을의 촌장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젊은이...... 또 하나의 부탁이란 딴 것이 아닐세. 바로 이 청년을 소림사 아래 사는 무량애(無量愛)라는 땡초에게 데려다 달라는 것일세. 녀석에게 너무나 원한이 많은 청년이라 말을 잃어버렸다네. 칼을 쓰면 칼로 망하는 법이지만 어쩌겠나. 마음에 맺힌 원한을 풀지 않고는 죽어 원귀가 될 팔자인 것을....... 젊은이, 꼭 부탁하네!" 말을 마친 해노인이 다시 돌아섰다. 그런 해노인의 입에서 탄식과 같은 웅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인간사(人間事) 인연이란 참으로 허무한 것이거늘...... 사랑이나 증오(憎惡)...... 이 모든 것이..... 어찌하여 이 나이 되도록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단 말인가......?" 웅웅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휙! 하고 해노인은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 종리연은 그를 만류하려 했으나 이미 한 발 늦은 후였다. 해노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날아간 것이었다. 그는 운암신니를 죽인 삼패천의 지옥혈사대를 향해 쫓아간 것이었다. "......." 종리연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가슴은 무엇인가에 의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정의(正義). 분노(忿怒). 그런 단어들이 뒤섞여 그의 가슴을 박동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종리연은 소리치고 있었다. "삼패! 너희들에겐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 순간 종리연은 그 자리에 없었다. 자신이 할 일을 깨달은 그는 즉시 신형을 날린 것이었다. '소림으로......!' 그것만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종리연은 곧 되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창응하산법(蒼鷹下山法)으로 찰나에 10장을 날았던 그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던 것이다. '아차차차......! 그 청년!' 종리연은 곧 되돌아 왔다. 그리고 보았다. 너무나도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놀라고 있는 청년의 일그러진 얼굴을. "뭘 그리 놀라고 그러쇼? 어서 갑시다. 갈 길이 머니." 종리연은 그때까지 놀란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전홍의 어깨를 툭 치며 재촉했다. 29 소림풍운(少林風雲) 종리연이 소림에 당도한 것은 그로부터 하루 반 나절 만이었다. 그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소림사 산문 앞에 당도했다. 시간이 지체된 것은 전홍이라는 젊은이와 발걸음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종리연은 전홍을 자비장원(慈悲莊園)까지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산문 안으로 들어가려던 종리연은 승인들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아미타불......! 멈추시오." 6인의 승려들이 그를 가로 막았던 것이다. 종리연은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귀사의 주지 스님을 뵈오러 왔소이다. 급한 일이오." 그러나 쇠귀에 경읽기였다. 그들은 눈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의 승려라는 권위의식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먼저 시주의 관등성명부터 밝혀야 예의가 아니오? 폐사의 장문인께서는 지금 바쁘신지라 웬만해서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소." "......." 종리연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지금 한가롭게 그런 예를 논할 때가 아니었다. 삼패가 소림을 치러 온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데 승려들은 한가로이 거드름이나 피우고 있는 것이다. "급하오! 어서 전갈을 전해 주시오!" 그때였다. "아니? 저자는......?" 6인의 승려 중 삼십 대의 승려 한 명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문득 비웃음에 찬 음성으로 이죽거리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 사형들! 소승은 저자를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담간랑이란 별호로 불리우던 자입니다. 그런데 얼마동안 보이지 않다가 나타났군요. 후후...... 아마 또다시 무공을 배우려고 찾아온 모양이지요?" "......!" 종리연은 그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에 흠칫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담간랑이라고 불리우던 시절 꽤나 얼굴이 팔렸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종리연에게는 이미 아득한 과거의 일이었다.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소생은 확실히 그런 이름으로 불리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방문한 목적은......." 그러나 종리연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승려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하하하핫......!" "킥킥킥......!" "......!" 종리연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뚫고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더욱더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였다. 사십 대의 중년 승려가 돌연 눈을 부릅뜨더니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썩 물러가라!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찾아온 것이냐? 지금 한창 무림의 대사를 논의하고 있는데 너같은 강호의 쓰레기를 맞이할 소림이 아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 종리연은 울컥 치받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자신이 과거 손가락질 받던 담간랑이라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다. 누가 뭐라든 이젠 중원무림의 안녕(安寧)이 그의 손에 달려 있는 판국이 아닌가? 그의 얼굴이 희어졌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심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또다시 한 승려가 호통쳤다. "어서 물러가지 않으면 네놈의 다리를 분질러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게 하겠다!" "뭐...... 뭐라고?"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종리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승려들을 상대로 일일이 사정을 얘기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시간이 촉박하여 예의고 범절(凡節)이고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무력을 써서라도 뚫고 들어가는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었다. 바로 이때였다. 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한가닥 날씬한 교영(橋影) 하나가 산문 앞에 당도하는 것이 아닌가? 이어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옥음이 낭랑하도록 울렸다. "형부! 관두세요. 눈알이 삔 자들을 상대해서 무엇하겠어요?" "......?" 형부라는 말에 종리연은 의아하여 몸을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니...... 그대는......?" 일순 종리연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한 눈에 반하도록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종리연이 너무나도 잘 아는 여인이었다. 백치여인! 바로 무창(武昌)에서 만났던 방여경이었다. 바로 하오방주 방의경의 친동생인 여인. 방여경은 본래 하오문의 한 젊은 기재를 사랑했다. 그런데 그만 언니인 방의경이 실수로 청년을 죽게 하고 만 것이다. 방의경은 방주가 된 이후 인간미보다는 철저한 조직력을 키우는 여인으로 변했던 것이다. 당시 방의경은 젊은 기재였던 청년을 훈련 시킨다는 명분으로 심하게 내몰았다. 그러나 무사 기질보다는 문인 기질이 강했던 청년은 비인간적인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자살을 하고 만 것이었다. 방여경은 그 일로 언니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내내 언니의 냉혹한 성격을 싫어하여 스스로 백치가 된 듯 연극하여 언니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종리연을 처음 만났을 때 그를 방의경에게 보낸 것은 방의경의 비정함이 종리연의 순박함으로 인해 동화되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핏줄은 핏줄이었던 것이다. "여경 낭자......!" 종리연은 반색을 했지만 다소 어색했다. 그러나 방여경은 종리연의 소매를 잡고 보기 좋게 눈을 흘겼다. "낭자가 뭐예요? 처제라고 불러야죠!" "그...... 그런가?" 종리연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구 말구요. 형부!" 방여경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축하해요. 야생마처럼 사나운 언니를 그렇게 훌륭하게 길들이다니...... 저의 기대가 맞았어요." 어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리연은 이런 자리에서 방여경이 남의 이목도 아랑곳없이 쑥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생글생글 웃으며 종리연을 쳐다보던 방여경이 문득 한숨을 쉬었다. 곧이어 그녀는 종리연의 귀에만 들리게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웬지 기분이 이상해요. 원래는 당신을...... 아니 형부를 조금 좋아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니 빼앗긴 것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 순간 종리연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설마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종리연이 눈 둘 곳을 몰라하고 있을 때였다. 방여경은 오만한 눈으로 승려들을 바라보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승려들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들로 하여금 뭐가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없게 했던 것이다. 이때 승려들 앞에 다가간 방의경은 품속에서 하나의 깃발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는 조롱하듯이 말을 내뱉았다. "보세요, 잘난 승려님들. 저는 하오문(下午門)의 사자(使者) 자격으로 소림을 방문했어요. 당신들의 그 잘난 장문인을 볼 수 있나요? 없나요?" "......!" 방여경의 당돌한 말에 책임자인 듯한 중년 승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말했다. "아미타불...... 공식적인 방문이라면 일단 장문인께 보고드리겠소이다. 두 분께서는 잠시 기다리시오." "흥! 꽤나 절차가 까다롭군요? 그렇게 거드름을 피우는 소림이 어째서 그 동안 죽은 척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빈정거리는 말에 승려들의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 하였다. 그러나 차마 사자 자격으로 온 여인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지 씩씩댈 뿐이었다. 종리연은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벌써 반 식경이 지나고 있었으나 산문 안으로 들어간 승려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빨리 면담이 이루어져야 할 텐데.......' 이때 방여경이 다가오더니 그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어때요? 형부. 언니가 좋은가요?" "......?" 뜻밖의 질문이 아닐 수가 없었다. 종리연은 순간 멍청한 표정으로 방여경을 바라보았다. 불시에 그런 때 그런 말을 물어오는 방여경의 의중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대답 대신 종리연은 그저 싱겁게 웃기만 했다. "아아...... 물어보는 내가 바보죠. 그쵸?" 방여경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종리연에게 무척이나 애처롭게 보였다. 종리연은 안타까웠다. 그녀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 주고 싶었으나 마음뿐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 지 갑자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순간에 방여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언뜻 물기가 반짝였다. "형부. 난 바빠요." "뭐...... 뭐가 그렇게......?" 종리연이 우물거렸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형부에게 한 가지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예요." "무...... 무슨?" "지금 언니가 이 근처에 와 있어요." "저...... 정말이오?" "그럼요. 바로 가까이에 있어요." 언니가 가까이에 와 있다는 말을 하는 순간 얼굴빛이 살아나는 종리연을 보며 방여경은 내심 솟아오르는 질투심을 느꼈다.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방의경의 소식을 듣는 순간 종리연의 기분은 살아나고 있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방의경을 만나고 싶었다. 그녀라면 자신의 답답한 심중을 어느 정도 이해해 줄 것같다는 기대감이 불현듯 솟구쳤다. 그는 사실 자신의 무기력함과 무능함을 통탄하고 있던 찰나였다. 화급한 소식을 가지고도 소림사의 산문에 조금 전까지 붙들려 있었던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한없이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방의경이라면 그런 자신에게 어떻게 처신하라고 일러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여경의 말은 계속되었다. "언니는 하오문의 모든 힘을 동원하였어요. 그것은...... 사방에서 흩어져 소림으로 육박해오고 있는 삼패천의 지옥혈사대를 저지하기 위해서예요." 종리연은 눈을 크게 떴다. "지옥혈사대를......?"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지옥혈사대를 막는다고......? 그...... 그렇게 엄청난 일을 어떻게......?" 지옥혈사대의 무서운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종리연이 아닌가? 그들에게 하마터면 죽을 뻔한 적도 있는 종리연이었다. 하오문이 아무리 방대한 인원과 조직을 가지고 있다지만 지옥혈사대를 상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아니...... 어떻게 하려고......?" 종리연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걱정 말아요. 언니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으니까요. 언니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지옥혈사대를 추적했어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림으로 오기 직전 그들을 궤멸시킬 계획을 세웠어요." 방여경이 안심하라는 투로 말했으나 종리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옥혈사대의 무자비한 힘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들의 가공할 만한 파괴적인 위력을 앝잡아보기가 십상일 터였다. 그것이 종리연의 근심을 더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녀 혼자서 어떻게......?" 그러나 방여경은 거리낌없이 입을 열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확신한다는 듯이. "아마 얼마 후면 지옥혈사대는 거의 모두 전멸할 거예요. 하오문의 특수한 함정과 매복 등에 걸려서 말이에요. 무공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죠. 하오문은 그럴 만한 능력을 충분히 지닌 방파예요." "......?" 그래도 종리연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그 무서운 지옥혈사대를 섬멸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방여경은 속삭이듯 말했다. "언니가 지옥혈사대를 막으려고 나선 이유는 오직 하나예요. 그것은 바로 형부를 위해서죠. 언니는 전력을 기울여 형부를 도울 거예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형부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 종리연은 할 말이 없었다. 뼈속 깊숙이 방의경의 애정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 느낌에는 심한 불안감이 동반되고 있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으나 안으로 들어간 승려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는단 말인가?' 종리연은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문득 저 멀리 일단의 흑점들이 나는 듯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방여경의 안색이 급변했다. "지옥혈사대예요!" 종리연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럼 그녀가 저지하는 데 실패했단 말인가?' 이때 방여경이 급박하게 말했다. "지옥혈사대는 도합 팔로(八路)로 나뉘어 오고 있었는데 언니는 그중 한 개 로에만 자신이 없다고 했어요. 어떻게든 저들만 막으면 되요!" 이때 마침 산문 안으로부터 승려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도 소림을 향해 몰려오는 무리들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아니? 저자들은......?" "오오......! 나무아미타불!" 승려들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할 뿐이었다. 종리연은 그들을 향해 호통쳤다. "무엇하는 것이오? 어서 경종을 울리시오! 저들은 삼패의 지옥혈사대요!" 그 말에 승려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산문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종리연은 단단히 마음먹으며 양손을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혈월팔천도식을 거의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과거처럼 자신이 없지는 않았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지옥혈사대가 왔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무공에 자신이 있어도 상대는 인간성을 내버린 공포의 지옥혈사대였다. 휘휘휙......!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혈포를 입은 인물들이 산문 앞에 속속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줄 잡아 사오십 명 정도 되었다. 그들은 일지겁천 조황백이 장차 천하를 정복하기 위해 양성한 천군(天軍)으로 그들의 총 숫자는 삼천 명에 달했다. 게다가 한결같이 미약에 의해 신지가 상실된 자들로서, 남은 것은 오로지 흉성(兇性)과 잔혹성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살광(殺光)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 이때 종리연은 그들이 막바로 공격하지 않고 대열을 이룬 채 산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우우우우......!" 문득 산 아래 쪽으로부터 심혼을 뒤흔드는 듯한 장소(長嘯)가 울린 것이다. 그 장소를 들은 순간 지옥혈사대는 일제히 시립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휙! 바람을 가르며 눈깜짝 할 사이에 한 사람의 신형이 떨어졌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 나타난 사람은 팔 척의 메마른 장신의 사나이였다. 일신에는 청삼을 입었으며 손에는 한 자루의 섭선을 쥔 얼음같이 찬 인간. 바로 조천백이었다. 무영비마 조천백이 나타나자 장내는 갑자기 북극으로 화한 듯 음산해졌다. 우우우우웅......! 소림사의 산문 주위를 둘러 싸고 있던 공기가 삽시간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일순 종리연의 눈에서 광채가 폭사되었다. 종리연은 그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자다! 바로 나의 사형 남궁환인을 죽인 자......!' 그는 과거 천상제일루에서 남궁환인과 함께 조천백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너무나도 공포에 질려 있었으나 조천백의 얼굴만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편, 조천백은 으시시한 시선으로 산문을 노려보다가 종리연을 발견했다. 그는 잠시 의아한 빛을 띄더니 입을 열었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이제 보니 네놈은 바로 그때......." 종리연은 문득 원한이 되살아 나는 것을 느꼈다. 사형 남궁환인을 비명에 가게 한 자가 바로 조천백이 아니던가? 그는 이를 갈면서 앞으로 나갔다. "그렇소! 나는 종리연이오. 당신이 죽인 남궁환인은 바로 나의 사형이었소!" 조문백의 눈에 조소가 어렸다. "흐흐...... 그 개같은 녀석이 너의 사형이라고? 그렇다면 더욱 잘되었군! 너는 복수를 해야 겠지?" "물론이오!" 싸늘하게 내뱉긴 했지만 종리연은 자신의 안정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무인에게 있어 안정이 흔들린다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에 속한다. 적을 앞에 두고 안정이 흔들린다는 것은 이미 싸우지 않고도 패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방여경은 가슴이 바짝 오그라들고 있었다. '어...... 어쩌자고 형부가 저런 악마와......?' 종리연은 소매 속에서 손을 꺼냈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혈월도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조천백의 눈이 번쩍 빛났다. "으음...... 알고보니 너는 혈월객의 진전을 이었군?" 그는 더욱 으시시한 안광을 흘렸다. "그렇다면 더욱 잘 됐다. 너를 사로 잡으면 그 역도들의 행방을 알겠지. 자! 시작해 볼까?" 음산한 웃음을 만들며 조천백이 막 섭선을 흔드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우리의 승부는 아직 나지 않았어요." 문득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 종리연과 조천백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육 척에 가까운 키를 가진 흑의여인이 담담하게 걸어오고 있는 것을. 등에는 오 척 장검을 꽂은 채 걸어오고 있는 여인의 등 뒤에서 하나로 묶은 흑발이 바람에 춤추고 있었다. "사영! 당신이......?" 종리연은 깜짝 놀랐다. 나타난 여인은 바로 마검성녀 단리사영이었기 때문이었다. 단리사영이 종리연을 바라보았다. 언뜻 그녀의 차가운 눈 속에서는 알지 못할 부드러운 훈풍과 같은 것이 스쳐갔다. 단리사영은 종리연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취했다. "당신은 이곳을 맡아주세요." "......?" 종리연이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단리사영은 곧장 조천백을 향했다. "귀하는 우리의 승부가 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겠지요?" 조천백은 흠칫했다. "낭자는......?" 그러나 단리사영은 변함이 없었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당시에는 너무 경황중이라 당신과 겨룰 기회가 좋지 않았어요. 그러나 오늘은 시간이 충분하니 멋진 대결이 될 거예요." "......!" 조천백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단리사영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당시의 일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일로 일지겁천에게 수모를 당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고수는 자신의 적수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가 만일 진정한 고수라면 말이다. 조천백은 잠시 단리사영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하지만 여기는 비좁으니......." 휙! 어느새 그는 신형을 날렸다. 신형을 날리며 그는 명을 내렸다. "소림을 쓸어 버려라!" 그의 뒤를 단리사영의 날씬한 신형이 화살처럼 쫓고 있었다. "사영!" 종리연이 그녀를 불렀으나 쫓을 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 지옥혈사대의 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피! 피! 피! 오직 피뿐이었다. 혈전(血戰)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카아아아......!" "크크크크......! 모두 쓸어 버려라!" 차차차차차창......! 지옥혈사대의 공격은 무자비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오직 살(殺)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살아 있는 인간병기들이었다. 물밀듯이 산문으로 밀려드는 그들의 힘을 도저히 종리연 혼자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우우우......!" 종리연의 입에서는 분노의 장소(長嘯)가 터져 나왔다. 이미 십여명의 소림 승려들이 지옥혈사대에 의해 사지가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흉성은 가히 필설로 형용하기가 불가능했다. 종리연은 태어난 이래 이같이 분노한 적이 없었다. 그는 폭포를 차고 오르는 수룡(水龍)처럼 신형을 날렸다. 번쩍! 촤아아아! 그의 양손에서는 혈월도가 날아갔다. 혈월도의 진수를 십성 가량 익힌 그는 지옥혈사대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의 흉폭함에는 치가 떨릴 뿐이었다. 두 개의 핏빛의 달이 허공을 날아갔다. 혈월팔천도식은 암기처럼 날릴 수도 있었으며, 또는 손에 쥐고 도법으로 전개할 수도 있었다. 종리연은 이미 수십 명을 죽였으나 산문으로 넘어 들어간 남은 자들을 일일이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저...... 저런! 다섯 놈이나 놓치다니!' 종리연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종리연 혼자의 몸으로 오십여 명이 넘는 지옥혈사대를 막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산문을 넘어 날아들어간 지옥혈사대를 돌아보았을 때 마침 소림사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뗑뗑뗑뗑뗑......! 급박하게 울리는 경종소리에 집결되어 있던 오개파의 고수들이 일제히 튀어 나왔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소림의 장경각(藏經閣), 달마원(達磨院), 지객당(知客堂) 등에 매복하고 있던 소림 승려들은 물론 무당(武當), 청성(靑城), 개방( 幇), 곤륜(崑崙) 등의 정예고수들이 속속 튀어나왔다. 이제껏 참고 참았던 삼패에 대한 분한(憤恨)으로 오파 고수들은 뼈를 묻을 각오를 한 것이었다. "아미타불......! 마(魔)의 사도들이여 물러가라!" "무량수불! 도(道)의 이름으로 멸하리라!" "차앗! 지옥으로 떨어져라! 흉마들!" 마침내 대혈전(大血戰)이 벌어졌다. 지옥혈사대는 소림의 산문을 넘어가는 즉시 오파 고수들과 부딪쳤다. 그러나....... 애초부터 적수가 아니었다. 지옥혈사대의 가공할 무공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것이었다. 그들의 가공할 위력에 오파 고수들은 처참하게 죽어가야만 했다. 더구나 지옥혈사대는 이미 오랫동안 구파일방의 무공을 격파하는 파공법(破攻法)을 익힌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진 구파일방의 고수들이라고 해도 지옥혈사대들에게는 한갓 먹이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크아악!" 시뻘건 피보라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대소림(大少林)! 천년 무림의 성지(聖地)인 소림사가 이토록 피로 물들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후일 무림의 사서(史書)는 이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리라! 치욕어린 무림혈겁(武林血劫)의 장이었노라고....... 30 자비장원(慈悲莊園)의 비밀(秘密) 한편, 천지간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은 숭산 동쪽의 태실봉(太室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두 사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과 세상에서 가장 비정한 사나이가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한 시진 가량이나 서로 대치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단리사영은 아직 검을 뽑지 않고 있었다. 또한 조천백도 섭선으로 얼굴 아래 부분을 가린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이제 어떤 쪽이던 간에 결단이 나야 하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서로의 사이에 놓여 있는 3장의 공간이 사라지는 순간이 곧 한 사람이 쓰러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아무도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단리사영은 해가 서산마루로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실상 그녀가 태양을 마주보고 있는 것은 극히 불리한 여건이었다. "......."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 속에는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원(圓)이 그려지고 있었다. 지금의 대치 상황이 문제가 아니었다. 포랑진에서 궁단향과의 만남이 있은 이후로 그녀는 달라졌다. 그녀는 오직 생의 목표를 검도에 바쳤으며, 자신이 추구하던 검도의 끝은 극강(極强)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임신이란 하나의 짐이었으며, 멍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녀는 강자(强者)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궁단향에게서 깨달은 것은 진정한 강(强)이란 유(柔)를 겸비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강한 것은 부러진다! 그것이 깨달음의 간단한 요체였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검도를 깨달을 수 있는가? 십여 년 간 가물거리기만 하고 잡히지 않는 검리(劍理)는 원(圓)에 있었다. 원(圓). 원이란 끝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하며, 또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세계가 바로 원인 것이다. 시작(始作)도 끝(終)도 없는 원의 세계. 그러나 지금까지 그녀가 구사한 검법은 하나의 무위지검(無威之劍)이었으나 그 선(線)은 언제나 직선이었다. 만일 원의 검리를 얻을 수 있다면 그녀가 추구하는 검의 세계는 달라질 것이다. 그 검의 길은 끝없이 윤전(輪轉)할 것이며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는 불멸(不滅)의 조화를 이룰 것이다. 문득, 태양이 서산 마루에 걸리며 눈부신 핏빛을 폭사해냈다. "......!" 단리사영은 부르르 떨었다. 환상처럼 상대방의 모습이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조천백은 섭선을 흔들며 움직이고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 그가 섭선을 움직임에 따라 단리사영은 그의 손이 하나에서 두개로...... 다시 두 개에서 네 개로...... 다시 수십 개로 늘어나는 것을 보았다. 섭선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단리사영은 현기증을 느꼈다. 빙글빙글 도는 섭선의 광영(光影)이 자신을 온통 뒤덮는 것같았다. 그러나 본능이란 무서운 것이다. 어느새 단리사영의 손은 장검을 뽑고 있었다. 번쩍! 반쯤 뽑힌 장검의 검날에 석양이 반사되어 조천백의 눈을 찔렀다. 조천백은 화살을 맞은 새인 양 떨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섭선이 활짝! 펼쳐졌다. 한순간 단리사영은 수없이 많은 꽃송이들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워......!' 그녀는 하마터면 스스로 손을 벌려 그 꽃송이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꽃송이들은 그녀의 손으로 들어오기 전 석양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꽃이 빛에 반사되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리사영은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원(圓)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원이 칼 끝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원은 원을 낳고...... 원을 낳은 원이 다시 원이 되고, 그 원이 또 다른 원을 잉태(孕胎)하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검의 방향은 우주(宇宙)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꽃송이들은 비바람을 맞은 매화꽃처럼 힘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한편, 조천백은 자신이 발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암기를 날렸다. 그가 지니고 있는 암기는 72종(種)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생애 한 번도 자신이 가진 모든 암기를 다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는 72종의 암기를 한꺼번에 모두 날린 것이다. 그런데...... 그는 환영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했다. 쓰으으으....... 기이한 음향과 함께 자신이 날린 암기들이 거대하게 그려지는 원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 조천백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은 처음으로 핏발을 돋군 채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한 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단리사영은 천천히 검끝으로 원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날린 암기들은 원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으으...... 저...... 저럴 수가?" 조천백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분명 자신의 암기에 맞아 쓰러지리라 믿었던 단리사영은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이 둥둥 뜬 채 날아오고 있었다. 단리사영의 몸은 눈부신 원의 광휘(光輝)에 싸여 있었다. 그 빛무리는 바로 검이 만든 광휘였다. "으으......!" 조천백은 부르르 떨었다. 이미 자신의 패배가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도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입술을 깨무는 조천백의 눈에서는 한가닥 섬광이 작렬했다. '아직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아직은 완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슉! 생각과 동시에 조천백도 떠올랐다. 그리고는 부딪쳐 갔다. 조천백의 몸과 단리사영의 몸이 거의 한 자 거리에 달했을 때, 스파아아앗! 그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조천백의 몸이 떠올라 단리사영을 향해 날아간 순간, 단리사영의 검이 만들어 낸 원이 갑자기 응축되었다. 동시에 그 원은 하나의 점(點)으로 화해 조천백의 심장을 관통했다. 거의 같은 순간, 조천백의 양쪽 어깨로부터도 검은 빛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너무나 빨라 육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 두 사람은 역(逆)의 방향으로 어긋나면서 떨어졌다. 서로의 위치를 바꾸게 된 무영비마와 단리사영.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조천백이었다. 조천백은 멍하니 단리사영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츄아아아아아! 그의 심장으로부터 한 줄기 피(血)의 화살이 뻗어 나갔다. 세차게 뻗어나간 피의 화살은 3장이나 뿜어져 나가 단리사영의 옷깃을 적셨다. 그러나 단리사영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너는...... 계집이지만...... 훌륭해! 내 평생 가장 강한...... 끄윽!" 그것이 조천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칭찬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영원히 남을 칭찬할 수 없었다.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었기에....... 그는 고목이 쓰러지듯 쓰러졌다. 팔 척 거신인 조천백은 그렇게 쓰러지고야 말았다. 쿵! 지축이 흔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사영!" 돌연 다급한 외침과 함께 태실봉으로 날아 오르는 인영이 있었다. 바로 종리연이었다. 종리연은 봉우리에 내려서는 순간 이미 조천백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을 본 종리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기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악이었다. 사실 봉우리로 날아오면서 그는 단리사영의 비참하게 죽은 모습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예상과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다니! 정녕 하늘의 도움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아닌가. "사영......?" 땅에 내린 종리연은 단리사영의 곁으로 가다가 흠칫하고야 말았다. 단리사영의 모습이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장검으로 땅을 짚고 서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균형이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토록 강하고 의지견정해 보이던 마검성녀 단리사영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어느덧 그녀의 몸은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손이 힘없이 아래 쪽으로 쳐지는 것이었다. "사영! 어디 다쳤소?" 종리연은 허물어지기 직전인 그녀를 가까스로 안았다. "흑......!" "......?" 종리연은 느닷없이 단리사영이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끝났어요...... 흐흑...! 이젠 검도(劍道)고 무엇이고...... 난 폐인이 되었어요!" "......!" 종리연은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의 양 어깨가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경악하여 급히 그녀의 어깨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어깨 근육이 끊어져 있었다.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이 그녀의 어깨를 관통하고 나간 것이었다. 어깨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팔 근육이 시작되는 곳이다. 따라서 그곳이 파괴되면 영원히 팔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어깨 속에 있는 뼈를...... 내공력으로 발사(發射)할 줄은...... 설마 그 정도일 줄은......." 스르르.......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단리사영의 몸이 무너지듯 종리연의 가슴에 안겼다. 그리고는 축 늘어졌다. 지나친 진기소모와 어깨의 치명상으로 인해 혼절을 한 것이었다. "......." 종리연은 그녀를 안고 멍하니 서 있었다. 마검성녀 단리사영이 폐인이 되다니....... 그것이 종리연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이 폐인이 되다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은 무인에게, 아니 적어도 단리사영에게 있어서는 사형선고가 떨어진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종리연은 해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문득 그는 단리사영의 어깨를 안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할 일을 했소....... 이제부터는 이 종리연이 하겠소. 당신은 편히 쉬어도 될 충분한 자격이 있소......." 이때, 태실봉으로 몇 개의 인영이 날아 올라왔다. 그리고는 숨이 끊어진 조천백의 시신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곧 종리연의 주변으로 다가왔다. 3인의 미녀들이었다. 방여경과 하오문주 방의경, 그리고 또 한 명의 미녀는 바로 천상제일루주였던 화안봉이었다. 화안봉은 마지막 연공을 마치고 소림사로 곧장 달려온 것이었다. 하오문주 방의경도 약간 늦었으나 소림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힘을 합해 지옥혈사대의 최후 발악을 저지시킨 것이었다. 처음에는 당하기만 했던 소림 쪽이었으나 숫적으로 우세한 데다가 종리연의 활약으로 지옥혈사대는 기가 꺾였다. 종리연은 전세가 완전히 아군 쪽으로 기운 것을 보고 먼저 몸을 빼어 태실봉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한 바탕의 혈겁이 지나간 후, 핏빛 노을이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밤이었다. '어떡한다? 가볼 수도 없고 아니 갈 수도 없고......! 이것이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로구나. 쩝......!' 종리연은 난처한 표정으로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림에서 멀지 않은 숭산 아래의 한 객점이었다. 그곳에서 자비장원까지의 거리는 대략 5마장쯤 되었다. 종리연이 망설이는 것은 자비장원으로 떠난 전홍이란 젊은이 때문이었다. 전홍을 자비장원으로 데려다 주는 동안 그는 힘겹게 그의 입을 열게 했었다. 그러나 힙겹게 열린 전홍의 입으로부터 그야말로 뜻밖의 말을 듣고는 그야말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량애라는 스님이 그렇게 사악한 놈이었단 말이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구려. 그는 중원에서 살아 있는 생불(生佛)이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사람이 아니오? 그런 스님이 어떻게 그런 일을......?" 과거 종리연은 무량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담간랑이란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을 때, 일단의 명문파의 젊은이들과 한 객점에서 고아 소년들을 데리고 있는 무량애를 먼 발치로 보지 않았던가. 당시 그는 무량애의 끝없는 자비심과 온화한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었다. 비록 떳떳치 못한 입장이었으므로 나서지는 못했지만 당시 자신도 할 수만 있다면 무량애와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마였다니! 여러번 구슬린 끝에 간신히 입이 터진 전홍은 치를 떨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제 아내는...... 바로 그놈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죽기를 결심하고 도망쳐 나온 소녀입니다. 아내는 결국 놈에게 당한 후유증으로 아이를 낳지도 못하고 그만...... 흐흑......!" 울분이 북받쳐 오르는지 전홍은 어느새 닭똥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렸다. "참으로 세상만사 요지경이로군. 대자대비한 부처의 탈을 쓴 사람이 금수(禽獸)만도 못한 짓을 하면서까지 욕정을 채우다니! 듣기로는 중원의 뜻있는 사람들이 무량앤지 뭔지 하는 그 녀석에게 수십만 냥을 보시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녀석은 그것으로 구제를 한 것이 아니라 치부를 했단 말인가?" "그런 내막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놈은 중원천지를 떠돌며 거두어 들인 불쌍한 아이들을 돌보는 자비스런 부처가 아니라는 겁니다. 녀석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어린 것들을 범하면서 노예처럼 부려먹는다는 겁니다. 그런 놈을 어떻게 살려둘 수 있겠습니까?" 종리연은 어이가 없었다. 그 자신도 완벽하게 속아넘어 갔을 뿐더러 아직도 중원무림인들은 입에 침을 튀겨가며 무량애를 칭송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자가 자비장원에서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온갖 추잡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니....... 종리연은 생각같아서는 당장에 쫓아가 요절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소림행(少林行)이 더욱 절박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는 순박하기 그지없는 전홍이 염려스러워 신신당부 했었다. "음....... 내 피치못할 일이 있어 지금은 당신을 도와줄 수가 없소. 하지만 한 가지 약속을 해주어야 겠소." "무...... 엇입니까? 공자님." 종리연은 피식 웃었다. "난 공자가 아니오. 그저 평범한 무부(武夫)일 뿐이오." 말을 해놓고 종리연은 씁쓸한 기분을 금치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담간랑 -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파렴치한으로 멸시당했었다. 그런데 이제 공자님이란 고상한 호칭으로 불리게 되다니. 그러나 전홍이 보기에 그는 신(神)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공자님께서 하명하신다면 목숨을 걸고도 지키겠습니다요." 종리연은 잠시 생각한 끝에 당부했다. "당신은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무량애가 그토록 나쁜 놈이라면 필시 무서운 마공(魔功)을 소유하고 있을 거요. 당신이 아무리 원한이 깊다해도 섣불리 달려들다간 복수는커녕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죽게 될 거요." "그...... 그럼 어떻게......?" 전홍은 울상을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도 한스런 마음에 이곳까지 왔을 뿐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마음같아서는 단숨에 놈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설사 놈을 만나더라도 절대 성급히 복수하려 들지 마시오." "그, 그러면?" "병법에도 속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소. 놈을 속여서 우선 놈의 측근에 접근부터 하시오. 그러다 기회를 보아 복수해도 늦지 않소." 전홍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해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흐흑......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아내의 원수조차 제대로 갚을 수 없으니......." 전홍의 눈에서는 다시 닭똥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종리연은 가슴이 뭉클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어리석은 일개 어부에 불과했으나 그의 아내를 향한 사랑이 지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급한 일을 마치고 꼭 돌아 오겠소. 당신을 찾아 복수할 방법을 찾아볼 테니 그때까지 내 말대로 자중해 주시기 바라오." 전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연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하였소." 전홍은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종리연은 다시 한 번 그의 어깨를 두드린 후 헤어졌다. 종리연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이야 말로 자비장원을 방문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때였다. '내일이면 궁단향을 찾아 떠나야 한다. 기회는 오늘밤 뿐인데....... 아무래도 전홍이라는 자가 염려스럽다. 울분만 가지고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짓쳐들어간 그가 오히려 당한 것은 아닐까?' 그야말로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 더구나 전홍이 그의 말대로 얌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일단 걱정이 되자 그는 방 안을 오락가락했다. "당신......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예요? 아니면 내일 다지성녀를 만나러 갈 일로 마음이 들떠서 그러시는 건가요?" 방 안을 오락가락하는 그를 보고 방의경이 조잘거렸다. 그녀는 단리사영을 간호하면서도 줄곧 종리연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아니오. 그 때문에 가슴이 설레이다니! 정말 말같지도 않은 말이오." 종리연은 펄쩍 뛰었다. 공연히 사람 잡지 말라는 듯. "호호호......! 그럼 무엇 때문인가요? 저희들에게 알리지 못할 근심거리라도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이번에 입을 연 것은 화안봉이었다. 종리연은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근심거리는 무슨...... 사실은 말이오. 좀 나갔다 와야겠는데 아무래도 사영의 건강이 염려가 되어서 그러는 것이오." "어머머! 형부! 이 야밤에 어딜 나가신다는 거예요? 세 부인을 한꺼번에 독수공방(獨守空房) 시키실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웃음을 띤 방여경의 눈빛이 짓궂게 빛나고 있었다. "호호...... 호호홋!" 객점의 넓은 방 안에 일시에 웃음꽃이 터졌다. "허헛......! 그런 것이 아니래두......!" 종리연의 얼굴이 어느새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는 처제인 방의경만 보면 이상하게도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그녀에게 딴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안쓰럽고 미안한 감정에다가 그녀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죄책감 비슷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종리연은 그녀에게 커다란 도움을 수차례나 받았으나 자신은 한 번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 것이다. "연랑! 이제 말해 보세요. 대체 무슨 일로 이 밤중에 나가시려 하시는지." 몸 안의 진기가 다 빠져 달아났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잠이 든 단리사영의 어깨에 이불을 덮어주던 방의경이 종리연을 향해 물었다. "사실은...... 무량애라는 스님을 한 번 만나 볼까 하오. 그가 거처하는 자비장원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오." "무량애라구요? 세인(世人)들로부터 살아 있는 자비로운 부처라는 칭호를 듣는 바로 그 스님 말인가요? 갈 곳 없는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돌본다는......?" 반색을 하며 끼어든 것은 방여경이었다. "아니? 그...... 작자를 무엇하러 만나시게요? 설마 보시(布施)하기 위해서는 아니겠지요?" 이번에 입을 연 것은 뜻밖에도 방의경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방여경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반응에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종리연은 장난기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니..... 보시를 하면 안 된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방의경은 얼핏 말 끝을 흐렸다. 그때서야 종리연도 정색을 했다. "당신도 뭔가를 알고 있는 모양인데.......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하오방의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말이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방의경이 고개를 들었다. "무량애라는 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저희 하오방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그렇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량애라는 스님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자비로운 생불이 아니라는 거죠. 정보에 의하면 자비정원에는 지금 현재 약 삼백여 명의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어머나! 그렇게나 많은 아이들을 손수 보살피고 있는데 자비로운 생불이 아니란 말이에요?" 방여경이 따지고 들었다. "생각해 보시라구요. 아무리 불가인이라 해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심지어는 소림사만 해도 삼패천이 날뛸 때 자파의 안위를 생각해 봉문하지 않던가요?" "......." 그 말에 여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의경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만일 그런 분이 있다면 그야말로 존경할 만 하죠. 더구나 한 둘도 아니고 삼백여 명이 넘는 오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일일이 거둔다는 것은 정말 생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맞아요. 그러니까 무량애 스님이 존경스럽다는 거 아녜요. 흥! 언니같은 사람은 흉내도 못낼 일이죠." 문득 힐난하듯 말하는 방여경이었다. 실상 방여경은 언니인 방의경의 냉철함을 싫어하고 있었다. 지난날 그의 연인도 방의경의 냉혹함 때문에 목숨을 저버리지 않았던가.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감히 흉내도 못낼 일이지." 방의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지난 일을 두고두고 후회해 왔기에 동생의 그런 힐난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방의경의 표정은 다시 냉철하게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동생을 향해 충고하듯이 타이르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의 이 언니는 네가 익히 알고 있는 예전의 언니가 아니란다. 그건 그렇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자비정원에 있는 삼백여 명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말인데......." "말해 보시오. 어떤 이야긴지 듣고 싶소." 종리연이 재촉했다. "무량애가 중원을 십여 년 가까이 떠돌며 지금까지 거두어 들인 아이들은 오천 명이 족히 넘는 인원이랍니다. 그런데 현재 있는 아이들이 삼백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방의경은 심각한 얼굴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 모두들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만약 방의경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사실이라면 엄청난 흑막(黑幕)이 숨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주...... 죽어가는 아이들도 있지 않겠어요? 원래부터 굶주리고 허약했던 아이들이니 말이에요. 병에 걸리거나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화안봉의 말이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예요. 무서운 전염병이 돌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갑작스럽게 죽어간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이유는 어떤 것이요? 무엇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라졌다고 보는 거요?" 종리연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방의경은 종리연의 눈을 주시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방의경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무량애는 삼패천을 능가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어쩌면 그것도 가공할 살인병기(殺人兵器)를 비밀리에 양성하고 있는지도....... 그 살인병기야말로 그 동안 그가 거두어 들인 아이들일지도 모른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 그 말에 모두 해연히 놀라고 말았다. 너무나 뜻밖의 유추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무량애가 가공할 살인병기를 키우고 있다니? 그것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소." 종리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사 그가 아이들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나쁜 짓을 한다해도 고작해야 치부를 위해서라면 몰라도 그런 무서운 일을 할 리가......?" 종리연은 물론 여인들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여경은 고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맞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방의경의 눈에서는 차디찬 빛이 흘러나왔다. "하오방을 무시하지 마세요. 하오방은 중원 전역에 걸쳐 방대한 조직과 정보망을 지니고 있어요. 뭔가 짚이는 게 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서...... 설마......." 안색이 하얗게 변한 방여경이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언니는 왜 그 사실을 구파일방을 비롯한 무림계에 알리지 않고 있었나요?"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삼패만 가지고도 전전긍긍해 하는 정파에 이런 사실까지 알려져 봐요. 그들은 결코 봉문을 풀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으음......." 종리연은 무거운 신음을 발했다. 사실이었다. 그 동안 삼패가 두려워 봉문하고 있던 구파일방이 아니던가. 만일 무량애가 또다른 패도세력으로 부상한다면 정파무림은 그야말로 절벽으로 몰리게 될 것이다. 방의경은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밖에도 의혹스러운 점이 많아요." "또 무엇이오?" "꽤나 오래 전의 일이에요.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는 셈이지만 무량애는 아이들을 팔아 넘긴 적이 있답니다." "팔아 넘겨? 대체 어디로......?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종리연은 참지 못하고 연달아 반문했다. "대리국(大理國)이나 묘강(猫疆)에 무사(武士)나 노예(奴隷)로 팔아넘겼답니다. 개중에 얼굴 반반한 여아(女兒)나 허우대 멀쩡한 사내아이를 말이에요." "그럴 수가?" "단지 치부를 하기 위해서 만이라면 중원에도 얼마든지 팔아넘길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자는 굳이 이역만리나 되는 곳으로 아이들을 팔아넘겼어요. 여기에는 뭔가 흑막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그, 그렇군." 종리연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무량애가 그런 일을 벌인 까닭이 도대체 뭐란 말이오? 그리고 그가 패도적인 살인병기를 키우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방의경은 차갑게 말했다. "무량애는 오래 전부터 도문팔가(道門八家)의 검(劍)을 사들이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바로 종리연이 담간랑이라고 불리우던 시절보다 더 앞서서 무량애는 쇠퇴해져가는 도문팔가의 검을 사들인 것이다. 용호환풍도가(龍虎幻風道家). 쾌황섬전도가(快皇閃電道家). 폭풍침마도가(暴風寢魔道家). 추살마전도가(追殺魔傳道家). 우수비린도가(右手飛 道家). 건곤음양도가(乾坤陰陽道家). 통혈천지도가(通血天地道家). 유수등룡도가(流水騰龍道家). 이들 도문팔가는 중원 무림에서는 정문(正門)도 사문(邪門)도 아닌 부류였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오직 가문의 명예를 걸고 십전검(十全劍)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즉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은 물론이거니와 마성(魔性)까지 겸비한 완전무결한 검을 만들어 내는 것에 가운(家運)을 걸었던 철저한 장인(匠人)이었던 것이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로군. 생불(生佛)이라고 추앙을 받는 무량애가 오래 전부터 도문팔가의 검을 사들이고 있었다니....... 더구나 그것들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오. 도대체 검과 자비장원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려." 정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방의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연랑이 가지고 계신 정보는 어떤 것인가요?" 종리연은 할 수 없이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담사에서 당신을 만난 후 소림사로 가는 도중 어떤 젊은이를 만났소. 그런데 그 젊은이가......." 종리연은 전홍을 만나게 된 연유와 그를 자비장원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말을 하면서 덧붙였다. "그는 기필코 아내의 원수를 갚겠다고 했소. 비록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긴 했지만 그의 안위가 걱정되어 가만 있을 수가 없소." 말을 하는 종리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잖아요? 어서 가서 그분을 구하세요. 어쩌면 지금쯤 목숨이 달랑거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잖아요." 방의경이 재촉했다. "괜찮겠소?" 벌떡 일어서던 종리연이 단리사영을 보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뭐가 괜찮다는 말이에요?" "사영은......." 그녀는 곧 종리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호호......! 염려마시고 어서 가세요. 사영은 지금 곤히 자고 있는 걸요. 제가 잘 돌볼 테니까 걱정마세요. 자꾸 사영만 찾으시면 제가 정말 질투할 거예요!" "고...... 고맙소 의경! 그리고 안봉!" "잠깐만요." 방의경이 말을 끊었다. 그녀는 곧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명심하실 게 있어요." "뭐, 뭐요?" 종리연은 약간 기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방의경의 완벽한 성품으로 미루어 필시 중요한 일일 것같았다. 방의경은 피식 웃었다. "호호! 그렇다고 긴장하실 건 없잖아요." "누, 누가 긴장했단 거요?" 종리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방의경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랑은 이제 혼자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요. 무슨 뜻인지 알죠?" 그 말을 하며 방의경의 눈은 자연스럽게 화안봉에게, 그리고 침상에 누워 있는 단리사영에게로 향해졌다. 그녀의 말뜻을 안 종리연은 절로 가슴이 뛰었다. "무, 물론이오. 난...... 혼자가 아니라......." "천하의 운명까지 한 몸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해요. 다시 말해 자비장원에서 지나친 모험은 삼가시라는 말씀이에요." "아, 알았소." 종리연은 가슴이 뭉클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더이상 어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몸을 날렸다. "때가 되었다. 바야흐로 오탁악세(汚濁惡世)를 깨끗이 씻어낼 때가! 이제 본불(本佛)이 참된 정법의 세상을 세우리라. 이름하여 무량천년왕국(無量千年王國)을!" 10년마다 한 번씩 꽃을 피운다는 천지음양화(天地陰陽花)가 은은한 향기를 흩뿌리고 있는 중앙 정원(庭園). 어스름 저녁에 한 승려가 자비장원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는 남루한 잿빛 승복을 걸친 차림이었으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깡말랐지만 준미한 얼굴의 사내였다. 다름아닌 무량애였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서서히 정원을 돌아 자비장원의 정문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정원 사이의 소롯길에 핀 들꽃들을 다소곳이 흔드는 시각이었다. 문득 무량애의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그의 시선은 한 곳에 멎었다. 정문 좌우에는 화단이 가꾸어져 있었는데 지금 그 화단 앞에서 누군가가 가위로 화단의 나무들을 전지(剪枝)하고 있었다. 실상 이런 모습은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날이 저무는 시각에 전지를 한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지금 전지하는 자는 아주 평범한 용모의 삼십 가량된 사내였다. 무량애는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했더니.......'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이런 미소는 생불(生佛)로 칭송받는 그가 평소에 자주 흘리는 미소였다. 단지 그 미소만으로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흠모해 왔었다. "허허....... 밤이 다되 가는데 다음날 해도 되지 않소?" 무량애는 사내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내가 돌아섰다. "아이구, 생불 어르신이시군요." 사내는 돌아서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웬걸요, 이 미천한 놈을 받아 주신 것만 해도 하해같은 은전이신데...... 이 밤이 새기 전에 정원을 다 손질할 생각입니다요." 무량애는 고개를 저었다. "허허....... 그럴 필요야. 오늘은 그만 쉬고 내일 하시구려." 무량애는 허름한 승복을 날리며 사내를 스쳐 지나갔다. 사내는 얼마 전 찾아와 스스로 자비장원의 종이 되겠노라고 간청해서 거두었었다. 평소에 무량애를 존경하여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자비장원에 머물며 궂은 일을 도맡아 하겠다고 간청해서 거둔 것이었다. 문득, 무량애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죽어라! 이 나쁜 놈!" 사내는 전지 가위를 세우더니 폭갈과 함께 무량애의 등을 향해 내리 꽂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피하지 못할 급습이었다. 그러나 무량애가 어디 보통 사람인가? "아미타불!" 무량애는 불호를 외우며 승포를 휘익 휘둘렀다. 단지 소매자락이 바람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어억!" 사내는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뒤로 붕 떠올랐다. 무형의 강기( 氣)가 사내의 몸을 2장이나 날려버렸다. 쿵! 사내는 화원 저만치에 떨어졌다. 그러나 사내는 잠시 꿈틀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악을 쓰는 것이 아닌가? "이 사악한 중놈아! 부처의 탈을 쓰고 채 익지도 않은 여아(女兒)를 농락하는 살인마야. 크흐흐......!" 사내는 바로 전홍이었다. 그는 종리연이 신신당부하여 종을 자원하여 자비장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 무량애가 의심없이 그의 곁을 지나자 그만 참지 못하고 공격한 것이었다. "시주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소승이 대체 무슨.......?" 무량애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청이력(廳耳力)으로 주변 백장 반경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음침해졌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마야! 내 너의 간을 꺼내 씹어먹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전홍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 그는 자신이 무량애의 적수는커녕 손가락 하나만 휘둘러도 죽음을 당한다는 것도 잊고 다짜고짜로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 들었다. 무량애의 눈에서 번쩍 하고 살광(殺光)이 치솟았다. 동시에 그는 슬쩍 손을 들었다. "으...... 아아악!" 전홍은 비명을 질렀다. 한가닥 항거불가능한 허공섭물진기(虛空攝物珍技)가 그를 붕 떠서 무량애에게 날아가게 한 것이었다. "큭!" 전홍은 숨이 콱 막혔다. 무량애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쥔 것이었다. 무량애는 눈깜짝할 사이에 전홍의 목을 거머쥔 채 훨훨 날아올랐다. 그의 모습은 자비장원의 후원을 향해 유령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다만 그 자리에는 그의 음산한 중얼거림만이 남아 맴돌고 있었다. "으음! 하마터면 십 년 계획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뻔했다. 어떻게 이런 헛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미리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자시(子時)가 가까운 시각. 푸르기 만한 밤하늘에 은사(銀絲)로 꾸며진 듯한 월광(月光)이 구름에 가리우더니 세우(細雨)가 소리없이 내리며 자비장원의 뜨락을 적시고 있었다. 자비장원(慈悲莊園).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살아 있는 생불 무량애가 천애고아들을 모아 은전을 베푸는 곳이다. 그는 전 중원을 떠돌면서 보시와 시주를 받아 이 장원을 설립했다. 세인(世人)들이 무량애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이다. 그의 속명(俗名)이 무엇이고 어디 출신인지는 여전히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지금 장원의 중앙에 세워진 2층 누각(樓閣)의 한 곳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곳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한 승려 한 사람이 상체를 벗고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의 좌우 맞은편에는 10세를 갓 넘겼음직한 남녀 한 쌍의 아이들이 같은 모습으로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서 깊은 삼매(三昧)에 빠져 있었다. 3인의 중앙에는 촛불이 놓인 다탁이 있었고 위에는 조그마한 차주전자와 사기로 만든 종지그릇이 놓여 있었다. 종지 안에는 세사(細沙)보다 더욱 부드러운 백분(白粉)이 들어 있었다. "......." 명상에 빠진 승려, 즉 무량애는 숨을 멈춘 지 오래인 것만 같았다. 타오르는 촛불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곧게만 불꽃을 세우고 있었다. 마치 연소(燃燒)조차 되지 않는 것처럼. 얼마나 더 시각이 흘렀을까? 일순 삼매에 빠져들었던 무량애의 몸이 수축을 하는 듯이 움직였다. 그것은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스...... 스읏! 보라! 무량애의 상체의 모공(毛孔)이 열리는 듯하더니 종지 안에 든 백분을 흡입하는 것이 아닌가? 미세하기만 한 흰 가루가 허공 가득히 펴져나가면서 사나이의 모공 속으로 연기처럼 스며드는 것이었다. 대단한 금강회흡강기(金剛廻吸 氣)였다. 백분이 연기처럼 떠올라 잘게 부서지며 사나이의 모공 속으로 흡입되고 있는데도 촛불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지금 무량애가 흡입하고 있는 백분(白粉)은 생기속근분(生肌續筋粉)이라는 진기한 약으로서 서역(西域)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이한 약물이었다. 스읏......스......! 마침내 백분이 모두 모공 속으로 빨려들어가자 무량애는 감았던 눈을 떴다. 순간 그의 눈에서 형용할 수 없는 광채(光彩)가 폭사되어 나갔다. 바로 그때다. 츠읏......츠......! 좌우 편에 마주 앉아 있던 아이들의 모공이 벌어지면서 핏빛 진기(眞氣)가 품어져 빠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핏빛 무지개처럼 품어져 나오는 진기는 어느새 무량애의 모공 속으로 연기처럼 흡수되어 들어가고 있었다. 진기가 빠져나갈수록 두 아이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무량애의 달뢰라마강기(達瀨喇磨 氣)에 넋을 제압당하고 있던 상태라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핏빛 무지개처럼 품어져 나오던 진기가 끊겼다. 파르르......! 그 순간 무량애의 눈에서 폭사되어 나갔던 광채가 흐릿해지면서 미동도 하지 않던 촛불을 파르르 떨게 만들고 있었다. 금강회흡강기가 시전되는 동안 방 안의 모든 공기가 제압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이제 거의 완성되어간다.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건곤지기(乾坤之氣)는 이갑자(二甲子)의 내공(內攻)과 비등하다. 후훗! 이 정도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이제 나의 원대한 꿈을 이룰 때가 다가왔다." 이렇게 소리치는 사나이는 다름아닌 무량애였다. 그는 곧 자기가 진기를 빼앗은 두 아이들을 직시했다. 순간, 츠팟......! 그의 두 눈에서부터 오색(五色)의 창백한 한광(寒光)이 폭사되어나갔다. 보라! 천령개(天靈蓋)로 오색 한광이 스며드는 순간 진기를 빼앗기고 살아 있는 시체가 되었던 그들이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로 변하고 있는 것을! 검었던 머리카락이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어느새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어나 지하 연무장(練武場)으로 가라! 그곳에서 무량애불의 진언(眞言)을 기다려라." 무량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은 무량애를 향해 오체투지와 합장을 한 후에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가부좌를 풀고 일어난 무량애는 누각 밖으로 나갔다. 쏴아아......! 얼마 전 뿌옇게 대지를 감싸며 내리던 세우(細雨)는 어느덧 빗방울이 굵어져 있었다. 뜨락의 파초잎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어둠 속에서 고즈넉하게 들려왔다. 어둠을 응시하는 무량애의 눈빛이 다시 번쩍였다. 그의 눈빛은 음산하고 섬뜩했다. "흐흐....... 이제 대법(大法)이 완성되어 간다. 잃어버린 제국의 맥(脈)을 잇는 일이 나 무량애에 의해서 완성될 날이 다가온다. 흐흐......!" 무량애는 분명 굵은 빗방울이 뿌려지는 화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옷깃에는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가공할 강기에 의해 빗물이 차단되고 있는 것이었다. "제국의 부활이 다가왔다. 제국의 도래를 막는 자에게는 단호한 죽음만이 올 것이다. 이제 오랜 기다림도 머지 않아 끝날 것이다." 무량애는 또다른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정방형의 정실(靜室)이었는데 아무런 꾸밈도 없는 소박한 구조였다. 다만 천정으로부터 십여 개의 금줄이 내려와 있을 뿐이었다. 무량애는 그중 하나의 금줄을 잡아당겼다. 그그긍......! 그러자 그가 서 있던 바닥이 회전하더니 아래로 서서히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눈깜짝할 사이에 아래로 사라졌다. 누각 아래의 비밀 지하공간. 그곳에는 8열로 도열해 있는 백포(白袍)인들의 무리들이 있었다. 한결같이 등에 장검을 메고 있는 8인의 백포인 뒤에는 수백 명의 인영들이 도열해 있었다. 8인의 백포인. 그들은 다름아닌 도문팔가의 검을 장악하게 된 무량애의 수석 8제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난 오 년간 자비장원의 지하 연공실에서 은밀히 천성천하유아독마식(天上天下唯我獨魔式)의 8검법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수석제자 잔불사마제(殘拂舍魔帝). 그는 구유백골음명신검(九幽白骨陰冥神劍)을 익혔다. 제2제자인 파초마인(芭蕉麻人). 그녀는 소녀표향대법(素女飄香大法)을 익힌 향지국(香至國)의 여인이다. 제3제자 옥수미요(玉手迷妖)는 소녀음양공검법(小女陰陽空劍法). 제4제자 묵철마공(默鐵魔功). 그는 심점마언신검(心點魔 神劍)을....... 그들의 뒤에는 또다시 300인 이상의 군효(群梟)가 도열해 있었다. 무량애는 도열해 있는 백포인들의 무리를 내려다보며 광소(狂笑)했다. "후하하핫! 이제 때가 무르익었노라. 제국의 강림을 위한 첫번째 시도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나 이제부터는 본불(本佛)이 제국 강림의 위업을 달성하리라!" 푸른 안광을 폭사해내는 무량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무(南無) 무량애존(無量愛尊)!" 8인의 백포인을 비롯하여 검을 차고 도열해 있던 군효들이 일시에 오체투지(五體投地) 하며 외쳐대는 것이었다. "푸하하하......! 너희들에게는 본불의 무량한 가피력(加被力)이 있을 것이다. 너희는 그것을 수지하고 믿느냐?" "나무 무량애존불!" 일시에 함성이 터져나왔다. 무량애는 흡족한 듯이 광소를 흘러내고 있었다. "푸하하핫......!" 그는 이미 이전의 무량애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가공할 비밀이 있었다. 그가 말하는 제국(帝國)!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으음......." 문득 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비밀을 눈치채고 있는 자가 있다니....... 그토록 만전을 기하라고 일렀건만 그따위 실수를 저지르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허공을 노려보는 무량애의 부릅 뜬 눈에서 시뻘건 살광(殺光)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곧 손을 뻗어 책상 아래 장치된 금빛 단추를 눌렀다. 31 기공추압법(氣空追壓法) 파르르...... 스으읏......! 바람에 문풍지가 떠는 소리와 함께 백포(白袍)에 백두건(白頭巾)을 걸친 인영(人影) 하나가 천장 위로부터 떨어져 내렸다. 인영은 혈혈백미(孑孑魄彌) 천마풍(天馬馮)이라는 자였다. 그는 무량애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은밀하게 호위하는 자였다. 천마풍은 곧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무량애불(無量愛佛)!" 천마풍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무량애의 입에서 대갈일성(大喝一聲)이 터져나왔다. "바보같은 놈! 어찌하여 일을 그따위로 처리하는 것이냐?" "......?" 창졸지간에 당하는 일이라 천마풍은 영문을 모른 채 어깨를 움찔 떨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이태 전에 자비장원을 빠져나간 계집애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억하겠느냐?" 무량애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 "그년을 분명히 척살(擲殺)했다고 너는 보고하지 않았느냐? 한데 그년의 남편이라는 작자가 이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 "무...... 무량애불!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신 것이 아니시옵니까?" 천마풍은 식은땀을 흘리며 되물었다.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무량애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위인이었다. 그의 자비로운 얼굴 뒤에 감추어진 잔혹한 혈욕(血慾)을 익히 보아왔던 것이다. 천마풍의 안색은 그만 흙빛이 되고 말았다. "무...... 무량애불!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갈(喝)!" 무량애의 입에서 뇌성벽력(雷聲霹靂)이 터졌다. 순간 누각의 벽이 허물어질 듯이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분기(憤氣)를 참지 못한 무량애의 손바닥이 천마풍의 얼굴을 향해 번뜩였다. 파앗......! 일순 천마풍의 얼굴 껍질이 벗겨지면서 시뻘건 혈무향(血霧香)이 누각 안을 가득 채웠다. 무량애는 내공도피강기(內攻刀皮 氣)로 그의 얼굴 껍질을 벗겨버린 것이다. "큭! 무...... 무량애불!" 철퍼덕 무릎을 끓으며 천마풍이 울부짖었다. "이번만 용서하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물러가라!" 무량애의 음성은 싸늘하기가 서릿발 같았다. "수...... 수지(受持)!" 비릿한 혈무향이 사라지기도 전에 천마풍은 허리를 조아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무량애의 눈은 어느새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천마풍은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며 누각 안을 빠져나왔다. 순간, 고오오...... 고오오......! 그가 차고 있던 단옥혈마검(丹 血魔劍)이 공기를 찢을 듯한 파공음(破空音)을 내면서 울기 시작했다. "......!" 고오오...... 고오오......! 단옥혈마검(丹玉血魔劍)! 이것은 천하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검이다. 길이는 사 척(尺)으로 그다지 크다고는 할 수 없고 또한 볼품도 없었으나 검을 지닌 주인의 마음을 읽는 마력이 있었다. 단옥혈마검은 지금 천마풍의 처절한 살기를 그대로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천마풍은 허공을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아대고 있었다. 주위는 벌레 울음소리 하나도 없이 고즈넉할 뿐이었다. 스스......! 종리연은 편복괘천법( 掛天法)으로 자비장원의 담장을 넘었다. 적적한 어둠에 쌓여 있는 자비장원은 생각보다 넓었다. 더군다나 야밤에 운무(雲霧)를 동반한 비까지 내리고 있는 터라 주위를 쉽사리 판별할 수가 없었다. "골치 아프군. 이 넓은 곳에서 전홍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중얼거리며 소롯길을 따라걷던 종리연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10장 거리 앞에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는 누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종리연은 안력(眼力)을 돋우었다. 순간 무엇인가를 느낀 듯 그의 몸이 긴장되었다. '진세(陣勢)다. 그런데 공기가 싸늘한 것으로 보아 살아 있는 사람이 펼치는 것이 아니다!' 종리연은 진법(陣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그의 육감은 어렴풋이 누각 주변에 극히 위험한 진세가 매복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럴 때 의경이 있었더라면.......' 그는 아쉬움을 느꼈다. 하오방주 방의경이라면 진법쯤은 간단히 파해할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어쨌든 그는 혼자 힘으로 매복을 뚫어야 했다. 슥...! 그의 신형이 비스듬히 누운 채 날아갔다. 놀라운 것은 허공에 뜬 그의 인영 아래로 그림자가 낮게 깔리며 날아간다는 사실이었다. 눈여겨 본다면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달도 없는 밤에 어찌 그림자가 생기겠는가? 파파파파팟---! 돌연 사방으로부터 무수한 암기가 쏟아졌다. 그것은 누각의 처마, 지붕 위, 화원, 심지어는 지면으로부터도 쏘아져 나왔다. 한결같이 극독(極毒)이 발려진 치명적인 암기들이었다. 퍼퍼퍽! 허공을 날아가던 종리연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었다. 그는 더이상 날아가지 못하고 바닥에 추락했다. "죽었다!" "크흐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사방에서 음산한 괴성과 함께 불쑥불쑥 괴영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이 쓰러진 종리연에게 다가갔을 때, "억?" "아, 아니......?" 그들은 눈을 부릅뜬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라.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의복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종리연은 이미 매복을 벗어나 유령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조화십팔보는 천하제일의 신법이었다. 그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목표지점인 누각의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온 신경을 기울여 누각 안의 동정을 살폈다. 마침 창문을 통해 안의 광경이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냐?" 누각 안으로부터 날카로운 음성이 터져나왔다. 종리연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기척도 없이 다가왔는데 알아채다니.......' 과연 방의경의 말대로 무량애는 보통 승려가 아니었다. 최강의 내가고수가 아니고는 조화십팔보의 신법을 구사하고 있는 그의 실체를 탐지할 리가 없었다. 한편, 누각 안의 인물은 바로 무량애였다. 그의 눈빛은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창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문득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누군지 모르나 들어오시오." 창문이 열리며 한가닥 인영이 누각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그는 장의(長衣)를 벗은 차림이었는데 그나마 빗물로 젖어 있었다. 바로 종리연이었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라." 종리연은 그럴 듯하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무량애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무슨 연유로 본 장원을 찾아오신 것이오? 또한 시주는 뉘신지? 게다가 그런 모습으로?" 종리연은 무량애가 여전히 위선자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다소 더듬거렸다. "그...... 그렇군. 쩝! 그러고 보니 이런 행색도 예의에 어긋나는 거로군." 종리연은 자신의 행색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온몸이 비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 종리연의 말에 무량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위이이이잉! 종리연의 모습이 사라지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찰나일순에 일어난 일이었다. 종리연은 공기를 가르는 신묘한 보법을 시전한 것이었다. 이름하여 기공추압법(氣空追壓法). 공기의 밀도(密度)를 이용해서 젖은 옷을 짜내는 방법이었다. "......!" 무량애의 눈이 가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무량애는 기공추압법을 시전하며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는 괴사나이의 모습을 잡아보려고 애를 썼으나 별무소용이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옷깃을 흔들며 지나가는 세찬 바람만 있을 뿐이었다. '대...... 대단한 보법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2갑자의 내공을 가지고 있는 무량애로서도 이토록 빠른 보법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젖은 옷을 공기의 밀도를 이용해 말리다니....... 스르르....... 마침내 누각 안을 휘돌던 바람이 멎었음을 느낌과 동시에 무량애는 한 사내를 보았다. 무량애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에게서는 조금 전의 후줄근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인사 하겠소. 야심한 밤에 허락도 없이 댁을 방문한 소인은 종리연이라고 하오!" "조...... 종리연! 네가 바로......?" 무량애의 입술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렇소. 난 종리연이오.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그때 무량애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자...... 잠깐! 시주가 바로 소림사를 습격한 삼패천의 지옥혈사대를 물리친 그 종리연이란 인물이란 말이오?" "바로 그렇소." "으음......." 신음을 토해내는 무량애의 이마에 한 줄기 주름살이 깊게 패이고 있었다. "본 장원에 찾아온 목적은?" 무량애의 음성은 점차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한 가지 따질 것이 있어 왔소." "......?" "당신이 중원의 살아 있는 부처라고 불리우는 스님 무량애가 맞소?" 종리연의 질문에 무량애는 눈썹을 푸르르 떨었다. "아미타불...... 그렇소이다." 종리연은 재차 추궁했다. "혹 진여랑이란 소녀를 아시오?" "......!" 무량애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모르오. 그런데 그 소녀가 어쨌단 말이오?" "으하하하하하하!" 문득 종리연의 입에서는 광소가 터져 나왔다. 한 동안 길게 웃는 종리연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날카롭게 말했다. "너무나 많은 소녀들을 망쳐놓았기에 진여랑을 기억 못할 지도 모르지. 무량애! 설사 중원 전체를 속인다 해도 하늘을 속이지는 못한다. 이 더러운 위선자!" 무량애의 몸이 경련했다. 그는 종리연이란 청년이 이미 자신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서서히 살기를 품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어느새 그의 말투도 변했다. 종리연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전홍이란 사람으로부터 모든 것을 들었다. 너야말로 인면수심의 개같은 위인이라는 것을!" "흐흐흐흐흐......!" 문득 무량애의 입에서 음침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까지의 자비스럽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놈!" 그의 눈에는 살광이 이글거렸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나 네놈은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든거나 다름없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날뛰는 거냐?" "옳지. 이제야 마각을 드러내는 군." 종리연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사실 종리연은 심사숙고하는 인간형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하고 순후한 성품이었다. 따라서 매사를 간단히 생각했다. 전홍으로부터 무량애의 정체를 듣고 방의경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후 이미 그를 처단할 의사를 굳히고 있었다. 한편 무량애는 느닷없이 나타난 종리연에게 의혹을 품고 있었다. '이놈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같다. 그렇다면.......' 문득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네가 날 찾아온 목적은 그걸 따지기 위해서냐?"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위선자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뤄주려고 왔다." "으홧홧홧홧홧......!" 문득 무량애는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엄청난 내공이 담긴 광소였다. 창문이 부르르 진동하고 심지어는 누각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였다. 문득 웃음을 뚝 그친 그는 으시시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불(本佛)이 네게 한 가지 제의를 하고자 한다." 종리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제의?" "너를 본불의 수제자로 삼고 싶다." "......?" 너무나 어이없는 말에 종리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이 수제자라니? "이제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제국의 도래가 다가오고 있다. 제국을 거스르는 자 망할 것이요, 오직 따르는 자만 살게 된다! 네가 본불의 제자가 된다면 너에게 제국의 영화(榮華)를 주겠다." 한 동안 무량애를 응시하던 종리연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순간 무량애가 노여운 음성으로 물었다. "어찌하여 웃는 것이냐?" 종리연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제국이란 무엇이냐? 죄없고 불쌍한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가 겁탈하고 능욕하는 것이 제국을 세우는 방법이냐? 겉으로는 생불의 탈을 쓰고 속으로는 악귀의 얼굴을 지니고?" 무량애가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했다. "으하하하! 연작(燕雀)이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굳이 변명을 하자면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무량애의 눈에서 광망이 폭사되어 나왔다. "네게 보여 줄 것이 있다. 내가 중원을 떠돌며 거두어 들인 수천 명의 떠돌이 거지 녀석들! 자 보아라! 지금 그들이 얼마나 늠름한 제국의 수호군사(守護軍士)가 되어 있는지를. 본불은 오히려 그들에게 제국의 영화를 안겨주었다." 그그긍......! 돌연 바닥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종리연은 흠칫했으나 무량애와 그가 동시에 하강하고 있었으므로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 잠시 후 종리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내려온 것은 거대한 지하광장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하광장에는 8열로 도열해 있는 백포(白袍)인들의 무리가 있었다. 또한 백포인들의 뒤에는 무수한 인영들이 승복차림으로 도열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한결같이 작달막한 키에 핏기 없는 얼굴의 어린아이들이었다. "나무 지존 무량애불!" 백포인과 수백 명의 괴동(怪童)들이 동시에 오체투지하며 외쳤다. 종리연은 그만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이...... 이들은 살아 있는 자들이 아니다. 한 점의 생기(生氣)도 느껴지지 않다니...... 대체 인간이란 말인가? 괴물이란 말인가?' "으하하하! 이제야 본불의 위력을 알겠는가?" 고막을 울리는 무량애의 웃음소리에 종리연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고 있었다. "네...... 네놈은 삼패천의 무리보다 더욱 악독한 놈이구나. 어린 아이들의 생기를 빼앗아 이런 꼭두각시로 만들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종리연은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 특히 꼭두각시가 된 어린아이들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전홍의 아내 진여랑이 떠올라 더욱 분노한 것이었다. "뭐? 날 수제자로 맞아들이겠다고? 으하하하하핫!" 종리연은 광소를 터뜨렸다. 순간 무량애의 눈이 사악한 핏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악마의 눈빛이었다. "크크크.......! 권주(勸酒)는 마다하고 벌주(罰酒)를 택하다니. 좋다. 죽기를 원한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크하하핫! 사랑스런 제자들아! 놈을 죽여라!" 순간, 지하광장에는 살기가 가득찼다.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8인의 백포인들이었다. 그들은 뻣뻣하게 서 있을 때와는 달리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더니 종리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종리연은 소매 속에서 혈월도를 꺼내 들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스파팟......! 8인의 백포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검 끝으로부터 괴이한 운무(雲霧)가 스멀거리며 솟아나기 시작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사부께서 말씀하셨지. 선공(先攻)으로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종리연은 더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내공을 끌어모으며 수중(手中)의 혈월도를 날렸다. 쐐애액! 유성(流星)이 떨어지며 내는 빛이었을까? 물러 서 있던 무량애의 눈동자에 한 줄기 빛줄기가 타며 스러지는 것이 보이는 것같았다. "크윽!" "켁!" 종리연을 에워싸고 있던 백포인 중 2인의 손목이 혈월도에 의해 잘려나가며 검이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백포인들이 주춤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종리연의 신형이 움직였다. 휘리릭! 조화십팔보의 절예가 펼쳐졌다. 그의 신형은 팽이처럼 회전하는 듯 하더니 여러 개로 갈라졌다. 그 바람에 백포인들은 목표를 잃고 잠시 진세가 흐트러졌다. 그때 무량애의 고함이 들려왔다. "뭣들하느냐! 놈은 눈속임을 하고 있다. 공격해라!" "우우우.....!" 음산한 신음소리가 백포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또한 창백한 얼굴의 동자승들의 입으로부터도 괴이한 신음이 흘러나오며 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리연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무리 절묘한 조화십팔보를 펼친다 해도 상대는 수백 명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신지가 제압된 꼭두각시들이었다. 그들을 모두 죽인다해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계속 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는 조화십팔보로 진신(眞身)을 분산시키며 머리를 굴렸다. '......!' 바로 그때였다. 궁(窮)하면 통(通)한다고 했던가? 그의 뇌리에 언뜻 떠오르는 8장의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혈월팔천도법(血月八千刀法)의 진수를 나타낸 혈월팔천도식이었다. 절박한 순간에 혈월팔천도식의 진수(眞髓)가 확연히 깨달아진 것이었다. 종리연은 혈월도를 거머쥔 채 눈을 감았다. 문득 그는 제1도(第一圖)를 떠올리며 팔을 활짝 벌렸다. 그것은 하늘에 달이 떠 있는 형상이었다. 부드러운 현과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조각달이 떠 있었다. 들판에 흑의수사가 그 달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듯이 종리연은 팔을 벌린 것이었다. 그러자....... 달이 사라지고 없었다. 달은 어느새 종리연의 손에 잡혀 있었다. 달을 거머 쥔 종리연의 눈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없이 많은 혈랑(血狼)들이 보였다. 어느 순간 종리연은 손을 떨쳤다. 혈랑들의 목이 깨끗이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종리연의 손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보이지 않은 날개를 가졌던가? 조각달은 어느덧 혈랑들의 목으로부터 청무(靑霧)를 뿌리며 종리연의 오른쪽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혈랑(血狼)이 으르릉 거리며 종리연을 공격해 들어왔다. 종리연의 양손이 좌우로 춤추듯 움직여지는 듯했다. "케엑!" "큭!" 혈랑이 무더기로 거꾸러지고 있었다. 푸른 피를 품어내는 혈랑사이로 두 개의 달이 창백한 빛을 발하며 날아가고 있었다. 어느샌가 두 개의 달이 나란히 낮게 풀 위를 스치고 있었다. 종리연은 낮게 날아드는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조각달 두 개가 종리연의 양손에 잡혀들어 왔다. "......." 종리연은 혈월팔천도식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지금까지 눈을 감고 혈월팔천도법을 시전한 것이었다. "......." 눈앞에 제일 먼저 드러난 것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며 쌓여 있는 창백하기 짝이 없는 시신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승복을 걸치고 있는 시신들은 모두들 나이 어린 해골들 뿐이었다. 그들은 무량애에게 진기란 진기는 다 빼앗긴 것이다. "으으으......! 네...... 네놈이 나의 십 년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고야 말다니....... 두고 보자! 내 필히 이 원수를 꼭 갚을 것이다." 문득 무량애가 울부짖었다. 종리연은 무량애를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그가 지금까지 시전한 것은 혈월팔천도식 중에 제6도까지 였던 것이다. 나머지 2도를 채 사용하기 전에 무량애의 수하들은 거꾸러지고 만 것이었다. 그는 아직 시전해보지 못한 나머지 2도로 무량애를 끝장 낼 생각이었다. 종리연은 이제 혈월팔도식의 오의를 완전히 깨우치고 있었다. 파파팟......! 그의 손아귀에 있던 혈월검이 달빛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무량애가 몸을 솟구쳤다. 차창......! 허공에서 검명(劍鳴)이 울리며 일순 은백(銀白)의 불꽃이 일었다. 순간 자욱한 피보라가 허공 가득히 퍼졌다. "크윽! 다... 당했다." 곤두박질치며 떨어져 내리는 무량애의 입에서 통한의 울부짖음이 새어 나왔다. "대...... 대단한 검식이다. 이갑자 내공의 힘을 무너뜨리다니! 크흐......! 그러나 포기하지 않겠다. 언젠가는 반드시 네 목을 취하리라......." 무량애는 이를 갈아부치더니 곧 어둠 속으로 신형을 감추고 말았다. 종리연은 손에 쥔 혈월도를 만지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야 혈월팔천도식의 오의를 완전히 깨달았다. 하늘이 내게 부여해 준 임무와 함께! 기필코 하늘의 뜻을 이루리라." 다짐하듯 중얼거리던 종리연은 혈월도를 소매 속에 감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이 생각난 것이었다. 종리연은 신형을 날렸다. 그는 자비장원의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었다. 어느새 자비장원은 텅 비어 있었다. 무량애가 사라지면서 수하들을 전부 철수시킨 듯했다. "전홍! 전홍......!" 32 사성녀(四聖女) 딸그락, 또다시 패(牌)가 뒤집어 졌다. "......?" 작고 아름다운 손 하나가 패를 들었다. "만날 봉(逢)이라...... 그럼 오늘은 만나게 된단 말인가?" 맑고 청아한 음성이 모옥 안을 울리고 있었다. 바로 궁단향이었다. "오늘...... 그분을 만나게 된단 말이지?" 궁단향은 웬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패를 던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아침에도 그녀는 16회나 패를 던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패를 던질 때마다 똑같은 글자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봉(逢)이었다. "......!" 밖에서는 새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흐르는 황하의 물소리와 함께 아침의 청량한 공기가 모옥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화창했다. 마치 하늘도 오늘 그녀가 기다리는 누군가를 맞이하려는 것처럼. 궁단향은 아침 노을이 반사되어 흐르는 황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 궁단향의 호흡이 한순간 멎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한 곳을 응시했다. '틀림없구나! 오늘 만난다고 하더니......!' 막 떠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모옥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한 대의 마차도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궁단향의 얼굴은 붉어졌다. 그녀는 얼른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급히 동경 앞에 앉았다. 손질하고 말 것도 없는 머리와 옷차림이었으나 그녀는 다시 한 번 손을 보고 있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궁 낭자...... 궁 낭자 안에 계신가요?" 무척이나 밝아보이는 청년의 음성이었다. 하늘은 늘 공평하다. 산이 높으면 반드시 깊은 골짜기가 있는 것처럼 묶여진 것이 있다면 그와 상대되는 풀 수 있는 힘도 어딘가에 감추어 둔다. 쇠락(衰落)과 죽음의 겨울이 있기에 성숙(成熟)과 생명(生命)의 여름이 있는 것처럼. 중원 무림을 피로 씻으려는 잔악무도한 삼패천에 대응하기 위해 하늘이 만들어 놓은 것. 그것은 바로 사성녀이다. 천기(天氣)가 조화롭게 만든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운명의 굴레가 1남 4녀를 한 자리에 모이게 하였다. 언뜻 보아서는 도저히 한 곳으로 모일 수 없는 사람들을 말이다. 하늘이 정한 운명이란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법리를 가지고 있는 것인 듯,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다름아닌 사성녀(四聖女). 방의경과 화안봉, 그리고 궁단향이었다. 나머지 한 명인 단리사영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태실봉에서의 조천백과의 싸움으로 그녀는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종리연 일행이 이곳으로 온 것은 바로 단리사영 때문이었다. 단리사영이 궁단향의 거처를 알려준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운명의 사성은 결국 한 자리에서 조우(遭遇)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한 남자를 중심으로. 모옥의 방 안으로는 뽀오얀 아침 햇살이 들고 있었다. "아프지 않아요?" 방의경은 단리사영을 위로했다. 차갑고 무표정하던 단리사영의 눈에 한가닥 따스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괘...... 괜찮아요. 저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하셨어요. 좀 쉬셔야지요." 부끄러워하며 단리사영이 말문을 흐렸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도......." 언뜻 방의경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어렸다. "어떻게 저보다도 먼저..... 아기를 갖게 되었을까? 내가 제일 먼저 공자님을 차지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는 음성이었다. 일순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단리사영을 돌아 보았다. 그들의 입가에는 한결같이 웃음이 베어 있었다. "......!" 다음 순간 단리사영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어쩔줄을 몰라하며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한편 종리연의 표정은 어떤가? "이... 임신이라구? 단리사영이......?" 순간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러나 그것은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한마디로 단리사영에 대한 고마움과 안쓰러움, 그리고 쑥스러운 마음 때문에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단리사영의 임신은 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값비싼 대가였다. 만약 그때 단리사영이 자진해서 옷을 벗지 않았다면 종리연은 이미 저승 사람이 되어 있었으리라. "고...... 고맙소! 사영!" 종리연은 와락 달려들어 단리사영을 끌어 안았다. "아얏......! 아파요. 살살 하세요." 단리사영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부끄러워 하면서도 종리연의 품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종리연과 방의경, 화안봉은 새로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원래 모옥에는 두 개의 의자밖에 없었으나 그 동안 궁단향이 새로 세 개를 더 마련한 것이었다. 단리사영은 지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검을 잡은 이후로 아마 처음 취해보는 낮잠일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하염없이 밝고 평화로웠다. 옆 방에서는 궁단향이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돕고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전홍이었다. 종리연은 자비정원의 지하 석실 안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전홍을 발견하고 구해 온 것이었다. 전홍은 궁단향과는 이미 구면(舊面)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성장했고 해노인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결혼을 한 적이 있었다. "아가씨. 불을 더 지필까요?" 전홍이 쑥스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며 묻고 있었다. 궁단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시겠어요?" 어느 순간부터 차를 달이는 향긋한 냄새가 모옥 안을 그윽하게 감돌고 있었다. "......." 3인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윽고 차가 다 끓은 듯 궁단향이 찻잔을 받쳐들고 건너왔다. "드시죠. 그러나 양해하세요. 차 끓이는 솜씨가 형편 없으니까요." "......." 3인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깨기라도 하듯 궁단향이 방긋 웃었다. 이어 그녀는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절 왜 찾아오셨는지 알고 있답니다. 저 또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궁단향은 말끝을 흐렸다. 종리연은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궁단향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사성녀 가운데 궁단향이 가장 나이가 많은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는 제일 나이가 어렸다. "아쉬운 일이에요. 제게 너무 늦게 오셨어요. 이 년 전쯤만 왔어도......." 궁단향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누구에게인지 모를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들으면 꽤나 당돌하게 여겨질 그런 질문이었으나 3인은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왜냐고요?" 말을 끝마친 궁단향은 3인의 눈을 하나씩 응시했다. "......." "여러분도 이미 아시겠지만...... 삼패가 탄생한 것은 하루 아침이 아니라 이백 년 이상이에요. 그들은 그 동안 끊임없이 힘을 축적해 왔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그 힘은 정점(頂點)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어요." "......!" 종리연을 비롯한 두 여인은 안색이 변했다. 상황을 짐작한다는 듯이 궁단향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물론...... 여러분에 의해 삼패의 하나인 조천백이 죽었다는 것은 알아요.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에요. 오히려......." 궁단향이 다시 말을 끊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잇고 끊음으로써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주어 이야기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는 것같았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니?' 종리연은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가 이 소녀는 무엇을 말하려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좀더 참고 듣기로 했다. 사실 종리연은 마음 속으로 궁단향을 조금쯤은 무시하고 있었다. 종리연이 언뜻 보기에는 그녀가 너무나 어려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삼패를 준동시켜 더욱 위험한 경우를 만들었을 뿐이에요." 종리연은 마침내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떼었다. "난 이해할 수가 없소." 그러나 궁단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입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하려는 말의 뜻은 알아요. 그러나 그건 진정한 삼패(三覇)의 힘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삼패란 문백, 천백, 황백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그럼?" 3인의 얼굴이 일시에 일그러졌다. 궁단향의 말은 자기들이 알고 있던 상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었다.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황백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 종리연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궁단향의 말뜻을 알 것도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궁단향은 그의 표정을 무시했다. 그녀의 말은 청산유수(靑山流水)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사실 삼패를 꺾으려면 그들의 완성되지 않은 수련 기간 중에 꺾어야 했어요. 그러나 이미 그는 완성되었어요." 종리연은 반박했다. "하지만 사성이 합치면......?" 그러나 그의 말은 궁단향에 의해 즉각 제지되었다. "틀렸어요." "......?" 종리연은 물론 그때까지 아무런 미동도 없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화안봉과 방의경도 놀란 표정으로 궁단향을 바라보았다. 궁단향은 잠시 침상에 누워 있는 단리사영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나즈막하게 입을 열었다. "삼패는 아직 그대론데 사성은 도리어 삼성으로 줄었어요. 그러니 우리의 힘은 약세가 된 거예요. 더군다나 사성이 삼패를 꺾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법은 없어요. 오직 상대할 수 있다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한 명이 줄어든 지금은 그만큼 더 어려워진 것이죠." "으음......!" 종리연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궁단향의 말은 옳은 것이었다. 사성이 힘을 합하면 삼패를 꺾는다라고 절대적으로 호언장담(豪言壯談)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무한진인도 그렇고 백미성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성의 힘을 모아 삼패천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했지 사성이 힘을 합치면 능히 삼패를 물리칠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하늘의 뜻. 사성이 힘을 합쳐 싸우거나 겨뤄보아야지만 승패는 판가름나기 마련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삼성의 힘으로 승리하기란 아득한 일이었다. 종리연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 궁단향은 문득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을 대하는 순간 종리연은 그녀의 맑은 눈빛이 자신을 투시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어떤 면도 그녀의 눈앞에서는 그대로 투영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알지 못하겠소. 도대체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이오?" 그때 궁단향이 그윽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종리가가." "......!" 종리연은 그녀의 다정한 호칭에 한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궁단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이었다. "가가께서는 힘을 얻으셔야 해요." "힘?" "그래요. 바로 힘이에요. 사성을 하나로 만든 것은 가가의 능력이에요. 그러나 진정한 힘은 가가에게서 우러나와야 해요. 어차피 사성은 가가를 위해서 존재하니까요." "내가 무슨 힘을 얻는단 말이오?" 종리연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궁단향은 부드럽게 그를 응시했다. "할 수 있답니다. 가가야말로 기재(奇才) 중의 기재인걸요." 종리연은 피식 웃었다. "나는 우둔한 바보요." 궁단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천하의 사성녀를 감복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자신을 바보라고 하나요? 세상에서 당신처럼 재질이 비범한 사람이 또 어디 있나요?" "......!" 종리연은 말을 잃었다. 사실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옳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오로지 그의 힘으로 사성녀를 얻지 않았던가? 내용이야 어쨌건 말이다. 종리연은 방의경과 화안봉, 그리고 궁단향의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천하에 그토록 도도한 여인이 어디 있으며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이토록 지혜로운 여인은......? 그리고 지금은 폐인이 되긴 했지만 그토록 강한 여인을 누가 얻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것은 오로지 종리연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남궁환인이었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런지는 미지수였다. 남궁환인이 사성녀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는지 아닌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그러나 종리연은 아직도 납득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종리연은 손을 벌렸다. "힘......? 힘을 가져서 나쁠 것은 없소. 그러나 대체 어떻게 힘을 얻으란 말이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궁단향은 미소지었다. "지금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일천육백 년의 백련교의 신비를 지니고 있는 광명비전(光明秘典)이에요. 광명비전의 진정한 주인이야말로 바로 종리가가예요." "......!" '광명비전!' '백련교!' 종리연뿐만 아니라 방 안의 모든 여인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 단어들은 너무나도 유명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궁단향은 계속 말을 이었다. "광명비전은 황하(黃河)의 수중궁(水中宮)에 비장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곳으로 이르는 길은 오직 천하에서 소녀만이 알고 있답니다. 조황백이 지난 십 년간 황하삼십육신을 동원하여 그 수중궁으로 통하는 문을 찾으려 하였지만 그는 아마 영원히 찾지 못할 거예요. 설사...... 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쳐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답니다.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그의 몸은 낱낱이 찢어지고 말 테니까요." 궁단향은 품속에서 하나의 금건(金鍵 : 금열쇠)을 꺼냈다. "이 광명금건(光明金鍵)이 없는 한은 말이에요." "......!" 중인들의 눈에 경이(驚異)의 빛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에 종리연은 심금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방의경이나 화안봉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종리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오.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빠질 수 있단 말이오?" 궁단향은 갑자기 쿡쿡 웃었다. 무엇인가를 생각했다는 듯이. 그리고 되물었다. "어떤 상황이요?" "천백이 죽은 이상 틀림없이 그들이......." "걱정말아요. 문백의 처리 문제는 이미 내정되어 있어요. 그것은 우리들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 "내일밤 삼경(三更)에 종리가가는 수궁으로 들어야 해요. 그때가 수류가 가장 약할 때니까요." 종리연은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밤이었다. 강변의 밤은 차분하게 깔리고 있었다. 하늘을 반으로 가르며 흐르는 은하수처럼 황하의 물도 밝게 빛나며 흐르고 있었다. 하늘의 은하수가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황하의 물 속으로 비쳐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벌써 가을을 예감하고 있는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만약 이 바람이 없다면 지난 여름의 그 뜨거운 태양빛을 인내(忍耐)로 이겨낸 수많은 과일나무들에게도 단맛이 베이지는 않으리라. 그러한 밤바람을 맞으며 궁단향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종리연 일행이 모옥으로 방문했을 때부터 줄곧 밝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적인 것뿐이었다. 실제 그녀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손수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단 한 가지라도 실수를 하거나 허술하게 행할 수 없는 것들로 무림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골똘하며 얼마나 걸었던 것일까? 궁단향은 문득 앞 쪽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누구...... 죠?" 그녀의 심장은 바짝 오그라들었다. 그녀는 무공(武功)의 무자도 모르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무공을 익혔다면 오늘의 다지성녀는 태어나지 않았을런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무공이 없는 나약한 소녀가 혼자서 밤길을 가는 데 누군가가 앞을 가로 막는다면 겁에 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때 전면의 그림자가 소리없이 다가왔다. "헉......! 누...... 누구......?" "나요. 궁 소저......." "아...... 난 또......." 궁단향은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앞에 서 있는 인영은 바로 종리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앗...... 이게 무슨......?" 궁단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종리연이 그녀를 와락 끌어 안았기 때문이었다. 종리연은 그녀를 억센 팔로 끌어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 사성을 모두 얻지 못했소. 그래서......." "......!" 궁단향은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있...... 으읍......!" 그녀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종리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자 궁단향의 가슴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뛰고 있었다. 종리연은 그녀를 번쩍 안고 어디론가로 날아갔다. 궁단향은 정신이 멍하고 머리 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 사람은......' 아무리 현명한 궁단향이었어도 종리연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잠시 후. 종리연은 그녀를 도화림(桃花林) 가운데로 데리고 갔다. 그는 그녀를 안고 쓰러졌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그의 입술이 궁단향의 입술을 눌렀다. "아읍...... 이건...... 하...... 학...... 당신......!" 궁단향은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녀는 온몸의 힘이란 힘은 모두 사라지면서 알 수 없는 신비한 느낌이 전신을 달리는 것을 느꼈다. "아으...... 음......!" 아무리 현명한 여인이라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종리연은 분명 말했었다. 자기는 사성을 아직은 모두 얻지 못했다고. 그것은 곧 궁단향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뜻이자 그를 차지하겠다는 이중의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니....... 밤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궁단향의 옷이 벗겨지고 있는 동안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춥다고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시원했다. 그녀는 별을 보고 있었다. 밤 하늘의 별들은 수없이 많은 인간의 운명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었다.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죽음과 생성(生成)....... 문득 하복부에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악......!"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이물감이 한 번도 침범하지 않은 그녀의 비지(秘地)로 종리연의 그것이 침입해 온 것이다. 종리연은 그녀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궁단향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가책을 느꼈다. 그녀의 눈 가장자리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오. 하지만 나로서는......." 종리연은 사부의 죽음과 사형의 죽음이 결국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언을 남겼다. 사성을 모두 아내로 삼아야 한다고 말이다. 삼성은 어떻게든 얻을 수 있었으나 아직까지 궁단향은 그의 여인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내일이면 수궁으로 들어가 광명비전을 얻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어떤 편법으로든 궁단향과 맺어져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마침 그녀가 혼자 산책을 나왔고, 그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쓴 것이었다. "용서하시오......." 그러나 궁단향은 문득 그의 아래에 깔린 채 눈물 그렁한 눈으로 웃었다. 그 웃음은 가슴이 저미도록 아름다운 것이었다. "아니예요...... 어차피 저도 원한 것이었나 봐요. 바보같이...... 난 오만하게 좀더 그럴 듯한 구실을 찾고 있었어요. 가가의 행동이 옳았어요. 저의 오만을 깨우치게 해주신 것...... 정말 고마워요." "......?" 종리연은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일시에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곧바로 궁단향은 손을 뻗어 종리연의 목을 안았다. "입맞춰 주세요. 가가. 전 영원한 가가의 여인이에요." "......?" 종리연은 영문도 모르고 궁단향의 달콤한 입술을 찾고 있었다. 끊임없이 불어오며 가을을 재촉하는 밤바람이 그들의 땀을 식혀 주고 있었다. 33 자중지란(自中之亂) 고뇌(苦腦)란 발전을 위한 태동(胎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던 일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나 스스로의 존재가치(存在價値) 이상으로 닥쳐오는 이 엄청난 충격을 바로 그 고뇌와 같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오오...... 하늘이여......! 항상 그렇듯이 태사의에 파묻혀 있는 사나이는 이렇게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조씨 황가의 셋째인 조문백이었다.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숙명으로 받았던 성(姓)과 태어남과 동시에 운명이 선사한 이름 조문백. 세상 사람들은 그를 또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바로 삼촌살인설(三寸殺人舌)이라고. 그런 조문백의 눈앞에는 한 자루의 섭선이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정물(靜物)처럼 놓여 있는 섭선은 한때 위엄과 존경, 그리고 박동(拍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죽어 있는 정물에 불과했다. "형님......!" 조문백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며 떨어졌다. "혀... 형님......!" 그는 연신 울먹였다. 섭선의 임자는 그에게 있어 정신적인 지주였다. 항상 강했으며, 너무도 깊은 속 마음 때문에 언제나 내심을 알 수 없었던 사람. 또한 그가 폐하라 부르는 대형(大兄)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더 존경했던 인물. '언제였던가......? 세 살이었나...... 네 살이었나......? 하루 종일 계속되는 연공(練功)이 싫어 동굴 속에 숨어 울고 있을 때 그는 나를 찾아와 맛있는 전병을 손에 쥐어주며 달래었었지...... 그런 그가...... 그런 이형(二兄)이...... 죽다니......!' 믿을 수 없는 비보(悲報)가 날아들었을 때 조문백은 넋을 잃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옥의 저승사자라고 해도 그를 데려갈 수는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 믿음은 하루아침에 살얼음처럼 깨어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 조문백은 내처 생각에 잠겨 들었다. '나에게는 신(神)이었던 사람. 어떻게 신이 쓰러질 수 있단 말인가? 감히..... 감히......!' 형인 조천백의 죽음은 이제 슬프기보다는 그에게 증오감(憎惡感)을 심어주고 있었다. 절대적(絶對的)이라 믿었던 사람이 그토록 넋없이 가버린 것에 대한 배반감 때문이기도 했다. '어......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어떻게......!' 벌써 4일째였다. 4일째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조문백의 고뇌는 바위를 치는 파도처럼 한순간의 휴식도 없이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문득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를 깊은 고뇌와 슬픔의 장벽(障壁)에서 헤어나오게 했다. "누구냐?" 조문백은 독기어린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폐......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삼왕야......." 문 밖에서 들려온 음성이 울먹이고 있었다. 그것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여인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순간 조문백의 안색이 변했다. 그것은 한 번이 아니라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 "사...... 삼왕야......" 다시 울먹이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쩔 수가 없었다. 조문백은 한숨을 쉬며 입술을 열었다. "알았다. 물러가라......." "당장......! 당장 전군(全軍)을 발동하지 못하겠느냐?" 쩌르르릉......! 조황백의 분노에 찬 외침은 대전(大殿)을 기둥째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문백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는 치밀한 사전 전략없이 삼패천이 움직였기 때문에 조천백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됩니다. 폐하!" "왜? 왜 안 된다는 것이냐? 짐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다!" "그래도 아니됩니다." "이런 발칙한...... 네놈이 죽고 싶으냐?" 조황백은 마침내 벌떡 침상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조문백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에서 이상한 발광(發光)이 일어나고 있었다. "잊으셨습니까? 이왕야께서 서거(逝去)하신 지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입니다. 그분에 대한 예우(禮遇)를 위해서라도 장례(葬禮)는 치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순간 황백의 몸이 바람도 없는데 푸르르 떨었다. "천백의 장례......? 으음......!" 그는 털썩 태사의에 주저앉았다. "으음, 좋다. 그럼 칠일장(七日葬)을 지낸다." "아니될 말씀입니다!" 조문백이 또한번 강하게 외쳤다. "뭐라고......?" "이왕야는 엄연한 송조(宋組)의 왕야(王爺)이십니다. 황가(皇家)의 장례를 그렇게 간략하게 치르는 법은 없습니다. 국법(國法)을 세울 우리 황가에서 황가의 존엄성(尊嚴性)을 무시하는 것은 곧 황가 스스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칠일장은 평범한 백성이나 치르는 것입니다." 조황백의 표정이 잠시 누그러졌다. "그럼...... 며칠 장으로 했으면 되겠느냐?" "백일장(百日葬)입니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조문백이 말했다. 순간 조황백의 눈썹이 무섭게 곤두섰다. "안 돼!" "왜......? 왜 아니된다는 말씀입니까?" "짐은 참을 수 없다. 천백을 죽게 한 무리들을 더이상 살려 둘 수가 없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어찌 짐의 마음이 편하겠느냐? 차라리 놈들의 수급을 베어 장례의 제단에 올리겠다." 조문백은 고개를 저었다. "장례기간에는 피를 흘려서는 아니되는 법입니다." "법은 무슨 법. 짐이 곧 법이다!" 꽝! 분이 북받친 나머지 조황백은 돌로 된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는 즉각 가루가 되어 석분(石粉)을 허공에 흩뜨리고 있었다. 무서운 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조문백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는 완강하기만 했다. 그의 입에서는 여전히 단호한 말이 흘러나왔다. "백일장을 치르는 동안 모든 활동을 중지해야 합니다." "으으...... 이 바보같은 놈......!" 분을 못이긴 조황백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튼 신(臣)은 그렇게 알고 장의를 준비하겠습니다." "......!" 조문백은 일어서서 절을 한 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조문백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조황백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광이 뻗어 나왔다. 그는 또다시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러나 내려칠 곳이 없었다. 가까스로 살광을 억누르며 조황백은 조문백의 뒷전에 대고 명령했다. "너의 말을 따르겠다. 그러나 장례일은 사십구일로 한다." "......." 미동없이 걸어나가는 조문백은 아무 말이 없었다. 포랑진의 모옥에는 방문객이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 그들은 아주 평범한 자들이었다. 어부들도 있었으며, 객점의 사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농부나 장사꾼도 있었다. 어떤 날은 떠돌이 거지 차림의 사내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모옥에 드나드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왜냐면 그들이 모옥을 방문하는 시각은 늘상 깊은 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방문객들이 드나든 이후부터 궁단향은 산더미같이 밀려드는 보고서를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포랑진에 자리잡고 살기 시작한 6년간에 걸친 모든 정보들이었다. 지금 그녀는 그것을 다시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매일 답지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결같이 한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궁단향은 그 인물에 대해서 생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벌써 삼십이 일째...... 그는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있어. 아마도 사십구 일을 채우는 동안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 이상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은 그가 애초에 말한 것처럼 사십구일제가 아닌 백일제를 고집하는 것이야.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그를 무너뜨리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야.......' 바로 그때였다. 삐이걱! 방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여인이 있었다. 방문 소리에 놀란 궁단향은 곧 뒤돌아 보았다. "......?"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궁단향은 의아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 모옥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뜻밖에도 꽃바구니를 든 소녀였다. 커다란 눈이 너무나 슬퍼 보이는 나머지 사소한 말 한마디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주르르 흘릴 것만 같은 애처로운 소녀였다. 궁단향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눈을 가진 소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동정심과 연민을 느끼게 했다.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면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그 말에 소녀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궁단향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눈물에 감염되어 스스로도 비감(悲感)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이때였다. 갑자기 소녀가 허리를 잡고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깔깔깔......! 나야, 나. 아니 나를 모른단 말이야? 향매?" 느닷없이 깔깔거리는 소녀의 얼굴이 변한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봉...... 봉 언니!" 궁단향은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꽃바구니의 소녀는 바로 화안봉이었던 것이다. "어...... 어쩜!" 그때서야 궁단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화안봉의 미령심안공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향매. 이제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마침내 제 모습으로 돌아온 화안봉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그러나 궁단향은 정색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직 멀었어요. 언니는 그가 천하의 지마(智魔) 조문백임을 잊지 말아야 해요." "호호호...... 물론! 그러나 나 역시 천하의 화안봉이야. 그것도 잊지 말라구." 화안봉은 자신 있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그 바람에 궁단향은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봉 언니의 미령심안공은 화경(化境)에 접어 들었구나. 나까지도 봉 언니의 미소 한 자락, 표정 하나에 감염될 정도니.......' "가셔야 합니다......!" 문 밖에서 8번째의 사자(使者)가 부르짖고 있었다. 그의 목은 이미 쉴 대로 쉬어 있었다. 그러나 안에서 들리는 말은 한결같은 것이었다. "아니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황명(皇命)이십니다. 사십구제가 끝난 지금...... 더이상 삼왕야(三王爺)께서 칩거하시는 것은 삼패천의 기(氣)를 꺾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일어나셔서...... 폐하(陛下)를 뵈어야 합니다." 방 안에는 조문백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비록 황백은 사십구제를 치르라고 명했지만 그는 백일제를 고집하고 있었다. 사십구제가 지나 수하들이 이미 제단을 걷어 치웠으나 오직 그만은 방 안에 틀어박혀 조천백의 제일(際日)을 지키고 있었다. 벌써 일곱 번이나 황백은 수하를 보냈다. 그러나 문백은 그때마다 단호하게 불응하고 있었다.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그는 대형(大兄)의 명(命)을 어기고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분노와 슬픔이 짙게 깔려 있는 탓이었다. '이형(二兄)의 죽음은 어쩌면 황백 당신의 무심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오!' 조문백은 수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조천백은 하늘(天)같은 의미였다. 대형 조황백에게서 느끼지 못한 모든 면을 조천백이 대행해 오지 않았던가. 조문백을 사로잡고 있는 이러한 생각이 결국 황명(皇命)을 거부하는 배경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황백은 천백이 죽었는데도 슬퍼하는 기색 하나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패업(覇業)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당신은 야속한 사람이오......!' 이것이 황백을 떠올릴 때마다 조문백이 갖게 되는 야속한 심정이었다. 이제 조문백은 모든 것이 싫었다. 어쨌든 그는 100일이 지날 때까지는 꼼짝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삼왕야......!" 8번째의 사자는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대로 돌아간다면 그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벌써 일곱 명째 헛탕을 치고 돌아간 사자들이 모두 황백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죽는 모습을 눈으로 본 사자는 설사 이곳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삼왕야...... 제발......!" 바로 그때였다. 방 안에 앉아 있던 조문백의 눈에서 언뜻 푸른 살광이 일어났다.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문을 열었다. "아...... 왕야......!" 그는 너무나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건 찰나적일 뿐이었다. 그가 고개를 쳐든 바로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두개골이 으스러졌다. "으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조문백은 일장으로 사자를 쳐죽인 다음 문을 쾅, 하고 닫았다. "뭐...... 뭐라고? 놈이 감히 사자를 죽였다고?" 태사의에 앉아 있던 조황백이 보고를 듣고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두 눈에서는 핏빛 광채가 쏘아져 나오고 머리칼마저 온통 곤두서고 있었다. 아우 조문백을 불렀으나 벌써 일곱 번째나 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여덟 번째 보낸 사자를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으으...... 놈이 감히...... 반역을 하겠다는 건가?" 그는 부르르 떨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놈을 직접 죽이겠다!" 그때였다. "폐하......." 문득 등 뒤에서 울먹이는 듯한 가냘픈 음성이 그를 붙들었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 설화였다. 설화가 온통 비에 젖은 배꽃인 양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로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애원을 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조황백은 문득 봄눈 녹듯 분노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설화만 보면 그의 격동하던 마음은 평화롭게 가라앉는 것이었다. "끄응!" 외마디 신음을 내며 조황백은 도로 태사의에 주저앉고 있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자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설화를 항상 가까이 두면서도 한 번도 그녀를 범한 적이 없었다. 왠지 그녀를 범하면 안 될 것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알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설화를 곁에 둔 채 그는 수없이 많은 다른 여인들을 잔인하게 유린함으로써 욕망을 해소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만은 달랐다. 조문백의 일로 그의 가슴은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떤 수를 쓰든지 그를 끌어내고 싶었다. "문백 그놈이...... 으음...... 그렇다면......!"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이어 침상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벽에 걸린 한 장의 산수화(山水畵)를 걷어냈다. 벽면에는 비밀 벽장이 있었다. 벽장 속에서 조황백은 금빛 찬란한 물체를 꺼내고 있었다. "만일...... 이것을 보고도 놈이 오지 않는다면......!" 조황백의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광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설화를 바라보았다. "설화. 네가 이것을 가지고 문백을 찾아가라. 그리고 내가 부른다고 전해라." 설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물기가 흐르는 눈에서는 놀람의 빛이 역력히 일어나고 있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그녀의 눈에는 황백의 손바닥 한가운데 놓여 있는 황금빛 물체가 비쳐지고 있었다. 관(棺). 영원히 썩지 않도록 시신(屍身)을 보존할 수 있는 수정관(水晶棺))이었다. 그 관 속에는 조천백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그의 모습은 잠자는 듯 편안해 보였다. 한 동안 조천백의 시신을 내려다 보던 조문백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형님....... 살아 있는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어찌 먼저 죽은 형님만은 그렇게 편안한 표정입니까? 흐흐...... 너무 하시는구려. 이 문백은 형님이 원망스럽소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조천백의 시신은 그저 하나의 정물이 되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조문백은 장례 기일 동안 관 옆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조황백의 명령으로 수하들이 사십구일장이 끝나 제단을 치우자 그는 관을 메고와 아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삼패천의 모든 조직은 마비현상(痲痺現狀)을 보이고 있었다. 삼패의 총군사(總軍師)인 그가 움직이지 않는 한 모든 기능은 당연히 공전(空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똑똑....... 문득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문백은 돌아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또 어떤 놈이 죽으러 왔느냐? 다시 말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본좌는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 다음에 들려온 한가닥 음성은 그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왕야님......." '설화!' 조문백은 전류에 감전된 사람인 양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홱 몸을 돌렸다. 그는 한 동안 문을 노려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과연 설화였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다소곳이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서 있는 모습. 그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가슴을 뒤흔들게 했다. "여긴...... 왜...... 왔느냐?"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조문백은 짜증을 냈다. 마음과 달리 그는 설화를 대할 때면 늘 그래왔던 것이다. 이 또한 설화란 여인이 주는 마력에 항거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을 보내셨습니다." "......?" 설화가 소중한 듯 가슴에 안고 있던 보자기를 끄르는 순간 조문백의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격렬한 떨림을 보였다. "오...... 옥새(玉璽)!" 설화가 펴보인 것은 용(龍)과 봉(鳳)이 정교하게 조각된 황제의 어인(御印)이었다. 다름아닌 송 왕조(宋王朝)의 옥새였던 것이다. 찬란한 금빛을 발하는 옥새를 바라보는 조문백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켰다. '형님....... 지나치시구려! 설화를 보낸 데 그치지 않고 옥새마저 보내다니.......'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황백이 옥새를 보낸 뜻은 명백했다. 만일 그 명까지 거부한다면 형제 간의 관계는 물론 군신(君臣)의 관계까지 끝장 내겠다는 무언(無言)의 경고(警告)가 아닌가? 아무리 조문백이라도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는 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 알았다." 34 미령심안공(迷靈心眼功) "......."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핏빛 안광이 튀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의심의 눈빛이었다. 원래 그 눈은 동일한 뜻을 품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가자고 굳게 맹세하던 눈이었다. 형제애(兄弟愛)로서, 그리고 송조(宋組)의 마지막 황족(皇族)의 피를 이은 황가로서의 맹세를 나누던 두 쌍의 눈(眼). 그 눈빛은 이제 각기 색(色)을 달리하고 있었다. 하나의 눈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눈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를 여실히 비난하고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한때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던 눈빛은 이제 그토록 다르게 퇴색되어 버린 것이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침묵으로 일관하던 조문백은 한참 후에야 마지 못한 듯이 입을 열었다. 마침내 그는 황백의 부름에 움직인 것이다. 조황백은 묵묵히 그를 응시하다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너는 짐의 어느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조문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있을 텐데." "......." 조문백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한 동안 조문백을 쏘아보던 조황백은 마침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로서는 최대한으로 인내를 감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잘 들어라. 너는 나의 동생이기 전에 짐의 신하다. 그리고 대송제국(大宋帝國)의 군사(軍師)이기도 하다. 너는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묵묵부답(默默不答) 속에서 황백을 쏘아보는 조문백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형님의 동생 입장이 더욱 소중합니다. 대송제국이던 무엇이던....... 그 사실이 제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음성이 되어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황백과 자신의 세계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이상 그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였다. 무엇보다도 형제를 생각하고 아끼는 방식(方式)이 달랐던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조천백의 죽음. 그것이 모든 것을 균열지게 한 원인이었다. 문득 조황백은 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그는 아우인 문백을 바라보다 무엇인가를 느낀 것이었다. "......!" 그는 동생이 더이상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문백의 눈동자는 분명히 그를 향하고 있었으되 초점은 그를 비켜나 먼 곳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조황백은 가슴이 무섭게 끓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미 문백이 자신으로부터 떠나버린 것을 알았다.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나 조황백은 역시 조황백이었다. 그에게는 형제애보다 대송제국의 부활이 더욱 컸다. 그는 야망(野望)의 화신이었으며 야망의 달성을 위해서는 그 이상도 희생시킬 위인이었다. 그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라. 약간의 시간을 주겠다. 그 동안 모든 것을 정리해라. 언제건 짐이 부르는 시간에 즉각 복명(伏命)토록 해라." 조황백. 효웅(梟雄)은 효웅이었다. 그는 조문백이 군사(軍師)로서 갖추어야 할 면모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비록 억지로 불려왔으되 문백이 지닌 평소의 지혜로움과 혜안(慧眼)은 지금 이 순간 조금도 발휘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문백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유예를 준다는 것이다. "황명이다. 문백 너는 즉시 이전의 너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알겠느냐?" 황백의 말이 끝났다. 그는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태사의에 앉아 눈을 감았다. 조문백은 황백의 처소를 나섰다. 그의 마음은 천근의 납덩이가 얹힌 듯 무겁기만 했다. '대체 본래의 나란 무엇이오? 이젠 나조차 나를 모르겠소이다...... 형님.' 그가 나갈 때 문 옆에 다소곳이 서 있던 설화가 고개를 떨구며 길을 비켜 주었으나 그는 설화가 지키고 서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듯했다. 그가 나간 후 황백은 설화를 바라보았다. 일순 그의 눈이 야릇한 광채를 띠었다. "이리 오너라." 그의 목소리는 참으로 오랫만에 부드러웠다. "네......." 설화는 말 잘 듣는 인형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네가 해 주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 황백의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설화는 고개를 들었다. 황백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이미 황백의 눈과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읽고 느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던 어떤 일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었다. 딸그락, 딸그락....... 궁단향은 패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패를 던졌다. 그러나 패는 매번 틀린 답을 줄 뿐이었다. '그렇다면.......' 떨어져 뒹구는 패를 주시하면서 궁단향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그녀가 느끼는 것은 하나였다. 패가 불확실 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운(運)에 달렸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제 성공이냐 실패냐는 인간의 능력 밖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만약 천운(天運)이 우리에게 있어만 준다면 실패보다는 성공할 확률이 더 많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리라.' 그녀는 이제 삼패천의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보원들이 침투해 있기도 했으려니와 방의경이 이끄는 하오문 수하들의 공(功) 때문이기도 했다. 하오문은 천하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들의 무공은 비록 보잘 것이 없으나 그들의 다양한 직업과 방대한 인원이 가지는 조직력이나 탐지(探知)에 관한 능력은 개방( 幇)을 능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방의경은 방의경대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고 있었다. 그것은 조직이 가지고 있는 힘을 총동원해 삼패천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최근 들어 궁단향은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조문백과 황백의 불화(不和)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심화(深化)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있다. 그들의 군열이 얼마만큼 깊어지느냐에 따라 성공할 확률은 더더욱 높아진다. 하늘은 끝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구나!" 그녀는 앙증맞은 주먹을 꽉 쥐면서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이 중얼거렸다. 삐이걱! 모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궁단향은 쥐었던 주먹을 풀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어느새 천진스런 소녀로 되돌아와 있었다. 들어서는 것은 화안봉이었다. 화안봉은 탁자 위의 수북한 보고서를 보고 콧등을 찡긋했다. "어때? 향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 궁단향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언니, 물론 기다리면 때는 오지요.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감이 잡혀요." 화안봉의 두 눈이 반짝 신비한 광채를 발했다. "그 때가 언제지?" "아직은 뭐라고 말할 단계가 아니에요. 패가 자꾸 바뀌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상한 것은......." 궁단향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패에 나타났다가 자꾸 사라지곤 하는 인물이 있어요. 그것은 미령심안을 지닌 여인이 황백과 문백의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이에요." 그 순간 화안봉의 안색이 변했다. "그...... 그렇다면 진짜 사성녀 중의 하나가 이미 삼패천에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니?" 놀라는 화안봉과는 달리 궁단향은 신중했다. 그녀는 화안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속단은 일러요. 그리고 제가 확신하는 것은 언니야말로 이제는 진짜와 다름없다는 거예요. 설사 진짜 미령심안이 따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빛을 잃은 상태랍니다. 더욱이 삼패 속에 있으면서도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은 이유.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녀는 삼패의 기운에 가려져 미령심안의 정기(精氣)를 잃고 있는 거예요." "그...... 그게 무슨 말이지? 향매. 내가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해 봐.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구나. 네 말대로라면 이젠 내가 진짜 미령심안의 주인공이란 말이니?" 화안봉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궁단향은 계속 어려운 말만 하고 있었다. 청아한 눈빛을 더욱 청아(淸雅)하게 반짝이면서. "만일 제 판단이 틀림없다면...... 더욱 잘된 일이죠. 비록 그 동안 삼패에 눌렸다지만 그녀는 알게 모르게 삼패의 기운을 잠식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 "만일 언니와 그녀가 안팎으로 삼패를 잠식(蠶食)한다면 의외로 문백의 죽음은 빨리 올 수 있어요." 화안봉은 활짝 안색을 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호호호...... 준비하면 되요. 조만간에 변화가 올 거예요. 그 변화는 아마도 문백의 내부 균열로부터 시작될 거예요. 그때 언니가 나타나서 그의 심기(心氣)를 뒤흔들어 놓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틀림없이 우리의 승리가 되는 거죠." "호호...... 알겠어.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할까?" 화안봉이 화사하게 웃었다. 밤(夜)이다. 밤은 어디에도 온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땅으로 스며들던 밤. 밤은 이윽고 땅에서 가옥(家屋)으로 그림자를 늘이다가 마침내는 가옥에서 사람의 마음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렇게 인기척 없이 다가와 온 세상(世上)의 사람과 사물(事物)을 점령하는 것이 밤이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생명없는 것들에게 침묵(沈默)을 주는 것이다. 조문백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은밀하게 찾아온 한 인영과 밀담을 나눈 후였다. 그가 돌아간 후부터 조문백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도 어둠이었고 마음도 어둠이었다. '영원히 햇볕이 들지 않는 곳이 있다면.......' 바로 그곳으로 조문백은 도망치고 싶었다. "......." 수정관(水晶棺)은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조문백은 수정관을 어루만지며 지금의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후후...... 나 문백이 이런 모습이 될 줄이야. 천하의 삼촌살인설인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후훗.......' 그는 쉬지 않고 수정관을 쓰다듬고 있었다. 수정관의 싸늘한 감촉은 정말 좋았다. 뿐만 아니라 수정관 안에 누워 있는 천백이 부럽기까지 했다. 지금 살아 숨쉬고 있는 자신이 도리어 죽은 것같았다. 반대로 죽어 숨을 쉬지 않고 있는 조천백이 살아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후후! 형님이 부럽소. 이렇게 평화로운 모습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형님이 부럽단 말이오.' 문백은 여전히 관을 쓰다듬으며 천백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둠의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 조문백은 눈을 치떴다. 언제부터 들어와 있었던 것일까? 방 안에는 흰 옷을 입은 가냘픈 인영이 서 있었다. "......." 인영의 정체를 알아보는 순간 조문백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야 말았다. "설화......!" "왕야......." 조문백은 부르르 떨었다. 곧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 무슨 일이냐?" "......." 설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리 완벽한 어둠의 신이라도 그녀를 잠식하지는 못할 것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설화는 눈이 부신 흰빛을 보이고 있었다. 옷도 희었다. 뿐만 아니라 피부도 희었다. 아마 꿰뚫어 보는 자가 있다면 그녀의 영혼도 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리라. 바로 그 순간 착각이었을까? 조문백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설화가 그의 면전(面前)에서 옷을 벗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화......!" 설화는 말없이 옷을 벗고 있었다. 마치 운명인 듯 감내하면서 소리없이 옷을 벗고 있었다. 사르락...... 사르락! 방 안은 어두웠으나 그녀의 백설같은 피부가 드러남에 따라 보석인 양 환하게 어둠이 밀려가는 듯했다. '이...... 이게......?' 조문백은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헛것이 아니었다. 사르락...... 사르락....... 분명 옷감이 흘러내리는 소리와 함께 따스하면서도 은은한 여체의 육향(肉香)이 느껴졌다. 이윽고 설화가 완전한 나신이 되는 순간 부드러운 여체의 모든 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수정관의 빛을 받아 반사되는 그녀의 육체. 그것은 이미 지상의 것이 아니었다. "무...... 무슨 짓이냐?" 조문백은 부르르 떨며 뒷걸음질 쳤다. 벌거벗은 설화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그를 향해 다가올 뿐이었다. 비단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녀의 앞가슴을 덮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설화의 하얀 젖가슴이 드러났다가 감추어지곤 했다. 이윽고 조문백은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졌다. 그의 등이 벽에 닿았을 때 설화의 나신도 어느새 그의 가슴에 안기고 있었다. "......!" 아찔한 현기증이 조문백을 사로잡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안았다. 손에 닿는 육체의 감촉은 조문백을 황홀경으로 이끌고도 남았다. 얼마나 원하는 일이었던가? 그는 밤이면 밤마다 설화를 그리며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화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것은 그녀가 바로 황백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네가 나에게로 오다니...... 그것도 네 발로 걸어서.......' "으......음......!" 조문백은 자신도 모르게 억제하고 있던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설화를 보듬고 있는 조문백의 온몸이 마른 장작개비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저히 끌 수 없는 뜨거운 불꽃이었다. 이성적이고 냉철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문백도 지금 혈관 속을 맹렬히 치달리는 욕망 앞에서는 한낱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 그는 황백이나 천백처럼 패도적으로 여인을 탐하지는 않았다. 오직 그가 지금까지 원해 왔던 여인은 지상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여인이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원했던 여인....... 그것은 다름아닌 설화였다. 그 동안 그는 다른 여인을 일체 품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남자였다. 수시로 타오르는 욕망을 발산하지 못하는 그의 가슴에는 한이 쌓이고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 한을 풀 수 있게 된 것이었으니....... 그는 설화의 육체에 입술을 대었다. 그녀의 육체는 손이건 입술이건 살짝 대기만 해도 미끄러질 정도로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설화...... 설화...... 설화......!" 문백은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설화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설화는 미동도 않고 선 채 그의 애무를 받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몸은 조금도 달아오르지 않고 있었다. "설화...... 오! 설화......." 문백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백의 죽음 이후 그는 제대로 잠을 자기는커녕 식사조차 거의 전폐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상아처럼 굳건하던 정신력도 지금 이 순간에는 허약하기 그지 없었다. 조문백은 겉잡을 수 없는 욕망이 전신을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게 하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설화의 빙기옥골과 같은 나신에 입술을 문지르며 무아경에 빠지고 있었다. "아......." 설화의 입술에서도 마침내 한가닥 신음이 흘러 나왔다. 환희의 신음이었는지 아니면 고통의 신음이었는지는 오직 그녀만이 알 일이었다. 그러나 조문백에게 그 신음은 희열의 신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설화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선 자세였다. 조문백은 소중한 듯 그녀의 목에서 어깨, 그리고 유방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설원(雪原)이 이러할까? 설원의 천년설(千年雪)을 이고 있는 고봉인들 이러할까? 그것은 평온. 온전한 평온의 느낌이요, 모성(母性)의 느낌이다. 조문백은 설화의 가슴을 입술로 문지르며 아득히 먼 과거 따뜻했던 어머니의 젖무덤에 파묻혀 있던 시절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의 입술이 도드라진 한 부분에 이르러 잠깐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세차게 빨았다. 입 안에 밀려들어온 유실(乳實)은 너무나 부드러워 그대로 녹아버릴 듯했다. "흐윽...." 설화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는 무너질 듯 무릎을 휘청거렸다. 그러나 조문백이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어 자세가 더이상 무너지지는 않았다. 설화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벽에 기댄 자세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무엇을 견디는가? 무엇을 참아 내는가? 아니면 그 무엇을 기다리는가? 조문백은 이제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였다. 그의 입술이 대평원을 가로질렀다. 설화의 아랫배를 지나 한 가운데 샘에 이르러 그의 혀가 춤을 추었다. 설화는 참을 수 없는 듯 두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 손은 조문백의 머리칼을 잡을 듯 하다가 다시 허공으로 들어 올려진 채 허우적거렸다. 두 사람이 있는 실내에는 수정관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정관 속에는 조천백이 누워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뜨거운 행위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한 여인과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동생 조문백의 결합을 기꺼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조문백의 입술이 설화의 중지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왔다. 비에 젖은 풀잎! 파초의 무성한 비궁을 향해 거침없이 들어가는 순간. "......!" 조문백은 비로소 그녀의 육체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는 문득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후다닥 몸을 떼었다. 스스로 원해서 안기는 여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조문백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그는 보았다. 설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순간적으로 그의 피는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깨달은 것이다. 설화는 스스로 원해서 자신의 육체를 바치러 온 것이 아닌 것이다! 조문백은 술에 취한 듯이 휘청거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나고 있었다. 마치 그는 두려운 그 무엇을 본 듯 진저리를 치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설화도 이상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급히 섬섬옥수로 눈물을 훔치며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왕야......." 순간 조문백의 입에서 한성과도 같은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설화...... 묻겠다. 이건 네가 원한 짓이냐?" "......." 설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대답 대신 그녀의 턱 밑으로 눈물 한 방울이 바닥으로 또르륵! 떨어졌다. "으흐흐흐......!" 조문백의 입에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설화의 대답을 들은 것이다. 그 순간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치워! 치우란 말이다! 크하하하하핫......!" 조문백은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말을 안 해도 조문백은 알 수 있었다. 설화를 보낸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그것은 바로 황백! 그가 아니고 또 누구이겠는가? 조문백의 예측은 맞았다. 설화를 그에게 보낸 것은 바로 황백이었다. 황백은 실로 효웅 중의 효웅이었다. 그의 원대한 야망은 대송제국을 재건하는 것이다.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설화조차 하나의 도구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설화를 이용하여 아우인 조문백을 돌이키게 하려 한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천백과 문백 두 아우가 설화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를 방관한 것은 천백, 문백 사이에 설화가 존재함으로서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백이 죽은 지금, 문백에게 설화를 보냄으로써 그는 소(小)를 내 주고 대(大)를 취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조문백이 누구인가? 지혜에 있어 천하에 둘째라면 서러워 할 인물이었다. 잠시 이성을 잃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가슴은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으핫핫...... 으핫핫핫핫......!" 조문백은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리며 어딘가를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삼패천의 본거지는 넓다. 드넓은 황하 삼십육 채의 수채(水寨)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채에서 생활하는 인원은 가히 만여 명에 달한다. 그들은 여러가지 일들을 하지만 명령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거대 조직이었다. 게다가 조직의 인물 외에도 가족이나 방계 식솔까지 더한다면 수채와 수채 인근 지역의 인구는 두 배가 넘는다. 따라서 같은 조직 내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녀는 온통 흰꽃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머리에도 가냘픈 손에도 한 아름의 꽃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녀를 태운 가마도 온통 흰꽃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소녀는 가마에 탄 채 눈물을 흘렸다. "싫어...... 싫단 말이야......!" 소녀가 고개를 저으며 애소하는 듯한 울음섞인 말을 흘렸을 때 가마를 멘 여인들은 모두 고개를 돌리며 옷깃으로 눈시울을 닦고 있었다. "제발 이러지 말으렴! 감히 어느 누구의 명이라고 우리가 거역할 수 있겠니?" 소녀의 어머니인 듯한 여인이 소매로 눈시울을 닦아내며 말하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나지? 난 싫다니까? 싫어...... 으흐흑......!" 소녀의 애소는 여전히 계속 되었다. 이때였다. "으하하...... 허허허......." 저만치 언덕으로부터 허탈한 웃음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는 인영이 나타났다. 팔 척 장신에 바짝 마른 몸매. 일신에 청포(靑泡)를 걸친 사람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조문백이었다. 광소를 터뜨리며 휘청거리며 걷던 조문백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자신이 있는 언덕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가마를 보았다. 처음에는 무심코 눈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전체를 흰꽃으로 장식한 가마의 특이한 모습이 그의 눈길을 잡아 끌었다. 그는 허탈한 가운데서도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며 가마를 주시했다. "......!" 문득 그는 가슴을 후려치는 충격을 느꼈다. 어느새 문백의 미간은 가늘게 좁혀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가마를 탄 소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 순간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설화!' 그러나 간신히 그는 그 말을 삼킬 수가 있었다.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니 소녀의 모습은 설화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내... 내가 귀신에 홀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넋을 잃은 조문백은 가야 할 길도 잊은 듯이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일순 알 수 없는 느낌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설화......!' 조문백의 가슴이 아려왔다. 그것은 바로 소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비록 설화와 모습은 달랐지만 소녀에게서 풍기는 애처로운 분위기는 남자의 마음을 온통 뿌리째 뒤흔드는 묘한 마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가마는 어느새 그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신형을 번뜩 날려 가마를 가로 막았다. "서라! 어디로 가는 것이냐?" 조문백이 갑자기 앞을 가로 막자 그때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가마를 따르던 여인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뉘...... 뉘시온데......." "으흐흑......!" 가마에 탄 소녀는 계속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조문백은 가마로 접근했다. 그는 소녀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웬지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아라." "......?" 소녀는 느닷없는 방해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순간, 소녀의 온통 눈물 젖은 눈망울이 그의 가슴에 화살처럼 와 박혔다. '오오...... 하늘이여!'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설화처럼 그의 마음을 휘어잡은 여인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었다. 문백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설화와 너무나도 같은 분위기를 가진 소녀를 만난 것이다. 소녀의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같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럴수가.......' 조문백은 부르르 떨었다. 마침내 문백이 입을 열었다. "넌...... 어디로 가는 것이냐?"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 중 하나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폐하(陛下)의 첩으로 가는 중이랍니다." '폐하의 첩으로...... 폐하의...... 폐하의...... 폐하의.......' 조문백의 머리 속에서 조금 전 여인의 음성이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의 목소리는 점차로 커지더니 그의 뇌리를 파괴시키기라도 할 듯이 더욱 증폭(增幅)되었다. '폐하의 첩...... 폐하의...... 폐하의.......' 조문백의 머리는 마구 헝클어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싫어...... 싫어요...... 난...... 가고 싶지 않아요......." 소녀의 애소(哀嘯)하는 듯한 음성에 눈알이 시뻘개진 조문백이 소리쳤다. "가지 마라!" 그러나 가마는 그의 외침과 무관하게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수심이 가득한 여인이 그를 지나치면서 한스럽게 말했다. "이 지상에서 폐하의 명을 거역할 사람은 없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폐하의 명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죽음밖에 없답니다." '폐하의...... 폐하의.......' 조문백은 머리를 움켜 쥐었다. 저만치 소녀의 가마가 사라지고 있었다. 소녀의 애소하는 눈동자와 그 절박한 음성이 그를 얽어매고 있었다. "안 돼!" 그는 모퉁이로 가마가 사라지는 순간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일까. 그가 급히 따라갔을 때 어찌된 셈인지 가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환영인가?' 그는 넋을 잃은 듯이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환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의 뇌리에 남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으후후...... 후후후후...... 으핫핫핫핫......!" 문득, 조문백은 실성한 사람인 양 광소를 터뜨리며 어디론가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한편 그가 사라진 직후 숲으로부터 가마가 나왔다. 가마를 따르고 있던 여인들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중 한 여인이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그가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 그렇게 말하는 여인은 바로 방의경이었다. 가마를 메고 있는 다섯 명의 여인들은 모두 방의경의 하오문 수하들이었다. "그가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같아요." 한 여인이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이번 일은 엄청난 모험을 요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어요. 틀림없이 그는 속아넘어 갔어요." 이때였다. "악!" 돌연 가마에 타고 있던 소녀가 한 모금의 울혈을 토하더니 쓰러졌다. "아니......?" 여인들이 놀라 소리 지르자 방의경은 고개를 저었다. "놀랄 필요 없어요. 그냥 두어요.. 봉매는 짧은 순간에 평생의 공력이 담긴 미령심안공(迷靈心眼功)을 전개했기 때문에 기력이 소진되었을 뿐이에요." 그랬던가? 그렇다면 소녀야말로 바로 화안봉이었단 말인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것은 어딘가로부터 불길한 느낌을 실어오는 것만 같은 그런 바람이었다. 35 마지막 황맥(皇脈) 항상 보는 물건이 어느날 갑자기 바뀐다면 누구나 쉽게 알게 마련이다. 그러나 항상 보이는 위치의 물건이 아주 조금씩 자리를 이동하거나 또는 물건의 형태를 아주 조금씩 바꾸어 놓을 경우 그를 알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특정 장소도 마찬가지다. 조문백은 아주 치밀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이 일만큼은 특별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세림당(洗 堂). 이곳은 그가 언제나 자주 가는 주점(酒店)이었다. 주점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였다. 늘상 손님이 붐비지도 그렇다고 아주 한가하지도 않은 편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아주 평범하다는 뜻이었다. 아니 평범하다기보다는 아늑한 느낌을 준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평소 조문백이 아끼며 이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주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세림당은 주인을 포함하여 일하는 사람은 모두 9인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도 그 인원이었는지 조문백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왕왕 머리를 많이 쓰는 인간일수록 아주 사소한 일에는 거의 무신경한 경우가 있듯이 그는 이 주점에 대하여 크게 유념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오로지 하나뿐인 목숨을 아껴야 했다면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고 자부를 하는 조문백도 한 가지만은 유의를 했어야 했다. 그것은 그가 주점에 올 때면 그 중 몇 사람의 손님들이 언제나 모습을 보이곤 한다는 특이한 사실이었다. 언젠가 조문백은 그 점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깊이 개의치는 않았다. 그는 삼패천의 삼왕야가 아닌가. 그런 신분으로는 어디를 가도 자유롭지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아주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런 장소에서 마음껏 허리띠를 풀어 놓고 술이건 음식이건 취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올 때마다 마주치는 몇 명의 손님들이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만 느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어느 정도는 맞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으로 그가 놓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주점에서 일을 거드는 사람들이었다. 최근 반 년 사이에 사환에서부터 주방 일을 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소리없이 하나 둘 바뀌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바뀌었으므로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간파했어야 하는 것은 마침내는 주점의 주인까지도 바뀌었다는 사실, 바로 그 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등하불명(燈下不明)! 이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갈라놓는 시발점이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어쨌든 좋았다. 그는 연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쏟아붓고 있는 형국이었다. "후후...... 후후훗......!" 조문백의 입에선 넋두리와도 같은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 모습일 뿐이었다. 수채에서 50여 리 떨어진 이곳까지 나와 술을 마시고 있는 조문백의 마음은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혼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황백에 대한 증오가 놀랍게도 그의 가슴을 뒤집어지게 하고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황백이 설화를 그에게 보낸 뜻은 자명(自明)했다. 그것은 그가 설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를 보내 그의 감정을 무마시키려 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황백은 벌써부터 그의 감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뿐 아니라 천백까지도 설화를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무엇 때문에 황백은 설화를 자신의 곁에 두어 그들 형제로 하여금 괴로움을 느끼게 하였단 말인가? 정작 황백에게는 무수한 여인들이 있었다. 그는 하루에도 여러 수십 명의 미녀들을 정복하고 있었다. 그런 처지에 있는 황백이 설화 하나쯤 천백이나 문백에게 양보할 수는 없었단 말인가? 황백은 그토록이나 천하의 모든 여인들을 홀로 독식(獨食)할 생각이었던가? 한 말의 술을 비운 조문백은 다시 술을 청하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흐흐...... 우리는 대형(大兄)을 폐하(陛下)로 모시기로 맹세한 형제요. 그리고 사성녀를 폐하의 황후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폐하의 곁에 삼천 궁녀를 선사할 생각까지 품고 있었소. 그런데 왜? 당신은 설화를 당신 곁에 두어 우리를 괴롭혔단 말이요? 이제와서 설화를 나에게 보낸 것은 이 문백을 달래어 이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소......?" 일그러진 미소와 함께 문백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크크크......! 정말 그런 것이오? 단지 설화만 주면 내가 돌아설 줄 알았소? 크크크......!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려. 한 피를 나눈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오." 탁자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흐흐흐......! 아까 설화의 눈물을 보고 모든 것을 알았소. 그녀는 스스로 원해서 나를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물론 당신이 옳긴 옳았소. 나는 설화를 못잊고 있었단 말이오. 하지만 나는 당신과는 다른 위인이오. 내가 원한 것은...... 설화의 자발적인 사랑이었소. 당신의 명령에 의한 꼭두각시 놀음이 아니라 말이오......." 술이 다시 탁자 위에 놓였다. 문백은 서둘러 잔을 채웠다. 바로 그때였다. 또...... 똑....... 두 방울의 눈물이 잔 속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문백은 알지 못했다. 그는 서둘러 잔을 비우고 다시 따랐다. 그의 중얼거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흐흐흐...... 그리고 말이오....... 이곳으로 오던 중 한 명의 소녀를 만났소. 바로 폐하...... 당신에게 가는 길이라고 하더이다. 흐흐흣......! 헌데 말이오. 폐하께 가는 그 소녀....... 그녀가 기막히게도 설화를 빼닮았더란 말이오. 그녀를 보는 순간 내 마음 속에서는 질투의 불꽃이 일었소. 난생 처음으로 난 당신을 배반할 결심을 했소. 나는 소녀의 가마를 세우고 가지 말라고 하였소. 그랬더니 그들이 뭐라고 하였는지 알겠소? 흐흐흐...... 폐하의 명을 어기면 죽음밖에 얻을 것이 없노라고 하 였소. 크흐흐...... 폐하...... 폐하...... 당신은 진정 위대한 폐하요. 내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크흐흐......!" 언제부터인가 주점에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출출함을 동반한 가을 저녁의 어스름이 밀려드는 탓인지도 몰랐다. 또는 한적한 강가에 위치한 이 주점의 풍경이 좋아서일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허! 오늘도 힘든 하루를 버텨내고 말았구먼!" 주점 안으로 들어서던 헙수룩한 장년인 한 명이 자리를 기웃거리며 탄식처럼 말했다. "어서 오시게! 간밤에 별 탈이 없었나 보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을 보니 말일세." 들어서는 사나이를 반기며 구석진 자리에서 한 패의 사람들이 떠들어 댔다. "오죽하겠는가? 나이 사십에 새장가를 들었으니......! 가을밤은 너무 짧아 밤새 구멍 팔 시간이 모자라지 않겠나? 그러니 낮의 일이 고될 수밖에!" "옛끼! 이 호로자식놈들! 지 아비 뻘 되는 사람을 그렇게 놀리다니......!" 사나이는 웃으며 자리에 끼어들었다. 곧이어 술잔이 한 순배 돌았다. "하긴......! 늦장가 간 사람 밤 재미 좀 볼려면 그런 고생이야 얼마든지 참아야지. 안 그런가? 그건 그렇고....... 자네 힘이 부치면 그 구멍 내게도 좀 빌려주게나! 요긴하게 쓰고 잘 닦은 후에 돌려 줄 테니까!"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짖궂게 사나이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예끼! 고약한......!" 말을 들은 사나이는 화를 벌컥 내는 시늉을 했다. 그 바람에 좌중에 있던 사람이 또 한 차례 파안대소(破顔大笑) 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 첫날밤 이야기나 좀 들어봄세! 대체 어쨌나? 정말로 깨가 하늘에서 쏟아지던가?" "허허헛......!" 질문을 받은 사나이는 갑자기 허탈하게 웃었다. 이어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깨소금인지 뭔 지 쏟아지긴 한바탕 쏟아지더군. 글쎄 내 얘기좀 들어 보게나! 허헛!" 사나이는 한 번 헛기침을 내뱉더니 입을 열었다. "명색이 장가를 갔다고 해서 내가 장인 집에 가지를 않았겠나?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내가 신부 방으로 들어갔을 때였네. 들어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는 신부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야." 말을 하던 사나이는 갑자기 목이 마른지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이었다. "그래 뭐라고 이야길 하던가?" "신부가 내게 묻기를, 서방님! 혹시 노래를 잘 하시나요? 이러는 거야!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가 노래라면 젬병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대로 고백했지. 난 노래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고. 노래의 노자도 모른다고" "그랬더니?" 이번에는 앞사람이 물었다. "그랬더니 신부가 하는 말, 내일 일가친척들과 동네 손님들이 집으로 몰려 온다는 거야. 자기 가문은 예로부터 노래를 즐겨 했다는 거야. 손님이 오면 틀림없이 노래를 해야 하는데 어떡하느냐는 거지." "그 참 고민이었겠네! 자넨 어릴 적부터 노래라면 학질을 앓던 사람이 아닌가?" "말을 막지 말고 끝까지 들어 보게나." "그려! 그려! 어서 해 봐!" "내가 죽을 상이 되어가지고 못하겠다고 하니까, 신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 "뭐라고?" "아, 글쎄 가만히 들어보기나 하라니까?" 사나이는 울컥 짜증을 냈다. "그려! 이젠 진짜 빌려온 보릿자루 모양으로 가만 있을 테니 어서 지껄여 보기나 해!" "그랬더니 신부가 하는 말이 정 모르겠으면 자기가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 하라는 거야. 그래서 그러마고 했지." "아따! 늦게 배운 도적질에 밤 새는 줄 모른다고 늦장가 가니까 그 신부한테 되게 홀렸던 모양이군!" "그려! 바로 그 짝이 난 거지 뭔가. 안 그래?" 술탁에 둘러 앉았던 중인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늦장가 간 사나이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내가 따라 하겠다고 했더니 신부가 선창을 하는 것이었어. '만수산(萬壽山)에―' 하고 말이야. 난 따라 했지. 큰 소리로 말이야. '만수산에―' 그랬더니 신부는 이번에 목소리를 죽이며 '너무 커요' 이러는 거야. 나도 따라했지. '너무 커요'. 그랬더니 이번엔 얼굴을 찡그리며 '안방에 들려요' 이래. 나도 똑같이 '안방에 들려요' 했어. 그랬더니 신부는 한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참으로 개같은 작자로군.' 하고." 여기서 사나이는 말을 끊었다. 목이 탔는지 한 사발의 술을 단숨에 비운 그는 손등으로 입술가를 슥 문질러 닦아냈다. 사나이의 말을 듣는 술꾼들은 침을 꼴깍 삼켜대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나이가 어찌나 구수하게 말을 하는지 그야말로 흥미 진진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저녁이었어. 신부가 말한 대로 일가친척이며 마을 손님들이 몰려들더군. 그들은 내게 노래를 청했어. 처음에는 잘 못한다고 사양을 했어. 그러나 막무가내더라구. 결국 난 일어서고 말았지. 그리고는 신부가 가르쳐 준 대로 노래를 했다구." 사나이는 곧 젓가락을 잡고 술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노래를 불렀다. "만수산에...... 너무 커요...... 안방에 들려요...... 참으로 개같은 작자로군......!" 좌중이 일시에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노래가 아닌가? 그러나 사나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으히히히!" "킬킬킬!" "으하하! 정말 죽여 주는군." "아니, 왜들 웃고 그래? 내 노래가 그렇게 재밌는가?" 사나이는 엉뚱하게 물었다. 그의 얼굴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연신 킬킬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그들의 눈을 살펴 본 사람은 알리라. 그들의 눈이 어느새 먹이를 노리고 있는 독수리의 눈처럼 하나의 목표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 주점 안은 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종내에는 거의 자리가 찼다. 다만 조문백이 앉아 있는 자리 주변의 몇 개만을 남겨두고 손님들이 거의 둘러싼 형국이었다. 만일 평소의 조문백이었다면 분명 이런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평소보다 열 배 이상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시각. 조문백은 대단히 취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 흔들릴 뿐만 아니라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까지 나고 있었다. 정신마저 몽롱할 지경이었다. 사실 그는 주량이 과히 센 편이 못되었다. 그런 그가 독하기 그지 없는 모백주를 열다섯 병이나 마셨으니 취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후후...... 후하하핫핫핫......!" 황혼이 짙게 깔린 무렵이었다. 와장창! 돌연 조문백은 술상에 쌓여 있는 술병들을 엎지르며 광소를 터뜨렸다. "와하...... 하하하...... 핫...... 핫......." 그러나 웃음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일시에 담소(談笑)를 멈춘 주점 안의 손님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황혼을 받아서인지 이상하게도 붉게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쿵! 조문백의 머리가 탁자에 부딪쳤다. 그는 그대로 탁자 위에 엎어진 것이었다. 지나친 과음(過飮)과 정신적인 황폐(荒廢)함이 천하의 삼촌살인설 조문백으로 하여금 더이상 버틸 수가 없게 만든 것이다.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었다. "......!" 그와 때를 같이하여 주점 안에 이상한 공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조문백이 술에 만취되어 탁자에 엎어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장내를 누르는 것은 이상한 공포(恐怖)와 살기(殺氣)였다. 그것은 제일 먼저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연신 낄낄거리던 패거리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고개를 돌리고 조문백을 바라보는 헙수룩한 사나이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주변 사람들의 눈은 일제히 엎어져 있는 조문백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살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랄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문백을 노리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보라! 주방으로부터...... 회계대로부터...... 심지어는 마굿간의 하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주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눈에서도 모두 똑같은 살광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스윽......!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손님으로 와 있던 삼십여 명의 각양각색 인물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소리를 죽이며 일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일 먼저 품속에서 검(劍)을 꺼낸 것은 바보같은 이야기를 하던 사나이였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 주점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병기를 뽑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품속에 병장기를 숨기고 있었다니....... "......!" 무거운 침묵이 주점 안을 얼어붙게 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무언(無言)의 합의(合意)와 상의(相議)가 되어 온 듯이 말이다. 그들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문백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주점 안의 공기는 들어선 사람들로 인해 후끈한 열기(熱氣)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열기도 주점 안을 지배하고 있는 으시시한 살기(殺氣)를 식힐 수는 없었다. 마침내 조문백의 주위에는 사십여 명의 사람들이 인(人)의 철벽(鐵壁)을 형성했다. 그들은 모두 조문백을 향해 병기(兵器)를 겨누고 있었으나 어느 한 사람 먼저 병기를 뻗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뽑을래야 뽑을 수가 없었다. 공포(恐怖)! 엄청난 공포가 그들을 휘어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천하의 삼패의 하나인 조문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바로 그들이 무기를 지금 겨누고 있는 문백에 대한 두려움. 정신을 잃고 있었으나 문백은 여전히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무공(武功)이 그만큼 특출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주체하기 힘든 침묵 속에서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죽느냐 죽이느냐의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시각을 그들은 똑같이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인들의 눈에서는 하나같이 그를 죽여야 한다는 뜻이 흐르고 있었으나 정작 먼저 나서서 그를 향해 검을 뻗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초조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한순간에 침묵의 균형(均衡)을 깨뜨리는 음성이 있었다. "아아......! 어찌하여 여러분은 망설이나요? 오늘을 위해 지난 반년간 각 문파에서 엄선된 당신들이 지금와서 그렇게 겁을 내고 있으니 천하가 웃을 일이 아닌가요?" 그 순간이었다. "이야아아아아!" 돌연 한 명의 중년인이 길게 장소를 발하며 검과 몸을 하나로 만들어 조문백의 등으로 날아갔다. 그는 다름아닌 바보같은 이야기를 주절거리던 헙수룩한 사나이였다. 파앗......! 한 줄기 공기를 찢는 듯한 파공음(破空音)과 함께 중인들은 보았다. 그의 검과 신형이 그대로 일직선이 되어 조문백의 등을 관통하는 것을! 조문백의 몸은 중년인의 검에 관통되어 그대로 바닥에 박혀 버렸다. "끄아아아악!" 조문백은 문득 괴성을 발하며 고개를 번쩍 치켜 들었다. 순간 그의 두 눈은 상상할 수도 없는 무서운 혈광을 발하며 부릅 떠졌다. 다음 순간, "쳐라!" 쐐애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사십여 명의 인영은 일제히 병장기를 난무하며 조문백에게 짓쳐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가공할 일이 일어났다. "으아아아아......!" 조문백은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홀(笏)을 집어 들더니 가슴에 검을 꽂은 채로 회전하는 것이 아닌가? 휘리리릭! 퍽! 퍼퍼퍼퍽......! 오오! 눈 뜨고 볼 수 없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조문백은 이미 살아 있다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정확히 등을 관통한 검이 가슴 앞으로 비어져 나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문백이 홀을 잡고 한 바퀴 회전하는 순간이었다. 퍼퍽......! 마치 두부가 으깨어지듯이 그의 주위를 둘러 싼 중원무림 제파(諸派)의 정예고수(精銳高手)들의 뇌수(腦髓)가 연속 터지며 박살나는 것이었다. 휘리리릭......! 피의 회오리가 일어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꽝...... 꽈르르릉! 엄청난 폭음을 동반하며 조문백의 홀(笏)이 폭비(爆飛)하는 것이 아닌가? 조문백의 홀 속에는 가공할 폭발력을 지닌 벽력탄(霹靂彈)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조문백은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최후로 동귀어진(同歸於盡) 하려는 생각에 최후의 진기(眞氣)를 격발하여 홀을 부서뜨린 것이었다. 꽈꽈꽝......! 콰르릉......! 사지가 부서지고 찢겨지는 신음소리는 폭음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주점 전체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반년 이상을 조문백을 죽이기 위해 세워진 치밀한 계략은 그렇게 무시무시한 장막을 내리고 있었다. 주점의 모든 인원을 갈고...... 손님까지도 위장을 하며 단 한순간의 기회를 위해서 모였던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정예고수들이 삼촌살인설(三寸殺人舌) 조문백과 함께 통째로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콰르르......! 눈 깜빡할 사이에 주점은 주저앉고 말았다. 뿌우연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주막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2인의 인영이 있었다. 그들은 둘다 여인들이었다. "아아...... 결국은 이런 비극을 낳고 말았어요......." 비틀거리며 이렇게 읊조리는 여인은 다름아닌 궁단향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덧 투명하리만치 맑은 이슬이 어려 있었다. "향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러나 저들의 희생은 무림사에 길이 남게 될 거야...... 무림의 정의를 위해 황금보다 더 값진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버린 위대한 사람들로 말이지......." 그녀를 부축하는 여인은 방의경이었다. 그녀는 궁단향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고 있었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주점을 바라보는 두 여인. 그녀들은 조문백의 최후의 발악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그 모습에 그녀들은 아직도 심금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궁단향은 소매를 올려 눈물을 찍어내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로써...... 삼패는 하나만이 남았군요......." 어둠이 몰려들고 있었다. 죽음보다 더 처절한 어둠의 장막이 두 여인의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뒤덮고 종내는 땅 속 깊은 곳마저 삼키어가고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도열하고 있는 대전(大殿)의 중앙에 하나의 관(棺)이 놓여 있었다. 장내에는 수백 명이 모여 있었으나 바늘 한 개 떨어지는 소리도 우뢰처럼 들릴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다. "......." 관 속에는 형체를 알아볼 길이 없는 육편(肉片)이 들어 있었다. 바로 그 육편이 그들로 하여금 이토록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산산조각난 육편. 그것은 다름아닌 조문백의 몸뚱아리였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조문백의 죽음! 그 엄청난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아연실색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중인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대전 상단의 거대한 태사의로 향하고 있었다. 태사의에는 철탑을 연상케 하는 검은 곤룡포의 거한이 앉아 있었다. 다름아닌 조황백이었다. 바로 삼패천의 주인인 일지겁천(一指劫天)이었다. 지금 500인이 넘는 지옥혈사대의 인물들이 숨을 죽이며 조황백의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천벽력(靑天霹靂)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삼왕야 조문백의 죽음은 그들에게 있어 믿어지지 않는, 아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던 것이다. 침묵. 바늘 하나만 떨어져도 크게 흔들리며 깨어져 버릴 것만 같은 침묵. 참을 수가 없는 이 침묵은 그러나 아무나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실이 그들을 더욱 견디기 힘들게 하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말이건 그들은 황백의 입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조황백은 영원히 침묵할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때였다. "폐하......!" 누군가가 대전 앞으로 뛰어가더니 오체복지했다. 그리고 그는 피를 토하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명(下命) 하옵소서! 지금 당장 왕야의 복수를 하명하소서......!" "......!" 지옥혈사대는 바로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일제히 핏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우우우......!" 지옥혈사대들이 막 입을 열어 괴성을 토하려 할 때였다. 바로 그 순간 조황백의 입술이 떨어졌다. 영원히 열릴 것같지 않던 두터운 입술이 열린 것이다. 그는 지옥혈사대를 천천히 바라본 후에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은 무척이나 의외로운 명(命)이었다. "둘째의 백일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셋째의 시신은 둘째와 함께 넣도록." 그뿐이었다. 그는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500여 명의 지옥혈사대는 뜻밖의 말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황백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영비마(無影飛魔) 조천백이라고 불리우는 지옥혈사대의 두 번째 주인. 즉 이왕야(二王爺)가 죽었을 때만 하여도 장례를 간단히 치르고 천하를 피로 적시려 한 조황백이 아니던가. "......." 500여 명의 지옥혈사대는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는 전율했다. 야명주(夜明珠)가 교교한 빛을 던지는 가운데 언제나 서너 명의 나부(裸婦)가 시중을 들던 넓은 침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제 나부들은 보이지 않았다. 색욕(色慾)을 돋구는 향기도 없었다. 썰물 뒤의 바닷가처럼 휭하니 빈 방. 조황백은 혼자 덩그렇게 큰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바위같이 거칠어만 보였다. 굳건한 의지(意志)를 지닌 철탑같은 분위기의 황백이었으나 어쩐지 그의 모습은 오늘따라 고독하게만 보였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허공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공을 바라보는 조황백의 동공(瞳孔)은 텅 비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끝내 열릴 것같지 않던 그의 입술이 일그러지듯이 열렸다. "네놈마저 나를 떠나다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는 아우들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아우들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그들은 떠나고 없었던 것이다. "문백......! 네놈마저 그렇게 가다니......." 그는 자책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뜻하지 않은 두 아우의 죽음에는 자신의 무관심과 의식적인 냉대도 한몫 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사흘간 황백은 오직 똑같은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수하들이 몇 번이나 그를 방문하였지만 감히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도록 그렇게 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을까? 문득 조황백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아니다. 간 녀석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내게는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일이 있다. 계집처럼 상념에 젖어 있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이어 황백은 몸을 일으키더니 한쪽 벽의 기관을 눌렀다. 그그긍....... 벽이 갈라지면서 지하로 통하는 비밀 암도가 나타났다. 그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폐하......." 가냘픈 음성이 황백의 발걸음을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 조황백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 음성이 바로 설화의 것이라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흠칫하더니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짐은 폐관에 들겠노라. 두 아우의 제(祭)가 끝날 때까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짐을 방해하지 말라!" 조황백의 음성이 멀어져 갔다. 스르릉....... 벽이 원상태로 닫히고 있었다. "......." 설화는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지하 석실 아래에는 하나의 밀부(密府)가 있다. 밀부는 간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단(神壇)이 있었다. 신단 위에는 한 벌의 낡은 곤룡포(袞龍袍)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곤룡포 옆에는 아직껏 빛을 잃지 않은 황금관(黃金棺)이 놓여 있었다. 조황백은 그 신단 아래서 엎드려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부복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문득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동시에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상이시여 사죄를 드리나이다...... 아울러 반드시 대송 제국(大宋帝國)을 이룰 수 있도록 가호(加護)를 바라니이다......." 조황백이 절을 하는 곤룡포는 바로 멸망한 송국(宋國)의 마지막 황제가 입던 어의였다. 또한 황금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조씨 황가의 유물 앞에서 언제까지고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하루...... 이틀...... 열흘.......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36 막을 수 없는 운명(運命) 흥망성쇠(興亡盛衰). 제 아무리 붉고 아름다운 꽃도 열흘 이상을 가지 않고, 만월인 달도 때가 되면 이그러지는 법이다. 이것은 바로 우주의 보편적인 질서이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대륙을 추풍으로 흔들 때....... 중원의 판도는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토록 막강하던 삼패천의 조직은 바위가 갈라지듯이 쩡, 쩌엉 소리를 내며 균열(龜裂)이 가고 있었다. 그 균열은 하부조직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확대일로를 걸었다. 일단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한 다음에는 강한 불신(不信)과 회의(懷疑),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동요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삼패천을 떠 받친 것은 바로 삼패의 정립(鼎立)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중 이패(二覇)가 쓰러짐으로써 사실상 삼패의 영향력은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삼패천을 크게 동요하게 한 것은 바로 일지겁천(一指劫天) 조황백의 폐관(閉館)이었다. 그가 백일간의 폐관을 선언한 이후 지상에서 모습을 감춘 그 백일(百日)이 지나는 사이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가 삼패천의 본거지를 비롯한 전역에 일어난 것이었다. 소문(所聞). 소문이란 제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아편(阿片)처럼 은밀히 퍼지며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어떤 심약(心弱)한 구석을 찌르는 것일수록 그 소문은 빠른 속도로 감염되어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지금 삼패천의 본거지였던 황하 삼십육 채는 물론이고 중원의 모든 거리와 주점이 어떤 소문으로 인해 떠들썩했다. 첫번째 소문은 조황백에 관한 것이다. -조황백은 두 아우가 죽은 후 겁이 나 숨어 버렸다.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버리고 영원히 변방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두 번째 소문. 그것은 더욱더 삼패천의 조직을 동요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삼패천을 세운 조씨 삼형제는 반역자(叛逆者)다! 대명조정(大明朝廷)에서 곧 삼패천을 역도로 단정, 하인을 막론하고 구족(九族)을 멸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세 번째 소문은 가뜩이나 흔들리는 삼패천을 결정적으로 동요케 만들었다. 그것은 짧은 시간에 막강 삼패천을 뿌리째 흔들어 버린 계기가 되었다. -조황백은 죽었다. 그의 시신은 옥문관(玉門關)에서 발견되었다! 소문...... 소문...... 소문......! 발없는 소문이 몰고 다니는 힘은 그 어떤 무기의 힘보다도 위력이 센 것이다. 전염병처럼 떠도는 소문은 마침내 삼패천을 폐허로 만들고 말았다. 긴가민가하던 삼패천의 하부조직들은 소문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져 나갔다. 마침내....... 중원 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던 삼패천도 과거의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천하 곳곳에 퍼져 있던 삼패의 하부조직은 하나하나 분쇄되어 갔다. 그것은 이제껏 봉문(封門)하고 있던 구파일방(九派一幇)이 봉문을 풀고 일제히 단결하여 상호 유기적인 조직력을 펴며 파상적인 공세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삼패천의 수하들이 갈 곳은 없었다. 그들은 투항을 하거나 아니면 협공을 당해 곳곳에서 쓰러져 갔다. 이제 삼패천이라는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천하제패(天下制覇)를 위한 신화(神話)의 탄생은 짧았다. 그러나 그 신화가 무너지는 시간은 더욱 짧았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 하던가? 그토록 강호천지를 핏빛 선풍으로 몰아넣었던 삼패의 신화도 내렸다가 금방 녹아버리는 봄눈처럼 어느덧 이제는 퇴색한 전설이 되어 버렸을 뿐이었다. 도도히 흐르는 황하(黃河). 핏빛 노을을 받으며 황하의 강상(江上)에 한 척의 배가 떠있다. 뱃전에는 노를 젓는 청년 하나와 아름답기 그지없는 네 명의 미녀들이 수수(愁愁)로운 표정으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성녀(四聖女). 그렇다. 바로 궁단향, 방의경, 화안봉, 단리사영 등이었다. 사성녀를 태운 배의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전홍이었다. 이제 진랑포 마을의 황하를 전홍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남자가누가 있을까? 해노인이 살아 있었다면 물론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 말이지만. 종리연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전홍은 그 우직한 성격과 달리 제법 눈썰미도 있었다. 천직이 어부인 그는 낮에는 고기를 잡았고 밤에는 사성녀들로부터 틈틈이 공부를 배웠다. 그는 어느덧 궁단향으로부터 지리를 보는 법과 천기(天氣)를 읽는 법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강심(江心)을 내려다 보고 있던 사성녀의 얼굴에는 근심과 우려의 빛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사성녀 중의 제일 맏이인 방의경이 입을 열었다. "향매. 어찌된 거지? 어찌하여 그분은 나오지 않는 거지?" 궁단향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차 있었다. "모르겠어요.. 광명비전(光明秘傳)을 얻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릴 줄은 몰랐어요. 그분이 일단 수궁(水宮)으로 들어가신 이상에는 아무도 언제 나오실 지 몰라요." 화안봉이 시선을 돌리더니 저 멀리 보이는 수채(水寨)를 바라보았다. "향매. 이상한 것은 조황백도 마찬가지야. 그는 삼패천이 궤멸되어 가는데도 어찌하여 출관하지 않는 걸까?" 단리사영이 입을 열어 말했다. 그녀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 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단리사영은 몸이 무거운지 연신 두 팔로 아랫배를 안고 있었다. "설사 그가 출관한다 해도 사정은 옛날 같지 않을 걸." 그러나 궁단향의 안색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그렇지 않아요. 사영 언니. 매번 말하지만 삼패천은 황백 한 사람을 가리키는 거예요. 비록 그 동안 방 언니와 여러 언니들...... 그리고 구파일방(九派一幇)이 힘을 합해 삼패의 조직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황백이 쓰러지지 않는 한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에요." "......!" 세 여인은 그 말에 전율스럽게 몸을 떨었다. 지난 몇 달여 간 얼마나 고심하여 삼패천을 무너뜨리는 데 공을 들였던가? 비록 영수(領袖)를 잃은 삼패천이었으나 그들의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만일 궁단향의 치밀한 작전(作戰)과 방의경이 이끄는 하오문(下午門)의 다양한 전법(戰法), 그리고 정보력이 없었다면 그들을 분쇄하기가 결코 수월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궁단향은 조금도 기뻐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오직 완전한 결말은 종리연이 출관(出關)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리연은 광명비전을 얻기 위해 황하의 수궁으로 들어간 이후 사성녀의 초조함과 근심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그가 언제 나올런지, 아니 설혹 출관한다 해도 이 짧은 시간 동안 그가 광명비전을 얼마나 숙달하고 나올 지는 그야말로 미지수였다. 도도히 흘러내리는 강물을 바라보는 네 여인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궁단향이 수채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열흘...... 열흘 후면 아마 조황백은 출관하게 될 거예요...... 아아! 그때부터가 정작 더 큰 문제예요." 궁단향의 말은 답답한 가슴을 어쩌지 못하던 네 여인의 가슴을 더욱 암울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 가기로 해요." 궁단향이 전홍을 보며 말했다. 그때까지 아무런 말 없이 노만 잡고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전홍이 몸의 균형을 잡았다. 삐걱! 삐이걱! 사성녀를 태운 나룻배는 곧 물살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한풍(寒風))이 천지를 휘감고 있다. 황하의 바람은 삭막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하다. 중원 너머의 고비사막에서부터 시작되는 매서운 바람은 대륙을 할킬 듯이 휩쓸고 있었다. 모옥 안. 세찬 바람이 부는 데도 불구하고 모옥 안의 바람막이 창으로부터는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웃음소리가 불빛만큼이나 따사롭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구! 아이구 배야! 정말이지 이 녀석은 누굴 닮아 이 모양일까요? 경 언니, 제...... 제발 이 녀석 좀 말려 주세요." 이렇게 기쁜 엄살을 내지르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단리사영이었다. 그녀는 지금 아랫배를 부둥켜 안고 연신 아파 죽겠다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배 속의 아기가 건강하게 뛰어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정말 그렇게 아파? 영 아우! 이 언니를 그렇게 놀리는 것이 아니야. 난 지금 질투가 나 죽을 지경인데......?" 방의경은 보고서를 보다 말고 짐짓 힐난했다. 그러나 방의경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그것은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문백을 미혹(迷惑)하기 위해 미령심안공(迷靈心眼功)을 시전했던 화안봉도 어느덧 화색이 돌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낮에 배를 타고 황하까지 나갔던 것도 무리였다. 당시의 일로 그녀는 거의 탈진되어 있었다. 평생 쌓았던 미령심안공을 한순간에 펼쳤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말이에요. 큰 언니. 질투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호호호......!" 화안봉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의 말에 옆 방에서 또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오늘밤은 사영 언니를 좀 놀려 주자구요. 저도 사영 언니가 너무 행복해 하니까 괜히 심술이 나네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궁단향이었다. 그녀는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 후에 마시는 차를 준비하는 것은 그녀의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 그때 아무런 말도 없이 웃음만 짓고 있던 전홍이 구석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언제부턴가 모옥 안에서 한 식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가 일어서자 방의경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아니.....? 어디 가시려고요? "잠깐 바깥을 좀 살펴 보고 오겠습니다."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까지는 여인들만의 분위기가 어색한 탓이었을까? "바쁜 일이 아니라면 차를 마시고 살펴보세요. 이렇게 바람이 매섭게 부는데......." "괘...... 괜찮습니다." "앉으시라니까요. 전홍 삼촌이 그러면 오히려 우리가 자꾸 어색해 져요. 우린 이제 한 식구가 아닌가요? 종리가가의 말씀을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방의경이 엄포를 놓았다. "정말 괜찮......." 그러나 전홍은 말을 끝까지 못했다. 그는 미적거리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방의경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입술에 대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밖으로 나가서 하고자 했던 것은 불을 지피기 위해서였다. 그 또한 황하에서 30년 이상을 산 사람이 아닌가. 이런 날씨라면 새벽이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얼어붙기 때문이었다. 전홍은 단리사영을 위해서 불을 더 지피려고 한 것이었다. 그로서는 단리사영을 대할 때마다 진여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뻘건 핏덩이를 쏟아놓고서 혓바닥을 깨물어 자진(自盡)하고 말았던 여인! 복수를 하기 위해 무량애를 찾아 갔으나 복수는커녕 하마터면 죽을 뻔하다가 종리연의 도움으로 살아났던 그였다. 그는 아직도 아내의 원한을 갚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점이 늘 전홍을 괴롭히고 있었다. 더구나 단리사영을 보면 볼수록 자꾸만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것은 전홍에게 이런 결심을 심어주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영 형수는 순산(順産)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곧 해산을 앞 둔 형수의 몸의 상태가 좋아야 한다. 더워도 안 되고 추워도 안 되는 것이다. 저녁 전에 땐 군불로는 새벽까지 온기가 남아 있을 것같지 않다. 더구나 내일 아침은 얼음까지 얼어 붙을 게다. 그 전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펴두자!' 이런 생각이 전홍으로 하여금 안절부절케 했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어요. 자, 어서들 드세요." 궁단향이 준비한 차를 쟁반에 담아 내왔다. 그녀가 오늘밤에 특별히 준비한 차는 오룡차(烏龍茶)다. 그것은 북건성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차 중에서 가장 맛과 향이 뛰어난 것이다. 더군다나 한 마리의 새까만 뱀이 살고 있는 차나무에서 딴 잎으로 만든 차는 그 향과 맛이 너무나 뛰어나 천계(天界)의 사람들까지 그 맛을 못잊어 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였다. 궁단향이 일일이 찻잔에 따르는 한 잔의 차. 은은히 배어나오는 향은 그야말로 마시고자 하는 사람들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향이 좋을 수가......! 향매, 지금까지 이런 차를 감추어 두고 있었던 이유가 뭐지?" 남산 만한 배를 내민 채 단리사영이 억울한 듯이 말했다. 전홍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 정말 이렇게나 근사한 향을 가진 차가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차마 마실 수가 없을 것같아요. 향이 너무나 아까워서......." 궁단향이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차는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답니다. 아까워들 마시고 어서 맛이나 보세요. 맛은 더더욱 기가 막힐 거예요." 그때 화안봉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복사꽃처럼 화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짖궂은 장난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의경 언니, 그리고 향 아우! 옛날 말 하나도 그른 것이 없어요. 중이 고기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가 남아나질 않는다더니...... 이제 사영 언니 때문에 이 집에 차라는 차는 씨도 없이 마르게 생겼네요. 더구나 전홍 삼촌까지도 가세하면......." "호호호호......!" "하하하......!" 모옥 안에서 일시에 파안대소(破顔大笑)가 터져나왔다. 그것은 한 동안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되었다. 웃음이 그치자 궁단향은 살며시 단리사영의 손을 잡아 주었다. "......." 두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세상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지혜로 반짝이던 궁단향의 두 눈에는 따뜻한 이해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검날처럼 날카롭고 세상에 대해 무심(無心)하기만 하던 단리사영의 눈에는 어느새 포용력(包容力)과 순응의 빛이 가득했다. 방의경과 화안봉의 눈빛도 그 둘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전홍의 눈에는 얇은 안개같은 물기가 어리고 있어서 사물을 희끄므레하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안타깝게 죽은 진여랑을 생각하고는 가슴이 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홍은 곧 눈물을 닦고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전홍의 마음을 읽은 방의경이 살며시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두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혀...... 형수님......." 실로 훈훈한 밤이었다. 타타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마른 장작들은 기세 좋게 타들어 갔다. 불땀은 좋았다. 매운 연기 한 줄기 올리지 않았다. 기세 좋던 불길이 조금씩 수그러들자 전홍은 마지막으로 장작개비 하나를 더 올려놓고서는 모옥의 아궁이를 빠져 나왔다. 휘이이잉! 하늘은 티끌하나 없이 맑았으나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 크르르......쿵! 처얼......썩! 쿵......! 나루터 방파제를 치는 황하의 물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이상한 일이다. 하늘이 저토록이나 맑은데 바람이 이토록이나 거세게 불다니......? 철이 든 이후 이토록 이상한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징조일까?' 전홍은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가 쳐다보는 하늘은 그가 서 있는 땅과는 달랐다. 별들은 더없이 밝고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체의 흔들림도 없이. 전홍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틈틈이 궁단향에게 배운 것을 떠올리며 별들의 운행을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 그는 드디어 서북쪽 하늘 끝에서 이상한 빛을 발하는 별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저...... 저것은 패왕(覇王)의 별이다! 그러나 새로 태어나는 별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나는 별이다. 반짝이는 빛으로 보아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멀지 않았다! 그가 나타날 시간이.......' 한편. 전홍이 별자리를 살피다가 놀라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모옥 안에 방의경을 찾아온 한 사람의 방문객이 있었다. 방문자는 도보꾼 차림의 늙수그레한 사내였는데 다름아닌 하오문의 정보원이었다. 방의경은 정보원의 보고를 받으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뭐라구요? 개방( 幇)이 하오방주를 습격했다구요? 어떻게 그런 일이......?" "분명 낙척서생(落拓書生)이 이끄는 개방의 문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방의경이 말을 끊었다. "자, 잠깐만...... 낙척서생이라면 소림회합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걸왕이 살해된 후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새로이 개방의 방주가 된 인물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자가 하오문에게 치밀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십이단주들은 한 날 한 시에 개방의 암습에 당했습니다. 겨우 청담우사(靑潭羽士) 안빈만이 그들의 습격을 모면했습니다." 방의경은 정보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걸왕이 의문의 살인을 당한 후에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전혀 예상치 못하게 새로이 개방의 방주가 된 인물. 그가 하오방을 습격하다니....... 개방이 어찌하여 하오문을 습격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이권(利權) 때문에 사소한 다툼 정도는 있어왔지만 전면적인 공격은 서로 자제하고 있었다. 개방과 하오문은 쌍벽을 이루는 조직체가 아닌가? 어느 한 곳이 다른 하나를 공격해 무너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두 방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면 결과는 모두의 전멸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방이 하오문을 공격해 오다니....... 이것은 오래 전부터 지켜오던 불문율(不問律)을 깨는 엄청난 짓이었다. "뭔가가 잘못됐어요. 분명 무슨 흑막이 있어요. 개방은 결코 하오문을 적대시 할 처지가 아니에요. 다시 알아보세요. 아니 제가 직접 가야겠어요." 방의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방의 새로운 방주가 된 낙척서생.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란 말인가? 무슨 이유로 오랫동안 지켜 내려오던 불문율을 깨면서까지 그가 하오방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곳에는 필히 흑막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근심어린 눈빛을 뒤로 하고 방의경은 어둠을 틈타 모옥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한참이나 늦은 시각.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모옥 안에서 홀로 패를 던지고 있던 궁단향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중원 무림이 피로 뒤덮히는 때가! 불과 며칠 남지 않았다. 잘 해야 앞으로 삼 일이다. 삼 일 후면...... 조천백의 백일제가 끝나는 날! 그때 삼패왕이 살아나와 무림을 피로 씻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분의 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직까지 광명비전을 얻지 못했다는 말인가? 아아...! 참으로 큰일이구나.......'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37 하늘(天)의 뜻(意) 불행하게도 천하제일의 지녀(智女) 궁단향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조황백이 눈을 뜬 것은 그가 선언한 그대로 조천백의 백일장이 끝나던 날이었다. "......!"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이 전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완벽한 확신에 대한 결과였다. '하늘이 진정으로 나 황백으로 하여금 송조(宋朝)를 재건(再建)할 운명을 주었다면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우들이 유명을 달리했다곤 하지만 당금의 명(明)을 세운 주원장이 그랬듯이 송조의 재건 역시 나 황백 하나로서 충분할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낡아 부스러질 것같은 선조(先祖)의 곤룡포에 절을 하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 황백은 너무나 조용한 대전(大殿)의 정적(靜寂)에 잠시 침묵한 채 서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천시지청술(天視地聽術)을 전개한 결과 대전은 물론 삼패천의 수채에도 지금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백은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바뀌어져 있었다. 수채의 건물들은 텅 비어 있었다. 수천 명에 달하던 수하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수채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거미들뿐이었다. 수채 곳곳에 거미가 거미집을 지어놓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폐가가 따로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난 순간 황백은 문득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핫핫핫핫......!" 그의 광소는 멀리멀리 퍼져 나가 5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였다. "폐하......!" 어디선가 귀에 익은 가냘픈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 그는 부르르 떨었다. 황백은 빙글 돌아섰다. 과연 설화였다. 설화는 일신에 하얀 소복을 입고 한 채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건물로부터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황백은 그녀를 향해 손을 저었다. 순간 설화는 마치 한 마리의 새인 양 그에게 끌려와 가슴에 안겼다. 막강한 허공섭물진기(虛空攝物振氣)가 한순간에 설화의 몸을 잡아당긴 것이었다. "어찌된 거냐?" 그는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설화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모두.... 갔답니다. 지금 이곳엔 아무도...... 없어요." "허헛헛...... 그러냐?" 황백은 너털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가슴을 쭉 폈다. 어느 순간 황백은 입을 열더니 홀가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잘된 일이다. 짐은 혼자가 더 편하다. 껄껄...... 뿐만 아니라 짐 혼자 있어도 삼패천 만한 조직을 재건하는 데는 일 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설화는 그 말에 그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설화. 검을 다오." 설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는 어디론가로 가더니 황백이 항상 지니고 다녔던 거검(巨劍)을 가지고 와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그 검은 보기에는 그저 커다랗기만 한 것이었으나 사실은 대단한 위력을 가진 검으로서 천하에 유일한 검이었다. 이름하여 팔만사천마검(八萬四阡魔劍)! 팔만사천마검을 만들기 위해 소요된 시간은 무려 사백오십 년(四百五十年)이었다. 그리고 그 검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은 사백오십 년 동안 삼백여 명에 달했다. 삼백여 명의 혼과 피가 팔만사천마검에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이다. 팔만사천마검을 잡은 조황백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빛이 흘러 나왔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핫핫......! 이제부터 나는 송왕조를 재건하기 위해 천하를 피로 씻을 것이다. 누가 짐의 길을 막을 손가?" 말을 끝마친 그는 설화가 아직 그의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되물었다. "설화. 너는 왜 가지 않았느냐?" 설화는 눈을 내리 깔면서 대답했다. "설화는 폐하의 것이옵니다." 단순명료한 대답이었다. 일순 황백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일어났다. "나를 따르겠느냐?" 설화는 망설이지 않았다. "폐하가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핫핫핫...... 좋다. 나를 따라라!" 황백은 거검을 들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설화는 그의 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마치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황백의 그림자처럼. 조황백은 수채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걸음걸이었다. "......!" 어느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수천 명의 무림인들이 도열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구파일방을 비롯한 무림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조황백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누군가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조황백! 삼패천은 무너졌다. 어서 검을 버리고 투항해라. 무림의 영령들에게 속죄하라!"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칼을 버리고 투항을 하기는커녕 황백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으하하핫! 가소로운 것들! 날 보고 투항하라고? 으핫핫핫...... 투항할 것은 너희들이니라!" 순간 그는 설화를 옆구리에 끼었다. 동시에, 슈욱! 그의 팔 척 거신(巨身)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쏘아갔다. 아니 대붕(大鵬)이 날 듯 황백은 군웅(群雄)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막아라!" "그는 혼자다! 겁내지 말고 처치하라!" 츠팟! 츠츠츠! 조황백을 에워싸고 있던 군웅들이 일시에 무기를 앞세우고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이 왕왕 벌어지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기에 세상살이의 묘미(妙味)와 경이(驚異)를 느끼듯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런 때인 것이다. "아니? 이럴 수가......." "저...... 저게 어찌된 일이냐?" 구파일방의 고수들의 입에서 놀람의 비명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순간적으로 결말(結末)을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백은 단 일인(一人)이었다. 그러나 그 일인의 힘은 수천의 무림고수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콰아아......! 쑤아아앙! 빛! 처음 그것은 번개처럼 다만 하나의 날카로운 빛의 일 편(一片)으로 보일 뿐이었다. 빛의 일 편이 수천여 무림인들 사이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것은 무림사 이래 일찍이 없었던 대참살이었다. 오오......! 후인(後人)이 있어 당시의 일을 기록하라고 하면 과연 무엇이라 쓸 것인가? 아마도 그는 붓을 꺾고 말 것이다. 이날, 정확히 말한다면 무력(武力) 624년...... 시월 스무 엿새날...... 황하 삼십육 채 밖은 시산혈해(屍山血海)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피(血)의 폭풍(暴風)의 시작점에 불과한 일이었다. 황하 삼십육 채에서 벌어진 대참사! 세인(世人)들은 그날의 일을 일컬어 지옥대전(地獄大戰)이라 일렀지만 다만 그것이 공포스런 혈보(血步)의 시작일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조황백은 팔만사천마검을 들고 행진에 행진을 계속했다. 그가 가는 곳은 어디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는 우회(迂回)하지 않았다. 어디건 일직선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길에 걸리는 문파(門派)는 완전히 멸문(滅門)되고 말았다. 단 일인! 일인의 힘이 이렇게 가공(可恐)할 줄이야 하늘인들 어찌 알았겠는가? 하늘도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것은 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천리(天理)를 거역하는 일이었다. 겨울(冬)은 깊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겨울은 이전의 겨울이 아니었다. 내리는 눈발 하나 없이 중원대륙은 얼어붙고 있었다. 그러나 혹한(酷寒)의 폭풍보다도 더욱더 대지를 얼어붙게 하는 것은 바로 일지겁천 조황백이 일으키는 피(血)의 행군(行軍)이었다. 그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중원무림을 뭉개려는 듯 한시도 쉬지 않고 행군을 계속했다. 그는 혈혈단신(孑孑單身)이었다. 아니, 혈혈단신이 아니었다. 기이하게도 그의 곁에는 항상 아름답고 가련해 보이는 소복(素服)의 여인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조황백은 언제나 그 여인만을 데리고 다니며 혈풍(血風)을 일으켰다. 이제까지 그의 손에 무너진 문파의 숫자는 백여 개 파가 넘었으며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한 무림인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조황백은 피의 거보를 쉬지 않고 옮기고 있었다. 그가 대체 어디까지 그 혈행을 계속할 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림은 얼어붙고 있었다. 하늘도 그의 출현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책(自責)이라도 하듯이 삼동(三冬) 내내 눈 한 송이 내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이제 중원의 땅에는 모든 것이 마르고 모든 것이 얼어붙고 있었다. 단지 조황백이 지나가는 곳마다 뿌린 피의 비(血雨)가 얼어붙은 대지를 파고 들 뿐이었다. 네 여인. 사성(四聖)의 운명(運命)을 타고 난 4인의 여인들은 속속 날아드는 비보(悲報)를 보고 넋을 잃었다. 종남파(終南派) 전멸(全滅). 해남파(海南派) 전멸. 여량파(呂梁派) 전멸. 공동파( 派) 전멸. 전멸...... 전멸...... 전멸...... 전멸......! 끝없이 날아드는 전서(傳書)는 피에 젖어 끈적거리는 것만 같았다. 믿을 수 없는 한 인간의 행적(行蹟) 뒤에는 이처럼 혹독하고 무시무시한 결과가 이어지고 있었다. 정녕 하늘이 그를 통해 이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새 궁단향의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지력(智力)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황백의 혈겁을 막아보고자 하였으나 대책(對策)이 없었다. 황백의 가공(可恐)한 팔만사천마검 앞에서는 만 가지 책략(策略)과 계교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용맹무쌍한 무림인을 동원해도 헛수고일 뿐이었다. 그녀는 이제 패를 던지지 않았다. 패는 언제부터인가 똑같은 글자만을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대(待).> 그것은 분명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패였다. 궁단향은 황백의 혈행(血行)이 거듭되면 될수록 급격히 머리가 세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흑단같던 그녀의 머리는 반백(半白)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방의경, 화안봉, 단리사영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녀들에게도 달리 뾰족한 수가 나지 않고 있었다. 단리사영이 나섰다. "향매. 더이상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야. 이대로 가다가는 전 무림이 그의 손에 완전히 전멸하고 말 거야." 지당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단리사영이 세 살박이 어린아이도 아는 말을 꺼내다니....... "......?" 3인의 여인은 일제히 단리사영을 쳐다보았다. 3인의 여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옥 안에 있는 유일한 남자인 전홍마저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단리사영을 바라보았다. 단리사영의 배는 만삭(滿朔)이었다. 불과 2, 3일 후면 몸을 풀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전보다 더욱 강해져 있었다. "이제 몸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하니...... 일단 그에게 부딪쳐 보는 것이 어떨까?" "어... 언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안 돼요. 절대로!" 궁단향이 펄쩍 뛰었다. "비록 언니의 검법(劍法)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제 불과 사나흘 후면 몸을 풀어야 해요.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언니의 어깨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는 할 수 없어요." 단리사영은 미소 지었다. "향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건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향매가 비록 지혜롭다 하나 지혜의 한계에 이르면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하늘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야. 우리는 언제까지나 연랑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도...... 도대체 그 몸으로......? 언니...... 지금...... 지금 제 정신이세요?" 궁단향은 말을 채 잇지 못하며 방의경과 화안봉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동의(同意)를 얻으려는 듯이 말이다. 방의경과 화안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방의경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하오문 총본으로 갔다가 엄청난 사실 하나를 확인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개방을 이끌고 있는 낙척서생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가짜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가짜 개방의 방주에 의하여 하오문은 치명적인 공격을 당한 후였다. 분노와 노여움이 솟았으나 방의경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또한 좌절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세를 읽을 줄 알았다. 조황백이 살아나 피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이때에 개방의 술책에 말려든다는 것은 무모한 짓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던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볼 때 개방을 움직이고 있는 낙척서생의 뒤에는 분명 사악한 음모를 가진 배후자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배후자가 어쩌면 황백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결국 방의경은 하오방 문도들에게 지금의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 살 길이라는 것을 전하고 잠시 지하로 피신해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모옥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종리연 뿐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하오방이 아니라 종리연이라는 사람이었다. 종리연이 되돌아 온다면 하오방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야.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최선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란다. 아무리 황백이 난리를 친다고 해도 그리고 설사 그것 때문에 내일 중원이 전멸한다고 해도 사영이 지금 그 몸으로 검을 잡는다는 것은 무리야. 설사 사영의 검술이 황백을 능가한다고 해도 말이지." 맏언니 답게 방의경의 말은 신중하고 조리가 있었다. 하오문이 어처구니없이 개방의 공격을 받아 와해되고 난 후에 보여 준 그녀의 침착한 행동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는 말투였다. 그녀는 단리사영 옆에 앉아서 그녀의 손을 거머쥐었다. "더군다나 지금 사영은 홀몸이 아니야. 더군다나 불과 이삼일 후면 몸을 풀어야 할 테고. 어쩌면 오늘밤이 될 지도 알 수가 없어!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어." 잠시 말을 멈춘 방의경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에 방의경은 다시 전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어. 향 아우의 점괘가 뭐라고 나왔지? 기다리라는 것 아니야? 그게 하늘의 뜻이야. 우린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이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덤빈다는 것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일일 뿐이야. 그건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행동일 뿐이지." 모옥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귀를 기울였다. 방의경의 낮은 목소리는 계속 되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오던 게 있었어. 만약에......." 방의경은 이번에는 궁단향을 바라보았다. "향매가 밤하늘을 연신 살펴 보았을 때...... 황백의 별은 활동을 시작했는데 수궁에 들어가신 그분의 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었어.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밤을 새워가며 생각해 보았어." 어느새 방의경의 음성은 비장해져 있었다. "그분의 별이 보이지 않는다....... 둘 중의 하나야. 광명비전(光明秘傳)을 아직 얻지 못하셨거나......." 이번에 그녀는 오랫동안 말을 멈추고 있었다. "......?" "얻지 못하셨거나......?" 단리사영을 비롯한 화안봉의 얼굴에 의아로움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궁단향이 방의경을 바라보았다. 방의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린 것일까,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눈을 감은 궁단향은 비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방의경은 작정이라도 한 듯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광명비전을 아직 얻지 못하셨거나 뜻밖의 일을 당하신 거야." "크...... 큰 언니!" "언니! 도...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을...... 뜻밖의 일이라니......서... 설마......?" 모옥 안은 한순간 경악(警愕)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방의경이 하고자 하는 말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것은 종리연이 뜻밖의 일을 당해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이 아닌가? "아...... 아니에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절대로!" 화안봉이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단리사영은 멍하니 방의경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의경은 이내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러길 바래! 하지만 우리는 최악의 순간도 예상을 해야 하는 거야. 설마설마 하는 마음으로는 아무 것도 안 돼! 그런 마음으로 황백과 맞붙었다가는 끝장이라구." "......!" "어...... 언니! 그렇다면 어떻게......?" "봉매! 아직까지 절망할 단계는 아니야. 다만 우리는 최악의 순간까지를 대비해 놓자는 것이지. 설사 그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실상 방의경이 이런 말을 꺼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하오문이 뜻밖의 공격에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지하로 숨어들어가야 하는 뼈저린 고통을 맛본 그녀가 아니었던가.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뜬구름 잡기 식의 무모한 희망만을 광적으로 바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 무모한 희망에 전부를 걸고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내던지려는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녀도 한때는 한 가지 생각만을 했었다. 전 하오문도들을 총동원해 개방에 맞서는 것. 치미는 감정대로 하자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으나 방의경은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며 자제했던 것이다. 그것이 결코 현명한 방법이 못되었기에. "어...... 언니!" 화안봉은 이제 완전히 울상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옛날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천하제일루주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어느덧 종리연이라는 한 남자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만약 종리연이라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건 방의경도 단리사영도 궁단향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들은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은 살아온 환경과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기는 했다. 방의경은 하오방(下午幇)이라는 조직을 이끌고 통솔하는 책임자로서 어느 정도의 감정 절제를 할 수 있었다. 단리사영은 검도(劍道)를 추구하는 검사로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일상화 된 여인이었다. 그리고 궁단향은 감성보다는 이성과 논리로 천리(天理)를 읽는 지혜로운 여인이 아니던가? 하지만 화안봉은 아니었다. 그녀가 비록 미령심안공(迷靈心眼功)을 얻었고 그것으로 삼패 중의 하나를 유혹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기루(妓樓) 출신이었다. 사나이들 때문에 또는 이성보다는 감성 때문에 여인들이 웃음과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곳. 화안봉은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인이었다. 방의경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무엇인가를 초연(超然)한 빛이 역력했다. "무림의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야. 일갑자(一甲子)가 영원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고 십갑자(十甲子)가 찰나처럼 짧게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야. 하지만 다만 한 가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그것을 알아야 해!" 방의경은 모옥 안의 사람들 하나하나를 돌아보면서 계속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조황백이 중원무림을 혈해(血海)로 만들며 종횡무진하고 있지만...... 설사 그것으로 중원무림이 끝장이 난다해도 때가 아니면 우리가 나설 수가 없는 거야. 나선들 개죽음을 당할 뿐이고......." "그럼 대체 어떡하자는 거예요?" 단리사영이 답답한 듯 반문했다. 방의경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있어. 뿐만 아니라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어. 황백의 힘도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되어 있어. 다만 우리가 그 끝을 빨리 오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뿐이야. 만약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면...... 차선(次善)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지? 그건 바로 기다리는 거야. 그분을 대신할 사람이 올 때까지!" "그분을 대신할 사람이라면......?" 단리사영과 화안봉이 의아해 했다. 방의경은 궁단향을 바라보았다. 궁단향의 입가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떠올라왔다. "의경 언니의 말이 맞아요. 벌써 그 사람은 이 세상에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지요. 그 사람은 바로......!" 궁단향과 방의경의 눈길이 일시에 단리사영에게로 쏠렸다. "......?" 단리사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편 화안봉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껌벅이다가 마침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어... 언니! 그렇다면......?" "후후....... 바로 맞았어. 다름아닌 사영이의......." "나... 나의......?" 단리사영은 얼떨떨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어떤 예감이 그녀의 뒷통수를 세게 치고 달아나기라도 한 듯이 화들짝 놀라는 것이었다. "어...... 언니!" "이제야 알겠니? 사영이 네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뭔 지....... 바로 그거야. 네 검술이 아무리 훌륭하고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 할 지라도 지금은 나설 수가 없어. 아니 나서서도 안 돼.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란다. 네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황백과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그때였다. "아아앗!" 단리사영이 아랫배를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렸다. "영매! 왜 그러는 거야?" 놀란 방의경이 급히 단리사영을 부축했다. "아... 아랫배가 아파와요. 무엇이 자꾸 나오려는 것같이...... 진통이 와요." "드디어 몸을 풀 때가 되었나 보구나. 자, 편하게 누우렴! 그렇지. 다리를 편하게 벌리고......." "......!" 세 여인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짓을 주고 받았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갑자기 모옥 안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치를 챈 전홍은 활짝 웃는 얼굴로 밖으로 나가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람 한 점 없는 겨울 밤이었다. 불쏘시게로 장작불을 일구던 전홍은 모옥 안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떡두꺼비같은 아들 하나만 낳으소. 그것도 종리 형님을 쏙 빼닮은 놈으로! 그놈은 틀림없이 장차 무림의 제왕이 될 것이오. 틀림없이!" "아악.......! 아아악......!" 순산(順産)이 아니었다. 벌써 3일 밤과 낮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동안 단리사영은 몇 차롄가 혼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한 생명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이토록 지난(至難)한 일인가? 아아......! 한 생명의 탄생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방의경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침대에 누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는 단리사영은 또다시 혼절 직전이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악!" 단리사영이 단말마(斷末魔)를 질렀다. 또다시 진통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의 진통은 다른 때 일어났던 진통과는 달랐다. 진통은 엄청난 통증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아아악......!" 천지를 울릴 것만 같은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오는 순간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의 방의경이 크게 소리쳤다. "나...... 나왔다! 옳지!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줘! 사영! 조금만 더 힘을 주라구! 옳지!" 그로부터 반 시각 후, "으아앙!" 하늘을 가르는 교교한 달빛보다 더 밝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모옥 안에서 들려왔다. "......!" 벌써 삼일째 모옥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밖에서 안절부절하던 전홍은 마침내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리자 하늘로 날아 오를 듯이 펄쩍 뛰어 올랐다. "이...... 이제 나왔나요?"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다급하게 물었다. "예! 나왔어요." 화안봉의 음성이었다. "거...... 건강 한가요?" "그럼요! 산모도 아이도 다 건강해요!" "오! 천지신명이시여! 참으로 고맙습니다!" 전홍은 자신도 모르게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손을 마주잡았다. 잠시 후 전홍은 이렇게 흐느끼고 있었다. "조...... 종리 형님! 사영 형수가 형님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형님은 왜 여태껏 소식이 없으신가요? 서... 설마 정말로 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렇다면 어서 오셔서 다...... 당신의 피붙이를 안아 보세요. 어서 오시라니까요. 모든 형수님들이 형님을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요!" 단리사영이 낳은 것은 앙증맞게도 귀여운 딸이었다. 전홍은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기뻐하며 어쩔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일까? 단리사영이 딸아이를 낳은 것은 정확하게도 무력 625년 새해 첫날 아침이었다. 새해의 첫날 아침. 궁단향의 모옥 안에서는 하늘의 축복처럼 한 여아(女兒)가 탄생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흐른 시간은 중원 무림에 뚜렷한 두 개의 명암(明暗)을 남기고 있었으니....... 38 쓰러진 궁단향(宮丹香) 무력 625년 2월 13일이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못기다리겠어요. 설사 제 한 몸이 으스러진다고 해도 좋아요. 황백의 혈보(血步)를 막겠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중원무림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될 거예요. 그러니 제발......." 단리사영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설사 실패해 죽는다고 해도 좋아요. 어차피 한 번 죽는 목숨이니까 말이죠. 기왕에 죽는 목숨이라면 그저 앉아서 당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의경 언니! 전 이전의 단리사영이 아니랍니다. 비록 아이를 낳아 몸은 어떨지 몰라도...... 제 마음 속에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비검식(秘劍式)이 물밀듯이 떠오르고 있답니다. 그러니 제발 보내주세요." 그렇다. 사영의 가슴 속에서는 이제껏 깨우치지 못했던 검도(劍道)의 오의(奧義)가 확연히 깨우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몸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이 사실이었다. 원래 조천백과의 싸움에서 그녀는 두 팔의 근맥이 잘렸었다. 무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중상이었다.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궁단향에게는 천기를 보는 혜안에 못지 않은 의술(醫術)이 있었다. 그녀가 의성(醫聖)에 버금가는 신술로 단리사영을 꾸준히 치료한 결과 끊겼던 근맥이 최근에 다시 붙었던 것이다. 단리사영. 그녀가 완전한 검도(劍道)를 얻기 위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가 어린 나이에 검을 알았고 검을 잡았을 때부터 그리고 검과 일생을 함께 할 결심을 했을 때부터 그녀의 목표(目標)는 오로지 한 가지였다. 완전무결한 검도를 익히는 것. 그것이 바로 단리사영의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희망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천지(天地)를 유랑(流浪)했던 것이었다. 오로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검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무림천하에 전해져오는 이야기로는 완전무결한 검도를 깨우친 달인(達人)으로 3인을 꼽는다. 그 첫번째 인물로는 수미혜심검진경(須彌慧心劍眞經)을 저술했다고 알려지는 대화상산(大和尙山)의 복마신니(宓麻神尼)이다. 그의 비경(秘經)인 수미혜심검진경은 사본(寫本)마저도 남아 있지 않은 절대비급(絶對秘級)으로 알려져 있다. 복마심니의 검도는 혜심검도(慧心劍道)라고 했다. 오로지 마음 하나로 검을 움직였던 것이다. 완전무결한 검도를 깨우친 두 번째 인물로는 진생우사(秦 羽士)가 있다. 진생우사는 원래 백정(白丁) 출신이었다. 나이 40에 깨달음을 얻어 불교에 귀의(歸依). 60년의 참회(懺悔)와 60년의 참수(參修) 끝에 진정한 검도를 얻었다고 했다. 진생우사 최후의 심득(心得)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 전설에 의하면 진생우사는 검도를 터득한 후에 짐승을 잡던 검으로 의술(醫術)을 베풀었다고 한다. 마지막 절대검도를 완성한 인물. 그는 뜻밖에도 정도(正道)의 인물이 아니라 사도(邪道)의 인물이었다. 형산(衡山)이라고 불리우는 남악(南嶽)의 축융봉(祝融峰) 정상에 진마세가(津魔世家)를 세운 사도 집안의 인물. 그의 이름은 진마화룡(津魔火龍)이다. 사도(邪道)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난 진마세가의 장손(長孫)인 진마화룡은 돌연변이(突然變異)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진마륭세가는 무림 대대로 패도의 자리를 탐내왔다. 그들은 기회만 되면 절정고수들을 키웠고 그들로 하여금 천하를 제패하려고 무척 애를 써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진마화룡은 달랐다. 그는 선대(先代)의 뜻을 존중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무림의 제왕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선천적(先天的)으로 무인(武人)이기보다는 장인(匠人)에 가까웠던 진마화룡은 가문(家門)이 지금까지 중원천하를 얻기 위해서 일으켜 온 피바람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진마륭세가의 실질적인 후계자로서 대권(大權)을 물려받았을 때 진마륭세가는 그에 의해서 봉문(封門)되고 말았다. 말이 좋아서 봉문이었지 그것은 혈통(血統)을 끊는 조치와 다름없었다. 이후, 진마화룡은 무예 대신에 검을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80년 후에 진마화룡은 화룡신검(火龍神劍)이라는 하나의 명검(名劍)을 만들었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진마화룡은 하나의 검을 만들기 위해 침식(寢食)을 잊다시피 했다. 그는 80년 세월 동안 한 번도 화로(火爐)를 떠나지 않으며 연철(煉鐵)에 몰두했다. 그것이 결국 완벽한 검도를 터득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진마화룡이 완전무결한 검도를 완성했던 것은 바로 화로 속의 불꽃 때문이었다. 봉문을 하고 장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80년 동안 진마화룡은 한 번도 화로의 불을 꺼뜨린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불꽃 속에서 결국 하나의 완벽한 검도를 끄집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도솔화혼무( 率火魂舞)! 이것이 바로 그가 터득한 검도였다. 단리사영은 이 세 종류의 절대검도를 익히기 위해 2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중원천지를 떠돌았다. 그러나 완전무결한 검도를 이루었다는 3인의 검도는 실전(失傳)된 지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전혀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그녀는 새로운 검도를 익혔던 것이었다. 풍운만상뢰검(風雲卍象雷劍). 자전구하벽검(紫 球霞碧劍). 천성열화혈검(天性烈火血劍). 이 삼대진산명검(三大眞山名劍)을 익힌 것은 물론이거니와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가공할 만한 공포의 마검도가 가미된 사도(邪道)의 검도도 익혔던 것이다. 하지만 완전하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그것들은 남의 옷을 빌려입은 것처럼 어색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완전무결한 검도는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단리사영이 아이를 갖게 되고 나서부터 였다. 완전한 원형(圓形)의 검도(劍道). 지금까지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 잡히지 않던 원형의 검도에 대한 오의가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원형의 검도에 대한 오의를 확연히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한 생명을 자신의 육체를 가르는 고통 속에서 낳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의경의 반대는 확고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영매! 당신에게는 무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 그것은 바로 이제 세상에 태어난 이 아이야. 그것을 잊어서는 안 돼. 하나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 이 아이는 사영의 아이일 뿐만이 아니라 종리가가의 아이라는 사실이야. 더 나아가서는 우리 모두의 아이일 수도 있고. 그런 아이의 어머니를 패할 것이 분명한 싸움터에 내보낼 사람이 누가 있어?" "아니에요. 저는 패하지 않아요. 설사 패한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어요." 단리사영의 각오는 대단했다. 그녀는 끝내 자기의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예전에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검사가 아니었던가? 그 기질이 새삼 되살아난 것이었다. "......." 단리사영은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의경 언니나 봉매, 그리고 향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에요. 다 알아요. 그래요. 제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아기까지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황백의 혈보를 막아야 하는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단리사영은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지금 조황백은 이미 중원무림의 수없이 많은 정파들 중에 사분의 삼을 혈검(血劍)으로 쓸어버리고 말았어요. 이대로라면 중원 무림의 앞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형국이 아닐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두 눈 멀뚱히 뜨고 지켜보기만 하란 말인가요?" "......." 좌중은 조용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이를 안고 있던 방의경의 눈빛이 단리사영에게로 향했다. 방의경은 깊은 눈동자로 단리사영을 한 동안 응시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영. 좋아. 그러나 내 말에 먼저 대답해 봐. 만약 내 말에 진솔한 대답을 할 수 있으면 사영의 뜻대로 해도 좋아. 하지만 대답을 못할 때에는 내 말을 따라야 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방의경의 뜻밖의 물음에 잠시 의아해 하던 단리사영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좋아. 그럼......." 화안봉과 궁단향의 눈길이 방의경의 입술로 쏠렸다. 전홍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방의경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생각같아서는 자신이 단리사영을 대신해서 황백과 싸우러 나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리사영에게 틈틈이 익힌 검술로 어찌 삼패천의 우두머리인 조황백과 싸울 수 있겠는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사나이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자신이 나서겠다고 말을 하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어리석지 않기 위해서 였다. 방의경의 말마따나 그렇게 나서서 죽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죽음일 것이 분명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당신께 완전한 검술을 익힐 때 까지만....... 사영 형수! 왜 그렇게 조급해 하시오? 무엇 때문에 헛된 죽음을 자초하시려고 한단 말이오?' 전홍은 꿇어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면서라도 단리사영의 출전을 막고만 싶었다. 자신의 무능이 이토록 한스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이제 전홍은 일말의 기대심을 가지고 방의경의 입술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의경이 어떻게 해서라도 단리사영을 적진(敵陣)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자....... 사영. 이제 대답해 봐요. 영매가 지금까지 검을 손에 잡고 있었던 이유가 뭐지?"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질문이었으나 단리사영은 한 동안 어리둥절했다. 너무나도 쉬운 질문이라 그것의 요지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 내가 검을 잡았던 이유......?' 단리사영은 생각을 추스리려고 애썼다. 방의경의 질문은 분명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유로 검을 잡았지?" 대답이 없자 방의경이 재차 물었다. "거... 검도를 깨닫기 위해서......" 단리사영은 마지 못한 듯이 말했다. 바로 그 순간 방의경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이었다. "사영. 영매는 분명 검도를 깨닫기 위해서 지금까지 검을 잡아왔다고 했어. 그리고 그런 사영의 이야기는 옳다고 생각해. 아니 옳아. 적어도 영매가 종리가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으니까.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방의경의 말은 이제 청산유수(靑山流水)로 이어지고 있었다. "영매는 종리가가의 아이를 낳은 후에 완전한 검도의 오의를 깨달았다고 했어. 그리고 지금 영매는 깨우친 검도를 가지고 황백을 물리치려고 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 그런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방의경의 표정은 엄숙했다. 마치 연공(練功)을 잘못하는 제자를 깨우쳐 주고 있는 근엄한 선배와도 같았다. "난 검도의 오의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연히 알아. 그것은 바로 영매가 검도의 오의를 깨우치기 위해 중원천하를 떠돌 때와 지금 현재는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는 사실이야." "......." "영매가 깨우쳤다는 오의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어. 뭔고 하니 그건 바로 '기다림'이라는 거야. 영매가 검(劍)의 도(道)를 깨닫고 얻기 위해 홀로 중원천하를 떠돌 때에도 이토록 조급했을까?" "......!" 단리사영은 한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방의경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았다. 그녀는 예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유일(唯一)한 재산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이었다. 검도를 깨닫기 위해서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훈련은 바로 그 기다림이 아니었던가? 기다릴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방의경의 말은 계속되었다. "또 한 가지가 있어. 지금 영매는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야. 그것이 황백을 물리치고야 말겠다는 조급증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검도의 오의를 터득한 기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흔들리고 있어. 그렇다면 결과는 뻔한 것 아니야?" "......." 단리사영은 끝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방의경의 말은 하나하나가 그녀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검을 잡아야 할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 초절정 고수에게 있어서 그것은 패배(敗北)를 먼저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 단리사영의 마음은 조급함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로지 한 자루의 검으로 중원 전역을 피바다로 만들어 얼어붙게 하고 있는 황백을 그녀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방의경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 있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최후의 상황은 아니라는 것. 그것을 깨달아야 해. 사실은 나도 조급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어. 어쩌면 그의 손에 하오방의 존재가 영원히 말살될 지도 몰라. 그러나 조급해 한다고 해서 풀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좌중은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의경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어느 것이나 옳았던 것이다. 전홍은 방의경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주먹을 꼭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던지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하루라도 빨리 검술을 익히자.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어차피 죽었던 목숨이 아닌가? 뜻하지 않게 얻은 목숨을 무림의 평화를 위해 버리리라. 기필코!' 그때였다.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가 있었다. "의경 언니의 말이 맞아요. 그래요. 지금이 최후의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비록 황백이 전 무림의 사분의 삼을 초토화 시켰다고 해도....... 맞아요. 기다려야 해요. 그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걸요. 자자....... 가라앉은 분위기라도 일신(一新)시키기 위해서 우리 차라도 마셔요. 제가 오늘은 특별히 백모차(白毛茶)를 준비했답니다." 부엌으로 들어가며 궁단향이 쾌활하게 말했다. 그러나 어찌 알 것인가. 궁단향의 속마음은 쾌활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 속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그녀는 하루에 수백 번도 넘게 천기를 살피고 점성술을 읽었다. 작금의 무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는 바로 수중궁으로 광명비전을 얻으러 떠난 종리연 뿐이었다. 천기와 별들은 분명히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건만 종리연으로서는 종내 무소식인 것이다. 천기도 쾌도 별들도 종리연의 행방을 나타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그분은 끝내 광명비전을 얻어 나타나실 것이다. 때가 멀지 않았다.' 궁단향은 흔들리는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주전자에 물을 채웠다. 바로 그 순간, "욱!" 비명과 함께 손으로 입을 막으며 궁단향은 허리를 꺾었다. "향매!" "향 아가씨!" 놀란 사람들이 황급히 뛰어가 그녀를 부축했다. "이... 이게....... 향매! 정신차려!" 화안봉이 울부짖었다. 궁단향은 붉은 선혈을 한웅큼 토해 놓고서 혼절하고 말았다. 속으로만 삼키던 불안과 근심, 종리연에 대한 걱정이 끝내 그녀의 가슴을 뒤집고 만 것이다. 모옥 안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궁단향을 에워싼 사람들의 표정은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사성녀의 실질적인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천하제일의 지녀인 다지성녀 궁단향이 혼절을 하다니. 이제 일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하죠?" 화안봉은 벌써 울상이었다. "......." 속수무책(束手無策)이기는 방의경도 단리사영도 전홍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궁단향이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더군다나 궁단향의 상태는 한 눈에 보아도 심상치가 않았다. "약을 구해와야 겠어요." 피가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던 전홍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 속에만 담고 있었던 주체할 수 없었던 불안감이 일시에 몰리면서 내장이 상한 거예요. 기도 많이 허약해 졌구요. 이전의 궁 아가씨가 아니에요." 어느덧 전홍의 눈가에 물안개같은 것이 맺히고 있었다. "이곳에서 삼십 리 동쪽에 월궁담(月宮潭)이라는 커다란 호수가 있답니다. 그곳에 사는 백년화리(百年火鯉)를 잡아 오겠습니다. 그것 한 마리면 궁단 아가씨는 틀림없이 원기를 회복하실 겁니다." "......." 아무도 막지 못했다. 막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따지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 낚시 준비를 끝마친 전홍은 죽립을 쓰고 나갔다. 밤(夜). 칠흑처럼 어두운 길을 낡은 죽립을 쓰고 뛸 듯이 걷는 사내가 있었다. 서걱서걱......! 사나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말라버린 갈대며 억새들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사나이는 한눈 파는 법이 없이 부지런히 길을 걸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가물었던 겨울 하늘에는 인간사(人間事) 수심(愁心)처럼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으나 사나이는 오로지 앞만 보고 갈 뿐이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사나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죽립 아래 숨겨져 있던 사나이의 눈이 일순 광채를 발했다. 그의 눈에 꽁꽁 얼어붙은 호수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곳이다. 전설로만 들었던 백년화리가 산다는 곳. 기필코 놈을 잡으리라." 하얀 입김을 내품으며 중얼거리는 사나이는 다름아닌 전홍이었다. 바짝 마른 갈대가 바람에 서걱이는 호수 가장자리를 벗어난 전홍은 호수 한 가운데로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호수는 한 자 두께로 얼어 있었다. 마침내 자리를 잡은 전홍은 메고 온 목검(木劍)을 손에 들었다. "갈(喝)!" 그는 얼음의 한 곳을 응시하다가 기합소리와 함께 목검을 힘차게 내리 꽂았다. 단리사영에게 배운 환원심인식(環圓心因式)이었다. 그 순간, 쩌정......! 목검이 떨어진 곳의 얼음이 날카로운 굉음을 지르며 밑으로 꺼지는 것이 아닌가? 얼음 구멍은 정확하게 한 자(尺) 넓이였다. 전홍은 곧 죽간을 얼음 구멍 속에 드리웠다. "......."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오로지 백 년 묵은 한 마리의 화리를 낚기 위해서.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으나 전홍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낚시바늘이 달린 죽간의 끝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하루가 지났다. 서산 하늘가로 핏빛 노을이 퍼지고 있었으나 죽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중원의 메마른 겨울바람은 왜 그리도 날카로운 것일까? 밤이 되자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고 있었다. 그러나 전홍은 목석처럼 움직임을 잊고 죽간의 끝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추위와 배고픔도 잊은 지 이미 오래였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원(願)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옥처럼 길게만 느껴지던 밤이 가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호숫가의 얼어붙은 갈대 사이로 떠오르던 태양이 어느덧 중천(中天)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휘청......! 죽간이 궁(弓)처럼 휘어지면서 얼음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끼이이익......! 대나무 낚싯대는 금방이라도 꺾일 듯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왔다!' 전홍은 긴장을 느끼며 죽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때로 느낌이라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는 법이다. 전홍은 자신의 낚시에 걸린 것이 화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서서히 손아귀에 힘을 주며 낚싯대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보라! 등짝이 시뻘건 화리 한 마리가 낚시바늘에 아가미를 꿰인 채로 물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얼음 사이로 드러나 보이고 있는 것을. 전홍은 젖먹던 힘까지 내어서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화리는 끌려오지 않으려고 물 속에서 연신 발버둥을 쳤다. 얼마나 힘이 막강했던지 낚싯대가 부러저 나가고 낚시줄이 끊어질 정도였다. 콰르르......! 마침내 좁은 얼음 구멍 속으로 끓어오르듯이 물이 솟구치면서 팔뚝 크기 만한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라왔다. 전홍은 즉시 화리를 겨드랑이에 끼었다. 그리고는 낚싯대를 챙기는 것도 잊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궁단향에게 먹이기 위해서 였다. 호숫가에 다다른 그는 내처 수풀 속을 뛰기 시작했다. 모옥까지의 거리는 30리였다. 빠른 걸음으로 달려도 두 시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이럴 때 종리 형님의 보행술을 익혀 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말이지 나는 참 어리석은 놈이다. 급박한 때에 가서야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으니 모자라는 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어이구. 돌머리!' 자책(自責)은 해도해도 끝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전홍은 달리는 동안 자책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하게만 살아온 자신에 대한 회의(懷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해노인 어르신과 종리 형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을 물총새처럼 피라미 새끼나 잡아먹고 있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사나이로서의 진정한 길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무림을 위해 이 한 목숨 떳떳하게 바치리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전홍이 호숫가를 막 벗어났을 때였다. 불현듯 전홍의 앞을 가로막는 수십 명의 인영이 있었다. "후후! 네놈이 화리를 잡아올리는 순간을 기다린 지 오래다. 모가지가 붙어 있기를 바란다면 화리를 내려놓고 가거라!" "......?" 전홍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죽립 사이로 앞을 가로막고 선 인영을 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놀라운 빛을 발했다. "너... 너는......?" 그렇다.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수많은 개방( 幇)의 무리들을 거느린 채로 길을 막고 선 인영. 마른 몸에 개방의 옷차림. 손에는 한 자루의 낡은 섭선을 쥐고 있었다. 낙척서생(落拓書生). 그렇다. 그는 바로 걸왕 오운천이 죽은 이후 개방을 손아귀에 틀어 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홍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낙척서생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 본 순간 그는 낙척서생에게서 오직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실체(實體)를 꿰뚫어 보고야 말았다. 낙척서생! 그는 다름아닌 무량애(無量愛)의 화신이었던 것이다.그가 한 눈에 알아본 이유는 그만큼 무량애에 대한 증오와 한이 깊었던 탓이었다. 전홍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틀림없는 무량애였다. 비록 겉모습은 달라져 있었고 개방 방주라는 새로운 신분을 위장하고 나타났으나 그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너...... 너...... 네놈은......?" 미처 말이 나오지 못했다. 너무나 놀라고 한스러운 나머지 전홍은 손가락을 세워 낙척서생, 즉 무량애를 가르키며 말을 더듬고 있었다. "......?" 한편 무량애는 전홍의 기이한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는 새삼 전홍을 훑어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번뜩 빛났다. "흐흐흐! 그러고 보니 네놈은 바로......." 그는 말을 잇지 않았다. 문득 그는 음침하게 외쳤다. "후후......! 얼빠진 놈! 목숨이 아깝다면 어서 화리를 내려놓고 줄행랑을 쳐라. 그럼 네 한 목숨만은 보전해 주마." 무량애는 설마 그가 자신을 알아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의 위장은 완벽했었다. 그런데 한 눈에 상대가 알아보다니. "이...... 이...... 죽일 놈......!" 마침내 전홍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부처의 탈을 쓰고 악마같은 짓만 골라하던 더러운 중놈! 네...... 네놈이 살아 있는 걸 보니 하늘도 무심치 않구나! 내 아내의 원한을 갚고야 말겠다!" 전홍은 어느새 목검을 꺼내들고 있었다. 그는 예전의 전홍이 아니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단리사영으로부터 어느 정도 검도의 초식(招式)을 익혔던 것이다. "크크크...... 가소로운 놈! 끝내 목숨을 버리겠단 말이로구나." 무량애의 눈에서 광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는 광소를 흘리며 손을 번쩍 들었다. 가능한 짧은 순간에 전홍을 죽일 생각이었다. 더이상 어물거리다간 그의 정체가 탄로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츠파앗......! 날카로운 강기( 氣)가 전홍을 향해 덮쳐가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전홍의 몸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일성(一聲)을 토해내고 있었다. "츠앗!" 허공을 나르는 전홍의 목검은 분명 무량애의 어깻죽지를 겨냥했으나 허공만 후려치고 말았을 뿐이었다. 어느새 전흥은 가슴 언저리에 아찔한 통증을 느끼며 저만치 날아가 떨어지고 있었다. "크아악!" 바닥에 쓰러지고도 꿈틀거리며 일어서려는 전홍의 입에서는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한뭉텅이 시뻘건 선혈이 토해졌다. 무량애의 일장(一掌)에서 쏟아져 나온 강기( 氣)가 외상(外傷)하나 남기지 않고 전홍의 몸 속으로 파고들어 단숨에 창자를 끊어버렸던 것이다. "흐흐흐......!" 무량애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冷笑)가 흘렀다. 그는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이어 그의 입에서 음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가소로운 놈! 고작 그따위 실력으로 본좌를 대적하려 하다니, 자! 사성녀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밝혀라! 그럼 목숨만은 붙여주마." "으으으......."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에 이를 악물고 있던 전홍의 눈이 번쩍 떠졌다. "사성녀라니? 난...... 모르는 일이다." "흐흐흐......! 잡아떼도 소용없다. 네놈이 그들과 한패라는 것을 안다. 더 놀라운 사실을 알려 줄까? 네놈이 화리를 잡으러 나온 까닭 말이다. 분명 사성녀 중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겠지? 흐흐흐......! 방의경이냐? 아니면......." 전홍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 어떻게 그걸......?" "어려운 일이 아니지. 본방은 하오방과 오래 전부터 숙적이었다. 하오방의 동태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다. 벌써부터 수하들로부터 하오방의 동태를 보고 받고 있었다." 무량애는 자신만만하게 뇌까렸다. "사성녀란 계집들이 이 근처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다만 근처에 수상한 괴진(怪陣)이 설치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지 못했을 뿐이지. 그런데 네놈이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흐흐......! 자, 이제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라." 전홍은 머리를 저으며 이를 악물었다. 속으로부터 시작되는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통 속에서도 어느덧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더러 그곳을 밝히라고? 후후......!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분들은 내 목숨보다 백 배 아니 천 배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후후후......! 내 목숨이야 죽은들 원통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만......" 울컥! 전홍의 입으로부터 또 한 차례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주먹을 들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무량애를 노려보았다. 이제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전홍은 초연(超然)했다. 그는 잠시 하늘 한 곳을 응시하다가 무량애를 쏘아보았다. 전홍의 입술이 심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문득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네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목숨밖에는 없을 것이다. 후후후....... 하나 더 있다면 이 화리가 있을까? 하지만 이 소중한 것을 네게 그냥 줄 수는 없지. 자, 가거랏!" 일순 전홍은 마지막 진기를 끌어모아 품고 있던 화리를 호수 속으로 던졌다. 포물선(抛物線)을 그리며 화리가 하늘을 날아갈 때였다. 울컥! 전홍의 입으로 시뻘건 핏덩어리와 함께 찢어진 창자가 한 올 삐져 나오는 것이었다. 창자가 터진 데다가 마지막 진기(眞氣)를 끌어모으느라고 힘을 쓰자 체내에 고인 피가 역류(逆流)하면서 일으킨 현상이었다. 이제 전홍은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무량애는 자신을 고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 전에 자기가 먼저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눈곱만치의 후회도 없었다. 오히려 사나이의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종리연과 사성녀에게 감사를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단 한 가지 후회되는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다름아닌 궁단향에 대한 것이었다. '궁 아가씨! 정말 죄송하게 되었구려. 백년화리를 잡았으나...... 아가씨에게 드릴 약은 만들 수가 없게 되었소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약속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으니....... 하지만 저승에서라도 내가 꼭 약속을 지키리라. 하루빨리 일어나 삼패천을 섬멸할 수 있도록 내 넋이라도 기원하겠소!' 때를 같이하여 그는 혀를 깨물었다. "윽!" "이... 이놈이......!" 상황을 알아차린 무량애가 달려들었을 때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화가 치밀어 오른 무량애는 앞 뒤 가리지도 않고 두 손을 뻗었다. "죽어랏!" 파파파팟!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장풍(掌風)이 쏟아져 나왔다. 너무도 가까운 거리였다. 전홍을 향해 쏟아진 장풍은 그의 몸을 산산조각 내고 땅을 움푹 패이게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끄아아아악!" 전홍의 최후였다. 그는 너무도 비참하게 한많은 일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주위에는 그의 혈륙이 난비 된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자!" 무량애는 이를 부드득 갈며 돌아섰다. 개방의 수하들은 이 모든 광경을 보았다. 한때 그들은 의로운 집단으로 무림의 위기 때마다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나섰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개방은 제 모습을 잃고 있었다. 새로운 방주 낙척서생이 영도한 이래로 개방은 연일 피보라를 일으켜야만 했다. 겉으로는 숙적인 하오방과의 싸움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달라지고 있었다. 정도의 길이 아니라 사도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 개방도들은 낙척서생이 한 사나이를 처참하게 죽이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그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39 절망(絶望)의 나락(那落) "전홍이 죽었다니......?" 비보(悲報)를 접한 순간 방의경은 한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식을 전해 온 것은 하오문의 여방도였다. 그녀는 미친 여자로 행세하며 정보를 수집해 왔었다. 그녀가 전홍의 죽음을 전해 듣고 즉시 모옥으로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 단리사영과 화안봉의 얼굴도 어느덧 납빛이었다. 궁단향은 핼쑥한 얼굴을 벽으로 향한 채 한 동안 말을 잃었다. 이제서야 그녀는 겨우 기동을 할 수 있게끔 되었던 것이다. "아아! 저 때문에 화리를 잡으러 갔던 그가 죽음을 당했다니......." 궁단향은 자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음성은 힘이 없었고 안색도 아직 파리해 보였다. 화안봉도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낙척서생(落拓書生)이란 자가 그토록 잔혹할 줄이야. 개방이라면 의로운 집단인데 어찌하여 그런 자가 방주가 됐을까요?" 그 말에 궁단향은 고개를 저었다. "그자는 낙척서생이 아니에요." "......?" 그 말에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의경이 설명했다. "향매의 말이 맞아요. 그자의 진정한 정체를 최근에야 알아냈어요. 그자는 낙척서생으로 변신한 무량애란 땡중이에요." "아니 그럴 수가......!" 화안봉과 단리사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비장원에서 사라진 무량애는 개방의 걸왕을 죽인 후 개방으로 잡입했어. 방주가 죽자 개방도들은 새로운 방주를 맞이해야만 했지. 본래 방규에 따르면 걸왕의 수제자인 문인백의(聞人白衣)란 자가 방주의 자리를 이어야 했지." "그런데요?" 단리사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개방의 십전대회(十全大會)가 열렸어. 방주의 자리를 이양하거나 개방이 존폐의 위기에 몰렸을 때만 열리는 대회지. 그 대회에서 놀랍게도 개방의 8대 장로들이 한결같이 낙척서생을 차기방주로 지지하는 바람에 큰 파란이 일어났어." "어떻게 그런 일이......?" "이유는 간단해. 진짜 낙척서생은 죽었어. 무량애가 그의 역을 한 거야. 뿐만 아니라 8대 장로 역시 모두 가짜로 대치됐거든. 그 자들은 도문팔가의 마검을 이어받은 자들이었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화안봉이 아미를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 놀랍군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죠?" "하오방을 우습게 보면 안 돼. 우리 방도들은 개방 속에도 들어가 있거든." "아!" 사실은 명확해졌다. 비로소 개방이 하오문을 적대시하는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방의경의 말에서는 어느덧 증오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미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어. 하오방의 정보력을 너무 과신했던 거야." "......?" "그 때문에 우리는 큰 실수를 저지른 거야. 무량애......! 그자는 단순한 요승이 아니었어. 그가 조문백과 연결 되어져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어. 그의 진실한 내력은 지난날 송왕가의 가신(家臣)이었다는 거야."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량애 역시 삼패천의 일원이 아닌가? "......."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이제 분명해졌어. 바로 우리를 찾기 위해서야. 죽은 조문백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개방의 전 조직을 동원해 우리를 뒤쫓고 있는 것이야." "결국......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셈이군요." "그런 셈이지." "그럼 조황백과 무량애의 관계는요?" 단리사영의 질문을 궁단향이 대신했다. "무량애는 조문백과 연결되어 있어요. 따라서 황백과도 무관하지 않아요. 어쩌면 황백과 이미 내통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그 구체적인 증거로......." 궁단향은 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흩어졌던 삼패천의 수하들이 개방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비록 겉으로는 황백 혼자서 무림을 패도하고 있으나 뒤에서 무량애가 각 파를 은연중 제어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빼어난 술책이에요." 장내는 무거운 침묵으로 뒤덮였다. 사실이 그렇다면 무림의 위기는 갈수록 태산인 셈이다. 이때 방의경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향매! 아직까지 그분의 소식은 없는 거야?" 궁단향은 파리한 얼굴을 가로젓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없답니다. 괘도 그렇고...... 성복술(星卜術)도 그분의 행방을 보여주지 않는 걸요." "아아......! 이제야말로 하늘이 정녕 우리를 버리시나 보다. 하오문의 조직이 와해되지만 않았어도 어떻게든 방도를 꾸며볼 터인데......." 방의경의 탄식이었다. 그녀는 지난날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개방( 幇)의 습격을 사전에만 알았어도, 아니 무량애의 정체를 조금만 더 일찍 파악했어도 이렇게 참담할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터였다. 뜻밖에 밀물처럼 짓쳐들어온 개방의 일격으로 하오문 총본(總本)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뜻밖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사실 조문백은 오래 전에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조천백의 사십구제를 핑계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을 때부터 그는 은밀하게 계략을 추진하고 있었다. 무량애로 하여금 개방의 방주(幇主)인 걸왕을 살해하고 낙척서생(落拓書生)으로 변신하게 한 것부터가 그러했다. 참으로 가공스러운 것은 무림의 어느 누구도 개방의 방주가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깨어진 쪽박이 아닌가. 지금은 깨진 쪽박을 아쉬워하며 무작정 앉아서 후회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앉아서 무량애의 포위를 당하느니 어디로건 뛰고 볼 일이 아닌가 말이다. 순간 방의경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화안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봉매." "......?" 화안봉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 알아?" "그... 런데요?" "무량애가 개방의 방주노릇을 한다면 우리는 삼패천의 보모(保姆) 노릇을 하는 거야." "어... 어떻게요?" "호호...... 천상제일루가 있잖아?" "천상제일루라고요?" "그래. 천상제일루. 그곳의 문을 다시 여는 거야. 우리가 무량애의 눈길을 피해 외각(外角)으로 숨어들면 들수록 더욱 꼬리를 잡히기가 쉬워. 그러느니 차라리 삼패천의 중심으로 숨어들자는 거지." "그게... 가능할까요?"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어차피 죽는 길 아니면 사는 길이야. 수중궁으로 들어간 그분이 나오는 날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 해!" "......." 화안봉은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끝내 입을 연 것은 궁단향이었다. "의경 언니의 말은 일리가 있어요." 궁단향은 탄식했다. "아아! 어쩔 수 없어요. 그럼 제가 마지막으로 방법을 생각해 보겠어요." 침묵. 네 여인 사이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두두두......! 4필의 말이 이끄는 마차 한 대가 메마른 먼지를 날리며 얼어붙은 관도를 달리고 있었다. 마차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내쳐 달리기만 했다. 마차 안에는 젖먹이 아이를 안은 여인과 안색이 파리한 어린 소녀 하나가 타고 있었다. 다름아닌 단리사영과 궁단향이었다. "이게...... 잘하는 일일까?" 묻는 사람은 단리사영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밤에 괘를 보았더니 별로 좋은 것같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썩 나쁜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으니까요." 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두두두두......! 덜커덩...... 덜커덩...... 마차는 쉴사이 없이 요동치며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향매." 단리사영이 궁단향을 불렀다. "......?" 삼동 내내 한 송이의 눈도 내리지 않아 바짝 메말라 있는 산야를 내다보고 있던 궁단향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단리사영을 바라보았다. 궁단향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자 이제 단리사영이 그녀를 외면했다. 이번에는 단리사영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사영 언니......." 궁단향은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녀는 단리사영을 보았다. 일순 단리사영의 두 눈에 어린 희미한 물기를 깨달았다. "......!"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토록 무정하고 냉혹하기만 하던 단리사영이 눈물을 보이다니....... 그때였다. 밖을 내다보고 있던 단리사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종리가가가...... 살아 있을까?" "......!" 궁단향은 즉시 고개를 흔들었다. "종리가가는 살아 있어요. 다만 아직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에요." "정말 그럴까?" "그래요. 틀림없어요." 확신한다는 듯이 궁단향이 말했다. 바로 그때다. 이히히힝......! 돌연 세차게 달려가던 말이 괴성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마차가 뒤로 넘어질 듯이 쳐들리더니 급기야 곤두박질치듯 한쪽으로 쏠리는 것이었다. "앗!" 궁단향은 비명을 지르며 단리사영 쪽으로 굴러왔다. 바로 그때였다. "카악!" 목이라도 떨어진 것인지 마부의 단말마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변괴가 생긴 것이다. 단리사영은 가만 있지 않았다. 어느새 검을 움켜 쥔 그녀의 신형이 마차의 지붕을 뚫고 밖으로 쏘아 나갔다. 뒤늦게 정신이 든 궁단향은 자신도 모르게 어린아이를 꼭 끌어 안았다. 이제 아이를 보호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평화롭게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웬놈들이냐?" 단리사영의 싸늘한 음성이 바람소리를 가르며 들려왔다. "크크크......! 네년이 바로 사성녀 중의 하나인 단리사영이라는 계집이로구나!" "네놈들은......?" 마차 앞에 선 단리사영은 인영을 노려보며 진세(陣勢)를 살폈다. 마차는 관도의 또랑에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마차의 뒤로 하늘을 깎아지르는 절벽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애와 궁단향을 보호해야만 하는 단리사영으로서는 사방(四方)이 트여진 곳에서 싸우느니 뒷면이 가로막힌 형세야말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한 방향만은 천애의 요새인 셈이었다. "네놈이 바로 무량애란 악승이구나!" 전면을 바라보던 단리사영의 얼굴에 언뜻 차거운 냉기가 흘렀다. "크크크......! 잘 아는 군. 알았으면 검을 버리는 것이 선수(先手)일 텐데?" 과연 마차를 가로막은 인영들은 수백 명의 개방도들이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낙척서생이었다. 그러나 단리사영이 그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았다. 이제 더이상 신분을 감출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버려야 할 것은 검이 아니라 네 더러운 목이다!" 단리사영의 서릿발같은 음성이 떨어졌다. 그녀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말과 함께 그녀의 검이 번개같은 빛을 토해내며 무한속도(無限速度)로 발검하고 있었다. 번쩍! 위이이잉......! 순간 수많은 원무(圓舞)의 파장(波長)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케에에엑!" "크악!"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개방도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아니 그들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검법이었다. 공격보다도 수비에 치중해야만 하는 단리사영이 적의 예봉을 꺾기 위해서 먼저 과감한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쳐라! 겁먹을 것 없다. 단숨에 계집을 도륙해라!" 졸지에 헛점을 찔린 무량애는 노성을 토했다. 그는 단리사영의 무공을 잘 알고 있었다. 소림사의 태실봉에서 조천백이 그녀의 일검(一劍)에 당하지 않았던가? 물론 당시 그녀도 치명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번 싸움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검의 허를 찔린 후 그는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번에 개방의 조직 중에서 선별한 최고의 고수들만 이끌고 왔었다. "쳐라!" 다시 한 번 그의 명이 떨어지자 수백 명의 고수들이 삼면(三面)에서 일시에 짓쳐들고 있었다. 번쩍! 차장! 창! 섬광(閃光)이 허공을 난무하며 핏빛 무지개를 뿌려댔다. 검무(劍舞)가 허공 가득 검화(劍花)를 흩뿌리고 있었다. "크악!" "으윽!" 개방의 고수들이 피를 토하며 연신 쓰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쉴사이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수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단리사영은 있는 힘을 다해 검무를 추었다. 그러나 차츰 힘의 한계를 느끼며 밀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마차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행동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가? 한 자리에 붙박힌 듯이 서서 삼면을 에워싸고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적들을 막아낸다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게다가 조천백에게 입었던 어깨의 상처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었다. 검을 휘두를수록 어깨에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 이젠 더이상 버틸 힘이 없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마차를 버리던지...... 내가 쓰러지던지.......' 그러나 두 가지 다 택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를 앙다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영 언니! 아기와 저는 탈출했어요. 걱정 말고 싸우세요!" 뜻밖에도 절벽 위에서 궁단향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 단리사영은 가슴을 억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한꺼번에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궁단향이 아기를 안고 까마득한 절벽 위로 올라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아니었다. 어느덧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모든 집착(執着)과 사심(私心)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에는 무심(無心)한 미소(微笑)가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단리사영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밀려드는 자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단 한 인영을 향해 조용히 검을 내밀었다. 그녀가 겨냥한 인영은 바로 무량애 였다. 그녀는 지금 하나의 검도를 시전할 참이었다. 지금에서야 완전히 오의를 터득하게 된 원형낙화혼검도(圓形落花魂劍道). 하나의 생명을 낳는 순간 터득하게 된 자신만의 검도였다. "쳐랏!" 무량애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피핏! 차르릇! 우르르르........ 일시에 그들이 짓쳐들었다. 스르릉......! 단리사영의 칼이 울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가 최후의 검식을 시전하기 직전 돌연 섬광(閃光)이 하늘을 찢으며 떨어지는 것이었다. 쾅! 콰콰쾅! 암기(暗器)와 폭약(爆藥)이 터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크아악!" 단리사영을 향해 짓쳐들던 인영들이 단말마를 토하며 산산조각나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아니......?" 무량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눈은 절벽 위로 향하고 있었다. 단리사영도 시선을 돌렸다. 문득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생각지도 않은 응원군이 절벽 위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암기와 폭약을 무량애의 진영을 향해 쏟아붙고 있었다. 콰콰쾅! 피잉......! '향매와 아기를 피신시킨 자들이 바로......?' 그러나 생각도 잠시뿐, 그녀는 검을 안고 신형을 전광처럼 쏘아나가고 있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린 궁단향을 피신시키고 무량애를 후미(後尾)에서 공격해 준 조직. 그것은 뜻밖에도 또다른 한 떼의 거지들이었다. 그 거지들의 선두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우뚝 서서 옷자락을 날리고 있었다. 문인백의(聞人白衣). 방규대로 하자면 개방의 방주가 되었어야 할 인물이었다. 그가 대동하고 있는 자들도 개방의 인물들이었다. 의로운 개방의 기개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그들은 가짜 낙척서생이 개방을 마도로 몰아넣고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분연히 일어선 것이었다. 그 동안 낙척서생을 따르던 개방 제자들도 다수 문인백의의 휘하로 돌아오고 있었다. 한편, "분하다! 이번엔 꼭 놈을 죽이려 했는데......." 절벽 아래서 한스런 음성이 들렸다. 단리사영이 검을 안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수십 구의 개방도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교활하게도 무량애는 개방도들을 방패로 그녀의 공격을 막은 후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언니! 무사해요?" 아기를 안은 궁단향이 염려스러운 듯 다가왔다. 단리사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다만 그 요승을 놓친 것이 분할 뿐이야." 문인백의가 다가와 정중히 포권지례했다. "소생은 개방의 선풍신개(旋風神 ) 문인백의라 하오. 본방이 악도로 화해 물의를 일으킨 것을 소생이 대신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단리사영은 그를 바라 보았다. 문인백의는 만면에 정기가 뚜렷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의 뒤에는 수백 명의 개방인들이 한결같이 숙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방금 전의 대혈전을 그들은 모두 지켜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제요, 자매들이었던 개방의 제자들이 단리사영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분노보다는 한탄이 그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개방에 인물은 남아 있었군요." 단리사영은 쌀쌀히 말하며 홱 몸을 돌려 버렸다. 그녀의 냉랭한 태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문인백의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로서도 입이 백 개가 있은들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돌아서서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한때의 판단착오로 마도에 빠져들었으나 그래도 우리의 형제들이었다. 시신을 고이 묻어 주도록 하라!" 문인백의와 개방도들이 시신을 거두는 동안 궁단향은 아기를 어루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가닥 암운이 서려 있었다. "언니. 아무래도 걱정이 돼요." 단리사영은 흠칫했다. "아니, 뭐가?" "천상제일루 말이에요. 적도들이 우리가 갈 곳을 미리 알고 공격했다면 천상제일루도 마수를 피할 수 없지 않겠어요?" "......!" 그 말에 단리사영의 안색이 변했다. 천하제일의 지녀인 궁단향의 예측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럼 이럴 때가 아니야!" 단리사영은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마차를 살펴 본 그녀는 그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마차는 더이상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 혼자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지 모르나 아기를 안고 궁단향까지 함께 대동하고서 마차 없이 먼 길을 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때였다. 문인백의가 두 필의 건마를 끌고 다가왔다. "괜찮으시다면 이 말을 사용하십시오." 단리사영은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으나 할 수 없다는 듯 그에게서 말고삐를 넘겨 받았다. 문인백의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비록 적도에 의해 본방이 잠시 미혹되긴 했으나 머지 않아 백도의 본분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삼패천에 대항하여 강호정기를 되찾는 일에 앞장 설 것이오." 단리사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에요." 단리사영은 궁단향을 말 위에 오르게 한 후 자신도 뛰어 올랐다. 이어 박차를 가해 달리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먼 길을 달려온 단리사영과 궁단향은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 쓴 끝에 천상제일루를 찾았다. 천상제일루의 웅장미려한 건물을 본 순간 두 여인은 거의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다행이야. 아무 일 없는 것같은데?" 단리사영의 말에 궁단향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녀는 안색이 변하며 재촉했다. "어서 들어가 봐요." "왜?" "어서요, 언니." 두 여인은 천상제일루의 대문으로 들어갔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몇 번이나 두드렸으나 아무도 대문을 여는 자가 없었다. 두 여인의 안색은 금새 파랗게 질려 버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단리사영은 내공을 돋워 대문을 밀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무쇠로 된 빗장이 부러지고 대문이 활짝 열렸다. 거의 동시에 안으로 뛰어 들어간 두 여인은 마침내 비명을 토하고 말았다. "아니...... 이럴 수가?" "아아!" 단리사영과 궁단향의 눈동자가 커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겉으로 말짱하던 천상제일루(天上第一樓)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곳곳에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하오문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목숨이 끊어져 있었다. "의경 언니!" "봉 언니!" 궁단향은 쓰러진 시체를 타넘으며 불렀다. 설마설마 한 일이 불행히도 현실로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참혹한 일이 그녀를 기다릴 줄은 몰랐다. 그녀는 목이 터지도록 불렀다. 그러나 천상제일루의 그 어느 곳에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두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에 살아 숨어 있을 것이라고 그녀들은 확신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바람일 뿐인가? 천상제일루를 샅샅이 뒤졌으나 방의경과 화안봉은 없었다. 시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죽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정작 수상한 것은 천상제일루 안에 이상한 냉기가 감돈다는 것이었다. "......!" 마침내 단리사영과 궁단향은 똑같이 그것을 느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던 두 여인은 거의 동시에 부르짖었다. "어서 나가야 돼!" 휙! 단리사영은 궁단향의 손을 잡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녀가 몇 차례 신형을 날려 담장을 뛰어넘는 순간이었다. 꽈르르르르...... 릉! 거대한 폭음이 일어나며 천상제일루가 화염과 함께 폭발하는 것이 아닌가? 아름답고 화려하기 그지 없었던 천상제일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가 되어 폭싹 주저않고 말았다. 만일 한 걸음이라도 늦었다면 그 속에 깔려 비명횡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실로 무섭고 잔혹한 함정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악랄한 수법이군." 단리사영이 잿더미가 된 천상제일루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문득 그녀의 눈에서 싸늘한 한광이 사출되었다. "향매." "네?" "지금 곧 객점을 구해라. 향매는 그곳에서 아기와 함께 기다려. 내 금방 다녀올 때가 있으니......." 그러나 궁단향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단호함이 어려 있었다. "아니에요. 절대로 언니와 떨어지지 않겠어요. 아기는 제가 보살필 테니 같이 가요." "향매!" 그러나 궁단향의 의지는 확고했다. "어차피 모든 것이 종국(終局)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지금 헤어지면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 지 몰라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해요.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저도 더이상 패나 뒤집고 살 순 없어요." 단리사영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윽한 눈으로 궁단향을 바라보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잡은 손에 뜨거운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 향매의 말이 맞아. 이제 우린 결코 떨어져선 안 돼." 궁단향은 방긋이 웃었다. "언니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지 결정됐나요?" "글...... 쎄?" "호호! 거 봐요. 혼자 갔으면 어떡할 뻔 했어요? 중원천지를 방황한다고 일이 해결되나요?" 단리사영은 곱게 눈을 흘겼다. "어서 말해 봐. 어디로 가야 하지?" 궁단향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품에서 패를 꺼냈다. "이것이 마지막 패가 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더이상은 저도 패를 던지지 않을 결심이에요." 패가 던져졌다. 그 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평(平)> "평(平)? 무슨 뜻이지?" 단리사영의 말에 궁단향의 고운 아미가 활짝 펴졌다. "제 생각과 일치하는 군요. 화북대평원(華北大平原)이에요. 적도들은 그곳으로 갔어요." "어째서지?" "간단한 문제예요. 황백이 패도의 행진을 하는 방향을 계산하면 화북대평원을 지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의경 언니와 봉 언니를 납치해 간 자들도 화북대평원으로 갈 확률이 많아요. 잊었나요? 무량애는 결국 삼패의 수하라는 것을?" "그, 그렇군." "지금 즉시 출발해요. 언니들을 납치해 간 자들은 그다지 멀리가지 못했을 거예요." 이윽고 단리사영과 궁단향은 두 필의 말을 구해 화북대평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흐흐흐....... 네년이 천상제일루주라는 년이로구나. 일지겁천(一指劫天) 님의 황후(皇后)가 될 뻔한...... 그리고 네년은 하오방주이고!" 방 안으로 끌려 온 방의경과 화안봉을 음흉한 눈빛을 띠고 내려다보며 호피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이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승복을 걸친 제법 준미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무량애였다. 어느새 그는 인피면구를 벗고 본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인백의의 출현으로 개방은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개방도가 그의 곁을 떠났으므로 더이상 가짜 행세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곳은 하북대평원(華北大平原)이 멀지 않은 한 야산 기슭의 장원이었다. 하북대평원으로 조황백을 모시러 가던 무량애는 이곳에서 하룻밤 쉴 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조황백을 만나기 전 유희(遊戱)를 즐길 생각이었다. 궁등이 밝은 빛을 뿌리는 방 안. "......!" 사로 잡힌 방의경과 화안봉은 치를 떨고 있었다. 그녀들은 보기좋게 무량애의 수하들에게 당한 것이었다. 천상제일루로 돌아갔을 때 좀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었다. 실상 천상제일루는 이미 무량애의 수하들에게 장악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두 여인은 무심코 마신 차(茶) 속에 독(毒)이 든 것을 몰랐기에 싸움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사로잡히고 만 것이었다. "흐흐흐! 꼴 좋구나." 호피의자에 앉은 무량애가 바닥에 내팽겨친 두 여인을 내려보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실내에는 8명의 백포인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도문팔가의 마검(魔劍)을 착용한 자들이었다. 지금 그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욕정(欲情)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두 여인은 천하제일의 미녀였다. 게다가 옷차림이 반쯤 흘러내리거나 찢겨져 있어 간간히 백옥같은 살결이 내비치고 있으므로 사내라면 당연히 욕정을 느낄만 했다. "후후후! 네년들이 앞으로 천년왕국을 누릴 송조(宋朝)의 황후자리를 거부한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이제 알게 될 것이다. 얘들아!" 무량애의 눈이 껌벅거렸다. "후후후후......!" "킬킬킬......!" 놀라운 일이었다. 장승처럼 서 있던 8인의 백포인들이 일제히 괴소를 흘리며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잠깐 사이에 그들은 벌거벗은 흉물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무량애의 묵인 아래 윤간(輪姦)을 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 상황을 짐작 못할 방의경과 화안봉이 아니었다. 노여움으로 가득차 있던 그녀들의 눈동자에는 이제 두려움과 당혹감이 가득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제 그녀들은 늑대 앞의 먹이일 뿐이었다. "다, 다가오지 마라! 혀를 깨물고 말겠다!" 방의경이 야멸차게 부르짖었다. "푸하하하핫! 마음대로 안 될걸?" ㅆ! 한가닥 경풍이 일었다. 순간 방의경과 화안봉의 아혈(啞穴)이 마비되고 말았다. 이제는 말도 할 수 없을 뿐더러 혀를 깨물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마침내 두 여인의 앞으로 징그러운 양물을 덜렁이며 괴인들이 다가왔다. 그야말로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눈을 질끈 감아 보았으나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악!' '아아!' 두 여인은 비명을 토했다. 마침내 그녀들의 몸에 징그러운 손길이 닿은 것이었다. 찍! 부욱---! 비단천 찢기는 소리가 났다. 그나마 간신히 걸치고 있던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여인은 알몸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몸에 괴인들의 손이 닿았다. 어깨에, 유방에, 하복부에, 그리고 사타구니에....... '아악...... 악!' 새어나오지 않는 신음을 토해내며 방의경은 심하게 몸을 뒤틀었다. "크크크......! 네년이 발광하면 발광할수록 더욱더 즐거울 뿐이구나." 무량애의 비웃음이 방 안을 울렸다. 방의경은 그만 몸을 부르르 떨며 사지를 경련했다. 한 괴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손이 뒤로 묶인 상태에서 방의경은 그만 앞으로 꼬꾸라져 버렸다. 그러자 아주 고약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난생 처음으로 방의경은 이런 치욕적인 자세를 한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바닥에 처박은 채 엉덩이를 불쑥 내밀고 엎드린 자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탐스러운 엉덩이가 뒤에 있는 괴인의 손에 의해 허공으로 치솟았다. '아......!' 방의경은 하늘을 원망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런 치욕만은 면하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건만 하늘은 그녀의 소원에 냉담하기만 했다. 마침내 괴인이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최후의 자세로 돌입했다. 바로 그때였다. 콰쾅! 쾅!!! 돌연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장원을 진동시키는 것이 아닌가? 사방의 벽이 흔들리며 천정으로부터 우수수 흙이 떨어져 내렸다. "뭐...... 뭐냐?" 여유를 잡고 호피의에 앉아 즐기려던 무량애는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괴인들도 정신이 혼란해진 듯 멍청한 표정이었다. 휘리릭! 문득 한 인영이 방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오 척 장검과 바람에 날리는 탐스러운 머리결을 가진 여인. 그녀는 다름아닌 단리사영이었다. 쐐애애애액! 번개불같은 검광이 방 안을 휩쓸었다. "케엑!" "끄윽!"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녀가 한 번 휘두른 검에 벌거벗고 겁간하려던 8인의 검마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8대검마. 그들은 도문팔가의 마검을 이어받은 자들로 개개인의 무공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채 대항 한 번 해보기도 전에 단리사영의 검에 고혼이 되고 만 것이었다. "으으으! 이...... 이런 개같은!" 무량애는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살인병기들이 이렇게 무참하게 도륙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 단리사영은 두 여인의 포박을 단숨에 끊어버리더니 재차 혈도마저 해혈해 주었다. "어서 이 옷을 입으세요." 단리사영은 두 벌의 옷을 던져 주고 난 후 몸을 빙글 돌려 무량애를 노려보았다. "네...... 네년은?" 비로소 단리사영의 모습을 똑똑히 본 무량애는 안색이 희어졌다. "너...... 넌 천상제일루와 함께 가루가 되지 않았느냐?" 단리사영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났다. "후후! 그따위 하류배의 솜씨로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단리사영은 매서운 살기를 발산하며 무량애를 추궁했다. "더러운 중놈! 이제 너의 생도 오늘로 마감이다. 각오해라." "......!" 무량애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 순간 단리사영의 검이 그를 향해 겨누어 졌다. 무량애도 가만 있지 않았다. 파앗! 그는 손을 활짝 벌리며 혈풍오뢰마장(血風五雷魔掌)을 쏟아냈다. 그가 최후의 비기로 숨겨 두었던 무공이었다. 그러나 단리사영이 무량애보다 빨랐다. 츠리릿! 섬광(閃光)과 함께 쏘아간 단리사영의 검식이 어느새 무량애의 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시뻘건 혈무(血霧)가 방 안을 가득 메우며 희대의 악승 무량애의 수급이 둥실 떠올랐다. 무량애는 자신의 육체에서 분리된 머리통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눈알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40 조화십팔보(造化十八步) 화북대평원(華北大平原). 그 끝없는 지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다. 금시라도 눈보라가 휘몰아칠 듯한 험악한 천기였다. 예로부터 화북(華北)을 장악하는 자가 곧 천하를 얻는다고 했다. 그만큼 화북대평원의 비중은 군사적으로 절대적인 요충지(要衝地)였다. 지금 한 사나이가 화북평원에 당도하고 있었다. 그는 팔 척의 거신을 지니고 있으며, 수중에는 육 척이 넘는 거검을 쥐고 있었다. 이름하여 팔만사천마검(十八萬四阡魔劍)! 뚜벅뚜벅......! 규칙적으로 걸어가고 있는 사나이의 모습은 마치 하나의 철탑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파라라라락! 바람이 불었다. 메마른 삭풍이 철탑 사나이의 옷자락을 찢어 발길 듯이 휘날렸다. 그러나 사나이는 초연했다. 그 뒤를 다소곳이 고개를 떨구고 따르는 인영은 그와는 크게 대조적인 가냘픈 여인이었다. 소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려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하늘 끝, 땅 끝까지라도 사나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하겠다는 비장한 의지가 여인의 눈 속에는 서려 있었다. 철탑 사나이가 걸어온 길은 피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애당초 하늘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여인 또한 후회하지 않고 있었다. 하늘 끝까지 간다면 따를 것이요, 설사 불지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해도 그녀는 따를 것이기에.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다름아닌 조황백과 설화였다. 그 이름들은 운명이 하나로 묶어놓은 이름이었다. 전 중원을 공포로 떨게 만들고 있는 일지겁천 조황백은 설화와 함께 그렇게 화북태평원을 걷고 있었다. 그 언제였던가....... 조황백은 무너진 송조(宋朝)를 재건하게 된다면 이 화북대평원에 웅장한 자신의 성(城)을 세우겠노라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지금 그는 평원을 걸으며 그 생각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무너진 송조를 세운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그 결심을 꼭 이룰 작정이었다. "......?" 조황백은 문득 뒤를 따르던 발자국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돌아섰다. 설화가 10여 장 뒤에 처져 있는 것이 보였다. 불현듯 황백의 눈에 그런 설화가 한없이 나약하게 비쳐졌다. 아름다웠으나 슬프도록 나약한 여인. 그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설화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뒤로 돌아 걸어갔다. "설화. 추우냐?" 설화는 황백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두 눈망울에 깃들인 천진무구한 슬픔을 어찌 황백이 모르겠는가. 황백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 좀 쉬어 가자." 황백은 설화의 가냘픈 몸을 살풋 감싸 안았다. 그리고 신형을 날렸다. 거암(巨岩). 그것은 화북평야 한가운데 솟아 있었는데 하나의 산봉우리인 양 평야를 굽어보는 위치에 있었다. 조황백은 설화와 나란히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고는 하나 그 모습은 도리어 하나의 탑이 서 있는 것같았다. "이리 오너라." 설화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황백을 보았다. 황백이 그녀를 향하여 팔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설화는 연일 계속되는 방랑으로 지쳐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황백의 따스한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녀는 다소곳이 그에게 기댔다. 황백은 그녀의 작은 몸을 안았다. 가슴에 다소곳이 안기는 설화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작은 아기새처럼. 황백은 문득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 번도 설화에게 다정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설화. 왜 나를 따르느냐?" 설화는 그의 품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겁먹은 듯한 눈이 가득 물기를 품고 있었다. '사랑하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물론 황백도 그녀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아무 말이라도 좋았다. 설화에게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설화. 너는 참으로 이상한 계집이다. 애초부터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짐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웬지 너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운명을 지닌 것같다는 느낌이었다." "......." 설화의 눈에서 기어이 한 줄기 눈물이 흘러 내리고 말았다. 그녀는 넓은 황백의 가슴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표시인지도 몰랐다. 황백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어깨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멀리 지평선 아득한 곳으로부터 한가닥 검은 폭풍이 이는 것을 그는 보았다. '곧 눈이 내리겠군. 올 겨울은 꽤 가물었었지.' 황백은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화는 계속 황백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황백은 문득 이 세상에 없는 문백과 천백을 떠올렸다. '......!' 황백의 가슴이 아려왔다. 대륙은 생각보다 넓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 그 넓은 대륙을 그는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죽이고 또 죽이고...... 가로막는 문파나 무림인들은 그의 앞에 더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하나같이 그의 패도적인 무공 앞에 쓰러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은 넓었다. 너무나 넓었다. 처음 그가 생각한 것은 간단했다. 정복(征服). 그 하나의 진리였다. 정복하고 또 정복하면 천하는 그의 발 아래 엎드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생각은 조금도 틀리지 않은 것같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에게 정복당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그러나 단 하나, 대륙만은 그에게 정복되지 않고 있었다. 대륙은 너무나도 넓고 너무나도 의연했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화북대평원의 한 거암만 해도 그렇다. 거암은 그의 존재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거암은 거암일 뿐, 그가 희대의 패도자라는 사실을 조금도 모르는 듯했다. 저 검은 폭풍만 해도 그렇다. 그 폭풍은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문득 조황백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회의였다. 세상은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그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 내가 아니란 말인가? 하늘이 나를 택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의 가슴 한 구석에서 갑자기 무엇인가 와르르 무너지는 붕괴의 굉음(轟音)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조황백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그는 자신이 약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독존적(獨尊的)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대륙이었다. 아무리 가고, 또 가도, 대륙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에 황백은 자신의 한계와 외로움을 절감하며 지금 이 순간 죽은 동생들을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문백. 놈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홀로 독보행(獨步行)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놈은 나로 하여금 검을 들 필요도 없다고 역설했었지....... 후훗! 그리고 천백. 그놈은 언제나 내가 할 일을 맡아 해주곤 하였지. 후훗...... 놈은 강해. 마치 나 자신을 보는 것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으니까....... 놈들은 정말 사랑스러운 아우들이었지! 그런데 이제서야 새삼스럽게 놈들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날 버리고 고인이 된 놈들을......' 지평선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황백의 눈에 얼핏 안개같은 것이 어리고 있었다. 천하를 피로 씻겠다던 잔악무도한 그의 눈에도 한가닥 눈물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황백은 쉬고 싶은 기분을 요즘 들어 부쩍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힘이 부쳐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단 한 번 만이라도 좋으니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푹 쉬었으면 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혈혈단신(孑孑單身), 혼자였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는 흠칫했다. "왜 우느냐?" 그는 비로소 아까부터 설화가 그의 가슴에 기대어 계속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 물었다. 고개를 든 설화의 대답은 천만 뜻밖이었다. "기뻐...... 서요." 설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엇이......?" "폐...... 폐화의 곁에 있다는 것이......." "......!" 더이상 말을 듣지 않아도 황백은 알 수 있었다. 아니, 말이라는 것은 이런 자리에서는 원래부터 필요치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황백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겨 주었다. "내 너에게 황후(皇后)의 자리를 주마. 온갖 부귀영화와 함께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그런 위치를 주마." "......." 대답 대신 설화는 더욱더 황백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황백의 약속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설화의 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내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 그런 모든 것보다 당신 하나면 된답니다. 그게 저의 소원이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차마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왜냐면 그녀가 아는 황백이라는 인물은 설화라는 한 여인이 안기에는 너무나도 큰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희끗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는 황백과 설화의 마음도 촉촉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 추위였고 오랜 가뭄이었다. 눈은 이내 폭설이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대륙 특유의 바람이 일자 엄청난 눈보라가 화북대평원을 휘감기 시작했다. 거암이 마주 보이는 곳에 하나의 천연적(天然的)인 요새(要塞)가 있다. 지형적으로 움푹 들어가 있어 거암 쪽에서는 그곳을 볼 수가 없는 곳. 지금.......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는 화북평원의 분지(盆地)에는 수천 명의 무림인들이 운집하고 있었다. 그들은 얼굴에 비장한 각오를 띄우고 병기(兵器)를 안고 있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영수(領袖)는 뜻밖에도 이십 세가 채 되지 않은 한 명의 가냘프기 만한 소녀였다. 그녀는 다름아닌 궁단향이었다. 그녀는 방의경, 화안봉, 단리사영에게 둘러싸인 채 거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괴물처럼 우뚝 솟아 있는 거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거암 위에 앉아 있는 두 개의 인영이 있었다. '......!'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궁단향의 마음은 절망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틀렸어! 도저히 가망이 없는 일이야. 아아! 어쩌면 하늘은 저토록 완벽한 철인(鐵人)을 만드신 것일까?' 지금 그녀의 주위에는 구파일방의 정예고수와 천하 각 문파의 고수들이 모두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곳에서 조황백과 최후의 결전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러나 조황백을 주시하면 할수록 궁단향의 마음은 더더욱 불안하기만 했다. 그녀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설사 이들 전부가 합친다고 해도 황백을 꺼꾸러뜨릴 수가 없다는 것을. '결코 이길 수 없어! 그는...... 다른 것이 아닌 삼패의 모든 것이기에.......' 절망 그 자체였다. 실낱같은 한 줄기 희망이라도 보였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더구나 퍼붓기 시작하는 눈발도 황백을 돕고 있는 형국이었다. '도...... 도저히 불가능해. 구파일방은 헛된 죽음을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말았어. 아아......하늘이시여......!' 이때였다. 불현듯 단리사영이 부르르 떨었다. "저...... 저기를 보아!" "......!" 그녀의 말에 세 여인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순간 궁단향과 방의경, 화안봉은 전기에 감전된 사람인 양 온몸을 떨었다. 아니 떨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저...... 저분은......!" "오오......!" 그렇다. 지금 그들이 숨어 있는 방향과는 다른 쪽에서 거암을 향하여 서서히 걸어가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점(點)에 불과했으나 차츰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인영의 윤곽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오! 하늘이시여! 끝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군요!' 궁단향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환영인가?' 조황백은 눈보라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곤 하는 하나의 점을 보면서 의아해 했다. 그러다 마침내, "......!" 조황백은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천시안(千視眼)을 전개한 결과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영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운명의 화살같은 심상치 않은 예감이 황백의 가슴을 쳤다. '어떤...... 미친 놈이 나 황백에게......?' 그는 가슴에 쿵, 하는 울림을 느꼈다. 그것은 명백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자가 바로 자신을 목표로, 자신과 싸우기 위해 오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이윽고 처음에는 점에 불과했던 인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왔다. 휘유웅! 눈보라를 타듯이 거암 위로 한 줄기 폭풍처럼 날아오른 인영은 곧 그의 눈앞에 떨어졌다. 놀라운 것은 상대방이 착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발을 땅에 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기승풍답천술(於氣乘風踏天術)!' 황백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것은 잊혀진 전설(傳說) 속의 경공술(輕功術)이었다. 단지 바람 한 점만 있어도 그 바람을 타고 날 수 있는 무림에서 수백 년간 실전된 경공술이 상대방에게서 펼쳐진 것이었다. 상대방은 마침내 그의 앞 5장 밖에 떨어졌다. 그를 바라본 조황백은 다시 한 차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같은 남자라도 반할 놈이군.......' 그렇다. 눈보라 속에 우뚝 선 채 백의자락을 날리고 서 있는 상대방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여인들의 가슴에 깊은 각인을 남길 정도로 아름답고 미려했다. 다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무한한 꿈을 주는 그런 옥인(玉人)같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불현듯이 나타난 그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조황백의 미간이 다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편, 한 마장 가량 떨어진 분지에서 거암 위에 나타난 인영을 보고 있는 4명의 여인들은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일 먼저 방의경이 감격에 겨운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그이...... 그이에요!" 그렇다. 그녀가 그이라고 자신있게 부를 만한 위인이 또 어디 있겠는가? 눈보라 속에서 평원을 가로질러 나타난 사나이는 바로 종리연이었다. 광명비전을 얻기 위해 황하의 수궁으로 들어갔던 그가 마침내 출관한 것이었다. "......!" 네 여인을 비롯한 수천 명의 군웅들은 숨을 죽인 채 거암을 바라보고 있었다. "향매! 이......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지......?" 너무나도 반갑고 감격스러워 화안봉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거암을 바라보고 있던 궁단향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뿐이에요." "한 가지 뿐이라니?" "기다리는 것....... 그분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인걸요." 중인들은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렇다. 그 방법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조황백의 가공할 무공을 그들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종리연이 광명비전의 비학으로 희대의 거마 효웅인 조황백을 물리쳐 주기만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눈보라는 미친 듯이 휘날리고 있었다. 철탑이 움직였다. 바위에 앉아 있던 황백이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제법이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가만히 품에 안겨 있던 설화를 밀어냈다. 설화는 부르르 떨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저만치 가서 주저앉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황백이었다. "자네 이름은?" 그가 이렇게 물었다는 것은 아주 파격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황백이 최소한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종리연이라고 하오." 종리연의 대답이었다. "......?" 황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것같은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는 눈썹을 이상하게 움직였다. "그럼...... 네가 바로 과거에 담간랑(膽肝郞)이라는 별호로 불리웠던......?" 종리연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소." 황백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소문이란 믿을 것이 못돼....... 자네는 참으로 훌륭한 무사다."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황백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짐이 한 가지 제의를 할까 하는데......?" 종리연은 대답없이 기다렸다. 황백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도 말을 이었다. "짐의 수하가 되지 않겠는가?" 파격적인 말이었다. 아니,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 황백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종리연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황백은 한 가지를 덧붙였다. "응한다면 짐이 중용(重用)을 약속하지." "훗......!" 종리연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흘러 나왔다. "왜 웃는가?" 종리연은 그를 바라보았다. 종리연의 눈은 참으로 맑았다. 마치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티 하나 없이 맑은 눈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험악하고 무서운 순간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눈이었다. 종리연이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원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상대가 적이라니. 그래서 웃은 것이오." 그 말의 의미는 자명했다. 황백의 안색이 굳어졌다. "네놈은 결국...... 짐의 반대 편에 서겠다는 건가?" 종리연의 대답은 짧았다. "운명이오." "운명이라. 그럴 듯하긴 하군." 황백은 결심을 굳혔다. "음. 아까운 일이지만...... 입장이 그렇다면 시간을 더 끌건 없지." 말이 떨어진 순간....... 파아아아아! 황백의 몸이 날았다. 거대한 철탑이 떠오르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는가? 그것도 떠오르는 순간 팔만사천마검이란 이름으로 불리우는 거검(巨劍)이 동시에 발검되는 광경을 말이다. 황백은 검과 거신이 하나가 되어 만장 허공으로 솟구친 것이다. 그러나 종리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세를 잡더니 쌍장을 합쳤다가 떼며 허공으로 춤추듯이 날아올랐다. 휘리리릭! 우- 우우응-! 휘이익-! 눈보라는 소용돌이의 기류 속으로 굉음을 울리며 휘날리고 있었다. "어...... 어쩌죠?" "아아! 벌써 일 주야째예요...... 어찌 인간이 저런 능력을......?" 이제 군웅들은 더이상 분지(盆地) 속에 숨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몸을 드러낸 채로 거암을 포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네 명의 여인들도 거암에 접근해 있었다. 그들은 허공에 먹장구름이 뒤엉켜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일 주일째 내내 싸우고 있는 조황백과 종리연의 모습이었다. 우르르르르....... 콰아아아......! 굉음이 이따금씩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두 마리의 흑룡, 백룡이 얽혀 싸우고 있는 광경과도 같았다. 칠 주야(七晝夜). 말이 칠 주야지, 그 동안의 싸움은 단 한시도 멈춤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신(神)의 싸움인들 저리도 굉장할까? 이때였다. 거암의 한 곳을 살피던 궁단향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기 저 여인......." 그 말에 삼인의 여인들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기도하는 여인이 있었다. 설화였다. 설화는 7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거암 위에서 무릎꿇고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그녀를 가르킨 궁단향의 입술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제...... 기나긴 싸움이 끝날 때가 되었어요......" "......?" 세 여인은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여인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찾아헤맸던 미령심안의 여인이에요. 그 동안 삼패의 곁에 있었기에 기도가 가려져 천기에도 드러나지 않았던 거예요." 방의경이 물었다. "그런데 싸움이 곧 끝날거라니......?" 방의경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문득 설화가 모로 쓰러지고 있는 것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다. 번...... 쩍! 돌연 허공에서 섬광이 일어났다. 뒤이어, "크으으으으아악......!" 처절을 극한 한 마디의 참담한 비명이 허공을 찢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조용해졌다. 굉음도 사라졌으며, 폭풍도 가라앉았다. 바로 그 순간 군웅들은 볼 수 있었다. 누군가가 거암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황백이에요!" 화안봉이 소리쳤다. 그렇다. 조황백이었다. 그는 일직선으로 거암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정수리가 거암에 부딪쳐 박살나려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신형을 바로잡으며 내려섰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거대한 철탑인 듯 굳건하던 그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술에 취한 낭인(浪人)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조황백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설화가 모로 쓰러져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설화를 일으키더니 자신의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다. 설화는 울고 있었다. "폐하......?" 황백은 웃었다. "허허...... 그래...... 너는 아직...... 괜찮으냐?" "폐하......!" 설화의 눈에서 비오듯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패한 것이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가 탈진하여 쓰러진 순간 황백의 심기가 흐트러져 종리연과의 싸움에서 치명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황백은 다정하게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패안(覇眼)에서 처음으로 뜨거운 사랑의 빛이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널...... 널...... 황후로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폐하!" 설화는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갑자기 철탑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폐하......!" 설화는 황백과 함께 쓰러졌다. 거대한 철탑은 설화를 안고 쓰러진 것이었다. 쿵! 희대의 거인(巨人) 일지겁천(一指劫天) 조황백. 그는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지금 하늘을 향해 뜬 눈에서는 기이하게도 욕망이라던가, 아니면 분노라던가, 또는 일말의 한(恨)의 빛초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의 눈에서는 아주 부드럽고 평화로운 기운이 어려 있었다. "흐흐흑......!" 그 눈동자 위에 설화의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폐하!" "......." 종리연은 애끓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설화를 바라보며 곁에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칠 주야의 싸움은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쏟아내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종리연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이때 거암 위로 많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림사에 전무후무했던 대혈전을 칠 주야 동안이나 지켜 보았던 무림군웅들이 거암 위로 올라서는 것이었다. 군웅들의 선두에 네 명의 아름다운 인영들이 가장 먼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바로 사성녀(四聖女)였다. 종리연은 문득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 그를 향해 달려오려던 사성녀는 그가 갑자기 등을 돌리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하여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때였다. 종리연이 다시 돌아섰다. 그 순간 궁단향, 방의경, 화안봉, 단리사영은 볼 수 있었다. 돌아선 종리연이 품속에서 한 자루의 섭선을 꺼내더니 좌우로 흔드는 것을......! 종리연은 섭선을 흔들며 그녀들에게 걸어왔다. 어느새 종리연의 걸음걸이가 바뀌고 있었다. 군자보(君子步)에서 군웅보(群雄步)로...... 백학보(白鶴步)로...... 다시 풍류취선보(風流醉仙步)로...... 낙화산보(落花散步)로....... 조화십팔보(造化十八步)를 전개하는 종리연을 바라보는 네 여인들의 표정은 정녕 볼 만한 것이었다. 그녀들은 넋을 잃은 채 종리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녀들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나이를 보고 있었다. 세상에 다시 없는 절세의 풍류남아요, 절세의 기공자(奇公子)를 바라보는 사성녀의 얼굴에는 황홀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화북대평원에 겨울 저녁의 잔양(殘陽)이 지고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