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한몽 - 책머리에 부쳐 검한몽 - 책머리에 부쳐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이것이 본 저 자의 욕심이다. 영상()으로 떠오르는 글이 아닌 한 줄 한 줄 음미해가며 읽는 글..., 그런 무협()이고 싶은 것이다. <도리불언하자성혜().> 복숭아 꽃과 배꽃은 그 꽃이 아름다와 소리 쳐 부르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 그 아래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소설() 또 한 이와 같은 것이라 생각해 본다. 작품이 란 그 내용의 충실함과 흥미로써만이 독자 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 공저자들의 일련의 작품들은 사실 정통 무협이라고 할 수는 없다. 흑백()이 뚜 렷하지도 않고, 또 때로는 마도()의 인 물이 주인공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 문이다. 게다가 정통무협에서 신성시되는 구대문파 의 경우 본 공저자들의 작품 속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한다고 해도 겨우 주 인공을 부각시키는 소도구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이유는 순전히 작품의 참신함을 위해서이 다. 그 내용의 충실함과 흥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참신함을 독자들이 원한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다. 새로움에 도전한다는 것은 언제나 모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허나, 본 공저자 들은 항시 그 모험을 즐길 것이다. 스스로 의 안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변함없는 질정()과 격려를 바라며.... 천중행() 배상(). 서1 달(), 그리고 매원() 정월 초하루, 달()이 있고, 천지를 뒤덮는 눈()이 있고, 그리고 한 명이 죽 었다. 새하얀 눈 위에 싸늘하게 굳어 있는 그의 옆에는 눈보다 흰 백매() 한 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사월 초파일(), 달이 있고, 화향()이 그윽하고, 그리고 둘이 죽었다. 화향 속 의 백매는 순결하기만 했다. 팔월 십오일(), 달이 있고, 낙엽이 있고, 그리고 다섯이 죽었다. 그들의 입에는 새하얀 백매가 물려 있었다. 달()과 백매..., 그리고 죽음.... 달과 백매는 오랫동안 죽음 위에 있었다. 그들은 매원()이라 불리웠다. - 매원(). 누가 매원의 일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매원일 뿐이 었다. 죽음을 창조하는 달빛의 살수()들일 뿐이었다. 공포의 살수단체() 매원의 출현은 짧았다. 그러나 매원은 천하에 두 가지를 던졌다. 죽음()이 그 하나였고, 그리고 공포 ()가 그 두번째였다. 그들은 무림사에 존재했던 어떤 살수단체보다 강했고, 그리고 신 비했다. 매원은 천하의 무림인들 뇌리 저 깊숙한 곳에 독초() 처럼 흐느적거릴 공포를 주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불멸의 신화( )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 그러나 매원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어둠(), 그리고 잠마해() 잠마해()라는 이름을 대변하는 것은 단 한 마디였다. 어둠()...! 그렇다! 잠마해는 곧 어둠이었다. 파괴와 살육, 그리고 피와 죽음으로 뭉친 어둠의 단체. 잠마해의 출현은 오래전에 있었다. 황금과 여인(), 그리고 권 력이 있는 곳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존재했다. <어두운 곳을 애써 들여다 보지 마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 다는 이유로 죽음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 설혹 잠마해의 일원일지라도 자신들의 실체()를 모른다는 잔 혹과 비정()으로 대변되는 어둠의 단체 잠마해. ...그들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넓어 차라리 하나의 광장()같은 대전()이다. 바 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삼 장도 넘어 보였고, 천장에 무수하게 박혀 있는 야광주()로 인해 대전은 대낮처럼 밝혀져 있었 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모든 통로는 완벽히 패쇄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또한 모든 창()에는 두꺼운 철판이 내려져 있고, 다시 그 위에 또한 겹겹이 휘장이 내려져 있다. 모든 것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곳, 시간의 흐름마저 정지되어 버린 듯한 완벽한 죽음의 공간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그 침묵의 공간 정중앙에 신태비범한 오 인()이 대리석 식탁 을 가운데로 하고 좌정해 있었다. 중앙의 거대한 태사의()에는 실로 고아한 풍도의 백의노문 사()가 앉아 현기 깊은 눈으로 전면을 쓸어보고 있었 다. 귀밑의 백발이 초로()의 완숙함을 엿보이게 하면서도 전체적 으로 균형잡힌 체격이었다. 끝없이 현기로운 눈빛을 흘려내고 있 는 맑고 깊은 눈, 문사차림의 백의노인은 마치 한 마리 학()처 럼 청신함을 풍기는 가운데 어딘가 비정과 죽음의 관록이 엿보이 는 차가움을 지니고 있었다. 백의문사는 그 번뜩이는 듯한 차가움을 더욱 드러내며 눈 앞의 사 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잠마해()에 심어둔 우리측 첩자인 화접()의 정체가 노출될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오?" 백의노문사, 그의 얼굴에는 다소 따분하다는 듯한 어떤 노기가 스 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화접이 잠마해에 잠입한 것이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고, 그는 이제 일반적인 첩자가 아니 라 잠마해를 이끌고 있는 열두 명()의 수뇌 중 한 명으로까 지 확고한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오." 은은한 노기에 잠겨 있는 백의노문사의 음성, 그 음성 아래에는 네 명이 침묵으로 앉아 있었다. "...." 그들의 용모에서 특이하다고 할 만한 특징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는 어딘지 비정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눈하나 깜빡이지 않을 기질들만이 풍겨나온다고나 할까? 설혹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죽음의 공포보다는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와 그 과정을 차갑게 생각할 그 런 느낌의 인물들 같았다. "노사()! 그 일은 본 은영사() 휘하의 하급정보원 한 명의 실수로 비롯된 것이었으나 지금은 누구의 잘못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차갑고 주의깊은 눈, 비웃고 있는 듯한 일그러진 입술과 각이 진 매부리코 등이 전체적으로 잔인한 맹수를 연상케 하는 사십대 거 구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는 은근했지만 뱃 속까지 울리는 낮고 굵은 음성은 우렁찬 덩치에 걸맞았다. "만약 화접의 정체가 노출되는 일이 생긴다면 본 신검부() 로서는 중대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들은 화접이 그동안 처리했 던 모든 일을 재검토할 것이 틀림없고 그렇게 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거구의 중년인은 함께 앉아 있는 삼 인()의 눈치같은 것은 아 예 살피지도 않은 채 똑바로 백의노문사를 직시하고 있었다. 덩치 에 걸맞지 않게 차갑고도 냉정한 성품을 나타내는 음성이었는 데.... 헌데 신검부라 했는가? <신검부().> 무림초유의 절대신화를 완성시킨 단체.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모든 무림제파()들 위에 신성()처럼 떠올라 있 는 사상초유의 단체. 중원은 이미 일통되었다. 신검부라는 거대한 이름과 힘(). 그리 고 신비() 앞에.... 전 중원무림인들을 모두 포용하고 있는 거대한 인맥()과 천하 곳곳에 거미줄같이 퍼져 있는 촉수(). 세인들이 석양과 함께 찾아드는 어둠을 대하는 순간 잠마해( )라는 어둠의 황제를 떠올린다면,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을 대하 고 떠올리는 이름이 바로 이 신검부인 것이다. 중원 십팔만리 안에 존재하는 삼만여 대소방파들은 신검부라는 이 름 아래에서만 생존할 수 있었다. 영원불멸의 신화, 그것이 바로 신검부인 것이다. 은영사()는 바로 이 신검부라는 거대한 무림제국의 눈과 귀 라고 할 수 있는 단체였다. 이들이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검부라는 거대한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들의 엄 청난 정보망 때문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으음! 그러니까 화접을 탈출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입장이니 결국은 그를 잠마해에서 지금의 지 위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겠구료?" 담담하고 단아한 풍도의 백의노문사는 어찌보면 일개 노학자에 지 나지 않을 듯 하다. 그러나 사실 그의 권위는 막강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신검부라는 거대한 제국의 제이인자()이며 신 검부 최고의 정보기관인 은영사()의 사주()인 것이다. 어느 누구라 하더라도 그의 권위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설혹 신 검부의 요직에 있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의 권위를 부정할 수는 없다. 죽기 싫다면.... "그렇습니다. 그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잠마해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불가능 하다면 그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적조 ()라는 암호명의 잠마해 수뇌 중 한 명을 제거하던가 아니면 화접의 정체가 노출되기 전에 그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으음...!" 중년거구인의 비정하고 단호한 말에 백의노문사의 얼굴이 잠시 일 그러졌다. 그러나 그의 이런 표정이 의도적이 아님을 모르는 인물 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일개인의 죽음에 동정따위를 느낄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은영사주(), 사선유사() 혁련연후()는 바로 신검부라는 거대한 무인제국을 획책하는 모반()을 사전 에 제거하는데 있어 귀재()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신비 속에 감춰져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적어도 무인() 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칭(), 혁련노사()라 불리우며, 신검부를 위해서라 면 백만()의 인명()이라도 눈하나 깜짝이지 않고 제거할 수 있는 무서운 냉정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자 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고수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적 여유가 얼마나 되오?" 사선유사 혁련연후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예, 노사! 아주 절박한 상태입니다. 화접이 어제 보낸 연락에 의 하면 잠마해의 십이수뇌 중 우리들 사이에서 붉은 손톱()이라 고 불리우는 사내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듯 하니 비상행동을 취 해도 되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적조()?" "예! 화접에게 접근하고 있는 자로서 잠마해의 핵심인물입니다." "음! 적조라는 인물은 화접의 정체를 폭로할 구체적인 증거를 갖 고 있소?" 혁련연후는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적조가 이미 증거를 잡았다면 화접의 목숨은 벌써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증거가 거의 잡혀가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됩니다." "화접의 정체를 폭로시킬 증거가 어딘가에 있단 말이오?" "예!" 거구중년인은 신중히 대답했다. 혁련연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그 증거를 잠마해의 인물들이 발견하기 전에 우리가 처 분할 수 있으면 화접을 구하게 되지 않겠소?" 거구중년인이 자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건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 "해서 다른 한 가지 방법을 세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증거를 인멸()하는 방법과 유사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선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거구중년인의 음성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도전하는 듯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떤 방법이오?" "예! 그 방법은...." 거구중년인은 거의 반각에 걸쳐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대전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혁련연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행하시오!" 천하() 그 자체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단체 신검부의 깊숙한 곳에서 이렇게 무슨 일인가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수백 년에 걸쳐 처절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어둠의 단체 잠마해와 신검부의 보이지 않는 전쟁, 그 지하의 전쟁 중 극히 한 단면에 불과한 일이었다. 안개가 아스라하게 피어오르는 새벽. 천공은 묵채색()에서 연청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하 며 보석처럼 밝게 빛나던 별빛이 흐려진다. 새벽의 장안()은 대장관이었다. 밤새 흥청거리던 한량() 들의 웃음소리도 한 줌의 은자를 위해 웃음을 팔던 유기()들 의 지분()내음도 이 새벽이면 찾을 수 없었다. 문물이 발달한 대도()답게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생()의 열 기()를 내뿜는 것도 긴 한낮과 밤만의 일이었고, 이 새벽은 그저 태고의 정적을 방불하는 적요()에 잠겨 있는 것이다. 금마비원(). 신검부내 죽음의 손이라고 알려져 있는 은영사()의 총단은 이 장안에 위치해 있었다. 금마비원이라는 거대한 편액 뒤 이십여만 평의 대지 위에 서 있는 고루거각()들과 거대한 거룡()의 몸체처럼 길고 높은 담장이 주위 오십여 리에 걸쳐 내부를 가리고 있는 곳. 금마비원 은 항시 폐장원()인 양 죽음처럼 무거운 정적에 휘감겨 있 었다. 신비 속의 성()이랄까? 그러나 굳이 장안에 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금마비원의 존재 를 모르는 이는 없다. 신검부라는 거대한 무인제국내에서 가장 막 강한 죽음()과 힘()을 집행하고 있는 곳으로써, 잠마해의 인 물이라면 처절한 공포와 가공스러운 증오를 품고 있는 곳이 은영 사이고 그 총단이 바로 금마비원인 것이다. 금마비원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는 은영서루()로 한 인영 이 다가들고 있었다. 대략 사십여 세나 되었을까? 날카로운 검미()에 잔잔히 가라앉은 눈, 균형잡힌 체형에 짧 은 수염. 두 발의 간격이 어깨의 폭을 넘지 않는 일정하면서도 단 정한 걸음걸이.... 청의중년인의 기태는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금마비원을 마 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면 신검부의 인물이 분명할텐데 그 기도로 보아 결코 하급무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끼이이.... 제법 거대한 석문이 좌우로 갈라지고 퀴퀴한 책곰팡이 냄새와 함 께 드넓은 무서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눈에 훑어만 보 아도 십여만 권에 달하는 서책들, 그 엄청난 분량의 서책들은 모 두 무서()들이었다. 신검부는 실로 독특한 방법으로 무공절기를 전수하고 있었다. 그 것은 신검부가 무수한 제파들의 도전을 받는 가운데 터득한 독특 한 방법으로 피의 경쟁 속에서 축적시킨 가장 효과적인 전수방법 이었다. - 신검부의 수하는 신검부 내의 모든 절기를 익힐 수 있다. 무수한 도전과 수많은 핏 속에서 얻어낸 무공 전수방법은 신검부 가 지니고 있는 모든 절기를 신검부의 어느 누구에게라도 공개하 는 기이한 방법이었다. 본시 강호제파들의 무공전수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가 있기 마 련이다. 우선 그 심성()과 제자의 방파에 대한 충성심을 완벽 히 파악한 후에야 상승의 절학을 전수한다. 그러나 신검부는 실로 독특하게도 우선 모든 비학()들을 공개한 후 각자의 노력이나 자질에 그 성취를 맡기는 것이었다. 신검부에는 모두 세종류의 연무관()이 있어 모든 수하들에 게 문호를 개방한다. - 백율학당(). 첫번째 관문. 이것은 어떤 일정한 장소를 기리키는 말은 아니었다. 신검부의 은 영서루에는 강호제파들의 기초적인 절기들이 모조리 비장되어 있 다. 구파일방()의 무공은 물론이고 천하의 모든 강호제파 들의 전통적인 무공들이었다. 은영서루에는 일급 절학들이 그 종()류만 해도 삼천여 종, 그 서책의 수효만 해도 십여만 권이 비장되어 있는 것이었다. 신검부 의 제자에게는 우선 은영서루의 모든 서책들을 자유로이 읽을 수 있는 권리가 허용된다. 신검부의 제자라면 무조건 백율학당이라는 제일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소요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범재()라 해도 대개 오 년이면 통과할 수 있다. 제일관문은 제일 기초적인 관문으로써 그곳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신검부의 인명부()에 그 이름 을 올리고 직책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 금천대(). 두번째 관문이었다. 금마비원 어딘가 지하 깊숙히 만들어진 연무관으로 이른바 지옥의 훈련이라 명명되는 곳이다. 금천대에 들어가게 되면 우선 십팔반병기의 모든 병장기를 자유자 재로 다룰 수 있는 절기를 익힌다. 연습은 실전()과 같고 입 관한 인물들 중 반 이상이 탈락한 정도로 혹독한 수련을 거친다. 통과하기까지의 소요기간은 극품의 신체를 지닌 기재라 해도 삼 년 이상이 걸린다. - 신검부(). 거의 대부분의 수하들은 이 마지막 관문에 대해서는 그 존재 여부 조차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세번째 관문은 본인의 자유의사 와는 상관없이 선택된 자에게만 개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생존능력()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꺾일 줄 모르 는 집념을 소유한 기재들이 선택되어 입관이 허락되는 곳이며 이 곳을 통과한 인물만이 진정한 신검부의 핵심인물이 될 수 있다. 신검부를 통과한 인물들에게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직책을 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게다가 신검부의 어떤 제자라도 죽일 수 있는 살인면허()를 지니게 되고, 그리고 거대한 무인제국 신검부의 내부에 접근할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통과되는데 소요되는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 어떤 이는 평생을 걸 려도 통과되지 못하기도 하고 또 더러는 일 년만에 통과하기도 한 다. 금마비원의 은영서루에는 지금 아무도 없었다.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청의중년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스쳤다. "훗! 역시 새벽이라 아무도 없군. 이래야 읽고 싶은 게 있어도 천 천히 읽을 수가 있지." 중년인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드넓은 서고()를 둘러보기 시작 했다. 서가()의 수효만 해도 일천여 개에 달하고 그 넓이는 일백여 장도 넘는 듯 하다. 그러나 이 넓은 서고도 기실 잠시 후면 거의 메어지다시피 많은 신검부의 제자들로 붐비게 된다. 그 이유는 이 곳의 무서는 안에서 읽을 수는 있되 지니고 나갈 수는 없기 때문 이었다. 하여 남들보다 조금 노력하는 인물들이라면 사람들이 별 반없는 이 시간에 좀더 많은 기서들을 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청의중년인은 이미 오래 전에 첫번째 관문인 백율학당을 통과한 백무잠()이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백율학당을 통과했다고 해서 이곳 은영서루의 모든 무서들 을 모조리 독파했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무공을 익히더라도 어느 정도의 수준만 넘으면 백율학당을 통과하게 되고, 그로 인해 대부분의 제자들은 한 두가지 자신의 적성에 맞는 무공만을 선택해 첫번째 관문인 백율학당을 통과하는 것이 상례이다. 백무잠은 두번째 관문인 금천대의 입관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도 남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새벽에 이곳을 찾은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묵묵히 서가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마음내키는 대로 무서들을 뽑 아 읽어가던 백무잠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익힌 무공은 기대할 만한 것이 못된다. 남들 이 전혀 손을 대지 않은 무서에서 좀더 새로운 무공을 찾아야 한 다. 그래야만 그들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백무잠은 특이한 방법으로 서책들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별로 손 때가 묻지 않은 무서들만 골라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이 멈춰진 곳에 두툼한 서책 하나가 다른 서 책들에 비해 서가에서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기이하군. 모든 무서들은 삼경에 서사()가 완벽하게 제자리 에 정리한다." 백무잠은 자신이 가장 먼저 이곳에 든 것을 생각해 냈다. "서사인 옥노인()은 이 일만 벌써 수십여 년간 해온 노인이 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잘못 꽂은 일이 없었는데...?" 백무잠이 바라보고 있는 서책은 비단 다른 서책들에 비해 약간 튀 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서체가 뒤집혀 보이게 거꾸로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일순 백무잠은 기이한 예감이 전류처럼 온몸을 휘어감는 것을 느 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예의 서책을 빼들었다. <무림통사().> 그것은 일반적인 무서가 아니었다. 강호제파들에 관한 기록으로써 물론 그 안에 그들의 무공절학을 소개한 내용이 있기는 하나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무림사( ) 기록일 뿐이었다. 스르륵! 헌데 백무잠의 손이 예의 서책을 대충 넘기는 순간 서책 안에서 돌연 얇고 빛바랜 양피지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백무잠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이순간 무엇인가 자신 의 전신을 휘어감았던 전류와도 같은 예감이 적중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채 뒤집혀 있는 빛바랜 양피지의 뒷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양()만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마치 수만 가닥 의 거미줄이 어지럽게 난무하고 있는 듯한 괴문양이었다. "알 수 없군. 이것은 어떤 장소를 나타내는 장보도()같기도 하고, 아니면 어떤 기관진식()의 파해도()같은 데...?" 백무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양피지를 품 안 에 갈무리한 채 서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이 순간에도 그의 전신을 휘어감고 있는 기이한 충동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서고 안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이면서도 어딘가 강인해 보이는 체구의 사내였다. 마악 은영서루를 빠져나가고 있는 백무잠과 엇갈려 서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던 흑의청년의 눈이 마주쳤다. 대략 이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흑의청년은 더할나위없이 고요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 기분나쁜 놈이로군. 못보던 인물인데...?' 백무잠은 흑의청년의 눈 속에 아무 표정이 없음을 발견하고 흠칫 눈을 돌렸다. 이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흑의청년과 스쳐 지나갔 다. 그러나 무심코 스쳐 지나간 흑의청년이 잠시 후 그의 발자취와 공 기중에 흘려낸 체취()만으로 교묘히 추적해오기 시작했음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장안의 북단(). 천마가 맞닿을 듯 이어져 있는 수많은 전각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 는 북단에 한 채의 장원()이 있었다. 장원의 규모는 거대했다. 그러나 그 큰 장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손질을 하지 않은 듯 단청()이 퇴색되어 있고 지붕의 기와에 는 여기저기 잡초마저 자라나고 있었다. 뿐이랴!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는 담장 사이로 엿보이는 장원의 뜰 에 역시 허리까지 자란 잡초만이 우거져 있을 뿐 오가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폐장()을 방불하는 을씨년스러움과 정적만이 감돌고 있는 예 의 장원으로 한 인영이 천천히 다가들고 있었다. 중후한 풍도를 보이고 있는 청의중년인은 바로 백무잠이었다. "...!" 백무잠은 을씨년스럽기 이를데 없는 장원에 이르자 잠시 쓸쓸한 눈으로 장원을 휘둘러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장원 깊숙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끼이이.... 거대한 대전의 낡아빠진 나무문을 지나고, 백무잠은 대전을 가로 질러 대전 한구석에 걸려있는 실물 크기의 커다란 편액() 앞 에 섰다. 이어 그는 고소를 머금으며 머리 위 벽면에 걸려 있는 편액을 돌리기 시작했다. 스르릉.... 기이하게도 벽면에 고정되어 있는 듯 하던 편액이 한바퀴 돌아가 고 백무잠의 전면 벽이 갈라지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나 지 않는가? "놈...! 내 질녀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도 알 수가 없군. 이런 도깨 비 소굴같은 곳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매일 이곳에만 쳐박혀 있는 지...?" 백무잠은 자신의 전면에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지하계단을 잠시 내려다 보다 혀를 찼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이미 예의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헌데 채 십여 장이나 내려 갔을까? 까아악! 돌연 그가 내려가고 있는 통로 좌측에서 웃고 있는 해골()이 튀어 나오지 않는가! 하얗게 뼈만 남아있는 인간의 두 개골이었 다. 끔찍하게도 예의 해골은 기이하게 웃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 었다. "...!" 놀라운 것은 백무잠의 반응이었다. 그는 남들이라면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는 이런 광경을 대하고도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무심히 스쳐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채 이장여도 가기 전에 더욱 해괴한 광경이 그의 전면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스르르릉! 끼끼끼.... 통로의 전면이 돌연 막혀버리는 순간, 좌우의 통로가 점차 빠르게 가운데로 좁혀지고 있었다. 뿐이랴! 덜컹! 백무잠이 지나온 뒤쪽의 통로에 역시 어느새 거대한 철판이 내려 져 있어 되돌아 갈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두 개의 좁 혀지는 벽면에 의해 압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백무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고소를 베어물었다. "이놈! 또 기관장치를 바꿨군." 백무잠은 빠르게 자신을 향해 다가들고 있는 좌우벽면을 쓸어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더 이상 우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능()아! 더 이상 장난을 계속하면 볼기를 치겠다." 쓴 웃음을 짓고 있는 표정, 그러나 그의 음성은 당황해 하고 있었 다. 좌우의 벽면이 이미 바로 코 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스르륵! 순간, 거짓말처럼 몸을 짓눌러버릴 듯 다가오던 좌우의 벽면이 다 시 뒤로 물러나며 통로가 열렸다. 그리고 소녀()..., 대략 십육칠 세? 소녀의 용모는 그대로 요정()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가는 얼굴의 선()과 크고 서글서글한 눈() ..., 그야말로 어둠의 정()처럼 어둠 속에서 솟아난 환상적인 용모였다. 소녀는 드러난 통로의 저쪽에 환상처럼 나타난 채 환하게 미소하 고 있었다. "호호, 숙부께서 이곳에는 웬일이세요?" "허허...!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 백무잠 역시 소녀를 대하자 밝은 표정을 떠올렸다. "호호!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숙부는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이곳 으로 오셨어요. 단순히 제가 보고 싶었다고는 보기 어려운데요? 지금까지 숙부께서는 무슨 이야기할 것이 없을 때는 이런 적이 없 었거든요." 백무잠의 얼굴에 고소가 스쳤다. "훗! 역시 능아의 눈은 속이지 못하겠군. 그래 네게 보여줄 게 있 었다." "...?" 소녀의 눈에 짧은 호기심이 어리는 순간 백무잠은 이미 품 속에서 은영서루에서 우연히 발견한 신검부의 극비문서를 꺼내고 있었다. "너라면 이 문서의 문양들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호기 심이 생겨 지니고 왔다만은 보통 중요한 것 같지 않으니 잃어버리 지 않도록 해라." "...?" 소녀는 예의 문서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별다른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참, 대숙()께서 오신다고 연락이 왔었어요." "형님이?" "예! 오늘 오신다는 연락이 있었으니 아마 곧 도착하실지도 모르 겠어요." "...!" "숙부께서는 대숙께서 오시는 게 반갑지 않으세요?" "아니다. 반갑지 않을 리가 있느냐. 하지만 형님이 문중()의 일에 좀더 신경을 쓰셨다면 본문이 이렇게 몰락하지는 않았으리라 는 생각을 하니...." 백무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순간 소녀는 오히려 밝게 웃고 있었다. "호호, 나는 본문 제남검문()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염려 도 하지 않아요. 숙부가 있잖아요. 숙부가 신검부의 제이 연무관 만 통과해 중책을 맡게 된다면 제남검문의 영광은 저절로 부흥되 는 것이니까요." "녀석...! 이 숙부를 너무 믿고 있는 것 같구나." "호호, 물론이지요. 이 백추능()의 숙부님인 걸요." "허허헛!" 백무잠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솟아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짐짓 얼굴을 굳혔다. "헌데 너는 언제까지 여자답지 못하게 이런 장난이나 하고 있을 것이냐?" "호호, 숙부께서 좋은 사람 소개시켜줄 때까지." "무엇이라고? 허... 누가 너같은 여자를 데려가려 하겠느냐!" 백무잠이 짐짓 울상을 했다. 그러나 백추능은 오히려 환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더 좋지 뭐.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숙부님 옆에서 괴물 장난감이나 만들며 보내도 되니..." "뭐, 뭐야?" 백무잠은 졌다는 듯 두 어깨를 움츠리며 익살스러운 자세를 취했 다. 이어 그는 몸을 돌려 다시 지하석전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반자 두께는 족히 됨직한 먼지가 깔려있는 음침한 통로를 빠져나 오는 그의 표정은 이 순간 천천히 굳어지고 있었다. 백추능, 단 하나 뿐인 혈육이었다. 아름다운 용모와는 달리 그녀는 온갖 기관건축과 기문둔갑 등에만 광적으로 집착한 채 소녀다운 성품을 보이지 않아 백무잠에게는 항시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미모()와 재기를 함께 지닌 그녀의 존재 는 오히려 그에게 생의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백무잠은 대전을 빠져나와 낡은 회랑()을 지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몰락해가는 장원의 후원에 위치한 이층 목조건물, 허름 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 헌데 백무잠이 침상 하나만이 있는 검소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는 순간, 그는 보았다. 자신이 들어선 방의 반대편 벽면이 소리없이 뚫려 나가며 한 흑영 이 소리없이 들어서고 있는 모습을.... 그것은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목조건물의 벽면이 뜯겨나가 며 그곳으로부터 흑영이 들어서고 있음에도 전혀 아무런 음향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무잠의 눈이 커지는 순간 흑영은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서 있었 다. 가늘고 흰자가 많은 무표정한 눈, 옆으로 길게 찢어진 입술 위에 걸린 차가운 미소.... 백무잠이 그 흑영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떠올리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로 한 시간 전 은영서루에서 마주친 바 로 그 흑의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놔!" 흑의청년과 백무잠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흑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단 한 마디였다. 헌데 기이하지 않은가! 백무잠은 그의 태도에 까닭모를 공포를 느 낀 것이었다. 백무잠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상대가 무엇때문에 왔 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음모가 있다. 누군가가 신검부의 극비문서를 빼돌리기 위해 은영 서루에 갖다 놓았다. 그것을 저 자가 인수하기 위해 온 것인데 내 가 먼저 발견한 것이다!' 순식간의 백무잠의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 백무잠은 순간적인 추 리끝에 한 가지 결론을 내리고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 그 극비문서를 은영서루에 가져다 놓은 신검부내의 첩 자가 있다는 뜻..., 그것도 수뇌중 한 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 다!' 이때였다. 백무잠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서 있자 흑영의 입가에 걸려있는 차 갑고 어색한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 듯 했다. 순간 흑의청년의 신형이 움직였다. 슉! 그 움직임은 너무도 희미해 마치 물 속을 들여다 보는 듯한 기분 이었다. 백무잠의 뇌리에 일순 본능적인 위기의식이 스쳐가고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의 검을 잡아갔다. 삭! 흑의청년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단숨에 백무잠의 머리위를 뛰 어넘으며 가볍게 허공을 그어댔고, 동시에 백무잠의 목에 가느다 란 혈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흑영의 몸이 다시 지면에 내려섰을 때 백무잠의 목은 이미 힘없이 뒤로 젖혀지고 있었다. 엄청난 선혈이 솟구쳐 나오고 그 순간 백무잠의 존재는 이미 생의 고통이나 야망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 흑의청년의 눈은 이미 백무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더할나위없이 기민한 동작으로 백무잠의 시신을 뒤지기 시 작했다. 백무잠이 입고 있는 옷의 내피와 외피 사이조차 철저하게 뜯어보는 치밀한 수색이었다. 그러나 찾고 있는 물건은 나오지 않 았다. 흑의청년은 백무잠의 옷을 한 치 크기로 갈가리 뜯어볼 정도로 치 밀하게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다소 당황한 눈빛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백무잠의 거처에 있는 목재침상을 뒤 지기 시작했다. 목재침상 역시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흑영의 손에 의해 한 치 간격으로 잘게 뜯겨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문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흑영은 이번에는 백무잠의 방 모두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좌우의 벽면을 모조리 뜯어내기도 하고 바닥을 파헤치기도 하면서 혹시 있을 비밀장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백무잠의 방은 쓰레기장을 방불하리만큼 갈가리 뜯겨졌 다. 이 모든 것은 실로 숨 한 번 몰아쉴 정도의 짧은 순간의 일이 었다. 잠시 후 흑영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온통 파헤쳐진 방 한가운 데 서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엄청난 선혈이 고여 있었다. 바로 백무잠의 몸에서 흘러나온 선혈이었다. 인간의 몸에서 그토록 많은 피가 흘러나오 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선혈이었다. 흑영은 그 피를 밟고 서서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백무잠을 추격해 온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백무잠이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 전 어딘가에 들렀었다는 것 을 깨달을 수 있었다. 흑의청년은 이내 눈을 들어 한 방향을 응시했다. 그의 차갑기 그지 없는 음산한 눈이 고정되어 있는 곳, 그곳은 바 로 백추능의 거처로 통하는 대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팔월 십오일. 달()이 있고, 낙엽이 있고, 그리고 다섯이 죽었다. 그들의 입엔 새하얀 백매()가 물려 있었다. 그들을 매원이라 불렀다. 달()과 백매, 그리고 죽음.... 달과 백매는 오랫동안 죽음 위에 있었다. 매원은 천하 무림인들의 뇌리에 독초()처럼 흐느적거릴 공포 를 주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불멸의 신화로 인구()에 회자되 었다. 그러나 매원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매화(). 세상의 온갖 매화들을 모아 놓은 듯한 곳이다. 방원 일백여 장에 달하는 드넓은 화원에 가득해 있는 것은 모조리 매화나무 뿐이었 고, 그 매화나무들은 아직 초겨울이었건만 대부분 활짝 만개해 있 었다. 화향()이 안개처럼 깔려 있는 곳, 그 중앙엔 언제부터인가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허름한 백삼()에 흐트러진 흑발(), 훤 칠한 키가 인상적이었다. 사내는 오랜 여행 끝이었는 듯 백삼은 먼지로 얼룩져 있었는데 이 제 겨우 약관에 불과할 듯한 사내의 눈은 기이하도록 무표정했다. 사내는 수많은 매화나무 중에 가장 오래된 듯한 고목() 아래 오랫동안 침묵으로 서 있었다. 그의 눈이 고정되어 있는 곳은 예 의 고목의 중간부근이었고 그곳에는 기이한 물체들이 일렬로 걸려 있었다. 폭 두 치, 길이 다섯 치에 달하는 위패() 형태의 작은 목판 명패들의 수효는 거의 이십여 개에 달했다. 사내의 무감정한 눈은 이때만큼은 감회에 잠겨 있는 듯 기이한 빛 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나이는 천천히 예의 명패들을 쓸어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의 명패에 눈이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길어 지루하기까지 할 정도였 다. <자당().> <무정인랑().> <도노().> ... <무색().> ... 명패에 새겨져 있는 기이한 명호들.... 예의 명패들 위에는 각기 기이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비 수()가 박혔던 듯한 작은 상흔들이었다. 명패의 크기와 형태는 일정했다. 그러나 그 명패들에 새겨져 있는 명호들은 각기 달랐고, 또 걸려 있는 형태도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수많은 명패들 중 대부분의 명패가 글귀가 새겨져 있는 쪽이 보이 지 않도록 뒤집혀져 있었던 것이다. 손(). 사나이의 희고 갸름한 손은 문득 뒤집혀 있는 명패 하나를 똑바로 뒤엎으며 뒤쪽에 새겨져 있는 명호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봉혈명().> 명호를 확인한 사나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할나 위 없이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좋은 친구였지! 우리들 중 가장 활발했었는데 마곡()의 잔결 () 시풍수를 죽이는데 실패하고 자결했었던가...?" 탁! 사나이의 손은 예의 명패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다음 명패 로 눈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더할 나위없이 가라앉은 분위기... 인생을 다 살아버 린 듯한 촌로의 염세적() 기질만이 풍기는 태도였다. <구월구일().> 명호치고는 기이하지 않은가? 허나 예의 명패를 대한 사내의 눈 깊은 곳에서 이채가 솟아나고 있었다. 구월구일이라고 새겨져 있는 명패는 다른 명패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유일하게 그의 명패 위에만 한 자루 작은 비수가 고목에 꽂혀 있 고, 그 비수의 손잡이에는 섬뜩하리만큼 붉은 헝겊이 매달려 있었 던 것이다. 그러나 비수가 고목에 꽂혀 있기 시작한 것이 이미 오 래 전인 듯 드러나 보이는 비수의 날에는 잔뜩 녹이 슬어 있었다. "구월구일... 나는 언제라도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패 위에 비수를 꽂아 놓은 지도 이미 삼 년이 지났다." 구월구일, 바로 사내의 명호였던가? "명령은 오지 않았다.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내의 독백 중간중간에는 많은 여백이 있었다. 그러나 그 독백은 분명히 이어지고 있었다. "살아 남은 친구들은 명령이 오지 않기 시작한 뒤로 하나 둘 떠났 고... 그리고 삼 년이 흐른 것이다." 명패 위에 꽂혀 있는 붉은 헝겊이 매달려 있는 비수, 그 비수가 명패 위에 꽂혀 있는 데에는 어떤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명령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그런 표시였단 말인가? "...." 사내는 오랜 시간을 자신의 명패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숨막히도 록 지루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사내의 손이 자신의 명패를 고목에서 떼어내 품 속에 집어 넣었다. "매원...! 지난 삼 년간을 나 혼자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명령은 오지 않았다." 사내는 허탈한 음성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흑발 사이로 드러난 사내의 얼굴에는 한쪽 눈 위에서 턱까지 길게 그어진 희미한 상흔이 있었다. 그러나 상흔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였고 그 용모는 실로 준수했다. 처... 벅! 처벅! 사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매화나무 사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 다. 구월구일, 매원의 마지막 살수(). 그의 등 뒤에 피어나 있는 매화는 요염하리만큼 선명했다. ... 그러나 매원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제2장 폐가()의 소녀() -3 "너는 이담에 뭐가 될래?" "음! 나는 대학사()!" "나는 장군()이 될 거야." "좋아! 나는 왕()이 되겠어!" 소동()들, 티없이 맑은 얼굴들이었다. 대략 육칠 세 가량들 되었을까?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는 소년과 깨끗하고 화려한 금의()를 걸친 소년들이 뒤섞여 저마다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다. 치기어린 그들의 모습은 실로 앙증스러운 것이었다 "풋! 그 놈들도...." "그래, 그래. 너희들만한 때가 가장 좋은 때지." 장안의 거리 한쪽 공터에서 뛰어 놀며 자신의 포부를 앙증스러운 눈망울로 떠들어대고 있는 소동들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눈 에는 흐뭇함만이 어려 있었다. 그렇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동심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장면인 것 이다. "좋아, 나는 이제 어른이 되서 대학사가 된 거야. 그러니까... 어 흠...!" 이때, 한 소동이 문득 마치 대학사라도 된 듯 짐짓 점잖은 태도를 지어 보였다. 자라지도 않은 수염을 쓸어내리는 듯한 모습은 더욱 앙증스러웠다. 한 소년이 이런 태도를 보이자 나머지 소동들도 일제히 떠들어대 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대장군()이야! 나는 지금 전장()에 나와서 부하들을 호령하고 있어!" "그래? 그럼 나는 왕이야. 대장군도 내 명령에 따라야 해!" 소동들은 제각기 장난에 열중해 대장군의 흉내를 내거나 왕의 흉 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소년들은 한쪽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또 한명의 소동을 의식했다. "소삼()아! 너는 커서 뭐가 될 거야?" "왜 너는 아무 말도 안했지?" 소동들은 자신들의 흉내 놀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 연신 재잘 거리며 예의 소동을 응시했다. 그러자 유독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소동이 마지못한 듯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구월구일이 될래!" 순간이었다. 예의 소동 역시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가를 흉내 놀이에 맞춰 말하 는 순간, 소동들의 눈이 커졌고, 그리고 돌연 무한한 감탄과 경외 의 빛을 떠올리지 않는가? "어?" "아...!" 마치 그 생각을 못했다는 표정들, 그리고 다음 순간 소동들은 예 의 소동을 구월구일로 인정한다는 듯 흉내놀이를 계속했다. "윽...!" "크윽!" 소동들이 일제히 비명을 떠올리고, 그리고 풀썩풀썩 지면에 무너 지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대학사라는 소년도, 무림 최고의 고 수라는 소년도 그리고 왕이라는 소년도 쓰러졌다. - 구월구일! 그 이름 앞에 스스로 왕이라던 소년도 대무인()이라는 소년 도 그렇게 쓰러지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여기고 있는 태도였던 것 이다. 눈(). 끝없이 안으로만 침잠되어 있는 눈, 아무런 의욕도, 생의 열기도 느껴지지 않는 허탈한 눈 하나가 언제부터인가 소년들의 흉내놀이 를 지켜보고 있었다. "...." 허름한 백삼은 먼지로 더럽혀져 있고, 늘어진 흑발 사이로 드러나 있는 준수한 얼굴에는 희미한 상흔이 그어져 있었다. 사내는 저자거리를 지나 장안의 남쪽에 위치한 자오진()이 라는 작은 고을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소동들의 이런 장난을 대 하고 더할나위 없이 쓸쓸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안에서 자오진으로 이어지는 관도()는 텅 비어 있었다. 그 관도 위를 오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이방인() 혼자 관도 저 쪽으로 쓸쓸히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던 것이다. 구월구일. 가공스러운 달빛 살수들의 단체 매원에서도 신화적으로 부각되어 있는 이름, 멀어져 가고 있는 쓸쓸한 사내의 뒷모습에서 구월구일 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3장 세 명()의 왼손잡이() 장안 자오진(). 육대고도()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장안에서 남으로 십 여 리 떨어져 있는 자오진은 계절을 잊은 듯 따뜻한 날씨였다. 장안과는 달리 한적하고 평화로운 작은 고을인 자오진에는 단 한 채의 허름한 주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이름없는 허름한 주루의 한 구석에 한 사나이가 조용히 앉아 죽엽청을 마시고 있었다. 사내는 허름한 백삼을 걸치고 있었으나 그 백삼 아래로 드러나 있는 피부는 기이하도록 깨끗했다. 주루는 한산했다. 손님이라고는 예의 백삼 사내밖에 없었기 때문에 맞은편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십이삼 세 가량 되는 점소 이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백삼 사내밖에 없었다. 그 사내는 소년의 호기심을 돋구었다. 그의 눈은 어쩌다 한 번 입구쪽을 바라보고 있기는 하나 그 눈에 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그저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였 다. 그의 얼굴에는 한쪽 눈 위에서 턱까지 길게 그어진 희미한 상흔이 있었다. 게다가 오랜 여행 중인 듯 옷과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흐 트러진 흑발에 가려져 있는 얼굴 또한 먼지가 묻어 있었으나 전체 적으로 백삼사내의 얼굴은 무척 준수했다. 헌데 아름답다시피한 용모를 지니고 있고, 이제 겨우 약관에 불과 할 듯한 사내의 눈은 기이하도록 무표정했다. 인생을 다 살아버린 듯한 촌로의 눈빛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아무런 생의 의욕을 지니지 못한 허무한 눈빛이기도 했다. 소년은 낯선 사람을 저울질 해보는데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특히 무림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맞추는 것이 그의 장기였 다. 그러나 이 남자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두 시간도 더 된 듯 하다. 사내는 주루에 들어선 후 죽엽청이 떨어지면 다시 손짓으로 주문 했을 뿐 아직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료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사내를 지켜보던 소년은 또 다시 사내 에게 기이한 것을 발견했다. "...!" 그렇다. 사내는 두 시간 동안 술을 마시면서 단 한 번도 오른손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희고 깨끗한 오른손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을 뿐 모 든 동작은 왼손으로 치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술을 따르고 그 술을 들이키는 것도 왼손이었고 다시 마른 안주를 집어 입에 가져가는 것도 왼손이었다. 잠시 후에 소년은 또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손, 그 손은 단지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 니라 항시 좌우가 막혀 있지 않은 곳에만 위치해 있다는 점이었 다. 그것은 소년이 새 주담자를 가져다 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소 년는 짐짓 오른손 바로 옆에 주담자를 놓았으나 사내는 무의식적 인 동작으로 그 주담자를 왼편 쪽으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사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소년에게 다가왔다. 소년은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몸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표정도 없는 듯 느껴지고 있었다. 체온()조차 없을 듯한 느낌.... 소년은 먼저 그의 키가 훤칠하다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고, 두 번째는 그의 걸음걸이가 다소 이상함을 느꼈다. 그렇게 많은 죽엽청을 마셨는데도 사내의 발걸음은 흐트러지지 않 았다. 흐트러지기는 커녕 어깨가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천천히 내 딛어 지고 있는 그의 걸음은 너무도 안정되어 있어 어찌보면 태산 이 움직이는 느낌마저 주었다. "주인 아저씨 계시냐?" "...!" 소년에게 다가온 사내의 입에서 소년으로서는 예상치도 못한 질문 이 흘러 나왔다. 소년은 사내가 단지 아무말도 없이 계산을 치룬 후 그렇게 떠날 것으로 느꼈었다. 헌데 놀랍게도 주인을 찾은 것이었다. "안, 안에 계시는데요. 아주머니는 주방에 계시고요. 오늘은 손님 이 별로 없어 아저씨는 나오실 필요가 없어서...." 소년은 당황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당황하는 이유를 알 수 없 어 더욱 당황해 했다. "좀 불러주지 않겠느냐?" 사내는 단 한 마디만 더한 후 앉았던 자리로 돌아갔다. 소년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무료하기 이를 데 없었던 일상( ) 중에 무엇인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듯한 느낌이 들은 때문 이었다. 그러다 문득, 소년은 또 한 가지 사실을 새삼 상기해 낼 수 있었 다. '참! 그러고 보니 주인 아저씨도 왼손잡이였는데 아줌마도 왼손잡 이였고.... 이상하군. 절대 오른손을 사용하지 않는 세 명의 왼손 잡이라?' 소년은 그 사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루의 주인 아저씨 역시 왼손잡이였다는 것이 생각나자 그 사내와 주인 아저씨가 어쩌면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 았다. "누, 누구?" 자오진의 이름없는 주루의 주인은 이십대 청년이었다. 다소 강인해 보이는 몸매를 지니고 있고 음식 기름에 물들어 있는 허름한 청의를 걸치고 있는 각이 진 얼굴이었는데 그는 지금 기이 하게 떨리고 있는 음성으로 소년을 향해 입을 열고 있었다. 주인을 찾는 손님이 있다는 말을 소년은 다소 흥미롭다는 듯 전했 다. 그리고 그 사내의 인상에 대해서도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알 려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주인의 반응은 소년이 예상하고 있 던 이상이었다. 소년은 주인이 놀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무림인들이 주루 안에서 혈투를 벌일 때도 주인은 그렇게 놀라는 모습이 아니 었다. 헌데 단지 사내의 인상만을 전해듣고 격동이 지나쳐 경악으로 바 뀐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다시 한 번 사내의 인상에 대해 이야기하던 소년은 또 다 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채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주인은 맨 발로 뛰쳐나갔기 때문이었다. "누군데 그래요?" 소년은 황급히 주인의 뒤를 따라가며 질문했다. 주인의 얼굴에는 터질 듯한 기쁨이 가득해 있었다. "친구야."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친군가 봐요. 주인 아저씨가 이토록 반가워 하는 모습을 처음 보니 말이에요." "대단한 녀석이지." 주인은 진정으로 대꾸하며 이미 주루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야아! 옥린()!" "창사()!" 사내는 일어나 양 팔을 벌렸다. 두 사내는 서로 포옹하고 뺨을 비 비면서 얼마동안 서 있었다. "술 한 잔 하겠어?" 잠시 후, 주인이 말했다. "좋아."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직도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주인 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윽고 양손을 놓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인은 마음 속으로 곤혹감을 느끼며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상대는 분명히 어딘가 흔들리는 느낌을 풍기고 있었으며 그것은 사태가 매우 나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느낀 이유는 사내가 과거에는 언제나 자신을 억제하고 육체나 몸가짐에 빈틈없이 신경을 쓰는 그런 남자였음을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가 그들을 떠나 이 주루를 차리기 전이었다. 삼 년() 전의 추억이 주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 당시만 해 도 친구는 건강이 넘쳐 흘렀고 얼굴에는 그 건강이 담겨 흘렀다. '우리가 안 것만 해도 이미 십 년()이 넘었으니 아마 지금쯤 갓 스물쯤 되었겠군!' 주인은 자신도 모르게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 다. 이제 갓 이십쯤 되었을 친구에게서 인생을 다 살아버린 노인 의 허무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가...?' 삼 년 전 헤어질 때 친구는 옆에 있어 주었고 자신의 결심을 칭찬 해 주었다. 단지 그 한 마디만으로도 그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 었다. 그는 그런 사내였던 것이다. "여보! 누가 왔나 한 번 보구료." 주인은 주방으로 뛰어들어가다시피 들어서며 입을 떼었다. 주방에는 다소 비대한 체구의 여인()이 열심히 땀을 흘리며 도마질을 하고 있었다. 주인보다는 훨씬 비대하고 큰 몸집. 얼굴 또한 너무 살이 쪄 눈이 파묻힐 정도의 여인이었다. 헌데 도마질을 하고 있는 그 여인의 손, 그 손 또한 왼손이었다. "누가 왔다고요?" "그래, 옥린이 왔어! 그 친구가 왔단 말이오." 여인은 주인의 말에 손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펄쩍 뛸 듯이 기쁨을 드러냈다. "옥린? 휴도옥린() 말인가요?" "그래, 바로 그 친구야!" 여인의 엄청난 거구가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뛰쳐 나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허어, 그 친구라면 그저... 하긴 우리들은 모두 그 친구를 좋아 했었지." 주인은 여인의 선불맞은 동작에 빙그시 미소했다. 따뜻한 미소였 다. "창사는 란매()를 너무 편하게 해준 듯 싶군." "응? 편하게 해주기는 이런 주루의 주방에나 처박아 넣은 주제일 세." "후훗, 그게 아니고 란매의 몸이 삼 년 사이에 두 배로 불어났기 때문에 한 말일세." "풋풋! 옥린! 내가 살이 너무 쪄 보기 싫은가 보지?" "후후후, 아니야. 보기 좋아서 한 소리였어." 삼 인(). 이름없는 허름한 주루의 내외와 그리고 기이한 기질을 풍기는 이 방인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들의 앞에는 엄청난 술과 음식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주루의 한 구석에는 유일한 점소이인 소년이 무엇이 그리 좋은 지 미소를 머금은 채 삼 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 손님조차 없는 한적한 주루는 오랫만에 기이한 열기에 휩싸여 있 었다. 그들 삼 인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웃고 떠들며 연신 마셔대는 삼 인은 마치 오랜 세월을 사귄 친구처럼 흉허물이 없었다. 소년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엿들으며 백삼 사내의 정체를 알아 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이내 무너졌다. 그들은 기이하게도 과거에 대 해서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차츰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그들의 동 작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손(). 웃고 떠들며 마셔대는 세 사람은 여전히 왼손만을 사용하고 있었 다. 그러나 소년은 이제 그들이 절대 왼손잡이가 아니라고 생각하 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타고난 왼손잡이라면 오른손도 사용해야 정상이다. 비 록 왼손에 비해 사용빈도가 다소 적기는 해도 분명히 오른손 역시 많이 움직여야 정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삼 인은 믿을 수 없도록 오른손을 사용하지 않고 있 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음식과 술병들도 오른 손의 활동에 방해되지 않도록 교묘히 안배되어 있지 않은가. 잠시 후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 다. 놀랄만큼 오른손을 철저하게 비어두고 있는 삼 인()의 웃음소 리는 밤이 깊도록 이어지고..., 차가운 초겨울의 월광()은 한 적하기만 했다. 창사(). 그는 손님도 없는 주루의 한 식탁에 앉아 아내 수희란(수)이 시장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휴도옥린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생명같은 지기(), 창사는 그 휴도옥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 사내에 관한 일은 결코 쉽게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창사 는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마악 어젯밤의 술자리가 끝나고 창사가 그에게 잠자리를 만 들어 주었을 때 휴도옥린이 한 말은 그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었 다. ... 얼마동안 묵을 참인가? ... 예정은 없어. 창사, 잠시 자네를 만나보고 싶었을 뿐이야. 어 떻게 지내나 보고 싶어서 말이야. 휴도옥린의 말이 뜻하는 것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창사는 알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그가 살아 있어야 할 의욕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창사의 상념은 아내 수희란에 의해 깨어졌다. 거대한 체구의 양 팔에 두 개의 광주리를 안고 주루로 들어서는 비대한 수희란은 콧 노래를 흥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옥린은?" "그는 지금 잠들어 있어." "무슨 일이 있었대요? 어쩐지 옛날의 그가 아닌 것 같아요." "그래, 그는 변해 있어.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 그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이 세상의 모든 즐거운 일은 혼자서만 독차지 한 듯 밝은 표정만 을 보이던 그녀의 얼굴에 그늘같은 것이 스쳐갔다. "그래요? 예전의 그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는 죽음과 함께 생 활하고 있는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활기찬 그런 사람이지 않았나 요?" "맞아! 그는 그랬지, 우리들이 내일의 일을 알지 못해 침울에 잠 길 때마다 그는 항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 남아야 한다고 말 해 주었었지. 그리고 그는 끝까지 살아 남아 누군가를 찾아야 한 다고 했었지." "모르겠어. 아마 찾고 있는 인물에 대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 수희란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녀의 살찐 얼굴에는 진정으로 휴 도옥린을 안타깝게 여기는 그늘이 어려 있었다. "그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면 어떨까요? 무엇인가를 하다 보면 다시 생의 의욕을 되찾을지도 모르잖아요?" "글쎄 옥린이 수락할지 모르겠군. 살아 있다는 것조차 귀찮아 하 는 듯 한데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겠어?" "아니예요. 당신이 권하면 혹시 마지못해서라도 들어 줄지도 모르 잖아요." "그래볼까?" 창사의 눈에 빛이 떠올랐다. 수희란의 계획이 맞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으나 휴도옥린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었다. "서사()말인데...." 창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휴도옥린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 라보았다. 그들은 주루의 빈 탁자에 앉아 있었고 창사는 수희란의 제안을 설 명하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창사가 다 시 되풀이 했다. "서사 말인데...." "서사라면 전장()같은 데서 장부를 정리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네. 마침 장안의 자모전가()에서 서사 한 명을 구 하고 있다더군." "바보같은 소리 그만해." 휴도옥린이 고소를 머금었다. "지금 내 형편으로는 내 나이조차 계산할 수가 없을 것이네. 그리 고 살인()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해본 적이 없음을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하, 하지만 자네는 해낼 수 있을 것이네." "그렇다 해도 나는 이제 한시라도 술을 먹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 는 주정뱅이가 되어 버렸어." "하지만...." 창사는 열심히 그를 설득했다. "계산이나 장부정리가 잘못되어 주인에게 손해를 입히게 되면 어 쩌겠나?" "그것은 그때 걱정하기로 하세.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그만 아니겠나." 휴도옥린은 창사가 돌연 이런 제의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 다. 그는 상념에 잠겼다. 창사는 적당히, 그리고 약간은 강압적으로 그가 받아들이도록 재 촉했다. 드디어 휴도옥린의 마음에도 어떤 동요가 생긴 듯 했다. 무엇인가 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음을 무엇보다 그 자신이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 이윽고 휴도옥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얼굴은 휴도옥린의 모습을 처음 발 견한 지난 저녁처럼 밝아졌다. 그러면서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자모전가(). 장안의 자모전가는 중원십대 전장() 중 하나로써 지부() 의 수효만 해도 천하에 십여 개소나 달하는 곳이었다. 주인은 무유금상() 곡향허(). 바로 십대거상( ) 중 한 명이며, 유림()의 당대 십이도제() 중 한 명이기도 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원래 유림의 학사들은 선비가 재물을 탐하는 것을 극기로 여긴다. 해서 상인 출신은 유문()에 발도 디딜 수 없는 것이 상례였 다. 그러나 무유금상 곡향허는 먼저 거상이 되고, 뒤에 유림의 십이도 제가 되었으면서도 그 놀라운 학문으로 유림의 어느 누구에게도 거부받지 않은 인물이었다. 동틀 무렵. 이 자모전가에 한 명의 서사()가 새로 고용되었다. 병이 생겨 누워버린 장칠()이라는 서사 대신 고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이 자모전가의 가솔이 된 백삼청년은 주인 무유금상 곡향허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백삼청년은 주인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고용된 것에 별 로 불만의 빛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번거롭지 않아 서 좋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말수가 별로 없고 어떠한 일에도 무표정한 얼굴빛을 바꾸는 법이 없는 백삼청년, 자모전가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휴도옥린이라는 것만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호기심을 느꼈다. 창사 내외가 마련해준 깨끗한 백삼으로 갈아입은 휴도옥린의 모습 은 누가 보아도 내성적인 성격의 서생()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휴도옥린에게 자모전가의 식솔들이 보여주었던 호기심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루에 거래되는 은자만 해도 오만금() 정도이다. 일개 전 장이라고는 하지만 그 식솔들의 수만 해도 일백이 넘는다. 그들은 모두 각기 맡은 바 일을 해내기에 바빠 새로 들어온 서사에게 더 이상 관심을 보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은 모든 것이 예상보다는 마음에 들었다. 먼저 자신의 존재에 별로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고, 그리고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하고 있자니 자신도 점차 기운이 솟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장부의 정리 방법을 배우며 자신이 자모전가에 들어선 후 만 난 사람들에 관한 생각을 더듬었다. 지금까지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언제나 주변 인물들을 분류 하고 자신에게 미칠지 모르는 그 어떤 영향력이나 일 그 자체에 골똘히 생각해 보는 버릇이 있었다. 이번 일은 그 성질이 전혀 다 르기는 했지만 습성에 따라 똑같은 절차를 밟고 있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은 또한 이미 자모전가의 전체적인 배치 등을 머리에 담 고 있었다. 공격할 대상을 묵도하는 순간 그곳의 자형이 저절로 파악되는 오랜 습관의 결과였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선임 서사가 두 번 설명해 주려할 때 이미 모든 장부의 기록 방법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 다. 한 시간에도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전표()를 가져와 은자와 교환해 가고 또 재물을 맡기며 전표를 떼어 간다. 그 모든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록되어야 한다. 또 때로는 가짜 전표도 들어오게 되는데 무엇보다 그것을 잘 확인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복잡한 일들을 휴도옥린은 저녁 무렵 이미 완벽하게 익혀버린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일을 알았다면 아마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 다. 그러나 휴도옥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 기억( )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것도 배운 것을 잊거나 조사해둔 것을 착오하게 되면 자신의 죽음을 걸어야만 하는 과거의 생활이 가져 다 준 엄청난 기억력인 것이다. 저녁이 늦을 무렵, 휴도옥린은 식사를 마친 후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사면이 백색일색이고 한쪽에 커다란 목재침상 하나만이 놓여있는 쓸쓸한 방이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그것조차 마음에 들었다. 휴도옥린은 침상에 앉아 품속에서 열두 비도()를 꺼내들어 정 성스레 닦아내기 시작했다.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 그러나 이 순간 만큼은 그는 오른손을 사용하고 있었다. 비수를 잡고 있는 손은 오른손이었고, 왼손으로 그 비수들을 닦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오랜 습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원래 많은 무기를 항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삼 년 전 그 일에서 손을 뗀 이 후로는 이 열두 자루의 비도만을 지니고 다녔다. 비도 역시 버려야 옳을 것이나 어쩐지 그것마저 버릴 수 없어 지 니고 다닐 뿐이었다. 그는 비도를 모두 닦은 후 품 속에 갈무리했고 이번에는 비도 대 신 한 병의 술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 그는 아주 천천히 술병을 비웠다. 그리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재기불능의 상태로 빠져 내성적으로 변한 사내는 새로운 일자리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지기인 내외의 판단은 정확했다. 휴도옥린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새로운 일에 열중해 있었던 것이다. 묘한 사내였다. 자모전가의 새로운 서사가 된 그 사내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 람들과는 달랐다. 보통 서사라면 복잡한 일 보다는 쉬운 일을 원했고, 제아무리 꼼 꼼하게 정리한 장부라 할지라도 항시 어딘가가 틀리지 않았을까 전전긍긍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틀렸다. 그는 아무리 복잡한 일을 시켜도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또 일단 정리한 장부는 다시는 수정하는 법이 없었다. 또 다른 특징은 두 가지나 있었다. 술이 무척 세다는 것과, 필요 한 말 이외에는 거의 입을 여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휴도옥린. 그는 삼 일만에 자모전가의 주인인 무유금상 곡향허가 관심을 보 일만큼 특이한 사내로 부상되었다. 그리고는 사흘째에는 모든 서사들을 제치고 자모전가 전체의 거래 를 정리하는 태서사()로 전격적으로 발령되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 일을 오히려 싫어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허, 다시 한 번 말해 주겠나? 기뻐하기는커녕 승진시켜주어 그만 두겠다는 것인가?" 어이없어 하는 음성, 그 음성을 흘려내고 있는 인물은 청의를 걸 친 선비풍의 장년인이었다. 물처럼 고요한 눈과 기품있는 용모, 그 앞에는 한 사내가 앉아 있 었다. 깨끗한 백삼을 걸치기는 했으나 수려한 얼굴 전체에 믿어지지 않 을 정도의 정적이 감돌고 있어 살아있다기 보다는 목상()을 대하는 듯 하다. 휴도옥린, 바로 그인 것이다. "예!" 휴도옥린은 짧게 대답했다. "이유는...?" 곡향허의 눈 깊은 곳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잔잔한 그의 눈 깊은 곳에서 솟아나고 있는 빛, 그것은 호기심을 넘어 기이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번거로운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단지 그뿐인가?" "...." "좋네. 그렇다면 절대 번거롭지 않게 해주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번거롭지 않을 수 있네." "...." "일이 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네. 그저 머물러만 있어 주게." "...!" "그 모든 것이 싫다면 내가 했던 말을 없던 것으로 하고 지금까지 하던 일이나 계속 해 주게." "...!" "그러나 단 한 가지 부탁만은 들어 주어야겠네. 거처를 내가( )로 옮겨 주게, 매우 조용한 곳을 준비하겠네." 휴도옥린은 마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곡향허의 눈에 안도하는 빛이 스쳤다. 휴도옥린은 가볍게 읍해 보인 후, 곡향허의 거처에서 빠져 나왔 다. 헌데 마악 회랑()을 돌아서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 을 멈췄다. 회랑의 반대 쪽에서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대략 십구 세 가량 되어 보이는 궁장여인과 십삼 세 가량 되어 보 이는 홍의소녀였다. 궁장여인의 용모는 실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일종의 불만같은 것 이 입언저리에 떠돌고 있었다. 크고 동그스름한 입술은 굴곡이 뚜렷한 얼굴 중에서도 가장 특징 이 있었고, 커다란 맑은 눈과 선이 부드러운 턱은 조각같기만 하 다. 윤기 흐르는 흑발은 어깨를 덮고 등 뒤로 흘러내려 가볍게 출렁이 고 있었다. 조각같은 아름다움은 가느다란 허리와 날씬한 지체( ), 그리고 풍만한 가슴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 휴도옥린의 눈에 짧은 순간 이채가 스쳤다. 그는 궁장여인의 아름다움이 몰고 온 최초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 해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궁장여인 역시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휴도옥린과 마주친 일에 어 느 정도 충격을 느낀 듯했다. "...!" "...." 그러나 이내 그녀는 다소 오만한 눈으로 휴도옥린을 스쳐 곡향허 의 거처로 멀어져 갔다. '곡미령()이라 했던가? 바로 그녀겠군!' 휴도옥린은 문득 한 이름을 떠올렸다. 자모전가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사 일이건만 귀가 따갑게 들어온 이름이었다. - 자모예령() 곡미령(). 그녀는 곡향허의 큰 딸이었으며 장안 제일의 재녀()였다. 금기서화()는 물론이고 산학()에 또한 밝아 자모전 가를 더욱 부흥시키고 있는 여인, 그녀는 또한 천승대장군부()의 이공자()와 정 혼되어 있는 신분으로 관부의 힘을 필요로 하는 자모전가로서는 매우 중대한 존재이기도 했다. 휴도옥린은 잠시 곡미령에 대한 말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 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인(), 제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을 보아도 그는 아무 것도 느 끼지 않게 성장되어 있었다. 충격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을 대한다 해도 그의 시각적( )인 느낌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차단되도록 훈련되었던 것이 다. 그것은 죽음과 삶 사이에서 생활하는 과거의 단편()에서 얻은 버릴 수 없는 습관이기도 했다. "그가 바로... 그 사람인가요?" 곡미령은 그 순간 곡향허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래, 보았느냐?" "예!" "네가 보기에는 어떤 사람 같았느냐?" 곡미령은 궁장자락을 소중한 듯 움켜쥐고 골똘히 무슨 생각에 잠 겼다. 그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는 무서워요." "무서워?" 곡향허의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그의 표정이 차갑기 때문만은 아니예요. 그런 외적인 것들과는 관계 없어요." "하지만 어째서 그가 무섭다는 거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쩐지... 음습한 죽음의 냄새가 나는 느낌 이에요. 마치 전문적인 살수()를 대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요?" "살수...? 허허헛! 그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곡향허의 입가에 쓴 웃음이 맴돌았다. 이때 곡미령의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소녀가 앙증스럽게 입을 열 었다. "그 사람이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 아버님이 어떻게 알지 요?" 또렷한 눈망울로 빤히 응시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귀엽기 이를 데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 깜찍스러운 소녀, 그녀는 곡향허의 두 딸 중 막내인 곡하령()이었다. "허허헛...! 다 아는 수가 있단다." "치이...!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거지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곡하령이 삐죽 입을 내밀었다. 깨물어주고 싶으리만치 앙징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때 곡향허는 곡하령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얼굴을 굳히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무공을 지니고 있다면 절대 내 눈을 속일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정 도라면 당금무림에서 적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꼽혀야 한다.' 문득 곡향허는 휴도옥린의 한 가지 버릇을 떠올렸다.절대 오른손 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항시 오른손을 비어두는 습관... 그것은 전문살수들에게서나 가 끔 볼 수 있는 습관이기는 하지. 허나 살수 따위가 내 눈을 속일 수는 더욱더 없다!' "...!" "...." 곡미령과 곡향허는 각자의 상념에 골몰한 채 대화를 잊었다. 그러는 가운데 밤()는 깊어가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거처는 다음 날부터 자모전가의 내가()로 정해졌 다. 넓고 한적한 화원 한 구석에 자리한 매우 조용한 곳이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휴도옥린은 자신이 원하면 매우 바쁘게 하루를 보낼 수도 있었고, 또 원한다면 하루종일 자신의 거처에 남아 있어도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시간을 사람들에 묻혀 분주히 보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묻혀 있다 보면 자신의 메마른 가슴에도 점 차 생의 열기같은 것이 솟아나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휴도옥린의 신경을 거슬리며 접근해 오고 있었다. 곡하령. 자모전가의 소공녀()이다. 이제 갓 십이 세에 접어든 그녀는 휴도옥린에게 남다른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창 왕성한 호기심으로 세상을 익혀나갈 나이 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니인 곡미령 때문인 듯 했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 곡미령이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평가하는 것 을 본 적이 없었다. 특히 남자에게 두려움같은 것을 느끼는 모습 은 아예 보지도 못했었다. 헌데 그런 언니가 휴도옥린에 대한 인 상을 무섭다고 부친에게 말하는 것을 들은 후, 곡하령은 휴도옥린 을 남다른 사람으로 단정해 버린 것이다. "뭐해?" 휴도옥린이 일을 마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오면 곡하령은 기다리 고 있었다는 듯 어김없이 조심스럽게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마치 호기심 많은 강아지처럼 살금살금 휴도옥린의 존재에 대해 파악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오빠는 이곳에 오기 전에는 뭐했어?" "...." "집은 어디야?" "...." "나같은 동생이 있어?" "...!" "치이, 내가 한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줄까? 언니가 그랬는데 오빠 를 보고 어쩐지 무섭다고 했어. 그때 처음 본 날 말이야." 곡하령은 중대한 비밀을 말해 준다는 듯 그렇게 흥분된 어조로 말 해왔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어린애를 다루는 데는 서툴렀다. 실제로 그는 어린애들을 한 번도 가까이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린애들은 연민의 대상이라는 것 이외에는 그의 인생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비밀()을 애써 감추고 싶었기 때문에 어린애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는지 도 모른다. 그렇다! 그는 어린애들이 겪는 고통을 무시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자신의 어린 시절의 고통이 기억되 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들을 다룰 때마다 하나의 광경이 떠오른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 아른거려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가 살아있는 한은 뿌리칠래야 뿌리칠 수 없으리라. 그는 그런 광경 가운데 떠오르는 인물들을 전 생애를 걸고 쫓기 위해서 무인()이 되었다고 해도 좋았다. 생각해 내기는 싫지만 망각해서는 안되는 과거.... 휴도옥린은 네 살이었다. 어딘지는 기억해낼 수가 없다. 그러나 무척이나 아름다운 호수 근 처인 것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님과 아름답고 부드러운 어머 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호수에는 비()가 안개처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호수 속으로 일곱 명의 기이한 일행이 소리없이 들어가 는 모습이 보였다. 인간들이 걸어 들어가듯 호수 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은 네 살의 휴도옥린에게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비극()의 시초였다. 상리()를 벗어난 움직임을 보여주던 일곱 명은 휴도옥린의 부 모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것을 깨닫고, 그 빗 속에서 다가왔다. 그리고 휴도옥린의 부모는 죽었다. 단지 보지 않았어야 할 광경을 본 이유 하나만으로.... 그 후, 네 살 어린 나이의 휴도옥린에게 닥친 것은 모진 시련 뿐 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소동이 겪어야 할 모진 고통이 그의 인생을 얼룩지게 만든 것이었다. 곡하령은 휴도옥린이 자신에게 무뚝뚝한 것에 대해서 조금도 불쾌 해 하지 않았다. 어떤 질문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그에게서 웬만하면 체념할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휴도옥린의 이같은 무뚝뚝함이 마음에 든 듯했다. 어린아이는 원래가 외고집쟁이이다. 특히나 곡하령같이 수많은 경 호무인들에 둘러싸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성장하는 아이는 더욱 그렇다. 그녀는 휴도옥린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휴도옥린이 다른 자모전가의 가솔들처럼 쩔쩔 매지 않기 때문이었다. 곡하령은 영리했다. 휴도옥린이 계속 침묵으로 대하자 그녀는 머리를 쓰며 그의 시계 ()에서 약간 벗어난 각도에서 살금살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휴도옥린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정면으로부터의 공 격은 곧 발각되고 철저히 무시당할 것이었다. 그녀는 참고 기다리며 오직 휴도옥린의 마음이 열리기만을 기다리 며 언젠가는 자신의 친구가 되고 말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우연히 마주쳐도 휴도옥린을 무시하는 척 해보였다. 휴도옥린은 점차 현재 자신의 위치를 허용하는 기분으로 되어 갔 다. 의식적으로 생각해 보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차츰 마음이 편 하고 홀가분한 느낌이 더해 갔다. 일은 점차 재미가 붙어갔다. 처음에는 단순한 업무로 단정해 버렸으나 상계()의 일은 실로 복잡하고 엄청난 이권 쟁탈이 숨어 있어 그의 적성에도 맞았다. 그는 지금 상당히 만족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명 령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저 하루를 보내는데 아무런 기대는 없어 도 예전처럼 체념해 버린 상태 또한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한 가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육체의 쇄잔을 방지 하기 위해서 술 마시는 버릇은 이제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이었 다. 일과()는 정착() 되었다. 휴도옥린은 해질 무렵까지 모든 장부를 정리했고 그 밖의 시간은 자유였다. 이따금씩 그는 자모전가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시기는 했 지만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손을 놀려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대상()을 폭파시키거나 때려 부수고 그리고 살해하면서 과거 를 보낸 죄책감 때문이 아닌가 하고 언젠가 창사가 농담을 한 적 이 있었다. 과거 속의 그는 파괴()에 관한 일들만 했었다. 수십 겹으로 둘러싸여 있는 기관건축()과 매복()을 최단시간 내에 파괴하고 목적물까지 접근하는 일, 과거의 그는 그 일을 즐기기까 지 했다.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는 대상을 깊숙히 침투해 들어 가 일을 완수하는 것에는 불가능에 도전해 그것을 해내고야마는 어떤 희열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자신이 파괴하기 위해 익힌 기관건축과 토목 술 등의 장예()를 이용해 오히려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기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자모전가는 항시 많은 재물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그 호위체제가 엄격했다. 하지만 휴도옥린의 눈에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 다. 그는 아무도 몰래 자모전가의 기관장치를 좀더 보완해 놓는다거나 무너진 담장 등을 보수하면서 점차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어느새 자신이 곡하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 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쩐 일인지 말괄량이 소녀인 곡하령이 놀러오지 않는 날도 있었 다. 그런 날 휴도옥린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새, 그는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정()이라는 올가미에.... 남녀()간의 사랑같은 감정이었다면 휴도옥린은 자신의 감정을 능히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명인()은 자신의 감정조차 필 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감정은 달랐다. 그것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 이 가슴을 훈훈하게 적셔오는 거대한 힘이었다. "어디 가?" "...." "치이! 또 술마시러 가는구나." 천천히 자모전가를 빠져 나가고 있는 휴도옥린의 옆에 곡하령이 강아지처럼 따르며 혀를 내밀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침묵했다. 곡하령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 다. 그러나 명백히 말하면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해야 옳았다. 이제는 그녀가 말을 거는 것이 귀찮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매일 술을 먹으면 어떻게 해! 은자를 모아서 오빠도 새색 시를 얻고 그리고 예쁜 아이들도 키우고 해야 하지 않아." "훗!" 곡하령의 당돌한 말에 처음으로 휴도옥린의 입가에 미소가 솟아났 다. 동시에 부드러운 음성이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들어가라. 오늘은 술마시고 남는 은자가 있으면 네 댕기라도 하 나 사다주마." "정말?" 곡하령이 펄쩍 뛸 듯 기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갸웃 하며 입을 내밀었다. "치이, 헌데 오빠는 매일 이경 쯤이나 돌아오는데 그때까지 문을 열고 있는 포목점이 있을까?" 휴도옥린은 곡하령의 앙증맞은 모습을 내려다 보며 밝은 웃음을 머금었다. "훗! 그렇다면 가는 길에 미리 사두지." "그럼 내가 따라가면 안될까?" 휴도옥린이 짐짓 얼굴을 굳혔다. "자꾸 그러면 댕기 사준다는 말을 잊기로 하겠다." "아, 알았어!" 곡하령은 찔끔한 듯 걸음을 멈추고 휘적휘적 멀어져 가는 휴도옥 린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휴도옥린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자모전가의 대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곡하령이 빙긋 웃었다. "결국 내 친구가 되고 만 거예요. 옥린 오빠!" 그녀는 혼잣말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귀여운 천사같은 모습이었 다. 꽈르릉! 쏴아아.... 저녁 무렵부터 꾸물거리던 하늘은 돌연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 다. 한 두 방울 비치기 시작하던 빗발은 이내 굵어졌고, 비는 순식간 에 폭우()가 되어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번쩍! 꽈르릉! 앞도 보이지 않도록 쏟아지는 빗줄기, 칠흑같은 암흑 속에 이따금 암천을 찢는 뇌전만이 번뜩이는데.... "으으...." 장안 외각의 야산(), 기괴한 형태의 기암기석이 난립해 있는 그곳에서 미약한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번쩍! 한 가닥 섬광이 어둠을 밝히는 순간, 답답한 신음성을 토해내고 있는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모습은 너무도 처참했다. 피범벅이 되다시피한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은 단전까지 늘어 져 있는 백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왼팔은 어깨죽지에서부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다. 뿐이랴! 옆구리에는 반자 정도 깊이 박힌 한 자루 검()이 몸의 일부분인 양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있었다. 그 지독한 부상 속에서도 그는 조 금씩 빗 속을 뚫고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으, 이렇게 지독한 놈들일 줄이야...."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옆의 암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인영에서는 야수의 울부짖음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략 육십은 넘었을 나이, 원래는 새파랬을 청의이나 그것은 이제 피와 먼지로 얼룩져 오히려 검게 느껴지고 있었다. "잠마해! 놈들이 무엇때문에 무잠()을 죽이고 이제 능아까지 죽이려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구나." 일순, 짙은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던 그의 눈에서 강렬한 신 광이 번뜩였다. "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능아만은 살려야 하는데 능아가 견뎌주 어야 하는데... 그 아이마저 죽는다면 본 제남검문()은 단맥하게 된다. 아! 내가 유랑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고 문중의 일 에 좀 더 신경을 쓰며 붕비, 그놈에게 본문의 무공을 물려 주었더 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청의노인의 눈에 자조의 빛과 강렬한 신광이 엇갈리고, 다음 순 간, 그의 몸이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어도 열 번은 더 죽었을 상처를 입은 사람치고는 믿지 못할 광 경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그의 눈에 갑자기 살기()가 떠올랐다. 쏴아아...! 쏟아지는 빗 속, 십여장 저쪽에 한 인영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 했다. "늦었군. 하령이 내가 댕기를 사갖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내 방에서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빗 속에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는 인영, 그는 바로 휴도옥린 이었다. 그는 귀가 시간이 늦은 때문에 평소에 다니던 길을 피하 고 야산을 가로지르기 위해 산중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후후, 더 늦게 되면 그 놈이 여간 떼를 쓰지 않을 것이다. 처음 으로 한 약속이니 서둘러야겠다." 문득 휴도옥린의 입가에 미소가 솟아났다. 허리에 두 손을 척 걸 친 채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곡하령의 앙증스러운 영상이 떠올랐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머금던 그의 얼굴 이 굳어졌다. 본 것이었다. 자신의 바로 앞에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무서운 눈을.... 번쩍! 허공을 가로 지르는 뇌전의 한 가닥 섬광으로 인해 다시 주위의 경물이 일순 모습을 드러냈다. "...!" 휴도옥린은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물체가 무엇인지를 알고 내심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도저히 살아 있을 수 없도록 처참한 상처 를 입고 있는 괴노인이 기이한 형태로 암벽에 몸을 간신히 지탱한 채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비오는 산중에서 만난 실로 섬뜩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다음 순간, 휴도옥린의 눈에서 일체의 감정이 사라졌다. 눈 앞의 존재가 이미 뇌리에서 지워진 듯한 눈빛..., 휴도옥린은 괴노인의 상세가 엄중하고 그가 이 빗 속에서 그런 상 처를 입고 서 있는 것 등에 대해 놀람도 의혹도 지닐 필요가 없다 는 듯 완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너무도 태연하고 너무도 순간적인 표정변화인지라 누가 보아도 휴 도옥린은 눈 앞의 괴노인을 보지 못한 듯 했다. "...!" 휴도옥린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청의노인은 차라리 어이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그 눈에는 또한 안도하는 빛 역시 떠오르고 있었 다. 휴도옥린이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 다. 그는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자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 이라는 점이었다. 처... 벅! 처벅! 청의노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하고 있는 순간 휴도옥린은 이미 삼 장 저쪽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채 삼 장을 멀어지기도 전 에 휴도옥린의 걸음은 천천히 멈춰지고 있었다. "...?" 휴도옥린이 걸음을 멈추는 모습에 의혹을 떠올리던 청의노인의 얼 굴이 처절히 일그러졌다. 휴도옥린이 자신 때문에 걸음을 멈춘 것 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쏴아아.... 휘이이.... 폭우를 뚫고 미미한 기성()이 사방에서 울려오고 동시에 기이 한 기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벌써? 으음!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추격을 물리칠 수는 없다!' 청의노인은 절망의 빛을 떠올리며 문득 멈춰 서 있는 휴도옥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음...! 믿을 수 없군. 나보다 먼저 그들의 기척을 감지하다니... 허나 그래도 어쩔 수 없을 것... 길을 잘못 들어 애꿎은 청년이 죽음을 당하겠군!' 청의노인은 한 팔만 남아 있는 손으로 반쯤 부러진 검()을 세운 채 기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닥쳐올 죽음의 손을.... 쏴아아.... 꽈릉!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폭우와 살벌하게 번뜩이는 뇌전(), 그 속에 무서운 긴장감이 팽배하기 시작했다. "...!" 휴도옥린은 조용히 걸음을 멈춘채 사면에서 조여드는 미미한 기척 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일곱! 하나같이 가공스러운 고수들이다. 헌데 문제는 이들이 나 를 보내주지 않을 듯 하다는 점이다!' 말은 필요 없었다. 휴도옥린은 빗 속에서 다가오고 있는 괴영들에 게서 이미 살기를 읽어내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이던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그것을 느낀 휴도옥린은 불필요한 말을 할 필요가 없음을 느 끼고 전신을 굳히기 시작했다. 녹슬어 있던 그의 세포 하나하나와 근육들이 맹렬히 반응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오래된 기억.... 그러나 그의 근육들은 위기를 먼저 느끼고 이미 과거의 반응을 되 찾아가고 있었다. 생()과 사()는 단 일순에 판가름 된다. 그러나 공포심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공포라는 것은 전투에 임했을 때 근육을 위축시키 기만 할 뿐 하등의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휴도옥린은 이미 오래전에 공포 따위의 감정에서 초월되어 있는 신분이었다. 파팍! 최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측대로 상대는 휴도옥린이 누군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슈우우욱! 드러난 흑영들의 수효는 일곱, 그들 중 두 명은 휴도옥린을 향해 덮쳐들고 나머지 다섯 명은 청의노인을 향해 공격해가고 있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적어도 그들은 십여 초 이상은 버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휴도옥 린의 존재를 무시했다는 중대한 실수는 그들의 죽음으로 직결되고 있었다. 그것도 눈깜짝할 순간의 죽음으로.... 파아...!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사용하지 않은 채 비워두고 있던 휴도옥린의 오른손, 그 오른손이 이 순간 환상같은 속도로 번뜩이고. 슈우우우! 빠악! 곧바로 빗줄기를 뚫고 일곱 가닥의 섬광이 번뜩였다. "크흑...!" "끅!" 일곱 가닥의 백광()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괴영들의 신형을 그림자처럼 덮쳐들고, 괴영들의 신형이 실끊어진 연처럼 허공에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이 모든 것은 환상을 대하는 듯했다. 휴도옥린의 오른손이 움직이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러나 그 손에서 비도()가 뻗어나고, 그리고 일곱이 죽었다. "이, 이럴 수가!" 청의노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뜨여졌다. 휴도옥린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고 흑영들이 저절로 쓰러져 버 린 듯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청의노인은 놀람과 불신의 빛으로 잠시 휴도옥린을 바라보다가 한 가닥 기대의 빛을 떠올렸다. "부, 부탁이 있소." "...." 휴도옥린이 몸을 돌려 쓰러져 있는 흑영들 사이를 한 바퀴 휘돌았 다. 그는 어느새 일곱 자루의 비도를 회수한 후 청의노인을 응시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러나 휴도옥린의 가공할 솜씨를 목격한 청의노인은 기대의 빛을 버리지 못한 채 더듬더듬 말을 잇기 시작했다. "노부는 백우군()이라 하오." "...!" 청의노인의 말에 휴도옥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검숙() 백우군.> 검()에 관한한 제남검문 앞에서 논하지 말라. 검숙 백우군은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검가(), 제남검문의 마지막 영광이라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명리()를 초월한 소탈한 성품으로 평생을 유랑으로 보낸 인 물, 만약 그가 유랑생활의 십분지 일만 제남검문에서 보냈다면 제 남검문은 당대 최고의 검가()로 당당히 군림하고 있었을 것이 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인 것이다. 휴도옥린의 놀람은 당연했다. 당대 최고 검의 달인이 놀랍게도 처 참한 상처를 입은 채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질녀()가 지금 위험에 처해 있소이다. 그녀를 구해 주 시오." "질녀?" "잠마해의 인물들이 그 아이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이유는 노부도 모르오. 그 아이는 지금 제남검문의 지하석전에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기관건축물 속에서 겨우 버티고 있으나 얼마 가지 못할 것이 오. 아마 지금쯤 이미 당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들이 잠마해의 수하들이란 말이오?" "그, 그렇소. 능아는 지하에서 온갖 기관장치로 겨우 버티고 있으 나 상황은 매우 긴박하오. 나는 그들의 이목을 나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그들을 유도했지만 잠마해의 수하들은 한편으로 나를 추적하 면서 나머지 인물들은 아직도 질녀가 몸을 숨기고 있는 기관들을 부수고 있을 것이오." "...!" "무잠이 신검부에 속해 있었기에 나는 신검부에 알리러 가는 길이 었소. 그러나 이들의 추적은 실로 집요해 결국 연락을 취할 수 없 었소이다." "내게 신검부에 연락해 달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녀를 구해 달 라는 것입니까?" "시, 시간이 없소. 그대의 능력이라면 직접 구하는 것이 빠를 것 같소." "...!" 휴도옥린은 적지 않은 시간을 검숙 백우군을 들여다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그는 남의 일에 나서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맡은 일 이외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무공을 사용해본 적도 없었 다. 설혹 그로 인해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나 지금의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검숙 백우군은 자신의 죽음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질녀 라는 소녀에 대한 걱정만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그의 무정 심()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해보겠소. 그러나 장담은 할 수 없구료." 휴도옥린이 고개를 끄덕인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검숙 백우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아이는 제남검문의 지하에 있소이다. 그 아이가 스스로 만든 기관매복이기는 하나 제법 복잡해 노부 역시 그 아이에게 접근하 지 못했소. 노부가 도착했을 때는 잠마해의 인물들이 기관을 부수 고 있던 중이었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할 수 없이 그들을 유인해 낸 것이오." "...!" "시, 시간이 없소. 어서, 어서 가 주시오." 휴도옥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나는 할 일이 있소." "...?" "바로 이 댕기를 한 소녀에게 건네주어야 하는 것이오." 휴도옥린은 다급해 하는 백우군의 눈 앞에 작고 앙증스러운 물체 를 흔들었다. 그것은 붉은색이었고 바로 소녀들이 좋아할 그런 것 이었다. '이, 이 사람은...!' 백우군은 차라리 어이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그 순 간 백우군의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투박스런 손가락은 놀라울 정도로 유연했다. 옆구리에 박혀 있던 검이 뽑혀나감과 동시에 지혈()되고, 그 리고 백우군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온갖 상처들을 그 손이 훑고 지나갔다. 그는 이어 명문혈에 손가락을 대고 신중히 살짝 눌렀다. "...!" 백우군은 일시지간 자신의 몸이 적지 않이 편해진 것을 느꼈다. 백우군의 뇌리에 또다시 경악이 떠올랐다. 휴도옥린의 조치는 기 계적인 것이었다. 그는 부상자에 대한 응급조치를 수없이 경험해 본 듯했다. 중상자의 처치요령에 익숙해져 있는 듯한 기계적인 조 치인 것이다. 그러나 백우군은 그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인해 이제 자신은 간단 히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기에는 끔찍해도 그렇게 깊은 상처는 아니었소. 어디 비를 피 할 곳을 찾아 좀 쉬고 있으시오." 휴도옥린이 손을 떼며 담담히 입을 열자 백우군은 아예 머리를 저 었다. 자신의 엄청난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휴도옥린 의 태도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휴도옥린은 이런 정도의 상처 는 수도 없이 대한 듯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 벅! 처벅! 휴도옥린의 신형은 이미 휘적휘적 멀어져가고 있었다. 제남검가, 예전의 영화를 말해주듯 제남검가의 장원은 드넓었다. 그러나 그 넓은 장원은 귀신이라도 나올 듯 을씨년스러운 가운데 잡초만이 우거져 있어 쓸쓸하기 이를데 없을 뿐이었다. 비마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폐장원은 숨이 막힐 듯한 정적까지 감돌고 있었는데.... "...!" 눈(). 한 쌍의 무심한 눈이 언제부터인가 제남검가를 유심히 살피고 있 었다. '모두 열일곱, 호흡 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절정의 고 수들이다!' 제남검가의 어둠에 잠겨 있는 담장 위에 몸을 숨기고 있는 인영은 바로 휴도옥린이었다. '사방에 매복해 있는 자들 이외에도 지하 어디선가 폭파음이 터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인원이 모여 있는 듯 하다!' 휴도옥린의 몸은 담장 위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담장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놀라운 은신대법이었다. 그 상태 에서 휴도옥린의 머리는 하나하나 제남검가의 배치를 머릿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훗! 이런 일은 처음이다!' 휴도옥린의 입가에 문득 고소가 스쳤갔다. 그렇다! 수많은 매복과 기관진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침투해 들어가본 경험 은 많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침투해 들어가 그 안의 인물을 살 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복자들의 눈을 피해 소리없이 구해 내는 일인 것이다. 침투와 살인, 그리고 흔적없는 도주....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는 달리 이번 일은 도주()에 큰 문제점 이 있었다. 자신 혼자만이 아닌 누군가를 데리고 나와야 하기 때 문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휴도옥린은 제남검가의 건물 배치도를 완전히 파악한 후, 행동방 침을 기계적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계획이 머릿 속에서 정리되는 순간, 그의 신형은 소 리없이 담장을 넘어들기 시작했다. 그 동작은 벽을 타고 내려오는 한 방울의 액체처럼 유연했다. "헉...!" "...!" 비내리는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이 마주쳤다. 휴도옥린이 소리없이 접근해가고 있는 삼장 전면, 한 흑영이 자그 마한 암석 뒤에 매복해 있다가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는 음산한 눈 빛을 발견한 것이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 그러나 그 눈은 흑의인의 뇌리 에 저절로 공포를 떠올리게 만드는 눈이었다. '누...?' 흑의인은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무엇인가가 망막()에 번뜩이고, 그리고 동시 에 초자연적인 고통이 입에서 시작해 곧바로 대뇌 깊숙히 전달되 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흑의인의 존재는 최초의 번뜩임과 함께 지 상에서 말살되어 버린 것이었다. '실수를 하다니... 으음! 역시 몸이 많이 녹슬었구나!' 입에 한 자루 비도()가 박혀 무너지고 있는 흑의인 앞에 한 인영이 소리없이 내려섰다. 휴도옥린은 흑의인에게서 비도를 회수하며 검미를 찌푸리고 있었 다. 잠마해의 수하에게 자신의 종적을 발견당한 것은 그가 저지른 최초의 실수였던 것이다. 과거의 그는 임무를 끝내고 완전하게 도주할 때까지 최소한 상대 에게 종적을 발각당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과거 의 일이었다. 그의 몸은 확실히 녹슬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저질러진 실수에 연연해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신형은 이미 지면을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꽈꽝! 우르르....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지면 속이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지 면 십장 깊이 소리없이 파고 들어가는 순간 은은히 전달되어 오는 진동과 폭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죽인 자의 시체가 반각 정도만 발각되지 않기를 기원할 뿐 이다. 그 전에 발각된다면 살아남기 힘들다!' 휴도옥린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한 번에 일장씩 땅을 뚫고 들 어가는 그의 동작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바보같은 놈들...! 모든 기관의 건축물은 정면으로부터의 공격에 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모르다니... 그렇게 하다가는 너희 들은 앞으로도 두 시진은 있어야 그 소녀가 있는 장소에 도달할 것이다!' 휴도옥린은 땅 속으로 전달되어 오는 진동을 느끼며 곧바로 진동 의 중심으로 파고 들고 있었다. 땅 속은 엄습하기 이를데 없었고, 그리고 지독하리만큼 어두웠다. 그러나 이 순간 휴도옥린은 아늑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둠(). 어둠은 곧 그가 즐겨 일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 5장 화접()은 신검부()에도 있었다 꽈득! 꽈지직!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하통로 한쪽 벽면이 뜯겨져 나가며 그곳으로부터 한 백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하 삼장 깊이에 위치해 있는 지하대전의 수많은 통로 중 한곳으 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은 바로 휴도옥린이었다. 꽈아앙! 우르르.... 그가 내려선 통로의 저쪽에서는 연신 무엇인가가 폭발되어 나가는 음향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잠마해의 수하들이 기관 을 부수고 있는 음향이었다. 놀랍게도 휴도옥린은 수많은 시간을 소비해 지하석진내를 진입해 들어가고 있는 잠마해의 수하들과 거의 같은 정도의 거리를 단숨 에 돌파해 온 것이었다. 잠마해 수하들과의 거리는 대충 삼장 여 정도, 수많은 벽면에 막 혀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언제 어 디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그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미로처 럼 얽혀 있는 지하대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남향()에 삼기오제양(), 구궁()이 복합되어 있는 배치로 보아 바로 장형둔적()이다!" 휴도옥린은 단숨에 지하대전 내부의 모든 지세를 계산하고 있었 다. "이런 복잡하고 절묘한 기관건축으로 보아 백추능이라는 그 소녀 는 귀문()의 진전을 이은 듯 하군." 휴도옥린의 눈에는 그 어떤 기관매복도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설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제멋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해도 그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구긍! 휴도옥린이 벽을 몇 번 더듬자 도저히 통로가 없을 듯 하던 벽면 이 갈라지며 통로가 드러났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뒤쪽 벽면 또한 갈라지며 그곳에 위치해 있던 세 명의 흑의인이 돌연 휴도옥린에게 덮쳐들었다. 느닷없이 통로가 열리고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삼청년이 마 악 또다른 통로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덮쳐온 것이 었다. 그들은 바로 잠마해의 수하들로서 휴도옥린의 모습을 발견하자마 자 말 한 마디 없이 공격해온 것이었는데.... "...!" 휴도옥린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연 고개를 숙이며 허리를 낮췄다. 쐐애액! 동시에,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그의 머리 위를 스치며 지 나갔다. "크아악!" "왁!" 그의 등 뒤로 덮쳐들고 있던 세 명 흑의인이 처절한 비명을 토해 내며 무너졌다. 피보라가 이는 가운데 그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각기 머리와 가슴 들을 움켜잡고 있었다. 강전(), 벽이 갈라짐과 동시에 그곳에서 폭사되어 나온 화살 이 그들의 몸을 향해 쏘아져온 것이었다. 그그그긍! 휴도옥린은 마치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 은 동작으로 새로 열린 통로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자신이 만든 기관건축물을 통과하는 듯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백추능. 그녀는 이틀째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있었다. 꽈꽝! 와르르.... 시시각각으로 가볍게 울려오고 있는 폭파음 가운데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것 때문이다. 이 한 장의 양피지 때문에 무잠숙부가 죽었고 저 들은 이것을 찾기 위해 집요하게 기관을 부수며 다가들고 있다." 그녀는 이미 백무잠의 죽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 지하대전의 깊숙한 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그녀였으나 이제는 이미 백무잠의 죽음과 백우군의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꽈아앙! 와릉! 시시각각으로 가까와지고 있는 죽음의 음향, 이제 그 시간은 거의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잠마해의 수하들은 반시간 이내에 모든 기관장치들을 제거하고 백추능이 있는 장소에까지 들어올 것이고, 그리고 그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백추능의 눈에는 일말의 공포도 떠올라 있지 않았 다. "그래, 죽어주마. 허나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은 나와 함께 죽어야 할 것이다." 붉게 물든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아롱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 에게 다가오는 죽음보다 백무잠의 죽음만이 가슴 아픈 것 같았다. "백부님은 아마 이들을 유인해 내는 한편 신검부에 이를 알려, 나 를 구하려 할 것이다만 모두 소용없다." 문득 백추능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양피지를 내려 다 보았다. "이 문서는 신검부의 최고 기밀문서.... 누군가가 이것을 잠마해 에 인계하려 했다. 이것은 곧 신검부의 수뇌중에 잠마해의 첩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데 이 일을 신검부에 알려 무슨 소용이 겠는가! 그들 역시 나를 구해주지 않을 것이다." 백추능은 백무잠이 건내준 문서를 대하고 많은 것을 추론해 내고 있었다. 일대의 재녀()다운 심기, 그녀는 이미 신검부라 하더라도 자 신이 구조받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꽈꽈꽝! 꽈앙! 폭파음은 이제 거의 삼장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백추능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기관중추()를 조정하는 하나의 거대한 손잡 이에 손을 가져갔다. 드넓은 지하대전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자폭장치였다. "십만 근의 화약이 이 아래 묻혀 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그저 설치해 둔 것이었다만...." 백추능은 기다리기 시작했다. 잠마해의 수하들이 자신이 있는 대 전까지 진립해 들어온 그 순간 기관을 작동하고 싶었던 것이다. 쩌저... 억! 꽈아아앙! 한 자 두께의 석벽이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석벽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그곳으로부텨 삼사 명의 흑의인들이 쏟아져 들어 오기 시작했다. 잠마해의 수하들이 드디 어 백추능이 있는 기관중추까지 진입해 들고 있었던 것이다. "...!" 백추능의 눈물에 젖어 있는 눈에 한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쥐고 있는 손잡이에 힘을 가했다. 모든 것을 말살시켜 버리는 죽음으로 이르는 손(),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이 커지고 그녀는 손잡이를 젖히려던 손을 자신도 모르게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털썩! 쿠웅! 대전으로 들어서던 네 명의 흑의인들이 돌연 소리도 없이 무너졌 다. 비명도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모든 음향을 죽인 채 전개되고 있는 그림 속의 광경같았다. 그리고 백추능의 망각 속에 비쳐들고 있는 하나의 백영이 있었다. 잠마해의 수하들이 부수며 들어서고 있는 석벽의 반대쪽 석벽이 소리없이 열리며 백영이 천천히 들어서고 있지 않는가! 잠마해의 수하들이 지면을 구르기 시작할 무렵 백영은 이미 백추능의 일장 옆에 다가와 있었다. "늦지는 않았군." 백영은 바로 휴도옥린이었다. 그는 나타나기 무섭게 잠마해의 수하들 중 일진()을 쓰러뜨리 며 백추능을 응시하고 있었다. 뿐이랴! 백추능이 알고 있어야 할 기관을 아무 말없이 움직여 무너져 버린 석벽 위에 또다른 석벽이 내려오게 만들고 있었다. "자, 시간이 없으니 어서 나갑시다." 쿠웅! 새로운 석벽에 의해 대전이 다시 고립되자 휴도옥린이 무심한 음 성으로 입을 떼었다. "...!" 백추능은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이 의 혹과 경악에 잠겨 휴도옥린을 응시했다. 휴도옥린의 눈과 마주친 백추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휴 도옥린의 눈은 맑고 밝았으며 아무 꺼리낌이 없는 솔직한 눈이었 다. 다만 눈의 홍채()가 회색으로 흐려 있어 겨울 아침의 잿빛 안 개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휴도옥린의 눈은 모든 표정을 안개처럼 가릴 수 있는 연막처럼 잿 빛으로 흐려져 있었다. '아...!' 그러나 일순, 돌연 그녀는 이유없이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가슴의 설레임은 몸에 떨어진 한 방울의 먹물처럼 급속히 그녀의 가슴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깊은 물 속과 같은 조용함을 지니고 있는 눈..., 그래 서인지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고 있는 듯 느껴지고 있는 눈 때문이 었다. 백추능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만큼 휴도옥린 의 눈은 그녀에게 신뢰를 주고 있었다. "갑시다." 휴도옥린은 자신이 들어왔던 석벽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왠지 이 사람이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애....' 백추능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제남검가에서 십여 리 떨어진 한 야산 중턱에는 오래된 폐찰( ) 하나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예의 폐찰에서는 소리없이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모닥불이 만 들어 내고 있는 불빛 아래에는 두 명이 침묵과 함께 앉아 있었다. 휴도옥린과 백추능이었다. "신검부에 연락을 해야 겠소. 그들의 문서를 지니고 있다가 이런 참화를 겪은 것이니 그들이 잠마해의 손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 오." 휴도옥린은 이미 백추능으로부터 대략의 전말을 들은 뒤였다. 그는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백추능의 표 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어쩐지 신검부조차 믿지 못하고 있었으나 휴도옥린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것이 수긍하는 것 이라고 느낀 휴도옥린이 몸을 일으켰다. 삐이걱! 폐찰의 문이 열리고 휴도옥린이 조용히 폐찰 밖으로 걸음을 옮겼 다. 그리고 이내 기이한 음향이 백추능의 귀를 파고 들기 시작했 다. 삐이이익! 휘이이이....! 휘파람소리같기도 하고 흐르는 바람소리같기도 한 괴음향, 휴도옥 린은 입술을 오므려 잠시 동안 괴이한 음향을 발한 후 다시 백추 능에게 돌아왔다. 신검부의 총단에 연락을 보냈소. 이제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이 도 착할 것이오." "...?" "훗! 내가 방금 방출한 음향은 신검부만의 연락방법이었소이다. 이른바 천리전통()이라는 것으로써 공력이 담겨 있기 때 문에 주위 십 리까지 번져 나갈 것이오. 그리고 십 리 이내에 누 군가 신검부의 수하가 있다면 그는 또다시 똑같은 음향을 전달하 게 되어 있소. 이런 방법으로 총단까지 연락이 되는 것이오." "아...!" 백추능의 눈이 커졌다. 과연 그런 방법이라면 총단이 제아무리 멀 더라도 순식간에 전달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사용한 천리전통은 이미 사 년 전에 신검부의 수뇌들만이 사용하던 암호()였소. 그들은 수시로 연락암호를 바꾸기 때문 에 아직도 효력이 있을까는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신검부의 총단으 로 접수될 것이오." "어, 어떤 내용을 보냈나요?" "이곳의 위치와 문서를 지닌 여인이 있으니 인계하라는 내용이었 소." "그, 그 암호를 잠마해의 인물들이 먼저 도청()해낼 염려는 없을까요?" "불가능할 것이오. 이 암호는 신검부 수뇌들만이 사용하던 것이었 으니까" "당, 당신은 신검부의 사람인가요?" 백추능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신검부의 수뇌들만이 알고 있는 암 호전통을 그가 사용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질문이기도 했다. "훗! 아니요. 나는 신검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오. 내 가 그들의 천리전통을 알고 있는 이유는 예전에 필요했었기 때문 이었소." "...!"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함께 있어 주겠소. 그대의 말대로 잠마해 의 수하들이 혹시 먼저 도착할 수도 있으니...." "고, 고마워요. 헌데...." "휴도옥린이라 하오." 휴도옥린은 백추능이 무엇을 물으려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며 미소했다. '아아, 이 사람은....' 백추능은 휴도옥린의 미소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삐이이이이! 휘이이! 기이한 음향은 장안 근교의 이름없는 야산에서 최초로 들리기 시 작해 곧이어 사면팔방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이 방출한 신검부만의 신비한 천리전통, 신검부는 이 독 특한 천리전통으로 천하에서 가장 빠른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었 다. 설혹 대막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신검부의 총 단에서는 반시간 후면 가만히 앉아 접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천리전통은 복잡한 암호로 구성되어 있어 수뇌급 인물들이 아 니면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단 천리전통이 들려오 면 신검부의 수하들은 그 음향을 총단으로 중계()해야 하는 것이다. 어둠에 잠겨 있는 장안 곳곳에서 기이한 음향이 연이어 들리기 시 작하고, 그 음향은 순식간에 오십여 리를 치달려 신검부의 최고정 보 조직인 은영사()로 접수되었다. 그리고 손(). 주름살이 별로 보이지 않는 희고 깨끗한 손 하나가 어둠에 잠겨 있는 야공으로 한 마리 전서구()를 날리고 있었다. 손의 중지()에는 핏빛 검()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굵은 지환()이 끼워져 있었다. 퍼드득! 퍼득...! 손의 주인은 문서를 지니고 있는 여인의 위치를 천리전통으로 알 게 되자마자 급히 한 통의 밀지()를 만들었고, 그리고 그 밀 지를 지니고 있는 전서구는 무서운 속도로 암천을 쏘아가기 시작 했다. 어둠의 본체, 무서운 죽음의 단체 잠마해를 향해.... 폐찰. 타탁...! 타다닥! 모닥불만이 소리없이 타오르고 침묵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얼마 후 휴도옥린의 무감정한 음성에 의해 깨어 지고 있었다. "신검부의 수하들이 오고 있소. 이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 오!" 휴도옥린은 삼십 여 장 밖에서 폐찰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기척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들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오. 번거 로운 것을 싫어하는 편이니...." "...!" 백추능은 말없이 휴도옥린을 응시했다. 휴도옥린은 잠시 그녀를 내려보다 몸을 돌렸다. 이때였다. 무슨 말인가를 할듯 말듯 망설이던 백추능이 돌연 호소 하듯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당신이 직접 나를 신검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지 않는 건가요?" "...!"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극비문서가 신검부의 수뇌 중 한 명이 빼 돌린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그래서 신검부의 인물이라 해도 믿 을 수 없는 심정이에요." 휴도옥린은 걸음을 멈춘 채 잠시 망설이는 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라면 그대를 구해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오." 더할 나위없이 냉정한 음성, 실로 기계적인 냉혹함만이 감도는 음 성이었다. 그리고 휴도옥린의 신형은 이미 폐찰을 빠져 나가고 있 었다. "아...!" 백추능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인가 중대한 것을 잃어버 린 듯 안타까운 눈빛이었다. 휴도옥린은 신검부의 수하들이 다가오고 있는 반대방향 산중소로 ()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뇌리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린 듯한 태도였다. 헌데 채 이십여 장이나 갔을까? 돌연, 그의 눈에 이채가 솟아나며 그의 신형이 좌측의 한 암석 뒤 로 소리없이 움직였다. 실로 번개가 번뜩이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 순간 그가 걸어가고 있던 방향에서 기이한 그림자들이 번뜩이 며 나타나 소리없이 폐찰 쪽으로 쏘아져 가고 있었다. 슈우우욱! 휴도옥린의 신형이 번개같이 좌측 암석의 그늘 사이로 숨어 들고, 그리고 거의 같은 순간 이십여 명에 달하는 흑영들이 휴도옥린이 있던 자리를 스쳐지나간 것은 거의 간발의 차이였다. "...!" 휴도옥린은 호흡조차 죽이고 흑영들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인 것 같은 느낌만을 주고 있는 소리없는 흑영들의 움직임이었다. 검은 그림자들은 인간의 상리()를 깨고 있었다. 그들은 달 ()이 구름 위를 타고 흐르는 허공에 둥둥 떠서 이동하고 있었 다. 단 한 번도 지면을 밟지 않은 채 허공을 주유하듯 사라져가고 있는 그들의 경공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뿐이랴! 인간의 정서라고는 단 한 점도 엿볼 수 없는 무생명의 눈빛, 검은 그림자들은 그러한 눈빛을 던지며 곧바로 이제 마악 휴도옥린과 백추능이 헤어진 폐찰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신검부의 수하들은 아니다. 그렇다면?' 휴도옥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검부의 수하들은 반대방향에서 오고 있었고, 그들은 이미 지금 쯤 백추능과 만나 그녀를 호위한 채 산을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잠마해! 잠마해의 고수들이다!' 휴도옥린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무엇인가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 은 것이었다. '신검부의 인물들과 거의 같은 시각에 잠마해의 고수들이 똑같이 이곳을 향해 도착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생각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들이 사라져 간 방향을 향해.... '이제 바랄 것은 단 하나, 그녀가 그 문서를 쉽사리 찾을 수 없게 감추었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문서가 쉽게 찾아지면 그녀는 그 순간에 죽게 된다!' 카앙! "으... 악!" 무서운 격돌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성이 울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귀영()처럼 움직이고, 그 속에 검광()이 번뜩이며 청의무인들이 연이어 쓰러지고 있었 다. 청의무인들의 수효는 십이 인(), 그들은 백추능을 가운데로 두고 앞뒤로 여섯 명씩 호위하는 형태로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으 나 최초의 비명성과 함께 선두의 청의인이 쓰러지고 거의 동시에 십이 명 모두가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빨리 닥쳐와 신검부의 수하들은 마치 스스로 쓰러 진 듯한 광경이었다. 쓰윽! 다음 순간, 허공을 밟으며 이십여 명에 달하는 흑영들이 검은 연 기가 모이듯 백추능의 주위로 내려 서고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흑포로 가리워져 있는 검은 그림자들, 그들의 음산한 눈이 백추능에게 집중되었다. "문서를 지니고 있느냐?" 더할나위 없이 음산한 음성, 백추능은 공포에 질려 입조차 열 수 없었다. "ㅋ! 그 문서는 네게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는 숨어 있는 첩자의 정체를 밝혀낼 귀중한 것이다." 흑포인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순간 그의 손이 허공을 향한 채 가볍게 움직였다. "...!" 백추능의 신형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없다. 어서 데리고 가자. 신검부의 후진()이 올지도 모른다." 팟! 흑영들의 신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은 허 공을 밟지 않은 채 지면을 박차고 있었다. 목적을 달성한 이상 소 리를 죽이기 위해 내공소모가 많은 능공답허()의 경공을 펼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선두의 흑포인이 백추능을 옆구리에 낀 채 질주해 가고, 그 뒤에 일렬로 늘어선 채 무서운 속도로 어둠을 헤치고 있는 그림자들은 한 번 도약()에 사오 장을 단축하는 가공할 속도로 빠르게 이 동해 나가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그들의 후미에 더욱 빠르고 더욱 은밀하게 움 직이고 있는 백영이 있었다. 스스슷...! 백영은 소리없이 가장 후미에 있는 흑포인을 덮치고, 미세한 음향 과 함께 백영의 우수는 흑포인의 머리를 짓누르며 왼손으로 그의 허리에 걸려있던 한 자루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이 모든 동작은 마치 물이 흐르듯 유연했고, 그리고 은밀했다. 흑포인의 신형이 채 쓰러지기 전에 백영은 다시 빠르게 앞으로 이 동해 가며 검을 쳐냈다. 삭! 한 줄기 검광이 어둠을 휘어감았다. 미미한 절단음과 함께 후미에서 두번째 흑포인의 동체()가 허 공으로 치솟았다. 실로 가공스러운 은밀함이 아니겠는가. 다음 순간, 더욱 무서운 광경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두명의 동료가 소리없이 죽은 것을 모르고 질주해 가고 있는 흑포인들이 뒤쪽에서 뻗어오고 있는 소리없는 검인()에 의해 한 명 한 명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다섯 명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비명조차 터져나오지 않았 다. 단 일검에 당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쓰윽! 백영의 신형은 더욱 빠르게 앞으로 솟아오르며 검을 뻗어냈다. 옆 으로 함께 질주하며 소리없이 수평으로 그어댄 그의 검날에 한꺼 번에 세 명의 흑포인이 다시 무너졌다. "윽!" "크윽!" 순식간에 십여 명의 흑영이 피를 뿌리며 지면을 굴렀다. "...?" 선두의 흑포인이 의혹의 눈을 돌렸다. 그가 최초의 비명성을 듣고 고개를 돌린 것은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악 눈을 돌린 순간 한 백영이 소리없이 검을 휘두 르며 동시에 네 명의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이 눈 속으로 비쳐들고 있지 않는가! 환상? 그렇다! 이것은 환상이었다. 그 짧은 순간, 어느새 그들 중 반도 넘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나머지 역시 백영에 의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 파앗! 선두의 흑포인의 눈에 채 경악이 떠오르기도 전, 백영의 신형이 중간의 흑포인들을 뛰어넘어 곧바로 그에게 덮쳐오고 있었다. 선두 흑포인과의 거리는 무려 십여 장, 놀랍게도 백영은 그 엄청 난 거리를 환상처럼 단축시키며 검을 뽑아오고 있었다. "헉!" 흑포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그러나 그는 잠마해의 수하들 중에서도 엄청난 최고의 고수, 그는 그 엄청난 공세를 대하고도 이미 소리없이 뒤로 퉁겨져 나가고 있 었다. 절단음과 함께 피가 튀었다. 백영은 이미 상대가 뒤로 튕겨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허공 에서 다시 도약하며 검을 휘둘러 흑포인은 이미 지면에 나동그라 진 뒤였다. 아아, 그토록 빠른 대응에도 불구하고 흑포인은 백영 의 검을 피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비명도 없었다. 흑포인은 자신이 충분히 상대의 검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백추능의 축 늘어진 몸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는 것을 한순간 망각했고, 그 백추능의 몸무게가 주는 감각의 미미한 오차 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열네 명의 흑의인이 쓰러지고, 다시 우두머리인 흑포인이 쓰러진 것은 실로 찰나지간의 일이었다. 아아, 이 일을 누가 믿을 수 있으랴! 백영의 가공할 솜씨는 눈으 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고 더욱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일체의 음향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치루어졌다는 것이었다. "누구냐?" "으으, 이럴 수가!"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나머지 다섯 명의 흑영은 어이가 없는 듯 제자리에 멈춰섰다. 천천히 백영이 그들 전면에 검을 늘어뜨리며 몸을 드러냈다. 좌수()에 검을 늘어뜨린 채 우뚝 서서 흑영들을 응시하고 있 는 백영의 눈은 거짓말처럼 무표정했다. 휴도옥린! 바로 그였던 것이다. "으으...! 천하에 이토록 가공스러운 좌수쾌검()의 달인 이 있었다니...!" "누, 누구냐? 신검부냐?" 순식간에 열다섯에 달하는 동료들을 잃어버린 흑영들은 휴도옥린 이 왼손에 검을 쥐고 있는 것에 또다시 경악했다. 좌수도법(), 일반적으로 좌수를 사용하는 도법은 정반()이 바뀌어 운용되 는데다 그 초식의 기이신랄함이 상리를 벗어나는 까닭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좌수도법을 사용하는 무인은 극히 드물어 대부분의 좌수무인은 모 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눈 앞의 휴도옥린에 대해 조금이라 도 들어본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그들을 더욱 당황하게 만든 듯했다. 이때였다. 파악! 무섭도록 담담한 눈빛을 흘리던 휴도옥린의 신형이 다시 움직였 다. 역시 그 무서운 좌수가 번개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헌데 번개치듯 움직이고 있는 검이 쥐어진 좌수에 모두의 눈이 집 중되어 있는 순간, 돌연 휴도옥린의 오른손이 환상처럼 움직이지 않는가! 쐐애애액! 오른손에서 뻗어난 것은 다섯 줄기의 백광()이었으며 그것은 진정 예측을 뒤엎은 가공할 공격이었다. 삭! 빠악! 다섯 줄기의 백광은 똑바로 흑영들의 몸으로 박혀들었다. 믿어지 지 않는 속도로 휴도옥린의 오른손을 벗어난 것은 바로 다섯개의 비도였다. "크윽!" "이, 이럴 수가 깨끗이 속았다!" "오른손이었다니...!" 흑영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 불신의 눈으로 천천히 무너지 기 시작했다. "속인 적은 없었다. 나를 좌수도법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착각한 것은 바로 너희들이었으니...." 휴도옥린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조소를 머금은 가벼운 음성이었 다. 오백여 장 높이의 산정(). 암석군만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는 예의 산정에 두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역시 그대의 불안이 그대로 적중되었구료." 담담한 음성과 함께 암천을 올려다 보고 있는 백삼청년은 바로 휴 도옥린이었고 그 옆에 기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인은 백추능이 었다. "또 당신이 나를 구해 주었군요." "...!" "본녀의 짐작 맞았어요. 이 문서를 빼돌린 것은 신검부의 수뇌 중 한 명이었어요. 그는 우리의 위치를 알자마자 다시 잠마해에 연락 한 것이 분명해요." 백추능의 말에 휴도옥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곤혹해 하는 빛이 어렸다. "이제 신검부의 수뇌중에 잠마해의 첩자가 있다는 것이 확인된 셈 이니 그들 역시 믿을 수 없게 되었군요." "그래요, 그것이 신검부의 중요정책을 결정할 수뇌급 중 한 명임 이 분명해요." 문득, 휴도옥린이 단호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갑시다! 내가 직접 신검부의 총단까지 그대를 호송할 수도 있으 나 이제 당신을 그들에게 내줄 수는 없을 듯 하구료." "...!" 백추능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기계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냉혹함을 풍기고 있는 휴도옥린이 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휴도옥린이 나직하게 내뱉은 말에는 겉보기와는 다른 부드러운 정()이 감추어져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다음 순간 백추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제 신검부조차 제가 문서를 지니 고 있는 이상 저를 추적할 것이 분명해요. 그들을 피해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신검부, 그리고 잠마해. 그렇다! 하나는 천하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한 세력이고, 또 하나는 역시 그 신검부와 대등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 잠마해라는 어둠의 단체 이다. 천하 어느 곳이라 해도 그들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곳은 존재할 수 없다. 죽기 이전에는 그들의 추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천하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그들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 소. 그러나 그들이라 해도 찾아내지 못할 곳이 단 한곳이 있기는 하오." "그곳이 어딘가요?" 백추능은 별로 기대하지 않은 듯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휴도옥린이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매원()!" 백추능의 눈이 커졌다. "매... 원?"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는가 해서 휴도옥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이미 눈을 돌린 채 어둠에 잠겨 있는 허공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달()이 있고 그리고 죽음이 있었다. 오랫동안 불멸의 이름으로 회자()되어 오는 공포의 대명사이 자 모든 무림인들의 뇌리에 독초()처럼 피어오르는 공포로 존 재하는 이름.... ... 그들은 매원이라 불리웠다. ... 달이 있고, 백매()가 있고, 죽음이 있었다. ... 달과 백매는 오랫동안 죽음 위에 있었다. ... 그들을 매원이라 불렀다. 죽음을 창조하는 달빛 살수들.... 공포의 살수 단체, 매원. 아아! 분명, 분명히 매원이라 했는가! 휴도옥린의 과거가 매원과 관련이 있었단 말인가...? : 6장 비극()의 화인()! 휴도옥린이 자모전가로 돌아온 것은 거의 동틀 무렵이었다. 그러 나 간밤에 그가 자모전가에서 자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그의 거처는 바로 자모전가의 내가 중 한곳으로써 평소에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 천천히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던 휴도옥린의 눈에 일순 이채가 스 쳤다. 자신의 방에서 내다 보이는 화원()의 중앙에 한 여인()이 조용히 서 있지 않은가? 아직 해도 뜨기 전의 새벽이다. 어슴푸레한 여명 아래 자모전가의 대공녀인 곡미령이 서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더 늦으셨군요?" "...!" 휴도옥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그 옆을 스쳐 지나갔 다. "어디를 다녀 오셨나요?" 헌데 바로 이 순간, 돌연 곡미령의 입에서 예상 외의 질문이 튀어 나왔다. 휴도옥린이 흠칫 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다 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곡미령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쓸데 없는 참견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단지 당신의 소매 끝에 피가 묻어 있길래 물어본 것 뿐이었어요." "...!" 휴도옥린은 적지 않이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그는 소매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고 있었다. "...!" 그의 뒷모습을 곡미령은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소매에 피같은 것이 묻어 있지 않았어!' 침상에 걸터앉아 휴도옥린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곡미령의 느닷없는 질문은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휴 도옥린은 그녀와 자신이 우연하게 마주친 것이 아님을 이미 잘 알 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는 이슬이 내려 있었다. 만약 그녀가 새벽 산책 중이었다면 이슬은 궁장 자락에만 묻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녀는 이슬이 내리기 전부터 이미 화원에 서 있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은 가볍게 스쳐 지나간 주위의 풍물이라도 완벽하게 머릿 속에 재현시킬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서는 지금 곡미령의 표정과 복장, 그리고 이슬에 젖어 있는 어깨 등, 그 어느 것 하나 놓치는 법 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처음 곡향허의 거처로 이르는 회랑에서 곡미령과 첫 대면했 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녀가 극히 냉정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용모는 휴도옥린으로서도 충격을 받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 었다. 그러나 그 순간 곡미령 역시 자신에게서 어떤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잠시 후, 휴도옥린은 모든 것을 정리해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 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것 이다. "여자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문서를 지닌 채...." "음...!" "잠마해의 습격이 있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잠마해의 인물들 역 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상황을 보건데 잠마해 역시 여자를 놓친 것입니다." 대전(). 사면이 밀폐된 드넓은 대전이다. 그 내부에서 지금 다소 당황에 찬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검부, 그 거대한 무인제국의 눈과 귀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기 찰 조직인 은영사( )의 회합이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 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암호연락 방법인 천리전통으로 연락을 보내왔던 인물이 그 후에 다시 연락을 했다고 했소?" 혁련연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평생을 죽음()과 피() 속에서 지내온 비정의 연륜을 지니고 있는 신검부의 군사, 힘과 피로써만 얻어낼 수 있는 죽음의 권좌 에 앉아 있는 그로서도 이런 난처함은 처음 경험해 보는 듯 했다. "예! 여자가 사라진 직후, 천리전통을 통해 기이한 전문()이 보내졌습니다. 그것은...." 매부리 코의 중년 거구 대한은 망설이다 결국 끝까지 말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혁련연후의 눈이 찌푸러졌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었단 말이오?" "예! 그것은 우리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수 뇌 중에.... 그자는 신검부의 수뇌 중에 숨어 있는 잠마해의 첩자 를 제거하지 않는 한 여자와 문서를 인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첩자가...?" 혁련연후는 다소 놀란 듯한 눈빛을 던졌다. 그의 전면에 앉아 있 는 네 명의 은영사 수뇌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를 보호하고 있는 그 정체불명의 인물은 그 자신이 보낸 천리전통을 받은 신검부의 수뇌() 중 한 명이 다 시 잠마해에 연락한 것으로 믿고 있단 말이오?" "그, 그렇습니다. 면밀한 분석에 의하면 그 자의 분석이 맞다고 판단됩니다. 우리측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도착한 직후, 잠마해의 고수들이 몰려왔던 것입니다." "음! 그러니까 신검부 내에도 그들의 첩자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 로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첩자가 수뇌 중 한 명 이라는 사실이 모두에게 놀람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들 중 한 명이 적의 첩자라...?" 혁련연후가 기이한 눈빛으로 다시 좌중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뱀의 눈을 방불하는 차갑게 번들거리는 눈(), 그 눈빛을 대한 좌중의 인물들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부리코의 거구 중년대한이 항의하듯 입을 열었다. "본 신검부에 적의 화접()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인 듯 합니다." 화접(). 이는 곧 상대편 세력에 숨어 있는 첩자()나 간자()를 의 미하는 그들만의 용어()이다. 거구 중년대한의 은은한 노기에 젖어 있는 음성이 이어졌다. "신검부 내에만 해도 천리전통을 해독()할 수 있는 수뇌급 인 물의 수효는 이십여 명이 넘습니다. 먼저 존귀하신 천공()의 직속 친위대인 무영마루()의 모든 사람이 천리전통을 해 독할 수 있고, 그리고 은하성단()을 비롯한 신검부 이십 사 개 예하단체의 장()들 모두가 천리전통을 해독할 수 있는 것 입니다." - 신검부. - 이십사 개의 예하단체를 거느리고 있는 무인제국. 신검부의 모든 조직은 천하에 공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 실 표면상의 일일 뿐 그 정확한 구성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 지 않았다. 공개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더욱 철저한 신비에 가려져 있는 단 체, 그 거대한 무인제국이 바로 신검부인 것이다. 중년 거구 대한의 말에 혁련연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 신검부 내의 화접을 잡아내는 일은 그리 급하지 않소. 문제는 그 문서를 하루 빨리 회수해야 하는 것이오." "...!" 혁련연후의 탄식같은 음성이 이어졌다. "문서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소. 그 문서는 기실 잠마해가 자신들의 모든 절기()와 힘()을 숨겨놓은 장소를 나타내는 장보도()인 것이오." "우...!" "아...!" 혁련연후의 설명에 모두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이른바 마고()라고 불리우는 것이지. 우리가 마고의 기관장 치를 열 수 있는 파해도()를 지니고도 이십여 년이 흐른 지 금까지 마고를 열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소. 첫째 마고의 장 소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고, 설혹 마고의 장소마저 알아낸다 하더 라도 아직은 마고내의 절기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 소." 혁련연후는 이마의 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그의 이런 태도로 미루 어 보아 문서의 중요성은 극대하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고의 장보도를 빨리 회수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장보 도를 건내 준 우리측 화접에 대한 단서가 그 문서내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오. 잠마해가 그 문서를 입수한다면 화접의 정체는 그 순간 폭로되고 마는 것이오." "아...!" 문득, 혁련연후의 담담하던 눈에서 기이한 빛이 강렬하게 뻗어 나 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소. 이미 문서가 잠마해에 입수되어 있을 가능성을 생 각해서 두번째 작전을 진행해야 할 것이오." "두, 두번째 작전이라면?" "할 수 없지 않겠소? 우리측의 화접을 잠마해에서 구해내는 수밖 에...." "음...!" 무서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혁련연후가 제시한 방법은 최악의 수 단이었고 그리고 무서운 피()의 혈전이 예상되는 방법이었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의 혁련연후는 아무도 모르게 기이한 미소를 머금 고 있었다. 얼굴은 굳어 있으나 그의 눈은 웃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눈으로 소리없이 웃는 자가 천하에서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던가...? 곡하령. 자모전가의 귀염둥이인 소공녀 곡하령은 지금 막다른 벽에 부딪쳐 있었다. 휴도옥린의 우정()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뭔가 좀 더 머리를 써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휴도옥린과의 관계는 분명히 개선되어 있었다. 휴도옥린은 이제 그녀에게 더 이상 무뚝뚝하지도 않았고 침묵으로 일관하지도 않았 다. 이제 휴도옥린은 의식적은 아니었지만 아무런 저항감을 나타내는 일은 없었고 그저 되어가는 대로 내맡기는 그런 태도였다. 그러나 곡하령은 역시 영리했고 그리고 그녀의 계획은 적중되어 갔다. "저어... 옥린 오빠." "...?" "자오진의 작은 주루의 주인이 바로 옥린오빠의 친구라며?" 휴도옥린은 깜짝 놀랐다. 그녀가 자신과 창사와의 관계를 알아낸 것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 이곳의 서사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바 로 그 친구였으니까....' 휴도옥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 순간 곡하령은 내심으로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창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휴도옥린의 얼굴에 언제나 떠올라 있던 그늘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친 김에 더욱 졸라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그 주루에 한 번 놀러 가. 그곳의 음식이 제법 맛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나는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 단 말이야." "...!" 휴도옥린이 빙긋이 미소했다. 사실 창사 내외는 주루를 해서 재물을 모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갖기 위해 주루를 운영하고 있을 뿐이지 음식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한 번쯤 창사 내외를 찾아가 볼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멋진 하루였다. 초겨울답지 않게 날씨마저 화창했고, 창사 내외가 정성껏 마련한 음식들은 정말이지 맛이 좋았다. 곡하령은 소박한 듯 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창사 내외와 어울려 음 식 만드는 것을 거들기도 하고 휴도옥린을 놀려 대기도 했다. 휴도옥린은 곡하령을 어린애가 아니라 친구를 친구집에 데려온 것 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옥린 오빠, 첩()이란 건 뭐죠?" 곡하령은 수없이 재잘대며 많은 것을 질문했다. 휴도옥린은 쉬지 않고 재잘대는 곡하령이 귀찮기는커녕 이제 한없 이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는 창사 내외에게 눈을 돌려 힐끔 곡하령을 쳐다 보았다. 이제 는 그녀로부터 어떠한 질문을 받아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일종의 처()야." 곡하령은 짐짓 놀랐다. "일종의 처? 그러면 진시황은 수천 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게 모두 처였다는 거로군요. 화아!" 이런 화제도 곡하령에게는 예사로운 것이었다. 나이에 비해서 그 녀는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그녀는 다음 순간 남자의 입장을 동경하듯 입을 열었다. "아내를 수없이 거느린다는 것은 틀림없이 힘드는 일이겠죠?" "풋!" "무엇이라고?" 곡하령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창사 내외와 휴도옥린은 크게 대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질문은 쉬는 법이 없었다. 곡하령은 완전히 좌중의 꽃으로 모두를 동심의 세계로 젖어들게 만들었다. 휴도옥린은 쉬지 않고 터져나오는 그녀의 질문에 납득이 갈 때까지 대답해 주고 어른에 게 하는 말투로 지껄여 댔다. 어린아이에게 자상하게 이야기해 주는 말솜씨는 그에게는 없었다. "이 상처는 어떻게 된 거죠?" 문득 곡하령은 풀어헤쳐진 휴도옥린의 가슴에 나 있는 희미한 상 처를 발견하고 다시 질문했다. "...!" 휴도옥린은 자신의 가슴에 선명히 찍혀 있는 상처를 내려다 보았 다. 그의 마음은 그 순간 칠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소상야우().... 소수() 위에 내리는 밤비()는 대륙 최대의 풍치를 지녔다 는 소상팔경() 중에 하나이다. 그 안개같은 실비가 내리고 있는 소수 위에 그림자들이 어른거리 고..., 그것은 비극의 시초였다. 휴도옥린의 자상했던 부모는 그렇게 소상야우 속에 죽었고, 어린 휴도옥린의 가슴에는 한 자루 장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일곱()이었다. 하지만 가슴에 검상을 입은 휴도옥린은 살아 남았고, 그리고 그들 을 희미하게 기억하며 천하를 모두 뒤져서라도 찾아내고야 말겠다 는 결심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 가족이 단지 그들을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나 의 가슴에 검을 박은 것이었다." "...!" 곡하령은 재빨리 이해하고 긴 침묵에 빠져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휴도옥린의 담담한 눈이 곡하령을 힐끔 바라 보았다. "이 세상에는 나쁜 일도 있는 거야. 그 전에도 이야기 한 적이 있 는 것 같지만...." 곡하령은 눈물을 글썽인 채로 미소했다. "좋은 일도 있을 거예요." 휴도옥린의 과거가 스스로의 입에서 밝혀진 뒤에 곡하령은 휴도옥 린에게 자유로이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단편 적인 과거만을 들려줄 수 밖에 없었다. 매원의 달빛 살수로서의 과거 역시 그가 이야기하는 내용에 포함 되어 있었다. 그가 그렇게 솔직이 자신의 과거를 담담히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은 곡하령의 때묻지 않은 마음씨 때문이었을 것이 다. 하지만 과거를 털어놓고 나니 휴도옥린은 한결 기분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감숙성() 회령()에 자리잡은 이 전장은 자모전가의 십 이지부 중 한곳으로써 지부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이 화북대전장에 휴도옥린과 자모전가의 대공녀인 곡미령이 와 있 었다. 장안의 자모전가까지의 거리는 마차로 이틀 정도.... 휴도옥린은 느닷없이 이 화북대전장에서 한 달간 거래된 은자의 호송과 기장의 감사를 명령받은 것이었다. 기실 장부의 검사 따위는 전혀 필요없었다. 휴도옥린은 화북대전 장의 모든 장부를 검토하면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화북대전장의 거래상태는 양호한 편이었고 기장 또한 정확했다. 그것은 휴도옥린의 출장이 곡미령에 의한 의도적인 것임을 나타내 는 것이었다. 왕복 나흘간의 마차 여행, 그 여행 중에 무슨 실마리를 찾으려는 듯한 곡미령의 의도적인 명령이었던 것이다. 따가닥... 따각! 관도, 감숙에서 섬서로 이어지는 관도상에 한떼의 인마가 나타났 다. 선두에서 은자를 실은 우아한 행렬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 주위로 는 자모전가의 고수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며 호위해 가고 있었 다. 그리고 가장 뒤쪽, 휘장으로 가려져 있는 사두마차 하나가 뒤따르 고 있었다. 바로 곡미령과 휴도옥린이 타고 있는 마차였다. "하령이 그대의 자랑을 꽤나 하더군요. 무척 자상하고 다정하다 고...." "...!" "헌데 어째서 저에게는 그렇게 냉정하신가요?" 마차 내부, 서너 명은 족히 다리를 뻗고 앉을 수 있는 공간이었 다. 그 속에 곡미령과 휴도옥린은 마주앉아 천천히 마차가 흔들리 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냉정하게 대한 적은 없었소." 휴도옥린의 말은 담담했다. 곡미령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휴도옥린은 그녀에게 드러내놓고 냉대한 적은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대할 뿐이었지 일부러 불쾌한 표정을 짓 거나 냉랭하게 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이번의 여행을 주도한 것이 아무런 효과도 없었음을 느꼈 다. 그녀는 기실 휴도옥린의 과거에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 은 점차 호기심을 지닌 어떤 관심으로 자라나 있었다. 그러나 이 제 자모전가에 들어가고 있는 길이건만 휴도옥린의 과거에 접근해 볼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었다. "당신은 어째서 왼손만을 사용하나요? 항시 왼손만을 사용하던데 오른손을 다치기라도 했나요?" 덜커덕...! 덜컥! 길고 긴 마차여행을 함께 하면서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괴로운 일 이었다. 휴도옥린에게는 침묵이 오히려 편안해 보이는 듯 했으나 적어도 곡미령에게만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지루한 침묵을 더이상 견디지 못한 곡미령이 다시 입을 떼었다. 휴도옥린 역시 짧게 대답했다. "습관일 뿐이오. 손은 다치지 않았소." "...." 대화는 또 끊겼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곡미령은 이제 짜증이 나 는 것을 깨달으며 눈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 마차는 이미 섬서성의 경계를 넘어들고 있었다. 창 밖의 풍경은 한가롭기 이를데 없었다. 그들이 다가가고 있는 관도 십여 장 전면에 많은 장돌뱅이들로 보 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아마도 장안으로 물건을 팔러가는 떠돌이 상인들인 게로군!' 곡미령은 한가한 생각을 더듬으며 마음을 풀었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기실 은자의 호송이란 극히 위험한 일이기는 했으나 이번의 호송 재물은 그리 많지 않은데다 자모전가 자체의 호위무사들은 단 한 번도 은자를 약탈당한 적이 없는 신화를 지니고 있는 고수들이었 다. 그러나 그녀의 방심을 비웃듯이 돌발적인 사건은 바로 그 직후 벌 어졌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신검부와 잠마해 사이의 치밀하고 복잡한 길 고 긴 음모의 전쟁()이.... 따가닥! 따각! 호송 마차의 행렬이 이내 이십여 명의 상인들을 따라잡으며 그들 가운데의 관도로 나아갔다. 팍! 파파팍! 순간, 선두의 한 금포상인이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홱 몸을 돌렸 고, 동시에 한가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던 장돌뱅이 상인들이 일제 히 병장기를 꺼내들며 호송행렬을 덮쳐들기 시작했다. 카앙! "크악!" 순식간에 세 명의 호위무사가 피를 뿌리며 지면을 굴렀다. "웬, 웬놈들이냐?" "막, 막아라. 비적()이다!" 순식간에 호위마차는 멈춰지고 처절한 혈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름한 복장의 촌로를 비롯하여 어리숙해 보이는 청년 상 인 등으로 분장해 있던 정체 불명의 습격자들의 무공은 실로 놀라 운 것이었다. 모든 것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마친 듯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 고, 그리고 공격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으악!" "이, 이럴 수가...!" 자모전가의 호위무사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하찮은 재물을 강탈하려는 비적들 치고는 믿을 수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던 것 이다. "...!" 곡미령의 눈이 커졌다. 최초의 비명성과 격돌음이 들려오자 혼비백산한 그녀는 멍청히 차 창 밖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휘익! 습격자들 중 한 명이 허공을 밟으며 곡미령의 마차로 날아들었다. 꽈득! 파파파팟! 그의 우수가 번뜩이자 무서운 회오리가 맴돌며 마차는 그 순간 산 산히 부서져 나갔다. "악!" 그녀는 자신의 눈 앞에서 마차가 터져나가는 순간 자신의 몸 또한 가루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져 눈을 내려감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녀의 귓 속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들 었다. "...?" 곡미령은 어리둥절해 눈을 떴다. 음성은 바로 휴도옥린의 것이었다. 그의 음성은 냉정하고 담담했 으며 단정적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와 휴도옥린은 어느새 격전장에서 삼 장여 떨어진 한 바위 뒤에 바싹 엎드려 있지 않은가! 휴도옥린은 그녀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몸으로 압박한 채 삼 장 전면의 격전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실로 담담해 피와 비 명이 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지 않았다. 뿐이랴! 곡미령은 그의 오른손에 한 자루 비도가 쥐어져 있는 것마저 발견 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 흐른 후, 휴도옥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격전장 쪽 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 그제야 곡미령은 싸움이 이미 멈춰져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 다. 은자가 실려 있던 마차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고, 습격자들 역시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 휴도옥린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나뒹굴고 있는 자모전가의 고수들을 한눈에 파악한 후 중상자들부터 치료하는 순서로 침착하게 순식간 에 응급조치를 끝냈다. 기이하게도 죽은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휴도옥린은 그 일을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 "당신은 무척 기민하더군요. 언제 나를 마차에서 끌어내 바위 뒤 에 내려 놓았나요?" 마차는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곡미령은 휴도옥린의 그 침착한 행동에 적지 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왜 그 비도는 사용하지 않았나요?" "사용할 수도 있었소. 그러나 그들은 인명을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 했소. 해서 나는 움직이지 않고 은자가 실린 마차를 내준 것이었소." "...!" "만약 내가 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면 우리 쪽도 많은 희생자가 생겼을 것이오." "아...!" 곡미령은 휴도옥린의 말이 무조건 맞는 듯 느껴졌다. 충격은 차츰 가셔지고 좀전에 벌어졌던 사건 현장이 뇌리에 되살 아났다. 병장기의 격돌음과 비명성 등, 그리고 자기 위를 덮쳐 누르고 있 던 휴도옥린의 중압감이 주는 알 수 없는 믿음감.... "...." 문득 곡미령은 조용히 상념에 잠겨 있는 휴도옥린의 옆 얼굴을 바 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굳어져 있어 그대로 조각품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휴도옥린이 얼굴을 굳히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잃어버린 재물은 사실 별게 아니었다. 더구나 한 사람도 죽지 않 았으니 그만해도 큰 다행인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의 곡미령은 모르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이 돌발적인 사태에 어떤 깊은 음모의 냄새를 맡은 것 이었다. 오랜 세월 죽음과 핏 속에서 체득한 본능의 힘이었다. 휴도옥린은 자신의 거처에서 창 밖의 화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제 곧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얼마 전의 습격을 분석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의 목표가 사람이었다면 그 상대가 곡미령이거나 자신이 었다면 분명히 지금쯤 죽어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삼 년 전만 해도 그는 습격해온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행동을 개시 하기 전에 무엇인가를 느꼈어야 했다.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먼 저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채 행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휴도옥린의 비도()를 맞이 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모두 쓰러졌을 것이다. 그들은 고수였다. 그러나 휴도옥린의 상대는 될 수 없는 자들이었 다. 하지만 그런 인물들을 상대하는 데에도 휴도옥린의 반응은 느 렸다.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렸던 점도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서도 그들을 퇴치할 수 있어야 했다. 이것으로 그의 결심은 섰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육체를 하나의 무기라고 생각해왔다. 다른 병장기들을 소중히 해온 것처럼 육체도 소중히 해왔다. 상처를 입으면 정성스럽게 치료를 했고, 그리고 완벽한 상태가 되 기 전에는 절대 새로운 일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헌데 지금은 그의 육체가 변질되어 있었다. 병기들과 달리 기름먹 인 면건()으로 닦아내기만 되는 일은 아니었다. 육체 모두를 천천히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인 것 이다. 삼 년()의 공백이 그의 잘 조련된 육체를 녹슬게 만든 것이었 다. 스르르.... 방문이 가만히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삼경이 넘어서였다. 기다림은 끝났다. 휴도옥린은 그 밤 안으로 누군가가 찾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상대가 온 것이었다. 대공녀 곡미령, 그녀는 불이 꺼져 있는 휴도옥린의 방으로 조용히 들어서 한참 동안 침상 위의 휴도옥린을 응시했다. 달빛은 밝았다. "...!" 휴도옥린은 침묵했고, 그리고 자신이 잠들고 있지 않은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곡미령은 곧바로 침상으로 다가들었다.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손을 뻗어 휴도옥린의 손을 잡는 시늉을 했 다. "...!" 휴도옥린의 손가락과 그녀의 손가락이 서로 스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침상 위에 누워있는 휴도옥린의 얼굴을 찬 찬히 내려다 보았다. 휴도옥린은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그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을 덮어갔다. 긴 흑발이 먼저 휴도옥린의 이마를 스치며 간지럽히고, 그리고 이내 촉촉한 느낌이 휴도옥린의 입술에 닿았다. 잠시 후 그녀는 일어섰고 동시에 부드러운 금의 궁장이 어깨 부위 에서부터 스르륵 흘러 내렸다. 그녀는 침상 곁에서 서서 드러난 나신()을 휴도옥린이 보아주 기를 기다린다는 듯 오랫동안 달빛에 노출시키고 있었다. 자극을 주기 위해 요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행동 같았다. 은은한 월광이 창문을 통과해 감미롭게 흘러들었다. 그 아래 희디 흰 곡미령의 나신은 늘씬했고, 충실하고, 그리고 만 곡()이 뚜렸했다. 크고 육감적인 입과 기이한 열기에 들떠 있는 눈(), 희디 흰 피 부에 반 정도를 가리며 흘러내린 길다란 흑발().... 그것은 완벽한 균형미를 이루고 있었다. 부드러운 그림자가 움푹한 턱에 드리워져 목덜미의 선()을 한층 더 선명하게 했다. "...!" 휴도옥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무어라 입도 열지 않았다. 그는 이 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휴도옥린의 눈은 그녀의 전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높은 가슴 아래쪽에는 그늘이 어려 있었고, 쭉 뻗어내린 지체( )는 양지유를 부어 만든 듯 희고 또 희었다. 곡미령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고 눈은 자신의 나신을 살피고 있는 휴도옥린의 얼굴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 휴도옥린은 깨달았다. 이런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어떠한 남자라도 제정신을 잃고 빠져들 고 말 것이라고.... 곡미령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이 그의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라 왔다. 이때, 곡미령은 다시 침상으로 다가들며 휴도옥린의 상체를 덮고 있는 금침을 걷어 올렸다. 그녀는 천천히 부드러운 손길로 휴도옥린의 몸을 매만지기 시작했 다. 마치 촉각만이 살아 움직이는 연체동물의 눈()이라도 되는 듯 그녀의 손끝은 휴도옥린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휴도옥린의 옷 속으로 그녀의 손은 파고 들었으며, 그리고 맨살의 감촉에 일시 파르르 진동하는 듯 하다가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상처를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곡미령은 휴도옥린의 몸에서 적지 않은 상처들이 만져지자 처음에 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다시 부지런히 손길을 움직여 그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나가고 있었다. 스르륵! 이 모든 것은 완벽한 침묵 속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달빛만이 소리를 내며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휴도옥린 역시 태초 그대로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곡미령의 손에 몸을 내맡긴 채 침상 위에 누 워 있었다. 희미한 월광조차 곡미령이 가리고 있어 휴도옥린의 건장한 육체는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다시 그녀의 긴 흑발이 출렁이며 휴도옥린의 몸을 덮었다. 그녀가 또다시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덮은 것이었다. 그리고 긴 흑발의 간지러운 듯한 감촉은 점차 아래로 옮겨갔다. 갑작스런 행동이었다. '음!' 촉촉한 온기()가 그를 감쌌을 때 그는 내심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휴도옥린은 여자를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런 경험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그녀는 마치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부드럽게 그의 남성을 감싸고 있었다. 너무 강렬한 흡인력과 너무도 부드러운 촉감이 번갈아 휴 도옥린의 전신을 뇌전처럼 강타했다. 그 쾌감은 너무도 강렬해 오히려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곡미령은 집요했다. 마치 휴도옥린의 전신을 삼키려는 기세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짧은 순간이었고 아쉬움을 남긴 채 그 녀는 머리를 들며 침상 위로 올라왔다. 서늘한 공기가 하체에 느껴지는 것 또한 일종의 쾌감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휴도옥린 위에 겹쳐져 머리칼을 그의 얼굴 양옆으 로 늘어뜨린 채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 기이한 열기와 미지의 흥분, 그리고 알 수 없는 은은한 공포가 깃 들어 있는 눈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를 주시 했다. 동시에 그녀의 하체가 조금씩 움직였다. 두 무릎을 휴도옥린의 하 체 양 옆에 위치시킨 채 무언가를 찾는 움직임이었다. 무섭게 팽창해 있는 사내를 중심으로 조금씩 그녀의 하체가 움직 이기 시작했다. 어느 한순간, 휴도옥린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가 팽창 된 자신의 한 부분을 스쳐감을 느끼고 전율했다. 그리고 무언가 거칠거칠한 감촉도 있었다. 다시금 촉촉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입과 비슷했으나 그러나 달랐다. "...!" 극히 느릿한 최초의 접촉이었다. 슬쩍 닿은 것에 불과한 자그마한 결합이었다. 그러나 전율은 있었다. 그리고 휴도옥린의 전신은 팽팽한 악력( )을 느끼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곡미령의 부드러운 하복부의 살결이 그의 하복부에 와 닿았다. "헉...!" 그리고 파과()의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 상태에서 그녀는 잠시 멈춰졌다. 하지만 이내 희디 흰 그녀의 몸이 작은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했 다. 무척 느린 움직임이었으나 그 움직임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 다. 그때마다 휴도옥린은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가 부딪쳐 오는 감촉과 전신을 조여오는 악력에 정신이 없었다. 아득한 환상이었다. 꿈결같으면서도 손에 잡히는 듯 했고 그러면서도 잡을 수 없는 감 각이었다. 둥둥둥.... 머릿 속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북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 날이 새는 기척을 느끼자 곡미령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옷 을 집어 들었다. 잠들어 있는 휴도옥린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 일순 몸을 떨었고, 그리고 옷을 입었다. 그녀가 두 번 다시 휴도옥린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 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모든 이성을 내던지고 어린애 같은 느낌에 들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무서웠다. 그도 두 번 다시 요구해 오지 않을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정혼자()가 있는 신분인 것이다. 제7장 흔들리는 제이()의 생() -1 집송()되던 은자가 강탈당한 사건은 자모전가에 적지 않은 충 격을 주었다. 잃어버린 은자의 양은 별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 건 자체가 주는 타격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자모전가의 원로()들은 이 일을 놓고 숙의를 거듭했다. 그리 고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자모전가로 집송되는 모든 은자의 호송을 신검부에 의뢰하고, 동시에 신검부의 고수들을 자모전가에 상주()하도록 파견을 요청했다. 이 모든 조치는 기실 전시효과를 얻으려는 발상이었다. 즉각 자모전가로 신검부의 고수 오십여 명이 파견되었다. 한눈에 보아 별로 대단한 고수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항시 자모전가 주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모전가는 이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감히 자모전가의 은자를 강탈하려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것 은 곧 신검부에 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었다. 설혹 공격받는 일이 있더라도 자모전가는 모든 일을 신검부에 맡 기면 그만이었다. 신검부는 그 엄청난 조직망으로 이내 습격자들 을 추적, 채포해 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음모였다. 우연으로 파생되고 있는 듯한 작은 일련 의 상황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음모의 톱니바퀴! 그렇다. 보이지 않는 전쟁의 거대한 음모의 수레바퀴는 점차 무섭게 돌아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이 일련의 상황들 은 곧바로 천하를 뒤덮고 있는 잠마해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잠마해, 어둠의 단체를 주도하고 있는 잠마해의 정보수집세력인 흑밀원()에서 이런 일련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곧바로 일어났다. 중년인(). 대략 사십()은 넘었을 나이였다. 그러나 중년사내의 풍도라고 보기에는 그 얼굴이 너무도 준미해 차라리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깊은 현기를 느끼게 하는 투명한 눈(), 여인의 아미처럼 그린 듯한 혈미(). - 흑살귀리() 비모소(). 천하를 통털어 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 니다. 그러나 일단 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오싹하는 한기를 느끼게 만드는 것 이 바로 이 인물이었는데.... 이 이름은 특히 신검부의 정보조직인 은영사의 수하들에게는 저주 의 이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이랴! 이 이름은 같은 잠마 해의 수하들에게조차 공포로 존재하는 이름이었다. <흑밀원().> 어둠의 단체 잠마해의 정보수집기관. 잠마해에서 이 흑밀원이 지니고 있는 권위는 엄청난 것이었다. 신검부와의 대정보전()을 위해 창설된 단체이나 대부분이 피로써 그 임무를 담당해 왔고, 잠마해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조직 을 이탈하려는 배반자를 처단함에 있어 무서운 능력을 보이고 있 는 단체인 것이다. 흑살귀리 비모소는 바로 이 공포의 단체 흑밀원의 원주였다.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그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솟아나는 순간 어디선가 죽음이 집행되고 있음은 공인된 사실.... 지금, 그 흑살귀리 비모소가 굳어진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취문옥주()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넓은 대전. 어디인가는 알 수 없다. 흑살귀리 비모소의 전면에는 삼장 둘레의 크기를 지닌 거대한 대 리석 집무용책상이 놓여 있고, 그 건너편에는 한 인물이 등을 돌 린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용모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리석 탁자와 그의 넓은 등은 기이한 조화를 이루 며 주위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더 이상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그는 신검부와 접 촉을 시도한 것입니다." 흑밀원수 비모소의 단아한 얼굴에 긴장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본해에 숨어있는 화접임이 분명합니다. 입수하려던 문서는 공교로운 일로 입수되지 못했으나 그 안에는 그가 화접이라는 증 거가 있습니다. 문서는 조만간 찾아낼 것입니다." "...." 태사의의 인물은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비모소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굵고 저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문서를 백추능이라는 소녀가 지니고 사라진 것이 확실하오?" "예! 그러나 그 계집애가 숨어 있을 장소는 없습니다. 신검부에서 도 그녀를 찾고 있으니 조만간 문서를 회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본해가 지니고 있던 마고해도()인 것은 사실이 오?" "그렇습니다. 화접은 이십 년 전에 본해의 최고기밀인 마고해도를 신검부에 넘긴 것입니다. 당시 그는 그곳에 자신의 표적을 남겼다 고 했습니다. 하니 그것만 회수한다면 그 안의 표식을 찾아내 취 문옥주가 화접이었다는 증거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문서를 회수한 뒤에 그를 탄핵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 소?" "그렇습니다. 그러나 취문옥주 역시 그 일을 알고 있기에 그는 비 상수단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신검부로 탈출할 계획을 진 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 "며칠 전 그의 자모전가가 몇명 비적들에게 은자를 강탈당하는 사 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것을 핑계로 신검부의 호위를 요청했 고 그리고 신검부의 고수 오십여 명이 파견되었습니다." 비모소는 다소 다급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어쩐지 긴장된 음성 이었다. "그러나 본 흑밀원에서 그 일을 조사한 결과, 그것은 조작된 강탈 사건이었습니다. 천하에 본 흑밀원의 이목을 숨기고 그런 일을 자 행할 단체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모전가의 고수들이 그렇게 쉽게 당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리숙한 조작극인 것입니다." "...!" "그런 조작을 할 이유는 명백합니다. 취문옥주는 아주 자연스럽게 신검부의 고수들을 주위에 머물러 있게 한 후 사태가 불리해지면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신검부로 탈출하려는 것입니다." "...." 태사의의 인물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기이한 압박이 되 어 비모소를 억압하고 있었다. 비모소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 며 강경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그를 처단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결국 태사의의 사내는 탄식같은 음성으로 침묵을 깼다. "취문옥주 곡향허. 그가, 그가 화접이었단 말이지?" 태사의의 인물이 침묵을 깨자 비모소의 얼굴이 일시 밝아졌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미 십 년 전부터 그를 의심해오고 있었습니 다. 이번 일만 해도 그를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을 것입니다." "으음! 그가 화접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소?" "예! 흑밀원주의 직위를 걸고!" "...." 다시 침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번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 다. 잠시 후, 굵고 음폭()이 넓은 더할 나위없이 중후한 음성 이 다시 흘러나왔다. "좋소. 그를 처단하시오." 뚝! 비모소가 내심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굳게 쥐어져 있던 그의 손에서 기이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 마디의 관절이 퉁기는 음향이었다. "그러나 그를 처단하기 전에 그가 화접이라는 증거를 좀더 확보해 야 할 것이오." "예! 물론이지요." 비모소의 입에서 화사한 미소가 솟아나고, 이어 그의 신형이 천천 히 대전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둠에 잠겨 있는 자모전가에 그림자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쏘아 져 오고 있었다. 쉬이이이익! 그 속도는 가히 섬전을 방불하는 것인지라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금린제(). 무유금강 곡향허의 거처, 이곳은 자모전가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 한 내가() 중에서도 금역()인지라 그 누구라도 허락없이 는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삼경이 다 된 늦은 시각이었으나 무유금강 곡향허의 내실에는 지 금 불이 밝혀 있었다. "...!" 더할나위 없이 단아한 풍도. 글을 읽고 있었음인가? 그의 전면 서탁에는 반쯤 펼쳐져 있는 한 권의 서책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펼쳐져 있는 서책은 건성이었고, 그의 눈에서는 이 순간 차가운 신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본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흑밀원의 냄새 맡는 작자들 이 요사이 부쩍 이 근처에서 발견된다는 보고였다." 그의 이런 기도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사해를 덮는 인품()과 덕으로 상인의 신분으로서도 유림 십이 도제 중 한 명이 된 곡향허에게는 지금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기질 만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흑밀원주 비모소! 네 뜻대로만 되지는 않을 것이다!" - 흑밀원. 어둠의 단체 잠마해의 최고정보조직. 이 흑밀원은 신검부의 은영사와 버금가는 치밀하고 철저한 기찰조 직으로 알려져 있는 어둠의 눈()이었다. 헌데 그 잠마해 최고 권위의 조직 이름이 무유금강 곡향허의 입에서 거론되고 있지 않 은가! 잠마해의 모든 인물에 대한 것은 철저한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특히 잠마해의 눈과 귀라고 할 수 있는 정보조직 흑밀원의 조직구 성은 잠마해의 수하라 해도 알지 못할 정도였는데, 곡향허는 그 원주()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듯 하지 않은가! "비모소, 나는 네가 자중하기를 바란다. 신검부의 힘이 점차 증대 되고 있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의 권력 다툼은 정말 바보같은 짓인 것이다!" 무슨 뜻이란 말인가? 곡향허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책자를 덮었다. 이때였다. 침중히 중얼거리던 곡향허의 눈에서 돌연 기광이 번뜩였다. 순간, 그의 몸에서 마치 고양이처럼 가볍게 원래의 위치에서 좌측 으로 이동해 갔다. 털컥! 동시에 거칠게 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무서운 속도로 안으로 뛰어 들었다. 팟! 그 순간 방 안의 황촉불이 꺼지며 무서운 살기()가 어둠속에 서 파동쳤다. 이때였다. "옥, 옥주()! 접... 니다!" 어둠 속에서 신음성이 담겨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순간 다시 방 안이 밝아졌다. 이것은 실로 눈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누군가가 곡향허의 거처 로 뛰어들고 그 순간 곡향허의 신형이 번개같이 움직이고, 방의 황촉불이 저절로 꺼지듯 사라지며 살기()가 화악 번지고, 그 리고 다시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며 방 안이 밝혀진, 이 모든 것은 단 한 순간의 동작으로 이어진 듯한 환상적인 속도였던 것이 다. 방 안의 입구 쪽에는 어느새 피투성이의 인영 하나가 간신히 몸을 가누며 곡향허 쪽을 향해 배례를 올리고 있었다. 전신에 걸치고 있는 것은 짙은 흑의, 고요한 몸가짐과 절로 배어 나오는 죽음()의 냄새..., 원래부터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을 듯한 흑의중 년인의 기도는 범상치 않았다. 흑의중년인은 전신에서 검붉은 선혈을 줄줄 흘러내면서도 예를 취 한 자세를 풀지 않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곡향허의 눈이 커졌다. "적성()! 본해에 있어야 할 네가 어찌된 일이냐? 그리고 이 상처는?" 적성이라 불리운 흑의중년인이 비틀거리며 눈을 들었다. 그가 앉아 있는 밑으로는 이 순간에도 검붉은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 만큼은 믿어지지 않으리만큼 침착했다. "옥주!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흑밀원주 비모소가 본해의 최 고 정예들인 살인잠천()의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 고 있습니다." "비모소가 살인잠천의 고수들을...!" "예! 비모소는 옥주를 신검부의 첩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친 소리!" 곡향허의 눈에서 뇌전이 이는 듯한 신광이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에 다급해 하는 빛이 스쳤다. "살인잠천의 고수들이라고 했느냐? 본해 최고의 고수들인 그들을 출동시키면 야야()의 제가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야야께서 조차 나를 신검부의 첩자라고 단정했단 말이냐?" - 야야(). 어둠의 단체, 잠마해의 대부(). 그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잠마해는 모두 십이수뇌로 이루어져 있고 야야는 그 뒤에 존재할 뿐 모든 것이 철저한 신비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비모소는 본해의 정보조직인 흑밀원의 원수직위 를 이용해 암중에서 오래 전부터 옥주에 대한 조사를 한 것입니 다. 그는 옥주가 신검부의 첩자라는 증거를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 다." 곡향허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리가! 그가 그렇게 빨리 움직이다니...? 이렇게 깨끗이 당 하다니...!" 폭풍을 만난 듯 그의 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곡향허의 눈에는 이 순간 짙은 허탈의 빛만이 떠올라 있었다. 헌데 놀라운 일이 아닌가? 중원 십대전장 중 하나인 자모전가의 주인이며 유림 십이도제 중 한 명인 무유금강 곡향허가 바로 어둠의 단체 잠마해 중에서도 가 장 잔인하다는 취문옥()의 옥주였단 말인가? 천하의 모든 무림인이 가장 두려워 하는 단체, 특히 신검부의 수 하라면 치를 떨며 증오하고 있는 단체가 바로 취문옥이 아니던가! "옥, 옥주! 어서 피하십시오." 곡향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직접 야야를 대면하겠다." 흑의중년인의 눈에 안타까움의 빛이 스쳤다. "제자 적성은 옥주께서 신검부의 인물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설혹 누명이라 해도 그것을 꾸민 인물은 바로 흑밀 원의 원주인 비모소입니다.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으음...!" 곡향허의 얼굴이 처절히 일그러졌다. "...!" "...!"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들은 번개처 럼 서로를 마주보았다. '벌써...?' 다음 순간, 방 안의 불이 꺼지고 그곳에서는 이미 사람의 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휴도옥린. 그는 깊은 잠에 취해 있다가 갑자기 뭔지 모를 기이한 느낌에 눈 을 떴다. 그 느낌은 결코 감각으로 느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었다. 본능()이랄까? 깊은 잠에 취해 있으면서도 잠재의식 저 아래의 본능은 바늘 떨어 지는 소리에도 반응할 수 있도록 열려 있었고, 그 본능()에 무엇인가가 감응되어 왔던 것이다. "...?" 휴도옥린은 눈을 뜬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그 가느다란 본능에 무엇인가가 감응되어 왔을 때는 섣불 리 육체를 움직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꽈직! 팍! 그러나 미세한 음향과 함께 창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동시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가공할 속도로 휴도옥린의 침상으로 덮쳐들었 다. 마치 허깨비를 방불하는 가공스러운 신법이었다. 쓰읏! 와직! 휴도옥린의 몸이 번개같이 옆으로 퉁겨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침 상이 박살나 흩어졌다. 그러나 휴도옥린의 신형은 이미 반대편에 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경악이 역력했다. 덮쳐온 흑영의 무공이 가공해서는 아니다. 자모전가의 내가에 머 물러 있는 그가 공격받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휴도옥린을 공격해 들었던 흑포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역시 놀람이 떠올라 있었다. 흑의인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등까지 짙은 흑포를 눌러쓰고 있어 드 러난 곳이라고는 두 눈밖에 없었다. 그 드러난 눈은 실로 차갑고 음산했다. '잠마해? 그것도 엄청난 고수들이다!' 휴도옥린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무공수위를 느끼고 전율했다. 순간 이채를 떠올리던 흑영의 눈이 다시 번뜩였다. 그 빠름은 가히 전광석화였다. "...!" 휴도옥린의 눈빛이 흐려졌다. 겨울 아침의 잿빛 안개를 대하는 듯 한 눈빛, 무서운 속도로 휴도옥린의 눈에서 일체의 감정이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손(). 그의 오른손은 번개처럼 뒤집혀 졌다. 삭! 그 손에서 뻗어나간 것은 한 자루의 비도였다. "끄윽!" 흑영의 목에서 가래끓는 듯한 기음이 터져나왔다. 비도는 정확히 그의 천돌혈 깊숙히 박혀 있었다. 그러나 흑영의 신형이 채 쓰러지기도 전에 휴도옥린의 몸은 창 밖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령... 하령이 위험하다!' 휴도옥린,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신전령()을 다해 한 가지를 염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곡하 령의 안위에 관한 것이었다. 자모전가. 어둠에 잠겨 있는 거대한 장원. 오십여 채의 대소전각의 내가()와 외가()로 구별되어 있 어 하나의 성()을 방불하는 규모의 자모전가는 실로 무서운 기 운에 잠겨 있었다. 어둠의 나래처럼 소리없이 자모전가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흑영 들, 마치 귀영()과도 같은 그림자들이 이 순간 자모전가의 어 둠 속을 기척도 없이 누비고 있었다. '음...!' 자모전가의 곳곳을 소리없이 넘나들고 있는 흑영들을 발견한 휴도 옥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쓰읏! 순간, 그의 모습을 발견한 흑영 하나가 벼락같이 덮쳐왔다. 기척도 없었고 흔적도 없었으나 그 속도는 믿어지지 않도록 빨랐 다. '일반고수들이 아니다. 잠마해의 정예고수다!' 휴도옥린은 사태가 더욱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슉! "끄윽!" 덮쳐들던 흑영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급격히 무너져 내렸고, 그 순간 휴도옥린의 신형은 이미 그를 비껴가고 있었다. 실로 가공스러운 솜씨였다. 매원 최고의 신화였던 구월구일( ) 휴도옥린이 전력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각. 자모전가의 광장으로 나온 곡향허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지고 있었다. 자모전가의 곳곳에 검은 그림자들이 소리없이 움직이고, 그때마다 자신의 수하들이 처절히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캉! "크악!" "왁!" 쓰러지는 것은 모두 자모전가의 수하 뿐이었다. 그 사실은 곡향허 에게 충격을 주고 있었다. 자모전가의 호위무사들 사이에는 진정 무서운 고수들이 숨겨져 있 었다. 바로 자신의 진정한 수하들이고 잠마해에서 취문옥을 이끌 어나가고 있는 어둠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너무도 간단 하게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럴 수가! 살인잠천의 고수들이 진정 모두 출동되었단 말인 가...!" 곡향허가 허탈한 웃음을 흘려내자 적성이라 불리던 흑의인이 그 옆에 내려서며 황급히 입을 떼었다. "옥주,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본해에 남아있던 나머지 취문 옥의 고수들은 지금쯤 이미 전멸되어 있을 것입니다." 곡향허의 두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폭발했다. "으으! 비모소, 네놈이!" 곡향허의 전신이 무서운 분노로 진동되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의 눈이 멍청해졌다. "막아라! 곡가주를 보호하라! 그는 우리편이다!" "곡가주를 보호하라! 그는 본부의 은영사에 속해있는 분이시다." 돌연, 어디선가 청의무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휘이이익! 단숨에 허공을 넘어들며 잠마해의 고수들을 공격해 들고있는 청의 무인들, 그들은 바로 신검부에서 파견나와 있던 무인들이 아닌가! 수효는 겨우 오십여 명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공은 실로 놀라워 잠마해의 고수들은 순식간에 밀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거만하기만 한 삼류무인 정도로 알고 있던 신검부의 수하들이 진정한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꽈꽈꽈꽝! 와릉! "크악!"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던 자모전가의 수하들은 이 뜻하지 않은 신검부의 도움에 점차 균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헌데 신검부의 고수들은 실로 기이한 중얼거림을 흘리며 싸움에 가담하고 있었다. "본부의 척살명단 제일호로 올라있던 취문옥주가 바로 자모전가의 가주였다니..., 그리고 그가 오히려 우리측 인물이었다니...." "제기랄 뭐가 뭔지 모르겠군. 그렇게 죽이려고 애쓰던 인물을 오 히려 보호해야 할 입장이라니...." "내 친구가 저 자의 손에 무서운 고문을 받으며 죽어갔다고 들었 다. 헌데, 헌데 저 자가 잠마해에 잠입해 있는 본부의 인물이었단 말인가...!" 신검부의 고수들, 그들은 실로 기묘한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흑 백()이 뒤집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마 음에 내키지 않은 듯한 표정을 띠우고 있었건만 그들의 무공은 여 전히 가공스러웠다. "...?" 그들의 기이한 중얼거림을 듣고 있던 곡향허의 눈이 더욱 멍청해 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이상 생각이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비록 신검부의 수하들이 뜻하지 않은 원병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잠마해 최고의 고수들인 것이다. 꽈꽈꽈꽝! "크악!" "윽!" 무서운 격돌음과 처절한 비명성, 그리고 검붉은 화염이 자모전가 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휴도옥린. 그는 무서운 속도로 자모전가의 내가 깊숙히 진입해 들고 있었다. 내가()는 완전히 초토화 되어 있었다. 잠마해의 고수들은 내가에 진입해들수록 더욱 많았고, 더욱 가공 스러운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화염과 여기저기 나뒹굴어 있는 처참한 시신들, 그리 고 그 사이로 번뜩이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 휴도옥린은 검은 그 림자들 사이를 유성처럼 누비며 점점 깊숙한 곳으로 치달렸다. 삭! "크악!" 그가 스쳐가는 뒤쪽으로 흑의인들이 무너져 내렸다. 휴도옥린은 곡하령의 거처가 어느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곳을 향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꽈앙! 와르르.... 휴도옥린의 신형은 채 반각도 이르기 전에 곡하령의 거처로 뛰어 들고 있었다. 창문이 부서지며 그의 백영이 방 안으로 내려서는 순간이었다. 사악! 파파파팟! 미처 그의 신형이 지면에 내려서기도 전에 좌우로부터 섬광이 덮 쳐들었다. '이곳까지...!' 휴도옥린은 덮쳐들고 있는 섬광들의 가공함보다는 곡하령의 거처 에 마저 흑의인들이 침해 있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더이상 꾸물거릴 여유는 없었다. 휴도옥린은 덮쳐들고 있 는 검기()를 비껴내며 벼락같이 일권()을 쳐냈다. "...?" 그것을 본 흑포인의 눈에 가소롭다는 빛이 스쳤다. 그는 휴도옥린 의 몸을 비껴가고 있던 검을 비틀어 그의 오른손을 베어들었다. 그 속도는 가히 전광석화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 믿을 수 없게도 휴도옥린의 오른 주먹은 다시 방향을 틀어 그의 가슴에 이르고 있 었다. 와- 득! "크아아악...!" 참담한 비명과 함께 흑포인의 신형이 뒤로 퉁겨졌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좌측에서 덮쳐들던 잠마해의 수하는 또다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우측 동료의 가슴에 작렬 했던 휴도옥린의 오른손, 그 손이 어느새 자신의 어깨를 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삭! 어깨로부터 하단전까지 길게 예리한 통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놀 랍게도 휴도옥린의 맨손이 스쳐지나간 곳이 검이 스쳐간 것 만큼 이나 예리하게 베어졌고, 동시에 흑포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촤악! 그리고 피().... 휴도옥린은 그 핏 속에 우뚝 서서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을 떠올리 고 있었다. 곡하령의 침상은 비어 있었다. 휴도옥린은 흐트러져 있는 곡하령의 침상에 손을 짚었다. 미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음! 일각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데...?' "놔, 놔줘요...!" 헌데 바로 이 순간, 삼십여 장 저쪽에서 앙칼진 교성이 터져나오 는 것이 아닌가! '하령...!' 휴도옥린의 전신이 굳어졌다. 들려온 소녀의 음성은 바로 곡하령 의 음성이었다. 슈우우욱! 찰나, 휴도옥린의 신형은 다시 음성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버님...." 곡향허는 정신을 잃은 채 멍청히 서 있었다. 그의 품에는 지금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한 소녀가 죽어가고 있었 다. "저, 저는 언제나 아버님이 그 악마의 단체, 잠마해의 인물이 아 닌가 의심해 왔어요. 그러나 이제 아버님이 신검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아버님이 자랑스러워요." 곡향허의 가슴에 안긴 채 죽어가고 있는 여인, 그녀는 바로 곡미 령이었다. 곡미령의 눈은 이 순간 부친 곡향허에 대한 자부심같은 희열만이 감돌고 있었다. 곡향허의 눈빛은 멍청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곡미령에게 말하려 했으나 입이 열리지 않는 듯 고개만을 망연히 흔들고 있었다. "미, 미령아... 미령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 그녀의 이름을 덧없이 불 러보는 것 뿐이었다. 음모(), 그로서는 헤어날 수 없는 거대한 음모의 희생물이 되 었음을 느끼며.... 꽈꽈꽝! 카- 앙! "취문옥주다. 잡아라!" "취문옥주 곡향허가 저렇게 젊다니 믿을 수 없군." 잠마해의 수하들은 내가() 깊숙히 진입해 들고 있는 휴도옥린 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에서 무서운 신위를 보이며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는 휴도옥린을 취문옥주 곡향허로 오해한 상태였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내가에서 무서운 신위를 보이며 움직이고 있는 휴도옥린을 취문옥 주의 얼굴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당연히 그라고 오해한 것이었다. 휴도옥린의 한걸음 한걸음은 그로인해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러 나 그는 무섭게 밀려들고 있는 흑영들을 헤치며 자모전가의 내전 () 쪽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곡하령의 비명성이 들려온 곳이 바로 내전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르다. 지금까지의 고수들과는 전혀 다른 자들이다!' 무수한 인()의 장막을 헤치고 대청이 보이는 화원으로 뛰쳐들던 휴도옥린의 전신이 굳어졌다. 대청에 이르는 문은 넓게 열려 있고, 그 좌우로 십여 명에 달하는 흑영들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심상치 않았다. 십장 밖에서 무서운 격전이 벌어지고 있건만 그들은 마치 강건너 불구경 하듯 무심한 눈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고, 아무렇 게나 늘어선 듯한 그들의 진세()는 실로 가공해 그들이 호위 하고 있는 듯한 대청으로는 공기 한 점 흘러들 수 없을 듯했다. 뿐이랴! 제각기 긴 장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흑포인들에게서는 아직 검조 차 뽑지 않고 있건만 삼엄한 검기가 바늘처럼 뻗어나오고 있었다. '하령은 저 대청 안에 잡혀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저 대 청 안에 있는 어떤 수뇌를 호위하는 듯 한데...?' 휴도옥린은 번개같이 생각을 굴렸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다시 움직였다. 번쩍! 창-! 휴도옥린의 신형이 섬전같이 흑포인들의 삼장 거리로 다가가는 순 간, 전면에 서 있던 흑포인의 허리에서 검광이 임과 동시에 휴도 옥린의 신형이 퉁겨졌다. "...!" 휴도옥린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그는 상대가 검을 뽑는 것을 보 지도 못했는데 상대는 어느새 검을 쳐내고 다시 검을 검집에 넣은 채 팔짱마저 끼고 무심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어찌 놀랍지 않으랴! 이미 휴도옥린의 손에 쥐어져 있던 한 자루 검은 자루만을 남기고 깨끗이 부러져 나가 있었다. '으음! 가공할 쾌검이다. 헌데 이들은 그저 저 안에 있는 어떤 인 물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는 듯 하군!' 휴도옥린은 대청의 좌우에 포진해 있는 흑의인들이 자신의 진입만 을 막아낼 뿐 공격을 잇지 않고 있어 의혹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더이상 경악하고 있을 수만은 없음을 느끼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슈슈슉! 번쩍! 또 다시 그 가공할 쾌검이 좌우에서 번뜩였다. 늘어서 있던 흑포 인들이 휴도옥린의 화후가 평범하지 않음을 느끼고 대여섯이 한꺼 번에 검을 뽑아 연수()한 것이었다. 그 공세의 빠름과 정확함은 천하의 누구라도 당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스스슥! 싹! 일순 무엇인가가 베어지는 듯한 파공음이 터지며 혈광()이 일 렁였다. 휴도옥린은 반 정도 남은 검을 벼락같이 좌우로 뿌려내며 허공에서 수평으로 몸을 뉘였다. 주루루루.... 삭! 그의 몸 여기저기에서 선혈이 배어나와 허공을 물들였다. 그러나 휴도옥린의 신형은 금린도천파() 식으로 비스듬히 허공 에 누워 이미 그들 사이를 지나 대청으로 미끄러져 들고 있었다. 이것은 살을 내주고 적의 뼈를 취하는 고육지계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도옥린은 자신의 부상을 무릅쓰고 대청 안으로 진입해 들기 위해 상대의 검을 몸으로 막아내며 진세를 흐트러 뜨렸고, 그 순간의 미세한 허점을 노리고 대청 안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대단하군." 허공에 수평으로 몸을 누인 채 그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휴도옥린 을 발견한 흑포인들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들은 더이상 휴도옥린을 추적하지 않은 채 다시 포진해 대청을 호위할 뿐이었다. "...!" 천천히 대청에서 몸을 세우며 내려서던 휴도옥린의 눈에 이채가 솟아났다. 드넓은 대청 안, 그 저쪽의 태사의 위에 한 인영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중년인, 대략 사십은 넘었을 나이이다. 그러나 중년사내의 풍도치 고는 너무도 그 용모가 준미해 차라리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깊은 현기와 비정을 담고 있는 유리처럼 투명한 눈(), 타는 듯 붉은 가는 혈미(), 혈미중년인의 전면 좌우에서 다시 십여 명 의 흑영들이 호위하듯 우뚝 서 있었다. "누구냐? 신검부의 인물은 아닌 듯 한데...?" 휴도옥린이 대청 안으로 뛰어들자 혈미중년인의 눈에 잠시 놀람이 떠오른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아이를 돌려 주시오." 휴도옥린은 혈미중년인의 눈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킨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 곡향허의 둘째 딸인 이 아이 말이냐?" 혈미중년인이 의외롭다는 듯 자신의 무릎 위에 안기듯 앉아 있는 곡하령을 내려다 보았다. 그는 곡하령을 부드럽게 안고 있어 언뜻 보기에는 곡하령을 해칠 의사가 조금도 없는 듯 느껴졌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이미 곡하령에게 자유의사가 없음을 한 눈에 간파하고 있었다. 명백히 납치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호...! 천하에 그대와 같은 고수가 있었을 줄은 몰랐네. 헌데 이 아이와는 어떤 관계인가?" 혈미중년인의 눈이 휴도옥린을 쓸었다. 휴도옥린에게 적지 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다! 그들의 전면에 우뚝 서 있는 휴도옥린, 서 있다고는 하나 휴도옥 린이 서 있는 지면으로 서서히 선혈이 물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엄청난 양의 선혈이 그의 옷밑으로 흘러 발등을 적시며 이어 지면 을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헌데도 휴도옥린의 표정이나 눈빛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동요가 없었다. "그 아이를 돌려 주시오." 휴도옥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성 또한 무서우리만큼 침착했다. "호, 놀랍군! 대단해. 하지만 우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나는 비모소라 하네. 잠마해의 흑밀원을 맡고 있지." 그는 마치 사교적인 장소에서 마주친 사이라는 듯 미소와 함께 입 을 열었다. 흑살귀리 비모소, 바로 곡향허의 처단을 계획하고 있던 흑밀원주 였다. "...!" 휴도옥린은 침묵했다. 그의 전신에서는 급격히 선혈이 빠져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흑밀원주 비모소는 휴도옥린이 침묵하자 다시 화사한 미소를 머금 었다. "이 아이를 돌려달라고 했는가? 그것은 나로서도 불가능한 일일 세. 우리는 배신자인 곡향허를 놓쳤네. 해서 이 아이를 이용해 그 의 목숨을 거둘 계획이네. 그러니 이 아이의 중대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지." 처벅! 휴도옥린이 한 걸음 다가들었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짙은 선혈의 족인()이 선명히 남겨져 있 었다. 어찌보면 그것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는 광경이었고, 또 공 포스러운 광경이기도 했다. "...!" 흑밀원주 비모소가 조용히 곡하령을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쓰윽! 스스슷! 찰나, 어느새 비모소의 전면에서 호위하고 있던 십여 명의 흑포인 이 하나의 진세를 구축하며 휴도옥린의 좌우에서 바람처럼 덮쳐들 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기합성도 터져나오지 않았고, 일체의 기척도 없 었다. 그저 죽음이 덮쳐오는 듯한 기세일 뿐이었다. 그러나 동시였다. 휴도옥린의 오른손이 번뜩인 것이..., 그리고 그의 입가에 얼음같 이 차가운 냉소가 어렸다. "막지 마라!" 쐐애애액! 쉭! 휴도옥린의 오른손에서 부채살같은 백광이 사면을 치달렸다. "흥!" 다시 휴도옥린의 입에서 소름끼치는 냉소가 터졌다. 무서운 살기 가 충만해 있는 냉소였다. 카앙...! 챙! 수십 개의 폭죽이 터지듯 사위는 작렬하는 검광의 회오리에 파묻 혔다. "왁!" "끄... 윽!" 돌연,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는 검광을 뚫고 경악에 가득한 비명성 이 이어졌다. 어느새 휴도옥린은 비모소의 삼장 전면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좌우로는 흑포인들이 처참한 형태로 쓰러져 있었다. 휴도옥린의 발등으로는 여전히 그의 몸에서 옷자락을 타고 흘러 내리는 핏물이 고여가고 있었다. 그것이 비모소에게 놀람을 준 듯 했다. 비모소는 자신의 친위대가 순식간에 휴도옥린에 의해 무너지자 잠 시 그윽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조금도 당황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이때였다. 비모소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며 곡하령을 돌려줄 것을 눈으 로 재촉하던 휴도옥린의 눈 깊은 곳에 기이한 빛이 일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과 타는 듯 붉고 선()이 날카로운 혈미, 그리고 여인처럼 아름다운 비모소의 얼굴, 그 얼굴에 점차 화사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미소! 그 미소를 대한 휴도옥린은 불현듯 아주 먼 과거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자신도 모르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잔잔한 물결처럼 그의 뇌리 깊은 곳에서 떠오르고 있는 아득한 기억이었다. 그렇다! 비모소의 미소를 대하는 순간 그의 기억 속에 묻혀있던 과거속의 한 얼굴이 스치듯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현 재 눈 앞에 서 있는 비모소라는 인물의 얼굴 속에 흡수되어 가고 있었다. '저 미소...! 그래, 본 적이 있어. 바로 그 비 내리는 호수, 아버 님과 어머님을 죽인.... 저 미소를 머금은 그자였어!' 휴도옥린의 기억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비모소의 단아하고 차가운 얼굴에 떠오른 냉소가 사라지는가 싶은 순간 그의 손이 움직였다. 슉! 하나의 검날이 그의 소매 속에서 번개같이 튀어나와 그것은 정확 히 휴도옥린의 가슴을 짓쳐들었다. 상상치도 못했던 가공할 솜씨 였다. 휴도옥린은 무너졌다. 비모소의 바로 일장 앞이었다. "옥린오빠- - !" 그때 곡하령이 자신을 부르는 외침이 휴도옥린의 귀로 흘러들었 다. 휴도옥린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미 비모소가 공격이 있 기 전부터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비모소의 공격은 그의 가슴을 통해 그의 전 신경조직을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고통과 충격으로 의식을 잃어 가고 있는 상태였으나 그의 유일한 소망은 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르던 곡하령의 울부짖음이 귀에 생생했다. 곡하령은 자신의 구조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비통한 울부짖음을 토한 것이었다. 살아야될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제야 휴도옥린은 전 생애 를 걸어 추척해온 일곱 사내들 중 한 명을 찾아낸 것이었다. 나는... 아무나 공격하지 않는다. 나의 상대는 강적()일 뿐이다. 내가 이빨을 드러냈을 때는... 운명을 건 한판 승부만이 있을 뿐이다. "옥린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있었어. 만약 그가 스스로 그곳을 벗 어나고자 하는 마음만 지니고 있었더라면, 설혹 지옥 속이었다 해 도 이 정도는 되지 않았을 거야. 그는 구월구일이니까" "...!" "옥린은 그 아이를 구하려 했던 거야. 하령이라는 그 어린아이를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구하려고 했던 거였어." "살아날 수는 있을까?"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어. 적어도 아직은 죽지 않았다 는 것...." "살아나야 할텐데...." "글쎄?" 휴도옥린은 몽롱한 의식 저쪽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일남일녀의 음 성을 들으며 점차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유일한 지기인 창사와 수희란이 두런거리는 음성 같 았다. 그러나 장벽 저쪽에서 울려오는 것처럼 종잡을 수 없어 휴 도옥린은 그 음성들이 현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휴도옥린의 몸에 어떤 반응이 있는 것을 느낀 듯 창사의 음성이 질문을 던져왔다. "내 말 들리나, 옥린?" "...!" 휴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몸놀림은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냘펐다. "큰 고비는 넘겼어. 잘된 것 같아." 창사는 휴도옥린이 깨어나는 것을 확인한 후 길게 기쁨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도옥린의 전신은 얼굴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극심한 상흔들 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상처들은 모두 꼼꼼한 손질에 의해 깨 끗이 씻기우고 손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자모전가에서 화염이 치솟는 것을 보고 자네 생각이 나서 달려갔 었네. 헌데 아무도 없었고, 자네는 쓰러져 있더군." "...." 휴도옥린은 창사의 말로 자신이 그에 의해 구조되었음을 알 수 있 었다. "하령은?"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최초의 질문은 엉뚱한 것이었다. "모르겠네. 자네는 지금 일주일만에 의식이 회복된 것일세. 그간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 어린아이는 잠마해의 인물들에게 납치되고 곡향허는 신검부에서 구출해 갔다더군. 소문에 의하면 곡향허는 바로 잠마해에 숨어 있던 신검부의 첩자였다더군." "...!" "살아 남은 사람은 없었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지. 관부 에서도 이 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조사 중이네. 죽은 곡미령이라 는 대공녀가 바로 장안부사의 아들과 정혼되어 있었기 때문인 듯 하네." 지난 일주일 동안 휴도옥린은 생사의 기로를 헤맸고, 그런 후 병 세가 호전되었다. 창사는 그런 휴도옥린을 간호하면서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휴도옥린의 의지가 강하다는 점이었다. 그로서는 믿 을 수 없으리만큼 강렬한 생존의욕을 보인 것이었다. "나의 상태는?" 한참 후에야 휴도옥린은 두번째 질문을 던졌다. 창사는 신중하게 설명했다. 검상()이나 자상() 등에 의한 상처에 대해서 그들 두 사람은 모두 경험이 많았다. "자네는 모두 열한 번의 검상을 입었네. 그중 아홉 곳에 상흔은 가벼운 것이었지만 한 곳은 심장을 건드렸고, 또 한 곳은 왼쪽 다 리의 근육에 손상을 입혔네. 다리의 상처는 이미 잘 손질했네만 심장 쪽의 상처는 아직 조심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이렇게 깨어 났으니 염려할 것은 없을 듯 하네." "나는 너무 느렸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 "놈들은 강했어." 창사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휴도옥린이 고개를 힘없이 흔들었다. "알고 있어. 잠마해 내에서도 최고의 살인자들이었네. 하지만 내 가 좀더 민첩했더라면 최소한 그 아이만은 구할 수 있었을 것이 네." "잠마해 최고의 고수들 중 열여섯이 자네의 손에 죽어 있었네. 나 는 그들의 상흔을 훑어보고 한 눈에 자네의 솜씨인 줄 알았지. 그 정도면 구월구일의 신화는 무너지지 않았네." "구월구일...?" 창사의 말에 휴도옥린의 전신에 기이한 반응이 일어났다. 이어 자 조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 구월구일이 바로 나였지." 휴도옥린은 고개를 외면하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주루 안채의 내 실인 듯 천장이 유독 낮았다. 휴도옥린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지고 눈은 멍하니 얼빠져 있었다. 그의 사고()는 이 순간 십칠 년 전의 망각의 강() 저쪽을 흐르고 있었다. ...소상야우, 비내리는 호수, 그리고 일곱 사내. ...여인의 눈썹처럼 그린 듯한 붉은 눈썹과 아름다운 얼굴, 투명 한 눈. ...부모를 죽인 일곱 명 중 하나는 붉은 눈썹을 지닌 아름다운 얼 굴의 청년이었어. ...그래, 맞아! 바로 하령을 옆구리에 낀 채 화사한 미소를 머금 던 그 자였어. 그렇다! 휴도옥린은 잠마해의 흑밀원주인 흑살귀리 비모소의 얼굴에서 아 주 먼 기억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미미한 잔물결처럼 더듬어 올린 것이었다. 문득 창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휴도옥린의 얼빠진 채 멍해 있던 눈빛이 변해 있음을 발견한 것이 었다. 휴도옥린의 얼굴은 얼어붙은 채였고 표정이 전혀 없었다. 눈 역시 아직도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눈은 증오로 이 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천하인들은 자모전가의 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있어온 잠마해와 신검부의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의 전쟁이 표면으로 드러난 하나의 단편적인 사건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들은 단지 신검부의 무능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신검부를 위해 잠마해 깊숙히 침투해 일하던 한 인물이 전 가족을 잃고 기반마저 잃어버린 사실에 신검부의 능력에 어느 정도 회의 를 느낀 듯했다.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 천하인들은 별로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드러난 상황만을 믿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모전가의 참화는 무림이라는 곳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천하를 장악하고 있는 한 거대한 세력을 분노케 하고 있었다. - 장안병마절도부(). 흔히들 천승대장군부()라고 부르는 곳이다. 중원의 하늘 아래 숨을 쉬면서 설혹 당금 천자의 황호()가 무 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이 천승대장군부를 모르는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당금천하의 병권()을 모조리 한손에 쥐고 있고, 제이의 무림 이라 지칭되는 관부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 최고 의 풍운아 천승대장군 희백()이 거처하고 있는 곳. 팔십만()에 달하는 금의위()와 일백이십만( )에 달하는 황군()을 눈빛으로 호령하며 무림을 아예 안중 에도 두지 않고 있는 인물, 그가 바로 천승대장군 희백이고 그가 국사()를 논하며 머물고 있는 곳이 장안병마절도부인 것이다. 천자()에 버금가는 권위와 영광 그리고 한 황조()를 다시 세울 수도 있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천승대장군. 오십여 리에 펼쳐져 있는 긴 담장 뒤에는 수십여 채의 고루거각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데.... - 천승위전(). 장군부의 중심부에 당당히 서 있는 삼층 고루거탑. 천승대장군 희백이 기라성같은 대명()의 무장들과 정사를 논 하는 이 천승위전의 삼층에 지금 수많은 인물들이 엄숙한 신색으 로 좌정해 있었다. "...!" "...!" 너무나도 넓어 대전이라기보다는 아예 광장을 방불하는 곳이다. 바닥에는 세 치 길이의 융단이 은빛으로 깔려 있고 그 위에 당당 히 갑주()를 걸친 무장들과 신태비범해 보이는 관부무인( )들이 삼십여 명이나 엄숙한 얼굴로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면, 아득해 보이는 저 끝에 거대한 태사의가 놓여 있고, 지금 그 위에는 평범한 백의를 걸친 한 인물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반백의 머리와 백의가 참으로 잘 어울려 눈이 부시고, 불그스레한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 없어 어찌 보면 홍안소년의 피부같다. 누구란 말인가.? - 천승대장군 희백. 오히려 천자 이상의 권위를 지니고 있고, 그가 머무르는 장군부를 일러 아무도 주저하지 않고 제이의 자금성()이라 말하게 만 들고 있는 인물, 바로 그였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단아한 백삼을 걸친 그에게서는 관부무림 최강의 인물다운 기도는 커녕 대장군다운 위엄조차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천승대장군 희백은 조용한 눈길로 좌하에 좌정해 있는 삼십여 명 의 인물들을 쓸어보고 있었다. "그래, 이 장군부가 있는 장안에서 그런 살인극이 벌어지는 것을 계속 방관만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들 하시오?" 천승대장군 희백은 지금 자모전가의 일에 대해 입에 담고 있었다. 그의 담담한 눈에는 은은한 노기가 비치고 있었는데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자모전가는 바로 장군부와 사돈지간이 될 뻔한 가문이었던 것이 다. 그의 둘째 아들과 자모전가의 첫째딸인 곡미령이 정혼한 것은 이 미 칠 년 전의 일, 이것은 오직 자모전가의 가주 곡향허가 유림에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이유 때문이었다. "황상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뭐라 생각하시겠소. 일개 무림세력이 관부를 희롱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 살상하고, 게다가 불까지 지르고 있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니... 더구나 이 장군부가 있는 곳에서 말이오." "...."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뒤덮여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 은 없었다. 이제와서 조사니 뭐니 입을 열어 보아야 오히려 희백 의 심기만 거슬리는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희백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번 자모전가의 일은 좀 더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오. 이미 일차적인 조사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 오." 서서히 희백의 두 눈에서 무서운 위엄이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곡대인이 음모에 희생된 것이라면 잠마해 뿐만 아니라 이 일에 관계된 신검부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대, 대인...!" "장군!" 좌중 인물들의 눈이 커졌다. 너무도 담담히 흘러나온 음성에 비 해, 그 내용이 실로 놀랍지 않은가! "그, 그렇다면 이 일이 단순히 잠마해라는 무리들의 짓이 아니라 신검부까지 관련되었다는 뜻입니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희백의 눈치를 살폈다. 희백이 고개를 저었다. "추측일 뿐이오. 해서 더 자세한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소." "그렇다면 이 일을 누구에게 맡기실 것입니까? 허락하신다면 소장 ()이 맡아볼까 합니다." 가장 말석에 앉아 있던 이십대 후반의 황의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부리부리한 호목()에 날카로운 검미(), 보기에도 날렵해 보이는 몸매 등이 한눈에 뛰어난 후기지수로 느꼈졌다. 희백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천규()! 너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일을 맡을 사 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 그게 누구입니까?" "나는 이 일을 둘째에게 맡겨 보려 한다." 둘째라면 바로 장군부의 이공자()를 일컫는 말일 게다. "...!" 순간, 좌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스치고 있었다. '그, 그 망나니를...!' '세상에 주색을 밝히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그 이공자 말인가?' 모두의 얼굴에 어이없어 하는 빛이 스치자 희백이 얼굴을 굳혔다. "공대선생()!" "예, 대인!" "그 아이에게 내 뜻을 전하는 것은 선생이 맡아 주시오. 그리고 더 할 말들이 없는 듯 한데 이만들 물러가시오." "예! 그럼...." 좌중의 인물들은 무엇인가 입을 열고 싶어하는 기색들이었다. 그 러나 희백의 표정이 이미 굳어져 있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채 물러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드넓은 대전에 천승대장군 희백만이 홀로 앉아 있었 다. 모두들 물러나는 순간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르 기 시작했다. "놈...! 네놈이 짐짓 망나니 행세를 하며 모두의 눈을 속이고 있 지만 내 눈마저 속이지는 못할 것이다." 희백은 독백과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뒷짐을 지며 천천히 대전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네가 천밀영()의 영주()임을 알고 있다. 허 니 이번 일은 아무래도 네가 맡아야 하는 것이다. 죽은 곡미령이 라는 소저는 그래도 너의 정혼자였으니...." - 천밀영(). 황실의 안전을 위해 천자()가 비밀리에 설치한 친위조직( ). 이 천밀영은 황실에 대한 모반()를 감시하는 철저한 비밀조직으로 그 구성은 완전한 신비에 가려 있었다. 그 권위는 드러나 있는 황실감찰기관인 동창()을 오히려 능가하고 있었 는데.... 수십여 채의 웅장한 고루거각으로 이루어진 장군부의 깊숙한 어느 한 곳. 화원을 가로질러 한 청의노인이 휘적휘적 눈에 보이는 대전을 향 해 다가들고 있었다. 신선풍의 청의 노문사는 깊은 현기를 엿보이는 눈을 빛내고 있었 는데 그의 얼굴은 지금 잔뜩 찌푸러져 있었다. 청의 노문사는 이내 대전 안으로 들어서 수없이 늘어선 여러 방들 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곧바로 회랑을 통과해 가장 안쪽의 내 실로 다가갔다. 문 앞에 이르자 노문사는 가벼운 기침을 터뜨린 후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는 이내 밖으로 밀리듯 되 돌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어디를 가시려는 참입니까?" "아, 예! 자당()과 약속이 있어서...." 열려진 문으로 흑의청년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섰다. 보기 드물게 준수한 용모와 흰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감돌고 있는 청년. 대략 이십칠팔 세는 되었을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청의노문사와 문 앞에서 맞닥뜨린 것이 몹시 난처하다 는 듯 억지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검은 윤기가 흐르는 흑금의()는 깨끗이 손질되어 먼지 한 점 묻어 있지 않고, 양소매 끝에 가로질러 수놓여져 있는 가는 금 선()은 화려함을 돋보이고 있다. 여기에 여인들이나 지니고 있을 화사한 금잠()으로 치렁한 흑발을 우아하게 어깨 한 쪽 에 고정시켜 놓았다. 오른손에 가볍게 쥐고 있는 흑우선() 또한 범상치 않은 물 건으로 느껴져 전체적으로 흑의청년의 모습은 보기 드문 풍류공자 의 인상이었다. - 잠풍인랑() 희수수(). 장군부 내에서는 모두들 그를 일러 흑린공자()라고 부른 다. 이 시대 최고의 권세와 영광을 자랑하는 대장군부의 이공자( )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희대의 풍류아가 바로 그였다. 하룻밤에 만금 은자를 물쓰듯 뿌리고, 장군분의 이공자라는 엄청 난 신분을 조롱하듯 기방() 출입을 일삼으며 무공연마에는 아 예 손을 끊고 있는 인물. 잠풍인랑 희수수가 무심코 대꾸한 말에 청의노문사의 얼굴이 일그 러졌다. "자당이라면 기녀() 아닙니까?" "아, 아니오. 그 아이는 단지 매월()을 만나기 전에 잠깐 얼 굴이나 보려는 것이었...." 잠풍인랑 희수수는 자신의 말이 잘못됐음을 느끼고 황급히 정정하 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다보니 더 난처한 말이 튀어나오고 만 것이었다. "끄응...!" 청의노문사는 아예 질렸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의 얼굴이 근엄하게 변해갔다. "이공자!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그렇게 기방 출입을 일삼 아서야...." "알, 알았소. 헌데 어쩐 일로...?" 노문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희수수는 노문사가 정색하자 내심 귀찮기 이를데 없는 듯 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말씀해 주십시요.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서...." "지금 자당 따위의 기녀 일에 신경쓸 때가 아닙니다." "...." 희수수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말을 할수록 노문사의 잔소리만 늘어난다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었다. 눈 앞의 노문사야말로 희수 수에게는 천하에서 가장 귀찮은 존재였다. 단정한 청의문사복에 학익건, 그리고 그 아래 현기 담긴 그윽한 눈, 한 눈에 보기에도 인품과 덕을 겸비한 대문사로 느껴지는 청 의노인이었다. - 공대선생(). 잠풍인랑 희수수를 어릴 때부터 가르쳐온 글선생이다. 그 공대선생은 완고하기 이를데 없어 희수수로서는 그의 눈을 피 해 부내를 빠져 나가는 일이 매일의 최대 일과였다. "이공자께서는 자모전가의 미령소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희수수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러 나 그는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게 뭐 있습니까? 어쨌든 그녀는 나의 정혼녀 아닙니까." "...!" "더구나 공대선생께서 월하빙인()이 되어 주선한 혼약이 니 저야 따를 뿐이지요." "음! 내 말은...." "하하, 무슨 말인지 알았습니다. 또 그녀를 자주 만나 가깝게 지 내라고 닥달하시려는 생각이시로군요." 공대선생은 난처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이어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녀는... 죽었습니다." "...!" 일순 희수수의 눈이 멍청해졌다. "잠마해라는 무림 단체의 습격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자모전가는 멸문되고, 부친은 신검부에서 구출해 냈으나 동생은 또 잠마해로 납치되었답니다." "...!" 잠시동안 희수수는 말이 없었다. 그는 더이상 공대선생이 입을 열 때마다 그의 수염이 흔들리는 모습을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 었다. 희수수는 더이상 익살스러운 표정을 띠우지 않은 채 공대선생을 직시했다. "단지 그 일을 알려주러 온 것입니까?" "그것 만이 아닙니다. 자모전가의 일로 인해 대인께서 분노하셨습 니다." "아버님이?" "예! 해서 이 일을 이공자께서 조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내게 직접 그 사건을 조사하라고 명했단 말이오?" "예! 은밀히 진정한 범인을 밝혀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마해의 습격이었다고 하지 않았소?" 희수수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그의 말에 공대선생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인께서는 이 사건이 단순하지 않다고 느끼신 듯 합니다." "...." "어떡하시겠습니까? 맡아 보시겠습니까?" "알았소, 알았소이다. 내 한 번 다녀 오리다." 잠풍인랑 희수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 작했다. 자신의 아내가 될 뻔한 여자의 죽음 따위는 이미 잊은 듯 낙천적인 표정이었다. 공대선생이 다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런 식으로는 곤란합니다. 대인께서는 이 일로 이공자의 능력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기왕에 맡겠다면 철저하게 파헤쳐야 합니다. 지원은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끄응...!" 잠풍인랑 희수수는 어쩔 수 없이 귀찮은 일에 떠맡겨진 것이 한심 스럽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알았소. 아버님이 만족하실만큼 조사해 보겠소. 잠마해의 수하들 중 몇 놈 정도는 잡아낼 수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지금 곧 출발하십시요. 모든 준비는 이미 해 두었습니 다." "지금 당장 말이오?" "예! 지금 당장...!" "하, 하지만 오늘은 만날 사람이 많은...." "기녀들 말입니까?" 공대선생의 눈에 추상같은 위엄이 솟아나자 희수수는 찔끔해 손을 내저었다. "알았소. 지금 당장 조사에 착수하겠소." 희수수가 응락하자 공대선생의 눈에 그제야 안도의 빛이 떠올랐 다. 공대선생은 다시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이공자, 노부는 직접 이 손으로 이공자를 길렀습니다. 때문에 누 구보다도 이공자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지요. 저를 실망시키지 마 십시요." "...!" 공대선생이 사라지자 잠풍인랑 희수수의 익살스럽기만 하던 표정 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더할나위 없이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잠마해... 후후! 드디어 이놈들을 상대해야 할 때가 왔단 말이 지... 이 희수수가 말이야!" "훗! 좋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너뜨려 주지. 나의 정혼녀를 죽인 대가로..., 그 과정에서 신검부의 혁련노사에 대한 것도 밝 혀내면 좋겠고...." 조각같이 단아한 희수수의 얼굴, 그 맑은 눈은 이제 더이상 세상 을 조롱하는 장난기 어린 눈빛이 아니었다. 무서우리만큼 담담한 그 무엇이 그 눈 깊은 곳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한편 이 순간, 천하를 강타할 폭풍은 또 다른 곳에서도 잉태되고 있었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이백 년 전(). ...황산() 천인봉(). 노인(). 노인이되 깊숙히 갈무리한 생명의 힘()을 엿보이게 하고, 단아 한 용모와 그윽한 눈길은 그야말로 천신()을 대하는 듯 하다. 희고 맑은 피부와 흩날리는 백염(), 인간으로서 더 이상 위대 하게 느껴질 수 없는 풍도의 백의노인은 오래 전부터 칼날을 거꾸 로 세워놓은 듯한 천험의 절지인 황산 천인봉의 정상에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전면, 언제부터인가 한 명의 청의노인()이 무 릎을 꿇은 채 허탈한 눈으로 지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청의노인의 기태는 실로 당당했다. 산발된 잿빛 머리칼에 황야에 몰아치는 삭풍에 그을린 듯한 거무스름한 피부와 뇌전이 이는 듯 한 눈() 등은 실로 웅장한 무인의 표상이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중간 부근이 끊겨나간 한 자루 반검()이었고, 그의 얼굴에 가득해 있는 것은 허탈과 패배의 굴욕감 뿐이었다. 청의노인의 가슴에서는 지금 검붉은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허허헛, 이제 신검부는 무림의 정상, 이제 무림은 영원히 그대의 발 아래 조아리게 되었군." 문득 청의노인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백의노인은 홀연히 선 채 그 그윽한 눈길을 천공에 두고 있을 뿐 이었는데.... 그가 누구란 말인가? - 천공() 금무극( ).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중원무림의 혼란과 죽음의 혈사() 를 종식시킨 위대한 기인(). 신검부라는 초무림단체를 탄생시켰고, 그로써 천하의 온갖 무림제 파들을 굴복시켜 하나의 무인제국()으로 일통시킨 위대한 무인(). 그렇다! 뉘라서 이 이름을 모르랴! 대하는 것만으로도 천신()의 위엄을 풍기고, 부드럽고 단아한 얼굴만으로도 항거할 수 없는 기도를 느끼게 하는 이 시대 최강의 무인.... 헌데, 그렇다면 이제 마악 비무를 마친 듯 천공 금무극의 앞에 무 릎을 꿇고 있는 청의노인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 신황금검() 사도정천(). 중원의 육문칠가() 중 최고의 가문이자 천하제일가( )로 불리우는 사도제일가()의 당대가주. 천하제일가 사상 가장 호쾌한 풍운아()로써 천공 금무극이 라는 인물과 신검부라는 단체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최강으로 군림 하던 전대의 최강자. 그렇다! 한 사람은 도전했고, 그리고 한 사람은 무인()으로서 그 사람 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사람은 패배하고, 한 사람은 승 리한 것이었다. 승자()는 신검부를 세운 천공 금무극이었는데 이것은 곧 천하 제일가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부탁이 있네." 짙은 허탈과 패배의 굴욕으로 망연한 눈빛을 던지던 신황금검 사 도정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천공 금무극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눈을 돌렸다. "십 년(), 신검부와 본가가 격돌한 것이 어연 십 년이었던가? 나는 오만()의 수하를 모두 잃었고, 천하에 퍼져 있는 속가 ()의 영재들을 모조리 그 싸움에 잃었네." "...!"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무너져 버린 천하제일가이나마 단맥() 시키지 말아 달라는 것이네." 사도정천의 말에 천공 금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도정 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단 한 마디.... "고맙네." 그 말을 끝으로 사도정천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이미 스스로의 심맥()을 끊었던 것이다. "잘 가게. 이 시대에서 유일했던 나의 적이며 지기였던 사람이 여...."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던가? 천공 금무극은 무심한 눈을 다시 천공으로 돌렸다. 그의 무심한 눈 저쪽에는 한 가닥 안도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이제 신검부라는 초무림단체의 탄생을 위한 그 길고 길었 던 마지막 진통이 끝을 맺은 것이었다. 무림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천하제일가는 이렇게 무너졌다. 무()에 입문한 무인들에게 가장 우선되던 무혼()의 가문, 신검부라는 항거할 수 없는 피()의 폭풍 앞에서 장장 십여 년에 걸친 대혈전을 이어왔던 가문이었다. 이제 마()와 사()는 지하 깊숙히 몸을 숨겼고, 지상 위의 모 든 정도무림은 신검부의 깃발 아래 무릎을 끓었다. 천하제일가의 제이십칠대 가주였던 신황금검 사도정천의 패배로 유일하게 그 힘 의 폭풍 앞에 항거하던 한 위대한 가문도 이렇게 종식된 것이었 다. 그러나.... 그로부터 칠십 년 후(). 천하에서 가장 파도가 거칠기로 유명한 남해() 천심만( )의 해안에서 백여 장 떨어져 있는 파도 속에 이 인이 우뚝 서 있었다. 쏴아아아.... 철썩! 파도는 허리까지 잠겨있는 그들의 몸을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는 데.... "졌군!" 문득, 한 자루 반검()을 든 마의노인()의 얼굴에 허 탈함이 스치고 있었다. - 검왕 사도황( ). 천하제일가의 이십구대 가주. 그는 신황금검 사도정천의 손()으로써 천하제일가의 부러진 반 검()만으로 천하 최강의 검호()라고 손꼽히던 인물이었 다. 검왕 사도황의 전면에는 새파란 학창의를 걸친 삼십대의 중년인이 마치 파도를 밟듯 당당한 기도를 풍기며 우뚝 서 있었다. 맑은 피 부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그윽한 눈은 단 한 번도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 제이대() 신검부주().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신비인(). 그가 천하를 일통시킨 신검부의 제이대 부주가 된 내막을 아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가 무공을 펼치는 것조차 본 사람 이 없었는데.... 그렇다! 또 다시 도전한 제이십구대, 천하제일가의 가주인 검왕 사도황은 단지 신검부의 신화를 다시 입증해주는 결과 밖에 되지 못한 것이 다. 철썩! 쏴아아.... 피에 물든 검왕 사도황의 몸이 서서히 파도에 휩쓸려가고, 천심만 은 다시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천하제일가의 제이십구대 가주 검왕 사도황이 비축했던 가문의 모 든 힘을 쏟아부어 신검부에 도전한 것은 처절한 혈사()였다. 붉은 피가 천하를 적신 이 대혈전은 장장 삼 년을 끌었고, 아무도 신검부가 이번에도 승리하리라고 장담하지 못했던 싸움은 결국 다 시 신검부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그러나 신검부는 천하제일가를 용서하고 그 불타버린 천하제일가 를 다시 건립해 주었다. 이제 천하제일가의 혈육이라고는 검왕 사도황의 손자인 일곱 살짜 리 소동() 한 명 뿐이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일백삼십 년 전의 일이었다. 처벅... 처벅! 음습한 습기에 젖어 있는 어둡고 긴 동혈(). 미로()처럼 얽혀있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동혈 속에 한 흑의 노인()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피부는 밀랍처럼 창백하고, 두 눈이 움푹 패인 채 자광()을 흘려내고 있는 흑의노인은 너무도 말라 흑의가 헐렁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뺨 또한 움푹 깎여나가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이는 흑의노 인은 긴 수염조차 은빛으로 물들어 있어 족히 일백 세는 넘어 보 였다. 그는 양손을 서로 다른 쪽 소매속에 넣어 팔짱끼듯 한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음산한 모습이면서도 사실 자세히 보면 청수하기 이를데 없었다. 풍기는 기운은 극도의 무심과 냉막함 뿐. 동혈의 한 부분에 이르자 어린아이 팔뚝 굵기의 철장이 가로막혀 있었다. 철커덩! 노인은 예의 철장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려 연 후 다시 안으로 걸 음을 옮겨갔다. 처... 벅! 처벅! 미로처럼 얽혀 있는 깊고 깊은 동혈을 이리저리 돌아 이십여 장 쯤 전진했을까? 전면에 돌침상이 눈에 띠고 그 위에 한 괴영이 웅 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태어나서 한 번도 빗어보지 않은 듯한 긴 흑발과 전신에 칭칭 감 겨있는 흰 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돌침상 위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괴영이 눈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두 눈과 전신에 칭칭 휘감겨 있는 흰 천 뿐이었다. 괴영의 차가운 눈 속에는 살기()가 퍼렇게 번뜩였다. 그러나 흑의노인은 개의치 않은 채 괴영에게 다가들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를 가로 막았다. 흑의노인의 눈빛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종(), 네가 이 동혈에 들어올 때가 일곱 살이었으니 지금 의 네 나이가 꼭 스물일곱이겠구나." 흑의노인의 음성이 가볍게 떨려 나왔다. 감회와 회한이 어린 음성 이었다. 순간 괴영의 눈에서 야수()같은 섬광이 번뜩였다. "듣기만 해라. 네가 묻고 싶었던 그 모든 것을 오늘 모두 이야기 할 것이니...." "...!" "지금으로부터 꼭 이백 년 전(), 천공() 금무극( )이라는 인물이 무림에 나타났다." "...!" "그는 신검부를 세우고, 무서운 힘으로 소림과 무당을 위시한 중 원 구대문파와 명문대파인 육문칠가()를 굴복시켰다. 붉 은 피가 천하를 적셨고, 결국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던 중원의 명문정파들은 모조리 신검부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 부르르.... 흑의노인의 은염()이 한 차례 진동을 일으켰다. 흑의노인은 한 차례 입술을 깨물더니 비감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신검부에 굴복하지 않은 가문이 있었다. 바로 본 가였던 천하제일가()였다." 뚝! 투둑! 어디선가 천장을 적시며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소리만이 울려 퍼 지는데.... "그로부터 십여 년간, 본가와 신검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처절 한 혈투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오만()에 달하던 수 하들과 천하에 퍼져 있는 본가의 속가()들이 모조리 괴멸되었 다." "...!" "그 싸움에서 본가의 이십칠대 가주()이셨던 신황금검( ) 사도정천() 선조께서 가문을 단맥()시키지 않는 다는 약속만을 받아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흑의노인의 입가에 쓸쓸한 고소가 맺혔다. 폭발할 것 같은 울분이 함유되어 있는 쓸쓸한 미소였다. "그로부터 칠십 년이 흐른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일백삼 십 년 전, 그 가문의 치욕을 씻기 위해 신황금검의 손()이었고, 내게는 조부 되시는 이십구대 가주께서 다시 신검부에 도전했다." "...!" "칠십 년 전보다 더욱 강해진 본가의 힘을 모두 동원한 무서운 혈 전()이었다. 그러나 결국 검왕 사도황 조부조차 제이대 신검 부주와의 비무끝에 천심만에서 돌아오지 못할 고혼이 되고 말았 다." 처절하기까지 한 천하제일가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듣고 있는 괴영의 눈빛은 아무런 변화가 없어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흑의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제이대 신검부주는 본가를 용서했다. 조부의 죽음만으로 모든 것 을 사한다는 명을 내리고 오히려 본가를 재건할 수 있도록 도와주 었다." 흑의노인의 눈, 자광으로 빛나던 그 눈은 무섭도록 텅 비어 있었 다. 그는 침상 위의 괴영을 향해 텅 빈 눈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재건된 텅 빈 본가에 남아 있는 혈육이라고는 그때 겨우 일곱 살이었던 나 하나였다. 천하제일가가 다시 웅장하게 재건된 그날 수하들과 모든 가솔들이 죽고 텅 비어 버린 그 황량하기만 한 본가에서 나는 공포와 고독으로 몸을 떨며 결심했다. 신검부! 그들에게 도전하겠노라고...." 뚝...! 뚝! 천장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침 묵 속에 흑의노인의 말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팔만사천수라황(), 본가를 세우신 일대조사 이외 에는 아무도 연성하지 못했다는 그 무적의 검공()! 나는 그 검공을 익히는데 실패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최고의 기재였던 조부께서 겨우 오성() 밖에 연성하지 못한 것을 나 혼자 연성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 "태어나는 순간 이미 벌모세수 되어야 하고, 인체의 모든 것을 무 ()를 익히기에 적합한 체질로 역근()해야 하며, 그리고도 이십 년 이상 지옥의 훈련을 거쳐야 겨우 완성되는 무공... 그것 이 바로 팔만사천수라황이었던 것이다." "...!" "또 하나 내가 팔만사천수라황을 연성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본가의 검이 부러진 반검()인데 반해 나의 팔이 정상이었다는 점이었다. 반검을 사용하려면 한 팔을 희생시킨 후 연성했어야 하 는데 나는 말년에서야 겨우 그 점을 깨달은 것이었다." "...!" "이제 내가 너를 태어나는 즉시 너의 왼팔을 베어낸 이유를 알 것 이다."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돌 침상 위에 웅크리고 있는 괴영의 왼소 매가 헐렁해 보인 것은 그 안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란 말인 가...? "그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너를 택했다. 그래, 너를 계획적 으로 잉태시킨 것이다." 탄생조차 복수를 위해 계획했다는 엄청난 말, 흑의노인의 음성이 문득 떨려 나오기 시작했다. "안다! 그동안 네가 겪어야 했던 그 지옥의 고통과 햇빛 한 점 들 어오지 않는 이 동혈 속에서 보냈던 너의 그 음습한 세월을... 나 는 네가 그 고통과 몸부림치는 고독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만년 청강으로 철장을 만들어 입구를 봉쇄하기까지 했다." "...!"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더라면 너 역시 팔만사천수라황을 어찌 연성했겠느냐!" - 팔만사천수라황. - 천하제일가 최고의 무공. 툭! 문득, 희디 흰 비단에 둘둘 말린 기물체가 침상 위의 괴영 앞에 놓여졌다. 싸여진 형태로 보아 한 자루 검이 분명했는데 그 길이 는 일반의 검과는 달리 한 자 반에 지나지 않을 듯 싶었다. "이제 너는 이 음습한 곳에서 나가야 한다. 저 강호로... 그리고 잠마해에 들어가라." "...!" "너의 탄생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탄생부터 너는 비밀이었 고, 그리고 본가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잠마해를 장악해라. 그리 고 그 힘으로 신검부를 무너뜨려라. 이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 다." 허탈해졌음인가...? 흑의노인의 음성이 차라리 담담해지기 시작했 다. 침상 위의 괴영은 그 동안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 너는 천하제일가를 잊어야 한다. 삼십일대 가주인 나를 죽 이고 천하의 죄인이 되어 잠마해에 들어가거라. 네게는 진정 인륜 ()으로서는 하지 못할 짐을 안겼다. 아버지라고 불리울 자격 도 없는 나이지만. 너의 손에... 아들 손에 죽고 싶구나." "아, 아버... 지!" 괴영의 입에서 처음으로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야수 가 울부짖는 듯한 한이 응어리진 음성이었다. "물론 너 역시 이 일에 실패하면 너의 아들 손에 죽어야 할 것이 다. 그것이 운명인 것이다. 가라! 그리고 삼 일 후 천하제일가의 삼십일대 가주인 내게 도전해 나를 죽여라!" 처벅...! 처... 벅! 흑의노인이 어느새 몸을 돌렸다. 동굴은 길고 또 어두웠다. 뚝...! 뚝! 때때로 천장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흑의노인의 발등에 떨어지고 있 을 뿐 사위는 어둠과 정적만이 휘감겨 있었다. "아, 아... 버... 님!" 괴영이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제자리에 무릎을 끓었다. 철커덩! 멀리서 철장이 흔들리는 음향이 울려왔다. 그러나 그 철장이 다시 닫히는 음향은 언제까지도 들려오지 않았다. ... 천하를 강타할 대폭풍이 잉태되고 있는 곳, 이곳은 어느 이름 없는 동굴이었다. : 9장 살수()의 신화()! 휴도옥린의 회복은 순조로왔다. 칠주야가 흐른 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앉을 수 있었고 걸을 수도 있었다. 그는 무리하지 않았다. 자신의 육체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창사에게 부탁해 자모전가 주변에 대한 모든 일을 은 밀히 알아보도록 했다. 자모전가와 거래하던 모든 전장들과 상인()들에 대한 것은 이 미 그의 뇌리에 담겨 있었다. 그가 창사에게 부탁한 것은 그들 내 부의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자모전가와 관계되어 있던 모든 인물들에 대한 창사의 조사 결과를 커다란 서책으로 만들어 꼼꼼히 기록해 나갔다. 어찌보면 그는 무척이나 태연했고, 그리고 한가롭게까지 느껴졌 다. 그것은 창사와 수희란의 예측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는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일부러 어느 정도 힘든 일을 맡아 하기도 했고, 잔심부름 따위를 자청하기도 했다. 일개월 후, 휴도옥린은 자신의 회복이 예상했던 만큼 순조로움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일개월 후 휴도옥린은 창사와 함께 주 루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이미 석양을 볼 수 있는 시각이었다. 휴도옥린이 부상에서 회복되고 있는 동안 겨울은 지나갔고 그리고 봄기운이 대지에 충만되어 있었다. 휴도옥린은 처음 이곳을 찾아왔을 때 그곳 탁자에 앉아 있던 것이 마치 옛날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는 그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대해 창사에게 조용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구해내야 하네. 잠마해의 어딘가에 갇혀 있을 그 아이 를...." "자네는 정말 그 아이를 좋아 했었군 그래." 그는 창사의 표정을 보고 약간 웃었다. "사실이야." 휴도옥린은 석양에 잠겨가는 야공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나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내 친동생만치나...." 돌연 휴도옥린의 눈에 기이한 빛이 솟아났다. 그것은 무언가 반드 시 해야할 일을 찾아낸 사람의 그런 눈빛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아이를 구해야만 하는 이유가 또 있네. 결국 나는 찾아낸 거야. 가슴 저 아래 묻어 두었던 그 증오의 대 상을...." "찾고자 하던 그 자들을 발견했단 말인가?" 창사는 다소 놀란 듯했다. 휴도옥린의 과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는 휴도옥린의 지난 세월 이 자신의 부모를 죽인 미지의 일곱 명에 대한 증오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자들 중 한 명이었어. 비모소라 하더군. 스스로 말 이야." "비모소...?" "그래! 그 자는 나의 부모를 죽였고, 그리고는 이번에는 그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갔어. 오직 그 아이의 부친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로 말이야." 휴도옥린의 눈은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분노와 증오가 옆 에 앉아 있는 창사에게도 전염될 정도로 강렬했다. 휴도옥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단순하지 않아. 단순히 잠마해만 관계된 것 같지는 않 아." "무슨 말인가?" "나는 이미 그 사건이 벌어지기 며칠 전부터 자모전가에 기이한 그림자가 덮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네. 음모의 냄새 였지. 추악하고 더러운...." "...!" "이 일은 단순히 곡향허가 잠마해에 숨어있던 신검부의 첩자라는 그런 차원이 아니야. 좀더 조사해보면 알겠지만 무엇인가가 있어. 신검부와 잠마해 양쪽 수뇌부와 연관이 되는...." 창사는 휴도옥린이 느끼고 있는 사건의 깊숙한 점은 알 수 없었 다. 그러나 그가 느낀 것은 명확했다. 휴도옥린, 그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를 구하는 일과 자신 개인의 복수가 기이하게도 겹쳐 있 지만 그가 잠마해 전체와 나아가 신검부까지도 그 복수의 대상으 로 삼고 있음은 확실했다. "어린 아이는 내가 구해내겠어. 그러나 가슴이 아픈 것은 이제 그 아이는 더 이상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야. 마치 내가 겪었 던 그 암울한 유년기처럼 말이야...!" "...!"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자들을 응징할 계획이네. 그리고 나의 어 린 시절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그 일곱 명도 함께 찾아내겠네." "그렇다면 그 일에 신검부가 개입되어 있다면 신검부까지 공격하 겠다는 것인가?" 창사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휴도옥린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창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큰 목소리로 웃었다. 휴 도옥린의 명확한 계획을 알게 됨에 따라 웃음소리도 더 높아졌다. 믿을 수 없다는 웃음이 아니라 휴도옥린의 계획을 기뻐하는 웃음 이었다. 휴도옥린도 미소했다. "매원, 매원의 매화가 다시 피어나겠군. 달이 교교한 밤에 말일 세." "물론이지. 매원은 다시 천하 위에 나타날 것이네. 나 구월구일이 존재하는 한..., 그러나 이번에는 명령에 따른 맹목적인 살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의지에 의한 살인일 것이네." 휴도옥린은 매원의 신화가 다시 피어날 것을 예상하고 즐거워하는 창사를 향해 미소와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해." "걱정마! 옥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돕겠네." 창사는 휴도옥린의 어깨에 손을 짚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살인은 하고 싶지가 않아, 그것만은 그만 두겠네. 아내와의 약속이야. 그러나 다른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 좋아." "자네에게 살인을 부탁하진 않겠네. 해준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 어. 죽이는 일은 내가 맡겠어. 하지만 나를 도우는 것만으로도 신 변에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네." "그렇겠지. 잠마해를 상대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쯤은 각오하고 있네." "고맙네!" "헌데 잠마해의 인물들을 추적()해 낼 수 있겠나? 잠마해는 일체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다시 어둠의 장막 저쪽으로 사라져 버 렸네. 그들을 추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세. 자네가 추 적해 낼 수 있을 정도라면 이제껏 잠마해가 존재할 수가 없을 것 일세." "방법은 있네.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결국 비모소라는 인물까지 접근해 갈 걸세. 자네가 그동안 수집해준 자모전가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정보로 그것이 가능할 걸세." 휴도옥린은 치밀한 전략을 짜놓고 있었다. 그가 그것을 설명하자 창사는 탄복했다. "병장기가 필요하겠군. 자네가 늘 사용하던 종류로 말일세." "그래, 내가 어떤 것들을 사용하는지 잘 알지? 그런 것들을 자네 에게 부탁하고 싶네." "어려운 일은 아니네, 그가 아직 낙양()에 있다면 말이야." "도노() 말인가?" "그래, 도노 좌비능()이 아직도 낙양에서 병기점()을 하고 있다면 자네의 손에 딱 맞는 병장기들을 그가 만들어 줄 것 이네." "...!" "그의 생명을 자네가 구해준 적이 있으니 아마 자신의 살로 만들 라 해도 그는 웃으며 그렇게 할 것일세. 더구나 매원의 신화가 다 시 살아나는 일 아닌가." "후후, 자네는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군." "물론일세. 구월구일의 신화는 어린아이들의 입에도 오르내릴 정 도였으니..., 헌데 언제쯤 일을 시작할 것인가?" "일 년 후, 내가 체력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필 요할 것이네." 체력회복을 위해서는 한적한 장소가 필요하다. 창사는 문득 그 점 에 생각이 미쳤다. 휴도옥린은 창사의 생각을 읽은 듯 입을 열였다. "매원으로 돌아갈 생각이네." 창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좋은 생각이야. 방해물이 들어올 수 없는 장소이니..., 더우기 그곳에는 자네가 구해준 백추능이라는 그 소녀도 있지 않은가." 백추능을 매원까지 데리고 간 것은 바로 창사였다. 휴도옥린은 단 지 그녀를 창사에게 맡기고 매원에 은신시켜 달라고 부탁했던 것 이다. "가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그 여자는 매우 조용한 성품이더 군. 자네의 훈련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네." "...!" 두 사람이 이야기를 끝냈을 때는 이미 새벽이 움터오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립던 옛날로 되돌아간 것 같이 그들은 흥분해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탁자에서 일어났다. 휴도옥린은 꼼꼼히 무엇인가를 적어넣은 커다란 서책을 뒤적이며 무엇인가 잊은 것은 없는가 재확인했다. 창사가 그런 휴도옥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면한 문제는 자네가 다시 구월구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체력을 되찾는 일이로군." 휴도옥린은 하품을 크게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싸울 수 있는 체력을 되찾는 일이 가장 급선무야." 낙양(). 육조()의 고도() 낙양 북단에는 한 채의 허름한 토가( )가 있었다. 백삼을 걸친 한 사내가 그곳을 찾은 것은 땅거미가 어둑어둑할 무 렵이었다. 사내의 풍도는 실로 평범했다. 어느 한곳 드러나 보이는 게 없는 극히 평범한 기질, 사내는 그 어떤 부류의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 도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돋보이지 않을 기이한 평범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무도 없는 황야()에 서 있어도 그 속에 묻혀 드러날 것 같지 않은 평범함이었고, 심지어는 사내이면서도 여인 ()들 틈에 섞여 있어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특이한 기질 이었다. 사내가 찾은 허름한 병기점 또한 이 점에 있어서는 비슷한 곳이었 다. 손님이라고는 일 년 내내 한두 명 찾아보기 어렵고, 간혹 들 려오는 망치질 소리 외에는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인 것이다. 땅... 땅! 사내는 그 한 구석에서 풀무질을 해대고 있는 묵의청년의 뒷모습 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비능...!" 이윽고 사내가 입을 움직인 것은 묵의청년이 풀무질을 끝내고 불 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묵의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온 것에는 별반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가 정작 놀란 것은 입구쪽에 서 있는 사내의 용모를 확인한 후였다. "죽을 뻔 했다고 들었네. 창사에게서...." "그랬었지." 너무도 간단한 인사가 끝난 뒤 두 사내는 침묵으로 서로를 관찰하 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대립적인 분위기였다. 낙양에서 이름없는 병기점을 꾸려나가고 있는 도노 좌비능( )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옥린, 우리가 친구사이였다는 기억이 나에게는 없네. 하지만 나 는 자네에게 빚을 지고 있지. 자네는 옥관()에서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 "그것만으로도 물론 자네가 요구하는 병장기들을 만들어 줄 수는 있겠지." 도노 좌비능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휴도옥린도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것으로 자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네. 나는 단지 자네의 솜 씨를 인정하고 나의 손에 맞는 병장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려 는 것 뿐일세." "그런가?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자네가 받아들였 어야 했네." "...?" "자네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간에 자네를 친구로 생각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 말일세.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지. 그러나 자네는 나를 친구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는 듯 했어." "...."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도노 좌비능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 다. 휴도옥린. 그가 웃었던 것이다. 구김살없는 명랑한 웃음이었고, 진정()이 담겨있는 따스한 미 소였다. "그런가, 고마워! 하지만 너는 이미 옛날부터 나의 친구였어." 좌비능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 앞의 이 사내가 진정 구월구일 인가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구월구일이 진정 많이 변해있음을 알 게 되었다. 대립적이었던 분위기는 일소되었다. 좌비능은 자신이 구월구일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 온 것 이 착각에 불과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눈 앞의 이 사내는 정신적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숨이 막혀들 듯한 침묵은 여전했지만 웃음은 진정이었고 전에 볼 수 없 는 것이었다. "물건은 모두 준비되어 있겠지?" 휴도옥린이 물었다. 도노 좌비능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갖추었어. 창사가 주문서를 보여준 것이 불과 보름 전이기 는 하지만 그 전에 준비해 놓은 것들이 있어 다행히 맞출 수 있었 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어쩐지 자네에게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지는군. 사실 병장 기를 만드는 솜씨야 자네가 나보다 월등했지 않은가!" 좌비능은 솔직하게 부끄러워 했다. 휴도옥린 역시 솔직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것은 예전의 이야기야. 그리고 지금 내게는 스스로 그것들을 만들 시간이 없어." "알았어. 아무튼 솔직이 말한다면 나는 사실 내가 만든 병장기들 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천하에 구월구 일밖에 없다고 늘 생각해 왔었네. 어쩌면 언젠가 자네가 필요로 할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만들어 둔 것인지도 모르지." "고마워!" 휴도옥린은 또다시 가식없는 맑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이 또 좌 비능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가 아는 구월구일은 웃을 줄을 모르는 사내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내는 굳은 신뢰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노 좌비능은 매원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휴도옥린의 깊은 마 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우정()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 로의 마음 속으로 통할 사내 사이의 굳은 신뢰감이었다. 도노 좌비능은 어쩐지 들뜬 기분으로 수많은 병장기들을 휴도옥린 앞에 일렬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것은 주문한 네 자루의 단도일세. 두 자루는 항시 자네가 사용 한 것처럼 두 팔에 숨길 수 있게 조금 구조를 고쳐놓았고, 나머지 두 자루는 발에 숨길 수 있게 만들어져 있지.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게 배려했네." "...." 휴도옥린은 제일 앞에 놓인 네 자루의 단도를 집어들어 세밀히 관 찰하기 시작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단도의 무게와 일치하는 훌 륭한 병기였다. 그는 만족을 드러내며 두번째의 병장기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평범한 장검일세.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썼네. 중량은 역시 자네의 손에 맞취 놓았네. 평범하기는 해도 뼈를 베 다가 부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네." "그렇군." 휴도옥린은 검자루 쪽을 잡고 검극()으로 허공에 한 바퀴 원 을 그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세번째의 병장기는 손바닥 크기의 앙증맞은 소궁()이었다. 휴 대하기 간편한 반면 일장 두께의 철판을 관통할 수 있는 강력한 탄력을 지니고 있는 무기였다. 강전()의 수효는 모두 오십여 개. "강전을 오십여 개 정도 더 만들어 주게." "그렇게 많이?" "아무튼 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아니니까." "...." 도노 좌비능은 침묵했다. 그는 휴도옥린이 무엇을 할 계획인지에 대해 일체 묻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간의 오래된 습관이고 또 사실 휴도옥린이 그 병기들 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 구월구일인 휴도옥린이 자신이 만든 병장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네번째의 병장기는 휴도옥린이 항시 지니고 다니던 열두 자루의 비도였다. 그 비도들은 새로 만든 것처럼 깨끗이 손질되어 있었 다. "그 열두 자루의 비도 만큼은 사실 자신이 없었네. 자네가 사용하 던 것을 창사가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무엇보다도 자네의 손에 맞 춰져 있을 그 놈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 네." 휴도옥린은 잠자코 미소하며 열두 자루의 비도들을 하나하나 쓸어 보았다. 그것들은 그의 육체의 한 부분이나 진배없는 것들이었다. 휴도옥린은 늘 그것들을 병기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일부로 여기고 있었다. 좌비능이 내놓은 마지막 병장기에 시선을 옮긴 휴도옥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것은 휴도옥린이 주문한 병장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보기에도 병장기같지 않았다. 손바닥 크기의 얇은 명패들이 겹쳐져 있는 듯한 기물체, 이십여 장에 달하건만 한 겹으로 겹쳐지자 그 폭은 겨우 세치에 불과했 다. 얇은 명판들은 금()에 무엇을 혼합해 만든 듯 은은한 금광을 발 하고 있었다. "인자천지도()라고 이름 붙였네. 동영의 인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기물들이지. 비도와는 달리 미세한 틈 사이로 파고들 수 있고 비영력()이 뛰어나 특이한 기병이 될 수 있을 것이 네." 휴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인자천지도 중 하나를 집어들 어 가볍게 우수에 쥐었다. 핑! 핑그르.... 정방형의 작은 금판이 무섭게 회전하며 반대쪽 벽으로 쏘아져 나 갔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의 광경이었다. 얇은 금판은 벽면에 가로 막히자 벽면과 한치 사이에 두고 벽면을 타고 흐르며 방향을 바꾸고 있지 않은가. 핑그르.... 인자천지도는 다시 휴도옥린의 손에 회수되었다. 휴도옥린은 크게 만족한 듯 미소를 머금었다. 좌비능은 휴도옥린이 새로운 병기를 다루는 것을 보고 내심 경탄 했다. 새로운 병기의 사용법에 대해 말한 적은 단연코 없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그 병기를 손에 쥐자마자 마치 본능인 듯 그 병기의 활용법을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에 들어. 특히 이 매화무늬가...." 휴도옥린은 인자천지도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인자천지도의 중앙에는 선명한 매화의 형상이 각인되어 있었다. 휴도옥린이 기뻐하자 좌비능은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다 시 품 속에서 기이한 물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자네가 요구한 병기들 이외에도 나는 그동안 많은 것들을 만들어 보았었네. 저 인자천지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으면 꺼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좌비능이 품 속에서 꺼낸 물체들은 실로 기이한 것들이었다. 한 무더기의 머리카락과 매미날개처럼 얇은 인피() 한 장, 그 리고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면건. 좌비능은 먼저 한 무더기의 검은 머리칼처럼 보이는 물체를 집어 들었다. "흑린단사()이네. 머리카락 사이에 박아 넣어 숨길 수 있 는 것으로써 필요할 때는 제아무리 강한 물체라도 끊어 낼수 있는 기병일세." 좌비능은 밝게 웃으며 그 중 하나를 집어들어 자신의 머리칼 사이 에 끼어 박았다. 그러자 그것은 머리카락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아 발견할 수가 없 었다. "이것은 면성폭약()일세. 보기에는 일종의 면건에 불과하 지만 폭발력은 상당하지. 옷깃 사이에 끼어두면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것이네." "...!" 휴도옥린은 어리둥절해 있는 상태였다. "자네의 손재주가 나보다 못하다는 것은 이제보니 나를 놀린 것이 었군." 좌비능이 웃었다. 그는 그것이 칭찬의 뜻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인피는 무기를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좋은 것이지. 때로는 상처도 감출 수 있고." 좌비능은 폭이 넓은 인피를 자신의 손목에 둘러보여 주었다. 그의 손목에는 깊은 상흔이 있었다. 그 상흔의 역사는 휴도옥린도 잘 알고 있었다. 헌데 예의 인피에는 강한 접착력이 있었고, 그것이 그의 손목에 마치 원래 그의 피부인 양 아무런 표시없이 달라붙자 좌비능의 상 처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제법 이용가치가 많은 것이네. 자...!" 좌비능은 다시 품 속에서 일곱 자루의 작은 비수()를 꺼내들 었다. 한 개의 크기가 어린애 손가락 크기에 불과한 작은 비수였다. 그 러나 비수는 한 눈에도 평범한 것이 아니었고 그 광채는 영롱하기 만 했다. "먼저 이 칠지비()를 손목에 차고, 그리고 그 위에 이 인피 를 착용하면 아무도 손목에 병기가 숨겨져 있는 것을 모를 것이 네." "...!" 휴도옥린은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일곱 자루의 작은 비수들은 마치 살 속으로 감춰진 듯 조금 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제아무리 주도면밀한 사람이 살핀다 해도 발견해낼 수 없을 듯 했다. 좌비능은 그 모든 병기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휴도옥린의 몸에 착용시켜 주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이십여 개의 명판, 인자천지 도에 애착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한 여름에는 매화를 볼 수 없지. 해서 나는 이 살인금판 위에 매 화를 새겨놓은 것이네. 매원의 신화를 꿈꾸며...." "알겠네." 휴도옥린은 잠시 후 낡고 쓸쓸한 좌비능의 병기점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술()은 하지 않았다. 좌비능은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았고 이제 휴도옥린 역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적어도 일이 끝나기 전까지 는.... "한 가지만 묻겠네." 휴도옥린이 병기점을 마악 빠져나오려는 순간 좌비능이 입을 떼었 다. "...!" "매원, 매원이 다시 살아나는 것인가?" 휴도옥린은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했다. 그리고 흔쾌 히 대답해 주었다. "물론이지!" 공격리산(). 우측으로 일백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죽음의 사막 대과벽( )을 끼고 있고, 그 아래 오십여 리 전면에 북방의 거악(), 대곤륜산()을 바라보고 있는 곳.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고봉()과 계곡들이 늘어서 있고, 울창한 수림과 사시사철 산을 뒤덮고 있는 안개로 인해 세인들은 감히 발을 디딜 수도 없는 곳이다. 오랜 풍상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한 기괴암석과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천험의 절지()는 가히 지옥의 한 풍경으로 느껴질 정도 였다. 헌데 이 공격리산 깊은 산곡 가운데 하나의 폐장원이 서 있었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인간이 거처하기는커녕 잠시 머물 러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은 천험의 절지 한가운데 거대한 장원이 존재해 있는 것이다. 장원은 황량하기 이를데 없었다. 보이는 것은 잡초 뿐이었고 드러나 보이는 담장은 거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는데다 귀기()마저 풍기고 있어 오랫동안 비어있 는 곳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황량하기 이를데 없는 장원은 온통 매화로 뒤덮여 있었 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매화들을 모조리 모아 놓은 듯한 광경, 기 이한 것은 그 수많은 매화들이 이미 철이 지났건만 활짝 만개해 있다는 점이었다. 사내, 허름한 백삼을 걸친 사내가 이 매화뿐인 공격리산 깊숙한 곳의 장원을 찾아온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사내는 정적만이 존재하는 거대한 매화장원에 들어서자마자 익숙 한 걸음으로 매화나무 중 가장 우람한 고목으로 다가섰고, 그리고 정오가 가까와지는 시각까지 예의 고목의 중간 부근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사내의 눈이 머물러 있는 것은 바로 그 고목의 중턱에 걸려있는 기이한 명패들의 위였다. <자당().> <무정인랑().> ... <도노().> <무색().> ... 뒤집혀 있기도 하고 똑바로 걸려 있기도 한 명패들. 사내는 예의 명패들 하나하나를 어떤 추억을 더듬듯 오랫동안 훑어보고 있었 다. 그리고 그의 눈이 마지막 명패마저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의 품 속에서 같은 형태의 명패 하나를 꺼내들었다. 사내는 예의 명패를 비어 있는 한곳에 걸었다. <구월구일().> 스스로의 명패이던가? 사내는 명패가 제대로 걸렸는지를 확인하듯 오랫동안 명패를 응시 했다. 이때였다. "오셨군요." 사내의 등 뒤에서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소녀(), 무서우리만큼 가라앉아 있는 침묵의 매화장원 한곳에 서 소리없이 나타난 소녀의 용모는 그대로가 하나의 요정이었다. 서글서글한 눈매 깊은 곳에는 맑은 현기가 떠돌고, 사내아이들처 럼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는 초록색궁장은 매화나무의 잎을 따다 만든 듯 싶었는데.... 그녀는 바로 제남검가의 후예인 백추능이었다. "...!" 휴도옥린이 몸을 돌려 미소했다. 순간 백추능의 눈이 소리없이 커졌다. 휴도옥린의 미소는 그야말 로 구름 속에서 솟아난 햇살처럼 맑았다. 그것은 절대 인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점이 백추능을 놀라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백추능은 내심 오히려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 다. 무뚝뚝하고 냉랭하던 휴도옥린에게서는 말 붙이기 어려운 냉혹함 이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어쩐지 안식()을 약속하는 무언의 평 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맑은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지금 의 그에게서는 깊은 거리감만을 느낀 것이었다. "쓸쓸하지는 않았소?" "예? 예! 별로... 원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니까요." 그리고 또 느닷없는 다정한 말투..., 휴도옥린은 확실히 변해 있었다. 백추능은 어리둥절해 더듬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분간은 함께 있을 것이오. 불편하더라도 양해해 주시오." 휴도옥린은 또다시 미소한 후 뚜벅뚜벅 고옥을 향해 걸음을 옮기 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는 백추능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그 러다가 그녀는 황급히 그가 사라져간 방향으로 뒤따라 갔다.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변하게 했을까? 불과 몇달 전만 해도 먼저 말을 걸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휴도옥린은 곧바로 고옥의 대청으로 들어섰다. 이어 그는 대청의 전면 석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뒤따라 들어서던 백추능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휴도옥린이 벽면 을 매만지자 갈라지고 그 뒤로 지하로 뻗어내려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제남검가에서 백추능이 스스로 설치했던 지하석 전의 장치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스스로 기 관진식의 대가라고 자처하고 있던 그녀로서도 발견해 내지 못했다 는 점이었다. 스르릉.... 휴도옥린이 말없이 지하로 내려섰다. 백추능이 뒤따라 지하로 들어서는 모습에 그는 잠시 흠칫 눈을 돌 렸으나 다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지하계단은 길고 또 길었다. 게다가 십여 장 내려가는 듯 하다가 다시 완만하게 위로 향하고 있었다. 백추능은 그제야 지하통로가 어디로 통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하통로는 고옥의 십여 장 뒤쪽에 서 있는 계곡의 절벽 속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윽고 드러난 것은 거대한 철문이었다. 휴도옥린은 거침없이 철문을 밀고 거대한 석실로 들어섰다. 지하석실의 모든 것은 오래전부터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백추능의 눈이 커졌다. 석실의 크기는 대략 둘러보아도 방원 일백여 장은 족히 되었다. 천장조차 둥그렇게 다듬어져 있었는데 그 높이는 무려 십여 장에 달할 듯 했다. 헌데 그 한쪽, 석벽을 파서 만든 벽장()이 입을 벌리고 있는 데 그 안에 무수한 서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지 않은가. 백추능은 그것들이 한눈에 무서()들임을 알 수 있었다. 백추능은 다시 석실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원형석실에는 모두 일정한 간격으로 다섯 개의 철문이 원 형으로 돌아가며 자리해 있었다. 그 철문 뒤에는 또다른 석실이 있는 듯 했는데 그것은 마치 다섯 개의 석실 중앙에 거대한 석실이 둘러싸여 있는 듯한 형세였다. "...!" 휴도옥린은 묵묵히 벽장으로 다가가 오십여 권에 달하는 무서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잠시, 그의 눈에 어떤 감회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이내 담담하게 굳어졌고 그는 조용히 석실의 중앙에 돌아와 가부 좌를 틀었다. 거대한 석실의 중앙에 단정히 좌정해 서책을 넘기는 그의 모습은 어찌보면 엄숙하기만 했다. 그는 백추능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 로 곁에 서 있는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사학총림().> 무심코 휴도옥린이 넘기던 책자의 표제()를 발견한 그녀의 눈 에 경악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녀의 뇌리에 대백()인 검숙 백 우군에게 언젠가 들은 바 있는 말이 스쳐갔다. ...천하에 존재하는 사공이술()은 모두 구천팔백여종( ). 그 중 가장 가공스러운 것은 사학십팔종( )으로 분류된 열여덟 종의 사공()이다. ...사학십팔종 중 하나만을 완전히 연성한다 해도 가히 고수( )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사학총림은 바로 사학십팔종 중의 하나였다. 사문()의 최고기공 중 하나로써 내공심결()은 일반 정종()의 내공심법과 달리 특이한 묘용을 지니고 있었다. 속성()의 공능과 함께 다른 사람의 내공을 흡취할 수 있는 사 이한 무공인 것이다. 대략 한 시진이나 흘렀을까? 휴도옥린은 사학총림을 모두 읽은 듯 원래의 자리에 갖다 놓은 후 다섯 개의 굳게 닫힌 철문 중 하나를 열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사문().> 백추능은 희미하게 철문 위에 새겨져 있는 글귀를 읽을 수 있었 다. 철문은 휴도옥린이 들어간 뒤 다시 굳게 닫혔고, 그 안에 무 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휴도옥린의 일과는 스스로에 의해 정해지기 시작했 다. 며칠이 흐른 뒤에야 백추능은 휴도옥린이 스스로를 재생()시 키기 위해 예전에 받았던 훈련들을 스스로 해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역천수라밀().> 한 권의 서책, 이미 수많은 사람의 손이 스쳐간 듯 낡고 허름한 책자이다. 그러 나 이 낡아빠진 고서가 의미하는 것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역 시 사학십팔종의 하나이며 가공할 사학이종()이 담겨있는 사학최고의 기서였던 것이다. 휴도옥린의 희고 갸름한 손은 예의 책자를 넘기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역천수라밀을 연성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는 스스로 설정한 무공 재연마과정을 위해 이미 외우고 있다시피 한 책자를 다시 독파하고 있는 것이다. 한 권의 무서를 모두 읽은 후에는 다시 그 무류()에 따라 다 섯 개의 석실 중 한곳으로 들어가 내공을 연마했다. 한 권의 무서를 모두 읽은 후 그가 다섯 개의 석실 가운데 한 석 실에서 소요하는 시일은 대략 열흘에 가까왔다. 휴도옥린의 일과 는 이런 방식으로 매우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그동안 백추능은 말없이 그의 식사를 맡아 주었다. 그녀는 휴도옥린이 스스로의 육체를 되살리는 그 모든 작업을 내 내 침묵으로 엄숙히 지켜보았다. 그 침묵으로 이어지는 둘만의 생활을 그녀는 스스로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심능지결().> "...!" 음식물을 장만해 석실로 들어선 백추능은 휴도옥린의 모습이 보이 지 않자 그가 또다시 철문 뒤쪽의 한 석실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 었다. 그녀는 벽장쪽의 무서들을 훑어본 후 그가 일곱번째의 무서() 를 재독파했음을 또한 알 수 있었다. "심능지결...?" 백추능은 벽장 한쪽에 쌓여있는 오십여 권의 무서 중에서 다른쪽 공간에 쌓여가기 시작하고 있는 무서들을 훑어보며 호기심을 드러 냈다. 그녀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휴도옥린이 오늘 독파한 심능지결( )이라는 기서를 펼쳐들었다. <귀문지계()는 천하제일이다. 역사()란 한 개인의 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 람의 심계()와 혀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힘으로써 천하를 얻고자 하는 자처럼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이다. 계()는 곧 보이지 않는 힘()인 바, 계()는 심()에서 비롯 되고 심()은 정()에 얽매이는 것, 귀문()에 들고자 하는 자 먼저 정()을 끊을지이니....> 백추능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뜨여졌다. 첫장에 적혀 있는 글귀를 이해 못할 리가 없는 그녀이다. 그녀 역 시 귀문()의 일학()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신분인 것이 다. "이, 이것은 귀문최고의 기학이라는 귀문천기록()의 원 본이다!" 백추능이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 눈 앞에 펼쳐 져 있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석실 한쪽 석벽에 쌓여있는 오 십여 권의 고서들 모두가 엄청난 기서들임을 이제야 확연히 깨달 았기 때문이다. 귀문의 모든 것은 기실 엄청난 지식()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 다. 금기서화() 등의 육예()는 물론이고, 병학()과 산학(), 토목건축(), 진법(), 온갖 병기()의 종류와 특징. 그리고 심지어 천하 모든 문파의 역사와 근원() 등등.... 그렇다! 그야말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의 박학함을 지니고 있어야만 남 에게 심계()를 펼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방대한 분량의 학문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어느 집의 개가 몇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가마저 알아야 할 정도로 한 인간이 모든 것을 알기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귀문의 심능지결은 이 모든 어려움을 해소시켜 주는 놀라 운 기서였다. 한 가지를 알게 되면 그 뒤의 숨은 것 열 가지를 추론해 낼 수 있 게 만드는 기학, 그것은 곧 천하 모든 학문의 속성비법() 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뛰어난 심리학()과 역학( )을 모태로 한 불가사의한 정보종합학()이었던 것이 다. 심능지결을 읽어나가던 백추능은 스스로를 기관진식의 대가라고 자처하던 자부심이 여지없이 구겨지고 있음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는 한숨과 함께 심능지결을 덮었다. 이어 그녀는 확 인하려는 듯 수북히 쌓여있는 책자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자살혈강().> 사대극양신공() 중의 하나, 그 위세는 정녕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극성지경까지 연성하면 이른바 화성지체()가 될 수 있다. 그 엄청난 양강지력을 내공에 운용해 펼쳐낸다면 주위 백장 방원 을 그야말로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극양지류()인 것이 다. <빙백천자기().> 천하십대 극한지류() 중의 하나. 천하에 퍼져있는 수많은 내공심결 중 음유지기()를 연성 하는 기공으로써 그 공능 또한 천하십대내공으로 꼽히고 있을 정 도이다. 쇳덩어리라 하더라도 얼려 터뜨릴 수 있으며 극한까지 연성하게 되면 숨결만으로도 태호()를 얼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무형독강( ).> 백추능이 놀람에 찬 눈으로 확인한 네번째 서책, 그것 역시 결코 평범한 무서가 아니었다. 독()을 체내로 흡취해 독성()이 강해질수록 내공이 증진되 는 방문좌도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가공스러운 독공()이었다. 무형독강이 완성되면 그야말로 전신이 그대로 독()이라 할수 있 고 그때문에 오히려 만독 불침의 효용을 지님은 물론 슬쩍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이제야 이제야 매원이 그토록 강했던 이유를 알 수 있겠 다." 백추능이 혀를 내둘렀다. 어느것 하나 평범한 것은 없었다. 그 엄청난 무학들을 기초로 삼 고 있는 살수()들이 과연 매원 이외에 어디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백추능은 다섯 개의 철문 뒤쪽 석실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휴도옥린은 한 권의 책자를 완전히 암기한 후, 예의 석실 중 한곳 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그 안에 과연 어떤 것이 있는지 지금처럼 궁금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사문(). 백추능이 조심스럽게 사문이라 각인되어 있는 철문 쪽으로 다가갔 다. 휴도옥린은 이미 다섯 개의 관문() 중 이미 귀문()이라 쓰여진 곳에 들어가 있음이 확실했다. 그가 오늘 본 서책이 바로 귀문의 선능지결이었기 때문이었다. 휴도옥린은 백추능이 어떤 행동을 해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 았었다. 그러나 그 다섯 개의 석실 중 한곳으로 들어가는 것마저 허락할지는 의문이었다. 해서 그녀는 휴도옥린이 귀문에 들어가 있는 이 순간을 틈타 사문에 들어가 보려는 것이었다. 제10장 신화()의 저력() -1 쿠웅! 철문이 닫히는 둔중한 소리가 백추능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 백추능은 그 소리에 어쩐지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내친 걸음인지라 석실 안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악마의 입 안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 석실 안은 무서운 사기()로 가득 차 있었다. 뿐이랴. 백추능이 채 두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사이로운 기 운이 악마의 숨결처럼 그녀의 전신을 휘감아왔고 사방은 칠흑처럼 어둠 에 휘감겼다. 백추능은 이미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 소녀이다. 그러나 내공( )을 끌어 올려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었다. 끼이이끼! 이때, 어디선가 기이한 음향이 들려왔다. 순간 전면에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그곳에 드러난 것은 아주 괴기스럽게 생긴 청동향로()였다. 크기는 백추능의 허리까지 올라올 정도였고, 향로 아래는 기형()의 단상이 청동향로와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스스스슷! 괴이한 음향과 함께 음산한 사기()가 향로 안에서 흘러 나왔고 동시에 석실 전체는 기괴한 분위기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끼이끼! 청동향로는 계속 돌아가며 푸르스름한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그 광채가 백추능의 몸에 스칠 때마다 그녀는 사이로운 느낌에 젖어 들었 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 다. '이상한데...?' 백추능은 차츰 담대해져 몇 걸음을 더 옮겼다. 그녀의 눈은 한시라도 청동 향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헌데 그녀가 석실 깊숙이 접어들수록 청동향로의 푸른 광채가 더욱 짙어지 지 않는가? 무서운 사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다가서던 백추능은 청동향로에서 일 장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이미 그때는 청동향로에서 뿜어지는 푸르스름한 광채는 말할 수도 없이 강 해졌고, 소용돌이 치는 사기는 전신 모공으로 밀려드는 것 같았다. 펑! 어느 한순간, 느닷없이 청동향로에서 폭음이 터지며 푸른 연기가 치솟았다. 크르르르...! 실로 괴기스러운 음향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기세가 어찌나 엄청난지 뜻밖 에 주위는 온통 푸른 연기로 뒤덮였다. "아...!" 백추능은 자신도 모르게 괴로운 신음성을 토했다. 연기에 휩싸이자 전신이 모조리 녹아내리는 듯 했던 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체내로 가공스러운 사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 위세는 너무도 강해 백추능은 창백한 안색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끼이이...! 크르르르...! 괴기로운 음향은 그치지 않았고 청동향로에서는 더욱 짙은 청광()이 뻗 어 나왔다. 이글이글 타오르며 회전하는 청광을 대한 백추능은 머리가 터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녀의 가슴 속에서 사악()한 생각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느낌이었다. 피()를 보고 싶은 충동이기도 했고, 어 디선가 잔혹한 죽음을 부르는 듯한 악마의 소리가 울려나오는 기분이기 도 했다. "...!" 백추능의 두 눈에 엄청난 사광()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 안돼...!" 일순,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 사악해지려는 마음을 바로 잡았 다. 이때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엄청난 진동이 일었다. 청동향로의 바로 위 쪽의 허공에서 보기만 해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아수라() 가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 백추능이 질린 눈으로 아수라를 쳐다보자. 아수라는 그녀를 향해 기괴한 웃 음을 지었다. 그 순간, 폭발할 것 같은 사기가 그녀의 전신을 덮어왔다. 그것은 청동향로 의 사기와 합쳐져 너무도 엄청났다. 백추능이 고개를 내저었다. 눈 앞의 조화들이 단순한 기관진식에 의한 것만 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 오묘함은 그녀가 자신의 제남검가 지하에 설치 했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고 있었다. 이 눈 앞의 아수라는 심성을 파괴시키며 실체인 양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으으으...!" 그녀는 몸을 돌려 석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발이 움 직여지지 않았다. 이때 그녀가 몸을 돌리려고 전력을 다하자 아수라의 형상이 돌연 흔적도 없 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어 푸른 연기 속에 희미한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 다. 그 그림자는 이내 선명해졌다. 놀랍게도 그것은 남자였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건장한 남자 가 나신 그대로를 드러낸 채 우뚝 서 있었다. 하체(). 창을 세워든 듯한 생생한 남성의 실체()가 백추능의 눈을 찔러 들었다. 남자의 육체는 너무도 완벽했다. 군살 하나 없는 완벽한 근육질의 상체에 쭉빠진 지체, 그리고 부드럽게 떠올라 있는 미소와 열기에 가득 차 있는 눈길.... "...!" 멍청해 있던 백추능의 얼굴이 화악 달아 올랐다. 그녀는 청백지신( )이었다. 남녀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몸인 것이다. 그러 나 이미 나이가 찼는데 어찌 운우()에 관한 일을 짐작치 못하랴! "아...!" 그녀는 처음에는 역겨움을 느낀 것 같았으나 어느덧 그녀의 눈에서도 열기 가 솟아나고 있었다. 나신을 드러내고 있는 건장한 사내의 얼굴이 어느새 휴도옥린의 얼굴로 변 해있지 않은가. 그녀의 신형이 무너졌다. 사내는 점차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들었다. 휴도옥린의 얼굴을 지닌 사내는 더할나위 없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으음...!' 백추능은 신음했다. 동시에 그녀는 전신으로 엄청난 사기가 몰려들고 있음 을 느꼈다. 욕정()을 느끼고, 그 욕정에 휘말려 들어 사기에 대항하 지 못하게 되면 그 즉시 심성이 사악하게 변해 스스로를 죽이고 마는 심 마()에 빠져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문()의 관문인 것이다. 이 사문은 또한 사공이학을 익힌 인물들에게는 오히려 그 사공을 증진시키 는 역할을 하는 관문이기도 했는데, 지금의 백추능으로서는 대항하지도 못한 채 심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백추능의 전신혈관은 팽창되어 있었다. 완전히 사기에 젖어들어 파열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위기를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오히려 열락에 젖어 신음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어서..., 어서 나를..." 사내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은 그녀의 느낌일 뿐, 실제로 옷을 벗기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의 손이었다. 그 상태에서 그녀는 청백지신의 몸으로는 믿기 어려울만치 격하게 하체를 움직이며 사내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스스로를 파열시키고 싶은 강렬 한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엄청난 욕구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헌데 바로 이 순간, 돌연 나체 사내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똑같은 얼굴을 지닌 인물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단정히 백삼을 걸치고 있었다. "음!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날 뻔 했군." 나타난 백삼청년은 바로 휴도옥린이었다. 휴도옥린은 스스로의 옷을 풀어 헤치며 환상에 빠져 있는 백추능의 혈도를 가볍게 제압한 뒤 사문을 나 서기 시작했다. "그 다섯 개의 석실은 모두 우리의 무공연마를 위한 관문이었소. 함부로 들 어가도록 방치한 것이 나의 불찰이었소." 백추능은 서서히 정신을 차리며 휴도옥린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사문 속에서의 일을..., 그 나체 남자를 휴도옥린으로 알고 있던 자신의 마 음을 눈 앞의 이 사내가 알고 있을 리는 없다. 환상은 대하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날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그녀 였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녀는 휴도옥린을 대하자 고개를 들 수 없었 다. "중앙 석실의 무서들을 읽거나, 그 어떤 일을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을 것 이나 그 다섯 개의 석실은 모두 죽음의 관문이니만큼 다음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오." 휴도옥린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백추능은 그가 자신의 침상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음을 느끼고 침구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훗! 내일부터 열흘 정도 나에게 음식을 가져다 줄 필요가 없소. 내일부터 인문()에 입관할 계획이니까!" "인문? 그 안에는 무엇이 있나요?" 백추능이 침구 속에서 질문했다. 휴도옥린이 쓴 웃음을 머금었다. "후후후, 그렇게 혼나고도 또 호기심이 나는 것이오? 인문 안에는 온갖 고 통이 존재하오. 만년빙() 속에 갇힌 듯한 추위와 용암같은 열기, 그리고 굶주림과 같은 온갖 고통 말이오." "아...!" "특히 독문()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그 안에는 여자들이 싫어하는 것들 만이 있으니...." "무, 무엇이 있나요?" 백추능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침구 밖으로 뾰족이 얼굴을 내밀며 입을 떼었다. "훗! 독사()와 전갈, 삼목섬여( )..., 오공() 등등 온갖 독 물()들이오.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끝까지 통과했다가 다시 나와야 하오. 그래야만 독()이 중화()되기 때문이오." "극독들이 서로 중화된다고요?" "그렇소. 독문 안의 독물들은 금독구십구종()을 상극의 이치대 로 집어 넣은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들어가면 그 모든 독물들에게 골고루 물려야 죽지 않게 되오." "골고루 물려요?" "후후, 그것도 모든 독물들이 지쳐서 물러날 때까지 물려야 하는 것이오." '끼약- !' 수천 종의 독물들에게 물려 뜯기는 관문은 생각만 해도 전신이 근질거리고 소름이 돋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매원의 오관문은 진정 무서운 곳이오. 처음 우리는 모두 일백여덟 명이었 소. 그러나 대부분이 오관문을 통과하는 중에 죽고 말았고 달빛 살수가 되어 활동한 것은 겨우 서른두 명에 불과할 정도였소." "...!" "대부분 십 세 이전에 들어와 십 년이 넘어서야 매원의 살수로 완성된 것이 오." "아...!" 백추능은 또 다시 매원의 가공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달빛과 함께 존재하는 가공할 매원의 살수들... 천하의 무림인들 뇌리에 공 포를 심어준 전설적인 이름, 매원! 그 매원의 신화에는 이런 엄청난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매원의 이 기관들과 그 엄청난 무공들을 과연 누가 안배한 것이란 말인 가?' 백추능은 새삼 매원을 창설한 인물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질문을 생각해 낸 순간 휴도옥린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없었 다. <마천일단섬().> 마종팔류() 중의 하나인 최고의 마공(). 휴도옥린이 소림의 비전밀공인 반야대능력()과 함께 마지막으로 독파한 것은 제이 마교()라 불리우던 잠마혈천()의 무공이 었다. 잠마혈천은 이백 년 전 신검부의 탄생과 함께 멸문한 가공스러운 마세( )였다. 그 잠마혈천의 비전무학이 매원에 남아 있다는 것이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백추능은 육 개월만에 벽장 안의 무서들이 다른 쪽에 정리된 것을 보고 휴 도옥린의 내공연마가 거의 마무리 단계임을 알 수 있었다. 헌데 매원의 오관문을 모두 통과한 휴도옥린은 다음 날부터 기이한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매원 뒤쪽 절벽 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중앙석실, 그 가운데 휴도옥린이 정좌해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두 장의 화선지()가 놓여 있는 상태였고, 그의 손에는 기이하게도 양손 모두에 먹이 듬뿍 묻혀 있는 붓이 들려 있었다. "...?" 백추능은 그가 두 손에 각기 붓을 쥐고 있는 모습에 의혹을 느꼈다. '설마 두 손을 동시에 사용해 글을 쓰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백추능은 말없이 휴도옥린을 지켜 보았다. 헌데 그녀가 설마하고 있던 일이 눈 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은 양손에 쥐어져 있는 두 자루의 붓으로 두 장의 화선지 위를 동 시에 채워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뿐이랴.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붓으로 한 폭의 매화도()를 그리고 있었고, 왼 손에 쥐어져 있는 붓으로는 그가 익힌 무공구결 중의 하나를 옮겨쓰고 있지 않은가.... 쓰윽...! 사사삭! 두 자루의 붓은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 광경에 백추능의 눈에 불신과 경악이 어렸다. '아아!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이런 일이...!' 두 장의 화선지 위에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매화도와 글씨는 놀라우리만큼 완벽했다. 매화는 살아 움직일 듯 생생했고, 왼쪽 화선지 위의 서체는 용비봉무의 힘 차기 이를데 없는 명필이 아닌가! "후후, 놀랄 것 까지는 없소. 손()의 감각을 되살리기 위한 훈련의 하나 일 뿐이니까. 처음에는 왼손에서 글씨를 쓰면 오른손도 따라서 글씨를 쓰곤 해 많은 곤욕을 치루었다오." 백추능이 입을 딱 벌린 채 서 있자 휴도옥린이 미소했다. "이제 내공연마 훈련은 거의 끝났소. 그러나... 육체의 감각을 되살려내는 훈련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오." 휴도옥린은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백추능은 아예 질 린 듯 입을 열지도 못했다. 매원, 그 가공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놀라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의 감각을 되살리는 휴도옥린의 훈련은 근 보름이나 이어졌다. 두 손에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려나가던 휴도옥린은 점차 양손에서 똑같은 형태의 도자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고 그리고 두 손을 휘둘 러 허공에 활보하는 수많은 새들을 가두기도 했다. 그리고 손()의 감각이 회복되자 휴도옥린은 뒤이어 발의 감각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사(). 눈에 보이지도 않을 듯이 가느다란 철삭()이다. 무영은사()라는 이름을 지닌 예리한 철삭을 지하석전의 발목 부근에 빽빽이 설치해 놓은 후, 휴도옥린은 눈을 가렸다. 그는 이어 눈을 가린 상태에서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무영은사를 조심스럽게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무영은사의 예리함은 가히 칼날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살에 닿기 만 하면 이미 그 살 속으로 파고들 정도인 것이다. 휴도옥린은 완전히 눈을 가린 상태에서 무영은사가 쳐져 있는 석 전을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나 점차 속도를 빨리해 뛰기 시작했다. 처음 삼 일간 그는 무영은사와 부딪쳐 무수한 상처를 입었다. 그 러나 삼 일 지나자 점차 무영은사와 부딪치는 일이 적어져 갔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그 무영은사 위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무심코 지하대전으로 들어서던 백추능의 눈이 커졌다. 휴도옥린, 그가 가느다란 무영은사 한 가닥 위에서 잠을 자고 있 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은 그 뿐이 아니었다. 휴도옥린의 모든 생활은 그때부터 한 가닥 무영은사 위에서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먹고 마시고 책 을 읽고 잠을 자는, 모든 일을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 느다란 무영은사 위에서 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한 달이 흘렀다. 휴도옥린은 이제 무영은사가 발목 높이로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대전 안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경공을 발휘하는 경지에 이 르렀다. 그러자 그는 무영은사를 발목 높이 뿐만이 아니라 머리와 목 등의 높이까지 설치하기 시작했다. 종횡으로 거미줄처럼 빽빽하게 설치된 무영은사의 숲은 수천 개의 칼날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살벌한 광경이었다. 뿐이랴! 그그긍! 휴도옥린이 기관의 한부분을 작동시키자 대전 전체가 움직이며 무 영은사가 쳐져 있는 지점을 수시로 변화시키지 않는가. 슈우우우욱! 스파앗! 그 속을 휴도옥린은 경공을 발휘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추능이 보기에는 그저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는 가공스러운 광 경 뿐이었다.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무영은사 사이를 교묘히 빠져나가고 있는 휴도옥린의 모습은 불가사의에 가까왔다. 그의 몸은 그야말로 동체()와 지체()가 따로따로 움직이 는 불가사의한 동작으로 단 한 번도 무영은사를 건드리는 일이 없 어 빠른 속도로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훈련을 휴도옥린은 빠른 속도로 말없이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백추능은 휴도옥린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증오를 읽을 수 있었다. 간혹 백추능은 휴도옥린의 전신에서 냉기어린 바다에서 피어오르 는 안개처럼 증오심이 발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백추능은 휴도옥린에게 무슨 계획이 있음을 알 수 있었 다. 무서우리만큼 처절하게 자신의 육체에 고통을 가하고 있는 휴 도옥린의 작업은 단순히 무공연마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재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삼 개월 후. 휴도옥린의 근육은 마침내 긴 휴식을 끝냈다. 모든 근육들은 그 하나 하나가 기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구월구일의 능 력을 충분히 되찾은 것이다. 다음 날부터 휴도옥린은 자신의 병장기들과 근육들을 동화() 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추능이 보기에 엄숙한 의식같았 다. 먼저, 휴도옥린은 여섯 종, 일백여 개의 병장기들을 일렬로 늘어 놓은 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내며 일일히 그 중량과 형태들 을 근육 깊숙히 기억시키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네 자루의 단도와 열두 자루의 비도, 그리고 한 자루의 평범한 청 강검, 여기에 이십여 개의 인자천지도와 일곱 자루의 작고 앙증맞 은 칠지비().... 그의 병장기들은 차츰 그의 육체 일부로 동화되기 시작했다. 백추능은 비어 있는 거대한 백색 석실에서 병장기들을 일렬로 늘 어놓고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듯한 휴도옥린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쩐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의 그런 모습에서 냉혹한 살수의 모습은 전혀 읽어낼 수가 없었 다. 매원의 지하석전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연무장()으로 활용되던 석전들 이외에는 무수한 병장기들이 있었고, 그리고 전서구()로 보이는 새들이 길러지고 있는 있는 새장도 있었다. 휴도옥린은 다른 것들에는 일체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백추능은 달랐다. 그녀는 특히 아무도 돌보지 않아도 그때까지 살 아있는 몇 마리의 전서구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전서구인가요? 어느 곳으로 보내는 것인가요?" 백추능은 어느날 그중 한 마리의 비둘기를 들고 휴도옥린에게 질 문을 던져왔다. 비둘기들은 백추능이 정성껏 보살폈는지 살이 쪄 있었고 윤기도 흘리고 있었다. "모르겠소. 그 전서구들은 매원에서 정보()가 필요할 때 날려 보내곤 하던 것들이오. 어디로 날아가 우리가 원하는 정보들을 지 니고 다시 돌아오는지는 우리도 알지 못했었소." "과연 전서구였군요. 헌데..., 필요로 하는 정보가 있을 때 이용 했다고요?" "그렇소. 매원은 항시 최고의 정보를 지니고 있었소. 우리가 살해 해야 할 인물의 모든 것을 저 전서구들이 지니고 왔었소. 심지어 는 살해당할 대상의 몸에 있는 하찮은 표식까지도...." "놀랍군요. 헌데 그 정보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나요?" "...!" 순간, 휴도옥린의 얼굴에 잔물결이 일었다. 이어 그는 오랜시간 동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의 태도에 미미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그날 이후부 터였다. 휴도옥린은 먼저 매원 주위에 약간의 진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가 펼친 진법()들은 백추능이 보기에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침입자 모르게 상대를 발견하기 위한 것들 이었다. 휴도옥린의 변화는 또 있었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 소한 매원 내에서 만큼은 고향에 돌아온 듯 마음놓고 지내던 그였 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닥칠지도 모르는 어떤 일에 대비하듯 항 시 긴장해 있음을 백추능은 느낄 수 있었다. 창사가 찾아온 것은 바로 그럴 즈음이었다. "몸이 단단해졌군." 창사는 휴도옥린의 체능()이 거의 매원시절로 회복되었음을 한눈에 간파하고 기쁨을 드러냈다. "그래? 헌데 어떻게 왔는가? 될 수 있으면 이곳에 오지 않는 게 좋았을텐데...." "훗! 자네의 모습도 보고 싶었고 부탁했던 일도 몇 가지 알아낸 게 있어 왔네." 휴도옥린이 창사에게 부탁했던 것은 잠마해의 인물에 관한 것이었 다. 자모전가와 거래하던 전장들을 은밀히 조사해 잠마해의 인물 로 추측되는 인물들을 알아 달라는 것이 그의 부탁이었다. "자모전가의 거래처 중 사해금장()이 있었네. 별로 크다 고는 할 수 없는 전장이지. 그러나 사해금장은 꾸준히 자모전가와 거래를 해왔고 용도가 불분명한 은자를 항시 자모전가에서 공급받 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네." "...!" "조사결과, 그들은 자모전가 뿐만 아니라 많은 전장으로부터 일정 량의 은자를 매달 거두고 있더군." "잠마해의 재물을 담당하는 부서겠군." "그렇다네. 잠마해에는 그런 부서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중 하나이겠지." "사해금장의 장주()는?" "철우비자() 동문흑()이라는 인물이네. 무당() 의 속가제자라더군." "...!" 휴도옥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는 얼굴을 굳혔다. "창사!" "...!" "나는 문득 이 매원 역시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네." 창사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는 휴도옥린의 말을 처음에는 이 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창사의 얼굴도 천 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매원의 원주()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네." "그랬지. 언제나 원주는 전서구로 살인명령서와 필요한 은자, 그 리고 은밀한 방법으로 무공들을 보내 주었을 뿐, 한 번도 우리 앞 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지." "맞아. 우리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원주에게 선택되어 처절한 지 옥훈련을 받았고, 그리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명령에 따라 살해했었네." "...!" "그러나 과거 우리들이 살해했던 인물들을 종합해 우리는 원주가 단지 거대한 인물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 더구나 우리에게 제 공한 그 엄청난 영약()과 무공들... 그리고 은자 등은 당연히 원주가 거대한 인물이어야 했네." "그렇다면...?" 창사는 휴도옥린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 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질 정도로 굳어졌다. "그래, 우리는 그 생각을 했어야 했네. 신검부와 잠마해... 우리 에게 그 엄청난 영약과 무공들을 제공할 수 있고... 그리고 필요 한 정보라면 무엇이라도 신속하게 조달할 수 있는 세력은 그 두 세력밖에 없네." "그렇다면 자네는 원주가 두 세력 중 한곳의 인물이라는 생각인 가?" "그래, 그것도 수뇌급 중 한 명일 것이네." "으음! 그렇다면 백소저의 신변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결론이군." "그렇다네. 내가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내게 위험은 없을 것이 네. 그러나 우리의 추측대로 매원이 그들 양대세력 중 한 곳에서 창설한 곳이라면 백소저에게는 이곳 또한 안전한 장소가 못되는 것이네. 백소저를 찾고 있는 것은 신검부와 잠마해 양쪽 모두이니 까...."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추론()이었다. 믿어지지 않는 추측이었 으나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그렇다! 달빛 살수단체인 매원의 창설에는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고, 그리 고 그 음모의 배후에는 신검부, 혹은 잠마해가 개입되어 있는 것 이다. "내가 완전히 회복해 이곳을 떠나 일을 시작하면 백소저의 신변이 위험해지네. 그렇다고 안전하다고 생각될만한 장소도 없으니...." 휴도옥린은 검미를 찌푸렸다. 예전의 휴도옥린이었다면 백추능의 안전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자신의 일과는 관계 없는 여인인 것이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확실히 변해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인물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주위의 인물이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을 솔직히 받아들이기 시작했 다. 인간은 함께 하는 한 어떤 방법으로도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 이다. "글쎄? 신검부와 잠마해 양쪽 모두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있을지 나도 염려스럽군." 창사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그들은 휴도옥린의 거처에 마주앉아 있었다. 목재로 투박하게 짜 여진 거친 침상 하나만이 놓여 있는 소박한 방이었고, 백추능은 한 번도 이 방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휴도옥린과 창사 가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 순간 백추능은 최초로 휴도옥린의 방으로 들어섰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갈곳이 있어요. 그곳은 어느 누구도 찾 을 수 없는 곳이에요." 백추능은 이미 휴도옥린과 창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듯했다. "...?" "...!" 휴도옥린과 창사가 백추능을 바라보았다. 거친 사내같은 기질을 풍기면서도 아름답기 그지 없는 백추능은 그들을 향해 자신있는 미소를 던졌다. "제남도()! 제남도가 바로 그곳이에요. 천하인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이죠." "제남도?" "예! 바로 제남검가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섬이에요. 그곳에는 우 리의 혈족들이 아득한 태고적부터 살아오고 있어요." "그런 안전한 장소가 있었다면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소." 휴도옥린은 내심 안도하며 질책하듯 입을 열었다. 문득 백추능이 얼굴을 붉혔다. "...?" 자신의 질문에 백추능이 대답하지 못한 채 미미하게 얼굴을 붉히 자 휴도옥린은 어리둥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창사는 무엇을 느낀 듯 미소를 머금었다. '이 여인은 저 놈을 사랑하고 있었군. 이곳에 있게 되면 언젠가 저 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에 더 안전한 곳이 있 어도 그곳으로 가지 않은 거였어. 그리고 계획대로 둘이서 함께 지내기도 했고....' 이어 창사는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 휴도옥린은 진정 창사가 웃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단지 사 무적으로 백추능에게 질문을 이었다. "그곳은 어디요? 위치는 확실히 알고 있소?" "예! 어렸을 적에 숙부님과 함께 간 적이 있어요. 아름다운 곳이 에요. 대륙의 남단()에 위치해 있어요." "먼 길이군. 좋소! 그곳까지는 내가 보호해 주겠소. 내일 아침 일 찍 떠납시다. 하루 빨리 떠나는 것이 위험부담이 그만큼 줄어드는 일일테니...." "...!" 백추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맑은 기쁨의 빛이 홍조()처럼 일렁였다. 휴도옥린의 예상대로 제남도까지의 길은 실로 먼 길이었다. 그러 나 오히려 지금의 백추능에게는 그 멀다는 점이 참으로 다행이었 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녀의 여심()만이 알 일인데.... 휴도옥린이 정색한 채 창사를 바라보았다. "창사, 부탁이 있네. 위험한 일은 아니야." "...?" "우리가 매원시절에 죽인 인물들에 대해 알아봐 주게. 사실 우리 는 그들의 진정한 신분도 모른 채 명령을 이행하기만 했네." "...!" "내 짐작이 맞는다면 우리에게 죽은 자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신 분 이외에 또 다른 신분을 지니고 있을 것이네." "음...!" "이미 죽은 자에게는 비밀이 필요없는 법이니 어쩌면 쉽사리 그들 의 진정한 신분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네." "무슨 뜻인지 알겠네." 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도옥린의 눈이 다시 백추능을 응시했다. "제남도는 조류()가 거센 곳이오?" "예? 예! 거셀 정도가 아니라 비밀해로를 모르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에요." 백추능은 느닷없는 휴도옥린의 질문에 의혹어린 눈빛을 던졌다. 휴도옥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마지막 감각훈련을 위해... 그렇지 않아도 해류() 가 거센 곳으로 가려던 참이었소." 그날 밤 휴도옥린은 자신의 병장기들을 천천히 몸에 착용하기 시 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청강검 한 자루 밖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는 무려 일백여 개의 병기가 숨겨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랜 시간을 걸려 백추능을 변장시키기 시작했다. 볼이 약간 튀어나와 보이게 만들어 코와 광대뼈의 위치를 낮추고, 얼굴에 기이한 액체를 발라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눈에는 기 이한 풀에 즙을 짜넣어 눈의 빛깔 또한 원래의 맑은 하늘빛에서 칙칙한 회색으로 변하게 했다. 그렇게 되자 백추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약간은 추 해 보이고 약간은 모자라 보이는 소녀로 둔갑해 버린 것이었다. 제남도라는 신비의 섬으로 향하는 여행준비는 그렇게 해서 끝이 났다. : 11장 제남도(), 신비()의 섬 봄()이 가기 전.... 대륙의 최남단 뇌주반도()의 작은 포구에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그리 크지 않은 소선()을 구입해 남해 위에 띄웠다. 남들이 보기에 그들은 무척 다정해 보였다. 사내는 평범한 청강검 한 자루를 옆구리에 차고 있었으나 검이라 고는 한 번도 잡아보지 않은 듯한 용모였고 안색이 창백하고 눈빛 이 칙칙한 여인은 그 사내를 극진히 따르는 전형적인 촌부() 의 모습이었다. 한 쌍의 남녀는 특히 바다가 거세다는 중해() 쪽으로 갈 예정 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들 남녀는 배를 띄웠고, 그리고 평범한 한 쌍 부부()의 일 은 그 바다 위에 생겼다가 스러지는 포말처럼 급격히 사람들의 뇌 리에서 망각되어 갔다. 항해()는 삼 일이나 계속되었다. 휴도옥린의 노젓는 솜씨는 백추능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휴도 옥린은 별로 힘들이지 않는 것 같은 몸놀림으로 노를 젓고 있었지 만 배는 무서운 속도로 항해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삼 일째, 그들이 목표하는 섬()이 아스라이 안개에 둘러 싸인 채 눈에 들어왔다. "저기예요. 저곳이 바로 제남도예요." "헌데 왜 이곳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오?" 휴도옥린은 일백여 장 저쪽에 안개를 허리에 두르고 누워있는 섬 을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추능이 예쁘게 미소했다. "기다려야 해요. 정오까지...." "정오까지?" "예! 이 지점부터가 가장 위험한 곳이에요. 보기에는 바다가 평온 스러워 보이지만 기실 표면 아래에는 무서운 와류()가 섬 주 위를 맴돌고 있어요. 그러나 정오가 되면 그 와류가 약해져요." "아...!" 휴도옥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뱃전을 붙잡고 바디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백추능의 말이 사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섬에까지 이르는 바다에는 물고기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 무 서운 폭풍와류에 견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저 섬에 외부인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게로군!' 허리에 걸려있는 안개와 그 위에 우산()처럼 솟아있는 빽빽한 밀림들... 섬은 신비스럽기 그지 없었다. 휴도옥린은 잠시 제남도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여행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백추능의 변장은 완벽해 한 번도 잠마해나 신검부의 추적을 받지 않았고, 또한 백추능은 휴도옥린의 과묵한 성품을 이해한 듯 그의 침묵을 거북해 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휴도옥린을 편하게 해주었 다. 이때였다. 회상에 잠겨있는 휴도옥린의 귀로 백추능의 음성이 흘러 들어왔 다. "문서의 비밀을 풀었어요." 그녀의 손에는 한 장의 빛바랜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바 로 백무잠이 신검부의 무서() 사이에서 발견해 백추능에게 건 네준 비밀문서였고, 그리고 바로 그의 죽음을 부른 문서이기도 했 다. "이 뒤쪽에 있는 이 문양들은 어떤 거대한 전각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매복을 파헤칠 수 있는 파해도예요. 이 파해도를 살펴보건데 이 기관매복이 장치되어 있는 곳의 규모는 실로 엄청난 것이에 요." "...!"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기관진들 하나 하나가 모두 절묘하기 그지 없어요." "...." 휴도옥린은 기실 예의 문서에 별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백추능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잇고 있었다. "이 문서에는 장소에 대한 단서는 없어요. 장소만 알아낸다면 반 드시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도대체 무엇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기 에 이렇게 엄청난 기관매복들을 설치한 것인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어요." "훗! 기관매복에 조예가 많다 하더니... 관심이 많구료." "예, 그래요. 이 기관매복들을 설치한 사람의 능력은 실로 대단해 요." 백추능은 손에 쥐고 있는 문서를 오랫동안 내려다 보았다. 회한이 엇갈리는 표정있었다. 이 한 장의 양피지 때문에 그의 숙부가 죽 었고, 그리고 자신은 쫓기게 된 것이었다. 헌데 바로 이때, 무심코 백추능이 들고 있는 양피지로 눈을 돌리 던 휴도옥린의 눈에 이채가 솟아났다. "그, 그것이 바로 문제의 문서요?" "그래요, 헌데...?" 휴도옥린의 태도가 기이함을 느끼고 백추능의 눈에 의혹이 어렸 다. 휴도옥린의 눈빛이 망연해졌다. 그 눈빛은 무엇인가를 열렬히 생 각하는 듯 하기도 했고 또 아득한 과거의 거억을 더듬는 것 같기 도 했다. 그리고 손. 그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품 속 깊숙한 곳에서 유지()에 단단 히 밀봉되어 있는 서낭()을 꺼내들고 있었다. "...?" 휴도옥린의 손이 천천히 유지를 끌러내고 다시 서신따위가 들어있 을 듯한 서낭을 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서낭 안에서 백추능이 쥐고 있는 양피지와 거의 같은 형 태의 양피지 한 장이 나왔다. 백추능의 눈이 커졌다. 거미줄처럼 빽빽이 기문양이 그려져 있는 오래된 양피지, 그것은 누가 보아도 백추능이 쥐고 있는 양피지와 같은 성질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게 뭔가요?" "음! 나도 모르오. 단지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나의 옷에 꿰매 주었던 것이오. 나는 그동안 이것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소." 백추능이 빼앗듯 휴도옥린의 품 속에서 나온 양피지를 받아들었 다. 이어 그녀는 두 장의 양피지를 세밀히 비교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양피지에 그려져 있는 문양의 형태는 달랐다. 그러나 양 피지의 지질()이나 연대(), 그리고 그려져 있는 문양의 획 등은 두 장의 양피지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임을 드 러내고 있었다. "이 두 장의 양피지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어요. 제가 지니고 있던 양피지가 어떤 장소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매복을 파 해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그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에요." "으음! 이미 짐작하고 있었소. 그리고 부모님이 죽게된 진정한 이 유도 바로 이 양피지 때문이었다는 것도...." "아...!" "나는 단지 일곱 명의 검은 그림자가 어둠에 잠긴 호수 속으로 사 라져 가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우리 가족을 해친 것 으로만 알고 있었소.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바로 이 양피지를 뺏 기 위함이었을 것이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휴도옥린의 과거의 한 단편을 알게 된 백추 능의 눈에 동병상린의 연민이 솟아났다. 잠시 후 백추능이 입을 열었다. "이 양피지 또한 제가 지니고 있으면 안될까요? 과연 어느 곳인지 한 번 풀어보겠어요. 지금 이 문양으로 보아 그 장소가 바다() 인 것 같기는 한데 자세한 것은 좀더 연구해 봐야겠어요." "그렇게 하구료." 휴도옥린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의 그들은 진정 모르고 있었다. 이 두 장의 양피지가 의미하는 것이 어느 정도 엄청난 것인지를.... 잠시 후, 그들을 태운 소선은 제남도의 해변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자 섬 깊숙한 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리고 소선이 해변에 닿을 즈음에 서는 이미 그들이 내려설 해변가에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 휴도옥린은 그들의 움직임을 대하고 내심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포위하듯 그들을 감싼 사람들의 움직임은 비상하도록 빨랐다. 그들은 모두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인 양 간편한 경장차림이었으나 얼굴은 검은 천으로 가리고 두 눈만을 내놓고 있었다. "저는... 백추능이에요." 백추능은 둘러선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침묵했다. 그들의 눈에서는 무서운 살기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추능은 당황했다. "저는... 이백 년 전 중원으로 떠난 백령비() 조사의 후예 예요. 바로 제남검가의 후예란 말이에요." "...." 거듭 말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오로지 살기()만이 휴도옥린과 백추능의 전신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때였다. 둘러선 사람들 중 누군가가 손짓했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이 섬 안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태도로 보아 백추능의 말을 확 인하려는 듯이 느껴졌다. 휴도옥린과 백추능은 해변에 방치되어 있었다. 둘러서 있는 사람들 또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들을 감 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여전히 위압적이었고 한 걸음이라 도 움직이면 여지없이 공격할 듯한 기세였다. '으음! 외부 사람들을 극도로 기피하는 관습이 있다더니 이것은 듣던 것보다 더하군!' 휴도옥린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청년들이었고 개중에는 늙은이도 섞여 있었다. 뿐이랴! 휴도옥린은 여자로 보이는 사람들도 발견하고는 내심 탄성을 토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한 명 한 명 모두의 몸놀림은 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 민했다. 자연스럽게 포위하고 있는 형태는 제아무리 고수라 해도 함부로 몸을 빼낼 수 없는 것이었고, 깊고 나직한 호흡은 모두들 무서운 고수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자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수대 ()를 내려오면서 쌓여진 본능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실로 괴이한 종족()이로군. 어느 한 명, 당장이라도 강호에 나간다면 고수 아닌 사람이 없군!' 제남도의 사람들은 밤낮으로 무공만을 익혀온 듯했다. 그리고 그 들의 진퇴에는 아무런 말도 교환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되는 엄 격한 질서가 있었다. 잠시 후, 연락을 위해 떠났던 사람과 함께 장대한 체구의 청의노 인 한 명이 뛰는 듯 달려왔다. 청의노인의 모습이 가까와지자 젖 어있던 백추능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숙()! 이곳에 와 계셨군요." "능아...!" 나타난 청의노인은 바로 검숙 백우군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제남도에 들어와 있었던 듯 했다. "능아... 살아 있었구나!" 백우군은 노안에 하나 가득 기쁨의 눈물을 담은 채 백추능을 힘차 게 안았다. 그러다가 옆에 서 있는 휴도옥린을 발견하고 반색했 다. "역시! 그대가 도와 주었구료." "별 말씀을...." 휴도옥린 역시 내심 안도했다. 백추능이 같은 혈족임을 확인한 사람들은 하나 둘 검은 천을 벗으 며 백추능에게 다가와 양팔을 벌리며 그녀를 가볍게 안아갔다. 차례차례 다가와 포옹한 후 눈웃음을 보내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 는 진정으로 백추능을 반기는 빛이 솟아나 있었다. "...!"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이한 예법을 갖추고 있는 그들에게 백추능은 진정으로 혈족들간에서 느끼는 짙은 유대 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휴도옥린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백추능은 그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라고 여러 차 례 말했으나 아무도 휴도옥린에게 따뜻한 눈길를 보내지 않았다. 잠시 후, 휴도옥린과 백추능은 섬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전각으로 안내되었다. 육중한 대문과 높은 돌담, 그리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호수등 전각의 형태는 당당했다. 하나의 작은 성()을 방불하는 전각은 세 개의 성곽으로 나뉘어 져 있고 성곽마다 출입하는 문이 있었다. 문 위에는 몇 개의 깃발이 해풍()에 나부끼고 있었다. 규모가 크지 않은 섬의 한복판에 마치 황도()에서나 대할 수 있을 듯한 굉장한 전각을 목격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신비하기 이 를데 없었다. 더구나 전각 전체에서는 음울하리 만큼 깊은 정적감 만이 느껴지고 있어 기이하기만 했다. 제남도의 사람들은 휴도옥린을 따로 전각의 서원()으로 안내 했다. 백추능과 백우군은 다른 곳으로 안내되어 간 듯 보이지 않 았다. 기다리기 시작한 지 어느새 반시진은 되었다. 휴도옥린은 어쩐지 이 섬에 잘못 온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 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적의()는 너무나 강렬 해 그들과 가까와 진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휴도옥린은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앉아 있는 것이 따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 장지문이 좌우로 열렸다. 새파란 청의를 걸친 사십대의 중년인이 정면 좌()에 앉아 있었 다. 각이 진 얼굴에 널찍한 어깨, 당당한 눈빛과 솔직담대해 보이는 태도는 실로 사내다운 기질을 풍기는 인물이었다. "나는 이 섬의 당대도주인 백붕비()라 하오." 중년사내는 휴도옥린을 향해 바닥에 두 손을 짚으며 예를 취했다. 휴도옥린 역시 같은 방법으로 예를 갖췄다. 중년사내, 백붕비가 서슴치 않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미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본 섬은 외부인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무척 싫어하고 있소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소." "...." "이 섬은 진귀하기 이를 데 없는 홍옥()의 산지()로써 우 리는 해마다 조금씩 홍옥을 내다팔아 가업을 유지해 오고 있소. 그러나 그 일은 극비로 진행되기 때문에 이 섬이 홍옥의 산지임을 아는 사람은 우리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지요." "...." "만약 외부에 본섬 전체가 홍옥으로 뒤덮여 있는 사실이 알려지면 본섬은 멸문지화를 당할 우려가 있는 것이오. 해서 우리는 이 섬 에 외부인이 들어오면 지금까지 한 명도 살려서 보낸 적이 없었 소." "...!" 휴도옥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백붕비의 말은 당당하고 정중했으며 그리고 솔직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휴도옥린을 죽여야겠다는 굳은 결의가 담겨있는 말인 것이다. '으음! 이런 일이....' 휴도옥린은 내심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였다. "양해해 주리라 믿소." 백붕비는 사뭇 정중하게 다시 예를 취한 후 몸을 일으켰다. 그리 고 장지문이 다시 닫혔다. 휴도옥린은 아무도 없는 서원에 앉아 망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을 공격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한데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지 알 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 휴도옥린은 마치 홀린 듯 멍청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켜 서원을 빠 져나오기 시작했다. 헌데 채 두어 걸음이나 걸었을까? 덜컥! 그의 발이 닫는 지면이 소리도 없이 아래로 꺼져 내렸다. 휴도옥린의 몸은 당연히 끝도 없이 뚫려있는 암흑의 공간으로 떨 어져야 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허리의 청강검을 끌러 함정의 벽면을 찍으며 솟아올라 순식간에 함정 건너편에 내려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휴도옥린의 전면에는 어느새 여섯, 일곱에 달하 는 사내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검은 빛으로 윤기를 뿜어내고 있는 기이한 검(), 휴도옥린은 그 들이 쥐고 있는 검()이 진검()이 아닌 목검()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철()이 귀한 듯 그들은 기이한 재질로 만들 어진 목검으로 휴도옥린을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목검이라 해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고수에게는 목검이나 진검이 나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의 눈이 다시 왼쪽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도 역시 대여 섯 에 달하는 사내들이 우뚝 서 있었다. 휴도옥린은 이미 말이 필요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실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휴도옥린은 이런 무의미한 싸움은 극히 싫었다. 그러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휙! 목검 하나가 바람을 끊으며 휴도옥린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공 간을 일순에 단축하는 가공할 솜씨였다. "윽!" 그러나 공격해 왔던 사내는 지면 한 쪽에 쓰러지고 그가 쥐고 있 던 목검은 휴도옥린의 손으로 옮겨졌다. 동시에 휴도옥린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한 명이라도 덜 다치게 하고 바다쪽으로 탈출할 것을 생각했 다. 파바박! 슈우우욱! 그러나 그가 순식간에 네 명의 혈도를 쳐서 쓰러뜨린 후 전각의 광장으로 나갔을 때 그곳에는 수십 명의 적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휴도옥린의 움직임에 맞춰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들에게는 훈련된 질서가 있었다. 그들은 싸우면서도 한 마디의 기 합도 지르지 않았고, 휴도옥린의 목검에 맞아 지면을 구를 때에도 비명성마저 지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다시 일곱 명이 휴도옥린의 목검에 맞아 나뒹굴었다. 아직까지 휴도옥린은 살수를 펼치지 않고 있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들을 죽이기가 진정 싫었기 때문이었다. 싸움이란 본시 간발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된다. 제남도 무인들의 무공은 진정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휴도옥린 의 무공은 죽음 가운데에서 쌓아올린 실전무예였고, 그들의 무공 은 숙달된 연무에 의한 것이었다. 그 차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휴도옥린의 일검(), 일검은 그 어느것 하나 빈 허공을 치는 일이 없이 정확한 속도와 힘, 그리고 방향을 지니고 있는 반면 제 남도의 무인들은 훈련된 질서와 무서운 투지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휴도옥린과 같은 무서운 고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팍! 카아...! 휴도옥린은 벌써 이십여 명의 혈도를 점하며 대문쪽으로 밀고 나 갔다. 이 괴물같은 성곽만 벗어나 밀림 속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그때에 는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섬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 후에 생각할 문제였다. 문득 휴도옥린의 눈에 한 쪽에 위치한 마굿간이 보였다. 마굿간에 는 수십 필의 말이 있었다. 그곳에 뛰어든 휴도옥린은 말등을 모 조리 세차게 친 후 그중 한 마리의 등에 올라탔다. 히히힝! 두두두두...! 아픔을 견디지 못한 말들은 일제히 소리치며 쇄도해 나갔고 적진 은 혼란으로 빠져 들었다. "이럇!" 휴도옥린은 말을 몰아 질풍처럼 우글거리는 그들의 사이를 돌파했 다. '제길...!' 휴도옥린은 내심으로 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헌데 미친 듯 말을 몰아가던 휴도옥린은 말을 멈추지 않을 수 없 었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던 것이다. 그 대문 앞에는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들까지 일렬로 늘어서 목검 과 죽창, 갈고리 등 온갖 무기들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 모두는 필사적인 표정이었다. "으음...!" 휴도옥린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양보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깨끗이 그들 손에 잡혀 죽던가, 아니면 사정없이 그들을 베어넘기며 활로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 휴도옥린은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쪽 을 바라보았다. 그가 도주를 만났던 서원의 장지문은 다시 열려 있었고 그곳에 도 주 백붕비가 감탄의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헌데, 백붕비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당황과 곤 혹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한 백우군과 백추능의 모습이었다. 휴도옥린은 그들 모습을 보기는 했으나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도주의 성품을 보아 그들이 아무리 간청한다 해도 자신에게 율법 을 깨는 호의를 베풀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휴도옥린의 예측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백우군이 도주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하는 모습이 보였고, 이어 도 주는 확인하듯 백추능에게 무어라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도 주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쳐들었다. 순간, 휴도옥린을 향해 이중 삼중으로 포위망을 쌓고 있던 제남도 의 무인들이 일제히 포위망을 푸는 게 아닌가? 그 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무서운 살기를 씻 은 듯이 지워버리고 백추능에게 보여주었던 그 기이한 예를 갖추 기 시작했다. "...?" 휴도옥린은 멍청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 휴도 옥린에게 다가와 가벼운 포옹을 하며 진정으로 반가와하지 않는 가! 그것은 바로 혈족에게 드러내고 있는 짙은 유대의 표현이었 다. 휴도옥린은 자신도 모르게 백추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어라 말했기에 이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변했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나 백추능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숙인 채 골똘히 상념 에 잠겨 있어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은 달리 보면 일부러 휴도옥린의 눈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을 했기에 이들이 태도를 바꾼 것이오?" "...!" "말이 통하지 않을 사람들 같았는데...?" 휴도옥린은 전각의 수많은 내실 중 한곳을 배정받았다.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쾌적한 장소였다. 백추능은 그가 무슨 질문을 던져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능금 처럼 목덜미까지 붉힌 채 지면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내심에 구름같은 의혹이 솟아났다. 그가 자꾸 재촉하자 백추능이 눈을 들었다. 기이한 열기()가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어요." "...?" 휴도옥린은 그녀가 입을 열 것 같은 기세가 아님을 느끼고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헌데 밤이 되어도 백추능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았다. 별다 른 대화도 없이 침묵과 함께 앉아있던 휴도옥린은 밤이 이슥해져 서야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고단하지 않소? 그만...." "아니예요. 저는 이곳에 있어야 해요." 백추능은 휴도옥린이 이제 돌아가 달라는 뜻을 비추자 힘없이 고 개를 저었다. 휴도옥린의 눈이 커졌다. "무슨 뜻이오?" "...!" 문득 휴도옥린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는 자신의 생 각을 확인하듯 빠른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우리를 부부라고 말했구료?" "...!" "사실이오?" 백추능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휴도옥린의 눈을 피하며 미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해서 나를 그대의 부군()이라고 말했단 말이오?" "예!" 기어들어가는 음성이었다. 백추능은 그 대답을 하면서 더욱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궜다. 숙여진 목덜미조차 불그스레 홍조로 물들어 있는 그녀의 이런 모 습은 실로 고혹적이어서 휴도옥린은 일순 가슴이 진탕되어 옴을 느꼈다. "호, 그래서 그들이 나 역시 혈족으로 받아들인 것이었군." "그래요." "...!" 휴도옥린은 잠시 침묵했다. 고소가 그의 입가에 맺혀 있었다. 그러다 이내 휴도옥린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더욱 난처한 얼 굴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 있는 한 우리는 할 수 없이 부부행세 를 해야겠구료." "...!" 휴도옥린은 우습기도 하고, 재미 있기도 하고, 그리고 또한 난처 스럽기 이를데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의 웃음은 길었다. 그러자 백추능 역시 붉어진 얼굴로 슬그머니 눈을 들어 휴도옥린을 응시하다가 배시시 예쁘게 미소했다. "풋!" 다음 날부터 휴도옥린은 스스로 설정한 마지막 훈련 일정을 진행 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능력은 아직 완전히 회복된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물 론 육체적인 건강을 되찾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본능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던 것이다. 애초에 계획했던 시일은 이미 초과되어 있었다. 그러나 휴도옥린 은 시일이 지금보다 더 많이 소모된다 하더라도 완전해지기 전에 는 절대 일을 시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조급해 할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꿈도 꾸지 못했던 신검부와 잠마해 라는 거대한 세력의 말살 작업에 필요한 능력의 회복인 것이다. 제남도의 도민들은 처음 느낀 것처럼 남의 일에 일체 관심을 보이 지 않는 성품들이었다. 휴도옥린이 무엇을 하던간에 그들은 무관 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 일부러 친해지려고 애쓰지 않아 휴도 옥린에게는 더욱 마음이 편안해지는 결과를 주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조금씩 조금씩 제남도를 둘러싸고 있는 폭풍와류에 도 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물고기들조차 살지 못하고 있는 거센 조류 속을 휴도옥린은 조금씩 범위를 늘려나가며 도전하기 시작했다. 제남도의 둘레에 휘몰아치고 있는 폭풍와류는 휴도옥린이 생각하 고 있던 최적의 훈련장소였다. 조류는 순간순간 방향을 바꾸고 있 었고 그 힘은 가히 태산이라도 짓누를 듯 엄청난 것이었다. 휴도옥린은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병장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사 방에서 조여오고, 휘몰아치고, 끌어당기는 압력을 받으며 자유자 재로 병기를 휘두를 수 있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휴도옥린이 바닷 속에 들어가 훈련하고 있는 동안 백추능은 항상 해변가에 앉아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생활이었다. 백추능은 진정 그의 아내라도 되는 듯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나 휴도옥린의 행동을 침묵으로 엄숙히 지켜보기만 할 뿐 질 문을 하거나 참견을 하지 않아 휴도옥린에게 절대 부담을 주지 않 았다. 휴도옥린이 기진맥진해져 백사장에 누워 있으면 그저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밤의 생활도 실로 기이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함께 잤다. 처음 며칠간은 휴도옥린은 침상을 백추능에게 내주고 의자 위에서 잠을 잤으나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자연스럽게 한 침상에서 자게 되었다. 그러나 육체적인 교접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잘 뿐이 다. 그러는 동안 둘 사이에 점차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 했다. 시간은 흘러갔다. 휴도옥린은 점차 그 거센 조류 속에서 평지처럼 움직일 수 이었 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육체와 정신은 완전히 일치되어 잃어버렸 던 모든 본능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도주 백붕비가 휴도옥린을 찾아왔다. "그동안 당신을 지켜 보았소." "...!" 도주 백붕비는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먼 아침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전문가인 듯 하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 한 것은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오." "...!" 휴도옥린은 침묵했다. 동시에 도주 백붕비의 날카로운 안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치 어떤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내가 찾아온 목적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은 아니오." 백붕비의 눈은 휴도옥린을 돌아 보았다.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최고의 무인이오. 나는 가끔 중원에 나가기 도 해 많은 무인을 본 적이 있지만 당신처럼 모든 병장기를 육체 의 일부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은 처음이었소." "...!"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소." 휴도옥린은 그제야 내심으로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백 붕비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실 본섬은 해마다 동영인()들의 습격을 받고 있소. 수백 년 전부터 동영무사의 습격이 끊이지 않아 우리는 자위()의 수단으로 끝없이 무공을 연마해 왔던 것이오. 그러나 우리의 무공 은 실전()에 크게 유용되지 못하고 있소." "제게 사람들을 훈련시켜 달라는 뜻이로군요." "그렇소. 기본적인 무공들은 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당신이 지니고 있는 그 우수한 살상능력과 실전에 임했을 때 의 임기능력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오." 제남도. 중원 제남검가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곳, 이들은 거듭되는 동영인 들의 습격에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무공을 익혀 어린아이라 하더 라도 각기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휴도옥린 처럼 정확하고 요령있는 살인() 비술은 아니었다. 휴도옥린은 살수()로서 키워졌고, 제남도의 사람들은 무인으 로 성장했다. 휴도옥린의 무공이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힘으로 살인을 해낸다면 제남도의 무공은 격식에 치우친 점이 많았다. "나는 당신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이든 간에 개의치 않고 있소. 단지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 도민들에게 훈련시 켜달라는 것 뿐이오." "...!" 휴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남도의 무인들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무공 이 놀라워 많은 시일이 걸리는 일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고맙소. 훈련은 바로 내일부터 시작해 주시오. 내가 보기에 당신 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두 남자는 세부적인 사항에 관해 논의했고, 그것이 끝났을 때는 이미 정오가 가까와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기분 좋은 인간 관계가 이루어졌다. 말이 없고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두 사람은 서로를 저울질해 본 후에 야 상대방에게 마음이 끌린 것이다. 다음 날부터 제남도의 도민들을 각기 살수()로 만드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휴도옥린은 자신이 매원에서 받은 그 지옥훈련을 떠올리며 그것들 중 가장 효과있는 훈련들만을 간추려 그들을 단련시키기 시작했 다. "주위의 지형지물은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용하시오." "필요없는 힘을 낭비하지 마시오." "생명과 직접 관계되지 않는 부위라면 일부러 그곳을 노출시켜 주 고라도 정확히 상대의 목숨을 끊어야 하오." "병장기를 육체의 일부처럼 느껴지도록 훈련하시오." 제남도의 도민들은 모두 합쳐 칠백여 명 가량이었다. 그들의 발전 속도는 눈부신 것이었다. 보름 정도 흐르자 그들은 휴도옥린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기 시작했다. 훈련에 임했을 때의 그들 태도는 실로 엄숙하고 진지해 휴도옥린 은 전혀 힘드는 줄 몰랐다. 여기에 각 개인의 장점과 단점을 세밀 히 관찰했다가 보완시켜주는 휴도옥린의 관찰력 또한 믿어지지 않 을 정도로 정확한 것이었다. 훈련을 시키고 있는 동안의 휴도옥린은 사람이 완전히 바뀐 듯했 다. 무뚝뚝하고 냉랭하던 기질은 사라지고 명석하고 실랄했으며 그리고 끝없는 인내를 보이며 부드럽게 지도해 나갔다. 도민들은 모든 것을 소화해 나가며 휴도옥린의 말이라면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민들은 이미 휴도옥린의 솜씨를 보 아온 터였다. 수십여 명에 달하는 자신들 사이에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당황하지 않은 채 자신들을 눈깜박할 사이에 쓰러뜨리는 그의 무공에 이미 경외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도민들은 휴도옥린에게 비판보다는 칭찬을 많이 듣게 되었 다. 그러는 동안 휴도옥린과 도민들은 진정한 혈족같은 굳은 결속 력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휴도옥린은 섬의 지형을 면밀히 살핀 후 수비에 대한 기관 매복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 일에는 백추능이 많은 도움을 주었 다. 정확히 한 달 후. 휴도옥린은 그가 섬의 외곽지역에 설치해 놓은 기관매복을 이용한 도민들의 훈련을 끝으로 모든 과정을 끝냈다. 동영인들의 습격을 가상해 대대적인 규모로 치루어진 훈련의 성과 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으음! 이 정도면 이, 삼천 명의 동영인들이 한꺼번에 습격해 온 다 해도 본섬을 지킬 수 있겠구료." 훈련을 지켜본 도주 백붕비는 신음처럼 탄성을 터트렸다. 휴도옥린이 빙그시 미소했다. "만약 이, 삼천 명의 동영인이 습격해 온다면 도민들 중 삼분지 일 가량은 희생될 것이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오." "...!" 백붕비의 눈이 커졌다. 그는 도민들의 무공이 그 정도로 향상되었 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지체된 한 달이라는 시일 때문에 휴도옥린에게 엄청난 기연이 이어진 것은 어찌보면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 아닐 수 없 다. 신()의 안배, 그렇다! 그것은 명백한 하늘의 안배였다. : 12장 해저()의 흑색대전() 남해()...! 그 여명은 참으로 신비로왔다. 아직 태양이 바다 저 아래에 있건만 점차 홍광()이 수표() 위로 번 지기 시작해 바다와 천공은 타는 듯 장엄한 붉은 색으로 뒤덮히는데.... 그러나 아직은 어둡다. 그것은 짙은 먹물 가운데 붉은 빛이 스며들고 있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제남도의 모든 것이 내려다 보이는 한 정봉에 묘령의 소녀가 우뚝 서서 여 명에 물들기 시작한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싱그럽기 이를데 없는 새벽의 해풍에 몸을 맡긴 채 수평선 저쪽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소녀는 바로 백추능이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눈에 점차 희열과 경악, 그리고 알 수 없는 흥분이 솟아나고 있었 다. 이때 그녀의 뒤쪽으로 소리없이 한 인영이 다가 들었다. "어딜 갔나 했소? 헌데, 이 이른 아침에 이곳에는 웬일이오?" 부드러운 음성, 바로 휴도옥린이었다. "아...!" 알 수 없는 흥분에 잠겨있던 백추능이 고개를 돌렸다. 이어 그녀는 잘됐다 는 듯 반색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양피지의 비밀을 풀었어요." 백추능의 손에는 휴도옥린이 건네준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쥐고 있는 양피지의 문양과 수평선 저쪽을 번갈아 비교해보며 흥분 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무슨 뜻이오?" "이 양피지가 뜻하는 장소를 알아냈단 말이에요." "...!" "그곳이 어디일 것 같아요?" "글쎄...?" 휴도옥린이 고소를 머금었다. 백추능의 들떠있는 모습도 귀엽기 이를데 없을 뿐더러 다짜고짜 알아맞추라 는 말투 또한 어린애처럼 해맑았다. "호호호! 놀라지 마세요." 백추능은 마치 중대한 비밀을 이야기한다는 듯 뜸을 들였다. 다음 순간 그 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과연 놀라운 것이었다. "바로 저곳이에요." "...?" 백추능이 바다 저쪽을 손짓했다. 여명에 물들어 있는 수평선, 그녀가 손짓한 곳은 바로 그 수평선 저쪽이었 다. "무슨 뜻이오?" "호호호! 그 장소가 바로 이 제남도에서 십여 리 저쪽의 바닷속이란 말이에 요." "...!" 휴도옥린의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호호! 저도 처음에는 이 양피지가 의미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내기 힘 들었어요. 단지 남해의 어느 섬 근처라고는 알고 있었는데..., 그 섬이 바로 이곳 제남도일 줄이야...!" "으음!" "한 번 가보세요. 이런 정도의 기관매복을 설치해 놓은 것으로 보아 그 안 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요. 아마... 제 추측이 맞는다면 천하를 경동시킬 엄청난 것이 숨겨져 있을 거예요." 휴도옥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장소이다. 백추능이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는 이미 그 신비의 장소에 가보기 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꽈르릉! 쏴아아아.... 제남도의 폭풍해류. 그 엄청난 살인와류()를 뚫고 한 인영이 움직여가고 있었다. 휴도옥린이었다. '으음! 지독하다! 이곳은 제남도의 근처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폭풍와류의 근원지인 듯 하구나!' 그렇다! 제남도의 근처에 휘몰아치고 있는 폭풍해류는 바로 양피지에 나타나 있는 장소에서 발생되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휴도옥린은 그 폭풍해류의 중심권으로 유영()해 들어가면서 엄청난 압 박은 점차 가중되어감을 느꼈다. '숨, 숨이 막힌다!' 휴도옥린은 해저() 속의 기류가 점차 강해지며 눈을 뜰 수 조차 없는 어둠이 시야를 가리자 곤혹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이미 신비 장소로 가는 위치와 그곳으로 통하는 해도()는 머릿 속에 외 우고 있는 그다. 그러나 눈조차 뜰 수 없는 압력과 눈을 떠도 한 치 앞 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아나가기란 거의 불가 능에 가까왔다. '흥! 두 장의 양피지를 모두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천하에 몇이나 될지 궁금하군!' 휴도옥린은 몸이 짓눌리는 압박 속에서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했다! 해저 속의 폭풍해류는 실로 지독해 초절정의 무인이 아니고서는 아예 접근 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전신의 감각으로 방향을 잡아나가면서 해저()에 웅장하 게 누워있는 검은 물체로 다가들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어렴풋이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내는 대전(), 전체가 묵광으로 은은 히 빛나고 있는 거대한 지하대전은 마치 악마의 거처라도 되는 듯 바다 저 아래 그렇게 서 있었는데.... 아아! 모든 것이 완전한 흑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재질 또한 신비하기 이를데 없어 은은한 묵광이 해저로 번져나가고 있는 이 광경은 원초적인 공포감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문, 문이 없다!' 해저대전을 발견한 휴도옥린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그렇다! 사방 일백여 장 크기에 달하는 웅장한 지하대전은 완전히 하나의 흑색바위 를 깎아 만든 듯 일체의 출입구를 발견할 수 없었다. '으음...!' 휴도옥린은 점차 호흡이 곤란해져 옴을 느꼈다. 이미 해저로 들어온 지 반 시간에 가까왔다. 제 아무리 호흡을 끊는 귀식대법을 활용하고는 있다지 만 더이상 견디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문득, 그는 백추능이 두번째 양피지를 해독해준 것을 생각해냈다. 휴도옥린 역시 기관매복에 관한한 전문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해저 대전의 건축물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놀라운 방법으로 지어져 있었다. 휴도옥린은 점차 전신이 터져나가는 듯한 압력을 느꼈다. 그는 서둘러 기관 장치를 찾으며 대전 위를 맴돌았다. 잠시 후, 그의 손이 조금도 틈이 없을 것 같던 흑색대전의 한 곳을 어루만 지자 한 사람이 겨우 들어설 수 있을 듯한 동혈이 드러났다. 슈우우...! 휴도옥린의 신형이 그 안으로 스며들고, 곧이어 동혈은 번개같이 다시 원래 의 형태로 막혀 버렸다. "휴우!" 대전 안에 내려선 휴도옥린은 긴 한숨을 토했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통로가 다시 닫혔고, 그리고 그가 들어설 때 함께 딸려 들어왔던 해수()는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그 순간 그는 한 방울의 물도 없는 흑색대리석 바닥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기관장치로구나." 휴도옥린은 머리를 저으며 천천히 대전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들 어선 곳은 방원 오장 정도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석실이었고 석실은 완전 히 비어있을 뿐이었다. 그 석실은 단지 그 신비에 잠겨있는 거대한 입구 에 지나지 않았다. 거대한 대전 전체가 온통 죽음의 함정만으로 가득해 있는 곳. 파해도를 지 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실로 벗어날 수 없는 함정만이 준비되어 있는 흑색대전. 휴도옥린은 조심스럽게 파해도에서 알게 된 비밀()의 방()을 향해 움 직여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파해도를 완전히 암기하고 있는 그로서도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 해저대전은 건축한 지 이미 칠, 팔백 년이 흘렀음이 분명하다. 그 엄청 난 폭풍해류에 단 한곳의 기관장치라도 고장이 났다면 나는 이곳에서 살 아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방(), 비밀의 방, 그 하나를 위해 수천여에 달하는 죽음의 함정이 준비되어 있고, 그 하나의 방을 위해 폭풍해류가 몰아치는 해저 깊숙이 거대한 대전을 지어야 했던 비밀의 방. 휴도옥린이 대전의 심처()에 자리한 그 비밀의 방에 접근해간 것은 근 이십사 시진이 흐른 뒤였다. 이미 대전의 기관매복을 파해시킬 수 있는 그로서도 이십사시진의 고군분투 끝에야 겨우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러나 흑색대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의 방을 대한 그의 첫 느 낌은 차라리 어이 없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방원 십여 장...? 완전히 밀폐되어 있는 백색의 방이다. 넓다고도 할 수 없는 그 방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팔뚝 굵기에 달하는 일 천 개의 황촉들이었고 방의 사면에 빙 둘러 놓여 있는 황촉들 뒤로 흙으 로 조잡하게 빚어놓은 듯한 열두 개의 토상()만이 있었다. 열두 개의 토상은 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 크기는 겨우 세자 정도에 불과했고, 그 배치 또한 벽면에서 열장 정도 떨어져 있어 어찌보 면 열두 명의 어린아이가 벽의 가장 자리에 늘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 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휴도옥린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 팟! 그리고 그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방에 가득해 있는 일천 개의 화촉 에 본신의 삼매진화로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일천 개의 황촉 모두에 불을 밝힌 후 방의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일장 둘레의 좌대에 정좌했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적중되기 시작했다. <연자()여, 우선 그대에게 잠마()의 맥()이 이어지게 되었음을 경하하노라.> 글귀. 일천 개의 황촉불이 밝혀지고 휴도옥린이 중앙의 좌대에 정좌하자 전면의 백색벽면에 촛불의 그림자들로 형성된 글귀가 나타나지 않는가! "잠마()?" 휴도옥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잠마().> 아아, 기억하는가! 지금으로부터 꼭 팔백팔십 년 전(), 마도() 영원불멸의 신 화() 창조를 위해 탄생되어진 마도 초유의 단체. 팔백팔십 년 전, 당대를 주름잡던 마도 최고의 고수 십이 인()이 모 여 악마의 대성전()을 탄생시켰다. 마도의 영광과 불멸의 신화를 위해 그들은 천하의 모든 기라성같은 마도고수들을 모아 하나의 단체를 만든 것이다. 마도의 모든 초강고수들은 그후 이 악마의 성지()로 모여들었고, 그리 고 마도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마도비급들을 그 성 전에 바쳤다. 열두 명의 마도고수들이 이끌고 있던 수하들의 수효만 해도 천하 모든 마도 고수의 전부라 할 수 있을 정도..., 여기에 천하각처에 퍼져 있던 마도 의 모든 인물들이 스스로 마도의 영광을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되어진 지상최강의 마도 단체가 잠마였으며 잠마의 탄생은 그야말로 정도무림에게는 피가 마르는 공포요, 죽음이었다. 허나 잠마의 존재는 또한 천하의 마도고수들에게는 중천의 태양같은 존재였다. 그 악마의 대성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천하의 마도고수들은 끝없이 만리장성 너머 어딘가로 집결했으나 그들은 다 시는 강호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악마의 대성전은 정도무림의 예측과는 달리 그 위치조차 신비에 묻은 채 점차 망각의 강 속에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마도의 전 세력이 집결된 뒤의 일... 그 엄청난 공포의 힘이 가져올 정도무 림의 파멸... 그러나 그 일이 얼어나지 않은 것이다. 잠마는 그저 탄생되었고, 기라성같은 마도고수들을 포용한 채 그렇게 점차 세월 속에 묻혀간 것이다. 당대에 이르러 이제 잠마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완전한 망각으로 묻혀버린 사상최강의 마도단체가 바로 잠마였는데, 이 잠마는 당대의 잠마해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진정한 마도의 본산 ()이었다. 그 지닌 바 저력()만 해도 지금의 잠마해가 지니고 있는 것에 능히 열 배 이상에 달하고, 오히려 신검부와 잠마해가 힘을 합한 것의 두배 이상 에 달하는 거대한 단체! 어쩌면 잠마해는 잠마라는 마도의 대성전이 신비 속에 묻혀버린 후 파생된 하나의 작은 줄기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다. 헌데 그 아득한 공포의 전설이 지금 휴도옥린의 눈 앞에서 실체를 드러내려 하고 있었으니.... <잠마, 마도 영원불멸의 신화! 그 신화를 위해 연자()는 선택 되었노라. 우리들은 그대가 누구이며 어떤 신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대는 오직 유일하게 이 마궁()에 들었으며, 그로인해 마도 의 대성전인 잠마를 이끌어 나갈 제일대 잠마천존()이 될 뿐이노라.> 일천 개의 황촉불과 열두 개의 토상()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에 의해 전면 석벽에 나타나고 있는 글귀, 그것은 실로 놀라운 내 용을 밝히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아득한 세월 이전에 안배된 어떤 운명이 자신에게 왔 음을 느끼며 예의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글귀들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도의 영광을 위해 잠마를 세웠다. 전 마도인은 한자리 에 모였고, 그리고 잠마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천하의 모든 마도고수들이 돈황()의 폐허 위에 영원한 마도의 대성전을 완성시킨 그날, 잠마의 탄생을 기초()했던 우리 열두 명은 한 가지 사실에 대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잠마를 이끌어 나갈 진정한 마종지주()을 선 택하는 문제였다.> <우리 십이 인이 완성된 마도의 대성전의 절대자가 되기 위해 서 로 쟁패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마도의 일통과 영광을 열망 하던 애초의 기도와는 달리 오히려 대성전을 완성시킨 후, 마도 스스로 자멸하는 결과가 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잠마라는 사상초유의 마세()를 완성시킨 십이 인()은 잠마십이천마()라고 불리우던 당대의 최강고수들이었 다. 팔백 년 전, 마도사상 최고의 기재들이며 마학()으로 마도의 번성기를 초래했던 인물들로써 이들 열두 명이 동시대에 마도에 출현함으로써 마도는 그야말로 유래없는 최고의 번성기를 누린 것 이다. - 천마조조() 휴도립(). 잠마십이천마 중 제일좌()인 천원좌()를 차지한 마도 최강자. 천마세()라는 가공할 마군()을 이끌며 중원무림에 등장 한 그는 육십 년만에 정도무림을 발아래 내려다 보며 천공을 우러 러 광오한 외침을 토한 인물이었는데.... 단아한 용모과 육십이 넘는 나이에도 칠흑처럼 검은 수염은 바로 그를 상징한다. - 마도(), 천염마존() 사우백(). 잠마십이천마 중 제이좌(), 한 자루 마도()로 태양을 벤다고 알려져 있는 가공스러운 마도고수. - 은단마벽() 언악군(). 신강(), 토번(), 막북()의 신()으로 숭앙되던 마도 고수, 괴퍅한 성품과 한 번 목표한 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을 내고 마는 집요한 독선으로 인해 같은 마도인들조차 그를 악마처 럼 꺼려온다. - 금사마황() 담비우(). - 흑사작() 필루추(). ... - 천고제군() 연리초(). - 북극성() 승우운(). 정도무림을 철저히 짓밟으며 천하를 십이분()했던 개세마존 들 십이 인이 공동으로 남긴 듯한 마궁의 글귀는 실로 엄청난 비 사()를 밝히고 있었으니.... <기실 우리 잠마십이천마가 도저히 융화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로 뭉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 마도 최강의 열두 명 이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모르 는 비밀로써 같은 마도인에게조차 밝힐 수 없는 마도의 치욕인 것 이다.> "...!" 휴도옥린의 눈에 강렬한 호기심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잠마, 그 신비와 아득한 공포의 이름! 탄생되었으되 영원한 신비 속에 묻혀버린 마도의 대성전, 그 탄생 비사가 밝혀지는 순간인 것이다. <이제, 우리 잠마십이천마는 스스로 천마()의 휘호를 버리고 잠마십이호교()라 칭함에 있어 영원한 마도의 대종사 이며 비어있는 잠마천존의 위()에 오를 그대에게 모든 것을 밝 히는 바....> 일천 개의 황촉불과 열두 개의 토상, 그 가운데 정좌에 있는 휴도 옥린의 주위 사면 벽면으로는 많은 그림자들이 황촉불에 의해 비 춰지고 있었다. 전면 벽면에 희미하게 나타나 있는 글귀 위에조차 무수한 사람의 그림자가 토상 때문에 아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일천 개의 촛불이 반사되고 있는 각도()에 따라 형성되는 토 상의 반사그림자는 그 크기가 확대되어 실물크기의 사람같다. 헌 데 그 수천 수만의 그림자들은 제각기 다른 형태와 자세를 취하고 있어 어찌보자면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 사이에 갇혀있는 듯한 느 낌이기도 했다. 휴도옥린은 그 무수한 그림자들이 만들어 내는 형상을 무시한 채 글귀만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범인()으로서는 흉 내조차 내지 못할 극고의 정력()이었다. <마도는 우리 십이 인의 출현으로 사상 최강의 번성기에 접어들었 다. 정도무림은 철저하게 짓밝혔고 그리고 마도천하가 목전에 완 성되는 듯 했다. 그러나 같은 마도인이라 해도 일산양호()를 용납할 수는 없는 법, 우리는 철저하게 짓밟힌 청년 소림()을 내려다 보면서, 명문 무당을 비웃으면서 그렇게 서서히 진정한 마도대종사를 가리기 위 한 마도만의 대회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마도의 영광 이었고 결국 마도만이 이 땅 위에 우뚝 솟을 그런 영광의 시대였 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패했다. 그것도 우리가 조소하고 비웃던 정도무림 의 단 일인()에 의해!> 촛불이 일렁이지 않고 있더라도 글귀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도의 치욕에 대해 기록하고자 하는 손()이 떨리지 않 을 수 없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단지 해맑은 피부에 청 년답지 않은 해탈한 눈빛, 그리고 마도최강이라고 자부하던 우리 들 한명 한명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준 그 가공스러운 신학( ) 외에는.... 마도의 십이전마대벌()을 이루고 있던 우리 십이 인 중 북극성 승우운이 최후로 패배하던 그날에 가서야 겨우 그가 천 가()라는 신비의 천외천()에서 온 인물이라는 것과 그 가 천가의 제삼십일대 숭양교주()라는 것만을 알게 되었 다.> '천가? 숭양교주?' 휴도옥린의 눈이 커졌다. 아아! 어찌 놀랍지 않으랴! 마도의 십이전마대벌이라는 가공할 세력을 모조리 꺾어내린 신비 의 천외천, 그러면서도 천하인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신 비단체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마도인들은 자신들이 신처럼 숭앙하던 십이천마가 패배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지 않았던가! <천가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몰랐다. 패배와 굴욕을 되씹 으며 겨우 알아낸 것은 천가가 일명, 숭양무원()으로도 불리우는 신비의 세외세력이라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가 잠마라는 사상최강의 마도단체를 만들게 된 진정 한 이유는 바로 이 숭양무원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잠마를 완성시켰고, 천하의 모든 마도고수에게 그들이 지 니고 있는 무학 중 가장 뛰어난 것 하나를 마도 대성전인 잠마에 바치도록 했고, 그리고 우리 십이 인은 모든 사심()을 버리고 하나로 뭉쳤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숭양무원의 가공할 신학을 꺾을 수 있는 마도사상 최강의 무공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었다.> <마도의 대성전이 완성되고 천하의 온갖 마학() 일천여 종이 집대성 되었다. 여기에 우리 십이 인이 지니고 있던 절대마학을 융화해 하나의 엄 청난 무공을 만들어 내는 일, 이 일에 십이 인은 삼십여 년의 노 력을 기울였고 결국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숭양무원의 신학을 능히 꺾을 수 있는 진정한 악마의 무학 이었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들조차 그 위력을 상상할 수 없는 그 절대마학을 그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마궁에 보존시킨 후 단 한 명의 절대마종주를 선택해 이곳에 들게 할 것이다. 그는 영원한 마도의 대종사가 될 것이며 잠마천존이 탄생되지 않 는 한 영원히 무림에 발을 디디지 않고 돈황의 그 황폐한 폐허 위 에 머무를 잠마의 신화를 펼 잠마천존이 될 것이다.> <만약의 일에 대비해 마궁에 대한 것을 두 장의 장보도로 만들어 우리 십이호교가 보관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잠마의 신화가 하루라도 빨리 천하 위에 피어나기 를 기원하며 이제 잠마천존이 될 기재를 선택하는 일에 전력을 다 할 것이다. 연자여, 마도의 영원한 대종사시여! 천가()를 꺾어 마도의 영광을 되살릴지이니....> 그것은 실로 아무도 모르는 비사였다. 휴도옥린은 너무도 엄청난 비사에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으음! 서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팔백 년 전, 마도의 대성전에 모여들었던 그 당시의 모든 마도 고수들이 돈황의 그곳에서 잠마 천존의 탄생을 기다리며 아직도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 휴도옥린이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사실이었다. 천가라는 천외 천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실 큰 관심은 없다. 그러나 이미 전설 속에 잊혀져버린 잠마라는 가공할 단체가 아직 도 그 신비와 전설 속에 묻혀 있기는 하되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는 뜻이 아닌가! 문득, 휴도옥린의 눈에 의혹이 솟아났다. "으음! 서찰에 의하면 마궁이 완성된 직후 잠마천존이 탄생되어 이곳의 무공을 익혀 잠마를 이끌고 강호에 나왔어야 했다. 헌데 어째서 팔백 년이 지난 당대에 이르기까지 잠마천존이 탄생되지 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어째서 마궁에 대한 장보도가 서로 흩어져 이렇게 강호에 유출되었단 말인가?" 휴도옥린은 이내 한 가지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궁을 완성시킨 후 잠마십이호교 사이에 어떤 분란이 있었으리라는 추측 이었다. 그로인해 두 장의 양피지가 유실되었고 그 때문에 아직도 잠마천 존이 탄생되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헌데 그 마궁에 휴도옥린이 최초로 발을 디뎠으니.... 휴도옥린의 뇌리에 다시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것은 천가라는 천외천과 당대의 신검부가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었다. "천가? 그들의 후예가 혹시 지금의 신검부가 아닐까? 그리고 현재 의 잠마해와 팔백 년 전의 잠마와 혹시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게 아닐까?" 휴도옥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천가의 후예가 신검부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잠마해와 팔백 년 전의 잠마가 연관이 있으 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서찰에 의하면 잠마의 세력은 잠마천존이 탄생되지 않는 한 강호 에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지금의 잠마해는 단지 진정한 마도의 세력이 증 발된 중원무림의 지하에서 그 후에 스스로 자생()된 어둠의 단체일 뿐인 것이다. 잠시 후, 휴도옥린은 사방 벽면에 비쳐지고 있는 무수한 토상의 그림자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열두 개의 토상들은 각기 기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거꾸로 누워있는 토상이 있는가 하면 두 팔을 허공을 향해 벌리고 서 있는 토상도 있었고, 그리고 검과 창 등을 쥔 채로 검무를 펼 치고 있는 듯한 토상도 있었다. 열두 개의 토상 자체는 실로 단순했다. 그러나 실로 놀라운 것은 황촉불에 그 토상들이 반사되어 만들어내는 그림자들이었다. 그림자들, 수천 수만에 달하는 그림자들.... 그 엄청난 수효의 그림자들은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하며 각기 다른 무공초식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뿐이랴! 휴도옥린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황촉불이 미세한 공기의 파동에 따라 흔들리게 되고, 그 순간 그림자들은 또다른 형태를 만들어내 며 또다른 무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아, 단 하나의 무공! 잠마십이천마는 분명히 모든 마학들을 집대성해 단 하나의 가공할 무공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단 하나의 무공은 그야말로 천하의 온갖 무공들을 모조리 융화하고 있었으니.... 구결은 없었다. 모든 것은 익히는 사람이 스스로의 재질에 따라 그림자를 보고 연성해야 한다. 잠마십이호교가 이 그림자들이 만들어내는 무공에 대한 구결을 남 기지 못한 까닭은 그들 스스로도 이 가공스러운 무공의 끝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흙으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듯한 십이토상의 표면에는 인체의 경혈 ()을 표시한 붉은 점들이 찍혀 있었다. 경혈을 나타낸 점들은 다시 검은 선()으로 그 진기도인()의 순서를 나타내는 듯한 표식이 되어 있었다. 열두 개 토상에 나타나 있는 내공심결(), 토납진기도인 () 방법은 모두 틀렸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이내 그 토상들의 진기도인법이 모두 하나로 일관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매원에서 수많은 종류의 내공심결을 익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열두 개의 토상이 보여주고 있는 내공심결은 또한 일반의 내공심 결과는 아예 그 차원을 달리하고 있었다. 열두 개 토상의 내공심 결을 모조리 연성해 일주천시키게 되면 범인이 일 년에 얻을 수 있는 내공()을 단 한 번의 운기()로 얻게 되는 것이다. 기연(),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어느 누구도 꿈꾸지 못한 대기 연이었다. "으음...!" 휴도옥린은 흥분으로 몸을 떨며 다시 정좌했다. 이제부터 그는 시간의 흐름을 잊을 것이다. 그리고 해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의 방에서 그는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나갈 것이다. 일단 주어진 것 만큼은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 이 구월구일 휴도옥린의 생존철학이었던 것이다. - 다음 권에 계속 - : 제13장 동영무림의 월영천() 제남도. 대륙의 최남단 뇌주반도에서도 거친 뱃길로 일백이십여 리를 가 야 당도할 수 있는 곳. 그 제남도에 어둠이 뒤덮여 있었다. 바다는 간간이 말없이 몸을 일으키고, 제남도는 죽은 듯 고요에 잠겨 있었는데.... 슈우우욱! 돌연, 그 제남도의 한쪽 해변에 괴인영들이 솟아났다. 전신에는 착 달라 붙는 검은 경장, 얼굴은 두건으로 가리고 있어 두 눈만이 드러나 있는 괴인영들의 눈에서는 음산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두 자루의 검을 허리에 한꺼번에 차고 있는 괴영들, 제남도의 북 단, 암석군만이 들어서 있는 해변가에 소리없이 나타난 그들의 수 효는 점차 늘어나 종내에는 일백여 명에 달했다. 흑영들의 몸놀림은 실로 기민한 가운데 은밀했다. 그들은 일렬로 해변에 늘어선 뒤 점차 제남도 깊숙이 향하기 시 작했다. 짙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믿어지지 않을만큼 무서운 정적과 기이한 어둠, 그리고 그 속에 서 소리없이 움직이는 흑영들의 모습은 어찌보면 진정 공포스러운 환상같기만 했다. 헌데, 흑영들이 채 이십여 장이나 전진했을까? "윽!" 돌연, 선두 대열의 흑영 중 한 명이 저절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 "...?" 흑영들은 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이채를 떠올렸다. 그러나 주위 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 이외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해변에 깔려 있을 뿐이었다. "헉!" 풀썩! 또 한 명의 흑영이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가 쓰러졌다. 흑영들 사이에서 작은 소요가 일기 시작했다. 허리에 걸려 있는 크고 작은 두 자루의 검과 기이한 복색(), 한 눈에 보아도 그들은 동영()의 무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헌데 그들은 제남도를 습격하기 위해 은밀히 상륙했다가 오히려 이유도 없이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적이다!" "매복이 있다." 흑영들은 나직이 외친 후 다음 순간 해변 가까이 펼쳐져 있는 밀 림 쪽으로 번개같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숲 속으로 뛰어들기만 하 면 자신들이 노출된 상황에서 벗어나 상대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이어 악몽같은 사건에 접하고 있었다. "윽!" 휘리릭! "크악!" 숲 속에 뛰어들기 무섭게 흑영들 사이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적들의 습격이다!" "크윽!" 흑영들 중에는 너무도 놀라 자신도 모르게 기이한 외침을 토하는 자도 있었다. 분명히 습격해온 것은 그들이었다. 그러나 밀림 속의 나무란 나 무는 모조리 검은 인간으로 둔갑이나 하듯이 검은 옷으로 변장한 그림자들이 나타나 그들을 베어넘겼다. 이것이 과연 인간인지 의심이 날 정도로 매복자들의 무공은 가공 스러웠다.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는 것은 모조리 동영무사들 뿐이 었다. 상대는 밀림의 지형과 어둠을 이용해 번개같이 나타나 검을 휘두 르고 다시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일체의 음향도 없었다. 그들은 기합성도 지르지 않았고 또 설혹 베임을 당해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동영무사들은 자신들이 마치 유령을 상대하고 있는 듯한 두려움 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체의 어둠 속에서 일체의 소리도 없이 벌어지고 있는 혈전, 그 혈전에서 당하고 있는 것은 그들 뿐이었다. 제남도에서 일백여 장 떨어진 바다 뒤, 제남도를 둘러싸고 있는 폭풍조류를 마악 벗어난 밤바다 위에 수십여 척의 배가 떠 있었 다. 그 중 가장 거대해 보이는 범선의 갑판 위에는 전형적인 동영의 복색을 갖추고 있는 이십대 청년 한 명이 팔짱을 낀 채 어둠에 잠 겨있는 제남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가신으로 보이는 네 명의 노인이 시립해 있었다. "한 시진 안에 승리의 신호가 올 것입니다. 천주(), 선실에 내려가셔서 기다리시지요." "...!" "제남도의 도민들이 제법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상륙한 무사들은 본 월영천()에서도 일급무사들입니다. 조 금도 신경쓸게 없습니다." 왜소한 키에 맑은 눈빛을 지니고 있는 홍의노인은 금의청년의 눈 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 금의청년은 그의 말을 못들었다는 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미와 찢어진 사목(), 여기에 전신에서 풍기는 더 할나위 없이 깊은 정적감.... 금의청년은 마치 한 자루의 칼날을 대하는 듯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헌데 월영천()이라 했던가? <월영천().> 동영무림을 주도하고 있는 오대세력 중 하나. 그러나 오대세력 중의 하나라고는 하나 기실 동영은 월영천 아래 일통되어 있는 상태나 다름이 없어 어찌보면 명실상부한 동영제일 가()가 바로 이 월영천이었다. 이들의 잠재력은 가히 이천 년 동영무림사상 최강의 것으로 평가 되고 있는데.... "인갈()!" 문득, 금의청년이 왜소한 홍의노인에게 눈을 돌렸다. "예!" "너는 본좌가 과연 월영천의 제일대 천주이셨던 월영인조( ) 삼성일정()의 유진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고 생 각하느냐?" "예? 그, 그게 무슨 뜻이신지요? 분명히 동영을 떠나기 전 천주 께서는 팔백여 년 전, 월영천의 사십팔월영()과 함께 중원으로 건너가셨던 그 분의 유진을 마궁에서 찾아내 회수하겠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래서 아득한 세월 이전부터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 내려온 마궁에 대한 전설을 확인하고자 그동안 계속 이 제남도를 공격해온 것이었다. 그 마궁의 위치가 이곳 제남도 부근이라고 전 설이 말하고 있기에 먼저 제남도를 정복한 후 마궁을 열어 보려 한 것이다." "헌데...?" "당시 중원으로 건너와 잠마십이천마 중의 한 분으로까지 올랐던 선조의 독문병기인 월영인검()은 확실히 본 동영 사상 최 고의 신병이기이며 월영천으로서는 꿈에서라도 회수해야 하는 신 물()이다." - 월영인조 삼성일정. 팔백 년 전, 마도의 최대 번성기를 이루었던 당시 십이전마대벌의 한 세력으 로 떠오르며 십이천마 중 제칠좌()를 차지했던 유일한 세외 마도인(). "그러나 마궁의 전설을 알고 있고, 그 위치조차 알고 있는 내가 과연 그 신검()을 회수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리라 여겼다면 그 것은 너의 오산이다." 금의청년의 말은 짧았다. 말의 핵심만을 간단히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성품인 듯했다. 홍의노인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그, 그렇다면...?" "ㅋ! 기왕에 마궁을 열 수 있다면, 잠마천존이 되어 중원마도의 대본산인 잠마를 장악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 "하, 하오나 그것은 당시 돌아온 사십팔월영 중 한 명이 짐작만 으로 한 말로써 그 진위를 믿기 어려운...." "나는 믿는다. 마궁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을 여는 자 가 분명히 잠마천존이 되는 것이다. 그 증거는 잠마의 세력이 아 직도 비밀에 싸여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실로 놀라운 일..., 동영무림의 일인자라 할 수 있는 월영천에서 마궁의 전설을 알고 있고 그 위치마저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다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금의청년 눈이 다시 어둠에 잠겨있는 제남도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제남도의 상황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동안 몇 차례 수하들을 보내 이곳을 습격해 보았다. 제남도에 서는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홍옥 때문인 줄 알고 있겠지만 홍옥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헌데 제남도의 반항이 예상 외로 거셌 지.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것이다. 월영이 이제 구주를 장악한 이상 더 이상 꾸물거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음...!" 금의청년의 눈에서 문득 강렬한 신광이 뻗어 나왔다. 그것은 야 망의 불길로써 중원대륙이라는 거대한 목표에 대한 야망이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그들이 제남도에 상륙시킨 수하들의 대부분이 이미 생포되거나 살해되었음을 그들은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으 니.... 바로 이때였다. 쏴아아...! 그들이 타고 있는 선단()의 좌측, 그곳 바닷 속에서 돌연 한 백영이 솟아나지 않는가! 놀랍게도 바닷 속에서 솟아난 백영의 전 신에는 물기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뿐이랴! 그는 바다 위로 솟아오르자 마자 거친 파도를 유유히 밟으며 월 영천의 선단 쪽으로 걸음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저히 믿 을 수 없는 신화적인 광경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고오오...! 꽈직! 백영의 손짓 한 번에 거대한 범선 하나가 그대로 터져나갔다. 쓰윽! 백영의 신형이 다시 허공을 밝으며 솟아나고, 어둠 속에서 그는 거대한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활보하듯 다시 두번째 배()로 쏘 아져갔다. "적, 적이다!" "미, 미친 놈!" 단 한 명만이 배의 갑판 위에 내려서자 동영무사들은 어이가 없 다는 듯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춤이 시작되었다. 죽음의 검무()가.... 삭! 파... 앙! 백영의 양손에는 어느새 새하얀 검신이 투명하게 느껴지는 쌍검 이 쥐어져 있었다. 검은 구름에 가려져 있는 만월()이 드러나고, 그러자 그 쌍 검의 검신에 만월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것은 환상, 죽음의 환상이었다. 백영은 단지 무아의 경지에 접어들어 춤을 추고 있는 듯 느껴졌 다. 거대한 만월이 그의 몸 주위에 어린 듯했다. 달빛 속에서 백영의 두 자루 검은 월광()을 흡수하며 다시 짙은 선혈을 불렀다. 사악! 꽈득! 거칠 것이 없었다. 두 자루 월영검()에 부딪치는 것은 모조리 양단되고, 그리 고 죽음이 혼란을 연출하며 이어진다. 월광 속을 가로지르는 한 마리 검은 독수리이련가, 눈발 속에 스 며드는 순백의 월광()이련가? 와릉! 꽈아아...! 또 다시 한 척의 배가 바닷 속으로 가라 앉았다. 다음 순간, 백영은 허공을 훨훨 날아 다음 배로 옮겨가고 있었 다. 월광 속에 드러나 있는 희디 흰 얼굴과 출렁이는 흑발, 바로 휴도옥린이 아닌가! 그가 마궁의 모든 것을 익히고 다시 나왔단 말인가? 쏴아아아...! 캉! 무서운 백광이 부챗살처럼 번져 나갔다. 십여 척에 달하던 범선들은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어 경악과 불신의 눈으로 이 광경을 대하고 있는 월영천 천주의 배로 휴도옥린의 신형이 허공을 단축하며 날아 내렸다. "누구냐?" "감히...!" 파파팍! 월영천주의 좌우에 시립해 있던 네 명의 호위원들이 덮쳐들었다. 휴도옥린은 일체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크윽!" "왁!" 그러나 그들은 덮쳐들 때보다 더욱 빠르게 퉁겨지고 있었다. 문 득, 너무도 무심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휴도옥린의 양손에 쥐어 져 있는 쌍검을 발견한 월영천주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월영인검! 그, 그것이...!" - 월영인검. 팔백 년 전 잠마십이천마의 중 한 명이며 중원에 동영의 무예를 전파한 새외마도인이었던 월영인조 삼성일정의 독문병기. 이른바 악마의 이빨이라 불리우는 가공할 신검, 이 월영인검은 바로 월영천의 영광을 의미하는 신물이었다. 휴도옥린의 두 눈에 미미한 이채가 스쳤다. 그는 이 두 자루 검 에 대해 사실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단지 열두 개의 토상 속에 당대의 십이천마가 사용하던 기병들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되어 토 상을 파괴시킨 후 그 안의 병기들은 지니고 나왔을 뿐인 것이다. 짧은 시간이 흐른 후. "천, 천존이시여...!" 퉁겨나갔던 네 명의 호위장로들 중 홍의를 걸친 왜소한 노인이 휴도옥린을 향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부복하지 않는가! 홍의노인은 다음 순간 월영천주를 향해 다급히 입을 떼었다. "천, 천주! 본 월영천은 과거에 잠마를 이루었던 십이전마대벌 중 하나입니다. 곧 잠마천존의 수하인 것입니다." "그, 그것을 나보고...! 인정하라는 뜻이냐?" 금의청년, 월영천주의 눈에 폭발할 것 같은 기이한 갈등이 어렸 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제 마악 휴도옥린의 그 가공스러운 무위 를 두 눈으로 목도하지 않았던가! 기이하게도 제남도에 상륙했던 수하들에게서조차 일체의 연락이 없는 상황이다. 월영천주는 모든 것이 어긋났음을 깨닫고 깊은 절망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천, 천존...!" 그 역시 무릎을 꿇고, 휴도옥린은 침묵으로 오랫동안 서 있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돌아가라. 그대가 온 동영으로... 그리고 두 번 다시 제남도를 공격하지 않기 바란다." "...!" "그리고 제남도에 상륙했던 수하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대하지 마라. 이미 전멸되어 있을 것이니...." "...!" 굴욕을 참으며 고개를 숙이던 월영천주의 눈이 일순 커졌다. 그 러나 그 순간 휴도옥린의 신형은 이미 월광 속으로 사라지듯 허공 을 가로 지르며 제남도의 어둠 속으로 묻혀가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밤, 휴도옥린이 해저 깊은 마궁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출관하고 우연처럼 월영천의 기습을 퇴치시킨 그날 밤, 제남도의 도민들은 자신들의 승리와 휴도옥린의 기연을 축하하는 성대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들이 휴도옥린에게 보여주는 존경심 은 이제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휴도옥린 역시 그들과 어울려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백추능은 반 년만에 돌아온 휴도옥린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밤이 깊도록 도민들의 흥겨운 연회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휴도옥린이 도민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존경받고 있는 것에 마음이 들떠있는 듯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몇 잔의 술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리고 그 날 밤 그녀는 자연스럽게 휴도옥린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마궁으로 들어가기 전 한 달 가까이 한 침상에서 자면서도 입맞 춤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이 침상에 드는 순간 그녀는 이미 나신이 되어 있었다.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술기운 때문에 용기를 낸 것이었을까? 부드러운 팔이 휴도옥린의 허리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입김이 그 의 어깨에 와 닿았다. 휴도옥린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녀가 하 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몸을 가볍게 일으켰다. 작고 부드러운 가슴이 그의 가슴을 압박해 왔다. 그녀의 입술은 뜨겁게 달아 올라 있었다. 휴도옥린은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 첫날 밤 이후. 백추능은 굳이 사랑이란 말을 꺼내지도 않았고 그날에 대한 일을 상기시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그저 없었던 일처럼 느껴지는 생활이 다시 이어졌다. 그녀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녀는 휴도옥린을 말없이 지켜 보았고 그리고 역시 말없이 휴도 옥린의 음식들을 챙겨 주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이미 느끼고 있 었다. 그것은 완전한 헌신이었다. 휴도옥린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가슴 태우거나 치근거리는 일 없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그의 부속품 으로 치부해버리는 헌신이었다. 그러나 백추능의 이 완전한 헌신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이 미 알고 있었다. 휴도옥린이 그 어떤 일을 향해 출발할 시각이 임박해 왔고, 그리 고 그 일은 영원히 휴도옥린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휴도옥린의 출발일정은 결정되었다. 그는 도주 백붕비에게 떠날 것을 통보했고 그리고 허가를 받았 다. 제남도의 도민들은 휴도옥린의 출발을 알게 되자 모두 한 자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래 묵혀 두었던 술단지들이 해변가에 줄지어 늘어섰고 섬에서 준비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음식들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칠백 명에 달하는 도민들 중 누구 한 명 빠지지 않고 모 두 드넓은 해변에 모여 들었다. 도민들은 진정으로 휴도옥린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휴도옥린은 인정의 따스함과 소속감을 느꼈다.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며 내일 아침 출발하겠다는 결의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먼 남해의 제남도에서 그는 난생 처음 행복을 찾아내기는 했 으나 행복의 종말이 두려워 목적을 버리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복수의 의지도 전혀 혼동되지 않았다. 그것은 닫혀진 서랍같은 것이어서 내일 아침이면 서랍은 다시 열 려지고 그로부터 일을 마칠 때까지 복수의 감정은 그의 정신을 지 배하고 다른 일체의 것을 추방해 버릴 것이다. 도민들은 웃고 즐기며 그리고 이별을 아쉬워 했다. 백추능도 따라 웃었다. 휴도옥린은 떠나기 전 백추능에게만은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들 려주기로 결심했다. 해변에서의 만찬이 무르익는 중간에 휴도옥린은 백추능만을 불러 내 해변가를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만감()이 교차되는 시간이었다. 내일 아침부터 그의 마음은 죽음과 파괴에 관한 계획과 준비로 가득 찰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백추능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큰 위안이었 다. 월광 아래 드러나 있는 해변의 굴곡은 환상처럼 느껴졌다. 사람 들의 흥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거리까지 와서 이윽고 휴 도옥린은 입을 떼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그는 지금 하려는 일과 그 이유를 그녀에게 말했다. 그것은 정녕 힘든 일이었다. 휴도옥린의 추측이 맞는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부모를 해친 일 곱 사내를 찾아 복수하는 일과 곡하령을 구해내기만 하면 되는 일 이 아닌, 잠마해라는 거대한 세력을 붕괴시켜야 하는 일이다. 그의 말은 웅변이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음울한 수밖에 없었던 일과 곡하령의 일....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잠마해를 붕괴시키려는 이유 를 설명하는 그의 말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휴도옥린의 이야기가 끝나자 고요함이 해변을 감쌌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휴도옥린은 목에 무엇이 걸린 듯 어색한 음 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그러나 떠나야 하오." 백추능이 눈을 들었다. 그녀의 눈이 젖어 있었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당신이 그런 말을 해줄 거라고는 미처 생 각하지 못했어요." "말할 생각은 없었소." "그럼 왜 말했어요?" "모르겠소. 아무튼 이 말은 해주고 떠나야 할 것 같았소." 문득 백추능이 고개를 떨궈 모래사장에 패여있는 그들의 발자국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은은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살아 남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요?" "별로...!" 휴도옥린이 매정스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만약 살아 남는다면 저에게 돌아오시겠어요?" 그녀는 다시 눈을 들어 휴도옥린을 정시했다. 휴도옥린 역시 걸 음을 멈췄다. "물론이오. 하지만 기다리진 마시오. 나를 기다린다면 그대의 인 생이 진정으로... 힘든 그런 게 될 거요" "...!" "살아 남을 기회는... 진정 희박하오. 그러니 기다리지 말아야 하오." "좀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당신에게 떠나지 말아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해 주셨으니 이제 저는 기뻐요," 여명은 결국 밝아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여명과 함께 휴도옥린은 떠날 것이다. 백추능은 그것을 생각하며 먼 바다를 응시했다. "...!" 이제부터 끝없는 기다림이 그녀의 운명임을 백추능은 잘 알고 있 었다. 제14장 죽음()의 전주곡()! -1 뇌주반도().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써 열대성 기후와 문물이 풍 족해 사람들의 성격이 낙천적이고 활달하기로 알려져 있는 곳이 다. 그 뇌주반도의 한 저자거리에 언제부터인가 한 사내가 구석에 쪼 그려 앉아 있었다. 그저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 목적인 듯 사내의 눈에는 아 무런 빛도 없었다. "...." 어찌보면 백치()를 대하는 듯한 무심한 눈, 사내는 오랜 시 간을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혼잡하기 이를데 없는 저자거리의 풍 경을 신기하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헐렁한 왼쪽소매와 흰천을 아무렇게나 두른 듯한 기이한 행색, 그리고 오른손에 아무렇게나 쥐어져 있는 부러진 금검() 한 자루. 그러나 사내의 용모는 실로 준미한 것이었다. 대략 이십칠, 팔 세나 되었을까?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햇빛을 받지 않은 듯한 흰 피부는 어찌 보면 창백하게 느껴지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음습한 동혈을 나온 뒤로 지금까지 많은 곳을 다녀 보았다. 그러나 저자거리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겨울날 아침이다. 그러나 겨울이라 해도 별로 춥지 않은 이 뇌주반도의 저자거리보 다 많은 사람이 붐비는 곳은 아마 드물 것이다. 어느 누구라 해도 이곳에 오면 고독하다는 느낌이 사라질 것이 다. 이곳에는 실로 수많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두 장 바구니를 들고 몸과 몸을 비벼대며 지나간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보 고 있는 외팔이 사내의 마음은 다소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뚜렷한 목적을 지닌 채 바쁘게 오가는 모 습은 생명이 활력()으로 그의 피부에 다가왔다. 외팔이 사내는 자신이 그 저자거리의 생기()에 젖어드는 느 낌에 몸을 맡긴 채 언제까지도 한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헌데 이 순간. 외팔이 사내가 쪼그리고 앉아있는 저자거리의 반대쪽, 십여 장 저쪽에 또 한 사내가 외팔이 사내처럼 오랫동안 저자거리를 바라 보고 있었다. 허름한 백삼에 허리에 걸려있는 역시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청강 검이다. 백삼사내의 모든 것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그 평범함으로 인해 그는 아무에게도 눈길을 받지 않은 채 멍청 히 저자거리의 활달한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내가 서로를 의식하지 못한 채 저자거리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실로 긴 시간이었다. 어느덧 석양이 저자거리에 내리고.... 활달했던 저자거리는 점차 활기를 잃어가며 하나 둘씩 상인들조 차 저자거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활기를 잃어가고 있는 저자거리의 풍경은 어찌보면 인생()의 황혼기에 비교되는 광경이기도 했다. 그렇게 복잡하고 왁자지껄하 던 곳이 빈 바람만이 남아있는 황량한 장소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 다. 저자거리에 석양이 내리고 모든 상인들이 철시()한 순간 그 장소에 남은 것은 외팔이 사내와 백삼사내 뿐이었다. 그제야 그들은 서로를 의식했다. "...!" "...?" 백삼청년, 휴도옥린은 내심 반대편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외팔이 사내에게서 기이함을 느꼈다. 아무런 빛도 발하지 않는 바다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암석덩 어리를 보는 듯 했다. 게다가 음습한 어둠의 기질마저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서운 인물이로군!' 휴도옥린은 상대가 한눈에 엄청난 고수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휴 도옥린이 외팔이 사내를 대하고 느꼈던 놀라움은 상대에게도 마찬 가지였다. 외팔이 사내, 그는 지금까지 휴도옥린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존재는 그야말로 인파 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 특이 한 평범을 보이고 있었다. 외팔이 사내는 분명 이 저자거리에서 북적대는 모든 사람들을 하 나하나 그 성격과 행색 등을 무의식적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휴도옥린 또한 분명히 그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 게도 그는 텅 빈 저자거리에 남아있는 휴도옥린을 대하고서야 그 를 의식한 것이었다. "...!"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휴도옥린의 눈은 더할나위없이 무심했다. 반면에 외팔이 사내의 눈 역시 무심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 무 심함은 어둠 속에 웅크린 야수의 본능을 내재한 무심이었다. 휴도옥린은 저자거리가 텅 비게 되자 천천히 저자거리를 빠져나 가기 시작했다. 제남도에서 대륙으로 돌아온 그의 첫걸음이었다. 휴도옥린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쪼그리고 앉아있던 외팔이 사내도 오른손에 반 자루 금검을 쥔 채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제 마악 눈이 마주쳤던 상대방에 대한 것은 이미 서로 깨끗이 잊어버린 듯한 느낌만을 흘려내고 있었다. 만남! 운명이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이 만남! 휴도옥린은 이 외팔이 사내를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다시 마 주치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석양. 그 석양 아래 잡목들만이 듬성듬성 펼쳐져 있는 구릉() 아래 쪽으로 실처럼 이어져 있는 작은 소로()를 휴도옥린은 걸어가 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안정되어 있었고 여유로왔다. 그러나 그의 눈은 그 렇지가 못했다. 멀리 오십여 장 좌측. 그의 눈은 그곳에 고정되어 있었고 수많은 청의무인들이 한 사내 를 가운데 두고 포진하고 있었다. 제각기 병장기들을 뽑아내고 서 있는 오십여 명의 청의검수 한가 운데 우뚝 서 있는 사내의 왼 소매는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이고 있었다. 그렇다! 바로 조금 전 저자거리에서 헤어진 그 외팔이 사내였던 것이다. 외팔이 사내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부러진 금검이 아무렇게나 쥐 어져 있었다. 검의 길이는 겨우 한자 반, 그 검으로는 아무것도 벨 수 없을 듯 초라해 보이는 모습이었고 외팔이 사내의 자세 또한 허술하기 이 를데 없었다. '아니야. 저 청의검수들은 지금 상대를 너무 경시하고 있어.' 휴도옥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순간이었다. 외팔이 사내를 둘러싼 구릉 전체에서 이는 강렬한 살기는 휴도옥 린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살기, 그것은 오십여 명에 달하는 청의무 인들이 엄청난 고수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광경이었다. 삭! 사사삭! 휴도옥린은 청의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미세한 음향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구경이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파아앗! 이때, 청의무인 중 한 명이 외팔이 사내에게 덮쳐들고 있는 모습 이 휴도옥린의 눈에 비쳐들었다. 뿐이랴! 거의 같은 순간에 외팔이 사내의 등으로 한 자루 거부()가 날아들고 있었다. 부웅! 쏴아아! 무섭도록 빨랐다. 비단 빠를 뿐만 아니라 시간의 배합과 방위의 각()까지 정밀하게 계산된 눈부신 합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눈 앞의 외팔이 사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듯했다. 신검부라는 거대한 세력에 맞서 집요하게 도전하고 있는 위대한 가문의 후예이며, 태어나는 순간 이미 벌모세수 되어야 하며 그러 고도 이십여 년간을 음습한 동혈 속에 갇혀 지옥의 훈련을 거쳐야 연성할 수 있다는 저주의 마학() 팔만사천수라황을 익힌 인 물. 사도제종()이라 했던가? 단 일 인()으로 신검부에 도전하고자 하는 초극무예의 달인 이 바로 그였으니.... 보라! 휘리릭! 그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휘두르는 비어있는 왼 소매, 그 펄럭 이는 빈 소매 뿐이건만 일순 허공 가득히 천변만화()의 수영()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 하나의 이어진 철판()이 되어 사방으로 폭산한다. "윽!" "우욱!" 순간, 답답한 신음과 더불어 쏜살같이 퉁겨져 나가는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지면에 떨어지고 나서야 가슴에 핏물이 흐르고 있 었다. 그리고 외팔이 사내의 오른손에 쥐어진 금검이 움직였다. 슷! 그의 금검은 곧바로 인의 장벽을 돌파한 후 그 뒤쪽에 오연히 서 있는 금의중년인의 가슴을 짓쳐들었다. 단 두어번의 동작이었으나 그것은 실로 그림같은 광경이었다. 금의중년인의 호위를 위해 철벽처럼 방어망을 형성하고 있던 십 여 명의 무인이 퉁겨나가고, 그리고 그 순간 금검이 찬란한 석양 빛에 반사되었다. 그리고 석양보다 붉은 선혈이 치솟고.... "이, 이럴 수가! 나... 용강철검() 관초악()이 너, 너따위의 애송이에게 단 일검에 당하다니!" 금의중년인. 우람한 체구에 흑염이 턱을 뒤덮고 있어 한눈에 위맹하기 이를데 없어 보이는 풍도이다. 그의 눈은 경악과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 용강철검 관초악. 신검부 외단세력 중 중추라 할 수 있는 팔대금왕() 중의 한 명. 뇌주반도를 비롯한 삼 개 성을 관장하고 있는 그의 무공은 가히 절정급이었다. "너, 너는 누구냐?" 관초악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가슴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걷잡을 수 없는 선혈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나? 사도... 제종!" 천천히 무너져가던 관초악의 눈에 또 다시 의혹이 솟구쳤다. 그러자 외팔이 사내가 다시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천하제일가라면 알겠군. 내가 바로 천하제일가의 삼십이 대 가 주일 걸세." 외팔이 사내, 사도제종의 말은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같은 것이었다. "천, 천하제일가! 사도제일가 말이냐!" "...!" "그, 그렇다면! 천하제일가가 다시 신검부에 도전을...!" 관초악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지면에 무너져 있는 그의 눈에 단 지 엄청난 경악만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곧 집요하기 이를데 없는 천하제일가의 신검부에 대한 삼차 도전을 뜻하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죽음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하제일가!' 오십여 장 구릉 저쪽에 서 있는 휴도옥린의 얼굴에도 놀람이 스 쳤다. 그 집요한 도전의 역사를 어찌 모르랴. 그렇다! 대륙의 아득한 남단 뇌주반도에서 중원의 심장부로 두 사내가 북 상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곧 엄청난 폭풍을 의미하는 것이었으 니...! 아아! 장안 자오진(). 장안에서 남으로 십여 리 떨어진 자오진에는 한 채의 낡은 주루 가 있었다. 편액()조차 걸리지 않은 작은 주루는 항시 한가했다. 때문에 유일한 점소이 소년은 항시 입구쪽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소년은 낯선 사람을 저울질 해보는데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헌데 소년은 도저히 그 신분을 짐작할 수 없는 한 백삼사내를 발 견하게 되었다. 작은 주루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백삼사내는 오랜 여행중인 듯 헝클어진 흑발과 더럽혀진 백삼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용모는 극히 준수한 편이었다. 소년은 사내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천천히 백삼 사 내의 용모를 확인한 후 이채를 떠올렸다. 그렇다! 꼭 일 년만이었다. 사내는 일 년 전에 찾아왔던 유별나게 왼손만 을 사용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내는 분명히 일 년 전의 그 사 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풍기는 기질은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음울해 하는 표정도, 염세적인 표정도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사내는 환하게 미소까지 보내고 있 었다. "주인 아저씨는 안에 계시냐?" "...!" 질문을 던지는 음성 또한 변해 있었다. 삭막한 북풍같은 음성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스한 음성이었다. 소년은 일 년 전과 똑같이 멍청해졌다. '저 사람이 저렇게 변하다니... 기적이란 정말 있는 것인가 보 다.' 소년은 내심 중얼거리며 슬금슬금 일어나 주인을 부르러 달려갔 다. 창사는 심각해져 있었다. 휴도옥린은 그의 심각한 얼굴을 대하고 자신의 추측이 어느 정도 들어맞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네가 부탁한 그 일을 조사해 두었네. 그 결과 기이한 일을 발 견했네." "...!" "예전에 매원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 그러니까 바로 우리가 살해한 사람들의 신분을 은밀히 알아본 결과 그들은 잠마해와 신 검부의 인물들이었네." "음...!" 창사는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떠올렸다. 그의 음성은 마치 알아내선 안될 어떤 중대한 일을 대한 듯 은은 히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 혼란스러워 죽을 지경이네. 매원 원주 가 만약 신검부의 수뇌 중 한 명이었다면 잠마해의 고수들을 우리 를 시켜 살해한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놀랍게도 살해된 인물 중에는 신검부의 중요인물들도 거의 같은 비중으로 섞여 있 었네." "나의 짐작대로군." "무엇이 말인가?" 휴도옥린의 말에 창사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휴도옥린은 굳어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원은 어떤 거대한 인물이 창설한 것이네. 말하자면 매원의 필 요성을 느낀 인물이 있었다는 뜻이지." "...?" "매원이라는 비밀 살수단체가 필요했던 것은 자신이 의심받지 않 기 위함이었을 것이네. 그는 아마...! 잠마해와 신검부 양쪽에 동 시에 몸담고 이중 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일 것이네." "이중 생활?" "그래. 그는 양쪽에 동시에 몸담고 있으면서 매원을 동원해 경쟁 자들을 제거해 나가며 차츰차츰 양쪽 모두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 여 나갔을 것이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우리에게 살해된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 아야 이득을 보는 인물이 있다는 뜻이니까." "...!" "그는 신검부에서도 있고 잠마해에도 있는 것일세. 내 추측이 맞 는다면... 그는 같은 사람일 것이네." "으음! 믿어지지 않는 일이로군." "나도 믿기 어렵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일이네." "어떻게 할 셈인가?" "매원의 원주가 누구이던간에... 그리고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 던간에 나의 복수와 관계없는 인물이라면 나는 이 일을 잊을 것이 네. 그러나...." "...?" "어쩐지 모든 음모가 그에 의해서 이루어진 듯 하네. 나의 부모 가 죽은 원인도 그와 연결되어 있는 듯 하고...."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는가?" "단지 느낌일 뿐이네." 휴도옥린이 몸을 일으켰다. 창사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무튼 그가 누구인지는 곧 알게 되겠지." 휴도옥린은 창사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면서도 일부러 딴청을 했다. 창사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제... 자네는 다시는 나를 찾지 않겠군." "그럴 것이네. 그래야만 자네가 위험해지지 않을테니...!" "음! 살아남기를 기원하겠네." "고맙네." 휴도옥린은 짧게 미소했다. 그의 미소에서 죽음의 냄새를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 점이 어쩐 지 창사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시작! 그렇다! 이 사내는 지금 아무도 꿈도 꾸지 못한 엄청난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천하의 어둠을 지배하고 있는 잠마해라는 초무림단체의 말살작업 을...! 금릉(). 황도() 금릉의 거리는 실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통팔달, 드넓게 뚫려있는 청석대로 위에는 무수한 선남선녀( )들이 오가고 있었고, 온갖 마차들과 우마차들의 인파가 정 신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황도()인 것이다. 휴도옥린은 멍청히 금릉의 시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금릉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 휩쓸리게 되면 누구나 무명 인()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휴도옥린과 비 슷한 백삼청년의 수효는 하루에도 천 명 이상 대할 수 있고, 어떠 한 행색을 하고 있어도 인파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 장소가 바로 금릉인 것이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멍청히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단순히 구경하 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다림은 곧 끝났 다. 바로 그의 첫 재물이 될 인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 철우비자 동문흑. 그는 성질이 포악한 거한이었다. 역정을 내면 움직임이 민첩해지고 그 타고난 실력으로 무공 또한 상승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기실 많은 사람들은 철우비자 동문흑같이 힘만 믿는 우둔한 사람 이 어떻게 사해금장을 운영해 나가는지 많은 의혹을 지니고 있었 다. 그러나 그가 단지 잠마해라는 어둠의 단체에 속해있는 하급 수금 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의혹을 품지 않고 있었다. 철우비자 동문흑의 일은 실로 간단한 것이었다. 그는 매달 잠마해에 속해 있는 전장이나 표국으로부터 재물이 들 어오면 그것을 보관했다가 다시 그 자신도 모르는 곳에 운송하면 되는 것이다. 저녁 무렵이었다. 철우비자 동문흑은 금릉의 중앙에 자리한 한 도박장에서 마악 나 오는 참이었다. 그는 흡족해 있는 상태였다. 도박장에서 패를 돌리는 자는 바로 같은 잠마해의 수하였고 그는 동문흑이 이기도록 교묘히 손을 놀려주었다. 그 결과 동문흑은 두둑해진 은자를 가슴에 넣고 자신이 타고 온 사두마차를 찾고 있었다. 그는 엄청나게 큰 거구를 더 강조하기 위해 항시 헐렁한 전포( )를 걸치고 다닌다. 그 헐렁한 전포의 가슴에 지금 한 식구가 평생 먹을 수 있는 거금이 단 한 시진만에 채워졌다. 그는 흡족한 기분으로 오늘 딴 은자를 오늘밤 모조리 쓸 계획이 었다. 만화루()에 새로운 기녀가 왔다던가? 그는 거리에 나와 자신의 마차를 찾았고, 마차는 그가 도박장을 들어갈 때 서 있던 장소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부 역시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 동문흑은 등을 돌린 채 마부석에 묵묵히 앉아 있는 마부를 힐끔 바라본 후 안에 탔다. 덜컹! 만약 그가 들떠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는 마부의 옷이 흑삼에 서 백삼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덜커덩! 따가닥...! 그가 마차 안에 오르자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행선지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동문흑의 마부는 그 자신만큼이나 동문흑의 다음 행선지를 잘 알 고 있기 때문이었다. 헌데 동문흑이 느긋한 자세로 마차가 가는 대로 몸을 맡긴 지 반 시진이나 흘렀을까? 동문흑은 문득 기이함을 느꼈다. 덜커덩... 덜컹! 따가닥... 따각! 마차는 점차 율동이 심해지고 있었다. 마치 자갈밭과 산중소로를 가는 듯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금릉내의 거리는 모조리 청석대로인지라 마차가 흔들릴 까닭이 없었다. "...!" 동문흑은 자신도 모르게 창에 쳐 있는 휘장을 젖히고 밖을 살펴 보았다. 놀랍게도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있었고 그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나 있는 광경은 동문흑으로서는 예상도 못한 것이었다. 마차는 동문흑의 다음 행선지가 아닌 엉뚱한 금릉교외의 야산으 로 접어들고 있던 것이다. "야, 이놈아!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동문흑의 호랑이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마부석 쪽의 휘장을 사납게 젖히며 묵묵히 앉아 있는 마부 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기이함을 그제야 깨달았다. 마부석에 조용히 앉아 마차를 몰고 있는 백삼사내는 그의 마부가 아니었다. "떠들지 마라. 이제 거의 다 왔으니...!" 백삼사내는 등도 돌리지 않은 채 산중소로로 말을 몰아갔다. "...!" 동문흑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 깜짝 놀랐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한 폐찰 앞에서 멈춰졌다. 일 년 내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듯한 그런 낡은 절이었다. 사내는 마차를 세우고 천천히 동문흑에게 다가왔다. "내려!" "...!" 동문흑은 멍청해졌다. 사내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단지 허리에 평범해 보이는 청강검 한 자루가 볼품없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자신의 두 배나 되는 거한인 동문흑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다루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내, 내가 누군지 아느냐?" 동문흑은 기이한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싸늘한 음성 뿐이었다. "내리라고 했다." 사내의 말투는 수수께끼였다. 북관()의 사투리가 섞여 있는 것 같았으나 동문흑이 보기에 사내는 북관쪽이 고향인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다. "...!" 동문흑이 짧은 순간 멍청해져 있는 순간, 사내의 오른 소매 속에 서 하얀 손이 튀어 나왔다. 그의 손은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깨끗하고 흰 손이었다. 퍽! 다음 순간, 동문흑의 머릿 속에서 굉음이 울리는 듯한 충격을 받 았다. 그는 차츰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으으!" 머리가 욱씬거리며 쑤시고 아팠다.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에 손을 가져가려했으나 손이 움직이지 않 았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턱이 가슴에 달라붙어 있었다. 시계()가 어렴풋이 밝아오자 왼쪽 팔목이 묶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픔을 참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았다. 오른손 역시 벽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의 양 발마저 벽면에 단단한 철삭으로 묶여 있었다. 그러니까 동문흑은 정신을 차려보니까 사지를 벌린 채 벽면에 묶여 서 있었 던 것이다. 동문흑은 기억이 되살아 나자 움찔 놀라며 전면으로 눈을 돌렸 다. 그 순간이었다. 폐찰내의 대웅전인 듯 중앙에는 벽에서 뜯어낸 나무를 태우고 있 는 듯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뒤쪽에 한 사내가 말없이 서 있었다. 모닥불이 끝없이 일렁이고 있어 사내의 용모는 잘 알 수가 없었 다. 사내는 팔짱을 낀 채 서서 그가 깨어나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내 말이 들리나?" 동문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놈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하겠다." 사내는 이 말을 무시했다. 그는 묵묵히 모닥불 뒤쪽에서 차가운 눈빛만을 보낼 뿐이었다. 동문흑은 슬그머니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보았다. 기이하게도 진기의 유통에는 막힘이 없었다. 사내는 그를 볼품 사납게 벽면에 묶어 놓기는 했으나 혈도를 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동문흑은 슬그머니 양 팔목에 진기를 끌어올려 철삭( )을 끊으려 하다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처럼 가는 철삭은 끊어지기는커녕 그의 살 속으로 힘을 줄 수 록 더 파고들 뿐이 아니겠는가.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고 잘 들어. 나는 지금부터 너에게 질문 을 하겠다. 그 모든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면 고 개를 끄덕여라." "...!" "대답을 회피할수록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 점은 약속할 수 있 다." "...!" 동문흑의 뇌리로 전율이 스쳐갔다. 모닥불 저쪽에 떠올라 있는 사내의 눈을 보니 그는 정말로 독종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단지 독종이 아니라 어딘가 섬뜩한 느 낌을 주는 눈이었다. 그는 화를 내려고 했다. 노여움으로 공포를 억눌러 보려고 했다. "이 도적같은 놈, 내가,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하고 이따위 수작 을...!" 동문흑은 무섭게 표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내가 모닥불을 지나 자신쪽으로 말없이 다가오자 그만 기가 죽었다. 그 순간 그의 복부로 내뻗치고 있는 사내의 왼손이 보였다. 퍽! 그 일격으로 동문흑의 거구가 휘청하고 꺾여야 정상이었다. 그러 나 그의 전신은 벽면에 고정되어 있어 그는 단지 같은 자리에서 펄쩍 경련을 일으켰다. 빡! 곧이어 얼굴에 일격을 얻어맞고 머리가 흔들거렸다. 그것은 믿어 지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동문흑은 진기가 막힘없이 흐르고 있는 상태에서 상대의 맨손에 그 정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다. 사내는 묵묵히 왼손으로 동문흑의 몸을 가격한 후 한 걸음 물러 섰다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래도 동문흑이 말할 기세를 드러내 지 않자 그는 다시 다가왔다. 이번에는 오른 손이었다. 희고 갸름한 손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은 것 같았다. 그리고 초자 연적인 고통이 곧바로 그의 대뇌 깊숙이 전달되어 왔다. 그의 전신이 덜덜 떨려왔다. 그것은 고통이라고 이름하기에는 너 무도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동문흑은 이 세상에 이 정도의 고통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시간은 짧았다. 사내는 이내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동문흑이 다시 제정신을 차 리기까지에는 반시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제 말할 준비가 되었나? 그런 종류의 고통을 두 번 다시 경험 한다면 그대는 미치고 말아. 대답해주고 않고는 중요한 게 아니 야." "무, 무엇을 알고 싶소?" 동문흑은 덜덜 떨리는 몸으로 눈을 들어 더듬더듬 거의 들리지 않는 모기만한 소리로 물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속해 있는 잠마해에 관한 모든 것을...!" "...!" 동문흑은 체념했다. 사내는 자신이 잠마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바 로 그 일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 심문은 한 시진 이상에 걸쳐 계속되었다. 사내의 질문이 점차 뜸해져 가면서 동문흑의 공포는 최고조로 달 해갔다. 더 이상 물을 것이 없게 된 뒤의 일, 그 뒤는 죽음만이 있을 것 이다. 동문흑은 이미 사내의 태도에서 그것을 느꼈고 그리고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 제15장 전설()의 달빛 살수() - 매원(). 달()이 있고, 죽음이 있었다. 오랫동안 불멸의 이름으로 회자되어 오는 공포의 대명사! 모든 무림인들의 뇌리에 독초()처럼 흐느적거릴 공포로 존재 하는 이름! ... 그들은 매원이라 불리웠다. ... 달, 백매(), 죽음. ... 달과 백매는 오랫동안 죽음 위에 있었다. ... 그들을 매원이라 불렀다. 죽음을 창조하는 달빛 살수들! 공포의 살수단체 매원! 매화의 신화가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달()이 있고, 한 명이 죽었다. 철우비자 동문흑의 입에는 섬세하게 그려진 매화 화선지가 물려 있었다. 그리고 열흘이 되기 전 달과 함께 열일곱의 죽음이 있었다. 그들의 곁에도 역시 매화는 있었다. 그들의 신원은 이내 판명되었다. 그들은 동문흑과 횡적으로 연결 되어 있는 잠마해의 수하들이었던 것이다. 잠마해의 조직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문흑이 밝 힌 열일곱 명이 그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죽은 열입곱 명 모두 고문을 받은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일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잠마해 에 속한 고수들 일백여 명 이상의 명단이 한 사내의 수중에 들어 갔음을...! 사내를 구월구일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러나 구월구일의 신화는 다시 피어나고, 동심을 지닌 소년들은 다시 구월구일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자오진의 손님없는 주루의 소년 점소이도 구월구일에 대해 이야 기 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창사를 향해 마치 자신이 구월구일이라도 되는 듯 신이나 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소년의 말을 듣고 창사는 처음 움찔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소년으로서 는 들을 수 없는 작은 음성이었다. "그래, 시작되었어." 한편 그 시각에 낙양의 허름한 병기점의 주인인 도노 좌비능역시 구월구일에 대한 신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그리고 다음에는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통쾌함을 느꼈다. 이어 그는 아무도 없는 빈 병기점이건만 누가 들을 세라 조심스 럽게 중얼거렸다. "그래, 바로 이 일이었군. 훗! 이렇게 큰 일이었다면 아예 마차 한 대 분량의 병기를 준비해야겠군." 어둠의 단체 잠마해. 피와 폭력! 그리고 비정과 온갖 음악()의 단체. 살인과 방화, 그리고 약탈을 일삼는 저주의 악마군(). 사 람들은 이 악마의 단체에 단 한 명의 사내가 도전한 일은 알지 못 했다. 그러나 매화가 달 아래 피어나는 일이 많아지고 그 죽음이 모두 잠마해 수하들의 것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 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몰랐다. 이것이 불과 시작이라는 사실을...! 철우비자 동문흑의 시체는 제일 먼저 금릉 관부로 옮겨졌다. 시 체는 발견된 순간의 모습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관부는 금릉과 가까운 곳에 일어난 이 살인사건을 무척 중시했 다. 어쨌든 황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 잠풍인랑 희수수는 동창()의 깊숙한 밀실 가운데 놓여있는 동문흑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그를 안내해 동문흑의 시신을 보여준 관부최고의 기찰조직인 동 창의 고수들은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해 있었다. 희수수는 이미 죽 은 자의 신분을 알고 있음은 물론 그 비밀 신분조차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동창의 고수들은 잠풍인랑 희수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저 그를 안내하고 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라는 영반(=동창의 수뇌.)의 지시를 받았을 뿐이었다. 희수수는 동문흑의 입에 물려있는 한 장의 사각진 작은 화선지를 빼내면서 눈을 빛냈다. "매화라...?" 화선지의 중앙에는 한 송이의 매화가 생화()인 양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매화...? 그렇군. 매원이었어!" "...!" "지난 사 년간 매원은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헌데 사 년만에 다시 움직인다?" 희수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특히 잠마해, 그리고 매원에 대해서...! "과거에 나는 매원의 꼬리를 거의 잡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에 매원이 돌연 활동을 중지해 버렸었지." 잠풍인랑 희수수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가 동문흑의 시체를 살핀 것은 단지 죽인 자가 과연 매원의 살 수인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역시 구월구일이었다. 과거...! 최고 능력을 보이던 자였지." 문득 희수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미소였다. "좋아, 좋아!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면 이번에는 확실히 그 꼬리 를 밝혀주마. 사선유사 혁련연후, 너의 꼬리를 말이다." 사선유사 혁련연후! 바로 신검부의 정보조직인 은영사를 관장하고 있는 신검부 최고 의 군사가 아닌가? 희수수의 독백은 실로 의혹스러운 것이었다. 희수수, 그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독백은 그만이 들을 수 있는 낮은 음성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헌데 알 수 없군. 이 철우비자 동문흑은 형편없는 하류인물인데 무엇때문에 혁련연후가 그를 죽여야 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순간의 잠풍인랑 희수수는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 다. 동문흑의 죽음은 곧 구월구일의 독자적인 복수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그 열흘은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진정 바쁜 나날이었다. 한 명은 구월구일이라는 이름으로 열일곱 명의 죽음을 창조한 사 내였고, 또 한 명은 구월구일에 의해 죽은 사람이 있을 때마다 쫓 아다녀야 하는 잠풍인랑 희수수였다. 그리고 잠풍인랑 희수수는 구월구일에 의해 죽은 잠마해의 수하 들이 모두 고문을 받은 흔적이 있음을 발견하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혁련연후의 명령을 받고 있지 않아. 그는 독자적으로 움직 이고 있는 거야. 그리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어. 잠마해의 하류급 인물이 아닌 핵심인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말이야." 잠풍인랑 희수수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렇다! 휴도옥린에게 잠마해의 하급 무사를 살해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 었다. 그는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잠마해의 거대한 인맥()을 뒤엉킨 실마리를 풀 듯 차근차근 추적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목적은 단 한 명이었다. 흑살귀리 비모소, 바로 잠마해의 눈과 귀랄 수 있는 흑밀원의 원 주인 그를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잠마해의 수하들 중 손이 미치는 자는 모조 리 죽이는 것, 휴도옥린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잠마해의 수하들이라면 어차피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인물들이기 에...! 마심절도() 단합기(). 황도 금릉을 끼고 있는 이 강소성에서 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 은 드물다. 자의방()이라는 별로 크지 않은 세력의 방주로서 그가 장 악하고 있는 지역은 진회하()와 그 진회하의 물결이 흘러 들어가고 있는 단양호()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개 보잘 것 없는 방파의 방주에 불과할 것 같은 그가 실은 잠마해의 서열 일백위() 이내의 고수이며, 그가 장악 하고 있는 것이 진회하와 단양호 뿐만이 아니라 강소성 전체인 것 을 안다면 사람들은 그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환락의 장소 진회하를 장악하고 있어 그 엄청난 재물은 상상하기 도 어렵고, 황도 금릉이 있는 강소성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 잠마 해 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실로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었는데...! 마심절도 단합기는 지금 분노해 있었다. 자의방의 총단. 넓다란 대전에 온통 자의()만을 걸친 이십여 명의 신태비범 한 인물들이 시립해 있고, 그 끝에 거대한 태사의가 놓여 있다. 태사의 위에는 앙상한 몸매에 빛바랜 자의를 걸치고 있는 육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움푹 파여들어간 두 눈과 양볼이 어쩐지 음산해 보이는 인상, 노 인의 오른뺨에는 동전만한 크기의 붉은 점 하나가 선명히 찍혀 있 었다. 마심절도 단합기. 바로 자의방의 방주이며 잠마해 외단() 세력 중 강소지부를 담당하고 있는 그였다. "열일곱! 동문흑까지 포함한다면 열여덟 명이 죽었어. 헌데 그동 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게냐!" 늘어선 수하들을 쓸어보는 그의 눈에는 살기에 가까운 노기가 이 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열흘 사이에 죽은 자들은 모두 그의 휘하에 있던 자들이었다. 그 들은 모두 동문흑과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자신과는 종적() 으로 관계를 이루고 있던 수하들인 것이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일인지라... 그리고 매원의 살수들은 워낙에 그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자들이라서...!" 수하 중 한 명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변명했다. 마심절도 단합기의 차가운 눈이 입을 연 구레나룻이 무성한 자의 대한을 응시했다. "매원? 바보같은 놈들! 이 일이 매원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믿고 있단 말이냐?" "...!" "...?" 늘어서 있던 자의방 수하들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마심절도 단 합기가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매원은 이미 사 년 전부터 활동을 중지했어. 그들이 느닷없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해 그런 별 쓸모도 없는 자들을 죽이리라고 믿 고 있는 네놈들이 정말 한심스럽구나."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 하지만 죽은 수하들 곁에는 하나같이 매원의 독문표식인 매 화가...." "멍청한 놈들! 사 년 전에 매원이 활동할 때, 그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본해의 중요한 인물들만 살해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잠마해 최고 고수들만을 말이다. 죽은 사람들의 신분은 당시 나조 차 모르고 있을 정도로 극비였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정확히 그들의 신분을 알아내 살해한 것이다." "...!" "해서 나는 당시 매원이 야야()의 친위세력이라고 믿게 되었 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누가 잠마해 내해()의 중요인물의 신 분을 그렇게 잘 알고 있겠느냐." "하, 하면...! 매원이라는 단체가 야야께서 반대파를 섬멸하기 위해 은밀히 만든 세력이라는 뜻입니까?" "그, 그런 일이...!" 수하들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실로 너무도 가공스러운 말이 아 닌가. 단합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추측한다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어쨌든 수하들을 죽인 자는 매원의 살수가 아니다." "...?" "...!" "매원은 본해의 내부 상황에 대해 기실 나 단합기보다도 많이 알 고 있다. 헌데 이 자는 지금 수하를 죽이며 그들을 통해 본해의 조직망을 알아내고 있다. 그가 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 르지만 최하류의 수하들에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역시 하류의 정 보뿐이다." "아...!" "으음...!" "그가 만약 매원의 살수였다면 그런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매원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본해의 최 고 비밀에 해당되는 수뇌들만 죽였으므로 그들이 본해의 내정을 잘 안다고 믿는 나의 추측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단합기의 말에 늘어선 수하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 다. "잡아라. 전력을 다해 범인을 색출하라. 어쩌면...! 천세유령부 ()의 짓일지도 모른다." 단합기의 가는 눈에서 무서운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천세유령부.> 바로 강소성과 맞붙어 있는 안휘성()을 담당하고 있는 잠 마해 십삼외단 세력 중 한곳이다. 같은 잠마해의 예하세력이면서도 기실 단합기의 자의방과 천세유 령부는 상당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증거만 찾아내면 된다. 만약 그들의 짓이라면..., 훗! 나를 강 소성에서 쫓아내려고 획책한 짓이었다면, 당당히 야야의 재가를 얻어 한 판 벌일 작정이다." "천명!" 대부분의 수하들은 어리둥절해 있는 상태에서 황급히 고개를 숙 였다. 단합기는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태사의에서 일어나 뒤쪽의 내전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의방의 경계는 엄중해진 상태였다. 마심절도 단합기는 수하들을 죽인 자가 어쩌면 빠른 시일내에 자 신의 신분을 알아내 이곳까지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별반 걱정은 하지 않았다. 죽은 수하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 나왔을 까닭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신분조차 알지 못하는 진정 최하류의 수하들이고 단합기와 그들 사이에는 무려 세단계의 중간 수하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진정 잠마해의 정보망을 알아내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고 해도 마심절도 단합기의 이름만이라도 알아내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그 과정에서 그자는 붙잡히게 된다. 제아무리 신출귀몰하는 귀신 같은 자라 해도....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던 단합기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내전의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유달리 소녀()들을 밝히는 취향을 지니고 있었고 바로 어제 저녁, 살결이 부드러운 소녀 한 명을 데려다 두었다. 오늘 그 소녀를 자신의 쇠약해져가는 육체에 불을 붙이는 도구로 삼을 작정이었다. 소녀는 침상 한 구석에서 쪼그리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헌데 그 눈빛이 기이했다. 어딘가 공포에 질려있고 창백해져 있 지 않는가! 자신 때문만은 아니다. 마심절도 단합기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깨 닫고 실내 좌우를 살폈다. 순간, 차갑고 예리한 검극()이 들어서던 방문의 바로 옆쪽에 서 소리없이 튀어나와 그의 목에 닿았다. "헉!" "조금이라도 소리치면 너는 당장 이 자리에서 끝장나게 돼!" 사내는 조용히 말했다. "...!" 단합기의 경악은 극에 달했다.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자의방 깊숙이 잠입해 들었단 말인가? 그는 생각해 보려고 했으나 그 순간 소리없이 접근해온 사내의 일격에 사고력을 잃었다. 아주 효과적인 일격이었다. 그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양다리와 무릎, 그리고 발목에 가는 철삭이 단단히 감겨 있었고, 양 발목 또한 실처럼 가는 철삭에 의 해 동여매져 있었다. 입은 거칠게 자갈로 물려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사내의 어깨에 매어져 자의방의 뒷산 쪽으로 운 반되어 갔다. 사내는 기이하게도 혈도를 점하는 방법을 쓰지 않은 채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비정하게 느껴지는 방법으로 단합기를 이동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강소성의 밤을 지배하고 있는 황제라고 자칭하고 있던 자신이 단 한 사내에 의해 어린애처럼 덜렁 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것 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사내의 몸놀림은 감탄스러운 것이었다. 단합기의 몸을 한쪽 어깨에 매고 있으면서도 그의 걸음은 경쾌했 고 그리고 은밀했다. 자의방의 곳곳에는 수하들이 매복해 만약의 적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사내의 종적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사내는 능숙한 동작으로 매복들을 피하며 순식간에 총단에서 상 당히 멀리 떨어진 거리까지 단합기를 이동해 갔다. 자의방이 내려다 보이는 야산에는 목조건물이 있었다. 자의방 수 하들의 외곽 경비초소였다.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으나 높다란 나무들의 윤곽과 허름한 낡은 목조건물이 보였다. 사내는 단합기를 그곳까지 매고 가더니 한 발로 문을 걷어찼다. 쿵! 단합기는 몹시 난폭하게 돌로 된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그리고 잠시 후 모닥불이 밝혀졌다. 단합기는 꼼짝도 하지 않고 사내가 가만히 방 안을 왔다갔다 하 는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일경이 흐르자 발걸음 소리는 가까이 왔고 그를 반듯하게 굴려 눕혔다. "몇 가지만을 묻겠다. 쓸데없는 대답을 피해주기 바란다. 예를 들어 너의 수하들 명단따위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니 그런 자들을 불러대느라 시간을 소비하지는 말기 바란다." "...!"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비모소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다. 그의 거 처를 곧바로 알려줄 수 있다면 더욱 좋겠고...!" 사내의 음성에는 단합기로서는 무엇인가 알지 못할 것이 담겨 있 었다. 단합기는 저항을 포기했다. "비모소는 본해의 정보조직인 흑밀원()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오." "흑밀원의 위치는?" "그것만큼은 나도 모르오. 진정이오." 사내는 단합기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으로 들어갔다. "그의 잠마해 내에서의 위치와 그의 거처에 대해 알만한 자에 대 해 말해라." 단합기는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순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본해의 십이수뇌의 한 명이오. 그의 거처는 내해()의 백화시()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어쩌면 그는 잠마해의 어느 곳에도 없을 지도 모르오." "...?" 사내의 눈에 이채가 솟아났다. 단합기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추측이기는 하지만...! 잠마의 고향으로 가 있을지도 모 르오." "잠마의 고향?" - 잠마! 팔백여 년 전에 완성되었던 마도의 대성전. 그리고 단 한 번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망각되어버 린 신비의 땅! "그렇소. 얼마 전..., 잠마에서 강호에 나와있는 몇 명 후예들을 부르는 잠마도책()이 나타났단 소문이 있었소. 어쩌면 비 모소 역시 그 잠마의 인물인지도 모르오." 단합기는 상대에게 자신의 진정을 알리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 말해야 했다. 상대에게 만족을 준다는 것은 곧 살아남을 수도 있 을지 모르는 희망인 것이다. "비모소, 그가 잠마의 후예일지도 모른다고...?" 사내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 히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잠시 동안 천장만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다 시 질문을 던졌다. "잠마해의 내부에서 지난 십여 년 동안 가장 급격하게 부상된 인 물이 누군가? 별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수뇌급에 든 인물말일세." "...?" 단합기는 잠시 멍청한 눈빛을 보였다. 그러나 사내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런 인물이 있기는 있었소. 운이 좋았다고 믿을 수밖에 없으리만큼 순탄하게 눈부신 속도로 직위가 부상된 인물은...무영 ()이오." "무영?" "그는 신비한 인물이오. 잠마해 십이 수뇌의 위에 군림하면서도 아무도 그의 진정한 정체를 모르고 있소." "잠마해의 지존인가?" "아니오. 그는 야야의 아래에 있소. 제이인자()일 뿐이 지요." "야야?" "그렇소. 그가 진정한 본해의 지존이오. 그러나 야야의 신분 또 한 아무도 모르고 있소." "무영에 대해 알만한 자는?" 단합기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없소. 아마... 야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오. 훗! 당 신이 혹시 바로 그 무영인지도 모르지. 무영은 그런 사람이오. 아 무데에도 없지만 또한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고 있는 무서운 사 람! 어쩌면 본해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그인지도 모르겠소." 무영에 대한 것을 입에 담고 있는 단합기의 눈에는 은은한 공포 가 어려 있었다. 그는 그 공포심에서 벗어나고자 짐짓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무영이라...?" 사내는 오랫동안 그 신비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사내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포박되어진 상태로 누워있는 단합기는 사내의 발걸음소리가 점차 멀어져가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단합기는 살아날 희망 따위를 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되었다. 꽈꽈꽈... 꽈앙! 와릉! 사내가 피어놓은 모닥불 아래에 감춰져 있던 폭약이 모닥불의 열 기에 폭발한 것은 정확히 사내가 사라진 반시진 후의 일이었다. 폭음(), 한 인간의 전신이 이 지상에서 말살되어 버림을 알리는 폭음, 그 폭음은 또한 한 사나이의 고독한 추적과 복수가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 제16장 구월구일! 활동을 중지하라! 중년인(). 사십은 넘었을 나이이건만 그 아름다운 용모는 미소년을 능가하 고, 특히 여인의 아미처럼 그린 듯한 혈미()는 너무도 인상적 이다. 흑살귀리 비모소. 잠마해의 정보조직인 흑밀원의 원주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의 지략가. 그의 투명한 눈은 지금 자신 앞에 늘어서 있는 흑밀원의 고수들 을 담담히 쓸어보고 있었다. "...!" "대단한 인물입니다. 불과 일개월 만에 본해의 십삼 개 외단의 단주까지 추적해 낸 것으로 보아 그 자의 능력은 감탄할 정도인 것입니다." 비모소의 전면 좌측, 허리가 굽은 현의노인()이 서 있었 다. 피폐한 피부와 흐물거리는 눈 가장자리로 미루어 노인의 나이는 상당히 많은 듯 했다. 현의노인은 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는 단 십여 명을 살해함으로써 이미 일백여 명 이상의 본해 수하들 명단을 쥐었고, 간단히 중간급 고수인 마심절도 단합기까 지 추적했습니다." "...!" "그는 사냥개의 본능을 지니고 있는 듯 합니다. 별로 힘 들이지 않고 본해의 조직 상부로 점차 접근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추적해 온다면 앞으로 삼 개월 이내에 본해의 모든 조직망 이 완전히 노출될 것입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흑살귀리 비모소가 그제야 입을 떼었다. "그의 최종목표가 나라고 했었소?" "예! 그자에 대해 알아 냈습니다. 그 자는 바로 자모전가의 사건 때 그 어린 계집아이를 구하기 위해 애쓰던 백삼청년이었습니다." "으음! 그가 매원의 구월구일이었단 말이지? 헌데 어떻게 살아났 을까? 나의 검은 분명히 그자의 가슴을 격중했는데...!" "...?" "그건 그렇고...! 그 자가 단독으로 본해에 도전한 이유에 대해 서 생각해 보았소?" "예! 바로 곡하령이라는 소녀때문인 것 같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군. 아무 관계도 없는 어린애를 위해 그렇게 무모하게 덤벼들다니...!" 현의노인의 눈에 긴장이 스쳤다. 그는 조심스럽게 비모소를 정시 했다. "이 일을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무서운 자입니다. 짐작이 맞는다면..., 앞으로 한 달 이내에 원주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자 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함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함정? 그러니까..., 나를 미끼로 함정을 준비해 두었다가 그자 를 잡자는 말이오?" "예! 그자의 최종 목표는 분명히 원주님입니다. 아직은 본원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비모소는 혈미를 찌푸렸다. 그는 단 한 명의 살수 때문에 자신이 미끼가 되는 함정을 준비해 야 한다는 일이 무척 불쾌한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 일은 부원주가 알아서 하시오. 그리고 곡향허를 처단 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소?" "그, 그것이...!" 현의노인 부원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몸을 숨기고 있는 위치조차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오?" "예, 그렇습... 니다. 신검부에서 그를 어느 곳에 은신시켜 두었 는지 워낙 그 행사가 은밀해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비모소가 문득 짧게 입을 열었다. "그가 숨어있는 곳은 동정호()의 무류도()라는 섬이 오. 그런 곳에 숨어 있는 것을 신검부 총단만을 뒤지고 있었으니 아직껏 알아낼 수 없을 수밖에...!" 부원주인 현의노인은 물론이고 둘러서 있던 수하들 역시 깜짝 놀 란 눈빛이었다. 비모소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그의 존재는 본해에 있어서 커다란 짐이 되고 있소. 본해의 모 든 비밀이 신검부에 넘어간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그가 살아있는 점이 문제인 것이오. 진정 중요한 것은... 배신자 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본해의 수하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는 점이오." "음...!" "당장 고수들을 무류도로 보내시오. 신검부의 수하들이 그를 지 키고는 있으나 별로 힘들지는 않을 것이오. 신검부의 수하들은 자 연스럽게 비켜 줄 것이오." "예? 그, 그게 사실입니까?" 비모소의 기이한 말에 현의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모소의 입가에 사이한 미소가 어렸다. "훗! 정보를 보내준 사람은 신검부 내에 숨어있는 우리측의 화접 ()이오. 그가 영향을 발휘해 잠시 곡향허의 호위망을 혼란시 킬 것이오. 그때 그를 죽이면 될 것이오." "아...!" "애써서 신검부의 호위망을 혼란시켜줄 그 사람을 실망시켜서는 안될 것이오. 물론 그전에 이미 파견되어 있는 환사()가 그를 죽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오." "환사? 그녀가 이미 떠났단 말입니까?" "그렇소. 열흘 전이오. 그러나 환사가 아직 성공했다는 보고를 보내지 않고 있어 다시 화접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오." "...!" "그리고 구월구일을 잡을 준비가 다 되는대로 그가 다음번에 추 적해낼 만한 수하들 전부에게 본원의 위치를 공개하시오. 더 이상 의 희생을 막기 위해 그 방법이 좋을 듯 하오." "천명- !" 이렇게 해서 흑살귀리 비모소를 향해 무섭게 추적해 오고 있는 한 사내를 위한 함정이 준비되었다. 한 마리의 전서구가 매화나무만이 가득 차 있는 비밀장소로 날아 가고 있었다. 매화가 많아 매원()으로 불리우는 곳, 아무도 없는 빈 매화 장원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전서구의 발목에는 가늘게 말린 유지 가 매달려 있었다. 구구구...! 전서구는 곧바로 황량하기 이를데 없는 매원의 지하에 도착했다. 두 세 마리의 비둘기가 남아있는 비둘기장 앞에 이른 비둘기는 오랫 동안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발 목에 매여 있는 유지를 끌러내주는 사람이 없자 비둘기는 부리로 유지의 매듭을 쪼아내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비둘기의 가는 발목에 매어져 있던 유지를 묶은 끈이 풀어지고 유지가 지하석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말려 있던 유지는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반쯤 펼쳐졌다. <구월구일! 활동을 중지하라.> 밀서()의 내용은 실로 간단했다. 보낸 자의 서명도 없었다. 그러나 밀서는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빈 장원에 그렇게 덩그러 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삼 일이 지났다. 밀서는 여전히 반쯤 펼쳐진 채로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일째 되는 날 아무도 없는 정적만의 빈 매원에 한 그림 자가 귀영처럼 스며들었다. 그는 소리없이 움직여 지하의 전서구들이 있는 앞으로 다가들었 다. 그의 걸음걸이는 실로 특이했다. 수북히 쌓여 있는 먼지 위에 단 한 점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다. 사내는 지면에 떨어져 있는 유지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읽는 듯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사내는 밀서를 집어들지 않았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전서구장 안에 남아 있는 두 마리 의 비둘기 중 한 마리를 집어들었다. 그는 이미 준비해온 밀서를 예의 전서구의 다리에 단단히 싸맨 후 전서구를 빈 허공에 날려 보냈다. 푸드득! 그리고 사내는 끈질기게 그 전서구가 회답을 갖고 돌아오기를 기 다리기 시작했다. 사내가 어떤 밀서를 어느 곳으로 보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러나 전서구는 세 시진만에 다시 돌아왔다. 회답을 지니고 온 것 이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전서구의 다리에 묶여있는 밀서를 끌러내기 시작했다. <동정호. 무류도().> 회신은 극히 간단했다. 사내는 한 인물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요 구한 것이다. 그의 정보요구는 극히 신중했고, 그래서 그 정보에 대답한 인물 들도 그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그가 질문한 것은 실로 우회적인 방법이어서 기실 답장을 보낸 인물도 그가 무엇을 알아 내려는 것 인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나 그 인물은 아마 사내가 정보를 요구했던 사실조 차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채 잊었을 것이다. 사내의 밀서는 그렇게 신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내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귀영처럼 매원 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이곳에 왔었던 흔적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낼 수 없을 듯 했다. 사내가 매원의 정보망을 사용한 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사내는 매원의 정보조직을 두 번 다시 이용할 수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려는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 었다. 사내의 이름은 구월구일이었다. "매원의 짓은 아니야. 그가 비록 매원에 속해 있던 살수라고 해 도 이건 그의 독자적인 행동이야." 잠풍인랑 희수수, 그는 마심절도 단합기의 죽음까지 알게 된 순 간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그는 동창()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의 옆에는 공대선생이 의아스런 눈으로 서 있었다. "이공자,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십니까?" 희수수가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 자는 나의 복수를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이오." "...?" "훗! 자모전가의 참화를 기억하십니까?" "예! 바로 그 일을 이공자님께 조사하라고 지시한 사람이 바로 저 아닙니까!" "예, 그랬지요." "조사한 결과 그 당시 자모전가에는 서사 한 명이 새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소." "서사()?" "예, 그는 기이한 청년이었으나 자모전가의 둘째 딸인 곡하령과 무척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했었소. 이것은 많은 사람이 증언한 것이오." "그 일이 이번 매원의 일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다는 것입니까?" "있어요. 그 청년은 곡하령을 친동생 이상으로 사랑한 듯 했소. 그리고 곡하령은 바로 잠마해에 납치되어 갔고 청년은 그날 이후 사라져 버렸었소." 잠풍인랑 희수수는 자모전가의 참화에 대해 정말이지 많은 조사 를 한 듯했다. 그의 집요한 추적망 속에는 조금 특이했던 자모전가의 서사가 들 어 있었고, 희수수는 어쩐지 기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 다. 희수수는 자신의 추측을 명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생각을 거듭 하며 말을 천천히 이었다. "나는 구월구일이라는 자가 무엇인가를 추척해가고 있는 듯한 느 낌을 받았었소. 죽은 자들은 모조리 심문을 당한 흔적이 있었던 것이오. 그는 잠마해의 핵심인물, 그러니까 바로 곡하령을 납치해 간 핵심세력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소." "아...!" "그가 어떻게 자모전가의 서사노릇을 하고 지냈는지는 모르나 그 는 무서운 사람이오." 희수수는 히쭉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기...! 정혼녀가 그들에게 죽었는데도 나는 이렇게 냄새나 맡 고 다니는데 그는 벌써 행동을 개시하고 있는 것이오. 그것도 믿 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잠마해의 깊숙한 곳으로 접근해 가 고 있소." "그가 과연 구월구일일까요?" "확실하오. 사년 전만 해도 나는 그의 솜씨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 었소. 틀릴 수가 없지. 그리고 그가 아니고서는 이런 놀라운 일을 벌일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희수수는 동창의 보고서를 한참 동안 들여다 보다가 한손으로 구 겼다. "재미있군. 합작해 보고 싶은 친구야!" 동시에 그는 몸을 일으켜 방의 한쪽에 걸려있는 거대한 동경( )을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공대선생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어디를 가시려는 것입니까?" 희수수가 우아하게 흑발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누구와 약속이 있어서...." "또 자당인가 하는 그 기녀입니까?" "아니오. 이번에는 설동심()이라는 아이입니다. 자당과는 이미 삼 개월 전에 헤어졌는 걸요." "끄응!" 공대선생의 단아하고 근엄하던 얼굴이 화악 일그러졌다. 장군부를 빠져나온 희수수는 깨끗한 백마 한 마리를 몰며 천천히 장안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따가닥... 따각! 햇살은 참으로 좋았다. 그는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사람좋은 미소를 보내며 일일이 목례 ()를 보내고 있었다. 깨끗한 백마와 먼지 한 점 묻어있지 않은 흑금의(), 그리 고 아직은 필요도 없을 흑우선이 왼손에 가볍게 쥐어져 있다. 보기 드물게 준수하고 눈에 뜨이게 화사한 그의 모습은 실로 돋보 이는 것이었다. "아! 이공자님! 날씨가 좋아 어디 바람이라도 쐬실 모양이로군 요?" 그를 아는 사람들은 스쳐가는 그를 향해 부러운 눈을 던졌다. 그 럴 때마다 희수수는 일일이 대꾸하며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이윽고 그가 접어든 곳은 자오진으로 통하는 관도상이었다. 관도에 이르자 그는 빙긋이 미소하며 중얼거렸다. "훗! 자모전가의 서사는 바로 자오진의 이름 없는 주루의 주인이 소개했었다. 그 주루의 음식이 특별히 맛이 좋다고 했는데 실망시 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희수수가 휴도옥린과 창사와의 관계를 포착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의 일이었다. 그러나 창사의 중대성을 깨달은 것은 근간의 일이었 다. 휴도옥린이 바로 구월구일이고 그가 잠마해를 상대로 복수를 시 작했음을 파악한 후에야 창사에 대해 호기심이 갔던 것이다. 그의 지위와 명성, 그리고 장군부의 엄청난 인맥과 관부의 치밀 한 조사망으로 휴도옥린과 창사의 관계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 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일에 희수수의 집요함이 가미되지 않았더라면 또한 쉽 다고만 할 수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공대선생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그는 지금 창사를 찾아 가고 있었다. 멀리 작은 주루가 보였다. 입구에는 한 소년이 의자를 내놓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 고 있었다. 주루의 점소이인 듯했다. 희수수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 희수수가 자신에게 똑바로 백마를 몰며 다가오자 소년의 눈이 둥 그래졌다. 소년은 그렇게 멋진 말과 그렇게 멋진 풍도를 지닌 사람을 난생 처음 보았다. 헌데 도저히 이따위 주루에는 들어올 것 같지 않은 기막히게 멋있는 흑의청년이 미소와 함께 말 위에서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 말 좀 어디에 매어두지 않겠느냐?" "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시려고요?" 소년은 어리둥절해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희수수가 다정한 미 소를 보냈다. "왜? 이곳에서는 음식을 팔지 않느냐?" "그, 그게 아니고...!" 소년은 황급히 말고삐를 잡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는 아직도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 순간, 희수수는 주위의 경관을 살피듯 천천 히 사방을 쓸어보았다. '흠! 제법이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매복해 있으라고 했 는데 하마터면 나마저 발견하지 못할 뻔 했으니 제법이야!' 그의 눈은 이미 주루의 사방에 호흡소리조차 죽이고 은잠() 해 있는 수십여 명의 관부고수를 파악해 내고 있었다. 희수수는 만족한 미소와 함께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희수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주루의 의자에 아주 편안히 앉아 심 심한 경의를 표하면서 말했다. "매우 훌륭한 음식이었소. 보기와는 달리 음식은 정말 최고의 솜 씨였소." 창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주루가 허름하다고 해서 음식까지 형편없으라는 법은 없으니 까...!" "그 말이 맞소." 희수수는 동의하고 창사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창사는 차가운 눈으로 희수수를 직시했다. "내 주위에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번지기 시작할 때부터 누군가 가 나를 찾아오리라고 알고 있었소.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구 료?" "나는 희수수라 하오. 장군부에서 왔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들어설 때 이미 알고 있었소." 희수수가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그의 이런 익살스러운 표정은 그가 입고 있는 화사한 옷차림과 화려한 복장을 거만하게 느끼지 않도록 했다. "뭐가 알고 싶어서 왔소?" 창사는 눈 앞의 인물이 어쩐지 그런 부류의 인물들과는 달리 거 만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준수한 용모에 화려한 차림이 첫눈에는 상당히 거부감을 주었으나 잠시 함께 있자 그의 인간성이 느껴진 것이었다. 희수수는 창사의 질문에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의 친구에 대해 알고 싶소. 구월구일이라 하던가? 아무튼 그는 살인자이니까요. 관부에서 잡아들여야 하는...."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소. 그의 과거 이외에는...." 창사가 고개를 저었다. 희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짐작도 안간다는 것이 오?" "그렇소. 나의 안전을 위해 그가 취해준 배려였소." "호...!" 문득 희수수가 얼굴을 굳히고 바싹 창사를 향해 잘생긴 얼굴을 내밀었다. "당신은 상황이 지금 어떤 상태하에 놓여 있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지금쯤은 잠마해의 수뇌들도 조직내의 부하들을 죽 이며 날뛰고 있는 인물이 누군가를 틀림없이 알아냈을 것이오." "...!" "그들의 조직은 나의 관부조직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고 어 쩌면 더 무서울지도 모르오. 그놈들이 당신을 수배하는 데에는 그 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잠마해의 수하들이 당신으로부터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주변에 득실거리기 시작할 것 이 뻔하오. 그들은 나처럼 점잖게 굴지는 않을 것이오." 창사는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요." 창사는 희수수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이 휴도옥린을 자모전가에 소개시켜준 경위를 알아내려 는 인물들의 모습이 눈에 띄고 있던 참이었다. 희수수가 미소했다. "주루의 주위에 매복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마시 오. 그들은 나의 명령으로 단지 당신을 보호하려는 것 뿐이오." 창사는 희수수의 말을 믿었다. 희수수는 술을 주문했다. 그는 온김에 아주 느긋이 시간을 보낼 결심인 듯했다. 그는 이곳이 아니더라도 오늘 밤은 술을 마시며 생각을 해둘 것 이 있었다. 지난 몇개월간의 사건들을 머릿 속에서 다시 정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단 한 명의 살수가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어둠의 단체를 상대하 고 있다는 현실을 명백히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벌컥! 희수수가 술을 마시는 자리에는 창사도 함께 했다. 두 사람은 처 음에는 묵묵히 술만을 마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술병이 쌓여갈수록 그들은 서로에 대해 기 이한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어쩌면 그 까닭이 서로의 기질이 극 히 상반되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이렇게 판이한 두 사내도 드물었다. 창사는 과묵하고, 떡 벌어진 어깨에다 납작한 코를 하고 있었다. 반면에 희수수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우아하고 수다스럽고 또 사 교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러나 희수수는 이 보잘 것 없는 주루의 주인에게서 감복할 만 한 기질을 차례차례로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그의 무공 수위는 분명히 희수수를 능가하고 있는 듯 했다. 또한 그는 철저하게 왼손을 사용하며 오른손을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고 있는 점으로 인해 흐트러진 상태에서도 결 코 허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창사는 한 번 느긋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자 곧바로 모든 분야에 엄청난 학식과 광범위한 지식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과묵해 보이면서도 그에게는 타고난 해학적인 기 질 또한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점이 희수수를 즐겁게 했다. 한편 창사의 입장에서 볼 때 희수수는 하나의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였다. 처음에는 부친의 후광() 때문에 관부의 비밀조직을 지휘하는 직책을 맡은 풍류공자 정도로만 보였다. 그렇지만 타고난 성실성과 집요함, 그리고 뛰어난 재능과 믿어지 지 않을 만큼 가공스러운 무공을 소유했다는 것을 알아내기에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빈 술병은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사는 시간이 흐를 수록 점차 매원시절의 동료끼리 한 자리에 모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지금까지 휴도옥린과 함께 있을 때 외에는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밖에는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그 어둠도 더욱 짙어갔다. "음...!" 시간이 삼경에 이르자 희수수는 이제 일어서야 함을 느꼈다. 소득은 있었다. 창사라는 한 인간과 아주 짧은 순간에 굳은 우정 을 맺은 것이었다. 바로 이때, 청의무복을 걸친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인이 조심스럽 게 한 통의 양피지를 들고 들어와 희수수에게 건넸다. "...?" 희수수는 극비보고서인 듯한 예의 서찰을 창사가 앞에 있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펼쳐 들었다. 이어 그는 오랫동안 문서를 내려다 보았다. 술이 깬 듯한 표정이 었다. 잠시 후, 그는 생각을 거듭한 후에 창사를 향해 정색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소. 잠마해의 중요인물 중 한 명의 거처가 얼마 전 느닷없이 밝혀졌소." "...?" "그자가 흑살귀리 비모소라는 인물이오. 그는 흑밀원의 원주인데 바로 그의 흑밀원 위치가 공개된 것이오. 물론 동창의 조직망에 조심스럽게 포착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일부러 공개된 듯한 느낌이오." "...!" 창사의 얼굴 역시 굳어졌다. 흑살귀리 비모소는 바로 휴도옥린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임 을 그는 잘알고 있었다. "흑밀원은 잠마해의 최고정보조직으로 그 위치는 지금까지 극비 에 속해 왔었소. 헌데... 그 위치가 느닷없이 공개된 것이오. 내 가 알기로는 구월구일이 찾고 있는 인물이 바로 비모소일 것이오. 맞소?" "...!" 창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이것은 명백한 함정이오. 구월구일을 끌어들이려는!" "...!" "상황이 매우 위험하게 되었소. 그대의 친구가 위험해진 것이오. 그도 비모소의 흑밀원 위치를 지금쯤 알아냈을 것이오. 그러나 그 것이 함정인 줄 모르고 그곳으로 갈 것이오. 그것을 막아야 하는 데...." 희수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창사는 희수수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 그가 알고 있는 희수수는 휴도옥린을 체포하려는 인물이 아니라 지켜보며 잠마해가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는 인물이었다. 희수수는 다시 창사를 직시했다. 이글거리는 뜨거운 눈이었다. "내 말을 모르겠소? 만약 당신에게 그와 연락할 방법이 있다면 어서 그를 막으라는 뜻이오. 나는 이미 매원이 어떤 정보망을 사 용하는지 잘 알고 있소. 매원의 정보망은... 바로 신검부의 은영 사에서 제공하는 정보망인 것이오." "신검부? 우리가 사용했던 정보망이 바로 신검부의 정보단체인 은영사에서 제공한 것이었다고...?" 창사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희수수의 말을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희수수는 단정했다. "그것은 사실이오. 그리고 나는 매원의 원주가 누구인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는 사람이오. 내 말을 믿으시오. 어서 그에게 경고해 야 하오. 함정이라고...!" "으음...!" 창사의 눈에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희수수는 웅변처럼 빠르게 말을 이었다. "구월구일, 그는 분명히 신검부의 정보를 적당히 이용했을 것이 오." 창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우리는 이미 매원의 원주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 었소. 해서 이번의 일에 매원의 정보망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었 소. 만약 사용한다면 단 한 번, 잠마해와 아무 관계없는 다른 일 이 있을 경우에만 사용할 것이라고 그는 분명히 말했었소." "좋소. 그가 매원의 정보망을 사용하지 않았다 해도 그는 잠마해 수하 중 한 명을 심문해 그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달려가고 있을 것이오. 그 경우에는 어떻게하겠소?" 문득, 창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옥린은... 그런 함정을 눈치 채지 못할 친구가 아니오. 그는 야 수와 같은 본능을 지니고 있소. 과거에도 그는 감쪽같은 함정을 미리 눈치 채고 우리를 구해내준 적이 여러번 있었소. 아마 그것 이 함정이라면 옥린은 오히려 그 함정을 이용할 것이오." "...!" 희수수는 창사의 자신있는 말에 어이가 없는 듯 가만히 그를 응 시했다. 그리고는 신음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오. 함정임을 모를 때가 있지 않겠소?" 그러나 희수수의 우려는 맞지 않았고 창사의 예상이 적중되었다. 바로 그 시간에 구월구일이라는 고독한 복수자는 함정이 준비되 어 있는 흑밀원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 직이고 있었다. 창사. 그는 천하에서 휴도옥린에 대해 역시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사 람인 것이다. ... 늑대는 비록 병들어 쓰러져 있는 호랑이라 할지라도 단숨에 덤벼들지는 않아. ... 조금씩, 조금씩 접근했다가는 물러나 다시 쓰러진 호랑이의 동태를 살피지. ... 병든 호랑이는 늑대가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어도 어쩔 수 없어. 늑대는 호랑이에게 힘이 남아있는 한 결코 성급히 덤벼 들지 않거든.... ... 늑대는 더구나 함정인 줄 알면서 덤벼들지는 않아. ... 왜냐하면, 생존을 위해 오랫동안 진화된 영리한 습성이니 까.... 동정호(). 호남성()에 자리해 있는 동정호는 대륙 오대호 중의 하나 로써 그 둘레가 무려 칠백여 리에 달하는 광활한 바다를 방불케 하는 호수였다. 드넓은 동정호 속에 자리잡고 있는 크고 작은 섬만 해도 삼천여 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섬은 그 중 반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 분의 섬은 인간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갈대와 온갖 철새들만이 우거져 있는 수많은 섬은 동정호의 물이 불어나면 사라졌다가 갈수기()에 다시 드러나곤해 그 수효 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무류도()는 거의 무인도에 가까운 작은 섬이었다. 완전히 무인도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이십여 호구의 어민들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동정호에서 고기를 잡아 생업을 이어 가고 있는 곤궁한 사람들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이 무류도에 기이한 일행이 머무르고 있었 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소리없이 무류도에 내려섰다. 새파란 청의에 각기 병장기를 숨기고 있는 이십여 명의 무인들은 한 사람을 엄중히 호위한 채 무류도에서 가장 넓은 집을 은자를 지불한 뒤 빌렸다. 무인들은 자신들의 상전이 병을 얻어 휴양하기 위해 한적하고 풍 광이 수려한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들의 말대로 수많은 호위무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십대의 중 년인은 얼굴에 아무런 생기도 없었다. 표정 또한 항시 멍청했으며 일단 거처가 정해지자 두 번 다시 밖으로 나오는 일도 없었다. 무인들의 태도는 기이했다. 분명히 그들은 중년인을 호위하는 듯 했으나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것은 호위가 아닌 감시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그러나 무류도에 머물기 시작한 기이한 일행의 일은 이내 도민들 의 뇌리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간해서는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곡향허는 무심히 창 밖만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류도에 온 지도 이미 수개월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의 은신처()는 지난 일 년 사이에 벌써 네번째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곡향허는 신검부의 지시에 따를 뿐 어쩔 수가 없 었다. 신검부의 지시는 명확했으며 그는 그 지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집 밖으로 나가지 말것, ... 신검부의 비밀표식을 지니지 않은 사람과는 절대 이야기 하 지 말것. 물론 호위하고 있는 수하들과도 개인적인 대화는 금지 함. ...당신의 신분은 현재 이십 년 전에 잠마해에 잠입해 있던 본부 의 예하세력 은영사의 제이인자임. "...!" 곡향허의 눈빛은 풀어져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생각 하고 있는지조차 잘 알 수 없는 심리상태였다. 그의 뇌리에 맴돌 고 있는 것은 일 년 전에 자신의 품 속에서 죽어간 곡미령의 음성 뿐이었다. ... 아버님! 저는 아버님이 그 악마의 단체 잠마해의 일원이 아 닌가 의심해 왔었어요. 그러나 이제 아버님이 신검부의 사람이라 는 것을 알게 되어 자랑스러워요. '음모야...! 음모였어!' 곡향허는 완전히 허탈해져 삶의 의욕을 잃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신검부의 지시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들이 었다. 잠마해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것임은 너무도 자 명한 일이었다. 변명은 필요없다. 그리고 이제 잠마해로 돌아간다 해도 그의 주 장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곡향 허는 완전히 체념한 상태가 되어 스스로의 사고력마저 폐쇄시키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은 충격을 가라앉힐 수 있는 힘이 되었 다. 장래에 대한 희망은 없었다. 신검부는 명백히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들이 급조()해 준 직위는 그에게 아무런 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곡향허는 신검부의 사람들이 자신을 아직껏 죽이지 않은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자 그 는 오히려 조금씩 원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오늘쯤...! 화원이나 거닐어 볼까?' 그것은 금지된 사항이다. 그러나 관계없다고 곡향허는 생각했다. 저녁 무렵. 곡향허는 석양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회랑으로 나섰다. 그의 거처 입구에는 신검부의 수하가 지키고 있었다. 그가 나서자 청의청년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를 지키고 있는 신검부의 수하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정확 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곡향허를 호위해야 하는 것 인지 감금하고 감시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명령이 불분명했던 것이다. 그들이 곡향허를 대하는 느낌은 실로 기이했다. 곡향허의 신분을 알기 전만 해도 그들은 잠마해의 취문옥주를 척 살명단 제일호에 올려놓고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 저주 의 곡향허가 자신들의 편이며 이십여 년간이나 적진 속에서 활동 해온 전설적인 영웅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오히려 허탈해지 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곡향허가 명령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도 막지 못하 는 것은 이런 기이한 갈등 때문이기도 했다. "으음!" 곡향허는 오랜만에 나와보는 풍경에 심호흡을 했다. 화원은 그리 잘 손질되어 있는 편이 아니었다. 꽃이라고는 몇종 류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반정도는 손질이 되지 않아 오히려 볼품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해도 곡향허의 눈에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광경이 었다. 이때, 곡향허는 문득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 이제 겨우 십오륙 세나 되었을까? 아직 어린애에 불과한 듯한 앙증스럽고 귀여운 용모였다. 소녀는 빈곤한 어촌 특유의 낡고 허름한 마의적삼을 걸치고 있었 고 하체에는 무릎이 드러나는 짧은 단삼()을 입고 있었다. 긴 머리와 크고 둥근 눈(), 순박해 보이는 표정 등.... 소녀는 무류도 원주민의 딸인 듯했다. 곡향허는 화원 한쪽에서 아직 남아있는 꽃잎을 따내고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도... 원래 우리가 빌린 이 집에서 살고 있던 소녀인가 보 군!' "...!" 소녀도 곡향허를 발견하고는 두려워하는 태도없이 부끄러운 미소 를 머금었다. 그는 무의식 중에 따라 웃었다. "하하하!" "호호호!" 그가 웃자 소녀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어린아이답게 조심스럽게 상대를 저울질해 본 후, 상대가 웃는 모습에 마음을 놓은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아저씨가 바로 아픈 그 사람이에요?" "아파? 내가 말이냐?" "예! 무사아저씨들은 음... 아저씨가 병때문에 이곳에 휴양차 온 것이라고 했었어요." 곡향허는 이내 상황을 짐작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나 이제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구나. 이곳은 참으로 좋구나. 햇빛도 좋고...!" 소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무척 기쁜 듯했다. "그래요.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소녀는 가까이 다가왔다. 이어 걱정스럽다는 듯 곡향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많이 아파요? 얼굴이 창백한 것 같아요." "괜찮다. 햇빛을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우리 아버지도... 아저씨처럼 오랫동안 아파하다가 돌아가셨어 요." 소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한 얼굴로 조잘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 곡향허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실로 천진한 소녀였다. 처음 얼마동안은 곡향허는 소녀가 일방적으로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따스함이 느껴지는 남을 잘 따르는 그런 소녀였다. 대화는 처음의 조심스런 말투에서 점차 스스럼 없는 어조로 변해 갔다. 그녀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고 이런 기이한 상황임에 도 불구하고 곡향허는 이 소녀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곡향허를 호위하고 있는 신검부의 수하들도 이들이 대화하는 것 을 보았으나 방해하거나 신경쓰지는 않았다. 소녀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와 함께 이곳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 들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점차 어두워져 와서 화원에 서 있기가 힘들어지자 자연스럽게 소 녀는 곡향허의 방으로 따라들어 올 수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마치 자신의 부친에게 그랬던 것처럼 작고 흰 손으로 곡향허의 이마를 짚으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병이에요? 열은 없네요. 아버지는 이마를 이렇게 만지면 뜨거웠어요." "열병이었던 게로군." "그건 모르겠어요. 아버님이 하여간 열이 많이 나고 괴로와 하셨 어요." 소녀는 자연스럽게 침상머리에 앉아 곡향허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와 콧등을 스칠 때마다 곡향 허는 약간의 성적 흥분을 느꼈다. 곡향허는 침상에 누워 머리맡에 앉아 있는 소녀의 아름다운 얼 굴, 크고 따뜻한 눈, 모양 좋은 입술 등 청결한 소녀의 냄새를 즐 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그는 소녀의 짧은 단삼이 침상 모서리에 걸려 허벅지까지 치켜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소녀는 단삼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인 듯했다. 그것은 빈한한 어촌 소녀로서는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곡향 허에게 준 충격은 컸다. 그녀의 은은히 드러난 흰 속살은 풍만하기 이를데 없었다. 소녀는 곡향허의 눈이 자신의 부끄러운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별로 놀란 빛이 아니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도 모 르는 듯했다. '음...!' 문득 곡향허는 소녀가 보기보다는 나이가 많다는 것을 느꼈다. 보기에는 천진한 소녀였으나 열여덟 정도는 된 성숙한 소녀였던 것이다. 그는 소녀의 드러난 흰 살결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소녀는 어느새 곡향허의 머리를 안고 있는 자세가 되어 여전히 곡향허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작은 가슴의 융 기가 곡향허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작고 탄탄한 소녀의 육체가 곡향허의 피부에 그대로 전달되어 왔 다. 그것은 무서운 유혹이었다. 어떻게 돌연히 이 소녀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곡 향허의 뇌리 한곳에서 불현듯 의혹이 솟아났다. 그러나 그 의혹은 무서운 유혹을 이겨 내기에는 잔물결같이 미미한 것이었다. 어린 듯 하면서도 탄탄한 몸을 지닌 하얀 살의 소녀는 그의 혼을 단번에 흔들어 놓을 요사스런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마력() 앞에서 그는 진정으로 무력해져 갔다. 곡향허의 눈이 뜨거워졌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작으면서 단단한 허벅지 위에 얹혀지자 소녀가 작고 수줍어 하는 듯한 소리 로 입을 열었다. "환사를 좋아해요, 아저씨?" "네, 네 이름이 환사였느냐?" 곡향허는 입 안이 말라갔다. "그래요. 환사예요. 모두들 저를 환사라고 불러요." "그래, 이름도 모르고 있었구나." 곡향허는 간신히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뺨을 쓰다듬 어 주었다. 그녀의 피부에 손이 닿자 기이한 충격이 그의 전신에 번졌다. 순간 환사가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메마른 입술에 소녀의 입김 이 닿아왔다. 동시에 그녀의 작은 가슴이 그의 얼굴을 압박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손을 소녀의 양 쪽 둔부로 가져 갔다. 손 안에 쥐어지는 둔부의 감촉은 그의 정신 을 완전히 잃게 하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의 일은 곡향허로서는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소녀의 옷이 떨리는 그의 손에 의해 벗겨져 내려다. 단 한 겹뿐 인 옷인지라 저절로 벗겨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곡향허의 옷은 소녀의 손에 의해 아주 부드럽게 벗겨져 버렸다.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소녀는 침상 위에 반듯이 누워있는 곡향허의 몸 위로 올라왔다. 곡향허의 우람한 몸집에 비해 아주 왜소하고 갸냘픈 체구였다. 때 문인지 배 위에 걸터앉은 그녀의 중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곡향허는 소녀가 완벽한 나체 그대로 자신의 배 위에 걸터 앉자 그녀의 둔부가 자신의 피부를 짓누르는 신선한 느낌에 정신이 없 었다. 마치 한 덩어리의 불을 집어삼킨 듯한 돌발적인 욕정이 그의 체 내에서 솟구쳐 올랐다. 실로 오랫동안 그렇게 완벽하게 팽팽해진 적이 없었던 그의 하체 는 이 순간 무섭게 돌기해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둔부 뒤쪽에 곡향허의 돌기물이 접촉되는 느낌을 느낀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창처럼 세워져 있는 돌기물을 내려다 보자 곡향허는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이후 처음으로 완벽하게 팽창되어 있다는 점이 또한 자랑스러운 기분이기도 했 다. 소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곡향허를 보며 미소했다. 뭔가를 이해 한다는 듯한 그런 미소였고 또한 욕정을 불러오는 미소였다. 그 상태에서 그녀는 거침없이 손을 돌려 곡향허의 하체를 쥐었 다. 따뜻한 손이었다. 그 전율하리만치 강렬한 온기에 곡향허의 전신 이 부르르 진동했다. 바로 그 순간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곡향 허는 자신의 몸이 이미 그녀의 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저 살짝 움직였을 뿐 소녀는 여전히 곡향허의 몸에 걸터앉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윽고 긴 산책길에 나서기 시작했다. 흠씬 비를 맞고 난 그들은 오랜 산책길에 나선다. 이윽고 두 사람은 늪에 이르러 배에 올라 노를 젖기 시작했다. 고기떼가 떠 있고 흐느적거리는 수초()가 떠 있다. 격류에 휩쓸린다. 솟구쳐 오르는 파도에 따라 소녀의 흑발이 아름답게 출렁인다. 배가 사납게 요동치자 곡향허는 전신혈맥이 터질 듯한 긴장과 절 박한 충동을 느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두 사람은 안간힘을 쓴다. 그럴 수록 배는 더욱 격렬한 진동에 휩싸인다. 이때였다. 환사의 손이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올리려는 듯 자신의 긴 흑발을 매만지고, 다음 순간 그녀의 손에 작고 예리한 비수 하 나가 쥐어졌다. 그것은 그녀의 긴 머리칼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듯했다. 작은 비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곡향허의 후두부에 다가갔다. 그러나 극히 자연스럽게 곡향허를 끌어당기는 동작으로 그의 뇌 속에 작은 이물질을 박아 넣으려던 환사의 동작은 이루어지지 않 았다. 그녀의 내부에서 폭죽터지는 듯한 분사()가 일고 그 순간,환 사는 경련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이 무엇에 막힌 듯 당겨지지 않았다. 손(). 그녀의 동작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갸름하고 흰 손이었 다. '으흑!' 환사는 몸 깊숙이 일어나는 폭죽같은 분사에 정신을 잃을 정도였 으나 동시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 백삼을 걸친 무표정한 사내의 손에 그녀의 손이 쥐어져 있 지 않은가. 사내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침상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출현은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누... 구?' 그녀의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몸 속에서 일고 있는 무섭고 힘찬 분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절정과 의혹, 그리고 불신과 경악을 느끼는 그 순 간 하나의 물체가 자신의 얼굴로 뻗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빠악! 검()은 경악과 환희로 벌어져 있는 그녀의 입을 무자비하게 관 통했다. 검이 발출되었던 방향으로 다시 회수되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검 붉은 선혈이 분출되었다. 그녀의 몸 속에서 일었던 분사와도 같은 세찬 힘이었다. 휴도옥린은 재빨리 검을 회수한 후 곡향허의 아혈()을 짚었 다. 곡향허는 아연실색했다. "으헉!" 그는 황급히 환사의 피에 젖은 시신을 밀어내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잠시 분간할 수가 없 었다. 그 어느 것도 현실같지가 않았다. 소녀와의 느닷없는 정사도 그 랬고, 그 격렬한 쾌감, 그리고 소녀의 급작스런 죽음과 휴도옥린 의 출현이 그랬다. 한참을 그렇게 미망() 속을 헤맨 후에야 곡향허는 소녀의 손 에 그때까지도 쥐어져 있는 비수를 발견하고 상황을 깨달았다. 곡향허는 이제 완전히 질려 있었다. "...!" 주르륵!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경악과 심한 부끄러움, 그리고 불신과 허탈 등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그 순간에 휴도옥린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잠마해에서 보낸 살수였소. 당신의 탓만은 아니오. 누구라도 유 혹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니...!" "그대는...?" 곡향허는 스스로 아혈을 푼 뒤 새삼 휴도옥린을 바라보았다. "나를 모르시겠소?" "아, 아니...! 그게 아닐세. 자네가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한 말이었을 뿐이네." 곡향허는 자모전가에서 다소 이상한 청년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휴도옥린이 이렇게 느닷없이 나타나자 정신이 없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는 당신이 잠 마해의 수하이던 신검부의 사람이던 그런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 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흑밀원주 비모소에 관한 것이오." "비모소!" 곡향허의 눈이 커졌다. 휴도옥린이 천천히 말했다. "그는 하령을 납치해 갔고, 그리고 나의 부모를 죽인 일곱 명 중 한 명이기도 하오." 휴도옥린의 간단한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 사내는 그 아이를 구출해내려 하고 있구나!' 곡향허는 대뜸 그 느낌을 전달받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방문 앞에는 신검부의 수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음성을 높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 이유가 휴도옥 린이 무영중에 주위에 펼친 진기의 벽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진기의 벽()를 차단할 수 있을 정도라면 보통 고수가 아니다. 곡향허는 생각이 거듭될수록 놀람이 커져 갔다. "비모소의 흑밀원에 대해 알려 주시오. 그곳의 자세한 지형과 비 밀통로 같은 것도 알고 있다면 아는 대로 모두...!" "음...!" 휴도옥린의 요구에 곡향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휴도옥린은 바로 적당한 사람에게 질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곡향허는 이내 흑밀원의 지형에 대해 휴도옥린이 외울 수 있을 만큼 자세히 설명했다. 휴도옥린은 묵묵히 그가 설명하는 지형을 머릿 속에 넣고 있었 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머릿 속에 넣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다른 경로로 알아낸 흑밀원의 위치와 지형과 비교하고, 그 차이점을 파 악해 그 안에 숨겨져 있을 함정까지 추론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비모소가 함정을 준비하기를 유도한 듯한 태도였다. 대답이 끝나자 휴도옥린은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왔을 때처럼 소리없이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 곡향허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체념이었다. 이곳에서 탈출한다 해도 돌아갈 곳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소리없이 창문을 열고 마악 그곳을 통해 빠져나가려던 휴도옥린 이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소. 단지 개인적인 호기심이오. 그대는 어느 편이오?" "...!" 휴도옥린의 질문에 곡향허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힘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신검부의 화접이 아니오. 나는... 진정 잠마해의 인물이었 소." "음모였군. 예측대로...!" 휴도옥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실내에서 보이지 않았다. 잠입과 탈출. 이것은 바로 휴도옥린의 장기였다. 곡향허의 거처 주위에는 이십여 명의 신검부 고수들이 매복해 있 었고, 또 무류도의 곳곳에는 오십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겹겹으 로 곡향허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이 곡향허를 만나고 나오는 것을 발견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헌데, 소리없이 곡향허의 거처를 빠져나오던 휴도옥린은 문득 기 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엄중했던 호위망이 돌연 완전 무방비 상태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이 진입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놀랍게도 그 많던 고수 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교대시간이라도 된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처럼 무방비 상태가 되다니...?' 휴도옥린의 뇌리에 알 수 없는 불안이 스쳤다. 그러나 무류도에 신검부 수하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에 생각이 미친 그는 의혹 을 지우며 호반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그는 갈대가 무성하고 곳곳에 늪지가 있는 곳에 도착했 다. 무류도는 완전한 어둠에 잠겨 고요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갈 대숲에 이르자 나지막한 기침을 터뜨렸다. 삐걱! "돌아오셨습니까, 공자님?" 순간, 늙수그레한 음성과 함께 한 척의 소선이 갈대숲 사이에서 나타났다. 배 위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세상풍파에 시달린 듯한 어옹() 이 노를 쥐고 있었다. 노인은 그 와중에도 낚시를 하고 있었던 듯 어망 속에는 몇 마리 고기가 들어 있었다. 노인은 바로 휴도옥린에게 배를 빌려준 동정호반의 평범한 어부 였다. 목적을 달성한 휴도옥린에게는 이제 소리없이 무류도를 벗어나는 일만 남았다. 그는 배에 올라 묵묵히 노를 젓기를 재촉했다. 헌데 그 순간, 마악 노를 저어 섬을 떠나려던 노어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공자, 혹시 이 섬에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까?" "...!" 휴도옥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내심 자신도 모르게 경각심이 생겼다. 그러나 그는 솔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만났습니까?" 노어옹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배를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계속 질문을 던지는 그의 태도 는 늙은 어부의 태도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라 휴도옥린은 서서히 진기를 끌어올리며 대꾸했다. "예! 만났습니다. 헌데 무슨 일로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노어옹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안도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아니고... 이 늙은이는 공자께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이 아닌가 했지요." "무슨 뜻입니까?" 노어옹이 금세 담담해진 안색으로 대답했다. "별다른 일은 아니고... 공자께서 섬 안쪽으로 가신 직후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의인들이 공자님이 간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몰려갔 습니다. 아마 바로 우리 뒤의 호반에 배를 댄 것 같았습니다. 한 오십여 명도 더 될 것 같았는데 분명히 이 근처의 사람들은 아니 었지요." "...!" 휴도옥린의 눈에 가벼운 진동이 일었다. 노어옹은 짐짓 아무렇지 도 않게 말하고 있었으나 휴도옥린은 이미 많은 것을 깨닫고 있었 다. 첫째, 이렇게 짙은 어둠 속에서 흑영들의 수효를 정확하게 알아 낸다는 것은 보통의 공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노어옹은 그들을 발견했는데 상대는 노어옹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 쳐지나간 것이 아닌가! '잠마해! 결국 잠마해의 수하들이 본격적으로 곡향허를 참살하러 온 듯 하다. 헌데 이 노인은 누구이길래...?'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노어옹에게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 이외에 또 이상한 점은 보지 못했습니까?" "보았지요. 흑의인들이 배에서 내려 섬 안쪽으로 가기 전에 저 쪽 선창 쪽에서 큰 배가 떠났습니다. 배 위에는 많은 청의무인들 이 타고 있었지요." "...!" 휴도옥린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어옹의 말이 사실이라면 곡향허를 호위하고 있던 신검부의 고 수들이 돌연 섬에서 떠나버렸고, 그 직후에 잠마해의 수하들이 공 격해오기 시작한 것이 된다. 휴도옥린은 자신이 섬을 빠져나올 때 느낀 의혹을 그제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신검부 내에 숨어 있는 누군가가 이곳의 호위망을 교란시켰다. 곡향허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명령에 따른 것이 다!' 휴도옥린은 생각을 마치고 다시 노어옹을 바라보았다. "노인장께서는 이제보니 실력을 감추고 있는 풍진이인() 이셨군요. 이곳에서 선착장까지는 사십여 장 거리... 이 어둠 속 에서 그들이 청의를 입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니 말입 니다." 휴도옥린의 말에 늙은 어부가 빙그레 미소했다. "풍진이인이라기보다는 풍진을 벗어나지 못한 한낱 늙은이일 뿐 이지요." "...!" 휴도옥린의 전신이 천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근육은 순식간에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무서운 살의였다. 상대의 무공수위에 대해서 모른다 는 점이 휴도옥린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으나 어쩔 수는 없 었다. 헌데 휴도옥린의 전신에서 살인자의 냄새가 소리없이 솟아나기 시작하자 노어옹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허허헛! 아무래도 말을 해야겠군. 기실... 나 역시 이 섬에 목 적이 있어서 배를 구하려던 사람이었소. 헌데 공자가 배를 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잠시 어부로 변장한 것이었소." "노부의 목적 역시 이 무류도에 갇혀있는 한 사람에게 무엇인가 를 알아볼 셈이었지요." "곡향허 말입니까?" "그렇소. 그런 이름을 지닌 사람을 찾아온 것이었소만...!" "물어보려고 하던 것은...?" 휴도옥린은 아직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살의를 지운 것은 사실이었다. "무영()! 무영에 관해 물을 것이 있었소. 그라면 무영에 대 해 혹시 아는 게 있을까 하고...!" 노인은 신비스럽게 미소했다. 휴도옥린의 놀람은 컸다. "무영! 잠마해의 제이인자라는 그 신비의 인물말입니까?" "공자도 알고 있었구료. 그렇소. 바로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었 으나 이제는 틀린 듯 하오." "...!?" "곡향허라는 사람은 아마 지금쯤 죽어 있을 것이오. 공자를 기다 리는 도중에 슬쩍 노부 역시 그를 만나려고 했으나, 공자의 이목 을 속이기가 어려울 것 같아 일단 공자를 실어다 준 후 다시 오려 했는데 그만 잠마해의 인물들이 나타난 것이었소." "노인장은 누구이십니까?" "허헛! 공자는 너무 이 늙은이를 핍박하는구료." 신분을 말하기 어렵다. 그 점은 휴도옥린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 가. 휴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그가 자신의 적이 아니 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노인장, 이곳에서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시겠소?" "왜, 그 사람을 구해볼 생각이시오?" "그렇습니다. 한 어린아이를 위해서...!" 슷! 휴도옥린은 이미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신형은 무서운 속도로 어둠 저쪽으로 쏘아져가기 시작했다. 노어옹이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소. 나는 그자들이 타고 온 배를 모조리 부순 후에 뒤쫓아 가 겠소." 슈우우욱! 노인은 웃음을 마치자마자 껑충 몸을 솟구쳤다. 그는 거대한 노를 여전히 손에 쥔 채 이십여 장 거리를 평지 밟 듯 날아가 그곳에 정박해 있는 십여 척의 소선들을 공격하기 시작 했다. 소선 위에는 각기 한 명씩의 흑영들이 퇴로를 위해 배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괴노인이 나타나 곧바로 쏘아져 오자 일시 멍청해졌다. 부웅! 우지직...! 찰나, 소선들 중 하나가 가운데가 갈라져 두 조각이 나며 박살났 다. "윽!" 뒤늦게 비명이 일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이미 다른 소선들이 두 동강이 나고 있었다. 와직...! 촤악! 눈깜짝할 순간에 잠마해의 수하들이 타고 온 소선 십여 척이 물 속으로 수장되어 버렸다. 사라져 가던 휴도옥린은 노어옹이 나무 로 만들어진 노로 가공할 무위를 드러내 보이자 내심 경탄을 금치 못했다. 곡향허가 머물러 있는 허름한 어가()에는 무서운 경적이 감 돌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이미 이삼 명에 달하는 신검부의 수하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아마 끝까지 곡향허의 주위에 있었던 인물들인 듯 했다. "벌써 끝났단 말인가...?" 휴도옥린은 얼굴을 굳힌 채 소리없이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 순 간 그림같은 광경이 휴도옥린의 눈에 들어왔다. 곡향허는 화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오십여 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병장기를 든 채 엄밀히 포위해 있었다. 곡향허는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저항을 포기한 듯한 상태였다. 그러나 상대가 한때 그들의 상관이었고 그 무공수위가 평범한 것 이 아님을 잘 알고 있던 잠마해의 수하들은 이런 곡향허의 태도에 기이함을 느끼고 선뜻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듯했다. 그것은 정지 상태였다. 그러나 휴도옥린이 마악 담을 넘어들며 그 정지상태의 그림같은 광경을 발견하는 그 순간에 잠마해 수하들의 공격은 시작되고 있 었다. 슉! 파파파팟! 잠마해의 수하들은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그런 정지 상태로 곡 향허를 포위만 하고 있었던 듯했다. 공교롭게도 휴도옥린의 도착 은 한 걸음 늦어 있었던 것이다. 오십여 명의 병장기가 일제히 곡향허에게 집중되고, 곡향허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린 그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곡 향허의 전신이 무수한 병장기에 의해 허공에 흩어졌다. 비명조차 없었다. 허공으로 번져나가는 피()와 육신의 파편들 만이 말없이 지면에 쏟아져 내렸을 뿐이었다. 곡향허는 결코 저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휴도옥린은 한 걸음 늦은 자신을 질책하며 신음성을 흘려냈다. 그의 신형이 암흑에 잠겨있는 허공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으악!" "끅- !" 순식간에 잠마해 수하들 사이에서 비명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캉! 사사삭! 검광이 번뜩이고 육편이 튀어 올랐다. 휴도옥린은 분노했다. 그는 이미 곡향허가 신검부와 잠마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세력 사이에서 희생된 제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한 인간의 운명이 남에 의해 조롱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분노를 유 발한 것이었다. 카아앙! "으악!" 처절한 비명성이 연거푸 터져나오고 사방에서 붉은 피보라가 일 었다. "여기에도 있다!" 휴도옥린의 출현에 우왕좌왕하고 있던 잠마해 고수들 사이로 또 한 인영이 뛰어 들었다. 부- 웅! "끅!" 거대한 노를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는 육순 노인, 실로 보잘 것 없는 노어옹으로 보이는 그의 손에서는 무서운 힘이 쏟아져 나왔 다. "으윽!"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날카로운 격돌음과 함께 뒤섞였다. 그리고 싸움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멈춰졌다. 휴도옥린은 냉랭한 표정으로 청강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의 주위에는 정확히 삼십칠 명의 흑의인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상 처는 하나같이 치명적인 것이었으며 단 일격이었다. 이 광경에 노어옹은 잠시 놀라는 빛을 보이다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곡향허의 시신으로 눈을 돌렸다. "이 사람이 곡향허란 사람이었던 모양인 게로군." "그렇습니다. 음모에 희생된 불쌍한 사람이었지요." 휴도옥린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그는 항차 만날 곡하령을 무슨 낯으로 대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삐걱...! 삐걱! 어둠에 잠겨 있는 동정호 위로 한 척의 소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소선 위에는 두 사람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멀리 드넓은 동정호의 곳곳에는 휘황한 궁등을 밝힌 채 풍류를 즐기는 유람선의 모습들이 환상처럼 비쳐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소선 위에 앉아 있던 두 사람 중 어부차림의 노인이 입을 열었 다. "공자는 바로 잠마해에 단독으로 도전한 구월구일인 듯 하군. 맞 는가?" "...." 휴도옥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어옹은 휴도옥린의 그런 침묵을 이미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야. 헌데... 공자는 특별히 잠마해의 인물들 중 흑 밀원주 비모소를 추적하고 있는 듯 한데 그 이유라도 있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호...!" 노어옹은 다시 노를 젖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휴도옥린을 바라보았다. "공자는 노부에 대해 궁금하지 않은가?" "...!" "허허헛! 아무래도 이 늙은이가 먼저 말을 해야 되겠군. 자네의 태도로 보아 영원히 이 늙은이가 누군지 궁금해 할 것 같지 않으 니 말일세." 휴도옥린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는 이미 노인장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을 회피한 것은 바로 노인장이었지요." "그러나 이제 마음이 변했네. 어쩐지 자네에게만은 밝혀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일세." "...?" "노부는 기실 신검부주인 태대천의 지기일세. 이번에 그의 부탁 을 받고 특별히 다시 강호에 나온 것일세." "...!" 휴도옥린의 눈에 소리없이 경악이 솟아났다. 신검부주, 구름 속의 신룡()인 양 아무도 그 진면목을 모른 다는 이 시대 최고의 신비인물, 그는 곧 하늘()에 비유되는 인 물이었다. 역대 신검부주가 모두 신비에 가려있기는 마찬가지였으나 특히 당대의 태대천은 그 이름조차 완벽한 신비에 가려 있었다. 신검부라는 거대한 무인제국을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암중 으로 지배하고 있는 그의 존재는 가히 신화적인 것이었는데 그 신 검부주의 지기라는 인물이 느닷없이 휴도옥린의 앞에 나타난 것이 다. "놀랄 것은 없네. 기실 지금의 신검부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내부는 그렇지 못한 실정이고 그래서 부주의 부탁으로 우리들이 강호에 다시 나왔을 뿐이니까." "...!" "신검부의 내부사정은 지금 매우 혼란스러운 편이네. 오래 전에 부주께서는 신검부내에 제삼()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음을 알 아냈네." "제삼의 세력?" "그렇네. 그들의 행사는 은밀한 가운데 신비하기 이를데 없어 부 주께서는 칠 년 전부터 내사()하고 있었으나 겨우 그들의 존 재만을 알아내는데 그치고 말았네." '잠마...!' 문득, 휴도옥린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는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놀랍군요. 잠마해일까요?" "아니네. 그 제삼의 세력은 잠마해 내부에도 숨어있는 완전한 제 삼의 세력이네." 노어옹은 한숨을 불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부주께서는 이제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 측근들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네." "음!" 휴도옥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부주는 이미 오래 전에 은거한 우리들조차 은밀히 불러내 조사를 부탁한 것일세." "헌데 우리들이라면 노인장 한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허허허! 부주의 아무도 모르는 지기들은 모두 마흔여덟 명이네. 우리들은 신검부를 오늘날의 그것으로 키웠고, 표면으로 드러난 것은 부주 한 사람 뿐이었네." 휴도옥린은 크게 놀랐다. 그것은 실로 아무도 몰랐던 비밀인 것 이다. '이들이 혹시 천가, 혹은 숭양무원이라 불리우는 그 천외천이 아 닐까?' <천가().> 팔백 년 전 마도의 무너질 수 없는 영광의 신화를 아무도 모르게 잠재운 신비의 단체. 일명, 숭양무원으로도 불리우고, 그 지니고 있는 신학()은 가히 신()의 무공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때, 노어옹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지금 강호에 준동하고 있는 제삼의 세력을 우리들은 그 배후에 무영이라는 인물이 조종하고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네. 해서 이번 에 무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 지도 모르는 취문옥주를 만 나려고 했던 것이었네." "무영이라면 잠마해의 이인자 아닙니까? 그가 제삼세력의 암중 배후의 인물이라면 그 세력 역시 잠마해에 속해 있는 세력이 아닐 까요?" 휴도옥린은 짐짓 아무 내막도 모르는 듯 질문을 던졌다. 많이 알 고 있다는 것은 필승()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많이 알고 있 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 않네. 잠마해 역시 조금씩 그 제삼 세력에 잠식되어가고 있는 중이니...!" "...!" "우리는 자네가 잠마해를 상대로 펼치고 있는 싸움을 암중으로 돕고 싶네. 대가라면 그 과정에서 무영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뿐이네." "도움은 필요없습니다." 휴도옥린이 잘라 말했다. 이어 그는 차갑게 미소했다. "어쩌면...! 제 목표에 신검부마저 포함될지도 모르니까요." "...!" 노어옹이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밀원의 위치가 밝혀지고 비모소의 거처가 알려졌으니 이제 자 네는 그곳으로 쳐들어갈 셈인가? 함정같은데?" "훗! 글쎄요...? 함정인 줄 알면서 들어가는 자는 바보이겠지요. 그러나 함정인 줄 알면서 가는 사람중에 간혹 바보가 아닌 사람도 섞여있는 법이지요." "...!" 휴도옥린의 말은 미묘했다. 노어옹은 그것을 느끼고 침묵했다. "으음! 자네는 참으로 신비한 데가 많은 사람일세. 부주처럼!" "...!" "아무튼 건재하기를 바라겠네. 그리고 언젠가 한 번 부주를 찾아 주었으면 하네. 서로 힘이 될 수도 있을 테니...!" "기회가 닿으면 그러지요." 휴도옥린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배 가 이미 호반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 제18장 괴소녀() 수빙()! 만옥산(). 감숙성의 경계에 자리잡은 대산으로써 그 높이는 무려 칠천 척에 달한다. 이 만옥산의 북단을 끼고 하나의 강()이 흐르고 있었고 비단이 길게 펼쳐져 있는 듯한 강의 양 옆으로는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쓰쓰쓰...! 쏴아아...!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갈대의 모습은 마치 파도가 몰아 치듯 일대장관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갈대 숲 사이에는 삼십여 명에 달하는 청의무인들이 각기 병장기 를 움켜쥔 채 숨을 죽이고 매복해 있었다. 월광()은 교교하고... 하얗게 월광에 반사되고 있는 갈대꽃 의 대해는 환상같기만 했다. 이때였다. 그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갈대숲의 저쪽에 한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마치 구름에 달가듯이 소리없이 갈대숲을 헤치며 다가 오고 있는 인영의 모습은 무척이나 고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태 양빛이라고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듯 창백한 피부, 몸에 걸 쳐져 있는 기이한 형태의 백포, 그리고 미풍에 따라 흔들리는 왼 소매. 백포청년의 오른손에는 흰 헝겊으로 둘둘 말린 기이한 물체가 아 무렇게나 쥐어져 있었다. 그 길이는 겨우 두 자 정도에 지나지 않 았다. 백포청년은 갈대숲 여기저기에 긴장의 눈으로 매복해 있는 청의 무인들을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그의 걸음은 늦춰지는 법이 없 이 일정했던 것이다. 대략 삼십대 초반? 백포청년의 선을 그어놓은 듯 가는 눈에서는 더할나위없이 차가 움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슷! 스스슷...! 문득, 조용히 다가오고 있는 그의 전면에 십여 명의 청의인이 나 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수효는 대략 십이 삼 명이었는데 그 움직임은 어찌나 은 밀했던지 마치 서 있던 갈대들이 사람으로 변신한 듯한 상황이었 다. 파아...! 슈파아아아앗! 그들 중 한 명의 손이 움직였다. 순간 수십여 개의 비침()이 하얗게 월광에 반사되며 백포청 년의 전신을 뒤덮었다. 솜털같이 가는 비침들은 순식간에 하얀 월 광 속에 스며들어 인간의 눈으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을 듯했 다. 말따위는 일체 필요없다는 듯한 침묵 속의 공격, 순간, 백포청년의 펄렁이는 왼 소매가 움직였다. 휘리릭! 동시에 흰 헝겊에 둘둘 말린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물체가 허공 을 그어댔다. 펄렁! 두 자 길이의 물체를 감싸고 있던 흰 헝겊이 지면으로 떨어지고, 돌연 흐릿해지기 시작한 월광을 뚫고 한 가닥 검광()이 번뜩 였다. "흑!" "끄윽!" 순식간에 두 명의 청의인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백포청년이 오른손에 아무렇게나 쥐고 있던 물체는 바로 중간부 근이 부러져 나간 반검()이었는데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 속도 로 허공을 그어댔다. "크... 악!" "왁!" 백포청년이 반검을 쥐고 있는 자세는 실로 기이했다. 검신이 자 신쪽을 향하도록 거꾸로 쥐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 상태에서 이리저리 가볍게 허공을 그어대고 있는 순간 가공할 도기()가 사방에 몰아치며 순식간에 다섯 명의 청의인 이 쓰러지며 지면을 굴렀다. 그들이 쏘아낸 비침()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두 자 길이의 반검에 십장 거리에 있던 그들이 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는 인물은 지금 이 순간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아무 것도 모른 채 먼저 공격해 들었던 그들은 거의 동시에 지면을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뿐이랴! 슷! 백포청년이 가볍게 갈대숲의 여기저기로 몸을 날리고, 다시 반검 이 허공에 춤추기 시작했다. "윽!" "크악!" 갈대숲에 매복해 있던 청의인들은 모두 삼십여 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숨어있던 갈대숲에서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모조리 쓰 러져 버린 것은 그야말로 눈깜짝 할 순간의 일이었다. 그리고, 백포청년은 어느새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신검부의 개들...! 이른바 살인집행기관이라는 천인막() 의 살수들이군. 그러나 네놈들이 나의 앞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 다." 백포청년은 쓰러져 있는 청의인들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천인막.> 신검부 최고의 정예들. 이들은 바로 신검부내에 배신자나 잠마해의 일류 고수를 상대할 때만 출동되는 죽음의 집행자들이었다. 그 수효는 일천(), 일단 목표가 되었다면 열흘을 넘기지 못 하고 죽어야 한다는 신화를 지니고 있는 죽음의 집행기관이 바로 천인막인 것이다. 처... 벅! 처벅! 백포청년, 그는 지극히 무심한 눈으로 중얼거린 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아, 믿을 수 있는가! 삼십여 명의 살인자들이 쓰러졌건만 백포 청년의 걸음은 단 한 순간도 지체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분간은 네놈들과 충돌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니 나를 귀 찮게 하지 말아다오." 누구를 향한 독백인가? 다음 순간, 백포청년의 모습은 이미 갈대숲 저쪽으로 사라져 보 이지 않았다. 헌데 바로 이 순간, 백포청년과 청의인들이 격돌했던 곳에서 이 십여 장 떨어진 갈대숲에서 한 인영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역시 같은 청의를 걸친 인물이었다. 대략 사십이나 되었을까? 그는 백포청년이 사라져간 방향을 망연 히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도제종! 과연 무서운 놈이다. 벌써 본막의 고수들 중 칠십여 명이 당했다." 사도제종? 아아, 그렇다면 백포청년이 바로 사도제일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사도제종이었단 말인가! "헌데... 알 수 없는 일이군. 본부의 모든 예하세력들을 괴멸시 키며 무섭게 혈풍을 일으키던 저 자가 돌연 방향을 바꿨다. 도대 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청의중년인의 눈에 곤혹해 하는 빛이 스쳤다. 그러나 바로 이때, 더욱 곤혹스러운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때? 저 사람 괜찮은 것 같지?" 음성, 더할나위없이 청아하고 맑은 음성이 그의 바로 뒤쪽에서 들려왔다. "...!" 중년인의 등을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음성이 들려온 곳은 바로 그의 등 뒤였다. 일체의 기척도 없이 자신의 등 뒤에 다가설 수 있는 인물이라면 상대는 이미 보통고수가 아닌 것이다. 상대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 신은 알지도 못한 채 죽어 있어야 할 상황이 아니겠는가. '어?' 벼락같이 고개를 돌리던 그의 눈에 의혹과 불신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린 바로 전면, 그의 눈 아래에 한 소녀가 언제부 터인가 우뚝 서서 사도제종이 사라져간 방향을 응시하고 있지 않 은가? 대략 십사오 세? 허벅지가 드러나 보일 듯한 짧은 단삼(), 연한 갈색의 피부 는 몹시 건강한 느낌을 들게 하고 짙은 눈썹에 얼굴의 반은 차지 하고 있는 듯한 크고 서글서글한 눈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설익은 야생풋과일같은 분위기를 지닌 소녀였다. 소녀는 한 손에 기이한 오채광휘()가 번뜩이는 단봉( )을 어깨 위로 걸친 채 사도제종이 사라져간 방향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소리없이 내 뒤에 다가온 인물이 이런 꼬마소녀 라니...?'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내가 너무 긴장했던 게로군!' 이때, 단삼소녀가 눈길을 돌리며 중년인을 빤히 응시했다. "왜 대답을 안해?" "무, 무엇을 말이냐?" 중년인은 소녀의 태도가 스스럼없이 귀여운 것인지라 자신도 모 르게 반문했다. "저 사람 어떠냐고 물었잖아?" "...!" "음! 나는 저 사람을 내 신랑감으로 찍으려고 하는데 당신 생각 은 어떠냐고 물은 거였어. 어디 말 좀 해봐!" "...!" 중년인의 눈이 멍청해졌다. 먼저, 꼬마에 불과한 듯한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맹랑한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두번째는 눈 앞의 이 꼬마 소녀가 자신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 어이가 없었다.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이 아이가 이렇게 함부로....' 중년인은 차라리 분노스럽지도 않았다. 그는 아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멀어져 가는 중년인의 모습에 소녀의 눈이 커졌다. 다음 순간 소녀는 앙칼진 눈으로 입을 열었다. "야, 당신! 이리 좀 와봐!" '야? 당신? 이리 좀 와봐?' 중년인은 돌연 머리가 아파옴을 느꼈다. '가뜩이나 우울한데 어디서 미친 꼬마가...!' 동시에 그의 전신에 터질 듯한 분노가 솟구쳤다. 그렇다! 삼십여 명에 달하는 수하들을 잃고 맥없이 돌아가야 하는 그의 지금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맹세하마. 사도제종과의 일로 네게 분풀이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는 오늘 혼 좀 나봐야겠다. 존장에 대한 예의를 알기 위 해서는...!' 그는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헌데 순간,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대하고 말았다. 소녀가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던 단봉()이 어느새 고 개를 돌린 그의 목젖에 닿아있지 않은가! 단봉은 여러 단()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낚싯대인 것 같았는데 어느새 삼장 밖까지 멀어져 있는 중년인의 목젖에 낚시대의 가느 다란 끝부분을 고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소녀와의 거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소녀는 한 손을 내밀어 기이한 형태의 낚시대 끝으로 그의 목줄기 를 툭툭 치며 입을 떼었다. "감히 내 말에 대꾸도 안하고 돌아서다니...! 본성()이었다 면 너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중원이니 내가 참지." 촤악...! 소녀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낚시대를 회수했다. 삼장까지 뻗어났던 낚시대는 어느새 하나의 단봉으로 변해 그녀 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자, 늙은 사람! 내 말에 대답 좀 해봐. 아까 그 사람... 내 신 랑감으로 적당하겠어?" "끄응!" 중년인은 이번에야말로 전신이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노기를 느꼈 다. 어쩌다가 자신이 그녀의 낚시대에 전신을 노출시켰으리라고 생각 한 것이 바로 그이다. 눈 앞의 소녀가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라고 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다. "원망하지 마라!" 번쩍! 그의 허리에서 검광이 솟아났다. 말도 필요 없었다. 무조건 혼쭐을 내놓고 보자는 것이 그의 판단 인 것이다. "어? 덤벼?" 그러나 순간, 소녀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시에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단봉()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 였다. 촤악! 와...득! 흰 빛이 허공에 번뜩였다. 동시에 중년인은 자신의 손이 가벼워 짐을 느꼈다. 흰 빛이 번뜩이며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장검으로 불가사의한 속도로 다가든 단봉의 끝에서 뻗어난 가느다란 낚싯줄 끝에는 금 광이 영롱한 작고 앙증스러운 조구(= 낚시바늘.)가 매달려 있 었다. 중년인이 보고 있는 순간 그 작고 앙증스러운 낚시바늘은 청강으 로 주조된 그의 장검을 두부로 만든 검인 양 뜯어내 버리고 있었 다. 낚시바늘이 한 번 스쳐간 후에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손잡이만 이 남아있는 검이었다. "제기! 그런 썩은 물건을 갖고 나를 혼내주겠다는 거야? 내참! 그런 짓은 나의 오채신조()를 모욕하는 짓이라는 것을 몰 라...?" 소녀가 투덜거렸다. 중년인은 멍청히 자신의 검과 어느새 단봉으로 변해있는 소녀의 오채신조를 바라 보았다. "제기...! 이 늙은이는 머리가 나쁜 편인가 보군. 내가 물어보는 말뜻도 모르는 것 같으니...!" 소녀는 그에게 대답 듣기를 포기했다는 듯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 다. 신검부 최고의 고수들이라는 천인막의 백부장()인 중년 인만 완전히 바보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헌데, 터벅터벅 사도제종이 사라져간 방향으로 채 십여 장이나 갔을까? 돌연 소녀가 눈을 돌렸다. "참, 아까 그 사람이 하는 말 들었겠지,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 는...! 경고하는데... 당신이 뭐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앞으로 그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 오채신조 수빙()이 신랑감으로 점찍은 사람이란 말이야." 수빙? 소녀의 이름이련가? "...!" 중년인은 눈 앞의 모든 일이 그저 꿈만 같았다. 다시는 꾸고 싶 지 않은 악몽()이었다. "치이...! 또 대꾸도 않는군. 그렇다면 경고하는 의미에서 오채 신조의 맛을 좀 보여주지!" 헌데 소녀가 다시 이십여 장 저쪽에서 걸음을 멈추며 중년인을 직시했다. 촤악...! 그리고 중년인이 채 어떤 생각도 떠올리기 전에 흰빛이 허공을 단축했다. 삭! 사사삭! 흰빛은 이십여 장의 거리를 격해 중년인의 몸 주위에서 맴돌다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중년인의 옷이 수십 가닥으로 갈라지는가 싶 더니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피부에는 단 한 치의 상처도 없었다. 가공스럽게도 소녀의 긴 낚 싯줄은 이십여 장 거리를 두고 중년인의 옷만을 모조리 벗겨 내버 린 것이었다. '으...!' 중년인은 드러난 알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질린 빛을 띠 었다. "호호호호...!" 그 모습에 소녀는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호호! 사도제종이라고 했지? 좋아...! 외팔이라는 게 마음에 걸 리기는 하지만 뭐 어때. 결정했어!" 소녀는 이내 허리를 편 채 다시 사도제종이 사라져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결정했다는 것일까? 소녀의 즐거운 듯한 음성은 갈대숲 위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고 있었다. "호호호, 중원에 나온 지 열흘만에 정말 좋은 건수 올렸어. 호호 호...!" 도(). 전신이 금()으로 만들어진 금도()는 그 폭이 세치에 달하 고 있었으나 그 폭이 더욱 넓어지는 중간 부근에 이르러 깨끗하게 끊어져 있었다. 해서 반검()의 길이는 겨우 두 자에 불과했는데.... 전신에 기이한 복색의 희디 흰 천을 두르고 있는 사도제종은 예 의 반검을 허공에 세운 채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반검()은 이 순간 기이한 떨림을 보인 채 무서운 도기 ()를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전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흑의노인()이 긴장된 눈으 로 사도제종을 직시하고 있다. 깡마른 체구에 헐렁해 보이는 흑포, 흑의노인의 전신에서는 강렬 한 검기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누구인가...? <하북혈군() 검수방().> 천주팔정() 중 일인(). 천하는 넓고도 넓어 모래알처럼 많은 기인이사()들이 은 연자중하고 있는 바, 그 기라성처럼 많은 세외고인들 중에서도 유 독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 천주팔정! 이른바, 각 방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알려져 있는 명 인()들. 검(), 도(), 봉() 등등...! 수많은 무맥()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달인들이 바로 천주팔정인 것이다. 천주팔정 중 하북혈군 검수방은 바로 극()의 달인이었다. 한 자루 삼두화극()으로 사방 백여 장을 뒤덮는다는 것 이 바로 그의 가공스러운 무공이었는데.... 사도제종, 그가 왜 천주팔정 중 한 명인 하북혈군 검수방과 대치 해 있단 말인가? 부웅! 캉! 하북혈군 검수방의 화극이 바람을 가르며 사도제종에게 밀어닥쳤 다. 기교나 변화 따위는 무시한 힘과 속도만이 담겨 있는 가공할 공세였다. "...!" 벼락같이 덮쳐오는 화극을 밀어낸 사도제종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철벽과 맞부딪친 듯한 엄청난 힘에 그의 내심으로는 감탄이 흐르고 있었다. 반자루 금검이 평범한 병장기였다면 단숨에 터져 나갔을 듯한 가 공할 힘이었다. 쏴아앙! 흠칫하는 사도제종의 머리를 향해 검수방의 화극이 다시 밀어 닥 쳤다. 머리 위쪽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듯한 단순한 초식, 놀랍게도 검 수방은 제일초에서 제삼초까지 모두 일관된 초식으로만 상대해 오 고 있었다. 한 자루 거대한 화극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맹한 기운은 사도제종 의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땅...! 반검이 기이하게 흔들리며 화극의 힘을 분산시켰다. 쏴앙! 무지막지하다고나 할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며 계속 한 가지 초식으로만 내려치는 검수방의 기세는 담담한 가운데 패도적인 위 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훗! 과연 천주팔정답구료." 사도제종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굶주린 야수 가 울부짖는 듯한 그런 미소였다. 이때였다. 한 가지 초식으로 일관하던 검수방의 초식이 일순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쏴아아아...! 질풍같은 극영()이 허공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제일극()이 번뜩이는가 싶은 순간 제이극()이, 그리 고 그 뒤에 또 다른 극영()이 연이어 밀려들었다. 거대하게 덮쳐드는 검수방의 극영은 밀밀히 겹쳐 종내에는 거대한 해일처럼 하나가 되어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화극이 무섭게 사도제종의 전신대혈을 압박하며 짓쳐들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반검을 눈높이에 수평으로 세운 자 세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의 공세는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도제종은 검수방의 화극을 끌어당기고, 밀고, 끊 고, 되돌려보내는 등 자유자재로 그의 공세를 차단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돌연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금검에서 휘황한 광휘가 부챗살처럼 사면으로 치달렸다. 번쩍! 카아아...! "으윽!" 운중섬뢰처럼 번뜩인 금검의 광휘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답답한 신음성이 터지며 한 인영이 퉁겨나갔다. 그것은 걸레처럼 찢기워 진 검수방의 신형이었다. "놀... 랍군. 과, 과연 사도제일가의 후예다운 무공이다." 검수방의 신형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의 전신에는 마치 악마가 할퀴고 간 듯한 삼백예순다섯 줄기의 상처가 반치 깊이로 빽빽이 자리해 있었다. 그 수많은 상흔들은 기이하게도 거의 똑같은 깊이로 검수방의 몸 을 뒤덮고 있었다. "이, 이 무공은 무어라 했는가?" 검수방은 경악과 불신, 그리고 알 수 없는 흥분으로 눈을 빛냈 다. "팔만사천수라황!" 사도제종이 입을 열었다. "팔만사천수라황...? 가히, 가히 악마의 무공.... 헌데, 자네는 이미 천주팔정 중 세 명을 꺾었다고 했었는가?" "그렇소. 나의 끝을 알기 위해...!" "그, 그렇다면... 더이상 다른 팔정들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을 듯 하군!" 검수방의 상세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만약 그의 웅후한 내력이 없었다면 그는 사도제종의 팔만사천수라황이 펼쳐진 그 순간 갈가 리 찢기고 말았을 정도였다. "...?" "자네의 무공은... 이미 우리들을 능가... 애써 그들을 찾아다니 며 비무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단 한 명, 그라면 어 떨지 모르겠...!" "...!" 사도제종의 극히 무심했던 눈 속에 짧은 이채가 스쳤다. "그는 바로 무영()...! 천주팔정 중의 한 명이기는 하나 아 무도 그와 대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영?" "그렇... 다! 그 역시 자네처럼 한 자루()를 사용한다고 들었 고...! 단 한 번도 적수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잠천사도십 자밀예()는 천하무적의 도법()이라고 들 었...!" "어디가면 그를 만날 수 있소?" 사도제종은 짧게 말했다. 그는 많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내였 다. 그렇게 성장한 것이었다. "모른다! 무영은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인물... 심지어 그가 실 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의혹이다. 그러나 어쩌면 비모소라는 인물이 그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모소?" "그렇다. 그는 잠마해 흑밀원의 원주... 그를 만나면 무영에 대 한 단서를 얻을지도 모르겠다." 검수방의 신형이 서서히 지면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 서 흘러나온 피는 이미 그가 서 있던 지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 다. "비모소! 잠마해라...?" 사도제종이 눈을 허공으로 돌렸다. 기이한 신광이 그의 눈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좋아! 신검부주를 만나기 전에 무영이라는 인물을 한 번 만나보 지. 팔만사천수라황을 시험할 대상으로...!" 처... 벅! 처벅! 사도제종은 왔던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그가 이 시대 최강자 중 한 명인 하북혈군 검수방을 방문한 시각 은 불과 반시진, 그 짧은 순간 중원의 하늘 위에 하나의 신화로 부각되어 있던 천주팔정 중 한 명의 신화가 깨어졌다는 사실을 아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헌데 채 이십여 장이나 걸음을 옮겼을까? 하북혈군이 머무르고 있던 만옥산의 이름없는 한 계곡을 마악 벗 어난 지점이다. 사도제종은 그곳에서 실로 기이한 소녀와 마주쳤다. "호호, 멋진 솜씨였어. 정말 멋있었어." 소녀(). 두 팔과 양 다리가 드러난 짧은 단삼을 걸친 소녀는 계곡의 초입 에 있는 한 암석 위에 가부좌를 튼 채 마치 사도제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앉아 있었다. 짧은 단삼을 걸친 채 가부좌를 틀고 있는 그녀의 이런 태도로 인 해 허벅지까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 소녀는 바로 스스로 오채신조 수빙이라던 그 괴소녀였다. 헌데 이 순간, 사도제종은 어디선가 짙은 피비린내를 맡았다. 그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소녀가 앉아있는 바위의 주변에 황의를 걸친 다섯 명의 청년이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지 않은가? 기이하게도 그들은 날카로운 병장기에 단숨에 격중된 듯했다. "호호호, 이들 말이야? 음! 이들은 자신들의 사부가 사도형( )에게 패배할 것에 대비해 이곳에다 함정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죽인 거야." 소녀 수빙은 사도제종의 눈에 의혹이 스치는 것을 발견하고 해맑 은 미소를 터트렸다. 사도제종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사도형...?' 우선 소녀의 거침없는 호칭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매복해 있던 장소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다섯 청 년을 죽인 그녀의 무공에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도제종의 표정은 거짓말처럼 무심해졌다. 그리고 눈 앞의 수빙을 무시한 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어?" 수빙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바위 위에서 발딱 몸을 일으키며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뭐야? 야, 고맙다는 말은커녕 사람에게 이렇게 무안주기냐...!" "...." "어디 가?" "...!" "내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아?" "...." "난 수빙이야, 헌데 형()은?" "...." "제기! 말하기 싫으면 그만 둬! 난 이미 형이 사도제종이라는 사 람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 "사도형! 음! 나를 어떻게 생각해?" "...?" "나... 이쁘지 않아?" "...." "제기! 벙어리도 아닌데 왜 벙어리 흉내를 내는 거야!" 수빙은 사도제종의 주위를 쫄랑쫄랑 따라오며 쉴사이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질문에 사도제종은 침묵으로 대 꾸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내심으로 완전히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 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녀의 혀때문이었다. 실로 기이한 일행이었다. 만옥산의 구릉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사도제종은 어떠한 순간 에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수빙은 단 일 순도 쉬지 않은 채 계속 조잘대며 그의 곁에 바싹 붙어 따르고 있 었다. 한 사람은 쉬지 않고 입을 놀리고, 또 한 사람은 그녀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듯 침묵한 채 묵묵히 걸음만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지치지도 않는군!' 만옥산을 벗어날 때쯤 해서야 사도제종의 눈에도 서서히 질렸다 는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수빙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제기! 벌써 여기까지?" 이어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떠올린 채, 전신을 긴장시키며 어떤 기척을 감지해 내려는 듯했다. 이 순간 사도제종 역시 무엇인가를 느끼고 몸을 굳혔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이백여 장 정도 떨어진 곳이다. 무엇인가가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숨 한 번 쉴 사이에 오십여 장을 단축하고, 그리고 그 정체에 대 해 생각할 때 쯤에는 이미 일백여 장으로 가까와지고 있었다. 그 것은 무서운 속도였고 공포스러운 기세였다. '네 명...?' 사도제종은 자신들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가까와지고 있는 것이 인간임을 깨달았다. '놀라운 자들이다. 하나하나가 능히 나의 백초를 견딜 수 있는 고수들이다!' 사도제종은 상대가 자신을 목표로 다가오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봐, 사도형! 그럼 다음에 또 봐! 난 좀 바쁜 일이 생겨서 이 만...!" 헌데, 수빙이 돌연 다급한 표정을 띄우더니 쏜살같이 반대방향으 로 쏘아져 가지 않는가? 쏴아아...! 그녀의 신법은 실로 놀라워 한 번 번뜩한 순간 이미 한 점()이 되어 아득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쓰으으...! 휘이이익! 순간, 사도제종이 서 있는 양 옆으로 무엇인가가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실로 놀라워 한 무더기의 질풍이 치달리는 듯했다. '내가 목표가 아니고 저 소녀가 목표였단 말인가?' 사도제종은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서 있는 양쪽 숲으로 질풍처럼 스쳐가고 있는 인영들의 경 공은 엄청나기 이를데 없어 그 하나만 보더라도 그들의 무공이 이 미 절정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더우기 사도제종같은 고수에게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 를 비껴가고 있어 어찌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뿐이랴! 그들이 사도제종의 주위를 비껴지나가는 순간 사도제종은 몸서리 치는 마기()를 느꼈다. 일반 무림고수가 아닌 것이다. '누구란 말인가? 어디서 저런 엄청난 고수들이...?' 사도제종은 새삼 수빙의 정체에 대해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입을 굳게 다물어버린 조개인 양 일체의 표정을 얼굴에서 지워버렸다. 그 자신과 관계되는 일이 아니라고 느낀 순간 그는 수빙에 대한 모든 것을 깨끗하게 뇌리에서 지워버 린 것이었다. "무영이라...? 그 자를 찾으려면 먼저 비모소를 찾아야겠군." 그의 걸음이 다시 기계처럼 정확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밀원! 바로 그곳을 향해...! 중원의 경계인 옥무관에서 동북으로 삼십여 리 떨어져 있는 곳에 낙혼대()라는 이름의 야산지대가 있었다. 이 낙혼대는 하남성 북망산에 있는 공동묘지보다 더욱 큰 공동묘 지가 자리해 있어 을씨년스럽기 이를데 없는 곳이었다. 헌데 이 죽은 자의 마을에 오래 전부터 하나의 문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흑문(). 잠마해의 삼백육십여 개 외단세력 중 하나이며, 전국 십삼성 중 감숙성을 관장하고 있는 서열 이십칠위()의 단체. 이 흑문에 한 사내가 찾아든 것은 죽음의 마을에서 살아있는 자 들만이 활동하는 시각인 정오 무렵이었다. 사내는 아무 말도 없이 흑문의 거대한 정문을 두드렸다.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백삼에 더욱 평범한 행색, 사내의 모든 점 은 타인의 눈에 그 어느 곳 하나 두드러진 점이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볼 것 같으면 사내는 준미하기 이를데 없었 고, 눈썹을 지나 왼쪽 뺨에 희미하게 그어져 있는 상흔()은 그의 매력을 더욱 독특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 사내는 바로 구월구일 휴도옥린이었다. 휴도옥린이 낙혼대의 계곡을 이용해 지어진 흑문의 웅장한 대문 으로 다가들자 호장무사로 보이는 두 명의 흑의인이 눈을 빛냈다. "문주()를 만나고 싶소이다." 휴도옥린의 태도는 어딘가 오만하게 느껴졌다. 표면적으로 흑문 은 신검부와 잠마해 그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은 단체였다. 그러나 감숙성의 상권()과 밤()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은 잠마해의 예하세력으로써 여타 단체와 거의 교류가 없는 상태였 다. "누구신지...?" 흑의인 중 한 명이 귀찮다는 듯 눈을 들었다. 흑문의 문주는 바로 흑오마령() 양자성()으로써 감숙성 최고의 고수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만나면 자연 알게 될 것이오." 휴도옥린은 흑의인의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거만하기 이를데 없 는 태도였다. 흑의인의 눈에 언뜻 노기가 스쳤다. '이런...!' 아무리 보아도 백면서생에 불과할 듯한 휴도옥린의 태도가 오만 하기 이를데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눈 앞의 이 백면서생이 단신으로 흑문이라는 거대한 문파를 말살 시키기 위해 온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아예 꿈도 꿀 수 없었다. "신분을 밝힐 수 없다...? 그렇다면 기다려라! 언젠가 문주께서 이 대문을 지나갈 테니...!" 흑의인 중 한 명이 다시 조소어린 음성을 내뱉었다. 그것은 명백 한 축객령이었다. 문주가 언제 나올 줄 알고 그때까지 기다린단 말인가! 말투는 제 법 정중했으나 그것은 명백히 방문자를 기만하는 말인 것이다. 휴도옥린이 싱긋 미소했다. "기다릴 시간이 없는데...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들어가서 만 나는 수밖에...!" 휴도옥린은 가만히 미소한 후 한 걸음 흑문 쪽으로 다가들었다. "...!" 두 흑의무인의 눈에 일순 벼락같은 섬광이 일었다. "이런...!" 그 중 한 명이 노호를 터뜨리며 허리에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휴도옥린의 손이 전광석화처럼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목격한 움 직임이 되고 말았다. 그 낯선 사내가 허리에 차고 있던 평범한 청강검으로 손을 가져 가는 것을 언뜻 본 순간 그 검은 어느새 날카롭고 예리하게 허공 을 갈랐고, 그리고 두 개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친 것은 거의 동 시였다. 휴도옥린의 손놀림은 너무도 정확했고 파괴적이었다. 피가 솟구칠 무렵, 휴도옥린은 이미 성큼 대문 깊숙이 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흑문 내부에는 많은 흑의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사이를 휴도 옥린은 태연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정문에서 일어난 사 건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휴도옥린은 흑문의 건물들 배치를 한눈에 훑어본 후 가 장 깊숙한 곳으로 빠르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건물들의 배치만 한 눈에 훑어 보아도 그는 어느 전각에 우두머리가 거처하는지를 알 아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눈은 정확했다. 그는 수많은 전각 중 한곳을 택해 걸음을 옮겼고, 그리고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엄밀한 호위망에 의해 걸음을 멈췄다. "흠...!" 휴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전각들에 비해 호위가 엄밀하 다는 것은 그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누구냐...?" "어떻게 이곳까지 왔느냐?" 휴도옥린이 점찍은 전각으로 다가들기 무섭게 그의 앞을 막아선 흑영의 수는 도합 십칠 명이었다. 하나같이 엄격한 훈련을 쌓은 고수들이었다. 순식간에 휴도옥린을 가운데로 하고 둥글게 포위한 흑의인들의 눈에는 어이없어 하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아니...! 이놈들은 무얼하기에 이런 자가 이곳까지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었단 말이지?" "젠장! 보초들이 모조리 졸고 있단 말인가?" 그들은 휴도옥린을 결코 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길을 잘못든 백면서생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죽음을 부르는 착각이었다. 쏴아아...! 휴도옥린의 손이 움직인 것은 그들의 포위망이 완벽해진 순간, 휴도옥린을 향해 구축되었던 포위망은 구축된 그 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암석같이 단단하게 느껴지는 몸이 소리없이 움직였 다. 동시에 그의 두 손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퍽! 와지직! 움직인 것 같지 않으면서도 열일곱 방위로 뻗어나가고 있는 공세 속에서 죽음의 파괴력이 이 순간 무섭게 휴도옥린의 전신에서 풀 려 나갔다. "끅!" "이, 이럴 수가...!" 꽈꽝! 왼손이 하나의 원을 그리며 한 명을 쓰러뜨리고 있는 순간, 오른 손은 반대방향에 서 있는 다른 자의 가슴을 짓쳐들고 있었다. 그 순간 휴도옥린의 오른 발은 또 다시 다른 자의 죽음을 부르고 있 었다. 휘리리릭! 휴도옥린의 움직임은 면면히 끊김이 없었다. 좌측에 있는가 하면 어느새 오른 쪽에 있는, 그야말로 팔방풍우()의 무서운 공세였다. 그때마다 피가 솟구치고 그리고 처참한 육신이 퉁겨 나갔다. 순식간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열일곱의 흑의인들이 지면에 나뒹 굴었다. "어?" "아니...!" 그제서야 휴도옥린이 들어가려던 전각의 곳곳에서 경악에 찬 일 성들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무수한 인영들이 다시 휴도옥린을 향 해 덮쳐들었다. 휴도옥린이 천천히 나타난 흑의인들을 쓸어 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휘청이는가 싶더니 그의 몸은 무서운 속도로 흑의인 의 장벽을 돌파하여 전각의 벽면을 뚫고 사라져 버렸다. 꽈꽈꽈... 앙! 와르르.... 휴도옥린이 뚫고 들어간 벽면에는 정확히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생겨났고, 그 구멍을 바라보는 흑의인들의 눈에는 귀 신을 본 듯한 경악이 담겨 있었다. '세, 세상에 세 자 두께의 석벽을...!' '저게 인간이냐...!' 팟! 파파파팟! 무수한 암기들이 빗발치듯 허공을 메웠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이미 반대쪽 방향에서 퉁기듯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슷! 휴도옥린이 뛰어든 곳은 전각 내에 자리한 거대한 대청이었다. 그곳에는 십여 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회의를 하듯 모여 있었고 휴도옥린이 뛰어든 순간 믿어지지 않을 재빠른 동작으로 다짜고짜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쏴아아아...! 카카카아! 휴도옥린이 가볍게 무수한 공세를 젖혀내자 흑의인들의 눈에 놀 람이 스쳤으나 그들은 순식간에 제이의 공세를 전개했다. 또 다시 엄청난 비표( )와 암기들이 허공을 뒤덮었다. 쓰윽! 휴도옥린의 희디 흰 오른손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그림과 같은 광경이었다. 휴도옥린의 희고 갸름한 오른손이 허공에 떠오른 순간 허공을 가 득 메웠던 각종 암기들은 모조리 퉁겨나갔고, 그 순간 십여 장 밖 에 멍청한 눈빛으로 서 있던 한 흑의인의 몸이 대항할 수 없는 힘 에 의해 휴도옥린의 오른손으로 빨려 갔다. "끄윽!" 휴도옥린은 격공섭물의 수법으로 한 흑의인을 끌어당긴 후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똑바로 그의 눈을 직시했다. "문주는 어디 있느냐?" "흑...!" 휴도옥린의 눈과 마주친 흑의인의 뇌리에 공포가 차올랐다. 칼끝처럼 예리한 눈빛이었다. 차갑기 그지없는 음산한 눈이었다. 휴도옥린의 무심하고 차가운 눈은 흑의인의 뒤통수까지 꿰뚫어버 릴 듯 무서운 정적감을 지니고 있었다. "문, 문주는...!" 흑의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문주는 바로 나다." 헌데 바로 이 순간, 대청 안에 모여 있던 이십여 명의 흑의인 중 한 명이 당당하게 한 걸음 나섰다. "...!" 휴도옥린은 손에 움켜쥐고 있는 흑의인에게서 눈을 떼고 그 자를 바라보았다. "노부가 바로 흑문을 관장하고 있는 흑오마령 양자성이다. 친구 는...?" 흑오마령 양자성은 감숙성 최고의 고수라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 었다. 그는 과연 일문의 지존답게 조금도 놀라는 빛이 없이 휴도옥린을 정시하고 있었다. 휴도옥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직! "끄르륵!" 순간 그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흑의인의 목덜미에서 괴상한 소 리가 울려 퍼지고, 동시에 휴도옥린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아 올랐 다. 쏴아앙! 휴도옥린의 우장()이 허공에서 번뜩였다. 빠지지직! 빠직- ! 섬뢰처럼 번뜩이는 수영()마다 새파란 뇌전이 이는 듯했다. '헉!' 흑오마령 양자성의 눈이 커졌다. 그는 휴도옥린이 이렇게 다짜고짜 공격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 했다. 그 손은 질풍처럼 빨라 양자성은 막아낼 엄두조차 내지 못 했다. 휘이이익! 꽈꽈꽝! 양자성이 서 있던 대청의 바닥이 한 자 깊이로 파여 나갔다. 양 자성은 삼 장 옆에서 퉁기듯 일어서며 휴도옥린의 공세에서 벗어 나려고 했다. 그러나 휴도옥린의 신형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며 양자성을 또 다 시 덮쳐오고 있었는데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고 있는 그의 몸놀림 은 가히 불가사의하기 이를데 없었다. 두 개의 동작이 이어진 것으로 느껴질 정도이니 휴도옥린의 빠르 기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꽈득! "크... 윽!" 휴도옥린의 우수가 양자성의 가슴에 작렬했다. 그는 가슴이 불에 덴 듯한 뜨거운 통증을 느꼈다. 모든 것은 단 한 동작이었다. "나를 막는 자는 죽음이 있을 것이다." 흑오마령 양자성의 죽음을 뒤로 하고 휴도옥린은 어느새 천천히 대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평범한 볼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백면 서생의 태도같았다. '으...!' '구, 구월구일이다!' 사라져 가는 그를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제기...! 발바닥에 땀이 다 나네." 소녀(). 대략 십오 세나 되었을까? 앙증맞기 이를데 없는 자그마한 단봉을 우측 어깨 위에 척 매고 있는 소녀가 언제부터인가 낙혼대의 드넓은 공동묘지의 한 무덤 위에 걸터앉은 채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수빙, 바로 그녀였다. "헌데... 어떻게 내가 가는 곳마다 알고 따라오는 것일까?" 수빙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은 오랫동안 추적을 받은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귀신같은 놈들...! 지겨워 죽겠네." 수빙은 다시 투덜거린 후, 그 앙증맞은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 다. '알 수 없단 말이야. 어떻게 내 행적을 그렇게 끝까지 알아낼 수 있는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그녀의 눈에 이채가 솟아났다. "그래, 이제 알았다. 이 천마봉환( ) 때문이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오른팔에 채워져 있는 묵빛 팔찌를 내려다 보았다. 두치 가량의 폭을 지니고 있는 팔찌는 그 빛이 기이하도록 검어 소녀들이 장식물로 차고 다니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모든 빛을 빨아 들인다고나 할까? 그녀가 차고 있는 묵환은 아름 답기는 커녕 투박하기 이를데 없는데다 기이한 마기()마저 뿜 어내고 있는 듯했다. "맞아! 놈들은 이 천마봉환의 한 짝인 천마용환( )을 들 고 나온 거야. 그래서 내가 어디를 가든 나를 쫓아올 수 있는 거 야." 수빙은 이제야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아낸 듯 희색을 띠었다. "호호, 천마용봉금환은 한 쌍의 팔찌...! 서로를 부르는 기이한 묘용을 지니고 있지. 가까와지면 미묘한 반응을 나타내며 기이한 진동음을 발한단 말이야! 호호, 놈들이 제법 머리를 썼군. 나를 쫓기 위해 천마용환을 들고 나왔다니...!" 문득, 수빙의 눈에 악동을 대하는 듯한 짓궂은 빛이 스쳤다. "호호, 그런 식으로 나를 쫓는다면 나는 귀찮아서라도 이 천마봉 환을 남에게 줘버리고 말겠어!" '그래! 맞았어. 호호호,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데...!' 수빙의 악동을 닮은 눈빛이 더욱 빛을 발했다. "좋아! 그 방법이 제일 좋겠군. 헌데 누구에게 줘버리지! 나중에 도로 찾으려면 적당한 인물을 골라야 할텐데...!" 수빙은 무덤 위에 걸터 앉아 생각을 굴리기 시작했다. 드넓은 공동묘지에서 무덤 위에 앉아있는 이런 그녀의 모습은 차 라리 어이가 없었다. 오가는 사람은 일체 없었다. 바람조차 을씨년스럽게 불어오고 있 어 과연 공동묘지다운 음산함을 풍기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따위의 일에는 일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자 신의 생각만을 굴리고 있었다. "무림인은 안돼! 이 천마봉환을 알아보고 아주 먹어버릴지도 모 르니...! 음, 아주 평범한 서생 정도면 좋겠는데... 그래야 다시 찾을 때 힘들지 않을테니까!" 잠시 후, 그녀는 결정을 내린 듯 무덤 위에서 풀썩 뛰어내렸다. 수빙은 감숙성에서 빠지는 관도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래, 평범해 보이는 서생 한놈을 잡자. 저기가 관도겠지?" 이어 그녀는 관도 옆에 풀썩 앉아 자신이 결정한 유형의 인물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낙혼대의 한 모서리를 관통하고 있는 관도()를 지나는 사람 은 드물었다. 그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대낮에도 을씨년스럽기 이를데 없 는 무덤의 대해가 펼쳐져 있는 관도를 누가 점차 어둠이 내리고 있는 이 시각에 통과하려 하겠는가? "제기! 이 동네는 인간이 씨가 말랐나?" 수빙은 점차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관도 위에 사람이 나 타나기를 기다린지도 어느덧 반시진이 가까운 것이다. "제기랄! 보물 남주기도 어렵네." 수빙은 다시 투덜거렸다. 바로 이 순간, 그녀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멀리 관도의 끝, 그곳으로부터 한 인영의 모습이 비쳐든 것이었다. 그녀는 반갑다 못해 아예 그 사람에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 정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한 눈에 그녀가 그렇게 기다리던 평범 한 서생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문! 청포회()와 삼월보(), 그리고 팔마당( )에 이어 내손에 의해 사라진 네번째 문파이다." 관도끝에 휘적휘적 나타난 인영.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을 지닌 백삼사내의 표정은 무심하기 이를데 없었다. 휴도옥린이었다. 헌데 그가 중얼거리고 있는 내용이 실로 놀랍지 않은가? - 흑문! 내 손에 멸망한 네번째 문파이다.! 아아, 휴도옥린은 도대체 무슨 계획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제19장 천마봉환( )... 정체불명의 고수들! -3 수빙은 가까와지고 있는 휴도옥린의 모습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도 적절한 인물이 나타나준 것이다. '흠! 어디 한 군데 돋보이는데 없이 평범하고... 저 병약해 보이 는 얼굴은 저자가 글벌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옳거니! 안성마춤이야!'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던 그녀는 휴도옥린이 삼장 가까이 접어들 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봐, 당신! 이리 좀 와봐!" 수빙이 오채신조를 휴도옥린에게 겨누며 까딱거렸다. '...!' 휴도옥린은 멍청해졌다. 점차 땅거미가 내리깔리고 있는 인적없 는 공동묘지의 한 가운데에 단삼차림의 소녀가 나타난 것도 괴이 스러운데 그녀는 마구잡이 말투로 하인 부리듯 자신을 부르고 있 지 않은가? "멍청하긴! 이리 오라는데 뭘 그렇게 멍청히 보고 있어! 여자 처 음 봐!" "허...!" 휴도옥린은 진짜 멍청해졌다. 그러자 수빙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했다. "걱정하지 마! 귀신은 아니니...!" 슷! 다음 순간 수빙의 신형이 삼장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어 휴도옥린 의 전면에 내려섰다. "손을 이리내 봐!" "...!" 휴도옥린은 깜찍하기 이를데 없는 소녀의 강압적인 명령에 내심 고소하며 손을 내밀었다. "너? 왼손잡이냐?" 수빙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며 그가 내민 왼손의 소매를 밀어올 렸다. '너? 왼손잡이냐?' 휴도옥린이 내심 깜짝 놀라는 순간, 수빙은 자신의 오른 팔목에 차고 있던 묵직해 보이는 묵환( )을 이리저리 매만지기 시작했 다. 끼르륵...! 끼륵! 묵환은 미미한 기음을 발하며 점차 그 환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수빙은 자신의 팔목에서 묵환이 빠져나올 크기로 넓어지자 묵환 을 빼낸 후 휴도옥린의 왼팔목에 그것을 채우기 시작했다. 실로 일방적인 행동이었다. 휴도옥린은 일체의 설명조차 없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수빙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했다. 끼르륵...! 끼륵! 묵환은 다시 휴도옥린의 왼팔목에 달라붙듯 채워졌다. "됐어. 이제 가봐! 그리고 팔아먹을 생각은 아예 관둬! 나 이외 에는 아무도 풀 수 없으니...!" 수빙은 휴도옥린의 왼팔에 다짜고짜 묵환을 채워준 후 고개를 까 딱거렸다. "훗! 이게 도대체 뭐지?" 휴도옥린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수빙의 깜찍하고 당돌한 태도가 귀엽기도 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일순, 수빙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미소, 휴도옥린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 그 미소는 수수 께끼같은 미소였다. 불타의 입가에 맺혀있는 미소같기도 했다. 가면 속에서 어슴푸레 나타나는 미소같기도 했다. 실로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듯한 미소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덮어두고라도 분명한 것이 있었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휴도옥린의 얼굴, 그 얼굴은 이제 결코 평범 하지 않았다. 무심코 대했을 때는 어디 하나 내세울데가 없는 평범한 용모인 듯 싶었다. 그러나 이 순간 수빙은 휴도옥린이 가슴이 떨리도록 준수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돌연, 그녀는 이유도 없이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가슴의 설 레임은 물에 떨어진 먹물처럼 그녀의 가슴 속에 번져갔다. 그러나 수빙은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도 돼! 어서 가봐!" '훗!' 휴도옥린이 내심 고소했다. 그러나 그 순간 휴도옥린은 미련없이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저거..., 무공만 좀 할줄 안다면 제법 쓸만할 텐데...!' 멀어져 가는 휴도옥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빙은 내심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져옴을 느꼈다. 한편, 조용히 관도를 걸어가고 있던 휴도옥린의 내심으로 점차 경악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투박하기 이를데 없어 보이는 묵환은 그의 왼팔을 잡아 뽑을 듯 이 묵직했다. 그 조그만한 묵환의 어디에 그런 중량이 담겨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으음! 평범한 물건이 아니군!' 휴도옥린은 묵환의 표면에 눈에 보일듯 말듯 한 마리 봉황의 무 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심 의혹을 금할 수 없었다. 헌데, 낙혼대를 채 벗어나기도 전이었다. 우우웅...! 돌연 휴도옥린의 왼팔에 채워져 있는 묵환에서 기이한 진동이 전 해져왔다. '...?' 휴도옥린은 깜짝 놀랐다. 묵환이 스스로 기이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진동은 처음에는 느끼기 힘들 정도로 미약했으나 점차 커지기 시 작해 종내에는 묵환이 울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묵환이 스스로 울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 가...?' 휴도옥린이 놀란 눈으로 새삼 자신의 왼팔목에 채워져 있는 묵환 을 내려다 보았다. 헌데 그 순간, 그는 무엇인가가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 속도는 가히 전광석화(), 마치 어둠이 밀려오는 듯 소리없이 빠르게 그 자신을 향해 밀려들고 있는 기이한 느낌은 공 포스럽기까지 했다. '누군가가 오고 있다. 나를 향해 똑바로...!' 휴도옥린의 전신이 긴장되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공포스러운 무엇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 고 있음을 알리는 수많은 경험으로 쌓여진 본능이었다. 무엇인가가 가까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은 순식간에 일백여 장 가 까이로 접근했다. 그리고 그것을 느꼈을 순간 이미 삼십여 장까지 다가와 있었다. 모습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알고 있었다. 석양으로 물들기 시작한 허공 속에서 무엇인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팟! 휴도옥린의 전면 허공에 돌연 하나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이 피에서 꺼낸 듯이 시뻘건 혈검()이었다. 혈검을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허공에 나 타나기 무섭게 휴도옥린의 몸을 그어내렸다. 검이 허공에 나타나고 그 검이 스스로 휴도옥린의 몸을 내리칠 듯 움직인 것은 실로 눈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헉...!' 휴도옥린은 퉁기듯 삼장 좌측으로 미끌어졌다. 그가 서 있던 지 면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휴도옥린은 몸 주위의 기류가 이상함을 느꼈 다. 이 습격은 일체의 기척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황급히 지면을 굴렀다. 두 가닥 긴 물결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거리가 반자 사이도 되지 않았다. 날아가는 속도는 극히 빨랐으나 바람조차 일지 않았다. 바로 두 개의 채찍이었다. 휘릭! 휴도옥린이 허공에서 재주를 넘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날아갔던 두 개의 채찍 중 하나가 허공을 되짚어 날아오며 그의 가슴을 찔 어왔다. 그 채찍은 갑자기 반듯한 병기처럼 변해 마치 긴 창처럼 찔러온 것이다. 휴도옥린은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공격을 받자 내심 한기()를 머금었다. 그는 왼손을 뒤집어 가슴으로 찔러오는 채찍을 쥐고 옆으로 미끄 러져 나가려 했다. 쏴아아...! 순간, 창처럼 찔러오던 채찍이 돌연 쏟아져 내리는 해일처럼 가 슴에 물밀듯 덮쳐왔다. 덮쳐오는 공력은 실로 대단해 부딪쳤다가 는 당장 피를 토하고 절명될 듯했다. 휘리릭! 전광석화같은 순간 휴도옥린은 또다른 방향에서 쏟아져 들고 있 는 채찍을 향해 오른손을 뿌렸다. 왼손으로 흡자결을 전개하면서 신형을 채찍의 힘에 실었다. 슈슈... 욱! 그의 신형은 일순 무서운 속도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아...!" 그 순간 어디선가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휴도옥린의 무공 에 경이로움을 느낀 것 같았다. 이때, 휴도옥린은 허공 삼장 높이로 솟구쳤다가 서서히 내려오며 그제야 자신을 공격한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혈포()를 걸친 기이한 두 명의 노인이 휴도옥린이 떨어져 내 릴 지점의 양쪽에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삼장도 넘을 듯한 긴 채찍이 들려 있었다. 동남쪽에 서 있는 혈포노인은 얼굴이 칠흑같이 검어 쇳덩어리같 아 보였다. 서북쪽의 노인은 누렇고 삐쩍 마른 한 줄기 고목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뒤쪽에는 더욱 해괴한 용모의 괴노파가 우뚝 서 있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과 푹 꺼져 들어간 두 볼, 너무도 수척해 뼈와 가죽만 있는 듯한 체구. 그러나 괴노파의 눈은 번개처럼 번 뜩이며 귀신의 눈처럼 섬광을 발하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눈이 다시 빠르게 전권을 쓸었다. '분명히 네 명일텐데 또 한 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군!' 휴도옥린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일 처음 공격해 온 것은 분명히 혈검을 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노파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고 또 다른 인물의 기척은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한편, 혈포의 두 노인은 자신들이 펼친 이초팔식()을 휴 도옥린이 어렵지 않게 와해시키자 아연해하고 있었다. 이 이초팔식에는 수십초의 변화와 수십초의 살수가 숨겨져 있었 다. 헌데 상대는 이 이초팔식을 일일이 풀어버릴 뿐만 아니라 몸 까지 빼낸 것이었다. 그들은 눈 앞의 백삼청년과 같은 고강한 적수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휴도옥린이 이 이초팔식을 풀어내는데 평생 에 쌓은 공력을 모두 썼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는 지금 허공에 서 한 마리 대붕처럼 양팔을 벌린 채 천천히 내려오며 열심히 단 전의 진기를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이 사용한 무공은 마도의 대성전, 잠마의 열두 명 창시 자들이 만들어 놓은 비밀의 방에서 익힌 무공이었고 지금 열심히 진기를 고르고 있는 심법 또한 그곳에서 익힌 심법이었다. 그 이외의 어떠한 무공으로도 두 노인의 채찍에서 벗어날 수 없 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마궁에서 얻은 무공은 실로 놀라워 두 노인의 무공도 그 안 에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는 누구냐?" 휴도옥린의 신형이 지면에 내려서기 무섭게 흑의괴노파가 입을 열었다. 휴도옥린은 깜짝 놀랐다. 흑의노파의 음성이 수천 마리의 까마귀 떼가 울부짖는 듯한 듣기 싫은 목소리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 고 보니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공격하고 있 지 않은가! 휴도옥린의 눈에 은은한 분노의 빛이 어렸다. "그러는 당신네들은 누구요?" "흥!" 휴도옥린의 반문에 흑의노파의 눈에서 섬광이 일었다. 그러나 그녀는 못내 궁금한 듯 다시 한 번 휴도옥린의 전신을 쓸 어본 후 입을 떼었다. "네가 지니고 있는 그 천마봉환은 어찌된 것이냐?" 괴노파의 눈은 곧바로 휴도옥린의 왼팔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제 야 휴도옥린은 그들이 무엇때문에 자신을 공격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랬었군. 어쩐지 이유없이 이런 물건을 내게 준다 했지.' 휴도옥린은 좀전에 헤어진 깜찍한 소녀를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나를 공격한 이유가 이것때문이었다면 나는 이것을 돌 려주겠소." 이어, 그는 왼팔에 채워져 있는 천마묵환을 풀어내려고 했다. "흥!" 그 순간 흑의노파가 냉소했다. 휴도옥린은 그녀가 돌연 자신을 조소하듯 응시하는 것을 깨달았 으나 무시한 채 묵환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헌데, 휴도옥린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묵환을 손목에서 빼낼 수가 없었다. '이런...!' 그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떠올랐다. 동시에 소녀가 아무렇게나 내뱉았던 말이 뇌리에 스쳐갔다. .... 팔아먹을 생각은 아예 관둬! 나 이외에는 아무도 풀 수 없 으니...! "흥! 네가 천마묵환을 다룰 수 있다고는 애초부터 믿지 않는다. 나는 네가 그 팔찌를 소궁녀()에게서 강탈했다고도 믿지 않 는다. 하지만 그 물건은 본성의 이대지보() 중 하나이니 반드시 회수해야겠다." 흑의노파의 눈이 싸늘해졌다. 휴도옥린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팔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소. 돌려줄 방법만 있다면 돌 려주고 싶소." "방법은 있다." "...?" 휴도옥린은 기대의 눈빛으로 흑의노파를 응시했다. 순간 흑의노파의 입에서 너무나도 소름끼치는 말이 흘러나왔다. "네 팔을 잘라내면 된다." "...!" 휴도옥린은 아예 어이가 없었다. 순간이었다. 쉭! 느닷없이 허공중에서 한 개 검이 나타나며 그의 왼팔을 찔러왔 다. 일체의 기척도 없이 나타난 검의 공세는 그 빠르기가 섬전을 방불케했다. 뿐이랴! 휘리리릭! 두 가닥의 검은 채찍이 배합을 맞추듯 허공을 날아와 휴도옥린에 게 날아왔다. 휴도옥린은 몸을 낮추며 세 방향의 공세 사이로 파고 들었다. 다 음 순간 그는 두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반대방향에 냉랭한 표 정으로 서 있는 흑의노파를 향해 덮쳐갔다.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공격이었다. "크흐흐!" 그러나 흑의노파는 휴도옥린이 자신을 향해 덮쳐드는 것을 대하 고 오히려 차갑게 웃고 있었다. 순간, 휴도옥린은 갑자기 피비린내를 느꼈다. 가만히 서 있던 흑의노파의 손이 허공에 가득 퍼지며 불쑥 그의 완맥을 쥐어왔다. 흑의노파의 금나수법은 아무 소리도 없고 민첩 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녀의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손이 번뜩이며 덮쳐온 순간 사방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휘익! 휴도옥린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질풍같이 좌측으로 몸을 틀었다. 노파의 갈고리같은 손이 그의 뺨까지 다가왔다. 슥! 초수가 극히 악랄했다. 그의 배후에서 덮쳐들고 있는 두 개의 검은 채찍과 혈검의 기세 도 놀라운 바 있어 휴도옥린은 일시지간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였다. 그는 마궁의 비밀의 방에서 익힌 무공을 떠올리며 빙글빙글 전장 을 반 바퀴 돌았다. 춤을 추듯 제자리에서 반 바퀴 회전을 하자 세 방향의 공세는 씻은 듯이 해소되어 버렸다. "멋진 녀석이로군!" 흑의노파가 눈을 빛냈다. 쏴아아앙...!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검은 그림자처럼 허공을 짚으며 덮쳐들었 다. 그녀의 갈고리같은 손은 이미 휴도옥린의 눈 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휘리릭! 게다가 두 개의 검은 채찍마저 두 개의 둥근 원을 그리며 그의 머리 위로 덮쳐오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날으는 화살처럼 이를 피하며 한기를 삼켰다. 그는 싸울수록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엄청난 고수들이다. 어디서 이런 고수가...?' 몸 주위에서 요동치는 검은 채찍과 사라졌다가는 불쑥 나타나는 혈검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는 흑의노파의 조공().... 휴도옥린은 점차 운기가 자유롭지 못함을 느꼈다. 그가 마궁의 비밀의 방에서 절정의 무공을 수련한 이래 이렇게 고강한 적수를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사 인()의 무공은 그 초식의 정교함은 물론 내공 또한 절정 에 달했다. 여기에 한수 한수가 치명적인 살수가 아닌 것이 없어 실로 위험스럽기 이를데 없는 접전이었다. 순식간에 이백여 초가 흐르고 휴도옥린은 미망 속을 헤맸다. 그는 기실 매원에서 수많은 무공들을 익힌데다 마궁에서 마도사 상 최강의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나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그의 것으로 융화된 상태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마궁에서 익힌 무공은 그 범위가 너무도 광대한데다가 한 가지 무공이면서도 수천, 수만의 무리()를 담고 있어 일시지간에 터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그를 공격하고 있는 네 사람의 무공이 그가 마궁에서 익힌 무공 속에 포함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뚜렷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휴도옥린은 그들이 펼치고 있는 기괴신랄한 무공이 점차 어떤 종류의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기이하게도 시간이 지날 수록 휴도옥린은 그들의 공세가 연결되 는 변화를 미리 읽어낼 수 있었다. 그가 아직까지도 쓰러지지 않 는 이유는 오직 그 때문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휴도옥린은 돌연 머릿 속에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도 마궁에서 익힌 그 수많은 토상들의 그림자들이 보여주는 무공초식들을 하나로 잇지는 못한 상태였다. 예의 신비한 무공을 창안했던 잠마십이천마는 분명히 그 무공을 하나의 초식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열두 개의 토상에 일천 개의 촛불이 비쳐져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무려 수만에 달했고, 그 그림 자들은 모두 각기 다른 초식을 드러냈다. 그 하나하나의 그림자들이 보여주는 무공 또한 각자 엄청난 것인 지라 휴도옥린은 그 하나하나의 초식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휴도옥린은 정체불명의 네명으로부터 무서 운 공격을 받으며 그가 익힌 그 수천, 수만의 초식 모두가 하나로 귀결되는 것임을 깨달았으니...! 그것은 결코 실전무학이 아니었다. 초식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초식, 그렇다! 엄청나게 많은 초식 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미망 속을 헤매야 했던 휴도옥린의 깨달음 은 오히려 그 많은 초식에 구애받지 않는 이의어기()의 정수()로써 바로 참다운 무리()인 것이다. 제20장 잔인한 계절, 그리고 비()...! -1 "와하하하...!" 맑고 낭랑한 대소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휴도옥린의 신형이 무수 한 공세 속에서 그림자처럼 번뜩이며 빠져나오고 가벼운 격돌음이 일었다. 꽈- 앙! 긴 채찍을 휘두르던 두 명 혈포노인이 휘청이며 한 걸음 물러나 고, 기쁨으로 가득 찬 휴도옥린의 대소가 끝나는 순간 장내에 낭 패한 표정의 흑의청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혈검을 늘어뜨린 채 망연히 서 있는 흑의청년의 기태 는 심상치 않았다. 대략 이십팔 세? 아무렇게나 늘어진 흑발과 깡마른 체격, 선을 그어놓은 듯이 옆 으로 길게 찢어진 사목(), 흑의청년의 전신에서는 무서운 사 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 흑의청년이 모습을 드러내자 휴도옥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도 옥린같은 고수 앞에서도 일체 기척도 없이 허공에 숨어있을 수 있 는 그의 능력에 새삼 감탄한 것이었다. 흑의청년의 입가에는 선혈이 묻어 있었다. 휴도옥린에 의해 내부 가 진탕되고 그 때문에 신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듯했다. "본인은 이만 물러갈까 하오. 오늘의 호의는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오." 휴도옥린이 짐짓 포권해 보였다. 슈아아아....앙!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어둠에 물들기 시작한 암천 저쪽으 로 아득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사혼()!" "예, 모모()!" "저 자를 추적해라. 나와 이신()은 소공녀를 추적하겠다." "예!" 휴도옥린의 신형이 어둠 속에서 사라져 버리자 흑의노파가 불쑥 속에서 한 개 옥함을 꺼내 흑의청년에게 말했다. "천마용환( )을 네게 주겠다. 그것이 있는 한 저자가 어디를 가더라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저와 격 돌할 필요는 없다. 단지 어떤 자인가 알아내어라." "예!" 사혼이라 불리운 흑의청년은 조심스럽게 옥함을 받아들었다. "저 정도의 고수가 강호에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음! 놀라 운 일이군." 흑의노파는 잠시 망연히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그들의 신형은 두 갈래로 흩어지며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밤(). 어둠은 나래를 펴고 그 깊은 안식으로 천하를 내리덮고 있었다. 사천성() 북단에 위치한 검주()는 인구 오만호에 달하 는 그리 크지 않은 고을이었다. 그 검주를 관통하는 대로의 남단 에 작은 객점이 자리해 있었고, 이 이층에는 한 시진 전부터 한 백삼사내가 머무르고 있었다. 객실은 예상했던 것 보다는 깨끗했다. 휴도옥린은 깨끗하게 손질된 침상 위에 몸을 눕히며 생각을 더듬 었다. '훗! 그들 덕분에 오히려 기연을 얻은 셈이 되었다. 헌데 그들이 과연 누구이기에 그런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휴도옥린의 의혹은 점차 커져갔다. 그들의 무공은 가히 당금 강 호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휴도옥린만 하더라도 깨달음이 없었다면 크게 낭패를 겪었어야 할 정도인 것이다. 휴도옥린은 앞으로 해야할 일과 괴물들에 대한 생각을 굴리며 점 차 아늑한 무의식의 세계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의 수면 방법은 실로 독특한 것이었다. 그의 전신경은 모두 열 려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일단 잠에 빠지면 깊은 수면을 취한다. 헌데, 그의 모든 근육이 마악 이완되기 시작할 무렵, 휴도옥린은 돌연 잠이 싹 달아나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한기(), 뼈를 베이는 듯 엄청난 한기가 시작된 곳은 바로 그 의 왼손 팔목이었다. 왼손의 팔목에서부터 시작된 한기는 무서운 속도로 그의 전신에 침투되어 휴도옥린은 마치 자신이 만녕빙 속에 떨어져 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우웃!' 휴도옥린은 마악 수면상태로 빠지려다가 기겁했다. 그는 황급히 일어나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이것이 한옥()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이런 엄청난 한기를 내뿜다니...!' 휴도옥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천마봉환을 풀러낼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내공을 끌어올려 그 한기에 대 항할 수밖에 없었다. 휴도옥린은 마궁의 비밀의 방에서 익힌 내공심결을 끌어올렸다. 그는 예의 내공심법을 스스로 잠마십이토강( )이라 이름붙였으며 천하의 어떤 내공심결보다도 뛰어난 것임을 자신하 고 있었다. 대략 반 시진이 흘렀을까? 휴도옥린은 하단전에서 시작된 진기가 사지백회로 퍼져나가는 순 간 체내에 침투했던 한기가 씻은 듯이 사라짐을 느끼며 눈을 떴 다. 잠마십이토강으로 진기를 일주천시키자 그의 전신은 날아갈 듯 상쾌해졌다. 헌데, 한기를 몰아낸 그가 다시 잠자리에 들고, 다시 마악 수면 에 빠지는 순간 천마봉환에서 뿜어나오는 한기가 또 그의 잠을 방 해하지 않는가! '이런...! 견딜 수가 없군!' 휴도옥린은 견딜 수 없는 한기에 다시 진기를 순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천마봉환에서 뻗어나오는 한기는 일반의 내공으로는 아예 대항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잠이 들만하면 무서운 한기가 느껴지고, 다시 운기조식으로 한기 를 밀어내고 수면을 취할 무렵이면 또 한기가 몰아닥쳤다. 결국 그는 끝없이 운기조식을 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으음...! 놀라운 일이군. 이런 팔찌를 그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 게 차고 다녔다니...!' 잠을 설친 휴도옥린은 새삼 괴소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새벽 쯤 되자 휴도옥린은 한편으로는 수면을 취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진기를 일주천시켜 한기를 몰아내는 분심이용( )의 묘용을 저절로 터득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그는 단지 끝없이 운기조 식을 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라도 수면을 취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심이용의 놀라운 기학을 터득해 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휴도옥린은 잠을 자면서도 끝없이 내공을 쌓아나가 는 결과가 되었다. 더우기 잠마십이토강은 단 한 번의 운기조식으로도 일반 내공심 법으로 얻을 수 있는 공력의 열배 정도 되는 내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진정 가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먼동이 틀 무렵, 휴도옥린은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뜬 후 자신의 기경팔맥 곳곳에 무궁한 진기가 뛰놀고 있음을 느끼고 깜짝 놀랐 다. 단 하루만의 결과였다. 그러나 천마봉환 때문에 끝없이 운기조식하게 되어 휴도옥린은 벌써 자신의 공력이 엄청나게 진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새삼 천마봉환을 억지로 맡긴 괴소녀에 대해 감사라도 드리 고 싶은 느낌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 소녀 역시 이 천마봉환을 끼고 이와같은 방법으로 내 공을 증진시켰는지도 모르겠군!' 휴도옥린은 기쁨을 금치 못하며 객점을 벗어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연이었다. 방울뱀은 항시 공격하기 전에 꼬리를 비벼 영롱한 방울소리를 울 린다. 딸랑, 딸랑 울려 퍼지는 그 방울소리는 정말이지 공포스러 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막상 공격을 시작하면 방울뱀은 결 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핏 속에 축적된 방울뱀의 생존의 법칙인 것이다. - 매원. 달()이 있고, 그리고 죽음이 있었다. 오랫동안 불멸의 이름으로 회자되어 오는 공포의 대명사! 모든 무림인들의 뇌리에 독초처럼 흐느적거릴 공포로 존재하는 이름...! ... 달과 백매는 오랫동안 죽음 위에 있었다. ... 그들을 매원이라 불렀다. 매화의 신화가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의 매화는 단순한 죽음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삼월보와 청포회라는 무림단체가 지상에서 말살되고, 그리고 팔 마당과 흑문, 천세유령부, 이화신궁() 등이 차례로 무너 졌다. 그들 문파의 성격은 이내 밝혀졌다. 그들은 바로 잠마해의 숨겨진 예하세력이었던 것이다. 매원의 달빛살수인 구월구일에 의해 괴멸된 문파들을 대문파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무너졌다고 해서 잠마해가 당장 어떤 충격을 받을 정도도 아니었다. 그러나 잠마해의 군소세력들이 이렇게 하나 둘씩 무너지는 것은 전 무림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리고 잠마해를 증오하는 모 든 이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구월구일은 이제 매원만의 달빛살수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무림인들의 구월구일이었다. "그가 목표를 바꿨을까?" 여인처럼 화사한 용모에 여인이나 지니고 다닐 금잠으로 윤기 흐 르는 흑발을 한쪽 어깨에 고정시킨 미공자. 항시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우아한 기품이 전신에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잠풍인랑 희수수는 이 순간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 다. 그의 전면에는 창사가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탁자 위에는 수많은 빈 주담자가 놓여 있었다. 창사는 잠풍인랑 희수수의 질문에 오랫동안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오히려 목표물을 더욱 확실하게 정하고 있을 것이 오." "그렇다면 교란작전일까요?" 희수수는 지금 구월구일 휴도옥린이 드러난 흑밀원을 공격하지 않고 잠마해의 군소세력을 붕괴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 의혹을 표 명하고 있었다. 희수수의 질문에 창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교란작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 아무튼 그의 생각을 이곳에 앉아 있는 우리들이 알 수는 없을테니...!" "...!" 희수수는 창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창사의 말이 라면 전적으로 믿는 듯했다. 창사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하나요. 그는 지금 목표물을 향해 착실히 접근해가고 있다는 점이요." "비모소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요?" "아마...! 그럴 것이오." "그가 위험하지 않을까요?" "사실 그는 위험 속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오.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그는 혼자이니까...!" 창사의 얼굴에 언뜻 고뇌의 표정이 스쳤다. 그는 휴도옥린과 합작하던 때의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그들 둘이서 한 사건을 맡아서 실패한 일은 없었다. 언제나 상대를 교란시키는 것은 창사였고 휴도옥린은 그 순간에 잠입해 살인을 끝냈다. 때때로 임무가 바뀔 때도 있었으나 그 어 느 경우라도 그들 둘이서 한 일은 실패가 없었다. 창사는 이번 일에 그가 도움을 줄 수 있었다면 휴도옥린의 일신 에 있을 위험부담이 휠씬 적어지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상념을 깨며 잠풍인랑 희수수의 진정에 차 있는 음성 이 들려왔다.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모르겠소." 창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희수수는 말없이 술잔을 들었고 그리고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휘이잉! 구름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서쪽으로부 터 불어왔다. "비가 오겠군...!" 희수수는 무심코 중얼거리며 술을 마셨다. 이때였다. 창사의 눈이 빛을 뿜었다. 그는 희수수의 무심한 말에 기이한 반 응을 보이며 창 밖의 허공을 직시하고 있었다. "우기()가 시작되는 것이오?" 창사의 음성이 기이한 흥분을 담고 있어 희수수는 괴이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소. 언제나 이맘 때쯤이면 서북풍과 함께 우기가 시작되지 요. 아마 이번 비는 제법 많이 올듯 하구료." 희수수는 기이함을 느끼며 무심코 대꾸했다. 그러자 창사가 탁자를 내리쳤다.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소! 그는 폭우가 시작됨과 동 시에 흑밀원을 공격할 것이오. 비가 시작되기 전에 흑밀원에 도착 해 있으면 우리는 그를 도울 수도 있을 것이오." 창사는 이제까지 희수수가 보지 못했을 정도로 빠르게 말했다. "폭우 속에서 공격을 시작한다고...?" "그렇소. 그가 언제나 사용하던 방법이오. 비는 공격자를 가리기 에 가장 적당한 자연물이니까!" 비()! 그렇다. 창사의 예측은 적중되었다. 잔인한 여름은 우기가 시작됨과 더불어 깊어가고 있었고, 그리고 한 사내는 그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륭산(). 하남의 북단에 자리하고 있는 궁륭산은 그 산세가 완만하기 이를 데 없어 하나의 고원()을 대하는 듯 하다. 그러나 완만한 가운데 숨어있는 험악한 지세는 인간의 접근을 불 허하리만큼 흉험해 사시사철 죽음의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 궁륭산의 중턱에는 하나의 릉()이 자리해 있었는데, 그 릉 의 규모는 실로 거대해 사방 백여 장을 휘감으며 당당히 누워있어 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대성에 가까왔다. 고대()의 이름모를 제황이 안치되어 있으리라고만 추측되고 있는 패릉()이었다. 이 패릉 위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 후드득!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점차 굵어져 종내에는 한치 앞 을 내다볼 수 없는 폭우로 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궁륭산 전 체는 짙은 폭우와 죽음같은 적막에 뒤덮여 음산하기 이를데 없었 다. 죽음처럼 고요한 적막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음산한 폭 우..., 그리고 그 가운데 유령들의 연회장인 듯 어슴푸레 몸을 누 이고 있는 패릉의 광경은 실로 음산해 어디선가 귀신의 호곡성조 차 들릴 듯했다. 그러나 뉘라서 짐작할 수 있으랴! 이 음산하기 이를데 없는 거대 한 패릉이 바로 어둠의 단체 잠마해의 눈과 귀라고 할 수 있는 흑 밀원의 총단인 것이다. 헌데 언제부턴가? 이 궁륭산의 입구에 한 인영이 비를 맞으며 천천히 들어서고 있 었다. 전신에 흰천을 둘둘 말고 있는 듯한 기이한 옷차림과 헐렁해 보 이는 왼소매,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반자루의 금검(), 바로 사도제일세가의 후계자인 사도제종이 아닌가! "흑밀원! 흑밀원의 원주가 바로 비모소라 했던가...?" 사도제종의 걸음은 기계적이었다. 놀랍게도 엄청난 폭우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는 듯 그의 전신에 닿기 무섭게 퉁겨나가고 있어 그는 발끝조차 젖어있지 않았다. 처... 벅! 처벅! 휘적휘적 걷는 듯한 그의 걸음은 무척 빨랐다. 한 걸음이 거의 십여 장에 해당되는 놀라운 신법인 것이다. "...!"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바늘로 찔러오는 듯한 엄청난 살기가 그의 주위에서 회오리치고 있지 않은가! "ㅋ!" 사도제종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막지 마라. 볼일만 마치면 조용히 돌아갈 사람이다." 그는 귀찮다는 듯 조용히 전면을 향해 입을 떼었다. 파... 악! 그의 발밑에서 돌연 한 흑영이 솟구쳐 올랐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흑포를 뒤집어쓴 흑영의 동작은 전광석화, 동시에 그의 전면에 점()이 분분히 찍히듯 무수한 흑영들이 나 타나며 덮쳐왔다. 쩌어억! 촤... 악! 빗물과 짙은 핏물이 뒤섞였다. 처참하게 나동그라지는 흑의인들의 육신이 비에 젖은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처... 벅! 처벅! 그리고 사도제종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겨 가기 시작했다. 흑밀원, 그 흑밀원의 총단인 궁륭산 깊숙한 곳의 패릉을 향해.... 이때, 궁륭산의 정봉()에 우뚝 서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패 릉을 주시하고 있는 이 인()이 있었다. 그들은 궁륭산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정봉에 우뚝 서서 폭우를 맞으며 사도제종의 가공할 무공을 대하고 서로의 눈을 찾았다. "저 사람은...?" 잠풍인랑 희수수의 옆에는 창사가 서 있었다. 창사의 눈에도 적 지 않은 놀람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구월구일이 아니요. 도대체 누구인지 나도 모르겠소." 창사의 대꾸에 희수수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들이 서 있는 정봉에서 사도제종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직선 거리로 삼백여 장에 달한다. 더우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거센 폭우가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그 거리가 그들에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희수수는 사도제종이 반검을 아무렇게나 들고 있고 그의 왼팔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도제일가의 후예라는 독비금검() 사도제종!' 사도제종의 등장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으음! 헌데 저 사람이 이곳에 무엇 때문에...?' 희수수는 독비에 금검을 쥐고 있는 백포사내가 당금 천하를 진동 시키고 있는 사도제일가의 후예임을 확신하며 내심 고개를 저었 다. 그의 눈이 다시 창사를 향했다. "그가 올까요?" "반드시 올 것이오." 창사는 오래 전부터 패릉 위의 암천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흑밀원에 잠입하는 순간 우리들은 그 반대쪽을 혼란시키면 될 것이오. 아마 어느 정도 그를 도와주는 결과는 될 것이오." "...!" 희수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화사한 미소가 감돌고 있지 않았다. 살기 라고 할까? 섬전같은 신광이 번뜩이다 사라졌다. "후후! 나는 혼란을 주는 정도로 끝낼 생각은 없소." "...!" "흑밀원에 운집되어 있는 잠마해의 정예고수는 모두 칠백여 명! 그들은 오늘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오. 그 누구 도...!" "...?" "이 일을 위해 나는 오늘 천밀영()의 정예를 모두 출동시 켰소. 드러난 잠마해의 세력을 일소시키지 못하고서야 잠풍인랑이 라는 외호를 어찌 유지할 수 있겠소." "...!" 창사는 그의 결심이 장난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그는 자신의 정혼자를 잠마해에 의해 잃은 사람인 것이다. 희수수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엷은 미소가 스쳐간 것은 또 한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 마리 용 역시 잡을 것이오. 아무도 잡지 못했던 구월구일을!' 잠시 후, 창사는 묵묵히 폭우에 잠겨있는 허공을 응시하며 손짓 했다. "그가 왔소!" "...!" 잠풍인랑 희수수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며 창사가 가리키는 허공 을 바라보았다. 있었다! 폭우와 어둠에 잠겨있는 궁륭산의 아득한 허공 위, 그곳에 희미 한 검은 물체가 소리없이 허공을 부유하며 점차 패릉 가까이 다가 가고 있지 않은가! 주의하지 않고 있었다면 도저히 발견해 낼 수 없는 검은 그림자,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비연()이었다. 비연에는 한 인영이 매달려 있었고, 모습을 자세히 확인할 수 없 었으나 창사는 그가 바로 휴도옥린임을 잘 알고 있었다. 창사와 희수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비연은 마치 한 마리의 거대 한 독수리처럼 소리없이 폭우를 뚫고 흑밀원의 총단인 패릉의 능 곽()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구월구일! 그렇다! 그가 도착한 것이다. "자, 우리도 시작합시다." 희수수가 화사한 미소와 함께 문득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팟! 허공에서 기이한 광채가 번뜩이고. 다음 순간, 궁륭산의 서북방향 산구()로부터 무수한 흑의인 들이 소리없이 궁륭산을 타넘어 오기 시작했다. 마치 검은 해일이 밀려오는 듯한 광경이랄까? 일체의 기척도 들리지 않았고, 어느 누구 하나 기침소리조차 내 지 않는 가운데 흑밀원의 외곽을 경비하던 잠마해의 수하들이 무 너지기 시작했다. 관부 최고의 비밀조직 천밀영이 드디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 이다. 한편 바로 이때, 궁륭산의 남동쪽으로부터 돌연 폭풍우를 뚫고 일곱 대의 검은 마차 행렬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두두두두...! 철... 커덕! 일곱 대의 마차는 완전한 흑색 일색이었다. 검은 휘장이 굳게 내 려져 있어 그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마부석에는 마치 쌍동이인 양 강시처럼 창백한 안색을 지닌 흑포 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거의 똑같았다. 무저갱처럼 깊숙이 들어간 눈과 시체처럼 푸른 안색, 그리고 인간의 감정이라 고는 일체 담겨있지 않을 회색의 눈(). 그것은 실로 대하는 것 만으로도 몸이 굳어져올 강렬한 사기()였다. 일곱 대의 검은 마차가 비를 뚫고 적막만이 감돌고 있는 산중으 로 접어들고 있는 이 광경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이들이 흑밀원의 경계망에 걸릴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누구냐...?" "웬 놈들이냐?" 순식간에 일곱 대의 검은 마차 주위로 이십여 명의 잠마해 수하 들이 내려섰다. 그러나 일곱 대의 마차에 앉아있는 흑포인들 중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마해의 수하들의 눈에 살기가 번졌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일곱 대의 마차가 멈춰지고 그리고 마부석 에 앉아있던 일곱 명의 흑포인들이 천천히 잠마해 수하들을 쓸어 보았다. 마악 공격을 개시하려던 잠마해 수하들의 온몸이 얼어 붙었다. 눈(). 자신들을 쓸어보는 일곱 흑포인의 눈, 그것은 결코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마치 악마의 눈을 대한다고나 할까? 이글거리는 새파란 섬광과 짙은 죽음의 냄새...,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들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쓰읏! 순간, 마부석에 앉아있던 일곱 흑포인의 신형이 일제히 허공위로 귀영()처럼 솟아났다. 휘이이이익! "헉!" 그 중 한 명의 소맷 속에서 가느다란 푸른 선()이 뻗어나와 수 하 중 한 명의 목을 휘감아 버렸다. "끅!" 비명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그는 맥없이 지면을 굴렀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일곱 흑포인의 신형이 제각기 허공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의 소맷자락 속으로부터 새파란 섬광이 번뜩이며 가느 다란 푸른 선이 뻗어나와 잠마해 수하들의 목을 휘감았다. 설명은 길다. 그러나 잠마해 수하들이 일곱 대의 마차를 세우고 그곳에 타고 있던 흑포인들에 의해 소리없이 살해 당하기 시작한 것은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박일 순간의 일이었다. 다음 순간, 둥둥 허공을 부유하던 흑포인들은 주위를 쓸어본 후 일곱 대의 마차를 둥글게 한 자리에 모았다. 끼끼끼...! 철커덕! 둥그렇게 모인 일곱 대의 마차는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 다. 잠시 후, 일곱 대의 마차가 둥그렇게 모인 원형의 공간에 방원 삼 장 넓이의 좌대가 만들어지고 그 위에 더할나위 없이 화려한 태사의가 놓여졌다. 태사의 뒤쪽에는 떨어져 내리는 비를 막으려는 듯 거대한 흑산 ()이 태사의를 가리며 서 있었다. 휘이이익! 삐이익...! 이때, 돌연 암천을 가르며 기이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휘파람소리는 세차게 퍼붓고 있는 폭우를 뚫고 기이한 여운을 담은 채 울려 퍼지고 있 어 공포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박쥐공주님을 대합니다!" "공주님을 대합니다-!" 찰나, 일곱 명의 흑포인들이 일제히 지면에 오체투지했다. 질퍽 한 지면에 완전히 얼굴을 처박은 최고의 충성을 나타내는 자세였 다. 쏴아아.... 문득, 빗소리만이 들려오는 적막 속에 기이한 펄럭거리는 음향이 들려온 듯 싶었다. 동시에 일곱 대의 마차가 만들어 놓은 좌대 위 쪽의 허공 위에 한 검은 물체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붉은 눈과 양 옆에 펼쳐져 있는 커다란 검은 날개, 비와 어둠의 허공 속에 둥둥 떠 있던 검은 물체가 천천히 태사의 에 내려 앉았다. 그러자 검은 물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헐렁한 흑포를 걸친 여인()이었다. 검은 흑발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더할나위 없이 차가운 눈. 흑 의여인이 걸치고 있는 흑의는 양소매가 보통 옷보다 두 배 이상이 나 넓었다. 양 옆구리에 또한 피풍처럼 기이한 흑건()이 붙어 있었다. 해서 허공에 떠 있을 때 마치 한 마리 거대한 박쥐처럼 보였던 것일까? 흑의여인이 태사의에 내려앉자 흑포인 중 한 명이 고개를 들었 다. "오채신조 수빙이 이 궁륭산에 온 것은 확실합니다. 하명해 주십 시요." "...!" 흑의여인의 눈이 흑포인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예! 아직 그녀는 그녀를 찾아 잠마를 떠난 조령모모() 와 사혼 일행 등과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계속 피해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흑포인은 마치 흑의여인이 무엇을 질문한 듯 혼자 대꾸하지 않는가? "...." 흑의여인의 눈은 계속 흑포인의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흑포인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 우리가 잠마에서 나온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조령 모모 일행과 합류하기 전에 그녀를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 "천마봉환은 그녀 수중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혼이 천마용환을 지니고 있으니 천마봉환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 기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흑의여인은 그 어느 순간에도 입을 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흑포 인은 그녀가 차례차례 질문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하고 있었다. 헌데 놀랍지 않은가! 잠마! 아아, 잠마라고 했는가? 그들이 바로 잠마에서 나온 인물 들이었단 말인가! 잠시 후, 마치 어둠의 정령인 양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흑의여인의 눈에서 새파란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한 마디, 단 한 마디가 처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 다. "그녀를 죽여라. 그리고 궁륭산에 들어온 인물들을 모조리 죽여 라.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천명!" 쓰윽! 휘이이익! 흑의여인의 신형이 다시 한 마리 거대한 박쥐형상으로 변해 암천 저쪽으로 솟아 올랐다. 실로 가공할 경공이었다. 아아, 무슨 일이란 말인가? 팔백팔십 년 전에 완성되었던 마도의 대성전 잠마, 그 잠마가 드 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인가? 그는... 모든 무림인들의 구월구일이었다. : 제21장 도림()에 내리는 혈풍() 궁륭산의 중앙에 자리해 있는 이름모를 한 패릉()의 능곽 안 쪽으로는 폭 오십여 장에 달할 듯한 도림()이 패릉을 빙 둘러 싸며 펼쳐져 있었다. 능곽 안쪽으로 도화의 숲이 펼쳐져 있고, 다시 그 안쪽에 거대한 분묘가 솟아있는 모습은 이 패릉이 고대황조의 한 제황의 무덤임 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는데.... 쏴아아...! 우르르...! 비에 젖은 도림은 실로 기이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세찬 빗줄기에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리는 도화()와 깊은 정 적, 그 어둠 속에 마치 귀영처럼 늘어서 있는 수많은 도화나무 들.... 귀기()가 흐른다고나 할까? 패릉 주위는 물론이고 도림 전체 에 언제부터인가 무서운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백영이 소리없이 도림의 중앙에 내려서고 있었다. 거대한 비연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와 함께 도림의 한 곳 에 내려선 인영의 몸놀림은 신속하기 이를데 없는 가운데 은밀하 기 짝이 없어 바로 옆에 누가 있더라도 전혀 알아낼 수 없을 정도 였다. 그렇다. 빗줄기와 함께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백삼인은 바로 구월구일이 었다. 휴도옥린은 도림에 떨어져 내리는 순간 몸을 낮추고 사면을 휘둘 러 보았다. 팍...! 순간, 그의 일 장 좌측에서 소리도 없이 한 갈래 막강한 잠경( )이 그의 장문혈을 습격해 왔다. 이 잠경은 추호의 음향도 발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섭도록 신속하여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해도 피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삭...! 그 잠경이 마악 휴도옥린의 장문혈에 적중되려는 찰나, 휴도옥린 의 신형은 가볍게 흔들리는 듯 하며 간발의 차이로 잠경을 타고 날아가 오히려 습격한 자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 휴도옥린을 기습했던 흑영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전신을 흑포로 뒤집어 쓴 그는 잠마해의 수하로써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매복해 있다가 느닷없이 휴도옥린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 자 소리도 없이 공격해든 것이었다. "크윽!" 그러나 그의 눈에 경악의 빛이 채 자리잡기도 전에 그의 숨은 끊 어져 버리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손에서 흘러나온 막강한 진력이 그의 심맥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휴도옥린이 도림에 내려서고 그를 발견한 흑영이 소리없이 죽어 간 것은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박일 순간의 일이었다. 스슷...! 휴도옥린의 신형이 소리도 없이 도림을 전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조금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듯 했으나 가볍고 빠르기가 비할 바가 없었다. 휴도옥린의 좌측 십여 장 전면. 그곳에는 네 명의 잠마해 수하들이 눈을 빛내며 잠복해 있었다. 그들이 매복해 있는 지점은 바로 패릉내부로 들어가는 모든 통로 를 한눈에 바라보고 있는 곳인지라 그들의 눈을 피해 패릉내부로 진입해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 이때, 그들 중 한 명이 휴도옥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숨쉬고 있는 동안 알아낸 마지막 일이었다. 쉭...! 빗소리에 뒤섞인 미미한 음향이 터져나오고, 동시에 휴도옥린의 몸은 십장 거리를 건너뛰며 덮쳐와 그 자의 입에 검을 들이댔다. 그의 허리에서 뻗어난 한 자루 청강검은 곧 바로 그 자의 머리를 노리더니 번개처럼 다시 우측으로 날아가 두번째 인물을 덮쳤다. 그 피가 용솟음치기 시작했을 때. 사악! 청강검은 세번째 사내의 가슴을 격중했고, 동시에 휴도옥린의 왼 손에 한 자루 비수가 나타나며 그것은 네번째 사내를 향해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 누구의 입에서도 비명성은 터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그야말로 너무도 빠르고 순간적인 동작이었으며 마 치 무희()의 도약처럼 부드럽고 거침이 없는 거의 예술적인 움직임이었다. "...!" 휴도옥린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담담한 눈으로 도림이 끝 나고 패릉이 시작되는 오장 밖의 한 지점을 응시했다. 거대한 패릉을 바라보는 그의 전신에 서서히 기이한 힘이 자리하 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자신도 통제하기 어려울 듯한 무서운 파 괴의 본능이었고 그리고 복수의 불길이었다. 삘리리리! 삘리리리...! 헌데 이 순간, 돌연 빗소리와 어둠에 잠겨있는 도림에 한 가닥 괴이한 퉁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지 않는가? 그 흐느끼는 듯한 퉁소소리는 처음에는 들릴 듯 말듯 시작되었으 나 곧이어 강한 힘으로 도림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빗소리에 묻히듯 은은하면서도 도림 전체를 휘감고 있는 퉁소소 리는 애처롭기 이를 데 없어 휴도옥린의 마음에 기이한 힘으로 침 입해 들었다. "...!" 휴도옥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퉁소소리는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어 그의 모든 동작을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 었다. 휴도옥린은 그 퉁소소리를 무시한 채 패릉 안으로 뛰어들 수도 있었으나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듯 자신을 부르고 있는 듯해 퉁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퉁소소리는 오십여 장 떨어진 도림의 한가운에서 들려오고 있었 다. '퉁소의 주인은 이미 나의 존재를 알고 있다. 저 사람을 어쩌지 않고는 결코 패릉 안으로 들어설 수 없을 것이다!' 휴도옥린은 마음을 굳혔다. 그의 몸이 조심스럽게 퉁소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 벅! 처벅! 기계적인 일정한 걸음걸이, 그리고 더할나위 없이 잔잔한 태도. 허물어져 내린 능곽의 한 모퉁이를 밟으며 한 사내가 조용히 도 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로 사도제종이었다. 그는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도림을 발견하고 잠시 이채를 띠었다. 쏴아아.... 비와 어둠에 잠겨있는 도림의 정경은 음산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도림 속에는 잠마해의 수하로 보이는 십이삼 명의 흑 영들이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도제종은 매복자들을 느끼고 귀찮은 듯 검미를 찌푸렸다. 매복자들이 포진되어 있는 형세로 보아 그들을 통과하지 않고서 는 패릉내부로 진입해 들어갈 수 없을 듯했다. 팍...! 돌연 사도제종의 신형이 좌측으로 퉁겨졌다. 그의 뒤쪽으로 물결 같은 괴이한 기세가 밀어닥쳤다. 그것은 은밀하기 이를데 없음은 물론이고 덮쳐드는 기세의 가공 함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사도제종이 좌측으로 비껴난 순간 그가 서 있던 자리로 수십여에 달하는 검은 그림자들이 소리없이 통과해가기 시작했다. 사사삭...! 사삭! 검은 해일이 소리없이 도림을 덮쳐들고 있다고나 할까? 전신에 날렵하기 이를데 없는 흑포를 걸치고 있는 괴영들, 일체 의 음향도, 일체의 기합도 없이 그들은 가공할 기세로 도림으로 덮쳐들고 있었다. 카강카캉! "크... 악!" 순식간에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관부()의 고수들 같은데...?' 사도제종은 한 곁에서 몸을 멈춰 세운 후 이채를 떠올렸다. 무서운 기세로 도림에 뛰어든 흑영들은 사도제종이 잠마해의 수 하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는 듯 그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소리없는 죽음의 파도처럼 잠마해 수하들을 공격하고 있는 그들의 기도는 실로 놀라와 사도제종조차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 그들은 바로 관부 최고의 비밀조직, 천밀영의 고수들이 었던 것이다. "윽!" "끄... 윽!" 거대한 해일이 해변가의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방불하는 가공스러운 공격 앞에 잠마해 수하들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기 시 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돌연, 어둠 속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동시에 도림 속으로 일곱 가닥의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파파파.... 팍! 음침한 웃음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일곱 그림자는 허 공을 밟으며 천밀영 고수들을 덮쳐갔다. 사악! 쉬이이익! 그들의 소매 속에서 새파란 귀기를 뿌리는 가느다란 단사() 가 뻗어나와 악마의 촉수처럼 허공을 휘감기 시작했다. "윽!" "와악!" 순식간에 도림가운데 핏줄기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저들은 또 누구란 말인가?' 사도제종의 눈이 커졌다. 느닷없이 귀영처럼 나타난 일곱 그림자는 천밀영의 고수들은 물 론이고 잠마해 수하들마저 무차별 살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 놀림은 가히 귀영을 방불하는 데다 그 신위 또한 일반 무림고수가 결코 아닌 듯했다. 팍! 돌연, 바람을 끊는 음향과 함께 그중 한 그림자가 번개같이 사도 제종에게 덮쳐들었다. 그의 가슴과 중궁()을 노리고 찔러들어오는 가느다란 단사 ()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무서운 예기를 뿌리고 있었 다. 번쩍! 사도제종의 눈썹이 꿈틀하며 그의 반검이 허공을 뒤덮었다. "...!" 무서운 검광()은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덮쳐들었던 귀영은 허공 중에서 네 번이나 몸을 바꾸며 이미 사 도제종의 검기를 피해내고 있었다. "...!" 사도제종의 눈에 감탄의 빛이 스쳤다. 자신의 금검을 그토록 간 단히 피해낼 수 있는 고수가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 다. 그러나 덮쳐들었던 흑영 또한 사도제종의 이같은 검세에 적지 않 게 놀란 듯 허공 중에서 몸을 멈춰세운 채 사도제종을 직시하고 있었다. 무저갱처럼 깊이 들어간 눈과 시체의 그것처럼 푸른 안색, 인간 의 감정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듯한 회색의 눈. 아아, 그들은 바로 잠마해에서 나왔다는 그 흑포인들이 아닌가. "...!" 흑포인은 사도제종이 뜻하지 않은 고수임을 느낀 듯 주춤주춤 허 공에서 망설이는 듯 하다 휙하고 다시 천밀영의 고수들이 있는 십 장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그가 내려서는 곳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울려왔다. "크아악!" 그것은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잠마해의 수하들은 물론이고 천밀영의 고수들조차 이 일곱 흑포 인들의 공세를 단 일초나마 막아내는 사람들이 없었다. "...!" 사도제종은 자신이 도착한 흑밀원에 뜻하지 않은 인물들이 몰려 들고 있음을 느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때였다. 삐릴리...! 삐이...! 갑자기 일진의 퉁소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려왔다. 퉁소소리는 그 렇게 높지는 않았으나 바로 귀밑에서 울려오는 듯 가깝게 울려왔 다. 예의 퉁소소리는 굴곡이 심해 사람의 심금을 뒤흔들고 있었고 기 이하게도 사람을 잡아끄는 듯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도림 속에서 들려오던 비명소리는 이제 거의 멈춰지고 있었다. 사도제종은 천천히 퉁소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겨가 기 시작했다. 쏴아아...! 후둑! 후드둑...! 칠흑같은 어둠과 비(), 그리고 그 어둠 위에 은은히 하얀 빛을 뿌리고 있는 도화(). 그 도림의 한 가운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느린 듯 하면서도 기민한 걸음과 잔잔히 가라앉은 눈, 바로 휴도 옥린이었다. 그의 십장 전면에는 한 채의 정자()가 어둠 속에 솟아 있었 다. 도림에 휩싸여 있는 자그마한 정자 안에는 이때 기괴한 행색의 네 사람이 있었는데 퉁소소리는 그들 중 난간에 기대 서 있는 육 순 가량의 노문사()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학도()는 다 떨어진 청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얼굴이 매 우 노랗고 깡말라 병색이 짙은 병자로 느껴졌다. 턱에도 몇 가닥의 수염만이 나 있어 전체적으로 기괴한 분위기를 지닌 노인이었다. 정자의 중앙에 걸려있는 희미한 유등의 불빛을 받아 노인의 얼굴은 또한 어딘가 이 세상 사람같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정신없이 퉁소만 불고 있는 노인의 뒤쪽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바둑에 열중하고 있었고, 바둑을 두고 있는 두 인물 바 로 좌측에 배가 잔뜩 튀어나온 비대한 체구의 노승이 가슴과 배를 드러낸 채 연신 술호로를 들이키고 있었다. 너무도 살이 쪄 목과 얼굴을 구별할 수 없고, 드러난 배는 그야 말로 만삭을 맞은 임부()의 그것을 방불했는데...! 비대한 노승()은 만면에 자애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연신 술을 마시고 있어 어찌보면 전설속의 취선불()을 대하는 듯 했다. "...!" 휴도옥린은 도림 가운데의 정자 안에 앉아 있는 네 인물들을 둘 러보며 이채를 머금었다.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절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비에 젖은 도림 가운데의 정자에 조용히 앉아 있는 분위기만 해도 이미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다 사방에서 죽음의 살기가 번져나오고 있는 곳에 아무것 도 못느끼고 있는 듯 각기 자신의 일에만 취해있는 태도 등은 대 하는 이에게 실로 기이한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취한 듯 그들 네 명을 응시한 채 걸음을 멈추었다. 기이한 퉁소소리는 더욱 가깝게 그의 귀에 울려오고 있었다. 느린 듯 하면서도 애처롭기 이를데 없는 그 소리는 휴도옥린의 마음을 파고든 듯 휴도옥린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기이하게도 도화잎들이 하나 둘 떨어져 우뚝 서 있는 휴도 옥린의 몸 위에 쌓여갔다. 비가 거칠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나 도화잎들은 비에도 씻겨내리지 않은 채 휴도옥린의 몸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삘리리...! 퉁소를 불고 있는 노학도는 사뭇 휴도옥린을 보지 못한 듯 지그 시 눈을 내리감은 채 퉁소만을 열심히 불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전혀 다른 일을 주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은 말없이 흘러갔다. 휴도옥린은 한 걸음 물러나 걸음을 멈춘 채 정자 안의 인물들을 응시하고 있었고, 정자 안의 네 기인은 여전히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고, 그리고 퉁소를 불고 있었다. 그러나 기실 휴도옥린이 정자를 발견하고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지금까지의 시각은 겨우 반각도 되지 않았다. 쏴아아...! 삐리리...! 짙은 어둠과 흐느끼듯 쏟아져 내리는 비, 그리고 은은히 밝혀져 있는 정자의 유등빛과 퉁소소리 등이 모든 것을 미망 속에 집어넣 는 듯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사부놈아! 너 또 슬쩍 두 번 두었지?" "제자놈아! 난 절대 그런 적 없다." "이 사부놈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시치미 떼기 냐...!" "난 모른다. 두기 싫으면 그냥 두기 싫다고 해라." 돌연, 조용히 바둑을 두고 있는 두 인물이 토닥거리며 싸우기 시 작했다. 먼지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옷차림과 단아한 용모의 이인 (), 그야말로 어느것 하나 흐트러진 데가 없어 그들의 성격이 치밀하고 고아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색피풍까지 두르고 있는 관옥같은 중년인과 그보다 약간 연상 으로 보이는 오십대 장년인은 둘 모두 깨끗한 도인()차림이었 으나 놀랍게도 바둑을 두며 터져나오고 있는 말투는 행색과는 전 혀 다른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의 행색과 풍도 등이 같은 문하임을 느낄 수 있 었는데 그들이 사제지간()이었던가? "쳐죽일 놈! 사부란 놈이 제자에게 사기나 치고...!" 관옥같은 중년인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역시 우아한 차림의 장년인 역시 마주 소리를 질렀다. "원수같은 제자놈아, 졌으면 곱게 졌다고 할 것이지 왜 시비를 거느냐!" "시비? 이 게으르고 털빠진 늙은 당나귀같은 사부같으니... 기필 코 고쳐놓고 말겠다." 어찌보면 믿어지지 않는 욕설들이었다. 서로 잡아먹을 듯 다투고 있는 그들의 말투는 도저히 사제지간으로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험악무비한 말투인 것이다. 그러나 사부라고 불리운 장년인은 제자의 그러한 말투에 익숙해 져 있는 듯 별반 크게 분노하는 빛도 아니었다. 그 역시 마주 험 상궂은 욕설만을 터뜨릴 뿐이었는데.... "이 기름바른 여우같은 제자놈아! 네 놈이 그런다고 이 사부가 눈하나 깜짝일 것 같으냐!" "오냐! 어디 제자놈 맛 좀 봐라!" 스스로 제자임을 자처하는 중년인이 돌연 손을 뻗어 장년인의 목 을 움켜쥐었다. "패라, 패! 이 천하에 다시없는 파락호같은 놈아! 바둑에 지기만 하면 사부를 패는 너같은 제자놈은 아마 천하를 뒤져도 없을 것이 다." 우당탕! 꽈꽝! 순식간에 정자 안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옷깃을 마주 움켜잡은 채 사생결단이라도 낼 듯 으르렁거리고 있어 어찌보면 어이없는 광경이었다. 한 옆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던 비대한 노승이 버럭 호통을 질렀다. "이 미친 놈들아! 너희놈들은 사제지간이면서 어찌된 놈들이 만 나기만 하면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이냐!" 자애스러워 보이는 노승의 입에서 터져나온 말투 또한 그의 인상 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었다. 순간 격렬히 다투고 있던 괴이한 사부와 제자가 서로의 손을 딱 멈춘 채 눈을 마주쳤다. "제자놈아! 이 놈이 우리들 보고 미친놈들이라고 했느냐?" "그런 것 같다. 사부야!" "어떻게 할까...?" 사부라고 불리운 장년인이 돌연 의논하듯 부드러운 말투로 바꾸 었다. 그러자 제자라는 중년인 역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혀를 잘라 버리든가, 영원히 지껄이지 못하게 이렇게 해 야 한다." 중년인이 한 손으로 목을 쓱 긋는 흉내를 내보였다. 그러자 장년 인 역시 사이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비대한 노승을 바라 보았다. 그들 기이한 사제지간이 음침하게 얼굴을 굳히며 기이한 눈빛으 로 자신을 응시하자 비대한 노승이 움찔해 투덜거렸다. "미친놈들! 서로 싸울 때는 잡아먹을 듯 욕을 해대더니 뭐가 어 ㅉ...?" "우리가 그랬냐?" 중년인이 다시 사부인 장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랬던 것 같다. 제자놈아!" "그럼 저 배만 나온 노승 놈을 해치우는 것은 다음에 하자." "그러자. 헌데 뭘 하지?" "다시 바둑이나 두자. 사부놈아!" "그러자." 두 기이한 사제지간이 다시 손을 놓고 바둑을 가운데에 두고 마 주 앉았다. 도림은 다시 질식할 것만 같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퉁소를 불고 있는 노학인()은 여전히 퉁소만 불고, 두 사 람은 다시 조용히 바둑에 열중하고 그리고 또 한 명은 술만 말없 이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순간 휴도옥린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다시 한 걸음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냄새... 그렇다. 그것은 본능으로 느낄 수 있는 짙은 죽음과 피 의 향수였다. 휴도옥린이 이미 오래전 절친했던 매원의 지기들에게서만 맡을 수 있었던 진정한 살인자()들의 냄새였다. 어쩌면 휴도옥린 그 자신에게서 풍기고 있는 살인자의 냄새일 수도 있다. 휴도옥린은 가깝고도 먼, 그 두려운 냄새를 그들 사 인에게서 느 끼고 한 걸음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은 일정한 간격이 생기자 다시 그들을 세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휴도옥린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호 의()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일반적으로 살수()들이란 자 신의 존재를 결코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구월구일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 것이었고 그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낸 것 이었다. 그러나 이 호의도 단 한 번뿐임을 휴도옥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의 대면 이후 그들은 몸을 숨길 것이고 그리고 휴도옥린을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살수가 같은 살수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서로를 대한 순간 휴도옥린과 그들은 서로에 대해 감응(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휴도옥린의 주위에는 이미 그의 출현을 눈치챈 잠마해 수 하들이 이십여 명이나 포진되어 있었다. 그들은 휴도옥린을 발견하고도 호각을 분다거나 패릉 내부로 연 락을 취하는 일없이 조용히 휴도옥린을 에워싸고만 있었다. 그들 의 이런 행동은 이미 사전에 오늘을 대비해 치밀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삘리리...! 돌연 퉁소를 불고 있던 노학인의 눈빛이 음침해지는 듯 하더니 돌연 퉁소소리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던 퉁소소리에 돌연 강력한 살기()가 담겨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마치 실체가 있는 하나의 검인 양 휘어감 기 시작했다. 카앙! 팍! 퉁소소리의 변화가 신호인 양 목상처럼 서 있던 이십여 명의 잠 마해 수하들이 휴도옥린을 향해 덮쳐들기 시작했다. 좌측의 흑의인은 적수공권으로 공격해오고 있었는데 손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귀가 따가운 파공음과 함께 무서운 질풍이 일어나 실 로 놀라운 위세였다. 뿐이랴! 우측의 흑의인은 한 자루 면도를 꺼내 덮쳐들고 있었는데 그 칼 질하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면도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도광만 이 번뜩일 따름이었다. 정자 주위에 포진되어 있는 잠마해 수하들의 무공은 일반적인 수 하들과 달라 이같이 그 위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 휴도옥린은 정자 위에 네 명이 짐짓 자신들의 일에 열중해 있는 듯 하나 모두 자신의 행동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고 있음을 느꼈 다. 이것은 흑의인()들의 공격에 대응하는 자신의 모든 동 작을 지켜보려는 행동임이 분명했다. 좌측으로 덮쳐가던 그의 신형은 다음 순간 이미 오른쪽에서 경사 를 그리며 빠져나오고 있었다. 빠악! 사삭!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흰 무지개가 동서남북 여기 저기서 연거푸 뻗치기 시작했다. "윽!" "끄윽!" 휴도옥린이 이십여 명의 흑영들 사이에서 움직인 신법은 거의 불 가사의할 정도였다. 그 움직임이 번개같이 빠르기도 했지만 무엇 보다도 인간의 육신으로는 도저히 불가사의한 방위로만 굴절되어 뻗어나고 있어 순식간에 일곱 명이 지면을 구르게 되었다. 쏴아아앙...! 그 순간 마악 드러나려는 휴도옥린의 등으로 또 다시 날카로운 검광이 덮쳐왔다. 그들은 동료가 일곱 명이나 순식간에 지면을 구르고 있는 것에는 일체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또다시 덮쳐들고 있었다. 그러나 검광이 베고 지나갔을 때 그 자리에는 휴도옥린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고, 검이 지나고 난 뒤 그 자리에 휴도옥린이 그대 로 서 있었다. 동시에 휴도옥린의 손에서 눈부신 검광이 번뜩이며, 덮쳐들었던 세 명이 비명도 없이 비에 젖은 지면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털썩! 주르륵...! 십여 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거의 순각적인 동작으로 무너져 내 리는 광경에 조용히 바둑을 두고 있던 기이한 사제지간의 눈에 놀 람의 빛이 솟아올랐다. "어떠냐?" "으음! 삵괭이 같은 비모소란 놈이 우리를 부른 이유를 알겠다. 사부야." "그래, 저자는 정말 강하다. 우리는 저자가 싸우는 것을 목격했 으면서도 기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나 진배없다." "그래, 사부놈보다 더 강한 것 같다." 휴도옥린, 그는 원래 서 있던 자리에 담담한 미소와 함께 서 있 었다. 그의 주위에는 십여 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어 어찌보면 공포스 럽기까지 했다. 그의 모든 동작은 절정에 달한 네 명의 살인자조차 파악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고 불가사의한 것인지라 휴도옥린의 능력을 파 악해 보려하던 네 명의 의도는 이미 실패한 셈이었다. "제자놈아, 저 사람이 사부보다 강한 것을 네놈이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단 말이야?" "사부놈아, 네놈이 내게 가르쳐준 재주라고는 사기치는 것 밖에 더 있었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기술 갖고는 저 사람을 죽일 수 없을 것 같으니 하는 소리다." 단아한 용모의 중년인이 사부라는 장년인에게 모자라는 듯한 태 도로 중얼거렸다. 장년인이 눈을 부라렸다. "돼지같은 놈! 네놈이 이 사부의 재주를 다 알고나 하는 소리 냐...!" "엉? 그렇다면, 제자인 나 몰래 사부 네놈은 숨기고 있는 재주가 있단 말이냐...?" "알긴 아는구나!" 중년인의 눈에 터질 듯한 노기가 서렸다. "늙고 게으른 당나귀같은 사부놈, 제자가 되면 모든 절기를 다 가르쳐 준다고 해놓고는 이제보니 네놈은...!" "내가 미쳤냐? 네놈같이 뺀질뺀질하기만한 제자에게 그 피같은 절기들을 전수해 주게?" "끄응!" 중년인의 얼굴이 이제라도 덮쳐들 듯 험악해졌다. 전신에서 풍기는 풍도와는 달리 그들의 말투는 그야말로 어딘가 모자라는 말투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이한 죽음의 냄새 는 여전했다. 어울리지 않는 언행과 태도, 이 모든 것들은 오히려 대하는 이로 하여금 더욱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다. "...!" 휴도옥린의 눈이 고요히 정자 안의 인물들을 직시했다. 그는 이미 상대가 자신의 적임을 잘 알고 있었다. 피할 수는 없 는 상황이었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을 놓친다면 오히려 그들의 끊임없는 암습에 괴로움을 겪어야 할 것임이 분명했다. 처... 벅! 처벅! 이미 결정된 일에 망설이는 것은 구월구일의 성격이 아니었다. 휴도옥린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을 해치워야 한다고 결정했으 며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높이 평가했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삐릴리...! 삐이...! 휴도옥린이 천천히 정자로 다가들기 시작하자 퉁소소리가 다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쏴아앙! 그 퉁소소리에 잠시 주춤거리던 흑의인들이 벼락같이 덮쳐들고, 동시에 도림의 곳곳에서 오십여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다시 솟아나 휴도옥린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의 장막, 가공할 죽음을 부르는 인의 장막이었다. 번쩍! 휴도옥린은 한 자루의 장검이 머리 반자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 렸다가 귀영()처럼 미끄러지며 손을 뻗어냈다. 그의 손은 가볍게 공격자의 가슴에 닿았다 떨어졌다. 흑의인의 몸이 부르르 진동되다 다음 순간 털썩 휴도옥린의 무릎 앞에 쓰러졌다. 그의 입에서는 어느새 검붉은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그것이 신호인 듯 엄청난 공격이 파상적으로 휴도옥린을 향해 밀려오기 시작했다. 고오오...! 번쩍! 휴도옥린의 신형이 물결 흐르듯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꽈꽈꽝! 까득...! 무수한 공세 속에서 그의 신형은 마치 한 점 공기인 양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그는 그저 한 개의 가벼운 깃털인 양 공세사이를 빠져나가며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정자의 네 인물에게만 고정되어 있었 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든간에 그의 눈은 정자에서 한시도 떨어지 지 않고 있어 그가 정자 안의 네 명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쏴아앙! 이때, 한 개 강전()이 돌연 허공을 타고 흐르는 휴도옥린의 등으로 덮쳐왔다. 공기를 끊는 예의 강전에 휴도옥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실 그의 신법은 상대의 공세에서 일어나는 미미한 경풍을 타고 흐르는 것인지라 상대의 공세가 제아무리 빠르고 엄밀하다 해도 그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공기를 끊으며 가공할 위세로 날아드는 강전 앞에서는 그의 불가사의한 신법이 무용지물인 것이다. 팍! 강전이 양단되며 지면에 떨어졌다. 흰 빛이 휴도옥린의 허리에서 솟아나 강전을 베고 다시 허공에 하나의 원을 형성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허리에 걸려있던 기이한 형태의 쌍검이 쥐어 져 있었다. 투명하다시피 맑은 검신을 지니고 있는 크고 작은 두 자루의 쌍 검은 바로 악마의 이빨이라 불리웠던 월영인검()이었다. 팍...! 사삭! 휴도옥린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인해()의 공세에 양손에 두 자루의 검을 나눠쥐고 원형을 그리며 공세를 펴내기 시작했다. 휘리리릭! "와악- !" 휴도옥린의 쌍검은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그 일초마다 태극()의 음양변화는 물론이고 천지간의 모든 섭리()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 정묘함이란 거의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검은 순간의 허점을 포착해 흑의인들의 사이를 가볍고도 민 첩하게 파고 들어 결정적으로 목표물에 적중하고 되돌아오고 있었 다. 이 모든 동작은 산처럼 무거우면서도 깃털처럼 날렵했다. 휴도옥린의 양손은 각기 두 자루 검을 쥐고 초식을 펼치고 있었 는데 어찌보면 두 자루의 검이 하나의 초식을 펼치면서 연결되는 듯 싶었으나 그렇게 느끼면 또 그렇지가 않았다. 이것은 마치 두 사람이 각기 초식을 펼치고 있는 듯한 광경이기 도 해 운검()의 묘는 그야말로 상상치도 못할 정도였다. "끅...!" "아아악...!" 휴도옥린의 신형이 조금씩 정자로 다가들기 시작했다. 주위에 무수하게 덮쳐들고 있는 잠마해의 수하들은 마치 하나의 원에 스스로 뛰어들어가 피를 토하며 퉁겨지고 있는 듯했다. 휴도옥린의 걸음은 점차 빨라지고 있었고, 그에따라 그의 주위에 는 끝없이 크고 작은 무수한 원이 형성되었는데 흑의인들은 그 원 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선()을 결코 파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 벅! 처벅! 마치 아무일도 없다는 듯 정자로 시선을 둔 채 걸음을 옮기고 있 는 휴도옥린에게서는 오히려 고요함이 흘러나왔다. 끊임없이 덮쳐 들고 있는 흑의인들을 쳐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고 요함이었다. 쉬익! 헌데 바로 이 순간, 휴도옥린의 좌측으로부터 일검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허공중에 돌연 솟아난 혈검()은 휴도옥린이 펼쳐놓은 검막을 뚫고 곧장 그의 왼쪽 어깨로 뻗어오고 있었는데 검이 닿기도 전에 서늘한 기운이 먼저 휴도옥린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어 혈검은 곧바로 휴도옥린의 왼팔을 노리는 듯 다가왔다. "...!" 휴도옥린은 크게 놀라 몸을 뒤틀었다. 허공 속에서 돌연 형성된 일검은 종적도 없이 다가왔기 때문에 검이 거의 육박해오기 전까지 휴도옥린은 눈치챌 수가 없었다. : 제22장 잠마()... 그 공포의 단체! 쉭...! 카앙! 휴도옥린은 느닷없이 날아든 혈검을 비껴내며 우측 허공을 향해 검을 쳐냈다. 쇠가 퉁겨지는 격돌음과 함께 허공 속에서 무엇인가 가 밀려났다. 사혼()이라 했던가? 그렇다. 허공 속에서 느닷없이 검을 쳐낸 인물은 바로 괴소녀 수 빙의 뒤를 쫓고 있던 흑의청년이었던 것이다. '역시...!' 휴도옥린은 별반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얼마전부 터 손목의 천마묵환이 진동하고 있어 기실 사혼의 존재를 눈치채 고 있었기 때문이다. 쉭...! 또 다시 허공 속에서 혈검이 날아들었다. 사혼의 검은 잠마해 수하들과는 달리 휴도옥린이 전개한 검막을 교묘히 위축시키는 것인지라 휴도옥린으로서는 괴롭기 그지 없었 다. 느닷없이 나타나 휴도옥린의 검세를 결정적으로 파괴시키며 날아 드는 사혼의 검은 또한 잠마해 수하들의 공세 속에 교묘히 숨어있 어 일시지간 어쩌지도 못할 정도였다. 사악! 꽈꽈꽝...! 그러는 와중에서 휴도옥린은 점차 정자로 다가들어 이제 사장 여 의 거리를 남겨두고 있었다. "사부야! 저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쌍검이 혹시 그 옛날 잠마십 이천마중의 한 명이었던 월영인조 삼성일정이 사용하던 월영인검 이 아니냐?" "그렇다, 제자놈아." 기괴한 사제지간의 눈에 다시 놀람이 떠올랐다. "저 사람은 진짜 알 수 없는 사람이구나. 일개 살수인 줄 알았더 니 놀라운 무공을 지니고 있고... 게다가 월영인검마저 지니고 있 다니...!" "글쎄다. 저런 인물을 누가 키웠을까?" "적어도 너같은 사부놈은 아니겠지?" 장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휴도옥린이 점차 정자에 가까와지는 것을 긴장해 하기 보 다는 경악과 의혹만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헌데, 사부야? 저 허공 속에 몸을 숨기고 검을 쳐내고 있는 작 자는 또 누구일까?" "모르겠다." "사부가 모르는 것도 있냐?" "그럼 나라고 세상일을 다 안단 말이냐!" "네놈이 애초 나의 사부가 되기로 했을 때는 그렇게 말했지 않았 느냐! 네 놈이 모르는 것은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고...!" "그,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 결론을 내자." 돌연 장년인의 눈이 커졌다. "무엇을 말이냐?" "내가 네 놈을 사부로 모신 것이 모조리 사기였으니 우리 관계를 끝내자는 말이다." "이, 이 벼락을 맞아 죽을 제자놈이 한 번 사부는 영원한 사부라 는 것을 모르냐...!"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이제는 내가 사부가 되어볼 차례다." 두 인물이 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긴장 을 담은 채 점차 가까와지고 있는 휴도옥린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 다. 사삭! 꽈꽈꽝...! 휴도옥린은 한 걸음 속에 일백여 개 이상의 원()을 형성하며 조금씩 정자로 다가들었고 일백여 명에 달하던 잠마해 수하들은 이미 오십여 명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한 순간에 도 그들은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때, 정자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유등의 불빛이 뻗어나가고 있 는 도림의 저쪽에 한 인영이 서서히 나타나 의혹의 눈으로 격전장 을 응시하고 있었다. "...?" 펄럭이는 왼소매와 둘둘 말고 있는 듯한 기이한 복색, 바로 독비 금검 사도제종이었다. 파... 악! 사도제종의 모습이 드러나자 잠마해 수하중 한 명이 다짜고짜 휴 도옥린에게 퍼붓던 공세를 바뀌 그를 덮쳐 들었다. 사도제종과 휴도옥린을 같은 일행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번쩍! 순간, 백광이 번뜩이며 덮쳐들었던 흑의인의 몸이 허공에서 멈취 졌다. ㅊ...! 촤악...! 흑의인들이 수없이 나동그라지며 빗줄기 속으로 선혈이 뻗쳐 나 갔다. "끄윽!" 흑의인은 허공 중에서 불신의 빛을 보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 다. 사도제종의 금검은 어느새 그의 손에 아무렇게나 둘러져 있었는 데 그 검이 움직였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가공스러운 속도였 다. 사도제종의 검기()는 실로 눈부신 것인지라 이 광경을 대한 정자 안의 인물들 또한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처... 벅! 처벅! 사도제종은 묵묵히 걸음을 시작했다. 그가 통과해 가고 있는 지점은 바로 잠마해의 수하들과 휴도옥린 이 격전하고 있는 곳과 비껴지나는 장소였다. 검광이 난무하고 죽음의 선()이 종횡으로 누비고 있는 장소로 태연히 들어서며 그는 간간이 금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이런 동작은 자신의 앞을 막는 인물을 무조건 베어넘기는 동작인지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아연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걸어가고 있는 뒤쪽으로 잠마해 수하들의 시신이 쌓여갔다. 그의 출현으로 인해 격전은 잠시 멈춰지는 듯했다. 이때였다. "...!" 조용히 격전장을 가로질러 패릉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사도제종 의 눈에 이채가 솟아났다. 동시에 그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의 눈은 곧바로 정자를 향하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정자안의 인물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정자 위쪽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 었다. "...?" "...!" 사도제종의 기이한 행동에 모두의 눈이 정자 위쪽으로 돌려졌다. 잠마해 수하들은 물론이고 휴도옥린의 눈에조차 의혹과 경악이 솟아났다. 정자의 삼장 위쪽 허공에 언제부터인가 거무스름한 물체가 둥둥 떠 있지 않은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마치 거대한 박쥐의 형상처럼 떠 있는 어 두운 물체, 놀랍게도 그 존재에 대해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정자 위쪽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검은 물체는 기이한 행색의 여 인()이었다. 어둠과 비, 그리고 기이한 형태의 검은 옷에 대조적으로 흰 얼굴 이 유령처럼 떠올라 있는 여인의 용모는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선()이 가는 입술과 그린 듯한 아미, 입고 있는 흑의로 인해 더욱 창백하게 느껴지는 희디 흰 피부. 이 여인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흑색 바람막이를 걸친 채 허공 에 떠 있었는데 이런 그녀의 모습은 비와 어둠을 몰고온 어둠의 여신()인 듯 여겨질 만큼 신비스러운 가운데 공포스러웠다. 놀랍게도 그 거친 빗발 또한 그녀의 머리 일장 위쪽에서부터 자 연스럽게 비껴 지나가며 일체 그녀의 몸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어 허공 속에 하나의 공동()이 생긴 듯한 형세였다. 휴도옥린을 비롯한 장내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이 절정고수 아 닌 사람이 없어 흑의 여인의 이같은 모습에서 그녀의 가공함을 능 히 읽어낼 수 있었다. 돌연, 정적이 내려앉았다. 흑의여인의 돌발적인 출현은 기이한 힘으로 모두에게 압박을 주 어 짧은 순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 채 흑의여인을 주시했다. 그 숨막히는 침묵을 깨며 돌연 흑의여인의 입에서 교소()가 터져나왔다. "호호호!" 그것은 은쟁반에 옥이 구르는 듯 아름다운 교소였다. 그러나 듣 는 이의 등골을 타고 식은 땀이 맺히는 공포스러운 웃음이었다. 그 순간 흑의여인의 몸이 허공에서 움직이는 듯 싶었다. 빠지지직! 흑의여인의 신형이 두둥실 정자의 지붕 위로 내려앉는데 놀랍게 도 그녀의 발이 닿기 무섭게 지붕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뿐이랴! 주저앉은 정자 안으로 흑의여인의 몸이 귀영처럼 번뜩였 다. 파앙! 꽈꽝! 퉁소소리가 끊겼다. 정자 안에서 휴도옥린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네 명의 살 인자들은 흑의여인의 한 공격에 사면으로 퉁겨나갔다. 흑의여인의 신형은 어찌나 빠른지 전광석화처럼 희미한 흑색그림 자만을 남기고 네 명에게 각기 덮쳐가 한 사람 앞에 연속 삼 장 씩을 쳐내고 있었다. "윽...!" "이, 이럴 수가...!" 정자 안에 있던 인물들은 각기 초절정의 고수들이었으나 번쩍하 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덮쳐 들자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이 에 큰 손해를 본 듯 했다. "호호호호...!" 네 명이 퉁겨나가자 다시 소름끼치는 교소성이 길게 울려퍼졌다. 그 소름끼치는 교소가 채 들려오기도 전에 그녀의 신형이 다시 허 공으로 솟아났다. 다음 순간, 처절한 비명성이 연속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끄윽!" "왁- - !" 흑의여인의 몸은 지면과 이장 정도 되는 허공 위로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녀의 검은 피풍 속에서 희디흰 옥수()가 한 번 번뜩일 때마다 잠마해 수하들의 입에서 비명이 들리고 허공으로 이삼 장 쯤 떠올랐다가는 시체가 되어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 었다. 놀라운 것은 단 한 사람도 그녀의 일 장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는 점이었다. "박쥐공주가...!" 허공 속에서 경악성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바로 사혼의 경악에 잠긴 음성이었다.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잠마해의 수하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들이 본 것이라면 그저 흑의여인의 손바닥 가운데 떠올라 있는 붉은 광 휘 뿐이었다. 그녀의 이런 도살은 어떤 일정한 상대를 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 그저 무차별한 도살이었다. 번쩍! 사도제종의 앞으로 덮쳐가던 박쥐공주의 신형이 가공스러운 속도 로 급회전했다. 사도제종에게 덮쳐들던 그녀는 그의 손에서 뻗어나고 있는 검기 ()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는 듯 황급히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크악!" 그러나 다음 순간, 급선회한 그 신법으로 그녀의 손은 이미 다른 잠마해 수하를 격살하고 있었다. 박쥐공주의 그저 한 번 스쳐가는 듯한 이 동작에 휴도옥린과 사 도제종, 그리고 정자 안의 네 인물과 사혼 등을 제외한 모든 흑의 인들은 단 한 명도 남지 못하고 이미 시신이 되어 있었다. 이 순간 박쥐공주의 눈에도 놀람이 가득해 있었다. 보잘 것 없는 이곳에 예상치도 못했던 고수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사, 사부야! 괜찮냐?" "음! 이 사부는 괜찮다. 제자놈, 너는 어떠냐?" "미안하다. 죽지 않아서...!" "제기! 명도 질기구나. 저 귀신같은 여자의 손에 살아남다니!" 기괴한 사제지간의 기괴한 대화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음성에 이번에는 팽팽한 긴장이 담겨 있었다. "별 해괴한 놈들이 다 몰려오는구나. 저 외팔이는 보아하니 요새 유명해지고 있는 사도제일가의 후예같은데...!" "맞다. 이곳에 구월구일 말고도 해괴한 놈들이 다 모이고 있는 것 같다." "제자놈아! 저 쪽을 봐라! 저자들은 분명히 관부의 사냥꾼인 천 밀영의 고수들이다. 저자들까지 이리로 몰려들고 있다니 참 신기 하구나." 도림의 반대편에는 천밀영의 고수들이 이미 패릉으로 진입해 들 고 있었다. 물밀듯이 패릉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는 그들의 기세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사, 사부야! 비모소란 놈이 이곳에다 꿀을 발라놓았나 보다. 왠 벌레들이 이리도 많이 몰려든단 말이냐!" "제자야,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우리는 구월구일만 죽이면 되니까!" "헌데 사부야! 저 귀신같은 여자는 누구이기에 저렇게 무섭냐?" "모르겠다. 추측이기는 하다만...! 아마도 잠마에서 나온 인물들 같다." "잠마?" 중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의 대화를 무심히 흘려듣고 있던 휴도옥린 또한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이때, 사도제종과 격돌하며 잠시 주춤하던 흑의여인의 신형이 가 공할 속도로 휴도옥린을 향해 덮쳐오기 시작했다. 쏴아앙! 꽈릉! 박쥐공주의 검은 소매 속에서 희디 흰 옥수가 벼락같이 튀어나오 고, 그 손은 이미 휴도옥린의 가슴에 이르러 있었다. 그 속도는 가히 불가사의할 정도, 피한다거나 막을 엄두도 낼 수 없는 살인 적인 속도였다. "흥!" 휴도옥린이 한기를 삼키며 냉소했다. 동시에 그의 수장()이 박쥐공주의 교묘하게 뻗어오는 옥장()과 격돌했다. 따따딱...! 단 한 번 부딪친 듯 했으나 일곱 차례의 격돌음이 터져나오고, 동시에 휴도옥린의 신형이 뒤로 쭉 밀려났다. '음...!' 휴도옥린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기이하게도 박쥐공주의 그 불가사의한 옥장()의 변화가 눈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슴치 않고 옥장이 진행되 고 있는 길목을 막아가며 수장을 쳐낸 것이었는데 그 순간 실로 엄청난 힘이 그를 태풍처럼 휘감으며 뒤로 밀어내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힘() 같지가 않았다. '이럴 수가...!' 휴도옥린은 만약 자신이 박쥐공주의 옥장()이 일으키는 속도 와 변화를 알 수 없었다면 크게 낭패를 겪을 뻔 했음을 여실히 느 꼈다. 박쥐공주의 옥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무공노수()를 미리 파악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는 내부가 진탕되는 충격을 받 은 것이었다. 쏴아앙! 경악도 일순이었다. 퉁겨졌던 박쥐공주의 신형이 다음 순간 믿어 지지 않으리만큼 신속하게 몸을 역회전시키며 덮쳐오고 있었던 것 이다. 꽈앙! 휴도옥린이 서 있던 지면이 반장 깊이로 패어 나갔다. 실로 엄청 난 위력이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이미 일장 좌측에 우뚝 서 있 었다. "...!" 두 번의 공세에도 휴도옥린이 멀쩡하자 박쥐공주의 눈에 또 다른 놀람이 스쳤다. 이 순간 휴도옥린 또한 내심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괴이하다, 이 여인의 신법이나 공격노수가 모두 내 눈에 보인 다. 이것은 마치 내가 이 여인의 무공을 이루고 있는 근본을 잘알 고 있는 듯 하지 않은가?' 휴도옥린의 의혹은 당연한 것이었다. 단연코 그는 박쥐공주를 지금 처음 대하고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녀와 격돌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차 박쥐공주의 무공 변화에 대해 저절로 깨달아지는 느낌이었던 것이 다. 이때였다. 돌연 허공 한 쪽에서 미미한 파장()이 느껴졌다. 박쥐공주의 눈이 급격히 돌려졌다. "흥! 사혼! 네가 감히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동시에 휴도옥린에게 다시 덮쳐들 듯 하던 그녀의 신형이 허공 한 곳으로 무섭게 덮쳐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허공 속에서 돌연 검은 물체가 모습을 드 러냈다. 짙은 흑의에 창백한 안색을 지니고 있는 흑의청년, 바로 사혼이었다. 사혼은 박쥐공주를 대하기 무섭게 도림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흥! 공주가 무서워 도망가는 줄 안다면 오해다." "멈춰라...!" 쏴아앙! 사혼과 박쥐공주의 신형은 순식간에 도림 저쪽 허공 위로 사라져 버리기 시작했다. 그 신법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 마치 유성이 밤하늘에 번뜩이는 듯한 속도였다. 이때, 기괴한 사제지간 사이에 또다시 덜 떨어진 듯한 대화가 이 어지기 시작했다. "사부야! 아무래도 이곳은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다." "그래! 일단 후퇴하는 게 좋겠다. 구월구일 말고도 괴상한 놈들 이 너무도 많다." "좋을 대로 하자." 그들의 대화가 신호였을까? 삭! 사사삭! 정자 안에서 구월구일 휴도옥린을 기다리고 있던 네 명의 살인자 들이 일제히 패릉 내부로 이어지는 통로 쪽으로 사라지기 시작했 다. 동시에 무심히 서 있던 사도제종 역시 패릉으로 이어지는 수 많은 통로 중 한곳을 택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휴도옥린은 잠시 비와 어둠 속에 몸을 누이고 있는 거대한 패릉 을 응시했다. 그의 존재는 이미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잠마해의 흑 밀원 총단인 이곳에 예측하지도 못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모여들었 다는 자체가 그로서는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또한 이 순간의 구월구일은 그 패릉이 죽음의 함정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패릉(). 궁륭산 중턱을 휘어감으며 거대하게 솟아 있는 패릉의 규모는 실 로 놀라울 정도였다. 패릉의 내부로 진입해 들어가는 통로의 수효만 해도 천중십팔숙 ()의 원리에 따라 도합 열여덟 곳이나 되었고 한눈에 보아도 고명한 건축가에 의해 설계된 듯 현기()를 품고 있었 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거대한 패릉의 입구는 모조리 개방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기관을 움직여 개방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힘으로 열고 들어선 것으로 곳곳에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이것은 잠마 해의 흑밀원이 총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거대한 패릉에 천밀영의 고수들과 잠마의 인물들이 몰려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휴도옥린은 열여덟 개의 통로 중 한곳의 암도()를 통 해 조심스럽게 패릉 내부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통로는 사면이 단단하기 이를데 없는 석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희 미한 유등조차 걸려 있지 않아 어둡기 이를데 없었다. "...!" 길게 이어진 암도는 어쩌면 평화스럽기까지 했다. 어둠과 정적에 잠겨 있는 암도를 소리없이 움직여 가며 휴도옥린 은 그의 내부가 고요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둠이야말로 살인자()의 고향이었다. 매원 최고의 살수였던 구월구일 휴도옥린의 마음 속에는 지금 독 특한 평화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평화야말로 살인자의 마음이 아무런 파장()도 지니지 않는 절대적인 평정이고 그 평정 위에서만 최고의 살인능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잠시 후 암도가 끝이 나고 길이 막혔다. 휴도옥린은 조용히 사방을 살펴보다가 석벽의 한곳을 매만졌다. 끼이익! 끼익! 그러자 돌이 마찰되는 음향과 함께 하나의 암문()이 드러나 며 방원 십여 장에 달하는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실 내부에는 두 명의 흑의인이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휴도옥린을 향해 덮쳐들었다. 허나 그들은 휴도옥린의 손에서 검은 빛이 번뜩이는 것을 발견한 순간 이미 숨 이 끊어져 버렸다. 휴도옥린의 이 검법은 너무도 빨라 단지 주위에 가벼운 미풍이 일었을 정도였다. "흑밀원은 원래 교묘한 기관장치가 준비되어 있는 고릉()을 총단으로 삼고 있었군. 이 왕릉()의 기관들은 원래 왕릉에 장 치되어 있던 것들임이 분명하다." 휴도옥린은 순식간에 두 명을 해치우고 석실을 살펴 보았다. 사 방 십여 장에 달하는 석실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은 이 석실 또한 단지 입구에 불과함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휴도옥린은 이미 석실을 한 번 살펴본 것만으로 내부로 이르는 통로가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품 속을 뒤져 병장기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지금까 지 통과해온 암도는 기실 함정이랄 수도 없었다. 진정한 죽음의 함정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슷! 그의 손에 앙증스럽기 이를데 없는 작은 궁()이 들려졌다. 바로 도노 좌비능이 전일 만들어준 강전()이었다. 다음 순간 석실의 한곳에 다시 암도가 나타나고 휴도옥린의 신형 은 소리없이 그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그들은 총단으로 진입해 드는 침입자를 위해 언제나 그곳에 매복 해 있는 것이 임무였다. 헌데, 지금 이 순간 세 명의 동료들이 돌연 침묵을 지키기 시작 한 것을 느낀 한 명이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입을 열고 있었다. "이봐! 저 앞쪽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헌데 자네들은 듣지 못했나?" 흑의인은 전면을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불현듯 고개를 돌려 좌측의 어둠 속에 기대 서 있는 동료를 직시했다. "이봐! 나도 구월구일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이곳으로 침입해 든 것은 알고 있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은밀히 잠복해 있어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단 말일세. 하지만 아직 그가 나타난 기척이 없으니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는 게 아닌가?" 흑의인은 점차 노기가 솟아났다. 나머지 세 명의 동료 중 그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시당한 것 같은 느 낌에 분노해 좌측의 석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동료를 바라보며 화 를 터뜨리려고 했다. 그 순간 그는 그 동료가 이미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 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전(), 길이 반 자 가량에 불과한 작은 강전이다. 전체가 먹빛으로 가라앉은 강전은 동료의 목을 격중하고 석벽에 박혀 있 었다. '헉...!' 흑의인은 기겁을 해 나머지 동료들을 살펴보았다. 두껍고 짧은 화살은 이미 그들의 가슴에도 박혀 있었고 그곳으로 부터 소리없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흑의인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소리를 치려고 했을 때. 쉭...! 돌연,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강전이 날아와 그의 가슴에 꽂혔 다. 흑의인은 자기 눈으로 화살의 날카로운 날이 그의 옷을 파고 들었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기까지 했다. 그는 한 순간 자신의 내장들이 경련을 일으키듯 들끓는 것을 느 꼈다. 그것이 그가 체험한 마지막 느낌이었다. 쓰윽! 네 명의 흑의인이 쓰러져 버린 암도 위로 한 인영이 소리없이 날 아들었다. 살인자()가 나타난 암도의 저쪽 건너편에는 다시 세 명의 잠마해 수하들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 교대를 하기 위해 오고 있는 자들 같았다. "...!" 그들은 암도의 중앙에 서 있는 살인자를 발견하고는 주춤했다. 손에 작은 궁()을 들고 있는 살인자를 발견한 그들 중 한 명이 무엇인가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파앗! 순간, 살인자의 신형이 천마가 허공을 날 듯 십여 장을 날아와 그의 목을 향해 장검을 내리쳐 왔다. "헉!" "이, 이런...!" 나머지 두 명이 대경실색해 허리에 장검을 뽑으려고 했다. 하지 만 그들의 검이 채 삼분지 일도 뽑히기 전에 그들은 비명 한 마디 도 지르지 못한 채 피를 쏟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실로 공포스러운 쾌검이었다. : 제23장 사왕()의 출현()! 창사와 희수수는 박쥐공주의 수하에게 낭패를 겪은 후 패릉 내부 로 진입해 들어가는 새로운 통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뒤쪽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 패릉내의 일이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때였다. 그들이 들어선 길고 긴 암도 전체가 돌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복도가 무너질 듯 흔들리자 크게 놀라 서로를 마주보았 다. "누군가가 기관을 작동시킨 모양이오. 아마 잠마해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패릉 전체 기관을 작동시킨 것임이 분명하오." 우르르릉...! 창사와 희수수는 서둘러 후퇴하려고 했으나 놀랍게도 그들의 배 후는 이미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뿐이랴! 진동이 계속될수록 청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찍찍 금이 가기 시 작하며 희미하게 어둠을 밝히고 있던 야명주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회랑은 순식간에 자신의 손가락 하나 내다볼 수 없는 어둠으로 뒤덮였다. "오늘 일은 별로 이득이 없을 듯 하오. 이곳에 투입시킨 천밀영 의 고수는 모두 일천 명 가량이었소만... 내 짐작이 맞는다면 반 수 이상이 희생될 것 같소." 희수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팟...! 창사가 묵묵히 화섭자를 꺼내 불을 밝혔다. 헌데, 진동이 멎고 난 후 사방을 살펴보니 그들은 분명 길고 긴 회랑의 가운데에 있었는데 어느새 하나의 커다란 석실 가운데 서 있지 않은가. 창사가 주위를 둘러보다 소리쳤다. "저쪽이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입구인 듯 하오." 희수수가 한쪽 벽면으로 다가갔다. 창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조심하시오. 이젠 전체의 기관이 작동했으니 모든 일에 조심해 야 할 것이오." 희수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위험하오...!" 순간 희수수가 서 있던 지점이 바닥으로 쑥 꺼져내려가며 전면에 서 무서운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희수수는 내심 한기를 삼키며 번개같이 몸을 비틀고 흑섭선을 휘둘렀다. 캉! 채앵!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희수수가 신형을 뒤집어 창사 앞으로 내 려섰다. 그의 어깨에서는 어느새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괜찮소?" "무섭기 짝이 없는 기관이로군요. 이미 진기를 끌어 올리고 준비 하고 있었는데도 이 지경이 되다니...!" 희수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전면의 벽면을 노려보았다. 패릉의 기관은 놀랍게도 상대방의 대응에 맞춰 안배해 놓은 것인 지라 실로 무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아주 소득은 없지 않아 어느새 새로운 통로가 전 면에 펼쳐져 있었다. "앞으로 갈수록 기관은 더욱 무서워 질 것이오. 아무래도 천밀영 의 고수들을 투입한 것이 잘못된 듯 싶소." 희수수가 서슴치 않고 새로 드러난 통로로 걸어들어가며 중얼거 렸다. 그렇다. 흑밀원의 기관들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휠씬 초절해 잠마해의 수하들을 잡기 위해 투입된 천밀영의 고수들이 이 기관에 많이 희 생될 것임이 분명했다. 창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쪽 통로에서 격돌음이 들려오고 있소. 그대 수하들이라면 도 와 주어야할 것 같소." 희수수가 깜짝 놀라 귀를 기울여보니 과연 오른쪽 통로 저쪽에서 파공음과 격돌음이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갑시다. 천밀영의 고수들이 무시할 수 없는 무공을 지녔다고는 하나 이 기관을 돌파하느라 지쳐 오히려 고전하고 있을지도 모르 오." 희수수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격돌음이 들려온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창사도 경공을 전개하여 희수수의 뒤를 바짝 쫓았다. 헌데, 마악 통로가 구부러진 지점을 돌아가려던 희수수가 황급히 몸을 멈춰 세운 채 창사를 제지시키지 않는가! "...?" 창사는 희수수가 긴장하여 일체 기척을 내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 는 것에 크게 의아해 했다. "으악!" "끅...!" 그들이 달려가려던 통로 저쪽에는 다시 커다란 석실이 자리해 있 었는데 그곳에서는 지금 처절한 비명성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창사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석실 안 쪽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호흡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석실 안쪽, 그곳에는 네 명의 흑의인과 한 명 장대한 체구의 홍 의노인이 대치해 서 있었다. 헌데 그 네 명의 흑의인은 모두 비슷한 풍도를 지니고 있었는데 바로 좀전에 창사와 희수수가 부딪쳤던 박쥐공주의 수하와 같은 기질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그들이 바로 같은 일행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석실의 바닥에는 여기저기 무수한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은 천밀영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잠마해 수하들도 뒤섞여 있어 또한 그 흑의인들에 의해 죽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창사는 한 명조차도 어쩌지 못한 가공할 고수들이 네 명이나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에 한기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였다. 카앙! 파파파... 팍! 박쥐공주의 수하들이 일제히 장대한 체구의 홍의노인에게 덮쳐들 었다. 그들의 소맷자락 속에서 일제히 네 가닥의 청사()가 뻗어나 와 허공을 휘감고 있어 그들의 무공을 잘 알고 있는 창사로서는 공포마저 느낄 광경이었다. "와하하하...!" 순간 고막을 진동시키는 호탕한 대소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장대한 체구의 홍의노인이 한 무더기 홍운()처럼 솟아올랐다. 그의 신형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한 바퀴 장내를 회 전했고, 동시에 그의 손에서 눈부신 광채가 사면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마치 붉은 구름 사이에서 수천 수만 가닥의 광채가 폭발한 듯한 광경이랄까? 파앙! "끅!" "와- 악!" 홍광만이 번뜩이는 가운데 네 줄기 인영이 뒤로 퉁겨져 나왔다. 허공으로 퉁겨지고 있는 그들의 전신에서는 선혈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마치 전신 곳곳에 무수한 상처를 한꺼번에 입은 듯 선혈은 몸 어 디라고 할 것 없이 전신에서 일제히 터져나오고 있어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도, 도대체 저 노인은 어떤 괴물이길래 저 무서운 자들이 한꺼 번에...!' 창사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것은 실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놀랍게도 그 엄청난 고수들 네 명이 상대의 단 일초도 감당하지 못한 채 마 치 악마의 손톱에 뜯긴 듯 전신에 무수한 상처를 남기며 당해버린 것이었다. (자! 소리없이 물러납시다. 저 자에게 들키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오!) 창사의 귀로 한 가닥 전음이 흘러들었다. 그것은 바로 희수수의 음성인데 기이하게도 희수수의 음성에는 공포라고 할 수 있는 긴 장이 담겨 있었다. 그의 말투에서 창사는 그가 홍의노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또다시 의혹을 느꼈다. 쓰윽! 슷! 창사와 희수수는 소리도 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서 순식간에 이십 여 장을 벗어났다. 창사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 저 사람이 누구이길래 저런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을까 요...?" "...." 희수수는 침묵했다. 창사는 원래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또한 대답하기 싫 어하는 것에 대해 두 번 이상 질문을 던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희수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스스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궁륭산이 오늘 잠마의 격 전장이 되어있는 듯 하다는 점 뿐이오." "잠마의 격전장?" "그렇소. 기이하게도 잠마의 고수들이 모조리 이곳에 모여, 잠마 내에서 하지 못한 세력 다툼을 이곳에서 벌이고 있는 듯 하다고나 할까?" "음...!" 창사가 침묵했다. 잠마라면 그 역시 전설처럼 들어서 알고 있는 공포의 단체인 것이다. 문득, 창사의 뇌리에 한 인영의 영상이 스쳐가며 그의 얼굴이 어 두워졌다. 그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는 영상은 바로 휴도옥린의 영상이었다. 쏴아아...! 번쩍! 싸늘한 검광이 벼락같이 번뜩였다. 검광이 사라지자 총단의 제사십삼로()를 지키고 있던 잠마해의 당주급 고수 한 명은 얼굴에 한 가닥 놀람의 빛을 머금 고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오른팔은 어느새 깨끗이 절단되어 있었다. 그의 일장 전면에는 무심한 표정의 백삼사내가 검을 세워든 채 서 있었다. 냉혹한 살인자의 기도를 풍기고 있는 백삼사내, 그는 바로 휴도 옥린이었다. 이때 휴도옥린은 상대가 자신의 검을 피해낸 것이 의외라는 듯 기이한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패릉 내부로 진입해 들어갈 수록 잠마해 수하들의 무공은 점차 드높아지고 있어 이와같이 전격적인 기습으로도 상대를 단숨에 해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그, 그대가 구월구일...!" 잠마해 수하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순간 휴도옥린은 싸늘한 눈으로 번개불이 튀기듯 검을 앞으로 쭉 밀어냈다. 번쩍! 잠마해 수하는 휴도옥린의 장검이 앞으로 벼락치듯 찔러오자 순 식간에 앞으로 반보 내딛고 탄력을 이용해 뒤로 몸을 빼내면서 번 개같이 지면을 굴렀다. 그의 임기응변의 신법은 실로 고명했으나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 을 때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휴도옥린의 검이 그의 가슴을 파고 들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는 경악, 불신, 공포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어 그 의 몸은 짚단처럼 땅 위에 굴렀다. 쉭...! 파악! 이때였다. 돌연, 두 가닥 검풍이 배후에서 휴도옥린을 덮쳐왔다. 그 검세는 노리는 부위마다 악랄하고 신속하여 가히 쾌검의 진수를 터득한 인물들의 공격같았다. 두 가닥의 검광은 마치 폭죽이 터지듯 눈 깜짝할 사이에 휴도옥 린을 휘감아 버렸다. 그 검막은 얼마나 매섭고 치밀하며 신속한지 천하의 그 누구라도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휙! 쉬익! 매서운 검기와 함께 지하통로를 밝혀주던 검광이 일순간에 사라 져 버렸다. 장내에는 어느새 두 흑영이 나타나 있었다. 복장으로 보아 잠마 해의 수하들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휴도옥린이 있던 자리에 아무도 없음을 발견하고 기절할 듯 놀라서 검을 세워 자신을 보호하며 휴도옥린의 종적을 찾았다. 그들과 일 장 가량 떨어진 곳에 휴도옥린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엇을 구경하는 듯한 자세였다. 다음 순간, 그들은 휴도옥린이 바로 자신들 앞에 다가와 있음을 알았다. 동시에 하나의 단검이 좌측 인물을 향해 내뻗어졌고 뒤를 이어 장검이 원을 그리며 우측 인물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쿠...웅! 두 사람이 무너져 내리자 휴도옥린은 잠시 자신이 만든 죽음을 내려다 보았다. 헌데 이때, 휴도옥린은 돌연 좌측 손목에 차고 있는 천마봉환이 다시 진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 휴도옥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마봉환이 진동하고 있다는 것은 천마봉환을 회수하려는 기괴한 일행 중 누군가가 접근해 오고 있 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혼이라 했던가? 이미 그의 공격을 무수히 넘긴 휴도옥린이었다. 그러나 쉽사리 그를 잡을 수도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어쩐 일인지 그들을 해치고 싶은 마음이 없어 휴도옥린은 내심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벅! 저벅! 헌데, 그가 서 있던 통로의 좌측에서 한 인영이 비틀거리며 휴도 옥린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의 걸음은 불안정하 기 이를데 없어 이제라도 쓰러질 듯 보였다. '사혼?' 휴도옥린의 눈이 커졌다. 그 순간 비틀거리며 겨우 휴도옥린 앞 에까지 다가온 인영는 풀썩 그의 앞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휴도옥린은 크게 놀라 중얼거렸다. 놀랍게도 사혼의 전신에 무수 한 상흔이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과연 한 사람에게 당한 상처란 말인가...?" 사혼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상처는 단숨에 이루어진 것으로 천하 에 이와같은 상흔을 단숨에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했 다. 사혼(). 항시 허공속에 몸을 숨기고 검만을 드러낸 채 공격해오던 잠마의 고수, 그 엄청난 고수가 전신에 악마의 이빨자국같은 상흔으로 뒤 덮여 죽어가고 있는 광경은 휴도옥린의 뇌리에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누가 있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휴도옥린의 뇌리로 한 가닥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 자신으로서도 사혼을 백초 이내에 제압할 자신은 없었다. 그 런 고수가 단 일초에 당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 다. "부, 부탁이... 있소." 이때,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사혼이 간신히 한 손을 앞으로 내밀 며 휴도옥린을 불렀다. 그의 손은 바로 앞에 서 있는 휴도옥린의 장삼을 안간힘을 다쓰 며 움켜쥐고 있었다. "모모()에게... 내성()의... 사왕()이 나타났다고 전해 주... 시오." '내성? 사왕()?' 휴도옥린의 눈이 잔잔히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는 장삼자락을 쥐고 있는 사혼을 묵묵히 내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사혼은 그 손을 푼 뒤 안간힘을 쓰며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나, 나는... 소궁녀가 그대에게 천마봉환을 준 이유는 모르 나... 소궁녀가 천마봉환을 주었으니 이것마저 맡겨도 될 것..." 차각! 사혼이 품 속에서 꺼낸 것은 자그마한 옥함이었다. 그의 손이 옥 함의 한곳을 만지자 옥함의 뚜껑이 열리며 그 안에서 휘황한 금광 이 뿜어 나왔다. 옥함 속에 들어있는 것은 한 개의 팔찌였는데 취옥()으로 만 들어진 듯 그 정교함의 아름다움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것은... 천마용환()... 손을...!" "...!" 휴도옥린은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혼의 태도로 미루 어보아 그 천마용환을 자신에게 맡기려는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 다. 천마봉환 하나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집요한 추적을 받 지 않았던가. 허나 그는 이내 그 천마용환으로 인해 자신이 어디 에 있든간에 쉽사리 추적해온 것임을 깨닫고 묵묵히 오른손을 내 밀었다. '이 봉환과 용환은 한 쌍으로 서로 감응()하고 있는 것이 틀 림없다. 이것마저 내가 보관하고 있는다면 나를 추적할 수 없을 것이다!' 끼르르륵...! 휴도옥린의 내심을 알 리 없는 사혼은 드러난 휴도옥린의 오른 손목에 천마용환을 끼우고 매만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천마용환은 휴도옥린의 손에 한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 었다. 사흔은 천마용환을 휴도옥린의 팔목에 채운 후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몸에 나 있는 상처들을 후일 모모에게 자세 히 들려준다면 더이상 감사할 수 없...!" 사혼은 마지막으로 부탁하려는 듯 안간힘을 모아쉬다 말을 끝맺 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숨을 거둔 것이었다. "음...!" 휴도옥린은 사혼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상처들을 내려다 보며 고 개를 흔들었다. "하나, 둘, 셋...! 엄청난 수효의 상처들이다." 휴도옥린은 강렬히 눈을 빛내며 사혼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상흔 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혼의 부탁을 이행하려기보다는 그 자 신의 강렬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사혼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상흔은 모두 달라 마치 수많은 검도 고수가 한 번씩 사혼의 몸에 상흔을 낸 것 같았다. 하지만 휴도옥 린은 이미 그 상처가 단 한 사람에 의해, 그것도 단숨에 생긴 것 임을 깨닫고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헌데, 휴도옥린이 망연히 상념에 잠겨있는 이 순간, 불현듯 십장 저쪽 모퉁이에서 낭랑하기 이를데 없는 소녀()의 음성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린오빠구나! 맞지?" "...!" 휴도옥린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느닷없이 들려온 음성, 그 음성이 음산하고 귀기스러운 죽음의 통로 한가운데에서 들려온 앳된 소녀의 음성이라는 사실도 그렇지 만 그 음성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음성이었던 것이다. '하령...?' 휴도옥린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 하령... 너...!" 음산한 어둠에 잠겨있는 통로 저쪽에서 한 소녀가 조심스럽게 휴 도옥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대략 십삼 세? 온통 피와 죽음의 냄새만이 어우러져 있는 패릉내의 통로에 어울 리지 않는 화사한 차림의 소녀는 바로 곡하령이 아닌가! 휴도옥린은 너무도 돌발적인 곡하령의 출현에 정신이 다 없었다. 비모소에게 납치되어간 그녀가 이렇게 의외의 장소에 나타난 것이 었다. 곡하령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백삼의 사내가 휴도옥린임을 확 인하고 번개같이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게 얼마만이야, 그동안 뭐했어? 나 보고 싶었지? 그렇지?" 곡하령은 순식간에 휴도옥린의 목에 매달리며 울먹이듯 입을 열 었다. 그녀 역시 이곳에서 휴도옥린을 만난 것이 의외였다는 듯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나 이뻐졌지? 에이...! 참! 그렇게 멍청하게 있지 말고 뭐라고 말좀 해봐, 응?" 휴도옥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눈 앞에 당면한 상황이 믿어지지 않 았다. 비록 비모소에게 납치되어 가기는 했으나 일개 소녀에 지나지 않 는만큼 신변에 큰 위협은 없으리라 믿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렇게 곡하령 스스로 휴도옥린의 앞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이 도저 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년(), 거의 이 년만의 재회였다. 곡하령은 그 이 년 동안 제법 많이 변해 있었다. 조금은 더 성숙하고 조금은 더 발랄해 보 였다. 여기에다 납치되었던 소녀로 보기 어려우리만큼 그녀의 표정에는 어두운 곳이 없어 휴도옥린은 그 점이 의혹스러웠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휴도옥린은 새삼 곡하령이 자모전가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곡하령을 안은 상태에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어떤 일도 따지고 보면 돌발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 모든 일이란 그 전후인과()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돌 발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지 그 어떤 일에도 납득할 수 있는 전후 인과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잠마해에 있어야할 하령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적어도 나를 위협할 수 있는 훌륭한 미끼였을텐데 그냥 풀어주다니 이해할 수 가 없군!' '이젠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것인가?' 수많은 생각이 두서없이 휴도옥린의 뇌리를 스쳐갔고, 그리고 정 돈할 자리를 찾기 위해 아우성쳤다. 모든 일을 주어진 여건만으로 스스로 정립해, 사용할 수 있는 정 보로 만들어 온 것이 구월구일 휴도옥린의 습성이었다. 그는 결코 곡하령에게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그 스스로 해답을 알아내야 하 는 것이다. 이ㄸ, 멍청히 서 있는 휴도옥린을 발견한 곡하령은 눈을 치켜떴 다. "정말 벙어리처럼 아무말도 하지 않을 거야?"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바쁘다." 휴도옥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년 전 곡하령을 대하던 때의 그 특유의 무뚝뚝한 태도였다. 그는 곡하령을 살며시 품에서 떼어낸 후 사혼의 시신 옆에 쪼그 리고 앉아 다시 그 상흔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가 알지 못하고 있는 엄청난 고수가 이 패릉안에 존재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근육 하나하나를 무섭게 긴장시키고 있 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야생동물을 부딪칠 것을 예감하고 있는 사냥꾼의 본능적인 위기감같은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 바로 휴도옥린을 긴장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 곡하령은 휴도옥린의 태도에 잠시 멍청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년만의 만남이고 또 기이한 장소에서의 만남이 아니던가. 그 러나 휴도옥린은 순식간에 그 특유의 무심을 드러내며 자신이 할 일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 제24장 정체불명()의 무림고수! "좋아!" 곡하령이 울먹일 듯한 표정으로 휴도옥린이 쪼그리고 앉아있는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았다. "한 가지만 더 말해봐." "무엇을 말이냐?" "나 다시 만난 거 좋아, 싫어?" "좋아. 아주...!" 휴도옥린이 씨익 미소했다. 곡하령은 그 말이 못내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치이...! 나는 그때 린오빠가 죽은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다 고...!" "훗!" "어휴! 무뚝뚝하기는 예전이나 똑같군. 생각대로 하나도 안 변했 어." "...!" "하긴 그 점이 매력이기는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곡하령도 마찬가지였다. 불현듯, 휴도옥린은 그런 그녀가 내심 안타깝기 이를데 없었다. '만일... 언니와 부친이 처참하게 죽고, 자모전가 역시 폐허가 되어버린 사실을 이 아이가 알게 되면 이 아이는...?' 휴도옥린은 내심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이 다시 사혼의 시신으로 향했다. 곡하령이 기이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하고 있는 거야?" "사혼이 내게 말을 하고 있단다." "사혼? 이 죽어 있는 사람의 이름이야?" "그래." "헌데 지금 이 시체가 옥린오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다고 했 어?" "그래...!" "치이...! 시체가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이야." "어떠한 이야기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들리는 법이란다." 곡하령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헌데 어째서 나는 알 수가 없지?" "...." 휴도옥린이 침묵했다. 그러자 곡하령이 돌연 으시시한 기분이 든 듯 사방을 쓸어본 후 다시 입을 떼었다. "빨리 말좀 해봐. 아무 말이나...!" "너는 이 죽어있는 사람이 무어라고 말하는지 듣고 싶으냐?" "응!" 곡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이미 너에게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란다. 그러나 너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기에 그 침묵의 말을 듣지 못할 뿐 이란다." "...?" "죽은 사람이 남긴 말은 때때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말이 될 수도 있단다. 그 까닭은 그 말이야말로 생명과 바꾼 교훈이기 때문이란다." "...!" 곡하령은 휴도옥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 은 기분이었다. 휴도옥린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만약 죽은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많은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의 말을 어떻게 들을 수 있다는 거야?" "죽은 사람의 말을 들으려면 귀보다는 눈을 사용해야 하는 법이 란다." "눈...?" 일순 곡하령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영리하기 이를데 없는 그녀 가 이찌 이 말뜻을 못알아 들으랴. 잠시 후 휴도옥린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나는 그 사람의 몸에서 많은 상처를 봤어." "맞았다." 곡하령이 신이 난 듯 계속 입을 열었다. "이 상처들은 모두 검()보다는 끝이 더 날카로운 병기에 난 상 처같아."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지?" "그 사람의 몸에 난 상처는 매우 깊고 짧은 편이야. 이런 상처는 검에 의한 자상()이 아니라 판관필()같은 기병에 의한 상처임이 분명해." 휴도옥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놀람을 드러냈다. 곡하령은 지난 이 년간 무공을 배웠음이 분명했다. 휴도옥린은 처음 그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신법을 보고 이미 그것을 알았으나 그녀의 안목은 생각보다도 뛰어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맞았다." 휴도옥린이 기뻐하는 빛을 보이자 곡하령의 말이 빨라졌다. "맞아? 호호, 나 이제 제법이지?" "그래, 하지만 그것은 죽은 사람이 하는 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그래요! 자세히 보니 이 사람을 죽인 사람의 초식까지 대충 알 것 같아요. 내가 좀더 많은 무공을 알고 있었다면 말이에요." 곡하령은 새삼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휴도옥린이 다시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심으로 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하령의 무공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다. 누구인지 모르나 단 일 년만에 무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를 이 정도로 키운 것으로 보아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혹시 비모소가...?' 휴도옥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할 뿐이었다. 곡하령의 말투는 일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에 휴도옥린에게 대하던 것처럼 마구잡이 말투를 사용 하다가 간혹 깍듯이 존칭을 쓰기도 해, 휴도옥린으로서는 오히려 듣기가 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존칭을 한다는 것은 이 제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 다. 휴도옥린은 그런 감정을 지우려는 듯 무감동한 음성으로 입을 열 기 시작했다. "그렇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은 말을 못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으 나 원래 죽은 자는 생각밖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셈이지. 그리 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죽은 자의 말은 살아있는 사람의 말보다 진실하다는 점이다." 돌연 곡하령의 표정에 기이한 변화가 일었다. "치이...! 살아있는 사람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말...! 그 말 나 들으라고 한 말 아니야?" "...?" 휴도옥린은 느닷없이 눈물을 글썽해가며 입을 여는 곡하령의 태 도에 정신이 다 없었다. 그러자 곡하령의 울먹이는 듯, 하소연 하는 듯한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다 알고 있단 말이야! 집이 불타고... 언니도 죽었고... 옥린오빠가 나를 찾기 위해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일들을 나도 이미 다 알고 있단 말이야...!" "...!" 휴도옥린은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곡하령은 이미 모든 것을 알 고 있었던 것이다. 곡하령이 체념한 듯 아니면 초연한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떡해! 이미 다 지난 일인데...! 누군 웃고 싶어서 웃 고 있는 줄 알아! 그 일만 생각하면 나는, 나는...!" 곡하령의 두 눈에서 일순 폭포수같은 눈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 했다. 그녀는 가슴이 벅차 오른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 작했다. 휴도옥린의 눈이 그윽해졌다. 놀랍게도 어린아이로만 알고 있던 곡하령이 이같이 놀라운 심득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씨이...! 남의 마음은 눈꼽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고 자기 생각 만 하는 나뭇토막처럼 멋대가리도 없는 게 괜히 사람을 울려...!" 곡하령이 거칠게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투덜거렸다. 실로 거칠 기 이를데 없는 마구잡이 말투였으나 그런 태도가 오히려 휴도옥 린의 가슴을 적셔왔다. "이제 됐다. 그만 해라." "치이...! 뭐가 됐다는 거야!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으며 이곳 에 어떻게 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아...!" "말해 주면 될 게 아니니?" "궁금한 척도 하고 물어보기도 해야 말할 기분이 나지!" 곡하령의 눈에서는 이제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집대로 휴도옥린과의 대화를 이끌어 나가며 그 특유의 앙큼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고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으며, 어떻게 나를 만나러 이곳에 온 것이냐?" "응, 나는 그때 잠마해의 악당들에게 납치되어 영락없이 죽는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 "나를 납치해 온 사람은 나를 이곳에 데려오기는 했으나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한 고승()에게 인도했고 그 사람은 내게 무공 을 가르쳐 주었어." "헌데 내가 이곳에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원주 아저씨가 말해줬어." "원주? 비모소 말이냐?" "응!" 곡하령의 태연한 대꾸에 휴도옥린은 멍청해졌다. 흑밀원주 비모소는 바로 곡하령의 부친을 죽이고 자모전가를 멸 망시킨 원흉이 아닌가. 그러나 곡하령의 태도가 너무도 태연해 휴 도옥린은 의혹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곡하령이 이런 휴도옥린의 의혹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사실 비모소 그 사람은 원래 잠마해 의 인물이 아니라 잠마해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이십 년 전부터 잠마해에 잠입해 있는 신검부의 사람이래." '화접! 신검부의 화접이 그였단 말인가...?' 휴도옥린의 뇌리에서 한 가지 의혹이 맹렬한 소리를 내며 풀려갔 다. 검은 것은 순간적으로 흰 것이 되어버렸고 흰 것은 검은 것이 되 어버린 듯한 놀라운 반전이었다. 이렇게 되자 곡향허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신검부와 잠마해의 보 이지 않는 전쟁에 대한 내막이 휴도옥린의 뇌리에서 그 엄청난 이 면의 비밀을 벗고 있었는데...! '으음! 그렇다면 곡향허가 비모소의 정체를 알아낼 것 같으니까 그에게 오히려 누명을 씌우고 제거한 것이었군!' 휴도옥린은 그 순간 한 통의 양피지인 마고해도()에 대 해 얽혀있던 내막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마고해도는 기실 곡향허에게 합리적인 누명을 씌우기 위해 신 검부에서 일부러 흘린 것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백무잠에게 흘러 들 어갔고, 그로인해 마고해도가 사라져 버리자 신검부에서는 다시 직접적인 방법으로 곡향허를 제거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 모든 전후인과를 한 순간에 깨달은 휴도옥린은 신검부라는 거 대한 제국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검부와 잠마해의 보이지 않는 전쟁. 그 처절하고 잔혹한 음모의 이면을 깨달은 휴도옥린은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로 오랫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때, 곡하령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나와 사부님만이 아는 비밀이니까 옥린오빠만 알고 있어 야 해. 원주 아저씨가 신검부의 수뇌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아주 위험하거든...!" '...!' 휴도옥린은 그제야 곡하령이 돌발적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깨달았다. 비모소가 곡하령을 풀어주어 휴도옥린을 만날 수 있도록 한 데에 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명백히 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 었던 것이다. '흥! 그 자신이 신검부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내게 알 리고 혹시 있을 자신과의 충돌을 막으려 했었군!' 휴도옥린의 마음 깊숙이 차가운 기운이 솟아났다. 비모소가 잠마해의 인물이고 그가 곡하령을 납치했기 때문에 그 를 추적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여건이 모두 바뀐다 하 더라도 휴도옥린에게는 그를 추적할 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휴도옥린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일곱 명 중 의 한 명인 것이다. "아이! 대답 좀 해봐!" 휴도옥린이 침묵하고 있자 곡하령이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음! 그래서 나는 옥린오빠가 지금 오해하고 있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왔단 말이냐. 오빠가 잠마해를 상대로 도전한 것이 바로 나 때문이 아니었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멀쩡하잖아. 그리고 원주 아저씨는 잠마해의 악당이 아니란 말이야." 곡하령이 불안한 듯 말을 잇자 휴도옥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헌데 비모소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조금 전에 떠났어." "어디로 말이냐?" "신검부로 간다고 했어." "신검부...?" 휴도옥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누가 있느냐?" "아무도 없어. 잠마해의 하류악당들밖에 없어. 사부님도 얼마전 에 만황고동()으로 떠나셨거든...!" "...!" 휴도옥린의 전신에서 일순 긴장이 소리내며 풀려나갔다. 목표물 을 놓친 허탈감이랄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곡하령을 응시했다. "너는 이곳에서 나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응." "그렇다면 지체하지 말고 빨리 이곳을 나가거라." "나 혼자만?" "그래, 나는 아직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것 같다." 곡하령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어. "싫어. 나 혼자는...!" "내 말대로 해라. 만약 듣지 않으면 다시는 너를 찾지 않겠다." 곡하령은 자모전가 시절에도 언제나 고집장이였고 제멋대로였으 며 변덕이 심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좀처럼 남의 말을 들으려 하 지 않았다. 심지어 부친조차 그녀를 어찌하지 못했으며 어떤 위협 이나 달램도 그녀를 흔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바로 휴 도옥린이었다. "흥! 오빠가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지 뭐!" 곡하령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휴도 옥린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 시무룩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 덕였다. "알았어. 나갈테니 그 무섭지도 않은 이상한 표정 짓지 마." "...?" "하지만 내가 나가서 기다릴테니 꼭 날 찾으러 와야 돼, 알겠 지?" "알았다. 이곳을 빠져나가서 곧장 자오진으로 가라. 너는 내가 너를 찾아갈 때까지 창사와 함께 지내기를 바란다." "아, 그 조그만한 주루의 주인아저씨 말이지?" "그래, 너를 보면 아마 무척 반가워할 것이다." "그렇기는 한데...! 좋아. 그렇다면 반드시 나를 찾아온다는 증 표로 내 볼에다 입맞춰줘." 곡하령이 얼굴을 비스듬히 휴도옥린에게 내밀며 앙증스럽게 눈을 내리감았다. 발가락을 곧두세운 채 뺨을 내맡기듯 내밀고 있는 이런 모습은 귀엽기 이를데 없는 가운데 가슴이 진탕되어 오는 작은 유혹이었 다. 요염하다고까지 할까? 이미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휴도옥린은 일시지간 당혹을 금할 수 없었다. "빨리...!" 휴도옥린이 짧은 순간 머뭇거리자 눈을 감은 자세 그대로 곡하령 이 소리쳤다. "음...!" 휴도옥린은 할 수 없다는 듯 허리를 숙여 그녀의 희디흰 뺨에 입 술을 댔다. 곡하령의 희고 은은한 홍조로 물들어 있는 뺨은 기이 하도록 뜨거웠다. 이때였다. 휴도옥린이 입술을 떼고 마악 허리를 펴는 순간 곡하령이 두 팔 을 뻗어 다시 목에 매달렸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무엇을 말이냐?" "음! 혹시 그동안 여자라도 생긴 것은 아니겠지." "...!" "아니 왜 대답 안해! 진짜 생긴 거야?" 휴도옥린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고소하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곡하령이 휴도옥린에게 매달린 두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 맑고 앙증스러운 눈을 휴도옥린의 눈 앞에 들이대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린오빠는 내가 오빠만큼 클 때까지 혼인하면 안돼. 알겠지?" "하하하...!" "뭐야! 남은 심각하게 말하는데 웃다니...! 죽어버려!" "하하하!" "웃지마! 그리고 만약 날 찾아오지 않으면 칵 죽어버리고 말테니 알아서 해!" "...!" 휴도옥린은 크게 웃다가 그녀의 서슬에 찔끔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곡하령이 문득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작고 얇은 반조각의 조개껍질, 오색이 영롱한 보 패()는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으로 느껴졌다. 보패의 안쪽면에는 한 노승()이 좌선해 있는 문양이 정교하 게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부님의 신물인 불영보패()야! 린오빠는 이제 더이상 잠마해의 인물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잖아. 그들이 길을 막 거든 이것을 보여줘. 그러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데." '불영보패? 그렇다면 하령에게 무공을 전수한 인물이 바로 불영 성승()이었단 말인가?' 곡하령이 자신의 손에 보패를 건네주는 것을 멍청히 지켜보는 휴 도옥린의 놀람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불영성승이라면 이미 일백 년 전부터 불가 최대의 기승()으 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신검부의 부주마저 최고의 예로써 대 한다고 알려진 전대의 기인이 하령의 사부였다니...!' 휴도옥린은 고개를 흔들며 새삼 손에 들려진 불영보패를 내려다 보았다. 곡하령은 이미 어둠에 잠긴 통로 저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헌데, 그가 마악 불영보패를 간수하려는 순간, 쉬익! 하는 음향 과 함께 돌연 한 가닥의 경기가 그의 수중에 있는 보패를 휘감아 왔다. 이 공격은 은밀하기 이를데 없어 휴도옥린은 하마터면 보 패를 놓칠 뻔 했다. 휴도옥린은 보패를 쥐고 있던 손바닥을 번개같이 뒤집으며 좌측 으로 미끄러졌다. 그의 손 위에 놓여있던 보패를 휘감으려고 뻗어왔던 물체는 여러 가닥의 은사()로 이루어진 불진(=먼지털이)이었다. "...!" 휴도옥린은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의 기승()이 바로 그의 삼장 가까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검은 색의 가사를 걸친 세 명의 기태는 심상치 않았다. 짙은 흑의가사에 온통 검은 빛이 감도는 불진을 들고 있는 세 명 은 똑같이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두 볼이 쑥 들어가 있는 게 마 치 나뭇가지에 옷을 입혀 놓은 듯 깡말랐다. 사람이 그렇게 깡마르고도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해 보일 정도였 다. 살점 하나 없는 피부는 쇳덩어리처럼 검어 또한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세 명 중 한 명은 검은 불신을, 그리고 또 한 명은 검은색 불장 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온통 검은색 바라를 쥔 채 석상처 럼 휴도옥린을 직시하며 서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전신에서는 일체 살아있는 생기()가 느껴지 지 않고 있었다. "...!" 휴도옥린이 놀라 다시 그들을 쓸어보는 순간 불진을 들고 있는 기승이 다시 덮쳐들었다. 기이한 행보()였다. 무릎을 굽히지 않고 마치 미끄러지듯 뻣 뻣이 서서 날아오고 있었는데 그 속도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 다. 쉬익! 칙...! 불진이 다시 휴도옥린의 전신을 휘어감았다. 불진은 그 끝이 수백여 가닥의 은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수 백여 개의 은사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오고 있어 순간 휴도옥 린의 전신내혈을 모두 노리는 듯했다. 하나의 병기로 이같이 수백 방위로 공격해오는 공세는 휴도옥린으 로서는 난생 처음 대하는 것이었다. 휴도옥린은 그 어느 것을 막을지 알 수 없어 황급히 몸을 빼냈 다. 그의 경공은 마궁의 비밀의 방에서 익힌 촛불의 환영으로 익 힌 경공으로써 당세무비()의 것이었다. 휘릭... 팟! 신형이 오른편에 있는가 하면 이미 좌측으로 돌아가 있어 불가사 의하기 이를데 없었다. 빠악! 그 순간에 휴도옥린의 좌장()이 불진을 들고 있는 괴승의 등 을 후려쳤다. 이 공격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라 기승은 피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이 세 명이 누구인지 알지 못해 죽일 의사까 지는 없었다. 그는 그저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고 삼성의 공력만큼 사용해 어려움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다. 헌데 그의 좌장이 기승의 명문에 격중되는 순간 휴도옥린은 철판 을 두드리는 듯한 충격을 받고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앙! 이 순간 석상처럼 서 있던 세 명 중 불장을 들고 있던 한 명이 그림자처럼 휴도옥린의 어깨로 불장을 쳐왔다. "...!" 휴도옥린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틀어 불장을 피했다. 순간 한 개의 검은 바라가 무서운 힘으로 그의 가슴을 덮쳐들었 다. 쏴아...! 그 공세는 바위라도 일격에 가를 듯 엄청난 것이었다. 피할 틈은 없었다. 휴도옥린은 황급히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허 리를 굽히는 자세로 바라를 막아갔다. 꽈릉...! 뇌전이 작렬하는 듯한 충격이 휴도옥린의 양손바닥에 터지고 그 의 신형이 붕 떠올랐다. 그러나 퉁겨지는 그의 신형을 향해 불진 을 든 기승이 다시 그림자처럼 붙어서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덮쳐 들었다. 이 모든 것은 실로 번개가 번뜩이는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세 기승의 출수()는 서로 수미상응()하여 그 교묘함 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꽈릉...! 꽈꽈꽝! 휴도옥린의 신형이 퉁겨나가며 뒤쪽의 석벽을 부수고 파고 들었 다. 휴도옥린은 기혈이 들끓는 것을 느끼며 무너져 내린 석벽 저쪽에 서 있는 세 명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경시하고는 있었다지만 그 세 명은 다시 볼 수 없는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 었던 것이다. '이들은 또 누구란 말인가? 저 세 사람의 삼인연수()는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듯 현묘스러운데다 그 힘 또한 불가사의 한 것이 결코 중원인들 같지 않다!' 휴도옥린은 단 한 번의 격돌로 기혈이 들끓는 내상을 입었음을 느꼈다. 크게 손해를 본 것이다. 쉭...! 부서져 내린 석벽 뒤쪽에 서 있는 휴도옥린을 향해 다시 불진이 덮쳐들었다. 엉뚱한 곳의 통로로 떨어졌던 휴도옥린은 불진을 가볍게 피하며 이번에는 세 명 모두를 눈여겨보며 대응했다. 한 사람을 상대하는 순간 나머지 두 사람 역시 함께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었다. 꽈릉! 카... 앙! 그의 수중에서 세 자루의 비도가 허공을 향해 뻗어났다. 그러나 세 자루의 비도는 바라와 불진에 가로막혀 지면에 떨어지고 있었 다. 싸울수록 휴도옥린의 놀람은 커갔다. 세 명의 기승은 휴도옥린의 공세에 적지 않이 노출되었고 왠만한 공격에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세 기승 또한 휴도옥린의 무공에 적지 아니 놀란 듯했다. 순식간에 이십여 초가 흐르고 격전은 더욱 격렬해져 가기 시작했 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도 빨라 이 모든 것은 불과 두어 번 호흡할 동안에 일어난 일에 불과한 정도였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 휴도옥린과 세 기승이 격돌하고 있는 회랑의 반대편에 언제부터 인가 한 인영이 나타나 조용히 격전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활처럼 굽은 허리와 착 달라붙은 머리칼을 쪽지어 감싸고 있는 노파는 바로 수빙의 뒤를 쫓고 있던 조령모모였다. 이때 노파의 눈에는 놀람이 가득해 있었다. 세 기승을 유심히 바 라보는 그녀는 그들의 출현에 적지 아니 놀란 기색이었다. 꽈릉...! 꽈꽈꽝! 회랑 전체가 은은히 진동하며 돌연 사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은 바닥이 움직이며 사방에서 기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 자 내심 깜짝 놀랐다. 그 순간 뒤쪽으로 하나의 암도()가 나타나 있음을 발견하고 서슴치 않고 세 기승의 공세 사이를 빠져나오며 암도 속으로 뛰어 들었다. 끼이이...! 세 기승은 일시지간 휴도옥린의 신형이 석벽 저쪽으로 사라져 버 리자 당황을 금치 못하는 듯했다. 휘이익! 그러나 그들 역시 휴도옥린이 사라져 버린 암도의 석벽을 부수며 이내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쓰윽! 휴도옥린과 세 기승의 격전을 지켜보던 조령모모 역시 그들이 사 라져간 암도로 쫓아가려는 듯 신형을 날렸다. 그 움직임은 마치 유령과 같아 전혀 종적이 없었다. 그러나 휴도옥린과 세 기승이 격돌하던 자리를 마악 스쳐나가려 던 조령모모의 신형이 돌연 날아갔던 곳에서 이장 정도로 되짚어 날아오며 경악의 빛을 띠었다. 발밑에 쓰러져 있는 한 구의 시신 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혼의 시신이었다. "으음...!" 조령모모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무서운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팟...!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 역시 휴도옥린이 사라져 버린 암도 속으 로 사라져 버렸다. - 다음 권에 계속 - : 끝 : 제25장 천마쌍환()의 비밀() 미로(). 패릉 내부는 실로 수많은 미로로 얽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옥 의 유형지처럼 어둡고 음산한데다가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마 ()의 회랑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그 수많은 미로중 한곳에 기이한 삼 인이 무서운 신위를 드러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뼈와 피부만으로 이루어진 듯 깡마른 삼 인의 기승에게서는 실로 음산한 사기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는 데.... 팍! 꽈꽈꽈꽝! 곳곳에 매복해 있던 잠마해 수하들은 그들을 발견하고 공격을 퍼 붓는 순간 무서운 힘에 의해 튕겨져 나가고 있지 않은가. 까득...! 퍽! 세 명 기승의 몸놀림은 실로 가공스러웠다. 그들은 좁은 미로에 일렬로 늘어서 마치 쌍둥이처럼 걸음조차 지 면을 미끄러지며 손을 쳐냈다. 무릎을 일체 구부리는 법이 없고 팔굽조차 구부리는 법이 없이 움 직이고 있는 그들의 앞을 막아설 수 있는 인물들은 아무도 없었 다. 치렁한 검은색 승포는 발끝까지 뒤덮고 있었는데, 그 기이한 행색 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어 실로 귀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 었다. "으악--!" "끄윽!" 세 기승은 잠마해의 수하이건 천밀영의 고수이건 앞을 가로막는 인물들을 무조건 살해하고 있었는데 그 위세는 정녕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헌데, 놀랍게도 그들 세 명 기승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눈이 있지 않은가? 작고 왜소한 체격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작은 그림자 하나가 그 세 명의 기승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팔과 다리가 드러난 짧은 단삼을 걸치고 어깨 위에 앙증스러운 단 봉()을 턱 걸치고 있는 소녀, 바로 괴소녀 수빙이 아닌가! 그녀의 태도는 실로 기이했다. 세 명 기승이 연신 석벽을 부수며 진입해 들고 있는 뒤를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따라 다니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를 세 기승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파... 악! 삭! 세 기승은 기관장치들을 무시한 채 통로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 라 마구 석벽을 부수며 전진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천밀영 고수들은 그들을 잠마해의 인물로 여기고 공격해 오고, 또 잠마해의 고수들은 그들대로 세 명 기승이 자신들의 적 인 줄 알고 공격해들고 있었다. 그러나 소리없이 덮쳐들었던 그들 은 무서운 힘에 퉁겨지며 죽어갈 뿐이었다. 이때였다. 돌연, 수빙의 옆으로 한 그림자가 다가들었다. "뭐하는 거냐?"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 거북한 음성, 수빙의 옆에 소 리없이 나타난 인영은 바로 조령모모였다. "사람일까, 귀신들일까? 벌써 한 시진째 쫓아다니고 있지만 저 세 명의 새카만 중늙은이들이 살아있는 사람인지 강시()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수빙은 조령모모 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조령모 모에게 질문한다기 보다는 스스로 중얼거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조령모모의 눈에 일순 어이없어 하는 빛이 스쳤다. 수빙의 재미있어 하는 독백이 이어졌다.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같기는 한데... 벌써 한 시진 째 아무 것도 먹는 것을 보지 못했고, 또 서로 말하는 것조차 보지 못했거 든...!" "...!" 수빙은 세 기승에 대한 호기심으로 조령모모에게서 도망가는 것조 차 잊은 듯했다. "정말 신기한 물건들이야, 그렇지? 까까중들이 검은색 승포를 입 는 것도 신기하고 무공도 괴이망측하고... 저런 괴물들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 "저 괴물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이런 음산한 패릉에는 무엇 때문에 왔을까?" 수빙의 독백은 정신없이 빠른 것이었다. 조령모모가 나타나자마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그녀의 호기심 왕성한 독백은 그 속도가 번 개같이 빨라 조령모모로서는 그 동안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을 정 도였다. 그러나, 곧 조령모모의 호통이 터져나왔다. "이 계집애야!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느냐?" "쳇! 내 말은 들리지도 않나?" 조령모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우! 내가 어쩌다 이런 골치덩어리를 맡아 가지고... 잘 듣거 라. 이 애물단지야." "응? 저 괴물들을 알아?" 그제야 수빙은 고개를 돌렸다. 느닷없이 조령모모와 마주치게된 것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저 세 기승은 천축의 흑뢰정사()의 장로들인 삼마륵( )이라는 괴물들이란다." "흑뢰정사?" "흑뢰정사는 마공()과 사공()의 본산이라 불리우는 곳으 로써 천축에서 가장 신비하고 무서운 곳이다." "그럼 무척 강한 인물들이겠네?" "지금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겠다는 거냐! 요 계집애야, 네 실력으 로 골탕을 먹여보려는 생각 따위는 아예 그만 두는 게 신상에 이 로울 것이다." "호...!" 수빙이 조령모모의 말에 오히려 더욱 흥미가 인 듯 눈을 빛내며 여전히 삼마륵을 바라보았다. 이어 호기심어린 음성으로 질문했 다. "모모가 나를 도와주면 저 괴물들을 충분히 골탕먹일 수도 있지 않을까?" "흥! 한 명이라면 몰라도 저들 셋이 같이 있으면 어림도 없다." "그래? 그럼 할아버지와 비교해서는 어때?" "너희 할아버지가 나선다 해도 장담할 수 없다." "와아, 그러고 보니 저 괴물들은 보통이 아니었구나." 수빙이 혀를 내둘렀다. 조령모모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헌데 저 괴물들이 이곳에는 무엇하러 왔을까?" "요 계집애야, 그러는 너는 무엇하러 이곳에 왔느냐?" "응? 나는 신랑감 되는 작자의 뒤를 쫓아오다 보니...." 수빙이 태연히 대꾸하자 조령모모는 아예 질린 빛을 머금었다. 허나 그녀는 삼마륵이 중원에 나온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 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들은 아마... 불영성승을 찾으러 온 것 같다." "불영성승?" "그래. 그런 이름을 지니고 있는 땡초 하나가 오래전에 흑뢰정사 에서 무엇인가를 훔쳐갔다고 들었다." "그게 뭔데?" "이 계집애야,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쳇! 좀 알면 안되나." 조령모모가 눈을 부릅떴다가 가느다란 탄식을 토했다. "계집애야, 이제는 내가 하나 물어볼게 있다." "말해봐!" "너, 네 할아버지에게서 훔쳐내온 천마봉환을 어찌 했느냐?" "응? 그거... 줘버렸어." 조령모모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 다. "누구에게 줬느냐?" "있어. 평범해 보이는 책벌레 서생이야. 다시 회수하기는 어렵지 않을 거야." "...!" "모모가 천마봉환을 들고 나와 나를 끝까지 쫓아오길래 하도 귀찮 아서 줘버린 거야. 호호호!" 수빙이 배를 잡고 교소를 터뜨렸다. 조령모모의 안색은 이 순간 이미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따라와라." 그녀의 갈고리같은 손이 수빙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디를?" "따라와 보면 안다." 조령모모는 수빙의 손목을 잡은 채 삼마륵이 진입해들고 있는 좌 측의 통로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한편, 휴도옥린은 삼마륵과 기관장치로 인해 헤어지게 되자 내심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관이 작동되면서 수많은 미로가 새로 생겼다 없어지며 그들 세 명 괴승과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 것이 었다.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사혈()조차 존재하지 않는 인간괴물 들... 도대체 그들은 누구였을까?" 휴도옥린은 어둠에 잠겨있는 회랑을 조용히 걸어가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는 이미 세 명 괴승이 불영보패때문에 자신을 공격한 사실을 깨 닫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들과 격돌할 때 입은 내상 먼저 치료해야겠군." 휴도옥린은 기혈이 안정되어 있지 않음을 느끼며 계속 걸음을 옮 기면서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걸으면서도 진기를 체내에 일주천시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르 러 있었는데 이것은 천마봉환 때문에 저절로 터득하게 된 분심이 용()의 묘용덕이었다. 헌데, 마악 진기를 이끌어 올리려던 휴도옥린은 돌연 오른 손목에 서 기이한 열기()가 생성되어 마악 꿈틀거리기 시작한 단전의 진기와 융화되는 것을 느끼고 경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 손목에는 사혼에게서 건네받은 천마용환이 채워져 있었다. 기이한 열기는 바로 그 천마용환으로부터 흘러나와 이미 천마봉환 의 음기()와 융화되어 있는 체내의 진기와 다시 융화되고 있 었다. 실로 기이한 느낌이었다. 천마용환에서 완맥을 타고 열기가 체내 로 흘러들자 이에 상응하듯 천마봉환에서 더욱 강렬한 음기가 끊 임없이 솟아나며 체내로 흘러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음양()의 기운은 마치 서로를 희롱하듯 그의 체내 에서 서로 격돌하며 뒤섞이고, 또 다시 하나로 합해지고 있었다. "윽...!" 휴도옥린은 두 가지 기류가 체내에서 충돌하며 융화되는 것에 처 음에는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이내 상쾌한 전율로 변 해 그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은 천마봉환을 찬 이후부터 마궁의 비밀의 방에서 연마한 잠마십이토강만을 운용해 왔는데 기이하게도 잠마십이토강은 천마 쌍환의 음양이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융화시키며 그의 내공을 급증 시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천마쌍환()이 마치 잠마십이토강의 내공심 결을 위해 안배된 듯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휴도옥린은 순식간에 내상이 완치됨은 물론 공력이 좀전보다 휠씬 증진되었음을 느꼈다. 휴도옥린은 자신이 생각지도 않은 엄청난 기연()을 얻은 것임 을 깨달았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회랑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 자가 맞냐?" "응!" "네가 천마봉환을 주었다는 책벌레 서생이 저자가 맞냐는 말이 다." "그렇다니까!" 휴도옥린이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는 회랑의 이십여 장 뒤쪽, 그 곳에 조령모모와 수빙이 나타나 멀어져가는 휴도옥린의 뒷모습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신법은 은밀하기 이를데 없어 이십여 장 저쪽에서 걸음을 옮겨가고 있는 휴도옥린은 아직 그들이 나타난 것을 모르고 있었 다. 수빙이 휴도옥린을 발견하고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헌데 저 책벌레가 이곳에는 왠일일까?" "흥!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 "이 계집애야! 네 발밑의 시체를 봐라!" "이 시체들이 어쨌단 말이지?" "잠마해의 수하들이다. 모두 저 자가 살해한 것이다." "...!" 수빙의 눈이 커졌다. 조령모모의 질책하는 듯한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이래도 저 자가 글벌레란 말이냐! 저 자는 너같은 계집애 열 명 이 덤벼도 어쩔 수 없는 실력을 지니고 있는 구월구일이라는 자이 다." "엉...?" 수빙의 깜찍한 눈이 부릅뜨여졌다. 찰나, 그녀의 입에서 거친 말이 터져나왔다 "저런 도둑놈! 감히 내 눈을 속여...!" 쏴아아...! 흰 빛이 허공을 가르며 곧바로 이십여 장 밖의 휴도옥린을 향해 뻗어갔다. 동시에 수빙의 작은 몸이 휴도옥린을 향해 덮쳐들고 있었는데 그 녀의 몸이 채 삼장도 나아가기 전에 그녀의 오채신조에서 뻗어난 가느다란 낚시줄은 이미 휴도옥린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실로 가 공할 위세였다. "...!" 휴도옥린은 무엇인가 날카로운 경기가 소리도 없이 덮쳐오자 경악 을 금할 수 없었다.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휴도옥린의 망막속으 로 기이한 흰 섬광이 파고 들었다. "헉...!" 휴도옥린은 황급히 몸을 틀며 흰 섬광을 젖혀냈다. 찌... 익! 와득! 흰 빛은 곧바로 휴도옥린의 목을 스쳐 지나가 석벽을 쥐어뜯으며 다시 어둠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제야 휴도옥린은 소리없이 덮쳐든 물체가 가느다란 낚시줄 끝에 매달린 조구(=낚시바늘)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약 흰 섬광()을 보지 못했다면 휴도옥린으로서도 피해낼 수 없었을 정도로 가공할 공세였다. 휘... 익! ㅊ! 또 다시 십여 장 저쪽에서 방원을 그리며 낚시바늘이 무서운 속도 로 덮쳐왔다. '괴짜 소녀?' 휴도옥린은 십 장 저쪽에서 괴소녀 수빙이 덮쳐오고 있는 것을 발 견하고 그제야 공격자가 누군가를 알았다. 그녀의 뒤쪽에는 조령모모가 우뚝 서 있었다. 수빙의 성격은 실로 급하기 이를데 없어 조령모모의 말이 채 끝나 기도 전에 이미 휴도옥린을 잡아먹을 듯 공격해 오고 있었다. 그 녀의 공격은 실로 날카로와 휴도옥린으로서도 조금도 경시할 수 없었다. 싸... 악! 팍! 휴도옥린이 서 있는 지점의 사방 벽면이 마치 예리한 보도로 베어 진 듯 찢겨 나갔다. 수빙의 오채신조가 보여주는 가공스러운 위력 이었다. "흥! 도둑놈 같으니... 무공을 할 줄 알면서 백면서생인 척 나를 희롱하다니...!" "꼬마, 내가 언제 너를 희롱했지?" 휴도옥린은 어이가 없었다. 수빙의 눈에 더욱 표독스러운 빛이 감 돌았다. "꼬마? 나보고 꼬마라고 그랬지! 좋아. 너 오늘 이 꼬마의 맛좀 봐라...!" 쏴아...! 팟! 오채신조의 낚시줄과 조구가 무섭게 허공을 휘감았다. 낚시바늘은 물론이고 낚시줄조차 예리하기 이를데 없어 걸리기만 하면 갈가리 찢길 판이었다. '허, 지독히도 급한 성격을 지닌 소녀로군!' 휴도옥린은 수빙의 무시무시한 공세에 몸을 피해내기 바빴다. 놀랍게도 수빙의 무공은 진정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녀의 오채 신조에서 펼쳐지는 무공은 사혼의 공포스러운 검법보다도 더 빠르 고 잔혹해 천하에 적수가 없을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오채신조는 휴도옥린의 옷깃 하나 잡지 못한 채 허 공만을 난자할 뿐이었다. 쉬... 익! 사사사삭! 무수한 흰 섬광이 겹겹이 허공을 난자하고 있다. 그 섬광 속에 서 휴도옥린은 가볍게 춤추듯 몸을 날리고 있었다. 수빙은 오채신조를 최고로 발동해도 휴도옥린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하자 스스로 약이 오른 듯 돌연 조령모모를 향해 소리쳤다. "모모! 뭐하는 거야! 어서 이 놈을 잡지 않고...!" "끌끌끌! 이 계집애야, 천마봉환을 줄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도둑 놈이라고 부르냐!" "흥! 그때는 이놈이 글벌레인 줄만 알았단 말이야!" "그렇다면 네가 신랑감으로 점찍어서 준 게 아니라 단지 우리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주었단 말이냐?" "그래, 그러니 빨리 와서 이놈을 같이 잡아야 해!" "잘하는 짓이다." 조령모모가 혀를 찼다. 그러나 그녀의 신형은 이미 휴도옥린의 배 후를 덮쳐들고 있었다. 카... 아! 쇠갈고리처럼 뻗어오고 있는 그녀의 우수에서 일순 짙은 피비린내 가 번져나왔다. 휴도옥린의 발이 어지러워졌다. 수빙 혼자서 덤빌 때만 해도 그는 겨우 약간의 우위를 점하고 있 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령모모까지 합세하자 그는 운신()이 자유롭지 못함은 물론이고 아차하다가는 낭패를 면할 수 없을 상 황으로 밀리고 있었다. 수빙의 오채신조와 조령모모의 혈조공()은 기이하게 조화를 이루며 그의 신법을 억제하는데다,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면치 못 할 살인적인 공세인지라 휴도옥린의 등에서 점차 땀이 솟아났다. 사삭! 쉬이... 익! 휴도옥린이 마악 왼쪽으로 한걸음 옮기는 순간, 눈 앞에서 백광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왼쪽 어깨가 조령모모의 손에 적중되었다. 이 일초는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써 예측할 수 없는 방 위로 뻗어온 것이었다. 조령모모는 분명히 출수를 실패한 후 한 걸음 물러나 있었는데 어 떻게 손을 늘여 휴도옥린의 어깨를 공격할 수 있었는지 그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격은 그가 비록 잠마십이토강으로 어깨를 방어했다 해도 통 증이 뼈로 스며 들었다. 휴도옥린은 더 이상 후퇴할 수만 없이 숨을 깊이 들이쉬며 몸을 앞으로 솟구쳐 수빙의 어깨에 일수()를 쳐냈다. 이와같은 접전을 치르면서 휴도옥린은 또 다시 기이한 느낌을 받 았다. 그것은 수빙과 조령모모의 무공노수()가 점차 거의 눈에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빙과 조령모모의 공력은 각기 휴도옥린에 비해 높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의 초식은 휴도옥린이 마고의 비밀의 방에서 익힌 초 식없는 무공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가장 신비한 것은 격전이 길어질수록 휴도옥린은 그들의 초식변화 를 보지 않고서도 미리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초식의 변화를 미리 깨닫고 있다고 해도 그는 두 사람을 격퇴시킬 수는 없었다. 수빙을 공격하려하면 조령모모가 덮쳐들고 또 초식이 계속 바뀌어 쉽사리 국면을 타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으음!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 잠마해 수하들이라도 나타나게 된 다면 곤란하다!' 휴도옥린은 잠마십이토강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어쩐 일인지 수빙과 조령모모에게 해를 입히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몰리기만 하다가는 낭패를 겪을 것 같았다. 꽈릉! 파파파팟! 휴도옥린은 두 손을 모두 뻗어내며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그의 두 손이 자연스럽게 수평으로 마주했을 때, 돌연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두 손을 서로 잡아끌지 않는가? '윽...!' 휴도옥린은 그것이 천마봉환과 천마용환이 서로 잡아끄는 인력( )임을 깨닫고 기겁했다. 그의 두 손을 양 손목에 채워진 쌍환이 서로 잡아다니며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차... 앙! 그의 두 손이 저절로 십자로 교차했다가 퉁겨졌다. 왼팔과 오른팔 에 채워져 있는 쌍환이 서로를 잡아 끌었다가 격돌한 후 퉁겨진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휴도옥린이 일부러 두 손을 십자로 교차한 것 같은 상황으로써 그 순간 기이한 힘이 휴도옥린의 체내로 쏟아져 들어 왔다. 그 힘은 노도()를 방불했고 그리고 뇌전()을 능가할 듯했 다. '으음...!' 휴도옥린이 이를 악물었다. 양 손목에서 시작된 엄청난 힘은 그의 전신을 폭발시킬 듯 강해 그는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잠마십이토강을 운용해 그 엄청난 힘을 사지백해로 인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우우웅! 스스릉...! 헌데, 돌연 그의 양 손목에 채워져 있는 천마쌍환에서 기이한 음 향이 울리기 시작했다. 용()이 포효하고 있다고나 할까, 아니면 봉()이 구름 속에서 울고 있다고나 할까! 그 음향은 신비스럽기 이를데 없어 일시지간 마음이 청량해지는 듯했다. 뿐이랴! 차칵! 삭! 휴도옥린의 양 손목에 채워져 있는 천마봉환과 천마용환에서 기이 한 칼날들이 돌출되지 않는가. 천마봉환에서 튀어나온 검날은 길이가 겨우 반자에 불과했으나 종 이장처럼 얇은 검신은 은은한 자색광휘에 뒤덮여 있어 놀랍기 그 지 없었다. 천마용환 또한 한 자루의 도신()을 발출하고 있었는데 도신 전체에는 청광()이 감돌고 있었다. 여기에 봉환에서 튀어나온 검신에는 한 마리 봉의 문양이, 용환에 서 튀어나온 도신에는 한 마리 용의 문양이 정교히 새겨져 있었 다. 이것은 실로 신비한 광경이었다. 휴도옥린이 계속 잠마십이토강을 운용하자 검신과 도신에 새겨져 있는 봉과 용이 스스로 도신과 검신에서 흘러나오듯 기이한 기류 가 형성되며 휴도옥린의 좌우에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의 좌우에 한 무더기 기류처럼 형성되어 있는 용과 봉의 환영은 마치 그를 호위하듯 떠올라 있어 대하는 이로 하여금 경악 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어? 저 놈이 용환까지 지니고 있었네?" 이 광경에 수빙의 눈이 커지고, 동시에 조령모모의 전신이 부들부 들 떨리기 시작했다. "수룡음()과 봉혈명()이다! 오오! 전설의 비밀이 풀 리다니...!" 조령모모는 크게 격동해 휴도옥린의 좌우에 떠올라 있는 용봉의 환영과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천마쌍환에서 방출된 도와 검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그, 그렇다면..., 구월구일, 저자가 바로 신화가 예시한 잠마천 주()였단 말인가!" 이때, 휴도옥린은 두 사람의 격동으로 떨고 있는 몸을 보지 못한 채 천마쌍환에서 방출된 도와 검의 표면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 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희미한 글씨가 솟아나고 있었다. <마도 영원불멸의 신화를 위해 만들어진 마도최고의 기공()인 잠마천단()을 익힌 잠마의 주인이여! 그대의 손에 의해 이 마도 최고의 기병 수룡음과 봉혈명이 천하에 빛을 보게 되었음을 경하하노라. 마궁의 비밀을 푼 그대만이 천마쌍환에 감추어진 수룡음과 봉혈명 의 비밀을 풀 것이니 그대 잠마천주만이 진정한 마도의 대종사이 시며 천하 위에 유아독존할 잠마의 영원한 신화일지니....> 글귀. 그것은 마치 검신과 도신 위에 한 방울의 액체가 번지며 글귀를 형성하듯 그렇게 신비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은 이 신비한 현상 앞에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놀란 이유는 또 있었다. 우연히 얻은 천마쌍환이 바로 그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잠마십이천마는 마궁에 하나의 초식과 하나의 내공심법만을 남겨 놓았다. 그 잠마천단()은 천하의 온갖 마학 일천여 종과 우리 잠 마십이호교의 십이대 무공을 융화시킨 것으로써 천하의 모든 무공 이 그 안에 담겨 있도다. 특히 잠마에 속해 있는 마도의 모든 무 공을 집대성한 것이기에 잠마의 모든 마공이 그 안에 포함되는 것 이다. 그것만으로도 잠마에 속해 있는 어떤 마도 고수의 무공이라도 꺾 을 수 있을 것이나 잠마천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다 시 여기 수룡음과 봉혈명을 만들어 천주의 무공인 잠마형() 을 남기니....> '으음...!' 휴도옥린의 머릿 속이 환해졌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수빙과 조령모모의 무공초식을 미리 알 수 있 었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잠마천단? 내가 마궁의 비밀의 방에서 익힌 무공의 이름이 잠마 천단이었군!' 휴도옥린은 스스로 잠마십이토강이라 이름붙인 무공의 원 이름이 잠마천단임을 알게 되고 격동을 금할 수 없었다. <마도 최고의 기병()인 수룡음과 봉혈명은 그 잠마천단을 운 용해야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만약 잠마천단을 익히지 않은 자가 천마쌍환을 동시에 착용한다면 그는 엄청난 음양이기에 의해 전신 이 터져나갈 뿐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후대에 드러날 진정한 잠마천주를 위한 안배이며 곧 잠마천주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물이 될 것이도다.> "...!" 휴도옥린은 정신없이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글귀는 그가 읽는 즉 시 다시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수룡음과 봉혈명이 천하에 드러나게 되면 모든 잠마의 후예들은 그에게 경배할 것이니.... 잠마의 신화를 세울 천주여, 마도의 영원한 영광이 그대에 의해 천하 위에 피어날 것이도다.> 글귀가 사라진 후 수룡음과 봉혈명을 사용하는 천마형()의 초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 천마형(). 천마형은 모두 세 초식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천마형은 모두 천마쌍환에서 발출되는 수룡음과 봉혈명이라는 기 병으로 펼치는 무공으로써 그 위력은 가히 천하무적이랄 수 있을 정도였다. - 봉황흔조() 혈망응(). 천마형의 제일초식. 이것은 왼손에 착용하고 있는 봉혈명만을 사용하는 초식이었다. 초식을 펼치는 순간 봉()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뒤덮고 그 신비 한 음향과 함께 죽음이 피어나는 무공이었다. 단장()의 곡()이 허공을 휘어감는 동안 봉황의 부리가 상대 의 가슴을 찍을지니.... - 용비혈훼() 용영산(). 천마형의 제이초식. 천마형의 제일초식이 봉혈명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이 제이초식은 바로 수룡음을 사용하는 초식이었다. 수룡음은 얇기가 매미날개처럼 얇은 한 자루의 도()를 말한다. 그 도()는 섬전을 방불하는 쾌()로 시작되고 비룡()의 도 흔()이 허공을 벨지이니 그 빠름은 뇌전을 방불할 것이며, 그 위력은 노도()를 능가할 것이다. - 제황쌍인() 용비봉무(). 천마형의 제삼초식. 이것은 수룡음과 봉혈명 양대기병을 동시에 사용하는 초식이었다. 이른바 제황쌍도라 불리우는 마도 최고의 기병이 동시에 폭발하듯 상대를 난자하는 것으로써 그 위력은 대해를 가르고 거악()을 양단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용봉의 쌍무()는 현란하기 이를데 없도다. 그 아름다움은 가히 인세()에서는 다시 대할 수 없을 것이되 만마()가 그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니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도다. : 제26장 보이지 않는 제삼()의 힘()! 천마형. 마도 최고의 기병으로 펼쳐지는 천하무적의 신공에 휴도옥린이 정 신없이 빠져있는 순간 조령모모와 수빙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씨이! 저 글벌레가 쌍환의 비밀을 풀다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수빙이 당황을 금치 못하며 입을 열었다. "쌍환의 비밀을 푸는 사람은 곧 잠마의 주인이다." 조령모모의 음성이 떨려나왔다. 수빙이 기이한 열기를 띤 음성으 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저 글벌레를 내 신랑으로 삼아야 하나? 그래도 하는 수 없지 뭐... 하긴 저 얼굴에 무공도 제법하는 편이니 외팔이보다야 낫겠지만...." 수빙은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그녀의 독백을 듣고 있는 조령모모는 내심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단단히 길을 들여놓아야 할텐데...?" "...!" 조령모모는 더 이상 수빙의 독백에 신경쓰지 않기로 내심 결정했 다. 헌데 바로 이 순간, 그그긍...! 꽈르르릉! 돌연, 그들이 서 있는 암도 전체가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 나 이번의 진동은 기관이 작동되는 진동과는 사뭇 달랐다. 지축이 뒤흔들리는 듯한 진동은 상념에 잠겨있던 휴도옥린을 경각 시켰다. 휴도옥린의 안색이 변했다. "응?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심상치 않소이 다." 휴도옥린은 천마형의 무공에 빠져있다가 불현듯 정신을 가다듬으 며 사면의 벽면을 휘둘러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불안이 그대로 적중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상황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 쩌... 억! 쩌쩌억! 그들이 서 있는 암도의 사방 벽면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갈라진 틈으로 어디선가 물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지 않 은가! 휴도옥린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그가 이곳에 오기 전에 수집했던 패릉의 내부구조에 대해 더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시오. 누군가가 수맥()을 터뜨린 듯 하 오." "수맥?" 조령모모의 눈에도 긴장이 스쳤다. 그들이 서 있는 지점은 패릉의 깊숙한 곳으로써 지하 십여장 아래 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만약 어딘가의 수맥을 건드려 그 물길이 패릉 내부로 쏟아져 들어온다면 제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해도 무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휘... 익! 휴도옥린은 그들에게 주의를 준 후 재빨리 암도 저쪽으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수빙의 눈에 다급해하는 빛이 스쳤다. 그녀는 황급히 휴도옥린이 사라져간 방향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어디를 가겠다는 거냐?" 하지만 조령모모의 갈고리 같은 손이 어느새 그녀의 손목을 움켜 쥐었다. "아니, 그럼 저 앙큼한 도적놈을 그냥 내버려두란 말이야?" "계집애야, 잔소리 말고 이곳에서 나가자!" 수빙은 휴도옥린의 뒤를 따라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이 조령모모와 함께 휴도옥린이 사라져간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몸을 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쩌... 억! 쩌적! 벽면이 갈라지며 그 틈사이로 흘러들기 시작한 물()은 그 양이 점차 불어나 이제 암도 전체에는 물이 차 있었다. 아직은 발목 정 도까지만 뒤덮힐 정도였으나 조만간에 그 물로 인해 회랑전체가 뒤덮일 것임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한 시각 정도는 버틸 수 있겠군." 휴도옥린은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계산해내며 옮겨가고 있었다. "비모소, 과연 무서운 심기를 지닌 자이다." 휴도옥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이미 흑밀원주 비 모소가 이곳에 자신의 죽음을 위해 철저한 함정을 준비했음을 느 끼고 있었다. 곡하령을 통해 그 자신이 신검부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한 것은 단지 휴도옥린이 살아남았을 경우를 대비한 하나의 배수진에 불과했다. 쩌... 억! 스스슷...! 휴도옥린은 다시 한 번 통로의 좌우를 살펴보았다. 그는 이미 이 런 상황에 대해 보통사람의 수십 배에 달하는 경험을 지니고 있는 달인이었다. 불가피한 위기상황 속에서 그 돌발적이고 위급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하는 그의 감각은 야수의 본능을 방불하는 것으로서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의 감각은 수백 번도 넘은 죽음의 함정 가운데서 체득한 피의 경험이기 때문이었다.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해 위기상황을 조성해낸다. 그리고 그 혼란 중에 스며들어 목표하는 인물을 살해하는 일..., 지금까지 휴도옥 린이 해온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지금의 상황은 목표가 자신이었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인 물이 다른 인물이기는 하나 구월구일 휴도옥린은 오히려 그 상황 을 역이용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일부러 안배 한 상황이라도 살인자들에게는 역시 가장 좋은 환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휴도옥린은 그 점을 생각하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튼 그는 구월구일인 것이다. 대전(). 사방 삼십여 장에 달하는 원형석실 한가운데 지금 무서운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허리까지 잠긴 물 속에서 오십여 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단 이 인()에 의해 도륙을 당하고 있었는데 흑의인들은 바로 천밀영 의 고수들이었다. "으음...!" "크윽!" 천밀영의 고수들을 습격하고 있는 이 인()의 모습은 실로 괴 이했다. 먼저 그들은 키가 겨우 사척 정도에 불과한 난장이인데다 수염이 발끝까지 내려온 노인이면서도 오색찬란한 색동옷을 입고 있어 오 히려 귀기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그들이 휘두르고 있는 병기 또한 특이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들은 판에 박은 듯 똑같은 용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각기 손에 청홍()의 초롱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허리까지 잠긴 물 위를 날아다니며 공세를 뻗어내고 있는 쌍동이 괴노인의 기세는 놀랍기 이를데 없어 천밀영의 고수 중 그들의 일 초를 제대로 감당해내는 사람이 없었다. "으... 왁!" "끅!" 어찌보면 두 난장이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두 개의 초롱만이 물 위를 떠다니고 있는 듯한 가공스러운 광경이었다. 이때 석실의 사방에 뚫려있는 수많은 통로 중 한곳에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창사와 희수수였다. 창사와 희수수는 천밀영의 고수들이 무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모습 에 노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자리에 멈추지지 않은 채 격전장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이 손을 쓰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창사와 희수수가 서 있는 통로의 반대편에 난장이 노인들 이외에 또 범상치 않은 기도를 지닌 이 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허리까지 잠기는 물을 밟고 서 있는 흑의여인과 붉은 주단위에 원 앙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예복()을 걸치고 있는 이십대 청년 이었다. 창사와 희수수는 그들이 난장이 노인들보다 더욱 무서운 인물들임 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섣불리 뛰어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백한 피부와 처절한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의 흑의여인. 아아, 그녀는 바로 박쥐공주가 아닌가! 박쥐공주의 일장 옆에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은 해괴하기 이를데 없 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얼굴을 보는 듯 순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이었 다. 헌데 청년은 그 해맑은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있지 않은가. 뿐이랴! 혼례를 치를 때 입는 원앙예복을 걸치고 있는 청년은 여인들이나 할 화장까지 하고 있어 어쩐지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하는 전율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중성인간()을 대하는 듯한 용모의 청년은 연신 박쥐 공주를 향해 눈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고 있었다. 그 음성 또한 남 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 "누님! 저들은 청홍쌍왜()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곳에서 나가자. 응?" "...!" "수빙이라는 계집애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이참 누님도 그까짓 계집애 일이라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분명히 건장한 남자이다. 그러나 애교를 담아 말하는 태도는 영락 없이 여자의 그것이 아닌가! 이것은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박쥐공주는 이미 그런 청년의 태도에 익숙해져 있는 듯 차가운 눈빛을 띠운 채 침묵하고 있었다. "수빙의 일은 신경쓸 거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재미있게 놀 생각 이나 하자, 응?" 청년의 태도는 교태를 부리는 여자의 그것과 어리광을 부리는 어 린아이의 태도가 혼합되어 있었다. 그는 박쥐공주가 끝까지 거들 떠도 보지 않는 것에 개의치 않은 채 계속 속삭이듯 입을 열고 있 었다. "음... 어디가 좋을까? 동정호, 신주팔경..., 중원은 구경할 데가 많다고 했어. 아주 좋은 추억이 될 거야." "...." "누님과 내가 혼인하면 아마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한 쌍이 될 거야." "...!" "누나! 누님은 잠마의 천주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 나는 누님을 보필하며 집안일을 살피고... 아이, 생각만 해도 기뻐!" "...!" "누님! 사랑해...! 난 누님만 옆에 있어준다면 언제까지고 행복할 거야. 나는 누님의 말을 잘 들을 거야. 지옥의 불 속이라도 누님 의 명령이라면...." 이때였다. 역겨움을 참고 있는 듯 하던 박쥐공주의 차가운 눈이 서서히 괴청 년에게 돌려졌다. "그 말, 정말이야?" "그럼...!" "좋다. 그렇다면 지금 한 가지 명령을 내리마." 박쥐공주가 입을 열자 청년은 무척이나 기쁘다는 듯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 명령이라도 좋아. 내가 얼마나 누님의 말을 잘듣는지 를 보여줄께." 순간 박쥐공주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청년이 예상하고 있던 말과 는 전혀 다른 엉뚱한 명령이었다. "초혼랑()! 죽어주었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서...." "누... 나!" 괴청년, 초혼랑의 얼굴이 화악 일그러졌다. "죽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네놈이 잠마에서도 구역질나게 만들더니 저 난장이들을 데리고 중원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다." "누님...!" 초혼랑이 애원하는 눈길로 박쥐공주를 바라보았다. 실로 역겨운 모습이었다. 헌데 이때, 초혼랑으로부터 눈길을 돌리던 박쥐공주의 눈 깊은 곳 에서 싸늘한 기광이 뻗어났다. 창사와 희수수의 바로 옆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 때문이었다. "창사!" 조용한 음성이 창사의 뒤쪽에서 울려왔다. 나직하기는 했으나 그 속에는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옥린?" 창사와 희수수는 자신들의 바로 뒤에 누군가가 나타난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창사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다. 그들의 바로 일 장 뒤에 소리없이 나타난 인영은 바로 휴 도옥린이었다. "반갑군. 헌데 이곳에는 왠일인가?" 휴도옥린의 눈은 희수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질문은 창사 에게 던져지고 있었으나 눈만은 희수수에게서 한시도 떼어지지 않 고 있었던 것이다. "...!" "...!" 일순 희수수의 눈과 휴도옥린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창사가 부드럽게 입을 떼었다. "자네를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온 사람일세. 천승대장군부의 이공 자일세." '천승대장군의 이공자?' 휴도옥린은 희수수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휴도옥린은 이미 창사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제이의 천성이었다.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습성, 어쩌면 그 제이의 천성때문에 그 가 아직껏 살아있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휴도옥린이오." "희수수라 합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스스로 자신을 소개했다. 잠풍인랑 희수수의 눈 깊은 곳에 기광이 스쳐갔다. 그러나 이 순간, 휴도옥린은 이미 한 걸음 석실쪽으로 내딛고 있 었다. "자네는 이제 물러나게. 이곳은 얼마 안있어 붕괴될 것이네." "...!" 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창사가 몸을 돌리려 하자 희수수가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창사가 그에게 미소를 던졌다. "그의 말에 따릅시다. 구월구일은 절대 자신없는 말은 하지 않으 니...." "으음...!" 휴도옥린의 단 한 마디에 창사가 몸을 돌리는 것이 희수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창사와 휴도옥린은 기실 그런 대화마 저 필요없는 사이인 것이다. 희수수가 못내 불안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잘 알고 있겠지만... 박쥐공주도 무섭지만 저 사내도 계집도 아 닌 놈을 조심해야 할 것이오. 하는 것 만큼이나 사이하고 음흉한 놈이 바로 저 초혼랑이니까...! "...." 휴도옥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물을 밟으며 원형석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창사와 휴도옥린의 만남은 무척 짧았고 적진 가운데에서의 만남이 었다. 범인들로서는 그들이 이토록 간단히 헤어지는 것이 이해되 지 않을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짙은 우정의 표시였다. "...?" 초혼랑의 눈에 기이한 섬광이 일었다. 휴도옥린을 발견한 박쥐공 주의 눈빛은 어딘가 기이함을 느낀 때문이었다. 박쥐공주의 눈빛이 차갑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초혼랑은 그 차가운 눈 깊은 곳에 어떤 여심()이 자라나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의 이런 발견은 기실 박쥐공주조차 느끼지 못하는 마음의 변화 를 제삼자가 먼저 알아낸 것으로써 초혼랑이 박쥐공주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청홍쌍왜! 저 놈을 죽여라." 이곳에 나타난 잠마 고수들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초혼랑은 이제 그 이유가 아니더 라도 휴도옥린을 반드시 죽여야 했다. 휴도옥린. 걸어오는 싸움을 그 역시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잠마의 모든 인물들과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일천이백 년간 전설과 신화로만 존재했던 잊혀진 마의 단체 잠마, 그 잠마를 수습하기 위한 싸움이었고,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이 패릉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신검부와 잠마 해, 그리고 잠마가 아닌 제삼의 힘()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느꼈다는 사실이었다. 어딘가에 몸을 감춘 채 풍운을 주도하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 구월구일은 자신이 그 제삼의 손()이 펼치고 있는 풍운의 중심 부에 서 있음을 느꼈고 그리고 그것은 구월구일이 극복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청홍쌍왜. 판에 박은 듯 똑같은 용모를 지니고 있는 한 쌍의 난장이 노인들 은 반양반음()처럼 느껴지는 초혼랑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휴도옥린을 향해 덮쳐들었다. 쓰윽! 팡! 천밀영의 고수들을 도살하던 기세 그대로 덮쳐오고 있는 그들의 위세는 실로 놀라워 사방에 온통 청광과 홍광이 가득한 것 같았 다. "...!" 휴도옥린은 그들이 천밀영 고수들을 무참하게 도살하는 것을 이미 목격한지라 경시하지 않은 채 대뜸 잠마천단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는 좌우에서 덮쳐드는 그들의 공세를 왼손으로 막아내며 오른손으로는 잠마형의 일초를 전개했다. 꽈직! 까드득! 청광과 홍광이 흩어지며 일순 석실 안에 무거운 파공음이 회오리 쳤다. 덮쳐들었던 청홍쌍왜의 신형은 그 순간 번개같이 뒤로 퉁겨 지며 사오 장을 날아가 석벽에 세차게 부딪쳤다. 꽈르르...! 꽈앙! 사오 장 밖의 석벽이 반쯤 부서지며, 그 아래로 처참하게 당한 두 구의 시체가 떨어져 내렸다. "으- 악!" "크윽!" 처절한 긴 비명성은 그 뒤에야 들려왔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너무나도 엄청난 광경에 모두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 무서운 신위를 발휘하던 청홍쌍왜가 휴도옥린의 단 일수() 에 석벽으로 퉁겨나가 전신이 짓이겨지는 처참한 죽음을 맞은 것 이었다. 이 결과는 휴도옥린에게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단지 조금전에 익힌 천마형의 일초를 오른손을 검 삼아 끌어당기듯 되돌려 보낸 것인데 그 한수에 절정고수 두 명이 눈깜짝할 사이에 절명해 버린 것이었다. 이것은 청홍쌍왜가 휴도옥린을 경시한데에 그 이유가 있기도 했지 만 천마형의 무공이 그만큼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이때, 박쥐공주가 돌연 경악의 눈을 보냈다. 그녀의 눈은 휴도옥 린의 살짝 드러난 양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천마쌍환을?" 쏴아앙! 그녀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검은 그림자가 번뜩인 순간 그녀의 옥장은 이미 휴도옥린 곁에 이르러 있었다. "내 놔!" 꽈꽝! 휴도옥린의 손과 박쥐공주의 옥장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순간 박쥐공주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휴도옥린의 신형은 이때 물 위를 밟고 있던 자세에서 한자 가량 물 속으로 밀려 내려간 정도였다. '저놈이? 두 시진 전에 격돌할 때만 해도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이 결과에 박쥐공주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이 순간 내심 크게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천 마쌍환을 얻은 이후 불과 한 시진만에 그의 공력이 크게 증진되어 있었던 것이다. 꽈릉! 쏴아아앙! 박쥐공주의 신형이 다시 귀영처럼 허공을 되짚어 날아오며 덮쳐들 었다. 휴도옥린의 무공을 알게 된 그녀는 이번에는 진력을 다한 듯 무서운 파공음이 주위 십장을 몰아치고 있었다. 그녀가 덮쳐오는 지점의 아래에 출렁이고 있던 물들이 크게 갈라 지며 파도를 일으킬 정도의 위세였다. 꽈앙! 꽈꽈꽝! 또 다시 그녀의 옥장과 휴도옥린의 손이 격돌했다. 그러나 이번의 격돌은 휴도옥린이 그녀의 옥장이 날아들 길목을 차단하고 기다린 형상이 되어버린 기이한 격돌이었다. 휴도옥린은 이미 그녀의 초식변화를 읽을 수 있어 그녀의 공격이 이어질 길목 을 차단하고 손을 쳐낸 것이었다. "...?" 박쥐공주 역시 그것을 깨닫고 내심 한기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 다. 휴도옥린은 분명히 그녀의 공세를 눈으로 보고 막은 것이 아 니라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가 어떻게 나의 무공을 알고 있단 말인가?' 박쥐공주는 돌연 전의()가 사라짐을 느꼈다. 자신의 무공초식 을 미리 알고 있는 상대와 어떻게 더 싸울 수 있겠는가! 그녀는 실로 귀신을 대하는 느낌 뿐이었는데.... 이때였다. "우우우...!" 돌연, 석실 저쪽에서 기이한 장소성이 터져나왔다. 수많은 석벽에 의해 가로막힌 오십여 장 저쪽에서 들려온 장소성 은 기이하도록 맑아 듣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공포를 느끼게 만들 었다. 꽈꽈꽈앙! 와르르르! 뿐이랴! 장소성에 이어 무엇인가가 연신 부서지는 음향이 들려오 고 있었는데 그 음향은 곧바로 휴도옥린과 박쥐공주가 있는 쪽으 로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꽈아아앙! 와르르! 석벽이 무엇인가에 부서지는 음향, 그 음향이 다가온 속도는 불가 사의할 정도로 빨랐다. 마치 누군가가 통로를 무시한 채 석벽을 부수며 다가오고 있는 듯 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녕 놀라운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하나의 석벽이 부서지고 두번째 석벽이 부서지는 음향이 마치 연 이어 들려오는 듯 했던 것이다. 그 기세의 가공함은 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휴도옥린과 박쥐공주 등이 있는 원형석실의 한쪽이 터 져나가며 그 뒤로 한 장대한 체구의 홍의노인이 들어섰다. "사왕? 사왕이다!" 초혼랑이 깜짝 놀라 외쳤다. 놀랍게도 그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해 있었다. 뿐이랴! 그는 홍의노인이 나타나기 무섭게 반대방향으로 번개같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사왕마저 나왔단 말인가?" 박쥐공주의 눈도 커졌다. 장대한 체구의 홍의노인이 곧바로 박쥐공주를 직시했다. "공주! 좀전에 천마쌍환에 대해 떠들었느냐?" "...!" 박쥐공주는 물론이고 장내에 있는 모든 이들은 차라리 어이가 없 었다. 휴도옥린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천마쌍환을 박쥐공주가 발견하고 경악성을 토한 것은 사실이다. 헌데 그 짤막하고 낮은 경악성을 수많은 석벽으로 가로막힌 오십여 장 저쪽에서 듣고 쫓아왔음이니 실로 놀랍지 않은가! 다음 순간, 홍의노인은 박쥐공주의 눈이 슬쩍 휴도옥린의 손목으 로 돌려지는 것을 보았다. 박쥐공주는 단지 그가 천마쌍환에 대해 물어보았기에 자신도 모르게 손목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홍의노인의 눈은 이미 박쥐공주의 눈을 쫓아 휴도옥린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천마쌍환을 발견하고 있었다. "호, 천마쌍환을 네 놈이?" 번쩍! 촤-아-앙! 무수한 오채신광이 번뜩이며 벼락같이 휴도옥린을 덮쳐들었다. 일 체의 말이 필요없다는 듯한 무지막지한 공세였다. 홍의노인의 손에는 어느새 칠채광휘가 번뜩이는 짧은 필()하나 가 들려져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눈을 뜰 수 없도록 만드는 광채가 부챗살처럼 번져나오고 있었다. "와하하하!" 그 가운데 고막을 진동시키는 홍의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휴도옥린은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는 눈부신 광채가 천 가닥 만 가닥 일어나면서 덮쳐오는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어떠한 무공으로도 상대할 수 없을 듯한 가공스러운 공세였다. "사왕! 그 분은 잠마천주이시다. 네가 감히 전설의 잠마천주를 공 격할 셈이냐?" 이 광경에 박쥐공주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으핫!" 휴도옥린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파앙! 눈부신 광채가 막 사라졌다. 동시에 휴도옥린이 어깨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서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어 백의를 붉게 물들 이고 있었다. '지독하구나!' 휴도옥린은 상대가 바로 사혼을 죽인 인물임을 깨달았다. 단 일초에 서른일곱 초식이 뒤덮이는 가공할 무공이 그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 그의 불가사의한 신법으로도 어깨를 적중당한 것이 었다. 이것은 잠마천단을 끌어올려 호신강기를 일으킨 상태에서도 당한 무서운 결과였다. 휴도옥린이 상대가 엄청난 고수임을 경각하는 순간. 번쩍! 사왕의 손에 들려있는 칠채신필()이 다시 눈부신 채광을 발하며 벼락같이 덮쳐들었다. 헌데 그 광채가 어찌나 현란한지 도무지 어디를 노리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왕이 다시 덮쳐온 것이 휴도옥린이 상처를 입은 채 자세도 가다 듬기 전이었으니 그 속도의 빠름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핫!" 휴도옥린은 다급히 호통을 내지르며 한 자루 비도를 발출한 후 잠 마천단의 신법을 발휘해 그 천변만화하는 채광 속을 빠져나왔다. "호? 괴이한 신법이로군." 사왕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맹세코 그의 칠채신필을 피해낸 인물 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휴도옥린은 잠마천단내의 신법으로도 그의 공격 을 모두 피해내지 못해 다시 한 차례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었 다. '으음! 사혼의 상세를 자세히 봐두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에서 끝 나지 않을 뻔 했구나!' 휴도옥린은 한기를 머금었다. 잠마의 모든 무공은 기실 그가 한 번 대하는 것만으로도 그 초식 의 변화를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마도고수의 모든 무공을 총망라한 잠마천단을 익혔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 다. 그러나 사왕의 무공은 그 초식의 빠름과 변화가 거의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인데다 그 짧은 순간에 우수에서 좌수로, 다시 우수 로 옮겨다니며 펼쳐지고 있어 어느 곳으로 쇄도해들지 도저히 짐 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촤앙! 번- 쩍! 또 다시 칠채신필이 사왕의 양 손을 번갈아 옮겨다니며 뻗어왔다. 단 일초가 펼쳐지는 그 섬전같은 순간에 칠채신필은 이미 그의 양 손에서 열 번 이상 옮겨다니고 있는 듯했다. '천마형의 무공이 아니라면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구 나!' 차칵! 채- 앵! 두 사람이 엇갈렸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금속음과 함께 휴도옥린과 엇갈린 사왕의 눈 에는 이 순간 놀람이 가득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휴도옥린과 자신의 손에 들 려있는 칠채신필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신필의 끝 이 세 치 가량이나 깨끗이 베어져 있지 않은가! "수룡음과 봉혈명?" 사왕은 휴도옥린의 양 손목에 채워져 있는 천마쌍환에서 기이한 병기가 돌출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신음성을 흘려냈다. "네, 네가 정녕 천마쌍환의 비밀을 풀었단 말이냐? 정녕 잠마천주 였단 말이냐?" 사왕이 신음하듯 중얼거리며 몸을 진동했다. "천주면 대수냐! 네놈의 천마쌍환을 빼앗으면 내가 바로 천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왕은 미친 듯 소리치며 또 다시 그 무서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삭! 번쩍! 휴도옥린은 천마형을 극도로 끌어올리며 양 손목을 교차하며 천마 형의 제이초식을 펼쳤다. 일순 허공에 무수한 비룡()의 환영 이 솟아나며 그 가운데 한 가닥 백광이 곧바로 사왕의 칠채신필을 베어갔다. 땅! 칠채신필과 수룡음이 격돌하며 맑은 음향을 토해내는 순간 칠채신 필은 다시 사왕의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동시에, 좌측을 뒤덮고 있던 공세가 우측으로 벼락같이 전환되고 있어 가히 더 이상 막아낼 수 없을 듯했다. 그러나 휴도옥린 역시 좌측 손목에 채워져 있는 봉혈명으로 그의 우측 공세를 모조리 봉쇄해가고 있었다. 좌수와 우수를 동시에 사용하는 무공이라면 휴도옥린 또한 일가견 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항시 왼손을 사용하던 버릇을 지니고 있어 왼손의 사용능력이 오른손에 버금가는 것이었 는데 이와같은 상황에 부딪치자 좌검우도()의 무공이 자 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우수에는 이미 수룡음이 돌출되어 있고 좌수에 또한 봉혈명 이 뻗어나 있었으므로 사왕처럼 병기를 이동시킬 필요조차 없었 다. 우우우우웅! 봉이 울부짖는 듯한 기이한 음향이 일시지간 사방을 휘어잡았다. "봉황흔조 혈망응!" 우렁찬 휴도옥린의 기합성이 터져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 "헉!" 동시에, 사왕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터져나오며 그의 신형이 덮 쳐들 때보다 더욱 빠르게 퉁겨졌다. 천마형의 제이초 봉황흔조 혈망응은 실로 가공스런 위세를 드러내 사왕은 마치 허공중에서 한 마리 대붕()이 자신을 향해 부리 로 쪼아오는 듯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사왕조차도 이 가공할 위력을 막아내는데 사오 장이나 퉁겨나가야 했던 것이다. 휴도옥린은 그 자신의 공력이 아직 사왕같은 인물에 비해 뒤떨어 지는 것을 느꼈으나 사왕이 당황한 표정으로 퉁겨나가자 크게 호 기가 일어 숨쉴 여유도 없이 다시 그를 향해 밀려들었다. 쉬이잉! 우우우웅...! 또 다시 한 마리 대붕이 허공에서 날개를 편 듯한 환영으로 모습 을 드러냈다. 그 가운데 눈부신 섬광이 한 가닥 곧바로 사왕을 덮 쳐갔다. '이 놈의 자식이 진정 마궁의 비밀까지 얻었단 말인가?' 사왕은 다급히 몸을 비틀며 자신의 무공 중 최절초를 눈깜짝할 사 이에 쓸고, 찍고, 후리면서 칠십이 필을 쏟아냈다. 칠채광휘는 한 마리 노룡()인 양 밑에서 위로 치솟아 올랐고 그 가운데 한 가닥 흰 빛이 유성처럼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렸 다. 정녕 공전절후라고 할 악투였다. 째- 앵! 용트림과 같은 음향이 터졌다. "으음!" "헉!" 두 마디 신음성이 들려온 것 같았다. 휴도옥린은 허공에서 삼사 장을 밀려나가며 간신히 신형을 바로 세우고 있었는데 그의 입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백의는 이 순간 혈의에 가깝게 변해 있었다. 사왕은 여섯 걸음 쯤 물러나 있었는데 그는 더 이상 물 위를 밟고 서 있을 수 없었던 듯 허리까지 물에 잠겨 있었고 드러난 그의 상 체에는 서너 가닥의 상혼이 나 있었다. '천마쌍환의 전설이 풀려 잠마천주가 나타나면 당할 자가 없다더 니 진정이란 말인가?' 사왕은 기력을 조절하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순간, 그의 눈이 다시 커졌다. 허공에서 퉁겨져 밀려나고 있던 휴 도옥린이 돌연 밀려난 거리만큼 되짚어 덮쳐들며 또 다시 양 손목 을 교차시키고 있지 않은가! 차앙! 그의 양 손목에 채워져 있는 천마쌍환에서 맑은 음향이 터져나오 고 동시에 사라졌던 봉혈명과 수룡음이 튀어나오며 가공할 예기 ()가 회오리쳤다. 이 순간 휴도옥린은 사왕과 크게 격돌한 후 오히려 체내의 진기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기가 크게 흔들린 순간 오히려 더욱 강한 진기가 솟아나 그의 체내를 번개같이 일주하며 상처를 입기 전보다 더욱 강한 공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우우우...! 그그긍! 허공에는 끊임없이 기이한 음향이 떠돌고 있었다. 동시에 휴도옥린의 좌우에 한 마리의 용과 봉황이 떠올라 오히려 덮쳐오는 그의 몸보다 더욱 빨리 사왕을 덮쳐갔다. 사왕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그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휘리릭! 크아아앙! 그 또한 휴도옥린의 공세가 펼쳐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신형을 솟 구치며 신필을 쓸어냈다. 꽈릉! 꽈- 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석실에 가득 차 있던 물이 용솟음치며 튀어올 랐다. 천마형의 최후 초식인 제황쌍인(), 그 가공할 초식 이 펼쳐진 것이었다. : 제27장 사 인()의 살수()들...! 제황쌍인. 마도의 모든 마공이 총망라되고, 그 마도 최고의 강자인 잠마십이 천마의 무공까지 융화하여 탄생된 이 시대 최강의 마공. 그 천마형의 제삼초인 제황쌍인이 펼쳐지자 방원 삼십여 장에 달 하는 석실에는 무서운 압력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카우우! 비봉과 와룡()의 울음소리가 진동하며 사방이 일시에 무서운 어둠에 잠기는 듯했다. 꽈르릉! 꽈아아앙! 죽음의 공포를 느낀 사왕 역시 필생의 진력을 모아 신필을 번개처 럼 찍어왔다. 우지직! 휴도옥린은 엄청난 반탄력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퉁겨져 벽에 부 딪쳤다. 꽝! 그러자 석벽이 휴도옥린의 부딪힘에 이겨내지 못하고 부서져 나가 며 구멍이 뚫어졌다. 휴도옥린은 비록 잠마천단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온 몸이 부서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의 공력은 사왕의 공력에 비해 확실히 뒤떨어지고 있어 만약 초식의 우세함을 얻지 못했다면 오 히려 크게 손해를 보았을 상황이었다. 휴도옥린이 진기를 가라앉히며 사왕을 바라보니 그는 맞은편 석벽 에 몸을 기대고 있는데 전신에서 뻗어나오던 기세는 씻은 듯이 사 라져 있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뜬 채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그에게서는 아직도 위맹한 기태가 흘러나오는 듯 했다. 휴도옥린은 크게 놀랐다. 자신이 전력을 다한 공세에도 사왕이 죽 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석벽에 기대 서 있지 않은가! 비록 전신에 무수한 상흔을 입고 선혈을 흘려내고는 있으나 그의 이런 기세는 정녕 간담이 서늘해져 오는 것이었다. 휴도옥린은 완전히 탈진되어 석벽에 기대 서 있는 것도 힘들 정도 였다. 허나, 언제 사왕이 덮쳐들지 알 수 없는 그는 황급히 진기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눈을 부릅뜬 채 석벽에 기대 서 있는 사왕에게서 괴이함을 느낀 듯 박쥐공주가 조심스럽게 사왕의 안색을 살피다 깜짝 놀란 듯 신 음성을 발했다. "사왕이 이미 죽어 있다!" 그렇다! 사왕은 이미 휴도옥린이 펼친 천마형의 최후초식에 전신의 심맥이 갈가리 흩어져 죽어 있는 상태였다. 눈을 부릅뜬 채 석벽에 기대 서 있어 마치 지금이라도 덮쳐들 듯 공포스러운 모습이기는 했으나 놀랍게도 그 상태에서 숨을 거둔 것이었다. '음...!' 휴도옥린이 내심 안도했다. 사왕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긴장 이 풀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쏴아앙-! 헌데 바로 이 순간, 휴도옥린의 안색을 살피던 박쥐공주가 돌연 탈진해 있는 그를 덮쳐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정녕 예상치도 못했던 기습이었다. "천마쌍환을 내놔라!" 까득! 휴도옥린의 신형이 구르듯 물 속에 잠기며 옆으로 퉁겨졌다. 꽈앙...! 그가 기대서 있던 석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일격을 실패한 박쥐공주의 옥장이 벼락처럼 좌측으로 이 동하며 곧바로 휴도옥린을 쳐왔다. 휴도옥린이 미처 신형을 바로 세우기도 전에 똑같은 속도로 이동해 오는 가공할 공격이었다. '윽!' 채- 앵! 휴도옥린은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다해 천마쌍환을 교차했다. 우우웅! 또 다시 허공에 대붕과 비룡의 환영이 엇갈렸다. 그러나, 이번 것은 휴도옥린이 거의 탈진되어 있는 상태인지라 그 위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악!" 박쥐공주의 입에서 뽀족한 비명성이 터졌다. 그녀는 휴도옥린이 완전히 탈진되어 있으리라 믿고 덮쳐든 것인지라 그가 반격해 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 미세한 방심의 허를 파고 들며 휴도옥린의 공세가 발동한 것이 었다. 박쥐공주의 신형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멈취지며 물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휴도옥린 역시 무사하지 않아 그의 가슴에서는 검 붉은 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박쥐공주의 일장()은 가히 암석이라도 부술 위력을 지닌 것인 지라 그는 자신이 가볍지 않은 중상을 입었음을 깨닫고 한숨을 불 어냈다. 이어 그는 물 속에 서서 진기를 이끌어내 일주천시키기 시작했다. 잠마천단이 단전에서 발동해 그의 십이기경을 통해 다시 체내로 융해되었다. 그가 이끌어올린 진기는 겨우 일성 가량에 불과해 내 상이 발작하지 않도록 하는데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때, 돌연 지독한 한기()가 엄습해 왔다. 사왕과의 격돌로 그들이 있던 석실의 사면이 더욱 부서져 있는 상 태였고 통로로 흘러들고 있는 물의 양이 더욱 증가되어 있었는데 기이하게 새롭게도 흘러드는 물은 무서운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심한수()! 으음! 지하에 흐르고 있는 수맥을 건드렸구 나." 휴도옥린은 패릉 내부로 차오르고 있는 물이 일반의 지하수와 달 리 단숨에 온몸을 얼려 버리는 지심한수임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내상을 입지 않은 상태라면 별 문제가 없으나 지금의 휴도옥린으 로서는 이런 차디찬 한수 속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 벅! 처벅! 휴도옥린은 간신히 몸을 가누며 천천히 석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 다. 문득, 그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에게 덮쳐들었던 박쥐공주의 몸 이 허리까지 잠긴 물 위에 정신을 잃은 채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완맥을 짚어 보았다. "음! 죽지는 않았군. 내상을 입은 상태이다. 그러나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이 지심한수에 잠겨 있게 되면 전신의 경맥이 얼어터진 다." 휴도옥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멀쩡한 사람이라 해도 지심한수에 오래 노출되어 있으면 동사( )할 판이다. 휴도옥린은 어쩐지 박쥐공주를 죽이고 싶지 않았 다. 그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그녀를 어깨에 둘러멘 후 다시 석실을 빠져나가는 어두운 통로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채 십여 장이나 갔을까? 돌연, 그의 걸음이 멈춰졌다. 전면. 언제부터인가 기이한 살기()가 곧바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벗어부친 웃통에 불쑥 튀어나온 배와 기름기가 번지르한 얼굴을 지닌 노승()이 삼장 전면에 서 있었다. "시주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 "헛헛, 노부의 인사가 늦었군요. 노부는 취선불()이라 하 오." "...!" 옆구리에 십여 개의 술 호로를 매달고 있는 대머리노승은 바로 도 림의 정자 속에 앉아 있던 기이한 네 명 살수 중 한 명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소. 시주께서는 이곳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취선불의 음성에는 적어도 살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같은 주당을 만나 술을 권하는 듯 부드럽기까지 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이미 그에게서 살의()를 읽어내고 있었다. "확신하고 있소." "하면 왜 가지 않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언 젠가 스스로 길을 열어 주리라 믿고 있소." 휴도옥린은 기실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상대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이기 싫어 제자리에 멈춰 선 채 그윽한 눈으로 취선불을 직시했다. 그가 기()를 모아 쳐낼 수 있는 것은 이제 단 한 번 뿐이었다. 그는 그 단 한 번의 기회를 아주 적절한 순간에 사용하기 위해 기 다려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먼저 움직여 공격한다거나 상대의 말을 믿고 그의 옆을 스쳐가려다가는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 고 있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은 취선불이 움직이지 않는 한 절대로 움직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매원 시절에 피의 경험으로 터득한 한 가지 말이 그 의 뇌리를 스쳐간 것이다. <최고의 살인자는 무공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최적의 순간을 포착 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시간은 초조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금이 간 사면의 벽면으로부터는 끊임없이 지심한수가 흘러들어 점 차 가슴까지 물에 잠기게 되었다. 취선불 역시 최고의 살수임에는 분명했다. 그는 이미 휴도옥린의 의도를 눈치채고 이윽고 천천히 한숨을 불어냈다. "노납은 이제야 구월구일이 최고의 살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 을 수 없게 되었군." "...!" "가시오." "...!" 취선불은 한 걸음 좌측으로 물러섰다. 휴도옥린은 그가 한 걸음 통로에서 물러나는 순간 아무말도 없이 그를 스쳐지나가며 번개처 럼 통로 저쪽으로 빠져 나갔다. 취선불이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바래다 줄터이니 잘 가시게." 슈우욱! 돌연, 그의 입으로부터 한 가닥의 주전()이 뻗어 나왔다.가느 다란 술줄기는 곧바로 휴도옥린의 등을 강타하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그 주전의 공세를 피하지 않았다. 그것을 피하려고 균 형을 잃는다면 그 순간 더욱 무서운 공세가 쏟아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꽈앙! 쇠망치로 강타당한 듯한 충격이 그의 몸을 흽쓸었다. 하지만 휴도 옥린은 그 힘을 빌어 오히려 단숨에 십장 거리를 날아가고 있었 다. 그의 신형이 줄 끊어진 연처럼 비틀거리면서도 순식간에 사라져 가자 취선불의 입가에 흡족해하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자고로 출가인()은 자비가 본분이지. 살생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은 일이지." 이때였다.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취선불의 귀로 어디선가 투덜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죽일 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살인하기 쉽게 상처를 입혀놓고 출가인의 자비를 운운하다니 개가 웃을 일이다!" 그 투덜거리는 음성 바로 뒤에 조금은 자상하게 느껴지는 음성이 뒤따랐다. "잘 보아 두거라. 자신은 적당히 물러서고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살인하는 수법이 바로 저 땡초의 특기이니라." 그 음성의 주인공들은 바로 정자 안에서 끝없이 싸우고 있던 두 명의 괴상한 사제지간이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음성들은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알고 있다. 사부놈아!" "모르고 있었으면 몰랐다고 솔직이 말해라, 이 제자놈아! 그래야 이 사부가 가르칠 맛이 나지 않느냐!" "헌데... 사부야! 우리가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는 거냐?" "괜찮다. 구월구일은 병사군()의 손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 할 것이다." "그 피리부는 병든 늙은 선비가 과연 구월구일을 죽일 수 있을 까?" "그럴 것이다." "사부놈아! 너는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 같구나." "이 사부가 누구냐! 이것이 바로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최고의 살인술인 무형살인술이라는 것이다. 대충 알았으면 입닥쳐라. 우리가 미쳤냐?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같은 살수 인 구월구일이라는 놈을 굳이 죽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부인 장년인의 음성이 이어졌다. "다른 작자가 죽인다면 모르지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구월구일이 어떻게 생겨먹었는가 보고 싶었을 뿐이지,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 는 않았다." "그건 나도 그렇다. 사부놈아!" "오랜만에 의견이 일치되는구나." "그래, 그런 의미에서 싸우자, 사부놈아!" "끄응!" 이때, 취선불은 그들의 어이없는 대화에 노기가 치솟은 듯 한모금 의 술을 마신 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쌍(), 무비()! 도와주지 않을 것 같으면 입이나 닥치 고 조용히 있거라! 이 개가 뜯어 먹을 놈들아!" 무쌍과 무비? 무쌍이라면 천하에 둘이 없다는 뜻이고 무비()라면 천하에 비 교할 게 없다는 뜻이니 실로 해괴한 명호가 아닌가! "저 땡초가 지금 뭐라고 했느냐?" "개가 뜯어먹을 놈이라고 한 것 같다, 사부야." "우리가 말이야? 개가 우리를 뜯어먹는다는 거냐, 우리가 개를 뜯 어먹는다는 거냐?" "개가 우리를 뜯어먹는다고 했다." "그래? 저 땡초가 그런 말을 했어? 야, 제자놈아!" "왜 그러냐 사부야!" "우리 심심한데 저놈이나 죽일까?"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괴이한 사제지간의 음성에 점차 살기가 파동치기 시작했다. 취선불의 얼굴이 화악 일그러졌다. "이런 미친 놈들! 내가 네놈들과 상종을 하면 앞으로 사람이 아니 다." 한편 이 순간, 휴도옥린은 가슴까지 차오른 물살을 헤치며 힘겹게 전진하고 있었다. 내상을 입고 있는 데다 취선불의 공격에 적중된 그의 상세는 실로 엄중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이 최악의 상태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 었다. 수많은 살인행로 중에 이보다 더 곤란했던 적도 수없이 많 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살아남았고 지금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신 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이런 확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돌연 그의 앞쪽에서 일 진의 퉁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삘리리! 퉁소소리는 마치 물 위를 떠오듯 신비스럽게 암도에 울려 오고 있 어 휴도옥린은 일순 심혼이 흩어지는 듯했다. 휴도옥린은 이미 괴 이한 사제지간인 무쌍과 무비의 대화를 들은 터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병사군?' 휴도옥린은 괴이한 별호를 지닌 노학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무쌍과 무비의 대화에서 알게 된 것이다. 과연 그의 십 장 전면에는 한 명 노학도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물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도림 속의 정자에서 쉬지 않고 퉁소를 불던 그 노학인이 분명했다. 삐리리리릴! 퉁소소리는 점차 드높아지고 그 굴곡도 심해 사람의 심금을 뒤흔 들었다. 살수()란 정통무공을 익힌 사람들과는 다르다. 살수란 항시 살인하기에 최고로 적합한 장소와 시기를 가려 단 일초에 상대를 살해하는 살인비술에 정통해 있을 뿐이지 개개인의 공력이 높다거 나 무공이 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강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 하찮은 존재로 여기 는 살수에 의해 목숨을 빼앗길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들은 적당한 시간이 오기를 끝없이 기다릴 줄 알며 또 적합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한 달, 일 년, 십 년이 되도록 손을 쓰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한이 있 더라도 일단 손을 쓰게 되면 반드시 상대를 살해하고야 마는 것이 다. 물 위에 우뚝 선 채 퉁소를 불고 있는 노학도가 모습을 드러낸 것 은 이미 휴도옥린의 상태를 확실히 파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 고, 곧 승산이 있음을 드러내는 행동인 것이다. 노학도, 병사군의 판단은 정확했다. 휴도옥린은 거의 탈진되어 있 는 상태였고 손을 쓸 수 있는 기력이라고는 단 한 번 정도밖에 없 었다. 그러나, 설혹 그 한 번을 활용한다고 해도 병사군은 자신이 그 기 력없는 일수에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 돌연, 퉁소소리가 끊어지며 한 쌍의 차가운 눈동자가 한성() 처럼 폭사되어 휴도옥린의 두 눈에 꽂혀왔다. 이 순간 병사군의 풍도는 마치 십 년은 젊어진 듯 느껴졌다. 병사군은 휴도옥린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꽉 다문 입에서 말을 꺼냈다. "상처를 입었는가?" "당신이 바로 병사군이오?" 휴도옥린은 그가 자신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고 있음을 느끼고 긴 장했다. "등에 상처를 입었는가? 내상 또한 가볍지 않은 듯 한데?" 휴도옥린의 예상이 적중되었다. 병사군은 오히려 휴도옥린 자신보 다도 더욱 그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휴도옥린은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 "이미 알면서 어째서 묻는 것이오?" "취선불이 한 짓이지?" "흥!" 휴도옥린이 냉소하자 병사군이 빙그시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흥! 그 땡초가 하는 짓이란 게 고작 남의 손을 빌어 살인하는 것 뿐이란 말인가?" 병사군은 홀로 독백하듯 중얼거리다가 돌연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 다. "그놈의 신분으로 봐서 이렇게 중상을 입은 사람을 배후에서 손을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왕 자네를 부상입혔다면 살려서 내게 보내서는 더더욱 안되지." "무슨 뜻이요?" "흥! 나는 결코 부상을 입은 사람이라도 손을 쓰지 않는 관대한 사람은 못된다는 뜻이었네." 휴도옥린이 그의 말에 조소를 흘려냈다. 취선불이 끝까지 손을 쓰지 않은 채 부상만 입혀 휴도옥린을 놓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병사군이 모습을 드러 낸 것이 아니겠는가. "당신에게 확실히 해둘 말이 있소." "...!" 휴도옥린이 돌연 입을 열자 병사군의 눈에 기광이 스쳐갔다. 휴도 옥린의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가 더욱 차가와졌다. "첫째, 그는 나의 배후에서 출수하지 않았다면 결코 손을 써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오. 그리고 둘째, 그가 아무리 전력을 다해 출수한다 해도 결코 나를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오. 그리고 마지 막으로 내가 들려줄 말은...." "...?" "그대 역시 결코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요." "크하하하하!" 돌연 병사군이 크게 웃었다. 길게 울려퍼지는 웃음소리는 공포스 럽기까지 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호언장담일세." "...!" "원래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대를 죽이려 했으나 그대의 호언장담이 마음에 들어 삼초를 양보하겠네." 휴도옥린의 입가에 다시 소리없이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미소였 다. 다음 순간, 그는 박쥐공주를 둘러멘 자세 그대로 말없이 걸음을 옮겨 병사군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싸우지도 않고 어디를 가겠다는 것인가!" 병사군이 놀라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당신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내가 죽는다는 거냐, 아니면 네가 죽는다는 것이냐?" "그 누구도 내게 삼초를 양보할 수는 없소!" 병사군이 노기가 치솟는 듯 살기를 뿜어내며 입을 떼었다. "그러니까 내가 만약 너에게 삼초를 양보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말이냐?" "잘 알고 있구료." "그렇다면 어찌해서 시험해 보지 않는 것이냐?" "...!" 휴도옥린이 침묵을 지키며 병사군을 정시했다. 문득, 병사군은 마음 속에 한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병사군은 이미 수없는 혈전을 겪은 최고의 노살수()였다. 그는 그 죽음과 피의 관록을 쌓아가는 동안 매번 수많은 눈동자를 대해왔다.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눈동자가 다 있다. 어떤 것은 원독이 가득 충만되어 있고, 또 어떤 것은 살기가 뒤엉 킨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공포와 겁에 질려 차마 보기 딱한 애원의 눈빛도 있었다. 하지만 병사군은 지금 눈 앞의 이런 눈동자는 본 적이 없었다. 휴도옥린의 두 눈동자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거의 무()에 가까울만큼 표정없는 눈동자, 구월구일 휴도옥린의 지금 이 눈은 마치 동상에다 붙인 보석과 같은 것으로 한참 바라보자니 마치 신 좌() 위에서의 신안()이 창생()을 내려다 보는 것 같 았다. 병사군은 자신도 모르게 위압감에 눌려 반 걸음을 물러섰다. 번쩍! 바로 이 순간, 휴도옥린의 출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병사군이 살수라면 휴도옥린 또한 살수였다. 가장 뛰어난 살수란 가장 기회를 잘 포착하는 살수임을 뜻한다. 구월구일은 가장 뛰어 난 살수였고 또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살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절대 자신이 없으면 출수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 다. 설혹 그 자신이 어이없이 죽음을 당할지언정 차라리 실패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구월구일이었고 비록 부상을 당한 상태 이기는 하나 구월구일은 역시 구월구일인 것이다. 쉭! 병사군의 몸이 갑자기 퉁겨지듯 삼장 좌측으로 물러났다. 그 서슬 에 그의 발밑에 있던 물들이 줄기를 이루며 함께 이동했다. 이때 휴도옥린은 이미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병사군은 휘청하다가 자세를 바로했다. 그의 우측 어깨에는 이미 휴도옥린의 손을 떠난 한 자루 비도()가 박혀 있었다. 치명적 인 것은 아니었으나 병사군은 이미 휴도옥린의 비도가 의도적으로 급소를 피해 박혔음을 깨닫고 있었다. "구월구일에게 삼초를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 소. 단 일초조차 받아 낸다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요." "...!" "그러나 당신이 죽지 않은 이유는 삼초를 양보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오." "쿨룩... 쿨룩!" 병사군은 한 바탕 기침을 해댄 후 눈을 들었다. "아직 두초가 남아 있다." 병사군은 계속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삼초를 양보한다고 했는데 너는 아직 일초밖에 펼치지 않았 다. 계속 출수해라." "...?" 휴도옥린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한참 동 안 병사군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한손이 아무렇게나 병사군의 전면 허공을 휘저었다. 그것은 공격이라기보다는 그저 두초를 채우는 행동이었다. "이것으로 당신이 내게 양보한 삼초를 나는 모두 사용했소." 이때였다. 차앙! 쐐애애애액! 병사군이 손에 들고 있던 퉁소에서 돌연 열 가닥의 차가운 한망 ()이 쏟아져 나왔다. 휴도옥린은 그것을 예상하지 못한 듯 표정을 굳히며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허벅지에 뜨끔한 충격을 받았다. 물 위로 서서히 선혈이 번져오르고 있었다. 열 가닥의 암기 중 하 나가 그의 허벅지에 적중된 것이었다. 문득, 병사군의 눈에 희열의 빛이 스쳤다. "나는 오늘 비로소 한 가지 교훈을 배웠다. 오늘부터 나는 절대로 남에게 삼초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신 너도 한 가지 교훈 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친한 지기라 해도 출수를 할 것이라면 기 필코 상대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아예 출수를 하지 마라." "영원히 잊지 않겠소." 살기와 적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때, 병사군이 품 속을 뒤지더니 하나의 기물체를 꺼내 휴도옥린 에게 불쑥 내밀지 않는가? 한 개의 호로병과 퉁소, 칠우선(), 금첩()의 문양이 뒤 섞여 있는 목패()였다. 휴도옥린은 엉겁결에 그가 내미는 목패를 받아들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이 쳐 죽일 놈! 사우패()를 그놈에게 주다니!" "안된다, 안돼!" "빌어먹을 타불... 저놈이 미쳤구나." 어디선가 세 가닥의 다급해 하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암도 저쪽에서 취선불과 괴이한 사제지간인 무쌍과 무비 가 당황을 금치 못하며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병사군은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휴도옥린을 향해 미소했 다. "그 사우패()는 우리 네 명을 부릴 수 있는 영부()이 네. 이제부터 죽지도 못해 쓸모없이 나이만 쳐먹어가는 우리들의 주인은 바로 자네일세." 병사군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대뜸 물 위에서 휴도옥린을 향해 깊 숙이 예를 갖추었다. "무엇들 하느냐! 새로운 주인에게 어서 절을 하지 않고!" 병사군은 힐끔 취선불과 무쌍, 무비를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끄응...!" "이, 이... 쳐 죽일 놈!" "으으으! 이 병든 늙은이가 끝내 우리를 망치는구나." 세 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도 병 사군을 따라 휴도옥린에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 "...!" 휴도옥린은 번개같이 이어지고 있는 돌발적인 상황에 정신이 다 없었다. "이제는 주인으로서 우리에게 할 일을 말해주게." 병사군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휴도옥린은 곤혹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그들이 난데 없이 자신을 주인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그들은 아마 하나의 영부를 만들어 자신들 중 가장 고명한 살수가 그 영부를 차지하며 주군으로 군림하는 어떤 규칙을 지니고 있었 음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사우패의 주인이 된 인물은 바로 병사군이었는데 그는 휴도옥린에게 패하자 사우패()를 서슴치 않고 휴도옥린에게 넘겨 그가 새로운 주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휴도옥린은 그들의 말을 이미 거절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진 정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문득, 그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한 여인을 찾아 주시오." "...?" "엉?" 모두의 눈이 커지고, 무비()의 입에서 괴이한 경악성이 흘러 나왔다. 단아한 용모의 그는 휴도옥린이 아무렇지 않게 벌써 주인 행세를 하며 명령을 내리자 놀란 기색이었다. "그 여인은 목덜미에 콩알만한 붉은 홍점()이 찍혀있고 양쪽 귓볼에 별모양의 보석을 박아넣고 있소. 나이는 아마 십팔 년 전 에 다섯 살 정도 되었으니 지금쯤 스물 둘셋, 정도가 되었을 것이 오." 병사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모르오." "...?" "끄응!" 모두의 눈에 다시 질린 빛이 감돌았다. 무비가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주인놈아!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우리 보고 찾아내라는 말이냐! 그게 주인놈이 된 첫번째 명령이란 말이냐! 그냥 성질같은면 콱...!" 병사군이 황급히 무비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무비가 입맛을 다시 며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알겠네. 아마 자네는 그 여인을 멀지 않아 보게 될 걸세." "기대하겠소." 휴도옥린이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는 기대한다고는 했으나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저 이 귀찮은 네명의 노살수들을 떼어버리기 위해 그런 부탁을 한 것 뿐이었다. 휴도옥린이 다시 걸음을 옮겨 그들로부터 멀어졌다. 무쌍이 눈을 부릅뜨며 병사군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멀지 않아 그 여인을 보게 될 것이라고? 이 쳐 죽일 놈! 누구를 죽이려고 환장했느냐!" "이놈아! 목덜미에 점이 찍혀 있는 여인이 천하에 어디 한두 명이 겠느냐! 그리고 여인들이란 보석을 수시로 갈아끼우는 족속들인데 그런 단서만 갖고 어떻게 그 여인을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한단 말 이냐!" 무쌍과 무비는 정말 분통이 터진다는 듯 손을 털며 병사군에게 다 가들기 시작했다. 다소 점잖은 편에 속하는 취선불조차 이 순간은 더 이상 참을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 놈아! 이름이라도 알아야 찾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냐! 아이고... 차라리 우리 보고 죽으라고 해라!" 이때였다. 꽈꽈꽈꽈꽈앙! 쩌어어억! 돌연, 암도 전체가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크! 수맥이 본격적으로 터진 모양이다. 어서 피하자!" 병사군이 그들의 공격을 피할 기회를 잡았다는 듯 황급히 몸을 날 렸다. 그러나 무쌍과 무비, 그리고 취선불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 은 채 투덜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우리 이곳에서 그냥 죽자!" "그러자 사부야! 이름도 모르는 계집애를 찾기 위해 발이 부르트 도록 천하를 뒤지느니 차라리 물귀신이 되는 게 낫겠다." 꽈꽈꽈꽝! 우르르르르릉! 순식간에 엄청난 물결이 패릉 내부의 모든 통로로 밀려들기 시작 했다. 사방의 석벽들이 무너져내리며 마치 지진을 만난 듯 요동치 기 시작했다. 그렇다. 흑밀원의 총단인 패릉 전체가 엄청난 수맥에 의해 터져나가고 있 었던 것이다. 음모와 죽음, 그리고 풍운을 묻은 채.... : 제28장 천가(), 그 신비()의 실체! 궁륭산. 그 중턱의 한 동굴 속에 모닥불이 소리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산()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깊은 어둠의 한 쪽에 서 소리없이 흘러오고 있는 불빛은 부드럽기 이를데 없어 아득하 게 느껴지고 있는데.... 탁! 타다닥! 모닥불의 불빛이 둥그렇게 비쳐들고 있는 어둠 속, 그 한쪽에 언 제부터인가 묘령의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헌데,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아닌가! 잠들어 있는 것일까? 솟아오른 가슴과 양지유를 부어만든 듯 미끈한 하체, 그리고 온갖 신비에 감춰져 있는 여인의 용모는 백설처럼 순결하며 청초해 보 였다. 길다란 흑발은 그 여체의 밑에 쫘악 퍼져 있어 흑백의 조화를 이 루며 여인의 아름다움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여인의 좌측 일장 옆에 언제부터인가 한 백삼사내가 쪼그리고 앉 아 모닥불빛에 고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아한 옆얼굴의 선()은 아름답기 그지없어 보였고 은은한 불빛 에 반사된 피부는 어찌 보면 조각같기만 하다. 그는 바로 휴도옥린이었다. 휴도옥린은 물끄러미 모닥불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 다. '비모소가 신검부의 화접이었단 말이지?' '헌데 잠마의 인물들은 무엇때문에 강호에 나온 것일까? 단순히 수빙이 들고 나온 천마쌍환을 탈취하기 위해 나왔단 말인가? 아니 다. 이 일에는 무엇인가 음모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휴도옥린은 자신을 목표로 한 무수한 고수들이 몰려든 것이 결코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그 어떤 일이라도 돌발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치밀한 계략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때 휴도옥린은 어둠 속에 숨어있는 제삼의 존재에 대해 본능적 으로 느끼고 있었다. 문득 휴도옥린은 바로 옆에 잠들어 있는 박쥐공주의 얼굴을 내려 다 보았다. 모닥불에 반사된 그녀의 모습은 실로 가슴이 진탕될 정도로 아름다왔다. 그런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어떻게 그 무서 운 도살을 자행했는지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을 보더라도 그 아름답다는 느낌은 휴도옥 린의 대뇌에 전달되지 못한다. 그렇게 훈련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의 박쥐공주는 그 철저한 지옥훈련에서 얻은 습관 마저도 무시할 만큼 아름다왔다. 헌데 휴도옥린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는 순간, 박쥐공주의 길고 가는 눈썹이 파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흠! 이제야 깨어나는군!' 휴도옥린은 이미 그녀의 내상을 완전히 치료시킨 후였다. 여기에 지심한수에 노출되어 있던 그녀의 몸을 녹이기 위해 옷을 모두 벗 기고 모닥불을 피워놓은 것이었다. "누, 누구?" 박쥐공주는 일시지간 몽환 속에서 헤매는 듯 멍청한 눈빛을 던지 다가 서서히 사고()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구월구일!" 휴도옥린이 짧게 대꾸했다. "구월구일?" 박쥐공주는 지금의 자신이 어떤 처지인 것도 모른다는 듯 누워있 는 상태에서 몇 번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마악 몸을 일으키려다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임을 깨닫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안색이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너... 너...!" 그녀는 아예 어이가 없는 듯했다. 그녀의 신분으로 언제 사내앞에 서 알몸으로 있어본 적이 있었겠는가! 너무도 기가 막혀 그녀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휴도옥린이 무감동한 음성으로 내뱉았다. "단지 젖어있는 옷을 말리기 위해 벗긴 것 뿐이니 그렇게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띠울 필요는 없소." "...!" 박쥐공주의 두 눈에서 무서운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지금의 박쥐 공주에게는 휴도옥린의 변명 따위는 아예 들려 오지 않았다. 그녀 의 최대 관심사는 휴도옥린이 자신의 나신을 오랫동안 마음껏 보 았다는 것이고 그리고 지금도 보고 있다는 점 뿐이었다. 박쥐공주 처럼 사이한 성품의 여인에게 있어 이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수치 였다. "이, 이... 나쁜 놈! 죽여 버린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휴도옥린에게 덮쳐들려고 했다. 휴도옥린이 내심 미소했다. 흑포로 전신을 가리고 한 마리 박쥐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며 무서 운 무공을 펼칠 때만 해도 그녀는 여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유령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서 흑포가 벗겨지고 희디 흰 나신이 드러나자 그녀 역시 일개 여인에 불과함을 깨달은 것이었다. 수치심에 안색 이 변해 표독하게 외치는 그녀의 이런 모습에서 휴도옥린은 오히 려 어떤 인간적인 모습을 본 것이었는데.... '훗! 성질을 부리니 그래도 사람같군!' 휴도옥린은 내심 고소를 머금은 후 차가운 눈으로 그녀의 전신을 쓸었다. "소저의 실력으로 나를 어쩌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얌전히 있는 게 나을 것이오." "이이...!" 박쥐공주의 입에서 기이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미 휴도옥린의 가공할 무위를 대한 그녀가 아니던가. 휴도옥린은 문득 장난기가 발동함을 느꼈다. 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그대의 나신을 보고 있는 것만 해도 황홀한데 춤까지 추어 주시 겠다는 것이요?" 박쥐공주의 얼굴이 더욱 파래졌다. 그녀는 자신의 무공으로는 이제 휴도옥린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절실히 알고 있기에 성질같으면 스스로 자진해버리고 싶을 정도였 다. "훗! 행여 그 못된 성질을 못이겨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오." "...!" "죽는 것 보다는 살아남아 내게 복수하는 게 나을테니...." "오냐! 죽더라도 네 놈을 처참히 죽인 후에 죽겠다." 박쥐공주는 표독스럽게 외친 후 사방을 황급히 휘둘러 보았다. 이 어 모닥불 옆에 널려있는 자신의 흑포를 찾아내 황급히 몸에 걸치 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은 느긋이 앉아 그녀가 옷을 걸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모닥불의 테두리 속에서 여인이 하나하나 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정녕 뇌쇄적이었다. 먼저 둥그렇고 탐스러운 허리가 굽혀지며 갸름하고 미끈한 흰 발 이 한쪽부터 올라간다. 그리고 작은 삼각의 고의가 앙증스럽게 걸 쳐지고, 다시 희디 흰 신비가 하나 둘 가려지는 모습.... 박쥐공주가 제아무리 빨리 옷을 걸친다 해도 휴도옥린에게는 이 모든 광경이 모조리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 돌아서서 옷을 다 입고 고개를 돌리던 박쥐공주의 얼굴이 확 붉어 졌다. 휴도옥린의 눈이 빤히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가! 농락당한 기분이 랄까? 박쥐공주는 그런 마음을 느끼고 돌연 울고 싶은 심정이었 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덤벼보았자 오히려 꼴불견인 상황만 불러일으 킨 것이니 어찌하랴! 휴도옥린이 그런 박쥐공주의 내심을 짐작한 듯 입을 떼었다. "생각 잘했소. 덤벼보았자 스스로 망신당할 뿐일테니...." "이, 이...!" 쏴아앙! 박쥐공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덮쳐들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불과 이장 여에 지나지 않아 실로 가공스러운 위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옥장은 질풍이 이는 듯 빨라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듯했다. 딱! 따다닥! 그러나 허공 속에서 일곱 차례의 격돌음이 터진 후 그녀의 손목은 이미 휴도옥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한 번 더 덤빈다면 다시 옷을 벗겨 놓겠소." 휴도옥린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오게 한 후 눈을 빤히 정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 박쥐공주는 아예 질린 듯 입을 다물었다. "자! 다시 앉으시오. 그리고 나 역시 잠마로 갈 것이니 길을 서두 를 필요는 없을 것이오." "...!" 박쥐공주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휴도옥린의 아무런 감정도 없는 음성이 이어졌다. "내가 그대를 그냥 구해줬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요. 길 안내 를 위해 구해준 것이니 분하더라도 천천히 생각하고 우선 이리 와 서 잠이나 자든지 아니면 이야기나 하든지 하시오." "...!" 휴도옥린의 잔인하리만큼 무정한 말에 박쥐공주는 귀에서 연기가 치솟을 정도로 노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잠시 동안 휴도옥린을 노려보 았다.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어느새 원래의 사이하고 극도 로 무심한 기질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조용히 몸을 움직여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네놈은 어떻게 그 천마쌍환을 손에 넣은 것이냐?" "내 이름은 휴도옥린이오." 박쥐공주가 찔끔해서 새삼 휴도옥린을 노려보았다. "으음! 휴도옥린, 어떻게 천마쌍환을 얻었느냐?" "남자가 이름을 먼저 밝혔으면 그대 역시 밝히는 게 예의일 것이 오." 휴도옥린이 다시 차갑게 입을 열었다. "휴우! 본녀는 등미방()이다." 박쥐공주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엉뚱한 말만 하는 휴 도옥린을 쳐죽일 듯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등미방이라? 이름만 예쁘군." "이름만...?" 박쥐공주의 눈에 다시 노기가 흘러나왔다. 일순, 그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웬만해서는 입조차 열지 않는 것이 그녀의 성품이었다. 해서 수하 들조차 그녀의 눈빛만으로 그녀의 뜻을 알아낼 정도였는데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말을 모두 합친다 해도 지금 휴도옥린을 상대하며 나눈 말수보다 적을 것이다. 휴도옥린이 그제야 박쥐공주 등미방의 질문에 대답했다. "수빙이라 불리는 괴소녀에게 얻은 것이오." "수빙...!" 박쥐공주 등미방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기이한 눈빛을 띠어다. "그 계집애와는 어떤 사이냐?" "그런 것을 물을 필요는 없을텐데...?" "...!" 휴도옥린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등미방이 다시 내심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물었지?' 그녀는 자신이 생각해도 그런 질문을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순간 그녀는 무엇인가에 찔린 듯 가슴이 뜨끔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너구리같은 놈! 그 계집이 천마쌍환을 주었을 정도라면 이미 그 계집과 그렇고 그런 사이임이 분명하다. 여우같은 계집! 조그만 계집이 강호에 나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사내에게 꼬리나 치 고 다니다니...!" 박쥐공주 등미방은 공연히 울화가 치미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한 가지 강렬한 의혹이 치솟아 자신도 모르게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헌데..., 천마쌍환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전설로 알려져온 마 궁에 들어가서 그 안의 무공을 얻어야 하는데 네놈, 아니 휴도옥 린, 너는 어떻게 신비를 풀 수 있었느냐?" "...!" "마궁에 대한 단서가 담겨있는 잠마비도( )는 이십 년 전 잠마의 총사였던 휴도성이 지니고 사라졌다. 나는 네가 마궁의 비 밀마저 풀었다고는 믿을 수 없다! 어떻게 수룡음과 봉혈명을 발출 할 수 있었단 말이냐?" 등미방은 휴도옥린이 침묵하자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말을 이었는 데 그 순간 휴도옥린의 눈에서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뿐이랴! 휴도옥린의 전신이 은은히 진동하고 있지 않은가! '휴도성! 아버님의 이름이다! 헌데 아버님이 잠마의 인물이었단 말인가?' 박쥐공주 등미방이 휴도옥린의 이런 변화를 눈치챘다. 그녀는 휴도옥린이 격동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자신을 직시하자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자신도 모르게 다시 입을 열고 있 었다. "휴도옥린? 휴도... 옥린? 네놈은 휴도성과 어떤 관계냐?" "그 휴도성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소?" "말했지 않았느냐! 잠마의 총사였다고" 휴도옥린은 내심의 격동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의 뇌리 속에서 소리를 내며 풀려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제야 그는 부친이 자신에게 한 장의 마고해도를 물려줄 수 있었 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고 동시에 부친의 죽음에 대한 내막을 새롭 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그랬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 일곱 사나이가 단지 그들을 보았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죽인 게 아니라 처음부터 부모님을 죽이기 위해 온 인물들이었단 말인가?' '마고해도를 탈취하기 위해...?' 휴도옥린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의혹들을 풀 어내기 위해 맹렬히 사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그는 깊은 사색에 잠겨있는 우수에 찬 모습 일 뿐이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모닥불에 반사되어 오히려 장엄하 기까지 했는데.... "...!" 휴도옥린의 옆얼굴이 모닥불에 반사되고 그 단아한 얼굴에 고독이 스며든 듯한 모습을 보며 등미방은 문득 알 수 없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느낌이었다. 등미방으로서는 난생 처음 느껴 보는 느낌이었다. 남자가 아름답다고 느껴지기도 처음이었지만 그 남자에게서 어떤 강렬한 충동같은 것을 느껴보기도 처음이었다. 등미방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휴도옥린의 단아한 옆얼굴을 훔쳐보고 있었 다. 휴도옥린이 눈을 돌려 그녀를 정시했다. "...!" 박쥐공주 등미방은 괜시리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잠마총사 휴도성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 "몰...!" 박쥐공주 등미방은 사납게 모른다고 외치려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어 그녀는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잠마는 원래 열두 개의 세력이 뭉쳐진 연합세력이었어요. 허나 오래전부터 그 열두 세력은 이합집산()을 거듭해 사대세 력으로 분류되었지요." "...!" "그 사대세력은 서로 잠마의 대세를 잡기 위해 끝없는 암투를 벌 이고 있어요. 그러나 그 사대세력의 어느 누구라도 넘보지 못하는 두 개의 신분이 있어요." "...?" "잠마가 세워진 초기부터 두 개의 신분은 신성시되어 왔고 당대에 이르러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신분으로 되어 있어 요. 바로 봉조하()와 부국공()이 그것이에요." "봉조하와 부국공?" "봉조하와 부국공은 잠마의 신화를 열 잠마천주의 탄생에 얽힌 비 밀을 선대로부터 물려 받은 사람을 일컫는 것이에요." "잠마천주의 탄생에 얽힌 비밀...?" "예! 바로 마궁의 위치를 알리는 잠마비도와 천마쌍환을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박쥐공주 등미방은 언제부터인가 공손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의 일이었다. "으음...!" 휴도옥린 역시 그녀의 말투가 변한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기실 잠마천주의 탄생에 얽힌 마궁의 잠마비도는 원래 두 장으로 나뉘어 보관되어 오던 중, 오백 년 전 잠마의 대혈겁 때 그 중 하나가 분실되어 단 한 장만이 봉조하가 보관하고 있기에 잠마천주의 탄생을 볼 수 없었던 것이에요." "아!" "그리고 이제 그 나머지 한 장의 잠마비도조차 전대 봉조하인 휴 도성이 몸에 지닌 채 실종되어버려 찾을 수 없게 되었어요." "...!" 휴도옥린은 이제 모든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그동 안 잠마천주가 탄생되지 못했던 것은 잠마천주가 될 후예를 고르 는 중에 서로의 의견이 충돌했고, 그 와중에 마궁을 열 수 있는 두 장의 잠마비도 중 한 장이 유실되어 버린 것이었다. 비록 한 장의 잠마비도와 천마쌍환이 있다고는 하나 나머지 한 장 이 없는 상태에서는 잠마천주가 탄생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휴도옥린이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부친 을 살해한 그 일곱 명의 정체불명의 사내들은 그 나머지 잠마비도 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신검부!' 휴도옥린은 나머지 한 장의 잠마비도가 신검부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임을 새삼 상기하고, 하나의 거대한 음모를 느끼지 않을 수 없 었다. 신검부를 세운 인물, 그가 잠마의 일맥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 다. '오백 년 전에 잠마내에서 대혈겁이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 한 장의 잠마비도가 사라졌다면 그것이 어떻게 신검부에 흘러들어 갔 을까?' 휴도옥린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실타래처럼 얽혀있어 너무 도 복잡했던 것이다. 그러나 구월구일 휴도옥린은 이 순간 이미 확실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아무튼..., 잠마로 가서 그 부국공이라는 인물을 만나보면 무엇 인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박쥐공주 등미방이 휴도옥린의 눈치를 살피며 무엇인가를 캐내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헌데..., 그 잃어버렸던 잠마비도가 어떻게 두 장 모두 그대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군요?" "...!" 휴도옥린은 침묵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뭘 물어도 반응이 없으니!' 등미방의 뇌리에 다시 노기가 치솟았다. 그녀는 노기를 애써 가라앉히며 짐짓 싸늘한 말투로 입을 떼었다. "아무튼 당신이 천마쌍환의 비밀을 풀었으니 잠마천주인 것만은 확실해요. 그러나 나의 조부님 도움 없이는 잠마의 천주로 인정받 기는 힘들 거예요." "...!" "그리고 당신이 피한다 해도 이제부터 당신은 진정한 천주가 되든 가 아니면 그냥 죽어주든가 해야 될 상황이에요." "...!" 은근한 위협이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그 어떠한 말을 들어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 었다. 그의 이런 침묵은 확실히 효과적인 것으로서 상대로 하여금 조바심을 느껴 저절로 많은 것을 스스로 털어놓게 만드는 힘이 있 었다. "팔백 년 전 모든 마도고수들이 하나로 뭉친 후, 그 마도의 대성 전인 잠마의 대권을 잡기 위해 우리들은 서로 치열한 싸움을 벌여 왔어요. 물론 잠마천주가 탄생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그동안 강호에 나올 수 없었던 것이지요." "...!" "헌데 그런 잠마의 고수들이 이제와서 잠마천주를 인정하고 그의 무릎 아래 일통할 수 있을까요?" 휴도옥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애초부터 잠마천주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소. 나는 그저 구월구일일 뿐이오." "호호호,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은 기호지세()라는 말을 아나요?" "흠! 이렇게 된 이상 진정한 잠마의 천주가 되든가 아니면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에 몸을 숨겨야 한단 말이오?" "예, 그래요." 문득 휴도옥린이 박쥐공주를 직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야릇한 장 난기가 걸려 있었다. "훗! 패릉에서 만났을 때와 기절해 있을 때는 말이 없어서 좋았는 데 지금은 말이 많아 오히려 번거롭구료." "...!" 박쥐공주 등미방의 안색이 홱 변했다. 어쩐지 자신이 천해진 느낌 이 든 것이다. "이, 이 야수같은 놈!" 그녀는 휴도옥린이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기절해 있을 때의 일을 꺼내자 너무도 분해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야수? 훗! 오늘 그대에게 들은 말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 군. 어때 그 야수의 진정한 맛을 보겠소?" "...!" 박쥐공주가 질린 눈으로 멍청히 휴도옥린을 직시했다.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게 휴도옥린의 태도였다. 말없는 어둠 속의 사나이같은 기질을 풍기는가 하면 느닷없이 짓 궂은 악동같은 기질을 풍기기도 한다. 그 어떤 것이 진정한 휴도 옥린의 성격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휴도옥린 역시 자신이 박쥐공주를 대하고 있는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쩐 일인지 사이하고 괴퍅한 그 녀 앞에서는 느물느물하고 짓궂은 풍류공자의 태도를 보여주고 싶 어지는 것이었다. 그토록 사이했던 그녀가 여느 여인과 다름없이 펄쩍펄쩍 뛰며 분 노하는 모습이 재미있기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늑대같은 놈! 좋다. 내 오늘의 일은 결코 잊지 않으마! 네놈 이 본 공주에게 매달려 애원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박쥐공주 등미방은 도도하기까지 했던 자세에서 표독한 암고양이 같은 태도로 변하며 뽀드득 이를 갈아 붙였다. 휴도옥린은 그녀가 악담을 퍼붓든 말든 앉아 있던 자리에서 비스 듬히 몸을 누이며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한잠 느긋이 잘 듯한 기 세였다. "...!" 박쥐공주는 그런 휴도옥린을 아무말 없이 내려다 보며 고개를 설 레설레 흔들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그들이 앉아있는 동굴의 바깥쪽에서 돌연 기 이한 노래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어둠 속에서 돌연 들려오기 시작한 노래소리. 짙은 어둠을 뚫고 낭랑한 노래소리가 휴도옥린과 박쥐공주가 앉아 있는 동굴의 앞쪽에서 들려오자 박쥐공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님은 어디에 있나 ... 흰 구름은 유유히 하늘을 흐르건만.... ... 홀로 서풍()을 대하여 눈물로 옷을 적시네. ... 아아, 천애유랑인(). 노래소리는 실로 처량하고 애절했다. 그것은 마치 연인()을 잃고 아픈 가슴을 달래는 듯한 애절함 이 담겨 있는 노래가락이었다. 노래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지 채 두 소절도 넘기 전에 박쥐공주 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마음이 허전해지고 깊은 슬픔이 북 받쳐올라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흘려냈다. 실로 기이한 상황이었다. 단숨에 듣는 이의 심금을 파고 드는 노래소리는 멀어지듯 가까워 지고 있었으며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듯 하면서도 자세히 들으 면 멀리서 은은히 울려오는 듯했다. ... 천애가자()의 천애가(), ... 이 노래를 듣는 자여, 그대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 잠마의 야욕은 하늘을 뒤덮고.... ... 그 죄악은 천세()에 이어지나, ... 천가()가 등장하니, ... 그 숭양()의 빛에.... ... 그 죄악과 야욕이 눈녹듯 사라지도다. 노래소리는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심금을 뒤흔드는 애절한 노래소리가 돌연 귀를 후벼내고 싶으리만큼 역겨운 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유리조각을 긁는 듯 하다고나 할까? 박쥐공주는 스스로 귀를 잘라내고 싶은 충동이 들만큼 역겨운 그 노래소리에 황급히 정신 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이마로부터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놀랍게도 박쥐공주와 같은 초절정의 고수가 노래소리에 담긴 음공()에 그대로 노출 되어 심신의 제압을 받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멈춰라!" 박쥐공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벼락같이 소리쳤다. "...." 거짓말처럼 노래소리가 끊겼다. 박쥐공주는 탈진한 기색으로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일광에 의해 동굴 밖의 광경이 어렴풋이 비쳐들고 있었다. 동굴에서 마주 보이는 십여장 밖의 초지() 위. 그곳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한 꾀죄죄한 노인이 한 그루 노송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지 않은가? 노인의 기태는 실로 기이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시름을 혼자 짊어진 듯 초점없는 멍청한 눈 으로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것이라고는 걸레나 진배 없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마치 실의에 잠겨 세상일에 흥미 를 잃은 사람같았다. 그 노인을 발견한 박쥐공주의 눈에 은은한 놀람의 빛이 스쳤다. "천애가자() 포군락()!" 박쥐공주는 마치 자다가 악몽을 꾼 듯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신음 성을 흘려냈다. "미친 계집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눈과 귀는 제대로 박혀 있었 군." "잠마의 꿈이라 불리우고 있는 계집이니 그래도 제법 한 가닥은 하겠지. 하지만 꼭지가 덜 떨어진 계집인 것만은 확실해." 바로 이 순간 천애가자 포군락의 좌측에서 돌연 두 가닥의 음성이 박쥐공주의 경악성에 대꾸하듯 들려왔다. "잠마의 쓸데없는 마물들이 가르쳐 놓았으니 오죽 하겠는가!" "흥! 그래도 어느 정도 쓸모있을 줄 알았는데...." 동시에 동굴에서 내다 보이는 둥그런 초지쪽으로 또다른 두 노인 ()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색 소맷자락이 발끝까지 끌리는 기이한 옷차림의 노인과 양손 에 북채를 쥐고 등에 커다란 북을 메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들의 행사는 실로 은밀해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박쥐공주는 그들이 어 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박쥐공주는 두 노인이 나타나기 무섭게 지독히도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있음을 생각하고도 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까닭 은 그녀가 그들의 신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으음! 만리능파광한수()! 천고십통() 기 취릉()!" 은은한 경악성을 흘리며 눈길을 돌리던 그녀의 눈에 다시 질린 빛 이 떠올랐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기까지 했다. "맙소사, 팔비신농() 정고()까지...!" 그러고보니 어느새 천애가자 포군락의 우측으로 또다른 노인이 서 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팔과 다리가 하나뿐인 남의노인이었다. 남의노인은 한쪽 다리 대 신 검은 쇠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그 움직임은 오히려 보통 사람 보다 훨씬 빨라 번쩍하는 순간 이미 동굴 앞에 다가와 있었다. 팔비신농 정고는 윤기가 흐르는 턱수염에 기다란 은발을 두가닥으 로 꼬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 드문 기인이 사()임을 알 수 있었다. 헌데 지금 어둠 속에서 휴도옥린과 박쥐공주가 머물고 있는 작은 동굴 앞으로 몰려들고 있는 인물들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었다. "한심한 늙은이들! 뭐 좋은 일이 있다고 그리도 급히 달려오는 것 이냐?" 천애가자 포군락을 비롯한 네 노인이 마악 동굴 앞에 모습을 드러 낸 순간 그들의 머리 위쪽에 돌연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머리 위쪽 허공에는 한 무더기 기이한 검은 구름이 떠있었 다. 그리고 그 검은 구름 위에 한 신태비범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 고 앉아 있지 않은가! 부웅...! 휘이잉! 그가 앉아 있는 검은 구름은 자세히 볼 것 같으면 끝없이 움직이 고 있어 결코 구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는데 기이한 음향이 그곳 으로부터 쉬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천자봉왕() 무선주()마저..., 으음! 신검부의 노 물들이 모조리 나왔구나...!" 이 광경에 박쥐공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전신에는 터 질 듯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그렇다! 검은 구름처럼 보이고 있는 것은 기실 구름이 아니라 한 무더기의 주먹만한 벌떼였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은 그녀도 익히 그 명 호를 들어왔던 인물로서 모두 그녀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었던 것이다. 무인제국 신검부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관장하고 있는 전대의 기 인()들..., 신검부주의 보이지 않는 지기들이라는 실로 엄청 난 인물들이 하나하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 부주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마흔여덟 명의 지기가 있네. 기실 신검부는 우리 마흔아홉 명이 세운 것이고 그중 드러난 사람은 부 주 한 명인 것이네. ...그 마흔여덟 명이야말로 신검부의 진정한 힘()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네. 휴도옥린. 짐짓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는 그는 이때 동정호의 무류도에서 마 주친 한 명 노기인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들이 무엇 때문에 돌연 이곳에 몸을 드러냈단 말인가? 박쥐공 주 때문은 아닌 듯 한데?' 휴도옥린은 눈을 뜨지 않았다. 좀더 상황을 지켜볼 필요를 느낀 것이었다. 나타난 다섯 명의 노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태연히 익살을 주고 받고 있었다. "허허헛! 봉왕(), 그러는 늙은 자네는 무엇 때문에 이역만리 떨어진 선기도()에서 이곳까지 날아든 것이냐?" 만리능파 광한수가 허공 위에 떠 있는 천자봉왕 무선주를 향해 외 치듯 입을 열었다. 천자봉왕 무선주의 입에서 장소가 터져나왔다. "와하하...! 잠마천주를 때려잡는 일에 본왕이 어찌 빠지겠느냐!" 그의 음성은 웅대하기 이를데 없어 일순 동굴 안의 석벽에서 돌 먼지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실로 엄청난 공력이 아닐 수 없었 다. 한팔과 한다리만을 지니고 있는 팔비신농 정고가 돌연 고개를 갸 웃거렸다. "헌데 저 꼬마놈이 진정 잠마천주인 것이 분명하냐?" "천마쌍환을 찬 것을 보니 분명할 것이다." 다섯 노인의 눈이 동굴 속을 꿰뚫을 듯 응시했다. 그들과의 거리 는 오 장도 넘었으나 그들은 모닥불 옆에 누워있는 휴도옥린의 손 목에 채워져 있는 천마쌍환을 이미 자세히 확인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부주께서 부르신 일이니 어련할라구...!" "헌데 부주는 여전하시냐?" "그 어르신네야 변함이 있을 턱이 있느냐!" 마치 어둠과 적막에 잠겨있던 궁륭산이 돌연 저자거리로 변해 버 린 듯한 상황이었다. 다섯노인 중 천애가자 포군락만이 여전히 말없이 허공만을 응시하 고 있을 뿐 나머지 네 명은 정신없이 입을 열고 있어 시끄럽기 이 를데 없었다. 잠마천주를 잡기 위해 왔다고 떠들고 있기는 했으나 마치 유람나 온 태도같을 뿐이었다. 마치 어둠과 적막에 잠겨 있던 궁륭산이 돌연 저자거리로 변해 버린 듯한 상황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나를 잡기 위해 이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그건 그렇다치고 신검 부에서 나의 존재를 너무도 빨리 알아내는군!' 휴도옥린은 차라리 어이가 없었다. 그가 잠마해의 흑밀원 총단인 패릉에서 천마쌍환을 얻고 그 무공을 드러낸 것이 불과 하루 전의 일이 아니던가! 그 짧은 순간에 깊숙이 몸을 숨기고 드러나는 법이 없던 신검부의 비밀세력들이 휴도옥린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음이니 실로 무서운 이목()인 것이다. 풍진을 희롱하며 익살로 세상을 조롱하며 지내고 있는 듯한 노기 인들의 음성이 이어졌다. "헌데 저 꼬마놈을 어떻게 때려잡지?" "그거야 적당히 손을 본 후에 부주에게 데려가야 하지 않겠나." "그게 좋겠군.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 같네. 저 꼬마놈은 지금 자고 있는 모양일세." "그렇군. 아무리 잠마천주라 해도 아직은 어린애이니 우리 늙은이 들이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그럼 저 꼬마가 잠이 깰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우리도 그동안 회포나 풀까?" "좋지...! 누구 술 가진 것 있는가?" 실로 여유만만한 태도가 아닌가! 박쥐공주 등미방은 그들이 자신때문에 온 것이 아님을 알고 다소 안도하기는 했으나 오히려 더욱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이 힐끔 누워 있는 휴도옥린을 바라보았다. 휴도옥린은 진정 잠이 든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진짜 잠이 들었단 말인가? 이런 판국에?' 그녀는 괜시리 약이 올랐다. "이 너구리같은 놈. 안자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어서 일어 나서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뭐하느냐!" "...!" 휴도옥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대꾸는커녕 그 순간 몸을 돌려 반대방향으로 눕고 있었다. 박쥐공주의 눈에서 차가운 신광이 폭사해 나왔다. "오냐! 내 오늘 천가의 인물들에게 죽는 일이 있더라도 네놈과 사 생결단을 내고 보겠다." 박쥐공주는 울화통이 터져 있는 대로 진기를 끌어올렸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바탕 나체 춤이라도 추겠다는 것이오? 조용하시오. 생각을 방해하지 말고!) 순간, 한 가닥 전음이 그녀의 귀로 파고 들지 않는가. 바로 휴도 옥린의 전음성이었다. '끄응!' 박쥐공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차 하다가는 휴도 옥린이 자신의 말을 실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난 것 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휴도옥린은 휴도옥린대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 었다. '신검부주의 보이지 않는 힘이 바로 천가였단 말인가! 으음! 저들 이 바로 숭양무원의 인물들이었다니...!' <천가().> 마도 천하를 목전에 두고 있던 잠마십이천마를 좌절시켜 잠마라는 마도의 대성전이 탄생되게 했던 신비의 무가().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그 천외천()이 이렇게 잠마천주 를 상대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음이니, 어찌보면 이것은 잠마와 천가의 그 길고 긴 전쟁이 드디어 그 대단원의 막을 향해 치달리고 있는 상황이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헌데 바로 이 순간이었다. 휴도옥린은 돌연 기이한 기세가 사방에서 물밀듯 밀려옴을 느끼고 해연히 놀랐다. 궁륭산의 사방에서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로 몰려오고 있는 듯한 느낌, 형체없는 기()의 돌풍이었다. '누군가가 오고 있다. 한두 명이 아닌..., 엄청난 수효의 고수들 이다!' 숭양무원의 은둔자들인 다섯 괴노인 역시 그 괴이한 기세를 느낀 듯 돌연 침묵하고 사방을 쓸어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조차 긴장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 그 괴이한 기세는 실로 엄청난 속도로 가까와지고 있었고 그 기세 의 삼엄함은 가히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슉! 돌연, 어둠에 휩싸여 있는 궁륭산의 저쪽 구릉 언덕에 하나의 횃 불이 솟아났다. 아니, 솟아났다고 느껴지리만큼 빠르게 횃불 하나 가 다가온 것이었다. 슈슈슉! 그 한 개 횃불을 발견한 순간, 그들이 서 있는 일백여 장 사방에 무수한 횃불들이 허공에 점()을 찍듯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아아, 실로 엄청난 광경이 아닌가! 횃불의 수효는 점점 불어나 순식간에 일천 여에 이르고 있었는데 그 다가오는 속도가 워낙 빠르고 은밀해 만약 횃불이 보이지 않았 다면 그 괴이한 기세에 질식되어 숨이 막혀버릴 듯한 기세였다. '저들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휴도옥린은 동굴 안에서 내다보이는 맞은 편에 나타난 인물들이 사방에서 동시에 나타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보통 고수들이 아니다. 어디서 이런 엄청난 고수들이 이렇게 많 이 몰려오고 있단 말인가!' 어찌보면 일대장관이랄 수도 있었다. 허공에 점이 찍히듯 순식간 에 나타난 횃불의 수효는 근 일천이 넘는 듯해 횃불의 대해() 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사사삭! 쓰읏! 거대한 원진을 형성한 횃불들은 무섭게 조여들어 순식간에 삼십여 장 가까이 이르렀다. 그 속도 또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헌데 횃불 아래, 실로 귀기스러운 흑의인들이 일체의 호흡소리도 흘리지 않은 채 각기 횃불을 쥔 채 서 있지 않은가! 전신에 걸친 것은 치렁한 흑포이다. 그 모두의 얼굴에 또한 개성 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듯 모두 공통된 사이함을 지니고 있었다. 검은 해일이 덮쳐들다가 일순 멈춰선 느낌이랄까? 대해처럼 밀려오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일정한 간격을 지닌 채 몸 을 멈춰 세웠다. 동굴이 뚫려있는 거대한 절벽쪽만을 제외하고 사방에 횃불을 들고 있는 기이한 흑의인들이 검은 나무의 숲처럼 늘어 서 있는 모습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 "...!" 숭양무원의 고수들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듯 침묵을 지키며 긴 장된 빛을 드러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 제29장 난세()를 부른 잠마천주의 탄생! 공포스러운 위세로 순식간에 궁륭산 일대에 모습을 드러낸 일천여 명의 흑의인들, 손에 들고 있는 횃불에 반사된 그들의 얼굴은 마 치 시체의 그것을 대하듯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일체 담기지 않은 삭막한 것이었다. 질식할 것 같은 정적이 흐르며 공기가 터져나갈 듯한 긴장이 팽배 하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어깨를 마주 대듯 검은 나무처럼 늘어서 있던 그들 중 한쪽이 돌 연 갈라졌다. 동시에 그 가운데로 두 인영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처... 벅! 처벅! 더할나위 없이 둔중하게 울려퍼지고 있는 발걸음소리, 숨막힐 듯 한 정적으로 휘감겨 있는 장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발걸음소리 는 기실 미미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으나 지켜보고 있는 모든 이 들의 귀에는 벼락이 치듯 강렬하게 인식되고 있었다. 기괴한 풍도의 두 인영. 한 사람은 피골이 상접하여 거의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의 구척장 신 노인이었는데 기괴하게도 그 엄청난 키에 비해 머리는 자라의 그것 만큼 작아 엄청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겨우 무릎까지 내려오는 짧은 청포()를 걸쳤는데 두 눈 도 얼굴만큼이나 유난히 작았으나 그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녹 색의 잔광은 대하는 사람을 질식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강 렬했다. 이에 반해 그 옆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인물의 모습은 완전히 상반 되고 있었다. 오척단구에 유난히 머리가 크다. 두 눈도 그 머리만큼이나 큰데 눈동자에 검은 자위가 없이 흰자위만 있지 않은가! 헐렁한 흰색 수의()를 걸치고 있고, 머리는 마구 산발된 채 허리까지 늘어져 있다. 그들의 이렇듯 대조적인 모습은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대하자 그것은 더할나위 없 는 공포가 되어 모든 이들의 뇌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사이함과 공포를 주고 있는 두 인물, 그들은 기계적인 일정한 걸음걸이로 동굴 앞의 초지까지 다가와 그곳에 멍청히 서 있는 천가의 다섯 노인을 향해 짤막하게 외쳤 다. "비켜!" "...!" 귀에 통증을 느낄 정도의 쇳소리였다. 천가의 다섯 노인이 자신도 모르게 길을 터줬다. 그러자 그들은 보조를 같이 해 동굴로 들어섰다. 휴도옥린과 박쥐공주는 동굴의 입구에서 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비스듬히 누워있는 휴도옥린 앞에서 그들의 걸음이 멈춰 졌다. 휴도옥린은 그들이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와 있는 상태이건만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휴도옥린의 바로 머리 위에서 그들은 서로의 눈을 주고 받았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문득 키가 큰 괴인이 난장이처럼 땅딸하고 머리만 큰 괴노인을 향 해 입을 떼기 시작했다. "소제의 생각으로는..., 아니 소제의 생각대로 할 수는 없지 않습 니까?" "아무튼 아우의 의견을 말해 보시게." "아닙니다. 형님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문득 대두괴인이 동굴 밖의 인물들과 박쥐공주와 휴도옥린 등을 한꺼번에 쓸어보았다. "이 놈들에게서 계란의 노른자를 짜내도록 하게." "역시 형님은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어찌 형님의 분부를 어기겠 소이까, 그럼 어떤 놈부터 시작할까요?" 키 큰 괴노인이 감탄했다는 듯 맞장구치며 대두괴인의 눈길을 따 라 주위를 쓸어보았다. "자네는 어떤 놈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 한가?" "아닙니다. 형님이 말씀하십시요." "이 놈들 중에서 우리를 무시하고 있는 자가 누군가?" "물론 우리의 발밑에 태연히 누워있는 이 어린 놈입니다." "그렇군." "이 놈은 눈도 뜨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이 놈은 과연 진정한 진주일까, 아니면 붕어눈일까?" "진주이면 살아날 것이고 붕어눈이면 죽겠지요." "훌륭한 진리일세." 사람들의 머리가 혼잡해졌다. 두 명 괴인의 대화는 그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었다.어떻 게 들으면 알아들을 것도 같은데 다시 생각하면 미친 놈들 수작같 기만 했다. "흥! 별 미친 놈들이 다 있군." 헌데 이 순간 초지의 중앙에 서 있는 고송의 윗쪽에서 돌연 싸늘 한 냉소가 터져나오지 않는가? 고송의 윗 부분, 그곳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한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아홉 개의 금빛 강환()을 팔목에 쭉 차고 있는 중년인은 지금 나타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곳에 서 있었음이 분명했다. 단구의 장발괴노가 그 큰 눈을 굴리며 중년인을 직시했다. "너는 왜 코로 숨쉬는고?" "우스운 일이 있으면 웃고, 가소로운 일이 있을 때 냉소를 터뜨리 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오. 어찌 내 마음대로 냉소를 터뜨릴 수 없 단 말이오." 중년인이 싸늘하게 외쳤다. 신검부의 다섯 노인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일천여 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의 기도는 실 로 엄청나 천가의 인물들인 그들은 긴장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느 닷없이 나타난 중년인이 태연히 시비를 걸고 있지 않은가! "자천()! 자중하게!" 천애가자 포군락이 중년인을 향해 외쳤다. 천애가자 포군락이 입 을 열자 그것은 기이하게도 사태의 심각성을 저절로 대변하고 있 었다. 그러나 중년인은 코웃음을 치며 여전히 대두괴인을 노려보고 있었 다. 고송 위에 서 있던 중년인 역시 천가의 인물임이 분명했으나 다른 인물들에 비해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두 괴노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했다.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 못 내 귀엽다는 듯한 태도였다. "음 너의 배짱이 참으로 가상하구나. 그런 용기를 지녔다면 천하 의 어떤 일이라도 못할 일이 없겠다. 너는 우리 형제보다 뛰어난 놈이다." "...?" 느닷없이 두 괴인의 입에서 칭찬의 말이 흘러나오자 중년인이 멍 청해졌다. "너의 사조는 누구이냐?" "구환노조() 조상산()이외다." "아우, 들어본 적이 있는가?" 대두괴인이 장신괴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키 큰 강시같은 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숭양무원의 뜨락을 지키는 어린 강아지입니다." "...!" 키 큰 괴인의 태연한 말에 중년인의 안색이 홱 굳어졌다. 자신의 사조를 향해 어린 강아지 운운하니 그는 노기가 치솟아 당장이라 도 살수를 전개할 듯했다. "아우!" "예!" "이제 순서를 바꿔야겠다" "어떻게?" 두 괴인의 기이한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연한 것부터 짜게!" "알겠습니다" 처벅! 처...벅! 키 큰 괴인은 대답과 함께 이미 몸을 돌려 동굴을 빠져나가며 나 무 아래로 내려와 있는 중년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실로 기이해 매우 느린 듯 보였으나 그 순간 이미 중 년인의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런 기이한 행보는 상대에게 엄청난 압박감을 주는 것인지라 중 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발작적으로 공격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엇...!" 파- 앙! 그의 양 손목에 채워져 있던 아홉 개의 금빛 강환이 일시에 발출 되며 허공에서 맴돌았다. 폭발하듯 뻗어난 아홉 개의 강환은 실로 엄청난 위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구나 키 큰 괴인은 뚜벅뚜벅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와 있어 도저히 피할 수도 없을 듯한 상황이 었다. 쓰읏! 그러나 그 순간, 구척 괴노의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양손이 소맷 속에서 쑥 튀어나오며 마치 밤하늘의 공기처럼 금빛 강환들의 막 을 뚫고 들어가 중년인의 머리를 감싸듯 양 손바닥으로 움켜 쥐었 다가 떨어졌다. 펑! 기괴한 음향이 터져나왔다. "끄... 윽!" 지옥의 절규가 중년인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금빛 강환들이 허공 에서 맥없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중년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부어오르기 시작했 다. 그의 머리는 순식간에 보통사람의 두 배 이상 되는 크기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는데 마치 머릿 속에 공기를 집어넣는 듯 끔찍한 형상 이었다. 투득! 찰나, 그의 얼굴 중 두 눈 부분에서 무엇인가가 터져나가는 음향 과 함께 진홍의 액체가 그의 칠공으로부터 힘차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 중년인은 주춤주춤 서 있는 상태에서 순식간에 처참한 형 태로 변해갔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금세 쭈글쭈글 오그라 들기 시작했다. 구척괴인이 한 걸음 물러서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 겨 대두괴인에게 다가갔다. "다 짰는가?" "짜긴 짰습니다만 너무 싱거워서... 쯧쯧!" 다시 괴상망측한 대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가의 다섯 인물 들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 구척괴인이 중년인에게 다가왔다가 물러난 것은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짝일 순간의 일이었다. 그 번개같은 순간에 중년인이 처참한 형태로 죽어갔으나 그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구경만 한 셈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대두괴인이 다시 휴도옥린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럼 이제부터 질긴 것을 짜게!" "예!" 구척괴인이 그때까지도 누워있는 휴도옥린을 내려다 보았다. "일어나라, 꼬마야." "...!" 휴도옥린은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며 슬쩍 박쥐공주의 표정을 살폈다. '박쥐공주는 이들이 누군가를 알고 있는 듯하다. 역시 잠마의 고 수들이란 말인가?' 휴도옥린은 내심 그들이 잠마의 고수들일 것이라는 추측을 굳히고 있었으나 기이하게도 박쥐공주는 물론이고 두 명의 괴노 역시 서 로 아는 체를 하지 않고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때였다. 우드득! 우득...! 돌연, 구척괴노의 몸에서 기이한 음향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동 시에 그의 키는 이척 정도나 더 늘어난 듯했다. 구척괴노의 이런 모습은 체내의 기()를 모으고 있는 것이었으며 무서운 공격이 쏟아지리라는 것을 예시하는 광경이었다. "...!" 휴도옥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직 내상이 완치된 상태는 아니었다. 휴도옥린은 이때 본신의 공력 중 겨우 오성 정도만을 끌어올릴 수 있는 상태인지라 눈 앞의 구척괴노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으드득! 이 순간에도 구척괴노의 몸에서는 여전히 소름끼치는 음향이 들려 오고 있었다. 그의 메마른 양팔 역시 이 순간 반자는 더 늘어난 듯했다. 마치 파충류의 가죽같다고나 할까? 서서히 수평으로 팔을 세우는 그의 팔 피부에는 기이한 검붉은 반점들이 드러나고 있어 체내의 기()가 극성으로 운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이 잠마의 고수라면 한 가지 방법은 있다!' 휴도옥린은 긴장된 눈빛을 띠우면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모험임에는 틀림없었으나 성공한다면 상대 의 공격을 무난히 받아 낼 뿐만 아니라 단숨에 내상까지 치유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가 익힌 잠마천단은 원래 마도의 모든 마공을 기초로 해서 탄생 된 기학이었다. 그 잠마천단은 무공초식은 물론이고 모든 마공의 내공심결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써 눈 앞의 구척 괴노가 잠마의 마공을 익힌 것이라면 그의 계획은 반드시 성공할 것 같았다. '잠마천단의 내공심결은 마도의 모든 마공 위에서 탄생된 것이다. 저 자의 기()를 체내에 흡수한다면 어렵지 않게 내상을 완치시 킬 수 있을 텐데...." 이때였다. 쓰윽! 구척노인의 몸이 움직였다. 불과 반 장도 되지 않는 거리이다. 그 거리는 원래 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나 진배 없었다. 휴도옥린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물러나기 전과 똑같은 상태였 다. 구척괴노는 그림자처럼 같은 거리를 같은 속도로 따라붙으며 휴도옥린의 머리를 좌우에서 때려왔다. 파악! 까득- ! 격돌음과 함께 구척괴노의 손바닥이 울렸다. 그러나 구척괴노의 손바닥에 적중된 것은 휴도옥린의 머리가 아니라 양쪽 손바닥이었 다. 그의 양손이 좌우에서 날아든 순간 휴도옥린은 양손을 턱밑에서 교차시켜 정확하게 구척괴노의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으나 순식간에 주위에 무서운 음향이 일었다. 꽈... 앙! 와르르! 흙먼지가 일순 동굴을 메웠고 주먹만한 암석조각들이 사방으로 비 산했다. 동굴 속에 서 있던 박쥐공주는 엄청난 반탄력에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일곱 걸음이나 밀려나야 했다. 그 흙먼지 속에서 구척괴노의 신형 역시 일 장이나 퉁겨졌고 휴도 옥린의 신형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박쥐공주와 천가의 다섯 노인은 의혹의 눈으로 사방을 쓸 어보았다. 휴도옥린의 신형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이 순간, 박쥐공주는 너무도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휴도옥린은 원래 서 있던 제자리에 있었다. 헌데 서 있는 것이 아 니라 깊이 반 장에 달하는 웅덩이 속에 조용히 누워있는 것이 아 닌가! 그 웅덩이는 두 사람의 진경이 맞부딪치는 격돌로 휴도옥린의 발 밑이 패여나간 것으로써 휴도옥린은 그 안에 반드시 누워 쏟아진 흙먼지에 거의 파묻혀 있다시피 했다. 사람들은 멍청해졌다. 구척괴노의 가공함에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쳤다. 그는 단 일초에 휴도옥린을 지면 깊숙이 묻어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휴도옥린은 완전히 절명해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흙에 파묻혀 구덩이 속에 누워있을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 박쥐공주는 지금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대두괴인이 흡족한 미소와 함께 입을 떼었다. "짰느냐?" "예!" "어떻더냐?" "짜기는 짰는데 녀석은 결코 연하지가 않았습니다. 녀석의 내공은 우리 형제들을 빼놓고는 천하에 상대할 사람이 없을 듯 했습니 다." "그렇게나 강했단 말이냐?" "뭐 별거는 아니었습니다만 아무튼 보통은 넘었습니다." "좀더 쉽게 말해보게." 대두괴인이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떼었다. 구척괴인이 움찔해 빠르게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뭐 좀 자존심은 상하지만..., 녀석은 소제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단지 경험이 부족하고 내상을 입 고 있는 상태여서 소제가 쉽게 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 그렇다면... 살아나면 우리의 천주로 모셔도 될 정도냐?" "결정했습니다." "그래?" 대두괴인과 구척괴노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웅덩이에 묻혀 죽은 듯 누워 있는 휴도옥린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대두괴인의 눈이 다시 초지쪽으로 돌려졌다. "그건 그렇고, 다음은 어쩐다...? 신검부의 강아지들은 내가 짜 랴?" "형님의 뜻대로 하십시요. 형님께서 몸을 풀고 싶으시다면 한 번 저것들을 짜보십시오." "그러지." 대두괴인의 눈이 초지 위에 서 있는 다섯 명을 하나하나 직시했 다. 그 눈빛에 숭양무원의 은둔자들이며 가공할 초절정의 고수들 인 다섯 노인조차 공포를 느꼈다. 그 눈()..., 검은자위가 보이지 않고 흰자위만이 희번덕거리는 그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라 지옥의 입구처럼 느껴지는 공포스러 운 것이었다. 대두괴인은 서서히 살기를 머금으며 돌연 나직하게 소리쳤다. "쥐새끼들! 어서 나오지 않고 뭣들 하느냐! 내가 몸소 끌어내야 한단 말이냐!" 그의 음성은 거의 들릴락말락 나직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초지의 뒤쪽에 우거져 있는 죽림()에 이 르러 돌연 폭발하듯 커지고 있어 죽림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일 단의 인물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동굴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죽림 속, 그곳에는 언제부터인가 일백 여 명에 달하는 청의 검수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바로 신검부 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천가의 다섯 노인이 모습을 드러낼 쯤에 이미 휴도옥린이 있는 동굴을 차단하듯 포진해 있었는데 느닷없이 흑의인들이 모습 을 드러내자 숨을 죽이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횃불을 들고 있는 일천여 명 흑의인들의 포위망 가운데에 갇혀있는 형상이었다. 파아아! 슈우우욱! 돌연, 대두괴인의 오척 단구가 둥실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솟아 올랐다고 느껴진 순간 그의 신형은 하나의 그림자를 방불하는 속 도로 죽림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차앙! 챙! 죽림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일백여 명의 청의검수가 일제히 허리 의 검을 끌러냈다. 일백여 명이 검을 뽑아내는 것이 마치 한 사람이 뽑아내듯 검명 ()이 일어 그들이 어느 정도의 훈련을 거친 자들인가를 드러 내고 있었다. "큭!" "아아악!" 그러나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오며 숲 속의 허공 위로 부 러진 검날들과 찢겨진 육편 등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대두괴인의 위세는 놀랍기 이를데 없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단번 에 십여 장 허공을 활보하고 있었는데 그 길고 긴 수의의 소맷자 락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신검부의 고수들이 서너 명씩 추풍낙 엽처럼 쓰러졌다. 헌데 놀랍게도 그 대두괴인의 일격을 막아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뿐이랴! 그의 소맷자락은 분명히 평범한 수의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보였 는데 오히려 예리한 장검들과 부딪치며 그 검들을 간단하게 절단 해 버리고 있지 않은가! 으적! 꽈꽈꽝!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음향이 쉬지 않고 이어지며 죽림 안은 순식 간에 귀영()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둘러선 흑의인들의 손에 들려져 있는 횃불에 의해 은은히 사방의 경물이 드러나고 있는 속에서 자유자재로 허공을 밟으며 청의검수 들을 쓰러뜨리고 있는 대두괴인의 모습은 차라리 환상 그 자체인 것이다. "으...!" "이, 이럴 수가!" 처절한 공포에 질린 몇몇 청의검수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죽림에서 뛰쳐나오며 도주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채 오 장도 가지 못해 포진되어 있는 흑의인들에 의해 가로막혀야 했다. "비켜!" 흑의인들의 기세는 실로 사이했다. 그러나 대두괴인에 비하면 아 무것도 아니라 짐작한 그들은 수중의 검을 쳐내며 길을 열려고 했 다. 팟! 치치치치칫! 헌데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흑의인들 중 바로 자신 앞 에 청의검수를 맞이하게 된 흑의인들이 소리없이 손을 쳐내고, 그 순간 덮쳐들었던 청의검수들이 오히려 눈깜짝할 순간에 무너져 내 리고 있지 않은가! 일곱, 여덟 명에 달하는 청의검수들이 흑의인들을 뚫고 도주하려 다가 순식간에 나동그라져 버렸다. "자오령()의 마인들이로군." 이 광경에 천가의 다섯 노인의 눈에 경악이 자리했다. 믿어지지 않게도 검은 해일처럼 둘러선 일천여 명의 흑의인들 개개인이 모 두 초절정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마치 지옥에 갇혀있던 수천여 명의 마인들이 뛰쳐나와 한 자리에 모여든 느낌이랄까! 순식간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처절했던 비명성이 칼로 자른 듯 끊 겼다. 횃불의 테두리 안에는 이제 천가의 다섯 노인들을 제외하고 는 아무도 서 있는 인물들이 없었다. 그것은 그대로 숨이 막힐 듯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이때, 박쥐공주는 흑의인들과 대두괴인의 엄청난 무위 따위는 별 로 관심없다는 듯 죽은 듯이 웅덩이에 파묻혀 누워 있는 휴도옥린 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일순, 그녀의 눈에 어이없어하는 빛이 스쳤다. "...?" 휴도옥린, 언제부터인가 그가 빤히 눈을 뜨고 있지 않은가! 휴도 옥린의 눈에는 엄청난 부상을 당한 사람같지 않게 힘()이 깃들 어 있었다. 이 모습에 박쥐공주가 어이없어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안죽었나요?" "...!" 그녀의 질문은 실로 해괴해 휴도옥린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박쥐 공주도 자신의 질문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일순 당황해했다. 그러나 그 당황은 이내 앙칼진 노기로 승화(?)되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면 왜 죽은 것처럼 가장해서 누워있는 거지?" "좀 쉬고 싶었소." 휴도옥린의 태연한 대꾸에 박쥐공주의 부아가 더욱 치밀었다. "이 너구리같은 자식! 그럼 살아 있다고 나에게만은 말해줘야 될 게 아니냐!" "내가 왜...?" '...?' 박쥐공주의 눈이 다시 멍청해졌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험상궂은 욕설이 튀어 나오고 말았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 자식아!" 박쥐공주는 험상궂은 욕설을 터뜨려 놓은 직후 스스로도 깜짝 놀 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맹세코 그런 욕설 을 입에 담아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성 품으로 남에게 약이 올라 그런 욕설을 퍼붓는다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헌데 괴이하게도 휴도옥린만 대하면 자신이 천해지는 느낌이 들고 자신도 모르게 얌전하다거나 고상한 태도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보이게 되지 않은가! 후두두! 휴도옥린은 이미 그녀의 이런 불가사의한 내심을 알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흙을 털고 몸을 일으켜 세웠 다,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역시... 나의 예측이 적중되었다. 다소 위험하긴 했으나 내상은 이제 완치되었다!' 휴도옥린은 진기를 끌어올려 쌍장에서 무서운 압력이 쏟아져 들자 양손을 턱밑에서 교차해 맞받아내며 그 순간 상대의 막강한 진기 를 체내로 끌어들여 내상을 치유시키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한 일로써 쌍방의 진기가 성질이 다르거나 받 아들이는 쪽의 내공 수준이 뒤떨어지면 목숨을 잃게 된다. 여기에다가 상대방의 진기가 쏟아져 나오는 순간과 받아들이는 시 기가 완벽하게 일치되어야 하는 관계로 범인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위험천만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멈추시오!" 휴도옥린은 대두괴인이 천애가자 포군락 등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모습을 발견하고 우렁차게 외쳤다. 천애가자 포군락과 팔비신농 정고 등은 이미 상대가 잠마의 장로 급 고수임을 깨닫고 한바탕 혈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범종이 울리듯 장대한 음성이 어둠을 뒤흔들자 살기 를 띠고 천가의 인물들에게 다가가던 대두괴인이 몸을 멈춰 세웠 다. "...!" "...!" 두 명의 괴노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놀람은 상당한 것이 었다. 땅속 깊이 처박혀 있던 휴도옥린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그들 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빨리 몸을 일으킬 줄은 예상도 못 했던 것이다. 대두괴인은 휴도옥린의 무공이 예상보다 심오함을 느낀 듯 구척괴 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우야, 전보다 더욱 싱싱해진 것 같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 "분명히 꾹 눌러짰는데?" "아우야, 올해 네 나이가 몇이냐?" "...?" 느닷없는 엉뚱한 질문에 구척괴노조차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러 나 그는 어떠한 엉뚱한 말을 들어도 이미 면역이 된 듯이 순순히 대꾸하고 있었다. "백사십까지는 세고 그 뒤로 세어보지 않은 게 한 이십 년 되니 까... 에... 그러니까 백육십 쯤?" "그럼 저 아이의 나이는 몇이나 된 것 같으냐?" "글쎄요. 한 이십 쯤...?" "느끼는 것이 없느냐?" "있습니다." "뭔데?" "한심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예, 바로 소제가 말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두괴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돌연 몸을 돌려 휴도옥린을 향 해 다가들기 시작했다. 오척단구에 비해 머리통이 유독 큰 그의 걸음은 해괴하기 이를데 없어 웃음이 나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 스꽝스럽다고 느낄 사이도 없이 그의 신형은 휴도옥린의 코 앞에 다가와 덮쳐들고 있었다. 촤아아악! 그의 양소매는 땅에 끌릴만큼 긴 것이었다. 그 긴 소매가 두 개의 철판인 양 허공을 휘어감자 사방에 온통 그의 수영()만이 번 뜩였다. 동굴 안은 겨우 폭 일장 반 정도에 지나지 않아 대두괴노의 소매 는 더욱 강렬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좌장을 쓸어내며 몸을 피했다. 획! 획획! 대두괴노는 휴도옥린이 소맷자락 사이를 빠져나가자 더욱 진기를 끌어올려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의 긴 소매는 때로는 검()이 되고 때로는 도()가 되기도 했 고, 어떤 때는 유성이 쏟아지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 다. 하지만 휴도옥린의 신법은 바로 마궁에서 수천 개의 그림자를 보고 터득한 것으로써 오히려 좁은 장소에서 그 불가사의한 묘용 이 더욱 발휘되고 있었다. 그의 신법은 마치 흘러가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었 다. 대두괴노의 초식은 실로 복잡다단했다. 어떤 때는 시원스레 광명 정대하다가도 어떤 때는 그 괴이함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 천하 의 무학은 모조리 익히고 있는 듯했다. 대두괴노가 펼치고 있는 난피풍()은 금사()가 난무하듯 어지러웠으나 자세히 볼 것 같으면 엄격한 흐름이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휴도옥린은 그의 공세 사이를 물흐르듯 빠져 다니며 점차 그 초식의 변화를 깨닫기 시작했다. 대두괴노가 사용하고 있는 무공초식 또한 이미 그가 익힌 잠마천 단의 무학범주 안에 속하는 것이었다. 처음 상대했을 때는 그 현 란함과 괴이함으로 인해 그것을 느끼지 못했으나 점차 그 변화가 휴도옥린의 눈에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의 운신()은 더욱 자유스러워졌고 오히려 그 초식과 초식 사이의 변화에 결정적인 공격을 펼칠 수도 있었다. 그러자 대두괴노는 소매를 거두며 장력으로 쳐왔다. 휘잉! 그의 일장에는 대단한 내력이 충만되어 있어 공기가 진동하는 것 만으로도 휴도옥린은 그의 공력이 초인적인 것임을 느낄 수 있었 다. 상대가 내력으로 겨루기를 원하고 있음이 확실해지자 휴도옥린은 크게 호기가 치밀어 오름을 느끼며 장을 맞받았다. 꽈꽝! 무서운 힘이 휴도옥린의 장을 통해 전해져 왔다. 휴도옥린은 잠마천단 중에 이화접목의 심법을 펼쳐 장력에 기를 모았다. 동시에 그는 끌어들이듯 장을 내쳤는데 그 힘은 산이 무너지듯, 호수가 제방을 무너뜨리듯 가공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휴도옥린의 이 일장은 내상을 입기 전보다도 더욱 강해 어마어마 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 대두괴노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일곱 걸음 이나 밀려났다. 그러나 밀려났던 그는 노기가 치솟은 듯 전력을 다해 다시 덮쳐들기 시작했다. 꽈릉! 그의 소맷자락이 다시 철판처럼 팽팽해지며 사방 오륙 장 범위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 위세는 지금까지와 전혀 달라 휴도옥린은 더 이상 신법에 의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채- 앵! 일순, 그의 양 손목이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우우우웅! 동시에 허공에서 용이 울부짖는 듯한 기음이 터져 나왔다. 휴도옥린의 양손목에는 어느새 수룡음과 봉혈명이 그 예리함을 드 러내고 있었는데 그 기세는 과거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파파파파팍! 사악! 기이한 음향과 함께 일순 흰 헝겊조각들이 무수히 동굴 속을 뒤덮 었다. 대두괴노는 참담한 표정으로 이장 밖에 서 있었는데 그의 양소맷 자락은 보기 사납게 모조리 잘려나가 팔꿈치까지 드러나 보일 정 도였다. 그러나 휴도옥린의 천마형은 아직 그 공세가 완전히 발동된 것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휴도옥린의 좌우에 한 마리 봉과 비룡의 형상이 환영처럼 떠오르 고, 그 환상같은 기류가 곧바로 대두괴노를 덮쳐왔다. 대두괴노는 이미 전의를 잃은 듯 단지 감탄하는 눈으로 수룡음과 봉혈명의 가공할 위세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만 있지 않은가! "안되요! 그는 단지 시험해 보려 한 것이었어요." 박쥐공주가 이 광경에 다급한 경악성을 터뜨렸다. 기실 박쥐공주는 대두괴노가 휴도옥린을 공격한 것이 잠마천주로 서의 무공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태연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두괴노의 무공을 알고 있었으므로 휴도옥린이 수룡음과 봉혈명을 발동한다해도 승부가 나려면 한 시진 이상은 걸리리라 믿고 있었다. 헌데 불과 단 이합의 격돌로 대두괴노가 밀려나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다. "...!" 차칵! 박쥐공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떠 있던 괴이한 기류들 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휴도옥린은 어느새 수룡음과 봉혈명을 다시 천마쌍환 속에 회수한 후 조용히 대두괴노를 직시하고 있었다. "...!" 대두괴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댄 후 휴도옥린을 향해 깊 숙이 절을 했다. "잠마의 후예, 자오령의 마마영()이 잠마의 천주를 대합니 다." "마장영()도 예를 드립니다." 대두괴노의 이마가 채 지면에 닿기도 전에 십여 장 밖에 서 있던 구척괴노 역시 단숨에 허공을 날아와 대두괴노와 함께 지면에 이 마를 박고 있었다. 그 행동이 워낙 빠르고 급작스러운 것인지라 휴도옥린은 오히려 멍청해졌다. 촤촤촤악! 촤악! "잠마의 천주를 대합니다!" "천주를 대합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공포스러운 기세로 늘어서 있던 수많은 흑의 인들이 일제히 지면에 오체투지 하지 않는가! 마마영과 마장영이 지면에 이마를 대는 그 순간 흑의인들 역시 무 너지듯 일제히 오체투지하며 예를 갖추고 있는데 그 일사불란함은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일천여 개의 횃불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그 돌연한 어둠 속에 무 너지듯 일제히 예를 갖추고 있는 흑의인들의 기세.... 그것은 마치 유령의 집회를 대하는 듯 했는데.... 아아, 잠마...! 그 마도의 대성전이자 공포의 단체인 잠마가 실체()를 드러낸 것이란 말인가! 천주의 명령 한 마디면 지옥의 불길이라도 불사하지 않고 뛰어들 절대적 충성을 드러내고 있는 흑의인들, 그 흑의인들은 오직 주인 의 명령을 받는 일 이외에는 일체의 감정도 없는 냉혹한 살인기계 같은 비정한 분위기를 흘려내며 그렇게 오체투지해 있었다. 이 광경에 당사자인 휴도옥린은 물론이고 천가의 다섯 노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으음! 저 자가 진정 잠마천주였단 말인가!' '자오령의 천마장령()이 저 자를 잠마의 천주로 인정했다 면 진정한 잠마의 천주이다. 가주()께서 염려하시던 일이 실 현될 줄이야...!' 천가의 다섯 노인들 중 팔비신농 정고와 천자봉왕 무선주는 물론 이고 이 순간 세상일에 염증을 낸 듯한 표정만을 보이고 있던 천 애가자 포군락의 얼굴에도 놀람이 가득해 있었다. '으음! 이렇게 되면 팔백여 년간 서로 다투며 강호에 나오지 못하 고 있던 그 마도고수들이 모조리 강호에 나오게 된다. 실로 엄청 난 일이로구나!' 천애가자 포군락은 더욱 시름어린 표정을 머금었다. 그의 눈에는 곧이어 무림을 뒤덮을 엄청난 피의 난세가 보이는 듯했다. 헌데 이때, 천가의 다섯 기인들 이외에도 이 광경을 지켜보며 경 악의 빛을 띠는 두 사람이 있었다. 궁륭산의 정상 부근. 휴도옥린이 있는 지점에서 오십여 장 위쪽의 중턱에 서 있는 그들 은 바로 조령모모와 수빙이었다. "모모!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수빙의 눈은 곧바로 일천여 명의 흑의인들이 절을 하고 있는 전면 에 오연히 서 있는 휴도옥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당당히 서 있는 휴도옥린에게서 차라리 어이없는 느낌을 받은 듯했다. "잘 봐두거라. 저것이 바로 잠마의 신화를 세울 잠마천주의 신위 이니라." 조령모모의 음성은 격동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저 자가 이미 잠마천주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 천마()의 전 통을 이어오고 있던 자오령()의 천마장령으로부터 인정받았 으니 이제 잠마의 패권을 쥐기 위해 치열한 쟁패를 거듭해 오던 사대세력도 하나로 뭉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그렇다면 모두 저 자의 수하가 되는 것이란 말인가요?" "말할 나위가 없지 않느냐!" "끄응!" "자오령은 오직 탄생될 잠마천주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천마의 전 통을 이어 내려오며 우리들의 세력다툼에도 관여하지 않던 잠마 최고의 비밀세력이었다. 그들이 천주로 인정한 이상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 하지만... 저 도둑놈을...!" 수빙은 자신이 천마쌍환을 휴도옥린에게 건네준 것이 기이하게 얽 혀 휴도옥린이 잠마천주로까지 되어 버리자 어이없어 입을 열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기실 그녀는 휴도옥린이 천주로 인정받으며 위엄을 보이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휴도옥린 옆 에 박쥐공주가 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헌데 저 계집애는 왜 저 자와 함께 있을까?" "신경쓰지 마라!" 조령모모는 그 따위 일에는 아예 신경도 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수빙은 자꾸 박쥐공주만을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 다 돌연 발작적으로 외쳤다. "아니야, 안되겠어. 나는 저자를 천주로 인정 못하겠어. 저 천마 쌍환을 도로 빼앗지 않고는 안되겠어." 노기를 띠우던 수빙이 돌연 몸을 날려 휴도옥린이 있는 쪽으로 날 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신형은 허공중에서 멈춰져 대롱대롱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령모모의 갈고리같은 손이 어느새 그녀의 뒷덜미를 움켜 쥐고 있었던 것이다. "놔!" 수빙이 그녀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악을 썼다. 조령모모가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요 앙큼한 계집애야! 누가 네 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하지만 걱 정하지 마라. 저자는 반드시 네 조부를 찾아오게 되어 있다." "...!" "잠마를 일통시키기 위해서는 부국공인 네 조부의 도움을 받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계집애야! 저놈을 만나고 싶으면 그때 가서 만나도 되지 않느냐!" 수빙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가 언제 저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 그녀는 내심이 발각된 것이 겸연쩍은 듯 다시 악을 썼다. 그런 그 녀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조령모모가 따끔하게 입을 떼었다. "네 년이 자꾸 그런 식으로 선머슴처럼 날뛴다면 저놈을 네 신랑 감으로 만들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정 히 저놈을 신랑감으로 삼고 싶다면 이 할미의 말을 들어라." "...!" 조령모모가 몸을 돌렸다. "자, 우리는 먼저 잠마로 돌아가 있자. 저자는 반드시 잠마로 오 게 되어 있으니!" 수빙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불쑥 입을 열었다. "그 말 정말이지?" "뭐가 말이냐?" "내가 잠마로 돌아가면 저 도둑놈을... 내 신랑으로...." "흥! 이 할미가 언제 허튼 소리하는 것 보았느냐?" "그, 그럼 좋아 뭐! 나는 단지 저 도둑놈을 혼내주고 싶은 것 뿐 이지 사실 신랑감으로는 마음에 없어. 그러니 내 앞에 끌고 오기 만 하면 돼!" "흥!" 조령모모가 어이없다는 듯 수빙을 쏘아 보았다. 수빙은 겸연쩍은 듯 이미 엉뚱한 곳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바빠질 것이다. 우리 잠마의 천주가 탄생했고, 천가 의 놈들도 모습을 드러냈으니...." 무엇을 느낀 것일까? 조령모모의 음성에는 긴장이 담겨 있었다. 궁륭산의 한 곳에서 벌어진 일이 의미하는 그 엄청난 뜻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팔백여 년간 망각의 강() 저쪽에 사라져 있던 잠마라는 거대한 마의 단체가 잠마천주의 탄생과 함께 서서히 그 실체를 드 러내고.... 신비와 전설로만 알려져 있던 숭양무원, 천가 역시 그 신비를 벗 고 있었음이니.... 난세()! 그렇다! 무서운 난세가 이렇게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낙양()에서 이십 여리 떨어진 인적이 드문 야산지대에 세워진 장원()에서 회합()이 열리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신중한 모습으로 일정하지 않은 간격을 두고 속속 예 의 장원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을 듯이 보였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을 알 아 볼 수는 있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제아무리 허술한 옷을 걸치고 있다고 해도 결 코 범인()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왔다는 흔적은 어느 곳에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장원에 들어설 때까지 무수한 인()의 장막에 의해 호위 를 받았으며 마지막 참석자가 도착하자 문은 안으로 굳게 잠겼다. 다시 일대에는 엄청난 인의 장막이 겹겹이 둘러쳐지고 있었다. 커다란 백색의 원탁에 둘러앉은 참석자들은 각기 그들이 대표하고 있는 세력내에서 무시 못할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진정한 실력자 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드러난 제일인자()는 아니었다. 표면 에 드러난 제일인자란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언제나 피곤하기만 한 허울좋은 자리라는 것이 그들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전에도 은밀한 장소에서 만난 적이 있었으며 서로를 굳 게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모두의 영화와 후대들의 평화를 위해 보다 철저한 비밀을 위해 그 들에게는 각기 암호명()이 주어졌다. <자부용().> <산단().> <울금향(.> ... <연리지().> ... <벽도().> .... 그 회합은 근 세시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 기는 점점 더 가열되어 갔다. 마침내 회합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무영은 결정을 내릴 시각이 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 을 향해 물었다. "연리지?" "찬성이오." "산단?" "찬성입니다." "울금향?" "우리는 지금 너무 조급하게 서둘고 있습니다. 구월구일이 우리에 게 오고 있다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가? 만약 이 일이 잘못 되어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게 된다면...." "찬성인지 반대인지만 말씀하시오." "반대입니다." "자고()?" "구월구일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너무도 위험한 존재입니 다. 그는 아직도 우리의 외곽에서 맴돌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깊숙이 들어올 수 있는 인물입니다. 찬성합니 다." "자부용?" "본인은 구월구일 역시 잠마총사 휴도성의 일처럼 깨끗이 마무리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찬성하오." "벽도?" "나는 반대하오. 이 일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위험을 안고 있을지 도 모르오. 그는 우리의 손에 의해 키워진 살인기계이나 기실 우 리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소.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를 죽일 수 있는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 "반대입니까?" "예! 반대입니다." 무영()은 모두의 의견을 들은 후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일에 찬성하는 입장이오. 그가 잠마천주로 되었기 때문 만은 아니오. 설혹 그가 잠마천주가 되어 잠마를 일통시키고 강호 로 그들을 끌어들인다 해도 기실 우리의 일과는 상관이 없소. 그 러나 우리는 그를 경계할 필요가 있소." "...!" "...!" "이것으로 결정된 것으로 하겠소. 다음번 회합에서 이번 임무를 맡을 적임자를 추천해 여러분에게 알리겠소." 정확히 두 시진 후. 언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이 있었느냐는 듯 일체의 흔적 도 남아 있지 않은 채 예의 장원 주위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 씬거리지 않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천하를 장악하고 있는 진정한 검은 손()들의 움직임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북방의 거악() 삼위산()에서 북쪽으로 이백여 리, 중 원의 끝이라는 옥문관()을 머리 위에 이고, 그 아래 천불동 ()이라는 불가최대의 성역()을 바라보고 끝없는 황토가 있다. 돈황(). 끝없는 황야()의 지평선만이 존재하는 곳, 사방을 둘러보아도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토만의 고장이 바로 이곳일진대 그 돈 황 위에 뜨는 태양은 더욱 붉게 느껴진다던가...? 그 폐허뿐인 돈황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호수()가 존재했다. - 합랍호(). 그것은 어찌보면 호수라기 보다는 하나의 대해()를 방불했다. 합랍호는 돈황에서 옥문관까지 이어진 거대한 호수로써 일명 죽음 의 호수라고 불리우는 곳이었다. 검푸른 물결 위에는 사시사철 안개()가 떠 있고, 호수의 주위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죽음의 늪지는 무성한 갈대로 그 독아() 를 위장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갈가마귀 몇마리만이 오가고 있을 뿐 합랍호는 완전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무성한 갈대와 짙은 안개, 그리고 빛바랜 듯한 태양.... 이것은 실로 사악()으로 가득 찬 지옥의 일부를 대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헌데, 그 정적과 무서운 귀기만이 가득한 합랍호변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곳이 바로 잠마의 성이에요." 갈대로 뒤덮인 늪지의 앞에 당도한 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걸치고 있는 옷은 기이하기 이를테 없는 헐렁한 흑포이다. 그러나 그 흑포 위에 떠올라 있는 얼굴은 차가운 오만이 넘치는 가운데 빙결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박쥐공주 등미방. 그렇다! 조용히 합랍호의 중앙을 손짓하고 있는 흑포여인은 바로 박쥐공주였고 그 옆에 서 있는 사내는 휴도옥린이었다. 휴도옥린은 눈을 들어 박쥐공주가 손짓하는 곳을 응시했다. 그녀의 손은 합랍호의 중앙지점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짙은 안개로 휴도옥린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 고는 짙은 안개와 독초처럼 드넓게 퍼져있는 갈대와 그리고 곳곳 에 검은 색으로 드러나 있는 늪지대 뿐이었다. '이 합랍호의 중앙에 섬()이 있고 그곳에 잠마의 성이 있다는 것인가?' 휴도옥린은 공력을 끌어올려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자 내심 고 개를 저었다. 합랍호의 곳곳에는 죽음의 늪지가 펼쳐져 있어 기실 합랍호 중앙 에 다가가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잠마의 성은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해도 들어가는 입구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찾을 수가 없어요. 이곳의 갈대숲과 늪지대는 천연적 으로 죽음의 미로()를 형성하고 있는데다 곳곳에 본성의 수하 들이 매복해 있기 때문이에요." "...!" 박쥐공주는 품 속에서 하나의 호각을 꺼내 들었다. 삐이이익! 맑고 청량한 호각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본성까지는 안내를 받지 않으면 상당한 곤란을 받게 되요. 제아 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수많은 늪지대 사이를 흐르고 있는 수 로()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에요." 박쥐공주 등미방은 호각을 분 후 무엇인가를 기다리듯 제자리에 서서 입을 열었다. 채 일각이나 흘렀을까? 우거진 갈대사이로 돌연 그들 앞에 한 척의 소선()이 소리없 이 미끄러져 왔다. 겨우 세 사람 정도가 탈 수 있을 듯한 조각배의 위에는 한 명의 사공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죽립()을 깊이 눌러쓴 사공의 태 도는 고요하기 이를데 없어 바로 잠마의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휘익! 소선이 나타나자 박쥐공주는 서슴치 않고 배 위로 뛰어올랐다. 휴 도옥린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배 위에 오르며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자!" 스르륵! 소선이 소리없이 갈대사이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평범한 청의에 도롱이를 걸치고 있는 사공은 노를 젓는 동작이 매 우 숙련되어 소선은 순식간에 이십여 장을 나아가고 있었다. '으음! 과연 안내없이 들어서려다가는 낭패를 면치 못하겠군!' 소선이 갈대와 늪지대 사이의 한 줄기 수로를 교묘히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휴도옥린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배는 앞으로 나아가는 듯 하다 되돌아 오기도 하고 다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기도 했는데 그런 행동이 모두 보이지 않는 수로를 따 라 움직이는 것으로서 아차하면 늪지대에 빠지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사공의 배를 모는 솜씨는 너무도 능숙해 채 일각도 되기 전에 소 선은 갈대와 늪지대로 이루어진 미로를 빠져나온 듯 넓은 호면에 이르러 있었다. 이때, 휴도옥린의 눈으로 합랍호의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섬() 과 그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웅장한 성곽()의 모습이 들어왔 다. 섬 전체를 휘어감고 있는 성()의 규모는 실로 방대해 어찌보면 물 위에 성이 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성은 이미 오래 전에 건축된 듯 여기저기 빛이 바래 있었는데 하 늘을 찌를 듯한 그 웅장한 규모에 비해 어딘가 삭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뿐이랴! 멀리 성곽의 윤곽만이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나 있는 성 전체 에서는 질식할 듯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어 어찌보면 유령의 성을 대하는 듯 으시시하기만 했다. "본성에 도착하면 당신은 당분간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박쥐공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당신이 자오령의 천마장령에 의해 천주임을 인정받았다 해도 아 직은 잠마의 일을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되요. 어쩌면 그들은 당신 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훗!" 휴도옥린이 나직이 미소를 흘렸다. 박쥐공주가 흠칫해 했다. 그녀는 의혹의 눈으로 휴도옥린을 응시했다. 그러나 휴도옥린의 표정은 물처럼 담담해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성에 들어간 후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은 부국공이에 요." 그녀는 휴도옥린이 무슨 의미에서 냉소를 터뜨린 것인지 알 수 없 었으나 계속 말을 잇기 시작했다. "당대의 부국공은 팔백 년 전 잠마를 기초()했던 잠마십이천 마 중 한분이신 무천대제() 수련후()의 후예로서 본성을 사분()하고 있는 천마세()의 수장()이에 요." "천마세?" "마학성( ) 수운종()은 천마의 군사()임을 자처하 고는 있으나 본성의 사대세력 중 가장 막강한 천마세를 이끌고 있 는 동시에 또한 잠마해의 야야()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기도 해요." "...!" 일순, 휴도옥린의 눈에 놀람의 빛이 스쳤다. 잠마해는 바로 잠마가 쓰러진 후 음지에서 독버섯처럼 자생한 악 마의 단체가 아니던가. 그 잠마해의 보이지 않는 지존이 바로 잠 마를 이루고 있는 사대세력 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부국공이었단 말인가? "흥! 그는 잠마천주가 탄생되지 않는 한 절대 강호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선조들의 유지를 어긴 인물이에요." 휴도옥린이 자신의 말에 강한 반응을 보이자 박쥐공주 등미방이 싸늘하게 외쳤다. '으음 그렇다면 잠마는 이미 강호에 발을 뻗고 있었다는 말이 되 는군!' 그 세력 중의 극히 일부분이 강호에 흘러나가 잠마해라는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음이니 실로 가공스러운 일인 것이다. "부국공 수운종은 겉으로는 도도한 학자인 척 하고 또 강호의 일 을 염려하는 지자()인 척 행동하나 기실 가장 엉큼한 인물이 에요. 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이미 잠마해를 장악하고 있는 것 이지요. 그는 당신에게 부드럽게 접근해 올 것이지만 언젠가는 제 거하려 할 게 분명해요." "...!" "하지만 너무 염려할 것은 없어요. 나의 조부님께서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해 주실 거예요." "그대의 조부?" 박쥐공주의 엉뚱한 말에 휴도옥린이 의혹의 눈을 들었다. 박쥐공 주의 음성은 어쩐지 매우 부드러운 가운데 은은한 열기가 담겨 있 는 듯 했다. "잠마의 사대세력 중 하나인 십마성( )의 당대성주가 바로 저의 조부님이세요." "...!" "부군공 수운종도 본성만큼은 감히 무시하지 못하는 입장이에요." 휴도옥린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어딘가 짓궂은 데가 있는 질문이 었다. "헌데 모든 세력들이 나를 제거하려 할 것이라면서 그대는 어찌해 서 그대의 조부가 나를 도우리라는 것이오?" "...!" 일순, 박쥐공주 등미방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어 그녀는 돌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머 금었다. 뿐이랴! 기이한 열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휴도옥린을 정시하지 않는가! 더할나위 없이 사이하고 거만하며, 그리고 도도하게만 느껴지던 그녀가 이렇게 화사한 미소를 머금자 주위에 수만 가닥의 꽃이 돌 연 피어난 것처럼 눈을 어지럽혔다. "...!" 그녀의 급격한 변화에 휴도옥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알 수 없 는 불안을 느꼈다. 박쥐공주 등미방은 화사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조부님은 제말이라면 어느 것 하나 거절하지 못하시는 분이에요. 나를 무척 사랑해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당신이 나의 조부님 을 남처럼 생각하지 말고 한식구로 여긴다면 조부님도 흔쾌히 당 신을 도울 것이에요." 등미방의 말은 어찌보면 간단한 대답인 듯했다. 허나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뜻을 깨달은 휴도옥린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들이란 진정 알 수 없는 존재로군. 내가 그렇게 짓궂게 행동 했는데 그 행동이 오히려 이 여인의 가슴에 나를 인식시켰던 모양 이로군!' 남처럼 생각지 말아달라는 말은 곧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는 은밀 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휴도옥린은 고소를 머금으며 눈길을 돌렸다. 헌데 바로 이때, 박쥐공주 등미방은 무엇인가 기이한 것을 느낀 듯 돌연 사공을 향해 싸늘하게 외쳤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 선미에 돌아앉아 열심히 노를 젓고 있던 사공은 등미방의 싸늘한 호통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여전히 노를 젓고만 있지 않은가! "네 놈은 누구냐?" 등미방은 그제야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이 자신의 수하가 아님을 깨달았다. 쏴아앙! 번쩍! 찰나, 그녀의 신형이 번개처럼 사공을 덮쳐갔다. 사공은 그녀가 덮쳐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등미방은 애초부터 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립을 벗기 려는 의도였다는 듯 죽립을 낚아채며 다시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그러나 죽립이 벗겨지며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안색 은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부국공!"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 경악의 눈을 부릅떴다. 드러난 사공의 얼굴은 과연 사공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대종사의 풍도 가 아닌가. 백설처럼 희고 긴 탐스러운 은염()과 은발(), 눈썹조차 눈처럼 흰 백색이었고 얼굴 전체에 홍조가 감돌고 있어 동안( )을 대하는 듯하다. 여기에 사해를 억누를 자연스러운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 신선풍의 노문사는 박쥐공주를 향해 더할나위 없는 자애스러운 미소마저 머 금고 있었다. "당, 당신이!" "허허허! 이 욕심많은 늙은이가 본의 아니게 널 놀라게 했구나. 하지만 솔직이 이 늙은이도 네가 나를 앞에 앉혀놓고 그렇게 심한 욕을 해댈 줄은 몰랐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손녀처럼 생각했는데 말이다." "흥!" 박쥐공주는 무안해져 냉소를 터뜨렸다. 부국공 수운종이 사공으로 변장해 바로 앞에 앉아있는 것을 모른 채 무지막지한 욕을 퍼부어댔으니 이런 낭패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무안해진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오히려 발끈해져 소 리쳤다. "흐흥! 당신의 그런 태도에 누가 속을 줄 아나요. 난 당신이...!" 부국공 수운종이 다시 미소했다. "허허허! 아이야! 사내들은 순종하며 얌전한 여인들을 좋아하는 법이란다. 그런 여인이 되려면 존장을 대하는 예의부터 갖추어야 하며 특히 말을 품위있게 해야 하는 법이란다." "...!" "그렇지 않은가, 젊은이?" 박쥐공주가 욕설을 퍼부어대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고, 그 순간 부 국공 수운종의 깊고 맑은 눈이 휴도옥린을 향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휴도옥린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쩐지 부국공 수운종이라는 인물이 박쥐공주가 험담한 그대로가 아님을 느낀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어딘가 친근한 정감이 간다고나 할까...? 부국공 수운종이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렇게 구차스런 방법을 사용했네만 괜찮겠는가?" "물론입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바로 어르신네를 만나기 위 해서 였으니까요." "허허, 그럴 것이라 생각했네." 부국공 수운종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사공의 태도로 돌아가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어찌보면 어이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휴도옥린에게는 그것이 기이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랜 침묵이 이어지고 조용히 노젓는 소리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삐이익! "...!" 휴도옥린과 부국공은 벌써 모든 일을 잊은 듯 한가한 표정으로 한 사람은 노를 젓고 한 사람은 주위의 경관으로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박쥐공주의 내심은 휴도옥린처럼 편하지가 않았다. '이러면 안되는데... 여우같은 늙은이가 이곳에서 미리 기다리며 사람을 가로챌 줄이야!' 그녀는 내심 초조하기 이를데 없었다. 허나 두 사람의 태도가 너 무도 무심해 하는 수 없이 침묵을 지키는 도리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잠마의 성이 점차 눈 앞으로 다가오고, 이윽고 유령의 성처럼 고 요하며, 몽환 속의 세계처럼 신비하고, 그리고 아득한 전설을 대 하 듯 환상적인 마도의 대성전 잠마의 성에 배가 닿고 있었다. '으음...!' 휴도옥린은 조용히 몸을 누이고 있는 거대한 고성()을 대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격동에 몸을 떨었다. 그 전설과 신비, 그리고 공포의 대지()에 이렇게 첫 발을 내 딛은 것이었다. : 제31장 밝혀지는 어둠()의 그림자! 잠마의 성. 엄청난 높이의 성곽이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섬에 첫 발을 내디딘 휴도옥린이 제일 먼저 대한 것은 기이한 홍광()을 띠고 있는 지면이었디. 그리고 그 십여 장 안쪽부터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풍경이었다. 바닥에 은은한 홍광을 띠고 있는 흙이 깔려 있고 그 앞에 펼쳐져 있는 숲은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괴이한 나무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헌데, 마악 부국공 수운종의 뒤를 따라 수림 안으로 들어서던 휴 도옥린과 박쥐공주의 눈으로 돌연 괴이한 물체가 쏘아져 오지 않 는가...! 카악...! 쉬익! 수림 속에서 번개같이 튀어나와 휴도옥린을 스쳐간 기물체는 곧바 로 박쥐공주 등미방의 얼굴로 덮쳐들었다. 그 속도는 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지라 등미방은 자신을 덮쳐 온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볼 수조차 없었다. 꽈릉...! 그녀의 옥장이 폭발했다. 그러나 날아들던 물체는 교묘하게 옥장을 피해 허공으로 치솟지 않는가? "매?" 등미방은 자신을 공격해 온 것이 한 마리 검은 매()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수림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림의 안쪽에 한 소녀가 우뚝 서서 매에게 손짓하고 있었는데 바 로 수빙이었다. 쉬... 익! 수빙의 손짓에 따라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또 한 마리의 흰 매가 번개같이 박쥐공주에게 쏘아져 왔다. "흥...!" 냉소와 함께 또 다시 그 가공할 옥장이 번뜩였다. 수빙이 부리고 있는 흰매는 대단한 영물()인 듯 했으나 박쥐 공주가 이같이 마음먹고 쳐낸 일장을 피할 수는 없을 듯했다. 쏴아아앙! 헌데 허공 높이 치솟아 올라갔던 검은 매가 그 순간 등미방의 얼 굴로 다시 덮쳐오고 있지 않은가! 흑응()의 기세는 놀랍기 이를 데 없었는 데다 그 공격시기가 아주 적절해 등미방은 백응()을 향해 쳐냈던 수장()을 황 급히 회수해 흑응의 공격을 막지 않을 수 없었다. 파파팍! 휘이이잉! 그 사이에 백응이 그녀의 가슴으로 파고 들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녀의 몸을 찍어왔다. 백응과 흑응은 마치 고명한 고수의 훈련을 받은 듯 이와같이 그 수미상응의 연수()가 마치 절정고수 두 명이 연합하는 듯했다. 그 기세 또한 엄청나 등미방은 그들의 발톱에 적중되는 날에는 중 상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낱 미물들이 감히...!" 등미방은 최고로 노기가 치솟았다. 꽈릉! 고오오...! 그녀의 소맷자락 속에서 양 손이 튀어나오며 번개같이 허공을 격 해 두 마리 매를 쳐갔다. 그녀의 손은 번개가 번뜩이듯 신속했다. 허나 흑응과 백응의 대응 또한 만만치 않아 등미방은 겨우 깃털 몇 개만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호호호! 흑취, 그래, 그래! 좌측으로 파고 들어라!" "백아()는 눈을 쪼아야지!" 이 광경에 수림 안에 서 있던 수빙이 신이 나서 외치기 시작했다. 두 마리 매는 박쥐공주 등미방만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수빙의 말 을 매우 잘 알아듣는 듯 그녀가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공격해 들 고 있어 등미방은 오히려 곤경에 처하고 있었다. "흥! 여우같은 계집, 오늘 흑취와 백아에게 혼좀 나봐라! 그 잘난 얼굴을 갈가리 찢어놓고 말테니!" "수빙! 이놈들을 어서 부르지 못하겠느냐...!" 박쥐공주 등미방은 두 마리 매가 영활하기 이를 데 없어 일시지간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고 노성을 터트렸다. 부국공 수운종이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빙아! 어서 그 놈들을 불러들이거라." "안돼...! 저 계집애가 중원까지 쫓아와 나를 죽이려 했단 말이 야!" "빙아야!" 부국공 수운종이 짐짓 노기띤 안색을 지었다. 그러나 수빙은 막무 가내였다. "내참.... 할아버지도... 안된단 말이야! 저 계집애는 또 임자있 는 사내를 홀리려고 졸졸 따라나니고 있단 말이야!" "말을 듣지 못하겠느냐...!" 수운종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마지 못해 수빙이 입을 삐죽거리 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휘파람 소리가 길게 울려퍼지자 무섭게 덮쳐들고 있는 흑백의 두 마리 매는 거짓말처럼 공격을 멈추고 수빙의 양어깨에 내려앉았 다. 이때였다. 쏴... 아앙! 박쥐공주 등미방의 신형이 너울너울 허공으로 날아올라 곧바로 수 빙에게 덮쳐들었다. 공포스러운 위세로 덮쳐들고 있는 그녀의 위 세는 놀라와 최대로 노한 것 같았다. 수빙이 덮쳐오는 그녀를 바로보며 냉소했다. "어? 덤벼...!" 파... 앙! 한 가닥 섬광이 허공을 베었다. 그 무서운 오채신조가 덮쳐오는 박쥐공주를 향해 뻗어간 것이었다. 수빙의 무공은 등미방에 못지 않은 것으로써 그녀의 오채신조는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무섭게 파동치고 있었다. 꽈꽝! 쏴아아...! 순식간에 두 여인은 무섭게 격돌하기 시작했다. 부국공 수운종이 고소를 머금으며 휴도옥린을 돌아보았다. "자, 우리는 이만 가세. 저러다 지치면 그만들 두겠지." "...!" 휴도옥린도 마주 고소를 머금었다. 부국공 수운종은 조용히 혈전을 벌이고 있는 수빙과 박쥐공주를 뒤로 하고 수림 안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허허헛! 자고로 여자가 가장 추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 남자를 두 고 서로 싸울 때이지. 그 꼴이란 정말 눈뜨고는 보지 못할 만큼 역겨운 것이거든..., 하지만 싸우고 있는 여자들은 자신들이 싸우 는 이유가 사내 때문이라는 것을 애써 감추려든단 말이야.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헌데, 문득 그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그 말이 치열 하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귀에 이르자 박쥐공주와 수빙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싸움을 멈추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부, 부국공... 당신은 정말...!" 박쥐공주와 수빙은 돌연 들려온 부국공 수운종의 말에 거짓말처럼 화다닥 싸움을 멈추고 멀어져 가는 그를 향해 뽀족하게 외쳤다. 수운종은 못들은 척 하며 계속 휴도옥린을 향해 입을 열고 있었 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고로 여자의 투기란 오히려 사내의 정()을 잃게 만드는 끔찍한 것이 아니겠는가?" "맞습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시달림을 받느니 차라리 도망가버리 는 게 보통 남자들의 버릇이지요." "하지만 두 여자가 사이좋게 섬길 때는 도망갈 이유가 없지 않은 가?" "물론이지요." 휴도옥린과 수운종의 그림자는 이내 멀어져 갔다. 그들이 태연히 주고 받은 말에 박쥐공주와 수빙은 충격을 받은 듯 서로의 눈을 찾았다. 그녀들의 마음 속으로는 휴도옥린의 능글맞은 대꾸에 노화가 치밀 었으나 그의 말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으니.... '저 늑대같은 놈! 벌써부터 할아버지와 죽이 맞아가지고...! 하지 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계집과 더 싸울 수도 없잖아?' '흥! 능글맞은 사람! 언제 이 계집과 눈이 맞아가지고...!' 박쥐공주 역시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더 이상 수빙과 격돌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흥!" "흥? 나도 흥이다!" 박쥐공주와 수빙은 서로를 잠시 노려보다가 외면했다. "그래야지, 이 계집애들아. 서로 합심해서 저 놈을 꽉 붙잡지는 못할망정 너희들끼리 싸워서야 어떻게 하느냐!" 그때 불쑥 조령모모가 나타나며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 "...." 수빙과 박쥐공주는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한 명은 얼음보다 차갑고 오만한 박쥐공주였고, 또 한 명은 남자 뺨치는 괴물소녀였으나 이 순간 그들의 목덜미는 붉게 물들어 있 어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합랍호의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하나의 전각(), 그 전각의 빈 청에 탁자를 마주하고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휴도옥린과 부국공 수운종이었다. 수운종의 안색은 이 순간 무섭게 내려앉아 있었다. "자네가 노부를 남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면 노부가 묻는 말에 사실 대로 대답해 주기를 바라네." "...!" 부국공 수운종의 태도는 실로 허탈하고 솔직해 휴도옥린은 구월구 일로서의 모든 천성을 버리기로 내심 마음먹었다. 구월구일 휴도옥린, 그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제이의 천성을 지 니고 있었고 살수로서의 기본이었다. 심지어 자신에 대해 거의 완 벽히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그들 살수의 본능인 것이다. 그러나 수운종 태도는 솔직할 뿐 아니라 깊은 연대감을 풍기는 것 인지라 휴도옥린은 오랜 기간동안 몸에 익혀온 경계본능조차 풀어 놓을 정도였다. "자네의 부친은 누구인가?" "...!" 휴도옥린이 눈을 들었다. 그의 내심으로는 적지 않은 놀람이 가득 해 있었다. 부국공 수운종이 많은 것을 물으리라고는 예상하고 있 었으나 부친에 관해 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부친의 함자는 휴도자, 성자를 쓰셨습니다." "어찌 되었는가?" 부국공 수운종의 눈에서 강렬한 기광이 뻗어났다. 그는 이미 그것 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놀란 빛은 아니었다. "돌아가셨습니다." "으음...!" 수운종이 눈을 감았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 왔다. "못난 사람... 끝내 혼자서만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니...!"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돌연 감고 있는 수운종의 눈아래로 눈물이 맺히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절대 가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휴도옥린은 침묵했다. 그러나 부국공 수운종의 부친을 대하는 진 정이 그의 가슴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잠시의 격동을 가라앉히며 문득 수운종이 앉아 있는 탁자의 모서리를 눌렀다. 차... 칵! 놀랍게도 그가 앉아 있던 태사의에는 기관장치가 되어 있었고 기 관을 작동하자 팔걸이 아래가 스르르 미끄러져 나오며 하나의 옥 함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 옥함은 자네의 부친이 내게 남긴 것일세." "아버님께서?" 휴도옥린은 눈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잠마의 군사였던 봉 조하였으니 부국공인 수운종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으리라 짐작 되어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이 옥함은 잠마에 어떤 위기가 도래하거나 나의 일신상에 알 수 없는 변화가 생기게 되는 순간에 열어보라고 남긴 것이네. 이젠 자네가 보게." "왜 제가...?" "훗! 자네의 부친은 내가 일신상의 위험에 처했을 때 이것을 열어 보라고 했으나 나에겐 나를 버티게 하는 신조가 있지. 후회는 아 무리 빨라도 늦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미 그대의 부친과 헤 어진 후에 강호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느끼고 열어보 았네." "...." "자네 역시 이것을 읽어두는 것이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될 듯 싶 네." "...!" 휴도옥린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부친 휴도성이 남긴 유진이 라면 그렇지 않아도 손에 넣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인 것이다. <노대가를 홀로 두고 떠나는 이 어린 아우를 용서해 주십시오. 세 상에 가장 큰 불효가 나이 든 부모를 남겨두고 길을 떠나는 것이 라 했는데 이 어린 아우를 안아 키운 노대가가 슬퍼할 것을 알면 서도 이렇게 떠나는 것을 생각하면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노대가께서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서찰. 옥함 속에는 단지 한 통의 서찰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글 귀를 대한 휴도옥린은 격동을 금할 수 없었다. 필체는 바로 그의 부친 휴도성의 그것이었다. 세 살 때 부친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던 휴도옥린은 당시 부친의 서체를 흉내내기에 얼마나 노력했던가. 아득한 추억이 그의 가슴 에 불같은 고통을 남기며 스쳐 지나갔다. 애써 잊으려 하는 추억 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부모의 죽음이 있 던 그 날의 추억이 이어져 그는 모든 추억을 무의식 저쪽에 깊이 잠가버렸던 것이다. 휴도옥린의 눈이 휴도성의 글을 따라 움직였다. <노대가께서도 아시겠지만 수백 년 동안 일어난 모든 난세는 무림 ()에서 시작되어 천하를 어지럽힌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소제는 더 이상 무림의 분규로 세상이 어지러워지 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림만 평온하다면 천하는 안정 되는 것입니다. 소제는 그런 꿈을 안고 떠났고..., 그 이유는 이미 짐작하셨겠지 만 새로운 잠마천주의 탄생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으음...!" 휴도옥린이 침음했다. 그의 부친이 마궁의 비밀을 풀 수 있는 한 장의 마고해도를 지닌 채 잠마를 떠나 잠적해 버린 이유는 잠마천주의 탄생을 막기 위함 이었던가? <잠마천주가 탄생되면 엄청난 힘을 지닌 본성의 모든 고수들이 강 호로 나가지 않겠습니까? 소제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해서 소제에 게 주어진 봉조하라는 신분을 이용해 잠마천주가 탄생되는데 필요 한 잠마비도를 영원히 감추기 위해 잠마를 떠났던 것입니다. 헌데...> <소제는 신분을 감추고 중원을 여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도 사귀 고 좋은 지기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학사()도 있었고 무인()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이 천하의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점차 그 어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천하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웅대한 계획이었습니다.> "...!" 글귀를 읽어내려가던 휴도옥린의 눈빛이 굳어졌다. 실체()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던 어떤 제삼의 세력 (), 그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들에 대한 단서가 부친의 서찰에서 단편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계획이란 절대 허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하의 모든 분야에 있는 이인자()들의 모임, 그 제이인자()들 의 모임을 창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문()과 무()의 각 방면은 물론이고 상계()와 관계() 등등.... 기실 천하를 이루고 있는 모든 분야의 실질적인 관장자는 그 세력 의 수뇌가 아니라 그 휘하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인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분야, 각 세력의 제이인자들의 모임, 그 모임의 의미는 간단합 니다. 그들이야말로 실질적인 관장자이므로 그들이 자신의 상관인 수뇌 들을 은연중 간섭하여 더 이상 평화를 깨는 일을 하지 않게 만드 는 것이었습니다. 모임의 원래 취지는 이와같이 천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 휴도옥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천하 각 분야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들의 이인자들, 그렇다! 그들 이야말로 실질적인 활동자들인 것이다. 제일인자는 사실 상징적인 존재이고 조직의 하부활동이나 세세한 움직임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다. 때문에 모든 세력을 움직이고 있는 인물들은 그 드러나지 않은 제이인자라고 말할 수 있었는 데.... <우리들은 천하의 평화를 위해서는 비정해질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모든 세력은 서로 공존할 것입니다. 만약 제일인자가 다른 세력을 병탄하기 위해 세력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 모든 이인자들이 합심해서 제거할 것 입니다. 우리들은 천하의 모든 세력을 포함하는 거대한 모임이었기에 한 세력의 우두머리를 제거하는 것 따위는 아주 간단하게 여길 정도 로 그 힘이 커졌습니다. 예를 들어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치려고 계획하고 있다면 공격세 력의 이인자()가 모든 정보를 상대세력에게 누출할 것이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힘을 함쳐 야망을 지닌 수뇌를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제 인자들의 연합세력이라는 모임 자체가 황당할지도 모 릅니다. 그러나 그 모임은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헌데, 소제의 계획으로만 끝날 수도 있던 이런 모임이 알고 보니 오래 전에 탄생되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소제는 제이인자의 모 임에 아주 자연스럽게 포섭된 것이지 소제가 그 모임을 계획한 것 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이인자의 모임은 소제의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방향 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제이인자들의 모임, 그 모임의 성격은 탄생된 이후 이미 급격히 변화되어 있었다. 모임을 주관한 각 세력의 이인자들은 평화를 원했고 그리고 영원 한 영화를 원했다. 그들은 곧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수성 ()의 속성을 지닌 채 천하의 평화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영 원한 영화에 대해 더욱 비중을 두게 된 것이었다. 해서 그들은 오히려 거대한 야망을 키우게 되었고 결국은 천하를 암중에서 지배하려는 제삼의 세력이 되고만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천하의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히려 천하에서 가장 파괴적인 집단이 되었고, 그리 고 가장 비정한 세력이 되어 이인자들의 야망을 실현시켜주는 연 합세()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었습니다.> 휴도성이 남긴 서찰의 후반부에는 참담한 고심의 흔적만이 기록되 어 있었다. 그는 제이인자들의 모임에 자연스럽게 포섭되었고 그 리고 그 모임의 실체를 깨닫는 순간 전율하며 고뇌했고 그리고 공 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그들과 싸울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나의 결심을 안다면 물 론 나는 그들의 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모든 세력은 이미 그들의 세력권안에 존재하는 작은 부속 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검부와 잠마해는 물론이고 잠마와 황궁 마저 그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정도이니 소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죽음을 바치는 대가로 나는 한 아이를 키울 것 입니다. 그 아이는 제이인자들의 모임에서 은밀히 창설한 매원()이라 는 살수조직에서 키워질 것이고, 그리고 언젠가 이 모든 일을 알 게 되면 그들을 부술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소제로서 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원한다면 그 아이가 나머지 잠마비도마저 얻어 마궁의 비밀을 푼 뒤 다시 노대가의 도움으로 천마쌍환의 주인이 되어 잠마천주가 되는 것 뿐입니다. 잠마천주가 되어 은밀히 이인자들을 제거해 나 가는 길만이 그 거대한 괴물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서찰은 중도에서 끝나 있었다. 무엇인가 더 할말이 있는 듯 했으 나 휴도성은 돌발적인 사태에 직면한 듯 서찰을 계속 쓰지 못한 듯했다. "으음...!" 휴도옥린은 서찰을 내려놓으며 눈을 들었다. 그의 내심에는 경악과 충격이 가득해 있었다. 천하 모든 세력의 제이인자들의 모임, 천하의 평화를 위해 이인자 들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또 때로는 힘을 합쳐 각 세력의 수 뇌가 피의 야망을 드러낸 경우 제거하기까지 하는 이인자들의 모 임, 그 제이인자들의 모임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창설목적과는 달 리 이제 엄청난 힘을 지닌 파괴적인 단체로 성장한 것이었으 니.... 아아...! 전대의 잠마총사였으며 봉조하였던 휴도성의 서찰에 의해 드러난 내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휴도옥린은 부친의 서찰을 읽은 후 오랫동안 격동을 감출 수 없었 다. 그 서찰로 인해 휴도옥린은 그 자신이 매원에서 달빛살수로 키워지게 된 경위와 잠마비도 중 한 장이 그에게 전해진 경위를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부친 휴도성의 안배였던 것이다. 휴도옥린은 부친이 어떻게 그의 신분을 감추고 매원에 넣게 되었 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휴도옥린의 부모가 비내리는 소수를 바라보며 죽음을 당한 그날, 그 죽음이 있기 전에 휴도성 은 이미 치밀한 안배를 끝내 놓은 것이었다. 잠시 후, 휴도옥린은 돌연 몸을 일으켜 부국공 수운종에게 대례를 올렸다. "소질이 대백()께 예를 드립니다." 휴도옥린의 음성은 미미하게 떨려 나왔다. 부친 휴도성과 끈이 연결되던 사람과의 만남..., 그 인연()의 조우가 그로 하여금 가슴 떨리는 감동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던 것 이다. "...!" 수운종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의 눈빛에는 진정이 어려 있었 다. "네가 이렇게 성장한 것을 지하의 네 부친이 본다면 기쁨을 참지 못할 것이다." "...!" "기실 네 부친은 이 서찰을 내게 보내며 어느 정도 난세()대 해 경각심을 심어주며 그 대비책으로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세력 을 만들기를 권했었다." "아!" 수운종의 말이 이어졌다. 휴도옥린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 였다. "기실 네 부친조차 그들의 일원이었으면서도 그들에 대해 아는 것 이 거의 없다고 했다. 제이인자의 모임은 철저한 비밀유지를 위해 각기 암호명을 사용하고 있어 모든 사람들의 신분조차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 "나는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네 부친의 서찰을 대하는 즉시 당시 십여 세 미만의 아이들을 은밀히 모아 그들을 훈련시켰다. 그것이 벌써 이십 년 전이었으니 이제 그 아이들의 나이는 삼십여 세..., 아주 쓸만한 재목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 "사실 내가 선조들의 유시를 무시한 채 잠마해를 장악하고 야야 ()가 된 것은 그들 율지비()를 조사할 삼환회() 의 기재들을 은밀히 키우기 위함이었다." "율지비?" "그렇다. 그들 제이인자의 모임의 명칭은 율법()과 칼()을 의미하는 율지비()인 것이다." "...!" "지금쯤 삼환회는 율지비에 대해 어느 정도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삼환회와 백부님과는 어떻게 연락을 주고 받습니까?" 휴도옥린의 눈빛에서 기광이 번득였다. 휴도옥린은 삼환회에 대해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미 부친을 죽인 일곱 명의 사내가 바로 제이인자의 모임인 율지비의 인물들임을 깨달았고, 그들 일곱 명에 대해 가장 빨리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삼환회를 이용하는 것임을 느낀 것이었다. 수운종의 말이 이어졌다. "삼환회에서 나에게 연락할 수는 없다. 내가 그들을 키우기는 했 으나 그들은 나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연락할 방법은 있으나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삼환회에 단 한 번도 연락을 취해본 적이 없었다." "...?" 휴도옥린의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기이한 일이 아닌가! 수운종은 스스로 삼환회를 만들어 율지비에 대해 조사하도록 만들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서로 연락하지 않았 다 함이니 진정 괴이한 일이 것이다. 휴도옥린의 눈에 의혹이 스치자 수운종이 빙그레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삼환회는 천하의 어떤 세력과도 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세력이다. 그들은 오직 율지비의 일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력으로써 한 사람의 대주()를 중심으로 내가 처음에 내린 한가지 명령 인 율지비에 대한 조사만을 은밀히 진행하고 있다." "...!" "그들의 존재는 철저한 비밀에 가려져 있을 필요가 있었다. 만약 율지비에서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다면 삼환회는 그 즉시 말살되고 말기 때문이다. 해서 나와 그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독 자적으로 명령을 수행해 나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다만 그들을 멀리서 지켜볼 뿐이지." "아!" 휴도옥린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수운종의 말이 이어졌다. "인간이 하는 일에 절대적인 비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이인자의 모임 역시 철저한 비밀이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느끼고 있음이다. 해서 나는 오히려 삼환회를 만들 어 놓기는 했으나 그들에 대해 잊으려고 애쓴 것이다." "그랬군요." "이것이 세력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너도 이 이치 를 배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 휴도옥린이 문득 눈을 들었다. 그의 입에서 단호한 음성이 흘러나 왔다. "헌대 나는 그 삼환회의 대주를 한 번은 만나야 될 필요가 있습니 다. 그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게 해주지 않으시렵니까?" "부친을 죽인 자를 찾기 위한 것이냐?" "예!" 수운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기실 너는 이미 삼환회의 대주를 만났었다." "그가 누구란 말입니까?" "바로 잠풍인랑 희수수라는 청년이다. 그는 네가 흑밀원을 공격할 때 너를 잡기 위해 그곳으로 간 적이 있었다. 아마 창사라는 네 지기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아!" 휴도옥린의 뇌리로 문득 창사의 옆에 서 있던 인물의 영상이 스쳐 갔다. 흑금의로 만들어진 짙은 흑의를 걸친 준수한 미공자, 그 잠풍인랑 회수수가 바로 율지비를 추적하기 위해 탄생되어진 삼환회의 대주 였단 말인가. 수운종은 돌연 품 속에서 하나의 작은 깃털을 꺼내들었다. 금빛이 영롱한 세치 크기의 깃털, 수운종은 묵묵히 금령우를 휴도 옥린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 금령우는 삼환회의 영주()를 상징하는 신물이다. 삼환회 는 아무에게도 소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세력이나 이 금령우가 있 으면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받아라. 천하에 인재가 많다하나 율지비를 괴멸시킬수 있는 인물 은 너 한 명 뿐이다. 너는 삼환회가 조사해낸 것을 바탕으로 그들 을 무너뜨려야 한다." 휴도옥린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휴도옥린이 금령우를 간수하는 것을 지켜보던 수운종이 고개를 돌 려 합랍호의 정경을 응시하였다. 안개와 기이한 홍광으로 물들어 있는 합랍호의 정경은 귀기가 흐 르는 듯 사이하기만 했다. 그 합랍호 위에 석양빛이 흐르고 있는 광경은 보는 이에게 기이한 감흥을 주고 있었다. 슷! 스스슷...! 돌연. 헌데 이 순간, 기이한 기세가 물결처럼 일어나며 휴도옥린과 수운 종이 앉아있는 빈청 주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수없이 밀려들고 있 지 않은가! 사삭! 사사삭! 순식간에 오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빈청을 에워싸며 휴도옥린과 수 운종을 포위했다. 그들의 기도는 범상치 않아 한눈에 가공스러운 마도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청의중년인이 서서히 휴도옥린과 수운종이 있는 빈 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른 듯한 체구에 어딘가 병약해 보이는 인상이다. 금욕적인 기질 을 풍기는 청의중년인에게서는 반면에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같은 것이 엿보이고 있었다. 매부리코와 굳건해보이는 턱, 청의중년인은 다소 수심에 잠겨있는 눈으로 휴도옥린과 수운종의 삼장 전면에 이르러 수운종을 가만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왔느냐?" 수운종이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히 말했다. 그는 빈청을 빈틈없이 에워싼 흑의인들이 분명히 적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 면서도 오히려 태연하기만 했다. 청의중년인이 오랫동안 수운종을 우수어린 눈으로 직시하다 입을 열었다. "사부님! 사부님과 구월구일을 죽이기 위해 왔습니다." "...!" "하지만 이것이 결코 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아 주십시오." "너였구나. 나의 세력에 숨어있는 율지비의 인물이 누구일까 언제 나 궁금했었는데...." 수운종이 미소했다. 청의중년인이 더욱 우수에 잠긴 눈으로 입을 떼었다. "그렇습니다. 천마세와 잠마의 후예들을 위한 것이니 기꺼이 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실 사부님께서 강호로 나가 잠마해를 장악했을 때에 이미 사부 님을 죽여야 했으나 그곳에 있는 우리 인물이 반대해 그때는 움직 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호, 잠마해에도 율지비의 인물이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노부 는 너희들의 손 안에서 놀아난 셈인가?" "...!" "하긴 잠마해의 실권은 무영()이 쥐고 있는 것이나 진배 없었 으니..." 수운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청의중년인은 바로 천마세의 태상()인 수운종의 네 제자중 한 명이었으며 평소에 돋보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치밀한 성격과 냉담한 상황판단 능력은 이미 천마세의 모든 수하들 사이 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그의 무공수위조차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문득, 수운종이 환하게 미소했다. "선고()!" "예!" "이 사부를 죽일 자신이 있느냐? 그리고 구월구일은 이제 살수 구 월구일이 아니라 잠마의 천주이시다. 과연 너의 무공으로 그를 잡 을 수 있다고 믿느냐?" "이 제자가 사부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듯이 사부님 역시 저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너는 평소에도 치밀하기 이를데 없는 성품이었지. 결코 실수를 하지 않는 성품이라 나는 네가 실수하는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그 치밀함으로 오늘의 일을 준비했다면 과연 나는 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그렇습니다. 저는 일을 시작할 때 그 일의 어려움을 실제보다 두 배 정도 더 어렵게 평가한 후 일에 착수합니다. 해서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지요." "호...!" "하지만 아직은 모자라다고 생각합니다. 해서 저는 오늘 사부님의 능력을 평소보다 네배 정도 더 높이 평가한 후 이곳으로 온 것입 니다." 실로 무서운 말이 아닌가! 상대를 능력의 네배 정도로 평가해 주었다. 그런 이후에 일에 착 수한 것이니 절대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실로 치밀하고도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보면 소름끼치는 말이기도 했는데, 수운종이 다시 감탄한 듯 고개를 끄 덕였다. "옳은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너와 같이 치밀하다면 아무도 실패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때, 휴도옥린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며 전신의 진기를 끌어 올리 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지금의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완벽한 죽음의 덫으로써 드러나 있는 오십여 명의 고수들 이외에도 더욱 많은 고수들이 빈청 주위에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 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일반고수들이 아니라 최정예의 고수 들인 것이다. '율지비 과연 무서운 조직이다. 내가 이곳으로 올 것을 미리 알 고, 그리고 부국공을 만날 것을 미리 알고 이런 안배를 해놓았다 니...!' 이때였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덫 가운데 빠져있는 수운종의 입가에 돌연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절대란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지. 천하의 어떤일도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네가 치밀하다면 이 사부 역시 치밀한 사람임을 명심했어야 했다. 이 사부는 그 절대적인 위기를 가정하고 항상 또다른 안배를 준비하는 사람인 것이다." 청의중년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수운종의 말에서 섬뜩한 불안을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찰나, 그의 입에서 발작적인 외침이 터져나왔다. "쳐라!" 꽈꽈꽈꽈앙! 와르르릉! 그의 입에서 죽음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빈청의 사방 벽면과 지붕이 터져 나가며 운집해 있던 고수들이 밀어닥쳤다. 그 기세는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해 제아무리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듯했다. 덜커덩! 헌데 돌연 수운종과 휴도옥린이 서 있는 일장 둘레의 바닥이 그대 로 꺼져 내리지 않는가? 우웅! 다음 순간 전각이 한 바퀴 회전하며 그들의 몸을 집어삼킨 지하통 로를 감추어 버렸다. 이것은 실로 눈 깜짝할 순간의 변화였다. 이 돌발적인 상황에 청의중년인의 안색이 완전히 탈색되었다. 그 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같은 고함성이 터져 나왔다. "잡아라! 절대 놓치면 안된다! 잡아!" 그는 완전히 실성한 듯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스스로 용납하지 않던 그가 생사가 걸린 중대한 시점에서 실수를 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수운종에 대해 그 자신의 확신과는 달리 완전히 몰랐 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는데..., 한 번의 실수, 그 단 한 번의 실수가 곧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것 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완전히 실성한 듯 소리를 지르며 날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나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경우에 대비해 한 가지 최후의 대비책은 마련해 두는 법이란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발을 구르고 있는 그의 귀로 부국공 수운종이 사라지기 직전에 했던 말이 악마의 외침처럼 웅웅거리며 떠오르고 있었다. : 제32장 죽음()... 살수()의 고향 잠마의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투쟁를 거듭하고 있던 사대세력의 회담은 급격하고 돌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돌발적인 회 담은 천마세의 세주이자 부국공인 수운종이 개최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전(). 정중앙에 사각의 거대한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사면에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태사의가 놓여 있다. 태사의 위에는 각기 신태비범한 인물들이 긴장된 빛으로 정좌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의 입에서 힘찬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마천주인 구월구일 휴도옥린이라는 자와 부국공이 힘을 합친 이상 우리들이 취해야 할 결론은 단 하나입니다. 여기에 계신 세 분이 힘을 합쳐야 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회의를 주도하는 듯 입을 열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천마세의 세주이자 부국공인 수운종의 네번째 제자였던 사인귀효( ) 관선고()가 아닌가! 제이인자의 모임인 율지비의 인물로서 바로 부국공 수운종과 휴도 옥린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인물인 그가 부국공과 휴도옥린을 놓친 후 바로 천마세를 제외한 삼대세력의 지존들에게 연락을 취해 회 의를 열게 된 것은 전격적인 행동이랄 수 있었다. 잠마의 사대세력을 이루고 있는 나머지 삼대세력의 지존들은 이 회의가 잠마의 실질적인 일인자인 부국공 수운종이 개최하고 있는 줄 알고 참석했었다. 그러나 회담은 바로 그의 네번째 제자에 의 해 주도되고 있었고 놀랍게도 사인귀효 관선고는 이미 천마세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이 점이 삼 인의 지존에게는 다소 의외였던 듯했다. 그러나 그 일 에 대해 입을 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치자고? 좋지. 아주 좋아!" 관선고가 회담의 목적을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 일순 좌측 제 이좌()의 홍의노인이 조는 듯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거렸 다. 그의 용모는 실로 특이한 것이었다. 눈두덩이의 살이 축 쳐져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는 듯 느껴지 고 있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드문드문 빠져있고 피부는 새카만 가 운데 검버섯이 피어있어 어찌보면 거동조차 불편한 병약한 노인으 로 보였다. 일순, 그의 축 쳐진 한쪽 눈두덩이가 치켜져 올라가며 그 속에서 새파란 기광이 뻗어 나왔다. "헌데 자네의 말을 어떻게 믿지?" 사인귀효 관선고가 얼굴을 굳혔다. 그는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않 은 채 입을 열었다. "저는 사부님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한 놈입니다.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 분을 도와 그들을 제거하는 방법 뿐입니다. 그들은 한 시진 전에 이곳에서 도주했습니다. 수하들이 모조리 동 원되어 추적하고 있는 중이나 아직...." 사인귀효 관선고는 놀라우리만큼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눈 앞의 이 세 노인을 속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고 모든 것을 솔직히 밝히는 길만이 그가 살 아남을 수 있는 한 가닥 활로임을.... 그의 이런 솔직한 태도에 세 노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때, 좌측 제삼좌()에 앉아있던 자의노인이 눈도 들지 않 은 채 불쑥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사부를 제거하려 했느냐?" 자색 소도()로 말없이 손톱을 손질하고 있던 노인, 눈에서부 터 비스듬히 턱 아래에까지 한 줄기 칼자국이 그어져 있는 자의노 인은 깡마른 체격에 왜소하기까지 했으나 기이하게도 그에게서는 한 자루 검날을 대하는 듯한 냉기가 번져나오고 있었다. - 검마() 연리귀(). 잠마를 사분하고 있는 사대세력 중 흑사단()의 지존. 그는 천마세의 세주이자 부국공이었던 수운종이 회의를 개최한 것 이 아니라 그의 네째제자에 불과하고 거의 무명이다시피했던 사인 귀효 관선고가 회의를 요구한 것임을 알게 된 순간 짜증어린 표정 을 짓고 있었다. 사인귀효 관선고는 마치 심문을 당하는 듯 긴장된 음성으로 대꾸 했다. "야망때문이었습니다. 저역시 세 분과 같이 패권을 겨뤄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인귀효 관선고는 말을 마치고 아직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우 측 제일좌의 흑의노인을 응시했다. "...!" 그의 눈빛에 더욱 긴장이 스쳤다. 우측 제일좌의 흑의노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까지 내리감고 있 는 상태였는데 놀랍게도 그 상태에서도 좌중을 압도하는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는데 간간이 뜨여지는 눈에서는 기이한 광채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 눈빛은 대하는 것만으로도 최면에 걸릴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 다. 검은 피부에 더욱 검은 흑의에 마치 한 그루 고죽()같은 분위 기.... 백탁 주위에 둘러앉은 인물들은 기실 모두 이 흑의노인을 주시하 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 흑의노인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형상 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십마성주(), 마영제() 등량용(). 천마세 이외에 가장 막강한 십마성을 이끌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박쥐공주 등미방의 조부로서 그 잔인한 성품과 살모사 와 같은 치밀하고 집요한 심기로 인해 모든 잠마고수들이 가장 두 려워하는 존재인 것이다. 지금 천마세의 내부에 이와같은 내분이 일어난 상태에서는 그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잠마의 사실상의 최강고수이며 부국공 수운종과 앙숙으로 지내고 있던 그의 입에서 돌연 기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꿇어라!" "...!" 사인귀효 관선고의 눈이 멍청해졌다. - 꿇어라! 그가 이 회의에서 최초로 꺼낸 한 마디, 그 나직한 음성은 실로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사인귀효 관선고는 등량용의 입에서 튀어나온 돌연한 말에 일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빛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태사의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있 었다. 등량용의 권태스러워 하는 음성이 조용히 이어지기 시작했다. "선고! 노부는 네놈같은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잘 알고 있다." "...!" "네놈같은 놈들은 이인자()의 자리에 만족할 뿐이지 결코 절대자()가 되려는 야망 따위를 지니지 못한 놈들이다. 그 이유는 절대자가 될 수 없는 그릇임을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이 지." "으음!" 사인귀효 관선고는 이어지는 등량용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 을 내뱉았다. 등량용은 여전히 권태스러운 눈빛이었다. "네놈같은 놈들은 또한 절대자의 권좌라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 자리인가를 잘 알고 있지." "...!" "...!" 등량용의 일방적인 태도에 나머지 이 인 역시 일시 놀란 눈빛을 띠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거물()들답게 별로 의외스러운 일 이 아니라는 듯 느긋한 태도로 등량용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고! 네 놈은 약삭빠르고 영리한 놈이다. 그리고 현재의 지위에 만족해 하고 있는 편이었지." "...!" 사인귀효 관선고의 눈에 점차 불안의 빛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등량용의 말투는 매우 부드러운 듯 했으나 어떤 무서운 의미를 담 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의 모든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그것같은 말투였다. "헌데 그런 네가 왜 굳이 생명을 건 모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부 를 제거하려 했을까?" "으음...!" "야망때문은 아니야! 아암, 그럴 리가 없지." 등량용이 혼자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관선고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입고 있는 옷이 하나하나 벗겨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을까?" 등량용이 나직이 독백하듯 말하며 돌연 관선고의 눈을 직시했다. 무서운 눈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며 관선고의 뒤통수까지 꿰뚫어 버릴 듯한 그 눈빛에 관선고의 얼굴이 점차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이인자(). 그들은 종종 자신들이 일인자나 진배없는 능력을 지녔다고 자부한 다. 그들이 보기에 일인자는 시기와 운을 잘 선택한 인물들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오히려 일인자들이란 그저 허울좋은 돼지들 로만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을 이인자들의 손에 의지하는 듯이 느 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순간 사인귀효 관선고는 점차 일인자들, 그 절대자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영제 등량용. 그도 그런 절대자 중의 한 명인 것이다. "선고! 본좌는 네놈이 어떤 세력의 사주를 받고 있다고 믿고 있 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간덩이가 부은 짓을 할 수가 없는 것 이다." "그, 그것은 대제()의 추측일 뿐이오." 관선고가 짐짓 냉정을 찾으며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등량용은 이 미 그의 항변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과연 어떤 세력일까? 본 잠마의 부국공이자 천마세의 세주이며 또한 잠마해의 야야라는 엄청난 신분을 지닌 부국공 수공()을 제거하라는 사주를 네가 선뜻 응할 정도라면 실로 엄청난 세력일 텐데 그런 막강한 힘을 지닌 세력이 과연 어떤 세력일까?" 등량용의 태도는 마치 한 마리 원숭이를 붙잡아 놓고 희롱하는 듯 했다. "황궁? 신검부? 아니, 신검부 뒤에 있는 그 천가나부랑이 들일까? 아니야, 아마 그 제삼의 세력인가 뭔가 하는 곳일거야." "...!" 일순, 사인귀효 관선고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십마성주 마영제 등량용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하지 않은가! 사인귀효 관선고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있던 자세에서 벌 떡 몸을 일으켰다. "꿇어라!" 싸늘한 일같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은 한 자루의 비수처럼 관선고 의 심신을 제압해 그로서는 다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정도 였다. 등량용의 음성이 다시 권태로운 듯 말을 꺼낸다. "아무튼 좋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본성인 것이다. 나 역시 느닷 없이 출현한 잠마천주라는 애송이에게 본 잠마를 내주고 싶은 생 각은 없는 사람이다." "...?" 절망으로 하얗게 질려있던 관선고의 눈에 일말의 희망이 솟아났 다. 등량용이 말을 이었다. "우선 네놈의 의견대로 우리 사대세력이 힘을 합치기로 하자. 그 러나...." "...?" 등량용의 눈이 다시 관선고를 응시했다. 관선고는 일순 가슴이 철 렁하는 느낌이었다. 등량용의 그 잔잔하게 빛나는 눈 깊은 곳에서 어떤 살의()를 느낀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나 넌 죽어 주어야겠다!" "헉! 대, 대제!" "선고, 본좌는 결코 네놈이 사부를 배반한 것 따위를 탓하지 않는 다. 본좌 역시 배신을 밥먹듯이 해왔기 때문에 오늘의 자리를 얻 은 것이니까" "...!" "그러나 본좌는 결코 잠마()를 배신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나 는 결코 잠마의 배신자를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으음!" 사인귀효 관선고는 이제 결코 요행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음 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자부심이 불러일으킨 실수였다. 그는 역시 이인자였고 결코 절대자들의 깊은 비밀과 그 절대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결코 남에게 농락당하는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때였다. "과연 등공()다운 말씀이외다." 돌연 그들이 회의를 열고 있는 대전의 한쪽 문이 열리며 조용히 두 그림자가 들어섰다. "...?" "...!" 회의가 열리고 있는 대전의 주위로는 일천도 넘는 마도의 최절정 고수들이 겹겹이 포위의 막을 펼쳐놓은 상태이다. 그러나 들어서 고 있는 두 그림자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은 듯 했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수하들은 침입자에 대한 보고를 해오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경악은 단지 사인귀효 관선고 에게만 해당되는 듯했다. 세 명의 지존들은 아무런 놀람도 드러내지 않은 채 침묵하고,들려 온 음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내 제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기를 바라오. 그의 목숨은 내가 거두어야 하는 것이오." 음성이 끝날 즈음에서 두 그림자가 완전히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부국공과 휴도옥린이었다. "...!" "...!" 등량용은 강렬한 눈으로 수운종을 직시했다. 두 명의 절대자, 거물들의 눈이 허공에서 잠시 얽혔다. 그들의 눈 에 담겨있는 것은 가득 찬 적의도 아니었고, 어떤 증오의 빛같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함께 늙어가는 절대자들끼리의 우의가 담긴 눈빛이랄까? 그러나 등량용의 눈이 휴도옥린에게 돌려졌을 때, 그 눈에서 번뜩 이는 것은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무서운 패기였다. "...!" 휴도옥린 역시 그를 마주 보았다. 등량용의 눈이 폭발하는 화산같은 눈빛이라면 휴도옥린의 눈은 비 어있는 바다()와 같았다. 휴도옥린의 눈에는 진정 아무런 빛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무엇을 달성하 기 위한 야망같은 것을 품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그가 살인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었기에 살인을 완수했고, 그리고 자신의 손에 죽어가는 자에게 증오나 연민 따위도 느껴본 적이 없 었다. 그가 다른 살수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바로 그 점이었고 그래서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등량용은 이런 눈은 난생 처음 대했다. 그는 자신이 먼저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고 내심 침음 했다. "죽여라!"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찰나, 소리없이 대전 안으로 한떼의 검은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 오기 시작했다. 수없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검은 그림자들, 거의 삼백여 명이 들어서고 있었는데도 일체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한 눈에 엄청 난 마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돌발적인 상황은 모두에게 경악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않을 듯 하던 삼대세력 중 나 머지 두 명의 지존들과 수운종조차 경악의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공스럽게도 등량용은 이미 이 회의에 참석하는 순간 부국공 수 운종과 휴도옥린이 이곳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이다. 사사삭! 쓰읏! 그 넓은 대전내에 순식간에 엄청난 수효의 흑의인들이 들어찼다. 바로 십마성의 정예들이었다. "안돼요!" 돌연 뾰족한 여인의 교갈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조령모모와 박쥐 공주 등미방이 얼굴을 굳히고 들어서고 있었는데.... 등량용의 눈이 차갑게 등미방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안돼요. 저분을 죽이려거든 저를 죽이세요." 박쥐공주의 눈빛은 절박하기 이를데 없었다. 등량용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놈을 좋아하느냐?" "그, 그래요." 등미방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휴도옥린 본인이 눈 앞에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이런 곳에서 여인의 여심()을 밝히는 것이었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박쥐공주 등미방은 진정 절박한 심정이었다. 지금의 상황 은 여인의 자존심 따위를 찾을 상황이 아닌 것이다. 등량용이 더할나위 없이 담담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저놈 대신 죽을 수 있겠는가?" "...!" 등미방의 눈이 일순 등량용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물 기가 어려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조부인 등량용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헛된 말을 입에 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질문은 그 녀의 마음을 알기 위한 의례적인 질문이라거나 익살이 담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등량용이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하나밖에 없는 손녀라도 본좌의 말에 거 역하는 그런 손녀라면 함께 죽이는 수밖에" "할, 할아버님!" 중인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들은 등량용이 충분히 자신의 손녀 라도 죽일 수 있는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휘익! 탁! 등량용이 돌연 한 자루 비수를 꺼내 박쥐공주 등미방에게 던졌다. "하지만 이 할아비가 직접 너를 죽일 수는 없다. 네 손으로 스스 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할, 할아버지!" "나는 너를 결코 여자로 키운 적이 없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스스 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등미방이 고개를 떨궜다. 이어 그녀의 눈빛은 이미 비장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난감하기 이를데 없었다. 기실 박쥐공주가 그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미처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그 자신때문에 한 여인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 는 없는 상황이 아닌가. 휴도옥린의 눈이 사면을 쓸었다. 또 다시 그의 체내에서 구월구일로서의 본능이 꿈틀거리며 용솟음 치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주변의 모든 상황이 그의 머릿 속에서 정리되고, 엄청 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그들 십마성의 고수들 사이에 있을 자 그마한 빈틈이라도 그의 눈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생존본능에 대한 감각은 거의 야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이미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치밀한 상황판단이었고, 그리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들 중 그 자신보다 고강한 무공을 지닌 자는 거의 없었다. 인의 장막을 뚫어야 하는 어려움도 이미 그는 해결책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 구월구일 그 자신의 힘으로 이 함정을 돌파하기로 결정한 것이었 다. 헌데 바로 이 순간, 돌연 그의 귀로 가느다란 부국공 수운종의 전 음이 파고 들지 않는가? (물론 자네의 무공으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네. 그리 고 천마장령이 이 근처에 있고 자오령의 모든 고수들이 이미 자네 의 안배에 의해 기다리고 있음 또한 알고 있네. 그러나 그들을 이 일에 끌어 들인다면 잠마는 피에 물들게 되네!) 수운종의 음성은 질책하는 빛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음성은 또한 부드러웠다. '으음 그렇군!' 휴도옥린의 내부에서 맹렬히 솟아나고 있던 달빛살수로서의 본능 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부국공 수운종의 전음이 이어졌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네. 잠마내의 모든 일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 저 늙은이에게 절 한 번 해주게 나?) '절을...?' 휴도옥린의 눈에 의혹이 솟아났다. 수운종의 미소가 감도는 전음 성이 이어졌다. (지금 저 늙은이가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건 자네가 꼼짝없이 자 신의 손녀를 받아들이는 것이네. 그것을 위해 저 늙은이는 연극을 하고 있을 뿐이라네. 기실 등량용 늙은이는 저 아이를 자신의 생 명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네!) "아...!" 휴도옥린은 머리가 환해져 왔다. 동시에 그는 손녀를 위하는 등량용의 진정을 느끼고 가슴이 따뜻 해져 왔다. 십마성의 제일인자이며 잠마의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 평생을 죽음 과 핏 속에서 보낸 무인(), 그 등량용도 손녀인 박쥐공주 등 미방을 위한 일이라면 일개 촌노()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때였다. 부국공 수운종이 돌연 휴도옥린을 향해 나직이 외쳤다. "이놈아! 너는 지금 네 계집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셈이 냐?" 느닷없는 호통에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멍청해졌다. 이것은 등량용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서 등공에게 손서(=손녀사위)로서의 예를 갖추지 않고 뭐 하느냐! 네가 아무리 잠마천주라 해도 등공은 네 계집의 조부이니 절 한 번 한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을 것이다." "...!" 휴도옥린은 수운종이 짐짓 호통을 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네가 등공을 외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등공이 미쳤다고 집안사람끼리 세력다툼을 하려 하겠느냐!" 휴도옥린이 등량용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소손 휴도옥린 존장을 대합니다." 그의 태도는 비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거만하지도 않았다. "흥!" 등량용이 냉소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은은한 기쁨으로 가득해 있었다. 부국공 수운종이 등량용을 향해 정색했다. "등공! 등공은 이 늙은이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허허헛, 나를 믿소?" "믿기야 하지. 지기라면 믿지 않을 것이나 그대는 나의 유일한 적 수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지." 실로 기이한 말이 아닌가. 친구라면 믿지 않는다. 그러나 유일한 적수이기에 믿을 수 있다. 어찌보면 황당하고 어이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같은 길 을 걸어온 두 절대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참뜻이 담겨 있었 다. "그렇다면 한 마디만 하겠소. 이제 더 이상 우리끼리 싸움질 하는 것도 질린 듯 한데 우리 늙은이들은 이제 술이나 즐기며 한가하게 여생을 보내는 게 어떻겠소?" "...!" 수운종의 뜻밖의 제의에 등량용의 표정이 일순 수많은 변화를 일 으켰다. 수운종의 말 뜻은 곧 휴도옥린을 잠마천주로 인정하고 모 든 것을 일임하자는 뜻인 것이다. 잠시 후, 등량용의 얼굴이 환히 밝아지며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 덕이고 있었다.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늙은이끼리 매일 술이나 마시는 것도 처 량해 보일 것이고... 음, 증손자나 한 명 있으면 그놈 뒷바라지나 하면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을텐데...?" 등량용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박쥐공주 등미방을 응시했다. 등미방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흐흐흐흣, 그 녀석! 좋기는 좋은 모양이군." "아이, 할아버님...!" 등미방은 괜시리 눈시울이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등량용이 돌연 백미를 찌푸리며 한곁에 서 어쩔 줄을 모르며 망연히 서 있는 사인귀효 관선고를 힐끔 바 라보았다. "수공()! 저 사부를 잡아먹으려 했던 끔찍한 야수는 어찌하실 것이오?" "응?" 수운종은 그제야 관선고에 생각이 미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힐끔 관선고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관심 없다는 듯 눈 을 돌리고 있었다. "저 아이만이 아니고 우리 사대세력 모두에게는 율지비의 인물들 이 숨어있을 것이오. 그러나 이 늙은이의 생각으로는 그놈들 따위 에 신경쓸 필요는 없을 듯 하오." "그렇군." 등량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오히려 사인귀효 관선고로서는 크게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수운종과 등량용은 진정으로 잠마에 숨어있는 율지비의 인물들 따 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다! 수운종과 등량용이 제일인자라면 그들은 영원한 제이인자들일 뿐 이었다. 그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거물 들의 기량인 것이다. 휴도옥린은 그들의 격의없는 대화를 들으며 문득 눈을 들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창() 밖으로 잠마의 하늘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하늘은 기이한 빛으로 물들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이제 그 하늘 아래 몸을 누이고 있는 마도의 대성전 잠마의 성이 더 이상 예전의 분열된 잠마가 아님을 잘 알 고 있었다. 잠마. 팔백여 년 전에 세워진 마도의 대성전. 그 잠마는 이제 신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기()는 한증막을 방불하는 후덕지근한 열기()로 휘감겨 있고 고개를 허공으로 치켜보아도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태초부터 인간의 발자취를 거부해온 신강성()의 밀 림지대. 낮이라 해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울창한 수림과 사방에 지 옥의 입구처럼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늪지, 그리고 온갖 독충들만 이 우글거리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는데.... 그 밀림지대의 깊숙한 한곳. 놀랍게도 어둠 저쪽에 거대한 전각들이 비쳐들고 있었다. 오십여 장 높이로 뺑 둘러쳐져 있는 인공가산() 가운데 자리해 있는 수많은 전각군()은 어찌보면 눈을 의심하지 않 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깊은 밀림 속에 하나의 웅장한 성()이 자리해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가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위치에 교묘하게 은 폐되어 있는 예의 대성에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가서고 있는 인물 이 있었다. 특이한 걸음걸이와 조용한 몸놀림, 바로 휴도옥린이었다. "...!" 가산 뒤쪽의 웅장한 전각군들을 발견한 휴도옥린의 눈에 이채가 솟아났다. 고소라고 해야 할까? 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쳐가고 있 었는데.... ... 잠마해의 무영이란 어떤 인물입니까? ... 그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없다네. 그는 그 저 무영일 뿐이지. ... 백부님께서는 그를 수하로 두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신분을 모 른단 말씀이십니까? ... 허허헛, 부끄럽게도 그렇게 되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잠마해 는 범죄자들의 단체. 그곳에는 하나의 율법이 있다네. 그것은 누 구라도 과거의 신분에 대해 밝히고 있지 않다면 지존인 야야라 해 도 질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네. ... 그랬군요. 헌데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잠마해의 총단에 있을 것이네. 헌데 그를 찾는 이유는? ... 추측입니다만 그가 율지비의 수뇌일 것 같은 예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원의 원주가 혹시 그가 아닐까 하는 의혹을 지니고 있습니다. ... 음! 잠마해의 총단은 신강성의 자강림()에 위치해 있 네. 휴도옥린은 부국공 수운종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어 그는 씁쓸 한 미소와 함께 거침없이 잠마해의 총단인 예의 대성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진입을 방해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제 잠마해에 단신으로 도전하고 있는 달빛살수 구월구일이 아니었다. 그의 지금 신분은 야야의 신물을 지니고 총단을 방문한 방문객이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은 총단에 들어선 직후 곧바로 무영의 거처인 무영전( )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채 무영전에 이르기 전에 그는 놀라운 광경을 대하고 있었 다. 무영전의 전각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앞쪽의 방원 오십 여 장에 달하는 거대한 광장에 지금 두 사람이 대치해 서 있지 않 은가! 그들의 주위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휴도옥린은 한눈 에 그 시신들이 잠마해 수하들의 시신임을 알 수 있었다. "사도제종?" 휴도옥린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그렇다. 헐렁한 헝겊을 두른 듯한 기이한 복장에 부러진 반자루 금검을 아 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사도제종이었다. 그의 전면에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백포를 걸치고 있는 백포복면 인이 우뚝 서 있었다. 두 눈만을 드러낸 백포를 전신에 걸치고 있는 백의 복면인의 기태 는 범상치 않았다. 헌칠한 키에 다소 마른 듯한 체구이다. 허나 특이한 것은 그의 기세가 마치 허공을 떠도는 한 무더기 구름인 양 신비감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무영?' 휴도옥린은 한눈에 그 백포복면인이 잠마해의 제이인자이면서 신 비 속의 인물인 무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들이 대치해 서 있는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인 듯했다. 돌연, 천천히 다가들던 휴도옥린의 눈으로 환상같은 광경이 들어 왔다. 휘이잉! 한 줄기 미풍이 소리없이 두 사람 사이를 휘어감고, 그 순간 백포 몽면인 무영의 백포가 펄럭인 듯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 휴도옥린은 보았다. 무영의 몸을 가리고 있던 백포의 이마 부분이 바람에 펄럭이며 갈 라지고 그 가운데 드러난 창백한 이마에도 가느다란 혈흔()이 그어져 있는 모습을.... 뚝...! 뚝! 가느다란 혈흔은 이마의 중앙으로부터 콧등까지 그어져 있었다. 그 혈흔이 끝나는 지점으로부터 한 방울 두 방울 선혈이 맺히며 턱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음! 한 발 늦었단 말인가!' 휴도옥린은 이미 자신이 한 발 늦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이미 승부가 끝나 있었고, 그는 그 그림같은 승부의 결과 가 펼쳐지는 순간만을 보게 된 것이었다. 무영은 천천히 지면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조금씩 아주 편한 자세로 지면에 기대며 문득 허탈한 눈으로 허공에 눈을 던지다가 돌연 이채를 띠었다. 그는 다가오고 있는 휴도옥린을 발견하고 마치 안도하는 듯, 더욱 자조하는 듯, 기이 한 표정을 머금지 않는가? 이 순간 휴도옥린의 눈에 역시 불신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의형(), 당신이?" "린아우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 "이렇게 고향으로 떠나기 전에 자네를 볼 수 있게 되다니 난 무척 이나 운이 좋은 놈인 듯하이!" 무영의 눈은 곧바로 휴도옥린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평온함만이 떠올라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 한 안색을 지니고 있는 중년인, 휴도옥린에게 이 중년인의 존재는 유일한 지기인 창사 이상의 것이었다. 구월구일 휴도옥린, 기실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에는 눈 앞의 중년 인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구월구일의 모든 살인기법은 바로 그에 의해 훈련되었다. 그는 철저하게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쳤고, 휴도옥린은 그의 말은 절대 잊지 않았다. 그는 바로 매원의 달빛 살수 중 구월구일 휴도 옥린이 있기 전에 최고의 살수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특히 휴도옥린에게 만큼은 자신의 모든 비기를 아낌없이 전 수했고, 그의 생존비법은 휴도옥린에게 있어 그 어떤 훈련보다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음 성은 더할나위 없이 평온했다. 살수들에게 있어 고향이란 곧 죽음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그가 항시 입버릇처럼 뇌까리던 말이었으며 항시 그 고향으로 가는 순 간만을 기다리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당, 당신이 무영이었단 말입니까?" 휴도옥린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코 무영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휴도옥린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렇다네. 하지만 또한 아닐 수도 있지." "...?" "무영은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닐세. 율지비의 모든 인 물들, 각 세력의 모든 이인자들을 통칭해 우리는 무영이라 부른다 네. 하지만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그중 진짜 무영이 바로 매 원의 원주라는 것 뿐이네." "음...!" 순간, 한곁에서 무심한 눈으로 서 있던 사도제종의 눈빛이 흔들렸 다. 그런 사도제종의 변화를 눈치챈 듯 무영은 허탈한 웃음을 흘 렸다. "하지만 자네는 헛수고 했다고 여길 필요는 없네. 자네가 찾던 잠 천사도십자밀예를 사용하는 도의 명인인 무영은 바로 나였으니 까!" "...!" 사도제종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순간의 일 이었다. 그의 눈에서 다시 감정이 사라지고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잠마 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은 그의 뒷모습을 보지도 않은 채, 그가 잘 알고 있고 의 형으로까지 삼았던 한 인물의 죽음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무영은 그 어느 곳에도 없고 또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는 말을 이 제 이해했는가?" "예!" 휴도옥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린 아우!" "...!" "부탁이... 있네." "무엇입니까?" "나를 매원에 묻어 주게." "...!" "그곳은 지겨운 곳이나 그래도 우리들에게는 친구가 있고, 우정이 있던 곳이었다네." "...!" "나는 자네와 우리들 친구들이 함께 생활하던 그때가 가장 좋 았...!" 툭! 무영의 목이 힘없어 꺾였다. 휴도옥린은 오랫동안 그의 죽음앞에 앉아 있었다. 매원, 그들에게는 고향과도 같고 어머니 품 속같은 장소였다. 처절한 지옥훈련이 있었고, 피와 죽음이 있어 돌아오지 않는 친구 들이 많아져 갔어도 그곳은 그들의 안식처였다. 휴도옥린은 그 매원시절의 모든 일을 떠올렸다. 그 어느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모든 추억을 천천히 회상하기 시작했다. 헌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등 뒤로 한 그림자가 소리없이 다가들었다. 더할나위 없이 준미한 용모의 미공자, 화사한 용모에 화려한 흑금 의를 걸친 그는 바로 잠풍인랑 희수수가 아닌가! 휴도옥린이 고개를 돌렸다. 잠풍인랑 희수수가 씨익 미소했다. 그에게는 확실히 창사가 느꼈 던 것처럼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휴도옥린은 이미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경계하지 않은 채 그 미소를 순수 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희수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나는 패릉에서 기실 그대를 잡으려고 했었소." "...!" "그 한 마리 용()을 잡기 위해 관부의 고수 일천 명을 투입해 반수 가량이나 희생되었던 것이오." "...!" "그 이유를 아시오?" "글쎄?" "훗! 나는 그 용에게 날개를 달아주려 했던 것이오. 삼환회라는 날개를. 그러나 그대는 이미 그 날개를 스스로 달고 다시 나왔으 니 내 입장이 상당히 거북스럽게 되고 말았소." "부국공에게서 들었소?" 희수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도옥린이 단호한 말투로 입을 떼었다. "나는 결코 삼환회를 어찌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삼환회는 단지 그대의 독자적인 세력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오. 내가 삼 환회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알고 있소. 그대는 율지비의 인물들 중 십팔 년 전 소수에 나타 나 전대 봉조하인 그대의 부친을 죽인 자들에 대해 알고 싶은 것 이 아니오?" "...!" 휴도옥린은 희수수가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음에 일시 흠칫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삼환회의 존재가 그동안 놀고 있지만 은 않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희수수가 돌연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명단을 일러주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겠소." "...?" "우리 삼환회와 친구가 되어 달라는 것이오. 그 정도의 대가는 있 어야 내가 그대를 만나기 위해 애쓴 보람이 있지 않겠소?" "...!" 휴도옥린 역시 마주 그를 향해 미소했다. 그의 미소는 참으로 밝 았다. "당신이 끈질기다는 것은 이미 창사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었소. 그러나 이렇게 막무가내로 친구가 되어달라고 덤벼들 줄은 몰랐 소." "훗!" "헌데 한 가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소." "...?" "알고 있을지 모르나 창사와 나는 술을 무척 많이 먹는 편이오." 순간, 희수수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화사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 다. 그는 받아들여진 것이다. 휴도옥린의 이 한 마디는 그것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느낀 희수수는 진정으로 밝은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얽혔다. 휴도옥린은 창사가 눈 앞의 희수수를 대하면 매원 시절의 지기들 과 같이 있을 때의 분위기를 느낀다고 한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순간, 문득 휴도옥린이 평생을 걸려서라도 찾아 헤매야 하는 그 일곱 사나이에 대한 신분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에 생 각이 미친 희수수의 눈에 한 가닥 그늘이 스쳐갔다. 그 우수는 이내 그의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으음! 그 명단을 알려 주다보면 그에 대한 것도 드러날텐데?' 잠풍인랑 희수수, 그는 과연 무엇을 염려하고 있단 말인가? 휴도옥린이 추적하고 있는 일곱 사나이 중 누군가가 휴도옥린이 죽일 수 없는 인물이 섞여있다는 뜻이란 말인가? : 제33장 어떤 죽음() 밤비 속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비와 어둠 속에 동화된 듯 있어도 없는 것처럼, 오래 전부터 있었 던 망부석처럼 분명히 보이지만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물처럼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하는 사나이.... 예의 사나이가 서 있는 굳게 닫혀진 대문 입구에 서 있는 석사자 ()와 이끼 낀 담장이 고대왕종의 고궁()처럼 전통과 연 륜을 느끼게 해주는 거대한 고가()의 앞이었다. 고가의 웅장함은 실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천년 풍상의 세월을 이겨낸 그 위엄은 가히 태산의 그것이었는데.... <와룡 헌원가().> 황제() 헌원씨()의 후예로, 명예와 전통을 중시하는 이 들에게 가장 추앙을 받는 위대한 명가(),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옛 것을 찾는 이들에게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이름이 바로 이 와룡 헌원가였다. 사나이는 오랜 시간을 그렇게 서 있었다. 구월구일, 그는 어느 한 가지 일이라도 오랫동안 기다렸고, 오랫 동안 관찰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구월구일은 이미 오래 보면 볼수록 또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착오가 생기지 않 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몸에 배어버린 일을 시작할 때의 살수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다림은 이제 끝나려 하고 있다. 이제 일을 시작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는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의 몸은 밤 비 속으로 녹아들 듯 이내 사라졌다. 넓은 연회장 안은 그녀의 수연(=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하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헌원가의 노대부인(). 나이 이십에 청상이 되어 팔십여 년간 헌원가를 지켜온 그녀는 마 르고 작은 육체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배어나오는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위압 적인 분위기는 누구도 그녀가 왜소한 체구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 하게 하였다. 또한 그녀의 얼굴은 어느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특징 있는 얼굴이었다. 자존심으로 가득 찬 얼굴, 그리고 잿빛 눈과 고 집이 있어 보이는 턱 등.... 그녀의 모습은 다른 노파들과 달리 강인한 면모와 위엄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무성하여 칠흙같이 빛났던 그녀의 머리칼은 이제 아름다운 은빛의 서리로 뒤덮였고, 상아빛 배자를 걸친 그녀의 드러난 피부 는 고령으로 인해 부드럽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했다. "내가 벌써 백살이라니 기분은 그렇지 않은데 벌써 그토록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그녀는 지나온 오랜 세월을 더듬었다. 그녀가 처음 시집을 왔을 때의 헌원가는 몰락해 버린 허울만이 존 재하는 실로 비참하고 굴욕적인 실상만이 존재하는 가문이었다. 게다가 그 헌원가에 홀로 그녀만이 남았었다. 그녀가 겪은 수모와 굴욕은 이루 형용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그러 나 오늘에 이르러 그녀는 강해졌다. 겉으로 변한 것은 없었다. 그 것이 그녀가 속해 있는 율지비의 율법이었기에.... 그녀는 제이인자의 연합세력인 율지비의 존재를 알았고, 그리고 자청해서 그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율지비의 핵심 중추수 뇌로서 천하의 그 누구라도 그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였다. 노대부인은 새삼 연회장을 가득 메운 하객들을 둘러보았다. 어느 누구할 것 없이 막강한 실력과 힘을 지닌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들이 두렵거나 귀찮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 었다. 그 많은 하객들이 모두 그녀의 충실한 심복이었기 때문이 다. 그녀의 드러난 신분은 역시 몰락해 버린 헌원가의 노대부인에 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질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율지비의 일곱수 뇌 중 한 명인 그녀가 보이지 않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알고 있 는 모든 인물들은 그녀가 발을 핥으라면 꼼짝없이 발을 핥을 것이 다. 노대부인은 오늘의 현실이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잘되게 되어 있어. 헌원가는 이제 내가 없어도 위대한 가문으로 남을 수 있어!' '힘있는 자에게는 굴복하고 아부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니까!' 문득 노대부인의 시선이 하객 중에서 빠져나와 한쪽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소년을 응시했다. 대략 십삼 세? 소동은 한눈에 보기에도 부러울 것 하나 없이 성장했음이 분명한 그런 차림이었고 그리고 귀엽기 이를데 없는 용모였다. "얘야! 이리 오너라." 문득 그녀는 소년을 불렀다. 노대부인의 증손자이자 헌원가의 후대인 헌원운()은 그녀에 게로 걸어와서 손을 잡았다. "정말 멋진 생일 잔치에요, 할머니!" "고맙다. 운아가 즐거웠다니 기쁘구나." 노대부인의 입가에 자애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러다 돌연 그녀 가 음성을 낮추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운아야." "응!" "이 할미는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거란다. 하지만 난 너에게 힘을 주고 죽을 것이란다." "힘()?" "그래, 드러난 힘은 아니지. 그러나 네가 그 힘을 지니게 되면 아 무도 너를 무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다." "그래, 나는 할머니 말을 믿어. 언제나 할머니 말은 이루어졌으니 까!" 허원운이 귀여운 눈망울로 대꾸했다. "그래 너는 성장해 율지비를 이끌게 될 것이다. 이인자들의 모임 이기는 하나 기실 천하의 주인이 바로 그들이란다." "율지비?" "응, 이것은 비밀이란다. 운아는 비밀을 잘 지킬 수 있겠지?" "그래. 사내는 언제나 한두 가지 비밀을 지니고 있는 법이라고 했 었잖아." "호호호!" 노대부인은 흡족한 듯 미소를 머금었다. 문득 피곤함을 느끼고 헌원운을 돌려보낸 뒤 조용히 그녀의 방이 있는 이층의 계단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구궁꽝꽝! 쏴아아...! 격노한 듯한 뇌성이 울리며 비가 더욱 굵어지기 시작했다. 창문에 부딪치는 빗물소리는 요란하기 그지 없었다. 수많은 하객들과 그녀의 가족들은 당당하게 선 자세로 계단 끝까 지 올라가는 노파를 바라보았다. 청뢰()의 섬광이 번뜩이며 뒤이어 둔중한 뇌성이 일었다. 꽈꽈과꽈앙! 번쩍! 그녀의 몸은 이때 이미 자신만의 방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에도 창은 있었다. 그리고 그 창으로 새파란 청뢰의 섬광이 비쳐들었다. 하늘을 유린하듯 번뜩이는 섬광이 문득 악마의 비수 같다고 느껴졌다. 헌데 바로 이 순간, 노대부인은 그 새파란 청뢰의 섬광이 창에 비 치는 것과 동시에 한 그림자가 그 청뢰를 타고 들어오듯 창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꽈꽈꽈앙! 그것은 실로 청뢰가 그녀의 방으로 뛰어들지 않았나 느껴질 정도 의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창이 박살이 나 흩어졌으나 뇌성으로 인 해 아래층의 어느 누구도 그 음향을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창이 부서지는 음향과 동시에 뇌성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누구?" 노대부인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그 청뢰에 몸을 숨긴 듯 번개같이 그녀에게 덮쳐들고 있는 백삼인 의 머리 위에서 하나의 검날이 곧바로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내리쳐 져 왔다. 삭- -! "끄윽!" 노대부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가슴을 불로 지진 듯한 통증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면에 어느새 한 백삼인이 의연히 서 있지 않은 가! "그, 그대는?" "구월구일." "구월구일?" "빚을 받으러 왔소이다." "빚?" "십팔 년 전 소수에 비가 내리던 그 날의 일을 기억하시오? 그날 의 아이가 바로 나였소." "...!" 노대부인은 일시 미망속을 헤맸다. 그녀가 저질렀던 그 숱한 범죄 를 지금의 그녀가 모두 기억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던 그녀는 오래전에 있었던 소수에서의 일을 곧 기억해낼 수 있었다. "휴도성과는 어떤 관계?" "부친이셨소." 휴도옥린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노대부인이 열고 들어온 문을 향해 걸음 을 옮기기 시작했다. 쿠웅! 그의 뒤로 노대부인의 왜소한 몸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 나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눈 앞에 보게 된 이 순간에도 미소를 잃 지 않고 있었다. "괜찮아!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어. 헌원가는 이제 내가 죽 어도 영원히 위대한 가문으로 남게 될 거야. 운아가 율지비에 속 해 있는 한...!" 이때였다. 태연히 문을 빠져나가던 휴도옥린이 몸을 돌렸다. "모르고 있었구료. 이것이 시작이라는 사실을...?" 시작..., 그렇다. 이것은 바로 휴도옥린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일곱 사내에 대한 복수와 율지비의 몰락을 여는 거대한 움직임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노대부인은 휴도옥린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말을 듣지 못한 채, 노대부인은 이미 숨을 거둔 것이었다. 아마 그녀가 휴도옥린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 녀의 죽어있는 얼굴이 이렇게 평안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휴도옥린은 노대부인이 올라왔던 계단을 통해 천천히 연회장을 헤 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노대부인을 죽이고 계단을 통해 태연히 내려오고 있어도 아 무도 그에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월구일 휴도옥린의 모습은 너무도 평 범했고 이런 그의 모습에서 구월구일이라고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헌데 마악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헌원가를 빠져나오려던 휴도옥린 의 귀로 많이 듣던 음성이 파고 들었다. "어? 사부놈아! 저기 가는 저 놈이 바로 주인놈 아니냐?" "으잉? 그래, 맞다! 제길 그렇게 발이 부르트도록 찾아다니던 저 놈을 이곳에 만나게 되다니...!"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대화내용, 바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험악 한 사제지간인 무쌍과 무비가 아닌가! "어딜 가냐! 네놈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다고." "주인놈아, 서라!" 무쌍과 무비가 순식간에 휴도옥린에게 다가들었다. 휴도옥린은 일순 난감한 기분이었다. 그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괴 살수들하고는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기분인 것이다. "나를 찾았단 말이오? 이유라도 있소?" "이런 정신없는 주인놈 같으니... 아니 이름도 알 수 없는 계집애 한 명을 찾아달라고 부탁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시치미를 떼다 니...!" "...!" 휴도옥린이 놀란 빛을 드러냈다. 그들이 지금까지 자신이 부탁했던 그 여인을 찾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놀랍지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드는 무쌍의 말로 미루어 마치 그 여 인을 찾아냈다는 투가 아닌가! "그녀를 찾았단 말이오?" "말이라고 하느냐! 못찾았으면 무엇때문에 네놈을 찾아 헤맸겠느 냐!" "...!" "고 계집애의 이름은 사라빈영()이었다. 중원인이 아니라 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혹시 네 놈이 우리를 골탕먹이려고 일부 러 그런 명령을 내린 게 아니냐?" 무쌍과 무비가 마치 휴도옥린의 음모를 밝혀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뚫어지게 그의 눈을 직시했다. "아니요. 반드시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여인이오. 그리고 이제 생각해보니 중원인이 아니었던 것 같소. 당시 그녀의 눈빛이 새파 란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 기억나오." "그래? 믿기로 하지." "그녀는 어디에 있소?" "이 헌원가에 초정되어 온 것을 우리가 조용한 곳에 모셔두었다. 병사군이 지키고 있고 우리는 이제부터 너를 찾아다니려 했다." "그곳이 어디요?" "이곳에서 한 십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취고운()이라 는 객점이다. 따라 오너라." "...!" 무쌍과 무비가 앞장을 서 순식간에 헌원가를 빠져 나가며 신형을 솟구쳤다. 휴도옥린은 한 가닥 기대를 지닌 채 그들의 뒤를 따르 기 시작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휴도옥린은 대뜸 사라빈영에 대한 물음부터 던졌다. 무쌍무비는 한결같이 꿈이라도 꾸는 듯한 몽롱한 눈으로 히쭉 웃 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잘 있다." 병사군이 느물거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에 있소?" 이번에는 취선불이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고 계집은 피가람족()의 족장()이라 그런지 너무 사 나와서 욕실()에 모셔두었지." "...!" 휴도옥린은 무쌍과 무비의 느물거리는 태도와 어조에서 그들이 사 라빈영을 곱게 대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수욕을 하고 있소?" "우우와와와!" 허나 무비가 휴도옥린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돌연 팔다리를 기 이하게 뒤틀며 벙어리 흉내를 내지 않는가? 휴도옥린은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느꼈다. "그녀를 어떻게 했소?" 이번에도 무비가 딴청을 부리며 무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부놈아! 고 미쳐 날뛰던 암말을 어찌했지?" 무쌍이 대답했다. "제자놈아! 구월구일이 쉽게 다룰 수 있도록 해두지 않았느냐?" "아하! 그렇지." "주인놈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잘 묶어 두었다." "...!" 그 순간, 휴도옥린은 벼락같이 방문을 박차고 나가 옆방을 향했 다. 방(). 그 내부는 의외로 상당히 운치있고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모든 장식이며 가구() 등이 변방()의 이 작은 현()에 위치한 객잔()으로선 갖추기 힘들 만큼 최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지금 그런 것들에 신경쓸 여가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곧바로 방 한쪽에 쳐진 휘장 뒤에 보이는 욕실의 문 을 향했다. 욕실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 휴도옥린은 신속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밀치듯이 욕실의 문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본 순간 그의 입술새로 나지막한 경악 성이 새어 나왔다. "음!" 그의 눈 앞에 실로 상상키 힘든 기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욕실, 중앙의 커다란 욕조 위에 한 여인이 사지 ()를 결박당한 채 거꾸로 허공에 매달려 있었는데.... 맙소사! 어이없게도 마치 제단()에 바쳐진 제물()처럼 한 여인이 발가벗긴 채 묶여 있지 않은가. 두 손목이 천장에 묶여 있고, 두 발목도 역시 위로 묶여 있는 여 인의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여인의 신비가 모조리 드러나는 황당한 것이었으나 이 뜻하지 않은 상황에 휴도옥린은 아찔한 충격보다도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해도 너무했군!' 휴도옥린은 이 기상천외한 행위에 잠시 어이가 다 없었다. 사라빈영의 길고 검은 머릿결은 욕실 바닥에 치렁치렁 드러워져 있었고, 천장을 향한 이국적인 아름다운 얼굴은 수치와 분노로 새 빨개져 있었다.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이국미인()의 나신 (), 그녀는 바로 사라빈영이었다. 사라빈영의 입에는 지금 재갈이 물려 있었고, 분노에 가득 찬 그 녀의 눈길은 탄원하듯 휴도옥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 휴도옥린은 느긋하게 사라빈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그녀의 다리를 풀어 욕조 난간에 올라서게 하고 두 손목도 마저 풀어주었다. 파앙! 순간, 손이 자유로와진 사라빈영의 좌수가 무서운 속도로 휴도옥 린의 목을 쳐왔다. 휴도옥린은 가볍게 좌수를 들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우수( )로는 그녀의 입에 물린 헝겊 조각을 풀어 주었다. 풀리자마자 그녀의 입에서 가히 발작적인 괴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극심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풀길 없는 자신에 대한 자학의 외침과도 같은 것이었다. 휴도옥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진정하시오." 사라빈영은 계속 알아 들을 수 없는 이국말로 마치 번갯불이 튀듯 소리를 질러댔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지극히 험한 욕설임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휴도옥린은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떠올리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옷을 입으시오. 그리고 이야기 좀 합시다." 사라빈영은 자신이 나신으로 휴도옥린의 앞에 서 있는 것에 대해 선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하기사 피가랍족의 여자들은 중원여자들과 달리 사내 못지 않게 활달해 남자 앞에서 알몸을 보여주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부족이었다. 피가랍족의 남녀()간에 관한 관념은 중원의 그것 과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사라빈영의 표독스러운 눈길이 휴도옥린을 향해 꽂히듯 번뜩였다. "얘기? 무슨 얘길 하자는 거야! 깨끗한(?) 중원 놈들! 날 납치해 와 이렇게 묶어 놓고선 무슨 엉뚱한 수작이야!" 서투른 중원 한어()였다. '깨끗한 중원 놈들...?' 휴도옥린은 그녀의 말이 더러운을 잘못 표현한 것임을 알고 내심 고소했다. "미안하오. 하지만 내가 그런 것은 아니잖소?" "나의(?) 앞잡이가 그... 잖아아!" "그들이 실수한 모양이오. 어쨌든 내가 대신 사과하겠소." "나는 어른(?) 취급하지 말아." '나? 어른...?' 휴도옥린은 계속 핵심적인 말은 반대로 표현하는 사라빈영의 서투 른 한어에 웃음이 치밀었다. 아마도 붙잡아 온 뒤 무쌍과 무지가 한어를 가르친다며 거꾸로 가르친 모양이었다. 휴도옥린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생각했다. 그는 이런 류()의 여 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성질이 급하고 표독스러운 여인에게는 더욱 능글맞은 것이 가장 좋은 대 응법인 것이다. "한어가 서툴구료." "흥! 좋은 자식!" "그럴 때는 좋은 자식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존경하는 자식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오." 휴도옥린은 그녀가 나쁜 자식이라고 말하려 했음을 알면서도 이상 한 방향으로 그녀의 말을 교정시켰다. "더 떠들어(=씨끄러!)." 팍! 사라빈영은 더욱 화가 치민 듯 갑자기 손을 휘둘렀다. 휴도옥린은 제자리에 서서 목만을 움직여 그녀의 손길을 피해냈 다. 빗나간 것이 억울했던지 그녀가 다시 비명이라도 지르듯 이국말로 욕설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우찌까지 빠찌까! 우라숭- !" "까잉고레상!" "...?" 휴도옥린의 눈이 멍청해졌다. 무슨 뜻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 다. 그러나 그 의미보다는 그 많은 말이 어떻게 그렇게 짧은 순간 에 쏟아져 나올 수 있었는지가 신기했던 것이다. 휴도옥린이 멍청히 자신을 응시하자 사라빈영은 그때까지도 휴도 옥린의 우수에 쥐어져 있는 손을 홱 잡아채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알고 있어!" "음모?" "그래! 나를 미끼로 피가랍족의 족장이신 아버님을 위협하려는 모 양인데... 흥! 어림있는 수작이지." '어림있는(?) 수작?' "우리 부족은 적에게 생포된 사람은 죽게 내버려두는 풍습을 지니 고 있어. 그러니 헛수작 열심히(?) 해!" 휴도옥린은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한어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비슷하게 돌아가는 듯 하다가 결정적인 말을 뒤바꾸고 있어 도대 체가 어디까지가 정상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이 문득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이런 미소는 실로 신비해 돌연 사라빈영의 눈이 커지고 있었 다. '이 자식! 제법 못생겼는데?' 사라빈영은 휴도옥린의 입가에 떠오른 신비한 미소에 일순 야생마 같이 날뛰던 것을 잊고 휴도옥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휴도옥린이 입을 열었다. "별다른 뜻은 없소. 오해하지 마시오. 그대의 피가랍족과 중원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본인이 굳이 피가랍족을 해칠 이유가 없지 않소? 나는 그저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오." "나랑? 왜, 내가 좋아요?" 사라빈영의 말투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뿐이랴! 콧소리까지 섞인 그녀의 음성에 기이한 열기가 담겨있지 않은가! "우선 옷을 좀 입었으면 좋겠소." 휴도옥린은 그때까지도 나신으로 우뚝 서 있는 그녀를 대하기 민 망스러워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욕조 한쪽에 처박혀 있는 옷같지도 않은 옷을 집어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방 벗을 것을 왜 입으라고 할까?" '응...?' 그녀의 말에 휴도옥린이 깜짝 놀랐다. '뭐야? 이 여자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을 몸으로 이야기 하자는 것 으로 알아들었단 말인가?' 휴도옥린은 아예 질렸다는 듯 내심 혀를 내두르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를 오래 전에 본 적이 있었소. 아마 십팔 년 전 쯤 되 었을 것이오." "...?" "내가 알아보고 싶은 것은 그때 그대가 과연 중원에 왔었냐는 것 이었소." "그럼 십팔 년 동안이나 나를 기다렸단 말이야?" 지극히 정상적인 말투, 휴도옥린은 먼저 그녀의 말이 뒤바뀐 것이 아닌가를 해석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뒤바뀌지 않았음을 확인했 으면 그 말의 의미도 생각해야 한다. 말은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말이 의미하는 바가 비정상이었다. '기다리긴 뭐를 기다렸단 말인가? 이 여자는 모든 일을 남녀의 관 계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 하군. 그것이 이들 부족의 습성이란 말 인가?' 문득 휴도옥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실 그가 그녀에게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한 사람의 행동과 신분 에 관한 일이었다. 소상야우. 소수에 비가 내리고.... 실같은 비안개가 내리던 그날 일곱 사내가 소수 속에서 걸어나오 듯 그렇게 나타났다. 그들 중 한 명의 어깨 위에는 다섯 살 정도 되는 앙증스러운 소녀 ()가 앉아 있었다. 그 일곱 사내는 휴도옥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 부모를 죽였 고... 휴도옥린이 기억하고 있는 일곱 사내의 얼굴 뒤에 한 소녀 의 영상도 그렇게 해서 뇌리에 새겨졌다. '음! 그는 중원인이었다. 그러나 희수수의 삼환회에서도 그때 이 소녀를 어깨에 메고 있던 그 자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 자에 대한 것은 이 여인의 입을 통해 알아내야 한다!' 휴도옥린의 눈이 다시 사라빈영을 향했다. 사라빈영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을 열지 않을 그런 여인임이 분명했다. 더구나 어깨 위에 있던 것으로 보 아 보통 관계가 아닐 것이다. 그런 여인의 입에서 알아내고자 하는 일을 들으려면 먼저 자신의 목적을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대화를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였다. 휴도옥린이 어떻게 그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인물에 대 한 대화를 끌어내는가 고심하고 있는 순간 돌연 한 가닥 전음이 그의 귀를 파고 들었다. (모르고 있나 보군. 피가랍족의 여인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든간 에 자신을 처음 취한 사내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 다네. 그리고 그 계집은 하는 행실은 개망나니이지만 분명히 아직 사내를 모르고 있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전음은 바로 병사군의 음성이었다. "...!" 휴도옥린의 입가에 씁쓰레한 미소가 스쳤다. 병사군의 말뜻을 어찌 모르랴! 그러나 그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가장 빨리 알아내야 하는 그로서는 병사군이 일러준 방 법을 사용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휴도옥린은 사라빈영의 몸 뒤로 돌아가 뒤에서부터 그녀를 으스러 지게 끌어안았다. "악- !" 사라빈영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휴도옥린은 그녀의 경악성을 무시한 채 그녀의 몸을 돌려 안았다. "이 존경하는 자식!" 조금전에 엉터리로 교정해 주었던 욕설이 사라빈영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휴도옥린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를 들어 침상으 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라빈영은 그 행동이나 말과는 달리 일단 휴도옥린이 그녀를 취 하려 하자 진정으로 경악해하고 있었다. 또 다시 알아 들을 수도 없는 욕설이 번개같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의 몸이 그녀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사라빈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순간, 휴도옥린의 뇌리로는 매원의 달빛 살수가 되는 과정에서 익힌 하나의 훈련과정이 스쳐 지나갔다. 매원의 달빛 살수들, 그들은 인체의 모든(?) 부분을 무기로 사용 하는 방법을 훈련했다. 그들에게 있어 성()은 필요에 따라 하나의 병기에 지나지 않았 다. 그들은 이미 성적 유희에 필요한 모든 신경을 말살당하는 훈 련을 거친 것이었다. 사라빈영의 몸부림치는 교구를 내려다보는 휴도옥린의 동공 깊숙 한 곳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 훈련 과정만큼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방법이 없다. 결국 이 여인은 그 훈련을 시험해 보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되겠군!' 휴도옥린의 눈빛이 담담해졌다. 상대의 반응이 격렬할수록 시험은 감칠맛이 나는 법이다. 그것은 여인이 이미 모든 제어력을 잃어 버렸다는 뜻이고, 그는 그 상대 를 적절히 요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휴도옥린의 오른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탐스러운 둔부 밑으로 뻗어 지더니 간단하게 조잡한 그녀의 가죽조각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으로 원을 그리듯이 유연하게 그녀의 전신을 쓸어 나갔 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의 동요같은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감미롭게 그의 손이 사라빈영의 탄력있는 등과 허 리의 능선을 스쳐 지나갔다. "...!" 사라빈영의 전신이 긴장되어 왔다. 꽃잎처럼 벌려진 그녀의 입술새로 달짝지근한 단내가 흘러 나왔 다. 그 입술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휴도옥린을 즐겁게 했다. 그러 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쾌락을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인의 가냘픈 교구가 잔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힐 때까지 기다렸다. 은은한 체향()이 배어 나오는 남만의 여인다운 특유의 끈끈한 피부가 땀에 젖어 그의 몸에 밀착돼 왔다. 신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인 듯 결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눈 을 내리감고 있었지만 사라빈영의 전신은 확확 달아오르고 있었 다. 휴도옥린은 여인의 척추 바로 아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 열이 오르고 반항하는 기색이 누그러지자 그는 여인 의 등을 쓰다듬던 손길을 천천히 그녀의 무릎으로 가져갔다. 사라빈영은 체념한 듯이 아니 어쩌면 바라고 있었던 듯한 눈길로 그를 올려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감각세포가 이 미 화아악 달아 오르고 있었다. "아아...!" 조금씩 그녀의 몸이 앞으로 내밀어지면서 활처럼 각을 이루고 있 었다. 휴도옥린은 그녀의 눈을 응시한 채 손을 그대로 그녀의 무릎위에 얹었다. 마치 잠시 휴식을 취하듯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육욕의 열기가 풍겨났다. 그것은 모든 이성적인 것, 강압적인 것을 벗어난 싱싱하고 건강한 완숙한 여인의 열기였다. 그녀의 살결은 뜨거운 정열을 품은 은은한 묵빛이었고 그것은 부 드러운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내리감은 얼굴선이 애잔하고 고왔다. 휴도옥린은 그녀의 눈에서 그의 손이 올라와 주었으면 하는 굴욕적인 욕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그 눈을 들여다 보면서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그녀의 전신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심해()를 유영하는 인어()처럼 위를 향해 쓰다 듬다가 다시 내려오고 그러다가 어느 곳에 이르러서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의 입술이 풀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론 여전히 격렬하게 반항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본능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정()이 그녀의 이성을 제압하고 있 었다. 그녀는 그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휴도옥린은 모든 여건이 성숙됐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라빈영의 두 팔이 머리 위로 돌려져 그의 목을 휘감았다. 휴도옥린은 자신도 어느새 옷을 모두 벗어던진 나체가 되어 그녀 의 위로 겹쳐졌다. 가녀린 여체를 바위처럼 단단한 사내의 몸이 억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비소()는 이미 습기가 범람해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사내의 전신을 빨아들일 듯이 뜨겁게 열리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양손을 그녀의 등 뒤로 해서 엉덩이 아래에 넣어 그녀의 몸을 떠 받들었다. 그리고 세찬 압력과 함께 휴도옥린은 더욱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 버렸다. "흡!" 사라빈영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분명한 고통이다. 그러나 고통은 기이하게도 더욱 매달리게 만드 는 그런 알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언제 그런 고통을 느꼈는가 싶으리만치 이내 고통과는 또다른 느낌이 그녀의 한점에 서 시작되어 전신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불꽃이 작렬하고..., 그들은 저 멀리 보이는 정점을 향해 치달렸 다. 아스라한 극치의 불꽃들, 그 환상의 불꽃들이 그들의 몸 속에서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그들은 거의 동시에 내부에서 일고 있는 작은 폭발을 느꼈다. 뇌성()이 그들의 뇌리 속에서 울렸다. 명멸하는 유성()들 이 그들의 내부에서 폭발하듯 작렬했다. 그리고.... 유월() 삼십일(). 안개()가 있고, 비()가 천지를 뒤덮었고 그리고 한 명이 죽었 다. 일백회의 수연()을 마치고 자신만의 비밀의 방에서 싸늘하게 굳어있는 헌원 노대부인의 옆에는 눈보다 흰 백매() 한 송이 가 떨어져 있었다. 칠월() 칠일(). 뇌성()이 있고, 천지를 뒤덮은 폭우가 있고 그리고 두 명이 죽었다. 폭우 속에 피어난 백매는 청초하기만 했다. 매원의 신화는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달()이 아니라 빗 속에서.... 구월구일은 천하에 두 가지 이상을 주었다. 죽음()이 그 하나였고, 그리고 공포가 그 두번째였다. 그는 무림사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살수보다도 완벽했고, 또한 집요 했다. 그리고 매원의 구월구일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회의는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팽팽한 긴장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무영()은 좌중을 쓸어보았다. 금릉() 교외에 자리한 호화롭기 이를데 없는 주작대루( )에는 언제부터인가 기이한 일행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경로로, 각기 다른 시각에 금릉에서 가장 큰 주 루()인 이곳 주작대루로 모여들었다. 주작대루의 수많은 별채 중 가장 조용하고 아늑한 이 별채는 이미 삼일 전부터 통째로 임대되어 있었고, 이미 수십여 명의 매복고수 들에 의해 엄중이 호위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노출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명, 가장 위험한 인 물이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제거하기로 결정한 구월 구일입니다." 무영의 음성은 격양되어 있었다. 그는 이미 한 가지 일을 실패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것이 그의 마 음의 평정상태를 뒤흔들었다. 율금향이 말했다. "천마세의 관선고가 그를 제거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헌데 그가 곧바로 우리에게 접근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 입니까?" "그렇습니다. 구월구일은 지금 정확히 우리 형제들만을 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월구일이 살해하고 있는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무영은 지금 우리에게 확실히 밝히지 않은 게 있는 듯 한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산단이 질책하듯 입을 열었다. 회의를 주도하는 무영은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머금었다. 그러 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들의 첫째 율법은 서로간의 신뢰인 것이다. "그가 목표로 하고 있는 형제들은 일곱()입니다. 그는 십팔 년 전, 잠마의 부국공 휴도성을 제거하는데 참여했던 그때의 일곱형 제를 추적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 "으음...!" "무영도 그때 그 일에 참석했습니까?" 자부용이 질문했다. 무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영께서는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휴도성은 우리를 배반했고... 우리는 그를 반드시 제거해야 했으니까요. 단 지 구월구일이 어째서 휴도성의 복수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군 요." 무영이 대답하듯 입을 열었다. "그는 휴도성의 아들이었습니다." 일순,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입을 연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확실히 이제는 그와 공존할 수 없는 입장이로군요. 그를 제거할 방법을 강구하셨습니까?" "예! 한 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전일 말씀드렸던 그 살수입니 다." "하지만 아무도 구월구일을 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먼저번에 도 네 명의 살수를 고용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구월구일의 수하가 되어버렸지 않습니까?"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천하의 그 누구도 구월구일을 살해할 수 는 없습니다. 그 자신이 뛰어난 살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번에 추천하는 인물은 다릅니다." "완전히 새로운 살수입니까?" "아닙니다. 형제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 에 은퇴했으나 바로 그점 때문에 기용하려는 것입니다." "무영! 확실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누구입니까?" 무영이 조심스럽게 장내를 쓸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이 일만큼은 본인 혼자서 관장하겠습니다. 철저한 비밀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으음! 그것은 좋소. 그러나 그가 과연 구월구일을 살해할 수 있 을까요?" "예! 확신합니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구월구일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그 역시 매원의 살수이 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 "으음 매원의 살수 중 아직 우리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있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자, 그럼 결정을 내립시다. 자부용?" "찬성입니다." "연리지?" "찬성합니다." "벽도?" "구월구일의 죽음을 위해서 축배를 듭시다. 물론 찬성입니다." "자고?" "찬성합니다." "산단?" "글쎄, 같은 매원의 살수라면 믿을 수 있기는 하겠지만... 아무래 도 좀더 신중히 결정하는 것이..." "반대라는 뜻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찬성입니다." "자, 이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무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시진 후. 주작대루의 별채를 통채로 빌렸던 인물들은 도착할 때와 마찬가지 로 각기 다른 경로로 다른 시각에 주작대루를 떠났다. 결정된 것은 한 사람의 죽음()이었다. 구월구일이 그 대상이었 다. 장안 자오진, 장안에서 남으로 십여 리 떨어진 자오진에는 한채의 낡은 주루가 있었다. 편액조차 걸리지 않은 작은 주루는 항시 한가했다. 때문에 이 주루의 유일한 점소이 소년은 항시 입구에 의자를 내놓 고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소년은 낯선 사람을 저울질 해보는데 많은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헌데, 문득 소년은 도저히 그 신분을 짐작할 수 없는 한 백삼사내 를 발견하게 되었다. 작은 주루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백삼사내의 걸음걸이는 무척이 나 안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오랜 여행중인 듯 헝클어진 흑발과 더럽혀진 백삼에 비해 사내의 용모는 극히 준수한 편이었다. 소년은 사내의 걸음걸이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시 한 번 백삼사내의 용모를 확인한 후 이채를 떠올렸다. 그렇다! 꼭 육개월만이었고 그리고 이번이 세번째의 방문이었다. 사내는 유별나게 왼손만을 사용하던 바로 그 사람이었고 주루의 주인인 창사와 절친한 지기로 그가 오면 항시 둘은 엄청난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극히 적었다. 헌데 이 순간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백삼사내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에 그는 더할나위없이 허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 두번째에 왔을 때에 는 대조적으로 밝은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번째의 방문에 그는 극도로 침체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소년은 그 백삼사내가 올 때마다 다른 표정과 풍도를 보이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주인아저씨 안에 계시냐?" 질문은 똑같았다. 그러나 확실히 백삼사내의 표정은 마치 죽을 장 소를 찾아온 듯 그렇게 어두웠다. 소년은 매번 그렇듯이 멍청해졌다. '같은 사람이 볼 때마다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어째서 나는 매번 이 사람의 얼굴을 잊고마는 것일까?' 소년은 내심 중얼거리며 슬금슬금 일어나 주인을 부르러 달려갔 다. 이 인(). 이름없는 주루의 주인인 창사와 그리고 올 때마다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이방인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들의 앞에는 매번 그랬던 것처럼 엄청난 술과 음식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소년은 그 술과 음식들이 이번에도 밤사이에 깡그리 없어지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소년의 예측은 맞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창사와 휴도옥린 은 그전보다 더욱 말이 없어졌고 그리고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소년은 다시 멍청해졌다. 창사와 이방인 휴도옥린 사이의 분위기는 확실히 변해 있었다. 무엇인가 이제 곧 폭발할 듯한 긴장감만이 그들 사이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소년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질식할 듯한 긴장이 싫어 소년은 슬금슬금 주루 밖으로 빠져나 갔다. 소년이 밖으로 사라지자 휴도옥린이 눈을 들었다. 그의 눈에는 아 무런 빛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자네는 많은 것을 알고 있더군." "알고 있었는가?" 창사의 음성은 어두웠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애써 미소를 떠올리려 했다. "술을 하지 않겠나?" "이미 많이 마셨어. 그러나 더 마시지." 휴도옥린은 술잔을 잡았다. 놀랍게도 오른손이었다. 이런 휴도옥린의 태도에 창사의 눈빛이 흠칫 파동쳤다. 그러나 그 는 휴도옥린과 함께 묵묵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동안 그들은 술만 마셨다. 아무도 서로 입을 열지는 않 았다. 밤은 깊어만 갔다. 대략 삼경쯤 되었을까? 창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옥린! 자넬 한 번 안아보고 싶군. 자네가 처음 이곳에 찾아왔을 때처럼 말일세." "좋지." 둘은 아무도 취하지 않은 듯했다. 두 사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탁자 옆에서 서로를 포옹했다. 창사의 소매 속에서 한 자루 비수가 튀어나와 휴도옥린의 등을 감 싸고 있던 손에 쥐어졌다. "...!" "...!" 비수는 점차 휴도옥린의 등에 다가가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움직 이지 않았다. 이때였다. 챙그랑! 창사는 돌연 손에 쥐고 있던 비수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발작적으 로 소리쳤다. "제기랄! 왜 알면서 피하지 않는가?" "...!" 휴도옥린은 바닥에 떨어진 비수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게는... 아무도 없었네. 내게는 매원 시절에 사귄 친구들만이 전부이고 그 친구들 중 자네만이 나와 가장 가까왔네." "...!"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세. 역시 내게는 아무도 없고 매원의 추억만 남아있네. 그리고 역시 자네만이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 사 람일세." 휴도옥린의 음성은 나직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창사는 그의 이런 음성 깊은 곳에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는 정()을 읽어내고 있었다. "헌데, 그런 자네가 나를 죽이려는데 무엇때문에 내가 피하겠는 가. 내가 자네를 죽이고 그리고 나 혼자 아무도 없는 이 천하를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나는 매원의 유령()들을 안고 살아가기 에는 너무 고독한 놈일세." 휴도옥린은 말을 마치고 다시 술병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탁자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 창사는 오랫동안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역시 휴도옥린의 맞은편 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휴도옥린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삼환회의 힘으로 내가 추적하던 일곱 사내에 대해 거의 대 부분 알게 되었네. 그리고 진정한 무영이 바로 신검부의 혁련연후 이고 그가 곧 매원의 원주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자네와 그가 아직까지도 연락이 닿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네." "...!" "삼환회의 새로운 보고에 의하면 율지비는 이번에 나를 죽이기 위 해 새로운 살수를 기용했다고 했네. 매원의 살수라더군." "그렇게 해서 나에 대해서 알게 되었군." 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엇을 감추려거나 은폐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휴도옥 린 스스로 결정하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싶네." 휴도옥린은 말을 마쳤다. 아울러 자신의 뜻을 밝히기도 한 행동이었다. 창사가 만약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기꺼이 죽어주려 하 는 것을 말이다. 창사의 음성도 아무런 감정없이 조용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원주는 나의 의부()였네. 기실 나는 매원의 살수로 키워진 것이 아니라 친구들 중에 배신자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그들 사 이에 숨겨진 감시인이라 할 수 있었네." "...!" "그러나 맹세코 나는 친구들을 배신하는 행동은 할 수가 없었네. 그리고 원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배반한 친구들도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평안할 수가 있었지." "...!" 휴도옥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어 창사의 말을 방해하지 는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독특한 대화 방법이었다. "역시 내게도 오랫동안 명령은 오지 않았네. 해서 나는 그들이 나 역시 포기한 것이라 믿고 매원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것이네. 그 러나...!" "훗! 명령이 왔군. 사 년만에?" "그래! 그것도 바로 자네를 죽이라는 명령이었네. 솔직이 고심하 지 않을 수 없었네. 나의 지금의 모든 생활을 포기하기에는 아내 를 너무도 사랑하고 있었네." "알고 있네." "그러나 결국은 네 녀석을 마누라보다도 더 좋아한 모양일세." "...!" 창사의 마지막 말은 투덜거리는 투였다. 그 말에 휴도옥린의 표정 을 뒤덮고 있던 어둠이 일시에 가셔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흥! 만약 당신이 옥린을 죽이려 했다면 당신은 내 손에 죽었을 거예요." 돌연, 주방 쪽에서 나직한 여인의 교갈이 터져 나왔다. 휴도옥린은 그 음성의 주인공이 바로 수희란임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같은 달빛 살수였고 휴도옥린을 좋아한 친 구들 중 한 명이었다. 문득 휴도옥린이 몸을 일으켰다. "가려는가?" "가야지." "...!" "창사,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 창사는 일시 망설이는 빛을 띠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기이한 표정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를 길러준 의부이기는 하지만 내가 자네를 죽이지 못한 이상 어쩔 수 없겠지. 원주는 매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네." "매원...?" 휴도옥린은 창 밖을 응시했다. 어느새 저 멀리 여명()이 움터오고 있었다. 새벽잠을 설쳐 일찍 주루의 문을 열려고 나왔던 점소이 소년은 깜 짝 놀랐다. 백삼사내, 그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또 다시 변화되어 있었다. 더 이상 이제 곧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될 듯한 그런 어두운 얼굴 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년과 마주치는 순간 환하게 미소까지 보내 고 있었다. 소년은 또 다시 멍청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이상한 모양이로군!'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내심으로 다시는 백삼사내의 표 정이 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제35장 숙적()들의 만남! 매화(). 세상의 온갖 매화들을 모아 놓은 듯한 곳이다. 방원 일백여 장에 달하는 듯 넓은 화원에 가득해 있는 것은 모조 리 매화나무 뿐이었고, 그 매화나무들은 대부분 활짝 만개해 있었 다. 은은하기까지 한 화향()이 능라()와도 같이 휘돌고 있는 이곳은 바로 매원이었다. 그 매원의 입구에 안개()처럼 흐르는 담백한 화향을 가르며 한 사나이가 조용히 들어서고 있었다. 눈()보다도 새하얀 희디흰 백삼에 흐트러진 흑발, 인상적으로 부각되는 훤칠한 키. 그리고 눈().... 그 눈동자에는 깊은 물 속의 고요와도 같은 조용함이 있었다. 그 래서인지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는 것 같아 보였다. 천하에 이러한 눈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은 단연코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휴도옥린이었다. 휴도옥린의 고요한 눈은 지금 수많은 매화나무 중에 가장 오래된 듯한 고목() 위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눈이 머무르고 있는 고목의 중간부위에는 예전과 같이 여전히 이십여 개의 명패들이 걸려 있었다. 휴도옥린의 눈빛에 이때만큼은 아련한 과거를 반추하는 듯한 감회 의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는 예전처럼 조용히 명패들을 쓸어보기 시작했다. <자당().> <무정인량().> <도노().> ... <무색().> 그는 무척이나 긴 시간을 마치 조각품을 감상하는 듯한 유심한 시 선으로 명패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린 듯 떨어지지 않는 애잔 한 시선을 명패로부터 돌렸다. 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자신이 이곳에 돌아온 진정한 목적을 위해 다시 걸음을 옮겨 나갔다. 오직 매화만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지. 휴도옥린은 천천히 공지의 중앙에 위치한 고옥()의 앞으로 다 가가고 있었다. 아직도 고옥까지는 이십여 장 가까운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휴도 옥린의 시야에는 이미 고옥의 앞에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한 사람 의 모습이 투영됐다. 비록 등을 돌리고 있어 그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뒷모습만으로도 주변의 대기를 압도하고 있는 백삼인().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체격이며, 귀 뒤로 쓸어넘긴 희끗희끗한 백 발이 초로의 완숙함을 엿보이게 하고, 마치 한 마리 학()처럼 청신함을 풍기게 하는 가운데 은밀한 어둠의 암영()이 드리워 져 있는 문사()차림의 백의노인이다. 그가 누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리라. 잠마해의 실질적인 관장자인 무영()이라는 신분과 신검부의 군사()라는 두 개의 상반된 얼굴을 가졌으며, 천하 모든 세력 의 이인자들의 비밀결사()인 율지비라는 무림사 초유의 기형()을 탄생시킨 인물, 바로 혁련연후였다. 휴도옥린은 정확히 그의 일 장 뒤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그러자 혁련연후의 잔잔하면서도 무게있는 음성이 그의 등 뒤로 흘러나 왔다. "나는 마음 속으로 창사가 올 것인가 아니면 구월구일이 올 것인 가에 대한 내기를 걸고 있었네." "...!" "그 내기에서 나는 구월구일을 택하였지. 후후,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혁련연후는 천천히 휴도옥린을 향해 정면으로 돌아섰다. 단아하면서도, 지나온 비정한 삶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관록어 린 오십대의 얼굴이 비로소 드러났다. 만남, 운명이 점지한 숙명적인 두 인간의 조우()는 이렇게 이 루어지고 있었다. "...!" "...!" 두 사람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한 눈길로 말없이 서 로를 바라보았다. 그들 두 사람 사이로 시간의 흐름이 정지해 버 린 듯한 침묵이 흘렀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 사이에 흐르며 진공상태를 이 루고 있는 듯한 침묵을 먼저 밀어낸 것은 혁련연후였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네. 이 날을!" 무언가 깊은 뜻이 함유된 한 마디였다. 휴도옥린은 그와 마주선 이래 처음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을 왜 죽였소?" 혁련연후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것은 내가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지. 천하에서 나의 신기묘산 ()을 능가했던 인물은 오직 그 하나 뿐이었네. 내 야망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필역적으로 그를 제거해야만 했던 것이지." "...!" "그러나...!" 혁련연후의 입가에 불현듯 자조섞인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결국 죽은 제갈량()을 사마의()가 당해내지 못 했듯이 그를 죽였으나 그를 이기지는 못하였네." "...!" "나는 그가 사후의 대비책을 세워 놓았으리라 짐작은 했었으나 그 대비책이 설마 자네를 매원()에 집어넣은 것이리라고는 예상 조차 못했었지." "...!" "나 역시 자네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자네의 재질에 눈이 어두워졌던 것이 천려일실이었지. 결국 모든 것이 자네의 부 친 뜻대로 된 셈이네. 지금 자네는 완벽한 힘()을 구비하고 내 앞에 서 있으니까!" "...!" "그러나 나는 후회스럽지는 않네. 왠줄 아는가?" 불현듯 혁련연후는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 휴도옥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는 희미한 이채가 떠오르고 있었다. 혁련연후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자네를 키웠기 때문이네. 천하 아니, 고금제일 의 살수이며, 영원한 마도의 꿈이라 일컫는 잠마천주의 위에 오른 구월구일을!" 휴도옥린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그러나 당신이 창조해낸 구월구일에 의해 당신은 이제 영원한 침 묵을 맞이해야만 하오." 혁련연후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갔다. "그렇겠지! 그러나 나쁘지 않아. 그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일테니 까... 사실 나는 자네가 휴도성의 핏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때 마다 오히려 그런 의심을 무의식 저편으로 밀어내기 위해 노력했 었다네. 나는 자네를 무척이나 아끼고 있기 때문이었네. 허허, 어 쩌면 휴도성은 나의 이런 심정까지도 예측하고 있었기에 자네를 매원에 집어넣은 것일지도 모르지...!" "...!" "자네에게 죽는다거나..., 내가 평생에 걸쳐 확고하게 다진 율지 비의 모든 기업이 붕괴되는 것 따위는 내게 별다른 의미가 없네. 다만 자네 부친에 대한 영원한 패배의식이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군!" "...!" 불현듯, 혁련연후는 두 다리를 약간 벌려 천주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이제 내가 자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네! 나는 지금 이 순간 모든 은원의 인과를 떠나 한때는 천하제일고수라 불리웠던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잠마천주 구월구일에게 도전하고 싶 네." "...!" 휴도옥린의 동공 깊숙한 곳에 짧은 순간 섬광이 번뜩였다. '효웅()이다!' 휴도옥린의 고개가 조용히 끄덕여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혁련 연후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네." 혁련연후는 천천히 한 걸음을 내걸으며 품 속에서 길이가 불과 반 자 가량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일순, 그의 손에 들린 단검에서 기이한 무지개빛이 휘황하게 일어 났다. "이것은 서홍참비()라 하네. 나는 이것으로 자네와의 승 부를 논할 것이네." 휴도옥린은 혁련연후의 전신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형의 기세가 점 차 강해지고 있음을 느끼며 말없이 잠마천단()을 끌어 올 렸다. "..." "...!"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들은 자리 이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 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 다. 그들 주변의 공기 속에 퍽, 퍽 하고 까만 자국같은 것이 생겼다가 지워지곤 했다. 공기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 주위의 대기는 급속하게 냉각되어 가고 있었 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혁련연후는 수중의 서홍참비를 일직선으로 뻗으며 완만한 호선을 대기 중에 그려냈다. 후우웅! 서홍참비의 검극()으로부터 일순간 여섯 개의 둥근 검환( )이 두리둥실 떠올랐다. 동시에 그 여섯 개의 검환은 마치 밤하 늘의 유성이 떨어지는 듯한 벼락같은 속도로 찬란한 빛을 동반하 고 휴도옥린을 향해 쏘아 들어왔다. 더구나 그 검환들은 첫번째 검환보다는 두번째 검환이 빠르게, 세 번째 검환보다는 네번째 것이 빠르게 쏟아져서 종래에는 한 덩어 리가 되어 휴도옥린의 머리 위로 마치 폭포수를 쏟아 붓듯이 떨어 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 기세는 너무도 가공스러워 혁련연후가 가히 필생의 검학을 펼 쳐냈음을 알 수 있었다. "육형검환()이구나!" 휴도옥린의 입술 새로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오히려 그 여섯 개의 검환 속으로 번갯불처럼 단축해 들어 갔다. 동시에 그의 양손이 마치 대붕()이 거대한 양날개짓을 하듯 활짝 펼쳐졌다. 우르르릉! 휴도옥린의 양팔목에서 찬란한 휘광이 눈도 못뜰 정도로 번뜩거리 며 검환들 사이로 뚫고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그 서리서리 일어난 휘광은 마치 거대한 봉황()이 울음을 터 뜨리는 듯한 굉음을 동반한 채 순식간에 검환을 파괴하고 그 여세 를 몰아 그대로 혁련연후에게 뒤덮여 가고 있었는데 마치 창공에 날아오른 봉황의 부리가 벼락처럼 쏘아져 오는 것과 같았다. 그 가공스런 위세와 도저히 인세에서는 다시 볼 수 없을 듯한 번 갯불같은 속도는 천하의 그 어느 누구라도 전의()를 상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혁련연후는 자신이 필생의 경력을 모아 펼쳐낸 육형검환이 이렇듯 간단히 파괴되고 오히려 그로서는 평생 처음 대하는 가공스러운 휘광이 뒤덮혀 내려오자 감탄의 빛마저 담겨있는 경악성을 터뜨렸 다. 웅! 그의 수중에 들린 서홍참비에서 재차 폭죽이 작렬하는 듯한 검광 ()이 솟구쳤다. "...!" 허나 그의 눈에 그 어떤 희한한 빛이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그의 검세가 극히 짧게 멈칫한 순간이었다. 꽈지직! "헉...!" 무엇인가가 빠개져 나가는 듯한 파괴음이 터져 나오며 혁련연후의 몸이 삼장 밖으로 날라갔다. 그의 몸이 제멋대로 삼장 밖의 지면 에 나뒹굴었다. 이미 그의 가슴은 짓뭉개진 채 새하얀 백삼이 온통 선혈로 물들어 있었고, 입으로는 연신 검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휴도옥린이 환상처럼 공간을 단축해 혁련연후의 앞에 내려섰다. 희미한 의혹의 빛이 담겨있는 그의 시선이 혁련연후의 이미 초점 이 풀린 눈동자와 철저히 짓뭉개진 가슴을 향했다. 도저히 회생불 가능한 상태였다. "...!" 광채가 사라진 혁련연후의 시선이 휴도옥린의 눈을 찾았다. 휴도옥린의 눈가에 가는 파문이 번졌다. "왜 피하지 않았소? 당신의 능력이라면 봉황흔조 혈망응은 피해낼 수 있었소." 혁련연후의 입가에 희미한 선이 그어졌다. "후후, 왜 피하지 않았느냐고? 어차피 나는 이미 자네의 상대가 아니었어. 그것을 확인했는데 굳이 패배자의 심정을 조금 더 연장 시키는 수모를 당할 필요는 없지!" "...!" 혁련연후는 생의 마지막 고통이 밀려드는 듯 억지로 미소를 떠올 렸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그러나 자네의 손에 죽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야" "...!" "어서 떠나게. 자네로서도 빠져 나가기 어려울 위험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 휴도옥린의 동공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부터 점차 자신의 주위로 급격히 가까와지고 있는 숨막히 는 듯한 살기()를...! 그리고 그 살기는 이미 어느 틈에 그의 이십 장 주변에까지 다가 들고 있었다. 휴도옥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미 늦은 것 같소!" 혁련연후의 꺼져가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이미 늦었다고...? 그렇다면...!"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무림사에 길이 기억될 한 일 대의 효웅은 이렇게 두 눈조차 감지 못하고 영겁의 장막 저편으로 떠난 것이다. "...!" 휴도옥린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혁련연후의 감기지 못한 눈을 지 그시 내리감겨 주었다. 일대의 효웅이며 또한 어린 휴도옥린의 인생을 뒤바꾸어 버린 인 물이다. 혁련연후에 대한 그의 마음은 사실 지극히 미묘한 것이었다. "잘 가시오. 원주!" 그는 잠시 동안 혁련연후의 얼굴을 바라본 후 서서히 몸을 일으켜 신형을 돌려 세웠다. 이어 사방을 조용히 둘러보던 그의 두 눈에 흐릿한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서 있는 공지를 에워싸고 있는 무수한 매화나무 위로 언제인 지 모르게 수십여 명의 인영들이 소리없이 출현해 있었다. 손가락 굵기 밖에 되지 않는 나뭇가지 위에 앉기도 하고, 비스듬 히 눕기도 한, 실로 각양각색의 형상을 하고 있는 수십여 명의 노 인()들. 휴도옥린이 느꼈던 숨이 막혀오는 듯한 살기는 바로 그들에게서 비롯되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휴도옥린이 알고 있는 인물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천애가자 포군락과 만리능파 광한수 등의 천가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발견한 휴도옥린은 이곳에 나타난 인물들에 대한 정체를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천가(). 숭양무원()이라고도 불리우는 신검부의 진정한 힘(), 그 사십팔 인()의 은자()들이 모조리 이곳에 출현한 것이다. "...!" 휴도옥린은 담담한 이채를 머금고 공지로 통하는 작은 소로를 바 라보았다. 그곳에..., 두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두 눈썹이 피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는 마치 여인의 그것보다도 처절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혈미중년인과 그 혈미중년인의 앞 에서 마치 한가로이 구경이라도 나온 듯한 차분한 걸음걸이로 다 가오고 있는 금포장년인이었다. 금포장년인의 기도는 실로 출중하기 이를데 없었다.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 같으나 마치 한 무더기의 구름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듯한 걸음걸이와 검은 수염을 짧게 다듬은 수려한 용모, 게다가 혈미중년인이 그의 뒤를 공손하게 따르고 있 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신분이 실로 범상치 않은 것임을 은연중 느 끼게 하고 있는데.... 허나 휴도옥린의 시선은 단 한 번도 금포중년인에게 향하지 않고 오직 혈미중년인만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표정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마치 입을 닫아버린 조개처럼 무표정한 그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은 완벽하게 절제된 살의()였다. 혈미중년인. 그는 바로 휴도옥린이 거의 이 년여를 그림자를 쫓듯 추적한 흑살 귀리 비모소였던 것이다. 이윽고 흑살귀리 비모소와 금포장년인은 휴도옥린의 삼장여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 "...!" 순간적으로 전광()이 얽히듯 비모소와 휴도옥린의 시선이 허 공 중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휴도옥린은 마치 강전이 꽂혀오고 있는 듯한 금포장년인 의 시선을 느끼고 그 순간만큼은 어쩔 수 없이 비모소에게서 시선 을 돌려야만 했다. 그는 조용히 금포장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금포장년인의 시선에서 압력을 느낄 수 있었으나 그 압력에 는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감정을 배제하는기 색만을 전달해 오고 있는 것이다. 금포장년인은 힐끗 혁련연후의 시신만을 바라보았다. "조금 늦었군!" 그는 낮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휴도옥린을 바라보며 묵진한 음성을 흘렸다. "귀하가 잠마천주인 구월구일이오?" 휴도옥린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그대가 신검부주인 천가의 가주요?" "...!" 일순 금포장년인, 신검부주의 눈에 잔잔한 노기가 스쳤다. 그는 휴도옥린이 자신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 자신을 놀렸다고 느낀 듯했다. 그때 비모소가 신검부주의 노기를 풀어주려는 듯 비웃는 듯한 어 조로 입을 열었다. "잠마는 낙마()였나 보군. 시세도 모르는 우자()를 천주 ()로 인정하다니...." "...!" 휴도옥린의 시선이 말없이 다시 비모소를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비모소는 섬뜩하리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이제 매원의 신화도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구월구일! 너의 죽 음을 끝으로...." 휴도옥린은 불현듯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비모소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제아무리 잠마천주라해도 과연 천가의 사십팔은() 의 수중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휴도옥린이 조소하는 듯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헌데 바로 이때, 돌연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마치 매화나무 에 둘러싸인 이 드넓은 공지 전체가 가라앉는 듯한 숨이 막혀오는 정적이었다. 사람들의 뇌리 속으로 그 정적은 말할 수 없이 불길한 예감이 되 어 가라앉고 있었다. 비모소는 동시에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소름 이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무어라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살기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악마의 검은손이 다가드는 듯한 질식할 것 같은 기이한 살기가 공지를 향 해 밀려오고 있었다. 그 살기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놀라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것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속으로 마성이 스며들어 오고 있는 듯한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이때였다. "짜버릴까?" "그래야겠습니다. 천주께 감히 너무 무례합니다" "그래 역시 짜야겠지." 돌연 숨막히는 정적으로 가득한 장내에 지극히 괴이한 두 가닥의 음성이 울려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 음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향 했다. 음성이 들려온 소로(), 그곳에 구척이 넘는 장대같이 큰 괴노 ()와 오척 단구에 보통 사람보다 무려 두배 이상 큰 두상을 가진 대두괴인이 나타나 있지 않은가. 그들을 대한 천가의 사십팔은 중 천애가자 등의 입술 새로 나지막 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자오령의 천마장령!" 그 경악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조금 전까지 밀려들던 그 기이한 살기가 어느틈에 매원 전체를 뒤덮고 있음을 느끼고 반사 적으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그들의 동공에 한결같이 더 이상의 한계가 없을 듯한 극심 한 경악의 물결이 파동쳤다. 보라! 수백 수천 그루의 매화나무 사이로 마치 겨울 해일이 밀려들 듯 소리없이 밀려들고 있는 무수한 인영들을...! 그것은 마치 어둠의 모체로부터 밀려나오는 어둠의 무리들이 순식 간에 대지를 뒤덮고 있는 듯한 공포스러운 광경이 아닌가! 뿐이랴! 마치 검은 해일이 양단되듯 쫘악 양쪽으로 밀려나며 그 사이로 허 공에 둥둥 뜬 채 날아오고 있는 은발은염은미()에 은 의()를 걸친 노인과, 그와는 극히 상반되게 드러난 피부는 물 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새카만 흑색으로 뒤덮인 흑의노인이 있었다. 그들은 마치 두 덩이의 구름이 밀려오듯 선 자세 그대로 날아오고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배어나오는 무형의 기도는 무려 오십 장 밖 에 있는 사람들의 심금이 떨릴 정도였다. "부국공! 게다가 마영제까지!" 누군가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외침이 새어 나왔다. 아아, 그렇다. 잠마()! 그 가공스러운 고수들이 한꺼번에 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검부주와 비모소를 비롯한 천가의 인물들은 잠마의 인물들이 부 국공과 마영제 등양룡의 손짓에 따라 소리없이 매원의 주위를 겹 겹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거의 넋이 나간 듯이 망연자실하게 바 라보았다. 그들이 구월구일을 잡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 기실은 천가를 잡기 위한 잠마의 덫이었던 것이다. 잠마의 모든 인물들이 움직임을 멈추자 장내에는 또 다시 죽음보 다 깊은 정적이 밀려 들었다. "...!" 휴도옥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비모소와 신검부주를 응시했다. 비모 소의 얼굴은 역력히 변해 있었으며 신검부주의 눈빛도 눈에 띠게 흔들리고 있었다. 휴도옥린은 장내를 지배하고 있는 정적을 밀어내며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부주! 본인은 잠마와 신검부, 아니 천가와의 격돌을 원하지 않고 있소. 만약 부주의 뜻도 그렇다면 잠마와 천가는 격돌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 신검부주의 눈에 흠칫 이채가 스쳤다. 기실 천가가 잠마의 천주인 휴도옥린을 경계한 것은 그 잠마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잠마의 탄생 동기가 천가를 상대하기 위함이었고, 잠마천주가 탄 생되는 날 잠마와 천가는 숙명적인 격돌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 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잠마의 천주로 탄생된 휴도옥린이 그 잠마를 기초한 십이천 마의 유시를 무시하고 평화를 원한다 함이니 진정 놀랍기 그지 없 었다. "으음! 천주의 뜻이 진정이라면 본 천가 역시 굳이 피를 원할 이 유는 없소." 신검부주의 눈에 다소 안도하는 빛이 스쳤다. 이 뜻하지 않은 상황에 신검부의 인물들은 물론이거니와 잠마의 고수들 또한 놀람을 금할 수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휴도옥린과 신검부주의 평화협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 지금은 숙명의 대회전을 벌일 시기가 아닌 것이다. 그 이유는 바 로 율지비라는 거대한 세력이 존재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휴도옥린이 돌연 비모소를 향해 싸늘한 눈빛을 던졌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한 가지 해결할 일이 있소. 바로 저 사람에게...." "...!" 비모소의 얼굴이 굳어졌다. 일순 휴도옥린은 신검부주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본인이 저 사람을 처리하는 것에 부주도 동의해 주리라 믿소. 그 까닭은 저 사람은 바로 율지비의 핵심인물이고 그것을 부주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오." "...!" 신검부주의 눈빛이 기이하게 흔들렸다. 일순, 그의 뇌리로 휴도옥린의 싸늘한 전음성이 종음처럼 울려 퍼 졌다. (흥! 신검부주 금가량()! 나는 이미 네가 진정한 천가의 가 주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원래의 가주였던 금운림() 을 살해하고 율지비의 도움을 받아 가주가 된 인물인 것이다. 그 러나 이렇게 많은 수하들 앞에서 비모소를 비호할 수는 없을 것이 다.) 휴도옥린은 신검부주가 일순 망설이는 것을 못본 척 하며 조용히 비모소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처... 벅! 처벅! 그의 걸음은 일정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기세는 기이하도록 무서 운 것인지라 상대방으로서는 공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였다. "신검부주에게 사도제일가의 사도제종이 도전하오." 돌연, 매원의 한쪽에서 고요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한 인영 이 인의 장막을 헤치며 유유히 신검부주에게 다가들기 시작했다. 반자루 금검을 아무렇게나 쥐고 있는 백포청년! 아아, 바로 사도 제일세가의 후예인 독비금검 사도제종이 아닌가! "...!" 신검부주는 이미 독비금검 사도제종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다. 신 검부와 사도제일가의 끝없는 도전의 역사는 천하의 모든 무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로서 신검부주는 이 순간 그의 도전을 회피할 수가 없음을 느꼈다. "좋다! 사도제일세가의 도전을 이 자리에서 수락한다." "고맙소." 사도제종은 마치 긴 방황끝에 목적지에 이른 사람처럼 평화스러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사도제종과 신검부주의 격돌, 이것은 무인대 무인으로서의 대결인 지라 그 누구도 간여할 수 없었다. 설혹 신검부의 수하가 제아무 리 많다 해도 그들은 사도제종을 이 순간 만큼은 막을 수 없는 상 황인 것이다. 두 사람이 대치해 섰다. 사도제종에게는 기나긴 방황의 끝이었고 신검부주로서는 넘어야할 관문인 것이다. 한편, 휴도옥린은 이미 비모소의 일장 앞에 이르러 있었다. 이미 무형의 살기가 크게 일어 마치 유형의 물체인 양 비모소를 압박 해 들었다. 비모소는 세 걸음 물러나고 그 순간 그림자가 따르듯 휴도옥린은 세 걸음 다가서고 있었는데 그속에는 많은 변화가 담겨져 있었다. 비모소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카- -악! "갈!" 찰나, 그의 품 속에서 환상처럼 짧은 적검이 튀어 나왔다. 그 적 검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휴도옥린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휴도옥린은 그 가공할 기세를 대하고도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적검이 그가 서 있던 공간을 베고 지나갔다. 사사삭! 적검은 이미 빈 허공을 베었음을 느끼고 되돌아와 순식간에 허공 을 물새틈 없이 난자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도 휴도옥린은 전혀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상황이었다. 휴도옥린의 걸음은 여전히 다가들고 있지 않은가! 그의 이런 몸놀림 하나하나는 천지간의 도리()에 따르는 것인 지라 자연스럽기 이를데 없었고, 비모소의 적검은 단지 휴도옥린 의 몸이 아닌 대우주()를 헛되이 가를 뿐이었다. 꽈직! 그 순간 휴도옥린의 우수가 천천히 뻗어나 비모소의 가슴으로 박 혀 들었다. 그의 손놀림은 느리기 이를데 없어 그것을 피하지 못 한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해 보였다. 그의 느린 손놀림은 어떤 절초도 장공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기가 막히게도 비모소의 몸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서 휴도 옥린은 이미 무()의 순리에 따를 뿐, 초식에 구애받지 않는 경 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크... 윽!" 비모소는 휴도옥린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듯한 손짓에 자신이 죽음 을 맞게 된 것에 불신의 빛을 띠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이미 급격하게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번쩍! 헌데 바로 이 순간, 휴도옥린의 뒤쪽에서 소리없는 검광의 비() 가 쏟아져 내렸다. 휴도옥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사도제종의 금검이 그의 머리 위에서 벼락같이 펼쳐지며 일순 수 천, 수만으로 쪼개져 폭풍처럼 신검부주의 몸을 휩쓸고 있는 것 을...! "헉!" 신검부주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전신은 이미 검의 폭풍에 의해 휘말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팔만사천수라황. 그 악마의 도법이 펼쳐진 것이었다. "...!" 사도제종은 허탈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언제까지고 움 직일 줄 모른다는 듯 석상처럼 그렇게 매원의 한곳에 박혀 있었는 데.... 휴도옥린은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허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대의 신검부주는 천가의 진정한 후예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사도제일가의 그 오랜 집념이 결실을 맺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휴도옥린은 몸을 돌렸다. 어쩐지 그 자신도 허탈해지는 느낌이었 다. : 제36장 죽음()의 집행자! 남해(). 만경창파(). 중원()의 최남단 광동성()으로부 터 뱃길로 열흘 이상 떨어진 그 아득한 망망대해()의 한 곳에 천하의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비역()이 있 다. 제남도. 아득한 옛날부터 단 한 번도 중원()에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 은 신비의 섬(). 그러나 검()을 잡은 이들에게 있어서는 검학 ()의 근원으로 전해지고 있는 외경()의 대상이 바로 이 제남도였는데.... 제남도는 오늘도 농밀한 안개() 속에서 그 실체를 감추고 있었 다. - 제령전(). 제남도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에 위치한 이 거대한 대전()은 지금 무겁고도 장중한 침묵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대전에는 대략 십여 명의 인물들이 자리해 있었고, 무엇인가 중대 한 논의()가 거론되고 있는 듯 대전의 분위기는 팽팽하게 당 겨져 있었다. 그 중앙에는 대략 사십대 중반의 청의()를 걸친 중년인이 좌 정해 있었다. 각이 진 얼굴과 넓직한 어깨, 당당한 눈빛과 담대해 보이는 사나 이의 기질이 물씬하게 배어 나오는 중년인, 바로 제남도의 당대 도주()인 백붕비()였다. 그리고 그의 양 옆으로는 마치 학()처럼 고고하고 은은해 보이 는 백의여인과 장대한 체구를 가진 고희()의 노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백추능과 그녀의 대숙() 백우군이었다. 제남도주 백붕비는 깊은 물 속과 같은 조용한 눈으로 전면을 응시 하고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이곳 제남도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팔 인()의 원로()들이 침중한 기색을 띤 채 자리해 있었다. 한결같이 소박한 베옷을 걸치고 온갖 풍파를 헤쳐온 지난 세월을 담은 주름진 얼굴을 가진 팔 인의 원로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팔 인이 에워싸고 있는 듯한 중심에 검은 베옷을 걸친 오십대의 초로인()이 조는 듯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극히 꼼꼼한 성격을 대변하는 작은 눈매와, 뱀처럼 냉철한 이미지 를 던지고 있는 얇은 입매의 선 등이 특징적으로 보이는 초로인이 었다. 헌데, 대전내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으나 유독 그만은 아무런 표정을 떠올리지 않은 극히 무 심한 표정이 아닌가. 백붕비가 여전히 조용한 눈빛으로 원로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 도주가 오늘 이렇게 원로회의를 소집한 것은 한 가지 중요한 단안을 내렸기 때문이오." "...!" "...!" 조용한 침묵을 밀어내면서 백붕비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본도는 지난 팔백여 년 동안 외부()의 세계와 완벽하게 단절 된 상태에서 가업을 유지해 왔소. 그것이 본도의 율법()이었 기에..., 그러나!" 그는 간결하게 말을 끊으며 잠시 머리가 희끗희끗한 원로들과 그 들 중앙의 초로인을 둘러보았다. 원로들의 얼굴에는 백붕비의 어 조에서 본능적인 그 무엇을 감지한 듯 더욱 심각한 기색이 떠오르 고 있었다. 백붕비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본 도주는 이제, 이제까지 본도에 이어져 내려오던 그 폐쇄의 율 법을 폐기시키고자 하오. 본 도주는 본도의 형제들을 저 드넓은 중원의 땅으로 진출시키고자 하는 것이오." 순간, 원로들의 주름진 얼굴 위로 일제히 한 줄기 파문의 빛이 번 져 올랐다. 율법의 폐기, 그것은 원로들로서는 실로 상상키 힘든 사안() 이었다. 하지만 온갖 세파와 풍진을 헤치고 오늘에 이른 노년의 완숙함은 이내 그들에게 다시 평정된 신색을 회복하게 해주고 있 었다. "이유가 무엇이오? 도주." 잠시 동안의 침묵을 밀어내며 원로들 중의 가장 상좌에 자리한 인 물이 조용히 물어왔다. 백붕비는 불현듯 시선을 돌려 백추능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과 마주친 그녀의 시선은 애잔한 그리움의 물결이 파도 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백붕비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본 도주는 그 어떤 야욕을 추구하기 위해 중원진출을 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오. 본 도주는 본도를 지켜준 한 인물에게 신의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오." 원로들의 동공 깊숙한 곳으로 거의 동시에 한 인물의 영상이 떠올 랐다. "휴도옥린을 말하는 것이오?" 이번에는 차석()에 좌정해 있는 노인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백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는 본도의 유일한 형제요. 그는 지금 매우 위험한 처 지에 놓여 있을 것이오." "...!" "...!" 원로들의 얼굴에 대부분 수긍의 빛이 떠올랐다. 제남도 인물들의 마음 속에 이미 휴도옥린의 영상은 깊숙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원로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나는 반대하오. 도주!" 이때였다. 돌연 이제껏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초로인이 천천 히 고개를 들며 지극히 잔잔한 음성을 흘렸다. 헌데 그가 입을 열자 기이하게도 지금까지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느낄 수 없었던 그의 존재가 좌중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 백붕비의 물처럼 고요하던 동공에 처음으로 기이한 이채가 스쳤 다. 그와 동시에 백추능의 눈에도 가는 파문이 일어났다. 그녀는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초로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는... 본도의 형제예요. 왜 안된다는 건가요? 백총관( )." 초로인. 그는 바로 제남도의 모든 제반사항을 관장하고 있는 총관()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백붕비를 제외한 제남도의 제이인 자()였으며 제남도의 모든 실무에 있어서 그는 실질적인 관 장자라 할 수 있었다. 총관은 힐끗 백추능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눈초리이기도 했으나 그 눈빛은 파충류의 그것처럼 섬칫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는 곧 백추능에게서 시선을 돌려 백붕비를 바라보며 느긋한 어 조로 말을 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 하나로 인하 여 본도의 팔백여 년 이상을 내려온 율법을 도주의 임의대로 폐기 한다는 것은 본도 형제들의 의사를 무시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 소." 말을 맺음과 동시에 그는 마치 동의를 구하는 듯 팔 인의 원로들 을 돌아보았다. 원로들은 모두가 심중한 기색을 떠올린 채 묵묵히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듯했다. "...!" 백추능은 희미한 노기를 떠올리면서 백붕비를 응시했다. 백붕비는 마치 총관의 반대를 예상이라도 한 듯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관의 입가에 문득 냉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도주의 생각일 뿐이외다. 나는 도주의 결정을 전적으로 허락할 수 없소." 그의 말투는 실로 오만했고 이미 도주에 대한 조심스러움 같은 것 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다. "...!" 백추능의 눈가에 떠올랐던 기이한 이채가 더욱 강해졌다. 그것은 백붕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붕비의 내심에 은근한 놀람이 고개를 쳐들었다. 총관의 어조가 오만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그의 태도가 평소의 그에게선 찾아 보기 힘든 강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백붕비와 백추능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들의 눈빛은 그 어떤 생각으로 동시에 일치되고 있었다. 백붕비는 마음 속에 일고 있는 심중을 굳히며 조용히 총관을 응시 했다. 그의 눈은 차갑고 무표정 그대로였으나 그 깊숙한 곳에 날 카로운 빛이 솟아나고 있었다. "총관!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이미 본 도주는 모든 결정을 내린 뒤요." 총관의 입가에 거미줄같은 미소가 걸렸다. "도주 마음대로 말이오? 나와 도민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소." 백붕비의 눈빛이 점차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 "총관! 배포가 많이 커졌군. 감히 본 도주가 이미 결정을 내린 일 을 총관 혼자의 힘으로 거역하겠다는 것인가?" 불현듯 총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착각하고 있구료. 도주! 나 혼자가 아니오." 백붕비의 눈빛에 어이없어 하는 빛이 스쳐갔다. 완전히 몸을 일으킨 총관이 음산하게 웃었다. "후후, 사람들이란 생사()가 걸려있는 상황에 있어서는 종종 일인자()보다는 실질적인 지배자라 할 수 있는 이인자( )를 선택하기 마련이라오." "설마...?" 백붕비의 시선이 미미한 불신의 빛을 담고 팔 인의 원로들을 향했 다. 그러나 총관의 눈은 여전히 백붕비를 직시한 채 우수()로 그 를 가리켰다. "보시겠소? 도주! 원로들은 도주()를 처단하라!" 동시에 실로 엄청난 명령이 아무렇지도 않게 총관의 입에서 흘러 나오지 않는가! 백붕비를 비롯한 백추능과 백우잠의 눈이 커졌다. 마치 총관의 명 령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팔 인의 원로들이 아무런 말도 없이 조 용히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그들의 주위로 포진하는 모습이 눈 에 들어온 것이다. 팔 인 중 좌측의 원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도주! 그러나 어쩔 수가 없구료!" "설마 했는데...!" "으음...!" 백붕비 등 세 사람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허나 기이하 게도 그들은 그 충격에서 비정상적이리만큼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 다. "...!" 순식간에 평정을 회복하고 있는 그들을 대한 총관의 눈에 일순 암 영이 스쳐갔다. 그의 뇌리에 이 순간 본능적인 불길한 예감이 조 수처럼 밀려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현실로 나타났다. 불현듯 백추능의 입술새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상태에서는 도 저히 나올 수 없는 담담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믿지 않았건만 과연 총관은 율지비()의 인물이었군요." 뱀의 그것처럼 차갑던 총관의 동공이 한껏 부릅떠졌다. "네, 네가 어떻게 그 사실을?" 촤아악! 순간, 백붕비가 앉아 있는 후방의 벽면이 마치 장지문이 열리듯 쫘악 밀려나며 그 사이로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대답은 내가 대신 해주지." 이 돌연한 음성에 총관은 얼음같은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흐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야로 열려진 벽면 사이로부터 네 사람이 천천히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 마치 확대경에 비친 듯 선명히 부각되어 오기 시작했 다. 전신에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흑금의()를 걸친 화사하리만 큼 준수한 미공자()와, 한결같이 날렵한 흑의 무복()차 림의 삼 인()의 장한()들이었다. 천천히 들어서고 있는 그들의 주위로는 무형의 살기가 크게 일어 나 마치 유형의 물체인 양 총관과 팔 인의 원로들을 향해 크게 압 박해 들고 있었다. 총관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무형의 살기에 심히 위축되어 무의식 중에 한 걸음 물러나며 은은히 경악이 담긴 질문을 던졌다. "누구냐? 너희들은!" 어느틈에 백붕비와 백추능 등의 앞에 이른 그들 사 인은 이미 서 로가 알고 있는 사이인 듯 가볍게 목례를 교환한 뒤, 앞장 선 준 미한 흑의미공자가 총관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친구를 대하는 듯 다정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히려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 는 그런 미소였다. "나? 나는 바로 그대와 같은 율지비의 인물들만 철저히 제거하기 위한 삼환회의 대주()인 잠풍인랑 희수수라고 하네." 그렇다! 그는 바로 잠풍인랑 희수수였던 것이다. 헌데 실로 놀랍지 않은가. 그가 이곳에 어떻게 나타났단 말인가? 희수수는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눈으로 자신을 호위하 듯 둘러싸고 있는 삼 인의 장한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그대를 처형해 주기 위해 본 대주가 특별히 모셔온 본 삼환회의 무인들이라네. 친구!" 총관의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삼환회라고? 그런 것이 존재했단 말이냐??" 백붕비가 비로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물론이다. 삼환회와 본 도주는 이미 네가 율지비에 속해 있음을 파악하고 네 정체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 함정을 준비하고 있었 다." "...!" 총관의 전신이 극심한 진동을 일으켰다. 불신과 경악으로 가득찬 그의 부릅떠진 눈이 백붕비와 희수수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이미 너희들 간에 이미 묵계가 이루어진 것이었단 말이냐?" 그는 말을 잇다 말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은 듯 부르르 전 신을 떨었다. 다음 순간, 그는 발작적인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쳐라! 원로들은 저들을 모조리 처단하라!" 쏴아아! 쏴악! 총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팔 인의 원로들의 가슴어림에서 여 덟 줄기의 검광이 마치 무지개처럼 서리서리 피어나며 희수수와 삼 인의 장한들을 향해 쏘아갔다. 그 검광들은 비할 바 없이 빠를 뿐만 아니라 그 변화가 천변만화 하여 천하의 어느 누구도 빠져나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금방이 라도 희수수를 비롯한 사 인은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 같았다. "죽음을 재촉하는군!" 희수수의 입에서 차가운 냉소가 터졌다. 그 속에는 소름끼치는 살 기가 충만해 있었다. 순간, 백붕비와 백추능 등은 보았다. 삼 인의 장한들이 번개같이 희수수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들의 소 맷자락에서 마치 달무리와 같은 자색의 광채가 벼락치듯 폭출되는 것을...! 그 광채가 어찌나 빠른지 번뜩였다고 느낀 순간 이미 팔 인의 원 로들의 얼굴에 이르고 있었다. "...!" 팔 인의 원로들은 상황이 이토록 돌변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급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들의 생각만으로 끝나 있었다. 사뿍! 사- -각! 무엇인가가 베어져 나가는 듯한 절단음이 터지고 허공에 피보라가 일었다. 이미 허공 중에는 비명조차 지를 겨를도 없이 원로들 하 나하나가 차례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허억!"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총관의 입술새로 불신과 경악이 어우러진 공포에 찬 신음성이 터졌다. "이제 그대도 가지 그래!" 이 순간 희수수의 휘파람 소리같은 차가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틈에 총관의 눈 앞으로 한 마리 유룡()과 같이 유연한 검 기()가 밀려들고 있었다. 그 검기는 그 변화가 천변만화하고 기오난측하기 이를데 없어 총관은 아연실색을 금치 못하고 전력을 다해 쌍장()을 검기를 향해 밀어냈다. 그의 장심에서 순간적으로 홍운()이 떠오르는 듯한 붉은 화륜 ()이 빙글빙글 돌며 검기의 위세를 막아 나갔다. "홍영구륜()이군!" 희수수는 가벼이 놀란 외침을 흘리며 수중의 연검()으로 커다 란 원을 그리며 천천히 앞으로 밀어냈다. 그 순간 그의 연검에서 아지랭이와 같은 백색의 흐릿한 검기가 피어오르며 붉은 화륜을 뒤덮어 갔다. 그리고 총관이 재차 일장을 격출하려는 순간, 이미 아지랑이와 같 은 검기는 그의 가슴 부위를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끄왁!" 총관의 가슴에서 선명한 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처절한 비명성 이 그 뒤를 따라 터져 나왔다. "...!" 총관은 불신과 회한이 담겨있는 눈빛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그 자세로 이미 숨이 끊어진 듯했다. 제남도의 원로회의가 진행되고 있던 이 제령전이 순식간에 처절한 피의 집행장으로 변해 버린 광경을 착잡하게 바라보고 있던 백붕 비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맙소. 친구!" 백붕비는 바닥에 양 손을 대어 보이는 제남도의 특이한 예법으로 희수수를 향해 예를 표했다. "별 말씀을... 우리의 당연한 의무일 뿐입니다." 희수수도 마주 포권을 쥐어 보이며 예를 취했다. 어느틈에 삼 인의 장한들은 조용히 그의 등 뒤에 시립해 있었다. 백붕비가 자세를 바로 잡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음! 실로 어이없는 일이요. 팔백여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외부인 과 접촉하지 않은 본도에까지 율지비의 손길이 닿아 있을 줄이 야!" "...!" 희수수는 그의 무거운 마음을 짐작한 듯 침묵으로 그 대답을 대신 하였다. 이때, 백추능이 어딘가 모르게 기대가 어린 눈빛을 떠올리며 희수 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헌데 대주께서는 어떻게 본도의 위치를 알게 되셨나요?" 희수수는 그녀의 물음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다는 듯한 묘한 미소 를 머금었다. "내 친구가 알려 주었소." 백추능의 얼굴에 작은 파문이 번졌다. "친구라시면?" 바로 이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돌연 한 마디 음성이 나직히 공간을 뒤흔들면서 흘러 들었다. "바로 나요." "...!" 일순, 그녀의 전신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박혔다. 음성..., 그 음성을 어찌 그녀가 모르겠는가? 그것은 그녀가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의 음성인 것을.... 그녀의 신형이 두려움을 머금고 천천히 돌아섰다. 동시에 백붕비 와 백우잠 역시 반사적으로 등을 돌리고.... 그 순간, 그들의 시 야로 한 사람이 조용히 대전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 신기루처 럼 투영되어 왔다. 시리도록 새하얀 백의()를 걸치고, 눈이 부시도록 환한 미소 를 떠올린 채 소리없이 대전으로 들어서고 있는 한 사람! 바로 휴도옥린이었다. "친구! 돌아왔구료." 백붕비의 신형이 튕겨지듯 휴도옥린을 향해 쏘아갔다. "...!" 휴도옥린과 백붕비, 그리고 이어서 백우잠이 제남도 특유예법으로 뜨겁게 포옹하는 광경이 백추능의 시야로 선명히 부각되어 왔다. 그리고..., 이윽고 휴도옥린과 백추능의 시선이 허공 중에서 얽혔 다. "...!" "...!"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에겐 말()이 필요 없었다. 그들은 마음()으로 이미 말()하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들은 그렇게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 오 리라던 휴도옥린의 약속, 그것이 지켜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휴도옥린이 제남도에 돌아온 바로 그 시각. 보이지 않는 은밀한 손길에 의해 천하 각처에서 천하를 장악하고 있는 이인자()들을 향한 죽음의 집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구문제독() 숭보원웅(). 대명황실()의 실질적인 관장자라 할 수 있는 이 시대 최 상의 권력가는 그의 총애하는 삼부인()과 함께 마악 잠자리 에 들려하고 있었다. 그 순간 침실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그리고 마치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표정이라고는 지어보지 못한 듯한 네 명의 흑의 무복 차 림의 장한들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숭보원웅은 경악과 분노에 가득 찬 일갈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 다. 허나 그의 음성이 채 어떤 의미를 갖고 허공에 울려 퍼지기도 전 에 그는 이미 보이지 않는 투망()에 의해 전신을 포박 당하고 있었다. 빠- 직! 동시에 마치 전광()이 작렬하듯 한 줄기 벼락같은 검광이 그 의 가슴을 꿰뚫었다. "크윽! 이, 이 미친...!"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허나 그의 귓가로 들려온 어떤 음성이 그를 죽음보다 깊은 나락으 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제독! 당신은 율지비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이오. 잘 가시오. 황궁의 위대하신 이인자 양반!" - 기륭대인() 월산단(). 천하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기륭대원장()의 모 든 실무를 관장하고 있는 총책사(). 그는 상계()의 가 장 거대한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었다. 허나 그는 어느날 아침 기륭대원장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서고( )에서 사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가 왜 죽어야 했는가를 사람들은 그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한 장 의 밀지()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사유(). 상계()의 이인자로서 율지비()의 자금책().> 어둠 속에서 죽음의 집행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천하 각처에 산재한 무려 삼천이백십칠 개의 모든 제방파() 에 속한 이인자()들이 남김없이 제거될 때까지 사형의 집행 은 한 달간에 걸쳐 대륙에 혈풍을 일으켰다. 집행자들은 잠마(), 삼환회()의 고수들과 이름모를 사 인()의 노살수()들이었다. 사람들은 전설적인 살수 구월구일()에 의해 주도된 그 피 ()의 가을()을 가리켜 학살의 가을이라 명명하였다. : 제37장 영원한 신화() 구월구일() "너는 이담에 뭐가 될래?" "응! 나는 대학사()!" "나는 장군이 될 거야." "좋아! 나는 왕()이 되겠어." 소동()들..., 티없이 맑은 얼굴들이다. 대략 육칠 세 가량들 되었을까?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는 소년과 깨끗하고 화려한 금의 ()를 걸친 소년들이 뒤섞여 저마다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다. 치기어린 그들의 모습은 실로 앙증스러운 것이었다. "풋! 그놈들도...." "그래, 그래! 너희들 시절이 가장 좋을 때지." 장안의 저자거리 한쪽 공터에서 뛰어놀며 자신의 포부를 앙증스러 운 눈망울로 떠들어 대고 있는 소동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는 흐뭇함만이 어려 있었다. 그렇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드 는 그런 장면인 것이다. 한 소동이 문득 마치 대학사가 된 듯 짐짓 점잖은 태도를 지어 보 였다. "좋아, 나는 이제 어른이 되서 대학사가 된 거야. 그러니까 어 흠...!" 자라지도 않은 수염을 쓸어내리는 듯한 모습은 더욱 앙증스러웠 다. 한 소년이 이런 태도를 보이자 나머지 소동들도 일제히 떠들 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지금 대장군이야! 나는 지금 전장에 나와서 부하들을 호령하고 있는 거야." "그래? 그럼 나는 지금 왕()이야. 대장군도 내 명령에 따라야 해!" 소동들은 제각기 장난에 열중해 대학사의 흉내를 내거나 왕의 흉 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한쪽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또 한 명의 소동을 의식했다. "화()아야, 너는 이 다음에 뭐가 될 거야?" 소동들은 자신들의 흉내놀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 연신 재잘 거리며 예의 소동을 응시했다. 그러자 유독 수줍음을 많이 타는 듯한 앙증스러운 용모의 소동이 마지 못한 듯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구월구일이 될래!" 순간이었다. 예의 소동 역시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흉내놀이에 맞춰 말하 는 순간 소동들의 눈이 커지고, 그리고 돌연 무한한 감탄과 경외 의 눈빛을 떠올리지 않는가? 마치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어?" "구월구일!" 다음 순간, 소동들은 예의 화아라고 불린 소동을 구월구일로 인정 한다는 듯 기이한 흉내놀이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윽!" "크윽-!" 소동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고, 그리고 풀썩풀썩 지면에 무너지 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대학사라는 소년도 무림최고의 고수라 는 소년도 그리고 왕이라던 소년도 쓰러졌다. 구월구일. 그 이름 앞에 스스로 왕이라던 소년도 대무인이라는 소년도 그렇 게 쓰러지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여기고 있는 태도였다. 눈(). 끝없이 안으로 침잠되어 있는 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눈 하나가 언제부 터인가 소년들의 흉내놀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평범한 청의의 앞자락에는 음식 기름기가 번지르 묻어있다. 다소 장대해 보이는 체격에 어찌보면 사람좋아 보이는 순박한 얼굴, 그 러나 그 눈에 간혹 스쳐가는 빛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깊은 정 적이었다. 사내는 소동들의 이런 장난을 대하고 문득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천천히 화아라고 불리운 소년에게 다가들었다. "화아야, 너 또 여기 있었구나! 내가 너를 찾느라고 이 저자거리 를 온통 뒤졌단 말이야." 더할나위 없이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러자 화아라는 소년이 고 개를 돌리며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깨끗한 피부에 더할 나위없이 앙증스러운 용모, 눈에 넣어도 아프 지 않으리만큼 귀여운 소동의 얼굴은 기이하게도 한 사람의 얼굴 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구월구일 휴도옥린. 그렇다! 소년의 용모는 구월구일 휴도옥린의 어린 시절 모습을 그대로 옮 겨 닮고 있었다. "창사아저씨!" 화아라는 소년이 다가오고 있는 청의중년인의 가슴에 안겨갔다. 창사? 이 청의중년인이 바로 창사였단 말인가? 창사의 얼굴과 풍도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음인가? 그의 모습은 확실히 중후한 중년인의 그것이었는데, 이 순간 창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녀석, 구월구일이 그렇게 좋으냐?" "응!" 창사의 널찍한 가슴에 안겨 저자거리의 공터를 멀어져 가고 있는 화아라는 소년이 서슴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이 아저씨보다 더 말이냐?" "그건...." 소동은 눈을 데구르 굴리며 더듬거렸다. 그러다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달라!" "어떻게 말이냐?" "난 창사아저씨를 음... 아버지만큼 좋아하지만 구월구일은 존경 한단 말이야. 음... 뭐랄까 음...." 소동은 대답이 궁색한지 자꾸 더듬거렸다. 그러다 얼굴을 붉히며 창사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에이! 그런 거 있잖아!" "허허, 화아야, 이 아저씨가 널 구월구일로 만들어 줄까?" "치이, 아저씨는 음식이나 잘 만들지, 뭐 다른 재주가 있다고..." "아니다. 내가 너를 구월구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네 아버지 에게 부탁해서...!" 소동이 입을 내밀었다. "치이! 아버지는 매일 밖에만 돌아다니고 어쩌다 집에 오는 날도 책만 읽는데 어떻게? 아버지는 아마 구월구일이 누군지도 모를 텐 데...!" 문득 창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음성이 잔잔하게 흘러 나왔다. "화아야." "응!" "구월구일은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단다." "아니야. 구월구일은 한 사람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이란 말이야." "허허, 녀석!" 창사는 소동이 막무가내로 구월구일에게 절대적인 존경심을 드러 내자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녀석! 자기 아버지가 그 구월구일인 줄도 모르면서 아버지를 글 벌레라고 시시하게 여기고 있다니!' 그랬던가? 휴도옥린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이 앙증스러운 용모의 소동이 바 로 구월구일 휴도옥린의 아들이었던가? - 휴도화(). 그렇다! 소동은 바로 백추능과 휴도옥린 사이에서 탄생된 휴도옥린의 외동 아들이었다. 나이 오 세(). 문(), 무()에 벌써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이고 있는 휴도화는 창사에게 있어 휴도옥린과 마찬가지로 귀중한 존재였다. "헌데 왜 나를 찾았어?" "응, 네 아버지가 오셨단다." "그래?" 휴도화는 돌연 창사의 품 속에 안겨있던 자세를 풀고 지면으로 뛰 어내려 쪼르르 앞장서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자오진으로 넘어가는 관도()였다. 헌데 휴도화가 채 십여 장도 가기 전에 관도 저쪽에 한 백삼중년 인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황혼을 정면으로 받고 다가오고 있는 백삼중년인의 준수한 얼굴에 는 희미한 상흔이 턱아래에까지 그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 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중년인의 풍도를 더욱 마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다! 구월구일 휴도옥린, 중년인의 중후한 풍도를 보이고 있으나 휴도 화가 가고 있는 반대방향에서 다가오고 있는 백삼중년인은 분명한 휴도옥린이었다. 휴도화가 먼저 휴도옥린을 발견하고 돌연 걸음을 멈춰 세웠다. 황혼을 받으며 다가오고 있는 휴도옥린, 그에게서는 이 순간 휴도 화로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기이한 위엄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 었다. "화아! 오늘따라 아버지가 멋있어 보이는데?" 휴도화가 고개를 돌리며 창사를 향해 미소했다. "녀석!" 창사가 웃었다. 그러나 그의 뇌리에는 이 순간 다가오고 있는 휴 도옥린의 존재가 단순한 지기 이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화아야! 네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사람이란다. 그는 천하에 존재 했던 살수들 중 진정한 살수이고, 그리고 역사의 파수꾼인 것이 다!' '악이 존재하는 한 그는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고, 그리고 매화의 신화는 피어날 것이란다!' 창사는 문득 석양을 받으며 다가오고 있는 휴도옥린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휴도옥린에게서 눈부심이 느껴지는 이유가 단지 석양 () 때문이었을까...? 달빛살수 구월구일은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