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제1권 책머리에 부쳐 ━━━━━━━━━━━━━━━━━━━━━━━━━━━━━━━━━━━ 하나의 작품이란 곧 한 인간의 탄생을 의미한다. 저자(著者)의 뇌리에서 형성된 한 인간, 이는 곧 새로운 성격을 지닌 한 영웅(英雄)의 탄생을 의미한다. 처절한 한을 품은 차가운 영웅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꿈을 지닌부드러운 인간일 수도 있다. 허나 본 저자들이 새롭게 탄생시킨 한 인간의 일대기(一代記)는이러한 모든 범주 를 벗어난 새로운 인간이다. 주천화(朱天華). 그는본 저자들이 탄생시키기 이전에 스스로 뛰쳐나온 새로운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꽃을 좋아했고... 한 잔의 술을 좋아했고... 그리고 그 꽃밭에서 읊을 수 있는 한 줄의 시(詩)를 좋아한 전형적인 인간. 우리는 이 주천화를 너무도 사랑했다. 해서 손에 검을 쥐어주는 것을 두려워 했으며, 그의 발아래 피가 밟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허나..., 달빛이 밝다. 한 인간의 생(生)이 본 저자들의 뇌리에 아쉬움을 남기며 스쳐간다. 주천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의 작은 소망을 우리는 어째서 이루어주지 못했을까? 생각하면 아쉬움 뿐이다. 절규하는 한 인간. 한 사내의 달빛처럼 하얀 이야기... 이제 시작하자. 천중행·천중화 공배 ■ 황 제1권 제1장 비운(悲運)의 벙어리 왕자(王子) ━━━━━━━━━━━━━━━━━━━━━━━━━━━━━━━━━━━ 북해도(北海島). 뼈를 에일 듯한 극한의 한풍(寒風)만이 천공을 뒤덮고, 영원히 녹지 않을 만년빙만이 대지에 두터운 막을 드리우고 있는 죽음의 절지(絶地). 휘이잉...! 우우웅!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이 얼어붙은 이 죽음의 대지 위로 한 줄기 냉풍이 불어 오고 있었다. 혹시 존재할지 모르는 단 한 점의 생명 체 마저 얼리려는 듯 혹독하기 이를데 없는 바람이었다. 이 북해도의 중앙에 주위의 빙산군(氷山群)을 압도하듯 우뚝 솟 아올라 있는 두 개의 고봉(高峰)이 있었다. 마치 죽음의 금역(禁域) 위에 군림하듯 태고의 신비를 품은 채 우뚝 서 있는 높이 일만 척(尺)의 고봉(高捧)의 위용은 실로 일대장관이었다. 헌데 두 개의 고봉 중 한 곳에서 지금 괴변(怪變)이 움트고 있지 않은가? 구구궁...! 화산(火山) 폭발의 조짐이련가? 두 개의 고봉 중 한곳의 정상에 서 언제부터인가 계속 화염(火焰)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눈이 닿는 곳 그 어디를 둘러 보아도 온통 끝없는 빙원설지(氷原雪地)이다. 하늘까 지도 온통 백색(白色)으로 물든 이곳에 한 가닥 검붉은 불빛이 고봉으로부터 솟구 쳐 오르자 그것은 마치 환상의 신비경(神秘景)을 보는 듯 했는데.... 이때 빙원의 적막을 가르는 굉음이 있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돌연 나타난 것은 화려한 팔기 마차 였고 마부석의 흑의장한은 손이 보이지 않으리만큼 채찍을 내리치고 있었다. 흑의장한의 이마에는 혹한에도 불구하고 땀방울이 흥건했다. 첫 눈에도 쫓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팔기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빙원을 가로질러 두 개의 고 봉 모퉁이로 꺾어드는 순간 두두두하는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팔기마차의 백여 장 뒤에 또다른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났다. 대략 삼십여 기(騎), 마상에는 위맹스러운 대한들이 강궁을 등에 멘채 팔기마차를 쫓고 있었다. 번쩍이는 철갑주(鐵甲胄)와 펄럭이 는 깃발로 보아 놀랍게도 그들은 바로 황군(皇軍)임을 알 수 있었다. 삼십여 명의 황군을 지휘하고 있는 선두의 인물은 네 명의 갈포 노인들이었다. 그들의 용모는 한결같이 눈이 번쩍 뜨이도록 비범했다. 허리까지 늘어져 휘날리는 백염(白髥)과 신광을 폭사시키고 있는 부리부리 한 눈, 굳게 닫힌 입가에는 어떤 위엄과 오만한 기질이 배어 있었다. 그렇다! 태고 이래 생명체의 접근을 불허하던 죽음의 오지(奧地) 에 돌연 필사의 추격전이 전개된 것이다. 두두두...! 하는 지축이 뒤흔들리는 음향과 함께 팔기마차는 화 룡빙산의 구릉(丘陵)을 넘어 돌았다. 문득 마부석에서 연신 채찍질을 하고 있던 흑의장한이 고개를 돌 려 추격대를 바라 보았다. 이어 그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마마! 이대로 가다가는 일각도 되지 못해 저들의 수중에 잡히고 말 것이옵니다." 마차 안에서 짙은 절망이 묻어 있는 탄식이 흘러 나왔다. "음! 황무오천성(皇武五天星)과 황실어림금의대(皇室御林錦衣隊) 의 추격이 이토록 집요하다니...." 흑의장한이 돌연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소신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사온데...." "...?"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니나 잠시의 시간을 낼 수는 있을 것으로 사료되오니 들어 주시겠습니까?" 팔기마차는 고봉을 돌아 추격자들의 시야에서 잠시 벗어나 있었다. "장위사(張衛士), 무슨 계책이라도 있단 말인가?" 마차 안의 음성이 질문을 던졌다. 장위사라 불리운 흑의장한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 였다. "예! 지금 저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으니 지금 이곳에서 마마께 서 내리면 소신이 저들을 유인하겠습니다." "금선탈각(金禪脫殼)의 계교를 쓰잔 말인가?" 마차 안의 음성에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흑의장한의 충정(忠情) 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이었다. "마마! 어서 내리소서." 한순간 팔기마차는 히히힝! 하는 말울음소리와 함께 급격히 멈춰섰다.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던 마차 안의 인물은 결국 결심을 굳힌 듯 마차에서 내렸다. 사순 가량의 화려한 금포를 걸치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의 용모는 비범하기 이를데 없었다. 용안호목(龍顔虎目), 피부 또한 백옥같이 흰 가운데 만인(萬人)을 억누르는 타고난 위엄을 지닌 사람이 었다. 금포중년인은 허리에 한 자루 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특이하 게도 묵빛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집에 화려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검이었다. "으음! 황무오천성과 황실어림금의대가 기어코 나를 죽이려고 한단 말인가!" 중년인은 지면에 내려서자 문득 천공으로 눈을 돌린 채 또다시 탄식을 흘려냈다. 헌데 황무오천성(皇武五天星)이라면 곧 황실의 최정예고수들이아닌가! 황무오천성 은 황궁내에서 다섯 명의 최고 고수들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들로서 금의위(錦衣衛) 를 관장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황실어림금의대(皇室御林金衣隊)는 엄선된 일천 명의 황실경호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중년인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 런 황궁의 고수들에게 쫓기고 있단 말인가? "마마! 시간이 없습니다." 흑의장한이 경각시켜 주려는 듯 외치듯 입을 열었다. "음! 천화(天花)야, 어서 나오너라." "...!" 중년인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명의 소동(小童)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대략 육칠 세 가량 되었을까? 수정조각처럼 단아한 용모, 실로 한폭의 그림같은 용모의 소년이었다. 남아를 어찌 여아에 비교할 수 있으리오만은 소동의 용모는 흡사 여아에게 남장(男裝)을 입힌듯 느껴졌다. 단지 옥(玉)에 티라고나 할까? 소동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희(喜), 노(怒), 애(愛), 락 (樂) 등, 인간이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감정들중 그 어느 것도 소년의 표정에서 읽 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소동의 한 쌍의 눈이었다. 물처럼 고요한 눈 깊숙이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은은한 녹광(綠光)과 백광(白光)이 떠돌고 있었다. 소동의 신비한 기질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소동의 태양혈 위 에는 은은히 푸른 혈맥(血脈)이 떠올라 청살선(靑殺線)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마마! 왕자님과 함께 이 말에 오르십시오." 장위사라 불리우는 흑의장한은 마차를 끌던 여덟 필의 말 중 가장 건장한 말을 끌 러냈다. "...!" 고삐를 건네받은 중년인의 눈에 격동과 함께 어떤 노기의 빛이교차했다. '장위사, 내가 부족하여 너의 희생을 요구하는구나...!' 허나 중년인은 묵묵히 소동을 말등에 앉힐 뿐이었다. "장위사는?" 소년의 담담했던 눈에 처음으로 어떤 감정이 떠올랐다. "왕자님,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신은 저들을 다른 방향으로 유인 한 후 곧 왕자님을 따를 것입니다." "...!" 결연히 외치던 장의사는 소동의 눈빛과 부딪치자 격동의 빛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 다. 소동의 눈빛은 물처럼 고요해 일개 어린아이의 눈빛이랄 수 없었다. 허나 그 눈 깊은 곳에 처음으로 어떤 안타까워 하는 빛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왕자님의 저 눈빛은 이미 소신의 충정을 헤아리고 있는 듯 하지 않은가? 아아..!' 장위사는 돌연 허리를 깊게 숙이며 대례를 올렸다. "두 분 마마! 부디 옥체를 보존하옵소서!" "으음...!" 중년인이 어딘가 자신없는 음성으로 대답하자 장위사의 눈에서 순 간 뜨거운 것이 흘러 내렸다. "마마...!" 장위사는 눈을 쓰윽 훔친 후 채찍을 내리쳤다. 팔기마차는 또다시 전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치달리기 시작했 다. 반면 중년인과 소동을 태운 말은 고봉을 끼고 돌며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 작했다. 구구궁...!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화룡빙산의 한쪽 빙봉에서 치 솟기 시작하던 화염이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져 갔다. "아니? 이 산이 곧 폭발할 것 같지 않은가!" 고봉을 끼고 질주하던 중년인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헌데 바로 이때 백여 장 후면 모퉁이에서 갈포노인들과 황실어 림금의대의 추적대가 나타나지 않는가! 그들의 수효는 정확히 반으로 줄어 있었다. "저 놈들이...!" 추적자들의 모습을 발견한 중년인의 눈에 암담한 절망의 빛이 스쳐갔다. "약은 놈들! 반반씩 나누어 두 방향 모두 추격해 왔구나...!" 이 순간 빙봉은 이제 잠룡(潛龍)이 몸부림치듯 더욱 꿈틀거리고 있었다. 빙봉은 더욱 거센 화염을 토하고 있어 이제라도 폭발할 듯했다. 중년인과 소동은 대자연과 인간의 양쪽에 쫓기는 입장인 것이다. 중년인이 빙봉을 바라보자 소동 역시 힐끔 화염을 내뿜고 있는 고봉을 올려다 보 았다. 위기를 느끼지 못함인가? 소동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無心)하기만 했다. 어느 한 순간, 우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빙봉은 무서운 불기 둥을 토하며 용솟음쳤다. 그것을 지켜보던 중년인의 눈에 어떤 광망이 스쳤다. "와하하하...! 차라리 잘 되었다! 네놈들의 손에 죽느니 대자연의 손에 죽으리라!" 광소(狂笑), 처절한 노기와 진한 허탈이 맴돌고 있는 광소였다. 허나 미친 듯 앙 천광소를 터뜨리던 중년인의 안색이 돌연 참담이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은 말 위에 앉아 있는 소동에게로 돌려졌다. '허나 이 어린 것까지! 아아...!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소년은 자신을 응시하는 눈길을 느끼고 중년인을 올려다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눈빛이었다. 문득 중년인의 눈에 반짝 기광이 스쳤다. '그렇다! 그것을 펼친다면 어쩌면 천화만은 살아날 수 있을지 모 르겠다. 천운(天運), 천운이 닿는다면...!' 말은 이미 빙원 전체가 꿈틀거리고 있어 공포를 느낀 듯 우뚝 멈춰 서 있었다. 그들이 멈춰진 곳은 바로 이제 곧 폭발할 것 같은 빙봉에서 이십 여 장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구릉이었다. 잠시 죽음보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중년인은 소동을 말없이 응시하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채 품속에 손을 넣었다. 차곡차곡 접혀져 있는 가죽주머니가 그의 품 속에서 나왔다. 중 년인은 묵묵히 가죽주머니를 펼쳐 그 속에 자신이 차고 있던 검을 집어 넣었다. "아버님, 왜 검을...?" 소동은 검집을 이루고 있는 가죽과 예의 가죽주머니가 같은 재질 임을 깨닫고 의혹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중년인은 묵묵히 미소를 머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소동(小童)은 부친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실로 처연하여 가슴이 떨려옴을 느꼈다. "천화야. 이팔찌는 내가 우연히 검과 함께 황궁무고(皇宮武庫)에서 얻은 것이다." 중년인은 팔목에서 기이한 형태(形態)의 팔찌를 끌러내며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검과 팔찌는 이 가죽주머니 속에 함께 들어있던 것이지. 애석하게도 네게 물려줄게 이것 뿐이로구나." "아, 아버님!" "너는 천운이 닿는다면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중년인의 음성(音聲)은 냉정(冷情)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아, 아버님...!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둘 모두 살아 남기는 힘들다." "아버님!" "어차피 이 애비는 죽어야 한다. 허나 이는 곧 새로운 탄생이기 도 하지. 죽음으로써 오명(汚名)이 벗어질 것이니 말이다." 소동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중년인의 말이 이어졌다. "이 아비는 이미 내막을 짐작하고 있었다. 태자(太子) 형님을 시 해하고 나에게 그 누명을 씌운 사람이 누구인지...." "하오면 어찌 이대로 참고만 계셨단 말입니까?" 소동은 외치듯 부르짖었다. 소년의 눈에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기가 들끓었다. 중년인은 소동의 눈에 떠오른 살기(殺氣)를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이 아비의 입장에 처했다면 역시 같은 길을 택했을 것이 다. 이 아비가 죽겠다함은 곧 황실을 위함이다." "...!" "나 역시 황실의 사람으로 더 이상 황실의 치부(恥部)를 천하만 민에게 내보일 수는 없었다. 아아! 이 추악한 형제간의 상잔(相 殘)을 어찌 만 천하에 공개할 수 있단 말이냐!" "하오나 이미 금수만도 못한 권력다툼이 천하에 알려졌고 그 오 명이 모두 아버님 한 몸에 집중되었거늘 이 마당에 무엇이 두려우시단 말입니까!" 소동의 절규는 일개 어린아이의 그것이랄 수 없었다. "와하하하!" 문득 중년인의 입에서 허탈한 대소가 터져 나왔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것이다. 오명은 나 하나로 족하고 새로운 황상은 천하민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아버님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사람을 위하는 정(情)이 남아 있단 말입니까?" "그 사람?" 중년인의 눈에서 문득 질책하는 듯한 싸늘한 한기(寒氣)가 흘러나왔다. "너에게 숙부(叔父)가 되시고, 곧이어 천하의 주인이되실 분이시다. 무엄하구나!" 부친의 질책에 소동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중년인의 음성이 차분히 이어졌다. "그분은 아마 천하를 밝힐 성군(聖君)이 되실 것이다. 이 아비가 유한없이 죽을 수 있음은 그것을 믿기 때문이다." 중년인은 이미 죽음에 초연해 있었다. "행여 너는 복수를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그것이 곧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이니 라...." "...!" 소동은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허나 그의 눈 깊숙한 곳에서는 점차 녹광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네가 천운이 닿아 이곳에서 살아난다면 신분을 감추고 초야(草 野)에서 글이나 벗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 "명심하겠느냐?" "하오나...." "명심하겠느냐?" 중년인이 엄숙한 신색으로 재차 질문하자 소동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더욱 굵어 졌다. "흐흐흑...! 예! 명심하겠습니다. 하, 하오나, 너무도 원통하오이다!" 부자(父子)의 대화는 실로 처연한 것이었다. 이들 부자(父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중년인은 바로 당금 황실의 이황자(二皇子)인 문국황자(文國皇子) 주상걸(朱常 傑)이었다. 그는 당대를 덮는 대학자(大學子)였으며 결코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 고고한 인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동은 문국황자 주상걸의 독자로서 천문왕자(天文王子)로 알려진 주천화 (朱天華)였다. - 천문왕자 주천화. 문일지백(聞一之百)의 귀재(鬼才). 그는 나이 오 세에 이르러 처음으로 입을 열었던 괴동(怪童)으로서 입을 열기 시작 한 순간부터 이미 무수한 석학(碩學)들이 그에게 굴복했다는 기사(奇事)를 지닌 소 년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도 결코 울지 않은데다 나이 오 세에 이르기까지 입을 열지 않아 사람들은그가 벙어리인 줄로만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이 세 살 때 부친 주상걸 에 의해 황실서고(皇室書庫)에 들어가 이 년 동안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그가 황실서고에서 나왔을 때 그는 이미 벙어리가 아니었으며 천하를 덮는 대학자가 되어 있었다. 문국황자 주상걸의 그때의 기쁨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으랴! 황실서고를 나온 다섯 살의 어린 주천화의 입이 열리며 흘러나온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반면 주천화가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할 사람은 또한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태사(太師)라 할지라도 어린 주천화에게 배워 야 했을 정도인 것이다. "천화야!" 무거운 침묵끝에 주상걸은 주천화에게 손을 뻗었다. 주천화는 눈물젖은 눈으로 부친의 가슴에 안겼다. "가죽주머니 안에는 다섯 권의 무공 비급이 들어 있다. 이 아비 는 그중 겨우 한 권만을 해독하고 익혔으나 나 일신을 지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 였다" 주상걸은 가죽주머니를 주천화의 가슴에 동여매며 말을 이었다. "너라면 그것들 모두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익히기는 하되 호신(護身)을 위해서만 사용하겠다고 약속해 주겠느냐?" "예!" '천화야, 부디 꿋꿋하게 살아가다오.' 주상걸의 눈이 흐려졌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천번지복(天飜地覆)할 굉음(轟音)과 동시에 무서운 불기둥이 천공을 뒤덮었다. 그것은 곧 천지의 개벽이었다. 드디어 화산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앗! 화산이 폭발한다!" "물러가라!" 이미 주상걸과 주천화의 십 장 가까이 추격해 왔던 황무오천성이 경악성을 발하며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 주상걸은 그들을 힐끔 바라본 후 천공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이다!' 주상걸의 눈빛에 기광이 스치는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는 이미 엄청난 돌더미와 화염이 덮쳐오고 있었다. "피, 피해라! 문국황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황무오천성과 황실어림금의대(皇室御林金衣隊)는 당황하여 일제히 말머리를 돌렸다. 천지가 뒤집히는 폭음과 함께 지형이 뒤바뀌고 있었다. 하늘은 무엇을 슬퍼하는가? 서편에서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폭설(爆雪)이 천공을 가득 메우며 쏟아진다. 건곤일색(乾坤一色), 천지는온통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백암(百暗)에 잠겨 있었다. 엄청난 화산폭발이 지나간 뒤의 빙역은 무서우리만큼 고요한 것 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그 폭설 속에 석상처럼 서 있는 인영들이 있었다. "휴우! 무서운 폭발이었다." 한 음성이 나직이 흘러 나오며 빙역의 한 곳을 응시했다. 그들은 바로 황무오천성과 황실어림금의대였는데 그들의 눈은 문 국황자 주상걸과 천문왕자 주천화가 서 있던 곳을 응시(凝視)하고 있었다. 그들 중 갈포 은염노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문국황자님, 천문왕자님! 권력에 희생되신 가엾은 분들...! 신 들의 죄를 지하에서나마 용서해 주옵소서.' 황무오천성과 황실어림금의대는 목적을 달성했으나 누구도 밝은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자! 우리의 임무는 끝났다. 돌아가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은 주상걸과 주천화의 죽음을 확신한 듯 무거운 어깨 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허나 이순간 그들의 뇌리에 한 가지 공통된 생각이 스쳐가고 있었다. '다행히 이 손으로 직접 고귀한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 것이 무 엇보다 기쁘다! 헌데 하늘마저 두 분을 버린 것이려나!' 그들은 대폭발에서 겨우 살아 남아 전신이 상처 투성이였다. 허 나 기실 주상걸과 주천화를 추적해야 했던 마음의 상처에 비한다면 하잘 것 없었는 데.... 그들이 돌아간 빈공간에 한가닥 한풍(寒風)만이 남아 눈발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헌데 일각이나 흘렀을까? 돌연 죽음의 빙역에 환상처럼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 십인의인영, 눈발조차 그들의 출연을 의식하지 못할만큼 가벼운 신법이었다. 헌데 그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백염이 늘어진 노승(老僧), 호로병을 연신 들이키고 있는 꾀죄죄한 몰골의 노개, 동안학발(童顔鶴髮)의 청의(淸衣)도인 등, 단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다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상을 풍기고 있는 점이었다. "아미타불, 다행이로다. 다행히 마(魔)의 갱(坑)이 폭발한 것이 아니었구나... 아 미타불." "낄낄낄, 그야말로 부처님의 가호 덕분이 아니겠소?" 노승이 합장하며 안도하자 노개가 또 한 모금의 술을 들이키며 익살을 떨었다. 그들의 표정에 일제히 안도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헌데 그들 이 안도하며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우르르릉! 소리와 함께 지축이 은은히 진동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앗!" "아뿔사!" 십 인의 눈이 일제히 한 곳에 고정되었다. 그들이 긴장과 초조 가득한 눈으로 응시하는 곳, 바로 화룡빙산 중 아직 폭발하지 않은 고봉(高峰)이었 다. 지축(地軸)의 진동은 점차 드높아지고 있었다. 이는 곧 나머지 빙봉 역시 폭발(爆發)하려는 징조임을 알 수 있었다. "기, 기어이! 마의 갱이 폭발하려는가?" 죽립을 깊이 눌러쓴 노니(老泥)가 떨리는 음성(音聲)으로 중얼거 렸다. 십 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빙봉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엄청난 폭음(爆音)이 터져 나오며 결국 남아 있는 빙봉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헌데 놀랍게도 한 줄기의 화염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무서운 암석들만 봉우리에서 튀어나오고 있지 않은가! 암석의 돌출은 거의 일각이나 계속 되었다. 십 인의 인영은 암석 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얼굴을 굳혔다. "크와와하!" 잠시 후 폭발음이 가라 앉으며 더이상 암석들이 솟구치지 않게 되었을 때 돌연 엄청난 광소(狂笑)가 고봉(高峰)쪽에서 터져나오고 있지 않은가! "와하하하!" 광소성은 한 두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무서운 공력에 공기가 진탕되었다. 삼 인의 안색이 싸악 변했다. "아, 아니! 그, 그들이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인가! 이럴 수가 무량수불." 청의도인의 음성이 크게 떨려 나왔다. 그 순간 고봉에서 네 줄기 광채(光彩)가 섬전같이 솟구쳤다. "크하하하, 이백 년, 이백 년 만에 맛보는 바깥 공기로구나" "와하하하!" 우르릉! 그들의 광소(狂笑)는 실로 엄청난 공력과 가공할 살기(殺氣)로 들끓고 있었다. 허공 십여 장까지 치솟았던 그들의 신형이 지면에 가볍게 내리섰다. 네 명의 괴인(怪人), 수염과 백발은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전 신에는 겨우 치부만 가린 헝겊이 붙어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특이한 형상이 아닌가! 사척(四尺)에도 못미치는 단구(短軀)의 난쟁이 노인, 반면에 장작개비처럼 바짝 마른 체구를 한 강시(疆屍)같은 괴노(怪老), 또한 명은 비교적 정상인 듯 했으나 흉 측한 검상(劍傷)이 안면을 뒤덮고 있는 독안괴노(獨眼怪老)였다. 헌데 그들 사 인의 괴인이 더욱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까닭은 마지막 노인의 용모 때문이였다. 백발이 뒤덮힌 얼굴, 허나 지난 날의 준미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 는 수려준미한 풍도의 노인, 그들의 모습은 실로 각양각색(各樣各色)이었다. 허나 눈빛만큼은 모두 똑같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녹광(綠光), 그 눈빛에는 처절한 복수의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 네 명 괴인의 이글거리는 눈이 기광(奇光)을 뿌렸다. "네 놈들은 누구냐?" 조용한 음성, 허나 십 인의 귀에 천둥치듯 작렬했다. "으...!" "천, 천절오살마(天絶五殺魔)!" 십 인은 몸에 와 닿는 살기에 전율하며 신음을 내뱉았다. "시, 시주들이 과연 천절오살마이시오?" 노승이 심신을 추스리며 입을 열었다. "크크크, 우리들을 아는 것을 보니 심상치 않은 놈들이로구나" 난쟁이 괴노가 괴소를 터뜨렸다. 순간 노승을 비롯한 십 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설마, 설마했더니 이 마두들이 아직도 살아 있었단 말이냐... 아아! 이 일을 어 찌할꼬....' 십 인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事實)에 전신을 떨고 있을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쿵... 쿵! 이때 고봉쪽에서 둔탁한 진동음이 들려오며 한 명의 철탑같은 인영이 다가왔다. "와하하, 아이들아! 귀가 먹었느냐? 네놈들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느냐?" 흑철탑(黑鐵塔)이 다가오고 있는 듯 엄청난 위용의 거구노인, 빙 봉에서 나타난 사람은 네 명에서 한 명이 더 늘은 것이었다. "섬, 섬강천마부(閃薑天馬斧) 흑웅(黑熊)!" "천절오살마가 모두 살아 있었다니...!" 경악, 그리고 어떤 공포에 젖은 음성이 일제히 터졌다. - 천절오살마(天絶五殺瑪). 이 이름은 듣기만 해도 공포에 숨을 멈출 무서운 이름이 아닌가! 무림사 이천여 년, 그 세월 속에 한 시대를 풍미하던 절대고수들이 어찌 한 둘 뿐이겠으며, 또 강 호를 혈수(血水)로 몰아 넣은 대마인(大魔人)이 어찌 일이 십이겠는가! 허나 천절오살마처럼 무섭게 떠오른 인물들은 또 없었다. 이백 년 전, 그들의 손에서 시작된 혈풍(血風), 그것은 곧 천지 혼암의 시대를 방불하는 엄청난 혈겁이었다. 피(血)를 밟지 않고는 걸음을 내디딜 수 없었고 시신을 치우지 않고는 마차를 몰 수가 없었다. 피는 대해(大海)를 붉게 물들였고, 혈무(血霧)는 천공(天空)의 태양을 가렸다. 천절오살마, 그들은 강했고, 또 잔혹했다. - 독화마황(毒火魔皇) 호국기(胡國期). - 고루마존(枯賜魔尊) 여웅비(呂雄飛). - 사극탈혼마(邪極奪魂魔) 뇌도천(雷刀天). - 천면색환마(天面色幻魔) 나창풍(羅昌風). - 섬강천마부(閃 天魔斧) 흑웅(黑雄). 천절오살마, 공포와 전율의 대명사 천절오살마가 이백 년이 흐른 지금 빙봉의 폭발과 함께 나타난 것이었다.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이, 이백 년 전, 전 정도무림이 숱한 희생을 치르며 저들을 이 곳에 감금시켰는데... 화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수라지옥갱(修羅地獄坑)이 진동되어. ..," 노승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천절오살마를 대한 십 인의 표정은 경악, 경악 일색이었다. 십 인의 신태비범한 인영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만약 세인들이 이들 십 인이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우내십존(宇內十尊).> 이들은 바로 전 무림의 태양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정도 십대명문대파(十代名問大派)의 명숙(名宿)들, 당금 무림에 서 최고의 배분을 지니고 있었으며 가장 나이어린 아미파(峨嵋派) 의 전대장문인 천영신니(天迎神尼)의 나이가 이미 팔십이 넘었을 정도였다. 중원 무학의 본산(本山)이라는 소림사(少林寺)의 천불선사(天佛禪寺), 그는 무림일 성(武林一星)으로까지 추앙받는 고승(高僧)이자 소림사의 전대장문이었다. - 무당(武當), 백학도장(百鶴道長). - 아미(峨嵋), 천영신니(天迎神尼). - 화산(華山), 태산일로(太山一老). - 청성(淸城), 청성무후(淸成武厚). - 점창(點蒼), 창해일검(蒼海一劍). - 종남(終南), 성심의유협(聖心儀楡浹) 사운비(司雲飛). - 공동( ), 천검제(天劍帝) 북리공(北理公) 등, 명문구파의 전대장문인 또는 장로(長老)들과 개방( 幇)의 개옹( 翁) 비종후(非宗厚). 아아!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우내십존, 정파의 기둥이랄 수 있는 우내십존 십 인이 천불성사를 위시하여 한 자 리에 모인 것이다. 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 죽음의 빙역에 빠짐없이 모이게 한 것이란 말인가? "크와하하,형색을 보아하니 네놈들은 구파일방의 아이들이로구나. 그렇지 않느냐?" 난쟁이 괴노인(怪老人), 독화마왕 호굴기의 눈에서 벼락치는 듯한 신광(神光)이 폭사했다. '아아, 저 눈빛! 한 가지만 해도 이들의 무공이 이미 어느 정도 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 아미타불, 이 일을....' 천불선사를 위시한 우내십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아미타불, 그렇소이다. 우리는 시주들을 다시 수라지옥갱으로 보내기 위해서 온 것이외다." 천불선사의 안색(顔色)이 굳어지며 장엄한 금광(金光)이 뻗어 나왔다. "뭐야? 크하하하!" "화하하하, 화산(火山) 폭발로 수라지옥갱의 금제가 풀림을 예견하고 달려온 것이 란 말이지?" 천절오살마, 그들은 광소(狂笑)와 함께 조소(嘲笑)의 빛을 드러 냈다.무서운 살기(殺氣)가 그 광소 속에 해일처럼 일렁였다. "크크크, 과거 우리들이 주유천하(周遊天下)하고 있을 때, 네 놈 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감히!" "흘흘흘, 개가 웃을 일이다! 네놈들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하리라 믿느냐?" 지독한 모욕이었다. 우내십존, 허나 천절오살마의 말에 반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하하하, 네놈들의 선조(先祖)에 의하여 이백 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빙옥(氷獄)에 갇혀 한(限)을 키워온 우리다!" 천절오살마 중 가장 준미한 인물. 바로 천면색환마 나창풍이었다. 그의 음성은 짐 짓 부드럽기 이를데 없었다. 허나 우내십존은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자가 바로 색(色)의 마왕(魔王)이자 지독한 심기를 지녔다는 천면색환마?' 자고로 살기(殺氣)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을 가장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소리장도(笑裏藏刀), 천면색환마의 무서운 점은 웃으며 사람을 죽인다는 점이었다. 누구든 그가 노리면 공포로 피가 말라 죽어야 했다. 천불선사의 안색(顔色)이 더욱 장엄하게 굳어졌다. "아미타불, 업보(業報)로다. 시주들, 어서 십방대진(十方大陳)을 펼치시오!" 천불선사는 선장(禪杖)을 치켜들며 우렁차게 외쳤다. 순간 우내십존의 신형(身形)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일십자대형으로 진세(陳勢)를 형성했다. - 십방대진. 구파일방이 함께 창안해 낸 죽음의 절진. 이것은 이백 년 전 천 절오살마를 제압하기 위해 창안된 가공할 진법이었다. 십방대진, 그렇다. 그것은 전문적(專門的)으로 천절오살마를 제 압(制壓)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십방대진? 크하하하, 이백 년 전에도 십방대진으로는 우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이 순간 천절오살마의 두 눈에서 엄청난 살기(殺氣)가 솟구치고 있었다. "에라! 이 놈들아, 이거나 처먹어라!" 독화마황의 손에서 검은 물체가 날았다. "독, 독화벽력뢰(毒火霹靂雷)!" "피, 피하시오!" 우내십존은 경악성(驚愕聲)을 발하며 일제히 신형(身形)을 솟구쳤다. 꽈꽝... 꽈꽈꽈꽝! 굉음(轟音), 그리고 엄청난 화기(火氣)가 방원 삼십여 장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 독화벽력뢰. 이것은 독화마황의 독문암기로서 독(毒)과 화약(火藥)을 혼합해 제조한 가공할 화 기였다. 독화마황은 과거 독화벽력뢰 한 알로 이백여 명을 한 번에 몰살시킨 적이 있을 정 도였다. "으윽!" "아아악!" 폭풍(暴風)과 함께 우내십존의 신형(身形)이 휘날렸다. 우내십존 중 다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허나 그들 또한 당금 무림을 위진시키고 있는 절대고수들이 아닌가? 결코 대단한 부상을 입은 사람도 없었다. "흐흐흐, 난쟁이, 네놈의 선물이 부족했던 게로군." 독안괴노인 사극탈혼마 뇌도천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독효벽력뢰가 떨어진 중심지는 지면에서 십여 장이나 패여 나갔 으니 실로 대단한 위력이 아닌가? 지형이 단 한 알의 독화벽력뢰로 인해 뒤바뀔 정도인 것이다. "흐흐흐, 그래? 그렇다면 한 알을 더 줄까?" 독화마황이 품 속에 손을 넣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천절오 살마의 나머지 사 인은 잔혹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헌데 문득 천면색환마의 눈빛이 변했다. "잠깐!" "...?" 독화마황이 의혹(疑惑)의 눈을 돌렸다. "저것은...?" 천면색환마의 눈이 한곳에 고정되어 크게 떠졌다. 바로 독화벽력뢰가 폭발(暴發)한 중심지, 그것은 깊이 십여 장이 나 패여 있었는데 그 위에 괴이한 물체(物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찢어진 옷자락과 흙 사이에 묻혀 있는 한 구의 시신(屍身), 헌데 그 시신 아래로부터 은은한 녹색광망이 비쳐나오고 있었다. 녹광(綠光)에는 처절한 마기(魔氣)가 담겨 있었다. "저것이 무엇이길래...?" 천면색환마의 음성(音聲)이 왠지 흔들리고 있었다. 순간 그의 신형은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이미 십여 장 깊숙한 구덩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핑! 그의 손이 움직이자 돌더미가 날아가며 한 구의 완전한 시체(屍體)가 드러났다. 아, 바로 주상걸의 시신이 아닌가! "헉! 천마금갑신공(天魔金甲神功)!" 주상걸의 시신(屍身)을 내려다보던 천면색환마의 안색(顔色)이 변했다. "무엇이? 천마금갑신공이라면? 그, 그것은 대제(大帝)의 실전무공이 아니냐?" 천면색환마의 경악성(驚愕聲)을 듣고 나머지 사마(四魔)가 놀란 빛을 드러냈다. ■ 황 제1권 제2장 전설(傳說)의 천마지체(天魔之體) ━━━━━━━━━━━━━━━━━━━━━━━━━━━━━━━━━━━ - 천마금갑신공. 일천오백 년 전, 마도천하를 이룩했던 천마수라대제의 독문절기였다. 이것은 특이 한 외공기학(外功奇學)으로써 신체의 일부분을 마음 먹은 대로 금강지체(金剛之體) 로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손에 천마금갑신공을 운기하면 그 손은 무엇이든지 파 괴시킬 수 있는 금강수(金剛手)가 된다. 헌데 이 천마금갑신공을 전신에 운기(運氣)할 수는 없었다. 전신 이 돌처럼 강해지기는 하나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이 자는 전신에 천마금갑신공을 운용해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다. 천마금갑신 공을 전신의 삼분지 이 이상 운기하는 것은 금기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텐데...." 고루마존이 주상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음, 모를 일이네. 헌데 이 시신 밑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뻗 쳐 나오니 어서 시체(屍體)나 치워보게!" 섬강천마부 흑웅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주상걸의 시신을 흙더미 속에서 들어냈다. 순간 가공할 녹색광채(綠色光彩)가 찬란히 퍼져 나왔다. "앗! 웬 아이가?" 주상걸의 시신 밑에는 한 소동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바로 주천화였다. 주천화의 가슴에는 삼척 길이의 검은 가죽주머니가 동여매져 있 었는데 녹광(綠光)은 그곳에서부터 스며져 나오고 있었다. "아니! 살아 있지 않은가!" 섬강천마부 흑웅이 고개를 내저었다. "청, 청살선(菁殺線)" 천면색환마의 눈이 주천화의 얼굴을 넋을 잃은 듯 주시했다. "틀, 틀림없는 천, 천마지체(天魔之體)다!" "천마지체라니? 무슨 말인가?" 천절오살마의 얼굴에 제각기 경악이 스쳤다. "틀림없다! 천마지체다. 오오!" 천면색환마가 격동에 몸을 떨자 나머지 사마의 눈이 주천화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태양혈 위에 은은히 떠올라 있는 저 청살선을 보게나! 확실한 것은 이 아이가 눈을 뜨면 알겠지만 분명 천마지체가 확실하다." 천면색환마의 단언(斷言)에 나머지 사마(四魔)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천마지체, 무림사(武林史) 이천여 년, 음모(陰謀)와 궤계(詭計)로 점철되어 흐르는 혈사(血史)는 무수한 전설을 생성(生成)시켰다. 전설(傳說), 환상처럼 떠도는 숱한 전설과 신화(神話), 그리고 예언(豫言)들은 무 림사를 장식하며 대해(大海)처럼 흐르는 많은 전설과 신화들 중 영원히 생동할 세 가지가 있었다. - 하나의 전설(傳說). - 하나의 신화(神話). - 하나의 예언(豫言). 전설, 숱하게 떠도는 살아있는 전설 중 단 한 가지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전설이 있었다. - 천령지체(天靈之體). - 천마지체(天魔之體). 천령지체, 천령성(天靈星)의 정기(精氣)를 받아 태어난다는 전설상의 신체(身體). <천령성이 천공(天空)에 나타나면, 지상에는 삼태홍점(三太紅點)을 지닌 아이가 태어나리라. 그 삼태홍점이 아이의 천령혈(天靈穴)에 선명히 자리잡히면, 그 아이가 곧 천령 지체이니라!> 전설(傳說)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지혜는 하늘을 꿰뚫을 것이고, 가공할 신력(神力)은 천하를 널리 밝히리라!> 천마지체, 천마성(天魔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마성지존(魔星至尊)! <천마지체의 탄생은 천하멸절(天下滅絶)을 의미하나니, 태양혈 위에 은은한 청살선(靑殺線)이 떠올라 있고, 눈 깊숙이 녹광(綠 光)과 백광(白光)을 함께 함유한 아이가 탄생한다면 곧 천마지체이니라!> 천마지체의 전설은 그대로 공포의 전설이었다. <천마(天魔)의 귀계(鬼計)는 천계(天計)를 희롱하고, 공포의 마 력(魔力)은 천하를 태초의 혼암(混暗)으로 떨구리라! 일월(日月)은 그 빛을 잃고, 만상(萬象)은 스스로 힘을 잃으리라!> 허나 전설은 단 한 차례 천마지체를 세상에 내보냈을 뿐. 천령지체는 영원히 전설 로만 흘려 보냈다. 단 한 차례 천마지체 출세(出世), 이는 곧 신화(神話)를 창조해 냈다. 천마수라대제(天魔修羅大帝), 그는 곧 신화를 창조해낸 인물이었 다. 무림사 초유의 마도천하(魔道天下)를 이룬 신화적인 존재. 일천오백 년 전, 마화(魔火)는 하늘까지 치솟았고 마염(魔焰)은 대지를 덮었다. 천마수라대제, 그는 곧 마신(魔神)이었으며 바로 영원한 마종지주(魔宗之主)였다. 신화(神話)는 그렇게 창조되어 한 가지 예언(豫言)을 남겼다. 천마수라대제 군림(群臨) 일백 년, 그는 한 가지 예언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 췄는데.... <일천오백 년 후, 본제의 후배가 이 땅에 태어나리라. 그 역시 천마지체이며 곧 제 이대 천마수라대제이다. 또다시 만인(萬人) 위에 군림할 것이며 마도(魔道)만이 영 생(永生)하리라!> 전설, 신화, 예언.... 그렇게 생성되어 떠돌며 도도히 세월 속에 흘러갔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무게 를 지닌 채. 허나 무심한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忘覺) 속에 묻으며 끝없이 흘러 이제는 아련한 전설 속의 전설로 만들었으니.... "천, 천마지체라면 대제께서 예언하신!" 넋을 잃고 있던 천절오살마가 번쩍 정신을 가다듬고 신음성(呻吟聲)을 토했다. "자! 빨리 그 아이를 깨워 보게나!" 섬강천마부 흑웅이 고리눈을 크게 부릅떴다. "믿을 수가 없군! 벌써 이 아이의 몸은 정상(正像)으로 돌아오고 있어!" "무엇이!"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채 망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천절오살마는 강렬한 시선(視線)을 교환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無 言)의 눈빛, 다음 순간 그들은 일제히 신형(身形)을 솟구쳤다. 어디로 가려는가? "멈추시오!" 우내십존이 구덩이 주위에 몰려 있다가 그들을 막아갔다. "와하하하, 네놈들은 좀더 살아 있어라! 후일 네놈들을 심판하실 분이 있을 것이 니...!" "크하하하!" 천절오살마는 손짓 한 번에 우내십존을 밀어냈다. 그들의 광소 (狂笑)에는 기쁨이 충만해 있었다. 천절오살마, 실로 번쩍하는 순간에 그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 "...!" 우내십존은 망연히 천절오살마가 사라진 방향만을 응시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천불선사의 입에서 무거운 불호소리가 흘러나오자 그들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천불대머리! 그들의 말을 들었는가!" 개방의 전대기인 개옹 비종후의 음성(音聲)에서 익살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천마지체! 천마지체!" "아아! 무서운 예언이 결국 실현되려는가! 천마지체가 현세에 나타나다니!" 우내십존, 그들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고 그 안색(顔色)에는 은은 히 공포의 빛이 떠돌고 있었다. "천불선사, 그 아이를 보셨소? 그 아이가 정녕 천마지체(天魔之體)일까요?" 무당의 전대고인인 백학도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미타불! 섬강천마부 흑웅의 품에 안겨 있던 그 아이는 분명 천마지체였소. 업보(業報)로고... 아아!" 천불선사의 백미에 강호(江湖)의 안위를 염려하는 근심의 빛이 이슬처럼 맺혔다. "허! 천마지체의 아이가 이곳에 묻혀 있었다니 실로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공교로운 일이로군요!" "음...!" 천검제 북리공이 주천화와 주상걸이 묻혀 있던 곳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문득 천불선사의 눈이 빛을 발했다. "천마금갑신공! 저 사람은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전신에 천마금갑신공을 운용한 것이군요." 그의 눈이 구덩이 속에 버려진 주상걸의 시신에 고정되었다. "저 사람이 누구이길래?" 돌연, 천불선사는 가볍게 몸을 날려 주상걸의 시신(屍身) 옆에 내려섰다. '천마금갑신공은 전신에 운용하면 금강지체로 변하게 되나 영원 히 깨어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천불선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 까닭은 대뇌마저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 이 사람은 소년을 살리기 위해....' 천불선사의 입에서 문득 탄식이 나왔다. "아미타불, 천마지체가 나타나고 천절오살마가 그를 데리고 갔으 니 우리는 장래에 닥쳐올 혈겁에 대비해야 할 것이오" 천불선사는 우내십존을 바라보며 돌연, 엄숙한 신색(身色)을 머금었다. "...!" "...?" "천령지체, 전설(傳說)의 천령지체를 지닌 기재(奇才)를 찾아내야 하오. 반드시!" 장엄, 그리고 비장한 결의가 천불선사의 승포자락을 휘날렸다.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 천불선사의 엄숙한 말에 구존(九尊)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허나 천령지체를 어디서 찾아낸단 말이시오?" "천령지체는 아직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전설 속의 신체(身體)가 아니오?" 우내십존의 안색이 이내 침통하게 물들어 갔다. "반드시 있을 것이오. 노납은 믿소이다. 하늘의 섭리(攝理)를... 그리고 노납이 감 히 천기(天 氣)를 헤아리건데 천마지체가 탄생한 순간 천령지체 역시 나타났음을 단언할 수 있 소이다. 아미타불!" "아...!" "그, 그것이 사실이오니까?" 중인들의 안색에 한 가닥 서광이 떠올랐다. "아미타불, 노납은 이미 육 년 전에 천마지체의 탄생(誕生)을 천 기를 지켜보고 짐작하였소이다. 그 순간 천령성 역시 빛을 발했소이다." "오오!" "아...!" "노납이 아직까지 헤아리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기는 하나 천마 지체가 나온 이상 천령지체도 반드시 탄생했을 것이오." "하면...? 그 한 가지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 무엇이오니까?" 천불선사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천마성의 광휘와 천령성의 광휘가 뒤엉켜 있었소. 그것이 무 엇을 뜻하는지 노납은 짐작할 수 없었소이다." "오! 그런 일이?" 중인들은 일제히 침음성을 흘려냈다. "아미타불!" 천불선사의 불호는 한풍(寒風)에 묻혀 희미해지고 있었다. 폭설이 또다시 산발한 채 흐느낄 때, 이미 죽음의 빙벽 북해도는 다시 태초의 침묵으로 침잠(沈僭)해 들기 시작했다. 우내십존마저 사라진 죽음의 고도(孤島)에 한풍만이 미친 듯 대지를 쓸고 있었던 것이다. 풍운(風雲), 진천하(震天下), 난무림(難武林)의 가공할 풍운(風雲), 그 전율 의 장(章)이 이렇게 열리고 있었다. 광장(廣場)? 아니었다. 사면(四面)이 막힌 기이한장소, 아득한 머리위로 손바닥만한 천공이 보이고 있다. 헌데 전후좌우의 벽면에서부터 휘황한 금광(金光)이 뻗어나오고 있지 않은가! 놀라운 일이었다. 전후좌우의 모든 벽면의 전체가 금(金)이 아닌가! 싯누런 황금(黃金)의 동혈(洞穴), 그곳의 넓이는 사방 삼십여 장에 달하리만큼 광 대했다. 헌데 그 황금 동혈의 한쪽에는 가득히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글씨의 내용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엄청난 개세절학(蓋世絶 學)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크흐흐흐, 이 지긋지긋한 황금동(黃金 )에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었다." "흘흘흘, 더구나 우리 스스로 찾아 오리라고는 더욱 생각치 못한 일이다." 그곳의 중앙에 오 인(五人)이 빙 둘러 앉아 있었다. 그들의 가운 데에는 한 소년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바로 주천화였다. "지옥수라갱, 이곳이 황금광맥의 중심지임은 우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지?" "크흐흐흐, 그렇고 말고!" "저 황금광벽에 새겨놓은 우리의 절기를 우리들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남겨놓은 것이었지...." 주위를 둘러보며 감회에 젖은 노인은 바로 천절오살마였다. 그러했다. 이곳은 바로 그들이 이백 년이나 감금되어 있던 화룡빙산의 한쪽 분화구 속이었다. "음, 이 아이가 드디어 깨어나는군...!" 천면색환마의 눈에 긴장된 빛이 떠올랐다. 천절오살마의 눈이 일 제히 주천화의 일신에 고정되었다. "으음...!" 문득 주천화의 입이 가볍게 열렸다. '꿀꺽!' 이때 천절오살마는 주천화의 눈이 떠지기를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순간 주천화의 눈이 번쩍 뜨여지며 맑은 빛을 발했다. "...!" 천면색환마는 긴장된 눈으로 주천화의 눈을 직시했다. '오오, 천마지체가 확실하다. 저눈 깊숙이 떠올라 있는 백광(白光)과 녹광(綠光)!' 일순 천면색환마의 몸이 격렬히 진동되었다. '헌데? 또 있다! 백광과 녹광이 교차하는 가운데 은은히 홍광(紅 光)이 떠올라 있지 않은가? 이, 이것이 대체 무슨?' 천면색환마가 한 가닥 의혹에 잠겨 있을 때 섬강천마부 흑웅이 답답한 듯 버럭 고 함쳤다. "색마! 어떻게 된 거냐? 천마지체가 확실하냐?" "그, 그렇다! 헌데...?" "헌데는 또 뭐냐?" 섬강천마부 흑웅은 천성적으로 불같은 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 아니다! 분명 천마지체다." 천면색환마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잘못본 것이겠지. 천령지체는 아직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전설상의 신체 일 뿐이니...' 천면색환마는 한 생각을 떠올리다 스스로 부인했다. '헌데 이아이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질은 전설상의 천마지체보다 뛰어난듯 하니...' 이때 주천화의 눈이 늘어선 천절오살마를 훑었다. 그의 눈에 의아해 하는 빛이 가 득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그러나 주천화는 그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대들?' '이놈 봐라!' 천절오살마는 주천화의 입에서 대뜸 아랫 사람을 대하는 말투가 흘러나오자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내 아버님은 어디 계신가?" 주천화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태도가 자연 스럽기 이를데 없었는데 상대를 억누르는 선천적(先天的)인 기품이 넘쳐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일국(一國)의 왕자(王子)로서 몸에 밴 항거(抗 拒)할 수 없는 위엄인 것이다. "흐흐흐, 쥐방울만한 놈이 노부들에게 감히 하대(下對)를...." "크크크!" 천절오살마는 서로를 마주보며 고소를 흘려냈다. "놈?" 순간 주천화의 눈에서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왔다. 가슴 서늘한 무형(無形)의 위엄이 주위를 압박했다. '대, 대단하다! 어찌 이, 이 어린아이의 몸에서 숨쉬기조차 힘든 위엄이 뻗어난단 말인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위엄, 천하 위에 군림할 풍도이다.' 천절오살마는 주천화의 눈빛 한 번에 심신(心身)이 떨려옴을 느껴야 했다. '이, 이럴 수가! 아무리 천마지체라고는 하나 내 나이가 몇인데 이따위 애송이에게 위압된단 말인가!' 천절오살마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들이 어찌 알리요. 이것이 천마지체의 신위라기 보다는 일국의 왕자라는 고귀한 신분에서 쌓여진 선천적인 위 엄임을.... 게다가, 주천화는 엄청난 독서량으로 형성된 고귀한 성품조차 지 니고 있지 않은가! 이것들이 자연스럽게 융화되니 실로 놀라운 신위를 드러내는 것 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소. 내 아버님은 어디에 계신가?" 주천화는 천절오살마를 차갑게 훑어본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불행히도 소공자의 부친께서는...." 순간 천면색환마는 주천화를 보호한 채 천마금갑신공를 운용해 죽어 있던 주상걸이 그의 부친임을 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무엇이!" 주천화는 천면색환마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일순신형(身形)이 휘청했다. 이어그는 쓰러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은채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 허나 일체의 울음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으며, 또한 눈물조차 볼 수 없었다. '놀, 놀라운 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가슴으로 우는가!' 주천화가 가늘게 어깨만을 떨며 내심의 격동을 사리고 있자 천절 오살마는 한 가닥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으으음!" 허나 주천화, 결국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울음을 참으려는 신음이 흘러나오자 천절오살마는 눈시울이 뜨거워옴을 느끼고 있었 다. 잠시 후, 주천화의 몸에서 진동이 가라앉았다. '아버님!' 눈을 뜬다. 헌데 그 눈에 떠오른 가공할 녹광을 대한 천절오살마의 안색이 홱 변했다. '저, 저럴 수가! 아무리 천마지체라 하나 저 눈빛은 아수라천존(阿修羅天尊)의..' 그들은 심장이 멈출 듯한 한기를 느끼고 대경실색했다. "...!" "...."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주천화는 어느새 예의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누구이며, 이곳은 또 어디인가?" 여전히 수하를 다루는 듯한 말투. 허나 아무도 그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허허, 이곳은 화룡빙산의 분화구 안이며 우리는 무림의 폐물들이외다. 헌데 소공 자는?" 천면색환마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독심(毒心)을 품고 있는 부 드러움이 아닌 진정한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냉혹하기 이를데 없어 단 한 번도 웃지 않 았던 사극탈혼마의 흉측한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으니.... 주천화에게 정을 느끼고 있단 말인가? '무림의 폐물들...?' 주천화는 주위를 둘러보고 내심 경악성을 터뜨렸다. '화룡빙산 안에 이처럼 넓은 공간이 있었다니! 더우기 사방이모두 황금이 아닌가!' "허허허, 이곳의 황금을 모두 캐낸다면 천하의 반을 살 수 있을 것이오." 천면색환마가 주천화의 내심(內心)을 짐작하고 득의의 미소를 흘려냈다. "헌데 소공자는 어찌된 신분이기에 이곳까지 오셨소?" 섬강천마부 흑웅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 그의 행동은 스스로도 믿지 못할 노릇이 었다. 자신도 모르게 일개 어린아이에게 공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주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신분(身分)? 아아! 저주의 신분, 내가 만약 평민이었다면 겪지 않았을 참화를 불러 일으킨 신분!' "...." 천절오살마는 주천화의 입이 열리길 기대하며 침묵했다. "...." 허나 주천화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천절오살마는 그의 행동에 일순 멍청해졌다. "이곳에서 나갈 길은 어디요?" 주천화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다 사방(四方)이 막혀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나갈 길?' 순간 천절오살마는 서로의 얼굴을 찾았다. '그렇지!' 천면색환마의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쳤다. 천면색환마의 눈에 스치는 의미심장한 빛, 천절오살마는 이미 그의 의도를 짐작하 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저 곳 뿐이오." 천면색환마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그 손은 아득히 뚫려 있는 손바닥만한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끼끼끼, 도대체 어떤 신분(身分)이기에 이토록 오만하단 말이 냐? 허나 네놈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어도 그렇게 건방을 떨 수 있을까?' 천절오살마는 서로를 쳐다보며 득의의 미소를 머금었다. '흘흘흘,네놈이 이곳을 나가려면 싫어도 우리를 사부로 모시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저 도도한 놈을 간단히 꺾는 방법이 있었군. 흐흐흐!' "...!" 주천화의 눈길이 천면색환마의 손을 따라 머리 위를 올려다 보았다. 아득했다. 무림(武林)의 절정고수라 해도 여간해서는 오르지 못할 높이가 아닌가? 사방의 벽면은 매끄럽기 이를데 없었고 그각도 또한 검날을 세운 듯이 날카로왔다. '저곳으로...?' 주천화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이때였다. "소공자가 저곳을 올라가려면 단 한 가지 방법 뿐이오." "...?" "그 방법은 저쪽 벽면을 메우고 있는 무공(武功)들을 익혀야 하는 것이지...." "무공...?" 주천화는 의아한 눈으로 한쪽에 빽빽히 새겨져 있는 글씨들을 훑어 보았다. "그렇소이다! 저무공들을 완전히 익혀야만 스스로 이곳을 빠져나갈수 있게 되오." 주천화가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것을 지켜보는 천절오살마의 입 가에 일제히 회심의 빛이 어렸다. '흐흐, 네가 그것을 익히려면 족히 십 년 이상은 걸릴 것이다. 그동안 우리를 스스로 사부로 모시지 않을 수 없겠지....' 천면색환마가 늘어진 백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공동전인(共同傳人)! 제이(二)의 마도천하를 이룰 천마 지체를 우리가 길러내게 될 줄이야!' 천절오살마의 눈에서 야망과 격동이 물결쳤다. 한편 벽면 가득히 새겨져 있는 무공들을 훑어보는 주천화의 눈이 점차 경악으로 크게 떠지고 있었다. '놀랍다!' 내심 탄성이 절로 터져나왔다. '이, 이것이 무공이라는 것인가! 일장(一掌)에 대해를 가르고 일 검(一劍)에 천지가 양단될 수 있다니...!' 천절오살마의 무공, 이는 실로 경천동지할 패도지학(覇道之學)이었다. 이백 년 전 이미 천하를 희롱하던 그들이 아닌가? - 지옥파천십이참(地獄破天十二斬). 섬강천마부 흑웅의 가공할 마공(魔功), 섬강천마부 흑웅은 타고 난 신력(神力)을 바탕으로 한 가지 가공할 부법(斧法)을 창안해 내었다. 지옥파천십이참, 이것의 가공함은 태산이라도 일섬(一閃)에 양단될 정도인 것이다. - 구유멸천살(九幽滅天殺). 사극탈혼마의 독문절기, 구유멸천살은 무정일심(無情一心) 속에 불필요한 모든 동 작을 배제한 일초즉살(一招卽殺)의 가공할 살공(殺功)이었다. 사극탈혼마는 한 자루 의 손바닥 크기 장난감같은 극(極)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일 초 이상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구유멸천살, 이것은 인간의 모든 정(情)을 끊고 살심(殺心)만을 키우는 일종의 심공(心功)이었다. - 고루귀령대법( 歸靈大法). 고루마존이 기록해 놓은 절대사공(絶代死功), 고루귀령대법에서 죽음의 냄새가 풍 기는 이유는 고루귀령대법이 온갖 시체들을 강시로 만들어 부리는 사이(邪異)한 대 법이기 때문이었다. 이 고루귀령대법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전신이 강시(彊屍)와 같이 되며 금강불 괴지체가 될 수 있었다. 독화마황 호국기는 두 가지 무공을 황금벽에 묻어 놓았다. - 수라천마화공(修羅天魔火功). 가공할 마염(魔焰)은 하늘을 태우고, 대지를 뒤엎는 폭풍은 우주 를 날린다. 가공무비의 화공(火功)과 벽력탄공(霹靂彈功), 독화마 황이 제조한 독화벽력뢰는 무림사상 최대의 벽력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 마혈패천독강(魔血覇天毒 ). 이것은 인간능력 이상의 독공(毒功)이었다. 독화마황은 이백 년 전 겨우 오성(五成)의 마혈패천독강으로 적 수를 만나지 못했다. 이 마혈패천독강이 극도에 이르면 천하에 못 녹여버릴 것이 없 었다. 천면색환마 역시 두 가지 괴이한 무공을 남겨놓고 있었다. - 천사섭령색혼술(天邪攝靈色魂術). 천하여인의 방심(芳心)을 휘어잡는 색혼방중술(色魂房中術), 천사섭령색혼술은 또 한 인간의 심리(心理)를 삼만구천(三萬九千)의 유형으로 분리한 심계지학(心計之學) 이기도 했다. 남의 계략이나 음모에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 또한 뛰어난 모사(謀士)여야 한다. - 천면환허비(天面幻虛飛). 열 걸음을 내딛는 동안 수십의 인물로 변형시킬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에게도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절대무이(絶代無二)의 경공이 함께 조합되어 있는 것이 바로 천면환허비였다. "어떻소? 쓸만하지 않은가?" 주천화가 거의 반 시간 동안을 각종 무공에 심취해 있자 천절오 살마는 득의의 미소를 흘려냈다. "...!" 주천화는 경악이 극에 달한 듯 입을 열지 못했다. '흐흐흐 놀랄만도 하겠지. 저것은 우리가 본신의 무학을 지난 이 백 년간 더욱 보완한 것이니 가히 천하무적인 것이다.' "흘흘흘!" 그들이 내심 회심에 젖어 있을 때, 주천화가 모든 것을 훑어본 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허나 그의 눈빛은 어느새 무심해져 있었다. 천절오살마는 주천화의 태연함에 왠지 불안함을 느껴야 했다. "소공자, 저 무공들이 마음에 차지 않기라도...?" 탐탁치 않은 그의 표정에 천면색환마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 헌데 주천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가! "그, 그럴 리가!" 천절오살마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나는 무공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나 저 무공들이 보기 드문 것임을 알 수 있 었소. 허나...." "허나? 허나 어쨌단 말인가?" 천절오살마는 마른 침을 삼켰다. "모름지기 남아라면 그 뜻을 세움에 있어 한 가지 분명히 정해야 할 것이 있지 않 겠소?" "...?" "...!" "나는 무공(武功)을 익히기로 이미 뜻을 세웠소. 허나 저 무공들은 아니오." 주천화가 단호히 내뱉았다. 그러자 천절오살마의 안색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그,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없소?" "우리의 무공(武功)을 익히지 않겠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천절오살마는 주천화의 뜻밖의 말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외쳤다. "그 이유는 일단 무공을 익히기로 결심한 이상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무공만을 익 히겠다는것이 내 뜻이오. 그것이 남아로서 품어야 할 대의(大意)인 것이지...!" '광, 광오(狂傲)하다!' '저. 저렇게 광망스럽다니!' 천절오살마는 혀를 내둘렀다. 천면색환마가 한숨과 함께 경색했다. "소공자의 뜻은 가상하기 이를데 없구료. 허나 우리의 무공이 천 하제일이랄 수는 없어도 당금무림에 적수는 없을 것이니...." 천면색환마는 입을 여는 도중 주천화의 입가에 떠오르는 조소에 흠칫 입을 다물었 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타의에 의해 이백 년이나 갇혀 있던 사람들의 무공이 높아야 얼마나 높겠소!" "허!" "네, 네놈이 정녕!" 천절오살마의 안색이 분노로 인해 참담히 굳어졌다. 처절한 모욕 감에 모발(毛髮)이 곤두섰다. 허나 그들은 극도의 자제력(自制力)을 발휘해 누구도 노화를 폭발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그들이 주천화의 재질을 아끼는 마음이 더욱 강했기 때문인 것이다. 헌데 불같은 성미(性味)로 여간해서는 참지 못하는 섬강천마부 흑웅만은 오히려 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천면색환마가 노기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일견 처연 해 보이리만큼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소공자 우리가 과거에 타의(他意)에 의해 이곳에 갇혔던 것은 사실이오." 그의 눈이 힐끔 황금벽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그들의 무공과 함 께 그들이 갇히게 된 경위까지 적혀져 있었다. 후사(後事)를 위해 만약 누군가 자신들의 무공을 얻는 사람이 있 다면 자신들의 복수를 부탁하는 글귀였다. "허나 그 당시 우리를 핍박한 것은 한두 명이 아닌 수만에 달했 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이백 년 전의 일이란 점이오." "하면 지금은 자신 있다는 말씀같이 들리는구료?" 문득 주천화가 고개를 들었다. "그, 그렇소!" 천절오살마는 서광(曙光)을 발견한 사람처럼 다급히 대꾸했다. '젠장! 무슨 경우가 이러냐? 오히려 무공을 익혀주십사 하는 꼴이 아니냐!' '제기랄 실로 개같은 경우다.' 그들은 내심(內心)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주천화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눈을 빛냈다. 털썩! 주천화가 돌연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동여매어져 있는 가죽주머니를 끌러냈다. "...?" "...?" 천절오살마는 주천화의 행동에 의혹(疑惑)을 품었다. '아버님은 이 속에 다섯 권의 무공비급(武功秘 )이 들어 있다고 하셨지....' 주천화는 가죽주머니 안에서 내용물(內容物)을 꺼내고 있었다. 그곳에는 가죽 검집에 들어있는 한 자루 검과 다섯 권의 책자가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이것들 중 한 권을 익히시고도 일약 무림의 고수가 되셨다고 했다.' 주천화의 눈에는 묘한 빛이 떠올랐다. 오기(傲氣)랄까? 일국의 왕자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자라나 남에 게 굽히기 싫어하는 그의 오기를 자극한 것이었다. '당신들의 무공이 놀랍기는 하나 나는 스스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무공을 익힐 것이오.' 주천화는 그중 한 권의 책자를 펴들었다. "...!" 순간 그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놀랍다! 아버님의 학문으로도 겨우 한권 밖에 해독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구나!' 다섯 권의 고서(古書), 실로 해괴한 방법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다른 서체로 적혀 있지 않은가? 고대(古代)의 갑골문(甲骨文)을 비롯하여 천축문(天竺文), 과두문(科紗文), 전자체(篆字體) 등... 실로 이 모든 서체에 능통해 있는 대학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읽을 수도 없을 정도 였다. 사삭... 삭! 주천화는 이내 책자의 내용해 심취해 들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한 자, 한 자 읽기도 힘든 책을 주천화는 마치 뒤적이는 듯한 속도로 읽어내려가는 것이었다. "...?" 천절오살마는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 책이 무엇이기에...?" 천면색환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때 주천화는 한 권의 책을 모두 읽은듯, 탁! 소리와 함께 덮고 또다른 책자를 집어들었다. "그 책이 무엇이오? 노부가 좀 볼 수 있겠소?" "...?" 주천화는 묵묵히 책장만을 넘기고 있을 뿐, 눈도 돌리지 않았다. 천면색환마가 손 을 뻗었다. 순간 주천화가 읽고 내려놓은 한 권의 고서가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 책자를 펴든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색마, 어떤 내용인가?" "무슨 책인가?" 독화마황과 섬강천마부 흑웅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천면색 환마의 얼굴이 문득 붉어지지 않는가? "허허허!" "...?" "내 이 나이가 되도록 이렇게 무안하기는 처음일세!" 천면색환마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뜻인가?" 독화마황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이... 나의 짧지 않은 학문(學文)으로도 이 책자를 읽을 수 없다네!" 천면색혼마의 입가에 쓴웃음이 머물렀다. "다만 각종 서체(書體)로 쓰여져 있다는 정도밖에 짐작할 수 없었소." "무엇이? 색마의 학문으로도 그 책을 해독할 수 없단 말인가?" 사마(四魔)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 그런 일이! 저 색마로 말하면 모르는 것이 없는 만박무불통 지(萬博無不通知)가 아니던가?' '뛰어난 학문으로 삼만사천 가지의 귀계(鬼計)를 창안해 낸 색마 가 해독할 수 없는 것이 있다니!' 그들의 눈이 일제히 단아한 자세로 독서삼매(讀書三昧)에 빠져있는 주천화에게 꽂혔다. '저 소공자는 저 책들을 모두 해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저렇게 빨리 읽으면 서...?' 주천화는 그들의 놀람은 아랑곳 없이 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 모 습을 지켜보는 천절오살마의 표정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잠시 후, 주천화는 다섯 권의 고서를 덮고 눈을 들었다. 주천화 의 눈 속에는 은은히 격동(激動)의 빛이 물결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맑은 빛, 주천화의 눈빛은 너무나도 맑았다. 허나 그 맑은 눈이 폭풍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이 책자를 서술(敍述)해 놓은 분은 나에게 북해도의 화룡빙산 황금분화구를 찾으 라 하셨다." 주천화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격동에 떨리는 눈으로 자세히 살피 고 있었다. 주천화의 돌연한 태도에 천절오살마는 의혹과 신비감에 빠져들었다. "이곳이 바로 책에 적혀 있는 장소임이 분명하다! 아아! 아버님 이 북해도로 도주해 온 것에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주천화의 독백에 천절오살마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곳에 황금분화구가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단 말 인가? 저 책을 기술한 사람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이때 한쪽 벽면을 지그시 응시하던 주천화가 돌연 탄성(歎聲)을 터트렸다. "천마금석사진(天魔禁石死陳), 그렇구나! 천마금석사진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고서에 적힌 장소가 확실하구나!" 주천화가 기쁨의 빛을 드러냈다. 순간 천면색환마의 몸이 진동되었다. "천마금석사진? 그, 그것은 천마수라대제의 수하였던 천기마자 (天機魔子), 그분이 창안해 내었다는 절진!" 그의 눈이 돌연 크게 떠지며 가죽주머니에서 꺼낸 검과 고서들를 뚫어져라 응시했 다. "뭐라고 했나?" 천면색환마의 태도가 괴이함을 발견하고 섬강천마부 흑웅이 외치듯 질문했다. "천마금석사진은 천마수라대제의 수하였던 기관토목(機關土木)의 일인자(一人者), 천기마자께서 남기신 것이네!" 천면색환마가 떨리는 음성으로 설명했다. 천절오살마의 얼굴에 또다시 경악이 떠올랐다. 돌연 우르르릉! 하는 웅후한 굉음이 진동했다. 주천화의 손이 한 쪽 벽면을 몇 번 만지자 돌연 벽면이 갈라진 것이었다. "진, 진정 이곳에 천마금석사진이 펼쳐져 있단 말인가!" 천면색환마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더듬거렸다. "이, 이럴 수가! 눈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구나. 지난 이백 년간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니!" "그, 그렇군! 더구나 이곳에 벽곡단이 있었던 것을 이상히 여기지 못했으니...." 천절오살마, 그들은 연이어 몰아치는 충격에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치 자신들이 꿈을 꾸는 듯 느껴질 뿐이었다. "...!" 주천화, 그 역시 잠시 망연히 서 있었다. 필연(必然),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이 자신에게 얽혀 있음을 느끼고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잠시 후, 주천화는 이윽고 마음을 정하고 석벽 안으로 걸음을 옮 겼다. 어떤 기대와 흥분으로 몸을 긴장시킨 채.... 누가 알랴! 그 길이 곧 일천오백 년의 시공(時空)을 뛰어 넘어 천마(天魔)로 이르는 길이었음을.... ■ 황 제1권 제3장 아! 천마수라대제(天魔修羅大帝) ━━━━━━━━━━━━━━━━━━━━━━━━━━━━━━━━━━━ 석실(石室), 눈부신 서광(瑞光)과 함께 한 칸 거대한 규모의 석실이 보이고 신비한 청광(淸光) 이 석실 가득히 깔려 있었다. 청광에는 어떤 신비함과 웅혼(雄魂)함이 가득했다. 석실의 중앙, 그곳에는 두 명의 노인이 좌정(坐定)해 있었다. 비범한 풍도(風度), 동안학발(童顔鶴髮)에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두 명의 노인, 천상(天上)의 선인(仙人)이 이러할까? 한 점 속세(俗世)의 티끌도 찾아볼 수 없는 백의노인들이었다. "...!" 주천화는 일순 망연해졌다. 그는 석실 안에 이러한 인물들이 형 형한 안광(眼光)을 발하며 있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천화의 뒤에 천절오살마가 넋을 잃은 채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때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들어왔던 석실의 문이 닫혔다. "어서오시오 소주(少主)!" 헌데 이 순간 어디선가 웅후한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주천화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노복은 천삼백 년 동안 소주께서 오시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음성은 중앙에 정좌해 있는 노인 중 한 명에게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천삼백 년? 그, 그럴 수가!' 인간이 어찌 천삼백 년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주천화와 천절오살마는 경악이 극에 달해 머리 속이 허옇게 변해옴을 느꼈다. "너희들은 어찌 본좌들을 대하고도 예를 갖추지 않느냐? 어서 예를 갖추지 못하겠 느냐!" 한 노인의 눈이 주천화의 뒤에 서 있는 천절오살마를 훑어 보며 신광을 폭사하지 않는가? "무엇이?" "...!" 천절오살마는 의혹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백미노인은 나이 삼백 에 가까운 그들을 마치 손자 대하듯 하지 않는가! "크하하하!" 섬강천마부 흑웅이 심중의 분노를 웃음으로 삭히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그대가 감히 우리를 능멸하려 하다니!" 섬강천마부 흑웅이 광소를 거두며 눈을 부라렸다. "허허허, 아우들이 네놈들의 이 모습을 보았다면 유계(幽界)에서나마 기절초풍을 했겠군." 백미노인이 문득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눈에서 부드러우면 서도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뻗어 나왔다. "네 이놈들! 본좌는 과거 대제를 모시던 만수성의(萬壽聖醫)이니 라! 네놈들이 아우들의 후예가 분명하거늘 이래도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천절오살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만, 만수성의?" 신음성(呻吟聲)이 절로 터져 나왔다. 천면색환마가 비틀하며 중얼거렸다. "만수성의라면 오백 년 전 천마수라대제를 보좌하던 칠천대극마(七天大極魔)의 한 명!" 천면색환마의 놀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 칠천대극마(七天大極魔). 일천오백 년 전, 마도천하를 이룩했던 천마수라대제에게는 일곱명의 가신(家臣)이 있었다. 천마수라대제가 신화적인 인물로 영원히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천기마자(天機魔子), 위군풍(偉君風). - 고루시혈마( 賜屍血魔). - 독군(毒君), 호용삭(胡龍朔). - 만수성의(萬壽聖依). - 수라마후(修羅魔侯). - 천마왕(天魔王), 뇌형(雷刑). - 구천도마(九天刀魔). 기실 천마수라대제는 표면적으로 직접 활동한 적이 거의 없었다. 직접적으로 무림 에서 활동한 것은 이들로서 그들이 마도천하를 이룩했던 것이다. 이들의 일신무공 은 가히 마신(魔神)의 경지였으며, 모든 마공(魔功)의 시조(始祖)였다. 그 칠천대극마 중의 한 명이 이곳에, 더우기 일천삼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 있음이니 어찌 믿을 수 있으랴! "그렇다! 본좌는 칠천대극마의 대형(大兄)이니라!" 백미노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너희들은 인간이 어찌 일천오백 년을 살아 있겠냐고 의심하겠으 나... 기실 노부는 너희들이 보는 것처럼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니라." 천절오살마는 아예 넋을 놓아 버렸다. "인간이 어찌 천리(天理)를 거역할 수 있겠느냐? 노부는 다만 본신의 의술로 원영 (元孀)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다. 허나 이것도 석실이 열린 후 일각만이 가능한 것이 다." '원영? 말로만 듣던? 그,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주천화, 여간해서는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던 주천화조차 혼란한 표정을 드러내 고 있었다. 허나 그가 누구인가! "노인장께서 일천오백 년간 원적(園寂)하지 못하고 계신 것에 어떤 연유가 있소?" 주천화의 음색은 어느새 예의 담담한 한기를 띠우고 눈 역시 평정을 회복해 있었 다. 만수성의의 백미에 감탄이 물결쳤다. "허허허, 역시 소주(少主)다우신 혜안(慧眼)이십니다." "...?" "노복(老僕)은 대제의 명(命)으로 소주가 오시길 기다려 온 것입니다." "나를? 내가 그대의 소주란 말이오?" 이때였다. "본손(本孫)들이 선조의 대형을 뵈옵니다!" 천절오살마가 정신을 가다듬고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감 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허허허!" 만수성의가 그들을 보고 자상한 미소를 머금었다. 헌데 천절오살 마가 칠천대극마의 후예라는 것이 사실이었던가? "보아하니... 네가 구천도마의 후손인 듯 하고...." 만수성의의 눈이 섬강천마부 흑웅을 훑었다. "그, 그렇습니다. 본손은 그분의 십삼대 손(孫)이옵니다." 섬강천마부 흑웅이 떨리는 음성으로 공손히 대답했다. "너는 고루시혈마의 일맥(一脈)인 듯하구나?" 만수성의가 고개를 끄덕인 후, 고루마존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십오대 손이옵니다. 이, 이곳에서 선조의 대형을 보게 되올 줄은...." 고루마존이 거북한 음성(音聲)을 최대한 공손히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허허, 너의 용모에서 과거 수라마부의 얼굴을 읽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천면색환마는 만수성의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끼고 더할 나위 없이 공경의 빛을 드러냈다. "그, 그렇습니다. 그분은 소손(少孫)의 십오대 선모(先母)이십니다." "흠, 천마왕 역시 냉막한 표정을 띠우고 있었지... 허나 그의 내 심에는 누구 못지 않은 열정이 담겨져 있었다." 사극탈혼마 역시 몸을 떨었다. "본손은 독군군, 그분의 십이대 손(孫)이옵니다." 독화마황은 만수성의의 눈이 자신에 이르자 먼저 입을 열었다. "허허허, 그들의 성격이 그대로 전해졌구나! 독군 역시 항시 해학을 즐겼느니라!" 만수성의의 눈이 천절오살마를 한 차례 훑은 후, 주천화를 응시(凝視)했다. "저들이 이곳에 모인 것이 우연이 아니듯 소주께서 이곳에 드시 게 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닙니다." "...?" "모든 것은 대제의 안배이셨습니다." '그, 그럴 수가! 어떻게 인간이 일천오백 년 후의 일을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주천화는 만수성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허허허, 노신이 원적할 시간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을 밝혀 드릴 것이니 조급해 하시지 마소서!" 문득 만수성의의 눈이 천절오살마를 직시했다.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거라! 소주는 이제 십일 년이 흐른 후 출도(出道)하실 것이 다." "...!" "이곳에 너희들이 모일 수 있게 안배했던 까닭은 소주(少主)의 존재를 미리 대면시키려는 뜻이었느니라!" 천절오살마가 황급히 구배(九拜)를 올렸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들은 공손히 몸을 돌렸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석문(石門)이 저절로 열리자 그들은 조심스럽게 석실(石室)을 빠져 나갔다. 이때 그들의 등으로 만수성의의 진중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너희들은 소주께서 강호에 출도하셨을 때 보필해야 하느니라. 그 책임이 가볍지 않음을 명심해라!" "명심 거행하겠사옵니다!" 천절오살마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등 뒤로 석문이 닫혔다. "휴우!" 석문이 닫히자 천절오살마는 일제히 긴장을 풀며 한숨을 흘려냈 다. 고루마존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그러게 말일세!" 천면색환마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아무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나가야 하지 않겠나?" "그렇지! 소공자께서 출관(出官) 하시는 것이 십일 년 후의 일이니...." 천절오살마는 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손으로 천마지체이신 그 분을 길러내지 못하는 것이 아 쉽긴 하나 항차 제이(二)의 천마대제께서 현세에 나타나심이니 실로 경하(慶下)할 일이네!" "십일 년! 결코 긴 세월은 아니지... 지난 이백 년에 비하면 그 야말로 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네!" "허나...." 섬강천마부 흑웅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 십 년의 기다림이 오히려 지난 이백 년 보다 길게 느껴 지네. 아아! 하루 빨리 그 분의 존재를 뵐 수 있었으면...." 섬강천마부 흑웅의 눈에 강렬한 빛이 떠올랐다. "자! 가세. 우리는 그 분이 현세(現世)에 출도하실 때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나?" 이때 천면색환마가 기쁨이 충만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 보았다. "십일 년, 그 동안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네!" 천면색환마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을 뿌렸다. 대망(大望)이 이 글거리며 그 눈에 뛰놀고 있었다. "가자! 우선 노부는 지난 이백 년 동안 쌓아온 한(恨)을 풀어야겠다." 고루마존이 음산하게 외쳤다. 가공할 살기가 넘실거렸다. "흘흘흘, 그렇지! 우리를 이 지긋지긋한 곳으로 밀어 넣은 놈들 에게 묵은 빚을 받아내야지!" 독화마황의 괴소에서 섬뜩한 살기가 묻어났다. "ㅋㅋ! 천하가 이제 박살나겠군!" 탈혼사극마 역시 비릿한 피비린내가 담긴 괴소를 흘려냈다. 섬강천마부 흑웅이 돌연 제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나는 강호에 나가지 않겠다." "무슨 뜻인가?" "...?" 섬강천마부 흑웅의 돌연한 행동에 모두들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 다. 섬강천마부 흑웅이 묵묵히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금부(金斧)를 풀러냈다. 거대한 황금도끼, 이것은 그의 독문병기(獨門兵器)였다. "나는 이곳에서 소주께서 출관하시는 그 날을 기다리겠네!" "...?" "이곳을 지키며 소주의 출관을 제일 먼저 맞이할 것이네!" 섬강천마부 흑웅의 음성에 강렬한 결의가 숨겨져 있었다. "허면, 자네는 앞으로 십일 년을 이곳에서 소주를 기다리겠다는 것인가?" 천면색환마의 물음에 섬강천마부 흑웅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 십 년을? 이곳이 지긋지긋하지도 않는가?" "이미 이백 년을 이곳에서 보냈네, 십 년을 더 있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나!" 섬강천마부 흑웅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내리 감았다. 우직한 충 정(忠情)이 모두의 가슴에 전해졌다. 섬강천마부 흑웅, 실로 우직하리만큼 충직한 인물이었다. "음!" 모두들 섬강천마부의 성품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음, 자네의 뜻은 잘 알겠네. 허나 우리는 강호의 일이 궁금하기도 하고 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자네의 뜻에 동조하지 못하네. 이해하여 주길 바라네." 섬강천마부 흑웅이 돌연 눈을 떠 강렬한 신광을 뻗어냈다. "그 해야 할 일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의 질문에는 질책하는 듯한 여운이 깔려 있었다. "그, 그야 물론 항차 이대(二代) 천마수라대제가 되실 소주(少 主)를 위한 안배가 아니겠나? 게다가 후대(後代)들의 안위도 염려스럽고...." 천면색환마의 음성에 알 수 없는 흔들림이 느껴졌다. "후후, 그뿐인가? 과연 그뿐이란 말인가? 와하하하." 문득 광소(狂笑)가 터졌다. "과연 자네들이 내심에 한 점의 사욕(私慾)도 깃들어 있지 않단 말인가?" "음!" 모두의 얼굴이 순간 알게 모르게 붉어졌다. 섬강천마부 흑웅이 다시 굳게 눈을 감았다. "나 역시 나만의 야망을 숨겨온 것을 부인치 않겠네. 허나 그 야 망은 소주를 대한 순간 뇌리에서 지워 버렸네." 섬강천마부 흑웅이 정곡(正鵠)을 찌르자 모두의 안색(顔色)이 굳어졌다. "허나 굳이 자네들에게까지 나의 길을 강요하지는 않겠네. 아무 튼, 나는 이곳에서 소주를 기다리겠네." 섬강천마부 흑웅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음!" "자네의 충정, 가상한 것이네! 허나 우리도 소주께서 출관하실 때를 맞춰 다시 올 것이네." 섬강천마부 흑웅은 오른손에 금부를 세워든 채 태산과 같이 정좌 해 있을 뿐,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자! 십일 년 후에 다시 만나세!" 그들의 신형이 비스듬히 솟구쳐 올랐다. 다음 순간 그들은 섬강 천마부 흑웅만을 남긴 채 모두 사라져 버렸다. "...!" 섬강천마부 흑웅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언제까지라도 그 자리에 있을 듯 앉아 있 었다. 헌데 채 반각도 흐르기 전이었다. 돌연 그의 뒤에서 석문이 열리지 않는가? "밖에 있는 자는 어서 이리로 들어오너라!" 이어 만수성의의 음성이 들려왔다. "...!" 섬강천마부 흑웅이 놀란 빛을 드러내며 황급히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 내가 남아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섬강천마부 흑웅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너에게 구천도마(九天刀魔)가 남긴 무공을 주겠다. 이것은 너의 충직함이 가져다 준 복연(福緣)이니라!" 만수성의의 음성에 섬강천마부 흑웅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선, 선조의 무공을...!" "어서 노부의 가슴 속에 있는 구천도절록(九天刀絶錄)을 꺼내 가거라!" - 구천도절록(九天刀絶錄). 석년의 구천도마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절대무학기서(絶代武學 奇書), 구천도절록을 손에 쥔 섬강천마부 흑웅의 전신이 격동으로 부르르 떨리고 있 었다. "선, 선조님의 무학이... 오오!" 섬강천마부 흑웅의 눈에서 격동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이처 럼 격동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원래 그의 무공은 이 구천도절록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허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에게 이어진 것은 구천도절록의 무공 중 오성(五成) 가량에 불과했다. 세월이 거듭되면서 대부분이 훼손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만으로도 천 하를 희롱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구천도절록의 원본을 대하게 되니 어찌 기쁘지 않 을 수 있겠는가! 섬강천마부 흑웅은 남다른 충정으로 실로 뜻하지 않았던 복연을 얻게 된 것이다. "너는 후일 소주를 보필함에 있어 추호의 게으름도 보여서는 안되느니라!" 만수성의의 말에 그는 거대한 체구(體軀)가 무너지는 듯 지면에 부복했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섬강천마부 흑웅은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주천화의 모습을 찾았 다. 이때 주천화는 섬강천마부의 격동에 찬 모습을 담담히 응시하고 있었다. "...!" "...!" 그들의 눈이 허공에서 말없이 얽혔다. 이 순간 석실(石室)에 흐 르는 것이 있었다. 아마 그것은 뜨거운 정(情)일 것이다. 주천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편안한 자세로 정좌해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도 단아했다. 마치 입선(入禪)에 든 고승(高僧)의 풍도랄까? 그는 기다리고 있 었다. 자신이 입을 열지 않아도 만수성의가 모든 것을 밝힐 것이므로.... "...!" 주천화의 이런 모습을 대한 만수성의의 눈에 감탄(感歎)의 빛이 가득했다. "허허허, 과연 천하를 위진(威震)시킬 기품이십니다. 대제의 예 언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군요!" "...!" "본시, 대제 그 분도 불운(不運)한 신분이셨습니다." 만수성의의 입에서 점차 일천오백 년 전의 비사(秘事)가 흘러 나왔다. "천금(千金)의 신분이나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옥체(玉體), 바 로 소주(少主)의 처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지요." '불행한 옥체(玉體)?' 주천화의 감긴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노, 노인께서 이미 나의 신분을 알고 계신단 말이오?" 결국 그의 눈이 떠지며 질문을 던졌다. "허허허, 노복의 신산지술(神算之術)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어찌 그 일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석년(昔年)에 대제께서 예언하신 것입니다." '대제. 천마수라대제, 도대체 그 분이 누구길래 그같이 미증유 (未曾有)의 능력을 지녔단 말인가?' 주천화의 냉정한 가슴에 점차 천마수라대제에 대한 경외지심(敬 畏之心)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대제께서는 원래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의 혈육(血肉)이셨습니다." "...!" 주천화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쳤다. "허나 적황자(適皇子)가 아닌 서황자(庶皇子)의 신분인지라 온갖 수모를 겪을 수 밖에 없는 출생(出生)이셨지요." "...!"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랄까? 주천화의 처지도 이와 같은지라 어느새 그의 표정도 굳어가고 있었다. "허나 대제께서는 천고(千古)의 보기 드문 체질로 태어나셨습니 다. 바로 천마지체(天魔之體)이셨지요." "천, 마, 지, 체." 주천화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전설상의 천마지체, 주천화 역시 천마지체의 전설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허, 놀라실 것 없습니다. 소주(少主) 역시 천마지체이시니까요." "예? 내, 내가 천마지체? 그, 그것이 사실이란 말이오?" 주천화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제 아무리 만박불통(萬博不 通)의 학문을 지니고 있다 해도 자신이 천마지체였음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대제께서 예언하시길 소주의 재질은 오히려 대제보 다 몇 배 뛰어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으음!" 주천화는 애써 격동을 가라앉히며 묵묵히 귀를 귀울였다. "대제께서는 신분에서 오는 마음의 갈등을 오로지 책을 벗하는 것과 무공을 익히시는 것으로 달래게 되셨습니다." - 천마수라대제. 그는 오직 무공만을 취미로 삼고 일체 황실(皇室)의 일에 관여하 지 않았다. 그가 즐겨 찾는 곳은 황실서고(皇室書庫)와 황실무고(皇室武庫) 뿐이었 다. 결국, 천마수라대제는 황궁무학(皇宮武學)을 바탕으로 가공할 마 공(魔功)을 창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후, 대제께서는 황실을 떠나 강호로 나오셨지요. 출도(出道) 일 년 만에 무림(武林)에 유아독존(唯我獨尊) 하셨고...." 만수성의의 음성, 과거사를 더듬는 그의 음성에 짙은 감회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후, 대제께서는 일곱 명의 고아(孤兒)들을 수하로 거두셨습니 다. 후일 칠천대극마라 불리우는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천마수라대제 군림 십 년, 천하는 칠천대극마의 활약으로 완전히 마도천하(魔道天下)로 바뀌게 되었다. 천마수라대제가 군림한 지 오십 년이 되었을 때, 그는 부황(父皇)의 붕어(崩御)를 듣고 황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허나 황실에 들어간 그는 분노만을 삭힌 채 돌아서 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부황의 붕어를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서운 권력다툼, 천마수라대제가 황실에서 느낀 것은 추악한 권 력다툼의 비정(悲情) 뿐이었다. "그후, 대제께서는 세사(世事)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는 황실에 가시지 않았습니다. 더우기 그후부터는 무림의 일에도 일체 관여하시지 않았습니 다." 천마수라대제는 인간사(人間事)에 짙은 회의를 품고 은거하기에 이르렀다. 헌데 그의 나이 일백칠십에 이르렀을 때, 그는 천기(天機)를 읽 고 후대(後代)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선 계(仙界)에 든 지 일천오백 년 후, 천하(天下)를 덮는 암운(暗雲)이 있었다. 천지(天地)를 태초(太初)의 혼암(混暗)으로 떨굴 무서운 피의 폭 풍이 천기에 나타난 것이었다. "대제께서는 후대를 위해 한 가지 안배를 펼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 시기에 또 한 명 천마지체의 기재가 태어나게 되는 것 또한 천기에 나타나 있었던 것입니다." 만수성의의 이야기는 짧지 않았다. 주천화의 눈빛이 격동에 흔들렸다. "그, 그 기재가 바로 나였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난세(亂世)를 평정(平定)할 사람은 바로 소주인 것입니다." 문득 주천화의 안색에 처연한 빛이 감돌았다. "후후, 헌데 한 가지 사실만은 대제께서도 미처 짐작하지 못하신 모양이구료." 주천화의 음성은 일개 소동(小童)의 그것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허탈했다. "...?" "나 역시 세사(世事)에 회의를 품고 있소. 천하가 어떻게 돌아가 든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인 것이오." 주천화는 마치 인생을 모두 살아버린 팔순 노인과 같이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무림의 일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 초야(草野)에 묻 혀 글이나 벗하며 보낼 것이오. 그것이 부친(父親)의 뜻이기도 했고...." "...!" 만수성의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주천화의 심정을 이 해하고 있는 듯한 부드러움 같기도 했고 또 어떤 분노의 노출 같기도 했다. "허나 인간사가 스스로의 의지(意志)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노부는 소주께 서 천하가 도탄(塗炭)에 빠지는 것을 내버려 둘 사람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 주천화의 몸이 진동되었다. "만학(萬學)을 머리에 담고, 대의(大意)를 가슴에 품은 채, 그것 을 사해(四海)에 펼치는 일, 그것이 남아의 웅지(雄志)가 아니겠습니까?" "...!" 주천화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그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웅지(雄志), 남아라면 누구나 품어볼 수 있는 대망(大望)이었다. 주천화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끼고 만수성의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대제께서는 천기마자를 시켜 이곳에 천마서원(天魔書院)과 부원(府院)을 건립하셨 습니다." 천마수라대제는 자신의 모든 유학(遺學)을 천마부원(天魔府院)에남겼다. 그후, 일부의 유품을 황실무고(皇室武庫)에 보관시켜 후일을 대비하게 되었다. 천마제혈검, 천마쌍환유엽도, 그리고 천마수라대제의 독문절기(獨門絶技) 중 외가 기공(外家奇功) 몇 가지, 이것을 황실무고에 따로이 남긴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후세에 태어날 천마지체의 기재에게 천마부원을 찾아올 수 있도록 안배한 것이었 다. "이 가죽주머니 속에 있던 것들이 바로 그 분의 유품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이, 이것들은 아버님이 황실무고에서 발견하시고 나에게 물려준 것인데... 아!' 주천화는 일천사백여 년을 내려온 치밀한 안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현듯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부친의 죽음을 대하고도 울지 않던 그도 결국에는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그 눈물에는 어떤 비장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버님! 소자, 아버님의 유명(遺命)을 받들지 못함을 용서하옵소서!' 눈물에 젖은 그의 눈에 강렬한 빛이 이글거렸다. '아버님! 이 못난 놈... 결국 눈물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으로 흘리는 눈물이 될 것입니다!' 어느새, 주천화의 안색은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놀라운 심득(心得)이 아닌가! "천마부원에 들겠소!" 주천화의 입에서 담담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만수성의의 음성에 기쁨이 물결쳤다. "천마부원을 열려면 대제의 유품을 노복의 옆에 좌화(座化)해 있 는 천기마자의 무릎 위에 올려 놓으시면 됩니다." "천기마자?" 주천화의 눈이 또 다른 노인에게 전해졌다. "천기마자와 노복만이 이곳을 지키느라 후손(後孫)을 잊지 못했습니다." '음! 천절오살마가 칠천대극마의 후예들이었으며 두 사람만이 후대(後代)를 남기 지 못했군!' 주천화는 천기마자와 만수성의의 충정에 감동을 받았다. 돌연, 주천화가 몸을 일으 켰다. "...?" 다음 순간 그는 그들 두 사람의 유체(遺體)에 돌연 대례(大禮)를 올리지 않는가? "소, 소주! 왜? 저희들에게...?" 만수성의의 원영이 놀라 외쳤다. "두 분은 결국 저를 위해 대(代)를 잇지 못하셨습니다. 허니 어찌 무심할 수 있겠 습니까?" 주천화는 기어코 대례를 마치며 허리를 폈다. "소, 소주! 아!" 격동이 물처럼 흘렀다. 문득 만수성의의 음성이 엄숙해졌다. "소, 소주! 감, 감사하옵니다! 허나 소주께서는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혀서는 안되 옵니다!" "후후후,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허나 두 분의 숭고한 충정이 나 로 하여금 허리를 굽히지 않을 수 없게 하는구료." "...!" 만수성의는 격동에 넘쳐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아아, 천기마자도 지하에서나마 소주의 마음을 헤아리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 옵니다." 시간이 되었음인가? 만수성의의 원영이 발하는 음성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아, 이제 노복은 이만 천계(天界)로 돌아가야 하겠군요. 소주! 어서 대제의 유품을 천기마자의 무릎 위에 올려 놓으십시오." 주천화는 그의 말에 따라 가죽으로 싸여 있는 천마제혈검과 천마 쌍환유엽도를 천기마자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푸시시시...! 순간 기이한 음향과 함께 백색 기류가 피어 올랐다. 이어 놀라운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천기마자의 유체가 가루로 되어 흘러 내리며 천마제혈검과 천마쌍환유엽도를 감싸고 있던 가죽이 타들어가고 있지 않는가! 다음 순간 만수성의의 유체 역시 가루로 흩어지고 있었다. "소주! 천마부원은 십이 년 후 폭발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그 안에 대제의 모든 유학을 이으셔야 합니다." 만수성의의 음성이 허공에서 미미하게 들려왔다. "소주! 모든 것은 소주의 의지대로 행하십시오. 다만 한 가지 소주께 밝혀둘 일은 천마수라대제의 군림 일백 년 동안 그 분은 한 번도 천의(天意)를 거역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천의?" "그 분의 손에 죽은 자 치고 악(惡)하지 않았던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지 요." 만수성의의 음성은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이때 돌연, 천기마자의 유체가 있던 자리에서 휘황한 광채가 발산되었다. 주천화는 돌연한 광휘에 눈을 돌렸다. "아!"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 자루의 검과 한 개의 팔찌가 드러나 있었다. 그것들을 감싸고 있던 가죽이 재가 되어 버리자 그곳으로부터 눈 부신 광채가 석실을 휘감고 있었다. 상아검집에 꽂혀 있는 한 자루 검, 바로 천마제혈검이었다. 천마제혈검의 손잡이에는 청광(淸光)이 감도는 명주(明珠)가 박혀 있었다. 주천화는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끼며 천마제혈검을 집어 들었다. 스르릉! 맑은 용음(龍音)과 함께 검신이 드러났다. 광휘는 더욱 강렬해졌 으며 그 가운데를 떠도는 마기(魔奇)도 더욱 진해졌다. 검신(劍身), 피를 얼려 버릴 듯한 백광(白光)이 떠도는 검신에는 아수라천존의 형상이 양각되어 있었다. 실로 전율을 금치 못할 무서운 형상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석년 의 천마수라대제가 사용했던 전설 속의 기병(奇兵)인 것이다. "천마제혈검이 뽑혔으니 천마서원이 열릴 것입니다. 소주! 대의(大意)를 펼치시기 를...." 만수성의의 음성이 들릴 듯, 말 듯 허공에 울려 퍼졌다. "부디 극락왕생(極樂往生)하시기를...." 주천화는 그것이 만수성의의 마지막 음성임을 느끼고 숙연히 입 을 열었다. 주천화는 천마제혈검을 다시 검집에 꽂은 후 팔찌를 집어 들었다. - 천마쌍환유엽도. 천마수라대제조차 만들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던 신병이기(神兵 異技), 천마쌍환유엽도 역시 상아로 둘러싸여 있었다. 둥글게 말린 그대로 팔목에 찰 수 있는 연도(軟刀)였다. 펼쳐 보아야 겨우 반 자 길이일 것이다. 허나 그 반자 길이의 한 자루 도(刀)가 천하를 덮을 수 있을 것임을 주천화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마쌍환유엽도의 손잡이에는 한 개의 홍옥(紅玉)이 박혀 있었다. 핏빛 야명주(夜明珠), 흡사 아수라천존의 광망이 이글거리는 마안(魔眼)같았다. "...!" 주천화가 두 개 전설적인 신병(神兵)들을 살피고 있었다. 이때 천기마자와 만수성의의 유체가 있던 자리의 뒤쪽에서 스르릉! 하는 굉음(轟音)이 들 려왔다. 석벽이 갈라지고 그 순간 기이한 향기(香氣)가 진동했다. 피진(避塵), 피충(避忠)의 공능(功能)을 지닌 서천축의 자단목향(紫檀木香)이었다. <천마서원(天魔書院).> 웅후한 필체가 주천화의 몸을 찔러왔다.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필체, 핏빛의 서체(書體)에서는 가공할 마기(魔奇)가 넘실 거리고 있었다. ■ 황 제1권 제4장 신비(神秘)의 삼태홍점(三太紅點) ━━━━━━━━━━━━━━━━━━━━━━━━━━━━━━━━━━━ 주천화는 절로 숙연해져 옷깃을 여몄다. 천마서원을 감도는 웅후한 기운에 압도된 것이었다. 장엄무비(莊嚴無比)한 분위기, 천마서원(天魔書院)의 넓이는 실 로 광대(廣大)했다. 그 넓은 석실에는 천장까지 닿는 서가(書架)가 겹겹이 서 있었 다. 서가마다 수백 권의 고서(古書)가 층층이 꽂혀 있었고, 서가의 수만 해도 일천여에 달했으니 실로 방대한 양의 책이 가득해 있었던 것이다. 주천화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실, 실로 황실서고(皇室書庫)를 능가하는 분량이구나!' 문득 주천화의 눈이 빛났다. 천마서원의 입구에 놓여 있는 서탁 (書卓) 위에 한 장의 서찰(書札)이 놓여 있었다. <그대의 입실(入室)을 경하하느니라. 본 천마서원에서는 모두 십 이만(十二萬) 권에 달하는 서책이 비장(秘藏)되어 있느니라!> 주천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황실서고의 책이 모두 육만여에 달한다 했다. 그에 비하면 거의 두 배로구나. 실로 놀랍다. 이 많은 서책을 어떻게 수집했단 말인가!" <본 서원의 한쪽에 삼 년(三年)을 지낼 수 있는 벽곡단(僻穀丹)이 보관되어 있다. 삼 년 안에 천마서원의 모든 책자를 읽은 다음 천마부원에 들어야 하느니라!> '삼 년?' 새삼 주천화의 눈이 서원(書院)을 훑었다. 그 엄청난 분량의 책 들을 과연 삼 년 안에 모두 읽을 수 있을지 불안해 하는 눈이기도 했다. <본제(本帝)는 나의 후예에게 일체의 시험관문(試驗關門)을 펼치지 않았다. 천마 지존(天魔之尊)으로 군림할 그대는 누구의 시험도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서찰을 남긴 사람은 천마수라대제였다. 헌데 그 내용이 실로 뜻 밖이 아닌가! 서찰에 의하면 자신조차 주천화를 시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본제의 후예는 어떠한 방면에서라도 남에게 뒤져서는 안된다. 부디 천마서원의 책자를 모두 읽은 후 천마부원에 들기 바란다. 천마수라대제 서(書).> "아아...!" 주천화는 서찰을 모두 읽고 격동에 잠겼다. 문득 주천화는 시장 기를 느끼고 벽곡단을 찾아 보았다. 천마서원의 한쪽에 거대한 항아리가 있었다. <천마단환(天魔丹丸).> 항아리 곁에 쓰여 있는 글귀를 보고 주천화는 그것이 단순한 벽곡단이 아님을 깨 달았다. 항아리를 개봉(開封)하자 청량한 향기가 그의 콧 속을 파고들었 다. 심신(心身)을 상쾌하게 하는 선향(仙香)이었다. "음, 실로 좋은 향기를 풍기는군!" 주천화는 서슴치 않고 그 중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천마단환은 스스로 액체로 녹으 며 절로 목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주천화는 순간 공복기가 씻은 듯이 사라짐을 느 꼈다. 잠시 후, 주천화는 천마서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첫번째 서가의 첫 줄에서 한 권의 책자를 뽑아든 그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이 책은 이미 황실서고에서 읽은 책이로군." 주천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먼저 내가 읽은 서책(書冊)과 읽지 않은 서책을 분류해야 하겠구나." 이윽고, 그는 서가에서 읽어보지 못한 책자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한 시간 가량 되었을까? 서탁은 물론 그 양 옆으로 수북이 책자가 쌓였다. 대략 삼만여 권에 달하는 책자(冊子). "휴! 이제야 모두 골라냈군!" 주천화는 허리를 펴며 한숨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나머지 구만여에 달하는 책자는 그가 이미 읽은 것이란 말인가? 정녕 그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헌데 주천화는 그 많은 책자를 서탁 옆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단 두 권의 책자만을 서탁 위에 올려놓고 있지 않은가? 주천화의 관심을 유독 끌었던 두 권의 고서(古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천하패왕지존록(天下覇王至尊錄).> <천룡법무무상절해(天龍法武無相絶解).> 주천화가 두 권의 책자에 유독 관심을 보이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나머지 책자 는 모두 일반 학문(學文)에 관한 것이었으나 그 두 권만은 다른 내용이었다. - 천하패왕지존록. 이것을 기술(記述)한 사람은 바로 천마수라대제 본인이었다. 천하패왕지존록에는 일천 명(一千名)의 고대무림고수(古代武林高 手)의 이름과 무공이 서열대로 적혀 있었다. 바로 천마수라대제 전대(前代)에서 천마수라대제가 활약한 시기까지 알려져 온 무공의 고수들이었다. "음, 이것은 무림(武林)의 기인(寄人)들에 관해 적어 놓은 것이로구나!" 주천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겼다. 첫 장을 넘기자 한 장의 서찰이 있었다. <천하패왕지존록의 서열(序列)은 감히 예언컨데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후대의 무공은 결국 이천 명의 무공에서 유래되어 확산될 것이니 이들의 무공 특색을 알아두면 천하를 행도(行道)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되리라! 천마수라대제 서(書).> "음, 실로 대단하다. 모든 무공의 근원(根原)을 파악해 놓으신 것이다. 헌데 이 일은 오직 나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듯 하구나!" 주천화는 천마수라대제의 뜨거운 정(情)이 시공(時空)을 초월해 가슴으로 전해져 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다음 장(章)을 넘겼다. 그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서열 일위(一位).> 서열 일위라 적혀만 있고 그 밑은 백지(白紙)였다. 주천화는 의혹과 함께 그 다음 장을 또 넘겼으나 두번째 장도 백 지에 가깝지 않은가? 다른 점이 있다면 몇줄이 더 적혀 있을 뿐이었다. <서열 이위(二位), 천하에 현신할 두번째 천마지체.> 주천화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적혀 있는 글귀는 단 두 줄 뿐 이었다. "제이(二)의 천마지체?" 주천화는 한 생각을 떠올리고 더욱 의혹에 잠겼다.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천하패왕지존록의 서열 이위에 미리 올라 있 다니!" 주천화는 알 수 없는 감동을 받으며 제삼장을 넘겼다. 세번째 인 물은 바로 천마수라대제였다. "음, 선사(先師)의 자존심은 실로 대단하셨구나. 서열 삼위라 하 셨으나 실제로는 바로 제일위가 아닌가?" 허나 천마수라대제는 자존심만이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무 공은 가히 고금(古今)을 통틀어 천하제일(天下第一)로 손꼽힐만한 것이었다. <서열 사위(四位), 천룡대성(天龍大聖), 천룡사(天龍寺)의 개파조사(開派祖師), 천 마수라대제의 무공에서 오십초(五十招)를 견뎌낸 인물. 그는 천룡무상신공(天龍武相神功)과 천룡보리금강진기(天龍普鯉金剛眞氣)를 창안한 인물임. 그의 무공은 육갑자(六甲子)의 내공이 있어야만 펼칠 수 있음.> <제오위(第五位), 벽안옥천녀(碧眼玉天女).> "여, 여인의 몸으로 오위에 오르다니!" 주천화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서둘러 읽어 내려갔다. <서역(西域) 파라밀궁(罷羅密宮)의 황녀(皇女). 칠채옥검(七彩玉劍)을 독문병기로 사용, 천마수라대제와 혼인하자 무림에서 은거 (隱居)했음.> 벽안옥천녀의 신상내력(身上內歷) 밑에는 그녀의 절학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 분이 사모(師母)였구나!" 주천화의 가슴에 문득 어떤 감성(感性)이 꿈틀거렸다. 헌데 무슨 까닭인가? 일순 그의 눈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 어머님!' 주천화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그의 뇌리에 돌연 모친의 형상이 떠오른 것 이었다. 주천화, 그는 아직은 역시 일개 소동이었음이니, 어린아이의 심성 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육위(六位), 달마선사(達魔仙師). 서천축 향지국(香地國)의 삼왕자(三王子)로 소림사의 조사(祖師). 소림 칠십이종절 예(七十二種絶藝)의 창시자며 그는 면벽구년(面壁九年)만에 달마역근세수경(達魔易 筋洗髓經)이라는 불문(佛門) 최고의 선공(禪功)을 창안해 내었음.> 아아! 소림사의 조사(祖師) 달마선사의 뒤에는 소림무공의 특징이 서술되어 있었 다. <나한권(羅漢拳), 칠십이종절예 중 제일 절예, 육십 년의 공력으 로 펼쳐야 완전한 위력이 나타남. 십이성(十二成)에 이르면 묵운(墨雲)이 회오리치며 나가는 가운 데 십 장 밖의 누각도 허물어 뜨림.> <금강지(金剛指), 칠십이종절예의 두번째, 백 장 밖의 바위도 구멍을 뚫을 만큼 패도적인 지공(指功), 그 속도 또한 가공스러울 정도임.> <백보신권(白步神卷), 제삼 절예.> <풍뢰나한장(風雷羅漢掌).> <나한삼십육수(羅漢三十六手).>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중략... 달마선사에 관해 기록한 부분은 실로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달마선사, 당금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로 군림하는 소림사의 조사!" 주천화는 혀를 내둘렀다. "그 달마선사가 겨우 서열 육위에 지나지 않다니!" 시간이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주천화의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간혹, 그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나올 뿐, 주천화는 천하패왕지존록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음, 만수성의, 그 분이 서열 십위라 대단하구나!" <십위. 만수성의, 독공(毒功)과 의예(醫藝)의 제일인자, 후대(後代)의 독공은 그의 독공에서 파생(派生)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응? 십일위는 천기마자?" 주천화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십위에서 십육위까지를 모두 천마 수라대제의 수하였던 칠천대극마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기마자, 천하패왕지존록의 서열 십일위, 그는 토목기관매복지학(土木機關埋伏之學)의 대가(大家)였다. 특히, 그의 심계(心計)는 너무도 뛰어나 만인(萬人)이 혀를 내둘렀다고 전해진다.> 천하패왕지존록에 올라 있는 고수들, 실로 평범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그 무공 또한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주천화는 단숨에 천하패왕지존록을 읽어내려 갔다. 숨 한 번 쉬 지 못했다고 할만큼 심취된 것이었다. 헌데 천하패왕지존록의 마지막 장에 이르자 주천화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뻗어 나왔다. 그곳에는 뜻밖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만(萬)에 하나, 인세(人世)에 천령지체가 출도한다면 천하패왕지존록에 실려 있는 모든 군웅들은 그에 의해 빛을 잃을 것이다. 그가 곧 천하패왕지존록의 첫장에 오를 인물이다. 붉은 삼태성(三太星), 아아! 천령지체여!> "...!" 주천화는 가슴이 진탕되어 옴을 느꼈다. 불쑥 웅심(雄心)이 그 밑바닥에서 강렬히 피어올랐다. "천령지체! 그, 그것이 무엇이길래?" 주천화는 천하패왕지존록을 덮으며 가슴을 폈다. "좋다! 천령지체, 그 신화를 깨리라! 나는 너를 누를 것이다." 주천화의 눈에서 맑고 신비한 빛이 강렬하게 뻗어나왔다. "제발 나와 같은 시기에 천령지체가 태어나길 바랄 뿐이다." 누가 있어 그의 눈빛을 보고 육 세의 소동(小童)이라 할 수 있겠는가! 태산을 향해 포효를 터뜨리는 듯한기상(氣像), 하늘(天)을 향해 도전하는 엄청난 기개가 아닌가! 헌데 그 순간, 주천화의 천령혈 부분에서 돌연 신비한 세 줄기 홍광(紅光)이 떠오르지 않는가? 아아! 너무도 신비했다. 헌데 세 줄기 홍광은 그의 머리 위에서 세 치 가량만 떠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전설, 전설이 있었다. <천령성이 천공에 나타나면, 지상에는 삼태홍점(三太紅點)을 지닌 아이가 탄생하 리라! 그 삼태홍점이 천령혈 위에 선명히 자리잡히면, 그가 곧 천령지체이니라! 천령지체, 그의 지혜는 하늘을 꿰뚫을 것이고 가공할 신력(神力) 은 천하를 널리 밝히리라!> 누가 짐작이나 했으리오! 천령지체와 천마지체가 모두 한 몸에 나타났음을.... 주천화,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전설의 양대신맥(兩大神脈)을 함께 지니고 있 음을.... 잠시 후, 주천화는 천하패왕지존록을 놓고 또 다른 책자를 집어 들었다. -천룡법무무상절해. 첫장을 넘기고 주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 천룡법무무상절해를 남긴 사람은 바로 천하패왕지존록에 두번째로 올라 있는 천룡대성승이로구나!" <노납 세수(世壽) 삼백에 이 천룡법무무상절해를 남기노라!> 천룡대성승, 그는 바로 천마수라대제 당시의 황궁, 황사(皇師)였다. 그와 천마수라 대제는 황궁 시절부터 이미 절친한 사이였다. 천마수라대제가 불세출(不世出)의 대 영웅임을 일찌기 예언했던 사람이 바로 천령대성승이기도 했다. 천룡법무무상절해는 천룡대성승이 천마수라대제에게 남기기 위해 적어놓은 것이었 다. 주천화는 천하패왕지존록의 앞부분을 장식한 인물(人物)들이 모두 천마수라대제와 깊은 관계에 있었음을 알게 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룡법무무상절해는 크 게 두 가지 경세신공(慶世神功)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천룡무상신공(天龍無相神功). 천룡보리금강진기(天龍普悧金剛眞氣).> 이 두가지는 모두 내공심법(內功心法)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진기(眞氣)를 운용(運 用)해 종래에는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를 연성해 나가는 불문의 토납내가심공 (吐納內家心功)이었다. 결국 몸을 보호하는 호신강기(護身 氣)를 연성할 뿐 남을 공격하는 수법은 아니었 다. 허나 천룡무상신공에는 한 가지 살상수법(殺傷手法)이 따로 남겨져 있었다. - 천룡법무탄광기(天龍法武彈光氣). 바로 천룡무상신공을 이용하는 무공이었다. 가공할 절대의 위력을 지닌 수법이었 다. 일종의 강기( 氣)를 발출하는 무공으로써 그 위력은 실로 놀라웠다. 천룡무상신공 을 손에 운용해 펼쳐내면, 곧 수공(手功)이 되고 장(掌)에 운용하면 또 장공(掌功) 이 되는 것이었다. 이 천룡법무탄광기가 극치에 이르면 천하에 견뎌낼 물체가 없었다. - 천룡보리금강진기. 이것은 천룡무상신공과는 그 성질이 판이한 내공심결(內功心訣)이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비한 위력을 지닌 신공, 바로 천룡 대성승이 노후(老後)에 면벽 백 년을 통해 창안한 무공이었다. 이것의 위력은 실로 세인들의 상상을 불허했다. <천룡보리금강진기가 십성에 이르면 전신에 어떠한 손상을 입어 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전신의 대소경락(大小輕絡) 중 단 한 곳만이라도 파괴되지 않았다면 능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으리라!> 이 일이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허나 천룡대성승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천룡보리금강진기는 단 한 모금의 진기만 남아 있으면 어떠한 부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신공인 것이다. "후유! 놀랍다. 어찌 이리 신비(神秘)한 무공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주천화는 천룡법무무상절해를 덮으며 놀란 눈을 들었다. "천룡사가 당대에 이르러 서역 최대의 문파로 군림할 수 있음이 결코 무리가 아니 군!" 잠시 후, 주천화는 시장기를 느끼고 또 천마단환을 복용한 후 서탁에 앉았다. 시간이 소리없이 부서지고 세월이 먼지가 되어 그의 어깨에 쌓여가기 시작했다. ... 천마서원의 책들은 실로 현존(現存)하는 모든 학문이 총망라된 것이었다. 금기시서화(琴棋時書畵)는 물론이고 삼교구류(三敎九流)의 오의(吾意)를 비롯한 모든 학문들, 심지어 천기(天幾)마저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의 통천지학(通天之學)들 이었다. 천문왕자(天文王子) 주천화, 이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만고(萬古) 기재가 아니던 가. 그의 뇌리에는 통천가공할 학문이 쌓여가고 이는 곳 장차 천하를 군림할 바탕으로 굳어가고 있었으니.... 세월유수(世月流水), 우주(宇宙)의 법칙(法則) 중 가장 확실한 것은 곧 세월의 흐름이 었다. 그것은 인간이 의식하고 있던 아니던 말없이 그리고 정확히 흘러간다. 주천화, 한 개의 석상(石像)과 같이 석탁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단아했 다. "...." 그는 여전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허나 그의 모습은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눈빛, 담담한 가운데 지고(至高)한 현기(玄氣)가 떠돌고 전신에 서는 대학자(大學子)의 풍도가 자연스럽게 배어나고 있었다. 허나 무엇보다도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그의 외모였다. 우선 체 구가 몰라보게 성장해 있지 않은가.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와 늘씬한 키, 실로 당당한 남아로 성장해 있었다. 여기에다 여인네처럼 맑고 고운 피부, 귀밑까지 힘차개 뻗어내린 짙은 검미(劍眉). 아아! 무슨 말로 그의 용모를 설명할 것인가! 천상미공자(天上美公子)? 아니었다. 이런 표현조차 오히려 그의 용모를 모욕하는 듯 느껴질 뿐이었다. 안타깝다. 그를 보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정녕 안타까울 뿐이었다. 문득 서책이 덮이는 소리가 터지며 주천화가 고개를 들었다. "이것이 마지막 책이었다!" 그의 눈빛은 가을 하늘같이 맑고 담담했으나 그 속에 은은한 기쁨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이 년(年)!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허나 선사의 예측보다 일 년이 빠른 것이다." 주천화의 시선이 돌연 자신의 몸을 살피며 고소를 머금었다. "후후, 이 년만에 나의 육체는 이십 세 청년의 그것으로 성장해 버렸군!" 이 년(二年)? 정녕 이 년밖에 흐르지 않았음에도 그의 체구가 이토록 변했단 말인 가? "천마단환의 공능(功能) 덕분이었지. 천마단환에는 내공을 증강시키는 약효가 있 었다." 주천화는 자신의 의복이 겨우 걸쳐 있는 정도임을 살피며 또다시 미소를 떠올렸다. "선사께서는 이미 내가 천마서원의 절반 가량을 통독해 있으리라 짐작하시고 삼 년 의 기한을 예측하신 것이었지. 허나 나는 선사의 예측보다 일 년을 앞당겼으니...." 문득 난감한 기색이 그의 미간에 스쳤다. "천마부원을 들려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어느 곳에도 천마부원에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지 않았다." 주천화는 마지막 한 권을 원래의 서가에 꽂으며 난색(難色)을 머금고 있었다. 헌데 그가 마악 마지막 책자를 정리하는 순간이었다. 돌연 우우우웅! 하는 괴이한 음향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앗!" 주천화는 자신의 몸이 허공(虛空)에 떠 있음을 깨닫고 경악성(驚 愕聲)을 발했다. 그의 발밑이 꺼지며 그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천, 천마부원?' 주천화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떨어져 내린 곳은 바로 천마부원인 것이다. <천마부원(天魔府院).> 그가 떨어져 내린 곳은 어느새 원상(原象)으로 돌아가 있었다. 주천화는 전면(前面) 석벽 위쪽에 선명히 떠올라 있는 네 글자에 심신이 진탕되어 옴을 느꼈다. 눈부신 홍광(紅光), 사방은 마치 선혈을 뿌려놓은 듯 가공할 혈기(血氣)에 휩싸여 있었다. 혈기 속에는 소름끼치는 처절한 마기(魔氣)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헉!" 주천화는 천마부원 안에 감도는 가공할 마기(魔氣)에 절로 몸을 떨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전면석벽을 바라보던 그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거대한 아수라천존상, 혈광(血光)이 감도는 무시무시한 석상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입에서는 당장이라도 지옥(地獄)의 저주(咀呪)가 터져 나올 듯했다. 헌데 아수라천존의 좌상(座像) 앞에 한 노인(老人)이 앉아 있었 다. 백미(白眉)에 백염(白髥), 허나 안색(顔色)은 중년인의 그것이 아닌가? 혈포(血袍)의 백포노인, 그의 가슴에는 생생한 아수라천존의 형상이 수놓여져 있 었다. '대, 대제!' 주천화는 혈포노인(血袍老人)을 발견하고 해연히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주천화 선사(先師)를 뵈옵니다!" 그는 황급히 구배(九拜)로 사제지례(師弟之禮)를 갖추었다. 순간 천마수라대제의 유체(遺體)가 돌연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것 이 아닌가. 그 위에 주천화에게 전하는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 주천화는 공손히 두루마리를 펴들었다. <네가 이 두루마리를 볼 수 있음을 확신하였노라. 이 천마부원에는 천마지기(天魔 至氣)가 가득해 있었다. 만약 천마지기를 이겨내지 못했다면 너는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천마지기? 이곳에 깔려 있는 혈기(血氣)가 천마지기인가? 해서 처음에 그토록 강렬한 마기를 느꼈던 것이란 말인가?" <기실 이치대로 따지자면 본제는 물론이고 후대의 너 역시 천마 지체이므로 마인(魔人)이 되어야 했다. 허나 원래 진정한 천마지 체라함은 스스로의 마성(魔性)을 극복할 수 있는 천품(天品)을 말함이니라!> 제마(制魔)의 경지조차 뛰어넘어 마(魔)를 곧 정(正)으로 승화 (昇華)시킬 수 있는 마인(魔人)의 경지. 천마지체, 전설은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진정한 천마지체라 함은 심마(心魔)에 굴복하지 않는 체질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천하패왕지존록에 올라 있는 고수들의 무공비급이 있 다. 천하패왕지존록에는 그 무공들의 특징만이 기술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단지 무공노수(武功路數)를 파악할 수 있을 뿐, 실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주천화는 서찰을 읽다 말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마부원의 한쪽에 황금으로 짜여진 서가(書架)가 있었고 그 서 가에는 대략 일천여 권에 달하는 무공비급들이 꽂혀 있었다. <천하패왕지존록에 올라 있는 인물들의 무공을 모두 익힌다면 가 히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으리라.> "아...!" 주천화의 가슴이 떨려왔다.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선사(先師)께서 이 모든 무공비급(武功秘 )들을 어떻게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일까 ?" 그는 떨리는 가슴을 누루고 두루마리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허나 어떠한 무공이라도 지닌 바 내공수위(內功水位)가 보잘 것이 없어서는 펼칠 수가 없다. 해서 본제는 후인을 위해 한 알의 천마화룡진구주(天魔火龍震九珠)를 남긴다.> 천마화룡진구주, 이것은 천마수라대제가 생전의 내공과 전설상의 화룡(火龍)이 남긴 내단(內丹)을 조화하여 만든 것이었다. 범인은 복용할 수조차 없었다. 이 천마화룡진구주는 단 한 사람 천마지체만이 복용할 수 있었다. 만약 범인(凡人) 이 이것을 복용하면 그 즉시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면치 못할 것이나 천마지체가 복 용하게 되면 엄청난 공력을 얻게 된다. 그 공력은 몇 갑자라고 추정조차 할 수 없 는 가공한 것이었다. 천마수라대제가 남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후인의 행도를 위해 본제는 약소한 안배를 더 남겨 놓았다. 유 용(有用)하게 써 주기를 바라노라.> - 금천수라대검(金天修羅大劍). - 천인혈옥삼(天印血玉杉). - 천기마금전(千機魔金錢). - 마라금강침(魔羅金剛針). 네 가지 세외기보(世外奇寶), 그리고 적잖은 보화가 주천화를 위 해 남겨져 있었다. 주천화는 한곁에 놓여진 금궤를 열고 이 기물(奇物)들을 살펴보 았다. - 금천수라대검. 전신이 묵광(墨光)으로 빛나는 기검(奇劍)이었다. 헌데 그 길이가 무려 오척(五尺)에 달하지 않는가? "괴이한 검이로구나! 이렇게 길어서야 누가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주천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 벌의 장삼을 꺼내들었다. "이것이 천인혈옥삼이로군." 주천화는 천인혈옥삼의 화려함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천인혈옥삼. 이것은 천마수라대제가 강호를 주유(周遊)할 때 입던 옷이었다. 천인혈옥삼은 천기마자가 특별히 만든 것으로써 만년천잠사(萬年 天蠶絲)와 현강백금사(玄剛白金絲)로 짜여진 옷이었다. 천하의 어떠한 신병이기(神兵異技)라도 천인혈옥삼을 손상시킬 수는 없었다. "핏빛 장인(掌印)? 바로 선사의 표식이 아닌가?" 주천화는 천인혈옥삼을 펴보고 알 수 없는 감동에 젖었다. 눈처 럼 흰 백삼, 가슴부분에 수놓여져 있는 혈장(血掌)이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 천기마금전. 엽전(葉錢) 형상의 특이한 암기였다. - 마라금강침. 암기로도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 의보(醫寶)였다. 주천화는 네 가지 기보를 갈무리한 후 천마수라대제가 남긴 두루마리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천마부원의 뒷쪽에는 화룡열천(火龍熱泉)이 있느니라. 지심(地心)의 정기(精氣)가 모여 이루어진 곳이니 그곳에서 천마화룡진구주를 복용한 후 운기하면 무한한 공능 (功能)을 얻으리라!> 두루마리의 끝에는 따로이 전하는 추서(追書)가 있었다. <후인은 강호를 행도함에 있어 혹시 벽안옥천녀의 후대(後代)를 만나면 각별한 배 려를 배풀기 부탁하노라. 끝으로, 후인의 모든 행동은 그대의 의지에 의할 뿐임을 명심하라. 그대가천하를 피(血)로 씻는다 해도 본제는 개의치 않노라. 다만 그것이 그대의 뜻이라면....> 천마수라대제의 서찰은 이렇게 끝나 있었다. 주천화는 격동에 떨며 조용히 다시 구배를 올렸다. 잠시 후, 서가에 다가간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한 권을 꺼내보았다. <천기비절록(天機秘絶錄).> 천기마자의 진제절학, 토목(土木), 기관(機關) 진도지학(陳度之學)과 심계지학(心計之學)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만수의학총요(萬壽醫學總要).> 또 한 권의 두툼한 고서가 다시 주천화의 손에 쥐어졌다. "아! 만수성의께서 남기신 것이군." 만수의학총요는 그야말로 하늘도 놀랄 기서였다. 이것을 십이성 익힌다면 천하에 못 고칠 병(病)이 없었고, 다루지 못할 독(毒) 또한 없었다. 주천화는 만수의학총요를 대략 훑어본 후, 첫번째에 꽂혀 있는 서책을 뽑았다. <천마수라천존공(天魔修羅天尊功).> 주천화의 손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바로 천마수라대제의 무학(武學)인 것이다. ■ 황 제1권 제5장 영웅(英雄)의 출도(出道) ━━━━━━━━━━━━━━━━━━━━━━━━━━━━━━━━━━━ 천마수라천존공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강기편( 氣篇), 천마수라천존공의 내공심법(內功心法) 편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절대마공(絶代魔功). 이 천마수라천존공은 놀랍게도 음양(陰陽)이 한데 어울린 마공이었다. 내공편에는 몇 가지 용도(用度)에 따른 운기법이 구별되어 있었 고 그것의 명칭은 또 각기 달랐다. - 천마양폭탄강(天魔陽瀑彈 ),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패도적인 양강지공(陽 之功)이었다. 실로 극양무쌍(極陽無雙)하여 쇠라도 대번에 녹여버릴 수 있는 무서운 화기(火氣)를 뿜어낸다. 사람이 이에 격중되면 재가 되고 말리라! - 천마빙유섬강(天魔氷柔閃 ), 이것은 천마양폭탄강과는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마공이었다. 극음무쌍(極陰無雙)하 여 천하에 그 무엇이든 얼려버릴 수 있었다. 심지어 끓는 용암마저 순식간에 얼려 버릴 정도인 것이다. 이 천마빙유섬강 또한 극성에 이르면 환(環)으로 형성하여 손을 통해 쳐낼 수 있었 다. 그야말로 빙강(氷 )이라 해야 옳았다. 사람이 이에 적중되면 얼음덩이가 되어 부서져 버린다. "세, 세상에 이와 같은 마공이 실재(實在)할 수 있는 것일까? 이 것만 해도 천하에 당해 낼 사람이 없겠다." 주천화의 눈이 더할 나위없이 크게 떠졌다. 천마수라대제의 무공은 이와 같이 전율스러운 살상수법(殺傷手 法) 뿐이 아닌가! 그러나 주천화는 심취하여 다음 장을 넘기고 있었다. - 천마마라혈강기(天魔魔羅血 氣), 이것은 강기편의 총화(總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이야 말로 사상 최고의 마공심결(魔功心訣)이었다. 사람을 단숨에 날려 버릴 수도 있고, 또 그 자리에서 핏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 는 무서운 마공(魔功). 이 천마마라혈강기가 극성에 이르면 전신에서 피를 뒤집어 쓴 듯 무시무시한아수라천존상이 떠오른다. 눈을 뜨지조차 못하게 만드는 강렬한 혈광(血光) 속에서 상대의목을 꿰뚫어 버리는 강기가 폭출된다. "으음, 너무 패도적이 아닌가!" 주천화는 내공심법편인 강기편만을 훑어 보고도 전율을 금치 못했다. "너무 잔혹해 익히기조차 두렵구나 허나...." 그는 고개를 흔들며 다음 장을 넘겼다. 장공편(掌功偏), 바로 천마수라천존공을 운기하며 장세(掌勢)를 뻗어내는 무공, 장공편에는 두 가지 절대장공(絶代掌功)이 기록되어 있었다. - 천마혈인장(天魔血印掌). - 천마청옥장(天魔靑玉掌). 이 두 가지 장공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할 정도로 무섭게 빠르고 패도적인 것이 그 특징이었다. 백 장 밖의 거암(巨巖)도 찰라지간에 녹아 버린다. 소리는 그 뒤에 들 릴 정도인 것이다. 상대는 장세가 뻗어 나오는 것을 눈으로 목격조차 못한 채 죽어 가게 된다. 천하의 어느 누가 이 장공을 피해낼 것이며 또 마주 상대할 수 있겠는가? 경공편(輕功篇), - 천마무영신법(天魔無影神法), 이것이야말로 경공수법 중 최고의 것이었다. <천마(天魔)가 허공을 밟음에 있어 한 점의 공기도 흔들림이 없어라!> 은밀한 것만으로는 최고라 할 수 없었다. 천마무영신법의 무서운 점은 한 모금의 진기만으로 천리(千理)를 단숨에 치달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검공편(劍功篇), - 천마마극구검류(天魔魔極九劍流), 단 구초의 검공이었으나 천하의 모든 검법을 포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빛을 양단(兩斷)시킬 수 있는 쾌(快)와 섬(閃), 그리고 환(幻), 진(震), 파(破), 흡(吸), 그리고 부드러움(柔)까지 포함되어 있는 검법이었 다. "히야!" 주천화는 천마마극구검류의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허나 다음 장 을 넘긴 그의 놀라움은 이미 천마마극구검류를 잊을 정도였다. "으음! 이, 이것은 천마쌍환유엽도의 사용법이로구나...!" - 폭섬도류(爆閃刀流). - 탈정도혼(奪精刀魂). - 천마쌍극도광참(天魔雙極刀光斬). 단 삼초식의 도법(道法)은 천마쌍환유엽도를 이용하는 도법이었 다. 그 무서움은 천마마극구검류가 어린아이 장난으로 보여질 정도였다. "가, 가공스럽다." 주천화는 손목에 끼고 있는 천마쌍환유엽도를 내려다 보았다. 은 은한 광휘만을 제거한다면 평범하기조차한 장신구(裝身具)에 불과했다. "이, 이것이 그토록 가공스러운 위력을 지녔단 말인가?" 천마쌍환유엽도의 뒤쪽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단추가 있었다. 그 것을 누르면 바로 한 자루 도(刀)로 변하는 것이었다. 얇기는 매미의 날개를 방불하는 세 치 가량의 도(刀), 이것으로 펼쳐내는 세 가지 도법은 가히 솟아오르는 태양도 벨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으음!" 신음을 뱉아내던 주천화의 눈에 천마수라천존공의 마지막 장이 들어왔다. <군림마존(君臨魔尊) 천마의 후인이여! 그 뜻을 펴리라!> 광오(狂傲)하다 해야 할 글귀, 허나 주천화는 결코 그 글귀를 광 오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 자신의 가슴에서도 웅대한 남아의 혼(魂)이 자라남에 야.... '아버님 이제 천하가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주천화는 천마수라대제의 지시대로 화룡열천 속에 정좌했다. 그 의 손에는 금궤 속에서 꺼낸 한 개의 옥갑이 들려 있었다. '아버님...! 지켜 봐 주십시오.' 주천화는 격동을 가라 앉히며 옥갑을 열었다. 순간 더할 나위 없 이 맑은 향기가 석실을 가득 메웠다. 옥갑 속에는 한 개의 단환(團環)이 들어 있었다. 바로 천마수라 대제가 자신의 내공과 화룡의 내단을 조화시켜 제조한 천마화룡진구주였다. 천마화룡진구주를 삼킨 주천화는 고요히 진기(眞氣)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천마화룡진구주를 삼킨 순간 그는 엄청난 진력이 체내에서 꿈틀거림을 느꼈다. 무 서운 힘,주천화의 음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러다가 이내 터질 듯 붉어지지 않는가? 주천화의 체내에서는 실로 감당키 어려운 기운이 끊임없이 형성 되어 사지백해(四肢百骸)로 밀려들고 있었다. "으으으!" 주천화는 고통을 느끼고 그 진기를 천마수라천존공의 구결에 따 라 운기해 나갔다. 진기의 흐름은 점점 강렬해져 종내에는 걷잡을 수 없이 일렁였 다. '참아야 한다. 끝까지 이겨내야 한다!' 주천화가 이를 악물고 있을 때, 무섭게 꿈틀거리던 진기가 한데 모여 그의 머리로 치달렸다. '헉!' 주천화는 느닷없이 머리 속에서 뇌성벽력(雷聲霹瀝)이 일어남을 느꼈다. 머리가 터져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주천화는 하마터면 그대로 비명을 토하며 쓰러질 뻔했다. 실로 상상할 수도 없는 처절무비한 고통이었다. 허나 주천화는 쓰러지 지 않았다. 그의 의지(意志)는 정녕 보기 드물게 초절(超絶)한 것이었다. 전신(全身)에 미미한 진동이 일고 있을 뿐 안색(顔色)조차 변하 지 않고 있었다. 허나 고통(苦痛)은 점점 심해지고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리기 시작 했다. 돌연, 꽈꽈꽈꽝! 하는 음향이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는 느낌과 함 께 그의 머리 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동시에 머리로 몰리던 진기가 다음 순간 임맥을 뚫고 사지백회로 스며들기 시작했 다. "아아...!" 주천화는 모든 고통이 일시에 사라짐을 깨달으며 황급히 진기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온몸에서는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광채(光彩)가 뻗어나와 석실을 가득 메웠다. 헌데 아아... 보라! 그 눈부신 광휘 속에 서서히 열여덟 개의 아수라천존상이 나 타나지 않는가! 이는 곧 천마수라천존공이 이미 극에 달했음을 나타내지 않는가? 단 한 번의 운기조식으로 이럴 수도 있는 것이란 말인가! 이때 그의 주변으로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의 옷이 서서히 찢어져 나가고 기이한 음향이 연신 터져 나왔다. 아아! 탈태환골(奪胎換骨), 바로 탈태환골의 조짐이 아닌가? 한편, 주천화가 앉아 있는 화룡열천의 물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이 또한 괴변 (怪變)이었다. 허나 기실 괴변이랄 수도 없었다. 화룡열천의 정기(精氣)가 그의 체 내로 스며들고 있는것이었다. 이윽고 화룡열천의 수분이 말끔히 사라지고 기음(奇音)도 뚝 멎 었다. 그러자 주천화의 몸에서 진동이 가라 앉았다. "휴우!" 긴 한숨과 더불어 그의 눈이 조용히 떠졌다. 그런데 보라! 이 순간 그의 용모가 몰라 보게 변모했지 않은가? 오관은 더욱 반듯해졌고 백옥같은 피부는 광택이 흘렀다. 천인(天人)! 완벽했다. 이 순간 그의 모습은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등 뒤로 길게 늘어진 흑발(黑髮)에조차 윤기가 흐르고, 담담한 눈에는 예전에 깊숙이 자리잡혀 있던 녹광과 백광조차 흔적도 남기고 있지 않았다. "음, 이제야 정녕 새롭게 탄생되었나 보군!" 주천화는 담담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응? 내 옷이?" 다음 순간 무심코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던 눈에 당황이 스쳤다. 그의 옷은 걸레가 되어 흩어져 있고 나신(裸身)에 가깝지 않은가? 문득 그의 눈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제 나는 완벽한 무인(武人)이 된 것이다." 주천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궤(金櫃)에서 천인혈옥삼을 꺼내 입었다. '선사님!' 새삼 천마수라대제의 온정(溫情)이 그의 가슴으로 흘러 들었다. 잠시 후, 그는 서가에 묻힌 서가비급들을 차례로 익혀가기 시작했다. 시간은 또 다시 침묵되어 흐른다. 천마부원, 이곳에서 무림의 영 원한 절대자로 군림할 천마지존이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있어 그의 성취(成就)를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휘이잉! 설풍(雪風), 차가운 눈보라 속에 세월이 묻어간다. 태양은 죽음의 절지에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일광(日光)은 하얗 게 흩어지다 소멸되어 가고 그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또 은빛을 뿌려낸다. 일광이 부서짐과 함께 부서져 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세월(歲月)이었다. 섬강천마부 흑웅, 그는 세월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자루 금부(金斧), 그의 오른손에 굳게 쥐어진 금부만이 세월을 의식하는 듯 때 때로 가볍게 흔들릴 뿐이었다. 정좌한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섬강천마부 흑웅, 세월은 그의 백미(白眉)에 더욱 허연 서리를 앉혔다. 문득 영원히 떠지지 않을 듯한 그의 눈이 떠지며 섬광(閃光)을 폭사시켰다. "...!" 의혹(疑惑)이 스친다. 이때 분화구(噴火口) 윗쪽에서 가벼운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한 인영이 내 려섰다. 백발동안(白髮童顔), 지난 날의 준미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노인은 바로 천면색환 마였다. 그의 옆구리에는 한 소녀가 끼어 있었다. "으음! 마부(魔斧), 아직도 그 자세로 앉아 있었는가?" 그의 눈에 섬강천마부 흑웅의 모습이 들어 오자 신음같은 감탄성(感歎聲)이 터져 나왔다. "왔는가?" 흑웅이 짤막히 내뱉은 후 다시 눈을 감았다. 허나 그의 눈썹이 격동으로 미미하게 흔들렸다. '드디어 십일 년의 세월이 흘렀음인가? 아, 드디어 소주께서 출관하실 때가 다가 온 것이다!' "봉(鳳)아야! 인사 올리거라. 이 분이 바로 섬강천마부 흑노협이시다." 천면색환마가 옆구리에 끼여 있던 소녀를 내려 놓으며 흑웅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십육 세 가량 된 소녀가 옷깃을 여민 후 읍했다. "소녀 나운봉(羅雲鳳), 노선배님께 인사 올리옵니다." 소녀 나운봉의 용모는 절세적이었다. 폐월수화(閉月羞花), 침어낙안(沈魚洛雁) 등, 현존하는 모든 미 사여구(美辭麗句)가 그녀를 위해 존재한다고 할까? 붓으로 그린 듯한 아미(娥眉), 길게 자란 속눈썹, 용모는 눈을 씻고 보아도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눈부시게 희고 고운 목덜미의 선(線), 그리고 그 아래로 뻗어내 린 지체(脂體)의 늘씬함.... "허허, 이 아이는 노부의 오대손(五代孫)일세!" 천면색환마의 말에 흑웅이 감았던 눈을 떴다. 흑웅의 눈에 알 수 없는 감회가 흘렀 다. '오대 손녀?' "소녀 나운봉, 이렇듯 노선배님을 대하니 실로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나찰옥녀(羅刹玉女), 나운봉(羅雲鳳). 방년 십육 세. 강호 신비 오대 세력 중 가장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는 수라사혼부(修羅死魂府)의 소공녀(少公女). 활발한 성품에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말괄량이였다. 그녀는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으면 냉혹한 살수를 펼쳐 이미 나 찰옥녀라는 외호를 얻고 있었다. 이때 흑웅에게 허리를 숙이는 나운봉의 입가에는 앙증맞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귀엽군!' 흑웅이 짐짓 굳어진 안색을 유지하려 하나 웬일인지 절로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나의 후예들도 없지는 않을 것인데....' 그의 뇌리에서 문득 인간의 감성이 흘렀다. '이제 나도 늙기는 늙은 모양이군. 한 번도 생각치 않았던 후손 들의 안위가 염려스럽기도 하다니....' 흑웅이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분화구(噴火口) 위쪽으로부터 또다시 인기척이 들려 왔다. 고루마존 여웅비, 사극탈혼마 뇌도천, 그리고 왜소한 체구의 독화마황 호국기가 내려섰다. 독화마황의 옆에는 한 청의노인이 힘겹게 따라오고 있었다. 헌데 독화마황의 형상이 실로 해괴하지 않은가? 그는 오색(五色) 의 색동옷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익살스러워 보이는 독화마황이 아니던가. 색동옷 을 입고 뒤뚱거리는 그의 모습은 실로 배꼽을 잡게 만드는 것이었다. "후후후, 난쟁이의 옷은 이백년전의 그것과 똑같군. 난쟁아, 나이 좀 생각해라!" 천면색환마가 나타난 그들을 훑어보다 고소를 머금었다. "흘흘흘, 내 나이가 어때서? 아직 삼백도 되지 않았는데...." 독화마황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중얼거렸다. "호호호...!" 그 모습이 너무 익살스러워 나운봉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섬강천마부 흑웅의 눈이 독화마황의 뒤에 서 있는 정체 모를 청의노인에게 고정되 었다. "이곳이 어디인데 외인(外人)을 대동하였는가?" 질책하는 듯 굳어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외인?" 순간 천면색환마의 눈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가? "조, 조부님!" 순간 청의노인이 섬강천마부 흑웅 앞에 털썩 엎드렸다. '조부? 나를 조부라고?' 흑웅의 전신이 흔들렸다. "허허허, 그 아이는 바로 자네의 손자일세. 자세히 보게나. 자네를 그대로 빼어 닮지 않았나?" 흑웅의 눈에 격동이 폭풍처럼 일었다. "소손(少孫) 흑평강(黑平强), 조부님을 뵈옵니다." 청의노인이 지면에 머리를 맞댄 채 황급히 조아렸다. "허허허, 은밀히 강호에서 알아낸 바 자네의 손자는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더군. 그는 구천만마문(九天萬魔門)이라는 문파를 세웠고, 그 명성 또한 우내십존과 어깨 를 같이 하고 있다네!" 천면색환마가 득의의 웃음을 흘려냈다. "그, 그래?" 흑웅의 눈이 감격에 떨며 흑평강을 훑고 있었다. "소공자께서는 언제 출관하시나? 오늘이 바로 십일 년이 되는 날 이니 지금쯤 출관하시지 않겠나?" 이때 독화마황이 흑웅에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 노부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네만 조만간 출관(出關)하실 것이네!" 흑웅이 고개를 흔들었다. '음, 당금무림에서 최고의 배분을 지닌 오대 조부께서 과연 누구를 기다리시는 것 일까?' 나운봉의 별같은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이때, 돌연 흑웅 뒤의 석벽이 갈라졌다. 순간 흑웅이 벌떡 일어서 한곁에 시립한 채 격동의 빛을 드러냈다. '아, 드디어 소주께서 십일 년 폐관(閉關)을 끝내시고....' 그의 태도가 말할 수 없이 정중해 나운봉과 흑평강의 눈에 짙은 의혹이 스치고 있 었다. 이때 갈라진 석벽으로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천천히라고 하나 그 속도는 무척 빨랐고, 걷는다고 했으나 그의 발은 바닥을 밟지 않고 있었다. 허공을 밟으며 귀영(鬼影)의 움직임같이 나타난 인영은 바로 주천화였다. "소주!" 흑웅이 황급히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자신 도 모르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 주천화, 그의 신태(身態)를 보라! 허공을 밟고 선 채 중인들을 담담히 훑어보는 모습이 너무도 신비하지 않은가! 일견키에 너무도 평범했으며 또한 너무도 고고(孤高)했다. 만약 허공을 밟고 있지 않다며 일개 빈약한 문사(文士)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눈처럼 흰 백의, 그 가슴에 떠올라 있는 핏빛 혈장(血掌)이 너무 나 대조적이었고, 백옥(白玉)을 깎아 다듬은 듯한 준미함. 맑고 신비한 눈은 너무도 담담하여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도저히 인간의 감정(感情) 따위를 지닌 눈같지가 않았다. 여기에다 길게 늘어진 흑발(黑髮)에조차 신비한 광택(光澤)이 흐 르지 않는가. 그 흑발은 한 점 바람도 없음에도 고요히 휘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정녕 환상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주천화, 그의 용모는 실로 절세미인에게 남장(男裝)을 입혀 놓은 듯 했다. 만인지 상(萬人之上) 절대군림존의 위엄, 그리고 은자(隱者)의 탈속(脫俗)함이 함께 풍기는 비범함, 주천화의신태는 이와 같이 단순히 준미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노부들이 소공자를 뵙습니다!" 천절오살마는 주천화의 비범한 풍도에 놀람을 금치 못하며 허리 를 숙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오랜만이오!" 주천화의 입에서 무심(無心) 흘러나왔다. 순간 그 광경을 목도한 흑평강과 나운봉의 경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렇게 잘 생긴 남자가 있었다니.... 흡사 환상을 보는 듯 하구나! 헌데 도대체 누구길래 당금 무림에서 최고의 배분을 지닌 이분들이 노복이라 자칭(自稱)한다는 말인가?' 나운봉의 눈은 주천화의 얼굴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 주천화는 천절오살마 외에 이 인(二人)이 더 있음을 보고 그들을 담담히 훑었다. "허허허, 이 놈은 노복의 손자입니다." 흑웅의 눈짓에 흑평강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해괴한 광경이 아닌가! '세, 세상에 이 일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나운봉의 경악은 극에 달했다. 혈도왕(血刀王) 흑평강, 그가 누구인가? 강호의 신비문파 구천만마문의 노문주(老門主)로서 이미 우내십 존과 대등한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이 아닌가! 그러한 당대 최고 의 고수가 이곳에서 어린아이 취급을 받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이 아이는 노복의 오대 손녀이옵니다." 천면색환마가 놀란 표정을 띠고 있는 나운봉을 소개했다. 나운봉 은 황급히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숙였다. "나운봉이라고 해요." 나운봉이 고개만 까닥이자 천면색환마의 안색이 변했다. "...!" 주천화는 나운봉을 잠시 바라보다 흑웅에게 눈을 돌렸다. "흑노, 그대의 후손답구료." "허허허, 그래도 강호에서 제법하는 모양입니다." 흑웅의 입가에 대견해 하는 득의의 빛이 스쳤다. 한편 나운봉은 주천화가 자신을 무시하는 듯 하자 고운 아미를 상큼 치켜떴다. '흥! 도도하기는! 남자가 꼭 계집애처럼 예쁘게 생겨 가지고 저 머리좀 봐! 꼭, 여자같잖아!' 나운봉이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것을 깨달은 주천화는 빙긋이 미소를 던 졌다. "아! 소생이 그만 결례를 범했구료... 나는 주천화라고 하오." 주천화의 미소를 대한 나운봉의 안색이 싹 변하고 말았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내, 내가 왜 이러나 가슴이 울렁이고... 아!' 그녀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것 같아 불안하기까지 했다. 나운봉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변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목덜미도 타는 듯 붉었다. '허허허, 저 말괄량이가 소공자(少公子)를 대하고 저렇게 얌전해지다니...!' 천면색환마가 내심 무엇을 깨달은 듯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운봉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주천화를 응시했다. "...!" 그녀의 눈빛이 꿈길을 걷는 듯 몽롱하게 풀려가고 있었다. 아니, 서서히 불타 오른다고 해야 옳을까? 만남,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운명의 만남이었다. '그래! 나는... 나는....'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내심 한 가지 결심을 굳히고 있었으니.... "아니? 혹 소공자께서 입고 계신 옷(衣)이 천인혈옥삼이 아니옵니까?" 문득 천면색환마가 놀란 일성을 토했다. "그렇소! 선사의 유품이오." "선사라 하심은?" 떨리는 가슴으로 주천화의 전신을 새삼 훑어보던 천면색환마의 눈이 커졌다. "그, 그 검이 그렇다면?" "그렇소! 선사께서 남기신 천마제혈검이오." "아!" "역시 소공자께서는 천마수라대제! 그 분의 전인(傳人)이...." 흑웅을 제외한 사람들이 격동으로 부르르 떨었다. "노복들이 대제의 현신을 앙축하나이다!" 다음 순간 새삼 모든 내막을 확인한 그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일어들 나시오!" 주천화가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순간 그들은 허 리가 저절로 펴짐을 느끼고 경악실색(驚愕失色)했다. '아무리 대제의 무공을 익혔다 하나 이, 이럴 수가!' 그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주천화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는 사흘 후 중원무림에 나설 것이오." "아...!" "오!" 천절오살마의 눈에 일제히 기쁨의 빛이 스쳤다. 헌데 슬쩍 암중 (暗中)으로 서로를 쳐다보던 그들의 눈에 괴이한 기색이 스치지 않는가? 주천화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기실 나는 무림의 일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문득 그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神光)이 폭사했다. "나는 흑노를 제외한 그대들이 이미 지난 십일 년 동안 강호에 어떤 기반을 닦아 놓았으리라 짐작하고 있소." 그의 눈빛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이 오그라 들게 하는 한기(寒氣)가 담겨 있 었다. "그 기반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또 짐작하고 있소." 천절오살마의 안색들이 질려갔다. "그대들의 뇌리에 각기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심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오." '이, 이럴 수가!' '헉!' 천절오살마는 정곡(正鵠)을 찔린 듯 움찔하며 숨을 죽였다. "그 일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다만 한 가지 당부할 것이 있다면...." 무서운 빛이 주천화의 눈에서 흘러나와 천절오살마를 훑었다.그 들은 등줄기에 식은 땀이 솟아남을 느꼈다. 주천화의 음성이 이어졌다. "무림을 제패하는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선민(善民)이라도 다치지 않아야 할 것이오. 아울러, 그대들은 선조(先祖)의 대(代)부터 형 제나 진배 없었으니 서로간에 상잔(相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오!" 담담한 말투, 허나 그것을 듣는 천절오살마의 뇌리에는 천둥이 치는 듯 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주천화가 돌연 말을 멈추고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서 한 가닥 암류(暗流)가 번뜩이다 사라졌다. "...!" 천절오살마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십여 장 뒤의 한 곳을 응시했 다. 그곳에, 아아! 다섯 치 깊이의 혈장(血掌)이 깊숙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저, 저것은 만년청강석(萬年靑剛石)이다. 천하(天下)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알려진 만년청강석에 다섯 치 깊이의 장인(掌印)이 새겨지다니...!'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저럴 수가!' 그들의 몸이 진동되었다. 어찌 두렵지 않으며 어찌 놀랍지 않으랴! 주천화, 이제 그는 결코 나약한 일개 소동이 아니었다. 천마수라대제의 모든 것을 이어 받은 절대자(絶大者), 바로 만사여의(萬事如意)를 당당히 포효할 수 있는 천 마지존, 군림무적(君臨無敵)의 일대영웅인 것이다. 사흘이 흘렀다. 돌연 화룡빙산의 밑에서 한 대의 팔기마차가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는 순식간에 눈덮인 구릉을 넘어 자취를 감췄다. 이때 마차 가 사라져 간 뒷쪽에서 소리없이 두 인영이 나타났다. "음, 드디어 천절오살마가 활동을 개시했구나!" 무거운 음성, 나타난 인영의 음성은 그가 입고 있는 흑의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헌데 그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있는 미서생이 과연 천마지체를 타고난 그 자인가?" "모르지. 자! 어서 장문사숙께 이 일을 아뢰야 하네." 누구인가? 몇 마디 문답을 주고 받은 그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없이 사 라져 갔다. 꽈꽈꽈꽈앙! 이때 돌연, 화룡빙산에서 폭음(爆音)과 함께 화염(火焰)이 치솟 았다. 엄청난 굉음(轟音), 천지를 뒤엎을 듯한 폭음이 조용했던 빙역을 뒤흔들었 다. 주천화(朱天華)의 강호 출도를 천하에 알리기 위함인가? 곧이어 무서운 폭발이 일었다. 굉음은 천공을 갈가리 찢으며 길게 메아리치고 있 었다. 무림(武林). 풍운(風雲)이 인다. 파란(波瀾)의 중원무림에 누가 감히 주천화에게 대항할 것이며 , 또 누가 있어 그의 앞길을 막을 것인가! 아니, 그의 오대 수하인 천절오살마의 행도(行道)조차 아무도 막을 수 없으리라. 빙봉은 언제까지라도 포효를 터뜨릴 듯 했다. 마치 대격변의 풍운무림(風雲武林)을 예고하려는 듯.... ■ 황 제1권 제6장 풍운(風雲)의 서막(序幕) ━━━━━━━━━━━━━━━━━━━━━━━━━━━━━━━━━━━ 두두두두! 소리와 함께 눈보라를 헤치며 웅장한 팔기마차 한대가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청의노인이었다. '흐흐흐...! 드디어 조부께서 출도하셨다!' 청의노인의 입가에는 득의(得意)의 미소가 가득했다. 혈도왕 흑평강, 이미 나이 일백팔십에 달하는 그의 가슴에도 불타오르는 야망은 있었다. '조부님만 본문의 일에 힘을 쏟으신다면... 흐흐흐, 누구도 본문에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혈도왕 흑평강은 마차를 모는 것이 조금도 불쾌하거나 힘들지 않 았다. 야망(野望)의 불길이 그의 몸을 태우고 있어 또한 전혀 한기(寒氣)를 느끼지 못했다. 한편, 마차 안은 매우 넓었다. 사방 이 장에 달하는 마차 안, 주천화는 중앙에 정좌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 다. 그의 앞에는 천절오살마 일행들이 앉아 제각기 상념(想念)에 젖어 있었다. 주천화, 천인혈옥삼 위에 산뜻한 가죽 옷을 걸치고 허리에는 천 마제혈검을 차고 있어 그 기태가 너무도 당당했다. '으음! 감회가 새롭다. 중원으로 돌아가게 될 줄은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었지....' 문득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버님! 보고 계십니까? 이제 천화는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허나....' 잠긴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결코 복수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중원이 그리울 뿐인 것입니다.' 주천화가 여러가지 감회에 젖어 있을 때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망울이 있었다. '흥! 목석같은 사내! 나 따위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 란 말이지? 치이! 두고 보라지!' 이때 독화마황이 새침해 있는 나운봉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괴소(怪笑)가 스 쳤다. "흘흘흘, 요새 계집아이들이란... 그저!" 그의 눈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오르자 나운봉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흥! 그게 무슨 뜻이지요?" '이크!' 독화마황이 짐짓 목을 움츠렸다. "난쟁이 할아버지는 소녀에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으신가요?" "불, 불만은 무슨... 흘흘흘!" 독화마황은 이미 나운봉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크크크, 난쟁이가 또 벌집을 건드려 놓았군." 고루마존이 옆에서 끼어 들었다. 천면색환마의 안색이 문득 안타까운 듯 굳어갔다. '쯧쯧쯧, 이 할아비도 너와 소공자가 맺어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너를 일부러 동행시켰다만 그것은 내가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니....' 천면색환마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치고 있을 때. "조부님! 말(馬)들이 지친 듯 합니다. 북해빙궁(北海氷宮)이 이 곳에서 멀지 않으니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부석의 혈도왕 흑평강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 흑웅이 주천화의 눈치를 살필 뿐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빙궁? 북해빙궁이라...?' 주천화의 뇌리에 한 생각이 스쳤다. "흑노, 북해빙궁과 북해빙극마(北海氷極魔)라는 절대 고인과 어떤 관계라도 있소?" 천면색환마가 의외라는 듯, 흑웅 대신 입을 열었다. "소공자께서 그 일을 어찌 알고 계십니까? 북해빙궁은 바로 북해빙극마가 세운 문파입니다." '북해빙극마 그는 천하패왕지존록에 이십일 위로 올라 있는 인물이었지. 그도 문파 를 세웠군.' 주천화는 내심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흑노, 그곳에 가서 쉬었다 갑시다." 주천화의 말에 따라 흑평강은 말머리를 틀었다. 헌데 삼백여 장 갔을까? 저 멀리서 은은히 병장기가 부딪치는 음 향과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리지 않는가? 섬강천마부 흑웅의 눈빛이 꿈틀했다. "강아야, 무슨 일이냐?" "글, 글쎄요? 저곳은 바로 빙궁이 있는 곳인데... 아마 빙궁에서 혈전(血戰)이 벌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빙궁에서?" 천절오살마의 표정에 의혹이 떠올랐다. 두두두두...! 마차는 순식간에 삼백여 장을 질주해 갔다. - 북해빙궁(北海氷宮). 북해도에 위치한 빙궁은 세외(世外) 신비이궁(神泌異宮) 중 한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그들은 강호에서 별로 활약하지 않았으나 은연중 대문파(大門派)로 인식되고 있었 다. 헌데 그 빙궁의 전면에서 지금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차앙! "으왁!" 새하얀 빙지(氷地)가 붉은 피로 물들고, 여기저기서 참혹한 시신 (屍身)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폭음(爆音)과 파공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백의를 입은 백여 명 대 한들이 한 대의 사두마차를 공격하고 있었다. 결사적으로 사두마차를 호위하는 인물들은 금포(金袍)를 걸친 이십여 명의 금의무 사들이었다. 헌데 금의무사들의 무공은 실로 놀라워 수적인 열세(劣勢)에도 불구하고 백의인들과 거의 대등한 접전(接戰)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격전(激戰)은 치열하기 이를데 없었다. "으음, 역시 빙궁의 수하들이...." 그 광경을 목격한 혈도왕 흑평강이 놀람을 드러냈다. 헌데 흑평강이 마차를 몰고 격전장(激戰場)에 나타나자 백의장한들 중 일부분이 마차를 포위해 들었다. "흥! 금광회(金光會)의 폐물들이 또 나타났군. 멈춰라!" "흐흐흐, 이놈들이 눈이 멀었나?" 혈도왕 흑평강이 어이없다는 듯 냉소를 터뜨렸다. "늙은이! 입이 제법 거칠구나. 어디 네놈의 무공도 그만큼 고절한가 구경해야 겠 다." 백의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으르렁 거렸다. 혈도왕 흑평강의 눈에서 신광(神光)이 일었다. "크크크, 저놈들은 굴러 들어온 은인(恩人)을 그 못된 말버릇으 로 오히려 적으로 만들려 하는군." 마차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고루마존이 혀를 찼다. "무슨 뜻이에요?" 나운봉의 질문에 천면색환마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혈도왕 흑평강과 빙궁의 궁주인 북해혈마(北海血魔)와는 원래 친분이 두터운 사이란다." "아!" 나운봉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돌연 엄청난 노성이 찌르르 울려 퍼졌다. "이노옴! 북해혈마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감히 본좌를 대하고 알 아보기는 고사하고 이토록 광망스럽게 굴다니!" 혈도왕 흑평강의 실로 가공할 내공이 담긴 호통이었다. "헉!" 빙궁의 수하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다음 순간 격전은 순식간에 멈춰졌다. 혈도왕 흑평강의 노성(怒聲)은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이때 한 인물이 혈도왕 흑평강 앞에 내려서며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아, 아니! 노선배님은 구천만마문의 혈, 혈도왕 흑노선배가 아닙니까?" "흐흐흐, 그래도 눈이 제대로 박힌 놈이 있긴 있었군." 혈도왕 흑평강이 다소 노기를 가라 앉혔다. 한편, 마차 안에 조용히 앉아 있던 주천화가 문득 섬강천마부 흑웅을 바라보았다. "흑노, 금광회란 무엇이오?" "...!" 흑웅이 알 리 있겠는가? 그 역시 이백 년 만에 강호(江湖)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금광회란 십 년 전부터 부상하기 시작한 신비문파입니다." 천면색환마가 흑웅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막강한 세력을 쌓으며 제법 날뛰는 무리들입니다. 듣자하니 엄 청난 재력(財力)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눈을 감았다. "관부(官府)의 냄새를 풍기는 신비한 단체이기도 하지요." 나운봉이 얼른 천면색환마의 말을 이었다. "관부?" 순간 주천화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괴이한 빛이 그 순간 무섭게 뻗어났다. 천면색환마는 주천화의 눈빛을 대하고 해연히 놀랐다. '이, 이 분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분이...?' "관부의 냄새를 풍긴다 함은 무슨 연유라도 있소?" 주천화의 음성에는 묘한 한기(寒氣)가 스며 있었다. "호호호, 그들의 막대한 재력, 그리고 십 년만에 강호의 대문파로 부상할 수 있는 실력,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건대 확실히 개입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는 것이지요." 나운봉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이때 독화마황이 나운봉을 대견 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흘흘흘, 제법 냉철한 분석이로구나. 그렇습니다. 소주, 그들은 또 은거한 전대노물들까지 포섭하려고 혈안(血眼)이 되어 있습니다." '금광회라...? 흥미를 끄는군!'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만수성의가 말씀하신 대혈풍(大血風)의 조짐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인가?' 주천화의 뇌리에 문득 만수성의의 말이 스치고 있었다. 한편, 마부석의 혈도왕 흑평강은 노기를 가라 앉히고 화려한 사 두마차와 금의무사들을 훑어 보았다. "저들이 금광회의 인물들이란 말이지? 헌데 빙궁과 금광회 사이 에 원한이 있다고 들은 적은 없었는데?" "예, 헌데 그, 그게...." 백의장년인, 그는 바로 빙궁의 부궁주(副宮主) 한빙마검(寒氷魔劍) 좌한비였다. 이 순간 그의 눈에서는 무서운 분노(忿怒)의 폭풍(暴風)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금광회에서 본궁(本宮)과 합작하자는 미명(美名) 아래 건방진 수작을...." "...?" "명분은 좋으나, 글쎄! 그 내용이 본궁을 통째로 삼키려는 수작이 아니겠습니까!" "금광회가 제법 설치고 다닌다고 소문은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혈도왕 흑평강이 가소롭다는 듯 사두마차쪽을 노려 보았다. "저들은 그 광망한 서찰을 전달하러 온 사자(使者)들입니다. 저 들을 죽여 본궁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 주려고...." 혈도왕 흑평강이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일이 그렇게 된 것이란 말이지?" 이때 문득 사두마차에서 심신(心身)을 상쾌하게 만드는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호호, 혈도왕 흑노선배님이 아닙니까?" 다음 순간 사두마차에서 두 명의 노파가 천천히 내려섰다. 백발에 피폐하기 이를 데 없는 용모의 두 명 노파, 그들은 쌍동이인 듯 그 용모가 판에 박힌 듯 똑같았다. "쌍, 쌍봉파파(雙鳳婆婆)!" 그들의 모습을 본 한빙마검 좌한비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쌍봉파파. 우내십존과 같은 배분을 지닌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합공(合功)은 가히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고 알려져 있 었는데 쌍봉파파는 이미 이십 년 전부터 무림에 몸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혈도왕 흑평강의 눈에 역시 은은히 경악이 스치고 있었다. "흐흐흐, 남해(南海)의 두 노인도 아직 죽지 않았군. 헌데 언제 금광회의 주구(走狗)가 되셨나?" "무엇이?" 쌍봉파파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폭사했다. 철판이라도 뚫어 버릴 듯한 가공할 눈빛이었다. "호호호, 주구라니요? 흑노선배님의 말씀은 좀 지나치시군요." 쌍봉파파의 뒤를 따라 한 명의 궁장소녀가 마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사뿐히 빙지를 밟는 그녀의 자태가 너무도 고혹적이었다. 그리고 화려했다. 궁장소녀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 자태가 실로 눈부 실 정도였다. 사뿐히 내딛는 한 걸음에 만화(萬花)가 피어나는 듯 했고, 슬쩍 드러나는 옥수(玉手)에 태양이 그 빛을 잃은 듯 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려서자 금광회의 수하들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네가 누군데 노부를 아느냐?" 흑평강이 적의를 감추지 않은 채 내뱉았다. "감히 이 분이 누구라고 망발을...." 쌍봉파파가 발작하려다 궁장소녀의 제지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저 계집이 누구길래? 쌍봉 늙은이들이 호위하는 신분이었단 말인가?' 흑평강이 놀란 빛을 드러냈다. "호호호, 천하의 흑노선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때 궁장소녀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허공을 간지럽히는 교소 또한 맑고 밝았다. 그녀의 말은 상대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교묘한 것이었다. 허나 그녀의 내심은 기실 웃음만큼 밝지가 않았다. '으음, 저 노마두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만약 저 자까지 이들에게 합세한다면 낭패를 면치 못하리라!' 그녀는 사뿐히 혈도왕 흑평강에게 더 다가갔다. "소녀가 감히 혈도왕 노선배께 한 가지 청할 일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달콤한 음성, 어떻게 보면 응석받이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는 듯 했고, 또 달리 보면 절세의 가인이 무서운 유혹(誘惑)을 발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흐흐흐, 이제 처음 본 네가 이 늙은이에게 청이 있다고?" 혈도왕 흑평강의 입가에 괴이한 빛이 스쳤다. "어디 어떤 것인지 들어보기나 할까?" 흑평강의 오만한 태도에 쌍봉파파가 또다시 붉으락 푸르락 이제라도 발작할 듯했다. "호호호, 기실 청이란 아주 간단한 일이지요. 다름이 아니고 흑 노선배님은 오늘 본회와 빙궁과의 일에 일체 관여하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흑평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그래? 만약 굳이 관여한다면?" 이때였다. "흑노, 빙궁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 이르시오. 나는 성 가신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소." 돌연 마차 안에서 담담한 주천화의 음성(音聲)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 흑평강의 어깨가 움찔했다. 주천화의 말은 곧 자신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이 다. 마차 안, 주천화의 표정에 어떤 일인지 미미한 흔들림이 보이고 있었다. 이어 잠시 격동을 보이던 그는 돌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 자 천절오살마 역시 일행을 의혹(疑惑)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주천화는 마차에서 내려서 궁장미소녀를 말없이 주시했다. "...!" "...?" 뒤따라 내려선 천절오살마를 비롯한 나운봉의 눈에 짙은 의혹이 맺히고 있었다. 천절오살마와 주천화가 나타나자 궁장미소녀를 호위하고 있던 두 명의 노파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헉! 천절오살마!' 그들은 대뜸 천절오살마를 알아보고 대경실색하여 궁장소녀를 막아갔다. "...?" 궁장소녀는 그들의 행동에 의혹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아가씨! 저 자들은 이백 년 전의 대살성들인 천절오살마이옵니다.) 순간 다급한 전음이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천절오살마!' 궁장소녀 역시 대경실색하며 새삼 마차에서 내려 선 천절오살마 일행을 살폈다. 순간 그녀는 천절오살마의 앞에 서 있는 주천화를 발견했다. 그녀의 내심에 감탄이 터졌다. '저, 저렇게 영준한 남자가 있다니.... 헌데 천절오살마가 마치 그를 호위하는 듯 한 걸음 뒤에 서 있지 않은가?' 돌연 그녀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헌데? 저 자의 눈빛을 보니 마치 내 얼굴을 살피는 듯 하지 않은가? 그, 그럴리 가, 이 면사는 천잠사(天簪絲)로 짜여져 있어 아무리 내공이 고절하다 해도 결코 투 시(透視)할 수 없을텐데?' 허나 주천화는 이미 그녀의 예상을 깨고 면사를 투시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 었다. '으윽! 어디선가 귀에 익은 듯한 말투와 음성이라 느꼈었는데 역시 그녀였군!' 이 순간 주천화의 눈에는 어떤 감회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련한 추억(追憶)이랄까? 주천화의 눈, 그 깊숙한 곳에 회상(回想)의 빛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지누이... 십이 년이 흘렀건만 그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구료!' 이때 주천화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궁장미소녀의 몸이 일순 진동 되었다. 그녀의 눈은 주천화의 얼굴에 못박힌 듯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지누이!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주천화의 눈은 이 순간 그답지 않게 부드럽기 이를데 없었다. "...?" 나운봉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주천화와 궁장소녀를 번갈아 쳐다 보던 그녀의 눈에 기이한 불길이 번졌다. "호호호, 두 분께서 아시는 사이인가 보지요?" 주천화는 빙그레 미소만 떠올렸다. "흑노, 이만 갑시다!" 다음 순간 그는 조용히 말한 후 다시 마차에 오르지 않는가! "예? 예!" 천절색환마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를 일이군. 저 여아(女兒)는 금광회의 인물이 분명한데... 소 공자님과 아는 사이인 것 같으니....' 이때였다. 빙궁의 눈덮인 거각(巨閣)쪽에서 돌연 웅후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와하하하, 누가 왔다고? 흑늙은가 왔다는 것이 진정(眞情)이란 말이냐?" 휘이익! 동시에 마치 한 개의 점이 떠오르는 듯 하더니 순식간에 확대되 어 혈도왕 흑평강 앞에 내려섰다. "흐흐흐, 북해노마! 오랜만이군." 혈도왕 흑평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빙궁궁주 북해 혈마였다. 다소 비대한 체구, 북해혈마의 전신에서는 무형(無形)의 냉기(冷 氣)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 또한 마치 얼음조각인 듯 투명 (透明)해 그가 가공할 음한지공(陰寒之功)을 익혔음을 알 수 있었다. "허허허, 귀신같은 늙은이 같으니 언제 본도(本島)에 왔는가?" 북해혈마가 짐짓 눈을 부릅떴다. "허허허, 그렇게 되었네. 워낙 중대한 일이 있어 자네도 못보고...." "강아야, 어서 가자. 그리고 소주님의 명이니 금광회의 인물들을 일단 돌려보내도 록 해라!" 이때 마차 안에서 섬강천마부 흑웅의 음성이 고요히 들려왔다. 흑평강이 흠짓하며 북해혈마를 바라보았다. "노마, 이 늙은이의 부탁인데 저들을 일단 돌려보내지 않겠나? 아니, 내 부탁이 아니라 조부님께서...." "조부?" 북해혈마의 안색이 굳어갔다. "조부라니? 바, 바로 섬강천마부 흑노선배란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이 커졌다. (궁, 궁주님! 섬강천마부 노선배님 뿐만 아니라 천절오살마 노선 배님들이 모두 마차 안에 계십니다.) 이때 한 곁에 시립해 서 있던 부궁주 한빙마감 좌한비가 전음을 보냈다. '헉! 노선배님들이 십여 년 전 지옥수라갱이 터져 강호에 나왔다더니 사실이란 말 인가!' (헌데 천절오살마 노선배들은 한 명의 백의미서생에게 소주라 부 르며 그 사람의 지시를 받는 듯 했습니다.) 부궁주 한빙마검 좌한비의 전음이 전해지자 북해혈마의 안색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 었다. '그, 그럴 수가! 당금무림에서 그 분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더, 더구나 미서생이라니...?' 북해혈마는 아예 정신이 없었다. '이, 이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도 엄청나다!' 그는 머리속이 하얗게 비어올 정도로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풍운, 풍운이 보인다. 아아...! 중원무림을 덮을 일대풍운이...!' 북해혈마가 넋을 놓고 있을 때 혈도왕 흑평강의 음성은 이미 십 여 장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 또 만나세!" 주천화 일행을 태우고 질주해 가는 마차를 멍하니 바라보는 이는 북해혈마 뿐이 아니었다. 궁장미소녀, 그녀는 어쩐 일인지 주천화를 보고 난 후 넋을 잃은 채 상념 에 빠져 있지 않은가? "맞다!" 돌연 그녀의 입에서 탄성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틀, 틀림없는 천화오라버니였다. 벙, 벙어리 왕자! 그, 그가 분명하다." 그녀의 음성은 격동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미서생이 군주(君主)께서 아시는 인물이오이까?" 좌우에 서 있던 노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서, 어서 마차를 돌려라! 저들을 따라가자!" 궁장미소녀가 다급히 외치며 마차에 올랐다. 금광회의 수하들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허둥댔다. 두두두...! 잠시 후, 궁장미소녀를 호위한 금광회 수하들이 주천화 일행이 사라진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굉음이 순식간에 빙역의 적막을 갈랐다. 헌데 군주라함은 황녀(皇女)를 뜻하지 않는가? 과연 궁장 미소녀 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두두두...! 마차는 질풍을 몰고, 그 질풍 뒤에는 또 하나의 바람(風)이 뒤따 르고 있었다. 그것은 서서히 움트고 있는 연풍(戀風)이었다. 북해도, 하늘에는 설풍(雪風), 대지에는 만년빙(萬年氷).... 어느 곳을 둘러 보아도 스산한 냉기(冷氣)만이 감도는 죽음의 귀 역(鬼域), 이곳의 사면 바다(海) 역시 만년을 두고 녹아본 적이 없었다. 허나 단 한곳 결코 얼지 않는 해로(海路)가 있었다. 극빙해(極氷 海), 바로 북해도로 이르는 유일한 해로였다. 극빙해의 선착장에는 언제부터인가 한 척의 거대한 철갑선(鐵甲 船)이 마치 작은 섬인 듯 정박해 있었다. 문득 한 대의 팔기마차가 예의 철갑선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철갑선에서 한 청년이 황급히 뛰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노야(老爺), 다녀 오셨습니까? 사조(師祖)님께서도...?" "그렇다! 조부님과 귀한 손님이 계시다. 준비는 되었느냐?" 혈도왕 흑평강이 마부석에서 내렸다. "귀한 손님이라면...?" 백의대한이 의혹을 드러냈다. 허나 혈도왕 흑평강의 눈은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상(上)아는 어디 있느냐?" 흑평강의 눈에 질책하는 듯한 싸늘한 한기가 떠올랐다. "조부님! 소손(少孫), 대령하였사옵니다." 갑판 위에서 한 명의 칠순노인이 황급히 뛰어내리며 허리를 숙였 다. 당당한 풍도에 희끗희끗한 귀밑의 백발(白髮)이 너무도 단아했다. 여기에 그의 안색은 백발과는 달리 혈색(血色)이 감돌았다. 또한 피부는 이십대의 청년과 같이 매끄러웠다. 오 장 높이에서 날아 내렸음에도 먼지 한 점 일지 않아 상승의 고수임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 혈도염라신(血刀閻羅神) 흑치상(黑治上). 바로 구천만마문의 당대 문주, 그는 바로 혈도왕 흑평강의 손자 였으며 섬강천마부 흑웅의 사대 손(孫)인 것이다. 어찌 보면 믿어지지 않는 일이 아닌가! 혈도염라신 흑치상만 해도 일신 무공이 입신(入神)에 달해 있었 으니, 그의 조부(祖父)가 생존해 있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던가? 헌데 그 혈도염라신 흑치상의 사대조(四代祖)인 흑웅조차 아직 두 눈을 버젓이 뜨 고 살아 있음이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실로 경기읍백(驚氣揖魄)할 대이변이라 하 지 않을 수 없는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어서들 내리시지요." 혈도왕 흑평강이 흑치상을 힐끔 바라본 후 허리를 접었다. 흑평 강의 등 뒤로 흑치상을 비롯한 구천만마문의 수하(手下)들이 도열해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천절오살마가 차례로 내려섰다. "노선배님을 뵈옵니다!" 순간 수십여 명에 달하는 구천만마문의 수하들이 황급히 대례(大禮)를 올렸다. 이때 천절오살마의 뒤로 주천화가 서서히 내려섰다. "이 분은 대제(大帝)의 후예이시다. 모두 예를 갖추어라!" 섬강천마부 흑웅이 주천화의 옆에 시립해 서며 낭랑히 외쳤다. 일순, 구천만마문 수하들의 안색에 경악(驚愕)의 폭풍(暴風)이 몰아쳤다. '저, 저 닭잡을 힘도 없을 것 같은 미서생이 대제의 후인(後人)이라고?' 모두 믿어지지 않는 안색이었다. 주천화의 눈이 모두를 훑었다. 담담한 눈빛이었다. 허나 중인들 은 그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위엄(威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놀라운 풍도!' '마치 태산을 대한 듯, 아니 하늘(天)을 보는 듯 느껴지다니!' "소주, 그만 선실로 드시지요" 섬강천마부 흑웅이 주천화에게 입을 열자 중인들은 또 한 번 경악했다. 주천화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후 철갑선에 올랐다. 묵묵한 태도에 무표정한 안색(顔色). 어떻게 보면 실로 거만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허나 누구도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천화오라버니! 잠, 잠깐만!" 한 대의 사두마차가 나타나며 궁장소녀가 황급히 외치는 것이 아닌가? "후후후!" 주천화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흑노, 타겠다면 말리지 마시오!"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괴이하게도 사두마차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헌데 이 순간, 구천만마문의 수하들이 경악과 함께 노기(怒氣)를 드러냈다. '저, 저 자가... 감히 사대조를 하인 대하듯 다루다니!' 혈도염라신의 안색이 붉게 달아 올랐다. '아, 아무리 대제의 후인이라 하나 새파란 애송이가!' 혈도염라신 흑치상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주천화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편, 나운봉 역시 새침해 노기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흥! 저 여우같은 계집애가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오라버니? 오 라버니 좋아하네. 누가 모를까 봐? 음탕한 것! 남자의 꽁무니나 쫓아오고...!' 나운봉, 그녀는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일까? 모를 일..., 어쩌면 그녀의 마음을 그녀 스스로도 모를 것이다. 궁장미소녀는 주천화의 말에 쌍봉파파를 돌아 보았다. "파파, 저는 저 배에 타겠어요. 그렇게 알고 딴 배로 오세요!" "아, 아가씨! 아니됩니다." 쌍봉파파가 대경실색했다. "저 배에는 엄청난 거마(巨魔)들이...!" "괜찮아요. 천화오라버니가 그들의 상전인 듯 하니 위험은 없을 것이에요." 궁장미소녀의 안색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순간 쌍봉파파의 뇌리에 한 생각이 스쳤 다. '오! 그, 그랬었나? 저 미서생과 아가씨가 어떤...?' 허나 그들의 안색은 이내 침중해졌다. "그렇다고는 하오나. 노신들은 아가씨 혼자 저 배에 오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노신들도 아가씨와 동행하겠습니다." "후후후...! 지누이! 그렇게 하시오!" '지누이? 과, 과연 천화오라버니였구나! 아아, 설마 했더니!' 궁장미소녀가 한 순간 몸을 떨더니 다음 순간 허공을 밟았다. 휘이익! 하는 음향과 함께 그녀의 몸은 똑바로 주천화의 품으로 날아왔다. "하하하, 지매(池妹)! 그동안 잘 있었소?" 주천화가 피하지 않으며 몸을 돌렸다. "천화오라버니!" 주천화 앞에 떨어져 내린 궁장미소녀가 주천화의 품에 뛰어 들었다. "오라버니...! 죽은 줄 알았는데...!" 궁장미소녀는 흐느끼듯 입을 열며 얼굴을 묻었다. 뭉클한 여체 (女體)의 감촉이 압박해 오자 주천화의 안색이 일순간 붉어졌다. "지매, 이곳은...!" 그제야 주위의 눈빛을 의식한 궁장미소녀가 떨어져 나갔다. 그녀 의 목덜미도 어느새 도화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천절오살마를 비롯한 중인들이 의혹에 잠겨 있을 때, 나운봉은 온갖 오만상을 다 짓고 있었다. '흥! 저 여우같은 계집애 너무 다정한 척 하는군. 얄미운 계집같으니... 허나 두고 보라지!' 나운봉은 매서운 눈으로 잡아먹을 듯 궁장미소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질투? 그러했다. 나운봉 스스로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허나 그녀의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불길은 분명 질투(嫉妬)의 불길이었다. 쏴아아...! 잠시 후, 육중한 철갑선은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철갑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격변(檄變)의 대지(大地) 중원! 피 (血)와 살(殺), 그리고 무지개빛 아름다운 사랑(愛)이 뒤엉켜 돌아가는 곳이었다. 지금의 뉘라서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구주(九州)를 진동하고 중원 십팔만 리를 떨쳐울릴 풍운이 한 척 철갑선에 실려 있음이니.... 그런데 철갑선이 극빙해를 떠나자마자 선착장 한쪽에 두 인영이 솟아나지 않는가? "으음, 괴이하다! 도무지 저 미서생의 정체(正體)를 짐작하기 어렵구나." 침중한 음성, 바로 예의 화룡빙산에서 주천화 일행을 엿보던 흑의인영들이 아닌가! "음...! 미서생이 금광회의 금검검주(金劍劍主)와도 친분이 있었다니 실로 괴이하 구나!" 두 명 흑의인영들의 눈에는 구름같은 의혹이 담겨 있었다. "자! 아무튼 우리도 어서 중원으로 가야 하지 않겠나!" 그들은 또다시 자취를 감췄다. 헌데 그들의 말로 미루어 보면 궁 장미소녀가 금광회의 금검검주가 아닌가! 금광회, 과연 주천화와 어떻게 얽히려는지...? 쏴아아...! 철썩! 파도, 무심(無心)하기만 했다. ■ 황 제1권 제7장 대혈풍(大血風)을 예고(豫告)하는 고요 ━━━━━━━━━━━━━━━━━━━━━━━━━━━━━━━━━━━ 선실(船室), 일개 선실이 마치 거대한 대청을 방불케 했고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어 한 마디로 웅장하며 화려했다. 그리고 탁자 좌우로 수십 개의 좌석(座席)이 마련되어 있었다. "소주, 이리로...." 섬강천마부 흑웅이 중앙의 태사의를 주천화에게 안내했다. 주천화는 무심한 표정으로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 다. '으으...!' 혈도염라신 흑치상은 그 광경에 분통이 터져 안색이 굳어졌다. '저 애송이가 끝까지 본좌의 사대조를 하인 다루듯 하다니!' 기실 태사의는 섬강천마부 흑웅을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던가? 헌데 흑웅은 주천 화 뒤에 시립해 서고 주천화의 옆 좌석에는 궁장미소녀가 태연히 앉고 있었으니.... 문득 주천화의 눈썹이 가볍게 흔들리며 그의 입이 열렸다. "흑노!" "예!" "지누이에게 다른 선실(船室)을 마련해 주시오." "싫어요! 저는 오라버니와 함께 있겠어요." 순간 궁장미소녀가 단호히 외친 후 주천화 옆에 그대로 앉았다. "흐흐흐, 두고 보자니까, 하늘높은 줄 모르는 년놈들이군." 혈도염라신 흑치상의 입에서 드디어 노화가 흘러나왔다. "건방진 놈! 나는 네가 과연 천마수라대제의 후예인지 시험해 보아야겠다!" 번쩍! 하는 순간 무서운 도세가 폭발했다.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전광석 화(電光石火)처럼 혈도염라신 흑치상의 옆구리에서 도광(刀光)이 일었다. "아앗!" 천절오살마는 이 돌연한 사태에 경악성을 토했다. 하지만 이미 혈도염라신 흑치상의 도(刀)는 주천화의 정수리를 무서운 속도로 쪼개가고 있었다. "...!" 허나 주천화의 눈빛은 이 순간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혈도염라신 흑치상, 그의 도법은 놀랍게도 빠른, 쾌(快)를 중시 하는 쾌수도법이었다. 그의 허리에서 도가 뽑히면 아무도 피해내지 못했다. 그 순간 주천화의 전신에서 괴이한 홍광(紅光)이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었다. 헌데 놀랍게도 홍광 가운데에 엄청난 아수라천존상이 떠오르지 않는가? 사위는 순식간에 핏빛 기광(奇光)에 잠겼다. 카앙! 순간 혈도염라신의 도는 주천화의 머리 위 세치 허공에서 퉁겨져 나왔다. 혈도염라신 흑치상의 입에서 돌연 핏물이 흘러 내렸다. "우욱!" 도를 움켜 쥔 채 그의 신형(身形)이 삼장 뒤로 퉁겨졌다. 도를 움켜쥔 손에서 주르륵 선혈(鮮血)이 흘렀다. 엄청난 반탄지 력(反彈之力)에 내상(內傷)과 함께 손가락이 파열된 것이었다. "천, 천마... 마라혈... 강기...!" 천절오살마의 안색이 싸악 변했다. 그렇다. 천마마라혈강기(天魔魔羅血 氣), 전설적인 공포의 강기(剛氣)가 아니던가! 장내는 순식간에 정적에 싸였다. 주천화의 눈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홍채 (紅彩)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예의 무심일색(無心一色)으로 돌아와 있었다. "...!" 시종일관 담담한 일색(一色)이다. 실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섬뜻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흑노! 다른 선실을 안내하시오." 주천화가 몸을 일으켰다. 흑웅은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소, 소주! 진, 진노(震怒)를 거두어 주십시요." 섬강천마부 흑웅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겠다는 듯 더듬거렸다. 천절오살마 중에서도 유독 주천화에게 남다른 감성을 지니고 있 던 그가 아니던가! 허니 그의 당황이 오죽하랴! "네 이놈! 평강아,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었단 말이냐! 어서 네놈 의 뺨을 쳐 소주(少主)께 불경(不敬)한 저놈의 죄를 대신하지 못하겠느냐!" 태산같은 거구에서 벽력성이 터졌다. "윽!" "와악!" 둘러선 수하들 중 공력이 약한 이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흑웅의 눈에서 무서운 빛이 뻗어나오자 흑평강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촤악... 쫙! 다음 순간 돌연 기음(奇音)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흑평강이 자신의 뺨을 스스로 후려 갈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피가 튀었다. 순식간에 흑평강의 뺨이 피로 얼룩졌다. 허나 흑평 강은 멈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부디... 진노를...." 그러자 구천만마문의 수하들이 이 참혹한 광경에 몸을 떨며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 다. "그만 하시오!" 주천화는 담담히 말한 후 궁장미소녀를 향해 눈을 돌렸다. "지매, 다치지 않았소?" "...!" 궁장미소녀는 넋을 잃은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이럴 수가! 천화오라버니가 펼친 것은 분명 천마마라혈강기였다!' 쌍봉파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저 미서생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천절오살마를 하인 대하듯 하 는데도 천마수라대제의 무공을 쓰다니...!' 주천화의 명을 따라 흑평강은 행동(行動)을 멈추고 흑치상에게 다가갔다. "그는 향후 백일 간 공력(功力)을 사용치 못할 것이오." 흑치상의 경거망동에 노화를 터뜨리려는 그의 귓전에 주천화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 왔다. 흑평강의 몸이 흠칫 떨렸다. "나 일신(一身)의 모욕이라면 참을 수도 있으나...." "...?" "...!" "그는 감히 선사의 명호를 입에 담았소. 차후 또다시 선사의 이 름을 경망스럽게 입에 담는 사람이 있다면...." 주천화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다. 노기가 드러나 있지 않은 무표정한 눈, 허나 중인들은 그 감정없 는 무심한 눈빛에 오히려 지옥(地獄)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오!" 말을 마친 주천화가 궁장미소녀에게 눈을 돌렸다. "지매, 황궁(皇宮)은 별고 없소?" 그의 태도가 실로 태연자약하여 궁장미소녀는 절로 혀를 내둘렀다. "천화오라버니, 도대체 그간 어떻게 보냈기에...?" "...!" 주천화는 놀란 눈으로 입을 여는 그녀를 향해 단지 빙그시 미소 를 머금을 뿐이었다. 그러자 궁장미소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후유! 기실 지난 십 년 간, 황실은 많은 격변을 치루었어요." 궁장미소녀는 가볍게 탄식한 후 주천화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십 년 전 삼황자(三皇子) 경무황자(敬武皇子)께서 등극(登極)하시었고...." "음, 결국 그 분께서 등극하셨군." 문득 주천화의 눈빛에 한기가 스쳤다. 궁장미소녀는 주천화의 눈 빛이 굳어짐을 깨닫고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 분은 당대(當代)에 이르러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성군(聖君) 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큼 덕치(德治)를 베풀고 계시지요." "으음!" 주천화의 입에서 기이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들의 대화는 나지막하게 이어져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아버님의 예상이 맞았음인가! 아! 아버님이 결코 복수를 꿈꾸지 말라고 하신 말... 이제야 그 뜻을 알겠구나!' 주천화의 표정이 음울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헌데 궁장미소녀, 그녀가 누구길래 주천화와 이미 알고 있으며 황실의 내막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 난화군주(蘭花君主) 주운지(朱雲池). 바로 선황(先皇)의 셋째 동생 덕무왕(德武王)의 손녀, 당금 황제 의 질녀(姪女)이자 주천화와는 육촌간인 황족(皇族)이었다. 주천화는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 몸을 일으켰다. '아아! 이제는 정녕 복수할 수도 없게 되었다!' 주천화는 내심의 우울함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심정(心情)이 착잡했다. "흑노!" "예!" "쉬고 싶소! 조용한 선실을 마련해 주시오!" "예!" 주천화가 조용히 걸어나가자 난화군주 주운지가 뒤를 따랐다. 아담한 선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단아했다. 한곁에 서탁이 놓 여 있었고 그 위에 몸을 눕힐 수 있는 침상이 자리했다. "지매! 혼자 있고 싶소." "소매는 천화 오라버니와 지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지난 이야기?" 주천화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주천화는 그녀를 대하자 잠시 따뜻한 마음이 되었 다. '벙어리 왕자...! 나는 다섯 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뇌리에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과거(過去)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허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벙어리 왕자라고 느낄 때, 지매만은 항시 나에게 다정했 었지....' "참! 오라버니!" 난화군주 주운지가 어떤 생각을 떠올린 듯 긴장된 빛으로 입을 열었다. "...?" "문국황자께서는...." "아버님 말이오?" "문국왕(文國王)이란 왕호(王呼)와 함께 그 분의 죄를 황명(皇 命)에 의해 사함을 받으셨습니다." "그, 그것이 사실이오?" 주천화가 눈을 크게 떴다. "예! 그것이 이미 십 년 전의 일로써 경무황자께서 등극(登極)하실 때...." "으음, 아버님의 예측이 맞았구나. 아버님 일신의 오명은 아버님 이 돌아가시면 벗겨진다고 하시더니...." "예? 문국황자께서 그 일을 예측하셨단 말인가요?" "...!" 주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 속은 매우 혼란했다. '으음, 일이 이렇게 된데에다... 그 분께서 만인(萬人)의 숭앙을 받는 성군(聖君)으로 불리운다니, 아아! 정녕 복수는 물거품으로 된 것이다.' 주천화는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허무하다!' 죽음보다 진한 허탈감이 그의 어깨에 내려 앉았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호호호, 죽이기엔 너무 예쁜 사내로군!" 돌연, 나직한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주천화와 주운지의 고개가 들려졌다. '헉!' 주운지의 내심(內心)에 경악성(驚愕聲)이 터졌다. 동경(銅鏡), 선실 후면에 깔려 있는 동경에 한 인영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전신(全身), 새까만 가죽옷이 머리 끝까지 덮여 있는 괴인영. 가죽옷은 몸에 착 달라붙어 괴인영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풍만한 가슴 에서 쥐어질 듯 이어지는 몸매의 굴곡은 나타난 괴인영이 바로 소녀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펑퍼짐한 둔부와 그 아래 늘씬하게 뻗어내린 지체(肢體). 몸의 굴곡만 보아도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나를 죽이겠다고?" 주천화가 동경을 응시한 채 무심한 일성(一聲)을 흘려냈다. '등 뒤에서 기척도 없이 나타나다니 놀라운 무공의 소유자다!' 주운지 역시 동경을 바라본 채 감히 몸을 돌리지 못했다. "후후! 그 얼굴을 보고 싶군!" "돌아서지 마라!" "...!" "그 순간 목이 달아날 것이니. 나는 너의 예쁜 얼굴을 그 몸에서 떼어내기가 내키 지 않는다." 흑의괴소녀의 음성은 주천화의 음성보다 무심했다. 허나 주천화는 태연히 고개를 돌렸다. 번쩍! 순간 한 가닥 백광(白光)이 허공을 베고 있었다. 주천화의 허리 에서 천마제혈검이 뻗어난 것이었다. 헌데 주천화는 결코 등 뒤로 검을 뻗어내지 않 았다. 찍... 찌찍! 동경(銅鏡), 그것이 정확히 사등분(四分) 되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헉!" 동경의 뒤에서 다급한 경악성(驚愕聲)이 터졌다. "...!" 주운지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선실의 입구쪽을 쳐다보았다. 허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동경에 비치고 있던 흑의괴인영은 이미 동경의 뒤쪽에 서 있었다. 동경이 주천화의 검세에 갈라지며 그 인영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스르르...! 헌데 아아! 괴인영의 가죽 옷, 서서히 열십 자로 갈라지며 바닥 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실로 놀라운 검초였다. 주천화의 검세는 흑의인영의 피부조차 건 드리지 않은 채 가죽 옷만 베어낸 것이었다. "실수를 했군...." 주천화는 어느새 천마제혈검을 거둔 채 담담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체(裸體)의 미소녀, 그녀는 주천화 앞에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녀는 가죽 옷만을 입고 있었을 뿐 그 속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던 것이 다. 육봉(肉奉), 양지유(羊肢油)를 부어 만든 듯 백옥같은 두 봉우리가 현란하게 눈을 찔러 왔다. 그 봉우리 위에 작은 열매가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고, 한 줌에 쥐 어질 듯한 허리와그 아래 터질 듯 좌우로 확산된 둔부, 그리고 더 아랫쪽의 태고의 원시림(原始林).... 아찔하다. 소녀의 몸매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네가 피하려 했기 때문에 부득불 상처를 남겼다." 주천화의 눈은 괴소녀의 몸매를 보고 있지 않았다. 괴소녀의 팔 에 한 가닥 미세한 혈흔(血痕)이 비치지 않는가? 허나 그 혈흔은 경미(輕微)하기 이를데 없어 발견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으음, 놀랍군요. 나의 신법(神法)은 지금까지 아무도 눈치 챈 자가 없었는데...." 완전한 나체로 서 있었으나 괴소녀는 태연하기 이를데 없었다. "후후, 무림의 여인들은 뻔뻔스럽기 이를데 없군!" 주천화는 말을 마치며 침상에 걸터 앉았다. "소주! 무슨 일이십니까?" "소공자님!" 이때 섬강천마부를 비롯한 천절오살마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달려왔다. "흐흐흐, 예쁜 사내! 다음에 봐요!" "어딜! 누구 앞이라고 네 멋대로 구느냐!" 난화군주 주운지가 앙칼진 고함을 터뜨리며 신형을 날렸다. "지매! 놓아 주시오!" 주운지의 몸이 무형의 기세에 멈춰졌다. "호호호, 이것 봐요. 예쁜 공자! 당신을 노리는 인물들이 많으니 그 목을 조심해요. 호호호, 당신은 내 맘에 쏙 들었어요" 괴소녀는 창문을 넘어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파도 속으로 자취를 감췄 다. "이것은?" 혈도왕 흑평강이 괴소녀가 남겨놓은 가죽옷을 보고 흠칫 했다. "북해천(北海天)의 인물이...?" 북해천(北海天), 북해도와 중원을 잇는 극빙해의 패주(覇主). 이들의 수공(水功)은 가히 천하제일 (天下第一)로 알려져 있었다. 허나 이들은 극빙해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원(中原)은 물론새외변방까지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전문적인 살수집단(殺手集團). 황금(黃金)만 손에 쥐어주면 그들 은 설사 지옥(地獄)이라도 뛰어들 집단이었다. 흑평강의 설명(說明)에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殺手)? 어떤 자들이 나를 노리고 있단 말인가?'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헌데 그 소녀가 살수라? 살수 치고는 말괄량이로군. 후후후!' 천절오살마의 안색은 주천화처럼 태연하지 못했다. '으음! 소주께서 중원에 이르기도 전에 살수들이 덤벼 들다니 일이 간단하지 않구 나!' 잠시 후, 중인들이 물러가고 다시 주천화와 주운지만이 선실에 남아 있었다. "...!" 주운지의 눈이 상념에 잠겨 있는 주천화에 고정되어 있었다. "천화오라버니! 소매의 얼굴이 궁금하지도 않나요?" 그녀의 음성은 다소 우울하게 느껴졌다. "후후, 이미 보았소!" "흥!" 주운지가 뾰로퉁해서 냉소를 터뜨렸다. 스르륵! 다음 순간 그녀는 자연스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면사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순간 선실(船室) 안이 환해진 느낌이 들지 않는가! 아름답다! 살결은 눈처럼 희고, 두 눈은 푸른 비취를 박은 듯 영롱하게 빛난다. 경성경국(驚城驚國)의 절세용모란 바로 난화군주 주운지를 일컫는 말이리라. 허나 주천화는 이미 몸을 길게 눕히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지매, 옆 방에 지매를 위한 선실이 마련되어 있소." 그뿐이었다. "...!" 주운지는 미묘한 눈으로 주천화를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 떠도는 미묘한 빛, 색(色)이 있다면 과연 무슨 색일까? 모를 일.... 그녀만이 알 것이다. 강호(江湖), 무섭게 격변(激變)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었다. 침묵(沈默)과 고요, 그 바닥에 암류(暗流)를 형성하며 꿈틀거리는 야망과 혈기(血 氣), 수많은 문파(門派)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떠오르고 헤아릴 수 없는 신진고 수들이 부상(浮上)했다. 이른바 무도정진(武道精進)의 극성기(極盛期)가 바로 당대 (黨代)의 흐름인 것이다. 이 가운데 야망을 지니지 않은 문파가 어디 있으랴만은 천하를 놓고 각축할 수 있는 대파(大派)의 수효만 해도 적지 않았다. 소림(少林)을 주축으로 한 명문십대 문파, 그들은 유사 이래 가장 강대한 세력 (勢力)으로 성장한 채, 정파(正派)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 명문정파들에 맞선 채 세력을 팽창해 나가는 사파(邪派)의 기세도 무림사 초유의 것이었다. 우선, 천절오살마가 이백 년 만에 강호에 등장하기 무섭게 떠오 른 세력만 해도 오개문파에 달했다. - 구천만마문(九天萬魔門). - 수라사혼부(修羅死魂府). - 만독성(萬毒城). - 고루마교( 賜魔敎). - 사천궁(邪天宮). 기실 이들 오개 문파의 역사는 천삼백 년 전 칠천대극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 었다. 허나 이백십여 년 전, 천절오살마의 대(代)에 이르러 절문(絶門)되다시피 했고, 그 들은 대마인의 후인(後人)이라는 낙인에 의해 생존 자체에만 급급했을 정도였다. 그 러나 천절오살마가다시 강호에 나선 지금 그들은 불운했던 시절을 떨쳐버리고 포효 할 수 있었다. 이들은 곧 마도(魔道)의 주축으로 부상했다. 천하마인이 모두 이 오대사파의 휘하에 모여 들고 사파는 이 오 대세력을 중심으로 굳게 뭉쳤다. 공포의 마도(魔道) 일맥(一脈)이 형성된 것이었다. 헌데 풍운무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비단 양대세력 뿐이 아니었다. 그 성격과 존 재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사대신비문파(四大神泌門派)가 있었던 것이다. - 금광회(金光會). 강호최대의 신비문파, 막대한 재력(財力)을 과시하며 무서운 속 도로 솟아오른 금광회의 위세(威勢)는 이미 강호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회주(會主)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구성 인물이 대부분 비밀(秘密)이었다. - 대천루(大天樓). 낙양(洛陽), 전대(前代) 원국사(元國寺)가 있던 자리에 홀연히 세워진 구층석탑(九層石塔)의 이름이었다. 일개 석탑이 어찌 무림대파(武林大波)로 불리울 수 있으랴? 의 문, 그리고 신비할 뿐이었다. - 사혈마선도(邪血魔船島). 그 이름만이 전설(傳說)처럼 중원무림(中原武林)에 떠돌 뿐 위치 조차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섬(島). 허나 누군가는 사혈마선도가 움직이는 섬이라고 했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 아닌가? - 대막혈사탑(大漠血死塔). 대막(大漠)에 자리잡은 죽음의 탑(塔). 그들은 단 한 차례도 중원에 나선 적이 없 었다. 허나 그들이 중원에 눈길을 준다면? 아아! 모를 일이었다. 헌데 이토록 많은 세력이 각축하고 있음에도 무림은 조용했다. 폭풍전야(暴風前夜)의 고요. 그렇다! 이는 실로 대혈풍을 예고하는 고요일 뿐 진 정한 평화(平和)가 아니었다. 만약 여기에 하나의 기폭제(起爆製)가 던져진다면? 오오! 상상하기조차 무서운 일이었다. 천하(天下), 곧 무서운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회오리에 휘말릴 것이 아닌가! 풍운(風雲)이 태동(胎動)하는 중원의 대지(大地), 그 중원을 감 회 어린 눈으로 응시하는 인영이 있었다. 갑판, 거센 해풍(海風)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팔장을 낀 채 우뚝 서 있는 인영, 허리까지 늘어진 흑발이 해풍에 휘날 리고, 장삼조차 찢어질 듯 펄럭이고 있었으나 예의 인영은 석상(石像)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헌데 그에게서는 대자연조차 거역치 못할 절대자(絶對者)의 풍도가 풍기고 있지 않 는가? 거친 파도조차 발 아래 무릎꿇릴 엄청난 기도와 은자(隱者)의 고 독을 함께 풍기는 기이한 풍도, 바로 주천화였다. '중원! 드디어 중원의 땅인가?' 주천화의 눈이 점차 핏빛으로 잠겨가는 해면(海面)을 응시(凝視)했다. '아버님! 천화는 외롭군요.' 고독하다. 문득 주천화의 뇌리(腦裏)에 천마수라대제의 영상이 스쳤다. 천마수라대제, 주천화로서는 단 한 번 그의 유체를 대했을 뿐이 아닌가? 허나 그의 가슴으로는 천마수라대제의 감성이 스치고 있었다. 천마수라대제의 영상, 다정한 미소를 보내는 듯하다. '허허허, 제자야! 외롭다고 했느냐? 허나 진정한 남아라면 고독 을 이겨내야 하느니라! 아니, 즐길 수 있어야겠지!' 부친 주상걸의 영상도 그의 뇌리에서 자상하게 입을 연다. '천화야! 이제 너는 모든 일을 잊었겠지? 과거는 흘러간 물(水), 너는 그저 너의 길을 걸어야 하느니라!' 주천화는 수많은 상념 속에 잠시 시간의 흐름도 잊고 있었다. 어느새, 안간힘을 쓰고 해면에 걸려 있던 석양(夕陽)도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산발한 채 하늘(天)과 바다를 덮었다. "천화오라버니!" 문득 나직한 한 음성이 주천화의 등에 부딪쳐 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주운지였다. "후후후, 바다의 야경(夜景)은 실로 정취가 있군...." 주운지는 고개를 살며시 내저었다. "천화오라버니는 어릴 때부터 항시 쓸쓸해 보였어요!" 그녀의 음성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저는 그 동안 한시도 천화 오라버니를 잊어본 적이 없었어요. 믿으실지 모르지만. ..." "...!" 주천화가 몸을 돌려 주운지를 직시했다. 그 눈에 형용하기 어려운 빛이 스치고 있 었다. "그 말을 믿는다." "아...!" "나의 가슴에 아직도 한 가닥 인간의 감정이 남아 있음은...." "...?" "바로 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허나...?" "그것은 이미 십여 년 전의 일, 지금의 너를 대하니 오히려 그때 의 운지에 대한 영상(映像)이 흐려진다." 주운지의 몸에 미미한 진동이 일었다. 주천화의 음성이 담담히 이어졌다. "어릴 때의 운지는 맑고, 밝고 천사같았지...!" "...!" "헌데 지금의 네 눈에는 야망(野望)이랄까? 아니, 추한 욕망이랄 수 있는 인간의 더러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으음!" 주운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주천화의 말이 너무도 신랄하게 그녀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든 때문이었다. 문득 주천화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神光)이 뻗어 나왔다. "일국(一國)의 황녀로서 부족한 것이 있었더냐? 여인, 아니 소녀 의 몸으로 무림에 뛰어들 정도로 너의 입장이 곤란해지기라도 한 것이냐?" "오, 오라버니!" 주천화, 그는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일견 주운지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스스로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며 공허했으니.... "오, 오라버니!" 주운지가 처연히 외쳤다. "저는 지금 매우 힘든 일을 맡고 있어요. 그래요! 제 가슴에는 소녀의 순박함보다 추한 야망만이 담겨 있어요." 돌연, 그녀는 몸을 날려 주천화의 가슴으로 뛰어 들었다. "맞아요! 저는 천화오라버니를 처음 보았을 때, 반가움보다는... 흑흑!" 주운지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천화오라버니와 천절오살마 사이의 관계를 먼저 떠올리고... 그리고 이용하려는.. . 흑흑!" "...!" 주천화의 눈빛이 다시 무심해졌다. "저, 저를 욕하시겠죠? 나쁜 계집이라고? 흑흑!" 주운지의 오열이 높아갔다. "허나 천화오라버니를 처음 보았을 때, 오라버니가 살아 있는 것 이 너무너무 기뻤어요! 그, 그것만은 진심이었어요." 주천화의 손이 가만히 그녀의 몸을 토닥거렸다. "지매!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의 길이 있는 법. 스스로 그것이 옳 다고 느끼면 바로 그 길이 옳은 길이 아니겠소." "오, 오라버니!" "나는 지매를 탓할 생각은 없소. 오히려 아무런 야심도, 포부도 없는 나 자신이 우울할 뿐..." "화오라버니!" 주천화의 가슴에 안겨 있는 그녀의 어깨가 흔들렸다. 해풍(海風)은 냉기를 토하며 두 사람을 스치고 있었다. '화오라버니는 예전의 벙어리 왕자, 그 분이 아니야. 너무 높아 보여... 아아!' 주천화가 무심히 입을 연다. "지매! 바람이 차군, 이만 선실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소?" 바로 이때 한 인영이 갑판 위로 올라오다 그들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어머! 저 여우같은 계집애가!' 매서운 빛이 그 인영의 눈에서 쏟아졌다. '하지만 두고 보라지... 저 사내는 내가 먼저...!' "핏!" 나타나는 인영은 돌연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순간 주운지는 깜 짝 놀라 주천화의 가슴에서 떨어져 나왔다. '음, 운봉소저로군....' 주천화의 입에 고소가 맺혔다. 나운봉의 조소(嘲笑)에 실린 뜻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호호호, 운봉소저로군요." 주운지 역시 나운봉의 마음을 이미 헤아리고 있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있 었다. "호호호, 화오라버니! 이제 중원에 나가면 귀찮은 일을 많이 당 하실 것이에요! 그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다닌다면 말이에요! 호호호!" 주운지는 언제 우울한 표정을 보였냐는 듯 낭랑한 교소를 터뜨리며 갑판을 내려서 고 있었다. '흥! 여우같으니!' 나운봉은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얼굴을 붉히며 홱 돌아섰다. 휘이익! 나운봉은 한껏 토라져 한 곳을 향해 치달렸다. 나운봉이 잔뜩 부어서 선실로 뛰어들자 천면색환마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 "할아버지!" 나운봉은 이제라도 울음을 토해낼 듯한 기세였다. "허허허, 왜 토라져서 뛰어들어 오느냐?" "칫! 고 여우같은 계집애가 글쎄... 소공자와 갑판에서...." "허허허, 운봉아! 이 할아비도 네가 소공자와 맺어지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단다. " 나운봉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떨군 그녀의 목덜미가 타는 듯 붉었다. "그, 그게 아...." "허허허, 허나 이 일은 너희들의 문제이지 할아비도 도와줄 수 없구나!" "어머나! 누, 누가 할아버님에게 그, 그런 도움을 달라고 했나요!" 나운봉이 제아무리 발랄하다 해도 일개 소녀의 몸으로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흥! 누가 그따위 거만한 사내에게 시집을 간다고 했어요?" "시집?" 천면색환마의 능청스런 반문(反問)에 나운봉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이... 몰라요!" 나운봉이 천면색환마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허허허!" 그녀의 등을 가만히 토닥거리는 천면색환마의 눈에 부드러움만이 떠돌고 있었다. 또 다른 선실, 흑웅이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앞에 혈도왕 흑평강과 그의 손자 혈 도염라신 흑치상이 침중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저... 대조(大祖)님!" 흑치상은 더할 나위 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흑웅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조님께서는 강호의 정세를 짐작하고 계시는지요?" 혈도왕 흑평강이 그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조부님! 소손은 조부님께서 하루빨리 본문의 대사(大事)를 관장 하여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 "더우기 다른 분들은 이미 십일 년 전에 출도하셔서...." "허허허, 그들은 이미 기반(基盤)을 다져 놓았단 말을 하려는 것이냐?" 흑웅이 감았던 눈을 떴다. "예! 그러니 저희들도 하루 빨리...." "허허허, 걱정하지 말아라! 이 할애비 또한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느니라." "...!" "내 어찌 이백 년 동안 놀고만 있었겠느냐? 더구나...." 흑평강과 흑치상을 가만히 훑어보는 그의 눈에 득의가 비쳤다. "나는 소주께 바친 충정으로 기연(奇緣)을 얻었느니라!" "기연을...?" 흑평강의 눈에 의혹이 스치자 흑웅이 말을 이었다. "그 기연이란 바로 선조의 무학이 담긴 구천도절록을 얻은 것이다." "구, 구천도절록!" 흑평강과 흑치상이 동시에 경탄성(驚歎聲)을 터뜨렸다. "더우기 나에게는 소주가 계시다! 그 분이 천하독패를 마음 먹는 다면 그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다." "그, 그 분의 능력이 과연 그 정도란 말씀이오이까?" "허허허, 노부 또한 그 분의 삼초지적이 못되는 실정이니 누가 있어 그 분의 적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삼, 삼초지적도 못 되신다구요?" 흑평강과 흑치상의 안색(顔色)이 하얗게 질렸다. "과, 과연 그 말씀이 사실일 것 같으면... 그 분만 본문(本門)을 도와 주신다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겠군요." "허나...." 흑웅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분은 무림인(武林人)이 아니시고, 더구나 무림의 일에 관여하시지 않을 것이 니...." "으음! 헌데 그 분의 정체(正體)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지요?" "글쎄...? 그것은 나로서도 다만 황족(皇族)임을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황, 황족?" 흑평강과 흑치상의 안색에 또 한 번 놀란 빛이 스치고 있었다. 경악(驚愕), 그리고 침중(沈重),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쌍봉파파, 그들도 주천화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보세요? 그 천화라는 미서생을?" "글쎄? 그가 천절오살마의 상전임이 확실해진 이 시점에 있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단지...." "...?" "적(賊)이 될 것이냐? 아니면 주상의 동반자가 될 것이냐? 하는 것을 파악해야 될 것이다." "허나 그는 군주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듯 하지 않아요?" 기대의 빛이 함유된 음성이었다. "아니다! 그에게는 절대독존(絶代獨尊)의 기도가 풍기고 있었다. 결코 사사로움에 치우쳐 자신의 의사를 팽개칠 인물이 아닌...." "으음!" "그가 만약 주상의 동반자가 되지 못할 바에는 우리의 일에 개입 (介入)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 "그가 만약 본회의 적으로 떠오른다면 우리의 대업(大業)은 산산조각 날 것이다." "으음!" 쌍봉파파의 눈도 바다의 어둠을 응시(凝視)하고 있었다. 바다(海)의 어둠이 점차 그들의 눈 속에 자리해 가고 있다. 동상이몽(同上異夢)의 밤, 이렇게 익어가며 밝아오는 아침을 맞 으며 바로 중원에서 주천화가 맞이할 첫번째 태양(太陽)이 되리라. ■ 황 제1권 제8장 영웅천하(英雄天下) ━━━━━━━━━━━━━━━━━━━━━━━━━━━━━━━━━━━ 산동성(山東省) 청도(淸道). 석양(夕陽)이 오늘따라 더욱 핏빛을 뿌려내고 있었다.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청도의 절경(絶景), 그 타는 듯한 석양을 마주한 채 한 인영이 술잔을 넘기고 있 었다. 해월루(海月樓). 해변(海邊)을 접한 이곳 해월루의 이층 창가에 백의장삼 위에 금 포를 걸치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소녀인가? 길게 늘어진 흑발이 허리까지 덮고 있지 않은가? "후, 난생 처음 먹어보는 술... 무척 쓰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음성, 바로 주천화가 아닌가! "지매! 그리고 흑노, 운봉소저 모두 뜻을 이루길...!" 주천화의 얼굴은 이미 몇잔의 술을 넘긴 듯 붉게 달아 올라 있었다. 그 모습은 그 렇지 않아도 소녀처럼 보이는 그의 용모를 더욱 절세미인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었 다. '후후후! 그들은 모두 나와 행동을 함께 하고 싶어했지. 모두들 나를 배경으로 자신들의 야망을 이룩하려고... 허나 그들이 밉지는 않았어.' 한 잔 술을 넘기는 주천화의 모습은 더 없이 쓸쓸해 보였다. '지금쯤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아다니느라고 법석이겠지? 허나 나는....' 주천화의 얼굴은 취기가 오른 듯 붉었다. 뛰어난 내공을 지닌 그가 술기운을 감당 하지 못할 리 있겠는가? 그는 단지 순수하게 술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주천화에게 다가오는 일남일녀가 있었다. 남자는 이십이 채 되지 않은 미공자였는데 영준하기 이를데 없었다. 허나 준미한 그의 얼굴에서는 어딘가 오만한 기질이 엿보였다. 그와 동반하고 있 는 소녀 역시 절세의 미모를 지녔으나 전신에서 싸늘한 냉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빈 좌석을 찾는 듯 주루 안을 훑어보다 주천화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 다. "낭자(娘子), 빈 자리가 없어서 부득불 합석해야 겠는데 괜찮으시겠소?" '낭자?' 주천화는 일순 멍청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훗! 내 뒷모습만 보고 여인으로 착각한 모양이지....' 주천화는 실소를 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후후, 연(連)아야, 네가 대신 청해 보렴!" 미공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에 같이 앉아도 되겠어요?" 홍의경장(紅衣輕裝) 소녀가 냉랭한 눈으로 주천화의 등을 직시했 다. 실로 안하무인(眼下無人)적인 태도였다. "앉으시오! 허나 본좌는 여인이 아니오." 주천화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심한 음성, 허나 그들 남녀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무, 무엇이?" "어멋! 남자?" 주천화가 천천히 돌아 앉았다. 순간 그들은 멍청해져 눈을 크게 떴다. "형, 형장! 실례했소이다. 뒷 모습이 여인같기에...." 미공자가 황급히 두 손을 맞잡으며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헌 데 주천화를 대한 소녀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다니! 꼭 여자같이 생겨 가지 곤... 비(飛)오빠 때문에 나까지 실수했군!' 그녀의 입가에 슬그머니 고소가 맺혔다. '호호, 하긴 앞모습을 보았어도 여인인 줄 알았겠군. 호호호, 너무 예쁘잖아?' 당황해 하던 미공자 역시 평정을 회복하고 내심 쓴 웃음을 머금었다. '후후훗! 이 사람은 여장(女將)만 해 놓으면 중원제일 미녀라는 제갈낭자 뺨치겠 군. 너무 예뻐!' 허나 그의 눈에 다음 순간 은은히 놀란 빛이 스치고 있었다. '허나 놀라운 기도(氣道)다! 은은히 풍기는 기도가 숨이 막힐 정도이니... 혹시?' 미공자는 한 생각을 떠올리고 흠칫 몸을 떨었다. "...!" 그는 힐끔 소녀쪽을 바라보고 무어라 입을 열려다 신광(神光)을 발했다. '후후후, 연매가 이 사내에게 첫눈에 반했나보군.' 그렇다! 주천화를 넋을 잃은 듯 응시하고 있는 소녀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돌고 있 지 않은가! "험!" 그는 소녀의 정신을 일깨워 주려는 듯 헛기침을 터뜨리며 포권했다. "형장! 처음 뵙겠소. 사해(四海)가 모두 동도(同道)라 했으니 이 런 기회에 인사를 나누고 친분을 맺는 것이...?" "...!" "본인은 남궁비(南宮飛)라 하오." "...!" 남궁비가 스스로를 소개했으나 주천화의 눈은 여전히 창 밖에 고정되어 있지 않은 가! 남궁비의 눈에 한기(寒氣)가 스쳤다. '지독히도 건방진 자다. 감히 남궁가(南宮家)의 소가주(少家主) 인 내가 먼저 인사를 청했는데...!' "흥! 제법 반반하다 했더니 오만무례한 자로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홍의소녀의 눈에서 싸늘한 한광(寒光)이 일었다. 남궁비, 그는 바로 명문세가(名門世家)로 손꼽히고 있는 오대무 림세가(五代武林世家) 중 한 곳인 남궁세가의 소가주(少家主)였던 것이다. 이미 좌수쾌검(左手快劍)이라는 별호를 얻으며 후기지수(後期之 秀) 중 단연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그 옆의 소녀는 무림이 봉(武林二鳳) 중 한 명이자 바로 남궁비의 동생 남궁연(南宮蓮)이었다. '후후, 무림의 여자들은 역시 거칠기 이를데 없군!' 주천화는 내심 나직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낭자! 본인(本人)이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결례(缺禮)를 범했구료." 남궁연을 향한 주천화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스쳤다. '헉! 내, 내가 왜 이러지? 저 사내의 미소 한 번에 가슴이 떨려오다니...!' 남궁비와 남궁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담?' 이때였다. "와하하하, 안하무인이로군! 계집처럼 생긴 자가 감히 남궁남매를 능멸하다니...!" 주천화 앞에 두 명의 당당한 청년이 막아섰다. 사자눈에 짙은 검미(劍眉), 당당한 체구에 늘씬한 키, 실로 사내 다움을 물씬 풍기는 약관의 미청년들이었다. "어머! 사(史)오라버니!" 그들을 발견한 남궁연이 반색을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남궁연에 게 부드러운 눈길을 던진 후 다시 주천화를 쳐다보았다. "형장(兄丈)! 그대는 무척 건방지구료. 더구나 검을 두 자루 씩 이나 차고 다니고..., 멋으로 차고 다니기엔 너무 무겁지 않소? 와하하하!" "사형! 그만 하시고 이리로 오시지요." 남궁비가 다가왔다. 주천화의 눈빛은 무심했다. "오호, 이제보니 그대들은 무림십영(武林十英)이었구료." "흐흐흐, 귀는 제대로 박혀 우리들의 이름을 듣기는 한 모양이 군. 그렇다! 본인은 공동( )의 천검수재(千劍秀才) 사호충(史胡忠)이라 한다." 득의(得意)해 하며 말을 잇던 사호충의 눈에 서서히 살광(殺光)이 솟아나고 있었 다.. "음...!" 허나 주천화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후 사호충의 옆을 돌아 지나치지 않는가! "호호호, 알고 보니 겁 많은 서생(書生) 나부랑이었군." 남궁연이 그것을 보고 냉소를 터뜨렸다. 스윽! 순간 사호충의 옆을 스치던 주천화의 몸이 그대로 허공을 밟으며 남궁연에게 다가 갔다. 귀영(鬼影)의 움직임이 이러할까? 찰싹! 찰나 기이한 음성이 주루(酒樓)를 진동(振動)했다. "읍!" 남궁연이 자신의 입을 감싼 채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주천화가 자신에게 덮 쳐 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주천화의 손에 입술을 맞은 것이었다. "낭자! 그대는 입을 조심하시오!" 실로 놀라운 신법이 아닌가? 주천화는 이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아니! 이 자가 감히!" 남궁비가 싸늘히 외치며 허리에 손을 뻗었다. 순간 사호충 등도 주천화를 가로막으며 노성(怒聲)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감히 무림십영(武林十英)과 사룡이봉(四龍二鳳)에 정 면으로 도전하는 자가 나타났군!" 살기가 충만한 노호(怒號), 주루 안은 순식간에 살벌한 긴장에 쌓였다. "도전? 본좌가 너희들에게 도전을?" 주천화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분위기를 의식하지 못한 듯 맑은 미소였다. 허나 주천화의 눈 깊숙한 곳에서 기이한 녹광(錄光)이 떠오르지 않는가! '헉! 저 눈빛은...!' '난, 난생 처음이다. 저 눈빛, 가만히 있어도 심장을 쥐어 오는 듯 하다니....' 지옥(地獄)의 공포가 그들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식은 땀이 절로 맺혔다. "후후후, 너희들이 그렇게 느꼈단 말이냐? 그렇다면 그 생각 자 체만으로도 본좌를 모욕한 것이니 용서할 수 없다만...." 주천화가 신광을 갈무리 한 채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이 가만히 옆에 있는 탁자를 눌렀다. 푸시시! 순간 미세한 음향(音響)과 함께 거대한 석탁이 그대로 재가 되어 흩어지지 않는가! 연기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은 용서하기로 하겠다. 허나 두번째 만난다면 이와 같이 되리라!" 스윽! 주천화의 신형이 그대로 허공을 미끄러져 나갔다. "무림십영! 사룡이봉이라. 기억해 두겠다." 그의 음성은 이미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일순 장내엔 무거운 정적(靜寂)이 흘렀다. "사, 사형(史兄)! 중, 중원무림에 저런 자가 있었단 말이오!" 남궁비가 정신을 차린 듯 털썩 옆좌석에 주저 앉았다. "모, 모르겠소...!" "도, 도대체 저 자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그들은 물론 주루 안의 모든 사람들은 방금 주천화가 보여준 신위에 넋을 잃고 있 었다. "혹, 혹시 그 자가 천절오살마의 공동전인이라는 신비의 서생이 아닐까요?" 남궁비의 말에 네 사람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 그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 자가 아닌가 싶소!" 사호충이 질린 안색으로 더듬거렸다. "나는 이곳으로 오다가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이 있는데...." "어떤 소문이었소?" "천마지체의 미서생이 근일내 중원무림에 나타나리라는...." "그것은 이미 알려진 바가 아니오?" "그렇소! 허나 천절오살마와 신비미서생이 바로 이곳 청도에 나타날 것이라 했소." "이곳 청도에? 그, 그래서 이곳 청도에 기이한 긴장감이 떠돌고 있었구료." 그들의 안색(顔色)이 침중(沈重)하게 굳어갔다. 헌데 그들 중 남 궁연만이 주천화가 사라진 후 아직껏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 자가 나를...?' 기이한 빛이 그녀의 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더우기 입술을 때리며 입을 조심하라고 하다니!' 소녀의 신분(身分)으로 견딜 수 없는 모욕이 아니던가? '헌데, 헌데 왜 나는 그자가 밉지 않은 것일까?' 그녀는 스스로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다음에 또 만나면 죽이겠다고 했지. 허나 그 또한 조금도 두렵 지 않고 오히려 만나고 싶으니....' 그녀는 스스로의 알 수 없는 생각에 내심 당황을 금치 못했다. 고개를 살며시 흔든 다. '그가 과연 소문의 대마두인가? 허나 그에게는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어!' 이때 남궁비가 남궁연을 응시(凝視)한 후 침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연아야! 그만 내려가자!" 그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한 달 후, 낙양(洛陽)에서 무림십영과 사룡이봉의 회합(會合)이 있으니 그때 그 자에게 당한 모욕(侮辱)을 갚을 방도를 강구(講究)하자꾸나!" "으음...!" 사호충이 문득 신음같은 탄식을 토해냈다. "후유! 소제의 경망된 행동으로 항차 무림십영과 사룡이봉에게 어떤 재앙이...." "사형! 그런 말은 하지 맙시다. 어차피 우리는 한형제나 진배없지 않소!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천하의 무림십영과 사룡이봉이 힘을 합친다면 무엇이 두렵겠소!"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남궁연이 힘없이 뒤따랐다. 헌데 그녀 의 내심에 그녀로서도 이해못할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면 그때에는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텐데....' 진정한 모습,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남궁연의 가슴, 점차 한 곳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으니.... 쏴아아...! 철썩! 파도가 자신의 몸을 씻으며 광란(狂亂)한다. 해변(海邊),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휩쓸려 떠도는 모래를 밟으 며 한 인영이 족적(足跡)을 남기고 있었다. 주천화, 휘날리는 흑발이 그의 내심을 반영하듯 해풍(海風)에 몸을 맡기고 있다. 한 폭의 그림이려나! 허나 그림(書)이라면 너무 고독한 그림이리라. "무림십영, 사룡이봉... 실은 사귀고 싶었던 젊은 영재들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발랄함이 부러웠는지도 모르지...." 고독한 중얼거림, 천공(天空)을 밝히고 있는 휘황한 월색(月色) 만이 주천화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그래, 금룡(金龍)에 가보자! 어찌되었든 그곳이 그립다. 내가 자라난 곳이니...." 아련한 독백, 그의 눈은 이미 눈 앞의 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 었다. 추억(追億)이 주마등(走馬燈)이 되어 그의 눈에 환상처럼 스쳐가고 있는 것이 었다. 쏴아악! 헌데 돌연, 끊임없이 반복되던 파도가 확산되며 주천화를 덮쳐오지 않는가? 파도 속, 흩어지는 물방울과 함께 은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 주천화의 눈에서 섬광(閃光)이 번뜩였다. 스윽! 그의 신형이 믿어지지 않을 속도로 뒤로 퉁겨졌다. 순간 그가 딛고 있는 모래바닥 이 쑥 가라 앉았다. 실로 절묘하기 이를데 없는 기습(奇襲)의 연속(連續)이었다. 번쩍! 파도와 함께 주천화를 덮친 것은 별(星)처럼 생긴 암기였다. 주 천화가 그것을 피하는 순간 지면이 꺼지며 또 그 밑에서 검날이 솟구친 것이었다. "흥!" 주천화의 눈에서 녹광(綠光)이 떠올랐다. 찰나 그의 신형은 이미 허공으로 퉁겨지 고 있었다. 그 순간 파도 속에서 십여 명의 흑의인영이 솟구쳤다. 실로 놀라운 배합(配合)이 아닌가! 흑의복면인들의 기습은 이와같이 상대의 허(虛)를 찌르는 절묘하고도 쾌속 한 것이었다. 번쩍! 허나 그들은 오히려 주천화의 검세(劍勢)에 뛰어드는 결과를 빚고 있었다. 오척에 달하는 금천수라대검이 주천화의 손에서 빛을 뿌렸다. "천마쾌검류!" 한 가닥 검광이 찬란하게 해변을 맴돌았다. 그 빠름을 무엇으로 형용하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대하는 듯 했다. 주천화의 허리에서 한 가닥 섬광(閃光)이 뻗어 나오고, 거기에 마주친 검과 도가 마치 무우 토막인 양 베어져 간다. 그리고 그 순간 피보라가 일었다. 이것은 모두 허공 십여 장 높이의 휘황한 월광(月光) 아래에서 그야말로 일순간에 벌어진 광경이 었다. "...!" 비명성조차 일지 않았다. 피분수만이 쏟아지는 가운데 괴이한 적막(寂寞)만이 감돌 았다. 실로 순간적인 일, 사방(四方)에는 애초의 월파(月波)와 고요 뿐이었다. 툭... 투툭! 일순 시간조차 정지된 느낌이 드는 가운데 나직한 기음(奇音)이 들리기 시작했다. 흑의복면인 열 명 가량이 피를 뿌리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 었다. 그 위로 주천화가 서서히 허공을 밟으며 내려섰다. "너희들은 누구냐? 후후,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것인가?" 주천화가 담담히 웃으며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흑의복면인의 목에 발을 올렸다. "크악!" 순간 죽은 줄 알았던 흑의복면인이 비명을 토했다. "자결을? 살려 두었건만 실수로군!" 주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허나 그 음성은 담담하기 그지 없어 믿어지지 않을만큼 냉혹(冷酷)하게 느껴졌다. 주천화는 손을 뻗어 그 자의 복면을 벗겼다. "음! 그들의 검초에 미루어 중원무학(中原武學)이 아니라 짐작했지만...." 주천화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동영(東瀛)의 인자(忍者)가?" 쏴아아...! 철썩! 무심한 파도가 주천화의 놀람에 찬 독백을 쓸어가고 있었다. "음, 누구인가? 이들을 사주한 자가?" 주천화의 검미가 꿈틀했다. "음, 나를 노리는 자가 있었다니... 후후후, 좋다! 감히 본좌에 게 도전해 온 이상 그냥 있을 수는 없겠지. 죽을 것이다. 그가 먼저...!" 주천화의 눈 속에서 녹광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천화는 파도를 밟으며 다시 걸음을 옮겨갔다. "형님! 힘드시지요? 자리를 바꿔 들까요?" "괜찮아! 내가 작아서 그런 걸 뭐!" 이때 주천화의 뒤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며 두 사내가 나타났다. '허! 과연 천하는 넓구나! 이곳에서 흑노보다 더 큰 사람을 만나다니...." 긴장의 빛을 띄우던 주천화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십 장 쯤 뒤, 그곳에서 두 명의 청년이 거대한 통나무를 앞 뒤에 서 멘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실로 괴이했다. 뒤에서 통나무 끝을 어깨에 메고 있는 청년의 체구는 흡사 태산(泰山)을 방불했 다. 칠척도 넘는 거구(巨軀), 벗어부친 가슴은 물론 얼굴에조차 검은 털이 수북히 자리잡고 있어 어찌보면 사람같지가 않았다. 반면 옆에 있는 청년은 평범한 체구에 다소 영준한 용모였으나 동생과 함께 있으니 왜소해 보였다. "형님! 제가 뒤에 있으니 형님이 무거워 보이는...." "괜찮다니까! 어차피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옥신각신하며 통나무를 나르며 주천화에게 다가왔다. 결국 동생의 강요에 못이겨 그들은 자리를 바꿨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천화의 입가에 실소가 맺혔다. '후후후, 결국 그게 그거로군.' 과연 그러했다. 그들은 자리를 바꿔 거구(巨軀) 동생이 앞으로 왔으나 통나무는 여 전히 형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것이 거구 동생으로서는 못내 죄송하게 느껴진 듯 또 한 번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 "허어! 벌써 우리는 일곱 번이나 자리를 바꾸었지 않느냐? 통나 무가 나에게 기울어지는 것은 내 키가 너보다 작아서 그런 것이니 이제 신경쓰지 마 라!" "아, 아니예요! 그렇다면 이번엔 이렇게...." 거구 동생은 더듬거리며 통나무의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 게 되자 결국 통나무는 그 혼자서 멘 결과가 되었다. "어때요? 이젠 좀 가볍지요?" "...!" 형은 할 말이 없는 듯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어깨는 통나무에 닿지도 않았 던 것이다. "형님! 이번에 황대인에게 은자를 받으면 명의(名醫)를 모셔서라 도 청(淸)아의 병을 고쳐 줍시다!" 거구의 청년은 그제야 싱글벙글 웃으며 말문을 돌렸다. 거대한 통나무를 혼자 메고도 추호도 무거워하는 기색(氣色)이 없었다. "휴! 그래야지! 헌데 청아의 병이 워낙 해괴한 것이라...!" 형이라 불리운 청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에잇! 이 근처에는 돌팔이 의원들만 있는지 누구도 청아의 병명 (病名)을 알아내는 의원이 없으니...." "제기랄! 그러게 말이다. 청아의 병(病)은 점점 심해져만 가는데...." 그들이 일제히 불평과 근심을 토해내는 것을 듣고 있던 주천화의 눈이 부드럽게 풀 렸다. '음, 정말 순박한 사람들이로군!' 주천화는 왠지 그들에게 정감(情感)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태도가 실로 순박하여 그의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을 굴리던 그가 그들 형제에게 다가갔다. "형장들! 듣자하니 누가 몸이 불편한 것 같은데 본인이 진맥(診脈)을 좀 해 드려도 괜찮겠소?" "...?" 고개를 푹 숙인 채 근심의 빛을 띄우던 그들 형제가 고개를 들며 의혹(疑惑)의 빛 을 드러냈다. "헉! 이것은...!" 주천화에게 고개를 돌리던 그들의 눈이 커졌다. 주천화의 옆에 십여 구의 시신이 참혹하게 널브러져 있지 않는가! "형, 형님! 이, 이곳에 웬 시신들이...?" 그들 형제가 놀람을 금치 못하며 미처 주천화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자 주천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청아라는 분을 본인에게 맡겨 보시지 않겠소?" "아니, 공자님께서 의원이시란 말이오?" 거구 동생이 반색하는 한편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소! 가전의학(家傳醫學)에 다소의 성취(成就)가...." 주천화가 담담히 말하자 그들의 안색이 한 순간 밝아졌다. '이 미공자의 신태가 범상치 않다! 어쩌면 선친께서 말씀하시던 기인(奇人)일지도. ...' 그들은 같은 생각을 떠올린 듯 서로의 눈을 찾았다. 다음 순간 황급히 통나무를 내려놓은 그들은 정중히 포권했다. "저, 저희들은 백씨 형제로서 저는 백가도(白加刀)이고 이 아이는 동생 백전(白電) 입니다." "아, 백씨 형제이시군요." 주천화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께서 의술(醫術)에 조예(造詣)가 있으시다니 진, 진정 반갑습니다." 동생 백전이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태산같은 거구를 숙였다. 범종(梵鐘)이 울리듯 우렁찬 음성, 그의 순박함에 주천화는 빙긋 이 미소를 머금치 않을 수 없었다. "자! 한 번 가봅시다." 주천화가 자신에 넘친 음성으로 앞장섰다. '후후, 나 일신(一身)의 온갖 학문이 남을 위해 쓰여짐이 이렇게 흐뭇한 것일 줄은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는 그들 형제의 근심을 덜어 줄 자신이 있었다. 만수성의의 놀 라운 의도(醫道), 그 역시 한자도 남기지 않고 이미 그의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 다. 백씨 형제들은 주천화의 범상치 않은 풍도를 대하고 내심 기쁘기 한량 없었다. 헌데 얼마쯤 갔을까? 슥... 스슥! 돌연, 그들 앞에 세 명의 백의복면인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해변에는 몸 숨길 곳 하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쑥 나타난 그들의 신법은 실로 평범치 않은 것이다. 주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음, 또? 헌데 이들의 복장을 보니 좀전에 나타난 자들과 다른 것 같군.' 백씨 형제들 역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안색을 굳혔다. "누구시오? 왜 앞길을 막는 것이오?" 백전이 벽력같이 외치며 한 걸음 나섰다. "우리는 저 분에게 볼일이 있어 온 것이다. 너는 비켜라!" 백의복면인들 중 가운데에 있는 인물이 냉랭히 외쳤다. 백전이 고리눈을 부릅떴 다. "무엇이? 이 공자님에게 볼일이 있다고? 그게 어떤 볼일인지 나에게 말할수 없소?" 백전, 그는 우직하며 단순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주천화에게 어느덧 깊 은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주천화에게는 자연스럽게 남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어 백 전은 자신도 모르게 주천화를 감싸려는 것이었다. "건방진 놈! 너따위 놈이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니다!" "무엇이!" 쿵! 백전이 노호(怒號)를 터뜨리며 발을 굴렀다. 그 위세가 자못 대단했다. '흐흣! 체구(體軀)만 큰 것이 아니라 성질 급한 것도 흑노 못지 않군!' 주천화는 그 광경에 내심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헌데 저들이 무림인인 줄 알면서도 저토록 대담한 것을 보니 이 들 형제도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로구나.' "이놈이 보자보자하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무서운 맛을 보아야 눈물을 흘리겠 구나." 좌측(左側)에 있던 백의복면인이 한기(寒氣)를 떠올리며 손을 뻗어냈다. 슈우욱! 무서운 파공음이 일었다. 실로, 전광석화(電光石火)를 방불하는 장세(掌勢)가 쏟 아져 나왔다. 꽈앙! 둔탁한 폭음이 터지며 담담한 신음이 들려왔다. "와하하하, 그것도 주먹이오? 간지럽군! 이 뱃놈도 선친께 배운 한 가지 무공이 있는데 받아 보시겠오?" 백전은 그대로 있는데 장세를 뻗어낸 백의복면인이 어깨를 흔들고 있지 않는가? "아우야! 잠깐! 그들은 내가 맡을테니 너는 이 분 공자님을 보호해라!" 백의복면인들이 경악을 떠올리고 있을 때, 백가도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만! 우리는 싸우러 온 사람들이 아니다!" 백의복면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손을 내저었다. "두 분! 잠시 물러나 주시오." 주천화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그들에게 적의(敵意)가 없음을 느끼 고 있었다. (공자께서 혹시 천무왕자님이 아니오이까?) 문득 한 줄기 전음이 그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헉!' 주천화의 안색이 변했다. (놀라지 마소서! 소신들은 문국왕전하의 측근들이옵니다. 마마! 태산(泰山)의 경무장(敬武莊)을 찾으십시오!) 계속되는 전음에 주천화의 신형이 가볍게 흔들렸다. '경무장? 경무장!' 이때 주천화는 한 생각을 떠올리고 놀란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 분께서 계신 것을 내가 왜 미처 생각치 못했을까?" 이어 그의 입에서 격정에 찬 일성이 터져 나왔다. (마마! 이 근처에는 지금 많은 무림인들이 잠복해 있습니다. 옥 체를 보중하소서! 그들의 눈이 있어 예를 갖추지 못함을 또한 용서 바라옵니다.) 주천화가 격동에 몸을 떨고 있을 때, 그들이 가볍게 허리를 숙여보인 후 사라져 갔 다. 백씨 형제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의문에 잠기고 있었다. '헉! 모를 일이군 그들이 이 분 공자님을 대하는 태도가 이해하 기 어렵구나 도대체 이 분 공자님은 어떤 신분일까?' 그들의 눈이 새삼 주천화의 전신을 살피고 있었다. '으음! 저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보검, 그리고 금포 속에 걸치고 있는 저 백의 또한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때 주천화의 눈에 한광(寒光)이 자리했다. "후후, 아직도 남은 자들이 있었군!" "...?" 백씨 형제의 눈에 의혹이 스치는 순간, 주천화의 손에서 한 가닥 금빛 광채가 폭사 해 나갔다. 무서운 속도의 금빛 광채(光彩)는 주천화가 서 있는 일 장 앞의 모래 지 면으로 파고 들었다. "크악!" 순간 모래바닥 속에서 처참한 비명이 터지며 모래가 풀썩 뛰어 올랐다. 뒤이어 모래 위로 서서히 핏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시신(屍身)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모래만이 점차 붉은 색으로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엇?"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씨 형제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청히 서 있었다. "...!" 주천화가 핏빛으로 물든 모래바닥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순간 한 개의 금침(金針)이 모래를 뚫고 빨려 나오지 않는가! 바로 천마마라금강침 이었다. "갑시다!" 다음 순간 주천화는 넋을 잃고 서 있는 백씨 형제의 손목을 잡은 채 허공으로 치솟 아 올랐다. 쑤아앙! 단숨에 허공 이십여 장 높이로 치솟는 것을 깨달은 백씨 형제는 주천화의 이 놀라운 경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빛(光)이라 한들 이보다 빠르랴! 주천화의 신형은 한 순간 아득 한 허공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주천화가 사라져 버린 백사장에서 한 인영이 꿈틀거리며 솟 아나 가슴을 쓸어내고 있었다. "실, 실로 대단한 자다! 천검마은대(天劍魔隱隊)들을 단숨에 죽 이는 것도 놀랍기 이를데 없는데...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던 우리들까지 알아내다 니!" 그의 음성은 공포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으음! 할망구들의 전언(傳言)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구나!" 헌데 그가 치를 떨며 주천화가 사라져 간 천공을 올려다 보는 순 간 돌연, 한 가닥 전음이 그의 귓 속으로 파고 들지 않는가! (그대는 가서 전하라! 너희들이 본좌에게 도전해온 이상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바로 주천화의 음성이었다. "천, 천리마라전성술(千理魔羅傳聲術)!" 흑의복면인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저, 저 자는 내가 숨어 있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살려준 것이었단 말인가 !" 전신을 세차게 떨고 있는 그의 뇌리에 좀전의 주천화의 전음이 생생히 떠올랐다. -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우욱! 무, 무서운 자다!" 주천화의 음성은 무서운 예감(豫感)이 되어 그의 뇌리를 짓눌렀 다. 반드시 실현(實現)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이 순간 흑의복면인은 무서운 공포에 서 있기조차 힘듬을 느껴야 했다. 주천화의 말 한 마디,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의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 황 제1권 제9장 피할 수 없는 사랑(愛)! ━━━━━━━━━━━━━━━━━━━━━━━━━━━━━━━━━━━ 월(月), 만월(滿月)은 온누리에 골고루 그 은파(銀波)를 흘려내고 있었다. 산중초옥(山中草 屋), 조용 한 산중초옥을 덮고 있는 은파가 유독 포근하다. 청도의 유일한 산(山)인 이곳 계곡 에 자리 한 초옥의 안에 세 사람이 침상곁에 서 있었다. 침상, 그 위에는 한 명의 소녀가 창백한 안색(顔色)으로 누워 있었다. 십오 세? 소녀의 피부는 병색(病色)이 겹쳐 시리도록 창백했다. 허나 그 용모만큼은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월궁(月宮)의 항아(姮娥)가 이러할까? 창문으로 스며드는 월파 (月波)가 소녀의 용모를 더욱 환상적으로 보이게 하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군. 이국인(異國人)이 아닌가?' 의혹의 눈으로 소녀를 내려다 보는 이는 바로 주천화였다. 그렇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미소녀는 병색이 짙어 피부가 흰 것만은 아니었다. "이 소저는...?" 주천화가 눈을 돌리자 백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중원인이 아니지요" "원래 십 년 전에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온 것을 선친께서 발견하시고...." "아! 그랬었구료." 백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헌데 커 갈수록 몸이 야위어 가며 안색이 더욱 창백해져 가는데 다 자리에 눕는 시간이 점점 많아져 이제는...." 이때 주위의 두런거리는 음성에 잠이 깬 듯 소녀의 눈이 살포시 떠졌다. "...!" 창공에 떠도는 푸르른 빛이 그 눈에 떠올라 있었다. 벽안(碧眼), 심혼(心魂)을 뒤흔들 만큼 기이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눈(眼)이었다. '으음, 눈이 시리도록 푸르구나... 실로 대단한 미인이다!' 주천화는 내심 소녀의 아름다움에 감탄성을 발했다. "아! 오라버니들 언제 오셨어요 헌데...?" 벽안미소녀의 눈이 주천화를 발견했다. "이 분은...?" "청아야, 이 분께서는 너의 병을 고쳐주실 의원이시다." "의원?" 벽안미소녀가 새삼 주천화의 얼굴을 살폈다. "어멋! 무슨 의원이...!" 문득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우선 주천화가 젊은 서생 인 것에 놀랐고, 두번째로 주천화의 영준(英俊)한 용모에 놀란 것이었다. "하하하, 청아가 의원께서 너무 미장부시니 수줍어 하는군!" 백가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 벽안미소녀는 그 말에 더욱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있던 주천화의 입에서 돌연 경악성(驚愕聲)이 터져 나 왔다. "아니, 저 미간의 푸른 점은...?" 그의 시선은 벽안미소녀의 미간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 "푸른 점?" 백가도의 눈이 황급히 벽안미소녀의 미간을 주시했다. 그곳에 과 연 보일 듯 말 듯 미미한 푸른 반점이 떠올라 있지 않은가? "저, 저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놀라시는 것입니까?" 백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물었다. "그, 그게 과연 무슨 말씀이신지?" 백가도 역시 불안한 예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럴 리가? 저 반점은 독공(毒功)을 최상승으로 연마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주천화는 그들의 질문을 듣지 못한 듯 벽안미소녀의 미간을 뚫어 지게 살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예에? 독, 독공이라니요?" "독공?" 주천화의 말에 그들 삼 인은 해연히 놀랐다. "아, 아니요! 그저... 어디 맥좀 짚어볼 수 있겠소?" 주천화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후, 벽안미소녀는 수줍은 듯 간신히 한 손을 침구 밖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희고 눈이 부셨다. 그렇다. 가녀린 두 손은 실로 옥(玉)으로 다듬은 듯 너무도 아름다웠다. 비록 여위어 뼈만 남아 있었으나 너무도 섬세한 손이었다. "...!" 벽안미소녀는 한 손을 내밀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파르르! 어쩐 일인가? 그녀의 속눈썹이 떨리고 있으니.... '이, 이 분은 단지 의원일 뿐인데 왜 이렇게 자꾸 가슴이 두근거릴까? 숨이 가빠지고... 아!' "...!" 주천화는 소녀의 맥을 잡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순간 한 줄기 부드러운 기운이 손목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낀 소녀의 전신이 가볍게 떨렸 다. '아! 따뜻하다! 왜 이럴까?' 그녀의 가슴에는 그녀 스스로도 느낄 수 있는 파문(波紋)이 일고 있었다. '여태 수많은 의원을 대해 보았지만 이런 느낌은....' 한편, 소녀의 맥을 짚고 있는 주천화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 소녀의 전신은 완전히 독(毒)으로 뭉쳐져 있구 나! 누가?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그는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분개했다. '으음, 누군가 이 소녀를 독인(毒人)으로 키우려 했구나!' 놀라운 일이었다. 벽안미소녀는 철저한 안배에 의해 독인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 독인(毒人). 내쉬는 숨결조차 사람을 단숨에 즉사(卽死)시킬 수 있다는 독공 최고(最高)의 경 지. 독인이 되려면 독공(毒功)을 극성으로 연성하거나 어릴 때부터 독물(毒物) 속에 서 성장해야 한다. 벽안미소녀는 후자(後者)의 경우로 이미 체내(體內)의 독(毒)이 가공할 정도였다. '으음! 괴이하다. 완벽한 독인으로 키워지다가 십 년 전부터 중 단되어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주천화의 눈이 떠졌다. "저어, 어떻습니까?" 백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으음!" 주천화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상념에 잠겼다. '음...! 지금 이 소녀를 치유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이 소녀를 오히려 완벽한 독인이 되게 해야 한다.' 그의 눈이 백가도를 바라보았다. "이 소녀께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완벽한 독공의 대가(大家)로 만드는 방법 뿐이오!" "예에?" 뜻밖의 말에 백가도가 놀람에 찬 일성을 토해냈다. "원래 이 소저는 태어나면서부터 독인으로 키워졌었소. 누군가가 고금에 없던 완벽한 독인을 만들어 내려 한 것이었소." "...?" "헌데 소녀의 체질이 그것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점차 쇠약해지자 버린 것이 분명 하외다." "아...! 그, 그런 일이!" "소저! 어떻소?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독공(毒功) 일인자(一人者)가 되고 싶으시 오?" "독, 독공의 고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음울한 빛이 스쳐갔다. "소, 소녀는 결코 무림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오. 허나 그 방법은 매우 까다로운데다 한 가지 영약(靈藥)이 필요하오." "어, 어떤 영약이 필요하오이까?" 백전이 황급히 외쳤다. 이름만 알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구해올 기세였다.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 영약이 중요한 것은 아니오. 영약이 있다 해도 시일이 너무 늦었소이다." "그, 그 말씀은...?" 백가도의 안색이 굳어갔다. "천상 소저는 싫어도 독공의 고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주천화가 빙긋이 미소를 던졌다. "공, 공자님! 그렇다면 저는 보통 여자와는 다른 몸을...." 벽안미소녀가 다급히 말하다 말꼬리를 흐렸다. 목덜미가 풀어진 그녀의 모습은 실로 폭발적인 유혹(誘惑)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하하하, 아니외다. 안심하셔도 되오. 독을 운기하지만 않는다면 평범한 여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오." "아!" "허나 일단 독공을 운기하여 뻗어 낸다면 가히 무서울 것이 없을 정도가 될 것이 오." 다 죽어가던 사람이 일약 천하의 고수가 된다하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아, 아니? 병을 고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독공의 고수까지 된단 말씀이오?" 백가도와 백전이 기쁨에 충만한 음성으로 외쳤다. "아, 아무튼, 막내가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들은 동시에 외치며 벽안미소녀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허나 소녀가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사온데...." 헌데 그 순간 벽안미소녀가 눈을 빛내며 주천화를 응시했다. '부탁...?' "제가 독공을 익힌 몸이 되면 이미 평범하지 않은 일생을 살아야 할 운명, 공자께서 소녀를 거두어...." 벽안미소녀의 안색이 붉어졌다. 그녀는 더 말을 잊지 못한 채 고개를 푹 떨구지 않 는가. '거두어 달라고?' 주천화는 그녀의 말에 기이한 여운이 담겨 있음을 느끼고 해연히 놀랐다. "무슨 뜻이오?" "별뜻은 아닙니다. 단지 평범한 여인이 되지 않는데다 거두어 주 는 사람조차 없다면 이대로 죽느니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무엇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불타오르는 눈으로 주천화를 직 시했다. "아니, 막내야!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백전이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허나 백가도는 이미 소녀의 마음을 짐작하 고 있었다. '후후, 역시 막내는 사람을 볼 줄 아는군. 이 분 공자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천하를 오시(傲視)할대영웅, 그래! 바로 내가 일신(一身)을 의탁할 만한 분이시다!' 주천화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으음, 거두어 달라는 말은 단순한 것이 아닌 듯하구나? 나에게 자신의 평생을 맡기겠다는...?" 주천화는 그녀의 말뜻을 깨닫고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소저의 말을 받아 들이기 어렵구료. 나는 떠돌이에 지나지 않소. 어찌 소저를 감당할 수 있겠소!" "그렇다면?" 일순 소녀의 눈에 절망과 같은 경련(痙攣)이 일어났다. "소녀는 병을 고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흑!" 다음 순간 벽안미소녀의 눈에서 이슬이 맺히며 격한 흐느낌이 터졌다. "...!"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내려다 보는 주천화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가련한 여인, 나 역시 하나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좋다! 내가 보살펴 주리라!' 주천화의 가슴이 젖어왔다. "알겠소. 소저, 그만 눈물을 거두시오!" 주천화의 말, 바로 소녀의 요구(要求)를 받아 들이겠다는 뜻이 아닌가! "아!"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물안개가 맺혀 있는 그녀의 눈망울, 영롱한 환희(歡喜)로 빛난 채 주천화의 동공(瞳孔)에 박혀왔다. "...!" "...!" 두 개의 눈, 허공에서 얽힌 채 언제까지 떨어질 줄 몰랐다. "오라버니! 저를 좀 부축...." 잠시 후, 소녀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자세(姿勢)를 바로 하지 않는가? "...?" 백가도와 백전이 의혹(疑惑)을 느끼며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순간 소녀는 침상 위에서 주천화에게 사뿐히 대례(大禮)를 올리지 않는가! "음, 인사는 소녀의 몸이 완치된 후에도 늦지 않을 것이오." 주천화가 내심 당혹(當惑)을 금치 못하며 손을 내저었다. 순간 그녀의 허리가 저절로 펴지며 그녀의 몸이 침상 위에 반듯히 눕혀졌다. "그대들은 밖에 나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주시지 않겠소?" "예!" 벌써 형제들이 신이 나서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돌멩이들을 주어 내가 부르는 위치에 놓으시오! 먼저 이곳을 구 궁(九宮)으로 하여 현문(玄門)에 세 개...." 백씨 형제들은 주천화가 불러주는 위치대로 하나의 기진(奇陳)을 설치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짧은 시각이 흐른 후 주천화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감리(坎離)의 두 곳에 돌을 놓은 후 호위 해 주시오. 그렇게 되면 아무도 이곳을 발견치 못할 것이오." 주천화의 담담한 말에 백씨 형제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 대체 어떤 진(陳)이기에...?" "후후, 천마금석사진이라는 것이지요. 당금 무림에서 이 진을 파 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주천화의 말은 광오하기까지 했다. 허나 그 말을 의심하는 사람 은 세 사람 중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주천화에게서 불가능한 것이 없는 절대능력자의 풍도를 느끼고 있었 다. 주천화의 존재는 어느 사이에 그들 뇌리에 그렇게 인식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저, 이 단환(丹丸)을 복용하시오!" 주천화가 담담한 표정으로 품 속에서 한 개의 단환을 꺼냈다. "천하의 모든 독(毒)이 모여 있다고 할 수 있는 천마만독환(天魔萬毒丸)이오." "...!" 소녀의 입가에 행복한 듯 감미로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공자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서슴치 않고 천마만독환을 복용하는 그녀의 얼굴이 태양보다도 밝았다. "소저의 체내에는 엄청난 독이 이미 쌓여 있지만 몇 가지가 빠져 있어 완벽한 독인이 되지 못한 것이오." 주천화는 그녀의 꿈에 젖어 있는 듯한 표정을 바라보고는 내심 가슴이 철렁해짐을 느꼈다. '대단한 미모, 한 번 웃음에 천지가 다 흔들리는 듯 하군!' 그는 고개를 흔들며 품 속에서 천마마라금강침을 꺼냈다. "자, 누우시오! 내가 금침을 모두 꽂는 즉시 불러주는 구결대로 진기를 인도해야 하오!" 순간 그의 손에서 천마마라금강침이 동시에 소녀에게 폭사되어 나갔다. 파파팟! 천마마라금강침은 그녀의 옷을 뚫고 전신 팔개대혈(八個大穴)에 깊숙이 박혀 들었 다. 한 개의 혈도에 시술하기도 어려운 것을 동시에 펼치다니 실로 놀라운 수법이 아 닌가! 더구나 의복 위로 혈도에 정확히 꽂는다는 것은 범인들로선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자! 먼저 단전의 진기를 일으켜 중극(中極)으로...." 주천화의 음성이 마치 경(經)을 읽듯 담담히 이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녀의 전신요혈에서 점차 푸르른 기류 (氣類)가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청색기류는 소녀의 몸 한 치 위에서 떠돌다 다시 전신으로 스며 들고 있었다. 점차, 소녀의 이마에 떠올라 있던 푸른 반점이 사라져 갔다. 일각이 흘렀다. 소녀의 안색(顔色)에는 어느새 은은히 홍조(紅 潮)가 떠오르며 혈색이 비쳤다. "...!" 그것을 지켜보는 주천화의 눈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음, 됐다. 이제 이 소녀는 완벽한 독인이 되었고 독강(毒 )마 저 펼쳐낼 수 있는 경지에 달했군!' 툭... 투툭! 소녀의 전신 팔개대혈(八個大穴)에 꽂혀 있던 천마마라금강침이 퉁겨져 나왔다. 주천화는 만족한 미소를 떠올리며 천마마라금강침을 회수했다. "아!" 소녀의 눈이 떠졌다. 그녀의 얼굴에 병색이 씻은 듯 사라지고 어 느새 뽀얀 피부로 뒤바뀌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내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아!"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녀는 벌 떡 일어서 주천화에게 몸을 돌렸다. 한편, 정상을 회복한 그녀의 전신을 바라보는 주천화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우물(尤物), 그렇게밖에 설명할 말이 없었다. 성숙한 여인의 풍만함과 청초함. 아아! 벽안미소녀의 용모는 정녕 인간의 그것 같 지가 않았다. "소녀 백청청(白淸淸), 대인(大人)께...." 그녀는 사뿐히 대례하며 희열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실 로 눈이 부실 만큼 유혹적이었다. '중원인과 다른 이국적인 미(美)... 너무 성숙한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저릴 정도 로 청초하군!' 주천화가 넋을 잃고 있을 때 백청청이 돌연 주천화의 품 속으로 뛰어 들었다. "공, 공자님!" 뭉클한 여체(女體)가 주천화의 가슴을 압박했다. '헉!' 주천화는 백청청의 담대한 행동에 아연실색(啞然失色)했다. '중원인이 아니라 이토록 대담한 것일까?' 그는 아찔해지는 충동을 받으며 그녀를 떼어내려 했다. 허나 그 럴수록 그녀는 더욱 파고들 뿐이었다. "소녀는 공자님을 처음 본 순간 이미...!"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얼굴을 붉히며 주천화의 품 속에 더욱 고개를 묻었 다. "버릇없는 계집이라고 꾸중하셔도 할 수 없어요. 저는, 저는 공자님에게 첫눈에.. .." 주천화의 가슴이 진탕되었다. 주천화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이토록 담대하리라곤... 훗! 단순하고 솔직한 것이 오히려 시원해서 좋기는 하다 만....' "어때요? 너무 버릇이 없나요?" 백청청이 맑은 눈망울을 들어 주천화의 눈을 직시했다. "하하, 아니오, 괜찮소!" 소녀의 입가에 배시시 환희의 미소가 번지고 그 모습은 너무도 귀엽게 느껴졌다. '후유! 이 소녀는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군. 돌처럼 굳어 있는 나의 마음조차 뒤흔들 정도이니....' "헌데 소녀가 따라 다니면 공자님께 짐이 되지 않을지?" 백청청의 눈에 우수가 내리며 순간적으로 표정이 변하는 것을 대 한 주천화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어린아이와 소녀는 다루기 어렵다더니... 헛된 말이 아니로구나!' "왜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정말 소녀를 귀찮게 여기시고 계신단 말인가요?" 이번에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듯 처연한 신색이 아 닌가. 여차하면 홱 토라질 것 같은 기세이기도 해 주천화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아, 아니오! 이렇게 소저가 품에 안겨 있으니 정신이 없어 대답을 못했을 뿐이외 다." "풋!" 백청청이 예쁘게 실소했다. '이 분은 엄숙하기만 한 줄 알았다니 짓궂은 면도 있었구나!' 백청청이 더욱 주천화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호호호, 저도 공자님의 품에 안겨 있으니 사실은 너무 황홀해 정신이 없어요." '맙소사!' 백청청의 솔직한 목소리에 주천화가 비명을 터뜨렸다. "...!" 백청청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발돋움을 하고 고개를 젖혔다. 주천화의 가슴이 진 동되었다. 촉촉히 젖은 백청청의 입술, 그것이 바로 턱 밑에 있지 않은가! 그녀의 전신(全身)으로부터 성숙한 여인의 체향(體香)이 코를 찔러왔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워 주천화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 채 그녀의 등으로 손 을 들었다. 점차 주천화의 얼굴이 숙여졌다. 그의 더운 숨결을 느낀 듯 백청 청의 얼굴이 달아 오르며 입술을 쫑끗했다. '아!' 백청청은 아득히 구름을 밟는 황홀경( 惚境)에 접어들며 주천화의 입술이 떨어지기 만 기다렸다. 헌데 이 순간 주천화가 아쉬운 눈으로 고개를 들며 살며시 백청청을 떼어내지 않 는가? '왜?' 그녀의 눈에 아쉬움과 의혹이 교차했다. "진(陳) 밖에 누군가가 와 있소. 나가 보아야 하겠소." '하필이면 이런 때에!' 백청청의 입에서 욕이라도 튀어나올 아쉬운 순간이었다. 안타까움이 오죽하랴! "저, 공자님! 수상쩍은 인물들이 진(陳) 밖에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백가도가 초옥 밖에서 나직이 외쳤다. "그들은 이 초옥(草屋)을 찾아내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으나 쉽사리 떠날 기미가 아 닙니다." "음, 알겠소! 내 나가 보리라." 주천화가 밖으로 나서자 백청청이 그 뒤를 따랐다. 그녀의 눈에 서늘한 한기가 떠올려져 나타난 인물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 청, 청아!" 백씨 형제는 백청청이 제 발로 걸어 나오고 그 형색 또한 완전히 바뀐 것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라버니들!" 백청청이 몸을 날려 백가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오오!" 한 쪽에 서 있던 백전이 거구(巨軀)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글썽였다. 헌데 백청 청이 삼 장 허공을 단숨에 쏘아져 오자 백가도의 놀라움은 극에 달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이, 이럴 수가! 과, 과연 무림의 고수가 되었구나!" 이때 주천화가 천천히 천마금석사진에 다가갔다. 그 모습을 지켜 보는 백씨형제들의 눈이 천신(天神)을 대한 듯 감복했다. 펑! 주천화의 손짓 한 번에 천마금석사진이 파해되었다. 천마금석사 진의 밖에는 한 대의 화려한 사두마차가 서 있었다. 그 주위로 십여 명의 백의인들이 사방을 수색하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돌연, 주천화의 음성이 들려오며 그의 신형이 나타나자 백의인들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오! 과연 이곳에 계셨군요! 소신은 천웅대원수(天雄大元帥), 대 장군의 휘하 상장군(上將軍) 공손우(公孫宇)라 하옵니다." "천웅대원수! 외조부님의...?" "예! 공자님을 모시러 왔사옵니다. 어서 마차에 오르소서." 이때 백씨형제들은 그들의 문답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 천웅대원수!" 그들의 놀람, 당연한 것이었다. - 천웅대원수 경호찬(敬虎讚). 실로 대단한 인물이 아닌가! 일백이십만(一百二十萬) 명친건흥군(明親建興軍)의 수장(首將). 불세출의 명장(名 將)으로 이름이 드높았으며 또한 청렴결백하기로 명망높은 무인이기도 했다. 천하에 이 이름을 모르는이가 존재할 수 없었으니 그가 곧 천웅대원수 경호찬인 것이다. "오! 그대들이 외조부님의 휘하에 있단 말이오?" 주천화의 눈에 기쁨이 물결쳤다. "예! 장군님께서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계시오니 어서 마차에 오르소서." 상장군 공손우가 허리를 숙였다. (왕자마마! 외인(外人)의 눈이 있어 예(禮)를 갖추지 못함을 허물치 마옵소서.) 가느다란 전음이 주천화의 귓 속으로 들려왔다. '저, 저 분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천웅대원수를 외조부라 한단 말인가?' 백씨형제들의 경악은 점차 극을 달리고 백청청 역시 내심 경악성(驚愕聲)을 터뜨렸 다. '아! 저분은 엄청난 신분을 지니신 분이 확실하다!' 그녀의 놀란 눈에 주천화의 눈이 들어왔다. "청매! 마차에 오르시오." 담담한 음성, 백청청은 가슴이 터질 듯 기뻤다. '청매? 나, 나에게 청매라고! 더구나 마차에 오르라는 말은 결국 나를 데려 가겠다 는...!' 폭발할 것 같은 기쁨에 젖어 있던 그녀의 눈이 문득 백가도와 백전을 바라보았다. "오, 오라버니...!" "청아야! 어서 마차에 오르렴! 그리고 공자님을 잘 모셔라!" 백가도가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짐짓 호탕하게 외쳤다. "그, 그래! 어, 어서 마차에 타라!" 백전도 형의 뜻을 깨닫고 황급히 손을 휘둘렀다. "예!" 살짝 고개를 숙이는 백청청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제기랄! 좋은 일인데 왜 눈물이 나려고 그래!' 백전이 그 모습에 콧등이 찡해옴을 느끼고 쓰윽 눈가를 훔쳤다. 백청청이 사뿐히 마차로 다가가자 중인(衆人)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 대, 대단한 미모다. 천하에 이런 절세미인이 있었다니! 헌데 왕자님과는 어 떤 관계일까?' 주천화는 그들의 놀란 모습을 대하고도 담담히 마차에 올랐다. 두두두...! 히히잉! 주천화가 마차에 오르자 사두마차는 힘차게 발굽을 굴렸다. 마차가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백전의 눈에 희비(喜悲)가 교차했 다. '처, 청아하고 헤어지는 것은 대단히 섭섭하지만 청아가 귀인을 만났으니 또한 기쁘기 이를데 없고... 제기랄! 이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다.' (백형,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시오. 나는 언젠가 그대들을 찾을 것이오.) 문득 멀어져가는 마차로부터 한 가닥 전음이 들려왔다. 주천화의 음성이었다. 그들은 마차를 향해 감격의 눈길을 던졌다. "누구냐?" 상장군 공손우가 호통을 터뜨렸다. "웬놈들이 감히 명친건흥군의 마차를 가로 막는단 말이냐!" 사두마차, 주천화를 태운 채 질주하던 사두마차가 멈춰섰다. 그 앞에 십여 명의 인영들이 엄숙한 신색으로 벌려 서 있었다. 각양각색의 모습들, 허나 담담한 신태가 제각기 일대종사(一代宗師)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아미타불...." 공손우의 호통에 불진(佛塵)을 든 노승이 흠칫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바로 소림사의 절대장문인 천불선사가 아닌가! "아미타불... 명친건흥군이라... 허면 이 마차가 경무장에서 온 것이었단 말씀이오 이까?" "그렇다! 바로 천웅대원수의 명을 수행하는 명친건흥군의 군행(軍行)이다!" 천불선사와 함께 있는 구 인의 인영, 그들은 바로 우내십존이었 다. 우내십존은 공손우의 당당한 외침에 제각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노납들은 우내십존이라 하오이다. 오늘 감히 그대들의 행렬을 막아선 것에는 한 가지 까닭이 있음이니 오해는 거두어 주시오. 아미타불...." "우내십존!" 상장군 공손우는 뜻밖이라는 듯 우내십존을 새삼 둘러 보았다. "으음...! 그대들이 정녕 우내십존이란 말이오?" 놀람을 떠올리던 그의 눈에 서늘한 한기(寒氣)가 스쳤다. "그대들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소, 헌데 어찌 본 행렬을 막는 것이오?" 무형의 위엄이 서리서리 스며 나왔다. "후후후, 그들은 본좌를 만나러 온 것이니 상장군은 물러나시오." 주천화가 마차 안에서 조용히 말한 후 마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우내십존, 전일 흑노에게 들은 적이 있다. 나를 만나러 온 것은 내가 과연 천절오살마의 공동전인이 되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겠지.' 주천화가 지면에 내려서자 공손우를 비롯한 명친건흥군의 인물들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 그 광경에 우내십존이 경악했다. '저 미공자가 십일 년 전의 그 아이란 말인가? 보고해온 용모와 일치하니 그가 분명할 것인데 어찌 명친건흥군이 그를 호위해 간단 말인가?' 그들은 공통된 의혹을 느끼며 주천화를 응시했다. 천불선사가 합장했다. "그대가 과연 천절오살마가 구해낸 천마지체인가?" 순간 상장군 공손우의 웅후한 호통(號筒)이 천불선사의 말문을 막았다. "무엄하다!" 그의 눈에서 전광(電光)이 번뜩였다. "그대는 불제자로서 어찌 이토록 경망되이 군단 말이냐! 이 분에 게 감히 하대(下待)할 수 있는 분은 천하(天下)에 단 한 분 뿐이시다!" '헉!' '그, 그렇다면?' 상장군 공손우의 호통에 우내십존의 안색이 굳어갔다. '그렇다면 저 미서생이 황족이었단 말인가?' 이때 주천화 역시 한기를 떠올리며 우내십존을 훑어 보았다. 엄 청난 위엄이 태산을 덮치듯 그들에게 밀려갔다. "그뿐이 아니라 당금 무림에서 또한 본좌보다 높은 배분(拜分)을 지닌 자는 없다." "그, 그렇다면 천절오살마는...?" 그들은 주천화의 광오한 말에 일순 어안이 벙벙했다. "후후후, 그들은 결코 내 사부가 아니다." 순간 주천화가 슬쩍 천인혈옥삼을 가리고 있는 금포를 젖혔다. 찰나 천인혈옥삼이 드러나며 가슴의 핏빛 장인이 뚜렷이 드러났다. "허억!" "천, 천인혈옥삼!" 쿵쿵쿵! 천마수라대제의 독특한 독문표기(獨門表期)를 발견한 우내십존이 경악성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퉁겨지듯 물러났다. "저, 저것은 천마제혈검!" 천인혈옥삼의 허리에 천마제혈검이 꽂혀 있음을 발견한 그들의 경악성은 극에 달했 다. "천, 천마수라대제!" 그들의 전신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렇다! 그대들의 짐작대로 본좌는 천마대제(天魔大帝)이다." - 천마대제! 주천화의 담담한 일갈이 그들의 뇌리에서 천둥치듯 작렬했다. "허나 본좌는 선사(先師)와는 달리 천하제패의 야욕은 없다. 무 림의 일에 전혀 관여할 의사가 없다." 우내십존은 완전히 넋을 잃은 채 주천화의 말에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들 알고 물러가라!" 주천화가 몸을 돌렸다. 스윽! 그의 신형이 선 채로 마차 속으로 사라졌다. "...!" "...!" 장내는 냉수 뿌린 듯 고요했다. 그 적막 속에 주천화의 조용한 음성이 마차 안에서 울려왔다. "허나 만약 어느 누구라도 선량한 백성들의 피를 뿌린다면 본좌 는 곧 그 자에게 죽음을 내릴 것이다." 엄청난 선언, 우내십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상장군!" "예!" 상장군 공손우조차 주천화의 신위(身威)에 넋을 잃고 있다가 황급히 허리를 굽혔 다. 다음 순간 그들의 행렬은 우내십존을 뒤로 한 채 먼지를 일으키며 치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천, 천마수라대제의 후인이 나타나다니...!" "천오백 년 전의 예언이 과, 과연 실현된 것이란 말인가!" 주천화를 태운 사두마차가 오십여 장 멀리 사라진 후에야 우내십존이 정신을 가다 듬었다. "아아!" 만취신개가 탄식을 토했다. "큰, 큰일이 아니오! 천, 천마수라대제의 후인이 나타나다니, 이제 무림은...?" 천하무림의 안위를 염려하는 짙은 안타까움이 그로 하여금 익살을 부릴 수 없게 했 다. "더, 더구나 우리들은 아직 천령지체를 찾아내지 못했으니... 아아!" "아미타불... 허나 노납은 그 자의 말을 믿고 싶구료. 그 사람의 눈에는 진심만이 뻗어 있었소." 허나 천불선사의 안색만은 오히려 밝지 않은가! "허나, 그것이 그 자의 가면(假面)이었다면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니오이까?" 종남파의 절대기인 성신인의유협 사운빈이 고개를 흔들었다. "노부의 생각으로는 오늘 그를 처치해 후환을 없애는 것이... 그 가 아무리 천마수라대제의 무공을 이었다 하나 우리 십 인이 함께 공격한다면...." 말을 잇던 성신인의유협 사운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의호가 성심인의유협으로 불리우고 있는 까닭은 그가 정대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입으로 합공을 해서라도 주천화를 처치하자는 말이 나오니 그들의 두려움이 어떠한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있을 듯했다. "아니되오! 설혹 그를 죽일 수 있다 해도 그의 뒤에는 천절오살 마가 있지 않소? 더구나 그가 천웅대원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 하니...." "하긴 천절오살마가 분노해 날뛴다면 천하에 누가 그들을 막아낼 수 있겠소?" 천불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상황을 종합해 보건데 천절오살마가 아직 야욕을 드러 내지 않는 것은 그 미서생 때문인 듯 하오이다." "음...!" "아!" 우내십존, 그들은 주천화의 등장이 무림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종잡을 수 없 었다. "아미타불... 바라옵건데. 그가 마인(魔人)이 아니기만 비는 수 밖에...." 천불선사가 처연한 불호를 외쳤다. 그의 백미 역시 누구를 한탄하듯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 황 제1권 제10장 황실(皇室)의 풍운(風雲) ━━━━━━━━━━━━━━━━━━━━━━━━━━━━━━━━━━━ 경무장(敬武莊), 천웅대원수 경호찬의 종가(宗家). 일개 장원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군영(軍營)을 방불케 했다. 수많은 군사들이 삼엄 한 경계를늦추지 않은 채 요소요소를 지키고 서 있었고, 거대한 전각들의 당당함이 실로 보는 이로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이 경무장의 당당한 대문 앞에 두 갈래로 군사 오십여 명이 늘어서 있었다. 그 신위가 자못 놀라워 이곳 경무장에 큰 행사가 있음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오십여 명에 달하는 군사들은 이미 석상인 듯 우뚝 도열해 있고, 그 가운데에 한 인영이 초조한 안색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體軀)에 묵광(墨光)이 감도는 비단장삼을 걸치고 있 는 육순노인, 노인의 기태는 정녕 보기 드문 것이었다. 전신에서 풍기는 무형의 위엄, 두 눈을 부릅뜨면 풍운(風雲)이 변색되고, 사자후(獅子喉)가 터져나오면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숨을 죽일 듯 했다. 실로 전형적인 무장(武將)의 기질이 그의 전신에서 풍기고 있지 않는가? - 천웅대원수 경호찬. 그렇다! 그가 바로 일백이십만 명친건흥군을 호령하고 있는 천웅대원수 경호찬이 었다. 그는 촉(蜀)의 오기장군(五騎將軍) 관운장(關雲將)의 용모와 흡사했다. 또한 단전까지 늘어진백염(白髥)이 너무 탐스러워 관운장에 이어 미염공(美髥公)이라는 별호를 얻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니! 마마께서 왜 이리 늦으신단 말이냐?" 천웅대원수 경호찬은 언제부터인지 초조감을 감추지 못한 채 서 성이고 있었다. 허나 그의 안색에는 터질 듯한 기쁨의 빛이 충만 해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서성이던 그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했다. '허허허, 하늘이시여! 감사하오이다.' 그의 입에서는 당장이라도 호쾌한 대소가 터질 듯 했다. '이 불충한 놈에게 이런 광영을 내리시다니...!' 그의 눈에서는 연신 뜨거운 빛이 흘러 나왔다. '오!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천문왕자님께서 살아 계시다니!' 돌연 고개를 돌려 그의 뒤에 서 있는 무장을 바라보았다. "여봐라! 정녕 그 분이 마마이시더냐?" 그의 뒤에는 당당한 체구의 무장(武將)이 거대한 청룡도(靑龍刀) 를 공손히 받쳐든 채 시립해 있었다. 그는 곧 경호찬의 시위무장 (侍衛武將)이었고, 그가 받쳐들고 있는 것은 경호찬의 병기(兵器)일 것이다. "예! 분명 그 분이셨습니다. 더우기 혜비(慧妃)마마의 모습이 그 대로 남아 있어 쉽게 알아 모실 수 있었습니다!" "허허허!" 경호찬이 기쁨에 넘친 대소를 흘려냈다. '란(蘭)아야, 그 분이 정녕 살아 계신다는구나. 그 분은 너의 아 들... 곧 이 늙은이의 외손(外孫)이 되시지....' 천웅대원수 경호찬의 두 눈에는 부드러움만이 가득해 있었다.문 득 그 눈에 한 가닥 쓸쓸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헌데 문국왕전하께서는 어찌 되셨단 말인가? 그 분은 정녕 타계(他界)하셨단 말인 가?' 그의 눈이 쓸쓸히 젖어들고 있을 때, 돌연 일진의 소음과 함께 사두마차가 백여 장 밖에 나타났다. "오! 오셨는가?" 경호찬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사두마차는 순식간에 경호찬 앞에 당도했다. "장군님, 천문왕자님을 모셔 왔습니다." 상장군 공손우가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며 허리를 접었다. "오!" 경호찬의 눈이 마차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덜컥! 마차의 문이 열리자 천웅대원수 경호찬은 마른침을 삼켰다. 주천 화의 눈이 천웅대원수 경호찬을 훑었다. "...!" "...!" 순간 천웅대원수 경호찬의 눈에서 주르륵 뜨거운 것이 흘러 내렸다. '과, 과연 천문왕자님이셨구나!' 주천화의 눈도 젖어갔다. '이 분이셨구나! 가끔 금릉에 오셔서 나를 소중스럽게 안아 보시 던 그 수염이 멋있었던 할아버님!' 털썩! 소리와 함께 천웅대원수 경호찬이 지면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신(臣), 천웅대원수 경호찬, 마마를 배알하나이다." 지면(地面)에 이마를 맞댄 채 조아리는 그의 음성이 흐느낌에 가까웠다. "불충한 신을 용서하소서...." 주천화 역시 지면에 무릎을 꿇었다. "외, 외할아버님! 여전히 강녕(康寧)하시군요." 그의 손이 경호찬의 늙은 손을 잡아갔다. "마마! 노신, 변방에 있던 중 비보(悲報)를 듣고 황급히 내려갔 으나... 이미 두 분 마마께옵서는...." 천웅대원수 경호찬은 십일 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주천화가 젖은 얼굴을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이 아닙니까!" "마마! 문국왕전하께옵서는...?" 천웅대원수 경호찬의 눈에서는 폭포같은 눈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주천화의 얼굴이 굳어갔다. "부친께서는 이미...." "예? 결, 결국!" 경호찬의 신형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 그 분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일대군자요, 대학자이시며 권력에 초연하시던 그 분이...." 경호찬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 주천화는 입을 지그시 문 채 천공으로 눈을 돌렸다. 경호찬이 벌 떡 일어서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여봐라! 내 갑주(甲胄)를 가져오너라. 어서! 그리고 전 명친건흥군을 모아라!" 엄청난 광망이 그의 눈에서 폭사했다. "내 당장 마마를 모시고 금릉으로 가리라! 자금성(紫金城)의 간 신배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리라!" 천신(天神)이 노한 듯 엄청난 벽력성(霹靂聲), 중인들이 아연실색했다. "석년에 문국왕전하에게 누명을 씌운 대신(大臣)들을 이 기회에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쓸어 버리리라! 무엇들 하느냐!" 좌우의 수하들은 하얗게 질려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외조부님!" 주천화가 쓸쓸한 음성을 흘려냈다. "소손은 지금 먼 길을 오느라 지쳐 있습니다!" '헉!' 천웅대원수 경호찬이 내심 경악성(驚愕聲)을 터뜨렸다. 주천화의 나지막한 음성이 그의 뇌리에 이르자 천둥치듯 작렬하며 뇌리를 일깨워 준 것이었 다. "아! 노신이 그만 추태(醜態)를 보였군요. 자, 어서 안으로 듭시지요." 주천화의 얼굴에 미미한 홍조가 스쳐갔다. "...?" "청매! 어서 나오시오. 이 분은...." 순간 백청청이 마차에서 내려 경호찬에게 사뿐히 허리를 숙였다. "허!" 경호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허, 대단한 절세미인인지고.' 주천화는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소손의... 소손의...." "허허허, 알겠사옵니다. 마마의 비(妃)가 되실 분이셨군요." 백청청의 얼굴에 노을이 번졌다. 당황과 기쁨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눈망울이 슬쩍 주천화를 올려다 보았다. '아아! 이 분께서 이 미천한 계집을...'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려 서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허허허!" 백청청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경호찬이 못내 대견한 듯 자상한 웃음을 터뜨렸 다. 백청청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못했다. 내전(內殿), 주천화가 정좌해 있고 그 앞에 경호찬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외조부님! 편히 앉으시지요. 저는 왕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손자가 아니오이 까?" "어찌 노신이...." 경호찬의 눈에 감동의 빛이 얼룩졌다. "정히 그러시면 소손도...." "아, 아니옵니다." 경호찬이 황급히 자세를 고쳤다. 그의 가슴으로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 "...!" 두 개의 눈이 뜨겁게 얽혔다. 허나 그들에게는 나눌 정담(情談) 이 없었다. 있다면 회상하기 싫은 쓰라린 추억 뿐.... 잠시 후, 주천화가 북해도에서 쫓기던 십일 년 전의 이야기를 들 려주자 천웅대원수의 눈에 광기(狂氣)에 가까운 노화(怒火)가 폭발(爆發)했다. "이, 이놈들이! 아무리 황명을 받았다 하나 감히 금의위와 황무오천성 따위들이.. .." 당장이라도 그들을 찾아가 일격에 격살시킬 듯한 기세였다. "음,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황명(皇命)은 곧 천명(天命)인 것을...." 주천화는 고개를 흔들며 그후의 일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자신을 위해 안배되어 온 기연(奇緣), 주천화가 천마수라대제의 진전(進展)을 이어받은 대목에 이르자 경호천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허허허, 이런 홍복(洪福)이 다 있나! 이는 곧 하늘이 결코 무심 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오이까!" 경호찬은 춤이라도 출듯 기뻐했다. "장군님! 병부상서(兵部尙書)께서 납시었습니다!" 이때 문 밖에서 당황한 음성이 짙게 메아리쳤다. "이대인(李大人)께서?" 경호찬이 흠칫했다. "어서 뫼시어라!" '병부상서?' 주천화 역시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금릉 자금성(慈金聲)에 있어야 할 병부상서가 예고없이 경무장을 찾은 것은 이미 보통의 일이 아닌 것이다. "장, 장군!" 육순의 금포노인이 다급한 기색으로 들어섰다. 수염만 희지 않았다면 젊은 장한으 로 보일 당당한 풍채, 바로 당금 조정의 병권(兵權)을 쥐고 있는 병부상서 이광무 (李光武)였다. "이대인(李大人)! 무슨 일인가?" 천웅대원수 경호찬과 병무상서 이광무는 원래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은 서로 마음을 통하고 있어 항시 스스럼 없이 왕래하고 있었다. "장군! 들었는가?" 병부상서 이광무는 어쩐 일인지 매우 서두르고 있었다. "이, 이보게! 천문왕자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소문을 자네는 못들었단 말인가?" 경호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가 번졌다. "허허허, 들었네! 이미 알고 있었네." "무엇이? 그, 그것을 알고도 이토록 태평스럽게 앉아 있는가? 어 서 천문왕자님을 찾아뵈야하지 않겠나!" 병부상서 이광무가 어이가 없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너무도 경황(驚惶)이 없어 경호찬 앞에 앉아 있는 주천화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허허허, 자네도 이제 늙더니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가 보지. 하하하!" 경호찬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이보게, 광무, 자네는 천문왕자님의 모습도 못 알아 보는가?" 순간 뇌전이 머리를 관통하는 충격을 받은 병부상서 이광무는 황 급히 주천화에게 눈을 돌렸다. "헉!" "허허허, 알아 보시겠나?" "황, 황자마마!" 이광무가 부르르 몸을 떤 후 황급히 부복했다. "신, 병부상서 이광무, 천문왕자님을 배알하옵니다!" "일어 나시오!"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주천화의 용모를 살피던 이광무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오오! 이토록 훌륭히 성장하시다니! 너, 너무 틀리다. 이 기상 (氣像)! 마치 승천(昇天)을 기다리는 잠룡(潛龍)같지 않은가!' 어린 시절의 주천화만을 연상하던 그는 주천화에게 풍기는 비범한 기도에 입을 딱 벌렸다. "마, 마마! 이토록 훌륭히 성장해 있으시다니... 하늘의 광영(光榮)이오이다!" 잠시 후, 격정을 가라앉힌 그의 표정이 새삼 또다시 대례를 올리고 있었다. "음, 천문왕자님을 뵈오니 석년의 혼란했던 정국이 떠오르는군요." 주천화의 안색이 다시 침울하게 굳어졌다. "모두 지난 일, 이제 그때의 일은 다시 떠올리지 마시오." 고개를 돌리는 주천화의 모습이 실로 쓸쓸했다. "허나...." 이광무의 안색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당금(當今)에 이르러 그때의 혼란(混亂)이 또다시 재현(再現)될 조짐이...." "무엇이?" 경호찬이 이광무의 돌연한 탄식에 펄쩍 뛰어 올랐다. "...?" 주천화의 눈에서 순간 무서운 섬광이 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황실의 혼란은 십일 년 전 이미 종식되 었고, 당금은 폐하의 어지신 정치(政治)로 정국이 안정되었다고 들었거늘...." "그, 그것이...." 이광무가 더듬거리며 경호찬을 바라보았다. "여보게! 주위좀 물리쳐 주게나!" 병부상서 이광무의 얼굴에 긴장된 빛이 스쳤다. "여봐라! 밖에 누구 있느냐? 모두 물러가고 이곳에 누구도 접근치 못하게 하라!" "예!" 경호찬 역시 이광무의 태도(態度)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아연 긴장했다. "기실 현 황실(皇室)은 지금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 "돌연 황상께서 병상에 누우신 후 황실 내에는 석년에 못지 않은 암투(暗鬪)가.... " "무엇이? 아니! 폐하께서 와병(臥病) 중이시란 말인가?" 경호찬 역시 모르고 있었던 듯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네! 어의(御醫)의 말에 따르면 도저히...."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도 정정하시던 분이...!" "그러게 말일세. 해서 지금 황실 내에서는 후사(後事)를 도모하 기 위한 각축이 끊이지 않는 실정이라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설혹 황상께서 붕어(崩御)하신다 해도 대통을 물려 받으실 태자(太子)께서 엄연히 계신 이 마당에 후사를 도모하다니 그 무슨 해괴한 일인가?" "그게 그렇지 못한 실정이네." 병부상서 이광무가 고개를 흔들었다. "여러 대신들이 두 파로 나뉘어 한파는 태자전하를 옹위(擁衛)하고 또다른 대신들 은...." "아니 태자전하말고 누구를 내세운단 말인가?" 경호찬이 의혹을 드러냈다. "글쎄, 돌연 연왕(燕王)전하를 옹립(擁立)하려고 움직이지 않겠나...." "연왕전하? 연경(燕京) 덕무왕(德武王)을? 그, 그 분은 초야(草 野)에 묻혀 술이나 벗하시는 분이 아닌가?" "그렇다네! 나로서도 여러 대신들이 돌연 연왕전하를 옹위하는 까닭을 모르겠네. " 순간 경호찬의 눈에서 섬광(閃光)같은 노기가 들끓었다. 경호찬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살기조차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 오늘에야 그 놈들의 뜻을 알겠네! 간신배들 같으니!" "...?" "그놈들은 태자전하께서 남달리 영민하시자 태자께서 등극하시는 것을 불안해 여기는 것이 확실하네!" "무슨 뜻인가?" "연왕전하는 원래 무골호인(無骨好人)이시니 전혀 날카로운 점이 없으신 분이 아닌 가?" "그렇지! 그 분이야 순후한 인품만이 돋보일 뿐, 기실 왕재(王才)다운 재질조차. ..." 이광무는 자신의 실언(失言)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황족에게 사람이 모자라는 위인이라는 뜻의 말을 사용했으니 기실 민망했던 것이다. "허니, 그 분이 등극하셔야만 간신배들의 뜻대로 황권이 움직일 것이 아닌가!" "으음...!" 무서운 말이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음모(陰謀)가 아닌가? 이광무가 신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듣고 보니 과연 자네의 말이 맞는 것 같으이. 하면 자네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무장(武將)일 뿐 황실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 네!" "후유...!" 경호찬의 완고한 말에 이광무가 탄식을 흘려냈다. "기실 정세(政勢)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네! 대내는 점차 살기 등등하게 변해가고 대신들은 어느쪽에 서야 할지 전전긍긍하고 있다네." "모든 무장(武將)들도 이미 양파(兩派)로 나뉘어져 대치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네. 지금 흔들리지 않는 것은 자네의 휘하에 있는 명친건흥군 뿐일세!" "이, 이놈들을...!" 더우기 천문왕자님이 나타나셨다는 소식이 대내에전해져 사태는 더욱 혼란해지고.. .." 이광무의 눈이 슬쩍 주천화를 응시했다. 허나 주천화는 그들의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 아닌가. 주천화가 몸을 일으켰다. 실로 무심한 눈이었다. "쉬고 싶소!" 음성마저 한 점의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추 악한 권력다툼에 회의를 느끼고 있음인가? 잠시 후, 주천화가 물러난 내전에서 두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숙의하고 있었다. "음, 천문왕자님의 의도는 어떠하던가?" "...!" 경호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말씀은 안 하시던가? 그 분도 엄연한 대통을 이을 권한(權限)이 있지 않나!" "기실 나도 오늘에서야 그 분을 뵈은 것이네! 그 분은 문국왕전 하와 같이 권력 따위에 초연하실 분인 것만 느꼈을 뿐이네...." "...!" "틀린 점이 있다면 심계(心計)가 깊으시고 또 가공할 무공을 지니신 것 뿐일세!" "아니? 마마께옵서 무공을? 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하면 그 나이에 이미 반박귀진(返撲歸眞)의 경지에 이르셨단 말인가?" 경호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스러워하는 빛이 그의 노안(老眼)에 가득했다. "그 분은 마음만 먹으면 천하무림(天下武林)을 한 손에 움켜쥘 능력을 지니신 분 이네." "허! 금상첨화(錦上添花)로군!" 이광무의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쳤다. 경호찬의 안색이 엄숙해졌다. "한 치의 자(尺)를 가지고 그 분을 측량 말게! 그 분은 문국왕 전하께서 그리 되신 것을 알면서도 참고 계신 분이네.... 고금에 다시 없는 대인(大人)이랄까?" "낭패로군! 기실 수많은 대신들이 매일같이 자네의 의중(意中)을 물어오고 있다네. " "...!" "나, 일신(一身)에도 점차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압력이 들어오고 있어. 조만간 양파(兩派) 중 한쪽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네." "나는 본시 무장(武將)!" 경호찬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그저 지켜 보겠네! 만에 하나 마마께서 박차고 일어나신다면 모를까?" 어둡다!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는 탓만은 아니었다. 황궁(皇宮)의 풍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무림에조차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법... 그래서 유독 하늘(天)이 어둡게 느껴지는가! 길게 이어진 복도, 오른편으로는 대나무 숲이 운치있게 펼쳐져 있었다. "화랑(華郞)! 심기가 편치 않으신 듯...?" 복도를 따라 이 인(二人)이 걷고 있었다. 주천화와 백청청이었다. 백청청은 주천화의 안색에 우수가 떠돌 고 있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 아니요!" 주천화의 눈이 백청청을 그윽히 응시했다. '후후, 기이한 마력을 지닌 여인! 청매만 대하면 모든 우수가 일시에 걷히는 듯 하 니....' 백청청의 안색에 홍조가 떠올랐다. 주천화의 눈에 떠도는 그윽한 향기(香氣), 여인은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진정을 느끼는 법이 아니던가? "아이! 왜 그런 눈으로...." "하하, 청매는 아무리 뜯어봐도 절세미인이구료." "화, 화랑! 그러시면 소녀 몸둘 바를...." "후후후, 허나 이렇게 청매를 보고 있을 때만이 나에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오." "...!" 백청청의 마음, 구름을 밟고 있었다. "헌데 소녀에게 한 가지 걱정이...." "그게 무엇이오?" "화, 화랑의 얼굴이 너무 예뻐 혹 딴 여인들에게...." "하하하!" 주천화가 밝게 웃으며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의 두 팔이 서슴없 이 백청청의 가녀린 몸을 감쌌다. "하하하,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내 어찌 이토록 예쁜 청매를 두고 딴 여인을 쳐다 보겠소?" "화랑! 그랬으면 오죽 좋겠어요. 허나 화랑께서 피하신다 해도 소녀들이 화랑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문득 그녀는 외로운 표정을 띠우며 어깨를 폈다. "소녀는 화랑을 독차지 하고 싶으나 만일 그런 일이 생겨도 개의치 않겠어요. 대 신...." "대신?" "꼭 저에게 미리 말씀하시고 딴 여자를 취하셔야 해요." "뭐요?" "자고로 영웅이란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법이 아니겠어요? 허니 화랑께서 다른 여인 을 취한다 해도 화내지는 않겠어요! 허나 반드시 나에게 먼저 허락을 얻어야 해요!" "뭐요? 으하하하, 그러리다. 내 반드시 청매의 명에 따르겠소! 으하하하!" 주천화는 백청청의 뜻밖의 말에 대소를 터뜨렸다. 문득 그의 가 슴에 백청청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물결쳤다. "흡!" 백청청이 놀란 일성을 토했다. 돌연 주천화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로 겹쳐 왔던 것 이다. "아아...!" 비음(鼻音)이 이어졌다. 철썩! 쏴아아...! 문득 그녀의 뇌리 속으로 파도소리가 느껴졌다. 아득하다. 끝없 는 나락(奈落)으로 떨어져 내리는 황홀경이라고나 할까? 굳게 포 옹한 채 복도 가운데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는데.... "으음...!" 잠시 후, 주천화가 몸을 떼내자 백청청이 안타까운 듯 탄식을 흘려냈다. "청매!" 주천화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 "청매는 일신에 이미 가공할 독공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을 운용할 줄 모를 것이 오." "...!" 백청청이 주천화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 독공(毒功)을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무공을 전수해 주겠소." "무공!" "그렇소! 청매도 일신을 보존할 무공을 지녀야 하오. 나의 주위 에는 항시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오." 그의 눈이 좌측의 죽림(竹林)을 살펴 보았다. "자! 저곳이 좋겠군!" 주천화는 백청청을 안은 채 단숨에 대나무 숲에 날아 내렸다. "이것은 일천오백 년 전 독군(毒君)이라 불리우던 기인(奇人)의 무공이오." 주천화의 입에서 낭랑한 구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백청청은 한 가지라도 빼놓지 않으려는 듯 정신을 가다듬었다. - 독조진해(毒祖眞解). 바로 일천오백 년 전 천마수라대제 휘하의 칠천대극마 중 독군 호용삭의 절정무공. 독공의 조사라 할 수 있는 독공 호용삭의 무공은 실로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 다. 천절오살마의 마혈패천독강은 이 독조진해의 오성 정도의 위력 밖에 지니지 못했으니 그 무서움을 어떻게 형용하랴! "자! 이것은 마라금강침이라는 것이오. 독을 운기하며 이것을 쏘 아낸다면 천하에 피해 낼 자가 없을 것이오." 주천화가 품 속에서 작은 옥갑을 건네 주었다. "다 암기했소?" "예!" 백청청이 마라금강침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 운기하며 던져 보시오!" 주천화는 이미 천마마라금강침을 암기로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을 가르쳐 주었다. "예!" 백청청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에서 파파파파팟! 하는 파공음과 함께 무수 한 은광(銀光)이 폭사해 나갔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발사된 마라금강침은 모조리 우거진 죽림 으로 사라져갔다. 피시시시...! 순간 죽림(竹林)에서 기이한 음향이 들려오지 않는가? "어때요? 이 정도면 화랑의 호법(護法)이 될 수 있겠지요?" 백청청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귀여운 익살에 주천화가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놀랍구료! 대나무들이 모조리 타버리다니!" 과연 그러했다. 백청청이 던져낸 마라금강침에 적중된 죽엽(竹 葉)들이 모조리 타들어가고 있었다. 가공할 만한 위력, 천하의 어떤 것이라도 견뎌내지 못할 무서운 신위가 아닌가! 주천화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하, 그만하면 내 호법으로도 충분한 실력이오." "호호호!" 주천화의 칭찬에 백청청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이때 돌연 주 천화가 죽림의 한 곳을 쳐다보며 나직이 외치지 않는가? "자, 청매의 솜씨를 시험해 볼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 나오는 것이 어떠냐?" 백청청이 흠칫 놀라며 매서운 눈빛을 쏘아냈다. "누가 감히 엿보고 있었단 말이냐?" 순간 죽림 속에서 황급히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의야행 복을 걸친 노인은 바로 혈도왕 흑평강이었다. "소공자님! 다시 뵙게 되는군요." 혈도왕 흑평강이 정중히 허리를 접었다. "누군가 했더니 혈도왕이구료. 헌데 웬일이오?" "조부님의 전갈을 가지고 왔습니다." "흑노가! 헌데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어찌 알았소?" "허허허, 소공자님의 일거일동에 천하인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모르셨습니 까?" "으음...!" 주천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헌데 무슨 전갈이오?" 기실 이번에 본문은 그 동안의 면모를 일신(一新)하고 새롭게 강호에 나서기로 했 습니다." "...!" "해서 문주(門主)도 바뀌고 또 정식으로 개파대전(開派大殿)을 할 예정이지요." "아...! 알겠소. 그러니까 그 개파대전에 본좌가 참석해 달라는 뜻이 아니오?" "그, 그렇습니다!" "흠! 구천만마문의 새로운 탄생이라...? 웅할아범의 초대이니 가 봐야 되겠지."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혈도왕 흑평강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흔쾌히 승락해 주시리라고는...." "흑노는 여전하시오?" "예!" 흑평강이 고개를 들었다. "허허허, 매우 바쁘시게 활동하십니다. 기실 조부님이 직접 오셔 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워낙 바쁘셔서...." "음, 알았소! 내 필히 참석하리라. 헌데 구천만마문은 어디에 있소?" 흑평강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하남(河南) 복우산(伏牛山)에 위치해 있습니다. 개차대전이 개 최되는 날은 바로 돌아오는 중양절(中陽節)이오니...." "음, 아직 시일이 제법 남았구료." "예! 그리고 그 일만이 아니고...." "...?" "조부(祖父)께서 소공자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시다 하셨습니다." '긴히 들려줄 말?' 주천화가 의혹을 드러냈다. "저로서도 확실한 것은 모르고 다만 매우 중대한 일인 듯했습니다." "알겠소!" "그럼!" 주천화의 확답을 얻은 흑평강이 만족해 하며 고개를 숙였다. 순 간 그의 신형(身形)은 그대로 솟구쳐 야공(夜公)으로 자취를 감췄다. "화랑! 저 노인은?" 백청청이 궁금한 듯 눈을 돌렸다. "음, 나와 친분(親分)이 있는 사람이오. 다시 강호활동을 재개할 모양이오." "...!" '흑노, 만약 그가 나의 도움을 원한다면 그의 부탁만은 들어주고 싶었다.' 흑웅의 충직(忠直)한 얼굴을 떠올리는 주천화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화랑!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시는 거예요?" "하하하, 아니오. 오늘밤 왠지 한 잔 술에 젖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소." "그러시다면... 소녀가 간단히 주반(酒飯)을 마련하겠어요." "그러시구료. 이밤 저 교교로운 달빛과 향기 그윽한 술 한 잔 그리고 청매의 아름다움에 취해보고 싶으니 말이오." "어멋!" 백청청의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채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머리 위로 교교로운 월광(月光)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밤(夜), 여인의 가슴에 야릇한 공포와 설레이는 기대를 동시에 품어주는 시각이었다. '오늘 밤... 화랑과....' 백청청의 가슴은 실로 파도를 만난 듯 흔들리고 있었는데.... ■ 황 제2권 제11장 여체(女體)의 미성(美聲) ━━━━━━━━━━━━━━━━━━━━━━━━━━━━━━━━━━━ ① 내실(內室). 내실이 아늑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인(情人)들의 뜨거운 눈길이 실내를 따사롭게 만들고 있기 때문인가? 주천화와 백청청이 응시 하는 눈길에 점차 열기가 더해가고 밤도 성숙해가고 있었다. "청매!" 주천화의 뜨거운 눈길에 백청청은 혼백이 다 녹아가는 느낌이었다. "화랑! 소녀가 술 한 잔 따라 드리겠어요." 대담하기 이를데 없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허나 이 순간만큼은 술이 넘치도록 손을 떨고 있었다. "후후, 청매답지 않군!" "예?" "떨고 있으니 말이오!" "떨, 떨기는요." "후후, 그 음성도 떨리고 있지 않소?" "아이!" 백청청이 곱게 눈을 흘겼다. "하하, 자! 이리 오구료." 주천화의 손이 백청청을 잡아 끌었다. "...!" 백청청의 심장이 마구 고동쳤다. "청매!" "예?"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고개를 드는 그녀의 입에서 단내가 풍기 고 눈에는 이미 열정이 뛰놀고 있었다. "후후, 우리 서로의 입술 크기를 재보지 않겠소?" "예에...?" "하하하!" "어멋! 짓궂으셔!" 백청청은 주천화의 말뜻을 깨닫고 펄쩍 뛰어 올랐다. 허나 주천 화의 이 익살스러운 한 마디에 그녀의 떨림은 이미 진정되고 있었다. 여인(女人), 때론 한없이 내면(內面)으로만 숨어들지만 반면에 어떤 계기가 주어 지면 스스로도 놀랄만큼 대담해지는 법. 주천화의 말 한 마디는 그녀의 대담성을 유 도하는 것이었다. "호호호, 화랑은 알 수 없는 분이세요." "...?" "때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하늘과 같이 느껴지고...." "또...?" "또 때로는 짓궂은 악동(惡童)같으시니...." "악동? 내가 말이오? 그렇다면 악동답게 행동해 볼까?" "예...?" 주천화의 손이 와락 그녀를 끌어 안았다. "어멋!" "후후, 더 짓궂을 수도 있지!" 그의 손이 교묘히 백청청의 옷을 헤집었다. "앗!" 백청청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성이 터졌다. 주천화의 한 손이 어 느새 그녀의 젖가슴에 닿아 있었다. '하악!' 백청청은 비음을 토하며 주천화의 가슴에 더욱 깊숙이 파고 들었다. "음!" 주천화의 입술이 그녀의 작은 입술을 덮어갔다. '아!' 주천화의 입술, 용광로라 한들 이보다 뜨거울까? 입술의 크기? 영원한 미지수로 남은 채 주천화는 고개를 들었다. "...!" "...!" 야릇한 침묵이 실내에 고였다. 그 침묵이 백청청으로 하여금 흥분과 두려움 그리고 기대감을 느끼게 했다. 드높아지는 호흡으로 인하여 그녀의 가슴은 눈에 띄게 출렁 거렸다. "...!" 백청청은 갈증을 느꼈다. "청매!" "...!" "내 옷을 벗겨주겠소?" "예!" 그녀의 눈에 벅찬 환희와 야릇한 공포가 자리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공손히, 그리고 소중스러운 동작으로 주천화의 모피화를 벗겼다. "...!" 백청청은 더 이상 수줍어 하지 않았다. 망설임없이 다가와 그의 요대를 풀고 상의를 벗겨 내렸다. 주천화는 자신의 상의를 곱게 개어 한곁에 놓는 백청청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백청청은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듯 상큼한 눈으로 주천화를 응시했다.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다음 행동을 재촉하는 무언의 눈빛이었다. 그러 자 백청청은 일시지간 놀란 눈빛을 떠올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결심을 굳힌 듯 떨리는 손길로 주천화의 옷들을 벗겨가기 시작했다. 상의가 완전히 벗겨지며 우람하면서도 돌로 빚어 만든 듯한 조각 같은 건장한 상체가 드러났다. 백청청의 손이 망설이는 떨림과 함께 하의로 움직였다. 그녀의 콧등에는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렇다! 청백지신, 소녀의 몸으로 언제 남자의 옷을 벗겨본 적이 있으며 또 언제 사내의 나신을 목격한 적이 있었겠는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의 손은 너무도 긴장되어 무척이나 긴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을 주며 주천화의 하의를 벗겨내고 있었다. 무엇엔가에 걸려 하의는 잘 내려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걸린 부분을 벗겨내는 그녀의 손에는 의혹과 미지의 공포가 담겨있었다. '헉...!' 이어 그녀의 내심으로 짧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창처럼 불거진 하나의 생명체가 그 옷 안에 숨겨져 있었다. 스스로 살아 약동하는 힘찬 몸놀림이 내재되어 있는 사내의 중심이었다. 백청청은 기이한 전율에 전신의 힘이 모두 빠져 나감을 느껴야 했다. 순간 주천화 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으로 안겨왔다. "음...!" 그녀의 몸에서 비릿한 체향이 일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이 흘러내리기 시작했 다. 점차 그녀의 백옥같은 살결이 드러났다. 이국(異國)의 정취를 물 씬 풍기며 아직 남자를 모르는 그녀의 몸은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선(線), 목덜미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線)이 너무도 눈부셨고 다시 풍만한 젖가슴으로 이어져 환상같은 미(美)를 형성한다. 그 풍만하며 청초한 몸이 주천화의 눈길에 파르르 떨린다. 마지막 남은 고의(袴衣), 백옥 살결에 연분홍빛 작은 삼각천이 너무도 앙증맞았 다. 스르륵! 주천화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겨 내리자 석상 처럼 굳어 있던 그녀의 몸이 허물어져 내렸다. "화랑!" 그녀는 수줍은 듯 몸을 움츠리며 길고 흰 손을 뻗어 감았다. 아아! 꿈틀거리며 안겨드는 여체(女體). 빙설(氷雪)보다 희디흰 피부. 현란하다. 익을 대로 익어 농염하 기까지 한 백청청의 나신에서는 또한 풋과일의 향기가 풍겼다. 주천화의 손이 그녀의 가슴에 머물렀다. "아아!" 그 손은 다시 스르륵 밑으로 흘러 대리석같은 아랫배를 거쳐 비 밀스러운 샘을 찾아 출렁인다. 숲 속이 어느새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으음!" 주천화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름을 느끼고 서서히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더해갔 다. 여인보다 흰 피부, 허나 단단한 근육이 돌보다 억세다. "하악!" 주천화는 그녀를 침상 위에 똑바로 눕힌 후 오랫동안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묘한 열기를 담은 채 방심되어 있는 그녀의 눈은 눈 앞의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돌처럼 단단한 주천화의 몸이 부드럽게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이어 두 무릎으로 그녀의 두 다리를 벌리며 자세를 갖춘다. 백청청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고, 다시 그녀의 몸이 펴지는 동작 으로 신비지문은 사내를 맞이할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앗!" 그녀의 몸이 한순간 크게 튀어 올랐다. 여인지문(女人之門)이 함락되고 그 순간 더욱 무서운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아아!" 드디어 두 개의 몸이 완전히 일치된 것이었다. 그리고 진입이 시작되었다. 거칠면서도 감미롭고, 공포스러우면 서도 기대감을 주는, 그러면서 또한 터질 듯한 환희를 깊숙이 안고 있는 고통이었 다. "아아...!" 그녀는 작게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헌신의 기쁨이여! 허나 그녀는 그의 실체(實體)가 더욱 깊숙이 전해져 오자 미소는 걷혔다. 열기어린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아!" 그녀는 힘차게 주천화의 몸을 끌어 안았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 그녀의 귀에 북소리가 울려오고 그 북소리가 그녀의 체내에 서 일어나는 것임을 느낄 때, 그녀는 대우주(大宇宙) 속을 유영(流永)하고 있었다. 고통과 희열이 공존하는 밤, 고통이 점차 밀려가며 참을 수 없는 쾌감이 움트고 있 었다. 암석처럼 단단하면서 용암처럼 뜨거운 존재가 부드럽고 무서운 힘으로 그녀의 깊 은 곳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항거할 수도 항거해서도 안 되는 거친 힘 앞에 백청청 은 자신이 아득한 어느 곳으로 빠져드는 느낌뿐이었다. 노도(怒濤)! 주천화는 하나의 파도가 되어 광란하고, 파도 끝에 실린 백청청 은 아득히 구름 속을 뛰논다. "음...!" 백청청은 침상을 굳게 움켜 쥐었다. 하지만 고통은 아니었다. 그 렇다고 파도에 떠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녀의 체내에서 움트고 있는 감미로움, 형용할 수 없는 감미로 움이 점차 감당할 수 없는 쾌감(快感)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느 한순간, 그녀는 자신의 은밀한 곳에서 이는 폭발과 근육의 경직을 느꼈다. 바 로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흐느낌과 함께 더욱 아득한 나락으로 빠져 갔다. "흐흐흑!" 월광(月光). 여전히 실내로 스며들어 감미롭기만 했다. ② 복우산(伏牛山). 수백 리에 걸쳐 뻗은 대산으로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명 산(明山)이었다. 그 수려한 풍광(風光)은 물론이고 계곡마다 절경 (絶景)이 아닌 곳이 없어 예로부터 많은 유람객들이 즐겨 찾는 산이었다. 흐르는 물소리가 심신을 맑게 해주고 불어오는 바람이 세속의 번 뇌를 일시에 씻어주니 어찌 명산이라고 하지 않으랴? 이 복우산에 이르는 한적한 소로(小路)로 문득 한 구의 말이 보였다. 마상에는 일 남일녀가 나란히 앉아 주위의 경치를 감상하는 듯 천천히 말을 몰고 있었다. 천상의 선남선녀(仙男仙女)인가? 그들의 용모는 실로 눈이 부셨다. "하하하, 청매! 이렇듯 단 둘이만 떠나오길 잘했지 않소?" "예! 부득불 호위하겠다는 무장들이 따라왔으면 이렇듯 오붓하지...." 일남일녀, 바로 경무장을 떠나온 주천화와 백청청이었다. "하하, 이 얼마나 홀가분하오." 주천화의 얼굴에도 보기 드물게 밝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기실...." "...?" 백청청의 눈이 빛을 발했다. "마음같아서는 청매도 떼놓고 오고 싶었...." "뭐예요!" 백청청이 앙칼진 일성을 토하며 주천화의 몸에 더욱 억세게 밀착했다. "흥! 내가 놓칠 줄 아세요? 이렇게 꼬옥 붙어서 다닐텐데...." 백청청은 주천화의 허리를 감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하하하, 그래, 놓치지 말고 꽉 잡구료." 그들의 모습은 실로 다정하여 천공(天空)의 태양이 시샘할 지경이었다. "청매! 꽉 잡으시오!" 헌데 돌연, 주천화의 음성이 굳어졌다. 백청청이 고개를 갸웃했다. "놓치지 마시오!" 순간 주천화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스치지 않는가? 찰나 주천 화의 몸이 말(馬) 위에서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실로 가공할 속도였다. "아앗!" 백청청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순간 그들의 몸이 허공(虛 空) 백여 장 높이로 치솟아 있지 않은가? "무, 무슨 일이에요?" "십 리 밖에 괴이한 동정이 느껴졌소. 짐작이 맞는다면 바로 구천만마문이 있는 곳이오." 백청청은 주천화의 허리를 더욱 힘차게 끌어 안았다. '십, 십 리 밖? 세상에! 이 분의 능력이 과연 십 리 밖 동정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란 말인가?' 주천화는 허공 백여 장을 단숨에 치솟아 오른 후 비스듬히 천공을 가로지르기 시 작했다. 쏴아아...! 아! 인간이 어찌 새처럼 허공을 활보할 수 있단 말인가? 백청청 은 귓전을 스치는 파공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으음, 과연 구천만마문에 어떤 일이 생겼단 말인가?" 그의 말에 백청청의 눈이 떠졌다. 어느새 그녀의 발 밑에 웅장한 전각들이 들어왔 다. 헌데 곳곳에서 잔연(殘煙)이 솟구치는 가운데 나지막한 신음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아니? 싸움이 있었나 봐요?" 백청청은 전각의 곳곳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드러냈다. "으음!" 주천화의 입에서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 나오는 순간, 그의 신형 이 묵직한 기세(氣勢)로 떨어져 내리다 지면(地面) 한 치 위에서 사뿐히 멈췄다. "소, 소공자님!" "소주!" 주천화가 떨어져 내린 곳은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모여 있던 광장이었다. 몇 명이 주천화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 주천화의 눈에서 한기(寒氣)가 폭사되었다. 지면에 반듯이 눕혀져 있는 한 구의 시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당당한 체구에 태산이 누워 있는 듯 엄청난 거구의 노인은 바로 섬강천마부 흑웅이 아닌가! 죽은 듯 누워 있는 흑웅의 모습을 본 주천화의 눈에서 가공할 녹 광이 쏟아졌다. 지옥의 마화(魔火)가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어찌된 일이오?" 그의 음성이 허공을 뒤흔들었다. "그, 그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인들이... 습, 습격을...." 주천화의 주위에 천절오살마 중 네 명이 모여 들었다. "저, 저희들도 좀전에야 도착해...." 그들은 주천화를 대할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그 순간 주천화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천절오살마를 등진 주천화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흑노는? 흑노의 상세는?" 그의 음성은 은은히 떨리고 있었는데 그 음성에는 가공할 살기가 담겨 있었다. 천절오살마는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주천화의 전신에서 스며나 오고 있는 가공할 기운,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이, 이미 일각 전에...." 천면색환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주천화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렸다. 무거운 침묵이 죽음보다 짙은 공포와 함께 주위를 덮었다. "흑, 흑노가! 누가 그랬는가? 누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천화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살기만 으로도 사람을 죽일 듯한 기세로 부르짖었다. "그, 그게 어떤 자들인지...." 흑평강이 눈물을 훔치며 다가왔다. 그의 전신도 피투성이였다. "허, 허나 힘에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 그들은 본문의 개파대전에 맞춰 치밀한 함정을...." 흑평강이 비분의 눈물을 뿌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 그들은 저희 늙은이들이 모이는 것을 기다려 한꺼번에 몰살 시키려고 이곳에 수십만 근의 화약을...." 독화마황이 처연히 눈을 들었다. "제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폭발하며 마부가 몸으로 폭발의 강세를 막...." "그들이 누구요?" 주천화가 재차 싸늘히 외쳤다. "...!"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당금 무림에 천절오살마를 공격하고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인 물들이 존재한단 말인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본좌는...." 주천화는 여전히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흑노를 죽인 자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기 전에는 흑노의 유체를 대하지 않을 것이오." 주천화의 음성은 어느새 담담해졌다. 그러나 가공할 살기가 들끓 고 있었다. 천신(天神)의 노함도 이보다는 못하리라. "...!" 중인들은 주천화의 기세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 '흑노, 나는 타의(他意)에 의해 가까운 사람들을 잃어 왔소. 허 나 이제는 결코 더 이상 보내지 않을 것이오!' 영웅의 분노, 사나이의 분노는 가히 천하를 뒤흔들어야 한다. 주 천화, 그의 분노로 인해 항차 무림은 전무후무한 가장 잔혹한 살 성의 출현을 피하지 못하리라. "청매!" "예!" 백청청은 주천화의 무서운 신위에 질려있다 다급히 대답했다. "갑시다!" "소, 소주!" "소공자님!" "흑노의 유체는 본좌가 다시 이곳에 올 때까지 안장하지 마시오! 한 달, 그 안에 다시 오리다." 무서운 선언이었다. 한 달, 일 개월 안에 흑노의 원수를 갚겠다는 노호(怒號)가 아닌가! "소, 소주!" "소공자님!" 주천화가 그대로 걸음을 옮기자 중인들은 형용하기 어려운 공포에 젖어갔다. 헌데 주천화의 신형이 사라지자 천면색환마가 안도의 한숨을 흘려내지 않는가? "후유! 다행이다. 소주께서 눈치채지 못하셨다." "색마! 빨리 마부를...." "알았네!" 그들의 대화는 괴기했다. "끄응!" 헌데 천면색환마의 손이 몇 번 움직이자 시체같이 누워 있던 흑웅의 눈이 떠지지 않는가? "과연 색마의 심기는 놀랍군. 그 찰나적인 순간에 이같은 머리를 쓰다니...." 독화마왕이 혀를 내둘렀다.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네! 이곳이 이토록 쑥밭이 되었는데 자네들의 수하들은 무사할 성 싶은가?" "그, 그렇지! 도대체 어떤 놈들이 감히 우리를 친단 말인가!" "아무튼, 무서운 자들임에는 여지가 없네. 한순간의 기지(機智) 로 소주를 무림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지만...." 천면색환마가 다급한 기색을 떠올렸다. "노부는 본문(本門)의 일이 궁금해 한시라도 더 있을 수가 없네. 그럼!" 다음 순간, 천면색환마의 신형은 이미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러 자 나머지 삼 인도 황급히 자리를 뜨지 않는가? 무림천하(武林天下). 아아! 무섭게 엉키고 있었다. ③ 휘이잉! 스스슥! 삭풍(朔風), 한 줄기 스산한 삭풍이 갈대와 석양을 쓸어가고 있 었다. 핏빛이 진한 석양 그리고 갈대, 묘한 대조를 이루며 괜시리 음산했다. "화랑!" "...!" "이, 이제 그만 안색을 푸세요. 그러다가 옥체(玉體)가...." 복우산에서 멀지 않은 갈대숲, 백청청이 조심스럽게 주천화의 눈 치를 살폈다. 순간 주천화의 전신에 가공할 살기가 꿈틀거렸다. 두 눈에서 무서운 녹광이 뻗어나갔다. "청매, 어릴때의 나는 힘없고 문약해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눈물로 지켜보아 야만 했소." "...!" "흐흐흐, 허나 이제는 다르오! 나를 노하게 한 자들을 모두 죽일 것이오!" 소름끼치는 살기(殺氣)에 무심한 갈대조차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으리라! "바로 이렇게 말이오!" 일순, 주천화의 신형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의 허리에서 가공할 섬광이 뻗어나와 사면을 휩쓸었다. "크악!" 헌데 돌연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한 줄기 혈광(血光)이 솟구치지 않는가? 검광에 의해 갈대들이 넘어갔다. 헌데 갈대들이 베어져 넘어가자 삼 장 전면에서 한 인영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가? 우뚝 서 있는 혈립(血笠)의 혈의괴인(血衣怪人), 그의 전신에서 서서히 선혈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삿갓이 갈라지고 혈의괴인의 몸은 삿갓에서부터 그대로 일도양단 되어 갈라지기 시 작했다. 쏴아아...! 피(血), 혈의괴인이 두 쪽으로 갈라진 후에야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자! 이제 나오시지!" 주천화의 손에는 두 개의 검이 들려 있었다. 오척 길이의 괴형검 (怪形劍), 바로 금천수라대검과 천마제혈검이었다. 이 순간 금천수라대검의 길고 가는 전신을 타고 한 방울의 선혈이 흘러 내렸다. 이때 전후좌우 갈대를 헤치고 네 명의 괴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 다. 혈립(血笠)에 혈의(血衣)를 걸친 네 명, 놀라운 기세가 그들의 주위에서 회오 리쳤다. "화, 화랑!" 백청청이 기겁하고 주천화의 등 뒤로 숨었다. 사 인(四人)의 기 도는 실로 놀라워 대번에 초절정 고수임을 알 수 있다. "후후후, 청매, 두려워할 것 없소. 저들은 곧 흑노의 영전에 올려질 첫 재물이오. " 주천화는 두 개의 검을 검집에 꽂으며 웃었다. "화, 화랑! 왜 검을?" 백청청이 놀람을 드러내는 순간 주천화는 가볍게 손을 뻗어 주위의 갈대를 꺾지 않 는가? "후후후!" 주천화는 계속 웃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 그것은 사악 (邪惡)했다. 천마(天魔)의 무서운 미소인 것이다. "후후후, 그대들이 흑노를 죽였는가?" 혈립괴인들은 주천화의 가공할 기세(氣勢)를 대하고도 흔들림이 없었다. 네 명 혈립괴인들의 손에는 각기 괴이한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핏빛 섬칫한 염주(念珠), 전면의 혈립인이 핏빛 염주알을 굴리며 입을 열였다. "클클클, 그 말의 대답은 이것이 해줄 것이다." 순간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핏빛 백팔염주(白八念珠)가 일제히 퉁기며 주천화를 덮쳤다. 혈광이 허공을 완전히 차단하고 그 순간 가공할 혈광은 섬전과 같은 기세로 거의 삼 장 범위를 뒤덮었다. "후후!" 순간 주천화의 전신에서 아수라천존의 형상이 스며나왔다. 타타탕! 하는 요란한 음향과 함께 염주알들이 퉁겨졌다. 찰나, 주천화의 손에 들려 있던 갈대가 섬전같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마치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은 순간적인 것이어서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 였다. "크윽!" 혈립이 벗겨지며 경악에 차 있는 눈이 드러났다. 그 한쪽에 갈대 가 꽂혀 흔들리고 있지 않는가? 혈의괴인의 머리에는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도 없었다. "그대들은 혈승(血僧)?" "으음, 역시 천마대제답군." 왼쪽 눈에 갈대가 박힌 혈의밀승이 신음성을 흘려냈다. 헌데 이 순간 혈의밀승의 눈에 꽂혀 있던 갈대가 저절로 튀어나오고 있지 않은가? 파앗! 갈대는 그의 눈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주천화에게 튕겨졌다. 갈대가 박혀 있던 혈의밀승의 눈에서는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언제 갈대가 박혔냐는 듯 말짱했던 것이다. "사유혈마밀공(邪柔血魔密功)." 주천화의 입에서 은은히 놀람에 찬 일성이 터져 나왔다. - 사유혈마밀공(邪柔血馬密功). 전신이 솜처럼 부드러워지는 서천축의 기공(奇功), 유(柔)를 근 본으로 하여 전신에 창칼이 박혀도 목숨을 잃지 않고 상처조차 입지 않는 괴공이었다. "아앗!" 백청청이 다급한 비명성을 내질렀다. 주천화에게 쏘아져 가던 갈 대가 돌연 방향을 바꿔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청매! 당황하지 말고 독강(毒 )을...." 주천화가 흠칫하며 외쳤다. 순간 백청청의 주위에서 검붉은 홍염이 일렁였다. 갈대는 그 홍 염에 닿기 무섭게 녹아버렸다. "독, 독강까지... 일개 여인의 몸으로 독강까지 방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니...!" 혈의밀승들이 경악을 토했다. 순간 서로의 눈을 마주친 그들의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쳐갔다. 이어 그들의 신형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주천화와 백청청 을 포위한 채 회전이 점차 가속되기 시작했다. "후후, 천풍홍사륜(天風紅死輪)! 그대들은 천축 극라습찰(極羅習刹)의 인물들이었 군." 주천화의 주위로 무형의 담장이 형성되었다. 헌데 그 무형의 담 장은 점차 가공할 압박을 발산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흡(吸)인가 하면 탄(彈)이었다. 원에서 뻗어져 나오는 기세는 이 와같이 종잡을 수 없는 잠력(潛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서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 다. "후후후!" 그러나 주천화는 여전히 냉랭한 웃음만을 흘려내고 있을 뿐이었다. "끌끌끌, 죽으려고 반항을 포기한 것이냐?" 혈의밀승들은 음침하게 웃으며 가공할 잠력을 뿜어냈다. 그들의 천풍홍사륜은 일단 발동하면 천하에 적수가 없었던 것이다. 파아아...! 이때, 엄청난 강기의 회오리를 뚫고 주천화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와하하하하, 기다리고 있었다." 웅후한 득의의 광소(狂笑)가 터졌다. 혈의밀승들의 신형 역시 빙 글빙글 돌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사실 그들은 주천화가 압력을 견 디지 못하고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흥!" 헌데 냉랭한 비웃음이 그들의 귀에 작렬하는 순간, 주천화의 신 형은 솟아오를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지면을 향해 떨어져 내리지 않는가? "아앗!" "저, 저 놈이!" 혈의밀승들의 입에서 다급해 하는 경악성이 터졌다. 파파파팟! 주천화의 손에서 갈대가 네 줄기로 폭사했다. 가공할 속도로 막 고 피하고 할 여유를 불허하는 것이었다. "크아앙!" "와악! 저 저 놈이 우리들의 사혈(死血)을 알고 있었을...." 허공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후후후, 사유혈마밀공을 연성한 자에게는 도검이 무용지물이다. 급소가 없기 때문 이지. 허나 단 한 곳 용천혈(湧泉血)이 바로 사혈임을 본좌는 알고 있었다." 아아! 혈의밀승들의 발바닥, 그곳에 갈대들이 깊숙이 꽂혀 있지 않은가? "으...!" 이 순간 네 명 혈의밀승들은 허공에서 힘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마치 태풍에 날리는 가랑잎같다고나 할까? 빙글빙글 돌며 떨어져 내리는 그들은 축 늘어져 있어 이미 죽은 듯 했다. 헌데 그들의 신형이 주천화의 삼장에 이르자 무서운 속도로 다시 회전하는 것이 아 닌가? "와하하하하!" 휘잉! 죽은 줄 알았던 그들이 일제히 주천화를 향해 덮쳐 들었다. 파파파파팟! 혈륜(血輪)이 가공할 기세로 벼락같이 엄습했다. 또다른 밀승은 그 순간 핏빛 철 주를 쳐내고 있었다. 그들의 합공은 그 배합이 가공하리만큼 치밀했다. 더구나 주 천화와의 거리가 삼장에 지나지 않아 피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흥!" 주천화의 눈에서 녹광이 폭사했다. "간악한 놈들! 천마양목단강!" 찰나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천화의 전신(全身)에서 가공할 핏빛 아수라천존의 광망이 뻗어나갔다. 번쩍! 꽈앙...! 네 명 혈의밀승들의 몸이 한순간에 허공에서 가루로 화해 흩어지고 있었다. "화, 화랑! 그들은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백청청의 눈에 공포의 빛이 맴돌았다. "청매, 그들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었소. 저들은 사유혈마밀공 을 극도로 연성해 단 한 모금의 진기(眞氣)만 남아 있어도 살아날 수 있소." "아!" "청매! 내가 잔인하다 생각하오?" 주천화의 안색이 굳어갔다. "나는 결코 잔인한 사람이 못 되오. 허나 흑노를 죽이고 나마저 죽이려는 그들이 나를 잔인해지게 만들고 있소." 그의 눈에 녹광이 잔양(殘陽)처럼 감돌았다. "예, 알아요." 백청청이 주천화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왔다. "더 이상, 더 이상은 말하지 마세요." 백청청은 주천화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주천화의 고통 어린 마음에 손이 닿지 않음이 안타까웠다. "청매, 나는 이제 생각을 바꿨소. 본시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 으려 했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오." "...!" "누군지는 모르나 해볼만한 상대요. 그들은 천절오살마를 두려워 하지 않았으며 오직 나만을 경계한 것이요." "...?" "내가 이곳에 도착하는 것을 치밀히 계산해 놓고 모든 안배를 만들어 놓았소." "...!" 백청청은 듣기만 할 뿐 전혀 입을 열지 못했다. "허나 그들은 나를 완전히는 모르고 있소. 그들은 실패할 것이고 죽은 다음에야 후회할 것이오." "...!" "이렇게! 이렇게 돌려줄 것이오! 천마월검류(天魔月劍流)- !" 그의 허리에서 한 줄기 검광이 솟아났다.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검광이었다. 뒤이어 주천화의 입에서 터져 나온 노호성이 갈대를 베고 허공을 찢는다. "천마수라혈검류(天魔修羅血劍流), 천마사극마검류(天魔死極魔劍流)-!" 살기가 가득 담겨 있는 검무(劍舞), 주천화는 내심의 분노를 단 지 검무로 삭히려는 듯 미친 듯이 쌍검을 휘둘렀다. 대해(大海)가 밀려나고, 천지가 일시에 무너져 내린다. 꽈꽈꽈앙! 우르릉! 갈대와 사석이 함께 난무했다. 먼지가 피어 오르며 주천화의 몸을 가렸다. 백청청은 놀람이 극에 달한 듯 멍청해졌다. 주천화의 돌연한 행 동은 분노의 폭발로 보기엔 미심쩍었던 것이다. "청매, 우리의 발 밑에는 십만 근의 폭약이 매설되어 있었소." 아니나 다를까! 주천화가 어느새 신형을 거두고 싱긋 미소를 던지지 않는가? "철저하고 치밀한 놈들...! 허나 그들은 본좌의 능력을 경시했소." "예에?" 백청청은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적이 누구기에 이토록 무섭 고도 치밀한 안배를 펼쳐 놓았단 말인가? 주천화가 구천만마문에 서 돌아가는 길이 바로 이 갈대숲임을 어찌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단 말인가! "청매! 부탁이 있소." "네! 어떠한 명이라도...." 백청청이 다소곳이 고개를 들었다. "후후, 명은 아니오. 부탁일 뿐이지." "...!" "나는 이제부터 강호를 주유할 것이오." "강, 강호...." "나를 거부하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거부하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백청청의 몸이 진동했다. "그렇소. 우선 흑노를 쓰러뜨리고 나에게도 도전해 온 자들을 섬멸시킬 것이오." "...!" "지금으로선 아무런 단서도 없지만 내가 내 힘으로 차근차근 파 해칠 것이오. 오직 나만의 힘으로...." "위, 위험하지 않아요? 더구나 단신으로 행동...." "위험? 나에게 위험은 없소. 내가 누구요?" "...!" 백청청은 주천화의 엄청난 기개에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나는 바로 천마대제요." "...!" "청매! 경무장으로 돌아가시오!" 담담한 음성, 백청청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듯 고개를 떨구었다. "예!" "하하, 걱정마시오. 조만간 모든 일을 끝내고 경무장으로 갈 것이오." "예! 알겠어요. 화랑의 명이라면...." 다소곳이 대답하는 그녀의 눈에 물기가 스몄다. 주천화가 몸을 돌렸다. 쓸쓸한 절대영웅의 고독이 뒷모습에 감돌았다. '화, 화랑...!' 이별의 순간이 덧없이 흐른다. 여심(女心), 항시 기다려야 하는 숙명의 여심이 잉태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 황 제2권 제12장 백전(白電), 하얀 번개! ━━━━━━━━━━━━━━━━━━━━━━━━━━━━━━━━━━━ ①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읍(大邑)으로 문물(文物)이 고루 발달 한 개봉은 무림의 명문 십대문파 중 개방( 幇)의 총단이 있는 곳이었다. 달(月), 월광은 다 스러져가는 토지묘 위에 걸려 월파(月波)를 던져낸다. 언제부터인가 개봉교외 허름한 토지묘(土地墓) 주위에는 수많은 걸인(乞人)들이 침중한 표정으로 포진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살광(殺光)을 번뜩이는 수백 명의 걸인들, 그들의 손에는 각기 병장기가 들려 있고 앞으로 닥쳐올 어떤 일에 대비하는 듯했다. 스스슥! 이때 토지묘의 전면 십여 장 앞에 한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백 의에 화려한 금포장삼을 걸치고 있는 미서생, 바로 주천화였다. "흠! 이곳이 천하제일방(天下第一幇)이라는 개방의 총타(總陀)인가?" 주천화의 담담한 눈빛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헌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마치 격전을 대비하는 듯 하지 않은가?" 주천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떼어 놓았다. 삐이익! 그제야 주천화를 발견한 듯 돌연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천공을 흔들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휘황한 횃불이 밝혀졌다. 대낮을 방불 하는 수많은 횃불들의 모습은 어찌보면 일대장관이었다. "후후후, 대단한 위세로군. 이것이 설마 나를 영접하기 위한 것은 아니겠지!" 주천화는 담담히 중얼거리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춰라!" 휙... 휘익! 그의 전면에 십여 명의 걸인(乞人)이 내려섰다. 그들의 손에는 모두 타구봉(打狗棒)이 쥐어져 있었고 두 눈은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대는 금광회의 사자인가?"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위맹스러운 체구, 날카로운 안 광(眼光)이 일견에 대단한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금광회? 이들이 어찌 나를 금광회의 사자로 본단 말인가?' 주천화의 뇌리에 한 생각이 스쳤다. '음, 그러고 보니 이들은 금광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군.' 주천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본좌는 천마대제이다. 귀방의 방주를 만나러 왔다." 그를 막아선 걸인들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천, 천마대제... 금광회의 인물이 아니란 말인가?" "어서 방주를 데려와라!" 주천화의 광오한 외침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들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아, 아니, 이 자가 감히 지존을 모독하다니!" "이, 이 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그다지 광망스럽게 구느냐?" 당장이라도 덮쳐올 듯 흉폭한 기세를 드러냈다. 헌데 그 순간, 주천화가 천천히 몸을 돌리지 않는가? "본좌는 일각의 여유를 주겠다. 일각 안에 방주가 나오지 않으면...." "...!" 무서운 여운에 개방 제자들은 섬칫한 공포를 느꼈다. "개방은 오늘로 천하에서 사라질 것이다." - 개방은 천하에서 사라지리라! 오! 이 얼마나 광오한 외침인가! 그것도 개방의 총타 안에 당당 히 서서 서슴치 않고 내뱉다니.... "으...!" "미, 미친 놈이구나...." 엄청난 충격에 중인들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흥! 미친 놈이 확실하군.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을 백면 서생 주제에 이곳이 어디라고...." 이때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며 조소를 터뜨렸다. 허름한 옷, 얼굴 여기저기에 땟국이 흐르는 인물이었다. 헌데 가 냘픈 체구에 긴 흑발은 곧 그가 소녀임을 보여주지 않는가? 십오륙 세? 다 떨어진 흑의를 걸친 소녀의 용모는 거칠고 더러운 차림에도 불구하고 눈이 부시도록 예뻤다. '여인(女人)? 개방에 여자가 있었던가?' 주천화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걸인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입가에는 경멸어린 조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호호호, 당신이 지금 본방을 멸한다고 하셨나요?" 가소롭기 이를데 없다는 듯 그녀는 양 손을 허리에 척 걸친 채 쏘아보고 있었다. - 흑봉취접(黑鳳醉蝶) 강추령(康秋玲). 그녀는 바로 무림십영에 올라 있는 신진고수였다. 흑봉취접 강추령의 일신 화후는 놀랍기 이를데 없어 전 무림에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타고난 천품(天品)에 무공의 성취 또한 높아 개방사상 최초의 여 방주로 내정되어 있을 정도인 것이다. 주천화의 눈에 한기가 스쳤다. "일각이 가까워지고 있군." 일순 가공할 마기가 그의 몸에서 일었다. "너는 여인이기에 본좌를 능멸한 것을 문책(問責)치 않겠다. 허나...." 주천화의 주위로 서서히 괴이한 기운이 물결쳤다. 그 가운데에 천천히 하나의 형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서운 형상, 태초(太初)부터 마신(魔神)으로 불리우며 공포를 주던 아수라천존의 형상이었다. '헉!' 흑봉취접 강추령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저, 저 자의 기도...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그녀의 뇌리로 후회같은 감정이 뇌전처럼 자리했다. '정, 정녕 신비의 천... 마... 대... 제였단 말인가!' 이때 돌연 혹독한 한풍(寒風)이 회오리쳤다. 주천화의 손에서 뻗어난 음한진기(陰 寒眞氣)는곧바로 한 사람을 덮쳐갔다. 바로 조금 전에 주천화에게 욕설을 퍼부었던 인물이었다. "크악!" 처절무비한 단발마의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그 뒤에 쩍... 쩌 쩍! 하는 기이한 음향이 이어졌다. 놀라운 광경이 아닌가? 주천화의 장력에 적중된 개방 수하가 그 대로 얼음으로 화한 후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후후후, 이것은 시작일 뿐이지...." 주천화의 차디찬 냉소는 그대로 지옥의 숨결이었다. '이, 이럴 수가! 인간의 몸이 순식간에 얼음으로....' 흑봉취접 강추령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음...!" "으음!" 사방에서 무거운 신음이 터졌다. 허나 그들은 다음 순간 살광을 뿜어내며 주천화를 포위해 들었다. "후후후, 감히 본좌에게...." 주천화의 표정은 시종일관 무심하기 이를데 없어, 보는 이의 등 줄기에 식은땀이 솟게 만들었다. 스르릉! 주천화의 손에 천마제혈검이 쥐어졌다. 순간 살기어린 금빛 검기 (劍氣)가 주위 십여 장을 덮었다. "후후, 몇 명이 죽어야 개방방주가 나타날까 궁금하군!" 지옥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듯 무서운 살기가 피어 올랐다. "멈추시오!" 이때 토지묘 밖에서 번개같이 세 인영이 쏘아져 왔다. "대, 대제께서 어인 일로...." 나타난 이는 바로 개방의 전대장로 개옹 비종후였다. 그의 좌우 로는 역시 신태가 범상치 않은 두 명이 따랐다. 개옹 비종후. 우내십존 중의 한 명으로 강호인의 명망을 한몸에 받고 있는 전 대기인이 아닌가! 그 개옹 비종후가 주천화를 발견하고 안색이 질려 더듬거리고 있 었다. "흠, 그대는 십존 중의 일 인(一人)이었군." 주천화의 전신에서 한기가 가라앉았다. "방주는 바로 나, 송아무개이외다. 그대는 누구기에...." 개옹 비종후의 좌측에 서 있던 인물은 바로 개방의 현임방주 절 독신개(絶毒神 ) 송양(宋陽)이었다. 그의 눈에 노기가 떠오르며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개옹 비종후가 황급히 저지했 다. "장문사질!" 절독신개 송양은 개옹 비종후의 행동에 의아함을 금치 못하며 주천화의 모습을 새 삼 살폈다. "개옹, 그대는 본좌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은가?" "대, 대제! 그것은 절대 아니외다." 개옹 비종후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 말을 누가 믿으랴! 당금 무림에서 최고의 배분을 지녔다 할 수 있는 개옹 비종후가 일개 백면서생 앞에서 쩔쩔매다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알겠소." 주천화의 눈에서 녹광이 가라앉자 개옹 비종후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본좌는 당금의 무림 정세를 알고 싶소." 개방( 幇), 곧 강호의 정보통이 아니던가? 그들의 정보망은 천 하에서 가장 광대하고 또 신속했다. '아!' 개옹 비종후는 주천화의 의도를 깨닫고 더욱 안도했다. '후유! 본방에 원한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었구나. 구천만마문을 비롯한 천절오살마의 세력이 기습당한 것을 보복하려고....' 개옹 비종후가 주천화의 전신에 은은히 떠올라 있는 살기에 고개를 흔들었다. '으음, 이 자는 지금 극도로 분노하고 있다. 과연 섬강천마부를 공격한 자들이 누구인지 모르나....' 이때 한 곁에서 관망만 하고 있던 흑봉취접 강추령이 그의 사조 가 쩔쩔매는 것에 분통이 터진 듯 고함쳤다. "흥!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군!" "령아야!" 순간 개옹 비종후가 기겁했다. 허나 흑봉취접 강추령은 막무가내였다. "흥! 본녀가 네놈의 버릇을 고쳐주겠다." 째앵! 뾰족한 음성을 터뜨리는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두 개의 작은 은 장도(銀粧刀)가 들려 있었다. 무서운 검기가 그 은장도에서 꿈틀거렸다. "버릇이 없군! 돌아서라!" 주천화의 눈에 조소가 떠올랐다. "아앗!" 순간 흑봉취접 강추령의 몸이 저절로 돌려졌다. 동시에 번쩍하며 백광이 허공을 치 달렸다. "대, 대제!" "그대는 여인의 몸이기에 죽이지는 않겠다." 허나 개옹 비종후가 경악실색하여 몸을 날리려는 순간 주천화가 담담히 내뱉으며 금천수라대검을 거두고 있지 않은가? 한줄기 미 풍(微風)에 흑봉취접 강추령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흩날렸다. "무, 무서운 쾌검(快劍)이다." 흑봉취접 강추령이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전율에 몸을 떨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려 주천화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 치욕 어린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당, 당신의 이름은 뭐지요? 이, 이 수모는 내 반드시...." "후후, 본좌는 주천화요." "흑!" 순간 흑봉취접 강추령은 신형을 홱 솟구쳤다. "당신, 주천화라고 했지요? 이제 당신은 나의 눈길을 피하지 못할 거예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녀의 입에서 한 가닥 전음이 흘러나 와 주천화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죽을 때까지 당신을 쫓아 다니겠어요.) 표독한 음성이었다. 허나 주천화의 눈은 이미 개옹 비종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구천만마문의 참화를 들었을 것이오. 의심되는 집단에 대해 알려주시오." "허나 사실 당금무림에서 구천만마문을 칠 수 있는 문파가 있으리라고는 아직 도 믿지 못...." "의심쩍은 곳이나 말하시오!" 주천화가 잘라 말하자 개옹 비종후가 마른 침을 삼켰다. "드러나지 않은 사대신비세력이 가장 의심스럽다 할 수 있소이 다. 그 중에도 대천루(大天樓)가 가장 신비하여 혹 그들의 소행이 아닌가...." 개옹 비종후는 당금의 무림정세를 언급한 후 사대 신비세력을 거론했다. - 대천루(大天樓). - 대막혈사탑(大漠血死塔). - 사혈마선도(邪血魔船島). - 금광회(金光會). 사대 신비세력, 이들의 정체는 실로 신비하여 아직까지 그 성격 을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들의 세력이 이미 명문 구파일방을 능가하리라는 것 뿐이었다. "사대신비세력 중 위치가 알려진 곳은 대천루 뿐이며 바로 낙양 에 서 있는 구층석탑이 그들의 총단입니다." '대천루? 좋다. 그 사대 신비세력을 하나하나 뒤지리라! 확증만 잡는다면....' 주천화의 눈에서 또다시 가공할 녹광이 떠올랐다. '그들이 설혹 하늘에 있다 해도 뒤쫓아 죽이리라!' 주천화의 기세에 개옹 비종후가 몸을 떨었다. '휴...! 도대체 어떤 자들이 저 자를 건드렸단 말인가? 아아, 이 일은 무림에 복이 될지 화(禍)가 될지 알 수 없구나!' 그의 노안에 강호의 안위를 염려하는 탄식이 흘렀다. "고맙소. 본좌는 이번 일을 잊지 않겠소." 그의 귀에 주천화의 음성이 들려오는 순간 주천화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 다. 개옹 비종후가 지면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유! 본방의 천 년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넘겼도다." 개옹 비종후는 지면에 앉아 넋잃은 듯 중얼거렸다. "이제 강호의 신비세력들이 모조리 무너지겠군." 안도인가? 탄식인가? "아아! 무서운 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무림이 피에 잠길 것이니...." 비종후의 탄식, 쓸쓸히 야공(夜空)을 떠돌고 있었다. 헌데 혈풍(血風)은 주천화만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개방( 幇). 천하에 일거방으로 불리던 그들은 이날 밤 금광회의 고수들에게 철저히 유린되고 강남 녹림삼십육채(綠林三十六寨)가 백여 명의 백의복면인들에게 혈겁을 당하니.... 중원무림! 혈풍(血風)은 중원무림을 뒤덮으며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② 황학루(黃鶴樓),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하남 낙양(洛陽)의 명소(名所). 이 황악루의 하늘 위로 비(雨)가 내리고 있었다. 스산한 겨울비 였다. 허나 겨울비에 젖어가고 있는 황학루만은 결코 스산하지 않 았다. 황학루는 항시 수많은 손님으로 들끓어 소음이 그치질 않는 곳이었다. 구수한 음식냄새와 청아한 주향(酒香), 그리고 북적거리는 주루 의 분위기는 겨울비의 스산함을 몰아내고도 남음이 있었다. 삼 층, 한 명의 금포서생만이 겨울비의 스산함을 감상하고 있었다. 단아한 풍도에 준미한용모, 허나 전신에서 풍기는 싸늘한 살기가 겨울비보다도 더욱 음산했다. "겨울비... 오랜만에 보는군." 금포서생은 담담히 중얼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주천화, 바로 그가 아닌가? "겨울에 비(雨)라... 하늘도 흑노의 죽음을 슬퍼하는가?" 주천화의 독백에 허심(虛心)과 허탈이 머물고 있었다. "흑노, 조금 춥겠군. 허나 외롭지는 않을 것이오. 같이 동행해 줄 죽음의 동반자가 많을 것이니...." 문득 주천화의 눈에 녹광이 자리했다. 술잔이 거칠게 탁자 위에 놓여졌다. "갈까? 흑노의 동반자를 구하러...." 주천화의 안색은 죽음을 뿌리는 듯 어두웠다. 그의 몸이 서서히 일으켜졌다. 우지끈! 꽝! 이때 돌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쪽에서 요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제기랄! 무슨 놈의 계단이 이렇게 약하냐?" 이어 범종이 울리는 듯 우렁찬 음성에 이어 다급해 하는 점소이 의 음성(音聲)이 들려 왔다. 점소이의 음성은 이내 아첨어린 음성으로 변하고 있었 다. "헤헤헤, 대인께서 워낙 체격이 좋으신지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누군지 체구가 큰 사람이 계단을 올라서자 계단이 부서져 내린 것이다. "이봐 앞으로는 좀 튼튼한 것으로 만들게!" 범종 울리듯 우렁찬 음성이 투덜거렸다. "...?" 순간 주천화의 눈에 이채가 스쳐가는 것이 아닌가? "이 목소리는?" 이때 한 거대한 체구의 인영이 삼 층에 올라서고 있었다. 십 척(十尺)에 달하는 거구(巨 軀), 거기에 호피(虎皮)로 엉성하게 만든 옷을 걸치고 있어 일견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드러난 가슴은 온통 부성부성한 털투성이었고, 등에는 거대한 강 궁(强弓)을 메고 있는 거한이었다. '백전(白電)이?' 주천화의 눈이 거구대한을 살피고 의아해 했다. "...!" 거구대한은 삼 층에 이르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구인가를 찾 는 듯 했다. 헌데 그는 바로 청도에 있던 백전이 아닌가! 주천화가 손을 흔들었다. "하하하, 백형(百兄)! 오랜만이오." "아니! 왕자... 공자님!" 백전이 황급히 호칭을 바꾸며 다가왔다. "후유! 겨, 겨우 공자님을 찾았군요." 그의 우직한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스쳐가고 있었다. 백전은 대뜸 주천화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소인의 대례를 받으소서...!" 백전의 돌연한 행동에 주천화가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괜찮소. 어서 일어나시오!" 순간 한 줄기 무형의 잠력이 백전의 몸을 일으켰다. "어엇! 내, 내 몸이!" 백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하하, 본좌의 신분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경무장에 갔었던 모양이구료?" 백전이 몸을 일으키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예! 실은 막내가 보고 싶어서 경무장엘...." "...!" "헌데 청매가 마마께서 단신으로 위험에 뛰어드셨다고 하길래...." 백전의 눈에 강렬한 섬광이 떠돌았다. "마마!" "...!" "마마의 일에 소인의 미력한 힘(力)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요." 백전의 눈에 강렬한 신광이 떠올랐다. "음...!" 주천화가 난색을 드러냈다. "저어 이것은...." 백전이 품 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주천화에게 건넸다. "음! 알겠소! 청매가 나를 찾으라 했나보군." 주천화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후, 청매가 몹시 불안했던 모양이군!' 서찰을 받아 든 주천화의 뇌리에 백청청의 아름다운 영상이 스쳐갔다. 용사비등(龍蛇飛騰)의 수려한 서체가 눈에 들어왔다. 구구절절, 애정이 넘치는 글 귀였다. <화랑! 걱정이 되어 오라버니로 하여금 화랑을 조금이나마 돕게 하기 위해 소녀 감히 무례를 범하나이다. 작은 오라버니는 강궁(强弓)을 다루는 솜씨가 범상치 않으니 화 랑의 일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하옵니다.> 주천화는 백청청의 서찰을 모두 읽은 후 백전을 응시했다. "강궁을?" 백전이 겸연쩍은 듯 두 손을 비볐다. "예! 저희 가문에 내려오는 가전절기로서 보잘 것 없는 것이오나...." 주천화의 눈이 백전의 등에 메어 있는 강궁을 살펴보았다. 일순, 은은히 감탄의 빛이 스쳤다. "그것은 만년독강철(萬年毒强鐵)로 만든 것이 아니오?" - 만년독강철(萬年毒强鐵). 현존하는 무쇠 중 가장 무겁고 강한 물체였다. 이 만년독강철은 귀하기 이를데 없어 주먹만한 크기만 갖고 있어도 부호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 다. "예? 만년독강철이라뇨?" 백전조차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강궁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던 듯 의아해 했다. 그가 강궁을 풀었다. "후후후, 대단한 강궁이요. 이렇게 크고 무거운 것을...." 주천화가 감탄성을 흘려내다 문득 이채를 떠올렸다. "이것은 흡사 천강흑신궁(天强黑神弓) 백천(百天)이 사용하던 신 궁(神弓)같은데 그렇지 않소?"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그 분은 우리 가문의 시조(始祖)입니다." "아, 그랬었군!" 백전이 조심스럽게 주천화를 응시했다. "헌데 어찌 그렇게 쉽사리 알아보셨습니까?" 주천화가 담담히 웃었다. '천강흑신궁, 그 사람은 천하패왕지존록에 스무 번째 기록된 기인(奇人)이었지!' - 천강흑신궁 백천. 천하패왕지존록 서열 이십 위. 육척(六尺)의 강궁으로 천하를 위진시킨 인물. 그의 신궁에서 쏟아지는 강전( 箭)은 능히 태양도 꿰뚫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천하제일신궁(天下第一神弓), 천 하의 모든 궁술(弓術)은 그의 궁술에서 파생되었던 것이다. 천하패왕지존록의 내용을 떠올리던 주천화의 눈에서 신광(神光)이 뻗어 나왔다. "백형! 저 나무가 보이오?" "예!" 황학루에서 일백여 장 떨어진 곳에 한 그루의 노송이 있었다. "그 노송에 붙어 있는 검은 점(點)을 쏘시오!" 백전의 뇌리에 의혹이 스쳤다. '마마께서 나를 시험해 보시려는 것인가?' 허나 그는 두 말 없이 번개같이 강궁을 잡아 살을 먹였다. 패앵...! 쐐애액! 무서운 파공음이 터졌다. 백전이 강궁을 만월과 같이 잡아당겼다 싶은 순간, 강전(强箭)은 이미 황학루의 창을 통과해 노송을 향해 박혀가고 있었다. 꽈아앙! 파공음이 귀청을 뒤흔들고, 가공할 묵광(墨光)이 찬란하게 솟아 올랐다. "크아악!" 헌데 그 순간 노송쪽에서 돌연 처참한 비명성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아니! 어떤 자가?" 백전이 경악했다. 강전은 노송을 꿰뚫고 그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정체불명의 흑의인조차 단숨에 꿰뚫어 버린 것이었다. "후후후, 정확했소. 백형의 궁술은 독보적이오." 주천화가 담담히 웃었다. 살기조차 드러나지 않을 만큼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그 순간 백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을 죽임에 있어 뉘라서 이처럼 담담할 수 있으랴! 백전은 주천화의 잔인함과 백여 장 밖 노송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감지해내는 능력에 두 번 놀라고 있었다. '이, 이 분은 신, 신(神)이시다!' 내심 감탄성이 터졌다. 백전(百電), 하얀 번개. 이 백전은 주천화를 만나 후일 천강흑신 궁에 이어 천하제일신궁으로 떠오르고 진정한 백전(百電)이 된다. - 천마대혈궁(天魔大血弓). 그의 한 자루 강궁은 천마대혈궁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천하마인 (天下魔人)들을 공포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이때 주천화가 몸을 일으키며 오척 길이의 괴장검인 금천수라대검을 끌러내고 있 었다. "백형! 이것은 우정의 표시요. 받으시오!" "어. 어찌 이 미천한...." "하하하, 내 이미 백형의 충정을 알고 있소." 주천화가 고개를 저었다. 문득, 그의 안색이 엄숙해졌다. "우리 함께 천하를 주유해 봅시다. 백형은 내게 가장 큰 조력자가 될 것이라 믿 소." "마마!" 백전이 대례를 취했다. 그의 음성은 벅찬 감동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마! 소인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마께 충성을 다하겠사옵니다." 문득, 그가 고개를 들고 주천화를 바라보았다. "마마! 제게 한 가지 청이 있다면...?" "...?" "제발 제게 하대(下待)를 하여 주시길... 소인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제부터 내 그대를 전궁(電弓)이라 부르리라!" "전궁(電弓)!" 백전이 가만히 되뇌었다. "멋진 이름이오이다!" 그의 가슴이 힘차게 뛰놀았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나이의 가 슴, 주천화의 가슴에도 뜨거운 정(情)이 피어나고 있었다. "자! 앉읍시다. 내 오늘을 기념해 그대에게 술 한 잔...." "마마! 또?" "하하하, 알겠소! 아니 알았다! 자, 전궁!" "예!" "...!" "...!" 두 개의 눈이 부딪혔다. 뜨거웠다. 말없이 흐르는 두 사나이의 감정, 연인들의 사랑보다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조용히 앉아 술잔을 들었다. 헌데 이때, 문득 나직한 대화 소리가 주천화를 자극한 듯 주천화 의 눈이 신광을 뻗어내지 않는가? "드디어 대천루(大天樓)의 신비가 벗겨지려나?" "글쎄 듣자하니 무림십영과 사룡이봉들이 몰려 갔다 하니 조만간 그 신비가 벗겨지지 않겠는가?" 주천화의 탁자에서 이삼 장 떨어져 있는 구석, 그곳에 두 명의 중년대한이 술잔을 나누며 대화에 열중해 있었다. 그들의 음성은 나직했다. 허나 주천화의 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흠! 대천루에 무림십영과 사룡이봉이 몰려갔다고?" 주천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공자님! 대천루라면?" "사대신비 세력 중 가장 신비하다는 곳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곳으로 가려던 길이었다." "예?" "그곳이 혹 내가 찾는 자들의 거처가 아닌가 해서 사대신비세력 을 하나하나 파헤치려고 하는 것이다." "...?" "전궁!" "예!" "강전은 충분하오?" "예!" "후후후, 오늘 밤 우리도 그곳에 가봅시다." 주천화가 서서히 한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전궁은 대답과 함께 강전을 소중히 닦기 시작했다. 마치 결전에 임하는 무사가 자신의 검을 갈 듯 진지한 표정이었다. 강궁, 은은한 묵광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죽음의 빛을 뿜어내듯이.... ③ 밤(夜), 칠흑같은 어둠 속에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낙양교외, 이곳에도 비는 내리고 그 빗속에 당당히 서 있는 구층 석탑(九層石塔)이 젖어들고 있었다. 대천루(大天樓). 비안개에 싸여 있는 대천루의 모습은 웅장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위엄은 보는 이의 감탄성을 절로 일으 켰고 검푸른 빛 청강석으로 세워져 있는 대천루 전체에서는 어떤 귀기(鬼氣)마저도 풍기고 있었다. 원통형의 대천루, 그 둘레에는 비안개가 아닌 괴이한 안개가 너 울처럼 깔려있어 탑신을 가리고 있었다. 신비하다 해야 할까? 대천루는 세인들의 접근을 불허하려는 듯 스스로 뽀얀 기류를 토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이 대천루의 주위에 사오 명의 남녀가 어른 거리고 있었다. 사오 명의 남녀, 모두 젊었으며 특출한 영기(靈 氣)가 엿보이고 있어 한 눈에 범상치 않은 인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의 얼굴에는 난처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금형(錦兄)! 저곳이 대천루임이 확실한데 들어가는 문이 보이지 않으니...?" 고개를 흔드는 청년은 바로 무림십영중의 일 인인 남궁비가 아닌 가? 그의 옆에는 남궁연과 사호충이 서 있었고 그밖에 황의경장의 서생(書生)도 보 였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 대천루의 주위에는 엄청난 무형진이 설치되어 있는 듯 하오." 황의서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실눈처럼 가늘고 영활한 빛이 그곳으로부터 쉬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심 기가 매우 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석탑을 감싸고 있는 저 안개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외다. 바로 하나의 기진에서 발생하는...." 황의서생이 단언하듯 말한 후 뚫어지게 대천루를 감싸고 있는 안개를 쏘아보았다. - 만기서생(萬氣書生) 금각. 무림십영 중의 일 인. 심기가 뛰어나고 기관진식(機關陣式)에 남다른 조예를 지니고 있 는 청년기재였다. 곤륜파의 제자로서 무림십영 중 가장 특출난 영재로 알려져 있었 다. "허! 소제의 눈에는 대단해 보이지 않는데...." 금각이 안개의 주위에서 난색을 띤 채 서성이자 사호충이 한 걸음 나섰다. "그렇다면 금공자께서도 파해방법을 모르신단 말인가요?" 남궁연이 신음성을 흘려내고 금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소생의 미흡한 솜씨로는 이 진(陣)의 내력조차 파악해 낼 수 없구료." 그의 안색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제갈낭자께서 오셔야만 이 진(陳)을 파해할 수 있을 것 같소이다." 사호충의 눈에 묘한 빛이 스쳤다. '후후후, 저 뽀얀 기류는 어쩌면 금형의 판단과는 달리 단지 허 장성세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호충 역시 각종 기문진에 정통해 있다고 자부해 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내 힘으로 저 안개를 돌파한다면 연매가 나를 다시 볼 것이다 !' 한 생각을 떠올린 사호충은 불끈 치솟는 오기에 말도 없이 몸을 날렸다. 휘이익! "사형! 안 되오!" 사호충이 불현듯 안개 속으로 뛰어들자 금각이 황급히 외쳤다.허 나 그 순간 이미 사호충의 신형은 안개 속에 뛰어들고 있었다. 금각의 안색이 싸악 변했다. "으악!" 순간 처절한 비명이 안개 속에서 터져 나왔다. 바로 사호충의 목 소리였다. 남궁비가 경악하며 몸을 날리려 했다. "사, 사형이?" "멈추세요! 저것은 무형환무절사진(無形幻舞絶死陳)이에요!" 이때였다. 다급한 음성이 남궁비의 몸을 멈추게 했다. 남궁비가 흠칫하며 다음 순간 희색을 떠올렸다. "아! 제갈낭자!" "오! 제갈낭자께서 오셨구료." 무림십영들이 마치 강력한 원군을 만난 듯 반색을 떠올리고 있었 다. 더구나 그들의 표정에는 은은히 공경의 빛조차 감돌고 있었다. 제갈낭자? 그녀가 과연 누구이기에 무림십영들에게 이렇듯 환대를 받는단 말인가? 빗속을 뚫고 한 소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가사를 걸 치고 손에는 백팔염주를 들고 있는 십칠 세 가량의 소녀였다. 흡사 여승(女僧)을 연상케 하는 옷차림. 허나 그녀는 삼단 머리 칼을 늘어뜨리고 있어 또한 승인(僧人)이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헌데 소녀의 용모는 가히 절세적이었다. 그린 듯한 아미(蛾眉)와 분홍빛 입술, 알 맞게 자리한 봉목(鳳目), 청초함과 함께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함까지 풍기고 있는 절세미소녀인 것이다. "아! 제갈낭자,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금각이 합장을 해보이며 다가왔다. "헌데 딴 분들은?" 금각이 의혹을 드러내자 회색가사의 소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개방과 녹림삼십육채의 혈겁 때문에 모두 돌아갔어요." 그녀의 음성은 침중했다. "음...!" "아!" 중인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제갈낭자! 저, 저 진이 무형환무절사진이라니 제갈낭자께서는 저 진의 파해법도 아시겠군요." 이때 남궁비가 문득 생각난 듯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사, 사형이 저 안에서 변을 당한 듯 하오. 어서 저 진을 파헤치 고 사형을 구해내야 하지 않겠오?" "그래요 언니! 어서 사공자님을 구해야 해요." 남궁연도 다급히 외쳤다. "연매! 너무 늦었어...." "예에?" "무엇이라고요!" "저 진은 천오백 년 전의 기인 천기마자라는 사람이 창안해낸 무서운 절진(絶陳)이 에요." "천, 천기마자? "천기마자라면...!" 일제히 경악성이 터졌다. "그래요. 일천오백 년 전, 칠천대극마의 일 인으로 천하에 군림 한 천하제일의 기관진식의 대가예요." 승포소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의 독문진식(獨門陣式)이 오늘날 이곳에서 재현되리라고 는 소매도 예상치 못했어요." "누, 누가 있어 그같은 절진을 재현...." 놀람에 찬 중얼거림을 흘려내던 남궁연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다면? 언니도 파해시킬 수 없다는 말인가요?" 사호충이 이미 진 속에 갇혀 있음을 생각해낸 남궁연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지는 않아, 허나 반시진 정도를 연구해야 하고 그 시간이면 사공자는 이미... ." 승포소녀의 눈이 흐려졌다. 헌데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천하진법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천기마자의 독문 절진을 반시진만에 파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소녀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역시 제갈낭자는 십전십미(十全十美)답구료." 금각이 승포소녀의 말에 감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녀가 십전십미로 알려져 있는 제갈천옥(諸葛天玉)이란 말인가! - 십전십미 제갈천옥. 소림제일봉(少林第一鳳)으로도 불리우는 재녀. 소림사 천 년 전통을 깨고 최초로 소림사의 속가제자(俗家第子)로 입문한 소녀였 다. 당금정도무림의 태양같은 존재인 소림 쌍불선(雙佛仙)의 전인(傳人)이었다. 소림 쌍불선은 당금 무림에서 최고의 배분을 지니고 있는 전대기 인들로서 천절오살마와 같은 배분이었다. 십전십미 제갈천옥, 그녀는 무림의 신진기수 중에서 단연 으뜸으 로 꼽히고 있는 재색을 겸비한 신녀(神女)였던 것이다. "호호, 다만 허명(虛名)일 뿐이지요." 제갈천옥이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이어 그녀는 조용히 지면에 정좌한 후 무형환무절사진을 주시하 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내 진의 파해법을 골똘히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헌데 이때 그들과 오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낭랑한 독백이 흘러왔다. "흠! 무형환무절사진이 이곳에 펼쳐져 있다니...." 돌연한 음성에 제갈천옥을 제외한 젊은 영재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머! 저 사람은...!" 남궁연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 눈에는 이내 어떤 기이한 빛이 스쳤다. '내 입술을 때린 그 신비공자!' 그녀의 눈이 고정되어 있는 곳, 그곳에 한 인영의 모습이 비안개 속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준수미려하며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고 있는 금포미공자는 바로 주천화가 아닌 가! "저 공자는...." 남궁비도 주천화의 모습을 발견하고 경악성(驚愕聲)을 터뜨렸다. 그의 눈이 무심코 주천화의 뒤에 서 있는 백전을 발견하고 크게 떠졌다. '저, 저렇게 큰 거인이 있었다니...!' 남궁비 등이 백전의 놀라운 체구에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후후, 전궁, 조심해서 내 뒤를 따르게! 내가 걷는 곳만을 밟아야 한다." "예!" 백전이 등에 메고 있던 강궁을 내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스윽! 주천화가 거침없이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앗! 조심하세요." 남궁연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나 무형환무절사진 속으 로 사라진 주천화와 백전은 아무 이상도 없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저, 저 자는 무형환무절사진을 파해할 수 있었단 말인가 ?" 금각이 눈 앞의 사실에 크게 놀라 외치듯 중얼거렸다. "대단하구나!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들어가듯 거침없이...." 남궁비 역시 혀를 내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남궁연은 놀람에 앞서 근심에 사로 잡히고 있었다. '제발 저 공자께 아무일도 없었으면....' "그래 바로 저것이 생문(生門)이다." 이때였다. 제갈천옥이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제갈낭자! 그래 알아 내셨소?" "예! 저를 따라 오세요. 정말 파해하기가 이토록 까다로우리라고는...." 제갈천옥이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그런데...." "...?" "제갈낭자! 방금 두 인물이 진을 파해하고 들어갔소." "예? 누, 누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 그토록 쉽게 진을 파해하고...?" "그, 그는 천마대제라 자칭하는 신비미서생이었소." 남궁비가 입을 열자 일순 제갈천옥이 흠칫했다. "그 사람이...!" 그녀의 눈에 순간 기쁨이 번뜩였다. '드디어 만나보게 되었구나. 과연 어떤 자이기에 그토록 광오한지 만나고 싶었 다. 천마대제!' 천마대제 주천화! 이 이름이 이미 중원을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전 설처럼 떠돌며 하나의 불문율(不文律)을 만들어냈다. <천마대제 주천화, 그를 건드리지 마라! 그것은 곧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죽고 싶은 자, 천마대제에게 도전하라! 그것이 가장 빨리 죽을 수 있는 길이다.> 십전십미 제갈천옥, 그녀의 뇌리에 무림에 떠돌고 있는 이 전설 같은 불문율이 스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무형환무절사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간 주천화의 눈에 한 인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공, 공자님! 저 사람은?" 그들이 걷고 있는 주위로는 한 치도 내다 보이지 않는 안개가 뭉 클거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안개 속에서 탈진한 상태로 바둥거리고 있는 사호충이었다. "후후후, 저 자는 자신의 역량만을 과신하고 진 속에 들어온 모양이군!" 주천화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순간 그의 손에서 한 줄기 잠력이 뻗어나가 한 곳을 강타했다. 펑! 하는 둔탁한 폭음이 터졌다. 동시에 대천루를 감싸고 있던 괴무(怪霧)가 순식간에 걷히기 시 작했다. 찰나지간에 거대한 구층석탑이 적나라게 드러났다. <대천루(大天樓).> 금빛으로 휘황한 현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비봉무(龍飛鳳舞)의 힘찬 서체, 실로 당당하기 이를데 없었다. "대천루라... 맞는 것 같군!" 주천화의 눈이 백전에게 돌려졌다. "전궁! 편액을 없애게!" "예!" 우렁차게 외친 백전의 손에서 묵광이 뇌전(雷電)과 같이 뻗어났 다. 활촉의 크기만 해도 어린이 주먹만한 강전이 동시에 두 대가 날아갔다. 꽈꽝! 우지끈! 현판이 박살나 흩어졌다. "흠! 훌륭한 솜씨군!"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인 후 걸음을 옮겼다. 일 층의 거대한 철문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천마청옥장(天魔靑玉掌)...!" 주천화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이 터지며 그의 손이 벼락치듯 뻗어났다. 꽈앙! 거대한 철문에 순간 푸른색이 감도는 장인(掌印)이 찍혀졌다. 헌 데 다음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지 않는가! 푸시시식! 휘이익! 거대한 철문이 푸르른 마화(魔火)를 발산하며 타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철문이 순식간에 타들어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저, 저것이 인간의 무공이란 말인가!' 그 광경에 백전이 경악했다. "전궁! 들어가세!" 주천화의 신형이 물흐르듯 대천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황 제2권 제13장 흥덕태자(興德太子)와 대천루(大天樓) ━━━━━━━━━━━━━━━━━━━━━━━━━━━━━━━━━━━ ① 광장을 방불케 하는 넓은 거실(居室)은 실로 너무도 우아하고 아늑했다. 천장은 황색의 야명주(夜明珠)가 부드러운 엷은 빛깔을 뿜어내고 바닥에는 서천축 명시국(明始國)의 특산품인 최고급 모피(毛皮)가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사면 벽에는 진기하기 이를데 없는 서화(書畵)들이 조화있게 장식되어 있었다. 정 중앙의 자단목 탁자 위, 그곳에는 이름도 모를 아름다운 꽃이 화병에 꽂혀 있어 정녕 운치가 넘치는 그런 거실이었다. 흡사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미(美)의 신(神)이 꾸며놓은 듯 화려하면서도 아늑한 실 내, 이곳은 바로 대천루의 일 층으로 들어선 주천화의 눈에 들어온 광경이었다. 놀랍게도 대 천루의 일 층은 아무것도 없는 넓고 아름다운 거실이었던 것이다. "...!" "뭐야! 텅 비어 있는 거실이라니?" 주천화와 백전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다음 순간, 백전은 무엇에 끌린 듯 서슴치 않고 거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잠깐!" 주천화가 다급히 외쳤다. "어어! 발, 발이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백전이 경악성을 터뜨리며 당황해 하지 않는 가? 백전의 두 발은 마치 자석에 붙은 듯 바닥의 융단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후후, 이 청아한 향기는 바로 천열인마액(天熱引魔液)에서 나는 것이었군." 주천화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감탄의 빛이 그의 눈에 은은히 떠올라 있었다. - 천열인마액(天熱人魔縊). 남만(南灣)에서 자생하는 다라수(多羅樹)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특수한 물질을 말한다. 이 천열인마액은 강력한 접착력(接着力)을 지니고 있어 한 번 붙 은 물체는 여간해서 떼놓을 수 없었다. "전궁! 움직이지 마시오!" 백전이 억지로 천열인마액에서 발을 떼내려 하자 주천화가 소리쳤다. 쏴아아...! 순간 사면의 벽과 천장에서 흡사 백사(白蛇)의 가죽같은 것이 뻗어나왔다. 휘리릭! 가늘고 긴 끈들은 순식간에 백전의 몸을 휘감았다. "호! 만년금강삭(萬年金剛索)까지...!" 그 광경에 주천화가 놀란 일성을 흘려냈다. - 만년금강삭. 일반의 도검으로는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는 희귀한 목피(木皮)로 만들어진 줄이었다. "끄응!" 만년금강삭이 전신을 동여매자 백전이 용트림을 터뜨렸다. 순간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을 얽어매고 있던 만년금 강삭들이 일제히 끊어져 나가지 않는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허...!" 주천화가 입을 딱 벌렸다. "대단한 신력(神力)이다! 저 만년금강삭이 끊어지다니!"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도 믿어지지 않을 힘이 아닌가! 우르르릉! 이때, 어디선가 진동음이 터져 나왔다. "음, 제법 철저한 기관매복이로다!" "천마빙유섬강(天魔氷柔閃 )!" 주천화의 입에서 우렁찬 포효가 터지며 동시에 백색기류가 거실을 덮었다. 거실에는 순식간에 가공할 한기가 소용돌이쳤다. 순간 바닥에 깔 려 있던 천열인마액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번쩍! 찰나, 주천화의 신형이 전광석화처럼 백전에게 쏘아져 갔다. 우르릉! 꽈꽝! 엄청난 철벽이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며 백전이 있던 자리로 덮쳐 왔다. 허나 백전은 이미 주천화에 의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공, 공자님!" 백전은 연속되는 기발하고 엄청난 기관매복에 혀를 내둘렀다. "후후후, 전궁! 이런 것들은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한 것일세." '어린아이 장난같은 것!' 백전은 주천화의 미소에 정신이 없었다. 만약 자신같으면 뼈도 못추릴 가공할 기관장치를 일개 잡술(雜術)에 지나지 않는다니.... "자! 가세!" 주천화가 앞장 섰다. 거실의 넓이는 실로 넓었다. 삼 장 가량 전진했을까? "아앗!" 돌연 그들의 뒤쪽에서 뾰족한 비명성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공자님! 아까 그 자들이 뒤따라 온 모양입니다." 백전이 근심어린 음성을 흘려냈다. "전궁, 걱정하지 마시오. 그들 가운데 이 정도의 난관은 능히 파 해칠 수 있는 인물이 있소!" "아니! 누, 누가?" "후후후!" 주천화는 싱긋 미소를 던질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자! 호기심이 생기는군. 이 층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주천화는 마치 재미있는 일이라도 찾아다니는 악동과 같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떠올렸다. "...!" 문득, 주천화가 백전을 응시하며 한 곳을 손짓했다. 좌측의 청강석 석벽이었다. 백전은 주천화의 손짓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쏴아앙! 쐐애액! 순간 그의 손에서 강전이 가공할 속도로 발사되었다. 묵광을 번뜩이며 날아간 강전이 그대로 청강석 석벽을 관통했다. 놀라운 위력이었다. 일장 두께의 청강석벽이 그대로 뚫려버린 것이다. 주르르륵! 피(血)...! 석벽에 박힌 채 부르르 진동하고 있는 강전의 끝을 타고 한 줄기 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흐흐, 공자님!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었군요." 백전이 그것을 보고 음산하게 웃었다. "후후, 저 자는 기관을 조종하던 자요!"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천화는 이미 한 눈에 기관의 중추를 알아내고 그것을 조종하고 있는 자를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전궁의 궁술은 진정 놀랍군!" 백전이 손을 내저었다. "아이구, 제가 대단하면 공자님을 어떻게 형용해야 합니까?" "하하하!" 주천화가 낭랑히 웃으며 거실의 끝에 섰다. 그곳에는 이 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이 층, 이 층에 올라선 주천화의 눈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헉! 이것들은!" 뒤따라 올라오던 백전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이 층의 거실은 일 층의 거실과는 정반대로 음산한 귀기가 풍기고 사방은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암흑천지, 그 속에는 괴이한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눈(眼), 새파란 안광을 번뜩이고 있는 수십 개의 눈이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천마고루군대전!" 주천화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 이것이 어찌 이곳에 설치되어 있단 말인가?" 주천화가 의혹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녕! 천기마자, 그 분의 후예가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 천마고루군대전(天魔 賜軍大殿). 바로 천기마자가 창안해낸 가공할 절진으로서 백이십 구의 강시 (疆屍)로 진(陳)을 형성하고 있는 실로 각종 진법 최고의 필사절진이다. "저, 저것들은 강, 강시가 아닙니까?" 암흑 속을 살펴보던 전궁이 기겁했다. 괴인(怪人)들, 한결같이 나신(裸身)의 핏빛 괴인들이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창백하다 못해 푸르른 얼굴, 그 얼굴에는 살점이 하나도 없고 겨 우 껍데기만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도 코와 입술은 떨어져 나가 고 없어서 군데군데 뼈와 뿌연 이가 뿌리채 드러나고 있었다. 부릅 뜬 두 눈은 시커먼 공동(空洞)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곳으로 부터 소름끼치는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정녕 꿈에 볼까 두려운 모습.... 끼끼끽...! 삐이꺽! 이때 괴이한 음향과 함께 강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루대전 이 발동한 것이었다. "후훗! 가소롭다." 주천화가 고소를 흘려냈다. "전궁!" 주천화의 시선(視線)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백전은 이내 강 궁을 만월처럼 잡아 당겼다. 일순 무서운 묵광이 날랐다. "끄악!" 한꺼번에 세 대의 강전이 날아가 세 구 강시의 비심혈을 꿰뚫으 며 그대로 머리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쿠쿵! 머리가 끊어져 나간 세 구의 강시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끌끌끌!" 돌연 어둠 속에서 소름끼치는 괴소가 들려왔다. "...!" 주천화의 눈이 담담히 한 곳을 쏘아보았다. 강시들을 헤치고 서 서히 한 명의 괴노인이 걸어 나왔다. 강시같은 괴이한 용모, 새까 만 수염이 지면에까지 늘어져 있는 노인이었다. "끌끌끌, 이 계집애같은 애송아! 네가 본좌의 아이들을 다치게 했느냐?" 괴노인의 입에서 분노가 들끓는 거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흐흐흐, 미친 늙은이로군! 감히 공자께 망발을 부리다니!" 전궁이 대소를 터뜨리며 강궁을 만월처럽 잡아 당겼다. "잠깐!" 허나 그 가공할 강전이 발사되려는 순간, 주천화가 손짓하여 전 궁을 제지하고 괴노인을 직시했다. "너는 천기마자의 후예인가?" 주천화가 대뜸 하대하자 괴노인의 안색이 붉게 달아 올랐다. "크흐흐흐!" 분노와 살기가 이글거리는 광소가 터졌다. "광망스러운 놈! 감히 그 분의 존명을 입에 담다니! 네놈은 그 분을 가볍게 입에 올린 죄로 사분오시(四分五屍)가 될 것이다." 주천화의 눈에 녹광이 떠올랐다. "너는 본좌를 보거라!"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 주천화가 서서히 겉옷을 젖혔다. 괴노인은 주천화의 전신에서 풍 기는 산악같은 기개에 홀린 듯 주천화를 바라보았다. "천, 천인혈옥삼! 그, 그대는?" "와하하하, 네가 감히 선사의 천인혈옥삼을 보고도 그토록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단 말이 냐?" 주천화의 소름끼치는 광소에 괴노인의 몸이 진동되었다. "그, 그대는 정말 천마...?" "꿇어라!" 괴노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항거할 수 없는 무형의 위엄이 그를 덮쳤다. 그의 경악이 극에 달했다. "너는 본좌를 의심하느냐?" 허나 주천화의 음성이 차갑게 이어지자 괴노인은 부들부들 떨다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의 눈은 주천화의 허리에 걸려 있는 천마제혈검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소, 소인이 두 눈이 멀어 대, 대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쾅쾅쾅! 괴노인은 지면에 부복한 채 마구 바닥에 이마를 찧고 있었다. 조아리다 못해 이마가 터지 도록 박고 있어 기이한 소리가 터져 나오고 순식간에 그의 이마에서 피가 튀었다. 선혈이 낭자했다. 바닥이 다 진동될 지경이었다. "그만!" 주천화가 그 광경이 보기 처참한 듯 소리쳤다. 괴노인의 행동이 멈춰졌다. 허나 그의 어깨는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도, 도대체! 공자께서는 정녕 신(神)이란 말인가?' 전궁이 이 광경에 입을 딱 벌렸다. "소, 소인을 용서...." "...!"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누구냐?" 주천화의 눈빛은 어느새 담담하고 무심하게 변해 있었다. 괴노인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 이 늙은이는 천기마자, 그 분의 후예로서 강호에서는 무후 천기로(武侯天機老)라는 허명을...." 전궁이 펄쩍 뛰어 올랐다. "무후천기로?" - 무후천기로(武侯天機老). 천기마자 이후 기관매복에 가장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고 알려진 인물. 나이 이백이 넘었고 천절오살마가 나타나기 전에는 가장 높은 배분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무림일괴 (武林一怪)로 손꼽힐 정도로 성품이 괴팍한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의 무공수위는 측정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기로(機老)!" "예!" "그대는 이곳 대천루의 문지기인가?" 돌연 주천화의 전신에서 한기가 솟아올랐다. 무후천기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본루(本樓)의 태상호법(太上護法)을 맡고 있습니다." 무후천기로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 순간 주천화가 신광을 폭사시켰다. "한심하군! 천기마자, 그 분의 후예가 남의 밑에서 일개 주구로 전락해 있다니...." 순간 말과 함께 주천화가 손을 흔들었다. 펑! "어이쿠!" 무후천기로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그의 입가에 선혈(鮮血)이 비쳤다. "이것은 천기마자, 그 분을 대신해서 내리는 벌이다." 무후천기로는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 한 후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 분께서... 천계에서 보았다면 통곡을 금치 못할 일이다. 한 문파의 지존이 되어도 시원치 않은데...." "...!" 무후천기로는 벌겋게 얼굴만 굳힌 채 꼼짝도 못했다. "이, 이 늙은이가 망령이 들어...." "기로, 가서 불러오너라! 과연 누가 기로를 수하로 부리는지 그 낯짝을 보고 싶구나!" "반각의 여유를 주겠다. 반각 동안에 그 자를 데려오지 못하면...." "...!" "너는 물론이고 이곳도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 뉘라서 주천화의 말을 의심할 수 있으랴! 주천화가 없앤다고 하 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것이다. 이때 이 층으로 올라서고 있는 한 떼의 인영이 있었다. 바로 제갈천옥을 비롯한 다섯 명의 영재들이었다. 그들은 무후천 기로가 주천화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광경을 보고 안색이 급변했다. 특히 무후천기로를 알아본 제갈천옥의 놀람은 더욱 컸다. '저, 저럴 수가! 무후천기로가 저 자 앞에 무릎을... 저 자가 도대체 사람이란 말인가?' 허나 주천화의 용모를 살펴보던 그녀의 눈에 결코 놀람만은 아닌 또다른 빛이 피어나기 시작했으니.... 제갈천옥, 십전십미의 재녀라 하나 그녀도 여인이었던 것이다. ② 무후천기로, 그의 안색은 지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반, 반각만에 태상(太上)을 데리고 오라니....' 그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솟아남을 느꼈다. "대, 대제, 태상의 신분은...." "거역하겠다는 것인가?" 주천화의 전신에서 가공할 마기가 일렁이며 은은한 살기가 무섭게 파동쳤다. "대, 대제!" 무후천기로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 그 분은...." 무후천기로는 극도의 당황에 더듬거릴 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후후후, 감히!" 주천화의 두 눈에 녹광이 어렸다. 그러자 무후천기로가 기겁하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대제, 본루의 태상은 당금황실의 흥덕태자(興德太子)이십니다.) 무후천기로가 다급히 전음을 날렸다. (허니 제가 어찌 감히 태자 저하를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 하오니 대제께서 오르시기를....) 이어지는 전음에 주천화가 흠칫 경악했다. (무, 무엇이라고?) 흥덕태자(興德太子)라면 바로 다음 대(代)의 천하의 주인이 될 황태자이다. 그런 흥덕태자 가 이 대천루의 루주(樓主)라는 것은 실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사대 신비문파 중 하나인 대천루가 황실과 깊은 연관이 있을 줄 뉘라서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음...!" 주천화가 놀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본좌가 직접 뵙겠다. 안내해라...!) 주천화의 뇌리에 수많은 의혹이 구름처럼 솟아 올랐다. '형님께서? 알 수 없는 일이다. 황궁에 있어야 할 태자형님이 어 찌 무림에 절대세력을 키우고 있단 말인가?' 무후천기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어서 제 뒤를 따르시지요." 무후천기로가 앞장서고 주천화와 백전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대전의 한쪽 계단을 오르자 제갈천옥을 비롯한 오 인이 황급히 몸을 날렸다. 헌데 그들이 막 주천화 일행이 사라져간 계단을 내려섰을 때 구 구궁!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벽이 나타나며 그들을 가로막았다. "음...!" 제갈천옥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어서! 어서 구석으로 몸을 피하세요." 순간 그들의 발 밑에서 덜컹! 하는 괴이한 음향이 터졌다. "아앗!" 그들은 기관장치에 의해 바닥이 꺼지는 것이라 짐작하고 허공으 로 몸을 솟구쳤다. 헌데 바닥은 꺼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모습 이 그대로 비춰지는 거대한 동경(銅鏡)으로 바뀌어 있지 않은가? "이게 무슨?" 허공(虛空)에 솟아 올랐던 그들이 바닥에 내려서며 의혹의 눈을 돌렸다. "앗! 언니, 사면이 모두 동경으로 바뀌었어요." 남궁연이 뾰족한 음성을 터뜨렸다. 과연 사면은 물론이고 바닥까 지 거울로 변해있지 않은가? 동시에 어디선가 맑은 광채가 스며들었다. "앗!" 그들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과 뒤, 그리고 바닥에까지 수십 명의 제갈천옥 일행이 비치고 있었다. 놀라서 당황해 하는 모습들이 실로 혼백이 날아갈만큼 수 십수백의 인영이 겹치고 또 겹쳤다. "제갈낭자,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일까요?" 남궁비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모르겠어요. 하여간 우선 움직이지는 마세요. 저 거울 속의 우 리들 모습을 바라보지도 말고요." 제갈천옥이 황급히 외친 후 눈을 감았다. 수십수백의 환영(幻影) 이 어지럽게 움직이자 정신이 다 없었던 것이다. "이, 이것은 우리들의 눈을 어지럽혀 심마(心魔)의 침범을 받게 만드는 기관매복임이 분명해요." 심마(心魔), 바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무서운 기관이었다. "우욱!" 사호충이 비틀거리며 황급히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무형환무절 사진에서 많은 기력을 고갈시켰기 때문에 가장 먼저 심마의 침범 을 받은 것이었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제갈천옥을 따라 황급히 눈을 감았다. "하하하, 소제에게 저 철벽을 뚫을 방법이 있소이다." 돌연 만기서생 금각이 호탕히 외치며 품 속에서 한 개의 옥갑을 꺼냈다. "모두들 안심하시오. 심마의 침범을 받기 전에 전면의 철벽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오." 제갈천옥이 눈을 떴다. "...?" "후후후, 어서 나오너라!" 금각이 옥갑을 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순간, 붕... 부웅! 윙윙! 돌연 기이한 음향이 들리며 옥갑 속에서 기충(奇蟲)들이 날아들 었다. 마치 흑봉(黑鳳)들을 연상케 하는 기이한 벌레들이었다. "어멋! 만년파철부식충(萬年破鐵腐湜蟲)!" 제갈천옥이 그 벌레들을 보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예에? 이 이것들이 쇠를 갉아 먹는다는 그 만년파철부식충이란 말인가요?" 남궁연이 신기하다는 듯 벌레들을 살펴보며 외쳤다. "그렇소. 열 마리의 만년파철부식충이면 반각 안에 무쇠 만근(萬 斤)을 갉아 먹을 수 있습니다." "아...!" "후후후, 사부님과 사천당문(四川唐門)에 갔을 때 특별히 선물받 은 것입니다.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 몰랐군요." 만기서생 금각이 득의의 미소를 떠올리며 만년파철부식충을 풀었다. "어머! 금공자께서 그런 기충을 지니고 계셨다니...." 남궁연은 손뼉이라도 칠 듯 기뻐하고 제갈천옥은 한 가지 근심의 빛을 드러냈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를 듯 하군요. 이 거울들이 단순히 우리의 심력(心力)을 소모시키려고 나타난 것 같지는 않아요." "예?" "분명 무엇인가 또 있을 거예요. 어서 이 기관을 조종하는 기관중추를 찾아내야 할텐데...." 헌데 그녀의 걱정어린 독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쿠르릉! 파파파팟! 돌연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천장에서 무수한 광망이 폭사되어 왔다. 은빛으로 번뜩이는 특수장창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려왔다. 헌데 정녕 무서운 것은 그 수많은 장창이 사면의 동경에 반사되어 날아 오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거울에 비춘 장창과 진짜 장창,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 가? 그들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위기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과연...? ③ 한편. 주천화는 무후천기로의 안내를 받아 대천루의 구 층에 오르고 있 었다. 구 층에 이르는 계단 입구(入口)에서 무후천기로가 허리를 숙였다. "대제, 이곳을 오르시면 태자저하께서 계십니다." "음, 알았소."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계단에 발을 딛었다. "멈추시오!" 헌데 이때 웅후한 내공이 실린 일갈이 터져 나왔다. "아미타불! 역(易)시주, 이곳은 태상전(太上殿)이오. 어찌 외(外)인을...." 구 층을 오르는 계단의 옆에는 세 명의 노화상(老和尙)이 석불인 양 정좌해 있었다. 황색가사에 눈처럼 흰 백미(白眉)의 노승들의 신태는 실로 범상치 않았다. "땡초들은 어서 비켜서게. 이 분은 바로 천마대제이시네!" "아니되오! 태상의 명이 없는 한!" 우측의 백미노인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후후후, 전궁!" 순간 주천화의 눈에 녹광이 스쳤다. "예!" 전궁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활시위를 당겼다. 쏴아앙! 찰나, 무서운 강전이 공포스러운 파공음을 발산하며 백미노승을 향해 날아갔다. 가공할 속도와 위세였다. "아미타불!" 우렁찬 불호가 터졌다. 패앵! 순간 똑바로 쏘아져 가던 강전이 무형의 강기에 의해 노승에게서 비켜 날아갔다. 놀라운 호신강기였다. 전궁이 쏘아대는 강전은 철 판이라도 뚫어버릴 위세를 지닌 것인데 강기에 의해 방향이 바뀐 것이다. "훗! 천룡무상신공을...." 주천화가 조소같이 중얼거렸다. "그대들은 천룡사(天龍寺)의 승인들인가?" "아미타불 역시 중원은 넓구료. 노납들의 무공을 단숨에 알아내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들의 놀람을 당연했다. 단지 강기만을 펼쳤을 뿐인데 상대가 한눈에 무공근원을 알아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룡사(天龍寺), 바로 천하패왕지존록의 서열 사 위로 올라 있는 천룡대성승이 창시한 문파였다. 주천화는 이미 천룡대성승의 무공 을 익힌 바 있어 그들의 무공을 알아본 것이었다. "흥! 역시 천룡사의 승인들이었군!" 주천화가 돌연 한기를 폭사했다. "천룡법무탄강기...!" 순간 주천화가 냉랭한 일갈을 터뜨리며 손을 밀어냈다. 우우우웅! 휘이잉! 무서운 잠력이 소용돌이쳤다. 그 가운데 한 가닥 잿빛 기류가 가 공할 속도로 노승들을 향해 밀려갔다. "아앗! 천룡법무탄강기! 이, 이럴 수가?" "아, 아니, 시주가 어찌 본사의 실전절예를...?" "조, 조사님의 무공이...!" 세 마디 경악성(驚愕聲)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파파팍! 순간 회색 기류는 이미 그들의 몸을 강타하고 있었다. "왁!" "크윽!" 답답한 비명성이 터지며 세 명의 노승이 바닥을 굴렀다. "으윽! 그... 그대는...." 그들의 가슴에는 놀랍게도 손바닥 크기만한 불상 형상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그들의 입가에 선혈(鮮血)이 묻어났다. "흥!" 주천화가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 "그대들은 천룡사의 천오백 년 금기(禁忌)를 깼다. 천룡사의 승 인들은 결코 중원에 들어설 수 없지 않더냐?" 세 명 노승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경악으로 몸을 떨었다. "시, 시주는 대체 뉘기에 본사(本寺)의 최고 비밀까지 알고 계신단 말이오?" "흥! 금기를 깬 첫번째 응징이다. 만약 천룡사로 돌아가지 않으면...." "...!" "이역만리 머나먼 이 중원땅에서 차디찬 고혼이 될 것이다." '으! 놀라운 일이다. 믿, 믿을 수가 없다. 본사의 최고 기밀을 알고 있다니....' 세 명 노승은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에 몸을 떨고 있을 뿐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천룡사 최대기밀, 그것은 한 가지 기밀을 말함이었다. 천룡사를 창시(創始)한 개파조사의 유언에 의한 금제였다. <천룡의 후예는 영원히 중원땅에 발을 디디지 말라!> 천룡대성승이 왜 이런 유시(遺示)를 남겼는지는 아무도 그 이유 를 알 수 없었다. 허나 그 유시는 그대로 곧 천룡사의 일천오백 년 금제가 되었다. 세 명 노승, 그들은 천룡사의 천룡삼천승(天龍三天僧)이었다. 천룡사 최고의 배분을 지니고 있는 천룡사의 고승들인 것이다. - 동천목승(東天木僧). - 서천신승(西天神僧). - 북천화승(北天火僧). 이들의 명성은 천룡사가 있는 서역(西域) 뿐만이 아니라 중원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때 구 층에서 돌연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분을 안으로 모시게." "천명(天命)...!" 무후천기로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과연... 형님의 음성이로군." 주천화의 중얼거림에 무후천기로가 펄쩍 뛰어오를 만큼 경악(驚愕)했다. "대, 대제께서도 황족이시란 말씀이시오?" 허나 주천화는 이미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 황 제2권 제14장 젊은 영웅(英雄)들의 만남! ━━━━━━━━━━━━━━━━━━━━━━━━━━━━━━━━━━━ ① 대천루의 가장 높은 구 층, 그곳은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정취가 엿보이는 장식들로 꾸며져 있고 어디선가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는 청아한 향기가 번지고 있었다. 태사의에 이십사 세 가량의 자의금포 청년이 깊숙이 앉아 있었다. 용안호목(龍顔虎目)이 은 은히 풍기는 고귀한 귀상(貴像)은 일견에 보통 신분(身分)의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은의(銀衣)를 걸친 미청년이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청년의 어깨에는 한 마리 금빛갈기를 지닌 매(鷹)가 앉아 있었다. 한 자루 섭선(攝扇)을 여유롭게 흔들고 있 는 청년의 눈빛은 고요하기 이를데 없었다. "태상! 모셔왔습니다." 무후천기로의 음성이 들려오자 금포청년의 눈빛이 흔들렸다. "...!" 주천화가 들어왔다. "하하하, 천화아우님, 어서 오시게!" 주천화의 눈빛 역시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후후후, 태자형님, 오랜만에 뵙게 되는군요." 태사의에 앉아 있는 비범한 풍도의 자의금포청년은 바로 당금 황 실의 황태자 주의천(主義天)이었다. - 흥덕태자 주의천. 바로 문국황자에게 누명을 씌우고 황제로 즉위한 당금(當今) 황 상의 금자(金子)로 주천화와는 사촌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기이한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 "...!" 주천화와 흥덕태자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주천화의 심정은 실 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대는 자신의 부친을 모함하고 천 하의 주인이 된 원수의 아들이며 또한 주천화와는 형제지간인 것이다. "천문왕자님, 소실 황실어림금의대(皇室御林金依隊)의 대장이자 금의위통령(錦衣衛統領) 추국태(秋國太), 마마를 배알하나이다." 흥덕태자의 옆에 시립해 있던 은의청년이 공손히 대례(大禮)를 올렸다. 이십사오 세? 태자의 나이와 거의 동년배(同年輩)일 듯 싶은 그 의 기태 또한 범상치 않았다. '음! 내가 중원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대하는 가장 출중한 영재이구나!' - 금의위통령 추국태. 당금 황실에서 가장 총망받는 문무겸비의 기재. 약관의 나이에 십만(十萬) 황실어림금의대를 통솔하고 있으며 또 한 일만 금의위(錦衣衛)의 수좌를 겸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 랴! 그는 흥덕태자와는 주종의 사이를 떠난 막역한 사이이기도 했다. 금의위통령 추국태가 대례를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후후후, 뛰어난 인재로군." "소신이 어찌...." 추국태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허나 주천화의 말을 스스로 도 인정하고 있는 듯 오만한 기질이 그의 눈에 스치고 지나갔다. '음! 이 자는 태자형님의 가장 큰 조력자가 되겠군!' 주천화는 새삼 추국태의 전신을 살폈다. 이런 그의 눈빛은 담담 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순간 더할 나위 없는 무형의 위엄이 자연스럽게 뻗어나고 있었다. '으음! 무서운 기도로군. 숨이 막히는구나!' 추국태 역시 암암리에 주천화를 살피다 해연히 놀라고 있었다. 주천화의 얼굴이 굳어지며 그의 눈이 흥덕태자에게 돌려졌다. "태자형님, 이곳에 흑노를 살해한 인물이 있습니까?" "흑노?" 태자가 의혹의 눈을 들었다. (저하, 흑노란 천절오살마의 일 인인 섬강천마부 흑웅을 이르는 말입니다.) 금의위통령 추국태가 전음을 보냈다. (천문왕자님께옵서는 아마 그 자를 살해한 자를 찾아다니시는 듯 합니다.) 추국태의 전음에 흥덕태자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으음! 그렇다면 본루에 일이 있어 온 것은 아니었구나!' "하하하, 그 사람을 살해할 만큼 뛰어난 고수(高手)는 본루에 없다네!" 태자가 짐짓 정색했다. "더욱이 아우님의 수하임을 알고 있는데 본루의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했겠는가?" "하긴 천조섭사(天鳥攝士)의 절기라 한들 흑노를 그렇게 쉽사리 죽일 수는 없겠지!" 주천화가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아닌가? 헌데 순간 태자와 추국태의 안색이 급변하고 있었다. '아, 아니, 그는 내가 익힌 무공(武功)을 이미 알고 있단 말인가?' 태자의 전신이 가볍게 떨렸다. '이, 이럴 수가? 내가 천조섭사의 무공을 익힌 일은 대내에서조차 아는 이가 없거늘....' 태자의 경악은 당연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절세신공을 익혀와 이제는 가히 천하무적(天下無敵)으로 자부해 오고 있었다. 그가 익힌 무공은 바로 일천오백 년 전의 인물인 천조섭사가 남긴 것이었다. - 천조섭사(天鳥攝士). 천하패왕지존록의 서열 십구 위에 기록되어 있는 기인(奇人). 천조섭사는 천하의 모든 날짐승을 마음대로 다루는 괴인(怪人)이 었다. 이른 바 조령신공(鳥靈神功)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에도 그는 한 자루 섭선으로 대해(大海)를 가를 수 있다고 했다. 잔백비류선(殘魄飛流扇)이라는 이름의 그의 섭선(攝扇)에서 펼쳐 지는 무공은 가히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전해져 왔다. 주천화를 마치 귀신 보듯 멍청히 응시하던 태자의 눈에 한 가닥 기광이 스쳤다. 푸드득! 순간 그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던 금응(金鷹)이 쏜살같이 주천화에게 덮쳐오지 않는가? 크악! 금응의 입에서 광폭한 기성이 터졌다. 금응이 덮쳐오는 속도는 놀랍기 이를데 없어 절정고수의 신법을 능가했다. "흥!" 주천화가 낭랑히 웃었다. "한갖 미물(微物)따위가...!" 전궁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우우웅! 동시에 그는 어께에 메고 있던 강궁을 끌러 금응을 쳐냈다. 그의 신력은 일 장에 만 근 바위도 가루로 만들 정도가 아닌가? 크악! 섬전같이 덮쳐오던 금응이 전궁의 기세에 몸을 틀었다. - 천산금응(天山金鷹). 신비의 대산(大山) 천산에서만 서식하는 영물(靈物)이었다. 천산금응의 몸놀림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금응은 기묘하게 전 궁의 공세(攻勢)를 젖혀내며 재차 주천화에게 덮쳐왔다. "흥! 천산금응을 죽이고 싶으신 것이오?" 주천화가 차갑게 웃었다. 순간 천산금응이 주천화의 몸(體) 가까이 이르자 힘없이 퉁겨나갔다. 끄윽! 태자 앞에 퉁겨진 천산금응이 애처로운 신음성(呻吟聲)을 흘려내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천산금응의 발톱은 철판이라도 단숨에 베어 낼 만큼 날카로우며 호신강기조차 파괴하는 무서운 것이었다. 헌 데 단지 주천화의 강기에 닿자마자 맥없이 나가 떨어지지 않는가. "전궁, 그만 가자!" 주천화가 미간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태자 주의천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아우님, 오해하지 말게. 적의(敵意)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지 아우님의 무공신위를 보고자 한 것이네!" 그는 벌떡 일어서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 주천화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천화아우! 부황께서는 아우의 소식을 듣고 찾고 계시네." 태자 주의천이 한 걸음 따라오며 말했다. "...!" 순간 주천화가 우뚝 멈춰섰다. 그의 전신에서 한기(寒氣)가 솟아났다. "후후후,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이번에는 대막(大漠)으로 보내려고 말씀입니까?" 조소(嘲笑)와 한(恨)이 서린 음성(音聲)에 태자 주의천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 그렇지 않네. 부황께서는 이미 석년의 일을 깊이 후회하고 계시네." 이때였다. "천문왕자님! 폐하께서 왕자님이 듭시길 고대하고 계십니다." 한곁에 서 있던 금의위통령 추국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은 천명이오니 부디...." "천명? 황명으로 나를 찾으신단 말이냐? 후후후!" 주천화의 조소에 추국태의 얼굴이 붉어졌다. "왕자님! 감히 성상(聖上)을 모독하는 언사를...." 그는 싸늘히 호통치며 주천화를 쏘아보았다. 순간 주천화의 두 눈에 녹광(綠光)이 번졌다. "후후, 그대의 충정(忠情)은 가상하다만...." 번쩍! 한 가닥 백광(白光)이 주천화의 허리에서 뇌전(雷電)과 같이 허공을 달렸다. "허억!" 추국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검(劍), 주천화의 손에 천마제혈검이 들려 있고 그 검날이 그의 목에 닿아 있었다. 주르륵...! 한 줄기 선혈이 미미한 혈흔(血痕)을 남기며 흘러내렸다. '이, 이럴 수가? 언제 검을 뽑고, 언제 나에게 접근해 왔단 말인가?' "천, 천화아우!" 태자 주의천이 다급히 외쳤다. 주천화는 태자 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본좌가 그대에게 충고하겠다! 그대가 비록 천하를 오시할 문무 제일인자라고는 하나... 천 상천(天上天),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추국태의 몸이 진동되었다. '이, 이렇게 빠른 검이....' "경거망동(輕擧妄動)은 네 자신을 망칠 뿐 아니라 나아가 황실에 조차 누를 끼친다. 명심하고 부디, 끝까지 태자 형님을 보필하길 바란다." 철컥! 주천화가 말을 마치고 천마제혈검을 거뒀다. "천... 천화아우 앉게나." 태자 주의천이 안도하며 자리를 권했다. 주천화는 마음을 가라앉 힌 듯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전궁! 이리와 앉게." "예? 어찌 소인이 감히...." 전궁이 대경하여 손을 내저었다. "태자형님! 저 사람은 장차 천하제일신궁(天下第一神弓)이 될 인물입니다." 태자 주의천의 눈이 새삼 전궁을 훑어보았다. "오, 장사(壯士)! 그대는 개의치 말고 이리 오라!" 전궁이 엉거주춤 난색을 떠올렸다. "소, 소인은 미천한 놈! 어찌 감히...!" "하하하, 괜찮다. 이리 앉거라." 태자 주의천의 권유에 전궁이 마지 못해 주의천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바늘 방석에 앉은 듯 불안해 하는 표정이 어찌 보면 가관이었다. "후후후, 태자형님, 곧 몇 명의 손님이 또 올 것입니다." "...?" 태자 주의천이 의혹어린 눈으로 주천화를 응시했다. 구구궁...! 꽈과앙! 이때 돌연 아래쪽에서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들려오지 않는가? "무슨 일인가?" 금의위통령 추국태가 벌떡 일어섰다. "예! 무림십영이라는 자들이 이 층의 관문을 파해하려고...." 황급히 대답하는 무후천기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태자 주의천이 추국태를 쳐다보았다. "무림십영? 구파일방의 젊은 기재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들이 무엇때문에 본루에...?" 주천화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어렸다. "그들은 사대신비세력 중 한 곳인 이곳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래...?" 태자 주의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 된 일이군. 그 사람들을 인도하라!"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② 원형 탁자. 그 주위에 구 인(九人)이 조용히 앉아 있다. 주천화와 태자 주의 천, 그리고 제갈천옥을 비롯한 신진고수들이었다. 태자 주의천의 안색은 무거웠다. "모두들 본좌가 왜 강호무림(江湖武林)에 뛰어들었는지 의구심이 들 것이오." "...!" "...!" 그들은 과연 크게 의혹(疑惑)을 느끼고 있었던 참이라 말없이 태자 주의천을 응시했다. 다 음 대(代)의 천하지주(天下至主)가 어찌 강호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단 말인가? "...!" 실내(室內)에 긴장이 떠돌았다. 하나의 비사(秘事)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헌데 단 한 명, 태자 주의천을 주시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남궁연이었다. 그녀는 몽롱한 시선으로 주천화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뜨거운 시선, 그녀는 실내의 분 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주천화에게 뜨거운 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녀만이 아니었다. 제갈천옥도 수시로 주천화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 선 역시 남궁연의 눈에 떠오른 미묘한 열기를 담고 있지 않은가. "기실 본좌가 무림에 뛰어든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 때문이오." 태자 주의천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중인들의 눈에 은은 히 놀람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 천하에는 거대한 암류(暗流)가 흐르고 있소. 그것은 누군 가 무림을 장악하려 하기 때문이오." "으음!" "그, 그런 일이...." 중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태자저하! 그것이 사실이오이까?" 만기서생 금각이 자신도 모르게 외치며 입을 다물었다. 태자의 옆에 있는 추국태가 무서운 눈빛을 뿜어냈다. "네가 감히 태자전하의 말을 의심한단 말이냐?" "아, 아니오. 단지 너무 충격적인 말씀인지라...." 만기서생 금각이 하얗게 질려 고개를 흔들었다. "태자저하! 하면 전하께서는 그 암류의 정체(正體)를 알고 계시오이까?" 제갈천옥이 재기어린 눈을 들었다. "음...!" 태자 주의천이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가만히 내저었다. "그들의 정체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소." "...!" "기실 이 일이 단순한 무림의 일이라면 본좌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으나...." "예에? 그, 그렇다면 황궁과도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오이까?" "그렇소이다! 그들은 무림을 제패한 후, 황실마저 삼키려는 야욕 을 지니고 있소. 해서 본인은 부득불 무림부터 안정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오." 태자 주의천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말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이란 말인가? "...!" "...!" 실내는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각자 태자 주의천의 말에 깊은 상념에 빠져 들었다. "후유! 기실 저희들도 강호에 흐르는 암류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제갈천옥이 고개를 들며 좌중을 쓸어보았다. "그 암류는 서서히 무섭게 퍼져나가 종내에는 전 무림을 덮으리라고 생각되었기에 저희들 의 문파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은밀히 움직이고 있지요." "...!" "사실 저희들이 이곳에 온 이유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음...!" 태자 주의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본좌도 명문정파의 도움을 받아 오늘의 난관을 해결하고 싶었소. 허나 본좌의 생각에 그대들의 문파에 적도(賊徒)의 간세 (奸細)가 깊숙이 침투되어 있으리라 생각되어 섣불리 본좌의 고충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소." "간세(肝細)? 저희들 내부에 그들의 첩자가 침투해 있으리라 믿으십니까?" 만기서생 금각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일이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씀이오?" 제갈천옥이 탄식을 토했다. "저하의 말씀이 틀리지 않아요. 본사(本寺)에조차 적지 않은 첩 자가 암약하고 있음을 소녀는 알고 있었어요." "무, 무엇이?" "그, 그것이 사실이오? 제갈낭자!" 무림십영이 호된 충격에 몸을 떨었다. "실상 황궁 내부에조차 그들의 세력이 침투해 있소. 본좌의 입으 로 밝히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나...." 실내(室內)는 태자 주의천의 말에 따라 더욱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 그들이 대체 누구기에 이토록 가공스러운 음모를...." 사호충이 신음성을 흘려냈다. 태자 주의천이 문득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좌가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무엇이오이까?" "모두들 닥쳐올 마수(魔手)에 대비해 힘을 길러야 할 것이오." "...!" "지금으로서는 그 이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소." "전하!" 제갈천옥이 문득 침묵을 깼다. "소녀가 추측컨데... 이 모든 일을 해결할 사람은 천하에 단 한 분 뿐이니 그 분께...." 태자 주의천의 얼굴에 한 가닥 밝음의 빛이 스쳤다. "그, 그가 누구요?" "...!" 제갈천옥이 말없이 주천화를 응시했다. "처, 천화아우가?" 태자의 놀란 중얼거림에 중인들은 크게 놀랐다. '아우? 저 저 사람이 황자(皇子)였단 말인가?' 제갈천옥은 주천화의 정확한 신분을 알게 되자 해연히 놀라고 있었다. 주천화의 담담한 눈이 힐끔 제갈천옥을 바라보았다. "나는 결코 무림의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소." 무심한 일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 모두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저 사람은 황자이면서 어찌 황실과도 연관된 음모를 도외시한단 말인가?' 제갈천옥이 한 가닥 실망의 빛을 드러냈다. '천화아우는 아직도 그때의 한(恨)을 마음에 품고 있구나!' 태자 주의천의 얼굴에 처연한 빛이 감돌았다. "...!" 이때 주천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흑노를 죽인 자들을 찾고 있을 뿐이오. 나를 십일 년간이나 지켜준 흑노." "...!" "천하의 어느 곳이라도 뒤져 흑노를 죽인 자들을 찾아 인과응보 (因果應報)의 무서움을 가르쳐 줄 것이오!" 주천화의 전신에서 숨이 막힐 듯한 살기가 피어 올랐다. "설혹 그 자가 이미 죽었다 해도 그는 또 한 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 했던가? 주천화의 전신에서 치솟는 무서운 기세와 의미심장한 말에 중인들은 절로 몸을 떨었다. 마치 자신이 그 상대이기나 한 듯.... ③ 달빛, 그리고 눈발이 흩어지는 소로(小路)를 남녀가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일남일녀(一男一女), 그들과 삼십여 장 떨어져 거구의 청년이 강궁을 손에 든 채 조심스럽 게 뒤따르고 있었다. 주위를 경계하며 긴장을 놓지 않고 있는 거구 청년은 바로 전궁이었다. 일남일녀는 뜻밖에도 주천화와 제갈천옥이었다. "낭자,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이곳은 낙양성내로 접어드는 소로, 제갈천옥은 주천화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따라 왔으나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 주천화가 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자 제갈천옥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미소는 의미심장하며 또 화사했다. '아름다운 여인이군!' 주천화는 그녀가 살포시 웃기만 하자 고개를 흔들었다. '헌데 회색가사라... 승인이 되기엔 정녕 아까운 미모로군.' 주천화의 눈이 무심해졌다. "낭자, 할 말이 없다면 본좌는 이만 가겠소." 주천화가 성큼 큰 걸음으로 움직였다. "호호호, 공자님께서도 궁금한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 "궁금하진 않소. 단지 낭자가 할 말이 있다기에 들어보려 한 것 뿐이오." 문득 제갈천옥의 안색이 진지해졌다. "공자님께서는 소녀에게 승포(僧袍)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시겠죠?" "후후후, 그렇소." 주천화가 시인하자 제갈천옥의 얼굴에 우수가 스쳤다. "소녀는 공자님을 처음 본 순간... 공자님의 눈에서 그늘을 발견했어요." "...!" 주천화가 흠칫하며 제갈천옥을 바라다 보고 그녀는 허공으로 눈 을 돌렸다. 그 눈에 아련한 비애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있었어요." 독백이련가? 주천화를 의식하지 않는 듯 그녀의 음성이 회상에 젖어갔다. "그 계집아이는 철이 든 후 자신이 고아(孤兒)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 "그녀는 모진 세파(世波)에 시달리다 결국은 비구니가 될 결심을 했어요." "...?" 주천화의 눈에 의혹이 스쳐갔다. '이 여인은 나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호호호!" 제갈천옥이 문득 낭랑하나 처연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기왕이면 큰 사찰의 승인이 되는 것이 낫다 싶어 소림사에 찾아 갔어요." '소림?' "헌데 그것은 뜻밖에도 그 계집아이의 일생을 바꿔주는 커다란 행운이 되었지요." 제갈천옥의 독백같이 흘러 나오는 이야기, 주천화는 그것이 바로 그녀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고 있었다. "그 계집아이의 재질이 소림사 최고의 세 분 전대고인의 인정을 받았고...." "...?" "그 천한 계집아이 역시 자신의 재질을 깨달으며 점점 오만해지기 시작했어요." "음...!" "점차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되었고 자신의 위에는 단 한 명도 뛰 어난 인물이 없다고 자만하기에 이른 것이었지요." 제갈천옥은 계속 꿈꾸듯 말을 이었다. 주천화는 묵묵히 그녀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헌데 어느날...!" 그녀의 눈이 문득 주천화의 단아한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 계집아이는 한 사람의 소문을 듣게 되었어요. 차갑고 광오한 절대자, 천마대제, 바로 당신에 대한 소문을...." "...!" 제갈천옥의 눈이 뜨겁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주천화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외치듯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 천마대제라는 신비미서생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 까닭은...." "후후후, 그와 겨루어 보고 싶었겠지." 주천화가 담담히 웃었다. "그래요!" 제갈천옥이 고개를 끄덕인 후 주천화를 직시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주천화를 직시하자 주천화도 몸을 세웠다. "겨루어 보시겠소? 후후후!" 주천화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 제갈천옥이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나는 도저히 못오를 하늘을 보았어요." "후후후, 고맙소." 주천화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갈천옥도 천천히 걸음을 떼어 뒤따랐다. "...!"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알 수 없는 분위기, 그들은 단 몇 마 디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어쩐 일인지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소녀는 어쩐지 영원히 소녀의 소망을 풀지 못할 것 같아요." "소망이 무엇이길래?" "비구니가 되는 것. 호호호!" 제갈천옥이 문득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밝고 천진한 미소, 주천화는 그녀의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며 가슴이 따뜻해져 옴을 느꼈다. '후후, 기이하군. 마치 오랜 옛날부터 이미 사귀어 온 듯한 느낌이 드는군!' 주천화는 한 생각을 떠올리고 내심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참, 공자께서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문득 제갈천옥이 지나가는 말투로 질문했다. 짐짓 무심한 말투, 허나 그녀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호호호, 저는 열아홉이에요." "아, 그럼 내게 누님이 되겠군." "누님?" 제갈천옥의 눈에 보일 듯 말 듯 환희가 솟아났다. 차갑고 너무나 멀리만 느껴졌던 주천화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후후, 낭자는 나의 내력을 듣고 싶지 않소?" 주천화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으리만큼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제갈천옥에게서 어떤 따 뜻한 감정을 느낀 때문일까? 어머니의 냄새같기도 하고 또 다정한 누이같은 분위기 그리고 포근한 연인(戀人)같은 복잡한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많은 말을 하게 한 것일까? "듣고 싶지 않아요. 이미 알고 있는 걸요?" "나의 내력을?" "예! 공자님이 황자(皇子)라는 사실과 천마대제의 전인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오. 벙어리 왕자였 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주천화의 전신(全身)에서 여인(女人)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고독이 묻어났다. "나는 어머님이 없소. 내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신 것이오." "아!" 제갈천옥의 가슴이 젖어왔다. "나는 연약했고 또 고독했소." "...!" "후후후, 이제까지 나는 강해지려고 노력했으나 내 마음은 자꾸 연약해지기만 하니...." "...!" 제갈천옥이 가만히 주천화의 한 쪽 팔에 팔짱을 꼈다. 자연스러 웠다. 또한 마치 주천화의 어떤 마음을 감싸주려는 듯 자애하고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차차 뜻대로 되시겠죠." 그녀는 주천화의 어깨에 부드럽게 머리를 기대었다. 그들의 모습은 매우 자연스럽게 보였 다. 뒤따라 오던 전궁이 그 광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기랄, 저 계집애가 누군데 회색 여우같은 것이 그새 공자님을 휘어잡다니....'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도리질했다. '청매가 불안해 하더니 결국 여우같은 계집애가 공자님을....' "호호호, 아주 보기 좋은 광경이군요. 옥언니!" 전궁이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제갈천옥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을 때 주천화와 제갈천옥의 앞길에 불쑥 한 소녀가 나타나며 낭랑한 교소를 터뜨리지 않는가! 몸에 착 달라붙는 홍의경장의 소녀, 십오륙 세 되었을까? 전신에 타는 듯 붉은 홍의를 걸친데다 질끈 머리를 동여맨 한가닥 면대조차 붉은 색이었 다. 흡사 불(火)의 요정이랄까? 소녀의 용모는 귀엽고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손에는 또한 붉은 활이 들려 있었는데 마치 장난감처럼 작고 예쁘게 생긴 소궁(小弓)이었다. '또 계집애가 나타났군!' 전궁이 불쑥 나타난 홍의소녀를 향해 강전을 날리려다 멈췄다. '이크! 저, 저것은 붉은 여우인가?' 전궁의 눈에 불안이 가득했다. 제갈천옥이 황급히 주천화에게서 떨어지며 얼굴을 붉혔다. "향매가 웬일로?" "호호호, 십전십미 옥언니와 천마대제 주공자님이 애틋한 사랑의 밀어(密語)를 나눈다... 전 무림이 경동(輕動)할 사건이군. 호호호!" 주천화의 얼굴도 미미하게 굳어졌다. "아, 아니 낭자께서는 그 무슨 말을...." 주천화가 당황해 하는 모습에 홍의소녀는 재미있는 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소녀 유난향(柳蘭香)! 공자님께 인사올립니다." 그녀는 짐짓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허나 그녀는 고개를 들며 혀를 쏙 내미는 것이 아닌가? 실로 귀엽고도 익살맞은 그런 모습이었다. 말괄량이 기질이 철철 넘치는 홍의소녀, 그녀가 누구인가? - 홍궁화봉(紅弓花鳳) 유난향(柳蘭香). 바로 무림이봉(武林二鳳) 중 일 인이었다. 천하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말괄량이, 그녀는 무림 오대세가 (五代勢家) 중 하나인 만궁보(萬弓堡)의 무남독녀였다. "향매는 무슨 일로?" 제갈천옥이 민망한 듯 대화를 바꿨다 "호호호, 옥언니 저를 이곳 낙양으로 오라고 한 사람이 누구였 죠? 혹시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잊어버리신 것이 아니에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제갈천옥은 더욱 곤경에 빠져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말괄량이한테 쑥스러운 광경을 목격당하다니 이 분의 신분을 알면서도 저토록 짓궂 게...' 주천화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후, 귀여운 소녀로군 한 점의 그늘도 없고 발랄하기만 하니....' 그는 유난향을 바라보며 내심 고소를 흘렸다. '훗! 무림에 나온 후 처음으로 당혹감을 맛보는군. 사랑이라?' 주천화가 당혹해 하고 있을 때, 삼십여 장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 고 있던 전궁 역시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제기랄...! 저 놈의 붉은 여우는 꼬리가 아홉 개는 달린 모양이 구나. 자신도 은근히 꼬리를 치면서 회색여우를 골탕먹이는 수법이란....' 이때, 유난향의 맑고 깨끗한 눈은 주천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주천화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그녀는 주위를 아랑곳 하지 않 은 채 주천화의 용모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호호호, 너무 예뻐! 좋아! 좋아! 내맘에 쏙 들어!" 유난향은 혼자 중얼거리며 점잖게 고개까지 끄덕이지 않는가?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허어!' 주천화가 어이가 없어 눈을 돌렸다. 이때 유난향이 돌연 붉은 소궁에 앙증맞은 녹색 화살을 걸어 한 곳을 향해 날리지 않는가? 십여 장 좌측 숲쪽이었다. 쐐애액! 그녀의 장난감같은 소궁에서 무서운 파공음이 터졌다. 정녕 놀라운 기세였다. 꽈꽝! 소궁의 시위줄이 튕겨지자 은은히 뇌성(雷聲)이 울려퍼졌다. 녹색 작은 화살은 무서운 속도로 숲 속의 아름드리 거목(巨木)에 꽂혔다. "호호호, 연언니, 어서 나오시지요." 유난향이 허리를 잡고 깔깔 웃었다 "...?" 제갈천옥과 전궁이 의혹을 느끼며 거목을 주시했다. "...!" 순간 한 명의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거목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 냈다. 청의소녀, 바로 남궁연이 아닌가? "연매! 연매가 어떻게?" 제갈천옥이 은은히 놀라며 질문을 던졌다. "호호호, 앙큼한 연언니 같으니, 치사하게 나무 뒤에서 옥언니와 주공자님의 뜨거운 사랑의 장면을 엿보다니...." 유난향이 살짝 눈을 흘겼다 "...!" 남궁연은 목덜미까지 붉힌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크으! 미치겠구나! 이번에는 또 푸른 여우가 나타나다니....' 전궁은 눈을 꿈벅거렸다. '도대체 몇 마리의 여우가 숨어 있길래... 큰일났구나! 저 여우 들이 모두 공자님을 휘어잡으려고 날뛰고 있다.' 한편, 주천화는 유난향의 짓궂은 말에 어쩔 줄 몰라 허공만 올려다 보고 있었다. "와하하하!" 이때 어이가 없는 듯 주천화는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민망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 한 웃음이련가? 허나 그의 가슴은 실로 처음으로 따뜻해져 있었다. 눈(眼), 점차 굵어지고 있었다. ■ 황 제2권 제15장 여심(女心), 빗나간 사랑! ━━━━━━━━━━━━━━━━━━━━━━━━━━━━━━━━━━━ ①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황도(皇都)인 금릉(金陵)으로 통하는 요충지로 낙양(洛陽), 항주(抗州)와 함께 중원의 삼대 상업도시(三大商業都市)로 손꼽히는 대읍이었다. 더욱이 황도가 가까운 관계로 수많은 거상 (巨商)들이 집단을 형성해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서주의 시가(市街), 천하의 온갖 산물(産物)들이 이곳에서 거래 되며 항시 흥청거리고 있었다. 때는 미시 무렵, 한 대의 사두마차가 인파를 헤치며 시가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마부석에 는 태산만한 거구의 청년이 앉아 힘차게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작은 산(山)을 방불하는 놀라운 거구, 범같은 눈, 바로 전궁이 아닌가? 그렇다면 마차 안에는? 그렇다! 바로 주천화가 두 눈을 반개(半開)한 채 사념에 잠겨 있었다. '대천루, 사대신비세력 중 대천루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어 느 곳에서 구천만마문을 습격한 것일까?' '금광회? 난화군주 지매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도 황 실세력일텐데... 혹 금광회에서 구천만마문을 습격한 것이 아닐까?' 주천화의 눈이 번쩍 떠졌다. 맑은 빛이 번뜩였다. '좋다! 일단 금광회에 가보자! 금릉에 가는 이상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이때 주천화가 타고 있는 사두마차를 뒤따라 질주해오고 있는 팔기마차가 있었다. 히히잉! 두두두...! 사두마차의 삼십여 장 뒤쪽, 맹렬한 속도로 주천화의 사두마차를 뒤따라오고 있는 팔기마차는 화려하기 이를데 없었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한혈마(寒血魔) 네 필과 또 윤기 흐르는 검은 오추마(烏 馬) 네 필. 팔기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만 해도 이미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명(明).> 팔기마차의 전면에 한 개의 깃발이 당당히 펄럭이고 있었다. "멈추시오!" 팔기마차는 순식간에 주천화의 사두마차를 쫓아왔다. "헛! 명친건흥군의 마차가!" 뒤돌아 보던 전궁이 흠칫하며 마차를 세웠다. "오라버니!" 순간 팔기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허공을 날아 전궁에게 쏘아져 왔다. 눈이 번쩍 뜨이도록 아름다운 궁장소녀, 바로 백청청이 아닌가? 이때 백청청은 우아한 궁장(宮裝)을 걸치고 있어 정녕 선계의 천녀(天女)인 듯 눈부셨다. '청매가?' 백청청의 음성에 주천화 역시 흠칫해 하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청매! 어떻게?" "화랑!" 백청청이 주천화의 가슴에 뛰어 들었다. "...!" "...!" 대로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히야! 내 오십 평생(平生)에 저같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은 처음 보는군!' 주천화는 군중들의 눈길을 의식하고 그녀를 가만히 떼어냈다. "청매! 어떻게 나를 따라왔소?" "흥! 다 들었어요. 화랑이 수십 마리의 여우들에게 휩싸여 정신이 없으시다고...." "여우들?" "그래요!" 백청청이 샐쭉해서 외쳤다. "그래서 이렇게 허겁지겁 달려온 거예요!" "훗!" 주천화가 내심 쓴 웃음을 머금고 전궁을 응시했다. 전궁은 짐짓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 딴청을 하고 있었다. "흥! 내 화랑 혼자 강호를 주유하고 다니는 것이 항상 불안했는 데 결국 여우같은 것들이 화랑을...." 백청청이 슬그머니 주천화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얏!" 주천화가 죽는 시늉을 했다. "호호호!" "하하하!" 주천화가 낭랑히 웃은 후 다정한 눈으로 백청청을 응시했다. "청매! 걱정할 것 없소! 기껏해야 세 명밖에 되지 않으니!" "예에?" 백청청의 눈이 똥그래졌다. 주천화의 능청에 그녀가 어이가 없는 듯 할 말을 잊었다. '히야! 공, 공자님도 이제 보니 순 능구렁이였구나!' 전궁 역시 혀를 내둘렀다. "하하하!" 주천화가 그들의 어이없어 하는 모습을 보며 대소를 터뜨리자 백 청청과 전궁은 슬며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히히핫!" "화랑!" "...?" 백청청이 한 팔을 끼며 기대왔다. "우리 마차들을 돌려 보내고 이곳 서주 시가를 구경해요." "그럽시다!" 주천화가 쾌히 승락하자 백청청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앞장섰다. 서주 시가는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늘어선 상점들 그리고 대로에까지 수많은 상 인들이 좌판(坐板)을 늘어놓고 목청껏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그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선남선녀들은 화복(華服)을 입은 사람으로부터 다 떨어진 누더기 를 걸친 사람 등,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사람들도 어깨를 맞대지 않고는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청매! 아직도 살 것이 남아 있소?" "호호호, 이제 몇 가지만 더 사면 될 것 같아요." 싱그러운 미소를 띄우고 대꾸하는 미소녀는 바로 백청청이었다. 그녀의 뒤로는 전궁 백전이 한아름 수많은 물품들을 안은 채 따라오고 있었다. 비단, 향료, 향차(香茶) 등등.... 전궁은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많은 물건들을 안은 채 주천화와 백청청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주천화가 내심 혀를 내둘렀다. '후유! 모를 일이군. 저 많은 물건을 사고도 도대체 얼마나 더 돌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주천화는 아예 질린 듯 백청청이 잡아 끄는 대로 끌려다니고 있었다. "...!" 이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더 살 것이 없나 기웃거리던 백청청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전면의 삼 장 좌측, 한 개의 쇠말뚝이 지면 깊숙이 박혀 있었고 말뚝에는 두 개의 쇠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 끝에는 두 마리 괴이한 짐승이 매어 있었다. 흡사 흑고양이같이 생긴 작은 짐승이었다. "자, 심산 깊은 곳에서만 사는 만수지왕(萬獸之王), 전설의 흑호(黑虎)입니다." 쥐눈의 사십대 중년인이 연신 손님을 부르며 외치고 있었다. "은자 오백 냥! 자! 흑호새끼를 살 분이 없습니까?" "호호호, 화랑." 백청청이 주천화를 잡아 끌었다. "저, 저것 좀 봐요! 아주 귀여워요." "...!" 지겨운 듯 하품하던 주천화의 눈에 기광(奇光)이 번뜩였다. '흑호? 만수잡기록(萬數雜奇錄)에 나오는 그 흑호?' 주천화는 만수성의가 남긴 만수잡기록의 한 구절을 떠올리고 해연히 놀랐다. - 만수잡기록(萬獸雜奇錄). 이것은 만수성의가 남긴 기서였다. 만수잡기록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신물영초(新物霙草)와 기금이수(奇禽異獸)는 물론 전설 속의 영웅들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는 책자였다. 모든 영조의 특징과 생김새 그리고 사용방법, 모든 괴수(怪獸)들 의 생태 등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주천화와 백청청이 흑호새끼를 팔고 있는 회의중년인에게 다가가 는 순간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하, 여보게! 법 그것이 흑호새끼인지 고양이인지 어떻게 아나?" "허허헛! 그러게 말이야! 그걸 도대체 누가 믿는단 말인가?" 사람들이 지나가며 장사꾼을 비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 순간 주천화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으음, 저것은 진짜 흑호의 새끼다. 저 영물을 용케도 잡았구나!' "어머 불쌍해요. 추운가 보아요. 저 귀여운 것들이 떨고 있지 않아요?" 백청청이 주천화를 잡아 끌었다. "화랑! 우리가 사서 길러요." 주천화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또? 또 사자고? 이, 이젠 저 맹호(猛虎)의 새끼까지!' 이때 백청청의 말을 듣고 회의중년인이 반색을 했다. "어이구! 잘 생각하셨습니다. 미소부(美少婦)의 높으신 안목(眼 目)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의 말에서 와르르 변죽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헤헤, 글쎄 아무도 이 영웅들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미소부께서는 단번에 알아주시니...." 상인이 미소부라는 말에 자꾸 힘을 주자 백청청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멋! 이 사람은 화랑과 나를 부부(夫婦)로 알고 있나봐!' 허나 그녀의 내심은 상인의 말이 듣기 좋았다. '하긴, 우리는 이미 부부지연(夫婦之緣)을 맺었으니 부부나 진배 없지.' 그녀는 기분이 흐뭇했다. "하하하, 귀하의 장사수단이 보통이 아니구료." 주천화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품 속에서 황금(黃金) 열 냥을 꺼냈다. "자! 그 놈들을 아가씨에게 어서 드리게나!" 상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 아니 이것을 모두?" "하하하, 받아두시오!" "아이구! 재신(財神) 나으리!" 상인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그는 황급히 흑호새 끼 한 마리를 끌어 백청청에게 인계했다. "호호호, 화랑! 이 놈 좀 봐요! 내 손을 마구 핥잖아요? 호호, 내가 좋은가 봐요." 백청청은 흑호새끼를 가슴에 안은 채 즐거워했다. "후후후, 그 놈도 미인을 좋아하는 모양이구료." "아이!" 백청청이 무안한 듯 곱게 눈을 흘겼다. "헤헤, 대인의 말이 옳습니다. 지금까지도 흉폭하기만 하던 놈이 마님의 품 속에서는 얌전해지다니...." 상인은 연신 아부를 잊지 않은 채 또 한 마리의 흑호새끼를 끌어냈다. "...!" 상인이 나머지 흑호새끼를 두 손으로 공손히 주천화에게 내밀었다. "...!" 주천화는 백청청이 좋아하는 모습만을 가만히 지켜보며 두 손을 내밀었다. 순간 상인의 눈에서 찰나적으로 기광이 스쳤다. 악독한 눈빛, 살기(殺氣)가 번뜩이는 무서운 눈빛이었다. 끄응...! 찰나 흑호새끼의 입에서 애절한 신음이 들리고, 한 가닥 예리한 검광이 그대로 주천화에게 밀려 들었다. 악독한 함정이었다. 상인의 소매 끝에서 예리무비한 단검이 튀어나와 흑호를 관통해 주천 화의 가슴까지 박혀 왔다. 실로 교묘한 수법인 것이다. 주천화는 흑호 때문에 상인의 검을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악독한 득의(得意)의 미소를 흘려내던 상인의 눈에 돌연 공포가 스쳤다. 주천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상인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 허나 주천화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녹광(錄光), 악마(惡魔)의 마화가 그 눈에 피어오른 채 냉랭한 한기를 품어냈다.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는데 눈은 무심하며 싸늘한 주천화의 모습은 정녕 심장이 그대로 멈춰버릴 것 같은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이, 이럴 수가! 용, 용린검(龍麟劍)은 어떠한 호신강기(護身剛 氣)라도 파해할 수 있는 명검인데!" 상인이 공포에 질린 채 주춤 물러섰다. "후후후, 용린검? 허나 천인혈옥삼을 뚫을 수는 없음을 몰랐던 게로구나!" 털썩!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버린 한 마리 흑호가 지면에 떨어지며 피보라를 일으켰다. 파아...! 그 피보라 속에서 상인은 하얀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크윽!" 허나 보기만 했을 뿐, 그뿐이었다. 피하기는 커녕 피해야겠다고 생각도 하기 전에 주천화의 하얀 손이 그의 가슴으로 박혀 온 것이다. 우드득! "...!" 주천화는 상대의 가슴에 한 손을 박아 넣은 채 뒤틀었다. 섬뜩한 음향이 울려 퍼졌다. "끄으으으악!" 무심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던 상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 이 터졌다. 헌데 돌연 한 음성이 들려 오지 않는가? "흥! 과연 천마대제답군. 동북방 십 리 밖의 묘지로 오너라. 기다리겠다." 주천화가 고개를 돌리자 이미 한 인영이 백 장 밖으로 신형을 감 추고 있었다. 주천화의 입에서 냉소가 터져 나왔다. "청매!" "예." "곧 돌아올 것이오. 저곳 객점에서 기다리시오." "저, 저도 함께 가면 안될까요?" "아니되오." 주천화는 단호히 말한 후 전궁을 바라 보았다. "전궁!" "예!" "청매를 지키시오." 순간 백청청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화랑의 곁에서 떨어지면 안돼요. 소녀에 게는 천하무적의 독공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끄응!" 전궁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천화를 바라 보았다. 주천화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하긴 당금 무림에서 청매를 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 몇이나 있겠는가!' 주천화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이 한순간의 방심이 그를 최대의 곤경에 빠지게 만들 줄은 지금의 주천화가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또한 그로 하 여금 장차 어떠한 일에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계기도 되었으니.... ② 휘이잉...! 밤(夜), 바람이 차다. 겨울 바람은 혹독하기 이를데 없이 강렬한 한기(寒氣)를 대동한 채 대지를 휩쓸고 있었다. 그 바람은 서주 교외의 이름없는 어느 묘지를 더욱 음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문득 한 인영이 그 한풍(寒風)에 묻어 온 듯 묘지 앞에 내려섰다. 바로 주천화였다. 이 순간 주천화의 전신에서는 겨울바람보다도 더욱 차가운 한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헌데 이 순간 주천화의 맞은편 어둠에 잠긴 묘지 속에서 왜소한 체격의 그림자가 홀연 모습을 드러냈다. "호호호!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요."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인영으로 눈을 돌리던 주천화의 눈에 일순 이채가 스쳐갔다. '저 소녀는 개방의...?' 나타난 인영은 의외에도 흑봉취접 강추령이었다. 넝마 속에 여인의 미(美)를 감추고 있는 무림십영의 일 인, 이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냉랭한 한기가 떠올라 있었다. '용린검으로 나를 죽이라고 시킨 인물이 뜻밖에 낭자였군.' "호호호! 당신이 내게 준 수모를 잊을 줄 알았나요?" 강추령이 처절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표독스런 여인의 한(恨)이 배어있는 웃음소리였다. "후후!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그 대인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오." 주천화는 담담히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흑봉취접 강추령의 눈에 더욱 악독한 빛이 스쳐갔다. "호호호, 본녀가 일단 활동을 개시했는데 그렇게 단순한 계략만 으로 당신을 상대할 것 같아요?" "...?" 강추령이 돌연 손뼉을 쳤다. 주천화는 그녀의 태도에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며 몸을 돌렸 다. 강추령이 득의의 교소를 터트렸다. "이제 천마대제 당신은 최초로 본녀에게 패하지 않을 수 없을거 예요. 자, 어서 모시고 나오너라!" 강추령의 음성이 떨어지기 무섭게 뒷쪽에서 조용히 일남일녀가 걸어 나왔다. 한 명은 넝마 를 걸치고 초립을 눌러 쓴 중년의 개방 수하와 한 명의 소녀였다. 헌데 개방 수하는 함께 걷고 있는 소녀의 목에 검을 대고 있는데 예의 소녀는 바로 백청청이 아닌가! "으음...!" 주천화가 흠칫 긴장의 빛을 떠올렸다. "호호호,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은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거예요."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주천화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강추령을 직시하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내 목숨을 원하는 것이오?" "목숨? 호호호!" 흑봉취접 강추령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 쉽게 죽일 수야 없지. 당신을 내 하인으로 만들겠어요. 평생 내 말에 복종하게 만들어 더할 나위 없는 굴욕감을 느끼게 만들어 줄 거예요." "하인?" 주천화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쳐갔다. "그래요. 기라면 기고, 내 발을 씻으라면 씻는 그런 하인이 되어야 해요." "하지만 청매가 자유롭게 되는 순간 나는 당신을 죽일 수도 있소." 주천화가 빙그시 미소했다. 우선은 백청청의 일신에 위험이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흥! 나는 당신에게 약속을 받아 내기 전에는 그녀의 목에서 검 을 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을 거예요." "약속?" "그래요. 당신은 소위 남아대장부이니 스스로 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지요?" "어떤 약속을 말하는 것이오?" "호호호! 물론 본녀의 하인이 되겠다는 약속이지요." "말뿐인 약속으로 청매를 풀어줄 수 있단 말이오?" "그래요. 나는 당신을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파렴치한으로 보지는 않아요." 흑봉취접 강추령의 눈에 떠올라 있던 살기는 어느새 기이한 빛으 로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고집스러운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그런 눈빛같았다. 게다가 주천화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 깊은 곳에는 기이한 열정 (熱情)마저 떠돌고 있었다. 실로 알 수 없는 것이 여인(女人)의 마음이라 했는데 과연 그녀는 무슨 마음을 품고 있단 말인가? 잠시 무심한 표정으로 강추령을 응시하던 주천화의 입가에 부드 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후후후...!" 주천화의 그 미소에 강추령은 일시지간 가슴이 진탕되어 옴을 느껴야 했다. 다소 짓궂은 장난기마저 엿보이는 미소, 마치 강추령의 내심(內心)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기이한 미소였 다. 그 미소는 실로 기이한 마력(魔力)이 되어 강추령의 동공으로 파고 들었다. "왜, 왜 웃어요?" 강추령은 자신의 내심을 들킨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 렀다.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을 청매의 동생으로 인정하겠소." "...?" 불쑥 주천화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실로 기괴(奇怪)했다. 일시지간 강추령은 무슨 뜻인 지 몰라 의혹(疑惑)의 눈으로 멍청히 주천화를 바라 보았다. 허나 이내 그녀의 어깨가 진동 했다. '청매의 동생으로 정하겠다고...? 저, 저 여자는 천마대제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들었다. 부인이 될 여자인 것이다. 헌데 날 부인이 될 여자의 동생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강추령은 현명한 여자였다. 주천화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미 깨달은 것이었다. 주천화의 말은 곧 주천화가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받아 들이겠다는 뜻인 것이다. "당, 당신...!" 강추령은 정곡을 찔린 듯 말을 더듬고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 났다. 주천화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장난기 어린 짓궂은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후후후, 언니가 될 사람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어서야 장차 어 떻게 둘이 사이좋게 본좌를 섬길 수 있겠소?" 주천화가 능청스럽게 한 눈을 찡긋했다. 그는 이미 강추령의 마 음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추령의 이런 행동은 수모를 받은 원한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주천화에 대한 연정이 비뚤게 표현된 것이었다. "당, 당신은 정말...." 강추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 올랐다. 그녀는 처참한 패배감과 터질 듯한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휘청거렸다. 주천화의 눈이 백청청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개방수하에게 돌려졌다. "그대는 청매의 몸에서 검을 치워라!" 헌데 바로 이때였다. 삼십대로 보이는 개방 수하가 돌연 섬칫한 괴소를 터트렸다. "흐흐흐...!" 그 괴소는 실로 섬뜩해 강추령은 무서운 예감을 받으며 후닥닥 고개를 돌렸다. 순간 개방 수하가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초립을 뒤로 젖혔다. 드러난 얼굴을 대한 강추령의 안색이 돌처럼 굳어졌다. "넌, 넌 누구냐? 본방의 제자를 어떻게 했느냐?" "흐흐흐! 나는 기선풍(奇詵豊)이라 한다." "기... 선풍!" 강추령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 흑사(黑邪) 기선풍(奇詵豊). 천하제일의 쾌도(快刀)를 구사한다는 공포의 살수(殺手)이다. 그 는 오로지 단 한 수의 살초만으로 정확히 상대의 목젖을 꿰뚫는 인물이었다. 방어를 무시한 절대살도(絶代殺刀), 그는 무림이괴(武林二怪)중 의 한 명으로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가공스러운 고수였다. 기선풍의 눈이 천천히 주천화를 향해 돌려졌다. 이어 무심하기 이를데 없는 바람같은 음성(音聲)이 그의 얇은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천마대제, 천인혈옥삼을 벗어라. 그러면 이 여인을 놓아줄 것이다." 일견해 기선풍에게서는 일체 살기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태도를 대한 주천화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살수무정심결(殺手無情心訣)을 깨우친 가공할 만한 고수다!' 주천화는 상대가 변화를 무시한 쾌도를 사용하는 자임을 깨닫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본좌와 정식으로 비무(比武)해 보고 싶은 모양이군." "후후후! 그렇소." 주천화는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천인혈옥삼을 벗었다. 그는 천인혈옥삼을 불쑥 강추령에게 내밀었다. "강소저! 이 옷을 좀 들고 계시지 않겠소?" 돌변한 사태에 넋이 빠져 있던 강추령이 화들짝 놀라며 주천화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 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했음을 깨닫고 망연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해요. 제 본의가... 아니었어요." "후후후! 알고 있소." 이때 기선풍은 백청청의 목에 대고 있던 도를 거두며 그녀를 밀 어냈다. 일순 백청청의 눈에 살기가 솟아났다. 그것을 발견한 주천화가 나직이 소리쳤다. "청매,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마시오. 그는 당신이 상대할 인물이 아니오." "휴우...!" 백청청이 탄식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기실 그녀는 금제에서 벗 어나자마자 기선풍을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백청청이 물러서자 주천화는 기선풍과 대치해 섰다. 기선풍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그대가 말리지 않았다면 저 여인은 지금쯤 죽었을 것이오. 나의 파섬도(破閃刀)를 피할 자는 아무도 없으니 말이오." "파섬도? 그렇다면 그대는 파풍쾌섬도(破風快閃刀) 기삼(奇衫)의 후예이겠군." "놀랍군. 아직까지 나의 내력을 알아내는 사람이 없었는데 단숨에 나의 내력을 알아 내다 니...!" 주천화의 말에 기선풍의 눈빛이 흔들렸다. '파풍쾌섬도 기삼, 천하패왕지존록 서열 구 위에 올라 있는 인물 이다. 헌데 그 사람의 후예를 만나게 될 줄이야...!' 한편 주천화 역시 내심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패왕록 서열 구위라면 실로 엄청난 인물이 다. 칠천대극마 중 맏형이었던 만수성의가 서열 십위였으니 파풍쾌섬도 기삼의 무공은 가히 절대무적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마서원에는 천하패왕지존록에 올라있는 일천 명 최강고수들의 무공비급들이 대부분 모 아져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파풍쾌섬도 기삼을 비롯한 몇 명의 무공비급은 빠져 있었다.' 주천화의 생각이 이어졌다. '하긴 그 정도만이라도 수집한 것만 해도 선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천화는 전신에 진기를 모으며 생각을 굴렸다. '저 자의 무공은 단 일초의 쾌도이다. 방어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가공할 살초... 허나 왠지 저 자가 마음에 든다. 저 자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할 방법은 없을까?' 불현듯 그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린 듯 밝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천하패왕지존록 서열 팔 위, 청해화검옹(靑海和劍翁)의 화검류(和劍流)를 펼치면 되겠군.' - 청해화검옹(靑海和劍翁). 파풍쾌섬도 기삼이 천하를 주유할 때 그와 쌍벽을 이루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청해화검옹 이었다. 그는 화검류라는 독특한 검공으로 수많은 격전을 치루면서도 단 한 번도 사람을 죽 인 적이 없는 괴인이었다. 공격을 배제한 완벽한 방어초식, 파풍쾌섬도 기삼의 도법이 방어는 염두에 두지 않는 일초 살공이라면 화검류는 전문적으로 남의 공격만을 방어하는 검초였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천하를 주유했고, 결국 격돌했다. 허나 패도(覇刀)가 이겼는지 화검(和劍)이 승리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두 사람 모두 그 이후 영원히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헌데 주천화가 생각에 잠겨 있는 순간 돌연 전궁이 노호를 터트 리며 강궁을 잡아 당기지 않는가! 그 무서운 강전이 폭발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번... 쩍! 기선풍의 허리에서 무서운 도광이 폭발했다. 티잉! 기이한 음향과 함께 전궁의 몸이 휘청였다. "이, 이럴 수가!" 전궁이 멍청히 부르짖었다. 놀랍게도 어느새 그의 만년묵강철로 만든 강궁의 시위가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실로 전광석화같은 순간의 일이었다. "후후후, 그대는 천강흑신궁의 후예로군. 허나 그대는 내 적수가 아니다." 기선풍은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도는 뽑힌 적이 없었다는 듯 허리에 꽂혀 있을 뿐인지라 그 속도의 쾌속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전궁의 안색이 변하며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죽, 죽이겠다!" 촤아악! 전궁은 이내 무서운 기세(氣勢)로 금천수라대검을 빼들었다. 오 척 길이의 기형검이 검은 빛을 발하며 죽음의 냄새를 뿌리기 시작했다. "전궁. 비켜서게! 그는 나를 만나러 온 사람이다." 주천화가 손을 흔들었다. 전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흠칫하며 물러섰다. 주천화와 기선풍이 다시 대치해 섰다. 무거운 정적과 긴장이 허공에 떠돌기 시작했다. 어느 한순간, 기선풍이 무서운 기세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저 자의 도식은 발검(拔劍)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천화는 아직 검을 뽑지 않은 상태였다. 주천화가 검을 뽑지 않자 기선풍이 싸늘히 외쳤 다. "검을 뽑아라!" 주천화는 담담히 웃을 뿐 검을 뽑지 않았다. 기선풍이 고개를 흔들었다. "고집이 세군. 하지만 일단 내가 검을 뽑으면 그대는 검을 뽑지도 못한 채 당할 것이다." "후후후, 과연 그럴까?" "건방진...!" 번... 쩍! 쐐애액! 기합도 도광도 없이 한 줄기 날카로운 파공음만이 허공을 갈랐다. 허나 그 파공음은 이미 도가 허공을 벤 뒤에야 들려올 정도였으니 도세의 빠름은 가히 섬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 다. 게다가 기선풍의 도가 채 뽑히기도 전에 삼엄한 도기(刀氣)가 이 미 주천화의 전신으로 쇄도해 들고 있었다. 무서운 파공음과 함께 두 인영이 갈라섰다. 이 순간 기선풍은 두 눈을 부릅뜨고 주천화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그대가 나의 파섬도를 피하다니...!" "...!" 주천화가 담담히 자신의 왼쪽 소매를 내려다 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옷소매가 반 자나 베 어져 너풀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미미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과연 놀랍군. 천하최고의 천마무영신법으로도 완벽히 피해내지 못하다니...!' 한편, 주천화와 기선풍의 격돌을 지켜보던 전궁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저, 저 자가 공자님의 옷깃을 베다니...!' 기선풍이 다시 허리에 손을 대며 눈을 번뜩였다. 순간 주천화는 그제서야 천천히 천마제혈검을 끌어냈다. "쾌월섬!" 기선풍의 허리에서 다시 무서운 도광이 폭발하듯 일었다. 뇌전을 방불케 하는 한 가닥 섬광이 주천화를 덮어 씌웠다. "섬망밀밀(閃網密密)!" 주천화의 입에서 낭랑한 일갈이 터지고, 찰나 허공은 천라지망을 방불케 하는 검망(劍網)에 뒤덮혔다. 카앙! 귓청을 뒤흔드는 금속성(金屬聲)이 진동했다. "윽!" 기선풍의 몸이 튕겨졌다. 간신히 제자리에 버티고 선 그의 눈에 는 경악의 폭풍이 물결치고 있었다. "섬망밀밀...! 그, 그것을 어찌 당신이...?" "그대의 선사와 청해화검옹은 승부를 내지 못한 채 서로 내상을 입고 은퇴했었지." 주천화가 천마제혈검을 거두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주천화의 말 에 기선풍의 놀람은 더욱 극에 달했다. "그, 그건 양가의 후예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양가 최대 의 비밀인데 어떻게 당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이오?" 이때였다. 주천화가 돌연 냉랭한 기합성과 함께 몸을 솟구쳤다. "천마마극구검류!" 파아아...! "윽!" 한 가닥 섬광과 함께 기선풍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철컥! 그제서야 천마제혈검이 다시 검집에 꽂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 그대의 파섬도만이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것이 아니다. 천마마극구검류의 빠름은 천하무쌍인 것이다." "...!" 기선풍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놀랍게도 어느새 그의 약 지(藥指)가 깨끗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그대는 본좌의 마음에 들었다. 그대의 쾌도수법에 경의를 표한다." 주천화는 잔잔한 눈빛으로 몸을 돌렸다. 기선풍은 멀어져 가는 주천화의 뒷모습을 응시하 며 기이한 눈빛을 머금었다. 다음 순간 그는 제자리에서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졌다!" 저 멀리 석양이 무릎 꿇고 망연히 앉아 있는 기선풍의 등 위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허나 그는 언제까지고 주천화가 사라져간 방향만을 응시하며 움직일 줄 몰랐다. 헌데 돌연 그의 주위에서 다섯 인영이 안개처럼 솟아나지 않는가? "...?" 기선풍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금빛이 빛나는 장창(長槍)을 들고 있는 다섯 명의 흑의복 면인들, 그들에게서 실로 무서운 살기가 뻗어나와 기선풍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대들은 누구이길래...?" 기선풍은 섬칫한 예감을 느끼며 그들을 훑어 보았다. "흐흐흐, 알 것 없다. 너는 조용히 죽어주면 된다." 다섯 명의 흑의복면인들 중 한 명이 음산하게 외치며 기선풍을 향해 금창을 겨눴다. 기선풍의 눈에 노기가 해일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그, 그 자가 나를 죽이라고 시켰단 말이냐? 나를 잘못 보았군." 기선풍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무서운 기세를 뿜어냈다. 헌데 기선풍의 입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그라는 인물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 황 제2권 제16장 운명(運命)의 만남 ━━━━━━━━━━━━━━━━━━━━━━━━━━━━━━━━━━━ ① 스스슥! 오 인의 흑의복면인이 기선풍의 주위에서 서서히 회전했다. 그들 을 훑어보던 기선풍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쳤다. '완벽한 방위망만을 밟고 있다! 물샐 틈조차 없다!' 오 인(五人)의 기도는 실로 놀라웠다. 마치 한 줄에 꿴 듯 동시에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 었는데 속도가 빨라질수록 무형의 가공할 압박이 기선풍을 억눌렀다. "흥! 금막오혈창(金漠五血槍)이로군." 기선풍이 그들의 내력을 알아내고 짐짓 조소를 흘려냈다. 허나 그의 눈빛만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은 채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크흐흐흐, 더욱 살려둘 수 없게 되었군. 우리의 정체를 알았으니...." - 금막오혈창(金漠五血槍). 대막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오 인의 절대고수들, 이들의 창술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한날 한시에 태어난 다섯 쌍동이인지라 그 합공 (合功)은 마치 한 사람이 펼치는 듯 능란했다. 휘리릭! 쐐액! 금광이 번쩍이며 다섯 개의 금창이 일제히 파공음을 토했다. "쾌(快), 광(光), 섬(閃)...!" 찰나지간 기선풍의 허리에서 도기(刀氣)가 폭발했다. 동시에 무 서운 악마의 호곡성이 천공을 뒤흔들었다. "크아악...!" "와악!" 기선풍의 쾌검, 과연 빨랐다. 순식간에 세 명의 목이 허공에 튀어 오르며 피분수가 솟구 쳤다. 금막오혈창의 가공할 절진도 그의 빠름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허나 세 명이 죽어 넘어가는 순간 두 개의 창이 그의 목과 등을 향하여 꿰뚫고 있었다. "크악!" "아아악...!" 순간 둔탁한 음향이 터지고 동시에 처절무비한 비명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 기선풍이 의혹의 눈으로 그들을 살펴 보았다. 그들의 미간, 두 개의 금전(金錢)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누가 나를 도와 주었단 말인가?" 이때였다. "그대는 이용당했을 뿐이다. 설사 본좌를 죽였다 해도 그대 역시 그들의 손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돌연 한 음성이 사방에서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들려오는 음성, 바 로 주천화의 음성이었다. 기선풍의 안색이 참혹하게 급변했다. '으음! 내가 죽이려던 사람이 오히려 나를 도와주고....'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폭발할 것 같은 살기가 떠올랐다. "믿던 그가 나를 이용하다니...! 죽일 것이다." 무서운 안광으로 결연히 내뱉은 기선풍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대는 살수(殺手)가 될 사람이 아니더군. 살수무정심결을 터득 했다 하나 그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십여 장 떨어진 숲 속에서 주천화가 멀어져 가는 기선풍을 담담 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백청청이 풀죽은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화랑! 저때문에 곤경에... 저는 경무장으로 돌아 가겠어요." 백청청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주천화의 눈에 부드러운 빛이 스쳤다. "청매, 괜찮소! 내 불찰이었소." "...!" 백청청의 안색이 다소 펴졌다. 주천화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다독거리며 눈을 돌렸다. 좌측 삼 장, 그곳에 흑봉취접 강추령이 망연자실하여 넋을 잃고 서 있었다. "...!" "...!" 그녀는 주천화와 눈길이 마주치자 화다닥 고개를 떨구며 얼굴을 붉혔다. "응? 뻔뻔스럽게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있었군!" 백청청도 강추령을 의식하고 주천화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좋아! 여우같은 계집애! 내 단단히 맛을 보여 줄테다!" 백청청이 표독스럽게 외치며 품 속에서 천마마라금강침을 꺼내 들었다. "흥!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감히 본녀 앞에서...." 순간 그렇지 않아도 민망해 고개를 떨구고 있었던 강추령이 이때다 싶어 일갈을 터뜨렸다. "무엇이라고!" 백청청의 전신에서 무서운 살기가 솟구쳤다. '허! 청매에게 저런 일면이 있었다니...!' 은은히 놀란 빛을 드러내던 주천화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순간 백청청의 눈에 살기가 떠오르며 그녀의 전신에서 묵광이 떠오르지 않는가? "독, 독공(毒功)을? 청매, 안 되오!" 백청청이 주춤하다 마라금강침을 쳐들었다. "내가 너를 납치했다고? 흥! 구해준 은인도 모르고...." 백청청이 멍청해졌다. "...!" 강추령이 주천화를 응시했다. 그 눈에 기이한 빛이 떠돌고 있었 다. 백청청은 그녀가 주천화를 쳐다보는 것을 보고 내심 차갑게 외쳤다. '흥! 여우같은 계집애! 화랑을 좋아하고 있었군!' 휘익! 돌연 강추령의 손에서 검은 물체가 폭사해 주천화를 덮쳐왔다. "...?" 주천화는 무심코 그것을 받아들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진흙더미를? 훗! 정말 짓궂은 여인이로군!' 주천화가 손 안의 물체를 바라보는 순간 강추령은 이미 십 장 밖을 훌훌 날아가고 있었다. "핏! 고 계집애가 끝까지 화랑에게 앙탈을 부리는군!" 암기인 줄 알고 긴장했던 백청청이 실소를 터뜨렸다. 이때 주천 화는 진흙 속에 무엇인가가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 진흙 속에는 한 장의 양피지와 사각형의 죽패(竹牌)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개방의 신물같은데?" "화랑! 그것이 무엇이에요?" 백청청이 빼앗듯이 낚아챘다. 백청청은 양피지를 펴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헌데 그녀의 표정이 수시로 변하지 않는가? 형용하기조차 힘든 묘한 빛이 그녀의 눈에 교차되고 있었다. "이번 일이 고 계집애의 짓이 아니란 말인가? 허나 고 계집애가 나를 인질로 하여 화랑을 위협한 것은?" "...?" 의혹에 잠겨 있는 주천화에게 백청청이 양피지를 던지듯 쥐어주 었다. 양피지에는 수려한 필체가 가득 차 있었다. 헌데 그 서두 부터 주천화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그런 내용이었다. <속 좁은 남자! 저자거리에서 당신을 죽이려 했던 것은 제짓이 아니에요! 또한 당신의 푸 른 눈의 여우도 제가 납치하려 했던 것이 아니예요. 당신을 미행하던 중 누군가 그녀를 인 질로 하여 당신을 죽이려 하는 것을 발견했어요.> "음...!"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읽어 내려갔다. 강추령의 서찰 (書札)은 한 구절 한 구절이 재치와 애교로 가득해 있었다. <해서 본방에서 중도에 그녀를 구해내고 당신을 골탕먹이려고 한 짓인데 일이 잘못되어 오히려 본방이 그들의 역계교에 넘어간 거예요. 그 영패는 본녀가 지니고 있었던 거예요. 본방의 장로임을 뜻하 는 개령죽패( 令竹牌)이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본방의 수하들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주천화는 손 안의 영패를 다시 한 번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대담하군! 이는 곧 나에게 정표(情表)로 준 것이 아닌가!' 주천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서찰(書札)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부디 몸조심 하세요! 당신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한두 명이 아니고 또 그들의 힘(力)은 가히....> 주천화의 눈에 녹광(綠光)이 번지고 그 속에는 무서운 살기(殺氣)가 일렁였다. '그랬었군! 허나... 부나비는 원래 자신의 죽음을 모른 채 불로 뛰어드는 법.... 얼마든지 오너라! 모조리 죽여주마!' <그리고 당부하는데 한갖 여인때문에 당신 스스로 사지(死地)로 뛰어드는 우(愚)를 범하지 마세요. 하긴 그 점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청언니에게 미안했다고 전해 주세요. 천첩(賤妾) 강추령 서(書).> '천첩? 훗!' 주천화가 내심 비명을 토했다. '무엇을 열심히 적는가 했더니 그새 이 서찰을 적고 있었구나. 헌, 헌데 천첩이라니!' 주천화는 강추령의 대담한 서찰에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재미있는 여인이군. 후후." 주천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백청청이 정색했다. "화랑!" "...?"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 주천화가 의혹의 눈을 주었다. "저도 그녀의 글을 보고 느낀 것이 있어요. 저는 다시 경무장으로 가겠어요." "음, 알겠소! 그것이 좋을 것 같소." 주천화가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외조부님께 안전에 유의 하시라고 전해 주시오. 그 자들 이 외조부님까지 노릴지도 모르니...." 주천화가 담담히 말한 후 한 곳을 바라보았다. "...!" 백전, 전궁이 지면에 털썩 주저앉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지 않는가? "전궁! 그 자에게 당한 것이 억울한 모양이군?" "예! 공자님!" 전궁이 침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그 자는 나를 너무도 참혹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천화가 다가갔다.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후후후, 자네에게 그 자를 꺾을 수 있는 무공(武功)을 전수해 주겠네!" "예? 정, 정말이십니까?" 전궁이 기쁨에 충만한 눈을 들었다. 주천화가 담담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궁! 그대는 오늘 이후로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을 것이오." "아아...!" 전궁은 이미 주천화의 능력을 믿고 있는지라 격동으로 몸을 떨었 다. 태양(太陽)은 어느새 온누리에 그 찬란한 광휘를 뿌려내고 있 었다. 또 한 명의 절대고수 탄생을 축복하듯이.... ② 금릉(金陵). 황도(皇都) 금릉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당금의 황제가 기거하는 자금성(紫金城)이었다. <자금성(紫金城).> 이 자금성이 어찌 금릉에서만 유명하랴! 천하(天下)의 주인인 천자(天子)의 권위를 상징하듯 우뚝 솟아 있는 대성(大成). 이곳은 곧 천하 그 자체였다. 자금성은 그 규모 는 물론이고 건물 하나하나의 화려함은 가히 천하제일인 것이다. 외궁(外宮)과 내궁(內宮)으로 구분된 자금성의 규모만 해도 장장 방원 백 리(百里). 그 안에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은 하나같이 명 장(名將)에 의해 건축되어 웅장함은 둘째로 치고, 그 수려함은 가 히 절세의 것이었다. 이 자금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읍이 바로 금릉(金陵), 숱한 고 관대작들이 기거하는 곳인지라 밤에도 결코 어두운 법이 없었다. 불야성(不夜城)이랄까? 금릉 전체가 문물과 정권의 중심지답게 밝 게 빛나는 것이었다. 대로(大路). 금릉시가 사통팔달(四通八達)로 쭉 뻗어난 대로에 한 점 미풍이 스치고 있었다. 휘이잉! 미풍은 거칠 것 없이 대로를 휩쓸고 그 뒤로는 한 대의 사두마차 가 뒤따르듯 질주하고 있었다. 두두두...! 자금성을 향해 똑바로 질주하고 있는 사두마차, 마부석에는 전궁이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떠돌고 있었다. "공... 자님! 성문(城問)이 보입니다. 더 이상 마차를 몰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전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마차 안에서 주천화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네! 본좌에게 자격이 있네!" "아!" 전궁은 그제야 주천화 역시 황족임을 상기했다. 자금성, 이곳은 평민들로선 말을 탄 채 입성(入城)할 수 없는 성 역이었다. 또한, 황족이라 해도 내궁(內宮)에서는 말에서 내려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제가 그만 추태를 보였습니다." 전궁이 얼굴을 붉힌 채 계속 말을 몰았다. 허나 그는 점차 눈 앞 에 다가오는 자금성의 위용에 기가 질린 듯 한껏 긴장된 안색이었다. 정문, 거대한 석사자가 양쪽에 버티고 서 있는 자금성 외부의 입 구, 그곳에는 금의갑주를 입은 부리부리한 장한들이 늘어서 있었다. 황실어림금의대, 황실을 경호하는 황실어림금의대의 수문위사들이었다. "멈추시오! 이곳은 황성(皇城)이오!" 주천화를 태운 사두마차가 거침없이 정문으로 다가가자 한 명이 막아서며 소리쳤다. "내려서 신분을 밝히시오!" "성문을 열라! 이 마차에는 천문왕자님이 타고 계시다." 전궁이 어깨를 펴며 당당히 외쳤다. 순간 수위문사들의 안색이 싸악 변했다. "천, 천문왕자님이! 어, 어서 내성으로 통보해라. 천, 천문왕자님이 입성하신다!" 순식간에 요란한 음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며 성문이 열렸다. 동시에, 성루(城樓) 앞에서 내궁으로 통보하는 듯 요란한 징소리가 터졌다. 두두두...! 전궁은 성문이 열리자 당당히 마차를 몰았다. '흐흐흐, 일개 촌부인 내가 황궁을 다 들어가 보다니....' 전궁, 그는 어깨를 펴며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십이 년, 십이 년 만이로군." 주천화가 마차 안에서 감회어린 듯 주위를 살폈다. "헌데 폐하께서는 쾌차하셨는지?" 문득 주천화의 입가에 고소가 스쳤다. '묘한 일이군, 막상 이곳에 오니 오히려 그 분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다니....'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 당금의 황상은 곧 그의 숙부이며 부친 을 모해한 원수가 아니던가? 두두두...! 마차는 잠시 후 외성을 가로질러 내성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때 청의관복을 입은 네 명의 노인이 대기하고 있었던 듯 마차 앞에 나타났다. "천문왕자님...! 폐하께서는 금궁정(金弓亭)에 납시었사옵니다. 그곳으로 가셔서 폐하를 배알하심이...." "금궁정? 알겠소!" 주천화의 눈에 일순 맑은 빛이 스쳤다. '금궁정에...? 성상께서 쾌차하신 모양이시군. 금궁정에 납시었 음은 이미 건강하심을 뜻하는 것이니....' 금궁정(金弓亭)은 황족들이 활(弓)을 쏘며 심신을 단련시키는 궁장(弓場)이었다. "전궁! 마차를 왼쪽 길로 몰게나!" "예!" 전궁은 자금성의 화려함에 내심 경악과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을 몰았다. '히야! 실로 대단하구나. 이곳이 외성인 모양인데 이렇게 화려하 다니! 과연 내성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자금성의 화려함은 전궁같은 범인의 눈에 실로 세외선경(世外仙境)으로 보일 정도였다. 지면을 덮고 있는 대리석은 발에 흙 한 점 묻히지 않아도 되었고 곳곳에 꾸며져 있는 인공호수와 가산(假山), 그리고 희귀한 수목 들, 햇빛마저도 이곳에서는 금빛으로 빛나는 듯 느껴졌다. 잠시 후, 십 장 전면에 울창한 송림(松林)이 나타났다. 송림 사이로 넓은 공터가 보이고 금빛의 영롱한 잔디가 환상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때 중무장한 어림금의대 십여 명이 마차를 막아왔다. "이곳에 성상께서 납시었습니다. 마차에서 내려서서 폐하를 배알하옵소서!" "...!" 주천화가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천문왕자님을 배알하옵니다!" 주천화가 내려서자 금의대들은 일제히 그에게 대례를 올렸다.주 천화는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훑었다. 그 눈에 은은한 녹광이 어렸다. "후후, 그대들은 황실어림금의대들인가?" 주천화의 음성은 담담한 듯 했으나 한기(寒氣)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 분이 그 문약하던 천문왕자님이란 말인가? 당금 천하를 위진시키는 천마대제!' '이 분이 폐하조차 함부로 어쩌지 못한다는 천마대제?' 그들은 절로 위압감을 느끼고 허리를 접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들의 음성(音聲)이 은은히 떨려 나왔다. 그들이 어찌 기억치 못하랴! 석년에 황무오천성과 황실어림금의대가 주천화 부자를 집요하게 추적했던 사실을.... "...!" 주천화는 복잡한 눈으로 그들을 쓸어보다 몸을 돌렸다. "전궁!" "예!" "강궁을 벗어들고 나를 따르라!" 어림금의대의 수장(首將)이 흠칫하며 눈을 들었다. "마마! 이곳은 성상께서... 병장기를 풀어 놓으심이...." 주천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서운 기세가 태산같은 중량으로 그들을 압박해 들었다. "해서 본좌를 막겠다는 것이냐?" "그, 그게 아니오라." 어림금의대의 수장이 찔끔하여 말을 더듬었다. "전궁! 가자!" "예! 마마...!" 전궁은 왠지 신이 나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금궁정. 환상같이 펼쳐져 있는 초지(草地) 위에서 사십대의 두 명 인영이 좌우의 시중을 받으며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금포장년인과 황의장년인이었다. 금포장년인은 다소 창백한 안색에 금포가 헐렁이고 있을 정도로 문약했다. 허나 그의 전신에서는 은은히 만인을 압도하는 기상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폐하! 천문왕자님께서 납시었습니다!" 주천화가 금궁정에 들어서자 길고 가는 음성이 메아리쳤다. 좌우 의 환관들이 주천화의 당도를 알리자 금포장년인이 격동으로 어깨를 떨었다. 허나 그는 계속 화살을 날리며 입을 열었다. "어, 어서 오너라! 천화야!" 주천화가 금포장년인에게 대례를 올렸다. 아아! 금포장년인, 그가 곧 당금 천하의 주인인 황제 영락제(永樂帝)였던가! 수척한 안색에 다소 긴 듯한 흑염이 늘어져 있고 창백하나 은은히 제왕의 풍도가 엿보이는 금포장년인, 그가 곧 주천화에게는 숙부가 되며 천하의 군림지존인 황제였던 것이다. "허허허, 오랜만이구나!" 주천화의 전신이 미미하게 격동했다.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허 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황제의 안위에 대한 것 뿐이었다. "폐하! 옥체는...?" 황제는 연신 화살을 날리다 흠칫했다. "허허허, 네 입에서 짐의 안위를 염려해 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구나." 황제의 용안(龍顔)에 일순 빛이 스쳤다. 어떤 감동의 빛같기도 했다. "으음, 다소 좋아진 듯해 오랜만에 궁장을 나왔다만...." 황제는 문득 화살 날리는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 "...!" 주천화와 황제의 눈(眼)이 엉켰다. 황제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천화야! 너도 활을 들고 이리 오너라!" 황제는 주천화의 맑은 눈빛에 문득 고뇌의 빛을 떠올리다 엉뚱한 말을 꺼냈다. "예!" 주천화는 담담히 대답한 후 전궁을 돌아보았다. "전궁! 강궁을 이리 주게!" 부복해 있던 전궁이 황급히 강궁을 두 손으로 받쳤다. "후후후, 전궁! 편히 앉게.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니...." 황제가 힐끔 전궁을 살폈다. "허허허, 그대는 짐을 어려워 말고 마음을 놓고 있으라!" "황, 황공하옵니다. 폐하!" 전궁이 더욱 몸둘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쐐애액! 이때 주천화의 손에서 강전이 번개같이 뻗어났다. 꽈꽝! 오십여 장 밖의 과녁에서 천둥치듯 폭음이 터졌다. 단 한 대의 강전에 거대한 과녁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오!" "아니! 저, 저토록 위력이 있다니!" 모든 사람들이 경악성(驚愕聲)을 터뜨렸다. "허! 네가 그렇게 크고 무거운 강궁을 어렵지 않게 다루다니!" 황제의 눈에 탄복의 빛이 스쳤다. "허, 마마! 신력(神力)이십니다." 황제와 함께 활을 날리고 있던 황의중년인이 감탄성을 토했다. 평범한 용모에 담담한 눈빛, 다소 왜소한 체구의 황의중년인의 신태는 평범한 듯 하면서도 은은히 고고한 풍도가 엿보였다. 일견 해 글이나 벗하며 유유자적하는 문사(文士)임을 알 수 있었다. 주천화가 천천히 황의중년인에게 몸을 돌렸다.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물처럼 고요한 주천화의 눈빛, 황의중년인의 눈빛도 가라앉은 심연과 같이 잔잔했다. '보통인물이 아니군!' 주천화의 눈빛이 빛났다. "그대는 누구인가?" 주천화의 음성이 다소 차갑게 울렸다. "허허허, 짐의 막역지우(莫逆之友)이니라. 대선생(大先生)이라 부르지...." 황제가 부드럽게 대신 대답했다. "태자의 학문을 돌보아 주시던 일대 학자이시란다." 헌데 그 순간 주천화의 눈에서 차가운 한광(寒光)이 폭사하지 않는가? "듣거라! 그대가 폐하의 지기지우(知己之友)라 하여 본좌에게 예 를 취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싸늘한 질책, 태산이라도 짓눌러 버릴 듯한 가공할 무형의 기세가 주위로 소용돌이쳤다. 황의중년인, 대선생의 눈에 일순 기광이 스쳤다. '그 연약하기만 하던 벙어리 왕자 천화에게서 엄청난 신위가... 으음! 제황지제, 제황지제로 다!' 황제의 눈에조차 경악이 스치고 있었다. 한편 대선생의 내심으로 한기가 스치고 있었다. '과, 과연 듣던 대로다! 숨막힐 듯한 기도로구나.' 이때 주천화가 돌연 강궁을 만월처럼 잡아당겨 대선생의 가슴을 겨누지 않는가? "폐하! 이 자에게 감히 황족을 모욕한 죄를 묻겠나이다." 낭랑한 일갈이 터졌다. "허어! 천, 천화야!" 황제가 기겁했다. "어서 대례(大禮)를 취하라!" 순간 주천화가 싸늘한 눈으로 대선생을 직시했다. 대선생의 눈빛이 일시 흔들렸다. 허나 그는 이내 담담한 신색으 로 돌아와 주천화의 앞에 부복했다. "미천한 몸, 마마를 배알하나이다!" 그의 음성이 은은히 떨려나왔다. 굴욕을 느낀 것일까? 슈우욱! 그 순간 주천화가 대선생에게 겨누었던 강전을 그대로 발사하지 않는가! "헉!" 경악성이 터졌다. 순간 거대한 강전이 그대로 대선생의 어깨를 파고 들었다. 헌데 어찌 인간의 몸에서 금속음이 터져 나오는가? 더구나, 대선 생의 어깨에서는 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다. "...!" 황제는 이 돌연한 상황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후후후, 그대는 역시 한 쪽 팔이 의수(義手)였군. 어떤 강철로 만들었는가?" 주천화가 차갑게 웃었다. "으음!" 대선생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후후후, 그대는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다. 왜 피하지 않았는가?" 주천화의 이어지는 질문에 대선생은 전신을 진동시켰다. '이럴 수가! 이 아이가 단번에 내가 무공을 지닌 것조차 간파해냈단 말... 인... 가?' "후후후, 무슨 이유에서 무공을 숨기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주천화의 전신에서 더욱 가공할 기세가 솟아올랐다. "천, 천화야! 이 분은 내가 잘 알고 있느니라. 이 분은 단지 조용한 성품의 학자...." "대답하지 못하겠느냐?" 주천화가 황제의 말을 끊은 채 재차 질책했다. "그, 그저 호신을 위해 약간의 무공을 지녔을 뿐입니다." "후후후, 호신이라?" 주천화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 "대선생! 그대의 정체는 곧 드러날 것이다. 그대는 내가 본 중 최고의 고수(高手).... 허나 결코 그대는 본좌의 적수(敵手)가 되지 못한다." 주천화의 입에서 한 가닥 전음성이 천둥치듯 대선생의 고막에 작렬했다. (경고하건데 폐하의 곁을 조용히 떠나라! 거역하면 곧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이어지는 전음에 대선생의 몸이 눈에 보이리만큼 진동했다. '으음! 산(山)! 거대한 산(山)이로다. 이, 이 일을...!' 대선생, 이 자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주천화는 어느새 전음을 마치고 묵묵히 과녁을 응시하며 시위를 퉁겼다. 쐐애- 액! "...!" 주천화의 표정은 어느새 무심(無心)일 뿐이었다. 꽈꽝! 또 한 개의 과녁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오십여 장 전면 에는 대략 일백여 개의 과녁들이 늘어서 있었다. 꽈꽝! 주천화의 손에서 강전이 발사될 때마다 정확히 하나씩의 과녁이 부서지고 있었다. 황제 영락제 역시 묵묵히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탁! 탁! "...!" 허나 황제의 화살은 과녁의 중심을 맞히지 못한 채 겨우 과녁에만 꽂히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주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숙부님이 흔들리고 계시는군. 석년 황궁의 제일고수로 자타가 공인하던 분이었는데....' 운명의 만남,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황 제2권 제17장 금궁정(金弓亭)의 해후(邂逅) ━━━━━━━━━━━━━━━━━━━━━━━━━━━━━━━━━━━ ① 금궁정(金弓亭). 사위는 정적에 잠겨 있는 가운데 한 가닥 단조로운 음향만이 언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탁... 탁! 금궁정에는 단 이 인(二人)만이 있었다. 황제 영락제와 주천화, 황제 영락제가 주위를 물리쳤기 때문에 사위는 과녁에 화살이 꽂히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떠돌고 화살은 점차 과녁에서 빗나 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화살은 점차 정확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천화야! 나에게 숙부라고 불러줄 수 있겠느냐?" 황제 영락제가 여전히 시위를 당기며 입을 열었다. 주천화가 강궁을 내렸다. "폐하! 제게 성상은 계실망정 숙부님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황제 영락제의 몸이 가볍게 진동했다. 그 역시 활을 내렸다. "너의 마음 십분 이해한다. 허나 인간이란 누구나 한때 우(愚)를 범할 수도 있는 법이 아니겠느냐?" "물론 그렇습니다. 허나 일개인의 야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더욱이 다 섯 살짜리 어린 소년은 그 일로 북해의 설원을 헤매게 되었고...." 주천하의 눈에 일순 녹광이 스쳤다. 허나 이내 그 눈빛은 무심하게 변해갔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하는 엄청난 충격까지 받았지요." 쐐애액! 꽈꽝! 그의 손에서 섬전(閃電)같은 강전이 뻗어나 또 다른 과녁을 박살냈다. "한(恨)! 어린 소년이 가슴에 품고 있기에는 너무도 큰 한이었습니다." "천, 천화야! 그래서 너는 그 한을 풀고자 하느냐?" 그의 음성은 미미하게 흔들렸다. 주천화의 손에서 또 다시 엄청난 기세(氣勢)로 강전이 쏘아져 나 갔다. 두 개의 과녁이 한꺼번에 날라갔다. 주천화는 차가운 눈으로 부서진 과녁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는 잊어 버렸습니다." 잠시 후 주천화는 실로 담담한 음성으로 독백(獨白)하듯 입을 열었다. "더욱이 제가 한을 풀고자 세상에 나왔을 때, 그 분은 이미 만인 의 숭앙을 받는 성군(聖君)으로 군림하고 계셨습니다." "...!" "저의 한이 비록 심해(深海)보다 깊다 한들 어찌 천하의 숭앙을 받고 있는 대성군에게 칼을 댈 수가 있겠습니까?" "으음!" 황제의 눈에 격정이 일렁였다. "허허허, 고맙구나! 우리 황실에 너와 같은 인물이 태어남은 곧 황실의 홍복이 아닐 수 없구나!" "후후후!" 주천화가 자조의 미소를 흘리며 다시 시위를 당겼다. "폐하! 저는 결코 큰 그릇이 아닙니다. 일개 범부(凡夫)보다도 못하지요. 만약 폐하께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계시지 않았다면...." 쐐- 애- 액! 꽈꽈꽝! 주천화의 말이 여운을 남기며 멈춰지는 순간 또 한 개의 과녁이 가루로 흩어졌다. "...!" "...!" 어색하고도 무서운 침묵이 이어졌다. 황제는 주천화에게 달리 할 말이 없음을 느끼고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이때였다. "천, 천화오라버니가 정말 오셨군요!" 돌연 낭랑한 옥음(玉音)이 들리며 한 궁장소녀가 달려왔다. 절세의 미모를 지닌 궁장소녀, 십오륙 세 가량 되었을까? 궁장소 녀의 용모는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아! 설누이!" 주천화가 고개를 들었다. 궁장미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어 올 라 있었다. - 화운공주(花雲公主) 주혜설(朱慧雪). 궁장미소녀는 바로 당금 황실의 꽃(花)이라 할 수 있는 화운공주였다. "오라버니!" 화운공주가 주천화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하하, 내가 설누이를 잊고 있었구료." "예? 저, 저를 잊고 있었다구요?" 화운공주가 샐쭉 토라졌다. "흥! 오라버니는 저를 잊고 있었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하하하, 그래, 그때의 상처는 다 나았소?" "...?" 주천화의 돌연한 질문에 의혹의 눈을 들던 화운공주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치이! 그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아직 낫지 않을 리 있겠어요?" "후후후!" 주천화의 눈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 부드럽게 풀렸다. "어릴 때 그대를 업고 자금천교(紫金天橋)를 건너다 그만 넘어지는 바람에...." "호호호, 그때 오라버니께서는 저의 투정에 못이겨 저를 업어 주셨다가 혼났죠?" 화운공주 역시 먼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동심에 사로잡혔다. 화운공주 주혜설, 주천화가 다섯 살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셋. 허나 주혜설은 유독 주천화를 따르는 편이었다. 주천화는 다섯 살이 꽉 차서야 처음으로 입을 연 괴동이었다. 주 혜설은 그런 주천화에게 왜 말을 하지 않냐고 울면서 떼를 쓰던 철부지였던 것이다. "호호호, 천화오라버니!" "...?" "제가 오라버니에게 왜 말을 하지 않냐고 하루종일 울며 떼쓰던 생각이 나요?" "하하하!" 주천화 역시 동심, 티 한 점 묻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밝은 대소를 터뜨렸다. "기실 그때 나도 무척이나 답답했단다." "호호호!" "하하하!"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본 채 밝게 웃음을 교환하자 황제의 용안에도 어떤 미소가 스쳤다. "허, 어쩌면 설아(雪兒)가 큰 일을 할지도 모르겠구나!" 허나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음울한 빛이 피어 올랐다. '형님! 이 못난 아우, 이제야 형님을 모해하며 큰형님을 시해 하면서까지 권좌에 욕심을 냈 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합니다. 형님! 이 아우는 이제 어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망연히 천공을 올려다보는 그의 뇌리에 문국황자 주상걸의 영상이 스치고 있었다. 황제의 이런 모습은 실로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했던가! 누가 알리요? 절대권좌에 앉아 있는 천하의 지존이 고독과 뼈아픈 회호에 휩싸여 하루하루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을 줄이야. ② 만수전(萬壽殿)의 황제의 침전(寢殿)은 황제의 허락이 없는 한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금역이었다. 실내, 넓다랗고 화려한 침실의 한 쪽에 열 사람이 한꺼번에 눕고도 남을 거대한 침상(寢牀) 이 놓여 있었다. 그 침상 위에 황제가 비스듬히 누워 있고 그 앞에 주천하가 교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있었다. 황제의 표정은 진중하기 이를데 없었다. "천화야! 너는 이미 모든 일들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만...?" "그러합니다. 폐하!" "으음! 그렇다면 태자를 도와 줄 생각은 없느냐?" 황제가 어렵게 입을 열자 주천화의 눈이 일순 무섭게 빛을 발했다. "...!" 그는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 "후후후, 제게는...." 돌연 주천화의 허리에서 검광이 솟았다. 천마제혈검이 무서운 파공음과 함께 침전을 받치고 서 있는 아름드리 기둥을 베었다. 쏴아아...! 헌데 바로 이 순간 기둥의 안쪽에서 피분수가 솟구치지 않는가! 동시에 한 인영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기둥이 무너져 내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한 인영이 기둥과 똑같은 색(色)의 옷을 입고 절묘하게 기둥에 밀착해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이다. "이, 이런 일이!" 황제의 용안(龍顔)에 경악(驚愕)이 스쳤다. 파아...! 이때 주천화가 천마제혈검을 천장을 향해 번개같이 던졌다. 아니, 던졌다기 보다는 검 끝에 그가 몸을 실어 날렸다고 해야 할까? 이검비행(御劍飛行), 이미 실전된 지 천여 년에 이르는 광고절금의 선공이 펼쳐지고 있었 다. 꽉! 천마제혈검은 무서운 기세(氣勢)로 삼 장 높이의 천장(天井) 깊숙이 꽂혔다. "크악!" 거의 동시에 묵직한 신음이 터지며 천마제혈검의 검신을 타고 한 줄기 선혈이 흘러 내렸 다. 삭! 다음 순간 천장이 크게 베어지며 한 물체가 떨어져 내렸다. 헌데 그것은 조그마한 백묘(白猫)가 아닌가? "흠! 동영의 인술(忍術)이군!" 주천화가 냉소를 터뜨렸다. 인자(忍者), 자신이 검에 찔린 것을 숨기기 위해 그 짧은 순간에 백묘를 천마제혈검에 꽂고 도주한 것이었다. 실로 절묘한 심계였으나 주천화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동영의 인자들이 감히 짐의 침전에까지!" 황제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다음 순간 노화로 인해 병세가 폭발할 듯 그는 머리를 짚고 그대로 침상 위에 쓰러졌다. "폐하!" 주천화가 허공에서 가볍게 내려섰다. 황제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해 있었다. "다소 회복되셨다 하더니...?" 주천화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황제의 맥을 잡았다. "...!" 그의 안색이 싸악 굳어졌다. 독(毒), 독이 아니다. 그보다 더욱 악랄한... 악, 악독하다! 어느 자가 폐하에게 납(鉛)을...!" 실로 가공스러운 일이었다. 황제는 어떤 만성독약에 중독된 것이 아니었다. 만성독약보다도 더욱 무서운 금제가 황제의 몸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 황제는 조금씩의 납을 복용해 연독 증세에 빠져 있었다. "어떤 독이라도 해독시킬 수 있지만 체내에 축적되어 있는 납은 도저히 씻어낼 수 없는 법..." 주천화의 눈에 가공할 녹광이 솟아 올랐다. "늦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을 지경이다." 주천화는 황제가 이미 반 년을 더 살 수 없음을 느끼고 탄식을 토했다. "끄응!" 주천화가 진기를 주입하자 황제가 정신을 차렸다. "으음! 추태를 보였구나!" 황제의 음성은 처연했다. 주천화는 지난 한(恨)이 황제의 처연한 안색을 대하자 일시에 풀어짐을 느꼈다. "폐, 폐하!" "천화야!" 황제가 쓸쓸한 눈을 들었다. "천화야! 짐의 몸은 이미 이 지경이 되었고... 더구나 상대가 누 구인지조차 알 수 없고, 이제 내가 너를 찾은 까닭을 짐작하겠느냐?" "...!" "작금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대신들조차 믿을 사람이라고는 하나 도 없으니 천화야! 짐은 너무도 외롭구나!" "폐, 폐하! 망극하오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죄를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 혈육이라 믿 고 있던 태자조차 후대의 권좌를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짐의 문안조차 오지 않는구나." "으음!" 황제의 처연한 탄식에 주천화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 그 아이의 얼굴을 못 본 지도 이미 육 개월이 넘었느니라." "폐하, 태자형님을 탓하지 마옵소서. 형님은 안오는 것이 아니고 못오고 있는 줄 아옵니 다." "무엇이? 그, 그 말이 사실인가?" "음...!" 주천화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침전에조차 적도(賊徒)의 무리가 침입해 올 정도인데 태 자형님이 어찌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형님은 지금 강호에 나가 있습니다." "강호에?" 황제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으음! 그 아이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짐은 원망만 하였구나." 황제는 자신만이 아니고 태자마저 사면초가의 위험에 놓여 있음 을 알고 더욱 음울한 안색으로 젖어 들었다. '으음! 폐하를 시해하려 하는 자는 아주 가까이 있는 자다! 폐하 가 염두에조차 두지 않고 있는 인물!' 주천화가 상념에 잠기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천화야!" 문득 황제의 노안에 신광이 떠올랐다. "예!" "너는 황족이다! 항차 황실에 닥칠 위험을 못 본 체할 사람이 아니라 믿는다." 황제의 음성은 병석(病席)에 누운 사람답지 않게 우렁차고 진지했다. "아니, 못 본 척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해서 네가 정녕 태자 를 도울 생각이 없다면 장차의 황실을 네게 맡기려 한다만...." "음!" 주천화가 흠칫했다. 정녕 충격적인 말이 아닌가! 황제의 말은 곧 대통(大統)을 주천화에게 넘기겠다는 뜻인 것이다. "태자보다는 네가 황위에 오르는 것이 대의(大意)를 위해 옳으리라 짐은 생각하노라." "불가하오이다...!" 주천화의 음성이 은은히 떨려 나왔다. "으음! 네가 쉽사리 수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한 일이다만...." 황제의 안색이 처연히 일그러졌다. "하면 짐은 너에게 태명어사대인(太明御師大人)의 직을 봉하노니 부디 이 일만은 거절하지 말거라!" "태명어사대인!" 주천화의 전신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 태명어사대인(太明御師大人). 아아! 이는 곧 황권의 대행(代行)을 뜻하는 것이었다. 만조백관은 물론 이려니와 심지어 황족이라도 그 생사탈권을 쥐고 있는 지고지상의 신분인 것이다. 모든 왕부(王府)의 동의하에만 제수할 수 있는 직책으로 대명사 상 한 번도 태명어사대인에 제수된 사람은 없었다. "...!" 주천화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폐하! 감히 황명을 거역하겠나이다! 저로서는 수락할 수 없는 줄 아뢰오!" "으음...!" 황제의 얼굴이 더욱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이때 주천화의 눈에서 맑은 신광이 뻗어나왔다. "폐하!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 주천화의 음성에는 상대로 하여금 깊히 믿게 만드는 힘(力)이 깃들어 있었다. "태자형님은 반드시 등극하실 것이옵니다." "...!" 황제의 눈에 어떤 격동이 스쳤다. '이, 이 아이의 속마음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황제가 창백한 얼굴을 처연히 끄덕이고 있을 때, 창 밖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③ 밤(夜), 천자(天子)가 계시는 자금성이라고 어둠이 내리지 않을 수 있겠 는가? 헌데 불야성처럼 곳곳에 불이 밝혀져 있는 자금성이 오늘 따라 유독 어둡게 느껴지고 있었다. 천문전(天文殿), 자금성의 외성에 자리한 한 채의 별원, 이곳은 천문왕자 주천화 를 위해 새로 건축한 전각이었다. 천문전의 객청, 주천화가 벽면을 마주한 채 석상(石像)처럼 서 있었다. 벽면에는 실물 크기의 미인도(美人圖) 한 폭이 걸려 있었다. 구름같이 틀어올린 머리채, 궁장 치맛자락을 살포시 움켜쥔 섬섬옥수(纖纖玉手), 별같이 맑은 눈망울 등이 실로 살아있 는 듯 생생했다. "전궁! 이 분은 나의 모친이시네!" 주천화의 음성이 젖어들었다. 주천화의 뒤에 시립해 있던 전궁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아! 무척이나 아름다우셨군요." 미인도(美人圖), 그것은 바로 주천화의 모친의 초상화였다. 주천화는 모친의 초상화를 아련한 그리움에 가득 찬 눈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이어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 전궁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마마! 누가 온다는 말이십니까?" "후후, 곧 알게 될 것이네. 음! 저기 오는군."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오랜만에 오셔서 감회에 사로잡혀 계셨군요."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한 인물이 대청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 바로 대선생이 아닌가? '저 사람이 왜 이곳에 왔을까?' 전궁이 의혹(疑惑)을 느끼고 있을 때 주천화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기다리고 있었소! 자, 안으로 듭시다." 대선생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으음! 내가 올 것을 간파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는 주천화의 놀라운 심지(心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실, 사면에 아무런 장식도 있지 않은 소박한 방이었다. "...!" "...!" 그곳에 주천화와 대선생이 마주 앉아 있었다. 대선생은 무릎을 꿇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대가 성상과 막역지우라, 헌데 언제부터 성상과 가까이 지냈소이까?" 주천화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대선생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예! 대략 이십 년 전쯤부터...." "후후후!" 주천화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하면 그대는 황실의 내막을 세세히 알고 있었겠군?" 대선생의 안색이 굳어갔다. "제가 무슨 황실의 내막을 알고 있겠습니까? 다만 주위에서 들어 어느 정도만...." 돌연 주천화의 전신에서 싸늘한 한기가 솟아났다. "헌데 대선생께서 본인을 찾아온 데에는 어떤 까닭이 있을 것이 아니겠소? 자, 용건을 들어 봅시다." 주천화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대선생이 마른 침을 삼켰다. "예! 실은 금궁정에서의 결례를 정중히 사과드리고자...." "그뿐이오?" 주천화의 눈에서 맑은 선광이 뻗어나갔다. "으음!" 주천화의 눈빛은 마치 상대방의 내심을 꿰뚫을 듯 예리하여 대선 생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토했다. "후후후, 본인은 대선생께서 비단 그 일만으로 나를 찾아왔으리 라고 믿지 않소이다. 혹 천하의 대세(大勢)를 논하고자 온 것이 아니오?" 주천화의 음성은 담담했다. 허나 실로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후유! 과연 천문왕자님의 눈은 예리하기 이를데 없군요!" 나직히 탄식을 터뜨리며 대선생이 고개를 들었다. "허나 미천한 소신이 무슨 천하의 대세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현 황실의 심상치 않 은 공기를 들려주어 약간의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그래...?" 주천화의 눈에서 일순 기광이 번뜩였다. 그가 싸늘한 음성으로 내뱉았다. "그대는 너무 깊숙이 관여하는 듯 하군. 황실의 일에 황족도 아닌 자가!" 주천화의 눈에 차가운 광망이 이글거렸다. "아는 것도 너무 많은 것 같군. 때로는 아는 것이 화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 오." 질책의 뜻이 담긴 주천화의 말에 대선생이 어깨를 움츠렸다. 대 선생은 내심 한기(寒氣)가 솟음을 느꼈다. '으음! 과연 뛰어난 인재. 한순간의 불찰로 이 아이의 눈에 띄었으니 참으로 낭패로다!' 돌연 주천화가 담담히 질문을 던졌다. "대선생! 그대는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주천화의 눈빛은 어느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주천화의 돌변한 태도에 대선생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허허허, 천문왕자님이야말로 현세(現世)의 진정한 영웅지체가 아닌가 합니다." "영웅이라?" 주천화의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떠돌았다. "본좌가 영웅이면 그대는 무서운 효웅(梟雄)이겠군." 순간 대선생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 마마, 어찌 저를 그같이 평가하시는지?" "대선생!" 주천화의 감정없는 나직한 음성이 벽력처럼 울려 퍼졌다. "언젠가 그대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오. 그때....." 주천화의 입가에 또다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본좌는 그대에게 한 잔의 술을 권할 것이오. 단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며...." 주천화의 말, 실로 의미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말이었다. "무슨 뜻이신지?" 대선생의 몸이 눈에 보이리만치 심하게 진동했다. "돌아가라!" 주천화가 그런 대선생을 차갑게 응시하며 일갈했다. "그대가 수십 년간 꾸며놓은 일은 하나하나 본좌에 의해 벗겨질 것이다." "흑!" 대선생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는 일체의 반박도 하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후후후, 그대는 시운(時運)이 없었다."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주천화가 차갑게 웃었다. "본좌를 만난 것이 최대의 악운이 될 것이다." 대선생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허나 그는 다시 비틀거리며 대청을 빠져나갔다. 대선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주천화의 눈에 문득 이채가 스쳤다. "그렇지! 그것을 전궁에게 주면 되겠군." 그의 눈은 새삼 전궁을 훑어보고 있었다. "전궁!" "예!" "따라 오너라!" 주천화는 복도를 거쳐 어느 내실로 들어섰다. 서고(書庫)이련가? 사면에 엄청난 분량의 책 이 쌓여 있었다. 사면이 모두 서가(書架)로 꾸며져 있는데도 그것도 부족하여 바닥 곳곳에는 수북히 고서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곳이 어디이기에 이렇게 많은 책들이?" 전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후, 이곳은 나의 서실(書室)이었다. 허나 진짜 서고(書庫)는 따로 있지!" 주천화가 빙긋이 웃으며 서가에서 한 권의 고서를 빼들었다. 스르르! 순간 서가(書架) 전체가 빙그르 회전하며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지 않는가! "이 아래에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진짜 서고가 있다네." "아니? 이 지하실 속에 서고가 또 있단 말씀입니까?" "후후, 들어가 보지!" 주천화가 앞장섰다 지하서고, 조그마한 서탁이 겨우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 사 방은 완전히 책으로 산(山)을 이루고 있었다. "이, 이 많은 책을 누가?" 전궁이 경악했다. "후후후, 모두 나의 손때가 묻은 책들이네." "...!" 전궁이 놀란 눈으로 새삼 주천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천화는수 많은 고서의 틈 사이에서 한 개의 거대한 철궤를 꺼냈다. "후후후, 드디어 임자없이 내려온 묵용철갑(墨龍鐵甲)이 빛을 보겠군." 뚜껑이 열리자 그곳으로부터 은은한 묵광이 솟아올랐다. "공자님! 그게 무엇입니까?" "후후후, 꺼내서 읽어보게!" "이, 이것은 갑주가 아닙니까?" 전궁이 의혹어린 눈으로 철궤 속의 물건을 꺼냈다. "어서 입어보게!" "...?" 전궁은 고개를 갸웃하며 묵광(墨光)이 어려 있는 갑추를 펼쳐 보 였다. 그것은 실로 거대한 갑주였다. 전궁은 주천화의 지시대로 그 갑주를 입었다. "허어! 딱 맞는군. 역시 내 짐작대로 아주 잘 어울리는군." 주천화가 감탄성을 발했다. 아! 천신(天神)이 있다고나 할까? 묵광이 은은히 감도는 갑주를 입고 서 있는 전궁의 모습 은 실로 위맹스러워 보였다. 마치 태산을 밟고 서 있는 천장(天將)을 방불하는 것이었다. "마마! 이 갑주는 누가 입던 것이기에 소인에게 딱 맞습니까?" 전궁이 자신의 모습을 둘러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후후후, 그것은 사람이 입던 것이 아닐세." "예엣?" 전궁이 놀라 화들짝 외쳤다 "전대 황조(皇祖)시절에 전쟁이 있기 전 군신(君臣)에게 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네." "...?" "그때 그 군신에게 입혔던 것일세." "허! 그 군신은 무척이나 웅대했던 모양이군요?" "그렇다네. 군신상(軍神像)의 키는 십 척에 달했으니...." "오!" 전궁이 감탄성을 토하자 주천화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 거대한 군신의 갑옷이 자네에게 딱 맞지 않나." 전궁이 뒤통수를 긁었다. "그, 그렇군요. 히히!" 전궁이 민망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짓다 입을 열었다. "헌데 이것을 어찌 공자님이 지니고 계십니까?" "선황께서 태어날 때 보내신 것일세. 군신의 정기를 받아 훌륭한 무장이 되라고 보내신 것이지!" 주천화가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묵용갑주라는 특수한 재질로 만든 것이라 보검도 감히 침범치 못하네." "이, 이 귀한 것을! 마마! 이 은혜를...." 전궁이 감복하여 말을 더듬었다. "후후, 본좌를 수호(守護)하려면 그 정도의 신위는 갖춰야 하지 않겠나?" "마마!" 전궁이 감격해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④ 금릉 교회, 허물어져 가는 토지묘(土地墓). 그 구석에 몇 명의 걸인이 웅크리고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금릉, 그 화려한 도읍의 외각에는 이토록 한 끼 양식을 구걸하며 차가운 토지묘에서 몸을 눕히는 이도 많았다. 휘이잉! 바람이 차다. 몇 명 걸인들은 얇은 적삼만을 걸친 채 누워 한기(寒氣)에 몸을 떨고 있었다. 허나 그 중 또 몇 명은 한기 따위엔 아랑곳 없이 곯아 떨어져 있기도 했다. 추위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걸인들은 그런 몇 명의 걸인들을 괴물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거지라 해도 같은 거지가 아님을 그들은 알 수가 없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태연히 잠 을 자고 있는 걸인들은 무공을 지닌 개방의 수하들이었던 것이다. 찌르르... 찌르르...! 어디선가 밤벌레가 역시 추위에 몸을 떨고 있었다. 휘이익! 돌연 백의인영이 마치 땅 위에서 솟아난 듯 토지묘에 나타났다. 바람 한 점 일지 않았으며 조그마한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어엇?"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몇 명의 걸인이 소리 없이 돌연 모습을 나타낸 백의인영을 발견하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백의인영, 희미한 잔월(殘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실로 환상을 보는 듯 수려했다. 주천화, 바로 주천화였다. "이곳에 혹 개방의 제자가 있는가?" 주천화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조용했다. 허나 그 음성에는 은은히 뇌성(雷聲)이 울리는 듯 한 힘이 깃들어 있어 곯아 떨어졌던 걸인들조차 단숨에 잠에서 깨어났다. "공, 공자가 뉘시기에 본방의 사람을 찾으시오?" 중년의 한 걸인이 부시시 몸을 일으키며 긴장했다. 툭! 그의 발 밑에 한 개의 죽패가 떨어져 내렸다. "허억! 이것은 본방의 개령죽패! 바, 바로 장로의 신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금릉분타의 제자 소일문(小一門)이 장로님을 배알하나이다." 털썩! 그는 무릎을 꿇고 황망히 예를 취했다. "무, 무슨 하명(下命)하실 일이라도?" 잠시 후, 소일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에게 명한다! 금릉은 물론 강호 전역에 퍼져 있는 제자들 에게 지금부터 금광회의 총타 위치를 알아내도록 하라!" "예?" 소일문의 안색이 하얗게 굳어갔다. "그, 그 일은 이미 전 제자들이 은밀히 조사하고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래?' 주천화는 소일문의 말에 흠칫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그렇다면 더욱 전력을 기울여 삼 일 안에 임무를 완수하도록 하라!" "삼, 삼 일!" 소일문이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 그것은 저희들로서 장담을 할 수가...." 주천화의 눈에서 무형(無形)의 위엄이 뻗어나왔다. 소일문을 비 롯한 걸인들은 숨조차 쉴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본좌는 천마대제이다. 너희들 장로의 신분으로 이 일을 지시한 것이 무리였다면...." "허억!" "본좌의 신분으로 다시 한 번 명하겠다! 삼 일 안에 금광회의 총 타이던 분타이던 한 곳만 알아내라!" "천, 천마대제!" 소일문 등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천, 천마대제가 본방의 장로?' 의혹과 경악이 벼락치듯 그들의 뇌리를 강타했다. "기한은 삼 일이다. 삼 일이 지나면 본좌는 개방을 적으로 돌리겠다!" "으!" 소일문의 안색이 홱 굳어졌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주천화의 모습은 이미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후 개방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주천화, 그의 혈보(血步)가 드디어 금광회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 황 제2권 제18장 강호제일전장(江湖第一錢莊) ━━━━━━━━━━━━━━━━━━━━━━━━━━━━━━━━━━━ ① 보국대전장(寶國大錢莊), 금릉 시가의 중심에 위치한 대전장이었다. 천하제일의 전장으로 써 보국대전장은 중원의 십분의 일을 살 수 있는 재물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신용이 있고 권위가 있는 보국대전장의 규모는 웅 대하기 이를데 없었다. 즐비해 있는 전각, 그 사이사이마다 푸른 수림과 온갖 기화이초가 어우러져 있어 실로 별천지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 장주 두우중(斗宇重). 이 보국대전장의 주인은 재왕(財王)이라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재왕 두우중의 행사는 신비하기 이를데 없어 실상 그의 진면목을 아는 이가 드물었다. 비범한 기상의 두 청년이 이 보국대전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 다. 태산같은 거구의 청년과 태양조차 빛을 잃을 미공자, 주천화와 전궁이 아닌가. <보국대전장(寶國大錢莊).> 보국대전장의 웅대한 현판을 마주선 주천화의 눈에 문득 기광이 떠올랐다. "후후, 개방의 정보는 과연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것이었다." "...!" "나는 그들에게 삼 일의 기한을 주었다. 헌데 그들은 이틀만에 금광회의 총단을 알아내다니...." 주천화는 조용히 보국대전장을 향해 다가가며 기이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후후, 이곳이 금광회의 재력을 뒷바침해 주는 곳일 줄은 아무도 몰랐지.' 보국대전장, 이곳이 바로 무림 사대신비세력 중 가장 은밀히 행 동하는 금광회의 총단이었던가? 주천화와 전궁이 거대한 현문에 다가가자 한 인영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육순의 회의노인, 그의 인상은 매우 부드러워 상대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하는 것이었다. 주천화가 말없이 육순 회의노인을 응시하자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허허허, 공자께서는 은자가 필요하셔서 온 것입니까?" 육순 회의노인은 전궁의 거대한 체구에 감탄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허어! 참으로 거대한 사람이로구나! 내 육십 평생에 처음으로 대하는 거구다!' 주천화가 담담히 질문을 던졌다. "노대(老大)의 신분은?" "저는 이곳의 집사로서 황자양(黃紫陽)이라고 합니다." 회의노인은 흠칫하며 정중히 입을 열었다. "후후후, 전장의 집사가 강호(江湖)의 일류고수라 어울릴 수도 있겠지." 주천화가 나직이 비양거렸다. "허어. 워낙 이곳의 재물을 넘보는 인물들이 많아서...." 회의노인, 황자양은 짐짓 태연히 말했으나 내심으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으음! 놀라운 안목이다. 단번에 노부가 무공을 지닌 것을 알아 보다니 이 공자가 누구란 말인가?' 주천화가 한 걸음 전진했다. "전궁! 들어가세!" 황자양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공자! 은자가 필요하시면 먼저 저에게...." "허어! 이곳에서는 손님을 세워놓고 흥정하는가!" 전궁이 벽력같이 호통쳤다. "그, 그게...." 황자양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어, 어서 객청으로 드시지요!" 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 잡히며 주천화와 전궁을 안내했다. "그래 무엇을 맡기시고 은자를 빌리시려는지?" 객청으로 들어선 주천화가 정색했다. "그대는 물러가고 주인을 부르라." "예?" 황자양은 내심 노화가 치밀었으나 주천화의 비범한 신태에 감히 항거하지 못했다. "허나 장주님께서는 지금 출타 중이시고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분인지라...." 그는 애써 부드럽게 말하며 주천화의 눈치를 살폈다. "전궁!" "예!" "옥갑을 꺼내게!" 전궁의 품 속에서 한 개의 옥갑을 꺼냈다. 제법 작지 않은 옥갑이었다. "...?" 황자양은 의혹의 눈으로 옥갑을 응시했다. "이만하면 주인과 직접 흥정할 가치가 있겠나?" 주천화가 옥갑을 열며 담담히 웃었다. 순간 옥갑에서는 영롱한 광채가 퍼져 나와 대청을 밝혔다. "이, 이것은!" 황자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세상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이 전설로만 전해져 오는 홍화야 명주(紅花夜明珠)가 아니오이까?" 그의 음성이 긴장으로 떨려 나왔다. "그렇네!" 주천화의 시인에 황자양의 어깨가 흔들렸다. - 홍화야명주(紅花夜明珠). 보옥지왕(寶玉之王)으로 손꼽히는 엄청난 기보. 묘강땅 심산에서만 채취된다는 극히 희귀한 보옥이었다. 핏빛 꽃 무늬가 천연적으로 떠올라 있는 억만금의 가치를 지닌 물건인 것이다. "그것도 여덟 개씩이나!" 옥갑 안을 들여다 보던 황자양의 눈이 더욱 커졌다. '으으! 놀라운 일이다. 이런 귀한 것은 황궁에조차 없을 것이다. 이 공자가 대체 누구이길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천화에게 질문(質問)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공, 공자! 대체 이것을 어디서 구했소이까?" "후후, 내가 이것을 지닐 자격이 없어 보인다는 뜻이오?"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고 단, 단지 의심...." 순간 전궁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무서운 신광이 뇌전치듯 번뜩였다. "이노옴...! 감히 뉘 앞에서 망발이냐!" 대청의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실로 공포스러운 위세인지라 황자양은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이구! 이 늙은이가 그만 주책을...." 그는 손을 비비며 새삼 옥갑 안의 홍화야명주를 바라보았다. '후후훗, 이것이 선사께서 남기신 재물의 백분지 일에도 못미치 는 것을 안다면 이 사람은 까무라치고 말겠군.' 황자양의 눈에 탐욕의 광망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고 주천화가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장주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황자양이 정신을 가다듬고 벌떡 일어섰다. 황자양이 안으로 사라진 지 반각이 되었을까?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주천화의 눈에 돌연 녹광(綠光)이 솟아났다. "전궁, 훔쳐 보는 자들이 많군! 쥐새끼같은 놈들!" "예!" 전궁이 주천화의 말뜻을 깨닫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쐐애액! 파파파팍...! 전궁의 손에서 순식간에 이십여 개의 강전이 사면으로 쏟아져 나 갔다. 실로 절묘하고도 놀라운 수법, 이십여 개의 화살을 날리는 것이 마치 한 개 강전을 날리는 것처럼 빨랐다. 더구나 강전들은 그들의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고 있었다. 꽈꽝... 꽈꽈꽈꽈앙! 무서운 폭음이 일었다. 사면 석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크악!" "와악!" 석벽이 뻥뻥 뚫리며 그 뒤에 숨어 있던 흑의인들이 그대로 날아가고 있었다. 폭음 그리고 비명, 이 모든 것은 실로 뇌전이 번쩍이는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와르르...! 사면 석벽이 강전의 위세(威勢)에 무너져 내리며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정녕 놀라운 위세가 아닌가! 먼지가 가라 앉았다. 순간 장내의 상황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십 여 명의 흑의인이 강전에 꿰뚫린 채 지면에 쓰러져 있었다. 헌데 그 가운데에 두 인영이 우뚝 서 있지 않은가? 파랗게 질려 있는 보국대전장의 집사 황자양, 그리고 자의금포를 걸친 비대한 체구의 장년인이었다. 금포장년인, 배가 미륵불의 그것보다 더 나왔고 얼굴에조차 개기 름과 살점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허나 조용히 주천화를 응시하 고 서 있는 그의 전신에서는 상대의 마음을 억압하는 기도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탁... 탁! 그의 손에는 전궁이 쏘아댄 한 개의 강전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석벽을 꿰뚫고 날아든 강전을 잡아 챈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강전으로 자신의 왼쪽 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실로 절대고수의 풍도였다. '아니! 내 강전을 손으로 잡아낸 것이란 말인가?' 전궁이 그 광경에 한기를 느꼈다. "후후, 그대들은 손님을 숨어서 엿보는 취미가 있었던가?" 주천화의 눈이 황자양을 응시했다. "그, 그것이 아니라!" 황자양이 일순 부르르 떨며 무어라 변명의 말을 찾았다. "그만 두게나! 수하들은 죽을 만큼 큰 죄를 범하지 않았네." 이때 비대한 자의금포인이 조용히 말하며 주천화에게 걸어왔다. 스윽! 놀랍게도 그의 발은 지면을 밟지 않고 있었다. 또한 다가오는 속 도가 일견 매우 느린 듯 했으나 어느새 주천화의 이 장 앞에 서 있지 않은가! "그대가 천마대제인가?" 그의 입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대가 재왕 두우중인가?" 주천화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 "...!" 그와 주천화의 눈이 마주쳤다. '흠, 제법 무서운 인물이군!' 주천하의 내심에 감탄성이 흘렀다. 그는 금포장년인의 외모를 보 고 색(色)과 은자나 밝히는 그런 인물로만 여기고 있었다. 허나 금포장년인의 눈에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내심 놀란 것이었다. 금포장년인의 눈은 자신의 눈을 빨아들일 듯 심유(沈幽)하지 않 은가? 그것은 다시 말해 그가 무서운 심기를 가진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금포장년인의 놀람도 이에 못지 않았다. '으음! 천마대제의 위명(偉名)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허나 그는 놀란 빛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렇소! 노부가 재왕 두 아무개요." "후후, 과연 재왕 두대협이셨군." 주천화가 비양거리듯 말하자 순간 재왕 두우중의 눈에 살광(殺光)이 스쳤다. 이때 주천화가 녹광(綠光)을 폭사시키며 싸늘히 질문(質問)을 던졌다. "그대는 금광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나?" "헉!" 재왕 두우중이 놀란 빛을 드러냈다. "으음! 천마대제는 무공만이 아니고 놀라운 정보망까지 지니셨구 료. 본인이 금광회의 인물임을 아는 사람이 없었거늘...." 재왕 두우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본인은 금광회에서 재당(財堂)을 관장하고 있소." "솔직하군. 좋다! 내 한 가지만 묻고 떠나겠다." "...?" "본좌는 지금부터 금광회를 파헤치기로 마음먹었다. 그 까닭은 금광회에서 혹시 구천만마문을 공격한 것이 아닌가 해서이다." "으음!" "그전에 그대에게 직접 묻고 싶다. 과연 구천만마문을 공격한 것이 금광회인가?" 재왕 두우중의 전신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 그것은 본회에서는 구천만마문을 공격할 이유가 없소." "그래? 좋다! 덕분에 시간이 절약되었다. 허나...." 주천화가 몸을 일으켰다. "그대의 말만 믿고 이대로 물러나겠다는 뜻은 아니다. 혹시 그대 가 거짓을 말할 수도 있으니...." 주천화의 두 눈에서 가공할 녹광이 뻗어나왔다. "본좌에게는 시간이 없다. 금광회 하나만을 조사할 시간여유가 없는 것이다. 해서 일단은 그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겠다만, 만 일 금광회에서 구천만마문을 공격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주천화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허나 그 여운이 오히려 무 서운 압박이 되어 재왕 두우중을 핍박하는 것이었다. 주천화가 천천히 엉망진창으로 변한 대청을 빠져 나갔다. "지매에게 안부 전하게!" "...!" 재왕 두우중과 황자양이 멍청히 서 있었다. 다음 순간 주천화의 신형이 대청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자 재왕 두우중이 황급히 몸을 날렸 다. 보국대전장 후원 깊숙이 위치해 있는 내전, 넓다란 내전은 텅 비 어 있고 그 중앙에 한 개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주, 주상!" 헌데 재왕 두우중이 그 빈 태사의를 향해 부복해 있지 않은가? "지금 마악 그 자가 떠났습니다." 그의 음성에는 은은한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무슨 일로 왔다더냐?" 돌연 어디선가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이었다. "그, 그게 본회에서 구천만마문을 습격한 것이 아니냐고...." "구천만마문? 으음! 정녕 그가 그 일만을 묻더냐?" "예!" 신비한 음성이 침중하게 굳어갔다. "알았다. 물러가라!" "예!" 재왕 두우중이 뒷걸음으로 조용히 물러 나왔다. "그 자는 진정 개인적인 원한만을 풀려고 흥분해 있단 말인가? 믿 을 수 없다! 그가 본회를 조사하게 해서는 안된다!" 재왕 두우중이 사라진 빈 대청, 괴이한 음성이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를 막아야 한다." 살기(殺氣),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일렁이고 있었다. ② 주천화와 전궁은 노국대전장을 태연히 빠져 나오고 있었다. 노국대전장의 수하들이 소동소 리를 듣고 객청 주위에 몰려 있었으나 아무도 그들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주천화가 정문을 완전히 벗어나자 전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공자님! 정말 그 자의 말만 믿고 이대로 싱겁게 물러서시는 것입니까?" "후후!" 주천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금광회는 중원제일의 전장까지 소유하고 있는 만큼 그 세력은 가히 추측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 전궁의 눈이 똥그래졌다. '뭐야? 그, 그렇다면 그들이 무서워 곱게 물러섰다는 뜻일까? 그, 그럴 리는 없고...?' "그들이 사실을 감추려 들고 나와의 대결을 기피한다면 나로선 그들을 더 이상 파헤칠 명분이 없다." 주천화가 전궁의 속마음을 짐작한 듯 부드럽게 웃었다. "아!" 전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단지 미끼를 던졌을 뿐이다." "미끼요?" "만약 그들에게 감춰야 될 상황이 있거나 찔리는 데가 있다면 그 들은 분명 나의 미끼에 걸려들 것이다." '아! 마마의 심기, 실로 놀랍기 이를데 없구나!' "...!" 주천화는 말을 마치고 묵묵히 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전궁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헌데 공자님. 지금 어느 곳으로 향하시는 것입니까?" "후후, 갈 곳은 한 곳밖에 더 있겠나?" "예에?" "자네의 전통(箭筒)을 보게!" 전궁이 의혹과 함께 전통을 살폈다. 전통은 텅 비어 있었다. "허, 그 많던 강전을 어느새 다 썼군요." 주천화가 시가의 모퉁이를 돌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전궁!" "예?" "후후, 자네는 내가 왜 이렇게 천천히 걷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나?" "예? 천천히 걸으시는 것에 어떤 이유가 있었단 말씀이십니까?" "후후후, 그렇다네. 그들의 눈에서 벗어나서는 안되지 않는가? 또한 그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어야 하겠지." "...?" 전궁으로서는 도저히 주천화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우리가 철기점(鐵器店)을 나올 때쯤이면 그들의 안배(按配)가 끝나 있을 것이네." "...!" "자, 저쪽으로 가보세. 철기점이 있으면 그동안 자네의 강전이나 보충하세." 주천화가 전궁을 이끌며 천천히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금릉철기점(金陵鐵器店).> 거대한 편액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금릉에서 가장 웅대한 대장간이었다. 점포의 넓이만 해도 방원 십여 장에 달했고 수많은 농기구, 각종 병장기 등 그곳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 온갖 철물들이 흡사 작은 산을 방불했다. 쾅... 꽈앙! 그들이 점포에 들어서자 요란한 망치소리가 들려왔다. 점포의 한쪽 구석, 웃통을 벗어부친 사십대의 장한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두들기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건장한 장한이 주천화와 전궁을 발견하고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 강궁에 쓸 수 있는 강전을 만들어 주게!" 전궁이 강궁을 내밀었다. 강궁을 본 중년대한이 혀를 내둘렀다. "허어! 이렇게 큰 강궁은 사십 평생 처음 보는군요!" 전궁의 거대한 강궁을 살펴보던 그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당장은 힘들 것 같은데요. 워낙 쇠가 많이 들고...." 이때 돌연 주천화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흠! 대장간 주인의 손치고는 너무 깨끗한 손이군!' 전궁이 주위를 둘러보다 한 곳을 가리켰다. "그렇지! 저 철봉을 개조하면 될 것 같소." "예에? 저, 저것은 군막(軍幕)을 치는 쇠말뚝인데 몇 개 되지도 않고...." 더듬거리던 그가 돌연 생각이 난 듯 이마를 쳤다. "아하! 그렇지! 저것들은 뒷채 창고에 또 있습니다. 가셔서 보시겠습니까?" "좋소! 한 번 가봅시다." 전궁이 쾌히 승락하자 주천화가 그들을 따라 후원으로 나섰다. '전궁!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헌데 이 순간, 주천화는 입조차 열지 않았는데 문득 전궁의 뇌리 에 한 음성이 영상처럼 스며들지 않는가? 이것은 입을 통하지 않 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불문최고의 기공인 혜광심어(慧光心言)였다. '헉!' 전궁의 안색이 일순 굳어졌다. 허나 그 역시 평정을 잃지 않은 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흐흐흐, 대장간에서의 혈투라...? 거 괜찮겠군! 쓸만한 병장기도 억수로 많을테니!' 전궁이 주위를 쓰윽 둘러보며 내심 괴소를 머금었다. '헌데 과연 내가 쓸만한 무기가 있을까?' 후원, 이곳은 금릉철기점에서 팔고 있는 온갖 철물들을 제조하는 곳이었다. 땅땅... 땅땅땅! 요란한 망치소리가 귓청을 찢을 듯이 울려퍼지고 있었고 한쪽에 거대한 용광로(鎔鑛爐)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훅훅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용광로의 밑에는 무서운 불길이 이글거리며 용광로 안의 쇠를 녹여대고 있었다. "그 쇠말뚝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소?" 전궁이 짐짓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질문을 던졌다. "예!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있습니다." 주인은 용광로 옆쪽으로 다가가며 전궁과 주천화를 안내했다. "흐흐흐!" 그들이 마악 용광로를 스치는 순간, 주인의 입가에 악독한 미소가 스치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그의 신형이 용수철 퉁기듯 번개같이 삼 장 앞으로 퉁겨나갔다. 와르릉...! 찰나지간 거대한 용광로가 주천화와 전궁을 향해 엎어졌다. 무서 운 열기(熱氣)와 함께 가공할 쇳물이 폭포수같이 그들을 덮쳐왔다. "이 놈이 웃어? 웃을 사람은 바로 나다! 이 놈아! 흐흐흐!" 허나 주인이 앞으로 몸을 빼내는 순간 전궁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 붙고 있었다. 이것은 전궁이 미리 주천화에게 주위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만약 방심하고 있다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꼼짝없이 쇳물을 뒤집어 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주천화의 신형 역시 쇳물의 공세를 젖혀내고 있었다. 쏴아아...! 파파파...! 헌데 놀랍게도 쏟아져 내리던 쇳물 속에서 돌연 한 인영이 튀어 나와 주천화에게 덮쳐오지 않는가! "...!" 주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세상에 부글부글 끓는 쇳물 속에 몸 을 숨기고 있다 기습해오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천마빙유섬강!" 주천화의 입에서 우렁찬 대갈이 터졌다. 그의 양손에서 백광이 쏟아져 나갔다. 무서운 한기(寒氣)가 함유된 가공할 강기였다. 파앙! "끅!"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화기(火氣)와 한기(寒氣)가 격렬히 뒤엉켰다. "으으!" 주위를 덮던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대신 가공할 냉기가 주위를 몰아쳤다. 천마빙유섬강, 천하에서 가장 극음무쌍한 장세가 아니던가! 두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용광로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인물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크크크, 이런 장공(掌功)이 존재하다니!" 두 명의 혈포인,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듯 면사같이 얇았으나 그 무서운 화기 속에서도 그을지조차 않았다. "놀랍군! 천마빙유섬강에 적중되고도 얼음덩어리가 되지 않다니...." 주천하가 그들을 훑어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헌데 그대들은 쌍동이인가? 똑같이 생겼으니?" "그렇다! 우리들은 쌍동이... 욱!" 두 명의 혈포인의 입에서는 한 가닥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데 그들은 과연 주천화의 말대로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불타 오를 듯 붉은 눈동자, 털 한 오라기 없는 민대머리의 용모 가 한눈에 쌍동이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너, 너의 무서운 장세에 허무하게 죽지만... 욱! 너, 너 는 결코 구마천(九魔天)의 손을 벗어날 수 없을...." "후후, 고맙다고 해라! 한날 한시에 태어난 너희들을 한날 한시에 죽게 해 주었으니...." 주천화가 이죽거렸다. "헌데 구마천이 누구이냐?" "북해천의 최고고수들... 우, 우리는 화마천(火魔天)이다." 두 명 화마천이 힘겹게 입을 열며 스르륵 무릎을 꿇었다. 이미 주천화의 천마빙유섬강에 그들의 화공진기가 박살나며 심맥이 끊어진 것이었다. "너, 너의 목에는 중원땅 삼분지 일이 걸려 있...." 털썩! 그들은 동시에 힘겹게 말하다 동시에 쓰러졌다. "흐흐흐, 구마천? 네깟 놈들이 감히 공자님을...." 전궁이 득의에 찬 괴소를 터뜨렸다. "화마천, 곧 너희들의 동료가 따라갈 것이니 저승길이 심심치는 않을 것이다." 우둑... 우드득! "으왁! 지, 지독한" 전궁의 손에는 대장간 주인이 매달려 있었다. 전궁이 양손에 힘을 주자 그는 처절한 비명 을 지르며 죽어갔다. 전궁의 두 손 사이에서 압사(壓死)되며 짓뭉개진 것이었다. "북해천. 결국 또다시 만나게 되었군 내 목에 중원땅의 삼분지 일이 걸려 있다? 후후, 적은 것이 아니군." 주천화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담담히 중얼거렸다. 쿵쿵... 쿵! 돌연 지축이 은은히 진동되고 있지 않은가? "뭐야! 아직도 남아 있는 놈이 있었나?" 전궁이 고개를 들었다. 한 인영이 후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헌데 아! 이것이 과연 인간이란 말인가! 실로 작은 산(山)을 방불하는 거대한 체구, 눈 하나의 크기만 해도 어른 주먹만 했고 그 키 는 열한 척이 넘을 것 같은 거구의 인영이 아닌가! 더구나 전신에 부숭부숭 새까만 털이 뒤덮혀 있었다. 전궁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괴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호오!" 좀체로 놀란 빛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주천화조차 입을 딱 벌렸다. "아니! 뭐 이따위 괴물이 있어? 나, 나보다도 더 크다니!" 전궁이 어이가 없는 듯 괴인을 훑어 보고 있었다. 이제 갓 삼십쯤 되었을까? 허름한 장삼을 걸치고 있는 거인이 주 천화와 전궁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당, 당신들은 누, 누구냐?" 더듬더듬, 허나 그 목소리는 쇠를 치듯 우렁찼다. "흐흐흐, 에잇!" 괴소를 흘리던 전궁이 벼락같이 거인에게 덮쳐갔다. "감히 뉘앞이라고 하대냐? 버릇을 고쳐주마!" 전궁이 순식간에 거인의 허리를 양손으로 부둥켜 앉았다. "어이? 왜, 왜이래?" "끄응! 잔소리 마라!" 전궁은 거인(巨人)을 끌어안은 채 그의 허리를 꺾으려는 듯 힘을 주었다. 이렇게 되자 거인도 질 수 없다는 듯 마주 안으며 힘을 썼다. "끄응!" "으응...!" 두 거인이 마주 안은 채 힘을 쓰는 광경에 주천화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후후, 마치 두 마리 대웅(大雄)이 힘 자랑하는 듯 하구나! 천하 제일의 거구를 지닌 두 사람의 신력(神力) 대결이라 재미있군!' 이것은 실로 흥미진진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흐흐흐, 너도 제법 하는구나. 너는 구마천이라는 놈들 중 역마천(力魔天)쯤 되겠구나!" 전궁의 음성이 들려왔다. "으랴찻!" 다음 순간 전궁이 대갈을 터뜨리며 더욱 신력을 끌어 올렸다. "으으!" 거한의 입에서 담담한 신음이 터지며 안색이 창백해져 갔다. "전궁! 그만하게! 그는 북해천의 인물이 아닐세." "...?" 전궁이 흠칫하다 손이 풀렸다. 스르륵...! 거한이 태산 무너지듯 지면에 주저앉았다. "후유!"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터졌다. "형, 형장! 미안하오! 그, 그만 내가 성급해서 실수를...." 순간, 거한이 돌연 전궁을 향해 부복하지 않는가. "대, 대형(大兄)! 소제를 거두어 주십시오...!" 이어지는 거한의 엉뚱한 말에 전궁이 멍청해 졌다. "저, 저는 어릴 때부터 힘(力)으로 저를 꺾는 사람이 있으면 그, 그 분의 수하가 되기로 결심해 왔습니다." 더듬거리는 음성이었으나 진정이 충만해 있었다. "으음!" 전궁은 그것이 그의 진심임을 깨닫고 난색을 떠올렸다. 그의 눈이 주천화의 결정을 바라듯 주천화를 응시했다. "쓸만한 사내같다. 네 뜻대로 하라!" "감, 감사합니다." 전궁의 입가에 함박 미소가 피어났다. "와하하하, 좋다! 너도 남아로서 천하를 활보해 보고 싶은 웅지가 있겠지?" "그, 그렇습니다!" "...!" "...!" 전궁과 그의 눈이 허공에서 뜨겁게 얽혔다. "나는 전궁이다!" "저, 저는 웅, 웅평산(熊平山)입니다!" "웅평산? 멋진 이름이다!" "형, 형님의 이름도 멋, 멋집니다." "와하하하!" "으흐흐흐!" 그들의 대소에 천장이 들썩거렸다.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참! 이 분은 내가 모시고 있는 분이다. 어서 대례를 취해라!" "예!" 웅평산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주천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헌데 그 순간 그의 허리가 저절 로 펴지지 않는가? 주천화의 손에서 뻗어난 잠력이 그의 허리를 잡아 편 것이었다. "그대는 남아! 평생 한 사람만을 따라야 한다. 그대는 이미 전궁 에게 충정을 맹세했다. 주인이 아닌 사람에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될 것이다." "...!" 웅평산의 눈에 감복의 빛이 스쳤다. '이, 이 분은 연약한 서생이 아, 아니었구나! 실, 실로 태산(太山)같으신 분이다!' 이때 전궁이 웅평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산(山)! 가서 쓸만한 병장기를 가져 오너라! 이제 공자님께서 이곳을 떠나야 하니...." "예!" 웅평산이 안으로 사라지자 전궁이 주천화를 응시하며 득의의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흐, 공자님! 제가 뜻밖에 아우를 얻었군요. 흐흐흐!" 전궁은 원래 순박한 성품인지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후후후, 전궁! 잘 돌봐주어야 하네. 그는 묵수살맥(墨獸殺脈)을 지니고 있네." "예? 묵수살맥이라니요?" "그것은 특수한 체질로 맹수들에게 나타나는 것이네. 인간이 이 맥을 지니고 태어나면 엄청난 신력을 지니게 되네." "...!" "허나 야수의 포악한 성품이 잠재해 있어 만일 그것이 폭발한다면 아무도 말릴 수 없다 네." "아아!" 전궁이 고개를 끄덕일 때 주천화가 전궁을 직시했다. "자네 역시 묵수살맥을 지니고 있다네." "예에?" "해서 자네 역시 범인들로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신력을 지니게 된 것이네." "그, 그렇다면 제 성품도?" "후후, 그렇지 않네. 자네의 선친께서 다행히 잠재해 있는 야수성을 제거해 버린 듯 하네." "아!" 전궁, 그는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과 흡사한 동생이 생겼다는 것이 오직 기쁠 뿐이었다. 이로써 무림에 또 한 명 거인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 황 제2권 제19장 수마천(水魔天)의 뜨거운 공세! ━━━━━━━━━━━━━━━━━━━━━━━━━━━━━━━━━━━ ① 석양(夕陽), 석양을 등진 채 삼 인이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북해천, 과연 놀라운 살수집단이었다. 전궁의 강전이 떨어져 그 것을 구하려 철기점으로 갈 것까지 예측하고 기다렸다니.' 주천화가 상념에 잠겨 말이 없자 전궁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 공자님! 어디로 가시는지요?" "후후, 바로 자네가 가고 싶어 하는 곳." "예?" "새로운 식구가 생겼는데 한 잔 술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 그걸 어떻게?" 주천화가 귀신(鬼神)같이 그의 마음을 헤아리자 전궁은 입을 딱 벌렸다. "후유! 역시 공자님의 심기는 귀신이라도 못 당하겠군요." "하하하!" 주천화가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알 수 없는 분이란 말이야!' 전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럴 때는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일단 노하면 옆에서 모시고 있는 나조차 숨이 막힐 정도이니....' 주천화가 전궁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후후후, 좋은 곳이 있네. 어릴 때 선친을 따라 한 번 가본 곳인 데 참으로 정취있는 곳이었지." "...!" "그곳의 정취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네." "도대체 어떤 주루이길래 공자님께서 그렇게 극찬을 하시는 것입니까?" 주천화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호수, 넓다란 호수가 몇 개의 산을 끼고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허어! 금릉에 저런 절경이 있었다니!" 전궁이 감탄사(感歎詞)를 터뜨렸다. 호변에는 수많은 주루가 벌써부터 홍등(紅燈)을 내건 채 늘어서 있었고 호면에는 수십 척의 화려한 놀잇배가 수상기루(水上妓樓)를 형성한 채 떠 있었다. "허어! 밤이 되면 굉장하겠는데요!" 전궁이 연신 감탄사를 발하며 호수를 둘러보았다. "저곳은 청호(淸湖)라 하지. 바로 홍택호(洪澤湖)의 줄기이네." 웅평산이 끼어들었다. "대형! 이 청호는 경관(景觀)이 수려하여 황자께서도 종종 행차 하시는 곳입니다. 금릉에서 유명한 곳을 손꼽으라면...." 웅평산 역시 주천화의 뜻을 눈치채고 술술 입을 열고 있었다. 기 이하게도 항상 더듬는 그가 이 순간만큼은 하나도 더듬지 않고 있었다. "자금성, 보국대전장, 그리고 이곳 청호입니다." "허어!" 전궁이 흥에 겨워 괴소를 흘려냈다. "청, 청호의 금잉어 회맛은 천, 천하일미로...." 웅평산은 다시 더듬거렸다. 이번에는 입 안에 군침이 돌았던 것이다. "꿀꺽!" 전궁이 군침을 삼켰다. "어, 어서 가, 가시지요." 전궁, 그도 더듬거렸다. "하하하!" 주천화는 순박하기 이를데 없는 두 거인의 행동에 대소(大笑)를 흩날렸다. 호변에는 태공(太公)들 또한 적지 않았다. 헌데 그중에서 유독 한 명 죽립노인이 눈길을 끌었다. 쏴아아...! 팔뚝만한 잉어 한 마리가 죽립노인의 낚싯줄을 따라 허공에서 꿈틀거렸다. 다음 순간 죽립 노인은 왼손으로 잉어를 누른 채 얇은 면도로 잉어의 배를 땄다. 그의 손놀림은 실로 능숙능란했다. 낚시에 잉어가 걸리고 노인이 그 잉어의 배를 따고 어망(魚罔)에 넣기까지는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헌데 놀라운 일이 아닌가? 분명 배를 가른 잉어가 어망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잉어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허나 그 잉어의 배로부터 선혈이 조금씩 흘러나오며 그 끝에 내장까지 섞여서 흘러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도 잉어는 살아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것이다. "억! 잉, 잉어가 살아서 헤엄을...!" 전궁의 눈이 크게 떠졌다. '흠! 놀라운 솜씨다.' 주천화 역시 내심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허, 이렇게 천천히 피와 내장을 빼내지 않으면 잉어회가 제 맛이 나지 않는 법이라오." 그들이 놀란 기색(氣色)을 보이자 죽립노인이 어색한 듯 입을 열었다. "호! 노인장! 대단한 솜씨로군요!" "허허허, 이 일만 육십 년을 해왔는데 어찌 대단하다고 할 수 있 겠습니까? 저희 선친께서는 배를 따고도 잉어가 삼 일 동안을 살아 있었습니다," "예에? 그, 그럴 수가!" "히야...!" 전궁과 웅평산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촤아아...! 죽립노인은 낚시대를 호수에 걸었다. 주천화가 무심히 그를 스쳐 갔다. 헌데 주천화가 등을 보인 채 마악 죽립노인을 지나치려는 순간 호면을 응시하고 있는 죽립노인의 두 눈에서 가 공할 살기가 스치지 않는가! 번쩍...!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반 자 크기의 면도가 무서운 도기를 폭사했다. 소리도 없었다. 또한 일체의 기척도 없이 몸을 날리는 그의 동작 은 실로 은밀하고도 신속했다. "...!" "...!" 죽립노인의 신형이 워낙 빨라 주천화의 일 장 뒤에 따라오고 있 는 전궁과 웅평산은 그 신형의 움직임을 미처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다. 주천화는 아무것도 의식치 못한 듯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조심해요!" 헌데 죽립노인의 면도가 마악 주천화의 목을 베려는 순간 호수 가운데서 앙칼진 음성이 터져 나왔다. 피이잉! "왁!" 죽립노인이 퉁겨져 나갔다. "후후후, 그대는 살기마저 감출 수 있는 살수이긴 했으나 내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주천화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으!" 죽립노인의 면도를 쥐고 있던 손이 박살이 나 있었다. 주천화의 반탄지기에 당한 것이다. 촤아아...! 이때 호면 한 가운데서 돌연 물기둥이 솟구치며 똑바로 주천화에게 뻗어갔다. "호오! 주의를 준 게 낭자였소?" 물기둥 끝에서는 한 명 날렵한 흑의(黑衣)를 걸친 소녀가 실려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어 굴곡이 드러나는 몸매, 마치 전설속의 인어(人魚)를 방불하는 신선하고도 매력적인 용모, 바로 전일 극빙해에서 주천화를 살해하려던 소녀 살수가 아닌가! "후후, 그대는 북해천마의 인물이 아니었소? 헌데 무엇때문에 본좌를 도우려 한 것이오?" "호호호, 오랜만이군요!" 흑의소녀가 가볍게 지면에 내려섰다. "아, 아니! 해, 해신(海神)이다!" "물, 물 속에서?" 주위에 있던 태공들이 웅성거리며 흑의소녀를 바라보았다. 흑의 소녀는 그들의 눈총도 개의치 않은 채 주천화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호호호, 북해천을 배반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 "내 신랑감을 죽이려 하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소녀의 신랑감을? 그, 그가 누구기에?" "호호호!" 흑의소녀가 허리를 잡고 교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녀가 한 손가 락을 들어 주천화를 지적했다. "바로 당신이에요!" "...!" 주천화는 어이가 없었다. "...!" 전궁의 눈에 낙담의 빛이 스쳤다. '크으! 이 계집애는 또 어디서 나타나 가지고... 아주 새까만 불여우가 나타났구나!' 그는 떫은 감을 씹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수마천(水魔天)! 네, 네년이 배반을 하다니!" 이때 죽립노인이 무서운 살기를 띄우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수마천? 당신이 수마천이었소?" "호호, 그래요. 당신은 태평세월이더군요." "무슨 뜻이오?" "이 곰같은 친구들은 수하인가요?" 흑의소녀, 수마천은 주천화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전궁과 웅평산을 둘러보았다. "곰? 아, 아니, 소저! 지금 뭐라고 했소?" 전궁이 눈을 부릅떴다. "호호호, 그래요! 덩치는 산만한 자들이 자신의 주인이 위험에 처해 있는 줄도 모르고...." "...!" "으!" 전궁과 웅평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후후후, 그래,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주천화가 담담히 웃다 돌연 녹광을 폭사했다. "물러가라!" 번쩍! 그의 오른손에서 무서운 연기가 벼락치듯 번뜩였다. 천마혈인장 (天魔血印掌), 마도 최고의 가공할 장공이 쏟아진 것이었다. 꽈꽝! "으아악!" 죽립노인의 몸이 태풍(颱風)에 날리는 듯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그들이 이야기에 열중해 있는 틈을 타 흑의소녀를 덮치려 했던 것이다. "저, 저 자는 도마천(刀魔天)이었어요." "도마천?" "예! 북해천의 최고고수인 구마천의 일원이에요." "...!" "당신은 지금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어요. 북해천 전체가 당신을 노리고 있어요." "후후!" 수마천의 다급함과는 달리 주천화는 담담히 웃고 있었다. "화랑! 제 말을 못 믿는 거예요." 흑의소녀가 답답한 듯 빽 소리쳤다. '이, 이건... 대담해도 보통 대담한 것이 아니구나!' 소녀의 입에서 대뜸 그런 호칭이 터져 나오니 뉘라서 놀라지 않으랴! "치이! 중대한 사실을 알려주려 멀리 북해도에서 이곳까지 당신 을 찾아 왔는데 내 말을 시답잖게 듣다니...." "그래? 무엇을 알려주려 왔소?" 주천화가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구마천이 어떤 인물들인가 하는 것과 본문의 모든 것, 허나 조건이 있어요." "조건?" "예! 바로 저를 평생 보호해야 해요!" '평생 보호? 저 여우가 결론은 공자님께 시집을 가겠다는 말이 아니냐!' 전궁이 혀를 내둘렀다. 주천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실 북해천의 일따위는 듣고 싶지 않소! 허나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지!" "...?" "북해천에 나를 죽여달라고 의뢰한 인물의 정체!" "아! 그것이라면 소녀도 알고 있어요." "...!" 주천화가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알려줄 수 없소?" "안되요! 먼저 저를 받아들이겠다고 승락하기 전에는...." 이때 전궁이 돌연 반 비웃음의 대소를 터뜨리지 않는가! "크와하하,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여자가 남자를 협박해서 시집을 가려 하다니... 와하하하!" "흑곰!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수마천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이어 그녀는 앙칼지게 쏘아부쳤다. "난 지금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크흐흐흐, 미치겠군!" 전궁이 움찔하면서도 대소를 멈추지 않았다. "화랑! 제이름이 무어냐고 묻지 않을 것이에요?" "으음!" 주천화는 계속되는 그녀의 맹랑한 태도에 신음성을 발했다. "그래, 당신 이름이 무엇이오?" "호호호, 구양금하(丘陽琴河), 어때요? 이름 예쁘죠?" "그, 그렇소! 무척 예쁜 이름이오!" 주천화가 졌다는 듯 손을 들었다. '기막힌 여인이로군. 헌데 무엇을 노리고 나에게 접근하는 것일 까? 저 눈빛을 보니 진정같기도 하고....' "어떻게 할 거예요? 제 낭군이 될 거예요, 아니에요?" 구양금하가 그윽한 눈망울로 주천화를 들여다 보았다. "글쎄, 정보는 알아야겠는데...." 문득 주천화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구양소저!" "예!" "내가 진정으로 마음에 드오?" "호호호, 물론 천하에 화랑이 아니고는 본녀의 남편될 사람은 없어요." "으음!" 주천화는 그녀를 놀리려다 오히려 당했음을 느꼈다. '못 당하겠군! 좋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더라도....' 주천화의 입가에 고소가 맺히고 있었다. ② 객잔의 화려한 내실, 은은한 분위기가 내실에 가득했다. "...!" 주천화와 구양금하가 간결한 술상을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구 양금하는 주천화의 품에 안기다시피 앉아 있었다. "화랑! 소녀의 잔을 받으세요." 구양금하는 애교가 철철 넘치는 음성으로 주천화에게 잔을 내밀 었다. 파르르! 술잔 가득 담긴 벽록색 액체(液體)가 잔잔히 파문을 일으켰다. '여인이란 진정 모를 존재로군. 살수로 키워진 이 여인의 가슴에도 열정은 있었는가?' 구양금하가 예쁘게 눈을 흘겼다. "아이! 뭐하시는 거예요? 어서 술잔을 받지 않으시고." 그녀는 열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주천화를 바라보며 콧소리를 토했다. "팔이 떨어지겠어요!" "후후후, 좋소!" 주천화는 그녀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거침없이 마신 후 다시 내밀었다. "자! 소저도 한 잔 들구료." "아이! 소저가 뭐예요? 이제 곧 부인이 될 사람에게...." "하하하, 좋소! 하매! 이 잔을 받으시오." "예!" 그녀는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았다. "호호, 화랑은 정말 이상한 분이에요." "훗! 나도 모르겠소! 누가 이상한 사람인지...." "호호호!" 그녀는 고운 동작으로 술잔을 넘긴 후 더욱 주천화의 품으로 파 고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술기운으로 인해 연분홍빛이 되어 있었다. 붉어진 얼굴이 실로 폭발적인 매혹을 불러 일으켰다. '귀엽군! 흡사 청매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주천화는 무심코 백청청의 얼굴을 떠올리며 흠칫해 했다. '이 광경을 청매가 보았다면 펄쩍 뛰겠지?' "흥! 누군가 다른 계집애를 생각하고 있었군요." 구양금하가 고개를 들며 하얗게 눈을 흘기고 있지 않는가? "허허허!" 주천화가 찔끔해서 짐짓 대소를 터뜨렸다. "누구예요? 그 계집애가? 저보다 예뻐요?" 구양금하가 마치 꼬집을 듯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주천화가 정색했다. "하매! 이젠 말할 때가 되지 않았소?" "...!" "자, 북해천에 나를 죽여달라고 의뢰한 인물이 누구요?" "그, 그것은...." 돌연 구양금화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의 눈에는 은은한 공포의 빛이 어렸다. "하매! 나를 진정 그대의 낭군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서 말을 해야 하지 않겠소?" "예!" 구양금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만히 주천화의 품 속에서 빠져나오며 정색했다. "어느날...." "...!" "본문에 금광회의 회주라는 인물이 찾아왔어요." "금광회?" 주천화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돌아간 후 본녀에게 북해도에서 돌아오는 당신을 죽이라는 명령이...." "그랬었군!" "헌데 얼마 전에는 금광회에서 당신의 목에 걸었던 금액을 대폭 으로 올리며 빨리 일을 끝내 달라고...." "...?" "중원(中原)의 삼분지 일을 주겠다는 것이었어요. 누구도 그 말 을 믿지 못했지만 뜻밖에 천주(天主)께서 그 의뢰를 승낙하신 것이에요." "천주?" "예! 본문의 태상이자 바로 소녀의 사부이기도 한 그는 바로 천마천(天魔天)이에요." "천마천?" "예! 그가 우리 구마천을 길러낸 사람이에요. 허나 기실 그의 진 면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 "해서 보이지 않는 하늘이라고 부르죠." "보이지 않는 하늘? 놀라운 인물인 듯 하군. 사제지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그래요!" "헌데 금광회주는 내 목값을 너무 적게 불렀군." "화랑! 방심은 금물이에요. 당신은 인간기보(人間奇寶)예요." 주천화가 어이가 없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 인간기보라!" 다음 순간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그의 전신에서 무서운 한기가 회오리쳤다. 돌연, 칼로 자른 듯 광소가 멈춰졌다. "하매!" "예!" "천주인 천마천도 중원으로 왔소?" "아마 그런 것 같아요." "후후, 그렇다면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그에게 천상천(天上天) 이 존재함을 알려줄 수 있겠지." 주천화의 놀라운 기세에 구양금하가 흠칫했다. "무, 무서워요!" 그녀는 허물어지듯 주천화의 가슴에 무너졌다. 두 팔로 억세게 그의 허리를 감았다. 허나 기실 그녀의 눈에 무서워하는 빛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내가 이 분을 정확하게 본 것 같애, 이 분을 살해할 인물 은 천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야!' 밤(夜), 점차 익어가는 소녀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화랑!" "...!" "우리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해요." "...!" "오늘 우리가 이런 이야기로 밤을 보내기엔 너무 아깝지 않아요?" "...!" "화랑!" "...!" "오늘밤 저를 여인으로 만들어 주세... 요." 그녀의 음성이 점차 가늘어져 끝내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으음!" 주천화의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와락 그녀에 대한 애정같은 것이 솟아 올랐다. "흠!" 돌연 구양금하의 입에서 한 차례 기음이 터졌다. 주천화의 억센 손이 그녀의 몸을 조였다. "아!" 그녀의 입에서 비릿한 처녀 특유의 체향이 번져 나왔다. 술기운에 보기 좋게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점차 들려졌다. 그녀 는 입을 반쯤 벌린 채 가쁜 호흡을 들이쉬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얼굴을 올려 대담하게도 주천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갔다. "흡!" 동시에 그녀의 희고 긴 팔이 주천화의 목을 억세게 끌어 안았다. "으음!" 구양금하는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 해 왔다. 그녀도 입술의 크기를 재보려는 것일까? 잠시 후 결코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그들의 포옹이 풀렸다. 구양 금하의 눈에는 기이한 열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푼 것은 제이의 불길을 위한 아쉬운 행동일 뿐 열정이 식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사르륵...! 그녀는 말없이 타오르고 있는 황촉불을 무시한 채 하나하나 껍질을 벗어가기 시작했다. 실로 대담한 행동이었다. 여인이 스스로 옷을 벗은 것이다. 터질 듯 팽팽한 젖가슴과 잘룩한 허리 그리고 그 아래로 깜짝 놀 랄 만큼 풍부한 둔부의 곡선이 눈에 들어 온다. 알맞게 살이 오른 매끄러운 아랫배와 그 아래 촉촉히 젖어 있는 신비의 밀림은 정녕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 아아! 실로 완벽한 여체였다 '음!' 주천화의 눈빛은 담담하고 무심했다. 허나 그녀의 희고 가는 팔 목이 그의 눈에 들어오자 흠칫 놀란 빛을 드러냈다. '수궁사(守宮沙)! 숫처녀의 상징인 수궁사를 지니고 있다니....' 그의 눈이 흔들렸다. '대담한 행동(行動)을 서슴치 않아 혹 색녀(色女)가 아닌가 의심했는데....' 점차 주천화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단전으로부터 불쑥 힘(力)이 솟구침을 느꼈다. 구양금하는 완전히 나체로 변한 후 사뿐 주천화에게 다가왔다. 대리석처럼 늘씬하게 뻗어내린 두 다리를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수초(水草) 사이의 은밀한 밀궁(密宮)이 살짝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아찔함이란 실로 정신이 아득해 질 정도였다. 구양금하는 주천화의 앞에 이르자 자신의 몸매를 보아달라는 듯 당당하게 버티고 선 채 뜨거운 눈으로 주천화를 직시했다. 주천화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주천화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구양금하의 앞에 섰다. '아!' 순간 구양금하가 눈을 돌렸다. 이미 단단히 돌기한 사내의 중심 이 그녀의 눈을 파고든 때문이었다. 공포, 야릇한 공포가 그녀의 등골을 치달렸다. 허나 그 순간 그 녀의 깊은 곳으로부터는 알 수 없는 흥분이 자라나고 있었다. 주천화는 우뚝 선 그 자세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아!" 그녀의 눈이 감겼다. 허나 터질 것처럼 팽창해 있던 사내의 실체(實體)가 그녀의 뇌리에 생생히 아롱거리고 있 어 눈을 감은 것인지 뜬 것인지 그녀로서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 주천화의 왼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왔다. 구양금하는 선 자세로 와락 주천화의 가슴에 무너졌다.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주천화의 눈에 역시 뜨거운 열기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쥐면 터 질 것 같으면서도 물고기의 동체인 양 탄력이 느껴지는 여체의 감촉은 실로 황홀했다. 이 순간 주천화는 왼손을 그녀의 뒤로 돌려 그녀의 둔부를 쥐어 갔다. 동시에 자신의 다리를 그녀의 다시 사이로 슬쩍 밀어넣어 두 다리를 벌리게 했다. 그 상태에서 주천화는 그녀의 왼다리만을 뒷쪽에서 안듯이 살짝 들어 올렸다. 이렇게 되자 그녀의 깊은 골짜기가 살짝 벌어졌다. 이미 촉촉한 온기에 휩싸여 있는 비소의 입구가 사내의 눈에 들어 왔다. '으음...!' 주천화는 호흡이 거칠어짐을 느껴야 했다. 마주 보고 선 자세에서 왼쪽 무릎을 살짝 구부 리며 쳐들린 그녀의 자세는 실로 폭발적인 유혹을 발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천화는 그녀의 둔부를 손바닥으로 틀어쥐었다. 그것은 마치 뒤 로 몸을 빼내지 못하게 하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는 몸을 앞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내의 실체, 뜨겁고 강인한 사내의 실체가 조금씩 벌려진 그녀의 하체를 꿰뚫기 시작했다. '헉...!' 너무도 부드러운 진입이다. 허나 그녀는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공 존하는 사내의 움직임에 자신도 모르게 내심 비명성을 질렀다. 아직 완벽한 결합은 아니었다. 사내의 선단만이 비소의 입구에 진입해 있는 그 상태에서 주천화는 몸을 멈췄다. 이어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뜨거운 열기로 이글거리는 눈 이었다. 이때였다. 다음 동작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구양금하는 자신의 몸에서 무엇인가가 빠져 나가는 허전함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왜...?' 주천화는 어느새 몸을 돌려 침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구양금하 는 모욕을 당한 기분이기도 하고 아쉬운 기분이기도 해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다. 헌데 침상에 오른 주천화가 반듯이 침상에 눕지 않는가! "...!" 구양금하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짓궂은 사람같으니!' 그녀는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주천화를 힐끔 바라본 후 침상에 다가왔다. 그녀의 눈이 잔뜩 좁아졌다. 오오! 천장을 꿰뚫을 듯 솟아 있는 남성의 우람함이여...! 힘줄이 툭툭 불거진 채 무섭게 꿈틀거리고 있는 핏빛의 생명체를 대한 그녀는 눈을 돌리지 못한 채 주천화 옆에 섰다. "...!" 주천화가 담담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무너지듯 그의 가슴 위로 엎어졌다. 그러자 주천화의 손이 그녀를 가볍게 끌어당 겨 자신의 몸 위에 올렸다. 반듯이 서로 마주보고 겹쳐진 상태가 된 것이다. 꿈틀거리는 젖가슴이 위에서 주천화의 가슴을 압박했다. 그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주 천화의 돌처럼 단단한 상체의 감촉이 그녀의 전신에 전율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미 한 번의 접촉이 있었는지라 그녀의 소중한 곳은 이미 홍수가 범람해 있었다. "으음!" "...!" 이때 주천화는 담담한 눈으로 그녀의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만을 응시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연 그녀가 춘풍(春風)을 유도해야 했다. '아이!' 그녀는 최대의 부끄러움을 무릅쓴 듯, 무릎을 굽혀 주천화의 허리 사이에 위치했다. "아아!" 그녀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 주천화의 두 손이 우왁스럽게 그녀의 육봉을 움켜쥐었다. 승마위(承馬位), 구양금하의 대담성이 아니면 순결을 바치는 소 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자세였다. '으음!' 그녀의 몸이 약간 비틀렸다. 드디어 소녀가 스스로 소녀지문(小女之門)을 파괴시키며 여인으 로 탈바꿈하려는 숨막히는 순간인 것이었다. "아아...!" 그녀의 둔부가 주천화의 억센 손에 의해 당겨졌다. 습기로 가득 찬 비림(秘林)에 한 개 거대한 불덩이가 화염을 토하였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하체가 균열을 일으키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온 것이었다. 그녀의 눈 이 다시 좁혀졌다. 그녀는 헌신하는 기쁨을 느끼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밀어냈다. "...!" "하악!" 그 순간 아래에서 위로 여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천화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율동이 계속되었다. 점차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환희를 맛볼 수 있었다. 고통 속에서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듯한 한 줄기 쾌감이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주천화의 입에서 격한 신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 가 두 개의 육체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일렁이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아아아...!" 구양금하는 점점 더 거친 호흡을 내뿜었다.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형용할 수 없는 육체의 환희가 그녀로서 참고 삭히기에는 너무도 벅찼던 것이다. "아아...!" "음...!" 침상이 비명을 토했다. 주르륵! 황촉불은 껌뻑껌뻑 눈을 껌뻑이며 굵은 촛농을 마구 떨구었다. 어느 한순간 구양금하의 입에서 신음이 터지고 그녀의 전신이 크 게 튀어올랐다 급격히 경직되어 갔다. 밖에는 어느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 "화랑!" "...!" "당신은 너무 짓궂어요!" 코먹은 목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구양금하는 젖은 몸으로 주천화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세상에 여자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후후, 미안하오. 몰라서 그랬으니 이해하구료." "어멋!" 구양금하가 펄쩍 뛰어 올랐다. "그, 그럼 나는 그 일을 잘 알고 있어서?" 그녀는 무어라 항변하려다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하하하!" 주천화가 크게 웃으며 살짝 그녀의 젖가슴에 매달려 있는 앙증맞은 앵두를 건드렸다. "아이!" 그녀가 몸을 트는 순간였다. "아앗!" 주천화의 손이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그녀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이! 호호호!" "흡!" 주천화가 돌연 자세를 바꿔 그녀를 눌렀다. "왜?" 구양금하가 의혹의 눈을 들다 자지러졌다. "어머! 또?" "후후, 싫소?" "아이! 몰라요." 다시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야사(夜史)는 역시 밤(夜)에 이루어지는 것이려나? 밤(夜), 새로 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 황 제2권 제20장 음모(陰謀)! 혈풍(血風)을 부르다 ━━━━━━━━━━━━━━━━━━━━━━━━━━━━━━━━━━━ ① 밀실(密室), 음모의 냄새가 일렁여 굵은 황촉불이 밝혀져 있었으 나 온통 어둡게만 느껴지고 있는 어느 밀실이었다. 예의 밀실에는 이남일녀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탑주(塔主), 도주(島主), 본좌의 초대(招待)에 응해 주셔서 감사하오." 조금 쉰 듯한 기이한 억양의 음성, 육순에 가까운 황의노인이 침묵을 깼다. 단아한 풍도, 그윽한 눈, 대학자를 연상케 하는 고고한 기품, 바로 황실의 대선생(大先生)이 아닌가! "흐흐흐, 당신이 우리 딸을 미끼로 초청하니 본녀가 오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은은한 노기가 들끓고 있는 음성, 이십대의 미부가 뼈가 있는 대 꾸를 흘려내며 대선생을 직시했다. 그녀의 용모는 실로 아름다웠다. 중원인이 아닌 듯, 새파란 벽안(碧眼)에 출렁이는 금발(金 髮)이 더욱 그녀의 용모를 돋보이게 했다. 그녀의 옆에는 삼십오륙 세쯤 되어 보이는 날 카로운 눈매를 지닌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 중년사내는 물처럼 잔잔히 가라앉은 눈으로 천장을 응시할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허허, 탑주의 말은 마치 본좌가 그대의 옥녀(玉女)를 납치하기라도 한 듯 들리는구료!" "호호호! 글쎄요. 두고 보면 알겠지요." 벽안미부가 노기를 삭히려는 듯 짐짓 교소를 흩날렸다. "으음! 아무튼, 본좌는 그대들에게 두 가지를 걸고 한 가지 일을 부탁하려는 것이오." "...!" "청해성(淸海省)을 비롯한 사개성(四省)이 그 대가인 것이오. 탑 주에게는 그 이외에도 탑주의 옥녀를 찾아 드릴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오." "호호호, 좋아요! 좋아! 저는 중원땅에 욕심이 없어요. 제가 바 라는 것은 오직 제 딸을 찾는 일이에요." 대선생이 확신에 찬 얼굴로 끄덕였다. "그 일은 본좌가 장담하겠소. 그 자를 죽이는 대로 탑주의 옥녀를 찾아 줄 것을...." 이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년인이 대선생을 직시했다. 마치 유 리알처럼 투명한 눈, 아무런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 무서운 눈이었다. "그 자가 진정 천마대제의 후인인 것이 확실하오?"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거북한 음성, 기이한 떨림을 지니고 있 어 듣는 이의 소름이 돋게 하는 것이었다. "허허허, 도주! 무림인이라면 이미 그 일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소." 대선생이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는 지금 천하가 좁다고 활보하며 독패군림하고 있소!" 중년인의 몸이 기이하게 흔들렸다. "크크큿! 드디어 본가(本家)의 일천오백 년 숙원이 나의 대(代)에 이르러 풀리려는가!" "...!" "천마수라대제! 그 자를 꺾는 것이 본가의 숙원이었다. 이제 그 후예가 나타났으니...!" 중년사내의 눈에서 가공할 불길이 이글거렸다. "으음! 도주, 만약 도주가 그 자를 꺾어주기만 한다면 본좌는 해 남도(海南島)와 북해도(北海島)를 그대에게...." "그만! 더 말할 필요도 없소. 그대가 그것을 조건으로 걸지 않아 도 나는 그 자를 꺾을 것이오." 중년인이 천천히 두 눈을 감은 채 팔장을 꼈다. "천마수라대제의 신화, 무너질 것이다. 이 손에 의해...." 퍽! 그의 앞에 놓인 철강석 탁자가 소리도 없이 가루로 변했다. 놀랍 게도 그는 손 한 번 움직인 적이 없었다. 실로 놀라운 신위가 아닌가! "으음! 과연 놀라운 무학이구료." 대선생이 감탄성을 발했다. "아무튼, 그 자가 누구의 손에 죽던가 본좌는 여러분들에게 내건 조건을 들어줄 것이오." 대선생의 눈에 기이한 불길, 야망의 불길이 솟아 올랐다. "크크큿! 그대의 신분을 알기에 그 말을 믿소! 그 자를 죽인 후 다시 만납시다." 중년사내가 눈을 떴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밀실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흐흐흐, 본녀도 이만 물러 가겠어요. 제 딸아이를 부탁해요." 벽안미부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녀의 몸이 발끝부터 서서히 사라지지 않는가! 종내에 그녀의 신형은 완전히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호호호!" 놀랍게도 그녀의 음성만이 이미 백 장 밖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대선생, 그들이 사라진 밀실에 홀로 앉아 있는 그의 눈에 무서운 야망이 이글거렸다. "주천화! 나의 야망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는 힘차게 몸을 일으킨 후 허공(虛空) 한곳을 무서운 눈으로 직시했다. "허나! 네 무덤만은 소중히 손질해 주겠다. 너는 우리 황족 중 가장 멋있는 놈이었으니...!" 아아! 대선생, 그의 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단 말인가? 그 역시 황족이었단 말인가? "크와하하! 누가 알겠는가? 사대신비세력 중 대막혈사탑이 본좌 의 수중에 있고, 사혈마선도 또한 본좌의 대업을 도와주고 있음을...." 득의의 광소(狂笑)에 밀실의 공기가 격탕쳤다. "헌데 사혈마선도가 천마수라대제와 한(恨)을 지니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와하하, 오히려 더욱 잘된 일이다." 쓰윽! 그의 발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을 반자나 파고들었다. "허나 대막혈사탑, 사혈마선도 너희들도 본좌의 등극에 맞춰 제물이 될 것이다. 흐흐흐!" 아아! 무서운 일이 아닌가! "흐흐흐, 이제 금광회와 대선생은 천하에서 사라질 것이다. 허나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천하는 본좌의 수중에 있으리라!" 휘이익! 대선생의 신형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의 광오한 외침만이 밀실에 떠돈다. 밤(夜). 이곳은 금광회의 보국대전장이었다. ② 강호(江湖), 무섭게 격변하고 있었다. 두 가지 풍운 격변의 비사(秘事)를 잉태한 채.... 비사(秘事), 그것은 혈사(血事)를 뿌리는 시발이었다. 제일겁(第一劫), 그것은 남해(南海) 아득한 곳으로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남해(南海), 쏴아아... 쏴아...! 철썩! 파도가 광란하며 제 몸을 으깨고 있다. 한 줄기 광풍마저 해면을 할퀴고 있었다. 헌데 문득 점(點), 수평선 저쪽에 한 점 점(點)이 나타났다. 촤아아...! 점은 점차 확대되고 이윽고 희미하게 그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헌데 이럴 수가! 오! 그것은 한 개의 섬(島)가 아닌가? 숲이 우 거져 있고 그 가운데에 초지(草地)까지 자리잡고 있는 사방 삼백 장 넓이의 섬(島), 섬이 마치 한 척의 배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르릉...! 쏴아아...! 그렇다! 움직이는 섬, 온통 귀기(鬼氣)만이 가득해 있는 죽음의 섬이 중원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크카카카...!" 돌연, 광란하는 해풍을 뚫고 광소가 터졌다. 섬의 중앙에 한 명 흑의중년인이 우뚝 선 채 다가오고 있는 중원 의 대륙을 응시하며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크크큿, 사혈마선도, 본도(本島)가 중원을 밟으리라! 허나 중 원, 너는 건드리지 않겠다. 아니 본좌에게 밟힐 가치조차 없다." "흐흐흐, 본좌가 원하는 것은 천마대제, 그 자와의 진정한 비무일 뿐이다." 우웅웅! 그의 외침이 파도를 삼켰다. "천마대제, 기다려라!" 움직이는 섬, 그것은 바로 사혈마선도라 불리우는 무림사대신비 세력 중의 한 곳으로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한 척의 배(船)였다. 그렇다! 그 죽음의 세력이 이렇게 중원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겁(第二劫), 그것은 죽음의 절지(絶地), 대사막(大沙漠)으로부터 잉태(孕胎)되고 있었다. 대막(大漠), 쇠라도 대번에 녹일 듯 무서운 열기가 이글거리는 죽음의 땅. 움직이는 것은 싯누런 황진 뿐, 대지를 온통 지옥의 열기로 만드는 무서운 폭염이 머무는 곳, 한 점 수분도 없이 지글지글 끓어 오르는 끝없는 열사의 땅. 그 가운데 신기루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한 개의 탑이 있었다. 휘이잉...! 대막을 휘감는 바람 또한 뜨겁다. 헌데 마천루(魔天樓)를 방불하 듯 우뚝 솟아 있는 탑신의 주위로는 실로 수많은 백골들이 허옇게 널려 있지 않은가? 모래 그리고 백골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당당히 서 있는 검은 탑. 마기(魔氣)만이 감도는 이 탑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털컹! 끼끼끼...! 돌연, 탑 하단에 있는 십여 개의 문이 정적을 깨며 열렸다. 두두두두...! 동시에 수십수백의 기마대가 쏟아져 나왔다. 질풍이 일었다. 마상에 앉아 있는 홍의인들은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으리만큼 냉막했다. "가라...!" 돌연 앙칼진 음성이 그들의 뒤에서 터졌다. "중원! 중원이다. 호호호, 천마대제! 천마대제의 수급을 베어와라!" 앙칼진 음성, 바로 여인의 음성이 아닌가! "호호호, 천마대제! 전 중원을 뒤져서라도 너를 찾아 내리라! 나의 딸 청아를 찾기 위해...!" 헌데 죽음의 명령을 내리는 음성에는 기이하게도 애끓는 모정(母情)이 깃들어 있었다. 이곳은 대막혈사탑이었다. 대막혈사탑, 무림사대신비세력 중의 하나, 그 중원침공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 사혈마선도. - 대막혈사탑. 언제 세워진 문파인지도 신비에 싸여 있고, 어떤 인물들이 있는 지조차 신비하기만 하던 신비문파. 그들이 일제히 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 천마대제를 죽여라! 뉘라서 믿을 수 있으랴! 한 번도 중원땅에 발을 딛지 않던 신비 양대문파가 단지 중원의 한 무인(武人)을 죽이고자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는 곧 천마대제의 영원한 신비를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으니 항차 이 일을 뉘라서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③ 스스스...! 안개(霧), 겨울의 안개는 왠지 인간의 마음을 젖게 만든다. 언제부터인가? 그 겨울 안개 속을 한 인영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 었다. 안개 속으로 파고드는 희미한 조양(朝陽)에 수려한 용모가 언뜻 비쳤다. 신비하리만큼 준미수려한 백의미공자는 바로 주천화였다. 죽산평(竹山平), 이곳은 환락의 도시 항주(抗州)로 이르는 넓은 죽림이었다. "금광회! 약삭빠른 자들! 어느새 총단을 옮기다니...." 주천화의 전신에서 안개에 젖은 살기가 스며나왔다. "보국대전장! 그곳에는 한 줌의 먼지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내 가 또다시 올 것을 대비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어느새 동쪽으로부터 서서히 솟아오르는 태양에 안개가 차츰 밀려나고 있었다. "허나 너희들은 스스로 꼬리를 드러낸 셈이다. 후후후!" 주천화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흑노의 유체에 약속한 기한이 한 달, 이제 불과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허나...!" 사면의 죽림이 그의 무서운 살기에 몸을 떨었다. "보름이면 충분하다. 금광회, 너희들이 숨을 곳은 없다!" 돌연 나직이 중얼거리던 주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먹이를 대한 야수의 습성이랄까? 그의 전신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어 야릇한 흥분에 떨었다. "후후후, 왔군!" 섬뜩한 미소가 그의 입꼬리에 맺혔다. "후후, 구마천 중 이번에는 어떤 자일까?" 주천화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허리의 검을 빼들었다. 쌍검(雙 劍), 그의 허리에는 두 자루 검이 매달려 있었다. 천마제혈검과 오 척 길이의 금천수라대검. 그는 전궁과 웅평산 그리고 구양금하를 경무장에 보내고 전궁에게 주었던 금천수라대 검까지 지니고 길을 떠나온 것이다. 패앵! 돌연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한 개 작은 물체가 빛살처럼 주천화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흥!" 주천화는 냉소를 터뜨리며 날아든 물체를 잡아챘다. "죽엽(竹葉)? 후후, 이번에는 초마천(草魔天)쯤 되겠군." 쏘아져 온 암기는 끝이 뾰족한 대나무 잎이었다. "캘캘캘, 그렇다! 제법 영리하군!" 죽림 속에서 괴이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가느다란 대나무 끝에 십여 명의 녹의인영들이 나타났다. 십여 명의 녹의인영들, 아! 그들은 놀랍게도 하나같이 똑같은 용모가 아닌가! 마치 풀잎에 맺혀 있는 이슬처럼 가느다란 대나무 끝에 거꾸로 매달려 있기도 했고, 또 그 위에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기도 했다. "본좌는 초마천이다. 네놈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놈은 벌써 우리 의 형제 중 몇 명을 죽였으나...." "...!" "본좌는 그렇게 쉽사리 당하지 않을 것이다!" 초마천, 풀잎처럼 깡마르고 창백한 안색을 지닌 괴인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폭사해 나갔다. 쉭...! 순간 공간을 뚫고 사방의 죽림에서 푸른 섬광이 번개같이 주천화의 전신으로 날아들었다. 실로, 반짝이는 섬전이었다. 푸른 대나무 잎들이 무서운 암기가 되어 덮쳐온 것이다. 카앙... 타타탕! 허나 죽엽들은 주천화의 전신 반 자 가까이 이르러 모두 퉁겨 나 갔다. "캘캘캘, 제법이군. 좋다!" 대나무 위에 있던 십여 명의 초마천이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쓰윽! 순간 초마천의 인영이 흐려지며 수십여 개의 환상(幻像)으로 변하지 않는가? "후후훗, 무영환신술(無影幻神術), 본좌는 이미 알고 있었다." 주천화가 차갑게 웃었다. "천마수라혈인장...!" 순간 그의 몸이 빙글 회전하며 가공할 홍광을 뒤로 밀어냈다. 쏴아아...! 무서운 잠력이 노도처럼 밀려갔다. 그 가운데에 한 가닥 장세가 뇌전이 치듯 번뜩였다. 파앙! "크왁!" 둔탁한 폭음과 처절한 비명성이 터졌다. 동시에 사방의 죽림 속 에 떠올라 있던 환영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주천화의 등 뒤, 아아! 보라. 한 명의 녹색인영 초마천이 처참한 형상으로 지면을 구르고 있지 않은가! "후후후, 그대의 무형환신술은 한 가지 허점이 있었다. 그림자, 그림자까지 환영을 만들지는 못한다." 주천화는 냉기를 뿌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크으! 너, 너는! 허, 허나 마마천(馬魔天)이 너를...!" 초마천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마마천? 후후!" 주천화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차가운 미소를 흘려냈다. 이때였다. 돌연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두두...! 천지가 개벽음을 토하는가? 무서운 굉음은 바로 오십여 장 뒤쪽 으로부터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죽산평의 전면, 그곳에는 오십여 기의 인마가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광폭하게 질주해 오고 있었다. 두두두두...! 천지를 무너뜨릴 듯한 굉음과 함께 인마는 삽시간에 주천화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마상(馬上)에는 전신에 은빛갑주를 입고 살광이 번뜩이는 은창(銀槍)을 굳게 거머쥔 건장한 무사들이 앉아 있었다. "...!" 주천화는 맨 앞에 우람한 중년인이 붉은 띠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자가 마마천인가?" 히히히힝...! 두두두두! 순간 수백 기의 말이 그대로 태산(泰山)을 깔아 뭉갤 듯 돌진해왔다. "와하하하하...!" 마마천의 입에서 광폭한 대소가 터져 나왔다. "천마대제! 혈기사혼대(血騎死魂隊)의 맛을 보아라!" 우뚝 버티고 서 있는 주천화의 입가에 문득 냉혹한 미소가 어렸다. "그대들은 장소를 잘못 택했군!" 이때 그의 손에 천마제혈검과 금천수라대검이 각각 나뉘어 쥐어졌다. "차앗...!" 그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성이 터져 나오며 동시에 그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다. "천마화검류!" 번쩍! 검광이 죽림을 파고들었다. "천마섬검류!" 무서운 검세가 흡사 번개가 치달리듯 대나무를 쓸어갔다. 그의 양 손에서 무서운 검기가 해일처럼 밀려나가며 죽림을 휘감았다. 헌데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제자리에 우뚝 돌아와 있지 않는가? "후후! 준비는 끝났다! 자, 이제 나머지는 내 손으로 죽여주마." 마마천의 혈기사혼대가 어느새 삼장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허나 주천화는 버티고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쌍검, 오른 손에 쥐어져 있는 금천수라대 검은 비스듬히 천공을 향했고, 왼손 뒷편으로 쥐어진 천마제혈검 은 지면을 향해 있었다. "와하하하! 간다!" 수십여 기의 기마가 그의 코 앞으로 밀어닥쳤다. 그의 몸이 마악 앞장 선 말에 깔리려는 찰나였다. 휙! 주천화의 몸은 흡사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앗!" "아니?" 혈기사혼대의 무사들이 놀라는 순간 어디선가 한 가닥 돌풍이 불어와 죽림을 휘감았다. 우스스...! 찰나 빽빽히 서 있던 대나무들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는가! 놀랍게도 방원 오십여 장에 달하는 대나무들이 지면에서 반 자 가량만 남아 있는 채 모조리 쓰러진 것이었다. 헌데 지면에 반 자 가량만이 남아 있는 대나무를 보라! 끝이 칼날처럼 날카롭지 않은가! 죽창(竹槍), 그대로 죽창의 대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앗! 멈춰라!" 히히잉...! 순식간에 혈기사혼대 사이에서 엄청난 혼란이 일었다. 히히잉...! 혈기사혼대는 주천화의 손에 베어진 대나무들이 날카로운 죽창의 밭이 되어 그들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허나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히히잉...! 말들이 마구 광란했다. "헛!" "아악!" 혈기사혼대는 순식간에 수습할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와하하하, 얼마든지 오너라. 모조리, 모조리 죽여주마!" 이때, 주천화의 음성이 허공에서 벽력 울리듯 터져 나왔다. 냉혹한 폭갈에 이어 주천화의 신형이 혈기사혼대의 중앙으로 떨어져 내렸다. 번쩍! 주천화의 신형은 무서운 속도로 인마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서운 은광과 묵광이 뒤엉켜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으악!" "크윽!" 처참한 비명, 살과 뼈가 베어지는 섬뜩한 음향, 순식간에 죽산평 위로 죽음(死)의 대혼란이 벌어졌다. 히히잉! 놀란 말들이 일제히 앞 발을 높이 치켜 올렸으며 사람과 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피를 뿌렸다. 아아! 주천화, 그는 지옥의 사자인가, 아니면 죽음의 심판자이련 가? 그는 조금의 인정도 두지 않은 채 무심한 검세를 휘두르고 있었다. "와하하하!" 광소(狂笑), 죽음을 뿌리는 광소였다. 쉬이익...! 차차차창! 은광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고 금속성 파공음이 울려퍼졌다. "으악!" "크아아악!" 그때마다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사람과 말들의 비명이 울렸다. 쌍검이 춤을 추고, 혈우(血雨)가 난무했다. 아! 이것은 정녕 목불인견의 참혹한 광경이었다. 아니, 말 그대로 지옥도(地獄圖)였으며 죽음의 길, 바다 끝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대로 손 한 번 놀 려보지도 못한 채 사오십 기의 인마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이때 이 경천동지할 광경을 대한 후위의 기마대들은 황급히 말을 멈춰 세우고 있었다. "저, 저럴 수가!" "아아...!" 그들은 모두 경악(驚愕)의 눈으로 주천화를 쳐다보았다. 주천화 는 이미 전신이 시뻘건 피에 젖은 하나의 지옥사자, 혈신(血神)이었다. 주천화, 그의 표정을 보라! 아아! 이토록 무심(無心)할 수가 없 었다. 오히려 평온(平溫)해 보이기까지 했다. "크악!" 한 명의 처절무비한 비명이 터질 때마다 피기둥이 천공(天空)으로 솟구친다. 히히잉...! 처절한 말(馬)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대지는 흠뻑 피(血)을 삼킨다. 주천화, 그는 이미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검신(劍神)의 검무(劍舞)련가? 유연히 움직이는 그의 손짓 한번에 수십의 인마가 고혼이 되고 그때마다 처절한 아름다움을 지닌 피의 무지개가 떠오른다. 그가 베는 것, 그것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으며 또한 살아있는 생명체(生命體)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心)을 베고 있었다. 나약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이었고 그리고... 그리고 자 꾸 내면으로만 침잠해 드는 웅지를 일깨우기 위한 고통이기도 했다. 주르륵...! 금천수라대검을 타고 핏물이 흐른다. 실로 처절한 광경이었다. "죽, 죽여라...!" "쳐라...!" 공포에 질려 있던 나머지 혈기사혼대의 눈에 광기(狂氣)가 스쳤다. 히히잉...! 두두두두...! 동시에 그들은 거대한 해일인 양 무서운 기세로 주천화를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은 불로 뛰어드는 부나비에 불과했다. 죽음으로 뛰어드는 끝없는 행렬.... 솟아 오르는 피안개.... 주천화, 그는 평온한 마음으로 검무(劍舞)를 춘다. 검광(劍光)이 번쩍일 때마다 피보라가 튀고 말과 사람이 한꺼번에 동강이 난 채 죽산평을 뒤덮는다. "섬-- 화!" 주천화의 폭갈이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비명(非命)이 터지고 피보라가 춤을 추었다. 쓰러지는 인마(人馬), 그들은 단지 허옇게 죽음의 빛을 뿌리는 검광만을 볼 수 있을 뿐, 그 후로는 아무것도 의식(意識)하지 못 했다. 이미 목이 달아나거나 허리가 양단된 후였기 때문이었다. 삽시간에 오백여 기의 인마 가운데 절반 가량이 허무하게 지면을 굴렀다. 붉은 띠를 질끈 동여맨 채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마마천의 안색이 대변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오십여 년을 키워온 나의 혈기사혼대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그가 경악에 잠겨 있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피보라가 날리고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주천화,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內面)을 베고 있었다. 나약해져서는 안된다! 절규! 천마대제의 내심(內心)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絶叫)는 그 대로 땅(地)을 베고 하늘을 베었다. 번쩍...! 꽈릉! 일섬(一閃)에 허공(虛空)이 울고, 일광(一光)에 대지(大地)가 몸부림쳤다. 삽시간에 절반이 넘는 인마가 처참한 핏물이 되었다. 이것은 실로 범인(凡人)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엄청난 살육(殺戮)이요, 도륙(屠戮)이었다. "멈, 멈춰라! 천마대제." 마마천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허나 주천화는 이미 지옥(地獄) 의 마왕(魔王)처럼 계속 피를 탐하고 있었다. 번쩍! "으아악!" "크윽!" 쓰러지는 인마(人馬). 그리고 솟구치는 피(血)! 피! 피...! "잔, 잔인한 놈!" 마마천이 허공을 날아 주천화에게 덮쳐왔다. 그의 손에 들려 있 는 한 자루 은창에서 무서운 파공음이 일었다. "...!" 순간 주천화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 눈에는 지옥의 마화를 연 상케 하는 가공할 녹화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천마... 쌍검폭검류!" 찰나,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일었다. 동시에 엄청난 광경이 뒤이어졌 다. 금천수라대검과 천마제혈검의 무서운 검기(劍氣)가 마마천의 몸 에 닿기도 전이었다. 천지(天地)를 압살할 듯한 엄청난 굉음(轟 音)이 울리자 마마천의 전신이 일제히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촤아아...! 분시(分屍), 그의 육신이 무참하게 찢겨 나가며 동시에 처참한 비명이 참혹(慘酷)하게 허공을 찢었다. 그 비명은 처절히 극을 이루었다. 마마천은 물론이고 남아 있던 백여 기의 인마가 통째로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꽝...! 꽈르르릉...! 그러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엄청난 굉음(轟音)에 이어 지 면(地面)이 갈라지고 암석의 표피도 쩍쩍 부숴져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아아, 세상에 이처럼 엄청난 검공(劍功)도 있는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정녕 인간의 무학(武學)이 아니었다. 분명코 이것은 신(神)의 무공(武功) 이었다.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이같은 검초를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잠시 후, 난무하던 돌먼지와 굉음이 가라 앉았다. 동시에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는데 그건 실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보라! 단 한 명, 단 한 명만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킬 뿐 오백 여의 혈기사혼대가 전멸(全滅)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천마천에게 이르라! 그가 천마천이듯, 본좌는 천상천이라고 말이다." 꿈틀거리는 단 한 명 생존자의 귀에 주천화의 음성이 환상처럼 파고 들었다. <천마(天馬)가 하늘을 날으니 쌍검이 춤을 추도다. 쌍검이 춤추 매 마(魔)가 하늘에 이르노니....> 주천화는 이미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 황 제3권 제21장 죽음을 부르는 탄검(彈劍)! ━━━━━━━━━━━━━━━━━━━━━━━━━━━━━━━━━━━ ① 항주(抗州), 영원한 환락(歡樂)의 도읍 항주는 천하제일의 색향(色鄕)이며 동 시에 중원최대의 상업도시(商業都市)였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이 항주에서부터 한 가지 소문이 떠돌아 전무림을 경동시키고 있었다. 그 소문은 바로 움직이는 죽음의 섬, 사혈마선도가 항주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사혈마선도는 신비사대세력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들이 항주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까닭 은 아무도 몰랐다. 때문에 항주는 더욱 더 불안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헌데 뒤이어 또 다른 충격적인 소문이 전무림에 떠돌기 시작했다. - 북해천이 파멸되었다. 살수집단 북해천, 천하(天下)에서 가장 완벽하고 강하다고 알려진 죽음의 사자들 북해천, 그들의 명성(名聲)은 이미 죽음의 이름이 되어 전무림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허나 천마대제 주천화가 단신으로 북해천을 멸망(滅亡)시켰다는 신화가 퍼져 나가며 그것은 그대로 살아 있는 신화(神話)가 되었으니.... 천마대제의 일거(一擧)는 무림(武林)에 영원한 신화를 창조한 것이었다. - 북해천, 그들은 무림의 불문율(不文律)을 어겼다. - 천마대제를 건드리지 마라! 이는 곧 죽음이다! 신화(神話)는 이렇게 창조되어 영원히 생동되었다. 항주, 항구도시 항주에 저 멀리 여명(黎明)이 움트고 있었다. 차디찬 겨울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 그 여명을 등지고 한 인영이 선착장(船着場)을 걸어오고 있었다. 쏴아아...! 철썩! 파도는 잔잔했으나 여전히 대지(大地)를 할퀸다. "...!" 이제 막 배에서 내린 듯 백의인영의 전신에서는 비릿한 바다냄새가 번지고 있었다. 고독해 보인다. 대해(大海)를 뒤로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 족흔 (足痕)을 남기는 그의 기태는 너무도 허탈해 보였다. "후후후...!" 문득 쓴 웃음이 그의 입가에 맺혔다. "북해천, 일천의 목숨을 죽였다." - 일천(一千)의 목숨을 죽였다. "어차피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생명들... 허나 내 마음이 왜 이렇게 허탈하단 말인가?" 놀라운 독백(獨白)이었다. 만약 누군가 그의 독백을 들었다면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멎어버렸을 엄청난 내용인 것이다. "천마천, 그 자를 놓쳤다. 그 자를 제거하지 않는 한 북해천은 또다시 일어날 것이다." 돌연 백의인영의 전신(全身)에서 허탈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 지고 무서운 한기(寒氣)가 솟아났다. 백의인영, 그는 바로 주천화였다. "후후, 사혈마선도, 그렇지 않아도 너희를 찾으려 했었다." 주천화의 눈빛이 바뀌었다. "구천만마문을 습격한 자들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이상, 신비 사대세력을 모조리 파헤칠 것이다." 주천화는 어느새 백사장을 벗어나 있었다. "항주! 네놈들이 항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잘된 일이 지. 본좌의 수고를 덜어 주었으니!" 항주, 그의 발은 어느덧 여기저기 휘황한 궁등(宮燈)이 아직도 밝혀져 있고 사방에서 여인 들의 지분냄새가 진동하는 색향(色鄕), 항주시가를 딛고 있었다. "...!" 주천화는 문득 시장기를 느꼈다. 주위를 둘러 보던 그의 눈에 가 장 크고 화려한 한 채의 건물이 들어왔다. <해선제일루(海船第一樓).> "음! 이곳이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해선제일루였나?" 주천화는 서슴치 않고 해선제일루로 다가갔다. 해선제일루 객청, 그곳에서는 지금 기이한 광경(光景)이 연출되고 있었다. "검무(劍舞)?" 막 해선제일루로 들어서던 주천화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객청의 한쪽, 방원 삼 장에 달하는 둥근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지금 그곳에서는 두 명의 소녀가 율동(律動)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그대로 내비치는 망사 에 얼굴을 가린 얇은 면사만을 걸치고 있는 두 명의 소녀, 면사는 그녀들의 몸매를 오히려 더욱 뇌쇄적으로 보이게 할 뿐이었다. 터질 듯한 젖가슴, 율동에 따라 아래 위로 미묘하게 출렁거리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젖가슴 정상에 맺혀 있는 자주빛 열매도 파르르 떨었다. 그녀들은 날씬한 허리를 흔들며 두 팔로 묘하게 목선을 그리듯 춤추었다. 적나라한 몸매, 뽀얀 허벅지와 그 사이의 비림(秘林)이 꿈틀거리며 눈을 파고 든다. 붉은 마화(魔花)가 드러날 때마다 무대를 응시하고 있는 손님들 의 눈에 허옇게 욕정의 빛이 들끓고 있었다. 극히 농염한 여체와 그녀들이 쥐고 있는 장검이 기이하게도 조화 를 이루며 더욱더 보는 이로 하여금 폭발적인 유혹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두 소녀가 춤을 출 때마다 망사 속의 나신이 은은히 내비쳤다. 살짝살짝 드러나는 젖가 슴과 눈부신 허벅지와 배꼽이 움푹 들어간 동그란 배 그리고 펑퍼짐한 둔부.... 두 소녀의 동작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노골적이 되어 갔다. 어느 한 순간 두 소녀는 얇은 망사의마저 거칠게 벗어 내렸다. 그러자 눈부신 여체가 확연히 드러났다. 야릇하게 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꼬며 발을 들어 올릴 때마다 은 밀한 부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곤 한다. 이것은 진정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뇌쇄적(惱殺的)인 광경이었다. "헉!" "으음...!" 사람들은 뜨거운 숨결을 몰아쉰 채 쥐죽은 듯 고요했다. 두 소녀는 더욱 뜨겁게 율동하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상대편 소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기도 하고, 또 허벅지 사이를 쓰다듬기도 한다. 뱀처럼 꿈틀대는 소녀들의 육체는 숨이 탁 막히 도록 색정적(色情的)이었으며 뇌쇄적이었다. 주객들은 홀린 듯 그들의 검무를 구경하고 있었다. "현란한 검무로군. 헌데 살기가 도는 것 같아!" 주천화가 고개를 돌려 빈 좌석을 찾았다. 이때 수많은 주객 중에 서 한 인영이 주천화를 발견하고 손을 쳐들었다. "훗! 화오빠!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한 소녀가 반색을 했다. 자그마한 홍색 소궁(少弓)을 들고 있는 소녀, 전신에 붉은 홍의경장을 걸친 유난향이 아닌가! 홍궁화봉 유난향, 대단한 말괄량이인 유난향은 주천화를 발견하 자마자 거침없이 오빠라 부르고 있었다. "호호호, 화오빠는 아주 넋을 빼앗기고 계시군요." '화오빠?' 주천화가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하하하! 오랜만이구나! 헌데 이곳은 어떻게?" "흥! 이곳으로 사혈마선도가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셨어요?" "그럼 그 일 때문에?" "호호, 그래요. 무림십영은 물론 우내십존들까지 이곳으로 오신걸요." 유난향이 놀란 기색을 띄웠다. "헌데 북해천을 멸망시킨 후 바로 이곳으로 오신 것인가요?" "그렇소!" "아...!" "헌데, 그렇다면 옥누님도 왔겠구료?" "옥누님? 호호호! 화오빠는 옥언니의 소식을 먼저 묻는군요." 그녀가 살짝 눈을 흘겼다. "흥!" "하하하! 자! 이곳은 점잖치 못한 곳같으니 이층(二層)으로 갑시다." 주천화가 짐짓 대소를 터뜨렸다. "좋아요!" 유난향이 대뜸 주천화의 팔장을 끼며 따라왔다. 그녀의 대담함에 주천화의 안색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유소저! 남들의 눈이 있으니...!" "쳇! 보라면 보라지요!" 유난향이 더욱 대담하게 주천화에게 밀착해 들었다. '후유! 이, 이 아가씨는 하매에 버금갈 정도로 대담하구나!' 주천화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때 유난향의 고운 아미가 상큼 치켜 떠졌다. "흥! 화오빠는 소녀보고 계속 유소저, 유소저 할 것인가요?" "하하하! 그럼 어떻게 부르란 말이오?" "흥! 좀더 다정하게 부를 수도 있지 않아요?" "하하! 알겠소. 내 이제부터 향매라 부르리라!"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천하의 천마대제도 일개 여인에게 약하군!' 주천화는 내심 실소를 머금으며 유난향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자, 향매!" "...!" "어떻소? 이렇게 부르면 되겠소?" "호호호! 좋아요!" 유난향이 마치 응석을 부리듯 매달렸다. 순간 물컹! 하는 느낌과 함께 그녀의 젖가슴은 기이한 촉감을 주며 주천화의 가슴을 압박해 왔다. "...!" 주천화는 야릇한 느낌과 함께 민망하기 이를데 없었다. 주천화의 얼굴이 은은하게 붉어지자 유난향도 그의 마음을 눈치챈 듯 얼굴을 붉혔다. "향매! 어서 이층으로...!" 주천화가 민망스러운 내심을 감추려는 듯 서둘렀다. "그, 그래요...!" 유난향의 음성이 말괄량이답지 않게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이층, 해선제일루의 이층은 일층보다 더욱 기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으음...!" "앗!" 조용한 곳을 찾아 올라갔던 주천화와 유난향이 얼굴을 붉혔다. 이곳에도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서 해괴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 명의 절세미소녀들, 그들은 완전 나체로 함께 어울려 부채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들은 기이하게도 얼굴에만 얇은 망사를 쓰고 있었다. 허나 얼굴만 가리고 그 아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이런 모습은 오히려 무섭게 색정적인 것이었다. "아아...!" "하아...!" 어디선가 선정적인 음률이 흐르고... 그에 맞춰 무녀(舞女)들의 입에서는 연신 기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행위 중의 쾌감에 젖은 비음(鼻音)이랄까? "으... 음...!" 그녀들의 행동은 실로 노골적이었다. 그녀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부채는 마치 남성의 그것을 상징하듯 상대소녀의 허벅지를 넘나들고 있었다. "지독하군...!" 주천화가 고개를 흔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긴장의 빛이 스쳤다. 기이하게도 이층에는 단 한 명의 주객도 없이 그와 유난향 단 둘 뿐이 아닌가? '괴이하다! 우리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았던가?' 그의 뇌리에 섬전(閃電)같이 한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면? 이곳은 우리들만이 올라올 수 있도록 딴 손님들을 제지했다는 뜻인데...!' "...!" 주천화가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으음...!" 문득 유난향의 입에서 기이한 신음이 터졌다. "헉!" 주천화가 놀라 유난향을 바라보았다. "하...!" 유난향의 입에서 단내가 퍼져 나왔다. 그녀의 눈이 붉게 충혈된 채 무대의 마무(魔舞)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음! 마무(魔舞)였군!" 유난향은 무대의 춤에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후후! 구마천 중 색마천(色魔天)이라는 색녀(色女)도 있었지. 그가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군." 나직이 중얼거리던 주천화의 눈에서 돌연 신광(神光)이 폭사해 나갔다. "갈(喝)...!" 우렁찬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다. 이것은 불문(佛門)의 창룡법음(蒼龍法音)으로써 흩어진 심지(心 志)를 되찾아 주는 무한한 공능이 있었다. "아!" 유난향의 눈에 맑은 빛이 되돌아왔다. "향매! 창문으로 뛰어내리시오!" 주천화가 굳어진 안색으로 외쳤다. 유난향은 무어라 대꾸하려다 말고 주천화의 놀라운 위엄에 질려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휙! 와장창! 유난향의 신형이 창문을 통해 사라지는 순간 돌연 어디선가 교소가 들려왔다. "호호호! 천마대제! 기다리고 있었다." "...!" "본녀는 색마천이다. 자신이 있으면 삼층으로 올라 오너라!" 주천화가 차갑게 웃었다. "훗! 이제 너만 제거하면 천마천만 남는가!" 주천화는 담담한 눈으로 마무(魔舞)를 전개하고 있는 다섯 소녀 를 쓸어본 후 삼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삼층, 이곳은 마치 환상의 세계를 보는 듯 화려했다. 연분홍 빛 은은한 양탄자가 보드랍게 깔려 있었고 은은한 봉등에서 실로 부드러운 빛이 삼층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또한 일남일녀가 율동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이십대의 건장한 남자는 그 용모가 천상의 미공자를 방불했고 소 녀 또한 월궁(月宮)의 항아를 무색케 하는 절색이었다. 청의와 백의, 그들은 단정히 옷을 걸치고 춤을 추고 있었다. 허 나 그들의 춤에서는 나체의 나무보다 더욱 강렬한 염기(艶氣)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한 자루 섭선을 들고 돌아가고 있었다. 소녀는 장검을 든 채 율동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장검(長劍)으로 찌르면 섭선(攝扇)으로 막고 장검이 후퇴하면 섭선이 쫓아갔다. 실로 교묘 한 섭혼무(攝魂舞)로써 남녀의 행위를 상징하는 간접적인 마무(魔舞)였다. 은은한 선율은 어느 곳에서 흘러나오는지 듣는 이의 심혼을 나락으로 떨구고 있었다. "흠! 예술이군!" 주천화가 태연히 정좌하며 그들의 춤을 감상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 남녀는 하나하나 옷을 벗어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건장한 상 체가 드러나고 이어 소녀의 가냘프고 유혹적인 젖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출렁! 백옥같은 젖가슴과 구리빛 건장한 사내의 상체가 안타깝게 스치 며 이윽고, 사내는 하의마저 벗어 던졌다. 순간 대리석을 연상케 하는 하체가 드러나고 그 사이의 육중한 그것이 칼날같이 힘차게 천공을 받쳤다. "아... 아!" "음... 음...!" 소녀도 비음을 토하며 나체가 되어갔다. 매끄러운 아랫배, 알맞게 살이 오른 허벅지.... "아... 아!" 두 남녀는 부딪쳤다 떨어지고, 떨어졌다 얼싸안으며 가공할 나무(裸舞)를 전개했다. 실로 보는 이의 말초신경(末梢神經)을 자극하는 뇌쇄적인 춤이 아닌가? 곧이어 두 남녀의 행위는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마치 단 한 명의 관객인 주천화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소녀는 어느새 사내의 중심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입에 물고 있었 다. 그녀는 사내의 중심을 혀로 핥으면서도 눈은 주천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방심된 듯한 눈... 열정에 들뜬 눈이며 또한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백치의 눈같았다. 뿐이랴! 주천화가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그 순간 그들의 행위는 어느새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여인이 사내를 쓰러뜨린 후 그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헌데 그 위치가 실로 교묘해 앉아 있는 주천화로서는 그들의 하체를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여인의 비소를 파고 드는 사내의 기둥이 고스란히 주천화의 눈을 찔러 오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런 위치에서 두 남녀는 더욱더 격렬하게 율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비소를 넘나 드는 사내의 실체와 흥건히 젖은 채 짓눌리며 유린되는 여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악마적인 선율은 두 남녀의 행위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이 순간 주천화의 두 눈은 무서우리만큼 고요했다. "후후! 저것으로 나를 상대하려 하는가? 좋다!" 주천화가 돌연 차갑게 웃으며 두 자루 검을 끌러냈다. 스르릉! 천마제혈검과 금천수라대검이 광채(光彩)를 발했다. 주천화, 무엇을 하려는가? 주천화는 자리에 정좌한 채 두 자루 검을 나눠 쥐어졌다. 이어 오척 길이의 금천수라대검을 활처럼 휘어 왼손으로 바닥에 눌렀다. "...!" 오른손에 쥐어진 천마제혈검, 주천화가 천천히 눈을 내리 감았다. "후후후, 춤에 비해 선율이 약하지 않는가?" 찌잉! 주천화는 천마제혈검으로 활처럼 휘어진 금천수라대검을 켜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두 개의 검으로 악기(樂器) 삼아 연주하는 것이었다. 실로 주천화가 아니면 생각해 낼 수조차 없는 기사(奇事)였다. 찌... 찌잉! 묘한 음향이 나직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후후, 자! 지옥의 사망곡(死亡曲)을 들려 주마!" 주천화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② 점차, 나직이 무서운 음율이 깔리기 시작했다. 끼끼... 이잉! 아수라마왕의 저주인가? 넓은 대청에 돌연 죽음의 어둠이 깔렸 다. 은은히 지옥의 십팔 층을 헤매는 원귀(寃鬼)의 호곡성(號哭 聲)이 울려퍼지고, 지옥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무서운 음향이 뒤덮혀 왔다. 아! 주천화의 전신을 보라! 그의 몸에서 묵광으로 빛나는 아수라 마황의 환영(幻影)이 떠오르지 않는가! "후후, 제일곡(第一曲) 사혈천존무(死血天尊舞)!" 악마의 미소련가? 주천화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실로 섬뜩했 다. 대청에 무서운 기운이 가득 번져 나갔다. 실내에는 점차 아수라천존상들이 가득 피어났다. 크아아아...! 흐흐흑! 무서운 귀곡성이 울렸다. 아아! 이곳이 바로 지옥이련가! "윽!" "아...!" 두 남녀의 행위가 돌연 멈춰졌다. 채 반각도 흐르기 전, 그들의 눈은 처절한 공포로 일그러졌다. "으아악!" "악! 살, 살려...!" 주르륵! 서로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상태로 두 남녀의 칠공에서 피가 흘 러내리기 시작했다. 사망지곡(死亡之曲)의 가공할 공포에 심맥이 파혈(破血)된 것이었다. 그들의 신형이 맥없이 늘어졌다. "흠! 겨우 한 곡을 탄주하기도 전에 죽다니! 너무 형편없군!" 주천화가 냉랭히 입을 열었다. 타앙! 순간 그의 한 손이 금천수라대검을 퉁겼다. 무서운 기세가 곧 바로 천장을 향해 쏘아져 갔 다. 소리도, 기척도 없는 살음(殺音), 실로 가공할 음공(音功)이 아닌가! 번쩍! 천장이 균열을 일으켰다. 쩍... 쩌쩍! 순간 천장이 박살이 나 흩어지며 한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으, 으음...!"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것은 놀랍게도 묘령의 소녀가 아닌가? 소녀의 용모는 진정 심혼(心魂)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백옥같은 피부와 터질 듯 부푼 가슴, 여기에 부러질 듯 가는 허리, 얇은 망 사만을 걸치고 있는 그녀의 몸매와 얼굴은 실로 보는 이의 심혼을 뒤흔들 정도였다. "...!" 소녀의 입에서는 선혈(鮮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애처로운 빛을 보이며 주천화를 응시했다. 헌데 그 눈이 어 찌나 맑고 청순해 보이는지 주천화조차 가슴이 진탕될 정도였다. '으음! 우물(尤物)이로군!' 그녀의 눈을 대하고 가슴이 흔들림을 느낀 주천화가 내심 경탄했 다. 허나 다음 순간 그의 눈에서는 차가운 광망이 쏟아지고 있었다. "후후후, 그대가 색마천(色魔天)인가? 과연 색마천으로 적합하군...." "...!" "한 떨기 비맞은 국화(菊花)같은 너의 용모에 많은 사람들이 홀렸겠다." "으! 본녀가 천주를 따른 지 오십여 년, 사혼무(死魂舞)와 혈마 음(血魔音)에 견뎌낼 자가 없었거늘...!" "후후후, 너희들은 본좌를 너무 모르고 있군. 하긴 본좌가 마악 성(魔樂聖), 무탁륜(無卓倫)의 음공마저 익히고 있는 줄 알 리가 없지!" - 마악성 무탁륜. 천하패왕지존록 서열 사십일 위. 천상천하의 모든 음(音)을 다룰 수 있는 음공의 조사(祖師)였다. "으...!" 색마천이 꿈틀거리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이럴 수가! 너, 너는 인간도 아니다. 어, 어찌 그 자의 음공까지 한 몸에...!" 주르륵! 그녀의 코와 입에서 검은 선혈이 쏟아지며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 다. 주천화의 음공에 적중되어 이미 전신 심맥이 갈가리 파괴된 것이었다. "천마천은 어디에 있느냐?" 주천화가 차갑게 외쳤다. 그의 날카로운 외침은 기이한 힘을 지 닌 듯 꺼져가던 그녀의 눈빛에 일순 섬광이 돌았다. "그, 그 분은...! 호호호!" 돌연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려던 그녀의 입에서 처절한 웃음이 터졌다. "네, 네가 제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분은 당하지 못할 것이 다. 그, 그 분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신...." "...!" "천하제일뇌(天下第一腦), 너, 너는 결국 그 분에 의해...!" 털썩! 색마천의 고개가 꺾였다. "천하제일뇌? 훗! 그만큼 영활하다는 뜻이겠지! 허나...!" 주천화의 눈빛이 무심해지고 있었다. "천마천! 너의 수족은 본좌에 의해 이로써 완전히 제거되었다. 후후, 이제 네가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천화가 몸을 일으켜 삼층 대청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천마천, 보이지 않는 하늘, 그가 조만간 그를 찾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천, 천화! 너, 너무 잔인...!" 한 소녀의 떨리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주천화의 삼 장 전면에는 두 명의 소녀가 안색을 굳힌 채 우뚝 서 있었다. 유난향, 그리고 회색가사를 걸친 아름다운 소녀, 바로 제갈천옥이었다. "옥누님! 언제...?" "...!" 제갈천옥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삼 인의 처참한 죽음에 그 눈망울이 고정되어 있었다. "왜? 왜 이렇게...!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그, 그들도 같은 사람이거늘...!" 제갈천옥의 신형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주천화의 안색이 굳어졌다. "옥누님!" 그의 눈에서 뜨거운 빛이 제갈천옥의 동공으로 파고 들었다. "...!" "누님에게는 누님의 길이 있듯이 소제에게는 나대로의 길이 있습니다." "...!" "불도의 자비로 모든 악인(惡人)을 대하다가는 언제 천하의 평화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으음...!" 제갈천옥이 신음했다. "천하만민을 위하는 길이라면...!" "...!" "나는 사악한 자들을 더욱 잔인하게 죽일 수 있습니다!" 주천화의 음성에는 기이한 떨림이 있어 듣는 이를 설득시키고 있었다. "...!" "...!" 일순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옥누님! 제가 저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저들은 죽는 순간까지 저를 노릴 것입니다." "아, 알았어요!" 제갈천옥이 손을 내저었다. "내,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아요. 나는 단지...!" "...!" 주천화가 미소를 떠올렸다. 그 미소는 너무도 처연해 제갈천옥의 가슴에 고통을 주었다. '어머! 화오빠와 옥언니가 어느새 이토록 가까운 사이였나?' 한편 유난향이 큰 눈을 굴리며 둘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화오빠가 옥언니에게 서슴없이 누님이라고 부르다니...!' "...!" "...!" 한편, 주천화와 제갈천옥의 눈이 허공에서 얽혀 있었다. '천, 천화... 이 분은... 너무 뜨거운 분...!' 제갈천옥의 가슴에 파랑이 일고 있었다. '고귀한 신분으로도 일신의 영화를 뿌리치고 무림에 뛰어든 것 은... 천하를 위하는 뜨서운 열정이 있기 때문인 것을...!' 제갈천옥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닫고 후회했다. '누구보다도 이 분을 이해해야 할 내가 오히려 잔인하다고 했으 니 이 분의 심적 고통이 어떠하겠는가...!' 그녀의 눈에 물안개가 피어 올랐다. 잠시 후, 주천화의 굳어 있던 얼굴이 풀렸다. "누님께서는 항주에 무슨 일로 오신 것입니까?" "사혈마선도가 이곳으로 온다고 하기에...!" 제갈천옥도 안색을 풀며 입을 열었다. "기실 사혈마선도와 대막혈사탑의 출현때문에 지금 전 중원은 더 할 나위 없는 긴장에 싸여 있어요!" "...!" "그들의 목적을 알 수 없어 전무림인이 연합해서 일단 그들이 중 원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아...!" "해서 구파일방의 정예들은 이곳으로 왔고 또 나머지 명문 오대 세가의 사람들은 옥문관으로 향하고 있어요." 이때 유난향이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향매!" 제갈천옥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휘이익! 순간 유난향이 신형을 날려 자취를 감추지 않는가? 그녀의 음성이 십 장 밖에서 들려왔다. "호호호, 옥언니!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해요. 화오빠하고 만나 서 할 이야기가 고작 그런 것 뿐이에요? 어서 조용한 곳으로 자리 를 바꿔 화오빠에게 한 잔의 술이라도 권하며... 그리고... 호호호...!" 그녀는 실로 묘한 여윤을 남긴 채 말을 끝맺지 않았다. 주천화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 제갈천옥도 주천화를 마주 보며 미소했다. "호호, 향매가 착할 때가 다 있었군. 우리를 위해 자리를 다 피해 주다니...!" 허나 태연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이 순간 은은히 붉어져 있었다. "호호호, 착하기는 뭐가 착해요. 나는 질투가 나서 피한 것 뿐이에요!" 헌데 아주 사라진 줄 알았던 유난향의 음성이 다시 들려오지 않는가? "하하하...!" "호호...!" 주천화와 제갈천옥이 어색하게 웃었다. 문득 제갈천옥이 짐짓 탄식을 터뜨렸다. "후우! 큰일났군. 앞으로 향매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하하하, 시달릴 때는 시달리더라도 우선 향매의 말대로 자리를 옮깁시다." "호호, 좋아요!" 제갈천옥이 태연히 장단을 맞췄다. '후후, 알 수 없군! 옥누님만 대하면 내 마음이 한없이 평안해지니....' 제갈천옥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천화 역시 소리없이 웃었다. 선창(船蒼), 짙은 비릿내가 물씬 풍기고 있는 바닷가의 어느 주루. 그곳 내실에 주천화와 제갈천옥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들 가 운데의 탁자에는 간결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주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천화, 천화 역시 사혈마선도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인가요?" "예!" 주천화가 나직이 대답하며 제갈천옥을 응시했다. "나는 신비사대세력을 모두 파헤칠 것입니다." "구천만마문을 습격한 자들을 찾기 위해?" "후후, 그것이 첫째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외에 그들을 파헤쳐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 "후후, 세인들은 단순히 내가 구천만마문의 복수를 위해 활동하 는 줄 알지만 기실 더 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차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주천화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③ 고개를 끄덕이던 제갈천옥이 조용히 술을 따루었다. 주천화가 한 잔의 술을 단숨에 넘기자 제갈천옥이 또 한 잔 따르며 정색했다. "천, 천화! 나에게도 한 잔... 주지 않겠어요." "옛?" 주천화가 흠칫했다. "누님은 불제자(佛弟子)가 아닙니까? 어찌...!" "...!" 제갈천옥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직... 계(戒)를 받지 않았어요. 아직은 불제자라고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주천화가 일순 머뭇거렸다. 제갈천옥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훗! 또 설사 계를 받았다 해도 나는 스스로 가사를 벗기로 했어요." 주천화는 마른 침을 삼켰다. "나는 나 자신을 깨달았어요. 결코 승인이 될 수 없음을...!" "무슨 이유로...!" "나는...!" 제갈천옥의 눈이 주천화를 응시했다. "천화를 만난 후, 운명같은 것을... 천화의 옆에 내가 있어주어야 할 것 같은...." 제갈천옥이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그녀의 목덜 미가 도화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음...!" 주천화의 신형이 가볍게 진동했다. "누, 누님!" 주천화는 자신도 모르게 와락 그녀를 끌어 안았다. "아! 화, 화랑!" 제갈천옥이 허물어졌다. 주천화의 가슴으로.... "하, 하지만 내가 누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 제갈천옥이 한 손을 내밀어 가만히 주천화의 입을 막았다. "화랑! 화랑은 내게...!"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 얼굴을 묻었다. '음...!' 주천화는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순간 그의 두 손이 부드럽 게 제갈천옥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천천히 제갈천옥의 얼굴이 주천화의 얼굴로 향했다. 촉촉히 젖은 입술, 제갈천옥은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미지의 흥분으로 가볍게 떨었다. "...!" 주천화의 입술이 천천히 그녀의 젖은 입술을 덮어갔다. "흠!" 꽃잎같은 제갈천옥의 입술 위에 주천화의 입술이 포개졌다. "...!" "...!" 꿈결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상대방의 입술을 빨며 언제까지고 떨어질 줄 몰랐다. 허나 탐하면 탐할수록 갈증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주천화는 그녀의 가사에 손을 댔다. 제갈천옥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추렸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시작될지 이미 짐작했던 것이다. 허나 몸을 움추린 것은 자신도 모르는 본능이었을 뿐 그녀는 이내 주천화의 손길에 전신을 내맡겼다. 주천화는 탁자 한쪽으로 가만히 그녀를 눕혔다. 제갈천옥은 허공을 보고 똑바로 누운 채 눈을 감고 주천화의 다음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보면 아직 계를 받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미 불문에 몸을 담 고 있는 불제자로서는 감히 꿈꿀 수조차 없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옷이 하나씩 벗겨짐에 따라 그녀는 불문과 자신이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윽고 신이 조각해 놓은 듯한 완벽한 여체가 드러났다. 가냘퍼 보이는 두 다리의 곡선과 그러면서도 풍만하게 느껴지는 둔부와 젖가슴.... 주천화는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긴 후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터 트리며 그녀의 완벽한 여체를 감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서두르는 손길로 스스로 옷을 벗어 나갔다. '...!'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제갈천옥의 귀로 사내의 옷벗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시간이 너무도 길게만 느껴진다. 이윽고 그 녀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핫!' 동시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질끈 두 눈을 내리감았다. 못 볼 걸 본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주천화의 나신이 그녀의 나신을 부드럽게 덮어 눌렀다. 제갈천옥은 돌처럼 단단한 주천화의 상체가 자신의 가녀린 젖가 슴을 짓눌러오는 감촉을 느끼며 호흡을 멈췄다. 이어 무언가 뜨거 운 물체가 그녀의 하복부에 닿아왔다. 좀전에 언뜻 본 사내의 실체 같았다. 사내의 실체는 그녀의 하복부에 닿아있는 상태로 주천화의 호흡에 따라 꿈틀거리는 느낌이 다. 제갈천옥은 더이상 수동적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뻗어 주천화의 목을 감아 안았다. 주천화의 두 손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 들었다. 여인의 마 음을 헤아리려는 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제갈천옥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자신조차 함부로 손을 대본 적이 없는 여인의 신비지문에 사내의 손이 닿아온 것이다. 그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또한 강인했다. 신비지문의 입구 근처를 맴돌면서 조금씩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제갈천옥은 자신도 모르게 두 다리를 살짝 벌렸다. 사내의 손길 이 쩔쩔매는 것 같아 도우려는 행동이었다. 이때였다. 주천화는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자신의 하체로 이끌었다. 제갈천옥은 주천화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손을 내맡겼다. 다음 순간 무엇인가 단단한 물 체가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용암처럼 뜨거우며 암석처럼 단단한 물체였다. '아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질겁하며 손을 빼내려 했다. 허나 주천화 는 고집스럽게 그녀의 손을 쥔 채 자신의 몸을 만지게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자 제갈천옥은 부끄러움을 잊고 사내의 실체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제갈천옥으로서는 난생 처음 겪은 운우지정(雲雨之情)이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몸은 무섭게 불타 오르기 시작했다. 종내 에는 주천화의 다음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재촉할 정도였다. 그리고... 갈증이 그녀의 내부를 폭발시킬 것 같은 느낌이 들 무 렵 사내의 몸은 거칠게 그녀의 내부를 꿰뚫기 시작했다. 파도..., 이슬비... 허공을 흘러가는 구름.... 그것은 실로 온갖 기이한 느낌뿐이었다. 그리고 절정에 달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이는 폭발을 느끼며 흐느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제갈천옥이 자신의 몸 위에 엎어져 있 는 주천화를 가만히 밀어냈다. "화, 화랑! 음식이 식겠어요. 어서...!" 어색한 순간을 넘기려는 듯 그녀는 실로 엉뚱한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주천화 역시 어색해 하며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시 단정히 옷을 입은 두 사람은 다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문득 제갈천옥은 주천화의 눈을 피하려는 듯 탁자에 눈을 주었 다. 그녀의 얼굴은 능금처럼 달아 올라 있어 보기에는 좋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제갈천옥이었다. 주천화는 마치 그녀의 이런 수줍어 하는 태도를 즐기려는 듯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멋! 이 생선 좀 봐요! 정말 먹음직스럽지 않아요?" 안주 중에 팔뚝만한 생선 한 마리가 먹음직스럽게 요리되어 있었다. "훗! 그렇구료!" 제갈천옥이 짐짓 저를 들어 생선으로 가져갔다. 기실 맛을 보려 기 보다는 이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다. 헌데 그녀의 저가 막 생선에 닿는 순간이었다. 파파파팟...! 돌연 생선이 폭죽 터지듯 터지며 백광(白光)을 폭사하지 않는가! 생선과 그들과의 거리는 불과 한 자 가량. 설사 신(神)이라 한들 피할 수 없는 거리였으며 무서운 빠르기였다. 실로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순간이었다. 엄청난 숫자의 암기(暗器)가 주천화와 제갈천옥을 덮쳐온 것이다. 눈깜짝 할 순간에 고슴도치가 될 판국이었다. 더구나, 백광들은 주로 두 눈 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어 더욱 눈부셨다. "앗!" 제갈천옥이 경악성(驚愕聲)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당했다!' 그녀는 내심 크게 부르짖으며 주천화의 안위를 떠올렸다. '헌데 누가 이런 악독한 함정을...?' 헌데, 그녀는 자신이 고슴도치가 될 순간을 기다렸으나 잠시의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 않는가? "...!" 그녀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엄청난 백광은 어느새 씻은 듯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주천화의 손에는 단지 한 마리 먹음직스러 운 생선이 들려있을 뿐이었다. "이, 이것은...!" 제갈천옥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내, 내가 환상을 보았단 말인가?' 그녀는 두 눈을 굴렸다. 허나 주천화의 전신에 은은히 떠올라 있 는 한기(寒氣)를 대하자 자신이 결코 환영을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화, 화랑! 이, 이것이 어떻게 된...!" "으음...!" 주천화가 손 안의 생선을 살피며 묵직한 탄식을 토했다. "이것은 탈명천환기(奪命天幻器)요." "탈명천환기?" 기억을 더듬던 제갈천옥의 안색이 싸악 변했다. - 탈명천환기. 천하에 손꼽히는 십대병기(十大兵器) 중 서열 삼위(三位)로 꼽히는 천고병기(千古兵器)로써 일천오백 년 전, 천수나타(千手羅駝) 당태호(唐泰湖)가 만든 것이었다. 특히 이것은 검(劍), 궁(弓) 심지어 찻잔에서부터 음식의 형태로 까지 어떤 모양으로도 변형시킬 수 있는 진정 가공할 암기였다. 또한 그 색깔조차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으니 실로 천고에 보기 드문 명기(名器)라 아니할 수 없었다. "천수나타 당태호는 천하패왕지존록 서열 삼십구 위(位)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이오." 주천화가 조용히 탈명천환기의 내력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가 곧 지금의 사천당문(四川唐門)을 세운 사람이기도 하오." "아...!" 제갈천옥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헌데, 누가 이런 짓을...!" "후후, 나를 노린 것이오. 천마천, 그 자의 짓이었지!" "천마천?" "그렇소! 기실 나는 금강불괴지체에 이르러 있소. 허나 단 한 곳 두 눈만은 금강지체가 될 수 없는 곳이 아니겠소? 천마천은 나의 두 눈을 노린 것이오." "아...!" 제갈천옥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허나 오히려 나에게 희귀한 병기를 선사한 결과가 되었으니... 와하하하!" 주천화가 통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옥누님! 이 탈명천환기를 옥누님에게 드리겠습니다." "화, 화랑!" "탈명천환기의 사용법은...!" 주천화가 나직이 전음을 보내기 시작했다. ■ 황 제3권 제22장 사혈마선도, 중원 침공! ━━━━━━━━━━━━━━━━━━━━━━━━━━━━━━━━━━━ ① 제갈천옥의 눈이 커졌다. '탈명천환기의 사용방법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세,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구나!' 어찌 놀랍지 않으랴! "자, 천마천은 실패한 것을 알고 사라졌을 것이오." 주천화가 전음으로 탈명천환기의 사용법을 알려준 후 탈명천환기 를 동그랗게 변형시켜 제갈천옥의 손에 쥐어줬다. "...!" "...!" 두 개의 손이 마주치자 식었던 열기가 되살아 났다. 둘의 눈이 얽혔다. 똑똑똑...! 헌데 이때 어디선가 은은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제갈천옥이 긴장된 빛을 띄웠다. "무슨 일입니까?" "저, 저 목탁소리는 사부님이 저를 찾는 신호예요." "목탁음?" 주천화가 가만히 목탁에 귀를 기울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목탁음은 나직하기 이를데 없었다. 허나 백 리(白里)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낭랑했다. "호, 불가(佛家)에 삼백 리 밖에까지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음공 이 있다더니 바로 이것이었구료!" "예! 보리탄음공이라고 해요. 빨리 가봐야...." 제갈천옥이 몸을 일으켰다. "화, 화랑! 어쩌면 다음에 만날 때는 자색평복을 입고 있을 거예요. 부디 몸조심...! 흡!"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주천화가 와락 그녀를 끌어 안아 입술을 덮어 버린 것이었다. '아이...!' 잠시 후 제갈천옥은 아쉬운 눈으로 창문을 통해 멀어져 갔다. "그래, 더 볼 것이 있는가?" 이때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주천화가 돌연 싸늘히 외쳤다. "흥! 나오지 않겠다면...!" 그가 몸을 일으켰다. "마마! 존체를 뵈옵니다." 순간 창문을 통해 세 인영이 날아들었다. "...!" 주천화가 흠칫했다. 나타난 세 사람은 회색 법복을 걸친 노승이 아닌가? 독천목승, 북천화승, 서천신승, 바로 천룡사의 천룡삼천승이었다. "...!" 주천화의 눈이 꿈틀했다. "그대들은 아직도 중원땅에 남아 있었는가?" 무서운 위엄이 천룡삼천승을 압박해 갔다. "아, 아니옵니다. 노납들은 그때 이후 곧바로 본사로 돌아갔습니다." 독천목승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하면 무슨 일로 다시 중원에 들어섰단 말씀이오?" 주천화의 안색이 다시 풀렸다. 음성도 적잖이 부드러워졌다. "기실 저희들은 본사에 계신 사숙조(師叔祖)께서 다시 중원으로 보내신 것이옵니다." "...!" "사숙조께서는 마마를 꼭 모셔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의 사숙조?" "예! 본사에서 최고의 배분을 지니신 분입니다." "헌데 무슨 일로 나를 모시고 오라고 했단 말이오?" "사숙조의 말씀에 의하면 마마께서 반드시 오셔야 한다고... 천 룡대조사께서 마마께 남기신 것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 분께서 나에게 남기신 것이 있다고?" 주천화가 놀라 외치듯 반문했다. 천룡대성승은 이미 일천오백 년 전의 인물이었다. 그런 천룡대성 승이 당금의 주천화에게 남긴 것이 있다니 어찌 의외롭지 않겠는가! 서천신승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 "기실 천룡대조사께서 제이의 천마대제가 현신할 것에 대비하셔 서 한 가지 안배를 해놓으신 듯 합니다." "음...!"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조만간에 천룡사로 가리라!" "감, 감사하옵니다." "아미타불...!" 천룡삼선승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노납들은 업무를 마친 것으로 알고 이만 하직을...!" "그렇게 하시오. 내 반드시 빠른 시일 안에 천룡사로 갈 것이니 그대들도 천룡사로 돌아가 있으시오." "예!" 천룡삼선승, 그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무엇일까? 천룡대성승께서 나에게 남기신 것이...." 주천화는 창 밖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갔다. 창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항주의 밤(夜), 항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던 항주의 밤이 오늘따라 어둡기만 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홍등(紅燈)들이 약속이나 한 듯 꺼져 있었다. 천공에조차 한 개의 별도 없어 항주는 온통 암흑이었다. 무슨 일인가? 색향 항주에 이러한 기변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 가? 더구나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아 마치 유령도시를 보는 듯 했다. 헌데 항주가 유독 어두운 반면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었으니.... 항주 바다, 항주에서 삼백 여 장 떨어진 해상(海上), 수도 헤아 릴 수 없는 배들이 운집해 있지 않은가! 해상(海上)은 실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수백여 채의 크고 작 은 선박들이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헌데 둥그렇게 운집해 있는 배들의 가운데에 기이한 것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가! 두 척의 배, 호화로운 두 척의 유람선이 중앙에 자리해 있고 그들 사이에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헌데 아아! 그 밧줄 위에 지금 이 인(二人)이 대치해 서 있지 않은가! 출렁이는 파도 그리고 연신 흔들리고 있는 배, 그 사이에 연결되 어 있는 가느다란 줄 위에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다니 정녕 놀라운 광경이었다. "호호호, 이것으로 당신의 패배를 입증해 드리겠어요." 줄 위에 서 있는 이 인(二人) 중 한 명은 궁장을 걸친 미소부였 다. 그녀는 낭랑한 교소를 터뜨리며 상대를 향해 일장을 쳐내고 있었다. 파아아...! 무서운 잠력이 똑바로 상대를 향해 밀려갔다. 파앙! 줄 위에 대치해 서 있던 사람은 백염이 늘어진 신태비범한 노인이었다. 헌데 바로 우내십존 중의 창해일검이 아닌가! "으음...!" 창해일검은 마주 일장을 밀어냈다. 그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터져나오며 그의 신형이 휘청했다. "호호호...!" 궁장미소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쏴쏴...! 그녀의 손이 풍차돌 듯 회전하며 무서운 잠력을 밀어냈다. 그녀 의 공세에 창해일검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 그것은 본문의 공동삼십육수( 三十六手)!" 공동삼십육수라면 바로 공동의 독문절기(獨門絶技)였다. "본문의 무공까지 알고 있다니...!" 창해일검이 놀라는 순간 궁장미소부의 공세는 이미 그의 면전에 이르고 있었다. "흑!" 창해일검은 가까스로 그녀의 공세를 파해시켰으나 그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휘이익! 창해일검은 해면(海面)을 박차고 한 범선에 올랐으나 그의 안색은 처연히 일그러져 있었다. "아...!" "으음! 창해일검 노선배가 패하다니...!" 주위에 운집해 있는 선상(船上)에서 신음같은 경악성(驚愕聲)이 터져 나왔다. 둥둥둥...! 돌연, 한 척의 거대한 호화유람선에서 힘찬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하하하, 세번째의 비무도 본도의 승리다." 순간 득의에 찬 대소가 터져나왔다. 호화유람선 위, 그곳에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장내를 관망하고 있었다. "율피! 수고했다." 그 가운데에 우뚝 서 득의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중년인이 있었다. 담담한 기태, 허나 파도 조차 숨을 죽일 만큼 무서운 기도가 그의 전신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휘이익! 궁장미소부가 몸을 솟구쳐 호화유람선으로 날아 내렸다. "다행히 본도의 명예를 지켰습니다." 그녀는 예의 중년인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인 후 한곁에 시립했 다. 흑의중년인의 차가운 눈이 운집해 있는 수많은 배를 한 차례 훑었다. "자, 이제 본도에서 세 번만 더 승리하면 그대들은 본도의 중원 상륙을 허락해야 할 것이오." "으음...!" "아미타불...!" 사방에서 무거운 탄성이 터졌다. 그러자 흑의중년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재삼 단언하건데... 본도는 중원에 단지 한 인물을 찾기 위해 온 것이오. 그 밖에 딴 이유는 없소!" "...!" "...!" "천마대제! 그 자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지, 중원에 어떤 해를 끼치고자 함이 아니오. 자, 이번에는 누가 본도의 수하들을 상대하시겠소?" 그의 눈이 맞은편의 거선(巨船)에 고정되었다. 맞은편의 배 위에 는 이삼십여 명의 무림인이 침중한 안색(顔色)으로 서 있었다. 그 가운데에 범상치 않은 풍도를 풍기고 있는 십 인의 노인들이 있었다. 우내십존, 바로 우내십존이었다. "아미타불...! 사혈마선도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이야! 그들이 중원의 모든 무학(武學)에 정통해 있을 줄은 실로 꿈도 꾸지 못했구료!" 천불선사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으음! 실로 상상조차 못 해본 일이었소이다." 개방( 幇)의 전대장로 비종후는 이 순간만큼은 익살을 잊고 있었다. "헌데 저들이 과연 천마대제만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일까요?" 천영신니가 더할 나위없이 어두운 신색으로 중얼거렸다. "후유! 모를 일이지요. 허나 그들의 무공이 이 정도이니 만약 그 들이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천불선사가 힘없이 말을 이었다. "중원에서는 이들을 막을 문파가 없소이다. 참으로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외다." "...!" 우내십존의 안색이 참담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자, 이번에는 어떤 고인이 나서시겠소?" 이때 맞은편 사혈마선도의 수하들이 타고 있는 배쪽에서 우렁찬 일갈이 터져 나왔다. 우내십존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창해일검을 비롯한 우내십존 중 십 인이 패했는데 이제 누가 있 어 저들과 비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으음...!' 그들을 지켜보는 주위의 배 안에 타고 있는 수많은 무림인들의 얼굴은 절망과 참담한 심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우내십존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호호호, 도주(島主)! 이제 기고만장하셨군요." 이때 어디선가 낭랑한 교소가 터졌다. 휘이잉! 동시에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한 날씬한 인영이 두 배를 잇고 있는 줄 위에 내려섰다. 해상(海上)이 일순 더욱 환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많은 횃 불 속에 드러난 인영, 실로 환상속의 선녀인 듯 아름답지 않은가! "와아! 십전십미 제갈천옥이다." "우, 십전십미다. 소림제일봉!" 군웅들 사이에서 환호성(歡呼聲)이 터졌다. 주위에 내려선 인영은 다름아닌 십전십미 제갈천옥이었다. "후후후, 중원에 더 이상의 인재가 없는가? 이제는 풋내나는 어린 계집애까지 내세우다 니...!" "흥!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 일.... 누가 나올 것인가요!" 제갈천옥은 그들의 조롱에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크하하하, 좋다! 천파(天波)!" "예!" "네가 상대해 주어라!"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이십대 후반의 흑의청년이 가볍게 줄 위에 내려섰다. "흐흐, 본도에는 칠십이해(七十二海), 삼십육파(三十六波), 구천(九天)이 있다." 천파라고 불리운 흑의청년이 내려서는 것을 보며 사혈마선도의 도주로 보이는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너희들의 우상이라던 우내십존은 그 중 삼십육파의 세 명에게 패했다."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파도를 뚫고 군웅들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으...!" "세, 세상에...!" 진정 경악(驚愕)할 일이었다. 우내십존이 사혈마선도의 이류급 수하에게 패했단 말인가! 이어지는 도주의 나직한 독백(獨白)에 군웅들은 아예 정신이 없었다. "흐흐흐, 구천 위에는 삼존이 있고, 그 위에는 본좌가 군림한다!" 제갈천옥의 안색(顔色)이 질려갔다. '사혈마선도, 이 자들의 세력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더구나 중 원의 무공을 모르는 것이 없다니...!' "낭자, 시작해 봅시다." 제갈천옥과 대치해 선 천파가 진기를 끌어모으며 외쳤다. 제갈천 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품 속에서 두 개의 환(環)을 꺼내 들었다. "...!" 천파의 눈에 의혹이 스치는 순간 사혈마선도의 도주가 흠칫해 하며 외쳤다. "천파! 조심해라! 그것은 불공마환(佛空魔環)이다." - 불공마환(佛空魔環). 불타가 손목에 차고 증과(證果)를 얻었다는 무량법보(無量法寶). 이것은 전설 속의 병기로써 무림십대 병기의 서열 일위(一位)에 올라 있는 소림이보(少林二寶)였다. 도주가 불공마환을 알아보자 제갈천옥이 놀란 빛을 드러냈다. "자, 받아보세요! 불광천환(佛光天環)!" 제갈천옥이 두 개의 환을 허공에 뿌렸다. 파아아...! 쉬이이...! 허공 중에서 무서운 파공음이 일며 수천 개의 환영이 떠올랐다. 환영들은 무서운 기세로 천파의 몸을 덮쳐갔다. "앗!" 천파의 몸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그의 허리에서 도광이 폭발했다. 카앙! 한 개의 환이 퉁겨졌다. 헌데 퉁겨진 환이 무서운 속도로 재차 천파의 몸을 향해 나선형으로 쏘아져가지 않는가! "흑!" 천파는 하나의 환을 쳐내고 다른 환을 젖혀내고 있어 피할 수가 없었다. 삭! 그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순간 허공을 가득 메운 찬란한 백 광(白光)이 씻은 듯이 자취를 감췄다. "호호호, 사정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갈천옥의 손에는 어느새 두 개의 불공마환이 쥐어져 있었다. "으음...!" 천파는 잔뜩 안색을 일그러뜨리고 있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천파! 돌아와라! 저 아이는 소림쌍불선의 제자이니 진 것을 수치로 여길 필요는 없다." 천파가 패해 물러나자 제갈천옥의 맑은 눈이 사혈마선도의 도주를 응시했다. "호호호, 어때요? 이만하면 귀도의 삼존쯤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이?" 도주의 눈에서 한기가 솟구쳤다. "크하하하, 삼존은 본도의 장로들이시다. 너따위 애송이에게 삼존이 나설성 싶으냐?" "...!" "그 분들 중에 한 분만 해도 천하에 적수가 없다. 있다면 천마대제, 그 한 사람 뿐이다." 사혈마선도 도주의 음성에는 확신이 넘쳐 있었다. "그래...?" 헌데 이때 돌연 어디선가 낭랑한 음성이 터져나오지 않는가! 나직한 음성, 허나 수백 명의 귀에 천둥치듯 작렬하는 기이한 음성이었다. 촤아아....! 돌연 물결이 솟구쳤다. 운집해 있던 배들이 어떤 무형의 힘에 의해 쫘악 갈라졌다. 그 사이 로 한 인영이 천천히 해면(海面)을 딛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허나 그의 발에는 단 한 방울의 물도 없었고 그가 딛는 발걸음을 따라 파도가 죽었다. "...!" "...!" 횃불에 반사된 수려준미한 용모, 천인(天人)이 이러할까? 나타난 미공자의 놀라운 등평도수 (登坪渡水)의 절기도 절기려니와 그 신태가 너무도 비범했다. "오...! 천, 천마대제다." "천... 마... 대제!" 누군가가 경악성(驚愕聲)을 터뜨렸다. 은은히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는 음성이었다. "천마대제?" 사혈마선도 도주의 눈이 나타난 주천화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주천화, 출렁이는 파도를 밟고 서 있는 그의 기태를 보라! 실로 신비하기까지 할 만큼 고고한 풍도가 아닌가! "이 비무는 더 이상 필요없다. 너희들이 과연 본좌를 찾아왔다면 본좌가 너희들의 섬으로 갈 것이니...!" 주천화가 담담히 입을 열며 도주에게 다가갔다. 쓰윽! 그는 어깨 한 번 흔들지 않고도 이십여 장을 귀영(鬼影)처럼 미끄러졌다. "그대가 사혈마선도의 도주인가?" 어느새 중년인 앞에 내려선 주천화의 눈이 중년인을 훑었다. 전 광과도 같은 무서운 눈빛에 중년인의 신형이 일순 부르르 떨렸다. "아, 아니외다. 기, 기실 도주님은 본도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옵고...." "후후후, 나를 불러내기 위해 도주행세를 하면서 중원무림에서 비무를 한 것인가?" "예!" 순간 중년인은 주천화의 놀라운 기도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공대했다. "좋다! 그대들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고 싶다. 안내하라!" "예!" 수많은 군웅들은 주천화가 단 몇 마디에 상대를 압도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휙! 도주로 행세했던 중년인이 신형을 날렸다. 주천화는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소리없이 미끄러져 나갔다. ② 사혈마선도, 하나의 섬인 듯 느껴질 만큼 거대한 배, 선상에서 수목이 자라고 푸르른 초원까지 펼쳐져 있으니 그 크기란 가히 설명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쓰윽! 항주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해상에 떠 있는 사혈마선도에 두 인 영이 내려섰다. 주천화와 그를 안내해 준 가짜 도주였다. 선상 전각(殿閣), 그 전각 안에 한 명의 중년인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삼십대의 흑의중년인, 날카로운 눈매가 다소 특이해 보일 뿐 고요하기 이를데 없는 신태 였다. 헌데 바로 밀실에서 대선생과 밀담(密談)을 나누던 그 흑의중년인이 아닌가! "...!" 일순 그의 눈빛이 파도쳤다. "도주님! 천마대제를 모셔 왔습니다!" 순간 밖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흑의중년인의 눈에 기이한 긴장이 떠올랐다. 허나 그것은 순간적인 것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마대제! 어서 오시오! 벌써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스르륵! 문이 열리며 주천화가 들어왔다. "대제! 앉으시오. 우선 그 이유를 밝히기 전에 본인의 내력부터 들려 주어야 하니...!" "그대의 내력?" 주천화는 너무도 태연히 도주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원래 본인은 대제와 비무하기 위해 중원에 온 것이오." "비무?" "실은 누군가 대제를 죽여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으나 본인이 원하는 것은 정당한 비무요!" "호..., 누가 나를 죽여달라고 부탁했소?" "그 일은...!" 도주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허나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본인은 그 사람의 부탁을 이행하려는 것이 아니고 대제와 진정 한 무공(武功)을 겨루고 싶을 뿐이오. 허나 만약 본인(本人)이 이 긴다면...!" "...!" "그 사람의 부탁도 저절로 들어줄 수 있는 것이오." 주천화가 문득 미소를 떠올렸다. "그대는 진정한 남아답군! 좋소. 헌데 본좌와의 비무를 원하는 데에는 어떤 까닭이 있소?" "예!" "...!" "본인은 냉가휘(冷可輝)라 하오. 본래 중원인이었소." "...!" 돌연 사혈마선도 도주 냉가휘가 몸을 일으켰다. "원래 본인은 싸움을 즐기지 않아 누구와도 겨루지 않는 사람이오. 단 대제는 예외요." 다음 순간, 그는 돌연 주천화에게 대례를 올리지 않는가? 실로 의외의 행동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오?" 주천화조차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은 선사가 모셨던 사람의 후예에 대한 예의일 뿐이오." 도주 냉가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기실 본인이 선조는 과거 천마수라대제를 모시고 있던 서동(書童)이셨소이다." "그, 그대의 선조가 나의 선사의 서동?" "그렇소!" 도주 냉가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선조께서는 천마수라대제의 시중을 들어주며 그 분의 모든 무공을 자연스럽게 익히셨소." "오...!" 놀라운 비사(秘事)가 아닌가? "그 분 말년에 선조께서는 자신의 무공 또한 천하무적임을 깨닫게 되었소." "으음...! 해서 귀도의 수하들이 중원 각파의 무공에 정통해 있었군?" "그렇소이다!" "해서?" "선조께서는 단 한 가지 야망을 가지셨소. 바로 천마수라대제를 꺾고 자신이 명실공히 천하제일인자가 되는 것이었소." "...!" "허나, 당시 서동이라는 신분이 있어 감히 천마수라대제에게 도전하지 못한 것이오. 그 분 의 뜻은 단순한 비무일 뿐, 천마수라대제와 적대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소." '음! 있을 수 있는 일이군!'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조는 유언을 남기셨소. 당대에는 그 분의 뜻을 이룰 수 없지만 후대에 이르러 천마수라 대제의 후예가 나타나면 그와 비무해 진정한 우열을 가려 달라고...!" "호오...!" 주천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다면 귀도의 수하들은 그 분의 유시를 받들어 선사의 후예 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려 왔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도주 냉가휘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동안 본문에서는 선조께서 남기신 천마수라대제의 무공은 물론...!" "...!" "그 무공을 파해시킬 수 있는 무공을 창안해 왔소." "으음! 일천오백 년이 흘렀으니 선사의 모든 무공을 파해하는 무 공을 창안해 낼 수 있었겠군!" "후후! 그렇소! 완벽하게!" 주천화를 응시하는 냉가휘의 눈에 점차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야망이랄까? "허나 이 비무는 그냥 비무로 그치지 않을 것이오. 만약 대제가 본도에게 패한다면...." "후후...!" 주천화가 짧게 웃었다. "그대는 중원무림을 제패할 마음이 생겼군?" "그렇소! 당신을 이긴다면 본도의 금제가 풀리는 것이오. 하면 우리는 중원을 제패할 것이오." "글쎄...!" 주천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려냈다. 이때 냉가휘가 몸을 일으 키며 돌연 주천화를 향해 포권했다. "파천무제(破天武帝) 냉가휘! 대제께 한 수 청하오!" 실로 정중한 비무 요청이었다. 주천화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토록 당당할 수 있음은 곧 자신의 무학에 자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좋다! 본좌는 그대의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다. 헌데 파천무제 라...? 그 광오한 별호를 자칭했으니 결코 살려둘 수 없게 되었다." 주천화의 전신에서 가공할 한기가 솟았다. 파천무제(破天武帝), 이는 곧 천마수라대제를 꺾겠다는 뜻이 아닌가? 선상초지(船上草地), 방원 삼십여 장에 달하는 초지(草地) 위에 두 사람이 대치해 서 있었다. "본인이 먼저 공격하겠다." 주천화가 천마제혈검을 뽑았다. "과연 선사의 무공을 얼마나 파해시켰는지 궁금하니...." 주천화는 서서히 검을 치켜 들었다. 천마제혈검이 가늘게 진동하 고 있었다. 천마제혈검의 진동에 따라 무서운 검기(劍氣)가 해일처럼 뻗어나갔다. 주천화는 강호에 나선 이후 최고의 강적(强敵)을 만났음을 직감했다. 파천무제 냉가휘 역시 검을 뽑았다. 끝이 반월처럼 휘어진 기형검이었다. 우우웅! 주천화는 반 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천마제혈검의 끝만 응시하 고 있었다. 이것은 곧 무서운 검세가 발동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차앗!" 어느 한순간, 주천화의 입에서 맑은 장소가 터졌다. "천마화검류!" 무서운 파공음이 귓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부우웅! 천마제혈검이 부러질 듯 진동하며 무서운 검기를 쏟아냈다. "파천황(破天荒)!" 순간 파천무제 냉가휘 역시 우렁찬 장소를 터뜨리며 검을 쳐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냉가휘의 기형검이 가공스러운 검영을 일으켰다. 꽈르릉! 좌우에서 마치 검은 용과 같은 기류가 수십 장 방원을 뒤덮으며 소용돌이쳤다. '으음! 과연 선사의 무공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검식이다.' 상대의 검세가 자신의 검세를 차단하며 밀려오자 주천화는 추호 도 방심할 수 없음을 느꼈다. "천마월검류!" 꽈릉! 장소가 터지고 천마제혈검이 용트림쳤다. 동시에 천공에 무수한 달그림자가 어렸다. 주천화가 전력을 다해 쏟아낸 검세, 그 기세 는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허나 냉가휘의 검세는 실로 괴이했다. 카앙! 주천화의 검법을 과연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 그 공세를 차단시 키며 검을 쳐내는 것이었다. 꽈꽝! 두 사람이 갈라섰다. 주천화의 어깨에 혈흔이 비쳤다. "놀랍군. 과연 선사의 무공을 모두 파악하고 있군." 주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바로 그 순간 그 가공할 냉가휘의 공 세가 폭풍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파파파...! 땅이 마구 파여 바람을 타고 흙먼지가 하늘까지 올라갔다. 주천화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와르릉...! 태양(太陽)과 같은 검은 기류가 수십 장을 뒤덮으며 그에게 덮쳐왔다. "천마섬검류!" 찰나, 무서운 검광이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용처럼 치솟았다. 밀리기만 하던 주천화가 다시 공세로 전환한 것이었다. 허나 주천화의 공세를 대한 냉가휘의 입에서 장소성이 터져 나왔 다. "와하하하, 섬검류 역시 본좌가 알고 있는 것!" 쓰윽! 냉가휘의 신형이 괴이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과연 주천화 의 섬검류는 허공만 스치고 있었다. 쏴아아...! 동시에 냉가휘의 기형검이 가공스런 기세로 주천화의 온몸을 뒤 덮었다. 위기였다. 주천화가 몸을 비틀며 왼손을 쳐냈다. 쏴아앙! 백색 강환( 環)이 마치 폭발하듯 수천수만 개로 불어나며 사방을 뒤엎었다. "크하하하, 천마청인장? 어림없지!" 냉가휘가 미친 듯 웃으며 기형검을 흔들었다. 까까까깡! 고막을 찌르는 듯한 듣기 역겨운 금속음이 미친 듯 진동하더니 백광이 사그라 들었다. "음...!" 주천화의 입에서 최초로 당황성이 터졌다. "천마대제, 목을 내놓아라!" 냉가휘가 광오하게 외치며 허공에서 연달아 칠검(七劍)을 쳐냈 다. 검영이 가공무쌍의 강기(剛氣)가 되어 사방 수십 장을 덮었 다. 스치기만 해도 박살이 날 무서운 기세였다. "천마마극마검류!" 꽈르릉! 번쩍! 낭랑한 외침과 함께 일진 뇌성(雷聲)이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가공할 굉음(轟音)이 터져 나왔다. 우드득! 선상에 심어져 있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날아가고 오십 장 밖 에 있던 전각들이 뒤흔들렸다.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 의 격동은 백 장 주위를 완전히 박살낸 것이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두 사람의 신형이 드러났다. '음! 저 자는 과연 선사의 모든 무공을 알고 있었다!' 주천화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 있었다. 허나 그의 두 눈만은 너무도 무표정하지 않은가? '만약 저 자의 내공이 나와 같았다면 이 일전에서 내가 크게 다쳤으리라....' 주천화는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무공을 상대가 알 고 있으니 실로 난감하지 않은가! "천마대제, 이번에는 그대의 목을 베겠소." 냉가휘가 싸늘히 외치며 한 걸음 나섰다. 무서운 기세가 폭풍쳤다. "파천황!- " 지옥의 사자후가 터졌다. 동시에 냉가휘의 신형이 허공에 떠오르 며 수십 배로 불어나지 않는가? 착각이련가? 냉가휘의 신형은 마치 거대한 산만하게 보이며 주천화를 향해 덮쳐왔다. "천마쌍환, 유엽도!" 순간 한 가닥 섬광이 주천화의 양 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속도로 뻗어나왔다. 채앵! "으왁!"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비명이 터졌다. 파천무제 냉가휘의 가슴 에서 피분수가 솟구치며 그의 몸이 광풍낙엽과 같이 오 장 밖으로 물러났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그의 손에는 반토막난 단검(短劍)이 들려 있었다. "으...! 이, 이게 무슨... 무공...!" 그는 경악과 공포 그리고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주천화를 쳐다보 았다. 분명 완전한 승기(勝氣)를 잡고 그가 먼저 발초하지 않았던가! 허나 오히려 주천화가 더욱 빨랐고 그는 분명히 그 섬광을 막았으나 그의 검은 반토막이 되고 만 것이다. 그의 동작이 조금만 늦었다면 그의 몸 역시 이미 두 쪽이 되었으리라! "그, 그게 무슨 무공이오? 그, 그것도 천마수라대제의 무공이었소?" "후후...!" 주천화가 냉랭히 웃었다. 타탁! 순간 두 개의 백광이 길게 회전하다 그의 손목에 감겨왔다. "후후! 선사의 무공이다. 허나 선사께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셨지." "으...!" 냉가휘의 몸이 흔들렸다. "너는 유엽도의 최초이자 최후의 제물이 될 것이다!" 주천화의 눈이 차갑게 굳어갔다. "폭섬도류!" 파파앗! 쐐애애액! 그의 손목에서 다시 무서운 광채(光彩)가 폭발했다. "윽!" 두 가닥 피분수가 솟구쳤다. 툭... 투툭! 동시에 섬뜩한 음향과 함께 두 개의 물체가 지면에 떨어졌다. 그것은 냉가휘의 양팔이었다. "왜? 나를 살려...!" "살려줄 줄 알았나?" 주천화의 눈에서 녹광(綠光)이 폭사해 나왔다. "그렇다면...?" "지금은 살려주겠다. 허나...!" "...!" "너는 사혈마선도를 이끌고 중원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중원 땅 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렀을 때...." "...!" "자결하라!" "으...!" 주천화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서운 명령이 망연히 서 있는 냉가휘의 뇌리에 섬전처럼 박혔다. 그는 자신이 결코 그 명령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 그의 눈이 사라져가는 주천화의 등에 꽂혔다. 주천화는 이미 달 빛(月光) 저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황 제3권 제23장 천명(天命)이 부르는 폭풍(爆風) ━━━━━━━━━━━━━━━━━━━━━━━━━━━━━━━━━━━ ① 태산(泰山), 의연히 솟아올라 만천하를 굽어보는 위치에 오른 태산의 비경(秘 境) 속에 경무장은 삼엄한 경계에 빠져 있었다. 경무장은 대 명친건흥군의 천웅대원수가 기거하는 곳이며 일백이십만 건흥군의 하늘같은 떠받침을 받는 곳, 지금 이곳의 모든 곳에서는 오보(五步) 간격으로 전신을 갑주(甲胄)로 무장한 채 창검(槍劍)을 소지한 병사들이 우뚝 지키고 있었다. 그 수(數)만도 자그만치 이만 명(二萬名), 가히 하늘이라도 무너뜨릴 위세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경무장의 깊은 밀실(密室), 타원형의 긴 탁자 주위에 일곱 명의 인물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신태비범한 그들의 용모는 실로 놀라운 위엄을 각기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안색은 한결같이 침중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탁자 위에 놓여있는 일곱 잔의 차(茶)는 차디차 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찻잔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헌데 중앙 태사의에 앉아 있는 인물은 바로 태자 주의천이 아닌 가? 그의 안면(顔面)에는 몹시도 불안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대체 무슨 일로 나를 위시한 이들을 부른 것인가?' 그의 마음은 갈수록 천근 만근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불안한 기색을 떨쳐 버리려는 듯 천천히 좌중의 인물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의 우측(右), 그의 가장 믿음직한 친구이며 충실(忠實)한 부하인 금의위통령(錦衣偉統領) 겸 황실어림군(皇室御林軍)의 대장(隊將) 추국태(秋國太)가 앉아 있었다. 금의위통령 옆, 청수하기 짝이 없는 오십대 문사(文士)가 단정히 앉아 있다. 태자의 우측, 호안(虎眼)의 노장군(老將軍)이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천웅대원수 경호찬, 바로 그가 아닌가! 경호찬의 좌측으로는 병부상서 이광무가 약간 고개를 숙인 듯한 모습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두들 천하 병권을 쥐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다시 그의 좌측으로는 육십대 무관복(武官服)을 입은 사나이가 눈에 들어왔다. 흰머리가 전신에 걸친 관복 사이로 내보였으나 아직도 구리빛 피 부가 건장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자리에 앉은 사십대의 문사(文士), 그는 태자보다 더욱 더 불안한 기색이었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태자 주의천은 미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때였다. 병부상서 이광무가 오랜 침묵(沈默)을 참기 어려운듯 돌연 입을 열었다. "여보게 장군! 천문왕자님께서는 오늘 오신다고 하신 것이 분명한가?" 조심스런 작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들을 소집한 것이 바로 천 문왕자 주천화였던가? 경호찬은 미미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흠! 그 분께서는 결코 허언을 하실 분이 아니시니 걱정말게." 옆에 앉았던 오십대 문사가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 마마를 뵈온 지도 무척 오래됐군요. 마마의 부친이셨던 문국왕 전하께서 워낙 바람 같은 분이라서 항시 자금성(紫金城)에 오셨다가도 훌쩍 떠나시고 하셨으니...!" 경호찬은 그 말에 눈가에 주름을 지으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허헛헛! 태사(太師)께서 문국왕 전하와 막역지우(莫逆之友)이셨 으니 감회가 남다를만 하겠구료." 오십대 문사, 그가 바로 태사(太師)였단 말인가? 그렇다. 그가 바로 한림원(翰林阮) 대학사(大學士)겸 태사인 선경덕(善景德)이었던 것이다. 대학사(大學士) 선경덕(善景德). 중원천하의 모든 유생들이 존경하는 천하의 대학자(大學子)이며 덕망(德望)높은 인물이 아닌가! 이 순간 육십대의 구리빛 사내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이봐! 자네는 손님을 초대해 놓고 겨우 차 한 잔만 끓여 내놓나?" 자못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경호찬은 다시 점잖게 미소를 흘 리고 핀잔을 주듯 농을 던졌다. "허...! 그 사람 보채기는 세살 먹은 애들 같구만!" "뭐라고?" "조금만 참게. 마마께서 곧 당도하실 것일세." 그들, 경호찬과 육십대 무관복의 사나이는 무척 친한 듯 싶었다. 그들의 대화가 약간은 장내의 침중함을 해소시켜 주고 있었다. 이때 추국태가 전음으로 태자를 향해 말했다. (태자마마, 저 사람을 아시는 지요?) 태자는 내심의 심정을 감추며 찰나지간 신광을 뿌렸다. (모르오. 혹! 금의위통령은 알고 있소?) 추국태는 은밀히 육십대 무관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괴팍한 장군인 삼십육로(三十六路) 수로대장 군(水路大將軍) 모용천(募容天)입니다.) - 삼십육로수로대장군(三十六路大將軍) 모용천(募容天). 물과 함께 평생을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 중원 사대해(四大海)와 장강남북(長江南北)의 모든 수로(水路)를 담당하는 수상전(水上戰)의 명수(名手)가 바로 이 사람인 것이다. 태자 주의천은 흠칫하며 육십대 무관의 구리빛 얼굴을 동공에 담 았다. 그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저 사람이...?) (그렇습니다. 마마, 자금성에 일 년에 한번 들릴까 말까하여 마 마께서 얼굴을 모르는 것입니다.) (으음...!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의 수전(水戰)과 수공(水攻)은 단연 독보적이고 천웅대원수 병부상서 등과는 의형제(義兄弟)지간이기도 합니다.) (...!) 주의천의 눈에 놀람의 빛이 배어 나왔다. 이때였다. 밖으로부터 우렁찬 군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룁니다. 천문왕자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경호찬은 화등잔만한 눈에 반가움을 가득 담은 채 외쳤다. "어서 뫼시어라!" "옛!" 잠시 후 실로 준미수려한 용모(容貌)의 미공자가 허공을 밟으며 들어섰다. 그는 주천화였다. 지금 그의 모습은 실로 솟아오르는 용(龍)의 모습을 방불하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비룡(飛龍)이 수놓여져 있는 용포(龍袍)에 천마제혈검을 왼손으로 검집째 움켜쥔 당당한 신위! 놀라운 일이 아닌가! 무슨 일로 그가 왕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용포를 입고 있단 말인가? "...!" "천문왕자님을 뵈옵니다." 태자를 제외한 모두가 일어서서 깊은 대례를 올렸다. 반각 후, 여유있게 대례를 받은 주천화는 좌중을 죽 훑어본 후 모용천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의 입꼬리에 기이한 미소가 매달렸다. "후후후! 모용장군의 수염은 여전히 짧으시군요." 모용천은 벌겋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조아렸다. "망극하오이다. 마마께서는 아직도 소신의 수염길이까지 기억 하시다니...." 주천화는 따뜻한 빛을 뿜어내며 미소했다. "하하하! 잊을 리가 있겠소? 모용장군! 그대가 나에게 목마를 태 워주다 수염을 뽑힌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오." 찰나 장내는 완전히 웃음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와하핫핫!" "하하하!" 모용천은 타오르는 태양(太陽)처럼 벌겋게 변한 얼굴이 되고 말 았다. 그의 큰 눈은 경탄 속에 경호찬에게 돌려지고 있었다. '만인을 포용하실 수 있는 빼어난 왕재(王才)로다. 이런 분을 손 자로 둔 저 늙은이가 부럽군.' 부러움, 그의 호랑이눈엔 경탄과 부러움이 동시에 얽히고 있었 다. 이때 주천화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지며 십대문사를 쏘아보았다. "그대가 이부시랑 사도진천(司徒眞天)이오?" 이부시랑 사도진천은 얼음물을 뒤집어 쓴 듯 가슴이 철렁하며 황급히 조아렸다. "예, 마마!" 주천화는 태자를 한 차례 응시한 후 냉막무비한 어조로 싸늘하게 물었다. "그대는 태자 형님께서 등극하시는 것을 반대하오?" 순간 사도진천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황망히 말문을 열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신(臣)은...!" 찰나지간, 그의 이마에 서늘한 땀방울이 송글송글 솟아나고 있었 다. 주천화는 그의 말을 일축해 버리며 심장이 싸늘해지도록 냉소했다. "후후후! 알겠소." 이어 그의 시선이 태자 주의천에게 향해졌다. 태자는 투명하고 흑백이 분명한 주천화의 시선(視線)이 창끝보다 더욱 시리게 느껴졌다. "...!" 순간 주천화는 엄숙한 신색을 지으며 태산이 내려앉는 듯한 위엄 서린 음성으로 힘주어 말했다. "태자형님! 제가 태자형님과 여러분을 이곳에 모신 것은 한 가지 허락을 받고자 해서입니 다." "...!" "...!" 순간 장내는 바늘 하나 떨어져도 소리가 울릴 만큼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또한, 모두의 눈 에 짙은 의혹이 구름처럼 피어났다. 주천화는 천천히 천장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것은 저에게 성상께서 태명어사대인(太明御師大人)을 제수하신 때문입니다." 순간 주의천의 경악은 극을 치닫고 있었다. "아바마마께서!" 그는 튕기듯이 태사의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중인들의 놀람 역시 태자에 필적할 정도로 컸 다. "오...! 진정 마마께서...!" 장내는 삽시간에 태풍에 휘말린 듯 격동으로 물결쳤다. 주천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또한 황궁과 결탁했던 강호의 무리들도 거의 그 뿌리가 뽑힌 상태요. 해서 자금성에 들려...!" "...!" 장내는 쥐죽은 듯이 주천화의 말을 경청(傾聽)했다. 태자 주의천 와 추국태는 파도를 만난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니, 사색(死色)이 된 인물은 이부시랑 사도진천이었다. 그의 얼굴엔 핏기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허나 이곳의 모든 사람은 알고 있었다. 태명어사대인, 그것이 바로 섭정(攝政)의 권한(權限)과 심지어 황상(皇上)의 권한조차 억누를 수 있는 엄청난 것임을! 주천화, 그는 강호(江湖)에서 돌아오는 길에 황상을 만나 마침내 그의 뜻을 승낙했던 것이 다. 주천화는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좌중(座中)을 돌아보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중인들 모두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경황 중에 깊이 부복했다. "태명어사대인의 명(命)을 충심으로 받들겠나이다!" 주천화는 재차 온화한 미소를 담았다. "고맙소. 이제는 형식적이나마 재가는 끝냈소." 순간 장내는 고요한 정적 속에 빠져 들었다. 이때 주천화는 천천 히 품 속에서 하나의 영패(領牌)를 꺼내들어 허공에 치켜들었다. 영패(領牌). 오색(五色)이 찬란한 영패는 홍(紅), 황(黃), 청(靑), 백(白), 흑(黑)의 오룡이 비천(飛天)하 듯 꿈틀대고 있었다. 바로 태명어사대인의 어패(御牌)가 아닌가! 이어 주천화의 입에서 엄 청난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다. "본 태명어사대인은 흥덕태자를 후대제(後代帝)로 봉한다. 흥덕 태자 주의천! 그대는 명(命)을 받으라." 순간, 흥덕태자는 격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내 그는 감격 의 눈빛을 떠올리며 바닥에 깊이 부복했다. "태명어사대인의 천명(天命)! 흥덕태자 주의천이 명(命)을 받습니다." 주천화는 한 차례 빙긋이 웃음을 던진 후 눈길을 좌중으로 던졌다. "병부상서 이광무는 명을 받으라!" 이광무가 바닥에 내려와 오체복지했다. "이광무...! 명을 받사옵니다." "그대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흥덕태자를 제(帝)로서 등극시킬 것이다!" "태명어사대인의 천명을 받습니다." 주의천은 경호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명친건흥군 수장(首將) 천웅대원수 명을 받으라." 경호찬이 깊이 부복했다. "그대는 모든 명친건흥군을 동원하여 흥덕태자의 등극에 반기를 드는 자를 모조리 처단하라." "태명어사대인의 천명을 받습니다." "금의위통령 추국태, 명을 받으라." 추국태가 떨리는 음성으로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모든 금의위군과 어림금의대를 동원하여 태자의 등극에 반기를 드는 자를 추살하고 구족(九族)을 멸하라!" 추국태는 감격하여 기쁨의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태명어사대인의 천명을 받습니다." "삼십육수로대장군 모용천, 명을 받으라." 부복을 입은 모용천이 깊이 엎드렸다. "그대는 모든 수로와 수군을 동원하여 바다와 강을 통해 달아나 는 모든 반역도배(反逆徒輩)들의 수급을 잘라라!" "신(臣), 하늘을 받들어 태명어사대인의 천명을 따르오리다." "한림원 대학사 선경덕은 명을 받으라!" 선경덕이 나와 깊이 부복했다. "그대는 흥덕태자가 등극할 때 모든 사서(史書)와 문서(文書)를 한 자의 오차 없이 정확히 기록하고 작성하라!" "명...! 명을 받사옵니다." 잇달아 떨어지는 천명(天命), 그것은 실로 천하를 질타하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이윽고, 주천화의 싸늘한 시선이 이부시랑 사도진천에게 떨어졌다. "그대는 반대하는가?" 사도진천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핏기없는 음성으로 부복하며 말을 뱉았다. "어찌... 소신이... 감히...!" 허나 주천화의 안색은 얼음장을 깎아 놓은 듯 차가왔다. "그대는 태명어사대인의 명으로 백의낙향(白衣落響)할 것을 명하노라!" "마마...!" ② 아아! 격변(激變)의 밤(夜). 이제껏 한 번도 내려오지 않던 태명어사대인, 그 힘은 너무도 무 서웠고 돌발적이었다. 그것은 중원(中原)을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이었다. 그 엄청난 기세는 능히 천하를 뒤흔들 것이니 뉘라서 그 앞에 반기를 들 것인가! 밤(夜), 밤은 그렇게 충격의 폭풍을 안은 채 깊어가고 있었다. 태명어사대인의 서릿발같은 명령이 천하를 질타하던 같은 시각, 하북성(河北省) 연경(燕京)의 연왕부(燕王府). 일명(一名), 덕무왕부(德武王府)라 불리는 이곳에는 불붙는 듯한 매화(梅花)가 만발해 있었 다. 매화림(梅花林), 붉은 매화가 새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찬연히 알리고 있는 시각(時刻)이었 다. 객청(客廳)에 한 초로(初老)의 육십대 노인이 단정히 정좌해 있 었다. 청수하기 짝이 없는 용모(容貌)에 짙은 검미가 일견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말해준다. 그의 앞으로 한 폭의 화선지(畵宣紙)가 펼쳐져 있었다. 노인은 지그시 매화림을 응시하며 타오르는 불꽃같은 매화의 영상(影像)을 뇌리 깊숙이 담 고자 했다. 헌데 붓을 잡은 그의 우수(右手)가 돌연 은은히 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하얀 백지(白紙)에 엉뚱하게 검은 먹물이 떨어지며 번져 나가지 않는가! 노인은 검미를 치켜뜨며 미미한 의혹(疑惑)을 떠올렸다. "흠! 이상한 일이다. 왜 이리 몸이 떨릴까? 저 매화를 똑바로 볼 수가 없으니...!" 노인은 화선지를 딴 것으로 바꾼 후 재차 붓을 들었다. 허나 웬일인지 매화는 제모양을 갖출 수 없었다. 노인은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붓을 내려 놓았다. "아니 되는군! 틀림없이 무슨 일이 발생했어." 불현듯 그의 뇌리에 어떤 불길한 예감(豫感)이 어둡게 가로 질렀 다. 그는 심중(心中)의 불안(不安)을 떨치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헌데 그때였다. 오십대의 둥그런 얼굴을 지닌 남자가 빠른 걸음 으로 다가와 객청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전하! 어서 객청으로 드시지요.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육십대 청수한 노인, 그가 바로 덕무왕이었단 말인가? 연왕(燕王) 덕무왕으로 불리우며 왕족 중 가장 야심이 없는 인물 로 알려진 사람이 바로 그였다. 덕무왕은 입가에 자상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이부대인(夷部大人), 내 그렇게 사양했건만...." 오십대 남자, 검미 끝에 큰 점이 특징인 그가 바로 이부상서(夷部常書) 진표악(陣豹岳)이었 다. 진표악은 재차 허리를 굽히며 입을 떼었다. "전하 이미 일은 성숙되었습니다. 전하를 모시고자 하는 십여 명 의 문무관(文武官)들이 모였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덕무왕은 찰나지간 신광을 번뜩였다. 허나 미미한 미소를 담은 채 뒷짐을 지었다. "허참! 가세. 그대들의 뜻이 정 그렇다면... 민심(民心)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겠구만!" 진표악은 희색이 만연해졌다. '드디어, 드디어 전하께서 결심하셨구나. 이제 등극(登極)하시는 일만...!' 그의 얼굴에 밝은 태양이 환히 떠오르고 있었다. 연왕부의 후원에 자리한 거대한 산(山), 그곳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창검을 번뜩이며 조련 (調練)에 한창이었다. 아름드리 거목(巨木) 사이에 숨겨진 수천(數千)의 군사(軍士). 그들의 기세는 하늘의 기둥이라도 뽑을 듯 했고 모두들 일기당천 (一騎當千)의 용맹(勇猛)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락! 이때 말발굽 소리와 함께 덕무왕과 진표악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냥을 나서려는 차림인 듯 등에는 전통(箭筒)과 간편한 가죽옷을 걸치고 있었다. 또한 손에는 강궁(强弓)까지 들고 있 었다. 덕무왕은 한 차례 군졸들을 훑어본 후 진표악에게 물었다. "이부대인! 그래, 누구 누구가 모였는가?" 진표악은 입술을 축이며 말문을 열었다. "예, 우선 이부, 형부, 공부, 예부의 네 명의 상서(尙書)와 예전 황무오천성 중 사 인(四人)이 있습니다. 또한...!" "...!" "남칠성 북육성의 부주(府主) 십삼 인(十三人), 중경(重京)의 동 로군부(東路軍部)의 상장군(上將軍) 도극치(刀極致)!" "...!" "그리고 그외 서로군부(西路軍府)의 상장군 손풍달(孫風達), 또한...." 이 순간 말을 듣고 있던 덕무왕의 안색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겨우 그 정도의 인물들인가? 명친건흥군의 경호찬, 병부상서 이 광무 등은 어찌하여 빠진 것인가?" 진표악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은 모두 중도파의 인물들로 개입하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부시랑을 경무장에 보내놓았습니다." 덕무왕은 무겁게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호찬, 그는 꼭 데려가야 하오. 그는 일백 이십만 건흥군의 수장(首將)이오!" 따각... 따각...! 말은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갔다. 진표악은 바삐 덕무왕의 뒤를 쫓아 나가며 말을 뱉았다. "하지만... 그는...." 순간 덕무왕은 싸늘히 동천(冬天)을 바라보고 뇌까렸다. "그는 당금의 황상께 한(恨)이 많은 인물..." 진표악은 더욱 죽을 죄를 지었다는 듯 덕무왕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소신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천문왕자님께서 나타나신 이후...!" 덕무왕은 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군! 그는 천화의 외조부가 되니... 천문왕자, 그를 그토록 죽이려 했건만 오히려 그의 가공할 무공과 심기만 실증시켜준 셈이 아니던가? 대체... 천문왕자(天文王子) 그 놈의 심기(心機)는 어느 정도인지....' 그 순간 덕무왕의 표정은 유난히도 창백했다. 몸조차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내심 주천화를 두려워하는 것 이 역력했다. 허나 그의 두 눈은 찰나지간 야망에 이글거리고 신광이 폭사했다. '그러나 삼십 년(三十年), 삼십 년의 세월을 계획한 일이다. 내 가 불구(不具)의 몸인 것을 깨닫던 그날부터 나의 야망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 덕무왕, 그가 불구였단 말인가? 왼팔, 우측보다 약간 무거워 보이는 그의 왼팔이 눈에 들어왔다. '흐흑! 남이 보아서는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덕무왕은 씹어 삼키듯 입술을 짓깨물었다. 어쩌면 그는 같은 왕족과 형제들 속에서 놀림의 대상이 되었던 것 때문에 생긴 불쌍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헌데 그때였다. 덕무왕의 상념을 산산이 깨어버리듯 황급히 한 삼십대 청의사내 가 급히 뛰어와 진표악에게 읍했다. 그의 안색은 핏기 한 점 없을 정도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대인(大人), 큰일났습니다. 지금 명친건흥군과 황실어림금의대, 금의위까지 모두 움직이고 있습니다." 진표악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황급히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어서 명확히 아뢰어라!" 진표악의 음성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청의의 사나이는 숨을 삼키며 이마의 땀도 닦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태, 태명어사대인의 천명(天命)이 발동되었답니다. 대인!" 덕무왕은 찰나지간에 수 차례나 안색이 변하며 경악(驚愕)으로 외쳤다. "태명어사대인!" 진표악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으나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그, 그게 누가, 누가 허락했단 말이냐? 태명어사대인은 또 누구냐?" 한달음에 천 리를 주파할 정도로 그의 음성은 급박했다. 사내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을 뱉았다. "예! 성상께서 직접 제수하셨답니다. 태명어사대인은 천문왕자님께서 윤허를 얻으심으로...." 덕무왕은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벼락같이 뇌까렸다. "천문왕자? 천화(天華)가!" 진표악은 누렇게 변한 얼굴로 망연히 말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헌데 그 분께서는 어떤 일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치 충격이 컸던 것이다. 장한은 자신이 그 말을 전하게 된 것이 황송한 듯 어쩔 줄 몰라했다. "그뿐만 아니라 태자저하의 등극을 반대하는 자는 모조리 참수하 라는 태명어사대인의 천명이 떨어진 것으로...." 쿵! 순간 덕무왕과 진표악은 하늘이 내려앉는 듯한 경악에 부르르 몸 을 떨었다. 덕무왕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큰... 실수였다. 내 어찌 태명어사대인... 그것을 몰랐단 말인가!' '하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던 것이니 미처 염두에 두지도 못했지.' 그의 야망(野望), 불구였기에 천하를 제패하여 보려던 그의 야망 이 모래 위에 쌓여진 누각(樓閣)처럼 산산히 부서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이때 진표악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덕무왕을 응시했다. 그 의 두 눈에는 짙은 공포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덕무왕은 그를 한 차례 응시한 후 힘차게 말꼬리를 돌려챘다. "후후,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 칼을 뽑은 이상 돌이키지는 않는다." "그러시다면...?" "그대들을 위해서라도 한 번 맞딱뜨릴 수밖에... 이랴!" 요란한 말울음 소리와 함께 말굽에 차인 흙먼지가 요란히 일어났 다. 덕무왕이 앞쪽으로 치달려 가기 시작한 것이다. 진표악은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이 추진해 온 행동, 잘 되면 충의공신(忠義功臣)이요, 못되면 구족(九族)이 멸살될 일이 아닌가? 진표악은 입술을 꽉 깨물며 말머리를 돌렸다. "끼랴!" 다다다다다...! 말은 박차를 가하는 아픔을 이기지 못한 채 힘차게 산등성이를 넘고 있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으나 어느 땐가는 다시 지면으로 내려앉을 것임을 알면서도.... 한 칸의 정갈한 밀실(密室), 천장에 붙은 야명등이 유난히도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아 래 덕무왕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 쪽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좌수, 유난히도 그의 좌수는 무거워 보였다. 스스스... 슥! 이때, 덕무왕의 모습이 돌연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헌데 놀랍지 않은가! 덕무왕의 모습이 찰나지간에 대선생(大先 生)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어 약간은 처량한 듯한 덕무왕의 독백이 밀실에 나직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대선생 노릇을 하기 이십 년(二十年)... 천화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수모조차 치루었거 만...!" 뚝! 한 방울의 물안개가 그의 눈가에 맺혔다가 손으로 떨어졌다. 헌데, 덕무왕과 대선생은 본래부터 한 사람이었단 말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천하가 믿지 못할 기사(奇事)가 아닌가! 덕무왕의 독백이 조용히 이어졌다. "무예에 심취한 지 오십 년... 천화의 무공과 재질을 나는 못당한단 말인가?" 깊은 탄식이 그의 입술을 더욱더 파리하게 만들었다. "하늘은, 하늘은 왜 나를 낳고... 또 천화를 낳았단 말이냐!" 공허한 그의 외침, 그의 좌측 철수가 유난히 보기 싫게 느껴진 순간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절규였다. 아아! 천문왕자 주천화가 이토록 거센 파문을 몰고 올 줄은 대야 심가이며 효웅인 덕무왕조차 어찌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야망, 불타는 야망의 연경 덕무왕부, 중원천하(中原天下)는 실로 거센 폭풍에 휘감겨 가고 있었다. ■ 황 제3권 제24장 황금 눈빛을 가진 여인(女人)! ━━━━━━━━━━━━━━━━━━━━━━━━━━━━━━━━━━━ ① 대초원(大草原), 중원(中原)과 대막(大漠)을 경계하며 원대무비하게 펼쳐진 대초원. 휘이잉...! 대막을 할퀴며 달려 온 사공(沙工)이 뜨거운 열기를 토한다. 시 작과 끝이 영원히 함께 하는 이곳 대초원에 핏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스스스슷! 삭막한 바람이 또 한 차례 대초원을 휩쓸고 지나간 뒤 지평선 저 쪽에 홀연 하나의 인영(人影)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신 백의에 찬연한 보광(寶光)을 발하는 쌍검, 임풍옥수의 풍 도, 늠름한 미장부 인영은 바로 주천화였다. 그는 다소 피곤해 보이는 시선을 지평선 아늑한 곳에 던졌다. "이제 대막까지는 불과 하룻길!" 녹색의 융단처럼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이다. 문득 주천화는 시선 을 들어 서천(西天)에 걸린 태양(太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 의 두 눈에서는 태양보다도 더욱 강렬한 광채가 피어 올랐다. "며칠 후, 중원천하(中原天下)는 새로운 태양(太陽)을 맞게 된 다. 부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태양이 되길...!" 주천화, 그는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머지 않아 황제(皇帝) 의 보위에 오를 태자(太子), 그가 만천하를 밝힌 위대(偉大)한 성군(聖君)이 되어주기를....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이때, 돌연 지축을 뒤흔드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일었다. 전방 오십여 장 거리, 자욱한 흙먼지를 말아 올리며 무섭게 질주해 오고 있는 일단의 인마 (人馬)들이 있었다. 줄잡아 오십여 기(騎), 그들은 중앙의 붉은 말(馬)을 중심으로 일사불란 한 대오(隊伍)를 맞추고 있었다. 선두에 찢어질 듯 펄럭이고 있는 눈부신 깃발, 푸르른 바탕의 그 깃발에는 붉은 글자로 선명한 네 글자가 뚜렷이 보였다. <태양막부(太陽幕府).> 두두두두...! 능란한 기마술을 발휘해 그들은 순식간에 주천화의 눈 앞에 이르렀다. 한결같이 건장한 체격에 가죽 단삼을 입은 장한들로서 살결은 구 리빛으로 검게 그을려 짙은 야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가슴에는 태양을 상징하듯 하나의 둥근 원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끌고 있었다. 이때 주천화의 시선은 아까부터 대열의 중앙에 못박혀 있었다. 소녀(少女), 붉은 말을 타고 있는 유일한 홍일점인 소녀, 그녀의 저 폭발적인 야성미를 무엇으로 표현하랴? 흑진주같이 새까맣게 윤기 흐르는 갈색 피부에 무르익을 대로 무 르익어 슬쩍 스치기만 해도 터져버릴 것 같은 팽팽한 몸매. 실로 그녀의 전신에서는 살인적인 매력(魅力)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주천화의 시선이 그녀의 탄력 넘치는 몸을 지나 얼굴 위에서 정 지한 순간이였다. "아니, 저 눈빛은...!" 주천화는 경악했다. 소녀의 눈빛은 신비로울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을 발산하고 있는 황금의 눈, 바로 금안(金眼)이 아닌가? "비켜라! 소막주(少幕主)의 입성(入城)이시다!" 선두의 대한이 벽력성을 터뜨렸다. 주천화는 그제야 언뜻 제 정신을 되찾았다. "잠깐! 대열을 멈춰라!" 황금빛 눈의 소녀가 대한을 제지하며 주천화에게 다가왔다. 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 "...!" 주천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의 금안 속으로 빨려듬을 느끼고 내심 경악했다. 금안소녀의 입에서 매혹적인 교소가 터졌다. "호호호, 그대는 중원인(中原人)같은데... 본성으로 가는 길인가요?" "본성...!" 주천화는 얼떨결에 반문했다. 그러자 금안소녀는 뜻밖이라는 듯 짜랑짜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이제보니 당신은 백면서생(白面書生)이군요. 이곳에서 태양막부를 모르다니...!" "...!" 주천화는 침묵했다. 그는 오직 금안소녀의 두 눈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음! 저 소녀의 눈빛, 저것은 일종의 무공조예임에 분명하다. 나 로서도 견디기 힘들 정도니...!' 순간 금안소녀의 눈빛에 야릇한 광채가 스쳤다. "호호호, 대단하군요. 그대가 처음으로 본녀(本女)의 시공(視功) 을 받아낸 인물이에요. 마음에 드는군요." "...!" 주천화는 무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에게 먼저 마음에 드 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지 않는가! '후후후, 내가 마음에 든다고… 벌써 여러번 들어본 말이군!' 주천화는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저는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그토록...!" "무엄한 자! 감히 소막주에게 무공조예를 묻다니... 네놈의 심장 에 철판이라도 깔았는지 보아야겠다!" 허나 주천화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 한 대한이 벼락같은 사자 후(獅子吼)를 터뜨렸다. 두두두...! 동시에 대한은 둔탁한 대감도를 휘두르며 질풍같이 주천화에게 덮쳐들었다. "허어...이곳이 비록 중원이 아니긴 하나 어찌 이렇게 무례하단 말인가!" 주천화는 어이가 없는 듯 가볍게 탄식했다. "크하하하, 건방진 놈! 네놈이 중원의 천마대제라도 된단 말이냐?" 대한은 광소와 함께 대감도를 무자비하게 흔들었다. "야혈풍(野血風), 멈춰라!" 허나 그의 대감도가 막 주천화의 목을 쳐가는 순간 돌연 한 마디 싸늘한 교갈이 터져 나왔다. 대한을 제지한 것은 바로 금안소녀였다. 야혈풍은 흠칫 동작을 멈추며 의아한 듯 말했다. "소막주님! 저 자는 대막금천녀(大漠金天女)에게 무례를 범한 자이온데 어찌...!" 순간 금안소녀의 두 눈에서 뇌전(雷電)을 방불케 하는 강렬한 노 을빛 광채(光彩)가 폭사되었다. "야혈풍, 네가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감히 본녀에게 이의를 제기하다니...!" "...!" 야혈풍은 금안소녀의 그 무서운 눈빛을 대하자 갑자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 전의 흉흉하던 기세는 씻은 듯 사라지고 그의 눈에는 공포의 빛만이 떠올라 있었다. 주천화의 눈가에도 은은한 경악의 빛이 내비쳤다. '흠! 대단한 기세로군! 저 소녀가 태양막부의 소막주인 대막금천녀?' 그 순간 불현듯 주천화의 뇌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혹시 그럴지도...!' 주천화는 곧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그대가 익힌 것은 벽안옥천녀(碧眼玉天女)의 금안탈혼공(金眼奪魂功)이 아니오?" "그대가 어떻게... 본성(本城)의 조사(祖師)를?" 순간 금안소녀가 대경실색해 외쳤다. 주천화는 자신의 추측이 적 중했음을 직감했다. 그는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 분은 본인의 선사모(先師母)가 되시는 분이오." 금안 소녀의 전신에 다시 한 번 벼락같은 충격이 일었다. "그,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천마대제 주천화!" "후후, 그렇소." 금안소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정말... 당신이 그 유명한 인물이라니...!" 주천화는 늠연히 내뱉았다. "그렇소. 본좌는 천마대제요. 대막혈사탑을 방문하기 위해 이곳에 왔소." "아아! 대막... 혈... 사탑!" 이어지는 주천화의 말에 금안소녀는 돌연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 대막혈사탑. 대막 최고의 세력과 힘(力)을 가진 공포의 마탑. 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대막의 패자 자리를 놓고 태양막부와 암중으로 끈질긴 대립을 펼쳐오던 세력이었다. 이때 금안소녀는 마상에서 훌쩍 몸을 날려 주천화 면전에 내려섰 다. 이어 그녀는 다짜고짜 주천화의 손을 잡아 끌었다. "호호호, 공자님! 어서 성으로 가요. 본성은 마침 오늘 후계자를 뽑는 날이에요." "소... 소저!" 주천화는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해연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중원과는 다르나 하나 너무 당돌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허, 허나..." "풋!" 금안소녀는 주천화의 당황해 하는 모습이 재미 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는 대막금천녀, 일명 대막일점홍으로 불리는 태양막부의 소막주 탐리화(探里花)예요." 금안소녀, 탐리화는 주천화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놓기는 커 녕 오히려 서로의 몸이 밀착될 듯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가. "...!" 주천화는 일순 숨이 막혀옴을 느껴야 했다. 그녀의 아찔한 체향, 손끝을 통해 전해오는 뜨거운 열기는 둘째 치고 그녀의 웃음은 항거하기 힘든 마력(魔力) 그 자체였던 것이다. '으음! 정말 살인적인 매력이다. 흡사 빛나는 흑진주를 보는 것 같은 이 야성미는...!' 주천화는 절로 자신이 빨려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자 금안 소 녀 탐리화가 재차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공자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주천화는 내심 흠칫하며 고소를 금치 못했다. '내가... 후후후, 여인에게...? 처음이군!' 순간 주천화는 빙긋이 웃었다. "후후후, 그대는 내가 본 여인 중 가장 매력적인 여인이오." 탐리화는 그 말에 은은한 홍조를 떠올렸다. "정말? 중원에 있는 공자님의 부인은... 더욱 뇌쇄적인 미모라던데...." '훗! 청매를 말하는군. 청매가 이곳까지 알려지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주천화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탐리화가 어떤 기대의 눈빛을 담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정말 제가 그 분보다 더 예쁜가요?" 주천화는 담담히 웃었다. "후후후, 내가 보기엔 중원의 옥(玉)누님과 청매. 그리고 그대 탐리화, 이렇게 세 사람이 천하삼미(天下三美)일 것이오." "피이! 괜히 할 말이 없으니까 둘러대기는...." 탐리화는 입을 삐죽였다. 허나 그녀의 얼굴에는 더 없이 환한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천하삼미(天下三美), 그것은 우연치 않게도 이렇게 급조(急造)되었다. 주천화는 이윽고 마음을 굳혔다. "자, 이제 그만 가봅시다. 그렇지 않아도 선사께서 유지가 계셨었소." 주천화가 태양막부로 가겠다는 말을 하자 탐리화는 크게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호호호...! 아버님께서도 당신이 오셨다면 크게 기뻐하실 거예요." 두 사람, 중원의 영웅(英雄)과 대막제일의 미녀(美女), 그들은 이렇게 만났다. ② 태양막부(太陽漠府), 대초원의 중앙에 웅대무비하게 세워진 한 채의 성(城), 이곳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태양막부는 방원 오백여 장의 초지(草地)에 걸쳐 드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또한 그 넓은 초지를 삥 둘러싸고 빽빽히 들어찬 수목(樹木)들이 천연적인 성벽 구실을 했다. 더구나 중간 중간에는 무서운 늪지대가 펼쳐져 있어 호보하(護褓河)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대자연의 힘을 빌어 축조된 천연의 요새와도 같았다. 태양막부 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막사들의 중앙에 한 채의 거대한 막사 가 자리잡고 있었다. 태양막부의 막부주(漠府主)가 기거하고 있는 곳이었다. 은은한 등불이 실내를 밝히고 있는 거대한 막사 안에 세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 다. 주천화와 탐리화, 그리고 육십대로 보이는 칠척거구의 위맹한 노인이었다. 두 눈에서 번갯불같은 검광을 내뿜고 있는 칠척거구의 노인은 바 로 이곳 태양막부주인 탐리목(探里木)이었다. 탐리목이 주천화의 두 손을 굳게 쥐며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잘 오셨소. 중원의 천마대제, 천하제일고수 주대협이 본막부와 깊은 인연이 있을 줄이야! 이 탐리목 생애에 이렇게 기쁜 날은 처음이오. 으하하하!" 주천화는 격의없는 탐리목의 태도에서 뜨거운 정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소이다. 막주부! 저는 대막혈사탑을 찾으러 온 사람이오. 막주부의 안내를 부탁하오." 문득 탐리목은 웃음을 그치고 침중하게 말했다. "대제! 사실 화(花)아가 본 막부의 고수들을 이끌고 초원에 나갔 던 것도 기실 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함이었소. 놈들은 호시 탐탐 본막부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형편이오이다." "...!" 주천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탐리화가 불쑥 끼어들었다. "호호호, 공자님! 곧 본 막부에서 신임막부주를 뽑는 행사가 벌 어질 거예요. 공자님께서 필히 참관해 주시리라 믿어요." 탐리화의 애교어린 음성(音聲)에 이어 탐리목도 정중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대제께서는 본막부 최대의 귀빈이시니 갈 길이 바 쁘시더라도 꼭 참관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라오." 주천화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선사께서도 훗날 이들 을 만나면 도움을 주라는 유지가 계셨으니... 이왕 도와줄 바에야 철저히 도와주자!' 허나 주천화는 마음을 굳힌 후 쾌히 대꾸했다. "좋소이다. 헌데 신임막부주는 어떤 방법으로 뽑는 것이오?" 탐리목이 대답했다. "본 막부에는 한 군데 성역(聖域)이 있소이다. 그곳은 본막부의 조사(祖師)이신 벽안옥천녀께서 만들어 놓은 곳으로써 대대로 성역이 되어 왔습니다." "...!" "바로 지하사궁(地下沙宮)이라는 곳입니다. 그곳은 전대(前代)의 오대장로(五大長老)가 지키고 있는 본막부의 최대 밀지(密地)이지요." 주천화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대대로 본막부의 막부주가 되기 위해서는 오대장로가 지키고 있는 관문을 거쳐 그곳의 칠 채옥검(七彩玉劍)을 취해야만 진정한 막부주가 되는 것이 관례입니다." "음...!" 주천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때 막사 안으로 한 명의 인물이 들어섰다. 준수한 용모를 지닌 사십대의 중년인, 그의 가는 눈 속에서는 끊 임없이 광채가 번뜩이고 있어 그의 심계(心計)가 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탐리목과 탐리화를 향해 정중히 허리 숙이며 입을 열었다. "소막주님! 사궁(沙宮)에 들어가실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준비를...!" "...!" "...!" 순간 탐리목 부녀(父女)의 얼굴에 언뜻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갔다. 주천화가 그것을 못볼 리 없었다. '흠! 무엇인가 있군!' 이때 탐리목은 일부러 호탕하게 웃으며 중년인을 주천화에게 소개했다. "허허허, 대제! 이 사람은 본막부의 부막주이오." 그러자 중년인은 곧 주천화를 향해 정중히 응했다. "달리위진(達里慰鎭), 천마대제를 뵙습니다!" 주천화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는... 야욕(野慾)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군!' 그는 상대에게서 풍기는 기도를 직감(直感)하며 늠연히 입을 열었다. "천마대제 주천화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막주는 짧게 내뱉은 뒤 다시 탐리화를 향했다. "소막주님! 어서 지하사궁으로 가시지요." "그, 그래요." 탐리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안색은 밝지가 못했다. 바로 이때 그녀의 귓전으로 주천화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소저! 그대는 벽안옥천녀, 그 분의 진전을 어느 정도 이어 받았소?) 뜻밖의 전음에 탐리화는 주춤했다. 그녀는 약간 굳은 안색으로 대꾸했다. (어느 정도는....) "옥(玉)을 아시오?" 돌연 주천화가 전음이 아닌 실제 음성으로 물었다. 탐리화는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이 분은 지금 나의 무공성취를 알아내려고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일까...?' 그녀는 곧 나직이 대꾸했다. "예!" 그러자 주천화는 두번째 질문을 던졌다. "천(天)을 아시오?" 탐리화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금(金)을 아시오?" 연이은 질문, 탐리화는 선뜻 대꾸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직...!" 순간 주천화가 은밀히 전음을 잇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전음이 이어지는 동안 탐리화의 표정은 수차례나 뒤바뀌고 있었다. 감탄과 경악의 표정이 그 짧은 순간에 실로 수시로 교차되고 있었던 것이다. "...!" 이때 탐리목과 부막주 달리위진은 탐리화가 걸음을 멈추고 표정 이 계속 교차하는 모습에 그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특히 부막주 달리위진의 표정에는 어떤 불안의 빛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그들이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바로 이 순간 주천화는 전음으로 태양막부의 시조 인 벽안옥천녀의 무공을 전수하고 있었다. 주천화는 이미 벽안옥천녀의 무공을 완벽히 익혔 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탐리화의 무공 약점(弱點)을 보충해 줄수 있었던 것이다. (뇌우(雷雨)는?) 주천화의 전음이 계속 이어졌다. 탐리화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주천화의 전음이 다시 이어졌다. 이때 탐리목은 언뜻 주천화의 의도를 짐작한 듯 부막주 달리위진에게 짤막히 명했다. "부막주, 먼저 나가 있게. 천마대제께서 못난 여식에게 가르침이 있는 모양이네." "알겠습니다. 그럼...!" 부막주 달리위진은 마지 못해 먼저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주천 화의 전음이 끝난 뒤 탐리목이 눈을 빛내며 나직이 말했다. "사실 부막주는 야심이 큰 자로서 본막부의 실권은 물론 중원까지 넘보고 있는 처지요." "...!" 주천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신비로운 미소(微笑)를 떠올렸다. "후후, 안심하시오. 부막주, 그가 아무리 야망이 크다 해도 소막 주 탐리화 소저는 이제 장로들을 물리치고 진정한 태양막부의 막주가 될 것이오." 의미심장한 미소, 주천화는 담담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양막부의 동쪽 후미진 곳, 그곳에는 방원 오십여 장 정도의 넓은 공지(空地)가 펼쳐져 있 었다. 헌데 공지에 깔려 있는 것은 풀(草)이 아니라 은빛 모래(沙)였다. 유독 이곳만이 모래 사장으로 덮여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모래사장의 중간에는 기이한 회오리가 일고 있어 모래 를 그곳으로 잔뜩 휘말려 올리고 있었다. 모래로 덮인 공지, 이곳이 바로 태양막부의 성역인 지하사궁(地 下沙宮)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이다. 지금 공지 앞에는 한 명의 여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착잡한 표 정으로 공지 중앙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는 탐리화였다. 그녀의 왼쪽에는 역시 공지를 응시한 채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 었다. 탐리목과 주천화였다. 연신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탐리목이 문득 입을 열었다. "화아야! 부디 마음을 굳게 먹고... 꼭 성공하기를 빈다." 주천화가 탐리화 대신 그를 위로했다. "막주! 너무 심려마시오. 소막주의 무공 정도면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순간 탐리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아버님! 공자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아무 걱정 마세요. 소녀는 결코 아버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어요." "그래, 그래야지...!" 탐리목은 딸의 모습이 몹시 대견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탐리화의 눈길은 다시 주천화에게 돌려졌다. 주천화를 바라보는 그녀의 흑요석같은 두 눈은 깊은 애정으로 충만하였다. "공자님, 제가 나올 때까지 꼭 기다려 주셔야 해요." "여부가 있겠소." 주천화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했다. "그럼, 나중에 뵙겠어요." 탐리화는 부친과 주천화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신형은 순식간에 모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화아야, 부디...!" 탐리목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주천화는 그가 딸을 생각하는 마 음이 유난히도 각별함을 느꼈다. 그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막주! 걱정하지 마시오. 태양막부의 대(代)는 반드시 소막주가 잇게 될 것이오." 탐리목은 그제서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대제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 늙은이 마음이 한결 놓입... 헉!" 탐리목은 웃다 말고 갑자기 경악의 신음성을 터뜨렸다. 아! 주천화의 신형이 어느새 모래 회오리를 향해 빛살같이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대제께서 어찌...!" 탐리목은 놀라 외쳤다. 그 순간 주천화의 전음이 탐리목에게 들려왔다. (막주! 안심하고 기다리시오. 본인이 소막주를 도울 것이오.) 탐리목의 안색이 확 변했다. (대제, 그, 그것은 본막주의 규칙을 어기는....) (하하하, 본인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걱정마시오. 내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것이오.) (아아, 대제...!) 탐리목은 얼굴 가득 감동의 빛을 떠올렸다. 그 순간 주천화의 모 습도 모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었다. 주천화, 그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탐리화를 도우려는 것이란 말인가...? 지하사궁(地下沙宮), 사막과 너무도 흡사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다. 단지 사방 삼십여 장 넓이의 광장을 꽉 채운 모래와 태양빛이 있을 뿐이었다. 괴이했다. 어디에도 빛을 뿜는 물체는 없거늘 지하사궁은 밝은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그 바닥에 깔려 있는 모래는 모두 십 장 간격으로 세 가지 색(色)을 이루고 있었다. 찬란한 금사(金沙)와 핏빛 선렬한 적사(赤沙) 그리고 거무스름한 흑사(黑沙)가 바로 그것이었다. 헌데 무언가 신비한 기운이 희뿌연 광채(光彩) 속에 은은히 흐르 고 있어 지하사궁 전체는 실로 환상적인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곳에 불현듯 한 개 인영이 날아 들었다. 바로 탐리화였다. 탐리화는 금광이 찬연한 금모래 위에 사뿐 내려서며 흑진주같은 눈망울을 굴렸다. 일순 그녀의 시선이 전면에 우뚝 고정되었다. "조각상...!" 전면, 한 개 실물 크기의 여인상(女人象)이 교교로운 자태로 세워져 있었다. 벽안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흡사 산 사람을 대하듯 정교했 으며 형용키 힘든 신비감이 연신 풍겨 나오고 있었다. 헌데 기이 한 것은 여인상이 가깝게도 보이다가 멀게도 느껴진다는 것이다. 환상(幻想)인가? 이곳에도 신기루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때 탐리화는 미세한 격동의 외침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사님이신 벽안옥천녀의 상이다." 벽안옥천녀라면 바로 천마수라대제의 부인이기도 하지 않은가? 탐리화는 조각상을 살피다 또다시 희열에 가득한 안광(眼光)을 뿜어냈다. "아! 칠채옥검(七彩玉劍)도...!" 칠채옥검은 벽안옥천녀상의 발 근처에 소중히 놓여 있었다. 탐리 화는 곧 그곳을 향해 신형을 움직였다. "아앗! 이, 이것은?" 허나 그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 발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아! 놀랍지 않은가! 그녀가 딛고 선 금모래들이 마치 개미떼인 양 스물스물 그녀의 발목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것은 자금적백사(磁金赤白沙)!" - 자금적백사. 전설상의 무서운 죽음의 모래였다. 병장기(兵仗器)를 지닌 인물 에게만 마치 살아 움직이듯 달라 붙는다. 그리고는 채 일각이 되 기 전 전신혈도를 봉쇄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는 것이었다. 한편 탐리화가 내려선 사궁의 한쪽에서는 주천화가 조용히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음! 저들이 태양막부의 장로(長老)들이군!' 지금 그는 신형을 빛과 같이 변화시키고 있었다. 완전히 사궁 안 의 빛 속에 흡수되어 전혀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 바로 벽안옥천녀상이 세워진 받침대의 밑 이었다. 은은히 오색 기광(奇光)을 뿜어내고 있는 다섯 명의 노인 들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백발의 나이를 짐작키 힘든 그들은 지금 모두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탐리화의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주천화는 이내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후훗! 태양막부의 성역(聖域)에 오행사상사진(五行四像沙陣)이 펼쳐져 있을 줄이야. 소막주가 고생을 좀 하겠군!' 주천화는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그렇다! 지금 탐리화는 오행사상사진에 걸려 들었다. 때문에 그 녀는 진(陣)너머 다섯 노인들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탐리화의 나직한 교갈이 터져 나왔다. "금안탄강기(金眼彈 氣)!" 그녀의 두 눈이 순식간에 금빛으로 물들었다. 촤라라락...! 순간 요란한 굉음이 일며 그녀 전신에 달라 붙었던 금모래들이 모조리 튕겨졌다. "호오! 이곳에 이런 함정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는 걸?" 이어 그녀는 재빨리 신형을 날려 자금적백사 너머 핏빛 모래를 밟았다. "아악!" 허나 그 순간 탐리화는 뾰족한 비명을 터뜨려야 했다. 돌연 엄청 난 화기(火氣)가 그녀의 전신을 엄습해 들고 있었다. 찰나지간에 그녀의 겉옷이 화르륵 소리를 내어 타올랐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주천화의 두 눈에 은은한 경악이 떠올랐다. '저것은... 화마염사(火魔炎沙)!' 화마염사는 실로 천하의 어떤 물체라도 태워버린다고 알려진 가공할 불길이었다. "천마빙한신공(天魔氷寒神功)이다." 탐리화는 입술을 깨물며 야무진 일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서 무서운 한기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기는 이내 화마 염사의 불길을 억누르며 오히려 주위의 모든 것을 얼음으로 만들 정도였다. 이 광경에 주천화는 내심 고소가 치밈을 금치 못했다. '훗! 소막주가 선사(先師)의 무공을?' 지금 탐리화가 시전한 무공은 바로 천마수라대제의 무공이었다. '그렇겠지! 선사모의 무공을 이어 받았다면 선사의 무공도 약간은 익혔겠지...!' 주천화는 안도했다. '내가 쓸데없이 걱정한 것일까? 허나....' 주천화는 이왕에 따라온 김에 끝까지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탐리화가 지하사궁의 관문을 통과하고 있는 이 순간 부막주 달리위진의 거소로 한 가닥 백영이 쏘아들고 있었다. "부막주님!" 백영은 밀실로 쏘아 들어가기 무섭게 허리를 접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그, 그것이 소막주가 이미 삼관문을 통과하고 대막오행로(大漠 五行老)의 시험마저 통과했습니다." "무, 무엇이?" 달리위진의 눈이 커졌다. "으음! 그 계집애의 능력이 그 정도였단 말이냐?" 달리위진에게 보고하는 내용은 탐리화가 무사히 막주로 오르는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 계집애는 아직 사궁에 있느냐?" "예!" 백의인이 허리를 접었다. "마악 오행로의 시험(試驗)을 통과하는 것을 보고 달려오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쯤 지하사궁을 나오고 있겠군." "예!" "그렇다면...!" 달리위진의 눈에 기이한 섬광이 번뜩였다. 이들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따라와라!" 달리위진의 신형이 소리없이 사라졌다. 무언가 음모의 냄새를 풍기는 움직임이었다. 한편, 탐리화는 칠채옥검을 허리에 차고 기쁨에 충만한 빛으로 지하사궁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후후, 저 기뻐하는 모습이란 마치 어린아이같이 천진하군!' 그 모습을 은밀히 지켜보는 주천화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 올랐다. 탐리화는 과연 그의 예상대로 무난히 막주의 관문을 통과 하고 칠채옥검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었다. 탐리화는 너무도 큰 기쁨에 지하사궁을 나오는 길이 길게만 느껴 질 정도였는데.... ■ 황 제3권 제25장 태양(太陽)의 딸 ━━━━━━━━━━━━━━━━━━━━━━━━━━━━━━━━━━━ ① 탐리화는 지하계단을 올라와 마악 모퉁이를 돌아 들고 있었다. 파파파파팟...! 헌데 바로 이 순간,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한 가닥 은빛 광망이 그녀에게 폭사해 오지 않는가? 탐리화는 지하사궁에서 자신을 엄습할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던 차라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앗!" 그녀의 입에서 경악성(驚愕聲)이 터지고 순식간 그녀의 안색이 굳어졌다. 은빛 암기는 이미 그녀의 가슴과 오개대혈을 동시에 압 박해 오고 있었다. 휘이잉! 암기의 날아오는 방향이 기묘하기 이를데 없는 데다 그 배합 또 한 절묘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나의 진을 형성한 채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탐리화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절세의 무공을 지닌 그녀였지만 방심하고 있어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실로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소저, 당황하지 마시오. 암기는 소저의 몸 한 치 앞에서 떨어질 것이오. 놀라지 말고 호신강기로 막아내는 척 하시오.) 헌데 돌연 한 가닥 전음이 전광(電光)처럼 그녀의 귓 속으로 파 고 들지 않는가? 바로 주천화의 음성이었다. 파파팍! 순간 그녀의 몸에 박혀오던 암기들이 일제히 무형의 장벽에 가로막힌 듯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결코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천화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도우려는 의도를 짐작한 것이다. "누구냐?" 그녀는 태연히 전면을 쏘아 보았다. 그녀의 이런 태도는 그녀 스 스로 위기를 극복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으음! 마혼신정(魔魂神錠)은 특별히 구한 것으로 호신강기마저 종이 뚫듯 파괴하는 것인데 이렇게 간단히 막아내다니...!" 한 인영이 모퉁이를 돌며 나왔다. "당, 당신은...." 탐리화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나타난 자는 바로 부막주 달리위진이 아닌가?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더구나 나를 암습하다니!" 탐리화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흐흐흐...!" 달리위진이 음침한 괴소를 흘려냈다. "당신은 이곳이 절대금역인 것을 몰랐단 말이오?" 탐리화가 매섭게 호통쳤다. "흐흐흐,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아무도 모를 것이 고...!" "무엇이? 호호호, 내가 보았는데 말이냐?" "흐흐흐, 너는 입을 열지 못한다!" "무엇이?" 탐리화는 달리위진의 눈에 악독한 빛이 떠올라 있음을 보고 해연히 놀랐다. "살인멸구를 하겠다는 뜻이냐?" "똑똑하군!" 달리위진이 다가왔다. 무서운 기세가 노도처럼 들끓었다. "호호호, 너는 내가 이미 막주가 되기 위한 관문을 거쳤음을 잊었느냐?" "...!" "그 관문을 거친 내가 너의 무공에 당할 성 싶으냐?" "흐흐흐, 과연 그럴까?" 달리위진의 태연한 태도에 탐리화는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전의 나라면 물론 저 자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허나 나의 무공 은 주공자의 도움으로 옛날과는 틀리다!' 그녀의 눈에 의혹과 불안이 함께 떠돌고 있었다. '저 자가 그것을 짐작 못했을 리는 없을텐데...!' "흐흐흐, 맹룡(猛龍)이 아니면 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너는 내가 자신도 없이 너를 막은 줄 아느냐?" 탐리화가 잠시 염두를 굴리고 있는 순간 달리위진이 자신감에 넘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 "너는 결코 막주로 오를 수 없다! 네가 죽어야만 나의 야망이 이 루어진다. 물론 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달리위진이 한 손을 쳐들었다. 순간 그의 장심에 기이한 홍광이 어리지 않는가? "그, 그게 무어냐?" 탐리화는 달리위진의 전신에서 이는 삼엄한 기세에 주춤했다. "마환파라장(魔環破羅掌)이라는 것이다!" 달리위진이 득의의 빛을 떠올렸다. "마... 환... 파라장!" 탐리화의 안색이 굳어졌다. - 마환파라장. 바로 천하오대마공 중 일위로 꼽히는 가공 무쌍한 절대마공이다. "간다...!" 소름끼치는 음성과 함께 시뻘건 불길과 같은 열류가 탐리화의 전신을 휘감았다. 마환파라장의 위세는 초강력한 것인지라 탐리화로서는 감히 맞받 을 수가 없었다. 헌데 막 몸을 피하려 하는 그녀의 귀에 주천화의 전음이 들려오지 않는가? (소저, 당황하지 말고 마주 쳐내시오!) "...!" 당황해 하던 탐리화가 주천화의 말대로 일장을 밀어냈다. 꽈릉! 무서운 폭음(爆音)이 진동했다. 사면(四面)의 석벽이 마구 진동했다. "으! 이럴 수가!" 답답한 신음과 함께 달리위진이 밀려났다. 그의 눈에 경악과 불신이 떠올라 있었다. 그의 눈 앞에 탐리화가 태연히 서 있지 않은가? "그, 그것은 무, 무슨 무공이냐?" "호호호...!" 탐리화는 자신과 똑같은 질문이 이번에는 달리위진의 입에서 흘 러나오자 통쾌하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네깟 놈은 알 필요도 없다!" 그녀는 짐짓 조소를 던졌으나 기실 그녀도 달리위진의 마환파라 장을 막아낸 무공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후후...!' 허공 중에 몸을 감추고 있는 주천화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탐 리화의 태도가 너무도 그럴 듯 했던 것이다. "무엇이!" 이때 달리위진이 악독한 눈빛을 떠올리며 또 다시 덮쳐왔다. "여기도 있다!" 꽈르르...! 순간 그녀의 좌측에서 세 가닥 암경이 쏘아져 오지 않는가! '숨어있는 자들이 또 있었구나!' 탐리화가 내심 당황성을 터뜨렸다. 벼락치는 폭음과 함께 창졸간 에 무서운 기세가 그녀의 몸을 덮어 왔다. 피할 수 있는 방위도 없었고, 감히 맞받아 낼 수 있는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소저! 시간이 없소. 오히려 저들이 한번에 덤빈 것이 잘된 듯하오!) 이때 당황해 하는 그녀의 귀에 또 다시 주천화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단 일격에 저들을 격퇴시킬테니 소저는 그저 태연히 소저의 무공인 척 하시오!) "...!" 그녀는 황급히 전음이 들려오는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허나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탐리화가 가만히 서 있자 암습자들의 눈이 빛을 발했다. "잘 생각했다. 곱게 죽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무서운 잠력이 그녀의 몸을 덮었다. 펑! 파아앙...! 둔탁한 폭음이 일었다. "왁!" "크윽...!" 헌데 비명을 토하며 나가 떨어진 것은 오히려 암습자들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달리위진의 눈에 극도의 경악이 가득했다. "호호호...!" 탐리화가 살기를 머금고 다가왔다. "으으...!" 달리위진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소저, 그 자를 죽여서는 안되오. 그 자는 비록 야심을 품고 있 었으나 일단 충정을 바치면 죽음을 불사할 인물이오!) 주천화의 전음이 그녀의 귀로 파고 들었다. (잘 달래서 훌륭한 협조자로 만드시오. 더구나 태양막부에는 그 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으니 더욱 죽여서는 안되오.) "...!" 탐리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전신(全身)에서 살기(殺氣)가 걷혔다. "부막주!" 그녀의 음성에 부드러움과 뜨거운 진정이 넘쳐 흘렀다. 달리위진 은 그녀가 태도를 바꾸자 의혹의 눈을 들었다. "나는 여인의 몸, 기실... 막주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점이 많아요!" 달리위진의 눈이 좁혀졌다. 탐리화의 태도에서 어떤 진정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저를 도와 주시지 않겠어요?" 탐리화가 의외의 부탁을 던지자 그의 눈이 더욱 좁혀지다 크게 떠졌다. "나는 부막주의 능력을 믿어요. 기실 부막주는 내가 여인이기 때 문에 여자의 밑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요?" "그, 그...!" 달리위진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일 줄 알았던 탐리화가 오히려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가? 탐리화는 그 말을 끝으로 가만히 달리위진을 응시(凝視)하고 있 었다. 그 눈에는 한점의 가식도 없는 뜨거운 진정만이 엿보였다. 털썩! 달리위진의 무릎이 굽혀졌다. '이, 이 분은 남자못지 않다.' 그의 입에서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막, 막주! 죽여 주십시오." "호호호, 누가 부막주를 죽인다고 했나요? 도와달라는 사람에게 죽여달라니...!" 탐리화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아아...!" 달리위진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옴을 느꼈다. 그것은 죽어도 변치 않을 충정이기도 했다. '받치리라! 이 남자 못지 않은 여걸(女傑)에게 나의 생명을 받치리라!' 달리위진, 탐리화를 죽이려 하다가 오히려 그녀에게 깊이 감복하여 이렇게 결심하고 있었 다. (공자님! 어때요? 내 연극이...?) 탐리화가 주천화가 있음직한 곳에 전음을 보냈다. (후후...!) 주천화가 내심 실소를 머금으며 몸을 날렸다. ② 태양막부, 태양막부는 온통 축제(祝祭)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만월(滿月)이 온누리를 밝히고 있었고 타오르는 횃불이 사방에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펑... 퍼엉! 축제를 더욱 열광으로 몰아넣은 폭죽이 솟아 올랐다. 그때마다 찬란한 불꽃이 천공을 수놓고 있었다. "와아...!" "와...!" 태양막부의 용사들, 그들은 오늘만큼은 맘껏 마시고 즐길 수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고 호탕한 대소가 연신 터져나오고 있었다. 징... 징징! 폭죽에 맞춰 요란한 징소리도 울려 퍼진다. 그 속에서 대초원의 용사들은 지금 한창 마주(馬走) 경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두두두...! 히히힝...!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리고 수십 대의 일인승 마차가 용사들을 태운 채 동시에 지축을 울렸다. 이 밤, 바로 신임막부가 취임한 경사스러운 날인 것이다. "와아...!" "달려라...!" 경기를 관망하는 용사들의 터지는 응원소리, 대초원은 순식간에 그야말로 뽀얀 먼지와 뜨거운 열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영웅막(英雄幕), 이곳은 주천화를 위하여 새로 만들어진 막사였다. 주천화는 침상 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곳의 일도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그의 눈은 물처럼 고요했다. '대막혈사탑, 이제 그들만 평정하면 중원무림에 불안요소로 남아 있던 신비사대세력은 모두 마무리되는 셈!' 주천화의 입가에 문득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세인들은 단순히 내가 흑노의 보복을 위해 움직인다고 여 기겠지만... 결코 그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아! 주천화의 계획은 바로 그것이었던가? "허나, 흑노를 공격한 자들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다. 십중팔구 는 금광회의 대선생 짓이 확실하지만!" 금광회를 떠올리던 그의 안색(顔色)에 문득 안타까움의 빛이 떠올랐다. '대선생, 작은 할아버님, 제발!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말아주시기를...!' 무슨 뜻이란 말인가? 주천화는 이미 대선생의 정체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사사삭! 이때 가볍게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제, 주무세요?" 낭랑한 옥음(玉音)과 함께 한 인영(人影)이 들어섰다. 바로 탐리화였다. 헌데 들어선 그녀 의 모습은 실로 보는 이의 심혼을 뒤흔들 만큼 선정적이지 않는가? 늘어진 흑발이 머리에서 출렁이고 한 잔의 술을 먹었음인지 그녀 의 얼굴에는 은은한 홍조가 어려 있었다. "막주, 늦은 시각에 웬일이오?" "호호, 늦다니요. 지금 천막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가가(哥哥)뿐인 걸요." '가가?' 가가란 다정한 사이에서나 부를 수 있는 호칭이었다. "...!" 주천화는 가슴이 진탕되어옴을 느꼈다. "가가! 저는 우연히 가가를 만났지만...!" 탐리화가 주천화의 침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옴에 따라 비 릿한 소녀의 체향이 주천화의 코를 찔렀다. "저는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어요." "으음...!" 주천화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일은 염두에 두지 마시오. 선사(先師)의 유시에 따른 것 뿐이니...!" "허나...!" 탐리화가 주천화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나란히 침상에 걸터앉은 그녀는 똑바로 주천화를 응시했다. '음...!' 주천화는 그녀의 눈에 기이한 열정이 떠도는 것을 느끼고 내심 탄식같은 신음성을 흘려냈 다. "저는 그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어요!" "...!" "해서... 소녀는 곰곰히 생각해 봤어요." "...?" "무엇으로 그 은혜를 갚을까 하고요!" "음...! 그 일은 신경쓰지 말...!" 주천화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탐리화의 희고 가는 손이 가만히 주천화의 입을 막아온 것이다. "저는 한 가지 결론을 얻었어요." "...?" 스르륵! 탐리화가 살며시 주천화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막...!" "제 모든 것을 드리겠다고...!" 그리고 주천화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탐리화가 빠르게 말한 후 주천화의 목을 두 팔로 안아오지 않는가? "가가,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주천화가 망연하여 입을 열려 했으나 열 수 없었다. "흡!" 그의 입이 촉촉히 젖은 탐리화의 붉은 입술에 막혀버린 것이었다. '헉!' 풍만한 가슴이 주천화의 가슴을 압박해왔다. "...!" 주천화는 머리가 텅 비어옴을 느꼈다. 뜨거운 피가 들끓었다.허 나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밀어냈다. "가가...!" 떨어져 나간 그녀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안개처럼 번졌다. "막주, 나는...!" 주천화가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스르륵! 헌데 탐리화가 돌연 입고 있던 경장을 풀어내리지 않는가? 순간 아아! 눈부신 여체가 주천화의 눈을 찔러왔다. 놀랍게도 탐 리화는 속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아닌가! 완벽히 드러난 여인의 나신, 정녕 이토록 완전무결한 아름다움도 있는 것일까? 아무도 믿지 않을 눈부신 아름다움이었다. 학처럼 긴 목, 가냘프 면서도 단단한 동그란 어깨 그리고 풍만한 젖가슴의 곡선이 실로 환상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신비의 삼각밀림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음...!" 주천화의 입에서 담담한 신음성(呻吟聲)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에 땀이 쥐어졌다. "가가!" 탐리화가 몽롱한 음성으로 주천화를 불렀다. "그래요. 제가 말을 잘못한 것 같아요." "...!" "저는 가가의 은혜를 갚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솔직히 가가의 사랑을 받고 싶어요." 여인의 대담한 고백, 어찌 사나이의 가슴이 흔들리지 않으랴! 와락! 탐리화의 나신이 주천화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가가, 사랑해 주세요." "음...!" "활활 태워주세요. 가가!" 그녀의 뼈조차 없는 듯한 기다란 팔이 억세게 주천화의 허리를 잡았다. 여인의 요구, 그것을 거절할 만큼 주천화의 심장이 차디찬 것은 못되었다. "리화...!" 뜨거운 마음이 전달되었다. 스르륵! 주천화의 옷도 흘러내렸다. 이 순간 대초원의 만월은 너무도 부드럽게 천공을 밝히고 있었 다. "아아...!" 탐리화의 호흡이 높아갔다. "음...!" 주천화의 호흡도 거칠어져 갔다. "아아...!" 탐리화는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주천화의 건장한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앗!" 일순 그녀의 가녀린 손이 주천화의 등을 파고 들었다. 그 손에 땀방울이 물처럼 맺혀 있었고 환희의 기쁨이 안개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아... 파... 요!' 탐리화는 한순간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허나 그녀는 고통을 고통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바로 기다리던 순간이었기에.... "아아...!" 주천화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탐리 화의 나신이 활처럼 휘어졌다. 무서운 충격이 그녀의 은밀한 곳을 넘나들고 있었다. 허나 고통은 점차 견딜 수 없는 기쁨으로 성장하고... 은밀한 곳 이 부끄러운 파문을 부르고 있었다. 주천화의 손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탐리화의 터질 듯한 육봉(肉峰)이 그의 손에서 잔인하리만큼 유린되고 있었다. "헉헉!" 주천화, 그는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추악한 혈육끼리의 상잔도... 그리고 슬퍼해야 할 흑노의 죽음도.... 해서 이토록 쉽게 마음을 열고 여체를 탐닉하는가? 영웅막, 대초원의 열풍에 휩쓸리지 않던 유일한 이곳도 뜨거운 열풍에 휩싸이고 있었다. 밖에보다 오히려 더욱 뜨거운 열풍이.... "가가! 고마워요!" "...!" 탐리화는 젖은 눈으로 주천화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온 세상을 얻기라도 한 듯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충만해 있었다. "가가! 우리 밖에 나가요." "글쎄...!" "오늘 밤은 아무도 자면 안되요. 모두 축제(祝祭)에 참가해야 해요." "후후...!" "자, 빨리 일어나요." 탐리화가 몸을 일으켰다. 우유빛 아름다운 나신의 상반신이 침구 밖으로 드러났다. "어멋!" 그녀는 자신이 알몸인 것을 미처 의식치 못하고 있었던 듯 다급한 경악성을 토했다. "뭘 봐요!" 그녀는 괜스레 주천화를 향해 눈을 흘겼다. '후후, 여인들이란!' 주천화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호수(湖水), 대초원의 중앙에 넓다란 호수가 있었다. 만월은 호 수에도 떠올라 있었다. 이때 잔잔한 수면 위로 두 개의 노가 조용히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호면(湖面)에는 한 척의 조각배가 유유히 흐르며 멀리 대초원의 용사들이 마주경기에 열중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상에는 실로 천상의 선남선녀를 방불하는 일남일녀가 앉아 있었다. "...!" "...!" 그들 사이에 대화는 오가고 있지 않았다. 허나 뜨거운 감성이 눈 을 통해 흐르고 있었다. 바로 주천화와 탐리화였다. 퍼엉! 그들의 머리 위로는 끊이지 않고 폭죽이 솟아올라 불꽃은 천공에 가득 퍼지고 있었다. 탐리화는 주천화의 팔에 안기듯 기대 있었다. "리화...!" 문득 주천화의 음성이 조용히 탐리화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예?" 무심히 고개를 돌리던 탐리화의 안색이 굳어졌다. "...!" 주천화의 안색이 굳어 있지 않은가?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리화...!" 주천화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나는 떠나야 하오." "예...!" "그대도 알고 있지 않았소? 내가 대막혈사탑으로 가는 길임을...!" "아...!" 탐리화가 안타까운 일성을 흘려냈다. "가셔야 하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 "오늘만은 그런 말을 하지 말아 주세요!" "아니오. 나는 이 길로 떠날까 하오." 주천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순간 탐리화의 눈에 더할 나위 없는 안타까움의 빛이 떠올랐다. "오, 오늘 떠나시겠다는 말인가요?" 그녀의 음성에는 원망의 빛조차 떠돌고 있었다. "으음! 이해해 주시오." 탐리화는 주천화의 말뜻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오래 있을 수록 이별의 고통이 깊어감 을.... "으음...!"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 "...!" 답답하고 안타까운 침묵이 흐르고.... 배는 소리도 없이 홀로 호면을 흐르고 있었다. 슈우우우욱! 퍼엉! 무심한 폭죽은 두 사람의 심정도 모른 채 끝없이 솟아올랐다 폭발하고 있었다. 헌데 우연이었을까? 한 개의 폭죽의 그들의 머리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 주천화는 천공에 솟아오른 폭죽을 보며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곧이 어 연출할 장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폭죽은 폭발하지 않았다. '불발인가?' 주천화는 탐리화와의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짐짓 딴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슈우우우...! 폭죽은 터지지 않은 채 그들의 머리 위 삼 장 가까이 내려왔다. 순간 주천화의 눈에 다급한 빛이 번개처럼 스쳤다. "실로 절묘한 함정이로구나!" 휙! 당황한 일성이 터지는 순간 그의 손이 탐리화를 채갔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퉁겨졌다. 파파파팡! 찰나, 천공에서 가공할 폭음이 일었다. 무서운 백광이 일순간에 천공을 뒤덮었다. 폭죽이 라 생각한 물체에서 엄청난 암기가 주천화와 탐리화를 덮쳐온 것이었다. "무슨? 악!" 주천화의 돌연한 행동에 의혹의 눈을 들던 탐리화가 대경실색했다. 촤아아...! 허나 그 순간 주천화는 이미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 호수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어떤 놈이 벽력탄을?' 탐리화의 눈에 살기가 치솟았다. 주천화가 아니면 영락없이 그들 은 지금쯤 시체로 변해버렸을 것이 아닌가! 주천화와 탐리화가 호면을 밟으며 지면에 내려섰다. "누구냐?" 탐리화의 눈에서 무서운 기세가 쏟아졌다. 이때 주천화가 가만히 탐리화의 팔을 잡아 끌었다. "막주, 이 일은 태양막부와 상관없는 일이오." "예?" 탐리화가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이번의 일은 나를 노린 것이 틀림없소이다!" "예? 누, 누가?" 탐리화가 해연히 놀랐다. "치밀한 수법으로 보아 나를 노리고 있는 천마천의 짓이 분명하오." "천... 마천?" "살수집단인 북해천의 천주요." 주천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추격이 이곳에까지 미쳤을 줄은...!" 문득 주천화의 눈에서 은은한 녹광이 떠올랐다. "집요한 놈같으니... 과연 보이지 않는 하늘답다. 허나!" 보이지 않는 하늘 천마천, 그의 추격은 과연 집요하기 이를데 없었다. "언젠가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주천화의 눈이 탐리화를 직시했다. "막주!" 탐리화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더할나위 없이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또...!" 탐리화, 대초원의 패자인 태양막부의 막주이기 이전에 한 여인이었다. 너무도 나약한.... "후후후, 이것이 사별(死別)이 아닌 다음에야 무엇을 안타까워 하시오?" 주천화가 짐짓 부드럽게 웃었다. "...!" 탐리화의 눈은 어느새 또다시 젖어들고 있었다. "태양의 딸이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여서야 되겠소?" "그래... 요!" 탐리화가 이를 꼬옥 악물었다. "안녕히... 가세요!" 탐리화가 고개를 돌렸다.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지 않겠다는 뜻이련가? "대, 대제! 다시 한 번 본 막부를 찾아 주시기를...!" "대제! 안녕히 가시오!" 이미 호변에 모여 있다가 주천화가 떠나는 광경을 지켜보던 태양 막부의 수하들도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여러분 그럼...!" 주천화의 신형이 번쩍하는 순간 대초원 저쪽으로 아득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 다시 고개를 돌린 탐리화의 눈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져 있 는 대초원과 한가롭게 걸려 있는 천공의 만월 뿐이었다. ■ 황 제3권 제26장 대막혈사탑, 신비(神秘)를 벗다 ━━━━━━━━━━━━━━━━━━━━━━━━━━━━━━━━━━━ ① 밤(夜), 뜨거운 열사(熱沙)의 대지에도 밤은 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낮에 뜨겁게 몸을 태우던 사막 의 모래알들은 점차 식어 종내에는 차가운 한기(寒氣)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맑은 천공엔 눈이 아리도록 찬란한 성좌(星座)의 움직임이 태고 의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는데.... 탑(塔), 불가항력적인 절대적 위엄과 힘을 내뿜는 듯한 거탑(巨塔), 흑암 (黑岩)과 정적 속에 도도히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흑탑이었다. 휘르르르르! 휘우웅! 엄청난 사풍(砂風)의 회오리가 끊임없이 탑을 에워싸고 일어난다. 격풍노도(激風怒濤)같 은 모래 폭풍(瀑風)은 그 무엇의 범접도 거부하는 엄청난 위세였다. 이때 주천화는 오십 장 밖에서 오연히 탑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 풍에 그의 옷자락은 찢어질 듯 나부꼈다. "자연적인 모래폭풍에 오행(五行)을 섞은 절진(絶陣)이다." 그는 느긋하게 뒷짐을 지며 중얼거렸다. "사풍오행절진(沙風五行絶陣)의 파해 방법은 단 한 가지! 북두성 (北斗星)이 천원(天元)에 이르면...!" 그는 천공을 응시했다. 바로 그때 암천의 북두성이 서서히 흐르 듯 천원의 자리로 옮겨가지 않는가! "...!" 주천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후후, 행운이군!" 우우우웅! 스스스...! 그 순간 모래폭풍은 구름같은 먼지를 피어올리며 쓰러졌다. "자, 이제 들어가볼까?" 주천화는 천천히 쌍검을 매만졌다. 헌데 사풍이 사라진 탑 주위 의 경관, 그것은 진정 공포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백골(白 骨), 무수한 백골들이 주위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삭아버린 해골들과 널브러진 병기들..., 그리고 그 앞에 우뚝 서 있는 모래폭풍에 시달려 온 거무튀튀한 대막혈사탑. 이것은 실로 귀기(鬼氣)가 느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주천화는 성큼 대막혈사탑 앞으로 다가들었다. 입구(入口)는 보이지 않았다. 허나 주천화는 예리한 눈으로 무수 히 패이고 닳아버린 탑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훗...!" 문득 미소와 함께 그의 두 눈에서 맑은 섬광이 튀었다. "흠! 이 벽돌은 유난히 반짝거리는군." 주천하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한 개의 벽돌을 가볍게 두드렸다. 예의 벽돌은 다른 것들과 조금도 다를데 없는 평범한 것이었다. 구구구궁! 헌데 묵직한 굉음과 함께 그 벽돌이 안으로 밀려들지 않는가! 다 음 순간 정면에 팔 장 가량의 문이 나타나며 모래 속으로 물 스미듯 사라졌다. 주천화는 가볍게 웃었다. "훗! 역시 짐작대로군!" 헌데 뒤이어 눈 앞에 나타난 광경은 실로 의외의 것이었다. 무수한 통로(通路), 바위로 무수한 사이사이를 막아서 만든 수많 은 협로(陜路)들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일순 주천화는 가벼운 신음을 터뜨렸다. "흠! 미로(迷路)라는 건가...?" 그렇다. 그것은 생사(生死)를 가름하는 무서운 죽음의 미로였다. 헌데 그 많은 미로에는 모두 똑같이 발자국이 나 있지 않은가! 어 느 길이 생로(生路)인지 진정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 주천화는 천안신공(天眼神功)을 돋궈 예리하게 발자국들을 살피 기 시작했다. 문득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솟아났다. "훗! 한심하군, 스스로 무덤을 파다니... 제법 머리를 썼지만 미 세한 먼지와 두께로 진정한 통로를 알 수 있지!" 그렇다. 진정 인간이 많이 다닌 생로라면 먼지의 두께가 분명 얇을 것이다. 주천화는 먼지를 몇 줌 집어 한 군데 미로를 제외한 모든 통로에 뿌렸다. 이어 한 통로로 들어서며 자신의 뒤에다 또 모래를 뿌렸다. "자, 이것으로 천마사혼진(天魔死魂陣)의 설치가 끝났다!" 그는 손을 탁탁 털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었다. "이제 그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놀랍게도 주천화, 그는 스스로 단 한곳의 생로마저 막아 버린 것이다. 약 일각 후, 주천화는 통로를 따라 계속 걷고 있었다. 문득 그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빛! 돌연 엄청난 빛줄기들이 그의 눈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눈부신 광채는 무수한 수정관(水晶棺)으로부터 쏟아지고 있었다. 통로가 갑자기 넓어지며 드러난 지하광장(地下廣場) 안에 수십 개의 수정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화려한 왕릉(王陵)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이럴 수가!" 헌데 그 앞으로 다가간 순간 주천화는 아연실색(啞然失色)을 금치 못했다. 벽안(擘眼)의 미녀(美女), 한결같이 뛰어난 미모의 여인들이 관 속에 잠들어 있지 않은가! "아니! 이 소녀는...!" 그는 경악해 부르짖었다. "청매(淸昧), 청매가 아닌가!" 한 수정관 속에 누워있는 벽안의 미녀, 맑고 청순한 듯 하면서도 지극히 요염한 매력을 발산하는 미녀는 놀랍게도 바로 백청청이 아닌가! 주천화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진정 괴이한 일이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공자님! 그 관을 건드리지 마세요. 그 분은 본 탑의 소탑주(少塔主)랍니다." 꾀꼬리와 같이 맑고 청아한 옥음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동시 에 두 명의 벽안미인들이 향긋한 장향(裝香)을 몰고 나타났다. 투명하도록 깨끗한 피부, 하얀 나삼 속에 은은히 굴곡을 드러내 는 균형잡힌 날씬한 교구(嬌軀), 이국적인 야릇한 매력을 풍기는 미인들이었다. 일순 주천화는 흠칫했다. '아니, 이곳엔 이국인(異國人)들이...!' 두 소녀는 주천화의 수려한 용모에 일순 놀란 듯했다. 허나 곧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공자께선 중원인이시군요?" "그렇소!" "그렇다면 저희를 따라오세요!" "...!" 주천화는 약간 의아했으나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다시 좁은 미로가 계속되었다. "...!" 얼마 후 주천화는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밝아짐을 느꼈다. "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선 절로 감탄성이 터져나왔다. 보라! 첩첩이 처마를 맞대고 있는 수많은 고루거각(高樓巨閣)들 을.... 그것은 실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건축의 모든 부분이 진정 신(神)의 예술품(藝術品)이라 할 정도 로 아름답고 우아했다. 중천엔 태양(太陽) 대신 수많은 야명주들 이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으며 곳곳엔 아름다운 인공호수(人工 湖水)와 가산(家山)들이 보인다. 심지어 갖가지 기화이초(奇花異草)들과 귀여운 짐승들까지 뛰놀 고 있었다. 신비의 도화경(桃花景)인가? 그 누가 시커먼 흑탑 속에 이런 장 관의 세계가 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주천화는 격동한 얼굴로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때 앞장섰던 한 소녀가 그를 돌아보며 상큼하게 웃었다. "호호호, 공자께선 본 탑의 신비(神秘)를 보신 두번째 중원인이에요!" 주천화가 물었다. "두번째! 그럼 첫번째는 누구였소?" "호호, 그건 저희도 몰라요! 다만 그가 중원의 황족(皇族)이었다는 것만 알 뿐! "황족...!" 황족, 이 신비의 대막혈사탑에 첫번째로 들어왔다는 황족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주천화는 짙은 의혹의 빛을 띄우며 다그치듯 물었다. "도대체 그대들의 정체는 무엇이오?" 그 물음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돌연 한 전각에서 청명하고 아 름다운 옥음이 맑게 울려왔다. "호호호, 그 아이들은 다만 시녀에 불과할 뿐이에요. 공자의 의문은 제가 풀어 드리지요!" "...!" 일순 주천화의 눈에 잔잔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곧 그는 신비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후후, 좋소!" 그는 가볍게 신형을 날려 한 개의 전각으로 향했다. ② "아니! 이럴 수가!" 주천화의 입에서 경악성(驚愕聲)이 터졌다. 그는 전각의 한 거실 앞에 얼어붙은 채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처, 청매가 이곳에...!" 눈, 당혹과 의혹에 사로잡힌 그의 눈은 곧장 한 소녀의 얼굴에 머물고 있었다. 백설처럼 희고 뽀얀 살결, 서글서글하면서도 잔잔한 정열을 품은 듯 지혜롭게 빛나는 눈, 섬세한 이목구비의 윤곽에서 느껴지는 이 지적인 분위기. 아니, 눈, 코, 입술, 가냘픈 듯 하면서도 두 팔에 가득 찰 듯 풍 만한 몸매까지 빼박은 듯 닮았다. 다만 눈 앞의 소녀가 화려한 궁 장차림이라는 것만 다를 뿐. "...!" 소녀는 당혹에 찬 눈으로 그를 마주 응시했다. 그녀의 좌우에는 이십대로 보이는 우아한 궁장미부와 한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용모는 매우 괴이했다. 짙은 흑발, 깡마른 얼굴 속에 움푹 잠긴 채 반짝이는 잿빛 눈동 자, 낡은 갈포를 걸친 비쩍 마른 몸에서 범상치 않은 기도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날카로운 눈빛은 주천화를 직시하고 있었다. 이때 화려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미부가 주천화와 자의궁장소녀를 번갈아 보며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대는 착각을 하는군요. 이 아이는 내 딸로서 본 탑의 소탑주입니다!" '딸이라고...!' 주천화는 머리를 흔들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수정관 속에도 분명 청매와 똑같은 소녀가 있건만...!" 바로 그때 돌연, 노인의 눈빛이 무서운 광망을 폭사하며 일진 폭 갈성이 울려나왔다. "크핫핫! 애송이 너는 너무 무례하구나!" "...!" 주천화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노인을 직시했다. 돌연 그의 입에 서도 앙천대소가 터져나왔다. "하하하, 내가 무례하다고? 대막혈사탑의 위용이 그렇게 대단한가?" 순간 노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노인은 눈가의 근육에 경련을 일 으키며 음침하게 웃었다. "크크크! 공주(公主)마마의 하명(下命)을 받고 대막에 왔더니 새 파란 애송이의 피를 손에 묻히게 됐군!" 그의 괴팍한 얼굴엔 일순 무서운 살기가 피어올랐다. 벼락이라도 몰아올 듯한 기세였다. 주천화는 짙은 의혹을 느꼈다. '공주? 그렇다면 이들은...!' 이때 자의궁장소녀가 주천화를 힐끗 보더니 노인을 향해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할아버지, 진노를 거두세요! 이 분은 아직 할아버지를 모르잖아요?" 노인은 어깨를 움찔하더니 억지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소탑주께서 말리시니...! 참겠소!" 허나 주천화는 그들의 대화에 상관없이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분명! 이들은 어느 소왕국(小王國)의 왕족(王族)이다. 헌데 왜 이 대막에...!' 자의궁장소녀가 눈을 치켜뜨며 영롱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어서 할아버지께 용서를 비세요!" "...!" "할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서역제일고수(西域第一高手)란 말예요!" 허나 주천화는 그녀의 말은 무시하고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홀린 듯 중얼거렸다. "똑같군! 목소리와 말하는 모습까지 저토록 같을 수가?" "...!" 주천화가 태연히 중얼거리자 소녀는 아연해졌다. 그녀는 노인의 눈치를 살피다 짐짓 노기띈 눈으로 주천화를 바라보았다. "당신...! 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주천화는 천천히 그들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나는 평생 누구에게도 용서를 빌어본 적이 없소. 물론 남 앞에 무릎을 꿇은 적은 더더욱 없고..." 담담한 그러나 굳건한 음성이었다. "놈! 네, 네가...!" 순간 갈포노인은 분노(忿怒)가 폭발하는 갈성을 지르며 발작하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주천화를 계속 주시하던 미부가 격동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지금 뭐라고 했지요? 혹시 중원에서 우리 청아와 닮은 소녀를 본 적이 있나요?" "그렇소." 순간 미부의 얼굴은 더욱 격정에 차올랐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주천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나의 아내요!" "...!" "...!" 순간 세 사람은 무서운 격동에 휩싸인 채 마주 보았다. 일순 자의궁장소녀가 기대에 찬 눈으로 주천화를 응시하며 더듬거리듯 물었다. "다... 당신이 나의 청언니를...!" 순간 주천화는 뭔가 생각난 듯 두 눈을 번뜩였다. "그렇군! 소저는 혹시 쌍동이 자매가 아니었소?" 소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헌데 언니가 누군가에 의해서...!" 그녀는 이내 쌍동이 언니를 떠올렸음인지 자신도 모르게 울먹거 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주천화는 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녀는 혹시 가슴에 붉은 화점(花點)이 있지 않소?" 순간 미부가 치미는 격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그래요! 그것은 본 왕국 여인들의 표식이에요!" 그녀는 하얀 옥수로 얼굴을 감싸쥐며 몸을 미미하게 떨었다. "오! 청아, 청아가...!" 무서운 격정과 기쁨이 손끝을 타고 떨리고 있었다. 노인도 그 뻣 뻣한 얼굴에 희미한 격정을 드러내더니.... "앙축하옵니다! 공주마마! 아마도 소탑주께선 살아 계신 듯 하오 이다!" 그는 미부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이 순간 자의궁장소녀는 주천화의 수려한 옆 얼굴을 바라보며 붉 은 입술을 터지도록 깨물고 있었다. '이 분이 나의 형부...? 헌데 내 가슴은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이 순간 주천화도 뭉클한 감동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독문표식! 비로소 청매의 출신 내력을 알게 되었군!' 이때 거실 입구에 한 명의 청의시비가 나타났다. "저어... 탑주님, 중원에서 서찰이 왔사옵니다!" 일순 미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흥! 그 자가 또 독촉인 모양이군! 가지고 오너라!" 시비는 공손히 서찰을 바치고 사라졌다. 핏빛의 봉첩(封帖), 헌데 서찰을 읽어나가던 미부의 얼굴에 미미 한 격동의 빛이 나타났다. 주천화는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헌데 당혹에 차오르던 미부의 두 눈은 마침내 경악으로 변하며 주천화를 향하지 않는가? "쌍검을 차고... 그, 그대가?" "...!" "그대가 바로 중원제일고수라는 천마대제 주천화인가요?" 순간 노인과 소녀의 시선이 모아지며 그들의 입에서도 동시에 경악성이 터졌다. "천마대제...!" "주천화...! 그대가?" 일순 주천화는 짐작했다는 듯 짤막하게 웃었다. "후후...! 그렇소!" "오오! 믿을 수 없어요!" 주천화는 희미하게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내가 대막에 왔으니 죽이라는 부탁인 모양이구료!" "그, 그래요!" "...!" "헌데 중원의 패자(覇者)가 그대처럼 젊고 잘 생긴 공자였다니...." 주천화는 그 말에는 대답없이 빙긋 미소를 띄우며 잔잔한 눈길로 미부를 응시했다. "그는 당신의 딸을 찾아준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것이오!" 순간 미부는 흠칫 놀라며 탄복의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 그대의 안목은 실로 놀랍군요!" "일 년 전...!" 주천화는 담담한 그러나 깊은 격정을 숨긴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 년 전, 나는 청도(淸島)에서 한 명의 이국여인(異國女人)을 만났소!" 주천화는 담담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해 자신이 백청청을 만나 게 되었던 모든 경위와 그 이후의 일을 들려주었다. 그의 이야기 를 듣는 동안, 미부는 눈물 속에 분노를 이기느라 애썼다. 주천화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차가운 혈광을 뿜으며 말을 내뱉았다. "결국! 모든 게 그 자의 농간이었군!" "...!" 주천화는 의문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부는 격정으로 흐 트러졌던 자세를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음, 우리는 본래 서역(西域) 화라왕궁(和羅王宮)의 왕족이었어 요. 헌데 불운하게도 외적의 침입을 받아 이곳 대막으로 쫓겨 오게 되었지요." "...!" "그때 공주의 몸이었던 나는 대막혈영신(大漠血靈神)을 만나 혼 인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이 대막혈사탑을 세우고 본토로 돌아 갈 힘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미부는 자의궁장소녀의 손을 잡으며 분노를 억누른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얼마후 나는 쌍동이 자매를 낳았답니다. 공자께선 광장에 있는 수정관 속의 청아를 보고 놀라셨겠죠?" 주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미부의 입가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내가 청아를 잃은 후, 그리움을 못 이겨 그 아이의 모습 을 새겨 만들게 한 조각품이었어요." 순간 주천화는 놀람과 경탄을 금치 못했다. '조각품이었다고... 그토록 생생한 모습이...!' 문득 그는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헌데 어떻게 청매를 잃으셨습니까?" 미부의 눈에 짙은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어느 날 한 명의 중원인이 본 탑을 찾아왔어요. 그는 내막을 밝 히지 않은 채 대막혈영신에게 힘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어요." "힘을...!" "허나 그는 거절했어요. 헌데 갑자기 청아가 이름모를 괴질(怪 疾)에 걸려 다 죽어가게 되었어요. 갖은 의술을 다 동원해 보았으 나 도무지 병명(病名)조차 알 수 없었어요." "...!" "헌데 그때 그 중원인이 청아를 치료해 주겠다고 했어요. 대신 요구 조건이 있었죠." "무슨 조건이었습니까?" "대막혈영신과 청아가 함께 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죠. 결 국... 우리는 청아를 살리기 위해 응낙했어요." "...!" "헌데 그후 중원으로 간 그들 두 사람이 모두 실종되어 버렸어요." 주천화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누군가... 대막혈영신을 죽이고 청매의 재질을 탐내 독인(毒人)으로 만들려 했던 거였군!' "그런데 이번에 다시 그 중원인이 거래를 요구해 왔어요! 청아를 찾아주겠다는 것이죠." 주천화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조건이 바로 나의 목이였군요?" 미부가 고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녀는 싸늘히 안색을 굳히며 허공을 노려 보았다. "나는 중원으로 가겠어요. 그리고 그 자를...!" "청매를 찾아오면 그 아름다운 섬섬옥수에 피를 묻히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주천화는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순 미 부의 얼굴이 깊은 감동에 젖어들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노인이 괴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크크크! 나 서역제일고수는 중원제일고수와 겨뤄보기를 꿈꾸어 왔다!" 주천화는 그를 힐끗 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무심한 듯 한 미소, 어떻게 보면 심혼이 뒤흔들릴 만큼 매력적이었으나 또한 가슴이 섬뜩해 지게 만드는 무서운 미소였다. "본좌는... 청해오는 비무를 거절해 본 적이 없었소." 노인의 엉성한 눈썹이 꿈틀했다. "크크크! 광오하구나!" "...!" "좋다! 이것이 너의 마지막 비무가 될 것이다." 쏴아앙...! 순간 기이한 파공음과 함께 한 가닥 검기가 주천화를 덮었다. 사 방이 고요하기 이를데 없는 가운데 한 가닥 검기가 번뜩였다. '이것은?' 주천화의 눈썹이 꿈틀했다. 파공음조차 없이 벼락치듯 무서운 공 세가 쏘아져 온 것이다. 채앵...! 두 사람이 갈라섰다. "...!" 주천화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흑의노인의 손에 주천화로서는 처 음 대하는 병기가 쥐어져 있었다. 얇기가 마치 종이장같았으며 그 끝은 점차 가늘어져 종래에는 바늘 같았다 "흐흐! 노부의 도법은 찌르기를 주로 하는 것이다." "찌르기?" "흐흐! 오직 앞으로만 전진하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지...!" "...!" 주천화로서는 그런 도법이 있다고 들어본 적도 없었다. 팟! 순간 노인의 손에서 또다시 예리한 도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것이 무슨 도법이란 말인가?' 주천화는 노인의 기괴실랄한 공세에 일시지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카앙! 주천화의 손에 천마제혈검이 쥐어졌다. 헌데 그의 소맷자락에 작 은 구멍이 나 있지 않은가? "음! 내 옷에 상처를 입힌 사람은 그대가 두번째다." 주천화의 전신에서 살기가 솟아났다 "훗...!" 노인이 괴소를 흘렸다. 팟... 파팟! 순간 그의 괴이한 도(刀)가 또다시 불꽃을 피어 올렸다. 과연 그 의 도법은 전진만이 있지 후퇴는 전혀 없었다. 허나 그의 전진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노인의 검은 완전히 예상을 뒤엎는 방향 으로 날아들고 그의 발 또한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 었다. 실로 흔하지 않은, 무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격식을 갖춘 그런 공세가 아니었다. 쨍... 채애앵! 연달아 격돌음이 터졌다. 쓰윽! 노인의 발이 계속 앞으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 주천화가 옆으로 미끄러져도 노인의 송곳같은 괴이한 병기는 여 전히 그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카앙! 불꽃이 튕기며 두 사람이 다시 대치했다. 주천화의 입가에 희미 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훗! 그대의 도법은 별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 "실로 처음 대하는 도법인지라 당황한 것은 사실이나...!" 주천화의 천마제혈검이 가볍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무 서운 검기가 사방으로 밀려나갔다. '헉! 무서운 기세다!' 노인은 무섭게 압박해 오고 있는 검기에 숨이 막혀옴을 느끼고 해연히 놀랐다. 우릉...! 파아아아...! "그대의 도법은 잔재주에 불과하다! 힘이 없다!" 허공에서 뇌성이 이는 순간 찬란한 검광이 온통 허공을 뒤덮었다. 파파파... 팟! 거대한 햇살과 같은 금광(金光)이 폭발하듯 노인의 몸으로 모아져 왔다. "헉!" 노인은 눈이 부심을 느낌과 동시에 가슴이 뜨거워짐을 깨달았다. 그 순간 노인은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기형병기가 산산히 조각나 며 동시에 무서운 검세가 자신을 덮어옴을...!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금광도 폭음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주천화는 태산과 같은 기세로 태연히 서 있었다. 헌데 그 앞에서 노인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으으...!" 털썩! 노인의 무릎이 지면에 닿았다. "그대는 내심에 야심을 품고 있었다." 노인의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선혈을 응시하며 주천화가 담담히 말했다. "그대의 눈빛에는 화라왕국의 공주, 아니, 대막혈사탑을 이용하 려는 야심이 숨겨져 있었다." 노인이 꺼져가는 눈빛으로 주천화를 올려다 보았다. "그대를 죽이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스르륵! 노인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죽은 것이다. 주천화에 대한 경외지심을 간직한 채...! "할, 할아버지!" 궁장소녀가 노인에게 달려왔다. "당, 당신은 잔인...!" 그녀의 눈이 원망스럽다는 듯 주천화를 응시했다. "란아! 그 분을 원망할 것 없다!" 이때 미부가 고개를 흔들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저 분의 눈이 정확했단다. 다지몰(多地沒)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기실 우리를 이용하기 위해 온 인물(人物)이란다." "예?" "어쩜 그 자가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자일지도 모르지...!" 미부의 계속되는 말에 소녀는 믿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저 아이는 사마사란(司馬思蘭)이에요. 귀하의 처제가 되기도 하니 앞으로...!" 미부의 눈이 주천화를 응시했다. "사마사란? 중원 이름이군요." "호호! 당연하지요. 아버지가 중원인이었으니까요." "하면 청매는?" "그 아이는 사마청이에요!" '사마청? 훗! 자기 아내의 이름을 이제야 똑바로 알게 되다니...!' 주천화가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주천화를 응시하는 미부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참!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어요." "...!" "이곳의 풍습은...!" "...!" "쌍동이 자매는 한 남자에게 시집 가기로 되어 있어요." 그녀의 엉뚱한 말에 주천화의 눈이 똥그래졌다. 사마사란의 눈도 커졌다. '우리에게 그런 풍습이 있었나?' 그녀로서도 알지 못하던 풍습인 것이다. 허나 그녀의 얼굴이 붉 어졌다. 어찌 모친의 뜻을 모르겠는가! 살그머니 주천화의 용모를 훔쳐보는 그녀의 눈에 햇무리같은 밝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기는 열사의 땅, 대막혈사탑이었다. ■ 황 제3권 제27장 천하패왕지존록(天下覇王至尊錄)의 완성 ━━━━━━━━━━━━━━━━━━━━━━━━━━━━━━━━━━━ ① 천공(天空)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한 점 구름도 보이지 않는 하늘, 그 아래 한 그루 거대한 고목(古木)이 너무도 당당히 서 있었다. - 천원성목(天元聖木). 높이는 오십여 장에 이르고 밑둥의 둘레는 장장 어른 스무 명이 휘감고도 모자라는 거목(巨木)의 이름이었다. 천원성목은 그대로 전설 속의 성목이었으며, 곧 서역 최대의 사 찰인 천룡사의 역사이기도 했다. 천원성목은 지금 온통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천원성목은 수천 년 묵은 은행나무를 말함이며 금광에 싸였다 함은 단풍이 들었기 때문인 것이다. 흘러간 세월을 돌이켜 보는가? 천원성목은 온통 단풍으로 물든 자신의 옷을 굽어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이 천원성목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인영이 있었다. "장관이군...!" 인영의 음성은 맑고 나지막했다. 그 용모 또한 그 음성만큼이나 수려했는데 더할 나위없이 신비한 기태가 엿보였다. 주천화, 주천화가 아닌가! "천룡사(天龍寺)에 이같이 멋있는 고목이 있는 줄은 몰랐군." 주천화는 천원성목의 웅장함에 연신 감탄사(感歎詞)를 흘려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천룡사이며 그가 천룡사에 온 것이란 말인가? "후후후, 이 천원성목을 본 것만으로도 헛걸음 했다고는 할 수 없겠군." "뉘, 뉘시요?" 이때 경악(驚愕)에 찬 음성이 십 장 뒤에서 들려왔다. 이로 미루 어 주천화가 천룡사의 후원에 서 있음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 주천화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천인혈옥삼, 그리고 허리의 두 자 루 검은 문약해 보이기도 하는 그의 용모에 특이한 매력을 더해주는 것이다. "혹, 혹시?" 한 명 승인(僧人)이 의혹의 빛을 떠올리다 이내 경악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소! 내가 천마대제요. 전갈해 주시겠소?" 주천화가 합장했다. 단아한 그의 태도에 승인의 안색이 싸악 변했다. "대, 대제!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승인은 황급히 합장을 해 보인 후 몸을 날렸다. "마마!" "마, 마마! 오신다고 기별을 주셨으면 노납들이 마중을...!" 휙! 휘이익! 천원성목을 향해 세 명 노승이 부리나케 질주해 왔다. "마마의 왕림을 영광으로 알겠나이다!" 그들은 주천화 앞에 이르자 정중히 대례했다. 동천목승, 서천선승, 북천화승 이었다. "그대들의 사숙조는 어디에 있는가?" 주천화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허허허! 우선 지객당(知客堂)에 드셔서 차(茶)라도...!" "흠! 그것도 좋겠구료!" 주천화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지객당, 주천화가 조용히 앉아 있고 그 앞에 삼승이 부복해 앉았다. "...!" 주천화의 앞 차탁에는 김이 오르고 있는 한 잔의 차가 놓여 있었다. "마마! 이것은 본사의 특산품인 용설녹향차(龍雪綠香茶)이오니 입에 맞지 않더라도...!" "허! 향기가 아주 좋구료." 주천화는 서슴치 않고 차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천화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 놓으며 천룡 삼선승을 훑어 보았다. "후후후! 그대들은 본좌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구료!" "예?" 천룡삼선승이 흠칫했다. 그러나 북천화승이 이내 정색하며 공손 히 입을 열었다. "기실! 마마께서 노납들에게 천룡사로 돌아가라고 해서 중원을 떠나오기는 했으나...!" "그것이 못내 불만이란 말이오?" "그, 그것이 아니옵고!" "...!" "기실 노납들이 중원에 간 것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유?" "예!" 주천화의 태도가 다소 부드러워지자 서천선승이 고개를 들었다. "노납들은 중원의 안위를 염려하였습니다." "...!" "본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불(魔佛)을 숭앙하는 마교(魔敎)의 무리가 있습니다." 주천화의 눈에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예! 극라습찰이 바로 그것입니다." "극라습찰! 음...!" 주천화가 한 생각을 떠올렸다. 전일 극라습찰의 밀승(密僧)들이 자신을 공격해 온 일이 있지 않은가! "극라습찰은 오래 전부터 중원정복의 야망을 키워오고 있었습니다." "...!" "노납들은 항시 그 일을 염려하고 있었는데 어느날인가 극라습찰 의 고수들이 은밀히 중원으로...!" "그렇소! 나는 이미 그들을 만나 본 적이 있소!" "예에? 마마께서 그들을 만나 보셨단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나를 죽이려 했소!" "아...!" 주천화의 눈에서 가공할 녹광이 피어 올랐다. "음! 본좌는 그들이 어떤 인물의 사주를 받아 본좌를 죽이려는 줄 짐작했는데... 사실 그들은 그들대로 야망을 지니고 있었군!"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을 초청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극라습찰은 이용당하는 척 하며 중원에 혼란을 야기시킬 목적으로 초청에 쾌히 응했던 것입니다." "하면 그대들은 극라습찰의 야욕을 제지하기 위해서 중원으로 들 어선 것이었소?" "예! 그러나 본사의 행사를 드러내기 싫어 일부러 태자마마의 대 천루에 가입한 것이었습니다." "음...!"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한기(寒氣)가 그의 전신에서 밀려 나왔다. "극라습찰은 중원의 낙양에 소림사보다 더욱 방대한 사찰을 짓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훗...!" 주천화가 차갑게 웃었다. "극라습찰, 그들은 어느 곳에 있소?" "이곳에서 백 리 밖의 음혼곡(陰魂谷)에...!" 동천목승은 주천화의 무서운 기세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 었다. 주천화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극라습찰, 본좌가 이곳에 온 이상 극라습찰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주천화의 음성은 단호했다. 뉘라서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있으랴! '무, 무서운 기도다.' '으음!' 천룡삼천승이 내심 한기를 머금었다. "아미타불...! 너희들은 그 분을 모시고 올라 오너라!" 이때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불호가 들려왔다. '놀라운 내공이다. 이 음성은 적어도 삼십 리 밖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주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미타불...! 명을 받사옵니다." 천룡삼선승이 경건히 승포를 가다듬으며 아무도 없는 허공에 황 급히 합장 배례했다. '으음! 이 음성의 주인은 이들의 사숙조라는 사람의 것이 틀림 없겠군!' 주천화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천룡삼천승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마! 황공하오나 잠시 옥체를...!" "알았소! 헌데 그 분은 어느 곳에 계시오?" "예! 사숙조께서는 천불암에 계시옵니다." 그후 천룡삼선승이 주천화를 안내해 간 곳은 천룡사 뒷산의 후미 진 곳이었다. 꽈르르...! 우르릉! 거대한 폭포가 굉음을 토하고 있는 계곡, 폭포의 삼장 옆에 작은 모옥이 한 채 있었다. "마마! 저곳으로...!" 모옥 앞에 이르자 천룡삼선승은 더할 나위 없는 공경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마마! 어서 드십시요. 노납이 몸이 불편하여...!" 이때 모옥의 안에서 정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 주천화가 말없이 모옥에 다가가자 천룡삼선승이 합장한 후 몸을 돌렸다. 실내는 어두웠다. 사면이 온갖 불서(佛書)로 꽉 차 있었고 그 중 앙에 어렴풋이 한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 주천화는 실내에 불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에 흠칫해 했다. 허나 그는 태연히 노승의 앞에 정좌했다. "마마, 존체를 배알하나이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인영이 두 손을 바닥에 짚으며 고개를 숙였 다. 헌데 그의 몸놀림이 다소 불편해 보이지 않는가? '으음...!' 주천화는 날카로운 안목으로 상대를 살핀 후, 내심 신음성을 흘려냈다. 노승의 용모는 실로 의외의 것이었다. 병색이 완연한데다 마치 뼈에다 가죽을 바른 듯 피폐하지 않은가! 길게 늘어진 백염만이 보일 뿐 하체를 덮고 있는 하의가 헐렁해 보이는 것이 두 다리가 젓가락처럼 쇠퇴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납은 하람(河濫)이라 하옵니다." 하람선사, 천룡사 최고의 배분을 지닌 고승, 그의 세수(世壽)는 이미 삼백이 넘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음! 하람선사이셨구료!" 주천화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람선사는 주천화에게 자신 을 밝힌 다음 수많은 고서(古書) 중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마마! 이것은 본사의 대조사이신 천룡대성승께서 마마에게 남기신 서찰이옵니다." "...!" 주천화는 하람선사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일천오백 년 전의 인물이 어찌 자신에게 서찰을 남길 수 있겠는가! "허허허! 놀라시는군요. 기실 천룡대성승께서는 이미 천기를 읽고 계셨습니다." 하람선사가 양피지를 건넸다. 주천화는 불가사의한 느낌에 젖으며 서찰을 펴들었다. 허나 이내 주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제이대 천마지체를 예견하고 남긴 것이었군!' <노납 천룡이 제이대 천마지체를 위해 이 서찰을 남기노라. 노납 은 제일대 천마지체인 천마수라대제와는 막역지우인 바... ..중략(中略)... 노납은 세수 삼백에 천기를 보건데 제이대 천마대제에게는 하늘 의 안배가 따로 있음을 발견하였도다.> 이는 이미 주천화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는 서둘러 서찰을 읽어 내렸다. 하늘의 안배가 있었다는 글귀에 의혹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이대 천마지체는 단순히 천마지체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니 그 는 곧 천령지체 또한 겸비하고 있음을...!> 주천화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천령지체, 천하패왕지존록의 서열 일위를 차지할 전설의 신체. 천룡대성승의 서찰에 의하면 자신이 바로 천령지체임을 나타내지 않는가! "그, 그런 일이...!" 주천화는 황급히 서찰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천하패왕지존록의 첫장과 둘째장을 비워 둔 것은 기실 노납의 뜻이었노라. 언젠가 천령지체와 천마지체를 함께 지닌 기재가 태어날 것이므로...! 그대에게 바라노니 천하패왕지존록을 완성하여 주기 바란다. 노 납과 천마수라대제는 지하에서나마 천하패왕지존록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노라. 천룡 서(書).> "으음...!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군. 어찌 전설 속의 양대신맥 이 한 몸에 나타날 수...! 그것도 바로 나에게...!" "허허허...!" 하람선사가 밝게 웃었다. "노납의 미거한 눈으로 보기에는 마마께서 천마와 천령의 두 가 지 맥을 함께 지니고 계시옵니다."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허허! 마마의 천령혈 위에 은은한 삼채광휘가 떠오르고 있음입니다." "무엇이...!" "허허허, 이로써 오랜 본숙의 금제가 풀리는 것이옵니다." "금제(禁制)?" "예! 천하패왕지존록이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본문의 금제가 풀리는 순간이옵니다." "으음! 그랬었구료!" 주천화는 천룡사가 천룡대성승의 유시로 한 가지 금제에 묶여 있 음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 금제를 푸는 방법이 천하패왕지존록의 완성이라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으음! 허나 천하패왕지존록은 천마서원에 있고 천마서원은 이미...!" "허허허, 그 일은 심려하실 것이 없습니다. 본사에 또 한 부의 천하패왕지존록이 있사옵니다," "...!" 주천화는 잠시 망연히 있다 문득 눈을 들었다. 하람선사의 전신 을 훑은 그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선사의 용태가 매우 심하구료." "허허허, 노납의 세수 이미 삼백이 넘었사옵니다. 천수를 다했음 이니 인력(人力)으로 어찌하오리까!" 주천화가 돌연 하람선사의 용태를 물어오자 하람선사의 백미에 감복의 빛이 내려 앉았다. "음! 어찌 천수를 다했다 말씀하시오? 본좌가 의도(醫道)에 어둡 지 않으니 잠시 맡겨 주시지 않겠소?" "허허, 부질없는...!" 하람선사가 입을 다물었다. 주천화의 손이 이미 그의 완맥을 잡아 온 것이다. "음! 과연 자연적인 병세로군. 허나...!" 주천화의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무슨?" 하람선사는 의혹의 눈을 들다 해연히 놀라고 있었다. 주천화의 몸으로부터 유입된 한 가닥 진기가 거침없이 십팔경혈을 흘러가지 않는가! 예의 진기가 스쳐가는 곳마다 활력이 샘솟음쳤다. '이, 이런 일이...! 나의 공력이 얼마인데... 설마 마마의 공력이 나를 능가한단 말인가?' 잠시 후, 하람선사는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움직이지 않던 하 체에도 탄력이 느껴지지 않는가? 실로,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 마마...!" "후후, 여러 말씀 마시고 천하패왕지존록이나 내주시오. 내 그것을 완성하리다." "마마!" 삼백 년이란 오랜 세월을 수양해 온 하람선사의 몸이 격정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② <천하패왕지존록.> 주천화는 천하패왕지존록을 대하고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의 손 에는 먹물이 듬뿍 찍힌 한 자루 붓이 들려 있었다. "...!" 사락! 표지를 넘기자 백지가 드러났다. - 서열 제일위. 이 얼마나 광오하고도 가슴 벅찬 장(章)이련가! "...!" 주천화는 단정히 정좌한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힘차게 붓을 움 켜 쥔 그의 손이 격동으로 미미하게 흔들렸다. - 서열 제일위. 천령무황(天靈武皇), 태명어사대인(太明御師大人), 천문왕자 주천화(天文王子 朱天花). 일필휘지(一筆揮之), 그의 붓 끝에 따라 구름이 피어오르고 용이 승천했다. 아아! 이로써 천하패왕지존록의 서열 일 위가 기록된 것이었다. <천령무황, 태명어사대인, 천문왕자 주천화.> 세인들은 영원히 기억하리라. 천하패왕지존록의 서열 일위에 기록된 이 이름을.... 주천화, 그 역시 가슴이 터질 듯한 격동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마마, 어서 둘째 장을...!" 그의 뒤에 하람선사가 시립해 있다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하람선사, 그가 서 있었다. 노쇠현상으로 하체를 쓰지 못하던 그 가 아닌가! 놀라운 일..., 주천화의 공력은 천수까지 거역할 정도란 말인가? "음...!" 주천화가 결코 무심할 수 없는 눈빛으로 둘째 장을 펴들었다. <서열 이위. 제이대 천마지체를 타고난 자.> 주천화는 감개어린 눈으로 그 글귀를 망연히 응시했다. 이어 그는 힘차게 그 위에 붓을 댔 다. 서열 이위. 천마대제(天魔大帝) 주천화(主天花). 아아! 이로써... 천하패왕지존록이 완성된 것이었다. 후인이 있어 천하패왕지존록을 본다면... 뉘라서 경복치 않으랴! 천하패왕지존록의 서열 일, 이위가 동일 인물이었으니.... 주천화(朱天花), 그가 천룡사에서 천하패왕지존록 위에 붓을 드 는 순간 중원(中原)은 폭풍노도같은 엄청난 격변(激變)과 격동(激 動)에 휘감겨 있었다. 만리장성(萬里長成) 밖에서 국경을 경계하던 백이십만 명친건흥 군, 그들 중 팔십만대군(八十萬大軍)이 돌연 장성(長成)을 넘었다. 제일진(第一陣), 이십만 기마대(騎馬隊), 그들은 항산(恒山)을 넘어 개봉(開封), 서주(徐州)를 쓸면서 금릉(金陵)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제이진(第二陣), 이십만 창검대(槍劍隊), 난주(蘭州)를 거쳐 장 안성(長安城)으로 돌진 중경부(重慶府)에 진(陣)을 쳤다. 제삼진(第三陣) 사십만 철갑기마대(鐵甲騎馬隊), 태산(泰山)을 밟으며 낙양(洛陽), 무창(武昌), 항주(抗州)에 이르고 있었다. 이십오만의 수군(水軍), 그들은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을 비롯 하여 오대호(五大湖)를 모조리 봉쇄했다. 아아! 일대 격변(激變)! 천지(天地)를 진동(震動)하는 말발굽소리에 중원천하(中原天下) 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엄습하는 가공할 공포에 부르르 몸을 떨 었다. 두두두두두...! 하늘로 치솟는 자욱한 흙먼지, 그것은 장장 팔백 리(八百里)를 덮고 있었다. 질풍노도(疾風怒濤), 바로 그것이었다 황도(皇都) 금릉(金陵), 그곳에서는 일대 이변(異變)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금성을 수호(守護)하는 오만(五萬) 황실어림금의대와 황실, 황 족(皇族)을 경호하는 일만(一萬) 금의위(金衣衛) 무사들은 황도 금릉(金陵)을 수비하는 구문제독부(九門堤督府)의 군사들과 치열 한 혈전(血戰)을 벌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그들의 싸움을 천하인들은 의혹과 두려움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헌데 천하인들을 더욱 경악케 하는 변사(變事)는 금릉의 백 리 (百里) 밖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 검은 대해를 연상케 하는 수십만 대군들의 위용! 그들은 말굽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 자금성을 포위하라. 그 추상같은 단 한 마디의 령(領)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이 천지개벽(天地開闢)의 놀라운 대격변, 의문과 공포는 천하인의 가슴과 뇌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과연 어찌된 일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의혹어린 소문, 그것은 전하고 있었다. - 성군(聖君) 영락제(永樂帝)의 붕어(崩御). 격변의 한 시대를 보내고 있는 중원천하(中原天下), 과연 어찌 될 것인가...? 옥문관(玉門關), 중원의 국경을 넘는 마지막 관문은 몹시도 한적 했다. 대격변도 이곳에서는 별개의 것인 양.... 허나 그것은 표면 뿐이었다. 이곳도 암중으로 터질 듯한 긴장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휘이이... 잉! 싸늘한 바람이 옥문관 주위를 휘감았다. 만리의 장성(長城)이 시 작되는 옥문관, 이곳의 역사(歷史)를 대변해 주듯 우뚝 선 비석 (碑石)이 보인다. <옥문관(玉門關).> 십 장 크기의 거대한 비석에 새겨진 각인(刻印), 그 글귀도 이제 는 풍화에 깎여 이제는 희미한 서체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때 한 명의 이십대 사내가 비석 앞에 우뚝 멈춰섰다. 새하얀 백의에 머리에 문사건(文士巾)을 쓴 서생(書生), 그의 좌 수에는 백설(白雪)처럼 흰 백옥선(白玉扇)이 들려 있었다. 혜지가 빛나는 그의 눈(眼), 그것은 누구를 기다리는 듯 멀리 끝 없이 펼쳐진 사막(沙漠)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조바심을 달래 는 듯 우수(右手)로 섭선을 툭툭 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저 멀리 아득한 사막의 저편에서 새하얀 백점(白點)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허어! 이제 오는군." 백의서생의 눈에 반가움이 스쳤다. 어느덧, 사막쪽에서 나타난 백의인영은 순식간에 백의서생 앞에 다가섰다. 아! 그는 주천화가 아닌가! 주천화는 일순 놀란 빛을 띄며 말을 뱉았다. "아니, 형님께서 이곳까지...!" 그때 백의서생은 전신을 미미하게 떨며 백옥선을 내려 놓았다. 백의서생, 그는 바로 흥덕태자 주의천이었다. 주의천은 환히 웃 으며 주천화의 두 손을 덮썩 잡았다. "하하, 태명어사대인! 어서 오시오." 찰나 주천화는 빙긋이 웃었다. 이어 태자가 손을 풀자 품 속으로 부터 태명어사대인의 영패를 꺼냈다. "이제 이 영패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주천화가 영패를 건네주자 주의천의 눈에는 뜨거운 것이 스쳤다. "아, 아우!" 얼떨결에 영패를 받은 그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주천화는 자세를 가다듬으며 정중히 대례를 올리지 않는가! 군신지례(君臣之禮), 그것이었다. "폐하, 아우의... 대례를 받으소서." "천화아우... 고맙네!" 태자 주의천의 눈에는 격동의 눈물이 어리며 미미하게 몸을 떨었다. "아우! 어서, 일어나게." 그는 주천화의 두 손을 잡아 일으켰다. "하하하, 폐하! 하대를 하소서. 이제 전 중원천하의 천자(天子)이십니다." 이때 태자 주의천이 침중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우! 부황께서는 내가 등극(登極)한 후, 곧 붕어(崩御)... 하셨네." "숙부께서는 결국...!"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沈默)이 흘렀다. 헌데 아아! 놀라운 말이 아닌가! - 흥덕태자의 등극(登極), 성조 영락제의 붕어(崩御). 문득 주천화의 뇌리 속에 문국왕 주상걸의 영상이 스쳤다. 자상하고 인자했던 대학자 문국왕 주상걸, 그는 허공에서 환히 미소를 띄우며 말하고 있었다. <천화야! 너는 그 분을 욕해서는 아니 된다. 더우기 복수를 꿈꾸 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주천화는 나직이 뇌까렸다. "후후후, 아버님! 소자는 결국 아버님의 명(命)에 따랐습니다. 허나...!" 남아(男兒)의 대의(大意)로써 모든 것을 씹어 삼키는 그의 웃음은 오히려 통곡이었다. 가슴으로 우는 것이 사내라 했던가...? 그 순간 주의천은 거대한 비석을 가리키며 침중히 말문을 떼었다. "아우! 이 비석이 언제 세워졌는지 알고 있나?" 그의 말은 자못 떨리고 있었다. 주천화는 암영을 지우며 태자를 주시했다. "하하하, 그것은 태조(太祖)께서 건국하신 후...!" 탁! 주의천은 잠시 잊었다는 듯 섭선으로 우수를 쳤다. "그렇군! 내 잠시 잊고 있었네. 아우가 바로 천하의 귀재 천문왕 자(天文王子), 아니 이제는 천문왕(天文王)이지!" 일순 주천화의 안색이 확 변했다. 천문왕(天文王), 그것은 곧 주천화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폐하! 이 아우는 왕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순간 태자의 눈빛에 의구심이 스쳤다. "허! 왜?" "그것은...!" 주천화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제 손에는 수백 명의 피가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찰나 태자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비석을 백옥선으로 내리쳤다. 파파파... 팍! 섬전지간에 풍화에 찌든 비석은 깨끗한 속살을 드러냈다. "아우의 성격을 아니 두 번 전하지는 않겠네. 허나... 이곳에 아우의 이름을 새겨주게." 주천화의 눈에서 일순 의문이 스쳤다. "왜...?" 주천화는 의문을 지니고 곧 지력(指力)을 발출하여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했다. 파파파... 팍! 돌조각이 튀기며 용봉비무(龍鳳飛舞)의 서체가 새겨졌다. <천문왕자(天文王子) 주천화(朱天華).> 깊이 일곱 치의 각인(刻印)! 가히 경악할 지력(指力)이 아닌가! "...!" 태자 주의천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신광(神光)을 빛내며 우수를 들어 힘차게 일필휘지했다. <하늘(天)에 명(命)으로 천하(天下)가 천문왕자(天文王子)의 공 덕(功德)을 기리고 경배하게 되리라! 흥덕태자 주의천(朱義天).> 주천화는 감격하여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폐하...!" 태자 주의천이 주천화의 우수를 잡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우, 아무말 말게 그리고... 이 비석을 지켜보세!" 태자 주의천, 아니 이제는 당금의 황상인 그였으나 마음은 심히 뜨거웠다. '아우, 이것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이 형의 선물일세.' 두 사람, 천하의 지존인 두 사내! 마주잡은 손, 그곳에는 진한 혈육의 정이 교차되고 있었다. 주천 화와 주의천은 묵묵히 비석을 응시했다. "...!" "...!" 주천화의 가슴 속에 열풍이 불어 감격의 물안개가 은은히 피어났다. '하늘(天)이시여! 부디... 폐하께 홍복을 내리소서!' 주천화의 마음, 그것은 정녕 그의 진실이었다. 그리고 후일 천하인이 이 비석을 가리켜 말하매 천문왕 천하대평 정(天下大平政) 비(碑)라 일컬었다. 조그마한 주루(酒樓), 변복의 황제 주의천과 주천화는 낡은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앞, 박주산채(博酒山菜)가 놓여 있었다. 허나 그들은 산해진미보다 더욱 달게 잔을 주고 받았다. 휘이잉! 낡은 주루의 벽틈으로 한풍(寒風)이 새어 들어왔다. 허나 뜨거운 혈육의 정(情)을 느낀 그들에겐 열기를 식히기에 족했다. "폐하! 아우의 잔을 받으소서!" 주천화가 달아오른 얼굴로 잔을 건넸다. 주의천은 연신 웃음을 흘리며 잔을 받았다. "하하하, 어쩌면...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군." "하하하, 과연 그럴 것 같군요." 주천화가 낭랑히 웃으며 잔을 받았다. 잠시, 침묵이 그들 사이를 갈랐다. "...!" "...!" 주천화가 안색을 천천히 굳히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장래 존체(尊體)에 각별히 유별하소서!" "아우, 고맙네! 허나 아우는 정녕 자금성(紫金城)으로 돌아와 주지 않겠나?" 진심이 어린 간곡한 어투였다. 주천화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 아우는 이미 오래전에 마음을 굳혔습니다." 주의천이 안타까운 눈길로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 곳으로...!" "후후후, 제게는 외조부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구만...!" 태자 주의천은 더 이상 주천화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 다. 허나 그의 용목(龍目) 속에는 여전히 한 줄기 아쉬운 빛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불현듯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숙였던 고개를 치 켜 들었다. "아우! 문방사보를 가지고 있나?" 주천화는 자신의 허리를 툭 쳤다. "하하하, 제게는 두 자루의 검(劍)이 있을 뿐...!" "폐하! 이것을...!" 그때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 육십대 노인이 조심스럽게 들어 와 깊이 허리를 숙이며 문방사보를 바쳤다. 주의천은 그것을 받아 천천히 주탁 위에 내려 놓았다. "아우, 부탁이 있네!" "...!" 태자 주의천이 티끌 하나 없는 화선지(畵宣紙)를 펴놓았다. "아우, 이곳에 대학자로서 나에게 한 마디 금언(金言)을 남겨 주게나." "...!" 의외의 부탁에 주천화는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허나 곧, 묵묵히 백지를 응시하며 붓을 들 었다. 스스... 쓰윽! 일필휘지, 단숨에 단 한 자의 글을 내리 긁었다. - 서(恕). 아! 희디 흰 하늘에 흑룡(黑龍)이 비천(飛天)하고 있었다. 그것은 용서할 서자가 아닌가! 주천화가 천천히 붓을 놓았다. "폐하, 부디, 만민(萬民)을 하해(河海)와 같은 성심(聖心)으로 통치하여 주옵소서." 용서하라! 천하를 더 이상 피에 잠기게 하지 말고 죄(罪)를 사(赦)하란 뜻이 아닌가! 주의천이 주천화의 뜻을 간파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아우의 깊은 혜지를...!" 주천화가 미소를 머금으며 한 잔의 술을 따라 마셨다. "헌데, 제가 부탁드린 것은?" "허허, 그는 연경에 있네. 아직도 그를 주종하는 무리들이 연경 주위를 진치고 있다네." "허, 아직도 그들이...!" 주천화가 탄식하며 내뱉았다. 그때 태자가 주천화를 조심스럽게 쳐다 보았다. "아우! 조심하게." 일순 그들의 뜨거운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휘이잉...! 변경의 한풍이 또 다시 두 사람의 사이를 스쳐갔다. 묵묵히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 그들은 언제까지나 일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이 자리가 두 사람의 마지막 대좌가 될 수도 있음을 느낀 때문이었다. 휘이잉! 차가운 바람, 늦겨울이 흐르고 있었다. ■ 황 제3권 제28장 대회전(大會戰) ━━━━━━━━━━━━━━━━━━━━━━━━━━━━━━━━━━━ ① 하북성(河北省) 연경으로 통하는 평야(平野), 이곳은 모두 시뻘 건 황토(黃土) 뿐이었다. 황토는 늦겨울 한풍(寒風)과 혹한에 얼 어붙어 시뻘건 얼음 빙판으로 화해 있었다. 일몰(日沒), 이 황야는 처절한 핏빛으로 떠올라 섬뜩한 기경(奇景)을 이룬다. 황토대야평(黃土大野坪), 일명 생사평(生死坪)이라고도 불리우는 곳이었다. 두두두두...! 다다다다...! 문득 천지를 뒤흔드는 일진의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 내 흑구름과 함께 시커먼 무리가 황토대야평 저 끝에 나타났다. 두두두두...! 삼백여 기(三百餘騎)인 인마, 그들은 강렬한 기세로 황토대야평 을 질주해 오고 있었다. 모두 흑의장포를 입고 흑색건(黑色巾)을 둘렀다. 오른팔에는 모두 상포(喪布)를 두르고 있었다. 어깨에는 검은 피 풍이 찢어질 듯 나부꼈다. 헌데 정 중앙, 두 명의 복장만 달랐다. 중앙의 단 두 명만이 붉 은색과 은빛의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주를 걸친 그들의 풍도는 실로 범상치 않았다. 순식간에 삼백여 기는 황토대야평으로 들어섰다. 이때 은색갑주 의 인물이 옆을 향해 소리쳤다. "폐하, 여기가 생사평이란 곳입니다." 헌데, 그는 바로 추국태가 아닌가!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붉은색 갑주에 홍의피풍을 걸친 준미한 인물은 바로 흥덕태자 주의천이었다. 주의천은 멀리 눈 앞에 펼쳐진 평야를 응시했다. "흠! 이곳이 인간들의 피가 흘러들어 황토로 바뀌었다는 생사평이란 말인가?" 오랜 역사 속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혈전(血戰)을 벌여 왔던 곳. 그리하여 피(血)의 역사(歷史)의 현장이기도 한 황토대야평이 바 로 이 생사평이었다. 문득 흥덕태자 주의천이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통령! 연왕부까지는 얼마나 남았는가?" "이백여 리 남았습니다. 폐하." "이백여 리...." 주의천은 나직이 뇌까리더니, 돌연 두 눈에 신광을 발하며 엄숙히 소리쳤다. "더욱 박차를 가하라! "예, 폐하." 이어 찌렁찌렁한 벽력음이 황야(荒野)의 하늘을 갈랐다. "더욱 속력을 내라!" 두두두두...! 흥덕태자 주의천. 아니, 이제는 제황(帝皇)의 관을 쓸 야심만만 한 인물, 그는 덕무왕의 잔당을 소탕하러 직접 연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그들의 뒤를 따르는 백여 개의 인영들이 또 있었다, 누르스름한 황포인(黃袍人)들, 그들은 모두 초절정 고수(高手)들 인 듯 가볍게 신형을 날려 인마무리를 뒤따르고 있었다. 헌데 그들의 맨 앞에 보통 사람의 두 배에 가까운 거구(巨軀)의 두 인물이 보였다. 그들의 신법은 몹시 신쾌무비해 두 개의 철탑 이 허공을 나는 듯했다. 이때 그 중 한 인물이 앞을 쏘아보며 음침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흐, 추국태! 공자님 말씀이 틀리지 않는다면... 너 또한 황 토대야평에서 죽을 것이다!" 순간 옆의 대한이 안색이 급변해 부르짖었다. "대, 대형(大兄)! 그 자는 성상의 막역지우라던데...." 그들은 바로 전궁과 웅평산이었다. 전궁은 신형(身形)을 날리면서 어깨에 전궁을 풀러내려 살을 먹 였다. 그의 두툼한 입술엔 시종 의미심장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흐흐흐, 아우야, 너는 모른단다. 지금껏 공자님의 말씀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 "그 분께선 내게 보낸 서찰에 적으시길... 폐하를 경호하라고 하 셨다. 황실어림금의대를 끌고...." 순간 웅평산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희번덕였다. "화, 대형께선 옛날에 뱃놈이라 하셨는데...." 일순 전궁이 찢어지도록 눈을 부릅떴다. "뱃, 뱃놈이라고? 흐흐흐, 아우야, 대형의 과거를 그렇게 들통내는 법이 아니란다!" 그는 얼굴을 무참히 일그러뜨리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으흐흐...!" "훗... 훗!" 백여 장 어림금의대들이 모두 배에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 렸다. 순간 전웅은 얼굴 근육을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버럭 소리쳤다. "그, 그대들은 웃지 마라! 본좌는 천문왕자님의 제일신위다!" "가자!" "속력을 내라!" 이내 그들은 질풍같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헌데 전궁의 말이 실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의 말에 의하면 흥덕왕자 주의천의 막역지우이자 제일심복인 추국태가 주의천을 배신하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얼마 후, 일진의 인마들은 광활한 황토대야평 중앙에 이르렀다. 실로 천하를 말발굽 아래 짓밟을 듯 가공할 기세였다. 헌데 돌연 추국태가 번쩍 우수를 쳐들며 소리쳤다. "여기가 좋겠군. 멈춰라!" 순간 시커먼 인마의 무리는 추국태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멈춰졌다. 흥덕태자 주의천은 의아해 몸을 돌려 물었다. "아니, 왜? 멈추는가?" 허나 추국태는 돌연 정숙하며 동문서답(東問西答)했다. "모두 말에서 내려 폐하께 대례(大禮)를 올려라!" 순간 수백 명 무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부복지례를 취하지 않는가! 주의천은 당황했다. "통령! 이 무슨...?" 불길한 예감(豫感), 먹구름같은 암울함이 일순 그의 뇌리로 밀려 들어왔다. 추국태는 그의 앞에 부복한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폐하, 소신은 폐하와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해 온 지기지우(知己知友)였습니다." 주의천은 마상에서 그를 내려다 보며 소리쳤다. "새삼스레... 무슨 말인가?" "허나 폐하! 소신은 천하평정을 위해 역신(逆臣)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주의천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미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폐하, 폐하께선 다정(多情)한 분이시지만, 진정한 제왕(帝王)의 재목은 아니옵니다." 순간 주의천은 몸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하면... 그, 그대가... 나를...!" 그의 입에서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음성이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천문왕자께서 제(帝)의 보위를 사양한 지금, 제황의 재목은 연 왕, 바로 덕무왕 전하뿐이옵니다!" 그 음성은 굳은 확신에 차 있었다. 순간 흥덕태자 주의천은 대노해 부르짖었다. "추국태, 네가... 이럴 수 있느냐!" 벽력같은 일갈이 적막한 광야를 뒤흔들었다. 허나 그것은 고독한 부르짖음일 뿐이었다. 추국태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천하만민(天下萬民)을 위해서...!" 위풍당당한 기개가 그의 몸에서 질식할 듯 품어져 나왔다. 주의천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황한 눈길로 전면의 수 백여 인물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모두 끄덕도 않고 있었다. 모두 추국태와 뜻을 같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의천은 멀리 뒷쪽의 금의위 무사들을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저 자들까지도...!" 추국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느린 동작으로 그러나 주저없이 검을 뽑았다. 스르릉! 용의 울부짖음같은 파공성과 함께 눈부신 검광이 허공에 부서졌다. 추국태의 우묵한 눈에 비장한 기운이 뭉쳤다. "폐하, 소신의 불충(不忠)을 용서 하십시요!" 순간 주의천은 창백하게 질리며 허공(虛空)을 향해 허망히 부르짖었다. "이, 이럴 수가...! 대체... 하늘 아래 누구를 믿어야 한단 말인가!" 카앙! 순간 추국태의 허리에서 검광이 폭발했다. 실로 가공할 검기가 태자 주의천, 아니 이제는 당금천하의 주인이 된 황제에게 쏘아져 갔다. "네, 네가 진정...!" 주의천의 눈에 경악(驚愕)이 어렸다. 탁... 타악! 주의천이 추국태의 공세를 무산시키며 말 위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 한 자루 섭선(攝扇)이 들려 있었다. "후후후, 역시 폐하의 절기도 만만치 않군요." 추국태가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소신은 폐하와 비무해 보는 것을 또한 기다려왔습니다." 쓰윽! 추국태가 검을 세운 채 전진해 왔다. 삼백여에 달하는 금의위들 은 이 광경을 지켜 보기만 할 뿐 아무도 주의천을 도우려 하지 않 았다. 그들은 모두 추국태의 충실한 심복일 뿐 태자의 명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주의천은 철저한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고 신음성을 흘려냈다. 연 왕의 안배가 이토록 치밀할 줄을 그 누구라서 예상할 수 있으랴! 사삭! 번쩍! 추국태의 검이 가공할 검기(劍氣)를 토해냈다. 허나 주의천 역시 절대의 고수(高手), 어렵지 않게 추국태의 검을 막아가고 있었다. "으음...!" 주의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연신 신음성을 흘려냈다. 짙은 절망의 기색이 그의 준미한 용모(容貌)를 덮었다. 쏴아아...! 추국태의 검이 또 다시 무서운 검풍(劍風)을 일으켰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쏴앙...! 돌연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한 가닥 백광이 무서운 기세로 추국 태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오지 않는가! 그 빠르기는 섬전을 무색 케 했으며, 그 가공할 힘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엇이냐?" 추국태가 기절초풍하며 주의천을 공격하던 검세를 바꿨다. 꽝... 타앙! 그 순간 추국태의 검이 부서져 나갔다. "헉!" 추국태는 그 가공할 기세(氣勢)에 아연실색(啞然失色)했다. "와하하하...!" 돌연 산을 갈아엎을 듯한 우렁찬 광소(狂笑)가 터졌다. 동시에 실로 태산만한 두 거구(巨軀)의 인영이 구르듯 날아왔다. 전궁, 그리고 웅평산이었다. "와하하하, 어떤 놈이 폐하를 시해하려 하느냐?" 전궁의 음성(音聲)이 뇌전(雷電)치듯 했다. "폐하, 심려 놓으소서!" 전궁의 손에서 다시 무서운 굉음(轟音)이 폭발(爆發)했다. 꽈꽝! 그 가공할 강전이 뇌전(雷電)치듯 추국태를 덮쳤다. "윽!" 추국태는 다급한 비명(悲鳴)을 토하며 미끄러졌다. "웬 놈이냐?" "와하하하, 네가 이번에도 피하면 다시는 활(弓)을 쏘지 않으리라!" 꽈꽝! 백광(白光)이 눈부시게 추국태를 향해 폭발(爆發)해 왔다. "이, 이렇게 빠를 수가!" 대내제일고수로 꼽히던 자신이 아니던가! 허나 전궁의 무서운 강 궁에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윽!" 그는 전력을 다해 피하려 했으나 강전은 이미 그의 왼팔을 꿰뚫고 있었다. 팍! 왼팔이 피떡이 되어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웅평산이 도끼를 휘 두르며 금의위 사이로 뛰어들었다. "에라! 이 잡놈들아! 폐하를 지켜야 할 놈들이 오히려 폐하를 공격하다니!" 그의 도끼에서 무서운 질풍(疾風)이 일었다. "크악!" "왁!" 그의 일격을 제대로 받아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산같은 거구(巨軀)에서 엄청난 신력(神力)이 빗발치듯 쏟아져 나왔다. 마 치 양떼 속에 뛰어든 맹수랄까? 웅평산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대내최고의 고수라던 금의위들이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크아악!" "아악!" 피가 난무(亂舞)했다. 끊어진 팔다리가 우박처럼 흩날렸다. 전궁 역시 무서운 기세(氣勢)로 강전을 쏘아대고 있었다. 화살 한 대에 이삼 명의 금의위들이 꼬치 꿰듯 한꺼번에 꿰뚫렸다. "으왁!" "왁!" 추국태의 안색이 싹 변했다. 단 두 명에 의해 삼백 인이 정신을 못차리고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당황하지 마라! 적은 단 두 명이다!" 한편, 영락없이 죽을 줄 알았던 황제 주의천의 눈에 감격(感激)이 떠올랐다. "저, 저 사람은 백장사...!" 그의 얼굴에 생기(生氣)가 감돌았다. "당황하지 마라!" 추국태가 고함(高喊)을 지르며 웅평산에게 덮쳐갔다. "두 명에게 금의위 삼백이 무너져서야 말이 되느냐!" "흐흐흐, 과연 그럴까?" 이때 어디선가 나지막한 음성이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추국태의 안색(顔色)이 싸악 변했다. 그들의 주위로 오백 에 달하는 은의(銀衣) 무사들이 솟아나지 않는가! "그, 그대는... 경, 경장군!" 그들의 중앙에 명친건흥군의 수장 경호찬이 백발을 휘날리며 서 있는 것을 본 추국태의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당, 당했구나!" 그는 웅평산에게 덮쳐가다 우뚝 멈춰섰다. "누, 누가 이토록 철저하단 말인가?" "흐흐흐, 누군, 누구겠나? 천문왕 전하이시지!" 전궁이 다시 화살을 쟀다. 쏴아아앙! 허공(虛空)에서 엄청난 파공음이 진동했다. 스윽! 추국태가 옆으로 미끄러지며 악독한 눈을 돌렸다. "천문왕자도 여기 왔느냐?" "와하하하, 닭잡는데 소잡는 칼을 쓸 수야 없지 않느냐!" 경호찬이 대소(大笑)를 터뜨렸다. "왜? 명친건흥군으로 부족하다는 말이냐?" 경호찬이 손을 치켜 들었다. "와아아...!" "역도들을 쳐부숴라!" 순간 그것이 신호인 듯 오백여 명친건흥군이 해일처럼 금의위를 덮쳐왔다. 그들은 일백이십만 명친건흥군 중에서 엄선된 최고의 고수들, 그 기세가 실로 광풍노도를 무색케 했다. 쏴아앙! "으악!" 꽈릉... 꽈꽈꽈꽝! 대번에 금의위들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실로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지고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천공(天空)을 뒤덮었다. 이곳은... 생사평이었다. ② 전궁과 웅평산은 황제를 호위(護衛)하고 있었다. 전궁의 강궁에 는 무려 일곱대의 강전이 한꺼번에 재어져 있었다. 그는 눈을 부 릅뜬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나 아무도 황제 십 장 가까이 다가 오지 못했다. "진정 천문왕은 오지 않았단 말이지!" 이때 추국태가 자신의 수하(手下)들이 풀잎처럼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악독한 미소를 머금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정녕 그렇다면 네놈들 중 이곳을 벗어날 놈은 한 놈도 없을 것이다." 추국태가 확신에 차 외치자 경호찬을 비롯한 중인들이 의혹(疑惑)을 떠올렸다. 이때 추국태가 번쩍 한 손을 치켜 들었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 금광(金光)이 영롱한 소검(小劍)이 들려 있었다. "흐흐흐, 진정한 금의위의 맛을 보여주지!" 그의 두 눈에 지옥(地獄)의 불길같은 악독한 광망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진정한 금의위?" 황제 주의천이 섬뜩한 불안에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생사평의 뒷쪽에서 수십의 흑의인이 솟아나지 않는가! 섬칫했다. 무서운 검세가 그들의 주위에서 형성(形成)되었다. 이렬로 늘어 서서 다가오고 있는 구십구 명의 흑의인들, 그들 구십구 명이 일 단 움직이자 무서운 귀기(鬼氣)가 질풍처럼 일었다. "와하하하, 관부(官府)를 대표하는 구십구 관부 최고의 고수들이다!" 추국태가 외쳤다. "크와하하하, 황족(皇族)들에게 억눌려 온 관부(官府)의 힘을 맛보아라!" "구십구검수(九十九劍手)는 명을 받들라!" "예!" 구십구 명의 흑의인들은 마치 한 사람이 대답하듯 일제히 복명했다. 대략 모두들 삼십여 세 가량? 허나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도는 이 미 그들이 최고의 고수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 있는 놈들은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쓸어 버려라!" 추국태의 음성에는 살기(殺氣)가 충만해 있었다. 겨우 구십구 인 의 흑의무사들로 오백에 달하는 명친건흥군을 주살하라니 어떻게 보면 광오(狂傲)하기 이를데 없는 명령이었다. 허나 지금 그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구십구 명의 전신에서 일고 있는 기운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쓰윽! 일렬로 늘어선 그들이 거침없이 다가왔다. 헌데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듯 일사분란했으며 그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마치 얼음을 지치듯 미끄러져 오고 있지 않은가! "무슨 귀신들이냐?" 전궁이 벼락같이 외치며 강전을 발사했다. 꽈꽝! 우르르...! 무서운 백광이 뇌전(雷電)치듯 그들에게 쏘아져 갔다. 헌데 그들은 검을 뽑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강전이 두 쪽이 나 떨어지지 않는가! '헉!' 전궁이 한기(寒氣)를 느꼈다. 순간 구십구 명의 흑의인들의 손이 일제히 허리로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허리까지 늘어진 흑발이었 는데 어찌보면 바람에 펄럭이는 흑발(黑髮)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채앵! 그들의 손에 일제히 검이 쥐어졌다. 창... 치앙! "으악!" "우아악!" 그것은 폭풍(暴風)이었다. 죽음의 이빨을 번뜩이는 무서운 폭풍, 거칠 것이 없었다. 일백이십만 명친건흥군에서 고르고 고른 고수들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넘어가고 있었 다. 어느 누구도 이 무서운 고수들 앞을 막지 못했다. 누구든 그 앞 에 얼씬거리면 그대로 끝이었다. 구십구 명의 흑의인들은 심지어 금의위까지 마구 베어 넘기며 밀려오고 있었다. 쏴쏴쏴! 그들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수십 인이 처참히 두 쪽으로 베어졌 다. 너무도 가공스러운 위세에 아무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이런 미친 놈들!" "멈춰라!" 전궁과 웅평산이 뛰어들었다. "멈- 춰- 라!" 이때, 돌연 허공에서 실로 뇌성인 듯 일갈이 터져나오지 않는가! 그 음성은 실로 엄청난 내공이 함유되어 있는데다 듣지 않을 수 없는 기이한 마력(魔力)이 담겨 있었다. "...!" 격전(激戰)은 순식간에 멈춰졌다. 기실 격전이라기보다 구십 구 검수의 일방적인 도살이 아니던가! "아니, 저럴 수가!" "누, 누가... 저런...!" 사방에서 탄성(歎聲)이 터졌다. 쏴아아아아앙! 생사평에서 십여 리 떨어져 있는 어느 고봉(高峰), 그 끝에서 아 득히 백광(白光)이 쏘아져 오지 않는가! 그 속도는 가히 번개를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사, 사람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과연 그러했다. 놀랍게도 십여 리 거리를 단숨 에 압축해 오고 있는 것은 백의인영이었다. 백의인영, 아아! 바로 주천화가 아닌가! "천마대제다!" "천문왕 전하이시다!" 탄성(歎聲)과 경악성(驚愕聲)이 엇갈렸다. 순식간에 주천화가 태자 주의천, 아니 황제 앞에 내려섰다. "폐하!" "오오! 천화아우...!" "폐하, 이번 일에 끝까지 관여하려 하지 않았으나...!" 주천화의 눈에 한 가닥 그늘이 스쳤다. "그 분에게 저런 최후(最後)의 세력(勢力)이 또한 숨겨져 있을 줄은...!" 주천화가 돌연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연왕부의 일은 제가 처리하고 싶습니다. 피는 저 하나로 만족해야 합니다. 폐하는 부디 앞으로도 손에 피를 묻히지 마시기를...!" "...!" "자금성으로 돌아가십시오." 주천화가 전궁과 웅평산을 돌아보았다. "그대들은 성상을 모시고 어서 자금성으로 돌아가라!" "예!" 전궁과 웅평산이 허리를 접었다. "폐하! 저들을 거둬 두십시요. 그들은 다소 우직하기는 하나 충 성심만큼은 아무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빠르게 말을 마친 주천화의 눈이 이번에는 추국태를 직시(直視)했다. "네 너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 전일(前日) 그렇게 당부했거늘...!" 그의 눈에서 실로 가공할 살기(殺氣)가 폭사했다. '헉!' 추국태가 놀라 뒷걸음쳤다. 삭! 순간 주천화의 손목에서 백광이 치뻗었다. 그 빠르기는 아무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 "크아아악!" 쿵! 피가 솟구쳤다. 어느 사인엔가 추국태의 몸이 정확히 두 조각이 되어 서서히 무너져 내렸 다. "자, 어서 떠나십시요. 이들은 내가 맡을 것입니다." 주천화의 말에 황제는 남은 인원들을 이끌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 경호찬이 근심의 눈으로 주천화를 바라보았다. "후후, 외조부님! 아무 걱정 마시고 어서 돌아 가십시요." 휘이잉! 문득 한 가닥 바람이 스치고, 그 바람이 완전히 생사평을 지나갈 무렵 생사평에 남아 있는 것은 주천화와 구십구 명의 흑의검수들 뿐이었다. 매몰찬 한풍(寒風)이 또 한 차례 얼어붙은 황토를 휩쓸었다. 구십구 명(九十九名)의 흑의검수(黑衣劍手), 그들은 일렬 횡대를 유지한 채 점차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산발한 흑발(黑髮)이 미친 듯 흩날렸으나 그들의 눈빛은 전혀 흐 트러짐이 없었다. 그들의 움직임 또한 전혀 빈틈이 없었다. 어떠 한 상태에서도 발검(拔劍)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態勢)가 갖추어져 있었다. 주천화, 그는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눈빛 또한 무심했다. 그의 전신을 압박하며 쇄도해 들고 있는 삼엄한 검기(劍氣), 그 것은 구십구 검수의 전신으로부터 무형 중에 뿜어지고 있는 기세였다. 한 마디로, 검도(劍道)의 초절정 고수가 아니고서는 검이 채 검 집을 벗어나기도 전에 이토록 삼엄한 검기를 뿜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문득 주천화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역시 그대들은 금의위(錦衣衛)의 무인(武人)들이었군!" "...!" "...!" 그러나 대꾸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한결같이 입 을 굳게 봉한 채 무심한 눈길로 주천화를 굽어볼 뿐이었다. 바로 이때 선두의 인물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주천화의 입에서 경이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대들은 황무오천성(皇武五天星)!" 아! 황무오천성, 그들은 과거 북해도에서 문국왕을 쫓던 대내 최 고의 고수들이 아니었던가! 그 황무오천성 중 사 인(四人)이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이다. 구십구 검수가 일제히 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동시에 황무 오천성 중 일 인(一人)이었던 중앙의 노검수(老劍手)가 무섭게 입 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전하(殿下)! 허나 우리들은 기실 금의위의 고수들 이 아니옵니다. 우리는 연왕부를 수호하는 덕무왕위대(德武王衛隊)입니다!" "음...!" 주천화는 짤막히 신음했다. 그는 구십구 검수의 왼쪽 팔에 한결 같이 매어진 건(巾)을 오랫동안 응시(凝視)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충정(忠情), 본좌만은 충분히 이해한다." 순간 노검수의 무심한 눈에 일말의 격동이 스쳐갔다. "전하, 저는 황궁제이고수(皇宮第二高手)로 불리던 천웅창(千雄昌)이옵니다." 다음 순간 그는 주천화 앞에 쓰러지듯 털썩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전 덕무왕위대는 천문왕 전하께 대례를 취하라!" 외침이 발해진 순간 구십구 검수는 일제히 주천화를 향해 대례를 올렸다. 천웅창의 노안(老眼)에 언뜻 뜨거운 광채가 일렁였다. "전하, 소신들의 대역죄를 부디... 용서하소서. 허나 본시 한 분 의 주군(主君) 앞에 충성을 맹세한 몸! 그 분의 하명(下命)은 곧 천명(天命)이 아니오리까?"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 주천화는 부복한 구십구 검수를 천천히 쓸어보다가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음! 이미 그대들은 죽음을 각오했군. 머리까지 풀어 내렸으니...!" "전하, 부디 용서를...!" "일어나시오. 이것이 그대들과 본좌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 주천화의 눈빛이 일순간 암울한 빛을 띠었다. 허나 그는 곧 무심으로 돌아갔다. 구십구 검수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 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죽여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는 이미 없는 것이다. 휘이이이잉! 살을 에일 듯한 찬바람이 주천화의 백삼자락을 사납게 펄럭이고 스쳐갔다. "구구검왕진(九九劍王陣)을 펼쳐라!" 순간 천웅창의 비장한 외침이 발해졌다. 차앙... 챙! 동시에 맑은 음향이 터지며 무서운 전광이 일어났다. 구십구 검 수가 일제히 발검하여 회전을 시작한 것이다. 츠으... 츠츠츳! 그 순간 이미 하늘과 땅은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하늘을 가린 검기(劍氣)의 광풍(狂風)과 몰아치는 살기(殺氣)뿐. 츠스슷...슈슈슉! 아홉 명이 한 몸이 된 듯 뭉쳐지며 일제히 주천화를 덮쳐왔다. 결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하고도 기쾌무비한 출수였다. 검광은 모두 아홉 갈래였고 그 빠름은 야공(夜空)을 가르는 뇌전(雷電)을 방불케 했다. "과연, 어쩌면 이 싸움이 생(生)에 마지막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주천화는 내심 감탄하며 쌍검을 수평으로 겨눔과 동시에 비스듬히 쓸어쳤다. 휘이이잉! 카아앙! 굉렬한 폭음이 터지며 시퍼런 불꽃이 사방으로 튕나갔다. 구십구 대 일의 무서운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윽!' 일순 주천화의 검미가 꿈틀했다. 그의 동작이 그토록 빨랐건만 구십구 명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에 내부가 잠시 진탕됨을 느낀 것이다. 구십구 검수가 펼치는 구구검왕진, 그것은 실로 주천화의 상상을 벗어난 절세무비의 것이었다. 주천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일성 장소와 함께 수중의 검을 벼락같이 뒤집으며 잇달아 구검십팔초(九劍十八招)를 전개했다. "천마혈검류(天魔月劍流)!" 쏴쏴쏴! 가공할 검세가 일어났다. 허나 그토록 무서운 검세가 구구검왕진 의 기이한 검세에 부딪치자 여지없이 무산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실로 무서운 검진이었다. 검세가 무산된 것을 안 주천화는 그 즉시 쌍검을 교차시켜 더욱 가공할 검기를 쏟아냈다. 츠츠츠츠...! 그의 쌍검에서 삼엄한 검광이 실체(實體)인 양 뻗어나갔다. 그것은 느리기 이를데 없는 검세였다. 허나 그것은 검강(劍 )을 운용한 막강한 검세였고, 이제 막 발동하기 시작한 구구검왕진의 중추(中樞)를 정확히 찔러갔다. 진의 변화를 정확히 간파하지 않고서는 결코 엄두도 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까까까깡! 매서운 불꽃이 튀며 주천화는 손목이 화끈해짐을 느꼈다. 검이 한 차례 진동하는 것 같더니 이내 검강이 검진의 중추 속으 로 사라져 버렸다. 놀랍게도 주천화의 공력으로 진세의 약점을 찔 렀는데도 이득을 얻지 못한 것이다. 주천화의 안색에 회의의 빛이 떠올랐다. '이럴 수가? 비록 칠성이라 해도 세갑자 이상의 내공이 집중되었 거늘 설마 이들의 무공이 그토록이나...?' 주천화의 생각은 더 이어질 수가 없었다. 쐐애액! 츠츠츠츠...! 바로 그 순간에 항거할 수 없는 엄청난 검기가 폭풍처럼 그를 향 해 덮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 황 제3권 제29장 혈전(血戰) 그리고 잔결오위(殘決五衛)! ━━━━━━━━━━━━━━━━━━━━━━━━━━━━━━━━━━━ ① 주천화의 상하를 노리고 아홉 자루의 검이 번개처럼 날아들고 있 었다. 헌데 그 검세는 실로 괴이신랄하여 주천화의 상하 요혈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검세가 그의 몸과 한 자 정도에 이르렀을 때, 주천화는 짤막한 기합을 내뱉으며 잇달아 쌍검을 떨쳐 정면으로 맞서갔다. 까앙! "윽!" 주천화가 비틀거리며 두 걸음 물러섰다. 쉬익! 검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카락 몇 올을 베어 버리고 지 나갔다. 등끝에 식은 땀이 쫙 솟았다. 주천화가 방향을 급전시키 지 않았으면 목이 날아갔을 판이었다. "악독하구나!" 주천화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으며 이를 악물고 전 공력을 쌍검 에 응집시켰다. "천마화검류(天魔花劍流) ! 천마폭섬류(天魔瀑閃流)!" 휘류류류...! 쏴쏴쏴...! 미친 듯한 검풍과 검빛이 어우러지며 검강(劍 )이 수레바퀴처럼 굴러다니면서 목위(木位)와 금위(金位)를 덮쳤다. 그곳 역시 진세의 약점이었다. 꾸아앙! 꽈르르르릉! 천번지복의 굉음이 터졌다. "크악!" "크아악!" 마침내, 두 명의 검수가 피화살을 뿌리며 날아갔다. 허나 그 순간 둔중한 금속성이 터지며 주천화는 한 모금 선혈을 토해냈다. 두 검수를 날려 버리는 순간 그도 여지없이 허리에 일 검을 맞은 것이다. 내상(內傷)은 입었으나 외상(外傷)은 없었다. 허나 어찌 그가 이 런 경우를 당해 보았단 말인가! 주천화의 눈에 분노와 살기가 폭사되었다. "천마쌍화검류- !" 주천화가 냉혹하게 외치며 쌍검을 벼락같이 쓸어냈다. 순간 검은 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마치 선혈과도 같은 홍광이 쌍검의 끝에서 눈부시게 폭출되었다. 파아아! 츠츠츠츠...! 헌데 아! 놀랍게도 그토록 무서운 검세가 구구검왕진에 부딪치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천천히 사그라 들지 않는가! 그 순간 구구검왕진의 검세가 더욱 날카로워지며 가공할 검기를 쏟아내었다. 씨이이...! 츠윽... 츠츠츳! 무서운 위기가 닥쳐왔다. 헌데 이 순간 주천화의 얼굴에 한 가닥 기이한 미소가 보일 듯 말 듯 스쳐갔다. '좋다! 천마검류(天魔劍流)의 마지막 초식 천마뇌검류(天魔雷劍 流)로 승부를 결정짓겠다!' 그렇다! 주천화는 결국 천마검류의 최후초식을 사용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심중유검(心中有劍), 쌍검필살(雙劍必殺), 의중살(意中殺)의 대 도(大道)에 이른 검도지학(劍道之學) 초극한의 경지가 펼쳐질 순 간이었다. ㅆ! 찰나 가공할 검기가 주천화의 목을 노리고 좌우에서 덮쳐왔다. 주천화의 몸이 그 순간 뒤로 물러나며 천지를 떨어 울리는 냉성이 울려 퍼졌다. "천마뇌검류!" 그 순간 실로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벌어졌다. 주천화가 허공에 서 한 바퀴 맴돌자 그의 전신에서 수천 수만 갈래의 눈부신 광채 를 발하는 검기가 부챗살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으악!" "크아아악!" 미처 피하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눈부신 검기가 유령의 혼 (魂)인 양 장내를 휘감는 순간 수십 명이 걸레조각처럼 찢겨 공중 에 쫘악 뿌려졌다. 아! 실로 공포스러운 검공이 아닌가! 허나 다음 순간 더욱 통천 경악할 광경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슈슈슈숙! 쐐애...! 주천화의 쌍검이 그의 수중을 떠나 구십구 검수의 검진 속을 헤집기 시작한 것이다. "저, 저럴 수가...!" "피, 피해... 으악!" 피보라가 튀며 참혹한 비명이 야공을 찢었다. 동시에 허공에서 주천화의 핏빛 광소가 미친 듯 터져나왔다. 이 어 그의 신형이 거꾸로 땅을 향해 내리 꽂히는 순간 돌연 주천화 의 두 손에서 새하얀 백기가 검기처럼 뻗더니 일순간 둥글게 환을 그렸다. "으아악!" "우악!" 동시에 헤아릴 수도 없는 목들이 몸뚱이를 떠나 피보라를 뿌리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쿵쿵쿵쿵...! 썩은 짚단처럼 넘어가는 목잃은 동체들과 허공으로 치솟는 피보 라. 아아! 실로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었다. 혼단백절(魂斷魄絶), 너무도 통천경악할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단 한 순간에 그토록 무섭던 구구검왕진의 구십구 검수가 모조리 시체로 변했다. 주천화,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한 검수의 머리에 박혀 있는 천마제혈검을 뽑아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달빛만큼이나 뿌옇다. 그토록 창 백한 주천화의 입가에는 한 줄기 선혈이 쉬지 않고 흐르고 있어 한 가닥 처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주천화의 발밑으로 피(血)가 대해가 되어 흐르고 있었고 천공에 도 석양이 핏빛을 뿌리고 있었다. '피곤하다.' 육체의 피곤이 아니었다. 그의 심신을 억압해 오는 피로감은 짙 은 허탈감에서 기인된 피곤이리라. 헌데 이때 주천화의 눈에 저 멀리 다섯 인영이 날아오고 있지 않은가! '또 있었는가...!' 주천화는 그늘을 떠올렸다. 헌데 그들은 섬전(閃電)같이 날아와 주천화를 향해 부복하지 않는가! 주천화 앞에 부복해 있는 오 인의 인영은 바로 천절오살마였다. 헌데 놀랍지 않은가.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섬강천마부 흑웅조차 버젓이 그 가운데 끼어 있었던 것이다. "...!" 주천화의 눈이 커졌다. 흑웅의 전신을 훑는 그의 눈이 차츰 좁아 졌다. 기쁨, 그리고 의혹(疑惑)의 빛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 그대들이...!" "이 늙은이들을 죽여 주옵소서!" 천절오살마가 일제히 입을 열었다. "흑노, 살아 있었구료!" 천절오살마는 지면에 이마를 조아린 채 들지 못했다. 흑웅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소주, 이 늙은이가 감히 소주를 속인 죄는 백 번 죽어 마땅합니다!" 주천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소주, 이 늙은이들은 오로지 당금무림에 흐르고 있는 암류를 제 거할 수 있는 분이 소주인 것을 알기에...!" "그만." 주천화가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마음을 이미 헤아리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소주...!" "대제...!" "그대들 덕분에 무림의 암운을 제거했고, 또한 천하각지를 둘러 보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하고 있소." "...!" "여기에 흑노까지 살아 있으니, 내 어찌 화를 낼 수 있겠소!" 천절오살마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흑노의 눈에 뜨 거운 무엇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소, 소주...!" "...!" "이 늙은이가 소주의 심려를 끼친 죄...!" "하하하, 더 말할 것 없다고 하지 않았소." 주천화가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나는 그대가 살아 있음이 더할나위 없이 기쁠 뿐이오." 아아! 그렇다면 구천만마문의 습격을 받고 흑노가 죽은 것이 모두 연극이었단 말인가? 그렇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실로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는데 바 로 주천화를 무림에 끌어넣기 위한 고육지계(苦肉之計)였던 것이다. "자. 일어들 나시오. 내 이미 그 일은 따지지 않기로 마음 먹었소." 주천화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천절오살마의 신형(身形)이 일으켜졌다. 헌데 주천화의 안색이 돌연 굳어지지 않는가!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속은 것이...!" '이크!' 천절오살마는 등골에 식은땀이 솟아남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겠구료!" 주천화의 눈이 그들을 차례차례 훑었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주천화의 눈에서 무서운 위엄이 뻗어나왔다. '꿀꺽!' 천절오살마는 주천화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것인가 잔뜩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 앞에 세 항아리씩의 술을 마셔야 하오." 주천화의 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물론 내가 보는 앞에서 시행하여야 할 것이오!" "예예?" 무엇인가 큰일이 날 줄 알고 있던 그들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와하하하!" 주천화가 앙천대소(仰天大笑)했다. "하하하!" "허허허허!" 천절오살마의 얼굴이 일제히 풀렸다. 그들은 주천화와 만난 이후 로 처음으로 마음껏 웃었다. "아이쿠! 큰, 큰일났군!" 돌연 고루마존 여웅비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소, 소주! 차라리 죽여 주십시요!" "...!" "이 늙은이는 술을 한 방울도 먹지 못합니다." 고루마존 여웅비가 울상을 지었다. "예? 하하하!" "끼끼끼!" 독화마왕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끌끌끌! 네놈이 이래도 술을 먹지 않는가 보자." 천절오살마, 오랜만에 배꼽이 빠지도록 웃고 있었다. 잠시 후, 천면색환마가 주천화를 바라보았다. "소주!" "...!" 주천화가 마주보았다. "소주께서는 지금 연왕부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후후! 그대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구료." "허허허! 소주의 일거일동에 이미 전 무림인의 이목이 모아져 있음을 모르셨습니까?" 문득 주천화의 눈이 천공으로 향했다. 공허한 빛이 그 눈에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은 마무리 되었소! 단지 귀결만이 남아 있을 뿐!" "...!" "천천히 걷다 내일 쯤 그 분을 뵈려 하오." 천절오살마와 눈빛이 마주쳤다. '으음! 역시 나의 추측대로 소주께서는 연왕의 최후세력을 모르고 계시는군!' 천면색환마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그에 따라 천절오살마 전원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천하에 다시없는 엄청난 고수들...!' '우리가 맡자!' 천절오살마, 주천화의 눈을 피해 묵계를 하고 있었다. "소, 소주!" "...?" "소주께서 내리시는 벌을 차후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 주천화가 의혹을 떠올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구료. 나 역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은 후 마음껏 회포를 풀고 싶으니...!" "그럼, 노노들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순간 천절오살마가 일제히 허리를 숙여보인 후 몸을 날리지 않는가! 주천화의 눈에 의혹이 스치고 있었다. '괴이하군! 저들은 무슨 일로 저리 급하게 떠나는 것일까?' 주천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저들도 저들 나름대로 바쁜 일이 있겠지!" 주천화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허나 그의 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고 있음은 어이된 일일까? ② 연왕부(燕王府). "저, 전하!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어둠이 깃드는 연왕부 후원의 넓은 매화림(梅花林) 속에서 이부 상서 진표악은 떨리는 다급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눈 앞에는 화려한 화복의 육순노인이 뒷짐을 진 채 걷고 있었다. 연왕, 그의 단아한 얼굴에는 자조(自照)띤 불신(不信)과 허탈한 빛이 짙게 질려 있었다. "...!" 그는 침중한 신색으로 말없이 매화림 속을 거닐었다. 검푸른 황 혼(黃昏) 빛이 어깨 위로 쓸쓸히 내려 앉는다. 허나 제왕다운 풍 도에선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진표악은 재차 초조하게 부르짖었다. "전하! 화급을 다투는 시각이옵니다." 일순 연왕의 걸음이 뚝 멎었다. 그의 몸이 미미한 떨림을 보였 다. 공허(空虛)한 눈이 잿빛 허공에 머물렀다. "허허허, 천의(天意)라면 어찌 인간의 힘으로 거역(拒逆)할 수 있으리...!" 그는 눈을 감으며 신음하듯 내뱉았다. "받아 들이는 수밖에...!" 순간 진표악의 우묵한 눈에 뜨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연왕 의 등을 향해 부르짖었다. "전하, 옥체(玉體)를 보중하셔야...!" 격정을 억누른 듯 연왕의 무거운 음성이 그 말을 잘랐다. "괜찮네." "전... 하...!" "그대의 뜨거운 충정(忠貞)은 지옥에 가서도 잊지 않겠네." '으... 흑...!' 진표악은 뜨겁게 치미는 오열을 억지로 삼켰다. "헉헉!" 바로 그때였다. 시커먼 인영 하나가 비틀거리며 매화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광망한 자!" 진표악의 눈에 번뜩 노기가 떠올랐다. 허나 다음 순간 상대 인영 의 정체를 알아차린 그는 다급히 나서며 부르짖었다. "아니... 너는... 어찌 되었느냐?" 흑영, 제법 비범한 기도를 풍기는 흑포중년인은 온통 전신이 피투성이었다. 그는 털썩 연왕 앞에 엎어지며 부르짖었다. "전하, 덕무왕위대들이 천문왕자에게 패하고 말았사옵니다!" "음!" 순간 연왕은 충격을 이기지 못한 듯 비틀하며 무거운 신음(呻吟) 을 토했다. 그토록 태연무심하던 그의 의지는 박살이 나버린 듯했다. 이부상서 진표악은 안색이 창백해지며 부르짖었다. "아, 그들마저 천문왕자에게 당했단 말인가! 그는 신(神)이란 말인가?" 다음 순간 그와 흑포인의 입에서 동시에 뜨거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전하!" "옥체를 보중하소서!" 그때 연왕은 이미 노을이 스러져 불타는 듯한 매화림 속으로 사 라지고 있었다. 그는 쓸쓸히 중얼거렸다. "본왕의 삼십년지계(三十年之計)가 끝내 막을 내리는가? 육신의 불구가 한(恨)스러워... 제황(帝皇)의 자리를 노렸거늘...!" 눈(眼), 허허로운 바람을 담은 듯한 눈이 꺼뭇한 하늘을 더듬었다. "결국 하늘은 나를 버리시는가? 한(恨)을 풀기도 전... 이 처참 한 육신을 저들 손에 넘기시려는가?" 문득 그는 품 속에서 가늘고 긴 사각(四角) 모양의 영패를 꺼냈 다. 한 쪽 끝이 뾰족하고 붉고 푸른 수실이 달린 황금빛 기물(奇 物)이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연왕의 눈가에 깊은 감회가 서렸다. "잔월금황패(殘月金皇牌)! 벌써 사십 년이 흘렀다." 그는 잔월금황패를 매만지며 회의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나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불행한 다섯 명의 인물 들을 거두었다. 그들에게 천하 각파의 무공과 영약(靈藥)을 주어 무학을 전수해온 지 사십여 성상(星霜)!" 문득 그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걷혔다. "이제 그들은 어떤 고수에게도 하루 낮밤을 패하지 않을 것이다." 연왕은 다시 잔월금황패를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인간적인 정(情)이 짙게 배인 미소였다. "그때 그들은 내게 단 한 번의 충성(忠誠)을 맹세해왔다. 나는 끝내 그들을 부르려 하지 않았으나, 하늘이 나의 확신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잔월금황패 끝에 달린 수실을 뽑았다. "내겐 일주야(一晝夜)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나를 받들던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쐐애애애액! 그 나직한 중얼거림이 끝나는 순간 잔월금황패는 한 줄기 섬광처럼 허공으로 쏘아올랐다. 번쩍! 퍼퍼... 펑! 돌연 허공으로 솟구친 잔월금황패가 어두운 천공에서 폭죽(爆竹) 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순간 천공은 찬란한 오색(五色)으로 물들고 있었다. 같은 시각, 연경(燕京)의 교외에 서 있는 한 채의 허름한 서당(書堂) 안에서 는 목청을 찢는 듯한 거북스런 음성이 찌렁찌렁 울려 나오고 있었다. "허어! 이놈들아, 대체 몇 번을 가르쳐야 알겠느냐? 백 번을 가르쳐도 잊어 먹다니!" 그 음성은 어찌나 큰지 허름한 서당 건물이 그 음성에 날아가 버릴 듯했는데.... 고리타분한 냄새를 풍기는 서당 안에는 대여섯 명의 조무라기들 이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모두 빈민(貧民)의 자식들인 듯 몰골 이 지저분하고 엉성했다. "이래 가지고야 십 년을 가르친들 까막눈을 뜨겠느냐? 에잉! 멍청한 놈들...!" 도대체 이 목청을 갖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모순이다. 어 린아이들은 모두 하루만에 귓고막이 얼얼하고 심장이 울렁거릴테 니까! 헌데 이 찌렁찌렁한 목청 주인, 누구든지 그를 대하는 순간 심장이 굳어짐을 느끼리라. 칠십대의 삐쩍 마른 노인(老人), 잿빛 머리칼은 뻣뻣한 갈대숲을 연상케 했으며, 한 쪽 눈이 시커먼 헝겊에 가려져 있다. 이 황폐하고 거친 인상의 노인은 분명 이 서당에 어울리지 않았 다. 허나 노인은 조무라기 앞에 달콤한 듯 잔소리를 늘어 놓고 있 었다. "이놈들아, 네놈들 머리통 속엔...!" 헌데 바로 그때였다. "와아! 누가 폭죽을 터뜨리나봐요!" "우와! 멋지다!" 우르르...! 조무라기들은 잔뜩 진력이 나 있던 판에 무엇을 발견한 듯 문 밖 으로 몰려 나갔다. 사부(師父)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듯한 행동이었다. "이, 이놈들...!" 애꾸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보았다. 열린 문을 통해 보이는 오색천공을...! 순간 그의 뻣뻣한 머리칼이 바람을 만난 숲처럼 부르르 아우성쳤 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격동에 찬 부르짖음이 흘러 나왔다. "잔월금황패! 마침내, 마침내 그 분께서...!" 애꾸노인은 벌떡 일어났다. 낡은 서당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젠 이 짓도 끝났군. 그래...!" 퍽...! 순간 그의 깡마른 몸은 어둠 속에 연기 꺼지듯 사라지고 없었다. 이 간단한 신법 하나만 보아도 그는 결코 한적한 시골의 훈장이 아니었다. 거대한 저택의 후원, 퍽... 퍼억! 둔탁한 파공음이 벌써 반나절째 울리고 있었다. 장작을 패고 쌓는 소리였다. 장작을 패는 노인(老人)은 보기가 안스러울 정도로 쇠약한 노인 이었다. 게다가 서 있는 자세조차 불안하게 다리를 절뚝 거렸다. 허나 그 옆에는 산더미같은 장작이 쌓여 있었다. 그 자그마하고 앙상한 노인의 몸 어디에서 그토록 엄청난 힘이 나오는 것인지 의아스러울 정도의 분량이었다. "아이! 할아범! 그만해. 날이 이렇게 어두워졌는데...!" 문득, 자그마한 어린 소녀가 사박사박 노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녀는 앙증맞은 손으로 노인의 낡은 갈삼(褐衫)을 흔들며 입술을 쫑끗거렸다. "할아범! 혜아(慧兒)는 옛날 이야기가 듣고 싶단 말야!" 퍽... 퍼억! 그러나 노인은 도끼질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예, 이제 다 됐으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아가씨!" 이때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던 소녀의 눈이 반짝 떠지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 아름다워라! 할아범, 별똥이 떨어지나봐!" "별똥이라구요. 아가씨!" 노인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의 쭉 째진 쥐눈이 무심히 허공에 이르는 순간 안색(顔色)이 급변하며 눈이 힘껏 부릅떠졌다. '왔군! 왔어! 사십 년만에...!' 조금씩 그의 쇠약한 몸에 떨림이 심해졌다. 허나 그와 함께 돌연 그의 전신에 일개 하인으로 보기 어려운 비 범한 기도(氣度)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어둠이 깔린 한적한 소로(小路), 한 명의 농부(農父)가 우차(牛 車)를 몰고 오고 있었다. 등에 그의 몸집보다 몇 배나 큰 짐을 메고 있는 그저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농부의 귀로(歸路)였다. 헌데 그는 우수(右手)가 없었다. 처참히 짓뭉개진 팔목만이 소맷 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간간이 드러날 뿐이었다. 또한 얼굴도 거미 줄처럼 흉하게 얽어 있어 어찌보면 처참한 인생을 겪어본 사람같았다. 어둠 속에 펼쳐진 산야(山野), 농부는 흐뭇한 눈길로 산야를 둘 러보며 소의 고삐를 당겼다. "아버님...!" 헌데 이때, 어둠 속에 가녀린 음성과 함께 한 여인의 모습이 드 러났다. 곱상하게 생겼으나 역시 평범해 보이는 촌부(村婦)였다. "아버님! 하루 종일 힘드셨죠?" 농부의 얼굴에 금방 훈훈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아니다. 아가, 그보다 너는 집에서 몸조심을 하랬더니...!" 농부는 자상한 눈길로 촌부의 불룩한 복부를 바라보았다. "아이! 아버님...!" 촌부는 배시시 웃으며 어둠 속에 얼굴 빛을 붉혔다. 문득 농부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몹쓸 놈! 유복자(遺腹子)를 남기고 저 혼자 떠나다니...!" 순간 갑자기 그의 눈은 허공에서 굳어 버렸다. 동시에 주체 못할 격동음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드디어... 사, 사십 년만에...!" 폭죽, 허공을 수놓는 찬란한 오색광채가 그의 동공 속으로 쏘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주루(酒褸), 연경 교외에서 멀리 떨어진 이 주루는 매우 낡고 볼품이 없었다. 문 밖에 내걸린 현판은 빛바래고 낡아 덜렁거렸으며, 주루 안 여 기저기엔 퀴퀴한 냄새와 함께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도무지 손님이라곤 찾아들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주루였다. 스스스슥! 쓱... 싹싹! 주루 안쪽의 구석에서는 지금 두 명의 노인이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을 닦고 있었다. 모두 육십대를 넘긴 노인과 노파, 두 사람 모두 두 팔을 숭숭 걷 어붙이고 쭈그리고 앉아 일에 열심이었다. 그들의 얼굴에선 훈훈 하고 따뜻한 행복을 엿볼 수 있었다. "후유...!" 얼마 후, 노파는 허옇게 살이 오른 팔뚝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문득 노파는 구석에 처박혀 정신없이 그릇을 닦고 있는 왜소한 노인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가느다란 실눈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노파는 왜소한 노인의 등에 손을 얹으며 다정스레 말했다. "영감! 이제 그만하고 들어갑시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이것을 마저 끝내야 내일 장사를 하지." "쿨록, 쿨록...!" 노파는 살찐 몸집을 흔들며 심하게 기침을 해대더니 금방 콧물과 눈물을 동시에 훌쩍거렸다. "후유! 내 이놈의 몸살병 때문에 평생 영감에게 죄를 짓는군요. 훌쩍...!" 노인이 혀를 차며 상체를 일으켰다. "허! 또 괜한 말을...!" 헌데 노인은 어린애 머리통만한 혹이 허리에 솟은 꼽추였다. 그 용모 또한 자라처럼 두 어깨 사이로 푹 파묻어진 목에 고리눈 을 지닌 흉한 것이었다. 꼽추노인은 노파의 손을 잡으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먼저 들어가 쉬구료. 몸도 불편한데." "미안하우, 영감! 쿨록! 쿨록...!" 노파는 거대한 몸집을 일으켜 어정거리며 나갔다. 드르륵! 넓은 주루 문을 여는 순간 빛, 찬란한 천공의 빛이 이 어둑한 주 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오늘따라 웬 별들이 저렇게 쏟아지누...!" 노파는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시야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노파의 음성에 꼽추노인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천공을 응시했다. 그 순간 그는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을 떨었다. 그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윽고,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한 마디.... "드디어... 사십년 만에... 그 분의 부르심을 받았다!" 순간 그는 벌떡 일어났다. 작달막한 삼척단구(三尺段丘)이나 이 순간 그의 전신에서는 절대 고수다운 패도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꼽추노인은 그릇을 내팽개치고 무엇에 이끌리듯 밖으로 향했다. "가야지... 내 평생 단 한 번의 맹세였다!" 연경(燕京), 연경의 저자거리는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불빛을 보고 날아드는 불나방들인가? 저자거리에는 늦은 시각에 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오히려 한낮보다 더 활 기를 띠고 있을 정도였다. 저자거리의 한 구석, 낡디 낡은 천막이 있었다. 앙상한 천막은 온통 울긋불긋한 색깔로 칠해져 있었고 어지럽고 흉한 낙서로 휘갈겨져 있었다. 헌데 천막 속, 한 인물이 낡고 군데군데 솜이 빠진 의자에 앉아 옷을 깁고 있었다. 의자에 푹 파묻힌 자그마한 인물, 허나 놀랍게도 난쟁이노인 었다. 헌데 난쟁이 노인의 앞, 조그마한 동자(童子)가 의자를 거꾸로 놓고 앉아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동그란 얼굴이 재기(才氣)와 함께 궁색한 느낌을 갖게 했다. 동자가 낯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듯 동자의 얼굴엔 무료한 빛이 역력했다. 난쟁이 노인이 머리를 들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낮에 재주넘기가 좀 심했더니 터진 구석이 많구나." 노인의 손은 능숙하게 알록달록한 옷을 꿰매갔다. 동자는 입을 삐죽거렸다. "치이! 할아버지, 이젠 버리고 새로 하나 사요. 벌써 수십 번도 더 꿰멘 옷인데...." "당치 않은 소리 마라." "은자 한 닢이면 될텐데...." 그 말에 난쟁이 노인의 얼굴 근육이 씰룩거렸다. 그는 동자를 향 해 짐짓 눈을 흘겼다. "이놈아! 그래도 한 평생을 같이 재주를 부려온 옷이다." "칫! 그까짓 낡고 더러운 것을...!" 동자는 무료한 듯 고개를 돌려 천막 밖을 빠끔히 내다보았다. "히야! 웬 사람이 저리도 많지?" 동자는 아예 일어나 발뒤꿈치를 들고 고개를 쑥 빼고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여린 목청이 째지는 듯한 경탄성이 빽 울렸다. "와아! 할아버지! 하늘이 무너지나봐요!" "...!" 난쟁이 노인이 일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봐요! 와봐요. 할아버지! 하늘의 별이 와르르 다 쏟아지고 있어 요!" "쯧!" 노인은 동자의 법석에 입맛을 다시며 삐죽 몸을 빼 천막 사이로 밖을 내다 보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깁던 옷을 내팽개치며 격동에 찬 음 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이 어릿광대 옷은 필요없게 되었다!" "...!" 동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떨리는 몸과 바닥에 내팽개쳐진 광대 옷을 번갈아 보았다. 동자는 납짝 뛰어내려 그 옷을 집어들 며 의혹에 차 혼자 중얼거렸다. "어릿광대 옷이 필요없게 됐다고...?" "그래...." 난쟁이 노인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어떤 비감과 격동을 내포한 음성이었다. "이제... 광대놀이는 끝난 것이다!" ■ 황 제3권 제30장 숙명(宿命)의 귀결(歸結) ━━━━━━━━━━━━━━━━━━━━━━━━━━━━━━━━━━━ ① 칠흑같은 어둠 속, 연왕부를 에워싸고 폭발할 듯 팽팽한 살기(殺氣)가 감돌았다. 그 것은 한 가닥 미풍(微風)만 불어도 활화산(活火山)처럼 폭발해 버 릴 듯한 위기감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거대한 연왕부 정면(正面)에는 한 개의 거대한 사자신상(獅子神 橡)이 우뚝 서 있다. 오랜 풍우(風雨)에 시달린 거상(巨橡)이었 다. 헌데 사자신상의 머리 위에 언제부터인가 자그마한 난쟁이 노 인이 눈알을 반짝거리며 앉아 있었다. 앙상한 백발(白髮), 온통 음폭음폭 패인 곰보자국, 그는 바로 연 경 저자거리의 광대노인이 아닌가? 노인은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장검의 파르스름한 검날을 가다듬고 있었다. 실로 강철이라도 두부처럼 베어낼 듯 살기(殺氣)가 어린 검이었다. "흐흐흐, 어떤 자든 와라! 모조리 황천으로 보내주마. 훗! 감히 그 분께...!" 바로 그때 소름끼치는 괴소(怪笑)와 함께 뭉뚝한 한 개의 인영이 공 튀듯 사자신상 앞에 나타났다. "크크크, 난쟁이는 난쟁이끼리 상대하는 게 좋겠군!" 일신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알록달록한 색동 옷을 입은 난쟁이 괴인, 그 작달막한 몸 전체에서 폭발할 듯한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사자신상 위에 앉은 난쟁이 노인의 음침한 괴소가 뚝 멎었다. "...!" "너는 누구냐?" "글쎄... 이름은 들어보았는지 모르겠구나. 본좌는 독화마왕 호 국기라 한다." "호...! 난 그런 것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린 제대로 만난 것 같구나!" 난쟁이 노인은 자신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천절오살마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독화마왕 호국기가 한손을 쳐들었다. 그 손에는 어느새 작 은 태양을 방불케 하는 붉은 빛을 머금고 있는 하나의 환(環)이 떠올라 있었다. 공포스럽기 이를데 없는 화공최고의 절기, 화강(火剛)이 하나의 형태를 지닌 채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슈파파파파! 동시에 천하의 어떤 물체라도 태워버릴 듯한 강렬한 화기와 함께 둥근 환이 난쟁이 노인을 향해 쏘아져 왔다. 난쟁이 노인은 크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막을 수도 피해낼 수도 없는 위력이 아니겠는가. 화르르...! 난쟁이 노인의 전신에서 이 순간 안개같은 기류들이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예의 기류들은 이내 하나로 뭉쳐지며 난쟁이 노인의 주위에서 흩어지지 않은 채 불꽃같은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호국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비전의 황무신강이로군." 꽈아아- -! 호국기가 쏘아낸 화염덩어리는 여전히 난쟁이 노인을 향해 치달 려 가고 있었다. 그 기세는 가히 유성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호국기가 입을 열었다. "한 백 년 전 정도라면 모르되… 지금의 본좌 앞에서는 황무신강 또한 무용지물이다." 파지지직! 꽈아아! 난쟁이 노인의 주위를 불꽃형태로 휘감고 있는 기류들이 호국기 가 쏘아낸 환에 의해 침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렬한 불길속을 파고 드는 하나의 작은 태양과 같았다. 난쟁이 노인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펼쳐놓은 화무(火霧)가 너무 도 허무하게 밀려나고 있지 않은가! "크아아악!" 뿐이랴! 이내 그의 전신을 휘감은 불꽃들이 돌연 더욱 크게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호국기의 환이 화무들과 부딪치며 더욱 강렬한 화기를 만 들어내는 현상같았다. 난쟁이 노인이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화르르... 난쟁이 노인의 전신이 이내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펼쳐놓은 황무신강이 스스로의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강렬해져 오히려 그 자신을 태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연왕부의 동쪽에는 나무들이 울창한 가산이 있었다. 그 가산 속의 숲 속에 언제부터인가 한 개의 희미한 그림자가 미 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뻣뻣한 잿빛 머리칼의 애꾸눈 노인, 바로 허름한 서당의 괴노인이 아닌가? 그는 담뱃대를 만지작거리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광오 하고도 태산같은 위압적인 기세가 그 깡마른 몸에서 풍겨 나왔다. "누가 이곳으로 올지는 모르되 천하의 어느 누구라 해도 이곳을 통과할 수는 없다. 평생의 은혜를 입은 대신 단 한 번의 명령에 내 목숨을 이미 덕무왕전하께 바친 나다." 이때였다. 그의 독백이 채 숲 속으로 퍼지기도 전에 한 인영이 천천히 숲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천천히 다가오는 듯하던 인영은 어느새 한 줄기 바람처럼 그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똑같은 애꾸눈 괴인, 거무튀튀한 입술에 흉엄한 미소가 칼바람처 럼 피어 오르고 있었다. 잿빛 머리칼 괴노인의 외눈에 도깨비불같은 잔광(殘光)이 튀었다. "흐흐흐, 당신도 애꾸?" "키키키, 그렇다. 노부의 이름은 사극탈혼마 뇌도천이라 하느니라!" '천절오살마중의 한 명이라는...!' 괴노인의 눈이 커졌다. 너무도 엄청난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번- 쩍! 괴노인의 놀람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한 자루의 극(戟)이 벼락같이 밀려 들었다. 캉! 불꽃이 튀며 담뱃대와 극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허나 놀랍게도 극과 마주친 담뱃대는 너무도 간단히 양단되었고 동시에 거대한 극은 여전히 괴노인의 전신으로 밀려 들고 있었다. 퍼- 억! 괴노인은 뇌도천의 극이 자신의 몸을 양단시키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며 벼락맞은 듯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가 내려다 보고 있는 그 순간에 극은 천천히 회수되어 뇌도천의 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가 본.... 서(西), 덕무왕부의 서쪽 담장 앞에 언제부터인가 한 노인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도끼가 만월의 빛을 반사시키고 있어 어찌보면 음산하기 이를데 없었다. 헌데 돌연 노인의 눈에 이채가 솟아났다. 동시에 그는 괴소를 머금었다. "친구! 이제 그만 나오시지...!" "흐흐흐! 그 장작 패는 도끼로 노부의 섬강천마부와 겨룰 수 있을까?" 쿵... 쿵! 우람한 철탑(徹塔)같은 거인(巨人)이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태산(泰山)을 마주한 듯한 엄청난 위압적인 기세를 뿜어내는 괴 인, 그렇다! 바로 섬강천마부 흑웅이었던 것이다. 쏴아앙! 무지막지한 기세로 흑웅의 도끼가 날아들었다. 막고 자시고도 없 었으며 일체의 변화 또한 없었다. 꽈앙! "끅...!" 그저 허공에서 지면으로 내려 패는 단순하기 이를데 없는 동작, 허나 이 단순한 동작은 엄청난 힘과 빠름을 지니고 있어 이미 하 나의 죽음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남(南), 꼽추노인, 낡은 주루에서 부지런히 그릇을 닦던 꼽추노인은 나무 위에 납짝 매달려 있었다. 그 짤닥막한 체구는 나뭇가지에 달린 괴이한 열매를 보는 듯했다. 문득 노인은 칠흑같은 어둠 속을 노 려보며 괴이무비하게 웃었다. "ㅋㅋㅋ! 친구, 드디어 왔군!" 그 괴소(怪笑)가 고요한 숲은 울리는 순간 무덤 속에서 뛰쳐나온 강시(彊屍)를 방불케 하는 괴인이 꼽추노인 앞에 내려서고 있었다. 일순 꼽추노인의 미간에 짙은 살광이 피어 올랐다. 그는 허리춤 에서 묵청빛 기형(奇形)의 도(刀)를 꺼내며 물었다. "그대 이름은...?" "흣흣! 못들어 봤나? 고루마존 여웅비라 하네." 북(北), 낡은 갈포중년인, 오른손이 없는 농부차림의 인물이었 다. 그는 바로 임신(姙娠)한 며느리의 몸을 걱정하는 농부가 아닌가? 지금 그는 시꺼먼 삽을 들고 땅에 선을 긋고 있었다. 단순한 행 동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이 가공할 절진(絶陣)의 설치임을 알게 되리라. "크크크, 이제 방원 백 장 내엔 그 누구도 통과하지 못한다!" "클클클, 과연 그럴까? 그대의 꿈은 너무 크군!" 한 소리 광오한 외침과 동시에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농부차림의 노인에게로 불어왔다. "흑!" 그는 일순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며 삽질을 멈추었다. 그는 서서 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가 설치해 놓은 절진 속에 누군가가 들어와 있지 않은가. 범상치 않은 기도와 깊은 심계가 그의 미소에 나타나 있었다. 농부차림 노인이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친구는 자신이 없는 모양이군!" "후후후, 천하에 나 천면색환마 나찰풍에게 자신 없는 것이란 없지!" 천면색환마 나찰풍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음소(陰笑), 사이 (邪異)한 미소 속에 치밀한 살기의 불꽃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덕무왕의 최후보루라는 잔결오위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어찌 전 대의 고인들인 천절오살마에 견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 덕무왕의 최후보루인 잔결오위가 이렇게 무너지고 있는 순간인 것이다. ② 재왕 두우중은 초조한 안색(顔色)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 다. 비대한 몸집에 천하에서 가장 느릴 듯난 몸놀림이었다. 그러 나 그의 뇌리(腦裏)에는 이 순간 수많은 상념(想念)이 번개치듯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끝났다!' 기름진 얼굴에 숨은 듯이 박혀 있는 눈이 영활한 빛을 번뜩였다. '연왕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의 눈이 천공(天空)을 살폈다. "오히려 연왕을 배신하는 길 뿐이다." 배신(背信), 강하게 그를 유혹(誘惑)해 왔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방법이거니와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좋다! 태자를 만나자. 그에게 연왕의 남은 최후 세력(勢力)을 폭로하고...." 연왕의 최후세력? 그런 것이 있었단 말인가! "기실 천문왕자만 없다면 아직도 해볼만 하다. 허나 천문왕자가 있는 이상 연왕은 결코 득세하지 못할 것이다." 재왕 두우중, 그는 심기가 깊은 인물이었다. 허나 단 한 가지, 그 순간 이미 연왕의 최후 세력마저 무너지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재왕 두우중의 몸이 한 모퉁이를 돌았다. 이때 그의 앞에 홀연히 솟아나는 한 인영이 있었다. "누구...?" 재왕 두우중이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 "너, 너는...!" 재왕 두우중의 얼굴이 굳어갔다. 나타난 인영, 바로 파풍쾌섬도 기선풍이 아닌가? "후후...! 오랜만이다!" 피풍쾌섬도 기선풍은 한 자루 검을 가슴에 안고 팔짱을 끼고 있 었다. 무서운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스며 나오고 있었다. "너는... 나를 이용한 후 죽이려 했다." 기선풍의 눈에서 가공할 광망이 이글거렸다. "으...!" 두우중이 흠칫 뒷걸음쳤다. "너를 만나기 위해 삼 일을 이곳에서 기다렸다." 쓰윽! 기선풍이 한 걸음 다가왔다. 순간 두우중의 눈에 악독한 빛이 스쳤다. "기선풍, 너를 이용하려 한 것은 사실이다." "...!" "허나 너를 죽이려 한 것은 나의 뜻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냐?" 기선풍이 팔짱을 풀었다. 무서운 도기가 도를 뽑지도 않았는데 두우중의 전신을 압박해 들었다. "생, 생각해 보아라! 나는 본문(本門)의 일개 당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쓰윽! 기선풍이 한 걸음 더 전진했다. "그렇다면 그런 결정을 내린 놈이 누구냐?" "회, 회주다!" 두우중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후후후, 너는 너무도 쉽게 입을 여는군." 두우중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망할 놈 같으니... 그렇게 말해 주었으면 어서 회주에게나 달려갈 것이지!' 두우중의 눈이 교활히 움직였다. '네놈이 연왕을 죽여 준다면 오히려 나는 더 편해진다. 허나 과 연, 네놈이 연왕을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너의 회주가 누구인지 모른다. 누구냐?" 순간 기선풍이 더욱 전진(前進)해 오며 차갑게 질문했다. "본주의 회주는...!" "빨리 대답하라!" "바, 바로 연왕이다." "연왕? 덕무왕이 금광회의 회주였단 말이냐?" 기선풍이 의외라는 듯 재차 질문했다. "그, 그렇다!" "으음...!" 기선풍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두우중이 살금살금 뒷걸음쳤다. "잠깐!" "...!" "네말이 사실이라 해도 너를 그냥 보낼 수 없다!" "무엇이?" 두우중의 작은 눈이 부릅떠졌다. "한 팔을 남겨라!" "이, 이놈이!" "그것도 생각해 준 것이다." "미친... 놈!" 두우중의 소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펄럭였다. 무서운 기운이 그 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네놈은 네 자신을 너무 과신하고 있구나!" "후후...!" 기선풍의 눈에 차가운 광망이 솟았다. "덤비겠다는 것이냐?" 기선풍의 차가운 조소(嘲笑)에 두우중의 눈에 악독한 살기가 떠올랐다. "미친 놈!" 파앙!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두우중의 손이 기이한 떨림을 토해 냈다. 먼지가 미친 듯이 피어올랐다. "훗! 제법하는 자였군!" 번쩍! 그 순간 무서운 도광(刀光)이 동시에 솟구쳤다. 무적일도(無敵一刀), 바로 파풍쾌섬도 기선풍의 가공할 쾌도가 전개된 것이었다. "욱!" 두우중이 튕기듯 물러섰다. 허나 그의 가슴 옷자락만 길게 베어 져 있을 뿐 상처는 없는 듯 했다. 그 역시 무시못할 고수였던 것이다. "나의 도를 피한 두번째의 인물이군!" 기선풍은 상대가 자신의 쾌도에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을 보고 내심 해연히 놀랐다. "차앗!" 두우중이 살기를 폭사하며 두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뻗어냈 다. 파르스름한 광채(光彩)가 무지개처럼 피어났다. "오홋!" 파풍쾌섬도 기선풍은 자신의 몸이 동그라미 안에 빨려 들어갈 듯 한 흡인력을 느끼고 내심 경악했다.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순간 푸르른 도광이 마치 뇌 전(雷電)이 일 듯 두우중에게 쏘아져 갔다. 팍... 파팍! 귓청이 찢어질 듯한 음향이 연달아 터졌다. 무서운 검기가 회오 리치며 십 장 높이로 솟구쳤다. "왁!" 그 속에서 두우중의 신음이 터졌다. 두우중이 놀란 눈으로 기선풍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의 오른 팔이 이미 지면을 구르고 있었다. "약속대로 한 팔만 거둔다." 기선풍이 도를 거두며 차갑게 말했다. "으...!" "연왕은 연왕부에 있느냐?" '무, 무서운 쾌도였다!' 두우중은 자신이 허무하게 패한 것에 정신이 없었다. "연왕은 연왕부에 있느냐?" 기선풍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 그렇다!" 순간 기선풍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그의 곁을 스쳐 십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③ '저, 저 미친 놈이 곧 바로 연왕부로 달려가는 것인가?' 두우중은 어이가 없는 듯 기선풍의 뒷모습을 응시(凝視)하고 있 었다. 이때 기선풍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또 하나의 눈이 있었다. 무심한 눈, 한 점의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 차가운 눈이었다. 무심코 눈을 돌리던 두우중이 기절초풍하여 물러섰다. "천, 천마... 대... 제...!" 그렇다! 그의 앞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주천화가 아닌가? "두우중!" 주천화의 전신에서 무서운 살기가 솟아났다. "기선풍은 너의 한 팔로 만족했지만 본좌는...." "무, 무엇하려는 것이냐...?" "너를 죽이겠다는 뜻이다." 주천화가 서서히 손을 쳐들었다. '으왁!' 두우중은 내심 저절로 비명이 터졌다. 지금 주천화의 기세는 실 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두우중같은 고수가 기세에 질려 숨을 못 쉴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랴! 팟! 주천화의 손에서 무서운 장력이 폭발했다. 이것은 주천화로서도 살심을 먹고 뻗어낸 일장이었다. 그 위세는 두우중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와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두우중의 비대한 몸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시간이 없다. 연왕을 기선풍의 손에 죽게 할 수는 없다." 두우중의 처참한 시신을 응시하며 주천화가 낮게 중얼거렸다. 쏴아... 앙!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한 가닥 폭음과 함께 허공 백 장 높이로 솟구쳤다. 연왕부(燕王府)의 매화림(梅花林). 혈매화(血梅花)가 만발하여 불붙듯 타오르던 연왕부의 후원, 매 화는 때도 되지 않았건만 시들고 있었다. 사각... 사각! 한 인영이 시들어가는 매화가지를 손질하고 있었다. 쓸쓸한 기태 가 시드는 매화꽃을 연상케 하는 육순 노인, 바로 대선생이자 연 왕으로 불리우는 덕무왕이었다. 이 순간 그의 단아한 얼굴에 짙은 그늘이 깔려 있었다. 야망이 무너진 지금 그가 할 일은 매화가지를 손질할 일 뿐이련가! "...!" 덕무왕,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자신을 찾을지 그 자신도 모른 채.... 이때 한 인영이 그림자처럼 솟아났다. '왔군!' 연왕은 여전히 가위질을 멈추지 않았다. 무서운 살기가 연왕을 덮쳐왔다. "그대가 덕무왕이오?" 차가운 음성, 바로 파풍쾌섬도 기선풍이 아닌가. 덕무왕은 자신의 예측과는 다른 엉뚱한 인물이 나타나자 의혹(疑惑)의 눈을 돌렸다. "그대는 누구인가?" "기선풍!" "기선풍?" "흐흐흐,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주천화가 보냈느냐?" 연왕이 고개를 숙이고 기선풍은 연왕이 자신을 몰라보자 의혹해 했다. "으음! 나는 천화가 직접 오는 것을 원했는데...!" 연왕이 처연히 말하며 몸을 돌렸다. "잠, 잠깐!" "무슨 말을 하려 하느냐?" "...!" "너는 그저 시키는 대로 나를 죽이면 되지 않느냐?" 연왕의 이어지는 말에 기선풍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당, 당신이 나를 죽여 살인멸구하려 하지 않았단 말이오?" "기선풍?" 그제야 연왕이 한 생각을 떠올린 듯 기선풍의 전신을 살폈다. "전일, 두우중이 천화를 죽이기 위해 한 명 고수를 초청했다는 말을 들었다. 네가 그 기선풍이란 말이냐?" "그, 그렇다!" 기선풍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연왕은 기선풍의 이름 을 듣고도 별다른 동정이 없었던 것이다. "헌데...!" 연왕이 그를 의혹의 눈으로 직시하자 기선풍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자는 놀라운 심기를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허나 그의 뇌리(腦裏)에 한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연극을 하고 있는지도...!' 그의 눈에 살기가 치솟았다. 그의 손이 허리로 뻗어갔다. "잠깐!" 이때 어디선가 조용한 음성(音聲)이 들려왔다. "...?" 기선풍의 눈 앞으로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수려준미한 풍도, 은은히 상대를 억압하는 제왕의 기개, 바로 주천화였다. '왔군! 헌데...?' 덕무왕이 의혹을 드러냈다. 그는 주천화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막 상 주천화가 나타나자 한 가지 의혹을 떠올린 것이었다. "기선풍! 그대는 그 분을 해쳐서는 안된다." 주천화가 기선풍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분은 너를 알지도 못하셨다. 모든 것은 재왕 두우중의 선에서 결정지어진 것이었다." "...!" "또한, 설혹 그 분이 너에게 그런 일을 했더라도... 너는 어차피 목숨을 팔지 않았더냐? 살인청부를 맡은 자는 살인멸구 정도는 생각했어야 한다." "으음...!" 주천화의 말에 기선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대제, 이곳에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소!" 기선풍이 허리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 주천화를 직시하는 기선풍의 눈에 기이한 빛이 맴돌았다. 뜨겁다고나 해야 할까? "대제, 아니 천문왕자님!" "...!" "이 일개 무인이 천문왕 전하와 비등한 신분이었다면... 당신을 영원한 지기로 사귀고 싶었소이다. 부디 존체를...!" 그 말을 끝으로 기선풍은 몸을 돌렸다. 그의 마지막 한 마디에 는 사나이의 뜨거운 진정이 어려 있었다. "기형!" 순간 주천화가 나직이 그를 부르지 않는가? '기형...!' 기선풍의 몸이 진동(振動)했다. 그의 어깨가 눈에 보이리만큼 흔들렸다. "기형, 한 번쯤 경무장에 와주시오." 주천화의 음성도 뜨거웠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한 번 통쾌히 마셔 봅시다!" "...!" 기선풍은 일시지간 입을 열지 못했다. "와하하하!" 허나 잠시 후 기선풍의 어깨가 흔들렸다. "내 나이 이제 서른셋! 이제야 마음을 열 지기가 생겼도다." 그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 기쁨이 넘친 대소를 흩날렸다. "으하하하!" 기선풍, 대소와 함께 사라지며 언제라도 대소를 터뜨릴 듯한 기 세로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기선풍이 사라지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은 시간(時間)의 흐름을 의식하 지 못한 채 침묵(沈默)을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덕무왕이 입을 열었다. "천화야!" "예!" 주천화, 그는 덕무왕, 바로 자신에게 할아버지 뻘이 되는 그에게 예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주천화의 이런 태도가 오히려 덕무왕에게 고통을 주는 것 같았다. 덕무왕은 시종일관 조용하며 예의를 잃지 않는 주천화의 태도에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천화야! 너를 막는 사람들이 없더냐?" "...!" "다섯 명의 이름도 없는 불구자들... 네가 이미 그들조차 처치했단 말이냐?" 주천화의 뇌리에 한 생각이 스쳤다. '이곳에 오는 동안 막는 인물(人物)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는 불현듯 천절오살마를 떠올렸다. '그들은 무엇인가 할 일이 있는 듯 서둘렀다. 으음! 그렇다면 그 들이 암암리에 나를 도우고 있었군.' 생각을 마친 주천화가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저에게 천절오살마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있지요!" "으음! 그들이라면 잔결오위(殘決五衛)를 상대할만 하겠군!" 덕무왕이 쓸쓸히 중얼거렸다. 문득 그의 눈길이 주천화를 향했다. "천화야! 너는 이 할아비를 욕하느냐?" 주천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네가 이해할지 모르겠다만... 나는 나의 몸이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 "세상을 증오하며 야망을 기르지 않을 수 없었단다." "음!" "허허허...!" 문득 덕무왕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너는 대선생이 바로 나라는 것 을 첫 대면(對面) 때 알고 있었느냐?" "예!" 주천화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덕무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단 말이냐? 내가 대선생으로 활동한 지 이미 이십 년도 넘었는 데...." "후후후!" 주천화가 문득 미소를 머금었다. 허나 순수한 웃음일 뿐 조소의 뜻이 담겨 있는 웃음은 아니었다. "제가 어렸을 적... 작은 할아버님께서는 저를 한 번 안아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 "그때 저는 할아버님의 좌수가 딱딱한 것을 느꼈습니다." "음...!" "저는 그때 이미 할아버님의 좌수가 의수임을 알았습니다." "하면 알면서도 금궁정에서 나에게...." "그 일은...." 주천화가 돌연 덕무왕에게 정중히 읍했다. "그때의 일은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덕무왕의 얼굴이 처연히 일그러졌다.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할아버님께서 그런 모욕을 받으면 모든 것을 포기하실 줄 믿고...." "허허허!" 덕무왕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더할나위 없는 비 감에 젖은 웃음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역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때 주천화가 담소하듯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그의 태도는 부 드럽기까지 해 전혀 적의를 찾을 수 없었다. "대막혈사탑에 가신 적이 있습니까?" "...!" 덕무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대막혈영신과 함께 데려온 소녀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덕무왕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좋은 체질을 지니고 있더구나. 해서 독공의 대가로 만들려 했는데... 그만 실수를 하여...." "으음! 과연 제 추측대로였군요." 주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연 주천화가 지면에 무릎을 꿇으며 대례를 올리고 있었다. 덕무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해못할 일이 아닌가? 주천 화는 어찌 하여 돌연 덕무왕에게 대례를 올린단 말인가? 더구나 그것을 보고 덕무왕의 얼굴이 왜 굳어진단 말인가? "정, 정녕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 "이, 이제 나는 이 매화와 더불어 살 것이다. 그래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냐?" 덕무왕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전하!" 주천화가 지면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 다. "이제와 생각하니 십일 년 전의 일도 모두 전하의 안배가 아니었습니까?" "...!" "전하는 이대에 걸쳐 친혈육들을 시해하셨습니다." 주천화가 몸을 일으켰다. '전하...?' 덕무왕은 주천화가 더 이상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호칭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주천화가 몸을 돌렸다. 천천히 매화림을 빠져나가는 주천화의 뒷 모습을 응시하는 덕무왕의 어깨가 가늘게 진동했다. 주르륵! 순간 그의 입에서 선혈(鮮血)이 흘러나왔다. '천, 천화야... 그, 그래도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니 고맙구나.' 털썩! 그의 무릎이 맥없이 꺾였다. 일대의 효웅(梟雄), 아니 간웅(奸雄)이랄 수 있는 덕무왕, 그가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하늘이 그를 낳고 또 주천화 역시 보냈음을...! 이때였다. 쓰러진 덕무왕에게 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할아버님...!" 가냘픈 인영, 바로 난화군주 주운지가 아닌가? "흑흑흑!" 그녀의 오열은 맑은 천공에 덧없이 퍼져가고 있었다. '전하, 부디 극락왕생하옵소서!' 주천화는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지매, 불쌍한 아이... 추악한 야망의 희생자. 그대가 무슨 죄가 있겠소!' 멀리 천공으로부터 희끗희끗 눈발이 비치기 시작했다. 눈발은 이 내 굵어져 순식간에 천공을 뒤덮었다. 백설(白雪), 주천화의 텅 빈 마음처럼 하얀눈이었다. ④ 경무장(敬武莊), 늦겨울의 천공은 무척이나 맑았다. 수많은 성좌들이 휘황찬란한 광휘를 자랑하듯 뿜어내고 있는 가운데 봄이 멀지 않음을 보여주 듯 천공을 감도는 바람에 훈기(薰氣)가 떠돌고 있었다. 따뜻한 기운, 이는 곧 천하가 태평함을 나타내지 않겠는가? 화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늑한 내실이었다. 예의 내실의 단아한 한 개 차탁에는 지금 따뜻한 김이 솟아 오르고 있는 찻잔이 올려져 있었고 차탁을 중심으로 삼 인이 앉아 있었 다. 그들은 주천화와 백청청, 그리고 구양금하였다. "...!" 주천화의 발밑에는 흑호가 웅크린 채 기분좋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후후, 금아야! 너는 볼수록 신기하구나." 주천화가 흑호의 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하루가 다르게 이렇게 커가니...!" "호호호, 당신은 금아(金兒)가 그렇게 좋으세요?" 백청청이 가만히 웃었다. 그녀의 지금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그녀와 함께 앉아 있는 구양금하의 모습은 전일보다 더욱 무서운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사랑을 획득한 여인은 더욱 아름다워진다고 했던가? "하하하, 이놈이 이렇게 나를 따르니 내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소?" 주천화가 밝게 웃었다. 이어 그는 흑호의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금아야, 어디 입 좀 벌려봐라!" 흑호는 주천화의 말에 그 큰 입을 따악 벌렸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주천화는 그 이빨들을 매만지며 미소를 머금었다. "흠! 이빨을 보니 앞으로 더욱 커지겠구나!" "호호호!" 주천화의 감탄하는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두 미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후후! 청매의 품에 안겨 있던 그 조그맣던 놈이 이렇게 성장하다니...!" 흑호는 꼬리를 치며 주천화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천화가 짐짓 비명성을 터트렸다. "어이쿠! 이놈아 넘어지겠다!" "호호호!" "호호...!"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 정담은 달콤하기만 했다. 문득 주천화의 눈이 백청청의 뱃쪽을 슬쩍 바라 보았다. "금아야!" 끄응! 주천화의 부름에 흑호가 눈을 들었다. "너는 곧 태어날 꼬마 도련님의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백청청의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아이! 당신도...!" "하하하! 그것이 뭐가 그리 부끄러운 일이라고 얼굴을 붉히시는 것이오?" "어멋!" 백청청이 곱게 눈을 흘겼다. "그, 그만하시고 주무세요!" 백청청이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아야! 가자!" 그녀의 눈이 구양금하를 바라보았다. 다정한 감성이 그 눈에 가득 담겨 있었다. "하매! 잘 자요. 대가를 잘 모시고!" "언, 언니...!" 백청청의 말에 묘한 여운이 담겨 있음을 깨닫고 구양금하가 얼굴을 붉혔다. "호호호!" 백청청이 밝게 웃자 그 순간 주천화가 구양금하를 두 팔로 안아갔다. "어멋! 언, 언니가 보지 않아요!" "후후! 청매의 말을 듣지 못했소? 나를 잘 모시라는...!" 백청청이 눈을 흘겼다. "엉큼하시긴... 저나 간 다음에 그러세요!" "하하하!" 구양금하는 더욱 얼굴을 붉히고 주천화는 대소를 터뜨렸다. 밤(夜), 창 밖의 밤은 실로 고요하기만 했다. 주천화와 구양금하는 침상 위에 다정히 얼굴을 마주본 채 누워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의 눈에 서서히 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천화의 손이 서서히 구양금하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구양금하는 주천화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스스로 옷을 벗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후, 많이 변했구료." "...!" "처음에는 먼저 옷을 벗더니...." "아이!" 문득 그녀의 손이 주천화의 가슴에 닿아왔다. 동시에 조용한 음 성이 그녀의 입술새로 흘러 나왔다. "당신...!" "...!" "모든 것을 마무리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주천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아직 한 사람을 해결하지 못했소." "천마천?" "그렇소!" 주천화의 얼굴에 한 가닥 그늘이 떠올랐다. 돌연 구양금하의 안색이 굳어졌다. "당신, 천마천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 "그가 두렵지 않으세요?" "후후후, 아직까지 나는 누구를 두려워해 본 사람이 아니오." "그럴까요?" 구양금하가 고개를 가만히 흔들었다. 이어 그녀의 입에서 의미심 장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당신은 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졌어요." 이 순간 구양금하의 얼굴은 기이하도록 굳어져 있었다. 주천화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그녀의 손에 어떤 압박이 전해졌다. 하지만 주천화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다는 듯 반문을 던졌다. "천마천에게 내가 졌다는 말이오?" "그래요!" 구양금하가 눈을 빛내며 주천화를 직시했다. "바로 이렇게!" 구양금하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허나 그것은 느낄 수 있을 뿐인 힘으로서 살기(殺氣)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그런 힘이었다. 바로 그 순간 구양금하가 돌연 낭랑한 교소를 터트렸다. "호호호, 천마천은 바로 저예요!" "...!" 너무도 의외였음인가? 주천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구양금하가 바로 천마천, 보이지 않는 하늘이었단 말인가! "호호호, 어때요? 아직도 패배를 인정하시지 않을 것인가요?" 구양금하가 주천화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손에 일성의 힘을 추가 했다. 그녀의 손이 닿아 있는 곳은 바로 장문혈(章門穴)로써 치명 적인 사혈이었으며 누르기만 해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기실 원래의 천마천은 이미 십 년 전에 죽었어요. 그 분은 저에 게 북해천을 넘겨주면서 천마천의 이름조차 넘겨 주셨지요." "...!" "제가 여인의 몸인지라 북해천의 고수들을 다루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이에요." 득의의 미소를 떠올리는 구양금하의 눈에는 어쩐 일인지 살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주천화의 눈빛에도 다급해 하는 기색은 한 점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 구양금하가 멍청히 주천화를 바라보았다. "왜 웃지요?" "...!" 주천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지금 당신을 죽이겠다고 사혈을 누르고 있는데 웃음이 나와요?" "후후! 어디 한 번 죽여보시오. 당신의 손에 죽으면 별 여한은 없을 듯 하구료!" "예? 정말?" "후후, 그 전에 당신의 목덜미나 만져보구료." "...!" 구양금하가 자신도 모르게 왼손으로 목덜미를 더듬었다. 무엇인가가 허공에 떠 있는 채 그녀의 목 뒤쪽에 닿아 있었다. "앗!" 그녀의 입에서 경악성(驚愕聲)이 터졌다. 천마쌍환유엽도, 그 가 공할 신기(神器)가 주천화의 진기에 의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후후후, 나는 이미 당신이 천마천인 줄 짐작하고 있었다오." "...!" 구양금하의 안색에 질린 빛이 떠올랐다. "당신은 내가 꼭 딴 여인들과 있을 때만 암수를 펼치더군!" "으음!" 주천화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당신이 아닌가 의심할 수 있었소." "...!" "나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단 한 명, 당신밖에 없었기 때문이오." 주천화는 말하는 한편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젖가슴을 쓸었다. "아이!" 구양금하가 몸을 틀었다. 그녀의 손은 이미 주천화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후후, 헌데 왜 당신은 나를 죽이지 않았소?" "치이! 잘 알면서...!" 구양금하의 손이 주천화의 옷 속으로 파고 들었다. "허나 대막에서 그 탐리화인가 하는 계집애하고 계실 때에는 정말로 죽이고 싶어요." "하하하!" 돌연 대소를 터트리던 주천화가 나직한 비명성을 터트렸다. "아앗! 왜, 왜 꼬집는 것이오?" "웃지 마요! 또 다시 다른 계집애와 그런 짓을 한다면...!" "그러면?" "그때는 진정한 천마천의 맛을 보여 주겠어요!" "후후, 지금 보여줄 수 없소? 이렇게...!" "어멋!" 주천화가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그녀의 몸이 주천화의 몸 위로 겹쳐졌다. "아이! 나에게 또 그런 짓을 시키려고요?" "후후...!" 밤(夜), 대무림사(大武林史)의 막이 내리며 안식이 찾아드는 그 런 밤이 조용히 깊어가고 있었다. waf - 대미 - wa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