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9] 제목 : [김용] 천룡팔부(天龍八部) 12장 올린이 : 멀티피씨(김효범 ) 96/08/29 17:34 읽음 : 558 관련자료 없음 ------------------------------------------------------------------------------ 12. 미녀에 취하다 (從比醉) 조그만 배는 한 줄의 수양버들이 서 있는 곳을 돌았다. 그러자 멀리 물가에 꽃나무 들이 빨갛게 늘어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노을이 물든 것 같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단예는 아, 하고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아주는 물었다. 왜 그러죠? 단예는 그 꽃나무숲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것들은 우리 대리국에 많은 산다화(山茶花)요. 그런데 어떻게 태호에 이와 같은 운남의 다화를 심었을까? 산다화는 운남성에서 나는 것이 가장 유명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를 운남 다 화라고도 했다. 그런가요? 이 장원은 만타산장(曼陀山莊)이라고 해요. 곳곳에 산다화를 잔뜩 심어 놓았죠.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산다화는 일명 옥명(玉茗)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름은 만타라화(曼陀羅花)라고 하 지 않는가? 이 장원이 만다라화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하니 어디 어떤 유명한 품종들 을 심어 놓았는지 한 번 보아야겠다." 아주는 노를 저어 배를 곧장 산다화가 많이 피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뭍에 다다 라 바라보니 모두가 붉고 하얀 산다화만 피어 있을 뿐 집은 보이지 않았다. 단예는 대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다화를 많이 보고 살아서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은 산다화가 많기는 하지만 진정 훌륭한 품종은 보이질 않는구나. 그렇다면 정 말 훌륭한 품종은 반드시 장원 안에 심어 놓았을 것이다." 아주는 배를 기슭에 대 놓고 단예에게 미소하며 말했다. 단 공자, 우리는 안으로 들어 갔다 금방 나오겠어요. 그녀는 아벽의 손을 잡고 뭍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꽃밭 속에서 가느다란 발걸 음 소리가 들리면서 한 청의(淸衣) 소녀가 걸어 나왔다. 그 소녀는 손에 한 다발의 꽃을 들고 있었는데 아벽과 아주를 보자 종종 걸음으로 그녀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주, 아벽, 너희들 참 당돌하구나. 또 몰래 여기까지 왔군. 부인께서는 두 계집의 얼굴에 칼로 십자 모양의 상처를 내어 너희들의 꽃과 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짓이겨 놓 아야겠다고 말씀하셨단다. 아주는 웃었다. 위초 언니, 숙모님은 집에 계신가요. 그 소녀 위초는 단예를 한두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 아주와 아벽에게 말했다. 부인께서는 또 두 말괄량이 계집애가 낯선 남자를 만다산장으로 데리고 왔으니 빨리 그 남자의 두 다리를 잘라 놓으라고 하셨어. 그녀는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기의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아벽은 자기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위초 언니,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아요. 정말이에요, 가짜예요? 아주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벽, 그런 말에 놀랄 것 없다. 숙모님이 계시다면 감히 이 계집애가 이렇게 히히덕 거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숙모님은 어디로 가셨지? 위초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이가 몇이지? 나의 언니가 되시게? 놀랍게도 요 영악한 것이 숙모님이 계시 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군.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아벽, 두 분 누이, 정말 오랫만에 이곳에 왔는데, 내 마음 같으면 한 이틀 이 곳에 묵어가게 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는 말했다. 나 역시 언니와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요. 위초 언니, 언제 한 번 우 리 장원으로 놀러 오세요. 오시기만 한다면 사흘 밤 사흘 낮을 자지 않고 우리가 짝이 되어 드리겠어요. 좋아요? 그러면서 아주와 아벽은 뭍으로 올라갔다. 아벽은 위초의 귀에 입을 대고 뭔가를 나 직이 속삭였다. 위초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체, 하고 웃으면서 단예쪽을 한 번 힐끔 쳐다 보았다. 아벽은 그만 얼굴이 새빨개졌다. 위초는 한 손으로 아벽을 잡고 한 손으로는 아주의 팔을 잡고 말했다. 자, 집안으로 들어가자. 아벽은 고개를 돌렸다. 단 공자,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단예는 말했다. 좋소. 단예는 세 소녀가 다정히 손을 잡고 꽃밭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뭍으로 올라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 나무 뒤로 가서 소변을 보았다. 조그만 배 앞에 한참 앉아 있으려니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 다. "어디 이곳에 만다화의 어떤 기이한 품종이 있는지 구경이나 해볼까?" 그리고 그는 내키는 대로 걸음을 옮기면서 구경을 했다. 그런데 그 꽃밭 속에는 만 다화 이외에는 다른 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견우화(牽牛花), 월월홍(月月紅), 장미 같은 것도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심어져 있는 만다화도 모두 평범한 것들이었 다. 다만 멋있는 점이 있다면 그와 같은 산다화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 장을 나아가자 산다화의 품종이 점점 많아졌다. 간혹 가다가 두어 송이 그럴싸한 것이 있었 으나 심는 방법이 틀려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장원이 이름을 만다라고 취한 것도 헛된 것이로군. 좋은 품종의 산다화를 엉망 으로 만들다니!" 그는 다시 생각했다. "어서 돌아가야지. 아주와 아벽이 돌아와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초조하게 생각할 것 이 아닌가." 몸을 돌려 그는 몇 걸음 가지 않아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군! 그는 꽃밭 쪽에서 내키는 대로 걸음을 옮기면서 걸었고 산다화에 정신이 팔려 그만 되돌아가는 길을 잃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소로길은 동으로도 서쪽으로도 나 있지 않는가?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고 아무래도 작은 배가 매어져 있는 곳까지 가려면 어려울 것 같아 속으로 생각했다. "먼저 물가로 가 보도록 하자." 그는 가면 갈수록 길을 잘못 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갈수록 산다화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왼쪽 편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아주의 목소리였다. 단예는 크게 기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우선 여기에서 그녀들을 기다리다 그녀의 일이 끝나면 함께 돌아가면 되겠지." 이때 아주가 말했다. 공자께서는 몸이 좋아요. 식사량도 괜찮구요. 요즈음은 개방의 타구봉법(打拘棒法) 을 연마하고 있어요. 아마도 개방의 누군가와 겨룰 모양이에요. 단예는 생각했다. "아주는 모용 공자의 일을 얘기하고 있구나. 이런 일을 엿듣는 것은 옳지 못하니 일 찌감치 멀리 떨어져 있어야겠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는 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그 녀들의 이야기가 언제 끝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바로 이때 한 여인의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단예는 몸을 흠칫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생각했다. "탄식 소리가 이처럼 아름답게 들리다니 세상에 이와 같이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을 수 있을까?" 이때 그 음성은 나직이 물었다. 이번에 그는 어디로 외출을 갔지? 단예는 여인의 한숨 소리만 듣고도 신심이 진동되었다. 그 두 마디를 더 듣게 되자 마치 전신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고 마음은 쓰리고 아팠으며 뭐라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적개심을 느꼈다. "그녀가 묻는 것은 분명히 모용 공자의 일일 것이다. 모용 공자에 대해 그녀가 이토 록 관심이 있다니, 모용 공자는 어떻게 하여 이런 복을 타고난 것일까?" 이때 아주가 말했다. 모용 공자는 먼저번 나가실 때 낙양으로 가서 개방의 고수를 만나겠다고 하셨습니 다. 그리고 등(鄧) 오라버니가 공자를 따라 갔으니 소저는 안심하셔요. 그 여인은 나직이 말했다. 개방의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이라는 이대 시기는 개방의 부전지비학(不傳之秘 學)이다. 너의 집 "환시수각"과 우리집의 "낭환옥동"에 숨겨진 비급들을 모두 모은다 해도 약간의 완전하지 못한 권법과 장법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다 운기행공의 심법(心 法)은 전혀 없다. 너희 공자께서 어떻게 그러한 이대 신공을 연마할 수 있겠니? 아주는 말했다. "타구봉법"의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어찌 공자께서도 생각해 낼 수 없겠어요? 권법 만 있다면 자기가 생각해서 심법을 만들어 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했어요. 단예는 생각했다. "모용 공자의 그 말에는 일리가 있구나. 아마도 그는 총명하고 의지가 굳은 사람인 가 보다." 그 여인은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설사 창안을 한다 해도 팔 년에서 십 년은 걸릴 것인데 조석지간에 어떻게 만들어낸 다는 것이냐? 공자가 권법을 익히는 것을 보았느냐? 혹시 내가 듣지 않은 부분이 있지 않든? 아주는 말했다. 공자는 봉법을 매우 빨리 펼쳐내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행운유수와도 같이...... 그 여자는 아, 하고 부르짖었다. 그는......, 그는...... 그처럼 빨리 펼쳐 보이든? 아주는 말했다. 그래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물론 잘못되었지. 타구봉법의 심법은 잘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봉법은 느릴수 록 좋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 어떤 수법은 갑자기 빨랐다가 갑자기 느려져야 하고 빠르다가 느려지기도 하고 빠른 중에 느림이 있고 느린 중에 빠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는 빨리 펼치기만 한다니 개방의 고수와 손을 쓰기 만 하면 아무래도 그는...... 아무래도 그는...... 너희드은 공자에게 전갈을 보낼 방 법이 있겠니? 아주는 음, 하며 말했다. 저희는 공자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지금쯤 개방의 장로들과 만났는지도 모르고요. 공자가 떠날 때 한 얘기로는 공자께서 개방의 마(馬) 부방주를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 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낙양으로 가서 그 일을 따지겠다는 것이지 결코 손을 쓰겠다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렇지 않다면 그와 등(鄧) 오라버니 두분이 결국 아무리 영웅호걸 이라도 중과부적이 아니겠어요?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말로 따지다가 잘못되어 언쟁을 하게 되고...... 아벽은 물었다. 소저, 타구봉법을 빨리 펼친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일까요? 그 여인은 말했다. 물론 당연히 안 되지. 그건 말할 필요도 없어. 그는 떠날 때 어째서 나를 만나지 않 았지? 그녀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초조하고도 걱정스러운 듯했는데 그 목소리는 여전히 간드러져 여간 듣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단예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난는 고소 모용이라는 사람이 매우 존경받고 있으며 두려운 존재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말을 들으니 그 모용 공자는 이 여인에게 지도를 받아야 할 정도가 아닌가? 설마하니 이와 같이 젊은 여자가 그토록 빼어난 재간이 있을까?" 일시 넋을 빠뜨리고 있던 터에 갑자기 그의 머리가 향나무 가지에 부딪히자 그는 자 시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급히 입을 틀어 막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 다. 여인은 물었다. 거기 누구예요? 그는 이미 몸을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하자 기침을 한 후 나무덤불 뒤에서 말했다. 불초는 단예라고 합니다. 귀장의 옥명꽃을 구경하다 그만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 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그녀는 말했다. 아주, 너희와 같이 온 그 공자냐? 아주는 대답했다. 네, 그래요. 소저는 아는 척하지 마셔요. 우리가 곧 데리고 돌아가겠어요. 그 여인은 말했다. 잠깐, 내가 한 통의 편지를 쓰겠다. 그에게 분명히 말해 주겠다. 개방 사람과 손을 쓸 일이 있다면 타구봉법은 결코 쓰지 말고, 원래의 권법만을 쓰라고 말이다. 설령 " 그 자의 방법으로 그 자에게 펼친다"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해도......, 너희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이 편지를 그에게 전하도록 해라. 아주는 망설였다. 그건...... 그건...... 숙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녀는 말했다. 아니, 너희들은 부인의 말만 듣고 내 마은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 목소리는 노기마저 띠고 있었다. 아주는 재빨리 말했다. 소저께서 숙모님께 알리지만 않는다면 저희는 물론 명을 받들겠어요. 더우기 공자께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니어요? 소저는 말했다. 너희들은 내 서재로 와서 편지를 가져 가도록 해라. 아주는 여전히 망설이더니 억지로 대답했다. 네. 단예는 그 여자의 한숨 소리를 들은 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그 녀에게 푹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을 알자 한 번 떠 나게 되면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되고 한평생 한이 될 것 같아 그녀에게 꾸지람 을 듣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녀의 얼굴 모습을 한 번 보아야겠기에 용 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아벽 누이, 그대는 나와 함께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그는 꽃나무 숲속에서 걸어나왔다. 그 여자는 그가 나오는 소리를 듣자 어, 하면서 등을 돌렸다. 단예는 그 숲을 빠져나오는 순간 연뿌리색 장삼을 걸치고 있는 소녀가 꽃나무쪽을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은 매우 아름다왔다. 기다란 머리카락은 뒤 로 넘겨 은색 명주띠로 묶여져 있었다. 단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그녀의 주위에 노을빛과 같은 것이 연기처럼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속세인 같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자 마음속 깊이 억울해 하며 입을 열었다. 불초 단예가 소저에게 인사 드립니다. 그녀는 왼발로 땅바닥을 한 번 구르더니 곧 뾰로통해져서 말했다. 아주, 아벽, 다 너희들 때문이야! 나는 외간 남자를 쓸데없이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 을 모르느냐? 그녀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몇 번 모퉁이를 돌더니 산다화의 숲속으로 사라지 고 말았다. 아벽은 빙그레 웃고 단예에게 말했다. 단 공자, 저 소저의 성질은 대단해요. 우리 빨리 떠나도록 해요. 아주 역시 웃으며 말했다. 단 공자가 마침 와 주어서 우리를 난처한 입장에서 구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왕 소저는 반드시 우리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주었을 거예요. 이 두 목숨은 그렇게 된다면 위험해지죠. 단예는 참을 수 없어서 뛰어 나오기는 했지만 그녀에게서 몇 마디 말을 듣자 무안하 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와 아벽도 반드시 원망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히려 고마워하는 것이 아닌가. 그로서는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고 마음속은 허전했다. 단예는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꽃 나무 덤불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벽이 가볍게 그의 소매자락을 잡아당겼는데도 단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벽은 웃으며 말했다. 단 공자, 우리 이제 가요. 단예는 흠칫해서 입을 열었다. 좋소, 우리는 가야 되겠지? 그는 아주와 아벽이 앞장서 걸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으나 한 걸음 가서 뒤를 돌아보고 또 한 걸음 내딛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세 사람은 조그만 배로 돌아왔다. 아주와 아벽이 노를 들고 저어 나아갔다. 단예는 멍하니 언덕 위의 산다화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에게 그만한 복이 없다면 운명은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그녀의 몇 번 내뱉는 탄 식소리를 듣게 하였고 그 몇 마디의 말을 듣게 하였으며 또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 게 하였을까? 하지만 만약 내가 그만한 복이 있다면 왜 그녀의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 을까?" 그는 산다화의 덤불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침울해졌다. 별안간 아주는 아, 하고 놀람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아! 숙모님...... 이 돌아오셨다. 단예는 고개를 돌렸다. 호수 위로 한 척의 쾌선이 나는 듯이 달려왔다. 그 쾌선의 선두는 오색영롱한 꽃송이들로 가득차 있었다. 배가 가까워졌을 때 보니 모두 다 산다화였다. 아주와 아벽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들은 몹시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아벽은 단예에게 눈짓을 했다. 그에게 일어나라는 뜻이어다. 단예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주인이 선실에서 나와 이야기를 할 때면 일어날 것이오. 사내 대장부가 너무 겸손해도 비열한 것이오. 이때 배 안에서 한 여인의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어떤 남자인데 감히 만다산장에 뛰어들었느냐? 어떤 남자라도 청하지도 않았는데 찾 아오면 두 다리를 잘라 놓는다는 것을 모르냐? 그 소리는 지극히 위엄에 차 있었으나 퍽 맑고 고운 소리였다. 단예는 낭랑히 말했다. 불초는 단예라고 합니다. 어쩌다가 그냥 귀장을 경과하게 된 것이며 결코 일부러 뛰 어들어 간 것은 아닙니다. 사과드립니다. 그 여자는 물었다. 네 성이 단씨냐? 그 음성에는 약간 의아한 빛이 들어 있었다. 단예는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흠, 아주, 아벽, 또 너희 두 계집애들의 짓이로구나! 모용복(慕容復)이란 그 녀석은 잘 배우지는 않고 항상 살금살금 남이 눈치나 살피면서 나쁜 짓만 한단 말이야. 아주는 말했다. 마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죠. 사실 저희들은 적의 쫓김을 받아 만다산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저희 공자께서는 외출하셨어요. 그러니 이 일은 저희 공자와 아무 연관도 없사옵니다. 여자는 말했다. 교묘한 변명을 늘어놓는구나. 도망칠 생각일랑 하지 말고 날 따라 오너라. 아주와 아벽은 풀이 죽어 대답했다. 예. 그리고는 작은 배를 저어 쾌선의 뒤를 따라갔다. 만다산장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거 리였으므로 배는 순식간에 뭍에 닿았다. 그러자 장식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쾌선에서는 많은 여인들이 걸어나왔다. 모두 시녀 차림이었고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삽시간에 서릿발 같은 검광이 번쩍번쩍 꽃나무 숲에 비춰졌다. 그런 여인들은 모두 아홉 쌍이었다. 십팔 명의 여인들은 두 줄로 늘어섰다. 그녀들은 모두 허리께에서부터 비스듬히 위로 겨냥하는 듯이 일제히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러자 선실에서 한 여인 이 걸어나왔다. 단예는 그 여인의 모습을 보자 참을 수 없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입을 딱 벌렸다. 혹시나 꿈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 여자는 아황색 비단 적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장식이 무량산의 옥미인상과 매우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중년의 아 름다운 부인으로 사십 세 남짓이엇으나 동굴의 옥미녀상은 십팔구 세 정도의 나이였 다. 단예는 놀란 끝에 다시 그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동굴의 옥녀상에 비해 눈썹, 눈동자, 코, 입이 비교적 아름답지 못한 편이었 다. 그리고 중년 부인의 얼굴에는 세파의 시달림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고 나이도 달랐 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닮은 데가 있었다. 아주와 아벽은 단예가 왕 부인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실 로 무례하기 짝이 없어 보여서 마음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연신 손짓을 하며 보 지 말라고 신호를 하였으나 단예의 눈동자는 왕 부인에게 못 박힌 듯 떨어지지 않았 다. 그 여인은 단예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냉랭하게 말하였다. 이 사람이 이토록 무례하구나. 나중에 제일 먼저 두 다리를 자르고 두 눈알을 뽑아 라. 그리고 혓바닥을 잘라 버려. 그러자 한 시녀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예. 그 순간 단예는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 나를 죽여 버린다면 모르되 두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거기가 혓바닥까지 잘라 진정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그는 진정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아주와 아벽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들은 얼굴색이 창백해져서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왕 부인이 언덕으로 오른 후 선실에서 두 쌍의 시녀가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쇠사슬이 들려져 있었으며 선실에서는 두 명의 남자가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나오고 있었다. 그 남자들은 쌍수가 뒤로 묶여 있었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얼굴이 수려한 것이 아마도 부유한 집안의 자제인 것 같았고 또 한 사람 은 단예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 바로 무량검파의 한 제자였다. "저 사람은 원래 대리에 있었잖는가? 어찌하여 왕 부인에게 잡혀 강남으로 오게 되 었을가?" 이때 왕 부인은 무량검파의 제자 당광웅에게 말했다. 너는 분명히 대리국 사람인데 어찌하여 그 사실을 부인하려 드느냐? 당광웅은 말했다. 저는 운남 사람이지만 제 고향은 대송나라의 영내에 있으며 결코 대리국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왕 부인은 말했다. 너의 고향이 대리에서 얼마나 멀다는거냐? 당광웅은 말했다. 사백여 리나 됩니다. 왕 부인은 소리쳤다. 오백 리가 못 된다면 대리국의 사람으로 치는 것이 마땅하다. 데려가서 만다라화 아 래에 산 채로 묻어 비료로 하라! 당광웅은 부르짖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까. 분명히 말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왕 부인은 냉소했다. 대리국의 사람이거나 단씨 성의 사람이 내 손에 잡히게 되면 무조건 산 채로 매장을 당한다. 도대체 너는 소주에는 무슨 일로 왔지? 이곳 소주로 온 이상 어째서 대리의 말투를 그대로 쓰고 있었으며 또 어째서 주루에서 큰소리를 치고 있었느냐? 너는 대리 국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대리국과 이웃이니 대리국 사람과 똑같이 처리하겠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하, 저 부인은 나 들으라고 하는 짓이구나. 아예 솔직하게 인정을 하자."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바로 대리국 사람이고 성이 단씨이니 산 채로 묻을 양이면 일찌감치 손을 쓰도 록 하시오! 왕 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너는 벌써 이름을 말했지 않느냐. 자칭 단예라고 했지? 흥, 대리의 단씨 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토록 쉽게 죽이지는 않겠다. 그녀가 한 번 소리를 지르자 한 시녀가 와서 당광웅을 끌고갔다. 그는 혈도를 짚혔는지 아니면 큰 부상을 당했는지 전혀 반항을 하지 못한 채 큰소리 로 부르짖기만 했다. 천하에 이와 같은 법은 없습니다. 대리국의 수많은 사람을 당신이 다 죽일 수 있습 니까? 그는 곧 꽃나무 숲속으로 끌려가서는 점차 멀어졌으며 외치는 소리도 점점 작아졌 다. 왕 부인은 약간 고개를 돌리더니 얼굴이 청수한 남자에게 말했다. 너는 무어라고 말할 테냐? 그 남자는 갑자기 두 무릎을 꿇고는 애걸하기 시작했다. 저의 가친은 경성에서 벼슬을 하고 있으며 슬하에는 외동 아들로 저밖에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부인께서 어떤 분부를 내린다 하여도 가친께서는 반 드시 응하실 것입니다. 왕 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너희 부친이 조정의 대관인 것을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너를 살려 주는 것은 어려 운 일이 아니다. 너는 돌아가서 즉시 집에 있는 조강지처를 죽이고 어제 네가 밖에서 몰래 사귄 묘(苗) 소저를 맞아들이되 삼서육례(三書六禮)를 모조리 갖추어야 한다. 그 공자는 말했다. 그건...... 저의 처를 죽인다는 것은 실로...... 불초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 고 정식으로 묘 소저를 맞아들인다는 것은 저희 부모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왕 부인은 그 말을 가로챘다. 그를 데려가 산 채로 매장하라. 그를 잡고 있던 시녀가 대답했다. 예. 그리고는 쇠사슬에 묶인 그를 끌고서 들어갔다. 그 공자는 놀라 전신을 부들부들 떨 며 부르짖었다. 제가 응낙을 하겠습니다. 왕 부인은 말했다. 소취, 네가 그를 직접 압송하여 소주성으로 들어가라. 친히 그가 자기의 처를 죽이 고 묘 소저와 혼례를 올리는지를 확인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일이 끝난 후에 돌아오 도록 하라. 소취는 대답했다. 예. 그 공자를 끌고 언덕 아래 매여 있는 조그만 배로 올라갔다. 공자는 애걸했다. 부인,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부인과 저의 처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묘 소저도 부인과 무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그토록 묘 소저를 두둔 하고 저의 처를 죽이고 달리 처를 맞으라 하십니까? 저는 평소 한 번도 부인을 뵈온 적이 없고 죄를 지은 적도 없습니다. 왕 부인은 말했다. 네게 이미 처자가 있으면 남의 처녀를 건들지 말아야 한다. 감언이설로 상대를 속였 다면 그 대가로 반드시 그녀를 처로 맞아들여야 한다. 그런 사실을 내가 알게 된 이상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무엇을 그리 새삼스러워 하느냐? 소취야,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어라. 소취는 대답했다. 예. 저는 상숙(常熟), 단양(丹陽), 무석(無錫), 가흥(嘉興) 등에서 모두 일곱 번을 처리하였습니다. 또한 소란(小蘭), 소시(小詩) 그녀들도 이러한 일을 몇 번 처리한 적 이 있죠. 공자는 관례가 그러하다는 말을 듣고 그저 울부짖는 소리만 했다. 소취는 곧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녀는 배를 몰고 소주성쪽으로 사라져갔다. 단예는 왕 부인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리에 맞지 않는 것을 보고 그만 눈이 휘둥 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멍청해지고 만 것이다. 속으로 "이런 법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을 지껄이게 되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왕 부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천하에 이럴 수 있는 일은 많고 많다. 단예는 다시 한 번 실망과 쓰라림을 느꼈다. "그날 무량산 석봉에서 본 옥녀상 신선 누님을 나는 얼마나 많은 감동으로 우러러보 았던가." 그런데 지금 왕 부인의 모습은 옥녀상과 매우 닮았으나 행동거지는 마귀와 같았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그때 왕 부인의 시녀들이 선실로 들어가더니 네 개의 화분을 들고 나왔다. 그것을 본 단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개의 화분에 심어져 있는 것은 모두 산다화였다. 퍽이나 얻기 어려운 희귀한 품 종이었다. 천하에서 산다화는 대리의 것을 으뜸으로 친다. 진남 왕부에는 유명한 품종이 헤아 릴 수 없이 많았으며 대리에서는 훌륭한 품종의 산다화를 얻을 수 있었다. 단예는 어릴 적부터 산다화를 수없이 보아 왔으며 여가가 있을 때는 십여 명이 넘는 원예사들이 이야기하고 논평하는 것을 듣곤 하였다. 그리하여 산다화의 우열, 습성 같 은 것들을 배우지 않고도 익힐 수 있었다. 이는 마치 농가의 자제가 숙맥(菽麥)을 배 우지 않고도 분간할 줄 알고 어부의 자제들이 물고기와 새우를 분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는 만다산장에서 정원을 슬쩍 돌아보았지만 정말로 뛰어난 품 종은 발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만다산장"이라는 네 글자가 명실상부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네 개의 화분에 심어진 산다화를 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 로 생각했었다. "이제서야 좀 말이 되는군." 그때 왕 부인이 입을 열었다. 소다(小茶), 이 네 개 화분의 만월(滿月) 산다화는 어렵게 구해온 것이니 잘 보살피 도록 하라. 소다라 불리워지는 소녀는 대답했다. 네! 단예는 왕 부인의 몇 마디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진정으로 산다화를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냉소했다. 왕 부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호수의 바람이 세차 화분들을 선실에 두었었다. 햇살을 보지 못했으니 빨리 햇볕을 쪼이게 하고 비료를 많이 주도록 하라. 소다는 소리내어 대답했다. 예. 단예는 여기에 이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만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왕 부인은 그의 웃음 소리가 이상한 것을 보고는 물었다. 왜 웃지? 단예는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산다화를 모르면서 산다화를 잔뜩 심어 놓은 것을 보고 웃은 것이오. 이처럼 훌륭한 품종이 당신의 손에 들어가니 마치 칠현금을 쪼개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 살풍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 애석하군 애석해! 정말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아프게 하는군. 왕 부인은 노해서 말했다. 나는 산다화를 모른다 하자, 그럼 너는 아느냐?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움직였다. "잠깐, 그는 정말 대리 사람이라고 했고 성이 단씨라 했다. 어쩌면 그는 진정으로 산다화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입으로는 좀처럼 지려 하지 않았다. 본장의 이름은 "만다산장"이다. 장원 안팎으로 모두 만다라꽃을 심어 놓았다. 자, 보아라. 얼마나 무성하고 찬란하냐. 그런데도 내가 만다라 꽃을 모른다고 하겠느냐? 단예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평범한 산다화는 자연적으로 성장하기 마련이죠. 그러나 네 개의 화분에 심어져 있 는 백다화(白茶花)는 그야말로 경국지색으로서 당신과 같은 문외한이 이를 제대로 심 을 수 있다면 나는 성을 갈아도 좋소이다. 왕 부인은 지극히 산다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도처에서 많은 돈을 주고 좋은 산다화 를 구해서는 산장에 심었다. 그런데 한 포기의 진귀한 산다화도 제대로 자라는 것이 없었다. 일 년도 못되어 시 들어 죽거나 아예 처음부터 시들어 죽게 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종종 이 때문 에 짜증을 부리곤 했는데 단예가 아는 체를 하자 오히려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질문을 던졌다. 저 네 개의 화분에 심어져 있는 백다화는 어떻게 해야 제대로 살 수 있느냐? 단예는 말했다. 당신이 만약에 나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예의를 반드시 차려야 할 것이외다. 왕 부인은 노하여 말했다. 너의 두 발을 잘라도 잘난 체를 할테냐? 소시, 먼저 그의 왼발을 잘라내도록 하여 라. 소시라고 불리는 시녀가 명을 받들고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다급해진 아벽이 말렸다. 마님, 그러지 마십시오. 만약 그를 해치게 된다면 고집이 센 그는 죽어도 말하지 않 게 될 것입니다. 왕 부인은 본래 단예를 놀라게 하려던 것이었지 단예의 발을 정말로 잘라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왼손을 치켜들었다. 소시라는 시녀는 즉시 검을 거두었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내 두 발을 잘라 저 네 뿌리의 다화 옆에다 묻는다면 정말 좋은 비료가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저 백다화가 매우 크게 잘 자라 꽃이 마치 대접만하게 피게 될지도 모르 는 일이죠. 하하하! 정말 묘하군, 묘해! 왕 부인은 원래가 그런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말하는 투로 보아 완전히 거 꾸로 얘기하는 듯하지 않은가! 왕 부인은 잠시 어리둥절하여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 다. 너는 무슨 큰소리를 그토록 치고 있지? 나의 이 네 개의 백다화가 어떤 명귀한 점이 있는지 이야기해 보아라. 제대로 알아 맞춘 후에 다시 너를 예의로 대접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단예는 말했다. 왕 부인, 부인은 이 네 개의 백다화를 모두 만월이라고 했지요. 그것은 아예 틀린 것입니다. 왕 부인은 꽃의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 백다화들을 참으로 이해한다고 하겠습니까? 이 네 뿌리 중의 하나는 홍장소과(紅壯素과)이고 또 하나는 조파미인검(조破美人검)이라고 한답니다. 왕 부인은 기인한 듯 물었다. "조파미인검"이라고? 무슨 이름이 그처럼 괴팍하지? 단예는 말했다. 불초의 가르침을 원하신다면 반드시 예를 갖추어야 될 것입니다. 왕 부인은 정말 단예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예가 네 그루의 꽃나 무들이 각기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자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좋다. 소시야, 너는 부엌으로 가서 운금루에 주연을 차려 놓고 단 공자를 접대하도 록 하라. 소시는 대답하고 달려갔다. 아주와 아벽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단 공자가 목숨을 건졌을 뿐 아니라 왕 부인이 그를 귀빈의 예로 대하자 정말 기뻤다. 그때 먼저번에 당광웅을 끌고 사라졌던 시녀가 나타나서 왕 부인에게 고하였다. 그 대리국 당씨 성을 가진 자를 홍하루(紅霞樓) 앞의 홍화 옆에다 묻었습니다. 단예는 속이 싸늘해졌다. 왕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자, 단 공자, 가실까요? 단예는 말했다. 폐를 끼치는 것을 부인께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왕 부인은 대답했다. 고수께서 찾아와 주셔서 만다산장의 영광이올시다. 그들은 겸손하게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 단예의 목숨이 간일 발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왕 부인은 단예를 데리고 꽃나무 길을 걸었다. 돌다리를 건너고 소로길을 지나 조그 만 누각 앞에 이르게 되었다. 단예는 그 조그만 누각의 처마 아래 한 조각의 편액에 운금루(雲錦樓)라는 석자가 씌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누각의 전후좌우에 심어져 있 는 것은 모두 산다화였으며 그 산다화들은 대리성에서는 삼류 정도의 것들로서 이 정 교한 누각에 어울리지 않는 감이 있었다. 왕 부인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단 공자, 당신네 대리국에 산다화가 많다지만 나의 이곳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 같은 산다화를 우리 대리국에서는 확실히 심지 않지요. 왕 부인은 반갑게 되받았다. 그래요? 단예는 말했다. 대리국에서는 일반 시골 사람들이라도 저와 같이 속된 다화를 심는 것은 전혀 우아 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왕 부인은 안색이 변하면서 노해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이 다화들이 속품이라고? 그 말은...... 너무나......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 아니오? 단예는 말했다. 부인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는 누각으로 가서 그 앞의 한 그루의 오색으로 얼룩진 다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 며 말했다. 저 한 그루를 부인께서는 보물처럼 다루셨겠지요. 저 꽃 옆의 옥란간(玉欄干)은 그 야말로 진정으로 화전미옥(和전美玉)이로군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는 꽃 옆의 난간을 크게 칭찬했다. 그러나 꽃송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입을 열 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글씨체를 품평하는 데 있어서 먹색이 새까맣고 종이가 값비싼 것이라서 좋다고 말을 하는 것과 같았다. 단예가 가리키는 그 다화에는 붉은 꽃도 있었고 흰 꽃도 있었으며 황색 꽃도 있었고 자색 꽃도 있었다. 꽃의 빛깔이 지극히 많고 화려했다. 왕 부인은 이것을 정말 진품으로 알고 있었는데 단예가 비웃자 대뜸 눈살을 찌푸리 게 되었고 그 눈에서는 살기마저 피어 올랐다. 단예는 물었다. 실례지만 부인, 저 꽃을 강남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왕 부인이 신이 나서 말했다. 우리는 특별한 명칭을 붙이지 않고 그저 오색다화라고 부른다오. 단예는 미소했다. 우리 대리에서는 알맞는 이름을 붙여 주었지요. 저 꽃은 낙제수재(落第秀才)라고 한 답니다. 왕 부인은 쳇, 하고 말했다. 그토록 듣기 싫은 이름이라니 아마 그대가 날조한 말이겠지. 저 꽃은 화려하고 당당 한데 어째서 낙방한 선비라고 한단 말이오? 단예는 말했다. 부인께서는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저 한 꽃잎에 도대체 색깔이 몇 가지나 됩니까? 왕 부인은 말했다. 나는 벌써 헤아려 본 적이 있소. 적어도 열 대여섯 가지는 될 것이오. 단예는 말했다. 모두 다 열 일곱 가지 색입니다. 대리에는 한 가지 진귀한 품정이 있는데 그것을 " 십팔학사(十八學士)"라고 한답니다. 그야말로 천하일품이지요. 한 그루에 열여덟 송이 의 꽃이 송이송이 피어나는데 모두 색깔이 다르답니다. 붉은 것은 전부 빨갛고 자색 것은 전부 자색이며 결코 다른 잡색깔이 섞여 있지 않지요. 그리고 열여덟 송이의 꽃 모양이 제각기 모두 달라서 나름대로의 묘한 점이 있답니다. 필 때는 일제히 피고 시 들 때도 일제히 시든답니다. 부인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왕 부인은 멍하니 듣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천하에 그런 꽃이 있다니, 나는 들어본 적이 없소. 단예는 말했다. 십팔학사에 비해 한 급 못한 것은 십삼태보(十三太保)라는 것으로 열 세 송이의 빛 깔이 다른 꽃이 한 그루에서 피어나죠. 그리고 파선과해(八仙過海)는 여덟 송이가, 칠 선녀(七仙女)는 일곱 송이가, 풍진삼협(風塵三俠)은 세 송이가, 이교(二喬)는 하나는 붉고 하나는 흰 두 가지의 꽃이 한 그루에서 피어난답니다. 이와 같은 다화는 다만 순 색이어야지 만약 붉은 가운데 흰색이 섞이거나 붉은 가운데 자색을 띤다면 하품이 되 는 것입니다. 왕 부인은 크게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쳐들고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했 다. 그는 어째서 나에게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말한 적이 없을까? 단예는 다시 말을 이었다. 팔선과해 가운데는 반드시 짙은 자색과 분홍색 꽃이 한 송있기 있어야 합니다. 그것 은 바로 철괴리(鐵拐李)와 하선고(何仙姑)이지요. 그 두 가지 빛깔이 없는 꽃이라면 비록 여덟 개의 꽃이 있다 해도 팔선과해라 할 수 없으며 다만 팔보장(八寶장)이라고 하지요. 팔보장 역시 명귀한 품종이지만 그래도 팔선과해보다는 한 급 떨어지지요. 왕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싸하군요. 단예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풍경삼협을 논할 때에도 정품(正品)과 부품(副品)의 구별이 있습니다. 무릇 정 품이라 하는 것은 세 송이의 꽃 중에서 자색꽃이 가장 커야 한답니다. 이 자색꽃은 바 로 규염객(규髥客)이지요. 그 다음으로 큰 것은 흰꽃으로 이것은 이정(李靖)이고 붉은 꽃은 가장 요염하면서 꽃송이는 작아 이것을 홍불녀(紅拂女)라 한답니다. 붉은 꽃이 자색꽃이나 흰꽃보다 크다면 바로 부품으로 떨어지고 그 차이도 엄청나게 마련입니다. 속담에는 "자기집 보물을 헤아리듯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명종의 산다화는 단예 집안의 진품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익숙하기 이를데 없이 그 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왕 부인은 들을수록 흥미가 더해 가는 듯 한 숨을 내쉬었다. 나는 부품마저 본 적이 없으니 정품은 말해서 무엇하나. 단예는 그 다섯 가지 빛깔의 산다화를 두고 말했다. 이 종류의 산다화는 빛깔을 두고 말할 때 십팔학사보다 한 가지 색이 적습니다. 거 기다가 잡색깔이 섞여 있어 순색을 띠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때도 먼저 피고 늦게 피는 것이 있으며 꽃송이도 크고 작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꽃은 십팔학사처 럼 신비의 고아한 티를 내긴 하지만 결국은 같지 않죠. 그래서 반쯤 시큼한 냄새를 풍 기는 선비쯤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우리는 이 꽃을 낙재수재라 한답니다. 왕 부인은 그만 훗, 하고 웃음지며 말했다. 그 이름은 너무 각박하게 지었군. 아마도 십중팔구 당신네들이 만들어낸 이름이겠지 이같이 되자 왕 부인은 단예가 산다화의 습성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운금루 위로 안내했다. 단예는 운금루 위의 장식이 화려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복판의 벽에는 공작이 꼬리 깃을 잔뜩 쳐들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양옆에는 한 부의 대련이 적혀 있었다. 씌어진 글은 다음과 같았다. "칠엽운차밀, 다화설투연(漆葉雲差密, 茶花雪妬姸)" 얼마 후 주연이 벌어졌다. 왕 부인은 단예에게 윗자리를 양보하고 자기 자신은 아랫 자리에 앉아서 상대를 했다. 주연 중의 음식은 아주와 아벽이 내놓았던 음식과 크게 달랐다. 아주와 아벽이 내놓은 음식은 담백한 가운데 운치가 있었고 운금루의 음식은 호화스 럽고 진귀했다.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운금루의 음식을 맛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단예 는 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왕가(王家)에서 자랐기 때문에 늘상 먹는 음식이 왕 부 인이 내놓은 음식과 같아 식상해 있었던 것이다. 왕 부인은 물었다. 대리 단씨는 무림(武林)의 세가(世家)인데 공자는 어째서 무예를 익히지 않았소? 단예는 말했다. 대리국에는 단씨가 많죠. 단씨 성 가운데서도 황족만이 무예를 익혔고 나머지 백성 들은 무예와는 거리가 멀어요. 왕 부인은 단예를 뜯어보다가 다시 물었다. 공자는 일반 백성인가요? 그렇습니다. 왕 부인은 급히 물었다. 공자는 황실의 종친을 알고 있나요? 단예는 단호한 어조로 부인했다. 한 사람도 알지 못합니다. 왕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말했다. 이번에 얻은 네 개의 화분 가운데 하나는 홍장소과라 부르고 또 하나는 조파미인검 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또 어떤 구별이 있나요? 단예는 말했다. 그 커다란 백화에 검은 얼룩이 약간 있는 것이 만월이죠. 그 얼룩은 바로 달 속의 계수나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얀 꽃잎에 두 개의 감씨만한 검은 반점이 있는 것은 안아미(眼兒媚)라고 하는 것이죠. 왕 부인은 기뻐서 말했다. 그 이름은 정말 잘 지었군. 단예는 말했다. 하얀 꽃잎에 붉은 점이 얼룩져 있는 것을 홍장소과라 합니다. 그리고 하얀 꽃잎에 한 가닥 파란 무늬가 있고 한 가닥 붉은 줄이 있는 것을 조파미인검이라고 부르죠. 그 러나 붉은 줄이 많으면 조파미인검이 아니고 의란교(倚欄嬌)라고 합니다. 부인, 생각 해 보십시오. 무릇 미인은 얌전하고 온순해야 합니다. 얼굴에 간혹 상처를 낼 때가 있 지만 그것은 결코 자기가 머리를 빗을 때 잘못하여 자국을 낸 것이거나 그 누구에게 할퀴어서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앵무새를 가지고 놀다가 새에게 상처를 입 었다고 해야 상리에 맞는 것이지요. 그래서 꽃잎의 파란 무늬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파란 털의 앵무새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만약에 온 얼굴이 상처투성이라면 그 미인은 언제나 남하고 싸우고 다투었다고 할 수 있으니 아름답다는 말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왕 부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고 있었다. 무척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색이 굳어지더니 소리를 질렀다. 당돌하군! 그대는 나를 풍자하고 있는 것인가? 단예는 깜짝 놀라 말했다.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어떤 점에서 부인의 위엄을 거슬리게 했는지 모르 겠군요. 왕 부인은 노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의 말을 듣고 그와 같은 예를 들어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해서 나를 모욕 하는 거지? 한 사람의 여자가 무공을 안다고 해서 아름답지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지? 얌전하고 온순해야 좋을 것은 또 뭐지? 단예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 후배가 말씀드리는 것은 상리로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무공을 알고 있는 여자 가운데에도 본래 매우 아름답고 단정한 여자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단정하지 못하다는 것인가? 단예는 말했다. 단정하고 단정하지 못하고는 부인께서 스스로 잘 아실 것인데 제가 어찌 감히 망언 을 하겠습니까? 제 생각입니다만 사람을 다그쳐서 저를 죽이게 하고 새로이 아내를 맞 아들이게 하는 행동은 결코 단정한 사람의 소행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왕 부인은 왼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네 명의 시녀가 일제히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읍했다. 저 사람을 데리고 가서 다화를 돌보게 하라. 예. 왕 부인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 단예, 너는 대리 사람이니 일찍 죽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잠시 죽이지는 않고 우선 안팎에 있는 다화들을 돌보는 벌을 내리겠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이 네개의 백화 중 만 약 하나라도 죽으면 너의 한 손을 자르게 될 것이고, 두 그루가 죽게 되면 두 손을 자 를 것이고, 네 그루 모두 죽게 된다면 너의 사지를 모두 잘라 버리겠다. 단예는 말했다. 만약 네 그루가 모두 산다면 어떻게 됩니까? 네 그루가 모두 살게 된다면 나를 위해 다른 품종의 다화를 키워야 한다. 우선 십팔 학사, 십삼태보, 팔선과해, 칠선녀, 풍진삼협, 의란교, 이런 유명한 품종들을 나는 한 품종마다 몇 그루씩 키워야 하겠다. 만약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네 두 눈을 뽑아 버리 고 말겠다. 단예는 큰 소리로 항의했다. 그와 같은 진귀한 품종들은 대리에서도 보기 드뭅니다. 하물며 이 강남땅에서 어떻 게 손쉽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한 품종마다 몇 그루씩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면 어찌 진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예 일찌감치 나를 죽이는 것이 낫겠소. 오늘 손을 자르고 내일 눈을 빼는 그런 고통을 나는 참을 수가 없소. 왕 부인은 호통을 쳤다. 내 앞에서 감히 방자하게 굴다니, 살기가 싫어진 모양이로구나! 데려 가라. 네 명의 시녀들은 그에게 다가와 두 사람은 그의 옷자락을 잡았고 한 사람은 옷의 앞섶을 잡아당기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등뒤에서 그를 밀었다. 다섯 사람은 끌고 끌리 면서 일제히 운금루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 네 명은 하나 같이 무공을 익힌 터라 단 예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다만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수 더럽게 걸렸다!" 네 명의 시녀는 그를 끌고밀고 하며 어떤 화원으로 데리고 갔다. 한 시녀가 삽 한 자루를 손에 쥐어 주었다. 또 한 시녀는 꽃에 물을 주는 나무통을 갖다 주며 말했다. 부인의 명에 따라 순순히 꽃을 심는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어요. 당신과 같이 부인 에게 반박하고 나선다면 당장 산 채로 매장을 당해요.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정말 하 늘의 보살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시녀가 말했다. 꽃을 심고 물을 주는 것 이외는 이 장원에서 함부로 돌아 다니지 말아요. 만약 금지 구역을 돌아다니다가 들킨다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니 그 누구도 당신을 구할 수 없을 거예요. 이 시녀는 매우 정중하게 그에게 한 차례 당부를 하더니 떠나갔다. 단예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대리국에서의 그의 지위는 그의 백부 보정제와 그의 부친 진남왕 다음이었다. 장래에 부친이 황위를 계승 한다면 그는 바로 황태자가 될 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강남땅에 잡혀와 어떤 사람은 그를 태워 죽이려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산 채로 매장하려 하고 팔다리를 자르고 두 눈을 뽑겠다고 위협하더니 이제는 강제로 원예사가 되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기가 막혔다. 비록 그의 성격이 소탈한 편이고 황궁과 왕궁에서 원예사들이 꽃을 다 듬고 풀을 깎으며 괭이로 땅을 파서 비료를 주는 것을 보아 왔고 또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역시 원예사는 비천한 사람이었다. 다행히 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낙 천적이었다. 역경에 처해도 잠시 의기소침해 할 뿐 곧 기분을 전환해서 자기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았다. "나는 무량산 옥동에서 이미 신선 누나를 사부님으로 모셨다. 이 왕 부인으로 말하 면 모습이 신선 누나와 비슷한다. 다만 나이가 더 많을 뿐. 그러니, 나는 그녀를 나의 사백(師伯)쯤으로 알고 있으면 그뿐 아닌가. 웃어른이 있으면 제자는 그 수고를 덜어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더군다나 꽃을 가꾸는 것은 선비들의 운치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찌됐든간에 칼이나 창을 써야 하는 무공을 배우는 것보다는 고아한 일이다. 구마지에게 잡혀 모용 선생의 무덤 앞에서 산 채로 불태워져 죽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꽃을 심는 것이 천배만배 더 유쾌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애석하게도 너무 떨어지는 이 런 품종들을 대리국의 왕자인 내가 친히 시중들어야 하는 것은 큰 인재를 조그마한 일 에 쓰는 것이고 그야말로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 아니겠는가. 하하하! 내가 소잡는 칼이냐? 화초 심는 것도 무슨 재주라고 큰소리치는 것이냐?" 단예는 생각했다. "이 만다산장에서 며칠만 더 묵게 된다면 그 어느 때라도 연뿌리 색 적삼을 입은 소 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게 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꽃을 심는 것이 내 게는 복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잎의 풀을 뜯어서 속으로 묵도를 올렸다. "어디 내가 언제쯤 그 소저를 만나 보게 될지 점쳐봐야 되겠다." 그는 풀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기고 다시 오른쪽으로 옮기면서 기다렸다. 태상감 하(兌上坎下)의 곤괘(困卦)가 나왔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곤우주목(困于株木) 입우유곡(入于幽谷) 삼세불관(三歲不觀)이다. 삼 년 동안 볼 수 없다니, 이야말로 딱하기 짝이 없는 일이로구나!"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돌렸다. "삼 년 동안 볼 수 없다면 사 년째에는 만날 수 있다는 뜻인데 딱하기는 뭐가 딱하 단 말인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는 더 자신을 다그치지 않았다. 입으로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괭이를 어깨에 메고 내키는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왕 부인은 나에게 네 화분의 백댜화를 심으라 했다. 네 개의 꽃은 정말 뛰어난 품 종이니 경치가 좋은 곳에 심어야 어울리겠지?"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사방의 경치를 살폈다. 그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면서 껄껄 웃 었다. 왕 부인은 다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곳에 다화를 심고서는 이곳에 만다산장 이라 이름을 붙여 놓았군. 그러면서도 다화가 그늘을 좋아하고 햇볕을 싫어한다는 것 도 모르고 햇살이 비치는 곳에 다화를 심어 놓았으니 다화가 죽지는 않더라도 활짝 피 기는 어려운 노릇이지. 거기다가 비료만 잔뜩 주었으니 아무리 좋은 품종이더라도 모 조리 시들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정말 애석한 일이군. 우스꽝스럽 다. 우스꽝스러워. 그는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로 찾아갔다. 조그만 산을 돌자 개울물 흐르는 소 리가 졸졸졸 났다. 왼쪽에 한 줄의 파란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는데 사방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이곳은 사방이 산등성이로 에워싸인 곳이라 햇살이 비쳐들지 않았다. 왕 부 인은 이런 곳에는 다화를 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한 그루의 다화도 보이지 않 았다. 단예는 크게 기뻐하며 중얼거렸다. 이곳이 가장 적절한 것 같군. 그는 다시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가서 네 개의 다화를 대나무밭으로 하나씩 옮겨갔 다. 그는 화분을 깨뜨리고 화분의 흙과 함께 땅에 심었다. 그는 한 번도 친히 다화를 심어 보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많이 보아 왔으므로 그대로 흉내를 낸 것이다. 네 개 의 백다화는 대나무 밭 옆에 심어졌다. 왼쪽에 조파미인검을 심었고 오른쪽에는 홍장 소과와 만월을 심었다. 안아미는 비스듬히 개울 한쪽으로 서 있는 바위 뒤에다 심어 놓았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것은 소위 천 번 만 번 불러서야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비파로 몸을 반쯤 가리고 나타나는 형상이 아니겠는가. 반쯤 얼굴을 가린 듯한 형상이야말로 더욱 미태 를 드러내는 것이다. 중국은 역대로 꽃을 미인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그러므로 꽃을 가꾸는 도리도 미인 을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단예는 황실 출신이고 어릴 적부터 시사를 몸에 익혀 왔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재간은 남보다 뛰어났다. 그는 개울물에 손을 담그고 두 손의 흙을 깨끗이 씻어냈다. 그리고 바위에 걸터앉아 안아미라는 다화의 앞 모습을 바라보고 뒷 모습도 바라보며 속으로 우쭐해했다. 바로 이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두 여인이 다가왔다. 그러자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이곳이 가장 아늑하고 올 사람도 없겠군. 그 목소리를 듣고 단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는 연뿌리 색의 비단 적삼을 입고 있던 그 소녀의 음성이 아닌가? 단예는 숨을 죽이고 기척도 내지 않은 채 생각했다. "그녀는 상관이 없는 남자는 만나 보지 않겠다고 했다. 나 단예는 그녀와 상관이 없 는 남자가 아닌가? 나는 그녀의 몇 마디 말을 듣고 그녀의 선악(仙樂)과 같은 음성만 들을 수 있으면 무한한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의 음성만 듣고 있어야지 절대 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선 안 된다." 그는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인 상태였는데 그 상황에서 감히 머리를 똑바로 들지 못 했다. 머리를 그렇게 비스듬히 놔두는 것은 머리를 돌리려 하다가 목뼈에서 무슨 소리 라도 나서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서였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소명(小茗), 너는 무슨 소식을 들었느냐? 그 이에 관한 소식 말이다. 단예는 그 소리에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가 말하는 그이는 단예 자신이 아니라 모용 복 모용 공자이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묻는 음성에는 관심의 빛이 가득 서려 있고 부 드러운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단예는 불현듯 모용 공자가 부러웠고 질투심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때 소명이라고 불리우는 소녀는 한참을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 지 못했다. 그대로 털어 놓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대로 말해야 돼. 그대의 호의는 잊지 않을께. 소명은 말했다. 저는 두려워요. 부인이 꾸지람하실까봐 두려운 거예요. 바보 같은 계집애. 네가 나에게 말한 것을 내가 어찌 부인에게 말하겠니? 소명은 말했다. 만약 아가씨에게 묻는다면? 그래도 나는 말하지 않지. 소명은 한참 주저하다 말했다. 고모님댁의 도련님은 소림사(少林寺)로 갔어요. 아주와 아벽의 말로는 개방으로 찾아갔다고 하던데? 단예는 생각했다. "고모님댁 도련님이라니? 그러면 모용 공자는 소녀의 고종 오라비인가 보다. 그러면 두 사람은 친척이 아닌가." 소명은 다시 말을 이었다. 부인이 이번에 외출하게 되었을 때 도중에서 공야(公冶) 둘째 나리를 만나게 되었어 요. 그리하여 개방의 수뇌급 인물들이 모두 강남땅으로 온 것을 알았어요. 그들은 바 로 고모님댁 도련님에게 크게 따지려고 한다나요. 공야 둘째 나리는 고모님댁 도련님 의 편지를 받았는데, 낙양에 갔던 고모님댁 도련님은 개방의 수뇌급 인물들을 만나지 못해 곧장 숭산(崇山) 소림사로 간다고 씌어 있더래요. 소녀는 물었다. 왜 소림사로 갔지? 소명은 말했다. 공야 둘째 나리의 말로는, 낙양에서 들은 소식인데, 소림사의 한 늙은 화상이 대리 에서 죽었대요. 그런데 그들은 또 고소 모용씨가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나요. 그래서 고모님 댁 도련님은 매우 화가 나시었대요. 그런데 다행히 소림사는 낙양과 그 리 멀지 않나 고모님 댁 도련님은 바로 소림사의 화상들에게 따지러 갔다나 봐요. 그 소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해명이 되지 않을 때는 손을 쓸 것이 아닌가? 어머님께서는 그와 같은 소식을 듣고도 왜 그냥 돌아오셨지? 소림사로 달려가 고모님 댁 도련님을 도와주 지 않고? 그건...... 쇤네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부인은 고모님 댁 도련님을 별로 좋아하 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소녀는 화가 난듯 말했다. 흥! 설사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어쨌든 한 편 아니니? 고소 모용씨가 밖에서 창피를 당한다면 우리 왕씨 가문에 무슨 영광이 돌아온단 말이냐? 소명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 소녀는 대나무밭 옆에서 오락가락하다가 갑자 기 세 그루의 백다화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주변에 깨어져 널려 있는 화분 조각들을 바라보며 어머, 하고 놀랐다. 누가 이곳에 다화를 심었지? 단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위 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공손히 읍을 하며 말했다. 소생이 부인의 명을 받고 이곳에다 다화를 심었습니다. 소저의 비위를 거슬렸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는 길게 읍을 했으나 눈은 앞으로 보고 있었다. 혹시 소녀가 "나는 나와 상관없는 남자는 만나보지 않아"하며 몸을 돌려 떠나버리면 다시 만나 볼 기회를 놓쳐버릴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가 소저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머리가 윙 하니 울렸다. 눈이 부 시고 두 무릎에 기운이 빠져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신선 누님, 저는 얼마나 신선 누님을 생각했는지 모른답니다. 단예가 사부님에게 인 사드립니다. 지금 단예의 눈앞에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은 무량산의 옥녀상과 모습이 똑같았다. 왕 부인은 옥녀상과 모습이 비슷하나 역시 나이가 들어 용모도 옥녀상만큼 아름답지 못했 다. 그러나 이 소녀는 복장이 다르다는 점 이외에는 얼굴형이나 눈, 코, 입술, 귀, 몸 매, 손발, 살결 등 닮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치 옥녀상이 부활한 것 같았다. 그는 꿈 속에서도 옥녀상을 수천 수만 번이나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눈앞에 살아 있는 옥녀상 을 친히 대하게 되니 그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이 세상인지 저 세상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 소녀는 그가 미친 사람인 줄 알고 흑,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두어 걸 음 뒤로 물러섰다. 당신은...... 당신은...... 단예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길은 여전히 그 소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때서야 그는 더욱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끝내 그는 눈앞의 소녀가 동굴의 옥녀상과 역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옥녀상은 요염하여 사람의 혼백을 앗아가 버리는 자태가 엿보였다. 그러나 눈앞의 소녀는 단정한 가운데 치기(稚氣)가 엿보였다. 비교 해 볼 때 옥인상이 이 소녀보다 더욱더 활달해 보였다. 그는 말했다. 그 날 석동에서 신선 누님의 모습을 보고 저 자신이 정말 복이 많다고 생각했습니 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직접 누님의 모습을 뵙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선녀가 있다 는 것이 헛말은 아니로군요. 소녀는 소명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뭐라고 하지? 저 사람은...... 저 사람은 누구지? 소명은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아주와 아벽이 데리고 온 그 책벌레예요. 그는 다화를 심을줄 안다 고 했어요. 부인은 그의 터무니없는 말을 믿었기 때문에...... 옥미인상을 닮은 그 소녀는 단예에게 물었다. 이것 봐요, 책벌레. 조금 전에 그녀와 내가 하는 얘기를 모두 들었나요? 단예는 웃었다. 소생의 성은 단이고 이름은 예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리국 사람이지 책벌레가 아닙 니다. 신선 누님과 소명 누이가 주고 받는 말을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점은 결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절대로 누설하지 않을테니까요. 소녀의 안색이 굳어졌다. 왜 누님이니 누이니 함부로 불러요. 당신이 자기 자신을 책벌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언제 나를 보았다는 거예요? 언제 보았다는 거예요? 단예는 물었다. 내가 당신을 신선 누님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달리 무어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소녀가 대답했다. 나는 성이 왕씨예요. 그러니 당신 역시 나를 왕 소저라 부르면 돼요.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안돼. 천하에 왕씨 성을 가진 소저는 수천 수만명이나 돼요. 하늘의 선녀 같이 어여쁜 당신을 어찌 왕 소저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그러니 그대를 어떻게 불러 야 할지 퍽이나 난처한 일이군요. 왕 선녀라 부르자니 너무 속되고 공주라 부르자니 송나라, 대리국, 요나라, 토번국, 서하 등 어느 나라에라도 공주가 없겠습니까? 그리 고 그녀들을 어찌 당신과 비길 수 있겠습니까? 소녀는 그가 연신 책을 읊조리는 말을 들으며 정말 책벌레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러나 그가 자기에게 홀딱 반해서 되새기는 듯이 자기를 칭찬해 주는 말을 듣자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라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되었든 그대는 운수가 좋아서 우리 어머님께 두 발을 잘리지 않았군요. 단예는 말했다. 자당되시는 부인께서는 신선 누님과 같은 용모를 지니셨더군요. 거기다 좀 특별한 성격을 지니셨더군요. 함부로 사람을 죽이니 신선과 같은 자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어요. 소녀는 아름다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서 가서 다화나 심어요. 우리는 요긴하게 할말이 있어요. 그녀의 태도는 그를 보통 있는 집안의 정원사처럼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예는 그녀의 그와 같은 태도를 조금도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녀와 조금이 라도 더 얘기하고 싶었고 몇 번이라도 더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생각 했다. "그녀가 기꺼이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하려면 그녀와 모용 공자의 일을 이야 기할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 그녀는 아무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단예는 입을 열었다. 소림사는 무림에서 태산북두 같은 존재입니다. 절 안의 고승과 고수들은 천명은 되 지 않아도 팔백은 됨 직하죠. 그들은 대개 칠십이 가지 절기에 정통합니다. 이번에 소 림파의 현비 대사가 대리의 신계사에서 어떤 자의 독수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대개의 고승들은 모용씨가 손을 쓴 것이라고들 여기고 있죠. 모용 공자가 혼자 위험한 곳에 뛰어든 것은 실로 크게 잘못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소녀는 아니나 다를까 몸을 흠칫했다. 단예는 감히 그녀의 안색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속으로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모용복이라는 자를 위해서 이처럼 관심을 가지고 걱정을 하는구나. 내가 그 녀의 안색을 쳐다보면 어쩌면 화가 나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그녀의 연뿌리 색 의상의 아랫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옥소 리보다 더 부드러운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림사의 화상들은 어찌하여 모용씨에게 그 죄명을 씌우고 있나요? 이유를 그대는 알고 있나요? 그렇다면 빨리 말해 주세요. 단예는 그녀의 나지막히 속삭이는 말을 듣고 그만 마음이 누그러졌다. 즉시 알고 있 는 바를 모조리 털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실 내가 알고 있는 바는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현비 대사가 몸을 위타저를 맞고 죽었다는 것과, 모두들 "그대의 수법으로 그대의 몸에 펼친다" 라고 하는 방법에 의해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 방법을 천하에서 고소 모용씨 집안에서만이 펼 칠 수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한 두 마디의 말로 설명 이 끝나고 이 말이 끝나면 그녀는 나를 재촉해서 다화를 심으라고 할 것이니 또다시 그녀와 대화를 나눌 실마리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짧은 말 을 길게 늘여 매일같이 조금씩 살을 붙여 이야기를 해 주면 그녀는 매일 나를 찾을 것 이고 만일 나를 찾을 수 없다면 마음이 근질거려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나 자신도 무공을 모릅니다. 무슨 금계독립(金계獨立), 흑호투심(黑虎偸心) 같은 가 장 쉬운 초식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리 집에는 한 친구가 있는데 성은 주씨이고 이름 은 단신이라고 합니다. 필연생(筆硯生)이라고도 하지요. 그는 보기에 문약해 보이고 나처럼 책만 파고드는 선비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그의 무공은 대단하답니다. 어느 날 나는 그가 부채를 오므리다가 꺼꾸로 들고 딱, 하니 그 부채의 자루를 한 덩치 큰 사 나이의 어깻죽지에 이렇게 찍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한 덩어리로 움 츠러들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한 무더기의 진흙 덩어리 같았습니다. 그 소녀는 말했다. 그것은 청량선법(淸凉扇法)의 타혈공부(打穴功夫)이에요. 제38초인 투골선(透骨扇) 의 초식은 자루를 꺼꾸로 쥐고 비스듬히 어깻죽지를 찌르게 되는 것이죠. 그 필연생은 곤륜파(崑崙派)의 삼인관(三因觀)문하의 제자인 것이 틀림없어요. 그 문파는 판관필을 잘 쓰는데 판관필을 쓰게 된다면 부채를 쓰는 것보다 무섭죠. 그대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요. 나에게 무공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어요. 만약 그녀의 그런 말을 주단신이 들었다면 정말 탄복해 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소 녀는 비단 그 일초의 수법과 명칭을 말했을 뿐 아니라 주단신의 사문 내력과 무공까지 도 똑똑히 말해 주었던 것이다. 만약 다른 무학의 명수가 있어서 그와 같은 말을 들었 다면 그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단예의 백부 단정명이나 그의 부친 단정 순이 그 말을 들었다면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찌하여 나이 어린 소녀가 무학에 대해서 이토록 건식이 넓을까?" 그러나 단예는 무공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소녀가 수월하게 말하고 있는 것 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단예는 그 소녀가 한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몰랐다. 다만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눈썹이 이렇게 꿈틀거리고 그녀의 입술이 저 렇게 삐죽하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 남자 하인은 연못 중앙의 삼면이 전부 창문으로 만들어진 나무집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