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천년세가 제1권(전3권) 지은이: 서효원 - 차 례 - 序章 1 잊혀진 신화(神話) 序章 2 천년대업(千年大業) 第1章 고약한 녀석, 유성혼(流星魂) 第2章 용(龍)의 세월, 그 숙명의 의미 第3章 야망(野望)의 의미 第4章 거대한 인연(因緣) 第5章 강자생존(强者生存) 第6章 이제 돌아간다 第7章 천 년의 침묵은 깨어지고 第8章 천년세가(千年世家) 第9章 가장 깊은 밤 第10章 침묵의 벽(壁) 序章 1 잊혀진 신화(神話) 그들의 신화(神話)는 무림 사상 가장 격렬했던 십 년(年)에 걸쳐 이룩이 되었다. 야망(野望)과 승부(勝負)와 절정절대비기(絶頂絶代秘技)의 기록들……. 대륙무도(大陸武道)에서 가장 치열했던 그들의 세력 다툼은 가히 춘추전국(春秋戰國)의 대란(大亂)을 방불케 했다. 살아서 군림하는 절대자(絶代者)가 되겠다는 야망(野望)과 영구히 붕괴되지 않을 악마제국(惡魔帝國)을 건립하는 욕망으로 인해 이룩된 시산혈해 가운데, 그들의 신화는 무림사의 분수령(分水嶺)이 되어 이어져 왔다. 무려 천 년(年)에 걸쳐서……. 영웅팔가(英雄八家), 사대마계(四大魔界). 다시는 없을 마계와 영웅계(英雄界)의 우상(偶像)들이여! 살아서는 신화를 이룩하고, 죽어서는 전설로 남은 그들. 십 년에 걸쳐 남북(南北) 십팔만 리(里)를 피로 씻으며 격돌했던 칠만사천(七萬四千)의 마계(魔界) 승부사(勝負士)들과, 오만이천(五萬二千)의 영웅계(英雄界) 무객(武客)들! 남칠성(南七星) 북육성(北六星)의 전역에서 격돌했던 양대세력의 무사들은 십 년에 걸친 세력 다툼 끝에 양패구상하고 말았다. 야망(野望)이라는 이름 아래 무림전국(武林戰國)을 이룩하고, 대업(大業)이라는 미명 아래 풍운대란(風雲大亂)을 십팔만 리에 불러일으켰던 인물들. 영웅팔가(英雄八家), 사대마계(四大魔界). 그들은 무수한 시산혈해를 이룩한 후 사라졌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듯이 그들은 천 년의 장막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나, 신화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신화는 천 년에 걸쳐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로 깨어나는 모든 여명(黎明)의 순간마다, 천산천수(千山千水)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바람(風)의 길목에서, 아스라이 떨어져 가는 유성우(流星雨)의 모든 밤(夜)마다, 그들 십이도(十二道)의 절대자들의 숨결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마계신화(魔界神話). 오천 년 전부터 그들은 사대세력으로 뭉쳤다. 죽어도 죽지 않는 마혼(魔魂)을 지닌 자들, 그들 악마의 숭배자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이룩하기 위해 악마의 율법(律法)을 이룩했다. 피(血)와, 죽음(死)과, 모든 밤(夜)을 바쳐……. 악마의 혼은 구천십지(九天十地)에 절대군림(絶代君臨)하는 그 날까지 밤의 가족(家族)으로 뭉쳐야 한다. 그들은 피의 결연 관계가 없어도 자신들을 가족이라 불렀다. 그리고 반역자는 용납하지 않았으며, 적(敵)으로 낙인이 찍히는 자는 그 자가 내부자이건 외부자이건 가리지 않고 만리추적(萬里追跡)하여 살해했다. － 밤의 가족은 무공(武功) 서열(序列)에 따라 이십팔 단계의 마계(魔界) 서열(序列)에 안배가 된다. － 하위자는 상위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상위자가 아비를 죽이라면 아비를 죽이고, 부처를 죽이라고 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 － 밤의 가족간의 인연(因緣)은 모든 것 이상이다! 그것은 혼(魂)이기에……! 무수한 공포의 기록 가운데 사대세력으로 뭉친 자들. 그들은 마교비전(魔敎秘傳)의 차이에 따라서 네 개의 완전무결한 세력으로 이합집산되었다. 태양마계(太陽魔界), 기환마계(奇幻魔界), 사신마계(死神魔界), 금강마계(金剛魔界). 겹겹이 펼쳐진 비밀의 장막에 실체를 감추고 머무는 마계의 지배자들. 그들은 사대승상(四大丞相)이라고 불렸으며, 마계천자(魔界天子)라는 신화적 존재의 후계자로서 안배가 되었다. 또한 마계천자는 그들 사대승상 가운데에서 나타난다는 마계의 율법이 완성이 되었으며, 천하각지의 마도계의 도전을 격파하는 가운데 사대마계는 지하무림(地下武林)과 암흑무림(暗黑武林)을 지배하는 가장 막강한 집단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 밤(夜)의 형제(兄弟)들이여! 밤의 가족(家族)들이여! 이제 우리의 시대가 왔다. 이제 침묵에서 깨어나 중토(中土)를 정복하라! 천 년 전 어느 날, 사대승상은 천하 정복의 명령을 전 마계 제자들에게 하달했고… 그 순간, 악마의 신화는 시작이 되었다. 베고, 죽이고, 파괴하고, 정복하고, 복종시키고……. 사대마계 무사들은 남북 구만 리를 뜨거운 혈액(血液)의 비(雨)로 적시며 무적의 진군을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실로 기괴한 여덟 세력의 거센 도전에 봉착하게 되었다. 대체 어디서 그러한 강호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단 말인가? 푸른 이리(靑狼)을 타고 오는 자들, 희디흰 손(素手)으로 너울너울 춤사위를 하며 오는 자들, 꽃과 풀(花卉)을 바구니 가득 담아 등에 메고 온 인물들, 영웅도 되지 못하는 밤의 인간(夜人)들이로소이다! 노래하며 가로막는 기인들……. 패왕(覇王), 풍운(風雲), 신화(神火), 그리고 유성세가(流星世家)! 대체 어디서 나타난 무도인(武道人)들인가? 그 이전까지는 무림계에 나타나지 않았던 팔대가문의 문하제자들이 무수히 나타날 줄이야? 마공은 신검(神劍)으로 막고, 독(毒)은 약(藥)으로 흩트리고, 암기(暗器)는 화탄(火彈)으로 태워 버리고……. 팔대세가의 인물들은 남북 십팔만 리를 장악하기 위해 천로(千路)에서 세력을 일으킨 사대마계의 승부사들을 모조리 가로막았다. 무려 십 년에 걸쳐 양대세력은 처절히 격돌하였으며, 최후의 한 사람이 쓰러지는 순간까지 피보라는 끊이지 않았다. 결국 사대마계의 준동(蠢動)은 철저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악마왕국을 이룩하고자 했던 사대마계는 사천 년의 모든 저력(底力)을 잃어버린 채 머나먼 유형(流刑)의 길에 올라야만 했다. － 태양(太陽)은 북해(北海 : 현재는 발해(渤海)로 불림)로! － 기환(奇幻)은 천축(天竺)으로! － 사신(死神)은 동영(東瀛)으로! － 금강(金剛)은 천산(天山)으로! 사천 년의 내란(內亂) 끝에 단결이 되었던 사대마계의 후예들은 일패도지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바로 그 날, 그들은 중토(中土)에 피와 눈물을 흘리며 이러한 말을 남겼다. － 언제고… 돌아온다! － 우리들이 승리하지 못한 이유는 적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일한 절대자(絶代者)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기다려라! 마계천자(魔界天子) 악마천사(惡魔天使)가 탄생하는 그 날을……! － 천 년이든 만 년이든, 그 날은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날, 마계의 염원(念願)은 풀리리라! 사대마계의 제자들은 그러한 저주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갔다. 또한 피와 주검의 산을 쌓으며 그들을 가로막았던 팔대가문의 후예들 역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날, 그들로 인해 하나의 영원한 신화가 중토에 깊이 새기어지게 되었다. 진정한 천년무림의 신화가……! 영웅신화(英雄神話). 제일유성(第一流星), 제이청랑(第二靑狼), 제삼야인(第三夜人), 제사패왕(第四覇王), 제오소수(第五素手), 제육신화(第六神火), 제칠화훼(第七花卉), 제팔풍운(第八風雲). － 팔대세가는 마계의 준동을 막기 위한 대중원(大中原) 최고(最高) 최후(最後)의 비밀결사(秘密結社)였다. － 하나 그들의 저력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막지 못한 이상, 패배자는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다. － 이제 우리는 영웅팔가(英雄八家)라 하지 못하리라. 이제 우리는 춘추팔가(春秋八家)로 몰락할 것이며, 사대마계의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계대장경(魔界大藏經) 안의 절대마예(絶代魔藝)를 모조리 격파할 대영웅(大英雄)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참회하며 지내라! － 영웅팔가는 힘이 비슷하기에 완전히 뭉치지 못했다. 이제 끝없는 참회와 참수(參修)의 길이 시작되리니……. － 군림(君臨)의 그 날이 있기 전까지… 중원(中原)이여! 우리들을 영웅이라 부르지 마오! 영웅팔가의 고수들은 사대마계의 승상들을 놓쳤다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그러한 말을 남겼다. 그 후 그들은 야인(野人)으로 돌아갔으며, 십년대란(十年大亂)이 있은 후, 천 년이 지나는 날까지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아, 영웅팔가! 그들은 결국 사라져 버린 신화의 마지막 장(章)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라면 그들은 사대마계의 연합된 저력을 격파하는 잠력(潛力)을 기르기 위해 와신상담하는 잠룡(潛龍)의 시대로 접어들었을 뿐인가? 하여간 천 년은 위대했다. 세월은 모든 것을 퇴색한 기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누구도 그들의 신화를 기억하지 못하며, 천하는 십이도(十二道)의 판도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고 흑도백도(黑道白道)로 갈리어 갈등을 거듭하게 되었다.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은 채……. 그들의 야망(野望)과, 그들의 꿈(夢)과, 그들의 혼(魂)과, 그들의 신화(神話)를……!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은 채 천 년은 하룻밤의 꿈처럼 지나가 버렸다. 하나, 그대가 무림인이라면 기억해야만 한다. 마계(魔界)와 영웅계(英雄界)의 승부사들과, 그들이 남긴 묵시(默示)를!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실일 수 있기에… 그대는 마계신화와 영웅신화를 잊지 말아야 한다. 진심(眞心)으로 그대는……! 序章 2 천년대업(千年大業) 천지개벽(天地開闢).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다. 성모봉(聖母峯)의 준험함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뇌성벽력 가운데 뿌리째 뒤흔들리고 있었다. 깊디깊은 밤, 마른 벽력이 포효하며 만산만수(萬山萬水)를 겁탈하듯 거친 번갯불을 끝없이 토해 내는 밤이다. 보라! 대체 어디서 날아드는 것일까? 수없이 많은 마등(魔燈)이 기나긴 행렬을 이루며 성모봉 위쪽으로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동(東), 서(西), 남(南), 북(北)……. 사방에서 다가서는 마등의 행렬은 십오 리(里)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듯이 둥둥 떠오르는 자들, 핏빛 전포(戰袍)로 전신을 휘어 감은 자들……. 시뻘건 혈마등(血魔燈)을 하나씩 들었으며, 핏물이 뚝뚝 흘러내릴 듯한 악마도(惡魔刀)를 도집도 없이 왼손에 쥐고 훌훌 날아오르고 있다. "……." 깊디깊은 침묵 가운데 움직이는 자들. 흰 천으로 전신을 휘어 감고 있으며 백마등(白魔燈)을 손에 쥐고 있다. 서리가 엉겨 붙은 듯 차가운 백인마창(白忍魔槍)을 하나씩 어깨에 떠메고 있는 자들. 이들 또한 끝이 없는 침묵과 죽음의 행렬을 이루며 치달아 가고 있었다. 녹포(綠袍)에 녹마등(綠魔燈), 녹혈광상검(綠血狂想劍)을 두 자루씩 등에 십자로 교차하여 메고 있는 자들. 그들 역시 침묵과 죽음의 행렬을 길게 이어 나가고 있었다. 흑포(黑袍)에 흑마등(黑魔燈), 흑사마라추(黑死魔羅鎚)를 허리에 둘둘 두르고 있는 괴인들 또한 기나긴 행열을 이루고 있다. 콰앙－! 하늘과 땅이 하나로 붙어 버리는 듯 산야(山野)는 격동을 하고 있으며, 괴인들의 움직임은 깊어 가는 밤도 잊고 끝없이 깊어 가고 있었다. 보라! 하나의 거대한 은색(銀色) 대전(大殿)을. 아름드리 기둥 백팔 개가 거대한 은와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기둥에 양각이 된 악마의 형상이 뇌성벽력이 내려칠 때마다 숨결을 흘리는 듯 약동으로 번뜩거린다. 뇌(雷), 그리고, 천 년의 눈이여! "삼 년이면 천하의 백팔 개 지역에 비밀타(秘密舵)를 완전히 구축할 수 있습니다!" 차디찬 목소리, 유계(幽界) 바닥에서 흘러 나오는 듯한 목소리이다. "또한 사 년째부터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며, 천하무도계의 숙적(宿敵)들은 그간 준비된 비밀세력에 의해 하나하나 섬멸이 될 것입니다." "……." "……." "모든 것은 오 년 안에 이룩됩니다!" 자욱한 안개다. 대전 안에는 사대마무(四大魔霧)가 뒤엉키고 있었다. 사악한 목소리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 무림계의 절대자들에 대한 모든 정보가 수집이 되었으며, 그들을 격파할 방법이 모조리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천년대업(千年大業)을 저지시킬 거대 집단에 대한 분석도 마무리지어졌습니다." 사색의 마무가 격하게 출렁거린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피(血)와 죽음(死)을! 이상입니다!" 몇 줄기의 마광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자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 그리고 안개로 몸을 휘감고 있는 자들. 암흑(暗黑) 지하(地下)에서 솟아오른 듯한 인물들, 이들은 꽤 오랫동안 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가장 웅장하고, 또한 가장 사악한 목소리가 나직이 흘렀다. "구파일방(九派一 )은?" "몰락 직전입니다. 기실 그들은 머리 없는 거인(巨人)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비밀결사(秘密結社)를 꾸미고 있으나, 그들의 모든 것은 저희들에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 "힘으로 박살낼 수도 있으나, 그럴 경우 공분을 사기 쉽기에 암중 와해하는 마령책을 계획하였으며… 그 중 칠 할은 이미 성사가 되었습니다!" "좋아!" "……." "여타 해외세력(海外勢力)은?" "달단(�됡�)의 흑풍사(黑風沙)와 동영(東瀛)의 월광(月光)이 두드러지나, 간과해도 좋을 수준입니다.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나, 적이 되기는 힘든 작은 집단이기에……!" "좋아!" "……." "춘추(春秋)의 그들은?" 신비한 목소리가 조금 격앙이 된다. "그들은 권태에 휘말려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흠……!" "영웅총사(英雄總師)는 나타나지 못합니다, 절대로! 그들은 잠력(潛力)을 키우다 못해 자멸하고 있습니다." "……!" "아마도 천 년 전의 실수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본 후 내린 결정입니다." "천 년 전에도 그러했었다. 그 자들에게는 실로 묘한 저력이 있다. 물론 그 모든 저력에 대비해 힘을 길렀고, 승리할 확신이 있다. 하나, 늘 조심해야 한다!" "예!" "좋아. 하여간… 시작하라. 천 년의 꿈을……!" "예엣!" "존명(尊命)!" 복창하는 소리가 은색 대전에 가득하다. 꽈르르르릉－ 콰앙－! 천지개벽(天地開闢).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악마의 밤은 개벽 가운데 깊어 갔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여간 운명(運命)은 시작이 되고 있었다. 第1章 고약한 녀석, 유성혼(流星魂) 구월(九月)이다. 산하(山河)는 단풍에 의해 혈세(血洗)당하기 시작했으며, 무수한 파편으로 깨어져 내릴 듯한 창궁(蒼穹)에 휘감기고 있었다. 원(元)과 명(明)이 교체되고 어언 이 갑자(甲子). 너무나도 오랫동안 농노(農奴) 노릇을 했던 강남(江南) 지방의 한인(漢人)들은 명제국(明帝國)이 세워진 후에야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강호무림(江湖武林) 역시 평온하다 할 수 있었다. 천하 도처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나고, 매일같이 무수한 사람들이 검하고혼(劍下孤魂)으로 사라지고는 있지만… 그것은 대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천하는 넓은 곳이다. 풍운이 거세게 부는 곳이 있다면 호수처럼 잔잔한 곳도 있다. 천하를 독패(獨覇)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을 저지하려는 세력도 있다. 그리고 지금의 평온은 양쪽의 세력이 적당한 균형을 이루었기에 벌어지는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아니면 폭풍 전야의 고요일 수도……. 구구(九九) 중양(重陽)의 날. 수유화(須萸花)를 머리에 꽂은 사람들이 높은 산에 올라 등고(登高)의 의식을 하며 헤어진 이들을 그리워한다. 저녁이 되면 폭죽 놀이가 시작되고, 금릉(金陵) 거리에는 화복(華服)을 걸친 사람들의 행렬이 줄이어진다. 대명의 초기만 하더라도 황도(皇都)는 금릉이었다. 홍무제(洪武帝)는 금릉에다가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성(城)을 이룩하고 천하를 통치했었다. 하나 패황(覇皇) 영락(永樂)이 제권(帝權)을 쥔 후, 황도는 금릉에서 북경(北京)으로 변하고 말았다. 금릉은 남경(南京)으로 화하였으며, 제정(帝政)의 중심지에서 문화의 중심지로 변화하고 말았다. 기실 영락제가 황성을 북경의 자금성(紫禁城)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면 훗날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북경성은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 백 리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새외세력(塞外勢力)의 놀림을 받기 쉽다. 그러나 금릉은 강남 지방의 중심지에 있으며, 만리장성과는 수천 리 떨어져 있다. 하여간 금릉성은 대도(大都)이며 고도(古都)답게 사계(四界) 내내 아름답고 번화한 지역이었다. 자시(子時)가 다가설 때였다. 금릉성의 북쪽 지역. 소슬히 스쳐 가는 송뢰(松 ) 바람이 달 그림자를 흔들고 있다. 백룡교(百龍橋) 아래에는 일그러진 달을 싣고 유유히 흘러가는 창랑(滄浪)의 물이 있으며, 성내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가 긴 메아리를 만들고 있다. 자욱한 야무(夜霧) 가운데, 갈대는 환희에 가득 찬 춤사위를 하며 구월 구 일의 밤 가운데 창랑의 물에 적시어지고 있었다. 이 일대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금릉성의 다른 지역과는 이질감을 주고 있었다. 거대한 전각도 보이지 않고, 길은 깨끗이 단장되었다기보다 야훼(夜卉)에 뒤덮이어 있었다. 낭인주(浪人州). 이름을 듣는다 하더라도 몸서리를 치게 되는 곳이다. 버림받은 유배자(流配者)들, 도부(屠夫), 창기(娼妓) 같은 천민(賤民)들, 가문에서 파문(破門)당한 파락호(破落虎)들이 모여 사는 곳. 죄를 짓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낭인(浪人)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마치 인간 세상의 늪지와 같이 습습하고 더러운 지역이며, 명조 이전 원조(元朝)에서부터 반역의 땅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그 곳, 낭인주의 더럽고 지저분한 대지 위에도 달은 떠오르고 있었다. 현실에서 배척당한 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 간간이 방치된 시체가 보였으며, 다 죽게 되어서도 독주(毒酒)를 퍼마시는 노낭인(老浪人)의 모습도 보였다. 갈대가 가득한 강기슭을 따라 휘청거리며 걷는 그림자 하나. 그는 작은 주호 하나를 들고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벌써 다 마시다니… 우라질!" 머리카락이 까치집을 방불케 한다. 걸치고 있는 옷은 분명 흑의(黑衣)인데 얼마나 많이 빨았는지 그 빛깔이 회색에 가깝다. 또한 풍잔노숙을 서슴지 않았던 듯 그의 옷자락에는 땟국물이 주룩주룩하다. 허리띠 대신 새끼줄 하나를 둘렀으며,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 있는 더러운 행낭 하나를 등에 차고 있다. 손에는 주호를, 흐릿한 눈망울에는 달빛(月光)을 가득 담고 있는 자. 그는 주호를 쥐어짜듯 하여 주호 바닥의 술을 모조리 마셔 버린 다음, 주호를 슬쩍 집어던졌다. "우(尤) 대인(大人)의 환갑(還甲)이 다시 오려면 육십 년 세월이 흘러야 하는데… 술이 벌써 다 떨어지다니……!" 우 대인은 금릉의 갑부이다. 그가 마시던 술은 우 대인의 회갑 때 얻은 것이다. 나이 십칠 세 되었을까? 얼굴이 너무나도 지저분해 본래의 용모가 추측되지 않을 정도이다. 하나 그의 눈망울과 콧날, 그리고 입매는 꽤나 절세적이었다. "제길, 낭인주의 개(犬)가 술을 굶게 되다니……!" 그는 욕설을 토하며 풀잎을 질끈 밟는다. 낭인주(浪人州)의 개(犬)! 천하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낭인주. 한데 낭인주 안에서도 버림을 받은 존재가 있다. 삼 년 전 그는 다리를 건너서 낭인주에 왔으며,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부터는 낭인주에서 가장 유명한 자가 되고 말았다. 거지에게서 동냥을 받고, 낭인에게서 밥을 빌어먹으며 소매치기의 은자를 소매치기하고……. 그는 낭인주의 파락호들을 질겁케 하는 행동을 일삼았으며, 한 걸음도 낭인주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유성혼(流星魂). 나이 십사 세가 되는 해에 낭인주에 왔으며, 이번 겨울이 지나면 십팔 세가 되는 괴소년의 이름이다. 하늘(天)은 창궁(蒼穹)이라기보다 묵궁(墨穹)이었다. 유성혼은 눈길을 들며 하늘을 바라봤다. 달빛이 얼굴을 물들이며 그의 입매가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저 달을 좋아하지 않아. 달이 밝으면 별빛이 흐려지기 때문이지." 그는 중얼거리며 입을 쩌억 벌리며 하품을 한다. "오늘은 어디서 유숙을 해야 할는지……!" 그는 중얼거리며 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신발 대신 가죽으로 발을 싸맸고, 천으로 된 허리띠 대신 새끼줄로 의복을 질끈 묶은 유성혼. 그는 날다가 지친 작은 까마귀가 둥지를 찾아가는 듯이 휘청거리며 낭인주 깊숙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달빛이 그를 뒤따르고, 그의 그림자는 휘청휘청 춤사위를 하며 누렇게 말라 가는 갈대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누가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유성혼 나으리를 위해 미인(美人)의 춤이 있고, 팔진미(八眞味)가 그득한 거실을 주겠느냐? 크크크ㅋ……!" 유성혼은 취기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차디찬 야풍(夜風)을 받아 가며 휘어이휘어이 걸음을 내디뎠다. 벌서 구백 일이 넘는다. 유성혼이 낭인주의 개가 되어 천하가 질겁하는 낭인주 사람들을 질겁케 하며 돌아다닌 지도……. 괴짜 소년, 그는 가히 괴인이라 불릴 만했다. 그는 양민들이 질겁하는 하오(下五)의 무리들과 친하게 지내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방문(傍門)과 좌도(左道)의 소년소녀들과 어울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인물에 의해서도 가두어지지 않았으며,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도 않았다. 구지(九指)의 이굉(李宏)이 소년소녀를 모아 놓고 전문 소매치기단을 만드는 데에도 끼이지 않았으며, 남창(男娼)을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화화낭낭(花花娘娘)이 천금을 주고 유혹하는 데에도 가지 않았다. 궁가방(窮家 )이나 소의방(素衣 ) 개방( )에도 끼이지 않았으며, 행자방(行者 )의 초청도 정중히 거절을 한 바가 있다. 작은 괴물 유성혼. 그의 뒷모습은 차츰차츰 짙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갔다. 축시(丑時)로 돌입할 때, 그는 구월의 밤하늘을 어깨에 지고서 다 쓰러져 가는 초막(草幕)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가시나무가 울타리가 되어 있으며, 문과 초막 사이에는 자급자족하기 위한 채소밭이 드넓게 펼치어져 있다. 낭인주 안에서는 그래도 운치가 있는 장소이다. 한데, 다 부서진 횡액(橫額) 하나가 놀라웠다. <십산대학림(十山大學林). 환우( 宇)의 모든 지혜(智慧)가 여기 모였으며, 문창(文昌)의 성기(星氣)가 이 곳 하늘에서 빛나노라!> 무려 육십 년 전에 세워진 십산대학림. 횡액의 글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초라하고 어두운 곳이다. 유성혼은 휘청휘청 걸어 사립문 안으로 접어들었다. 문을 지키는 사람도 없으며, 개 한 마리 없다. 다만. "……!" 한 사람이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입 안으로 읊조리고 있었다. 나이는 이십칠팔 세 정도. 걸치고 있는 옷은 청포(靑袍)인데, 유성혼의 옷보다도 낡고 지저분했다. 그는 유성혼이 들어오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 그는 흐릿한 눈빛을 달 쪽으로 던지며 무엇인가를 쉬지 않고 암송하고 있었다. 가끔 그는 무릎 위에서 종이 한 장을 길게 찢어 낸다. 찌익－! 싯누런 종잇장 하나가 고서에서 찢기어지며 그것은 그의 손아귀 안에서 작게 뭉쳐져서 즉시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간다. 이어 그는 종잇장을 질겅질겅 씹어먹으며 무릎 위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보았으며, 종잇장을 과실 먹듯 먹어치운 다음 다시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하후초(夏侯楚). 그가 낭인주에 온 지 벌써 십육 년이 된다. 그는 십산대학림의 마지막 제자(弟子)라고 스스로를 칭했으며, 이제껏 초막 외부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사실 하후초란 사람이 낭인주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유성혼은 극히 예외적인 측에 속한다 할 수 있었다. 밤안개가 짙게 다가설 때, 유성혼은 하후초 쪽으로 다가가며 하품을 했다. "크으… 졸립군. 이봐, 림주(林主)는 계신가?" "……!" 하후초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그는 유성혼이 안으로 들어왔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성혼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그는 유성혼과 면식이 많은 처지였다. 그리고 그는 유성혼에 대해 아주 조금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번 비위를 건드리면 때려죽이기 전에는 다스릴 수 없는 맹랑한 기질이라는 것, 또한 천하에서 가장 질긴 얼굴 가죽과 가장 질긴 혓바닥의 소유자라는 것.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가장 날카로운 입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골치 아픈 녀석. 또 왔군!' 하후초는 다만 손 하나만 쳐들었다. 그는 서실(書室)의 문을 가리켰고. "ㅋㅋ… 노선생이 방에 계신 게로군!" 유성혼은 비듬이 덕지덕지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북북 긁어 대며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그는 두 걸음 정도 걷다가 하후초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웃었으며……. "공부 잘해. 훗날 나의 좌문군사(左門軍師)가 되려면 적어도 백만 권의 고서를 암기해야 하니까!" "……!" 하후초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다. '내가 네녀석의 좌문군사라고……?' 그는 유성혼을 쏘아봤으며 지극한 노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유성혼의 너무나도 맑은 눈빛을 보고는 묘한 수치심을 느꼈다. '대단한 눈이다. 그 깊이와 맑기가……!' 겉모습으로 판단할 때, 유성혼은 너무도 볼품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성광을 흘려 대는 두 눈을 대하게 된다면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후초의 얼굴이 이내 달아오른다. "하후초, 수양이 부족하군. 계집애처럼 양 볼을 붉히다니! 하여간 좋아. 자네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암기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성격상의 몇 가지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 나의 휘하(麾下)에 들 수 있겠지!" 하후초는 유성혼이 다시 한 번 머리를 긁으며 토해 내는 말을 듣고는 끄응 한숨 소리를 내고 말았다. 유성혼은 ㅋㅋ대며 서실 쪽으로 접어들었다. 작은 괴물, 그는 십 수 년 내내 글을 외운 하후초를 자신의 부하로 취급하고 있었다. 유성혼은 비틀비틀거리며 추국(秋菊) 가득한 뜨락으로 접어들었다. "우라질! 노선생의 취미도 고약하군. 먹지도 못할 국화를 이렇게 많이 기르다니. 물론 국화가 완전히 쓸모 없는 것은 아니지. 국화주(菊花酒)를 만들 수 있으니까!" 유성혼은 떠벌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 기이한 서생 하후초는 유성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어이해 저 녀석만 보면 나 자신이 작게 느끼어지는 것일까? 아아, 그리고 사부는 저 녀석을 귀빈으로 대접을 하니… 저 녀석은 대체 어떠한 녀석인지 모르겠군.' 하후초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다시 책장 하나를 찢었다. 이어 그는 그것을 입에 삼켰고, 우물우물 씹어 삼키기 시작하였다. 그는 글을 읽고 외웠으며, 외우는 글을 모조리 입 안에 삼키어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내일 새벽까지는 세 권의 책을 씹어먹게 될 것이다. 너른 서재(書齋). 말이 서재이지 서가(書架) 하나 없고 곰팡내 나는 책 한 권도 보이지 않는다. 주호가 지저분히 널리어 있을 뿐이다. 방 가운데는 바둑판이 하나 있으며, 바둑판은 계피학발 노문사의 베개로 쓰이고 있었다. 가슴에 줄이 끊어진 금(琴)을 안고 누워 있는 노문사. 천문대선생(天文大先生). 낭인주 사람마저도 얼굴을 알지 못할 정도로 위부 출입이 없는 노은사(老隱士)이다. 눈빛에 묘한 선기(仙氣)를 지니고 있으며, 국화를 기르는 취미를 지니고 있는 기벽한 노인이었다. 하후초를 가르치는 데 반나절을 쓰고, 국화를 기르는 데 반나절을 쓰는 노인. 그는 자다가는 유성혼의 기척을 느끼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낭인주의 개가 왔군?" "왔소이다." 유성혼은 덥석 안으로 들어가서는, 천문대선생이 마시다 남긴 주호를 찾아 바닥을 비워 버렸다. 그리고는 벌렁 드러누웠고, 고약한 발 고린내를 방 안 가득 풍기는 가운데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무서재(無書齋) 무현금(無弦琴)의 십산서재(十山書齋)에 영광을 주기 위해 일야(一夜) 유숙하러 왔소." 유성혼이 능청을 떨자. "고약한 녀석. 네놈은 잠자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천문대선생도 주호를 찾아 술을 마신다. 그는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매를 소매섶으로 닦아 내며 술을 마시는 기벽을 지니고 있다. "유성혼, 네놈은 승부를 내기 위해 온 것이다." "크크… 그렇소." "좋아, 도전을 받아 주겠다." 대체 무슨 대결일까? 노소(老少)는 머리를 맞대고 드러누웠으며, 취향(醉香)이 서재에 가득한 가운데 숫자 놀음을 하기에 바빴다. "좌하(左下) 삼(三)에 삼(三)……." 유성혼이 말했고. "네놈이 이제는 수비할 줄도 아는구나. 좋아, 노부는 우상(右上)의 사사(四四)이다. 후후……!" "우하(右下) 삼사(三四)." "좌상(左上) 삼사(三四)." "우하(右下) 삼구(三九)." "호오, 저돌적이군. 좋아, 좌하(左下) 사사(四四)." 대체 무슨 숫자 놀음일까? 두 사람의 대화는 밤과 더불어 길게 이어졌다. 기(碁), 두 사람은 바둑을 말로 두고 있는 것이다. 삼 년 전 낭인주의 개 유성혼은 천문대선생을 찾아와 바둑을 두자 했으며, 열 점을 깔고도 참패를 당하는 뼈아픔을 겪었다. 그 날 이후, 그는 거의 매일 밤 천문대선생을 찾아와 바둑을 두었다. 그의 바둑 실력은 일취월장 늘었으며, 천문대선생의 십이대기예(十二大碁藝)를 모조리 격파하는 위업을 이 년 반 만에 이룩할 수 있었다. 이어 두 사람은 말로써 승부를 가리기 시작했으며, 언제부터인가 유성혼은 이전(二戰) 중 일승(中一勝) 정도는 거둘 수 있는 바둑 실력을 얻게 되었다. "어복(魚腹)을 먹고 삼변(三邊)을 취하려 하다니… 고약한 놈!" "이제 돌을 던지시지요." "어림없다. 승부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적어도 세 곳에서 풍운(風雲)이 벌어질 수가 있다. 그 중 두 곳에서 이긴다면 노부가 이긴다. 팔(八)에 육(六)." "그 수를 기다렸습니다. 크크……!" 새벽까지 두 사람은 이어비기(以語比碁)를 거듭했으며, 찬란하다기보다 처연한 구월의 태양이 초막 위로 떠오를 때에는 계가(計家)가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계가는 하나마나 했다. 이긴 쪽은 유성혼이었다. 그는 다섯 집과 반 집을 공제해 주고도 반 집을 이기는 근소한 승리를 거둔 것인데, 천문대서생은 노망난 노인이 투정을 하듯 복기까지 해 가면서 집수를 거듭해서 헤아리는 것이다. 천문대선생과 유성혼. 두 사람은 나이를 초월한 친구 같았고, 사이가 좋은 할아버지와 손자같이도 보였다. 유성혼은 늦은 아침에 떠나갔다. 예의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전리품으로 얻은 주호 하나를 옆구리에 꿰어찬 채로……. 천문대선생은 창가에 기대어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노안을 꿈벅거리고 있었다.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다. '용이다. 혼세를 구할 한 마리 용이 분명하다.' 환상이었을까? 노안이 혜성처럼 불타오르는 것은? 천문대선생, 그도 낭인주에 어울리지 않는 괴인임에 분명하다. 정오경. 유성혼은 신투(神偸) 이십랑(李十郞)과 더불어 검패(劍牌)를 하여 은자(銀子) 십오 냥(兩)을 딸 수 있었다. 신투 이십랑은 다시는 유성혼과 도박을 하지 않겠다며 치를 부들부들 떨면서 금릉성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그는 금릉의 거대한 도박장을 돌면서 유성혼에게 잃은 돈의 천 배를 하루 만에 복구할 것이다. 저녁 무렵, 유성혼은 화화낭낭(花花娘娘)이 제자들에게 방중술(房中術)을 가르치는 것을 국외자(局外者)가 되어 경청을 했으며… 여자의 속살도 보지 못한 주제에 화화낭낭의 방중술이 세 가지 결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거만히 지적해 내기도 했다. 낭인주의 개, 그는 낭인주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처지는 정녕 아니었다. 사실 그는 낭인주의 늙은 낭인은사(娘人隱士) 등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지난 삼 년에 걸쳐 그들의 잡기(雜技)를 전수받은 것이다. 낭인주에는 백이십팔(百二十八) 종(種)의 좌도술법(左道術法)이 있다. 하나, 그 모든 것을 합한다 하더라도 네 가지 가운데 하나만 못하다. 천문(天文)의 기(碁), 구야(歐也)의 검(劍), 문혼(文魂)의 화(畵), 유성(流星)의 눈(眼). 세칭 낭인사절(浪人四絶). 유성혼의 눈빛은 낭인사절 가운데 하나였다. 흐릿하면서도 초롱초롱하고, 느낌이 없는 듯하면서도 매우 진실된 의미를 담고 있는 그의 두 눈. 그의 눈은 심해(深海)를 닮은 두 눈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의 깊이를 느끼는 사람은 오천여 낭인주 사람 가운데 오직 열도 되지 않았다. 구야노인(歐也老人), 그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곰방대를 빨고 있는 노인, 꼽추이고 추물이다. 과거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장인(匠人)이라 하나, 그가 철물(鐵物)을 만드는 것을 본 사람은 없다. 그의 철물점에는 단지 한 명의 제자가 있고, 그는 언제나 농기구(農器具)를 만들고 있다. 철거(鐵巨)라는 자, 나이 열여섯인데 벌써 칠 척(尺)의 거구이다. 그는 구야노인이 주워 기른 고아로서, 온갖 종류의 농기구를 만들어 금릉성 안에 내다 팔고 있었다. 구야노인, 그는 담배연기를 피워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놈의 눈은 무서운 눈이다. 네놈은 천하를 훔칠 놈이다. 고약한 녀석. 그러나 노부에게서는 아무것도 훔쳐 가지 못할 것이다. 아암!" 구야노인은 그런 말을 벌써 이백 번은 했을 것이다. 오른손에는 무쇠 곰방대, 왼손에는 양피지(羊皮紙) 두루마리 한 장. 그는 두 가지 물건을 쥔 채 백 년을 살아왔다. 잠잘 때에도, 걸을 때에도, 그는 두 가지 물건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은 구야노인이 쥐고 있는 두루마리에 장인술(匠人術)의 비법이 적혀 있다고 추측할 뿐, 그 안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네놈은 많은 피를 흘릴 놈이야! 노부에게 무공이 있다면 네놈을 당장 쳐죽였을 것이다. 한데 멍청한 천문(天文)은 네놈을 몰라보고 네놈에게 십산진학(十山眞學)을 전하고 있으니… 우라질! 훗날 어떠한 관문이 네놈을 막겠는가?" 그가 중얼거릴 때, 유성혼은 죽간(竹竿) 하나를 둘러메고 철물점 뜨락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과묵한 거인소년 철거(鐵巨)의 등을 툭 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힘을 더 길러! 천하제일인의 우문비위(右門臂衛)가 될 녀석의 힘이 그게 무엇이냐?" 철거,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체격을 가진 녀석이다. 그는 지금 오백 관(貫) 무게의 쇳덩이를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짚단 하나를 내리듯이 가뿐하게……. 그는 유성혼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자, 머리를 긁으며 입가를 히죽거렸다. "배가 고파 힘이 안 나오는 게요. ㅋㅋ……!" 철거는 진짜 주인을 대하듯 유성혼을 대한다. 이 년 전, 철거는 귀찮게 말을 거는 유성혼을 세게 쳐서 쓰러뜨린 바 있었다. 그 때 그는 유성혼이 죽었다고 여기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었는데, 유성혼은 입술 사이에서 피를 흘리며 일어나 다시 다가섰다. 느긋하게 웃으며……. 철거는 그를 다시 후려쳐 쓰러뜨렸다. 유성혼은 쇄골(鎖骨) 하나가 부러져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났다. 맞아 쓰러지고, 일어나고, 쓰러지고, 일어나고……. 그러한 일이 스물다섯 번 되풀이된 후, 소년 철거는 유성혼에게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그리고 유성혼은 만신창이가 된 채 웃으며 넘어졌고, 이번에는 진짜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작은 괴물, 그는 대체 어디서 온 자일까? 第2章 용(龍)의 세월, 그 숙명의 의미 바람(風)이다. 구월을 휘말아 올릴 듯한 바람이 낭인주의 갈대숲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파도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갈대숲이 고사리손을 흔들 듯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 댔으며, 흰 갈대꽃이 눈발처럼 뿌리어진다. 낭인주의 서북(西北) 쪽, 그 곳에 가면 낭인주의 더러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호수(湖水) 하나가 있다. 석화호(石花湖). 창랑(蒼浪)의 물은 낭인주를 관통하다가 세찬 여울이 되어 회돌이를 치다가는 그 호수로 접어든다. 호수 건너에는 거대한 장원(莊院)이 하나 있고, 장원의 그림자는 맑은 석화호(石花湖)에 고스란히 투영(透影)되다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우레 치는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 월하탄(月下灘)이라 부르는 여울이다. 달빛이 좋은 날이면 금린어가 떼를 이루며 상류로 비등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곳에 이르면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석화장의 전경이 환히 보이며, 장원(莊院)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세외선경 같은 장원에 머물고 있는 한 명의 선녀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월궁(月宮)의 항아(姮娥)가 실족해 내려왔다고 알려진 석화장의 여인. 그녀가 천하제일 갑부의 딸이라는 얘기도 있고, 황족의 피을 이어받았다는 소문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도 그녀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월하탄은 낭인주와 타지역의 경계 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쏴아아… 쏴아아……! 바람이 드세게 불 때, 유성혼은 한 명의 외팔이 소년과 더불어 월하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십만호(十萬戶).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 소년이다. 나이는 십구 세로 유성혼에 비한다면 두 살이나 위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부터 유성혼을 깍듯이 주인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는 하오도(下五道)의 종사가 되는 것을 꿈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미 오십여 가지의 투술(偸術)을 익히고 있다. 그는 하후초(夏候楚), 철거鐵巨)와 더불어 유성혼이 훗날의 가신(家臣)으로 점찍은 인물이었다. 놀랍게도 신투술(神偸術) 시합을 하여서 유성혼은 신투 십만호를 자신의 종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바람이 거세진다. 갈대가 뿌리째 뽑혀 날아오른다. 유성혼은 긴 낚싯대 하나를 오른쪽 어깨에 둘러매고 걸었으며, 십만호는 대나무 바구니 하나를 들고 유성혼을 뒤따랐다. 달이 그들을 따르고, 월하탄의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공자(公子), 언제야 묘도(妙道)를 전수하시려오?" 십만호는 퉁명스러운 표정이었다. 묘도(妙道). 투술(偸術) 중의 투술로 낭인주의 인물 가운데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에 불과하다. 그는 바로 유성혼. 사실 십만호가 황금같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짬짬이 유성혼의 호위 노릇을 하는 이유는, 유성혼의 묘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고 때가 되겠지." 유성혼의 표정은 한가롭기만 하다. 기실 그의 표정을 보고 그의 내면을 짐작한다는 것은 무리이리라. 허무해 보이고, 조금은 짓궂어 보이는 표정. 그러한 표정은 낭인주의 묘한 수업(修業) 가운데 얻어진 위대한 소산이라 할 수 있었다. 권태롭고 만사에 지친 듯한 표정, 다분히 해학적이기까지 한 표정이 졸리운 표정으로 변화한다. "그 때는 내가 만들지 않는다!" "무슨 소리요?" 십만호는 대들 듯 물었고. "그 때를 만드는 사람은 바로 너다." "예? 때를 만드는 사람은 나라고요?" "너는 작은 것만 훔치고 있다! 기녀의 금비녀, 늙은 상인의 전대… ㅋㅋ… 그것은 밤의 장사치고는 지극히 작은 것이다." "무슨 소리요? 이래 봬도 벌써 오천금(五千金)을 모았거늘……!" "십만호, 너는 너의 손(手)의 빠름만 믿는다. 그래서 신투는 되어도 투왕(偸王)은 되지 못하는 것이며, 금릉의 하오문 거두들이 네놈이 성장하는 것을 지극히 꺼리는 것이다." "우라질! 황금이며 은자가 작은 것이라면, 큰 것은 대체 무엇이오?" 십만호는 욕을 하듯 말한 다음,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는 팔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유성혼을 사납게 쏘아봤다. "이제부터 공자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겠소." "왜?" "공자는 사기꾼이오. 재주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알기는 아는군." "우라질! 하여간 공자에게 평생을 맡길 수 없소. 나는 이제 금릉으로 들어가겠소. 조직(組織)을 꾸밀 기회가 있기 때문이오. 나는 공자가 나와 함께 가서 군사 노릇을 해 주기 바라오. 하나, 거절한다면… 결별이오!" 십만호, 그는 이미 천하십도(天下十盜) 안에 들 만하다. 유성혼 앞에 서면 꼼짝도 못하나, 그는 벌써 이백여 도적을 부리고 있다. "어쩌시겠소?" 십만호가 소리치자. "네 발의 주인은 너이지. 그러니 어디로 가든 네 자유이다!" "……." "하나, 너는 영원히 나의 부하다. 왜냐하면, 너의 마음(心)은 이미 내게 제압되었으니까!" 유성혼에게는 미묘한 매력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흐릿한 눈빛이며, 전체적으로 고독해 보이는 인상 가운데에는 타인을 압도하는 기세가 있다. 아마도 십만호는 그것을 느낀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십만호, 상인(商人)이 되고자 하느냐?" 그의 눈에서 혜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소. 나는 매우 가난하게 자라 왔소. 해서 나는 온 천하의 황금을 모조리 나의 창고에 담아 보겠다는 야망을 가진 바 있소." 십만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떠날 듯한 자세를 취하며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십 년 안에 거상(巨商)이 될 자신이 있소." "십 년이라면 긴 시간이로군." "훗훗… 그럼 더 짧은 시간에 거상이 될 방법이 있단 말이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다." "무엇이오?" "내게 두 권의 책자가 있다. 그 안에는 묘한 비법이 적혀 있다. 어떠냐? 그것을 읽어 볼 작정이 있느냐?" 유성혼은 구깃구깃한 옷섶을 뒤져 두 권의 책자를 꺼냈다. 그 중 하나는 만상비학(萬商秘學)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천방대산경(天方大算經)이라는 것이었다. 유성혼은 그것을 십만호에게 툭 내던져 준 다음, 십만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질기디질긴 그물과 같았다. 십만호는 도저히 그의 눈빛에서 헤어날 수 없는 듯 저도 모르게 두 어깨를 움츠렸다. 바로 그 때, 유성혼은 싱긋 웃으며 허리춤에서 작은 주머니를 떼어 냈다. "십만호, 나는 너의 솜씨를 믿는다. 그래서 하나의 도박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전재산을 네게 투자하는 것이다." 유성혼이 떼어 낸 주머니 안에는 은자(銀子)가 구 냥(兩) 들어 있었다. 십만호는 그것을 받아 들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데, 유성혼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신형을 틀었다. "십만호, 너의 마음은 내 주머니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유성혼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먼저 발걸음을 내디뎠다. 십만호는 그가 걸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칭 낭인주의 제왕. 한데 그는 낭인주의 개를 자칭하는 유성혼에게만은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여간… 거물(巨物)이다!" 십만호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어디서 성장했는지 모르나, 보통 인물은 아니다. 물론 지금은 보통 인물로 보이나, 그것이야말로 저분의 정녕 거대한 면모이다. 평범 가운데 비범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그는 주먹을 거머쥐었고, 문득 허공을 바라봤다. 곧 야우(夜雨)가 뿌려질 듯 하늘은 먹장구름에 휘말리고 있었다. "우라질! 천하가 무엇이든 나와 상관이 있겠는가? 내게 중요한 것은, 젊음을 바쳐 기반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는 화풀이를 하듯 외치며 모습을 감췄다. 그는 한 마리 물개가 사라지듯이 자취를 감췄고, 짙은 안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유성혼의 목소리가 고즈넉한 밤공기를 뚫고 멀리 메아리쳤다. "천하를 얻고자 한다면 물건을 훔쳐서는 아니 된다.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낭인(浪人)이 되어 얻은 병법(兵法)이다." 휘청휘청……! 유성혼은 특유한 팔자걸음으로 사지를 흔들흔들거리면서 낭인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늘 위에는 달이, 호수 쪽에서는 안개가 애잔한 느낌으로 다가서고 있다. 낭인주의 개, 유성혼. 그는 대바구니 가득 금린어(錦鱗魚)를 담아 넣고서는 휘청휘청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 그 곳은 낭인주의 지역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나… 낭인주 특유의 더러움과 권태로움이 머물지 않는 곳이었다.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장소, 그 곳은 실로 기묘한 정취를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정원(庭園)이었다. 동서(東西)로 백 보(步), 또한 남북(南北)으로도 백 보의 크기를 지닌 정방형의 뜨락이다. 단아한 뜨락은 가을 단풍보다도 짙은 단장화(斷腸花)의 붉은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화도(花道)를 잘 알지 못하는 자라면 뜨락 가득 그러한 절대화해(絶對花海)를 이룩하지 못했으리라. 어디를 봐도 꽃의 바다이다. 자칫 발을 잘못 디디게 된다면 핏물의 호수에 빠진 듯한 환각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야릇한 화려(華麗)와 사이(邪異)한 분위기가 뒤섞이어 있는 장소, 그 곳 역시 유성혼이 가끔 들리곤 하는 장소였다. 또한 그가 거치는 장소 가운데 가장 이질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울화정원(鬱花庭園). 그러한 이름을 갖고 있는 정원이다. 어디를 봐도 사람이 머무는 기척이 없으며, 낭인주에 기거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대체 어떠한 인물이 머무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살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을 이용해서 제갈무후(諸葛武后)의 팔진도(八陣圖)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단 둘, 바둑 좋아하는 노선생과 이 곳의 미친 예인(藝人) 문혼(文魂)뿐이다!" 유성혼의 눈빛이 야릇해진다. 깊디깊은 호수가 돌연 광풍에 휘말리면서 뿌연 탁류(濁流)로 화해 버리는 듯, 그의 두 눈에서는 알지 못할 예지의 빛이 흘러 나왔다. 물론 그러한 혜광(慧光)은 거의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으며, 유성혼의 입매에는 특유한 고집과 장난기가 범벅이 된 야릇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월하탄 근처. 백색 암괴로 이룩한 하나의 석옥(石屋)이 세워져 있다. 이 년 전, 늙은 말을 타고 와서 와룡거(臥龍居)라 불리는 그 곳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든 괴인 하나가 있었다. 검문혼(劍文魂). 나이는 유성혼보다 한두 살 위쪽, 유성혼과는 정반대로 가공스러운 기품을 지니고 있는 미소년이었다. 그는 돌을 깨어 석옥을 세웠으며, 어디에도 가지 않고 세 가지 일에만 전념을 했다. 그림(畵)을 그리는 일, 죽간(竹竿)을 호수에 담그는 일, 그리고 하염없는 눈빛으로 석화궁(石花宮)이라는 거대한 장원을 응시하는 일……. 낭인주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피치 못할 한 가지씩의 사연들을 갖고 있다. 그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스스로를 유폐시키기 위해 이 척박한 땅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검문혼, 그에게도 세상을 등질 하나의 사연이 있단 말인가? 바람이 밤안개를 흩트리고 있을 때였다. "……!" 그는 습관대로 자시의 하늘 아래 정좌하고 앉아서 하나의 붓을 쥔 채 바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창백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다. 매부리코가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며 나이답지 않은 백미(白眉)가 기이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는 하나의 산(山)처럼 정지되어 있었으며, 유성혼은 죽간을 든 채 그의 뒤쪽으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마찬가지군. 벌써… 수십 번째다.' 유성혼의 눈에 전에 없던 기광(奇光)이 스치고 지나간다. '또 저 소녀의 얼굴을 그렸다.' 낭인의 수업을 위해 낭인주에 온 유성혼.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과 더불어 낭인사절에 속하고 있는 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특히 검문혼이라는 괴짜 천재(天才)의 면모는 유성혼을 능가한다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언제나 호흡이 나직이 가라앉았으며, 눈빛이 흐릿한 심연(深淵)의 그 빛을 연상케 한다. 어디 그뿐이랴? 창백한 얼굴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기운은 타인을 압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검문혼은 오랫동안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봤다. 애틋한 눈망울의 소녀. 아아, 그것은 차라리 환상이리라. 창(窓)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한 명의 소녀. 오직 한 종류의 검은 묵(墨)으로 그려진 미소녀의 초상화인데, 정녕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검문혼은 그림을 응시하다가 문득 붓을 꺾었다. 뚝－! 세필은 둔팍한 소리를 내며 꺾였으며, 검문혼의 목소리가 느릿느릿 시작되었다. "유성이라는 친구! 내 그림이 어떻다고 여기는가?" 차고 강한 목소리였다. 또한 한 번 들으면 영원히 기억될 음색(音色)을 지니고 있었다. "글쎄……." 유성혼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특징이 없는 표정과 특징이 없는 음색(音色)이다. 그는 검문혼과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기(氣)가 대단하구려." 유성혼이 말하자. "어떠한 기?" "글쎄, 인간의 정념(情念)을 자극하는 색기(色氣)라고나 할까?" "훗훗… 제대로 봤군!" 검문혼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막을 달리는 이리를 방불케 하는 차가운 미소. 하여간 검문혼은 외모가 지극히 출중한 미소년이었다. "그리고 나의 그림은 그러한 기운으로 인해 절정(絶頂)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가?" "글쎄……." "훗훗… 색기가 그림에 떠오른다는 것은 나의 가슴 속에서 저 소녀를 범하고 싶다는 욕망(慾望)이 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지." 검문혼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마치 태양(太陽)같이 그의 두 눈은 격정적인 안광을 토하며 미소녀의 영상에 고정되었다. "지난 이 년… 나는 빌어먹을 운명(運命)을 증오하며 여기 왔지. 매우 모욕스럽다 여기면서……!" "……." "나의 천재성(天才性)이 이러한 오지에서 썩어야 하는 것을 슬퍼하며 나는 여기에 왔지." 검문혼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잔(盞)이 하나 들려 있었다. 잔은 유성혼에게 건네어진다. 이미 그러한 일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듯 유성혼은 잔을 서슴없이 받았으며, 검문혼 바로 곁에 놓인 대나무 함지에 손을 넣어 하나의 주호를 찾아 꺼내 들었다. 주호 안에는 설하옥로주(雪霞玉露酒)라는 명주(名酒)가 가득 들어 있었다. 유성혼은 술을 한 잔 마신 다음, 술잔을 검문혼에게 전했다. 검문혼은 여전히 그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보기 전까지 나는 내가 사문(師門)에서 이단자(異端者)로 낙인찍히어 사형사저(師兄師姐)들에게 반골(叛骨)로 낙인찍히고 이 년 유배(流配)되어… 삼류인생들이나 하는 치졸한 일을 하게 된 것을 슬퍼했었다!" 바람이 차다. 하나, 검문혼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두 사람을 보고 웃고 말았다. 나의 적(敵)은 사문에 있지 않고, 사문 밖에 있음을 알게 되었기에……!" 검문혼은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비웠다. 이어, 술잔은 다시 유성혼에게 건네어졌다. 그 때 검문혼은 유성혼을 보며 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유성이라는 친구! 자네는 그 중 하나이네!" "과찬은 금물이오." 유성혼의 입매에는 바보스러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검문혼, 유성혼. 가히 두 마리 잠룡(潛龍)이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차이점 가운데 가장 큰 점은 특징이 있다는 것과 특징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검문혼은 만 명(名) 가운데 들어가도 즉시 알아볼 수 있는 묘한 기질을 갖고 있었으며…성혼은 두 사람 속으로 끼여 들어가도 즉시 구별이 되지 않는 평범함을 지니고 있었다. "유성(流星), 그리고 석화(石花). 하나는 운명(運命)의 반골(叛骨)이고, 하나는 운명의 미색(美色)을 지닌 계집이지. 훗훗… 내게 살인할 수 있다는 허가가 내려졌다면, 그 둘은 벌써 내 손에 죽었다!" 검문혼은 그렇게 말하며 유성혼을 바라봤다. 그런데 유성혼은 ㅋㅋ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자 앞에서도 웃다니? 지금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든다. 석화궁 안의 기화요초(琪花瑤草)를 찾다가 길을 잃은 듯, 고추잠자리는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선회하고 있었다. "유성……!" "왜?" "나는 곧 떠난다." "섭섭하군. 물론 언젠가 떠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만……." "피차 일반이지. 사실 나는 진작 떠날 작정이었는데, 자네를 한 번 보고 가기 위해 아직 머문 것이다!" 검문혼의 지금 모습은 다분히 인간적이었다. 사실, 그는 이 년 전만 하더라도 얼음으로 뭉친 듯이 차가운 소년이었다. 그는 이 년 동안 낭인주에 와서 그림을 그리고 낚시를 하는 가운데, 차가운 기질을 한결 덜 수 있었다. "나는 사문으로 갈 것이다. 거친 북해(北海)의 땅으로……!" "흠……!" "두 명의 사형(師兄)과 한 명의 사저(師姐)가 이미 거친 지옥(地獄)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지옥, 어떠한 곳이기에 지옥이라 하는 것일까? "지옥?" 유성혼은 다시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 곳을 거치면 악마가 되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가……!" 검문혼의 웃음은 차라리 처연했다. 그는 아주 야릇한 눈빛을 허공에 던졌다. 한순간, 그의 눈길은 유성혼의 눈에 집중이 되었다. 차고 강한 눈빛이다. 송곳처럼 예리하게 다가서는 눈빛. 그러나 유성혼은 그저 담담한 눈길로 바라볼 뿐이다. 두 사람의 눈빛은 오랫동안 한데 뒤엉켰다. "세 가지 부탁을 하겠다, 유성." "무엇인가?" "첫째, 내가 기록한 서적을 한 사람에게 전해 달라는 것. 그리고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하라는 것!" "……!" "해 봤자 소용이 없으니, 열 송이 꽃(十花)을 꺾으라는 말!" 검문혼의 눈빛은 점점 뜨겁게 타올랐다. 그러나 유성혼의 눈빛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둘째, 그녀를 맡으라는 것!" "그녀?" "너와 함께 사랑하는 계집… 석화(石花)를!" "으음……!" "일 년 안에 그녀와 결혼해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계집을 영영 잃게 될 것이다!" 석화! 그녀는 누구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서 거론이 되는 것일까? "셋째! 날아오르지 마라, 유성!" "날지 말라고?" "등천(登天)하지 마라. 무림(武林)의 하늘로… 훗훗… 용(龍)이 되지 마라. 용이 된다면 내게 죽을 테니까!" 검문혼의 눈빛은 가히 번갯불이었다. 이글이글거리는 태양의 눈빛, 그 눈빛과 흐리멍텅한 유성혼의 눈빛은 오랫동안 뒤엉켰다. 주호 세 개가 바닥이 날 때 검문혼은 소매에서 소책자(小冊子) 하나를 꺼냈다. "이것을 창허상인(蒼虛上人)에게 전하라!" "창허상인?" "천문대선생(天文大先生)의 진짜 이름이지. 구파일방(九派一幇)의 태두(泰斗)라 불렸던 자. 그에게 이것을 전하고 내가 이전에 한 말을 하라!" 검문혼은 점점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유성혼은 소책자를 받으며 피식 웃었다. "좋아, 부탁을 들어 주지!" "능청스러운 녀석. 네놈은 실로 속이 깊은 놈이다. 나라도 뚫어 보지 못할 정신 세계를 지닌 놈." "……." "네가 내 앞에 다시 서지 않기 바란다. 다시 보게 된다면 죽을 테니까. 이렇게……!" 검문혼은 중얼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일순 그의 장심에서부터 칠채광(七彩光)이 몽롱하게 일어났으며, 칠채광은 칠색의 연무로 변하면서 바위를 드넓게 휘어 감았다. 츠으으－ 츠으으－! 수증기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며, 도끼로 찍어도 흔적이 남지 않을 바위는 엿이 화로 위에서 녹듯이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일대가 한증막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태양열화장(太陽熱火掌)!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켜 삼라만상을 불태우는 극양의 강기무공이다. 십 이성 화후에 이른다면 십 장 안을 한순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낭인주의 괴서생 검문혼, 그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단순한 낙척서생(落拓書生)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강호의 절정고수자였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성혼의 태도였다. 그는 검문혼의 가공할 무위(武威)를 대하고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담담한 빛을 뿌려 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검문혼의 눈빛이 비수날처럼 예리해지면서 가공할 살광을 폭사해 냈다. 그러나 빛은 이내 사라졌으며, 검문혼의 몸뚱이는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용(龍)으로 자라나지 마라. 절대로!" 휘이이잉－! 그는 파풍천리추(破風千里追)를 발휘해 오십여 장을 호선을 끌며 사라졌다. 마치 하나의 연(鳶)이 떠오르듯, 검문혼은 탄지지간에 호수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가 떠오르고 난 후, 도합 네 곳에서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파파파팟－! 호수 속, 나무숲 안에서, 석옥의 지붕에서, 그리고 바윗돌 아래에서 네 개의 그림자가 훌쩍 치솟아 올랐다. 기변(奇變). 네 개의 그림자는 유령이 나타나듯이 나타났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를 검은 천으로 뒤덮은 자들. 전신에서부터 뿜어지는 위세가 가히 태산을 허물어뜨릴 듯하다. 네 사람은 천천히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잔을 쳐들고 있는 소년 곁으로… 바로 유성혼 곁으로! "술맛이 좋군!" 유성혼은 잔을 말끔히 비워 버렸다. 그는 네 명의 괴인이 다가서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검문혼에게 전해 받은 소책자를 쥐고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빛이 야릇하다. 기이한 혈하(血霞)가 자욱이 퍼지고 있으며, 사요(邪妖)한 기운이 자오선(子午線)을 따라 황도(黃都)로 다가가고 있었다. 천지혈세(天地血洗)의 천기. 하늘이 핏빛 달무리에 뒤덮인다는 것은 천년대란이 벌어진다는 공포에 기득 찬 천기였다. 홀연히 나타난 네 사람은 절정의 신법을 발휘하여 유성혼 뒤쪽으로 다가섰다. 두 눈에서 뿜어지는 형형한 정광을 뿜어 내는 자들, 하나같이 가공할 기세를 보이고 있는 절정의 고수자들이다. 이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한순간, 사 인의 허리가 일제히 굽혀진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천기가 불안합니다. 마계(魔界)가 열릴 듯합니다." "더 이상 대공자(大公子)께서 낭인(浪人)의 길을 떠도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영웅계(英雄界)의 천년회천대업(千年廻天大業)을 주도하시어야 할 위대한 혈통의 주인으로서… 이렇듯 천하고, 지저분하며, 위험한 곳에 더 이상 머문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조속히 돌아가십시오. 노복들, 돌아가신 선가주(先家主)의 영령을 뵙기 민망스러울 정도입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일 장으로 산악을 허물어뜨리는 힘을 지닌 네 명의 고수가 유성혼에게 깍듯이 절을 하다니? "천 년의 꿈이 시작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이제 낭인 생활을 마치고 가문으로 돌아가십시오." "벌써 천 일(日)이 되어 갑니다." "더 이상 가문의 율법을 어기시면 아니 되십니다. 혈관 속을 흐르는 영웅혈(英雄血)을 더 이상 거역하시어서도 아니 되십니다!" 절을 하며 외치는 네 사람, 이들 중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강호의 일백 대고수 안에 끼일 것이다. 낭인주의 개. 한데 그에게도 비밀이 있었단 말인가? "나의 주인은 나요. 가문의 율법이 아무리 지엄하다 하더라도 나를 다스릴 수는 없소. 왜냐하면… 가주(家主)는 나이니까. 물론 고매하신 제원로(諸元老) 장로(長老)들이 있기는 하나… ㅋㅋ… 형식상으로나마 가주는 나이고, 나는 가주이기에 가문을 도망친 비겁자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천 일의 낭인(浪人) 수업(修業)을 한다고 불리고 있지 않소?" 유성혼의 입가에는 고소가 떠올랐으며, 눈빛은 짙은 고뇌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등을 돌리지 않았다. "이 곳 낭인주는 더럽고 지저분한 곳. 무림계(武林界)의 모든 혼탁한 저류(抵流)가 다 모여 있소.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영웅계(英雄界)에 비한다면 가히 까마귀들의 소굴이오!" 네 사람 모두 석상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곳 더러운 까마귀 소굴에서… ㅋㅋ… 영광스러운 나의 가문이 주지 못한 진실된 어떤 것을 얻었소." 대체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유성혼의 말은 쉬지 않고 이어졌고, 등 뒤에 시립한 사 인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율법이 싫어 도망쳤고, 그대들은 지난 삼 년 간 나를 따르며 내가 가문으로 들어가기를 권했소. 나는 그 때마다 거절했소." "……." "……." "이유는 하나, 야망(野望)이라는 미명 아래 타인의 피를 보아야만 하는 나의 숙명이 역겹고… 영웅총사(英雄總師) 자리를 얻기 위해 나를 뒤에서 비방하고 욕하는 무리들이 구역질나기 때문이었소." 아아, 유성혼.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단아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떠돌아다니는 개구장이가 아니었다. 그의 두 눈에는 정녕 깊은 의미가 담기어 있었다. 그의 눈은 가히 거인(巨人)의 눈이었다. 지금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유성혼의 진실된 모습일 것이다. "그렇소! 나는 허무주의자였고, 패배자였소. 나는 피를 두려워했고, 승부(勝負)를 두려워했소." "……." "……." "그래서 나는 낭인 수업을 빙자해 진짜 낭인이 된 것이오." 유성혼, 그는 입매를 질끈 물고 있었다. "하나… 하나, 이제는 다르다오. 아시겠소? 나는 겁쟁이 대공자가 아니오. 낭인주에서 들개처럼 지내는 가운데… ㅋㅋ… 나는 진짜 야수(野獸)가 된 듯하오." 그의 눈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실로 묘한 야망(野望)의 불길이 엿보이고, 그 자신도 꺼뜨리지 못할 어떠한 욕망의 기운이 두 눈 깊은 곳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사노(四老), 나는 애송이가 아니다. 나는… 이미 소년이 아니다." 그는 천천히 잔을 들었다. "진심(眞心)으로……!" 유성혼의 하이얀 치열이 달빛을 부서뜨린다. 지금 그의 전신에서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술잔에는 달이 담기어 있다. 유성혼은 천천히 잔을 입술에 대었다. 지금 그의 입매에 매달려 있는 것은 고뇌에 가득 찬 미소였다. 그는 술을 마셨고, 달 그림자가 술과 더불어 삼키어졌다. "나의 가문은 춘추율법(春秋律法)에 따라 초강자(超强者)가 되는 수련을 강요했다. 나는 그 율법에 저항하다가, 천 일의 낭인(浪人) 수업(修業)에 접어들게 되었다!" 술잔은 단숨에 비워졌다. 유성혼은 소매로 입가를 쓰윽 닦아 냈다. "이 곳 낭인주(浪人州)는 나의 소년 시절이 마무리지어진 곳이다. 나는 이 곳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하늘과 땅과 바람을… 그리고 가문의 천년적(千年敵)인 마계의 인물이라 추측된다 하더라도 눈빛이 맑은 검문혼 그 녀석을……!" "……!" "……." 네 사람은 그림자처럼 시립해 있었다. 이들이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해 있는 것은 그만큼 유성혼을 존경한다는 것이다. 천기공(天機公). 모든 종류의 진학(陣學)에 능통한 사람이다. 몇 개의 대나무 가지만으로 태산을 감춰 버리는 재능이 그에게 있다. 그는 흑백마도(黑白魔道)의 일천 가지 포진학을 터득하고 있는 바, 그가 모르는 진식은 천하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지공(神智公). 백 가지 병서(兵書)를 줄줄 외우고 있는 사람, 그는 병법에 있어 가히 대가(大家)라 할 수 있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군사 일백으로 일만의 군사를 막을 수 있는 신병책이 담겨져 있다. 귀산공(鬼算公). 구장산학(九章算學)을 비롯한 천하각계의 산학에 정통한 사람이다. 무림에 뛰어들지 않고 강호상계로 진출했다면 지닌 바 산학을 이용해서 천하십대거부 안에 들었을 사람이다. 그의 산학은 유성혼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바 있다. 무량공(無量公). 온갖 종류의 병기(兵器)를 다루며, 사천당가(四川唐家)의 암기술(暗器術)을 터득해 일만 장 밖으로 암기를 날릴 수 있다. 네 명의 고수자(高手者)들, 이들은 유성사노(流星四老)라 불렸으며… 유성혼이 다섯 살 되던 해부터 유성혼의 뒤를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교두(敎頭)로서, 시위(侍衛)로서……. 유성사노는 유성혼의 분신이 되어 오랜 세월을 유성혼과 더불어 지냈다. "나의 가문은 나를 절대자로 기를 예정이었다. 그러하기에, 나의 어린 시절은 피와 눈물로 점철이 되었었다. 나는 그 때마다 내가 영웅계(英雄界)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유성천가(流星天家)의 이십팔대(二十八代) 가주(家主)임을 증오했었다." 유성혼, 그의 본래 이름은 천씨(天氏)인 듯했다. 아아, 유성세가(流星世家)! 그 이름은 천 년 전에 잊혀진 이름이다. 한데, 유성세가의 인물들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단 말인가? "춘추팔가(春秋八家)를 증오하며, 내가 무림(武林)의 기둥(柱)이 되어야 함을 증오하며, 나 자신의 피를 증오하며……!" 천유성(天流星), 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비웠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자의에 따라 무사(武士)가 되고자 한다. 이유는 하나, 세상(世上)은 내가 있는 힘을 다한다 해도 정복(征服)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며… 천하무도(天下武道)에는 나를 능가하는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허다하기에! 훗훗……!" 천유성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이어 그는 천천히 뒤돌아 서며 유성사노를 쓸어 봤다. 바람이 그의 전면을 휘어 감으며 머리카락이 헝클어진다. 준령처럼 우뚝한 콧날이 드러나고, 각이 지어 완강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의 매무새가 완연히 드러난다. "사노, 이제부터 나를 호위하지 마라!" "예?" "대공(大公)이시여! 그것은 아니 되는 말씀이십니다." 유성사노는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였다. "사대마계(四大魔界)에서는 춘추팔가의 후계자들을 추쇄하기 위해 전문 암살 집단을 이룩했으며, 춘추팔가 내부의 거두(巨頭)들 또한 유성세가를 두려워하며 권모술수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속하들은 대공이 귀가(歸家)하시는 그 날까지 대공을 호위해야 합니다." 네 사람이 정색하고 말하자. "나의 말은 부탁이 아니오. 명령이오!" 천유성의 눈빛이 혜성(彗星)처럼 황홀해졌다. 이어, 그는 느릿느릿 신형을 틀어 걸음을 내디뎠다. 죽간을 둘러멘 채 휘어이휘어이 걸어가는 천유성. 풀잎을 밟고, 바람을 가르며… 그의 어깨 위로 추우(秋雨)가 가늘게 뿌리어지기 시작했다. "녀석, 용이 되지 말라고? 훗훗… 좋은 말이다. 용이 되어 높이 난다는 것은 어렵고 피곤한 일이지. 하나 하늘이 문득 좋아 보이니, 어찌 하겠느냐? 그리고 그 말은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천유성은 휘파람을 불며 사라져 갔다. 유성사노는 그가 가는 것을 보고 입을 따악 벌렸다. "호흡이 사라지고 있다. 오오, 호흡을 완전히 감추고 맥박 소리를 정지시키는 경지에 이르신 것이다!" "보라! 풀잎을 디디고 걷거늘, 풀잎은 휘어지지 않는 것을! 초상비행(草上飛行)을 초월하는 유성비행술(流星飛行術)을 이미 터득하신 것이다!" "오오, 대공은 우리들의 눈을 속여 가며 유성무예(流星武藝)를 터득하셨던 것이다!" "아아, 우리들의 눈마저 속이시다니… 아아, 저분은 천하를 속일 수 있어도… 천하는 저분을 속이지 못하리라!" 네 사람은 천천히 장읍을 취했다. 그들은 지난 수년 이래 유성혼으로 가장한 천유성을 면밀히 관찰하였으나, 유성혼이 절세무예를 연마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데, 천유성은 이미 고수자가 되어 있었다. 풀잎을 밟으며 걸어가는 천유성, 그의 뒷모습은 우막(雨幕) 속으로 조용히 감추어졌다. 第3章 야망(野望)의 의미 秋佳節近重陽 正是陶家醉興長. 想見倣霜花滿 可能分與一枝香. 맑은 가을 아름다운 계절이 중양절에 가까우니, 정히 도연명의 취한 흥이 길 때라. 생각해 보니 서리를 기만한 꽃이 뜰에 가득하니, 능히 한 가지를 나누어 줄 수 있겠지. 국화 향기가 비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있다. 뜨락에는 국화가 가득하다. 국화는 가장 오랫동안 강호인의 사랑을 받아 온 꽃이다. 또한 중양절에 국화주(菊花酒)를 마신다는 것은 팽조(彭祖)와 장방(長房) 이래의 오랜 관습이었다. 뜨락 가득한 국화 가운데서 노선생은 고뇌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국화 가지를 돌보고 있었다. 죽은 잎사귀를 자르고 말라 버린 잎사귀를 떼어 낸 후,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화려한 궁전 모양을 이룩하도록 꽃가지를 가는 철사로 잇고……. 천문대선생의 화도(花道)는 검문혼의 불타오르는 듯한 화도(畵道)에 비해 은근하며 신비로웠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도교(道敎) 비전(秘傳)의 은화비도(隱花秘道)라 할 수 있었다. 한순간 천문대선생은 국화 화분 위에 황금(黃金)의 성(城)을 하나 이룩했다. 이어 그는 느릿느릿 다가서는 낭인주의 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밤에 낚시라니… 좋군?" 그의 표정은 매우 짓궂었다. "밤의 화도(花道)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천유성은 특유한 독설로 응수를 한 다음,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소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무엇이냐? 네놈도 책을 본단 말이냐? 문맹(文盲) 녀석이?" 천문대선생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유성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고, 마치 시조를 읊는 듯이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해 봤자 소용이 없으니, 십화(十花)를 꺾으라!" 천유성은 검문혼이 부탁한 대로 하고 있었다. 적어도 녀석은 천유성의 친구이기에……. 한데, 그의 한 마디 말로 인해 격동이 시작될 줄이야! "뭐… 뭐라고?" 천문대선생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십화(十花), 그는 그 말에 전신을 경련시켰다. 팟－! 한순간 그의 주름진 손이 다가서며 천유성의 완맥을 불끈 쥐었다. "누… 누가 그 말을 하더냐?" "아이쿠! 대선생이 많이 굶은 게군요? 나를 잡아먹으려 하다니!" 천유성은 몹시 아픈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 말을 가르쳐 주었느냐?" 천문대선생의 눈에서는 푸른 빛줄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마치 천유성을 죽이고 싶은 듯. 사실 천유성이 비위를 쫓아 보낸 이유는,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비위들이 그대로 따라다니는 중이었다면… 그들은 천문대선생을 향해 살초(殺招)를 쳐내며 덤벼들었을 것이다. "누가?" 천문대선생은 사납게 외쳤다. "책 주인이오. 우라질! 심부름을 하려다가 이런 고생을 다 하다니……." "책 주인?" 천문대선생은 재빨리 왼손을 내밀어 소책지를 취했다. 이어 그는 십여 장으로 이루어진 소책자의 첫장을 폈다. <중악(中嶽) 붕괴(崩壞)> 용사비등한 글씨 아래 기이한 도해가 그려져 있었다. 점(點)과 원(圓), 그리고 호선(弧線)이 복잡다난하게 얽히어 있다. <사(死) 대나한(大羅漢)!> 책장 끝에는 그러한 글귀가 적히어 있다. "이… 이럴 수가? 대나한진을 섬멸할 수 있는 수법이 여기 기록되어 있다니……!" 천문대선생은 사지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는 중악붕괴장을 살핀 후, 다음 장을 넘겼다. <무당(武當) 파멸(破滅). 사(死) 태청(太淸).> 그러한 글씨 아래 복잡한 도해가 그려져 있다. 청색(靑色)의 도해가 있고, 그 위로 핏빛의 도해가 겹쳐 그려져 있었다. 청색의 도해는 하나의 검진(劍陣)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핏빛의 도해는 그것을 격파하는 수법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었다. "으으… 으으… 본파의 태청검진마저……!" 천문대선생은 책을 든 채 휘청거렸고, 천유성은 그 순간 손목이 미끄러져 나옴을 느꼈다. 그는 바보스러운 표정으로 천문대선생을 바라봤다. "……." 천문대선생은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검문혼이 지은 소책자, 그 안에는 열 가지 기문진세를 파괴하는 비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오백나한대진(五百羅漢大陣), 태청검진(太淸劍陣), 복마주천검진(伏魔週天劍陣), 용호풍운진세(龍虎風雲陣勢)…….> 백도가 자랑하는 열 가지 기문진세이다. 만마(萬魔)를 굴복시키고 백도의 명예를 지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는 백도의 수호신과도 같은 열 개의 진법들. 그것은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백도의 십대기인에 의해 비밀스럽게 복구가 되었다. 또한 그것은 천 명의 소년기재(少年奇才)들에 의해 모종의 장소에서 비밀리에 완성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천문대선생의 옷자락은 빗물에 축축이 젖었다. 지금 그의 주름진 얼굴에 맺힌 것은 빗물일까? 아니면 눈물일까? 그는 영혼이 허물어진 강시( 屍)처럼 일각도 넘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십화(十花)는 몰락한 백도를 부흥시키기 위해 이룩한 비밀결사(秘密結社)인데… 시작도 하지 못하고 패배하다니……!" 그는 볼을 실룩실룩거리다가 천유성을 바라봤다. 천유성은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십화란 무엇일까?' 그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으나 표정에는 그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호숫가에서 가끔 마기(魔氣)가 솟았지!" "……." "아마 그 기운을 일으킨 자가 소책자를 꾸몄을 것이다." "……." "대단한 자다. 그는 이십사만 백도인의 숙원을 실로 무참하게 허물어뜨려 버렸다. 백도가 마도(魔道)와 패도(覇道)를 무찌르기 위해 연마하고 있던 십대진세가 그에 의해 모두 격파되었다. 물론 지면상의 대결로 실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것이나, 열 가지 진세는 펼치나마나이다. 다시 말해,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십화의 기반은 모두 붕괴된 것이다." 천문대선생은 허무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창허상인(蒼虛上人). 백도계의 살아 있는 우상과 같은 존재이다. 무공이 절대적이라는 이유도 있거니와, 인품이 하늘에 닿았다는 것이 그를 백도제일인으로 만들었다. 일 갑자 전, 그는 백도의 부흥을 외친 다음 홀연히 사라졌었다. 그는 바로 현재의 천문대선생이었다. "노도(老道)는 십산학림(十山學林)의 기예를 얻어 십화의 기반을 이룩했었다. 한데 그것이 시작도 되지 못하고 허물어진 것이다. 훗훗… 사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창허상인, 그는 본시 무(武)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문(文)에 뜻을 둔 사람으로, 나이 사십 세 시절부터는 문성(文聖)이라고 칭송을 받을 정도였었다. 그의 문예(文藝)는 가히 천추제일(千秋第一)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기문진세에도 능통한 바 있었다. 그는 구파일방의 기문진식을 하나하나 복구하는 데 오랜 세월을 보냈다. 대소림(大少林) 복호나한대진(伏虎羅漢大陣), 아미산(峨嵋山) 수미혜검진(須彌慧劍陣), 무당(武當) 대태청검진(大太淸劍陣), 개방( ) 용호풍운대진(龍虎風雲大陣), 화산(華山) 매화난파풍검진(梅花亂破風劍陣)……. 그는 백도가 잃어버린 진세를 하나하나 복구해 나갔다. 그 이유는 하나, 백도를 위협하는 암흑 무림 세계에는 절정고수가 허다한데 비해 백도계에는 뚜렷한 영웅이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그물 같은 진세를 펼쳐 구파일방을 노릴 악마의 무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릴 계획을 이룩한 바 있었다. 그 계획이 바로 십화(十花). 그것은 완전한 비밀 가운데 수십 년 간 계획되었으며, 한 단계 한 단계 실천이 되어 왔었다. 한데 마도무림의 수뇌도 아닌 하나의 소년무사에 의해 십화가 꾸미고자 했던 기문진세 대계는 완전히 와해되어 버린 것이다. "기실… 그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많은 수단이었다!" 창허상인은 넋없이 하늘을 봤다. "뭇 사람이 피를 흘리고 이긴다 하더라도, 긴 세월 동안 싸워야만 했던 그런 계획이었지." 노룡의 눈빛이 흐릿해진다. "상대는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백도의 기반을 허물어뜨리고, 사기(士氣)를 제거한 것이다!" 체념일까? 창허상인의 미소는 쓰디쓴 고소였다. 그는 천천히 걸었고, 국화 가지 하나를 손에 쥐고 힘을 느릿느릿 가했다. 뚝－! 국화 송이 하나가 잘리어진다. "무당(武當)의 국화(菊花), 숭산(嵩山)의 영산홍(映山紅), 해남(海南)의 동백(東柏), 청성(靑城)의 수선화(水仙花), 무산(巫山)의 금잔화(金盞花), 개방( )의 옥잠화(玉簪花), 화산(華山)의 매화(梅花), 전진(全眞)의 모란(牡丹), 그리고 곤륜(崑崙)의 포송영(浦松英), 장백(長白)의 무궁화(無窮花)… 크으… 십화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조락하게 되었다!" 청허상인은 한순간에 십 년도 더 늙어 보였다. "백도에는 절대기재(絶代奇才)가 없기에 사마외도에 의해 철저히 조롱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도는 위대하다. 비록 천재가 없어 모든 것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백도는 위대하다!" 창허상인은 허공을 향해 외치다가 눈길을 내리깔았다. 그는 천천히 천유성을 바라봤다. 천유성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이전과는 달리 힘이 있는 눈빛이다. 제 스스로 묵궁을 태우며 날아가는 혜성의 빛이 거기 어려 있었다. 또한 그의 입가에는 창허상인이 짓고 있는 번뇌와 비슷한 우수가 드리워져 있었다. 창허상인의 눈은 천유성의 얼굴에 고정이 되어 떠날 줄 몰랐다. 왜일까? 응시하는 눈빛에 가없는 염원이 담기어 있는 것은? '백도는 철저히 조롱당했다. 이대로 가면 백도의 명예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천하를 담을 그릇을 찾을 수 없었기에 십화의 도박을 시작했는데……!' 창허상인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린다. '운명인가? 십화가 꺾인 날, 운명의 기재를 선택한다는 것은?' 창허상인의 눈은 매의 눈이 되어 천유성의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 일 전, 낭인주에 들어섰을 때와 비할 바 아니다. 이제는 나를 능가하는 거인이 되어 버렸다.' 창허상인은 천유성을 처음 본 그 날부터 그의 매력에 반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의 정체에 대해 물은 바 없다. 그가 모든 것을 전하려 하면서도 천유성의 신분에 대해 의심하지 않은 까닭은 바로 눈빛 때문이었다. 지금 유성혼의 눈은 너무도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 눈이다. 용의 눈!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눈이다.' 창허상인의 눈빛이 돌연 엄숙해졌다. "유성혼." "예?" "노도는 뛰어난 농부(農夫)가 못 되는가 보다." "어인 말씀이신지요?" "숨어 농사를 지었는데… 망치고 말았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봄이 되면 피지 말라 해도 꽃은 피어나는 법이 아닙니까?" 천유성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직후, 창허상인의 굳은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하긴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사실 꽃을 피우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늘이지! 어린 네게 배우다니… 훗훗… 네놈은 역시 괴물이다." 창허상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힘을 가했다. 이어 그는 서재 쪽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천천히 말했다. "같이 들어가 주겠느냐? 너와 철야대국(徹夜對局)을 벌이고 싶다. 물론 들어오지 않아도 좋다. 오게 되면 매우 힘든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 어리석은 농부가 되어야 하니까!" 실로 묘한 청부였다. 십화(十花). 아직은 천하가 알지 못하는 비밀결사(秘密結社)이다. 우두머리는 창허상인, 그는 일 갑자의 세월을 바쳐서 십화의 세력을 이룩했다. 한데, 십화가 저력을 일으키기도 전에 십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십대방파의 절기들이 산산이 파괴되고 만 것이다. 검문혼은 지난 이 년 간 십대진세를 파괴하는 비법을 연구했으며, 파해법을 완성하는 순간 홀연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검문혼, 그는 실로 무자비한 도부(屠夫)였던 것이다. "오지 않아도 좋다!" 창허상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듣기 힘들었다. 천유성은 그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타파의 일에 끼여드는 것은 율법이 부정하는 일이외다. 하나, 이 일에는 끼여야 하겠소이다. 선조들이여! 나를 원망해도 좋소이다. 하여간… 나는 국화를 좋아하는 노인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겠소이다!" 쏴아아… 쏴아아……! 빗발은 폭우로 화했다. 빗발과 더불어 구월은 차가운 공기에 휘어 감겼다. 지리한 바둑이었다. 식사도 하지 않고, 차(茶)로 뱃속을 채워 가며 노소(老少)는 밤을 새워 가며 바둑을 두었다. 딱－! 창허상인은 돌 하나를 놓았고,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무형신권(無形神拳)의 요체는 중(重)하고 느리다는 데에 있다. 펼치어질 때에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으며, 상대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나, 위력이 극에 달하면 바위를 십 장 거리를 격해 부술 있다. 무형신권은 백보신권(百步神拳)과도 일맥상통한다!" 창허상인은 돌 하나를 놓을 때마다 하나의 무공 구결을 이야기했다. 천유성은 그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었으며, 다 외운 후에는 자신의 바둑돌을 반상 위에 내려놓았다. 딱－! 겉보기는 지극히 한가롭다. 하나, 이것은 바로 죽음의 바둑이라 할 수 있었다. 창허상인은 십화의 규율에 따라 자결해야 한다. 십화는 철저한 비밀 속의 조직인지라, 상대에게 정체가 밝혀지게 되면 자결해야만 한다. 뜨락, 하후초가 멍한 표정으로 하늘에서 뿌리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또한 십화의 인원, 그는 창허상인이 취한 무당의 후계자였다. "태청보록(太淸寶錄)을 전하겠다." 그의 뒤로 창허상인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 왔다. 창허상인은 한 판의 바둑을 두는 가운데 자신이 외우고 있는 모든 무공비급을 천유성에게 암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형의십천결(形意十天訣), 양의심법(兩意心法), 무쌍진경(無雙眞經). 하후초가 이미 외우고 있는 구결들이다. 하후초가 씹어먹었던 종이는 바로 창허상인이 그에게 전수한 무공비급의 책장이었던 것이다. "유성… 그가 십화의 형제가 되는 것은 사부의 꿈이었다. 오늘은 사부의 꿈이 이루어진 날이거늘, 내 눈에서는 쓰디쓴 눈물이 흐르다니……!" 하후초의 손에는 검문혼이 작성한 소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그 또한 백도의 철저한 패배에 대해 뼈저리게 느낀 듯했다. "유성혼! 부디 사부를 위해 무당(武當)의 국화(菊花)를 개화(開花)시켜 다오! 자네는 나를 십 배 능가하는 진짜 천재(天才)가 아닌가?" 폭풍의 운명, 그것은 이렇게 개화(開花)되는 것인가? 미소(微笑)다. 창허상인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벌써 구 일(日), 그는 바보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과 더불어 바둑을 두며 보냈다. 한 권의 소책자로 인해 참혹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창허상인은 지금 너무나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다 암기했다고? 구파일방의 절예 가운데 위력이 강한 구십사 종 절기를?" "……!" 천유성은 따라 웃고 있었다. 가히 염화시중의 미소이다. 두 사람의 미소는 다분히 비슷했다. 미소의 깊은 의미가 진정 인간적이라는 데에서……. 기실 창허상인은 천유성을 하후초 이상의 후계자로 보고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둑을 두며 진학(陣學)과 병학(兵學)을 전수했다. 즉 그는 바둑돌을 두어 가는 가운데, 자신이 창안한 창허진도(蒼虛陣圖)를 천유성에게 전수한 것이다. "녀석, 역시 백치는 아니었군!" 창허상인은 몹시 힘든 표정을 지었다. 그는 구 일 사이 대머리가 되어 있었다. 탐스럽던 은발은 바짝 말라서 등 뒤로 모조리 떨어져 내렸다. "확인해 보지 않겠다. 너는… 거짓말을 안 할 놈이니까." 창허상인의 얼굴로 여명(黎明)의 빛줄기가 흘러들었다. 그리고 문 쪽으로 앉은 천유성의 앞에는 그림자가 길게 나타나고 있었다. 창허상인은 천천히 창문 쪽을 바라봤다. 그 곳 하늘 위, 하나의 핏빛 별이 떠올라 계명성(啓明星)의 빛을 무색케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찬연한 핏빛의 별. 창허상인의 눈길은 그 별에 집중이 되었다. "저 별을 아는가?" "압니다. 저 별은 천괴성(天魁星)이라 합니다!" "그렇지. 천괴성이지. 가장 강한 성기(星氣)를 지니고 있다는 별이지. 그리고… 저 별이 뜨면 환우천하( 宇天下)에 대란(大亂)이 벌어진다는 천기(天機)가 있지!" 창허상인의 미간에는 검은 그늘이 만들어졌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구 일 전 밤에 심맥(心脈)을 절단해 버렸다. 이제까지 버텨 온 것은 천유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 별이 왜 여기 떴는가 궁금했었지. 하나, 이제는 아네. 저 별은 바로 자네 때문에 떠오른 것임을……!" 창허상인은 힐끗 천유성을 바라봤다. 천유성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자네의 눈빛은 독특하네. 불투명한 가운데 신기(神氣)를 담고 있네." "……!" "또한 지네는 거대한 그릇이네. 백도의 절기로는 아마도 그 거대한 그릇을 채우지 못할 걸세!" "……!" "자네에게 십화의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네. 노도가 비록 자네를 신뢰한다 하더라도 십화의 율법이 엄한지라, 자네에게 십화에 대한 것을 상세히 말할 수는 없네." 창허상인의 코에서 푸른 액체가 주루루 흘러내렸다. 그는 현재 사선 위에 서 있었다. "일 갑자(甲子) 전, 구파일방의 장문인 앞으로 한 장의 밀지가 날아들었고… 그로 인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일제히 바뀌었네. 그리고 바로 그 날, 십화의 씨앗은 땅에 떨어졌네." 말소리가 들리기는 하나, 일대는 적요했다. 시공이 정지되어 버린 듯한 적막감. 하여간, 하나의 새벽은 시작이 되고 있었다. "당시 구파일방에 전해진 밀지에는 구파일방이 자랑하는 십대(十大) 진산절학(鎭山絶學)의 파해초(破解招)가 기록되어 있었네. 만에 하나 그것을 익힌 사람이 출현했다면, 구파일방은 열흘도 버티지 못하고 피에 씻겼을 것이네. 해서 장문인들은 분루를 흘리며 장문인 자리를 버렸던 것이고, 복수를 하기 위해 십대진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네. 그 때 일을 시직한 사람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은 노도뿐이지. 먼저 죽은 아홉 친구들은 노도를 철석같이 믿고 있으나, 언제나 힘에 겨웠지. 이유는 하나, 노도에게는 천재성(天才性)이 없으며… 천하를 경륜할 지혜가 없기 때문이지!" 창허상인은 천천히 등을 벽에 기대었다. 방 안에는 어느 틈엔가 하후초가 들어와 창허상인 옆에 시립했다. "백도는 무기력한 상태이고, 십화는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지." 창허상인의 눈빛은 자애스러운 할아버지의 눈빛이었다. 그는 그러한 눈길로 천유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천유성의 양 볼은 가볍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무정(無情), 무심(無心), 무감(無感)의 정신 수련을 하고 있던 천유성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뜻 있는 일이었다. "어떤가? 해 보겠는가? 열 송이 죽어 가는 꽃을 가꾸어 보겠는가?" "해 보겠습니다." "좋아, 좋아. 자네는 배짱이 두둑하니, 절세적 기예만 터득한다면 십화의 후견인(後見人) 노릇을 톡톡히 할 걸세." "……!" "국화(菊花), 매화(梅花) 영산홍(映山紅), 동백(東柏), 수선(水仙), 옥잠(玉簪), 포송영(捕公英), 금잔(金盞), 무궁(無窮), 모란(牧丹)을 잊지 말게. 절대로……!" 창허상인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는 짙은 미소 가운데 실로 놀라운 말을 던졌다. "떠나게. 그리고 오지 말게!" "아……!" "그래도 오겠다면… 한 가지를 행하고 오게. 그것은 바로 노도가 구 일 간 전수한 모든 절기를 격파하는 절기를 얻은 후, 오라는 것이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절기를 연마한 후 오라는 것이 아니고, 절기를 격파할 만한 능력이 생긴 후에 오라니? 우두두둑－ 우둑－! 천유성의 손에서는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양 주먹을 쥐고 입술을 가볍게 벌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성…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 아마 일 년은 가다릴 수 있을 걸세. 더 이상 늦는다면… 십화와 자네의 인연은 끓어진다네." 백도의 거룡(巨龍) 창허상인, 그는 흐릿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나가라는 턱짓을 했다. 천유성은 조심조심 일어났고, 창허상인은 지친 듯 눈을 스르르 감으며 입술을 떼었다. "아마도… 다시 못 볼 걸세!" "아……!" "십화를 거둘 작정이라면… 숭산(崇山)에 가게." "……." "십화의 진정한 주인은 노납이 아니네. 노납은… 한 분 상고기인의 수족에 불과하네." "아……!" "그분은 요료(了了)… 무림은 모르나, 그분이야말로… 백도제일인(白道第一人)이시네." "……." "그분을 찾게. 요료(了了)… 그 이름을 잊지 말게." "……." "됐네. 가게나!" 창허상인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으며, 천유성은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걸음을 내디뎠고… 아주 천천히 신형을 틀며 방문을 벗어났다. '가문의 율법을 거역하고서라도… 하고 싶은 일은 하겠습니다. 저를 기다려도 좋습니다.' 그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는 떠오르는 태양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초(楚), 노선생을 잘 모시게!" 그는 하후초에게 말한 다음,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뜨락에는 국화가 가득하다. 비는 이미 그친 후였다. 국화꽃에는 맑은 이슬이 영롱히 매달려 있었다. 호숫가, 갈대는 며칠 사이 꽤나 조락했다. 누렇게 말라 버린 갈대숲 가, 그는 봉두난발한 차림으로 바윗돌을 디디고 서서 호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지않아 가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낭인(浪人) 수업(修業)은 끝났다.' 그의 모습은 잔잔한 호수에 투영되고 있었다. '나는 가문의 율법을 증오하며 문을 나섰다. 나의 자유로움을 찬미하며, 그리고 천 년에 걸쳐 백일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가문들을 비웃으며…….' 맑은 거울의 물은 그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미 소년은 아니다. 허름한 옷을 걸치고 까치집의 머리카락이기는 하나, 천부적인 용모만은 어쩔 수 없었다. 가히 인중룡(人中龍). 만에 하나 낭인주의 혼탁한 저류(底流) 가운데에서 잡초 같은 기질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그의 외모는 눈부시도록 타올랐을 것이다. '십 세 때, 아버지는 내게 춘추율법(春秋律法)을 전하고 돌아가셨다. 죽음보다도 가혹한 사대율법(四大律法)을…….' 우두둑－ 우둑－! 천유성은 주먹이 으스러져라 불끈 거머쥐었다. 기일(其一). 춘추팔가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고, 영웅팔가(英雄八家)로 대군림(大君臨)하기 전까지는 일생을 가문에 바쳐야 한다. 기이(其二). 마계는 언제나 춘추팔가를 노리고 있다. 그들에게 정체를 발각당하면 아니 된다. 따라서 가문의 무공은 적을 죽일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기삼(其三). 타파의 진전을 얻으면 아니 된다. 기사(其四). 절대의 길에서 벗어나면 아니 된다. "나의 가문은 천 년에 걸쳐 네 가지 율법에 의해 성장해 왔다!" 바람이 가볍게 일어난다. 천유성의 옷자락은 슬쩍 뒤집어졌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가문의 혹독한 율법을 증오했으며, 나를 무사로 만들고자 하는 세월을 증오했다. 나는 방랑시인이 되고 싶었기에……!" 그의 눈길은 서서히 허공으로 옮기어졌다. 하늘은 깨어져 내릴 듯 투명했다. 암영(暗影)이라고는 찾아보지 못할 추천(秋天)은 창궁(蒼穹)이었다. "하나, 이제는 조금 알 듯하다. 야망(野望)의 깊은 의미를……!" 第4章 거대한 인연(因緣) 갈대숲 가운데, 천유성의 이목을 끄는 자그마한 물체가 어른거린 시기는 유시(酉時)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암코양이처럼 웅크린 작은 그림자. 불안에 가득한 눈망울에 미간에는 땀이 가득하다. 나이는 열여섯 정도 되었을까? 남자의 옷을 걸치고 있기는 하나, 분명 계집아이였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결한 미모를 갖고 있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못할 뇌쇄의 미를 지니고 있는 소녀는 조금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천유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 "……." 천유성은 구야노인의 거처 쪽으로 다가가다 말고는 남장소녀를 보고 문득 걸음을 멈췄다. '석화(石花)… 아아, 석화다. 언제나 먼 곳에서만 보아 왔던…….' 그는 돌연 석고상으로 경직이 되었다. 이 장(丈) 앞에 있는 작은 동체, 갈대숲에 웅크린 남장소녀의 얼굴은 천유성의 동공을 확대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녀이다. 차라리 퇴폐적이라 할 눈매에, 꽤나 높은 콧날과 산딸기의 입술, 터져 버릴 듯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육봉(肉峯)과, 꺾어져 버릴 개미 허리를 지니고 있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녀. 그녀는 천유성이 자신을 보고 멈추자,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초조해 하고 불안해 하는 기색은 너무나도 완연했다. "길… 길을 잃었다!" 애써 남자아이의 목소리를 흉내내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묘한 유혹으로 다가서는 목소리, 다시는 잊지 못할 앙금을 남기는 그러한 목소리였다. "장안(長安)에 가려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장안?" "거기 외조모(外祖母)가 계시다. 그분을 찾아 나섰다." 소녀는 두 손으로 가슴을 짚고 있었다. 제딴에는 가슴이 불쑥 솟은 것을 교묘히 감추겠다는 듯……. 하지만 그녀는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다 하더라도 암컷이라는 것이 드러날 정도로 대단한 여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녀뿐이리라. "내일까지 걸으면 장안에 가리라 여겼는데… 그만 발을 삐고 말았다." "장안까지 가는데 하루면 된다 믿었느냐?" 천유성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성큼 다가갔고. "으으음……!" 남장소녀는 몹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뒤로 제쳤다. 그녀는 천유성이 아는 소녀였다. 언제나 창을 통해 석화호를 바라보며 지내는 비밀 속의 소녀. 그녀가 석화궁을 벗어난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일 년 안에 그녀를 취해라! 석화란 검문혼과 천유성이 암호처럼 부르는 이름이다. 검문혼의 그림을 통해서만 가까이 대할 수 있었던 그녀가 갈대숲 안에 웅크리고 있다니… 애써 남자아이 행세를 하며……. "어디 보자!" 천유성은 석화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무… 무엇을 보자는 것이지?" 석화는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비릿한 향기가 풍겨 왔다. 그것은 낭인주에는 없는 진짜 여자의 내음이었다. 달콤하고 곤혹스러운… 맡기만 하면 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그러한 방향(芳香). "네 발(足)." "발… 발을? 아니 된다. 으으, 발을 보이면 아니 된다!" 석화는 돌연 자지러졌다. 발을 보인다는 것은 여자에게 있어 지극한 치욕이다. 특히 귀족 가문의 여인에게 있어 다른 남자에게 발을 보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발은 정조의 상징이라 할 수가 있다. 석화가 몸서리를 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발을 삐었다며?" 천유성은 바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삐… 삐지 않았다. 그냥… 그래 본 것이다!" 석화는 울상을 지으며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삐지 않았다고……?" 천유성은 짓궂은 표정 가운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바로 앞에 환상을 두고 있는 셈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눈앞에 있고, 그녀의 뺨을 타고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석화를 보고 있을 때, 사방에서 묘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쓰으으… 쓰으으……! 바람결을 타고 빠르게 괴영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조심조심 다가서는 수백 명의 무사들. 그들은 모두 자색(紫色) 옷소매가 달린 전포(戰袍)를 걸치고 있었으며, 등 뒤에는 신도(神刀)와 신검(神劍)을 십자로 교차해 지니고 있었다. 호흡마저 감추며 다가서는 자들. 이들은 석화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다가섰다. 석화는 그것도 모르고 울상을 지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꼼짝도 못하고 갇혀 사는 나의 처지가 지긋지긋해 외가로 도망치려 했거늘… 휴우, 강호의 길이 이리도 위험할 줄이야. 궁을 탈출하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이 리(里)도 못 가고 이런 꼴이 되다니!" 석화는 너무도 귀족적인 소녀였다. 옷을 입고 밥을 먹고 목욕을 할 때에도 타인의 시중을 받으며, 세 걸음만 걷는다 하더라도 교자(轎子)를 타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그러한 위치이다. 그녀는 황족(皇族)이라던가? 쓰으으… 쓰으으……! 일대에 천라지망이 펼쳐졌으나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 저 녀석을 어찌해야 할는지……? － 백치(白痴) 같지 않은가? 살인멸구(殺人滅口)할 필요는 없겠네. 아마 다섯 걸음도 가지 못하고 오늘 겪은 일을 잊어버릴 테니까! － 낭인주에는 인간 쓰레기들만 있지. 살아 있기는 하나, 이미 죽은 자들이지. 자아, 그냥 가세! 군주(君主)가 무사하면 되지 않은가? 수많은 무사들이 석화를 암중호 위하며 천유성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그들은 알지 못하리라. 천유성이 그들의 숫자가 이백사십오(二百四十五)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북경관어(北京官語)를 써서 말을 전했음을 정확히 알아차렸다는 것을……. 묘하게 다가선 소녀 석화, 천유성은 그녀의 진실된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취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여인. 하나, 가문의 율법대로라면 나는 여자를 외부에서 얻지 못한다.' 천유성은 숨을 폐부 깊이 빨아들였다. '석화는 나와 인연이 없는 여자다.' 천유성은 주변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척 휘청거리며 걸을 뿐이었다. 석화는 이미 떠난 후였다. 그녀는 길이 휘어진 부분에 이르러 격공점혈(隔空點穴)에 당해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으며, 무사들 가운데 하나가 그녀의 몸을 정중히 들쳐 안은 채 한 마리 독수리가 날아오르듯이 훌훌 날아오른 것이다. 바람이 차다. 머지않은 곳에 겨울(冬)이 머물러 있는 듯했다. '한데, 그 얼굴이 잊혀지지 않다니…….' 천유성은 하나의 바윗돌이 되어 있었다. 석화라는 소녀를 처음 본 시기는 삼 년 전. 그는 석화궁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주렴에 가려진 창을 통해 밖을 보고 있는 석화를 보았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석화의 눈망울에 새벽의 햇살이 반짝였음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운명처럼… 석화라는 소녀의 영상은 언제부터인가 뇌리 깊이 새겨진 것이다. '눈이 내리기 전, 돌아가야 한다. 천 년의 율법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 이 곳을 떠나기 싫다. 진심으로……!' 천유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호수 쪽으로 걸어갔다. 바로 그 때였다. "꼬마야, 길을 묻자!" 정녕 신묘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땅 속에서 흘러 나오는 듯한 목소리. 그 소리는 하늘 위에서, 사방에서 동시에 들린 듯이 전해졌다. '팔방환어(八方幻語)… 동시에 여덟 장소에서 음파를 전하는 이 수법은 실전된 해외절학(海外絶學)인데……?' 천유성은 누군가 다가섰음을 느꼈다. 그것도 가공할 절정의 무위를 지니고 있는 자가. 달 아래(月下)였다. 실로 기이한 차림새의 인물이 서서 천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를 검은 천으로 휘어 감은 자. 그의 전신에선 기이한 사기가 느껴져 온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죽은 눈이었다. 모든 감정이 가라앉아 버린 칙칙한 눈빛, 어떠한 정서도 찾아 내지 못할 죽은 눈빛의 흑포괴인은 묘하게도 두 자루 도(刀)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왼손에 쥐어 비스듬히 가슴에 안고 있고, 또 한 자루는 가슴에 푸욱 꽂아 넣은 채……. 피(血), 흑포괴인의 하반신은 피에 젖어 있었다. 그러한 상태로 내공을 시전한다는 것은 가히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머리 위에는 달빛을 이고, 발 아래에는 조락해 가는 갈대잎을 깔고 있는 자. 그의 어깨는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서 있는 것만 해도 그에게는 몹시 괴로운 일인 듯했다. 하나,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철저한 인(忍)의 수련을 거친 듯, 그는 가슴에 검을 꽂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중원제일의 장인(匠人)을 찾아왔다. 그에게 하나의 청부를 완수하기 위함이지! 그것을 하기 위해… 크으… 죽음조차 미루고 왔다!" 죽은 눈의 괴인, 복면 아래로 흰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자그마한 체구이고, 깡마른 체형이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는 터져 버리기 직전의 화산(火山)처럼 집약된 힘이 느끼어지고 있었다. '왜인(倭人)이군.' 천유성은 괴인의 말소리가 중화인의 그것과는 음색이 다름을 알았다. '자객(刺客) 중의 자객이라는 인자(忍子)일까?' 천유성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권태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장인(匠人)?" "그렇다. 모든 마병(魔兵)을 베어 버리는 신병이기(神兵異器)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찾아왔다." "……?" "그가 만드는 보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이백팔십(二百八十) 수하들이 산다. ㅋㅋ… 과거 핏덩이로 도망갔던 그 애송이 곁에는 동해제일(東海第一) 연검술사(煉劍術士)인 장광씨(長光氏)가 있다. 놈이 만든 마병(魔兵)과 호갑(護甲)을 계산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우라질! 그 애송이에게 당하다니……!" 대체 누구일까? 그는 한어(漢語) 반, 일어(日語) 반 섞어 제멋대로 뇌까렸다. 달빛이 교교하다. 그 덕에 괴인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혈액(血液)의 빛깔은 보다 붉게 반짝거렸다. 묘한 인연의 밤, 괴인은 눈을 껌벅거리며 입술을 희미하게 떼었다. "장광씨가 만든 마병을 꺾을 수 있는 병기를 만들 사람은 오직 하나, 이백 년 전 천하를 정복했던 거장궁(巨長宮) 일맥(一脈)뿐이다!" "거… 거장궁?" "거장궁의 후예가 낭인주에 머물러 있음을 아는데, 십오 일 걸렸다. 우라질! 이십 일밖에 버티지 못하는데, 거처를 찾는 데에만 꼬박 십오 일 걸렸다!" 쓰으으……! 괴인은 구름을 타고 흐르듯이 둥둥 떠서 다가섰다. 기이한 사기(邪氣)를 흘리는 자, 그의 두 눈은 점점 강하게 타올랐다. 환몽미백안(幻夢迷魄眼). 보기만 해도 의식을 잃어버리는 최면안이다. 하나, 천유성의 눈빛은 환몽미백안에 당하고도 흐려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눈빛은 심연처럼 깊이 가라앉았다. "우라질! 다 죽게 되어서 작은 독종(毒種)을 보게 되었단 말인가? 범인의 십 배 정신력이 없다면 제압되어야 하거늘……?" 흑포괴인은 휘청이며 몸을 바로잡았다. 바로 그 순간, 그의 가슴에서는 붉은 핏발이 튀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내가운기(內家運氣)가 잘못되는 통에 내공으로 차단한 피의 흐름이 다시 시작되는 듯, 흑포괴인의 몸뚱이는 어깨에서 무릎까지 완전히 피에 적시어졌다. 한데, 어찌 된 일일까? 좌절로 깊이 가라앉았던 두 눈이 차츰차츰 희열의 빛으로 타오르지 않는가? "호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하군!" 무엇을 보고 이리도 감탄하는 것일까? 흑포괴인의 눈은 희열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살찌지도 마르지도 않고, 두 팔이 범인의 팔보다 조금 길군. 게다가… 너의 눈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태양의 눈이다. 오오, 이럴 수가……?" 휘리리리링－! 흑포괴인은 바람처럼 다가섰다. 천유성의 몸뚱이는 찰나적으로 뻣뻣해졌고, 흑포괴인은 천유성 바로 곁으로 다가서며 나방이 더듬이를 놀리듯이 손을 내밀어 천유성의 근골을 세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깨와 늑골, 하단전, 무릎 관절, 손목 부위……. 그의 손길은 빠르게 천유성의 전신을 훑어 내려갔다. "호오, 근골이 좋군!" 흑포괴인은 연방 탄성을 터트렸고, 그러는 동안에 가슴에서 뿜어지는 핏줄기는 보다 굵어졌다. "대… 대단하군! 이러한 근골이 중원의 구석진 곳에 있다니… 대체 강호의 거대 방파의 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기에 이리도 완벽한 근골을 그냥 내버려둔단 말인가?" 흑포괴인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또한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달을 바라보고 있으며, 눈물이 흘러내리는 통에 달 그림자는 찌그러지고 있었다. "월광류(月光流)의 조사시여! 이제야… 이제야 진정한 후계자를 만난 듯합니다!" 일어(日語)로 중얼거리는 흑포괴인, 그의 옷자락에는 문양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월(月). 핏빛의 달이 옷자락에 그려져 있었다. 핏빛이라니? 설마 중원무림계를 제외할 때 무공 수준이 제일 높다는 동영무림계(東瀛武林界)의 위대한 우상(偶像), 월광(月光)이란 말인가? 월광. 남기는 것은 죽음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남기지 않는다. 흔적을 남기는 것은 월광의 수치, 그는 죽음만 남기고 사라져 간다. 가히 살인도(殺人道)의 신(神)이라 할 수 있는 자. 그는 막부(幕府)의 난(亂) 가운데 위대한 활약을 하였으며, 부풍살막(扶風殺幕)이라고 하는 청부살인 집단을 만들어 막부의 장군(將軍)들에게서 거금을 받고 청부살인을 도맡아 왔다. 하나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수길씨(秀吉氏)를 격파하고 막부를 장악한 후, 그는 직업(?)을 잃어버리고 늙은 농부가 되었으며… 그 후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보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데, 그가 중원 깊은 곳을 헤메이고 있다니? 심장 바로 위에 검을 꽂고 다 죽어 가는 상태로……. 달빛은 검은 구름에 감추어질 때, 월광은 전과는 달리 숙연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일어로 떠벌이다가는 오랜만에 한어로 말했다. "이십오 년 전, 나는 거대한 청부(請負)를 맡게 되었다!" "……." "거금(巨金) 사천만금(四千萬金). 훗훗… 나는 청부 사건을 완수한 후, 그 돈으로 유구국(琉球國)을 사서 제왕(帝王)이 되려 했다. 그래서 천 명의 수하를 이끌고 청부 맡은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한데 일이 묘하게 되었다. 일은 자꾸 미궁에 빠져들었으며, 암습을 만나 인간 병기에 가까운 수하를 칠백이십(七百二十)이나 잃고 말았다." "으음……!" "그 이유는 하나, 인술(忍術)만 믿었지 상대의 병기가 얼마나 가공스러운지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상대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자만에 패한 것이다!" 월광, 그는 중원무도계의 인물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형식이 거의 없으며, 가식도 거의 없다. 살인도의 우상 월광. 그는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십오 년 전, 선단(船團)을 이끌고 중원으로 들어섰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어떠냐, 꼬마? 내가 실패한 청부를 네가 하지 않겠느냐?" "글쎄, 나는 본시 타인의 일에는 개입하기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천유성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크크… 사실 하지 않는 것이 좋을 정도로 힘든 일이다." "……." "상대는 나를 능가하는 살수(殺手)이며, 늘 일천 살수에 호위되고 있다. 또한 거처를 수시로 바꾸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다!" "흠……!" "더욱이 그 자를 죽이는 데 대한 대가로는 은자 일 냥(兩)도 돌아가지 않는다. 사천만금을 모두 선금(先金)으로 받았으되, 이십오 년 동안 강호를 종횡하며 다 써 버렸다. 수하들에게 거쳐를 마련해 주고… 크크… 이것저것 하기 위해! 기실 중토는 너른 곳이었다. 섬(島)에서 생각할 때보다… 천 배, 만 배 거대한 곳이었다. 우라질 정도로 컸다. 대륙은……!" 어렸을 때부터 대인자술(大忍者術)을 터득한 월광. 그는 백두 살이 되는 현재까지 칠천 건(件) 이상의 살업(殺業)을 완벽하게 성사시켰다. 하나, 그는 최후에 맡은 한 가지 일을 실패로 돌리고 만 것이다. "나는 놈이 거대 누각을 세우고 있음을 알고 단신으로 찾아갔다. 우선 그것이 잘못되었다. 수하들을 불러 같이 가야 했거늘… 마음이 급한 나머지, 단신으로 칠천 리(里)를 달려 놈을 찾았다. 결과, 놈의 모습을 채 확인도 못하고 백인살예진(百忍殺藝陣)에 걸렸으며… 크크… 사몽(死夢), 그 놈의 어검(馭劍)에 가슴을 관통당하고 말았다. 크크… 그래도 헛수고만은 아니었다. 사몽, 그 놈이 살아 있음을 알아 냈으며… 놈 곁에 장광씨(長光氏)가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것은 피가 흐른다는 것보다 위험한 현상이었다. "어떠냐, 꼬마?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살인청부를 맡지 않겠느냐?" "흠, 약간 흥미가 당기는군." "대가는 둘(二)이다. 하나는 월접(月蝶)이라 불리는 나의 제자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동영무도(東瀛武道)의 살인예술(殺人藝術)이라 불리는 십삼인자술(十三忍者術)의 구결을 얻는다는 것!" 십삼인자술! 월광류의 전설을 이룩케 한 기적의 살인술이다. 동영무도에 전수된 온갖 살인 초식의 정화이며, 그 중에는 중원에서 흘러든 자객도(刺客道)의 술법도 있다. 달빛 가운데 천유성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연히 다가선 운명, 그것은 비릿하고 쓰디쓴 유혹이었다. 하나, 떼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유혹이었다. 그것은 행운이 아니라, 승부(勝負)이기에……! "성공 확률은?" "백분지일(百分之一)." "흠……!" "놈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성공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게다가 나의 수하 월접(月蝶)들은 초조해 하고 있으며, 하나하나 잡혀 죽고 있다. 아마도 일 년 안으로 성공 가능성은 무(無)에 가까워진다! 모두… 진실이다!" 밤이 깊어 가고, 검은 구름에 감추어지던 달덩이가 화사한 얼굴을 다시 내밀기 시작했다. 이십오 년 간 한 인물을 추적한 집념의 대인자(大忍者). 동영에서는 인자제왕(忍者帝王)이라 불리는 살인 청부업자이다. 한데, 그 흉칙한 살인귀의 눈빛이 다정하게 느끼어지다니? 오직 하나의 길에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일까? 인자제왕 월광의 눈빛은 어린아이의 눈빛처럼 순수해지고 있었다. "……!" 그는 이제 말하지 않았다. "……!" 천유성은 팔짱을 낀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동영무도계는 오래 전부터 천시를 받아 왔다. 더욱이 중원명가의 후예라면 동영무도계 따위는 백안시하기 마련이다. 천유성도 얼마 전까지는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나, 지금 그의 가슴 가운데에서는 이상한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끌 수 없는 야릇한 욕망, 그것은 천하무도(天下武道)를 섭렵해 보겠다는 묘한 야망이었다. "좋소. 내가 대신 맡겠소!" 천유성의 말은 새벽이 될 때 시작되었다. 그는 밤이 지나가고 여명이 시작될 때까지 고뇌를 하다가 월광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다. "네놈은 백치다. 그 어려운 청부를 도맡다니……!" 월광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인자제왕과 낭인,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교감이 흐르고 있었다. 한 장의 쪽지. 그것은 월광이 이십오 년 간 상투 속에 간직한 쪽지이다. "이것이다. 청부서(請負書)는!" 월광은 떨리는 손길로 쪽지를 천유성에게 전했다. <죽여야 할 자, 사몽(死夢). 수길씨(秀吉氏)의 마지막 후예, 일천(一千) 가신(家臣)에게 호위되어 거선(巨船)을 타고 본국을 빠져 나갔음. 거대세력이 항차 그를 일본의 천황(天皇)으로 기르기 위해 끌어간 듯! 더 이상 아는 것은 없음! 사천만금(四千萬金)을 선금(先金)으로 보내겠음. 월광류(月光流)가 이룩한 부풍살막(扶風殺幕)은 사백 년에 걸쳐 무사도(武士道)를 지킨 이상, 의심하지 않겠음! 기한은 무제한…….> 묘한 청부서이다. 그리고 청부서의 말미에는 지인(指印) 하나가 찍히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손가락 자국이었다. "이십오 년 전, 그 쪽지를 받았다. 청부를 완수하기 위해 이십오 년을 중원의 방랑자로 바쳤다. 다시 동영의 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ㅋㅋ… 몸은 가지 못하고 혼백만 가게 되었다. 사실, 실패한 인자는 무덤조차 세울 수 없는 것이 인자의 법칙이다!" 월광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웃었다. 그를 웃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 낭인주의 개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천유성의 가공스러운 근골이었다. "병기를 만들어… 나는 죽어도 수하들이 임무를 완수케 하려했다. 하나, 이제 나의 생각은 달라졌다. 크크… 병기 따위는 필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병기가 필요 없는 인간 병기가 만들어질 테니까!" 월광은 히죽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한순간 천유성은 폭풍에 말아 올려지는 가랑잎처럼 월광의 손아귀에 완맥이 쥐어지고 말았다. "어어엇……?" 천유성은 몸이 뜨거운 기름불에 휘어 감김을 느끼며 탄성을 발했고. "시간이 없다. 나흘이 있을 뿐이다. 그 사이, 네게 동영무도의 십삼대술법(十三大術法)을 전하겠다. 또한 월광류가 이룩한 부풍살막의 오십 가지 신호법(信號法)을 네게 전하겠다." 월광의 눈은 금빛으로 타올랐다. 제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천유성이었으나, 그러한 눈빛을 보고 의식을 제대로 간직할 수는 없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처럼, 천유성의 혼백은 월광의 마음 그물(心網)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츠으으－ 츠으으－! 일대에는 자욱한 흑무가 번지기 시작했다. 월광의 모공에서 흘러 나오는 안개가 두 사람의 몸뚱이를 감춰 버리는 것이다. 십삼인자술(十三忍者術). 일명 무적인자술(無敵忍者術)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밤의 절학이며, 광명정대한 승부를 가늠하기 위한 절기가 아니라 살인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절기였다. 사실 대륙의 무예는 원조(元朝) 이후에는 살인술로 변화하고, 그 이전에는 영웅적인 절기가 태반이었다. 특히 천유성과 같이 영웅가문의 후예라면 십삼인자술 같은 암흑의 절기는 사갈시하기 마련이다. 밤의 숙명… 월광(月光). 그들의 비전은 대대로 한 사람에게만 이어졌다. 천유성은 묘한 운명으로 인해 월광류의 마지막 전인이 되는 것이다. － 적이 나를 안다면 이미 실패한 것이다. 중원의 영웅들은 인자의 술법을 비겁자의 암습 수단이라 천시한다. 훗훗… 하나, 중원에도 자객도(刺客道)는 있지 않느냐? － 인자는 무공을 중시하지 않는다. 무공에는 한계가 없다고 하나, 한계는 분명히 있다. 인간은 신(神)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인자들은 살인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 나는 천여 가지 살인 도구를 만들 수 있다. 하나, 네게는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법을 전수하지 않겠다. 그것은 하류 인자들이나 하는 삼류(三流) 살인술(殺人術)이니까! － 네게 전할 것은 세 가지다. 그 나머지는 배우나마나 한 잡학(雜學)이다. 잠입(潛入)하는 법, 살인(殺人)하는 법, 그리고 탈출(脫出)하는 법……. 천유성은 반듯이 누워 있었다. 인자제왕 월광은 그의 쌍장에 자신의 쌍장을 대고 있었다. 겉보기에 그는 입도 떼지 않았으며, 호흡도 거의 멈추었다. 하나,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언어가 오고 가고 있었다. 본시 인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호를 한다. 새 소리, 곤충 울음소리에 뜻을 부여하여 휘파람 소리를 내어 동지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어금니를 뽑고 나서 가짜 어금니를 만드는데, 그것은 백여 가지 신호를 발하는 비밀 호각이 된다. 어디 그뿐이랴? 수화(手話)에 능통해야 하며, 먼 곳에서 상대의 입술 모양만 보고도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위해 독순술(讀脣術)을 터득해야 한다. 또한 상대의 눈빛을 읽어야 하며, 지극히 평범한 자세 가운데에서 허실(虛實)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한다. － 살인은 육감에 따른 능력(能力)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技術)이다. 적어도 동영에서는……! 월광은 단순한 청부 살인마가 아니었다. 그는 놀랍게도 창허상인도 알지 못하는 고금 각계의 상승무학에 정통하고 있었다. 본시 대륙무도계의 인물들은 자파의 명예를 숭앙한다. 해서, 그들은 타파의 전전이 강하다 하더라도 감히 익히려 하지 않고 장점보다는 단점을 말하기 좋아한다. 하나 동영무도계의 인물들은 천 년에 걸쳐 타파의 절기, 특히 대륙의 절기를 수집하는 데 정혈을 다해 왔다. 천하대란을 일으키고 실패하여 동영으로 숨어 든 자에게서 대륙무학의 진수를 끌어냈으며, 왜구들이 노략질해 온 기진이보 가운데에서 대륙무도계가 잃어버린 무수한 상고진경을 찾아 냈다. 십삼인자술, 그것은 대륙무림계를 경악케 할 만한 비기들이었다. 한 가지 추적술, 부풍비각(扶風飛脚). 추적은 끈기를 요구한다. 또한 진기를 일시에 소모하지 않고 조금씩 나누어 소모하는 호흡법을 필요로 한다. 어떤 때에는 만 리를 추적해야 하며, 온갖 악천후를 겪을 수도 있고, 인간이 생존하지 못할 악조건 속으로 들어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장거리를 달리는 가운데 진기를 거의 소모하지 않는 특수한 호흡법, 경신보행술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부풍비각이다. 그것은 월광이라 하더라도 칠 성 수준밖에 익히지 못한 가공할 경신추적술이었다. 하나의 호신공(護身功), 천색비포(千色秘袍). 인자들은 대부분 많은 살인 장구(裝具)를 지니고 다닌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소지품을 지니지 못할 경우가 있다. 그러한 경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시전하는 수법이 바로 천색비포라 불리우는 대인자술이었다. 금색포(金色袍), 은색포(銀色袍), 동갑포(銅甲袍), 혈전포(血戰袍), 무영포(無影袍), 사린포(邪麟袍)……. 호신강기와는 다른 호신절기로 체외로 어떠한 강기( 氣)도 흘리어 내지 않는다. 다만 진원지기를 이용하여 모공에서 안개를 뿜어 내어 자신의 흔적을 감출 뿐이다. 숨소리, 심장 박동 소리, 심지어 체온마저 감추어진다. 바로 눈앞에 숨는다 해도 상대는 시전자를 찾아 낼 수 없다. 지금 월광이 시전하고 있는 수법이 바로 흑무포(黑霧袍)라고 하는 천색비포의 한 가지 수법이었다. 네 가지 은잠술. 잠마사은(潛魔邪隱), 잠룡무흔(潛龍無痕), 일백무종(一百無踪), 백인무적결(百忍無敵訣). 그 어떠한 자연물에도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술이다. 환술(幻術)과는 달리 그것은 눈속임이 아니다. 그것은 고도로 단련이 된 모공 기법이며… 상대가 천이통(天耳通), 천안통(天眼通), 타심통(他心通)을 터득했다 하더라도 찾아 내지 못할 은잠술이었다. 호수(湖水), 바위, 숲, 눈더미, 뿌리어지는 빗줄기,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가랑잎, 심지어 적이 던져 내는 암기의 그림자 속에도 몸을 감출 수 있다. 두 가지 탈출술. 야공부풍(夜空扶風), 야천환(夜天幻). 호흡을 멎은 채 혼신 공력을 발휘해 내며 맥박을 끊은 채 십이 성 진기를 발출할 수 있다. 시체가 움직이는 듯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으며, 상대가 천이든 만이든 감쪽같이 빠져 나갈 수 있다. 무음(無音), 무흔(無痕), 무종(無踪)……. 야공부풍과 야천환은 가히 완벽한 밤의 절학이었다. 다섯 가지 살인 초식, 가히 예술(藝術)의 경지에 달한 오대도초(五大刀招)이다. 월광혼(月光魂). 빛줄기보다도 빠르게 도세를 쳐내며, 상대는 도를 느끼는 찰나 미간(眉間)에 구멍 하나가 뚫려 쓰러지고 만다. 만 번 이상의 발도(拔刀) 연마 후에야 시전할 수 있는 것으로, 상대가 어떠한 초식을 시전한다 하더라도 월광혼만은 피할 수 없다. 월광혼은 절대의 빠르기를 지니고 있기에, 상대는 자신의 장기가 되는 초식을 채 시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월광영(月光影). 빛도 없이 소리도 없이 다가가는 도세이다. 단거리의 공격에 적합한 초식으로, 상대는 칼이 다가선다는 것도 모른 채 등판에 구멍이 뚫리게 된다. 월광접(月光蝶). 빛으로 상대를 유혹하고 소리 없이 죽음의 칼이 다가간다. 상대가 다수의 호위무사들 가운데 머물러 있을 경우, 진가가 발휘되는 살인 초식이다. 월광야(月光夜). 소리로 상대를 유인하고, 빛도 없이 상대의 목숨을 마감시킨다. 한 번 시전되면 피를 보기 전에는 거두어지지 않는다. 월광은 이 한 초식으로 인해 천하제일의 자객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월광무(月光舞). 구결로만 전해지는 최고 최후의 인자검(忍者劍). 그것은 십삼인자술을 모조리 터득한 이후에야 시전할 수 있는 절기였다. 그 위력은 아직도 미지수이며, 그것이 과연 인간이 시전할 수 있는 절기인지조차 알지 못할 일이었다. 만에 하나, 월광이 월광무를 얻었더라면 능히 일본을 얻었으리라. 새벽이다. 천유성은 너무나도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린 소년처럼 피곤함을 느끼며 의식을 되찾았다. 안개가 보이고, 밝아지기 시작하는 가을 하늘이 보인다. '아, 환상이었을까?' 천유성은 눈을 껌벅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머리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구결이 기억되어 있었다. 한데 그것을 전한 당사자인 월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월광, 그는 밤에만 나타나는 존재일까? 꼬박 나흘, 그는 천유성의 마음 깊은 곳에 십삼인자술을 새겨 넣었었다. 한데 지금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실패한 인자는 무덤에 묻힐 자격이 없네! 늙은 인자,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호숫가였다. 천유성의 눈을 시큼하게 하는 물건이 뒹굴고 있는 곳은. 핏물에 더럽혀진 한 벌의 흑포가 호수가 바위 위에 단정히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단검(短劍) 한 자루가 놓여졌고, 단검 아래에는 혈서(血書) 한 장이 뒹굴고 있었다.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게.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자네에게 너무나도 많은 짐을 지어 준 듯하군. 사몽(死夢)을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겠으니, 살인청부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게! 하지 않아도 좋네.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중원무림(中原武林)은 천 년에 드문 난세(亂世)이니, 부디 조심하기를! 언제고 나의 수하를 만나면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게. 그 충성스러운 녀석들이 나의 죽음을 슬퍼하다 못해 할복자살하기 쉬우니까! 그 녀석들을 부르고 싶다면 동정(洞庭) 백화주(百花洲)에 꽃배를 띄우게! 여기 놓인 단검은 장광씨(長光氏)가 만든 마병(魔兵) 가운데 하나이네. 일명 색혈(索血), 무인(無忍), 무광(無光), 무채(無彩)의 마병이지. 현재 만들어진 것이 수만 자루, 그것은 난세를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할 것이니… 슬픈 일이네! 거장궁(巨匠宮)의 신검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장광씨의 마병은 혈우천하(血雨天下)를 이룩할 걸세.> 글은 그렇게 끝이 났다. 월광은 혈서를 적은 다음, 단검으로 심장을 찌르고 물 속으로 사라져 갔다. 지금쯤 그의 시신은 깊은 물 속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동영무도의 살인마 월광, 그는 나타나지 않았던 듯 종적을 감췄다. "……!" 천유성은 흑의자락을 오랫동안 쥐고 있었다. '아마도 달이 떠오르는 모든 밤마다… 노인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오.' 천유성의 눈빛은 엄숙했다. '무림은 야망의 대지… 모든 사람은 야망을 가슴에 지닌 채 떠돌다가 풀잎의 이슬처럼 져 버린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강호의 법칙을 증오했었다. 하나, 이제 조금은 알 수 있다. 그 야망의 숭고함을……!' 천유성은 며칠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비밀결사 십화(十花), 살수 조직 부풍살막(扶風殺幕). 암흑에 묻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두 가지 집단의 장래가 천유성의 어깨 위에 짊어지어질 줄이야? "강호(江湖)… 이제 너를 사랑한다! 훗훗… 그러하기에, 너를… 너를 정복해 보겠다. 훗날 후회할지라도……!" 천유성의 미소는 가히 거인의 미소였다. 봉두난발의 소년, 그의 가슴 속에서 뭉클뭉클 일어나는 대야망(大野望)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가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가문이 강요하는 영웅계(英雄界)의 율법이 나의 자유를 구속하고, 천 년 간 허황된 꿈을 쫓아 일생을 허비한 조상네들이 가엾게 여겨졌기에! 가주(家主) 지위에 욕심을 내는 대숙(大叔)이 환멸스럽고, 일생을 영웅도에 바쳐야 하는 나의 운명이 역겹게 여겨졌기에… 나는 돌아가지 않으려 했었다.' 천유성은 흑포를 거머쥔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하나, 이제는 돌아가겠다. 그리고 시작하겠다. 영웅의 길을! 세월이 나를 막고, 천하가 나를 거역하더라도……!" 저벅－ 저벅－! 천유성은 떠오르는 태양 쪽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하나이다. 내가 얻지 못했던 그것을 얻는 것! 그 다음, 돌아가겠다." 한 달 내내 천유성은 전과는 다른 묘한 생활을 하며 보냈다. 그는 무작정 구야노인의 철물점으로 들어갔으며… 구야노인이 욕을 하건, 언성을 높이건, 상관을 하지 않고 철물점에서 장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불을 지피고, 쇠를 녹이고, 주형을 떠서 쇳물을 붓고, 풀무질을 하고, 망치를 휘두르고……. 낭인주의 개, 천유성. 그는 자신의 낭인 생활을 장인(匠人)의 직업으로 마감하려 하는 것일까? 第5章 강자생존(强者生存) 어느 새 첫눈이다. 거위털 베개가 터지며 하늘 가득 거위털이 뒤덮이듯이, 주먹만한 함박눈 송이가 낭인주 가득 떨어져 내렸다. 천지간이 온통 눈이다. 버림받은 땅 낭인주가 모처럼 다른 세계와 일통되고 있었다. 오직 한 곳을 제외하고. 화르르르륵－! 힘차게 살아 오르는 불길들. 석면 그릇 안에서 쇠가 녹아 가고 있으며, 거인 철거(鐵巨)는 제 몸무게보다 두 배는 더 무거운 쇠망치를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땅－! 쇠망치가 떨어져 내리며 벌겋게 달아오른 철물이 점점 하나의 형태로 변해 간다. 철거는 천생 신력을 지닌 역사이다. 그는 몇 번의 담금질 끝에 하나의 낫을 만들었다. 날이 파랗게 선 날, 이 곳에서 만든 낫은 날이 예리하고 오래 가기에 금릉 일대까지 제법 이름이 나 있다. 천유성은 상의를 벗은 채, 하나의 낫을 살펴보고 있는 상태였다. '날(刃)이 신통치 않다.' 천유성은 한 달 넘게 장인의 기예를 터득했다. 물론 구야노인이 그에게 직접 전수를 한 것은 아니었으며, 구야노인이 기른 고아소년 철거가 없는 말주변으로 꽤나 정성스레 전수한 장인술이었다. 날(刃), 모든 병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이다. 거장(巨匠)은 금속을 가리지 않고, 명장(名匠)은 죽어 있는 쇠붙이에 혼을 불어넣는다. '내가 만든 낫의 날은 죽어 있다. 그러나… 저기 있는 전도(箭刀)의 날은 다르다. 살아 있다. 서리(霜)처럼……!' 천유성은 하나의 전도를 바라봤다.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져 표면에 녹이 붉게 선 전도 하나. 그런데 전도의 날은 새파랗게 살아 있었다. '구야노인이 직접 만든 기구는 모조리 살아 있다. 으음, 나는 그 기술을 쉽게 얻으리라 여겼거늘…….' 천유성은 달포째 묘한 패배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 그는 철(鐵)의 예술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기실 천유성은 연검(練劍) 마검(磨劍)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어렸을 때에는 연검과 마검의 상승비기를 연마한 바가 있다. 한데 구야노인의 비전에 비한다면 가히 명월 앞의 반딧불이라 할 수 있었다. 늘 잠만 자는 꼽추의 추물노인, 구야충(歐也忠). 밥 먹기보다 담배를 좋아하는 괴노인, 또한 낭인주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낸 낭인주의 대부(代父). 그의 거친 손이 만들어 낸 강철은 가히 예술이라 할 수 있었다. 천유성은 그에게서 연검술을 터득하는 것을 낭인주에서의 마지막 연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한 달이라는 세월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刃) 하나 제대로 갈지 못하는 처지일 뿐이었다. － 네놈에게는 검(劍)을 만드는 법을 전수할 수 없어! 네놈은 천하를 훔칠 큰 도적이거든! 노부는 네놈의 눈을 안다. 모든 것을 훔칠 큰 도적의 눈! 네놈에게는 호미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지 못하겠다. － 검은 만들지 못해. 잊었어! － 이 곳에서는 농기구만 만든다. 피를 흘리는 검은 만들지 않는다! 구야노인은 가끔가다가 그러한 말을 했다. 과연 그가 거장궁(巨匠宮)이라는 고대방파의 후계자인지는 도저히 추측 못할 일이었다. 첫눈이 내리는 날, 천유성은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갔으며… 어깨 위에 흰 눈이 소담스럽게 쌓일 즈음, 그의 앞으로 한 명이 홀연히 나타났다. 검은 옷에 검은 흑립(黑笠), 그는 꽤 오랫동안 눈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듯 옷자락에 눈송이가 묻어 있었다. "대공(大公), 긴급한 일이 있어 왔소이다!" 초조한 어조로 말하며 장읍을 하는 자. 그는 유성사노(流星四老) 가운데 하나인 신지공(神智公)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유성을 보필하였으며, 천유성에게 웅지(雄志)를 가지라고 눈물로써 권고했던 유성사노 가운데 한 사람. 그는 무림지다성(武林智多星)이라고 불릴 정도로 병법에 출중한 사람이었다. 한데, 그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는가? "대공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아, 그것은 진정… 말씀드리기 괴로운 일입니다." "무엇이오? 신지공답지 않게 괴로워하다니? 훗훗… 나 말고 또 다른 누가 신지공을 괴롭힌단 말이오?" 천유성의 웃음은 해맑았다. "대공자! 속하, 오천 리(里)를 쉬지 않고 왔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신지공은 말을 다하지 못했다. 대체 어떠한 말을 하기 위함일까? 천유성이 한시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러 온 것일까? 아니라면……? "가문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 천유성의 입매가 약간 경직되었다. 언제나 가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신지공이었다. 한데, 그가 오천 리를 쉬지 않고 달려와서 가문에 돌아가서는 아니 된다고 말을 할 줄이야? "삼 년 간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가문의 대권(大權)은 혜성(彗星) 대숙(大叔)에게 완전 장악되었으며, 대공자의 존재는 미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 "그분은 외부에서 괴고수들을 끌어들여 춘추팔가를 힘으로 일통하는 계획을 이룩하시었습니다!" "……!" 눈발이 천유성의 머리카락 위에 흩뿌리어진다. 천유성의 까치집 같은 머리카락은 차츰차츰 흰색으로 물들었다. "말씀드리기 송구스러우나, 대공자께서는 총사(總師) 자격이 없는 무능아로 낙인이 찍히었으며… 혜성 대숙의 주도 아래 대공자를 가주 지위에서 하야(下野)시키자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유성 대공자가 돌아오실 경우, 소리 없이 제거할 만반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신지공은 무릎을 땅에 대고 있었다. 그는 뜨거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속하를 비롯한 유성사노, 그리고 유성세가의 진정한 충신들은 언제까지 대공자의 충신이나… 세월은 대공자를 버렸습니다. 아아, 이제는… 대공자의 뜻대로 완전한 자유인이 되시는 것이 최상의 선택입니다!" 신지공은 손을 불끈 거머쥐었다. 천유성은 허공을 우러르고 있었다. 매우 묘한 눈망울이다. 좌절도 허무도 없는… 오직 순수한 정열만이 스미어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신지공은 조심스럽게 천유성을 올려다봤다. 일순. "아……!" 그는 천유성의 표정을 보고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정녕 묘한 일이었다. 그는 천유성이 지극히 분노하고 좌절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천유성의 입가에는 고뇌의 빛이 아니라, 미소(微笑)가 머금어져 있지 않는가? 너무나도 담담하고 단아한 미소다. 신지공의 예측을 초월하는 거인의 미소가 천유성의 입 매무새에 머금어져 있었다. "나는 수천 가신이 비웃는 가운데 떠나왔소. 가문의 율법이 싫었기에… 모든 것을 떨치고 떠났소!" "……." "훗훗… 본시 나는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소." "……." "하나, 지금은 다르오." "다… 다르다니요?" "나는 돌아가겠소." "흐으윽……!" 신지공의 숨결이 급박해졌다. "돌아가겠소. 원단(元旦)의 그 날, 모든 사람이 나를 가로막더라도 나는 돌아갈 것이오!" "아… 아니 되십니다. 가시면 아니 되십니다!" 신지공은 정색을 했다. 그는 얼굴에서 비지땀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춘추팔가 가운데 저력이 가장 거대한 가문은 저희 유성세가이며, 일급무사가 가장 많은 가문은 패왕세가입니다. 대공자가 가문을 비운 삼 년 사이, 양가는 밀착이 되었습니다. 그 일은… 아무도 돌이키지 못할 일입니다!" 신지공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나 천유성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운명의 반골(叛骨). 그는 묘한 웃음을 풀풀 날리며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세가는 나의 가문이오.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천유성은 팔장을 낀 채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순간, 신지공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가볍게 벌렸다. 퍼붓는 눈발 때문이었을까? 천유성의 뒷모습이 점점 거대하게 느끼어지는 것은……? '그 사이, 기연이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기질이 저렇게 달라지다니……!' 신지공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눈보라가 보다 강하게 다가섰다. 신지공의 모습은 눈의 장막에 완전히 감추어졌다. 멀리서 철거 녀석이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불협화음으로 들려 오고, 드넓은 뜨락은 눈에 하얗게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일월(十一月)의 하늘은 먹구름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네놈에게는 단 한 가지도 가르쳐 줄 수 없어!" 구야충은 곰방대에서 재를 털어 내고 있었다. 가끔 잔기침 소리를 내는 구야충, 그의 열 손가락 끝은 연초로 인해 샛노랗게 물들었다. 천유성은 싱글싱글거리며 구야충노인 면전에 앉아 있었다. "제가 무엇을 가르쳐 달라던가요, 어르신네?" "고이얀 녀석! 네놈의 눈만 봐도 네놈의 검은 뱃속을 알 수 있다. 천하를 훔칠 도둑놈! 네놈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구야충은 곰방대를 입에 물었으며, 분명 부싯돌도 없거늘 연초는 찰나적으로 시뻘겋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쉬지 않고 흰 연기를 피워 냈고, 천유성은 화기(火氣)에 훅훅 달아오르는 철물점의 연철장(練鐵場)에 상의를 벗은 채 풀무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옷을 걸치면 깡말라 보이나, 그의 가슴 근육은 탄력적으로 발달되어 있었다. 또한 철물점에서 쇳물과 불기둥을 다루는 가운데 그의 상반신은 구릿빛으로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낭인주의 개, 그는 낭인주의 저류 지대에서 전수되는 온갖 하오문의 술법을 전수받았다.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은 구야충의 장인도(匠人道)뿐이라 할 수 있었다. 천유성은 모든 사람의 재간을 어떻게든 전수받았다. 눈먼 월하적(月下笛)에게서는 피리 부는 법을 배웠고, 문둥병이 걸린 악사(樂士) 이궁(李弓)에게서는 오음탄주(五音彈奏)의 금법(琴法)을 배웠다. 어디 그뿐이랴? 거지에게 동냥하는 법을 배웠고, 소매치기한테는 투술을 서슴없이 전수받았다. 심지어 기녀(妓女)에게서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묘법까지 전수받기도 했다. 들판을 헤매는 들개 마냥 그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주워 삼켜 버린 것이다. '큰 녀석… 저 녀석은 거인의 피를 지니고 있다.' 구야충 노인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언제나 흐릿하고 불투명하기만 했던 눈빛이 한순간 기름을 끼얹은 장작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죽을 날만 기대하던 구야충, 그 또한 절세내공(絶世內功)을 지니고 있는 상고의 기인이란 말인가? '천문(天文) 창허(蒼虛)의 의혼(義魂)과, 인자제왕(忍者帝王) 월광(月光)의 살인술(殺人術)을 동시에 얻을 정도로 거대한 그릇은 고금에 오직 하나… 저 녀석뿐이다. 저 녀석의 그릇은 너무나도 거대하다. 저 녀석이 태어난 것이야말로 천년무림계의 일대 행운이다.' 구야충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흰 연기를 코로 힘껏 내뿜으며 거칠게 소리쳤다. "이 놈아! 불을 꺼뜨리려고 작정을 했느냐? 불을 다룰 때에는 너의 계집을 애무하듯 다뤄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고약한 놈! 빌붙어 먹으려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야 되지 않느냐?" 구야충은 욕설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운명이라면……!' 오랜만에 눈이 개었다. 하늘 위, 유성의 군대가 서쪽 하늘을 향해 끝없이 진군해 가고 있었다. 함성 대신 흰 검호(劍弧)를 끝없이 끌면서 무수한 별무리는 쉬지 않고 검은 들판을 격사해 지나갔다. 두 눈, 꽤 오랫동안 유성우(流星雨)에 고정이 된 두 눈이 있다. 맑고 순수한 두 눈, 그 눈에는 정녕 거대한 의미가 스미어 있었다. '보름 후면 가야 한다. 내가 태어난 그 곳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했거늘, 내 발로 거기 가게 되다니……!' 바로 천유성, 그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유성이 꼬리를 끌며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 년… 나의 가문은 천 년 간 숨어 힘을 길렀다. 나는 그러한 일이 어리석은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가문의 율법에 저항했다. 나타나지도 않을 사대마계(四大魔界)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인생이 저 별똥별처럼 허망하게 스러져 가는 것을 증오했었다.' 천유성의 눈빛은 매우 아름다웠다. '선대(先代)의 은원에 일생을 바쳐야 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 여겼다. 하나, 이제는 다르다.' 그는 차가운 십이월(十二月)의 공기를 폐부 깊이 빨아들였다. '피어나지 않을 국화를 피우고자 하는 창허상인의 야망과, 베어지지 않을 달 그림자를 베려 하는 월광의 야망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야망의 길 위에서 하나의 별이 되어 떨어져 내리더라도,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대야망(大野望)의 길을……!'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고, 그의 뇌리로는 두 여인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나는 어머니의 얼굴, 또 하나는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죽었다. 그 날 천유성은 의원(醫員)이 되겠다 맹세하며 열두 살이 되는 날까지 천하의도를 모조리 터득했다. 사실, 천유성의 섬세한 기질은 그의 어머니 쪽에서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청랑세가(靑狼世家)의 여인이었다. 대막(大漠)을 달리며 바람을 가르는 인물들… 바람보다 빠르고 폭풍처럼 용맹한 사람들. 그들은 춘추팔가 가운데 극소수이나, 제일 용맹하다. 하나, 나의 어머니는 비단결처럼 섬세했다.' 천유성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아, 그의 어머니의 얼굴과 겹쳐지는 또 하나의 얼굴. 그 얼굴은 바로 석화(石花)라는 소녀의 얼굴이었다. '그 소녀의 눈은 어머니의 눈을 닮았다. 그래서 보자마자 깊이 기억되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잊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 가문의 율법대로라면 그 소녀를 취하지 못한다. 내가 영웅총사(英雄總師)가 되어 가법을 바꿀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춘추팔가가 정한 여인과 결혼해야 한다. 가법에 따른다면 패왕세가(覇王世家)의 여인 하나가 나의 아내가 되리라. 하나, 탐욕스러운 패왕세가 사람들은 내게 여인을 주지 않으리라.' 영웅계(英雄界). 그 이름은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이름이다. 천 년 전, 천로(千路)에서 일어난 악마의 무사들이 있었다. 사대마계(四大魔界). 금강(金剛), 사신(死神), 기환(奇幻), 태양(太陽). 악마왕국을 건립하기 위해 천하혈풍을 일으켰던 무리들. 그들은 보름도 되지 않아 천하도처에 시산혈해를 이룩했다. 바로 그 때, 영웅팔가라 불리우는 신비한 무리들이 나타났고… 무려 십 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거듭 벌어진 가운데 양대세력은 양패구상하고 말았다. 사대마계, 영웅팔가. 지금,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 그들의 후예들은 아직까지 천 년 전의 전설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천 년에 걸쳐서 실로 혹독한 율법 가운데 저력(底力)과 잠력(潛力)을 기르며 살아 왔던 것이다. 특히 영웅팔가의 후신(後身)이라 할 수 있는 춘추팔가의 인물들은 실로 가혹한 율법 가운데 생활해야 했다. 일거수일투족이 율법에 따라 금제되며 거주와 직업, 심지어 생각마저도 가법에 의해 조종이 되어야 했다. － 잠력을 길러야 한다. 춘추팔가의 영광을 위해 모든 방면에서 절대자가 되어야 하며, 바로 그 날, 무너졌던 영웅팔가의 전통은 다시 세워지리라. 천유성은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율법 가운데 생활했다. 오로지 영웅총사가 되어야 하는 지고의 율법. 각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난 자들은 죽는 그 날까지 그것만을 지상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자신의 대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의 자식에게도, 그의 자식이 못다 이루면 자식의 자식에게로……. 천유성은 율법을 거부했으며, 십사 세가 되던 해 반골의 기질을 발휘해 가문을 뛰쳐나오고 만 것이다. 뚝－ 뚝－! 유성은 비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내게는 이제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다시는 나와 같이 불행한 무사가 태어나지 않게끔… 팔가(八家)를 일통하고, 마계를 섬멸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나의 야망이다!" 천유성의 미소는 천진난만한 소년의 미소 같았다. 하나 너무나도 가공할 집념이 뭉치어져 있어, 그 어떠한 힘으로도 그 미소를 풀어 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돌아간다. 야망의 검을 쥐고… 훗훗… 야망의 길 위에서 피를 뿌리고 쓰러지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겠다." 새벽. 언제나 시작이 되는 새벽이다. 하나, 이 새벽은 조금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천유성은 세 시진 가량 월광의 인술(忍術)과 구파일방의 비전비기를 지하 동굴에서 반복 연마하다가 여명의 안개를 가르며 구야충 노인의 철옥으로 접어들었다. 저벅－ 저벅－! 멀리서 봐도 즉시 알 수 있는 거만한 걸음이다. 낭인주의 개 천유성, 그는 특유한 미소를 지으며 철물점 안으로 들어섰다. "철거, 이 놈아! 장차 네놈의 주인이 되실 나으리가 오셨다. 어서 아침을 대령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천유성은 크게 소리치는데, 반응이 전과 달랐다. 철거는 새벽잠이 없는 녀석인지라 늘 일찍 일어나 망치로 쇠를 두드려 일대를 시끄럽게 만든다. 한데, 이 새벽에는 철거의 체취가 전혀 느끼어지지 않았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일대를 흐르는 공기 또한 여느 날의 공기와는 사뭇 달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힘이 천군만마가 달려들 듯, 사방에서 달려들고 있지 않은가? "……!" 천유성의 얼굴이 숯불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철물점 안에는 도합 열한 개의 화로가 놓여 있다. 그 중 불기가 있는 것은 단 하나이고, 나머지 열 개의 화로는 언제나 불이 꺼진 상태였다. 천유성은 열 개의 화로에 불을 지피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바 있었다. 화르르륵－! 지금 새벽의 대기를 태우며 열 개의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철거는 보름 간 오지 않을 것이다. 쿨룩쿨룩……!" 철물점 한가운데, 구야충 노인이 나무 의자를 하나 놓고 앉아 기침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 어르신네?" 천유성이 입을 가볍게 벌리며 다가설 때였다. "고약한 녀석! 네놈의 끈기와 배짱에 졌다. 좋아! 네게 모든 것을 전수하겠다." 구야충의 눈빛이 섬전처럼 타오름과 동시에 벽력과도 같은 일갈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 순간, 열 개의 화로에서 가공스러운 기운이 일어나 천유성의 몸뚱이를 사 장 밖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 아닌가? 쿵－! 천유성은 걷잡지 못할 힘에 휘말려 눈구덩이에 처박혔다. 용광로 속을 헤치고 나온 듯 모발이 그을렸으며, 피부가 불에 덴 듯 쓰리고 아팠다. "봉(鳳), 황(凰), 천(天), 지(地), 풍(風), 운(雲), 용(龍), 호(虎), 조(鳥), 사(蛇)… 거장십로(巨匠十爐)의 기세(氣勢)는 모든 기운을 불태워 버린다. 그대로 들어서다가는 숯이 되고 만다. 마음 속의 심마(心魔)를 불살라 버린 다음, 좌칠우삼(左七右三) 우회이(右回二) 좌회육(左回六)… 그러한 순서로 들어서거라!" 거대한 범종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는 분명 구야충 노인의 목소리인데, 기이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들렸다. 보라! 구야충 노인의 신체가 이전과 다르게 변화하지 않는가? 꼽추 허리가 펴지고, 추악하던 얼굴이 청수한 노인의 얼굴로 변화하며, 깡말랐던 체구가 세 배 정도 부풀어오르지 않는가? 우두둑－ 우둑－! 구야충 노인은 칠 척 거구의 노인으로 변화했다. 만에 하나 변화한 지금의 모습이 그의 진짜 모습이라면, 그는 무려 일백 년 간 변체환용술(變體換容術)로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고 살아온…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역용가(易容家)일 것이다. 또한 그의 체내의 사 갑자 내공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너를 삼십삼대(三十三代) 거장궁주(巨匠宮主)로 삼겠다. 거장궁의 맥(脈)을 단맥케 하려 했으나, 네놈에게 꺾이고 말았다. 좋아, 네놈에게 모든 것을 전하겠다. 네놈의 신체를 천하에서 가장 강한 신체로 만들고, 네놈의 손을 장인의 손으로 만들겠다. 또한 네게 거장궁의 염원을 전하겠다!" 구야충의 목소리로 인해 일대가 뒤흔들렸다. 개벽(開闢). 가히 개벽처럼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여명이었다. 거장궁(巨匠宮). 그 이름은 두 부류의 무림계에 있어 가히 영원한 우상(偶像)이라 할 수 있었다. 첫째 장인도(匠人道). 장인의 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거장궁은 하나의 하늘이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성가는 무림계의 대소림(大少林)에 필적할 만하다 할 수 있다. 세인들이 천한 직업이라 여기는 장인도에는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영웅들이 무수했다. 그들은 인간을 사랑하는 대신 철(鐵)이나 돌(石)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혼을 다해 철을 녹이고 돌을 깎는 가운데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들 장인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우뚝 세워진 금자탑이 바로 거장궁이었다. 철을 돌처럼 다루며 돌을 종이처럼 다루는 장인들의 집단. 강호영웅들에게 신병이기(神兵異器)를 선물하는 것을 사문의 자랑으로 여겼던 인물들이다. 둘째, 거장궁은 의도(醫道)에 있어서도 하늘이었다. 강철에 생명을 불어ㄴ을 줄 알았던 인물들. 그들은 의도(醫道)의 완성자이기도 했다. 기실 철을 다루며 산다는 것은 살을 깎아 먹는 일이나 다름없다. 대대로 많은 장인들이 조사(早死)하였으며, 중년을 넘긴 사람이라 하더라도 폐병을 앓고 죽기 마련이었다. 하나 거장궁의 인물들만은 달랐다. 그들은 체내(體內)에 철기(鐵氣)를 빨아들이는 방법을 완성했으며, 그 덕에 금강불사지체(金剛不死之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사실 거장궁은 문을 닫기 직전, 인간의 몸을 가장 완벽한 병기로 만드는 것을 연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거장궁은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정사양도의 존경을 받았던 문파이다. 그들이 봉파(封派)를 단행하고 무림계에서 사라진 것은 아직도 신비사(神秘事)에 속하고 있다. 거장지존(巨匠至尊). 구야충은 이 갑자 전만 하더라도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거장궁의 현판을 쪼갠 장본인이며, 거장궁의 모든 병장기를 심해에 던져 버린 장본인이었다. 그는 현판을 쪼갠 그 날 이후 검을 만들지 않았다. 다른 기구는 만든다 하더라도 검만은 만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펴 봐라. 네놈이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거장궁의 비밀이다!" 거장지존 구야충은 천천히 하나의 물건을 천유성에게 전했다. 천유성은 거장지존이 말해 준 방법대로 진세를 뚫고 철물점 안으로 접어든 상태였다. 거장지존이 그에게 전하는 물건, 그것은 그가 이 갑자 내내 한순간도 놓지 않았던 하나의 두루마리였다. "그것으로 인해 거장궁은 단맥(斷脈)이 되었다. 네놈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물건은 노부의 뱃속으로 들어간 채 심해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거대한 체격으로 변화한 거장지존, 그는 눈빛과 숨결로 천유성을 압도했다. "이… 이것은……?" 천유성은 조심스레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 안, 천유성이 기대하던 글자는 보이지 않았으며 죽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죽통 안에는 붉은 주단에 덮인 물체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조심해서 꺼내라. 자칫 힘을 가한다면 손가락이 잘려진다. 아주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거장지존의 목소리가 웅장해졌다. 지금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는 천유성이 꺼내는 물건을 차마 볼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놈이 갖고 온 쪽발이 장광씨(長光氏)의 마인(魔刃)과는 품격이 다른 것이다. 장광씨의 마병은 이류(二流)일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진품(眞品)이다!" "……." 천유성은 조심스럽게 붉은 주단을 꺼냈다. 그리고 일순. 팟－! 새파란 무엇인가가 그의 손가락에 가벼운 상처를 만들었다. "아아, 너무나도 예리한 날(刃)이군요?" 천유성은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보다 땅바닥으로 떨어진 작은 날 하나를 보고 경악을 했다. 길이가 세 치, 그것은 너무나도 날카로운 날을 가진 소도(小刀)였다. "번뇌혼(煩惱魂)이다. 일명 백팔번뇌도(百八煩惱刀)이며 거장궁을 문닫게 한 물건이다. 또한 노부는 그것보다 날카로운 날(刃)을 만들기 위해 지난 이 갑자 내내 사색을 하며 지냈던 것이다!" "번… 번뇌혼?" "죽음의 날이다. 그러한 날이 마검(魔劍)에 달린다면, 능히 천하를 지배하게 된다." "으음……!" "모든 호신강기(護身 氣)가 베어지고, 모든 보병(寶兵)이 잘린다. 어장(魚腸), 막사(莫邪), 칠성(七星), 용천(龍天)… 모든 보검은 짚단이 잘리듯이 잘려 버린다!" "대단하군요. 누가 이것을 만들었습니까?" "노부의 내자(內子)!" "예에?" "노부는 장인의 길에 일생을 바쳤다. 노부에게는 여자 대신 검을 비롯한 병장기가 있었을 뿐이다. 노부의 내자는 선사(先師)가 안배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노부를 사랑했고, 또한 증오했다. 그녀는 증오심을 이기지 못하고 거장궁의 심득(心得)을 모조리 빼어 냈으며… 천하의 마병술사(魔兵術士)들을 불러 모아 연구한 결과, 번뇌혼을 만들어 냈다." 실로 놀라운 사연이었다. 거장의 길을 추구한 거장지존 구야충에게 그러한 사연이 있다니……. "그녀는 유가문(瑜伽門)의 후예였다. 사실, 그녀는 거장궁의 비밀을 빼내기 위해 거장궁의 여인이 된 것이었지. 그녀는 거장궁의 힘으로 거장궁을 섬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방법을 써서 거장궁을 조용히 침묵시킨 것이다." "……!" "아마도 너는 모를 것이다. 노부가 바로 그 물건을 보고 거장궁의 현판을 깨는 그 순간부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거장의 미소, 그 미소에는 진정 짙은 인간의 비애가 실리어 있었다. "그녀는 나의 씨를 배고 있었다. 다시 말해, 나의 후예가 천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허물어뜨리고자 하는 마계(魔界) 깊은 곳에… 나의 후예가 머물러 있는 것이다! 유성, 네녀석은 나를 대신해 그 아이를 찾아야 한다. 아마도 유가씨(瑜伽氏)를 쓰고 있겠지. 나의 아내가 아름다웠으니, 후예 또한 아름다우리라. 그 아이를 찾아라. 그것을 약속해야 한다." 구야충의 눈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혼백을 태워 버릴 듯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눈. 범인이 그 눈과 마주쳤더라면 혼백이 불타 버리는 충격을 맛보았을 것이다. 천유성의 눈 또한 태양이었다. 그렇다. 바로 그 눈으로 인해 거장지존 구야충이 이 갑자 만에 처음으로 화로에 불을 지핀 것이다. 오직 한 길을 추구한 장인도의 거목(巨木) 구야충. 지금 그의 눈에서는 화로의 불기둥보다 더 강렬한 야망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너는 무림 최고의 뼈를 갖게 될 것이다. 검을 만드는 비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의 신체가 바로 가장 가공스러운 신병이기(神兵異器)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훗훗… 그것이 바로 거장궁이 이 갑자 동안 깨우친 장인도 최후의 비밀이다! 너는 이제 인간 병기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운명. 천유성에게 또 하나의 운명이 성큼 다가선 것일까? 깊디깊은 지하 밀실이다. 일 장도 넘은 거석(巨石)으로 이루어진 지하 삼십오 장의 밀실 내부. 화르르르륵－! 언제부터인가 다섯 개의 화로(火爐)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천장을 파랗게 물들이며 타오르는 이생신화(離生神火). 보통 화기(火氣)는 강렬해질수록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화하게 되며, 화기가 극에 달할 경우 불은 흰빛으로 화하게 된다. 그리고 뇌성벽력이 일어나는 듯한 굉음 가운데, 창노한 목소리가 흐른다. "거장궁주의 길은 무사도(武士道)보다도 머나먼 장인(匠人)의 길이다." 위풍당당하게 생긴 노인, 그는 바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 구야충(歐也忠)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명예와 황금을 두고 강호를 종횡했던 시절, 그는 장인의 길에 빠져들어 모든 것을 헌신했었다. 능히 강호의 일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는 오로지 장인도(匠人道)의 마지막에 서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장인의 신(神)이다. 그의 두 눈에는 외길 인생을 걸어온 사람 특유의 고집과 집념이 서리어 있었다. "거장궁에는 두 가지의 염원(念願)이 있다. 거장궁주가 된 자는 자신의 대(代)에 그것을 이룩하고자 노력해야만 하며, 자신의 대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차대(次代)에 그것이 이루어지게끔 안배를 해 두어야만 한다!" 구야충은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쪽,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차갑게 반짝거리는 두 눈을 지니고 있는 미청년 하나가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바로 천유성. 지금 그의 무릎 앞에는 일곱 권의 고서(古書)가 뒹굴고 있었다. 일곱 권의 서적은 천하에서 가장 신비롭다는 거장궁의 종사(宗師)들이 일생을 바쳐 이룩한 심득(心得)을 기록하고 있었다. <기문십팔반병기총요(奇門十八班兵器總要)> 기문무림가(奇門武林家)에 속하는 십팔도(十八道)의 무사들이 사용하는 잡다한 병장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외. <외문십팔반병기총요(外門十八班兵器總要)> <사문십팔반병기총요(邪門十八班兵器總要)> <마문십팔반병기총요(魔門十八班兵器總要)> <요문십팔반병기총요(妖門十八班兵器總要)> 나머지 두 권의 고서는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권위를 지니고 있는 천 년의 고서이다. 그 중 한 권은 거장궁주만이 볼 수 있는 서적이며, 또 한 권의 서적은 거장궁을 이룩하게 한 운명의 천서(天書)였다. <거장만병신기보(巨匠萬兵神器譜)> 천하고금의 신병이기(神兵異器)가 모조리 기록되어 있으며, 병장기의 특징과 사용법, 그리고 그것이 나타날 경우 그것을 파해하는 방법까지 세세히 기록이 되어 있다. 어디 그뿐이랴? 거장만병신기보 내에는 천하마도계의 마병(魔兵)과 요병(妖兵), 사도병장기(邪道兵仗器)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으며… 변황해외(邊荒海外)에서 전설로 남아 있는 제반 병장기의 세세한 내막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수록이 되어 있었다. 만든 자와 만든 시기, 정확한 모양 등등……. 그것이야말로 삼십삼대(三十三代)에 걸쳐 지혜의 유산을 전했던 거장궁의 가장 큰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이 강호계로 흘러 나가게 된다면, 아마도 혈우성풍(血雨腥風)이 일어나는 대혈겁이 야기될 것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아무리 세력이 약한 방파라 하더라도 거장만병신기보를 취하는 찰나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으니까! 또 한 권의 서적, 그것은 글이 거의 없는 서적이다. 그 안에는 산천지리(山川地理)가 그려져 있으며, 이해하기 힘든 부호와 표기가 붉은 먹으로 첨부되어 있었다. <천금만상지리지(天金萬象地理地)> 사해(四海)와 오악(五嶽), 팔황(八荒), 구주(九州), 이십팔동천(二十八洞天)이 모두 그려져 있는 지리서이다. 그 가운데에는 거장궁을 창립한 상고이인 천광지존(天鑛至尊)이 이백 년 세월 동안 이십구만 리(里)를 종횡하며 찾아 낸 천하의 광맥(鑛脈)이 붉은 선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만년한철(萬年寒鐵), 설화빈철(雪花賓鐵), 자금사(紫金砂), 천년오동(千年烏銅), 만년빙옥(萬年氷玉), 음양혈옥석(陰陽血玉石), 자정(紫晶)……. 병장기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광물이 묻혀 있는 곳이 모조리 기록된 서적이 바로 천금만상지리지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천금만상지리지에는 천광자가 광맥을 찾다가 알아 내게 된 금맥(金脈)과 은맥(銀脈)도 기록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이 한 권의 고서를 소유하는 자는 바로 천하제일의 부호가 된다는 것이다. "거장궁의 염원은 두 가지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 어떠한 방파에서도 만들어 내지 못했던 무한(無限)의 신력(神力)을 지닌 신검(神劍)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구야충의 눈에서는 정광이 흘러 나왔다. 그는 강호계에서 활약을 한 바가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의 몸 안에 실려 있는 내공의 힘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과거 그의 아내가 그를 암살(暗殺)하려 하였을 때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는, 그의 내외무공이 완벽한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독장(毒掌)에 심장을 격타당했으며, 금석(金石)을 두부처럼 베는 마검에 십팔 검을 난자당했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죽은 것으로 알고 떠나갔으나, 그는 죽지 않았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독장과 마검의 검신은 그의 피부만을 잘랐을 뿐이었다. 구야충의 신체는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특이한 신체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철기(鐵氣)와 화기(火氣)를 접하며 살아왔다. 그로 인해 그의 체내에는 철류(鐵流)가 형성되기에 이르렀으며, 그의 피부는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에 도달하게 되었다. 구야충은 창허상인(蒼虛上人)보다도 두 배 강한 내공을 지니게 되었고, 그의 외공(外功)은 가히 일천 년 무림 사상 가장 뛰어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로 강호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또 하나의 염원이라면 고금에서 가장 강한 근골(筋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가장 강한 근골이오?" 천유성은 오랜만에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빛은 언제 보아도 순수해 보였다. 천하를 삼키고도 남음이 있는 야망(野望)이 담겨져 있는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천진해 보였으며, 또한 맑아 보였다. 하여간 천유성의 두 눈은 무서운(?) 눈이었다. 너무나도 맑아 그 어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거장궁의 마지막 염원은 불사신체(不死身體)를 이룩한다는 것이다." "불… 불사의 신체?" "훗훗… 놀랄 것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스러지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외부의 파괴에 의한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다. 거장궁 사람들은 철물(鐵物)을 다스려서 천 년의 세월이 지난다 하더라도 빛과 날카로움을 잃지 않는 병장기를 만들고자 노력했었고, 그러는 가운데 인간의 신체를 완벽한 신체로 이룩하겠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불사신체의 꿈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구야충은 그렇게 말하며 하나의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손때가 묻은 두루마리, 구야충의 품 밖으로 나가 본 바가 없는 두루마리로 거장궁의 최후(最後) 비전(秘傳)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제 이것은 네 것이다. 너는 거장궁의 마지막 염원을 이룩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네녀석보다 우둔하나 인내심이 있고, 우직한 철거(鐵巨) 녀석은 거장궁의 또 하나의 꿈인 신검(神劍) 완성(完成)의 꿈을 이어 나가게 될 것이다!" 불사신체, 신검 완성. 거장궁은 그 두 가지 염원을 지닌 채 천 년 세월을 이어 왔다. 춘추팔가(春秋八家)와 사대마계(四大魔界)가 천 년 내내 전해 온 무공(武功) 완성(完成), 무림패업(武林 業)의 꿈과는 다른 장인의 꿈이다. 하나 그것이야말로 천하를 정복하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천하는 정복할 수 있어도, 장인의 꿈을 완성하기는 불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무림 일천 년 제일의 비사였다. <오행형의불멸대법(五行形意不滅大法)> 신검 완성의 꿈과 더불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인간(人間) 장인(匠人)의 염원에 의해 이루어진 비급이다. 그 안의 내용은 이미 백파검학(百派劍學)을 외우고 있는 천유성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경금기세(庚金氣勢), 천린만금류(天鱗萬金流). 그것은 오행형의불멸대법의 제일기세이다. 오행 가운데 으뜸인 금(金)의 기운으로서, 도가(道家), 불가(佛家)의 내공법과는 달리 천 년 간 면면히 내려온 혈맥(血脈) 내부의 금류(金流)를 이용해 영성하게 된다. 다시 말해, 거장궁의 장인들은 신검을 만들어 나가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금속(金屬)을 몸 속에 흡입하게 된다. 어떠한 이는 그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중독되어 죽게 되며, 어떠한 이는 내가심법을 얻어 금속의 기세를 내공으로 다스린 바 있다. 하나 오행형의불멸대법은 그 모든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것은 체내로 들어오게 된 금속의 기운을 이용해 근골(筋骨)을 강철(鋼鐵)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것을 십 성 수준으로 익히게 된다면 내공 구결을 외움에 따라 신체를 진짜 금속처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화기세(離火氣勢), 단천열화세(斷天熱火勢). 불의 기운이며 극양(極陽)한 기운이다. 그 기운을 잘못 다스린다면 내화(內火)가 터져서 신체는 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거장궁의 인물들은 자신의 신체를 생체실험(生體實驗) 대상으로 삼아서 이화기세인 단천열화세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비법을 터득한 것이다. 을목기세(乙木氣勢) 을목사령세(乙木死靈勢), 개토기세(開土氣勢) 만겁멸천뇌(萬劫滅天雷), 한수기세(寒水氣勢) 비폭광혈류(飛爆狂血流). 도합 다섯 가지의 기운. 그 기운은 상극작용(相極作用)을 일으키는지라, 한 인간의 신체에 동시에 담길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오행형의불멸대법은 수백 년 전에 이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는 대법을 시전받다가 죽을 수가 있다." 구야충은 천유성을 힐끗 바라봤다. 다분히 충격적인 말임에도 불구하고, 천유성의 입가에 떠오르고 있는 단아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미소는 보다 짙어지고 있었다. "사람은… 꼭 한 번은 죽지요. 언제 죽든 간에……." 누가 그의 배짱을 없애 버리겠는가? 천유성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하자, 구야충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죽음의 확률은 십분지구(十分之九). 즉 구 성(成)이다. 열 번 시전된다면, 아홉 번은 죽기 쉽다. 살아남을 경우는 한 번에 불과하다." "훗훗… 그래도 운이 좋군요?" "운이 좋다니?" "죽을 확률이 백분지일(百分之一)보다 십분지일이니, 그래도 운이 억세게 좋은 것이 아닙니까?" 천유성의 눈은 심해(深海)와 같았다. 그의 눈빛에 담기어 있는 깊은 의미는 무림기인 구야충이라 하더라도 뚫어 보지 못할 정도로 심오했다. "무림(武林)은 이제 적자(適者)의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강자(强者)의 시대입니다. 적자생존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부터는 강자생존(强者生存)의 시대입니다." 심해의 두 눈이 화로처럼 강한 빛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구야충의 두 눈도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그의 입꼬리에는 파르르 경련이 맺혔다. "큰 도적이 될 놈!" "훗훗……!" "네놈에게 노부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다니… 고약하구나. 하여간 좋아, 좋아. 어차피 남에게 빼앗겨야 될 재주라면, 고금에서 가장 큰 도둑에게 빼앗기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겠지!" 구야충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또 하나의 운명은 그렇게 다가왔다. 천유성은 천하에서 가장 오래됐으며, 또한 문하제자 수가 천하에서 가장 작은 거장궁의 제삼십삼대 궁주로 발탁이 된 것이다. 철(鐵)의 방파, 그리고 불(火)의 방파! 거장궁에는 하나의 사훈(師訓)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강철은 두드릴수록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다섯 개의 화로에서 동시에 가공할 기세가 뿜어지기 시작한다. 불기둥이 화룡으로 변하며 꿈틀거릴 때마다 무지막지한 열무(熱霧)가 석실을 태워 버릴 듯 기승을 부린다. 오행의 방위를 점하고 있는 다섯 개의 화로, 그것은 구야충이 거장궁을 봉하면서 갖고 나온 거장궁의 진산보물이다. 오행신화로(五行神火爐). 용암처럼 퍼부어지는 불줄기를 가둘 그릇은 그것밖에 없다. 콰르르르－ 콰르르르－! 천지개벽(天地開闢)!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듯하다. 천유성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강철의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으며, 다섯 개의 화로에서 치솟아 오르는 오행철무(五行鐵霧)가 그의 전신을 휘어 감기 시작했다. 천유성의 몸뚱이는 화사(火蛇) 떼에게 먹히듯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이는 것은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화무. 단천열화세는 천지간에 가장 극양한 기운이다. 그 안에 갇힌다면 꿇는 기름 지옥에 갇힌 듯, 몸뚱이가 한순간 잿더미로 화하는 격심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천유성은 극한대의 인내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는 천하기재였으나, 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만은 참을 수 없었다. "흐으으윽……!" 그는 내장이 불타서 재가 되어 버리는 듯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숨소리를 토했고, 천하제일의 장인 구야충은 그의 천령개(天靈蓋) 백회혈(百會穴)에 장심을 댄 채 자신의 내공을 모조리 일으켜 천유성의 운기행공을 돕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폭음 가운데 천유성의 몸뚱이가 핏빛으로 달아올랐다. 이화기세(離火氣勢)가 강해지며 그의 신체는 하나의 용광로가 된 듯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으며. 휘리리리링－! 이번에는 만겁멸천류(萬劫滅天流)의 기세가 덮쳐 들며 그의 신체가 칠흑같이 새카매지기 시작했다. 운명의 연무(練武). 이러한 상태는 벌써 십 주야(晝夜) 내내 계속이 되었다. － 네녀석을 불멸신체로 만드는 것은 천리(天理)에 역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구나. 어리석은 창허(蒼虛)가 네녀석을 믿고, 자신의 모든 지혜심득(智慧心得)을 네게 전하였듯이……! － 이제 너는 고금 무림 사상 가장 강한 근골(筋骨)을 지니게 되었다. 너의 몸 안에는 다섯 가지의 금속 기운이 스미어 들었다. － 설화빈철(雪花賓鐵)과 자금사(紫金砂), 만년한철(萬年寒鐵), 오동(烏銅), 그리고 빙옥(氷玉)… 그 다섯 가지의 금속 기운을 지금 당장 너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하나 언제고 너의 내공이 인간의 극한(極限)에 도달한다면, 너의 신체는 바로 천하에서 가장 가공스러운 병기로 화하게 될 것이다. 일컬어 불사철혼(不死鐵魂)! 그 경지에 이르는 찰나 거장궁의 염원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경지가 된다면 어떠한 마공이라 하더라도 너를 꺾지 못할 것이다. － 네게 두 사람을 맡긴다. 한 녀석은 철거(鐵巨). 그 녀석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이다. 그 녀석은 무사보다는 장인으로 어울릴 녀석이다. 그 녀석의 운명을 네게 맡긴다.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나, 분명 천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노부의 후예를 네게 부탁한다. 그 아이가 유가씨(瑜伽氏)라면 가슴에 핏빛 나비 무늬를 새기고 있을 것이다! 콰르르릉－ 콰쾅－! 무시무시한 우레 소리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第6章 이제 돌아간다 백옥(白玉)으로 깎아 놓은 것일까? 너무나도 희고 아스라한 보기(寶氣)를 흩뿌리며 누워 있는 하나의 남신(男身). 탄탄한 앞가슴과 군살이 없는 아랫배, 조금 길어 보이는 흰 목덜미에 각(角)이 예리해 보이는 아래턱……. 주먹을 콰악 거머쥔 채 누워 있는 하나의 남신체. 그것은 가히 예술(藝術)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노인의 눈이 오래 전부터 그 아름다운 남신을 보고 있다. 진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눈, 그 눈에서는 희열의 빛이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노인은 너무도 탈진한 듯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노인은 마지막 한 올의 진기까지 써 버린 상태였다. 그에게는 호흡이 차라리 고통이라 할 수 있다. 보라! 그의 입가로 미소가 번지어 가는 것을! "노부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인 듯하군. 천하의 그 어떠한 장인(匠人)이 이리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겠는가? 쿨룩쿨룩……!" 기침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기침 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조각(彫刻)처럼 아름다운 신체. 그것이 문득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는 노인의 기침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정확히 두 시진이 지난 후였다. 꿈틀……! 검은 거웃(毛)이 엷게 뒤덮이어 있던 가슴의 근육이 꿈틀거렸고, 콰악 거머쥐어졌던 열 손가락이 스르르 펴진다. 그리고 꼭 눌리어져 있던 눈까풀이 위로 쳐들리며 너무나도 현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눈빛이다. 강(强)하고, 또한 뜨거운 눈빛. 그 눈빛에는 실로 엄청난 힘이 실리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뜨거운 불기둥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보검(寶劍)의 빛처럼 날카로웠다. 대체 이럴 수가? 그의 오른손이 투명(透明)하지 않는가? 뼈가 들여다보이고 핏줄이 들여다보인다. 게다가 신비로운 빛이 흐르고 있어, 진정 한 덩어리의 수정(水晶)으로 만든 가짜 손이 팔목에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오오, 그 손은 바로 불멸여의수(不滅如意手)… 오행천수(五行天手)!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석을 두부처럼 으깨어 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손이었다. "내가 너무나도 큰 빚을 지었구나." 신비하고 영롱한 눈빛이 흐릿해졌다. 그는 한 노인의 미소지은 채 죽어 있는 얼굴을 보았고, 그 시신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는 바로 천유성, 그는 삼십삼대(三十三代) 거장궁주(巨匠宮主)가 되었으며, 거장궁의 천년염원 가운데 한 가지를 완성시킨 것이다. 그에게 모든 것을 전하고 죽은 거장지존, 그는 모든 것을 다 이룩한 것이 기쁜 듯 만면에 자애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숨결을 거두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그의 유서가 놓여 있었다. <네게 신화(神話)에의 꿈을, 철거에게는 전설에의 염원을 전하며 눈을 감는다. 또한 네게 핏빛 나비의 후예를 맡긴다. 강호에 나간다면 그 아이가 어떠한 악마이든, 노부를 보듯 다정히 대해 주어야 한다. 네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사지로(武士之路)를 패웅(覇雄)의 길로 만들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패웅의 길은 꺾고 부수어 버리는 길이다. 네가 그러한 길로 접어든다면, 너와 거장궁 사이에는 인연이 끊어지게 될 것이다. 무사의 길을 장인(匠人)의 길처럼 걷기 바란다. 절차탁마하고, 끝없이 노력하는 길로 삼기를 바란다. 노부는 악마들의 힘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십대마학(十大魔學)의 가공스러움을 알고 있다. 그것을 격파할 방법을 알아 내기 전에는 정면으로 나서지 말라! 타인(他人)의 선혈(鮮血)을 흘리려 하지 말고, 너의 피를 대지(大地)에 흘려라. 그렇게 한다면 구천(九泉)에서도 즐겁게 웃을 것이다. 네게 부탁한다. 거장궁의 꿈과, 바보 녀석 철거, 그리고 어디엔가 살아 있을 핏빛 나비의 후손을……! 이제 너의 신체, 특히 우수(右手)는 신화적 능력을 지녔으니… 조심하여 쓰기 바란다.> 철거, 천하에서 가장 우직한 녀석이라 하더라도 과언은 아니었다. 언제나 말이 없으며, 기껏 지어 보인다는 것이 빙그레 웃는 정도에 불과한 과묵한 녀석 철거. 한데 그 우둔한 녀석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펄펄 함박눈이 날리고 있는 낭인주의 하늘 아래서 철거는 얼굴을 뒤덮는 눈물도 감추지 못한 채 쇳덩어리를 녹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할 때, 철거는 벌써 한 시진째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백삼인에게 처음으로 말을 던졌다. "가시오! 피차 바쁜 처지가 아니오?" 말이 없는 사람이 어떤 때에는 진정 뼈에 저미는 말을 한다. 철거의 무뚝뚝한 말은 천유성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녀석, 구야노인은 너의 하늘이었지. 아아, 그분이 나를 위해 목숨마저 바칠 줄이야…….' 헌칠한 키의 미소년, 풋풋한 소년의 체취와 더불어 묘한 완숙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청년의 어깨 위로 눈발이 쌓이고 있었다. "나와 함께 가자, 철거!" 천유성은 구야노인의 시신을 묻은 후였다. 그는 철거를 데리고 낭인주를 떠날 예정이었다. 요 며칠 사이 낭인주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역병(疫病)이 낭인주를 덮치는 가운데 낭인주에 기거하던 사람들은 거처를 금릉 시내로 옮기게 되었으며, 그러한 와중에 신년(新年)은 점점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철거는 상의를 걸치지 않았다. 통나무를 방불케 하는 우람한 가슴과 허리, 철거의 가슴 근육은 꿈틀꿈틀거렸으며…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실로 거대한 쇠망치가 내리쳐진다. 따앙－ 땅－! 철거는 이를 악문 채 쇠망치만 쉬지 않고 흔들어 댔다. "나는 마음이 좋은 놈이 아니라오." "으음……!" "사부는 적어도 삼십 년은 더 사실 분이셨소. 한데 나는 그분의 시신을 눈 속에 파묻었소. 우라질!" 따앙－ 땅－ 땅－! 강철 두드리는 소리가 낭인주 하늘에 메아리친다. 잿빛으로 가라앉는 하늘 아래 우직하고 말없는 철거의 눈에서는 점점 더 격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어서 떠나시오." "정녕 나와 더불어 가지 않겠단 말이냐?" "내게는 나의 길이 있소이다. 물론 그대는 이제부터 나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오. 하나 나를 데리고 가려면, 그대 자신을 입증해야만 하오." "입증하라고?" "언제고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사가 되었다고 여긴다면, 주저 없이 돌아오시오. 그 때 나의 충혼(忠魂)을 바치겠소. 하나, 지금은 그대를 주인으로 섬길 수가 없소이다. 그 날이 일 년 후에 오건, 백 년 후에 오건… 이 자리를 지키며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겠소. 그리고… 바로 그 날, 철거란 녀석은 천하제일인의 우비위(右臂衛)가 될 것이오!" 따앙－ 땅－ 땅－! 쇳소리가 보다 강해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 소리를 듣는 찰나, 고막이 터져 버리고 말 것이다. 씨익 웃기를 잘하는 바보 거인 철거, 그의 체내에 가공할 내공이 있다는 것은 천유성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장인(匠人)의 길에 접어든 우직한 녀석, 그의 상체에서는 후끈거리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따앙－ 땅－ 땅－! 쇠 소리가 보다 강해지는 가운데, 철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아오. 눈이 더 많이 퍼붓기 전에 나서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글쎄……!" "……!" 철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구양충의 두 가지 염원 가운데 하나인, 장인도완성(匠人道完成)을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그가 시작한 싸움이야말로 가장 힘들고 머나먼 싸움일지 모른다. 함박눈 송이가 보다 커졌다. 일대는 설국(雪國)으로 화했고, 천유성의 머리카락 위에도 눈이 소담스럽게 쌓이기 시작했다. '좋아. 갈 때는 가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야 한다.' 천유성은 천천히 뒤돌아 섰다. 그는 아주 조용히 신형을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철거는 그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알아들은 듯했다. 그는 상체를 멈칫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선사(先師)는 편히 돌아가셨소이까?" "그런 셈이다. 고통 없이 돌아가셨다." "으음, 그렇다면 아마도… 주인 때문일 것이오. 주인이 그분의 유업을 이으리라 확신하셨기에… 웃으며 돌아가셨을 것이오." "아니다. 네녀석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라질! 어서 가기나 하시오." 철거는 욕설하듯이 말한 다음, 쇠망치를 내리쳤다. 그는 별리지정(別離之情)을 강하게 느끼는 듯했다. 구야충의 시신을 묻은 상황이 아니라면, 아마도 이별주(離別酒)가 나누어졌을 것이다. "조심하시오. 적은 다수(多數)인 데다가 초강자(超强者)들이라고 알고 있소." "녀석, 내가 누구냐? 나는 진짜 개 같은 놈이다. ㅋㅋ……!" 천유성은 메마른 웃음소리를 허공에 띄워 보내며 신형을 틀었다. 그는 휘청휘청거리며 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곧 온다. 나를 믿어도 좋다, 철거!' 그는 차츰차츰 눈보라 속에 파묻혔다. 또한 철거가 일으키는 불협화음 소리는 끝없이 계속되었으며, 점점 더 고조되고 있었다. 퍼부어지는 눈발 가운데였다. 한 줄기 피리 소리는 눈보라치는 소리를 뚫고서 멀리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삘리리리… 삘리리리……! 애잔하고 스산한 가락이다. 한(恨)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가락의 뜻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홍의소녀 하나가 얼어붙은 호숫가에 다소곳이 앉아 옥적(玉笛)을 입술 사이에 빼어 물며 음률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선(線)이 아름다운 여인이다. 풋풋한 내음을 흘리다가 가을 하늘 아래서 상큼하게 익어 버린 한 알의 능금처럼 신선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 그녀는 고즈넉이 앉아 옥적을 불고 있었으며, 그녀의 몸 둘레로는 눈처럼 흰 백포를 걸친 신비 무사들이 윤회풍령진(輪廻風玲陣)을 펼쳐서 그녀의 전후좌우를 삼엄히 포위하고 있었다. 쓰으으… 쓰으으……! 눈보라에 휘감겨 돌아가는 무사들. 숫자가 이백에 달하고 있는데, 어찌나 정교한 은신술을 쓰고 있는지 눈보라와 사람 그림자가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파공성마저 바람 소리에 감추어졌기에, 일대에는 눈보라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방원 일백 장 안에는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다.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대기 속으로 애잔하게 퍼져 나가는 피리 소리뿐이었다. 석화(石花).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얼어붙은 호숫가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이다. 여인이란 계절마다 변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앳되어 보이기만 하던 석화의 모습이 긴 여름이 지나고 성숙의 가을이 지나가는 사이,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졌다. 가슴은 풍만히 부풀어올라 붉은 궁장을 터뜨려 버릴 듯이 도발적으로 솟아올랐으며, 바위에 걸터앉은 자태가 냉요(冷妖)한 가운데 선정적이었다. 미끄럽게 이어지는 허벅지의 선, 끊어져 버릴 듯이 잘룩한 허리의 선, 이 세상의 모든 시름이 가라앉아 있는 듯한 우수의 두 눈……. 삘리리리… 삘리리……! 석화는 월하단장곡(月下斷腸曲)이라는 곡을 불고 있었다. 거의 매일같이 그녀는 호숫가에 나와 피리를 불고 있었다. 가출(家出)을 하려다가 실패를 한 후, 그녀는 상부의 아량에 따라 장원 밖으로의 외출이 약간이나마 허가가 된 상태였다. '아버님… 어이해 오시지 않으십니까?' 석화의 눈빛이 뿌예진다. 마음이 모질어지지 않았다면 벌써 두 뺨을 뜨거운 눈물로 촉촉이 적시고 말았을 것이다. '저는 언제까지나 조롱 안의 새처럼 살아야 합니까? 아아, 강호(江湖)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라는데… 저는 제게 허가가 된 일 마장 방원 안에서 청춘을 허비해야만 하다니! 여인의 숙명이란, 다른 사람이 말하듯이… 영원히 기다리는 숙명입니까?' 삘리리리……! 피리의 음률이 자꾸만 흐트러진다. 하여간 신의 경지에 이른 음률이었다. 일대의 모든 것을 취하게 할 수 있는 월하단장곡. 눈이 춤을 추고, 바람이 흐느끼며 스치어 지나간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호수 표면에서는 쨍쨍!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으며, 일대는 은세계로 화한 지 오래였다. 모든 것이 정물화처럼 정지가 되어 있다. 어떠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대의 질서를 파괴하지 못할 듯했다. 바로 그 때였다. 저벅－ 저벅－! 대체 어디서 들려 오는 눈 밟는 소리일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발자국 소리만이 들려 오고 있다.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으며… 그에 따라 일대의 진세가 빠르게 흐트러졌다. "누군가… 다가선다." "조심해라. 군주(君主)를 노리는 자일지 모른다." 휘리리리링－! 백 장 방원을 감싸던 진세가 일시에 흐트러짐과 동시에, 무사들의 움직임이 보다 영활해졌다. 눈바람을 타고 위로 날아오르는 자, 몸을 비스듬히 날리며 공중제비를 잇따라 도는 자, 다짜고짜 검을 끄집어 내며 휘파람을 불며 떠오르는 자……. 파파팟－ 팟－! 이백여 무사들은 방원 일백 장을 포위하다가는 진세를 확산시켜 방원 이백 장을 드넓게 포위하기 시작했다. "다가서는 자는 누구든 베어야 한다!" "군주의 솜털이라도 다치게 된다면 구족이 멸하게 된다." 일사분란한 움직임이다. 고도의 수련을 거치지 않은 무사들은 흉내내지 못할……. 휘리리리링－! 야무지게 다가서는 바람 소리, 그리고 미친 듯이 퍼부어지는 눈보라. 방금 전에 들렸던 발자국 소리는 환상의 소리였던 듯, 일순 사라져 버렸다. 무사들이 발자국 소리에 놀라 진세를 흩트리는 그 찰나, 석화는 상체를 흔들흔들거리며 다가서는 미남자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조금 짓궂어 보이는 미청년, 그는 꽤나 권태로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먹물빛 검은 눈썹은 차라리 검(劍)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고, 우뚝한 콧날은 태산준령을 연상케 한다. 어찌 보면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듯하고, 어찌 보면 자랄 대로 다 자란 건장한 청년 장부였다. 그에겐 묘한 풋내와 더불어 완숙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는 기묘한 발자국 소리를 일으켜서 무사들의 주의를 흩트린 다음, 설무둔잠술(雪霧遁潛術)을 써서 홀연히 석화 곁으로 다가선 것이다. "……?" 석화의 진홍(眞紅) 장미 입술이 가볍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꿈이리라. 그녀 자신보다도 아름다운 남자가 존재하고 있을 줄이야? 한옥(寒玉)으로 깎아 만든 듯한 남자, 그는 석화의 멍한 눈빛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는 내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지. 나는 유성(流星)이라 하지." "유… 유성?" "훗훗……!" 그는 웃기만 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 가운데 석화는 그가 누구인지 불현듯 느낄 수 있었다. "그… 그 때 그 소년이로군?" "석화, 발을 보여 달라고 한 말을 잊지 않았군?" 미청년은 다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감히 황족(皇族) 앞에 와서 장난을 하다니? 오만하고 귀족적인 석화는 모든 남자의 눈빛과 표정에서 권태감과 혐오를 느끼는 미인이다. 하나, 지금 망막에 들어오는 유성이라는 사내의 눈짓만은 싫지가 않았다. "누… 누구지? 그대는?" 석화의 눈빛이 더욱 몽롱해지는데, 그는 스르르 떠올라 눈보라 가운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유성……!" "유… 유성?" "훗훗……!" 웃음소리가 환상처럼 흐르는 가운데, 그의 모습은 찰나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거의 탄지지간. 그의 모습을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석화 한 사람에 불과했다. '대체 누구이기에……?' 석화는 그가 사라져 간 곳으로 향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짧다면 짧은 생애 가운데, 이 순간 같은 충격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 이제는 내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지. 나는… 유성이야! 괴청년이 남긴 말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뇌리를 지배했다. 석화의 두 뺨에는 그녀도 의미를 모를 홍조가 떠올랐으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옥적을 미끄러뜨리고 말았다. "유… 유성? 아아, 그 때 보고 두 번째 보는 것인데… 그 사이 용(龍)이 되었단 말인가?" 석화는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한 사내가 그녀의 가슴에 이리도 강한 영상을 남기기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바보 같은 사람. 내가 마음에 든 눈치인 듯한데, 어이해 강호무사답게 나를 납치해 가지 못한단 말인가?' 석화의 눈빛은 우울감에 휘어 감겼다. '그대는 알아야 해요. 나는 자유롭게 남자를 선택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그녀는 섬섬옥수를 꼬옥 거머쥐었다. '나는 황족입니다. 그러하기에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은 지금 어디 계신지 모를 아버님이 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기는 싫지만,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석화는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소녀에게는 왜 우는가 물을 필요가 없다. 소녀이기에 우는 것이니까. 정말 큰 눈이었다. 닷새도 넘게 쉬지 않고 퍼부어져서 천하구주(天下九州)를 삽시간에 흰색으로 채색해 버린 그러한 대설(大雪)이었다. 폭설 가운데의 해후. 운명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순간을 기억해야만 한다. 바로 이 순간, 하나의 숙명이 잉태되었으니까. 바로 그 날, 그 곳에서 이십사만 리(里) 떨어진 대빙하(大氷河)의 동토(凍土)에서 또 다른 귀거래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 인물, 깡마른 체격이며 빛 바랜 회삼(恢衫)을 걸치고 있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날개를 접은 독두옹(禿頭翁) 한 마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으며, 유난히도 흰 소수(素手)에 장검(長劍) 한 자루가 매만져지고 있었다. 야릇한 표정, 그것은 미소(微笑)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었다. "이제 잠룡의 계절은 지나갔다." 휘청거리며 쓰러질 듯 걷는 자. 하되 그의 몸은 질풍보다도 빠르게 설원(雪原)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육안으로 보아선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판단되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제는 그 어떠한 힘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 얼어붙은 빙해(氷海)와 같은 두 눈에서 가끔 불기둥이 치솟아 오른다. 강철을 녹일 듯 가공할 기세로 타오르는 두 눈! 악마의 태양을 방불케 하는 눈빛이 삼엄하다. 츠으으－ 츠으으－! 전신 모공에서 빙무를 뿌리고 있는 자. 그는 막대한 내공이 없이는 시전하지 못한다는 어풍비행(御風飛行)을 시전하며 치달려 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나의 야망(野望)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나의 천재성(天才性)을 두려워했던 자들은 이제… 나의 진정한 힘(力)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위대한 태양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풋풋……!" 휘리리리링－! 설풍이 몰아닥친다. 꽤 큰 함박눈 송이가 바람을 타고 춤추듯 날아오른다. 사계 내내 뼛속으로 저미어 드는 극음지기가 퍼지고 있는 곳. 한데 그는 홑옷을 걸친 채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연(鳶)처럼 빠른 속도로 빙하의 지대를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천년대업은 내 손아귀 안에서 이루어지리라. 천하의 모든 무사는 나 태양혼(太陽魂)을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 경배하리라! 프핫핫……!" 휘류류륭－! 한 줄기 폭풍이 치솟아 오르는 것일까? 그의 신형은 일순 바람 기둥으로 화해 북천(北天)을 향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르릉－! 천지개벽의 순간처럼 사위가 강풍설에 휘말려 들기 시작한다. 환상일까? 한 줄기 핏빛 무지개가 떠오르며 빙하 지대의 하늘을 반으로 끊어 나가고 있는 것은? 실로 무시무시한 검세(劍勢)가 허공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태양소수마공(太陽素手魔功). 너무나도 오랫동안 절전이 되었던 전설상의 마공이다. 고오오오－ 고오오－! 핏빛의 무지개가 끝없이 떠오르듯이 시뻘건 빛줄기가 암천고공(暗天高空)을 쩌억 끊어 나가는 가운데, 그의 신형은 일순 자취를 감췄다. 다시 눈바람이 몰아닥쳤고, 빙하 지대에는 그의 발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눈(雪)은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린다. 그러나 이제 그를 기억해야만 한다. 태양혼(太陽魂)이라는 인물을! 第7章 천 년의 침묵은 깨어지고 희마랍야(喜馬拉耶). 하늘 아래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그 위에 오르면 사방 어디를 보더라도 그 곳 이상의 존재를 발견할 수가 없으리라. 너무나도 차가운 한기가 흐르고 있는지라, 생명체라고는 존재하지 못하는 영원한 정적과 침묵의 장소이다. 액비사봉(額非舍峯). 창궁(蒼穹)의 지고함을 부정해 버린 마천거봉(魔天巨峯)이다. 성모봉(聖母峯)이라고 불리기도 한 그 곳은 희마랍야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인간의 침입을 거부하듯 고고한 기세로 서 있는 그 곳은 파밀고원(巴密高原) 일대의 인물들, 그리고 천축(天竺)의 인물들이 성지(聖地)로 여기며 숭배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 곳,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탑이 세워지고 있었다. 삼라만상의 웅장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높아지고 있는 대탑(大塔). 탑은 오 년 전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십팔층(十八層) 높이로 쌓여졌다. 휘리리링－! 차디찬 기세가 액비사봉을 휘어 감는다. 저주처럼 피어 오르는 눈안개는 십팔층 대탑을 신묘하게 휘어 감기 시작했으며… 탑 일대를 지키고 있는 귀영(鬼影)들은 눈보라가 억세어지든, 제거되든, 개여하지 않고 일정한 보폭과 박자를 지닌 보행법으로 십팔층 대탑 주위를 호위하고 있었다. 쓰으으… 쓰으으……! 억겁 내내 쉬지 않고 흘러다니는 악마의 한무(寒霧). 강철이라도 얼어뜨려 버릴 정도로 차가운 기세이다. 그런데 십팔층 대탑 일대의 인물들은 가죽으로 만든 옷자락 하나만 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싸늘하게 죽어 버린 눈빛들이다. 동서남북 어느 쪽을 돌아보는 경우라 하더라도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침묵의 눈빛이었다. "……." "……." 표정이 없고 감정이 없는 인물들이다. 또한 수천에 달하는 무사들은 호흡마저도 일정한 박자를 지니고 있었으며, 맥박 또한 완전한 절제 가운데에서 뛰어지고 있었다. 침묵(沈默)의 공포(恐怖). 차라리 소란이 일어난다면 저주스러운 공포감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천년군림탑(千年君臨塔)> 오오, 바로 천년군림탑이란 말인가? 천년군림탑이 세워지는 곳은 천하에 오직 한 곳이다. 사대마계(四大魔界)의 마도무림(魔道武林)과 팔황(八荒), 구주(九州), 십지(十地), 이십팔천(二十八天)의 사도무림(邪道武林)을 정복한 마의 절대자가 거주하는 곳에만 탑은 세워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탑이 세워진 일대는 악마대본영(惡魔大本營)이라 부르기도 한다. 악마대본영은 사대마계의 정신적 중심지이다. 남북(南北) 구만 리(里)의 지하무림(地下武林)을 피와 죽음으로 정복하고, 이십팔만 리(里) 환우무림계( 宇武林界)에 악마의 금자탑을 이룩한 자만이 그 곳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악마대탑으로도 불리는 천년군림탑, 그것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미 공포라 할 수 있다. 피(血)와 죽음(死)으로 일어난다는 천 년의 저주, 천년군림탑이 대체 어느 틈에 성모봉 정상에 세워졌단 말인가? 휘리리링－! 핏빛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끝없이 깊은 혈해(血海)에서 피어 오르는 핏빛의 연무처럼 뭉클뭉클 피어 오르는 악마혈무. 무시무시한 혈폭마강살류(血暴魔 煞流). 그것은 자연 조화에 의한 바람이 아니라, 마도내공심법(魔道內功心法)에 따른 내가강기(內家 氣)였다. 하나의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으며, 콸콸 쏟아져 내리는 혈액(血液) 같은 핏빛 안개는 의자 둘레를 휘어 감고 있었다. 보라! 언제부터인가 그 일대를 지키고 있는 악마의 첨병(尖兵)들을. 의자 뒤쪽에 병풍(屛風)처럼 도열해 있는 자들과 의자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자들. 어디 그뿐이랴? 얼핏 볼 경우 보이지 않게끔 철두철미하게 은잠해 있는 살수(殺手)와 예사(銳士) 은잠자객(隱潛刺客)들도 있다. 그 숫자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바로 의자 위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며, 그에 대해 진실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다만 그는 악마의 신(神)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일천 년 간 괴리되어 있던 사대마계의 힘을 하나로 뭉친 마도계의 위대한 제황(帝皇)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검해(劍海)와 화해(花海), 사해(死海), 혈해(血海)를 힘으로 복종시키고… 사대마계에서 분파(分派)되어 나간 이천사백(二千四百) 마도군소방파(魔道群小 派)를 차례차례 굴복시켰으며, 변황(邊荒) 각지(各地)에 흩어져 있던 구대마맥(九大魔脈)을 하나로 뭉친 위대한 마황! 악마천사(惡魔天師)! 그는 스스로를 제이세(第二世) 마황야(魔皇爺)라고 칭하고 있었다. 사대마계의 천년대업을 이룩하겠다는 웅지(雄志) 아래 삼십여만 명의 마도세력을 비밀리에 규합했던 인물. 그는 오만 명을 척살(擲殺)하고 이십사만 명을 독(毒)으로 항복시켰으며, 자신의 측근 군사(軍師)와 호법(護法) 이백구십여 명을 한날 한시에 척살해 버리는 무자비함 가운데 자신의 오늘날을 이룩했다. 오 년 전, 그는 성모봉 위에 탑을 이룩하기 시작했으며… 이 날은 바로 그 웅장한 악마대탑이 완성되는 날이었다. 보라! 시뻘건 안개 가운데에서 폭죽처럼 퍼져 나오는 핏빛 안광을. 처음부터 끝까지 힘(力)으로 뭉쳐 있는 무시무시한 안광. 번쩍－! 이글이글 타오른다기보다는 차디차게 가라앉은 눈빛이다. 그러나 그 잔혹하고 포악함은 금강석(金剛石)이라도 흐물흐물 녹여 버릴 듯하다. '천 년의 침묵은 없다. 이제… 악마의 시대가 시작되리라.' 악마천사(惡魔天師), 또한 제이세(第二世) 천년마황야(千年魔皇爺). 그는 뭇 시위무사(侍衛武士)들을 포진(布陣)시킨 채 사대세력의 지배자들의 배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둥－ 둥－ 둥－! 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악마의 북 소리 가운데, 얼음으로 이루어진 빙전(氷殿) 바닥을 가로지르며 다가서는 한 부류의 무사들이 있었다. 숫자는 일백팔(一百八), 남녀노소(男女老少)가 골고루 섞이어 있으며 아름다운 사람과 추악한 사람이 모조리 끼여 있다. 하나 그 모든 사람은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어, 내공이 삼 갑자 이하라면 면사를 뚫어 볼 수 없을 것이다. 일백팔 인의 인물들, 그들은 바로 사대마계에서 분파(分派)되어 나갔던 일백팔 개 마도세력의 표파자( 把子)들이 아닌가? 핏빛 면사로 얼굴을 가린 자들은 악마대본영에 들어설 수 있는 외단(外壇)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낮은 지위를 갖고 있다. 그들은 신표로서 음혈마번(陰血魔幡)을 지니고 있으며, 마계(魔界) 서열(序列) 제오위(第五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그들은 마군(魔君)이라 불리고 있으며, 필요한 경우 악마대본영에서 일천(一千) 무사(武士)를 끌어다가 쓸 수가 있다. 일천 무사라는 숫자는 적다면 적은 숫자이다. 하나 그들이 모두 악마대본영 안에서 이십 년 넘게 잔혹한 악마 수련을 받은 무사라고 한다면, 실로 경천동지할 숫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열 오 위에 불과한 자들이 음혈마번 하나로 일천 명의 일류살수(一流殺手)들을 부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대마계가 지난 일천 년 내내 뼈와 살을 깎아 가며 참아 오는 가운데 길렀던 저력(底力)과 잠력(潛力)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서열(序列) 사 위(位) 이십칠마후(二十七魔后). 모두 여인들이며 녹색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들은 잔혈마번(殘血魔幡)을 신표로 삼으며 어느 때, 어느 시기이든 잔혈마번 하나로 삼천 무사(武士)를 동원할 수가 있다. 이십칠마후는 대부분이 변황의 여인들로서 마황야는 그들과 동시에 정략 결혼함으로써 악마대본영의 기세를 일거에 이십팔만 리(里) 가득히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서열 삼 위(位) 이십팔제독마존(二十八提督魔尊). 자색(紫色) 면사(面紗)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십팔 인의 거목(巨木)들이다.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일방(一方)의 패주(覇主)로 군림하고 있던 자들로, 마황야의 암중일통(暗中一統) 가운데 악마대본영에 흡수가 된 자들이다. 각기 휘하에 수만 명의 무사를 거느리고 있는 자들로, 그들의 정체가 어떠한 것인지는 마황야만이 알고 있다. 그 중에는 백도인(白道人)도 있고, 무림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상가(商家)와 관부(官府)의 인물들도 있다. 슷－ 슷－ 슷－! 삼엄한 기세를 일으키며 다가서는 이십팔 제독마존들은 지난 이십 년 내내 마황야에게 격파를 당해 마황야를 평생 지존으로 섬기기로 복종을 한 바 있다. 그들은 천하도처에 흩어져 세력을 키우고 있다. 만에 하나, 세력의 유지가 힘들 경우가 생기거나 타파를 쳐야 할 일이 생길 경우 신표로 삼고 있는 폭혈마번(暴血魔幡)을 이용해서 사흘 안에 오천 무사를 충원받게 된다. 서열 제이위(第二位) 구대승상(九大丞相). 신표는 철혈마번(鐵血魔幡). 구대승상은 악마대본영 내부에 상주를 하고 있으며, 필요한 경우 일만 무사(武士)를 자유롭게 부릴 수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 이 갑자(甲子) 이상 산 노마두들로서 오랫동안 칩거를 한 바가 있다. 그들이 강호계로 되돌아 나온 이유는, 바로 마황야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마황야는 그들의 무공보다 그들의 경륜(徑輪)과 지혜를 이용하고자 했고, 구대승상은 천년대업을 이룩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었기에 마황야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춘추(春秋)의 팔가(八家)는 다시 깨어날 것이오. 아니, 그들은 지난 천 년 내내 깨어나 있었소. 그러하기에 우리 사대마계는 지난 천 년 간 대륙무림(大陸武林)을 정복할 기회를 찾지 못했던 것이오. 유성(流星)의 천가(天家), 야인(野人)의 중리씨(中里氏), 신화(神火)의 개산씨(芥山氏), 청랑(靑狼)의 백가(白家), 화훼(花卉)의 천승가(千乘家), 소수(素手)의 을불씨(乙佛氏), 패왕(覇王)의 설씨(雪氏), 풍운(風雲)의 주씨(朱氏). 춘추의 팔대세가는 개성이 다른지라, 뭉치기 힘들면서도 위급한 경우라면 언제든 하나로 뭉치고 있소! 그들은 소수(小數)이되 그들의 신공절학(神功絶學)은 사대마계의 팔만사천(八萬四千) 마학(魔學)을 능가하고 있소! 하나 결국은 중과부적(衆寡不敵), 사대마계가 완전한 하나로 뭉쳐질 경우 그들은 우리들을 막을 수 없소. 또한 춘추팔가는 천 년 이래 가장 약세(弱勢)이며, 그들 내부의 혼돈으로 인해 총사(總師)를 선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오. 우리들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악마도(惡魔道)의 후예들은 다시 일천 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오! 마황야는 폭풍 같은 열변을 발휘해서 구대승상을 자신의 군사부(軍師府) 군사들로 삼았다. 기실 구대승상이 마황야를 지지해 주지 못했더라면, 마황야는 사대마계를 하나로 뭉치지 못했을 것이다. 구대승상, 그들의 머리 속에는 지난 일천 년 간의 마도무림사(魔道武林史)가 모조리 기록이 되어 있다. 마황야는 그들의 지식과 지혜에 힘을 입어 실전이 된 마공을 무수히 찾아 냈으며, 마병이기(魔兵異器)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네 명의 전사(戰士)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과, 피와, 공포의 승부사(勝負士)들. 항차 악마대본영의 신봉으로 천하를 정복하는 대선봉이 될 인물들, 그들은 사대왕야(四大王爺)라 불리고 있었다. 서열 제일위(第一位) 사대왕야(四大王爺)! 금색 면사로 얼굴을 가렸으며 색혈마번(索血魔幡)을 왼손에 쥐고 있다. 필요한 경우 십만 무사(武士)를 불러 낼 수 있으며, 구대승상 이하 모든 사람에게 죽음을 명할 수가 있다. 마황야라 하더라도 찬탄해 마지않는 천재성(天才性)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며, 가장 나이가 많은 자라 하더라도 이제 이십오 세가 넘지 않는다. 그들은 형식상 사형사매(師兄師妹)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경쟁을 하고 있는지라, 언제나 긴장을 풀어 놓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백 일마다 한 번씩 승상군사부(丞相軍師府)에서 자신의 무공을 입증받아야만 하고, 그 자리에서 실수를 한다면 치욕의 유배(流配) 생활을 해야만 한다. 그러한 교육으로 인해 사대왕야는 철저한 승부사로 자라났으며, 피와 죽음, 그리고 평범한 인간이라면 끔찍하다 여길 모든 잔혹 행위에 능통한 자들로 자라났다. 제일왕야(第一王爺) 폭풍혼(暴風魂). 귀족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는 자이다. 나이는 이십오 세, 얼핏 보면 공자대부(公子大夫)를 연상케 할 정도로 헌헌(軒軒)하고 늠름한 기표를 갖고 있다. 잘 웃을 줄 알며,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는다 하더라도 절대 내색을 하지 않는다. 백팔마관(百八魔關)을 가볍게 통과했으며, 지난 오 년 간 마황야 휘하에서 악마대본영의 축조를 도와 자신의 지혜와 지휘력을 입증했다. 만에 하나, 그의 사제들 가운데서 그를 능가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십 년 안에 제삼세(第三世) 마황야로 올라설 것이다. 제이왕야 사몽혼(死夢魂). 석고로 빚은 듯이 차갑고 단정하게 생긴 인물이다. 몸이 깡말랐으며,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니고 있다. 마황야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히 강한지라, 사몽혼만은 마황야 앞에서 착검(着劍)을 허락받았다. 그는 부상(扶桑) 출신이며, 중원(中原)을 피에 둥둥 띄운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중원에 대한 복수심을 지니고 있는 자였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강인한 자, 그는 악마대본영 직속 살수전(殺手殿)인 사형마루(死刑魔樓)를 이끌고 있다. － 그가 누구이든 상관이 없다. 그의 이름이건, 그의 거주지이건… 혹은 그의 용모상 특징만 밝혀진다면 사몽혼은 죽일 수 있다. 사몽혼, 그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살인자(殺人者)이다. 오백여 명의 살업을 단 한 번도 실패로 돌리지 않은 자이며, 모든 종류의 암살법을 알고 있다. 걸어다니는 살인 기계로 불리는 자, 그는 마황야가 지니고 있는 비밀 병기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악마대본영의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마황야의 일에 방해가 되는 인물을 도맡아 척살한다. 하나 평상시의 그는 지극히 수줍고 온순한 자로서 꽃(花)과 새(鳥)와 난(蘭)과 차(茶)를 사랑하고 있다. 살인마저 미학(美學)으로 여기는 자, 그는 회색 눈빛을 흘리며 느릿느릿 걸어 들어왔다. 걸을 때 소리를 내지 않으며 숨을 들이마시고 토하는 데에도 공기를 흩트리지 않는다. 그의 옆에는 제삼왕야가 따라 걷고 있었다. 한 마리 핏빛 나비일까?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기는 하나, 정녕 아름답고 풍만한 체형이 궁장 밖으로 선정적으로 노출이 된다. 혈접혼(血蝶魂). 남자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여인이다. 가히 우물(尤物)이며 애물(愛物). 그녀의 흰 손만 본다 하더라도 뇌쇄되어 버릴 정도로 혈접혼은 극치의 선정미를 지니고 있었다.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몸짓, 어딘지 모르게 고독한 눈빛, 그것이 묘한 관능미(官能美)와 합쳐져서 그녀의 미를 절대의 미로 만들고 있었다. 마도제일미인으로 군림하는 혈접혼. 그녀는 전 마도인의 꿈이며 환상이다. 하나 누구도 그녀를 안을 수 없다.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자, 그 날로 폭풍혼과 사몽혼에게 주살당할 것이다. 또한 그녀는 강철의 나비이고, 강철의 꽃인지라, 이제껏 그 어떠한 사내도 그녀의 속살을 볼 수 없었다. 네 번째 인물, 그는 가장 젊고 가장 고독해 보였다. 의미 없는 표정에 의미가 없는 눈빛, 기라성 같은 사형사저에게 짓눌려 기세가 죽어 버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자. "……." 그는 두드러지는 바가 전혀 없는 가운데, 천천히 내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태양혼(太陽魂)이라는 자. 적어도 지금 그가 사대왕야 가운데 세 번째라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했다. 단 한 사람, 최상석에 머물러 있는 마황야를 제외하고는. '폭풍… 야망이 크고 웅장한 놈이다. 그러나 신적(神的)인 권위를 갖고 있지 못하다. 사몽은 강하고 빠르나, 미(美)에 심취하여 거친 마도인들을 다루기 힘들다. 그리고 혈접… 남자보다 월등하나,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에 종사(宗師)가 되는 데 장애가 있다.' 마황야의 시선은 천천히 한쪽으로 돌리어졌다. 느릿느릿 다가서고 있는 한 청년, 마황야는 그를 쓸어 보며 실로 오랜만에 눈을 껌벅거렸다. '내가 도박사라면 저 놈에게 걸어 보겠다. 놈은 한 번 부러졌기에 더 강해졌다. 하나, 젊고 너무나도 강하다는 것이 결점이다. 전 마도를 이끌기 위해서는, 강자(强者)의 면모와 패자(覇者)의 면모 이외에도 가공할 포용력이 필요하다. 아마도 사대왕야는 그것을 알지 못하리라. 강하기는 하나, 젊으니까.' 마황야, 그는 여전히 핏빛 안개에 몸을 휘감고 있었다. 둥－ 둥－ 둥－ 둥－! 북 소리는 점점 고조가 된다. 악마대본영의 회동, 이것은 오 년 만에 이루어진 악마영웅회(惡魔英雄會)라고 할 수가 있었다. 오 년 전, 악마천사는 휘하세력을 모조리 모아서 회합을 가졌고… 그 날 이후, 천하도처에서 보이지 않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싸움은 주로 사마외도(邪魔外道)를 걷는 무림도상 인물들 사이의 세력 쟁탈전이었다. 악마천사의 수하들은 온갖 신분으로 위장하여 마도세력으로 파고들었으며, 오 년에 걸친 혈전(血戰)과 권모술수 가운데 정녕 가공스러운 신화(神話)를 이룩할 수 있었다. 마도세력 가운데 구 성을 통합하는 무림 사상 유례가 없는 기적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난 오 년 사이, 실로 가공스러운 악마의 맹(盟)이 구주팔황에 암중 형성되기 이르렀던 것이다. 둥－ 둥－ 둥－! 울려 퍼지는 북 소리 가운데, 악마천사의 두 눈에서는 대전에 모인 천신만마(千神萬魔)의 심령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는 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정녕 마황야라 불리어 부끄럽지 않은 극한의 내공을 지닌 자. 그의 눈빛이 핏빛 안개를 뚫고 폭사되어 나가는 찰나, 일백팔 명의 마도 거목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또한 그들의 입술이 동시에 벌어지며 마후(魔吼)가 토해지기 시작했다. "천년군림(千年君臨)……!" "영세무적(永世無敵)… 사대마계(四大魔界)……!" "우우……!" 일백팔마의 환호 소리 가운데 대전 천장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름드리 기둥이 뿌리째 뒤흔들렸으며, 단단하게 얼어붙은 바닥이 쩌억 금이 가기 시작했다.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일백팔마를 제외한 무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어떠한 자는 오장육부가 음파(音波)로 인해 뒤흔들리며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울컥 토했고, 어떠한 자는 휘청이다 못해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우우……!" "드디어 웅비(雄飛)할 시기가 도래했다. 이제… 우리들의 준동은 아무도 막지 못하리라!" 환호하는 무리들, 그 중에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려 대는 자들도 있다. 함성은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악마대본영은 지진 한복판에 들어간 듯 오랫동안 뒤흔들렸다. 손(手) 하나. 핏빛 안개 가운데에서 튀어나온 하나의 손이 아니었다면 소란은 꽤 오랫동안 일어났을 것이다. 무적천군번(無敵天軍幡). 매우 아름답게 생긴 삼각소기(三角小旗)이다. 금잠사(金蠶絲)로 짠 듯 금빛의 천 표면에 상서로운 기운이 흐르고 있으며, 금색 소기의 대는 투명(透明)한 혈수정(血水晶)으로 이루어져서 그것을 쥐고 있는 자의 손바닥이 아련히 비쳐 보였다. 문사(文士)의 손이다. 무사(武士)의 손이라면 그렇듯 희고 매끄럽지 않을 것이다. 무적천군번을 꺼내 든 손과 더불어 악마대본영 내부는 무덤 속 같은 정적에 사로잡혔다. 무적천군번은 바로 마계천자(魔界天子)의 신표이다. 그것을 쥐고 있는 자는 사대마계의 목을 쥐고 있는 자라 할 수 있으며, 그 작은 영기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바치리라 맹세를 한 무사들의 숫자는 삼십여만에 달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무한한 황금(黃金)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있으며, 천하각지에 흩어진 사대마계의 비밀 분타를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 무적천군번을 쥐고 있는 자는 바로 마계천자이며, 그는 악마도의 인물들에게 있어서는 신(神)이라 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깊은 침묵이다. "……." "……." 수많은 무사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보라! 모든 인물들이 오체투지(五體投地)하고 있지 않는가? 무적천군번을 보는 자는 눈을 빼야 하고, 무적천군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는 혀를 잘라야 한다. 그것은 악마율법(惡魔律法)의 제일조이고, 사대마계의 형제들이 지난 천 년 간 지켜 왔던 죽음의 율법이었다. 숨을 죽이고 있는 자들, 그들 가운데 반수 이상은 언제고 무적천군번을 손에 쥐리라는 맹세를 한 바 있다. 사대마계는 강자(强者)가 우위에 서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마계천자의 대관식은 전통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무위를 입증함으로 이루어진다. 침묵 가운데 비등해 오르는 미묘한 흥분. 지난 일천 년 간 너무나도 많은 마도계의 영웅들이 무적천군번의 주인이 되기 위해 분투하다가 쓰러졌다. 풀잎 끝에 매달렸다가는 태양과 더불어 스러지는 이슬처럼, 너무나도 많은 마도인들이 무적천군번의 환상을 쫓다가 스러졌다. 만에 하나 가장 강한 자가 사대마계의 지존이 된다는 율법이 없었더라면, 사대마계는 천 년 간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북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완전한 침묵, 그 공포의 침묵은 신비한 목소리로 인해 깨어지기 시작했다. 핏빛 안개 속에서 나직하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이와 성별을 짐작하지 못할 목소리, 은은한 듯하면서도 대전 내부에 있는 모든 사람의 귀에 똑같은 음량(音量)으로 전달이 되는 악마혈후(惡魔血吼)의 목소리. 그 소리는 바로 마황야 악마천사의 목소리였다. "지난 오 년 간… 가족(家族)들은 무수한 피를 뿌렸다." 가족, 사대마계의 인물들은 자신들을 가족이라고 칭한다. 기실 그들은 기회가 있으면 서로 죽이고 모략을 하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들이며, 그러한 포악함을 언어의 유희로 뒤덮어 버리기 위해 가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백도가 잠들어 있는 사이, 우리들의 형제 삼만이천(三萬二千)이 희생되었다." "……." "……." 모두 말이 없다. 마황야가 말을 하고 있는 가운데 말을 하는 자는 마황야의 친위군(親衛軍)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것 또한 천 년 간 깨어지지 않았던 악마의 율법 가운데 하나였다. "어떠한 이는 암살되었고, 어떠한 형제는 협공당해 죽었다. 어떠한 형제는 피를 쏟으며 죽어 갔다. 그러나 그 어떠한 형제도 사대마계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았다!" "……." "……." "오늘 우리들의 영광은 그들의 일치단결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후 그 어떠한 자이건 내분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우리들을 위해 죽어 간 형제들의 이름 아래 죽어 가야만 할 것이다!" 차디찬 목소리 가운데 무적천군번이 경미하게 흔들거렸다. 한 치 가량 움직였을까? 콰쾅－! 일순 벼락치듯 뇌성이 일면서 대전 한가운데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무적천군번이 슬쩍 움직임과 동시에 막대한 잠경이 흘러 나와 대전 바닥을 삼 장 깊이로 파 버린 것이다. 숨을 죽이고 머물러 있는 자들. 대부분의 인물은 마황야가 보인 무공의 기세에 압도당해 얼굴을 뜨거운 땀으로 축축이 적시기 시작했다. 찰나적으로 벌어진 일을 정확히 알아본 사람은 다섯도 되지 않는다. 마황야가 시전한 초식이 혈세잠마류(血洗潛魔流)이며, 그것이 바로 팔만사천마보(八萬四千魔譜)의 무공 서열 제육위 무공이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은 오직 하나에 불과했다. 바로 태양혼, 그는 사대왕야 가운데 막내이다. 언제나 말이 없으며, 고독한 가운데 머물며 적도 친구도 만들지 않았던 자. 그는 사대왕야 가운데 가장 뒤떨어지는 자로 알려졌으며, 그러한 이유로 인해 꽤 오랫동안 유배당한 바 있다. 느낌이 없는 얼굴을 가진 자, 그는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회색빛으로 칠해진 인간 같았다. 악마영웅회! 누구든 자신이 있는 자라면 마황야에게 도전할 수 있다. 마황야는 율법에 따라 도전을 받아야 하며, 도전에서 꺾인다면 그는 자결하고… 그를 꺾은 자가 새로운 마황야가 된다. 악마영웅회는 무려 일천 년 만에 재현된 것이었다. 마황야는 차가운 어조로 천년사(千年史)를 이야기한 다음, 또다시 손을 쳐들었다. 하나의 잔(盞), 어느 틈엔가 그는 옥배 하나를 쳐들고 있었다. 잔 안에는 핏빛 술이 가득히 담기어 있다. "영광을 위해……!" 잔은 천천히 쳐들려진다. 한 치 한 치 떠오르는 손, 마황야의 자세는 한순간 흐트러졌고. '허점(虛點)이다.' '천재일우의 암살 기회이다.' 그의 건배(乾杯)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의 눈빛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폭풍혼(暴風魂), 혈접혼(血蝶魂), 천마대승상(天魔大丞相), 혈천마후(血天魔后)……. 마황야에 버금가는 마공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건배 광경을 보며 한순간 눈빛을 흩트렸다. 살기(殺氣)! 절세고수라 하더라도 느끼지 못할 미세한 살기가 흘렀다. 그러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감히 마황야를 암습하는 자는 나타나지 못했고, 마황야는 느긋한 자세로 건배를 마쳤다.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허점을 드러내는 자. 그는 뜻은 있으되, 손은 쓰지 못하는 묘한 비겁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악마천사 마황야의 지위는 암살 위협이 많은 천하의 삼대 지위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의 지위는 천자(天子), 또 하나의 지위는 영웅총사(英雄總師), 그리고 마지막의 지위가 바로 마황야라는 지위였다. "강한 자라면… 누구든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마황야는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고독한 음색(音色)이다. 마의 천자답지 않게 짙은 허무감이 배어 있는 음성이다. 마황야는 무수한 도전자를 베어 버리며 오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마수 아래 고혼이 된 사람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가 앉은 자리는 피의 자리이다. 피를 흘려야만 지킬 수 있는 자리이고, 피를 흘리고서도 앉고 싶은 자리인 것이다. 한데 그는 정작 천하마도의 절대자가 되자, 묘한 고독감에 휘어 감겼단 말인가? "그리고… 앉은 자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훗훗……!" 악마천사의 맺음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소리는 그의 입 안을 뱅뱅 돌았을 뿐, 입술 밖으로 토해진 말은 아니었기에. 하여간 사대마계의 위시한 전 마도세력은 파란의 일천 년 가운데 가장 거대한 기세로 뭉친 셈이었다. 천하각지에 퍼진 순찰(巡察)들이 무림 각대세력의 동향을 수시로 전하며, 악마영웅회가 벌어지는 이 순간에도 사대마계의 저력은 하루가 다르게 증가되어 가고 있다. 깨어난 천 년의 폭풍! 이제 이들의 발호를 막을 세력은 단 하나도 없으리라. 군마평의회(群魔評議會). 마황야는 참석하지 않는 자리이다. 회의를 주최하는 사람은 사대왕야 가운데 우두머리라 할 수가 있는 폭퐁혼과, 구대승상 가운데 우두머리인 천마대승상이었다. 사대왕야와 구대승상이 참석하며 순찰당(巡察堂)을 이끌고 있는 자가 배석하여 천하 무림의 대소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사대마계의 하부세력의 이동이 결정나며, 악마천하에 방해가 되는 자들의 죽음이 결정이 된다. 어디 그뿐이랴? 내부의 인물 가운데 의혹스러운 자들에 대한 척살령이 내려지는 자리도 바로 군마평의회였다. 스물스물 피어 오르는 마향. 순찰당주는 휘장 뒤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두터운 안대에 가려졌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란 듯 그의 마혈(魔穴)이 침에 의해 제혈(制穴)당한 상태이다. 다시 말해, 그는 군마평의회에 나와 이야기를 할 수는 있으되 군마평의회에 어떠한 이들이 모인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셈이었다. "당금 무림계에 있어 폭풍의 눈이 될 수 있는 자라면, 도합 여섯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찰당주가 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난 오 년의 혈투 가운데 모아진 무림 최후의 비밀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사실은 바로 장래의 무림계를 이끌어 나갈 가장 중요한 기록들이었다. 한 가지 한 가지 사실을 알아 내기 위해 무수한 마도순찰들이 죽어 갔으며, 문일지백의 천재들이 모여 앉아 철야를 하는 가운데 천하에서 가장 가공스러운 내막이 분석되었다. 결과 사대마계는 천하대세를 그 어떠한 세력보다도 자세히 알게 되었으며, 그 내막이 군마평의회에서 이야기되는 것이다. "첫째 인물은 만검황(萬劍皇) 백풍(白豊)! 이 갑자 이전의 무림맹주(武林盟主)로서, 그의 출신은 춘추팔가 가운데 하나인 청랑세가(靑狼世家)로 밝혀진 바 있소이다." "……." "그는 구파일방을 배후에서 후견(後見)했던 인물로서, 무림을 떠난 지 어언 일백 년째입니다. 그는 죽었다고 알려졌었는데, 얼마 전 그의 모습을 본 일들이 있었습니다!" 백풍(白豊), 체격이 크고 술을 잘 마시는 노기인이다. 푸른 이리를 타고 다니며, 어떠한 적을 상대해서도 정확히 이 식(式)을 쓴다. 상대가 누구이건 예의상 무조건 일 식을 상대해 주며, 상대가 어떠한 자이든 가리지 않고 한 번의 출수로 승리를 거뒀던 인물이다. 그는 영웅도(英雄道)의 우상이었는데, 홀연히 사라진 바가 있다. "그의 종적을 계속 추적하고 있는 상태이며, 그가 풍진오성자(風塵五聖者)와 회동하는지 철저히 조사하는 상태이외다." 풍진오성자, 그들은 창허상인보다도 이배분(二拜分)이 높은 절대기인(絶代奇人)들이다. 철심화공(鐵心畵工) 개산두(芥山斗), 야혼십일절(夜魂十一絶) 중리간(中里干), 패왕지존(覇王至尊) 구장풍(句章風), 농모(農母) 천승화(千乘花), 생사신의(生死神醫) 을불화(乙佛華). 명리에 초탈했던 강호의 은자(隱者)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던 절기는 구파일방의 비전절학을 압도하는 바 있다. 풍진운오성자는 만검황 백풍과 동배의 인물들로서 비슷한 시기에 강호에서 은거한 바 있다. 한데 그들이 동시에 나타났단 말인가? 만에 하나, 그들이 세력을 키우거나 후계자를 정해 무공을 전수한다면 항차 대폭풍이 일어나게 되리라. "두 번째 중요 인물은 풍운친왕(風雲親王)이라는 인물입니다. 그 또한 춘추팔가의 인물로 사려가 되는 바, 황제(皇帝)의 신임을 크게 얻고 있는 자이며 지난 십오 년 간 종적이 묘연한 자입니다." "……." "……." "그의 이름은 주의(朱義). 그는 제거되거나, 끌어들여야 할 자로 분석되었습니다!" 실로 미묘한 회합이었다. 끝없이 말을 이어 나가는 한 명의 백발노인과, 그것을 묵묵히 듣는 네 명의 젊은이들과 아홉 명의 노마두들. 어찌 생각하면 서원에서 벌어지는 시담회(詩談會) 자리를 연상케 한다. 하나 이 자리는 바로 중원천하의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자리라 할 수 있었다. "세 번째의 인물은 만박서생(萬博書生) 하후초(夏侯楚)입니다. 그는 백도의 떠오르는 별로 여겨지는 자로서, 십화(十花)의 국화혈(菊花血)로 불리며 숭산(嵩山) 근처에 기거하며 소림(少林)과 무당(武當)을 위시한 백도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십화… 끈질긴 자들!" "ㅋㅋ… 벌레들! 그러하기에 바로 코앞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십화가 다시 깨어나다니? 이것은 막내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사대왕야 가운데 셋이 눈길을 돌렸다. 그들의 눈빛은 한 사람의 얼굴에 모아졌다. "……." 말없이 팔짱끼고 앉아 있는 청년, 헌칠한 키이며 깡마른 체격이다. 그는 느낌이 깃들여 있지 않은 무표정 가운데, 뭇 사람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넘기고 있었다. 바로 태양혼,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하더라도 표정을 바꾸지 않을 자이다. '잡초들… 질기군!' 그는 속으로 내뱉을 뿐, 얼굴에는 표정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순찰당주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천하대세를 좌우할 네 번째의 인물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름(姓名), 고검랑(孤劍郞). 별호(別號), 신풍인자(神風忍者). 지위(地位), 월하살막(月下殺幕) 수석대인자(首席大忍者) 겸 풍방주(風 主). 출신(出身), 동영(東瀛) 강호(江戶). 나이, 그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나 외형상 서른 정도로 보임. 특기, 제반 종류의 살인술(殺人術)에 능통. 청부를 받는다면 그 어떠한 자라도 쓰러뜨릴 자임. 만에 하나, 외부세력이 그를 끌어들인다면… 그가 이끌고 있는 이백여 초절정(超絶頂) 자객(刺客)들이 사대마계의 요인들을 암살할지 모름! 한시빨리 죽이거나, 한시빨리 끌어들여야 할 자임. 신풍인자 고검랑, 그는 암흑무림계에 홀연히 나타난 풍방(風 )의 우두머리였다. 풍방. 일정한 거처를 갖고 있지 않는 집단이며, 황금만 받는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는 살수들의 집단이다. 사대마계의 무사들은 지난 오 년 간 풍방을 와해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다섯 번째로 지목된 인물은 매우 특이한 내력을 지니고 있는 자였다. 중원대상가(中原大商家)의 주인이 되는 자. 그는 절세고수자(絶世高手者)라기보다 신흥 거부(巨富)였으며, 무공이 아니라 재력으로 사해팔황에 자신의 힘을 펼쳐 나가고 있었다. 막대한 황금으로 군산칠십이채(君山七十二寨) 휘하 녹림도(綠林徒)를 지배하며… 강호전역에 쾌활림(快活林)과 객잔(客棧), 표행( 行), 은장(銀莊)을 퍼뜨리며 불가사리처럼 세력을 늘려 나가고 있는 자이다.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고, 거처도 확실하지 않다. 그는 금맥(金脈)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의 존재는 나날이 거대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인물, 그야말로 가장 기괴한 인물이었다. 가장 공포스러운 이름을 지녔으며, 가히 살아 있는 신이라 불릴 수 있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어찌 생각할 경우, 일고할 가치도 없는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영웅무정(英雄無情) 일검향(一劍香). 나타나는 순간 무조건 암살(暗殺)해야 함.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이용해서……. 일검향이라 불리는 자는 천하에서 가장 빠르며, 가장 강한 자이다. 그는 모든 종류의 마공을 격파하는 신공을 익히고 있으며, 어떠한 종류의 싸움이든 자유자재로 처리를 한다. 영웅무정 일검향은 가히 살아 있는 신이라 할 수 있는 자이다. 하나, 그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존재에 불과했다. 영웅무정 일검향, 그는 영웅총사(英雄總師)라 불린다. 그는 영웅팔가(英雄八家)를 이끄는 자이며, 영웅도의 대표파자(大 把子)인 동시에 천하백도의 상징적인 맹주이다. "영웅팔가는 천 년 전의 격전 이후 분리되었으며, 그 후 어떠한 형태이든 가맥(家脈)을 이어 가고 있으나… 춘추팔가로 비하된 상태에 불과할 뿐,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고 분석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영웅총사 영웅무정 일검향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순찰당주의 기나긴 말은 이제서야 끝이 났다. 바로 그 날 새벽. 성모봉에서 만 마리 전서구(傳書鳩)가 날아올랐고, 도합 이십만 무사들이 적어도 오천 리(里) 이상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천 년 사상 가장 격한 격류(激流)가 시작되는 날은 바로 신년(新年)이 시작되는 원단(元旦)의 날이었다. 천 년 만에 대혈풍이 일어나기 시작한 날, 이 날의 새벽은 진정으로 처연하게 깨어났다. 여명(黎明). 하루에 한 번은 있는 새벽이다. 그러나 이 새벽이야말로 일천 년 무림 사상 가장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새벽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십 수만 무사들이 천하도처로 흩어져 나가기 시작했으며, 천 년 간 기른 악마의 저력이 사해팔황으로 격류가 되어 휘몰아쳐 나아가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비밀 분타로 비밀 명령이 떨어졌으며, 무림 사상 가장 격렬한 일월(一月)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가능한 한 조용히 처리하라. 그 자들이 비록 잠자는 거인(巨人)이라 하나, 자칫 대파란이 일어날 수가 있으니까… 조용히 침묵시켜라, 조용히!" 뒷짐진 자, 전신에서 대인(大人)의 풍모를 일으키고 있다. 그는 수천 무사들에게 행진을 명령하는 가운데 일월 일 일의 대기를 폐부 깊이 빨아들였다. 폭풍혼! 무수한 인물이 훗날의 마황야로 지목하고 있는 그는 히죽 웃으며 이렇게 토해 냈다. "소림(少林) 정도는 피 한 방울 흘리지 말고 침묵시켜야 한다. 훗훗……!" 소림이라니? 작은 숲이라는 이름. 아아, 그 이름은 바로 사대마계와 영웅팔가라는 비무림계(非武林界)의 양대전설이 아니라 무림정사(武林正史)를 좌지우지한 천년거목(千年巨木)의 이름이 아니던가? 한데,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말고 소림을 침묵시키라니? 또 하나의 인물, 그는 남자답지 않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자였다. 너무나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며, 검을 잡기에는 너무나도 얄팍하며 보드라운 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자라면 그를 무시하는 마음을 영원히 품지 않게 될 것이다. 영혼마저 정지가 되어 버린 듯한 얼굴, 그 얼굴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라고는 사(死)의 기운뿐이었다. "가자!" 차갑게 토하는 자, 그는 사몽(死夢)이라 불리는 자였다. "못다 한 일이 많다. 그 일을 다해야 한다."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자, 사몽. 그는 사대마계에서도 공포의 상징으로 불리는 살수들을 대거 이끌고 표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몰려 나가는 마인(魔人)들, 피와 죽음과 욕망에 굶주려 있는 자들이다. 일천 년 전 천하를 혈세했던 마병(魔兵)에 비해 세 배 넘게 강한 자들이며, 그들의 숫자 또한 일천 년 전에 비할 수 없이 무수하다. 쓰으으… 쓰으으으……! 죽음의 바람처럼 사라져 가는 자들, 그들은 중원을 향해 쉬지 않고 이동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천하를 정복하기 이전에는 되돌아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 또한 악마의 율법이고, 죽음의 법칙이다. "태양혼! 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지? 이제는 야망(野望)이 식었느냐?" 혈접혼(血蝶魂), 그녀는 몇 장의 밀지를 품속에 집어넣으면서 하나의 인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회색 옷을 걸친 청년, 그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고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독두옹(禿頭翁)의 갈기를 매만지고 있었다. 기이한 권태감을 느끼게 하는 자, 그는 바로 마도의 이단자로 불리고 있는 태양혼이었다. 그는 모든 무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로 느릿느릿 행동할 뿐이었다. 그는 단 하나의 휘하도 거느리지 않았으며, 폭풍혼이나 사몽혼처럼 황금과 기진이보에 욕심을 갖지도 않았다. 아무와도 내심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자. 그는 폭풍혼과 사몽혼, 그리고 혈접혼이 출정(出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완조와 놀기(?) 바쁜 듯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마황야에 불과하며, 마황야는 태양혼에게 아무것도 명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태양혼은 혼자만의 미묘한 자유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슷－ 슷－! 손가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새털이 하나 날아올랐다. 태양혼은 세상살이에 지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의 권태감 가운데에는 묘한 비웃음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세상은 넓다오, 누이!" "흠, 하긴 너는 강호 나들이를 했었지. 유배(流配)에 따른 것이었지만……!" 혈접혼은 채립(彩笠) 끝을 기울였다. 태양혼과 그래도 말이 오고 가는 사람이라면 혈접혼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태양혼, 그의 입술 사이에는 풀잎이 씹히고 있었다. 이 곳은 설중(雪中)임에도 불구하고 기화요초가 자라고 있었다. 기문진세의 작용으로 인해 사계절 가리지 않고 꽃송이가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사람이 많소." "하긴……." 혈접혼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에는 개(犬)도 있고, 용(龍)도 있소." "개와 용?" "훗훗… 누구든 용이 되고자 하며, 자신이 개라는 것을 말하기 싫어하오. 하나, 오직 한 놈만은 다르오. 놈은 용이거늘… 개처럼 행세했었소!" "무슨 말이지?" "놈을 죽였어야 했다는 말이오. 이상하게도 놈의 불투명한 시선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소. 우라질! 그 때 놈을 죽였어야만 했는데……."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강호의 유명인사이냐?" "놈은 나보다 더한 이단자요. 그리고 바로… 저기 있소!" 태양혼은 힐끗 손을 쳐들었다. 새벽 하늘이 그의 손끝에 걸리는데, 빛의 화살 하나가 끝없이 회색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하나의 유성(流星)이 포물선을 끌며 새벽 하늘을 끝도 없이 쪼개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第8章 천년세가(千年世家) 어디일까? 너무나도 아름다운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수십 리(里) 광야(曠野)를 뒤덮고 있었다. 첨봉(尖峰)들이 병풍처럼 줄지어 서 있으며, 새도 날아들지 못할 유리벽이 천 길 넘게 수직으로 치솟고 있다. 그 곳은 하나의 거대한 분지(盆地)였다. 인간은 가히 흉내내지 못할 자연의 위대한 건축은 거산(巨山)의 장막(帳幕) 가운데 이룩되어 있었다. 수없이 많은 꽃송이들이 사계(四季)를 가리지 않고 피어나며, 자욱한 향무(香霧)가 번지고 있어 자칫 잘못 걸음을 내디디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거대한 화단을 지나치면 귀부신공(鬼斧神工)으로 만들어진 듯한 수백 채의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웅장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금빛 기와를 이고 있는 고루거각의 지붕은 아스라하게 부서지는 연보라색 새벽 안개로 인해 물들고 있었다. 가히 신계(神界)에 가까운 곳이다. 추악한 것은 어디에도 모습이 뜨이지 않는다. 청석(靑石)이 깔린 길이 동서(東西)로 길게 이어지고 있고, 백석(白石)이 깔린 길이 남북(南北)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방사형으로 이루어진 길의 중앙에는 거대무비한 전각이 하나 서 있으며, 전각의 긴 그림자는 검은 코끼리 마냥 수천 평 너비의 연무장(練武場)을 반쯤 뒤덮고 있었다. 묘한 침묵과 정적이 흐르는 곳이다. 팔괘(八卦)에 따라 세워진 오백십이 개의 전각들, 도합 팔 개 지역으로 분할이 되어 세워진 모든 전각은 기문진도에 따라 건립되어 있었다. 팔팔(八八) 육십사(六十四), 육십사 채의 전각이 하나의 군(群)을 이루고 있으며… 그러한 군이 여덟 지역에 설치가 되어 기기묘묘한 팔괘의 변화를 이룩하고 있다. 도합 오백이십 채의 고루거각이 방사형을 이루며 건립되어 있다. 그 둘레에는 화해(花海)가 펼쳐져 있으며, 꽃의 바다 뒤쪽에는 울울창창한 만년송백림(萬年松柏林)이 방대한 규모에 걸쳐 펼쳐져 있다. 그 뒤에는 거산(巨山)의 병풍이 도열해 있고, 그 위에는 타오르기 시작하는 일월 일 일의 하늘이 있다. 원단의 새벽이다. 싱그러운 향기가 일대를 휘어 감고 있다. 이리저리 흐르는 연보라색 안개 가운데, 웅장하고 신비로운 건축물 가운데 만들어진 하나의 철성(鐵城)이 안개에서 천천히 빠져 나오고 있었다. 오랜 세월 가운데에도 녹이 슬어 있지 않은 철와(鐵瓦), 그리고 어디를 봐도 창문이 없는 폐쇄의 구조이다. 다른 건축물에 비해 규모가 작다 할 수 있으나, 전체적인 모양의 장엄함으로 인해 철성은 일대의 오백이십 채의 거대한 신축(新築) 건물을 압도하고 있었다. <유성천가(流星天家)> 연보라색 안개 사이에서 현판 하나가 떠오르듯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아, 바로 유성천가였단 말인가? 일천 년 전에 무너졌다고 알려진 유성천가가 천 년이 지난 이 순간까지 이렇듯 거대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이 날의 새벽은 의미가 깊은 새벽이었다. 천 년의 율법에 따라 외부 세계와의 연락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일천 년 간 성장해 온 유성천가에 천 년의 바람이 몰아닥치기 시작하는 날이며, 전 무림의 운명을 결정지을 하나의 사건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영웅대전(英雄大殿). 유성천가의 가주가 머무르는 장소이다.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없던 건축물이며, 최근 들어 건립된 수백 채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새벽이 깨어날 즈음, 영웅대전은 돌연 벽력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 그가 돌아온다고……?" 영웅대전은 대갈일성에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실로 거대한 황금색 태사의 위에 등을 깊숙이 파묻고 있던 초로(初老)의 백포문사(白袍文士). 머리 위에는 절풍모(折風帽)를 썼으며, 백포를 가로지르고 있는 자색 허리띠에는 칠채보주(七彩寶珠)가 박힌 이 척(尺) 패검(佩劍)이 차여 있다. "놈이… 기어코 돌아온단 말인가?" 백포인의 눈에서 푸른 섬광이 쏟아져 나온다. 전신이 환히 비추일 정도로 매끄러운 대리석(大理石)의 대전. 드넓은 대전 바닥에는 황금색 양탄자가 깔리어 있으며, 그로 인하여 대전은 반으로 나뉘어지고 있었다. "……!" "……." 좌측에는 문반칠십이원로(文班七十二元老)가 시립해 있고, 우측에는 무반칠십이장로(武班七十二長老)가 시립해 있다. 유성천가를 이끌고 있는 거두(巨頭)들이다. 하나같이 절정의 내공을 갖고 있는 듯, 눈빛에 힘이 실리어 있다. 지금 장내는 묘한 흥분 속에 휘감겨 있다. － 그분이 오고 있습니다. － 십만대산으로 접어드는 어귀에서 그분의 모습을 본 순찰호법이 향전(響箭)을 쏘아서 그분의 출현을 알렸습니다. － 대공자(大公子)께서 천 일(日) 만에 귀거래(歸去來)하십니다. 그분은 이각(二刻) 안에 세가 안으로 당도하실 듯합니다. 옷차림이 허름하기는 하나, 분명 그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정처없이 천하를 떠돌아다니셨던 유성(流星) 대공자가 드디어 돌아오십니다. 단신으로……! 원단(元旦)이 깨어나는 새벽, 천 년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유성천가는 한 인물의 출현으로 인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유성, 바람의 혼백을 타고난 괴팍한 천재. 유성천가의 가주 지위마저 지겹다 여기며 훌쩍 떠나갔던 유성천가의 후계자 서열 제일위 자, 그가 돌아오는 것이다. 정확히 일천 일 만에 그가 태어나고 소년 시절을 보낸 십만대산의 세가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춘추제일가(春秋第一家) 유성천가(流星天家). 일명 천년세가(千年世家). 천하의 그 어떠한 세력도 붕괴시키지 못했던 무림의 성지이며, 춘추팔가의 본산이다. 지금 유성천가는 폭풍을 만난 듯 흔들리고 있다. 단 한 사람의 출현으로 인해……! 갈대가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 십만대산은 남방(南方)의 거악인지라, 산하(山下)에는 한겨울이라 하더라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끝이 없이 펼쳐진 갈대밭 사이, 하나의 고영(孤影)이 휘청거리며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백포를 걸친 청년, 머리 위에 방립 하나를 쓰고 있는데 기우듬히 올려 쓰고 있는 모습이 차라리 천진스러워 보였다. "꽤 오랜만이다. 이 길을 다시 밟다니……." 갈대밭 사이의 길을 걷는 청년, 그는 힐끗 눈길을 들어 귀무(鬼霧)에 감추어진 협도를 바라봤다. 얼핏 본다면 지형이 험하고 거친 곳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곳은 인공의 손길이 가미되어 있는 곳이며, 만에 하나 무조건 그 곳을 향해 걸어가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유성천가는 천 년을 침묵 속에서 지내 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은거지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것은, 완벽한 기관으로 주위를 차단시켰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게 짊어지어졌던 숙명(宿命)을 거부하며 저 곳을 나섰다. 또한… 어린 나를 이용하여 춘추팔가를 일통하고자 했던 혜성(彗星) 대숙(大叔)에게 반항하며 저 곳을 나섰다.' 예지에 가득 찼던 눈빛이 암울해진다. '나는 무사(武士)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천년무가(千年武家)에 태어난 것을 증오했었다.' 우두둑－ 우둑－! 그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뼈마디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서는 말할 수 없이 강한 섬광(閃光)이 폭사되어 나왔다. '물론 그러한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다시는 나같이 고독한 무사가 없어야 한다고 믿기에… 돌아온 것이다.' 그는 느릿느릿 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으며, 바람이 강하게 불며 갈대숲이 일제히 누웠다. 저벅－ 저벅－! 그는 허리까지 차는 갈대숲을 헤치며 걸음을 내디뎠고, 아스라한 연보라색 안개 가운데 일월 일 일의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몇 걸음을 내디뎠을까? 방립을 올려 쓴 채 걸음을 내디디던 청년의 입꼬리가 가볍게 틀어졌다. '기세(氣勢)가 다르다. 바람 소리 가운데, 또 다른 파공성이 스미어 있다.' 휘이이이익－! 사방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 가운데,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에서 황갈색 그림자들이 다가서기 시작했다. 빠르고 날렵하게 다가서는 그림자들. 바람이 갈대잎을 말아 올리는 가운데, 여든하나의 그림자가 청년의 전후좌우를 포위했다. "여기서 걸음을 멈추셔야 합니다." "존경하기에… 가로막을 수밖에 없소이다." 얼굴을 황건(黃巾)으로 가리고 있는 자들. 등에 쌍검(雙劍)을 교차하여 걸고 있으며, 암기 주머니로 보이는 주머니를 두세 개씩 차고 있었다. 이합집산(離合集散). 여든한 개의 그림자는 뭉쳤다가 흐트러지고, 흐트러졌다가는 뭉치는 가운데 포위망을 점점 압박시켰다. 팔십일로(八十一路) 풍영불회진(風影不廻陣). 강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절학으로, 한 번 펼치어진다면 여든한 명의 무사 가운데 열 사람이 남을 때까지 진세가 유지된다. 공수전환이 지극히 경쾌하며 눈(雪), 비(雨), 우박 같은 악천후(惡天候)일수록 진세의 위력이 배가된다. 팔십일로 풍영불회진을 이룩한 사람은 유성천가의 제사대(第四代) 가주(家主)였던 천화린(天華鱗)이었다. 유성천가! 천 년 간 잊혀졌던 전설상의 세가이다. 또한 춘추팔가의 우두머리이며, 천하에서 가장 엄한 가법(家法)을 지니고 있는 가문이었다. 유성천가의 인물은 끝없이 무공을 연마해야만 하며,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절기는 익힐 수 없다. 그리고 유성천가는 대대(代代)로 심득(心得)을 이어서 검도(劍道)를 완성해 나가는 율법 가운데에서 천 년을 보냈다. 즉, 춘추팔가에 속하는 여덟 가문은 각 한 방면에서 고금제일의 경지에 오르도록 안배가 되어 있었다. 쓰으으… 쓰으으……! 바람을 타고 갈대잎들이 날아오른다. 여든한 명의 절정 고수자들, 그들은 갈대잎 뒤에 신형을 감춰 가면서 팽이처럼 돌며 진세를 압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삼엄한 기세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으며, 갈대가 뿌리째 뽑혀 허공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천지사방이 갈대잎으로 만든 담장으로 둘러쳐진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진세는 벽락구주(碧落九州)에서 육합풍운(六合風雲)으로 변화했고, 이어 만화재방(萬花齋芳), 자기동천래(紫氣東天來), 천기돌출(天騎突出), 오악개정(五嶽開頂)으로 빠르게 변화되어 나아갔다. 파파팟－! 무자비한 기세가 팔방에서 치솟아 오를 때. "환영이 성대해서 좋아!" 백포청년은 팔짱을 낀 채 하이얀 치열을 내보이며 웃었다. 바로 천유성(天流星), 운명의 풍운아 천유성이 낭인(浪人) 수업(修業)을 마치고 드디어 가문으로 복귀한 것이다. "하나, 이렇듯 성대하고 소란스러운 환영식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구려." 천유성은 싱긋 웃다가 오른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다섯 손가락이 활짝 펴지는 가운데, 그의 손은 허공을 다섯 치 정도로 동방(東方)에서 서방(西方)으로 비스듬히 끊어 나갔다. '허점은 변문(變門)과 사문(死門) 사이이다.' 초식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간단한 동작이다. 아무런 소리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내가경력(內家勁力)이 발출되는 특유의 파공성도 일어나지 않았다. '용서하게, 가문의 형제들이여!' 지극히 단순한 선(線)을 끌며 다섯 치 이동하는 옥수(玉手). 그 가운데 하나의 풍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콰르르릉－ 콰쾅－! 표풍(飄風)처럼 날아오르며 검무(劍舞)를 추던 여든하나의 무사가 일제히 몸놀림을 멈추는 것이 아닌가? "흐윽!" "이… 이럴 수가? 검진이 저절로 와해되어 버리다니? 으으, 단 일 수(手)에 진세의 축이 끊어지다니?" 폭풍처럼 날아오르던 무사들은 허공에서 저희들끼리 부딪치며 벌렁벌렁 나뒹굴기 시작했다. 진세란 빠르고 정교할수록 허점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진세의 축을 건드린다면 진세는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 무공의 이치이다. 천유성은 손을 다섯 치 가량 움직여 진세의 변문(變門)과 사문(死門) 사이의 축을 슬쩍 끊어 버린 것이다. 그의 일 수(手)는 월광영(月光影)이라는 수초(手招)였고, 그것은 바로 십삼인자술(十三忍者術)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 출수(出手)에는 구파일방의 초식 가운데 세 가지의 변화가 깃들여 있었다. 곤륜(崑崙)의 종학금룡수(縱鶴擒龍手), 화산(華山)의 매화탄공지(梅花彈空指), 전진(全眞)의 함허일자진결(涵虛一字眞訣). "유감이 되는 것은… 타파의 무공으로 나의 가문 무공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천유성은 일 초 만에 진세를 붕괴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휘청거리며 걸음을 내디뎠고, 이전과는 달리 몸놀림이 가공스럽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이십 장 정도를 가르고 지나갈 때였다. "들어서지 마십시오!" "세가는 정복되었소이다. 대공지를 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소이다." "오랫만에 귀가하시는 대공자를 차단해야 하는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슷－ 슷－ 슷－! 안개 속에서부터 그림자 세 개가 훌훌 떨어져 내렸다. 여든한 명의 수비무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경공을 구사하고 있는 세 사람. 하나는 묵포(墨袍)에 묵검(墨劍). 가운데의 인물은 적포(赤袍)에 혈검(血劍), 혈립(血笠). 마지막 인물은 은포(銀袍)에 은검(銀劍)을 지니고 있었다. 파팟－ 팟－! 삼 인의 절정무사는 다짜고짜 삼재허무검세(三才虛無劍勢)를 펼치며 천유성을 가로막았다. "용서하십시오." "속하들, 힘(力)으로 저지해야만 하는 현실이 증오스럽소이다." 그리고 천유성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대들이로군! 프핫핫… 선부(先父)가 친히 기른 유성삼위(流星三衛)! 프핫핫……!" 천유성은 허공에서 신형을 멈추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홀연히 나타난 세 사람은 과거 그를 주공으로 섬겼던 무사들 가운데 하나로, 가장 빠른 검초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다. 철엽(鐵葉), 단엽(丹葉), 사엽(死葉). 세 사람은 일생(一生)을 검에 바친 사람들이며, 그들을 기른 사람은 바로 천유성의 아버지였다. "들어가시면 아니 되십니다." "유성사노(流星四老)는 칠 일 전 연금되었고, 문무쌍반(文武雙班)의 원로장로(元老長老)들은 모조리 포섭되었소이다. 또한 기존의 세력을 다섯 배 능가하는 외부세력이 들어와서 세가를 장악한 상태외다." "속하들, 이런 결례를 저지르게 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여기서 걸음을 멈추신다면 모르되, 굳이 들어가시겠다면 힘(力)으로 가로막을 수밖에 없소이다." 유성삼위사는 허공 중에 몸을 띄운 채 천유성을 가로막는다. 절정의 답허부공(踏虛浮空)이다. 무공이 절정에 이르게 되면 허공 중에 몸을 띄울 수는 있다. 하나 떠 있는 상태로 말을 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유성삼위사는 조금 전 천유성을 가로막았던 팔십일로(八十一路) 풍영밀검대(風影密劍隊)의 삼대교두(三大敎頭)들이며, 천유성이 일곱 살 되던 해 천유성 앞에 무릎을 꿇고 일생을 천유성에게 바치기로 맹세한 유성백팔가신(流星百八家臣) 가운데 속하고 있다. 파팟－ 팟－! 철엽, 단엽, 사엽은 풍차가 돌 듯이 빠르게 움직이며 천지인(天地人) 삼방을 신형으로 뒤덮었다. 어지럽게 뿌리어지는 환검영(幻劍影). 도합 세 사람이 나타났을 뿐인데, 마치 삼백 명의 무사들이 군무(群舞)를 추는 듯한 광경이 만들어졌다. 월이화영(月移花影), 구로개벽(九路開闢), 뇌정천리(雷霆千里), 천풍지뢰(天風地雷), 단천열화(斷天熱火)……. 잡다한 초식이 잇따라 시전이 되며, 천유성은 검영(劍影)의 거벽(巨擘)에 휘감기게 되었다. 휘리리릭－! 검은빛의 무지개와 핏빛의 무지개, 그리고 은색의 무지개가 일어나며 무수한 원호(圓弧)를 형성한다. 수만 개의 원이 허공 가득 떠오르는 가운데, 천유성의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선부의 무기명제자(無記名弟子)로 부끄럽지 않다. 빠르고, 정교하다. 그러나 한 가지 고칠 것이 있다." 천유성의 손이 다시 허공을 끊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욱 단순한 움직임이며, 무가의 상리를 초월한 단초(單招)였다. 현란하게 떠오르는 삼색검호(三色劍弧)를 향해 내뻗치는 옥수(玉手). 빠르다기보다 느리며, 너무도 느리기에 차라리 정지된 듯하다. 그의 손은 오직 하나의 점(點)을 향해 세 치 이동해 나갔다. 세 사람의 검세가 뭉치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해……. "검을 쥔 자는 무정(無情)해야만 한다. 내가 강호에서 배운 이치는 바로 그것이네. 자네들은… 그러한 이치를 보다 공부해야겠네." 팟－! 천유성의 손은 한 지점에서 정지가 되었다. 세 자루 보검이 연환협격술로써 뭉치는 지점. 그 지점을 찾아 낸다는 것은 인간의 시력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그 지점을 향해 정확히 손을 그어 댄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가 갖고 있는 속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한데 천유성의 옥수는 시력과 속도의 한계를 돌파하여서 그 지점을 정확히 찍어 내고 있었다. 따당－ 땅－ 땅－! 세 자루 보검은 일순 허물어져 버렸으며, 유성삼위는 상체가 찌릿하게 마비됨을 느끼며 갈대숲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어떠한 초식이었소이까?" "아마도… 이 것은 꿈이리라. 으으, 나이 어린 유성 공자가 어이해 우리 셋을 일 식으로 격파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세 사람은 가공할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사지가 마비되어 나뒹구는데, 미묘하게도 그들이 짓고 있는 표정은 고통이 아니라 희열이었다. 기실 유성천가는 세력이 양분된 상태였다. 유성천가는 강호의 어떤 세력보다 전통을 중히 여기는 집단이다. 그들은 세력을 키우기보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에 주력했기에, 그 결과 소수의 집단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총인원 구백여 명 정도. 하나같이 강하고 충성심으로 무장된 사람들이다. 폐쇄적으로 유지되던 유성천가에 외부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건 삼 년 전 일이었다. 천유성이 가문을 버리고 낭인의 길에 오른 후, 외부에서 무수한 무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도합 육 개 세력이며, 유성천가의 무사들보다 월등한 무공과 술수를 지니고 있었다. 천유성을 제거하고자 했던 천혜성은 그들의 힘을 빌어 유성천가를 장악하기에 이르렀으며, 천유성을 따르던 구세력(舊勢力)은 신세력(新勢力)에 하나하나 정복당하고 말았다. 유성사노가 천유성이 세가로 복귀하지 않기를 바랬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괴이한 노인이다. 죽간(竹竿)을 연(淵)에 드리우고 있는데, 죽간에는 은사(銀絲)가 매달려 있지 않았다. 천년세가로 접어드는 비도(秘道) 어귀의 호수. 일대에는 천 년 간 붕괴되지 않았던 기문진세가 펼쳐져 있는지라, 그 곳에 서면 하늘빛이 주야(晝夜) 내내 칠흑처럼 검게 보인다. 또한 임독양맥이 타통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진세에 휘말려 의식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노인은 호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어코 들어가다니… 고집이 대단하군."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하다. 어찌나 주름이 많은지 표정이 읽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뒤쪽, 몸이 풍만한 노파 하나가 대나무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비단천을 펼쳐 놓고 자수를 뜨고 있는데, 자수로 꾸며지는 것은 천 송이 꽃이었다. "녀석은 율법을 파괴했소이다. 타파의 무공을 쓰고 있소이다. 그 죄는 무공이 폐쇄되어서 마땅한 죄요. 그러나 돌아왔다는 것은 몹시 대견스러운 일이 아니겠소?" "ㅋㅋ… 젊은 시절에는 누구든 반골(叛骨)이 되지." "유성, 정녕 고약한 녀석이오." "천기(天機)를 타고난 놈이지. 그리고 중원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놈이지. 하나, 현재로서는 녀석을 도울 수 없어. 모두 천년률(千年律)이 아니겠소?" "하긴… 하긴……!" 호숫가의 두 노인, 이들은 조금 암울한 표정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폐인(廢人)이 될지 모르겠소. 율법에 따라서……." "이것은 도박이 아니외까? 모두 잃거나, 모두 따거나……." 바람이 강하다. 그리고 진눈깨비가 바람을 타고 펄펄 날리고 있었다. 눈이 퍼부어지기 시작한다. 산천초목은 거위털 같은 눈송이의 장막에 뒤덮이기 시작했고, 산 울음소리가 우레 소리보다도 커졌다. 일월 일 일 묘시(卯時)가 될 때, 그는 드디어 그 곳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났던 곳, 또한 그가 소년 시절을 보내었던 곳. 천년세가! 그 곳은 그가 떠나던 때에 비할 수 없이 변모되어 있었다. 첫째, 이전에 비해 전각(殿閣)과 누대(樓臺)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가 되어 있었다. 둘째, 세가 안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무수했다. 혜성(彗星) 대공(大公), 그는 유성천가의 이십칠대(二十七代) 손(孫)으로서, 죽은 이십칠대 가주의 친동생이다. 춘추팔가 가운데에서 가장 강하며, 천 년 전부터 절정검경(絶頂劍經)에 접어든 일대검호(一代劍豪)들을 무수히 배출해 낸 중원제일의 비밀세가 유성천가! 그 곳은 실로 엄격한 피의 계보(系譜)에 따라 대통을 전하고 있었다. 천유성은 가법에 따라 이십팔대 가주가 되어야 할 입장이었으며, 만에 하나 그가 죽는다면 혜성 대공이 이십팔대 가주가 될 것이다. 유성천가의 가주가 되는 자는 춘추팔가문의 대회합에 나아가게 되며, 그 자리에서 영웅총사(英雄總師)가 선발이 되게 된다. 또한 영웅총사는 절대적인 힘을 지닌 채 사대마계의 준동(蠢動)을 격파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일천 년 간 깨어지지 않았던 춘추의 율법이었다. 휘청휘청……! 천유성은 백포 자락을 바람에 펄럭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차갑군!" 그의 검미(劍眉)가 꿈틀거리며 역팔자(逆八字)로 휘어졌다. 보라! 드넓은 백석로(白石路)가 펼쳐져 있고, 무수한 무사들이 오고 가는 것을.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천유성을 향해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천유성이 다가서는 데도 전혀 모른 척할 뿐이다. 천유성은 일방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를 향해 다가서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를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그 어떠한 사람도 천유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강한 거부를 하고 있었다. 천유성은 끝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입매에는 한기(寒氣)가 맺혔으나, 그것은 차츰차츰 단아한 기색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시해도 좋네, 가문의 형제들. 그러나 내가 여기 돌아온 이상, 이제 나를 내몰 사람은 없을 걸세.' 천유성은 빙그레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웃다니? 철저한 냉대를 받는 가운데 탈속하게 웃다니? 천유성은 사람들의 철저한 무시를 미소로 받아넘기며 문무재 쪽으로 갈음을 옮기었다. 문무재(文武齋). 천유성이 소년 시절을 보냈던 서재이다. 그 곳은 천 년 전에 세워진 유성천부(流星天府) 내부에 세워져 있으며, 그 곳에서 창을 연다면 사계(四季) 내내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피어난 아름다운 뜨락을 볼 수가 있다. 과거에는 유성천부만이 유일한 건축물이었는데, 현재에는 유성천부보다 십 배 거대한 전각들이 무수히 설립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문무재로 접어드는 어귀에는 무사들의 거처가 세워져 있으며, 그 안에는 영웅천가 출신이 아닌 외부의 고수들이 대거 머물러 있었다. 장도(長刀)를 껴안고 있는 자도 있고, 철편(鐵鞭)을 둘둘 말아 지닌 채 천유성이 걸어가는 것을 보며 차디찬 눈빛을 던지는 자도 보였다. 어떠한 자는 문차(文叉)와 무차(武叉)를 양 손에 번갈아 쥔 채 파풍쌍차술(破風雙叉術)을 시전해 바람 소리를 일으키고 있었으며……. "카아아악……!" 찬유성이 오기를 기다렸다가는 입을 딱 벌리며 시꺼먼 가래침을 토해 내는 자도 있었다. 문무재 근처에 있는 괴무사들의 숫자는 도합 구백구십구(九百九十九)에 달하고 있었다. 천유성은 팔짱을 낀 채 걷고 있었다. '유성사노가 내게 절대로 귀가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한 것을 이제야 이해하겠군.' 천유성은 가공할 경력(勁力)이 일대에 서리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살기가 치솟아 올랐으며, 그가 다가가고 있는 문무재는 진세의 회오리바람 안에 휘말려 있었다. '하나같이 가공한 자들이다. 세가의 식솔들이 무릎을 꿇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천유성의 눈에서 일순 푸른빛 섬광이 뿜어졌다. 하나 너무도 찰나적인 변화였는지라,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벅－ 저벅－! 천유성은 그래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또한 그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는 보다 짙어지고 있었다. "대숙은 솜씨가 좋은 분이시지. 그분이 아닌 누가 무림천하의 절정무사들을 이리도 많이 거둘 수 있단 말인가?" 천유성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거처로 접어들었다. 그는 열다섯 차례 거듭해서 살기가 다가섬을 느꼈으나, 팔을 풀어 출수(出手)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를 격동시키기 위해 슬쩍슬쩍 몸을 움직인 자들은 천유성의 태연자약함 아래 머쓱해져서 신형을 멈추고 말았다. '뜻밖이군.' '나이 약관(弱冠)도 아니 되었는데, 대인(大人)의 풍모가 느껴지다니……?' '철부지에 반골이라고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묵시적으로 천유성에게 위협을 가하던 구백구십구(九百九十九) 검(劍)은 야릇한 압박감에 휘어 감겼다. 천유성이 분노해서 포효하며 손발을 휘저어 대었더라면, 차라리 무사들은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하나 천유성은 유성천가의 영역으로 접어들어 자신의 거소로 들어설 때까지 절대로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가 낭인주(浪人洲)에서 배운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정신의 인내력이 아니겠는가? 서재 문은 꽈악 닫혀 있었다. 천유성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서재 문을 밀기 시작하는데, 한순간 그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가공할 기세가 느끼어진다.' 상승고수라면 오감(五感) 이외에 또 하나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본능적인 예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내공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러한 감각이 발달되기 마련이다. 뼛속으로 파고드는 차디찬 기운, 천유성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서재 내부에서 막대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천유성의 미간에 자잘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보라! 누가 붙여 두었는지 모를 한 장의 쪽지가 서재 문에 달라붙어 있지 않은가? <어린 까마귀(烏鳥)에게는 먹을 것을 줄 수가 없다!> 어린 까마귀라니? 천유성을 두고 하는 조롱의 말이 아닌가? 천유성은 쪽지의 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입술을 질겅 물었다. "일단은 받아 주겠다. 모조리!"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집요하게 인내해 가며 서재 문을 활짝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찰나,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문무재는 넓이가 겨우 칠 평(坪)에 불과하거늘, 천유성은 망망대해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빙글빙글……! 하늘이 돌고 땅이 회전을 한다. 오른쪽에서는 수십 길의 해일(海溢)이 덮쳐 들었으며, 왼쪽에서는 아가리를 따악 벌린 해룡(海龍)이 다가섰다. 허공에서는 머리카락을 풀어 흩트린 나찰(羅刹)과 수라(修羅), 염라(閻羅)들이 펄펄 춤추며 떨어져 내렸고… 뒤쪽에서는 포효 소리가 일어나며 수만 마리의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유황불이 치솟아 오르고, 광풍이 휘몰아치며 모든 것을 말아 올린다. 천지혼돈(天地混沌). 문무재 내부는 아수라(阿修羅) 지옥계(地獄界)로 변화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맑은 눈빛이다. 한순간 흐릿하게 침잠이 되었던 그의 눈빛은 찰나적으로 예광(銳光)을 흘리며 본연의 지혜를 발출하기 시작했다. "대숙께서 인재들을 끌어들였다더니… 사실이로군. 칠 평 너비의 방 안에다가 만멸혼돈진세(萬滅混沌陣勢)를 펼친 사람이 있다니……!" 천유성은 한순간 아득함을 느꼈으되, 의식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창허상인의 진학(陣學), 병법(兵法)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창허상인의 무공은 천하제일이 아니되, 그의 진학과 병법은 가히 고금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천유성은 방 안에 만멸혼돈진세가 펼치어져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좌삼(左三) 우이(右二)… 우측으로 세 번 돌고, 비스듬히 두 걸음 나아간다." 천유성은 백포 자락을 펄럭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일 보 일 보를 거인의 걸음으로 내디뎠으며, 그가 도합 일곱 걸음을 내디딜 때 주위에서 일어나던 환각(幻覺)은 모조리 사라졌다. 천유성은 단 칠 보(步)로써 첫 번째의 영접(?)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다. 第9章 가장 깊은 밤 천여 권의 고서(古書). 하나의 자단목(紫檀木) 팔선탁(八仙卓), 문방사우(文房四友)와 칠현금(七弦琴)……. 문무재 내부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천유성이 가문을 떠난 사이, 가문을 완전히 장악한 천혜성이라 하더라도 천유성의 서재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문무재는 가주가 기거하는 곳으로, 가주가 아닌 자는 들어설 수 없다. 그것 또한 변하지 않을 천년율 중 하나였다. 유성천가의 역대 가주들은 문무재 안에 머물며 지혜심검(智慧心劍)과 무검제일결(無劍第一訣)이라 불리는 유성천가의 가전검법을 연구해야 한다. 일천 년에 걸쳐 스물여덟 명의 인물이 문무재에 기거했으며, 천유성은 바로 스물여덟 번째의 유성가주(流星家主)가 되는 셈이었다. 스물일곱 권의 서적이 보인다. 그것은 참검기(參劍記)라 불리는 것으로서, 유성천가의 가주가 되는 사람은 죽기 직전 한 권의 참검기를 기록해야만 했다. 천유성은 가문을 떠나기 이전, 스물일곱 권의 참검기와 더불어 칠 개 성상(星霜)을 보낸 바가 있다. 그러나 당시 그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가문을 떠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가문의 율법을 가공스럽고 또한 지긋지긋한 허구의 율법이라고 여겼기에, 흔쾌히 모든 것을 버리고 가문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가문의 율법이 치졸하고 괴팍한 것이라 여기며 이 곳에서 가문을 버릴 결심을 한 바 있다!" 천유성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당시, 나는 나의 가문을 휘어 감은 천년율(千年律)을 증오했었고… 무공의 길을 거부했었다.' 천유성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나의 증조부, 나의 고조부가… 모두 이 곳에서 참검하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스러져 갔었다. 나는 그들이… 허황된 꿈을 쫓다가 스러졌다고 여겼었다.' 그는 천천히 서가(書架)를 향해 다가갔다. 손때가 묻은 서적들이다. 그 안에 어떠한 글이 쓰여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어떠한 서적이 꽂혀 있는지 눈을 감아도 다 알 수가 있다. '하나, 지금 나는 알 수가 있다. 무사의 길이 멀고 험하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가문 조상들이 추구했던 길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헌신의 길이며, 누구도 이루기 어려운 무공(武功) 완성(完成)의 길이라는 것을…….' 천유성은 머리 속에 방대한 무공 지식을 담고 있었다. 그가 외우고 있는 무공 서적은 천여 권에 달한다. 창허상인이 전한 구파일방의 절예들, 월광의 자객무도, 거장궁주가 전한 장인도의 비전비기들……. 삼 인의 전대기인들은 천유성의 그릇을 알았기에, 그 그릇 안에다가 자신들의 심득을 모조리 전했다. 그들이 전한 것은 천년세가에 남아 있는 것에 비할 수 없이 방대한 분량이었다. 하나 수만 권의 비급으로도 전할 수 없는 것이 천년세가에는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 년에 걸쳐 무너지지 않는 집념(執念)이었다. 소년 시절, 천유성이 그리도 증오했던 천 년의 전통이 지금은 천유성의 가슴을 뿌듯하게 채울 줄이야? 그가 성숙하고 완숙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라면 그의 가문에 전해졌던 천 년의 운명이 하늘의 안배에 따라 천유성에 의해 마무리지어지기 때문일까? "대숙, 내가 돌아온 이유는 가주의 지위에 욕심을 내기 때문이 아니외다." 천유성은 의자 위의 먼지도 털지 않고 걸터앉았다. '내가 돌아온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돌아와야만 했기 때문이올시다.' 그는 천천히 팔짱을 끼며 서가를 바라봤다. 서가 위쪽에는 글이 양각(陽刻)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 왔던 글이고… 이러한 것이었다. <일천 년 걸쳐 검을 연구(硏究)한다 해도 절정지경(絶頂之境)에 돌입할 수 없는 것이 한 인간의 숙명이다. 검도무한(劍道無限)이나, 인도유한(人道有限)이도다! 천년세가는 대세(大勢)에 초월하는 가법을 지켜야만 한다.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문하제자의 수를 천 인(人)이상 거두어서는 아니 되며, 세력을 넓혀서도 아니 된다. 대세에 치중할 경우, 검도(劍道)를 잊게 되기 때문이다. 검(劍)을 이기는 자가 검을 얻는다. 검을 얻는 자, 모든 것을 이룩하리라! 그는 일검향(一劍香)이라 불릴 것이며, 춘추팔가를 지배하리라! 그가 태어나는 날, 천 년의 저주는 풀릴 것이다. 달빛(月光)을 베고, 구름(雲)과 바람(風)을 베어 버리고, 하늘(天)을 베고, 마음(心)마저 베어 버려라. 검(劍)이 나타나면 검을 베고, 운명(運命)이 나타나면 운명마저 베어 버려라.> 일천 년 전, 당시 사대마계와 격돌하다가 사지(四肢)가 잘려졌던 인물이 있었다. 그는 영웅팔가의 제일대 총사(總師)였던 영웅무황(英雄武皇) 천무검(天武劍)이라는 인물이었다. 서가 위의 글씨는 영웅무황 천무검이 새긴 글씨였다. 천 년 전의 싸움 이후, 사대마계의 인물들은 구주팔황(九州八荒)으로 퍼져 나가서 세력을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비급을 모아 팔만사천마보(八萬四千魔譜)를 완성하기에 이르렀으며, 천하도처에 마도세력을 일으키며 천하 정복의 기회를 노려 왔다. 반면, 춘추팔가라고 스스로를 전락시킨 영웅팔가의 인물들은 세력 확대를 버리고 일생을 검도의 완성에 바쳤다. 그리고 일천 년… 사대마계는 가공할 크기의 세력으로 일어났으며, 춘추팔가는 그들에 비해 천분지일(千分之一)에 불과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며 춘추팔가끼리의 교류 또한 전무한 상태였다. "스물일곱 분의 가주들은 일생을 검에 바쳤다. 그분들은 각 한 권씩의 참검기를 남겼다. 그것은 이십칠(二十七) 편(編) 유성검보(流星劍譜)가 되었으며, 나는 어린 시절 그것을 보았으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로 인해 나는 가문을 비웃으며 가문을 나섰다. 하나…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얻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미숙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의 야망을 이룩하기 위해서는이십칠 편 유성검보 안에서 절정검도를 찾아 내야 한다. 십 년이 걸리든, 이십 년이 걸리든……!" 천유성은 손가락을 써서 허리띠를 약간 느슨히 풀었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문무재 안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그의 숙부가 악마들을 부려 그를 쫓아 내려 한다 하더라도 그를 밖으로 쫓아 내기는 힘들 것이다. 낭인주(浪人洲)의 개(犬). 대체 누가 그 비위 좋은 녀석을 쫓아 낼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시작이다. 무사의 길은……!" 유성천가의 전대가주들은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검도의 극한경(極限境)을 모조리 연구한 바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빠르기와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가공할 내공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 있어 천유성은 출생에서부터 절정검도에 접어들도록 안배되어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는 태중에서부터 태교(胎敎)로 검혼(劍魂)을 얻은 바가 있다. 그의 외조부는 바로 청랑혼(靑狼魂) 백풍(白豊), 그의 외조모는 농모(農母) 천승화(千乘花)였다. 천유성은 태어나자마자 벌근세수(伐筋洗 ) 되었으며, 그의 체내에는 막대한 잠력이 흡수되었다. 게다가 그는 유랑 생활하는 가운데, 세 번의 기연을 만났다. 그로 인해 그는 세 줄기 내공을 체내로 흡수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하나로 융합한다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최상승 경지에 몰입하게 될 것이다. 그가 천년검학(千年劍學)을 새롭게 연구하기 시작하는 날, 천하의 천여 개 지역에서는 피의 폭풍이 시작되고 있었다. － 악마대본영을 섬기겠는가? － 마황야를 지존으로 섬기겠다면 살고, 섬기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구족(九族)이 죽어 버리리라! 피(血), 그리고 죽음. 천 년 전과는 달리 외부로는 소문나지 않는 비밀의 살인극이 도처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강호명숙(江湖名宿)들이 속속 죽어 갔으며, 끝이 없는 피의 궤적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전율과 공포의 밤이 거듭되었으며, 그것은 누구도 걷잡지 못할 폭풍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해(四海), 팔황(八荒), 구주(九州)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피보라로 인해 천하가 혈겁에 빠져들었다. 한데 천년세가는 묘한 분열에 휘말린 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차디찬 눈빛이다. 핏빛의 주단이 깔려 있는 서재 내부. 집기와 기물은 황궁에서도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호화찬란했으며,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소품이라 하더라도 만금(萬金)의 값을 지니고 있다. 천마원(天魔園)의 마황재(魔皇齋). 악마대본영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자세한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는 곳이다. 이 곳은 바로 마황야의 거처. 마황야는 십오 년 내내 마황재 안에서 야망을 길렀고, 그 덕에 암흑무림의 지존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창궁(蒼穹), 창 밖으로 일월의 창궁이 보이고 있다. 마황야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고, 그의 뒤쪽에는 높이가 한 길 반 정도 되는 혈옥병풍(血玉屛風)이 펼쳐져 있다. 병풍의 양면에는 십장생도(十長生圖)와 오악도(五嶽圖)가 찬란하게 수놓아져 있다. 병풍의 뒤쪽, 그러니까 오악도가 그려진 쪽이다. 한 명의 노고수가 오체투지한 채 머물러 있었다. 천마대승상(天魔大丞相). 마황야와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하나, 그라 하더라도 마황야의 진실된 모습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김없이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 육 년에 걸쳐 천하 대세를 조사해 두었는지라, 그리 큰 방해를 받지 않고 구주팔황의 남북무림계(南北武林界)를 차례차례 정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 마황야, 그는 말수가 적은 인물이다. 일반 마도계의 거두들과는 달리 문사풍(文士風)의 인물. 그는 천마대승상을 통해 명령을 내리고 천하 대세에 대한 것을 보고받고 있었다. "이러한 속도라면 반 년 안에 천하의 삼분지이(三分之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중원은… 크네.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네!" "……." "백도는 마도와 다르네. 평상시에는 분열이 되어 있으되, 대란(大亂)이 벌어지면 언제 분열했더냐 싶게 뭉치네." "그 점, 익히 명심하고 있습니다. 해서, 천하백도의 양대본산(兩大本山)을 철저히 분열시켰습니다!" "양대본산?" "첫째는 구파일방(九派一 )입니다. 그들은 암중에 비밀 결사를 만들어 사대마계에 대항하기 시작했는 바, 그들 쪽에는 십대의혈한(十大義血漢)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름하여 십화(十花)! 그들의 기세는 불사조(不死鳥) 같았으되, 수년에 걸친 파훼병법 덕에 그들은 구파일방의지지 기반을 잃게 되었으며… 며칠 전, 대혈전(大血戰)으로 인해 십화는 완전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혈전을 이끄신 분은 사몽과 폭풍. 본시 가공할 저항이 예상 되었으나, 뜻밖에도 쉽게 처리되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악마대본영의 상부자들은 백도계의 정세에 대해 백도계의 명숙들보다도 세세히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백도가 뭉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가장 빠르고 강한 자들을 구파일방에 보내 구파일방의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을 모조리 꺾어 버린 것이다. "구파일방의 십대기재(十大奇才) 명단(名單)은 탁자 위에 있습니다. 거기 이름이 적힌 인물은… 제거되어 폐인(廢人)이 되었습니다!" 탁자 위, 몇 장의 쪽지가 뒹굴고 있다. 그 중의 하나. <십화척살령(十花擲殺令) 건(件)! 제일화 국화(菊花), 만박서생(萬博書生) 하후초(夏侯楚). 제이화 포송영(蒲松英), 곤륜(崑崙) 운중일학(雲中一鶴) 군무옥(君武玉). 제삼화 영산홍(映山紅), 소림사(少林寺) 무연승(武緣僧). 제사화 동백(桐柏), 해남제일검(海南第一劍) 비검추혼(飛劍追魂) 엽상(葉霜). 제오화 금잔화(金盞花), 무산옥녀(巫山玉女) 난고(蘭姑). 제육화 수선화(水仙花), 청성(靑城) 사일신객(射日神客)…….> 십 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하단에는 이러한 글귀가 간략히 기록되어 있었다. <예상 외로 빠르게 제거했음. 백도의 주류인 구파일방은 십 년 안에는 뭉칠 수가 없을 것임!> 마황야는 그러한 글을 본 다음, 입술을 떼었다. "시신을 확인했는가?" "그… 그것은……." 천마대승상은 멈칫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확인하지 못했군?" 마황야의 눈빛이 음산해졌다. "숭산(嵩山) 근처에서 놓쳤습니다. 하나 숭산 일대에는 악마무사들이 대거 투입되었는지라, 그들은 오래지 않아 추적 살해될 것입니다.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독상(毒傷)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죽을 것입니다! 그 점만은 믿어 주십시오, 마황야." 천마대승상이 간곡히 말하자. "나는… 한 인물을 알고 있다. 창허상인(蒼虛上人)이라는 인물! 그는 지략이 대단한 인물이다. 나는 그를 알기에 사대왕야 가운데 하나를 보내 그를 꺾게 했다." "……." "창허, 그는 웃으며 죽었다. 웃으며 죽었다는 것이 불안하다." "으음……!" "하여간 주의를 계속하라. 구파일방이 깨어난다면, 천년대업이 여지없이 붕괴될 테니까!" "마황야,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훗훗… 듣지 않아도 안다." "예?" "정면으로 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사람. 자네는 내가 천지를 피로 뒤덮기를 바라는가? 중원을 얻기 위해서는 혈우(血雨)를 되도록 많이 뿌려야 한다고 믿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말이네. 마도계라면 피보라로써 정복할 수 있고, 나는 그렇게 해서 마도계를 정복했네. 하나, 백도계는 다르네. 백도계는 힘이 아니라, 지략으로 꺾어야 하네. 물론 힘이 있어야 하나, 힘만으로 아니 되네!" "속하, 마황야의 뜻은 알고 있으되 하부세력에서 불만이 비등하고 있습니다." 천마대승상의 주름살이 깊어졌다. 그는 병풍을 바라본다. 병풍의 위의 오악도는 너무나도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누구든 그 뒤쪽에 서려 할 것이다. 천마대승상도 한때에는 마황야를 베고 마황야 자리에 서려고 계획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마황야의 심복이 되었고, 마황야를 도와 천하 정복을 달성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내부에서 반역자가 생길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아네." 마황야의 대답 소리는 너무나도 차가웠다. "아… 아신다고요?" "나를 제거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음을 아네. 훗훗… 모르긴 해도 십만 정도는 나를 제거하려 할 것이네." "으음……!" "사실, 누구든 나보다 뛰어나다면 나를 벨 수 있겠지. 나의 피를 보는 자라면 나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겠지. 그러나 아직은 없네. 그리고 나는… 나를 벨 인물이 마도계에 없음을……." 마황야의 표정이 묘해진다. 절대자(絶代者)라 불릴 수 있는 자, 그의 입에서 토해지는 목소리는 실로 놀라웠다. "섭섭하게 여긴다네!" 섭섭하다니? 자신을 베는 자가 없다는 것이 섭섭하다니? "강자(强者)도 많고, 모사(謀士)도 많네. 그러나 마도계에는 진정한 영웅이 없네. 사실 천하를 정복한다 하더라도, 사대마계가 이룩한 거대한 무림기업을 제대로 경영할 인물이 있을지 모르겠네!" 묘한 침묵이 이어진다. 마도계의 거성(巨星)을 무수히 떨어뜨리고 절대자가 된 마황야, 그의 출신이 어떠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여간 그는 가장 강하고 뛰어난 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또 하나의 건(件). 그것은 새로운 돌풍에 대한 자세한 보고였다. "무맥(武脈)에 대한 세력 판도는 세세히 조사되었고, 그에 따라 하나하나 해결이 되고 있으나… 상맥(商脈)에 대한 것은 너무나도 변화막측한지라 분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공할 기세로 자신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는 한 인물에 대한 것은 아직 미궁입니다." "누구인가, 그는?" "중원대상가(中原大商家)를 일으킨 자입니다. 그는 십만거상(十萬巨商), 혹은 중원제일상(中原第一商) 황금충(黃金蟲)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본거지를 낙양성(洛陽城)에 두고 있습니다." "……!" "그는 천하의 은장(銀莊), 표행( 行), 기루(妓樓), 쾌활림(快活林) 등에 세력을 거느리고 있으며… 저희들이 방해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의 휘하세력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방해를 해도 늘어나다니?" "그는 미묘한 상술(商術)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든 이익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의 휘하로 수많은 상인들이 투신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끄는 세력은 파괴 약탈을 자행하는지라, 중원대상가는 상대적으로 상인들의 지지와 인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으음, 돌연한 가시로군. 금맥을 얻지 못한다면, 무맥을 얻는다 하더라도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인데!" "그렇습니다." "십만거상이라는 자를 일급(一級) 암살(暗殺) 대상으로 올리게." "이미 일급 암살 대상에 올렸습니다. 그를 죽이기 위해 삼천 명의 무사들이 낙양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를 찾지 못했습니다. 중원대상가를 포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마황야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껏 승승장구해 왔던 인물, 하나 그는 천천히 실패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긴 대륙은 너무나도 넓고 깊은 곳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의 건. 그것은 묘한 이단자들에 대한 비밀 보고였다. <풍방(風 ). 숫자 이백팔십(二百八十). 우두머리, 신풍인자(神風忍者) 고검랑(孤劍郞). 청부할 경우 누구든 암살해 버림. 그들이 백도계와 유착한다면, 사대마계의 요인(要人)들이 암살될 가능성이 충분함!> 풍방은 동영의 세력이며, 중원으로 이주해 온 이후 차근차근 힘을 모아서 중원의 자객도(刺客道)를 정복했다. "혈접혼이 풍방의 괴멸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빠르고 은밀한지라, 좀처럼 제거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통촉해 주십시오." 천마대승상은 은근히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마황야의 대답은 뜻밖에도 태연자약했다. "그들은 이기적이네. 그러한 이상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천년대업에 방해가 될 수 없을 걸세!" "아……!" "하나 그대로 둔다면 위험을 하시(何時)라도 야기할 수 있을 것이니, 순찰들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철저히 추적하게!" "예!" 천마대승상은 허리를 넙죽 숙였다. 이어, 그는 또 하나의 미혹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년 유배에서 돌아온 제사왕야의 행동이 하부세력에 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태양혼 말인가?" "그분은… 울지 않는 새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울지 않는 새! 몹시 미묘한 별명이다. "한 번도 무공을 나타내지 않고 있으며, 늘 술에 취해 살고 있습니다. 그분은 폐인이 되었다고 소문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분을 왕야 지위에서 하야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습니다!" "훗훗… 그것이 이상한가?" "……?" "나라도 울지 않는 새가 될 것이네." "예?" "놈은 가장 뛰어난 기재이네. 마도제일의 천재이지. 놈이 재간을 보인다면, 적어도 이 인(人)이 그를 죽일 것이네." "대체 누가……?" "하나는 폭풍혼, 또 하나는 바로 본좌!" "아아……!" 천마대승상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울지 않는 새, 태양혼. 그는 마도세력 내부의 미묘한 변수(變數)였다. 그는 철저한 감시 가운데 머물러 있으며, 하루 십이 시진 내내 감시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아는 듯 움츠러 들었으며, 그로 인해 사대마계의 고수들은 그를 폐인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창궁이 묵궁(墨)으로 화해 간다. 사대마계에는 무수한 인원이 있으며 그들이 행하고 있는 일은 수천 가지에 달하는지라, 그 중 중요한 일만 이야기하더라도 하루 해가 지나가는 것이다. "천마화(天魔花)는?" 마황야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이제까지는 육성(肉聲)으로 이야기했는데,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천마대승상 또한 전음으로 말을 받았다. "모든 준비가 차근차근 진행이 되었습니다. 백팔 종 영약(靈藥)이 한 곳에 모였으며, 십대 무공교두(十大武功敎頭), 그리고 이십사마약사(十大魔藥師)가 모두 모였습니다." "으음……!" "한 달 안에 나머지 준비가 완전히 끝날 것입니다." "……." "천마화를 피어나게 하는 계획은 철저한 비밀 가운데 완수되고 있습니다." 천마화! 그것은 암호(暗號)이고, 사대마계와 악마대본영을 통틀어 가장 비밀스러운 이름이었다 사대왕야라 하더라도 그 이름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천마화! 피어나서는 아니 되는 악마의 꽃이다. 마황야라 하더라도 피어나게 하는 것을 주저할 정도로 공포스러운 악마의 꽃, 천마화. 그것은 최후의 운명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천마화의 대상으로 마황야께서 직접 선출하신… 강호여인(江湖女人)에 대한 것은 이미 세세히 조사되었습니다!" "으음……!" "명하신다면 이틀 안에 이 곳으로 납치되어 올 것입니다. 그녀는 황족(皇族)으로 초령군주(草玲君主)라 불립니다. 하나, 그녀의 측근 인물들은 그녀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석화(石花)라는 이름으로……!" 석화! 석화가 마황야와 천마대승상 사이에서 거론이 되다니? 침묵이 더욱 짙어진다. 마황야는 묘한 번뇌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그는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천마화는 피어나서는 아니 되네. 그러나 어쩌면… 천마화가 피어나야만 할지 모르겠군. 그래야 내가 이룩하는 천년기업에 진정한 후계자가 나타날 테니까!" 그의 목소리는 꽤나 나직했기에, 천마대승상은 내공을 십 성 일으켜서야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밤이 깊어 가면 호흡 소리는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천마대승상은 실로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최후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속하, 한 가지 깊은 고뇌(苦惱)가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천하 대세를 가늠하는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또한 황야께서 그 일에 대해 등한히 여긴다 여기기에, 감히 직언(直言)을 하고자 합니다. 목을 걸고서……!" 그가 조금 두려운 표정으로 말할 때. "훗훗… 아네." 마황야의 대꾸는 의외로 담담했다. "아… 아시다니요?" "대승상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안다네." "예에? 아신다고요?" "그대는 춘추의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춘추, 바로 춘추팔가를 말한다. 사대마계보다도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가문. 사대마계의 준동을 천 년에 걸쳐 방해한 의협의 화신이다. 춘추팔가와 사대마계와의 싸움이야말로 지난 천년무림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승상은 본좌가 수수방관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그들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물론이지. 그리고 이미 본좌는 그 점에 대해 만반의 대비책을 세워 두었다." "예?" "이미 일천(一千)이 갔다. 그 곳으로……!" "오오……!" "그들은… 그들의 대표자가 나타날 경우, 일각 안에 그 자를 척살하도록 안배되어 있다!" "그… 그럴 수가? 이미 그러한 안배가 되었을 줄이야……?" "후후… 신화는 없다. 춘추팔가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들은 십오 년 전에 붕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십오 년 전, 그들은 내란(內亂)에 휘말려서 세력의 오분지사(五分之四)를 잃었다." 마황야, 그는 정녕 철저한 인물이었다. 그는 순찰당을 친히 이끌고 있는 천마대승상도 알지 못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천마대승상도 알지 못하는 십여 종류의 친위세력을 거느리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 "아……!" "물론 하나의 인물이 태어날 확률은 있다. 그 곳 역시 물이 깊은 곳이니, 한 마리 대어(大魚) 정도는 나타날 수 있겠지. 그러나… 그뿐이다!" 마황야는 분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한란(寒蘭)의 잎을 조심스레 매만지는 마황야, 그의 입술 사이에서는 실로 무자비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일 인(人)으로 인해 천하(天下)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신(神)이 아닌 이상……!" "또한 그가 만에 하나, 신이라 하더라도… 그는 제거된다. 그는 나타나지 않아야만 하리라!" 폭풍의 밤. 이 밤은 하나의 숙명을 만드는 가운데 깊을 대로 깊어 갔다. 第10章 침묵의 벽(壁) 팔 일의 새벽은 짙은 안개 가운데 시작이 되었다. 천년세가 내부에서 일어난 풍운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는데도 침묵은 오히려 깊어만 갔다. 가히 소리 없는 폭풍이라 할 수 있다. 세가의 외곽에 겹겹이 절진(絶陣)이 설치되었으며, 무수한 기관이 새로이 보강되었다. 풍운의 핵은 역시 문무재였다. 문무재 둘레는 십 수 겹의 검진(劍陣)에 의해 포위된 상태이다. 절정의 기량을 지닌 무사들이 시선을 문무재의 굳게 닫힌 문에 고정시킨 채 천유성이 나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하천류검진(九河天流劍陣)! 아홉 명이 한 조를 이뤄 소검진을 만들고, 소검진 아홉이 모여 이룩되는 공격 일변도의 검진이다. 누구든 검진에 걸리게 되면 팔십일 명의 차륜공세에 휘말려 방향을 잃게 된다. 대폭풍검세(大暴風劍勢). 검진은 주로 쾌검수(快劍手)들로 이루어진다. 이들의 발검은 여느 고수들보다 두 배 이상 빠르기에, 검세가 휘몰아치면 무지막지한 검기(劍氣)의 폭풍 속에 빠져들게 된다. 환환무영검진(幻幻無影劍陣). 유령환궁에서 만들어졌다는 환검술(幻劍術)에 기초를 둔 검진이다. 무영신행보(無影神行步)로 상대의 감각을 마비시킨 다음, 사혈을 점한다. 문무재 내부. 천유성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빗어 넘기며 한 잔의 차를 들고 있었다. 도합 일곱 평의 장소. 서실(書室) 하나 다실(茶室) 하나가 딸려 있으며, 약실(藥室) 하나가 부속되어 있는 전형적인 문사의 방이다. 천유성은 외부의 소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난 칠 주야 내내 이십팔 편의 유성검보를 정독하였고, 지금은 그의 아버지가 저술한 서적을 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검도를 연마하는 사람이 닦아야 하는 심성(心性)에 대한 것이 기록이 되어 있었다. 또한 책의 말미에는 어제 저녁부터 천유성의 눈길을 끄는 글귀가 기록이 되어 있었다. <바람(風)과 불(火)과 물(水)과… 대지(大地)를 모르고 지낸 천 년의 성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우친 지금… 죽음에 이르렀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유성이 나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가 사대검도(四大劍道)를 얻기 바라기보다, 얻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정녕 힘든 숙명이기에! 가문의 율법을 어기고서라도 그가 검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를! 침묵지벽(沈默之壁)이 붕괴되지 않기를! 천년성(千年城)이 지하(地下)에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람과 불과 물과 대지, 그리고 침묵의 벽. 천유성은 그것을 입 안으로 거듭 되뇌었다. '풍화수지는 바로 네 가지 기운을 뜻한다. 설마… 그것은 우리 가문에서 창조된 지혜사대검도(智慧四大劍道)의 통합(統合)을 뜻하는 것이란 말인가?' 천유성은 손가락에 걸고 있는 찻잔 안의 찻물이 차게 식는 것도 알지 못했다. "바로… 그것인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굴 반면을 덮고 있으며, 가끔 반짝거렸던 눈빛은 몇 시진 내내 흐릿하게 침잠이 되었다. 호흡과 맥박마저 정지가 된 듯, 천유성은 하나의 석상(石像)으로 화해 가고 있었다. 지난 천 년 간 사대마계와 춘추팔가는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지내기보다, 수백 차례에 걸쳐 격돌한 바가 있다. 대접전은 한 번도 없었으나 사대마계와 춘추팔가의 영웅들은 '지금이 때다!' 외치며 검을 쳐든 바 있었다. 그러나 상대를 찾아나섰던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제거가 되었다. 패자는 있되, 승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사대마계의 마학과 춘추팔가의 신공은 그 위력이 완전히 같았기에… 부딪치면 양패구상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 유성천가의 인물들만은 움직인 바가 없다. 유성천가는 춘추팔가 내부에서도 이단자로 불릴 정도로 폐쇄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그러한 고집과 전통으로 인해 유성천가의 검도는 천 년 전에 비할 수 없이 상승이 되었다. 그 가운데의 지혜사대검도(智慧四大劍道). 섬전(閃電)… 풍검도(風劍道). 가장 빠른 검초를 구사하는 검도이다. 초식의 구사는 아예 필요하지 않다. 섬전풍검도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빠르다는 것이다. 초식 변화가 필요 없는 이유는, 초식 변화가 있을 경우 검초의 빠르기에 저해가 되기 때문이다. 좌(左)에서 우(右)로, 혹은 상(上)에서 하(下)로 끌어 나가는 단선(單線)의 검도(劍道).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팔목에 천 근(斤) 무게의 강철 팔찌를 찬 채 생활해 나가며 출수(出手)의 쾌속함을 터득해야 한다. 하나, 천유성은 이미 그것을 터득한 셈이었다. 그것은 바로 월광무(月光舞)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월광무와 섬전풍검도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섬전풍검도는 정지된 상태에서 움직이는 적을 베는 비결이며… 월광무는 움직이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적을 베는 비결이라는 것뿐이었다. 검도에는 국경도 없고, 사문 내력의 차이도 없는 것일까? 유성천가에서 천 년 간 전승되어 온 사대검도 가운데 한 가지와 동영무도계의 제일검도와 판에 박은 듯 흡사하다니……. 두 번째의 검도의 위력은 섬전풍검도의 배에 달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론(理論)일 뿐, 실현된 바가 없다. 축융(祝融)… 화검도(火劍道). 검세(劍勢) 가운데 막대한 화력(火力)을 뿜어 넣는 패도적인 검도로서, 그것을 시전하게 되면 전후좌우가 불바다에 휘어 감기게 된다. 그것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순양동자공(純陽童子功)을 터득해야 하고, 어떠한 사기(邪氣)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혜의 저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또한 축융화검도를 시전하기 위해서는 가공스러운 열기(熱氣)를 폭출시키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화기(火氣)에서도 손상이 되지 않는 내외공(內外功)을 겸비해야 한다. 그 점에 있어, 천유성은 축융화검도를 시전하는 데 장애가 없다 할 수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신비로운 지위라고 하는 거장궁주의 지위와 더불어 천유성은 하나의 대법을 연성했다. 오행형의불멸대법(五行形意不滅大法). 거장궁주가 죽으며 그의 체내에 불어넣은 진기는 가히 일천년지공(一千年之功)에 달한다. 그것이 기경팔맥으로 융화되어 나간다면 천유성은 초식을 구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능히 구주(九州)를 힘으로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축융화검도를 시전한다 하더라도 내력의 손실을 입지 않으리라. 세 번째 검도. 감리(坎離)… 수검도(水劍道). 가장 변화로운 초식이다. 그러한 초식 구사는 미학(美學)의 경지를 돌파한 것으로, 내공이 아무리 강한 자라 하더라도 감리수검도에 접하게 되면 손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 극유(極柔)한 검도이고, 만 가지 초식 변화가 동시에 펼치어진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회전해 나아가는 무수한 초식. 그것은 이십대 가주 대에 이르러 완성이 되었다. 마지막 검도. 지(地)… 대지검도(大地劍道). 그것이야말로 천년세가에 남아 있는 만 가지 무공 가운데 최고의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대마계의 마공을 격파하기 위해 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절대 절정의 검초, 대지검도. 그것을 완성한 인물은 천유성의 조부이며, 유성천가의 이십오대 가주인 천광지(天光志)였다. 그는 검식을 완성했으되, 검을 잡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차(茶)와 꽃(花) 가운데서 일생을 보낸 바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여생을 바쳐 춘추검사(春秋劍史)를 기록하였고, 그 안에는 춘추팔가와 사대마계사의 크고 작은 싸움이 모조리 기록이 되고 있었다. 천광지는 유성천가를 혁신한 인물로, 그는 문하제자들의 수를 최소한도로 제한하였으며… 문하제자들이 검(劍)보다 서적을 가까이 하게 한 인물이었다. 사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유성천가와 다른 춘추칠가와는 교분이 깊었으나, 천광지의 괴이한 행각으로 인해 유성천가는 춘추칠가와 격리가 되고 말았다. 천광지는 천유성이 태어나던 해에 죽었다. 그는 갓 태어난 천유성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 이 녀석의 눈은 정말 아름답고, 무서운 눈이다. 유성의 빛을 닮은 눈… 모름지기 이 녀석은 천하에서 가장 고약한 성격이 되리라. 좋아, 이 녀석을 유성(流星)이라고 이름짓겠다! 천광지는 천유성이 가장 흠모하는 인물이었다. 천유성은 그가 저술한 모든 서적을 외우고 있으며, 그가 수집한 천하각지의 비서들을 한두 차례씩 모조리 본 바가 있다. 그런데 지금 새삼스럽게 그의 존재와 그의 심득(心得)이 가슴 가득 파문을 일으킬 줄이야……. "가문의 어르신네들 가운데 검을 취하지 않은 분은 그분뿐이다. 그것은 바로… 그분만이 검을 버리는 경지에 도달한, 진정한 절세검호(絶世劍豪)이시기 때문일 것이다." 천유성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거기 가 봐야만 한다. 조상들이 모조리 묻힌 곳, 그리고 가문의 최후 비밀이 존재하고 있는 곳. 혜성 대숙조차 알지 못하는 천년제일의 신비지. 이제는… 그 곳에 갈 자신이 있다.' 천유성은 천천히 신형을 일으켰다. "얻거나 죽겠으되, 후회는 없다." 그는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채 성큼성큼 문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가주만이 알게 되는 장소… 바람과 물과 불과 대지가 한데 엉키어 있다는 장소, 검을 얻지 못하는 자라면 꼭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 들어서면 나올 수 없기에 오직 한 번만 들어설 수 있다는 곳……." 천유성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고 문이 저절로 열렸다. 바로 그 순간. "나선다!" "막아라!" 사방에서 호통 소리가 터져 나오며 돌연 검은 회오리바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스물네 방위에서 돌개바람이 일어나서 문무재 쪽으로 몰아쳐 나가기 시작했다. 폭풍이 일어나며 수백 개의 그림자가 천유성 쪽으로 떠올랐다. 문무재 주변을 포위하던 열다섯 개의 검진이 동시에 발동하면서 천유성의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쓰러뜨려라!" "우우……!" "무조건 막아야 한다!" 파파파팟－! 백여 자루 검이 검화(劍花)를 번뜩이기 시작했다. 동서남북 사방이 검벽(劍壁)에 가로막혔고, 금석을 가루로 바수어 버리고도 남음이 있는 위맹한 잠력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구하천류검진, 대폭풍검세, 환환무영……. 하나같이 가공할 검진들이다. 천지사방이 검의 폭풍에 휘말렸으며, 검기는 뇌전으로 화해 천유성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천 년의 세가 유성천가. 검의 전통을 수호하며,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유성세가에 초유로 일어난 가주 쟁탈전. 막힌다면 천유성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가주의 지위는 그 순간 천혜성에게 넘어갈 것이고, 천유성은 진짜 낭인의 길로 떠나야 할 것이다. 빛살처럼 떨어지는 검기(劍氣). 화려한 꽃술을 피운 수만 송이 검화(劍花)! 한 걸음만 움직인다면 수백 자루의 검이 그를 난자할 듯 달려들 것이다. 그러나 천유성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입가에 치기 어린 웃음을 떠올리면서 오른손을 허공 중으로 그어 가기 시작했다. 보라! 그의 손이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한 치, 두 치, 세 치……. 그의 손은 정확히 삼 촌(寸) 이동했다. 그리고 그 간단한 움직임으로 인해 일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던 폭풍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체 이럴 수가? 투둑－ 툭－! 속속 날아올랐던 괴무사들이 인상을 찡그린 채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검을 미끄러뜨리며 떨어져 내리는 자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들이 왜 마비되어 버리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말았다. "예의는 있는 친구들이로군? 길을 내주다니……." 천유성은 뒷짐을 진 채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구깃구깃한 백포 자락이 바람에 나부꼈고, 머리카락이 춤추듯 너풀거리는 가운데 흘러내려 얼굴 반면을 뒤덮었다. 문무재 일대의 무사들은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여섯 노인, 다섯은 남자이고 하나는 여인이다. 그들은 검은 안개에 휘어 감긴 채 대전 지붕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천유성이 일 식을 발휘해 백여 무사들을 쓰러뜨리며 이동해 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본 듯했다. 누가 외치는 것일까? 욕설 섞인 목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고집스런 유성천가에서만이 용(龍)이 나타나다니… 우라질! 유성천가는 천 년 전에도 맹주(盟主)였는데, 지금도 맹주가 된단 말인가? 힘이 다 사라진 줄 알고 왔는데, 한 마리 용이 불쑥 나타나다니……!" "ㅋㅋ… 고약한 녀석이네. 천유성이라는 놈은! ㅋㅋ… 놈은 타파의 무공을 익히고 있네. 율법에 의해 놈은 무공을 폐쇄당하고 기억을 제거당해야 하네. 하나, 놈이 모든 것을 얻는다면… ㅋㅋ… 지긋지긋한 천 년의 율법은 그 녀석으로 인해 깨어지게 되겠지. 그럴 가능성은 백분지일(百分之一)이나, 어쩐지 그 희박한 확률을 걸고 도박을 하고 싶군." "하여간 용의 가문(家門)이다. 이 곳은……!" "천유성은 방금 전 수미혜검(須彌慧劍)을 일으켰다. 그것은 최상승 검도이며, 천혜성도 얻지 못한 검도 비결이다. 다시 말해, 천유성은 이미 천혜성을 월등히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휘이이잉－! 검은 안개는 보다 짙어졌다. "뛰어난 녀석! 그러나 지금은 참아야만 한다." "네게 뼈저림을 주어야 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모두 숙명일 것이다." 여섯 괴인,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문무재에서는 북방으로 십오 리. 그 곳은 언제나 뿌연 안개에 덮여 있기에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곳이다. 안개는 특이한 지형지세와 기이한 절진으로 만들어졌는 바, 파진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백 년을 헤매도 안으로 들어설 수 없다. 그 곳은 가주만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였다. 그 곳, 하나의 거벽(巨壁)이 세워져 있다. 암석의 벽이 아니라 강철의 거벽이다. 표면이 매끄러우며, 그 위 삼라만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천유성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그 곳으로 다가갔다. <침묵(沈默)의 벽(壁)> 벽은 천 년 전에 세워졌다. 그 벽 아래에는 오천여 구의 시신이 누워 있으며, 그들은 바로 사대마계를 막기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바친 영웅계의 무사들이었다. 그 자리는 영웅팔가가 춘추팔가로 개명이 된 장소이며, 춘추팔가의 여덟 총사들이 천 년을 기약한 맹세의 자리이기도 했다. <춘추팔가는 힘이 같기에 늘 분열이 된다.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한 명의 절대자가 탄생되어야 한다. 출신 가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가문마저 지배하는 인물! 그는 영웅총사(英雄總師)라 불릴 것이며, 일검향(一劍香)이라 불릴 것이다!> 벽면에는 스물일곱 개의 검흔(劍痕)이 파여져 있다. 그리고 천여 개의 장흔(掌痕)이 찍혀 있으며, 무수한 도흔(刀痕)과 지인(指印)이 새기어져 있다. 검흔, 지인, 장흔은 각기 깊이가 달랐다. 어떠한 것은 구백여 년 전에 찍혔고, 어떠한 것은 이십 년 전에 찍혔다. 가장 깊은 것은 팔십 년 전에 천광지가 새긴 검흔으로, 그 깊이가 무려 삼 장(丈)에 달했다. 천유성의 아버지가 남긴 검흔도 침묵지벽 위에 남아 있었다. 침묵지벽이란 춘추팔가의 인물들이 세월을 격해 비무(比武)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춘추팔가의 가주가 되는 인물은 율법에 따라 침묵지벽 앞에 와서 자신의 무공을 펼쳐야만 한다. 무공 시전은 어떠한 형태이든 흔적을 남기게 되고, 그 흔적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쓰으으… 쓰으으……! 바람이 불어닥칠 때, 천유성은 연달아 열다섯 개의 검진을 격파하며 침묵의 벽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침묵의 벽 일대에는 지키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짙은 안개만이 앞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천유성은 가주만이 알고 있는 파진도에 따라 침묵의 벽 앞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저 벽의 권위를 이겨 내지 못했다!" 천유성은 망막 가득 침묵의 벽을 담아 넣고 있었다. "춘추팔가의 모든 인물이 저 벽의 권위로움 앞에 무릎을 꿇었으며, 그로 인해 춘추팔가는 깨어나지 못했다." 천유성의 눈빛이 오색광망(五色光芒)을 토하기 시작했다. 거장궁주가 전한 오행형의공이 눈빛을 타고 폭사해 나오는 것인가? "저 벽은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합금(合金)으로 자금사(紫金砂)와 설화빈철(雪花賓鐵), 그리고 만년한철(萬年寒鐵)로 이루어졌다. 저 벽은 천 년 전 붕괴된 영웅팔가 전 고수가 지니고 있던 병장기(兵仗器)를 모조리 녹여서 만들었으며, 무게는 백오십만 관(貫)에 달한다." 저벅－ 저벅－! 천유성은 족인을 찍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과거, 나는 저 벽을 깰 자신이 없어 가문을 떠났던 것이다." 우우웅……! 그의 모공에 막대한 힘을 지닌 잠무(潛霧)가 뿌리어지기 시작했다. 보라! 그의 몸 외부로 검영(劍影)이 일어나는 것을. 천유성은 자신의 몸 안에 스미어 있는 모든 종류의 잠력을 한꺼번에 격발시키며 벽을 향해 다가갔다. 콰아아－ 콰아아－! 벽은 뿌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천유성은 일 보 일 보 내디디는 가운데 막대한 압력에 사로잡혔다. 그가 진기를 일으켜 내면 침묵의 벽은 그보다 세 배 더 거대한 힘으로 반탄력(返彈力)을 발휘해 냈다. 마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천유성이라는 존재를 붕괴시키겠다는 듯이……. 콰쾅－! 해일로 밀어닥치는 암경. 천유성이 거장궁의 불사의 외공을 얻지 못했다면 오장육부가 아스러지는 고통을 맛보았을 것이다. "천 년의 율법… 나를 죽이기 바란다.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내 손 아래 네가 무너질 테니까!" 쿵－ 쿵－! 천유성은 보다 큰 걸음으로 다가갔으며, 그의 얼굴은 불붙어 타오르는 숯덩어리처럼 시뻘개졌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폭발해 버릴 듯 팽창하기 시작했으며, 도저히 뒤섞일 수 없는 네 줄기 잠력이 한꺼번에 폭출되어 사지백해(四肢百骸)로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콰쾅－ 쾅－! 일대는 가공스러운 폭풍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침묵의 벽을 보호하기 위해 매설된 기문진세가 한꺼번에 모든 위력을 발출하기 시작하며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땅거죽이 쩌억쩍 갈라졌으며 십여 리 안이 뿌리째 뒤흔들리는 가운데, 거석(巨石)이 바람에 휘말려 훌훌 날아올랐고…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거목(巨木)이 뿌리째 뽑혀 날아올랐다. 콰르르르릉－ 콰쾅－! 천지혼돈, 천지개벽! 이러한 일은 천 년 간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춘추파천황진(春秋破天荒陣)이라 불리는 진세는 천유성의 도전(?) 가운데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우두둑－ 우둑－! 천유성의 몸뚱이는 도끼에 맞아 바수어지는 나무 조각 마냥 둔팍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극심한 고통을 느낄 뿐이지, 가벼운 찰과상도 입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바람을 쪼개며 치솟아 오르는 천유성. 보라! 그의 몸뚱이를 뒤덮는 한 마리 거룡(巨龍)의 형상을. 유성이 흘러가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천유성! "우우……!" 하늘과 땅이 뿌리뽑히는 듯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천유성의 몸뚱이는 거대한 벽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우지끈－ 콰쾅－! "나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이겠소!" 천유성의 외침 소리일까? 포효 소리가 터지는 가운데, 실로 믿어지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쩌어어억－ 쩍－! 대체 이럴 수가? 천 년 전에 건립이 된 침묵 벽이 수직으로 쪼개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꽈악 닫혔던 문이 열리는 듯한 광경이 시작되며 천유성은 몸 속으로 스미어 드는 황홀한 금빛 광채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꿈이리라. 가문의 최고 보물을 파괴한 자신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광채가 다가서다니? 뇌성은 쉬지 않고 이어지면서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침묵 벽을 중심으로 한 방원 오백 장 안은 완전히 함몰이 되었으며, 땅바닥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기관 돌아가는 소리와 더불어 거대한 무쇠의 벽이 지하에서부터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삼십여 장 높이의 철벽(鐵壁)이 치솟아 올랐으며, 철벽 일대로 회오리바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천동지할 폭음이 세 시진 내내 거듭되는 가운데, 유성천가의 북쪽에는 너무나도 웅장한 하나의 성(城)이 세워지고 있었다. 보라! 성문 높이 걸리어 있는 하나의 현판(懸板)을. <영웅팔가(英雄八家)> 천년성(千年城)! 일천 년 전, 오천 무사에 의해 육십 년 내내 세워졌으며… 세워진 그 날, 지하 깊이 사라진 성이다. 성은 기관장치에 의해 나타나도록 안배가 되어 있으며, 성을 지상으로 치솟케 하는 기관은 바로 침묵 벽의 파괴였다. 그것이야말로 아무도 알지 못했던 영웅팔가 최후의 비밀이며, 최후의 안배였다. 쿠쿠쿠쿠쿵－!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지는 듯하다. 길이가 십 리(里)에 달하는 성곽이 지표 외부로 돌출되는 가운데, 일대는 이전에 비할 수 없게 격한 폭풍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보다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대무비한 성은 폭풍우(暴風雨)에 휘말리기 시작했으며, 그 어떠한 것도 성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천년성, 그 곳은 바로 일천 년에 걸친 춘추팔가 가주들의 무덤이며… 누구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지(不歸地)였다. 한데 성곽이 천 년 만에 치솟아 오르다니? 운명의 안배는 그 어떠한 바람(風)이 되어 흘러가는 것인가? 2권에서 계속됩니다 제목: 천년세가 제2권(전3권) 지은이: 서효원 - 차 례 - 第1章 깨어나는 신화 第2章 영웅무정 일검향, 그가 나타났다 第3章 이제 시작이다 第4章 소림(少林), 잠자는 거인(巨人) 第5章 패배의 뜻은 第6章 무림을 떠나 다오 第7章 바람의 형제들 第8章 무림혈서(武林血書) 第9章 침묵의 검도(劍道) 第10章 난세(亂世)의 야망 第11章 대상인(大商人) 第1章 깨어나는 신화 성(城)은 잠들지 않은 채 천 년을 보냈다. 그 곳은 춘추팔가의 가주들이 죽기 전 찾는 장소였으며, 외부인이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연무관(練武關)이었다. 다시 말해, 지난 일천 년에 걸쳐 춘추팔가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최후로 방문했던 장소가 천년성이었다. 그것은 천년율법의 마지막 율법으로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춘추팔가의 가주가 되는 자는 죽음이 다가서거나, 더 이상 이룩하지 못할 무공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경우 하나의 장소를 찾아야 한다. 그 곳은 바로 십만대산의 침묵지벽! 자세한 것은 그 곳에 있다.> 천 년에 걸쳐… 정확히 말한다면 천구십오 년(年)에 걸쳐서 무수한 인물들, 정확하게 칠천구백팔 인(人)이 침묵지벽 앞에 왔다. 그들은 제각기 절학을 발휘해 벽에 흔적을 새겼으며, 벽이 깨어지지 않을 경우 자신의 무공이 완성되지 못한 것을 참회하면서 침묵지벽 아래의 암혈을 통해 천년성으로 들어섰다. 천유성은 칠천구백구 번째의 방문자였으며, 처음으로 침묵지벽을 깨뜨린 인물이었다. "이것이 운명인가?" 천유성은 넋 나간 표정을 지으며 앞을 바라봤다. 운명의 이단자, 천유성. 그가 들어서게 된 장소는 천 년 간의 무수한 방문자들이 한 번도 들어서지 못했던 총사대전(總師大殿)이었다. 천년율법이 만들어진 장소이며, 춘추팔가의 인물들은 한 번도 들어서지 못했던 장소였다. 천유성은 춘추팔가의 경지를 초월한 인물이기에, 운명과 가법의 안배에 따라서 총사전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천 년의 시련은 끝이 났다. 그대… 모든 것을 얻고 영웅팔가를 부활하거나, 그대의 대에 이르러 춘추팔가가 영원히 무너지게 되리라!> 실로 놀라온 글귀이다. 그리고 그 것이야말로 천 년에 걸쳐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운명의 안배였다. 영웅총사를 기다렸던 글귀들, 그것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영웅팔가의 무예가 모두 여기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얻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대마계에 이미 완전 노출되어 장단(長短), 허점(虛點)이 노출된 것이기에! 여기 들어선 자는 그것을 격파하는 경지에 도달한 후에야 출도(出道)할 수 있다.> 천유성은 오랜만에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린 소년처럼 전체적으로 탈진한 인상이다. 그는 대리석전(大理石殿) 안에 머물러 있는 셈인데, 사면 벽에는 서가가 마련되어 있으며 서가 위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의 종류는 일백팔 종. 그것은 영웅군검도(英雄群劍圖)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영웅팔가의 무공 가운데 가장 강한 일백팔 종 비기였다. 그 위력은 소림사 칠십이 종 절기보다 두 배 이상씩 강했으며, 그 가운데 반수 이상은 춘추팔가에는 전해지지 않은 실전비기(失傳秘技)였다. 천 년 전의 결투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는 무수하다. 당시의 싸움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보다도 격렬했으며, 영웅팔가와 사대마계의 대표적 고수들은 그 싸움 가운데 구 할 이상 쓰러져 죽었다. 그 덕에 양 파의 가공스러운 무공은 모조리 실전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웅군검도 안의 백팔 절학을 터득하기는 쉽다. 하나, 그것을 격파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을 격파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천년성 안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 안에는 절세신공을 터득하기 위한 모든 안배(按配)가 되어 있다. 백 명의 무사가 백이십 년 간 머물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천유성은 한 권의 서책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건축도해(建築圖解)로서 이 성이 세워지고 나서 만들어진 서책이었다. 성은 풍운대성(風雲大城)으로 불리며, 아흔아홉 개의 대전(大殿)과 구백구십 개의 소전(小殿)으로 형성되어 있다. 또한 기관장치가 한 번 발동이 된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천년성 외부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모든 기관을 내공으로 부숴 버리는 것이다. 하나의 방. 그 안에는 무수한 관(棺)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천 년 내내 여기 들어와 죽은 춘추팔가의 거두들이 방금 전에 죽은 듯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관은 만년온옥(萬年溫玉)으로 만들어졌기에 천 년이 지난다 해도 시신은 죽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 너무나도 원통한 나머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자들, 그들이야말로 천년법을 실천한 장본인들이라 할 수 있었다. 춘추팔가의 역대 가주들은 천 년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으며, 침묵의 벽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통감하며 생을 마감해야 했다. 너무도 숙연한 분위기다. 천 년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었다. 천유성은 말할 수 없는 경건함 가운데 방 안을 돌아다녔으며, 한 곳에 이르는 순간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아 내고야 말았다. 두 개의 관이 놓여 있는 곳은 유성천가의 가주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관에 누워 있는 두 사람. 한 사람은 두 팔을 깍지끼어 가슴 위에 얹어 놓고 죽어 있는 인물이며, 또 하나의 인물은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기품 있는 인상을 지니고 있는 청수한 중년문사였다. "할아버지… 아버지……!" 천유성은 철부지처럼 눈물이라는 액체로 뺨을 적시고 있었다.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은 그의 조부와 그의 선부였다. 천유성은 시신을 향해 절을 했고, 입 안으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얼마 후, 그는 조부와 선부의 시신에서 다른 여타한 시신에는 없는 이상한 흔적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웃다니? 두 사람의 시신은 웃는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특히 천유성의 아버지는 실로 짙은 웃음을 입가에 짓고 있었다. 그 또한 두 손을 깍지끼듯 모은 채 가슴 위에 얹어 놓고 있는데, 한 장의 쪽지가 거기 쥐어져 있었다. "쪽지라니?" 천유성은 흠칫 놀라며 쪽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본시 시체가 되면 살이 경직되기 마련인데, 유성천가를 이끌었던 그의 손가락은 너무나도 부드럽게 펴졌다. 한 장의 쪽지. 그 안에는 글씨가 적혀 있었는데 너무나 놀랍게도 천유성 자신이 거론되어 있었다. <믿는다. 네가 나의 글을 보기를! 유성, 나의 아들아! 적어도 너는 죽기 직전 이 곳을 찾지 않고, 정문(正門)을 통해 여기 들어와 나를 발견하기를 믿는다. 너는 뛰어난 녀석이니까!> 아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버지라던가? 그는 자신의 아들이 최초로 침묵벽을 파괴한다는 것을 죽는 순간까지 믿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의 웃음이 그리도 자연스럽지는 않았으리라. <아버지는 천재(天才)이지 못했다. 그래서 무가(武家)의 위대한 유산은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 하나, 아버지는 확신하고 있다. 그 어떠한 조상들보다도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고집불통에 반항기가 많은 네녀석, 유성이다. 네게 말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 남자의 눈물은 용루(龍淚)이니… 값싸게 보이지 말라는 것과, 네 손 아래 천 년의 저주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 아버지로서 네가 무사(武士)가 되어 혈전을 시작하는 것을 예측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무업(武業)이란 가장 고독(孤獨)하고, 가장 힘든 업이기에……!> 천유성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그는 실컷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 년에 걸쳐 이룩된 거대한 무덤 안에는 춘추의 일가(一家)를 맡아 오다가 침묵벽을 찾아왔던 영웅들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춘추팔가의 선조들의 진전이며 영약, 병장기를 자가(自家)에 남기지 않고 한 장소에 남긴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 사대마계가 춘추팔가의 웅비(雄飛)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천 년에 걸쳐 춘추팔가의 모든 것은 마치 작은 강이 바다로 모이듯이, 천년성 안으로 고스란히 모아진 것이다. 무수한 영약(靈藥)과 기진이보(奇珍異寶), 병장기(兵仗器), 천하 각대방파의 인물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 천년성 안에는 지난 일천 년 간의 무림에 대한 모든 것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대소방파의 흥과 망, 위대한 무사(武士)들의 업적과 비밀 내력들, 천하무림계의 세밀한 계보도와 각대방파의 세력도가 수만 권의 책 속에 담겨 있었다.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문파도 있었고, 아직까지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문파도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사대마계와의 대전을 위해 사용할 각종 병장기들이 병가에 진열돼 있었으며, 그 때를 위해 사용할 무수한 황금들이 창고 하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엄청난 물건은 천하각지에서 수집이 된 막대한 양의 영약이었다.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에서 만년삼왕(萬年蔘王), 금갑신구(金甲神龜), 화리(火鯉), 구엽자지선란(九葉紫枝仙蘭), 자패(紫貝), 용연향초(龍延香草), 만년지균(萬年地菌), 삼목금섬담(三目金蟾膽) 등……. 헤아릴 수 없는 영약이 천년성 안으로 흘러들었으며, 단약술과 제약술에 능통한 인물들이 죽어 가는 순간까지 정성을 다해 열 가지의 단약을 만들어 고스란히 남겨 두었다. 어떠한 인물도 자신을 원해 단약을 삼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춘추팔가의 위대한 면모였다. 혈채향혼단(血彩香魂丹). 핏빛의 껍질이며 진한 향기를 흘리고 있다. 그 종류는 다섯 가지인데, 특징이라면 그것은 복용할 경우 내가진력을 급증시킨다는 것이다. 금채설혼단(金彩雪魂丹). 황금빛의 단약이며, 조금 쓴 약향을 풍기고 있다. 종류는 두 가지로 모든 종류의 독기(毒氣)를 단숨에 몰아내는 약효를 지니고 있다. 자채빙혼단(紫彩氷魂丹). 세 가지 종류이며, 하나같이 자색 광채를 띄우고 있다. 물 없이 복용할 수 있도록 제조되어 있으며, 어떠한 종류의 창상(創傷)이라도 감쪽같이 아물게 한다. 또한 마공에 당한 상처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마법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다. 성은 천 년 전에 세워진 것이되, 성의 위대함은 천 년에 걸쳐 형성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을 이룩하기 위해 오천 무사가 목숨을 바쳤다면 성을 꾸미기 위해 천 년에 걸친 칠천여 명이 헌신한 셈이었다. 세 번째 방은 장진고(藏珍庫)였다. 그 곳에는 영웅팔가의 팔대가주(八大家主)가 지니고 있었던 기진이보(奇珍異寶)들이 놓여 있었다. 옥선(玉扇), 혈적(血笛), 천잠보의(天蠶寶依), 영웅무적검(英雄無敵劍)……. 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사대마계의 종사들과 격돌하는 가운데 마기(魔氣)를 이기지 못하고 모양이 훼손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물건만은 천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번(幡)으로 칙칙한 묵광(墨光)을 흘리는 깃대에 매달려 있었다. 삼 척의 기가 펼쳐진다면 웅장하게 그려진 풍운만변도(風雲萬變圖)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풍운제일번(風雲第一幡)> 천 년 전 영웅팔가의 무사들은 그 아래 뭉친 바가 있다. 그것은 사대마계의 무적천군번(無敵天軍幡)과 더불어 무상의 신위를 지니고 있는 물건이었다. 풍운제일번에는 혈흔(血痕)이 묻어 있으며, 그것은 천유성의 이십팔대조의 기슴에서 뿜어진 핏줄기였다. － 다시는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우리들이 피를 흘렸도다. － 패배할 인물이라면… 아예 출도(出道)를 하지 말아야 한다. 영웅무정 일검향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패배도 허용이 되지 않는다. 천 년의 집념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만에 하나, 사대마계의 인물이 천년성 내부를 구경했더라면… 세력을 확대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천년성 안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천년성 안에서 죽었으며, 그로 인해 천년성의 비밀은 외부로 소문이 나지 않았다. 장진고에는 영웅팔가의 후예들, 다시 말해 춘추팔가의 인물들이 남긴 기진이보도 무수히 남아 있었다. 그 중에는 장인의 눈(匠人之眼)을 갖고 있는 천유성을 놀라게 하는 절세신병들도 수십 가지였다. 만에 하나, 천년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물건들은 한자리에 모이지 않고 천하도처로 흩어져 나갔을 것이다. 천유성은 천년성 내부를 두루 도는 데에만 사흘을 썼다. 천년세가의 진정한 저력(底力)이 모여 있는 곳, 그 안에는 사대마계를 멸살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나 영웅팔가의 선조들은 가문의 후예가 자신들의 안배를 이용해 천하를 굴복시킬까 두려워한 나머지, 모든 진전을 비밀 속에 묻어 버렸다. 오직 하나의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영웅무정(英雄無情) 일검향(一劍香)! 실로 미묘한 일이다. 천년세가의 율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천유성이 영웅무정 일검향으로 선택이 될 줄이야! 하나의 밀실, 그 안에는 천유성을 흠칫 놀라게 하는 세 권의 경전이 놓여 있었다. "영웅팔가의 힘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천유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그 세 권의 서적으로 인해 가문의 진정한 힘을 알게 되었다 할 수 있었다. 첫 번째의 서적, 정녕 두터운 서적이다. 종이의 장 수가 삼천 장이며, 적혀진 글자는 수천만 자에 달하고 있다. 거기 적혀 있는 것은 천년대결전 이후 영웅팔가와 훗날의 춘추팔가의 인물들이 변황오해를 주유하며 수집한 변황무림계의 무공들이었다. <사대마계의 마공을 격파하기 위해 변황의 절학을 모으기 시작했다. 무려 구백 년에 걸쳐 변황의 무학이 모조리 수집이 되었다. 영웅총사가 아닌 누구도 이 책을 볼 수 없으며, 보아서도 아니 된다. 왜냐하면 그 중의 어떠한 것은 마성(魔性)을 일으키는 것이기에, 섣불리 이것을 익히다가는 마인이 되고 만다!> 천축(天竺)과 서장(西藏), 그리고 대막(大漠). 중원에서 아스라이 멀리 떨어진 곳이다. 하나 그 곳에도 엄연히 무림계는 존재했으며, 일시적으로 중원을 능가한 적도 있었다. 바로 그 곳의 무학이 한 권의 책에 담겨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었다. <변황사해무림경(邊荒四海武林經)> 그 한 권의 서적을 이용한다면, 오십여 개의 방파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황사해무림경에는 변황의 무공이 서른여섯 단계로 나누어져 기록이 되어 있었다. 삼십육 단계의 무공은 삼류무사들이 시전하는 잡학이었으며, 호신공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제칠단계의 무공부터는 가히 일파를 이룩할 수 있는 상승절학들이었다. 또한 제삼단계 이후의 절기는 중원천하에 현존하고 있는 절기를 능가하고 있는 가공할 절기들이었다. 제삼단계의 무공은 서른두 가지, 제이단계의 무공은 열여섯 가지, 그리고 제일단계의 무공은 일곱 가지였다. 천유성이 익힐 가치가 있는 무공은 그 중에서도 이 단계와 일 단계의 스물세 가지 절기였다. 천룡사원(天龍寺院)에서 만들어진 절기가 세 가지, 그것은 천룡삼품(天龍三品)이라 불리고 있는 절기이다. 홍모사(紅帽寺)와 황모사(黃帽寺)의 절기가 여섯 가지,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비학이 네 가지이다. 그 나머지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와해되어 버린 변황 상고 방파의 비밀 절학이었다. 기환마교(奇幻魔敎)의 절학과 배교(拜敎)의 환술(幻術), 유가문(瑜伽門)의 유가술도 기록이 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만에 하나 천유성이 타파 절학에 능숙하지 않았더라면… 구결이 있다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천유성의 눈길을 끄는 부분은 유가문의 유가밀종(瑜伽密宗)을 기술한 부분이었다. <유가문은 밀교(密敎)의 일맥으로 사대마계의 한 축인 기환마계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그들의 무공은 환술(幻述)의 극상에 이르렀는 바, 빠르고 변화롭다는 데에 가장 큰 장점을 갖는다.> 천유성이 유가밀종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에게 거인의 길을 알려 준 한 명의 노인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거장지존 구야충. 그는 유가일맥의 여인을 부인으로 두었고, 그로 인해 거장궁의 현판을 떼어 내는 참담함을 맛본 사람이다. 하되 그는 부인을 너무도 사랑하게 되었고, 그러하기에 천유성에게 자신의 후예를 부탁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것으로 인해 노야께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게 될지도…….' 천유성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그려지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두 번째의 경전, 그것 역시 상당한 두께를 지니고 있었다. <마병구편(魔兵九篇), 비병삼십육편(秘兵三十六篇), 천병백팔편(千兵百八篇)> 무적천병비본서 안에는 고금무림계에서 시도가 된 바 있는 모든 종류의 병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창허상인도 깨닫지 못했던 절정의 진세가 서른여섯 가지 창안되어 있으며, 그것은 천강삼십육진세(天 三十六陣勢)라고 따로 불리어지고 있었다. 풍형세(風形勢). 바람의 자유로움을 이용해 펼쳐지는 진세이다. 그 안에 갇힌다면 사위가 폭풍우에 휘말린 듯한 착각을 갖게 한다. 무형세(霧形勢). 안개의 변화를 가미시킨 진세였는 바, 한 번 펼쳐지면 백 장 안이 안개의 바다로 변모하게 된다. 천강삼십육진세는 자연의 조화를 응용하여 만들어진 가공할 진세이다. 자연 기물을 이용해 펼칠 수도 있고, 사람들을 진세의 변화에 사용할 수도 있다. 진세를 이용한다면 한 사람의 힘으로 십만을 가둘 수도 있다. 천유성은 한 권의 책으로 인해 거대한 힘을 얻었다 할 수 있었다. 세 번째의 서적, 그것은 힘(力)의 기록이 아닌 사실의 기록이었다. 그 안에는 사대마계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의심되는 천년무림사 내의 모든 인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신체 특징과, 즐겨 사용하는 무공, 습관과 성격, 가족상황… 인간에 대해 기록할 수 있는 것이 모조리 기록되어 있었다. 그 곳에 이름을 남긴 사람의 숫자는 팔만여 명에 달했다. 악마의 사전이라고 칭할 수 있는 서적, 그 중 구 할 가량은 휴지나 다를 바 없다. 상고시대의 인물에 대한 기록으로 거기 적힌 사람은 모두 죽었을 테니까. 하나 일 할 부분은 사대마계의 주축이 되는 인물들에 대한 세세한 기록으로서, 그것은 결전이 시작될 경우 엄청난 도움이 되는 사항이었다. 언제부터일까? 영산 십만대산의 허공으로는 십채보기(十彩寶氣)가 뿜어져 오르기 시작했다. 일월(一月)이 지나가고, 이월(二月)은 더욱 빨리 지나가 버린다. 삼월(三月)이 시작될 때 상서로운 기운은 보다 짙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일어나는 기운이기에 허공을 찬란하게 물들이는 것일까? 연화대(蓮花臺) 위였다. 언제부터인가 상서로운 광채가 뿜어지기 시작했으며, 우레 치는 소리를 방불케 하는 소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콰광쾅－! 하늘이 무너지듯 굉음이 잇따라 터져 나오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힘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짙디짙은 흑무(黑霧)가 탑(塔)처럼 치솟아 오르고 있다. 그 안에는 황금신무(黃金神霧)가 원구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백무가 뭉클뭉클 일어나고 있었으며… 자색 안개와 녹색 안개도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단아한 미소(微笑). 그의 입가에는 단아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눈을 감은 것도 아니고 뜬 것도 아니다. 반개(半開)되어진 눈에서는 야릇한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보라! 쩌어어억－! 그의 피부가 정수리에서부터 반으로 쪼개어지는 것을. 차가운 느낌을 주던 피부가 시커멓게 타 들어가며 뱀이 허물을 벗는 듯이 쪼개어지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갓난아이의 피부와 같은 흰 피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천령개(天靈蓋)에는 세 송이의 꽃송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아,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경지. 그 경지는 오기조원(五氣朝元)과 육식귀원(六識歸元)의 경지를 초월한 출신입화,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였다. 대체 며칠 내내 운기행공을 한 것일까? 암흑 세계 안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감지해 내는 수법을 터득하고 있는 천유성이었으나, 자신이 얼마 동안 운기행공했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다만 사방이 지극히 환해졌으며 몸의 무게가 느끼어지지 않는 신비한 경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느끼어질 뿐이다. 그는 내공에 있어 거의 극한계(極限界)에 도달한 것이다. 정기신(精氣神) 일합(一合)의 경지. 부공삼매(浮空三昧)의 조화지경(造化之境)이라고 일컬어지는 경지이며, 그러한 경지에 이른다면 마공을 익힌다 하더라도 마성에 빠지지 않는다. "세월이 내게 아픔을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러한 성취를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유성은 천천히 연화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 긴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닌데, 그의 전체적인 면모는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완숙되어 있었다. "이제 천년세가는 침묵하지 않는다! 사대마계는… 탄생한 것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천유성은 벗어 두었던 백포를 천천히 걸쳤다. 우르르르릉－! 뇌(雷)와 더불어 장대비가 퍼부어지고 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퍼부어지는 빗줄기에는 인간의 지혜로는 측량하지 못할 신기(神氣)가 서리어 있었다. 그 기운은 운기행공을 방해하고 내가장력을 허공에서 파훼하여 버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뇌우 가운데 들어서게 된다면 어떠한 절세고수라 하더라도 진기를 제대로 시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붕괴되어 버릴 듯할 때였다. 돌연 지표의 한 부분이 반으로 쪼개어지는 가운데, 열 줄기의 빛줄기가 가공하게 뿜어지기 시작했다. 절세신병(絶世神兵)의 출현 때에나 나타난다는 서기(瑞氣)가 땅 속에서부터 치솟아 올랐고, 삼월 사 일의 새벽이 지진 소리로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흰 빛줄기 하나가 표표히 치솟아 올랐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버들잎 마냥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흰 그림자는 찰나적으로 삼십 장 허공에 내걸렸고, 신형이 핑그르르 회선하는 가운데 그의 몸뚱이는 퍼부어지는 장대비 줄기를 뚫고 이동해 나가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그리고 소리보다도 빠르게 미끄러져 나가는 흰 그림자. 아마도 환상이리라. 어찌 한 인간이 그리도 쾌속하게 신형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허리에 삼척기(三尺旗) 하나를 차고 있는 백포청년.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구깃구깃한 옷자락이 묘한 퇴폐감과 더불어 탈속감을 전해 준다. 언어로는 형언하지 못할 의미가 담기어 있는 두 눈. 그 눈은 깊은 바다처럼 불투명한 빛을 담고 있었으며, 어떠한 광채라 하더라도 그 빛보다 신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긴 꼬리별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듯이, 지하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백의청년은 천마행공(天馬行空)의 경공을 시전해 단숨에 백여 장을 가로질렀다. 그는 퍼부어지는 빗줄기를 뚫고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복에 습기를 적시지 않았다. 팔만사천 개의 모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실낱같이 가는 잠경이 신체 외부에 보이지 않는 강기의 막을 형성하며 폭우발을 퉁기어 내고 있는 것이다. 가히 조화지경(造化之境)에 달한 내공. 츠팟－! 그는 빗살처럼 빠르게 폭우를 가르며 사라져 갔고, 허공에는 천상의 음률처럼 신비로운 목소리가 잔잔한 여운을 남기기 시작했다. "천 년의 신화는 완성되어야 한다. 가문의 조상들이 이 순간을 위해 웃으며 목숨을 바쳤다. 기다려라, 강호여!" 쏴아아… 쏴아아……! 빗소리, 그리고 뇌성벽력. 하여간 누군가 나타났음에 틀림이 없었다. 第2章 영웅무정 일검향, 그가 나타났다 안개가 짙게 깔리고 있다. 드넓은 유성천가는 기문진세에 의해 외부 세계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천 년 간 외부인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던 용의 가문. 새 소리와 바람과 달빛만이 들어설 수 있다는 불문율을 천 년에 걸쳐 지키고 있는 천년세가. 그런데 천년세가 깊은 곳에서는 미묘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백포(白袍)에 백건(白巾)을 두른 무사들. 숫자는 구백구십구(九百九十九)이고, 병장기는 사 척(尺) 거검(巨劍)이다. 검자루에는 화려한 검술이 아니라 베폭이 둘둘 감기어져 있으며, 백포 허리에는 체대 대신에 새끼줄이 동여매어져 있었다. 삼월 사 일의 새벽. 유성천가의 연무장은 침묵의 행진에 뒤덮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제단(祭壇)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상태였다. "……!" "……!"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구백구십구 인의 무사들의 망막에는 여섯 인물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깡마른 노인들이다. 대체 언제부터 제단 아래 정좌하고 있는지 모르되, 여섯 노인은 꽤 오랫동안 곡기를 끊은 듯이 하나같이 깡마르고 초췌한 몰골들이었다. 오남일녀(五男一女), 여섯 노인은 모두 계피학발이었으며… 어떠한 인물은 너무나도 늙은 나머지, 눈동자가 전부 흰자위로 변화했을 정도였다. 강시처럼 메마른 여섯 노인들, 이들은 죽음보다도 더 깊은 회한의 침묵에 휘어 감겨 있었다. "기적은 없다. 신화 또한… 없다!" "아아, 그 녀석을 막았어야 만했다. 막았어야만 했다." "세가는 이제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 여섯 노인은 죽음으로써 참회해야만 한다." 착잡한 목소리가 흐른다. 여섯 노인은 거의 두 달 동안 결가부좌를 튼 채 식음을 전폐하고 제단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무정한 녀석! 우리들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사라져 버리다니……" "녀석은 율법에 도전하다가 죽었다." "꽃다운 목숨을 사지로 밀어넣은 장본인은 바로 우리들일세. 아아, 이제 우리는 죽음으로 그 죄를 씻어야만 하오." "그 녀석의 맹랑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꾸민 연극이… 그 녀석을 죽게 할 줄이야… 운명이 가혹할 뿐이다!" "청랑(靑狼), 소수(素手), 야인(夜人), 신화(神火), 패왕(覇王), 화훼(花卉)는 힘을 잃었다. 유성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유성세가의 맥이 끊어진 이상, 춘추팔가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여섯 노인들은 눈길을 포단 아래쪽으로 돌렸다. 그 곳, 각기 한 자루씩의 비수(匕首)가 베에 싸인 채 뒹굴고 있었다. 길이가 세 치에 불과하나, 날의 예리함이 가공스러운 사망혈비(死亡血匕) 여섯 자루. 만에 하나, 그것을 살에 댄다면… 찰나적으로 백여 가지 독이 몸 속으로 스며들면서 살과 뼈와 내장을 흐물흐물 녹여 버리게 된다. "유성이 태어나던 날, 우리 육노(六老)는 그의 대부(代父)가 되기를 맹세하였다. 이제 그가 죽은 것으로 확인된 이상, 우리 육노는 그와 더불어 최후를 마칠 수밖에 없다." 육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깡마른 손에는 주름살이 그득하다. 여섯 사람의 손이 여섯 자루의 사망혈비에 닿을 때였다. 매화숲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랬었군. 모든 것은 연극이었군. 춘추팔가의 어르신네들이 혜성 대숙과 짜고 한 일이었군. 나를 천년성으로 들게 하기 위한 고육지계였다는 것을…….' 너무나도 신비한 눈빛이다. 한 점의 혼탁함도 느껴지지 않는 눈에서는 무궁한 힘이 느끼어진다. 압도하는 눈빛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눈빛이다. 바로 천유성이었다. 그가 아닌 어떤 사람이 이렇듯 신비한 눈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인가? 옥쇄를 준비하는 노인들, 그들은 바로 춘추팔가의 여섯 가주들이었다. 천유성은 제단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매화나무 가지 위에 머물러 있는데,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비엽잠환(飛葉潛幻)이라는 수법을 써서 신형을 감추고 있는 상태였다. 옥수(玉手), 매우 희고 깨끗한 손이 슬쩍 떨어진다. 그와 더불어 여섯 송이 혈매화(血梅花)가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려 옥같이 흰 손바닥에 거머쥐어졌다. 너무나도 그윽하고 고요한 동작 가운데, 여섯 송이의 핏빛 매화꽃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둥둥 떠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소리도 일으키지 않고 날아가는 여섯 개의 혈매화. 그것은 오 장 정도 날아가다가는 육합방위(六合方位)로 흩어졌으며, 속도가 배가되기 시작했다. 하나,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허공을 빠르게 끊어 나가는 물체는 파공성을 내기 마련인데, 여섯 송이 혈매화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육합모니불주공(六合牟尼佛珠功), 유가문의 절학 가운데 하나로 칠백 년 간 절전이 된 전설상의 절학이다. 그것이 유성천가 안에서 신비 청년에 의해 시전이 될 줄이야? 여섯 자루의 비수, 그 위 여섯 쌍의 노안(老眼)이 맺히고 있었다. "시작하세!" "더 이상의 삶이란 굴욕이며, 수치가 아니겠는가?" 여섯 자루 사망혈비가 동시에 쳐들린다. 옥쇄(玉碎)의 의식. 천년율법에 따르지 못한 가문의 죄인들이 가문의 혼을 지키기 위해 이행하는 최후의 의식이다. 여섯 자루 사망혈비가 쳐들려지는 그 찰나였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따당－ 땅－ 땅－ 땅－! 강철 음이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가운데, 여섯 자루의 사망혈비는 찰나적으로 쇳가루로 바수어졌다. 또한 망연자실해 하는 여섯 노인의 손아귀에는 형체가 하나도 훼손이 되지 않은 혈매화가 한 송이씩 쥐어졌다. 소리도 없이 날아든 여섯 송이 혈매화는 거의 동시에 여섯 자루의 사망혈비를 박살내 버리며, 여섯 노인의 손바닥으로 살그머니 떨어져 내린 것이다. "누… 누가……?" "으으, 어이해 이런 일이……?" 여섯 노인이 자지러질 때였다. 매화숲에서부터 호쾌한 목소리가 돌연 터져 나왔다. "앞으로 저를 애송이 취급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어르신네들!" 맑은 목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무엇인가가 치솟아 올랐다. 매서운 바람 소리가 일어나는 가운데,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이 십 장 허공에서 펼쳐졌다. 풍(風)… 운(雲)……! 하늘 가득 거대한 풍운도가 형성이 되며 우레 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일대의 모든 매화나무가 꽃비를 뿌리기 시작했으며, 그와 동시에 흰 그림자 하나가 훌훌 날아올랐다. 끝없이 치솟아 오르는 흰 그림자. 그는 거대무비한 풍운도 속으로 날아올랐으며 허공 가득 흰 손 그림자가 퍼져 나가는 가운데 거대한 풍운도는 하나의 깃발로 화해 그의 손아귀에 거머쥐어졌다. 풍운제일번(風雲第一幡)! 그것은 바로 영웅무정 일검향의 신표였다. 영웅팔가의 후예들은 그것을 감히 바라볼 수 없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찰나 오체투지해야만 한다. 그것을 쥔 자가 설령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아들이라 하더라도……. "영… 영웅총사(英雄總師)! 오오, 드디어 신화는 시작이 되는 것이오이까? 천 년의 영령이여!" "우우, 영웅무정 일검향의 출현이다. 우리들이 굴욕하며 기다린 보람이 있다." "이… 이제 죽어도 좋다." 자결하고자 했던 여섯 노인에서부터 구백구십구의 검객이 하나 빠짐없이 오체투지에 들어갔다. 바로 그 순간, 허공 가득 용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절을 하는 사람은 혼이 날 것이오. 폭화를 올리고 연회를 시작해야 하오. 프핫핫… 흐느끼기 위해 천 년을 참은 것이 아니오. 호쾌히 웃기 위해 참은 것이오." 웃는 자, 그는 풍운제일번을 쥔 채 호선을 끌며 사라져 갔다. "술(酒)을……!" 그는 아침부터 독주(毒酒)를 찾고 있었다. 절풍모(切風帽)를 쓰고 있는 중년문사, 그는 팔선탁 앞에 등나무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데… 의자 근처에는 빈 술 주담자가 이십여 개 뒹굴고 있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군. 뼛속으로 저미는 자책감을… 우라질! 술을 말(斗)로 들이켜도 뱃속의 불길은 꺼지지 않는군." 취해 외치는 중년문사, 그는 바로 천혜성(天彗星)이었다. "놈이… 그렇게 멍청히 죽다니… 우라질 놈!" 유성천가의 후계자 서열 제이위자이며, 소림사 장문인을 능가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유성천가에 무수한 고수들을 끌어들였으며, 천유성을 은근히 핍박하며 천유성이 도망치기를 기다렸던 자이다. 또한 오랜만에 돌아온 천유성을 완력으로 몰아붙인 바 있으며, 정체 모를 외부인들을 대거 유입한 인물이다. 한데, 그가 술에 빠져 있다니? "네놈은 멍청한 놈이다. 내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폭풍 속으로 스러져 가 버리다니……!" 부들부들……! 천혜성의 손은 수전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텅 빈 잔을 손에 쥐었으며, 화주(火酒)가 반 정도 찬 주호를 집어들고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네놈은 알지 못하리라. 네놈이 천재 중의 천재라 하더라도… 내 마음 안은 알지 못할 것이다!" 천혜성의 얼굴에는 회한의 빛이 가득했다. 천유성이 폭풍의 성 가운데로 실종한 후, 천혜성은 쉬지 않고 술을 퍼마셨다. 괴소를 터뜨리며 일배주(一杯酒), 의미 없는 눈빛을 허공에 던지며 한 잔의 술을……. 그는 쉬지 않고 독한 술을 퍼마셨으며, 휘하제자들이 아무리 만류한다 하더라도 그의 술은 늘어만 갔다. "노괴물들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거늘… ㅋㅋ… 그 미친 노괴물들의 말을 믿었다가 너를 잃고 마는구나." 천혜성은 상체를 흔들거리며 주호를 기울이고자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주호는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 나타났을까? 훤칠한 키의 청년 하나가 불쑥 손을 내밀어서 천혜성의 팔뚝을 가볍게 움켜쥔 것이다. "마시지 마십시오. 이미 취하셨습니다." "어… 어떤 놈이 나를 막느냐? 비켜라. 이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천혜성은 벌컥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망막으로 너무나도 수준(秀俊)한 청년의 얼굴이 떨어져 내렸다. 고독한 눈빛에 암울한 미소를 지닌 얼굴이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이목구비에서 기이한 신기(神氣)가 뿜어지고 있다. 너무나도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허약해 보이는 가운데 굳강함을 지니고 있으며, 고독해 보이는 가운데 강한 의지가 엿보이고 있다. "다 압니다. 사실, 이전에 알았습니다! 대숙의 의표를……!" "너… 너는… 너는……?" 천혜성의 눈빛이 여지없이 흐트러졌다. 대체 이럴 수가? 백 년이 지나더라도 만나지 못할 사자(死者)를 바로 곁에 두게 되다니? 이것은 정녕 꿈이리라. 아니, 내가 술에 취해 버렸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녀석의 얼굴이 바로 앞에 와 있단 말인가? "네… 네가 어이해… 어이해……?" 천혜성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나왔다. "저의 심약(心弱)함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저를 죽일 듯 행동하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단아한 미소를 짓는 청년, 그는 바로 유성천가의 이십팔대 가주 천유성이었다. "또한 그렇게 사주한 인물들이 춘추팔가의 어르신네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으으, 꿈이 아니기를……!" 천혜성은 휘청이다가 입에서 핏줄기를 뿜어 냈다. 천유성을 제거하고자 했던 인물,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천유성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천혜성이 천유성을 죽이고자 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외부에서 천유성을 노리는 자들로부터 천유성을 보호하자는 데에 있었다. 바로 사대마계의 살수(殺手)들로부터! 또한 방랑벽이 있는 천유성을 가문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천혜성은 괴로움을 참아 가며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썼던 것이다. 아저씨와 조카 사이란 본시 정다운 사이이다. 천혜성은 천유성을 위해 악마의 가면을 쓰며 행동했던 것이고, 그 가운데 속병을 얻은 것이다. 천유성의 존재를 확인하고 피를 뿜어 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녀석… 너로 인해 천 년의 율법이 바뀌게 되었구나. 아아, 너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것은 바로 풍운제일번(風雲第一幡)! 그렇다면… 헛헛… 너는 바로 일검향(一劍香)이 되었구나." 천혜성은 천유성의 손을 수십 번 매만진 후에야 그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임을 완전히 알 수 있었다. 천혜성은 그의 손을 쥔 채 놀라운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삼 년 전, 천혜성은 육 인(人)의 은밀한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바로 춘추팔가의 육대종사로서 풍운세가(風雲世家)를 제외한 여섯 세가의 우두머리들이었다. 그들은 백도계를 오랫동안 이끌었던 인물들로서, 천하 대세에 대해 해박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사대마계가 악마대본영을 구축하며 일대 준동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우리들은 이길 수 없소. 적은 너무나도 거대하기 때문이오! － 그렇다고 해서 비겁자로 수수방관할 수는 없기에, 하나의 최후 방편을 써야만 하오. 그것은 엄청난 희생이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춘추팔가문의 인원 가운데 나이가 스물다섯 이상 되는 사람은 모조리 죽을 수밖에 없는 계획이오. － 우리들은 일단 세력을 유성천가로 모아야만 하오. 그래도 유성천가가 아직은 사대마계에 비밀이 노출되지 않았기에! 그 다음, 스물다섯 이하의 인재들을 제이의 장소로 도피시켜야 하며… 그들 가운데 하나의 인물을 선출해 그에게 모든 것을 전수해야 하오. － 이십오 세 이하자(以下者) 가운데 훗날의 우두머리가 될 인물은 이미 선출이 되었소. 그는 바로 천유성! 일단은 그를 세가로 돌아오게 해야 하오. 그 다음, 그를 죽이는 척하면서 그를 빼돌려야 하오. 그렇게 한다면, 사대마계의 거두들은 그에 대해 방심하게 될 것이오. 그러할 경우, 이십 년 안에 춘추팔가의 힘은 사대마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성장하게 될 것이오! － 후예가 온전하다면… 능히 웃으며 죽을 수 있지 않겠소? 청랑(靑狼), 소수(素手), 야인(夜人), 신화(神火), 패왕(覇王), 화훼(花卉). 육 가문의 우두머리들은 춘추팔가의 인물인 동시에 천하무림계의 백도명숙(白道名宿)이었다. 청랑세가의 가주, 그는 강호에서 만검황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만검황(萬劍皇) 백풍(白豊). 한때 백도제일인으로 군림하던 사람이다. 그는 검의 제왕으로 일생을 통해 한 번의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지난 이백 년 간 춘추팔가에서 배출한 인물 중 강호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춘추팔가의 인물 중 그를 능가했다고 알려진 사람은 유성천가의 천광지, 바로 천유성의 조부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는 한 자루 검을 들고 천하를 주유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사대마계의 준동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룬 바 성취가 한 단계 높았더라면, 그가 영웅총사가 되었을 것이다. 나머지 오대가문의 가주들 역시 강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었다. 철심화공(鐵心畵工) 개산두(芥山斗), 야혼십일절(夜魂十一絶) 중리간(中里干), 패왕지존(覇王至尊) 구장풍(句章風), 농모(農母) 천승화(千乘花), 생사신의(生死神醫) 을불화(乙佛華), 풍진오성자라 불린 사람들, 이들이 종횡천하한 까닭 역시 만검황 백풍과 같은 까닭에서였다. 그들은 거대한 세력을 갖고 있기에 사도마계의 준동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춘추팔가에서 하나의 영웅이 탄생하기 전에는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천혜성은 그들의 제안에 몹시 번뇌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의 뜻에 동조하여 천지가 개벽할 내분의 연극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사실 유성사노(流星四老) 또한 그의 뜻에 따라 행동한 셈이었으며, 여타한 가문의 후예들은 천혜성과 천유성 사이의 세력 다툼이 연극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유성아, 일단 몸을 피하도록 해라! 사대마계의 살수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이 곳은 이미 노출되었다." 천혜성은 취기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는 조카의 손을 꽈악 쥐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몸을 피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니다. 너는 현명한 녀석이니, 나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압니다." 천유성의 입가에 맑은 미소가 번졌다. 천혜성은 그가 순순히 응답하자, 몹시 기분이 좋은 듯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천유성의 입술이 벌어지며 새어나오는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떠나지는 않습니다!" "안… 안다면, 어이해 거절하느냐?" "숙부의 방법대로 한다는 것은, 사대마계의 눈을 속여 승리를 훔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저는 승리를 훔치고 싶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이기겠습니다. 승리를 훔치기 위함이었더라면, 가문의 선조들이 일천 년에 걸쳐 침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천유성은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쳐들었다. 그는 거듭해서 세 잔의 술을 마셨다. 천혜성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의 당황하던 표정은 차츰차츰 웃는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네놈의 눈은… 용의 눈이구나!' 천혜성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그의 몸뚱이는 그가 진기를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둥둥 떠다니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탁자며 책상, 서가가 동시에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천유성 또한 의자에 앉은 채 다섯 자 높이 떠올랐다. 천유성이 내공을 발휘해 방 안의 모든 것을 다섯 자 높이 띄워 올린 것이다. 천혜성은 만근추 신공으로 몸을 내리려 했으나 그럴수록 몸은 둥실 떠올랐다. "너의 내공이 이 정도라니……." 천혜성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하나 두 눈은 크나큰 희열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혜성은 천유성이 이룩한 성취가 상상을 초월함을 알게 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나 역시 피할 생각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니 되오. 승낙을 할 수 없소." 밖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방 밖, 여섯 명의 노인이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 뒤에는 백포에서 무복(武服)으로 갈아입은 여섯 가문의 무사들이 거대한 검진을 펼치고 있었다. "영웅총사인 것을 인정하오만, 아직은 힘이 미약하오. 그것을 알기에, 감히 앞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는 것이오." 눈에서 형형한 빛줄기를 뿜어 대는 노인, 그는 바로 만검황 백풍이었다. 풍진오성자 역시 그의 말에 동조하는 듯 결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아직은 참아야 하오, 영웅총사!" "아직 미숙하외다." "사대마계는 마황야 하나로 뭉친 지 오래요. 우리가 그들을 꺾기 위해서는 힘을 더 길러야만 하오." 너무도 진지한 표정들이다. 그들은 사대마계의 힘을 피부로 느낀 바 있었기에 이렇듯 강경한 어조로 천유성의 결심을 바꾸려 하는 것이다. 특히 결사적인 사람은 만검황 백풍이었다. '너무 어리기에 대세를 보는 눈이 미숙한 것이다. 우리 육노가 십 년 간 보필한다면, 그 때는 천 년의 승부를 볼 수 있을 것이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만검황 백풍은 사대마계의 힘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한 사람이다. 오 년 전, 그는 사대마계를 일통한 마황야의 정체를 알아 내기 위해 악마대본영에 침입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는 열두 개의 마진(魔陣)을 돌파했으나, 마황야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천마어검술(天魔御劍術)로 날아든 마황장노의 검에 밀려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이 춘추팔가의 결속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만검황 백풍의 눈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천유성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다. '천년성에서 영웅팔가의 진전을 얻었다 하나, 부족함이 많다. 절정에 이르기 전에는 대전(大戰)은 없다.' 사대마계의 힘이 지금처럼 강성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푸른빛 이리와 더불어 천하를 주유했을 것이다. 그는 자연을 벗하기를 즐기며 절정의 검도를 추구하던 사람이다. 천유성의 몸 속을 흐르는 핏속에는 그의 핏줄 한 부분이 섞여 있다. 천유성의 낭인의 기질은 그에게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만검황 백풍이 형형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때, 천유성은 침묵하고 있었다. 왜일까? 그가 한 마디 말도 않고 침묵하는 이유는? 천유성은 담담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허공에 응결된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은 천천히 내려지면서 만검황 백풍의 눈과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만검황 백풍은 뇌전을 맞은 듯 강렬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오오, 이럴 수가? 이미 무상심검도에 들었단 말인가?' 무상심검도(無上心劍道)! 그것은 절정의 무도에 든 자만이 이룰 수 있는 경지로, 만검황 백풍이 이루고자 그토록 노력했던 지고무상의 경지인 것이다. "성에서 나오며 일대를 두루 살펴봤습니다!" 천유성 눈빛이 일순 차가워졌다. "까마귀들이 와 있더군요. 도합 일천(一千). 하나같이 빠르며, 위맹한 자들입니다!" "까마귀들?" "훗훗… 일천, 꽤 많은 숫자입니다. 하나, 그들 가운데 오직 이십 명만이 돌아갈 것입니다!" "이십 명이 돌아가다니?" 만검황 백풍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천유성은 단호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정식으로 싸움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적(敵)이 나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십 명의 눈(眼)과 입(口)이 필요할 것입니다!" 무사는 말로 하지 않는다. 무사는 오직 검으로 자신을 입증하는 것이다. 천유성은 대체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 것인지……? 어느 새 봄(春)이런가? 십만대산(十萬大山)의 유성천가는 매화의 화풍(花風)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핏빛 매화와 백설처럼 흰 매화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습기를 가득 품은 바람이 다가설 때마다 꽃잎사귀들은 희열에 가득 찬 경련을 일으킨다. 언제 부터일까? 쓰으으… 쓰으으……! 귀영들이 숲 그림자에 몸을 감추며 오고 가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이동하면서도 파공성을 흘리지 않는 인물들. 하나같이 흑포를 걸치고 있으며, 등에는 쌍검을 둘러메고 있다. 죽어 버린 눈들… 그리고 맥박과 호흡마저 정지가 되어 버린 듯하다. 피에 찌든 검은 옷자락을 너풀거리며 이리저리 오가는 자들의 숫자는 정확히 일천이다. 이들은 벌써 두 달에 걸쳐 진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폭풍혈사군(暴風血死軍), 잔마추혼병(殘魔追魂兵), 사형잔혼대(死刑殘魂隊), 천마위령단(天魔慰靈團)……. 사대마계 내부인들이라 하더라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장막(帳幕) 뒤쪽의 살인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폭풍혈사군은 마황친위대(魔皇親衛隊)에 속하고 있으며, 잔마추혼병과 사형잔혼대는 사형마루(死刑魔樓)라는 암살 전문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천마위령단은 하나의 비밀 임무를 위해 새롭게 모집이 된 자들로서, 적어도 오십 회 이상의 암살 경력을 지니고 있다. 살인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상석을 내주지 않는 자들, 단 하나만 나타난다 하더라도 공포의 혈겁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이다. 한데, 이들이 어이해 일천 명이나 대거 나타났단 말인가? 실로 화려한 축제였다.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유성천가 전역에서 폭죽이 터져 올랐으며, 무수한 검사들이 발검(拔劍)한 채 환호성을 발하기 시작했다. 만여 개의 깃발이 나뭇가지에 내걸렸으며, 지하 술창고에 저장이 되었던 술이 모조리 꺼내졌다. 둥－ 둥－ 둥－! 북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기 시작했으며, 아름다운 무희들이 백석로를 누비며 오고 가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시작이 된 대축제. 영웅총사의 출현을 기념하는 축제는 닷새 내내 계속될 예정이었으며, 축제 가운데 유성천가 일대의 기문진세는 모조리 파훼가 될 예정이었다. 삼월 사 일, 달빛이 좋은 밤이다. 갈대가 달빛을 반짝반짝 반사시키고 있으며, 자잔한 밤안개의 흐름 가운데 괴영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멍청한 자들! 실컷 퍼마시며 놀아라. ㅋㅋ……!" "영웅무정(英雄無情) 일검향(一劍香)이라는 존재가 출현한 것이 확실시된 이상, 더 이상 기다릴 것 없소. 계획한 대로 춘추의 무리들을 모조리 피떡으로 만들어야 하오!" "길어야 두 시진일 것이오." "오랫동안 살인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훗훗… 그 즐거움을 실컷 맛보게 되는군."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서는 자들,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진한 죽음의 냄새뿐이다. 폭풍혈사군(暴風血死軍), 잔마추혼병(殘魔追魂兵), 사형잔혼대(死刑殘魂隊), 천마위령단(天魔慰靈團). 사대마계가 자랑하는 사대 살인 조직이다. 이들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살행에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다. 이들이 스치고 지난 자리엔 남는 건 피와 죽음뿐이다. 휘휙－ 휙－! 천 명의 살수들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고, 여덟 줄기 검은 바람처럼 흐트러져서 유성천가 쪽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허공에서 유성이 끝없는 포물선을 이끌며 진군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시각 그는 이십 리 떨어진 곳에서 뜨락 어귀에 서서 한 가지의 갈대(?) 허리를 가볍게 꺾어 들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구깃구깃한 백포. 꽤나 섬세한 손을 지닌 미청년은 갈대 허리를 가볍게 잘라 갈대를 손에 쥔 다음, 갈대꽃으로 입술을 간지럽혔다. 여인의 입술처럼 짙붉은 입술이다. 대체 누구이기에 무형의 기세만으로 일대를 압도하고 있는 것일까? "운명이라면… 피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팟－ 팟－ 팟－! 밤안개를 가르며 치솟아 오르는 검은 그림자들. 손을 어깨 위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자들이 태반인데, 손아귀에 철검 자루가 꽈악 거머쥐어져 있다. 한시라도 발검(拔劍)해 낼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하며 유성천가 내부로 스미어 들어가는 자들은 이미 유성천가의 내부 구조에 대해 익숙히 알고 있는 듯, 이 곳 저 곳을 살펴보지도 않고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유성천가 안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일각(一刻)도 길다!" "놈의 수급을 베어 내는 자에게는 상으로 계집이 하나 주어질 것이니, 분투하기 바란다." 가공할 빠르기로 날아드는 자들. 그들은 폭화(爆火)가 부서져 내리는 밤하늘을 가르며 하나의 장소를 향해 여덟 줄기 회오리바람이 한 줄기 거대한 선풍으로 뭉치는 듯한 선형을 이루며 접근해 갔다. 자시(子時), 밤 중의 밤이며 가장 깊은 밤이다. 하늘 위에는 신월(新月) 하나가 비수처럼 떠올라 있다. 아스라한 달빛이 흘러내리는 가운데, 안개는 신묘한 광채를 반짝반짝거리며 부서져 가고 있었다. 한데 이럴 수가? 유성천가 내부가 무인지경이지 않는가? 분명 천여 무사들이 머물러 있었는데, 찰나적으로 썰물처럼 사라져 버렸으며… 뜨락에는 기화요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달빛과 바람, 그리고 안개. 텅 빈 뜨락에는 오직 하나의 그림자가 있을 뿐이다. 손에 갈대 가지 하나를 들고 있는 자, 그는 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린 채 고개를 들어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게, 친구들!"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짓는 자, 그는 자신을 향해 폭풍우처럼 다가서는 자들을 느끼지 못하는 듯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숨결이며 자세는 심연(深淵)처럼 고요히 침잠되어 있으며, 눈빛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짙붉은 입술이 가볍게 벌어지며 아름답고도 흐릿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오게! 내게 기회를 주게. 신화를 이룩할 기회를……!" 第3章 이제 시작이다 뜨락에는 기이한 정적이 감돌고 있다. 하나, 그 적막 속에는 가공할 암경이 흐르고 있었다. 대지를 딛고 서 있는 천유성. 하나 자세히 본다면, 그의 발이 땅에 닿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천유성은 이미 내공을 끌어올린 상태였다. 달이 검은 구름에 문득 휘어 감기는데, 전후좌우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속속 출몰하기 시작했다. 파파팟－ 팟－ 팟－! 회심의 미소를 짓고 유성천가 안으로 잠입해 온 일천 살수들. 악마대본영에서도 악마들로 소문이 난 자들로서, 사대왕야가 직접 이끄는 살수세력을 제외한다면 악마대본영에서 가장 가공할 무사들이라 할 수 있었다. 온갖 종류의 병장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갖가지 전투에 능수능란하며, 이미 수십 차례의 살인 경험을 지니고 있다. 잠입과 파괴, 은잠, 암살 등… 제반종류의 자객술에는 한결같이 달통한 자들이다. 도합 일천의 무사들은 천유성을 향해 십 겹의 동심원을 펼치면서 파도가 밀려들 듯이 세찬 기세로 다가섰다. "고약하군. 함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치졸하군. 게다가 저기 서 있는 놈은 대체 어떠한 놈인지 모르겠군." "하여간… 제압하고 봐라." "다섯만 나서라. 그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여기 머물렀던 자들이 어디로 숨었는가 살펴봐라." 영반(領班) 지위에 머물러 있는 자들의 호통 소리와 함께 다섯 개의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츠팟－! 빠르다. 다섯 개의 그림자는 호선(弧線)이 아니라 직선(直線)을 끌면서 천유성의 머리 위쪽으로 치솟아 올랐다. 핑그르 신형을 회전시키며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자들은 찰나적으로 천유성의 머리 위 하늘에 신형을 띄워 올렸다. 다섯 개의 독검(毒劍)이 뽑히며 다섯 줄기의 검호(劍弧)가 치솟아 올랐다. 묵궁(墨穹)을 반으로 끊어 나가는 다섯 줄기의 검파(劍波)는 천유성의 전후좌우, 그리고 복부를 향해 오행검세(五行劍勢)를 형성하며 다가섰다. 예술의 경지에 돌입한 자객술. 만에 하나, 다섯 가운데 넷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하나는 어떻게든 성공하게 되는 가공스러운 공격법이다. 절대절명의 순간. "환영한다, 그대들을!" 천유성은 처음 손을 이동시켰다. 고요한 호흡 가운데 오른손은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하며, 갈대꽃이 비스듬히 허공을 끊어 나가기 시작한다. 정확히 일곱 치, 갈대 줄기는 허공을 베었으며 바로 그와 더불어 위대한 검도의 신화는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파파팟－ 팟－ 팟－! 갈대 줄기가 직선을 끄는 찰나, 허공 다섯 군데서 둔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윽!" "무… 무상검도(無相劍道)!" "갈… 갈대 줄기에 진기를 실어 검을 자르고… 나의 가슴뼈를 바수어 버리다니……!" "저… 저 자가 바로… 일검향이다!" "웨에에엑……!" 투둑－ 툭－! 핏덩어리가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며 다섯 명의 살수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실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아올랐다. 천유성은 갈대 한 가지에 백만 관 진기(眞氣)를 실어 보냈고, 그로 인해 다섯 살수는 검이 잘리고 가슴뼈가 바수어진 채 십여 장 밖으로 고무공 퉁기듯이 퉁기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일검탄공(一劍彈空) 진천결(振天訣). 그것은 유성천가에서 전승되어 온 검도 가운데 하나이다. 일명 무상검도. 절정에 이른 고수자만이 시전할 수 있다는 극강의 검식이다. 천유성은 갈대 가지로 다섯 명의 일류고수를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베어 버린 것이다. 침묵.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기변(奇變)으로 인해 구백구십오 인의 살수들은 일순 깊은 침묵에 사로잡혔다. 어떠한 자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수중의 검을 미끄러뜨렸으며, 어떠한 자는 따악 벌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한 채 상체를 휘청거렸다. "저… 저 자가… 사술을 썼음에 틀림이 없다." "으으, 놈은 마법을 썼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다섯 형제가 갈대 가지에 죽어 버린단 말인가?" "우라질! 천마위령단(天魔慰靈團), 모두 나서라!" "카아아… 놈을 난도질해라!" 포효 소리, 그것은 피를 끓게 하고 살기를 불러일으킨다. 누가 부르짖는지 모를 포효 소리와 더불어 이백여 명의 무사들이 흑립을 비스듬히 내려 쓴 채 훌훌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쓰으으… 쓰으으……! 달빛 속으로 파고드는 자들. 이들은 처음 날아올랐던 다섯 명과는 달리 최절정의 은잠술(隱潛術)을 발휘해 크고 작은 지형지물에 신형을 감추며 날아올랐다. 그들은 영웅무정 일검향이라는 자를 척살하는 일을 위해 특별히 선출이 된 자들로, 하나같이 경공에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악마대본영은 세워진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다. 가히 백전백승(百戰百勝). 악마대본영은 위대한 전설을 이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쳐라!" "모든 종류의 공격을 가해도 좋다!" 휘이이이익－! 휘파람 소리가 거듭 일어나는 가운데, 천마위령단의 몸놀림은 경쾌하게 이합집산(離合集散)하기 시작한다. 뭉치고, 흐트러지고, 흐트러지다가 뭉치고……. 휘파람 소리에는 운신(運身)의 신호가 담기어져 있다. 휘파람 소리의 고저장단과 박자에 따라 이백여 무사들은 호령에 따라 군무(群舞)를 추는 자들처럼 진세를 넓혔다 좁혀 가며 천유성 둘레에 위맹한 잠력의 진세를 겹겹이 일으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조금 쓸쓸해 보이던 천유성의 입매에 미소가 지어진 시기는. "이십(二十)이 갈 수 있을 뿐이다. 모두 기도하기 바란다. 그 이십 명의 행운아 가운데 끼이기를……!" 그의 몸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기이한 일이다. 그는 정지된 듯 이동하고 있었다. 부동신보(不動神步)라고 불리는 최상승의 경공을 초월하는 어풍부공(御風浮空)의 경공마저 얻었단 말인가? 천유성은 소리마저 일으키지 않고 오 장 날아올랐으며. "어… 어엇? 저게 무슨 수법이냐?" "으으, 피해야 한다." 천마위령단 전원의 눈길이 그를 향해 집중되는 찰나, 그의 오른손은 하나의 거대한 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성… 흡자결(吸字訣)." 고오오－ 고오오－! 갈대 줄기로 인해 원형이 형성되며…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나의 은색(銀色) 원호(圓弧)가 허공을 뒤덮는 가운데, 막대한 흡력(吸力)이 일어나며 일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으으읏… 나의 몸이 제멋대로 떠오르다니……!" "악… 악마다. 저 자는… 악마다!" 휘휙－ 휙－ 휙－! 천마위령단의 살수들은 흡입력에 이끌려 제 실력보다 훨씬 빠르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갈대꽃으로 인한 원은 점점 더 커졌다. 반경이 일 장(丈)에서 이 장으로… 원형은 보다 더 확대되었으며, 급기야 그것은 십 장(丈) 반경의 거대한 은빛 고리로 변화했다. 천마위령단의 살수들은 표풍(飄風)에 말려 올라가는 가랑잎 마냥 원호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으으읏……!" "피… 피해야 한다. 다가가면 죽는다!" 대체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가? 은색 고리 가운데로 무사들의 몸뚱이가 빨리어드는 가운데, 무수한 은색(銀色) 편린(片鱗)이 화살처럼 퍼부어지고… 둔팍한 소리가 일어나는 가운데, 수백 송이의 피꽃이 너무나도 찬란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유성우(流星雨)가 뿌리어지는 듯한 검세. 동시에 칠천 방위가 검파에 뒤덮여 버렸으며, 방원 오십 장 안이 새하얀 광막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치리리리릿－! "크으으윽……!" "케엑!"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잇따른 가운데 사대마계의 일류무사들은 어디서 날아드는지 모를 검파에 관통되어 푹푹 쓰러지기 시작했다. 쓰러지고, 그 위에 또 쓰러지고……. 골육난비(骨肉亂飛), 혈우성풍(血雨腥風)……. 유성천가의 연무장은 피보라에 휘어 감기기 시작했다. 갈대 줄기는 오랜만에 내려졌다. 뭇 생명이 갈대 줄기에 의해 잘리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갈대꽃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이기는 것이… 꼭 즐거운 일은 아니다." 천유성은 저도 모르게 신형을 휘청거렸다. "피 내음이 이리도 역겨운 줄 몰랐다." 첫 번째의 살인이기 때문일까? 그는 격한 구역질을 느끼며 눈을 스르르 감아야 했다. 하여간, 돌아간 자는 이십(二十)에 불과했다. 정확히 이십 명만이 유성천가의 담을 넘어 되돌아 나갈 수 있었다. 삼월 사 일의 신화. 그것은 당금 무림계를 뿌리째 뒤흔들어 버릴 가공할 혈사(血史)였다. 일천 명의 무사가 왔고… 오직 이십 명이 돌아갔다. 밤이 깊어 가는 가운데, 비가 뿌리어지기 시작했다. 습습한 대기가 낮게 가라앉는 가운데 역겨운 피비린내가 이리저리 몰리기 시작했다. 천유성은 갈대를 내던지며 힐끗 하늘을 바라봤다. 빗줄기가 눈 속으로 파고든다. 그는 검미를 찡그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술이 마시고 싶군. 오랜만에 취하도록 마셔 보고 싶군!" 천유성은 자신의 내공과 검초에 놀란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휘청휘청 걷기 시작했으며, 어느 틈엔가 꽤 많은 무사들이 나타나서 어지러이 널브러진 시체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백여 마리의 비둘기. 발목에 핏빛 철통 하나를 매달고 있는 전서구(傳書鳩)들이 창공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강남무림도(江南武林道)의 비밀 분타에서 날려진 백여 마리의 천리전서구는 끝없는 날갯짓을 하며 쉬지 않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삼월 오 일, 이 날은 중원천하에 가장 엄청난 파문이 벌어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잠자던 거인이 깨어나고, 가장 처절한 승부가 시작됨을 알리는 비합전서구들은 빠르게 창공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사흘 후, 그것은 네 개의 외단(外壇)으로 날아들었고… 그로부터 정확히 일개 시진이 지난 후, 악마대본영의 사대외단에서는 거의 비슷한 속도로 각기 하나씩의 신형이 표풍처럼 날아올랐다. 어디 그뿐이랴? 천하각지로 흩어져 나가던 일급무사들의 움직임에 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악마대본영의 순찰당의 움직임이 예전에 비할 수 없이 급박하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대체 어떠한 쪽지이기에……? <집행자(執行者) 일천(一千) 중 생존자 이십 인(人). 하나같이 발광(發光)한 상태로 복귀했음. 그들이 입은 육체적 상처보다 심령상의 타격이 가공한지라, 다시는 무공을 쓰지 못할 것임!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를 접하지 않은 이상, 그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임!> 사흘 후, 십만대산에는 또 한 차례의 혈풍이 일어났다. 사백(四百) 거령살혼군(巨靈煞魂軍), 칠백(七百)의 탄궁천리살풍대(彈弓千里殺風隊), 구백(九百)의 혈풍마영대(血風魔影隊). 광동(廣東)과 광서(廣西), 복건(福建)의 삼대성(三大省)에 자리잡고 있던 악마대본영 분타에서 차출이 된 무사들은 도합 이천이었다. 이들 이천의 무사들은 비밀 명령을 전해 받고 대거 십만대산으로 들어갔으며, 너무나도 놀랍게도 단 한 사람 되돌아 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유성천가 안으로 접어들었다가 가공하기 이를 데 없는 기문진세에 휘말려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닷새 후에는 다수의 무사가 아니라, 오십여 명의 특급살수들이 십만대산을 찾았다. 마황야가 친히 기른 살수들이다. 일컬어 사형악마친위대(死刑惡魔親衛隊). 악마대본영에서도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자들이다. 어떠한 종류의 암살에도 실패를 하지 않았던 인물, 그들은 북무림계를 맡고 있는 사몽혼의 휘하 살수대와 더불어 악마대본영의 양대 암살 조직이었다. 십팔반병기를 자유롭게 다루며, 천하각지의 자객술을 모조리 터득하고 있는 철저한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유성천가로 접근해 갔으며, 그 다음 날 새벽이 될 때에는 단 세 사람만이 되돌아 나왔다. 휘청휘청……! 흐느적거리며 몽유(夢遊)하듯 걷고 있는 세 사람. 그들의 동공에는 초점이 상실되어 있으며,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석고 조각처럼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뜨락이다. 천유성은 꽤 오랜만에 화초를 완성할 수 있었다. 유성천가는 그가 돌아온 이후, 이전과 판이한 장소로 변화되었다. 유성천가의 중심지는 지하에서 치솟아 오른 천년풍운대성 안으로 옮기어졌으며, 이전의 장소는 텅 비게 되었다. 천유성은 손가락으로 난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의 뒤쪽, 꽤나 조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문사 하나가 따르고 있다가 그의 단아한 자세를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언제까지 고스란히 노출될 작정인가?" 천혜성, 그는 천유성의 숙부였으며 천유성의 부탁에 따라 영웅팔가의 총관이 되어 있었다. 하나 그는 천유성이 어떠한 속셈을 지니고 있는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 승리를 훔치지 않습니다. 천유성은 늘 그렇게만 말했다.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는 데에는 무한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천유성은 난향을 폐부 깊이 빨아들이며 입술을 떼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유성, 자네의 신적인 무공은 익히 아나… 상대는 수십만이네. 그 중에는 자네에 필적하는 자들도 있네." "압니다." "으음……!" "사실… 사대마계의 저력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지금과 같은 병법을 시작한 것입니다." "정체를 노출시키는 것이 병법이라니?" 천혜성은 몹시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철부지로 보일 뿐이다. 천유성이 일 권(拳)을 발휘해 천만 관 거석을 박살낸다 하더라도 천혜성은 천유성의 건강을 염려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하… 하긴……." "그들은… 저라는 존재를 눈에 가시로 알고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쓰던 간에 조속한 시일 안에 저를 제거하려 할 것입니다." 천유성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 누구도 측량하지 못할 지혜와 무공을 겸비한 청년 영웅. 그의 눈빛은 어린아이의 청백안(靑白眼)을 닮고 있었다. "저는 당분간 표적이 되어야만 합니다." "위험한 일이다." "승부란 도박이지요. 훗훗… 어렸을 때, 제게 마작(麻雀)을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대숙이 아니신지요?" "그… 그랬었지. 내가 조카에게 마작을 가르쳐 준 바 있지." "많이 따기 위해서는… 약간은 잃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 분도 대숙이었습니다. " 천유성의 눈빛이 일순 가공스러운 광망을 토해 냈다. 천혜성은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압도감을 느끼며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유성은 힐끗 창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게는 두 개의 패(牌)가 있습니다. 사실 일검향이라는 존재를 정면으로 노출시키는 진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숨겨진 두 개의 패를 꺼내기 위함입니다." "숨겨진 패라니?" "바로… 저것입니다." 천유성은 손가락으로 두 개의 물체를 가리켰다. 지극히 평범한 메꽃(野花) 한 송이, 그리고 허공의 달을……! 꽃이라니? 그리고 달(月)이라니? 갑자기 꽃과 달(月)을 이야기하다니? "열 송이 꽃(十花)이 피어나야 합니다. 그 꽃이 피어나지 않는 한, 싸움은 길고 지루해질 것입니다." 천유성의 얼굴에 신기가 서리고 있었다. "그리고… 달이 떠올라야 합니다. 훗훗……!" 너무나도 아름답고 수준한 얼굴이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하이얀 피부와 짙붉은 입술, 전체적으로 청신(淸新)하며 풋풋한 인상이다. 하나 그에게는 젊은 시절에는 없기 마련인 야릇한 달관과 관조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낭인주의 개로 떠돌던 세월이 가르쳐 주었던 무림의 저류(底流)에 대한 통찰이 그를 보다 거대한 인간으로 만들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천혜성은 조카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했다. "아, 만에 하나 십오 년 전의 대실종이 없었더라면… 네게 그리도 거대한 짐이 지워지지는 않았을 텐데……." "실종이라니요?" 천유성이 흠칫하자. "이제 너는 그 일에 대해 알아야만 할 때다. 사실 춘추팔가… 아니, 우리 영웅팔가의 힘은 사대마계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았었다. 하나, 십오 년 전의 대실종 사건으로 인해 세력이 급격히 약해졌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비밀이었으며, 천 년의 풍운대성과 더불어 춘추팔가의 최후 비밀이었다. 풍운대성에는 무한한 기진이보와 비급이 비장되어 있다. 하나, 대세를 움직이는 데에는 기진이보나 비급을 갖고 이룩하는 데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대세를 가늠하는 싸움에 있어 중요한 것은, 실전(實戰)의 능력을 지닌 정예무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실 춘추팔가에는 현재 만이천 정도의 무사들이 머물러 있을 뿐이고, 그 중 태반은 노년층이었다. 춘추팔가의 힘은 그 덕에 사대마계에 비할 수 없이 약화되었다 할 수 있었다. 한데 그 뒤에 전대비사가 머물러 있을 줄이야? "모든 비밀은 제팔세가(第八世家)에 있다. 그 곳이 깨어나야만 영웅팔가는 진정한 영웅팔가가 되는 것이다. 사실 제팔세가, 풍운세가(風雲世家)가 깨어나지 못했기에… 영웅의 가문이 사대마계의 힘에서 밀리게 된 것이다." 천혜성이 말하는 일, 그 일은 천유성이 네 살 되던 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춘추팔가는 사대마계의 준동이 수년 앞으로 다가섰다는 것을 알고 하나의 거대한 안배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을 주창한 사람은 만검황 백풍이었다. 그것은 춘추령(春秋令)으로 작성이 되었고, 춘추팔가문의 여덟 가주들에게 각기 한 장씩의 춘추령이 발송이 되었다. <사대마계를 막기 위해서는 힘(力)이 있어야 하며, 어떠한 싸움에도 능한 고수자들이 적어도 일만(一萬)은 있어야 함. 팔가에서 각기 천오백(千五百)의 영재(英才)를 선출하여 하나의 장소에서 특별한 연무를 시킨다면 훗날 사대마계가 어떠한 형태이든 준동하기 시작할 때, 일백 일 안에 제압할 수 있을 것임!> 실로 가공스러운 계획이다. 위대한 신화를 이룩하자는 계획은 은밀한 가운데 진행이 되었으며, 일 년에 걸쳐서 일만이천(一萬二千)에 달하는 영재들이 모종의 장소로 모이게 되었다. 또한 각 세가가 비장하고 있던 무수한 영약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며, 교두(敎頭) 노릇을 할 노사(老師) 칠십이 인이 선발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모인 장소는 바로 춘추제팔가(春秋第八家), 일명 풍운세가라고 불리고 있는 곳이었다. 일만이천이라는 숫자는 실로 많은 숫자이다. 하물며 일만이천 명 모두가 최고의 자질을 지닌 일세기재들인 바에야……. 그런데 바로 그 회합 이후, 실로 가공스러운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한날 한시에 실종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들은 천금멸사군(天禁滅邪軍)으로 스스로를 불렀는데,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마치 지상에서 증발되어 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들은 부러진 병장기, 찢어진 의복 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춘추팔가의 힘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그로 인해 사대마계가 준동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은 천유성도 이제서야 처음 알게 되는 일이었다. "당시 일만이천 천금멸사군을 이끌기로 안배가 되었던 인물은 풍진오성자(風塵五聖者)의 의발전인(衣鉢傳人)이자, 동시에 제팔풍운세가의 신임가주였던 한 명의 기린아(麒麟兒)였다." "……." "그는 황족(皇族)이었다." "황족?" "그는 황제(皇帝)의 아우였고, 주의(朱義)라는 인물이었다. 당시 너 정도로 뛰어나다고 여겨졌던 인물로서, 풍운친왕(風雲親王)이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아, 풍운친왕……." "그는 황제를 움직일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해서, 그는 황제의 영역 내부에 거대한 비밀 연무관을 이룩했던 것이다." "……." "그 장소는 바로 춘추금쇄부(春秋禁鎖府). 그 곳에서 일만이천 영재들이 천금멸사군으로 등룡(登龍)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춘추금쇄부는 초토화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천혜성은 그렇게 말하며 조카를 바라봤다. 숙부의 눈길이기 때문일까? 그 눈빛은 매우 따뜻하고 다정했다.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대란(大亂)은 오직 구십구 일(日) 안에 마무리지어질 것이다. 당시 천금멸사군에 영입되었던 인물들이야말로 춘추팔가의 진정한 영웅들이니까!" 십오 년 전의 비사, 그것이야말로 춘추팔가를 잠자는 거인으로 만든 뼈저린 비사였다. 만에 하나, 그들이 나타난다면… 천하 대세는 동시에 바뀌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보면 저는 숨겨진 패(牌)를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를 갖고 있는 셈이군요?" 천유성의 눈빛이 반짝 혜광(慧光)을 발했다. 그는 주먹을 거머쥐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는 가문을 믿습니다. 가문의 혼(魂)과 집념을… 그리고 그들 일만이천 영웅객(英雄客)들이 어디에든 남아 있다고 여깁니다. 그들 또한 춘추의 형제들이니까, 어떻게든 생존하고 있을 것입니다." 천 년의 집념. 춘추팔가의 인물들만이 뼈저리게 느끼는 무서운 집념이다. 그것은 깨뜨리려 해도 불사조처럼 타오르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하기에 춘추팔가는 사대마계에 비해 인원 수가 늘 이십분지일 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힘의 균형을 이룩해 왔던 것이다. 사대마계는 무조건 수하들을 모으며, 춘추팔가는 정예(精銳)만을 선발하여 영재로 교육한다. 그 점이야말로 영웅도의 춘추팔가가 사대마계를 압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 할 수 있었다. 문득 천혜성의 손이 천유성의 어깨 위에 내려졌다. 천유성은 천혜성보다 두 치 더 컸다. 천혜성은 훤칠한 키의 청년이 되어 귀가한 조카의 어깨를 다독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풍운세가는 기실… 네녀석과 인연이 많은 가문이었다!" "인연이라니요?" "너의 아버지는 청랑세가의 여인과 혼례를 맺었으며, 나는 소수세가(素手世家)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또한 너는 가법에 따라 풍운세가의 종손이 되는 여인과 혼례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아……!" "당시 너의 혼담이 오고 갔던 여아(女兒)는, 초령(草玲)이라 했었다. 살아 있다면 십팔 세가 되었을 것이다." 초령. 황실에서 태어난 여인이며, 태어나고 나서 바로 풍운친왕의 품에 안겨 초야(草野)의 한 장소로 옮겨진 여인이었다. 그녀가 바로 가문이 정한 천유성의 정혼녀였다. 다음 날, 천유성은 풍운대성 일대에 다섯 개의 진식(陣式)을 손수 펼쳤다. 그의 가문 노고수들은 일곱 가지 검진을 연마하느라 수염에 땀방울을 맺기 시작했으며, 오천여 소년소녀들이 풍운대성의 지하 연공관으로 들어갔다. 달이 떠오를 때, 천유성은 백만(百萬) 대군(大軍)을 천 일 간 막을 모든 안배를 마친 다음 홀연히 사라졌다. 한 장의 초상화. 그것은 귀수필(鬼手筆)이라는 자의 솜씨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그는 악마대본영 안에 상주하고 있는 자로서, 언어로 표현이 되는 사물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리는 데 천부적인 재간이 있는 자였다. 그는 뭇 사람의 입을 통해 한 인간에 대한 형상을 들었고, 자신이 들은 것을 종합하여 한 장의 그림을 만든 것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수중에 갈대를 하나 들고 있는 자.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체형이며, 무객(武客) 특유의 강인함은 보이지 않고 있다. "두 눈을 묘사하기에 가장 힘들었습니다!" 귀수필은 탁자 위에 펼쳐진 초상화를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인간의 표정은 그림으로 나타내기 힘드나, 숙련된 화공이라면 희노애락의 표정을 자유롭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 두 눈만은 묘사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눈빛으로 인해 한 인물의 전체적인 느낌이 나타나게 되기에……." 그는 힐끗 눈길을 던졌다. 그는 그 뒤쪽을 바라볼 수가 없으되, 그 뒤쪽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그를 바라볼 수 있다. 중원에서 벌어지는 군마평의회(群魔評議會). 군마평의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사대마계의 삼십삼만 무사들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다. 또한 군마평의회에 참석하는 사람이라면 항차 마황야(魔皇爺)의 지위에 도전을 할 수가 있다. "영웅무정(英雄無情) 일검향(一劍香)이라는 자의 두 눈은 묘사할 수 없는 눈이었습니다. 화공들은 그러한 눈을 일컬어… 용(龍)의 눈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귀수필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장막 뒤에는 삼남일녀(三男一女)가 머물러 있다. 바로 사대왕야(四大王爺). 천하각지의 마도세력 가운데에서 선발이 된 마도 기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네 사람이다. 폭풍혼(暴風魂), 본래의 이름은 사마위승(司馬威昇). 마도제일의 명가라는 사마잠룡세가(司馬潛龍世家)의 젊은 가주이며, 마황야의 의발전인이다. 팔만사천마보(八萬四千魔譜) 안의 제반마공에 능통하였으며, 또한 고금 각 파의 병가기보(兵家奇譜)를 섭렵하고, 용인술(用人術) 과 용병술(用兵術)에 능통하다. 무공의 경지가 이미 마황야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자. 그는 영웅무정 일검향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한 마리 야수로 인해 대업(大業)에 장애가 오다니……!' '무수한 무사들을 거느리지도 못하고 늙어 빠진 노은자(老隱者) 몇을 거느리고 나타난 애송이 하나로 인해 사대마계의 순찰들이 십여 일 내내 파란에 휘말리고, 군마평의회가 열리다니…….' 폭풍혼은 영웅무정 일검향의 초상화를 쓰윽 바라봤다. 어딘지 모르게 허약해 보이는 청년이다. 또한 짓고 있는 표정은 쓸쓸하고 고독해 보인다. '관상학에 따라 해석할 때, 저러한 인상을 가진 자는 대가(大家)가 될 수 없다. 모르긴 해도… 영웅무정 일검향은 기세가 와해되어 버린 춘추팔가가 최후의 발악으로 내세운 허깨비에 불과할 것이다.' 폭풍혼은 내면적으로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긴 그는 이미 역전노장이 아니던가? 그는 마황야를 위해 검을 든 이후 천하무림계의 거목(巨木)을 무수히 베었고, 거성(巨星)을 무수히 떨어뜨렸다. 그 중에는 백 년 넘게 무명을 날렸던 인물도 허다했으며, 수년 간 노린 끝에 제거한 인물도 있다. 그가 대적했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노련하고 강했으며, 무자비한 인물들이었다. 하나, 그들은 모두 폭풍혼에게 제거가 되었다. 폭풍혼이 젊디젊은 영웅무정에 대해 야릇한 실망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반면, 제이의 인물 사몽혼(死夢魂)은 두 주먹이 바스러져라 불끈 거머쥐고 있었다. 그는 사형마루(死刑魔樓)를 이끌고 있으며, 사신마계(死神魔界)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로… 죽음의 미학을 숭상하는 자다. 그는 영웅무정의 초상화를 보며 회색의 두 눈에서 차디찬 살망(殺芒)을 쉬지 않고 뿜어 냈다. "오랜만에 권태감이 깨어지는군. ㅋㅋ… 사실 당세천하에는 내가 노릴 만한 자가 없었다." 번쩍－! 낮게 가라앉았던 악마안이 핏빛 섬망을 쉬지 않고 뿜어 냈다. 피(鮮血)와 죽음을 사랑하는 자, 그는 하이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애검(愛劍)을 매만졌다. "나의 피는 고수의 피에 굶주려 있다. ㅋㅋ… 무수한 적이 나의 검에 피를 발랐으되, 진정한 고수의 피는 한 번도 발리지 않았다." 사대마계에서 가장 뛰어난 암살 전문가, 그는 오랫동안 흥분에 휘어 감기기 시작했다. "네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ㅋㅋ… 너로 인해 나의 고독이 깨어지기를 바란다." 사몽혼은 영웅무정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微笑)가, 그의 손끝에는 가는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 대해 잘 아는 자라면 지금 그가 가공스러운 살의(殺意)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의 웃음은 죽음의 미소였다. 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린다는 것은, 그가 살인미학(殺人美學)에 휘말리며 전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너는… 나타나지 않았어야 했다. 애송이!" 사몽혼의 입술에는 본시 윤기가 없었는데, 지금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늑대 같은 자, 그의 회색 눈빛은 영웅무정 일검향이라는 존재로 인해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사몽혼이 살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한 여인의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사대마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면서도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여인 혈접혼. 그녀는 영웅무정의 초상화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녕 이상한 일이다. 그녀는 차고 독랄한 여인으로, 자신의 야망(野望)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여인이었다. 또한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일에 접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끼여드는 여인이기도 했다. 한데 이 순간, 그녀는 묘한 갈등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아름답다.' 피와 죽음 가운데 청춘을 바치고 있는 혈접혼이 한 인물의 초상화로 인해 정녕 상상하지 못했던 미묘한 충격에 휘말리고 마는 것이다. 적(敵)이 아름답게 느끼어지다니……. 또한 한 장의 그림으로 인해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 버리다니……. 혈접혼은 호흡을 통해 냉정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이상하게도 초상화는 그녀의 눈빛을 빨아들였다. '나의 마음이 이렇게 흔들리다니…….' 혈접혼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실물도 아니고, 한 장의 그림으로 인해 나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다니…….' 혈접혼의 아름답던 입매가 일그러졌다. '내가 직접 죽이리라. 감히 나의 마음을 동요시키다니…….' 그녀의 입꼬리가 묘하게 쳐들려졌다. "내가 제일 먼저 놈을 찾아 죽이리라!" 바로 그 때였다. "ㅋㅋ… ㅋㅋ……!" 구석진 자리에서 버릇없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술 한 병을 들고 있는 자, 군마평의회의 존귀성을 알지 못하는 듯 예의 없이 방만한 자세를 취한 채 의자에 걸터앉은 자. 그는 돌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네놈은… 결국 용(龍)이 되고 말았구나. ㅋㅋ……!" 태양혼(太陽魂), 다른 자들과는 달리 사문에 복귀한 이후, 단 한 번의 살행(殺行)도 거행하지 않은 자이다. 그는 나태하고 게으른 자로 낙인이 찍혔고, 그로 인해 그는 머지않아 후계자 서열에서 제거된다고 소문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칙칙하게 가라앉은 채 한 번도 강하게 타오르지 않았었다. 야망과 명예에 대해 미묘한 권태를 느끼기 시작한 마도제일의 기재 태양혼. 그의 두 눈이 돌연 무시무시하게 타올랐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타오르는 두 눈에서 강철을 녹일 듯한 빛이 폭사되어 나왔고, 그의 입가에는 오랜만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래, 너는 유성(流星)이다. 너는……!" 태양혼의 두 눈은 진정 태양처럼 강렬하게 타올랐다. '당세에서 나의 권태를 깨어 줄 사람은 오직 세 사람… 운명의 이남일녀(二男一女)! 그 중 하나가 바로 너다. 유성… 훗훗… 드디어 네가 나타났구나. 어리석은 녀석. 용이 되지 말라고 충고했거늘… 어리석은 녀석. 그리고 가장 인간다운 녀석. 그러나 네놈은 영웅(英雄)이 되지 못할 놈이다. 그것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 그래도 너의 친구(親舊)이기에…….' 하여간 이 날, 천유성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네 사람을 만든 셈이었다. 이 날의 모임으로 인해 적어도 이만 명이 이동하게 되었으며, 영웅무정 일검향이라는 존재는 사대마계의 암살 서열 제일위로 급상승하게 되었다. 폭풍천하! 천 년 만에 깨어진 세력의 균형은 한 인물의 출현으로 인해 급박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第4章 소림(少林), 잠자는 거인(巨人) 소림사(少林寺).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끼이는 고찰(古刹)이다. 또한 규모에 있어서는 용문사(龍門寺), 천왕사(天王寺), 백운사(白雲寺)를 능가하는 대찰(大刹)이다. 천 년 전 천축승(天竺僧) 하나가 왔었고, 소림사라는 사찰은 그 날 이후 천하제일사(天下第一寺)로서 중원구주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달마(達磨)가 혜가(慧可), 도방(道房), 혜광(慧光)을 기르는 가운데 소림사는 사찰의 범주를 넘어 중원의 정신적 중심지로 화하게 되었다. 기실 소림사는 달마 조사로 인해 세워지지 않았다. 소림사의 창립 설화는 달마 조사보다, 발타(跋陀)라는 선승(禪僧)에 가깝다. 발타와 달마. 하여간 두 사람의 천축(天竺) 선승(禪僧)에 의해 소림사는 대사찰로 화하였으며, 거대한 불도량으로 변화했다. 달마 조사는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 經), 그리고 육십사 식(式)의 운신술(運身術)을 전하였으며… 십팔나한수(十八羅漢手)를 소림사에 남겼다. 그 후 각원(覺遠) 선사(禪師)가 소림권(少林拳)을 완성하였으며, 칠십이 수(手)의 초식을 완성시켰다. 이어 추월(秋月) 선사(禪師), 속가의 이름이 백옥봉(白玉峯)이라는 인물이 소림사에 입사하였으며… 그는 용(龍), 호(虎), 표(豹), 사(蛇), 학(鶴)의 오 권(拳)을 소림사에 전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소림의 무공은 주로 외가(外家)의 무공으로서, 강(强)하고 빠름을 주류로 삼았다. 하나 달마에 필적하는 선사(禪師), 일관(一貫)의 대(代)에 이르러 소림의 무공은 외가일맥에서 내가(內家)의 일맥으로 변화하였으며… 오금나(五擒拿), 내가기공(內家氣功), 옥천검술(玉泉劍術) 등이 도입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일관 선사의 수제자 채구의(蔡九儀)는 퇴격술(腿擊術)을 소림사의 무공에 합치시켜 소림사의 무공을 한 단계 증가시켰다. 등공초약(登空超躍)과 어풍비행(御風飛行). 칠십이종절기(七十二種絶技)와 금강삼매진기(金剛三昧眞氣). 천하의 어떠한 방파보다도 방대한 초식을 지니고 있는 소림사의 무공은 일 인에 의해 이룩되었다기보다, 천 년에 걸친 연구와 창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중원무림계의 태두(泰斗)인 소림사. 오계(五戒)를 지키고, 그 중에서도 살계(殺戒)를 엄히 지키는 승려들의 방파 소림사는 거인 중의 거인이었으나… 엄격한 사훈(師訓)으로 인해 언제나 강호의 후견인 노릇을 해 왔다. 참으라(忍). 또 참으라(再忍). 그리고 다시 한 번 참으라(三忍)! 소림사의 역사, 그것은 대인(大忍)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림사의 무공은 대부분이 수비 초식이며, 소림사의 진세 또한 수비를 위주로 하는 변화를 갖고 있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강호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림사는 언제나 백도무림계의 정신적인 우상(偶像)이 되어 왔으며, 가장 많은 속가(俗家)의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현재 소림사는 잠자는 거인(巨人)으로 비유되고 있었다. 꽤 오래 전부터 소림사는 향화객(香火客)들의 발걸음을 끊게 하는 율령을 발표하였으며, 소림사 전통의 연공연기관문(練功練氣關門)은 먼지를 뒤집어쓴 폐허지로 변화했다. 독경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종 소리조차 들려 오지 않았다. 소림, 위대한 소림은 죽어 버린 것일까? 방장(方丈). 사찰의 장문인(掌門人)은 방장이라고 불린다. 아마도 세속 방파의 우두머리는 방장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방장이라는 말의 뜻은 사변의 길이가 각기 일 장(丈)이라는 것을 뜻한다. 방장이라는 뜻은, 지극히 작은 방 안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 그 어떠한 강호방파의 우두머리가 자신을 방장이라고 칭하겠는가? 다다미가 겨우 세 개 깔릴 정도로 작은 방이다. 두 눈에서 진물이 줄줄 흐르는 노승 하나가 있다. 손목에는 때가 묻은 염주(念珠)를 지니고 있고, 낡디낡은 포단 하나를 깔고 앉은 채 귀퉁이가 찌그러진 공탁 위에 너덜너덜한 불경 한 권을 얹어 놓은 채 상체를 흔들흔들거리며 무엇인가를 읊조리고 있다. 요료(了了). 살아 있는 소림의 활불(活佛)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는 개미 한 마리만 죽인다 하더라도 백일면벽(百日面壁)을 할 정도로 피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대단한 의협심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사기(邪氣)에 대해서는 엄청난 혐오감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일세의 활불 요료, 백도에 있어 그의 배분은 세 손가락 안에 끼일 정도로 엄청나게 높다. 죽은 창허상인이라 하더라도 그에 비한다면 큰 무당 앞의 새끼 무당 정도에 불과할 것이며, 풍진오성자라 하더라도 그에 비한다면 배분이 얕다. 기승(奇僧) 요료, 그는 면벽굴 안에서 죽을 때까지 면벽을 하겠다고 맹세를 한 바 있는데… 삼 년 전, 반 강제로 면벽굴을 나서야 했다. 그는 완전한 타의에 의해서 방장실로 처박히게(?) 되었으며, 그 날부터 지금까지 방장실을 중심으로 한 방원 오십 장(丈) 이내에 유배당한 몰골로 화하고 말았다. 소림사의 살아 있는 우상인 그는, 지난 십오 년 전 한 명의 동자승(童子僧)을 무기명전인(無記名傳人)으로 거둔 바 있다. 그의 법호는 무연(無緣). 요료는 무연 선사에게 삼 년에 걸쳐 소림비학(少林秘學)을 전했고, 천 일째 되는 날 무연 선사를 산방(山房) 밖으로 쫓아냈다. － 고약한 놈! 눈에서 살기(殺氣)가 흐른다. 네녀석은 중답지 않게 피를 좋아하고 있다. 썩 나가 버려라! 네따위 녀석은… 피를 좋아하는 무당(武當)의 속물(俗物), 창허(蒼虛) 밑에서나 머물 수 있는 녀석이다! 요료는 일 장을 내쳤으며, 황금빛 광선이 무연 선사를 휘어 감는 가운데 무연 선사의 몸뚱이는 백여 장 밖으로 퉁기어 나갔다. 대금광항마불인수(大金光降魔佛印手). 요료 선사는 백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무공을 외인에게 밝힌 것이다. 그의 내공은 백도 사상 세 번째 안에 끼일 수 있을 정도로 높았고, 소림사 이백 년 가운데 가장 강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하나 그는 현재 소림사의 젊은 승려들 사이에서 철저한 비겁자라고 배척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이유는 하나, 그가 악마대본영의 공격을 받고 너무나도 쉽게 항복을 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현재 소림에는 이맥(二脈)이 있다. 하나는 북소림맥(北少林脈)으로, 본산(本山)을 중심으로 하여 일천 리 이내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며… 또 하나는 남소림맥(南少林脈)으로서, 대부분 소림속가(少林俗家) 출신이며 타파 출신으로 소림사에 투신한 사람들이 남소림맥에 속한다. 요료 선사는 북소림맥과 남소림맥이 동시에 추앙하는 소림사의 활불인데… 반년 전, 어느 날부터 그의 명예에 똥이 발리워지고 말았다. 그 날 소림사에 삼천 명의 살수(殺手)가 왔고… 그들은 대나한진(大羅漢陣)을 화탄(火彈)으로 격파했고, 소림사의 원로(元老)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장경각(藏經閣)을 봉쇄하고, 달마암(達磨庵)을 점거하였으며, 대웅전(大雄殿)에 군막(軍幕)을 이룩하는 가운데 소림사 승려들의 행동거지를 엄격히 규제하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랴? 그들은 독단적으로 소림사의 봉파(封派)를 위부에 선언하였으며, 소림사를 살수의 전당으로 삼는 가운데 외부 무림계의 적들을 죽이기 위해 파견하는 살수들을 소림사 대웅보전 안에서 선발을 했다. 요료는 바로 그 날, 면벽굴 밖으로 강제로 끌리어 나왔다. 그는 인질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소림사 승려들은 그가 악마대본영 무사들과 싸우기를 바랬는데,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요료는 빙그레 웃었고, 단 일 초도 저항하지 않고 제 발로 방장실 안으로 잡혀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 날 이후, 그의 거처 둘레에는 다섯 겹의 검진이 펼치어졌으며… 만에 하나, 소림사의 승려가 악마대본영과 격돌을 한다면 요료가 죽는다는 포고문이 나붙었다. 승려들은 요료가 소림을 위해 자결하기를 은근히 바랬으되, 요료는 자결은커녕 몹시 유쾌한 표정으로 나날을 지냈다. － 악마대본영은 만월(滿月)이네. 둥근 보름달! 그는 간간이 과부 엉덩이만한 채미원(菜薇園)에 나아가 소채를 가꾸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문득 고풍(古風)의 선(線)을 지닌 불당 처마로 인해 갈라진 하늘을 보며 야릇한 말소리를 흘렸다. － 꽃은 아무 때나 피는 것이 아니지. 꽃은… 계절이 와야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이지. 겨울(冬)에 꽃을 보려고 하지 마라. 특히… 이 늙은 땡추중이 꽃을 구경시켜 준다고 믿지 마라. 땡추중에게는 굴이 어울리지, 강호(江湖)가 어울리지 않거든. 계집질할 재간도 없고, 술 마시는 재간도 없고, 염불만 할 줄 아니……! 미묘한 공안(公案)이다. 하여간 소림사의 활불은 마른 똥막대기처럼 타락하고 말았다. 이 날도 요료 선사는 지극히 쉬운 금강경(金剛經) 첫장을 펴 보고 있다. 이백사십 년 간의 승려 생활 내내 백오십만 번은 보아 온 글자 하나가 그의 망막에 스치운다. <공(空)> 텅 비었다는 글자이다. 요료 선사는 손가락에 침을 묻힌 다음, 그 글자를 지그시 집었다.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야. 끌끌……!" 그는 혀를 차면서 한 잔의 차(茶)를 들었다. 향기가 지극히 강한 차, 곡차(穀茶). 악마대본영의 무사들 덕에 요료 선사는 차종(茶種)을 바꾸게 되었다. 이전에는 작설차(雀舌茶)나 용정차(龍井茶)를 들었고, 향편(香片)이나 오룡차(烏龍茶)를 섞어 마셨는데… 반년 전부터는 곡차였다. 여아홍(女兒紅), 설화옥로(雪花玉露), 천일취(千日醉)……. 향기가 강하고 마시면 뱃속이 화끈거리는 곡차. 맛은 훌륭하나 요료 선사 같은 일세고승(一世高僧)과는 어울리지 않는 속세의 물건이다. 곡차란 바로 술이기에……! 그러나 요료 선사는 악마대본영의 무사들이 마시라고 하는 곡차를 한 잔도 사양하지 않았다. － 중은 분수를 알아야 해. 위대한 영웅무사들이 극진히 대접하는 곡차이거늘, 노납이 어찌 미천한 승려로서 곡차를 배척하겠는가? 요료, 만년에 타락해 버린 노승이다. 그는 마른 똥막대기로 불렸고, 소림사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미승이라 하더라도 요료를 존경하지 않았다. 요료를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소림사의 배분(拜分)상 천자배(千字拜) 이상 가는 승려들에 불과할 것이다. 소림사는 유서 깊은 방파이다. 또한 승려들은 속세인보다 오래 살기에, 소림사에는 십대(十代)가 뒤섞이어 살고 있었다. 그 중 최고의 배분이 바로 요자배(了字拜), 그 다음이 무자배(無字拜), 그리고 공(空), 현(玄), 천(天), 광(曠), 대(大)……. 요료, 그는 여전히 공자 한 자를 지적하고 있었다. 뱃속을 화끈거리게 하는 곡차 한 잔을 들며 그는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며 금강경 공부를 하는 것이다. "알 수 없단 말이야. 쯧쯧……!" 그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창문 너머 달빛이 흐르고 있는 불정(佛庭)으로 한 사람이 저벅저벅 나타나고 있었다. 사찰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현란한 장포를 걸친 자. 그는 몹시 거만한 자세로 걸음을 내디디고 있는데, 그의 뒤쪽에는 흑의검사(黑依劍士) 이십팔 인과 백의검사(白衣劍士) 이십팔 인이 기나긴 기러기 날개를 이룩하며 살기등등한 자세로 뒤따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입가에는 잔혹한 기운이 드리운 자. 그는 이백사십 세 노승 요료가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며 글을 읽는 것을 보며 사악한 눈빛을 뿌렸다. "소림은 죽었다. 철저하게……!" 전신에서 소름끼치는 마기(魔氣)가 흐른다. 그는 삼천 고수로서 소림사를 정복하고, 그와 더불어 오만여 수하들을 천하에 풀어서 팔파일방(八派一 )의 본거지를 힘으로 정복한 인물이었다. "타파는 저항하다가 무너졌다. 그러나 두 파만은 달랐다. 소림과 무당! 세칭 천하백도계의 양대본산이라 불리어지는 두 마리 거호(巨虎)만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정복되었다. 다시 말해… 훗훗… 소림이나 무당, 특히 이 곳 소림사는 유명무실한 집단인 것이다!" 히죽히죽 웃는 자. 그는 한 마디 명령으로 칠천여 명을 죽인 바 있는 인물이었다. 폭풍혼(暴風魂)! 항차 제삼세(第三世) 마황야를 꿈꾸고 있는 자이다. 그는 군마평의회에 참가한 후, 화산(華山)에 들어 함옥별부(涵玉別府)에 숨어 저항하던 화산십이검(華山十二劍)을 주살(誅殺)하였고… 그 날 조찬으로 상어 지느러미 요리와 북경식 오리 구이를 든 다음, 곤륜문하(崑崙門下)였던 북천칠혈(北天七血)을 격파했다. 그 날 밤, 그는 세 명의 미녀와 더불어 침상에 들었으며… 백도의 무사 오십사 인이 그를 암살하기 위해 닥쳐 들었다가 그의 사십팔(四十八) 흑백무적위사(黑白無敵衛士)에게 걸려 참살당했다. "소림사는 지겨운 곳이다. 훗훗… 하나 머지않아 이 곳을 떠날 것이니, 어느 정도 지루한 것은 참아야지. 훗훗… 낙양(洛陽), 그 곳이라면 악마대본영의 제일외단(第一外壇)이 살 만하지 않는가?" 폭풍혼은 요료 선사를 비웃는 눈초리로 바라보다가는 느릿느릿 신형을 틀었다. 바로 그 때, 요료 선사의 얼굴에 미묘한 경련이 일어났다. 실로 야릇한 성광(聖光). 그의 진물에 덮인 두 눈에서는 엄청난 빛줄기가 흘러 나왔다. "기(氣)……!" 요료 선사는 한 마디 외치며 흠칫 창 밖을 바라봤다. 그가 보는 쪽은 폭풍혼이 걸어가고 있는 곳과는 정반대 되는 곳이었다. '거대(巨大)하고 힘차다. 그리고… 정녕 빠르다.' 부르르……! 요료 선사의 다섯 손가락이 격렬히 떨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세는 절대영웅(絶代英雄)에게만 있다. 그는 적어도 십 리(里) 밖에 있거늘, 노납에게 기세를 전하다니…….' 그의 눈빛은 한순간 강하게 타올랐다가는 스르르 무산이 되었다. '드디어… 드디어 백도의 하늘을 바칠 기둥이 다가선단 말인가?' 그가 아닌 누구도 감지 못할 가공스러운 기세. 그것은 십 리 밖에서부터 느끼어졌으며, 거의 찰나적으로 오 리(里)를 이동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요료 선사는 공자(空字)를 집던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또 하나의 글자를 지적하고 있었다. <하늘 천(天)> 요료 선사는 그 글자를 집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창허(蒼虛)… 자네가 말한 녀석이 오는 것인가? 아미타불… 아니라면 또 다른 인물인가? 아아, 모르겠네그려. 노납이 이제 마른 똥막대기 신세에서 벗어나게 될는지……!" 이 순간, 요료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그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이야말로 그가 이전에 지었던 표정과는 다른, 진실되고 의미 있는 표정이었다. 그가 천자를 집고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삼천여 무사들이 펼치고 있는 진세를 유유히 돌파해 가면서 담을 다섯 개나 훌훌 뛰어넘고 있었다. 소림은 악마대본영에서 파견된 무사들에게 완벽하게 점령된 상태이다. 어디를 가든 그들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검(劍)을 안고 뜨락을 거니는 자들, 예도를 품은 채 소림사의 일반 승려들 사이에 끼여서 호시탐탐 주의를 살펴보는 자들, 여차하면 쏘아 낼 수 있도록 갑노(匣弩)의 줄을 팽팽히 걸어 둔 채 소로(小路)를 살펴보는 자들……. 하나같이 살기 가득한 눈빛을 던지고 있다. 폭풍혼 사마위승과 더불어 소림사에 온 이들은 소림사의 요지에 겹겹의 진세를 만든 채 소림사의 내부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기실 소림사에 기묘한 대치가 벌어진 이유는, 마황야가 백도의 명문거파에서는 피를 뿌리지 말라고 하명했기 때문이었다. 마황야는 마도를 정복하던 시절에는 무자비할 정도로 단호했던 자이다. 하나 그는 백도에 대한 총공격을 명할 때, 되도록 피보라를 적게 뿌리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 백도인들은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숭상한다. 그들을 굴복시켜 실리(實利)를 취하기 위함이라면, 그들의 대의명분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만에 하나 숭산(崇山)과 무당(武當), 화산(華山)에서 피보라가 일어난다면… 천하를 정복하지 못한다. 백도를 피로 씻은 자로서, 백도를 오 년 이상 정복한 자는 없다. 백도를 천 년 정복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가운데 백도를 정복해야 한다. 젊은 승부사들에게는 지극히 불만스러운 명령이었다. 특히 폭풍혼과 사몽혼, 두 사람에게는 깊은 권태감을 안겨 주는 무기력한 명령이었다. 해서 폭풍혼은 자신의 거점을 소림사에서 낙양으로 옮길 작정을 한 바 있고, 그것을 추진하는 상태였다. 이 밤, 폭풍혼은 휘하 정예무사들 가운데 반수 가량이 두 눈을 부릅뜨고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으되… 그가 여유만만하게 방장실로 다가가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작은 채미밭, 그 곳은 밀다원(密茶園)이라고 불리고 있다. 밀다원은 소림사의 방장실을 둘러싸고 있는 차밭을 말하며, 그 곳에서는 차 잎사귀가 자라고 있다. 그 위 달빛이 뿌리어지고 있으며, 요료 선사를 하루 십이(十二) 시진(時辰) 내내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열두 명의 무사들이 십이로파풍영진(十二路破風影陣)으로써 밀다원을 엄밀히 방어하고 있었다. 넷은 지표 위에 사상검세(四象劍勢)를 펼치고 있고, 넷은 방장실 처마 위에 풍운검둔진(風雲劍遁陣)으로 감추어져 있다. 넷은 지하에 은잠하고 있다. 만에 하나, 누군가 나타난다면… 십이 인의 검이 동시에 발출이 되며, 그 순간 호각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가운데 소림사 내부의 폭풍무사들이 일시에 혈풍을 일으킬 것이다. 하나 그들 또한 한 인물의 출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낙엽 지는 소리도 내지 않고 바람을 뚫고 다가선 자. 그는 짙은 안개가 달빛을 차단하는 한순간의 틈을 이용하여 운룡비공(雲龍飛空)으로 날아올랐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동영무도의 비각무흔(飛脚無痕)을 발휘해 작고 음습한 실내로 접어들었다. 흐릿한 눈빛을 가진 청년. 그가 방장실의 대들보 위로 사뿐히 날아 내릴 때였다.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요료 선사의 입매에 염화시중의 미소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꽃은 금릉(金陵)에서 피었으며……!" 미묘한 선시(禪詩)이다. 이 밤따라 흥취가 일어나는 것일까? 마른 똥막대기라고 불리고 있는 타락한 고승은 느릿느릿 시를 읊었다. "열매는 숭산(崇山)에서 익어 가는 것인가?" 그는 그렇게 읊조린 다음, 기지개를 천천히 켰다. 일순, 그의 진물에 뒤덮인 두 눈이 한 곳에 집중이 되었다. 바로 그 곳, 그가 머물러 있었다. 싱긋……! 홀연히 나타난 괴청년은 요료 선사의 눈짓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박쥐들이 많은데 눌러 계시다니… 용하시군요?" 그의 목소리는 혜광심어(慧光心語)를 이용한 목소리였다. 혜광심어는 일반 전어술과는 달리 입술을 벌리지 않고 음파(音波)를 비공(鼻孔)을 통해 전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랄까? 요료 선사도 싱긋 따라 웃는다. 그리고 그도 입술을 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똥 내음 가운데에서 해탈하는 것이 승려의 본분이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요료 선사는 죽은 호랑이가 아니었다. 그의 전신에는 예측하기 힘든 내공이 깃들여 있으며, 만에 하나 그가 내공을 발휘한다면… 소림사 내 무사들의 반수 가량이 그 하나를 막아 내지 못하고 피 구덩이 속에 빠져 버릴 것이다. 요료,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참고 있을 뿐이었다. 승려로서 피를 흘릴 수가 없기에……. "젊은 녀석들이 고생이 많지." "아……!" "창허… 그 짓궂은 녀석 때문이지. 유성(流星) 하나가 떨어질 날을 기다리며… 똥 구덩이에서 너무 오래 참았지!" 빙그레 이어지는 대자대비한 미소, 그것이야말로 고승 요료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요료 선사는 창허상인을 십화의 우두머리로 지목한 인물이었다. 그것은 악마대본영의 치밀한 순찰 조직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백도의 마지막 비밀이었다. 나타난 괴청년, 그는 가문의 천 년 숙원을 해결하고 출도한 천유성이었다. 그는 창허상인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림사로 온 것이다. "참을 만했네." "저를… 믿으십니까? 오늘 처음 보는데?" "끌끌… 인물이야 오늘 처음이나, 자네의 천기(天機)는 늘 보아 왔네. 그러나 예상보다 빠른 출도(出道)로군." 요료 선사는 염주를 떼굴떼굴 굴렸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두눈에는 장엄한 빛이 떠올랐다. "두둑한 배짱이 마음에 드네만, 백도는 지친 상태야. 자네 하나가 강하다 하더라도… 하늘과 땅이 바뀌지는 않아!" 실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천유성이 정식으로 나설 경우, 악마대본영의 무서운 보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게다가… 열 송이 꽃(十花)은 가지가 약하지!" "아……!" "반년은 더 있어야 완전히 피어날 수 있네. 기실 노납이 똥 구덩이 가운데에서도 참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네!" 요료 선사는 활불이라고 불리어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에 초연한 인물이었다. 하나 싸움이 벌어질 경우, 백도의 의혈한들이 애꿎은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알기에… 번뇌를 삭여 가며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이다. 젊고 강하고 빠른 자. 유성이라고 불리는 자! 그는 바로 창허상인이 선택한 백도의 우상, 천유성이었다. "아해(兒骸)들이 더 자라야 해." "아해들이오?" "다 죽어 가고 있지! 열 명의 아해들이……!" "으음……!" "창허, 그 고약한 녀석이… 죽기 전, 너무도 고약한 명령을 내렸지." 이심전심으로 오고 가는 대화. 하나 그 안에는 천하무림 정세를 좌지우지할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꼬리별 하나를 위한 결정이었지. 노납은 내심 걱정을 했으나, 창허의 재주를 알기에… 만류하지 않았네. 창허에게는 하나의 재주가 있지. 그것은 바로…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라네!" "아아……!" "일단… 농막(農幕)에 가 보게. 가면 알 걸세." "농막이오?" "산하(山下)에 있네." 요료 선사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듯 탈속한 표정을 지었다. "숭산에서는 혈화(血花)를 피우지 말게. 피어나야 할 혈화였다면, 자네가 오기 전에 이미 피었을 걸세. 일단은 그 멍청한 녀석들만 데리고 떠나게. 그리고… 언제든 하늘을 가를 수 있을 때(開天), 구파일방을 깨우게. 그뿐이네."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그리고 그가 숨을 세 번 들이마시고 네 번 토할 때, 홀연히 나타났던 천유성은 달빛이 검은 구름에 휘어 감기는 틈을 이용해 산망을 홀연히 벗어났다. 숭산농막(崇山農幕). 소림사 승려들이 곡식을 만들기 위해 가꾼 농토 가운데 세워진 하나의 초막(草幕)을 말한다. 농토는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고, 보리와 밀이 자라야 할 농토에서는 무심한 갈대만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또한 얼마 전에 내가고수들끼리의 격돌이 있었던 듯, 난석군(亂石群)이 드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밤에는 달빛이, 새벽에는 안개가 바윗돌을 핥는다. 가끔 가다가는 추적추적 야우(夜雨)가 바위들을 적셨으며, 비와 더불어 일어나는 바람은 키가 큰 갈대를 일시에 눕히곤 했다. 지금, 야무(夜霧)가 짙다. 아니, 그 짙은 밤안개는 거의 매일 피어 오르고 있었다. 소림사 대웅전에서 구십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숭산농막 일대에는 촉루가 군데군데에서 눈에 띄었으며, 부러진 병장기(兵仗器)들이 달빛에 번득 빛을 발하고 있다. 그 곳은 십화(十花)가 박살난 장소였다. 십화의 십대영주(十大領主)들은 반년 사이 열 명의 암살자가 되어서 악마대본영의 고수들을 찾았으며,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십전십패(十全十敗)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백도에는 더할 나위 없이 거대한 충격이었으며, 그러한 일로 인해 백도의 주도세력인 구파일방은 깨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쓰으으… 쓰으으……! 자욱한 안개가 흐른다. 안력(眼力)을 방해하는 습기 짙은 안개가 흐르자, 난석군이 그 안에 묻혀 버렸으며… 스산한 느낌을 주는 갈대밭마저 안개에 휘말려 버렸다. 안개가 보다 짙어질 때, 하나의 빛이 다가서고 있었다. 빛은 안개를 가르며 빠르게 다가서고 있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속도의 극한을 초월한 절정의 능공초약(凌空超躍). 내공의 기세로써 신형을 띄워 올린 상태로 소리도 내지 않고 허공을 가르며 움직이는 경공이다. 허공에서의 진퇴가 자유자재하며, 위로 올라가고 날아 내리는 것 또한 날개 달린 짐승의 동작보다도 자유롭다. 또한 그것은 어기배검(御氣排劍)과 선천검도(先天劍道) 같은 초상승검도(超上昇劍道)를 시전하기 위한 운신술(運身術)이기도 했다. "이 근처인데… 진세가 대단하군?" 허름한 백포이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위에는 방립 하나가 얹혀져 있다. 바로 천유성. 그는 소림사 안으로 들어가서 요료 선사를 만난 다음, 은밀히 몸을 빼내어 서 숭산농막을 찾아온 것이다. "이러한 진세를 칠 사람은 창허상인뿐이다. 그렇다면 그분이시거나, 초(楚)가 펼친 것이다. 이것은 혼돈귀무(混沌鬼霧)의 진세로서, 백파진학(百派陣學)을 깨우친 사람만이 펼칠 수 있다." 스팟－! 천유성의 몸놀림이 보다 원활해졌다. '초, 고약한 녀석. 어이해 악마대본영 따위에 패배한단 말이냐? 너는 내가 잊지 못할 몇 사람 가운데 하나이거늘… 어이해 나를 실망시키느냐?' 천유성은 요료 선사의 말을 기억해 가며 진세 깊이 들어갔다. 요료 선사는 십화의 씨를 뿌린 사람이며, 창허상인은 목숨을 다 바쳐서 십화를 돌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상고기인들이야말로 진정한 백도의 영웅들이었다. 혼돈귀무진은 천유성이 아니라면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진세이다. 소림사 일대에 폭풍혼 휘하세력이 무수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숭산농막이 온전히 보전되고 있는 이유는, 농막 일대에 혼돈귀무진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패망했다고 소문이 퍼져 있는 십화. 과연 십화는 멸망한 것일까? 第5章 패배의 뜻은 부들부들……! 주둥이가 깨어진 백자기 주호를 쥐고 있는 오른손은 격렬히 떨리고 있었다. 그는 깡마른 체구로 인해 더욱 날카롭게 보였다. 그의 망막에는 도자기 잔(盞) 하나가 보이는데, 잔 역시 이가 빠진 상태였다. 실내에는 음습한 공기가 감돌고 있다. 그는 잔기침 소리를 내며 독주(毒酒)를 들고 있었다. "쿨룩쿨룩……!" 호된 기침 소리 가운데 손은 더욱 격렬히 떨렸다. 그는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손가락을 덜덜 떨면서 술잔을 입가로 갖고 갔다. "……!" 꽤나 말이 없다. 그리고 눈빛은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묘한 정지감을 주는 청년도인(靑年道人)이다. 전체적인 인상이 예리하며 이지적인데, 그는 술로써 자신을 죽여 버리고 있었다. "또… 밤이 지나가는가?" 느릿느릿한 목소리이다. 오랜 기다림에 지친 목소리이며, 처절한 한이 배어 있는 목소리이다. 그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한 마디 말을 하며 주호목을 쥐었다. 느릿느릿… 주호는 기울어졌으며, 술이 쪼르륵 소리를 내며 흘러 나와 이가 빠진 자기 술잔을 가득 채웠다. 그 곳은 실로 짙은 약향(藥香)이 풍기고 있는 곳이었다. 열 개의 침상이 놓여 있었으며, 그 중 아홉 개의 침상 위에는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활기(活氣)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이 곳이 무림의 한 장소라고 한다면 아마도 개가 웃을 것이다. "세월이 나를 술 마시게 하는군. 제길, 이제는 욕이라는 것도 배웠다!" 월의(月衣)라는 도복(道服)에, 허리춤에는 솔기가 빠진 불진(佛塵)이 하나 꿰어차여져 있었다. 옷자락에는 술이 묻어 있고, 검은 액체가 달라붙어 있었다. 술 속에 깊이 침잠이 되어 버린 듯, 그는 손가락을 가늘게 떨면서 다시 일배주(一背酒)를 들려 했다. 바로 그 때였다. "실망인데? 책(冊)이 아니라, 술(酒)이라니?"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며 헌칠한 체격의 청년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자, 그는 흑방립 하나를 기우듬히 썼으며 작은 행랑 하나를 등에 메고 있었다. 구깃구깃한 옷자락에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거슬려 보인다. 그러나 그는 치졸해 보이지 않고, 퇴폐적일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남자로서 그리도 선정적(煽情的)으로 보인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그의 육체는 노련한 장인이 혼신을 다해 만든 남신(男神)의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특히 섬세한 손매와 그윽한 눈매는 가히 압권이었다. "초(楚), 자네도 술을 배웠는가? 세월이 그리도 치열했던가? 꽁생원이 술잔을 손수 들 정도라니?" "으으, 바로… 바로……!" 술 마시던 도사는 너무나도 놀라 입을 따악 벌렸다. 어찌나 크게 벌렸는지 주먹 하나가 쑥 들어갔다가 나올 정도였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크윽!" 그의 상반신이 격렬하게 떨렸으며, 입술 사이에서 시꺼먼 핏덩어리가 왈칵 게워지는 것이 아닌가? 피를 한 사발도 넘게 토한 도사. 그는 바로 만박서생(萬博書生)이라는 별호를 갖고 있는 하후초(夏侯楚)였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암기력(暗記力)을 갖고 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천유성이 꼭 만나야 할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야속하네. 이제야 오다니……!" 하후초는 피를 왈칵 토하고도 모자라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의 얼굴은 말라 버린 가랑잎처럼 형편없이 보였다. 생기(生氣)라고는 찾아보지도 못할 정도이며, 두 눈에는 빛이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는 폭풍혼과 싸웠고 철저하게 패배했다. 그는 극심한 고통에 사로잡혔으며,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 독한 술을 마신 것이다. 하후초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낭인주에서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술에 찌든 육체를 지닌 타락한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하나 그의 눈빛이며 표정은 반가움에 가득 찬 것이었다. "그러나… 반갑네. 여기 오다니……!" 그가 피를 흘리며 말하자. "미련한 사람. 예전에는 비급을 외우기 위해 종이를 씹어먹는 염소가 되더니, 이제는 몸이 다 망가진 채 술을 드는 바보가 되었는가?" 천유성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후초는 이미 쓰러져 요양해야 할 신체였다. 한데, 매일 술을 마시다니? "자네는 현명한 사람인데… 어이해 이렇게 멍청한 행동을 하는가?" "살다 보면 약간 미칠 때가 있지. 상인의 재를 무당산에 뿌릴 때 그랬고, 지금이 그렇지. ㅋㅋ……!" 그는 미친 듯 웃으며 손을 내밀었으며, 천유성도 눈시울을 붉힌 채 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손을 마주 잡았다. 하후초의 손은 얼음으로 깎은 듯 지극히 차가웠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막혔다. 어이해 이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요상대법(療傷大法)을 쓰지 않았단 말인가?' 천유성은 강한 눈빛을 흘렸다. 하후초가 그를 안다면, 그는 하후초를 안다. 하후초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세기재이며, 무당파의 장문인이 될 사람이다. 또한 그는 무당파의 상청보록(上淸寶錄), 태청진경(太淸眞經)을 모두 터득했으며… 천유성보다도 많은 각 파 비급을 암송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창허상인이 구해다 준 영약을 먹어 가며 막대한 내공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그가 다친 상태에서 전혀 회복되지 않고 술에 찌든 폐인이 되어 천유성을 기다릴 줄이야? "패했다는 것을 들었겠지?" "물론……." "ㅋㅋ… 죽지 않은 것을 비웃지 말게!" "아……!" "비웃으면 아니 되네. 모두… 자네 때문이니까. ㅋㅋ……!" 하후초의 눈빛은 무섭게 타올랐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하후초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은 정녕 엄청난 충격을 전하기 시작했다. "자네를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죽을 때까지 싸웠을 걸세. 자네가 오리라 믿었기에, 죽음보다도 굴욕 가운데서 벌레처럼 움츠리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네." 하후초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기침을 할 때마다 자주색 피를 왈칵왈칵 토해 냈다. 하후초는 창허상인의 의발전인이자 당금 백도계의 제일인자이다. 그는 만박서생(萬博書生)이라는 아호를 가졌으며, 지지 기반이 붕괴되어 버린 십화를 이끌고 있었다. 십화는 창설될 때부터 사대마계에게 노출이 되어 왔다. 그로 인해 십화를 일으키는 데 주축이 된 십대방파는 사대마계에게서 가장 큰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하나 십화는 여전히 건재한 상태이며… 십화가 붕괴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요료 선사와 창허상인의 안배(按配)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홉 개의 침상에 누운 사람들은 하후초를 대형(大兄)으로 섬기고 있는 백도십파의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이다. 그렇다. 이들이 바로 사대마계의 암습으로 인해 쓰러진 무림십화였다. 사대마계는 그들을 쓰러뜨리며 승리를 확신한 바가 있다. 한데 그들이 쓰러진 것 또한 안배일 줄이야? "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네. 진짜… 가장 쉬운 일이네. 무사에게 있어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패배한 상태로 살아남는 것이라네!" 하후초는 잔을 쳐들었다. 그는 곧 쓰러져 혼절할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여러 잔째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노상인은 자네가 언제고 온다며, 최후의 안배를 계획해 둔 것이네. 바로 자네를 위해! ㅋㅋ… 그분은 십화를 거의 다 무너뜨리는 가운데 마각을 벗긴 것이네!" "마… 마각?" 천유성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보겠는가, 우리들이 얻어 낸 것을? 나를 비롯한 십화령주가 왜 쓰러져 폐인(廢人)이 되었는지를 보겠는가? 어이해 변변히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는가를 알고 싶은가?" 하후초는 다 죽어 가는 사람답지 않게 무시무시한 정광을 두 눈에서 토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공의 힘이 아니라, 정신의 힘이었다. 하후초는 창허상인이 죽은 이후, 창허상인의 심득을 모조리 얻었다. 그는 현재 창허상인을 능가하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대마계의 도전 가운데 너무나도 쉽게 쓰러졌다. 사대마계는 십화의 폐망 가운데 승리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상상하지 못할 창허상인의 마지막 안배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찌이익－! 하후초는 다짜고짜 장포 앞가슴을 찢어 냈다. 그의 앞가슴이 환히 나타난다. 앞가슴에는 핏빛 뱀이 달라붙은 듯한 상흔(傷痕)이 가득했다. 하후초는 그 상처로 인해 폐인이 되고 말았다. "자랑스러운 상처라네." 하후초는 손바닥으로 상처를 매만졌다. 입가에는 웃음이,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퍼부어지는 가운데 그는 천천히 뒤로 나뒹굴었다. "정녕 자랑스러운 상처라네. 보… 보게. 자네에게 이 상처를 보여 주기 위해 자결하고픈 마음을 참아 가며… 악착같이 기다렸네. 으음……!" 하후초는 쓰러지며 의식을 잃었다. 그 지독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하후초이거늘… 천유성이 나타나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탈진해 나뒹구는 것이다. "초(楚)… 진짜 강자(强者)는 내가 아니라, 자네였군? 이 가공할 고통 가운데 웃으며 기다렸다니……." 천유성의 눈시위가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하후초의 몸뚱이를 두 팔로 안아 든 다음, 마지막 침상 위에 그의 몸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한순간 그의 두 눈에서는 예지에 가득 찬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창허상인은 내게 사대마계의 마학(魔學)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의 눈길은 무당파의 대제자 하후초의 가슴에 집중되었다. 핏빛 뱀이 달라붙은 듯한 상처는 사대마계의 거두를 상대하는 가운데 입은 것이다. 당시 그는 충분히 몸을 빼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상대의 초식에 격타당한 바 있다. 가슴에 정확한 상흔을 남기기 위해, 또렷하고 완벽한 상처를 가슴에 새기기 위해서……. "이것은 무공비급보다도 완벽한 마공의 기록이다. 초의 가슴살은 썩어 허물어졌고, 그 빛은 녹자색(綠紫色)이다. 이로 보아 사대마계의 파해신공(破解神功)인 잔마음혈류(殘魔陰血流)가 나타났음이 분명하다." 천유성은 하후초의 상처를 보며 하나의 마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잔마음혈류! 금석(金石)을 녹여 버리는 파훼신공이다. 골수 안에 독을 품고 있다가 장력과 더불어 시전하는 수법으로, 장력에만 신경을 쓰다가 장력에 스미어 있는 잔마음혈류를 느끼지 못하고 오장육부가 썩는 독상(毒傷)을 입게 된다. 하후초의 가슴에 장인을 남긴 자는 바로 폭풍혼이다. 그는 아무도 몰래 잔마음혈류를 터득했으며, 그것을 이용해 항차 마황야의 지위에 도전할 작정이었다. 한데 하후초의 희생으로 인해 그의 무공 비밀이 밝혀지고 만 것이다. 두 번째 인물, 그는 곤륜문하(崑崙門下) 운중일학(雲中一鶴) 군무옥(君武玉)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백도에서 가장 빠른 경공을 익히고 있는 인물이다. 그 역시 충분히 몸을 피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꺼히 상대의 검하(劍下)에서 피를 흘렸다. 포송영(蒲松英)의 영주, 그의 가슴에는 방사형의 묵흔(墨痕)이 가득했다. 오직 일 검(劍)으로 인해 새겨진 검흔이다. 하나 상처는 깊었고, 적어도 백팔 회(回) 거듭 베어진 듯한 흔적이 형성되어 있었다. 운중일학 군무옥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러한 상처로 인해 죽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운중일학 군무옥은 천유성도 알고 있는 곤륜의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을 지니고 있었기에, 상흔을 갖고도 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십대마학(十大魔學) 가운데 하나인 사형묵룡결(死形墨龍訣)에 따른 상처이다!" 천유성은 상처를 살펴보며 또 하나의 마공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완벽한 마도자객술(魔道刺客術)이라는 사형묵룡결. 그것을 시전할 수 있었던 사람은 천년마도 사상 스무 명도 되지 않는다. "또한… 검의 흔적이 색다르다. 이것은 바로… 색혈(索血)이라 불리는 마병(魔兵)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장광씨(長光氏)의 물건이며, 색혈은 바로 사몽(死夢)이라는 자의 애병(愛兵)이다." 천유성은 더욱 강한 눈빛을 폭사해 냈다. 세 번째 인물은 매끄럽게 깎은 머리 위에 계인(戒印)을 선명히 새기고 있는 중년 승려였다. 그는 극한의 고통 가운데에도 단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법호는 무연(無緣), 그는 내공에 있어서 하후초를 능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요료 선사의 무기명전인(無記名傳人)이며, 계보상 소림사(少林寺)의 장문인(掌門人)이 될 수 있는 인물이며, 숭산농막(崇山農幕)의 진짜 주인이었다. 그는 십화에서 영산홍(暎山紅)으로 불리고 있으며, 소림사의 칠십이 종(種) 절학(絶學) 가운데 스물다섯 가지에 정통한 인물이기도 했다. 무연은 대금강진기(大金剛眞氣)와 십팔층무상진력(十八層無相眞力)으로 몸을 보호한 상태에서 일 검을 맞았다. 그의 목젖에는 동전만한 혈흔이 새기어져 있었다. "파천섬광류(破天閃光流)다. 사대마계의 파천섬광류……!" 천유성은 주먹을 펴지 못했다. 사대마계의 마학은 외부에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가 자파무공의 파훼식(破毁式)을 만들까 우려한 나머지,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독문절학은 시전하지 않는다. 창허상인은 그들의 신비를 깨어 버리기 위해 십화의 십대의혈한(十大義血漢)들에게 일부러 패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오직 한 사람, 천유성을 위해……! 동백(桐柏)의 주인은 해남파(海南派) 제자였으며, 좌수검(左手劍)의 절대자로 불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비검추혼(飛劍鎚魂) 엽상(葉霜). 그는 등판 드넓게 상처를 새겨 넣은 채 엎드려 있었다. 그의 상반신을 허물어뜨린 마학은 십대마학 가운데 절전된 것으로 여겨진 쇄령폭황참(碎靈爆皇斬)이었다. 천유성은 상세를 세세히 살피는 가운데 쇄령폭황참의 출수(出手) 변화(變化)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금잔화(金盞花). 무산파(巫山派)를 일으키는 사명을 갖고 있는 무산옥녀(巫山玉女) 난고(蘭姑)의 암호명이다. 그녀는 백도제일화로 불렸던 여인인데, 지금은 천하에서 가장 흉악한 추물로 변화했다. 사몽이라는 자에 의해 얼굴이 바스러지고, 목줄 위로 흉칙한 상처를 남기고 만 것이다. 무산옥녀는 마공 비밀을 알기 위해 자신의 용모를 바친 것이다. 여인에게 용모는 죽음보다도 중요하다. 목숨은 주어도 용모는 지키는 존재가 여인이라는 존재이다. 하나 무산옥녀 난고는 용모를 희생해 가면서 사대마계비전 환상회선마해수(幻想廻旋魔解手)의 비밀을 알아 낸 것이다. 청성(靑城)의 사일신객(射日神客). 그는 수선화(水仙花) 한 가지를 안은 채 누워 있는데, 그의 하반신에는 상처가 그득했다. 그는 천잠사의(天蠶絲衣)라는 보의(寶衣)를 걸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심한 상처를 입었다. 그를 벤 인물은 사몽, 그는 단 일 검으로 여든하나의 상처를 만들어 냈다. 그 중 일곱 개의 흔적은 사일신객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만한 것인데, 사일신객은 청명호심공부(淸溟護心功夫)를 시전한 채 검을 맞았기에 한 줄기 목숨만은 보존할 수 있었다. "팔십일로 파풍무흔(破風無痕)이라는 것이외다." 사일신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쓰러진 지 사십 일째이며 곡기를 취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다친 사람인데, 표정이 아주 밝았다. "저는 지난 사십 일 내내 파풍무혼을 격파할 비법을 연구했소이다. 결과 다섯 가지의 운검(運劍), 운신(運身)의 요결(要訣)을 깨달을 수 있었소이다. 그것은 서적에 적혀 있소이다, 대령주(大令主)." 사일신객은 천유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천유성도 그를 보고 있는데…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이되, 두 사람 사이에는 진하디진한 우정(友情)이 교차되고 있었다. 사일신객은 나이 서른다섯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고통을 참아 가며 몹시 즐거워하고 있었다. 천유성의 헌헌(軒軒)한 기표와 맑디맑은 눈빛이 그에게 크나큰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 곳에서 백 일 머무시며 우리들이 알아 낸 마공파훼식(魔功破毁式)을 터득하시기 바라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우리 열 사람은…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고 스러진다 하더라도 모두 웃으며 죽을 수 있소이다." "……!" 천유성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 대체 어떠한 말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는 사일신객과 손을 마주 잡았으며, 사일신객은 청년영웅의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고맙소." 천유성은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십화, 가장 화려하게 피어난 의(義)의 꽃이다. 십화는 한 인물을 위해 철저히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최후의 안배는 마학파해(魔學破解)의 안배이다. 숭산농막(崇山農幕)에는 사대마계가 자랑하는 십대마학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을 모조리 깨우친 이후, 십화를 이끌기 바란다.> 창허상인은 간단한 유서를 남겼다. 그는 십화를 피우려다 끝내 그 개화됨을 보지 못하고 스러져 버렸다. 천유성은 십화의 후견인(後見人)이라 할 수 있으며, 최후의 안배에 따라 십대마학의 비밀을 하나하나 깨달아 나가기 시작했다. 패배와 고통 가운데 기록이 된 열 개의 흔적. 천유성은 그 흔적을 세세히 살피는 가운데, 이전에 알지 못했던 마학 비밀을 터득할 수 있었다. 출수(出手)와 발검(拔劍), 운검(運劍)과 이신(移身)의 비밀들. 만에 하나,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사대마계의 중요 인물들을 상대했더라면… 이기기 위해 무수한 초식을 시전해야만 했을 것이다. 잔화수혼(殘花搜魂), 백팔영(百八影) 마라금쇄(魔羅禁鎖), 뇌궁비섬폭(雷穹飛閃爆)……. 닷새 내내 천유성은 열 개의 상흔을 연구하며 지냈다. 그 사이 그는 십대마학의 파해식을 나름대로 깨달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그의 무공은 가일층 증가하게 되었다. 하후초를 위시한 십 인은 그 사이 몇 번이고 깨어났다가는 혼절을 했고… 그러다가는 다시 깨어났다. 그 중의 어떤 인물은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쓰러질 때의 상황을 세세히 이야기했고, 어떠한 인물은 부서진 팔다리를 겨우겨우 흔들며 자신이 연구한 파해식을 몸소 시전해 보이기도 했다. 밤안개가 흐를 때, 천유성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천천히 손바닥으로 빗어 넘겼다. 며칠 밤을 꼬박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형제들! 그대들로 인해 나의 무공은 보다 완벽해졌소. 그러나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소. 그 말은 훗날, 나의 검(劍)이 대신 말해 줄 것이니까." 무섭게 가라앉은 눈이다. 차라리 강하게 타오른다면 느낌이 덜할 것이다. 깊이 가라앉은 삼해(深海) 같은 눈빛, 그 눈빛의 의미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로 신비했다. 그 날은 폭풍우(暴風雨)의 날이었다. 일부러 패배한 바보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구릉(丘陵) 위에 서서 차가운 비를 홀딱 맞으며 그 녀석을 보고 있었다. 그는 오전 내내 깎아 만든 한 자루 목검(木劍)을 들고 있었다. 약간만 외모에 신경을 쓴다면 전설상의 송옥(宋玉)을 능가하는 전륜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까마귀처럼 형편없는 복식을 하고 있는 녀석. 그는 한 자루의 목검을 애지중지 다듬은 다음, 그것을 오른손에 비스듬히 쳐들고 들로 나서고 있었다. 콰르르릉－! 하늘이 울부짖고 있다. 갈대숲이 모조리 뽑혀져 날아오르는 듯한 광란이 일어나고 있으며, 농막 어귀의 등룡천폭(登龍天瀑)은 무시무시한 물줄기를 쉬지 않고 토하고 있었다. 뇌전(雷電)과 노폭(怒瀑), 그리고 일 인(人). "검은… 지독히도 무정한 녀석이지. 아무리 정(情)을 준다 하더라도 대답하지 않는 녀석!" 옥수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손이 천천히 쳐들리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시작되고 있었다. "무수한 검호(劍豪)들이 검의 진정한 비밀을 캐어 내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너무나도 많은 청춘이… 검 아래 고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저벅－ 저벅－! 그는 꽤 큰 걸음으로 폭포수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손이 느릿느릿 쳐들리며 검극(劍極)이 지면과 평행선을 이룩하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손은 비스듬히 떨치어졌으며… 그와 더불어 그의 신형은 퍼부어지는 빗줄기 속으로 슬쩍 감추어졌다. 또한 한 줄기 흰 무지개가 뿌리어지기 시작했다. 치리리릿－! 끝없이 흘러 나가는 검 무지개. "이제 검의 혼백을 알겠다. 또한… 검의 울음소리와 검의 무게를, 그리고 검의 길을, 그 흔적이 없는 길을……!" 창룡후(蒼龍吼)같이 터져 나오는 목소리 가운데……. 등룡천폭. 천 년 가운데 단 한 번 끊어졌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십 장 너비의 대폭포이다. 달마 조사가 달마삼검(達磨三劍)을 득검(得劍)하며 갈대잎 하나로 등룡천폭을 끊은 바 있다. 그 후 등룡천폭은 한 번도 흐름을 중단하지 않았는데, 소리도 없이 덮쳐 드는 흰 빛줄기로 인해 무 베어지듯이 반으로 갈라졌다. 이어 검세는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으며, 허공 가득 하나의 동그라미를 만드는 가운데 더욱 빠른 속도로 거벽(巨壁)을 향해 다가갔다. 콰아아－ 콰아아－! 극강(極强)하며 또한 극유(極柔)한 검세가 일어나는 가운데, 십 장 높이의 거벽은 찰나적으로 모래의 산이 되어 허물어진다. 고운 모래가 흘러내리기 시작할 때, 검 무지개는 폭풍우 속으로 쭈욱쭉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등천해 오르는 백룡처럼 떠오르는 검. 우막(雨幕)은 정확한 원형으로 끊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환상처럼 펼쳐지는 무(無)의 공간. 그의 검세는 찰나적으로 십오 장 허공에 치밀하고도 두터운 검막(劍幕)을 형성하며 비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언덕 위에 서 있던 열 명의 청춘은 너 나 할 것 없이 뺨을 눈물로 뒤덮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 이제는 죽어도 좋아! 하후초는 병자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천유성이 득검(得劍)하는 사이, 음숭맞은 요료 선사가 열 개의 대환단(大還丹)을 은밀히 전해 하후초 일행의 병세를 말끔히 깨어나게 한 것이다. － 너희들은 너무나 조급하며 거칠다. 너희들에게 어찌 억조창생의 장래를 맡길 수 있겠느냐? 그래서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백도를 너희들에게 맡긴다. 첫눈(初雪)이 뿌려지기 전에 혈풍(血風)을 마무리지어라! － 유성은 그릇이 큰 놈이다. 그리고 욕심이 많은 녀석이다! 그 녀석에게… 구파일방의 장문영부(掌門令符)를 임시로 보관하겠노라! 마른 똥막대기 요료, 그는 자신의 진기를 십화의 십대영주에게 고스란히 나누어 주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 날, 그는 천유성과 더불어 천리전음(千里傳音)으로 무엇인가를 한 시진 넘게 이야기했고… 그 후에야 즐거운 표정으로 방장실 안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뒹굴면서……. 요료, 그는 창허상인과 더불어 백도의 거목(巨木)임에 틀림이 없었다. 第6章 무림을 떠나 다오 격동(激動)! 기변(奇變)! 무림대세는 봄이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세력을 팽창시키던 악마대본영의 삼십여만 무사들은 하나의 인물에 의해 철저히 방해당하고 말았다. 영웅무정 일검향. 그는 자신의 영토에 가공할 진세를 만들어 뭇 마두들을 유인하여 사로잡아 버리는 가운데, 구만 리(里)를 종횡하기 시작했다. <옥검풍운단(玉劍風雲團) 궤멸! 오직 십일 인에 의해, 우두머리는 영웅무정 일검향으로 사려됨!> <사천(四川) 검주(黔州) 능운자개단(凌雲紫蓋壇) 궤멸. 흉수는 십일 인, 우두머리는 영웅무정 일검향! 사천의 세력은 그로 인해 와해되기 직전!> ……. 열사흘에 걸쳐 영웅무정 일검향과 정체를 알지 못할 십 인의 고수는 일곱 군데의 강호세력을 격파해 버렸다. 그것은 가히 무가(武家)의 기적이라 할 수 있으며, 화산이 터져 오르는 기세로 세력을 확대시켰던 사대마계의 악마대본영은 기세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영웅무정 일검향이 자신의 거처를 숨기며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추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가로막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을 오히려 유쾌히 받아들였다.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신화.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전승(全勝)의 전설은 영웅무정으로 인해 이룩되기 시작했다. 대세에 저항하는 일인무사(一人武士). 그는 적어도 삼십여만이 가장 먼저 죽이고자 하는 인물로 부상해 올랐으며, 그의 수급에는 십대가 편히 지낼 황금과 더불어 지고한 지위가 내걸리게 되었다. 묘한 것은, 그가 구파일방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와 요료 선사 사이의 약속 때문에 벌어진 일은 십대령주라 하더라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습습한 공기가 와호진(臥虎鎭) 허공을 휘감고 있다. 호북성(湖北省) 깊은 곳. 봄은 익을 대로 익었으며, 가랑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당장이라도 뇌성벽력이 토해질 듯한 험악한 날씨가 시작되고 있었다. 풀잎에 덮여 있는 소로(小路)를 따라 방립을 기우듬히 쓴 청년 하나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헌칠한 키에 늘씬한 체구, 그리 특징적인 아름다움은 없으되 신체의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어… 한 번 본다면 평생 잊지 못할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이슬과 빗물을 매달고 있는 풀잎을 짓밟으며 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뎠다. '얼마 전부터 요기(妖氣)가 흐르고 있다. 훗훗… 와라, 버러지들! 내게 축제의 기회를 다오!' 천유성은 악마대본영이 자신의 진로(進路)를 예측할 수 있게끔 거의 비슷한 속도로 이동해 가고 있었다. 또한 십령화주는 그를 보조하는 가운데 녹슨 검을 가다듬었고, 새로운 무학을 나날이 터득해 나갔다. 쓰으으… 쓰으으……! 안개가 짙게 뿌려질 때였다. 천유성의 고막 속으로 가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바로 만박서생 하후초의 목소리였다. 그는 만에 하나, 암살자가 나타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백 장 앞을 가고 있는 상태였다. "아네." 천유성의 대꾸는 매우 간단했다. "아신다고요?" 하후초가 놀라자. "그는 단 하나이지. 그리고… 호흡이 조금 거친 자이지." "그… 그렇습니다! 정말 묘한 녀석입니다.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인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이제껏 만난 그 누구보다도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는 자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후초가 어찌 말하든, 천유성의 걸음걸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천유성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천군만마 속을 걷는다 해도, 그의 걸음걸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백여 장 갔을까? 그 곳에서 그는 운명처럼 한 사람을 만났다. 실로 엄청난 충격 가운데……. 묘한 녀석이다. 오른쪽 어깨 위에는 길다란 청죽간(靑竹竿)을 걸치고 있으며, 등에는 깨어진 칠현금(七弦琴)을 떠메고 있다. 거지도 눈살을 찡그릴 정도로 지저분한 옷을 걸치고 있는데, 그 옷자락에서는 술 내음이 뭉클뭉클 배어 나왔다. "오다니… 멍청한 녀석! 이제는 도망갈 때도 된 듯한데!" 오른손에 술잔을 들고 있는 자, 그는 안개를 가르며 나타나는 천유성을 바라보며 돌연 ㅋㅋ대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이다. 그는 오장육부를 토해 낼 듯이 웃어제쳤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모인 자는 흩어지고, 간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 ㅋㅋ… 아는 것은 많아도 어쩔 수 없이 죽어 썩은 뼈다귀가 되어 누운 성현들이 지껄인 말을 무시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믿어지는군." 갈대숲에 웅크리고 있다가는 천유성을 향해 불쑥 손을 내미는 자. 그의 손에는 술잔이 쥐어져 있으며, 술잔 안에는 화주(火酒)가 가득히 담겨져 있었다. 향기는 진하지 않되, 마시면 뱃속이 불붙는 듯 뜨거워지게 된다. 진정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술의 향기보다는 술의 열기(熱氣)를 마시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화주는 애주가(愛酒家)의 술이라 할 수 있었다. "마셔 버려. 우라질 녀석!" "아, 너는……?" 천유성의 입매가 가볍게 벌어졌다. 그의 눈빛은 차츰차츰 온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너였군? 바로 너였군?' 그의 입가에는 단아한 미소가 떠올랐다. 취한 듯 보이는 청년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말을 했다.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마셔라. 그리고……." 그의 눈빛은 기이하게 강렬해졌다. 내공이 약한 사람이라면 그의 눈빛을 보는 찰나, 의식을 잃어버릴 정도로 강하고 싸늘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떠나는 게다. 이 지긋지긋한 무림계(武林界)를……." 키득키득거리는 자, 그는 바로 검문혼이었다. '문혼(文魂), 바로 네녀석이구나.' 천유성은 낭인주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검문혼은 천유성도 추측하지 못할 지혜와 힘을 지니고 있던 자였다. 한데, 그가 낙척서생 차림으로 나타나다니? "무림을 떠나 다오. 나를 위해, 그리고… 너를 위해!" 검문혼은 천유성을 향해 술잔을 내밀었다. 천유성의 눈빛이 흐트러진다. "너는 영웅(英雄)이 되지 못하는 놈이야. 그것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지." 실로 간단한 말과 행동에 불과할 뿐이나, 검문혼의 말은 그에게 깊은 충격을 안겨 주기 때문이었다. '그랬었군. 역시 너는…….' 천유성은 어딘지 모르게 고독한 눈빛을 던졌다. 실로 묘한 일이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유성은 검문혼을 알고, 검문혼은 천유성을 알기에…….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우정에 찬 시선이 오고 갈 뿐이다. 바람이 보다 강해졌다. 그리고 짙은 습기를 품은 구름이 하늘을 휘어 감기 시작하는 가운데,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내가 네놈을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빌어먹을!" 두 사람은 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에 고스란히 의복을 적시면서 술을 나눠 마셨다. "문혼… 너는 언제나 고리타분하군.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말고 더 좋은 이야기도 많을 텐데?" 그는 화주 한 잔을 거침없이 비웠다. 만에 하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술 속에 독이 타여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술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술을 마셨다. 그만 만독불침(萬毒不侵)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는 검문혼이 내미는 술잔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검문혼은 그의 친구이기에……. '역시… 네 배짱은 대단하다.' 검문혼은 천유성이 주는 잔을 돌려받았고, 그 잔 가득 술을 따라서 이번에는 자신의 목줄기를 술로 적셨다.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 두 사람은 무림에서 가장 기묘한 술자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검문혼은 다섯 잔의 술을 마신 다음, 소매섶으로 입가를 닦았다. 술에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흐릿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그가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던 미소라는 표정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는 잘 있겠지?" "그녀라니……?" 천유성이 반문하자. "ㅋㅋ… 그녀를 데려간 사람이 네가 아니란 말이냐?" "아……?" 천유성은 흠칫했고, 검문혼은 천유성을 바라보며 다시 술잔을 내밀었다. "석화(石花)… 운명의 여인이 될 만한 여인이지. 가장 아름다운 여인. 훗훗… 그녀를 데려갈 사람이 너 이외에 또 누가 있겠느냐?" 석화, 그녀는 단 세 번 보았을 뿐인데… 아직껏 천유성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여인이다. 강호가 난세에 처하지만 않았다면, 천유성은 제일 먼저 그녀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제일 마지막에 만날 사람이다. 천유성이 지금껏 석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석화장이 폐쇄되었으며, 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천유성은 검문혼이 그녀를 데리고 갔다고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한데, 검문혼의 말투로 보아 검문혼도 그녀를 데려간 것이 아님에 틀림이 없었다. 결국 석화는 천유성도 모르고 검문혼도 알지 못하는 장소로 떠나가 버린 것이다. "그녀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은 섭섭한 일이지. 그러나 그녀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나는… 나태한 무사가 되었을 것이다. ㅋㅋ…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있다가는 검에 녹이 슬기 십상이 아니겠느냐?" 다시 술이 오고 갔다. 용이 용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두 사람은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그 어떠한 상대를 느낄 때보다도 강하고 격하게……. 어쩌면 그것은 질투가 아닌 우정일 것이다. 번쩍－! 하늘이 푸른빛으로 물들며 뇌전이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빛줄기는 보다 굵어졌다. 검문혼은 얼굴이 붉게 물든 상태로 손바닥을 들어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이전에 비해 훨씬 깡말랐으며, 고독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의 눈빛은 구정물처럼 뿌연 빛을 흘리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의 눈빛을 보고 그가 타락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리라. 하나 상승무도를 익힌 사람이라면, 그 눈빛에 서린 가공할 의미를 깨닫고 몸서리를 치며 떠나갈 것이다. 태양소수마공(太陽素手魔功). 팔만사천마보 가운데 서열 제이위의 마공이다. 검문혼의 눈빛과 살결은 그가 초극마공(超極魔功)이라 불리는 태양소수마공을 익히고 있음을 뜻하고 있었다. 주호는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술잔을 꽉 채울 정도로 따른다면, 두 잔이 따라질 것이다. 그 중 한 잔은 천유성이, 또 한 잔은 검문혼이 마셨고… 그 사이 빗줄기는 폭우로 변화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너는 여전히 바보다!" 검문혼은 다시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빗었다. 그의 눈빛은 우의를 전하고 있었다. "나라면 고독한 행진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끝없이 나타나는 적을 향해 돌진하다가… 하나의 유성처럼 타서 스러지고 마는 바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ㅋㅋ… 너는 뛰어난 놈이나, 우스꽝스럽게도 영웅(英雄)이 되려 한다. 바보 같은 녀석! 영웅이란 고독하고, 불우한 노릇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ㅋㅋ… 친구, 무림을 떠나 다오.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검문혼은 천유성의 면모를 정확히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는 천유성이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면모 가운데 둘 정도는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였다. "핏빛 나비가… 시작이다. 그리고 죽은 꿈이 있고, 울지 않는 새가 있다. 그리고 죽음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들 삼십만 마리의 불나방들이 있다." 미묘한 은유다. 혈접(血蝶)과 사몽(死夢), 불명조(不鳴鳥)……. 그것은 사대마계에서 말하는 암호명이었다. "돌아가라. 앞으로 나아가지 마라. 부디! 끄으윽……!" 검문혼은 취하는 듯 트림을 해 대며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휘청휘청……! 그는 쓰러질 듯 폭우 속을 걸어갔다. "용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제… 알지 않느냐? 크으……!" 그는 퍼부어지는 빗줄기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으며, 천유성은 그의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토했다. "그래, 네가 바로 울지 않는 새였다. 이제야 너의 진면목을 알겠군. 네가 바로 울지 않는 새… 태양혼(太陽魂)이다!" 천유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사이, 검문혼의 뒷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쏴아아… 쏴아아……! 빗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나는 네가 영원히 울지 않는 새이기를 바란다. 만에 하나, 네가 울며 날아오른다면… 피비가 뿌리리라. 친구, 너는 영원히 울지 않는 새여야만 한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녀석은 너를 그렇게 내버려둘 것 같지 않군." 콰르르르르릉－! 뇌성벽력이 지축을 끊을 듯할 때, 천유성은 몇 잔의 술에 취해 버린 듯이 상방신을 흔들흔들거리며 가던 길을 계속했다. "분명한 것이라면, 나보다는 네가 현명하다는 것이다." 그의 발걸음은 조금도 멈춰지지 않는다. 무사의 길… 또한 고독한 영웅의 길로 그는 휘청거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닷새 후, 폭우는 결국 황하(黃河)를 범람시켰다. 그러는 가운데 봄은 상실되었으며, 지리한 여름은 습습한 대기(大氣)에 파묻힌 채 시작되고 있었다. 강호계는 하나의 인물로 인해 완전히 혼돈되었다. 냉혈(冷血)의 악마(惡魔), 혹은 철혈(鐵血)의 승부사(勝負士)로 표현되기 시작한 자. 영웅무정 일검향. 그는 악마대본영의 구대외단(九大外壇) 세력을 방문하였고, 그 곳의 괴수들을 하나하나 척살했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자신을 집요하게 추적한 악마대본영의 사형마루(死刑魔樓) 무사들을 삼천이백 넘게 쓰러뜨렸다. 두려운 것은, 그에게 놀라운 무공을 지닌 십 인의 방수( 手)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무적십일향(無敵十一香)! 그들은 그렇게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영웅무정 일검향에게는 무적향수(無敵香帥)라는 이름이 덧붙여지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 천하를 경동시켰던 모든 인물들의 이름을 대지(大地)에 묻어 버리게 만들었다. 녹림대상(綠林大商) 십만거상(十萬巨商), 풍방주(風 主) 고검랑(孤劍郞)……. 그는 끝없이 중원을 종단하는 가운데 스물다섯 차례 싸웠으며, 정확히 스물다섯 차례 이겼다. 그에게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는데, 그것은 마공이 극에 달하지 않은 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묘한 율법으로 인해 악마대본영의 하수자(河手者)들은 도리어 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고수자들만을 찾아 격파했기에, 하수자들은 그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피하지도 않았다. 하여간 악마대본영은 무적십일향의 출현으로 인해 지난 오 년 간 이룩한 기반을 반 넘게 잃어버린 셈이었다. 황하가 크게 범람하는 그 날, 그는 호북(湖北)의 내봉진(來鳳鎭)을 지나서 호남성(湖南省)의 용산(龍山)으로 접어들었고… 능수(凌水)를 건너 무릉산(武陵山)이라는 절세비경(絶世秘景) 속으로 추적추적한 빗발을 가르며 접어들었다. 하후초 일행은 조심스럽게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본시 다른 임무를 맡고 있으나, 신처럼 숭배하는 천유성과 동행하고 싶어하기에 보름 간 천유성을 뒤따른 것이다. 이 날은 그들이 천유성을 보조하기로 약속한 십오 일 가운데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전에는 사라마영단(死羅魔影團) 일흔둘이 화기(火器)를 갖고 덤비다가 하후초와 운중일학에 의해 쓰러졌으며, 두 시진 후에는 사방에서 휘파람 소리가 일어나는 가운데 채색포(彩色袍)를 걸친 자들이 오락가락거렸다. 하나 천유성은 그들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부지런히 걸음을 내디뎠다. '꽃(花)는 완성되었다. 이제… 달(月)이 남았다.' 그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후초를 비롯한 인물들도 그의 향방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가공스러운 신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챘을 정도였다. － 나에 대해 알려하지 말게. 알게 되면 정이 떨어질 테니까! 천유성은 하후초가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할 때마다 그렇게 대답했다. 천년세가(千年世家)의 영웅총사(英雄總師). 하후초는 아직도 천유성의 그러한 신분을 완전하게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악마대본영이 심한 출혈을 감수하면서도 천유성을 잡고자 하는 것을 어리석은 병법이라고 나름대로 분석하는 상태였다. 또한 그는 연전연승을 하고 있으면서도 깊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끝까지 이길 수는 있으되, 그로 인해 악마대본영이 붕괴된다고는 믿어지지 않소이다. 그들은 정녕 거대하기 때문이외다!" 하후초가 근심스레 말하자. "자네는 역시 현명하네." 천유성의 입가에는 천진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하후초는 그를 힐끗 올려다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른 방법을 써야 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타파와 손을 잡는다던가……." 하후초는 이 날따라 말이 많았다. 한 시진 후에는 천유성과 다른 길로 가야만 하기에, 그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천하 대세를 세세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쏴아아… 쏴아아……! 폭우가 심할 때 유성의 하이얀 이빨이 나타났다. "바람(風)이 변수(變數)야." "예?" "포악하며 빠르지. 또한 독단적이지. 지극히 이기적(利己的)이며, 차디찬 족속들이지. 그들이 거두어져야만 하는데… 약간 자신이 없어." "바… 바람이라니요?" 하후초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삐이이익－! 돌연 무릉산중(武陵山中)이 예리한 호각 소리로 인해 적요로움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귀기(鬼氣)가 일어났고. "카아아… 카아아……!" "크크… 크으으… 크크……!" 멀리서부터 나찰(羅刹)의 호곡성을 방불케 하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 왔다. 하후초는 그 소리를 귀담아듣다가 천유성을 힐끗 봤다. "소녀장한후(素女長恨吼)로군요? 이전과 다른데요?" 하후초는 천유성을 친구가 아니라, 주인으로 섬기고 있었다. 천유성이 만류해도 그는 상하(上下)의 예법을 철저히 지켰다. "그렇군. 소녀장한후는 중원의 수법이 아니라, 밀교(密敎)의 수법이지." 천유성의 눈빛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그는 일각 이전부터 가공할 예기(銳氣)를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 나타난 것이다. 이전에 꺾은 어떠한 인물보다도 강한 자가 악마의 발톱을 감추며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휘하세력을 드넓게 포진(布陣)시켜서 하나의 진세를 이루게 했으며, 천유성 일행이 하나의 지점으로 들어서게 유인하고 있었다. "어찌할까요?" 하후초가 초조한 기색으로 묻자. "수수방관!" "예?" "이전보다는 흥미 있을 듯하네. 지금 내가 느끼는 기세는… 내가 꼭 찾아야만 하는 하나의 문파에만 비전되어지는 유가밀종세(瑜伽密宗勢)라네." "유… 유가밀종이오?" "묘한 운명이로군. 울지 않는 새가 나타나 충고를 하더니, 이제는… 이제는……!" 천유성의 이빨은 백옥이나 박속처럼 희었다. 하후초는 그에게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야릇한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흥분을 하다니… 대영주가 흥분을 하다니……?' 하후초는 천유성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천유성이 숨결을 흩트리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지금 천유성의 숨결이 격하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 그 고집 센 노인네의 후손을… 남자라면 좋은 친구가 될 것이고, 여자라면……." 의미 없이 중얼거리는 말은 너무 작았다. 하후초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그 순간 천유성은 한 줄기 흰 선을 끌면서 백여 장 밖으로 신형을 폭사시켜 나갔다. "절대 끼여들지 말게. 내가 죽더라도!" 그는 단호한 말을 남긴 다음, 우막 속으로 사라져 갔다. 비는 쉬지 않고 퍼부어졌으며, 무릉산 봉우리가 습무에 감추어졌다. 이 날, 또 하나의 묘한 숙명이 시작되는 것인가? 빗속이다. 그녀는 마치 남자 마냥 팔짱을 느긋하게 낀 채 천유성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화려한 옷차림이다. 곤룡암화포(袞龍暗花袍)라 불리우는 궁장을 걸치고 있으며, 개미 허리 마냥 잘룩한 허리에는 옥장홍속대(玉裝紅束帶)를 매고 있다. 옥장홍속대에는 백옥쌍패(白玉雙佩)가 달려 있었으며, 여인의 삼단같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위에는 오사절상건(烏紗折上巾)이 씌워져 있었다. 신발로는 원앙보혜(鴛鴦寶鞋)를 신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에는 추상(秋霜)이라는 보검(寶劍)을, 왼쪽 어깨에는 백홍(白虹)이라는 예도(銳刀)를 짊어지고 있다. 손목에는 꽤 긴 채대(彩帶)를 빙글빙글 휘어 감고 있었으며, 열 손가락 가운데 여덟 손가락에 옥환(玉環)을 차고 있었다. 쏴아아… 쏴아아……! 세차게 퍼부어지는 빗줄기 가운데, 여인의 몸에서 뿜어지는 현란한 보광이 신비한 환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황홀한 보광에 감추어지기 시작하였으며, 퍼부어지는 빗방울이 빛을 흩트리는 가운데 그녀의 몸이 증발되는 듯한 환각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이다. 오똑한 콧날에 딸기 빛의 입술, 심해 바닥에 가라앉은 흑진주(黑眞珠)같이 맑은 눈빛이 영롱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하게도 건조해 보였다.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생동감이 느끼어지고 관능미(官能美)가 느끼어지기 마련인데, 빗속의 여인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나무 조각으로 정교하게 깎아 만든 목각인형처럼 보일 뿐이었다. 무향화(無香花). 향기가 없는 꽃이다. 자색 궁장을 걸친 여인은 꽃은 꽃이되, 향기를 일으키지 못했다. 실로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이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천유성이 성큼 다가서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네가 영웅무정 일검향이군?" 전적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말투이다.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는 말대로군.' 천유성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방립을 슬쩍 쳐들어 보였다. 하이얀 치열이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 꽤나 신선하다. 악마대본영에 공포의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천하제일살(天下第一煞)의 모습치고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흥! 역시 대단하군!" 여인은 차디찬 냉소를 터뜨렸다. 한데 정녕 미묘하게도 그녀의 입술이 이빨에 잘강 깨물리며 그녀의 차디차던 눈빛이 한순간 야릇하게 흐트러졌다. 미묘한 마음의 흔들림이랄까? 여인은 천유성의 용모와 체취에서 이전의 어떠한 사내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흥분을 맛보고 있었다. '초상화에는 없던 매력이 있다. 거부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매력. 그러나… 나를 사로잡지는 못한다. 나는 마도여종사(魔道女宗師)가 될 여인. 대체 누가 나를 흔들리게 하는가?' 향기 없는 꽃의 여인, 그녀는 천유성이 오 장 가까이 다가서자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긴 말은 않겠다. 다만 네게서 하나의 물건을 갖고 가야겠다는 말만 하겠다! 그 물건은 악마대본영 내에서 나의 지위를 높여 주게 될 것이다." "모를 일이군. 나 같은 빈털털이에게 마계의 여장부가 노리는 물건이 있다니?" "호호… 그것은 바로 너의 수급(首級)이다!" 혈접혼(血蝶魂). 그녀는 바로 사대왕야의 하나인 혈접혼이었다. 그녀는 감찰의 일을 맡아 보고 있으며, 그러한 관계로 인해 협의도 인사들을 척살하는 일에는 나서지 않았던 여인이다. 혈접혼의 이번 출행은 극히 이례적인 일에 속했다. 그녀는 천유성을 제거하는 일에는 제일 먼저 나섰으며, 자신의 심복을 풀어서 천유성의 종적을 철저히 수색한 바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천유성을 죽일 경우 마황야의 후계자 자리가 보장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천유성의 초상화가 그녀의 내면 세계에 미묘한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벌레들의 집단인 춘추팔가의 우두머리! 나의 수고를 끼칠 필요 없이 네 스스로 수급을 잘라 바쳐라!" 혈접혼의 눈에서는 사요(邪妖)한 빛이 흘러 나왔다. 한데 그녀의 전체적인 얼굴 윤곽은 지극히 아름답고, 또한 순후해 보였다. 기실 그녀는 사대왕야 가운데 가장 심약(心弱)한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영웅무정 일검향을 잡기 위해 나선 데에는 자신의 당당함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저의도 끼여 있었다. "글쎄, 나의 목은 꽤나 질기지." 천유성은 지극히 여유만만했다. 그는 강호계에서의 혈전을 거치는 가운데 보다 완숙되어 가고 있었다. 느물느물거리는 태도, 그리고 미묘한 권태감을 느끼게 하는 미소가 혈접혼에게 또 한 번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아름다운 미소다. 아아, 내가 어렸을때부터 동경해 왔던 남자의 용모는 바로 저러한 것이었다.' 혈접혼은 남자를 모르던 여인이었다. 천하제일의 살수 사몽혼이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으되, 그녀는 사몽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마황야의 후계자로 공인받고 있는 폭풍혼의 유혹도 간단히 물리친 바 있는 냉혈의 여장부가 혈접혼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비 속에 흔들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 유성의 외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은잠한 것을 천유성에게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혈접혼은 천천히 손을 쳐들어 올렸다. 그녀는 마음 가득히 파고드는 천유성의 영상을 애써 지우려는 듯, 보다 독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 초(招)만 쓰겠다!" "영광이군. 나 같은 잡종을 상대로 오 초나 쓰시겠다니……." 천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왜일까? 혈접혼의 얼굴 윤곽이 꽤나 낯익게 여겨지다니? 혈접혼은 그가 필히 죽이고자 하는 대상이었으며, 그가 은밀히 작성한 살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한데 바로 앞에서 자신을 죽이겠다고 외치고 있는 혈접혼이 이상하게도 외인(外人)으로 여겨지지 않다니? '누군가와 닮았다.' 천유성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그는 혈접혼과 얼굴 윤곽이 비슷한 인물을 기억하고자 했으나, 좀처럼 기억이 되지 않았다. 쏴아아… 쏴아아……! 비보라가 보다 세차질 때, 갈대는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질 듯 축축 휘어졌으며… 갈대잎이 광풍을 타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링－! 바람이 보다 드세게 일어날 때, 혈접혼은 허리를 가볍게 틀며 훌쩍 날아올랐으며… 재차 교구를 퉁기는 순간을 이용해 비보라 치는 허공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만 그녀가 몸에 매달고 있던 장신구의 현란한 보광(寶光)이 사방으로 뿜어지며 기이한 환상을 허공 가득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 마리 거대한 불나비(火蝶))가 날아오른다. 비 속으로 날아오르는 거대한 나비. 그것은 무형(無形)이며, 동시에 유형(有形)이었다. 나비 그림자는 점점 거대해졌으며, 혈접혼은 맥박 소리마저 감춰 버린 채 허공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날개를 퍼득거리며 날아오르는 핏빛 불나비. 세차게 퍼부어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나비의 환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 천유성의 입술이 장미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제일초는 펼치지 않는 게 좋겠다. 밀교(密敎)의 비접만리환(飛蝶萬里幻)은 나도 익히 아는 것이다. 네가 그대로 다가선다면, 나는 가차없이 너의 목젖에서 피보라를 튀게 하겠다!" 천유성은 오른손을 쳐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세차게 퍼부어지는 빗줄기 속, 하나의 바위가 이끼에 덮인 채 놓여 있는데… 천유성의 손은 바로 그 곳을 향해 돌리어졌다. 허공을 부유하는 나비의 그림자와는 전혀 무관한 곳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으음, 역시 명불허전이로군!" 이끼 뒤덮인 바위 뒤쪽에서 자색 연기가 훌쩍 날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파팟－ 팟－! 가벼운 파공성이 일어나는 가운데 짙은 향훈(香薰)이 번졌다. 바위 뒤에서 떠오른 인물은 바로 혈접혼이었다. 그녀가 시전했던 비접만리환술은 채 펼쳐지기도 전에 천유성에게 분쇄당하고 만 것이다. 바람 소리가 점점 강해진다. 빗줄기가 이리저리 쏠리기 시작했으며, 허공 가득 회오리바람이 형성되면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카아아아… 카아아……!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악마의 울부짖음 소리.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온갖 망상에 사로잡히며 발광하게 된다. 처절한 비명 소리가 보다 커질 때, 천유성은 또다시 손을 쳐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거목(巨木)이 서 있는 곳이다. "혈사미백(血死媚魄) 잠마풍(潛魔風)은 더욱 위험하지. 왜냐하면, 나는 풀 내음 가운데에서 계집의 암내를 맡는 재주가 있으니까. 네가 혈사미백 잠마풍을 쓴다면, 어디로 숨든 네가 숨은 위치를 알 수 있다! 네가 계집인 이상, 고약한 암내가 풍기기에……!"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서 또다시 자색 연기가 솟아올랐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혈접혼이었다. 그녀는 치욕을 느끼는 듯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혈접혼의 장기는 은잠술이다. 그런데 지금 은잠술을 채 펼치기도 전에 상대의 눈에 걸려 버린 것이다. "죽여 버리겠다!" 혈접혼은 마성이 발작하는 듯 격하게 소리치며 몸을 팽이처럼 돌리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링－! 그녀의 몸뚱이가 회선하는 가운데 무수한 빛줄기가 토해지기 시작한다. 또한 그녀의 몸뚱이는 무수한 분영(分影)으로 쪼개어져서 사방의 하늘을 휘어 감기 시작했다. 아흔아홉 개의 환영이 나타나고, 눈을 저미는 보광이 폭사되며 삼라만상을 휘황찬란하게 밝혔다. 그러나 천유성의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유가술 따위로 나를 시험하지 말거라. 네게 시전하는 유가층층타라패엽(瑜伽層層陀羅貝葉)은 유가밀종에서 제칠위 무공에 불과하다. 네가 만다라수(曼茶羅手)나 범천혈무(梵天血舞), 혹은 천수여래인(千手如來印)을 쓴다면… 상대할 마음이 날지 모르겠지만!" 그가 중얼거릴 때, 허공 가득 부서져 나가던 아흔아홉 개의 환영은 찰나적으로 사라졌으며… 혈접혼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났다. "다 알다니? 마황야도 모르는 사문의 비결이거늘……!" 혈접혼의 입술은 창백해졌으며, 뺨은 석고상의 뺨처럼 경직이 되었다. 천유성의 유가술은 그녀의 유가술을 오히려 능가했다. 유가술로써 사대왕야 자리를 차지한 혈접혼이 자지러지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네… 네가 존경스럽군? 그러하기에, 더더욱 너를 죽여야겠다.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최후 병기로써……!" 혈접혼은 진흙탕으로 떨어져 내리며 손을 품안에 넣었다. 그녀는 검과 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삼의 병기를 끄집어 냈다. 그녀의 품속에 비장되어 있던 병기, 그것은 항차 그녀가 천하를 정복하는 데 사용할 작정으로 소지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죽음의 완성이라 불리는 물건. 그것은 자루가 없이 날(刃)로만 이루어진 이 촌(寸)의 병기였고, 전신이 푸른 인광에 뒤덮인 물건이었다. 혈접혼은 하나의 마병(魔兵)을 손바닥에 쥐었고, 바로 그 순간 정녕 가공스러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환(幻)!" 앙칼진 호통 소리가 구소(九 )를 메우는 가운데, 혈접혼의 호리호리한 몸뚱이가 고공(高空)으로 치솟아 올랐다. 자색 옷자락에 폭우발을 뚫으며 떠오르는 찰나였다. 무시무시하며 음사한 파공성이 일어나는 가운데, 혈접혼의 몸뚱이가 한 줄기 빛더미로 화하기 시작했다. 찬란하고 감미(甘美)로운 빛이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황홀한 보광(寶光)이 치솟아 오르며, 허공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송이 연화(蓮花)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천여 개의 핏빛 잎사귀가 펼쳐지며, 그 가운데에서 황금빛 꽃술이 피어난다. 실로 찬란하게 피어나는 악마의 꽃수술들……. 동시에 팔십일방(八十一方)에 자색(紫色) 폭화(爆火)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며, 혈접혼의 몸뚱이는 허공에서 문득 증발이 되어 버렸다. 아스라한 자무가 이리저리 흘렀으며, 혼백을 마비시켜 버리는 빛줄기가 섬뢰(閃雷)처럼 치솟아 올랐다. "이… 이것은 유가밀종(瑜伽密宗)의 제일공(第一功)이라는… 번뇌살흔(煩惱殺痕)이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바로……?" 천유성은 처음으로 인상을 경직시켰다. 유가밀종은 천축(天竺)의 대설산(大雪山)에서 자생한 방파이며, 실로 복잡한 계보를 이룩하며 오천 년 간 발전해 왔다. 그들은 무림 방파라기보다 종교 집단으로서, 그들의 환술(幻術)은 라마교(喇 敎)와 배교(拜敎), 밀교(密敎)로 전래가 되었다. 지금 혈접혼에 의해 시전이 되는 수법은 밀교일맥에서도 가장 신비스럽다는 수법이었다. 휘리리리링－! 무시무시한 바람이 몰아닥치기 시작하며, 은빛 비늘 같은 편광(片光)이 천유성의 몸을 향해 눈보라처럼 다가섰다. 전신 삼백육십오 개(個) 대혈(大穴)을 일시에 노리며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예광(銳光). 그것은 살갗에 닿기만 하더라도 살을 녹여 버리고 뼈를 바수어 버리는 가공할 마강(魔 )의 정화(精華)였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좋아!" 천유성은 다가오는 빛줄기를 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지에 뿌리를 내린 거목(巨木)이 된 양 전혀 움직이지 않고 허공에서 퍼부어지는 빛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실로 느릿느릿한 호흡에 유연한 시선(視線)이다. 그의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가 매달려 있기까지 했다. 완전한 정지(靜止). 천유성은 하나의 거석(巨石)이 되어 있었다. 아니, 그는 산(山)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파파팟－ 팟－! 빛줄기는 보다 눈부시게 분출이 되었으며, 팔십일로(八十一路) 번뇌살흔(煩惱煞痕)은 위력이 십 성 수준으로 배가되어서 정지하고 있는 천유성 쪽으로 들이쳐 왔다. 절대절명(絶代絶命). 초(秒)라는 가장 짧은 시간 단위마다 신형을 일천사백 보(步)씩이나 이동하는 혈접혼. 겁(劫)이라는 가장 긴 시간 내내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 있을 듯이 보이는 풍운아, 천유성. 가장 빠른 마공과 가장 느린 수비식이다. 그리고 동시에 두 번의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으으음… 찌를 수 없다." 허공에서 터져 나오는 가벼운 한숨 소리. "너무나도 아름답다. 나보다도……!" 혈접혼의 목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리는 가운데 번뇌살흔 수법이 일순간 흐트러졌으며, 수천만 줄기의 편광우(片光雨)가 찰나적으로 위세를 잃어버렸다. '저 눈(眼)이 나의 혼백을 빨아들인다. 저 눈을 보면 나의 마성(魔性)이 눈 녹듯이 녹아 버린다.' 혈접혼은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서 힘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녀가 시전하고 있는 팔십일 로 번뇌살흔은 여전히 극강한 위력을 발휘해 냈다. 치리리리릿－! 사위팔방(四圍八方)을 완전히 뒤덮어 버린 자색(紫色) 마광(魔光)은 촘촘한 그물로 변하며 천유성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덮쳐 내려갔다. 자색(紫色) 도세(刀勢)가 빗발치듯 퍼부어지는 가운데, 천유성의 오른손은 단 다섯 치(寸)를 이동하고 있었다. '여의투명옥수(如意透明玉手)!' 투명할 정도로 흰 손이다. 그 손은 미묘한 궤적을 끌며 파공(破空)을 시작했다. 그 손은 무인(武人)의 손이라기보다 장인(匠人)의 손에 가까웠다. 동작(動作)의 완벽(完璧)을 추구하는 거장(巨匠)의 손! 유연하고 그윽하게, 마치 붓을 들어 수묵화(水墨畵)를 치듯이, 목불(木佛)의 눈을 파듯이……! 먹물이 듬뿍 찍힌 세필(細筆)로써 난초(蘭草) 한 가지의 기나긴 잎사귀를 치는 듯이, 그의 오른손은 정확하게 다섯 치를 이동해 나갔다. 그의 손끝이 다가가는 방향은 혈접혼이 꺼내 든 최후의 병기의 날이 파랗게 반뜩이는 바로 그 곳이 아닌가? 맨손으로 마병을 쥐려 하다니? "바… 바보! 일부러 죽으려 하다니……!" 혈접혼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녀는 찰나적으로 잠무(潛霧)에서 벗어나는데, 기이하게도 울상을 짓고 있었다. 팟－! 가벼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은 한꺼번에 변화하고 말았다. 천유성은 오른손을 다섯 치 정도 이동시킨 채 이전보다 더욱 짙고 화사한 미소를 입가에 짓고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여겼는데… 훗훗… 그러했었군!" 짙은 의미가 담기어 있는 미소이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혈접혼의 꺼내 든 제삼의 병기가 그의 오른손에 고스란히 쥐어져 있지 않은가? 천유성의 손바닥에는 피 한 방울 맺히지 않았다. 그는 육장(肉掌) 안에다가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날(刃)을 가볍게 거머쥔 것이다. "이럴 수가? 네가 번뇌혼(煩惱魂)을 거머쥐다니? 그것은 나의 외조모(外祖母)가 구명(救命) 무적(無敵)의 병장기로 물려주신 것이거늘……!" 혈접혼은 동정(同情)의 눈물이 아닌 분루를 흘리고 있었다. 번뇌혼(煩惱魂). 죽음의 완성이라고 불리는 절세마병이다. 그것이 시전된다면 절대로 격파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고, 그것은 지난 백여 년 간 한 번도 깨어지지 않은 병가(兵家)의 전설 가운데 하나였다. 혈접혼이 비록 야릇한 동정심에 휘말려 도세를 늦추었다고 하나, 그렇다고 해서 번뇌혼 특유의 예기(銳騎)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천유성은 너무나도 단순한 금나수(擒拿手)로써 그녀의 비밀 병기를 간단히 거머쥐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압수(押收)다!" 천유성은 병기를 더 힘껏 거머쥐었다. 옥수(玉手)라고 할 정도로 아름답고 깨끗한 오른손바닥이 불끈 거머쥐어지는 가운데, 혈접혼은 저도 모르게 이 촌(寸) 길이의 마병을 놓치고 말았다. 사실 모든 것은 거의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천유성의 손은 어느 틈엔가 투명(透明)하게 변화되어 있었다. 어찌나 투명한지 뼈가 들여다보이고, 핏줄이 선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는 혈접혼이 알지 못하는 사이, 거장궁의 수법 오행형의불멸수(五行形意不滅手)를 발휘해 냈단 말인가? 천유성은 싱긋한 미소 가운데 이 촌 소도를 간단하게 빼앗아 들었다. 혈접혼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서 천유성의 얼굴을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너… 너의 손은 신(神)의 손이더냐?" 그녀가 울상이 되며 말할 때. "훗훗… 이제까지는 너에 대해 개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었다. 하나, 이제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천유성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손을 쳐들었다. 오행형의불멸수, 일명 여의투명수(如意透明手)의 공력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아름다운 손이었다. 기이한 율동(律動)과 더불어 다가가는 손 가운데, 혈접혼은 그 어디로도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눈과 저 손이 나를 마비시키다니……?' 헐졉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어떠한 사내 앞에서도 냉정(冷靜)을 잃지 않았던 강철(强鐵)의 꽃송이. 그런데 그 강철의 꽃송이가 지금 격풍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너는 나를 다른 용어(用語)로 불러야 한다." "다… 다른 용어라니?" "너라고 하면 아니 된다. 그것은… 상관이 없는 사람을 호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실로 담대하며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또한 그의 뒷말은 혈접혼의 입술이 딱 벌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너라고 하면 아니 되며, 정랑(情郞)이라 해야만 한다!" "정… 정랑?" 혈접혼은 당장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원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유성을 쏘아봤다. "정랑이라고 부르다니? 내 비록 네게 패했으되, 내가 너의 여자라도 된단 말이냐? 너를 정랑이라고 부르라 하다니……?" "훗훗… 바로 말했다." 천유성의 눈에서 혜광(慧光)이 반짝 일어났다. 그는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혈접혼을 바라봤다. "나는 너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또한 나는 너를 나의 첩(妾)으로 만들어 줄 작정이다." "첩… 첩이라고? 네가 승자(勝者)라고 나를 너무나 깔보는구나. 나… 나를 너의 첩이라고 하다니?" 혈접혼의 눈썹 끝에 맑은 이슬이 맺힐 때였다. "너의 젖가슴에 핏빛 나비(血蝶)가 있다면, 너는 나의 여자다. 내 비록 너의 과거(過去)와 현재의 잔혹함과 오만함이 싫다만… 훗훗훗……!" "피… 핏빛 나비? 그… 그것을 어찌……?" 혈접혼이 자지러질 때. "바로… 이것!" 천유성은 야릇한 웃음 가운데 옥수를 내저었다. 그의 손은 일반 무사라면 노려서는 아니 되는 여인의 치부(恥部)인 유근혈(乳根穴) 부위로 다가갔다. 한순간 그의 손은 곤룡암화포(袞龍暗花袍)의 젖가슴에 닿았으며, 찰나적으로 위아래 수직으로 이동을 했다. 찌이이익－! 자주색 나비가 날개를 떨치며 날아오르는 것일까? 혈접혼의 화려하던 궁장 한 조각이 찢어져 허공으로 펄펄 날아올랐다. 아아, 너무나도 순결한 가슴이여! 이제껏 그 어떤 남자도 바라보지 못했던 순결하고 고귀한 가슴이 환하게 나타났다. 탱탱하게 부풀어오른 젖가슴은 배꽃처럼 희었고, 잘 익은 복숭아처럼 탐스럽다. 그 위, 한 마리 핏빛 나비가 날개를 활짝 핀 모습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천유성은 나비 무늬의 문신(文身)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너는 나의 여자다. 물론 너 같은 계집은 마차로 하나 가득 태워 모조리 준다 하더라도, 거절하고 싶다만……!" "닥… 닥쳐라, 악마(惡魔)! 이 잔악한 색마(色魔)야!" 혈접혼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떨어뜨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손은 유가패엽수(瑜伽貝葉手) 가운데 천수개화식(千手開花式)으로 허공 가득 핏빛 손 그림자를 뿌렸다. 천유성은 손이 가슴으로 다가서는 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서두르면 안 돼. 신방(新房)은 훗날에야 치뤄질 것이니까.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아양과 교태가 아니라 정신 수양이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파팟－ 팟－! 둔팍한 소음이 터지는 가운데, 혈접혼의 소수(素手)는 천유성의 가슴을 잇따라 일곱 차례 격타했다. 한데 천유성의 얼굴 표정에는 약간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으며, 오히려 인상을 찡그리는 쪽은 혈접혼 쪽이었다. "으으, 금강불괴(金剛不壞)로군!" 그녀는 팔목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데. "훗훗… 또다시 틀렸다. 금강불괴가 아니라, 불멸여의신(不滅如意身)이다. 혈접혼, 너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네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네가 세상과 세월을 너무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 나를 훈계하지 마라!" 혈접혼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위기를 느낀 암코양이의 눈에서는 독살스럽고, 또한 요염(妖艶)한 빛줄기가 하염없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쏴아아… 쏴아아……! 폭우가 내리고 혈접혼의 전신은 빗줄기에 완전히 젖었다. 궁장이 몸에 꽈악 달라붙은 통에 탱탱히 부푼 가슴과 잘룩한 허리, 펑퍼짐한 둔부의 선이 완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옷자락이 찢어진 통에 풍만한 가슴 하나가 옷 밖으로 튀어나왔으며, 장밋빛 유실(乳實)이 그 끝에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렸다. "너를… 너를 죽일 테다!" 그녀가 악에 받쳐 소리칠 때. "정랑 앞에서 그러한 소리를 하면 아니 된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너의 언행(言行)에 대해 인내할 수 있으되, 다음부터는 참아 주지 못한다!" 천유성은 여전히 비위 좋게 말하고 있었다. 가슴에 찍힌 핏빛 나비 무늬, 번뇌혼이라는 작은 비밀 병장기. 그 두 가지로 인해 천유성의 태도는 완전하게 달라져 버린 것이다. 하나 혈접혼은 원통스럽고 분한 나머지, 천유성의 눈빛이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여무사가 아니라, 여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눈빛이 따뜻해지고, 그의 입가에 매달리는 미소가 진정으로 따사로운 인간의 미소라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쏴아아… 쏴아아……! 빗발이 보다 더 세차게 퍼부어질 때. "너… 너를 죽여 버릴 테야. 너의 오만함을 철저히 조롱하는 가운데, 너를 죽여 버릴 테다!" 혈접혼은 흐느끼듯 외치다가 훌훌 날아올랐다. 한 마리 자색 제비(紫燕)가 날아오르듯, 혈접혼은 호선(弧線)이 아니라 직선을 비스듬한 사선으로 길게 끌면서 세차게 퍼부어지는 비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천유성은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져 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나의 신체를 천하에서 가장 강한 신체로 만들어 주신 노장인(老匠人)께 어느 정도 보답을 한 듯하군." 천유성은 나직이 중얼거리다가 슬쩍 손짓을 했다. 그 순간 일대의 숲에서부터 열 개의 신형이 번개처럼 폭출되어 나와 천유성 앞에 일자로 늘어섰다. 바로 유성십화(流星十花)였다. 하후초를 위시한 십 인의 영웅들이 일자로 늘어서며 시립을 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유성이 여인의 옷자락을 떼어 내어 젖가슴을 구경하는 악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일 줄이야? 그를 태양처럼 숭배하는 유성십화에게 있어 천유성의 돌발적인 기행은 꽤나 큰 충격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들 십일 인 사이의 인간적인 신뢰는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와해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은 아무 소리 않고 천유성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천유성은 팔짱을 낀 채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얼굴 가득 빗방울을 적시면서……. "혈접혼은 내가 첩(妾)이나, 정실(正室)로 거두어야 하는 여인이네!" "아……!" "으음……!" 하후초 이하 모든 사람이 탄성을 발했다. 그들은 천유성의 말이 하나의 계략에 따른 말이라고 여겼던 것인데, 천유성이 자신의 말은 진실이라고 밝힐 줄이야? "그녀는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네. 사실 불행한 여인이지." "……." "그녀의 눈빛은 그녀의 천성이 순후하다는 것을 엿보이게 하네." "……." "그녀가 정도에 들 수 있도록 도와 주게. 그리고 그녀가 향기(香氣) 나는 꽃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기 바라네. 이 일은 자네들의 영주(令主)인 십화지존(十花至尊)을 돕는 것이 아니라, 무림계에 빚이 많은 천유성이라는 젊은이를 돕는 것이네. 이상이네!" 천유성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쳐들었다. 그는 기웃한 방립(方笠)을 더 기웃이 내린 다음,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신형은 찰나적으로 오십여 장을 미끄러져 나갔으며, 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퍼부어지는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허공에서부터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다시는 나를 따르지 말게. 그리고… 십화개벽계(十花開闢計)를 시작하게." 쏴아아… 쏴아아……! 빗줄기 속에 그의 뒷모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 가운데 또 한 줄기의 목소리가 흘렀다. "조심하게!" 그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하늘은 뇌전으로 찢어지고 있다. 콰쾅－ 쾅－! 개벽의 밤이 시작이 된다. 삼라만상이 모두 부서져 버릴 듯하며, 일대가 온통 물에 잠기어 수계(水界)로 화해 버릴 듯하다. 第7章 바람의 형제들 동정호(洞庭湖)는 천하제일호로 불리어 부끄럼이 없는 천하대호이다. 두보(杜甫)는 동정호가 하늘과 땅을 가른다고 노래하였으며, 무수한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동정호의 광대함과 아름다움을 찬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수천 개의 섬이 연무(燃霧)에 휘감기고 있고, 바다처럼 너른 물결 위로 갈매기들이 떼지어 날아오르고 있다. 일 개(個) 성(省)에 버금가는 규모를 지니고 있는 동정호. 그 위에 배를 띄운다면 망망대해를 운항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사월(四月)이 되며, 동정호 일대에는 하나의 기괴한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입에서 입을 통해 동정어은(洞庭漁隱)들 사이로 퍼져 나갔으며, 어느 틈엔가 동정호 호변의 모든 객잔과 주루에서 그 이야기가 거론이 되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소문, 그것은 하나의 배(船)에 대한 이야기였다. －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에는 분명 환상이라고 여겼다. 대체 배가 그리도 빨리 움직일 수가 있단 말인가? 또한 가다가는 수면(水面) 위로 떠오르고, 공중제비를 돌기도 하고… 가히 귀신의 조화이다. － 군산(君山)으로 가는 수로(水路)에서 그 배를 보았다. 그 배는 자욱한 안개 바다 속에서 치솟아 나와 상강(湘江) 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기이한 노래 소리가 흘렀고… 꽃 내음이 천지에 가득했다. － 그 배는 분명 꽃배다! 백화주 일대를 주유하는 천상(天上)의 꽃배 한 척이 나타났다. 한 척의 배, 그 배의 출현은 동정호 일대를 흥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배는 무인선(無人船)이라고도 했고, 선녀선(仙女船)이라고도 했다. 어떠한 이는 꽃배가 백여 척 떼를 지어 나타났다고 했고, 어떠한 이는 그 배 위에서 피리 소리가 흘렀다고 했다. 하여간 한 척의 배가 나타난 것만은 사실이었다. 푸를 대로 푸르러 가는 사월의 하늘 아래, 꽃배 한 척이 신비하게 출현한 것이다. 사월 십오 일. 갈대가 우거진 수로이다. 수로 양쪽의 갈대밭은 너무나도 무성해 백만 대군이라 하더라도 흔적 없이 숨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침 햇살이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수로 한가운데를 가르며 나아가는 한 척의 범선(帆船)이 있었다. 오색(五色)의 돛을 달고 있는 거대한 범선 위에는 수부(水夫)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으며, 꽤 화려하게 만들어진 선실(船室)과 선실의 월동창(月洞窓)이 보였다. 용두(龍頭)를 이물 쪽에 매달고 있고, 봉두(鳳頭)를 고물 쪽에 매달고 있는 거대한 오색 범선. 아아, 만리수룡선(萬里水龍船). 그것은 수륙표행무림계(水陸 行武林界)에서 두각을 날리기 시작한 만리수룡선이 아닌가? 선주(船主)는 산동(山東)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룡대인(水龍大人)이라고 불리운다. 그의 휘하에는 이백팔십 척 범선이 있으며, 그가 거느리고 있는 선단(船團)은 물길이 통하는 지역이면 어디든지 표물을 운송하며… 그 속도가 타 표행에 비할 수 없이 빠르기에, 만리표행(萬里 行)의 이름은 날이 갈수록 상승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끼이이익－! 거대한 만리수룡선은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 가운데, 평원(平原)을 질주하는 천리마(千里馬)처럼 경쾌하게 물결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아마도 천하각지로 보내어지는 만리표행의 표물선 가운데 하나가 어떠한 일로 인해 동정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표행의 선박이 동정호로 들어선다는 것은 너무나도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 날의 표물 호송에는 한 가지 신묘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만리수룡선의 창고란 창고가 모조리 텅텅 빈 상태라는 것이었다. 또한 만리수룡선의 선실 안에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수룡대인의 모습이 보이고 있지 않는가? 나이는 육십 정도이고, 벙어리이다. 그는 불구자라는 열등감을 이기기 위해 상도(商道)에 뛰어들었다고 알려졌으며, 탁월한 상술과 신용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의 수륙기업을 이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날, 수룡대인은 월동창을 통해 갈대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 수(數)를 다루는 상인이기 때문일까? 그의 인상은 매우 차갑고 날카롭게 보였다. 강호가 혈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표행에 어려움이 생긴 탓일까? 수룡대인은 한 잔의 차(茶)를 마신 다음, 석고처럼 경직된 얼굴로 갈대숲을 오랫동안 쏘아봤다. 실로 기이한 일이다. 산(算)은 알아도 무(武)는 모른다고 여겨지던 수룡대인이다. 한데 그의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정망(精芒)이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는군!' 눈빛이 한층 강해졌다. 종이를 화르르 불살라 버릴 듯 강렬한 눈빛이다. 그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망이 쏘아지는 그 찰나였다. 무성한 갈대숲에서부터 하나의 인영이 섬전처럼 치솟아 올라 지극히 빠른 속도로 만리수룡선 위쪽으로 다가섰다. 연기가 흐른다고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빠른 경공술 가운데, 검은 그림자는 신형을 핑그르르 회전시키며 수룡대인이 머물러 있는 선실의 창을 통해 선실 안으로 날아들었다. 선실 바닥에는 두툼한 갈색 주단이 깔려져 있는데, 검은 그림자는 주단의 실오라기조차 휘게 하지 않으며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전신을 흑포로 휘어 감은 자이다. 얼굴을 흑건으로 감싸고 있으며, 양 손에는 흑색투(黑色套)를 끼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는 낫처럼 생긴 철간차(鐵竿叉)를 메고 있고, 왼쪽 어깨에는 장식이 별로 없는 삼 척(尺) 반월도(半月刀)를 메고 있다. 또한 오른쪽 손목에는 건곤권(乾坤圈)이라는 기문병기를 차고 있고, 왼쪽 손목에는 일월아(日月牙)를 차고 있다. 칙칙한 눈빛. 어떠한 경우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숨결과 맥박,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기계화시켜 버리는 가공할 수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한 느낌을 줄 수가 없으리라. 자객(刺客)이라니? 수룡대인 앞으로 자객이 나타나다니? 한데 선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존명(尊命)!" 슷－! 흑의괴인은 정중히 무릎을 꿇었으며, 두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지 않는가? "수석대인자(首席大忍者)… 화선(花船)의 출현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아보라는 밀명을 이행하고 왔습니다. 속하 풍혼사십구랑(風魂四十九郞),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기에 수석대인자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한어(漢語)가 아니었다. 그것은 머나먼 동영(東瀛)의 말이었다. 수석대인자, 풍혼사십구랑. 그것이 바로 그들의 진실된 면모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화선의 출현은 확실합니다. 속하가 이끄는 제팔인자대(第八忍者隊)의 살수 하나가 친히 그것을 목격했습니다." "으음……!" "그는 풍혼칠십사랑(風魂七十四郞)으로, 수공(水功)에 있어서는 이백팔십 바람의 형제들 가운데에서 최고로 단련한 자입니다. 그는 수중 추적술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데, 그 배만은 오 리(里)도 추적하지 못했습니다!" "……!" 수룡대인은 팔짱을 꽈악 낀다. 석고처럼 경직된 얼굴 가운데에서 가공스러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풍혼사십구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배는 막주비전(幕主秘傳) 십삼인술(十三忍術) 가운데 하나인 잠룡무흔(潛龍無痕)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습니다." "십… 십삼인술! 그렇다면 조작이 아니라, 진짜란 말인가?" 수룡대인은 오랜만에 입술을 떼었다. 차갑고 나직한 목소리이다. 그는 벙어리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까지 벙어리 행세를 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한문(漢文)은 알되 한어는 정확하게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또한 동영인(東瀛人)이었다. 풍혼사십구랑은 몹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수룡대인을 올려다봤다. "막주(幕主)이신 듯합니다. 돌아가셨다고 여겨졌던 그분이 우리들을 찾으시는 듯합니다. 실로 오랜만에……!" 그가 말을 약간 더듬을 때. "막주는 아니다!" 수룡대인은 풍혼사십구랑의 말을 한 마디로 끊어 버렸다. "아… 아니라니요?" "막주는… 사망했다. 비록 그분의 시체를 직접 본 사람은 없으되, 그분은 십중십(十中十)… 사망했다." "……!" "당시 그분은 사몽(死夢)을 추적하셨고, 그 가운데 백인살예진(百忍殺刈陣)에 고립되셨다. 그분에게는 천오백 고수를 독살(毒殺)시킬 정도의 독공(毒功), 화공(火功)이 시전되었다. 결국… 그분은 사몽의 후예에게 암살된 것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돌연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는 신호가 나타나다니……." 그의 눈빛은 점점 강하게 타올랐다. 무시무시한 살기, 그리고 강한 집착이 어리어 있는 눈빛이다. "그분이 쓰러진 후, 살막의 잔여세력은 온갖 고생을 다해 피바람을 뚫고 불사조처럼 일어났다. 우리들은 와신상담의 고초를 겪었고, 중원인들의 모욕과 질시를 받아 가는 가운데… 세력을 길렀다!" "……!" "결국 우리는 해냈다. 우리는 악마대본영마저도 함부로 여기지 못하는 거대세력을 이룩해 냈다. 그리고 십 년 만에 막강한 패도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데… 한데 뜻밖에도 월하선(月下船)이 나타나다니……." 월하선! 그것은 해외무림계(海外武林界)에서 가장 철저한 비밀에 휘어 감겨 있는 하나의 살인 조직 내부에서만 통하는 암호였다. 수백 년의 역사 가운데 단 하나의 반역자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 어떠한 살업이라 하더라도 어김없이 이행한 바 있던 살인무림도의 전설. 월하살막(月下殺幕). 지금은 이미 망각 속에 묻혀 버린 이름이다. 그러나 월하살막은 붕괴된 것이 아니었다. 월하살막은 본거지에서 대이주를 했을 뿐이며, 지금 그들의 세력은 과거에 비할 수 없이 치밀하고 견고하게 짜여진 상태였다. "우리는 중원을 무시할 만한 기반을 이룩했다. 악마대본영도 간과하지 못하는 바람(風)의 방( )을! ㅋㅋ… 우리 형제들 가운데 반수 이상이 불구자가 되는 혈전(血戰)을 치루는 가운데, 우리는 풍방을 이룩했다. 풍방은 우리들의 것이지, 다른 자의 것이 아니다. 악마대본영이라 하더라도… 풍방은 가질 수 없다. 또한 그 어떠한 신적(神的) 인물이라 하더라도… 풍방을 소유할 수 없다!" 역감을 가득 품고 있는 목소리였다. "월하혼… 자신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가 중원천하에서 그 얼마나 고초를 겪었었는가 안다면, 그의 고집과 집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백여 번의 사경(死境)을 겪었고, 그 가운데 여든 번 넘게 중외상(重外傷)을 입는 가운데 오늘의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고검랑(孤劍郞). 수룡대인은 바로 고검랑이었다. 고검문(孤劍門)의 대표이며 젊은 시절 강호(江湖)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신풍대인자(神風大忍者)라고 불리는 자. 그는 동영무도계(東瀛武道界)의 영원한 제이인자(第二人者)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그의 무공은 일세(一世)를 정복할 만한 것이었으되, 그는 늘 한 인물의 너무나도 찬란한 후광(後光)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보다 노련하며, 강하며, 치밀했던 자. 그는 바로 월하살막의 최후 막주였던 월하혼이었다. 고검랑은 번번이 그에게 패했고, 삼십 년 전에 월하혼 휘하로 영입당하게 되었다. 그는 월하혼을 존경했으며, 또한 증오했다. 상부자(上部者)이며, 경쟁자(競爭者)로……! 그런데 그가 중원천하에서 엄청난 세력 기반을 이룩한 이 마당에 끊어졌다 여겨지던 월하혼의 일맥(一脈)이 출현하다니? "월하살막의 혼은 면면히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본국(本國)의 인물에만 한정되고 있다!" "아……!" "타국의 인물은 월하살막의 형제들… 풍방의 형제들 머리 위로 올라설 수가 없다!" "그… 그 말씀은……?" 풍혼사십구랑이 조심스레 고개를 쳐들자. "나타난 인물이 월하혼 본인이시라면, 나는 그분의 부활을 의심한 죄과로 할복자살할 것이며… 풍방은 그분께 거머쥐어질 것이다!" "으음……!" "그러나 나타난 인물이 월하혼 본인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라면… 특히 그 사이, 우리들을 조롱했던 중원인이라면… 그는 죽는다!" "설마… 암살(暗殺)을?" 풍혼사십구랑의 눈빛이 격하게 떨렸다. "일통(一統)에 방해가 되는 자라면… 피를 쏟아야 한다! 중원인이 풍방을 갖게 되면 풍방은 지리멸렬된다. 그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으음……!" "우리들은 무수한 실전 경험을 쌓았다. 그가 월하혼의 그 모든 것을 이어 받았다 하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 고검랑의 눈빛은 가히 살모사의 눈빛이었다. 그는 다시 창 밖을 바라봤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일까? 그의 표정은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물론 그가 힘(力)으로 자신을 입증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그 자 앞에서 죽음을 택할 것이다!" 고검랑, 그는 팔짱을 풀며 느릿느릿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선실의 벽 쪽으로 걸어가는데, 벽면에는 금(琴) 하나가 걸리어 있었다. 보통의 금은 칠현인 법인데, 그것은 삼현이었다. "바람의 형제들은 죽을지언정, 모욕은 받지 않는다!" 그는 삼현금을 천천히 내렸으며, 삼현금의 목통 부위에서 하나의 예도(銳刀)를 천천히 끌어냈다. 매우 날카로운 생김새를 지니고 있으되, 빛은 흐르지 않는다. 도광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묵(墨)을 송진에 개어서 도신에 발랐기 때문에, 햇살이 도신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빛이 반사되지 않는 것이다. "월하혼… 그분은 위대한 인자이셨다!" "……." "그러나 그분의 그릇된 결정으로 인해 월하살막은 모든 기반을 잃고, 광활한 대륙을 유랑(流浪)하는 부랑의 무리로 화하고 말았다!" "으음……!" "그분을 존경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 그분이 덕천막부(德川幕府)에게서 불가능한 청부를 받아 우리 형제들을 수년에 걸친 죽음의 행진으로 몰아넣었다는 데에는 철저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 "……." "또한 그분이 우리들 내부에서 후계자를 고르지 않고, 외부에서… 우리들을 멸시한 중원무림계에서 후계자를 길렀다는 사실이 분노스러울 뿐이다!" 스르르르릉－! 예도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흘렀다. 고검랑은 잔혹한 웃음을 풀풀 날린 다음, 풍혼사십구랑을 바라봤다. "여기 온 인원은 얼마인가?" "속하 이하, 전원(全員)이 왔습니다. 갖가지 신분으로 위장한 채 백화주 근처로 모였습니다." "명이 떨어진다면 얼마 안에 이행할 수 있는가?" "두 시진이면 진형이 갖춰질 것이고, 적어도 일 주야 안에 살인은 완성될 것입니다!" "좋아! 그럼 즉시 시행하라!" "아……!" "가서 갖고 와라. 그의 수급(首級)을!" 고검랑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그의 눈빛은 칙칙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월하혼이시여! 그대라면 내가 존경하여 어떠한 명이 내리든 절대 복종할 것이되, 그대의 후계자에게마저 꺾이고 싶지는 않소이다. 나도 남자(男子)이고, 무도자(武道者)이기에……!' 실로 단호한 결의였다. 죽음의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힘든 일인데, 고검랑은 단호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실패할 경우,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러니 살인 명령의 이행에만 충실하기 바란다." 쏴아아… 쏴아아……! 만리수룡선은 끝없이 물길을 미끄러져 나아간다. 안개가 흐트러질 무렵 선실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고, 그것은 거의 일수유(一須臾)의 찰나에 이십여 장을 이동해서 깊디깊은 갈대숲으로 사라져 갔다. 만리수룡선을 움직이는 수부들 가운데, 검은 연기가 선실에서부터 갈대숲 쪽으로 날아올랐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동정호 일대에서는 기이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두 시진이 지난 다음이었다. 이백칠십구 인(人)이 이동하기 시작했고, 하나의 지역을 향해 기묘한 진식이 펼치어지기 시작했다. 죽간(竹竿)을 떠메고 있는 노어옹(老漁翁)에서부터 도롱이를 걸친 채 휘청휘청 걸어가는 젊은 수부, 걸인(乞人), 승려(僧侶), 악사(樂師)……. 이백칠십구 인은 조용히 정해진 곳을 떠나는데, 이렇다 할 외형적 공통점이 없는 이백칠십구 인 사이에는 사실 몇 가지의 특징이 있었다. 첫째, 하나같이 맨발(赤足)이라는 것. 둘째, 하나같이 눈빛이 칙칙하다는 것. 셋쩨, 이백칠십구 인이 하나같이 헝겁으로 둘둘 만 길쭉한 보따리를 지니고 있으며… 마지막의 특징은 이백칠십구 인의 몸에서 기이한 내음이 흐른다는 것이었다. 죽음의 내음! 그것은 오랫동안 혈전(血戰)을 치룬 사람들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처절하고도 사악한 내음이었다. 백화주(百花洲). 남창부(南昌府)에서 일 마장 정도 떨어진 곳을 말하며, 동정호 일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갈대, 그 너머에는 만경창파가 넘실거리고 있고… 안개가 아스라하게 덮인 수평선 위로 배들이 오고 가고 있다. 안개가 자욱하게 번져 나가고 있는 십오야(十五夜)이다. 하늘 꼭대기에는 바람난 계집의 둔부처럼 크게 부풀어오른 만월(滿月)이 덩그러니 걸리어 있고, 습기를 품은 바람이 갈대숲 쪽으로 몰리어 가고 있다. 하나의 배, 길이가 이 장(丈)에 달하는 소선(小船)인데… 기나긴 흰 궤적을 끌면서 백화주 일대의 호면을 가로지르고 있다. 아아, 꽃에 뒤덮인 환상의 배여! 배 위에는 무수한 꽃이 담기어져 있었으며, 꽃송이에서부터 풍기어 나오는 향기가 안개에 배어 들 정도로 짙다. 배의 고물 쪽에 하나의 인영(人影)이 서 있다. 검은 편립을 기우듬히 쓰고 있는 청년이다. "……." 그는 꽤나 무심한 눈길로 동정호의 푸르고 깊은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안개를 몰고 다니고 있는 신비의 꽃배. 달빛이 안개를 금빛으로 믈들였으며, 고즈넉한 자세로 서 있는 청년의 백포 어깨 역시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대체 누구일까? 어이해 그는 꽃으로 장식이 된 배를 몰고 백화주 앞의 푸른 물살을 가르고 오고 가는 것일까? 쏴아아… 쏴아아……! 물결이 보다 드세어진다. 달이 커다랗게 떠오르게 되면 동정호의 물이 호안 쪽으로 밀려가게 되며, 그로 인해 무성한 갈대 허리가 물에 잠기게 된다. 지금 꽃배는 물결을 가르면서 갈대숲 안으로 돌진해 나아가고 있었다. 배의 뒤쪽으로 흰 궤적이 남는다. 배를 젓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꽃배는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호면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이다. '느끼어진다.' 강인한 선을 이루고 있는 각진 턱이 움찔거린다. 그리고 무심하던 눈빛에 깊은 의미가 담기어지기 시작한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다가서기 시작했다. 좋아, 자네들은 신의(信義)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친구들이로군.' 회심의 미소랄까? 아름답고 강해 보이는 입가에는 얄궂은 표정이 나타났다. 쏴아아… 쏴아아……! 꽃배는 보다 빠르게 호면을 가르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느 한순간. "부공비등룡(浮空飛騰龍)!" 청년의 입술이 가볍게 벌어지는 찰나, 꽃배는 호면에서부터 한 자 정도 둥실 떠오르며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명한 바퀴를 매달고 평원을 미끄러지는 마차처럼, 꽃배는 동정호면 위에 한 자 둥실 떠서 무려 오백 장을 거침없이 질주해 나아갔다. 콰아아－ 콰아아－! 배가 지나는 부위마다 흰 용이 살아서 펄펄 날아오른다. 배 바닥에서부터 스미어 나온 막대한 잠력이 잔잔하던 물결을 거친 파랑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어느 순간 배는 물 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갔고, 폭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배는 수 장 높이의 물기둥을 배 바닥에 떠받친 채 둥둥 떠올라 오르기도 했다. 기기묘묘한 조화를 이루며 나아가는 한 척의 꽃배. 월하선(月下船). 그것은 강호계에서 가장 철저한 약속의 상징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청부를 맡은 노인자(老忍者)와 그를 추종하는 이백팔십 초살수(超殺手)들 사이의 약속이 거기 담겨 있는 것이다. 십오야(十五夜). 달이 좋은 날, 가장 멋지며 또한 가장 살벌한 조우는 서서히 시작이 되고 있었다. － 하나의 지점을 택해야 한다. 그는 철저한 승부사이며, 매우 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 － 풍방의 형제들, 죽음을 두렵게 여기면 아니 된다. 그가 비록 가공할 내공으로 시위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 심령상으로 제압당해서는 아니 된다. － 신호가 떨어지면… 베라! － 마지막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공격이 멈추어져서는 아니 된다. 이것은 대형(大兄)의 명령이다. 자네… 하수검사들은 그 이상의, 그 이하의 추측도 해서는 아니 되네. － 무조건… 베게! 은밀한 말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무수한 그림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은 꽃배를 중심으로 거대한 동심원을 그렸고, 차츰 그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동서남북에서 동시에 나타난 자들은 정확히 이백칠십구. 형형색색의 옷차림이며, 각기 다른 병장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빠르다는 것! 이백칠십구 인은 날줄 씨줄이 얽히고설키는 가운데, 하나의 그물(網)이 짜여지는 듯한 진세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자들과 서에서 동으로 움직이는 자들,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전후좌우 사방팔방이 무수한 그림자에 뒤덮이는 가운데, 꽃배의 오십 장 방원이 완전히 포박되었다. 그들이 완벽한 동심원을 이룩하는 순간이었다. 콰쾅－ 쾅－! 천지개벽의 폭음이 일어나며 이백칠십구 개의 점(點)이 하나의 거대한 벽(壁)을 형성하지 않는가? 안개가 지극히 짙어졌고, 달빛이 완전히 감추어졌다. 자연 현상과 지형 지물을 이용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신체만을 이용하여 펼친다는 대인자철벽진(大忍者鐵壁陣). 그것은 꼭 한 번 펼쳐진 바가 있다. 월하살막이 숙적 잔월인자단(殘月忍者團)의 사월류(死月流)를 완전히 멸살시켜 버리던 그 날, 대인자철벽대진은 무장평원(武藏平原)에서 펼치어졌으며… 사십구 일(日) 내내 진세가 유지되는 가운데 천만 번의 격돌이 벌어졌고, 그 가운데 오천여 명이 목 잘린 시체로 화했다. 하나가 쓰러지면 둘이 나타나고, 둘이 쓰러지면 넷이 나타난다. 넷이 쓰러지면 여덟이 나타나고, 여덟이 쓰러지게 되면 십육 인의 인자들이 출몰하게 된다. 끝없이 회전하는 차륜검진(車輪劍陣). 그것은 일성(一城)을 공략하기 위해 만든 진법으로, 이제껏 일개인(一個人)을 상대로 그것이 시전된 바가 없다. 한데 그것이 백화주 앞의 호면에서 한 인물을 상대로 펼치어지고 있었다. 우르르르릉－ 쾅－! 천만균(千萬鈞)의 뇌정(雷霆)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미친 물결이 십칠 장 높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기기묘묘한 조화를 이루고 운항해 나아가던 꽃배는 격한 물살에 휘말리며 하늘 높이 떠올랐다. 격변(激變)! 동정호반이 비등하듯 들끓어 올랐으며, 파편처럼 흰 포말이 튀어오르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폭음이 일어났다. "참(斬)!" 한 마디 긴 호통 소리와 함께 더욱 가공할 일이 벌어졌다. 파파팟－ 팟－! 이백칠십구 개의 건곤권(乾坤圈)이 동시에 날아올랐고, 이백칠십구 자루의 비도(飛刀)가 날아올랐다. 고공(高空)을 난도질해 나아가는 살인 병기들. 우박이 거꾸로 치솟는 듯, 꽃비가 땅에서부터 허공으로 토해지듯이 뿌려지고 있다. 월광혈린표(月光血鱗 ), 비황추혼석(飛黃追魂石), 자모원앙침(子母鴛鴦針), 만자탈백비추(卍字奪魄飛鎚)……. 사십여 종(種)에 팔만 점(點) 이상의 암기들이 동시에 허공으로 격발이 되었다. 벼락치는 듯 잇따라 터지며 꽃배는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작렬하는 폭죽처럼 박살이 나서 분해되었다. 매캐한 초연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비릿하고 쓰디쓴 독향이 사방으로 흘러 나가기 시작했다. 멸절대폭뢰세(滅絶大爆雷勢). 대인자철벽대진의 사십구(四十九) 변화(變化) 가운데 제일 마지막의 변화이다. 대인자철벽대진의 여타한 공격이 효능을 잃어버릴 때에야 시전되는 필살의 공세인데, 다짜고짜로 그것이 시전된 것이다. 풍혼사십구랑(風魂四十九郞)! 나이는 어리나, 풍방의 서열(序列) 이 위인 자(者)이다. 그는 검은 연기에 뒤덮인 허공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성공하리라 예상했으되, 막상 성공을 하니… 섭섭하군!" 그는 수룡피의 (水龍皮衣)를 걸치고 있으며, 부평판(浮萍板)이라 불리우는 나무 조각을 신발 바닥에 낀 채 물 위를 걷고 있었다. 안개를 가르며 나타나는 이백칠십구 인은 하나같이 흑건(黑巾)으로 얼굴을 휘어 감고 있다. 또한 흑건 중앙에는 <풍(風)>이라는 글자가 핏빛 글씨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쓰으으… 쓰으으……! 대인자철벽진세는 보다 단거리로 압축이 되었다. 꾸역꾸역 나타나는 인자들, 이들은 역전의 노장들이며 철저한 무사(武士) 감각(感覺)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낭인(浪人)이 되어 중원천하를 떠돌았고,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풍방을 이룩했다. 암흑도(暗黑道)의 청부사들이 되어서 암흑무림에 피보라를 일으키는 가운데, 악마대본영과 세력 다툼을 시작하는 자들. 강호의 어떠한 방파에 가 본다 하더라도, 풍방의 형제들같이 철저하게 실전으로 단련이 된 무객들은 찾기 힘들 것이다. 안개를 가르고 달빛을 타고 나타나는 이백칠십구 인. 그들이 하나의 점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할 때였다. 동정호 바닥이 갑자기 비등해 오르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거경(巨鯨)이 떠오르는 듯, 무엇인가가 수저(水底)에서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다. 콰아아－ 콰아아－! 막대한 잠력을 일으키며 떠오르는 물체. "어… 어엇?" "저… 저것은? 오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최초의 실패다. 으으으… 믿을 수 없다!" 풍혼사십구랑을 필두로 하여 모든 인자들의 눈빛이 일순 흐트러지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는데, 물기둥 위에는 흰 옷을 걸친 청년 하나가 두 다리를 어깨 넓이 정도로 벌린 채 서 있었다. "무사에게 방심은 금물임을 잘 알 텐데?" 청년은 팔짱을 끼웠고,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물기둥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충천(沖天)해 올랐다. 또한 한순간에 이르러서는 나사 모양으로 빙글빙글 뒤틀리기 시작했고, 청년의 몸은 물기둥과 더불어 선회하기 시작했다. 비폭나선(飛暴螺旋), 잠룡승천(潛龍昇天). 이백칠십구 인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얼굴이 새까맣게 물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보통 무객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쳐라!" "오랜만에 적수가 나타났다. 저러한 인물과 싸우다 죽는다면, 죽어도 영광일 것이다." "하하하앗……!" 차창－ 창－! 강철 음이 잇따라 터져 나온다. 무수한 검이 뽑히어졌으며, 백여 명의 인자들은 어느 틈엔가 포검(抱劍)하여 떠오르고 있었다. "카아아앗……!" "무사에게 두려움은 수치이다." "강적이라고 피한다면, 살막과 풍방의 명예는 도탄에 빠지고 만다." "우우우……!" 풍방의 살수들은 비조가 떼를 지어 날아오르듯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들은 삽시간에 청년의 머리 위쪽까지 날아올랐으며, 일제히 살검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예리한 검파(劍波)가 빗발처럼 흘러내리며 청년의 전후좌우를 또다시 완벽하게 휘어 감았다. 인자들의 검은 보통 무사들의 검과 다르다. 그 검은 사혈(死穴)만 노리며, 예절이나 격식 같은 것은 아예 취하지 않는다. 수비식은 아예 없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공격 초식으로 일관이 된다. 그러하기에 빠르면 이기고, 늦게 되면 어처구니없이 패하게 된다. 풍방의 인자들은 바람의 형제들이라 불린다. 그들은 속도를 무기로 삼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들의 경공이 최절정 수준이지 못한다면… 그들은 단시일 안에 전설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지개가 거꾸로 떨어져 내리는 듯, 꽃비가 춤추며 뿌려지는 듯한 가운데… 물기둥을 일으키며 치솟아 오른 청년은 처음으로 입술을 떼었다. "합격(合格)이다, 그대들은!" 그의 손이 느릿느릿 떨치어진다. 일정한 초식에 따라 움직이는 손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와 허무의 율동으로 움직이는 손이다. 오른손이 일정한 수식도 없이 흔들리는 가운데, 너무나도 미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둔팍한 소리가 잇따라 터져 나오며, 포검한 채 다가서던 인자들의 사지가 쩌릿한 충격 가운데 빳빳하게 마비되기 시작했다. "월… 월광무(月光舞)……!" "야… 야천환(夜天幻)의 절정수(絶頂手)이다." "월광의 절대자시다. 아무도 이룩하지 못한 초극살도(超克殺道)를 터득하신 분이 나타나신 것이다. 율법을 창안하실 수 있다는 절대자가……!" 수염이 흰 노인자들은 마비감 가운데 툭툭 떨어지면서도 패배감보다는 환희감을 느끼고 있었다. 완전한 패배는 차라리 아름다운 것일까? 더욱이 그것이 자신의 사문의 무공에 의한 패배일 바에야……! 슷－ 슷－ 슷－! 괴청년은 잇따라 오 식(式)을 시전했다. 혼(魂)에서 영(影)으로……! 나비 떼의 춤사위 같은 접초(蝶招)와 야(夜)의 초식, 그리고 가장 완벽한 살인무도라는 월광무(月光舞)의 정화를……! 어디 그뿐이랴? 그는 다른 칠 종 절학(絶學)을 잇따라 시전하기 시작했다. 운룡처럼 비공해 오르다가는 제비처럼 떨어져 내리고, 돌연 신체를 안개에 휘감아 감추었다가는 오십 장 먼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고, 일백 개의 분신(分身)을 끌면서 허공을 뒤덮어 버리고……. 부풍비각(浮風飛脚), 천색비포(千色秘袍), 잠마사은(潛魔死隱), 잠룡무흔(潛龍無痕), 일백무종(一百無踪), 백인무적결(百忍無敵訣), 야공부풍(夜空浮風), 그리고 야천환(夜天幻)……! 아아, 바로 십삼인자술(十三忍者術)이 아닌가! 인자의 제왕이라는 월하혼(月下魂) 대(代)에 이르러 모조리 재현이 되었으며, 월하혼도 완전히 익히지 못했다는 전설상의 무공이다. 그것이 중원청년에 의해 완전무결하게 재현이 될 줄이야? 침묵, 모두 침묵에 들어서고 있었다. 사위는 언제 폭풍이 일었나 싶게 질식할 듯한 적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백칠십구 인자들의 눈에는 엄청난 존모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죽이고자 했던 자들이 그를 존경하다니? "바로 월광무(月光舞)이십니다! 인자의 살아 있는 우상이여!" "우리들을 죽일 자격이 있으십니다. 신풍대인자의 명에 따라 살인하고자 한 죄로 죽여 주십시오. 아니, 할복의 명만 내리시면 됩니다. 권위를 부정한 죄로 자결하겠습니다." "오오, 위대한 월광지존(月光至尊)이시여! 월하혼도 이룩하지 못했던 인자도의 전설을 이룩하신 절대자시여!" 월하살막의 인자들은 하나같이 격동하고 있었다.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흔여섯은 되며, 가장 나이 든 사람은 백사십 세에 달한다. 이들은 동영무도를 종횡하다가 월하혼을 따라 중토에 들어섰다. 월하혼이 패퇴한 후 이들은 낭인의 길로 들어섰으며, 그 험난한 세월 가운데 좌절하지 않고 집념 하나로 힘을 길러 왔다. 이들이 지닌 바 투혼은 그 어떠한 자도, 그 어떠한 세력도 꺾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목숨이 아니라, 명예이다. 명예를 얻지 못하는 한, 절대 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그들이 한 인물에게 완벽하게 승복을 한 것이다. 월하혼이 지목한 후계자, 그는 바로 중원제일의 풍운아 천유성이었다. 하긴 그가 아닌 누가 그러한 신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목숨은 귀중한 것이지. 그리고 지금은 그대들의 살인 수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난세(亂世)이지. 훗훗… 자네들을 원망하지는 않네. 아마도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분노해 죽여 버렸을 걸세. 나는 사자(獅子)들을 바라지, 양(羊)들을 바라는 것이 아니기에!" 천유성은 피가 끓어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 순간, 진정 빠르고 강한 날개 한쪽을 얻은 것이다. 월하살막의 후신인 풍방, 그 단체를 완전히 접수하게 되었다는 것은 구파일방이 모조리 되살아난 것과 비슷할 정도로 중차대한 일이었다. "자네들을 누가 이리도 강한 무사로 교육했는지 알아야겠네. 그에게 꼭 해 줄 말이 있네. 아마도 저 배 위에 있는 자인 듯하군. 아까부터 한숨을 쉬는 폼이 이상한 자……." 파팟－! 천유성은 안개를 가르며 날아올랐다. 그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나타난 만리수룡선(萬里水龍船)을 향해 신형을 폭사시켰으며, 이백칠십구 인자는 훌훌 날아올라 그를 뒤쫓았다. 달빛이 그들을 뒤따랐고, 안개와 물결이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며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第8章 무림혈서(武林血書)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은 만리수룡선의 선실에서 벌어졌다. 달빛이 화사하게 떨어져 내리는 주단 위에 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신풍인자(神風忍者) 고검랑(孤劍郞). 그는 자신의 완전한 패배를 자인하며 홀연히 날아든 천유성 앞에서 도(刀)를 쳐들었다. 자결을 하기 위해……. 죽음으로써 자신의 반역을 벌하기 위해 그는 애도(愛刀)를 쳐들었다. 하나 천유성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 나온 또렷한 그의 자국어는 고검랑을 경악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술을 한 잔 사고 싶군." "아, 술을……?" 고검랑은 넋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바람의 형제들을 무적의 무사로 기른 노인에게 건배(乾杯)로 청하고 싶소." 빙그레 웃는 천유성, 그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악감(惡感)도 느끼어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순후하고 솔직한 표정이다. 방금 전 가공스러운 무위를 보였던 사람과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술이라니? 축배(祝杯)의 잔을 들자니? "여기 오는 가운데 풍방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 풍방이 엄격한 살인율(殺人律)을 지켰다는 것과, 거래(去來)에 공정했다는 것, 그리고 죽어서는 아니 되는 인물의 선혈(鮮血)에 대한 청부는 거절했다는 것을……!" "아……!" "중원은 너른 곳이오. 아마도 이 곳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고독감은 느끼지 못할 것이오. 그것이 과거 나와 인연을 맺은 바 있던 동영제일인에 대한 나의 보답이 될 것이며……." 부드러운 눈빛이다. 냉혈의 길을 걸어온 인자들이라면 그러한 눈빛을 혐오할 것이다. 세상의 냉혹함과 비정(非情)함을 모르는 철부지만이 그러한 눈빛을 던진다고 외치면서. 그러나 그 어떠한 사람도 천유성의 눈빛을 보고 조소를 터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힘이 있고, 의미가 깊은 미소이며, 아름답고도 냉철한 눈빛이기에! "갑시다. 이미 주루 한 곳을 봐두었소!" "정… 정녕 속하를… 속하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까?" 고검랑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렸다. "나라도 그리하였을 텐데… 내가 어찌 고검랑을 미워하겠소이까?" 진실된 말이다. 세파를 겪은 고검랑은 천유성의 말이 진실된 말임을 뼛속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천유성의 목소리에 일말의 위선이 섞이었더라면… 고검랑의 눈에서 오랜만에 인간의 눈물이 흘러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륙(大陸)은 역시 큰 곳이군요. 대인(大人)을 뵙다니……!" "나는 일개 소인배요. 그러니, 대인이라 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주공(主公)은 대인이십니다. 속하, 모든 기반을 주공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고검랑이 감격해 말하자. "다시 내 앞에서 그러한 소리를 한다면, 나는 십삼인자술을 살막에 돌려주고 떠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천유성은 절하고자 하는 고검랑을 안아 일으켰다. 동정제일루(洞庭第一樓)라 불리는 주루가 있다. 사계(四季) 내내 신선한 회(膾)를 먹을 수 있으며, 어느 날 당도하더라도 백 년 묵은 소홍주(蘇紅酒)를 마실 수 있는 곳이다. 풍월주루(風月酒樓). 오층의 높이로 일이층은 주점이고, 삼사오층은 객잔(客棧)이다. 각 층마다 천이백 개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는,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주루인데… 그 날, 기적이 벌어졌다. 그들, 온갖 잡배들이 다 모여 이룩된 듯한 괴인 무리들이 술 고픈 얼굴로 미친 듯이 쳐들어왔으며… 어디서 훔쳤는지 모를 금원보(金元寶) 백 개를 주루주인에게 내놓고 풍월주루를 오 일 간 통째로 빌렸다. 그리고 더 놀라운 기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차 스무 대를 채우고도 남음이 있는 창고의 주담자(酒曇子)가 모조리 동이 나 버렸고, 거기에 걸린 시간은 오직 팔 개 시진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풍방의 업무상 알게 된 천하무림 비밀 세력도입니다." 고검랑은 취기를 약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상승고수자였으나 정말 많이 마셨으며, 이 순간만은 내공으로 술기운을 억제하고 싶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는 품에서 두툼한 혈서(血書)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와 단독대좌하고 있는 천유성의 손으로 정성스레 넘기어졌다. <무림혈서(武林血書)> 피와 죽음의 기록이며, 풍방이 암흑도의 전설을 이룩하는 가운데 얻게 된 강호의 비밀스러운 기록이다. 그 안에는 천하 고수자들의 무공 장단점과 거처, 습성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풍방의 인자들이 판단하여 정한 십품서열(十品序列)에 따라 강호 고수자들의 명단이 분류, 기록되어 있었다. 무림혈서에 기록된 인물들의 총수는 사천팔백(四千八百). 그 가운데 천오백 정도는 일방(一 )이나 일파(一派), 일회(一會), 일성(一城), 일교(一敎), 일곡(一谷), 일전(一殿) 등을 이끌고 있는 자들이다. 또한 상위 오백여 인은 적어도 이천 무사 이상을 거느리고 있으며, 오백 리 넘게 세력을 장악하고 있는 패웅(覇雄)들이었다. 그 중에는 악마대본영과 연수(連手)한 자들의 이름도 끼여 있었다. 하나 악마대본영의 마두들은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기에, 무림혈서의 기록도 완전한 것은 되지 못했다. 다만 책의 말미에 있는 핏빛의 글씨 부분만은 실로 큰 도움이 되는 새로운 사실들을 이루고 있었다. <이하자(以下者) 초절정(招絶頂) 고수자(高手者) 내지 천하 대세를 가늠하는 풍운아(風雲兒)들임! 이들에 대한 살인 청부는 사절해야 함. 풍방의 현재 실력으로는 이하자들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 그들에 대한 청부를 받다가는 실패를 경험하기 십상임.> 그러한 단서가 적히어 있으며, 그 아래 몇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첫 번째 이름은 바로 마황야(魔皇爺)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름은 사대왕야(四大王爺), 그리고 세 번째 이름부터 색다른 이름들이었다. <십만대상(十萬大商). 이름은 있고 거주지도 확실하되, 그를 아는 사람은 없음. 그는 거대한 상권을 이룩하였으되, 모든 것을 문서(文書)와 암호 통신으로 조종하기에… 그의 수하들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함. 분명한 것은, 그가 낙양성(洛陽城) 중원대상가(中原大商家)의 영역 내부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며… 어떠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중원대상가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임. 그는 나이와 용모, 모든 것이 비밀인데… 악마대본영은 수천 무사를 보내 그의 장원을 포위하기 시작했음. 하나 그를 찾아 내기 전까지는 그가 이룩한 부(富)를 빼앗지 못할 것임. 십만대상은 상맥(商脈)의 전설로, 그는 은자(銀子) 팔 냥(兩)을 밑천으로 하여 거대기업을 이룩하였고… 중원대상가가 이룩되는 데 걸린 시간은 오직 일 년에 불과. 그의 상술(商術)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음. ……. 만에 하나, 그가 악마대본영에 장악된다면… 녹림도(綠林徒)와 하오도(下五道), 그리고 천하금맥(天下金脈)의 칠 할 이상이 악마대본영의 관장하에 들어갈 것임.> 십만대상, 살아서 상인들의 우상이 된 자이다. 오직 은자 팔 냥으로 신화를 창조해 나간 자. 그는 악마대본영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는 중원제일의 갑부였다. 또 하나의 인물. 그는 바로……. <영웅무정(英雄無情) 일검향(一劍香). 이름은 천유성(天流星)이라고 추측이 됨. 자세한 내막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되, 항차 천하 정세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자로 판단이 됨.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인물임. 그를 만난다면 일단 피해야 함.> 천유성의 이름마저 밝혀져 있었다. 악마대본영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이름을 그들은 알아 낸 것이다. 사냥개의 집요한 후각에 매의 눈을 지니고 있는 자들, 풍방! 천유성이 그들을 얻었다는 것은 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다름이 없다. 하나 고검랑은 자신이 갖고 있는 무림혈서가 완벽한 것이 아니라며 은근한 죄책감을 토로했다. "기실 속하는 제이(第二)의 정보통(情報通)에 불과합니다." "그럼… 더 뛰어난 정보통이 있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누구인가?" "바로… 이 자입니다." 고검랑은 한 사람의이름을 지적했다. 십만대상(十萬大商). 악마대본영이 영웅무정 일검향과 같은 비중으로 취급하는 자. 그는 천하에서 가장 많은 황금을 갖고 있는 자로 알려져 있으며, 무수한 사람이 모여 사는 낙양성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나뭇잎을 숲에 감추고, 조개 껍데기를 바닷가에 감추듯이… 그는 자기 자신의 몸을 인파 가운데 감추어 둔 것이다. "이 자라면… 마황야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으음, 대단하군." "묘한 자이지요. 그러나… 이 자만은 못합니다!" 고검랑의 손길이 미끄러졌다. 그는 또 하나의 이름을 지적했다. "이 자는 천년세가(千年世家)의 대표입니다. 사실, 천하에서 가장 부자는 이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영웅무정 일검향. 그는 그 이름을 지적하고 있었다. "또한… 가장 신비한 자이지요. 바로 앞에 있다 하더라도 알지 못할 자입니다. 이 자의 얼굴은 악마대본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머지않아 그 중 일매(一枚)가 접수될 것입니다. 그 때, 지존에게 즉시 건네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예?" "훗훗… 초상화보다야 실물이 낫지 않은가?" 천유성은 웃으며 술잔을 쳐든다. 소리 없는 건배(乾杯). 그 가운데 고검랑의 얼굴은 숯불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바… 바로… 바로……!" 그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고, 입 안이 바짝 타는 듯 거푸 술을 들이마셨다. 하여간 정취가 나는 술좌석이었다. 연회는 닷새 내내 계속이 되었다. 고검랑은 하루 정도만 연회를 하자 하였으되, 천유성은 어찌 된 일인지 오 일의 연회를 계속했다. 그 사이 풍월주루 근처로는 신비한 그림자들이 오고 가기 시작하였으며, 기이한 풍운이 풍월주루를 중심으로 하여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악마대본영에서 파견된 자들, 그들이 대거 모여드는 가운데 풍월주루는 암중에 포위되어 버리는 것이다. 닷새의 연회가 끝나는 날이다. 천유성은 가장 큰 잔으로 술을 따라 마신 다음, 고검랑에게도 술을 따라 주었다. 그는 고검랑이 술잔을 텅 비우기를 기다렸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시작하세!" "으음, 그 사이 나타난 자들을 척살하는 것입니까?" 고검랑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는 피비린내를 감지한 듯,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기를 잡기 위해 보검을 쓰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야." "예?" "자네들을 일찍 노출시키고 싶지 않네. 이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나 혼자서도 능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네." "어… 어이해 저희들을 떼어 보내려 하십니까?" "먼저 낙양에 가게." "아, 그럼 그를 찾으라는 명이십니까?" "그렇네." 천유성은 천천히 편립을 뒤집어썼다. 그는 검은 끈을 질끈 조이며 하이얀 치열을 드러냈다. "어떤가? 자신은 있는가?" "자신이라니요?" "여기서 도망쳐 나가는 것!" "그 정도야 자신 있습니다. 사실… 도망치는 데에는 바람의 형제들을 따를 무객들이 없을 것입니다!" "좋아, 그럼 지금 떠나게!" "주… 주공은?" "나는 낚시를 하러 가야겠네. 동정호에 붙은 청랑호(淸浪湖)에 대어(大魚)가 많다고 들었다네." "낚… 낚시요?" 고검랑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하여간 반문은 허락이 되지 않았다. 고검랑은 이백칠십구 인자들을 이끌고 갈가마귀 떼가 날아오르듯이 창문 밖으로 뛰어나가야 했으며, 수많은 은잠자들이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하나 바람의 형제들은 추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이 사용하는 경공은 중원천하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보적인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직선으로 움직인다. 인자들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바람이 흐트러져 가듯이 사라져 가는 이백팔십 개의 그림자들을 보며 풍월주루를 소리 없이 포위했던 괴무사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리고 천유성은 주루주인에게 죽간(竹竿) 두 개를 빌리고 있었다. 하나는 네 칸짜리, 하나는 세 칸짜리였다. 주루주인은 청랑호에서의 낚시에는 새우 미끼가 최고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귀띔해 주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두 척 넘는 잉어를 낚을 수 있다는 것과 자칫하다가는 잉어에게 딸려서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까지 상세히 일러 주었다. 흔들흔들……! 그는 죽간을 메고 걸어 나갔고, 일패도지 흐트러진 진세 사이의 구멍을 유유히 뚫고서 휘파람을 불며 강기슭을 따라 걸어갔다. 낚시라니? 영웅무정 일검향으로 화신해 천년대명(千年大命)을 이행해 나가기 시작한 천유성이 갑자기 한가로운 조사(釣士)가 되다니? 청랑호(淸浪湖)라는 호수. 달을 삼켜 버린 후, 검푸른 아픔으로 가라앉아 버린 심연(深淵)이다. 끝없이 진군해 나아가는 갈대의 군사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버린 산중의 호수이며, 거기에 죽간을 드리운다면 능히 달을 낚아 올릴 수 있다. 기우듬한 파립(破笠), 꽤 오랫동안 빨지 않아 구깃구깃해진 백포에 몸을 휘감고 있는 청년. 그는 조금 지친 듯한 눈빛을 호수에 던지고 있었다. 호면에는 달 그림자가 선명히 박히어 있었다. 물결이 지극히 잔잔한지라, 달 그림자는 기울 때 떨어져 내린 그림자처럼 흔들림이 없이 머물러 있었다. 퇴폐적이다 할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이다. 희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피부, 한 덩어리 한옥(寒玉)을 섬세하게 조각한다면 청년과 같은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우뚝한 콧날과 부리부리한 검은 눈썹, 헝클어져 얼굴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얼굴 반면이 감추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실로 뛰어난 용모였다. 깊이를 알지 못할 정도로 가라앉은 눈빛이 절정(絶頂)이다. 두 눈에 호수를 투영시키고 있는 청년은 벌써 월척(越尺)을 여러 마리 끌어올리고 있었다. 물에 허리를 담그고 있는 갈대가 가늘게 흔들린다. 고요하던 수면에는 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선명하기 이를 데 없던 달 그림자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야릇한 떨림이 맺혔다. "조심성이 많은 친구들이로군. 내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할 뿐, 좀처럼 다가서지는 않는다." 천유성, 그가 아닌 어떤 인물도 이러한 신비로운 기세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사대마계와의 천년전쟁을 시작한 천유성. 그는 독특한 방법으로 독보천하(獨步天下)를 시작하고 있었다. 노인네들은 그가 보다 더 큰 잠력을 기른 다음 싸움을 시작하기 바랬으나, 천유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타초경사(打草驚蛇)의 누를 일부러 범해 버렸으며, 성동격서(聲東擊西)가 아니라 정면공격을 가했고… 그 덕에 그는 수만 무사들의 노림 대상으로 변화해 버렸다. 그의 초상화는 수천 장 그리어졌고, 사대마계가 이끌고 있는 수백 개의 비밀 분타에는 영웅무정 일검향이라는 이름이 거의 매각(每刻) 거론이 되었다. 폭풍의 눈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천유성, 그의 미소는 보다 아름다워졌다. "하여간… 솜씨가 상당한 친구들이다. 훗훗… 내 근처로 다가서지는 않고 있으되, 이리저리 움직이며 잠입하는 솜씨가 구파일방의 경공을 능가한다. 그것은 바로 부풍잠은(扶風潛隱)이다. 동영(東瀛)의 경공 가운데 부풍비각(扶風飛脚)과 쌍벽을 이루는 솜씨!"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죽간을 잡아챘다. 피이잉－! 죽간 허리가 휘며 은사(銀絲)를 타고 묵직한 중량감이 전해졌다. "대어(大魚)다. 예상 외로 빠르게 대어가 걸렸다!" 은사가 끊어질 듯 팽팽히 당기어지며 호면에서 물방울이 퉁기어지는 가운데, 등이 시뻘건 혈리(血鯉) 한 마리가 끌려 나오고 있었다. "진짜 월척(越尺)의 대어이다!" 나무 등걸에 기대어 있는 자, 전체적으로 깡말랐으며 걸치고 있는 옷자락은 깨끗한 회삼이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창백한 이마, 얄팍한 입술과 칙칙한 눈빛으로 인해 흡사 조각처럼 보인다. 차갑다. 그에게 느껴지는 느낌은 너무도 차갑다는 것이다. 그의 가슴에는 한 자루 검이 안기어져 있었다. 그의 손,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는 손이다. 하나의 특징은 손바닥이 매우 얇다는 것이다. 또한 손가락 위의 부위가 발그레하게 물들고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예민하게 깎이어져 있었다. 검을 익힌 자라면 그의 손만 보고도 섬ㅉ함을 느낄 것이다. 감각(感覺)의 검도! 초식이나 내공에 따라 시전하는 보편적인 검술이 아니라, 본능적인 감각에 따라 시전하는 검도가 있다. 그것은 초식을 위주로 하는 무공과는 달리 일정한 운검(運劍)의 형식이 없으며, 철저할 정도로 상대의 허점을 파고든다. 바람이 일어나며 회색 옷자락이 나풀거렸다. 그리고 회의청년 주위로 꽤 많은 무사들이 소리 없이 다가서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데에도 파공성을 내지 않는 자들. 내리닫이 우직포(羽織袍)를 걸치고 있으며, 얼굴을 묵직한 철립(鐵笠)으로 가리고 있다. 또한 아래턱에 시꺼먼 망사천을 내리우고 있어 쓰윽 바라본다면 얼굴은 보이지 않고, 얼굴 가운데에서 토해져 나오는 혈망(血芒)만이 보일 뿐이다. 소리도 느낌도 없이 다가서는 자들은 여러 종류의 무기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길이가 짧고 섬세한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전적으로 암살을 위해 만들어진 살인마병장(殺人魔兵仗)! 그것은 중원무림계의 양식이 아니라, 해외무림계의 기이한 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물건들이었다. 한 노인. 그만은 철립이 아니라 구천혈룡관(九天血龍冠)을 머리 위에 얹어 놓고 있으며, 검은 우직포 대신 학창의(鶴 衣)를 걸치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중후한 느낌을 주고 있는 노인이다. 그는 얼굴을 주름살로 뒤덮고 있는데, 매부리코와 세 갈래 수염이 인생의 경륜과 성격의 예리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장광전중(長光田中). 노인은 그러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신에서 실로 기이한 내음을 흘리고 있었다. 매캐한 유황 내음이라고 할까? 철(鐵)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내음만 맡고도 노인의 특기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을 철과 더불어 산 인물. 아니, 그는 전생을 날(刃)에 바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부풍신장(扶風神匠). 장광전중은 그러한 별호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손이 닿게 되면 녹이 슨 고철(古鐵)이라 하더라도 천하보병(天下寶兵)으로 변화하게 된다. 또한 그가 마검(磨劍)을 한다면, 그 날(刃)은 철을 잘라 버리고 옥을 끊는 예기(銳氣)를 지니게 된다. 부풍신장은 노장인 특유의 고집과 끈기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하나 그는 지금 상당히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氣)가 불안하외다.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회색 옷을 걸친 채, 장검을 어루만지고 있는 청년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기라는 것! 상승고수라면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으리라. 그것은 오감(五感)으로는 감지하기 힘든 기세로서, 상승무공을 터득한 사람이라면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일검향이라는 자가 비록 단독으로 있으되, 그 자의 무위(武威)로 보아 그의 출현은 함정이기 쉽소이다!" 부풍신장은 정중히 허리를 꺾었다. 직후 석고상처럼 굳었던 청년의 입술이 가늘게 벌어졌다. 그와 더불어 감정이 거의 깃들여 있지 않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동감이오." "동감이시라면?" "나 또한 미묘한 기세를 느꼈소. 그것은 내가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거대(巨大)하고 깊은 기세였소. 중원천하에 그러한 기세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충격스러울 뿐이오. 역시… 영웅팔가는 위대한 무사 집단이었소!" "아……!" "어쩌면… 놈은 스스로를 노출시켜 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오." 칙칙하던 눈빛이 무섭게 번득거렸다. 꿈마저 죽어 버렸다고 알려진 자, 그는 바로 사몽(死夢)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마황야 휘하로 들어가 마보(魔譜) 안의 마공을 터득한 후, 어떠한 상대를 만나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소!" "……!" "하나, 지금 나는 미묘한 공포감에 휘말렸소. 내가 무사인 이상, 거짓말은 하지 않겠소!" "으음……!" "혈접혼을 간단히 물리치고, 폭풍혼 휘하세력을 철저하게 궤멸시킨 자! 그는 가히 일인방(一人 )이라 할 수 있소.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제반무공을 능숙히 사용하며 그 안에는 동영인술(東瀛忍術)마저 끼여 있소!" 사몽은 손을 들었고, 소맷자락이 흔들리는 가운데 소책자 네 권이 떨어져 내렸다. 투둑－ 툭－! 이슬 묻은 풀잎 위로 떨어져 내리는 네 권의 소책자는 악마대본영의 순찰당에서 작성한 소책자였다. 그 안에는 한 인물의 무공, 행동, 성격, 그리고 습성에 대한 것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순찰당의 분석에 의하면, 그는 젊고 오만하며 괴팍한 자로서… 전통적 방법이 아니라, 특유의 방법으로 처신한다고 기록되었으며, 그의 나이로 미루어 보아 내공은 칠 갑자(甲子)를 능가하지 못한다고 분석하오. 그러한 연유로 인해, 그는 지난번의 몇 차례 혈전(血戰)으로 인해 막대한 내력의 손실을 입었으며… 내력을 보충하기 위해 며칠 간 은거하며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할 것이라고 보고되었소!" 차고 정확한 말이다. 감정은 완전히 배제가 된 목소리, 천하에서 그러한 치밀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예감은 다르오. 그는 오래 전 내가 정녕 힘들게 꺾은 한 인물을 연상케 하고 있소!" "힘들게 꺾다니요?" "바로… 월하혼(月下魂)!" "아아……!" 부풍신장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쩌면… 놈은 그의 진전을 얻었을지도 모르오." 사몽의 얼굴은 더더욱 창백해졌다. 그리고 표정이 없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승부사들에게는 예감이라는 것이 있으며, 승부사의 기질이 강한 사람일수록 예감을 믿기 마련이다. "놈이 두려운 것이 사실이오. 하나, 지금 이 순간처럼 나의 마음이 흥분되기는 처음이오." "흥분되다니요?" "처음으로 베고 싶은 자를 만났기에……!" 너무나도 사악한 미소가 흐른다. 사몽은 애검의 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더듬었다. 애인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듯한 손길이었으며, 떨림이 없었던 손가락에는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놈이 승부의 미학(美學)을 아는 놈이기를… 물론 놈이 신(神)이라 하더라도 죽을 것이되, 놈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죽어 가기를 바라오!" 사몽, 그의 눈빛은 잿빛이었다. 사십여 가지의 마관(魔關)을 거치는 가운데 그의 피는 냉혈(冷血)이 되었으며, 그의 눈빛은 암울한 회색으로 변화했다. 얄팍하고 예리한 손매는 다분히 미적 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는 부조화를 느끼게 하는 오관의 배열. 그는 치밀하다기보다는 단순하며 집요한 자였다. － 나는 제일인자(第一人者)에 대한 꿈은 없다. 내 자신의 능력을 알기에! ㅋㅋ… 나는 죽이는 데에만 익숙한 녀석이지, 세력을 이룩하는 데에는 재간이 별로 없는 녀석이다. 나는 나의 머리 위에 오직 일 인만 남겨 두겠다. 철저한 승부사, 사몽. 마황야가 그를 태산같이 믿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실, 악마대본영이 이룩했던 혈겁 가운데 중요한 십여 가지 혈겁은 사몽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몽, 그는 가장 강력한 살인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일컬어 백인살예(百忍殺刈). 그들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이며, 또한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살수들이다. 사형마루(死刑魔樓), 또는 사신마계(死神魔界)를 지탱하고 있는 보루들. 그들이야말로 마황야의 가장 뛰어난 충복들이었다. "승부를 아는 자라면… 내가 오랜만에 직접 나선다 하더라도, 권태감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몽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놈은 죽어야만 한다. 놈은 내가 흠모하고 있는 한 여인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다.' 사몽은 사랑이라고는 아예 모른다고 알려진 자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하나의 사랑은 존재하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처음 보고 나서부터 그의 메마른 가슴을 가득 채운 여인이 하나 있었다. 란(蘭)이라는 여인. 차가우며 예리한 여자. 사몽은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그림자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녀는 바로 혈접혼이었다. "나의 여인을 조롱한 자… 그리고 악마대본영의 권위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 자! ㅋㅋ… 몇 가지 점에서 너는 나의 마음에 쏘옥 들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너는 죽는다." 사몽은 애검을 깊이 끌어안았다. 색혈(索血). 장광씨가 만든 마병 가운데 서열 일 위 병기이다. 무인(無刃)에 무광(無光), 그리고 무채(無彩)의 병장기이다. 하나 그것은 가장 거대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몽의 마공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십대마학 가운데 일곱 가지를 익혔다는 살인의 천재, 그는 천천히 눈길을 허공에 던졌다. "일단 너를 시험하겠다. 네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ㅋㅋ……!" 그는 잔혹한 웃음소리를 내다가 손을 슬쩍 쳐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파파팟－! 사방에서 잿빛 그림자들이 솟구쳐 올랐다. 사람의 움직임이라고 여기지 못할 정도로 쾌속하게 이동해 나가는 일백 개의 잿빛 그림자들. 이제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땅 속과 나무숲에서 일제히 신형을 폭사해 나오는 무사들은 하나같이 전신을 회색 전포로 휘어 감고 있었으며, 목에는 녹슨 쇠사슬을 칭칭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호선을 끌며 떠올랐으며, 꽤나 큰 포물선을 끌면서 청랑호 쪽으로 사라졌다. 일백 인의 초살수자들, 그들은 월하의 인자들을 능가하는 전문가들이었다. 월하의 인자들은 제반살인에 능통하고 노련한 무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몇 가지 살인 율법을 지니고 있었으며, 내공의 기초가 색달라 살인 기계가 되지는 못했다. 적어도 도망갈 줄은 알고 있기에……. 그렇지만 일백살예(一百殺刈)라 불리는 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태어난 직후 살인마관(殺人魔關)에 내팽개쳐졌으며, 오천 명의 남아(男兒)가 치열한 생존 훈련을 거치는 가운데… 도합 일백 명만이 살아남게 된 바 있었다. 그들은 악마혼을 부여받게 되었으며… 전신이 백독불침(百毒不侵), 수화불침(水火不侵)의 경지에 이르도록 단련을 받았다. 소리도 없이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는 자들, 그들은 지난 십 년 간 한 번도 패한 바가 없는 악마의 화신들이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일백살예가 사몽과 영적으로 교감한다는 것이었다. 쓰으으… 쓰으으……! 잿빛 안개가 흐르는 듯한 가운데, 청랑호 일대는 짙은 마기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第9章 침묵의 검도(劍道) 안개가 달빛을 가렸다. 눈을 부릅뜬다 하더라도 삼 장 밖을 보기 힘들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안개에서는 내음이 풍긴다. 특히 호숫가의 안개에서는 야릇한 원초적 내음이 풍긴다. 수초(水草)의 내음처럼 풋풋하고, 어딘지 모르게 묘한 환각을 일으키는 안개의 내음이 짙게 흐르는 가운데 그는 또다시 한 마리 대어를 낚아 올리고 있었다. "힘이 좋아. 금린어(金鱗魚)는……." 피이이잉－! 은사가 끊이질 듯 팽팽히 당기어졌으며, 죽간은 활처럼 휘어졌다. 내공을 쓴다면 간단히 끌어당길 수 있으나 그는 내공을 쓰지 않았기에, 고기를 끌어내느라 상당히 애를 먹어야만 했다. 은사는 팔뚝만한 금린어에 힘껏 끌리기 시작했으며, 그는 죽간을 반듯이 세운 채 호수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물살에 파문이 번졌으며, 호면 위로 금린어의 요동으로 인한 물거품이 번져 오르고 있었다. 짙은 안개의 날, 그의 입가에는 싱긋 미소가 머금어졌다. "좋아, 좋아!" 야릇한 음색(音色)이다. 한 번 듣고는 영영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무색(無色)인 동시에, 언제까지나 또렷이 기억이 될 야릇한 음률의 목소리이다. "좋아, 더 다가서라. 더……!" 흐릿한 눈빛이 차디찬 빛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 꽤 많다. 그리고 하나같이 고수자들이다. 정녕… 거대한 고기가 걸려들었다.' 천유성의 이마 위에 핏줄이 불끈 일어났다. 슷－ 슷－ 슷－ 슷－! 너무나도 작은 파공성과 더불어 그림자들이 출몰하고 있었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다가서는 일백 개의 그림자들. 그들은 청랑호를 빙 둘러 포위하며 느릿느릿 접근하고 있었다. 회색 옷을 걸친 자들, 등에 쌍검을 교차해 메고 있으며 그들의 오른손은 한결같이 오른쪽 어깨에 걸린 검자루에 닿아 있었다. 청립을 얼굴 깊이 눌러 쓴 자들인데, 철립 사이로 무자비한 눈빛이 푹푹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일백 명의 암살자들은 살인 기계라 불릴 수 있는 마도의 초정예들이다. 안개가 보다 짙게 번질 때였다. 백 명의 무사는 암중에 신호를 교환하며 사방으로 회선하며, 진세를 흩트리기 시작했다. 보폭이 정연하며 숨결도 정연하다. 날아오르고 숨어들고, 신형이 겹쳐지고, 흐트러지고… 백 명의 무사들에 불과한데, 놀랍게도 일천 무사들도 점령하기 힘든 지역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는 팔뚝만한 금린어를 물 밖으로 끌어냈으며, 치기 섞인 웃음 가운데 금린어를 낚싯줄에서 떼어 냈다. 그의 쌍수(雙手)가 무엇인가를 하게 된다는 것은 등 뒤에 완벽한 허점이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아니나 다를까? 파팟－! 동쪽 늪지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치솟아 올랐다. 둘 다 소리 없이 검을 끌어올렸으며, 좌뇌전(左雷電) 우파천(右破天)의 쌍심합격검(雙心合擊劍)을 펼치며 천유성의 등판을 향해 다가섰다. 그들이 오 장 정도 신형을 이동시켰을 때, 이번에는 갈대숲에서부터 다섯 개의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그들은 허공에서 인간 사다리(人間雲梯)를 형성하는 가운데,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형성시켰다. 일대가 폭풍에 휘말리며 갈대들이 뿌리째 뽑혀 올랐고,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군마무(群魔舞)! 사신마계에서 전해진다는 절정의 살인마공이다. 다섯 명의 신체에서 뿜어지는 다섯 줄기 잠력이 하나로 합쳐지며 막대한 잠경이 터져 나온다. 벼락 치는 소리가 수면을 뒤흔들 때, 천유성은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우장을 옆으로 내어밀고 있었다. 우우웅……! 기이한 떨림 소리 가운데, 그의 다섯 손가락은 투명(透明)한 수정(水晶)처럼 변화하고 있었다. 불멸여의천수(不滅如意天手)! 번뇌혼을 잡아 낼 때 시전된 이후, 한 번도 시전되지 않았던 공포의 장인수(匠人手)이다. 좌측에서 쌍심합벽검(雙心合劈劍)이 떠올랐고, 등판 쪽에서 군마무(群魔舞)의 공세가 펼치어지는데… 그의 오른손이 우측으로 내쳐지다니……. 갈대가 짙게 우거진 곳, 천유성의 손바닥은 그 곳으로 향해졌으며 비파현이 퉁기어질 때처럼 활짝 펼치어졌다. "잠마둔(潛魔遁)… 역시 좋아!" 콰르르르릉－! 폭음이 터져 나오는 찰나, 갈대숲이 파괴되면서 일곱 개의 핏덩어리가 툭툭 튀어올랐다. 입에 비수를 물고 잠수공으로 다가서던 일곱 명의 살수들이 갈대숲을 한꺼번에 붕괴시켜 버리는 불멸여의천수공에 의해 오장육부가 바스라져서 호수를 피로 물들인 채 위쪽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일곱이 비명도 없이 죽어 갈 때, 천유성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빠른 출수(出手)로써 좌수를 비스듬히 그어 나가고 있었다. 춘추풍검도(春秋風劍道)에 따른 수식. 그것은 하나의 환상을 허공에 이룩하였으며… 허공에 떠올랐던 다섯 명의 살인 기계들은 살초를 펼치고자 하는 그 찰나, 몸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크으으윽……!" "이…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웅무예(英雄武藝)이다." "케에에엑……!" 군마무를 펼치던 다섯 살수는 전신이 오그라 드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인간 사다리를 허물어뜨렸다. 그들이 비명 소리를 터뜨리며 무너지기 시작할 때, 천유성은 앉은 자세 그대로 둥실 날아올랐다. 천유성은 죽간을 오른손에 가볍게 거머쥔 채 떠올랐다. 그는 단정히 앉은 자세 가운데 십 장 날아올랐고, 차가운 미소 가운데 죽간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 영웅팔가 사람들은……!" 피이이잉－ 핑－! 삼 장 길이 은사가 빳빳이 펼쳐졌으며, 마치 삼 장 길이의 대도(大刀)가 풍차 돌 듯이 회전하는 가운데 무수한 은색(銀色) 편린(片鱗)이 사방으로 폭사되어 나갔다. 홍문(洪門)과 중궁(中宮)을 이룩하는 지점이 수천만 줄기의 편광에 뒤덮이기 시작했고. "카아아악……!" "철… 철저한 살인초이다. 으윽!"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웨에에엑……!" 땅 속으로 스미어 다가서기 시작한 일단의 회의살수들이 은사에서 뿜어진 강기에 격중되어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섬전풍(閃電風)!" 은사는 기기묘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청랑호 주변을 휘어 감기 시작했다. 갈대잎들이 춤추듯 날아올랐으며, 물결이 거센 파도로 화해 물가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천유성의 몸뚱이는 환광에 휘어 감기어 버리는 가운데, 백인살예진의 중심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일 인이고, 상대는 다수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중과부적이나, 이번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즉 천유성은 주변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베어 버릴 수 있는 여건이었으며,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동료들을 벨까 두려워하는 나머지 검초를 위축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나타난 허점(虛點). 그것은 하나에서 셋을 세는 동안의 허점에 불과하였고, 천유성은 바로 그 짧은 시간을 일부러 연출해 낸 것이다. 얇을수록 날카로운 날(刃)이 되는 것일까? 가늘디가는 은사였으되, 막대한 잠력이 깃들자 그 어떠한 보도보다도 가공할 파괴력을 발휘하며 사방의 모든 것을 끊어 나갔다. 파파팟－ 팟－! 둔중한 소리가 한 번 일어날 때마다 정확히 한 사람씩 쓰러졌다. 은사에 눈이 달린 듯, 은사가 다가가는 곳마다 피 한 방울이 튀었다. 완전한 무사의 감각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렇듯 정교한 출수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든하나, 여든둘……!" 천유성은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하나에서… 일백까지……. 그는 비릿한 혈향을 맡는 것이 역겨운 듯,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가운데 정확히 백이라는 숫자를 헤아렸다. 그러나 그의 수(數)는 끝이 나지 않았다. "하나가… 더 있다." 천유성은 허공에 뜬 상태였으며, 실로 음사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다가서는 기운일까? 그 기운은 그가 베어 버린 일백 살수들의 몸에서 일어났던 잔악하고 차가운 기운과는 또 다른 기운이었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섰다.' 보다 희미하고 또한 차가운 기세. 그것은 점점 다가서고 있었으며, 지극히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그에게만 있다. 바로… 그에게만……!" 천유성은 숨결을 끊었으며, 천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밀히 다가서던 기세는 그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급선회하기 시작했으며, 돌연 회오리바람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휘류류륭－ 휘류륭－! 무시무시한 선풍 가운데 백 장 안의 갈대가 모조리 뽑히어 차솟아 올랐다. 가공할 폭발음과 더불어 허공에 여든한 자루의 검영(劍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각도(角度)이고, 속도 또한 각기 다르다. 마치 여든한 자루의 검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나타나는 듯한 광경이 벌어지는데… 천유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마학 가운데 하나이다. 바로 팔십일로(八十一路) 파풍무흔(破風無痕)이다.' 천유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허점을 모조리 드러낸 채 계속 떨어져 내리기만 했다. 회오리바람이 보다 강렬해졌다. 천유성의 정지는 혈접혼과 싸울 때의 정지와는 또 다른 정지였다. 그 때에는 상대의 위치를 알고 정지했었으며, 지금은 전혀 달랐다. 그는 이정제동(以靜制動)의 파훼법을 사용하기 위해 신체 모든 부위의 움직임을 멈추어 버린 것이다. 한데 그의 정지는 회오리바람 가운데 몸을 감춘 사몽을 움찔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는 대처법이었다. '더 벨 데가 없다. 검이 나가지를 않는다.' 사몽은 한순간 아득함을 느꼈다. 허술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천유성의 몸뚱이가 점점 거대하게 느끼어지다니……. 그는 거인(巨人)이고 사몽 자신은 소인(小人)이 되어 버린 듯, 그는 심령상의 막대한 압박감을 느끼는 가운데 초식을 즉시 변화시켰다. 뇌성벽력이 터져 나오며 전보다 더한 소란이 발생한다. 호수의 물이 하늘 높이 끌리어졌으며, 나무란 나무가 모조리 뿌리째 뽑혀 버렸다. 뇌궁비섬폭(雷弓飛閃爆). 그것 또한 십대마학 가운데 한 가지였다. 한 번도 격파당하지 않은 초식이며, 사대마계가 영웅팔가를 굴복시키기 위해 천 년에 걸쳐 전승 발전시킨 초식이다. 그런데 그것 또한 도중에서 차단되고 말았다. 천유성은 느릿느릿 하나의 동작을 취하는데, 그 간단한 동작은 뇌궁비섬폭의 진로를 모조리 가로막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으으, 그것마저……!" 사몽은 처음으로 격한 숨소리를 내며 재차 초식을 변화시켰다. 잔마음혈류(殘魔陰血流)와 환상회선마해수(幻像廻旋魔解手)가 변초로 펼쳐졌으며, 뒤이어 사형묵룡결(死刑墨龍訣)이 시전되며 한 마리 검은 용의 그림자가 고공에서부터 대지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우우웅……! 거대한 악마의 용이 나타나는 그 찰나였다. 천유성은 처음으로 신형을 급히 틀었으며, 그의 입술 사이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몽, 너는 내게 지는 것이 아니다. 너는… 백도의 영웅들에게 지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일 지(指)를 퉁기어 내고 있었다. 매우 단순한 초식이다. 하나 그의 손가락 끝에서 발출이 되는 오리알 굵기의 지력은 검강(劍 )처럼 뭉쳐져서 묵룡의 머리 부위로 다가갔다. 바로 묵룡의 눈알 부위를 향해……. 소리보다 빠르기에,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너무나도 가공스러운 수법, 그것은 바로 천유성의 창안 검초였다. "어엇? 네… 네가 어찌 허점을 아느냐?" 사몽의 자지러지는 목소리가 들렸으며, 그의 몸뚱이가 팽이처럼 돌면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피해야 한다. 저것은 침묵(沈默)의 검도(劍道)이다.' 사몽은 처음으로 공포를 예감하며 수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늦은 후의 행동이었다. 치리리리릿－! 무형의 형의검강(形意劍 )은 허공으로 폭사되어 나가는 가운데, 사몽의 복부를 비스듬히 꿰뚫고 있었다. "내가… 일격에 지다니… 말… 말도 아니 된다!" 사몽은 신체의 고통보다 더한 정신적인 충격 가운데 침몰되기 시작했다. 그는 단 일 초에 패배해 버린 것이다. 초현 침묵검도(沈默劍道)에! 어찌 알겠는가? 백도의 십 인이 이 순간의 신화를 이룩하기 위해 살아 있는 비급 노릇을 했다는 것을! 쿵－! 사몽은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떨어져 내렸으며, 눈까풀을 벌벌 떨면서 천유성을 바라봤다. "……!" 이상한 의미의 눈빛이다. 그것은 분노도 참회도 아닌, 또 다른 뜻을 담고 있었다. 기이한 존경과 우정을… 검의 진정한 뜻을 아는 하나의 승부사에 대한 끝없는 찬미를……! "혈접혼을 부탁하네! 자네는… 그녀를 가질 자격이 있네." 사몽은 느릿느릿 말하는 가운데 피를 토하며 죽었다. 그가 죽는 그 찰나, 이십여 장 밖에서는 또 한 사람이 죽어 가고 있었다. 장광씨(長光氏), 그는 손으로 머리를 깨어 자신의 목숨을 마감하고 있었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며, 천유성이 공포스럽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주인, 사몽의 죽음을 외로운 죽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가차없이 자신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대는 뛰어난 승부사였네. 십대마학에 대해 익히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패자는 나였을지도 모르네!" 천유성은 천천히 어깨를 늘어뜨렸다. 피보라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승부의 진정한 미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값싼 피를 흘리지 않는다. 천유성은 야릇한 고독감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사몽과 같은 자와 결투할 기회가 별로 없다는 데에서 오는 미묘한 허탈감이리라. 그것도 아니라면, 실로 지루했던 한 인간의 살해에 대한 청부가 마무리지어졌다는 데에서 오는 허탈감일 것이고! "누구든 흙으로 돌아가지. 흙은 따뜻하다니… 편히 잠들게!" 그는 천천히 신형을 틀었으며, 터벅터벅 걸음을 내디뎠다. 일대에 모인 자들은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며 슬금슬금 피하는데, 그 중의 몇은 천유성을 존경하는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완벽한 검사. 이 날은 하나의 검이, 하나의 신화가 이루어진 날이라 할 수 있었다.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세력. 악마대본영! 그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한 마리 거룡(巨龍)이나 공룡(恐龍)의 움직임을 연상케 한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며,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무엇이고 간에 위장에 처박아 버린다. 또한 그 거대한 체구로 인해 움직임이 둔하기 마련이며, 어떠한 때에는 눈(眼)에서 귀(耳)로 가는 데에… 그리고 귀에서 뇌(腦)로 가는 데에 수십 일이 걸리기도 한다. 사몽(死夢)의 죽음! 그것이 아마대본영의 총사(總師)가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전해지기까지에는 꽤 오랜 시일이 걸렸다. 무려 칠 일, 어찌 생각한다고 하면 칠 일이라는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일곱 번의 새벽과 일곱 번의 아침, 그리고 일곱 회의 낮과 일곱 차례의 밤이 지난 후에야 사몽의 죽음은 마황야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사몽혼께서 청랑호(淸浪湖)에서 영웅총사를 발견하고 격돌하신 바, 실로 유감스럽게도 패배(敗北)해 살해당하셨음! 단 일 검(劍)에…….> 화려한 금박지에 깨끗이 정서(整書)가 된 서찰 한 장. 그것은 사신마계(死神魔界) 소속 순찰호법(巡察護法)에 의해 작성이 된 초안지(草案紙)를 사대마계 총관이 순찰당 소속의 서기(書記)에 의해 새롭게 작성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일단 순찰당주 회의에 보내어졌으며, 이틀에 걸친 평의회 가운데 그것은 초급비사(超急秘事)로 판명이 되어 그 즉시로 상부에 전해졌다. 또한 그것을 전해 받은 자는 너무도 위중한 사안인지라 갈팡질팡하지 못했으며, 마황야 전임 비위(譬衛)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온 직후에야 대갈일성이 터져 나왔다. － 이… 이러한 긴급 전언을 이제야 전하다니……! 하여간 사몽의 죽음에 대한 것은 길고도 복잡한 경로를 통한 이후에야, 마황야 곁의 한 인물에게 전하여졌다. 천마대승상(天魔大丞相) 겸임, 마계원로원(魔界元老院) 대원로(大元老) 겸임, 일백팔(一百八) 군마장로회(群魔長老會) 제일장로(第一長老). 그는 서찰을 받고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동요하였으며, 새 주전자의 차를 비워 가며 고민을 하다가 하나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 새벽(黎明), 화원(花園)에서… 이 일을 보고해야만 한다. 새벽이라는 시간과 화원이라는 장소가 정해진 이유는 이러하다. 사대마계의 정복자 마황야가 하루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상태로 활동하는 시각이 새벽이기 때문이며… 이 가을, 웃음을 터뜨리는 장소가 화원이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새벽의 화원이 아니라… 다른 시각, 다른 장소에서 그러한 소식이 전달되게 된다면… 아마도 그 소식을 전하게 되는 자는 마황야 손 아래에서 피곤죽이 되어 버리게 될 것이다. 천마대승상의 그러한 결단(?)으로 인해 서찰이 마황야에게 전해지는 것은 다시 이틀 늦어졌다. 왜냐하면, 서찰이 천마대승상에게 접수가 된 시각은 황혼녘이었으며… 그 다음 날 새벽에는 천마대승상이 마황야를 볼 수 없게 되었기에, 그 다음 날 새벽에야 전달이 된 것이다. 마황야는 구주팔황(九州八荒)의 정사(正邪) 중간(中間) 무림인사들과 접견을 하느라 지극히 바쁜 상태였다. 그 날 새벽만 하더라도, 마황야는 일곱 회의 회견 선약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여간 사몽의 죽음에 대한 건(件)은 오랜 시간 후에야 마황야에게로 전달이 되게 된 셈이었다. 일곱 번의 낮과 일곱 번의 밤. 그 짧다면 짧은 시간이 강호천하에 영향을 끼친 바는 실로 지대(至大)하다. 만에 하나, 마황야가 그 일에 대해 긴급히 알게 되었더라면… 강호계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사몽의 죽음. 어쩌면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사(武士)란 그 날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확신하기 힘든 업(業)을 지닌 자들이기에……. 풀잎의 이슬처럼 지내다가 떠오르는 태양의 빛에 스르르 증발이 되는 이슬 마냥 덧없이 사라지는 목숨들이기에……. 한 인물의 죽음이 그리 큰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몽의 죽음이 시사하는 바는 실로 크다. 단 일 검(劍)에 죽었기에… 오직 일 검에……! 너무나도 정확한 일검(劍) 일식(式)에 죽었다는 것이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초저녁인지라 안개가 자욱하며, 그 빛은 이 세상의 어떠한 비단보다도 보드라운 연보라색이었다. 이슬을 떨어뜨리고 있는 천자만홍(千紫萬紅)과 떠오르는 햇살 가운데로 피어 오르는 기화요초들. 세상에서 꽃이라 불리는 종자는 모조리 모인 듯하다. 또한 사계(四季)에 걸쳐 피고 지는 모든 꽃이 한꺼번에 피어나고 있었다. 동백(冬柏)에서… 매화(梅花), 이화(梨花), 앵화(櫻花), 해당화(海棠花), 수선화(水仙花), 심정화(沈丁花), 금작화(金雀花), 작약(芍藥), 옥잠화(玉簪花), 장미(薔薇), 금잔화(金盞花), 백일홍(百日紅), 자양화(紫陽花), 상사화(相思花), 향일계(해바라기), 국화(菊花), 자오련(子午蓮) 등……. 그리고 두 사람. 하나는 단아한 가운데 전도(剪刀)로써 장미 꽃송이를 잘라 바구니에 담고 있었으며, 먼 뒤쪽에는 노인 하나가 오체투지하고 있었다. "황야(皇爺)! 혈접혼은 형편없이 당했으며, 믿어 마지않았던 사몽마저 쓰러졌습니다!" "으음, 사몽마저……!" 장미 꽃송이를 꽃가위로 잘라 내는 자, 그는 입술이 얄팍하며 어딘지 모르게 고독한 인상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그의 몸 주위에는 강시무사( 屍武士)들이 득실거리고 있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는 무수한 살수들이 은잠해 있기 마련이다. 그에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의 등을 보고 이야기해야만 했다. 마도를 정복한 악마의 제왕, 마황야의 손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죽을 가능성이 있다고는 여겼었지." 실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하들에게 자신의 동요된 모습을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의 휘하로 삼십삼만여 무사들이 모여들지 않았을 것이다. 사몽, 그는 마황야가 양아들처럼 여기던 자였다. 그가 쓰러졌다는 것은 마황야가 이제껏 잃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거대한 패배라고 할 수 있었다. "몇 초에 쓰러졌는가? 적어도 사흘은 버텼겠지?" "아닙니다." "그럼… 이 주야(晝夜)?" "아닙니다." "그럼?" "사몽 왕야는 단 일 검(劍)에 쓰러졌습니다!" 일 검……. 그 말과 더불어 마황야의 손에서 꽃가위가 미끄러졌다. "일… 일 검이라고? 사몽이… 단 일 검에 쓰러졌단 말인가?" "목격한 인물이 많습니다!" "사… 사몽이 일 검에 쓰러지다니……!" 마황야의 눈빛이 격하게 떨린다. 그는 마도의 절대자가 된 이후, 최초로 진정으로 격동하고 있었다. 휘청……! 마황야는 처음으로 하수들이 있는 데에서 휘청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군림(君臨)의 자리에 앉은 이후, 하수들에게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놈이 일 검에 죽다니……!' 마황야는 사몽의 죽음보다도 그가 단 일 검에 죽었다는 것을 경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마… 놈이 신(神)이란 말인가?" 꽃이 아침 햇살에 핏빛의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마황야는 혈채(血彩)의 꽃을 좋아하는지라 화원에 수많은 꽃송이가 피어 있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핏빛의 단일화종(單一花種)이 무한히 심기어져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언제나 뒷모습만 보이고, 짙고 두터운 장막 뒤에 숨어서 전 마도를 원격조종하고 있는 마도의 절대자 마황야.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허공을 바라봤다. 깨어나는 아침이기 때문일까? 고공(高空)은 푸르게 투명해지고 있으며, 퍼부어지는 햇살은 투명한 작살처럼 그의 전신을 향해 파고들었다. '대업을 이행하는 데 나의 모든 것을 바쳤다. 심지어 나의 청년 시절과 장년 시절마저 무림에 바쳤다. 그리고도 마도의 구 성을 장악했을 정도이며, 휘하들의 마음은 아직도 완전하게 장악해 버리지 못한 상태이다.' 그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킨다. 사몽이 단 일 검에 죽었다는 것은 그의 모든 기반을 허물어뜨릴 만한 결정적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당세무림에는 그의 경쟁자가 될 만한 거호(巨豪)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마황야는 세력을 일으키기 이전에 자신의 경쟁자가 될 인물들을 하나하나 제거한 바가 있다. '놈의 존재가 일약 나의 존재보다도 거대한 존재로 부상해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적어도 무공에 있어서는 신이다. 마도든, 백도든, 그의 적수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마황야는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데 약관의 청년검사 하나가 그의 일에 정면으로 방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대마계의 무사들은 그를 두려워하는 것보다도, 영웅무정 일검향이라는 존재를 두려워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천년세가의 저력이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준동하는 것을 견제한 바가 있다.' 츠으으－ 츠으으－! 그의 전신 모공에서는 차디찬 한무(寒霧)가 뿜어져 나왔다. 대지를 동토(凍土)로 얼려 버릴 듯 차가운 기운. 그 기운은 쉬지도 않고 뿜어져 나왔으며, 그가 머물러 있는 곳 일대는 세 치 두께의 서리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들이 준동하지 못하리라 확신을 했었다. 적어도 백 년 안에는 그들이 깨어나지 못하리라 여겼었다. 한데 거대한 방해를 받게 되다니… 그것도 오직 하나의 인물에 의해……!' 마황야의 눈빛은 점점 새빨개졌다. 투명한 홍옥으로 깎아 만든 두 개의 보석을 눈구덩이 속에 박아 넣은 듯이 빛을 강하게 발산시키는 악마의 눈. 그 눈은 점점 더 가공할 마광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일순 그는 단정하게 호흡을 회복하며 이렇게 내뱉었다. "제비 한 마리로 인해 봄이 오는 것은 아니지. 훗훗… 사몽의 죽음은 성대한 장례와 더불어 대지 깊이 묻어 버려라!" "예에!" 천마대승상은 그제서야 어느 정도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황야의 뒷모습을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거인(巨人)은 거인이다.' 그는 마황야의 가공할 의지에 새삼 압도당하는 눈치였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 진행이 되었다. 천마대승상은 사몽의 죽음과 그의 처리 문제를 세세히 이야기했으며, 영웅무정에 대한 추적대의 평성에 대한 이야기를 세부 사항까지 일일이 이야기했다. 아침이 완전히 깨어나는 시각, 마황야는 호미 하나를 찾아 들며 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는 굵은 흙을 잘게 바수어 식물의 뿌리가 잘 자랄 수 있게 만들었으며, 가끔 가다가는 이랑을 파서 물이 잘 빠져 나가게 했다. 그는 호미 끝을 땅에 가볍게 찔러 넣으며 힐끗 고개를 쳐들었다. "낙양(洛陽)의 일에는 지장이 없겠지?" 천년고도(千年古都) 낙양성. 수십만 호가 모여 사는 천하의 대도읍이다. 한데 악마대본영의 입김이 그 곳에마저 미치고 있단 말인가? "진행이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낙양을 중원총타(中原總舵)로 새롭게 가꾸는 일은 방해받지 않고 무사히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천마대승상은 전에 비할 수 없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사실 거대한 세력을 이끌다 보면 패배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행하는 일이 많고 싸워야 하는 일이 많으니까, 열 번 싸울 경우 세 번 패배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세 번 패했다고 해서 거대한 세력이 약화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천마대승상의 미소는 그러한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낙양… 그 곳에서만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 "예." "폭풍혼… 그는 사몽보다도 뛰어난 고수자(高手者)이며, 또한 본좌에 버금가는 병법가(兵法家)이다." "예." "더욱이 그의 휘하에는 진정 강한 무사들이 오천(五千)이나 있다. 그들마저 실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에!" 천마대승상의 대답 소리가 길어질 때. "울지 않는 새는(不鳴鳥) 어찌하는가?" 마황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태양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울지 않는 새라면?" 천마대승상은 고개를 조심조심 쳐들었다. "그렇다. 태양혼… 그 놈은 가장 멋진 승부사의 기질을 갖고 있는 놈이다. 그래서 나는 그 놈의 장래에 가장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분은… 여전히 그대로이십니다." "여전히 그대로라면?" "폐인(廢人)이십니다. 술(酒)과 여자와, 도박에 빠진 상태입니다. 그분이 회생하리라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천마대승상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는 태양혼에 대해 야릇한 배반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렸을 때의 태양혼을 가르친 사람이 바로 천마대승상이다. 그는 태양혼의 자질과 능력을 잘 알고 있는데, 태양혼은 그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좌절감을 느끼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한데, 마황야의 반응은 의외적이었다. "대승상, 그대 또한 울지 않는 새가 영원히 침묵한다고 믿는가?" "예?" "검문혼(劍文魂), 그 녀석이 좌절한 상태로 끝난다고 믿느냐는 말이네." "그… 그렇습니다. 속하 뿐이 아니라 원로회의 모든 원로들이 그러한 쪽으로 의견을 모은 지 오래입니다." 천마대승상의 대답이 그러할 때였다. "역시 놈은 뛰어난 놈이네. 대승상마저 속이다니……." "예? 속이다니요?" "놈은… 가장 속깊은 놈이네. 어쩌면 폭풍혼을 물리치고 서열 이 위로 올라설 작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네. 하여간 대승상마저 놈이 완전한 폐인이 되었다고 여길 정도라니… 으음, 이상하게도 놈이 두려워지는군." "어… 어인 말씀인지요?" "승부에 목숨을 건 사람이라면 누구든 죽음을 생각하지. 그리고 누가 자신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지.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백도의 어떠한 암살자(暗殺者)가 은잠해 들어와서 잠자고 있는 본좌의 염통에 구멍을 내는 것으로 나의 목숨이 마감되리라 예측했었네!" "아……!" "하나, 지금은 다르군. 나를 죽일 자는 특정치 않은 암살자가 아니라, 천하의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군. 일검향이라는 자와 검문혼… 바로 그 둘 가운데 어떠한 하나가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 마황야는 그렇게 말하며 눈길을 먼 산에 걸었다. 산 그림자는 구름에 휘어 감겨 있었다. "본좌도 늙었나 보군. 선혈(鮮血)이 보기 싫고, 문득문득 죽음이 느끼어지다니……."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는 지극히 작아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第10章 난세(亂世)의 야망 사대마계의 사대왕야 가운데 하나인 혈접혼은 총타(總舵)로 돌아와서는 그녀답지 않은 기행을 하고 있었다. 술타작에 주사라니……? 주담자를 쉬지 않고 비우고, 계집답지 않게 걸직한 욕설을 쉬지 않고 토해 내고, 그녀는 반 미치광이가 되어 주호만 작살내면서 밤을 맞이했다. "죽일 테야, 내 손으로!" 혈접혼은 한 남자의 영상에 완전히 휘어 감겨 버렸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하더라도 그 남자의 영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야만스럽고 무례했던 한 남자, 천유성. 그는 어느 틈엔가 그녀의 신으로 변화해 버리는 것이다. "죽일 테다. 진짜로 죽여 버릴 테다. 죽여 버릴 테다. 그 자를 내 손으로……!" 맹세를 거듭하는 혈접혼, 그녀는 최근 들어 한숨과 눈물이 많은 여자로 변화되고 있었다. 언제나 깔끔한 복식을 유지하고 있었던 혈접혼이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옷차림이 창녀(娼女)처럼 엉망이었다. 운발(雲髮)로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은 형편없이 흐트러져 버렸으며, 머리카락을 빗지도 않은지라 땟국물이 주룩주룩 끼일 정도였다. 여장(女裝)은 아예 포기했고, 꽤나 커다란 남자의 무복(武服)을 걸친 채 온갖 종류의 슬을 묻히고 다녔다. 어디 그뿐이랴? 그녀의 탐스럽고 포동포동한 젖가슴에 무슨 죄악의 씨라도 심어져 있는 듯이, 허구한 날 젖가슴을 거친 베수건으로 닦아 냈으며… 어떤 때에는 반 미치광이가 되어서 하늘을 보며 시간이 가는 것을 까맣게 망각해 버렸다.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밤마다. "아아아……!" 그녀의 표정은 아주 기이하게 변화되었으며, 그녀의 눈빛은 꿈에 취한 소녀의 눈빛으로 변화되어 갔다. － 너는 나의 계집이야! 거칠고 억센 남자의 목소리가 쉬지 않고 귓전을 때린다. 마계 사람들에게는 없는 풋풋한 인간미(人間美)가 있던 남자. 그와의 만남은 혈접혼의 모든 것을 깡그리 무너뜨려 버렸다. 사몽혼은 죽었으며, 혈접혼은 술에 찌든 폐인으로 화하기 시작하였으며, 태양혼은 두려움을 느끼는지 어디론가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폭풍혼의 지위만이 상대적으로 신장이 되었으며, 영웅무정 일검향이라는 존재는 공포의 대상을 넘어서서 사대마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기이한 존재로 변화되었다. 최단시일 안에 자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떨친 자, 천유성! 그가 쓰러지지 않는 한, 사대마계의 무림 정복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날 밤이었다. 마황야의 선택보다도 무자비한 맹세가 이루어진 시각은……. 월하(月下). 오래 전부터 하나의 인영이 머물러 있다. 그의 등 뒤로는 긴 그림자가 나타나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사악하고 잔혹해 보이는 차디찬 두 눈이다. 석고상처럼 경직된 얼굴 가운데에는 느낌조차 정지되어 있는 두 눈이 박히어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경직된 채 머물러 있었다. "언제고 해야 한다 여겼으되… 기회는 적어도 십 년 안에는 없으리라 여겼었다. 그래서 폐인처럼 지내며 기회를 엿보았었다. 한데… 그 녀석으로 인해 기회가 나타났다." 이글이글 타오른다기보다 차디차게 얼어붙은 눈빛이다. 냉막하며 건조한 느낌을 주는 자, 그의 입술 사이에서 풀잎이 한 장 씹히고 있었다. "놈은 강하고 거대(巨大)하나, 욕심이 없다. 그러하기에… 유성, 그 놈은 절대자(絶對者)가 되지 못한다. 피를 겁내기에… 훗훗……!" 히죽거리는 자, 그는 바로 마계의 신비인 태양혼이었다. "마황야는 그의 적이 되지 못한다. 그는 잔혹하고 독랄한 처세로 자신의 아성(牙城)을 이룩하기는 했으되 자신의 지위에 집착을 하고 있으며, 마도거목들을 경계하고 있다. 그로 인해, 전 마도(魔道)의 결속은… 겉보기로만 이루어지지, 내실이 완벽해지지는 못하고 있다." 사악한 표정을 짓는 태양혼, 그는 실로 오랜만에 허리에서 검을 끌러 내리고 있었다. 녹슬었다고 여겨지는 태양마검(太陽魔劍). 태양마검은 하나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그것은 바로 검의 주인이 바로 태양마계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태양혼은 검집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사악한 눈빛을 던졌다. "마황야는… 영웅팔가를 정복하고 사대마계를 정복할 작정을 하고, 각 세력에 자신의 심복을 들여보냈다. 또한 십 년 전, 바로 이 날… 그가 베어 버린 인물 가운데 나의 부모(父母)가 끼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그의 휘하에서 나의 저력을 길렀다." 번쩍－! 태양혼의 눈빛이 차츰차츰 달아올랐다. 극강(極强)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이다. 그것이야말로 아무도 알지 못하던 태양혼의 진실된 눈빛이리라. "사대마계의 세력은 기나긴 싸움을 하는 가운데, 와해되기 시작했다. 물론 최후에 가서는 승리를 거둘 것이나, 상처가 많은 영광일 뿐이다. 하나, 나의 사적인 세력은 고스란히 보존이 되어 있다. 일만오천(一萬五千)의 암살군단(暗殺軍團)! 훗훗… 제반마공에 능통하며, 역용, 잠입에 절대자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고스란히 힘을 보유하고 있다." 태양혼은 천천히 눈길을 쳐들었다. 사악한 가운데 고독감이 느끼어지는 눈빛이다. "그들은…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죽어야 할 마도의 위선자(僞善者)들이 모조리 죽어 버리는 것뿐이다. 오직 한 시진(時辰)이면 족하다. 한 시진이면 썩어 빠진 마도계의 노친네들이 모조리 제거될 것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악마의 눈, 그 눈에 달 그림자가 선명히 박히어 들었다. 안개 속의 맹세, 그것은 정파는 물론이거니와 마도계마저도 폭풍 속에 몰아넣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남자(男子)인 이상,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실패할 수도 있으되, 후회는 하지 않겠다. 훗훗… 도전한 자만이 영광을 취할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그는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느릿느릿 그어지는 손 그림자 가운데. 우우웅……! 그의 애검은 무시무시한 살명(殺鳴)을 토하며 그의 장중에서 한 마리 섬룡(閃龍)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십 장에 달하는 검기가 번갯불처럼 토해지는 가운데, 안개를 적시는 달빛이 쩌억 갈라졌다. 촤르르르르륵－! 무시무시한 악마 검세가 사방으로 폭사되어 나가는 가운데, 거목 수십 그루가 일제히 베어졌다. 지진이 일어나는 둔한 굉음 가운데, 백여 장 방원 이내가 검세에 휘말려 산산이 바수어졌다. 만폭비천열화류(萬爆飛天熱火流), 천만영겁등천비(天萬永劫騰天飛), 만사표향화허잠(萬死飄香化虛潛), 구천팔황벽력궁(九天八荒霹靂弓). 콰아아－ 콰아아－! 검세가 쉬지 않고 시전이 되며 허공으로 회오리바람이 치솟아 올랐다. 태양혼, 그는 마황야가 상상하는 것보다 두 배 강한 자였다. 그의 내공은 쓰면 쓸수록 고강해지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언제 나타났을까? 도합 팔 인이 안개를 타고 훌훌 날아들었다. 태양혼 앞에 머물면서 시립하는 자들은 사대마계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며, 마황야가 심복으로 여기는 자들이었다. 하나 그들 팔 인은 마황야보다 젊고 포악하며, 보다 사악한 태양혼에게 충성을 맹세한 지 오래였다. "모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마황 휘하는 격동 중입니다. 영웅무정 일검향의 지칠 줄 모르는 파괴를 막기 위해 마황의 친위무사(親衛武士)들이 외부로 흘러 나갔으며, 그들 가운데 뛰어난 자들이 속속 쓰러졌습니다. 또한 마황야가 가장 믿던 사몽의 죽음으로 인해, 마황의 호위 조직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리게 되었습니다. 실시한다면 오 성(成)의 승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황은 금강불괴(金剛不壞)인지라, 어떠한 암살술로도 그를 베 지 못하리라 여깁니다.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 그는 악마천사의 친위세력 가운데 소속해 있는 자였다. 그는 이 년 전에 태양혼을 만났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태양혼의 능력을 알아차리고 태양혼의 사적인 심복이 되기를 맹세했다. 태양혼은 그를 통해 마황야 주변의 세력에 대해 세세한 것을 알아 낼 수 있었으며, 그를 기반으로 가공할 계획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마황야의 마음에 허점이 생긴다면… 자신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의 마음에 허점이 생기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물, 그는 구대승상(九大丞相) 가운데 하나가 되는 자였다. 그는 제사위 서열에 있는 자인데, 제일위로 오르기 위해 태양혼을 주인으로 섬길 결심을 한 것이다. "마황야는 두 개의 비밀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가실 노련하기 이를 데 없는 마황야를 배반하고, 젊은 태양혼을 섬긴다는 것은 대단한 도박이다. 이길 확률보다 질 확률이 큰 도박. 그러나 그는 태양혼을 선택했다. 그가 행한 일은 마황야의 비밀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그 중 하나는, 사대마계의 제일적(第一敵)인 영웅무정 일검향을 암살하는 일입니다." "……!" "그것은 차근차근 진행이 되었으며, 열흘 안에 시행되리라 여겨집니다. 그 계획대로 된다면, 마황야는 영웅팔가의 대총사를 제거하게 될 것입니다!" "흠, 또 하나의 계획은?" "그것은 암호명, 천마화(天魔花)라는 것입니다." "천마화?" "자세한 것은… 마황야 한 사람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마력을 지닌 하나의 존재를 탄생시키는 계획으로, 천마화가 탄생한다면 마황야는 실로 엄청난 배후를 갖게 된다 할 수 있습니다." "으음……!" "천마화는 나타나서는 아니 되는 존재입니다. 천마화가 나타난다면… 아무도 마황야를 꺾지 못합니다." "천마화라는 존재가 그리도 대단한 존재라면, 마황야가 어이해 그것을 아직까지 이루지 않았는가?" "세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되, 마황야에게 내면적인 번뇌가 있다고 사려되는 바입니다." "번뇌(煩惱)?" 태양혼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아마도… 천마화로 화신할 대상이 마황야와 사적인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 "다시 말해, 누구든 천마화가 되면… 인성(人性)을 잃게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마황야는 번뇌를 하는 듯합니다." 밀고자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마황야답지 않군. 번뇌를 하다니… 번뇌는 아편이거늘……." 태양혼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깊은 밤 가운데, 무시무시한 음모는 무르익고 있었다. － 구대승상들이 모두 모이고, 마후(魔后) 마군(魔君)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를 노려야 합니다. － 저희들이 이끌고 있는 세력은 만반의 준비를 모조리 갖추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결단의 순간뿐입니다. 결단이 내려진다면, 패배할지라도 피바람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 혈접혼을 끌어들인다면 승산이 배가됩니다. － 어떻게 하든 혈접혼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혈접혼을 끌어들인다면… 기환마계의 고수들을 수족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태양혼은 여전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달은 산마루까지 떨어져 내렸다. 태양혼은 팔짱을 꽈악 낀 채 입술을 가늘게 떼었다. "기다려야 한다. 조금 더……!" "……!" "……!" "살인(殺人) 명단(名單)에 오른 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들이 방심한 채 축배(祝杯)의 잔(盞)을 들 날이 있으리라.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마도의 진정한 역사(歷史)가 이루어지리라!" 너무도 잔혹한 음성이다. "그 날은… 악마(惡魔)의 날(日)이라 불리리라. 푸핫핫……!" 밤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쳤다. 태양혼과 그의 측근 인사들의 몸뚱이는 꾸역꾸역 몰려드는 안개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대도(大都) 낙양(洛陽). 그 곳은 중원(中原)의 중심지라고 말할 수가 있다. 주(周)가 생겨난 곳이 바로 낙양이다. 또한 전국(戰國) 시절에 그 곳은 낙양이라고 이름지어졌다. 진시황(秦始皇)은 자신의 친부(親父)인 여불위(呂不葦)를 문신후(文信侯)로 삼아 낙양 일대의 십만 호를 다스리게 하였다. 한(漢)의 고조(高祖)는 수도로서 낙양을 삼았으며, 그 이후 낙양성은 고대 문화의 중심지 노릇을 해 왔다.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거리 가득 사농공상(士農工商), 온갖 종류의 인간 군상들이 오고 가는 곳이 낙양성이다. 성곽은 수십 차례에 걸쳐 증축 개축이 되었는 바, 그 길이는 정확하게 육십구 리(里)와 삼백이십 보(步)에 달하고 있다. 황도(皇都)가 연경(燕京)이 된 이후, 정치의 중심지는 연경이 되었으며… 문화의 중심지는 여전히 낙양 일대라 말할 수가 있다. 어디 그뿐이랴? 신용(信用)을 목숨보다도 귀중하게 여기는 화상(華商)들은 대대로 낙양성을 거래의 중심지로 삼아 왔다. 낙양성 안에 본점(本店)을 두고 있는 은장(銀莊)이 부지기수이며, 조금 거대하다고 소문난 은장이라면 적어도 하나의 분점 정도를 낙양성 안에 만들어 두고 있다. 드넓은 화북평원의 온갖 농산물이 모여들며, 성 북쪽에는 광활하며 힘찬 중원의 젖줄 황하(黃河)가 도도하게 흐르는 가운데 거대한 선박이 내리는 선창이 마련되어 있다. 낮이고 밤이고 시끄러운 고도, 낙양성. 그 곳은 역사적인 배경과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 노릇을 톡톡히 하도록 배려되었다. 황금(黃金)이 풍성하면 나비(蝶)와 꽃(花)이 꼬이기 마련.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주루와 쾌활림(快活林)은 태반이 낙양성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가 있다. 그 중 하나인 야환궁(夜歡宮). 낙양성의 남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아주 거대한 규모의 쾌활림이다. 쾌활림이란 온갖 종류의 유락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거대한 유곽이며 도박장이다. － 낙양성(洛陽城) 북쪽에는 망산(邙山)이 유명하며, 낙양성 남쪽에는 야환궁이 유명하다. 죽은 자라면 북망산(北邙山)에 가고, 산 자라면 야환궁에 가서 주색(酒色)에 묻혀라! 야환궁은 북망산과 비교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단 일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야환궁은 강호의 여타한 쾌활림을 제치고 천하제일의 쾌활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야환궁의 주인되는 자가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거래에서 신용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 화대(花代)를 아까워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쾌활림에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인의 미색(美色)이 화대의 가격에 어긋나기 때문에 아까워하는 법이다. － 도박에서 돈을 잃는 것을 애석해 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사술에 농락당할까 봐 조급해 하는 것이다. － 은자(銀子)를 쓰지 않으려 하는 인간은 없다. 인간이 은자를 아끼고 쓰지 않는 존재들이었더라면, 아예 은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일개 쾌활림 주인의 철학치고는 대단한 상업 철학이다. 그러나 야환궁을 이룩한 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될 것이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 가운데서 가장 황금이 많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있다. 관부(官府)마저 좌지우지할 정도로 거대한 부를 이룩하였으며, 말 한 마디로 천하의 은장 천여 개를 열고 닫게 하며, 차 한 잔 마시는 가운데 고민한 결과 남칠성 북육성의 농산품의 가격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자. 천하제일상(天下第一商)이자 강호제일부호(江湖第一富豪). 그는 바로 십만대상(十萬大商)이었다. 봄이라면 매화(梅花)가 가득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희고 붉은 매화꽃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무성한 녹음(綠陰)이 대신하고 있다. 다만 숲 언저리에 난초원(蘭草園)이 형성이 되어 있어, 그 어떠한 꽃보다도 아름다운 꽃이 소담스럽게 자라나고 있었다. 난초를 두고 은유한 아름다움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사실 난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난초의 꽃은 화려하고 요염하다. 다만 그것이 귀하기에 신비스럽게 표현이 되고 있을 뿐이다. 야환궁은 난초원으로 유명하였으며, 회랑(回廊)이 기나긴 백와본전(白瓦本殿)까지 가는 정원의 풍경은 자금성(紫禁城)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소문이 나고 있었다. 정원을 가꾸는 데 들인 은자가 무려 이백만 관(貫)이다. 사람들은 십만대상을 두고 광인이라고 표현하였으나, 정원이 꾸며지고 나서 반년도 되지 않아 그는 상술(商術)의 천재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그는 반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이 정원에 쏟아 부은 은자의 십 배를 거둬들인 것이다. 십만대상의 상술은 대부분이 그러했다. 그는 천이백여 종의 투자를 하였으며, 그 가운데 팔백 가지 이상에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또한 그는 하나의 업종에서 많은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았으며, 지극히 작은 이익을 남기고자 했다. 결과, 그의 기업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번성하게 되었으며… 중원제일의 상인이라는 소리를 일약 듣게 되었다. 하나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세칭 십팔상왕(十八商王)이라 불리는 열여덟 명의 동업자(同業者)들에게 서찰을 통해 명령을 내렸으며… 그들과 약속한 비밀 신호에 따라 연락을 할 뿐이지, 휘하인들 앞에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나는 가난한 사람이야. 내세울 것이 없어. 그러하기에 자네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니, 조급하게 여기지 말게! 게다가 나는 목이 귀함을 아는 놈이지. 훗훗… 지금 나서다가는 당장에 목을 잃게 되지. 물론 그것이 진정한 이유는 아니야. 기실 나는 빚이 많은 사람이라네. 나는 한 명의 귀인(貴人)에게 신세를 많이 졌네. 그에게 빚을 갚기 전에는 절대로 나서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 하게! 지난 겨울, 십만대상은 두터운 휘장 뒤에서 그러한 말을 한 바 있다. 그 날이 그가 십팔상왕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한 최후의 날이었다. 그 날 이후,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그 해 겨울부터 십만대상이 경영하고 있는 상인 조직, 중원대상가(中原大商家)로 무수한 불청객들이 찾아들었다. 은밀히 나타난 자들, 일반 상인들과는 질이 다른 자들로서 품안에 적어도 세 가지 종류의 살인 도구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또한 국법 따위는 간단히 어기는 자들이며, 인간의 목숨 정도는 너무나도 간단히 끝내 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한 자들. 그들은 온갖 방법을 다해 중원대상가 안으로 잠입해 들어왔으며, 어느 날부터인가 그들은 중원대상가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야환궁 일대를 완전히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십만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머물러 있으리라 예상되는 장소에 살수들을 대거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거상들을 납치하여 무수한 고문을 가하였으며, 비가 억수로 퍼붓던 유월 어느 날부터 그들은 중원대상가의 진짜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날도 마찬가지였다. 야환궁을 찾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으나, 야환궁은 일만오천 무사들에 의해 완전히 포위가 된 상태였다. 온갖 종류의 신분으로 위장한 자들, 그들은 야환십이루(夜歡十二樓)라 불리우는 열두 개의 누각을 점령하였으며… 중원대상가의 거상들은 그 날부터 하루 온종일 감시자들과 더불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십만대상은 절대로 잡히지 않았다. 무수한 절정고수들이 그를 찾느라 혈안이 되었으나, 그는 거처를 발각당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자신의 거처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第11章 대상인(大商人) 표화루( 花樓)라는 주루이다. 비가 세차게 퍼부어지고 있을 때, 주루의 이층 구석진 자리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워졌으며… 그 때문인지 구석진 자리에 머물러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멀리서 볼 경우 잘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둘 다 방립을 썼는데, 한 사람은 젊었고 한 사람은 중년인이었다. 텅 빈 주호가 두 개. 그리고 하나는 막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에 술을 채운 구리 술잔을 드는 사람은 약관의 청년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선해 보이는 인상인데, 그에게는 남이 갖고 있지 못한 세 가지의 여유가 있었다. 눈빛이 그러하고, 숨결이 그러하다. 손의 움직임을 비롯한 신체의 전체적인 움직임이 대단한 여유를 타인에게 느끼게 했다. 반면 그의 맞은편 자리에 있는 상인풍(商人風)의 노인은 정반대 되는 조급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초조한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으며, 근처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 좌불안석이었다. "예감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 자들은 중원대상가를 구 할 이상 정복하였으며, 며칠 안으로 중원대상가의 모든 것이 그들에게 장악될 듯 여겨집니다. 그 자들의 우두머리는 폭풍혼이라는 자입니다. 이름은 사마위승(司馬威昇)! 그는 마도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받는 일로 두 가지 일을 맡았는데… 그 중 하나가 구파일방을 침묵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가 바로 상맥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합니다. 그 두 가지 사실을 알아 내는 데 꽤나 애를 먹었습니다." 그는 전어로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은 그가 입술을 지극히 경미하게 달싹거리는 것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고검랑(孤劍郞). 이제까지 천하 대세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던 풍방(風幇)의 우두머리이다. 그에게 술을 사 주는 사람은 바로 천유성이었다. 당세에 있어 그가 아닌 어떠한 인물이 그와 같은 여유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천유성 특유의 끈기와 여유는 천년세가의 종손이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낭인주 시절에 그러한 끈기와 여유를 익힐 수 있었다. "얼만가? 그들의 숫자는?" "일만오천입니다. 며칠 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오리라 예측되고 있습니다." "많군." "그렇습니다." "상인들을 상대로 그렇게 많은 무사가 나타난다는 것이 모를 일이군." "십만대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머물러 있으리라 예측되는 장소는 모조리 수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발견한 사람이 없습니다." "……." 천유성은 고요한 자세로 술을 마셨다. 고검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움찔거리는 자세를 취했다. "속하가 이끄는 세력 또한 십만대상의 종적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십팔상왕이라 불리는 측근들과의 연락 또한 끊어 버리고 있습니다!" "흠……!" "십만대상을 잡는 데 무수한 무사들이 동원되었으며, 모든 종류의 추적 방법이 시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고검랑은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을 전했다. 그는 추적술의 대가이다. 그가 찾고자 한다면 어떠한 사람이든 찾아 낼 수가 있다. 하지만 십만대상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유령 인간처럼 머물러 있었다. "폭풍혼은?" 천유성은 또 한 잔의 술을 비웠다. "그 자는 야환십이루에 본영(本營)을 차리고 있습니다." "고약한 녀석이군. 숭산에서 그냥 놓아 둔 것이 꺼림칙했었는데, 이 곳에서 놈을 다시 보게 되다니……." "숭산에서 보셨다고요?" "그렇다네. 당시 위대한 땡추 한 분이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나를 봐야 했을 걸세!" 천유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고검랑의 시선으로는 받아 내지 못할 힘이 그 눈빛에 담기어 있었다. 물론 그 가공스러운 한광은 찰나적으로 사라졌으나, 고검랑은 그 눈빛에서 천유성의 내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땡추중이라니요?" "마른 똥막대기!" 천유성은 농담하듯 말을 내던진 다음, 술잔을 내려놓았다. "마… 마른 똥막대기요? 대체 그게 무엇입니까?" 고검랑은 콧등을 찡긋 주름지으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살수의 업에 충실한 사람이고, 그 노친네는 승려의 업에 충실하지. 그리고 수수께끼의 인물 십만대상은 자신의 업에 충실한 사람일 것이네. 어딘지 모르게 그가 마음에 드는군. 아마도… 내가 무사가 아니라 상인이었다면, 그러한 상인이 되었을 걸세. 그를 만나는 대로 술을 한 잔 사 주어야겠네. 그로 인해 악마대본영의 전초세력이 꽤나 고생하고 있으니… 훗훗… 그는 중원무림계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그는 찾기 힘든 자입니다. 한데 그를 단시일 안에 찾아 낼 비장의 방법이라도 계시단 말씀이십니까?" "악마대본영 쪽에서 그를 못 찾는 것은…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이지, 십만대상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네." "예?" "폭풍혼은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네. 그래서 그를 찾지 못하는 것이네." "그가 모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상인(商人)이라는 것!" 꽤나 단순한 말이었다. 십만대상이 상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만천하에 단 한 사람도 없다. 한데 폭풍혼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니…….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간직한 채 밤을 향해 치달아 가던 장하(長夏)의 낙양은 돌연 풍운에 휘말리게 되었다. 하나의 인물로 인해, 오직 반시진 만에 낙양성은 풍운에 휘말리게 되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파란을 야기하기 시작한 자. 그는 거대한 방문(榜文) 하나를 화운객잔(華雲客棧)의 처마에 내어 거는 것으로 낙양성의 모든 질서를 깨뜨렸다. <급매(急買)! 품목(品目)은 쾌활림(快活林). 대금(代金)은 적정한 가격에서 결정을 짓겠음. 다만 바라는 쾌활림의 규모는 일 일(日) 오천 명(名) 이상의 식객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함. 신용에 대해 의심을 품는 자라면, 천금은장(天金銀莊)에 가서 한 장의 어음을 확인하기 바람.> 화운객잔은 객실 수가 이백칠십 개에 달하는 고급 객잔이다. 다른 객잔처럼 이층 이상의 높이로 새워지지 않았으며, 드넓은 장소에 모조리 단층으로 이루어졌고… 그러한 구조 덕에 어떠한 객실에 머물든 간에 후정(後庭)의 고아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반면 천금은장이란 만리대표행(萬里大 行)의 관할 은장으로서, 중원대상가와 쌍벽을 이루는 은장이다. 저녁 무렵, 그 곳에 한 사람이 나타났으며… 그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적힌 전표(錢票)를 내밀었다. 무려 황금(黃金)으로 천만 냥(兩). 아마도 단 한 장의 전표에 그리도 거대한 액수가 적히기는 십여 년 만에 처음일 것이다. 그 전표는 어떠한 경우라도 만리대표행이 지불을 처리하는 것으로서, 누구든 그것으로 황금 천만 냥을 취할 수가 있다. 하나 그 전표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전표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진 것이라는 데에 있다. 전표의 나머지 반쪽이 없다면 그것은 휴지 조각이나 다를 바가 없으되, 나머지 반쪽을 취해서 짝을 맞춘다면… 그것은 천 명의 부자를 만들 만한 거대한 황금산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해괴하게 출현한 자. 그 자의 정체에 대한 것은 밤이 한 번 지나가는 사이, 낙양성의 모든 은장주들 사이에서 거론이 되기 시작하였으며… 약삭빠른 자들은 새벽이 되기도 전에 전표 반쪽을 천금은장에 맡긴 인물을 찾아가 매물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 정오경, 하늘이 뇌성벽력으로 인해 갈라지기 시작하며 폭우가 저자거리를 물바다로 만들기 시작할 때… 그 기괴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중원대상가 내에서도 심각하고 신중하게 거론이 되기 시작했다. 낙양성 안에서 일 일 오천 명 이상의 식객을 처리할 수 있는 쾌활림은 오직 한 곳에 불과하다. 그 곳은 바로 야환궁이다. 다시 말해, 화운객잔에서 기이한 거래를 시작한 자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야환궁에 눈독을 들이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 일이었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자. 꽤 뚱뚱한 편이나 비곗살로 이루어진 체격이 아니라 탄탄한 근육으로 뭉쳐진 체격이기에, 비둔해 보이기보다는 굳강해 보인다. 오른팔뚝에 허리가 개미 허리같이 가는 미희 하나를 휘어 감고 있으며, 왼손에는 금배(金杯)를 들고 있는데… 금배 안에는 향기가 매우 짙은 술이 담기어져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음험하며 사악해 보이는 자. 그는 황제보다도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있으며, 그가 머물러 있는 곳은 진시황의 아방궁보다도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도열해 있는 무사들의 의복은 구중천(九重天) 내의 시위무사(侍衛武士)들의 의복을 방불케 하였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도검(刀劍)은 도검 자체만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고 훌륭했다. 빛이 강하게 뿌려지는 제반집기들과 팔선탁(八仙卓) 위에 그득히 널리어 있는 미주가효(美酒嘉肴). 이 곳은 바로 중원대본영(中原大本營)이라고 이름지어진 악마대본영 중원대단의 중심지였다. 황금색 전포를 걸치고 있는 자, 그는 살이 나긋나긋한 계집의 속살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는 가운데 아래턱에 세 갈래 수염이 난 천수나타(千手羅陀)란 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천수나타는 본시 사천당문(四川唐門) 출신으로서, 악마대본영을 등에 업고서 사천당문의 문주 지위에 올라선 자였다. 하나 그는 중원무림계가 하나로 뭉쳐질 때까지는 사천당문으로 복귀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며, 자신을 악마대본영의 순찰호법(巡察護法)으로 밀어 준 어떠한 자의 주구 노릇을 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십팔상왕이 한자리에 모인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 기괴한 일로 인해 우리들이 찾고자 하나, 찾지 못했던 십만대상을 찾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으음, 그 거래가 그리도 심각한가? 죽음이 두려워 깊이 숨어 버린 십만대상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니……." 송충이가 달라붙은 듯한 검은 눈썹을 꿈틀거리는 인물은 폭풍혼이었다. 그는 사몽혼이 죽고, 혈접혼이 폐인이 되었으며, 태양혼이 은자처럼 행세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있는 자였다. 또한 악마대본영의 진정한 후계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믿고 있으며, 마황야의 대업을 이어 받을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가고 있는 자였다. "십만대상은 상인입니다. 속하들은 미처 그 점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상인들은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그 곳이 지옥의 유황불 속이든, 빙산(氷山) 속이든, 가리지 않고 들어가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흠……!" "무사들은 상인들을 무시하나, 기실 상인들은 무사들보다도 용감한 데가 많습니다." 천수나타는 나름대로 예리한 안목을 지니고 있는 자였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분석해 본 것이 있기에, 폭풍혼을 자신의 주인으로 받들어 모신 바이다. "모름지기 상인들은 이익에 밝습니다. 그리고 낙양에 소문이 파다한 거래가 성립된다면, 십만대상은 앉은 자리에서 무려 삼백만 냥을 이익 보게 됩니다." "왜?" "이 곳 야환궁의 가격은 시세로 따질 때 칠백만 냥입니다. 한데 그 자는 야환궁을 천만 냥에 사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거래가 성립된다면… 십만대상은 자신에게 썩은 이빨처럼 골치를 썩이고 있는 이 곳 야환궁을 고가로 처분하게 되는 셈이며, 우리들이 머물러 있는 이 곳의 소유주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다른 자들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수나타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말처럼 하기 쉬운 것도 없고, 말처럼 하기 힘든 것도 없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말은 쉽고도 힘들며, 간단하고도 미묘한 말이었다. 기실 악마대본영 쪽에서는 황금 백만 냥 정도를 십만대상에게 주어서 반 강제적으로 야환궁을 정복할 작정이었다. 그 일이 거의 다 진행이 되었는데, 뜻밖의 방해자가 나타난 것이다. 신비상인(神秘商人)이라 불리기 시작한 자. 그는 악마대본영이 낙양성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루 저녁만에 철저하게 훼방놓아 버린 것이다. "천만 냥은 거금인데… 그 어떠한 인물이 그러한 거금을 하루에 동원할 수 있단 말인가?" 폭풍혼의 눈썹이 보다 큰 곡선을 그렸다. "글쎄요. 그 점에 대한 것만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여간 신비상인이라는 자는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입니다. 어쩌면 그 자의 출현으로 인해 십만대상을 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방법이든 좋다. 골칫거리 십만대상을 찾을 수만 있다면……!" 폭풍혼은 술을 마신다. 그는 계집의 풍만한 유방을 매만졌고, 터질 듯 부푼 젖가슴 위의 젖꼭지를 가볍게 뒤트는 가운데 두 가지의 결정을 내렸다. － 기일(其一), 고수 오천을 풀어 천금은장과 화운객잔을 포위하라. 단 명령이 있을 때까지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 － 기이(其二), 십만대상이 나타나는 즉시 정중히(?) 모시고 오라! 그는 세 잔의 술을 마시는 사이에 무사 구천여 명이 대이동을 하는 하명을 했으며, 악마대본영 휘하무사들의 움직임은 일각(一刻)도 되기 전에 화운객잔에 불쑥 들어선 천유성에게 세세하고 정확하게 보고가 되었다. 그는 씨익 웃었으며, 한 잔의 맑은 차를 마시는 가운데 뜨락을 거닐었다. 천금은장에 황금 천만 냥짜리 전표의 반쪽 부분을 전한 자는 바로 천유성이었다. "그는… 온다!" 천유성은 태연자약했다. 이백팔십 풍방의 형제들은 좌불안석 불안해 하고 있는데 비해, 천유성은 실로 느긋했다. "그가 상인이라면… 온다. 나는 그를 믿는다. 그는… 두 시진 안에 나를 찾아올 것이다!" 노을이 핏빛으로 번지고 있다. 비가 개인 후이라 그러한지, 허공은 말할 수 없이 맑고 깨끗했다. 매일 한 번씩 있는 황혼이나, 이 날의 황혼은 정녕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내게 했다. 팔월(八月)이 시작된 지 닷새째이다. 팔월 오 일 유시(酉時)가 지날 무렵, 야환궁 어귀는 밤의 환락을 찾는 무리들이 타고 온 마차에 뒤덮였고… 지분 단장을 마친 기녀들은 자신을 찾아온 단골 서방을 마중하며 온갖 교태스러운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환궁의 뒤뜰에는 하나의 사자등(獅子燈)이 밝혀지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켜지지 않은 사자등. 그것은 십만대상의 동업자들이 십만대상을 찾는 신호이며, 그것은 악마대본영 쪽에서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친히 나서야 합니다. 매우 큰 거래이기에 속하들로서는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총사(總師)가 친히 신비상인을 만나신 다음, 결정하셔야 합니다.> 방문(榜文). 공공연히 내어 걸린 한 장의 방문은 십만대상에게 알리는 십팔상왕의 의결 사항이기도 했다. 방문은 낙화정(落花亭)의 기둥에 나붙었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낙화정은 황하의 지류(支流) 하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채봉정(彩鳳亭)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다시 말해, 낙화정 기둥에 방문을 붙인다면… 황하에서 시작이 된 비봉탄(飛鳳灘) 물 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두 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십만대상이 거기 끼여 있다면… 꽤나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악마대본영은 역시 인물이 많은 장소였다. 또한 그 곳에는 무수한 고수자들이 있는지라, 방문이 내어 걸린 시각에 강물 위를 오고 간 모든 배의 모든 하객들에게 각 삼 인(人)씩의 추적자들을 딸려 붙일 수가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낙화정을 중심으로 한 이십 리 이내는 천라지망에 뒤덮였다. 누구든 평범치 않은 행동을 한다면, 악마의 더듬이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십만대상이라고 예측되는 인물은 무조건 잡히게 되며, 이미 그러한 일은 속속 벌어지고 있었다. 의복이 화려한 자, 혹은 낙화정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자, 조금이라도 의심쩍은 행동을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납치되야 했으며… 엄청난 변명을 해댄 후에야 악마의 소굴에서 풀려 나올 수 있었다. 하여간 풍운은 시작되었다. 무림계의 풍운은 대도 낙양성을 비밀스러운 파란에 휘어 감아 버린 것이다. 뒤뚱뒤뚱……! 꽤나 볼품이 없는 걸음이다. 그는 한 잔 거나하게 마신 뒤인 듯, 휘청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실로 지저분한 옷차림인지라, 그가 다가가는 곳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코를 두 손가락으로 집게 조이듯 조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인분(人糞)이 묻은 농부(農夫)의 옷. 그는 흑색(黑色) 단삼(單衫)을 걸치고 있는데, 저녁 늦게까지 밭에 나가서 거름을 푸다 온 듯 전신에 똥을 바르고 있었다. 머리에서는 이(?)가 툭툭 튀며, 입을 벌릴 때마다 싯누런 이빨이 드러나 보였다. 왼손에 주호 하나를 쥐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에는 거름통을 떠메고 있다. 이십군(李十君)이라는 인물이다. 낙양에서 가장 가난한 인물로, 계집의 엉덩이만큼 작은 땅에 소채를 가꾸면서 살고 있는 자이다. 입심이 사나워 말을 할 때마다 욕설이고, 코 고는 소리로 잠자는 새를 날려 버릴 정도로 품행이 거칠고 방정치 못한 자이다. 술 한 병을 사는 데에도 일각(一刻)은 흥정을 하여 구리돈 일문(一文)을 악착스레 깎아 버린 후에야 술을 사는 자. 이십군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채화로(彩花路)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모든 사람이 비웃고 천시하는 자, 그의 머리 속에서 어떠한 상념(想念)들이 오고 가는지 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가 광인이라고 혀를 끌끌 찰 것이다. － 미친 녀석! 똥 푸는 농부 주제에 천만(千萬)이라니? － 무엇을 사고, 무엇을 판다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삼십대 농부 이십군, 그의 머리 속에서는 천만 냥이라는 액수가 저울질되고 있었다. 소똥 내음, 닭똥 내음, 말똥 내음……. 온갖 거름 냄새를 죄다 풍기고 뒤뚱거리며 걷는 이십군. 그는 점점 하나의 장소로 다가가고 있었다. 바로 화운객잔(華雲客棧). 다섯 시진 전부터 악마대본영의 일급고수 오천 명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버린 곳으로 그는 다가가고 있었다. '그 자는… 거래를 아는 자이다.' 이십군은 하품을 하며 입을 쩌억 벌렸다. 싯누런 이빨이 달빛을 퉁기어 낸다. 그는 게트림을 끄윽 해 댄 다음 바지춤을 내렸고, 둥실 떠오른 달에 대고 시원스러운 오줌발을 퍼부어 댄 다음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게다가 배짱이 있다. 악마대본영이 삼키고자 하는 쾌활림을 거금을 주고 인수하고자 하다니… 그가 악마대본영의 인물이 아니라면, 나는 하나의 상인으로서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될 것이다.' 뒤뚱뒤뚱 걷는 추레한 농부, 그가 바로 장막 뒤의 천하제일 거상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 세 끼 식사 값으로 동전(銅錢) 구문(九文)도 채 쓰지 않으며, 침소라고는 눈비를 막지 못할 초막(草幕)을 쓰고 있는 자. 그가 바로 십만대상이었다. 그는 야환궁 바로 옆에서 채소를 가꿔 팔고 있는 농부였고, 거의 매일같이 악마대본영의 무사들을 천여 명 이상 구경(?)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달빛이 흐릿하다. 그리고 그는 역겨운 거름 내음을 풀풀 흘리며 그 곳을 향해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자시(子時)가 되어 갈 때였다. 천유성은 중원에서 가장 느긋한 자세로 고검랑과 더불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고검랑은 번번이 패착점에다가 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천유성은 별 힘들이지 않고 이길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머물러 있는 객실은 화운객잔에서 가장 큰 객실로서, 세 개의 침실과 하나의 서재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그 곳은 악마대본영의 무사들에 의해 엄밀하게 포위가 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천유성은 정면으로 나서지 않은 상태였으며, 고검랑이 신비상인의 대리인 입장에서 몇 명의 상인들을 상대해 본 바 있고… 세 시진부터는 찾아오는 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오지 않습니다." 고검랑은 서툰 한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천유성에게 꽤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천유성이 바로 곁에 악마대본영의 무사들을 두고 있으면서도 베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이고, 오지도 않을 십만대상을 기다리는 가운데 스스로 위기에 처해지는 것이 두 번째 불만이었다. "오네." 딱－! 바둑돌은 경쾌한 타석성을 내며 반상에 떨어져 내렸다. "그는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인물이며, 악마대본영을 오랫동안 농락했을 정도로 재간이 많은 자입니다. 한데 그가 어이해 무사들이 포위하고 있는 객잔에 나타나겠습니까? 이름 없는 산사(山寺)나 숲 속이라면 혹 모르겠지만……." 고검랑이 툴툴거리자. "그가 진짜 거상이라면 이익이 생기는 일이 있을 경우,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나타날 걸세. 사실 나타나기는 어려워도, 도망치기야 쉬운 것이 아닌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나 이 곳에 펼쳐진 자모추혼(子母追魂), 파풍패엽(破風貝葉), 육합혈전(六合血戰)의 세 가지 악마검진을 뚫고서 이 곳까지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악마대본영 쪽에서도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것입니다." 고검랑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그 사이 흑석(黑石)이 무려 서른다섯 개나 사석으로 화해 바둑판 아래 놓여졌다. 다시 말해, 고검랑은 일곱 판의 바둑을 내리 지고 만 것이다. 바둑이 여덟 판째 진행되어 갈 때였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으며, 객실의 시중을 드는 점소이 하나가 조심스러운 거동으로 서재 안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물주전자 하나를 쟁반에 담아 들고 있는데, 두 사람을 대하는 투가 실로 조심스러웠다. 특히 고검랑을 대하는 표정은 황제를 대하는 표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검랑을 풍운의 신비상인으로 알고 있으며, 천유성은 그의 서기(書記) 정도로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주전자를 탁자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고, 뒷걸음질쳐서 걸어 나갔다. 천유성은 그가 방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 곳 화운객잔이 바로 중원대상가 예속이라는 것을 알고 투숙한 보람이 있군." "예?" "훗훗… 방금 전에 나간 녀석은 강호에서 서열 일백 위 안에 드는 자이네." "아……!" "자네도 흥분한 상태가 아니라면 그것을 알아차렸을 걸세. 놈은 걸을 때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눈빛 가운데 예기를 흘리고 있었네. 아마도 중원대상가의 태상호법(太上護法) 정도는 될 걸세. 다시 말해, 내가 이겼네. 그가 나타난 것이네." 천유성은 그렇게 말하며 물주전자를 대뜸 쳐들었다. 순간, 하나의 쪽지가 나타났다. 고검랑은 쪽지를 보고 크게 놀라워했으나, 천유성은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지. 대상인의 전갈을… 역시 그는 온 것이네!" 천유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주 작은 쪽지를 손에 쥐었다. 그것을 펴자, 깨알처럼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먹물도 마르지 않은 글자들이 보인다. <즉시 후정(後庭)으로 나오기 바람. 야환궁을 천만 냥에 인수할 작정이라면, 금야(今夜) 안에 모든 서류를 그대에게 넘겨 주겠음. 뜨락을 걷다가 기침을 두 번 하기 바람!> 바로 십만대상의 글이었다. 그는 오천 무사가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는 화운객잔 안으로 실로 유유하게 접어든 것이며, 객잔 안에 상주하고 있는 자신의 수하를 통해 신비상인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한 것이다. 천유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쪽지를 읽은 다음, 고검랑을 바라봤다. "자네가 나가서 소란을 일으키게!" "이목을 돌리란 말씀이시군요?" "훗훗… 늘 하던 것이지." "그 다음, 어찌해야 합니까?" "그 곳으로 가게." "……." "그 다음, 바람의 형제들을 모두 부르게. 폭풍혼이라는 자와, 그 자가 가장 믿는 자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말게. 하여간 품위 있게 행동하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고검랑은 품위 있게(?) 행동하라는 대목에 있어서 피식 따라 웃었다. "대가가 없는 살인을 해 보기도 오랜만이군요. 훗훗……!" 일각 후, 신비상인이 뜨락에서 휘하의 십여 상인들과 더불어 담소한다는 말이 악마대본영 예하 무사들의 비위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거래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에서부터, 내일 새벽에는 떠나야겠다는 말 등등……. 신비상인은 거만하고 오만하게 행동을 하였으며, 그가 어떠한 말을 했는지는 거의 즉시 쾌활림 쪽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를 지극히 정중하게 쾌활림으로 불러들이라는 밀명을 받은 호위무사 이백여 명이 야풍비공술(夜風飛空術)을 시전하며 화운객잔으로 접어들었다. 또한 그러한 일련의 소란이 벌어지는 사이, 천유성은 낙척서생 행세를 해 가며 뜨락 구경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슬이 신발 바닥을 축축이 적신다. 천유성은 풀잎을 질끈질끈 밟으며 뜨락 언저리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걷는 천유성,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얼굴 반쪽을 뒤덮고 있다. 방립은 쓰지 않았고, 역용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영웅무정이라고 여기는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강호에 소문이 난 영웅무정에 대한 신화와 지금 천유성이 보이는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이기에, 그의 초상화를 본 바 있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가 영웅무정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새벽에는 많은 사람이 죽으리라.' 천유성은 달이 검은 구름에 휘어 감기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만에 하나, 나의 휘하에 정예고수 일만 명만 영입이 된다면… 이 지리하고 의미 없는 혈전(血戰)은 마무리지어질 것이다.' 그의 눈빛이 흐려진다. '마황야… 그도 어쩌면 후회할지 모른다. 이 지리하고 권태로운 혈전을 시작하게 된 것을……!' 그는 시상(詩想)을 생각하는 서생 마냥 느릿느릿 걸음을 내디뎠으며 잔기침 소리를 냈다. 쿨룩쿨룩 거푸 기침을 하고 나서 다섯을 셀 시간이 지났을까? 꽤나 구린 내음이 풍겨 오기 시작하며 누군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천유성보다도 훨씬 지저분한 차림새이며, 게다가 흑색 단삼에다가 온갖 향기롭지 못한 거름 찌꺼기를 묻히고 있는 투박한 용모의 소유자. 나이는 서른 정도 되었을까? 무례하고 거칠어 보이는 농부, 그는 으슥한 숲에서부터 불쑥 걸어 나왔으며……. "아……?" 천유성은 그의 얼굴을 보다가는 입술을 따악 벌리고 말았다. 어디 그뿐이랴? 행운엄월보(行雲嚴月步)를 써서 성큼 운신(運身)해 들어서던 농부 또한 그를 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이… 이럴 수가? 여기서 그대를 뵙다니……?" "세상이 좁군… 정말 좁아. 십 년 안에는 자네를 보기 힘들다 여겼는데……." 천유성의 경악은 미소로 변화해 갔다. 농부의 경악 또한 감격한 표정으로 바뀌어졌다. "젠장, 정말 강호가 좁군요. 여기서 주공(主公)을 뵙다니… 우라질! 이 기쁜 심정을 뭐라 말해야 합니까?" "프핫핫… 모를 일이야. 그래, 자네가… 자네가 십만대상이란 말인가? 정말 큰 도적이 되었단 말인가? 자네 같은 돌대가리(石頭) 좀도적이 그 짧은 시간에 그리 큰 조직을 이룩할 수 있었단 말인가?" 천유성의 희고 깨끗한 손과, 농부의 투박하고 억센 손이 하나로 합쳐졌다. "어쩐지 이상하다 여겼수다. 이 세상의 그 누가 나를 깜짝 놀랄 비장의 거래를 시작하는가 내심 궁금했었수다. ㅋㅋ… 한데, 바로 그대였소이까?" 철저한 신비의 장막에 자신을 감추고 있다가 나타난 십만대상. 그는 천유성을 보고 뜨거운 눈물을 주루루 흘리기 시작했다. 녹림하오도(綠林下五道)를 석권한 무림의 일대거인. 그러나 그는 지금 한 명의 부랑아에 불과할 뿐이었다. "젠장! 뭐라 말씀해 보시오, 주인! 대체 어찌 된 일이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십만대상, 그는 바로 그였다. 십만호(十萬戶). 낭인주(浪人洲)의 파락호(破落戶)였던 자다. 그리고 천유성이 낭인 시절, 장차 자신의 가신(家臣)으로 거느리겠다고 단언한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 십만대상은 바로 십만호였다. 그는 낭인주를 떠난 즉시 녹림의 형제들을 모아 하나의 세력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세 달이 되기 전에 강호제일(江湖第一)의 녹림세력을 이끌 수 있었다. 그는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의 총채주(總寨主)로 선발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보름 후 또 하나의 세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중원대상가! 그는 난세(亂世)를 이용하여 터져 나오는 화산처럼 기세를 상승시킨 난세의 대상인이었다. 휘하무사 이십사만(二十四萬), 일 일(日) 거래금(去來金), 육백사십만 냥(兩), 휘하 분타(分舵) 구백사십 개 소(所)……. 세력의 방대함만 따진다면 이미 개방( )을 능가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이끄는 세력에는 절세고수들이 지극히 드물며, 대부분의 무사들은 대세를 좌우하지 못할 하급무사들이었다. 하나 그가 이룩한 중원대상가는 어떠한 세력에 의해서도 와해되지 않을 특유의 끈기를 갖고 있었다. "모두 주인 덕이오!" 십만호는 대뜸 다섯 번 절을 했다. 그는 몇 번 절하는 것이 격식에 맞는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네 덕이지, 어찌 내 덕이냐?" 천유성의 눈시울도 가볍게 붉어졌다. 하후초(夏候楚), 십만호(十萬戶), 철거(鐵巨), 그리고… 석화(石花). 네 명의 인물은 그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십만호는 화운객잔의 점주가 머무는 곳으로 천유성을 끌고 들어왔고, 다짜고짜 천하에서 가장 귀한 술을 세 병이나 대령케 했다. 악마대본영의 무사들은 이미 철수한 상태였다. 그들은 고검랑을 신비상인이라 여기고 그를 지극히 정중히 팔인교(八人轎)에 태워 야환궁 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다. 밤은 깊을 대로 깊었다. 이 밤은 피비린내 나는 밤이 아니라, 우정이 확인되는 열정의 밤이었다. "주인 덕분에 컸소. 사실… 중원대상가는 주인 것이오. 물론 모조리 주인 것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반 이상이 주인 것이오." "왜?" "투자를 하지 않았소이까? ㅋㅋ……!" 십만호는 술을 거푸 일곱 잔 마신 다음,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쓰윽 닦은 뒤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끌렀다. 그 안에는 열여덟 개의 인장과 여덟 개의 은자가 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중원대상가의 모든 것이오." 십만호는 주머니 안의 물건을 모조리 탁자 위에 꺼냈다. 열여덟 개의 인장은 중원대상가의 상황(商皇)의 신표가 되는 것이며, 은자는 시정에서 평범하게 통용되는 은자였다. 정확히 팔 냥(兩). 고린내가 배인 은자 팔 냥을 불쑥 꺼내다니? "이것이 모든 것을 이룩하게 했소. 물론 두 권의 서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남이 볼까 무서워 태워 버렸소이다. 하여간 중원대상가에는 하나의 빈 자리가 있으며, 그 자리는 소인을 보다 큰 인물로 이끌어 줄 주인을 위한 자리이며… 대상야(大商爺)의 자리외다!" 십만호는 여전히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가 꺼낸 은자 팔 냥은 천유성이 낭인주를 떠나는 십만호의 손에 쥐어 준 은자 팔 냥(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의 중원대상가를 이룩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거절하면 지랄을 부릴 것이니… 알아서 하시오, 주인!" 십만호는 주머니를 반 강제로 천유성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 녀석… 나이 어린 주인이라고 알기를 걸레로 여기는구나." 천유성은 욕하듯 말했으나, 그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녀석… 필경 거인이 되리라 여겼지만, 단시일 안에 이루어 내다니… 아아, 진정 큰 신화를 이룩한 인물은 내가 아니고, 바로 너다.' 천유성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십만대상이 십만호라는 사실, 그리고 십만호가 지금까지 천유성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천하 대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일이었다. 즉, 이 날 밤의 해후로 인해 천유성은 적어도 규모에 있어서는 악마대본영과 대등하게 된 것이다. 새벽이 깨어날 때까지 두 사람은 허리띠를 끌러 놓고 술을 들이마셨다. 거인과 거인의 묘한 해후. 어쩌면 밤 사이 마셔 버린 명주(銘酒) 스물다섯 병으로도 모자랄 그러한 거대한 운명의 만남일 것이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 제목: 천년세가 제3권(전3권) 지은이: 서효원 - 차 례 - 第1章 팔월(八月)… 혈풍(血風)은 시작되고 第2章 신(神)은 죽어야 한다 第3章 승부(勝負)의 미학(美學) 第4章 우리 결혼(結婚)해요 第5章 유성(流星)… 떨어지다 第6章 풍운금쇄전(風雲禁鎖殿) 第7章 천마화(天魔花) 第8章 최후의 승자(勝者)는 第9章 신검(神劍)이 울 때 第10章 깨어난 거인(巨人) 第11章 십일월의 신화(神話) 第12章 유성(流星), 네가 이겼다 第1章 팔월(八月)… 혈풍(血風)은 시작되고 새벽의 보라색 안개가 채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야환궁(夜歡宮)은 여타한 장소와는 달리 지금에야 문을 닫게 되었으며, 마차들이 떠나가는 소리가 애잔한 박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악마대본영은 야환궁을 접수하여 항차 악마대본영이 끌어들일 인물들을 대접하는 유락소로 제공할 작정이었다. 그러한 제안을 한 자는 바로 폭풍혼 사마위승이다. 폭풍혼은 마도세가의 적통을 이어 받은 자다. 그는 누구보다 야망이 큰 자로, 마황야가 되는 것을 일생의 꿈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자신의 동배 가운데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며 오늘의 지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과거 태양혼이 한창 활약할 시기에 낭인주로 유배(流配)된 이유도 바로 사마위승의 사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하로 열세 계단 내려가게 되면 이르게 되는 대리석전(大理石殿) 안이다. 일대는 흑전포(黑戰袍)를 걸친 자들과 적색(赤色) 무장(武裝) 차림의 무사들에 의해 철통같이 포위되고 있었다. 무사들의 등에는 귀두도(鬼頭刀)와 거령도(巨靈刀)가 십자로 교차하여 메어졌으며, 허리춤에는 암기통을 달고 있다. 흉신악살처럼 살기등등한 자들. 이들은 바로 악마대본영에서 사형마루의 살수들 이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흑혈마전단(黑血魔戰團)의 무사들이었다. 누구든 살해할 수 있으며, 어떠한 방파라도 초토화시킬 수 있다. 소림사를 짓밟고 무당을 깨어뜨린 자들은 바로 그 자들이다. 이들은 지난밤에 정중히(?) 초빙이 된 한 인물이 머물러 있는 대리석 궁전 일대를 엄밀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일대는 흑포인들과 적포인들로 가득 메워졌다. 야환궁 일대에 나타났던 일만오천 무사들 가운데 서열상 상부에 속하고 있는 자들은 거의 다 나타난 셈이었다. 핏빛의 융단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유성별부(流星別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반지하(半地下)의 궁전은 그러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유성별부는 십만호가 천유성에게 헌(獻)하기 위해 이룩한 장소였다. 거대한 석실이 스물다섯 개 있으며, 석도(石道)의 좌우벽 아래에는 등신대(等身臺)의 남녀조상(男女彫像)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복잡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팔진도(八陣圖)에 따라 건립이 된 유성별부는 항차 대상가를 다스릴 절대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십만호는 중원대상가를 이룩하게 한 천유성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유성별부를 이룩했던 것이다. 현재 이룩된 부분은 설계도상의 면적 가운데 삼분지일에 불과한 데에도 불구하고 실로 방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천 명의 장인(匠人)들이 지난 팔 개월 내내 쉬지 않고 가꾼 지상의 극락이라 할 수 있다. 폭풍혼은 그 곳을 악마대본영의 중원대총단으로 만들 작정으로 야환궁을 암중에 정복한 것이다. 태사의 위, 폭풍혼은 거만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맞은편 자리에 머물러 있는 하나의 인물을 지극히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밤새 내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회유와 고문법을 다 사용한 셈이었으되, 그의 입에서 말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바늘로 혈도를 찔러도 침묵. 채찍으로 후려친 다음, 상처에 소금을 뿌려도 침묵. 분근착골(分筋錯骨), 착골수혼(錯骨搜魂). 근육을 가닥가닥 끊어 버리는 형벌을 가한다 하더라도 침묵이다. 실로 기막힌 일은 그 자의 반응이다. 그는 실로 느긋한 표정에… 가끔 가다가는 하품까지 한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형벌이 시시하다는 듯, 어떤 때에는 새끼손가락으로 양쪽 콧구멍을 돌려가며 후벼파기도 한다. "시시하단 말이야." 가끔 가다가는 알아듣기 힘든 이국어로 지껄이기까지 한다. "본국 무사라면 더 악랄하지. 아마… 노부의 살점은 적어도 세 근 정도 떨어졌을 거야. 한데 귀찮고 지겹기만 하군. 이런 것도 고문이라고 하니……." 하품을 하는 자, 그는 인간에게 가해질 수 있는 모든 고통에 익숙한 자였다. 그는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신체에는 상처 자리가 잠깐 동안만 남을 뿐이었다. 그는 기이한 신체 단련을 한지라 어떠한 깊은 상처가 생긴다 하더라도, 체내의 회생력으로 인해 상처가 금세 아물곤 했다. "아해야, 노부를 건드리지 마라. 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단다." 히죽거리는 자, 지금 그의 몸 칠 개 요혈에는 낭아곤(狼牙棍)을 축소한 듯한 고문 기구가 쑤셔 박혀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몹시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가 나면… 무섭다!" 풍방의 주인 고검랑. 사실 그가 아니라면 폭풍혼이 가하는 무자비한 고문 아래에서 느긋하게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빠드득! 이제부터 진짜 보여 주겠다. 네놈은 침묵한 대가를 톡톡히 받게 될 것이다." 폭풍혼의 살집 좋은 아래턱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네놈이 감히 내게 승부를 걸다니…….' 폭풍혼은 잔혹한 눈빛을 흘리며 천천히 오른손을 쳐들었고. "좋아, 이제 진짜로 해 볼까?" 그 순간 네 명의 대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네 개의 단로(丹爐)를 안고 미끄러지듯 다가섰다. 하나의 단로에서는 숯불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거기 길다란 철봉(鐵棒)이 푸욱 박히어 있다. 두 번째 단로에는 독액이 부글부글 끓고 있고, 손발톱을 빼내는 철겸자(鐵鉗子)가 담기어져 있다. 세 번째 단로에는 핏빛의 액체가 고여 있으며, 근육을 도려 내고 살을 썩히는 데 쓰이는 철삭(鐵索)이 넣어져 있고… 마지막 단로에는 눈알을 조용히 빼내는 갈고리 두 개가 차디찬 독약수에 담겨져 있었다. 고검랑, 그는 네 가지 형구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듯 처음으로 눈꼬리를 가늘게 떨었다. "화형사린추(火刑死鱗鎚)에 잔시분골자(殘屍分骨刺), 게다가 색혈잔음부시삭(索血殘陰腐屍索)에… 으음, 고루마구( �뽜は�)까지!" 고검랑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는 힐끗 허공 쪽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팔다리 몇 개쯤은 주인을 위해 능히 바칠 수 있으나, 이번 일은 정말 억울한 듯하외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것이오?" 대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 하여간 고문에 무심하던 고검랑이 네 개의 단로로 인해 흔들렸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독무를 피워 내는 단로 네 개가 바로 곁까지 다가섰다. 더 이상 수수방관하다가는 손톱이 뽑히고 눈알이 뽑힌 다음, 전신 근육이 어포 뜨이듯이 조각조각 뜨여질 것이다. 폭풍혼은 고검랑이 동요하는 것을 보자 식욕이 동하는 듯, 옆의 탁자 위에 놓은 그릇에서 사과 한 알을 집어들었다. 그는 사과를 씨앗째 깨물어 먹기 시작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재미가 있을 게다. 선혈이라는 것은 보면 볼수록 즐거움을 주는 묘약이지. 훗훗……!" 살모사 같은 녀석, 그는 사과를 깨물어 먹으며 고개를 조용히 끄덕거렸다. 네 명의 고문 담당 무사들은 고검랑 곁으로 보다 가까이 다가갔으며, 사방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우… 찢어 죽여라!" "우우… 피 내음이 그립구나!" "카카카카카… 저 놈의 심장은 내 것이다. 카카……!" 악마의 환호성이 요란하게 시작이 된다. 피에 굶주린 악마들의 호흡 소리일까? 흑혈마전단 무사들은 무기를 손바닥으로 두드려 가며 환호성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고검랑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며 이렇게 외쳤다. "너희들, 참아야 한다. 알겠느냐? 주인이 허락하시지 않는 한,피를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보고도 못 본 척하라!" 대체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하여간 그를 향해 다가서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대리석전 안에는 이백팔십구 개의 그림자들이 은잠해 있었다. 하나하나 가공스러운 은잠술을 지니고 있는 자들. 빛을 발하지 않게끔 검은 칠을 한 병기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고검랑의 목소리가 들리는 지점에 드넓게 포진하고 있는데, 악마대본영 쪽 인물들은 그들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숨소리를 감추고 인체의 온기(溫氣)를 대기 속에 숨겼으니, 바로 등 뒤에 선다 하더라도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무공을 터득한 인물에게서 의당 흘러 나오게 되어 있는 기세란 기세를 모조리 감추어 버리는 대살수(大殺手)의 훈련을 거친 자들이다. 그들을 찾아 낸다는 것은 나무숲에서 한 장의 나뭇잎을 특별히 골라 찾아 내는 것 정도로 힘든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참아라, 부탁이다!" 고검랑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중원을 종횡하며 몸이 반쯤 부서지기 수십 차례, 그 사이 그가 겪은 고통은 필설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렇듯 무기력하게 당한 적은 없었다. 그의 몸에 고통을 가했던 자는 그가 받은 고통의 몇 배를 받아야 했으니까. "내가 죽더라도… 참아라, 형제들!" 고검랑은 다시 한 번 외치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허공에서부터 차갑고도 맑은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이제는… 참을 필요 없다!" 대체 누가 어디서 하는 말일까? 그 소리는 모든 무사들의 귓속으로 정확히 같은 음량으로 들리게끔 조절된 목소리였다. 하나,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 아니? 대체 누가……?" "어디냐?" 무사들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동요하기 시작할 때. "ㅋㅋ… 주인의 목소리가 여자의 목소리보다도 달콤한 목소리인 줄 몰랐소이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던 고검랑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는 여유를 되찾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거대한 석벽이 칼에 베어지는 비단처럼 쭈욱 베어지는 가운데 하나의 흰 그림자가 둥둥 떠서 날아 내리고 있었다. 허공을 밟으며 떨어져 내리는 자, 팔짱을 꼈으며 방립 하나를 약간 위로 올려 쓰고 있다. 머리카락이 흩어져 얼굴 반면을 가리고 있으며, 각이 진 아래턱에 드리워진 미소가 의미심장하다. 그는 대리석 바닥으로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저… 저 자는……!" "영웅무정(英雄無情) 일검향(一劍香)이다." "바로 천년세가(千年世家)의 대총사이다!" "놈… 놈이 여기에 나타나다니……?" 차창－ 창－ 창－ 창－! 강철 음이 요란하게 터져 나오며 천여 자루의 독도(毒刀)가 일제히 펼쳐졌다. 수천 줄기의 도홍(刀虹)이 뻗어 나갔으며, 벽을 쪼개고 나타난 천유성을 향해 수백 개의 신형이 빨랫줄 같은 선을 끌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명불허전. 흑혈마전단의 움직임은 혈겁의 주역답게 빠르고 영활했다. 그러나 천유성은 팔짱을 풀지 않았다. 그는 폭풍혼이 머물러 있는 태사의를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내디뎠으며, 오히려 자신을 쏘아보는 폭풍혼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리기도 했다. "바람을 조심하게! 무척… 참았지. 여기 있는 나보다도……!" 뚜벅－ 뚜벅－! 그가 네 걸음을 걸었을 때, 그리고 오백여 무사들이 갈가마귀 떼처럼 그의 주변으로 떨어져 내릴 때였다. 돌연. "척살(刺殺)!" "존명(尊命)!" "살해해도 좋다!" 우지끈－ 쾅－!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사방의 벽이 동시에 무너져 내렸고, 수십 개의 조각이 일제히 넘어지는 가운데 이백여 개의 검은 그림자들이 훌훌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들의 움직임은 바람보다 빨랐다. 이들은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날아올랐으며, 천유성의 머리 위쪽에 이르러 반원구(半圓球) 같은 검은 그물을 펼치면서 일제히 살초를 전개해 냈다. 파파팟－ 팟－! 이백칠십구 자루의 단검이 각기 이 초(招)씩을 시전하는 가운데, 허공 가득 피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혈(血)… 우(雨)… 성(腥)… 풍(風)……! 아비규환의 아수라 지옥도는 너무도 찰나지간에 펼쳐졌다. "……!" "헉!" "바… 바로… 풍… 풍방(風 )이다!" 가슴이 피범벅이 되어 낙하하는 자들. 이백칠십구 인이 찰나의 순간에 천돌혈(天突穴)과 유문혈(幽門穴)에 각 일 검을 격타당한 채 죽어 버린 것이다. 흑혈마전단의 무사들이 돌연한 기습에 주춤거릴 때, 또다시 이백칠십구 줄기의 선이 사방으로 그어졌고… 그 가운데 이백칠십구 개 소(所)에서 피보라가 치솟아 올랐다. 너무도 빠르다. 악마대본영의 무사들은 너무도 쾌속한 공세에 전열을 흩트렸으며, 그 가운데 무참한 도륙이 거듭되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검화, 그것은 곧 혈화가 되어 일대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다. 파파팟－ 팟－! "케엑!" "으으, 진… 진짜 전문가들이다!" 천유성이 일 보(步)를 내디딜 때마다 이백칠십구 인이 쓰러졌다. 시(屍)… 산(山)… 혈(血)… 해(海)……! 악마대본영은 그것을 만들어 본 역사만 갖고 있지, 그것을 이룩해 본 역사는 갖고 있지 않았다. 이들은 철저하게 단련이 된 무사들이었으나, 상대는 보다 철저한 전문가들이었다. 살인 기계에 버금가는 살인 능력을 지닌 자들, 바람의 형제들. 천유성이 십 보 걸을 때 도합 이천칠백구십 명이 시체로 나뒹굴었다. 천유성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태사의 바로 앞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으으, 전설은… 전설이 아니라… 현실이었던가?" 폭풍혼은 이제까지의 모든 여유와 자만을 잃어버린 채 머리카락을 빳빳이 곤두일으킨 채 사지를 바들바들 떨었다. 파파팟－ 팟－ 팟－! 파공성이 잇따르며 피비가 피안개로 화한다. 연달아 쓰러지는 무사들, 검은 그림자들이 언뜻언뜻거릴 때마다 시체가 이백칠십구 구씩 만들어졌다. "자네는 실수한 거야. 휘하무사들 가운데 정예들을 한자리에 모아 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네!" 천유성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폭풍혼을 올려다봤다. 퇴폐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눈빛이다. 그의 시선은 폭풍혼의 영혼에 너무나도 강렬하게 새기어지고 있었다. "……!" 폭풍혼은 안색이 밀랍처럼 하얗게 물든 채 사지를 경직시켰으며, 천유성은 다시 세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자네 같은 얼간이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 마황야가 측은하게 느껴지는군." "으으… 으으……!" "물론 사대마계에 인물이 없는 것도 아니지. 울지 않는 새와 핏빛 나비는 걸물이지. 그러나… 자네는 쓰레기야. 아는가? 쓰레기를? 바로 자네가 그것이지! 인간 쓰레기!" 천유성은 더 바짝 다가서며 천천히 손을 풀었다. 폭풍혼은 공포와 분노가 범벅이 된 심정에서 손을 재빨리 쳐들어 허리에서 연검(軟劍)을 끌러 내며 위로 떠올랐다. 그의 신형은 굵은 회오리바람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경천동지할 폭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천마폭혈추(天魔爆血鎚)!" 마계무공 서열 삼 위에 기록된 무공이다. 열두 겹의 호신강기로 몸을 두른 다음, 천마강살(天魔 煞)로 상대를 박살내는 필살의 마공이다. 폭풍혼은 마계 서열 이 위에 오른 자다. 그는 사대왕야의 일인자가 된 후,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해 보지 않았다. 우지끈－! 석판이 마의 선풍에 휘말려 박살이 나 돌모래로 날아오른다. 폭풍혼의 몸은 어느 새 묵혈색의 기류에 휘감겨 보이지 않았다. "파(破)－ 천(天)－ 섬(閃)－ 광(光)－ 류(流)－!" 섬뜩한 푸른빛! 묵혈색 기류 속에서 푸른빛 섬광이 언뜻하는 순간, 가공할 검파가 천유성의 정수리를 향해 작살로 떨어져 내렸다. 파천섬광류는 오로지 파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검식이다. 검신이 아닌 검강(劍 )으로 상대를 궤멸시키는 데, 폭풍혼은 이 일 검으로 숱한 마도의 거마들을 제거한 바 있다. 놀라운 건 천유성의 반응이었다. 그는 가공할 기세로 다가오는 검파를 보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강하기만 할 뿐이네. 또한 상대가 빠르다면 미처 피할 수 없다는 단점도 갖고 있지." 천유성은 비웃듯 말하며 몸을 옆으로 이동시켰다. 오직 일 보를 움직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일 보는 폭풍혼의 비장의 일 식을 무산시키는 운명의 일 보였다. 츠츠츳－! 푸른빛 검강은 애꿎은 돌바닥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폭풍혼이 흠칫해 할 때, 천유성의 손길은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용서해 주지 못함을… 부디 이해하게." 그의 차가운 손은 단선(單線)을 끌었으며, 허공에서는 문득 한 송이 짙붉은 꽃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퍽－! 너무나도 경미한 파공성과 더불어, 거대한 기세로 일어났던 묵혈색 기류는 녹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폭풍혼은 가슴이 박살이 난 상태로 힘없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가는 가운데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신(神)이었던가?" 그는 침묵검도(沈默劍道)의 제일수식(第一手式)에 당해 상반신이 바스러져 버렸다. 천유성의 무공은 초식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는 가공할 내공을 토대로 가장 빠른 수식을 시전하는 것으로, 가장 완벽한 승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 신이었던가?" 폭풍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리석 바닥을 뒤덮은 융단 위로 떨어져 내렸으며, 그 사이에도 피보라는 쉬지 않고 일어났다. 천유성은 꽤나 쓸쓸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나 같은 녀석이 난세의 무사가 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무수한 선혈과… 주검을 대해야 하니까." 혈풍은 한 시진 내내 계속되었다. 풍방의 희생은 스물일곱, 그리고 악마대본영은 일만오천 무사 가운데 팔천사백을 잃어버렸다. 악마대본영이 이룩된 후 이처럼 참담한 패배는 없었다. 그들은 애써 기른 악마의 후계자를 잃었을 뿐 아니라, 수십 년 간 공들여 키운 마도의 전사들을 상실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기밀 서류가 모조리 천유성에게 장악되었으며, 그로 인해 강북무림계의 마도세력 기반은 거의 다 밝혀지고 말았다. 십 년 간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할 수 있다. 사대마계가 오늘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 년이란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폭풍혼의 죽음,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진정으로 컸다. 그것은 바로 천유성이 이끄는 세력이 악마대본영과 필적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혈풍은 이제서야 진정으로 시작이 되는 듯했다. 그리고 이번 여름은 정녕 끈적거리고 지루하게 덮쳐 드는 것이었다. 第2章 신(神)은 죽어야 한다 사흘 후. 천마대승상은 술을 든 후에야 천마원으로 나가야 했다. 그는 마도의 번영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노마두다. 강호의 백도인들은 그를 사갈시할지 모르나, 그는 이제껏 천시받아 왔던 마도계의 인물들에게는 하나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떠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자. 그는 마황야도 존경할 정도로 처세술에 능한 자로서, 그러한 처세술 덕에 마황야 휘하의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 될 수 있었다. 온갖 종류의 싸움을 경험하고, 온갖 잡다한 종류의 인간을 경험해 보았던 역전의 노마두. 그는 어떠한 일에 접해서도 이성의 자제력을 잃지 않는 것으로 소문이 난 바 있다. 한데 그는 이 날,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오 년 전에 거둔 스물세 살짜리 애첩 백마랑(白馬娘)에게 처음으로 쓰디쓴 말을 했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지 모른다." "예? 돌아오지 못하시다니요? 먼 곳으로 출정나가시는지요?" 천마대승상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는 아름다운 여인, 백마랑. 그녀는 무림계의 내막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하는 여인이며, 자신을 취한 천마대승상이 강호백도계 인사들의 암살 서열에서 제오위 안에 끼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마대승상에게도 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소녀가 무장구(武裝具)를 준비해야 하는지요?" 백마랑은 상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달리 가는 데는 없다." 천마대승상은 술을 한 잔 더 마셔 버린 후에야 자신이 어디에 가는지를 이야기했다. 기실 그가 가는 데는 외지가 아니었다. 그는 천마원에 가서 마황야를 만나야 하는 처지였다. 마황야는 최근 들어 지하(地下) 밀궁(密宮)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상황이었다. 마황야의 하루 생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천마대승상이었다. 한데 그가 마황야를 만나러 가면서 어쩌면 돌아오지 못하리라 이야기하다니? "밤을 새워 연회가 있는지요?" "글쎄, 그러할지도 모르지." "지존께서 대승상께 보다 편한 지위를 하사하시면 좋겠습니다. 연일 대승상과 환담을 나눌 수 있게끔… 보다 한가로운 자리로……." 백마랑의 얼굴이 붉어졌다. 천마대승상은 악마의 백정으로 소문난 인물이었으나, 백마랑이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그녀는 천마대승상이 마음 좋은 영감님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여간 천마대승상은 이 날, 죽음을 각오하고 천마원이라고 불리우는 화원으로 가야 했다. 그가 말해야 하는 사실, 그것은 그에게 죽음을 내리게 할지 모르는 보고였기에……. <중원제일단(中原第一壇)으로 꾸밀 예정이었던 중원대상가(中原大商家)는 영웅무정 일검향에게 장악되었음. 그는 대상벌(大商閥)이라고 불리어지던 중원대상가를 너무나도 간단히 접수했음! 폭풍혼은 살해당하고, 휘하 고수자들 가운데 태반이 쓰러졌음. 중원의 상맥을 장악하겠다는 계획은 완전 백지화(白紙化)되었으며… 백도계 가운데 하락무림(河洛武林), 관북무림(關北武林), 제로무림계(薺魯武林界)를 암중에 정복하겠다는 계획마저 틀어졌음. 그 기반을 이룩하는 데에는 오 년이 걸릴 것임.> 몹시 지루한 이야기였다. 연전연승(連戰連勝)할 때의 이야기라면 몹시 즐거운 분위기가 이룩될 것이나,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냉기(冷氣)가 돌기 마련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죽이지 못하는 고독한 도전자, 영웅무정. 한데 그는 차츰차츰 자신의 세력을 확대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천마대승상은 품에 독비(毒匕)를 하나 지니고 있었다. 잠룡비(潛龍匕)라는 것으로, 날에 칠보추혼산(七步追魂散)이 발라져 있다. 그것을 그에게 전한 사람은 바로 마황야. 마황야는 대막(大漠) 팔천 리를 정복하는 그 날, 승리를 기념하며 잠룡비를 천마대승상에게 전했다. 천마대승상은 그것을 자신의 서재(書齋)에 보관해 두고 있었는데, 이 날은 그것을 품에 지니고 나왔다. 그것을 지니고 나온 이유는 하나, 그것으로 심장에 구멍을 낼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승부계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예감이 발달되기 마련이다. 천마대승상은 아침부터 묘한 죽음의 예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는 전패의 보고를 하러 떠나기 직전에 서재에서 잠룡비를 꺼내 품에 넣은 것이다. 만에 하나, 마황야가 죽음을 명할 경우 그것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러서 자결을 하기 위해……. 하지만 죽음의 명은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천마대승상의 자결보다도 더욱 가공스러운 악마의 결정이 내려지게 되었을 뿐이었다. 천마원은 습무에 휘어 감기어 있었다. 유난히도 대기가 차갑다고 느끼어지는 이유는, 마황야의 몸에서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한무(寒霧)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 마황야는 천마대승상의 보고를 들으며 얼굴을 몇 차례고 밀랍처럼 하얗게 물들였다. 악마계의 신, 마도계의 거목들을 집요한 싸움 가운데에 정복했던 자. 그의 눈빛이며 호흡은 본래의 평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이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으음……!" "그가 거쳐 간 곳은… 악마대본영이 손댈 수 없는 장소가 되어 버리는 일이 거듭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구파일방의 기반마저 붕괴되어 버릴지 모르겠습니다." 천마대승상은 비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채……. "그는 풍방(風 )마저 건드렸습니다. 풍방은… 월광무(月光舞)라는 자 휘하에 모였으며, 낙양의 혈풍에 선봉을 섰습니다. 그들과 영웅무정 사이에는 실로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분석되고 있습니다." "그 자들마저……!" 마황야의 숨소리가 사라졌다. 그는 오랫동안 앞을 바라봤다. 이제껏 그에게 보고를 했던 천마대승상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천 명의 결사대를 모으라는 밀지가 마련되었습니다. 모든 분타에서 가장 강한 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영웅무정 일검향을 최우선적으로 암살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듯하기에……."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그것은 덫에 걸리는 일이다! 다수(多數)에 의한 추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덫이오?" "그는 일부러 표적이 되고 있다!" "아, 표적?" "그는 우리들의 힘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스스로를 앞에 내세워 우리들의 순찰 조직을 마비시키고… 또한 마도의 위대한 영웅들을 끌어들여 보란 듯이 격파해 나가는 것이다. 그 덕에 악마의 대업은 그 놈 하나로 인해 철저히 방해당하게 된 것이다!" 마황야의 눈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일대가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영웅무정… 그 놈은 감히 신(神)이 되고자 한다. 어리석은 녀석! 그 놈은 아직도 천하 대세를 모르고 있다." 가공할 기세가 뿜어지며 화원의 꽃송이들이 광풍에 휘말려 버린 갈대잎이나 가랑잎처럼 훌훌 날아올랐다. "신이 되고자 하다니… 나의 천하(天下)에서!" 우지끈－ 꽝－! 마황야가 한 발을 구르는 찰나, 거대한 흙구덩이가 파였다. 지진이 일어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으며, 천마대승상은 꽤 먼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충격을 느끼며 휘청휘청 세 걸음 물러나야만 했다. '역시 마황야시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천추천멸마공(千秋天滅魔功)이다. 십대마학을 익힌 후에야 익히는 천년마학(千年魔學)!' 천마대승상의 장포는 땀에 흥건히 젖었다. 마황야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극강한 마세가 천마대승상의 모공으로 파고들며 그의 호흡을 방해하는 것이다. 마황야, 그는 마도천년 사상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인물인데… 그러한 평판을 들어 부끄럽지 않았다. "신(神)은 죽어야만 한다!" 마황야는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흑(黑), 회(灰), 혈(血), 녹(綠)의 오색마무를 동시에 일으켜 신체를 뒤덮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콰르르르릉－ 쾅－! 대벽력(大霹靂)의 굉음 가운데 모든 것이 뒤흔들렸다. 마황야의 몸이 높이 날아오를 때, 휘청휘청 뒤로 물러나던 천마대승상은 입을 따악 벌리다 못해 머리카락을 빳빳이 일으켰다. "설마… 천마화(天魔花)를?" 부르르……! 그의 전신이 격렬히 떨리기 시작했다. "천마화를 피어나게 하시고자 결정하셨단 말씀입니까?" 천마대승상은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다. "아… 아니 되십니다. 그것은……!" 마계제일비밀사(魔界第一秘密史). 암호명(暗號名)… 천마화(天魔花).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말며, 생각하지도 말며, 호기심을 가져서도 아니 된다. 천마화에 대해 거론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척살된다. 천마화는 마황야가 지니고 있는 최후의 비밀마병(秘密魔兵)을 뜻한다. 그것은 한 인간의 이름이며, 그 인간의 출현은 전 마도(魔道)와 전 백도(白道)를 포함한 구주팔황 무림계의 운명을 뒤바꾸어 버리는 최후의 운명이 된다. 천마화, 피어나서는 아니 되는 악마의 꽃이다. 마황야는 격분한 나머지, 그 꽃을 피어나게 하는 것일까? 깊디깊은 지하(地下) 밀실(密室) 안이었다. 밖에서는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끔 안쪽에서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곳. 다른 지하 밀실과는 달리 매우 기분 좋은 향기가 흐르고 있는 곳이다. 하나의 옥침상이 놓여 있으며, 그 둘레에는 여덟 개의 금은향로(金銀香爐)가 여덟 개의 연화대 위에 놓여져 있다. 네 개의 향로는 금섬로(金蟾爐)이고, 네 개의 향로는 은룡로(銀龍爐)였다. 쓰으으… 쓰으으……! 향로 안에서 무엇이 타오르는지 모르나, 여덟 줄기의 향무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한 숨만 마신다 하더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러한 향기. 용뇌마혼향무(龍惱魔魂香霧), 자하음신무향(紫霞陰神霧香), 천세악령환향(千歲惡靈幻香), 귀령마계비향(鬼靈魔界秘香)……. 특수한 약방문(藥方文)에 따라 제조가 된 여덟 종류의 악마향이 여덟 개의 향로 안에서 동시에 타오르는 것이다. 침상 위, 누군가 누워 있다. 병이 깊어 보이는 하나의 여인. 소복(素服)을 걸치고 있으며, 두 손을 깍지끼듯 끼어서 배꼽 위에 올려놓고 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여인은 두 눈을 물끄러미 떠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으나, 두 눈의 초점이 모여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딘지 모르게 백치(白痴) 같아 보이는 여인이다. 나이는 이제 열여덟에서 아홉 정도이며, 전신의 발달이 냉요(冷妖)하고 뇌쇄적이다. 입가에는 의미 없는 미소가 머금어졌으며, 파리한 입가에는 귀기(鬼氣)와 요기(妖氣)가 흐르고 있다. 삼단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어깨를 덮고 있으며, 매우 얇은 백색 궁장인지라 앞가슴의 융기가 감추어지지 않았다. 옷을 찢고 튀어나올 듯이 발달이 된 두 개의 젖가슴.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고 토할 때마다 가슴이 가볍게 출렁거렸다. 신(神)이리라. 인간이라면 이렇듯 완벽(完璧)하지 않을 테니까. 있어야 할 곳에 박히어 있는 두 눈과, 더 이상 높아서도 아니 되고 더 이상 얕아서도 아니 되는 콧날과, 그렇게 다물려 있지 않다면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을 단순호치(丹脣晧齒), 희고 긴 목덜미에 창백한 피부빛. 그녀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 순간, 하나의 그림자가 안개를 헤치며 침상 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황금색 전포(戰袍)를 걸치고 있는 자. 허리에는 구룡옥황혈대(九龍玉皇血帶)를 두르고 있으며, 신발로는 십색주(十色珠)를 꿰어 만든 운룡보혜(雲龍寶鞋)를 신었다. 밀랍같이 차가운 뺨에 싸늘한 빛을 흘리고 있는 두 눈. 그 눈은 바로 천마의 눈이었다.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는 금포중년인은 뒷짐을 진 채 침상의 여인 곁으로 다가갔다. "어떠하냐?" 그의 입술이 가볍게 벌어지며 차가운 목소리가 시작된다. 두 눈에 꿈결을 떠올리고 있던 여인은 그 목소리를 듣자, 표정 없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아… 아버님이십니까?" 너무나도 희미하며, 그러면서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색이었다. 여인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성욕을 느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외부로 강하게 타오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파고드는 신비하며 온유한 아름다움이었다. "기분이 아주 이상합니다. 저의 몸이… 무게 없는 허공(虛空)이 되어 훌훌 날아오르는 듯합니다." "그것은 제일경(第一境)에 도달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너는 제십경(第十境)까지 접어들어야 한다. 제일경만 통과한다 하더라도, 너는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끼이는 고수가 된다. 그리고 제오경까지 도달한다면, 아무도 너를 격파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제칠경 이상에 접어든다면, 너의 천마화공(天魔花功)은 고금무적(古今無敵)이 된다. 그리고 제구경 이상이 된다면, 너의 무공은 전지전능해진다." 차갑고 강한 목소리였다. 아아, 바로 마황야! 그가 지하 밀실로 접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누워 있는 여인은 그이 딸이란 말인가? 마황야는 가문(家門)과 사문(師門)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인데, 그에게 하나의 혈족이 있다니? "너는… 강(强)해져야만 한다. 나의 딸이기에……." "아… 아버님, 저는 무인(武人)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저의 숙명(宿命)을 아버님께 알아듣기는 했으되, 두렵습니다. 제가 어찌… 타인의 피를 제 손에 바르겠습니까? 저는 가랑잎 한 장이 떨어지는 것만 보아도 눈물이 흘러 나오는 바보 계집인데……."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백치미가 가득한 눈빛이 흐려진다. 한 방울의 눈물(淚)… 여인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과거(過去)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며 고독하게 살고 싶습니다. 소박하게 온순하게… 아아, 지금 저의 입장은 하나의 악몽(惡夢)처럼 두렵습니다!" 순간. "심마(心魔)다. 너는… 나약해진 것이다. 너는 위대한 악마의 딸이다. 너는 네 자신의 정체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마황야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갑고 단호했다. 인성이라고는 아예 배제되어 버린 악마의 음성이었다. 마황야는 백치여인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면서 품속에서 하나의 약병을 꺼냈다. 핏빛 액체가 그득 고인 약병이다. 마황야는 그것을 친히 여인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이것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너는 사흘 안에 천마제오경(天魔第五境)까지 초월해서 돌입하게 될 것이다!" "무… 무섭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든 그러하다." "아……!" "너는 곧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피와 죽음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될 것이다!" "……." 약병이 기울어졌다. 향기가 짙은 혈액수는 여인의 입술 사이로 꿀꺽꿀꺽 흘러 들어갔다. "네게 속성대법(速成大法)을 시전할 작정이다. 몇 가지 초식만 배운다면… 너는 즉시 마도 제이의 고수가 될 것이다!" "……." "너는 일 년 안에 나의 경지를 능가하게 될 것이며, 악마도의 천년염원을 이룩하는 유일한 존재가 될 것이다. 불멸불사지체(不滅不死之體)로 화할 것이고… 환우를 지배할 것이다. 나는 못했으되,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으음……!" "훗훗… 일단 네게 하나의 기회를 주겠다. 피(鮮血)와 접할 기회! 너는… 백도제일인을 네 손으로 죽이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 너는 정녕 짜릿한 쾌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피와 죽음에 대해 익숙하게 될 것이다!" "으으… 으으……!"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익숙해지면 공포스럽지 않다. 자아, 이제 깊이 잠들라. 너는 꿈 속에서 천마백팔품(天魔百八品)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너를 돕겠다. 아니, 이것은 네 스스로 만든 너의 숙명이다. 너의 자질은 천하제일이니까. 이것은 너의 운명이다.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콰아아－ 콰아아－! 마무가 짙게 퍼진다. 그리고 진정 공포스러운 하나의 운명은 시작되고 있었다. 악마의 운명, 그것은 없어서는 아니 되는 마지막 운명이다. 진심으로……! 휘류류륭－! 무시무시한 광풍이 지하 밀실 내부를 꽈악 메우고 있다. 대체 어디서 불어닥치는 바람이란 말인가? 사면의 벽에는 문(門)이 있기는 하되, 창(窓)이라는 것은 아예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서 석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니? 시꺼먼 바람 줄기는 점점 가공스러운 기세로 화해 갔으며, 어느 순간부터 석벽에 거북이 등가죽처럼 균열이 벌어진다. 날을 파랗게 세운 도끼(斧)로 내리찍는다 하더라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는 금강혈석벽(金剛血石壁)인데, 실로 가공스러운 마경(魔勁)이 들이 덮쳐 가면서 금강혈석벽에는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창이 전혀 만들어져 있지 않은 지하 밀실. 바람(風)은 하나의 침상 위에서 시작이 되고 있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공허한 눈망울에, 두 손은 깍지를 끼어 배꼽 언저리에 살포시 얹어 놓고 있다. 핏빛 꽃잎이 빼어 물려 있는 듯한 도톰한 입술에 오똑한 콧날. "……!" 완전히 정지(靜止)된 숨결이다. 너무나도 깊이 가라앉은 호수(湖水) 같은 여인. 한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신체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치미(白痴美)를 느끼게 하는 미인의 전신 팔만사천(八萬四千) 모공(毛孔)에서는 자욱한 흑무(黑霧)가 피어 오르고 있었으며, 그 검은 안개가 허공에서 뭉쳐지면서 그녀의 몸 둘레에서 실로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콰아아－ 콰아아－! 대벽력(大霹靂). 천지혼돈(天地混沌)이 시작되던 그 순간 같은 격렬한 소음이 석실 안을 휘어 감기 벌써 칠 주야(晝夜). 백치미인의 얼굴은 굵은 땀방울에 뒤덮여 가고 있었다. "……."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으며, 신체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호흡 소리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여인의 몸뚱이에서는 실로 무시무시한 기세의 암경(暗勁)이 폭사되어 나왔으며, 그 힘은 점차적으로 강화(强化)가 되었다. 흑수정(黑水晶)의 벽이다. 정방형(正方形) 석실의 위쪽 천장 한가운데에는 새까만 흑수정 판 하나가 박히어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빛의 조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어두운 데에서는 밝은 쪽이 환하게 보이며,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곳을 전혀 볼 수가 없다. 그 곳, 언제부터인가 아홉 명의 인물이 머물러 있었다. 전신을 혈포로 칭칭 휘어 감은 자가 의자를 놓고 앉아 있으며, 그 맞은편 자리에는 고동색 장포를 걸치고, 봉황관(鳳凰冠)을 쓴 노인들이 머물러 있었다. 아홉 사람은 하나같이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마황야, 그리고 마황야만이 진실된 신분을 알고 있는 악마팔대성의(惡魔八大聖醫)들이 아닌가? 우르르르릉－ 콰쾅－! 무시무시한 폭음이 계속될 때 마황야의 입술이 오랜만에 떼어졌다. "대법(大法)의 시전이 어딘지 모르게 장해를 받고 있소. 제원로들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여기오?"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이다. 마황야는 강철로 깎아 만든 조각(彫刻)처럼 머물러 있었다. 팔대성의들은 그의 말에 숨소리를 낮추었으며, 그들 가운데 서열(序列) 일 위(位)이며, 또한 장로원(長老院) 제이장로(第二長老), 그리고 약왕당주(藥王堂主)이자 대호법군사전(大護法軍師殿)의 제이좌(第二座)에 올라 있는 묘강철수마의(苗疆鐵手魔醫)가 넙죽 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천마제오경(天魔第五境)까지 돌입하는 데 난항이 거듭되는 이유는 모름지기… 심마경(心魔境)에 있습니다!" "으음……!" "잔마경(殘魔境)에서 음마경(陰魔境), 그리고 살마경(煞魔境), 화마경(火魔境)의 네 단계는 무사히 통과하였으되… 심마경에 돌입하며 주화입마(走火入魔)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 "심마경의 강한 유혹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다분히 복합적일 것이되… 속하들이 판단하건대, 하나의 결정적 원인이 있다고 사려가 됩니다. 그것은… 그 어떠한 자(者)의 영상이 천마화주(天魔花主)의 뇌성(腦性)에 깊이 스미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영상?" 마황야의 눈빛이 번쩍 강렬해졌다. 그는 열 손가락에서 무쇠가 부러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꽈악 거머쥐고 있었다. 암호명(暗號名)… 천마화(天魔花). － 말하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기억하지도 말라. － 그 이름을 머리에 떠올리는 자, 악마의 율법(律法) 아래 참살된다. 사대마계제일의 비밀사, 천마화. 아아, 지하 밀실에서 탄생되고 있는 악마혼(惡魔魂)의 정체는 바로 비밀 가운데의 비밀인 천마화란 말인가? 한 덩어리 밀랍을 녹여 뭉친 듯한 여인. 너무나도 아름다우며, 그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지(靜止)되어 버린 아름다움이다. 어떤 부분이든 고친다면, 그녀의 아름다움은 깨어지게 될 것이다. 숨결이며 맥박, 그리고 시선마저도……. 천마화의 모든 것은 정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무공이라고는 일 초(招) 반 식(式)도 알고 있지 못하는 처지에서 초속성(超速成)으로 마인(魔人)이 되어 가고 있었다. "……!" 얼어붙은 듯한 여인의 몸 안에는 천년공력(千年功力)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영약(靈藥), 단약(丹藥)이 들어가 있는 상태이고… 백팔(百八) 교두(敎頭)의 격체전력(隔體傳力) 가운데 그것이 한꺼번에 격발이 된 상태였다. 만에 하나, 그 기운이 안으로 갈무리된다면… 그녀는 가공스러운 신체를 지닌 채 깨어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밖으로 터져 버린다면… 그녀의 몸뚱이는 한순간 재로 화하고 말 것이다. "위험합니다!" 묘강철수마의가 사색이 되어 말할 때였다. "본좌는 믿는다. 저 아이가 심마와의 싸움에서 이길 것을! 저 아이의 머리 속에 어떠한 자의 그림자가 있든, 그 자는 극복될 것이다. 저 아이는 천 년 만에 하나 태어난다는 악마성혈(惡魔聖血)을 타고났으며… 천마옥골지체(天魔玉骨之體)이다." 마황야는 입술을 질겅 씹었다. 바로 그 순간, 무엇인가 폭발하듯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하늘과 땅이 하나로 합쳐지며 모든 것이 와해되어 버리는 듯 굉음이 터져 나오며, 흑수정 벽마저 쩌억 갈라졌다. 그리고 흑수정 파편들이 허공으로 튀어오르는 가운데, 시꺼먼 바람 기둥이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흑무가 짙게 번져 나가며 사이(邪異)한 기운이 사방으로 흘러 나가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와류(渦流)를 형성하며 모든 것을 휘말아 버렸다. 보라! 우지끈－ 콰쾅－! 무엇인가 치솟아 오르는 가운데 거석(巨石)이 바수어졌고, 머리통만한 돌덩어리가 퉁기는 가운데 호리호리한 그림자 하나가 표표히 날아 내리는 것을……! 슷－! 부공비행(浮空飛行)이라니? 무공이라고는 일 초도 시전하지 못했던 여인이 초상승 경공인 부공비행을 쓰다니? "……!" 너무나도 의미가 없는 눈빛이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우수가 표정에 짙게 배어 있었으며, 실로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진 채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사박사박……! 요염한 그림자는 마황야 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으으… 으으……!" 마황야는 그답지 않게 전율하는 가운데, 열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드세게 거머쥐었다. 황금으로 만든 용두(龍頭) 모양의 의자 모서리는 일순 박살이 났으며, 바로 그 순간 마황야의 입이 활짝 벌어졌다. 웃음(笑),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프핫핫핫… 드디어… 드디어 천마제오경(天魔第五境)에 돌입했구나. 프핫핫… 그래, 너는 역시 나의 딸이다. 내가 이루어 냈듯이, 너도 이루어 낸 것이다! 프핫핫……!" 마황야의 앙천대소는 다시 한 번 격변을 일으켰으며, 그 소리에 실린 무시무시한 잠마음살기(潛魔音煞氣)는 팔대마의들의 고막을 찰나적으로 창호지 찢듯이 찢어발겼다. 팔대마의들은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꾸고 고막이 타 버리는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벌렁벌렁 나뒹굴었다. 마황야의 웃음소리는 더욱 오랫동안 계속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백치미를 지닌 미인의 입술이 떼어지는 순간, 사르르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도 애처로운 웃음 가운데 여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피(血)은 싫습니다. 진심입니다. 이것은 저의 숙명(宿命)이 아닙니다, 아버님!" "……." 눈물이 흐르다니? 천마화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다니? 비정하고 잔혹한 냉혈율(冷血律)을 창조한 마황야 앞에서 감히 울음소리를 낸 인물은 없었다. 한데 그녀는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검(劍)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아버님을 휘어 감은 야망(野望)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 "이 세상의 모든 병장기를 없애 버리고 싶습니다. 아버님의 야망과 더불어……."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이다. 마황야는 묵묵히 그 소리를 들었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역시 일세의 거인이었다. 그는 상상 밖의 말을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피를 좋아하는 인물은 없다!" "아……?" "다만 피를 흘려야만 천 년 간 이룩되지 않았던 대업(大業)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것이다!" "대… 대업이오?" "그것이 바로 숙명이다. 그 이상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생각할 필요도 없다!" "으으음……!" "피를 혐오하든, 좋아하든,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너는 본좌의 진정한 후계자이며… 너의 혈관(血管) 가득 악마무림의 명예로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 "너의 선모(先母)는 이 날을 위해 내게 몸을 바쳤다. 훗훗… 사실, 너의 선모는 병사한 것이 아니다." "그… 그럼……?" "죽었다. 바로 이 손 아래!" 마황야는 불쑥 오른손을 내어밀었다. 얄팍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주는 손이다. 그 손 아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인의 천령개(天靈蓋)를 뭉개뜨렸었단 말인가? "흐으으… 흐으으……!" 천마화주의 숨결이 흐트러질 때. "그녀는 마혈지주(魔血之主)였고, 나는 성혈지주(聖血之主)였다. 나는 그녀의 정체를 모르고 그녀를 아내로 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를 아는 순간, 그녀를 때려죽인 것이다. 어린 너를 꼬옥 안고 있던 그녀를……!" 실로 무자비한 말이었다. 딸에게 자신이 딸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말하다니? 평범한 문가(文家)에서는 도저히 거론되지 못할 말이었다. 그러나 마황야는 그 말을 서슴지 않고 토해 내고 있었다. 그는 몇 마디의 말로 천마화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웃으며 죽었다. 왜냐하면, 네가 있기에… 그녀의 꿈을 이룩해 줄 네가 있기에……!" "악… 악마! 악마!" "그렇다. 악마다. 본좌가 그러하고, 너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숙명이다!" 실로 무자비한 말이었다. 석화의 어머니, 그녀는 마도 사상 가장 위대한 혈통을 타고난 여인이었다. 사대마계의 우두머리인 금강마계(金剛魔界)의 적손인 혈혼미랑이 바로 석화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혈혼미랑(血魂美娘)은 너무도 아름답고 사악한 심성을 지닌 여인이었다. 하나 금강마계의 종사는 그녀가 태어나는 날, 대를 이을 남아를 얻지 못했다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혈혼미랑, 그녀는 실로 놀라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하나의 기둥을 만들어 금강마계에 바치려 했던 것이다. 혈혼미랑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기남아를 찾아나섰으며, 그 남자의 피를 이어 받은 하나의 기재를 만들어 금강마계의 대통을 이으려 했다. 그 소산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석화였다. 씨내리가 된 기남아는 나중에 그 까닭을 알고는 대노해 그녀를 일 장에 격살했으며, 그것을 기화로 야망을 이루기 위해 사대마계에 투신을 했고… 끝내 마황야의 지위에 앉을 수 있었다. 아무도 정체를 모른다는 마황야, 그 배후에 한 여인의 집요한 집념이 숨어 있다는 것은 천하가 모르는 비밀이었다. 마황야는 차갑고도 단호한 표정을 이어 나갔다. "오늘 이 자리가 이룩되기 위해 십칠만이 죽었다. 그리고…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한다. 어쩌면… 오십만이 죽을 수 있다." "흐으으… 흐으으……!" "너는 숙명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너의 숙명이기에……!" 마황야는 천천히 일어났으며,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귀밑 머리카락은 눈처럼 희어지고 있었다. 그는 천마화를 제오경까지 끌어올리는 가운데, 자신의 진원지기를 절반 가량 소비해 버린 것이다. "네 스스로 알게 되리라! 너의 숙명을……!" "……." "일단, 하나의 일을 맡기겠다. 신(神)을 자처하고 있는 한 명의 이단자를 척살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는… 네 손에 꼭 죽어야 할 사연이 많은 자이다." 마황야는 지친 듯한 자세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천마화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기만 했고. "자세한 것은 금합(金盒)에 담기어 있다. 죽을 자의 이름과 신분을 비롯한 모든 것… 그리고 그 자를 죽이는 방법……." "으으… 으으……!" "네가 해야 한다!" "어이해… 어이해 내가… 내가 피를 뿌려야 하지요?" "그것은…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 할 수 없다니요?" "나는 이미 칠 년 전부터 마약(痲藥)을 먹어 왔다. 오장육부는 썩었고, 팔다리는 지난해부터 흐물흐물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사실, 휘하 가운데 그것을 아는 자가 단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벌써 나의 자리는 반역자들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마황야는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지금 이 순간처럼 그의 뒷모습이 처량하고 왜소해 보이기도 처음이리라. 깨어난 마도의 마지막 숙명, 천마화. 그 꽃은 정녕 잔혹한 피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인가? 한 장의 초상화. 둘둘 말리어 있는 초상화는 섬섬옥수(纖纖玉手)에 의해 조심스럽게 풀리어졌다. 희미하며 여린 손길이다. 꽃가지 하나도 제대로 꺾지 못할 듯이 보이는 손길 가운데 초상화를 둘둘 말고 있던 홍사(紅絲)가 풀리며 초상화는 활짝 펼쳐졌다. 가로가 한 자, 그리고 세로가 세 자에 달하는 초상화이다. 그 안에는 하나의 인물 형상이 담채화(淡彩畵)로 그려져 있는데, 신체의 모든 부위가 너무나도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우뚝한 콧날, 장부의 기개를 짐작케 하는 강인한 입매……. <암살(暗殺) 서열(序列) 제일위자(第一位者). 영웅무정(英雄無情) 일검향(一劍香). 본명은 천유성(天流星)으로 추측이 됨. 출신은 천년세가(千年世家)로 일컬어지는 유성세가(流星世家). 나이, 불투명. 성격, 지극히 단호하면서도 예측하기 힘든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 "이 얼굴은… 으으, 대체 이럴 수가……?"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손길이 바람을 만난 국화 가지처럼 흔들렸다. "이 사람은 바로… 바로 유성이다. 아아, 바로 그다. 언제나 나의 머리 속에 매암돌았던 인물… 바로… 바로 이 사람이다!" 숨결이 거칠어졌으며, 그녀의 손등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꽤나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된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으며, 붓을 들어 초상화의 한부분에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초상화에 필(筆)을 가하는데, 실로 놀랍게도 그의 두 눈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진짜 눈처럼 깊은 의미를 간직하게 되었다. "그래, 바로 이러한 눈빛이었다. 이 사람은… 바로 이러한 눈빛을 내게 던지며 다가왔었다." "운명이라고? 이것이 운명이라고? 호호호…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미친 웃음소리이다. 그리고 그 날, 천마원에서는 하나의 핏빛 선이 너무나도 빠르게 날아올라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第3章 승부(勝負)의 미학(美學) 그 날, 팔월(八月)이 진홍(眞紅)의 가을로 접어드는 날이었다. 그는 아침에 도박장에서 마작(麻雀)을 했다. 그는 십팔나한(十八羅漢)의 패(牌)를 쥐었으며, 그 덕에 육십 점(點)을 딸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그의 호주머니에는 군자금(?)이 두둑해질 수 있었고, 그 결과 말술(斗酒)을 들이마실 수 있었다. 태양혼(太陽魂).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가장 뛰어난 마도 기재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는 성년이 되면서 도태해 버렸으며, 두 달 전부터는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의(魔醫)들이 무수히 그를 진맥하였으나, 그의 뇌호혈에 난 커다란 종양을 녹일 비방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폐인으로 낙인이 찍혔으며, 마황야의 명령을 받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순찰호법들마저 그의 언저리에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 더 이상 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 태양혼은 철저하게 썩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폐인이 되어 세월을 보낸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제정신이었다면 벌써 영웅무정 일검향의 손 아래 죽었을 것이 아닌가? － 돌아가자. 더 이상의 변화는 없다.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솟구쳐 올랐다. 지붕 위에서, 암석 뒤에서, 화단의 그늘 아래서……. 썩은 짚단 속에서 그림자가 하나가 솟구쳐 오른 후, 더 이상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 무렵, 태양혼은 죽간 하나를 둘러멘 채 호숫가로 다가갔다. 갈대가 우거진 호숫가, 그는 주호 모가지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에는 죽간을 쥔 채 낚시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순간, 그의 눈빛은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호수 바닥, 기묘한 수공(手功)을 써서 은잠해 있는 자가 있으며… 그는 수중전어술을 써서 그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황야에 대한 비밀 정보, 영웅무정에 대한 소식, 폭풍혼의 죽음으로 인해 악마대본영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까지……. 태양혼은 폐인이 아니었다. 그의 저력은 이미 마황야의 예속세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을 뿐이지, 죽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바람이 갈대 허리를 일제히 눕혀 버린다. 달빛은 호수를 커다란 거울처럼 반짝이게 했으며, 짙게 다가서는 야무(夜霧)는 그의 하반신을 휘어 감았다. 그의 살결은 병적일 정도로 희었다. 그는 자신의 타락을 증명하기 위해 매일 세 냥 무게의 독액(毒液)을 마시고 있었다. 안색이 나빠지고, 숨결이 거칠어지며, 입술을 벌릴 때마다 썩은 내음이 나게 하는 지독한 마약을 먹어 가며 마도 순찰들의 이목을 속이고 있었다. 흐릿한 눈빛이 오랜만에 반짝였고, 그의 호흡은 겨울 북풍보다도 차디차게 변화했다. 옷자락이 풍선 부풀 듯 부풀어올랐으며, 입가에는 그의 본래 표정이 머금어지고 있었다. "때가 무르익어 간다. 폭풍혼마저 쓰러진 이상, 대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태양혼 검문혼, 그는 실로 오랜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진정한 마혈(魔血)을 타고난 인물. 그는 마도계의 신진무사들의 추대를 받고 있으며,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의 숫자는 이미 십만을 넘었다. "그 녀석은… 역시 거인이다. 그 녀석은 아무도 하지 못한 기적을 이룩하고 있다. 하나, 놈은 쓰러질 수밖에 없다. 마황야는 전면공격으로는 쓰러뜨리지 못할 인물이다. 놈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의 뇌리로는 하나의 인물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인물 가운데 그가 가장 친한 인물로 여기고 있는 인물. 그리고 그가 가장 큰 적으로 여기고 있으며, 운명의 적이자 친구로 여기고 있는 자. 천유성! "내가 여자였다면 너를 유혹하기 위해 천하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걸쳤을 것이고, 너와 내가 같은 문사였다면 너를 찾아가 백 일 밤을 세워 가며 세상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하나… 검(劍)이 갈라 놓았다. 우리 둘은… 검이라는 차가운 녀석에 의해 반으로 갈라졌다. 어리석은 친구… 그것이 운명인가 보다." 검문혼은 다시 흐릿한 눈빛으로 되돌아 갔다. '놈은 죽는다. 신이 아닌 이상! 그러나… 놈을 존경하는 나의 마음만은 영원할 것이다. 놈은 승부에서 미학(美學)을 찾고 있다. 어리석은 놈! 승부에는 미학이 없다. 있다면, 최후의 승자에게 돌아갈 축배(祝杯)의 잔(盞)이 있을 뿐이다.' 이 밤, 검문혼의 맹세는 완벽해지고 있었다. 가장 뛰어난 예감을 지니고 있는 폭풍의 승부사. 그의 머리 속에서는 이십구만(二十九萬) 리(里)를 피로 씻어 버릴 가공할 계략이 성숙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수하들은 하나의 명을 기다리며 무수한 장소에서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었고, 그 일은 조심스러운 가운데 하나의 운명을 창조하고 있었다. 가장 역겨운 혈겁(血劫)의 운명을……! 사각－ 사각－! 창백한 손길이 끝없이 움직인다.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풀어 흩트린 백의여인. 그녀는 며칠 전부터 하나의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뭇조각 하나를 구해 화장대 위에 세워 놓고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그것을 목도(木刀)로 세세히 다듬는 일이 그것이다. 상반신만 하던 나무 덩어리는 차츰차츰 작아졌으며, 그러한 가운데 한 인물의 얼굴을 이룩하고 있었다. 콧날이 우뚝하고 입술이 세련된 선을 그리고 있다. 흐트러진 머리결이며, 입가의 단아한 미소마저 생생히 묘사가 된다. 하나, 실로 미묘한 의미를 담고 있는 두 눈만은 완전하게 만들어질 수 없었다. '무서운 눈… 그 눈을 새길 수가 없다.' 잘강－! 장미 입술에 피가 맺힐 정도로 세게 다물리어졌다. '그의 눈을 새기지 못한다는 것은… 나의 한 조각 마음이 그에게 제압되었다는 뜻이리라.' 핏빛 나비의 여인 혈접혼, 그녀는 구 일 전부터 그의 형상을 조각으로 깎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그의 영상에 휘감기다 못해 하게 된 결심에 따른 일이었다. － 내 마음을 훔친 그 자를 죽이기 전에는 검을 쥐지 못한다! 감히 나의 옷을 찢고 나를 자신의 첩이라고 모독한 자. 그 자를 죽이기 이전, 일단 나의 가슴에 남아 있는 더러운 앙금을 씻어 버려야만 한다! 그 다음, 그를 죽이겠다! 혈접혼은 천유성을 잊기 위해 천유성의 조각을 깎고 있었다. 그녀의 목도술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천유성의 얼굴과 상반신은 거의 완벽하게 재현이 되었다. 그 섬세한 조각술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정교했는 바, 그녀 주변을 감도는 인물들도 그것만은 인정하고 있었다. 보라! 그녀의 주변을 유령처럼 매암도는 그림자들을. 그들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침묵의 눈빛만을 띤 채 그녀의 주변을 살피고 있을 뿐이다. 기환마계(奇幻魔界)에 속한 무사들. 그들에게 있어 혈접혼은 우상 같은 존재이다. 비록 소수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강하고 독랄했다. 혈접혼이 반 유폐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 권위가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이리라. 사각－ 사각－! 혈접혼은 입술을 깨물어 가며 조각을 깎았다. '다 만든 다음, 일 장에 부수리라! 그리고 그 날 벽에 걸어 둔 애검을 끌러 내릴 것이며… 그 순간, 천유성은 애검에 피를 바르게 되리라.' "죽여 버릴 테야.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혈접혼은 악마성에 가득 찬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매는 잔혹해 보이지 않았다. 무엇인가 부족해 보이는 눈빛이며, 웃음소리 가운데 배어 나오는 애틋한 한숨 소리……. 혈접혼은 이전과 다른 여인이 되어 있었다. 매일 이십 번 넘게 죽이겠다고 맹세하는 대상자로 인해 그녀는 작고 왜소한 하나의 여인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바보처럼 기다릴 줄만 알고… 여장부답지 않게 한숨과 눈물을 쏟게 되다니……. "죽일 테야… 악마!"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정말이야. 너를 베어 버릴 테야. 너의 심장을 가르고 뜨거운 피를 분출케 할 테야!" 지리한 장마가 끝난 지 꽤 여러 날 만에 다시 폭우(暴雨)가 퍼부어졌다. 장대처럼 내리꽂히는 빗줄기는 시원하게 여겨지기보다 뼛속으로 저미는 한기(寒氣)를 느끼게 했다. 이미 계절은 가을(秋)로 접어들고 있는 것일까? <산서비단(山西秘團) 격파당함. 흉수들은 풍방(風 )의 이백 인자들. 죽은 자의 숫자는 일흔다섯. 그러나 하나같이 타주(舵主) 이상의 인물들인지라, 산서비단은 유지될 수가 없음!> <철마령(鐵馬嶺) 마검훈련부(魔劍訓練部) 격파당함.> ……. 풍운은 계속되고 있었다. 지리한 싸움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피의 행진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적감이 감돌고 있었다. 수천 명의 특급고수들로 이루어졌던 영웅추적군(英雄追跡軍)은 소문 없이 해산이 되어 버렸으며, 악마대본영은 변황(邊荒)으로 대철수를 하기 직전처럼 문하제자들의 거동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랴? 영웅무정 쪽에 거처가 노출이 된 대소거점은 모조리 봉파(封派)되어 버렸으며, 보름 사이 최소한 구만여 무사들이 각기 삼천 리 이상 이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하나의 지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암중에 집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철저한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악마대본영이다. 상부자는 하부자들을 알아도, 하부자들은 상부자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전서구(傳書鳩)나 암호를 통해 전달이 된 명령에 따라 행동을 할 뿐이다. 구만여 무사들의 이동, 그 일은 실로 은밀하게 거행이 되었다. 그 일을 명한 사람은 마황야 본인이었으며, 그는 무사들이 왜 한 곳에 모여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연산(燕山) 쪽으로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큰 무리는 오천(五千)이고, 작은 무리는 일이백(一二百) 정도입니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군마(群魔)들의 숫자는 이미 구만사천(九萬四千)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 자들은 거의 중원의 대소거점을 차지하고 있던 자들이며, 출신은 하나같이 변황무림계(邊荒武林界)입니다." 고검랑은 야릇한 흥분감을 느끼고 있었다. 미소가 드문 대인자 고검랑. 한데 그가 며칠 전부터는 실없는 웃음을 풀풀 흘리고 있었다. "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자들은 결국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 이제까지 물바다로 변해 가는 이름 없는 산사의 뜨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천유성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의 판단과는 완전히 다르군." 그의 눈빛에는 어딘지 모를 한광이 저미어 들고 있었다. 문득 고검랑은 기이한 한기(寒氣)에 사로잡혔다. '주공은 어떠한 경우에도 온기(溫氣)를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분인데… 한기를 일으키시다니……?' 고검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유성을 바라봤다. 천유성은 그에게 오른쪽 얼굴을 보이고 있는데, 그의 시선은 대지(大地)에 집중되어 있다가 허공으로 돌리어지고 있었다. 우르르르릉－! 천지개벽의 직전처럼 하늘은 몸부림치고 있었다. 먹장구름은 산사의 처마 끝에 걸릴 듯이 가라앉았으며, 뇌성(雷聲)은 들리지 않되, 푸른 섬전(閃電)은 문득문득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의 세력은 천 년에 걸쳐 이루어졌네. 그리고 그 세력을 하나로 일통한 자는 나를 능가하는 병법(兵法)을 갖고 있는 마황야이지. 그는 반년에 걸친 격전 가운데 오직 일 성(成)의 세력을 잃었을 뿐이네." "오직 일 성이오?" "사대마계는 너무나도 거대한 거목(巨木)이지. 나는 그 거대한 나무의 잔가지 몇 개를 잘라 낸 정도에 불과하네." "으음……!" "기실 천하 대세(大勢)를 좌지우지하는 무림 대승부(大勝負)는 여타한 병전(兵戰)과는 달리 무사들의 수(數)에 따라 결정이 되지 않고, 절정고수(絶頂高手)들의 수에 의해 결정이 되네." 천유성은 이틀 간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그 사이, 자신의 휘하에서 전해 온 수백 장의 밀지를 한 장 한 장 세세히 읽은 후였다. 그의 번뇌는 그 후부터 시작이 되고 있었다. "절정고수의 숫자에 있어 마황야가 이끄는 악마대본영은 백도를 월등히 능가하고 있네!" "아……?"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마황야의 거처를 추적해 가서 그를 척살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네. 만에 하나, 세력의 균형이 약간이라도 깨어지게 되는 날이면… 진짜 많은 피가 흐르네." "균형이라니요?" "마도(魔道)는 일통되어야 하네. 마황야가 비록 언제고 내 손에 죽을 자이기는 하되, 당분간은 그가 악마대본영의 지존(至尊)으로 머물러 있어야 하네. 그가 물러나거나 암살당한다면… 모든 것이 붕괴되네." "암살이오? 주인 말고 또 누가 그를 암살하고자 한단 말인가요?" 고검랑이 얼떨떨해 하자. "마황야는 내가 두려워서 숨어 있는 것이 아니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거마들의 반역을 두려워하기에 숨어 있는 것이네." "아……!" 고검랑은 그제서야 천유성의 말뜻을 알아차리는 듯했다. 천유성은 습습한 공기를 폐부 깊이 빨아들였다. 그는 우막(雨幕)을 그대로 망막에 투영시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또한 나를 성급히 암살하려 하지 않네. 아마도 그는… 절정의 순간에 나를 죽이려 할 걸세. 그래야만 마황야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을 테니까." "……." "승부에는 법칙이 있지. 그것은 실로 미묘한 율동과 박자를 갖고 있는 것이네. 그것은 가끔 지리하고 권태로운 감(感)을 느끼게 하네. 만에 하나, 그러한 권태감 가운데 좌절하게 되어 냉정을 잃게 된다면… 누구든 자신의 최후패(最後牌)를 성급히 꺼내게 되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무서운 바람이 일어나게 되네.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불끈, 그는 주먹을 쥐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네가 문득 생각이 난다, 철거(鐵巨)!' 천유성은 하나의 거한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좌비위(左臂衛)로 삼아야만 하는 인물. 그 역시 실로 치열한 승부계(勝負界)에 머물러 있는 인물이었다. 가장 고독하고 머나먼 승부의 여정에……! '너는 검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너와 약속을 한 바 있다. 검도를 극복한 다음, 너를 찾기로…….' 천유성의 뺨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바람을 가르고(破風), 소리보다 빨리(超音) 검을 쳐낼 수 있다. 호수의 달 그림자를 베어 버리고(斷月), 폭우의 장막을 검기로 끊을 수 있다. 하나, 단 한 가지 베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늘(天)이다. 아아, 그것을 베어 버리지 못하는 한… 철거, 너와의 승부에서 패자는 바로 나일 것이다. 내가 군림(君臨)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검의 패자가 될 것이다.' 천유성은 두 가지 방면에 승부를 걸고 있었다. 하나는 사대마계와의 천 년에 걸친 격전을 마무리짓는 것, 또 하나는 낭인주에서 맹세한 고금제일검도(古今第一劍道)인 절정극한검도(絶頂極限劍道)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더욱 치열하고도 고독한 싸움은 바로 후자(後者)일 것이다. 타인을 베기는 쉬워도, 자기 자신을 베기는 힘들다. 검을 쓸 수는 있어도, 검을 이해할 수는 없다. 검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검 그 자체가 되기는 불가능하며… 검 그 자체가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검을 완전히 망각해 버리는 최후의 경지에는 도달하기 힘들다. 쏴아아… 쏴아아……! 비가 세차게 퍼부어진다. 아마도 이 비는 꽤 여러 날 계속될 것이다. 일순 천유성의 호흡이 가볍게 끊어졌고,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돌려졌다. "누군가 따라붙었다. 놀라운 일이다. 오십 장 안에 접어든 후에야 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다니… 게다가 일대에 머물러 있는 바람의 형제(風之兄弟)들마저 그가 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천유성은 말소리를 흘리며 허공으로 소리 없이 떠올랐다. 그는 한 줄기 유성이 긴 꼬리를 끌며 포물선을 이루듯이, 대번에 오십 장을 가로질러 숲 안에 이르렀다. 신의 경지에 이른 능공초약(凌空超躍)! 거의 탄지지간에 그는 오십사 장을 돌파한 것이다. 천유성은 비에 젖은 가랑잎을 사뿐히 밟으며 날아 내렸으며, 그의 검미(劍眉)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놓치다니……!" 그의 상반신은 가볍게 휘청거렸다. 그가 이십 장 이전 지역에 이르렀을 때, 하나의 그림자가 숲에서부터 유령처럼 빠져 나간 것이다. 소리도 없이, 그리고 느낌도 흘리지 않고… 그는 천유성을 경악케 하는 경신술을 사용하여 사라져 버린 것이다. 비가 더욱 드세게 뿌리어졌고, 결국 하늘은 푸른 번개와 더불어 뇌성벽력을 토하기 시작했다. 콰쾅－ 쾅－! 삼라만상이 허물어지는 듯할 때, 천유성은 한 곳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가운데 아주 야릇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의 뒤쪽에는 이백여 풍방의 인자들이 병풍처럼 날아 내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하나같이 초긴장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천유성이 돌연 웃음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오랜만이군. 사몽혼을 벤 이후, 이러한 고수자를 만나 보지 못했었는데… 식어 가는 나의 투혼(鬪魂)을 다시 불살라 버리는 자가 있다니… 훗훗……!" 그는 웃으면서 손을 가볍게 쳐들었다. 순간, 바람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추적술을 가지고 있는 풍혼사십구랑(風魂四十九郞)이 휘파람을 길게 뽑아 내며 우막을 찢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을 대지와 거의 평행선을 끌게 하며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는 부풍비각(浮風飛脚)이다. 지형지물이 아무리 울퉁불퉁하다 하더라도 간단하게 돌파할 수 있는 가공스러운 경공술이며, 또한 동영무도 특유의 추적 경신술이다. 파파팟－! 요란한 파공성이 아니라, 작고 경미한 파공성이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가운데 기묘한 행진이 시작되었다. 집요하며 철저한 자, 그는 극히 경미한 흔적을 따라서 천유성의 종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천유성을 역(逆)으로 끌어들였으며, 이백여 풍방의 인자들이 아무리 따라잡으려 해도 그 자는 절대로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하여간 그 어떠한 인물이 천유성을 향해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닷새 넘게 천유성 곁에 매암도는 자. 그는 정확히 오 리(里) 거리를 두고 천유성을 따랐으며, 언제부터인가 천유성이 도리어 그를 쫓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대체 누가……? 하여간 가장 끈끈한 승부는 막을 올리고 있는 셈이었다. 第4章 우리 결혼(結婚)해요 북방지역 또한 폭우에 잠기고 있었다. 대추적은 폭우 속에서 한 번도 중단됨이 없이 이어져 왔다. 사천 리(里), 그리고 칠백사십 리(里)에 걸친 추적. 풍방의 형제들 가운데 경신술이 처지는 사람은 이미 뒤떨어졌다. 풍방의 형제들은 사막을 지나간 대상(隊商)의 흔적을 백 일 후에도 찾아 내는 추적술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풀잎의 밟힌 모습에서, 그 위를 지나간 인마(人馬)의 종류와 숫자를 정확히 가려 낼 수 있으며… 말라 버린 인분(人糞)을 분석하는 가운데 남녀 성별과 출신 지역, 그리고 식성을 정확히 파악해 낸다. 어디 그뿐이랴? 추적당하는 상태의 섬세한 심마 상태마저도 손바닥 위의 손금을 들여다보듯이 정확하게 알아 낸다. 그러나 그 자를 쫓는 것은 지극히 힘들었다. 그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풀잎을 밟고 달려도 풀잎은 꺾이지 않았으며, 며칠 내내 치달리면서도 곡기(穀氣)를 취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경공은 매시진 같은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의 내공은 끝없이 시전한다 하더라도 고갈이 되지 않는 신화경(神化境)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산하(山河)는 비에 잠기고 있었다. 온갖 악천우를 뚫고서 추적을 행하였던 풍방의 형제들이었으되, 빗속을 치달리는 절세고수를 추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나, 천유성은 풍혼사십구랑과 고검랑도 찾아 내지 못하는 지극히 미세한 흔적을 찾아 내어 집요하게 추적할 수 있었다. 고검랑은 천유성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자, 발을 동동 구르며 천리전음술을 써서 말했다. "함정일지 모릅니다!" 쏴아아아… 쏴아아……! 고검랑의 목소리는 폭우 내리치는 소리를 뚫고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천유성은 비에 잠기는 갈대숲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혼신내공을 발휘하고 있었다. 구월(九月)을 삼켜 버리는 홍수 가운데. "아니네. 함정이 확실하다네." 천유성은 천리전음술로써 회답을 하면서 끝없는 선을 끌며 사라져 갔다. 포물선을 끌며 사라져 버리는 유성처럼, 일세풍운아 천유성의 뒷모습은 짙은 비의 장막 속으로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함정이 확실하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추적하시다니……!" 고검랑은 발을 동동 구르며 천유성이 사라진 쪽으로 쉬지 않고 치달아 나아간다. 그와 천유성 사이는 일각마다 삼십 리씩 멀어졌다. 그러나 고검랑은 그도 모르는 사이, 하나의 지역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바로 연산(燕山). 그는 연산을 향해 다가가는 형세였으며, 연산에서 사백 리 남쪽 떨어진 천목진(天木鎭) 어귀에 이르러 천유성의 종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천유성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간 것일까? 그를 유인해 간 인물은 누구란 말인가? 뭉클뭉클 피어 오르는 습무(濕霧). 비는 지난밤으로 말끔히 개었으되, 곡구(谷口) 언저리는 꾸역꾸역 피어 오르는 물안개에 휘어 감겼다. 연산의 지령(支嶺) 가운데 하나인 파천황령(破天荒嶺)의 애검봉(愛劍峯) 어귀이다. 대낮이라 하더라도 햇살이 파고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골짜기로 하나의 헌칠한 고영이 다가서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비가 세차게 퍼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옷자락에는 물기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단정치 못한 머리카락이 산발된 상태로 등줄기를 뒤덮고 있다. 눈빛은 흐릿하고 유연(悠然)하며, 입가에는 의미 짙은 미소가 머금어지고 있었다. 전신에서 신기를 뿜어 내고 있는 약관의 미장부, 그는 애검봉을 쓱 바라보며 검미를 꿈틀거렸다. "흔적은 이 일대에서 끊어졌다. 흠, 그렇다면 이 곳이 바로 함정인 듯한데… 마기(魔氣)는 느끼어지지 않는군." 바로 천유성, 그는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월광무영혼(月光無影魂) 추적술을 발휘해 신비인을 만 리 추적해 온 것이다. 그의 추적술은 월하혼(月下魂)에게서 친히 전수받은 십삼인자술(十三忍者術)의 경지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천년성 안에서 변황계의 절전 절학을 무수히 외웠으며, 종횡천하하는 가운데 그것을 하나하나 깨우쳐 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의 무공은 싸움을 하는 가운데에도 나날이 신장해 나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천유성은 옷자락을 안개 품은 바람결에 펄럭거리며 곡구로 느릿느릿 다가섰다. '함정이라 여겼는데… 마황야가 비장의 패를 꺼냈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천유성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돌연 허공에서부터 한 줄기 목소리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왔다. 까아아아… 까까… 왔다! 드디어… 왔다!" 몹시 듣기 역겨운 목소리였다. "아……?" 천유성은 힐끗 고개를 쳐들었다. 안개가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는 허공에서부터 핏빛 구름 덩어리 하나가 날아 내리고 있었다. "왔다. 별 하나가 왔다. 흐르는 별이 왔다!" 짓궂은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앵무조(鸚鵡鳥)의 목소리였다. "대단한데? 앵무새가 사람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내는 영조라는 것은 아나, 저 정도로 정확하게 사람의 발성을 흉내내다니……." 천유성은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핏빛 깃털에 황금색 부리를 지닌 천축신관무(天竺神冠鵡). 핏빛의 거대한 앵무새는 이십여 장 허공을 빙글빙글 선회하는 가운데, 세 번째의 말을 꺼냈다. "여자(女子)가 부른다. 여자가… 까아아악… 깍……!" 앵무새는 세 살배기 아기가 소리치듯이 소리치다가는 훌훌 날아올랐다. "여자가 찾는다고? 설마… 새 주인이 나를 찾는단 말인가?" 천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는 신형을 가볍게 퉁겼다. 그는 탄궁사일(彈弓射日)의 백도신법을 능숙하게 발휘하고, 활시위에 매겨져 발사가 된 화살처럼 빠르게 곡구 쪽으로 날아들었다. 앵무새는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가는데, 마치 천유성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듯이 천유성이 몸을 날리는 속도와 같은 속도로 비행해 나아갔다. 기이한 골짜기이다. 이름 모를 야화(野花)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다. 달콤하다기보다 상큼한 향기가 풀숲에서부터 피어 오르고 있었으며, 풀잎에 매달린 이슬은 보석보다도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더욱이 골짜기 안으로 접어들고 일 마장 정도 지나가고 나서부터 안개의 흐름이 기묘해지기 시작했다. 천추환상무진(千秋幻像霧陣). 오랫동안 절전된 바 있는 기환마교(奇幻魔敎)의 장안둔진세(障眼遁陣勢)이다. 그것이 애검봉에 펼쳐져 있었다. 앵무새는 여전히 낮게 비행하면서 천유성의 앞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새와 한 명의 풍운아. 그리고 미묘한 순간은 극점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었다. '죽음의 초대인 듯한데… 너무나도 은근하군. 초대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나, 나에 대해 상당한 연구를 한 자임에 틀림이 없다.' 천유성은 팔짱을 낀 채 앵무새가 인도하는 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휘리리리링－! 천유성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의 뒤쪽 허공이 아주 짙은 흑무의 벽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땅에서부터 검은 장벽이 치솟아 오르듯이, 땅 속의 음기(陰氣)와 사요한 기운이 하나로 합쳐지는 가운데 생문(生門)을 사문(死門)으로 뒤바꾸어 버렸다. 천추환상무진세는 들어설 수는 있어도, 나설 수는 없는 진세였다. 정확히 칠백이십(七百二十) 보(步). 천추환상무진을 통과하는 데에는 그러한 숫자의 보수(步數)가 쓰이어졌다. 그리고 천유성은 실로 상상치 못할 하나의 장소에 도달하게 되었다. 대체 어디일까? 보라! 거대한 대리석주(大理石柱)가 쭈욱쭉 뻗어 오르고 있지 않는가? 기둥의 숫자는 정확히 일만이천(一萬二千) 주(柱). 하나하나 십 장(丈)의 높이이며, 아름드리 우람한 굵기이다. 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일만이천 개의 대리석 기둥은 표면에 흠집조차 남지 않았다. 광대한 분지(盆地)를 그득 메우고 있는 대리석 기둥들의 행진. 그것은 하나의 압권이었으며, 천하의 그 어떠한 축조물도 이룩하지 못한 일대장관이었다. 다만 일만이천 개의 기둥은 세워져 있건만, 전각(殿閣)이며 지붕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분지 내는 미완성(未完成)의 대지였다. 곧게 뻗어 나간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청석대로(靑石大路)는 매우 드넓어서 사두마차(四頭馬車) 여섯 대가 나란히 달릴 수가 있다. 일만이천 개의 대리석 기둥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都市)와 같은 거대한 성을 이룩하고 있었으며, 지붕이며 처마는 보이지 않되 제반 기초공사는 마무리지어진 상태였다. 귀부신공으로 만들어진 천 개의 가산(假山)이 있으며, 성숙해(星宿海)를 방불시키는 백 개의 호수(湖水)들이 백련화영렬진도(百蓮花影列陣圖)에 따라 줄지어져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옥류(玉流)가 흐르고 있으되, 옥류의 흐름은 기둥의 뿌리를 건드리지 않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기적이다. 아아, 이러한 도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절정고수가 만 명 이상 동원되었으리라." 어지간한 일에는 표정조차 바꾸지 않았으되, 이번만은 다른 표정에 사로잡히는 천유성이었다. '이것은… 가히 신의 도시이다.' 천유성은 피가 묘하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건축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다. 그는 일만이천 개의 기둥과 천 개의 가산, 그리고 일백 개의 인공호수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풍운도해(大風雲圖解). 그것은 천유성이 풍운대성 안에서 깨우친 바 있는 최후의 기관학이다. 일만이천 개의 기둥은 그것의 기초를 이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 어떠한 세력이 대풍운도해에 따라 건축을 시작하였으며… 제반 기초공사가 마무리지어진 상태에서 대역사가 돌연 중단되어 버린 것이다. "천년성의 절학이 여기서 재현이 되다니… 이것이야말로 무림인들이 꿈에서라도 이루고 싶어하는 가장 완벽한 포진(布陣)이며 기관(機關)이다. 아아, 이것은 비록 미완성이되… 그 웅자가 나타나게 될 경우, 단 백 명으로 천만 대군을 막을 수 있는 철옹성이 이루어지게 되리라. 대체 어떠한 무림세력이 건축학의 전설을 이룩했을까?" 천유성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바로 그 때였다. 띠이이이잉－ 띵－ 띵－! 대체 어디서 들리는 비파(琵琶) 소리일까? 단장곡(斷腸曲)일까? 아니면 야월화조(夜月花調)일까? 여인의 흐느낌 소리 같기도 하고, 짝을 찾아다니며 우짖는 꾀꼬리의 슬픈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듣기 힘든 아름답고도 처연한 가락. 그것은 일만이천 개의 기둥 가운데 한 지점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처연한 매혹의 비파 소리. 그 소리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달려 있는 듯, 천유성의 신형은 둥둥 떠서 비파 소리가 시작되는 곳으로 향해지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 곡조를……?' 천유성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천군만마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도 동요한 바 없던 천유성인데, 비파 소리에 피를 끓이다니……? 띠이이이잉－ 띵－! 애잔하고 처연하며 또한 신비로운 곡조. 그 소리는 엉성하게 세워진 한 채의 석옥(石屋) 안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머물러 있었을까? 그녀는 비파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고개를 살포시 떨군 채 비파를 퉁기고 있었다. 손가락이 정교하게 놀려지는 가운데, 비파현은 고저장단이 기묘한 박자를 이루는 묘한 곡조를 퉁기어 냈다. "……!"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천유성이 꽤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의 왼쪽 어깨 위에는 핏빛 앵무새가 나래 접고 앉아 그녀의 희고 창백한 뺨에 부리를 비벼 대고 있었다. 미완성의 신비 도시 안에 고독하게 머물러 있는 여인은 완벽, 바로 그 자체였다. 전후좌우, 어디에서 보더라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다. 어떠한 미인이든 간에 한두 가지 결점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콧날이 너무 뾰족하여 냉정(冷情)해 보인다던가, 입술이 조금 두터워 선정미(煽情美)와 관능미(官能美)가 너무 짙어서 유심미(幽深美)를 흐리게 한다던가, 가슴이 너무 커서 농염(濃艶)하기는 하되 냉요(冷妖)하게 여겨지지 못한다던가, 키가 너무 커서 남자 같아 보인다던가, 너무 작아서 누이동생을 보듯 다정하게 느끼어지기는 하나 신비한 아름다움은 느낄 수 없게 되던가, 눈빛에 요기(妖氣)가 흐르고 있어 단정치 못한 색감(色感)과 더불어 섬뜻한 충동을 일으킨다던가……. 미란 결점을 수반하기 쉬운 단어이다. 그러하기에 미는 보다 값나가는 단어가 되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여인은 미 하나에 운명을 걸곤 한다. 하나 비파를 퉁기고 있는 여인은 화장도 하지 않고 장식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완전했다. 솟아오르는 한계, 그 곳까지 솟아오른 콧날. 적당히 부풀어오른 뜨거운 장미의 입술. 희고 가는 목덜미에, 투명하여 녹아 버릴 듯한 피부……. 이 세상의 모든 미는 그녀에게 집중이 되어 있었다. 저벅－ 저벅－! 천유성은 보행을 흩트리고 있었다. 강호에 정식 출도한 이후, 이 순간처럼 마음이 동요되기도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그대는……?" 그의 눈빛은 아련한 별빛을 담고 있었다. 대체 이럴 수가? 바로 이 곳에서 그녀를 만날 줄이야……? 천하 정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던 천유성이었으되,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정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그의 피는 용광로 쇳물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석화(石花), 어이해 그대가……?" 바로 석화였다. 운명의 여인 석화.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천하제일 미인 석화가 바로 비파의 여인이었다. 신비하게 사라졌고, 너무나도 갑자기 나타난 석화. 그녀는 천유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후에야 힐끗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처연하였으며, 또한 암울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눈은 더 이상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묘한 요기가 흐르는 눈 가득 천유성의 영상이 투영이 되었다. 석화는 꽤 오랫동안 천유성을 물끄러미 바라봤으며, 도톰한 장미 입술을 벌려 이렇게 중얼거렸다. "우리… 결혼(結婚)해요." 실로 믿지 못할 말이었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 결혼해요. 그래야만이 모든 것이 평화로워집니다. 진심입니다." － 나를 내자(內子)로 맞이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이 환우( 宇)에 일어나는 혈풍우(血風雨)가 멈추어집니다. － 그대, 유성(流星)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나와 결혼하시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와 나와의 결혼은 기이한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분은 반대하시나…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저의 결정을 옳다고 여깁니다! 석화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어디 그뿐이랴? 천유성의 전신 혈관(血管) 속의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대는… 음약(淫藥)을 썼구려?" 천유성의 뺨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석화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무릎 위에서 비파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빛은 애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왜 나의 부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오? 나는 그대가 천하에서 가장 정숙한 여인임을 알고 있소. 한데… 그대가 무림인이었단 말이오?" 천유성은 끓어오르는 육욕(肉慾)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일반 무사라면 아마도 벌써 굶주린 야수가 되어 석화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천색환희산(千色歡喜散). 마교의 물건이다. 지극히 미세한 분량으로 천하의 모든 인간을 환락에 굶주린 탕아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이다. 석화는 천색환희산을 허공에 뿌렸는데, 기실 그것은 비파현(琵琶絃)에 묻어 있다가 비파가 퉁기어짐에 따라 허공으로 확산이 되었던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나를 알고 있을 뿐이며, 둘의 나와 셋의 나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석화의 볼도 붉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뭇사내를 추종자로 둔 바 있는 여인이다. 그러나 천유성만큼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안겨 준 남자는 없다. 또한 지금 그녀 앞에 나타난 천유성처럼 거대해 보였던 인물도 없었다. "하나의 나는 낭인주(浪人洲)의 석화이고……." 석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천천히 초혜(草鞋)를 내디뎠었으며, 섬섬옥수(纖纖玉手)를 살포시 내미는 가운데 기이한 춤사위를 시작한다. 끊어질 듯 가는 허리가 흔들릴 때마다 은근한 향기가 뿌리어진다. 석화는 손에 채대(彩帶)를 풀어 쥐는데, 그것은 그녀의 개미 허리를 꼬옥 졸라매고 있던 허리띠였다. "둘의 나는 풍운세가(風雲世家)의 초령(草玲)입니다. 아십니까? 내가 그대 천유성 공자(公子)의 정혼녀(定婚女)라는 것을……?" 엄청난 사실이었다. 초령군주(草玲君主). 풍운친왕(風雲親王) 주의(朱義)의 딸이 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천 년 영웅팔가의 율법에 따라 천유성의 아내가 되기로 안배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바로 운명의 여인, 석화라니? 사르르… 사르르……! 석화의 춤은 더욱 열정적으로 변화되었다. 몸이 뒤틀릴 때마다 궁장이 매미 허물처럼 흘러내렸다. 동그란 어깨가 나타났으며, 부풀 대로 부푼 앞가슴의 능선이 조금씩 노출되기 시작했다. 터질 듯 도발적으로 솟아오른 육봉이 나타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손가락을 써서 옷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기이한 율동(律動) 가운데 옷을 벗어 버리기에! "천마무(天魔舞)… 그렇다. 이것은 바로 마교천외천식(魔敎天外天式) 가운데 하나인 천마무이다!" 천유성은 일순 눈에서 혁혁한 한광을 폭사해 냈다. 천마사무(天魔四舞). 제일무(第一舞) 태양환희(太陽歡喜), 제이무 우주홍몽(宇宙鴻 ), 제삼무 만접사향(萬蝶死香), 제사무 천마등천(天魔騰天). 마교가 천 년 전에 창안해 냈으며, 지난 천 년 간 그것을 익힌 사람이 없었던 가공하고 포악스러운 무공이다. 석화가 시전하고 있는 춤사위가 바로 천마무였다. 천유성이 그것을 알아차리는 찰나, 석화의 몸 움직임이 보다 빨라지기 시작하였으며… 궁장 상의가 사르륵 벗어지며 그녀의 속살 모든 것이 완전히 노출이 되었다. 너무나도 희고 깨끗한 몸뚱이이다. 또한 팔뚝에 찍혀 있는 수궁사(守宮砂) 핏빛 점이 선명히 나타났으며, 그것은 그녀의 정조를 상징하고 있었다 터질 듯 팽팽한 가슴에 잘룩한 허리……. 여인이라면 아무에게나 자신의 가슴을 보여 주지 않는다. 여인은 자신의 가슴을 보는 남자를 단 한 사람 선택하여 그에게 자신의 모든 숙명을 맡겨 버린다. 석화, 그녀는 천유성을 그러한 남자로 선택한 것일까? 한데 어이해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일까? "셋째, 나는 한 송이 꽃입니다. 악마의 꽃… 바로 마계제일화(魔界第一花) 천마화(天魔花)입니다." 휘리리링－ 휘리리링－! 석화의 몸뚱이는 무수한 분신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넷… 여덟… 열여섯… 서른둘… 예순넷……. 석화의 몸은 수백 개가 되기 시작했으며, 천유성의 몸은 그 무수한 그림자에 의해 포위되기 시작했다. "천마화……?" 천유성의 콧날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요. 나는 천마화예요. 나는 그대를 죽여야만 하는 처지입니다." "으음, 그…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환우의 마계를 지배하는 마황야는 바로… 영웅계(英雄界)의 인물이십니다. 그는 바로 풍운친왕이시며… 나의 아버님이시자 그대의 장인(丈人)십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악마대본영을 이룩한 인물이 바로 영웅팔가에서 천고기재(千古奇才)로 선택된 바 있는 풍운친왕이라니? "그분은 영웅팔가를 무너뜨리고 사마대계를 정복하는 대야망(大野望)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 직전인데, 그대가 방해한 것이지요." 치리리리－ 치리리릿－! 석화는 흐릿한 그림자를 뿌리며 이리저리 움직였으며,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는 더욱 고조되기 시작한다. "그분을 존경하지 않지만, 그분을 도와야만 합니다. 저의 숙명이기에……." 무공이라고는 알지 못하던 석화가 바로 천마화였으며, 본래의 신분은 바로 황실(皇室)의 초령군주(草玲君主)였다. 실로 복잡한 인연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그리도 복잡하고 미묘한 은원(恩怨)이 교차되기도 힘든 일일 것이다. "부디… 나를 아내로 취해요. 그 다음, 마황야의 모든 것을 물려받아요. 그렇다면 혈풍이 사라집니다. 아버님은 그대를 바라지 않을 것이나, 내가 그대를 바라고 있으니……." 석화는 그렇게 말했고, 그 순간 천유성의 옥수가 허공에 단선을 그어 댔다. 음파보다 빠르게 허공을 끊어 나가는 옥수무정식(玉手無情式) 가운데. 팟－! 둔팍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석화의 천화무가 순간적으로 정지가 되었다. "아직 그대는 나의 상대가 아니지. 그리고… 남자들은 자신의 여자가 울며 고민하기를 바라지 않지." 천유성은 손을 끌어냈으며, 순간 석화의 호리호리한 몸뚱이는 그물에 끌려 나오는 물고기처럼 천유성의 손짓에 따라 이동이 되어 천유성의 품속으로 안겨 들었다. 천마무가 멈추어지고, 두 사람의 몸뚱이가 하나로 합쳐진 것은 거의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똑똑한 놈이 아니야. 나는 복잡한 것은 몰라! 다만… 내가 그대를 버릴 수 없다는 것만 알고 있지." 천유성의 입술은 석화의 장미를 훔치고 있었다. "아……!" 석화는 천유성의 강한 포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두세 차례 뒤틀었으나, 그것은 다분히 형식적인 동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천유성보다도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찌익－! 그녀의 치부를 기리고 있던 붉은 천 조각이 붉은 나비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눕히어졌다. 활(弓)처럼 휘어지기 시작하는 나신. 하이얀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여신의 상이 이러할까? 미끄럽게 뻗어 내린 허벅지의 선은 완벽한 직선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 천유성이 농담 삼아 보고자 했던 작고 섬세한 발은 허공으로 살짝 쳐들렸으며… 다섯 발가락 끝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머리카락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나풀거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호흡은 흐느적거리는 수초(水草)의 노랫소리로 화했다. 불붙는 밤이다. 더 이상 뜨겁게 달아오르지 못할 정도로 밤은 달아올랐다. 천유성의 몸 움직임은 천마화를 희열과 고통에 휘어 감기게 했고, 터져 버릴 듯 팽창된 그녀의 젖가슴은 천유성의 탄탄한 가슴에 터질 듯 납작이 눌리어졌다. 우윳빛 살결에 땀방울이 매어달리고, 고혹스러운 숨소리가 점점 고조가 된다. 활짝 열려 버린 몸과 마음의 문……. 아마도 이제는 진짜 신이라 하더라도 그녀를 만류하지 못할 것이다. 저항하지 못할 거대한 힘으로 다가서는 해일(海溢), 그것은 육욕(肉慾)이 아니었다. 육욕이었더라면 그렇듯 가공스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운명의 힘이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 오래 전에 맺어진 사랑의 힘이었다. 토실토실한 젖가슴에 처음으로 애무의 손길이 가해지고, 포도알 같은 유실이 간지럼을 타며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피부에 땀이 흘렀고, 머리카락 역시 점점 땀에 젖기 시작했다. 달(月) 하나, 살짝 구름에 숨어 버렸다. 인적 없는 도시는 두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신방이었다. "……!" "아……!" 입맞춤은 꽤나 길었고, 더욱 정열적인 율동이 시작된다. 풍랑은 보다 격렬해지고, 천유성은 처음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한 유성이 되어 여신의 하늘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끝없이 질주하는 유성처럼……. 그리고 그는 타올랐으며… 바다의 여신 또한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랑에는 미숙함이 없다. 타오른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은 완벽해진다. 열해(熱海)로 끓어오르는 젊음의 밤, 검이며 선혈이며 죽음 따위의 언어는 아예 생각날 수 없으리라. 그저 뜨겁게 태워 버리는 행위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아……!" 그녀는 하나의 악기가 된 듯 흐느낌 소리를 낸다. 비파는 이미 버렸는데, 그녀의 몸뚱이가 바로 비파가 되어 버리는 듯했다. 기이한 율동의 움직임이 시작되며,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성(性)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다 가져요!" 천마화는 눈을 꽈악 감았다. 그녀의 전신 구석구석으로 그의 손길이 다가섰다. 팽팽하기 이를 데 없는 피부는 차츰차츰 긴장의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차갑기만 하던 얼굴 표정에는 묘한 고통과 희열이 범벅되기 시작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여신(女神)일까? 천마화는 아교처럼 끈적끈적하게 밀착되었으며, 천유성은 처음으로 자신이 무사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끊어질 듯 힘차게 당기어진 활처럼 휘어지는 여체. 그리고 두 손은 비단천처럼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교성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어색한 가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남녀의 몸, 미완성의 도시에서 애정은 완성이 되고 있었다. 새벽에 천마화는 흥겨운 콧소리를 내며 오랜만에 머리카락을 단장하며 상큼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그녀는 초야(初夜)를 마친 성숙한 여인이었으며, 자신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미소 가운데 관찰(?)하고 있는 한 명의 영웅을 바로 곁에 두고 있었다. "부끄러워요. 보지 말아요." 천마화는 정향(丁香) 봉우리 같은 혀를 살짝 빼어 물었다. "나만 보나? 석화도 나의 벗은 몸을 보고 있잖아?" "피이!" "핫핫……!" 천유성은 정말 맑게 웃었다. 그는 천마화의 가공할 내력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번뇌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하긴 그의 가문은 승리를 훔치기 위해 일천 년 간 침묵했던 것이 아니라, 천전천승(千戰千勝) 하기 위해 천 년 내내 침묵했던 것이다. "사흘이에요. 신혼생활은……." 천마화는 행복감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사흘… 좋지. 하긴 나도 휴가를 받을 때가 되었지." "사흘 후… 나와 함께 악마대본영으로 가야 해요.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하든 간에 이 지겨운 피바람을 멈춰 줘야 해요." "물론이지." "자신 있나요?" "훗훗……!" 천유성은 미소지으며 끄덕였다. 그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지으며 마주 보는 그 시각, 그 일대는 팔만사천 무사에 의해 엄밀히 포위되고 있었다. 팔만사천 무사는 각기 하나씩의 화탄을 쥐고 있었으며, 언제라도 화탄을 발사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한 채 미완성의 도시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第5章 유성(流星)… 떨어지다 그 녀석… 손에는 주호를 들었으며, 어깨에는 죽간(竹竿)을 걸친 채 머물러 있다. 의미 없는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는데, 두 눈에서는 온갖 질투의 빛이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단꿈을 방해해야 하는 것을……." 아아, 그는 바로 검문혼이 아닌가? 그가 나타날 줄이야? "나의 야망을 위해 너는 사라져야 한다. 아느냐? 너는 유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유성이란 본시 오랫동안 하늘을 밝히지 못한다. 유성은 찰나적으로 하늘을 태워 버리다가는 떨어지게 되어 있다." 검문혼의 손에는 깃발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천천히 쳐들었으며, 적어도 팔만 쌍의 시선이 깃발에 신경을 집중하며 숨소리를 조절하고 있었다. "석화… 네게도 미안하다. 너의 남자를 죽여야만 하는 것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내게 진정으로 미안한 일이다." 검문혼의 볼이 실룩거렸다. 그의 눈빛은 어느 새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너는 미쳐 버릴지도 모르지. 하나, 이 한(恨) 많은 세상을 미친 채 산다는 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차갑고 창백한 손이다. 그 손은 천천히 내려졌으며, 깃발도 따라서 내려졌다. 바로 그 순간, 적어도 팔만 명이 팔을 흔들었으며… 사천여 명의 무사들은 갑노(匣弩)를 힘차게 발사해 냈다. 피이이이잉－ 핑－! 파파파팟－! 메뚜기 떼처럼 튀어나가는 무수한 철환(鐵丸)들. 그것은 삽시간에 팔만사천 주 한가운데로 날아들었다. 화룡마뢰(火龍魔雷). 운중마부(雲中魔府)에서 만들어진 화탄이며, 폭발력이 굉천뢰(宏天雷)의 두 배이다. 천리화혈신전(千里化血神箭). 갑노에 메겨 한 번에 다섯 시(矢)씩 발사해 낼 수 있는 것으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반경 십 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 벽력뇌화탄(霹靂雷火彈). 화기를 제조한 벽력궁(霹靂宮)에서조차 만들기를 꺼려했던 악마의 화탄이다. 벽력뇌화탄이 터지고 난 일대는 십 년 간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로 변하고 만다. 사망열천마왕탄(死亡裂天魔王彈). 검문혼이 직접 만든 것으로, 최후의 순간에 쓰고자 안배해 두었던 물건이었다. 그 위력은 화룡마뢰보다 십 배 더하다. 천마화는 기둥들의 도시를 빠져 나가 옥류(玉流)에 손을 담근 채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는 상태였다.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순간 가운데 머물게 된 천마화의 표정은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것이었다. 그녀가 파공성을 듣고 허공을 힐끗 올려다보았을 때, 허공에는 적어도 팔만사천 개의 화탄에 의해 갈라지고 있었다. 피이이잉－ 피잉－! 파파파－! 모든 화탄은 한 곳으로 집중이 되었다. 천마화의 머리를 넘어 일 마장 정도 떨어진 한 곳을 향해. 지상에서, 중원에서… 가장 행복한 새신랑이 휘파람 불며 누워 있는 바로 그 곳으로……! 콰르르르릉－ 콰쾅－!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불바람이 치솟아 오른다. 무시무시한 화풍이 솟구쳐 오를 때. "안 돼!" 천마화는 얼굴이 새하얗게 물든 채 천천히 쓰러지고 있었다. 그녀의 등판 쪽으로 살을 태울 듯한 열풍이 다가섰으나, 그녀는 금강불괴인지라 그 정도는 능히 견딜 수 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처녀를 바친 바로 그 장소가 무시무시한 불기둥에 휘어 감기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안 돼!" 천마화의 머리카락이 창 끝처럼 빳빳이 치솟아 올랐다. 그녀의 해맑은 천성으로 인해 자제가 되었던 가공스러운 마성(魔性)이 일거에 폭발해 버린 것일까? 그녀의 살결은 얼음 조각처럼 차가워졌으며, 피부 위로 새파란 반흔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두 눈은 얼음으로 깎아 만든 눈처럼 귀기(鬼氣) 어린 냉광을 무시무시하게 뿜어 내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쾅－! 너무나도 엄청난 폭발 가운데 지진이 시작된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으며, 깊디깊은 운하(運河) 같은 도랑이 쭈욱쭉 파여 나가기 시작했다. 수천 마리 화룡(火龍)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으며, 매캐한 검은 연기가 적어도 이백 장 높이로 치솟아 올랐다. "……!" 천마화는 일 마장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 대폭발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에 휘어 감기고 말았다. 진짜 바보가 되어 버린 듯, 그녀는 꽤 오랫동안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매달리기까지 했다. 너무나도 강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면 뇌성이 마비된다고 하던가? 천마화는 반 미쳐 버린 듯했다. "이것이 운명이란 말인가?" 그녀는 힐끗 한 곳을 바라봤다. "그대… 진짜 악마입니까? 나의 아버지시여?" 그녀는 아마도 알지 못할 것이다. 마황야가 그녀에게 딸려 준 십만 무사 가운데 구 할 정도가 이미 검문혼의 휘하로 영입이 되었다는 것을……. 마황야의 명은 불복한다 하더라도, 검문혼의 말은 듣는다는 것을……. 콰르르르릉－! 불길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아마도 열흘 내내 불기운이 남아 있을 것이다. 사대마계가 보관하고 있던 화약 가운데 절반 가량이 한순간에 터져 버린 것이다. 하나의 유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 날의 대폭발 이후, 강호 대세는 정녕 급박하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봉파를 단행했던 악마대본영의 남북제타(南北諸舵)는 일제히 복파(復派)하기 시작했다. 안휘(安徽), 절강(浙江), 강서(江西), 호남(湖南), 호북(湖北), 산동(山東), 하남(河南), 섬서(陝西), 산서(山西), 광동(廣東)……. 각 성(省)의 총타(總舵) 또한 문을 활짝 열었으며, 이제는 그 어떠한 도전이라도 모조리 받아들이겠다는 자신감을 강호계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 유성(流星)이… 떨어졌다. 한 인물의 죽음, 그것이 무수한 축배의 잔(盞)을 쳐들게 하였으며… 악마대본영의 식어 가던 기세는 다시 한 번 가공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고독한 승부사, 천유성. 그는 하나의 유성처럼 빛을 잠깐 발하다가는 떨어져 버리고 만 것일까? 아니라면……? 구월이 깊어 갈 때, 천마원에서는 천 마리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비둘기는 각기 하나씩의 철통(鐵筒)을 매달고 있었다. 철통에는 쪽지가 한 장씩 들어 있으며, 그것은 천하각지에 있는 일천 군마에게 전달이 되도록 안배가 되어 있었다. 꾸룩… 꾸룩……! 잿빛의 전서구들은 천마원 허공을 뒤덮으며 떠올랐으며, 이 날만 하더라도 무적향수의 죽음이 파다하게 소문나지는 않은 상태였다. 천 마리 전서구가 강호전역에 퍼진다면, 무림 사상 가장 격렬한 파란을 일으켰던 한 인물은 무림사(武林史)에나 남을 과거의 인물로 변화될 것이다. 무척 세찬 빗줄기였다. 구월(九月)은 비에 의해 겁탈되어 버린 듯, 벌써 여러 날째 하늘은 먹장구름에 뒤덮여 버렸다. 검은 장막이 되어 뿌리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무시무시한 울림 소리가 시작된다. 콰르르르릉－ 콰쾅－! 하늘이 부서져 내리고 있다. 뭇별이 보석(寶石)처럼 박히어 찬란하게 반짝거려야 할 야공(夜空)은 뇌우(雷雨)에 찢어 밟히어지고 있었다. 우레 치는 소리가 얼마나 커다란지 폭우발이 퍼부어지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노호(怒號)하는 하늘 아래, 그 여인의 창(窓)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죽었다고? 어처구니없이 죽어 버렸다고……?" 광기(狂氣)가 서린 목소리이다. 백설처럼 희디흰 나삼을 걸친 요염(妖艶)한 절세미인 하나가 손에 목도(木刀)를 거머쥔 채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번갯불이 하늘을 갈라 버릴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밀랍처럼 희었다가는 돌연 새파랗게 물이 들곤 했다. 목도가 파르르 떨리고 있으며, 그녀의 탐스러운 입술이 바람을 만난 듯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목도를 섬세하게 놀려 하나의 목조각(木彫刻)을 완성하기 직전이었으며, 그녀가 목조각의 눈을 새기기 직전에 전서구(傳書鳩)가 그녀의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영웅무정 일검향. 폭사한 듯! 마황야가 은밀히 기른 한 명의 전문가가 그를 유인, 살해하는 데 성공하였음. 백도의 거성(巨星)은… 떨어졌음!> 기환마계(奇幻魔界)에 속한 밀첩이 긴급히 보낸 전서구 다리에는 그러한 쪽지 하나가 묶이어져 있었다. "그가 죽었다고? 어… 어이해… 그 오만하고 거만한 자가 죽었단 말이냐? 어이해… 그리도 강한 자가……?" 혈접혼, 그녀는 이제껏 그녀를 지탱해 주었던 모든 독기(毒氣)를 송두리째 ㅇ어버리는 듯했다. 그녀에게 애정(愛情)의 씨앗을 던져 주고 가 버린 무정아(無情兒)의 그림자를 마음 속에서나마 제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던 혈접혼이다. 언제나 천유성을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맹세했던 여인. 한데 그녀가 지금 완전한 병자(病者)의 낯색이 되어서 상반신을 휘청휘청거리는 것이다. 열병(熱病)에 걸린 장미화처럼, 그녀의 전신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미… 미쳤군. 내가… 내가 왜 울어야 하지?" 혈접혼은 제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목도를 꽈악 쥐고 있는 손등을 촉촉이 적실 때에야 자신이 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손으로 죽이고자 맹세했던 자가 죽었는데… 정말 죽어 마땅한 적수가 죽었을 뿐인데… 내가 왜 바보처럼 운단 말인가?" 혈접혼의 목소리는 광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정말 잘 죽었거늘… 크흑흑……!"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녀의 소수(素手)가 힘껏 떨어지는 가운데 목도가 허공을 번개처럼 갈랐다. 목도는 음파보다도 빠르게 날았고, 일직선을 그으며 천유성의 조각 얼굴 가운데를 향해 파고들었다. 목도가 얼굴 가운데에 꽂히기 직전, 혈접혼은 저도 모르게 난화패엽다라인(蘭花貝葉茶羅印) 수법을 시전해 비단 옷자락을 흔들었고, 조각된 얼굴 가운데로 관통해 들어갈 듯하던 목도는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며 석회 바른 벽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바보 같은 여자, 혈접혼. 어이해 자신을 철저히 무시하고 성적 모독까지 준 자의 조각을 쪼개어 버리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이미 그의 여자(女子)였단 말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 그를 사모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 목숨보다도 강렬하게……?" 혈접혼은 문득 습기를 품은 야풍이 얼굴을 덮침을 느꼈다. 무덤에서 기어나온 강시처럼 그녀는 걸었으며, 질이 좋은 비단 궁장을 스르르 벗어 버리기 시작했다. 옷자락이 흰 나비의 날갯짓처럼 미끄러져 내리는 가운데, 너무나도 탄력적인 동체가 완연히 나타났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순수한 몸뚱이! 그 어떠한 사내도 보지 못했던, 아니 꼭 한 명의 남자만이 보았던 몸이다. 그런데 그가 죽어 버리다니……. "까르르르르……!" 혈접혼은 광기 어린 웃음소리를 터뜨렸으며, 쌍수를 어지럽게 휘둘러 댄다. 폭음이 일어나며 동경(銅鏡) 하나가 박살났으며, 자단목으로 만든 탁자가 산산이 바수어졌다. 혈접혼은 반 미치광이가 되어 자신이 애지중지 모은 골동품과 장신구들을 모조리 박살냈다. 무려 이각 내내 그녀는 방을 부숴 버렸는데… 남게 된 것은 오직 하나, 그녀가 정말 부숴 버리리라 생각했던 천유성의 조각뿐이었다. 흐트러진 시선 가운데 혈접혼은 천천히 나뭇조각을 껴안아 들었다. "누군가… 나와 연수(連手)하기를 바랬었지!" 그녀는 실로 차가운 느낌을 흘리며 나뭇조각을 껴안아 들었다. 나뭇조각 아래에는 밀첩 한 장이 뒹굴고 있었다. <마도의 진정한 영광을 위해, 젊은이들의 시대를 위해, 진정한 웅비(雄飛)를 위해, 악마(惡魔)의 날에 동참하기를……!> 이틀 전에 홀연히 날아든 밀첩이었다. <나찰옥향단(羅刹玉香團)의 손을 빌려 주기를!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었음. 그대가 돕는다면 십중십(十中十) 성사(成事)될 것임!> 나찰옥향단. 기환마계에 속한 여인들로 이룩한 무사 집단이다. 하나같이 미인들이고, 손속이 독랄하다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이네들이 담당하는 것은 감찰 업무였으나, 지닌 바 무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가공했다. 혈접혼의 눈에서 섬망이 이글거린다. "좋아, 하겠다. 악마에 날에… 내가 갖고 있는 세력을 모조리 쏟아 붓겠다!" 혈접혼은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도 엄청난 맹세를 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천유성이 죽었다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맹세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천유성이 예측한 대로 세력의 균형은 철저하게 허물어졌다. 이제부터 내일(來日)을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이제부터 강호인(江湖人)들에게 내일은 없을 테니까! "악마의 날에 피비를 뿌리리라. 바로 그를 위해……!" 같은 날, 소림사(少林寺) 경내(境內)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툭－ 툭－! 호미가 차밭의 흙더미를 자잘하게 깨어 부순다. 한 줌도 아니 되어 보이는 깡마른 노승. 소림사 제일배분이나 소림사의 사미승에게 놀림감이 되어 있는… 천하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친네, 요료(了了). 그는 소림사 방장실 앞의 다원(茶園)에 나아가서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잔기침 소리를 하면서 호미질을 하는데, 그의 뒤쪽에는 열 명의 기린아(麒麟兒)들이 살기등등한 자세로 머물러 있었다. 장대한 체격을 지닌 청년무사들과, 날렵한 몸매를 지니고 있는 옥봉(玉鳳) 같은 여협(女俠)들이다. 지난 봄만 하더라도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누워 있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언제 다쳤냐 싶게 말짱하게 나아 있었다. 유성십화(流星十花). 아직은 제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백도계의 영웅들이다. 훗날 천하 십대방파를 이끌 미래의 장문인들이며, 자신의 사문에 대한 충성심보다도 무적향수(無敵香帥) 일검향에 대한 충성심을 더 강하게 갖고 있는 인물들이다. 만박서생(萬博書生) 하후초(夏候楚). 그를 위시한 십 인의 기린아들은 하나같이 상복을 걸치고 있었다. 검자루 위에는 흰 천을 둘둘 휘어 감고 있으며, 무엇이 원통한지 해를 볼 수 없게끔 차양이 긴 검은 차일립(遮日笠)을 쓰고 있었다. 전신에서 살기를 콸콸 흘러내리고 있는 십 인. 이들은 한가롭게 다원을 다듬고 있는 요료 선사가 못마땅한 듯, 상당히 분노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결정을 지었습니다." "……." 요료 선사는 입을 쩌억 벌리며 하품을 한다. 하후초는 비감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십만대상은 화약(火藥)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십만대산의 천년세가로도 연락이 갈 것이며, 잠든 체하고 있던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일시에 검을 뽑아 들 것입니다! 악마들은 피 빚을 배로 갚게 될 것입니다." "……." "복수해야 합니다. 그분의 복수를……!" 하후초의 눈은 핏빛으로 달구어졌다. 그의 사부 창허상인이 죽은 후, 이리도 처절한 심정이 되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백도의 우상이었던 무적향수 천유성. 그가 어딘가에서 폭사당했다는 것은 즉시 그의 휘하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며… 바로 그 순간, 무사들은 일제히 상복을 걸친 것이다. "최후의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싸울 작정입니다!" 하후초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할 때였다. 느긋한 자세로 다원을 가꾸던 요료 선사의 손이 쳐들려졌으며, 흙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는 호미의 자루가 하후초의 머리에 가서 부딪쳤다. "돌대가리! 네 사부 창허나 마찬가지구나. 멍청한 녀석!" "어… 어이해… 복수하는 것을 멍청한 짓이라 하십니까?" 하후초는 두개골이 바스러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요료 선사를 마주 쏘아봤다. 그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요료 선사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악마대본영에 대한 복수의 길이었다. "녀석, 복수라니? 네놈은 얼굴이나 씻고 다니느냐?" 요료의 주름진 얼굴이 짓궂게 일그러졌다. "얼… 얼굴을 씻다니요?" "쯧쯧, 다 죽게 된 놈들을 귀하디귀한 대환단을 주어 살려 놓았더니… 나이 든 땡추 앞에서 고개를 바짝 쳐들고 말대답이나 툭툭 하는군! 킁… 고약한 녀석들!" 요료 선사는 화를 내어 가면서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표정은 미소에 뒤덮이어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깊은 신지를 갖고 있다는 요료 선사. 그는 소림의 살아 있는 활불이자, 천유성의 후견인이었다. 한데 그는 천유성이 쓰러졌다는 소문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화약을 갖고 놀다가는 오줌 싼다. 그리도 할 일이 없으면 땡추중을 대신해서 차밭이나 가꿔라!" "예… 에?" "클클… 땡추는 바빠서 먼저 가겠다. 기실… 선약이 있다. 오늘 밤을 세워 바둑을 두기로 했지." "누… 누구와……?" "ㅋㅋ… 어린 녀석인데, 그래도 예절이 바른 놈이다. 노납이 좋아하는 홍시를 한 바구니나 갖고 오지 않았겠느냐? 클클… 고검랑(孤劍郞)이라던가? 하여간 배포가 큰 놈이다. 어찌나 밥을 많이 퍼먹던지… 클클……!" 고검랑이라니? 그는 바로 풍방의 우두머리이자 천유성의 심복이 아닌가? 한데 그도 이미 소림사에 와 있단 말인가? 그 또한 천유성이 쓰러졌다는 사실에 대해 태연자약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천유성의 죽음을 아예 믿지 않고 있단 말인가? "설… 설마 그분이… 아직 살아 계시단 말인가? 선사가 저리도 태연자약하시니……?" 하후초가 상반신을 휘청일 때. "그 녀석은 인중이 길지. 그리고 목줄도 길지. 모르긴 해도, 노납의 다비식(茶毘式)은 놈이 해 줄 거야. 물론 한 백 년 후의 일이겠지만. 아암, 오래 살아야지, 오래 살아야 하고 말고!" 요료 선사는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이며 걸어갔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거인의 걸음걸이였다. 그가 십 보도 가기 이전, 유성십화는 상복을 찍찍 찢어 버리기 시작했으며… 검자루에 묶었던 흰 천도 가차없이 끊어 냈다. "그래, 그분은 어떠한 장소에서도 살아 나오실 분이다. 우리들이 악마대본영 쪽의 소문만 듣고 너무 성급히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프핫핫……!" "하긴… 우리들이 성급했다. 모르긴 해도, 그분의 신체의 강인함만은 고금제일이다!" 웃음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온다. 열 명의 청년들은 요료 선사에게 대든 것이 멋쩍은 듯, 다원을 날렵하게 가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휘파람을 불고,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가면서……. 어디일까? 자욱한 안개가 이리저리 흘러다니고 있다. 마치 바닷물이 펼쳐져 있는 듯이 안개(霧)는 삼라만상을 함몰시키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의 고성(古城)이 있다. 이제까지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고 있는 장소. 그 곳은 바로 풍운친왕(風雲親王)이 기거하고 있는 장소였다. 춘추팔가의 혈통인 동시에 마가의 지배자가 된 인물. 그는 영웅무정 일검향을 쓰러뜨린 이후, 측근 인사들을 거느린 채 마황존부(魔皇尊府)로 들어섰다. 이 날, 아침의 안개가 너무나도 짙은 날… 천하무림사를 뒤바꾸어 버릴 하나의 역사(歷史)가 시작되고 있었다. 보라! 사방에서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들을. 꾸역꾸역 나타나는 흑의인들은 마황존부를 향해 뻗어 나간 팔방대로(八方大路)를 일시에 휘어 감아 버렸다. 동서남북에서 무수히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들. 오랜 혈전(血戰)에 지쳐 버린 듯한 표정들이면서도, 마도인 특유의 사기(邪氣)를 전신에서 뿌리고 있는 자들이다. 꾸역꾸역 나타나는 자들은 안개가 사라지기 이전, 마황존부를 엄밀하게 뒤덮어 버렸다. 바로 이 날, 마황야는 천하 삼백구십팔 개(個) 방파( 派)의 장문영부(掌門令符)를 접수하는 날이다. 천 년 간 침묵을 지켰던 사대마계가 중원무림의 삼분지이를 정식으로 정복하는 날이며, 악마대본영(惡魔大本營)이라는 존재가 천하무림계에 정식으로 밝혀지게 되는 날이다. 뜨락이다. 무수한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피어나고 있으며, 나지막한 가산(假山)의 그림자가 안개 사이에서 삐죽이 나타나는 명경지수(明鏡止水) 위로 투영이 되고 있었다. 천마원(天魔園)이라 불리는 뜨락. 새벽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천마원으로 모여들었다. 천하각지에서 모여든 마도계의 거목들은 마황야의 중원(中原) 정복(征服)을 기념하기 위해 천하각파의 기진이보(異寶)를 한 가지 이상씩 준비해 왔다. 보검(寶劍)을 지니고 온 자, 상고비급(上古秘 )과 영단(靈丹)을 갖고 온 자……. 마치 신을 찬미하는 숭배자들처럼 무수한 마도거두들이 마황야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든 것이다. 군무(群舞)가 시작된다. 일백팔 명의 검녀(劍女)들이 반나의 옷차림으로 춤추며 날아오른다. 뜨락은 이미 짙은 방향으로 취해 버렸다. 나찰옥향단(羅刹玉香團)이라 불리는 미녀군단이 마황야를 찾아온 마도거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비파 소리에 맞춰 검무를 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날아오르고, 허리를 뒤틀고, 요염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을 찡긋거리며 검을 흔들고, 꽃잎을 비처럼 뿌리고… 나찰옥향단의 춤사위는 눈요기 거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뜨락 외곽 지역에서 천하역사(天下力士)들이 장봉(長棒)을 풍차처럼 돌리며 가슴 근육을 자랑하고 있다. 그들은 태양마계(太陽魔界)에서 힘을 기른 자들로, 일백태양풍(一百太陽風)으로 불리고 있다. 울퉁불퉁한 가슴 근육을 자랑하며 제미곤과 장봉을 빙글빙글 돌리는 구 척 거한들. 그들의 유희 또한 이 날의 흥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백 로(路)에서 모여든 악마의 전사(戰士)들. 마황야만이 알고 있었던 악마대본영 외단의 지배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락무림계의 백도를 이끌었던 하락영웅(河洛英雄) 이철산(李鐵山), 그의 모습도 보였다. 그가 사대마계의 한 인물일 줄이야? 관북제일검(關北第一劍)이라는 유룡대협(遊龍大俠)의 모습도 보이며, 아미산(峨嵋山) 복호사(伏虎寺)의 백미대불(白眉大佛)과 적미대불(赤眉大佛)의 모습도 끼여 있었다. 무적천군번(無敵天軍幡)에 복종하기를 맹세한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의 백도인들의 숫자는 오백이 넘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칠 할 이상이 일파(一派)의 명숙(名宿)으로 손꼽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마황야라는 인물, 그는 투사(鬪士)라기보다는 모사(謀士)에 가까운 자였다. 그는 피보라를 일으켜 세력을 장악하기보다 세작(細作)과 첩자를 이용해 방대한 세력을 정복하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 그는 자신의 천하를 이룩한 것이다. 그의 휘하세력은 십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영웅무정 일검향마저 그에게 제거되었다는 소문과 더불어 수많은 세력이 그를 지지했으며, 그를 반대하던 자들이 속속 그의 휘하에 투신한 것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새벽이 깨어날 때, 천마원은 천 년의 축제를 시작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일만오천의 살수(殺手)들이 독비(毒匕)를 준비한 채 요소요소로 스미어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하나도 없는 가운데… 아침이 환하게 깨어났다. 둥－ 둥－ 둥－ 둥－! 북 소리가 천마원을 휘어 감기 시작했다. 나찰옥향단의 춤사위는 고조가 되었으며, 일백태양풍의 움직임 또한 보다 경쾌해졌다. "와아… 군림천하(君臨天下)!" "우우……!" 환호하는 소리가 하늘을 들썩거리기 시작했으며, 호화로운 영웅건(英雄巾)에 피풍의(避風衣)를 걸친 무사들이 속속 나타나며… 검술이 화려한 패검(佩劍)을 높이 쳐들기 시작했다. 악마의 날!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한 화려하게 깨어나는 아침이었다. 울지 않는 새(不鳴鳥). 그는 이 날 아침에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쩌면 이 날 마시는 술이야말로 그가 진정 마시고 싶어 마시는 술일지 모른다. "그 녀석을 비웃었는데… 나도 그 꼴일까?" ㅋㅋ거리는 검문혼. 그는 천유성에게 팔만사천 발의 화탄을 날리게 한 장본인이었으나, 그것은 아직 소문나지 않았다. 당시 거기 갔던 인물들은 모조리 검문혼의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지금쯤 천지를 종횡하여 나가고 있을 것이다. 악마의 날을 위해! 실로 오랫동안 준비가 되었던 혈겁을 위해 그들은 악마대본영 예하 세력 삼백사십 개 소(所)를 향해 질주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술잔은 고뇌를 마감하는 술이 될 것이다. "후회는 없으리라! 일 검(劍)이면 된다. 연습까지 해 본 이상,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중될 것이다." 그는 느긋한 자세를 견지하며 술잔을 입술에 대고 가볍게 빨았다. '나는… 나니까.' 그는 술이라는 달콤하면서도 뜨거운 액체를 들이마셨으며,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황야는 어리석었다. 내가 마황야였다면… 울지 않는 새는 죽여 버렸을 것인데… 그는 새가 울기를 끝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가 술을 마시는 사이, 일만여 살수들은 천마원의 요소에 배치되었으며… 사정을 모르는 강호의 거마들은 연회장에서 담소를 하며 자신을 소개하기에 바빴다. 둥－ 둥－ 둥－ 둥－! 북 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천마원의 석장(石莊) 문이 활짝 열리면서 백여 명의 미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홍의낭자들. 꽃바구니 안에 수북히 담기어 있는 꽃잎들이 섬섬옥수에 의해 뜨락 가득 뿌리어지기 시작한다.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나타나는 여인들 뒤에는 포검(抱劍)한 무사가 이백여 명이 뒤따르고 있으며, 그 뒤쪽에는 오백여 노고수들이 화려한 예복을 걸친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제일 앞에 선 인물은 천마대승상! 그는 이 날의 연회를 준비한 장본인이었다. '이제… 도전은 없으리라.' 천마대승상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가끔 가다가 눈을 마주치게 되는 마도계 인사들에게는 온화한 미소로 응답을 해 주었으며, 노년의 고아한 품격을 잃지 않기 위해 꽤나 노력해 가며 그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십 장 뒤쪽에는 거고(巨鼓)가 두 개 뒤따르고 있다. 북을 등에 멘 자가 둘이고, 그 뒤에 서서 거대한 북채로 북 소리를 내는 사람이 사 인이다. 천지쌍탑(天地雙塔)과 사대천왕(四大天王). 하나같이 우람하고 육중한 체격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둥－ 둥－ 둥－ 둥－! 피를 끓게 하는 북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쇳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실로 화려한 패검(佩劍)을 착용한 자들이 줄줄이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계집인지 사내인지 구분하기 힘들며, 나이는 하나같이 열네 살 정도이다. 마도계를 이끌어 갈 신성(神星)들. 숫자는 구백(九百)이며, 마황야에 의해 친히 교육을 받은 검사들로서… 오늘 이 자리는 그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보이는 자리였다. 구백호검대(九百護劍隊) 뒤쪽, 십이인교(十二人轎) 하나가 미끄러지듯 나타나고 있었다. 열두 명의 철포거한(鐵袍巨漢)이 떠메고 있는 거대한 십이인교 위에는 황제보다도 화려한 옷차림을 한 중년인이 머물러 있었다.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인물! 그는 바로 마황야였다. 풍운친왕(風雲親王) 주의(朱義). 춘추팔가의 대업을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서, 검을 거꾸로 쥐었던 인물이다. 일만이천(一萬二千) 천금무적위(天禁無敵衛)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춘추팔가를 함구시켰으며, 사대마계 안으로 잠입해 들어가 십오 년에 걸친 싸움 가운데 자신의 지위를 천하제일마로 만든 인물. 둥－ 둥－ 둥－ 둥－ 둥－! 북 소리는 점점 요란해 졌으며, 마황야의 입가에는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나의 야망은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딘지 모르게 창백한 얼굴이다. '이제 시작되리라. 본좌가 바라는 모든 것이……!' 마황야는 격전을 치루는 가운데 중병(重病)에 걸렸으나, 그것을 하수인들이 알까 봐 철저하게 기밀을 유지한 바 있었다. 그는 마공을 익히기 위해 마단(魔丹)을 장복했으며… 그 결과, 골수에까지 마독(魔毒)이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마의 절대자였으나, 마공은 절대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가 이룬 경지는 마도 사상 세 손가락 안에 끼이는 경지이다. 그러나 그 역시 선대의 마도거성(魔道巨星)들이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친 것이다. 만약 그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었더라면 지난 몇 년 간의 기다림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정복하고 파괴함으로써 굴복을 받아 냈을 것이니까. 그러나 지금, 그는 승리자였다. 마도는 이미 일통을 했고, 백도마저 손아귀에 들어와 있지 않은가? "이제 더 이룩할 것은 없으리라. 오늘의 연회가 끝나고 나서 보름 안으로 백도는 완전 장악되리라! 머리 잘린 거인이 넘어지듯이……!" 마황야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번졌으며, 그 미소는 일순 차갑게 경직되고 있었다. 둥－ 둥－ 둥－ 둥－! 요란한 북 소리, 군마들이 환호하는 소리에 묻혀 실로 희미한 살기가 다가서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목숨을 노리고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마황야의 눈빛이 섬망을 발한다. 마황야의 자리는 죽음의 자리이다. 지나온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자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자객이 되어 살검을 휘둘렀던가? 마황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돈다. 살기는 보다 가까이 접근했다. 바로 땅 밑까지……. "……!" 마황야는 가마 밑으로 다가서는 예리한 기운을 느끼고 입을 가볍게 벌리는데……. 차앙－ 창－ 창－! 가마 둘레에 있는 무사들이 일제히 발검(拔劍)하였으며, 적어도 오십 명의 고수들이 가마 아래쪽으로 들이닥쳐 가며 권장지(拳掌指)를 휘둘러 댔다. 땅이 움푹 패이며 먼지 바람이 피워 오른다. "누가… 감히……?" "어느 놈이 지둔술(地遁術)로 다가서느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였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사방에서 삼엄한 기운이 일어나면서 일대가 한순간 냉각되기 시작했다. "악마의 날을 시작하라!" 외마디 기합이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나찰옥향단(羅刹玉香團), 일백태양풍(一百太陽風), 구십일(九十一) 전풍뇌전대(電風雷電隊), 이백사십(二百四十) 흑천마영수(黑天魔影手)……. 일대를 시위하고 있던 무사들 가운데 반수 가량이 돌연 독검을 끌어올리며 좌우에 선 자들을 무조건 베어 버리기 시작했다. 투둑－ 툭－ 툭－!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잘리어진다. 허리가 뚝뚝 끊어지며 창자가 쏟아져 나온다. 사해팔황에서 모여들어 축배의 잔을 쳐들던 거마들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암살(暗殺)당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럴 수가? 검이 다가서는 것을 보면서도 피할 수 없다니? 누군가 술에 산공약(散功藥)을 풀어 버린 것이다. 파파팟－ 팟－! "케에에엑……!" "으윽! 반… 반역이다!" 피보라가 칠천여 개 소(所)에서 잇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뜨락 가득 시신이 널렸으며, 부러진 팔다리가 도끼에 잘린 통나무 조각처럼 여기저기 널리어졌다. <암호(暗號), 악마의 날! 동원 인원, 일만사천(一萬四千). 그 가운데 일만이천은 외부에서 들어서고, 이천은 내부에서 치솟아 오른다. 화건(花巾)을 두른 자는 친구, 화건을 두르지 않은 자는 무조건 베라!> 실로 가공스러운 명령이었다. 이마에 꽃무늬가 영롱한 두건을 쓴 자들이 대거 나타나며 연회장은 피비에 씻기어지고 있었다. 마황야, 그는 역시 마도의 거인이었다. 그는 눈빛만 조금 흔들거렸을 뿐, 돌발적인 소란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반역은 언제나 예상되던 일이 아닌가? 그러나 한날 한시에 수만의 무사들이 검을 거꾸로 쥐었다는 것은 조금 예상 밖인 듯,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천멸혈광무(天滅血光霧). 혈무가 한순간 짙어지면서 그의 오른손에는 십이 성 진기가 모아졌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그의 일 장을 무사히 받아 넘길 자는 없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우우웅……! 수만 마리의 벌 떼가 일시에 날아오르듯, 은은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그의 오른손이 두 배 이상 부풀어올랐다. 그가 막 일 장을 쳐내려 할 때였다. 등 뒤에서 기이한 살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차갑고 강인한 가운데, 요사한 기운이 섞인 살기. 그것은 유가밀종의 극상이라는 번뇌혈미공(煩惱血彌功)을 익힌 자만이 내뿜는 기운이었다. '혈접혼, 너는 반역자의 명단에 오르지 않았었는데…….' 마황야의 눈꼬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모두 죽여 버리리라! 버러지들……!" 장삼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그가 신경이 등 쪽으로 모아진 것은 찰나의 바로 그 순간뿐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을 이용해 무엇인가 날아들었다. 흰빛은 백섬(白閃)이 뻗어 오듯 다가섰으며, 한순간에 십 장을 가로지르며 마황야의 가슴을 관통했다. 푸욱－! "용서하시오!" 검(劍) 끝을 타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검에 관통되어 버린 그의 입술이 기이하게 벌어졌다. "너… 너인 줄 알았다." 마황야는 혈접혼의 접근으로 인해 흠칫했으며… 바로 그 찰나, 검문혼의 암살검(暗殺劍)이 십 장 밖에서 신검합일(身劍合一) 다가서서 그의 허파를 뚫어 버린 것이다. "네… 네가 아닌 누가… 이렇듯 완벽한 역모를 꾸미겠는가?" 마황야는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검에 관통되었다. 그의 오장육부는 마독으로 인해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기에, 검문혼이 다가서는 것을 느꼈으면서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를… 진작 죽였어야 하는 것인데……." 마황야는 검을 거머쥐었고, 그의 열 손가락은 검신에 베어져서 우두둑 잘리었다. "그러나… 너는 후회하게 된다. 사실… 네가 바라는 자리는… 네가 지금 머물러 있는 자리보다 좋은 자리가 아니야." 마황야는 분노하고 있을 뿐이지, 후회하지는 않았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아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지 않은가? 검문혼은 검을 한 바퀴 뒤틀었고, 마황야의 허파에 큰 구멍이 뚫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황야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너는 역시 어리다!" "어리다고? 내가……?" "모르고 당할 나였다고 믿느냐?" "그럼… 알았단 말인가?" 검문혼의 얼굴색이 새하얘졌다. "역사(歷史)가 말하겠지. 그리 멀지 않았다… 내가 왜 허무하게 쓰러지기를 자처했는지……!" 마황야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실로 놀랍게도 그는 오늘 아침에 자신에 대한 암살극이 벌어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비 조직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왜? "나는 네게 죽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후계자를 위해 죽어 가는 것이다! 훗훗……!" 마황야의 입이 벌어졌고, 뜨거운 피가 검문혼의 옷자락에 뿌려졌다. 마황야는 눈을 크게 뜬 채 죽었으며, 그의 입가에는 진정 득의한 미소가 머금어지고 있었다. "우라질! 알았다고? 말도 아니 된다!" 검문혼은 악을 쓰며 검을 끌어냈다. 이어 그의 손이 어지럽게 휘어졌으며, 마황야의 팔과 다리가 끊어져 버렸다. 검문혼은 악에 받친 나머지 이성을 잃어버리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파팟－ 팟－ 팟－! 마황야를 암살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죽은 자의 시신을 무참히 난도질하는 것은 우두머리가 되는 자라면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이다. 검문혼은 죽어 버린 마황야의 격장계에 넘어가서 그러한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하여간 악마의 날은 완벽하게 마무리지어졌다. 검문혼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마황야를 따르던 무사들 가운데 혈검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무사들이 쓰러졌으며… 악마의 그 날, 강호전역에서는 검문혼 휘하무사들이 마황야를 추종하는 무사들을 대암살하는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졌다. 하나의 핏빛 책(冊)이었다. 검문혼은 과거 마황야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핏빛 책을 들추고 있었다. <암살자(暗殺者) 명단(名單)> 그 안에는 사백여 명의 절정고수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다. 첫 번째 이름은 마황야, 두 번째 이름은 천마대승상이었다. 검문혼은 암살자 명단을 한 장 한 장 펼쳤으며, 붓을 들어서 지난 새벽의 혈겁에서 죽어 간 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워 나갔다. 이름들은 끝없이 지워졌다. 검문혼은 무려 반 시진에 걸쳐서 이름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고 암살자 명단에는 팔십여 명의 이름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혈겁에서 빠져 나간 자들이며, 어떠한 자는 아예 혈겁의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제거된 자들은 주로 내부의 인물들이다. 다시 말해, 마황야의 추대 세력 가운데 거대방파를 이끌고 있던 팔십일곱 명이 살아남았다는 말이 된다. 검문혼은 바로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일이 조금씩 잘못되어 가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막마왕(大漠魔王) 철룡군(鐵龍君), 파천비마채(破天飛魔寨) 채주 파천마야(破天魔爺), 운중일마존(雲中一魔尊)……. 죽지 않은 여든일곱 사람. 그들은 휘하에 적어도 삼천 무사를 거느리고 있다. 거대한 세력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사실 마황야가 죽는 악마의 날에 죽지 않았던 것이다. 마황야의 세력은 오분지일 정도가 궤멸되었을 뿐이며, 진짜 충성스러운 세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설마… 마황야가 죽기 전, 한 말이 진짜였단 말인가?" 검문혼은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저도 모르게 아주 독한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쏴아아… 쏴아아……! 폭우(暴雨)다. 천지는 비의 장막에 감추어졌으며, 낮은 하늘로 가라앉은 검은 먹구름은 문득문득 푸른 도끼날을 내던졌다. 개벽의 폭음과 더불어 밤은 깊어 갔다. 세차게 퍼부어지는 빗줄기 가운데 하나의 그림자가 휘청휘청 움직이고 있었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등판을 뒤덮고 있으며, 퍼부어지는 빗줄기로 인해 옷자락이 살에 꽈악 밀착되고 있다. 날렵하며 호리호리한 몸뚱이로 보아… 여인이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퍼부어지는 빗줄기 가운데 눈처럼 흰 옷을 걸친 여인의 전신은 차디차게 적시어지고 있었다. 굴곡이 완연한 몸뚱이가 한기(寒氣)에 떨리고 있다. 너무나도 기이한 표정이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니다. 마치 백치(白痴) 같은 표정. 백의여인은 폭우 속을 너울너울 춤추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 초점이 없는 눈빛과 의미가 가라앉아 버린 입매의 허망한 미소……. 뇌쇄의 백치미와 더불어 운명적인 관능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절세가인. 천지가 함몰되어 버릴 듯한 폭풍의 밤은 깊어 갔고, 여인의 흐느적거리던 움직임은 서서히 멈추어졌다. 너무나도 차가운 빛이 두 눈에서 뿜어지기 시작하며, 여인의 희고 깨끗한 섬섬옥수(纖纖玉手)에는 가는 경련이 시작되었다. "숙명(宿命)은 이제 없다." 인간의 목소리라고 여겨지기에는 너무나도 잔혹한 목소리였다. 꽃 중의 꽃, 지상(地上)에서 피어난 꽃송이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처절하게 피어난 한 송이 운명화(運命花)와 같은 여인. 그녀의 빙기옥골(氷肌玉骨)은 온통 비에 젖었다. 유난히 긴 속눈썹에도 물기가 떠올랐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흘리는 눈물(淚)이라는 사치품이리라. "과거도… 미래도 없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섬세한 손바닥에 의해 매만져졌다. 드세게 퍼부어지는 빗줄기 가운데, 사방에서 파공성이 들리며 괴영이 속촐하기 시작했다. 의복이 너덜너덜한 자들이다. 부러진 병장기(兵仗器)를 걸치고 있는 자들이며, 그 중의 어떠한 이는 전신에 피를 뒤덮고 있었다. 지옥에서 탈출한 야차(夜叉)의 무리들인가? 어깨가 베어져 흰 뼈가 들여다보이는 자도 있고, 한쪽 다리가 정강이께에서 끊어져 진흙탕으로 붉은 핏덩이를 뚝뚝 떨어뜨리는 자도 있다. 암기(暗器)에 무수히 격중되어 고슴도치같이 된 자도 있으며, 복부가 베어져서 창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손바닥으로 움켜쥐며 휘청휘청 걷는 자도 있었다. 패잔(敗殘)의 무사들. 숫자는 칠백에 달하고 있으며, 하나같이 핏빛 눈빛을 흘리고 있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세차게 퍼부어지는 빗줄기 가운데, 문득 여인의 시선은 허공으로 돌리어졌다. "나의 태생을 증오했었다. 악마를 아버지로 섬기고 있었다는 것을 저주했으며… 자결할 결심까지 했었다." 번쩍－! 천지가 온통 파랗게 물들며 여인의 희디흰 얼굴과 목덜미마저 새파랗게 물들었다. "피는 피를 부르는 것을 증오하며… 검(劍)이란 물체를 든 자들을 모조리 증오했었다." 이상한 한기(寒氣)가 점점 짙어진다. 아름답고 나약해 보이는 여인, 그러나 그녀는 뿌리어지는 빗속에서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화해 가고 있었다. 콰쾅－! 우레 소리가 요란할 때, 여인의 망막이 뿌옇게 변화하며 여인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유성… 그와의 만남이야말로 마지막 운명이라 여겼었다. 그리고 그를 죽게 만든 숙명을 증오했었다. 그의 극락왕생을 빌며 나의 여생을 바칠 작정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죽어 간 모든 생명을 위해……!" 미소, 화려하고 고결한 미소이다. 그리고 그 신비로운 미소는 점차적으로 악마의 미소로 변화해 갔다. "이제 운명을 믿지 않는다. 나를 피눈물 뿌리게 한 세월에 복수할 뿐이다. 호호호……!" 웃다니?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까르르 웃다니? 너무나도 발작적인 웃음이다. "복수한다. 가장 철저하고… 완벽하게! 호호……!" 잔혹하며 광적인 웃음, 그 소리가 커져 가는 가운데 여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말라 가고 있었다. 폭음 소리 같은 우레 소리 가운데, 여인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휘청휘청 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투성이 괴인들은 주먹을 거머쥔 채 그녀를 뒤따랐고, 누가 외치는지 모를 악마의 부르짖음 소리가 폭우의 장막 너머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우, 악마의 꽃이여!" "천마화(天魔花)여! 진정한 악마의 영광을 위해 피어나라!" "피는… 피로 돌려주리라. 우……!" "천마화 아래 다시 웅비(雄飛)하리라!" 꾸여꾸역 몰려가는 무리들. 이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세차게 퍼부어지는 폭우와, 흐느끼는 듯한 외침 소리, 그리고 끝없이 이동해 가는 무사들의 머나먼 행렬 가운데……. 第6章 풍운금쇄전(風雲禁鎖殿) 깊디깊은 지하(地下). 한 줄기 빛도 흘러들지 않고 있는 완전한 어둠이다. 뜨거운 기운이 흘러 나오고 있는 이유는, 얼마 전에 대폭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폭발은 거대한 도시 하나를 부수어 버렸으며, 그는 거석 더미에 파묻힌 채 지하 동굴 깊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츠으으－ 츠으으－! 짙은 안개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실낱처럼 가는 안개였으나, 그것은 차츰차츰 짙은 기운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붉은 지렁이들이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듯, 어떤 때에는 푸른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나타나는 듯하다. 기이한 안개는 시간이 갈수록 보다 짙어졌다. 또한 그 가공할 안개에는 무시무시한 파훼력(破毁力)이 스미어 있는 듯, 거석 덩어리를 모래로 바수어 버리고 있었다. 우르르르릉－! 우레 소리가 일어나는 가운데, 안개는 하나의 원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이한 형상으로 뭉치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거대한 연화(蓮花)였다. 백련아함기(白蓮阿含氣). 전설로만 알려져 있는 최고의 내공이다. 사지(四肢)가 동시에 잘리고 척추가 끊어지지 않는 한, 백련아함기는 끊어지지 않는다. 해서, 그러한 내공은 여의여래불멸세(如意如來不滅勢)라고 불리고 있었다. 안개는 점점 더 짙어졌으며, 연화는 보다 더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무엇인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뻘건 빛이 치솟아 올랐다. 청홍쌍무(靑紅雙霧)마저 그 가공스러운 혈광(血光)으로 인해 새빨갛게 물이 들고 있었다. 철혈지세(鐵血之勢). 강철의 기세이며, 강철이 불에 달구어질 경우 나타나는 혈광이다. 빛은 더더욱 강해졌으며, 연화꽃의 내부에서는 핏빛 광채가 아닌 제이의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녹색(綠色)이었다. 화려하고도 찬란한 빛. 단로(丹爐) 안의 불기운이 드세어질 경우, 빛은 붉은색에서 녹색으로 화하게 된다. 그 경지는 바로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였다. 두 시진 후부터 세 번째의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금광(金光)이 솟구쳐 올랐으며, 그로 인해 혈광과 녹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우웅……!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거석 더미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금빛 광채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라, 집채만한 돌덩어리들이 쭈욱쭉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보라! 최후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그것은 너무나도 찬란한 백광(白光)이었다. 다른 빛이라고는 전혀 스미어들지 않은 순수한 백광이다. 그 빛은 다른 빛과는 달리, 눈을 자극하지 않았다. 강하다기보다 부드러우며, 눈을 자극하기보다 눈을 보드랍게 해 주는 신비한 화기(和氣)를 지니고 있다. 불사여의광(不死如意光). 오오, 그것이야말로 고금에서 가장 신비로운 내가기공(內家 功)이 완성될 때 일어나는 기운이 아닌가? 고영(孤影), 언제부터인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숨을 멈춘 채 합장을 했고, 눈을 반개한 채 구결에 따라 내가호흡(內家呼吸)을 계속하고 있다. 한 번 빨아들인 숨결을 이용해 보름 이상 내가운기를 한다는 것은, 절세고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모공을 통한 호흡은 하게 되어 있는데, 그는 완전히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투명(透明)한 피부! 뼈가 들여다보이고 힘줄과 핏줄이 들여다보인다. 마치 얼음으로 깎아 만든 듯한 인영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남자 같아 보이지 않는 자. 연화 안에는 그가 머물러 있었다. 콰아아아－ 콰아아아－! 지진이 일어나는 듯 지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몸뚱이는 나선형으로 뒤틀리며 힘차게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산산이 바수어지는 가운데, 암혈(暗穴)이 뚫린다. 무려 십사 장(丈), 그는 내가기세를 이용하여 돌 속을 십사 장이나 파고 들어간 것이다. 한순간 벼락 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푸우!" 그는 긴 숨을 토하며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역시 그분은 위대했다. 훗훗……!' 헝클어진 머리카락마저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용모이다. 헌칠한 키에 탄탄한 가슴 근육……. 옷을 걸친다면 조금 여위어 보일 것이고, 옷을 벋는다면 너무나도 아름답게 발달된 가슴 근육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어깨에서 신기를 뿜어 내는 자, 그는 바로 천유성이었다. "그분은 나의 신체를 지상에서 가장 강한 신체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맹세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키신 것이다!" 종유동굴로 내려선 인물, 그는 일세의 풍운아답게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 가득히 고뇌의 빛이 흐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는… 나를 속였을까?' 천유성은 천천히 종유굴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뇌리로는 석화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를 죽이기 위해… 나와 결혼한 것일까?' 저벅－ 저벅－! 그의 걸음 소리가 가벼운 반향을 일으켰다. "나는 그녀를 믿는다. 그녀는 절대 나를 속이지는 않을 여인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용당했을지도 모르고……!" 천유성의 몸놀림은 보다 빨라졌다. 그는 쏘아진 화살처럼 움직여 굴이 휘어지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굴에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천유성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굴을 따라가기 이 마장 만에 천유성은 처음으로 인간이 남긴 흔적을 찾아 낼 수 있었다. 파석(破石) 더미, 굴 천장 높이가 구 장(丈)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地下) 동구(洞口)가 있고… 그 곳은 거대한 돌에 의해 완전히 파묻혀 버렸다. "이 곳에도 폭발이 있었단 말인가?" 천유성의 눈빛이 별빛처럼 강하게 반짝거렸다. 그의 눈빛에는 이전보다도 강한 힘이 실리어 있었다. 팔만사천 개 화탄의 폭발에 묻혔다가 구사일생 살아난 천유성의 내공은 이전보다도 고강해졌다. 다시 말해, 그의 몸 안에 잠재되어 있던 모든 기세(氣勢)가 폭발 가운데 하나로 뭉쳐져서 그의 잠원진기(潛元眞氣)로 흡수가 된 것이다. "누가… 이 곳을 부수었을까?" 천유성은 파석 더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일순, 그의 품안에서 무엇인가가 강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천유성은 품안에서 무엇인가가 떨리기 시작함을 느끼며 얼른 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손에는 이 촌(寸) 소도(小刀) 하나가 쥐어져 나왔다. 바로 번뇌혼(煩惱魂). 천유성이 혈접혼에게서 빼앗아 낸 물건이다. 천하에서 가장 예리한 마병(魔兵). 그것은 마기(魔氣)를 도신 가득히 품고 있는 물건이며… 만들어지는 당시 백 인(人)의 생혈(生血)을 흡수하였는지라, 살아 있는 마혼(魔魂)을 일으키고 있었다. 번뇌혼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번뇌혼이 달아오르고 있다니?" 천유성은 짐짓 눈을 찌푸렸다. 그의 뇌리 속으로 거장궁주가 전한 한 장의 비급이 떠올랐다. <마병제일좌(魔兵第一座) 번뇌혼은 두 가지 경우에 접할 때 흐느낀다. 첫째의 경우는 살기(煞氣)를 느낄 때. 그 경우, 도신은 적색(赤色)으로 달아오르며 귀를 찢는 살명이 흘러 나온다. 둘째의 경우는 신기(神氣)를 느낄 때. 그 경우에는 뇌성벽력 같은 우레 소리가 터져 나오며, 도신은 핏빛으로 달아오르는데… 그 빛이 선홍색(鮮紅色)이다.> 거장궁은 병기가에서 제일가는 사문이다. 천유성은 현임 거장궁주였다. 비록 그가 궁주이고, 또 다른 인원이래 봤자 우직한 거인 철거가 있을 뿐이나… 천유성은 자신이 거장궁주라는 것을 가장 큰 명예로 생각하고 있었다. "선홍색으로 달아오른다? 그렇다면……?" 천유성은 번뇌혼을 손바닥에 쥐며 파석 더미를 바라봤다. '저 뒤에 신기를 일으키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천유성의 단해에는 백 년을 쓰고도 남을 거대한 힘이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는 이미 내공을 시전하고 있었다. 유가제일비전(瑜伽第一秘傳) 어룡등공파(御龍登空破). 혈접혼도 알지 못하고 있는 유가밀종의 진정한 절학이다. 천유성은 천년풍운성 안에서 그것을 터득한 바가 있다. 보라! 그의 몸이 허공에서 아홉 개로 나누어지는 것을. 파팟－ 팟－! 실체와 너무나도 똑같은 환영이 아홉 개 만들어지는데, 환영은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천왕구품(天王九品). 구로마현(九路魔現)이라는 좌도비공(左道秘功)을 능가하는 최절정의 장안술(障眼術)이다. 체내의 단기(丹氣)를 끌어올려 아홉 개의 형상을 일으키는 것이며… 아홉 개의 형상에 각기 다른 기세를 일으킨 다음, 그것을 구합진결(九合眞訣)로 하나로 뭉쳐서 폭발시키는 것이다. 열여덟 개의 옥수(玉手)가 떨쳐지면서 아홉 줄기의 기운이 토해져 나왔고, 허공 중으로 뻗어 나가는 가운데 아홉 개의 기류는 하나로 뭉쳐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고리(環)를 형성했으며, 고리는 핑그르르 선회를 하면서 파석 더미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레 소리가 종유굴을 무너뜨릴 듯한 가운데, 파석 더미는 광풍에 휘말려 오르는 낙엽처럼 날아올랐다. 콰아아아－ 콰아아아－!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가운데 파석 더미는 좌우로 밀렸으며, 천유성의 입술 사이에서는 천룡제일후(天龍第一吼) 소리가 맑고 청아하게 터져 나왔다. "하아아앗!" 또다시 벼락 치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번뇌혼은 구합유가진결에 따라 광풍을 이끌며 앞쪽으로 떨쳐 나가다가는… 원을 그리면서 천유성의 품안으로 되돌아왔다. 역시 번뇌혼의 위력은 가공했다. 거석 더미는 번뇌혼으로 인해 박살이 나고 말았다. 보라! 파석이 좌우로 밀려 나가는 가운데, 거대한 철문(鐵門)의 잔해가 나타나는 것을. 두 아름이 넘어 보이는 철주(鐵柱)가 두 개 서 있는데, 철주 사이의 거리는 백 보에 달했다. 철주와 철주 사이에는 철갑문이 내려져 있으며, 문고리 같은 것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문이 아니라 벽(壁)이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철벽 위쪽, 천유성의 눈길을 끄는 글귀가 양각(陽刻)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흙에 묻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녹슬지 않은 글씨. 그것은 바로 이러한 다섯 글자였다. <풍운금쇄전(風雲禁鎖殿)> 벽에 파인 다섯 글자. 그것은 천유성의 피를 뜨겁게 끓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그렇군. 이 곳이 바로 풍운금쇄전이군? 아아, 풍운친왕은 바로 이 곳에서 세가의 일만이천(一萬二千) 영재(英才)들을 척살해 버린 것이다." 그의 옷자락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그렇다. 일만이천 개의 기둥을 세운 사람은 바로 나의 형제들이다. 그들은 각기 하나씩 대리석 기둥을 깎아 세웠고… 그것이야말로 척마멸사(拓魔滅邪)의 웅지(雄志)를 뜻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신전을 세우고자 했는데… 풍운친왕이 그들을 배반했으리라. 그리하여 지하 부분을 건립한다는 구실 아래 그들을 모조리 한자리에 모았고… 문을 막아 버린 것이리라." 천유성의 몸뚱이는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폭발(爆發)하듯, 그의 체내 모든 무공은 떨쳐지고 있었다. 소리보다 빠르며(超音), 달 그림자를 갈라 버릴 정도로 신묘하다. 바람을 가르며… 금석을 두부 자르듯이 베어 버린다. 천유성 대에 이르러 창안이 된 침묵검도(沈默劍道)! 마병 번뇌혼에 의해 침묵검도가 시전이 되자, 검도의 패도적인 위력은 보다 가공스러워졌다. 쩌어어어억－! 벽은 갈라졌으며, 천유성의 몸뚱이는 그 안으로 빨려들 듯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강호의 마지막 신화(神話)는 시작되고 있었다. 어쩌면 숙명(宿命)이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습한 공기에 뒤덮인 대전(大殿)이다. 공기 구멍이 있는 듯 어느 정도는 신선한 편이었으되, 오랜 세월 동안 폐쇄로 인해 대전 내부에는 독장(毒 )이 형성되어 있었다. 높이가 오 장에 달하는 천장이고, 폭이 사 장에 달하는 백석로(白石路)가 곧게 뻗어 나아가고 있었다. 폭발로 인해 붕괴되어 버린 지상의 건축물을 능가하는 웅대한 건축물이 지하에 펼치어져 있었다. 쭈욱쭈욱 뻗어 나가고 있는 아름드리 기둥들. 그것은 천장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기둥 표면에는 멋들어진 조각이 새기어져 있었다. 대체 어떠한 신의 손길이 기둥에 그러한 음각화(陰刻畵)를 새겨 넣은 것일까? 만리풍운도(萬里風雲圖). 바람이 구름을 말아 올리는 그림이다.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조화를 일으키는 벽화 안의 그림은 천유성에게 강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림에는 무공 비밀이 있다!" 천유성은 천년세가의 영웅총사로, 영웅팔가의 무예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정통한 청년이었다. 현재 십만대산에 머물고 있는 노년층 고수들은 영웅팔가의 진실된 비전초식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만리풍운도는 그 가운데 하나인 풍운만겁검도(風雲萬劫劍道)를 나타내고 있었다. 드넓게 퍼지는 구름 무늬는 바로 검극이 휘둘러지며 나타나는 검로(劍路)와 검화(劍花)를 뜻하고 있다. 그것은 웅휘롭고 또한 패도적인 천년세가의 진산검초였다. 봉황천애도(鳳凰天崖圖). 봉과 황이 쌍으로 날고 있으며, 기기묘묘한 몸놀림 가운데 까마득한 단애로 날아 내리고 있다. 봉의 날갯짓과 황의 날갯짓. 그것은 모두 가공스러운 경신비행술(輕身飛行術)의 비결을 표현하고 있었다. 봉황칠절무식(鳳凰七絶舞式). 춤추듯 자유롭게 날아오르며, 허공에서의 방향 전환이 곤륜파의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 이상으로 정교하고 원활하다. 물론 그것은 천유성이 익히 쓰고 있는 능공초약(凌空超躍)에 비해 한 단계 뒤지는 수법이나, 초절정 내공의 뒷받침이 없이도 시전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으며… 오랫동안 허공을 주유한다 하더라도 내력의 손실이 적은 그러한 절기였다. 세 번째 그림에는 노옹(老翁)이 하나 그려져 있다. 노옹의 손에는 죽간(竹竿)이 하나 쥐어져 있는 바, 죽간의 끝은 무수한 동그라미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가운데 도롱이를 걸친 노옹은 미소를 담뿍 짓고 있었다. 사물을 관조하는 듯한 자세, 정지된 듯한 가운데 완전한 움직임을 이룩하고 있는 초식이다. 부동대유인결(不動大柔靭訣). 천유성은 그림 가운데 그가 천년풍운대성 안에서 비급으로만 외웠던 하나의 구결을 언뜻 떠올릴 수 있었다. 보보(步步)마다 절학이 그림으로 펼치어져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조각이 무수한데, 조각품은 태반이 여덟 개의 형상을 이룩하고 있었다. 광야(曠野)를 치달리는 이리의 조각. 그 조각에는 날렵한 경공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송이들. 돌로 만든 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돌꽃들은 금나수(擒拿手)와 지력(指力)을 표현하고 있다. 거대한 흰 코끼리의 조각. 그 조각의 움직이지 않는 움직임 가운데에는 내가운기술의 비결이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가장 크고 힘찬 천룡(天龍)의 조각에는 절정검도가 기록되어 있었다. 비늘을 떨치며 날아오르는 듯한 천룡의 상. 그것은 지하 대전 풍운금쇄전(風雲禁鎖殿)의 중심지에 세워져 있었다. 천룡! 유성과 천룡은 하나의 가문의 상징이다.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이며, 명예롭게 군림하기보다 암중에 천하의 혼을 수호하는 데 지난 일천 년의 세월을 바친 정녕 영예로운 무가(武家). 유성천가(流星天家). 천룡의 조각은 바로 유성천가의 상징이었다. 천유성이 조각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돌기둥 뒤에서부터 그림자들이 언뜻언뜻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은밀히 나타났고, 천유성이 알아차릴까 조심해 가며 천유성 둘레를 엄밀히 포위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고, 너덜너덜한 전포(戰袍)들이다. 게다가 모발(毛髮)이 반백(半白)이 된 자들도 태반이며, 어찌나 오랫동안 암흑계(暗黑界)에 머물렀는지 시력(視力)이 퇴화되어 있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꾸역꾸역 나타나는 자들, 무수한 기둥이 그들에 의해 뒤덮여 버리는 데에는 탄지지간도 걸리지 않았다. 천유성은 하나의 진세 안에 감추어진 꼴이었다. "완벽하다. 속도(速度), 그리고 포진(布陣)의 술(術)이……!" 천유성은 저도 모르게 찬탄사를 발했다. 신비하게 나타난 만여 무사들.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면 그리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다. 나이가 많은 자라야 이제 서른일곱 살 정도로 보인다. 하나 정녕 오랜 지하 생활로 인해 그들은 박쥐처럼 신체의 감각 기능이 퇴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무사들은 수신호로 의사를 전해 가며 진세를 더욱 바짝 좁혔다.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완전무결하며, 수많은 사람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진세의 단점이기 쉬운 속도의 단점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영적으로 통하지 않고는 저러한 진세를 포진하지 못한다!" 천유성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다. 저들은 바로 나의 형제들이다.' 그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고, 두 다리는 어깨 넓이보다 약간 넓게 벌어졌다. 힘이 가득 실리어 있는 자세이다. '고맙소. 기다리고 있다니……!' 그 자세는 천하 어떠한 무가에도 없는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수비 자세는 아예 없고 무조건 공격을 하는 자세이다. 천천히 그는 거보를 내디뎠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를 포위한 괴무사들의 표정이 기괴해진다. "으으으……?" "저… 자세는? 영웅탁탑(英雄托塔), 팔 가문 사람들의 표식이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말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무사들의 목은 거칠게 쉬어 있었다. 기실 이 곳은 외부와 십오 년 넘게 폐쇄되어 있었다. 이 곳은 본시 종유굴이었는데, 십오 년 간에 걸친 대역사 끝에 정녕 거대하고 아름다운 지하 궁전이 만들어진 것이다. 풍운금쇄전(風雲禁鎖殿). 천년풍운성의 규모를 갖고 있으며, 기진이보는 없으되 살아 있는 의혼(義魂)이 머물러 있다. 보라! 저벅저벅 걸음을 내디디는 천유성의 두 손이 높이 떨치어지며, 허공으로 흰빛이 뿜어지는 가운데 하나의 환상이 떠오르는 것을. 한 마리 용이 날아오른다. 흰 용이 쭈욱쭉 떠올랐으며, 천유성이 손짓을 함에 따라 유형진기(有形眞氣)로 인해 만들어진 용은 비행을 하기 시작했다. "천 년의 꿈은……!" 천유성은 진기를 모아 외치기 시작했다. "팔황(八荒)의 혼백이 하나로 뭉쳐 이루어진다. 그것을 일컬어 대명(大命)이라 한다." 돌연 천 년을 이야기하다니? 그런데 그가 한 마디 하는 순간, 만이천 무사들의 눈빛이 여지없이 흐트러졌다. "천룡무(天龍舞)… 바로 대총사(大總師)만이 시전할 수 있는 최고의 영웅무예이다." "설마… 설마 그대가 대총사시란 말이오?" "믿을 수 없소. 어이해… 어이해……!"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숫자 일만이천, 하나같이 강시( 屍)처럼 깡마른 사람들이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먹지 못할 것마저 먹어 가면서 십오 년을 생존해 온 자들. 이 세상에서 가장 집요한 정신력과 생존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천금무적위(天禁無敵衛).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죽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들을 믿었었다. 한데 그대들은 역시 진정한 영웅들답게 내 앞에 나타나 주었다. 형제들이여……!" 천유성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영웅의 눈물, 그것은 정녕 값진 용의 눈물이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기다렸소!" "으으,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지 못할 정도요. 풍운친왕의 반역으로 인해 우리들은 건축하다 말고 기관에 빠져들었소. 그 원한을 풀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소." "춘추팔가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우우, 이제 영웅팔가의 진정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들은 천유성의 무공에서 천유성이 어떠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천유성은 영웅총사가 자신을 밝히는 신표로 시전해 내는 천룡무를 시전했고, 춘추팔가에서 가장 강한 무사들은 즉시 그것을 알아본 것이다. 십오 년 간 갇혀 있었던 사람들,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춘추팔가의 영웅들인 것이다. 본시 만사천칠백(萬四千七百)이 여기에 들어왔다. 그 가운데 이천칠백은 고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으며, 육천 정도의 무사들은 허기와 굶주림으로 인해 거의 폐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수년 전, 지하(地下) 수맥(水脈)과 석균(石菌)이 발견이 되었고… 그로 인해 풍운금쇄전에는 새로운 활력이 생겨났다. 무사들은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추었으며, 기거와 침식을 통제하는 지독한 법을 만들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먹고, 모든 동작과 언행은 완전히 통제된다. 허락 없이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 움직이면 허기가 질 테니까! 이유는 하나, 살아남기 위해! 실로 집요한 투혼이었다. 천하의 그 어떠한 싸움보다도 더 치열했던 싸움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 지하에서 십오 년 내내 이어졌던 것이다. 우두머리는 천문성(天文星). 천유성이 세 살 때 유성천가를 떠난 인물이다. 그는 천유성과 팔촌(八寸) 사이였으며, 당시만 하더라도 유성천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소문났었다. 모든 것을 이룩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는 춘추팔가의 기재들이 끝없이 생존할 수 있도록 철저한 무정율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일만사천이라는 다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들은 고독과 권태감을 이기기 위해 매일 싸웠고, 싸우고 또 싸우는 가운데 가전비기를 완벽히 터득할 수 있었다. 지난 십오 년은 침묵의 세월이되, 덧없는 침묵의 세월은 아니었다. 일만이천 무사는 모든 종류의 격전에 능하게 되었으며, 천하에서 가장 웅장한 지하의 건축물 하나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우우우……!" 천유성은 장소(長嘯)를 내뿜었다. '이 순간만은 가법을 어기겠습니다.' 그는 엄청난 파문을 하고 있었다. 가법상 그는 눈물을 타인에게 보여서는 아니 되는 것인데, 중인이 보고 있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우우우우……!" 무시무시한 사자후가 토해졌으며, 무사들은 하나하나 입술을 벌리며 따라서 장소를 토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우……!" 가공할 휘파람 소리, 장소성이 하나로 뭉친다. 오오, 그것은 영웅팔가 제일의 음파진(音波陣). 벽력궁(霹靂宮)!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 가운데 재현이 되었으며, 천장이며 돌기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집채만한 돌덩어리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지반이 쩌억쩍 갈라지기 시작하고, 벽이 무너진다. 그러나 풍운금쇄전의 기초는 여전했으며, 그 장소를 이룩한 일만이천 진정한 영웅들의 합창은 폭음 소리 가운데에도 여전히 계속이 되었다. 같은 시각, 그도 하나의 운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거대한 금관(金冠)을 쓰고, 그는 태대사의(太大獅椅)에 머물러 있었다. 의자의 등받이 부분은 한 길을 넘었으며, 폭은 두 팔을 활짝 편다 하더라도 양 끝을 동시에 잡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은 울고 만 천재, 검문혼. 그는 대역모를 성공시켰으며, 자신의 지위를 일약 삼세(三世) 마황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이전에 엿보였던 여유라는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마황야보다 세 배 두터운 수비검진(守備劍陣)을 펼치게 하였으며, 자신이 섭취하는 모든 종류의 음식을 미리 맛보게 하는 호법을 셋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기거하는 곳, 움직이는 장소마다 무수한 시위무사들이 몰려갔으며…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암살자에 대한 철저한 대응책이 열 가지 넘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는 거처를 자부비전(紫府秘殿)이라는 곳으로 옮기었으며… 닷새 꼬박 잡아먹은 복잡하고 치밀한 계산 가운데, 자신의 측근세력을 신본영(新本營)의 백팔(百八) 좌(座)에 배치할 수 있었다. 그 사이 그는 한잠도 잘 수 없었으며,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을 회유하는 데 다시 사흘을 썼다. 하여간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전 마도를 정복한 자가 된 것이다. 일백팔(一百八) 군마왕(群魔王). 한결같은 은포(銀袍)를 걸치고 있다. 그들은 마황야 바로 다음 자리에 머물고 있는 자들이며, 신본영의 호법인 동시에 장로들이었다. 마황야가 다스리던 시절에는 노년층 고수들이 득실거렸으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나이가 많아 봤자 서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자들이 일백팔 군마 가운데 구 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젊다는 것은 과격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젊은이들의 혈기(血氣)는 노인들의 기세보다 거칠기 마련이니까. 군마평의회(群魔評議會). 이전에 비할 수 없이 힘이 있어 보인다. 마황야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자들, 가슴 가득히 승리를 채우고 있는 자들이다. 투혼(鬪魂)을 발산시키고 있는 눈빛들을 보라! 천군만마(千軍萬魔) 사이에 떨어뜨린다 하더라도 혈로(血路)를 내며 유유하게 빠져 나올 전승(全勝)의 마검객(魔劍客)들! 마도가 썩었다며 사부(師父)를 베고, 친아버지를 베어 버리고, 사형과 사숙을 무참하게 베어 버린 악마의 승부사들. 이들은 하나같이 잔(盞)을 들고 있었다. 실로 커다란 잔이다. 그 안 가득 열화비천주(熱火飛天酒)라고 불리우는 특제주가 담기어져 있었다. "이제… 적(敵)은 없다!" 검문혼은 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가장 큰 잔이 들려져 있었다. "다만… 죽을 시체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우우우……!" "카아아아… 카아아……!" 포효하는 소리, 환호하는 소리, 그리고 잔 일백팔 개가 검문혼의 잔을 따라서 쳐들리어졌다. "악마의 영광은 우리들의 시대에 이루어질 것이다. 제마(諸魔)들이여!" 검문혼은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젊고 강하며 무자비한 자, 그는 마황야의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건배(乾杯)를……! 악마의 형제들이여! 밤의 가족들이여! 이제 피의 길은 이십구만 리(里)에 걸쳐 이루어져야만 한다. 마황야의 병법은 어리석은 병법이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멸시켜야 한다. 악마의 언어들이 오고 간다. 검문혼은 잔을 텅 비게 만들었으며, 일백팔 군마왕은 따라서 잔을 비웠다. 술 내음이 뿌리어지는 가운데 숨소리가 격렬해진다. 보라! 거대한 벽에 걸리어 있는 괘도(卦圖)를. 그 안에는 중원산천지리(中原山川地理)가 꽤나 세세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복잡한 선이 백팔 개나 그어져 있었다. 선의 시작 부위에는 일(一)에서 일백팔(一百八)까지의 번호가 하나씩 적히어 있었다. 그것은 병진로(兵陣路)를 뜻하고 있었다. 즉 일 번의 줄은 일로혈마군(一路血魔軍)의 진군하는 방향을 뜻하며, 이 번 줄은 이로혈마군이 나아가는 방향을 뜻한다. "굳이 일백팔 로로 세력을 흩트리는 이유는, 당세에 사라져야 할 무림세력이 일백팔 개 있기 때문이오!" 검문혼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신(神)이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그 중 사 개 소(所)가 가장 큰 세력이오!" 검문혼은 좌중을 둘러보며 힘있게 내뱉었다. 제일지(第一地), 소림(少林). 폭풍혼이 떠나 온 후, 소림사에는 미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사실 역모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소림사 쪽으로 천여 명의 무사들이 파견되어 자초지종을 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제이지, 십만대산(十萬大山) 천년세가(千年世家). 그 곳은 아직도 진세에 휘어 감겨 있다. 백 년 내내 수비만 하고 있을 듯, 천년세가 인물들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진세를 겹겹이 펼친 채 침묵하고 있었다. 제삼지, 낙양(洛陽) 중원대상가(中原大商家). 폭풍혼이 죽은 장소이다. 녹림하오도(綠林下五道)의 본산이며, 천유성에게 접수된 것이 확실한 장소이다. 검문혼은 그 곳마저 힘으로 파괴하여 버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 네 번째 장소, 성모봉(聖母峯). 그 곳에는 마황야의 연공관이 있다. 검문혼은 그 곳을 그대로 두는 것이 꺼림칙한 나머지, 일천(一千) 비조군(飛鳥軍)을 파견하여 그 곳을 폭발시킬 예정이었다.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철저해져야 한다. 제마들! 밤의 율법 아래 우리들은 독보천하 하게 될 것이며, 그 영광을 위해 피와 죽음을 겁내어서는 아니 된다." 그는 다시 건배를 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검문혼. 하나 그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를 고뇌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고뇌를 하다니? 냉혈의 승부사, 검문혼에게 고뇌의 빛이 흐르다니? 비록 자신의 부모를 죽이기는 하였으되, 양부로 섬기고 있던 인물을 난도질해 죽여 버린 자가 번뇌의 빛을 일으키다니……. '이제 안다. 나는…….' 그는 잔을 빨았으며, 뜨거운 술이 목젖을 타고 흘러들었다. '이 자리가 고독자(孤獨者)의 자리라는 것을… 물론 후회하지 않을 것이나, 지금 고독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잔을 텅 비웠으며, 그로부터 일각 후 일백팔 군마왕은 일천(一千) 내지 삼만(三萬)의 무사들을 거느린 채 백팔 로로 흩어져 나아가기 시작했다. 폭풍은 이제 진정 시작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바로 그 날 그 시각, 그 곳에서부터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마지막 운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第7章 천마화(天魔花) 희마랍야(喜馬拉耶).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이다. 만년빙하(萬年氷河)에 뒤덮여 있는 침묵의 장소. 맑은 날이라면 하늘을 뚫고 치솟아 오른 준험한 산봉우리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되, 날이 맑은 날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날은 설풍(雪風)에 휘말리고 있었다. 지금도 억겁(億劫)의 저주처럼 차디찬 눈보라가 산정을 휘어 감고 있었다. 휘리리리링－!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눈보라이다. 희마랍야의 정봉은 눈보라에 완전히 휘어 감겨 있었다. 그 곳에는 언제부터인가 빙전(氷殿) 하나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곳 둘레에 펼쳐져 있던 진식이 모조리 붕괴되어 버리는지라 그 곳은 빙하에 뒤덮여 버렸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그 곳은 기화요초(琪花瑤草)들이 뒤덮여 있었다. 며칠 전, 무수한 무사들이 거조(巨鳥)를 타고 그 곳에 당도하였으며, 그로부터 사흘 후 기문대진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휘리리리링－! 산을 허물어뜨릴 듯한 바람이었으되, 산은 여전히 군림의 웅자를 보여 주고 있었다. 산상에 세워진 빙탑은 실로 거대했으되, 산악의 거대함에 비한다면 눈에 뜨이지도 않을 정도라 할 수 있었다. 얼음으로 세운 탑은 긴 고드름을 매단 채 냉동되고 있었다. 실로 힘차고 포악스러운 마세(魔勢)가 시작되고 있었다. 빙탑 일대의 기문대진이 허물어진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가공스러운 기세로 인해, 빙탑은 다시 한 번 얼어붙고 만 것이다. 핏빛의 눈이다. 그리고 피부빛은 밀랍처럼 희었다. 초점이 없는 눈이 사이(邪異)한 느낌을 준다. 언제부터 누워 있었던 것일까. 여인의 몸뚱이는 절반 정도 얼음에 파묻혀 있었다. 호흡이 아예 사라진 시신인 듯 거의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는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으며, 그녀의 탐스러운 몸뚱이 위로 결빙이 되고 있었다. "……." 눈빛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눈 한 번도 깜박거려지지 않았다. 보라! 그녀의 천령개(天靈蓋) 부위에서부터 혈무가 스며 나오는 것을. 뭉클뭉클 흘러 나오는 혈무는 석실을 꽈악 메우고 있었다. 석실 안, 여든일곱 명의 복면인들이 앉아 있었으며… 그들은 한결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오른손을 펴서 미간에 수직으로 세우고, 오른 팔목을 왼손바닥으로 가볍게 받쳐 든 자세이다. 콰광－ 쾅－! 무시무시한 뇌성벽력이 시작된다. 팔십칠 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내공의 기운은 여인의 몸 안으로 스미어들고 있었다. "천마제육경(天魔第六境) 돌파!" 천지개벽. 허물어지고 또 허물어진다. 빙탑은 뿌리째 뒤흔들렸으며, 시뻘건 기운은 보다 더 짙어졌다. "제칠경… 무심경(無心境) 통과!" 고오오－ 고오오－! 악마의 숨소리 같은 파공성과 더불어 여인의 몸뚱이는 차츰 혈광에 뒤덮여 갔다. 영혼마저 얼어붙은 듯한 여인, 그녀는 바로 천마화라고 불리는 여인이었다. － 이제 숙명은 없다. 나의 모든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피로 피 빚을 갚아 가는 것만 남았다! － 자네들은 이대로 강호로 나갈 수 없네. 왜냐하면, 지하 생활로 인해 시력이 감퇴되었는지라… 자칫하다가는 햇살을 보는 찰나, 눈이 멀게 되네. － 내가 특수한 방립(方笠)과 병장기(兵仗器)를 만들어야 하네. 그것이 입수되는 대로 움직이세! 천유성, 그는 지하에서 열흘을 보냈다. 그가 그 사이 한 일은, 일만이천 무적영웅단(無敵英雄團)을 꾸미는 일이었다. 무사들은 너무나도 오랜 기아로 인해 강시처럼 마른 상태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장독( 毒)에 걸려 운신이 힘든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이 강호에 나아가게 된다면 천하무림계의 판도는 일거에 달라지게 될 것이다. 가장 강하고 끈질긴 승부욕을 지니고 있는 무사들. 단 백 인만 있다 하더라도 일성(一省)을 정복할 수가 있다. 일천 명이 있다면 대강남북(大江南北) 양대 지역 가운데 일 개 지역 정도는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정예고수들이 일만이천! 천유성은 휘하 고수자들의 숫자에 있어 악마대본영을 순간적으로 십 배 초월하게 된 것이다. 또한 천금무적위 무사들은 마공을 격파하는 방법을 부단히 연마한 바가 있다. 그들은 십오 년에 걸친 연무 가운데 무궁무진한 실전무예(實戰武藝)를 창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외부로 빠져 나갈 수 있다는 마음을 포기한 상태였으며, 자결(自決)이라는 수단은 무사로서는 행할 수 없는 너무나도 치욕스러운 패배이기에… 자결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던 것이다. 그들은 천 권의 비급을 꾸몄으며, 그 가운데 오백 권 정도는 사대마계에 비전되어지는 팔만사천마보(八萬四千魔譜) 안의 마공을 격파하는 무공이었다. 그들이 강호에 나가서 제 실력을 발휘한다면, 천 년에 걸친 대접전은 완벽하게 마무리지어질 것이다. 꾸역꾸역……! 연산 허리는 너무나도 기이한 행렬에 의해 뒤덮여 버렸다. 시월(十月) 보름의 새벽, 이 날은 정녕 놀라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떼를 지어 이동하는 강시들일까? 첫눈이 내려 희끗희끗해진 산령을 따라서 움직이는 자들. 몸놀림이 신비로우며, 하나의 특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자세, 그러한 자세는 타인이 보기에 무기력해 보이는 자세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세를 취한다면 내공의 소모를 없앨 수가 있다. 꾸역꾸역 이동해 가는 검은 그림자들의 등에는 엉성한 철검(鐵劍)이 한 자루씩 메어져 있다. 그들이 걸치고 있는 무복(武服)은 썩어 버린 것으로, 걸레로 쓰기에도 부적당한 것이었다. 하나 그들은 녹슨 철검과 썩어 빠진 무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아아, 보라! 그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곳을! 하나의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분명 무수한 발자국이 찍히어 있어야 하건만, 초설(初雪)이 내려 이루어진 설원(雪原)에는 족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설마 일만이천 무사 전원이 설지표풍술(雪地飄風術)을 써서 치달리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일파를 이끄는 영도자들만이 시전할 수 있는 초상승 경공인데, 일만이천 무사가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을 시전하고 있단 말인가? 숫자를 자세히 헤아려 본다면 일만이천과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제일 앞서 가고 있는 청년, 그만이 백포를 걸치고 있었다. 너무나도 오래 빤 나머지, 회삼인지 백삼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기는 했으되, 본래의 영준한 모습은 감추어질 수 없었다. 그 곁에는 얼굴이 백설처럼 흰 중년인이 따르고 있는데, 모발은 눈처럼 희었으며 나이는 장년이어서 보기가 기괴했다. "풍운친왕은 대단한 자입니다!" 천문성(天文星), 그는 입술을 거의 벌리지 않고 말하고 있다. 그를 비롯한 모든 무사들의 동작은 오랜 폐쇄 생활 가운데 자연스럽게 터득이 된 침묵의 동작들이었다. "그는 본시 영웅총사감으로 내정이 된 인물이었는데… 야망(野望)이 너무 컸습니다." "흠……!" "그는 군림천하(君臨天下)하고자 했고, 피를 함부로 뿌리고자 했습니다. 해서, 제가 가로막았습니다!" 천문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과거, 그는 풍운친왕과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은 바가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의 무예와 풍운친왕의 무예는 쌍벽을 이루었었다. "그는 웃었으며… 일단 기다려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진정 무서운 계획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그 이전, 이미 마가(魔家)와 접촉을 했던 것입니다!" 천문성은 쓰디쓴 표정을 지었다. 지난 일천 년 세월 가운데 오직 한 명의 배반자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절대마황이 된 마황야였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자신은 되어 봤자 중원제일인(中原第一人)이 될 것이라고!" 천문성은 번뇌하고 있었다. 마황야, 그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그의 번뇌는 우정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딸은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맞는 말이오." "아, 그의 딸을 아십니까?" 천문성은 힐끗 천유성을 바라봤다. "알다마다……!" 천유성의 눈빛도 처연해졌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부인이라오. 아무도 갈라 놓지 못할 나의 부인이오. 아시겠소?' 행렬은 더욱 빨라졌다. 그 날, 천하의 백여 군데에서는 풍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끈끈하고 비릿한 피의 바람과 구름이……. 첫 번째의 풍운은 사천당가(四川唐家)에서 시작이 되었다. 사천당가는 봉파를 단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 자들은 사천의 금사강(金沙江)을 건어서 사천당가로 난입해 들어갔다. 숫자는 사천여, 우두머리는 사천당가 출신의 마두 천수나타(千手羅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폭풍혼 휘하에 소속되었던 자였다. 그는 중원대상가가 무너지는 그 날, 두엄 더미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그 덕에 정녕 귀중한 목숨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그는 태양혼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손수 태양혼을 찾아가서 자신의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에 손가락 하나와 귀 하나를 잘라 냈다. 하여간, 그로 인해 그는 일백팔 군마왕 안에 끼일 수 있었다. 그가 이끄는 마도세력은 제이십팔로군(第二十八路軍)이었으며, 주축이 되는 세력은 사천당가에 오랫동안 눌리어 왔던 환영마궁(幻影魔宮)이었다. "아녀자들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쳐야 합니까?" 그의 수석부호법은 사천당가가 십 리 밖에 이르게 될 때, 입수하게 된 정보를 천수나타에게 이야기했다. 천수나타는 마치 천만 대군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항우같이 기세등등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여자(女子)들은 고수를 낳을 수 있으며, 아이들은 고수로 성장할 수가 있다!" "그… 그 말씀은?" "간단하다. 모조리 죽여라!" 사천당가는 그 말이 떨어지고 나서 정확하게 반시진 후에 초토화되었다. 사실, 그 곳은 무인지경이나 다를 바 없는 장소였다. 당씨의 종손들은 소림사 근처로 가서 무림맹에 투신하였으며, 십화(十花)라는 비밀결사에 투신한 바가 있다. 사천당가에는 암기(暗器)를 날릴 수 있는 무사가 오십도 되지 ㅇ았는데, 이십팔 로를 맡은 천수나타는 그 곳을 초토화시켜 버린 것이다. 혈(血)… 풍(風)……! 십오야(十五夜)의 밤이 지나가고 나서 대륙천하는 돌연 피보라에 휘어 감겼다. 일백팔 로로 흩어져 나간 악마신본영(惡魔新本營)의 무사들은 정해진 대로 혈겁을 시작했다. <척살 대상자 사만오천(四萬五千). 이십구만 리(里)를 종횡하는 가운데 걸리는 시각은 일백 일(日). 이제부터 그 계획은 운명(運命)이라 불린다. 운명에 순응하는 자이건, 거부하는 자이건, 모조리 죽는다. 다만 운명을 만들어 내는 우리들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검문혼이 친히 내린 명령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 내부의 싸움을 조속히 평정시키는 길은, 악마의 가족들에게 외부인의 피맛을 보게 하는 것이다. 싸움 가운데 무사들은 강해질 것이며, 모든 불만을 풀어 버리게 될 것이다. 운명, 그것은 정말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이었다. 그 계획대로 한다면 하루에 한 개 문파씩 무너져 나가게 되었으며, 최후의 순간에 가서는 악마신본영이 인정하는 강호세력만이 존재하는 무림일통이 벌어지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화산(華山)은 두 번째 피에 씻겼다. 과거에는 함옥별부(涵玉別府)가 피에 씻기었는데, 이번에는 여협들이 머물러 사는 옥엽검부(玉葉劍府)와 매천무궁(梅天武宮)이 피에 씻겼다. 도처에서 일어나는 피보라, 운명이라 불리는 병법이 실시되고 나서 사흘 안에 사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그 날까지는 아무런 저항도 벌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 날까지는……. "어찌해야 할까요?" 북방의 산천이 내려다보이는 주루의 창 앞이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여아홍(女兒紅)을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주루 안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방립을 벗지 않았다. 반면 다른 청년은 방립을 등 뒤에 걸어 놓고 있었다. "고약하군. 일이 그렇게 될 줄이야……." 질그릇 잔을 쳐드는 청년의 입술은 이월의 꽃보다 붉었다. 벌써 다섯 주담자째 마시는 술이었다. 천유성, 그리고 천금무적의 총위사(總衛士) 천문성. 본시 이들은 십만대산을 향해 갔었는데, 가는 도중에 천하도처에서 벌어지는 혈겁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마황야가 암살되고, 태양혼 검문혼이 제삼세 마황야로 올라간 이야기는 이미 강호계의 모든 인물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들이 준동하리라는 것은 알았으되, 이러한 식으로 무자비하게 준동할 줄은 몰랐소!" "풍운친왕은 대단한 인물인데… 그를 베다니? 태양혼이라는 자가 대체 어떠한 자이기에……?" "놈은 울지 않는 새라 불린 바 있소. 야망이 크고 배짱이 두둑한 놈이오. 또한 병진세에 대해서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소!" 천유성은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 친구여, 무림을 떠나 다오.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언제였던가? 검문혼은 주호를 꼬나 쥔 채 천유성 앞에 나타났었다. 그는 충고하는 투로 그렇게 말한 바 있었다. "바보 자식! 내게는 영웅이 되지 말라고 하고서는… 네놈은 어이해 악마가 되고자 하느냐?" 천유성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나는 알아. 너는 천성적으로 악마가 되지 못할 놈이다. 너는 시인묵객(詩人墨客)이 되어 시나 짓고, 꽃이나 기르며 살 놈이다. 한데 네놈이 천년마가의 지배자로 올라서다니…….' 부르르르……! 그의 손은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천문성은 육감으로 천유성의 내면에 혼돈이 있음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천유성은 눈길을 창 너머에 두고 있었다. 대지(大地)는 눈에 뒤덮이고 있었다. 눈은 인간의 모든 죄악을 씻어 준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내린 눈은 잔혹한 겨울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에 불과할 뿐이었다. '처음 검을 쥐었을 때. 피를 흘리기는 무척 쉽다고 여겼다.' 그는 다시 잔을 쳐들었다. '그리고 검도를 알게 되며, 그것이 무척이나 힘든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다시 한 잔의 술을 빌어먹을 운명의 이름 아래……. 그리고 빌어먹을 친구를 위해! '그리고 지금은… 피를 흘린다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유성의 눈빛은 깊은 바다를 닮았다. 너무나도 깊기에 투명하다 하더라도 언제나 뿌예 보인다는 심해(深海). 천유성의 두 눈에는 거해(巨海)의 의미가 담기어 있었다. '어이해… 나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느냐?' 천유성은 쓸쓸한 빛을 얼굴에 떠올렸다. 하여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섯 잔의 술을 마셨다. 이후, 그의 시선이 오랜만에 천문성에게 돌리어졌다. "준동을 그냥 놓아 둘 수는 없네." "물론이지요." 천문성의 입가에는 그제서야 미소가 퍼졌다. 천년세가 인물에게는 특유한 기질이 있다. 끈질기면서도 강하며, 그러면서도 온화한 기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기질은 절정무도 수련에 적합한 기질이다. 천년세가의 가풍(家風)은 숙명적으로 절세고수를 기르게끔 안배되어 있었다. 천 년 간에 태어났다가 스러져 간 무수한 인물 가운데 가장 강한 인물이 천유성이라면, 두 번째 강한 사람은 천문성이었다. 그들은 풍운금쇄전 안에서 비무를 해 본 바 있다. 천문성은 천유성의 칠 성 내공을 받아 냈고, 천유성의 침묵검도(沈默劍道)를 오 초(招) 넘게 받아 냈다. 물론 그는 십 초를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으되, 그의 무공은 지난 봄에 죽은 사몽혼을 능가하고 있었다. 다시 술이 비워진다. 천유성은 눈에 정광을 뿌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단서가 있네!" "예?" "한 가지가 없어야 하네!" "무엇인지요?" "피(鮮血)가 없어야 하네." "예… 에? 피를 없애고 이기라니요?" 천문성이 당황하자. "진정한 강자(强者)에게는 관용의 아름다움이 있네. 물론 악마대본영의 무사들은 용서받지 못할 마인(魔人)들이나, 죽여서는 아니 될 걸세. 제압하여 무공을 폐쇄한다면,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대가를 모두 다 치루게 했다고 할 수 있을 걸세." 실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힘든 명령이십니다. 물론 그렇게 해 보겠으되, 그들에게 원한이 많은 하부무사들이 살기(殺氣)를 참을 수 있을는지……." "해야 하네." 천유성은 눈빛으로 천문성의 영혼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한 잔의 술을 들었다. "진정한 강자이기에 무혈(無血)의 승리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네. 그래야 악마대본영의 준동이 뿌리째 사라질 걸세!" － 일단 천 리 남쪽으로 갔다가 이동하며 그 자들을 막게! － 금릉(金陵)에서… 나를 기다리게! 나는 한 군데 꼬옥 갈 데가 있네. 그 곳은 바로 나의 운명이 시작된 곳이네. 설원을 가로지르며 치달리는 무사들. 모조리 흑포를 걸치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 위로 삐죽 검자루가 두드러지고 있다.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이동하는 사람들. 호흡 소리가 아주 작고, 눈빛이 음침하다. 일만이천 명이 치달리고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소란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완벽하게 단련이 된 정예고수 일만이천! 이들은 거대한 용형진(龍形陣)을 펼치며 움직여 갔다. 눈보라에 섞이어 움직이는 무사들. 대체 어디로 움직여 가는 것일까? － 가세! － 훗훗… 검이 제대로 쓰여질지 모르겠군! 내뻗는 데에는 자신이 있으되, 그것을 허공에서 멈출 수 있을는지……! － 선혈을 보면 파문(破門)이라니? 영웅총사의 명령이니 따라야만 할 것이나, 너무한 명령이다. 第8章 최후의 승자(勝者)는 자부비전(紫府秘殿). 안탕산(雁湯山)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성채이다. 본시 이세 마황야는 자신의 야망을 이룩한 이후, 천하를 천마화에게 물려주고 나서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로 인해 그 곳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며졌다. 사계(四季) 번갈아 기화요초가 피어나며, 눈길을 아래로 내리면 만리운해(萬里雲海)가 끝없이 펼쳐지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 안탕산은 남방의 산악으로 겨울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산상에는 언제나 겨울이 머물고 있다. 이 날도 허공에서는 눈이 뿌리어지고 있었다. 소담스럽게 떨어지는 함박눈이다. 눈발은 자부비전의 연무장 허공 십오 장 지점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녹아 물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자부비전 내부는 비에 젖고 있었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빗줄기 가운데, 자부비전은 구 일에 걸친 축제 분위기에 휘어 감겨 있었다. 보라! 허공으로 폭화(爆火)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거대한 꽃송이가 만들어졌고, 사방에서부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들 때마다 폭화 하나가 터졌다. 운명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승전보를 갖고 날으는 전서구들. 전서구들이 순찰당으로 날아 내릴 때마다 폭죽을 터뜨려 허공을 불꽃으로 덮는 것이다. 퍼엉－ 펑－ 펑－! 이 날 밤에는 다섯 개의 폭화가 터졌다. 다섯 장의 승전보가 날아들었기에 다섯 개의 폭화가 터지는 것이다. 맹문산(孟門山) 사풍전(死風殿) 궤멸! 그 어떠한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객들의 집단 사풍전. 인원은 구백사십오이고, 그들의 살인술은 풍방 다음으로 이름이 높다. 하나 그들은 의로운 자는 죽이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에, 언제나 사대마계에는 가시가 되어 왔다. 이세 마황야는 그들이 저항하지 않는다면 치지 않았었는데, 태양혼은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풍전은 칠천 무사에 의해 포위되었고, 이천사백이 죽는 대접전 끝에 사풍전의 현판은 쪼개어지고 만 것이다. 적녀환희루(赤女歡喜樓).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지내는 나체족들의 집단이다. 거처는 운남(雲南) 대리현(大理縣). 그들은 정사 중간이며 타세력과는 연락을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풍운친왕은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는데, 태양혼은 달랐다. 그는 적녀환희루를 쳤고, 적녀환희루의 미녀 사백여 명이 혈전 가운데 붙잡혔다. 그녀들은 색노(色奴)로 쓰여질 예정이었다. 피를 보는 자는 색에 굶주리기 마련이다. 태양혼은 수하들에게 성적 위안을 줄 여인을 구하기 위해 적녀환희루 같은 정사 중간의 집단을 무너뜨린 것이다. 사우혈림(死雨血林). 사백 년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방파이며, 세력이 줄어들어서 얼마 전부터는 봉파를 단행하고 있는 집단이다. 태양혼은 그 곳도 박살을 내게 했다. 이유는 하나, 사우혈림이라는 이름이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다. 폭풍신궁(暴風神宮), 자오낭낭천(子午娘娘天)……. 다섯 개의 집단이 파훼되었다. 다섯 번의 싸움에서 적어도 만 명이 쓰러졌을 것이다. 펑－ 펑－ 펑－! 폭화가 치솟아 오를 때, 검문혼은 태사의에 앉아 창을 통해 폭화가 터져 나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눈빛이다. 승리감에 도취된 눈빛이라기보다 미묘한 공포에 휘어 감긴 눈빛이었다. 그는 전에 비할 수 없이 수척해졌다. "도합 서른두 개 지역에서 완승을 거뒀다!" 펑－ 펑－! 하늘이 자색 연화에 덮히고 있다. 그리고 사방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검문혼은 모든 소리가 역겨운 듯 인상을 찡그렸다. "하나, 대부분 의미 없는 승리이다. 진짜 깨져야 할 곳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고 있다!" 그의 입술은 새까맣게 말라 버렸다. 마도를 정복한 젊은 마웅(魔雄), 그는 대체 무엇을 고뇌하고 있는 것일까? "얻은 것은 전무(全無)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승전보를 듣는 가운데 조급해져 가고 있었다. 어떠한 날에는 술이 없을 경우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되며, 술을 아무리 마셔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두 명의 이름이 매암돈다. 으음, 어이해 그 자들의 이름이 좀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단 말인가?" 두 명의 이름… 대체 어떠한 이름이기에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석화, 천유성. 검문혼은 이름 두 개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석화는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빨리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십 년은 있어야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따질 경우, 후환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게다가 성모봉으로 살수들이 갔으니… 만에 하나, 천마화가 연무를 그 곳에서 하고 있다면 암살되었을 것이다!" 검문혼은 잔을 든다. 그는 고독히 잔을 비웠다. 대업을 이룩한 마웅의 처지이거늘, 그와 술을 나누어 마실 친구조차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름… 그 이름이야말로 공포다! 만에 하나, 그가 죽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허물어지리라! 철저하게……!" 커다란 잔 가득 독한 술이 채워졌다. 그는 단 한 모금에 술을 다 마셨으며, 즉시 또 한 잔을 마셨다. "마황야마저 건드리지 못했던 자. 그는 나로 인해 죽은 것이다. 하나,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이 혀 끝에 매암돈다!" 그러는 동안에도 폭화가 쉬지 않고 터지고 있었다. 비에 젖는 뜨락이다. 그 곳에서 매우 묘한 정경 하나가 벌어지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은 여인. 머리를 산발했으며, 지저분한 옷차림이다. 의미 없는 눈빛에 바보처럼 짓고 있는 이상한 미소. 그녀는 꽃송이를 하나 들고 있었으며, 섬세한 손가락을 놀려서 꽃잎을 한 장씩 뜯어 내고 있었다. "그는… 죽었지!" 똑－! 또 하나의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아니야. 그는… 살았다!" 똑－! "그는 죽었지." ……. "그는 살았지!" 기이한 말의 반복이다. 여인은 오직 두 종류의 말만 잇따라 토해 내며 빗줄기 속에서 전신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아름답고 신비한 미인… 혈접혼. 그녀는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으며, 검문혼이 딸려 붙인 백 인의 무사들이 그녀의 몸 주위를 감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너무도 선정적이다. 옷이 비에 젖으며 그녀의 육체는 너무도 선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 주위 삼십 장 내로 접근하지 못한다. 만약 그녀가 한순간 정신을 차린다면,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육체를 탐하는 것을 안다면… 눈부신 섬섬옥수가 휘날려지며 살초가 전개되리라. 그녀의 일 검을 막을 사람은 악마대본영 내에서 단 한 사람에 불과하다. 현재의 마황야 태양혼, 그밖에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일대에는 기환마계에 속한 그녀의 가신들이 은잠해 있다. 그 자들에게 잘못 보인다면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유령처럼 다가와 목을 가져갈 테니까. 하여간 그녀는 가장 고적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죽었지. 아니야, 그는 살았지." 쪼그리고 앉아 꽃잎을 떼어 내는 혈접혼. 그녀의 치마폭에는 나뭇조각 하나가 휘감기어 있었다.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녀에게서 빼앗아 내지 못했던 나뭇조각은 그녀가 정성을 다해서 깎은 천유성의 조각이었다. "바보 새끼! 죽었다면 정말 죽은 줄 알아!" 혈접혼은 천유성의 조각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비록 천유성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은 아니되,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천유성을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되고 말았다. 쏴아아… 쏴아아……! 비가 뿌리어지고, 더 높은 하늘에서는 눈이 뿌리어지고 있다. 아마도 이번 겨울은 꽤나 추운 겨울이 될 것이다. 소림사 경내에는 이전과는 비교될 수 없는 미묘한 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수한 고수들이 기습할지 모른다는 소문 때문도 아니며, 환우천하가 피에 씻기기 시작했다는 정확한 소식 때문도 아니다. 미묘한 분위기는 한 노승의 기이한 행동에서 시작이 되고 있었다. 마른 똥막대기라 불리던 노승, 요료(了了). 그는 폭풍혼이 소림사를 힘으로 정복했을 때, 그가 바라는 대로 허깨비 방장 노릇을 하면서도 시원스레 코를 골며 잠들었던 기승이었다. 천유성이 죽었다는 소문과 더불어 유성십화가 복수검을 끄집어 낸다고 했을 때에도 태연자약해 했으며, 다원에 나아가서 호미질을 하고 고검랑과 더불어 바둑을 두는 가운데 소일을 할 정도로 태평스러웠다. 어디 그뿐이랴? 운명이 시작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어도 그는 웃었다. － 운명? 개똥이라고 해라! 고집스럽고 또한 타인이 예측하지 못할 기행을 일삼는 천하제일승 요료, 그가 돌연 이상해졌다. 그답지 않게 목욕 재계를 하였으며, 불단을 쌓고, 참불(參佛)하기 시작했다. 수다스럽던 그의 입이 사흘 넘게 다물리어졌다. 그리고 성라운행(星羅運行)을 바라보면서 가끔 가다가 장탄식을 토했다. － 이해할 수 없는 기운이 어두운 곳에서 치솟아 오르고 있다. 천지신통(天地神通)의 경지에 오른 달관한 노선사 요료. 그의 입에서 심각한 소리가 나온다면 진짜 심각한 일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현재 소림사에는 삼대세력이 집결되었다. 비밀결사 십화. 백도 최후의 조직이며, 항차 백도맹으로 발전을 할 세력이다. 둘째 세력, 중원대상가. 이끌고 있는 자는 십만호(十萬戶). 그는 하후초와도 안면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십화의 인물들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를 따라온 녹림의 거두들은 백도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소림사의 승려들이 자신들을 환대한다는 데에 감격하고 있었다. 셋째 세력, 풍방(風 ). 도합 이백팔십 인으로 이루어졌는데, 현재는 이백사 인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소림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백에 지나지 않았다. 고검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며, 고검랑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풍혼사십구랑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풍혼사십구랑은 무림혈서(武林血書)에 적힌 자들을 찾아다니며 은밀히 척살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오십여 인자들을 이끈 채 강호를 종횡하고 있었다. 고검랑은 홀연히 하산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요료 선사만이 알고 있었다.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도제일의 배분자 요료, 그는 이 밤에도 별을 보고 있었다. "하나는 천왕(天王)의 별이고, 하나는 마왕(魔王)의 별이다." 그는 천기운행을 닷새 넘게 살폈다. '천왕의 별은 매우 강해질수록 좋은 것이되, 마왕의 별은 성기가 강해지면 아니 되는 죽음의 별이다.' 그의 주름진 이마에 땀방울이 끈끈히 매달렸다. "무서운 겁(劫)이 시작되는 것일까? 아미타불……!" 요료 선사는 합장을 하며 눈을 반개했다. 개고기이고 술이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었던 기승 요료. 그는 십 일 넘게 곡기를 끊고 있었다. 천유성이 실종되고 나서부터, 그는 뜨거운 차를 제외하고는 식량을 입에 대지 않았다. 사실 천유성의 안위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요료 선사였다. 그가 걱정하는 가운데에도 태연자약하는 이유는, 그마저 불안해 할 경우 전 백도의 결속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무림 사상… 한 인물의 어깨에 천하의 운명이 걸린 일은 여러 번 있었다.' 번뇌의 빛이 짙어진다. 활불(活佛) 소리를 듣는 기승, 그는 합장을 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운명이 한 인물의 어깨에 걸리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나타나야 한다. 우라질 녀석! 어이해 이 늙은 땡추중의 속을 새까맣게 태워 버린단 말인가?" 이 날, 고검랑은 요료 선사에게 밀명을 받고 북방으로 치달려 가고 있었다. 그는 바람보다도 빨리 달리는데,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고개를 휘휘 저어 대고 있었다. "대체 하늘에 무슨 글자가 쓰여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는 힐끗 하늘을 바라봤다. 며칠 전, 요료 선사는 천리전음술로 그를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 천기가 불안하네! 가서 알아봐야겠어. 자네의 걸음이 빠르니, 가 보게나. － 북방에서부터 악마의 기세가 치솟아 오르고 있네. － 북방이오? 마도는 남쪽에서 설치고 있는데, 어이해……? － 그들은 허깨비들이다. 그들은 대세를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 그… 그럼……? － 아미타불… 노납도 알지 못한다. 노납은 정녕 가공스러운 기운이 일어남을 느끼었다. 그 기운은 진정 강한 기운이었으며, 과거 노납이 영웅무정 일검향에게서 느끼었던 기운을 오히려 능가하고 있다. － 아……! － 아미타불… 누군가 나타나지 말기를 비네. 아미타불……! 요료 선사는 태어난 이후 최고로 심각해졌다. 그는 대지의 혼을 느끼고, 바람 소리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이었다. 그는 실로 거대한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 천유성의 몸에서 흘러 나왔던 기운을 능가하는 기운. 그 기운은 중원으로 들어와서는 아니 되는 기운이다. 천마사멸세(天魔死滅勢). 최후의 숙명이라고 불리는 전설상의 기세이다. 그것은 천 년 전에 나타났었다. 사대마계가 준동하던 그 날. 그 기운이 천 년 후, 지금 나타난 것이다. 바로 그 날, 자부비전에서는 최초로 폭화(爆火)가 없는 밤이 시작되었다. 폭화가 없다는 것은 승전보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껏 승승장구하던 백팔로혈세군(百八路血洗軍)의 행진에 장애가 있었단 말인가? 하여간 무엇인가가 틀어지고 있었다. 악마의 천재 검문혼이 계획한 이십구만 리 혈세계는 아흐레 만에 처음으로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전서구가 날아들지 않았고… 정녕 공포스러운 무엇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무려 천하의 이 개 지역에서!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처음으로 패배를 알리는 쪽지가 날아든 때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한 후에야 이루어졌다는 이십구만 리 혈세계가 처음으로 패배를 경험한 것이다. 동시에 두 개 지역에서! 도저히 예측하지 못했던 이대세력에 의해 운명(運命)은 가로막히고 있었다. 손(手)이었다. 환우( 宇)를 피보라에 잠기게 한 것은 두 개의 손이었다. 운명의 손이라 불리우는 두 사람의 손. 그것은 검문혼이 일으킨 천하혈세병법(天下血洗兵法)을 실로 무참하게 파괴시켜 버렸다. 첫 번째 손, 천마수(天魔手). 그 손을 만나면 아니 된다. 만나는 찰나, 그대는 죽는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차가운 손이며, 무엇이든 부수어 버리는 손이다. 죽음의 손은 성모봉(聖母峯)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검문혼 휘하 마도인들은 그 손을 만나는 족족 몸이 으스러져서 죽었다. 희고, 차갑다! 그뿐이다. 그 손은 더 이상의 느낌을 주지 않았다. 몽롱하게 피어 오르는 혈무 가운데에서 쑤욱 나타나는 손은 팔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참히 파괴시켰다. 천신마종(天神魔宗) 감사우(甘死雨). 그는 그 손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여기며 입을 따악 벌렸고, 그 손이 활짝 펼쳐지는 것을 보는 찰나 머리가 바수어지는 시체로 화했다. 그는 성모봉의 악마대본전(惡魔大本殿)을 무너뜨리라는 밀명을 받고 일천 비조군을 거느리고 간 인물이었다. 그는 단 일 장에 천령개가 곱게 으스러져 죽은 것이다. 두 번째로 그 손을 본 자는 폭풍무영(暴風無影) 옥기린(玉麒麟). 그는 성모봉에서 수만 리 떨어진 옥관(玉關) 지역에서 그 손을 봤다. 처음에는 핏빛 안개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기에 이상하다 여기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 손이 활짝 펴지는 찰나 탄성을 발할 수밖에 없었다. － 아름답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며 아름다운 손이다! 가히… 예술(藝術)이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을 가볍게 벌렸으며. 퍽－! 실로 경미한 파공성과 더불어 그의 상반신이 배꼽 위쪽 부분에서부터 피모래로 바수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옥관을 넘어 유사군림궁(流砂君臨宮)을 찾아가는 참이었으며, 성모봉을 향해 간 자를 제외할 경우 최북방을 찾아가게 된 자였다. 그는 죽었으며, 그가 이끌고 갔던 마도세력은 반시진 만에 참살당했다. 두우－ 두두－ 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 머나먼 대막 등격리에서부터 만(萬) 기(騎)의 한혈마(汗血馬)가 나타났으며… 정확한 시각, 정확한 장소에 천마수의 주인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이튿날 그들은 십 개 로로 흩어져 나갔으며, 다음 날부터 검문혼의 북방세력은 철두철미하게 와해되어 버리기 시작했다. <산해관(山海關)에서 구천(九千) 영웅(英雄)이 모조리 참살되고, 들과 산을 뒤덮은 시체 위로 까마귀들이 날아들기 시작함!> <제사십구로(第四十九路) 병진을 구축하고 나아가던 음신마웅(陰神魔雄)의 휘하세력은 하나 남김없이 격파당했음! 음신마웅은 천마수의 주인을 만나 죽었으며, 그의 휘하세력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사지가 잘리는 죽음을 만났음!> 자부비전으로는 급보가 속속 날아들었다. 거의 매일같이 그들은 천 리(里)를 이동했다. 또한 그들은 거의 매일같이 이겼으며, 그 때마다 검문혼을 마황야로 추대한 자들은 수천 명 넘게 핏속에 누웠다. 하나 검문혼 자신에게 있어 더 가공할 충격이 되는 사건은 북방무림이 아니라, 남방무림계에서 시작이 되었다. <숫자 일만이천(一萬二千). 하나같이 검은 방립(方笠), 차양이 아주 길어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방립을 쓰고 있으며… 걸치고 있는 옷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음. 병기는 한결같은 흑색(黑色) 장검(長劍). 그들은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차림이나, 그들이 거처하는 곳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 홀연히 나타난 일만이천 무사, 그들은 오십여 로로 흩어졌다가 모였으며… 다시 백 로로 흩어졌다가 모이는 천라지망진(天羅地網陣)을 펼치며 움직였다. 매일 이천 리씩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검문혼 휘하무사들은 철저한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단 하나도 죽지 않은 채 마도무사들은 너무나도 철저한 패배를 경험해야만 했다. 일만이천 무사들이 시전하는 무공은 마공에는 극성이 되는 신공이초들인지라, 마도인들은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일만이천이라는 수의 무사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진열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진세가 방만해질 경우에는 진세의 구축이 힘이 든다. 구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지극히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일만이천 무사들은 모든 방면에서 기적을 이룩하고 있었다. 두 번째 손, 일만이천침묵수(一萬二千沈默手). 일만이천 명의 무사들은 한 사람처럼 행동하였기에 일만이천침묵수라고 불렀다. 마치 일만이천 개의 손을 지닌 자가 나타난 듯이……. 하여간 북방에서는 죽음의 행진이, 남방에서는 무혈(無血)의 승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수북히 쌓인 서찰 더미. 그리고 거의 매각마다 새로운 서찰이 날아들고 있는데, 서찰을 발목에 묶은 채 날아들고 있는 전서구(傳書鳩)는 처음에 날아든 전서구에 비할 수 없이 힘찬 녀석들이었다. 전서구가 전서를 전하고도 힘이 남는다는 것은, 전서구가 날려진 장소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즉 처음에는 실로 먼 지역에서 전서구가 날리어졌기 때문에, 전서구들은 밀지를 전하며 피를 토하며 죽곤 했는데… 최근 들어 날아드는 전서구들은 이천 리 안쪽에서 날리어졌기 때문에, 자부비전의 순찰당 마당으로 날아들고는 여전히 힘이 좋은 상태인 것이다. <여인(女人)으로 여겨짐. 나이는 짐작할 수 없으며, 용모 또한 짐작할 수 없음. 죽음을 각오하고 비밀을 알아보기 위해 다가선 살수들이 수천이었으나, 단 하나도 그녀 곁으로 다가서지 못했음! … 중략(中略)……. 다만 그녀를 보필하는 거마(巨魔)들이 마황야 시절에 고위에 올랐던 인물들이라는 것과, 그 중의 태반은 마황야의 말에 의해 죽었다고 소문난 자들이라는 것을 밝혀 냈음! 다시 말해, 북방에서 쳐내려오는 무사들은 마황야를 추종하고 있는 자들임! 그 명단은… 후략(後略)…….> 부르르르……! 손이 떨리고 있다. 손목까지 화려한 금포에 뒤덮이어 있다. 그런데 금포에는 술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그래… 그 계집이다!" 빠드득 이를 가는 자, 그는 삼세 마황야 검문혼이었다. 그는 수년 간 계획하여 상부자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마황야 자리에 올랐는데, 오십 일도 되지 않아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천마화(天魔花)다. 그년이… 후계자로 나타났다!" 불끈－! 검문혼은 주먹을 드세게 거머쥐었다. '마황야… 역시 위대한 자다. 그는 자신의 죽음마저도 이용했다. 나는 어리석게도 꼭두각시 노릇을 한 것이다.' 검문혼의 살색은 말랍보다도 희어졌다. 그는 마황야를 베어 버린 위대한 고수자(高手者)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그만은 알고 있다. 그가 마황야를 베었을 때 마황야는 금강불괴가 아니었으며, 이전에 비해 내공이 삼분지일로 감퇴된 상태라는 것을! "마황야는 죽을 자였다!" 검문혼의 눈길이 한 곳으로 향해진다. 하나의 검이 벽에 걸리어 있었다. 그것은 마황야의 새로운 신표였다. 제이세 마황야의 가슴에 푸욱 꽂혔던 물건으로, 현재 악마신본영에서는 무적천군번(無敵天軍幡) 이상 가는 권위를 갖고 있다. 한데 어찌 된 일일까? 검극(劍極) 부위가 녹슬어 가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비상(飛霜)이라는 명검(銘劍)이다. 독에 담근다 하더라도 잘 부식되지 않는 천년보검이다. 그런데 비상검은 서서히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검극에는 검붉은 액체가 발리어져 있는데, 그것은 마황야의 몸에서 흘러 나온 피였다. "피가 쇠를 녹이고 있다. 다시 말해, 마황야는 내게 죽는 시각에… 독상(毒傷)으로 인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라질!" 검문혼은 무수한 마공기서를 섭렵했기에 마도에서 전해지는 온갖 종류의 독에 관해 알고 있다. <가장 지독한 독은 잠령마혼독(潛靈魔魂毒)이다. 그것은 금강불괴의 신체도 한 줌의 혈수로 녹여 버린다. 복용한 후 무한대의 마공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결국에는 독기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다. 목숨을 버릴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복용해서는 아니 되는 독이다.> 그렇다. 마황야 풍운친왕은 천마화를 속성으로 연성시키기 위해 극대한의 마공이 필요했으며, 스스로의 수명을 단축해 가면서 잠령마혼독을 복용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실이었다. 검문혼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 올랐다. 검문혼은 일 장을 내쳤으며, 벽락마황수(碧落魔皇手) 일 식 가운데 비상신검은 산산이 바수어졌다. 쾅－! 벽에는 두 자 깊이의 장인이 선명히 찍히어졌다. "그는 나를 철저히 이용했다. 그는… 나를 자신을 죽이는 도구로 이용을 했던 것이다!" 검문혼은 이제야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마황야는 자신의 죽음이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이에 자신의 후계자를 길러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반역의 검에 맞아 죽는 방법을 택하였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과거에는 그를 추종하지 않았던 상고신마들이 그를 위대한 마도의 거인으로 추대하며 그의 딸을 마성녀(魔聖女)로 옹립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도박사였다! 우라질!" 검문혼은 술을 마셨고,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닦았다. '하나, 아직 멀었다. 나는 그것마저도 생각을 했다. 사실 내가 얻은 세력은 너무 방대하다. 열 가운데 아홉을 잃어도 좋다. 훗날, 다시 찾을 최후의 기반만 유지되고 있으면 된다. 훗훗… 그 기반은 천하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에 만들어질 것이다. 바로 숭산(嵩山)에……!' 검문혼은 술기운 가운데 여유를 되찾기 시작했다. 비록 십여 일 사이 그의 휘하가 무수히 죽고 제압되었으되, 그는 여전히 거대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가 가장 믿고 있는 자들은 아직 건재하다. 아마도 그들은 가장 완벽한 승리를 이룩하기 위해 심야 내내 쉬지 않고 치달리고 있을 것이다. 태양무사(太陽武士). 검문혼의 가계인 태양마계 출신의 무사들이다. 그들이 있는 한, 검문혼은 건재하게 될 것이다. "패배란 늘 있을 수 있지. 아암, 승부를 자주 접하다 보면 패배를 경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자위하며 술을 쉬지 않고 마셨다. 하여간 미묘한 공포가 시작되는 것만은 분명한 일이었다. 또 하나의 서찰, 검문혼이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한 서찰이 있다. <일만이천침묵수(一萬二千沈默手). 신속하게 이동하다가 움직이지 않고 있음. 금릉(金陵) 근처! 진형세를 이룩한 채 백리사(百里沙)에 머물렀음. 진세 같지도 않은 진세이며, 왜 그러한 진세를 펼치는지 밝힐 수 없음!> 일만이천침묵수들에 대한 소식, 그것 역시 엄청난 공포를 전하고 있었다. "죽이며 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죽이지 않고 이긴다는 것은 정녕… 힘든 일일지 모른다!" 그의 목소리가 어느 틈엔가 쉬고 있었다. 하긴 그가 아무리 절세고수라 하더라도 마황야가 된 이후, 이제까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으니……. "좋아, 마지막 도박을 해 보자. 그래, 미치광이가 된 한 마리 핏빛 나비를 날리어 보자. 그 다음, 양대 신비세력을 격돌시키는 계획을 시작한다면… 이 위기가 예상 외로 빨리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검문혼은 애써 여유를 되찾는다. 마도제일의 이단자, 어쩌면 그는 낭인주의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자유롭고 홀가분하던 시절… 그 시절이야말로 그의 최고의 계절이 아니었을까? "핏빛 나비로 하여금 침묵수의 괴수를 죽이게 한다면, 침묵수들은 일패도지 할지 모른다. 좋아, 해 보자. 살아 있는 한은 기회가 있지 않는가? 나는 더 어려운 일도 해치운 사람이다!" 검문혼은 맹세의 말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의 술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과거에는 가짜로 술에 찌든 폐인 행세를 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진짜로 술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폐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잔마혈사도(殘魔血死刀)라는 것이다!" 뜨락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렀다. 표정이 수척한 금포청년이 뒷짐을 진 채 뜨락을 거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하나의 왜소한 그림자가 머물러 있다. 아아, 너무나도 냉요(冷妖)로운 여인 하나가 히죽이고 있었다. 의미 없는 웃음을 풀풀 날리는 여인. 그녀는 유가란(瑜伽蘭)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ㅋㅋ… 칼을 준다고?" 유가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구장이 소녀 같은 자세이다. 칼의 의미를 모르고 죽음의 비릿함을 알지 못하는 순수한 표정이었다. "도신에 독기가 발리어 있다." "……." "너는 오늘 밤 안으로 떠나야 한다." "떠나라고? 그럼… 이 지겨운 곳을 나가도 된단 말이냐? 내가 나가 놀지 못하도록 방해해 놓고서는?" "이제는 나가도 된다." "호호… 좋아.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매우 간단한 일을 해야 한다!" "어떠한 일?" "칼을 한 번 쓰는 일이다. 너는 할 수 있다. 너의 밀종(密宗) 냉혈다라은(冷血茶羅隱)이라면… 성사가 가능하다." 검문혼, 그는 하나의 금갑을 지니고 있었다. 금갑 안에는 예도(銳刀)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금갑은 천천히 유가란의 손으로 넘기어졌다. 한데 유가란은 만사가 따분한 듯 하품을 했다. 백치가 된 여인,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묘한 관능(官能)과 천성적인 해맑음뿐이었다. "그는… 강하다." "……." "그리고… 나쁘다!" "나쁘다니?" "그는 얼마 전, 한 사람을 죽였다." 검문혼의 목소리에는 사기(邪氣)가 스미어 있었다. 음사하고 잔혹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묘한 최면공이 실리어 있었다. "그는 이 사람을 죽였다." 검문혼은 소매를 떨쳤으며, 소맷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던 양피(羊皮) 두루마리가 퉁기어져 나오는 가운데 활짝 펼치어져서 뜨락에 펼쳐졌다. 그 위, 한 인물의 초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 그의 얼굴은 가히 살아 있는 전설로 비교될 수가 있다. 한데 어찌 된 일인가? 뜨락 안에는 그 얼굴이 또 하나 있지 않은가? 하나의 정교한 목각인형(木刻人形)이 있다. 바로 유가란의 품안에……. 유가란은 잘 때에도 인형을 껴안고 있었으며, 거의 매시진 그것을 안고 뒹굴고 있었다. 목각인형의 얼굴과 초상화의 얼굴은 완전히 같았다. "이… 이분을 죽인 자가 나타났다고?" 우두두둑－ 우둑－! 유가란의 척추뼈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으며, 그녀의 천령개(天靈蓋) 위쪽으로 핏빛 안개가 피어 오르며 그것은 차츰차츰 하나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나비(蝶) 한 마리, 그것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 네가 죽여야 할 자는 네가 사랑하는 자를 죽인 자다!" 검문혼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얼굴 한 구석에는 야릇한 질투의 빛이 떠올랐다. '죽어서도 여인을 지배하다니…….' 검문혼은 천유성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는… 과연 뛰어난 놈이다. 유가란의 마음은 나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는데… 죽은 네가 유가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다니……!' 바람이 차다. 두 사람의 옷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좋아, 죽일 테야!" 유가란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으며, 얼마 후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第9章 신검(神劍)이 울 때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장소에는 아주 기이한 천기(天機)가 벌어지고 있었다. 복술사들은 그것이 천지재앙의 표시라고 하였으며, 그 곳에서 오래 산 인물들은 호수 바닥에서 한 마리 잠룡(潛龍)이 날아오르기에 벌어지는 형상이라고 했다. 우우우웅……! 무엇인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으며, 금릉(金陵) 외곽 지역의 하늘은 핏빛으로 불타 올랐다. 어떤 때에는 한낮에도 핏빛 광채가 치솟아 올라 구름을 붉게 물들였다. 바로 낭인주(浪人洲)의 하늘이다. 천지가 피바람에 휘어 감기고 있는 덕에 기이한 신비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낭인주 근처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단 하나의 무사들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 분명히 영약(靈藥)이다. 영약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하기에, 하늘이 핏빛으로 물드는 것이다. 핏빛 기운으로 보아, 태양화리(太陽火鯉)일지 모른다. 그것을 잡아 복용한다면, 일약 천하제일의 내공을 얻게 될 것이다! － 기진이보(奇珍異寶)이다. 핏빛의 기운은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기진이보가 나타나며 치솟아 오르는 기운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그 물건에 손을 대지 마라. 그것은 내 것이다! 대세에는 상관이 없이 강호를 주유하는 무사들이 꾸역꾸역 낭인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가도록 그 어떠한 인물도 영약이나 기진이보는 찾을 수 없었고, 핏빛의 기운은 차츰차츰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고독해 보이는 청년이다. 갈 길이 급하지 않은 듯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소로(小路) 좌우의 갈대는 바람에 흩날렸으며, 저 곳에 청랑호(淸浪湖) 물이 언뜻 빛을 발하고 있다. "좋아, 이 곳의 대기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신선하지!" 그는 여유 있는 표정 가운데 숨을 깊이 빨아들였다. 거기에는 들꽃 내음이 섞이어 있었다. 들국화의 내음이다. 정원에서 가꾸어지는 대국(大菊)에 비해 볼품이 없으되, 그 향기는 재배되는 국화보다도 한결 진했다. 잠자리 한 마리가 나래에 가을을 싣고 떠오르고 있다. 지극히 한가롭고 유연한 걸음걸이로 내딛어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낭인주에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옷차림이 그러하고, 한가로운 걸음걸이가 그러하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낭인주에 아는 사람이 꽤 많은 상태였다. 장태태(張太太). 그녀는 전에 비해 훨씬 더 뚱뚱했다. 그녀는 새로 얻은 젊은 서방을 엎어 놓고 주먹으로 묵사발을 만들어 나가다가는 그가 가시나무 울타리 뒤로 지나가는 것을 봤다. "아니, 유성혼(流星魂) 아니야? 호호호… 어찌 된 바람이지? 말없이 떠난 낭인주(浪人洲)의 개(犬)가 돌아오다니!" "글쎄 말이야. 바람이 잘못 불었어. 그래서 내가 왔어!" 천연스러운 표정을 짓는 자, 그는 바로 천유성이었다. 그는 낭인주에 오기 위해 모든 것을 일단 떨쳐 버린 것이다. 낭인주, 그 곳은 그의 운명이 시작된 곳이다. 그리고 그의 야망이 시작된 곳이며, 그가 꼭 한 번은 와 봐야 하는 숙명의 장소였다. 이유는 하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은 어디 있지? 대장간에 가 보았더니 화로가 꺼졌고…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데, 태태?" "ㅋㅋ… 곰처럼 억센 철거 녀석 말이냐?" 장태태는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벼팠다. 짓궂게 일그러지는 추한 얼굴이나, 유성혼이라는 존재를 반갑게 맞이하는 마음만은 진정이었다. "요즘 재미가 좋아, 그 녀석은!" "재미가 좋다니?" "매일 술타작이지." "술을?" "뭘 못 만들었다던가? 우라질 녀석! 그 놈은 뭉툭한 쇳덩어리 몇 개만 갖고 노상 술만 퍼마신다." "아……!" 천유성의 입술 사이에서 한숨 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녀석이 실패했단 말인가?' 천유성은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하여간… 어디야?" "저쪽… 네가 늘 가던 곳!" "아, 그 곳!" 거장궁의 두 번째 제자, 그는 천유성과 하나의 내기를 했었다. 그리고 누구든 이기는 자가 먼저 찾기로 약속을 한 바 있다. 천유성이 낭인주에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래턱에는 철사(鐵絲)같이 빳빳한 수염이 수북하게 돋아났으며, 걸치고 있는 베옷에는 무수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환우천하에서 가장 체격이 거대한 녀석 철거. 그는 주루 구석진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몸을 새우처럼 구부린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체격이 거대하기 때문일까? 그가 점소이에게 쥐어 준 은자 세 냥으로는 그의 거구를 취하게 할 만한 술을 살 수는 없었던 듯, 그는 커다란 주담자(酒曇子) 십여 개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취하지 않은 상태가 되어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만들지 못했다. ㅋㅋ… 나의 모든 혼(魂)과 백(魄)을 불어넣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허탈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라질!"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있었다. 그의 체격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크고 장대하였으나, 아름드리 통나무 같던 허리는 전에 비할 수 없이 홀쭉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허리 둘레가 중원에서 제일 길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바는 없었다. 덩지 큰 녀석 철거, 그는 다시 한 잔의 독주를 뱃속으로 돌진시켰다. 마신다고 한다기보다 들이붓는다고 해야 할까? 그는 적어도 열 모금은 먀셔야만이 비울 수 있는 커다란 술잔을 단 한 모금에 말끔히 비워 버렸다. "크으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나는 역시 꼭지가 덜 떨어진 놈이었다. ㅋㅋ… 한 자루 검(劍)마저 제대로 만들지 못하다니……!" 이번에는 아예 술 주담자를 통째로 들이켰다. 꿀꺽꿀꺽……! 그는 술 주담자 하나를 완전히 비운 다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토했다. "노사부(老師父)의 말은 모두 다 맞았었다. 하나, 내가 언제고 천년보검(千年寶劍)을 만들어 내리라는 예측만은 틀리신 듯하다. 제기랄! 나는 검 한 자루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다. 내가 만들어 낸 병장기의 날은 하나같이 뭉툭하고, 예기(銳氣)가 흐르지 않는다. ㅋㅋ… 이전만 하더라도 강철을 두부처럼 베어 내는 날을 만들어 냈었거늘, 어이해… 어이해 나의 손이 이리도 무디어졌단 말인가?" 철거는 미친 듯이 소리치다가 허리춤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내팽개치듯이 탁자 위에 던져졌으며,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십여 자루의 병장기가 뒹굴어 나왔다. 도합 열세 자루. 다섯 자루는 검(劍)의 형상을, 네 자루는 도(刀)의 형상을, 세 자루는 판관필(判官筆)의 형상을, 그리고 나머지 한 자루는 검도 아니고 도도 아닌 기이한 형상을 갖고 있었다. 검고 음습한 광채가 흐르고 있는 철기(鐵器)들. 실전용으로 쓰기에는 크기가 작은 소병기들이다. 또한 그것을 병장기라고 부르기에도 부적당하다 여겨질 정도로 열세 개의 철기에는 차가운 기운이 없었다. 대체 그럴 수가? 칙칙하고 차가운 철물에서 따뜻한 느낌이 흘러 나오다니? 철거, 그는 지난 반년 내내 강철을 녹이고 두드리는 가운데 밤을 잊고 낮을 잊어버리곤 했다. 고금에서 가장 위대한 장인(匠人)이 되기 위해……. 그를 거둬 준 거장지존(巨匠至尊)을 능가하는 천하명장(天下名匠)이 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여자라는 족속은 아예 바라보지도 않았고, 머리 속에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암컷의 내음이 그리워지고 꿈 속에라도 여자가 나타나면… ㅋㅋ… 즉시 한천(寒泉)으로 달려가 홀랑 벗고 차디찬 물 속으로 뛰어들어서 심마(心魔)와 환영을 없애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흐트러진 눈빛이다. 그것은 완전히 탈진해 버린 눈빛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최선을 다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렇듯 허탈한 눈빛을 던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곡기(穀氣)마저 끊었으며, 살을 태우고 뼈를 녹일 듯한 열기(熱氣)를 참아 가며 쇳덩어리와 씨름을 했다. 혼을 불어넣기 위해! 그런데… 그런데… 우라질!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쳤는 데에도 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라질! 나는 살 가치도 없는 놈이다!" 철거의 욕설이 커지는 가운데 주루가 난장판이 된다. 의자가 날아오르고, 탁자가 바수어져 떠오르고,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바닥에 웅덩이가 파여 나갔다. 와장창－ 쿵－! 철거가 주먹을 다섯 번 휘두르기도 전에 꽤 큰 주루 안은 무인천지로 화하고 말았다. 대체 누가 철거의 신력(神力)을 막을 수 있겠는가? 철거는 장인으로서 길러진 청년이다. 어렸을 때부터 화기(火氣)를 가까이 했으며, 철기(鐵器)를 늘 벗하고 살아왔다. 매일같이 천여 회씩 망치를 휘둘러 댔으며, 무거운 강철 덩어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일을 거듭했다. 결국 그의 근골은 강철보다도 단단한 근골로 변화하였으며, 그의 사지백해는 후천진기(後天眞氣)라고 불리우는 엄청난 잠력(潛力)이 깃들게 되었다. 쾅－ 쾅－! 철거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돌이고 나무고 가리지 않고 박살이 나 버린다. "젠장, 다 틀려 버린 게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썼는데… 만들어 내지 못했다. 나는 역시 백치였다. ㅋㅋ… 돌아가신 사부님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나를 속였던 것이다. 그것을 이제야 알다니……!" 그가 미친 황소처럼 날뛰고 있을 때였다. 대체 언제 나타났을까? 구깃구깃한 백포 자락으로 몸을 휘어 감고 있는 헌칠한 키의 낙척문사(落拓文士) 하나가 불쑥 나타나며 단아한 어조로 말했다. "그분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았다." "누… 누구냐? 누가 헛소리를 하느냐?" 철거는 무쇠 주먹을 불끈 쥐며 허공에 쳐들어 댔다. 취기가 올라 핏빛으로 달아오른 두 눈, 게다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어 앞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이다. 너무나도 흰 얼굴이다. 사내의 얼굴이라기보다는 계집의 얼굴처럼 희며, 오관(五官)의 배열이 너무나도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 번 보기만 하면 눈길을 돌리지 못할 정도이다. 단아하게 다물어진 입매, 태산준령처럼 치솟아 오른 콧날을 지닌 미청년. 낙척서생 특유의 허름한 옷차림이었으나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신기(神氣)는 감추어지지 않았다. 부드러운 가운데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눈빛과, 섬세해 보이는 가운데 예리한 맛을 느끼게 하는 옥수(玉手)는 가히 압권이었다. 지금 그의 손에는 하나의 철검(鐵劍)이 쥐어져 있었다. 만들다 만 철검일까? 끝이 뭉툭하며 날(刃)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일반 장검이 흘리어 내는 예광(銳光)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검신의 두께가 꽤나 두꺼웠다. 보통 종류의 병장기만도 못하며, 신병이기(神兵異器)라고 불리는 천하기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망가진 쇳덩어리. 그런데 그것을 쥐고 있는 그의 손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느냐? 너는 해낸 것이다!" "아… 내… 내가 해내다니……?" "훗훗… 너는 만들어 낸 것이다. 녀석, 네가 자랑스럽다. 너는 위대한 장인이 된 것이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온 천하에 오직 한 사람… 바로 정말 바보 같은 네놈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웃는 청년, 그의 눈시울은 가볍게 달아올랐다. 그는 바로 천하무림계에 한 줄기 폭풍이 되어 나타난 천유성이었다. 한데 그가 철거에게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다니? "유… 유성! 내가 해냈다고? 너마저… 너마저 나를 위로하려 하느냐? ㅋㅋ… 동정은 필요 없다!" 철거는 천유성을 확인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주루루 흘렸다. 기실 철거는 천애고아(天涯孤兒)이고, 천유성에 대해 지독하게도 각별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천유성도 철거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는 처지였다. 하나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미남자, 다른 하나는 크고 우직하며 멍청한 거인.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교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해냈단 말이냐? 나는 폐인이 되고 말았는데?" 철거는 천유성을 대하기 수치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나 천유성의 미소는 진실된 미소였다. "바보 자식! 너는 강철에다가 생명(生命)을 불어넣었다. 아느냐? 강철에서 온기(溫氣)가 일어나는 경지가 바로 신장(神匠)의 경지라는 것을?" "아……?" "네가 만든 병기로 인해 천기(天機)가 달라질 정도인데… 훗훗… 네녀석만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 그럴 수가? 네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를 위안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철거, 너는 너와 같은 것이 꼭 하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천유성의 눈은 거인의 눈이었다. 그의 체구는 철거에 비해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되, 천유성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도는 철거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진정한 거인, 철거는 진정한 작은 거인 앞에서 묘한 제압감을 느꼈다. "하… 하긴 네 말은 맞는 말이다." "너는 장인이기에… 검의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넣기는 했으되, 검의 소리(劍吟)는 듣지 못한 것이다!" "검의 소리?" "너는 듣지 못하리라. 천룡(天龍)의 울부짖음 소리 같은 검의 소리를… 녀석, 네가 자랑스럽다. 너는… 내가 이룩한 것보다 훨씬 거대한 것을 이룩해 낸 것이다. 너는 천년거장궁의 염원을 이룩한 것이다." "염… 염원……?" "프핫핫… 진장한 승자(勝者)는 내가 아니라, 너다. 덩지만 크고 애기 같은 녀석이… 정녕 길고 지루하며 고독한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천유성의 눈시울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는 피의 계보상 영웅팔가의 후예이다. 하나 그는 자신의 가문보다는 자신이 운명에 따라 선택하게 된 거장궁이라는 사문(師門)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거장궁에는 오직 두 사람의 문도(門徒)가 있을 뿐이다. 천유성, 철거. 고집스럽고 괴팍한 녀석들. 현실과 타협하며 휘어지기보다는, 싸우다가 부러지기를 택하는 녀석들. "따라와라. 네게 보여 주겠다. 네가 검의 예술(藝術)을 완성시키는 동안, 내가 완성한 것을 네게 보여 주겠다. 너만은… 그것을 볼 자격이 있다." "너… 너도 이룩했느냐?" "이제 시작이지. 그러나 자신은 있다. 그것을 보여 주고… 네게 일배주(一杯酒)를 거나하게 얻어 마실 수 있다는 자신은 있다. 프핫핫……!" 천유성은 앙천대소룰 터뜨렸고… 그러한 가운데 천유성의 몸뚱이와 철거의 몸뚱이는 흰 기류에 휘어 감기기 시작했다. 안개는 소리 없이 두 사람의 몸을 휘어 감았다. 그것은 완숙된 선천강기(先天 氣)이다. 본시 선천강기는 발출이 될 때 격렬한 파공성을 내기 마련인데, 천유성이 흘리어 내는 선천강기는 어떠한 파공성도 흘리지 않았다. 안개는 소리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을 휘어 감았고, 한순간 일대의 꽤 많은 사람들은 두 놈의 미친 녀석이 바람이 되어 홀연히 사라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따당－ 땅－! 허공에서 금원보(金元寶) 두 개가 떨어져 내린다. 아마도 그것은 깨어진 기물집기를 변상하기 위한 대금일 것이다. 낭인주(浪人州), 그 곳은 운명이 시작되었던 장소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운명이 만들어진 장소이다. 미친 두 녀석은 흰 안개에 휘말린 채 낭인주를 철따라 지켜 서는 야화(野花)의 황량하나 포근한 늪지를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너는 이루어 낸 것이다. 봐라, 이것을! 이것은 이제까지 가장 날카로운 날이라 알려졌던 것이다." 호숫가에서 천유성은 하나의 비수(匕首)를 품에서 꺼내고 있었다. 길이가 이 촌(寸)이고, 실로 잔혹하고 독랄한 마기를 뿜어 내고 있는 사악한 물체였다. 그것은 칙칙하고도 음험한 죽음의 예광을 흘리고 있었다. 천유성은 맨살로 그것을 힘껏 거머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를 흘리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의 쌍수(雙手)는 번뇌혼의 예기를 이길 정도로 단련이 된 것이다. 하여간 천유성은 번뇌혼을 쥔 채 철거를 봤으며, 입가에 단아한 미소를 띄우며 철거가 만든 병기 가운데 하나를 쳐들었다. 그것은 철거가 만든 물건 가운데 가장 긴 녀석이었다. 뭉툭한 몸뚱이에 투박한 형상, 번뇌혼과는 모든 방면에서 대조가 되는 물건이다. 천유성은 두 가지 물건을 천천히 하나로 합치기 시작했다. 가장 예리한 번뇌혼의 날과 날이라고는 아예 없는 철거의 병장기가 하나로 합해지는 그 순간이었다. "어… 엇?" 철거의 눈알이 한 치 정도 튀어나왔으며, 그의 입은 주먹 두 개가 시원스럽게 들어갔다가 나올 정도로 커다랗게 뜨여졌다. 대체 이럴 수가? 삿－! 너무나도 경미한 금속성과 더불어 번뇌혼의 허리가 싹뚝 잘려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천유성은 양 손에 균등한 힘을 가하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번뇌혼을 쥐었으며, 왼손에는 철거의 병기를 쥔 채 하나로 합쳤는데… 잘려진 쪽은 번뇌혼이었다. "이긴 것이다, 네가! 너야말로 천하제일의 장인이 되었단 말이다!" 철거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 낼 뿐이었다. 남자에게도 울 자격이 주어지는 시각은 있다. 기실 어떤 때는 팔 척 남아라 하더라도 호쾌하게(?) 울 때가 있는 것이다. "너는 만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천룡음(天龍吟)! 구야 노사께서 만들고자 했던 거장궁의 염원이며, 고금 모든 장인의 숙원이 되는 물건이다." 천유성은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는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한 마리 용처럼 날아올랐으며, 그의 좌수(左手)가 반원을 그리는 가운데 그 물건 또한 반원을 그렸다. 천룡음(天龍吟). 우직한 녀석 철거가 만들어 낸 병장기. 그것은 기이한 파공음을 하늘 가득 흘리기 시작하였으며… 그 소리는 용의 울부짖음 소리를 닮아 가는 가운데, 하늘 가득 거룡(巨龍)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고오오－ 고오오－! 무수한 용이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가운데, 천유성의 몸과 천룡음은 하나로 합해지며 보다 높이 치솟아 올랐고… 어느 한순간, 철거는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하늘(天)도 어떤 때에는 반으로 갈라질 수 있음을……! 백리사(百里沙)는 비에 적시어지고 있었다. 도도하다고 말하기에는 흐름이 너무나도 느린 적마강(赤馬江) 좌우. 너무나도 보드라운 은색 모래가 드넓게 펼치어져 있었다. 적마강 일대로 꽤 여러 날 전부터 아주 많은 낭인(浪人)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커다란 차일립(遮日笠)을 쓴 자들이다. 역겨운 내음이 풍기는 무복(武服)을 걸치고 있으며, 등에는 철검을 한 자루씩 떠메고 있다. 비슷한 차림에 비슷한 눈빛들, 이들은 바로 새로운 신화로 등장한 천년세가의 무사들이었다. 일만이천 천금무적위(天禁無敵衛), 일흔두 번 써웠고, 일흔두 번 이겼다. 검문혼 휘하에는 그들을 꺾을 만한 무사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는 무사들, 그들의 어깨 위로 세우(細雨)가 뿌리어졌다. 북방 지역이라면 아마도 눈(雪)이 떨어져 내렸으리라. "……." "……." 말없이 머물러 있는 천금무적위. 이들은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에도 악마신본영의 진세를 여지없이 흩트려 버렸다. 천금무적위들이 한 장소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천하에 소문나게 되었으며, 사십팔 로(路)에서부터 마계의 무사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재 싸움은 양분되고 있었다. 북혈(北血)… 남묵(南墨)……! 북방무림계는 핏빛 옷을 걸친 무사들에 의해 피에 씻겨지고 있으며, 남방무림계는 흑포를 걸친 천금무적위들에 의해 평화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흩뿌리는 세우가 장막처럼 펼쳐진다. 머지않아 십일월이 시작될 것이다. 혈풍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었다. － 백도(百道)는 잠들었고, 악마들이 등천(騰天)한다. 의협(義俠)은 오직 침묵의 손들뿐이다! 그러한 노래가 강호 전역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천하 대세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자들이 지껄이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소림(少林), 무당(武當), 공동( ), 곤륜(崑崙), 무산(巫山), 개방( )……. 천하의 백도방파는 그 어떠한 때보다도 잠력이 거대해진 상태였다. 만에 하나 그들이 검을 끌어낸다면 실로 경천동지할 파란이 다시 한 번 벌어지게 될 것이다. 하여간 그들 일만이천 영웅들은 오랫동안 빗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을 향해 다가서던 마계무사들은 어처구니없이 쓰러졌으며, 지난밤부터는 암습자들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침묵에 익숙한 자들, 그들은 일만이천(一萬二千) 봉(峯)의 진세를 이룩하며 백리사의 야우(夜雨)와 더불어 밤으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인물, 언제부터인가 숨을 멈춘 채 엎드려 있다. 예도(銳刀) 하나를 가슴에 안고 있는 왜소한 그림자. 그는 모래 속에 일 장 정도 파고들었으며, 숨도 쉬지 않고 호흡 소리도 없이… 맥박 소리마저 감춘 채 은잠을 계속하고 있었다. 죽어 버린 눈빛에 창백기(蒼白氣)가 가득한 피부, 전신을 회포(花袍)로 휘어 감고 있는 인영. 일만이천 무사들 가운데 그가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죽여야 한다.' 피를 차갑게 식힌 채 기다리고 있는 냉혈인간. 그는 누군가를 끝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누구인지 모르나, 그의 심장에 세 치 구멍을 내야 한다. 왜 죽여야 하는지…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쿵－ 쿵－ 쿵－! 녀석이 걸음을 떼어 넣을 때마다 지축이 뒤흔들리는 것 같다.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일까? 아니라면 기분이 몹시 좋기 때문일까? "좋아, 이제 나는 자네의 좌비위(左臂衛)야. 꽁생원 하후초마저 머지않아 볼 수 있게 되다니… 정말 즐겁네!" 앙천대소를 터뜨리는 자, 중원에서 가장 거대한 체구를 지니고 있는 자이다. 허리가 거목의 허리처럼 우람하며, 낡아 빠진 단삼 자락 사이에서 툭툭 불거져 나오는 근육은 강철처럼 탄탄하다. 철거(鐵巨), 그는 천유성을 뒤따라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천유성도 상당히 큰 키였으되, 철거의 덩치가 워낙 대단한지라 난쟁이처럼 왜소해 보였다. "철거, 하늘빛이 좋구나." 천유성은 백리사 쪽을 향해 이동해 가고 있었다. 그는 철거에게 세 시진에서 걸쳐서 하나의 보행법을 전수했으되, 철거는 흥나는 대로 쿵쿵 소리를 내며 걷는 것이었다. "제길, 늘 보는 하늘이거늘……!" 철거는 툴툴거리면서도 몹시 즐거운 표정을 금치 못했다. 중원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미청년이 바로 앞에 있다. '가장 강한 녀석이다. 손발이 아니라, 의지가……!' 철거는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가는 요조숙녀와 같았다. 갈대밭을 가로지르고 강가를 따라 오랫동안 걷자, 갈대밭이 끝이 나며 흰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부위가 시작되었다. 바로 백리사. 그 곳은 천유성이 천금무적위들과 해후하기로 내정한 장소였다. "와 있군!" 천유성은 빗속에 서성이고 있는 일만이천 무사들의 모습을 오백 장 밖에서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천년세가의 가장 큰 저력은 바로 저들이다. 나의 형제들…….' 천유성은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철거는 뛰다시피 하여 겨우 천유성을 뒤따를 수 있었다. 휘이이이잉－! 천유성은 유운신보(遊雲神步)를 시전해 일만이천 무사들 쪽으로 움직여 가기 시작하였으며. "총사시다. 드디어 오시었다." "천하제일인이 오신다." 일만이천 무사들은 가벼운 흥분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천유성을 항해 장읍(長揖)을 할 때,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무적묵검진(無敵默劍陣)이라는 진세가 파훼될 때였다. 슷－! 무엇인가가 사중(砂中)에서 미끄러져 나아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희미한 냉기(冷氣)가 흘렀고, 그 기운은 천유성 쪽을 향해 섬전(閃電)처럼 폭사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섬ㅉ한 기운, 그 기운을 제일 처음 느낀 사람은 천문성이었다. "감히 자객(刺客)이……?" 그는 쌍수를 쳐들었고, 벽력천강권(霹靂天 拳) 일 식이 시전되어 백리사의 모래를 뒤흔들었다. 우지끈－ 콰쾅－! 폭음이 일어나며 깊이가 이 장에 달하는 구덩이가 파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모래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빠… 빠르다! 너무나도 빠르다. 이미… 늦었다." 천문성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는 힐끗 천유성 쪽을 바라보는데, 천유성의 뒤쪽 허공으로 핏빛 그림자 하나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보라! 천유성의 입가에는 짐짓 미소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설마 그는 자객이 자신을 기다렸다가 덮쳐 든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 자그마한 인영은 소리 없이 이 장 치솟아 올랐으며, 바로 그 순간 그의 몸뚱이와 예도 하나가 한 줄기 핏빛 무지개로 합쳐진다.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허공을 잘라 버리는 살인도초(殺人刀招). 섬예(閃刈)! 천유성은 핏빛 광채가 등 뒤 세 치 되는 곳에 이를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핏빛 광채가 두 치 더 접근할 때. "조금 늦군!" 그의 우수가 슬쩍 떨치어졌으며, 일대에 모인 모든 사람은 하나의 백색(白色) 환(環)이 나타나서 천유성의 몸뚱이를 휘어 감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천왕금쇄환(天王禁鎖環)이다. 소리보다도 빠르게 시전되는 선천진기(先天眞氣)이다. 소리도 내지 않으며 유형화된 백색의 강기로서, 어떠한 종류의 마병이든 차단해 버린다. 게다가 천왕금쇄환에는 흡력(吸力)이 있어, 다가서다가 비껴 가는 물체들을 모조리 장권(掌圈) 안으로 빨아들인다. 초를 십분지일로 끊는 시간에 천유성의 손은 열여덟 개의 백색 고리를 만들었으며. 따당－ 땅－ 땅－! 요란한 강철 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허공에서 쇳모래가 뿌리어졌다. "제길, 틀렸다. 실패했다!" 왜소한 인형은 또다시 높이 날아올랐다. 아아, 등 뒤에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탐스럽지 않은가? 자객은 여자(女子)란 말인가? "난(蘭)이 실패하다니… 제길!" 마치 악동(惡童)처럼 심한 욕설을 하며 날아오르는 작은 그림자는 오 장도 더 날아가지 못하고 멈칫하게 되었다. 거벽(巨壁)일까? 무엇인가가 그녀 앞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계집! 감히 내가 주인으로 섬길 유성혼을 죽이고자 하다니……!" 인간의 장벽 하나가 날아올랐으며. "가라!" 여자객은 앙칼진 호통 소리를 내며 쌍장을 합했다가 활짝 펼치는 자세를 취했다. 옥수모니인(玉手牟尼印) 수법. 강철 벽을 으스러뜨린다는 밀종절학(密宗絶學)이다. 벼락 치는 소리가 나며 비보라가 거꾸로 치솟아 올랐다. 놀랍게도 옥수모니인의 기세는 순간적으로 흐트러져 버렸으며, 여자객의 입술 사이에는 새빨간 핏물이 튀어나왔다. "금강지체(金剛之體)로군? 나의 장력을 퉁기어 내다니?" 어딘지 모르게 앳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공중제비를 돌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철거 또한 십 장 뒤로 퉁기어져 나갔다. "빌어먹을 계집년! 손이 맵구나. 철거의 단벌옷이 다 찢어졌다!" 바로 철거였다. 허공으로 날아올라 여자객의 퇴로를 가로막은 장본인은 철거였다. 물론 그가 막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자객에게는 퇴로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만이천 무사들은 살기를 일으키며 진세를 좁히기 시작했다. 태산이라도 갈아 버릴 듯한 기세로 덮쳐 오는 천금무적위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멈추게들! 내가 아는 여인이네!" 희뿌연 기류가 날아드는 가운데, 천금무적위의 진세가 형편없이 흐트러졌다. "어이쿠우!" "역시… 영웅총사시다." 천금무적위들은 광풍에 날아오르는 대나무 잎사귀처럼 사방으로 퉁기어졌다. 천유성은 여자객 바로 곁으로 표표히 날아 내렸다. 웃다니?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인물을 보고 웃다니? "오랜만인데?" "아아… 아아……!" 휘청휘청거리며 피를 꾸역꾸역 토하던 여자객.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유성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퇴폐적이며 관능적(官能的)인 눈빛이다. 그리고 다분히 백치미(白痴美)를 느끼게 했다. "너… 너는……?" 정말 아름다운 오관(五官)의 조화를 갖고 있는 절세미인. 옷차림이 형편없으며, 얼굴이 피에 범벅이 되고 있기는 하나, 그녀의 천부적 아름다움만은 훼손이 되지 않았다. "그래, 나를 알겠는가?" 천유성은 팔짱을 낀 채 성큼 다가섰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는데, 여인의 눈빛이 점점 기이하게 흐트러지는 것을 보고는 눈가를 찌푸렸다. '설마… 백치가 되었단 말인가?' 그는 신형을 빠르게 날렸으며, 여자객과 그 사이의 거리는 대번에 단 팔 척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맹랑한 여자객의 고개가 자꾸만 기웃거렸다. "너는… 너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는 신비 여자객. 그녀는 바로 혈접혼(血蝶魂)이었다. 본래의 이름은 유가란(瑜伽蘭), 기환마계주(奇幻魔界主)이며 한때 사대왕야 가운데 하나로 군림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예전의 일이었다. 홀연히 나타난 혈접혼 유가란은 반 미치광이였으며, 일곱 살배기의 지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철거와 일 장 격돌하는 가운데 중내상(重內傷)을 입은 듯, 그녀의 상체는 서서히 앞으로 나뒹굴었다. 천유성은 얼른 두 팔을 내밀어 그녀를 받아 들었으며, 그녀의 입술이 살포시 벌어지며 야릇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여간… 좋은데?"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성의 힘은 제거되어 버리고, 감정과 본능만이 남게 된 미묘한 처지의 혈접혼. 그녀의 낯색이며 눈빛은 그녀가 마교대법에 제압당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너는 역시 살아 있었다. 호호… 하여간 좋구나. 호호… 이 말은 진심이야." 혈접혼은 문득 천유성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듯이 까르르 웃으며 천유성의 옷가슴에 피를 반 사발이나 토했다. 식초 내음이 뭉클 풍기어 나오는 독혈(毒血)이다. 검문혼은 혈접혼 유가란에게 만성독약을 먹인 듯했고, 독기운이 내공 소모로 인해 빠른 속도로 번져 가는 듯했다. "정말 좋아, 네품은!" 혈접혼 유가란은 행복감에 겨워하고 있었다. 천유성은 죽어 가는 그녀의 손을 꼬옥 쥐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죽지 않아.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살릴 테니까!" 비가 그칠 무렵, 일만이천 무사들 가운데 이천만 낭인주에 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북상(北上)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무림성지 소림사(少林寺)를 향해. 철거도 그들 일행에 끼여서 낭인주를 떠났다. 천유성은 그들을 배웅할 수 없었다. 그는 이천 무사들이 호위진세를 펼친 거장궁 깊이 들어가서 날개 부러진 나비 한 마리를 치료해야만 했던 것이다. 第10章 깨어난 거인(巨人) 반듯이 누운 유가란(瑜伽蘭). 그녀의 눈은 아직도 감기어지지 않았다. 초막(草幕) 내부는 달빛에 젖고 있었다. 그녀의 망막으로 화려한 달빛이 투영되고 있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눈빛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우며, 또한 순수한… 마치 나이 어린 소녀의 눈망울처럼 청백기(靑白氣)를 엿보이고 있다. 백치경에 접어든 여살수 혈접혼. "……."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눈에서부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천유성을 알아보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천유성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소!" 꽤나 퉁명스러운 말이다. 그러나 진정 뜨거운 인간미가 담기어져 있었다. 이 곳은 바로 그가 거장지존에게서 거장궁의 대업을 제수받은 장소이다. 그 곳에 그의 후예가 들어왔다는 것은 하나의 묘한 운명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더욱 운이 좋게 될 것이오!" "으으음……!" 혈접혼 유가란은 오랜만에 숨소리를 터뜨렸다. 그리고 장미잎 같은 입술이 팔랑대며 투정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렀다. "가면… 아니 돼!" 아주 나이 어린 소녀가 떼쓰며 말하는 듯하지 않는가? '지독하군. 문혼… 그 놈은 너무나도 극악한 방법으로 혈접혼의 마음을 제압해 버렸다. 혈접혼의 지능은 칠 세 소녀 정도이다.' 천유성은 손 하나가 다가섬을 보았다. 떨리는 손길이다. 혈접혼은 천유성의 얼굴을 향해 차가운 손을 내밀었다. "가면… 아니 돼. 정말이야!" "물론… 나는 아니 갈 것이오." 천유성은 싱긋 웃어 주면서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여살수의 손을 콰악 쥐었으며, 혈접혼의 손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가운데 그녀의 표정은 보다 편안해졌다. "고마워!"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그녀는 심령금제(心靈禁制)에 당해 기억을 잃어버렸다. 하나, 천유성에 대한 영상만은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 많이 봤어. 호수 표면에서, 거울에서, 그리고 꿈에서……!" 방긋……! 혈접혼은 상냥스레 미소를 지었다.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테야. 한데,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군." "글쎄, 잘못한 것은 없소!" 천유성은 조심스레 그녀의 맥박 고동을 살펴봤다. 그는 의학(醫學)에 있어서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콩알 세 개 반의 무게로 손가락이 눌리어졌다. 얼마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경혈 한 곳이 막혔다!" 천유성의 눈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혈접혼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난(蘭), 나와 한 가지를 약속해야겠소." "무… 무엇을……?" "아파도 참아야 한다는 것!" "으음, 아픈 것은 싫어." 아예 응석이다. 말(馬)만한 여자가 남자의 코앞에서 버릇없이 떼를 쓰다니? "그러나 그대가 바란다면, 노력하겠어.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으나, 무슨 말이든 다 들어야 한다는 것만은 알겠어." 유가란, 그녀는 단 한순간도 여인답게 살지 못한 여인이다. 어렸을 때에는 가법에 따라 독랄한 여고수자로 길러졌고, 나이 열다섯이 넘어서부터는 마황야에게 철저히 이용당했다. 그리고 지난 여름 이후에는 검문혼에게 이용을 당했다. 만에 하나, 그녀의 마음 가득히 천유성의 영상이 떠오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정말이야. 참을 수 있어!" 유가란은 입술을 잘강 씹었다. "좋소. 그럼 시작하겠소." 천유성은 해맑은 미소 가운데 우수를 내밀었다. 일순 그의 우수가 투명(透明)해지기 시작한다. 그 무엇이든 파괴해 버리는 불멸여의수(不滅如意手). 가히 금강지수(金剛之手)라 일컬어지는 손이다. 살이 투과되어 보이며 핏줄이 들여다보인다. 흰 뼈마디가 선명히 나타났으며, 오른손이 팔뚝 부위까지 완전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탄지지간(彈指之間)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다시 말해, 천유성의 내공출수(內空出手)는 완벽경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불멸여의수에는 두 가지 힘이 있다. 하나는 사수(死手), 또 하나는 생수(生手)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불멸여의수는 생사신수(生死神手)라고도 불리우고 있었다. "손이… 아름다워!" 유가란은 밝게 웃는데, 바로 그 순간 천유성의 우수에서는 무시무시한 잠경(潛勁)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활화산(活火山)의 기세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강했다. 유가란의 몸뚱이는 찰나적으로 백광에 휘어 감겼다. 몸이 조각조각 바수어지고, 오장육부가 타서 재가 되어 버리는 듯하다. 너무나도 지독한 고통이다. 특히 뇌호혈(腦戶穴) 부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근육이 파열되고 살이 타 들어가는 고통, 그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정신의 고통이었다. "……!" 입을 꽈악 물고 그녀는 고통을 버텼다. 천유성을 위해, 천유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심마(心魔)가 파괴되며 덮쳐 드는 모든 고통을 이겨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휘리리리리링－! 가공스러운 기세가 쉬지 않고 그녀의 몸 속으로 흘러들었다. "흐으으… 흐으으……!" 유가란의 숨소리가 차츰 급박해진다. 또한 그녀의 뒤통수 부위에서 비릿한 혈액(血液)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며, 세 치 길이 은침(銀針) 하나가 뇌호혈에서부터 솟구쳐 나왔다. 천마제령침(天魔制靈針). 미세한 은침 가운데 독통(毒筒)이 있고, 그 안에는 뇌를 마비시키는 독약이 들어 있다. 유가란은 마황야가 죽는 그 날, 검문혼에게 암습당했던 것이다. "하아아악……!" 유가란의 호흡 소리가 이전과 달라졌다. 그녀의 피부는 새파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를 지탱해 주었던 마공지기가 모조리 녹아 버리는 가운데, 그녀는 내공을 상실해 버렸다. 그로 인해, 그녀는 너무나도 엄청난 한기를 느끼며 피부 가득 소름을 돋우는 것이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으며, 검은 머리카락 가득히 서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추… 추워!" 유가란은 사지를 피르르르 떨었으며, 돌연 상반신을 일으켜서 천유성의 가슴에 자신의 동체를 내던졌다. 천유성은 그러한 일이 벌어지리라 느끼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장탄식을 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대로 두면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죽는다. 살리는 길은 오직 하나, 나의 삼매진화(三昧眞火)를 몸 안 가득 불어넣어 주는 길이다!" 천유성은 미끄러운 몸뚱이를 가슴 가득 느꼈다. 너무나도 탄력적인 몸뚱이다. 한 명의 남자도 안아 보지 못했던 동체, 그것은 스스로 미끄러지며 연체동물의 몸뚱이처럼 몸에 휘어 감겨 들었다. 본능(本能)으로 그녀는 천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초처럼 흔들거리는 머리카락, 희고 긴 목덜미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는 가운데 그녀의 몸뚱이는 천유성의 상체에 꼬옥 안기어 있었다. 열정(熱情)… 그리고 원초의 욕망. 유가란은 너무나도 격한 흥분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녀의 정화(情火)를 풀어 주지 못한다면… 그녀는 다시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사르르륵……! 그녀의 옷자락은 매미의 허물처럼 벗기어졌다. 도발적으로 솟아오른 가슴, 그 위 두 개 유실(乳實)이 있고 그 곁에는 핏빛 나비 무늬가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천유성으로서는 그것을 두 번째 보는 셈이었다. "그대의 외조부(外祖父)가 바로 이 곳에서 그대를 내게 맡겼소! 그리고… 이 곳에서 그대를 안게 되는구려." 천유성은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천마화가 된 석화만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한데 유가란은 미묘한 숙명으로 인해 그의 여인이 되고 만 것이다.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여체, 그녀는 이미 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너무도 빨리 끓어 넘치는 파도가 되었다. "나를 버리지 말아요. 나를 죽일지언정……!"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애기같이 앳된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금 흘러 나오는 목소리는 그녀의 진짜 목소리였다. 다시 말해, 그녀는 이 순간이나마 본래의 정신을 되찾은 것이다. "진심으로 그대와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눈을 꼬옥 감아 버렸다. 유가문(瑜伽門)의 마지막 후예, 거장지존은 그녀를 천유성에게 맡긴 바 있다. － 나의 후예를 만난다면 나를 대한 듯 대해 주게, 유성! 일세거인 거장지존 구야충, 그는 천유성의 오늘을 만든 진정한 장본인이다. 타오르는 여인 유가란,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이 팽창되고 있었다. 출렁거리는 동체… 해면처럼 휘어지는 몸뚱이가 너무도 뇌쇄적이다. 가히 완전에 가까운 미모였다. 두 가지 결점이라면 허리가 너무나도 잘룩하며 콧날이 매우 뾰족한 편이라는 것이나, 그것도 어찌 보면 대단한 매력이었다. 그리고 어두운 데에서 본다면 눈동자가 까맣게 반짝이기보다 파르스름하게 반짝거리는 변황 제일미인. "……." 그녀는 애써 가쁜 숨결을 참고 있었다. 눈을 꼬옥 감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유가란. 그녀는 천유성이 옷을 벗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 소리만으로도 벌써 희열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기실 여인들이란 생각만으로도 절정에 도달한다. 툭히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뇌리에 가득 차게 되면 여인들은 그 순간, 지상에서 가장 큰 희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슷－ 슷－! 천유성은 옷을 벗었고, 나체가 되었다. 그는 초야의 신랑처럼 수줍어 했으며, 그의 가슴은 천천히 유가란의 탱탱히 부푼 가슴에 밀착이 되었다. 젖꼭지가 가슴을 간질이는 가운데, 유가란의 볼은 가을 하늘 아래 익어 가는 능금처럼 달아올랐다. 활이 되어 휘어지는 여인, 그녀는 격류가 되어 휘어지기 시작하였으며… 화려한 비단의 휘장이 되어 산(山) 하나를 휘어 감았다. '이제 죽어도 좋아!' 그녀는 속눈썹에 눈물을 매달았다. 그리고 천유성은 여인의 늪지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그는 또 하나의 인연을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유가란은 차츰차츰 불(火)의 여인이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나비 마냥 그녀의 손짓은 천유성의 등을 완전히 휘어 감아 버렸다. 밤이 샐 때까지 그녀는 한 번도 천유성의 몸에서 손을 떼어 내지 못했다. 애무에서 격렬한 파과(破瓜)의 순간까지, 그녀는 상상하지 못하는 희열과 고통에 사로잡혔다. 새벽에 하나의 핏빛 뜨거운 앵화(櫻花)가 피어났으며, 그로 인해 유가란은 천유성의 여인이 될 수 있었다. "나같이 천한 계집과 함께 있다 보면, 그대의 영명(英名)에 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에도 소녀를 버리지 않으시다니요?" "란은… 아름다운 여인이거든. 사실 군림천하 할 수 있다 해도, 난(蘭)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얻을 수 있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훗훗… 나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이오!" "흐흑… 감사합니다. 소녀 같은 마도인을 용서해 주시다니……." "내게 감사하지 마오. 그럴 필요는 없소. 나는 영웅이라 불릴 자격이 없는 녀석이오. 이것 역시 진심이오." "……." "그리고… 란(蘭)은 무슨 죄를 지었든 간에 용서받을 것이오. 천년세가주의 아내가 되었으니까!" 유성혼은 한 여자를 얻었다. 그리고 덤으로 그녀를 따르는 기환마계 사람들을 부리는 자격까지 갖게 된 것이다. 그 날, 겨울 광야는 폭설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장강(長江)의 물줄기가 담기어졌다. 깊이를 모를 대강은 도도한 물줄기를 끊임없이 하류로 흘러 보내고 있다. 그녀는 둥둥 뜨다시피 하여 장강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미 죽어 버린 듯, 그녀의 눈에는 생명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핏빛 안개가 언제나 그녀의 피부 위를 흐르고 있다. 천마제십경에 도달한 완벽한 마성체. 냉혈(冷血), 잔혼(殘魂), 음백(陰魄), 사령(死靈)……. "장강을 건너리라. 그리고… 모조리 죽이리라!" 그 목소리는 산 사람의 목소리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녀는 표풍을 말아 올리며 장강 쪽으로 이동해 갔으며, 그녀 뒤쪽으로 일만 기의 준마가 뒤따랐다. 두우－ 두두두－ 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운진이 말려 올라간다. 왼쪽 허리에 반월도(半月刀)를 차고 있는 자들. 하나같이 차디찬 눈빛이고, 싸늘한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 대천마병단(大天魔兵團).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채 이동해 나아갔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 그리고 번뜩번뜩거리는 악마의 눈동자들. "검문혼… 놈의 수급을 잘라야 한다!" "장강 기슭에 놈의 수하들이 대거 진을 치고 있다. 숫자가 무려 오만구천(五萬九千)에 육박하고 있다. 벌레들! 숫자는 많을수록 좋다!" 휘리리리링－! 대천마병단은 거대한 검은 바람을 일으키며 장강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날, 그 곳에서 북방으로 이촌여 리 떨어진 하나의 지점에서도 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거악(巨嶽) 숭산(崇山), 예로부터 중악(中嶽)이라 불리고 있는 산이다. 태실(太室), 준극(峻極), 소실(小室)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거봉준령이 끝없이 이어져 나가고 있다. 하늘을 짓밟아 버릴 듯 진군해 나아가는 천군들처럼 힘찬 기세로 움직여 나아가는 봉우리들. 그러한 위용으로 인해 고래로부터 중악에는 세상을 등지고자 하는 인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 중 소림사(少林寺). 그 곳은 선승(禪僧)들의 장소였으며, 달마 조사가 중원에 온 이후 그 곳은 중원무도계의 상징으로 변화했다. － 소림(少林)이 무너지면 중원이 무너진다! 소림사는 군림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수비의 상징이었다. 끝없이 참는 방파, 소림사. 천 년에 걸쳐 소림사는 인내를 거듭해 왔다. 어떠한 조롱과 멸시를 받더라도, 세월이 소림사를 속이더라도… 소림은 참아 왔다. 그러나 참지 않았던 방파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붕괴된 반면, 소림사는 붕괴되지 않았다. － 소림의 혼(魂)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강호계에는 그러한 격언이 만들어질 정도이다. 눈이 숭산을 뒤덮고 있다. 소림사 대웅전 처마에도, 요료 선사가 가꾸는 다원(茶園) 위에도, 고풍이 풍기는 돌담장 위에도… 눈은 뿌리어졌다. 그리고 꾸역꾸역 다가서는 삼만여 절정무사(絶頂武士)들의 머리 위로도 눈은 퍼부어졌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소림에 당도한 자들. 하나같이 혈전포(血戰袍)를 걸쳤으며, 검집이 아예 없는 독혈사린검(毒血死鱗劍)을 오른손에 쥔 채 조심스럽게 소림사 경내를 향해 다가서고 있다. 위대한 신화를 만들고자 하는 자들. 그들은 바로 검문혼의 정예 태양혈마단(太陽血魔團)의 삼만사천 절정고수들이었다. 눈과 바람이 격렬해지는 가운데, 그들의 몸놀림이 점차적으로 빨라졌다. '어느 정도의 저항은 있으리라 여겼는데, 저항이 없군. 훗훗… 위대한 소림사라고? 개똥이라 해라.' '이제 소림사는 무림사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소림사를 무너뜨린 인물들로 강호사에 기록이 될 것이다.' 파팟－ 팟－! 삼만사천 태양혈마단의 몸놀림은 보다 경쾌해졌다. 한 잔의 맑은 차(茶). 작설(雀舌)이나 오룡(烏龍) 같은 향기가 맑은 것도 좋고, 용정(龍井)이나 천지(天地) 같은 명품이라면 더욱 좋으리라. 겨울의 뜨락을 내다 보며 뜨거운 차를 마신다는 것은 제왕이 되어 만조백관의 절을 받아 가며 궁정을 거니는 검만큼이나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리라. "고약하단 말이야, 요즘 젊은 것들은!" 주름살이 닭벼슬같이 늘어진 노승 하나. 그는 깡마른 손목에 염주를 걸고 있는데, 실로 오랜 수양에도 불구하고 경련하고 있었다. 방금 전, 한 사람이 홀연히 그가 머무는 선방으로 접어들었다. 무척이나 예의가 없는 녀석이다. 방문한다는 내용을 배첩에 적어 전하고 들어서야 마땅한 것인데… 그는 대뜸 선방으로 들어섰고, 말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는 가운데 아까운 차만 두 잔 연속 축내기 시작했다. 요료 선사, 그리고 일세풍운아 천유성. 두 사람은 정신적인 사부와 제자 사이라 할 수 있었다. 천유성이 태어난 장소가 천년세가일 것이되, 그를 진심으로 알아 준 사람은 요료 선사와 창허상인이었다. "선사, 건강은 좋으십니까?" 실로 느긋한 목소리이다. 천유성은 복마나한진(伏魔羅漢陣)을 소리 없이 뚫어 버렸다는 말이며, 자신이 어찌어찌해서 살아나 여기 오게 되었다는 말은 아예 하지 않았다. "아암, 좋고말고!" 요료 선사도 기인은 기인이었다. 그는 천유성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듯 활짝 웃었다. "바쁠 때 나타나다니… 역시 눈치가 빠르다. 네녀석이라면 모름지기 소림사에서 고기를 대접받을 정도로 수완이 좋구나." 요료 선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초(楚)는 어디 갔습니까? 보이지 않던데요?" 초, 만박서생 하후초를 말한다. "무당으로 갔다." "아, 그럼 시작되는군요?" 천유성은 탄성을 발했고. "때가 된 것이지.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날아오를 때가 된 것이고, 열 송이 꽃이 결실을 맺을 때가 된 것이지!" 요료 선사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십화의 고수들은 암중에 소림사를 빠져 나간 상태였다. 그들은 자파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소림사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병법에 활용이 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태양혈마단이 소림을 치기 위해 온다는 정보는 오래 전에 입수가 되었다. 본시 십화의 무사들은 소림사에서 혈겁을 일으켜 마도세력의 예봉을 꺾어 버릴 작정이었는데, 요료 선사가 그들을 모두 내쫓아(?) 버린 것이다. － 아해들아, 이제 집으로 돌아들 가거라! 요료 선사는 단호한 말 가운데 십화를 모조리 하산시키었다. 사실 지난 십 일 사이, 소림사를 빠져 나간 사람들의 숫자는 육만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사람의 숫자만 하더라도 오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 중 타파의 인물들은 이만 정도였다. 소림사는 철저한 수비 진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십 일은 능히 버틸 것이다. 그 가운데 십화가 일을 처리하고 돌아온다면, 소림사를 향해 오는 자들은 역으로 포위가 될 것이다. 요료 선사가 생각한 병법은 그러한 것이었다. "하나, 한 가지 의혹이 있네!" 지금 요료 선사는 진지할 대로 진지해졌다. "무엇인지요?" 천유성은 찻잔을 텅 비운 다음, 공탁 위에 내려놓았다. "며칠 전부터 또 다른 세력이 소림사 경내로 다가섰네." "……." "노납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정교한 은신술을 쓰고 있는 자들이지. 숫자는 꽤 많은 편이네. 만에 하나, 그들마저 악마들의 편에 선다면… 소림사는 불타고 말 걸세!" 요료 선사는 합장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성스러운 기세가 떠오르고 있었다. "묘한 자들이네. 거칠게 느끼어지지는 않으나, 노납도 간파하지 못할 비밀을 갖고 있네." "지저분한 자들이지요." 천유성은 태연자약하게 말했고. "아, 그들을 아는가?" 요료 선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알다마다요." "어떠한 자들인가?" "저의… 가족(家族)입니다!" "뭐… 뭐라고?" "제가 이 곳으로 오라고 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천년세가의 마지막 영웅들입니다." "오오, 그들이 세가 사람들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들은 소림사를 암중에 지키기 위해 온 것입니다. 아마도 소림사 사람들은 마인들을 단 하나도 구경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이얀 치열이 나타난다. 천유성의 몸에서는 어떠한 기세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요료 선사의 경지를 넘어서 버린 것이다. "단 하나도……!" 천유성이 또 한 잔의 차를 들기 시작할 때였다. 스－ 파－ 파－! 기나긴 담장 아래에서 일제히 오천 개의 그림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흑포에 흑립이다. 또한 수중에는 녹슨 철검을 들었으며, 나약해 보이는 자세 가운데 지극히 영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담장 아래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무사들은 막 담장을 타넘어 가려 하던 혈전포의 마인들을 일사불란하게 가로막았다. "여기서 멈추게!" "훗훗… 그리 놀랄 것 없어." 파－ 파－ 파－! 오천여 흑의무사들은 가공할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러한 가운데 마병들이 잇따라 잘리어졌다. "어이쿠우!" "으으, 소림사 사람들이 아니다." "제길, 함정이란 말인가? 우리들의 순찰 조직은 이미 마비되어 버렸단 말인가?" "바로… 침묵수들이다!" 찰나의 순간마다 이천여 무사들이 벌렁벌렁 나뒹굴었다. 검은 바람이 흐르며 핏빛 꽃송이들이 날아오르는 듯했다. 소림사의 담장을 넘어 소림사 경내로 들어갈 수 있었던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담장 아래에서 오천 무사들이 날아오르는 그 순간, 태양혈마단의 후미(後尾) 쪽에서 오천 무사들이 날아올랐으며… 좌측에서 이천, 그리고 우측에서 일천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바람보다 빨리 움직이는 무적의 영웅들. 처음에 비할 수 없이 신법이 날렵해졌으며, 내외공의 출수 또한 보다 정교해졌다. "녀석들! 나타난 것을 후회해야 할 것이다!" "아느냐? 천 년 간 잠을 잔 뜻을?" 휘휙－ 휙－! 이합집산(離合集散). 흐트러지고, 뭉치고, 모여들고, 흩어진다. 무사들은 지하 생활에서 얻은 온갖 고질병에서부터 말끔히 깨어난 듯했다. 그들의 몸놀림은 본래의 속도를 되찾고 있었다. 검은 담장이 쭈욱쭉 펼치어지는 듯하며, 핏빛 갈마귀 떼들은 담장을 넘어가지 못하고 툭툭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암기를 던져라!" "침묵수는 바로… 천년세가의 무리들이다." "그렇다. 바로 팔가문(八家門)의 무사들이다. 으으, 그… 그것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피잉－ 핑－ 핑－! 잡다한 암기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하며 독혈검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도 침묵수들을 떨어뜨릴 수 없었다. 오히려 빗발치듯 날아오르는 암기들은 마도고수들의 등판과 목줄, 그리고 복부 속으로 푹푹 처박히어 들었다. 또한 푹음이 일어나며 불기둥이 쭈욱쭉 치솟아 오르는데, 화탄이 작렬하며 시꺼먼 연기와 불기둥이 솟아오를 때에도 쓰러지는 쪽은 모조리 태영혈마단 무사들이었다. 골육난비(骨肉亂飛), 혈우성풍(血雨腥風)……. 대접전인지라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맹세가 지켜지기는 힘든 일이었다. 검기충천(劍氣沖天). 눈 오는 하늘이 파랗게 물들기 시작했으며, 핏빛 전포에는 더욱 짙은 색깔의 선혈이 묻히어지기 시작했다. 소림사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넋 나간 표정으로 싸움을 바라보기만 했다. 영웅팔가(英雄八家). 소림사보다도 오래 전에 새워진 가문이며, 겹겹의 신비에 휘어 감긴 채 오늘에 이어진 가문이다. 진정한 검의 의미를 알고 있는 무인들의 가문, 영웅팔가. 그들의 정예무사들은 일당십(一當十)으로 마도인들을 무찔렀고,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삼만여 무사들 가운데 구 할 가량이 널브러지게 되었다. 이 날의 패배는 검문혼에게 있어 진정으로 뼈저린 패배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예봉은 완전히 무너진 셈이었으며, 이제는 천하를 피로 씻고자 해도 무사가 없어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되고 만 것이다. 영웅은 의외로 조용한 인물이기 쉽다. 소리 없이 나타났다가 소리 없이 떠나간 천유성. 그는 차만 다섯 잔 마시고 떠나갔으며, 요료 선사는 꽤 오랜만에 불공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약한 녀석! 노납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다니……." 천유성,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第11章 십일월의 신화(神話) 십일월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 날, 천 년 만에 제일이라 하는 대격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도합 열한 군데에서 벌어졌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격렬했던 싸움은 장강(長江)에서 시작이 된 마도 양대세력의 격돌이었다. <천마화, 그녀는 황하(黃河)를 건넜고… 일만 무사들을 대동한 채 장강으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운명의 손으로 소문이 난 여인, 그녀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피로 파멸시켰다. 모든 무사들이 그녀의 일 수 아래 피떡이 되어 으스러졌다. 육지공룡(六指恐龍), 혈천괴영자(血天怪影子), 폭천무상(暴天無相), 일보추혼마검(一步追魂魔劍), 음양군자(陰陽君子), 천수나타(千手羅陀), 잔혼일사(殘魂逸士), 파천혈염라(破天血閻羅), 비검혜성존(飛劍彗星尊), 만사대제(萬邪大帝)……. 검문혼 휘하 일백팔 군마왕에 속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일백팔 로로 흩어져서 천하혈세를 단행하기 시작했었는데…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주검으로 화하고 만 것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남(江南)의 젖줄, 장강이여! 강기슭에는 갈대밭이 무성하다. 물에 허리를 담근 채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쓸리고 있는 갈대숲 사이였다. 피(鮮血), 그리고 널브러진 시체들……. 지옥도(地獄圖)일까? 오만여 명의 시체가 갈대숲 안을 뒹굴고 있었다. 이십팔 로(路)에서 모여든 무사들이 하나로 뭉쳐서 그녀를 가로막았으며, 삼 주야에 걸친 혈전 끝에 오만칠천사백팔십일 구의 시체가 갈대숲에 널려지게 된 것이다. 천마화, 죽음의 꽃이여! 그녀는 검문혼 휘하자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도망치든, 숨든, 일백팔 군마왕 이하 모든 마도인들은 천마화의 철저한 복수에 의해 사지가 절단되어 쓰러져야 했다. 까아아악… 까아아아악……! 갈대숲 허공은 까마귀 떼에 뒤덮이고 있었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하게 날아든 까마귀들. 시(屍)… 산(山)… 혈(血)… 해(海)……! 그리고 부러진 병장기와 피에 젖은 옷자락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호흡이 끊어진 채 쓰러진 자들……. 어떠한 자는 머리 위쪽이 바수어졌고, 어떠한 자는 허리 아래쪽이 뭉그러져서 쓰러졌다. 일 장에 죽은 시체에서는 피가 많이 흘러내리지 않는다. 피를 많이 흘리는 시체는 도검자(刀劍子)에 맞아 쓰러진 시체들이었다. 도검의 흔적이 없는 시체라면 천마화에게 죽은 자들의 시체일 것이다. 매우 기이한 노릇이었다. 죽어 있는 자들의 얼굴을 보라! 공포가 아니라, 찬미가 가득 담기어 있지 않은가? 그 어떠한 완벽한 존재를 보고 경탄하다가 죽어 버린 듯, 천마화에게 당해 죽은 자들은 하나같이 찬미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여간 소림사에서, 그리고 장강에서 연파(連破)당한 악마신본영(惡魔新本營)의 기세는 머리 잘린 뱀의 꼴로 지리멸렬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격전들. 그것은 소림사를 제외한 팔파일방(八派一 )의 총본산(總本山) 구 개 지역에서 벌어졌다. 무당(武當) 상청관(上淸觀)에서, 전진(全眞)의 백운도관(白雲道觀)에서, 공동파( 派) 주천검부(週天劍府)에서, 곤륜(崑崙) 운중궁(雲中宮)에서, 무산신녀곡(巫山神女谷)에서, 개봉(開封)의 개방총타( 總舵)에서……. 한날 한시에 악마신본영의 휘하 구대단(九大壇)이 허물어졌다. 구대단은 일백팔 로의 마군과는 또 다른 세력들이었다. 그들은 검문혼이 믿는 최후의 비밀 저력이라 할 수 있었는데, 너무나도 형편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유성십화(流星十花). 만박서생 하후초 이하 십 인의 청년무사들은 자파(自派)로 은밀히 복귀하였으며, 한날 한시에 백도의 거대세력을 일으켜서 악마신본영의 최후 목줄을 졸라 버린 것이다. 그들이 압승을 거둔 데에는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깨어난 십만대산(十萬大山) 천년세가(千年世家)의 무사들이 대거 나타났다는 것이다. 혜성(彗星) 대공(大公) 천혜성(天彗星). 천유성의 숙부가 되는 인물이다. 그는 오천 무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는데, 천년풍운성 안에서 절정비예(絶頂秘藝)를 터득한 오천 무사는 일만이천 천금무적에 버금가는 가공할 저력을 나타냈다. 베고, 또 베고……. 십 일에 걸쳐 혈겁이 벌어졌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백도는 숫자에 있어 마도세력을 능가해 버린 것이다. 마지막 싸움, 십일월 일 일에 시작이 된 마지막 싸움은 가장 특이한 싸움이었다. 일(一) 대(對) 육천(六千). 그 싸움은 무림천년사에 유례를 찾지 못할 싸움이었다. 안탕산하에서 시작이 된 격전은 한 발의 향전으로 인해 시작이 되었다. 피이이이이잉－! 동천(凍天)을 깨고 화살 한 발이 날아올랐다. 화살 꼬리에 달린 바람 구멍이 바람을 가르며 내가고수가 불어제치는 장소성처럼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안탕산을 들썩이게 했다. <누군가 나타났음. 오직 일 인(人)! 그러나 그는 제일매복(第一埋伏) 천군만마진도(千軍萬魔陣圖)를 가볍게 붕괴해 버렸음.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선천강기(先天 氣)는 모든 마병(魔兵)을 바수어 버렸음. 젊은 자임. 옷차림이 누추하며, 방립(方笠)을 썼음. 등에 거검(巨劍)을 한 자루 메고 있기는 하되, 그것을 쓰지는 않음! 제이매복(第二埋伏) 굉천열화진(宏天熱火陣)을 유유히 통과하며, 자부비전(紫府秘殿)을 향해 다가가고 있음! 아무도 막지 못할 자로 보임!> ……. 큰 걸음이다. 팔짱을 느긋하게 낀 채 걷고 있는 자, 그는 벌써 삼천여 명을 쓰러뜨렸다. 그는 동천에서 퍼부어지는 함박눈을 맞아 가면서 새벽의 안탕산 허리를 지나쳐 가고 있었다. "너를 죽일 수 없다!" 아래턱이 보이는데, 각이 진 턱의 매무새가 강인한 인상을 준다. 날카로운 강함이 아니라, 부드럽고도 끈질긴 강인함이다. 그는 나타나는 모든 장애를 단 일 초로 허물어뜨렸다. 그는 자부비전 쪽으로 쉬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으며, 삼 보(步)도 옮기기 전에 괴영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파팟－! "혈화비망(血花飛網)!" 여덟 개의 그림자가 날아오르며 거대한 핏빛 그물 하나가 펼치어진다. 도검으로 끊을 수 없다는 혈잠사(血蠶絲)로 짠 그물로써 어떠한 장력으로도 퉁기어 내지 못한다. 혈화비망은 제삼매복을 구축하고 있는 혈화검단(血花劍團)의 팔대신마(八大神魔)에 의해 펼치어졌다. 여덟 개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교차되는 가운데, 핏빛 그물이 펼치어지는데. "나를 막지 말게. 자칫하다가는 나의 맹세가 깨어질지 모르니까.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나의 맹세가 깨어져서는 아니 되네들!" 그의 입술은 가볍게 벌어졌고, 팔짱 낀 상태 그대로 그의 몸뚱이가 간단한 경공초식인 일학충천(一鶴沖天)으로 떠올랐다. 그는 너무나도 빠르게 허공을 뚫으며 날아오르는데. "미안하네. 그대들의 물건을 망가뜨리게 되어……." 찌이이익－! 질기디질긴 혈화비망에는 정확하게 사람 크기만한 구멍 하나가 뻥 뚫리게 되었다. "흐으으윽……!" "너… 너는 누구기에……?" 팔대신마가 사색이 되는데, 그들의 피부 속으로 차갑고 예리한 기운이 비수 파고들 듯이 파고들었다. 파팟－ 팟－ 파－! 둔탁한 소리가 잇따라 터져 나오는 가운데, 팔대신마는 마혈(魔穴)이 찌릿함을 느끼며 의식을 잃어버렸다. 여덟 거마는 눈두덩에 푹푹 처박혔으며, 그는 신형을 표표히 떨어뜨리며 다시 거보(巨步)를 내디디기 시작했다. "나타나라. 이제 더 피할 데가 없지 않느냐? 어리석은 친구!" 저벅－ 저벅－! 쉬지 않고 걸음을 내디디는 자, 그는 네 가지의 매복을 두 시진에 걸쳐 격파했다. 천군만마진도(千軍萬魔陣圖), 굉천열화진(宏天熱火陣), 사멸혈화겁세(死滅血花劫勢), 백로마영진(百路魔影陣). 검문혼이 자부비전을 보호하기 위해 펼친 진세이다. 그것은 그 어떠한 세력의 침입이든 막을 수 있다고 소문난 것이었다. 오직 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바로 천유성. 그를 막을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천유성은 단신으로 자부비전 안으로 접어들었다. "단 하나라고? 우라질!" 검문혼은 천천히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피부는 새까맣게 물들어 버렸으며, 수전증에 걸린 듯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단 일 인에 의해 사대매복이 부서졌단 말이냐? 천마화를 막기 위해 펼치었던 사대매복이거늘?" 부르르르르……! 검문혼의 몸이 진동을 일으켰고, 단단하기 이를 데 없던 대리석 바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이기에……?' 검문혼은 태양소수(太陽素手)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순간, 두 명의 고수자가 바람처럼 날아들었고… 무시무시한 마광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 검이 대령되었습니다!" "존검(尊劍)… 여기 대령되었습니다!" 청홍쌍위사(靑紅雙衛士). 그들은 검문혼의 친숙부들이며, 검문혼에게 반역의 꿈을 심어 준 바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사 척 거검(巨劍))을 떠받들고 다가섰다. <존(尊)> 얼마 전에 만들어진 절세마병이다. 검문혼은 그것으로 천마화의 심장에 구멍을 낼 작정이었다. 존검은 사악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검문혼은 검자루를 향해 손을 내밀면서 히죽이 웃었다. "본좌가… 지리라 여기오?" "그… 그럴 리 없습니다!" "마황야는… 천세 내내 무림을 지배하실 것입니다!" 청홍쌍위사는 고개를 떨구는데, 두 사람의 미간(眉間)에는 검은 그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검문혼은 그러한 기색을 알아보고 클클거리기 시작했다. "마음 속으로는 내가 지리라 믿고 있구려?" "아… 아닙니다." 청홍쌍위사가 일제히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우라질! 얼굴에 쓰여 있는데 부정하다니……!" 콰쾅－! 검문혼은 발을 쿵 내디뎠고, 돌바닥이 또 한 차례 산산이 바수어졌다. 일순 그의 창백한 손이 쳐들렸으며, 존검은 황금빛 검집에서 뽑혀 나와 수백 줄기의 검세를 발출해 냈다. 현란하게 피어나는 금빛 꽃송이들. 꽃술마저 또렷하며, 꽃이 피고 흐트러지는 형상이 생화(生花)와 거의 같다. 태양화(太陽花). 태양소수마공의 최후 경지를 말한다. 파파팟－ 팟－ 팟－! 수천 송이의 마화가 대전 바닥을 휘어 감는 찰나, 청홍쌍위의 몸뚱이는 한 줌의 혈사(血砂)로 바수어졌다. 뚝－ 뚝－! 존검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오랫동안 검이 녹슨 상태로 지냈었다." 검문혼의 마성은 이전보다도 훨씬 강한 상태였다. 그는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火山)과 같았다. 그리고 그는 피를 보게 되자 즐거운 듯, 득의한 웃음을 가득 흘렸다. "좋아. 이제는 선혈의 비릿한 맛을 다시 알게 되었으니… ㅋㅋ… 그 놈이 누구건, 내게 베어진다!" 그는 검을 검집에 회수했으며, 일순 그의 몸뚱이는 끝없는 포물선을 끌면서 산하 쪽으로 폭사되어 나갔다. 운명의 승부사 검문혼, 그는 정말 오랜만에 검을 잡은 것이다. 흩뿌리어지는 눈 속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는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쌓여지고 있었다. 그 곳에 머문 지 벌써 여러 시진째 되는 듯했다. 고독한 눈망울로 대지를 빨아들이고 있는 미남청년. 그는 자부비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고 직접 나온 검문혼은 그를 멀리서부터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불에 타서 재가 된다 하더라도 쉽게 알아봤을 것이다. "너로군?" 검문혼은 휘청였고, 그의 눈에서 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는 천마화의 격돌에 대비해서 몇 가지 마교비법을 시전한 상태였다. 그의 눈빛이 위맹(威猛)해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철시마령술(鐵屍魔靈術). 백팔 구의 강시를 쌓아 놓고, 쌍장을 통해 강시의 음기(陰氣)를 빨아들이는 가운데, 막대한 잠경을 얻는 방법이다. 강시의 음기는 골수(骨髓) 속으로 스미어 들어가게 되며, 구결을 외울 경우 그것은 태양소수마공(太陽素手魔功)과 더불어 시전이 되어서 전방의 모든 것을 얼려 버린다. 실로 위력이 강한 마공이되, 익히고 시전하는 가운데 자칫하다가는 살이 부패될 수 있기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익히지 않는 비법이었다. 검문혼은 그것을 익혔고, 그로 인해 그의 팔뚝까지가 시꺼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천독구유마공(千毒九幽魔功). 독지(毒池)에 몸을 담그고 모공(毛孔)을 통하여 독기를 체내로 빨아들이는 비법이다. 그것을 시전하게 되면 살갗이 흐물흐물 녹아 버리는 독황체(毒皇體)가 되나, 검문혼은 그것을 감수했다. 사황불사만겁대법(死皇不死萬劫大法), 혈천패엽비기(血天貝葉秘技)……. 검문혼은 소림사(少林寺)에서의 대패(大敗)를 안 다음, 일곱 가지 대법을 시전했다. 그것은 십 일에 걸쳐 이루어졌고, 세 시진 전에 완성이 되었다. 천유성은 여섯 시진 전에 안탕산에 왔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세 시진은 기다려 준 것이다. "너였구나. 네가 살아 있었던 거로구나. ㅋㅋ… 그러하기에, 혈접혼이 실패했던 게로구나? 우라질!" 역시 우정은 좋은 것일까?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사이임에 틀림이 없으되, 문득 반가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펄펄 날리는 함박눈 사이로 두 사람은 십 장 거리로 좁혀졌다. "나다! 그래, 내가 왔다!" 천유성은 손바닥을 쳐들었고, 습관적인 동작 가운데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정녕 아름다운 얼굴이다. 검문혼에게 질투감을 일으키게 했던 얼굴이었으며, 비록 그가 쓰러뜨리고자 하였으되 평생 처음으로 우정을 느꼈던 한 인물의 얼굴이기도 했다. 바람이 강해지며 함박눈이 춤추며 날아올랐다. "네게 건방지나마 하나의 충고를 하고자 한다." 천유성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는 검문혼에 비해 반 치 정도 크다. 멀리서 본다면 두 사람의 체격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지금 천유성의 몸은 더 이상 거대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보였으며, 검문혼의 모습은 지극히 작고 왜소하게 보였다. "과거 네게 했던 바로 그것이다!" "무림계를 떠나라는 충고냐?" 검문혼의 볼이 일그러졌다. "그렇다. 떠나라, 무림을! 물론 너는 죽어야 할 죄인이다. 널 살려 보낸다는 것은 나의 위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유성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언제나 진지한 눈빛을 흘린다는 것도 검문혼에게는 내심 역겹게 느끼어지는 듯, 그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너를 놓아 주겠다!" 천유성이 담담히 말하자. "미쳤군. 이 곳은 적어도 나의 영토야. 네가 비록 사대매복(四大埋伏)을 간단히 격파하기는 했으되, 이 곳은 나의 영토이다!" 검문혼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근처에는 수없이 많은 무사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자부비전 내부에 머물러 있다가 나타난 자들이다. 숫자는 팔천여, 오색(五色) 각기 다른 무복을 걸치고 있는데… 강호를 종횡하는 어떠한 무사들보다도 강해 보이는 자들이었다. 일컬어 일천(一千) 혈비(血匕). 천 명의 정예살수자(精銳殺手者)들이다. 실력이 막강하며, 검문혼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 검문혼은 가장 가까운 곳에 그들을 두고 있었다. 그들의 피와 일천혈비의 피는 같은 태양마계의 피였다. 혈포(血袍)에 두 자루의 혈검(血劍)을 등에 십자(十字)로 교차해 메고 있으며,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검문혼에 집중이 되어 있다. 태양마겁수(太陽魔劫手). 숫자는 이천이다. 자부비전의 내성(內城) 지역을 호위하던 자들로, 언제나 검문혼의 십 리(里) 안에 머물러 있다. 반강시(半 屍)의 마인들로서, 검문혼과 그들은 심령적으로 통하고 있다. 눈빛이 잿빛이며, 걸치고 있는 옷자락도 회색 무복이다. 피에 굶주린 이리 떼 같은 자들은 두 번째의 벽을 펼쳐 일대를 포위하고 있다. 쓰으으… 쓰으으… 쓰으으……! 언제나 움직이는 자들도 있다. 숫자는 칠백, 무영귀전단(無影鬼箭團)이라고 불리며… 머물러 있기는 하되,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은잠술과 환술에 능통하며, 과거에는 태양마계의 척후무사들로 활약한 바 있는 자들이었다. 네 번째 세력은 흑색 무복을 걸치고 있다. 모조리 묘령의 낭자들로서, 한 번 이상씩 검문혼과 정사(情事)의 밤을 지샌 바 있는 여마들이다. 검문혼은 육체로서 그들을 지배하였으나, 항차 수많은 친아들을 낳아서 무림천하를 지배해 볼 작정이었다. 옥화표향(玉花飄香), 야화잔향(夜花殘香), 비화암향(飛花暗香). 칠백여 낭자들은 세 집단으로 나누어지는데, 걸치고 있는 복장이며 지니고 있는 병기는 거의 비슷했다. 마지막 무사들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모조리 백포를 걸치고 있는데, 손에는 귀두대도(鬼頭大刀)를 한 자루씩 쳐들고 있었다. 밀랍같이 흰 얼굴에 전신에서 사기를 뿜어 내는 자들. "흐으으… 흐으으……!" "카아아아… 카아아……!" 숨가쁜 호흡 소리, 그리고 피에 굶주린 눈빛들. 가히 악마경에 돌입한 백색마인(百色魔人)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나도 젊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녀석이래야 이제 열네 살 정도로 보였다. 백색마인단은 가장 최근에 성립이 되었으며, 검문혼은 그들을 앞세워서 실지를 회복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소년소녀들이 선택된 이유는, 나이가 어린 탓에 마성(魔性)에 쉽사리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콰아아아－ 콰아아아－! 악마의 기세는 보다 격렬해졌다. 검문혼의 어깨를 으슥거리며 팔짱을 끼었다. "충고할 자격은 네게 없다. 있다면, 내게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 밑에서 일할 작정이라면, 너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으로 만들어 주겠다!" 검문혼은 ㅋㅋ…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천유성의 입가에도 미소가 퍼지고 있었다. "미안하네, 친구. 그러한 제안은 거절할 수밖에 없다네!" 그는 미소짓기는 하되, 이전에 비할 수 없이 고독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낭인주의 개 시절에 우연히 만난 검문혼. 그와 천유성은 뛰어나다는 데에서 비슷했다. 기실 낭인주 시절만 하더라도 검문혼이 보다 뛰어났었다. 바람이 강해지고, 눈보라는 팔천여 마인들을 뒤덮어 버렸다. 마인들은 점차적으로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검문혼은 천유성이 담대한 표정을 짓는 것이 역겹다는 듯이 가래침을 뱉어 냈다. "퉤에에……!" 새까만 가래침이 천유성의 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네놈은 언제나 건방지다. 여기 혼자 와서는 아니 된다!" "흠……!" "물론 너는 강하다. 아니, 막강(莫强)하다. 어쩌면 천마화보다도 네가 더욱 강할지 모른다!" 검문혼은 더욱 뜨거운 핏빛 안광을 흘렸다. 그의 눈빛은 강철을 녹일 듯이 격렬했다. "하지만 여기 혼자 와서는 아니 된다. 너는 실수했다. 그것은 너의 두 번째 실수이다." "글쎄……." "크크… 첫 번째의 실수는 천마화를 찾은 것! 크크… 그리고 지금 너는 두 번째 실수를 한 것이며, 오늘의 실수야말로 너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 실수가 될 것이다." 검문혼은 사악하게 웃으며 손을 쳐들었다. 순간. "존명(尊命)!" 차앙－ 창－ 창－! 일천 자루의 혈검이 뽑히어지며, 허공이 천 조각으로 쪼개어지는 듯한 환상이 일어났다. 일천 혈비가 일제히 발검(拔劍)하였으며, 천 자루 마검이 떨쳐지며 설원이 핏빛으로 물드는 것이다. 하나 천유성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안하네, 친구. 진심이야.' 그는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문혼은 그의 얼굴에서 공포의 빛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보기 역겹다는 듯, 또 한 번 가래침을 뱉었다. "퉤에!" 그는 침을 뱉어 버리며 다시 한 번 손을 쳐들었다. "존명!" "존명!" 이번에는 사천 자루의 마검이 일제히 펼치어졌다. 이천 태양마겁수(太陽魔劫手)가 각기 두 자루씩의 마검을 뽑아 들며, 허공 가득 마검화(魔劍花)가 피어났다. 흐드러지는 악마의 검화들, 수천만 송이의 죽음의 꽃송이들이 현란하게 피어난다. 그것을 보고 공포와 전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천유성 이외에 또 있을까? "……." 그의 표정은 여전했다. 노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한 명의 죽마고우가 마성에 빠져 타락한 것을 진심으로 동정하는 표정이었다. "고… 고약한 놈! 찢어 죽일 테다!" 검문혼은 잇따라 세 차례 손을 휘저었다. 사방에서 누런 그림자들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한다. 무영귀전단(無影鬼箭團) 칠백이 은신처에서 날아올랐고, 그들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마병을 한 자루씩 끄집어 냈다. 거의 같은 순간. "호호호… 호호호……!" "저 거만한 자를 내 손으로 죽이겠다!" "신첩들이 여기 있습니다. 황야시여, 심려하지 마십시오." 삼화향검루(三花香劍樓)의 여인무사들이 일제히 채색검(彩色劍)을 쳐들었다. "크아아… 크아아……!" "죽… 죽여라!" 쿵－ 쿵－ 쿵－! 백색마인단이 뒤뚱뒤뚱 다가서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벽이 미끄러지듯, 천유성은 삽시간에 팔천사백 마인들에 의해 육합(六合)을 포위당하게 되었다. 검문혼은 그제서야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의 저력을 알겠느냐? 프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눈보라치는 소리보다도 커져 나갔다. 그러나 앙천대소, 그 소리는 차츰차츰 작아졌다. "으으… 으으……!" 검문혼의 머리카락이 삐죽 치솟아 올랐다. "저… 저들이 언제 나타났단 말인가?" 보라! 저 먼 설원(雪原)을 뚫고 나타나는 무사들을. 대거 나타나는 흑포무사들, 철검(鐵劍)을 하나씩 들고 낡은 흑포 자락을 펄럭이며 움직이는 자들은 하나하나 경쾌한 운신술(運身術)을 시전하고 있는데… 소리도 없이 일대를 포위하며 다가서고 있었다. 눈보라 속으로 나타나는 일만이천(一萬二千) 검사(劍士). 침묵수(沈默手), 천금무적위(天禁無敵衛). 고금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무사세력이다. 천년세가의 정예무사들이며, 지하에서 십오 년에 걸친 극한 연무를 거쳤다. 천금무적위는 천문성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한 진세를 유지하며 일대를 드넓게 포위하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마진 외부에 하나의 거대한 진세가 펼치어지는 셈이며, 거대한 진세의 힘은 다섯 개의 마진을 송두리째 허물어뜨려 버리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천년세가의 진정한 저력이 마침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검문혼 예하자(隸下者)들로서는 감히 그 무시무시하며 소리 없는 기세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거대한 흑벽(黑壁)처럼 일만이천 무사는 다섯 개의 진세 주위를 완전히 포위했다. "따라오지 말라 했거늘……!" 천유성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북북 긁으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 요료 선사가 가라 하시었소이다! － ……? － 총사(總師)는 너무 마음이 좋다 하시었소. 자칫하다가는… 의당 제거해야 할 자를 놓치게 된다 하셨소! 그래서 저희들을 총사 뒤쪽에 딸려 보내신 것이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말이다. 십오 년의 침묵을 깨고 나타난 천금무적위사들. 이들은 천만 휘하보다 두 배 많은 세력을 허물어뜨리는 신화를 이룩했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구파일방은 완전한 힘을 되찾는 데 적어도 삼 년을 소비했을 것이다. 눈이 차갑게 느끼어진다. 휘청……! 검문혼은 넋 나간 표정으로 상체를 흔들었다. "내가 졌단 말인가? 지혜(智慧)의 대결에서도… 우라질!" 그는 태어난 후 두 번째로 패배감을 느꼈다. 첫 번째의 패배감은 천유성이 석화를 안는 그 순간에 그를 휘어 감았었다. 그리고 지금, 그를 유지하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릴 만한 패배의식이 치밀어오르는 것이다. 폭설(暴雪) 가운데, 두 녀석의 미묘한 승부는 종극을 향해 치달아 갔으며… 일만이천 침묵수들의 진세로 인해 가공스러운 진풍이 일어나며 다섯 개의 마진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第12章 유성(流星), 네가 이겼다 꾸역꾸역 다가서는 일만이천 침묵수들은 수신호로 의사를 전달해 가면서 가공스러운 진세를 더욱 치밀하게 구축했다. 그리 빠르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천천히, 그러나 힘이 있는 움직임들이었다. 우르르르릉－ 쾅－! 뇌성벽력이 터져 나오며 흙모래 바람이 치솟아 올랐다. 수적으로, 그리고 실력상 검문혼의 세력은 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알겠군. 일만이천 불사신(不死身)들은 바로 영웅팔가의 인물들이었군?" 검문혼의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났다. 보라! 그의 금색 장포가 터질 듯 팽창이 되며 머리카락이 일순 혈발(血髮)로 화하며 길게 늘어지는 것을. 어디 그뿐이랴? 관절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의 두 팔이 본래 길이보다 세 배 길게 늘어나고 있었다. 통비마형(通臂魔形). 오래 전에 실전이 된 금단의 마공이다. 한데 검문혼은 그것을 터득한 것이다. "하여간 좋아. 네놈을 찢어 죽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검문혼의 몸뚱이는 순간적으로 핏빛의 회오리바람으로 화하였다. 끝없이 일어나는 핏빛 선풍. 멀리서 본다면 하나의 혈탑(血塔)이 치솟아 오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힐 것이다. 산천(山川)이 노호하기 시작했다. 한기가 짙어지며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지반 위를 덮은 눈이 투명한 얼음으로 결빙되기 시작하면서, 마치 검이 부러지는 듯한 쇳소리가 빙판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음혼만류(陰魂萬流)!" 검문혼의 모습은 이미 감추어졌다. 다만 그의 목소리가 허공을 뒤덮었으며,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기(邪氣)가 콱콱 뿜어지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링－ 쾅－! 한풍이 사방으로 밀려 나갈 때. "황야 천세… 천천세……!" "우리는… 승리한다. 카아아아……!" "쳐라!" "짓밟아 버려라!" 군마들은 환호하며 무작정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불꽃을 향해 날아들며 몸을 불사르며 죽어 버리는 불나방처럼, 육천 마인들은 검문혼의 영적인 명령에 따라 일제히 마성을 폭발시키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파팟－ 파파팟－! 검이 잇따라 펼쳐진다. 무수한 검화(劍花) 도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일당백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는 진정한 고수들이다. 그러나 천유성 휘하무사들에 비한다면 너무나도 먼 거리가 있다. "쳐라!" 검문혼이 발검하며 사자후를 터뜨리는 찰나, 나머지 일만일천구백구십구 검이 따라서 발출이 되었다. 검파가 현란하게 치솟아 오른다. 무수한 무지개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듯하며, 설풍(雪風)의 짙은 장막은 찰나적으로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파라라라－ 팟－ 팟－! 검기가 노한 파도처럼 치솟아 올랐으며, 마치 해일이 숲을 덮치듯이 마검진세는 침묵수들의 검세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통도 없는 듯 표정조차 바꾸지 않고 쓰러지는 자들. 오오, 그리고 죽은 자들의 몸에서는 녹혈(綠血)이 흘러 나오지 않는가? 완전한 마인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다. 이들은 내공을 잃게 되면 그 즉시 몸이 녹아 혈수로 변하게 된다. 비명도 없이, 그리고 죽음의 서러운 의미도 모른 채 마인(魔人)들은 속속 쓰러졌다. 종횡천하하며 연전연승하던 천금무적위들에게 있어서 이렇듯 처절한 싸움은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베고, 또 베고… 그리고 또다시 베어 버린다. 피는 증오하나, 지금은 피를 뿌릴 수밖에 없다. 검문혼으로 인해 육천여 인은 회생하지 못할 마경에 빠져든 것이다. 툭툭 떨어져 나가는 팔과 다리들, 떼구르르 구르는 수급(首級)……. "하나의 영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시산혈해(屍山血海)가 무한하게 이룩될 수밖에 없다. 별것 아니다. 어쨌든… 둘 중 하나는 이길 테니까!" 검문혼은 허공에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 천유성은 오랜만에 표정을 경직시켰다. 한쪽 뺨을 일그러뜨린 채 그는 눈길을 설천(雪天)에 모우고 있었다. 검문혼의 무수한 환영이 흘러다니고 있었으나, 천유성은 정확하게 실체를 찾아 낼 수 있었다. "문혼… 이제 알겠다." 전과는 달리 아주 차가운 목소리였으며. "알다니? 무엇을 알았단 말이냐?" 검문혼은 광기 어린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천유성의 입술이 희미하게 벌리어졌다. "너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래, 이제야 그것을 확실히 알겠구나. 불쌍한 녀석! 너는… 과거에 죽은 것이다." "나는 영생불사(永生不死)한다. 크핫핫……!" 휘리리리링－! 바람이 더욱 강해지는 가운데,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금우(金雨)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존(尊)－ 마(魔)－ 혼(魂)－!" 치리리리릿－! 수천만 개의 금파(金波)가 떨어져 내린다. 태양소수마공(太陽素手魔功)의 최후(最後) 변초(變招)이다. 만에 하나, 그 화려한 금빛 비늘에 스치게 된다면 형제도 없이 바수어져서 죽게 된다. "태－ 양－ 소－ 수－!" 콰르르르르릉－ 쾅－! 대지와 묵천(墨天)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하다. 너무나도 화려한 금빛 비의 장막이 드넓게 펼쳐지는 가운데, 천유성의 전신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는 존검에서 뿜어지는 마세에 접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거산(巨山)처럼 그는 움직임이 없이 머물러 있었다. 이정제동(以靜制動)의 부동지세(不動之勢).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되, 그는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태양소수마공의 기세가 더욱 강렬해진다. 이번에는 불우박 덩어리가 수만 개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얼어붙었던 대지가 폭약에 의해 뒤집어지는 듯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주먹만한 불우박들이 무수히 떨어지는 찰나. 한 치(寸). 천유성의 손은 오랜만에 제자리에서 이동을 했다. 옥으로 깎아 만든 듯한 손이 움직인다. 너무나도 고요하며 아름다운 동작이다. 그의 손은 다시 한 치 쳐들렸으며, 손가락 끝이 호선(弧線)을 끄는 가운데 그의 등에서부터 무엇인가가 뽑히어져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르르르르릉－! 한 마리 용이 날아오르는 듯 거검영(巨劍影)이 수직으로 치솟아 오르는 가운데, 검문혼이 이룩한 불의 장막은 여지없이 갈라졌다. 완벽한 검세이다. 완전한 각도(角度)에 완벽한 속도……. 더 이상 이를 데가 없는 절정대검도(絶頂大劍道). 군림(君臨)! 그것은 풍운금쇄전 내부에서 터득이 되었으며, 이 자리에서 두 번째로 시전이 되었다. 그 날, 낭인주의 하늘을 벤 수법도 바로 군림검도였다. 보라! 하늘이 끊어져 나가는 것을. 백룡 한 마리가 끝없이 날아오르는 듯, 신검 천룡음(天龍吟)은 무려 오십 장을 치솟아 올랐으며, 그 사이 적어도 백팔 번 거듭 무적어검강(無敵御劍 )을 발출해 냈다. 단 일 검(劍)이나, 천 식(式)이 포함되어 있다. 파팟－ 팟－ 팟－! 둔팍한 소리가 잇따라 터져 나왔으며, 허공에서 문득 한 송이 피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헉!" 급박한 호흡 소리와 함께 공포를 걸친 자가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쿵－! 그는 파헤쳐진 대지로 떨어지며 세 차례 경련을 일으켰다. 오공에서 푸른 피를 줄줄 토하는 자, 그는 바로 야망의 승부사 검문혼이었다. "좋아, 완벽했다. 너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했다. ㅋㅋ……!" 검문혼은 끝까지 옷었다. 입술을 벌릴 때마다 오장육부가 바수어진 조각들이 게워졌다. 운명의 이단자, 한 자루 검에 승부를 걸어 봤던 야성의 청춘. 그는 팔다리가 끊어진 상태였으며, 몸뚱이만 남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키득키득 웃으며 죽어 갔다. "그 정도는 되어야… 아암, 그 정도는 되어야……!" 비웃는 듯한 목소리이다. 하나 그 목소리에는 마기(魔氣)가 실리어 있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그래도 그가 순수했던 시절에 말하던 목소리를 닮아 가고 있었다. "바보 자식……." 천유성은 성큼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입술을 질겅 깨물며 이렇게 외쳤다. "죽을 때에는 적어도… 슬픈 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바보 자식!" 그는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리고 검문혼의 질기디질긴 목숨은 흐리어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눈망울에서 순수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도망가고 싶었다! 죽는 것이 무서웠지." "아……!" "그러나 네가 이겼다. 이것은 진심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간적으로 말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워 보이는 표정 가운데 죽어 갔으며, 천유성은 오랫동안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술을 나누어 마시며 너를 무림에서 은거시키려 했었는데…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게 되다니……!" 그의 어깨 위로 눈발이 흩뿌리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 싸움은 완전히 마무리지어졌다. 육천 무사는 단 오백만 남기고 모조리 죽어 버렸다. 일천은 싸우다가 죽었으며, 나머지는 검문혼이 죽는 찰나 자결해 버린 것이다. 하루 내내 술을……. 천유성은 안탕산 아래의 주가에 가서 독한 술을 자음자작했다.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고, 창을 내다 본다든가 하는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으며, 그 사이 그들은 안탕산의 산음(山陰) 속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눈보라는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천유성 쪽으로 다가섰으며, 그 일대에는 십여만 무사들이 은밀히 추적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성십화(流星十花), 풍방(風 ) 인자(忍者), 구파일방(九派一 )의 수로명숙(首老名宿)들, 녹림하오도(綠林下五道)……. 대부분이 천유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천유성은 자신의 출현을 비밀로 묻어 달라고 요료에게 부탁을 했으되, 요료는 못 들은 척 그 비밀을 누설시켰다. 폭설을 뚫고 나타나는 무사들 가운데에는 유성천가를 비롯한 영웅팔가의 노고수들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하나 그들은 아직 정식으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보라! 한 줄기 혈풍(血風)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작고 섬세한 그림자가 날아올랐으며, 그로 인하여 백여 장에 걸친 핏빛 안개 바람이 일어나 산천을 휘어 감았다. "카아아아… 카아아……!" 지축을 뒤흔드는 악마의 부르짖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석화(石花) 초령(草玲). 숙명을 부정해 버리고 복수를 시작한 여인. 마황야가 진정으로 후계자로 삼은 천마화(天魔花)가 안탕산 안으로 치달려 들어오는 것이다. 그녀의 뒤쪽에는 말(馬)을 버리고 경공으로 치달리기 시작한 일만 천마병단(天魔兵團)이 활기등등한 기세로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자부비전을 허물어뜨리고 검문혼을 잡아 조각조각 찢어 죽일 작정을 하고 옥관(玉關)에서부터 안탕산까지 피의 길을 뚫은 것이다. "먼저 우리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무적향수(無敵香帥)!" 어깨를 으쓱이는 청년도인. 기품이 헌헌(軒軒)하며 인물이 수려하다. 항차 백도부맹주(白道副盟主)로 등용이 될 예정인 무당제일인(武當第一人). 그는 바로 만박서생(萬博書生) 하후초였다. 그는 천유성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천유성은 술을 마시는 사이, 지인(知人)들에게 포위되고 만 것이다. "구파일방의 저력이 되살아 났소이다. 세가무사들은 탈진했을 터이니, 일단 백도무사들이 진세를 펼쳐 천마화 일행을 제압하는 것이 최상책일 것이오!" "……." 천유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검문혼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허탈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뭇 거마를 척살한 바 있는 천유성이었으나, 절세절정의 경지에 들어서고 나서는 선혈 뿌리는 일을 자제했다. 그는 검문혼마저도 용서해 줄 작정이었는데… 검문혼은 죽음을 자청하다시피 달려들어 죽고 만 것이다. 다시 한 잔의 술… 꽤 여러 잔째 마시는 것이나, 얼굴에 취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천유성에게 취한다는 것은 없다. 다만 술의 화끈한 열기를 목젖 가득 느끼기 위해 술잔을 쳐들고 있을 뿐이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인물, 그는 풍방의 수석대인자(首席大忍子) 고검랑(孤劍郞)이었다. 그는 꽤 여러 날 동안 천마화를 추적했다. 천마화의 습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천마화에게는 허점이 없다고 소문났으나, 꼭 그것은 아니외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일거에 장내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했다.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은 고독히 술잔을 쳐드는 천유성 한 사람에 불과했다. 한데 고검랑이 몇 마디 말도 하기 전에 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 천마화는 배가 약간 부른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임신을 하고 있습니다! － 임신을 한 여인은 보호 본능이 강한 법입니다. 사실 천마화가 일약 천년제일 마도고수가 된 이유는…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복부를 쉬지 않고 노려야 합니다. 치졸한 암습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악마입니다. 희생이 있을지언정… 그녀는 죽여야 합니다!" 고검랑의 분석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팟－! 천유성의 손아귀가 쥐어졌으며, 잔이 산산이 바수어졌다. 보라! 그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불줄기를. 그리고 그의 입가에 지어지는 아름다운 미소(微笑)를! "그 여인이 임신했다면… 그 아이는 바로 나의 아이이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천마화의 아이가 천유성의 아이라니? 사실, 천마화가 천유성과 살을 섞은 사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요료 선사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천마화와 천유성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 "아아, 그랬던가?" "……." 넋을 잃은 사람이 반이고, 묘한 흥분에 휘어 감기며 탄성을 발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단 두 사람만이 달랐다. "축하합니다, 주공! 아버지가 되시다니……!" 십만호(十萬戶), 그는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철거도 몹시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재주가 많소. 어느 사이, 또 하나의 여인을 후린 것이오?" 일만 무사들과는 달리 세련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가장 인간적이며 천유성의 내면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래, 그녀는 나의 여인이지. 내가 지켜 주지 않는다면, 천하의 그 누가 그 여인을 지켜 주겠는가?" 천유성은 손을 내밀었고, 술을 병째 들이마셨다. 이어 그는 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했으며, 단 일 보(步)를 걷는 찰나 그의 뒷모습은 하나의 점(點)으로 화하고 말았다. "아… 아니 됩니다. 혼자 가시면……!" 철거가 허둥지둥 뛰기 시작했고, 십만호는 거름 내음을 풀풀 흘리며 뒤쫓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유성십화가 날아올랐다. 더 높은 하늘로는 풍방의 무사들이 훌훌 날아올랐다. 어디 그뿐이랴? 언제 나타났는지 요료 선사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아해(兒孩)들아! 사내에게는 가끔 혼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란다. 아미타불……!" 요료 선사의 사자후 소리가 중인들의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맑게 씻어 주었다. 요료 선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기실 천유성은 소림사에서 요료 선사에게 그러한 번뇌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속세인으로서 계집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어찌 영웅이라 하겠느냐? 너희들은 술이나 퍼마시며 기다려라. 유성은 이미 완벽해졌다. 일만 천병마단 따위는 혼자서도 무찌를 수 있다." 요료 선사의 사자후는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비키게. 나는 나의 아내를 데리고 가야 하네!" 그는 쉬지 않고 폭설을 뚫고 걸었다. 우수에 천룡음을 든 채 성큼성큼 걷는 천유성. 그가 일 보 내디딜 때마다 수십 무사들이 달려들었다. 진정한 악마대본영의 거마들, 과거에는 최소한 향주(香主)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쓰러져라!" "감히… 지존을 아내라 하다니……!" 폭음 소리가 잇달았으며, 놀랍게도 손을 내린 채 걷는 천유성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손을 쓴 자들이 오히려 벌렁벌렁 나뒹굴었다. "어이쿠우!" "크으으… 그대는… 신(神)이오?" 우지끈－ 꽈꽝－! 강하게 공격한 자는 반탄진기에 의해 몸이 허물어져서 죽었고, 약하게 공격한 자는 팔 하나를 부러뜨린 채 벌렁벌렁 나뒹굴었다. "내 여자를 내가 데리고 가는 일을 막지 말기 바라네." 천유성, 그는 한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핏빛 안개에 뒤덮여 있는 하나의 그림자. 너무나도 아름다운 영상의 여인이다.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완벽성이 깨어질 것이다. 미(美)의 화신(化神)이라 할 수 있는 여인이다. 다만 눈빛이 시뻘겋고 피부가 밀랍처럼 흰 것이, 생동하는 아름다움을 죽음의 미학(美學)으로 바꿔 버렸다. 핏물이 고인 듯한 두 눈에서 쉬임없이 기광이 흘러 나왔다. "……!" 고개가 약간 기웃거린다. 그녀의 망막 가득히 천유성의 모습이 담기어지고 있었다. 천유성은 그녀를 향해 일직선을 그으며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한 시진 간 걸었으며,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걸음을 멈추어 본 적이 없다. 그를 막아 섰던 천마병단의 거마들은 반수 이상 폐인이 되고 말았다. 저벅－ 저벅－! 천유성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결혼을 바란 사람은 너였다." "아……!" "네가 자청한 결혼인 이상, 너는 아직도 나의 여자다. 너는… 네가 한 맹세를 지켜야 한다." "으으… 으으……!" 천마화의 눈빛과 숨결이 흐트러졌다. 그녀는 과거의 초령군주가 아니었다. 그녀는 심마경(心魔境)에서 태어났으며, 천마경(天魔境)에 돌입한 마도 사상 가장 강한 고수였다. 그러나 천유성과의 인연이 어찌 그리 간단히 지워지겠는가? "그… 그대군? 으으으……!" 그녀의 입술이 얄팍하게 벌어졌다. 한동안 흐트러졌던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으며, 호흡 소리도 본래의 평정을 되찾았다. "살았군.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천만에……!" "부정하지 못할 숙명이다. 나는 그대를 죽일 수밖에 없다." 천마화는 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네게는 나를 죽일 능력도, 자격도 없다. 네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닮은 사내아이 하나를 쑤욱 낳아 나의 가슴에 안겨 주는 것이다." "닥… 닥쳐라. 그 아이를 어찌 아는지 모르나, 곧 사산(死産)될 것이다." 천마화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천만에, 그 녀석은 태어난다. 너의 마성이 사라지기만 하면, 그 녀석은 건강하게 태어나게 된다. 나는 이미 아이의 이름마저 지었다.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그 아이는 천룡음(天龍吟)이다. 바로 우리들의 아이지." 천유성이 말하며 천룡음을 쳐들었고. 파팟－ 팟－! 검파가 구 로(路)를 가르는 가운데, 막 천유성을 향해 덮쳐 들던 구대사신(九大死神)이라는 자들의 몸뚱이가 바스라졌다. 쓰으으으……! 파팟－! 유성은 세 줄기의 단선(單線)을 허공에 그렸으며, 그로 인해 천마화 주변 백 장 이내는 텅 빈 장소로 화하고 말았다. 남과 녀, 그리고 흰 눈이 있을 뿐이다. "너는 천마화가 아니야. 너는 석화야!" "미… 미쳤군?" 천마화는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너는 영웅팔가의 인원이기도 하다. 또한 어렸을 때 너는 나의 정혼녀로 선택이 되었다. 그것이 운명이다! 그뿐이야!" 천유성도 포검(抱劍)한 채 날아올랐다. 두 사람은 끝없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였으며, 일 장 상승할 때마다 각 십 검(劍)씩을 발출해 냈다. 콰광－ 쾅－! 천지개벽(天地開闢). 경천동지(驚天動地). 지난 천 년 가운데 이렇듯 격렬한 싸움은 없었다. 사대마계의 지존과 영웅팔가 지존의 격돌. 그 싸움의 승자가 무림을 지배한다. 허공은 폭풍에 휘말렸으며, 이십 리 안의 삼림(森林)이 광풍에 휘말려 뿌리째 뽑혀 날아올랐다. 지진이 일어나는 듯 지반이 갈라졌고 어떤 때에는 불바람이 허공을 휘어 감았다. "천마화룡참(天魔火龍斬)!" "너는 나의 여인!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하게 할 테다." "만사혈혼뇌(萬邪血魂雷)!" 천마화의 악에 찬 음성이 계속 터져 나왔고, 그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천마화는 마공,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절대의 마공이다. 그러나 그녀는 천유성의 그림자도 베어 낼 수 없었다. 급기야 천마화의 마성은 폭발하듯 치밀어올랐으며, 그녀가 알고 있는 가장 가공스러운 마공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보라! 음습한 바람이 일어나는 가운데, 허공 가득 천마화의 분신이 떠오르는 것을. "팔(八)－ 만(萬)－ 사(四)－ 천(千)－ 마(魔)－ 무(舞)－!" 무수히 나타나는 그림자들의 숫자는 차츰차츰 늘어났고… 어느 한순간, 악마영(惡魔影)의 숫자는 정확하게 팔만사천 개로 늘어났다. 콰르르르릉－ 콰광－ 쾅－! 가공스러운 마경(魔勁)이 퍼부어지며 땅에 오 장 깊이의 도랑이 푸욱 파였다. 천유성은 포검한 채 정지하고 있었다. 그는 군림검도(君臨劍道)의 기수식을 준비하고 있으되, 아직 운검(運劍)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죽이기는 쉽다. 그러나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천마화의 마공을 헤아릴 때, 죽이지 않고 사로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모두 환상이야. 그리고… 단 하나만이 실체이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는 대지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소리이다. 너울너울 춤추는 천마의 그림자들.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흘리며 천마소수(天魔素手)가 팔만사천 개 떨치어진다. 단 하나만이 진짜 손이고, 다른 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유성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콰광－ 쾅－! 종말처럼 일대는 허물어졌다. 돌덩어리란 돌덩어리는 모조리 바수어졌으며, 거대한 숲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팔만사천 개의 그림자들은 더욱 너른 지역을 휘어 감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지되어 있던 천유성의 표정이 변화된다. '들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를… 희미하나, 분명 인간의 심장 고동 소리이다.' 그는 아주 경미한 박동 소리를 듣고 있었다. 쿵－ 쿵－ 쿵－! 그 소리가 일어나는 곳은 바로 천마화의 실체가 머물러 있는 곳이다. '그래, 네녀석은 나와 천마화 사이의 아이이지. 네가… 네 에미를 구하는구나.' 천유성이 들은 심장 박동 소리는 태아(胎兒)의 심장 소리였다. 천마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는 감추어졌으되, 태아의 심장 소리만은 감추어지지 않는 것이다. "군(君)－ 림(臨)－!" 나직한 일갈과 더불어 천룡음이 날아올랐다. 오직 하나의 점을 향해서. 백 장 먼 곳의 한 점, 그 곳을 정확히 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군림검도로는 그것이 가능했다. 일순 너무나도 경미한 파공성과 더불어 허공을 휘어 감았던 악마의 그림자들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흑!" 천마화는 입을 가볍게 벌린 채 떨어져 내렸으며, 천유성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그녀의 몸을 사뿐히 받아 들었다. "이제 영웅도… 악마도 없다. 정녕 지루한 천 년의 세월은 마감된 것이다." 그는 너무나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끝없이 거보(巨步)를 내디뎠다. 지금, 그는 영웅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친구를 베어 버린 슬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젊은이였고, 두 팔뚝 위에 걸쳐 든 여인으로 인해 묘한 포만감을 느끼게 된 소박한 젊은이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천유성, 그는 힐끗 하늘을 바라봤다. 폭설(暴雪)이 아니라, 함박눈이 뿌려진다. 어쩌면 이번의 눈만은 서설(瑞雪)인 듯했다. "그래, 이제 알았다." 그는 느릿느릿 걸음을 내디뎠다. 굳었던 표정은 차츰차츰 활짝 풀리기 시작했다. "내일(來日)에는 내일의 태양(太陽)이 떠오른다. 그렇다. 내일에는 내일의 바람이 불고… 그뿐이다." 그는 웃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석화의 손이 풀썩풀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다. 천유성은 애검(愛劍) 천룡음(天龍吟)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부지런히 걸음을 내디뎠다. 바람(風)이 불어 오는 곳을 향해, 그리고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향해서 그의 거보가 계속되었다. 서설(瑞雪)이 내리고, 그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내일에는 내일의 태양이… 피와 죽음이 비추어지지 않는 그러한 태양이 뜨리라. 하나 내가 구태여 끼여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죽간(竹竿)을 둘러메고… 호숫가에 가 있게 되리라. 프하하……!"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