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왕예조 제1권 ·책머리에 부쳐·cos ━━━━━━━━━━━━━━━━━━━━━━━━━━━━━━━━━━━ 나무(木)를 깎아 불상(佛像)을 만드는 작업, 그 목불상(木佛像)이 생명을 얻으려면 공인(工人)의 손에 의해 깎여져서는 안된다는 말 이 있다. 공인은 그저 나무 속에 담겨있는 불상을 끄집어 내어야 지, 목불상을 깎아서는 안된다는 말인 것이다. 진흙 속에 있던 금강석(金剛石)을 꺼내듯 나무 속에 있는 목불상 을 끄집어 내는 일에 실수란 있을 수 없을 터..... 글을 쓴다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작품이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作家)가 단지 그 작품이 스스로 튀어나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작업을 할 뿐이고 그 로 인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팔왕예조(八王藝祖)는 역사속에 존재했던, 중국통사(中國通史)에 단지 서너줄로 기록되어 있는 팔왕(八王)의 난(亂)이라는 대참극 을 무림이라는 배경으로 바꿔 무협소설로 재조명한 이야기이다. 시간이 흐름은 곧 역사가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비록 그 속에서 함께 생활하고 경험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는 자신의 삶이 역사의 장 한편을 기록하는 것임을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오 늘 우리가 겪은 모든 일들이 후인들에게는 하나의 역사로 남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말하면 또한 아무리 거대하고 처절했던 사건일 지라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는 잊혀지기 마련이고 기껏해야 사료 속의 몇 줄로 남을 뿐이다. 허나 결코 잊어서는 안될 역사라는 것도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반드시 순환되기 때문이다. 천중행 배상. ■ 팔왕예조 제1권 ·서막(序幕)· ━━━━━━━━━━━━━━━━━━━━━━━━━━━━━━━━━━━ 흑빙만(黑氷灣). 아득한 동토(凍土)의 대지, 북해도(北海島)에서 풍요의 대지 중원 (中原)으로 이어지는 머나먼 죽음의 해협(海峽). 이 흑빙만에 석양이 지고 있었다. 회색의 빈 바다는 더할나위 없이 고요했고, 끝없이 펼쳐진 빈 바 다 위로 간간이 소리없이 흘러 내려오고 있는 회색 빙산(氷山)의 조각들만이 음울한 반사광(反射光)을 내뿜고 있었다. 지는 석양, 회색의 하늘과 회색의 바다...., 그리고 끝없는 모래 사장이 이루어내고 있는 공포스럽기조차 한 회색의 사구(砂丘). 이 모든 것들은 실로 바라볼수록 대자연에 대한 신비감과 외경감 (畏敬感), 그리고 대자연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왜소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헌데 눈의 착각일까....? 흑빙만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한 조각 회색 유빙(遊氷)의 위, 불어 오는 해풍에 전신을 맡긴 채 한 마리 붉은 늑대와 더불어 환상처 럼 우뚝 서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비정해 보이는 입가로 숙명(宿命)처럼 매달려 있는 고독한 미소, 무릎을 덮은 치렁한 흑포장삼(黑布長衫). 점차 가까와지고 있는 흑빙만의 해변을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지 고 있는 그의 전신에서는 먹이에 달려드는 야수를 닮은 광폭한 분 위기와 더불어 비어있는 바다와 같은 절대의 고요가 배어 있었다. 전혀 상반된 두 가지 기질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고독한 중년인, 한 마리 붉은 늑대만을 벗삼아 저 머나먼 죽음의 해협을 건너오고 있는 이 고독한 사내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잠시 후, 빙산(氷山)은 소리없이 흑빙만의 해변으로 다가들고, 중 년인은 감정없는 아주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요한 태도로 대륙 에 첫 발을 내딛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고독한 모습으로..... 그리고 십칠 년 후. 중원대륙을 미증유(未曾有)의 공포(恐怖)로 휘감을 운명(運命)의 덫을 이고 온 한 고독한 사나이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 팔왕예조 제1권 풍(風) 살인자와 광인의 피(血) ━━━━━━━━━━━━━━━━━━━━━━━━━━━━━━━━━━━ 고오오오..... 대명(大明) 태종이년(太宗二年). 그날..... 억수같은 비가 천지를 함몰시킨 그날, 중원사상(中原史上) 가장 방대한 영토를 정복한 대명의 전쟁영웅(戰爭英雄) 영락제(永樂帝) 는 자금성(紫金城)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제황(帝皇)의 호수 곤명호 (昆明湖)에서 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쩌면 대명제국(大明帝國)의 운명(運命)을 뒤바꾸어 놓을지도 모를 한 사나이를..... 쏴아아아.... 우르르르! 방원 오백여 장의 거대한 호수(湖水), 곤명호는 장대같은 빗발에 흐느끼고 있었다. 헌데 그 호면(湖面)의 중앙에 언제부터인가 한 채의 거대한 석선 (石船)이 미동도 없이 떠 있지 않은가! 미친 듯이 광란하고 있는 폭우 속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는 석선의 모습은 언뜻 보면 환상의 섬같기만 했는데..... 예의 거대한 석선의 한 선실(船室), 중앙에 호화스럽기 이를데 없 는 태사의(太獅倚)가 놓여 있고 그 태사의에는 한 명 장엄한 풍도 의 중년인이 깊숙이 상체를 묻고 있었다. 한 일자로 꽉 다문 입, 사자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두상(頭上)에 육중한 체구. 전신에서 가히 구주팔황(九州八荒)을 압도하는 무상 의 위엄을 폭풍처럼 뿜어내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대명천자 영락제(大明天子 永樂帝). 바로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무인황제(武人皇帝)이며, 삼 년간의 긴 전쟁끝에 자신의 조카인 혜제(慧帝)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보위 (寶位)에 오른 일대패왕(一代覇王). 태사의의 인물은 바로 그 지칠 줄 모르는 야망아 태종 영락제였다. 그의 전면, 한 사나이가 등을 돌린 채 우뚝 서 있었다. 눈부신 백의에 등을 돌린 채 서 있어 그 용모는 알아볼 수 없었 다. 하지만 은연중 풍겨 나오는 절대의 기도(氣道)와 또한 그러면 서도 어딘가 고독한 분위기를 지닌 사나이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창 밖의 폭우만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눈 앞의 이 광경은 실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의 주인인 당대의 대명천자 앞에서 감히 누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있을 수 있단 말인가? 죽음같은 정적이 실내를 꽉 메우고 있었다. 문득, 예의 백의인의 저미한 음성이 그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폐하!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소질(小姪)은 이미 폐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순간 영락제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 긴장의 빛이었다. 백의인이 영락제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희미한 유등(油燈) 아래 그 얼굴이 떠올랐다. 붉디 붉은 입술에 갸름한 얼굴의 선(線), 핏줄이 그대로 드러나 보일 것 같은 투명 하고도 깨끗한 피부. 번개보다도 희고 준수한 그 얼굴은 실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몇 배 나 능가하고 있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극미(極美)한 아름 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그의 전신에서 보는 이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인식되고 있 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그의 두 눈이었다. 흡사 하얀 빙벽(氷壁)에 활활 이글거리는 두 개의 횃불을 박아 놓은 듯 소름끼치도록 강렬 한 광채를 발하는 눈이었던 것이다. 그 눈은 어찌보면 새파란 광기(狂氣)로 번들거리는 광인의 눈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소질은 폐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 "소질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다 또한 너무 많은 세력을 거 느리고 있으니 이쯤에서 제거하심이 당연한 일이겠지요." "음....!" 영락제의 눈빛이 재차 미미하게 흔들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영락 제는 순식간에 다시 완전한 무표정으로 돌아와 지그시 전면의 백 의인을 응시할 뿐이었다. 실로 무심한 시선이랄까....? 돌연 그런 영락제를 마주 응시하던 백의인의 입가에 한 가닥 요기 스러울 만큼 화사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폐하! 오늘 소질을 부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아닙니까? 소질 역시 이런 날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영락제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고, 백의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화사한 미소는 더욱 차가운 빛을 뿌리는데..... 실로 가공스럽지 않은가! 백의인은 자신의 죽음을 거론하면서도 자신의 죽음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지극히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린왕자(潛燐王子) 주문빈(周文斌).> 이 이름은 대내에서조차 극비(極秘)로 붙여진 이름이다. 금년 나이 삼십이 세, 그가 황실의 피를 받고 태어난 황족임은 분 명하나 그의 정확한 출생내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 어 그의 존재마저도..... 단지 그가 영락제에 의해 키워진 대내 최강의 고수(高手)이며, 대 명 황실사상 가장 뛰어난 자질을 타고 난 천재라는 사실만을 극소 수의 인물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영락제는 태사의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희미한 유등(油燈)이 그의 장중한 풍도(風度)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영락제는 뒷짐을 진 채 오랫동안 창 밖의 폭우를 응시하다가 비로 소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빈아야! 네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니 짐의 마음이 오히려 편하구나." "....!" "허나 짐이 너를 제거하려는 이유는 비단 그것만은 아님을 알고 있느냐?" "....!" "솔직히 짐은 네가 두려울 때가 있다." 짐은 네가 두렵다! 아아, 담담한 음성에 비해 너무나도 놀라운 말이 아니겠는가. 수 만에 달하는 공신들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해치운 비정의 패웅 이며, 자신의 혈육마저도 잔인하게 제거하며 스스로 천하를 취한 효웅 영락제의 입에서 어찌 그러한 말이 흘러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헌데 더욱 기이한 것은 영락제의 고백에 가까운 말을 듣고도 잠린 왕자 주문빈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 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여인처럼 화사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을 뿐이었다. "빈아! 너는 엄청난 천재성과 광기에 가까운 잔인성, 그리고 도살 꾼과 같은 비정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 "물론 오늘의 짐이 있기 위해서는 너의 그런 재질과 성품이 필요 했던 것은 사실이다. 허나 짐은 근래에 이르러 너를 생각할 때마 다 본 주씨가문의 악몽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구나." - 주씨가문의 악몽. 영락제, 중원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를 정복한 철혈(鐵血)의 무인 황제(武人皇帝). 그의 음성은 이 순간 어떤 회한(悔恨)과 고통으 로 은은히 떨려 나오고 있었다. "기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대명제국을 일으킨 본 주씨가문의 혈통에는 하나의 저주스러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영락제의 음성이 이어졌다. "본 주씨가문의 혈통에는 대대로 저주스러운 악마의 피가 잠재된 채 유전(遺傳)으로 내려오고 있음이다. 바로 살인자와 광인의 피가....!" - 살인자와 광인의 피! 아아, 태종 영락제의 입을 통해 밝혀지고 있는 이 엄청난 사실, 그것은 그 누구도 모르는, 또 알아서도 안될 대명황실 최대의 비밀이었는데..... "살인자와 광인의 피.... 때로는 권력에 대한 엄청난 집착욕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또 때로는 부에 대한 편집광적(偏執狂的)인 형태 로 나타나기도 하면서 몇 대에 걸쳐 거듭, 혹은 몇대를 건너 나타 나기도 했다." 돌연 영락제의 두 눈에 강렬한 신광이 스쳤다. "빈아야! 너는 네 자신의 신세에 대해 의문을 느껴본 적이 없느냐....?" 실로 돌연한 질문, 주문빈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영락제를 응 시하다가 기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떼었다. "금수도 근본을 알거늘 어찌 인간으로 자신의 신세에 대한 의문이 없었겠습니까?" "....!" "그것은 제가 철들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의혹이었습니다." "으음....!" "나의 아버님은 황족이면서도 왜 황적(皇籍)에조차 오르지 못했으 며 왜 나는 항시 아무도 오지 않는 자금성 깊숙한 곳에서 숨어 살 듯 살아야만 했는지...." "....!" "그 의문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내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한(恨)으 로 새겨졌고 오히려 내가 오늘날 그 수많은 죽음의 사선을 넘어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락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여는 그의 음성 저 아래 에는 희미한 고통의 빛이 묻어 있었다. "그렇다! 본 가문에 내려오는 저주받은 피의 흔적, 그 살인자와 광인의 피가 바로 네 부친의 몸에서도 나타났다. 해서 종실(宗室) 에서는 네 부친을 황적(皇籍)에 올리지 않은 채 아무도 모르게 제 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으음....!" 일순 주문빈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어찌 충격적인 일이 아 니겠는가. 허나 다음 순간 실로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은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군요." 담담한 음성, 주문빈의 입가에는 어느새 다시 그 섬뜩하리만큼 화 사한 미소가 번져 오르고 있었다. "하면 폐하께서는 이제 그 살인자와 광인의 피가 제 몸에도 나타 날 것이라 의심하고 계시는 것이로군요?" "......" "그래서 더욱 저를 제거하시려는 결심을 굳히셨던 것이고...." 돌연 조용히 입을 열던 주문빈의 입가에 한 가닥 처연한 미소가 스쳤다. "허나, 폐하! 소질은 참으로 불행한 놈입니다." "....?" "소질은 나 스스로도 나를 죽일 수 없는 그런 인물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주문빈의 돌연한 말에 영락제의 눈자위가 가늘게 경련했다. 이 순간 주문빈은 자신과 영락제 사이의 정중앙에 놓여 있은 희미 한 유등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할나위 없이 담담한 음성이 그 입에서 흘러 나왔다. "폐하, 이 유등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 곧 내가 죽는 순간임을 소 질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곤명호 주위에 수많은 고수들이 잠 복해 있다는 것도...." 영락제의 눈가에 이번에는 완연한 경악의 빛이 떠오르고, 그 순간 주문빈의 손이 천천히 유등을 집어올려 허공으로 치켜들려 하고 있었다. 아아, 그것은 곧 자신에 대한 죽음의 신호가 아니겠는가. 주문빈 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그 유등을 들어 올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돌연 죽음같은 정적이 실내를 휘감았다. 마치 어둠이 갑자기 덮쳐든 듯 무서운 정적이었 다. 그리고 손(手), 하나의 손..... 어느새 백옥(白玉)같이 희고 여인의 그것처럼 갸름하며 실핏줄이 그대로 드러날 것처럼 투명해 보이는 손 하나가 거짓처럼 솟아나 유등을 들어 올리려는 주문빈의 손등을 지그시 누르고 있지 않은가! 소수(素手), 환상처럼 솟아나 주문빈의 손등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새하얀 소 수, 그 공포스러운 소수의 주인은 그제서야 서서히 형상을 나타내 고 있었다. 전신을 두른 희디흰 백포(白布), 얼굴은 가면(假面)인 양 일체의 표정도 감정도 없다. 여기에 회를 바른 듯 희디흰 피부가 무척이 나 섬뜩하게 느껴진다. 뿐인가! 눈(眼), 흡사 무저갱(無底坑)을 연상케 하는 깊숙한 두 눈에는 아 무런 생명의 빛도 감정도 담겨있지 않아 마치 투명한 유리알을 들 여다 보는 듯 무서운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백포인(白布人), 그의 출현은 그야말로 어둠이 뭉쳐 있다가 흩어 지며 한 인간을 만들어 낸 듯 환상과도 같았다. 헌데 그 백포인을 발견한 순간 영락제의 입에서는 실로 쥐어짜는 듯한 경악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냉월고성검무정(冷月孤星劍無情)!" <냉월고성검무정(冷月孤星劍無情).> 이 이름은 그 자체가 곧 하나의 신화이다. 어둠 속의 율사(律師), 공포의 백색인간(白色人間) 등등, 수많은 별칭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무림사 최대의 신비고수(神秘高手). 그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나이와 그 성별조차 추측불가 의 인물이 바로 그인데, 그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백 년래에 단 두 번뿐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호가 세인들의 뇌리에 철저한 공 포로 인식되어 있으며, 천하의 주인인 황제마저 그의 출현에 경악 을 금치 못해야 할 이유는 그가 바로 한 전설적인 세력을 의미하 는 상징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출현은 곧 무림사 초유(初有)의 신비세력, 법밀사의 총율사 (總律師)가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 법밀사(法密社). 이것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초무림세력(超武林勢力)이다.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제파(諸波)간의 분쟁이나 천하에 발생하는 모든 범 죄에 대한 재판권을 지니고 있으며, 이 법밀사에서 내려진 결정은 가히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절대적인 효력을 발생하여 천하의 그 누구라 해도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설혹 황제라해도..... 한 마디로 법밀사는 황권(皇權)조차 능가하는 이 시대 최고의 엄 청난 권의를 지닌 단체인 것이다. 그리고 냉월고성검무정은 바로 이 법밀사의 총율사를 그림자처럼 수호하는 신비속의 인물, 그의 출현은 곧 법밀사의 가공할 단체의 지존(至尊)이 나타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네가 법밀사의 총율사가 되었단 말이냐?" 영락제의 음성은 실로 무참하리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허나 주문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보셨습니까? 소질은 이제와서는 내 자신이 나를 죽이려 해도 죽 을 수 없는 그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주문빈의 유등을 들어 올리려던 손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주문빈의 손등을 지그시 누르고 있던 냉월고성검무정도 그 제야 천천히 손을 떼었다. 이것은 주문빈의 말을 그대로 입증해 주는 광경이었다. 주문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폐하! 소질의 몸에 살인자와 광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으음......!" "허나 소질은 그 저주받은 피의 흔적을 결코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 "본 가문의 피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 위에 군림하는 것을 용 납치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다행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그 살인자와 광인의 피는 제게 또한 엄청난 천재성(天才性)을 부 여했기 때문입니다." 주문빈이 몸을 돌렸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선실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 다 문득 들릴 듯 말 듯 극히 저미한 음성을 흘려냈다. "폐하! 우리 가문에 내려오고 있는 살인자와 광인의 피, 그 피가 혹시 폐하의 몸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폐하는 이미 수 만 명의 생명을 말살시켰을 뿐만 아니라 혈육마저 죽이며 스스로 보위에 오르셨으니 말입니다." "으음....!" 영락제의 신형이 벼락을 맞은 듯 진동했다. 허나 그 순간 더욱 충 격적인 말이 영락제의 귀로 파고 들고 있었다. "폐하! 제 몸속에 흐르고 있는 피에는 더욱 큰 야망이 있습니다. 황실로서도 채울 수 없는.... " "....!" "피(血)가...., 제 몸의 피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실보다 더욱 거대한 것을!" 순간, 영락제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무엇에 억눌린 듯한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들릴 듯 말듯 새어 나왔다. "제(帝).... 벌(閥)....?" 제.... 벌! 기억해 두자! 절대패왕인 영락제로서도 무참히 공포의 빛을 떠올리는 신비의 이 름이며, 살인자와 광인의 피를 지니고 있는 한 광기어린 천재의 야망이 머무르는 이 이름을..... 영락제의 경악에 찬 표정은 아랑곳 없이 잠린왕자 주문빈은 화사 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미 선실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섬뜩한 여 운을 내포한 한 마디를 남긴 채..... "천하의 어느 누구라 해도 소질의 위에 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천하의 어느 누구라 해도 내 위에는 설 수 없다. 이날, 제황의 호수 곤명호에서 영락제와 그의 아무도 모르는 조카의 만남이 있었다. 곧 살인자와 광인의 피를 지닌 이 인(二人)의 만남이었다. ■ 팔왕예조 제1권 풍(風) 고독자(孤獨者)의 성(城) ━━━━━━━━━━━━━━━━━━━━━━━━━━━━━━━━━━━ 그는 강하다. 강하기에 그는 싸우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의 고독한 성에서 간혹 찾아오는 방문객만을 맞을 뿐이다. 허나 그 방문객들은 언제나 늘어진 어깨로 되돌아 갈 뿐인데..... 육합단종(六合斷宗) 적리노단(赤鯉盧段). 이 이름이 천하인(天下人)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곧 절대(絶代)였다. 검(劍)을 잡기를 두려워하는 절대자(絶對者). 이 시대 최강(最强) 의 무인(武人)이라 지칭되는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었으며, 최하 의 신분에서 최상의 신분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린 입지전적(立志傳 的)인 인물로 평가받는 절대자가 바로 이 이름이다. 스스로의 피와 땀만으로 마도(魔道) 일백여덟 가문(一白八家門)과 정도(正導)의 구백이십칠 개(九白二十七個) 문파, 그리고 사도칠 십이세(邪道七十二勢)를 일통(一統)시킨 하나의 무인국가(武人國 家), 위정부(位政府)라는 거대한 배경을 탄생시킨 위대한 절대자. 그의 위정부는 당대에 이르러 중원 그 자체라 불리운다. 허나 그 말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옳을 것이다. 육합단종 적리노단! 그가 바로 중원 그 자체이다. 검을 잡기를 두려워하는 절대자. 검을 쥐지 않고도 중원을 취한 그이기에 만약 그의 손에 검이 쥐어진다면 육합(六合)이 그의 일 검(一劍)에 베어질지니..... 하남(河南) 건천산(建千山), 주봉(主峰)인 검봉(劍峰)을 끼고, 천험(天險)의 절봉(絶峰) 삼백 육십여 봉우리에 띠처럼 둘러 세워진 거대한 천리대성(千里大城)이 있다. 실로 인간이 축조(築造)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대 역사(大役事)의 현장이었다. 그 안의 대소전각(大小殿閣)의 수효만 해도 무려 팔천오백여 개, 한 마디로 무림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무림이라 할 수 있는 이 곳은 바로 대륙최강(大陸最强)의 단체 위정부였다. 삼월의 춘광(春光)은 더할나위 없이 따사로왔다. 미풍(微風)은 청신(淸新)하기 그지없고, 그 아래 대지는 꿈꾸듯 춘기(春氣)에 물들어 있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위정부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는 한 전각의 모퉁이, 따사로운 햇 살을 받으며 한가롭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일노일소(一老一少)가 있었다. 잿빛 장삼의 노인과 십이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소동(小童)이 바로 그들이었는데 노인의 손에는 이때 소동의 것인 듯 새하얀 가죽신이 들려 있었다. 일견키에는 평범한 촌로(村老)가 손자의 떨어진 백혜(白鞋)를 꿰매주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노인에게서는 실로 기이한 기질이 엿보이고 있었다. 노인 답지 않은 탄력이 느껴지는 새하얀 피부와 간간이 눈 깊숙한 곳에 서 일렁이고 있는 절대의 기세는 그가 결코 평범한 촌로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육합단종 적리노단> 아아!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나 지금 일개 촌로처럼 평범한 모습 으로 소동의 백혜를 깁고 있는 노인은 바로 이 시대 최강의 무인 으로 손꼽히고 있는 육합단종 적리노단이 아닌가. 바로 위정부의 최고통수권자(最高統帥權者)이며, 검을 잡기를 두 려워 하면서도 중원의 절대자로 떠오른 신화적인 인물. 놀랍게도 그가 일개 촌로처럼 전각의 모퉁이에서 햇살을 받으며 소동의 백혜를 꿰매고 있었던 것이다. 삭....! 사악! 가죽 실이 연결된 자그마한 세침(細針)을 든 채 적리노단은 도취 된 듯 말없이 백혜를 꿰매고 있었다. 만약 그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이 이런 광경을 대했다면 자애스러 운 노인이 손자의 백혜를 깁고 있는 모습에 걸음을 멈추고 입가에 절로 미소를 머금었을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적리노단의 옆에 함께 쪼그리고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은 실로 앙 증스러우리 만큼 귀여웠다. 가슴에는 대한 금룡(金龍)의 문양이 수놓여져 있고, 그 앙증맞은 어께 위에는 눈부신 백응(白鷹) 한 마리가 날개를 접은 채 조는 듯 앉아 있다. 백옥같은 해맑은 피부와 약간 큰 듯한 눈망울, 허나 미소동의 전 신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고귀한 기품과 대해(大海)조차 숨을 죽일 은은한 위엄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비록 어린아이다운 순진함을 보이며 지면에 쪼그리고 앉아 있기는 하나 어딘가 절제(節制)된 태도와 은은한 기품으로 보아 미소동의 신분이 보통이 아님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천응소공(天鷹少公) 적리운(赤鯉雲). 바로 이 시대 최강의 무인이라 평가받고 있는 적리노단의 증손(曾 孫)으로서 적리노단으로 하여금 위정부 전체와 바꾸라 해도 거절 할 것이라고 알려질 만큼 적리노단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소년이었다. 뛰어난 천품(天品)으로 인해 위정부의 작은 태양으로 불리우고 있 는 귀재가 바로 이 천응소공 적리운인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툭! 적리노단은 입으로 실밥을 끊으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백혜를 흡족한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운아! 어떠냐? 이만하면 앞으로 일 년은 더 신을 수 있겠지?" 실로 자애스러운 음성이 적리노단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응. 됐어!" 소년 적리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적리노단이 꿰매준 백혜를 신고 몇 번 발을 굴러 보기 시작했다. 쿵! 쿵....! "좋아.... 좋아!" 적리운의 눈에 기쁨어린 치기(稚氣)가 가득했다. 그 모습은 실로 귀엽기 이를데 없어 적리노단의 입가에는 절로 자애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백혜를 시험하듯 몇 번 지면에 발을 굴러보던 적리운이 우뚝 동작 을 멈췄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못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헌데 알 수 없단 말야....?" 적리노단은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있던 자세에서 고개만을 들어 인자한 눈으로 적리운을 바라보았다. "허허.... 운아는 또 무엇이 궁금해 그러느냐?" "응. 그것은 말이야. 나는 할아버지가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할아버지를 어려워 하는 거지?" "허허.... 그놈!" 적리노단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나 그 순간 서서히 그의 얼굴에서는 무상의 위엄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할아비가 강자(强者)이기 때문이란다." "강자? 할아버지가 그렇게 강해?" 적리운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눈빛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는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적리운의 이런 귀여운 모습에 적리노단 이 나직이 실소했다. "허허.... 그놈, 이 할아비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로구나." "응! 솔직히 그래!" 실로 당돌한 대꾸가 아닌가. 허나 다음 순간 적리운은 돌연 엄지 손가락을 세워 앞으로 내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할아버지는 얼마나 강한데? 이거야....?" "허허.... 그놈 참!" 적리노단의 입가에 다시 부드러운 실소가 맺히고, 그는 이어 조용 한 음성으로 자상하게 입을 열었다. "운아! 천하에는 강한 사람이 많단다. 허나 강자라 해서 다 같은 강자는 아니지. 이 할아비가 단언하건대 천하에서 이 할아비보다 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단다." 광오하기 이를데 없는 말이었다. 허나 적리노단은 충분히 광오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이 시대 최강의 단 체, 위정부의 부주(府主)인 것이다. "이 할아비가 그것을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이 할아비의 오늘이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란다." 적리노단은 적리운에게 들려준다기 보다는 자신 스스로에게 하는 듯한 독백조로 천천히 말을 잇고 있었다. "강자란 결코 폐쇄된 방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란다. 진정한 강자란 오로지 자신의 피와 땀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란다." - 강자란 피와 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폐쇄된 방에서 만들어지진 않는다!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 적리노단 평생의 심득(心得)이었다. 허나 그 순간 적리운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삐죽였다. "에이! 누가 그런 어려운 말 하라고 그랬어? 나는 그저 할아버지 가 천하에서 몇번째냐고 물어본 것이란 말이야." "허허....!" 적리노단은 이런 적리운의 모습이 더할나위 없이 귀여운 듯 은은 한 미소로 자애스럽게 입을 떼었다. "글쎄, 천하는 넓고 넓어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모래알처럼 많단 다. 그 때문에 이 할아비로서도 천하 제일인자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단다." 언뜻 적리운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대답을 듣기는 했으 되 들으나 마나한 대답이었으리라. 적리운의 눈이 다시 이채를 발했다. 적리노단의 음성이 조용히 그 의 귓 속으로 흘러 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천하인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천하최강고수(天 下最强高手)가 분명히 존재한단다." "그 사람이 누구야?" "허허허.... 이 할아비는 아니란다. 아니, 그 사람은 이 할아비와 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란다." "....!" "만약 그 사람이 나타난다면 이 할아비라 할지라도 웃으면서 기꺼 이 그의 발에 입을 맞출 것이다." "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지? 도대체 누군데....?" 적리노단이 잠시 말을 멈추고 아득히 먼 천공을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극히 엄숙한 표정이었다. "그 사람은 전설 속의 인물이란다.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왜 아직 나타나지 않는 거지?" "그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사람들은 잠천(潛天)의 전설을 잊고 있으나 그 잠천의 문(問)이 열리는 날, 그가 나타날 것이란다." "잠천?" 적린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강렬한 호기심을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 적리노단의 시선이 다시 아득한 천공으로 돌려졌다. "수천 년부터 내려오는 경호무인(警護武人)의 일맥(一脈)이라는 것이 있단다.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최초로 직업으로 삼은 무림 최초의 직업(職業)인 경호무인의 맥이 바로 잠천이란다." "경호무인의 맥(脈)? 경호무인이라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지켜 주는 호위무사가 아니야?" "그렇단다. 지닌 바 무예로써 대가를 받은 최초의 직업이 바로 경 호무인이지. 경호무인들, 그들은 존재하되 존재가 없는 그림자와 같은 사람들이란다." "....!" "사람들은 종종 경호무인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적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그래! 모두들 경호무인이 분명히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 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식사를 하기도 하고, 볼일을 보기도 해." "....!" "이 운아도 처음에는 경호인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무 척 불편했으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측간에도 가는 정도가 되었어." 그렇다! 그림자 인간이라 불리우는 경호무인들, 그들 또한 같은 인간임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경호무인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태연히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기 도 하고, 또 태연히 잠에 빠진다. 그리고 일말의 수치심도 없이 볼일을 보곤 하는 것이다. 헌데 천하에 산재해 있는 그 경호무인을 하나의 끈으로 연결시키 는 일맥(一脈)이 존재한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적리운을 굽어보는 적리노단의 두 눈에 무한한 애정의 빛이 일렁였다. "운아야!" "응!" "만약에 말이다. 만약 경호무인들을 누군가가 마음대로 명령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에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어? 경호무인들은 대 가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딴 사람이 그들을 명령할 수 있겠어? 만 약 그렇다면 천하는 그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적리운이 고개를 저으며 자신있게 대꾸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적리노단에 입가에 한 가닥 심유(深幽)한 미소가 스쳤다. 동시에 그는 이제까지의 분위기와는 더욱 다른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허나 그것은 가능한 일이란다. 잠천, 그 경호무인의 일맥이 바로 잠천이고 그 잠천을 여는 사람이 곧 할아비가 말한 천하최강의 고 수, 살인혈황(殺人血皇)인 것이다." "천하의 모든 경호무인들을 연결하는 전설의 단체가 잠천이고 잠 천의 천주(天主)는 살인혈황이라고....?" "그 살인혈황이 나타난다면, 천하의 경호무인들은 모두가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어야 한단다." '살인혈황!' 적리운이 자신도 모르게 은은한 격동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잠천, 경호무인의 일맥, 먼 옛날 사람들이 무공이라는 것을 익힌 후 그 무공으로 대가를 받기 시작한 최초의 직업이 곧 경호무인이 아니던가? 허나, 기실 무공을 직업으로 삼는 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대가 를 받고 살인을 청부받는 직업살수(職業殺手)가 있는가 하면, 재 물의 안전한 호송을 책임지는 표국( 局)의 표사들이 있다. 그리 고 황제나 귀부인, 상인, 대학사 등, 각계 각 층의 온갖 사람들의 신변을 책임지는 경호무인이 그렇다. 헌데, 아는가? 무(武)를 근본으로 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 모든 무인들을 관장하는 하나의 비밀을....? <잠천(潛天)>.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름이며, 무(武)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무인 이라면 절대의 율법(律法)처럼 인식하고 있는 신비의 이름이다. 허나 기실 그 어느 누구를 붙잡고 물어보아도 이 잠천의 존재에 대해 명확히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혹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경호무인이라 할지라도 잠천에 대해 묻는다면 그 실체(實體) 를 결코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 무공을 직업으로 삼는 자, 잠천의 일원이 된다. 허나 잠천에 대해서는 설혹 가족이라 할지라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꿈 속에서라도..... 잠천의 세 가지 율법(律法) 중 가장 우선된다는 침묵의 율법이 있 어 잠천의 신비는 이 침묵의 율법에 의해 수천 년간 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때, 돌연 적리노단의 표정이 더할나위 없이 엄숙해졌다. "운아야!" "응!" 적리운 역시 엄숙히 대꾸했다. 그것은 적리노단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때문이었다. 적리노단이 태양이라도 단숨에 녹여버릴 듯한 강렬한 눈으로 잠시 적리운을 응시했다. "손을 이리다오." 적리운이 의아한 눈을 든 순간 적리노단이 적리운의 작고 어린 앙 증맞은 손바닥에 자신의 거칠고 매듭진 손을 조용히 올렸다. 그리 고 흡사 주문같은 저미하고도 차분한 음성이 적리노단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그 살인혈황은 바로 네가 될 것이다. 살인혈황은 천하에 산재해 있는 모든 그림자인간들, 경호무인들의 제황(帝皇)으로 군림할 위 대한 전사(戰士)란다." 적리운은 무엇인가 가슴에 와닿는 알 수 없는 감동에 숨을 죽였다. 백지처럼 깨끗한 소년 적리운의 가슴에 서서히 차오르고 있는 가 슴떨리는 감동, 그것은 야망이라는 색채를 지닌 거대한 것이었다. "잠천이 열리는 날, 이 할아비는 너의 이 손에 천하를 쥐어 줄 것이다!" - 너의 손에 천하를 쥐어주겠다. 적리노단의 확신에 찬 음성이 이어졌다. "겨우 중원만으로 만족하는 이 위정부 따위가 아닌 진정한 천하 제벌을 말이다!" - 진정한 천하 제벌! 적리노단, 그는 이제 더 이상 사랑하는 손자의 백혜를 기워주는 자상스러운 촌로가 아니었다. 위정부라는 중원최강단체의 부주이 며 동시에 제벌이라는 신비의 이름을 향해 야망을 불태우고 있는 대야망아였다. ■ 팔왕예조 제1권 풍(風) 공포의 백찰무경(白察武警) ━━━━━━━━━━━━━━━━━━━━━━━━━━━━━━━━━━━ <흑사(黑蛇) 은한검적(銀寒劍賊) 낭비살(浪費薩). 금년 나이 육십이 세, 마교(魔敎)의 부활(復活)을 외치며 결성된 검은 악마의 후예인 흑마단(黑馬團)의 핵심인물. 그 차갑고 음험잔혹한 그의 성격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검은 독사 (毒蛇)라는 그의 외호임. 특히 그는 어린 소녀들을 죽음에 이를 때까지 욕보인 후 잔인하게 교살(絞殺)하는 것을 즐기는 구제받지 못할 패륜아임. 흑마단이 몰락한 후 행방불명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음. > 방(房), 전혀 아무런 빛깔도 지니지 않은, 사면이 완전히 백색으로 이루어 진 밀폐된 방이다. 문(門)....? 그런 것은 애초부터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사면 전체가 매끈 하다. 실로 공포스럽기조차한 백색의 방, 그곳에 단 하나의 장식 물이 있었다. 정중앙에 놓여 있은 작은 탁자 위의 유등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는 데 예의 유등에서는 악마의 숨결과도 같은 희미한 빛이 흘러나와 백색의 방 전체를 더욱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실내는 그 불빛이 흐르는 소리가 느껴질 듯이 완벽한 고요에 잠겨 있었는데..... 유등의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비쳐들고 있는 구석, 조악(粗惡)하게 만들어진 나무의자 하나가 있고, 그 위에 한 사내가 두 팔이 뒤로 돌려진 채 묶여 있었다. 검은 두건으로 두 눈이 가리워져 있고, 양 팔목에는 거무틱틱한 광택을 뿌리는 강철 수갑이 채워져 있다. 흑사 은한검적 낭비살. 바로 그가 아닌가? 백색의 방. 그곳의 정적은 길고 길었다. 그 정적 속에 낭비살이 긴 수면상태에서 깨어나 천천히 의식을 회복하고 있었다. 순간, 낭비살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깨달았다. '은은한 피비린내? 음....! 향기(?)로 보아 꽤 쓸만한 곳인 듯하군!' 낭비살의 입가에 엷은 조소의 빛이 스쳤다. 실로 대단한 여유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알 수 없는 고문실같은 곳에 끌려왔음을 대번에 짐작해내고도 공포스러워 하거나 의혹해 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다. 흑사 은한검적 낭비살, 그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 자신이 바로 그 런 피와 죽음의 향기 속에서 반 평생을 보내왔기 때문인데..... '우습군. 일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악마의 고향에서 지내온 노부를 이런 곳에 초대하다니.... 지겨운 일이기는 하나 오랜만에 그런대 로 향수에 젖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낭비살은 결코 초조해 하거나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상 황하에서 초조해 하거나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고향에 돌아온 듯 일말의 아늑함마저 느끼며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사고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서두를 필요는 없다. 생각조차 빨리 할 필요가 없다. 아마 나를 이곳에 데려온 자들은 오랜 시간 나를 내버려 둘 것이 다. 그것이 고문의 일단계이니까.' 낭비살, 그에게는 근육이 찢기우고 뼈가 갈리우는 일따위는 고통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따분한 일이었다. 그는 지금 오히려 은근한 기대를 갖고 이제 머지않아 자신을 심문 할 심문자(審問者)를 느긋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는 심문자와 피심문자(彼審問者) 사이의 승부가 어떤 쾌감을 주는 것이라는 사 실까지도 익히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을 죽음을 등에 업고 살아온 나다. 후후....! 만약 내 입이 열리게 만들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오히려 그놈에게 찬사를 보내주마!' 문득, 낭비살은 희미한 조소를 떠올리다가 일시 안색을 굳혔다. '헌데, 어떤 놈들이 감히 황실의 오행작위(五行爵位)까지 받은 본 좌를 이렇게 감쪽같이 데려올 수 있었단 말인가?'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미한 긴장의 빛이 스쳐갔다. 허나 만약 누군가 그의 내심을 읽을 수 있었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 흑마단의 일급 수뇌로써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그가 완전히 변신하여 황실의 오행작위까지 받은 채 버젓이 활보해 왔음을 의 미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노부의 과거를 아는 놈들이?' 낭비살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미 흑사 은한검적 낭비살은 흑마단이 몰락할 때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시체까지 남기고 왔는데 누가 노부의 과거 신분을 알 수 있겠는가!' 낭비살은 스스로도 자신의 신분위장에 확신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 었던 것이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뇌리 저 아랫쪽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허나, 혹 놈들이 노부의 과거를 심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로 그 빌어먹을 과거의 내 신분이 내 입에서 흘러 나와서는 안된 다. 절대로....!' 낭비살은 다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치 즐거운 유 희(遊戱)를 눈 앞에 둔 사람처럼 느긋이..... 이때였다. 낭비살은 단연코 자신의 일 장 앞에 누군가 나타나는 기척을 느끼 지 못했다. 헌데, 불쑥 하나의 손이 그의 어깨를 짚어왔다. 따스 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부드럽게..... 동시에 너무도 낮아 들릴락 말락한 음성이 그의 귀로 흘러 들어왔다. "흑사 낭비살! 오랜만이다." 너무나도 돌연한 음성, 게다가 그 음성은 흡사 다정한 지기를 부 르는 듯 정감마저 담겨 있어 웬만한 인물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어 떤 반응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허나 상대는 낭비살이었다. 그는 마치 이런 일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사뭇 능청스럽게 반문했다. "흑사 낭비살? 그가 누구지?" '형편없는 놈들이로군. 나같은 거물(巨物)에게 이런 케케묵은 구 식방법을 사용하려 하다니....!' 동시에 그의 내심으로 상대를 한껏 비웃는 조소가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녀석! 그래도 한 가닥 했다고 재롱을 떨기는.... "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저미한 음성은 오히려 그런 낭비살의 태도 가 귀엽다는 듯 웃음기마저 머금고 있지 않은가? 낭비살의 눈을 가리고 있던 흑건이 조용히 풀렸다. 강렬한 불빛이 낭비살의 두 눈을 후비듯 파고 들었다. 그것은 희미한 유등의 빛이었으나 장시간 눈을 가리고 있던 낭비 살에게는 가히 충격적으로 강렬한 불빛이 되어 쏟아져 들고 있었다. 낭비살은 역시 이런 방면의 대가답게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영상속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육중한 체구였다. 화강 암처럼 강인해 보이는 인상에 파랗게 밀어버린 머리가 유등의 빛 을 받아 유난히 새파란 광채를 발한다. 두툼한 입술, 여기에 적당히 튀어나온 배를 지닌 마의중년인(麻衣 中年人). 그는 약간 권태로운 듯한 눈길로 낭비살을 향해 씨익 미소를 보냈다. 어찌 보자면 사람 좋아 보이는 탁발승(托鉢僧)같은 사나이였다. 허나 이 순간 낭비살은 직감적으로 눈 앞의 상대가 진짜로 무서운 전문가(專門家)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놈은 진짜 독종이다. 어째 기분이 좋지 않다! ' 낭비살은 그제야 희미하게 공포의 언저리를 더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의중년인, 그는 적지 않은 시간을 침묵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그저 권태로운 눈빛으로 조용히 낭비살의 눈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차츰 낭비살의 등을 타고 식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낭비살은 숱한 고문을 직접 해보기도 하고 또 수많은 고문을 당해 보기도 한 인물이다. 허나 눈 앞에 나타난 이런 부류의 인물은 그 로서는 난생 처음이었다. 지옥의 공포랄까....? 마의중년인은 단지 말없이 눈만 들여다보는 행동 하나로 낭비살에 게 실로 어떤 고문보다도 무서운 공포를 심어주고 있었다. 반각(半刻), 그 공포스러운 침묵이 채 반각이나 흘렀을까? 주르르륵....! 마침내 낭비살의 등줄기로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의중년인 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낭비살! 피차 피곤한 짓은 적당히 끝내기로 하자. 말할 준비가 되었으면 언제든지 입을 열어라." "무, 무엇을?" 낭비살은 더듬거렸다. 그의 눈빛은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을 하 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빛이었으나 마의중년인은 그의 말은 들 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다시 한없이 권태로운 눈길로 그를 굽어볼 뿐이었다. '으.... 죽일 놈! 전문가 중에서도 진짜 전문가로군. 허나....' 낭비살은 무서운 한기(寒氣)를 느끼면서도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때였다. 사면이 흠집 하나 없이 완전히 폐쇄된 백색의 방 한쪽에서 소리없 이 한 사나이가 귀엽게 잠든 어린아이 한 명을 가슴에 안은 채 들어섰다. "헉!" 그 어린아이의 얼굴을 발견한 낭비살의 입에서 외마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얼굴은 처절히 일그러졌다. 어린아이. 사나이의 가슴에 천진한 모습으로 안겨 잠들어 있는 어 린아이는 바로 낭비살의 유일한 혈육으로써 말년에 겨우 얻은 아 이였던 것이다. '무, 무슨 짓을!' 낭비살의 두 눈은 무한한 의혹과 공포를 담은 채 황급히 마의중년 인에게 돌려졌다. 허나 마의중년인은 잔잔히 그의 시선을 묵살한 채 들어 선 사나이로부터 아이를 받아들었다. 이어 극히 부드러운 손길로 잠들어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낭비살을 권태로운 눈으로 응시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낭비살이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허나 마의중년인은 역시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를 무심히 건너다 볼 뿐이 아닌가. 마침내 낭비살 의 이마에서도 땀방울이 솟기 시작했다.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뚝! 돌연 극히 나약한 기음(奇音)이 그 정적을 깨뜨렸다. "으앙!" 잠들어 있던 아이가 갑자기 자지러질 듯 요란하게 울어대기 시작 했다. 아아, 마의중년인이 아무 소리없이 아이의 손가락 하나를 젖혀버린 것이 아닌가! "으.... 이 잔인한 놈 같으니....!" 뚝! 낭비살이 치를 떠는 순간 아이의 두번째 손가락이 기음을 발하며 맥없이 젖혀졌다. 마의중년인의 손은 아이의 세번째 손가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일체의 표정변화는 물론,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권태로운 시선을 낭비살에게 고정시킨 채였다. "말, 말하겠다! 무엇이든지!" 새하얗게 질린 낭비살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 는 흐느끼고 있었다. 천하의 패륜아 흑사 낭비살이 소리죽여 울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독사의 새끼, 허나 그래도 부정(父情)을 지니고 있는 것 이 기특해 아이에게는 더 이상 손대지 않으마." 마의중년인의 입가에 그제야 인간다운 감정의 빛이 스쳤다. "그리고 한 가지 네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너의 말을 들을 사람 이 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순간 낭비살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최대의 속도를 다해 이제부터 마악 입을 열려다가 갑자기 멍청해졌다. '이자 말고 또 있단 말인가....?' 마의중년인의 얼굴에 문득 경외의 빛이 어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 "낭비살! 네 따위 놈이 그 분을 직접 대할 수 있는 영광을 지니다니 실로 부럽다."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그는 아이를 안은 채 몸을 돌렸다. 아이는 어느새 다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낭비살! 노파심에서 주의를 주겠는데 그 분을 대하게 되면 네가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를 갖춰 모셔라." "......!" "그 분의 눈살이 한 번 찌푸러지는 순간 너의 이 독사새끼의 몸이 한 번 베어질 것이고 두 번 찌푸러지면 두 번 베어질 것이다. " 낭비살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을 심문하는 것이 바로 이 마의중년인이리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막상 자신이 입을 열려 하자 그는 물러나겠다 는 것이 아닌가! '천하에 누가 있어 이런 전문가에게 저토록 공경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낭비살의 두 눈에 의혹이 파도쳤다. 그 순간 마의중년인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돌연 둔중한 발걸음소리가 백색의 방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처벅! 처.... 벅! 마치 지옥의 저 아래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 낭비살은 그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그림자가 소리없이 실내로 들어섰다. 하지만 무릎까지 길게 늘어진 검은 가죽장삼의 그림자만이 낭비살의 눈에 비쳐 들었다. 낭비살은 나타난 사나이의 발쪽으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가죽옷으로 싸인 단단하기 이를데 없어 보이는 몸체. 그리고 역시 가죽으로 가려있는 목부분을 지나 사나이의 얼굴이 그의 눈을 파고 들었다. 순간 낭비살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헉!" 낭비살, 그는 맹세코 인간의 얼굴로서 이토록 공포스러운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오오! 코, 입, 눈두덩이. 그 모든 것의 형체란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저 시뻘건 피를 나무뭉치에 발라놓은 듯한 전율스러운 모습,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무수한 검상(劍傷)과 닭벼슬처럼 검붉게 일어난 흉터들..... 눈이 있었던 듯한 지점에는 그저 구멍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두 개의 동공(瞳孔)이 뻥 뚫려 있다. 그 눈은 곧 지옥의 문으로 통하 는 두 개의 구멍, 바로 그것이었다. 실로 꿈에서조차 볼까 두려운 흉터덩어리 인간인 것이다. 허나 낭비살이 이토록 놀란 것은 결코 검은 가죽옷을 걸친 사나이 의 용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흡사 죽어 자빠질 듯 놀란 최대의 이유는 바로 그 괴인의 정체를 안다는 것 때문이었다. <잔백인혼(殘魄引魂), 단두백정(短頭白丁) 학거비(學巨肥).> 금단(禁斷)의 공포, 그리고 살아 있는 전설(傳說)로 대변되는 이름이다. 그의 존재는 스스로 냉혈한(冷血漢)이라고 자칭하는 부류의 인간 들에게 있어 가히 신(神)마저 초월하는 하나의 우상(偶像)을 의미한다. 인간으로서 가장 두려워하는 염왕, 사신(死神), 그리고 악마(惡 魔)의 공포를 뛰어넘어 더욱 공포스러운 존재로 느껴지게 만든 최 초의 인간이 바로 그였다. 아울러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의 한계를 깨뜨린 최초의 인간백정(人間白丁)이 또한 이 단 두백정 학거비였다. 허나 무엇보다도 그를 가장 확실한 공포로 이 지상에 심어준 것은 그가 바로 이 지상에서 가장 무섭고 끈질긴 하나의 가공스러운 집 단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백찰무경(白察武警). 최고, 최강, 최다(最多)의 인간사냥꾼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을 탄생시켰다. 철저한 수사망(搜査網)과 집요한 추종술(追從술)로 천하의 모든 범죄인들에게 가장 처절한 공포로 군림하고 있는 지상최대의 무적 기찰단(無敵譏察團). 단 일문의 은자라도 훔쳐본 적이 있는 사람이거나, 하찮은 범죄라 도 저질러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백찰무경의 존재를 안다. 그 리고 일단 백찰무경의 흑서(黑書)에 자신의 명단이 올려져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처절한 공포로 피가 말라 죽어야 한다. 잡히 는 그 순간까지..... 잔백인혼 단두백정 학거비, 그는 바로 이 백찰무경의 서열 이위 (二位)에 올라있는 인물로서 곧 백찰무경의 공포를 상징하는 인물 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내가 이 공포의 시조라는 인간백정을 만나게 되다니....!' 낭비살, 그는 너무도 엄청난 공포에 자신이 의자에 묶여 있는 상 태인 것도 잊은 채 앞으로 고꾸라지듯 맹렬히 이마를 지면에 처박았다. 꽈....앙! 이마가 터지며 피가 흘러 나왔으나 낭비살은 그것조차 전혀 의식 하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후, 후진말학(後進末學) 낭비살! 삼가 노조종(老祖宗)을 대합니다!" 의자에 묶인 채 오체투지하는 낭비살을 내려다 보는 흉터덩어리 인간 학거비의 깊고 깊은 두 눈엔 아무런 빛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낭비살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후, 후배는 흑궐(黑闕)의 내정조직(內政組織)을 담당하는 십이야 로(十二夜路) 중 제일로(第一路)의 예하, 목작림(木雀林)의 수뇌 를 겸임하고 있으며.... " 이때, 정신없이 입을 열고 있던 낭비살의 뇌리에 불현듯 한 죽음의 율법이 스쳐갔다. - 죽음은 주되 비밀은 주지마라! 바로 어둠의 단체 흑궐(黑闕)의 죽음의 율법이었다. 허나 낭비살 은 고개를 세차게 저은 채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의 그에 게는 흑궐의 죽음의 율법보다는 눈 앞의 학거비란 존재에 대한 공 포가 더욱 절실했기 때문이다. "후배는 현재 황실의 오행작위를 받아 표면적으로는 하남막부(河 南幕府)를 맡고 있으나 과거 흑마단의 일원으로서.... " 순간 화강암처럼 단단히 백색의 방 정중앙에 뿌리를 내리고 침묵 을 지키고 있던 단두백정 학거비의 얼굴이 꿈틀했다. 동시에 어둠 속을 흐르는 바람처럼 실로 소름끼치는 음향이 학거비의 입술 사 이로 흘러나왔다. "낭비살. 본좌가 흑궐 따위의 일을 듣기 위해 네놈을 찾은 줄 아느냐?" 일체의 억양이 존재하지 않는 음성, 묻는 것인지 아니면 홀로 독 백하는 것인지조차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허나 기이 하게도 그 음성은 실로 엄청난 공포가 되어 낭비살의 고막을 찢어 내고 있었다. 낭비살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그 엄청난 공포 속에서도 그의 머리는 혼란으로 어지러웠다. '그,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그리고 나에게 무엇을 알아내기 위해 좀체로 남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 자가 직 접 나섰단 말인가....?' 학거비의 입에서 다시 그 소름끼치도록 무심한 일성이 흘러 나왔다. "십칠 년 전, 한 마리 붉은 늑대를 데리고 한 사나이가 흑빙만을 건너왔다. 아느냐?" 낭비살은 완전히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답은 커녕 그 질문 의 의미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낭비살의 대답은 이미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 학거비가 몸을 돌려 걸어 나가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였다. 처벅....! 처벅! 기계처럼 일정한 걸음걸이. 그 걸음은 결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 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저 기계처럼 정확할 뿐이었다. '도, 도대체?' 낭비살은 순식간에 자신에게 일어났다 사라져간 일련의 상황이 마 치 폭풍이 지나간 듯 하다고 느끼며 경악과 의혹으로 물든 눈으로 학거비의 사라져 가는 뒷모습만을 넋잃은 듯 바라 보았다. 어둡고 긴 낭하(廊下)였다. 사면이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흑단(黑檀)으로 만들어진 길고 긴 낭하는 마치 지옥으로 이르는 계단처럼 길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 고 그리고 무덤 속처럼 고요했다. 그 가운데 한 사나이가 기계처럼 정확한 걸음걸이로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처벅....! 처벅! 잔백인혼 단두백정 학거비, 실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 는 사나이, 그에게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지루할 정도로 정확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두 눈은 일체 좌우를 둘러보는 일이 없이 전면에 고정되어 있었 고, 화강암처럼 강인해 보이는 어깨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실로 독특하게 두 다리만을 움직이며 걷고 있다. 마치 하나의 육중한 바위덩어리가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어슴푸레한 낭하의 저 끝에 하나의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퇴색 할 대로 퇴색해 실로 볼품없는 철문이었다. 헌데 예의 볼품없는 철문 가까이 이른 학거비의 표정에 일순 미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 하지 않는가? 너무도 미미하여 발견하기조차 어려운 표정변화였으나 분명히 그 의 표정은 변하고 있었다. 돌로 조각한 듯 무심비정(無心非情)한 표정과 한없이 잔혹스러워 보이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이 순간 희 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뿐이랴! 지옥의 입구처럼 보이던 한없이 깊고 어둡던 그의 두 눈, 그 눈 속에 은은한 경외(敬畏)의 빛과 자애스러운 빛이 아울러 떠오르고 있었다. 끼이이이....! 학거비는 다음 순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극히 조심스럽게 철문을 열었다. 순간 거대한 석실(石室)이 학거비의 눈 앞에 펼쳐졌다. 석실이라 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광장을 방불케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석실이었다. 석실의 중앙에는 하나의 거대한 태사의(太獅倚)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등받이에 가려 그의 모습은 잘 보이 지 않았다. 학거비는 조용히 태사의의 뒤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실로 믿을 수 없게도 그는 태사의와 삼 장 되는 지점에 이르러 보 이지 않는 인물의 뒷모습을 향해 공손히 예를 표하였다. "소주(少主)! 다녀왔습니다." 더할나위 없이 공손한 음성이었다. 아아, 잔백인혼 단두백정 학거비같은 인물이 이토록 공손히 최대 의 경의를 표할 인물이 천하에 존재했음을 뉘라서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학거비의 말이 끝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비로소 태사의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할아범! 그 역시 모르고 있는 듯 하구료?" 놀랍도록 맑고 낭랑한 음성, 그것도 약관(弱冠)에도 채 못미쳤을 젊디젊은 음성이었다. "....!" 학거비는 마치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 듯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무거운 정적이 드넓은 석실을 한 차례 휘감았다. 이윽고 태사의의 인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되었소. 그만 가보시오." 음울한 목소리였다. 순간 학거비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스러졌다. 일종의 안타 까움 같기도 하고, 깊은 연민같기도 한 그런 빛이었다. 학거비는 복잡한 시선으로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처벅....! 처벅! 학거비의 모습이 석실에서 사라지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태사의가 천천히 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현한 어둠 속에 잠 겨있던 드넓은 석실 가운데 하나의 빛이 떠오르듯 태사의에 앉아 있는 인물의 얼굴이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했다. 헌데 놀랍지 않은가. 잔백인혼 단두백정 학거비, 백찰무경이라는 거대한 무적 기찰조직 의 실질적인 관장자이며, 인간공포의 끝이라고 불리우는 학거비에 게서 그토록 공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 잘 되어야 십오륙 세에 불 과한 흑의미소년(黑衣美少年)이었던 것이다. 약간 창백해 보이는 피부와 대조적으로 음영(陰影)이 뚜렷한 검은 눈, 콧날은 높지도 낮지도 않게 가장 적당한 높이로 우뚝 솟아 있 고, 한 줄기 홍선(紅線)을 그려 놓은 듯한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다.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 흑의미소년의 용모는 그야말로 남장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안 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어딘가 문약해 보이는 기질과 단아한 얼굴이 언뜻 보면 절세미소녀로 착각할 정도인 것이다. 허나 태풍의 핵(核)과 같은 정적(靜寂)을 안고 있는 눈, 그 눈에 는 아무런 표정도 없어 심연(深淵)과 같은 정적감을 풍기며 흑의 미소년의 전체적인 기질을 강렬하게 특징지어 주고 있었다. 누구란 말인가....? 그는 과연 누구이기에 학거비와 같은 인물로부터 이토록 진정어린 공경을 받고 있단 말인가? <유빙(劉氷).> 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적지 않다. 허나, 이 이름과 천하최강의 무적기찰조직인 백찰무경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은 천하에 단연코 단 한 명도 없다. 그 까닭 은 백찰무경의 실질적인 대총사는 바로 학거비였기 때문이다. 유빙은 오랜 시간을 침묵으로 태사의에 몸을 묻고 있었다. 너무도 거대한 태사의, 허나 그 태사의는 이 순간 유빙이 앉아 있 으므로 해서 기이하게도 매우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어떤 결단력(決斷力)을 함유한 나직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제.... 벌! 그렇다면 이제는 제벌 내에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 제벌. 이렇게 이 이야기는 붉은 늑대의 사나이를 추적하는 신비소년(神 秘少年), 유빙(遊氷)으로부터 전개된다. 그리고 풍운(風雲)은 이제 시작된다. ■ 팔왕예조 제1권 제1장 심야(深夜)의 미행인(尾行人) ━━━━━━━━━━━━━━━━━━━━━━━━━━━━━━━━━━━ ① 비가 그친 후, 습기를 머금은 후덥지근한 밤 열기가 그늘 속에 숨겨진 한 고독한 사나이의 그림자 주변에 깔려 있었다. 사나이의 얼음장같이 날카로운 눈초리가 인기척없는 거리를 샅샅 이 훑어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 나타난 기척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사위(四圍)에는 점차 어둠이 검은 날개를 내리고 있었다. 사나이가 몸을 감추고 있는 곳은 남창(南昌)의 혼잡한 동남로(東 南路), 거대한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처마를 잇대어 늘어서 있 는 곳이었다. 사나이는 오랜 시간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다림은 이제 마악 끝나려 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전면의 한 장 원(莊園)의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소리없이 열려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좀전에는 분명 열려있지 않던 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문 앞, 깨끗한 백의(白衣)를 걸치고 한 손에 새하얀 학익선(鶴 翼扇)을 말아 쥔 중년인이 이제 마악 문에서 나온 듯 천천히 걸음 을 옮기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은 사나이가 어둠 속 에서 지켜보고 있는 반대쪽이었다. 멀리 두터운 어둠의 장막 저쪽에 숨어 있던 사나이가 마침내 움직 이기 시작했다. 사나이의 움직임은 신중하고 또 민활했다. 허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길고 지루한 미행(尾 行)의 끝을 의미하는 것임을.... "누구냐?" "...." "나를 미행하는 이유는?" 사나이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가 쫓던 백의중년인이 한 모 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우아하리만큼 단아한 풍도의 백의중년인, 그는 사나이의 동공(瞳 孔)에 무심한 시선을 꽂은 채 천천히 학익선을 펼쳐들고 있었다. 실로 여유롭기까지 한 태도였다. 사나이는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그 행동은 영락없이 겁을 집어먹 은 일개 촌부(村夫)의 그것이었다. 파앗! 허나 돌연 뒷걸음치던 사나이의 신형이 눈깜짝할 사이에 가공할 속도로 폭사해 이미 중년인의 목줄기로 손을 쳐내고 있었다. 슈파아아.... 앗! 동시에 거짓말처럼 그의 가슴에서 반자 길이의 붉은 검이 튀어나 오고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그 적검(赤劍)은 이미 중년인의 목 어림을 휩쓸어가고 있었다. 이 일련의 동작은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였다. 백의중년인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스쳤다. 피를 말릴 듯한 섬칫한 미소, 그리고 그 미소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그의 우수가 조용히 번뜩였다. 번쩍! 순간 공중으로 솟아올랐던 사나이의 얼굴이 싸악 굳어졌다. 촤아아악! 실로 믿을 수 없게도 악마의 휘파람소리 같은 섬칫한 기음(奇音) 과 함께 백의중년인의 학익선이 자신의 반자 길이 적검을 두 조각 으로 가르며 그대로 밀고 들어오지 않는가! 쩌어어.... 억! 학익선에 의해 대나무 쪼개지듯 적검이 베어지고 학익선은 적검만 이 아니라 그것을 들고 있는 사나이의 주먹을 가르며 팔을 세로로 쪼개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나이가 보고 있는 순간 학익선은 길 게 그의 늑골(肋骨)로부터 복부(腹部)로 일선(一線)을 그어가고 있었다. 촤.... 악! 붉은 피가 확 뿜어졌다. 사나이의 몸은 일순간 허공에 그대로 정체되어 있다가 이내 천천 히 지면으로 무너져 내렸다. 쿠.... 웅! "알 수 없는 일이군." 백의중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 자의 무공으로 보아 결코 하류(下流)가 아니다. 방심했다면 오히려 내가 당했을 것이다. 헌데 무엇 때문에 이 자가 나를 미행하고 있단 말인가?" 백의중년인은 알 수 없다는 듯 사나이의 시선을 잠시 물끄러미 굽 어보다가 천천히 등을 올렸다. 스.... 읏! 헌데 백의중년인이 사라진 직후 일단의 야행인(夜行人)들이 소리없이 내려섰다. 그들의 수효는 셋, 삼 인의 복장은 각기 달랐다. 서두에 상인(商 人)차림의 다소 비대한 금포중년인(錦袍中年人)이 섰으며, 그 뒤 에 걸인(乞人)을 방불하는 다 떨어진 마의를 걸친 청년 한 명과 또한 이제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간신히 지팡이에 몸을 의지 하고 있는 촌로(村老)가 따르고 있었다. 이 세 사람에게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공통점을 찾을 수는 없었 다. 허나 깨닫기 이전에 느껴지는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눈이 더할나위 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과, 지면에 쓰러져 있 는 사나이의 주변으로 소리없이 내려서는 야수(野獸)의 기민성이었다. "옮겨라!" 상인차림의 비대한 금포중년인이 짤막하게 내뱉았다. 그러자 걸인복장을 하고 있는 청년과 노인으로 변장해 있던 두 명 이 일체의 말이나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소리없이 사나이의 시 신을 옮기기 시작했다. 민첩하기 이를데 없는 움직임이었다. 인적이 드문 남창의 한 소로(小路)에 이내 어둠과 정적이 내렸다. ② 사나이의 시신은 한곳으로 옮겨졌다. 회색의 방(房), 온통 회색빛 일색(一色)인 거대한 회색의 방이었다. 회색의 방 정중앙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회색의 대리석 탁자가 위 치해 있었는데 그 위에 사나이의 시신이 반듯이 눕혀져 있었다. 그리고 반백(半白)의 장년인(長年人)...., 땅땅한 몸집에 적당히 살이 잡혀 있는 아랫배와 희끗희끗한 반백 의 귀밑머리가 어떤 관록을 엿보이게 한다. 사나이의 시신을 가느 다란 실눈으로 꼼꼼하게 내려다 보고 있는 그에게서는 마치 오랜 세월을 문서 따위나 정리하며 보냈을 듯한 조금은 따분하고 권태 로운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허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부류의 인물은 절대로 적수(敵手) 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그에게서는 일단 한 가지 일에 집착하면 끝장을 낼 때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독종의 기질이 엿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반백의 장년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잔잔한 실눈 으로 마치 실오라기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듯 실로 오랜 시간을 사나이의 시신에 남아 있는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 갈라진 늑골과 가슴 부위에 절단면(切斷面)과 혈액(血液)의 응고 형태, 그리고 사나이가 죽었을 당시의 표정을 완벽히 파악해 내려 는 듯 그의 감겨 있는 눈까풀을 들쳐 보기도 한다. 반백의 장년인은 사나이의 시신에 남아 있는 검흔의 첫 부분과 마 지막 부분을 비교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그 상처에서 상대방의 병 기(兵器)냄새라도 알아내려는 듯 코를 대어본 후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반백의 장년인은 천천히 시신에서 눈을 떼 며 고개를 들었다. "완벽하다. 가공스러운 솜씨다....!" 나직이 흘러나오는 음성, 그 음성에는 은은한 경악이 묻어 있었다. "천마람(天魔嵐)이라 불리우는 신비신흥세력(神秘新興勢力)중 한 명인 남천검백(南天劍伯) 자청비(自靑備)의 무공화후가 이 정도였다니....!" 반백의 장년인은 마치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숙고하려는 듯 깊숙이 팔짱을 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결론을 내린 듯 무겁게 중얼거렸다. "보고해야겠군. 어쩌면 대총사(大總師)께서 찾고 있는 붉은 늑대 의 사나이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반백의 장년인은 천천히 회색의 방을 빠져 나갔다. ....한 통의 극비보고서(極秘報告書)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③ 소주(蘇州), 꿈과 낭만의 항구도시(港口都市). 예로부터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고, 소주팔경(蘇州八景)이라 불리 우는 천하절경(天下絶境)이 있어 더욱 잘 알려진 중원제일의 미항(美港)이다. 낮이면 진회하(秦淮河)의 푸른 창파(滄波)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밤이면 아리따운 소주의 가인(佳人)을 벗삼아 한 잔 술에 시정(詩 情)을 돋우는 풍류의 고향이 바로 소주인 것이다. 이 소주에 누구나 한 번은 꼭 들러보고 싶어하는 명소가 있었다. <천향화방(天香畵房).> 화예(畵藝)에 관한한 가히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고 있는 중원제일의 화방(畵房)이다. 내노라하는 명숙(名宿)치고 이 천향화방의 명품을 자랑삼아 한두 점 소장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고, 또 고관대작치고 이 천향화방에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천향화방은 특히 인물화에 있어 탁월한 기예를 발휘하고 있는데, 천향화방에서 그런 인물화는 오히려 실물보다 더욱 생명감이 있어 보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제아무리 가난한 범부라 할지라도 자신의 모습을 담은 초 상화 한폭 정도는 후손에게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에 인물화에 탁월한 기예를 나타내고 있는 천향화방은 명실공히 소주 제일의 명소로 손꼽히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 천향화방은 실로 세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비밀 한 가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천향화방이 백찰무경이라는 거대한 무적 기찰조직 을 이끌고 있는 대총사(大總師)의 가문(家門)이라는 사실이었다. 진회하를 끼고 있는 소주남단의 구릉(丘陵) 중턱에 한 채의 장원(莊園)이 있었다. 주위에 온갖 화초(花草)들이 만발해 있고, 마치 구릉과 구릉 사이 에 숨은 듯 자리해 있는 예의 장원은 실로 고요하기 이를데 없었다. <천향화방(天香畵房).> 그렇다! 이 장원이 바로 천하제일의 화도(畵道)를 자랑하고 있는 천향화방인 것이다. 천향화방의 화청(畵聽), 한쪽으로는 온갖 화구(畵具)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은은한 묵 향(墨香)이 감도는 가운데 화예의 명가(名家)다운 고아한 풍취가 느껴지는 그런 화청이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예의 화청의 중앙, 높다란 나무의자 위에 한 소녀가 두 발을 대롱거리며 앉아 있었다. 대략 십삼사 세? 아직은 채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이다. 허나 쌍꺼풀 진 기다란 속눈썹에 깜빡거리는 커다란 눈, 능금같은 두 볼에 깊숙이 파인 보조개가 실로 환상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여기에다가 마늘쪽같이 곧은 콧날, 만지면 분이라도 묻어날 듯 새 하얀 피부 등은 완연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화예란(華芮蘭). 만품대부(萬品大夫) 화우백(華宇伯)의 장중보옥(掌中寶玉)이다. 만품대부 화우백은 이 시대 최고의 대유(大儒)로서 그 뛰어난 인 품과 고매한 수양으로 패웅 영락제조차 스승으로 공경하고 있는 당대의 대석학(大碩學)이었다. 일찌기 명태조(明太祖) 주원장이 그의 높은 덕과 학문을 기려 왕 호(王號)를 하사하였고, 그 손녀인 화예란은 아직 십삼 세에 불과 하건만 이미 천하제일미인(天下第一美人)으로 공인받고 있는 일대 재녀(一代才女)였던 것이다. "왜 여태 안나오는 것일까....?" 화예란이 상큼 눈을 치켜뜨며 지루한 듯 두 발을 대롱거렸다. 그 로 보아 누군가를 몹시 기다리는 눈치임을 알 수 있었다. 이때 화청으로 이르는 내실의 문이 조용히 열리며 한 흑의미소년이 들어섰다. 십오륙 세나 되었을까? 조금은 창백해 보이는 얼굴, 여기에 검고 조용한 눈이 대조되어 강렬한 인상을 던진다. 그 용모는 실로 수려해 마치 미소녀에게 남장(男裝)을 입혀놓은 듯 싶었는데.... 아, 예의 흑의미소년은 바로 백찰무경의 인간공포 학거비로부터 보고를 받던 그 소년이 아닌가! 그의 진정한 신분이 바로 천향화방의 주인이었단 말인가? 유빙(遊氷). 그렇다. 그는 바로 천향화방의 당대 소년가주(少年家主)인 유빙이었다. 소주에 기거하는 인물치고 또 화도(畵道)에 입문한 인물치고 이 소년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겨우 십오 세의 나이에 천향화방을 가업으로 이어받아 그 명성을 조금도 욕되게 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소녀같이 아름다운 용모에 항시 우수(憂愁)에 젖어 있는 듯한 깊은 눈을 지녔으면서도 의연 히 천향화방을 이끌어가고 있는 그의 존재는 확실히 보는 이에게 깊은 감명을 주곤 하는 것이었다. 뿐이랴! 그의 화도(畵道)는 역대 천향화방의 가주(家主)들 보다 높이 평가되며 고관대작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빙오빠는 나빠!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그것도 나같은 숙녀를 말이야!" 화예란이 새침해져 있는 대로 입을 내밀었다. 그 모습은 실로 깨 물어주고 싶으리만큼 앙증맞았다. 허나 유빙의 태도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담담하기만 했다. "내가 늦은 것이 아니라 공녀(公女)가 빨리 온 것이다. " "치이.... " 화예란은 유빙이 무덤덤하게 대꾸하자 금세 시무룩해져 하얗게 눈을 흘겼다. 유빙은 천천히 화구를 펼쳐 들었다. "준비가 되었으니 의자에 앉아라." 허나 화예란은 나무의자에서 발딱 내려선 채 앉을 생각도 하지 않 고 빤히 유빙을 응시했다. "내 초상화를 그릴 시간은 앞으로 얼마든지 많아. 그러니 오늘은 우리 재미있는 이야기나 해. 응?" 유혹덩어리랄까? 그녀의 모습은 실로 가슴이 진탕될 정도로 깜찍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유빙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녀는 시간이 많을지 몰라도 난 그렇지 않아." "치이, 누가 매력 없다고 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억지로 매력있는 표정 지으려고 애쓰지 마." "....!" "음....! 왕부(王府)의 언니들이 그러는데 유빙은 그 차가운 표정 끝에 떠오르는 미소가 매력이래. 나 역시 유빙의 그 차가운 미소가 매력적으로 보여." 실로 깜찍스러운 말이 화예란의 입에서 서슴없이 튀어나오고 있었 다. 유빙은 그 당돌하기 이를데 없는 화예란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입꼬리를 묘하게 말아 올렸다. 헌데 화예란의 입에서 다음 순간 더욱 가공지경의 말이 흘러 나오지 않는가. "혹시 그 차가운 매력적인 표정, 억지로 짓는 것은 아니야? 날 꼬이려고....?" 유빙의 입가에서 미소가 싸악 사라졌다. "아무래도 공녀는 오늘 그림 그릴 마음이 없는 듯 하군. 난 이만 돌아가겠다." 유빙이 주섬주섬 화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순간 화예란이 찔끔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누가 그림 그릴 마음이 없다고 그랬나 뭐!" "그렇다면 어서 의자에 앉아!" "응....! 알았어, 알았다니까!" 화예란의 입이 부어 올랐다. '바보, 멍청이....! 좀 넘어가 주면 어때서, 고지식하긴 꼭 돌부처같애.' 투박해 보이는 나무의자는 화예란에게는 무척 컸다. 해서 다시 의 자에 앉은 화예란은 키와 의자가 맞지 않아 두 발이 허공에서 대 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절로 미소를 베어물게 만드는 앙증스 러운 것이었다. 화예란은 그런 자세에서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빙은 묵묵히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단 한순간의 망설임 도 없는 거침없는 손놀림, 그 손놀림에 또 하나의 화예란이 화폭 위에서 새롭게 탄생되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묵묵히 일에 열중하고 있는 유빙의 모습을 지켜보던 화예란이 더 이상 참기 어려운 듯 다시 재잘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나를 천하제일미녀(天下第一美女)라고 그러는데 빙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입에 담음에 있어 이토록 천연덕스러울 수도 있는 것일까....? 유빙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런 것 같다." 순간 화예란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를 그린 그림의 제목(題目)을 빙오빠가 천하제일미인도(天下第 一美人圖)라고 붙였다는데 정말이야?" "그랬지." 유빙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화예란이 흡족한 듯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돌연, 그녀는 고개를 살레살레 젓지 않은가? "하지만 난 사실 그 제목이 마음에 걸려. 왜냐하면 천하제일미인 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 주인공은 따로 있거든." 유빙이 흥미있다는 듯 눈을 들었다. 화예란이 이토록 겸양을 떠는 모습을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때? 내가 천하제일미인이라고 이름붙이고 싶어하는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아?" "글쎄....?" "후후, 내가 천하제일미인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어하는 주인공은 바로 빙오빠야!" "....!" 유빙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한대 맞았다는 표정이었다. 화예란이 배시시 웃었다. "빙오빠는 정말이지 너무 귀여워! 특히 뭐랄까, 음.... 우수에 촉 촉히 젖어있는 듯한 그 눈은 내가 봐도 샘이 날 정도로 아름답단 말이야! 아마 빙오빠에게 여장(女裝)을 입혀 놓으면 나보다 이쁠 거야!" 순간 유빙이 천천히 화필(畵筆)을 내려놓았다. "공녀! 아무래도 오늘은 더 있어 봐야 입씨름만 하게 될 것 같군." "킥!" 화예란이 유빙의 엄숙하고 당황해 하는 표정에 입을 막으며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유빙이 진짜로 붓을 놓을까 두려운 듯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알았어. 더 이상 말하지 않을께!"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허나 화예란은 또 다시 심심해진 듯 두 발 을 짤랑거리며 입을 열고 있었다. "빙오빠!" "......" "나 이뻐? 빙오빠는 날 어떻게 생각해?" "맹랑한 소녀라고 생각하지." "맹랑? 왜?" 화예란의 눈이 또 다시 악동(惡童)의 눈빛을 방불하는 기이한 눈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꼭지가 덜 떨어진 맹랑한 생각과 맹랑한 말만 하니까!" 유빙은 화예란이 그렇게 물어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서슴치 않고 대꾸했다. 하지만 화예란은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생글생글 미 소를 떠올렸다. "맞아! 맹랑한 점에 있어서는 우리는 비슷하다고 생각해." "....!" "이제 열다섯 밖에 되지 않았으면서도 인생을 다 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빙오빠를 나도 늘 맹랑하다고 생각해 왔거든." 유빙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가 말로는 화예란의 상대가 되 지 않음을 느낀 것이었다. "음.... 그런 점을 보더라도 우리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인 것 같아. 둘 다 맹랑하니까." 헌데 다음 순간 화예란의 입에서 더욱 결정적인 말이 튀어나오지 않는가! 스스슷....! 쓰읏! 유빙은 더 이상 말대꾸 했다가는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듯 묵묵히 화필을 놀리기 시작했다. 화예란도 이제는 뭐라고 해도 유빙이 대꾸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허나 유빙은 과연 알고나 있을까....? 이 순간 화예란의 내심으로 무서운(?) 결심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빙오빠! 누가 뭐래도 빙오빠는 내거야! 아무에게도 빙오빠를 빼앗기지 않겠어!' 잠시 후, 유빙이 조용히 화필을 내려놓으며 눈을 들었다. "이제 됐다. 삼 일 후 완성된 그림이 공녀의 생일에 맞춰 왕부에 도착될 것이다. " "빙오빠가 직접 그림을 전하러 올 거야?" 화예란이 일순 기대에 찬 눈빛을 띄었다. "아니, 다른 사람을 시켜 보내겠다. " "에이, 빙오빠가 직접 오면 좋은데.... 빙오빠가 직접 와! 응? 내 방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단 말이야. 난 그것들을 빙오빠에게 보여주고 싶어. " "...." "음....그리고 와서 우리 할머님 초상화도 그려줘. 우리 할머님은 나이가 많아 이곳까지 올 수가 없단 말이야." 화예란은 필사적이었다. 허나 유빙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곳이 아닌 곳에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 화예란이 짐짓 울상을 지었다. "치이....우리 할머님은 이제 얼마 살지 못하신단 말이야. 그런데 아직까지 초상화 한폭 없단 말이야. 그러니 이번에는 내 부탁을 들어줘!" "그럴 수는 없어. 다른 곳에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이 본가의 전통이니 말이다. 허나 정 그렇다면 노마님의 인상착의(人相着衣)를 말해줘." 화예란의 눈이 커졌다. "인상착의만 듣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이야?" "물론!" 화예란이 못믿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허나 시험삼아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듯 그녀는 차분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유빙은 새로운 화선지를 화구에 걸어놓고 잠시 화예란이 말하는 인상착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붓을 집어들어 화선지 위에 한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하지 않는가! 쓱....! 스스슥! 대략 반각이나 흘렀을까? 유빙이 돌연 입을 열었다. "노마님은 평소 어떤 옷을 즐겨 입으시지?" "응? 연꽃 무늬가 들어 있는 하늘색.... " 화예란은 멍청히 대꾸하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어 화선지 위에 눈을 주었다. 헌데, 순식간에 화선지 위에 연꽃 무늬가 수놓 아져 있는 청의를 입은 하나의 인물화가 완성되지 않는가! 화예란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림 속의 인물화, 그것은 완벽한 그 녀의 할머님 모습이었는데 평소 즐겨입는 옷마저도 완벽히 똑같았다. 아아, 이것을 어찌 인간의 솜씨라 할 수 있겠는가! 단지 인상착의 만을 듣고 그 인물의 용모는 물론이고 그 풍도마저 완벽하게 재현 할 수도 있단 말인가! 허나 이것은 천향화방의 소년가주, 유빙이 지니고 있는 능력의 일 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천하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천향화방은 인상착의만을 듣고도 완벽한 초상화를 그릴 수 있음은 물론이고, 또 인간의 음성만 듣고도 그 음성의 주인의 턱 과 목부분의 형태를 알아낼 수 있다. 여기에 손 등에 나 있는 한 줄기 검흔(劍痕)만으로 그 상처를 입 게 된 상황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 천향화방은 곧 백찰무경이라는 거대한 기찰조직의 산실(産 室)로써, 악인들을 추적하던 일천여 년의 오랜 경험들이 당대에 이르러 경이적인 수사기예(搜査技藝)로 발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대에 이르러 천종예가는 천향화방을 통해 화도(畵道) 하나만으 로 성명(聲名)하고 있으나 기실 천종예가는 모든 방면에 있어 타 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천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 은자(隱者)의 가문이었다. 바로 중원제일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명인의 가문 천 종예가(天宗藝家)가 천향화방의 뿌리였던 것이다. 금기서화(琴棋書畵)는 물론이고, 의도(醫道), 병학(兵學), 상학 (商學) 등등...., 붓을 들면 천하제일의 서도명인(書道名人)이 되 고 금반산을 쥐면 천하 최고의 상재(商才)를 발휘한다. 뿐이랴! 천종예가는 고도의 살인미학(殺人美學)을 추구하는 피의 예술성마저 지니고 있었으니.... 살해된 사람의 검흔(劍痕)을 보고 뛰어난 의도(醫道)로 그 살해된 상황을 추정해내 범인을 색출한다. 음성을 듣고 인체학(人體學)과 화예(畵藝)를 동원해 그 사람의 턱과 목의 형태를 그려낸다. 그리고 가문이 지니고 있는 놀라운 병학(兵學)으로 범죄자의 심리 를 분석, 그의 탈출로를 정확히 산정해 낸다. 천예(千藝)를 지니고 있는 천종예가의 능력과 수사기예의 조합, 그것이 이렇게 당대에 이르러 백찰무경을 무적의 기찰조직(譏察組 織)으로 성장시킨 것이었다. ■ 팔왕예조 제1권 제2장 죽음의 꽃.... 천엽사화(千葉死花) ━━━━━━━━━━━━━━━━━━━━━━━━━━━━━━━━━━━ ① 유빙이 완성된 노부인의 초상화를 화예란에게 내밀었다. 화예란은 완전히 넋을 잃고 예의 그림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이때, 고소를 머금으며 화선지를 정리하던 유빙의 눈에 문득 이채가 스쳐갔다. 마악 정리하려던 화선지 위, 그 위에 보고서 형식의 양피지 한 장 이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소주! 소주께서 추적하고 계신 창랑왕(蒼狼王)에 관한 단홍(丹 紅)의 연서(聯書)가 새로 당도했습니다. 이것은 본경(本警)의 전 위대(前衛隊), 자검박(紫劍泊)의 축무벽(築茂璧)이 보고해온 것으로써.... > 단홍연서, 이것은 백찰무경의 경준(警俊=백찰무경의 수사원)들이 전위대에서 작성하는 극비보고서를 일컫는 말이었다. 유빙은 예의 단홍연서를 읽어 내려가며 강렬한 신광을 뻗어냈다. <축무벽의 판단에 의하면 그가 쫓고 있던 남천검백 자청비라는 인 물이 당금 무림에 신비하게 부상되고 있는 신비신흥세력, 대천람 (大天嵐)에 속해 있는 한 명임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이에 축무벽은 그 자의 무공화후를 알아낸 결과 그는 아직까지 중 원에서 단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는 무공을 사용하고 있음을 밝 혀냈다 합니다.> "대천람.... ?"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장의 화선지 사이에 언제 끼워져 있었는지 모르게 끼워져 있 는 보고서는 결코 짧은 내용이 아니었다. <남천검백 자청비, 그는 최근 팔십일로수로연맹(八十一路水路聯盟)을 흡수해 적성단 (赤星團)이라는 막강한 단체를 구축했습니다. 이로인해 일약 흑도 (黑道) 서열 삼위이자 서북무림(西北武林)의 패주(覇主)로 화려하 게 부상한 인물로서, 그의 출신내력은 완벽한 신비에 싸여 있음. 본경의 요주의 인물 명단에도 올라있지 않은 그의 과거로 미루어 그의 과거는 아무의 기대도 받지 않는 평범한 것이었던 것으로 사 료됨. 그가 이렇게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 붉은 늑대의 사나이, 창랑왕과 연관이 있지 않았나 추정됨.> <남천검백 자청비가 만약 창랑왕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해도 대천 람이라는 신비신흥세력의 존재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그를 계속 추적해야 할 것으로 사료됨.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를 본경에서 잡 아들여 문초하는 것도....> 돌연,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유빙은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전율 이 일어남을 느꼈다. 미미한 전율, 가슴 설레이는 듯한 느낌이었 다. 그 가슴 설레임은 이내 물에 떨어진 먹물처럼 그의 가슴 속으 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지금 무엇인가가 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천람.... 창랑왕....' 허나 그것은 의식의 표면 바로 밑까지 와 있으면서도 얇은 장막에 차단되어 확연히 떠오르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때, 화예란은 상념에 잠겨 있는 유빙을 빤히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졌다. '흥! 이렇게 해서 기어코 왕부에 오지 않으려고 하지만 오히려 오지 않을 수 없게 될 걸!' 화예란, 과연 어떤 음모를 계획하고 있단 말인가....? 잠시 후 화예란은 떠난 듯 화청에는 유빙이 홀로 상념에 잠긴 채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할아범!" "예! 소주." 스스슷.... 그의 전면에 순간적으로 하나의 어둠이 녹아내리듯 한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흉측하기 이를데 없는 용모의 가죽옷을 걸친 인물, 바로 백찰무경 의 실질적인 관장자이며 천하인들에게 인간 공포의 끝이라 지칭되 고 있는 잔백인혼 단두백정 학거비였다. "할아범은 어찌 생각하는가?" 학거비의 모습을 담담한 눈으로 지켜보며 유빙이 돌연 질문을 던졌다. "단홍의 연서를 모두 읽으셨습니까?" "그렇다네." 문득 학거비의 눈에서 예리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되었다.... ?" "그렇습니다. 축무벽의 판단이 맞는다면 창랑왕은 대천람이라는 신비신흥세력을 길러냈음이 확실합니다." "....!" "그가 본경의 추적을 받기 시작한 것이 이미 십칠 년 전, 허나 그 는 어쩌면 그 이전부터 대륙을 장악할 준비를 해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어쩌면, 대천람은 그의 친위세력(親衛勢力)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대천람 중 한 명인 남천검백 자청비가 일약 서북무 림의 패자로 부상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최소한 대륙의 반은 이미 그의 손에 장악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 최소한 대륙의 반은 이미 창랑왕의 손에 장악되었을 것이다. "허나.... 창랑왕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도 백 찰무경의 몇몇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지....!" "그것은, 천하인들이 그의 존재를 깨닫고 방비를 하려 할 때에는 이미 창랑왕이 완전히 대륙을 장악한 후일 것이니.... " 학거비의 음성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했다. 강렬한 의지가 깃든 음성이었다. "결국 지금 창랑왕을 잡지 못하면 영원히 잡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소주. 창랑왕의 존재를 천하에 알려야 합니다." "할아범의 말은 곧 그와 정면대결을 하자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지금껏 미루어 왔지만 이제는 창랑왕과 정면대결이 불가피 합니다." 학거비의 태도는 단호했다. 강렬한 의지와 무서운 투혼이 그의 전 신에서 들끓고 있었다. 허나 유빙의 음성은 지극히 무감동했다. "그래야만 되겠지. 하지만 그 일은 어쩐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네." "소주! 무슨 말씀을....?" 학거비의 흉터덩어리 얼굴이 꿈틀했다. 유빙의 입가에 문득 한 가 닥 음울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창랑왕이 할아범과 나만큼이나 백찰무 경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네." "....?" "어쩌면 그는 이미 이 단홍연서의 내용마저 알고 있을지도 모르 네. 아니, 나에게 이 단홍연서가 도착한 순간 그 역시 같은 것을 받아들고 있을 것이네." "소주!" 학거비의 비정잔혹한 눈에서 강렬한 이채가 솟구쳤다. 도저히 영 문을 알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유빙의 검고 조용한 눈이 지그시 학거비를 응시했다. "할아범은 본경이 일천 년 동안 본가인 천종예가라는 은자의 가문 에 의해 운영되어온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리라 생각하는가?" "단연코 소주와 이 학거비 두 사람뿐일 것입니다." 학거비가 단언했다. 그것은 그만큼 그 사실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백찰무경의 역사는 일천 년, 그 백찰무경을 대대로 이끌어온 대총사의 가문이 있었다. 그 가문은 바로 천종예가로써 천하인들에게는 그 이름조차 알려지 지 않은 은자의 가문이었다. 세상과 문을 닫은 채 오직 백찰무경 을 이끌어 오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세상의 악을 심판해온 신 비의 가문인 것이다. 그 천종예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맹세코 단 한 사람도 없다. 심 지어 유빙의 그림자나 다름없는 학거비조차 천종예가의 실체에 대 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 유빙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할아범!" "....!" "거기에 한 사람을 더 추가시켜야 할 것이네. 바로 창랑왕이지." 학거비는 내심 신음했다. 실로 그의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유빙 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문득, 유빙의 눈이 차갑게 가라 앉았다. "할아범은 아버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있는가?" "전대 대총사께서는 지병으로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학거비가 의아해 하는 얼굴로 반문했다. 유빙이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지. 허나 아버님은 십 년 전 병으로 돌아 가신 게 아니라 바로 창랑왕에 의해서 살해되신 것이네. 그것도 바로 이곳 집무실에서....!" "그, 그럴 수가!" 학거비의 입에서 경악에 찬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맹세컨데, 학 거비가 평생을 통해서 이렇게 놀라본 적은 결코 없었다. '대총사의 죽음이 너무도 갑작스러워 의혹스럽기는 했었으나 설마 창랑왕이 대총사를....!' 학거비의 몸이 거센 충격으로 휘청일 때, 유빙의 시선은 허공을 가로질러 천천히 한 곳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하나의 거대한 초상화가 석실의 벽면에 걸려 있었다. 한 사나이의 모습이 그 초상화 안에 있었다. 회색의 하늘과 회색 의 바다를 배경으로 한 마리 붉은 늑대와 더불어 흐르는 빙산 위 에 우뚝 서 있는 한 사나이. 무릎을 덮은 치렁한 흑포장삼에, 비 정해 보이는 입가로 숙명처럼 고독한 미소가 걸려 있다. 아아, 그는 바로 십칠 년 전 한 마리 붉은 늑대와 더불어 죽음의 해협 흑빙만을 건너 대륙에 당도한 신비의 중년인, 바로 창랑왕이었다. 이 순간, 유빙의 눈은 폭발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 는 거센 복수의 불길이 그 눈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불길은 그 자신을 태우고 나아가 누군가, 아니 천하를 태워버 릴 듯한 무서운 분노의 불길이었다. 천하의 어느 누구라도 이렇게 무섭게 분노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대하지 못했으리라. "창랑왕은.... 아버님이 자신을 쫓는 것을 알고 아버님을 살해한 것이네. 곧 창랑왕은 그때부터 본경의 존재를 세밀히 알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네." 학거비가 경악의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창랑왕이 현재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본경을 그대로 방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유빙이 차갑게 웃었다. "그것은 본경이 바로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 이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무너뜨릴 수 있는.... " "....!" "또 한 가지, 그는 어쩌면 본경을 이용해 제벌(帝閥)의 정체를 파 악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르네." "제.... 벌!" 학거비의 눈에 한 가닥 기이한 광채가 스쳐갔다. 비록 아무도 알아 볼 수 없는 극히 짧은 순간의 일이었으나 자신 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깊은 회한(悔恨)의 빛이 그의 눈에 번뜩이는가 싶은 순간 스러진 것이다. 유빙은 서탁 위에 놓여져 있는 단홍연서를 천천히 응시했다. "허나 이제 그 신비신흥세력인 대천람이 과연 창랑왕과 연관이 있 고, 우리가 그들을 깊숙이 건드리려 한다면 창랑왕은 더 이상 방 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네. 아마.... 나를 제거하려 하겠지." "으음...." 학거비가 침음했다. 유빙의 말대로 창랑왕이 백찰무경의 모든 일을 그토록 세밀히 알 고 있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명확하지 않은가. 그 순간 비정과 잔혹으로 뭉쳐진 학거비의 전신에서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주. 그러나 그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 "이 학거비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천하의 그 누구라 해도 소주의 솜털 하나 다치지 못할 것입니다. 설혹 상대가 창랑왕이라 할지라도....!" "....! "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학거비의 말을 절대로 단순한 장담 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천하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 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학거비 단 한 사람 뿐일 것이라는 사 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 그의 뇌리로 문득 그의 부친이 죽기 전에 들려준 말이 스쳐가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는 단연코 창랑왕일 것이 다. 그는 고금제일의 초극강고수(超克强高手)인 것이다. 허나 또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학거비를 내세울 것이다. 이 아비가 학거비를 만난 것은 이십일 년 전, 당시 그는 전신에 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런 학거비를 이 아비가 구해줌으로써 그는 백찰무경에서 제이 (第二)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허나 그의 과거만은 이 아비로서도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아비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었으나 한사코 자 신의 과거에 대해서만은 굳게 입을 닫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아비는 단언할 수 있다. 천하에서 창랑왕과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학거비 뿐임을.... 그리고 추측하건대 그의 과거는 필시 대단할 것이다.> 두 사람...., 유빙, 그리고 학거비.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이 순간 깊고 뜨거운 정의 해일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주종간 (主從間)이 지니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진정한 정(情), 그런 정이 물결치고 있는 눈빛이었다. 부친이 죽자 유빙은 학거비의 등에 업혀 성장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두 사람간의 정은 혈육의 정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여 이제는 모든 것을 초월한 진정한 지기(知己)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의 관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주는 나의 생명, 이 학거비가 이날까지 모질게 삶을 연명해 온 것은 오직 소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거비의 눈에는 새삼 격정이 뛰놀고 있었다. '소주가 없는 학거비의 삶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 유빙이 어찌 그런 학거비의 마음을 모르랴! 학거비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소주! 어찌할 것인지를 결정하십시요." 유빙은 실로 오랜 침묵 끝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범의 뜻대로 하겠네. 창랑왕의 존재를 천하에 알리고 전쟁(戰爭)을 시작하겠네." ....전쟁(戰爭). "잘 생각하셨습니다." 학거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과감하게 부딪치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학거비는 유빙의 결정에 다소 들뜬 표정으로 이윽고 가볍게 포권해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무한한 애정과 격려가 담긴 눈빛, 그는 잠시 유빙의 얼굴을 응시 하다가 몸을 돌려 석실을 빠져 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유빙의 눈은 언제부터인가 다시 전면에 걸려 있는 거대한 창랑왕 의 초상화에 머물러 있었다. "창랑왕, 나 역시 아버님에 이어 그대의 손에 제거될 운명에 처하 게 되었군. 허나 그대는 기억해야 할 것이네. 이것이 바로 내가 기다리던 순간임을....!" - 창랑왕, 나 역시 아버님에 이어 그대의 손에 제거될 것이다. 허 나 그것은 바로 내가 기다려 왔던 일이다! 아아, 유빙의 무서운 결의가 담긴 음성만이 거대한 석실을 맴도는데.... ② 천문왕부(天文王府). 영락제의 스승이자 황실에 막강한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 황사(皇 師), 만품대부 화우백의 사저(私邸). 소주 막간산(莫看山)을 뒤로 두고 수백 채의 고루거각이 웅장하게 솟아 있으니 이곳이 바로 당대에 이르러 왕호(王號)까지 하사받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명문(名門) 천문왕부였다. 땅거미가 짙어지는 사월 초이틀 날의 석양 무렵. 한 대의 마차가 조용히 천문왕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준미하기 이를데 없는 흑의미소년이 담담한 눈길로 앉아 있었다. 유빙, 바로 그였다. 유빙은 담담한 눈길로 마차 창문을 통해 천문왕부의 내부를 감상 하고 있었다. 허나 그의 표정에는 이 순간 무엇인가 곤혹스러운 일을 맞닥뜨렸다는 듯 씁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공녀가 이렇게 노대부인(老大婦人)을 내세워 초청해 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초청....?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정중한 초청임에 틀림없었다. 허나 이것 이 화예란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는 강제소환이나 다름없음을 유빙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어찌하랴! 당대 최고의 권세 를 누리고 있는 천문왕부의 노대부인의 초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화원(花園). 천문왕부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화원은 실로 고요했다. 갖가지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한껏 어우러져 만발해 있는 화원은 왕부의 다른 장소와 달리 오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아 왕부내에 또 다른 별세계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휘별축(素輝別築). 바로 천문왕부의 최고 어른이랄 수 있는 노대부인의 거처이다. 노대부인은 만품대부 화우백의 모친으로써 그 성품이 괴팍하기로 유명했다. 젊었을 때는 무림십대고수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힐 정도 의 여걸(女傑)이었다던가? 허나 이미 십 년 전부터 만품대부 화우백의 문후인사조차 귀찮다 고 거절하며 오직 소휘별축에만 박혀 있는 성미 괴팍한 일개 노파 에 불과했다. 유빙은 한 명 궁장중년미부의 안내를 받으며 화원 사이로 난 청석 대로(靑石大路)를 걷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 채의 별 전(別殿)이 주위의 거각들과 뚝 떨어진 형태로 우뚝 솟아 있었다. '왕부의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실로 조용하구나. 어쩐지 신비한 느낌이 들 정도로.... ' 유빙이 좌우를 조용히 쓸어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아무튼 번잡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러는 사이 유빙은 어느새 청와(靑瓦)에 길게 이어진 홍장(紅牆) 을 끼고 있는 월동문(月東門) 앞에 당도했다. 월동문을 지나자 화 원에서 보이던 별전이 바로 눈 앞에 드러나는데 그 풍광(風光)이 실로 수려했다. '음, 선경(仙境)을 방불하는 곳이로구나!' 유빙의 내심으로 감탄성이 흘렀다. 언뜻 보이는 천보채교(千步彩橋), 그 밑으로 흐르고 있는 맑은 청 류(淸流), 여기에 일체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온갖 조류(鳥類)들과 기수(奇獸)들이 그 사이에서 뛰놀고 있어 진 정 도원경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방(房). 방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차탁(茶卓) 하 나가 전부였다. 그외의 장식물이라면 오직 그 대나무 침상 위쪽의 벽면에 걸려 있는 한 폭의 초상화였는데...., 예의 초상화는 바로 얼마 전 유빙이 화예란의 말만 듣고 그린 노 대부인의 초상화가 아닌가. 초상화 밑에는 초상화와 판에 박은 듯 같은 풍도를 지니고 있는 한 명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마른 체구에 허연 백발, 머리칼은 단정히 빗어넘겨 위로 쪽을 짓고는 있으나 숱이 눈에 띄게 많이 빠져 있어 머리에 착 달라 붙어 있고, 피부는 피폐하기 이를데 없 어 고목나무의 껍질을 연상케 한다. 허나 유빙이 들어서자 예의 현의노파(玄衣老婆)는 찌르는 듯한 안 광(眼光)으로 유빙의 전신을 쓸어보고 있었다. '음, 저 나이에 저런 무서운 안광을 지니고 있다니!' 유빙이 흠칫했다. 현의노파의 눈빛은 그야말로 바늘로 찌르는 듯 날카로왔던 것이다. 허나 그는 이내 의연한 자세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유빙이 노대부인을 뵙습니다." 현의노파의 찌르는 듯한 안광이 순식간에 걷히며 부드러운 기가 감돌았다. "오, 유공자이신가. 기다리고 있었다네." 유빙이 노대부인의 손짓에 따라 대나무 탁자 아래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소공자는 혹시 천종예가의 후인이 아닌가?" 헌데 유빙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노대부인이 질문을 던져 오지 않는가? 유빙의 전신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노대부인의 입에서 그러한 질 문이 흘러나오리라고는 미처 예상도 못했던 것이다. 허나 그는 서슴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노대부인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스치며 그녀는 감회가 깃든 눈으 로 새삼 유빙을 응시했다. "은자의 가문, 천예(千藝)의 가문인 천종예가의 후인을 직접 대할 줄은 예상 밖이었네." "....!" "란아가 들고 온 내 초상화를 보고 혹시 천종예가의 후인이 아닐까 생각했었네만.... " 노대부인이 문득 유빙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이것 좀 봐 주지 않겠나?" 노대부인의 손에는 한 개의 영롱한 꽃송이가 들려 있었다. 너무도 정교해 생화(生花)처럼 느껴지는 옥(玉)으로 만들어진 듯한 꽃송이였다.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천엽사화(千葉死花)라 불리우는 것이네." "천엽사화? 죽음의 꽃....?" "그 천엽사화는 원래 천종예가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이 있네." 노대부인이 날카로운 안광으로 유빙을 일별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천엽사화는 원래 두 개로 분리되어 있다고 했 네. 원래의 이름은 천엽자모화(千葉子母花)로써 한 개의 꽃이었고 두 개가 하나로 합쳐지면 놀라운 비밀이 풀린다고 했네. 그 중 자 네가 들고 있는 것은 바로 천엽자모화 중 천엽모화(千葉母花)이네." "천엽모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천엽용봉금화(千葉龍鳳金花)라고도 불리운다고.... " "그렇다네. 그 꽃은 기실 칠백 년 전, 오국(吳國)의 천하제일미, 화국공주(花菊公主)의 혼인식을 축하하기 위해 천종예가에서 진상한 것이었네." 유빙이 흥미를 나타내자 노대부인의 음성이 빨라졌다. "화국공주에게는 천엽모화를, 그리고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될 사 람에게는 천엽자화를 선물해 혼인식 날 서로 맞춰 하나의 꽃으로 완성시키며 혼인식을 더욱 빛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했네." "헌데 어째서 이렇게 따로따로 두 개 꽃이 되어 있습니까?" "천엽자모화는 하나로 합쳐지지 못했네." 노대부인이 문득 탄식을 터뜨린 후 말을 이었다. "혼인식이 있기 바로 전 날, 부마도위가 의문의 변사체(變死體)로 발견된 것이네. 그가 지니고 있던 천엽자모화 중 하나는 그때 사 라져 버렸다더군." "아....!" "그 후 화국공주는 시름시름 앓다가 역시 죽고 말았네. 그 후로부 터 이 천엽자모화를 일컬어 죽음의 꽃, 천엽사화라 부르게 된 것이네." "그랬군요." "원래 천엽자모화는 따로 따로 비밀을 지니고 있고 하나로 합쳐지 면 더욱 놀라운 비밀이 풀어진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네. 허나 우 리는 그 천엽모화 하나의 비밀도 아직 풀지 못했네." 문득, 노대부인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해서 힘이 든 듯 입을 다물었다. 유빙은 노대부인이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노대부인은 마치 유빙이 앞에 있다는 것을 잊은 듯 실로 오 랜 시간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노대부인이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아 유빙이 몸을 일으키 려는 순간 돌연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자네가 갖게. 그것은 천엽자모화 중 천엽모화일세." "하, 하지만...." "내 초상화를 그려준 보답이니 여러말 말게!" 유빙의 얼굴에 곤혹스러워 하는 빛이 스쳤다. 허나 그는 굳이 사 양할 필요는 없다고 느껴 입을 열지 않았다. "듣기에 천종예가의 후인들은 모든 방면에 신(神)의 능력을 지니 고 있으나 단 한 가지 무공만은 익힐 수 없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 헌데 이 순간, 노대부인의 감겨 있던 눈이 돌연 뜨여지며 또 다시 찌르는 듯한 안광이 유빙의 뒤통수마저 꿰뚫을 듯 쏘아져 들어왔다. 유빙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찰나, 노대부인의 입에서 더욱 놀라운 질문이 흘러나왔다. "또, 그 천종예가가 바로 백찰무경을 대대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유빙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긴장으로 전신을 굳힌 채 노대부인을 마주 직시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천하최대의 비밀이라 자부해 오고 있는 천종 예가의 일을 노대부인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음....! 사실입니다." 유빙은 노대부인의 표정에서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음을 느끼며 탄식처럼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노대부인이 다시 흐릿한 눈으로 눈을 내리 감았다. 동시 에 그녀는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을 찾아주게. 내 기실 그것을 부탁하기 위해 소공자를 초청한 것이었네." "....!" "왕부의 힘으로도 찾을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내 개인적인 일인데 다 백찰무경이라면 능히 그를 찾을 수 있기에 부탁하는 것일세." 유빙은 이채를 떠올리며 다시 노대부인을 응시했다. 허나 노대부인의 감겨진 눈은 다시 뜨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유빙이 무어라 입을 열기 전 말을 잇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의 이름이나 출신내력, 심지어 용모조차 모르네. 단지 십 칠 년 전, 한 마리 붉은 늑대와 더불어 대륙에 왔다는 사실밖에는.... " '창랑왕!' 유빙의 눈에 경악이 물결쳤다. 천문왕부의 노대부인이 말하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유빙이 찾고 있는 창랑왕이 아닌가! "그만 가 보게!" 유빙이 경악에 잠겨 있는 순간 돌연 노대부인이 짜증스러운 말투 로 손을 흔들었다.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실로 괴팍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유빙은 어이가 없었다. 그 자신은 아직 무어라 대답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란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그 아이의 방에 들러보게." 노대부인은 그 말을 끝으로 침상 위로 길게 몸을 눕혔다. 이렇게 되면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유빙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노대부인의 거처를 물러나왔다. 유빙은 천문왕부의 여러 전각을 지나 화예란의 거처로 다가가며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내가 백찰무경의 대총사라는 사실을 노대부인이 알고 있었다니....!' 그는 무엇인가 불가사의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노대부인이 그가 그린 초상화 때문에 자신을 초청했다는 것과, 천 종예가의 명품(名品)이라는 천엽사화를 내보이며 그 자신이 천종 예가의 후인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물어온 점, 여기에 또 천종예 가가 바로 백찰무경의 대총사 가문이라는 점을 들어 창랑왕을 찾 아 달라고 한 일까지..... 유빙은 노대부인을 만나 지금까지 주고 받은 모든 대화가 기실 그 어느것 하나 우발적인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노대부인은 이미 유빙이 백찰무경의 대총사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초청한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음....! 노대부인은 과연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이 그는 어느새 화예란의 거처 에 당도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화예란의 거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깐 어디를 간 것일까? 그냥 가기도 뭐하고 잠시만 기다려 보자!' 유빙은 내실로 이르는 대청에 우두커니 서 있기도 어색해 대청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돌려졌다. 노대부인에게 강제로 선사받은 천엽사화, 은은한 미백(美白)의 광 휘를 발하고 있는 영롱한 한 송이 꽃을 대하는 유빙의 눈에 호기 심이 번뜩였다. 꽃잎의 수효는 무려 오백여 개. 한 개, 한 개의 꽃잎이 실로 정교 해 영락없이 생화(生花)같기만 했는데 이 한 송이 꽃은 물(水)의 정(精)이 꽃피운 수국(水菊)의 청초하면서도 어딘가 농염함을 지 니고 있고, 또 백모란의 우아한 격조(格調)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여기에 단장화(丹粧花)와 같은 처절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유빙은 마치 불을 머금은 듯 영롱함을 드러내고 있는 아름답고 요 염하며, 그리고 또 청초한 가운데 처절함을 모두 지니고 있는 천 엽사화를 잠시 예리한 눈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음....! 이 천엽사화는 본가의 선조이신 예황(藝皇) 유귀광(劉貴 光) 선조님이 만든 것이라 했는데 그 분은 어째서 이토록 가공스러 운 기병(奇兵)을 탄생시켰단 말인가?" 유빙은 묘한 감회를 느낀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헌데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는 그의 독백에 의하면 그가 이미 천엽 사화의 비밀을 풀었다는 게 아닌가? 바로 이때였다. (소주!) 어디선가 돌연 극히 저미한 전음성이 대청에 서 있는 유빙의 귀로 파고 들었다. '할아범이....?' 유빙이 이채를 머금으며 천엽사화를 갈무리 한 후 전음성이 들려 온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소주, 긴히 보고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그 말괄량이를 만날 일도 아찔했는데.' 유빙이 천천히 천문왕부를 빠져나갔다. 스슷....! 유빙이 마악 천문왕부를 빠져나오는 순간, 그가 타고 있는 마차 안으로 한 그림자가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잔백인혼 단두백정 학거비, 바로 그였다. "할아범! 모두 들었는가?" "예! 천문왕부의 노대부인은 실로 신비한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천문왕부내에서 저는 수상한 그림자를 여럿 보았습니다." "...!" "천문왕부는 대문벌(大門閥)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 내부에는 이 학거비조차 조심해야 할 기라성같은 고수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음....! 대문벌로 알려진 천문왕부에 수상한 그림자라?"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학거비가 미미한 긴장을 담은 채 유빙을 직시했다. "소주, 무림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 "제벌, 제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유빙의 눈에 일순 차가운 섬광이 스쳤다. 학거비의 묵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천람의 실체(實體)를 밝혀냈습니다." 학거비가 더욱 긴장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대천람?" "예! 그들은 십오 년 전 결성된 비밀결사(秘密結社)로써, 십팔 인 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 대천람. - 십팔 인으로 이루어진 비밀결사.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그들의 모체(母體)는 중원최대의 고아원 (孤兒院)인 오화팔문(五花八門)이었습니다." "오화팔문?" "예! 그곳에서 자란 열여덟 명의 기재(奇才)들이 십오 년 전 죽림 (竹林)에서 우정을 맹세하며 비밀결사 대천람을 결성하고, 항차 자신들만이 대륙을 지배할 것이라 장담했답니다." "호.... 헌데?" "그 대천람과 창랑왕이 과연 연관이 있는 것 같나?" "확실한 증거는 못찾았지만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음.... " 유빙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에도 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것은 그동안 뒤쫓던 창랑왕 에 대한 실마리를 이제야 찾아낸 기쁨보다는 본능이 어떤 위험을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위기감, 바로 미지의 위험에 너무 접근해 간 듯한 예감이었다. "할아범!" "예!" 유빙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는 이미, 제벌의 중원백탁대평의회(中原白卓大評議會)의 소집을 요구했네." - 제벌. 학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벌의 움직임은 바로 소주의 평의회 소집요구 때문이었단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네. 바로 사월 초파일이네." "음....! 창랑왕의 존재를 제벌에 알리시겠다는 의도시로군요." "그렇네. 바로 천하에 알리려는 것이네." 학거비의 얼굴에 일순 격정이 떠올랐다. "잘하셨습니다. 헌데 이번에도 역시 혼자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네. 율법이니까.... " "이번만큼은 제가 동행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 본경이 이제 대 천람과 붉은늑대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이상 아무래도 소주의 신변이.... " 학거비의 눈에 일순 간절한 빛이 일렁였다. "더우기 창랑왕이 과연 소주의 신분을 알고 있고 또 제벌의 중원 백탁대평의회의 소집을 요구했다는 것을 안다면 소주의 신변이 더 욱 위험합니다."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학거비를 부드럽게 응시하는 그의 눈 깊은 곳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할아범! 나도 이번만큼은 할아범과 동행하고 싶네. 더우기 천문 왕부의 노대부인같은 사람마저 나의 신분을 알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허나, 그러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더욱 혼자 가야 한다네!' 문득, 내심 나직이 중얼거리던 유빙이 품 속에서 하나의 금낭을 꺼내 들었다. "할아범과 동행할 수는 없네. 제벌의 율법이니까! 그리고 이 금낭 은 내가 떠난 후 열어보도록 하게." 학거비는 못내 안타까운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유빙의 얼굴에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음을 보고 더 이상 무어라 입을 열지 못한 채 금낭을 받아 들었다. 이때 유빙은 팔짱을 끼며 천천히 눈을 내리 감았다. 눈을 감으며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할아범! 이미 승부가 시작되었다네!' - 이미 승부가 시작되었다. 아아! 무슨 뜻이란 말인가? 짐짓 태연을 가장하고 있으나 이 순간 유빙의 전신은 다가올 어떤 일을 떠올린 듯 팽팽히 긴장되고 있었으니.... ■ 팔왕예조 제1권 제3장 제벌(帝閥) ━━━━━━━━━━━━━━━━━━━━━━━━━━━━━━━━━━━ ① 제.... 벌(帝閥). 제벌의 탄생은 오래 전에 있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바로 천하 그 자체가 되었다. 이미 천하는 하나로 일통(一統)되었던 것이다. 제벌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지닌 채.... 하나의 거대한 대형 초상화가 수백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드 넓은 대리석의 광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광할한 바다를 등에 지 고, 새하얀 학청포(鶴靑袍)를 휘날리며 뒷짐을 진 채 우뚝 서 있 는 한 노인의 모습을 담은 거대한 초상화,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한폭의 신 인화(神人畵)였다. 천하에서 가장 근엄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고, 그리고 또 한 더할나위 없이 중후해 보이는 인물화, 그는 천하에서 가장 위 대한 인간신화(人間神話)의 주인공이었다. 제벌의 대벌주(大閥主). 인간이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신보다도 더욱 전지전능한 존재로 굳게 믿고 있는 팔황십방(八荒十方)의 관장자. 더 이상 위대할 수 없는, 제벌이라는 거대한 이름의 우산(雨傘)으 로 천하를 뒤덮고 있는 무림사 최강의 조직을 이끌고 있는 인물. 초상화의 인물은 바로 그 초무림단체(超武林團體), 제벌의 대벌주였다. 드넓은 대리석의 광장은 언뜻 삭막한 황야를 연상케 했다. 허나 대벌주의 초상화에서 뿜어지는 위엄 때문인지 지금 대리석 광장은 마치 신들의 신전(神殿)처럼 엄숙하고 장중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그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문득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극 히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백탁대평의회(白卓大評議會)가 다시 개최된 것도 어언 이 년만이 구료. 이렇게 여러분의 강녕한 모습을 뵙게 되니 참으로 기쁘기 한량 없소이다." 극히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한 위엄이 서린 음성, 그 음성은 대리석 광장의 한가운데에서 발해진 것이었다. 대리석 광장의 정중앙, 거대한 사각의 백탁(白卓)이 놓여 있고, 그 주위로 사 인(四人)이 앉아 있었다. 각기 비범한 풍도를 지니고 있는 사 인의 주위로는 그 무엇으로도 견제할 수 없는 극패(極覇)한 기운이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는데..... 우측 제일좌(第一座),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허름한 잿빛 장삼에, 어디서나 흔히 대할 수 있는 평범한 용모이 다. 허나 극히 평범해 보인다는 것이 오히려 가장 특징적으로 눈 길을 끌고 있다. <육합단종(六合斷宗) 적리노단.> 검을 잡기를 두려워하는 절대자(絶對者)로 알려진 바로 중원최강 의 단체 위정부를 이끄는 위정부의 최고통수권자 적리노단이 아닌가! 우측 제이좌(第二座), 화사한 백의(白衣)차림의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붉디붉은 입술에 갸름한 얼굴의 선, 핏줄이 그대로 내비칠 듯한 투명하고도 깨끗한 피부에 실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무색케 하는 극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백의인이었다. 특히 하얀 빙벽(氷壁)에 활활 이글거리는 두 개의 횃불을 박아 넣 은 듯 소름끼치도록 강렬한 광채를 발하는 눈이 대하는 이의 뇌리 에 충격을 던진다. 아아! 그는 또 누구인가! <잠린왕자(潛燐王子) 주문빈.> 황권(皇權)마저도 능가하는 엄청난 권위를 지닌 법밀사(法密社)의 총율사(總律師)이며, 영락제의 아무도 모르는 친조카이면서도 영 락제에게마저 두려움을 주고 있는 살인자와 광인의 피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바로 그 주문빈이 아닌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주문빈과 적리노단은 가히 천하의 실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닌 절대자들이 아닌가. 헌데 그런 두 인물이 나란히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공스러운데 그 두 명과 대등 하게 자리할 수 있는 인물이 두 명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좌측 제일좌(第一座), 한 비대한 중년인이 쉴새없이 땀을 훔치며 앉아 있었다. 워낙 얼굴에 살이 많이 쪄서 눈, 코, 등 오관(五觀)이 오밀조밀하 게 한데 붙어 언제나 울상을 짓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그 너무도 비대하고 둔한 몸때문에 의자에 앉아 있으면 서도 연신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며, 열 손가락 모두에 가 지각색의 보석반지를 낀 희고 통통하게 살찐 손으로 수건을 든 채 마치 계집애가 얼굴에 분을 바르듯이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실로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하기까지 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모습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가지각색의 보석반지로 치장된 희고 통통하게 살찐 손의 약지(藥指)부분이었 다. 그 약지의 손톱에 마치 소녀들이 봉숭아 물을 들인 듯한 새빨 간 색칠이 칠해져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것이 비대한 중년인의 희고 통통한 손에 칠해져 있는 것이 기이하게도 조금도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 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스럽기조차한 기이한 전율을 불러 일으 키고 있었는데..... 좌측 제이좌(第二座), 비대한 중년인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분명 누군가를 위해 마련 된 좌석이나 그 주인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했다. 그들과 마주 보는 위치에 깨끗한 백삼(白衫)을 걸친 선비풍의 한 노문사(老文士)가 앉아 있었다. 단정히 빗어넘긴 은발(銀髮)에 잘 다듬어져 있는 은염(銀髥), 맑 고 청신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깨끗한 피부와 온화한 미소 등이 실로 고귀하고도 우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의 가슴에는 한 마 리 적연(赤燕=붉은 제비) 문양이 특징적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백삼노인은 좌중을 부드럽게 쓸어보며 말을 이었다. "나 예운림은 때때로 본벌(本閥)이 하나의 인체와 같은 구조로 이 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소이다. 특히 이렇게 본벌의 중원(中原) 다섯 핵심세력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는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어 기분이 흡족해 지지요." "....!" "중원 최강의 세력을 지닌 위정부라는 몸체에, 법밀사라는 권위의 두 다리가 받치고 있고, 여기에 백찰무경이라는 최고의 정보망과 수사력을 지닌 눈과 귀를 지니고 있으며.... " 백삼노인, 예운림(藝雲林)의 음성은 마치 동조를 구하듯 부드러웠 다. 마치 동지의식을 느끼고 있는 듯 다정한 음성이었다. "또 나 예운림의 백금전가(百金錢家)라는 훌륭한 두뇌를 지닌데다 최강의 행동력을 지닌 십만종단천인막(十萬宗團千 幕)이라는 두 팔이 있으니 결국 중원의 제벌은 완벽한 다섯 개의 기관으로 이루 어진 인체(人體)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예운림이 말을 마치며 흡족한 미소와 함께 다시 좌중을 훑어보았다. 헌데 그의 입에서 담담히 흘러나온 내용, 그것은 실로 가공스러운 내용이 아닌가! - 막강한 몸체로 비유할 수 있는 위정부(位政府), - 황권을 능가하는 권위의 두 다리라 할 수 있는 법밀사(法密社), - 천하의 어떤 것도 놓치지 않는 눈과 귀 백찰무경(白察武警), - 두뇌(頭腦) 백금전가(百金錢家), - 가공할 행동력을 지닌 두 팔, 십만종단천인막(十萬宗團千 幕). 결국 백삼노인, 예운림의 말은 이 다섯 세력 위에 제벌(帝閥)이 존재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그 제벌의 휘하에 더욱 많은 초강단체 들이 존재함을 시사하고 있지 않은가. 아아, 이 얼마나 경악할 사실이란 말인가. "본인은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일 때마다 늘 뿌듯한 감회를 느끼곤 하오이다." "....!" "......" "여러분들과 같은 절대자들과 함께 제벌이라는 위대한 조직의 일 부가 된다는 것은 진정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문득, 말을 잇던 예운림의 시선이 백탁의 정중앙에 놓여 있은 사 루(沙漏=모래시계)로 옮겨졌다가 비대한 중년인의 옆, 비어 있는 좌석으로 돌려지며 이채를 발했다. "이제 중원을 담당하고 있는 본 중원백탁대평의회가 개최될 시각 이 되었구료. 헌데 본 백탁대평의회의 개최를 요구한 유빙 대총사 가 아직 도착치 않다니 이상한 일이 아니오?" 예운림이 의혹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리노단과 주문 빈, 그리고 비대한 중년인 역시 이채를 떠올렸다. 백찰무경의 대총사 유빙이 앉아 있어야 할 빈 좌석을 무심한 듯한 시선으로 쓸어보는 그들의 눈에 일시 기이한 광채가 교차되었다. "유빙대총사는 오늘 붉은 늑대의 사나이, 창랑왕(蒼狼王)이라는 신비인물에 대한 조사 결과와 근간 신비신흥세력으로 부상하고 있 는 대천람에 대해 무엇인가를 밝힐 것이 있다 했습니다." '창랑왕!' "대천람이라....?" 예운림이 조용히 말을 잇는 순간 적리노단과 주문빈 등의 눈에서 기광이 스쳐갔다. 예운림이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허나 준례(準例)대로 세 시각을 더 기다려 봅시다." "....!" "......" 삼 인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눈은 기이한 이채를 담은 채 교차되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뇌리에 위대한 제벌의 율법(律法) 그 제일항(第一 項)이 불현듯 스쳐갔기 때문이다. <중원의 모든 일은 중원백탁대평의회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진 다. 백탁대평의회는 위정부 등 각 단체의 오 인(五人)의 장(長) 모두가 모였을 때만 인정된다. 만약 백탁대평의회가 개최되는 시각에서 세 시각이 넘도록 오 인 의 장(長) 중 누군가가 불참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 장(長)과 세력 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간주, 그 세력 전체를 폐쇄함으 로써 제벌의 기밀을 유지시킨다.> 백탁대평의회는 지상무림의 관장자 제벌의 예하 의결기관이다. 그 야말로 중원의 최고의결기관(最高議決機關)인 것이다. 이런 백탁대평의회에 아무런 통보조차 없이 늦거나 불참한다는 것 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지금 백탁대평의회가 개 최되고 있는 시각에 백찰무경의 대총사 유빙이 아직 도착하지 않 고 있음은 그의 신상에 어떤 중대한 변화가 일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음, 백찰무경에 무슨 일이 발생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 야 이렇게 늦을 리가 없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백찰무경의 대총사 유빙이 이곳에 오지 못 하게 한 사건은 도대체 어떤 일이란 말인가?' 네 사람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백찰무경의 대총사 유빙의 신 상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중원의 다섯 개 세력 중에서 가장 견고하고 가장 많은 신비를 안 고 있는 세력은 백찰무경이다. 현 천하에서 그 백찰무경의 대총사 유빙의 일을 방해할 수 있는 세력은 단연코 존재하지 않는다. 헌데....?' '유빙 대총사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세력이 있다면 천하를 통 털어 몇 되지 않는다. 이곳에 모여 있는 우리 네 명 중 한 명이 아니라면 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모여 있 는 누군가가 그를....?' 사 인(四人)의 눈이 일시 미묘한 빛을 담은 채 교차되었다. 동시 에 그들 각자는 내심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으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로군. 유빙은 비록 어리 고 가문의 전통에 의해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백면서생에 불과하나 그는 항차 대벌주의 뒤를 이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미완(未完)의 대기(大器)이다.' '그런 유빙을 제거한다는 것은 항차의 대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니....' '헌데, 이들 중 누가 과연 그를.... ?' 절대자들은 비슷한 생각을 한다던가? 네 사람의 눈빛이 한 순간 묘하게 허공에서 얽히며 그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떠돌기 시작했다. 실로 어색한 침묵이 흐르면서 대리석 광장을 메우기 시작한 긴장 은 점차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잠시 후 예운림이 그 어색한 침묵을 깨며 입을 떼었다. "앞으로 두 시각을 더 기다려야 될 것이니 우선 마련된 음식이나 들면서 천천히 기다리도록 합시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좌측 제일좌의 비대한 중년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것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의 입가에는 이 자리에 참석한 이래 처음으로 흡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허허허....! 당막주(唐幕主)께서는 여전히 식욕이 좋으신 모양이군요." 예운림이 미소하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짝짝! 손뼉소리가 울려퍼지기 무섭게 드넓은 대리석 광장 한쪽으로 부터 수많은 은반(銀盤)을 든 소녀들이 소리없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절륜한 미색(美色)에 붉은 홍의를 걸친 소녀들이었는데 그들은 일체의 기척이나 표정변화없이 수많은 음식들을 석탁 위에 내려놓은 후 소리없이 물러났다. "이 음식들은 본인이 최고의 성의를 다해 마련한 것들이니 아무쪼 록 모두들 즐겁게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운림이 우아한 동작으로 몸소 몸을 일으켜 각자의 접시에 음식 들을 덜어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작품을 감상해줄 인물들을 대하는 듯 자상하기 이를데 없었는데.... 적리노단과 주문빈, 그 두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서 그들에게 음식 을 권하며 회의를 주도해 가고 있는 듯한 이 인물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금상왕(金商王), 사선유사(邪仙儒士) 예운림(藝雲林).> 붉은 상인들의 단체라 불리우며, 심지어 수저 한 벌의 거래라도 완벽히 장악하고 있다는 천하 최고의 상권(商權)을 구가하고 있는 백금전가(百金錢家)의 당대가주. 백금전가는 일반적인 상가와는 아예 그 차원을 달리한다. 바로 천 하를 경영(經營)하는 엄청난 대상(大商)의 단체인 것이다. 예운림은 바로 이 백금전가의 가주로서 천하최고의 모사(謀士)인 동시에 또 천하제일의 요리사로 자처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요리한 음식을 남과 함께 즐기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낙으로 삼고 있으며, 천하 최고의 음모(陰謀)나 지략(智 略)은 바로 주방에서 나온다는 지론(持論)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가장 우아하고 고상한 음식을 직접 요리하는 그의 손에서 실로 엄 청난 피(血)의 계획이 수립되곤 하는 것이다. "아! 이 음식은 정말 훌륭하군요. 내 평생 이렇게 훌륭한 음식은 진정 처음입니다." 좌측 제일좌의 비대한 중년인이 음식이 놓여지기 무섭게 그야말로 정신없이 먹어대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예운림의 입가에 자신의 작품을 감탄해주고 있음에 감사하다는 듯한 미소가 솟아났다. "그것은 옌워( 蛙)라는 것입니다." 그는 비대한 중년인이 마악 저( )로 집어들고 있는 음식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옌워?" "예! 해안(海岸)의 바위에 붙어 서식하는 금사연(金砂 )의 보금 자리를 보름간 소금에 절여 잘 말렸다가 씻어낸 후 만드는 요리이지요." "호....!" 비대한 중년인은 마치 예운림의 말을 잘 기억해 두려는 듯 눈을 들었다가 이번에는 그 옆의 음식을 끌어 당겼다. "아, 이것은 피탄(皮炭)이로군요. 집오리 알이 이런 맛을 내는 것은 처음인데요." "마음에 드신다니 감사합니다. 집오리알을 삼 일간 화향(花香)에 절이는 것이 중요하지요." "좋아요. 좋아, 대단히 훌륭한 음식들입니다." "허허허, 천하제일의 미식가이신 당막주의 찬사를 들으니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군요." 비대한 중년인은 다시 쉴새없이 음식들을 섭렵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주문빈이 이직도 음식에 전혀 손대지 않고 있 는 것을 발견한 듯 의아한 얼굴을 들었다. "주 총율사(總律師)께서는 식욕이 없으십니까? 이 훌륭한 음식들 을 구경만 하시고 계시다니....?" 순간, 주문빈이 얼굴에 노골적인 경멸의 빛을 떠올리며 차갑게 내뱉았다. "나는 사람하고만 식사를 하오. 하마와 식사를 해본 적은 없소." - 나는 하마와는 같이 식사를 하지 않는다. 일순, 비대한 중년인의 얼굴이 사이하게 굳었다. 허나 그것은 그 야말로 극히 찰나지간의 일, 그는 잠시 멈추었던 손을 다시 음식 으로 옮겨가며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하는 하마에겐 한 가지 좋은 장점이 있소. 그것은 그 하마가 식사시간에만은 결코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당신 에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 주문빈의 얼굴이 굳어졌다. 허나, 비대한 중년인은 주문빈의 표정은 거들떠 보지 않은 채 다 시 쉴새없이 음식을 먹어대고 있었다. 아아! 실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 당금 무림에서 과연 누가 있어 법밀사의 총율사인 주문빈에게 이 토록 무례한 언사를 이토록 태연스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당결(唐潔).> 제벌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탄생되어진 가장 비정한 살인기관(殺人機關)이 있다. 바로 제벌 대벌주의 친위세력이며, 대벌주의 권위를 나타냄과 동 시에 실질적으로 제벌의 힘(力)을 대행하는 피의 단체. - 십만종단천인막(十萬宗團千 幕) 일명, 지옥의 천사들, 혹은 죽음의 전도사(傳道師)라고도 불리우 는 비정한 살인기계(殺人器械)들의 집단. 그들은 오직 살인, 그 하나만을 위해 탄생되었다. 일단 이 십만종 단천인막의 지목을 받은 인물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이라 말할 수 없다. 설혹 상대가 황제라 해도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오직 살인학(殺人學) 하나만을 익혀온 살인의 전문가들로서 구성된 무림사 최대의 살수집단이 바로 이 십만종단 천인막인 것이다. 그리고 비대한 중년인, 당결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인물이야말로 그 십만종단천인막을 이끄는 신비속의 인물이었으나 그의 신분내 력은 아무도 모른다. 단 한 가지, 초특급 살인전문가들의 제황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의 무공이야말로 천하최강의 것이라 추측될 뿐이었다. 아울러 천하제일의 미식가(美食家)를 자처하는 인물이 또한 그였는데...., ②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만찬은 계속되고 있었다. 허나 시간의 흐름 에 따라 사 인(四人)의 표정은 눈에 뜨일 정도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일이군....! 이미 율법이 정한 세 시각이 지났소이다." 문득 위정부의 부주인 적리노단이 저를 놓으며 우려어린 안색으로 좌중을 쓸어보았다. 그들의 눈빛이 다시 한 번 허공에서 묘하게 얽혀 들었다. 예운림이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오. 유빙 대총사는 우리에게 오늘 창랑왕이 라고 불리우는 신비인물에 대한 그간의 조사내용과, 대천람에 대 해 밝히고자 했었소. 헌데 유빙 대총사가 아직까지 도착하지 못하 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가 그들에게 오히려 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오." "....!" "....." "이 일은 곧 유빙 대총사가 그들을 아는 만큼 그들 또한 백찰무경 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외다. 뿐만 아니라어쩌면 그 대천람이라는 인물들이 본벌(本閥)에 대해 적지 않은 것을 알 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오." "음....!" "....!" 세 사람이 예운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문득, 잠린왕자 주문빈이 기이한 열기로 이글거리는 눈을 빛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 시각까지 유빙 대총사가 백탁대평의회에 참석치 못한 것은 그 가 현재 곤경에 처해 있거나 아니면 이미 제거되었음을 뜻합니다." "....!" "그리고 만약 유빙 대총사가 그들에게 생포되었다면 본벌의 기밀 또한 흘러 나간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외다." "음....!" "이미 세 시각이 지났으니 율법대로 처리해 우리의 존재를 은폐하 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실로 비정하도록 단호한 음성이었다. - 만약 오 인의 장(長) 중 누군가 백탁대평의회가 개최되는 시각 에서 세 시각이 넘도록 불참하게 되면 그 세력과 장(長)에 문제가 있다고 간주해 그 세력과 장을 제거한다. 문제라는 말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배신(背信)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 제벌의 적대세력에 포섭(包攝)되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외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제벌에 해 (害)를 끼칠 우려가 있는 그 모든 것이 포함되는 것이다. 제벌의 율법...., 비대해진 기관이기에 비정해야 하고, 그로인해 정해진 제벌의 율법 중 제일항, 주문빈의 요구는 바로 이것을 말 하는 것이었다. "총율사의 말이 지당하오. 그리고 지기였던 백찰무경이 만약 우리 들 중 누군가가 아닌 엉뚱한 인물에게 장악된 것이라면 그것은 참 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야기시킬 수 있는 문제, 어쨌든 이렇 게 된 이상 유빙과 백찰무경을 우리들 손으로라도 완벽히 제거해야 할 것이외다." 예운림이 주운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실로 더할나 위 없이 비정한 말을 내뱉고는 있으나 그의 태도는 여전히 우아함 을 잃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본벌의 기밀을 유지하는 것이오. 하니, 백찰무경의 대총사 유빙을 제거할 수밖에....!" 주문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당결을 응시했다. "이 일은 역시 당막주가 맡아야 하는 것이 아니오?" 그때까지도 그들의 대화에 일체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음식을 즐기 고 있던 당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십만종단천인막은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 존속되고 있으니 당연히 맡아야겠지." 나직이 중얼거리는 당결의 눈에 순간적으로 사이한 광채가 떠올랐 다 스러졌다. 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비대하고 느린 몸집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가공할 냉기였다. 예운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든 일이 규명될 때까지 백찰무경은 폐쇄하기로 하고 그 장(長)인 유빙대총사에게는 설혹 그가 아직 살아 있다 하더라도 빠른 시간 내에 그에게 확실한 죽음의 가시관을 씌울 것을 본 백 탁대평의회의 이름으로 결정하겠소이다." "동의하오." "동의.... 하오." 주문빈과 적리노단이 저미한 음성으로 입을 열고, 이어 당결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어제의 지기가 오늘의 적으로 탈바꿈하고, 유빙에게 오히려 죽음을 안기려는 가공할 죽음의 손이 되고 있었으니.... 잠시 후, 네 사람은 차례차례 대리석 광장의 벽면에 걸려 있는 거 대한 인물화를 향해 예를 취하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위정부의 부주인 적리노단이 선두에서 거대한 인물화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대벌주....! 당신은 과연 누구란 말이오? 당신이 과연 누구이기 에 초상화 하나만으로 우리를.... 아니, 천하를 굴복시키고 있단 말씀입니까....?' 적리노단의 눈에서 일순 강렬한 섬광이 치달렸다. 허나 그것은 그 자신이 아니면 도저히 알아내기 어려운 그런 것이었다. '허나...., 당신은 이 사실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합니다. 언젠가 이 자리에 나의 손자 적리운의 인물화가 걸릴 것이라는 사실을....!' 더할나위 없이 강렬히 타오르는 야망의 눈길, 허나 적리노단은 언 제 그랬냐는 듯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며 빠져 나갔다. 두번째 인물은 예운림이었다. 그는 두번째로 거대한 인물화 밑을 지나치며 그 아래 마련되어 있 는 옥단(玉壇)에서 한 개의 기물(奇物)을 집어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사각 패(佩), 전체가 은은한 금광으로 물들어 있고 그 전면에는 한 송이 국화의 문양이 정교히 각인되어 있는 패였 다. 한 송이 국화의 문양은 바로 제벌의 대벌주를 나타내는 문장 (紋章)이었다. 예운림은 더할나위 없이 정중한 자세로 두 손으로 대벌주의 문장 을 집어들어 천천히 그곳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오늘, 제벌의 기밀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백찰무경의 대 총사 유빙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허나, 기실 여기에 모여 있는 우리들조차 제벌의 일각(一角)밖에 알지 못하고 있는데 기밀유지니 어쩌니 하는 것은 실로 우스운 일 인 것이다. 진정한 목적은 단 하나 대벌주가 되려는 야망의 길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한 세력을 없애려는 것 뿐이었다!' 뚜.... 벅! 뚜벅! 예운림 역시 조용히 빠져나가고, 그 뒤를 이어 주문빈 또한 제벌 의 대벌주 문장에 더할나위 없이 정중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대벌주, 천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나는 당신을 존 경합니다. 당신의 그 위대함을....!' 주문빈의 눈에는 진정으로 공경하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허나 주 문빈이 존경하는 것은 대벌주의 권좌일 뿐이지 결코 대벌주 자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그대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 권좌의 주인이 바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나 주문빈에 의해!' 그렇다. 팔황과 십방을 관장하는 제벌의 대벌주, 그 대벌주라는 권좌에 대한 야망이 주문빈으로 하여금 대벌주를 존경하게 만들고 있을 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결이 천천히 비대한 몸을 움직였다. 그는 대벌주의 인물화 전면에 이르자 그대로 두 손을 지면에 짚으며 완전히 오체 투지(五體投地)했다. '대벌주, 나의 신이여. 천하의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위대한 나의 대부(代父)이시여....!' 눌라운 일이었다. 당결은 단지 대벌주를 떠올린 것만으로 감격해 몸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영광이 영영세세(永永歲歲) 빛날지이니....!' 당결. 그는 가장 감격적인 표정으로 그리고 가장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대벌주의 인물화 밑에 오체투지한 채 문득 가공할 살광(殺光)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대벌주이시여! 오늘 여기 모여 있는 놈들이 모두 대벌주의 위대 한 권좌를 꿈꾸고 있는 놈들임을 이 당결은 한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허나....,' '허나 제가 있는 한, 이 당결이 있는 한 그 어느 놈도 대벌주의 그 위대한 권좌를 노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당결이 이어 지면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제야 천 천히 몸을 돌이켜 옥단 위에 놓여 있은 대벌주의 문장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집어들어 입술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실로 광적(狂 的)이리만큼 대벌주에 대해 충성심을 지니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 여주는 행동이었다. ...... 모두가 빠져나간 빈 대리석 광장에는 죽음보다 더 무거운 정적이 내리 깔리고...., 마치 신전(神殿)을 관장하고 있는 듯한 거대한 인물화 속의 노인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천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 팔왕예조 제1권 제4장 운명의 날.... 사월초파일! ━━━━━━━━━━━━━━━━━━━━━━━━━━━━━━━━━━━ ① 사월 초파일(四月八日), 이날, 불타(佛陀)의 음덕(陰德)을 기리는 연등들이 천하를 뒤덮고 있고, 어디를 가나 온통 축제의 분위기로 들떠 있는 이날...., 이날은 운명의 날이 되고 있었다. 유빙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한 인간에게..... 번쩍--! 꽈르르릉....! 꽈꽈꽈꽝! 악마가 시샘이라도 하는 것일까? 마른 하늘에 돌연 뇌성이 임과 동시에 장대같은 비가 천공을 뒤덮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우르르르! 그리고 그 폭우 속에서 하나의 살인지령(殺人指令)이 조용히 실행되고 있었다. ...... 네 명의 마의인(麻衣人)이 부상당한 한 소년을 에워싼 채 주춤주 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부상당한 소년은 바로 유빙이었고 네 명의 마의인은 다름 아닌 대 총사를 호의하는 백찰무경의 초특급경준들이었다. 헌데 지금, 그들은 실로 엄청난 공포에 찌들어 있었다. 마치 겁이 많은 아낙네가 한밤중에 잠이 깨어보니 낯선 남자가 자 기 옆자리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 듯한 놀라움과 공포가 극에 달한 표정들이었다. 백찰무경의 경준이 되기 위해서는 무공 이전에 극한의 공포와 맞 서기를 즐거워할 줄 알아야 되며, 오히려 공포에 대해 왕성한 호 기심을 느껴야 한다. 헌데, 유빙을 호위하는 백찰무경의 경준들은 지금 완전히 공포에 질려 현재의 자신을 의식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쏴아아아....! 폭우 속에서 권태스러운 발걸음으로 그들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어둠보다 짙은 검은 도포, 가슴에 선명히 떠올라 있는 붉은 아수 라(阿修羅)의 문양(紋樣)...., 여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녹색의 피부...., 실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눈에 드러나 보이는 모든 것이 섬칫하고 공포스 럽게 느껴지는 사나이였다. 허나 퀭하니 뚫린 그의 두 눈을 보고난 후라면 이 모든 것들은 오 히려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야수의 눈도, 악마의 눈도 아니었다. 사람의 눈이든, 야수와 악마의 눈이든 최소한의 감정은 담겨져 있 다. 그것이 비록 탐욕 혹은 잔혹, 비정(非情)이든간에...., 허나 사나이의 눈은 완전히 죽어있는 채 그 깊숙한 곳에서 사이한 불길이 일고 있었다. 지옥으로 통하는 두 개의 입구라고나 할까....? 그렇다! 그 두 눈은 그대로 사이한 화염이 타오르는 지옥으로 통하는 두 개의 입구였다. 턱! 뒤로 물러서던 경준들의 등이 벽에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었다. 순간이었다. "으아아아-!" 네 명의 경준은 거의 발작적으로 흑의도포인을 향해 일제히 덮쳐갔다. 빨랐다! 믿을 수 없으리 만큼...., 허나 그것은 엄중하게 말해서 공격이라 할 수 없었다. 진정한 공 격이란 냉정함이 겸비되어 있을 때만이 이루어지는 것, 그러나 지 금 경준들의 행동은 단지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악적인 몸부 림일 뿐이었다. 죽음은 어쨌든 공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였기에..... 번쩍! 흑의도포인의 한 손이 움직이고, 한 줄기 새파란 섬광(閃光)이 허공을 갈랐다. 사악! 삭! 천공을 유린하고 있는 뇌린(雷鱗)의 푸르름 속으로 번뜩인 섬광이었다. 비명소리는 없었다. 단지 뼈와 살이 단숨에 베어지는 섬칫한 절단 음과 함께 네 명의 경준이 허공에 날아 올랐다. 유성처럼 붉은 피 의 꼬리를 끌며..... 유빙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흑의도포인은 여전히 아무런 병기 도 들지 않은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유빙이 유일하 게 본 것은 그의 헐렁한 양 도포자락에서 순간적으로 섬광이 일었 다는 사실 뿐이었다. 문득 유빙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이 자는, 할아범과 비슷한 데가 많군.' 유빙은 문득 그가 공포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지고 있음을 느꼈다. 더불어 하나의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 시각, 백찰무경의 제이인자 잔백인혼 단두백정 학거비는 하나의 금낭(錦囊)을 펼치고 있었다. 금낭은 바로 천문왕부에서 유빙이 건네준 금낭이었다. 그의 눈은 웬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본능(本能)이랄까? 그는 자신의 손이 어쩐지 자꾸 떨려옴을 느끼고 있었다. <할아범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면 아마 나는 창랑왕에 의해 죽음 에 처해 있거나 이미 죽어 있을지도 모르네. 그것은 창랑왕이 자 신의 존재를 제벌에 알리려는 나를 결코 살려둘 리 만무하기 때문이네. 또 나를 제거할 가장 완벽한 기회는 할아범이 내곁에 없을 때 뿐, 바로 내가 백탁대평의회로 가고 있는 순간이라는 것을 창랑왕이 모를 리 없고, 또 그 호기를 놓칠 리 없기 때문이네.> 학거비의 전신이 난생 처음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금낭 속의 서찰은 바로 유빙의 유서나 다름없지 않은가! <할아범, 이렇게 죽음을 걸고 도박을 벌이는 나를 용서하게. 허나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네. 숨어 있는 창랑왕를 상대하려면 결코 드러난 상태에서는 불가능함 을 깨달았던 것이네. 해서 나도 나 자신을 완벽히 감추기로 생각 했던 것이네. 창랑왕를 끌어 내려면 내가 완벽히 감춰진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방법 뿐이네. 다시 말해 나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감춰지고 반대로 창랑왕는 노출되는 것일세. 할아범 내가 제벌의 백탁대평의회에 참석키 위해 가는 길은 천하 의 아무도 모르네. 허나 나는 확신하고 있네. 창랑왕만은 만약 할 아범이 동행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낸다면 반드시 그 중도에서 죽 음의 손을 뻗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할아범! 내 몸의 인향(人香)을 이번만은 지우지 않았네. 이 유빙이 완전히 숨이 넘어가기 전에 할아범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한 때문이네. 그리고 할아범이 나를 찾는 시각이 늦어 만약 내가 이미 완전히 죽어 있다면 나의 시신을 악마의 표본실(標本室), 적전마람(赤塼 魔嵐)으로 옮겨주게. 나의 시신에 한 가닥의 온기만 남아 있다면 나는 그곳에서.....> 악마의 표본실과 적전마람...., 어딘가 섬뜩한 이름들이 아닌가! 허나 학거비는 유빙의 서찰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의 신형은 이미 천장을 박살낸 채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쏘아가고 있었으므로.... "소주....!" 꽝! 슈아아앙--! - 신이여!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싶지 않거든, 소주를 나에 게서 빼앗아 가지 마소서! ② "그대의 이름은?" 유빙은 눈 앞에 다가온 흑의도포인을 무감동한 눈으로 응시했다. "아수적치(阿修赤齒) 척무명(拓武明). 대천람의 일인일세." "대천람? 역시 그대들이었군." 유빙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메마른 미소였다. "대총사! 그대는 너무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일 을 결코 남이 아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 뱀이 말을 한다면 이런 음성일 게다. 그의 음성은 마치 독사가 말 을 하듯 아무런 감정도 찾아 볼 수 없었고, 어쩐지 그 번들거리는 피부에 맨살이 닿은 듯한 섬칫한 느낌을 주었다. 음성조차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이런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었지. 바로 할아범을 처음 대했을 때였던가? 인간이 과연 얼마만큼 처참한 경우를 당하면 이 런 음성으로 변할까 궁금했었다.' 돌연 유빙은 빗물이 흘러 내리고 있는 지면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어 극히 편안한 자세로 척무명을 응시했다. "척무명! 그대같은 사람을 나의 목을 가져갈 사람으로 보내주다니 창랑왕, 그가 돌연 고맙게 느껴지는군. " 유빙의 너무도 의연한 자세에 최초로 척무명의 눈에 어떤 감정같은 빛이 스쳐갔다. "아마 그 어느 누구라도 그대같은 사람에게 죽는다면 그리 억울하 지는 않을 것이네. 자, 시작해 보게. " 문득 천천히 다가들던 척무명의 발길이 멈추어졌다.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였느냐?" "후훗....! 그 이유를 알게 되면 그대는 결코 나를 죽일 수 없을 것이네." 척무명같은 인물들에게는 호기심 따위의 사치스러운 감정이 존재 하지 않는다. 더우기 이런 상황하에서는..... 허나 단 한 가지, 그들같은 부류의 인물들은 안된다는 말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 버릇을 지니고 있다. 척무명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말해라!" 그러나 유빙은 아무런 대꾸없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할 듯한 자세였다. 허나 유빙은 알고 있었다. 척무명은 자신이 그 이유에 대한 것을 말하기 이전에는 결코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척 무명같은 부류의 인물들은 불가능이라는 단어에 대한 강렬한 거부 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곧 짧은 순간이나마 학거비의 도착을 기다리기 위한 임기 응변이었는데 자신의 목숨을 놓고 뉘라서 이토록 냉철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때였다. "척무명! 그 이유는 내가 말해주마!" 실로 몸서리쳐지도록 공포스러운 음성과 함께 한 인물이 장내로 내려섰다. 잔백인혼 단두백정 학거비, 바로 그였다. 척무명의 완전히 죽어 있는 회색의 눈에 기이한 광채가 솟구쳤다. "믿을 수 없었는데 당신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구료." "한이 많은 사람은 결코 쉽게 죽지 않는 법이지." "그렇구료." 학거비의 말에 척무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거비와 척무명, 두 사람에게서는 어쩐지 비슷한 기질이 흘러 나 오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들 두 사람이 이미 서 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쏴아아아....! 폭우는 더욱 거세지고 두 사람은 그 폭우 속에서 서로를 응시한 채 언제까지나 움직일 줄을 몰랐다. 문득 그 무서운 침묵을 깨며 척무명이 입을 열었다. "그 분은 항시 천하에서 오직 당신만이 최고의 자격이 있다고 말 하곤 했었소. 하지만 이제는 다르오. 그것은 바로 나 척무명이 있기 때문이오." 척무명은 천천히 좌수(左手)를 치켜 들었다. 그에 따라 검은 도포 속에서 그의 좌수가 서서히 드러났다. 헌데 그것은 결코 손이 아 니었다. 녹슨 붉은 적린(赤鱗)이 섬뜩하게 일어서 있는 뭉툭한 쇳 덩이일 뿐이었다. 그 뭉툭한 쇳덩이 한가운데에는 투명한 녹색 면도(面刀)가 축 늘어져 있었다. 흡사 악마가 녹색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듯한 하나의 기병(奇兵), 좌수 그 자체가 하나의 병기였던 것이다. "일보단사(一步斷死) 녹인혈(綠人血)!" 학거비의 흉터덩어리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들었다. 척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기억해야 할 것이오. 녹색의 재앙(災殃), 일보단사 녹인 혈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기병인가를...." 말과 함께, 투명한 녹색면도가 섬칫한 인광(燐光)을 뿌리며 빳빳하게 곤두서기 시작했다. <녹색의 재앙, 일보단사 녹인혈(一步斷死綠人血).> 자객(刺客)들의 우상인 사백(死伯)이 서술한 살병도책(殺兵刀冊)이란 기서(奇書)가 있다. 살병도책은 살인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일천 개의 살인병기를 그 위력에 따라 서열(序列)을 매긴 일종의 병기보(兵器譜)인데 그 마 지막에 한 귀절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 시대를 피로 물들일 절대흉인(絶代兇人)만을 주인으로 선 택하고 끝내는 그 주인마저 파멸로 몰아넣는 저주받은 재앙이 서 린 살병(殺兵)이 있다. 일보단사 녹인혈. 일보(一步)를 떼기 전에 상대를 해치지 못하면 자신이 죽어야 하 는 피의 기병이 바로 일보단사 녹인혈인 것이다. 그 진정한 위력의 실체는 알 수 없으나, 단연코 살병도책에 수록 된 그 어떤 살인기병도 일보단사 녹인혈의 가공할 살상 능력을 능 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척무명의 죽은 눈이 칙칙한 회광(灰光)을 뿌렸다. "이 세상에서 일보단사 녹인혈에 죽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단 세 사람,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 "내가 백찰무경의 대총사를 죽이는 일을 맡은 것도 바로 당신 때문이었소이다." 학거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척무명! 네가 비록 일보단사 녹인혈의 주인이 되었다 해도 아직은 나의 적수가 아니다." 척무명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은 사실이오. 허나 백찰무경의 대총사와의 거리는 현재 당신보다 내가 더 가깝소." "과연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학거비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스쳤다. 허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한 줄기 녹색 섬광이 돌연 가공할 속도로 유빙을 향해 뻗어갔다. 팟! 동시에 학거비의 신형이 유빙에게 퉁겨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실로 한 방울의 빗줄기가 채 두 치 거리를 떨어져 내리기 전에 발생한 일이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유빙을 향해 뻗어가던 녹색 섬광이 허공에서 느닷없이 방향을 꺾어 학거비의 전신을 덮어 씌어가고 있지 않은 가. 실로 예상치 못했던 가공할 공세였다. 허나 더욱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학거비, 그가 자신에게 덮쳐드는 녹색 섬광을 무시한 채 유빙을 깊숙이 안은 것이었다. 마치 독수리가 자신의 알을 품듯 자신의 생명 따위는 도외시한 놀라운 행동이었다. 카앙! 녹색섬광을 뿜어내던 일보단사 녹인혈이 금속성 격돌음과 함께 퉁겨졌다. 척무명의 눈에 흠칫 경악이 스치고 바로 그 순간 학거비의 신형이 유빙을 품에 안은 채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믿어지지 않게도 그는 이 순간 도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척무명의 눈이 더욱 커졌다. 허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눈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가거라! 일보단사 녹인혈--!" 카악! 척무명의 입에서 짧은 일갈이 터짐과 동시에 녹색섬광이 멀어져 가는 학거비의 등을 향해 치달리고, 예의 녹색섬광은 이미 오십여 장 밖을 질주해 가고 있는 학거비의 등을 여지없이 꿰뚫은 채 회 수되고 있었다. "흑!" 짤막한 비명이 터졌다. 허나 그 뿐, 유빙의 몸을 안은 학거비의 신형은 이내 비와 어둠 속으로 녹아 들고 있었다. 피(血), 붉은 피를 빨아들인 채 회수되어 온 일보단사 녹인혈을 내려다 보는 척무명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치고 있었다. 경악이라 해야 할까, 허탈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씁쓸하게 느껴지는 그의 음성이 이내 조용히 빗 속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학거비, 당신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대총사 유빙은 결코 살아날 수 없을 것이오!" 쏴아아아.... 꽈르릉! 이 순간 천공을 잡아 뜯는 뇌전의 흐느낌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는데...., ③ 번....쩍! 꽈릉! 밤(夜), 먹물을 풀어놓은 듯 한치 전면도 내다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거칠게 쏟아져 내리고 있는 비의 장막(帳幕)은 어둠이라는 장막 위에 또 한 겹의 어둠을 덮어 씌우고 있었고 간혹 그 암천을 유린 하는 뇌전(雷電)의 푸른 섬광만이 악마의 혓바닥인 양 번뜩이고 있다. 귀기(鬼氣)련가....? 어둠은 끈적끈적한 숨결을 흘려내며 한 야산을 뒤덮고 있었다. 눈조차 뜨고 있기 힘드리만큼 거칠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와 어 둠, 대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태초의 원시림으로 뒤덮혀 있는 야산에의 어둠과 비는 실로 공포스럽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그 지옥의 어둠 속을 언제부터인가 한 인영이 극히 조심스럽게 수 림을 헤치며 전진해 나가고 있었다. "소주, 정말 견디실 수 있겠습니까?" "하루 정도는...."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 거의 들릴락 말락 조심스럽 게 울려오고 있는 음성, 바로 유빙과 학거비의 음성이 아닌가. 유빙은 학거비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힘겹게 대꾸하고 있는 그의 가슴에서는 계속 붉은 피가 번져나오고 있었다. 녹색의 재앙이라 일컬어지는 저주의 살병(殺兵), 일보단사 녹인혈 이 가슴을 꿰뚫은지라 기실 살아날 가망은 전혀 없었다. 허나 학거비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유빙의 죽음을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같았다. 이때, 학거비의 전신이 돌연 팽팽히 긴장되었다. 우우.... 카오오! 돌연 어디선가 야수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지금 이 순간 학거비는 결코 그 야수의 울음소리에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소주! 산이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 "이것은 바로 누군가가, 이 주위 일백여 장 가까이 매복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야수들의 울음소리도 백장 이내에서는 들려오 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적지 않은 수효의 인물들이 이 산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능만이 강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한 마리 야수라고나 할까? 학거 비의 눈은 이 순간 살기에 가까운 야수의 본능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때, 유빙이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할아범!" "예! 소주." "우리는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에 당도하기까지는 아무도 만나서는 안되네." "예.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천람 놈들은 소주의 죽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닐세. 이제 우리는 설혹 백찰무경의 수하들을 만난 다 하더라도 몸을 숨겨야 하네. 아마 지금쯤 내가 습격받은 장소 를 중심으로 그 사방 일천리 가량이 완전히 포위되어 있을 것이네." "그들은 대천람과 창랑왕의 수하들일 수도 있고, 또 제벌의 수하들일 수도 있네." "제벌!" 학거비의 눈에 일시 미묘한 이채가 솟았다. 유빙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그렇게 되었네. 내가 백탁대평의회에 참석하지 못한 이상 그들은 오히려 창랑왕보다도 나에게 더욱 집요한 적(敵)이 되어버린 것이네." "음...." "후후, 창랑왕은 아마 그것까지 예상하고 안배했을 것일세." 학거비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의혹에 잠긴 음성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헌데.... 소주는 그 악마의 표본실인가 하는데만 도착하면 과연 살아 나실 자신이 있는 겁니까....?" 학거비는 안타까움이 뒤섞인 강렬한 의혹의 표정으로 유빙의 대답 을 기다렸다. 그러자 유빙은 그가 무엇을 물어보려 했는지 알았다는 듯 미소했다. "할아범! 할아범은 과연 내가 이런 치명상을 자초하고도 이렇듯 태연한 것이 무척 의아스러운 모양이구료." "그, 그렇습니다." 학거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염려말게. 나는 죽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네. 나 는 그곳에서 살아날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무공 또한 익힐 것이네." 학거비의 눈이 커졌다. 그는 유빙의 말이 실로 믿을 수 없는 내용 임을 뻔히 알고 있었으나 이 순간 유빙의 표정이 너무도 태연스러 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허나 이내 그는 터질 듯한 희열에 전신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곳에만 가면 정, 정말 살아나실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후후, 이미 죽어 있었다 해도 내 몸에 온기만 남아 있는 상태라 면 충분했네. 헌데 나는 지금 하루는 버틸 수 있을 정도이니 우리 는 하루라는 시간 여유가 있는 것이네." 학거비는 유빙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어 일시 멍청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돌연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그, 그곳이 어떤 곳이기에?" "바로 백찰무경의 산실(産室)이랄 수 있는 곳, 그 동안 백찰무경 에서 잡아들인 온갖 범죄자들과 마인(魔人)들의 표본(標本)이 남 아 있는 곳이네." "마인들의 표본실?" "그렇다네. 백찰무경의 역사는 이미 일천 년이 넘어 그 동안 본경 에서 잡아들인 마인들의 수효도 엄청나다네. 그 마인들 중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들의 표본만을 따로 보관해 둔 곳이 바로 악마 의 표본실 적전마람이라네." "아....!" "악마의 표본실을 만든 것은 바로 그 악마들을 제도(濟度)하기 위 해서 였네. 악마의 능력은 단연코 신보다 가공하네. 그들을 제거 하기 위해 그들의 실체를 알아야겠기에 그들의 표본을 수집해둔 것이네." "....!" "나는 이제.... 그 악마의 힘을 얻으려 하네." - 악마의 표본실(標本室), 나는 이제 그 악마의 힘을 얻겠다! 섬뜩하지 않은가. 이 순간 유빙의 눈은 더할나위 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허 나, 그 눈은 가라앉아 있기는 하나 서서히 폭발하고 있었다. 마치 전신이 하나의 검은 불길에 휩싸여 있는 듯한 느낌 속에서 그의 눈은 무서운 복수의 불길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이때, 학거비가 돌연 한 손가락을 내밀어 유빙의 입술을 눌렀다. 동시에 그의 전신은 무섭도록 긴장해 전신근육이 미미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야수가 본능적으로 위기를 의식하고 있는 듯한 행동, 학거비 의 두 눈은 전면 좌측의 한 곳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소주, 오십여 장 좌측 전면에 두 명이 있습니다.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소리를 내지 말아 주십시요.) 가느다란 전음성(轉音聲)이 유빙의 귀로 흘러 들고, 그 순간 학거 비의 몸은 이미 풀 사이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는 한 마리 야사(野 蛇)처럼 오히려 전면으로 소리없이 전진해 나가고 있었다.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도사리는 적자생존의 법칙대로 살아가고 있 는 야수들의 몸놀림을 방불케 하는 기민성과 조심성이 깃든 움직 임이었다. 어둠과 빗속에서 숲과 나무의 그늘로만 이동해 가고 있 는 학거비의 이런 몸놀림은 결코 무공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찰나,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다가들고 있는 두 명 흑의인의 신형이 유빙의 눈에 들어왔다. 사악! 치릿....! 한편 흑의인들이 그들이 전면에서 다가오고 있는 학거비의 신형을 발견한 순간 그들의 몸 한 부분에서 극히 미세한 음향이 작렬했다. 학거비의 강철같은 손이 그들의 신체 일부를 건드림과 동시에 두 명 흑의인은 비명성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허나 그들의 신형이 비에 젖은 지면에 쓰러지는 음향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쓰러지려는 그들의 몸을 학거비가 조용히 받아 소리없이 지면에 내려 놓았던 것이다. "십만종단천인막의 살인자들이군요." 그들의 모습을 일별한 후 학거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음성 에는 미미한 경악이 담겨 있었다. "예측한 그대로일세. 이제부터는 우리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뜨여 서는 안되네.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일개 비둘기라도 말일세." 유빙이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쏴아아.... 후드드득! 비는 더욱 거세어지고 어둠은 더욱 짙어지며 이렇게 먼 여로(旅 路)를 향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신형을 은폐시키고 있었는데...., ④ "적전마람에 대해 들려 주십시요." "적전마람은.... 본가에서 세운 것이네." "천종예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기실 .본가는 세인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하나의 특이한 혈통을 지니고 있다네." "....?" "필(筆)을 들면 천하제일의 신필(神筆)이요, 망치를 들면 곧 하늘 의 장인(匠人)이 되는...., 가히 모든 방면에 있어 신의 능력을 부여받은 선천적 천예(千藝)의 혈통이랄 수 있지." "....!" "허나 애석하다 할까....? 본가의 그 뛰어난 예술성은 비단 그런 방면에서만 천재성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네." "....?" "본가의 혈통에는 피의 예술성과, 사(死)의 찬미...., 그리고 파 괴의 본능마저 잠재되어 있었다네. 선천적 살인술사(殺人術士)의 본능이....," - 피의 예술성과 선천적 살인술사의 본능! "그 이유는 본가의 혈통 속에 선천적인 살인술사의 피인 악마의 혈청(血淸), 사형종혈(邪形種血)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었네. " - 악마의 혈청, 사형종혈(死刑宗血)! "한 마디로 본가는 신과 악마의 능력을 동시에 부여받은 가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 "아....!" "사형종혈이 본가의 혈통에 잠재되어 있음을 입증한 선조가 있었 네. 그 분은 바로 백사(白死), 사형예조(死形藝祖) 유군휘(劉窘 揮)로써 아직까지 하얀 죽음의 신의 공포로 알려져 있는 분이네."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 아아...., 맹세코 인간 공포의 끝이라 지칭되는 잔백인혼 단두백 정 학거비를 이토록 놀라게 할 것은 천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단 하나, 오직 그 이름 하나만큼은 그를 경악케 하고 남음이 있었다.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 일명 피의 예술사! 피(血), 또는 죽음으로 통하는 모든 분야에 있 어 가히 신화적인 전설이 되어 떠도는 인물. 무림사 최강의 고수로 인식되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였으며, 일천 삼백 년 전,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한 이래 한 인간이 최초로 가장 많은 인간을 살해했다는 피의 전설을 잉태시킨 인물이 또한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였다. 헌데 그가 바로 천종예가의 선조였단 말인가....! "그, 그 사람이 천종예가의 선조이셨단 말씀입니까?" "후후....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은 바로 그 분에 의해 세워졌다고 보아야 하네." "아....!" "허나.... 본가의 한 선조께서는 살인술사의 피가 본가의 혈통에 있는 것이 싫어 그것을 제거하셨네." "....!" "그 분은 본가의 후예들이 뛰어난 다른 방면의 예술성만을 지닌 채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네." "음....!" "그렇게 해서 그 후부터 본가의 후인들은 무공을 익힐 수 없게된 것이네. 허나 본가는 백찰무경이라는 단체를 세워 악을 제도할 수 있었다네." 유빙이 힘이 든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학거비는 천종예가와 백찰무경, 그리고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에 대한 신비가 점차 풀어짐에 따라 내심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 유빙의 말이 사실이라면 과연 그곳에는 지난 일천여 년 동안 존재 했던 모든 절대마왕들의 무공과 그들의 신병이기(神兵異器)들이 보관되어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쏴아아아.... 우르르르! 비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세어지고 그 속에서 악마의 표 본실 적전마람으로 향하고 있는 학거비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 학거비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소주! 그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이쪽 으로 계속 가면 되는 것인지....?" "맞네. 악마의 표본실은 악마의 금역(禁域)이라 불리우는 토번사 풍리(土藩沙風里)에 위치해 있네. " 유빙이 조용히 대꾸하며 문득 이채를 떠올렸다. "할아범!" "예?" "나 역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네." "....?" "할아범과 아수적치 척무명과는 어떤 사이인가?" 일순 학거비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이어 그는 어떤 과거를 떠 올린 듯 어두운 표정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소주....! 그것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빙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허나 그는 학거비의 표정 어딘가에서 한 줄기 고뇌를 본 것 같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할아범의 태도로 보아 그는 할아범의 과거와 어떤 연관이 있는 인물인 듯 하구나.' 이때, 학거비의 눈 깊은 곳에서 돌연 섬광이 번뜩였다. "허나 한 가지...., 차후라도 그 놈을 만나면 조심하셔야 된다는 것을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 "아수적치 척무명...., 그 놈은 살인에 관한한 가히 천부적인 재 능을 타고난 살인기계같은 놈입니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지상 에서 가장 무서운 놈이 될 것입니다." "......" "오늘 내가 그놈과 정면승부를 걸지 않은 것도, 바로 그놈이 두려 웠기 때문입니다." "후후.... " 유빙이 기오한 미소를 흘렸다. "실로 오랜만에 할아범의 거짓말을 들어보는군. 할아범은 나 때문 에 그러한 것임을 이미 알고 있네." 학거비가 정색했다. "소주. 그렇지 않습니다. 소주가 그 자리에 없었다 하더라도 저는 그 자와 정면승부를 피해 도주했을 것입니다." "....!" "척무명같은 자에게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살인비기(殺人秘技)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살인비기는 두 단계 위의 상수 (上手)들에게도 치명적인 상처를 가할 수 있는 그러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저는 놈이 익히고 있는 무공을 모르기에 도주한 것입니다." "....!" "소주, 명심하십시요. 제 말은 상대를 잘 모르는 경우에는 모험을 하는 것보다는 일단 물러서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거비의 담담한 음성이 의미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필승의 방법임 을 깨달은 듯한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라! 상대를 정확히 파악할 때까지 도전하지 않는 최강자, 곧 도전해 갈 때에는 이미 상대를 완벽히 꺾을 승산을 갖고 있다 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할아범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최강자일지 모른다!' 불현듯 유빙의 뇌리를 스친 생각인데.... "어쨌든 소주의 몸이 회복되면 소주는 이 학거비에게 볼기를 맞을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 "다른 것은 다 용서할 수 있으나 소주의 목숨을 소홀히 한 것 만 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유빙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범이 때리는 볼기라면 기꺼이 맞겠네." "그리고...." 학거비의 얼굴에 단호한 빛이 떠올랐다. "이 한 가지는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설마 연습 삼아 죽어보 고 싶은 일이 생기더라도 소주는 이 학거비의 허락없이는 절대로 죽을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후후.... 반드시 기억하겠네." 고독한 탈주(脫走), 허나 두 사람의 훈훈한 정이 교차되고 있었기 에 이 탈주는 더 이상 고독할 수 없었다. 쏴아아아.... 장대처럼 내리 꽂히고 있는 빗줄기 또한 이제는 차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헌데 바로 이때, 유빙과 학거비는 한 그림자가 자신들의 뒤를 줄 기차게 따라오고 있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전신에는 짙은 흑의를 걸쳤다. 대략 육십대에 달했을 듯한 육순노 인의 은발(銀髮)은 기이하게도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흐트러지 는 법이 없었고...., 청수한 얼굴에 단아한 이목구비와 잘 손질된 흑의 등이 마치 연회 장에 마악 참석하려는 듯한 우아한 모습인데 그에게서는 놀랍게도 범죄의 어두운 면과 세련된 우아함이 잘 조화되어 있어 그것이 오 히려 무서운 마력으로 눈을 찌르고 있었다. "백찰무경의 대총사 유빙! 그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나만 은 안다! 이제야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의 신비를 풀 수 있게 된 것 같군. 정말 오랜 기다림이었다." 나직이 중얼거리던 흑의노인은 학거비와의 거리가 벌어지자 다시 은밀히 뒤쫓기 시작했다. 흑의노인의 추종술(追從術)은 천하최강 의 고수라는 학거비조차 전혀 눈치챌 수 없는 실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아아, 과연 그는 누구란 말인가....? ■ 팔왕예조 제1권 제5장 벽(壁) 속의 여인(女人) ━━━━━━━━━━━━━━━━━━━━━━━━━━━━━━━━━━━ ① 악마마저 외면한 죽음의 땅, 사시사철 미친 듯한 광풍(狂風)과 살 인적인 검은 모래바람만이 아우성치며 회오리치는 저주받은 천형 (天形)의 대지. 이 황폐한 죽음의 사막, 토번사풍리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쏴아아아.... 꽈우우우웅! 굉음은 갈가리 고막을 찢어내고, 살인적인 검은 모래바람이 수십 수백 개의 어마어마한 모래기둥을 형성하며 모든 것을 까마득한 천공 너머로 휘말아 올린다. 광풍에 휘말린 검은 모래들이 그대로 예리한 칼날이 되어 살갗을 후벼파고,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검은 모래의 안개가 흡사 끈끈한 악마의 숨결처럼 전신을 휘감아 온다. 아아...., 실로 대자연의 무서운 힘이 절감되는 광경이 아닌가! 헌데 한 사나이...., 그 미친 듯 회오리치는 살인흑사풍(殺人黑砂風)을 헤치며 한 발 한발 끈질기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악 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을 찾아가는 고독한 탈주객, 유빙과 학거비였다. ...... 쏴아아아아! 광란의 흑사풍은 점점 그 기세를 더하는 가운데 문득 유빙의 미약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할아범! 잠깐만 나를 내려주게." "....?" 학거비는 멈칫했다. 허나 이내 유빙의 표정에서 무엇을 깨달은 듯 조심스럽게 그를 내려놓았다. 유빙은 단정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어 품 속에서 하나의 버 들가지를 꺼내 지면에 꽂더니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 학거비의 눈에 의혹이 차올랐다. "소주, 지금 무엇을....?" 유빙이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이 있는 곳을 찾고 있는 중이네." "예....? 그 버들가지로 말입니까?" 유빙이 조용히 미소했다. "천종예가의 선조 중에는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에 달통한 천하 명장(天下明匠) 천기재제(千機才帝) 유묵(劉墨)이라는 분이 계시네." "....?" "그 분께서 집이나 성을 짓는데 가장 중시한 것은 바로 물(水)이 었네. 우물이 없는 집이나 성은 아무리 훌륭해도 쓸모가 없지 않겠나?" "....!" "하여 그 분께서는 사상 최초로 버들가지를 이용해 수맥(水脈)을 찾는 한 가지 기예(技藝), 유목탐수기(柳木探水技)를 창안하셨네." 유빙은 지면에 꽂아놓은 버들가지에 일별을 던졌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본시 싱싱한 버드나무의 가지는 물을 찾는 특성을 갖고 있네. 해 서 수십 리 밖에 있는 수맥이라 할지라도 유목이 그 방향으로 미 세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지할 수 있으면 이런 사막에 서도 쉽게 물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네." "하면.... 물하고 적전마람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간단한 이치이네. 이런 죽음의 사막에서 살아가려면 의당 물이 있는 곳에 성을 지어야 하지 않겠나? 적전마람은 바로 모래 속으 로 흐르는 강, 오목수하(烏木水河) 위에 세워져 있음이네." 학거비가 그제야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울러 그의 눈에는 은은한 놀람의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안배로구나. 천종예가의 사람이 아니면 결국 그 누 구도 적전마람을 찾을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때 유빙이 조용히 눈을 떴다. "자, 이제 다시 출발하세, 좌측으로 세 시각만 가면 적전마람에 도착할 수 있네." 석양(夕陽). 죽음의 사막 토번사풍리에 석양이 찾아들었다. 쏴아아아.... 꽈우우우웅! 광란의 흑사풍이 여전히 허공을 누비는 가운데 광활한 사막 저 아 득한 곳으로부터 핏물이 번지듯 서서히 진홍의 석양이 밀려들고 있는 광경은 실로 일대장관이었다. 헌데 일순, 그 광란의 모래바람 속을 헤쳐나가던 학거비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아아, 그의 전면에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휘이이....이.... 검은 모래바람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천공을 뒤덮고, 악마의 휘파 람 소리같은 으시시한 기성(奇聲)이 들려오는 곳, 그곳에.... 비껴드는 천공의 태양빛을 받아 하나의 거대한 폐성 (廢城)이 서서히 그 웅대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대한 자적색(紫赤色) 성채가 핏빛 석양을 받아 멀리서 보면 흡 사 거대한 핏빛 구름덩이가 땅에 내려앉는 듯한 공포스러운 광경 을 연출하며 서서히 위쪽으로부터 그 장엄한 실체를 드러내고 있 었던 것이다. 성벽은 적당히 퇴색되어 더욱 연륜의 무게와 위용을 더하고 그 위 로 검붉은 덩쿨들이 독약번지듯 덮혀 있다. 붉은 악마의 성이랄까....? 분명 화강암으로 축조된 성채이나 그 검붉은 덩쿨들로 인하여 흡 사 하나의 거대한 붉은 악마의 성을 보는 듯 하다. 퇴색된 성채...., 검붉은 덩쿨...., 그리고 밀려드는 핏빛 석양....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기이한 조화를 이뤄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자적색 성채의 신비와 위용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곳이 악마의 표본실이라는 적전마람입니까....?" 학거비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 음성은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치밀어오르는 기이한 전율과 감동을 억제하지 못해 은은히 떨려 나왔다.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玉)의 왕이라는 연마적옥(燕麻赤玉)을 깎아 만든 적전(赤塼= 붉은 벽돌) 팔만사천 개를 쌓아 이룩한 지상최고의 건축물이네." 학거비는 귓전으로 유빙의 음성을 들으며 이미 홀린 듯 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 가까이 다가갈 수록 그 웅 자(雄姿)는 더욱 무서운 중압감으로 그를 찍어 눌렀다. 퇴색한 성 채는 갑각류의 껍질같은 청철색 이끼로 온통 뒤덮혀 있어 고색창 연하고 으시시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유빙이 입을 떼었다. "적전마람의 특징은 입구가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네. 더우기 성 전체가 청철사태(靑鐵死苔)라는 살인 이끼로 뒤덮혀 있어 누구도 침입이 불가능하네." "그럼 어떻게 안으로....?" 학거비의 눈이 의혹의 빛을 발했다. 유빙이 담담히 대꾸했다. "안에서 열어 줄 것이네." "안에서....? 그럼 우리가 오는 것을 누군가가 이미 안에서 알고 있다는 말씀임....?" 찰나였다. 학거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둔중한 굉음이 울리며 하나의 시커먼 암혈(巖穴)이 눈 앞에 드러났다. 그그긍! 깊고 어두운 낭하(廊下)...., 마치 지옥의 그 끝이 맞닿아 있는 듯한 깊고 어두운 낭하는 온통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혀 있었다.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듯.... 학거비는 치밀어 오는 놀람과 호기심을 지그시 억누르며 묵묵히 발길을 내딛었다. ...... 낭하는 길고 어두웠다. 느껴지는 것은 뼈를 깎는 지독한 냉기(冷 氣)와 퀴퀴한 곰팡이 냄새 뿐이었다. 헌데 그 낭하의 끝부분에 이르른 순간 돌연 새하얀 벽면(壁面)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 하더니 하나의 얼굴이 환상처럼 솟아 나지 않는가! 창백하도록 새하얀 피부에 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붉디붉은 입술, 사슴처럼 크고 맑으면서도 안개에 잠겨있는 듯한 몽롱한 눈, 여기에 백치미(白痴美)와 청초함이 한데 어우러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얼굴이 새하얀 벽 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실로 공포스럽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학거비의 몸이 일순 긴장으로 흠칫 굳어졌다. 헌데 그 새하얀 얼굴을 발견한 유빙의 입가에는 한 가닥 은은한 반색의 미소가 떠오르고 있지 않은가? "설(雪)누님, 오랜만이오." 이어 극히 다정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순간, 새하얀 벽 속에 떠오른 희디흰 얼굴의 주인이 서서히 그 형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눈처럼 새하얀 백의(白衣)로 전신을 감싼 여인, 대략 십팔구 세....? 눈부신 백옥요대(白玉腰帶)가 허리에서 둔부 로 이어지는 아찔한 곡선을 더욱 현란하게 강조시키고 있다. 여기에다가 늘씬하게 뻗어내린 유난히 긴 다리가 선정적으로 눈을 찔러오고...., 치렁한 머릿결을 가볍게 말아올려 하얀 띠로 질끈 묶은 모습이 마치 한 떨기 수선화처럼 청초한 매력을 발산한다. 흡사 눈의 요정(妖精)과도 같은 여인. 허나 차갑다. 미치도록 아름다우나 그녀에게서는 웬지 북풍한설 (北風寒雪)보다도 매서운 한기(寒氣)가 발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백의여인의 출현은 그야말로 하나의 환상과도 같았는데..... "유....빙? 이 목소리는.... 그래! 유빙이야!" 이 순간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아름다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어 백의여인은 초점이 맞지 않는 기이한 눈으로 유빙쪽을 응시 했다. 그것은 마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맹인(盲人)의 태도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소리없이 유빙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로 손을 뻗어갔다. "....!" 학거비의 얼굴이 꿈틀했다. 허나 유빙이 그 순간 가만 있으라는 듯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백의여인이 유빙의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 이 맹인이 물체를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이내 백의여인의 입에서 반가움이 가득 담긴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맞아, 좀 커지기는 했지만 .... 유빙, 유빙이야!" 몹시 기쁜 듯한 음성에 이어 그녀의 손이 유빙의 몸마저 마구 더듬기 시작했다. "화! 그 꼬맹이가 벌써 이렇게 크다니...., 이제 완전히 어른이 다됐...." 일순, 유빙의 몸 어디를 스쳤음일까? 말을 잇던 그녀의 얼굴이 돌연 확 붉어졌다. 그녀는 슬며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당황을 감추며 근심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헌데, 어디서 이렇게 다친 거지?" 유빙이 빙긋 웃었다. "별 것 아니오. 그것보다도 어서 나를 악마의 표본실로 안내해 주시오." "....!" 백의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이 이번에는 학거비에게로 뻗쳐갔다. 학거비는 흠칫 물러섰다. 학거비의 태도에 유빙이 담담히 말했다. "할아범! 그대로 있으시오. 설도(雪陶)는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손으로 확인하는 버릇을 갖고 있소. 손끝으로 상대를 기억 해 두려는 것이오." 백의여인의 손을 피하려던 학거비의 몸이 천천히 멈춰졌다. 백의여인, 설도는 세심하게 학거비의 얼굴을 더듬어 나갔다. 흉측 한 얼굴이나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부드럽고 섬세하게 하나하나 더 듬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참으로 많은 싸움을 했구나. 원래 있던 코는 이십 년 전쯤 검에 의해 베어진데다 다시 칠 년 전, 철추(鐵錐)같은 것으 로 맞아 형태가 없어졌고, 귀는 오십 년 전쯤 화기(火氣)에 녹아 버렸으며.... 게다가 얼굴 전체에는 모두 이십여 번의 상처가 나 있어. 그러나 원래의 얼굴은 준수했던 것이 틀림없어." 설도가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 학거비의 몸이 충격으로 미미하게 진동했다. 그녀는 손끝만으로 자신의 얼굴이 이렇게 변하게 된 원인을 자세히 밝혀냈을뿐 아니 라 원래의 얼굴마저도 유추(類推)해 알아내고 있지 않은가! 상처 위에 상처가 덮히고, 그 상처 위에 다시 상처를 받아 아예 원래의 형태를 잃은 채 한낱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린 자신의 얼굴 을 단지 더듬어보는 것만으로도 정확히 알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가공스러운 일이었다. 유빙은 담담히 미소했다. "후후, 그렇게 놀랄 것 없네. 설도는 자신이 한 번 만져본 사람이 면 그 사람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네." "....!" "설도는 이곳 악마의 표본실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금마백로 (禁魔白路)의 수호신(守護神)인 것이네." "금마백로?" 학거비의 눈이 다시 기광을 발했다. 그에게는 눈 앞에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이 모두 신비하고 경이로울 뿐이었다. 유빙의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다. "설도는 선천적으로 앞을 못보는 눈뜬 장님이기는 하나 그 능력은 가공하네. 나조차도 그녀의 능력을 다 알지 못할 정도로...." 헌데 바로 이때 설도가 돌연 고개를 갸웃했다. "유빙! 혹시 동행이 있어?" "아니오." 유빙이 고개를 저었다. 순간 설도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이방인(異邦人)이로군. " 학거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이곳에 들어섰단 말이오?" "그래요." "그걸 어떻게....?" 학거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즉시 전신의 모든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는 백 장 밖을 기어가는 개미의 동정도 능히 감지할 수 있는 능 력의 소유자였다. 허나 그는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가 없어 진정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설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벽(壁)이.... 금마백로가 나에게 말해주고 있어요." 설도는 마치 학거비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짐짓 벽 가까이 귀를 대며 말했다. "아마, 그는 유빙이 이곳에 들어오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다 가 똑같은 방법으로 들어왔을 거예요."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흡사 액체처럼 스물스물 벽면 속으로 스 며들기 시작했다. 육신을 지닌 한 인간의 육체가 어찌 한줌의 액 체처럼 녹아들 수 있단 말인가! 어찌보면 이것은 실로 공포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유빙은 사라져 가는 그녀를 보며 다급히 말했다. "설누님! 그 자를 죽이지 말고 내 앞에 데려다 주시오." "알았어. 유빙!" 그녀의 음성은 이미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② 처벅.... 처벅! 멀리, 금마백로의 끝으로부터 한 인물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유빙과 학거비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려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육십대의 흑의노인(黑衣老人). 나이는 들었지만 전신에서 풍기는 우아함과 세련미는 흡사 노련한 풍류서생(風流書生)을 연상케 한다. 청수(淸秀)한 얼굴에 단아한 이목구비, 정성스럽게 빗어넘긴 은발 (銀髮)의 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짐이 없고 수염과 의복은 마치 이 제 마악 성대한 연회장(宴會場)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처럼 말끔하 게 잘 손질 되어 있다. 실로 이십대 미공자(美公子)조차도 따를 수 없는 세련미와 우아함 을 한 몸에 지닌 흑의노인에게서는 더불어 퇴폐적인 범죄의 냄새 와 어두운 면이 기막히게 잘 조화되어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바로 학거비와 유빙의 뒤를 미행해 오던 흑의노인이 아닌가! 유빙과 학거비의 눈이 이채를 발한 것도 동시였다. 설도는 보이지 않고 난데없는 흑의노인이 태연히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르륵..... 이때 벽면에서 환영(幻影)처럼 설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 노인이 제발로 걸어오겠다고 해서 내버려 두었어." '잡혀 오는 것보다 당당히 스스로 나서겠다....? 재미있는 인물이로군!' 유빙의 입가에 고소가 스쳤다. 흑의노인이 유빙의 면전에서 걸음을 멈추며 담담히 입을 떼었다. "노부는 율한극(律寒極)이라 하네. 강호의 친구들은 밤(夜)의 귀 족(貴族), 야작(夜爵)이라고 부르지." "밤의 귀족 야작....?" 흑의노인의 입가에 극히 우아한 미소가 번졌다. "별호 자체에 운치가 있어 노부 역시 야작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 한다네. 소형제도 앞으로 야작이라고 불러주게." 흑의노인은 비단 미소만 우아할 뿐 아니라 그 행동과 말투 또한 마치 연회석상에서 자신을 소개하듯 여유롭고 느긋하기 이를데 없었다. <야작(夜爵) 율한극.> 일명, 밤의 신사(紳士), 새벽 이슬을 밟고 사는 어둠의 귀족, 고 금을 망라해 수많은 신도(神盜)들이 명멸해 갔으나 단연코 이보다 더 전설적인 인물은 없었다. 어떤 단체와도 어울리지 않은 채 오로지 단독으로 활동하는 신비 의 신투(神偸), 다른 신투들과는 달리 일체의 모습을 바꾸지 않으 며 당당하게 범행(犯行)을 성사시키고 유유히 사라져 가는 어둠의 신화(神話). 특히 그는 엄청난 고가품이나 누대(累代)의 예술품만을 전문적으 로 훔치는 대형신투(大形神偸)로써 혁혁한 명성을 떨쳐온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강호여인(江湖女人)들에겐 또한 가장 매력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인물이 바로 그였는데 현재 그는 엄청난 고가품과 예술 품으로 뒤덮힌 혼자만의 장원(莊園)에서 우아한 귀족생활을 보내 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때, 야작 율한극을 묵묵히 응시하던 학거비의 깊숙한 눈에 무서 운 한기(寒氣)가 차올랐다. "야작! 너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흑의노인 야작 율한극의 시선이 천천히 학거비에게로 옮겨졌다. "물론이외다. 귀하께서는 인간공포의 끝이라고 불리우는 그 유명 한 단두백정이시고, 소형제는 백찰무경의 대총사 유빙이 아니십니까?" "그럼 이곳이 어디인지도 알고 있느냐?" "그렇소. 사실 이 세상에서 백찰무경에 대해 나 야작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오." 야작 율한극은 여전히 우아한 태도를 잃지 않은 채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나의 가장 위대한 선조이셨던 밤의 황제(皇帝) 황성야야 (皇城夜爺)께서 백찰무경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스스로 백찰무경 에 잡혔으며, 또 이곳 악마의 표본실에 끌려 왔기 때문이오." "....!"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바로 위대하신 선조이신 밤의 황제 황성야 야께서 남기신 유품을 거두기 위함이오." 황성야야라는 네 글자를 입에 담는 야작 율한극의 얼굴에는 이 순 간 극도의 자부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황성야야 율여립(律女立)은 밤의 질서를 세운 명실상부한 밤의 황 제였다. 그는 지상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천자직인(天子職印) 을 훔쳐 밤일을 하는 천하의 신투들에게 조정(朝政)의 중신들이 황제에게 받는 것과 똑같은 임명장(任命狀)을 내리는 기행(奇行) 으로 밤의 황제가 된 기인(奇人) 중의 기인이었다. 오늘날에도 진시황의 직인이 찍힌 그 임명장은 밤의 업계(業界)에 서 절대적인 신분을 상징하는 증명서로 통용되고 있으며, 황성야 야 율여립은 지금에까지도 밤의 세계에서 신처럼 추앙받고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던 것이다. 학거비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야작! 네가 이곳에 온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소이다." 학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 혼자만 죽으면 모든 일은 깨끗하게 해결되겠구나." "그럴 것...." 순간 무심코 대답하던 야작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학노형께서는 지금 나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생각이시오?" 학거비는 침묵했다. 그것은 긍정의 표시였다. 헌데, 야작이 돌연 버럭 언성을 높이는 것이 아닌가! "학노형! 죽일 때 죽이더라도 사람이 이럴 수가 있소?" "....?" "아무리 불청객이라도 손님은 손님, 또 이곳까지 따라온 성의를 봐서라도 물 한 잔 대접이라도 한 후 죽이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이오." 학거비의 얼굴이 망연해지는 순간, 야작은 우아하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유빙을 응시했다. "그렇지 않은가? 대총사?" 유빙의 입가에 희미한 고소가 떠올랐다. 야작의 태연자약함이 웬 지 밉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유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학거비를 향했다. "할아범, 결례(缺禮)를 사과하시오." "......?" 이렇게 되자 학거비만 졸지에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야작이 마치 위로하듯 다정히 입을 열었다. "괜찮소이다. 학노형! 사람이 살다보면 다 실수할 때가 있는 법이 아니겠소?" 다음 순간 야작은 학거비의 얼굴이 기이하게 변하는 것을 간파하 고 재빨리 유빙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대총사! 나는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에 몹시 지대한 관심을 가 지고 있었네. 어떤가? 이런 기회를 빌어 나 야작에게도 한번쯤 견식을 시켜주는 것이....?" "좋습니다." 유빙의 흔쾌한 대답에 야작은 무척이나 놀란 듯 얼굴 가득 경탄의 표정을 떠올렸다. "과연 대총사는 정말 그릇이 큰 인물이군. 장차 크게 될 것일세. 아암.... 크게 되고 말고....!" "....!" "자 그럼 슬슬 가볼까?" 야작은 말과 함께 태연히 앞장서 걸음을 옮겨갔다. 학거비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되었던 것이다. 허나 유빙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학거비를 재촉해 그의 뒤를 묵묵히 따르기 시작했다. 기이한 동반자, 그의 이름은 밤의 귀족 율한극이었다. ③ 그그긍....! 하나의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십만마본회랑(十萬魔本回廊).> 길게 펼쳐진 회랑의 꼭대기에 고색창연한 하나의 현관이 걸려 있었다. 세 사람은 확 끼쳐 오는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학거비와 야작 율한극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다. 십만마본회 랑에는 입구부터 발목까지 묻힐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 었는데 걸음소리까지 흡수하는 완벽한 죽음의 정적 속에서 저쪽 깊은 곳으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소음(騷音)이 미약하 게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악마의 울부짖음 같은 기성(奇聲)이...., 유빙이 굳어진 두 사람의 표정을 은은한 미소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적전마람의 입구인 죽음의 회랑으로써 십만마본회랑이라는 곳이네." "......!" "백찰무경이 지난 천이백 년에 걸쳐 이 세상에서 가장 포악하고 흉측한 악인들(惡人) 십만을 골라 그들의 생체(生體)를 연구 보존 하기 위해 진열해 놓은 곳이네." "......" "곧 죽음의 회랑, 십만마본회랑은 십만 명의 악인과 마인들의 생 체 표본이 진열되어 있는 곳이지." 사면이 온통 새하얀 벽으로 되어 있는 죽음의 회랑은 점점 넓어지 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하얀 벽 양 옆으로는 높이 두 자, 넓이 한 자 반 가량의 선반(旋盤)이 이단 삼단으로 짜여져 있고, 그 선 반 위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푸른 액체가 넘실거리는 수정병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흑!" 일순 야작 율한극의 입에서 숨막히는 신음이 터졌다. 푸른 액체가 넘실거리는 수정병 속, 그곳에는 갖가지 수급들이 흉 측한 모습으로 넘실거리며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눈을 딱 부릅뜬 것, 머리에서 귀 뒤쪽까지 두 동강이 난 것 등 수 많은 인간의 잘려진 목이 실로 끔직스러운 형상으로 수정병 속에 서 흔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잘려진 채 목만이 남아 있는 수급들의 연령 또한 가지가지였다. 그 수급들의 전체적 인상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면 어딘가 사악한 표정이나 음험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이 거의 대부 분이라는 점이었다. 완전히 뇌(腦)만 드러내놓고 있는 표본도 있었고, 때로는 어깻죽 지로부터 잘려진 팔만이 들어 있는 수정병도 있었다. 그 모든 표 본들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성분을 알 수 없는 푸른 액체 속에 담겨 음침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실로 까무라칠만한 광경이 아닌가! 남녀가 뒤섞여 있는 수급이 유 빙 일행에게 푸른 액체 속에서 '왜 자기는 여기에 있는 거냐' 고 말없는 원망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흔적은 결코 찾아볼 수가 없어 실로 죽음의 회랑(回廊)이라는 말이 실감된다고나 할까....? 이미 죽어 있는 인간의 온갖 부품(部品)과 흔적들만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흘러간 마인(魔人)들과 범죄자들의 흔적이...., 야작 율한극이 기겁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이 흉측한 것들을 이렇게 진열해 놓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유빙이 담담히 대꾸했다. "이것들은 더 이상 흉악할 수 없는 십만 범죄자들의 표본, 그들의 신체 각 부위를 연구하기 위해 보관해둔 것이오." "....!" "범죄자보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알아야만 가능한 것, 이곳의 표본들은 인체를 십만 개의 유형(類型)으로 분리, 그 표본 과 연구결과를 남겨 놓은 귀중한 자료들인 것이오." 야작 율한극이 기가 질린 듯 입을 다물었다. 인간의 인체를 이토 록 철두철미하게 연구한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헌데, 한순간 야작 율한극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동시에 엄청난 경악성이 터졌다. "앗! 움직인다....! 표본실이 움직인다!" ■ 팔왕예조 제1권 제6장 노란색의 망령 ━━━━━━━━━━━━━━━━━━━━━━━━━━━━━━━━━━━ ① 그들의 전면 한 곳, 마치 표본인 듯 움직이지 않고 있는 하나의 물체가 있었다. 백포노인(白袍老人)이었다. 백포노인은 어깨죽지부터 절단된 한 개 팔이 들어 있는 수정병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잘려진 팔을 싫증도 내지 않은 채 오랫동안 석상처럼 바라보 고 있었는데 어찌보면 너무도 움직임이 없고, 기(氣)마저 감지할 수 없어 하나의 표본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허나 예의 백포노인은 수정병 안에 담긴 팔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주 가끔씩 의미 모를 미소를 떠올리고 있어 살아 있는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헌데, 놀랍게도 백포노인의 왼쪽 소매는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되자 한 눈에 그 수정병 안에 들어 있는 팔이 바로 그 노인의 것 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팔과 대면하고 있는 노인의 용모는 실로 기괴했다. 웃기에 도 너무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랄까? 키는 겨우 사척(四尺) 정도에 불과하고, 가냘픈 체구를 가리고 있 는 흰 장포는 헐렁하기 그지 없다. 여기에 누런 피부는 영락없는 캐캐묵은 양피지같았다. 뿐이랴! 고목의 껍질같은 손에는 동맥이 툭툭 불거져 있었으며 진 한 갈색의 눈동자와 권태스러우리만큼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허나 그의 전신에서는 실로 믿어지지 않을만큼 깊은 정적감이 풍 겨 나오고 있었다. 그 정적이 너무도 깊어 무심코 그 곁을 지나치 려던 야작 율한극이 돌연 그가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실없이 웃는 모습을 발견하고 기겁한 것이다. 표본인 줄 알았던 인간이 돌연 씨익! 미소짓는 광경은 실로 수급 이상으로 으시시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크게 놀란 것은 학거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내색은 않고 있 었으나 그의 몸은 본능적인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빙이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후후, 인사들 하시오. 이 분은 이곳 적전마람을 관장하고 계시는 차손이라는 분이시오." 백포노인은 유빙의 말을 분명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야작 율한극과 학거비는 마악 인사를 하려다 엉거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유빙이 문득 무엇을 떠올린 듯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어 짐짓 음성을 높여 말했다. "인사들 하시오. 여기 계시는 차손께서는 지상 최강의 강자이시며 아울러 나 유빙의 오직 하나 뿐인 위대한 대부(代父)이시오." 백포노인 차손이라 불리우는 노인이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 다. 그리고 입가에 극히 흡족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들었느냐?" "예....?" 마악 예를 취하려던 야작 율한극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보자마자 하대(下待)라...., 생긴 그대로 괴물이군.' 그가 내심 투덜거릴 때 차손은 지극히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유빙에게 다가섰다. "내 귀여운 아들이 남의 등에 업혀서 오다니.... 자, 이리 오너라." 그의 말이 마악 끝나는 순간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학거비의 등에 업혀 있던 유빙은 이미 차손의 한 팔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학거비의 눈이 찰나지간 섬광을 발했다. 경악인지 살기인지 종잡 을 수 없는 섬광이었다. 허나 차손은 마치 애초부터 학거비의 존재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유빙의 상세를 살피고 있었다. 문득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러졌다. "일보단사 녹인혈! 그 빌어먹을 장난감이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었단 말인가?" "....!" "쯧쯧....! 어째 네가 이곳에 온 것이 심상치 않다 생각했더니, 이제야 대충 알겠구나." 차손이 혀를 찼다. 놀라운 것은 그가 유빙의 상처를 슬쩍 살펴본 것만으로 모든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허나, 내가 눈을 버젓이 뜨고 있는 이상 내 귀여운 아들이 이런 꼴이 되어서는 곤란하지." 차손은 잠시 고개를 젓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유빙의 상처를 만지기 시작했다. 학거비의 눈이 커졌다. 당연한 것이 그가 마악 차손의 손놀림을 눈여겨 보려는 순간 이미 차손은 유빙의 몸에서 천천히 손을 떼고 있었던 것이다. "완벽히 치유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젠 충분히 걸을 수는 있을 것이다." 차손이 얼굴 가득 인자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유빙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실로 믿을 수 없게도 출혈이 씻은 듯 멈춰졌을 뿐 아니라 계속되던 통증도 말끔히 사라진 것이 아닌가! 허나 유빙보다 더욱 경악한 것은 바로 학거비였다. 녹색의 재앙, 일보단사 녹인혈에 당한 치명적인 상처가 이렇게 순식간에 응급처 치 되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이 노인은....?' 차손을 응시하는 학거비의 눈에는 깊은 회의와 경악이 물결치고 있었다. 이때, 차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귀여운 아들아! 헌데 너를 따라 이곳에 몰래 들어온 간 큰 도둑 이 있다는데, 어떤 놈이냐?" 유빙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야작 율한극이 한 발 앞서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도둑이 아니라 손님이오!" 차손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크크.... 바로 네 녀석이었구나." 키득키득 웃으며 야작 율한극을 요리조리 훑어보는 차손의 눈에는 그야말로 왕성한 호기심이 뛰놀고 있었다. "크크.... 그렇지 않아도 마침 살아 있는 실험재료가 없어서 한번 나가려던 참인데, 아주 잘 되었다." 차손이 흡족한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야작에게 다가섰다. '살아 있는 실험재료....? 그럼 나를....?' 야작은 그야말로 기절초풍했다. "이 미친 늙은이가....!" 이어 그가 절묘한 뒷걸음으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쿵! 허나 바로 그 순간 야작은 어느새 자신이 지면에 누워 있고 차손 이 음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얼굴 바로 위에서 빤히 자신을 내 려다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만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옴을 느 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차손의 움직임이 하도 빨라 그는 무엇이 어 떻게 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볼상사납게 지면에 대자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헌데 다음 순간 차손은 야작을 마치 가벼운 한 개 나뭇잎마냥 달 랑 한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오?" 야작이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허나 음성만이 튀어나올 뿐이지 몸은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은 이내 반듯한 석탁 위에 올려졌다. "너의 눈을 보니 네 놈은 남보다 발이 빠르고 머리회전이 기막히 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그 다리부터 자세히 관찰해 볼 예정이다." 차손이 씨익 웃었다. "내 다리? 관찰....?" 야작의 눈이 한없는 의혹의 파도를 타고 굴러갔다. 바로 그 순간 야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차손의 한 손에 기 괴한 물체가 들려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절단된 왼발 하나였다. 야작은 일순 멍청해졌다. 그는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의 왼발이라 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차손의 손은 분명 맨손이었는데다 다리가 잘리는 감각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헌데....,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의 왼발이었다. "그, 그게 내.... ,내 왼발이....오?" "크크....! 그렇다. 헌데, 별로 특이한 점도 없군. 괜히 헛수고했네." 차손은 투덜거리며 들고 있던 다리를 털썩 내려 놓았다. '저게.... 내 다리....?' 야작의 눈이 희번뜩 돌아갔다. 차손의 손이 이번에는 그의 배있는 쪽으로 뻗어갔다. 야작은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차손의 볼품없는 손이 갖 는 무서운 능력을 그제야 실감한 것이다. 그 손은 이제 또 일체의 감각도 없이 예리한 면도(面刀)가 되어 자신의 배를 난도질할 것 이 아니겠는가! "으, 으악! 이 미친 늙은이야....! 사람 살려!" 순간 야작은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진 채 실로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야말로 야작은 까무라치기 일보직전인 것이다. "차손! 그만해 두십시요. 저의 상세가 더 급합니다." 이 순간 유빙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허나 차손은 야작의 머리에 탐욕스러운 눈을 고정시킨 채 무감동하게 대꾸했다. "너의 상세는 이틀 안에만 손대면 완전히 치료할 수 있다. 시간이 넉넉하니 나는 이 녀석의 뇌를 한 번 보고 싶다." 이어지는 차손의 말에 야작 율한극은 아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뇌를....? 내 머리를 가르겠다고....?' 야작의 눈이 재차 희번뜩 돌아갔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아니, 꿈으로만 끝나주기를 기원했다. 유빙이 약간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난은 그만 하십시요. 차손!" '장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발을 잘라낸 것이 장난....?' 야작은 억울하고 분했다. 분해도 이렇게 분할 수가 없었다. 허나, 지금의 그에게는 오직 유빙만이 유일한 구세주가 아니겠는가! 유빙이 정색을 하자 차손이 휭하니 몸을 돌렸다. 그의 볼은 잔뜩 부어 있었다. 야작이 소리쳤다. "이 미친 늙은이야, 내 발을 다시 원상태로 해 놓아야 할게 아니냐!" "난 붙이는 일은 하지 않아, 이 녀석아!" 차손이 유빙의 제지에 심통이 난 듯 쏘아붙였다. '으....! 꼼짝없이 외발이 되었구나....!' 야작 율한극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기분이었다. 남의 다리 하 나를 너무도 장난처럼 떼어낸 차손이 차라리 원망스럽다는 느낌조 차 일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야작이 절망의 한숨을 내쉴 때 유빙이 고소를 머금으며 짤막히 말했다. "설도! 그 다리를 붙여줘라." 스르륵! 순간 새하얀 벽면 속에서 설도의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났다. 이어 그녀는 눈부신 속도로 손을 놀려 야작의 다리를 순식간에 원상태 로 돌려놓고 있었다. 눈이 안보이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야작의 눈에 재차 극도의 경악이 스쳤다. 그는 그제야 상대가 눈 먼 장님임을 깨닫고 내심 경악의 신음을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잔뜩 부은 얼굴로 한쪽에 서 있던 차손이 이번에는 학거비와 시비 를 벌이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학거비의 전신을 차근차근 훑어보는 차손의 눈은 기이할 정도로 반질거리고 있었다. "이 세상에 조금도 불필요한 부분 없이 이토록 완벽한 육체를 가 진 놈이 있었다니...., 더우기 인간이 지닌 모든 행동반경을 감각 적으로 예지(銳智)할 수 있는 고도의 지옥수련(地獄修鍊)을 쌓은 듯 하니 정말 볼수록 탐나는 놈이군." 차손의 눈에는 다시 왕성한 탐구욕이 약동하고 있었다. "너, 너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지 않을래?" "이 미친 늙은이.... ! " 순간 학거비가 움찔했다. 얼굴의 흉터가 모조리 꿈틀거리며 일어 섰다. 아무리 학거비라 할지라도 자신을 생체 실험하겠다는 데야 어찌 소름이 돋지 않으랴! 허나 차손은 오히려 진지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내 일평생 중 천하 최강의 악마들이라 자처하는 벼라별 놈들의 생체를 다 만져 보았지만 너처럼 완벽한 놈은 처음이다. 내 정성 을 다할테니 한 번 시험해 보자. 응!" 일순 학거비의 전신에서 얼음칼같은 싸늘한 살기가 자욱히 피어올 랐다. 동시에 그의 두 눈 빛깔이 누렇게 죽어 들었다. 누런 것은 완벽한 죽음의 색깔, 그 지옥의 문을 연상케 하는 깊고 어두운 눈이 완전히 누렇게 변 하며 얼굴 전체에 뒤덮힌 흉터들이 일제히 검붉게 곤두서고 있는 모습은 실로 공포스럽기 이를데 없는 광경이었다. 차손의 눈에 일순 감탄의 빛이 물결쳤다. "햐! 이제보니 네 녀석은 완벽한 살인기계로 성장한 놈이구나. 좋 아, 좋아! 내가 한 말은 취소다. 취소야!" 차손은 뜻밖에도 손까지 내저으며 학거비에게서 선선히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그때에야 학거비의 공포스러운 모습이 서서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헌데, 등을 돌리는 차손은 가까스로 키득거리는 웃음을 참고 있었으니.... '크크.... 저 놈을 언젠가 꼭 실험대 위에 올려 놓아야지!' 허나 동시에 그는 이 순간 하나의 심각한 의혹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저놈처럼 완벽한 놈을 길러낼 수 있는 곳이 있다 니.... 실로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유빙의 동반자는 한 사람이 더 추가되었다. 신비의 노인 차손! 노란색의 망령(忘令)으로 불리우는.... ② <적전마람.> 거대한 악마의 성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고, 또 엄선된 악마의 표본들이 남아 있는 진정한 마고(魔庫)이기도 한 적전마람의 입구 에 네 사람이 도착했다. 차손의 뒤를 따르고 있는 야작 율한극과 학거비는 이 순간 극도의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종현약(天宗賢約).> 적전마람의 입구에는 하나의 거대한 혈비(血卑)가 우뚝 솟아 있었 다. 혈비의 크기는 높이 삼 장, 넓이 일 장에 달했고, 천종현약이 라는 굵은 서체 밑에 깨알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을 설립한 것은 항차 세상을 어지럽힐 마인(魔人)과 범죄자들을 효과적으로 제도하기 위함이다. 이 적전 마람에 표본으로 남긴 인물들은 구제받지 못할 마인들과 범죄자, 또는 천하의 공적(公敵)으로 지탄받은 인물 중에 가장 뛰어난 자 들이 모인 것이다. 그 목적은 오직 그들의 모든 것을 완전히 파악 해 후일 나타날 비슷한 유형의 범죄자에 대처키 위함인 바.... 후인이여! 이러한 취지를 명심해 본 적전마람의 모든 것을 오직 천하의 평화를 위해 사용할 것을 맹세하여야 할 것이다. 혈비에 각인되어 있는 글귀는 푸르른 이끼에 뒤덮혀 있었다. 그것 은 적전마람의 역사가 실로 오래 되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는데.... 유빙의 눈에 어떤 감회가 물결쳤다. 천종예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그는 새삼 역사의 뒤에 숨겨진 채 천 하를 위해 노력해온 선조들의 기상이 시공(時空)을 건너뛰어 그의 가슴으로 밀려드는 듯한 감회를 받았던 것이다. "천종현약은 천종예가의 제이대 가주이셨던 천약성(天藥聖), 구주 성자(九州聖子) 유백초(劉白草) 어른께서 남기신 것이다." 차손이 유빙의 가슴 속에 이는 감회를 눈치챈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분은 바로 이 적전마람과 백찰무경의 시조이시기도 하지....!" "....!" "아마 천종예가의 선조들 중 가장 뛰어나시고 인간다운 분이었을 것이다." 차손의 음성은 놀랍게도 이 순간 만큼은 진지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분이 바로 천종예가에 유전(遺傳)되는 살인자의 광폭한 야수 성(野獸性)이 담긴 악마의 혈청, 사형종혈을 스스로 제거한 분이시니까...." 차손의 말을 들으며 네 사람은 적전마람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석실 안에는 죽음의 회랑, 십만마본회랑처럼 수많은 표본 들이 가득 차 있었다. 단지 다른 점은 이곳의 표본들은 석실을 바 둑무늬처럼 종과 횡을 맞춰 늘어서 있는 석단 위에 진열되어 있다 는 점이었다. 허나 십만마본회랑과 진정으로 다른 점은 예의 석단 위에 놓여 있 는 것들이 인체의 일부분 표본만은 아닌 다양한 종류의 기물(奇 物)들이라는 점이었다. 마치 이곳에 표본을 남긴 인물들이 생전에 사용했던 기병(奇兵)이나 유물들인 듯 했다. 문득, 유빙의 눈이 한 석단에 멈춰졌다. 적전마람의 입구 제일 첫 번째에 위치해 있는 석단이었다. 석단의 위, 그곳에는 실로 섬뜩하게도 하나의 손이 올려져 있지 않은가! 살은 이미 오래 전에 삭아 버린 듯 뼈만이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는 손뼈의 표본은 실로 보는 이의 뇌리에 저절로 공포감 을 느끼게 만드는 섬뜩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대하는 순간 죽음을 당하고 만다는 일견사수(一見死手) 감오극 (甘吳極)의 죽음의 손이다." 유빙의 눈이 예의 손뼈에 고정되자 차손이 귀찮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손 자체가 죽음의 기병으로써 당시 이백칠십여 명의 강호명숙 (江湖名宿)들이 저 손에 의해 죽음을 당했었지!" "....!" "일견사수 감오극!" 학거비의 눈에 이채가 솟아나고, 율한극의 입에서는 숨을 참는 듯 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굳이 차손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이미 일견사수가 만들어낸 피의 기사(奇事)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견사수 감오극.> 오호전국시대(五胡戰國時代)를 피의 공포로 떨게 했던 피의 기사를 아는가....? 어둠과 함께 한 개의 손이 허공을 떠돌지니.... 인간의 형체는 일체 보이지 않고 허공에 한 개 손만이 너울너울 날아다니며 죽음을 부른다. 그 혈수(血手)를 대한 자, 그 어느 누 구도 살아 남을 수 없으니.... "저 일견사수 감오극의 무공은 석단 아래에 남겨져 있다. 허나 저 런 따위의 무공은 익힐 가치도 없으니 그만 보거라." 차손이 시덥잖은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그러자 유빙이 천천히 고 개를 끄덕이며 스쳐 지나가지 않는가! 율한극의 눈에 어이없어 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 천하 무림인들이 만약 이 광경을 대했다면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 했을 것이고, 일견사수 감오극이 살아 있어 이 말을 들었다면 그 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야작 율한극이 돌연 정색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차손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떼었다. "저.... 어르신네! 아무리 그래도 일견사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 도 내가 저 무공을 좀 익히면 안 될까요?" 차손의 얼굴에 돌연 경멸의 빛이 스쳐갔다. 그는 말도 하기 귀찮 다는 듯 대뜸 욕설부터 터뜨리고 있었다. "이 썩은 돼지야! 일견사수인지 피묻은 손인지 하는 천한 절기는 이곳에 있는 일천의 표본 중 제일 하위의 것인데 뭐 체면을 생각해....?" 야작 율한극이 멍청해졌다. 그는 지금 차손이 무턱대고 욕설부터 늘어놓은 것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했다. '일견사수의 무공이 최하위의 것이라고....?' 야작 율한극이 아연해져 차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 순간 차손은 유빙과 함께 휑하니 일 장 밖으로 걸어가며 다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썩은 돼지! 그렇게 아쉬우면 너나 열심히 피묻은 손이나 붙잡고 익히고 있어라!" 야작 율한극은 차손의 욕설은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넋을 잃고 주위를 새삼 둘러 보았다. 바둑무늬처럼 일렬로 열과 오를 맞춰 빽빽이 늘어서 있는 석단들. 그 수효가 무려 일천에 달하고, 그 위에 엄청난 한 가지씩의 절기들이 놓여 있음이 새삼 피부로 전해 져 오자 그는 아예 정신이 다 없었다. 그렇다! 그 일천의 석대 모두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무공들이라니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닌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야작 율한극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허나 이내 현실을 인식한 그의 뇌리로 엄청난 흥분이 치달리고 있었다. '기연(奇緣)! 이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대기연(大奇緣)이다!' 야작 율한극은 새삼 정신이 번쩍 들어 부리나케 차손과 유빙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때 차손과 유빙은 한 석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유빙과 차손이 걸음을 멈춰 바라보고 있는 석단 위에는 실로 방대 한 분량의 기물(奇物)들이 놓여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엄지손톱 크기의 철환(鐵丸) 한무더기, 금광이 영롱한 목걸이 하나, 은으로 만들어진 듯한 골패 한조(一組), 여 기에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는 흑수피(黑水皮) 한짝 등등.... 실로 한 인간이 남겼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운 많은 기물들이 한 석 단 위에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많은 수효의 기물들이 한 석단 위 에 올려져 있음이 유빙의 주위를 끈 듯 그는 잠시 예의 기물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게 모두 한 사람이 남긴 유물입니까?" "그렇다. 바로 살인장황(殺人匠皇) 척계리(拓界吏)가 남긴 죽음의 장난감들이다." 유빙의 질문에 차손이 무감동한 말투로 대꾸했다. 순간 율한극은 또 다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 살인장황?' 너무도 전설적인 이름이 아닌가! 허나 유빙은 마치 처음 듣는 명호라는 듯 무감동한 시선으로 차손을 응시할 뿐이었다. "살인장황?" "그렇다. 그 자는 장인(匠人)이었지. 허나 죽음을 부르는 기병들 만을 전문적으로 제작해낸 인물이었다. 잡동사니로 보이는 저 물 건들 중 평범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차손이 말과 함께 손을 뻗어 예의 수많은 기물 중 머리카락처럼 생긴 한 웅큼의 흑사(黑絲) 중에서 한 가닥을 뽑아 들었다. 그것 은 영락없이 한 무더기의 모발이 뽑혀져 있는 듯한 형태의 흑사였는데.... "흑린단사(黑燐斷絲)라는 것이다. 잘 보아라." 차손이 예의 한 가닥 흑사로 한 옆에서 하나의 철봉(鐵棒)을 집어 들며 철봉의 가운데에 감았다. 화르르.... 순간 미세한 음향과 함께 파란 불꽃이 솟아나는가 싶자 순식간에 예의 흑사가 감긴 부분이 예리하게 끊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단단하기 이를데 없어 보이던 철봉의 중간 부분은 실로 칼로 자른 듯 깨끗이 절단되어 있었다. "이 흑린단사는 놀랍게도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해왕철모(海王 鐵母)조차 끊을 수 있단다." "음....!" 유빙의 눈에 감탄이 스쳤다. "살인장황 척계리를 잡기 위해 실로 수많은 고수들이 희생되었다. 저 석대 위의 물건들은 모두 무이산(巫夷山)의 구곡계(九谷溪)에 서 그를 죽였을 때 그의 몸에서 나온 것들이다." "....!" "모두 가공할 위력을 지닌 기병들이었지. 심지어 그가 신고 있던 신발과 입고 있던 옷조차 모조리 암기였던 것이다." "놀랍군요. 저 많은 것들이 모조리 병기이고 그것을 한 인간의 몸 에 지니고 있을 수 있었다니...." 유빙이 차손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모두 살인장황 스스로 만든 기병들이다." 차손 역시 이 살인장황 척계리 만큼은 무시하고 있지 않은 듯한 말투로 담담히 말을 이었다. 돌연 유빙의 눈에 한 가닥 이채가 스쳤다. 그의 눈은 살인장황이 남긴 수많은 기병들 사이에 놓여 있은 한송이의 꽃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는 영락없는 생화였다. 그 형태는 국화를 닮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정확히 말해 국화도 아니었다.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예의 조화(造花)를 집어드는 유빙의 눈 에 은은한 흥분이 물결쳤다. "천엽사화(千葉死花)라는 것이다. 죽음을 부르는 꽃이지." 차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허나 유빙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 었다. 그는 손에 들려있는 천엽사화를 단지 뚫어지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그 천엽사화로 인해 칠십여 명의 고수가 한순간에 살해되었지. 허나 그 천엽사화만큼은 기실 살인장황 척계리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습니다. 바로 본가의 선조께서 만드신 것이지요. 이것은 천엽자모화 중의 천엽자화입니다." 차손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차칵! 이때였다. 유빙은 손에 들고 있던 천엽사화의 한곳을 건드려 꽃대 부분이 갈라지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천엽자화의 길이는 세치, 그 꽃대의 길이는 겨우 한치에 지나지 않는데다 가늘기 이를데 없어 그 안에 기관장치가 숨겨져 있을 것 같지 않았으나 그 안에 빈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스르륵.... 꽃대가 갈라지자 그 내부에서 매미날개처럼 얇고 가늘게 말린 양 피지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제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지 모르겠다. 천종예가의 장예 (匠藝)를 능가하기 위해 밥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애쓰고 있는 내 게 웬 시러베 아들같은 놈들이 자꾸 찾아와 나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아 간단 말인가!> 가늘게 말려있는 양피지, 그 위에 적혀있는 글귀는 서두부터가 되 는 대로의 말투에다 넋두리로 시작하고 있었다. "사실 백찰무경에서는 그 자를 추적하면서도 그 자가 살인을 저지 르는 이유를 몰랐었다. 허나 그 넋두리를 발견하고 난 뒤에야 그 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를 알게 되었단다." 차손이 양피지를 읽어 내려가는 유빙에게 조용히 말을 던졌다. "그 자는 자신이 조용히 장예(匠藝)를 연마하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싫어 방문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다." 차손이 말을 하며 양피지를 계속 읽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내가 만든 작품을 단 한 번도 판 적이 없건만 어떻게 알고 무림인들이 자꾸 찾아 오는지 모르겠다. 무림인들은 끝없이 찾아 와 나의 명품을 팔라고 요구해 왔다. 허나 나는 결코 나의 작품들 을 팔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나의 목적은 오로지 천종예가의 장예를 뛰어넘는 명품을 탄생시키는 그 자체에 있다. 헌데 귀찮게 자꾸 무림인들이 찾아오니 그들을 막기 위해서라도 아니, 아예 그들을 죽여 버리기 위한 암기(暗器)를 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나의 작품들에 자부심을 느낀다. 나는 한점의 내공도 익히 지 않았으나 이른바 고수라는 무림인들을 간단히 없앨 수 있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명품들의 도움으로....> "음...." 유빙이 고개를 저었다. 실로 어이없는 내용이 아닌가. 귀찮다고 사람을 죽이기 위해 암기를 제작해 내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죽음의 기병들을 제작해 내는 살인장황으로까지 되다니.... <살인에 두 가지 잇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를 찾아와 귀찮게 구는 무림인들을 없앨 수 있는데다 또 제작한 명품의 성능을 시험 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되는 것이다.> 유빙이 경악과 함께 고소를 베어 물었다. "음....! 귀찮다고 사람을 죽이고 병기를 시험해 보기 위해 사람을 죽이다니!" 유빙은 고개를 저은 후 살인장황 척계리의 글을 마저 읽어내려가 기 시작했다. 그 뒤부터의 내용이 천종예가에 관해 기록되어 있었 기 때문이다. <아아....! 결국 나는 천종예가의 장예를 영원히 능가할 수 없단 말인가! 이 천엽사화만 십 년이 넘게 눈이 빠져라 들여다 보고 있 건만 이것을 능가할 명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다니.... > 살인장황 척계리가 남긴 글의 후반부는 처절한 탄식으로 끝나 있 었다. 그 글귀를 읽고 유빙은 자신의 가문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실 유빙은 자신의 가문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은 형편 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천향화방을 통해 화도의 대가로 알려 져 있는 것 이외에도 많은 방면에 있어 대가로 성명해 오고 있었 음을 대략 알고는 있었으나 막상 그 실체를 대하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예황(藝皇) 유귀광.> 팔백 년 전, 미천한 직업이었던 장인의 위치를 황후장상에 못지 않은 예인(藝人)으로까지 승화시킨 인물이 있었다. 그의 손이 닿으면 일개 나무조각조차 생명을 얻는다던가....! 문득 유빙이 품 속에서 하나의 꽃송이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천문왕부의 노대부인에게서 얻은 천엽자모화 중의 천엽모화였다. 차손과 율한극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살인장황 척계리가 지니고 있던 천엽사화와 똑같은 조화 한 송이가 유빙의 품 속에서 나오리 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리라. 차칵! 다음 순간 그들의 눈 앞에서 두 개의 꽃송이가 교묘히 얽히며 완 벽한 하나의 꽃송이로 변했다. 일천 개의 꽃잎이 영롱한 광채를 발하며 더욱 찬연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아....!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잉태하고 있는 천엽용봉금화, 그 한 송이 꽃이 이렇게 수백 년만에 드디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인 것이다. 완벽해진 천엽사화를 들고 서 있는 유빙의 모습은 마치 한 송이 꽃을 꺾어든 풍류공자의 모습이었다. 허나 뉘라서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이 한송이 꽃이 항차 천하 위에 화려하게 피어날 지니.... ■ 팔왕예조 제1권 제7장 광인(狂人)의 일기(日記) ━━━━━━━━━━━━━━━━━━━━━━━━━━━━━━━━━━━ ① 어느덧 유빙과 세 사람은 적전마람의 끝 부근에 이르렀다. 적전마 람의 제일 깊은 곳에는 지금까지의 표본들과 달리 진정 섬뜩한 표 본이 자리하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액체가 담겨 있는 수정병 속에 미백색의 기물질이 들 어있지 않은가! 수많은 주름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뇌(腦). 그렇다! 놀랍게도 인 간의 대뇌만이 추출되어 표본으로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후한(後漢) 경치 이년. 부마도위(駙馬都尉) 여율령(如律靈)의 뇌(腦).> 예의 대뇌가 담겨있는 수정병이 올려져 있는 석단의 중간에는 표 본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여율령이라면 후한의 대학자(大學者)이자 금엽공주(金葉公主)의 부군(夫君)으로 초령왕(楚靈王)에 봉해졌던 일대 인걸이 아닙니까?" 유빙의 눈에 의혹이 솟구쳤다. "그는 역사에조차 일대영웅으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거늘 그의 대뇌가 어찌 이곳에 있는 겁니까?" 유빙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차손을 돌아보았다. 차손이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물론 범죄자이니 이곳에 표본이 남겨져 있는 것이지." "....?" "그 석단의 하단에 광인의 일기가 있으니 그것을 읽어보면 알것이다." 차손이 권태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한 후 하나뿐인 팔을 장난스레 흔들었다. "광인의 일기....?" 유빙이 의아스러운 눈으로 석단의 아랫쪽으로 눈을 돌렸다. 허나 다음 순간 그의 눈에 또 다시 의혹이 솟아났다. "이것은 치수를 재는 면척(面尺)이 아닙니까?" 석단의 하단부에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위에 하나의 얇은 금척(金尺)이 놓여 있었다. 길이는 한자, 폭이 반치에 달하는 얇은 기다란 하나의 금척을 바 라보며 차손이 다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보기에는 하나의 금척으로 보이나 그것은 예리한 마흔아홉 개의 금척이 겹쳐진 금첩(金帖)이다." '금첩이라면 금판(金版)으로 만들어진 얇은 수첩(手帖)이라는 뜻인가....?' 유빙이 의아해 하는 순간 차손이 말을 이었다. "그 표면에 바로 초령왕이라는 인물이 남긴 광인의 일기가 기록되 어 있으니 자세히 읽어보면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유빙이 손을 내밀어 예의 금첩을 집어 들었다. 사악! "윽!" 동시에 유빙이 나직이 비명성을 터뜨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아아, 단지 가볍게 스친 것만으로 그의 손에 예리한 상흔이 생겨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지 않은가! 촤르르륵....! 그리고 단 하나의 얇고 기다란 면척으로만 보이던 금첩이 촤르륵 펼쳐지며 지면에 떨어졌다. 마치 병풍이 접혀 있다 펼쳐진 듯한 형태의 금첩이었다. 매미날개 처럼 얇은 마흔아홉 개의 금척이 겹쳐져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금척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촤르르륵.... 차손이 가볍게 예의 금첩들을 주워들어 다시 접으며 유빙에게 내 밀었다. 마흔아홉 개에 달하는 얇은 금척들이 파도가 밀려나가듯 펼쳐졌다가 다시 하나로 겹쳐지는 모습은 어찌보면 신기하기까지 했다. 언뜻 하나의 금빛 해일(海溢)이 수평선 위에서 몰려오고 그 뒤를 이어 또다른 금빛 해일이 겹겹이 밀려오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 러 일으키고 있는 광경이었는데..... 유빙은 한손에 쥐어지는 얇은 금첩을 대하고 감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기이한 금첩이로군. 헌데 여기에 일기가 쓰여져 있단 말입니까?" 유빙은 금첩의 표면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얇은 금척의 표면에 깨알같은 글귀들이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일기를 지니고 다니며 계속 기록해 나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임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기록은 곧 나 의 죄를 입증하는 기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위험에 물 러날 사람이 아니다.> 깨알같이 쓰여져 있는 글귀들, 그것은 마흔아홉 개의 얇은 금척들 위에 정교히 새겨져 있었다. 기록 날짜는 적혀져 있지 않았고 마 치 수시로 자신에게 말을 하듯 적어나간 일기 형식의 글귀였다. <나는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자기표현의 욕구가 굉장히 강해졌 으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제이(第二)의 나를 고백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이렇게 기록해 나가지 않을 수 없음이다. 이 일기가 내 손 을 떠나는 것은 내가 죽었을 때 뿐일 것이다.> '....!' 유빙은 점차 일기 형식의 글귀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자신에게 비범한 재능이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나의 가능성를 낮춰 평가하는 것은 바보뿐이다. 나의 심 기는 평범한 사람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소위 기재라고 불리우 는 인물들조차 내게는 어린아이 정도의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 다. 나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성공을 약속받은 사람인 것이다.> 광인의 일기, 후한의 부마도위이자 초령왕이었던 여율령이 남긴 일기는 실로 상당한 아집(我執)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자신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나의 출신 신분만은 기대에 어긋났다. 부친은 하잘 것 없는 인생을 보내다 쓸모없는 살인을 저질러 까마귀 밥이 되어 버린 것 이다. 여기에 나의 용모 또한 내가 지닌 엄청난 천재성에 비해 너 무도 초라한 것이었다.> "훗!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군." 유빙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소를 머금으며 금첩을 넘겼다. 세번째의 금첩이 넘겨졌다. <소년 시절, 낙양(洛陽)의 거리에서 한 명문의 귀공자에 의해 보 잘 것 없는 배수( 手=소매치기) 한 명이 죽음을 당하는 광경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귀공자의 권한과 무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배수는 피를 뿌리며 처참히 죽어갔다. 허나 그 광경을 목격한 많 은 사람들은 그 공자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진 정어린 경탄과 흠모의 눈빛으로 말이다. 힘과 권위를 지닌 자의 살인은 내 부친이 저지른 살인과는 전혀 다를 평가를 받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나는 내가 무엇을 취해야 할지 깨달았다.> <나는 피를 뿌리며 죽어간 소매치기를 관찰했다. 우둔한 사나이였 다. 도저히 생각지도 못할만큼 바보스러운 자였다. 나는 이 사나 이에게 걷잡을 수 없는 경멸감을 느꼈다. 그때 얼핏 가슴 속에 떠오른 것은 악인들의 수준이 대단히 얕다는 것이었다. 부랑아, 낙오자, 인간쓰레기, 그들이 흘러 흘러 악인이 된 것이었다. 머리가 좋은 인간이 이 놀랄만한 기회, 스스로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이런 새로운 세계를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한 것이 놀라 울 지경이었다. ...... 나는 이 착상(着想)을 붙잡았다. 그 얼마나 멋진 분야인가!> 광인의 일기, 그것은 엄청난 천재성을 지닌 한 인간이 스스로 범 죄의 제황이 되기로 결심한 동기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기록이었다. 우수한 인간이 스스로 지하에 뛰어들어 그곳의 제황이 되려는 것이다. 범죄에의 의식적인 활동 은 야망과는 또 다른 무서운 욕망이었던 것이다. <이중생활(二重生活)을 하지 않으면 안될 필요성을 느꼈다. 나의 진짜 활동을 위장하기 위해서 정상적인 길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개성(個性)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완벽한 나의 이중생활을 위해서.... 나는 유명했던 대학사들을 표준으로 해서 나 자신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학문을 익혔으며 그들의 여러 가지 버릇과 매력을 재현했 다.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나는 십 년이 못되 천하제일의 대석학으로 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석학이 되기 위한 변장(變裝)은 필요없었다. 지난 날 존재했던 대석학들의 학문과 개성을 흉내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개성을 장갑처럼 몸에 딱 붙였다. 일단 그것을 벗으면 나 는 나 자신으로 되돌아 왔다. 피의 향기를 그리워하고,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과 권위에의 집착을 지닌 나로....,> "....!" 유빙은 광인의 일기에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그것은 실로 너무도 놀라운 내용이었다. "저 자는 결국 대석학으로서 부마도위에 선택되고 초령왕에까지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생활이고 그는 범죄자들의 제황이 되어 결국 정변(政變)을 계획, 황위마저 찬탈하려 했다." 차손이 문득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여율령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도 지겹고 끔찍하다는 듯 하나뿐인 손을 마구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정변을 일으키기 일보 직전에 본 백찰무경의 수사원들에 의해 제 거되기는 했으나 백찰무경에서는 그의 죽음을 우연한 사고사처럼 꾸미지 않을 수 없었다." "....?" "그것은 그의 범죄에 대한 아무런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인의 일기가 남아 있었으나 그 내용이 너무도 가공스러워 그것 을 공개할 수는 없었다." "아....!"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차손의 입에서 더욱 놀라운 내용이 흘러나왔다. "그는 바로 지하무림(地下武林) 흑궐(黑闕)의 비조(鼻祖)이다." "그가 흑궐의 비조였단 말입니까?" 학거비와 율한극의 눈에도 경악이 치달렸다. "그렇다. 그는 보잘 것 없던 범죄자들의 세력을 조직적으로 체계 를 잡아 확고한 어둠의 단체로 정비해놓은 것이다. 오늘날까지 흑 궐이 제벌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유지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뛰어난 능력이 흑궐을 완벽하게 조직해놓았기 때문인 것이다." 학거비와 유빙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실로 가공스러운 비사(泌事)를 알게 된 것이다. - 흑궐(黑闕). 지상에 제벌이 있다면, 지하에는 흑궐이 있다! 이른바 지하무림이라 지칭되는 검은 단체, 살인 밀매(密買)등의 온갖 범죄를 범한 자들이 뭉쳐 연합한 음성조직(陰性組織). 이 흑궐의 조직은 실로 거대하다. 허나, 누가 그 흑궐의 일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혹 흑궐에 속 해 있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음, 후한의 일대인걸 초령왕이 바로 흑궐의 비조였다니...." 유빙이 고개를 흔들자 차손이 말을 이었다. "그 일기에는 그가 무공을 얻은 과정과 그 무공구결도 기록되어 있다. 그는 새로운 상황이 있을 때마다 기록해 놓았으며 가공할 무공을 얻을 때마다 역시 기록해 놓았다. 그 금첩을 우리 손에 넣 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 "위대한 영웅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천재인가 미치광이인가는 아 무도 단언할 수 없지만....." 유빙은 차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여율령의 금첩을 계속 넘겨갔다. '초령왕 여율령의 무학이라....? 과연 어떤 것을 남겼을까?' 유빙은 초령왕 여율령이 남겼을 무학에 대해 크나 큰 흥미를 느끼 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사로 알려진 악마의 두뇌 여율령의 무학,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이란 말인가? ② 초령왕 여율령, 범죄의 제황이자 조직의 천재. 그의 일기에는 그가 초령왕으로 책 봉되기까지의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자신이 초령왕 이 되기 위해 펼쳤던 온갖 귀계마략(鬼計摩略)은 곧 그 자체로서 악마의 술법서(術法書)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낮게 평가해 준다 고 해도 일기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병법서(兵法書)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헌데, 여율령은 무학일도(武學一道)에서도 엄청난 악마의 천재성 을 발휘하고 있었으니...., <무술은 겨우 한 인간을 상대로 펼치는 기술이다. 해서 나는 무공 을 경멸한다. 내가 추구하는 야망은 한 명, 한 명의 인간을 상대 하기에는 너무 광대한 것이다. 허나, 또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피의 천공 아래에서 선렬한 진홍 의 액체를 뿌리며 죽어가던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환희로 몸 을 떨며 무공을 참오했다.> <살인팔비전조(殺人八臂戰操).> 서른세 개의 금척을 넘기는 순간 여율령의 무공이 드러나기 시작 했다. 그것은 초령왕 여율령이 황실무고에서 얻은 무공을 참조해 그 스스로 창안해 낸 악마의 무공이었다. <대학사의 신분으로 무기를 지니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 실 살인에 반드시 무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체는 그 자 체로써 훌륭한 살상병기(殺傷兵器)이니, 두 팔, 두 다리, 그리고 두 무릎과 팔꿈치를 제대로 활용하게 되면 엄청난 파괴력을 나타낸다. 뿐이랴! 손 하나만 해도 권(拳), 장(掌), 지(指), 등 수십여 병기 로 활용할 수 있음이니 살인팔비전조는 이와 같이 인간의 육체를 병기로 활용하는 무공이다.> 여율령이 스스로 창안해 낸 살인팔비전조, 그것은 전삼결(前三結) 과 후사결(後四結)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삼결 제일공(第一功), 천수투예(千手鬪藝).> 천수투예는 다시 삼장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제일장 일지관수(第一章 一指貫手). .... 한 손가락을 순간적으로 상대의 중요 장기(臟器)를 찌른다. 이것은 예상보다 더욱 중대한 타격을 상대에게 입힐 수 있다.인후 (咽喉)나 심장을 찔리면 즉사하게 되는 것이다. 제이장 쌍권쇄골(第二章 雙拳碎骨). .... 권(拳)을 사용하여 상대의 중요 골격을 단숨에 부순다. 제삼장 십지사이기(第三章 十指邪牙技). ....이것은 실로 잔혹한 수법이었다. 상대의 혈맥이나 신경을 잇고 있는 근육을 잡아채어 찢어내는 악 랄한 무공인 것이다. 이 십지사이기에 걸리면 마치 야수의 발톱에 찢긴 듯 상대의 육체는 갈가리 찢길 것이니...., <전삼결 제이공(第二功), 비봉풍란(飛鳳風亂)> 제일공 천수투예가 단지 손과 지(指), 그리고 권(拳)만을 이용하 는 것이라면 제이공 비봉풍란은 두 팔과 두 손을 모두 사용해 돌 개바람처럼 적을 공격하는 무공이었다. 막을 수는 없다. 또 설혹 막았다 해도 그 순간 다른 방향에서 풍 차처럼 회전하는 팔에 걸리게 된다. <전삼결 제삼공(第三功), 살인철각(殺人鐵脚)> 발과 두 무릎을 사용하는 무공으로써 제일공과 이공이 상체를 이 용하는 공격이라면 이것은 하체만으로 상대를 죽이는 살상수법이었다. 상체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돌연 두 발과 두 무릎이 날아 드니 뉘라서 방비할 수 있겠는가! <후사결(後四結), 살인전동(殺人戰動), 화(火), 풍(風), 수(水), 지(地).> 후사결은 바로 네 가지 초식이면서 곧 하나의 연환초식(連環招式)이었다. 인체의 모든 부분이 각자 따로 움직이면서 연속적인 동작으로 회 전하며 적을 공격하는 무공으로써 인체역학(人體力學)을 무시한 불가능한 방향과 불가능한 근육, 심지어 머리카락조차 따로 움직 이며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니 실로 가공스러운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살인전동 화풍수지는 순식간에 펼쳐지며 또 상대에게 치명적인 공세를 가할 때까지 끝없이 연결시킬 수 있어 제 아무리 몸이 빠 른 사람이라 해도 끝까지 피해낼 수는 없는 그런 공격이었다. 살인팔비전조(殺人八臂戰操), 이 살인팔비전조는 이같이 단지 인체만으로 적을 살상하는 무공이 었는데 그 위력은 실로 끔찍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점의 내공(內功)이 없어도 전개할 수 있음은 둘째치고, 이 살인 팔비전조에 의해 살해된 사람은 그야말로 야수에 찢긴 듯 처참한 형상으로 죽어가지 않을 수 없었으니 진정 잔혹한 무공인 것이다. "으음.... 이 광인의 일기가 흑궐에 전해지지 않은 것은 실로 다행이로군요." 유빙이 문득 눈을 들었다. 차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황위찬탈의 치밀한 계략은 지 금이라도 황위찬탈을 노리는 인물에게 훌륭한 악마의 병법서가 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 광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무공 들이 흑궐에 전해졌다면 지금쯤 흑궐은 천하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빙은 차손의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러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광인의 일기중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보다도 그 일기가 적혀있는 금첩 자체이다 " 차손의 이어지는 말에 유빙이 의혹을 느낀 듯 눈을 들었다. "그 금첩 자체가 바로 엄청난 기병(奇兵)인 것이다. 천하에서 가 장 강한 재질이라는 화룡백금철모(火龍白金鐵母)로 만들어진 하나 하나의 금척에는 사망도첩(死亡刀帖)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사망도첩(死亡刀帖)!" 차손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마흔아홉 개의 금척 제일 뒷부분을 읽으면 알겠지만 단언하건대 그 사망도첩의 위력을 능가할 기병은 천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차손의 입에서 이러한 경탄에 가까운 말이 튀어나온 자체가 놀라운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마흔아홉 개의 금척 하나하나가 가공할 기병이기도 하지만 금척들의 양 끝에는 각기 작은 홈이 파여있어 두 개 또는 세 개, 원한다면 마흔 아홉 개 전부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어 장장 사 장 구 척(四丈九尺)에 이르는 지상에서 가장 긴 면도(面刀)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금척들을 병렬(竝列)로 연결시키면 하나의 우아한 살인금선(殺人金扇)이 될 수도 있단다." 차손은 사망도첩에 대해 실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헌데 돌연 그는 몸을 홱 돌려 야작 율한극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지 않는가? "내놔!" "뭘....?" 야작 율한극이 차손의 돌연한 태도에 움찔해 하며 더듬거렸다. 뻑! 찰나, 차손의 하나 뿐인 오른팔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번 뜩이며 야작 율한극의 머리를 강타했다. "어이쿠!" 야작 율한극은 뭐가 날아온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비명성을 터뜨리며 나뒹굴었다. "내놔?" 차손이 나가 떨어진 율한극의 전면에 내려서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헤헤...." 율한극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의 입에는 이 순간 어색한 미소만이 감돌 뿐 전혀 분노한 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허나 그의 눈만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제기....! 이 놈의 늙은이 앞에 서기만 하면 도대체가 내가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으니 참 알 수가 없는 노릇이구나!' 야작 율한극이 내심 투덜거리며 주섬주섬 자신의 품 속에서 온갖 기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헌데 그가 자신의 품 속에서 주섬주섬 꺼내 차손의 손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은 바로 악마의 표본실에 비 장되어 있던 온갖 기물들이 아닌가! 율한극이 품 속에서 꺼내는 기물들의 분량은 실로 엄청났다. 대략 잡아도 오십여 점은 넘을 것이다.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이 품 속에 모두 들어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분량인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꺼내기 시작해, 심지어 신발 속에서까지 온갖 기물 들이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율한극은 단 한점이라도 속였다가는 차손에게 또 다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할 기회를 주게 됨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그야말로 깨끗이 적전마람에서 슬쩍한 기물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다냐?" 잠시 후 율한극의 손이 멈춰지자 차손이 무서운 눈으로 질문을 던 졌다. 율한극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손 역시 대략 기물들을 훑어본 후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다음 순간 차손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이상한데....?"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손이 일순 다시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이 썩은 돼지! 너 또....!" 율한극이 순간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글쎄 그것이 참 이상하단 말입니다. 난 그러고 싶지 않 은데 그만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니...." 율한극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다시 품 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내밀었다. 헌데 그것은 적전마람의 기물이 아니라 차손의 물건이었다. 놀랍 게도 율한극은 차손에게 물건을 내주는 그 순간 차손의 품 속을 슬쩍 뒤졌던 것이다. 차손이 황급히 자신의 물건을 빼앗아 품 속에 갈무리했다. "썩은 돼지! 네놈은 참으로 신기한 손을 지닌 듯 하구나."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네 손을 한 번 만져봐도 되겠느냐?" 율한극이 미소했다. "아. 물론 만져 보아도 됩니다." 율한극은 자랑스럽다는 듯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차손이 야작 율한극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관찰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눈빛 깊은 곳에 왕성한 탐구욕(探究慾)이 번들거 리고 있었다. '윽!' 그 눈빛을 발견한 율한극은 문득 등골에 소름이 돋음을 깨달았다. 그는 혼비백산하여 황급히 자신의 손을 차손의 손에서 빼냈다. 차 손의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악! 이 미친 늙은이가 또 무슨 생각을...." 그는 기겁을 해서 뒤로 물러나며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헌데 그 손이 저절로 미미하게 떨리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참으 로 기이한 현상이었다. 율한극의 의사(意思)와는 상관없이 손이 저절로 미미한 진동을 일으키며 경련하고 있었다. 야작 율한극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이 미친 늙은이! 내 손을 어떻게 한 것이냐?" "끽끽.... 끽!" 차손이 율한극의 무섭게 분노하며 절망하는 표정을 바라보며 끼득 끼득 웃기 시작했다. "썩은 돼지! 나는 네 손을 조사해본 것에 불과하다. 그 손의 신경 계통에 내 명령을 전달해 본 것 뿐이니 너무 안달하지 마라. 곧 괜찮아질 것이니 말이다. 헌데...." "....?" "네 놈의 손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더구나." "....?" "그 손은 과연 대뇌(大腦)의 영향력이 없어도 독자적으로 움직이 고 있었다. 타고난 신투(神偸)의 손이랄까? 네 놈에게는 실로 아 까운 보물인 것이다." 율한극이 멍청해졌다. 조금 전에 적전마람내의 기물들을 훔친것에 대해 그저 변명하기 위해 한 말인데 차손이 그 말이 맞다고 하자 그 자신도 멍청해진 것이다. "너, 그 손을 이 표본실에 남기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 아니나 다를까? 차손의 입에서 실로 공포스러운 제의가 흘러 나왔다. '왁!' 율한극이 하얗게 질려 번개같이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실 로 너무 서두르느라 하나의 석단을 그대로 받으며 나뒹굴었다. 와르르.... "어이쿠!" 야작 율한극의 입에서 저절로 비명성이 나왔다. 헌데 있는 인상을 다 쓰며 몸을 일으키던 그의 눈이 돌연 찢어질 듯 부릅떠지지 않는가! <황성야야(皇城夜爺) 율여립.> 그 자신이 충돌했던 석단 아래의 글귀가 그의 눈으로 파고 들었던 것이다. 율한극은 눈을 들어 무너질 듯 했던 예의 석단의 위로 천천히 눈을 돌렸다. 석단의 위쪽에는 다른 표본들과 달리 완벽한 한 인간의 유체(遺 體)가 중후한 풍도로 가부좌를 튼 채 좌화(坐化)해 있었다. 단아 한 용모에 귀족적인 인상, 좌화해 있는 인물의 풍도는 야작 율한 극의 풍도와 어딘가 비슷한 데가 많아 보였다. "오오...." 야작 율한극의 입에서 감격에 떨리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그는 벌떡 일어나 예의 유체를 향해 천천히 구배(九拜)를 올리기 시작했다. "오오....! 이 우매한 놈에게 드디어 위대한 조사님의 유체를 배 알할 영광을 주시다니....! 신이여, 감사하옵니다!" 야작 율한극은 격동의 눈물을 흘리며 구배를 마쳤다. 학거비와 유 빙, 그리고 차손이 율한극의 행동에 눈을 돌렸다. 유빙의 눈에 한 가닥 의혹이 솟았다. "황성야야 율여립은 대도(大盜)이기는 했으나 의적(義賊)이 아니 오? 결코 나쁜 인물이 아닌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맞는 말이다. 허나, 황성야야는 스스로 이곳에 안치되기를 원했었다." "....?" "이유는 이곳에 표본(標本)된 구백구십구 명의 범죄자들과 자신과 의 서열을 비교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유빙의 눈에 고소가 스쳤다. 신투(神偸) 역시 범죄자임에는 틀림없는 일...., 황성야야 율여립 은 스스로 범죄자임을 자처하며 이곳에 찾아와 다른 범죄자들과의 서열을 따지고 싶어했다 함이니 어찌 담담할 수만 있으랴. 차손이 문득 심통 사나운 미소를 머금으며 율한극을 힐끔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런 멍청한 후예가 찾아올 것 을 깨닫고 그 후예가 천종예가와 인연을 맺는 것을 바란 때문인지도 모르지!" 야작 율한극의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그, 그말이 사실이오?" 차손이 빽 소리쳤다. "이 멍청한 돼지야! 네 선조의 유체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것 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렇군요." 야작 율한극이 더욱 자부심을 느낀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황성야야같은 훌륭한 인물에게서 어떻게 너같은 썩은 돼지가 태 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구나." 차손이 더욱 이죽거렸다. 허나 율한극은 태연히 대꾸했다. "아무리 새것이 뛰어나다 해도 옛것보다는 못한 법이오." 느닷없이 진중한 음성, 율한극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차손이 놀 랍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이어 감탄한 듯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말을 생각해낼 수 있었지?" "책에서 나오는 말이오." "그럼 그렇지!" 율한극의 말에 차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끼득끼득 웃으며 슬 그머니 유빙을 향해 고개마저 끄덕이지 않은가? 율한극은 그제야 또 자신이 농락당했음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늙은이! 날 어린애처럼 가지고 놀다니....!' 그는 돌연 퉁명스러운 말투로 차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위대한 조사께서 나같은 후예가 찾아올 줄 알았다면 분명 유물을 남겼을 터, 헌데 왜 유물은 보이지 않는 것이오?" "내가 보관하고 있으니까!" "주시오." 차손이 짓궂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 모 습은 마치 치기를 벗어나지 못한 일개 어린애의 그것이었다. "싫다! 허나...., 네가 나와 한 가지 내기를 해서 이긴다면 지금 당장 갖다 줄 수도 있지." "내기?" "말이 내기이긴 하지만 사실 네 놈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내기이다." 율한극은 솔깃해졌다. "어떤.... 내기인데....?" 차손이 율한극의 우아한 수염을 심히 아니꼬운 눈길로 응시했다. "그 버릇없는 수염을 내가 자르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자르지 못 하면 네가 이기는 것이다." "내.... 수염?" "하지만 너는 이 드넓은 석실 아무데나 숨어도 되지만 난 이 자리 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게 이 내기의 조건이다. 어떠냐?" 자신의 턱 수염을 소중히 움켜쥔 율한극의 눈이 일순 반짝 광채를 발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 자리에 그대로 있고 난 얼마든지 숨어도 된다 이말이오?" "그렇다!"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던 율한극의 얼굴에 뛸 듯한 기쁨이 어렸다. '이 미친 늙은이가 드디어 돌았구나! 사람이 무슨 재주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수많은 석단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수염을 자를 수 있단 말인가?' 순간, 차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테냐? 아니면 포기할테냐?" "하겠소!" 율한극이 서슴치 않고 대꾸했다. "그럼 숨어라." "절대로 약속을 어기면 안되오!" "걱정말고 어서 숨기나 해라. 이 수염기른 돼지야!" 휘익! '두고 보자. 이 미친 늙은이!' 율한극은 내심 앙심을 다지며 미로같이 얽힌 석단 사이를 요리조 리 몸을 날려 빠르게 사라져 갔다. 잠시 후, 율한극의 신형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순간 차손의 눈 이 가늘게 좁혀졌다. "숨었느냐?" "숨었소." 어디선가 들려온 음성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기실 이 순간 율한극은 차손이 보이지 않는 석단 밑에서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미친 늙은이! 무슨 수로 보이지 않는 나의 수염을 자르겠다고....?' 율한극은 수염을 소중하게 감싸쥔 채 깊숙이 몸을 웅크렸다. 자신 의 승리를 확신하는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채..... ■ 팔왕예조 제1권 제8장 표본실의 두 개골(頭蓋骨) ━━━━━━━━━━━━━━━━━━━━━━━━━━━━━━━━━━━ ① "이리줘봐!" 차손이 유빙의 손에 들려있던 사망도첩을 빼앗듯 가로챘다. 이어 그의 시선은 율한극이 사라진 쪽으로 천천히 옮겨졌다. "잘 보아라. 내가 왜 사망도첩을 사상최강의 살인기병이라 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게 될 것이다." 촤르르륵! 다음 순간 사망도첩이 눈부신 속도로 차손의 손을 떠났다. 접혀져 포개져 있던 마흔아홉 개에 달하는 금척들, 그 첫번째 금척이 쏘 아지며 그 뒤에 연결된 두번째 금척이 뻗어나가고, 다음 순간 순 식간에 마흔아홉 개의 금척이 차례차례 연결된 채 허공을 치달리 기 시작했다. 촤악! 촤촤촤악....! 마흔아홉 개에 달하는 얇디 얇은 금척들이 파도가 밀려 나가듯 지 면과 한 치 간격을 두고 끝없이 밀려 나가고 있었다. 하나의 금빛 해일이 수평선 위를 치달리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금빛 해일들 이 계속해서 밀려나가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것은 실로 일대 장관이었다. 헌데, 지면과 한치 간격을 두고 밀려나가던 예의 사망도첩이 한 석단에 가로 막힌 순간, 사망도첩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인 양 방향을 꺾어 계속해서 뻗쳐가고 있지 않은가! 아아, 수없이 석단에 의해 가로 막혔으나 사망도첩은 그때마다 유 연하게 방향을 꺾어 거침없이 벽면을 타고 미끄러져 나가고 있다. 촤르르륵.... ㅊ! 촤르르륵.... 촤.... 악! 흡사 그것은 길이 오십여 장에 달하는 은사(銀蛇)가 갈짓자로 갈 대숲을 헤치며 전진해 가고 있는 듯한 광경으로서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놀라운 광경이었다. 사십구 개의 금척을 이어놓은 것이 바로 이런 묘용이 있을 줄실로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야작 율한극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미친 늙은이, 이젠 꼼짝없이 황성야야의 유품을 내놓아야 할 것 이다. 무슨 수로 이곳에 숨어 있는 내 수염을 자른단 말인가!' 헌데 바로 이때였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스스슥....! 그의 등 뒤에서 미약한 기음이 들려온 것이다. 야작의 고개가 빠르게 돌려졌다. "헉! " 순간 그의 입에서 경악에 잠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매미 날개처 럼 얇디 얇은 금척이 어느새 바로 자신의 발밑까지 뻗쳐와 있지 않은가! '사망도첩....!' 그것을 느낀 순간 금척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한 마리 독 사가 고개를 쳐드는 듯한 형태로 위로 솟아 오르며 그의 얼굴을 스쳐갔다. 삭! 미세한 기음이 터지는 순간 율한극의 발치로 잘라진 수염이 눈발 처럼 흩날렸다. 율한극이 평생을 소중스럽게 다듬어 온, 자신의 생명처럼 여겨오던 바로 그 수염이 몽땅 잘려나가고 만 것이다. 촤르르르륵....! 촤아악! 그 순간 사망도첩은 원래대로 회수되기 시작해 차손의 수중에 돌아와 있었다. "썩은 돼지야! 그만 나오너라!" "....!" 잠시 후 한 석단 밑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야작이 모습을 드러냈 다. 몽땅 잘려나간 수염을 감싸쥔 채 울상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 은 실로 가관이었다. "큿큿! 나이도 어린 놈이 건방지게 나보다 멋있는 수염을 기르고 있어 눈꼴이 시었는데 이젠 제대로 된 것 같군." 차손이 키득거렸다. 허나 아무도 차손을 따라 웃는 사람은 없었 다. 사망도첩이란 살인기병의 놀라운 위력을 직접 눈으로 목도한 때문이었다. 차손이 문득 유빙을 응시했다. "사망도첩의 무서운 점은 제 아무리 완벽한 밀실(密室)이라 해도 단 한 치의 틈만 있으면 파고들어 그 안의 인물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겠군.... 요."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손의 말을 방금 전 충분히 실감했던 것이다. 문득, 유빙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초령왕 여율령은 두뇌와 무공 등 모든 방면에서 악마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인데 그런 자가 어떻게 백찰무경의 손에 붙잡혔는 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차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당시 여율령이 사망도첩을 사용하였더라면 결코 적전마 람의 모든 것을 통달한 내가 살아 있었다 해도 그를 사로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 "허나 그는 끝내 사망도첩을 사용하지 않았다." "....?" "그것은 맨 처음 사망도첩을 만들고 사망도첩에 광인의 일기를 기 록할 때 자신에게 한 맹세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한 맹세?" "여율령이 남긴 광인의 일기는 곧 천하정복의 성장기록! 그 광인 의 일기가 종결됨은 곧 여율령이 천하정복을 이루었다는 것을 뜻한다." "......" "하지만 여율령은 그 광인의 일기를 끝낸 후에야 사망도첩을 병기 로 사용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던 것이다." "왜 그런 짓을....? 사망도첩을 병기로 사용했더라면 천하정복이 더 쉬웠을 것이 아닙니까?"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황이 된 후 자신의 이중생활에 대한 모든 기록이 담겨 있는 사망도첩의 일기를 적들에게 읽힌 다음, 그 제황의 일 기나 다름없는 사망도첩으로 상대를 죽여 그들이 까무라치게 놀라 며 죽는 모습을 즐기려 했던 것이다." "....!" "한 마디로 사망도첩을 제황의 일기가 기록된 제황의 기병으로 만 들어 모든 적들을 죽이는 변태에 가까운 쾌감을 만끽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음....!" 유빙이 경악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초령왕 여율령은 자신이 제황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일기로 기록하고 그 희귀한 제황의 일기가 기록된 도첩을 병기로 삼아 모 든 적들을 죽이겠다는 기발한 착상에 이른 것이었군. 실로 악마의 제황다운 생각이다!' 유빙은 야릇한 기분을 느끼며 새삼 사망도첩을 세심히 살펴나갔 다. 사망도첩은 모두 마흔아홉 개의 면척으로 이루어 있었다. 부 챗살 정도의 넓이에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매미 날개처럼 얇은 예 의 금척들은 그 자체가 가공스러운 악마의 귀계(鬼計)가 하나하나 수록된 악마의 술법서(術法書)일 뿐더러, 또한 지극히 화려하면서 도 더할나위 없이 우아한 살인기병이었는데.... 사망도첩을 세심히 살피던 유빙의 눈이 문득 이채를 발했다. 사망 도첩을 이룬 마흔아홉 개의 면척 중 세개 금척에만 아무 글귀도 적혀 있지 않았다. '세 개가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천하를 지배하기 직전이었다는 뜻인데....' 순간, 그의 눈이 재차 강렬한 이채를 발했다. 사십구 개의 면척 중 가장 마지막 면척에 깨알같은 글씨가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사망도첩의 끝부분에는 작은 홈이 파여져 있어 두 개 또는 세 개, 원한다면 마흔아홉 개 전부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다. 전부 직렬로 연결시킨다면 그 전체 길이가 무려 사장 오척에 이르는 천 하에서 가장 긴 검이 될 것이니 이 사망도첩은 곧 나 여율령의 신물(信物).... .... 중략(中略) ....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나의 완벽한 이중생활을 완결지을 그날이...., 나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 후 나는 나의 이중생활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는 이 사망도첩 하나하나로 적들을 죽일 것이니, 그들이 나의 사망도첩에 죽어가며 나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표정 을 상상하면 지금부터 벌써 몸이 떨릴 정도이다. ...... 흑궐(黑闕) 내가 만들어 놓은 지하무림은 이 사망도첩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이고 이 사망도첩이 가공할 살인병기로 쓰이고 있는 그 순간 만 큼은 나 여율령 또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나 진배가 없음이다.> "희대의 광인 여율령다운 글이군!" 유빙은 고소하며 시선을 옮겼다. 광인의 일기, 그 마지막은 사망도첩을 사용해 펼치는 사십구개의 초식(招式)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천홍사영비(天紅死影飛).> 제일식(第一式), 파일락 가인루(佳人淚). 한 개 꽃잎이 떨어짐은 미인의 눈물, 그 아름답고 처연함은 단장(斷腸)의 고통이니...., 한 개 금척이 미풍을 타고 흐른다. 쾌중쾌(快中快)! 쾌의 극치를 추구하는 초식으로 이보다 빠른 초 식은 결코 존재치 않는다. 무형(無形)의 대기를 가르며 금빛 광망이 번뜩이매 단장의 고통이 그대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제이식(第二式), 쌍편비(雙片飛) 사성고(死聲高). 두 개의 꽃잎이 서로를 부르니, 하늘과 땅이 노래로 답한다. 쏘아지고, 휘어지고, 솟아오르며, 내리 꽂히는, 또 그런가 하면 두 개의 금척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회전하며 적을 도륙(屠戮)한다. 각도와 방향을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환묘(幻妙)한 초식, 두개의 금척이 허공에 뿌려지는 순간 천지엔 죽음의 비명만이 가득하리라. .... 제칠식(第七式), 칠척천사(七尺天射) 태양관(太陽貫). 일곱 개의 금척으로 태양이 꿰뚫리고.... 제구식(第九式), 구화천교(九花天橋) 채홍비(彩紅飛). 꽃의 다리(花橋)가 천공(天空)에 걸리매 피의 무지개가 허공을 난다. .... 제이십일식(第二十一式), 사일(射日), 화화파천(花花破天). 수천수만 개의 칼날이 한꺼번에 퍼부어지는 듯한 초식으로 말 그 대로 폭우와 같은 초식이다. 상대는 반드시 죽는다. 폭우를 피할 능력을 지니지 않은 한..... .... 제사십구식(第四十九式), 화분분(花紛紛) 월백(月白) 설백(雪白) 천지백(天地白). 사망도첩 최후최고의 초식, 일천 개의 꽃잎이 일시에 휘날리니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천지도 희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절대독존(絶代獨尊)의 초식. 사십구 개의 금척이 일시에 뿌려진다. 그 위력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 天下唯我獨尊), 방원 삼백 장 안의 모든 생물체는 핏덩이로 화해 산화(散華)된다. 번뜩이는 섬광과 지옥의 재현 속에서..... 이 최후초식은 또한 탄결(彈結)과 밀결(密結)로 나뉘어 공격초식 과 방어초식을 겸하고 있었다. "으음...., 실로 가공스러운 위력이다. 헌데 살인금척(殺人金尺) 을 꽃잎에 비교하다니 악인치고는 제법 운치가 있군." 유빙이 은은한 감탄성을 흘리며 사망도첩에서 시선을 뗐다. 그의 시선은 차손에게로 옮겨졌다. "여율령이 마본제일호(魔本第一號)였다면 사본제일호(邪本第一號)도 있겠군요. 차손?" 차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따라오너라." 잠시 후 차손은 일행을 한쪽으로 몰고 갔다. 마치 악마의 표본실 전체를 이분(二分)한 듯 경계가 지어져 있는 석실의 반대편 중앙 에 거대한 석단 하나가 동떨어져 외로이 서 있었다. 헌데, 섬뜩하지 않은가! 파르스름한 불빛을 받아 소름끼치도록 사이한 광채를 발하고 있는 인간의 두개골(頭蓋骨) 한 개, 놀랍게도 석단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살이라고는 단 한점도 붙어 있지 않은 두개골이었던 것이다. <천하제일사교(天下第一邪敎), 오두미교(五斗米敎)의 교주(敎主), 사성교조(邪聖敎祖) 동맥(仝陌).> 예의 석단 아래에는 한 줄의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세 사람의 눈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무릇, 종교(宗敎)란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성스럽고도 가장 막강한 존재이다. 불교만 하더라도 지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세력이나 제국(帝國)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의 교 조(敎祖)라 할 수 있는 불타(佛陀)는 그 어떤 성인(聖人)이나 황 제(皇帝)와도 견줄 수 없는 유일무이존(唯一無二尊)의 위치를 구 가하고 있다. 팔백 년 전, 자칭 하늘에서 불타를 거느리는 만신의 제왕 천상제 (天上帝)라 외치며 나타난 한 인물이 있었으니...., <사성교조 동맥.> 상상할 수도 없는 기괴무비한 사술(邪術)로 민심을 현혹시켜 오두 미교(五斗米敎)를 지상제일의 종교로 인식시켰음은 물론, 천만교 도(千萬敎徒)를 졸지에 광신도(狂信徒)로 만든 인물이 바로 그였다. 당시 정사마(正邪魔)에 관계없이 전 무림과 황궁(皇宮), 하다못해 종계(宗系)의 인물들까지 힘을 합쳐 그를 없애려 했으나 끝내 실 패했고 말년에 그는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전해지는데..... "동맥! 저 놈이야말로 인간이 탄생된 이후 가장 나쁜 놈이다." 차손이 분개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시 저 놈을 잡기 위해 사상 처음으로 나의 선조인 차백이란 분 이 출도하여 저 놈을 이곳으로 끌고 왔다." "....!" "만약 당시 저놈을 잡지 못했다면 천하의 만백성은 물론 중(僧), 도사(道士), 심지어 황제까지도 저놈을 천상제(天上帝)로 떠받드 는 광태(狂態)를 연출했을 것이다." "호....! 사성교조의 위력이 그 정도였습니까?" "말도 마라. 저놈은 어찌된 놈인지 자연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 아 끌고 굴복시키는 마력(魔力)을 지닌데다, 저놈이 웃으면 자신 도 모르게 기뻐지고, 저놈이 울면 따라서 슬퍼지는 것은 물론.. .." "....!" "저놈은 어떤 거짓말을 해도 사람들에겐 사실처럼 느껴지는 실로 믿기지 않는 재주를 가진 놈이었다." "....!" "당시 저놈을 포위했던 사백 명의 초강고수가 놈의 일장설교에 녹 아나 저놈의 광신도가 되고, 저놈이 거느렸던 사천궁녀가 놈이 실 종되자 연모의 정을 이기지 못해 떼지어 죽는 등, 실로 저 놈의 마력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차손은 생각할수록 열이 뻗치는지 이제 침까지 튀겨가며 말을 잇고 있었다. "더우기 그 놈은 정신의 힘을 이용하는 모든 사술(邪術)을 집대성 한 지상최강의 사종(邪宗)! 그놈을 잡으려던 백찰무경이 오히려 풍지박산이 날 일보 직전에 당시 적전마람의 람주(嵐主)였던 차백 이란 분이 나서서 가까스로 놈을 이곳으로 끌고 왔던 것이다." "실로 대단했었나 보군요." "대단하다마다...., 아마 사이한 면에서만 보면 이 놈을 따를 놈 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어쩌면 여율령 보다도 더욱 골 치 아픈 놈이 바로 이 놈일 것이다." "....!" "난 애초부터 이놈의 사술에 정나미가 떨어져 쳐다보지도 않았지 만 네가 익혀두면 쓸모가 많을 것이다." 유빙이 흠칫했다. "사성교조 동맥의 사술을....?" "그렇다. 네 녀석은 얼굴이 반반하니 앞으로 끝없는 여난(女難)이 몰아칠 것이다. 허나 저놈의 사도비전(邪道秘傳)을 익혀두면 제 아무리 골치 아픈 계집이라도 자유자재로 울렸다 웃겼다 할 수 있 고, 또 사이한 놈을 다룰 때 아주 적격일 것이다." 차손은 귀찮다는 듯 등을 돌렸다. 허나 지금의 유빙이 어찌 꿈엔 들 상상했으랴! 사성교조 동맥이 남긴 사도비전의 위력과 방대한 묘용은 능히 지상을 뒤덮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② 유빙의 일행은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을 지나 한 곳에 당도하고 있었다. <천예은장주(天藝隱藏州).> 입구 상단에 걸린 거대한 현판이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고 있는 곳 이었다. 차손을 제외한 세 사람은 일순 멍청해졌다. 천예은장주는 시야가 탁 트인 하나의 평원을 연상케 할 정도로 광활한 석실이었는데.... ...... 없었다. 광활한 평야를 방불케 하는 석실 전체가 그야말로 개미새끼 한 마 리도 없이 말끔히 비어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 바닥만이 은은한 은빛 광채를 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닥 전체를 뒤덮은 하얀 은빛 유액(乳液)에서 발산되는 광채였다. 석실 안을 기웃거리던 야작이 의혹의 눈을 빛냈다.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바로 너같은 썩은 돼지들의 신체를 개조시키는 악마의 수련장(修練場)이다." 차손은 기다렸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악마의 수련장.... ?" 야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차손의 시선이 문득 유빙을 향했다. "무공을 익힐 생각이겠지?"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 질문, 유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차손!" "더 이상 가볼 필요가 있겠느냐?" "......" 유빙은 침묵으로 긍정을 표시했다. 차손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 "그럼 가자." 순간, 유빙의 검고 조용한 눈이 차손을 직시했다. 그리고 단호한 음성...., "차손! 나는 악마의 혈청(血淸) 사형종혈(死刑宗血)을 원하고 있습니다." 순간, 차손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뭐? 사형종혈을....?" 그는 갑자기 유빙을 향해 노발대발 욕설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미친 놈! 끝내 그 썩은 물을 마시려 하다니.... 바보같은 놈! 그 것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명인(名人)이 될 수 있건만 굳이 살인 자가 되려 한단 말이냐? 도대체.... 에이 멍청한 놈!" 유빙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욕설의 파편을 고스란히 맞고 서 있었 다. 눈(眼), 그 검고 우수로 가득 찬 촉촉히 젖은 눈을 망연히 석 실 저편에 던진 채...., 그 모습을 본 차손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도 마음이 아픈 듯 유빙을 슬며시 외면했다. '가여운 놈, 네놈의 한(恨)이 그 저주받은 살인자의 피를 마셔야 될 정도로 깊었단 말이냐?' 잠시 후, 차손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네놈이 원한다니 할 수 없지." 이때였다. 의아한 얼굴로 유빙과 차손의 모습을 지켜보던 야작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저...., 어르신네! 악마의 혈청 사형종혈이란 게 무엇입니까?" "너같은 돌대가리는 알 필요 없어!" 차손의 사나운 힐책이 야작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이어 차손은 유 빙을 안아들고 휭하니 천예은장주 안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그 뒤를 학거비가 묵묵히 따랐다. 야작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빌어먹을 늙은이! 내가 말만 꺼냈다 하면 지랄이야....!' 유빙의 일행은 하이얀 은빛 유액이 깔린 천예은장주 안으로 들어섰다. "어? 이게 왜 이렇지?" 헌데 첫번째 걸음을 옮기던 야작이 놀라 외쳤다. 그의 발바닥이 은빛 유액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는 것이다. "끙!" 야작은 죽을 힘을 다해 몇 걸음을 간신히 떼어 놓았다. 등줄기에 땀이 솟구쳤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헌데 차손과 학거비는 여 유만만하게 저만큼 앞에서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저...., 저 괴물들은 발에 기름을 발랐나?" 야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어 다 시 한 번 죽을 힘을 다해 걸음을 떼어 놓았다. 허나 그는 단 두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파김치처럼 늘어지고 말았다. 주르륵....! 이마에서 주먹만한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드디어 야작은 포기하고 말았다. "같이 가요!" 그의 애타는 고함이 천예은장주를 울리는 순간, 저만큼 앞서가던 차손이 몸을 홱 돌려 날아오더니 냅다 야작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 썩은 돼지! 멍청한 종자 놈! 걷지도 못하다니....!" 퍽! 빡! 퍼....억! 야작은 그야말로 호화찬란하게 얻어 터졌다. 헌데, 한대씩 얻어 터질 때마다 야작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지 않은가? "어이쿠!" 이윽고 야작은 학거비가 서 있는 곳까지 쉴 사이 없이 난타당하며 당도했다. 파김치처럼 늘어진 야작의 귀에 차손의 음성이 비수같이 꽂혔다. "잘 들어둬. 이 썩은 돼지야. 넌 이제부터 이곳에서 나에게 지금 처럼 집중적인 지옥수련을 받아야 해." "으으으...." 무자비하게 난타당한 야작은 대답도 못한 채 싫다는 듯 고개만 저었다. "싫어도 할 수 없어. 네 선조가 직접 부탁한 것이니까." 차손이 매몰차게 말했다. "으으으....!" "똑바로 기억해 둬! 네가 앞으로 이곳에서 배워야 될 것은 제대로 숨쉬는 법부터 시작해서 제대로 보고 걷는 것 등, 한 마디로 네놈 의 잃어버린 본능을 되찾는 것이다." "으으으...." "인간은 원래 그 어떤 야수보다도 강인한 체력과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헌데 네 놈처럼 술과 고기 등을 먹으면서부터 몸이 썩기 시작한 것이다. 너는 이제 이곳에서 썩어버린 몸을 태초의 순수한 인간의 몸으로 개조시켜야 한다." "....!" "진정한 무예란 머리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인체의 각 근육들이 스스로 반응, 반사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터득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의식작용 이전에 반사작용을 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진 자만이 진정한 무도인(武道人)이라 할 수 있다." "......" "예를 들어, 상대의 검이 날아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대뇌에 전달하면 대뇌가 팔에 검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려 팔이 움직이는 일련의 행동을 의식작용(意識作用)이라 한다. 바로 네가 지금 지 니고 있는 몸의 상태이지." 어느덧 율한극의 입에서 나오던 거부의 신음성은 쑥 들어가 있었 다. 그의 시선은 호기심과 탐구의 빛을 발한 채 차손의 입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초의 인간처럼 깨끗한 몸이 되면 눈이 확인하고 대뇌가 알아 차리기 전에 팔이 먼저 움직이는 반사작용의 능력을 갖게 된 다. 그 속도의 차이는 자그마치 수십배에 달한다." 일순, 야작 율한극의 눈이 바짝 기광을 발했다. 처음에는 그저 멍 청히 듣고 있었는데 차츰 차손의 말이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박 히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 네놈은 인주점액(人蛛點液)에 달라붙어 걸을 수 없었는 데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나에게 맞는 순간 인주점액의 성분 을 네놈의 발이 스스로 느껴 반사작용을 한 때문이다. 너는 지금 부터 이곳에서 그 반사작용의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아....! " 야작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차손의 말은 간단했으나 실 로 엄청난 오의(奧義)가 그 안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야작은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네! 이 못난 후배가 미처 어르신네의 높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잘 좀 이끌어 주십시요." 차손은 한 팔을 장난스레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헌데, 너 뭐 좀 좋은 거 가진 것 없냐? 나는 세상에 나가 본 지가 하도 오래 되어서...." 야작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서슴없이 품 속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차손은 쪼그리고 앉아서 야작이 꺼내놓은 것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허나, 고개를 든 차손의 얼굴에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별로 맘에 드는 것이 없는데 또 다른 것은 없냐?" "없는.... 데요." 야작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곤란한데....?" 야작 율한극의 눈가에 다급한 기색이 스쳤다. "그, 그럼 이것은....?" 그는 재빨리 소매 속에서 한 가지의 물건을 꺼내 차손에게 내밀었 다. 일순 차손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야작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꼬깃꼬깃 접어진 한 개의 서책(書冊) 이었는데, 표지에는 여인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옥방야화(玉房夜 話)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이게 뭐지?" 차손의 눈이 예의 왕성한 탐구욕으로 반들거렸다. "예! 미인도(美人圖)가 그려진 옛날 여인들의 이야기 책입니다." 차손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의 음성이 눈이 뜨여지는 것보다도 빠르게 튀어나왔다. "이거 나에게 다오." 순간 야작의 영활한 두뇌가 빠르게 회전되었다. '옳지. 가만 보니 이 미친 늙은이가 미인도에 약하군. 그래도 남자라고....' 허나 야작은 자신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느물스럽게 꼬리를 말았다. "저...., 그냥은 곤란한데...." 이번에는 차손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그럼 너에게 황성야야의 유물을 주마. 그러면 되겠지?" '이게 웬 떡이냐?' 야작은 기쁨으로 튀어나올 듯한 눈을 애써 억눌렀다. "어르신네께서 그러시다면야...." 휙! 순간 야작이 채 승낙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차손의 손이 미인도를 번개같이 낚아챘다. 이어 그는 밑도 끝도 없는 한 마디를 내뱉으 며 유빙을 안고 어디론지 몸을 날리고 있었다. "내 귀여운 아들을 천종비고(天宗泌庫)에 데려다주고 올테니 너희 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 어디로 가는 건가요. 차손? ... 적전금마옥(赤塼禁魔獄)으로 간다. - 적전금마옥....? ... 천종비고(天宗秘庫)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전금마옥을 반드 시 거쳐야 한다. 적전금마옥이 바로 천종비고의 입구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유빙과 차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들의 음성 만이 나직이 울려 오고 있을 뿐이었다. ③ <적전금마옥(赤塼禁魔獄).> 뚜.... 벅! 뚜벅! 음침한 불빛 속으로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유빙과 차손이 조 용히 지하계단을 밟고 있었다. 사방의 통로는 엷은 미백색의 화강 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는 석벽은 더욱 음산 하기만 했다. "아마 이곳은 처음이겠군." 문득 차손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헌데...., 이곳은 마치 감옥 같군요." 유빙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을 쓸어보았다. 그의 눈에는 의혹이 떠올라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생체실험을 위해 대기중이던 죄수들이 갇혀 있던 곳이지." "생체실험? 살아 있은 인간을 해부하기도 했다는 말입니까?" 유빙의 눈이 커졌다. 당연하지 않은가. 살아 있은 인간의 몸을 해 부하기 위해 범죄자들을 가두었던 곳이라니....! 차손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어쩔 수 없었다. 선(仙)의 수호자 백찰무경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는...., 허나 삼백 년 전부터 이곳은 비어 있었다. 백찰무경은 완벽해졌으니까!" "음....!" 유빙이 고개를 저었다. 허나 그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묵묵히 지하로 이르는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 지하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당도한 유빙의 눈이 커졌다. 아무도 없 는 텅빈 뇌옥(牢獄), 통로를 가운데로 하고 양 옆으로 굵은 철장 이 박혀 있는 뇌옥들이 줄을 잇고 있었는데 그 뇌옥의 전면 석벽 에 실로 거대한 글귀가 쓰여있지 않은가. 칙칙한 죽음의 냄새가 배어 있는 음습한 뇌옥의 벽면에는 실로 거 대한 글자가 쓰여있어 유빙의 눈을 찌를 듯 파고 들고 있었다. - 천종예가에 저주를! 신이여! 이 악마의 표본실을 파괴하소서! 한 글자의 크기가 사방 한자 정도, 한눈에 피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용되었던 죄수가 자신을 가둔 천종예가의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담아 자신의 피로 쓴 것이었을까....? 피로 물든 손바닥에 사무친 원한을 담고 쓴 듯한 울퉁불퉁한 거대한 글자는 벽 앞에 선 인간 의 혼을 뒤흔드는 박력을 지니고 있었다. 검붉은 자획(字劃)의 한 조각이 처절하게 눈을 파고 들어 유빙은 한동안 망연히 서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유빙은 예의 거대한 저주의 글밑에 깨알같은 작은 글귀가 쓰여져 있음을 발견했다. 유빙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작은 글씨들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떠그랄...., 나는 인간임을 포기한 인물이었다. 허나 내가 이곳 에 갇힌 얼마 후 부터 백찰무경의 개종자들이 나를 죽이지 않고 이곳에 가두어 잘 먹이고 편히 지내게 하는 것이 생체실험(生體實 驗)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안 그 순간부터 내가 인간임을 절실 히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가증스러운 일이었다. 가장 독종이 우리 악인들이라고 말하 지만 백찰무경의 개종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독종 이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도(醫道)를 더욱 증진시키고 수사학(搜査學)을 첨단으로 발전시키겠다는 미명 아래 살아 있는 우리들을 온갖 실 험 재료로 사용했다. 천하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한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인간이 아닌가!> "음....! 이 글을 쓴 자는 어떻게 하여 본가(本家)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을까?" 혈서를 읽어가던 유빙은 섬뜩함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꼈다. <천종예가의 독종들은 내가 얌전하고 그들의 말을 잘 따르자 나를 신임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실험을 도와주도록 부탁하였 고 조수(助手)로 기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나는 이곳에서 감금된 동료들이 생체실험을 위해 사육당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끔찍하게도 같은 동료 중 한 명이 그들에 의해 생체실험을 당하는 장면까지 목격하게 되었다. 천종예가의 놈들은 실로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생체실험 대상이 된 동료는 마혈(魔穴)을 제압당한 것이 아니었고 금침(金 針)에 당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실험대 위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그는 의식이 깨어 있었고 말까지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헌데 그 들은 살아 있는 동료를 그 자신이 내려다보고 있는 상태에서 분해 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한쪽 귀로부터 반대쪽 귀에 걸쳐 이마의 머리털이 난 부분 에 가로로 한 일(一)자로 세도(細刀)를 그어 내린다. 지혈을 해놓 고 벤 부분을 손가락 끝에 걸고 두정(頭頂)쪽으로 두피를 힘껏 잡 아 당기면 그대로 두개골이 노출된다. 그 두개골을 미리 준비된 활처럼 생긴 톱으로 썰어 갔다. 이렇게 해서 노출시킨 살아 있는 죄수의 뇌를 특수한 장치로 고정시키고 여러 부위에 온갖 자극을 주며 죄수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놀랍게도 동료는 그때까지 멀 쩡하게 살아 있었고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뇌의 어느 한 부분을 찌르자 의식이 없는데도 스스로 한 다리를 움직이는가 하면, 또 다른 곳을 건드리자 성대(聲帶)가 무의식적 으로 움직이며 괴이한 기음향을 내질렀다. 그래도 동료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겠다는 듯 의혹어린 눈빛일 뿐이었다. .... 중략(중략) .... 천종예가의 독종놈들! 그들은 엄숙하게 행동하며 오직 의도(醫道) 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는 듯 고매한 척 해도 어찌 인간이 인간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음....!" 유빙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발했다. 구구절절의 혈서에서 과 거의 모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백찰무경의 실험은 실로 가공스러운 성과를 성취하고 있는 듯했 다. 그들은 인체의 모든 역학(力學)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뚫고 있었다. 숱한 실험으로 인해 얻어진 성취들을 백찰무경의 수사력(搜査力) 을 증진시키는 보조학문(輔助學文)으로 적용시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백찰무경의 수사력이 증대되어 나간다면 감히 단언 하건대 백년 후 쯤에는 천하의 어떤 범죄자나 악인이라도 지상 위 에서 설 땅을 잃게 되고 말리라.> <아....! 지금이라도 나를 이 지옥같은 곳에서 풀어준다면, 그리 고 내가 용병시장만 찾을 수 있다면, 나는 이곳을 기왓장 하나 남 기지 않고 초토화 시킬 수 있을 것인데....! 용병시장(用兵市場)의 들개들을 동원하려 이곳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스러울 뿐이다.> 일순, 글을 읽어가던 유빙의 눈이 번쩍 이채를 발했다. "용병시장? 대체 그곳이 어떤 곳이길래 이리도 자신있는 글을 남긴 것일까?" <용병시장, 그곳의 힘이라면 능히 이곳을 없앨 수 있다. 용병시장 의 용병들개들이라면 능히 악마의 인체실험소인 악마의 표본실을 기왓장 하나 남기지 않고 짓뭉개버릴 능력이 있을 것이다. 허나, 오오.... 두렵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꿈일 뿐, 나는 머지 않아 먼저 나의 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실험대 위에 올려지게 될 것이다. 허나 나는 그들에게 나를 인체실험대상으로 주지는 않겠다. 스스 로 죽을지언정 그들에게 사육당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겠다. 이곳에 들어올 후인(後人)이여! 행여 그대가 이곳을 빠져나갈 기 회가 생긴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용병들을 동원하여 이곳을 가 장 처참히 파괴시켜다오. 우리 악인들과 범죄자들이 설 땅을 위해서라도.... .... 하략(下略) .... > 글은 계속되고 있었으나 유빙은 시선을 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씁 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쯧! 이 글을 남긴 인물들에게 미안하게 됐군. 이 글을 읽는 인물 이 분명 범죄자나 악인이라 생각하며 당부한 부탁이겠으나 나는 적전마람을 없앨 수 없으니 말이다." "허나, 용병시장인 용병육주비전(用兵六柱比廛)에는 한 번 필히 가보아야겠군. 이토록 이 자가 장담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힘이 상상불허의 엄청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니까...." 유빙은 용병시장이라는 곳에 큰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그의 마음 속에서는 한 가지의 결심과 함께 강렬한 투혼(鬪魂)의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다시 강호에 나선다면 가장 먼저 용병시장인 용병육주비전과 본 천종예가의 힘을 비교해 보리라." - 용병시장인 용병육주비전과 천종예가의 힘을 가장 먼저 비교해 보리라! 그때였다. 차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고 있느냐? 빨리 오지 않고. " 차손은 하나의 석벽(石壁) 앞에 서 있었다. 단 한치의 틈도 없이 매끈한 석벽이었다. 차손은 석벽을 가리켰다. "이곳이 천종예가의 무덤이랄 수 있는 천종비고의 입구이다." "이 석벽이 천종비고의 입구란 말입니까?" 유빙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적전마람은 실로 교묘하고 치밀하기 이를데 없는 이중구조의 건 축물이다. 밖에서 보기에는 하나의 건물이나 기실 이곳은 두 개의 전혀 다른 별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 "천하의 어떤 건축물의 달인(達人)이 이 건물의 수치를 정밀하게 측정한다 하더라도 이 벽 뒤에 또 하나의 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알아낼 수가 없다." 차손은 단언하듯 말했다. "설혹 이중건축물임을 알아차린다 해도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 나 역시...." "....!" "이 석벽은 분명 존재하고 있으나 입구가 없다. 오직 천종예가 후 인들의 정신감응(精神感應)에 의해 열리는 환상의 문이 존재할 뿐 이다. 곧, 천종예가의 후예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금단(禁斷)의 벽이 바로 이것이다." "......!" 이어지는 차손의 말에 유빙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내용인 것이다. "실로 신비한 기관축성(機關築城)의 진수라 할 수 있지. 바로 유 목탐수기라는 기예를 창출하신 천기재제 유묵이라는 분의 걸작품이니까." 천기재제 유묵!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오국(吳國)의 태백(太伯)이라는 지위 까지 올랐던 기관진식의 신. 그가 설계축성한 건축물은 하나같이 난공불락의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 유명하다. 허나 천하의 아무도 모르고 있으나 그의 최고걸작물은 천종예가의 종택(宗宅)이랄 수 있는 이 악마의 표본실 작전마람이었는데...., 마본관(魔本關), 이곳은 절대 외부에서 침입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안에는 또 하나의 건축물이 숨겨져 있었고, 설혹 마본 관이 파괴된다 하더라도 천종비고만은 영원히 세상에 드러나지 않 을 것이니 가히 신적인 건축물이 아니겠는가! 차손의 얼굴은 엄숙하게 변했다. "자! 이제 그만 들어가거라." 차손은 심연의 깊은 눈으로 유빙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유빙은 잘 알고 있었다. 천종비고 안에 잠들어 있는 천 종예가의 신비, 그 숙명의 끈 앞에 유빙은 서 있는 것이었다. 유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매끈한 석벽의 앞으로 서서히 다가 들었다. 순간 유빙은 자신의 몸이 어떤 것에 이끌리는 듯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앞을 가로막고 선 석벽 안에서 집요한 그 무엇이 유빙을 부르고 있는 느낌이랄까...? 우우우.... 우웅! 스르르르르.... 동시에 유빙의 몸은 마치 모래에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매끈한 석 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그것은 실로 환상적인 기관이었다. 천종예가 후예의 정신감응만이 열 수 있다는 환상의 문, 드디어 금단의 벽이 일천이백 년만에 그 신비의 문을 열고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의 가문 천종예가의 신비가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하늘의 예(藝)를 완성했다는 천종예가의 실체(實體)는 어떤 것이란 말인가....? ■ 팔왕예조 제1권 제9장 사랑(愛)의 기병(奇兵), 은라초의(銀羅草衣) ━━━━━━━━━━━━━━━━━━━━━━━━━━━━━━━━━━━ ① 천종비고(天宗秘庫).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금단(禁斷)의 성역(聖域). 그 천년신비(千年神秘)를 간직하고 있는 천종비고의 입구에 유빙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전신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슴 저 아래에서부 터 차오르고 있는 짙은 격정과 감회 때문이었다. '이곳이 바로 지난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본 천종예가의 모든 것이 비장되어 있는 가문 최대의 성지(聖地)란 말인가....!' 더할나위 없는 정적감....,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숙연해지는 장 엄한 분위기이다. 유빙의 눈이 천천히 천종비고의 전면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석판으로 옮겨졌다. <후대(後代)여! 이 천종비고는 본가의 성역으로써 후대는 단 한 번만 이곳에 들 수 있다. 바로 자신이 천수(天壽)를 다했다고 느 끼고 자신이 평생 터득한 학문을 이곳에 남기기 위해 드는 순간 뿐인 것이다. 허나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본가에서 세운 백찰무경에 최대의 위기가 닥쳤을 때, 그리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집대성된 본가의 모든 학문과 비기(秘技)가 필요할 때에만 이곳에 들어 본 가의 모든 비기를 취할 수 있음이다.> 거대한 석판에는 굵은 서체가 이끼에 뒤덮힌 채 새겨져 있었고 그 글귀를 대한 유빙의 눈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유빙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창랑왕, 그 자는 본가의 모든 능 력....,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본가의 전능이 합쳐지지 않고는 꺾 기가 불가능한 자입니다." 확신에 넘친 독백이 유빙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마치 선조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듯한 태도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왔고 그리고 이제 취할 것입니다. 악마보다 도 강한 본가의 모든 것을...., 그 위대한 힘을!" 유빙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린 후 천종비고 깊숙이 걸음을 옮겨갔다. 천종비고의 실체는 미로처럼 얽힌 길이 삼십여 장, 폭 삼 장여의 긴 석실이었다. 헌데, 미로처럼 얽혀 있는 회랑 형태의 통로 좌우에는 사방 두 자 크기의 벽장(壁欌)들이 쭉 연이어져 있지 않은가! 예의 벽장들 속에는 서책(書冊), 혹은 온갖 기물(奇物)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한눈에 한 개 벽장마다 한 사람씩의 유진(遺 塵)이 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벽장의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으며 그것은 곧 천종 예가라는 은자의 가문의 역사인 것이다. "이 빈 벽장들은 앞으로 있을 후대들이 자신이 터득한 것과 평생 얻은 것들을 남길 곳이로군." 천종비고의 입구에서 십여 장 거리에 달하는 벽장을 지나도록 그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벽장은 없었다. 유빙은 대번에 그 빈 벽장들이 앞으로의 후대를 위해 미리 만들어진 것임을 느끼며 걸 음을 빨리했다. 대락 이십여 장을 더 갔을까....? 그는 한 개의 벽장 위에 위패(位牌)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종성필(文宗聖筆) 유백상(劉栢象).> "....!" 유빙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문종성필 유백상은 천향화방을 세운 그 자신의 조부인 것이다. '할아버님....!' 유빙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비록 얼굴은 모르나 혈육에 대한 친밀감이 그의 가슴으로 밀려들 며 어쩐지 쓸쓸한 기분에 젖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유빙은 자 신도 모르게 문종성필 유백상의 모든 것이 남겨져 있을 것이라 추 측되는 벽장의 문을 열었다. 문종성필 유백상은 한 권의 얇은 서책(書冊)만을 남기고 있었다. <화유육법진해(畵有六法眞解).> 유빙이 고개를 갸웃했다. "화유육법이라면 화도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익 히는 기초적인 화예인데 어째서 이런 기초적인 것을 이곳에 남기신 것일까....?"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서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 화유육법 제일법(第一法), 응물상형(應物相形). ....화상(畵像)을 자신의 마음 속 깊이 받아 들인다. 이는 곧 그 리고자 하는 대상(對相)의 생명을 느껴야 함이니.... 어린 시절 수십 번도 더 익혀왔던 화유육법을 새삼 조용히 읽어 내리며 감회에 젖어가던 유빙의 눈에 문득 강렬한 이채가 솟구치 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화도를 논한 것이 아니다." 유빙은 순간적으로 뇌리 가득히 자리하고 있는 하나의 영감(靈感) 을 붙잡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응물상형, 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이는 곧 상대를 완벽하 게 파악해야 필승(必勝)을 거둘 수 있음이니.... 순간적으로 환상처럼 유빙의 뇌리에 차오르고 있는 글귀, 그것은 곧 심오한 무리(武理)가 아닌가! 가장 평범하면서도 난해한 무(武)의 이치(理致), 문종성필 유백상 의 화유육법은 바로 그 엄청난 무론(武論)을 감추고 있는 하나의 무학기서(武學奇書)였던 것이다. - 화유육법 제이법(第二法), 경영위치(經營位置). ....그리려는 화상(畵像)과 주위경관의 배치(配置), 곧 구도(構 圖)를 정한다. 곧 대자연의 함축을 의미하니...., 실로, 가공스러운 실전무도(實戰武道)이다. 한 줄기 바람과 멀리 산등성이 위에 떠도는 구름, 그리고 나뭇가 지 하나 모두 화폭에 옮기듯 진정한 무인이라면 격전이 벌어질 주 위환경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곧 자신의 것 으로 활용해야 함이니..... - 화유육법 제삼법, 골법용필(骨法用筆). ....용필(用筆)은 힘차게, 그리고 섬세해야 한다. 무인의 병기(兵器)는 곧 제이의 생명, 그 병기를 다룸에 있어 자 신의 손과 발같아야 함이다. 더도 덜도 아닌 꼭 필요한 힘만으로 도 병기를 뻗어낸다면, 곧 한줌의 진기를 담지 않았다 하더라도 능히 적을 패퇴시킬지이니..... - 화유육법 제사법, 수류부채(隨類賦彩). - 화유육법 제오법, 전이모사(轉移模寫). "으음....!" 유빙은 새삼 화유육법을 모두 읽어내린 후 감탄의 눈을 들었다. 그 화유육법 안에 더할나위 없이 심오한 무리(武理)가 담겨 있음 을 깨달은 그는 내심 격동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록 일각 여 의 시간만을 소비했으나 이 순간 자신이 엄청난 무의 이치를 깨달 았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대저, 무예(武藝)란 술(術)의 경지를 뛰어넘어 도(道)에 이르게 되면 익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 아니던가! 아아....! <예황(藝皇) 유귀광(劉貴光).> 선조들의 유진이 남겨져 있는 수많은 벽장들을 스쳐지나가며 훑어 보던 유빙의 걸음이 문득 멈춰졌다. "예황 유귀광 선조님이라면 바로 살인장황 척계리로 하여금 좌절 감을 느끼게 했던 명장(明匠)....?" 유빙이 천엽자모화를 생각해내고 예의 벽장을 조용히 열었다. 단지 천엽자모화 하나만으로 살인장황 척계리같은 엄청난 인물로 부터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던 예황 유귀광은 과연 천엽자 모화 이외에 어떤 것을 남겼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이것은 풀로 만들어진 우의가 아닌가?" 예황 유귀광의 유진이 남겨져 있는 벽장 안에는 빛바랜 한 통의 서찰과 한 벌의 초의(草衣)가 들어 있었다. 풀잎 색깔같은 은은한 청광(淸光)과 금광(金光)이 어우러져 있는 우아하기 이를데 없는 화려한 초의였다. "....!" 유빙이 의혹의 눈빛으로 예의 초의를 집어들었다. 헌데 마악 초의 에 손이 닿은 순간 그는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의를 이루고 있는 푸른빛과 은빛의 풀잎들이 너무도 얇고 예리해 마치 칼날을 맨손으로 만지는 듯한 섬칫한 느낌이 전해진 것이었다. 초의는 비올 때 입는 도롱이처럼 어깨와 등, 그리고 좌우 팔굽까 지만 덮는 형태로 짜여져 있었다. "....?" 유빙은 초의에 관한 기록이 남겨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그 옆 에 놓여져 있는 서찰을 집어 들었다. <여보! 어느덧 은라초의(銀羅草衣)는 완성이 되었건만 그것을 입 을 당신은 가고 없구료. 하늘을 뒤덮는 본가의 뛰어난 의예(醫藝) 로도 당신의 지병을 고치지 못하고 점차 죽어가고 있는 당신의 모 습을 지켜보며 이것을 만들었건만.... > 예황 유귀광이 은라초의와 함께 남긴 서찰은 놀랍게도 그가 바로 자신의 아내에게 보내는 서찰 형식의 글이었다. <당신에게 당신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음을 알리지 못한 채 그 죽 음의 비밀을 나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도 고 통스럽구료.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당신의 죽음의 비밀을 나 혼자 만이 간직한 채 아무것도 모르며 미소짓고 있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괴로움을 잊기 위해.... 나는 이 은라초의를 만든 것이라오. 당신이 원했던 그대로 은라초의(銀羅草衣)는 아마 무적(無敵)의 기병(奇兵)이 될 것이오. 그 풀잎 하나하나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재질인 해왕금모(海王金母)와 남만(南蠻)에서만 자생(自生)하는 금청신초(金靑神草)를 혼합해 만든 지상에서 가장 질기고 예리한 죽음의 풀잎이기 때문이오. 그 하나하나는 천하제일의 암기가 될 것이며...., 천하의 무엇으 로도 은라초의를 손상시킬 수 없음이니 또 완벽한 호신초갑(護身 草甲)도 될 수 있다오. 허나 이제 은라초의가 완성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것을 입을 당신은 이미 가고 없으니.....> 아아, 한 여인, 아내에 대한 사모지정(思慕之情)이 구구절절 담겨 있는 서찰의 내용은 실로 보는 이의 심금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 이 아닐 수 없었다. "음...." 유빙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애수(哀愁)를 느끼며 문득 천종예가의 족보라 할 수 있는 유가진서(劉家眞書)의 내용을 머리 에 떠올렸다. "아.... 그래! 예황 유귀광 선조의 부인이셨던 분은 바로 당시 최 고의 여류고수(女流高手) 초의령령(草衣零鈴) 갈소군(葛少窘)이란 분이셨지. 이 은라초의라는 것은 바로 그 분을 위해 만든 것이었구나." 유빙의 눈이 다시 서찰로 돌려졌다. <본가의 의예로도 이제 당신을 회생시킬 가망이 없음이 확실해졌 소. 이곳 적전마람의 모든 의예를 동원했으나 이제 죽음의 절차를 밟을 길만이 남아 있을 뿐..... 그러나 조금도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당신의 밝은 미소를 대할 때마다 죽음의 비밀을 홀로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나의 마음은 찢어질 듯 하다오.> 아내에 대한 죽음의 비밀을 홀로 간직하고 있는 남편의 심정을 상 상해본 적이 있는가....? 더구나 그 아내를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고 있는 이의...., 예황 유귀광의 서찰은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찰이었다. 예의 글귀는 처음에는 아내에게 보내는 서찰 형식으로 쓰여져 있었으나 그 말미는 홀로 독백하는 투로 기록되어 있었다. <....토번사풍리의 하늘 위로 비가 내리고 있다. 웬지 예감이 이 상하다. 하늘조차 음울하게 가라앉은 듯이 느껴지기만 하는 날이다. .... 아내는 자주 나를 찾았다. 그러다가, 내가 곁에 있음을 발견하고 는 엷은 안도의 웃음을 지어보이곤 한다. 아내와 나는 여느 때보 다 많은 말을 주고 받았다. 물론, 아내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심각해진 것도 벌써 칠주야 전이나 우리는 많은 말을 가슴 으로 나눈 것이다.> <아내의 몸은 반듯이 눕혀졌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 다. 아직 따뜻한 손이.... 었다.> 예황 유귀광의 글은 처음 아내에게 보내는 서찰식으로 쓰여졌다가 후반부에는 아내가 죽을 당시의 상황을 자신에게 들려주는 듯한 일기체로 쓰여져 있었다.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서찰이었고, 그리고 너무도 인간적인 글이었다. "음, 이 분은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셨구나." 유빙은 단지 서찰을 읽은 것만으로도 콧등이 찡해지는 감동을 받 으며 천천히 예황 유귀광이 아내를 위해 만들었다는 은라초의를 집어들었다. 우아하고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풀잎으로 만들어진 우의(羽衣), 유빙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웬지 네가 좋아질 것 같다....!" 사실이었다. 그 은라초의에 진한,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랑의 이야 기가 담겨 있음을 알기에 그는 더욱 은라초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유빙은 은라초의를 자신이 후일 강호에 나갈 때 입기로 내심 마음을 굳혔다. 오늘의 뉘라서 짐작이나 했겠는가! 유빙의 이 한순간의 결심으로 천하최고의 기병이 천종비고 깊숙한 곳에서 사장(死藏)되지 않고 항차 천하를 진동시키게 되었음이니..... 은라초의(銀羅草衣). 초의를 이루고 있는 하나하나의 풀잎이 가공할 암기가 되고, 그것 이 쏘아질 때마다 기음향(奇音響)과 함께 하나의 목숨이 이 지상 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니 항차 이 은라초의에서 발출되는 기음향 을 일러 세인들이 죽음의 단장곡(斷腸曲)이라 일컫게됨을 유빙조 차 지금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② 천종예가의 제십일대(第十一代) 가주(家主)는 바로 음(音)으로 천 하를 진동시킨 인물이었다. <천지율성(天地律聖) 유금(劉金).> 그의 벽장(壁欌)에는 한 권의 두툼한 서책과 손바닥 크기의 장난 감처럼 생긴 기형의 호금(胡琴=비파)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오악지예(五樂之藝)라....?" 유빙이 천천히 서책을 집어들었다. '통상 오악이라 함은 금슬, 생우(笙芋), 고(鼓), 종(鐘), 탁(鐸), 이 다섯 가지 악기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그 다섯 가지 악기를 다루는 음예(音藝)를 기록한 책자란 말인가?' 호기심과 함께 오악지예의 첫장을 넘긴 유빙의 눈에 한 줄기 서찰 식의 글귀가 파고 들었다. 헌데, 그 내용이 또한 놀랍지 않은가! <이 오악지에는 사악성(邪樂聖) 당율(唐律)의 천원마금(天元魔琴) 을 대하고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음예와 음공(音功)에 감동을 받아 본인이 그와 비교키 위해 창안한 것이다. 허나 창안은 했으되 그 위력은 시험해 보지는 못했도다. 그 이유 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이기에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대여! 후대 중 누군가가 다시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사악성 당율의 음공 과 본인의 오악지예를 비교, 그 우월을 가려주기 바란다.> 서명조차 남겨져 있지 않은 간단한 글귀, 그 글귀 아래에는 오악 지예에 대해 적지 않은 분량이 기록되어 있었다. "천지율성이시라면 황실에 최초로 악부(樂府)를 설치토록 하신 분 이 아닌가! 그런 예인(藝人)께서 음공을 창안하셨다니?" 유빙은 은은한 경악과 함께 오악지예의 내용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으음, 놀라운 음공이다. 가히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를 뒤집을 수 도 있는 가공스러운 음공이다!" 유빙은 오악지예의 위력을 대하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오악지 예의 위력은 가히 천번지복의 것으로서 들릴 듯 말 듯한 종음(鐘 音) 하나로 십리 밖의 인간을 죽일 수 있음은 물론이고, 은은한 비파음으로 모든 인간의 의지(意志)를 자신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있는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스스로 자신의 귀를 파괴하지 않는 한 노예 (奴隸)가 될 수밖에 없는 가공스러운 위력이었으며 또한 음파(音 波)를 한 곳에 집중시킨다면 십 장 두께의 철판에도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음파를 하나의 띠처럼 형성해 발산한다면 태산이라도 양단 (兩斷)할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문득 유빙은 한 가지 의혹에 젖어 들었다. "본가는 오래 전부터 선천적으로 무인의 본능을 제거당해 무공을 익힐 수 없다고 했는데 이토록 가공스러운 음공을 창안할 수 있었 다니....?" '혹시, 무인의 본능이 완전히 제거되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유빙은 망연히 의혹에 잠겨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오악지예와 함께 놓여 있던 손바닥 크기의 호금을 집어들었다. 길이는 겨우 반자에 불과한데다 더우기 현(絃)이 단 한 개 뿐이 없는 호금을 대한 유빙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허나 예의 장난감같은 호금에서는 은은한 살기가 뻗쳐 나오고 있 어 그는 새삼 세밀히 호금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악성 당율의 기병인 천원마금이란 말인가?" 유빙은 잠시 후 천원마금의 몸체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득한 천공에 구름이 흘러가는 듯한 문양이었는데 자세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이 하나의 글귀를 이루 지 않는가! <천원장상술예(天元葬상術藝).> 바로 천원마금을 사용하는 가공할 음공(音功)이다. 놀랍게도 천원 마금의 몸체에 구름처럼 기이한 문양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하 나의 가공할 음공구결이었던 것이다. 이 순간의 유빙은 모르고 있었으나 기실 사악성 당율은 사백 년 전 천하를 위진시킨 음공 최고의 고수였다. 그는 음공 하나로 천 하를 제패하고자 했던 일대효웅으로써 그의 야망을 저지시키려던 제벌의 고수 일천칠백여 명이 그의 음공에 요녕땅 오소리 강변에 서 상처 하나 없이 전멸해 버린 죽음의 일화는 지금도 모르는 이 가 없을 정도인 것이다. "음....! 잔인함과 패도적인 면에서는 이 천원장상술예가 오악지 예에 비해 월등하다. 허나 그 깊이와 다채로움에 있어서는 오히려 오악지예가 더욱 뛰어나다." 천원장상술예의 구결을 모두 읽어내린 유빙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다시 천천히 천종예가의 선조들이 유진을 남긴 벽장들 사이의 통로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본가의 혈통에서 피의 살인술사, 선천적 무인의 본능을 제거하신 분은 바로 제이대(第二代)가주이셨던 천약성(天藥聖) 구주성자(九 州聖子) 유백초(劉百草) 선조님이시다. 먼저 그 분의 유진을 살펴 보아야겠구나."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는 백골에도 살을 붙이고, 죽은 지 삼일만 지나지 않았다면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엄청난 신의 의술(醫術) 을 지녔던 의성(醫聖)이었다. 그의 유진이 들어 있는 벽장은 십여 장을 걸어간 후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 수많은 벽장 중 제일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는 첫번째 벽장의 내 부에는 두께가 반 자에 이르는 서책이 들려 있었다. 그 서책과 함께 온갖 세침(細針)들이 들어 있는 금갑을 비롯하여 무수한 영약(靈藥)들이 담겨 있을 듯한 크고 작은 약병들이 함께 놓여 있었는데 그 한쪽에 한 개 기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손바 닥 크기의 수정병(水晶甁)이 놓여 있지 않은가? 그 하단에 한 개 대롱이 돌출되어 있고, 예의 돌출부의 끝은 점차 가늘어져 종내에는 바늘처럼 뾰족해 있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미 세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유빙은 예의 기이한 형태의 수정병을 발견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본능이었다. 무엇인가 자신의 신체 일부분인 듯한 느낌이 드는..... <천금방구십삼서(千金房九十三書).> 반 자 두께의 거대한 서책은 놀라운 의예가 적혀있는 의학대전이었다. 의예(醫藝)라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방면의 놀라운 기학(奇學)들 이 수록되어 있는 방대한 분량의 의학대전을 대한 유빙의 눈이 커졌다 맥리지학(脈理之學)과 경혈지학(經穴之學), 그리고 단도지학(丹道 之學)과 진기도인요상법(眞氣導引療傷法)은 물론이고 천침요결(千 針要訣) 등의 그야말로 방대하고도 최고의 의예만이 수록되어 있 는 의학기서였다. 진기(眞氣)로 환자의 상세를 치유시키는 진기도인요법의 오묘함은 둘째로 치고, 일천 개의 세침만으로 인체의 일부분을 죽였다 살렸 다 할 수 있는 천침요결에까지...., 뿐이랴! 천하에 존재하는 온갖 독(毒)의 운용법까지 자세히 수록 되어 있지 않은가! 허나 무엇보다 천금방구십삼서의 가공스러운 것은 후반부에 있었다. 예의 후반부에는 인체역학에 대해 적지 않은 분량이 기록되어 있 었다. 모든 인체의 장기(臟器)들이 정교한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각 장기가 손상을 입었을 경우 인체 전체에 미치는 영향과 생명에 지장을 주는 정도 등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체의 신비(神秘)를 완전히 풀었다고 할 수 있는 놀라운 장(章)이었다. 천금방구십삼서의 끝부분에는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가 누구에겐 가 남기는 글이 남아 있었다. <풍아(風兒)에게 남긴다. 네 나이 이제 겨우 네 살...., 아직 모 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다. 그러나 나의 천수(天壽)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기에 후일 네 가 성장해서 알고 싶어할 일들을 여기 글로서 남긴다.> 실로 자상한 서체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아들에게 남긴 글이었다. <풍아야! 이 아비는 나이 삼 세 때부터 너의 할아버지이시며 내게 는 아버님이 되시는 위대한 피의 예술사, 사형예조 유군휘 그분과 함께 천하를 돌아 다녔단다. 네 조부께서는 어디를 가도 반드시 나를 데리고 다니셨던 것이다.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었단다. 아버님을 따라다니며 황혼이 내리는 아름다운 갈대 숲에서 자기도 하고, 드넓은 지평선(地平線)을 한없이 바라보며 인생를 배우기도 하는 생활을 한 것이란다.> 유빙은 정신없이 서찰에 빠져들었다. 그 내용 중에 사형예조 유휘 군에 관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형예조 유군휘는 위대한 피의 예술사로 불리우고 있는 고금최강 의 무인으로써 바로 천종예가의 비조인 것이다. <허나 아버님의 여행이 일반적인 여행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님의 천하여행이 곧 위대한 피의 에술사를 향한 길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때부터 행복하지 않게 되었단다. 아버님의 피의 예술사로서의 길을 따라다니며 나는 실로 많은 사 람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분은 진정 위대한 살인술사(殺人術士)이셨다.> 사형예조 유군휘, 뉘라서 이 이름을 모르랴! 일천칠백 년 전에 존재했던 고금최강의 고수로서 그의 살인은 그 자체가 곧 하나의 예술이라 평가되었다. 사형예조 유군휘는 위대한 시성(詩聖)이자 엄청난 대학사였으며 또한 최고의 신의(神醫)였다. 허나 그는 이 모든 학문을 단지 인간을 보다 정확히, 그리고 신속 히 죽일 수 있는 살인학을 위해 익혔던 것이었으니...., <아버님이 걷는 피의 예술의 길을 따라 다니며 나는 많은 사람들 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 죽어가는 인체를 해부(解 剖)해 보며 의도에 정진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혹시 아버님이 상대로부터 부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즉, 만에 하나 아버님이 다치게 되면 나는 아버님을 치료해야 했기에 의도를 익힌 것이었다.> 인류가 이 땅 위에 생겨난 이래 최고의 의도를 지녔다고 알려져 있는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의 의도 입문의 동기가 실로 의외롭 지 않은가. <아버님은 진정 위대한 피의 살인술사이셨다. 아버님은 머지않아 천하 위에 군림했다. 허나 나는 부친의 피의 예술성에 차츰 회의 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 역시 놀라운 무인의 본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부친과 함께 여행하며 부친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본 것 만으로 나는 이미 놀라운 살수의 대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싫었다. 나는 의도에만 정진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 중략(中略) .... 점차, 인체의 신비에 대해 접근해 가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이율 배반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의도성취는 모두 부친에 의 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몸이 완전히 식기 전에 그들의 아직 살아 있는 인체를 세밀히 관찰, 해부해 보며 터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음...." 유빙이 고개를 저었다.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의 일대기라 할 수 있는 글귀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부친이 부상을 당할 것이 두려워 치료를 위해 의도를 익히게 되었 고, 종내에는 그 부친에 의해 죽은 사람들 때문에 놀라운 달인이 되었다니 어찌 이율배반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대한 피의 예술사였던 부친이 입적하실 때 쯤에 나는 이미 천 하 최고의 의도를 성취했다. 이것은 모두 전장(戰場)에서 얻어진 생생한 체험의 결과였다. 그야말로 타인의 죽음 속에서 얻어진 성 취인 것이다. 때로 아버님은 나의 의도에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는 종내에 이 르러서는 나와 함께 의도를 익히셨다. 허나 나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의도에 참오한 반면, 아버님은 더 욱 정확히, 그리고 더욱 신속히 인간을 죽이기 위해 의도를 익힌 것이었다. 갈수록 나는 아버님이 살해한 인물들을 실험재료로 사용할 수 없 게 되었다. 실험으로 쓸 수 있는 인체는 뇌는 죽었으되 아직 그 신체 장기들은 살아 있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님의 살인술은 점점 더 가공해져 손을 뻗은 순간 이제 상대는 완전히 인체의 말단세포(末端細胞) 하나까지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풍아(風兒)가 태어났다. 어쩌면 그렇게 나를 닮았는지 모르겠다. 고사리 손으로 옴지작거 리며 내 얼굴을 만지려는 네가 너무도 사랑스럽다. 그러나 그때 나는 너를...., 너의 귀여운 모습을 대하고 문득 한 가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본가의 혈통 때문이다. 본가의 혈통은 실로 우수해 모든 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선천적인 무인의 본능 또한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선천적 무인의 본능, 피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살인술 사로서의 재능이 나는 불안한 것이다. 풍아가 성장해 또 다시 아버님처럼 살인술사의 길을 걷게 될것 같 아서 말이다.>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의 서찰은 결코 짧은 내용이 아니었다. 그 리고, 따스한 부정과 인간적인 고뇌가 담겨 있는 글이기도 했다. ■ 팔왕예조 제1권 제10장 되찾은 피(血)의 본능(本能) ━━━━━━━━━━━━━━━━━━━━━━━━━━━━━━━━━━━ ① 검(劍)으로 흥한 자는 검으로 망한다. 그리고 피로 일어선 자는 핏 속에 누울지니....,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이 평범한 진리 였다. 자신의 아들이 사형예조 유군휘처럼 일생을 피의 예술사의 길을 걷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그에게 모종의 결심을 굳히게 했던 것이었는데..... <피(血)로 일어선 나라는 피로 망한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해서 나는 인체의 신비를 풀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나의 의도를 발휘해 본가의 혈통 속에 잠재되어 있는 천 재성(天才性) 중에서 이 피의 예술을 추구하는 살인술사의 본능만 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가공스러운 일이 아닌가! 어찌 인간의 잠재능력 중에서 다른 것을 제외하고 단 한 가지 본 능만을 제거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신(神)의 영역(靈域) 에 속한 일이 아니겠는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허나 결국 나는 풍아의 몸에서 피의 본능, 대살수의 본능을 제거 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풍아는 물론이고 그 후대들 또한 영원히 무공을 익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웬지 자꾸 불안감이 든다. .... 말년(末年)에 이를수록 위대한 피의 예술사이셨던 아버님의 뜻을 이해할 것만 같다. 악인(惡人), 범죄자(犯罪者)들, 이 세상에는 존재해서는 안될 인간들이 너무도 많음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한 명의 악인을 교화(敎化)시킬 능력으로 백 명의 악인을 제거하는 것이 천하를 위해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뇌리를 지배한다. 생명의 존엄성만을 고집하던 나의 생각이 반드시 옳지 만은 않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인간은 타고나는 순간부터 선(善)하나 환경이 그를 악하게 만든다 는 나의 생각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던 같다.> 성선설(聖善說)과 성악설(聖惡說), 인간은 애초 선하냐 아니면 그 반대로 악한 것이냐 하는 영구히 풀리지 않을 인간성의 숙제, 그 숙제를 놓고 이미 일천육백년 전 에 고민했던 한 인간이 있었으니..... <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풍아의 몸에서 제거한 사형종혈(死刑 宗血)을 남긴다. 이 사형종혈은 본가의 혈통에서 선천적인 무인의 본능을 제거한 혈정(血精)이다. 나는 이 혈정을 나의 마지막 여생 을 다바쳐 천하에서 가장 순수한 혈청(血淸)으로 만들 예정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이 혈정은 본가의 사혈종혈보다도 더욱 무서운 본능을 지닌 것이 된다. 바로 태초 인간이 지녔던 순수한 혈청이 되는 것이다.> 태초의 순수한 혈청, 바로 인간이 야수성(野獸性)을 그대로 지니 고 있었을 때의 그 본능을 말함인데, 사실 지금의 인간은 그 본능 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 인간이 번성해 가고 서로 교류하며 후대를 탄생시 키는 과정에서 서로의 순수한 피에 불순물이 섞여 혼탁해지기 때 문인 것이다. 이 피의 혼탁성은 친족간 혼인으로 인해 태어나는 후대에 이르러 서는 더욱 강해진다. 해서 근친상간(近親相姦)이나 친족간의 혼인 은 고금을 막론하고 법으로 금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순수한 본능은 어떠한 야수보다도 강하다. 그러기에 만수 (萬獸) 중 인간만이 번성할 수 있었음이다. 허나 대를 거듭해 나가며 인간의 피는 혼탁해졌고 여기에 화식(火 食=익힌 음식)을 취하면서부터 인간의 본능은 급격히 퇴화(退化) 하기 시작했음이다. 그러나 이 종혈(宗血)은 바로 잃어버린 본능 을 되찾게 해주는 묘용(妙用)을 지닌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악마의 혈청이라 이름 붙였다. 그 까닭은 이 혈정을 섭취하면 야수의 본능 또한 강해지기 때문이다. 후대여! 후대는 절대 본가에 최대의 위기가 도래하지 않는 한 이 악마의 혈청을 취하지 말기를 바라노라.> - 악마의 혈청, 사형종혈! 아아....! 실로 섬뜩하지 않은가.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의 서찰 아래에는 백찰무경의 탄생비사(誕 生泌事)에 얽힌 글이 덧붙여져 있었다. <악마의 혈청, 사형종혈을 취하지 않더라도 본가는 영원하리라. 이를 위해 나는 나의 의도와 부친을 따라다니며 터득한 무공과 본 가의 전 재물을 털어 하나의 단체를 만든다. 존재할 가치가 없는 마인들과 범죄자들의 제도에 그 목적을 두는 이 단체의 설립으로 부친의 길을 대신 하고자 함이다. ....유백초(劉百草) 서(書).> 유빙이 눈을 들었다. 백찰무경의 기원(起源)과 천종예가의 뿌리에 대해 왼벽히 알게 된 그의 가슴으로는 격동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 분께서는 단 한 가지를 모르셨다. 본가의 혈청 속에서 비록 무인의 본능을 제거했다고는 하나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유빙은 문득 자신이 지나오며 훑어본 수많은 선조들의 유진을 떠올렸다. "비록 무공을 연마할 수는 없었지만 선조들은 모두 뛰어난 무학을 남기신 것이다. 천지율성, 예황 유귀광 선조, 그리고 조부이신 문 종성필 등, 모든 선조들이 자신의 학문을 결국에는 모두 상승무도 (上乘武道)로 승화시킨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유빙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인 후 한곳에 눈을 고정시켰다. 가운데 에 미세한 구멍이 파여 있는 관(管) 형태의 세침이 달려 있는 악 마의 혈청 사형종혈이 들어 있는 수정병이었다. 사형종혈로 손을 뻗어가는 그의 눈에 터질 듯한 격정이 뛰놀기 시작했다. "선조이시여! 본가의 제이십팔대 손(孫), 유빙은 이제 잃어버린 본능을 되찾을 것입니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은 떨려 나왔다. 그는 우선 일보단사 녹인혈에 의해 입은 치명적인 상처를 치료하 기 위해서라도 사형종혈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고 창랑왕 에 대한 승부를 위해서 무공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유빙은 천천히 사형종혈이 들어 있는 수정병에 붙어 있는 세침을 자신의 팔목에 가져갔다. "이 세침을 동맥(動脈)에 연결시키고 사형혈기(死刑血氣)라는 내 공구결을 운기(運氣)하면 된다고 했다." 푸욱! 일순 세침의 끝이 그의 팔목 깊숙이 파고 들었다. 동시에 유빙은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가 사형종혈을 체내로 흡수하기 위해 창안 해 낸 사형혈기의 구결을 떠올렸다. 순간 수정병내에 담겨 있던 검붉은 액체가 가느다란 세침의 구멍 을 통해 점차 그의 체내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한 방울, 한 방울..... 유빙의 전신에서 점차 기이한 홍광(紅光)이 감돌기 시작하고, 그 에 따라 수정병내에 들어 있던 악마의 혈청 사형종혈이 그의 체내 로 빨려 들고 있었으니...., 아아! 이로써 일천칠백 년 전 잃어버린 피의 본능, 선천적 살인술 사의 본능이 이렇게 유빙에게 이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최강고수의 탄생. 그렇다! 이것은 곧 전대미문의 최강고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② 봉황(鳳凰)이 어우러져 있는 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는 옥대 (玉臺), 그 높이는 일장 반에 달하고, 폭은 근 일장여에 이르고 있다. 천하에 그만큼 거대한 옥(玉)이 존재한다는 것도 믿기 어렵거니와 그 전체에 수놓여져 있는 문양은 그야말로 천하최고의 예술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종비고 전체를 굽어보는 듯한 위용으로 서 있는 옥대 앞에 언제 부터인가 유빙이 우뚝 서 있었다. 예의 옥대가 위치해 있는 곳은 바로 천종비고의 제일 깊은 곳으로 써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의 유진이 들어있던 벽장의 뒤쪽에 위 치한 거대한 원형석실의 중앙이었다. 헌데 이 순간의 유빙의 전신에서는 기이한 기질이 풍겨 나오고 있 었다. 검은 흑발이 허리 아래에서 출렁이고 있는데 그 어깨에는 화려하 고 우아하기 이를데 없는 청광과 미백광의 은라초의(銀羅草衣)가 걸쳐져 있다. 빙옥(氷玉)과 같이 새하얀 얼굴에 더할나위 없이 깊은 정적(靜的) 감을 보이고 있던 눈(眼)은 더욱 깊은 고요속으로 가라앉아 있다. 또 그 눈에는 어둠과 번뜩이는 피의 야수성, 그리고 알 수 없는 고독의 그림자, 우수(憂愁) 등등...., 실로 형용하기 어려운 무엇 이 담겨져 있지 않은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우면서도 더할나위 없이 차갑다. 이것은 그가 바로 잃어버린 본능, 피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선천적 살인술사의 본능을 되찾았음을 느끼게 해주는 변모가 아니겠는가! "음...., 이곳이 본가의 위대한 살인술사이셨던 사형예조 유군휘 선조님의 유진이 모셔져 있는 곳이로군." 유빙은 화려한 옥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그 음성 또한 어둠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헌데 예의 옥대가 바로 사형예조 유군 휘의 유진이 모셔져 있는 곳이란 말인가? 유빙은 옷깃을 여민 뒤 천천히 옥대를 향해 구배(九拜)를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옥대 위의 물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 권의 서책, 그리고 크기가 다른 소도(小刀) 한 자루와 장도(長刀) 한 자루..... 사형예조 유군휘가 남긴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유빙은 미미한 실 망을 느끼며 서책을 펼쳐 들었다. <나의 아들 초아는 이 아비의 살수행(殺手行)에 혐오를 느꼈을 것이다. 허허허....!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린 나이의 초아에게 나는 너무도 참혹한 살인의 장면을 무수히 보여 준 것이다.> 더할나위 없이 자상한 서체였다. 부정(父情)이 훈훈하게 느껴지는 글이었는데 예의 글은 바로 그의 아들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에 게 보내는 것이었다. <초아는 나의 자질을 완벽하게 승계(承繼)했다. 허나 초아는 성품 이 유해 문(文)과 의도에 더욱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것 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허나 이 아비의 살수행에 혐오를 느낀 네가 그 뛰어난 의예로써 자신의 후대의 몸에서 선천적 무인의 본능을 제거해버리지나 않을 까 염려스럽구나.> 놀라운 일이었다. 사형예조 유군휘는 이미 천약성 구주성자 유백초가 스스로의 혈통 에서 피의 예술성을 제거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아비는 그 일도 크게 우려하지는 않는다. 설혹 그로 인해 나의 후대들이 영원히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의 후대들은 다른 분야에서 얼마든지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으 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아깝다면 일백여 년간이나 참오해 터득한 나의 무학이 나의 대에서 단절되는 것이다. 해서 여기 먼 후대 중에 다시 피의 예 술, 살인의 미학(美學)을 추구할 후대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남긴다.> 유군휘와 유백초의 두 가지 글은 서로 주고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떤 일관성이 엿보이고 있었다. 마치 서로의 생각을 사후(死後) 에 주고 받은 듯한 서체였다. 그리고 부자지간의 짙은 정과 또 서 로의 고집같은 것이 엿보여 가슴이 따사로와지는 그런 글인 것이다. 아들 유백초에게 보내는 글 밑에는 따로이 추신이 붙어 있었다. <초아에게 당부한다. 네가 무공을 혐오하는 것 자체는 말리지 않 겠다. 허나 네가 정 후대들에게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하겠다면 나의 무공과 너의 의도를 합쳐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 주기 바란 다. 천하의 악을 제거하는 파수군, 무적(無敵)의 기찰조직을 말이다.>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백찰무경의 탄생은 원래 이 분의 유언(遺言)때문이었구나." 유빙의 눈이 다시 서책으로 향했다. 서찰의 아래에는 사형예조 유 군휘가 평생을 통해 깨달은 무학이 남겨져 있었다. <살인칠율(殺人七律)> 방대한 분량의 서책은 바로 일반적인 무도의 이론서(理論書)였다. 그것은 모두 칠 장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평범한 이론이기는 하 되 어느것 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는 평범한 가운데 무한한 진리 가 담겨져 있는 무론(武論)이었다. - 천병진해(千兵眞解). 위대한 피의 예술사는 천하에 존재하는 어떠한 병기라도 자유자재 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꽃잎 하나, 구르는 돌멩이 하나, 심지 어 물 한방울이라 할지라도 가공한 살상병기로 이용할줄 알아야 함이다. 천하에 존재하는 만물 모두가 위대한 피의 예술사에게는 모조리 살인기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방대한 분량의 병기 사용방법을 기록한 것이었다. 천 하의 모든 물체를 병기로 대용하는 방법이 엄청난 분량으로 할애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종류만 해도 수천 종, 십팔만 병기는 물론이고 온갖 병기들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초식씩이 아울러 남겨져 있었음이니..... - 살수만심(煞手萬心). 살인칠율의 두번째 율법, 이것은 인자무정심결(忍者無情心訣)과 흡사한 고도의 심결(心訣)이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인자무정 심결을 완전히 능가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정(無情)만이 아니라 유정(有情)조차 필요에 의해 조절 통제하는 가공할 심결이었던 것 이다. 위대한 피의 예술사는 살인의 방법을 자유자재로 결정할 수 있어 야 한다.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상대를 죽일 수 있어야 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야수에 찢긴 듯 처참히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모든 살인의 결과는 항시 냉정한 판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져 야 하는 것이다. 무인이란 자신의 감정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화를 내는 것은 극적효과를 노리기 위해 필요에 의해서만 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히 통제할 줄 알아야 함을 명심하라. - 분신단공(分身丹功). 진정한 무인이란 무엇보다도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의지대로 언제 어느때라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인체는 실로 정밀한 하나의 연합체(聯合體), 우주(宇宙) 그 자체 를 방불한다. 인체의 조직은 실로 엄밀해 어느 한 부분이라도 부 상을 당하게 되면 인체 전체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다. 허나 위대한 무인이라면, 남의 생명을 다루는 피의 예술사라면 팔 하나가 떨어져도 그 영향이 일체 다른 부위에는 미치지 않을 능력 을 지녀야 한다. 전신이 모두 분해되어 팔 하나, 검을 쥔 손 하나 만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 손은 독자적으로 살인을 완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살수만변(殺手萬變). 진정한 무인은 대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길 줄 알아야 함이니 곧 밤이면 밤의 일부가 되고, 눈(雪) 위에서라면 그 눈과 하나로 동 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물 속이라면 곧 물(水)이 되어야 함이니..... - 살수칠감(殺手七感) 천의무봉(天衣無縫).> 위대한 살인술사는 항시 움직여야 한다. 일을 하지 않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항시 천하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바, 전혀 상관이 없는 작은 이야기라도 십 년 후에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십년 전에 들었던 소문 하나로 죽이고자 하는 인간의 치명적인 약 점을 찾아 낼 수도 있으므로..... 살인칠율(殺人七律),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인간학(人間學)이었다. 그리고 또한 초 인탄생(超人誕生)의 학문이기도 했다. 유빙은 미친 듯이 살인칠율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 어느것 하나 절대 흘려 넘기는 법이 없이 그의 뇌리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 었고, 이렇게 해서 십도(十道), 천종(千宗)의 각 방면에 걸친 전 능(全能)이 한 인간의 몸에 축적되기 시작했으니.... 한자 반 길이의 소도(小刀) 한 자루와 네자 길이의 장도(長刀)의 이름은 쌍월(雙月)이었다. 둘 다 초생달처럼 얇게 끝부분이 휘어 져 있는 도(刀)였다. 헌데 소도의 도신(刀身)에는 붉은색 자월(紫月)이 정교히 새겨져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마치 도신 위에 붉은 초생달 이 떠올라 있는 듯한 환각을 주고 있었고, 그에 반해 장도의 도신 에는 하얀 만월(滿月)이 새겨져 있었다. 또 소도는 어쩐지 섬뜩한 살기를 흘려 내고 있는 반면 장도는 부드러운 기운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유빙은 예의 두 자루 도를 조용히 집어들고 자신도 모르게 침음하고 있었다. "음, 이것이 바로 사형예조 선조님이 천하 위에 군림하실 때 사용하시던 병기련가....?" 일천칠백 년 전 사형예조의 호흡과 기가 흘러 들었을 듯한 두 자 루의 도를 잡는 순간 유빙은 불현듯 그 두 자루의 도와 자신 사이 에 어떤 감정이 교류(交流)된 듯한 느낌에 젖어 들었다. 병기와 인간의 교감, 그렇다. 착각일지 모르나 유빙은 분명 어떤 교감을 느꼈던 것이 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자루의 도를 양 손에 나눠진 채 도신 을 뽑아들었다. 일순 석실에 차가운 한기와 부드러운 기운이 안개 처럼 번져나가고, 새하얀 도신의 광채가 유빙의 전신을 휘어감았다. 헌데 보라! 두 자루의 도를 양 손에 나눠쥐고 있는 유빙의 전신, 그 몸 뒤쪽 으로 거대한 만월이 솟아난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차가운 냉월(冷月) 가운데 하나의 거대한 사람의 그림자가 두 팔 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듯한 느낌, 마치 한 줄기 풀잎을 밟고 두 자루의 도를 좌우로 나눠쥔 채 휘황한 월광을 받으며 서 있는 고 독한 낭인같은 기질...., 그런 기이한 분위기가 유빙의 전신을 휘 감고 있었던 것이다. 유빙의 얼굴은 이 순간 더할나위 없이 무표정했다. 그리고 두 눈 은 더욱 깊은 정적감을 안은 채 가라앉아 있었는데, 더할나위 없 이 사이하고, 고독하고, 그리고 차갑다. 뉘라서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유빙의 이 순간의 모습, 이것이야말로 제이의 사형예조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스르륵....! 유빙은 기이한 감상을 받으며 애석한 듯 두 자루 도를 도집에 넣었다. 그 순간, 무엇인가가 걸린 듯한 느낌에 그는 다시 장도를 뽑아 들 었다. 헌데 다시 검집을 빠져 나오며 도신을 따라 한 장의 얇은 양피지가 딸려나오지 않는가? <원월도법(圓月刀法).> 유빙의 눈에 격동이 어렸다. 이것이야말로 사형예조 유군휘 선조의 진정한 독문무공임을 직감한 때문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얇은 양피지를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원월도법은 단 일초로 이루어졌으나 동시에 일천 초식으로 나뉘어 질 수도 있는 가공할 도결(刀訣)이었다. 두 자루 쌍월로 허공에 한 차례 원을 그리는 동안 끝나는 도법으 로써 기수식이랄 수 있는 제일초식과 최후초식이 하나로 이어짐은 물론 똑같은 초식인 것이다. 허나 처음 일초식을 전개했을 때와 모든 초식이 전개된 뒤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최후의 초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니..... 전설, 전설은 말하고 있었다. 사형예조 유군휘는 단 한 번도 이 원월도법을 끝까지 펼쳐 본 적 이 없어 원월도법이 그리는 원을 목격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유빙은 원월도법의 구결을 완전히 암기한 후 새삼 격정이 끓어 올 라 다시 두 자루 도, 쌍월을 양 손에 나눠 쥐었다. 순간 또 다시 유빙의 모습은 차가운 냉월 속에 떠올라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만월 속에 한 고독한 무인이 우뚝 쌍도(雙刀)를 들고 서 있는 듯 한 기고한 분위기였다. 이것은 바로 일천칠백 년 전 피의 예술사로 군림했던 사형예조가 시공을 뛰어넘어 이 시대에 다시 재현됨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니 누가 꿈엔들 상상이나 했으랴! 이제 한 명 위대한 피의 예술사의 발치에 팔왕천하(八王天下)가 처절히 통곡하게 됨을....! ③ 중원(中原), 첫 얼음이 어는 계절이 중원을 찾아들고 있었다. 십일월의 하늘을 검은 날개로 뒤덮던 까마귀떼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십이월의 하늘은 기러기떼의 차지가 되고 있었다. 기러기떼는 까마귀떼와는 달라 아무리 많은 무리가 날아도 하늘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다. 언제나 정연한 대오를 갖추어 날고, 우짖 음도 대오만큼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는 합창이다. 허나, 천공에 기러기떼가 덮히는 것은 곧 모든 것이 얼어붙는 동 토(凍土)의 계절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 그 계절의 전환기에 무림 역시 하나의 전기(轉機)를 맞고 있었다. 일천칠백 년이라는 아득한 시공(時空) 동안 단절되었던 피의 예술 성, 선천적 무인의 본능을 되찾은 한 사나이로부터..... ④ 토번사풍리(土蕃砂風里), 악마의 금역 토번사풍리에 차가운 달이 걸려 있었다. 열사와 광풍의 대지 사막의 밤은 더할나위 없이 고요했고...., 악 마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듯 솟아 있는 모래언덕들이 월광을 받으 며 사막의 밤을 더 한층 교교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주위의 사구들을 누르는 듯 솟아 있는 가장 높은 한 모래언덕 위 에 한 인영이 교교로운 월광을 받으며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서 있는 사구(砂丘)의 높이는 대략 일천여 척, 천공에 걸려 있는 한월(寒月)조차 사구의 한쪽에 걸려있는 듯 느껴지고 있었는 데 그 거대한 월륜(月輪) 한가운데 언제부터인가 한 사나이가 팔 짱을 낀 채 극히 오연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월륜의 한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월제(月帝)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만월(滿月)이 떠오르는 밤, 죽음의 모래언덕 위에서 고독 히 울어대는 은빛 늑대의 오만함이랄까...., 그의 모습은 실로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었다. 사막의 열기가 싸늘히 식어버린 사구 위에 오연히 서 있는 사나이의 전신 에서는 더할나위 없는 사이함과 또 슬프도록 아름다운 고독감이 한데 어울려 있었던 것이다. "삼 년, 삼 년이 흘렀다!" 문득 그의 입에서 감회어린 음성이 나직이 흘러 나왔다. "나는 이제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의 모든 것과, 본가의 모든 비 기(秘技)들을 완전히 익혔다." 나직한 독백, 허나 그 독백 속에는 터질 듯한 감회와 함께 폭발할 것 같은 어떤 웅지(雄志)가 맴돌고 있었다. 사구 위의 월륜 한가운데 떠올라 있는 듯 고독히 서 있는 인영, 아아...., 그는 바로 유빙이 아닌가! - 삼 년이 흘렀다. - 나는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의 악마의 힘과 천종예가의 신의 비기를 모두 익혔다. 유빙의 모습은 실로 많은 변모를 보이고 있었다. 아름답기 이를데 없었던 용모는 더욱 보는 이의 눈을 찌르는 충격 적인 것으로 성장해 있었고 여기에 나약하게 느껴지던 전체적인 기질은 어딘가 모르게 폭발할 듯한 응집력(凝集力)을 내포한, 체 력의 광폭(狂暴)함이 피부 아래 억눌려 있을 듯한 느낌을 준다. 우수에 젖어 있는 듯한 맑은 눈은 더욱 차갑게 가라 앉아 있고, 문약한 서생의 그것인 듯한 새하얀 피부는 오히려 악마의 차가움 을 드러내고 있는 듯 강인해 보이기만 했다. 원래 강인함과 아름다움은 조화되기 어려운 것. 허나 지금의 유빙 에게서는 놀랍게도 강인함과 아름다움이 기묘하게 조화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뿐이랴. 그를 더욱 기묘한 분위기로 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복장 이었다. 허리에는 두 자루 도인 쌍월이 걸려있고 상체에는 실로 특이한 초의(草衣)가 미백광(美白光)을 발하며 걸쳐 있다. 은은한 푸른 빛과 동시에 금광마저 포함하고 있는 풀로 짜여진 듯 한 초의는 바로 은라초의였다. 우의형태로 미려하게 만들어진 은라초의를 걸치고 있는 유빙의 모 습은 어찌보면 환상같기만 했는데...., 허리 아래에서 두 자루 도(刀), 쌍월을 희롱하듯 출렁이는 흑발, 군살 하나 없을 듯한 체구를 덮고 있는 은라초의, 그리고 더할나 위 없이 고요한 정적감, 여기에 마치 거대한 만월 속에 서 있는 듯한 기이한 분위기..... 그것은 마치 어둠과 월광, 고독한 늑대, 악마 환상적인 아름다운 여신의 영상, 정적 등등, 이 모든 단어가 한꺼번에 연상되는 실로 독특한 분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유빙의 담담한 음성이 다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죽음의 사막 토번사풍리! 이제 이곳과도 이별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죽음의 정적을 안은 채 교교한 월광 아래 악마의 폐허처럼 펼쳐져 있는 사막의 둘러보는 유빙의 눈에 문득 감회가 어렸다. 허나 다 음 순간 그의 눈에서는 다시 차가운 불길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허나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나는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에 는 이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은 고독한 은자(隱者)의 성(城)으로 바뀔 것이다." 유빙의 뇌리에는 이미 두 가지 결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하나 는 고독한 강호행(江湖行)이었고, 두번째는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 람을 폐쇄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아무리 정(正)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지만 인간의 생체를 시험한 현장을 보존한다는 것에 반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때, 돌연 그의 눈에 한 가닥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내려다 보고 있는 광활한 밤의 사막 저 쪽, 거의 일백여 리 떨어진 한곳에 기이한 불빛이 떠올라 있지 않은가? 그것은 실로 일대장관이었다. 마치 수많은 횃불의 바다라고나 할 까? 밤의 장막 건너 저쪽에 펼쳐져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횃불의 바다에 유빙의 눈에서 의혹이 솟아났다. "이 악마의 금역 토번사풍리에 손님들이라....?" 유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의혹은 실로 당연한 것이었다. 뇌리에 떠올리는 것조차 공포 스럽게 여기고 있는 이 죽음의 땅에 돌연 불야성을 이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인 것이다. "냄새 나는 돼지같은 녀석들! 위대한 수도(修道)의 현장을 제멋대 로 푹푹 파 헤치다니....!" 돌연 유빙이 서 있는 사구 아래쪽에서 심통사나운 노인의 음성같 은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예의 음성은 점차 유빙쪽으로 가까 워져 왔다. "푹푹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막 어딘가에 안장(安葬)된 춘추 전국시대, 제(齊)의 황제 문공(文公)의 용천릉(龍天陵)을 발굴하 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음성이 그의 말을 반박하며 뒤ㅉ았다. "이 썩은 돼지야! 그게 그거 아니냐!" 먼저 들렸던 음성이 사납게 높아졌다. 동시에 왜소하기 이를데 없 는 흰 전포의 노인과 우아하고 세련된 풍도를 지니고 있는 육순노 인이 유빙이 서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적전마람을 관장하고 있던 신비의 노인, 차손과 밤의 귀족, 야작 율한극이었다. 둘이서 서로 다투며 올라오는 모습을 대하고 유빙이 고소를 머금으며 입을 떼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차손이 분노한 듯 사납게 입을 열었다. "땅파는 두더쥐들이다. 모조리 땅 속에 처박을 놈들이지!" "....?" 유빙이 차손의 말에서 아무런 내용도 알아 듣지 못하자 야작 율한극이 입을 열었다. "춘추전국시대 제국(齊國)의 황제 문공이 묻힌 춘추제일고분(春秋 第一古墳), 용천릉을 발굴하고 있는 것이라네." 유빙이 다시 의혹어린 눈으로 멀리 횃불의 바다가 펼쳐져 있는 쪽을 돌아 보았다. "헌데 십만에 가까운 인파가 모여 들다니 필경 다른 이유가 있는 듯 하구료?" "그렇다네.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가장 큰 이유는 제왕(齊 王) 문공의 유물때문이 아니라 기실 함께 안장되어 있는 문공의 황비(皇妃), 전국무후(全國武厚) 정궁왕비(正宮王妃) 종무염(宗茂 艶)의 유물 때문이라네." "전국무후, 정궁왕비 종무염!" 유빙의 눈에서 순간 이채가 솟았다. 전국무후 정궁왕비 종무염은 바로 전설적인 최강의 여고수가 아니 겠는가. 종무염은 일개 평민의 신분이었으나 사냥을 나왔다 적국 의 살수에게 죽음을 당하려는 위기에 처해 있는 제의 황제를 구해 주어 일약 정궁왕비로 간택된 여류무인이었다. 불세제일재녀(不世第一才女)라 불리울 정도로 뛰어난 무공과 재기 (才氣)를 지니고 있고, 그 얼굴이 반백(半白), 반적(半赤)이어서 반선녀(半仙女)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 제국(齊國)의 재상이었던 춘추제일모사 여자국(呂自國)이 그녀를 대하는 순간 스스로 제자가 되기를 자처했다는 일화는 그 녀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게 되었는데...., 허나 무엇보다도 그녀의 이름이 일천오백여 년이나 흐른 당대에까 지 기억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입신(入神)에 달한 무공 때문이었다. 제국을 위협하던 춘추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절대자들을 전 국무후 정궁왕비 종무염이 모조리 꺾으며 가장 열세에 처해 있던 열국(列國), 제(齊)를 초강국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저 곳에 모여든 인물들은 대부분이 무인들이네. 바로 정궁왕비 종무염의 유진(遺塵)을 얻기 위해 몰려든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야작 율한극이 말을 덧붙였다. 순간 유빙의 눈이 차갑게 가라 앉았다. "그대로 놔둘 수는 없겠군." 유빙이 차가운 한기를 흘려내자 순간 차손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 다. 이어 그는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어린애처럼 즐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잘 생각했다. 그저 저렇게 탐욕에 눈이 어두워 망자의 무덤까지 파헤치는 놈들은 모조리 땅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보다도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유빙의 음성은 담담했다. "이유?" "예. 정국왕비는 바로 우리 천종예가와 깊은 연관이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 차손이 의혹의 눈으로 유빙을 빤히 응시했다. 그 빛나는 눈은 무 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유빙은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가는 차손이 또 무슨 심통을 부릴지 몰라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정궁왕비 종무염 왕비는 바로 본가의 제칠대 가주이신 예황 유귀 광 선조님의 빙모(聘母)이십니다." "예황 유귀광? 바로 네가 입고 있는 은라초의를 만든 사람말이냐?" "예. 그리고 어쩌면 용천릉에 그 분의 부인이셨던 초의령령 갈소 군의 유체 또한 안장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음....! 초의령령이 바로 전국무후 정궁왕비 종무염의 딸이었지. 그래, 맞아!" 그제야 차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의령령 갈소군은 춘추전국시대 한 줄기 풀잎으로 천하를 위진시 켰던 여고수로서 젊은 나이에 천종예가의 엄청난 의도로도 고칠 수 없는 난치병에 걸려 예황 유귀광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어간 슬 픈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닌가. 기실 지금 유빙이 걸치고 있는 은라초의는 바로 자신의 부인 초의 령령 갈소군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든 기물인 것이다. 헌데 그 초의령령 갈소군이 바로 정궁왕비 종무염의 친딸이란 말 인가....? 은라초의를 걸치고 있는 유빙이 강호출도 첫 걸음에 그 은라초의 의 주인이 되었어야 할 초의령령 갈소군과 관계되는 일에 부딪치 게 된 것은 운명이 예시한 기이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용천릉 또한 본가의 선조 중 한 분께서 설계 축조한 것임 이 분명합니다. 하니 그곳을 훼손하는 것을 그대로 방관할 수는 없겠지요." 차손이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좋다. 좋아! 심심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용천릉(龍天陵), 제나라의 왕, 문공과 정궁왕비 전국무후 종무염의 유체(遺體)가 묻혀 있다는 용천릉의 발굴현장은 실로 광대했다. 드넓은 사막의 수십여 개 사구(砂丘)를 포함해 방원 십여 리를 걸쳐 수많은 깃발 들과 측량기구(測量器具)들이 설치되어 있고, 그 주위로 관복을 걸친 관부의 고수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막관대군벌(漠關大軍閥)의 막장(漠將)인 대호군(大虎君) 진송방 (陳松傍)이 그 경계를 담당하고 있는 가운데 주야로 쉬지 않고 그 넓은 발굴현장을 파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로 십여리에 걸친 방대한 지역을 모조리 십 장(十丈) 깊 이로 파헤치고 있었으나 아직 문공의 용천릉이 드러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용천릉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 발굴현장의 주위에 는 엄청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이 발굴은 원래 극비에 속한 일이었다. 헌데 어떻게 알았는지 발 굴 현장으로 계속 무림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악마의 금역 토번사풍리의 발굴현장 주위로는 간이 주루마저 수없 이 생길 정도였다 일대 기연을 노리고 온 무림인들과 인부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간이 주루의 수효만 해도 십여 개, 그야말로 폐허 한가운데 돌연 신도시가 생겨난 것이었다. "중원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동영(東瀛), 서천축(西天竺), 하다못 해 서역(西域)의 눈파란 놈들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천하무림인 들이 모조리 집합된 것 같군요. 지금은 괜찮은 것 같지만 용천릉 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 아마 일대 대혈전의 장(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실로 큰일이지요." 세 사람, 은라초의를 걸치고 쌍월을 허리에 걸친 유빙과 우아한 풍도의 율 한극, 그리고 왜소하며 메마른 체구를 지닌 차손이 함께 용천릉의 발굴현장 주위에 급조된 신시가지를 걷고 있었다. 난생 처음 적전마람을 벗어나본 차손은 보이는 것 모두가 신기하 다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그 옆을 따르는 율한극은 더욱 세 련되고 더욱 우아한 풍도로 느긋이 오가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입 을 떼고 있었다. "큰일은 무슨 큰일, 우리는 그저 구경만 하면 된다." 율한극의 말에 차손이 중얼거렸다. '이 늙은이는 그저 내 말이라면 깔아 뭉개려고 하니....' 야작 율한극이 차손의 뒤통수를 무섭게 쏘아 보았다. 허나 다음 순간 그의 눈은 무엇을 발견한 듯 이채를 발했다. "남의 눈에 뜨이는 것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니고 하니 우리 저곳에 가서 술이나 한 잔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야작 율한극이 가리키는 곳에는 급조된 가건물치고는 그 규모가 엄청난 한 채 목조건물이 우뚝 솟아있었는데 휘장과 나무기둥으로 대충 건축된 예의 건물의 정면에는 실로 어울리지 않는 편액(扁 額)이 붙어 있었다. <중원제일부(中原第一府).> 거창하지 않은가! 허나 그 거창한 이름에 단 하나 걸맞는 것이 있 기는 했다. 그것은 바로 그 규모였다. 휘장으로 대충 둘러진 주루안의 넓이는 근 백여 장에 이르는 데다 그곳에 놓여 있는 탁자의 수효만 해도 이삼백여 개. 뿐이랴. 놀랍게도 그 대부분의 탁자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헌데 그토록 많은 인파가 들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루의 분위 기는 무거운 긴장에 잠겨 있었다. 마치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듯 그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꺼리고 있는 듯 했다. 그저 함 께 온 일행들끼리 서로 음성을 낮춰 조용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음식과 술만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되는 것이 있다면 그들 모두 새로 주루에 들어오는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점이었다. 마치 새로운 경쟁자가 어떤 인물인가를 살피려는 듯한 태도 같았다. 유빙과 차손, 그리고 더할나위 없이 우아한 풍도의 율한극이 들어 서자 예외없이 주루안 모든 인물들의 눈이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 했다. 두 자루 도를 허리에 찬 채 특이하기 이를데 없는 초의를 걸치고 있는 유빙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거리낌없이 들어오고 있는 왜소 한 체구의 차손, 그리고 우아하기 이를데 없는 세련된 풍도를 지 니고 있는 율한극의 모습은 그 어느 누구 하나 남의 눈을 끌지 않 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허나 중인들의 호기심어린 눈은 이내 그들 뒤쪽으로 돌려지고 있었다. 유빙일행의 바로 뒤에 마치 따라 들어오는 듯 한 노인과 소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단죽(短竹)을 입에 문 채 조용한 눈으로 들어서고 있는 노인의 용 모는 극히 평범했다. 얼굴에는 잔주름이 뒤덮여 있고 입고 있는 옷 또한 허름하기 이를데 없는 황의이다. 어디서나 대할 수 있는 전형적인 촌로(村老)의 모습이었다. 허나 기실 중인들의 호기심어린 눈동자가 일제히 유빙 일행을 떠 난 것은 노인의 손을 잡고 함께 들어오고 있는 소녀때문이었다. 소녀(少女), 그녀의 용모는 실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앙증스러 웠다. 볼우물이 깊게 파인 복사꽃을 방불하는 홍조띈 얼굴에, 윤 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흑발을 토끼처럼 두 갈래로 묶어 뒤로 넘겼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경이로 가득해 있는 크고 서글서글한 눈망울은 마치 물방울같다. 그러나 취옥빛 치마에 녹색 단의(短衣)를 걸친 그녀의 옷차림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촌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옷차림은 기이하게도 소녀의 용모에 너무도 잘 어울려 실로 하나의 인형을 대하는 듯 앙증스럽기만 했다. 대략 십오륙 세....?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대한 주루 안의 젊은 무림인들의 눈에서 강렬한 이채가 솟아났다. 그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천하의 무엇이 라도 포기할 듯한 눈빛이었다. 소녀의 용모는 실로 유빙 일행에 대한 호기심따위는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던 것이다. 유빙 일행이 구석진 자리에 앉고, 뒤따라 들어온 담뱃대를 든 황 의노인과 단삼소녀 역시 그들과 가히 멀지 않은 빈자리를 찾아 자 리에 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주루 안에 있던 인물들 중 한 명 화복청년이 다소 취기가 오 른 얼굴로 돌연 단삼소녀를 향해 걸어갔다. 거만하기 이를데 없는 태도에 얼큰히 술이 오른 얼굴이었다. ■ 팔왕예조 제2권 제11장 제이차(第二次) 팔왕(八王)의 난(亂)! ━━━━━━━━━━━━━━━━━━━━━━━━━━━━━━━━━━━ ① 중인들이 호기심어린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소녀에게 다가간 화 복청년의 음성이 거만스럽게 흘러나왔다. "보아하니 노래를 팔며 떠도는 것 같은데....?" "맞아요. 하지만 노래를 팔지는 않아요." 화복청년의 거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소녀가 생긋이 미소하며 대 꾸했다. 그녀의 태도는 상냥하기 이를데 없어 제아무리 악인이라 하더라도 저절로 부드러워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 소저는?" 화복청년이 부드러운 눈길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단삼소녀가 화사 하게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취려홍(翠麗紅)이라 해요. 그리고 저희 할아버지는 사 람들이 보통 취노인이라고 불러요." "아, 이제보니 취소저였군. 그래 취소저는 무엇을 파는가?" 놀라운 변화였다. 화복청년의 태도에서 오만한 기가 씻은 듯 사라 지고 마치 친 누이동생을 대하는 듯 부드러운 기운만이 흘러 나오 고 있었다. 이것은 단삼소녀의 응대가 너무도 부드러워 그 어느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변하고 마는 듯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이야기를 팔아요. 아주 재미있고 희귀한 이야기죠." "소저가 말인가요?" "아니예요. 전 단지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할 때 좀더 재미있게 하 도록 도와 드릴 뿐이에요." 주루 안에 있던 중인들의 눈에 일제히 호기심이 솟아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강호라는 세계는 원래 숱한 기화(奇話)가 난무하는 곳 이 아니던가. 문득, 중인들의 호기심을 눈치챈 듯 취려홍이 방긋 미소하며 주루 안을 귀여운 태도로 둘러 보았다. "누가 저희 할아버지에게 술 한 잔 대접하실 분 없나요? 저희 할 아버지는 정말 이야기를 잘 하셔요. 아마 술대접 하신 것을 후회 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저희 고향에서는 취설서(翠舌書), 취노인 이라 하면 모르는 이가 없어요. 너무 이야기를 잘 하셔서 삼 일 밤낮을 술대접 받은 적도 있을 정도예요." 취려홍의 말에 화복청년이 미소했다. 그의 태도는 이제 완연히 명 문의 귀공자같은 깍듯한 예의를 보이고 있었다. "술은 얼마든지 대접할테니 한 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시오." "고마워요." 순식간에 취노인이라는 황의노인 앞에 한 주담자의 술이 나왔다. 황의노인은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술을 한 잔 마시고 들고 있던 단죽(短竹)에 다시 연초(煙草)를 잰 뒤 불을 붙여 한 모금을 빨더 니 서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헌데 바로 이때. 한쪽 구석에서 아까부터 화복청년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지켜보고 있던 홍의소녀 한 명이 돌연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화복 청년과 일행인 듯 했는데 화복청년이 취려홍에게 관심을 보이자 심히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이야기를 하려면 빨리 해봐라. 더럽게 추파를 던지지 말고." 그녀의 눈은 취려홍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지극히 모욕적인 언사라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발끈하여 한바탕 소란을 부렸을 것이다. 그러나 댕기머리 소녀 취려홍은 배시시 웃으며 오히려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어서 말씀하세요. 아마 술값 정도는 더 나올테니까요." 황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다시 한 잔을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려홍아! 너는 팔왕(八王)의 난(亂)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그럼요. 누가 그걸 모르겠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일천일백 년 전 에 삼국으로 분리되어 있던 천하를 통일시킨 대진(大晋) 황실의 제왕(諸王)들이 진황실의 패권을 다투며 골육상쟁의 처참한 역사 를 연출한 것이 아닌가요?" 취려홍이 방그레 웃는 양쪽 볼에 살짝 보조개가 생겨났다. 그것은 너무도 매혹적으로 보여 화복청년은 대화 내용보다 그녀의 용모에 일시 넋이 빠진 듯 했다. "원강(元康) 원년(元年)에서 광희(光熙) 원년에 이르는 십칠여 년 간 제왕들의 싸움으로 무려 십만여 명이 살해당했다지요. 아마....?" 취려홍이 미소와 함께 말을 잇고, 취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 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이차(第二次) 팔왕의 난도 아느냐?" "팔왕의 난도 제일차가 있고 제이차가 있나요?" 취려홍이 눈을 빛내며 반문하자 취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제일차 팔왕의 난처럼 여덟 명의 제왕이 난립해 천하 를 피의 난세로 몰아가고 있기에 제이차 팔왕의 난이라 부르는 것이란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마치 제이차 팔왕의 난이 이 시대를 가리키는 것 같군요." "맞았어. 네말이 맞다." 취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한 모금의 연초를 빨아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 시대에는 도저히 한 시대에 한꺼번에 태어날 수 없는 너무 뛰 어난 효웅(梟雄)과 영웅들이 공존하고 있단다. 그들이 모두 천하 의 패권을 노리고 있음이니 이것은 능히 제일차 팔왕의 난을 능가 할 피의 난세를 예고하는 것이란다." 단삼소녀 취려홍이 눈을 크게 떴다. "무서운 일이군요. 헌데 팔왕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요?" "팔왕 중에는 드러난 사람도 있고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이 할아비도 잘 모른단다. 허나 그들 대부분은 지상에서 가장 강 했던 인물들의 후예로서 그들에게는 각기 하나씩의 별호(別號)가 붙여져 있단다." "어떤 별호인가요?" "금왕(金王), 사왕(死王), 낭왕(狼王), 혈왕(血王) 등 그들의 특 성에 맞게 지어진 별호란다." "멋진 별호로군요. 그 별호만 들어도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이제는 그 팔왕 중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황의노인과 그 말을 받아 대꾸하고 있는 손 녀 취려홍의 이야기는 주루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중인들을 매료 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니, 대부분의 인물들은 눈을 크게 뜬 채 경악의 표정으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이야 기는 바로 현 강호의 정세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의노인, 취설서 취노인이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신 후 입을 열었다. "팔왕 중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은 세 명이란다. 금왕, 혈왕, 그리 고 팔왕 중 가장 신비하고 뛰어난 힘을 지닌 천왕이란다." "그럼 금왕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해 주세요." 취려홍이 마치 중인들을 대신하듯 재촉했다. 취설서 취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왕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고 가장 머리가 뛰어난 백금전가(百金錢家)의 후예를 말하는 것이란다." - 금왕! - 천하제일의 재력과 천하제일의 두뇌를 지니고 있는 백금전가의 후예! "두번째, 혈왕이란 중원정통무맥(中原正統武脈)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잠천(潛天)의 살인혈황의 후예를 말하는 것이고....." - 혈왕! - 중원정통무맥 잠천의 살인혈황의 후예! 취설서 취노인의 말에 무섭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 취려홍이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맑은 눈을 귀엽게 깜빡이다가 질문을 던졌다. "정말 무시무시하군요. 헌데 팔왕 중 으뜸이라는 천왕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요?" "천왕이란 바로 천종예가의 후예를 말하는 것이란다. 천종예가, 그들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술을 섭렵한 예인(藝人)의 가 문이란다." 취려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천종예가의 사람들은 모든 방면에 뛰어나기는 하지만 무 공만은 익힐 수 없는 몸이라던데 어떻게 천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이죠?" 취설서 취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한 모금의 술을 음미 하듯 천천히 마시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입을 열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자 주루 안에 있던 모든 중인들의 눈에는 답답해 하는 빛이 솟구칠 정도였다. 취설서 취노인과 그 손녀 취려홍이 주고 받는 대화의 내용은 일반 적인 전설이나 기화가 아닌 당금 강호의 정세를 정확히 이야기하 는 것인지라 무림인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크게 호기심을 느 껴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천종예가의 사람들은,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 것이란다. 그것은 무공을 익히지 않고도 충분히 그 들은 강하기 때문이었단다." "그럼 할아버지 말씀은 천종예가의 사람들이 무공에 있어서도 뛰 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요?" "그렇단다. 천종예가는 기실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의 후예들이니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그들이 어느 정도의 재능을 지녔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지 않겠느냐!"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 취려홍이 귀엽게 혀를 내밀며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은 크게 놀 랐다는 표정이었는데, 기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중인들의 경악을 대신 표현한 것이라고 해야 옳았다.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 실로 전설적인 피의 예술사가 아닌가!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 인간이면서도 피의 예술성을 지닌 신에 비견되는 지상 최고의 강자였던 그 분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취려홍이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질문을 던지고, 취설서 취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또한 천종예가는 백찰무경의 대총사 가문이며 그 외에 도 많은 비밀을 지니고 있는 가문이란다. 허나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천종예가의 후인이야말로 지상 최강의 강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란다." 취설서 취노인의 말에 취려홍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허나, 천왕이 되어야 할 천종예가의 마지막 후예인 유빙은 삼 년 전에 죽지 않았나요?" "소문은 그렇지만 그의 시체를 본 사람은 없다. 또 하늘이 내린 인물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 법이란다." "그럼 할아버지의 말씀은 그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말이군요?" 취려홍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다시 질문을 하며 한 차례 주루 안을 쓸어 보았다. 그것은 마치 모든 중인들 역시 자신처럼 믿지 않을 것이라는 듯한 동조를 구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헌데 우연이었을까? 취려홍의 눈이 이 순간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유빙의 얼굴에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것이 아닌가! 취설서 취노인이 취려홍의 질문에 대꾸했다. "아마 그는 살아 있을 것이다." 취설서 취노인과 취려홍의 대화방식은 실로 독특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사람이 물으면 한 사람이 대답하고 또 듣고 있는 사람 들이 궁금해 할 부분이 생기면 취려홍이 대신 질문해 주며 궁금한 점만을 골라서 이야기하고 있어 중인들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그들 의 대화 내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질문을 던지고 있는 손녀 취려홍이 만약 취설서 취노인만큼 모든 것에 정통해 있지 않았다면 과연 그토록 정확히 질문을 던지 며 대화를 유도해 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중인들은 대부분 이 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취설서라는 노인과 손녀. 참으로 신비한 사람들이로구나. 저들은 어떻게 본가에 대해 저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여인이 입어야 할 은라초의를 특이하게 걸친 채 백면서생처럼만 느껴지는 새하얀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두 자루 도를 허 리에 차고 있는 유빙이 한쪽 구석에서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때 취설서 취노인과 손녀 취려홍의 이야기가 계속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큰일이군요. 헌데 만약 이것이 엄청난 피의 난세를 예고하 는 것이라면 어째서 제벌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요?" "제벌! 글쎄 어쩌면 제벌 내부에 이미 분열이 왔을지도 모른단다. 제벌의 대벌주가 되기 위한 후계자 쟁탈전이 노골화 되지는 않았 으나 오래 전부터 대벌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있단다." "아....!" "허나 제벌은 기실 너무 비대해져 언젠가는 분열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고 있었단다. 그리고 제벌의 대벌주는 어쩌면 이 모든 것을 그저 방관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단다." "그것은 왜 그런가요?" "아마 더욱 강한 후계자를 구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지. 비가 온 뒤의 땅이 굳다는 말도 있지 않느냐? 아마 그런 이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로군요. 팔왕 중 할아버지가 말한 삼왕만이 격돌한다 해도 천하는 피에 젖을 텐데 나머지 오왕이 가세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취려홍이 짐짓 심각하다는 듯 아미를 찡그렸다. 취설서 취노인이 탄식처럼 입을 열었다. "팔왕이 격돌하는데야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허나, 실낱같은 하 나의 희망은 팔왕 중 두 사람이 힘을 합치고, 용병시장(用兵市 場), 용병육주비전(用兵六注比廛)의 힘을 얻어 나머지 제왕들을 굴복시키는 것 뿐이란다." -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 취려홍의 눈이 커졌다. "용병육주비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에요?" "......" 취설서 취노인은 돌연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단죽으로 탁 자를 툭툭 때려볼 뿐 입을 열 기세가 아니었다. 중인들의 눈에 안타까움의 빛이 솟구쳤다. 한참 호기심이 치솟아 있는 순간 취설서 취노인이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이때 취려홍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배시시 미소하며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이런...., 벌써 술이 떨어졌군요. 할아버지는 술이 떨어지면 이야기를 못하시는데....." 그녀는 중인들을 다시 훑어보며 간청하듯 입을 열었다. "누가, 우리 할아버지께 술을 대접할 분 안계신가요?" 그러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복청년이 한 걸음 나섰다. 그 는 이야기가 중도에서 끊긴 것이 답답하다는 듯 빠르게 입을 열었다. "주인장! 이 집에 있는 모든 술을 이곳에 쌓아 두시오." 그의 호통에 한쪽 회계대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사십대 중년인의 눈이 희번뜩 커지며 희색이 만면해 술과 음식들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취설서 취노인은 한 잔의 술을 마신 후 흡족한 듯 입언저리를 손 바닥으로 닦아내며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이란 말 그대로 파괴와 살상을 대신 해주 는 용병들을 고용할 수 있는 곳이란다." "정말 기이한 시장이로군요. 헌데 그들이 얼마나 무섭기에 팔왕의 난을 잠재울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인가요?" "무섭지. 아암. 무섭고 말고....! 용병들이란 일반적인 무인들하 고는 다르단다. 천하의 어떤 사람이라 해도 명예욕(名譽慾)이 아 니면 권력욕(權力慾), 설혹 자기 자신이 스스로 아무 욕심이 없다 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가지 작은 욕심은 있는 법이란다. 허나....." "허나....?" "용병들이란 오직 무공과 전투기술을 스스로 더 높은 경지로 성취 해 가는 것만을 즐기는 괴짜들이란다. 그들은 일반 무인들처럼 자 신을 나타내기 위해 무공을 익히는 것은 아니지. 그때문에 세인들 은 그들의 존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지만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진 정한 무인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란다." "....!" "그들 중에는 세상에 혐오를 느껴 그저 되는대로 전쟁터를 전전해 가고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인물은 파괴와 살상 그 자체를 즐 기기 위해 용병의 길을 택한 인물도 있단다." "아...., 그렇다면 그들은 진정 명예욕이나 금욕(金慾) 따위에 초월해 있다는 것인가요?" "그렇지. 그저 외길인생들의 모임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용병들이 란 이 세상에 존재했던 어떤 투사들보다도 강한 투사라는 것은 틀 림없다." 장내는 쥐죽은 듯 정적에 잠겼다. 너무도 엄청난 내용이자 실로 희귀한 내용이 일개 촌로인 듯한 취설서 취노인의 입에서 흘러나 온 때문이었다. "찾았다-!" "용천릉이 드러났다!" 헌데 바로 이 순간 돌연 어디선가 환호성이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 가! 주루와 꽤 멀리 떨어진 곳인 듯 예의 환호성은 아득히 들려왔다. 팟! 파파파- 앗! 순간 주루를 메우고 있던 수많은 무인들이 마치 썰물 빠지듯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루에는 썰렁한 기가 감돌았다. 용천 릉이 드러났다는 소식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려나간 것이었다. 허나 취설서 취노인과 유빙 일행, 그리고 화복청년은 용천릉이 드 러났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주루 안에 남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빙은 깊은 상념에 잠겨 천천히 음식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화복청년이 주루를 빠져나가지 않은 것은 어떤 흑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취소저, 그렇게 이야기를 팔고 다니는 것이 힘들지 않소?" 화복청년이 취려홍에게 다가가며 질문을 던졌다. 취려홍의 전신을 훑어보는 그의 눈에는 이 순간 음험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 나 취려홍은 방긋이 웃으며 부드럽게 응대할 뿐이었다. "힘들지 않아요. 저는 할아버지와 함께 천하를 떠돌아 다니는 것이 재미있기만 해요." "그렇지 않을텐데..... 이렇게 아름다운 낭자가 떠돌아 다니면 못 된 사람들이 나쁜 생각을 하게 되는 법이라오. 그러니 나를 따라 가지 않겠소?" 화복청년의 신형이 점차 취려홍에게 다가들었다. 이제야 노골적인 흑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제가 왜 당신을 따라가야 하나요?" 취려홍은 아직 그의 말뜻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맑은 웃음을 띄며 반문했다. "그것은...., 나를 따라가면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기 때문이오." 취려홍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저는 그런 것 필요 없어요." "글쎄....!" 천진무구하게만 보이던 취려홍이 의외로 단호하게 나오자 그는 야 비한 웃음을 머금으며 더욱 바싹 다가들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오? 려홍이가 싫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단죽노인이 당황에 찬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화복청년은 귀 찮다는 듯 살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단죽노인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많이 늙었군. 너무 오래 살았어. 그러나 이 아이를 내게 순순히 넘겨주면 더 오래 살 수도 있겠지." 단죽노인이 입을 딱 벌린 채 공포의 눈빛을 떠올렸다. 화복청년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것이었다. 이때 취려홍이 문득 유빙을 빤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누구 저희들을 구해주실 분이 안계신가요? 저희들을 구해주신다 면 제가 술 한 잔을 대접해 드리겠어요." 유빙의 눈빛은 무감각했다. 그는 말없이 음식을 들 뿐 취려홍의 눈을 피했다. 더할나위 없이 싸늘한 태도였다. "소형제, 내가 저들을 구해주어도 되겠는가?" 이 광경에 야작 율한극이 조심스럽게 유빙과 차손의 눈치를 살폈다. "썩은 돼지같은 놈. 네까짓 놈이 아니더라도 저 낭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차손이 나직이 혼자 중얼거리며 눈을 돌렸다. "무, 무슨 말이오? 지금 저 불쌍한 노인과 손녀가 당장 위험하게 되었는데!" 야작 율한극이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분노한 듯 사납게 입을 열 었다. 차손은 귀찮다는 듯 중얼거리며 손을 저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이 썩은 돼지야! 그러나 저 노인과 손녀는 너 보다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것만은 알아 두어라." 야작 율한극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는 새삼 노인과 취려홍을 바라보았으나 아무리 보아도 닭잡을 힘 하나 없는 가련한 촌로와 손녀가 아닌가! "귀찮다고 불의를 보고 피한다면 그게 어디 사람이오!" 야작 율한극이 의연히 외치며 몸을 일으켰다. "흥!" 차손은 가소롭다는 듯 빈 허공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② 야작 율한극, 그는 분명히 성공한 범죄자였다. 그의 이름은 전설 이 되어 무림에 떠돌고 있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신투로서 항시 일체 변장도 하지 않고 우아한 자신의 성에서 우아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는 그의 대담함으로 인 해 그의 명성은 더욱 드높아지고 있었다. 지하무림 흑궐(黑闕)과도 일체 관여하지 않은 채 단신으로 무림을 종횡하고 있는 그의 존재는 가히 영웅적인 것이기도 했는데..... 화복청년에게 천천히 여유있는 동작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의 전신 에서는 이 순간 범죄자들의 대부(代父)로서의 관록같은 것이 저절 로 풍겨나오고 있었다. "......" 화복청년의 눈에 일시 흠칫해 하는 빛이 스쳤다. 우아하고 세련된 풍도의 율한극에게서 그는 오히려 어떤 비정과 잔인함을 느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율한극이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무엇인 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야작 율한극의 주먹이 사정없이 그의 복부로 내리꽂혔다 퍽! "....!" 화복청년이 보기에 율한극은 무척이나 사무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 었으며 시간을 낭비하는 따위는 스스로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듯 한 기운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는 눈깜짝할 순간에 화복청년은 배를 움켜쥐고 엎어졌다. 비명은 너무도 큰 충격에 목에 걸려 나오지도 않았다. 퍽! 뻐벅! 율한극은 자신을 소개하는 일따위는 애초부터 마음에도 없었던 듯 했다. 그는 그저 지극히 우아한 동작으로 주먹이 뻗어나가도록 신 경쓸 뿐 일체 입을 열지 않은 채 화복청년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퍼억! 화복청년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전신 마디마디가 끊어지고 부서 지는 고통보다도 율한극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율한극은 무엇에도 무관심해 보였다. 단지 우아하고 세련된 동작 으로 패는 것에만 신경를 쓰고 있는 듯 했던 것이다. 맞고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로 짓이겨졌는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잠시 후 화복청년이 완전히 혼절해 버린 뒤 율한극이 천천히 손을 털며 극히 우아한 동작으로 취려홍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머금으 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야작이라는 사람이외다. 이 자에 대해서는 이제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오." "호호! 그렇게 되었군요. 저 사람은 이제 당분간 아무에게도 시비를 걸지 못하겠군요." 취려홍이 자신의 발 밑에 축 늘어져 있는 화복청년을 내려다 보며 까르르 웃었다. 참혹한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야작 율한극의 태도 에서 마치 우아한 연회장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듯한 느낌만 받았던 것이다. 율한극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자리에 돌아와 슬그머니 차손의 눈치를 살폈다. "차손! 어떻습니까? 제 동작이 우아했습니까?" 차손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썩은 돼지치고는 제법이었다. 무공이란 원래 우아함을 잃 지 않아야 되는 법. 너는 끝까지 우아함을 유지했다." 율한극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차손의 칭찬에 만면에 미소를 머금 으며 자리에 앉았다. 허나 이때 유빙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 는 앉자마자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갑시다. 별로 시간이 많지 않을 듯 하군요." 유빙이 담담한 태도로 주루를 빠져나갔다. 헌데 그 순간 취설서 취노인과 취려홍의 눈이 그의 등을 의미심장 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 유빙의 등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취려홍의 눈 깊숙한 곳, 그곳 에서는 기이한 빛이 맴돌고 있었다. ③ 방금 전만 해도 불야성을 이루며 수많은 무인들로 흥청거리던 거리였다. 그러나 수많은 천막들이 늘어서 있는 급조된 신시가지는 지금 죽 음의 도시처럼 썰렁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모조리 용천릉의 발굴현장으로 몰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유빙이 가고 있는 방향은 의외에도 용천릉이 드러났다고 알려진 방향이 아니었다. 묵묵히 뒤를 따르던 야작 율한극이 고개 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드러났다는 용천릉은 서북방향인 듯 한데 왜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쪽으로 갔다네." 유빙이 무표정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용천릉은 저쪽에 있을지 몰라도, 전국무후 정궁왕비 종무염의 무 덤이 있는 곳은 그쪽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유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종무염은 천고의 재녀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천봉극음지체(天鳳 極陰之體)라는 특이한 신체를 타고 났었습니다. 그러한 특이한 체 질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 을 발휘하는 법이지요." "그것하고 무덤이 무슨 연관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예! 용천릉을 설계 축조한 사람이 본가의 선조이신데 그 사후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의 사후에도 신경을 쓴다? 그 말은 곧 묻힐 자리조차 풍수지리학에 따른다는 것인가?" 야작 율한극의 눈이 커지고, 유빙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이지요. 풍수지리학에 의하면 천봉극음지체를 타고난 사람은 삼음지(三陰地)에 묻혀야만 영생(永生)할 수 있다 했습니다." "삼음지?" "예! 삼음지는 지상에서 가장 지고한 세 가지 순음지기(純陰之氣) 가 모여 있는 곳을 말합니다. 태음(太陰), 월음(月陰), 토음(土 音), 이 세 가지 음기(陰氣)가 교차되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지요. 원래 보통사람이라면 이 삼음지를 피해 안장되나 종무염 정궁왕비 는 특이한 체질을 지니고 있었기에 오히려 삼음지에 안장한 것입니다." 그제야 야작 율한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힐끔 유빙을 바라보았다. '나이도 많지 않은데 늙은이처럼 아는 것도 꽤 많군!' 율한극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허나 어찌 알았겠는가! 천하에 존 재하는 어떠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지금 유빙의 성취를 능가할 것 은 존재하지 않음을..... 천종예가, 모든 방면에 있어서 신의 능력을 지니고 있던 가문의 후예인 유빙의 뇌리 속에는 실로 천기(天氣), 만학(萬學)이 담겨 있는 것이다. "끄- 윽!" 어디선가 극히 저미한 비명성이 들려왔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알아챌 수도 없는 미세한 비명성이었다. 비명성이 그토록 미약한 것은 바로 그 비명성이 땅 속 깊숙한 곳에서 들려온 때문 이었다. 그러나 유빙과 차손은 물론이고 야작 율한극 또한 그 비명성을 너 무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유빙의 눈이 전면 십장여 지점에 있는 한곳에 고정되었다. 그의 눈에는 이채가 솟아 있었다. "놀라운 일이군. 누가 벌써 삼음지에 안장된 종무염 정궁왕비의 유체가 있는 곳을 발견했단 말인가?"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모래언덕의 중간지점이었는데 작은 모래 구덩이가 눈에 띌 뿐이었다. 허나 예의 모래구덩이는 기실 지하로 이르는 입구로써 누군가가 파헤쳐 놓은 것이 분명했다. 겉으로 보 기에는 일개 모래구덩이었으나 그 아래에는 드넓은 광장이 존재하 고 있었던 것이다. "저 모래구덩이가 삼음지의 입구인가?" 야작 율한극 역시 예의 모래구덩이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하고 입 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헌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삼음지 안으로 들어 간 듯 하군요." 유빙의 전신에서 서서히 기이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악 마의 혈청 사형종혈을 복용해 선천적 무인의 본능과 피의 예술성 을 추구하는 살인술사의 본능을 되찾은 그의 전신에서 엄청난 예 기(銳氣)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치 악마가 검은 날개를 펴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아니면 돌 연 어둠이 주위로 내려앉는 가운데 하나의 만월이 떠오르며 그 가 운데 유빙의 몸이 떠올라 있는 듯한 광경이랄까? 쓰- 윽! 유빙은 두 자루 도(刀) 쌍월을 매만지며 소리없이 모래구덩이 안 으로 미끄러졌다. 고독한 은빛 늑대 한 마리가 모래언덕 위에서 만월을 향해 울부짖는 듯한 분위기를 남긴 채..... ④ 모래구덩이 아래로는 기나긴 통로가 끝없이 뻗어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축조된 지하통로로써 바로 정궁왕비 종무염의 유 체가 안장되어 있는 유택(幽宅)으로 이르는 입구임이 틀림없었다. 헌데 희미한 어둠의 장막 저쪽에서 병장기 격돌하는 소리와 미미 한 비명성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카- 앙! 사사삭! "크윽!" 모래구덩이 아래에서 십여장 들어간 통로의 저쪽, 그곳은 사방 넓 이가 삼장여에 이를 정도로 통로가 넓어지기 시작하는 곳이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처절한 혈투가 전개되고 있었다. 더할나위 없이 화려한 한 채의 가마(家馬)가 수십여 명의 흑의인 들에 의해 둘러싸인 채 공격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휘황한 백봉(白鳳)이 날개를 편 채 창공을 비상하고 있는 무늬가 화려히 수놓여져 있는 사인교(四人轎)의 주위에는 아홉 명의 중년 미부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며 흑의인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중년미부들의 손에는 실로 기이한 병기가 들려 있었다. 금비녀처 럼 생긴 기형의 병기 금차(金 )를 든 그녀들의 무위는 실로 놀라 운 것이었다. 허나 숫적으로 열세인데다 흑의인들은 기습을 가한 듯한 형상이고 백봉칠향교(白鳳七香轎)를 둘러싸고 있는 중년미부 들은 의외의 기습을 당한 듯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면치 못하고 있 는 것이었다. "금차문(金 門)의 금차낭낭(金 浪浪)들이?" 유빙의 뒤를 따라 들어 오던 야작 율한극의 눈에 의혹이 솟아났다. - 금차문. 이 금차문은 당금 강호에 새롭게 부상되고 있는 여인문파(女人門派)였다. 모든 것이 신비에 가려있는 여인문파. 알려진 거라곤 단지 황실관 부와 연관이 있다는 점뿐이었다. 그녀들의 무공은 황실무공과 깊 은 연관이 있는데다 그 화후가 보통이 넘어 당금무림에 막강한 세 력으로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 신흥세력이었다. "저런 파렴치한 놈들! 수십여 명이 떼거지로 저 아름다운 여인들을 핍박하고 있다니!" 야작 율한극이 분노의 표정을 떠올리며 한 걸음 나섰다. "소형제. 내가 상대하겠네." 유빙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율한극은 우아한 동작으 로 격전장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삭-! 카앙! "앗!" 아홉 명에 달하는 금차낭낭들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수십여 명 에 달하는 흑의인들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검은 천으 로 가리고 있어 어딘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그 무공 또한 놀라워 이제라도 금차낭낭들은 피를 뿌리고 쓰러질 것 만 같았다. 그들의 일장 가까이 태연히 다가간 율한극이 극히 우아한 동작으 로 자신의 은발을 쓸어올리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싸움이라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마." 옆머리를 한 손으로 우아하게 쓸어넘기고 있는 율한극의 여유로운 태도, 그의 모습을 대한 흑의인들의 눈에 어이없어 하는 빛이 떠 올랐다. 난데없이 어디서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타난 것은 둘째로 치고 그 풍도가 너무도 우아하고 세련되어 있어 오히려 놀란 것이었다. 허나 일체의 말도 없이 돌연 한 명 흑의인이 율한극을 향해 덮쳐 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싸아아-! 무서운 검기(劍氣)가 다음 순간 이미 율한극의 전신대혈을 뒤덮고 있었다. 그 무의는 실로 가공스러운 것으로써 평범한 인물들이 아 님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허나 율한극은 우아한 동 작으로 예의 검세를 비껴내며 혀를 찼다. "쯧쯧, 서둘지 마라. 난 아직 준비가 덜 되셨다." 율한극은 이어 손을 털고 머리를 다시 매만지고 옷매무새마저 단 정히 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흑의인들을 향해 몸을 세웠다. 실로 어이없으리만큼 여유로운 태도였다. 허나 흑의인들은 일체의 기척도 없이 다시 덮쳐 들었다. 팟! 파파팟! 전면으로 두 명, 좌측으로 한 명, 그리고 우측과 머리 위쪽으로 각 한 명씩. 그들의 합공은 그야말로 물샐틈 없는 완벽한 공세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 일체 눈빛을 교환하거나 입조차 열지 않 은 채 공세가 펼쳐지고 있어 어찌보면 공포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율한극의 신형이 돌연 제자리에서 빙그르 회전했다. 파파.... 앗! 슈파아-! 돌연 그의 전신에서 칠채(七彩) 광휘가 사면으로 뻗어나감과 동시 에 무서운 예기가 흑의인들의 미간에 박혀 들고 있지 않은가! 캉! 파파팍! "크- 윽!" "왁!"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사면에서 덮쳐 들던 흑의인들 을 비롯하여 백봉칠향교를 공격하고 있던 흑의인들조차 일제히 고 목나무 쓰러지듯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어느 사이엔가 그들의 미간(眉間)에 각기 하나씩의 기물 체가 정확히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오색이 영롱한 기물체, 어찌보면 그 영롱한 광휘로 보아 보석같기 만 했다. 허나 일반적인 보석들과는 달리 예의 기물체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형체를 지니고 있었다. 작은 환(環)처럼 생긴 것이 있는가 하면 육각으로 깎인 것이 있 고, 또 그런가 하면 장방형으로 길게 다듬어진 것도 보인다. 그 모든 것이 같은 형체를 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율한극은 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이름도 위대한 황성야야께서 남기신 칠홍육각석 (七紅六角石)이라는 것이니라. 암기 서열 제일호인 칠홍육각석에 죽는 것이니 그리 억울하진 않을 것이다." 율한극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순식간에 전멸해 버린 흑의인들을 둘러보았다. - 삼백육십오(三百六十五) 칠홍육각석(七紅六角石). 이것은 바로 황성야야 율여립을 암기(暗記)의 제황으로 끌어올린 병기서열 삼 위에 달하는 기병(奇兵)이었다. 삼백육십다섯 개의 각기 형태가 다른 보석들로 이루어진 이 칠홍 육각석은 일시에 방원 백장내의 모든 것을 뒤덮을 수 있어 가히 천하무적의 암기로 손꼽히고 있는 신병이었다. 이 칠홍육각석은 그러나 황성야야 이후로 지난 일천여 년간을 나타나지 않았던 병 기이기도 했다. "살인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우아하고 깨끗하고, 조용하게!" 율한극이 조용히 중얼거리며 칠홍육각석을 회수한 채 몸을 돌려 유빙과 차손이 있는 곳으로 다가들었다. "세, 세상에!" "칠, 칠홍육각석!" 금차낭낭들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지고, 그녀들의 표정에 경탄과 감격이 어리는 것을 느끼며 율한극은 지극히 만족스럽다는 표정으 로 차손에게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괜찮은 작품이 아닙니까?" 당연히 그는 또 한 번의 칭찬을 들으리라 믿고 있었다. 헌데 차손 의 얼굴이 이 순간 더할나위 없이 싸늘히 굳어 있지 않은가! "이리좀 와 봐라." 차손의 음성 역시 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율한극의 뇌리로 문득 한 가닥 불안이 스쳐갔다. 그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차손에게 다가갔다. 헌데 아니나 다를까? 퍽-! 차손의 하나뿐인 손이 느닷없이 율한극을 향해 뻗어오지 않는가! 율한극은 이미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차손의 손 길을 도저히 피해낼 수는 없었다. 율한극의 무공은 지난 삼 년간 의 고련으로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차손의 공세는 율한극으로서도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가공스러 운 것이었다. "어이쿠!" 율한극이 비틀거렸다. "이 멍청한 썩은 돼지! 뭐가 어째? 이 정도면 괜찮은 작품이라고!" 퍼- 억! "아이구!" 율한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이제야 차손이 진정으로 분노했음을 느낀 것이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율한극은 차손이 진정으로 노한 것임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당 황해 더듬거렸다. 차손의 손은 무자비한 고통을 주며 연이어 율한 극의 몸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 미친 녀석! 황성야야의 삼백육십오 칠홍육각석의 암기비술은 네놈이 지니고 있는 마지막 비기(秘技)가 아니냐! 충분히 맨손으 로 상대할 수도 있는 조무래기들에게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고 자 만에 빠져 있다니!" 차손의 분노는 쩌렁쩌렁 암도(暗道)를 울리고 있었다. "이 미친 녀석! 비기는 감출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더욱 큰 위력 을 나타내는 것임을 몰랐단 말이냐!" 율한극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의 몸 위로 쏟아지는 차손의 손과 발길질을 고스란히 맞으며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비기라는 것은 상대가 모를 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인데 이 썩은 돼지가 단지 자랑하기 위해 펼치다니!" "....!" "그러고도 히죽히죽 웃음이 나온단 말이냐!" 율한극은 순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비명을 삼켰다. "이 쓸개빠진 녀석아! 네놈은 흉터덩어리 인간 학거비가 언제 자 신의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그가 무슨 병기를 사용 하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차손은 격한 음성으로 재차 다그쳤다. "또 그가 언제 자만에 빠져 있는 것을 본 적이라도 있느냐?" "....!" "진짜로 강한 명인도 그러거늘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운 주제에....." 차손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으며 더욱 무서운 분노를 터트렸다. 그 리고 그의 손과 발이 더욱 빨라졌다. "죽어라! 다른 놈에게 죽느니 아예 내 손에 맞아 죽는 게 낫지. 이 한심한 놈!" "음....!" 율한극의 몸이 미미하게 떨려왔다. 그것은 결코 고통 때문이 아니 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었다. 진정한 명인과 절대고수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마구 구타하고 있는 차손에게서 한없는 존경심과 우애를 느끼고 있었다. 비록 차손이 장난스럽게 행동하는 기인이기는 했으나 또한 진정으 로 자신을 아껴주고 있음을 그의 분노를 통해 느낀 것이었다. 차손이 손을 멈추며 문득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이 미친 녀석을 그래도 제자라고 그동안 가르쳤다니....진 짜 돼지를 가르쳤어도 너보다는 났겠다." 율한극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차손! 고정하십시요. 이제 다시는 자만하지도 과신하지도 않겠습니다." 율한극이 진정으로 뉘우치는 기색으로 조용히 입을 열자 차손이 빤히 율한극의 눈을 응시했다. 이어 훈훈한 정이 감도는 음성으로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썩은 돼지! 너에게는 그런 엄숙한 표정은 어울리지 않는다." 율한극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율한극, 그는 차손이 자신에게 진한 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되 었고 언제나 골탕을 먹는 입장이면서도 그 자신 역시 차손에게 어 느새 깊은 정이 들었음을 이 순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 팔왕예조 제2권 제12장 앙큼한 여심(女心) ━━━━━━━━━━━━━━━━━━━━━━━━━━━━━━━━━━━ ① 암도(暗道), 미로(迷路)처럼 얽혀 있는 암도를 따라 유빙이 조용 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다소 안도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다행이로군. 저들이 제일 처음 이곳을 발견한 듯하다. 아무도 먼 저 들어간 흔적이 없다!' 유빙의 바로 뒤에는 차손과 율한극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뒤따르 고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백봉칠향교를 호위한 금차낭낭들이 조용 히 따라오고 있었다. 문득 유빙의 눈에 한기가 떠올랐다. 그는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백봉칠향교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야작! 이 분들이 나가는 길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밖에까지 안내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야작 율한극이 차손을 돌아 보았다. 유빙의 말은 곧 명백한 축객 령(逐客令), 바로 백봉칠향교와 금차낭낭들을 내쫓으라는 말이었다. "들었는가?" 야작 율한극이 정색하며 금차낭낭들을 둘러보았다. 허나 이 순간 금차낭낭들 중 제일 연장자인 듯한 중년미부가 조용히 나서더니 유빙을 향해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닌가? "저.... 유공자님! 저희 아가씨께서 잠시 유공자님을 뵈었으면 합니다만...." '유공자.... ?' 유빙의 눈에 흠칫 이채가 솟아났다. 놀랍게도 그들이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유빙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허나 그는 이내 더욱 싸늘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나를 알고 있다니 잘되었군. 천종예가의 후예들은 가문의 일을 남들이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알 것이니 말일세. 자, 그러니 어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네." 허나 바로 그 순간 백봉칠향교 안에서 돌연 웃음을 참는 듯한 나 직한 교소가 터져나오지 않는가! "킥! 억지로 매력있는 차가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는 버릇은 여전하군." 유빙의 눈에 일시 희미한 이채가 솟아났다. 허나 그 이채는 이내 반색으로 변해갔다. 너무나도 귀에 익은 말투 그리고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백봉칠향교의 주렴이 걷히며 한 소녀가 조용히 내려섰다. 촤르르르-! 오이씨같은 앙증스럽고 아름다운 발(足)이 먼저 지면을 밟고, 뒤 이어 궁장에 감추어진 늘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그리고 화려한 궁 장을 단정히 걸친 전신이 드러나고 이내 햇살이 피어나듯 더할나 위 없이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커다란 눈과 백옥빛 피부, 건강미가 넘치는 발그레한 두 뺨에는 깊은 보조개가 파여있어 실로 가슴이 진탕될 정도이다. 여기에 함 박웃음을 머금은 채 드러나 있는 뽀얀 치아가 너무도 가지런하다. 아아!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희미한 암도를 환하게 돌변시키고 있 는 절세미소녀는 바로 경국제일미인 화예란이 아닌가! "이제보니 맹랑한 공녀였군." 유빙이 미미한 반색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어찌 반갑지 않으 랴! 허나 그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짐짓 싸늘히 입을 열고 있었다. 하지만 내심 유빙의 가슴은 은은히 진동되고 있었다. 삼 년(三年). 그 삼 년의 세월이 유빙을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시 킨 것이기도 했지만 화예란에게 역시 엄청난 변화를 안겨준 세월 이었음을 대번에 느낀 것이었다. 그저 귀엽기만 했던 말괄량이 소 녀를 이제 완연히 여인의 티가 물씬 풍기는 절세 미소녀로 성장시 킨 것이었다. 차손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눈을 빛냈다. "아들아! 저 귀여운 아이와는 아는 사이냐?" "예, 조금....." 유빙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차손의 눈빛 속에 짓궂은 빛이 일렁이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이때 돌연 화예란이 차손에게 다가가 입고 있는 궁장(宮裝)이 더 럽혀지는 것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대례(大禮)를 올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화예란이라 합니다. 유빙 오라버니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이지요."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새색시가 시아버지에게 대례를 올리는 듯 엄숙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유빙의 눈이 화예란의 돌연한 태도에 멍청해지고, 순간 차손은 입 이 찢어질 듯 만면 하나 가득 미소를 떠올렸다. 화예란의 이런 모습은 실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앙증스 럽고 귀여운 것이었다. 그리고 가공스러우리만큼 민첩한 대응(對 應)이었다. 화예란은 차손이 유빙에게 아들이라 호칭하는 것을 듣 자마자 이같이 선제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유빙의 부친이라 믿고 그 부친부터 공략(攻略)하겠다는 귀여운 음모(?)가 아니겠는가! "흘흘....! 무슨 큰 절까지....!" 화예란의 작전은 기가 막힐 정도로 적중하고 있었다. 차손은 단 한순간에 이미 화예란의 편이 되고 있었다. "아니예요. 이 세상에서 소녀의 큰절을 받으실 분은 오직 유일하 게 어르신네 한 분뿐인 걸요. 모자라더라도 많이 가르쳐 주고 귀 여워 해주시면....." 차손의 입이 더욱 찢어졌다. 노인치고 공대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 이 뉘 있으랴! 더우기 화예란같은 귀엽고 아름다운 소녀의 사근사 근한 공대 앞에서야..... "흘흘....! 이르다 뿐이겠느냐. 이제부터 너는 내 친자식이나 마찬가지니라." 차손이 한 팔뿐인 오른손을 마구 흔들었다. 이것 또한 명백히 며 느리에게 하는 듯한 말투가 아닌가. 척하면 착이라던가....? "고마워요! 이제부터 소녀도 어르신네를 친아버님처럼 모시겠어요." 실로 앙큼한 태도..... 유빙은 입을 딱 벌린 채 두 사람의 태도를 멍청히 지켜보기만 하 고 차손은 더욱 흐뭇해져 저절로 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으하하.... 제자야! 어떠냐 내 양딸이?" 그는 너무도 흡족해 아무에게나 자랑하고 싶은 듯 돌연 야작 율한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말 훌륭합니다. 이 세상에서 저토록 어여쁘고 예의 바른 소녀 는 없을 것입니다. 진정 축하드립니다."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너무도 황당무계한 상황에 유빙은 쓴웃음조차 짓지 못한 채 멍청해졌다. 이렇게 순식간에 한 쌍의 다정한 부녀(父女)가 탄생될 줄이야 뉘 라서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또 이것이 모두 화예란의 엉큼 한 흑심(?)에 의한 작전이라는 것을 유빙만은 알고 있었기에 그는 내심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문득 차손의 눈이 유빙을 향했다. "귀여운 나의 아들아! 이제야 너를 기른 보람이 느껴지는구나. 너 는 정말 좋은 아이를 니 애비에게 며느리로....." 차손이 찔끔 말을 멈췄다. 유빙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아들아! 너는 기쁘지 않느냐?" 유빙은 그의 질문을 무시한 채 싸늘히 얼굴을 굳혔다. "이곳은 천종예가의 선조께서 만드신 유택입니다. 외인(外人)은 절대 들일 수 없습니다." 차손의 눈에서 번쩍 불꽃이 일었다. 그는 사나운 말투로 유빙의 말을 반박했다. "이놈아! 저 아이가 어째서 외인이란 말이냐? 내 양딸이 아니냐! 양딸!" "......" 유빙이 할 말을 잊었다.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열며 몸을 돌렸다. "그렇다면 저는 먼저 들어가겠으니 차손은 저 맹랑한 공녀를 데리 고 천천히 들어오십시요." 유빙이 앞장서 뚜벅뚜벅 암도 저쪽으로 사라지자 차손의 입에서 신세타령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 무심한 놈같으니...., 내가 저를 얼마나 귀여워해주고 사랑해 주었는데 나를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다니." 차손은 크게 실망한 듯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그러자 화예란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위로하지 않는가! "유빙 오라버니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단지 쑥스러워서 그랬을 거예요." "정말 그런 것 같으냐?" "그럼요. 유빙오빠는 남들 보는 앞에서 여자에게 다정하게 해주는 성격이 아니었어요. 그 성격이 어디 가나요. 뭐!" 차손이 희색을 띄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저놈은 좀 싸늘하게 보이지만 속마음은 아주 착하단다. 앞으로 네가 많이 보살펴 주려무나." "네." 화예란이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흘흘.... 자! 가자!" 차손은 더욱 기분이 좋아진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실로 번갯불에 콩 튀겨먹는 식으로 급조(急造)된 부녀지간(父女之 間)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참으로 죽이 잘맞는 오래된 부녀지간같았다. ② <전국무봉황후전(戰國無封皇后殿)> 거대한 석전(石殿), 실로 엄청난 넓이의 석전이 지하에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의 실물크기 황금군상(黃金群像)이 일천 개나 열과 오를 맞춰 전면 드높은 석단을 향해 하례(賀禮)를 드리는 형상으로 서 있고, 그 뒤쪽으로는 흙으로 빚어 만든 듯한 수많은 기마상(騎馬像)들이 또한 셀 수 없이 가득 차 있었음이니 석전의 넓이는 실로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석전 전체에서는 마치 지하에서 망자(亡者)들의 제황이 하 례를 받고 있는 듯한 엄숙하고도 장엄한 분위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더할나위 없는 정적과 숨막힐 듯한 엄숙함이었다. 석전의 북쪽 상단에는 거대한 석대가 삼 장 높이로 솟아 있었는데 예의 석대 위에는 두 개의 수정관(水晶棺)이 석전내의 모든 것 위 에 군림하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안치되어 있었다. 은은한 광휘를 발하고 있는 수정관이 놓여 있는 위치는 바로 정확한 삼음지(三陰地)였다. 그렇다. 이 석전이 바로 전국무후 정궁왕비 종무염의 유택이었던 것이다. 유빙은 전국무봉황후전의 장엄하고도 숙연한 광경에 자신도 모르 게 옷깃을 여몄다. "......" 망자의 휴식처를 침입한 듯한 느낌에 그는 더한층 조심스럽게 두 개 수정관이 있는 석대를 향해 다가들기 시작했다. 두 개의 수정관 중 그 한 개에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한 중년 미부와 한 장년인이 함께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수정관에는 반백(半白), 반적(半赤)의 기이 한 용모를 지닌 여인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부부인 듯한 두 명의 중년남녀가 안치되어 있는 수정관을 바라보 던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황(藝皇) 유귀광(劉貴光) 신위(神位).> <초의령령(草衣玲玲) 갈소군(鞨少君) 신위(神位).> 수정관 전면에는 역시 수정으로 조각되어 있는 위패(位牌)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빙의 짐작대로 예황 유귀광 부부가 함께 안장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위패였다. 유빙은 예의 예황 유귀광 선조부부가 안장되어 있는 수정관 앞에 놓여 있는 빛바랜 서책을 집어 들었다. 바로 예황 유귀광이 죽기 전에 남긴 글이었다. <그녀는 졸립다고 했다. 그녀는 잠을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할 것 같다고 말한 다. 허나 그 잠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잠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죽음의 비밀을 혼자 간직할 고통으로 가슴이 무너지고만 있는데 그녀는 웃으며 내 곁을 떠나 려 하고 있는 것이다.> 초의령령 갈소군의 최후 무렵에 기록된 듯한 글귀, 그 글귀는 예 황 유귀광과 초의령령 갈소군 사이의 말년을 이미 알고 있는 유빙 에게 코끝이 찡해지는 애절한 글이 아닐 수 없었다. 예황 유귀광의 아내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담겨져 있는 글, 그 글 은 아내 초의령령 갈소군이 죽기 직전과 바로 죽은 후의 자신의 심정을 기록한 고통의 일기였다. <이로서 나의 사랑, 나의 인생은 회색빛 잔해 속으로 묻힐 것이 다. 그녀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깊은 잠에.... 웃으며.... 나의 찢어지는 가슴의 고통을 모른 채 그렇게 빠져 들었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난 지 사흘. 문득 나는 이즈음에 들어 몹시 기쁘고 유쾌해 졌다. 그것은 한 가지 생각을 마무리지었기 때문이다.> 예의 처절한 사랑의 글귀를 읽어 내려가던 유빙의 눈에 일시 의혹이 솟아났다. 동시에 한 가닥 불안이 뇌리를 스쳤다. 예황 유귀광의 글에서 어 떤 섬뜩한 무엇을 느낀 것이었는데.... . <외롭게 혼자 간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것. 그것이야말로 회색빛 나 의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희망이 아니겠는가! 이제 남은 것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나의 신변을 정리하는 것 뿐이다.> "음, 역시 이 분은 천수(天壽)를 다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하 던 아내의 뒤를 따른 것이었구나." 유빙은 황급히 다음 글귀를 읽어내린 후 고개를 저었다. 실로 지고한 사랑이 아닌가! 저절로 가슴이 젖어들 숭고한 사랑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몹시 바쁘고 활기찬 나날이었다. 사랑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갈 생각을 하며 신변을 정리하는 나의 마지막 나날은 몹시 바빴다. 허나 나는 전혀 힘이 든 줄 몰랐다. 사랑하는 그녀를 만났을때 건네줄 선물을 준비해야 하기도 했고, 또 우리들 두 사람 사랑의 결정체인 린아(麟兒)의 앞날에 대한 배려도 해야겠다. 허나 나는 이 모든 일을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대하기 위해 즐거 운 마음으로 마무리짓고 싶은 것이다.> <모든 일이 이제 정리가 된 듯하다. 이제 그녀에게 갈 시각이 된 것이다. 헌데 이곳에 와서야 그녀가 가장 기뻐할 선물 하나를 잊 고 있었음이 생각났다. 그것은 그녀에게 선물하려던 은라초의에 맞는 무공구결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풀잎을 병기로 사용하던 무공을 천하제일의 무공으로 보완해 그녀에게 선물하는 것, 이제 내가 해야할 일은 바로 그것이다. 은라초의는 내가 그녀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든 최고의 기병, 이제 그 은라초의로 사용할 무공만 그녀에게 선물하면 되는 것이다. 허 나,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원래 그녀가 풀잎을 비도(飛 刀)로 사용하던 초의비결(草衣秘訣)을 응용하면 가히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음, 은라초의를 기병으로 사용하는 무공구결이 이곳에 남아 있었단 말인가?" 유빙의 눈에 어떤 기대가 스쳤다. 초의비결을 보완해 무적의 신공 (神功)을 창안하려 한 예황 유귀광 선조의 글에서 이곳에 그 완성 된 무공구결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항시 하던 말이 문득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천종예가의 후예는 무공을 익히지 못하니 자신이 천하제일의 여고수가 되어 나를 영원히 보호하겠다며 더욱 무공에 정진하던 그녀는 항시 천 하제일인이 되겠다고 애교스러운 장담을 하곤 했었다. 린아를 낳고 부터는 그 극성도 더욱 심했었는데..... 허나 이제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비록 현세(現世)에서는 이루어지 지 않았을지 모르나 내세(來世)에서만은 그녀는 천하최강의 무인이 될 것이다. 그 까닭은 내가 완성시킨 무공인 초의령령 사모곡(思母曲)이야말 로 본가 최대의 무인이셨던 사형예조 선조의 원월도법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니.....> 서찰은 끝을 맺지 않은 상태에서 끊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은 라초의로 펼치는 기학(奇學)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초의령령 갈소군이 원래 지니고 있던 초의비결을 완 벽히 보완해 실로 천하제일의 신공으로 다듬은 것이었다. <초의령령(草衣玲玲)- 사모곡(思母曲).> 무공 이름치고는 특이하지 않은가! 특이하게도 예황 유귀광은 자 신이 창안해낸 무공의 이름에 조차 아내를 그리는 제목을 붙인 것이었다. 헌데 은라초의를 이루고 있는 은빛 풀잎 하나하나를 병기로 사용 하는 예의 초의령령- 사모곡은 한 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위력을 보이고 있었으니..... 유빙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미 만학(萬學)을 머리에 담고 수십여에 달하는 절대기학 (絶代奇學)들을 익힌 인물이다. 그러기에 단지 한 구결만을 보더 라도 그 무공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 가공할 위력!" 유빙의 입에서 저절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한 줄기 풀잎을 비도(飛刀)로 사용하는 초식인 초의령령- 사모곡 은 한 개, 또는 두 개, 아니면 수십여 개의 풀잎을 발출하며 펼쳐 내는 무공으로써 실로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모든 무공구결은 또한 은라초의라는 기병만으로 펼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모두 다섯가지 초식으로 나뉘어져 있는 살인기예(殺人技藝)였다. - 제일살곡(第一殺曲), 초도일비(草刀一飛) 일원황(一元荒). 한 개의 풀잎이 허공을 가른다. 금성철벽이라해도 막을 수 없으며 하나의 점(點)이 허공에 일점 (一點)을 찍는 순간 죽음의 단장음(斷腸音)만이 떠돌 것이니..... - 제이살곡(第二殺曲), 초도난보(草刀亂步) 칠성난(七星亂). 일곱 개의 풀의 칼이 허공을 주유한다. 모든 것은 물이 베어진 듯 흔적도 없이 깨끗이 베어질 지이니..... - 초의령령사모곡 제삼살곡(第三殺曲), 팔궤도파(八机刀派) 귀곡팔황(鬼哭八荒). 칼의 파도가 해일이 되어 천지를 유린한다. 팔황에 풀피리 소리와 죽음의 음향만이 진동할지니..... - 초의령령사모곡 제오살곡(第五殺曲), 초의장막(草衣帳幕) 십절도섬천하(十絶刀閃天下). 풀잎의 장막이 일시에 천하를 뒤덮는다. 그 가운데 도광(刀光)이 뇌전과 함께 천과 지를 태초의 혼암(昏暗)으로 되돌릴 지이니..... 유빙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면 이 분이야말로 사형예조 선조님이나 천약성 유백초 선조 님보다 더욱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분인지도 모르겠다." 유빙은 새삼 예황 유귀광 선조와 그 아내 초의령령 갈소군의 애절 한 사랑에 대해 떠올렸다. "이 분은 단지 그 다정다감한 성품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오직 아 내에 대한 사랑으로만 돌렸지만, 이 분이 완성시킨 이 초의령령 사모곡이야말로 그 분의 엄청난 천재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기실 예황 유귀광은 선천적으로 체내에서 무인의 본능을 제거당하기는 했으나 엄청난 무인의 본능을 지니고 있던 무(武)의 귀재였음이 틀림없었다. 수많은 기병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기병들을 다룰 수 있는 무공에 이미 달통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여기에 그 기병에 맞는 무학을 스스로 창안했다 함이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유빙이 예황 유귀광의 엄청난 무학에 감탄하고 있을때 어느새 그 의 뒤로는 차손과 화예란이 다가들고 있었다. 헌데 화예란은 서슴치 않고 석대 위로 올라와 예황 유귀광 선조 부부가 누워 있는 수정관 옆에 놓여 있는 정궁왕비 종무염의 수정 관에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화예란은 이어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종무염의 유체가 안장되어 있는 수정관의 한 부분을 매만졌다. 스르륵! 그러자 예의 수정관 위에 덮혀 있는 수정벽이 밀려나며 그 내부가 드러나지 않는가! "....!" 유빙의 눈에 놀람이 솟아났다. 순간 화예란은 태연히 유체옆에 놓여진 종무염의 유진(遺眞)을 꺼내들고 있었다. "공녀가 어떻게 본가의 기관을 열 수 있었단 말이냐?" 유빙의 다소 놀람에 찬 질문에 화예란이 배시시 웃었다. "몰라요. 그러나 나에게 란매(蘭妹)라고 불러준다면 대답할 수도 있어요." 유빙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 못한 듯 입을 열었다. "란매....! 이제 됐겠지?" "됐어요." 화예란이 활짝 미소를 머금으며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귀엽게 눈을 좁혔다. "음, 원래 이분 정궁왕비의 친가(親家)와 저희 할머님의 가문은 같은 가문이었어요." "천문왕부의 노대부인이 바로 정궁왕비의 생가(生家)의 후예였단 말이지?" 유빙이 흠칫 이채를 떠올렸다. 화예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정궁왕비께서는 말년에 자신이 묻힐 장소를 천종예가 에 부탁하면서 그 비밀을 하나의 시(詩)로 남겨 생가(生家)에 보냈던 거예요." "아....!" 유빙이 신음성을 터뜨렸다. 이제야 모든 것이 그의 뇌리에서 의문의 껍질을 벗는 듯한 느낌이었다. 화예란이 종무염의 유체가 안장되어 있는 정확한 위치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낼 수 있었던 것과 수정관을 열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전일 노대부인이 천종예가에 대해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었던 점 등이 모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 시의 구절이 하도 난해해 신비를 풀지 못하고 있었으나 내가 우연히 풀어 여기까지 오게된 거예요." 화예란의 이어지는 말에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서 모든 의혹이 풀린 것이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그들이 서 있는 전국무봉황후전에 한 떼의 흑의인들이 소리도 없이 밀려들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그 수효는 무려 오십여 명. 전신을 완전히 흑포(黑袍)로 뒤집어 쓰고 있는 그들의 전신에서는 실로 가공스러운 기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체의 동정도 느껴지지 않는 소리없는 움직임. 그리고 더할나위 없이 잔잔한 눈빛, 이 모든 것들은 그들 개개인 모두 가공할 고수 들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 팔왕예조 제2권 제13장 죽음(死)의 풀피리 소리! ━━━━━━━━━━━━━━━━━━━━━━━━━━━━━━━━━━━ ① 스슷....! 스스슷....! 실로 미미한 음향과 함께 검은 파도가 밀려오는 듯 순식간에 전국 무봉황후전을 가득 메운 정체불명의 흑포인들의 모습을 대한 유빙 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안개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훗! 감히 천종예가의 선조께서 묻힌 유택을 침범하다니.... 예황 유귀광 선조님의 영면을 방해한 것만으로도 이미 용서할 없는 일이다." 어찌보면 더할나위 없이 맑은 백면서생의 미소이다. 허나 유빙의 전신에서 서서히 번져나오고 있는 기이한 기세와 어 울려 그의 미소는 보는 이의 등골에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는 가 공할 죽음의 미소처럼 공포스럽게 떠오르고 있었다. 뿐이랴! 드러난 그의 피부는 마치 한 겹 얼음이 내리 덮힌 듯 빙석처럼 투 명해지고 있는 듯 했고 두 눈은 일체의 감정도 없이 깊이 침잠되 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이 순간 그의 주위로 마치 만월(滿月)같 기도 한 후광(後光)이 떠오르는 듯한 환영이 비쳐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모래 언덕에서 만월을 향해 울부짓고 있는 고독한 한 마리 은빛늑대를 연상시키고 있는 듯한 분위기...., 마치 만월 속에 거 대한 사람의 그림자가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독안개처럼 번져나오는 살기..... '아....!' "......" 유빙의 돌변하는 기이한 분위기에 화예란과 야작 율한극이 흠칫 경악했다. 인간의 전신에서 이토록 기이한 분위기가 떠오르리라고 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차손이 심히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 빌어먹을 악마의 혈청 사형종혈의 피의 본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군." 차손이 문득 정색하며 율한극을 향해 입을 떼었다. "잘 봐두거라! 유빙의 저 모습이야말로 진짜 피의 예술사(藝術史) 의 모습이다. 우리는 오늘 일천칠백 년이나 단절되었던 피의 예술 사의 가공할 피의 본능이 부르는 죽음의 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야작 율한극의 눈에 극도의 호기심이 어렸다. 유빙은 차손의 빈정대는 듯한 말과 무서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흑포인들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문득 예황 유귀광이 남긴 서책을 다시 펼치기 시작했다. "초의령령사모곡! 그 애절한 사랑이 담긴 무공을 시험해 보기에 실로 적당한 기회로군." 유빙. 그는 이제라도 덮쳐들 듯 소리없이 그의 주위 석대 가까이 다가들고 있는 흑포인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천천히 서책을 넘겼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너무도 태연자약한 행동. 파- 앗! 어느 한순간, 유빙의 전면 삼장, 가장 선두에서 다가서고 있던 흑 포인의 신형이 단숨에 허공을 단축하며 덮쳐 들었다. 어깨 한 번 움직인 것 같지도 않은데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이미 유빙의 한 치 앞에서 작렬하고 있었다. 삐- 익! 귀를 찌르는 한 줄기 풀피리 소리가 돌연 정적을 갈랐다. 흑포인의 신형이 돌연 멈춰지고 유빙의 담담한 음성이 뒤를 따랐다. "초의령령- 사모곡 제일곡, 초도일비(草刀一飛)!" 쓰- 윽! 유빙은 어느새 서책의 다음장을 넘기고 있었다. 헌데, 아아! 마악 유빙에게 공세를 퍼부으려던 흑포인의 미간을 보라! 그곳에는 어느새 한 줄기 은은한 청광을 흘려내고 있는 풀 잎이 꽂혀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초도일비(草刀一飛) 일원황(一元荒). 한 개 풀잎이 허공을 가른다. 하나의 점이 허공에 일점(一點)을 찍는 순간 죽음의 단장음이 들려올 지이니..... 맹세코 전국무봉황후전내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유빙의 손이 움 직이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허나 어느새 풀피리 소리와 함께 은라초의의 한 개 풀잎이 기음향(奇音響)을 발출하며 흑포인 의 미간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아....!" 야작 율한극의 입이 딱 벌어지고...., 소리없이 사면에서 다가들 고 있던 흑포인들의 눈에 이채가 솟아났다. 이때 유빙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서책을 넘기고 있었다. 팟! 슈파아-! 순식간에 네 방향에서 흑포인들이 다시 귀영(鬼影)처럼 덮쳐왔다. "훗! 제이곡, 초도난보(草刀亂步) 칠성난(七星亂)!" 삐이이익-! 삑! 유빙의 담담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싶은 순간 다시 귀를 찌르 는 풀피리소리가 진동했다. 철- 썩! 와르르....! 동시에 귀영처럼 덮쳐들던 흑포인들이 환상처럼 무너져 내렸다. 놀랍게도 그들의 미간에는 정확히 하나씩의 미백색과 청광이 어우 러진 풀잎 하나씩이 박혀 흔들거리고 있었다. 꽈- 윽! 슈- 우욱! 흑포인들은 마치 검은 파도처럼 일제히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들 의 공세는 가히 경인지경(驚人之境), 태산이라도 단숨에 쓸어버릴 듯한 무서운 공세였는데 무엇보다 가공스러운 점은 그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음은 물론이고 죽어가면서조차 비명성 하 나 터뜨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순간 유빙은 또 다시 서책을 넘기고 있었다. 바로 예황 유귀광이 남긴 은라초의의 사용구결인 초의령령- 사모 곡을 다시 펼쳐보고 있는 것이었다. 헌데 믿을 수 있는가! 유빙, 그는 원래 초의령령사모곡을 처음 읽었을때는 그 무공구 결과 위력만을 대충 훑어 본 것에 불과했다. 허나 이 순간 그의 손에서 예의 가공할 기학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은 곧 그가 공세 속에서 예의 초의령령사모곡의 하나를 펼치고 있음이니....! 삐- 이- 익! 삑! 털썩! 쿠.... 웅! 또 다시 선두에서 밀려들던 열두 명의 흑의인들이 흩어지는 물보 라처럼 무너지고, 그 뒤로 유빙의 음성이 담담하게 들려왔다. "팔궤도파- 귀곡팔황!" 아아, 이것을 어찌 우아하고 아름답기만한 은라초의가 보여주는 위력이라 믿을 수 있을텐가! 더구나 유빙은 예의 초의령령- 사모 곡을 단지 한 번 읽은 것만으로 완벽히 펼쳐내고 있었으니..... 순식간에 죽음의 정적이 전국무봉황후전을 내리 덮었다. 그것은 실로 공포스러운 정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공포스러운 유빙의 무위에 흑포인들의 눈엔 이제야 인간의 감 정, 공포의 빛이 물결쳤다. 이십여 구의 시신 앞에 우뚝 서 있는 유빙의 전신은 마치 포획물 (捕獲物)의 시체를 밟고 천공을 향해 포효성을 터뜨리는 은빛 늑 대를 보는 듯 한다고나 할까....! 이것은 악마의 혈청, 사형종혈이 지닌 가공스러운 피의 예술성이 일천칠백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재현되고 있는 광경이었으니..... 삭! 흑포인들 중 한 명이 오른손을 허공으로 올려 기이한 수신호(手信號)를 보냈다. 스슷....! 스스슷! 찰나 흑포인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일체 소리도 없이 물러 나기 시작했다. 눈은 계속 유빙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으나 그들은 뒷걸음치며 그야말로 썰물이 빠지듯 어느새 전국무봉황후전을 빠 져 나가고 있었다. "....!" 유빙이 흠칫 이채를 떠올렸다. '물러날 때는 물러날 줄 안다....? 평범한 자들이 아닌 것은 짐작 하고 있었지만 놀랄만큼 훈련이 잘 된 자들이로구나!' 흑포인들이 소리없이 전국무봉황후전에 밀려들고, 유빙의 손에서 죽음의 풀피리소리가 터져나오며 이십여 명이 쓰러지고 그리고 흑 포인들이 다시 소리없이 물러난 이 일련의 행동. 이 모든 것이 일 체 별다른 격돌음조차 없이 한 줄기 풀피리 소리만 들려왔다 사라 진 순간에 마무리 된 것이었다. 흑포인들은 등장에서부터 물러날때까지 일체 입을 열지 않았고 유 빙 역시 너무도 고요한 태도로 살인을 끝낸 것이었다. 소비된 시간은 그야말로 반각여. 그 짧은 시간에 한 초인(超人)의 탄생이 예고된 것이었으니..... 제이세(第二歲) 사형예조(死刑藝祖)의 탄생지장(誕生之場), 그 탄 생의 장(場)은 죽음의 사막, 토번사풍리였다. ② 토번사풍리(土藩砂風里). 열사(熱砂)의 대지 토번사풍리의 허공 위에 차가운 만월(滿月)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사구(死丘) 위에 은은히 내리비치고 있는 은파(銀波)는 요 기(妖氣)에 가까운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그 월광(月光)을 받으며 세 개의 그림자가 조 용히 토번사풍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깨 위에는 우아하기 이를데 없는 미백색의 초의(草衣)를 걸치고 단아한 얼굴에 월광이 반사되어 더욱 신비롭다. 유빙. 그렇다! 만월의 교교로운 월광에 잠겨 있는 토번사풍리를 소리없이 빠져나가고 있는 인물은 바로 유빙과 차손, 그리고 야작 율한극이었다. 야작 율한극의 눈에는 이때 불만에 가까운 의혹이 떠올라 있었다. "소형제! 무엇때문에 이렇게 급히 떠나는 것인가? 내 생각에는 용 천릉의 발굴 현장도 지켜 보면서 이곳에서 대충 강호의 정세를 파 악한 후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유빙이 고개를 저었다. 야작 율한극의 눈에 더욱 의아스러워하는 빛이 어렸다. "그렇다면 소형제는 아직 중원으로 갈 생각이 없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야작 율한극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중원으로 가기 위함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출도했단 말인가? 그 리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야작 율한극. 그는 기실 중원이 그리웠다. 아무 계획도 없이 유빙 의 뒤를 미행해 오다 적전마람에 들어 삼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항시 우아한 생활을 즐겨오던 그에게 삼 년간이 나 죽음의 사막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실로 지옥같은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뿐이랴! 기실 그의 내심에는 지난 삼 년간 적전마람에서 익힌 기 예를 한시라도 빨리 중원에 나가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차손이 안스럽다는 듯 기이한 눈빛으로 야작 율한극을 빤히 응시했다. "알 수 없는 일이군. 이런 돌머리가 이 나이가 되도록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이오?" 차손이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야작 율한극이 볼멘 음성으로 되물 었다. 차손이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이 돌머리 놈아! 지금 중원은 제벌의 내분과 팔왕의 난인가 뭔가 하는 아귀다툼이 벌어지기 일보직전의 폭풍전야라고 하지 않았더냐!" "....!" "이런 시기에 네놈은 빙아가 내가 왔소 하고 소문내고 다녀야 시원하겠느냐?" "그렇다면 무엇하러 출도를....?" "네놈은 몰라도 된다." 차손이 단호히 말을 끊자 문득 율한극의 눈에 비꼬는 듯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다면 사부는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알고 있다. 허나 네 녀석에게는 절대 가르쳐 줄 수 없다." '미친 늙은이! 자기도 모르면서....!' 야작 율한극이 내심 욕설을 퍼부어댔다. 허나 그는 내색하지 않 은 채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입을 열었다가는 또 다시 욕만 먹게 될 것임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얼굴에 이채가 스쳤다. 무슨 생각을 떠올렸음인가? 그는 자신감에 넘친 표정으로 유빙을 바라보았다. "참, 소형제는 아까 종무염의 유택에 나타났던 흑포인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고 있는가?" 유빙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는 것인가?" 율한극이 의심스럽다는 듯 반문했다. 유빙이 고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예! 그들은 흑궐(黑闕)의 전위세력 중 하나인 삼랑소(三浪所)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율한극이 머쓱해졌다. 그는 무수한 강호정보를 쥐고 있는 자신을 자랑하려다가 문득 유빙이 천하최고의 정보망을 자랑하던 백찰무 경의 대총사였음을 떠올린 것이었다. 유빙이 머쓱해져 있는 율한극에게 눈을 돌리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헌데 짐작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흑궐에 어떤 변동이 있는 듯 하군요." "지하무림 흑궐에 변동이....? 어떻게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적전마람에 있는 동안 흑궐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지 만 내가 아는 흑궐은 제벌이 있는 한 결코 무림의 일에 섣불리 손 을 대지 않는 단체였습니다. 헌데 그들이 천하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용천릉의 일에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그들이 어떤 변화를 겪었다고 짐작하게 된 것입니다." "음....!" 유빙의 말에 야작 율한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빙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흑궐은 용천릉의 보물에 그리 큰 관심을 지 니고 있지는 않은 듯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이 무엇때문에 수하들을 파견했단 말인가?" "만약 흑궐이 용천릉의 보물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총력을 기 울였다면, 황궁이 개입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 니다. 헌데 그들은 수백 개의 예하세력 중 하나인 삼랑소 하나만 을 파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단지 천하의 동태를 파악하려 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율한극이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단 한 가지 상황만으로 흑궐의 의도를 추론(推論)해 낸다는 것. 이것이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님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어지고 있는 유빙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듣고 그는 아예 아연실색 했다. "내 짐작대로라면 흑궐은 이미 강력한 지배자에 의해 재정비된 듯 합니다. 그 인물에 의해 흑궐은 그 힘이 절정으로 첨예화 되었으 며 이제 곧 수백 년 동안 감추고 있던 모습을 드러내어 천하를 휩 쓸 것입니다." "흑궐이....!" 율한극의 눈에 경악이 치달렸다. 유빙의 추측이 너무 비약적인 것 은 둘째로 치고, 그 내용이 너무도 가공스러웠던 것이다. '설, 설마 삼랑소의 수하들을 대한 것만으로 그런 결론까지?' 율한극이 멍청히 유빙을 응시했다. 허나 지금의 그가 어찌 짐작이 나 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유빙이 한 말은 정확한 추론이었으며 결코 제벌에 못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는 흑궐의 등장은 현 지상 무림을 뒤덮고 있는 제이차 팔왕의 난에 필적하는 거대한 피의 소 용돌이를 예고하는 것이었음을..... ③ 꽈르르.... 르! 꽈꽈꽝! 뇌성같은 굉음이 귀청을 찢을 듯 울려나오고 거대한 물줄기가 미 친 듯 회오리치는 곳, 폭 일백여 장에 달하는 해협(海峽) 전체가 마치 미친 듯 남쪽 바다를 향해 밀려가고 있는 이곳은 청해성(靑 海省)의 북단에 자리한 등룡합습탄(騰龍合襲灘)이었다. 거대한 북해(北海)의 해류(海流)가 좁은 만(灣)을 통해 대해(大 海)로 밀려나가는 자연현상으로 인해 항시 이처럼 폭포줄기를 방 불하는 거센 해류가 광란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삼 인의 기이한 일행이 이 등룡합습탄을 향해 점차 다가가고 있었다. 우아하기 이를데 없는 초의를 걸친 흑의미소년과 왜소하기 이를데 없는 외팔이 노인, 여기에 더할나위 없이 세련된 풍도의 육순노 인. 바로 유빙과 차손 그리고 율한극이었다. 꽈우르르....! 꽈아아-! 등룡합습탄이 가까와질수록 귀를 찢어낼 듯한 굉음은 더욱 커지 고, 유빙의 뒤를 바짝 따라오며 입을 열고 있는 율한극의 음성은 그에 따라 자연히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소형제! 정말 이 등룡합습탄을 거슬러 올라갈 작정인가?" "그렇습니다." 율한극의 질문에 유빙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서슴없이 대꾸했다. 율한극이 질린 눈으로 유빙을 돌아보았다. 이어 그는 자신의 어깨 에 올려져 있는 한 척의 혁선(革船)을 손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허어....! 내 애초에 이 가죽배를 사올 때 등룡합습탄을 오르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정말 등룡합습탄을 오를 예정이란 말인가?" 미친 듯한 급류가 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는 암초들 위로 덮쳐들 고, 수십 마리의 용(龍)이 뒤얽혀 미친 듯 몸부림치고 있는 듯한 해류가 바로 눈 앞에 있다. 율한극은 그 엄청난 광경을 대하고는 아예 어이가 없는 듯 했다. "허어.... 소형제도 농담을 할 때가 다 있는가? 하지만 이 산더미 같은 파도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농담이 좀 지나쳤네." 율한극은 마치 유빙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듯 짐짓 고개를 저었다. 차손이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허튼 소리 그만하고 빨리 걷기나 해라." 율한극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정말 등룡합습탄을 거슬러 올라갈 생각이십니까?" "갈테냐? 안갈테냐?" "가긴...., 가야.... 지요." "그럼 입 다물어라." 차손이 눈을 부라리자 율한극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치 고삐 끌린 송아지처럼 어깨에 메고 있는 가죽배를 추스린 후 엉거주춤 유빙과 차손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허나 잠시 후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는 다소 노기어 린 음성으로 유빙을 향해 입을 열고 있었다. "소형제! 도대체 지금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가? 자살 연 습을 위해 저 빌어먹을 파도를 헤치고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이 아 니라면 나도 좀 알아야 하지 않는가!" "후후....!" 유빙이 미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지금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에 가는 것입니다." "용병시장?" 율한극의 눈이 커졌다. "그렇소. 용병시장은 바로 이 등룡합습탄을 거슬러 올라가 그곳의 중앙에 자리해 있는 삼각주(三角洲)의 섬, 봉린주(鳳麟洲)에 위치해 있소." "아....!" 율한극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한 가닥 이채가 스쳤다. "저, 저기....!" 율한극이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등룡합습탄의 한곳을 가리켰다. 그들이 다가가고 있는 등룡합습탄의 중앙, 그 미친 듯 광란하고 있는 해류의 중앙에 놀랍게도 한 척의 자그마한 가죽배가 떠있었 다. 가죽배 위에는 한 인영이 앉아 두 팔로 노를 잡은 채 등룡합 습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해일에 시달리고 있는 한 개 나뭇잎 같다고나 할까? 폭풍에 희롱당하고 있는 양피지 조각이라 해야 할까....? 놀랍게도 가죽배 위의 사십대 묵의중년인은 그 엄청난 해류의 회 오리를 무시한 채 묵묵히 해류를 헤치며 등룡합습탄을 거슬러 올 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군." 전면만을 응시한 채 홀연히 등룡합습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묵의중년인을 발견한 율한극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용병이오. 아마 고용되었다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고 있는 듯하오." 유빙 역시 묵의중년인을 바라보며 이채를 떠올렸다. 헌데 등룡합습탄의 거친 해류 속을 자세히 보자니 그 산더미같은 파도를 헤치며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용병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산더미같은 파도에 그 모습이 가려졌다가는 다시 나타나고, 다시 나타났다가는 순식간에 파도에 묻혀버리고 있으나 분명히 대여섯 척에 달하는 가죽배들이 등룡합습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연어( 漁)가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듯 위태해 보이면서도 한편 강렬한 느낌을 주는 광경이었다. 율한극의 눈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등룡합습탄을 거슬러 올라 가고 있는 인물들이 의외로 적지 않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일인용(一人用) 가죽배를 타고 여기저기 단독으로 해류 속을 헤치 며 가는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갈매기처럼 대오를 형성해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용병군(用兵群)도 있었다. 갈매기처럼 질서정연한 대오가 어느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율한극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뿐이랴! 묵묵히 해류를 헤치고 올라가고 있는 인물들이 있는 반면 두 서너 명이 짝을 이뤄 그 엄청난 파도 속에서 펄쩍펄쩍 튀어오르며 서로 장난을 치며 올라가는 인물들도 있지 않은가! 수많은 병장기를 몸에 걸치고 있는 가죽배 위의 사내들. 허름한 묵의를 걸친 중년인과 팔과 가슴이 드러난 기이한 형태의 상의를 걸친 채 건장한 근육을 드러내고 있는 청년 등등..... 그들에게서 공통된 것은 하나, 그것은 천하가 일시에 무너진다해 도 눈하나 깜빡이지 않을 강인함이었다. "저 엄청난 파도를 평지 밟듯 하는군요." 율한극이 용병들의 모습에서 형용하지 못할 짙은 흙냄새와 사나이 다운 강인함 그리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허무감 따위를 느 끼고는 문득 혀를 내둘렀다. "저들이 거센 파도를 타고 있는 단순한 몸놀림 자체도 이미 수많 은 실전에서 얻어진 싸움기술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덮쳐드는 파도의 파장(波長)을 저들은 오히려 본능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차손의 눈이 가라 앉았다. 율한극은 차손조차 감탄을 보내고 있는 용병들의 존재에 내심 한 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져 유빙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소형제! 용병시장에 가서 무엇을 할 계획인가?" 유빙의 눈빛이 차갑게 빛을 발했다. "그들을 취하던가...., 아니면 제거해야겠지요." '으잉?' 율한극이 멍청해져 다시 한 번 유빙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농담은 아니겠고....?' 한 줄기 냉기(冷氣)가 율한극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아아....! 어찌 가공타 하지 않으랴! 헌데 바로 이 순간, 유빙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하고 있지 않은가? 유빙의 눈이 고정되어 있는 곳으로 율한극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돌려졌다. 등룡합습탄의 해류 중앙에 한 척의 조각배가 떠 있었다. 놀랍게도 예의 조각배는 등룡합습탄을 거슬러 올라가지도 않고 있었고 또 물살에 밀려 떠내려 가지도 않은 채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엄청난 해류 속에 한 가닥의 미동도 없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 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의 조각배를 지켜보고 있는 유빙의 눈에 이때 부드러운 무엇이 가득 차 있었다. 조각배 위, 그곳에는 한 명의 황의노인과 갓 십이삼 세 가량 되었 을 미소년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앉아 있었다. 낡은 황의에 잔잔한 기도의 노인과 하얀 피부에 소녀처럼 아름다 운 용모의 귀여운 소년이었다. 앙증스러운 용모의 소년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재잘거리며 황의노인에게 말을 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도 다정스러워 보였다. 부자지간(父子之間) 이련가? 그들의 다정한 모습에서 훈훈한 인간애를 느낀 유빙의 눈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부친의 장삼끝을 잡고 소주 경내 를 구경하던 시절.... 아버님의 걸음걸이가 그 어린 나의 눈에 너 무도 멋있게 보여 그 걸음걸이를 흉내내며 졸졸 따라다녔었지....!' '훗! 아버님의 술마시는 모습 또한 하도 멋있어 몰래 술마시는 흉 내를 내다 그만 취해버려 술주정을 한 적도 있었지!' 유빙의 뇌리에 아련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 부친과 보냈던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즐거운 순간이었다. 무섭다는 핑계로 항시 부친의 옆에서만 자려다가 꾸중을 들었던 일에서부터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함박웃음을 머금기도 하고 울 상을 하기도 하던 부친의 영상까지...., 어린시절의 유빙에게 있 어 부친의 존재는 가히 우상이자 신이었으며, 그리고 또한 어머니 이자 친구였던 너무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잠시 후 아련한 추억에 잠겨있던 유빙의 전신에서 문득 기묘한 분 위기가 번져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렬한 살기(殺氣)였다. 어 둠 속에서 만월의 새파란 월광을 받아 파랗게 빛나고 있는 아름다 운 은빛 늑대를 연상케 하는 강렬하면서, 또한 그 자신의 전신을 불태우고 나아가 천하를 태워버릴 듯한 살기였다. '창랑왕!' 유빙의 눈이 문득 암천을 교교히 밝히고 있는 만월로 돌려졌다. 부친의 영상을 그리던 그의 뇌리에 또 다시 창랑왕의 존재가 연상 되며 무서운 분노가 그의 전신을 휘어감고 있었던 것이다. "창랑왕! 이제.... 시작이다. 피의 승부가....!" 유빙이 만월을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서운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음성이었다. ④ 한편, 잃어버렸던 선천적 피의 본능을 되찾은 유빙이 용병육주비 전으로 향하며 만월을 우러러 복수의 불길을 피워 올리고 있는 이 순간, 그 만월 아래 팔왕의 격돌을 예고하는 거대한 대폭풍의 서 곡이 중원의 심장부에서 펼쳐지고 있었으니..... 화르르....! 타다닥! 불꽃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암천을 휘어감고 있다. 무서운 폭발음과 함께 다시 새로운 불기둥이 교교로운 월광을 따 라 치솟아 오르고 어두운 밤하늘에 시커먼 연기가 회오리치며 엄 청난 불길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하남성 건천산. 산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아아, 놀랍지 않은가! 하남성의 대산(大山) 건천산이 송두리째 불 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남성 건천산을 빙 둘러가며 웅장하게 세워져 있는 거대한 천리대성(天里大城)이 타오르고 있 는 것이었으니..... - 위정부(衛正府). 마도 일백여덟 가문과 정도 이십칠 문파, 그리고 사도 칠십이 세 를 일통시킨 중원무성(中原武城)! 그 엄청난 영화가 지금 만월 아 래 불타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크악!" "으윽....!" 불타오르고 있는 위정부의 여기저기, 엄청난 불길 속에서 수많은 흑의인들이 소리없이 움직이며 위정부의 수하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교교로운 월광 아래 무서운 불길이 이글거리고, 그 화염보다 더 붉은 선혈이 솟구쳐 오른다. 아아! 뉘라서 믿을 수 있을 텐가! 중원 그 자체라 불리우고 있는 위정부가 이렇게 몰락하고 있었음이니..... 불타고 있는 위정부의 그 거대한 몸부림을 지켜보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허름한 청의에 평범한 용모. 한 개 나무의자를 내놓고 그 위에 털썩 앉아 불타고 있는 위정부 를 지켜보고 있는 인물은 바로 육합단종(六合斷宗) 적리노단(赤里盧丹)이었다. 육합단종 적리노단. 기억하는가? 손자의 백혜(白鞋)를 기워주며 천하를 주겠다고 장담 하던 위정부의 부주. 경호인들의 집단인 잠천(潛天)의 신비를 쥐 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며, 최하의 신분에서 최상의 신분으로 스스 로를 끌어올린 입지전적인 중원의 최강자. .... 그는 강하다. 강하기에 그는 자주 싸우지는 않는다. 그는 단 지 자신의 고독한 성(城)에서 간혹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할 뿐이다. 그렇다! 검을 잡기를 두려워하는 절대자 육합단종 적리노단. 당황해서 날뛰고 있는 수하들과 가신들, 그리고 불타오르고 있는 위정부를 마치 남의 집이 타고 있는 것처럼 무심히 지켜보고 있는 인물은 놀랍게도 적리노단 바로 그였던 것이다. 꽈르르릉! 화르륵! "잘 타는구나." 또 하나의 새로운 불기둥이 허공으로 솟구쳤을때 그는 한잔의 술 을 들이키며 처음으로 단 한 마디를 내뱉았다. 그 자신이 평생을 걸쳐 이룩한 위업이 잿더미로 화(火)하고 그를 우상처럼 섬기던 수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가는데도 그는 남 의 일 구경하듯 무심히 또 한 잔의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가장 풍운아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는 절대 자 적리노단. 그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문득 그는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가신에게 술을 더 따르라고 눈짓한 후 내심 나직이 중얼거렸다. '밀려오는 파도를 썩은 볏짚 하나로 막을 수는 없겠지!' 그는 마치 한 잔 술에 아픈 마음을 타서 마셔 버리고 모든 사념을 훌훌 털어버리려는 듯 그렇게 다시 한 잔을 들이켰다. 몰락의 순 간이었다. 허나 바로 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풍운아다운 협기(俠氣)를 뿌 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천년거암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위정부의 무인들을 베어넘기고 있는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은 그의 십장 내에조차 접근하지 않은 채 무섭게 위정부를 유린할 뿐이었다. 카우우....! 돌연 멀리 산등성이에서 한 가닥 광폭한 야수(野獸)의 기성이 들 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일순 야수의 기성이 들려온 곳으로 눈길을 돌리던 적리노단의 눈 빛이 싸늘하게 빛을 뿜었다. 자신의 위업이 무너지고 있는 것조차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던 그의 눈빛이 이 순간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아! 멀리 내다보이는 건천산의 정봉(頂峰) 위에 차가운 만월이 걸려 있고 그 만월 속에 환상처럼 아른한 두 개의 그림자가 떠올 라 있지 않은가! 거대한 붉은 늑대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기음을 토해내고 있 고, 그 옆에 한 사나이가 팔짱을 낀 채 불타오르고 있는 위정부를 홀연히 내려다보고 있다. 숙명처럼 매달린 고독한 미소, 먹이에 달려드는 야수를 닮은 광폭 한 분위기와 더불어 비어있는 바다와 같은 절대절명의 고요....! 아! 그는 바로 이십여 년 전 한 마리 붉은 늑대를 대동하고 죽음 의 해협 흑빙만을 건너온 창랑왕이 아닌가! "너였구나. 오늘의 이 걸작을 남긴 것이....." 육합단종 적리노단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옆에 놓여 있는 한 자루 목검(木劒)을 움켜잡았다. "좋군! 창랑왕.... 이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적리노단은 천천히 핏빛의 목검을 움켜쥔 채 창랑왕이 오연히 서 있는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만월 속에 떠올라 있는 듯 오만하면서도 고독하게 서 있는 창랑 왕, 그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처럼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적리노단을 여전히 말없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아....! .... 불타는 위정부. 그것은 곧 팔왕(八王)의 대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거대한 난세의 피바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 팔왕예조 제2권 제14장 전설(傳設)의 춤(舞). 창랑왕파진곡 ━━━━━━━━━━━━━━━━━━━━━━━━━━━━━━━━━━━ ① 만월이 걸린 밤.... 저주받은 늑대의 아들이 춤을 춘다. 얼굴에는 휘황한 황금 늑대가면.... 손에는 붉은 적아낭채(赤牙浪綵).... 너울거리는 검은 도포와.... 은파(銀波) 속을 휘도는 조용한 몸짓. 아름다운 선율에 붉은 악령의 공포를 싣고.... 늑대의 아들은 죽음을 찬미한다. 신조차 죽어버린 냉월(冷月)이 떠오르면.... 저주받은 늑대의 아들이 춤을 춘다. 빠른 걸음과.... 은파를 휘감아 도는 흰 손, 우아한 학의 춤을 닮았네. 마치 붉은 봉황이, 요성인(堯聖人)의 봄에.... 춤추는 것 같도다. 차갑게 걸려있는 만월...., 비릿한 안개...., 요기를 머금고 있는 듯한 야풍(夜風)과 부서지는 은파..... 그 가운데, 헐렁한 흑의를 걸친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어두운 파동(波動)이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 맴돌며 회오리치고 있는데..... 입술 끝에 매달린 고독한 미소, 야수를 닮은 광폭성과 함께 무섭 게 가라앉아 있는 절대의 고요. 바로 창랑왕이라고만 알려져 있 는 신비인이 아닌가! 커다란 검은 천에 단지 목과 두 팔을 집어넣을 수 있는 둥근 구멍 을 뚫어놓은 기묘한 의복, 고대 제사장(祭司長)들이나 입었을 듯 한 헐렁한 검은 도포의 가슴과 허리에는 둥근 원이 있고 그 원 속 에 한 마리씩의 용(龍)이 수놓아져 있다. 원의 테두리 밖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오색의 구름 무늬였다. 그 운채(雲彩) 문양을 다시 흰 헝겊이 싸두르고 그 흰 헝겊은 또 한 진홍의 천에 의해 둘러 싸여져 있었다. 창랑왕, 그는 천천히 예의 양당(陽唐=두루마기 형태의 예복)을 꺼 내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붉은 매채를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휘황한 금광(金光)을 뿜어내고 있는 하나의 가면(假面)을 얼굴로 가져가 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늑대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가면이었다. 분노한 형상을 한 늑대의 가면. 머리털은 짙은 적색이고 부릅뜬 눈동자와 이빨이 하얗게 은색으로 빛나고 있다. 창랑왕이 예의 황금가면을 얼굴에 쓰는 순간 마치 그의 신형이 어 둠 속에 녹아 버리고 허공에 하나의 황금색 악마의 얼굴이 둥실 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은 도포를 입고 있 는 가면의 아랫부분이 어둠에 가려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안개 속을 뚫고 건천산의 정봉으로 다가오던 위정부주 적리노단의 눈에 한 가닥 이채가 솟아났다. 검은 양당과 순금의 황금가면, 그리고 붉은 매채. 여기에 부드럽 게 흘러 내리고 있는 만월의 은파 등, 모든 것을 한 눈에 대한 그 의 뇌리에 문득 하나의 전설이 스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신조차 죽어버린 냉월이 걸린 밤.... 저주받은 늑대의 아들이 춤을 춘다. 얼굴에는 휘황한 황금가면.... 손에는 붉은 적아낭채.... 너울거리는 검은 도포와.... 은파속을 휘도는 조용한 몸짓.... 아름다운 선율에 붉은 악령의 공포를 싣고.... 늑대의 아들은 죽음을 찬미한다네. .... 하략(下略) 창랑왕파진곡(蒼浪王破陳曲), 이것은 중원 고대의 모든 춤을 서술 해 놓은 가무행전(歌舞行典)의 첫장을 기록하고 있는 한 줄의 시(詩)였다. 누가 서술한 것인지는 모르나 늑대의 아들이라는 창랑왕(蒼浪王) 이 춤추는 모습과 움직임을 나타낸 노래인 것이다. 창랑왕이란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북제(北霽)의 왕으로서 실존했 던 인물.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폐성에 유폐(幽閉)된 채 늑 대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실제의 인물이었다. 후일 창랑왕은 복위되어 북제의 왕으로 올랐는데 창랑왕은 만월이 떠오르는 밤이면 늑대의 형상을 한 황금가면을 쓰고 흑낭당(黑浪 唐)이라는 의복을 입은 후 적아낭채를 흔들며 늑대의 울음소리에 맞춰 춤을 추곤 했다. 그의 춤은 뛰는 춤이라 해서 전쟁 장면을 연상케 하는 빠르고 신 비한 춤으로 칭송되고 실제로 창랑왕은 그 춤 하나로 숱한 무인들 을 쓰러뜨렸다고 전설은 말하고 있었다. 왕의 신분으로 고성(古城)에 유폐된 채 늑대의 젖을 먹고 성장해 야 했던 한 고대군주(古代君主)의 처절한 한(限)과, 광폭한 늑대 의 야수성(野獸性)이 깃든 전설의 춤. 그 전설의 창랑왕파진곡을 떠올린 적리노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사실이 스쳐간 것이었다. '당금의 난세를 주도해 가는 팔왕중 낭왕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알 려져 있는데 그 낭왕이 바로 전설속의 창랑왕을 뜻하는가?' 적리노단의 얼굴에 그늘이 내렸다. 신비 속의 팔왕 중 한 명인 낭왕, 창랑왕! 그의 등장은 곧 팔왕의 난이라 불리우고 있는 난세의 회오리가 이 렇게 시작해 대륙을 무서운 피의 장(場)으로 뒤덮을 것이라는 사 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낭왕, 창랑왕인가?" "......" 적리노단의 음성이 묵중하게 안개를 헤집었다. 허나 창랑왕는 침묵했다. "조용한 자로군.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신비함처럼....." 적리노단이 문득 환하게 미소했다. 노웅(老雄)의 미소, 강렬한 투지를 되살리는 미소였다. "그대가 대천람이라는 신비조직을 이끌고 있는가?" "......" "그대가 바로 백찰무경의 유빙 대총사를 잠재운 것인가?" "......" "그대 역시 제벌을 꿈꾸고 있는가?" "......" 적리노단은 그답지 않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허나 그 어느 말에 도 창랑왕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의 이런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 록 기이한 느낌이 되어 적리노단을 압박해 들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의 악령이 눈 앞에 있고 그 꿈 속의 악령이 몽환(夢幻)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적리노단의 전신이 점차 긴장되어 갔다. 이때 창랑왕의 흰 손이 검은 양당의 소맷자락 속에서 튀어나오며 가면 위로 떠올라 머리 위에서 한 바퀴 돌았다. 소리없는 움직임이었다. 마치 몽환 속의 움직임인 양 허공으로 솟아오른 창랑왕의 손목으 로부터 손끝까지의 흰 선(線)이 요기를 뿜으며 어둠 속에서 선명 하게 맴돌고...., 다음 순간 앞서 올라간 손을 쫓듯 또 하나의 손 이 올라가며 흰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오른쪽 무릎이 올라가고, 왼쪽 다리를 축(逐)으로 하여 창랑왕의 몸이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황금늑대의 가면을 쓴 그는 어떤 신비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 다. 발을 디디고 몇 발자국 걸은 다음 뒤로 끌고 그대로 방향을 바꾸어 천천히 움직이다가 목을 돌린다. 그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우아한 동작..... 모가 지 지 않는 원형의 움직임 속에는 무서운 거친 힘이 숨겨져 있었다. 그렇다! 창랑왕파진곡. 그 전설의 춤이 시작된 것이었다. 카우우....! 카우! 이때 창랑왕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거대한 붉은 늑대 한 마 리가 돌연 고개를 만월을 향해 쳐들며 기성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마치 창랑왕의 춤에 가락을 보내는 듯한 울부짖음이었다. 그에따 라 창랑왕파진곡의 춤이 점차 빨라져 갔다. 소란성(小亂聲)으로부터 난서(亂序)로 차츰 춤의 속도가 빨라져 갔다. 아름답고 장엄하며 신비한 춤이었다. 고대왕조의 몽환(夢 幻)의 세계가 보는 이의 심혼을 뒤흔들며 현란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조차 지겹게 여겨지던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검을 잡을 상대를 만나다니.....' 문득 적리노단의 얼굴에 가벼운 흥분이 치달렸다. 창랑왕과 삼 장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그이건만 그의 전신으로는 창랑왕의 창랑왕파진곡에서 뻗어나오는 무형의 압력이 무한대의 힘으로 압박되어 오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반사적으로 적리노단의 전신의 기가 반응하여 모든 세포 하나 하나를 새로운 활력으로 가 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신은 이내 터질 듯한 힘의 응집체로 변화하고 있었다. 검을 잡기를 두려워 하는 절대자 육합단종 적리노단. 그가 천천히 목검을 전면에 세웠다. 양 발을 두 어깨 폭 만큼 벌 린 자세 천주부동(天柱不動)의 힘찬 자세였다. 카우우우! 카우우....! 만월을 향해 우러르는 창랑왕의 포효성은 점차 기이한 높낮이를 지닌 채 이어졌다. 동시에 창랑왕과 적리노단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 적리노단은 일시 그 황홀한 움직임에 정신을 잃었다. 순간 창랑왕의 주위에 회오리를 형성하고 있던 돌개바람이 허공에 방대한 자기(磁氣)를 형성한 채 적리노단의 몸에 들이닥쳤다. 촤- 아악! 촤르르륵! 창랑왕의 손에 쥐어져 있는 붉은 매채가 현란한 요기를 뿌리며 일 순 적리노단의 목줄기를 휘감아 들었다. 허나 그것은 공격동작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그저 법열(法悅)의 경 지에 이르는 한마당의 춤사위로 느껴질만큼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적리노단은 자신이 그 현란한 춤사위로 빨려드는 듯한 충동에서 벗어나며 돌연 목검을 밀어냈다. 그들의 주위로는 이 순간 엄청난 진공(眞空)이 형성되며 거대한 자력이 적리노단을 점차 창랑왕에게로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챠- 앗!" 적리노단은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거대한 무형의 자력으로부터 벗 어나고자 목검을 허공에 그어내렸다. 일순 안개와 자력이 두 갈래 로 흩어지고 만월조차 흩어졌다. 허나 목검에 와닿는 반응은 일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검이 창랑왕을 꿰뚫었다고 생각한 순간 창랑왕의 신형은 그의 목검의 날을 가볍게 걷어차며 깃털처럼 더욱 높은 허 공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쫘- 악! 만월의 월광이 흩어지는 순간 창랑왕의 신형은 사라지고 월광들이 한 번 흩어지는 순간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그 등 뒤 로 내려서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날카로운 바늘처럼 적리노단의 등을 찔러왔다. 슈- 욱! "크윽....!" 찰나 미세한 음향이 월광을 흐트러뜨리고 한 줄기 가느다란 붉은 비단 띠가 적리노단의 목에 휘어감기며 비명을 토하게 했다. 주르르륵....! 적아낭채의 수많은 가닥끝에 매달려 있는 늑대의 이빨들이 그의 목을 파고들며 붉은 선혈을 빨아내는 순간 적리노단은 아련한 통 증과 함께 스스로의 몸 안에 충만되어 있던 모든 힘이 일시에 잦 아들고 있음을 느꼈다. "끄르르....!" 순식간에 적리노단의 목에서 기이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지옥의 얼음구덩이에서 흘러나오는 저승의 소리였다. "......" 적리노단은 차가운 지면 위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눈은 뜨여져 있었으나 급격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의 주위에 는 한기(寒氣)와 안개, 그리고 깊은 정적만이 깔려 있었다. 검을 잡기를 두려워 하는 중원의 절대자 육합단종 적리노단. 그 엄청난 거물이 이렇게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까- 아! 헌데 어느 한순간, 돌연 그의 부릅뜬 눈이 고정되어 있는 아득한 허공 위에 한 마리 거대한 백응(白鷹)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 백 응을 대한 적리노단의 뇌리에 문득 한 소년의 영상이 스쳐갔다. 귀엽고 앙증맞은 용모를 지닌 소년, 바로 천응소공 적리운이었다. 따사로운 양광 아래...., 자애로운 표정의 적리노단이 예쁘고 앙 증맞은 용모를 지닌 손자 적리운의 백혜를 꿰매주고 있었다. 적리 운은 완성된 백혜를 신어본 후 두 발을 지면에 쿵쿵 굴러보며 기 쁨의 빛을 띄운다. 그러다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 할아버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야? - 잠천의 천주,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살인혈황의 후예란다. 너는 바로 그 잠천을 열어야 한단다. 그리고 전설의 살인혈황이 되어야 한단다. - 살인혈황? - 아가야! 너에게 천하를 주마! 겨우 중원에 만족하는 이 위정부 가 아닌 진정한 천하, 제벌을....! 적리운의 상기된 얼굴이 격동을 삭히며 허공으로 돌려진다. 따스 한 삼월의 야광이었다. 손자 적리운의 영상을 떠올리던 적리노단 의 입가에 천천히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에서는 이 순간 급격히 힘이 풀어져 가고 있었으나 반면에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히고 있었던 것이다. '천응! 모든 것을 보았느냐? 가거라....! 가서.... 운아에게 이야 기해 주려무나. 너의 주인이자 잠천의 천주인 운아에게 말이다....!' 풍운아 적리노단. 그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고 체 온 또한 차가운 지면에 동화되어 가듯 식어가고 있었다. 허나 그 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더욱 짙어져 가기 시작했다. '운아야! 이제야...., 이제야 이 할아비가 그렇게 고대하던 너의 시대가 열리는구나! 나의 시대는 이렇게 가고.... 이제 지상최강 의 강자라 일컬어질 너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팔왕 중의 일 인으로...., 창공을 나는 천응처럼 힘차게 웅비할 너를.... 너의 웅비를 이 할아비는 믿는다....!' 적리노단의 눈은 감겨지지 않았다. 허나 그 눈에서는 무서운 속도 로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위정부는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새로 시작되는.... 것....' 그러다 어느 한순간, 그의 눈에서 단번에 힘이 빠지는 순간 그의 고개가 차디찬 지면에 닿고 있었다. 거목(巨木)의 몰락이었다. 까아아....! 그 순간 아득한 암천을 맴돌고 있던 한 마리 천응이 슬픈 듯 울부 짖은 후 암천 아득히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팔왕 중 일 인인 잠천의 천주 살인혈황 적리운을 부르는 움직임이었고 이 것은 또한 난세의 부름을 뜻하는 것이었다. - 제이차 팔왕의 난은 이렇게 시작된다. 너무도 거대한 난세의 소용돌이었다. ② 꽈꽈아! 촤아악....! 등룡합습탄, 산더미같은 파도가 연이어 밀려오고, 좌우로부터 노룡(怒龍)의 몸 부림을 방불하는 와류(渦流)가 숨쉴틈 없이 강타해 온다. 그 엄청 난 급류 속에 혁선을 띄운 율한극은 안색이 씨벌개진 채 사투(死 鬪)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투덜거렸다. "아니 남은 죽어라 하고 노를 젓고 있는데 두 손 두 발 다 놓고 있다니 여기가 무슨 잔잔한 호수인 줄 아시오?" 율한극이 볼멘 소리로 외쳤다. 엄청난 격류를 뚫고 전진하고 있는 자그마한 가죽배는 이제라도 뒤집혀질 듯 위태로왔고 율한극은 양 손에 노를 나눠 쥔 채 혼자 고군분투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율한극은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발휘해 노를 젓고 있는 것인데 차손과 유빙은 율한극의 뒤쪽에 우뚝 서서 그저 태연히 전면만을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율한극의 고함성에 차손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불만이면 너도 우리처럼 팔짱을 끼고 있으면 될 게 아니냐!" "누굴 놀리는 거요! 이렇게 죽어라하고 노를 젓는데도 위태위태한 데 나마저 팔짱을 끼라니....! 이 미친 늙은이야! 차라리 말이나 말지....!" 율한극이 기분이 좋을 때는 차손에 대한 호칭이 사부가 된다. 그러나 성질이 나면 이와같이 미친 늙은이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 오는 것이 그들 사이인데..... "이 멍청한 썩은 돼지야! 언제까지 저어도 요모양 요꼴인데 아직 도 포기하지 않는단 말이냐!" 차손은 율한극의 거친 호칭에 빙긋이 미소하며 조소했다. 그렇다. 그들이 타고 있는 작은 가죽배는 율한극이 제아무리 용을 써도 전 진하기는 커녕 겨우 쓸려가지 않을 정도였다. 엄청난 급류 위에서 한 개 나뭇잎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야작 율한극의 눈에서 불똥이 튀겼다. "이 미친 늙은이! 남은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쓰고 있는데.... 에 잇! 누가 포기하라면 못할 줄 아나? 에잇 마음대로 되라!" 다음 순간 그는 신경질적으로 두 손에 쥐고 있는 노를 집어던지며 벌떡 일어섰다. "에잇! 저 미친 늙은이 때문에 나까지 물귀신이 되어야 하다 니....!" 야작 율한극이 엄청난 위세로 연달아 밀려오고 있는 파도를 바라 보며 씩씩거렸다. 순식간에 그들이 타고 있던 가죽배가 급류 속에 처박힐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율한극은 닥쳐올 일에 대비해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스르륵....! 쏴아아! 헌데 바로 그 순간 가죽배는 곤두박질 치기는 커녕 오히려 파도를 타넘으며 스르륵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렇게 노를 저어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맴돌던 혁선이 점차 빠른 속도로 전 진해 나가자 율한극은 아예 정신이 없었다. "이어....! 이 놈의 배가 미쳤나?" 율한극이 어이가 없어 차손을 돌아보았다. 순간 차손의 기묘한 동 작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차손은 헐렁한 소매를 휘두르며 좌우의 파도를 허공을 격해 쳐내 고 있었는데 그 간단한 동작에 혁선이 엄청난 급류를 거슬러 올라 가고 있지 않은가! 단 하나뿐인 외팔을 유유하게 휘두르며 좌우의 와류를 쳐내고 있 는 차손의 동작은 힘 하나 들이지 않은 채 마치 새를 쫓는 듯 여 유로운 동작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그 간단하기만 한 동작에 혁 선은 점차 급류를 뚫고 전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썩은 돼지야! 이리 와 봐라!" 차손은 유유히 외팔을 휘두르며 율한극을 쏘아보았다. "왜....?" 율한극이 머쓱해져 주춤주춤 다가들었다. "뛰어 내려!" 율한극의 눈이 커졌다. 차손의 외팔이 돌연 엄청난 굉음을 발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급류 속을 가리킨 것이었다. "사부....!" 율한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손이 엄숙한 음성으로 나직이 입 을 열었다. "이 멍청한 썩은 돼지야! 이 세상에 어느 누가 힘으로 저 엄청난 급류를 꿰뚫고 올라갈 수 있겠느냐! 내가 조금 전에 일러주지 않 았느냐! 용병들의 행동은 거센 급류를 꿰뚫는 것이 아니라 그 급 류의 파고를 이용해 오히려 미끄러지며 전진해 나가는 것이라고....." "......" 율한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제야 그는 무엇을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다. 이곳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용병들은 그 거센 격류를 결코 힘만으로 뚫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물살의 흐름을 오 히려 자신의 것으로 이용하는 하나의 기학(奇學)이었던 것이다. 이때 유빙 일행이 타고 있는 혁선은 어느새 급류의 중앙에 고정되 어 있는 조각배에 이르고 있었다. 부자지간인 듯 다정해 보이는 일노일소(一老一小)가 낚시대를 드 리우고 있는 조각배, 급류 속에서 한가롭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 는 노인과 미소년을 대한 율한극이 문득 불가사의한 광경을 대했 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저 배는 어찌된 영문....?" "힘을 주위로 펼쳐내는 수많은 기학 중에는 와선경(渦旋勁)이라는 특이한 기술도 있다." "와선경.... ?" "두 개의 상반된 힘을 정면으로 엇비껴 마주치면 회오리와 같은 돌개바람 현상이 일어나지. 그 돌개바람의 힘은 실로 엄청나다." "그것과 저들과 무슨 관계가....?" 차손의 설명에 율한극의 눈에 더욱 의혹이 어렸다. 차손이 말을 끊지 말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 돌개바람의 중심부는 오히려 잔잔하다. 아무리 엄청난 회오리 태풍이라도 그 중심부인 태풍의 눈은 잔잔한 이치와 똑같다." "그렇다면 사부의 말은 저 조각배 위의 두 사람이 와선경의 기법 대로 밀려오는 급류와 똑같은 힘으로 엇비껴 힘을 쳐내고 있어 그 중심부가 태풍의 눈처럼 잔잔해져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 믿어지지 않으면 아무것이나 저들 주위에 던져 시험해 봐라!" 율한극이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뜨자 차손이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율한극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 산더미같은 급류를 정면으로 상대할 수 있는 힘을 연속적으로 소리없이 발출해낼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한다니....! 율한극이 문득 품 속에서 가벼운 양피지 한 장을 꺼내 초엽비도 (草葉飛刀)식으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급류의 중앙에 떠 있는 조 각배 근처로 던졌다. 파파팟....! 순간 가볍기 이를데 없는 양피지 조각이 물결에 휩쓸리는 것이 아 니라 아예 가루로 되고 있지 않은가! 율한극의 등에 한기가 치달렸다. 차손의 말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었다. '으음....! 저들이 과연 누구기에 저런 능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율한극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빛을 담은 채 새삼 조각배 위의 황의노인과 미소년을 바라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그들의 노 소가 실로 엄청난 고수라는 사실을 이 순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때였다. 한가하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미소년이 유빙 일행을 힐끔 바 라보며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봐요! 어젯밤 봉아(鳳兒)의 꿈에 한 마리 천룡(天龍)이 이 등룡 합습탄을 거슬러 올라오는 꿈을 꾸었다는 게 맞죠?" 황의노인이 자애스럽게 미소했다. "글쎄다. 내가 보기에는 천룡이라기보다 영락없이 달밤에 처녀를 홀리는 여우같은데....?" "맞아요. 너무 그럴 듯 하게 생겼지요?" 노인과 미소년의 대화 내용은 기이했다. 유빙과 차손 등은 그들이 바로 유빙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소년이 다시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처녀 홀리는 여우라 해도 저 정도라면 한 번 홀려볼만 하겠는데요." "예끼! 녀석.... 첫눈에 아주 단단히 마음에 든 모양이로구나." 황의노인이 짐짓 눈을 부릅뜨자 귀엽게 생긴 미소년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저 여우...., 봉아의 마음에 꼭 들어요. 이미 점찍어 놓았어요. 할아버지만 알고 있어야 돼요!" "허허.... 녀석!" 미소년의 대담하고도 기이한 말에 황의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 다. 미소년의 눈이 유빙쪽으로 돌려졌다. "이봐요? 여우.... 아니, 당신! 이름이 뭐예요?" 유빙의 눈에 고소가 맺혔다. 악동같은 기질을 풍기는 소년의 제멋 대로의 말에 내심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그는 웬지 그 미소 년에게 호감이 느껴져 부드럽게 대꾸했다. "유빙이라고 하네, 소형제." "유빙....?" 미소년은 마치 유빙의 이름을 단단히 뇌리에 새기려는 듯 가만히 입 속으로 되뇌었다. 그의 입에서 또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당신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이 있는 봉린주로 간다네." 미소년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그럼 잘 됐군요. 나는 봉린주의 소천주(少天主)인 채봉(彩鳳)이 라고 해요. 제가 길을 안내해 드리죠." 말과 함께 미소년은 예의 조각배 위에서 몸을 날려 어느새 유빙의 곁에 내려서고 있었다. "봉린주의 소천주....?" 유빙의 눈에 의혹이 머물렀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채봉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순간 그는 내심으로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은은한 월광 아래 드러나 있는 소년 채봉의 얼굴. 그것이 너무도 아름답지 않은가! 분을 바른 듯한 희디흰 피부와 깊게 파여 있는 볼우물. 기다란 속 눈썹밑에 깜빡거리고 있는 그윽한 크고 검은 눈. 이슬을 머금은 듯한 꽃잎같은 입술 등, 여기에 가느다란 얼굴의 곡선은 아무리 보아도 소년의 얼굴은 아니었다. 유빙이 그 뛰어난 아름다움에 잠시 망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유빙이 뚫어지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자 채봉이 무안해 진 듯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겼다. "체! 사람 얼굴, 처음 봐요?" 그제야 실수를 깨달은 유빙이 헛기침을 터뜨렸다. 채봉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형장께서는 용병시장에는 무엇때문에 가는 거요?" "용병을 사볼까 해서 왔네." 유빙의 담담한 대꾸에 또 다시 채봉이 박수를 쳤다. "그거 아주 잘됐군요. 전할아버지는 용병을 흥정하고 공급해 주는 일을 총괄하는 상평난전(上平亂廛)의 행수(行首)이세요." "허허.... 이녀석, 무슨 쓸데 없는 짓을 하려는 거냐!" 채봉의 말에 담담히 낚싯대를 응시하고 있던 황의노인이 고개를 돌리며 노안을 일그러뜨렸다. 허나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낚싯대 를 챙기더니 유빙이 타고 있는 혁선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쓰- 윽! 거칠게 몸부림 치고 있는 격류를 밟으며 태연히 오 장여 거리를 단축해 오고 있는 그의 경신술은 실로 놀라웠다. 유빙의 눈에 일순 감탄의 빛이 스쳤다. 파도를 밟으며 걸어오고 있는 능평도수(凌平渡水)의 절기치고는 믿어지지 않는 경지였던 것이다. 오척 단구에 까만 피부, 한쪽 귀는 오래 전에 베어져 버린 듯 형 체조차 없다. 왼손에는 낚싯대를 챙겨들고 있는데 그 오른손에는 두툼한 낡은 가죽서책이 들려져 있었다. 노인의 용모 또한 해괴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무엇보다 기이한 점 은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한 권의 가죽서책이었다. 얼마나 오래 들고 다녔는지 손때가 반지르르 묻어 있는 한자 두께 의 서책을 들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언뜻 영락없는 장돌뱅이 상인 으로 여겨졌다. 허나 어딘지 모르게 차손을 방불하는 초연함이 그 의 전신에 휘감겨 있지 않은가! "전할아버지는 육주비전으로 나뉘어진 용병육주비전 중 상평난전 의 행수이십니다. 비전육행수(秘廛六行首) 중 한 분이시지요." 그가 유빙의 가죽선에 오르자 채봉이 소개하듯 입을 열었다. "전할아버지는 숫자에 관한한 지상 최고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 천 가지 일에 달통한 책사(策士)라 하여 천박사책(千博死 策)이라 불리우며 희궁(希宮)이라는 함자를 지니고 계신 분입니다." - 천박사책 전희궁. - 용병육주비전 중 상평난전을 이끄는 비전육행수. "용병육주비전 중의 모든 용병들 중 세번째로 값이 비싼 분이기도 하지요." 채봉의 말에 문득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책사 천박사책 전희궁. 그가 용병시장에서 세번째로 비싸 다는 것은 곧 그의 가치와 무서움이 용병시장의 서열 삼 위라는 암시였던 것이다. 전희궁은 채봉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귓가로 흘리며 두터운 가 죽장부를 뒤척이고 있다가 눈을 들었다. "손님은 용병을 어느 정도나 사려고 왔는가?" "많을 수록 좋겠지요." "많을 수록....? 그 말을 곧 용병시장을 통째로 사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가?" "그렇습니다." 유빙의 태연한 대꾸에 천박사책 전희궁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 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용병시장에 있는 용병들의 수효는 모두 삼천여 명에 이르네. 그 들 개인의 몸값이 대략 황금 천 냥..... 대충 계산해도 용병시장 의 모든 용병들을 통째로 사려면 자그마치 황금 삼백만 냥이 필요하네." "......" "그 정도 황금이면 대명의 천자라해도 지불할 능력이 없을 것이 네. 헌데 손님은 과연 그만한 황금이 있는가?" "없소이다." 상평난전의 전주 천박사책 전희궁의 말에 유빙이 서슴치 않고 고 개를 저었다. 유빙의 입가에 서서히 기묘한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외상으로 사볼까 하오." "외...., 외상!" 전희궁의 입이 딱 벌어졌다.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황금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고용되는 전투대행사(戰鬪代行士)들 이 바로 용병들이 아닌가! 황금을 대가로 받는 대신 그들은 자신 의 목숨을 맡기는 것이다. 헌데 그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의 목숨 을 외상으로 사겠다니....? 짧은 침묵이 흐르고...., 천박사책 전희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상종못할 친구로군." "훗!" 전희궁이 다시 유빙을 직시했다. "헌데 손님께서는 용병을 사고 파는데 몇 가지 금약(禁藥)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 "그 금약의 첫째 조항은 제아무리 많은 황금을 준다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에게는 결코 팔지 않는다는 것이 본전의 금약일세. 그리고 두번째는 본전은 여하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천하의 패권 (覇權)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일세. 또.... 가장 중요한 조항 으로는 절대로 한 개인에게 필요 이상의 많은 용병을 팔지 않는 다는 것이 있다네. 물론 한 개인에게 모든 용병을 한꺼번에 판다 는 것은 아예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지." "호.... 그런 조항이 있었단 말입니까....?"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면 비꼬는 것 같기도 한 종잡을 수 없는 태도였다. 전희궁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울러 손님같은 사람에 대한 벌칙도 있는데 어떤 건지 한 번 들어보겠는가?" "....!" "만약 용병시장을 천하패권에 이용하려는 자가 있거나, 용병시장 전체를 사려는 자가 있다면 본전은 그를 적으로 간주해 총력을 기 울여 제거하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네." "호....!" "손님은 이래도 용병육주비전을 통째로 사들이겠다는 생각을 고집하겠는가?" 천박사책 전희궁의 전신에서 점차 사이한 기세가 일었다. 순간, 유빙의 전신에서는 더욱 기이한 기세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만월이 주위를 휘감고 있는 듯한 달무리를 연상케 하는 분 위기로써 대하는 이의 숨을 막아놓을 듯한 엄청난 위엄이었다. "물론 나는 용병육주비전을 몽땅 사들이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이다." 순간 모든 이들의 눈에 은은한 경악이 어렸다. 상평난전의 전주인 천박사책 전희궁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유빙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용병육주비전과 정면대결을 불사 하겠다는 뜻인 것이다. 의외로 천박사책 전희궁의 입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허허.... 허허헛! 손님은 정말이지 대단한 분이군. 좋네! 아무 튼.... 본전에 온 손님이니 흥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구경부터 하시게!" "....!" 무엇인가 팽팽히 긴장되어지던 분위기가 기이하게 돌변하자 채봉의 얼굴이 밝아졌다. 유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전면으로 눈을 돌렸다. 어느덧 여명(黎明)은 점차 대지를 붉게 물들이며 솟아오르고 있었 고 그들이 타고 있던 가죽배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 안개에 묻혀 있는 하나의 거대한 섬에 이르고 있었다. 사 면으로는 엄청난 급류가 회오리치고 그 위로 장막처럼 두터운 안개가 뒤덮혀 있다. 그 안개를 붉디붉은 여명이 파고 들며 기이 한 채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가운데 자리해 있는 거대한 섬은 실로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바로 용병의 섬 봉린주였다. 대륙을 얻은 패주도...., 무림을 일통시킨 절대자도 결코 이곳만 은 얻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는 신비의 섬 봉린주. 드디어 그 용병의 섬 봉린주에 당도한 것이었다. ■ 팔왕예조 제2권 제15장 도수명인(刀手名人)陳曲) ━━━━━━━━━━━━━━━━━━━━━━━━━━━━━━━━━━━ ① "누구의 배인지는 모르지만 지독하게 요란하게 꾸며놓은 용주(龍舟)로군." 유빙 일행이 타고 있는 가죽배가 봉린주의 해안에 접근해 가는 순 간 야작 율한극이 문득 탄성을 터뜨렸다. 그들이 다가가고 있는 봉린주의 해안 한 곳에는 한 채의 거대한 용주(龍舟)가 정박해 있었다. 용주에는 수백 개의 깃발이 뒤덮여 있고 선채 전체에 휘황한 금박 (金色)이 칠해져 있었는데 그 화려함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대운하(大運河)를 축조했던 수양제(隨楊帝)가 자랑하던 천자용주 (天子龍舟)보다 더욱 화려한 느낌을 주고 있는 한 척의 용주를 휘 둘러 보며 율한극이 혀를 내두른 것이었다. 율한극이 놀란 빛을 띄우자 채봉이 배시시 미소하며 설명했다. "본전의 단골 고객인 남황(南荒)의 거상(巨商), 금융대인(金融大 人)이 타고온 금상용주(金商龍舟)예요." "남황의 거상 금융대인!" 율한극의 눈에 또 다시 놀람이 스쳤다. "백금전가와 맞서 대륙의 상권을 암중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신비 의 거상 금융대인이 이곳의 단골이란 말인가....?" "물론이지요. 본전의 존재는 신비에 가려 있기는 하나 이미 알만 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들이 강자이면 강 자일수록 본전의 존재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 답니다." 채봉의 이어지는 설명은 실로 의미심장했다! 천하패권을 꿈꾸는 인물이라면 이미 거의 대부분이 용병육주비전 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들 중 강한 인물일수록 용병육주비전의 비 중을 높게 쳐주고 있다! 아아! 채봉의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곧 용병육주비전이 그만큼 엄 청난 비중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잡초와 거친 암석군, 그리고 늪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거대한 섬. 와류가 한시도 쉬지 않고 주위를 휘감고 있는 지형상의 험난함은 둘째로 친다해도 섬 자체의 황폐함만으로도 이미 인간이 살아가기 힘든 곳이었다. 봉린주. 신선들의 섬이라는 봉린주가 기실 이처럼 황량하기만 한 폐허의 섬이었던 것이다. 그 봉린주의 백사장에 안개를 뚫고 유빙과 차손 그리고 율한극 등이 내려섰다.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의 첫인상은 한 마디로 폐허 위에 간간이 천막 따위가 서 있다는 느낌이었다. 유빙 일행이 마악 내려선 백사장의 여기저기에 수많은 인물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잡담을 나누고 있기도 하고 또 홀로 뚝 떨 어져 멍하니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인물도 있다. 그들의 수효는 어림잡아 수백여..... 그들은 드넓은 백사장과 그 백사장에 이어져 있는 황야의 여기저 기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실로 기경이 아닐 수 없었다. 거대한 암석 위에 팔 자로 누워 멍청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묵 의중년인에서부터, 거대한 나무의 나뭇가지 위에 비스듬히 누워 다소 호기심어린 눈으로 유빙 일행을 훑어보는 흑삼노인 등등..... 그 한쪽에서는 아무렇게나 지면에 쪼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인물도 있었고 어떤 청년은 자신의 전면에 수많은 병장기를 늘어 놓고 끝없이 정성스러운 손길로 닦아내고 있기도 했다. 무인도에 좌초한 난민(難民)들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난전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 같다고나 할까? 그 기괴한 광경을 대한 율한극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흡사 무인도에 좌초해 구조를 기다리는 난민들같군." 채봉이 고소했다. "우리들이 내려 선 곳은 용병육주비전 중 낭인용병(浪人用兵)들이 머물고 있는 낭리난전의 한곳이에요. 저들은 바로 낭리난전의 낭 인용병들이지요." "낭리낭전....!" 율한극이 과연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채봉이 문득 얼굴을 굳히며 유빙을 향해 입을 떼었다. "당신들은 사람들이 현 무림의 정세를 제이차 팔왕의 난이라고 칭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나요?" "알고 있다네, 소형제."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봉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 팔왕의 난이라는 말 중에서 팔왕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소형제는 아는가?" 유빙이 미소를 머금으며 오히려 반문했다. "물론이에요. 팔왕이란 무림이 탄생된 이래 가장 강했던 여덟 명 의 초고강고수를 말하는 것이에요." 유빙이 자신의 말에 흥미를 나타내자 채봉이 신이 난 듯 빠르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팔왕이란 모두 그 태어난 시대가 다르기는 해도 각자 최강의 무 인으로 손꼽히던 여덟 명의 무인으로서...., 천종예가의 초대가주 인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가 그 중 한 명인 천왕(天王)으로 불리우 고, 그리고 중원 정통무맥이라는 잠천의 천주인 살인혈황은 혈왕 (血王)이라 불리우며 일좌(一座)를 차지하고....." 유빙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채봉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에 흑궐(黑闕)의 비조인 초령왕 여율령이 초령왕으로서 팔왕 중 한 명에 속하고....." "초령왕 여율령 역시 팔왕 중 한 명이라고....?" 유빙의 눈에 일시 기이한 빛이 스쳤다. 허나 그는 이내 담담히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주받은 늑대의 아들이라는 창랑왕(蒼浪王) 등.... 팔왕 은 기실 각기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나 고금을 통틀어 무적이라 일 컬어지는 여덟 명의 최강자를 말하는 거예요." "....!" "헌데 세인들이 당대를 일컬어 제이차 팔왕의 난이라 비교하는 것 은 그 전설적인 최강자들의 후예(後裔)들이 기이하게도 당대에 모 두 한꺼번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에요." - 천왕.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 - 혈왕. 중원정통무맥 잠천의 살인혈왕. - 초령왕. 흑궐의 비조 초령왕 여율령. - 창랑왕. 늑대의 아들 창랑왕! 시대를 달리해 존재했던 전설적인 최강의 무인들. 그들의 후예가 당대에 한꺼번에 등장한다. 아아! 팔왕 중 몇 명은 아직 신비에 가려 있었으나 이 팔왕들의 후예가 당대에 이르러 한꺼번에 등장함은 곧 무엇을 뜻하는가! 난세(亂世)! 그렇다! 난세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헌데, 팔왕과 용병육주비전과는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가?" 문득 유빙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듯 채봉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채봉이 돌연 팔왕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그는 팔왕과 용병 시장이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채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떼었다. "용병육주비전은 바로 그 팔왕 중의 일 인(一人)인 일천만승(一天 萬承) 금문마조(金門魔組), 만승왕(萬乘王) 채문초(彩文楚)란 분 에 의해 세워진 곳이에요." "만승왕 채문초!" 율한극의 눈에 경악이 치달렸다. <일천만승 금문마조, 만승왕 채문초.> 태초의 혼암(混暗)이 음양(陰陽)으로 분리되어 천과 지로 구분되 며 인간이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점차 그 인간의 수효가 늘어 씨족과 부족이 형성되면서 인간은 처절한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번성하게 되니.... . 왕조(王祖)와 무림이 아직 틀이 잡히기 전인 아득한 고대, 그 시 대는 적자생존으로 생을 영위해 가는 아직 인간이라기 보다는 야 수에 가까왔던 시대로써 문(文)보다는 살아 남기 위한 무력(武力) 이 더욱 높이 평가되어 뛰어난 투사들을 일러 명인이라 칭하여 숭 배할 수밖에 없는 피의 시대였다. 그 당시 이 명인의 칭호를 받은 뛰어난 투사의 가문은 자그마치 일천(一千)에 달했고 그들을 일러 금문일천사해성(禁門一千死海 星)이라 했다. - 금문일천사해성. 고대무림을 대표하는 일천 명인의 가문. 이들의 무예는 실로 엄청 난 것이었다. 허나 이 금문일천사해성의 일천 명 명인들은 스스로 한 사람의 가신(家臣)으로 자청했는데..... 한 손에는 고대 최초의 문파(門派)인 금문(禁門)의 율법이 새겨진 일천만승경(一千萬承經)이라는 금판경(金板經)을 들고, 그 어깨 위에는 금록색 눈빛에 창끝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 꼬리를 지니고 있는 전설의 영물(靈物), 사문(邪門)이 올려져 있다. - 일천만승 금문마조, 만승왕 채문초. 그렇게 고대무림에 나타난 그는 단신으로 일천 명인의 가문을 굴 복시키며 금문(禁門)이라는 무림 최초의 문파를 창설한 것이었다. 일천만승이란 병거(兵車) 만승(萬承)을 소유한 천자(天子)라는 뜻 이었으니 그의 신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봉린주에 있는 용병들은 바로 그 만승왕에 굴복한 금문일천사 해성이라는 일천 명인들의 후예들이에요." 채봉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유빙이 묻지도 않은 용병육주비전 의 비사(秘事)까지도 서슴치 않고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금문일천사해성의 후예들....?" 유빙의 눈에 흠칫 이채가 스쳤다. 금문일천사해성이라는 고대무림의 패주들..... 그들은 비록 만승왕 일천만승 금문마조 채문초에 의해 패하기는 했으나 각기 무의 원류(源流)를 이루고 있는 가문임을 그 역시 전 설처럼 들어 알고 있었다. 채봉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용병시장이 바로 고대무림(古代武林)의 후신(後身)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야작 율한극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새삼 감탄과 경악의 눈으로 주위를 쓸어보았다. 그의 눈에 이채가 솟아났다. 여기저기 낡은 천막과 통나무 가옥들이 서 있고 심지어는 아예 가 옥의 형태도 갖추고 있지 못한 바람막이 휘장만 가려져 있는 곳도 있었는데 이 용병시장에는 사려는 사람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가 없었다. 팔려는 사람들조차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누워 있기도 하고 나무에 기대 졸기도 하며 잡담을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그 한곳, 거대한 고목나무 아래 한 이십대 후반의 묵의청년이 지 면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율한극의 눈은 바로 그 묵의청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행동 이 너무도 기이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길게 누워 있는 묵의청년은 양 손에 한 무더기의 철환(鐵丸)이 나 눠진 채 계속 허공으로 쏘아올리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엄지손톱 크기의 작은 철환들은 허공에 솟구쳤다가 다시 떨어져 내리고, 그 리고는 다시 그의 손가락에 의해 퉁겨져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뿐이랴! 수많은 철환들은 그의 발등에 떨어졌다가 다시 퉁겨지기도 하고 또 복부있는 곳으로 떨어져 퉁겨오르기도 했다. 무릎이나 팔의 맨살 등등, 묵의청년은 그야말로 전신으로 철환들 을 퉁겨내고 있었는데 그의 전면에 너무 오래되어 글씨조차 알아 보기 어려운 나무판자 하나가 지면에 꽂혀 있지 않은가? <병기(兵器), 살인묵환(殺人墨丸). 가격(價格), 적병의 수급 한 개당 은자 이십 냥.> 희미하게 쓰여져 있는 기이한 글귀는 언제 쓰여졌는지 모르나 이 미 퇴색할 대로 퇴색한 데다 판자는 거의 썩어 들어가 있어 한 눈 에 그 나무판자가 그곳에 꽂혀 있은 지가 백여 년도 넘은 듯했다. "미친 놈....!" 잠시동안 이채를 띄우며 묵의청년을 지켜보던 율한극이 혀를 차며 눈을 돌렸다. 순간 쏘는 듯한 차손의 음성이 그의 고막을 강타했다. "미친 놈은 바로 너다! 눈이 삐었으니....!" '으잉?' 율한극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차손을 노려보았다. 차손이 정색하며 입을 떼었다. "저 자가 전신으로 퉁기고 있는 철환을 자세히 보아라. 그 철환을 맞고 무엇이 떨어지고 있는지....!" "....?" 율한극은 차손이 심통으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은 것이 아님을 느끼며 다시 묵의청년의 행동을 주시했다. 쉭! 쉬- 익! 묵의청년이 튕겨냈던 묵환들이 팔에 떨어지면 팔의 근육이 퉁겨내 다시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고, 발에 떨어지면 발은 움직이지도 않 았는데 철환들은 다시 허공으로 쏘아져 가고 있었다. 헌데 그 퉁겨지고 있는 높이는 모두 칼로 자른 듯 똑같은 일장여 높이였다. 그의 이런 행동은 아무리 보아도 습관적인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전신의 근육이 철환들을 퉁겨내고 있기는 하나 별반 신기하 다고 할 수는 없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헌데, 아아, 한 개의 철환이 일 장 높이로 허공에 퉁겨졌다가 다 시 떨어져 내리는 순간 놀랍게도 무엇인가 미세한 물체가 지면에 떨어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윙! 위윙.... ! 묵의청년의 몸 일 장 높이에는 수많은 하루살이들이 떠돌고 있었 다. 겨우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크기의 하루살이들이었다. 헌데 놀랍게도 묵의청년의 철환이 퉁겨질 때마다 한 마리씩의 하 루살이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율한극이 멍청해졌다. 일반적으로 작은 물체에 속도를 실어 큰 물체를 파괴하기는 어렵 지 않다. 허나 철환은 하루살이들보다 컸고 더구나 하루살이들은 힘을 받을 수 없는 허공에 떠 있지 않은가! 그런 하루살이들을 철 환으로 정확히 한 마리씩 죽이고 있는 이 동작은 그야말로 신기 (神技)가 아닐 수 없었다. 뿐이랴! 묵의청년은 전신을 까딱도 하지 않은 채 단지 근육의 운동만으로 그런 가공할 위력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한 힘과 속도, 그리고 적중되는 순간의 순간타력(瞬間打力) 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차손이 망연해져 있는 율한극을 향해 입을 떼었다. "그리고 저 판자를 보아라." 차손이 익살도 부리지 않은 채 무겁게 말을 잇자 율한극이 황급히 판자로 눈을 돌렸다. "저 나무판자에 쓰여져 있는 글귀는 이미 아득한 세월 전에 쓰여진 것이다. 대략 삼백 년도 넘게 저 나무판자가 꽂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저 청년은 대대로 저 짓 하나만을 가업으로 이어받았음을 뜻하는 것 이다. 용병이라는 직업을 말이다!" "아....!" 율한극이 새삼 몸을 움츠렸다. 이제야 용병들의 가공함을 뼈저리게 인식한 것이었다. "저 사람은 금문일천사해성의 일천 명가(名家) 중 한 가문인 탄암 세가(彈岩勢家)의 후예예요." 율한극의 질린 듯한 표정을 바라보며 채봉이 묵의청년에 대해 설명했다. "수천 년에 걸쳐 이룩된 탄암세가의 가전기예인 비망묵환(飛忘墨 丸)은 가히 암기술의 최고봉이랄 수 있지요." 유빙과 율한극은 채봉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다시 한 번 낭리난 전의 곳곳을 쓸어보았다. 폐허를 방불하는 섬의 여기저기 낭리난전의 곳곳에는 실로 수많은 낭인용병들이 각기 무관심한 표정으로 널려 있었다. 그 수효는 한 자리에 모아 놓으면 개미떼를 방불할 정도였다. 헌데 그들 용병들에게는 어떤 규율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나무 위에 길게 누워 있는 용병이 있는가 하면 길다란 깃발에 자 신을 소개하는 간단한 글귀를 써놓은 채 아예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는 자들도 있다. 또 어떤 인물은 유빙 일행을 대하자 마치 자신의 상품을 선보이듯 수많은 병기를 꺼내들고 끝없이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했다. 문득 천천히 낭리낭전을 휘둘러 보던 율한극의 눈이 다시 한 곳에서 멈춰졌다. "저들은 누구인가? 보아하니 용병들은 아닌 것 같은데....?" 후줄근한 장포(長袍)를 걸치고 무엇엔가 짓눌린 듯 땅딸만한 체구 의 금포 곰보노인과 그를 호위하고 있는 듯한 좌우의 구리빛 청동 거한들, 그 세 사람은 낭리낭전을 기웃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얼굴이 얽을대로 얽은 금포노인은 둘째치고 그의 좌우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두 명 청동거한의 위세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키는 거의 팔 척이 넘는 듯해 보였고 머리 하나만 해도 바윗덩어 리가 거대한 산 위에 얹혀 있는 듯했다. 보통 사람의 두 배가 넘 는 엄청난 체구의 두 거한의 피부는 구리빛으로 익어 있어 한 눈 에 보아도 엄청난 신력(神力)을 지니고 있는 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저 가운데의 곰보노인은 금융대인의 노복인 만보산(萬寶山)이라 는 인물이에요. 그리고 좌우의 청동거한들은 금융대인이 거느리고 있는 경호무인 중 가장 포악하고 무서운 오고달탄(吳古達呑)의 용 사로서 오고쌍탑(吳古雙塔), 철격(鐵格)과 철관죽(鐵關竹) 형제들이지요." "오고쌍탑 철가형제....? 무지막지한 놈들이군." 율한극의 눈에 은은한 놀람이 떠올랐다. 엄청난 거구임에도 불구 하고 그들의 몸놀림이 마치 고양이처럼 민첩하고 가볍게 보였기 때문이다. 차손이 문득 율한극의 어깨를 두드렸다. "썩은 돼지야! 그러나 만약 네가 저들과 어떤 불상사가 생긴다면 너는 그들 셋 중에서 오히려 저 두꺼비처럼 생긴 곰보노인을 조심 해야 할 것이다." 차손의 말에 율한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미 형편없어 보이 는 곰보노인이 심상치 않은 노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느낀 것이었는데..... "저 곰보노인은 사람의 혼(魂)을 뺏을 늙은이다. 아주 위험한 인물이지....!" 차손은 그 곰보노인의 진정한 능력을 이미 꿰뚫은 듯 다소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때 채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빙을 잡아끌었다. "마침 잘됐군요. 저들은 지금 용병들을 사기 위해 온 것이에요. 그러니 저들의 흥정을 보아두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 유빙은 못이기는 척 그녀가 잡아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 다. 금융대인의 노복 만보산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② <도수명인세류표(刀手名人細流 ). 이 지상에서 서열 팔십구 위(八十九位)의 암살가(暗殺家). 가격, 별도 상담요. 도수명인세류표는 이 지상에서 그 무공 서열이 팔십팔 위 이내의 명인만을 상대하는 일에만 용병으로 고용됨.> 깡마른 상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그 피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닦지 않은 듯 더러워 보였다. 수염과 머리는 자 랄대로 자라 정좌해 있는 무릎을 완전히 뒤덮고 다시 지면에까지 늘어져 있다. 그 아랫도리에는 짧은 단삼을 걸치고 있고 그나마 입지 않았다면 영락없는 원시미개인으로 보아줄 수밖에 없는 노인이었다. 실로 안스러울 정도로 마른 노인이 지면에 정좌해 있는데 그 전면 에 기이한 한 개 팻말이 꽃혀 있었다. 그리고 그 노인의 옆에 십팔구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흑의소년이 기이한 혈색의 노인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우뚝 서 있었다. 언뜻 보면 같은 일행인 듯 그렇게 그들은 언제까지고 한 사람은 앉은 채, 또 한 사람은 선 채 그곳에 못박혀 있었다. 낭리낭전의 이곳저곳을 기웃기웃하면서 살펴보던 금융대인의 노 복, 곰보노인 만보산의 걸음이 멈춰진 것은 바로 이 기이한 노인 앞이었다. "어느 분이 도수명인세류표라는 분이오?" 팻말을 훑어보던 만보산이 문득 입을 떼었다. 굳게 감겨 있던 흑의소년의 눈이 뜨여졌다. 아무 생각도 읽어낼 수 없는 공허한 눈빛이었다. "지금은 바로 그대 앞에 앉아계신 분이 도수명인세류표이십니다." 흑의소년의 음성은 그 눈빛 만큼이나 공허하게 울려오는 음성이었다. '지금은 앉아 있는 노인이 도수명인세류표라고....? 그렇다면 다 른 때는 또 누가 도수명인세류표란 말인가....?' 헌데 그의 말뜻이 실로 기이하지 않는가! 만보산의 눈에 의혹의 빛이 어리자 흑의소년의 바람소리처럼 공허한 음성이 이어졌다. "손님! 의아해 할 것 없소이다. 이 분이 안계실 때에는 내가 바로 도수명인세류표가 되니까요. 우리는 대대로 도수명인세류표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흑의소년은 적지 않은 말을 한꺼번에 내뱉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기이하게도 듣는 사람에게는 그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호....!" 만보산은 흑의소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한 번 팻말을 쓸어보며 입을 떼었다. "우리는 이미 상평난전에서 도수명인세류표라는 사람을 황금 일천 이백 관에 고용하기로 흥정을 마쳤소이다." "....!" "물론 도수명인세류표의 요구대로 무공 서열이 천하에서 팔십팔 위 이내에 드는 인물을 상대하기 위함이오." "......" "그래서 나는 도수명인세류표라는 분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니 고 있는가 확인하고자 온 것이외다. 황금 일천이백 관은 결코 적 은 것이 아니기에....." 만보산, 그는 어쩐지 자꾸 목이 타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자신 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한 번 손바 닥으로 문지른 후 말을 덧붙였다. "해서 나는 도수명인세류표라는 분의 무공을 시험해 보기 위해 오 고쌍탑 철격씨형제를 대동했소이다. 이 두 사람을 상대로 지상을 통틀어 서열 팔십구 위의 암살가라는 도수명인세류표의 실력을 입 증해 주었으면 하오." "....!" "상품을 파는 상인이라면 자신의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 그 물건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첫번째 상도의(商道義)가 아니오. 해서...." 만보산이 더듬더듬 말을 덧붙이자 그제야 흑의소년이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물론이오. 허나 아무런 대가도 없이 실력을 보여줄 수는 없소이다." 잠시 이채를 떠올렸던 만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 두 사람을 상대로 무공을 펼쳐보이는 대가로 황금 백 관을 추가시키겠소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 이 두 사람에게 만에 하나 다치는 일이 있더라도 상관치 않을 것이오. 물론 그렇 게 되면 계약은 자동적으로 파기되는 것이고...." 마악 말을 마치려던 만보산의 눈이 커졌다. 그가 열심히 혀를 놀 리고 있는 그 순간 흑의소년의 몸이 소리없이 만보산의 좌우에 서 있은 오고쌍탑의 옆에 내려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보산이 의아스러워 하는 눈으로 소년의 행동을 지켜보려는 순간 오고쌍탑 중 철격이 돌연 만보산의 어깨 위에 자신의 턱을 올려놓았다. 만보산의 얼굴이 화악 일그러졌다. 철격의 이런 행동은 상식밖의 일이었고 대단한 무례였다. 그가 비록 금융대인의 노복이라고는 하나 오고쌍탑과는 비교할 수 도 없는 신분인 것이다. 그런데도 철격은 그 상태에서 웃고 있었다. "내 어깨에서 그 얼굴을 치우게." 만보산이 조용히 외쳤다. 허나 철격은 여전히 얼굴에 기이한 미소 를 머금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만보산의 눈빛이 가공스럽게 차가워졌다. 그는 노기를 참지 못해 몸을 움직여 손을 쳐내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뚝....! 뚝! 돌연 만보산의 발등에 무엇인가 기이한 것이 방울져 떨어져 내리 고 있지 않은가! 무심코 자신의 발등을 내려다 보던 만보산의 얼 굴이 굳어졌다. 피(血)! 선명한 진홍색의 액체가 철격의 허리와 배를 적시며 지면 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만보산은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털썩! 순간 그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철격의 머리가 기이한 각도로 젖혀짐과 동시에 철격의 거대한 신형이 지면으로 무너져 내렸다. 철격의 소나무 둥치처럼 굵고 강인한 목이 한순간에 한 겹의 피부 가죽만을 남긴 채 깨끗이 베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끔찍한 광경이자 가공스러운 일이었다. 언제 어떻게, 또 무엇으로 흑의소년이 이런 끔찍한 행동을 했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만보산과 오고쌍탑 중 한 명이자 죽은 철격의 동생인 철관죽의 눈 이 서로 마주쳤다. 그들은 너무도 가공스러운 광경에 미처 경악하 지도 못한 듯했다.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서로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눈빛, 그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만보산이 제정신을 차리고 철관죽을 향해 소리쳤다. "덤벼!" 철관죽이 주춤거렸다.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른 채 한 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처 참히 죽어 버렸는데 어찌 감히 덤빌 수 있겠는가! "덤비란 말이야. 이 멍청한 놈아!" 철관죽이 공포에 질려 주춤거리자 만보산이 다시 외쳤다. 그러나 철관죽은 여전히 울상을 한 채 제자리에 못박혀 있었다. "이 겁장이 같으니! 저 소년을 죽이란 말이다! 네 형제의 복수를 하란 말이야!" 만보산이 다시 외쳤다. 허나 그 순간 소년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미련....." 멍청히 공포에 질려 서 있는 철관죽을 향해 무어라 소리치려던 만 보산의 음성이 목에 걸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에 철관죽의 한 쪽 어깨에 희미한 홍 선(紅線)이 그어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그 한 줄기 붉은 선 (線)은 쫘악 확산되어 그대로 터져나감과 동시에 폭포수같은 선혈 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철관죽 역시 이미 흑의소 년의 공격을 받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 이들의 신체는 청룡언월도로 내리쳐도 끄덕 없으리만큼 금강 불괴에 가까운데 이렇게 썩은 무우처럼 간단히 무너지다니....? 더구나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 맨손에!' 만보산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때, 어이없이 당한 철관죽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흑의소년에게 덮쳐들었다. 마치 한 개 대산이 무서운 기세로 덮쳐드는 듯한 엄 청난 위용이었다. 흑의소년의 신형이 둥실 떠오르며 철관죽의 머리를 타고 넘어 그 의 뒤쪽에 내려섰다. 그의 한 손이 순간 철관죽의 목을 향해 허공 에 대고 장난처럼 그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어 그의 발이 마악 지면에 닿는 순간 철관죽의 목이 수그러지고 있었다. 역시 흑의소년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쿠- 웅! 철관죽의 거구가 지면을 구르자 흑의소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인에게는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믿었어야 했습니다." 만보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론 도수명인세류표의 능력을 시험 하려던 것은 바로 그였으나 흑의소년이 이토록 가공스러운 능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예상도 못했던 것이다. "당신은 약속한 황금 백 관을 우리들의 가격에 얹어서 계산해 주어야 합니다." 흑의소년은 무감동한 음성으로 중얼거린 후 지면에 나동그라진 오 고쌍탑의 처참한 시신에 눈을 주었다. "이 바닥의 쓰레기는 당신 것이니 당신이 책임지고 치우도록 하십시요. 지금 당장....." "아...., 알았소이다." 만보산이 공포에 질려 더듬거렸다. 허나 그의 입가에 그런 와중에 서도 한 가닥 흡족해 하는 미소가 어렸다. 진정 가공할 인물을 고 용했다는 만족감의 표현이었다. '황금 일천이백 관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용병들이야....! 역시 금융대인의 눈은 정확하단 말이야.....' "사, 사부! 저, 저것이 도대체 무슨 기예입니까?" 만보산의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오던 유빙 일행 중 율한극이 고 개를 저으며 차손을 돌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율한극 역시 흑의 소년의 몸놀림을 아예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차손이 조용히 입을 떼었다. "이미 오래 전에 잊혀져 버린 검수탈백인(劍手奪魄刃)이라는 살인도법이다." "도법? 손으로 펼쳤는데?" 율한극이 멍청히 반문하자 차손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손 그 자체는 이미 지상최고의 무기라고 내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 않느냐? 명인에 이른 사람에게는 인체의 모든 부분이 무서운 병기인 것이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특히 손만을 단련시킨 듯 하 다. 한극! 너는 손칼이라 불리우는 기예가 있었다는 것도 들어보 지 못했단 말이냐?" 율한극이 아직도 의혹의 눈빛을 띄우고 있자 차손이 질색하듯 입을 열었다. 율한극의 눈에 새로운 놀람이 자리했다. '손칼?' 다음 순간 그는 외치듯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저들이 바로 상고무림시대에 손칼이라는 기예를 완성시 켰던 도수명인이란 말....?" 율한극의 질문은 중도에서 끊겼다. 기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던 질 문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도수명인세류표라고 스스로를 밝힌 팻말이 노인과 흑의소년 앞에 꽂혀있었으므로..... 용병(用兵)! 금문일천사해성의 후예들, 그 가공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팔왕예조 제2권 제16장 비정형살상병기(非定型殺傷兵器) ━━━━━━━━━━━━━━━━━━━━━━━━━━━━━━━━━━━ ① - 비정형살상병기(非定型殺傷兵器). 정형(定型)이란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물체를 뜻한다. 비정 형이란 이와 반대되는 말로써 곧 일정한 형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 이고, 비정형살상병기란 그 일정한 형체가 없는 살상무기라는 뜻 이 되는데...., 여기 그 비정형살상병기를 제작해 내는 대가(大家)들이 있다. - 예맥(藝脈) 일명, 난예공방(亂藝工房)이라고 불리우는 이들을 상징하는 이름은 장리난전이었다. 곧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 중 하나인 장리비전은 이 비정형살상병 기를 제작해 내는 장인용병(匠人用兵)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검(劍), 도(刀), 창(蒼), 극(戟), 월(鉞), 봉(棒) 등등...., 인간 이 유사이래 만들어낸 모든 병기는 어느 누가 보더라도 병기임을 알 수 있는 정형병기(定型兵器)이다. 허나 장리난전의 장인용병들이 제작해 내고 있는 병기들은 이런 정형병기가 아니라 세인의 예측을 불허하는 기오막측한 비정형의 살상병기들이었다. - 깊은 밤, 야래향(夜來香)의 그윽한 향기가 그대를 찾아온다. 야 래향은 밤과 함께 그대를 찾을 것이나 그것을 음미하지 마라. 곧 죽음의 향기일지니..... - 느닷없이 그대 앞에 한 개 뛰어난 백옥소(白玉簫)가 놓여 있다. 한 번 불어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으리만큼 뛰어난 백옥의 피 리...., 허나 만지지 마라! 입에 대는 순간 죽음의 음향이 그대를 휘어감을 지이니..... 세인의 예측을 불허하는 기병(奇兵)들, 무심코 악수를 나눈 상대 의 손바닥에 죽음의 독액(毒液)이 묻어 있을 수 있고 자신이 애지 중지 사용하던 검의 손잡이에서 돌연 죽음의 비침(飛針)이 날아올 수도 있다. 여인의 체향(體香)이 묻어 있는 한 장의 수건(手巾)이 돌연 방원 삼백여 장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면성폭약(綿性爆藥)으로 바뀌는 수도 있고, 머리맡에 잔잔히 놓여 있는 한 잔의 물이 흔들리면 터 져버리는 수성폭약(水性爆藥)일 수도 있다. 무수한 천막들이 난립해 있는 곳. 크고 작은 수많은 천막들 사이 로 쭉 뻗어 있는 대로로 유빙일행이 채봉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예의 대로의 좌우로는 듣도 보지도 못한 수많은 기물들이 좌판 위 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천막들 안에서는 각기 두세 사 람씩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뻘건 쇳물이 끓고 있는 화로를 매만지는 사람에서부터 열심히 망치질을 해대고 있는 사람. 아름다운 도자기를 구워내고 있는 인 물이 있는가 하면 또 한 벌의 갑옷을 깁고 있는 인물도 있다. 실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봉린주 내에 이러한 기이한 곳이 존재함 을 대하고 율한극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곳은 용병시장이라기 보다는 흡사 온갖 잡동사니 물건을 진열 하고 파는 천민들의 야시난전같군." "......" "헌데 저들도 모두 용병인가? 소형제." "그래요. 이곳은 신체의 직접적인 수단을 사용치 않고도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비정형살상병기를 제조해내는 장인용병들이 있는 장리난전이에요." 율한극의 질문에 채봉이 조용히 대꾸했다. 율한극은 채봉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비정형살상병기? 장인용병들?" 채봉이 유빙의 단아한 얼굴을 힐끔 훔쳐보며 마치 그에게 들려주 듯 설명을 이어갔다. "인명을 살상하는 데에는 신체와 정형병기(定型兵器)를 사용하는 것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어요. 화약과 독(毒)이라든지, 일 종의 암습(暗襲)이랄 수 있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에요." "......" "비정형살상병기란 누가 보아도 병기같지가 않은 살인기병들을 말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생활필수품에 기묘한 조작을 해서 목적한 인물을 살해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지요." "으음....! 물건 자체의 위력만으로 인간을 죽인다? 하지만 상승 무도를 연성한 절대자들에게는 그따위 것들이 통하지 않을텐데?" "그렇지 않아요. 이곳에서 만들어 내는 비정형살상병기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살인무기들인지라 절대자라도 일단 목표가 되면 죽음을 면할 수 없어요." "말도 되지 않는 소리!" 율한극이 일축했다. 그러자 채봉의 입가에 미소가 솟아났다. 그녀는 한 노파가 쪼그리고 앉아 기이하게 생긴 약탕관에 무엇인 가를 끓여대고 있는 좌판에서 한 개 기물체를 슬쩍 집어들었다. 이어 율한극의 등을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내가 이곳에서 만든 비정형살상병기들의 위력을 보여줄 테니 한 번 시험해 보실래요? 나는 이곳에서 노인장에게 비침(飛 針)을 날리겠어요. 그것을 한 번 막아보세요." "흥!" 율한극이 냉소했다. 경공과 신법이라면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대가가 바로 그인 것이다. 삼 장 정도 걸어간 채봉이 율한극을 마주보는 자세로 수중에서 가 늘기 이를데 없는 비침을 발사했다. 머리카락처럼 가늘기 이를데 없는 비침이 날아오는 속도는 실로 살인적이었다. 허나 율한극이 누구인가! 성공한 범죄자이며 또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악마의 표본실 적전 마람의 람주인 차손에게 지난 삼 년간 지도를 받은 인물이 아닌가! 탁! 타타닥! 십여 개의 비침이 순식간에 지면에 퉁겨졌다. "이런 것이 비정형살상병기라면 정형병기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율한극은 다소 의혹을 느끼며 눈을 들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쉬- 익! 쉭! 지면에 떨어졌던 비침들이 저절로 다시 율한극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지 않은가? "어....!?" 탁! 타탁! 율한극이 다시 손이 휘둘렀다. 그에 따라 비침들은 율한극의 몸에 이르기 전에 다시 지면으로 떨어졌다. 허나 튕겨 나가던 비침들은 채 반 자도 밀려나가기 전에 다시 방향을 바꾸어 율한극을 향해 쏘아져 오기 시작했다. 팟! 파파팟! 타타탁! 율한극의 손을 쳐내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그에 따라 허공에서 퉁겨졌다가 다시 쏘아져 오는 비침들의 속도 역시 점점 빨라져 갔 다. 놀랍게도 쳐내는 족족 모조리 다시 율한극을 향해 쏘아져 오 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스스로 생명을 지니고 있는 물체인 듯 끝없이 계속 덮쳐들고 있는 비침의 공세는 실로 어지러울 정도였다. "호호호, 그 비침에는 독이 묻어 있어요. 스치기만 해도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니 조심하세요." 채봉이 가만히 이 광경을 바라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제기...., 남장여인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네. 방정맞은 웃음 좀 멈추게." 율한극은 채봉이 교소를 터뜨리자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연신 손을 놀렸다. 비침들이 회돌아치고 있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 한 눈조차 팔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때 차손의 신형이 소리없이 움직이며 율한극의 뒤에 내려섰다. 그는 율한극의 등에서 무엇인가 검은 철판 하나를 떼어내 집어 던졌다. 손바닥 크기의 얇은 철판, 그것은 바로 채봉이 슬쩍 율한극의 등 에 붙여 놓았던 물건이다. 예의 철판이 율한극의 등에서 떼어져 십 장 밖으로 날아가자 비침 들 역시 그 철판이 날아가는 쪽을 향해 쏘아져 가지 않는가? "호호호! 그 철판과 비침들은 강력한 자력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노인장께서 등을 돌리지 않고 그 자력이 통하는 길을 차단하고 있 는 한 언제까지고 서로 잡아끄는 힘 때문에 노인장에게 덤벼들 거 예요." "아!" 그제야 율한극은 모든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저 비침 하나만으로도 귀찮은 사람 하나 정도는 혼자서 끝없이 춤추게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호호! 어느 무인도 적 앞 에서 등을 보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음....!" 율한극이 떨떠름한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서 그 는 비정형살상병기라는 것이 무시할 게 못된다고 느낀 것이었다. 동시에 수많은 좌판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온갖 기물들을 새 삼 둘러보는 그의 눈에 질린 빛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그는 머쓱해진 입장을 돌리려는 듯 한 곳에 눈을 고정시켰다. "저것은 무엇인가?" 약초를 끓이고 앉아 있는 노파의 옆 좌판 그 한곳에 적색의 아름 다운 피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살인각적(殺人角笛)이라는 비정형살상병기예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일개 피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 피리를 불면 속에 감추어 진 취시(吹矢)가 반대 방향으로 튀어나와 사람을 죽이게 되지요." "으음....! 피리를 부는 순간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이 되겠군." "그래요. 살인각적은 보기에는 희대의 진품인지라 음(音)을 좋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 불어보지 않고는 못견디죠." "호.... 음률을 좋아하는 인물에게 주면 저절로 살해되겠군." 율한극은 감탄의 빛을 띄우다가 혀를 찼다. "쯧! 이곳은 아주 몹쓸 곳이로군." 이어 그는 휘적휘적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수많은 좌판 위에 진열되어 있는 온갖 기물들 그 앙증맞 기 이를데 없는 기물들이 모조리 비정형살상병기인 것이다. "호호..... 아마 이곳에 있는 모든 비정형살상병기들을 동원한다 면 현 무림의 절대고수들을 거의 전멸시킬 수 있을 거예요." 율한극의 내심을 눈치 챈 채봉이 다시 교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 녀는 쪼그리고 앉아 단로(丹爐)를 들여다 보고 있는 노파를 향해 눈을 돌렸다. 은빛 비늘같은 흰 머리가 단정하게 빗겨져 있고, 하얀 피부는 비 록 피폐해 있기는 하나 어딘가 귀품을 드러내고 있다. 취색 저고 리에 자접문양의 비녀를 꽂고 있는 노파를 바라보는 채봉의 눈에 는 부드러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자접할머니!" 채봉이 나직이 외치고 예의 노파를 등 뒤에서 끌어 안으며 함께 쪼그리고 앉았다. "어이구! 이녀석! 다칠라....?" 노파 역시 만면에 하나 가득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채봉을 마주 안았다. "헌데 자접할머니가 이곳에는 웬일이야?" 채봉의 눈에 의혹이 어리고, 순간 노파의 눈이 유빙을 쓸어보았다. "ㅋ! 네놈 일이 아니라면 이 할미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나왔겠느냐!" "....!" "그래, 우리 귀여운 봉아를 홀린 녀석이 바로 이 놈이냐?" "할머니도 참....!" 유빙을 뚫어질 듯 쏘아보는 취의노파의 눈빛은 실로 강렬했다. 허나 다음 순간, 취의노파의 입가에는 흡족해 하는 듯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흠..... 역시 저 늙은이가 제대로 본 것 같군. 헌데 도화살(桃花 煞)이 너무 짙어 봉아 속을 꽤나 썩일 것 같은데....!" 채봉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그녀는 목덜미까지 능금처럼 붉힌 채 고개를 떨궜다. 십삼사 세 가량의 소년으로만 보이는 그녀는 기실 남장을 걸친 여 인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남장여인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태 도를 보이고 있어 유빙 일행은 그를 처음 대할 때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헌데 취의노파의 말에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떨군다는 것, 이것 은 그녀가 이미 유빙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광경이 아닌가? 채봉이 어색해진 입장을 바꾸려는 듯 문득 취의노파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헌데, 자접할머니는 이곳에서 무얼 하시는 거예요?" "왜 궁금하냐?" "예. 할머니는 이 장리난전의 일에서 이미 오래 전에 손을 떼셨잖아요." 채봉이 고개를 갸웃하자 취의 노파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ㅋ! 이 할미가 네 합환주(合歡酒)를 만들어 주지도 않고 은퇴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지." "합환주....." 채봉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ㅋ! 이 할미가 전에 말한 미약(媚藥) 말이다."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바라보며 취의 노파가 다시 느물스럽게 미소했다. 채봉의 눈이 커졌다. "미약이라니요? 그렇다면 지금 할머니가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전에 말한 사랑의 미약이라는 것인가요?" "그렇다. 이것만 저 놈에게 먹이면 저놈은 너를 한시라도 보지 않으면 미치게 될 게다." 채봉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녀가 제아무리 대담하다 해도 당 사자인 유빙이 빤히 듣고 있는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제삼 자가 대신 밝히고 있으니 어찌 고개를 들 수 있으랴! 능금처럼 붉어진 얼굴로 숨도 쉬지 못한 채 지면을 내려다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빤히 내려다 보며 취의노파가 다시 미소했다. "크크ㅋ! 요 귀여운 것. 이 할미가 다 알아서 할테니.... 어서 저 놈에게 이 할미나 소개시키거라." 채봉이 화다닥 놀라며 눈을 들었다. "이 할머님은 이곳 장리난전의 전대(前代) 행수이시며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의 가장 웃 어른이신 자접천모(紫蝶天母)이세요." '자접천모....!' 유빙의 깊숙이 가라앉은 눈이 잔잔히 흔들렸다. 그는 정중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유빙이라 합니다. 천종예가의 말학(末學)이 천모를 대합니다." 실로 정중하기 이를데 없는 태도였다. 차손을 제외하고는 천하의 어느 누구에게도 허리 한 번 숙이지 않던 유빙으로서는 실로 파격 적인 대우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채봉의 말이 이어졌다. "천모께서는 비정형살상병기를 제조하는 난예공방, 장리난전사상 최고의 성취를 이룩하셨던 분이셔요. 또한 본전의 모든 인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분이기도 하지요." 자접천모는 기이한 눈으로 유빙을 쓸어 보았다. "음, 한 눈에 대단한 천룡이라는 것을 느꼈다만 천종예가의 후예 일 줄은 미처 몰랐네. 그렇다면 지금 자네가 걸치고 있는 그 초의 는 바로 천종예가의 사람이 만든 것이겠군." 은라초의, 미백광이 은은한 풀잎으로 엮어 만들어진 은라초의를 세심히 살피는 자접천모의 눈에 언뜻 감탄이 스쳤다. "예! 본가의 예황 유귀광 선조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음! 인세에 천종예가가 있어 그 피의 예술성이 신의 경지에 이르 렀다더니 역시 그 말이 사실이로군." 자접천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유빙과 자접천모의 대화에 채봉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유빙의 진정한 신분을 이제야 눈치 챈 때문이었다. '저분이 바로 삼 년 전에 실종되었던 백찰무경의 소년대총사 유 빙....? 바로 천종예가의 마지막 후인이 바로 저분이었다니!' 채봉의 내심으로 문득 한 가닥 기쁨이 솟아났다. 그것은 일견해 나약한 문생(文生)으로만 보이는 유빙이 예측대로 엄청난 인물이 었음을 확인한 기쁨이기도 했다. 헌데 바로 이때, 자접천모가 문득 좌측 삼 장 밖의 한 곳을 바라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가? "흥! 용병육주비전이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진정한 귀인(貴人)께 서 왕림하셨는데 하찮은 벌레들이 분위기를 망치려 들다니!" 뇌전이 이는 듯한 기광이 자접천모의 눈에서 번뜩이고 다음 순간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띈 얼굴로 유빙을 돌아보았다. "공자! 이 늙은이에게 천종예가의 그 놀라운 예술품의 위력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 역시 좌측 삼 장 밖의 한 곳을 바라보며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은라초의의 예술성을 할머님같은 분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보여주겠습니까! 아무쪼록 정확한 평가를 내려 주십시요." 유빙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극히 차가운 미소였다. 삐- 익! 날카로운 풀피리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왁!" 동시에 자접천모가 힐끔 직시했던 삼 장 좌측 지점에서 돌연 처절 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죽음의 풀피리 소리! 은라초의의 풀잎 한 개가 어느새 허공을 치달려 좌측 삼 장 밖의 지면을 파고들고, 그 순간 지면 아래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나 온 것이었다. "누, 누가 우리를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단 말....?" 이 놀라운 광경에 채봉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삐-익! 유빙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며 또 다시 풀피리 소리가 허공을 진동했다. "크윽....!" 한 줄기 청광(靑光)이 무서운 속도로 십 장 밖으로 치달리는 순간 십 장 밖에 서 있는 한 그루 고목의 나뭇잎 사이에서 한 명 흑의 인이 떨어져 내렸다. 예의 고목의 가지에는 한 명 용병이 길게 누워 눈을 감고 있었는 데 그는 자신의 머리 위쪽에서 돌연 한 구의 시체가 떨어져 내리 자 기겁한 표정이었다. "아....!" "오!" 장리난전의 모든 장인용병들은 유빙의 이 놀라운 무위(武威)에 일 제히 감탄성을 터뜨렸다. 자접천모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입을 떼었다. "진정한 비정형살인기병은 무인의 힘과 조화될 수 있는 그 초의이 네. 자네가 입고 있는 초의야말로 지상 최고의 비정형살인기병이 랄 수 있을 것이네." "과찬이십니다." 유빙이 은라초의에서 발출된 풀잎들을 회수하며 미소했다. 이어 품 속에서 하나의 조화를 꺼내 돌연 자접천모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좀 보아주십시요. 천엽사화(千葉死花)라는 것입니다. 역 시 예황께서 만드신 명품이지요." 천엽사화를 받아들고 있는 자접천모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천엽사화의 위력 또한 제가 펼쳐 보여 드려야 하나 아무래도 할머님이 직접 사용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하군요." "음...!" 자접천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녀의 미간에 문득 알 수 없는 노기가 떠올라 있지 않은가? 그것은 결코 유빙에게 향한 노기는 아닌 듯 했다. "고맙네. 이해해 주어서...., 나의 불찰일세." 채봉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자접천모의 입에서 탄 식처럼 흘러나오는 순간, 자접천모의 주름투성이의 손이 천엽사화 의 한 곳을 건드렸다. 팔.... 랑! 천엽사화의 붉은 꽃잎 하나가 떨어져 내리며 동시에 천엽사화의 일천 꽃잎들이 일제히 폭발하며 사면으로 비산(飛散)해 나갔다. 파파- 팍! 쏴아아-! "끄윽!" "으아아악!"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아아! 그들이 서 있는 곳의 사면을 보라! 수많은 천막 속에서 각기 무엇인가를 만들며 분주해 있던 이십여 명의 장인용병들, 그들의 전신에 천엽사화의 꽃잎들이 비수처럼 박혀 있지 않은가!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자접천모는 스스로 천 엽사화의 기관을 작동시켜 장리난전의 장인용병들을 해치운단 말인가! "천, 천모! 이, 이게 무슨?" 채봉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 는 듯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장인용병들을 둘러 보았다. 자접천모가 쓸쓸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이미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너희들을 죽이려 했다." "예? 저까지 죽이려 했단 말인가요?" "그렇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마저 죽이려는 의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자접천모의 쓸쓸한 어조에 채봉의 얼굴에 그늘이 내렸다. "내 이미 본전 내부에 어떤 암운(暗雲)이 깃들어 있음을 짐작하고 는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천하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 이 고도(孤 島)에 역시 난세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었단 말인가? ② 묵의장년인(墨衣長年人). 이마에는 주먹만한 검은 혹이 달려 있어 보는 이의 눈길을 잡아끌 고, 그 두 눈은 횃불이 이글거리는 듯 강렬한 신광을 뿜어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대하는 듯 강렬한 안광(眼光)에 더 할나위 없이 고요한 기도를 지니고 있는 인물. 패도적인 기질과 해탈의 경지에 접어든 도공(陶工)의 정적감을 함께 지고 있는 이 인물은 바로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 중 장인용병들의 집합체인 장 리난전의 당대 행수(行首)였다. <천공장령(天工匠領) 작계광(雀鷄光).> 천하의 모든 장예(匠藝)에 고금최고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알려져 있고, 비정형살상병기제작의 최고명인이라 알려져 있는 인물이 바 로 그인데..... 천공장령 작계광. 지금 그는 한 노파의 전면에 무릎을 꿇은 채 고 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전면에 우뚝 서서 노기를 드러내 고 있는 한 인물은 바로 장리난전의 전대 행수 자접천모였다. "계광! 여기 쓰러져 있는 벌레같은 놈들은 누구이며 그리고 어찌 하여 장리난전의 장인용병들이 감히 노신을 방문한 저 손님들을 공격하려 했느냐?" 자접천모의 눈에서는 무서운 안광이 찌르듯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분노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한점의 바람도 없건만 장포 자락이 저절로 펄럭이고 있었고 백발이 창끝처럼 곤두서 있었다. 오랜 시간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공장령 작 계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님에게 당한 두 명의 외부인은 바깥 세상에서부터 추적해온 제 벌의 살수들이며.... 본전의 장인용병들이 그들을 해치려 한 것은 저 손님들이 우리의 적이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벌의 살수들?" "제벌?" 자접천모의 눈에 경악이 스치는 순간 유빙과 차손의 눈이 서로 마 주쳤다. 놀랍게도 그들의 행적이 이미 제벌에 노출되었음을 뜻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벌이 이미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으음.....' 유빙의 눈에 일시 차가운 한기가 어렸다. 천하 그 자체라 일컬어지는 제벌! 그 가공할 촉수(觸手)를 새삼 인식함과 동시에 가슴 저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투지를 느낀 것이 었다. 이때 자접천모는 다시 무서운 눈길로 천공장령 작계광을 쏘아보고 있었다. "흥! 그것은 그렇다치고 헌데 너희들은 용병육주비전을 세우신 만 승왕의 유일한 후예인 채봉을 무엇때문에 죽이려 했느냐?" "....!" "만승대연(萬乘大宴)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내가 언제 이런 더 러운 수법을 가르쳐 주었더냐!" "......" 천공장령 작계광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이런 침묵은 오히려 더욱 많은 것을 자접천모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이때 자접천모의 노갈에 유빙의 눈 깊은 곳에서 이채가 솟아났다. '채봉이 만승왕의 후예였던가? 헌데 이들은 왜 채봉을 죽이려 했단 말인가?' 문득 유빙은 용병들의 행동은 자신이 봉린주에 도착한 다음에 전 개된 것이므로 그 일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일천 년 이상을 세상과 격리되어 온 금문일천사해성의 후예들! 이들이 세상에 나갈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용병으로 고용되었을 때 뿐이다. 분명히 무슨 일인가 있다. 용병시장의 천년전통이 뒤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우연인가? 고대무림(古代武林), 금문사해일천성의 후예들인 용병시장. 유빙이 이 용병시장에 도착한 시기에 엄청난 폭풍의 회오리가 용 병시장 내에 회오리치기 시작했으니..... 한편 천공장령 작계광이 무서운 질책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자 자접천모의 입에서 문득 탄식이 흘러 나왔다. "으음, 그래 네놈들은 며칠을 더 참을 수 없었단 말이냐! 서로 죽 이고 죽는 작태를 연출하더니 이제는 소천주마저 해하면서까지 하 루라도 일찍 강호에 나가려 한단 말이냐!" 자접천모의 처연한 탄식에 작계광의 어깨가 진동했다. "사, 사부님.... 제, 제자는 단지....." 자접천모가 손을 내저었다. "안다. 내 어찌 너희들의 마음을 모르겠느냐! 천 년의 한(限)인 것을...., 그러나 나는 너만은 의연히 전통에 따르기를 원했다." "사, 사부님....!" "금문일천사해성의 후예들 중 우리들은 장인의 후예이다. 장인에 게는 도(道)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욕(私慾)과 명리(名利)를 초 월해 예(藝)에 정진해야 하거늘....." "사, 사부님!" "시끄럽다. 나는 네놈에게 야망을 위해 정을 버리라고는 가르친 적이 없다. 네가 과연 채봉을 죽일 수가 있더란 말이냐!" "제, 제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못난 제자를 죽여 주십시 요." 천공장령 작계광의 어깨가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순간 자접천모 의 눈에서 더욱 무서운 분노의 불길이 솟구쳤다. "죽여 달라고? 내 손으로 너를 죽여 달라고....?" "......" "이제라도 잘해 보겠다고 하지 않고 죽여 달라고? 내가 어떻게 너 를 키웠거늘 죽여 달라니.... 이 못된 놈!" 이때였다. 한곁에서 묵묵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차손이 돌연히 팔을 휘휘 내두르며 한 걸음 나서는 것이 아닌가! 차손은 부드러 운 음성으로 분노에 몸을 떨고 있는 자접천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요즘 아이들은 다 똑 같아요. 배은망덕하고 오만하고, 모두 제 생각만 하는 못된 놈들이지요." "....?" 차손이 돌연 나서며 부드럽게 말을 건네자 자접천모가 멍청해졌다. "허나, 노부인의 제자는 그래도 노부인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차손의 부드러운 위로의 말에 자접천모가 뜻밖에도 순식간에 노기 를 풀며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요. 이 아이는 좀 미욱한데가 있기는 해도 심성은 착하답니 다. 본 용병육주비전에 얽힌 대세의 흐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 동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본 마음은 아니랍니다." "그런 것 같군요. 허나 내 제자놈은 멍청할 뿐 아니라 이 사부 알 기를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아주 못된 놈이랍니다." 자접천모의 말에 차손이 돌연 슬픈 듯 처연한 신색을 하며 대꾸했 다. 돌연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야작 율한극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사부! 내가 언제....!" 율한극은 너무도 억울해 자신도 모르게 외치려 했다. 순간 자접천 모가 돌연 무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지 않는가! '저 미친 노파가!' 율한극은 자접천모의 무서운 눈빛에 찔끔해 입을 다물자 자접천모 가 다시 차손을 향해 입을 열었다. "버릇없는 제자놈은 매로 그 버릇을 다스려야 합니다." 차손이 싱글벙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신 훈도방법이십니다." "이해하시는군요." "이해하다 뿐이겠습니까! 저도 매처럼 좋은 훈도방법은 없다는 것 을 뼈저리게 알고 있답니다." 차손과 자접천모의 주고받는 대화에 율한극의 얼굴이 노래졌다. '뭐, 뭐야! 내 나이가 몇인데.... 매, 매로 다스려?' 그는 아예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죽이 맞아버린 차손과 자접천모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장리난전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자, 같이 가면서 이야기나 나누도록 합시다. 아이들의 일은 아이 들에게나 맡겨야지 우리들처럼 늙은 사람들이 일일이 신경써 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이제는 이 늙은이를 폐물취급하고 제멋대로들 행동하니....." 돌연 차손이 고개를 돌려 부릅뜬 눈으로 율한극을 직시했다. "너는 이 노부인의 제자와 함께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반성하고 있거라!" '반성? 내가 뭘했다고?' 율한극이 멍청해졌다. 그 순간 차손과 자접천모는 어느새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장리 난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으....!" 그들의 뒤를 바라보는 율한극은 전신을 흔들며 치를 떨었다. 허나 이 순간, 채봉의 얼굴은 더할나위 없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유빙 역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을 머금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 팔왕예조 제2권 제17장 웃지 않는 소년(少年)! ━━━━━━━━━━━━━━━━━━━━━━━━━━━━━━━━━━━ ① 회랑(廻廊). 회랑은 만승왕의 후예들이 거처하고 있는 금문녹당의 깊숙한 곳으 로 이어져 있었다. 그 위에 유빙과 채봉 단 둘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곳은 본가의 후예가 아니면 그 어느 누구라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에요." "......" 채봉의 나직한 설명에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봉의 설명이 아 니더라도 회랑을 일별한 유빙의 눈에 언뜻 감탄의 빛이 스치고 있 었던 것이다. '구십구 개의 기관(機關)과 각종 기관장치로 제어되어 있는 완벽 한 건축물이다. 힘으로 뚫고 들어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 이다!' 담담한 눈으로 이미 회랑 좌우의 무서운 기관장치들을 꿰뚫어 본 유빙이 문득 입을 열었다. "조부가 암습당한 곳은 어디요?" "바로 이 안이었어요." 유빙의 눈에 다시 이채가 스쳤다. 허나 그것은 번개같은 순간의 일인지라 채봉은 유빙의 눈에서 번뜩이는 이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조사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워낙 은밀해 단 하나의 단서도 찾아내지 못 한 거예요. 소녀의 추측으로는 단지 금문일천사해성의 인물들이 모두 힘을 합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 뿐이라는 결론밖에 얻지 못했어요."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의 눈빛은 이 순간 더욱 가라앉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은 하나의 석실에 당도했다. 입구를 마주보고 있는 벽면 전 체가 하나의 수정벽이었다. 그 수정벽을 통해 멀리 봉린주의 백사 장과 그 건너 망망대해가 내려다 보이고 있었다. 가슴이 탁 트인 망망대해가 바로 눈 앞에 놓여 있는데다 봉린주의 드넓은 해안선(海岸線)이 한눈에 들어와 실로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내려다 보이는 바다 위로는 낙조(落照)가 드리워져 있었고 수 정벽을 통해 비쳐들고 있는 진홍빛 낙조 가운데 한 노인이 거대한 이륜좌거(二輪坐車) 위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깨끗한 백포에 단정히 빗어 넘긴 백발과 무릎까지 늘어져 있는 백 염(白髥)노인이었다. 수정벽을 통해 내려다 보이는 망망대해의 낙조만을 응시하는 노인 의 전신에서는 실로 기이한 정적감이 풍겨 나온다. 헌데 괴이하지 않은가? 백포노인은 채봉과 유빙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고개 한 번 돌 리지 않을 뿐더러 눈빛 또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유빙은 한 눈에 노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느꼈다. 백포노인은 분명 그의 눈 앞에 있건만 살아 있는 생명체라기 보다는 하나의 고목나무같은 느낌만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채봉이 활짝 미소를 머금으며 쪼르르 이륜좌거 위의 노인에 게 줄달음쳤다. "할아버지! 봉아가 없는 동안 심심하셨죠?" 채봉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품 속에서 백색수건을 꺼내 노인 의 이마에 맺혀 있는 땀을 훔쳐냈다. 이어 그녀는 쉬지 않고 노인 을 향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없었느냐고요? 에이.... 참! 봉아의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 "그래도 봉아가 걱정이 된다고요? 에이...., 그것은 할아버지가 봉아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거라고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할아버 지를 대신해 봉아를 지켜줄 사람이 생겼으니 아무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 "그게 누구냐고요?" 쉬지 않고 노인을 향해 혼자 질문을 던지고 다시 대답하던 채봉이 문득 조심스러운 눈으로 유빙을 훔쳐본 후 노인의 귀에 입을 바싹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 사람은.... 음....! 유빙이라는 사람이에요. 천종예가의 후예 이자 백찰무경의 대총사래요." "....!" 백포노인. 그는 일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채봉이 많 은 말을 하고 있건만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으 로 바다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고 손 끝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식물인간(植物人間). 그렇다. 살아 있으되 전신의 기능이 모두 마 비되어 버린 식물인간이었던 것이다. 채봉은 그런 노인을 향해 마치 자신의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하듯 열심히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실로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처절하다고나 할까? '....!' 유빙은 채봉의 이런 태도에 문득 가슴 한곳에서 아련한 통증을 느 꼈다. 그것은 연민(憐憫)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인간애의 발로였다. '으음.... 채봉! 실로 외로운 소녀로구나. 얼마나 외롭고 사랑에 굶주렸으면 저렇듯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조부를 붙잡고.....' 유빙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때, 채봉은 마치 가슴 속의 비밀을 노인에게만 털어 놓는다는 듯 노인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건 할아버지만 알고 계셔야 해요. 일급 비밀이니까요. 사 실.... 저는 그 사람이 첫 눈에.... 마음에 쏙 들었어요." "......"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느냐고요? 음, 우선 잘 생겼고.... 착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아무튼 모두 마음에 들어요." 채봉이 얼굴을 붉히며 속삭인 후 혀를 쏙 내밀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아직 치기를 벗지 못한 일개 소녀의 태도였다. 이미 십육 세에 달한 성숙한 여인이라기 보다는 동심만이 가득해 보이는 그 런 태도인 것이다. "할아버지보다 더 좋으냐고요? 에이, 그것을 부끄럽게 어떻게 말 해요. 아무튼 할아버지도 기쁘죠?" "......" "무척 기쁘다고요? 봉아도 할아버지가 기뻐하실 줄 알았어요. 하 지만 봉아는 절대로 할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 "봉아는 이 세상에서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요. 또 이렇게 할아버 지와 이야기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러니까.... 답답하시더 라도 오래오래 사셔야 돼요. 아주 오래....." 채봉의 끝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하나 가득 이슬이 맺혀 있었다. 허나 그녀 는 자신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노인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듯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때 차갑게 가라앉았던 유빙의 눈에서도 어느새 물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고통이라 할까? 아니면 너무도 처절한 채봉의 태도에 피의 본능만이 야수의 광폭 성과 함께 가슴 깊이 자리하고 있는 유빙의 마음 또한 흔들렸음인 가! 채봉의 이런 태도를 지켜보던 유빙의 가슴이 젖어들고 그의 뇌리 에 아득한 과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어린시 절, 동심 속의 세계였다. ... 내가 태어난 천향화방의 뒷산은 늘 푸른 송림(松林)으로 뒤덮 혀 있고 하나의 호수가 있었지. 나는 어렸을 때 비록 어머니는 없 었지만 늘 짓궂고 쾌활한 소년이었다. ... 훗! 책을 읽으라는 학거비의 성화를 뿌리치고 몰래 도망치기 일쑤였고, 뒷산에 모이는 동네 아이들을 훈련시킨다고 모조리 부 상병(?)으로 만들어 놓곤 부친의 질책이 무서워 학거비의 애원에 도 불구하고 뒷산에 숨어 아버님을 곤혹케 했었지. ... 누구던가? 열여덟 살난 예쁘고 앙증스러운 소녀와 입을 맞춘 소문이 퍼져 근처 어른들이 나만 보면 입가에 실웃음을 머금기도 했지! 허나, 사람들이 따돌리는 문둥병자 소년을 이 년동안이나 몰래 간호하고 치료해 줘 어른들을 감탄시킨 적도 있었지....! 쾌활하고 깜찍했으며 조숙했던 한 소년이 있었다. 어른들의 입가 에 쓴 웃음을 떠오르게 만드는 조숙(早熟)함과, 또 어른들의 눈에 감탄을 떠오르게 하는 용기와 지혜를 지녔고, 그리고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눈빛을 받던 그들의 대장. 그는 세상에서 가장 그의 부친을 좋아하던 소년이기도 했다. 그는 나면서 이미 축복을 받았고, 그리고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신분으로 성장했다. 헌데, 어느날 한순간 소년은 보랏빛 인생을 말살당하고 말았다. 창랑왕이라는 신비인물에게 자신의 우상이었던 부친을 잃은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웃지 않는 소년이 되었다. 바로 유빙이라는 이름을 지닌.... '....!' 유빙은 채봉의 슬픔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지닌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허나 언제까지고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빙은 고개를 흔들며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되셨소?" "금문만승대연이 치뤄진 직후부터라고 했으니 이미 오십여 년째예요." "내가 한 번 진맥(診脈)해 보아도 되겠소?" "....!" 채봉이 눈을 들었다. 일순 그녀의 눈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번뜩 였다. 허나, 그 희망의 빛은 무엇을 떠올린 듯 이내 스러지고 있 었다. 오십여 년간의 수많은 노력으로도 치유시키지 못했었음을 상기한 때문이었다. 유빙은 묵묵히 손을 뻗어 노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잠시 맥을 짚 어본 후 노인의 초점없는 눈을 들여다 보기도 했다. "자폐증(自閉症)이로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유빙의 눈에서 이채가 스며나왔다. "예? 자폐증....?" "그렇소. 이 분은 신체적으로는 무척 건강하오. 오십여 년 전에 엄청난 상처를 입은 흔적이 있기는 하나 그것만으로 이렇게 된 것 이 아니라는 뜻이외다." "그, 그렇다면....?" 채봉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유빙의 음성이 차가와졌다. "이 분은 신체적인 충격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것이오. 해 서 육체가 다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살아 있음을 거부 하는 것이오." "그, 그런 일이....." "아마 너무도 큰 정신적인 충격에 자신도 모르는 잠재의식이 스스 로를 거부하고 있는 듯 하오." 채봉은 유빙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빙이 문득 채봉에게 질문을 던졌다. "헌데 봉매(鳳妹)는 왜 만승왕의 절기를 익히지 않는 것이오?" 채봉이 고개를 저었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그녀는 대답했다. "부친의 실종과 함께 모든 절기가 사라져 버렸어요." '그렇다면 누군가가 만승왕의 절기를 노리고?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만승왕을 소리없이 암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라면 무엇때문에 만승왕의 절기가 필요하겠는가?' 유빙의 뇌리에 일순 하나의 강렬한 의문이 솟구쳤다. 그 의문은 전에 만승왕이었던 노인의 증세를 파악한 그의 뇌리에서 자연스럽 게 결합하며 더욱 깊은 의혹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느끼고 있었다. 이 풀리지 않는 하나의 의문이 곧 빙 산(氷山)처럼 그 돌출부위는 적지만 그 아래에 거대한 흑막(黑幕) 을 내재하고 있음을..... '아무튼 용병육주비전을 얻든가 아니면 제거해야 한다. 금문일천 사해성의 후예들인 용병들이 이대로 천하로 쏟아져 나간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천하는 엄청난 혼란에 뒤덮히게 된다!' 유빙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뇌리에 한 가지 결심이 굳어지고 이 결심으로 인해 용병육주 비전은 무서운 풍운에 휩싸이게 되니.....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의 풍운...., 그 본격적인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② 밤(夜). 어둠이 폐허의 섬 봉린주 위로 나래를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밤의 어둠과 고요에 잠겨들고 있었다. 허나 이 순간, 봉린주의 단 한곳만은 밤을 잊은 채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은하성단(銀河星團).> 용병육주비전 중 귀족난전이라 불리우는 곳. 이 은하성단은 최초 로 귀족사회를 형성한 금문일천사해성의 고대 귀족들의 후예들로 이루어진 비전이었다. 정통적인 귀족용병들의 모임이랄까? 그들은 모든 용병들 중에서 가장 귀족적이고 오만스러우며 독선적인 용병들로 알려져 있었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짧은 초지(草地)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초 지 위에는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온갖 형태의 빠오(=천막)가 장관 을 이루며 엄청난 규모로 서 있었는데..... 그 정중앙에는 방원 오십여 장의 공지(空地)가 형성되어 있고 공 지의 중앙에 거대한 모닥불이 꿈틀거리며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사면에는 탐스러운 초지들....,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천막들과 공지 한가운데의 모닥불. 모닥불의 주위에는 탁자들이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음식들이 정갈하면서 푸짐하게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탁자 주위에는 수 많은 인물들이 각기 술잔을 쥔 채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실로 고요한 가운데 품위가 있었다. 은은한 아악(雅樂)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고취시키고 있고 그 가운 데 더할나위 없이 우아한 풍도의 인물들이 야외연회(野外宴會)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소는 잔잔하고, 오가는 걸음과 담소하는 모습 또한 극히 우아했는데..... 귀족용병(貴族用兵)! 그렇다. 이들은 바로 귀족난전 은하성단의 귀족용병들, 항시 우아 한 귀족적인 생활을 즐기며 사교활동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이 야 외연회는 그들의 일상생활이었다. 헌데 오늘의 야외연회에서는 실로 특이한 인물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완전히 몸에 배어 있는 우아한 태도와 여유 있는 웃음, 그리고 누 대(累代)에 걸친 예술품에 대한 뛰어난 안목과 능수능란한 화술(話術)..... 귀족들의 야외연회에서 오늘 단연코 돋보이고 있는 인물은 바로 야작 율한극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실로 품위 있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기실 그는 지금 최고로 만족해 있는 상태였다. 지난 삼 년간 황폐 하기 이를데 없는 적전마람에서 보낸 우아하지 않은 생활과 차손 에게서 겪은 온갖 수모에서 돌연 자신의 우아한 생활을 되찾은 그 는 실로 만족스럽기 이를데 없었던 것이다. "어떻습니까? 사부, 이곳이야말로 우아하고 귀족적인 인간다운 인 간들이 사는 곳 아닙니까?" 율한극은 한 손에 수정 술잔을 쥐고 느긋하고 우아한 미소를 머금 은 채 얼굴을 굳히고 못마땅해 하고 있는 차손을 돌아보았다. 차손의 얼굴에 심통이 어렸다. "이곳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쓰레기장이고 이곳에 모여 있는 놈 들은 모조리 거만한 벌레들 뿐이다." 야작 율한극의 입가에 우아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마치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바라다 보는 듯한 기이한 눈으로 차손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실테죠. 사부님같은 분에게는 우아하고 귀족적인 것은 어울 리지 않으니까요." "이 쓸모없는 썩은 돼지! 무엇이 어째! 나에게는 우아하고 귀족적 인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차손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변화를 일으켰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귀족용병 중 한 명 이 슬그머니 차손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노인장! 좀 품위 있게 작은 소리로 담소해 주시오." 차손의 눈이 멍청해졌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넌 누군데 감히 이 어르신네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냐?" "....!" 차손의 무지막지한 말투에 우아함을 잃지 않은 채 나직이 질책하 던 귀족용병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허나 그는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은 채 대꾸하고 있었다. "본인은 남방제일귀족의 후예인 백선(白仙) 화가휘(華可輝)라 하오." 머리에서 발끝까지 산뜻한 백의 백포를 두르고 있는 육십대의 백 삼인, 흰 수염이 단정히 손질되어 있는 그는 야작 율한극에 못지 않은 우아한 풍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를 일별한 차손이 코웃음을 쳤다. "남방제일귀족의 후예?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보기에는 한 마리 흰 돼지에 불과하구나." "허허, 노인장께서는 많이 취하셨군요. 아무래도 좀 쉬셔야겠소이다." 백선 화가휘가 혀를 내두르며 손을 저었다. 그는 여전히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우아한 풍도 밑에 감추어진 두 눈 깊숙한 곳에서는 살기에 가까운 노기가 스쳐 가고 있었다. 그 살기를 읽었음인가? 차손이 킥킥거리며 괴소를 터뜨렸다. "쿠ㅋ! 이제야 흰 돼지들이 본색을 드러내는군. 이 쓸모 없는 흰 돼지야! 어서 공격해 보거라. 점잖은 척 하지 말고!" 차손의 입에서 그야말로 신랄한 조롱이 터져 나왔다. 뿐이랴! 그 는 하나 뿐인 외손을 백선 화가휘의 바로 코 앞에서 이리저리 흔 들며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끄응....!" 화가휘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아무리 우아한 품위를 지키려 해도 차손의 태도는 그를 분노케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왜? 두려우냐? 허옇게 질려 가지고 땀이나 흘리는 주제에 무슨 품위를 찾는다고....." "노인장!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화를 내겠소." "킥! 돼지가 화를 내는 것은 내 평생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었 다. 어디 오늘 신기한 구경을 할 것 같군." "이, 이....!" 화가휘의 수염이 곤두섰다. 그야말로 귓구멍에서 연기가 치솟으리 만큼 분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품위를 잃 지 않기 위해 노기를 억누르며 아예 차손을 상대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차손의 빈소매가 다시 그의 눈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놈의 흰 돼지는 진짜 이상한 돼지로군. 얼굴색이 노래졌다 파 래졌다 하니 실로 신기한 돼지란 말이야." "죽엇!" 노기를 억누르고 있던 백선 화가휘의 허리에서 검광(劍光)이 폭발 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위세로써 지켜보던 율한극의 몸은 순식 간에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끄.... 윽!" 허나 찰나, 허리에서 검을 뽑아 차손의 몸을 향해 쳐내던 화가휘 의 눈에 불신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그의 목에서 기이한 음향 이 흘러 나오지 않는가! 아아! 화가휘의 손에 쥐어져 있던 한 자루 장검. 그 장검의 검극 (劍極)은 부드러운 곳에 박혀 있었다. 바로 화가휘 자신의 입 속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짝일 순간의 일로써 그 어느 누구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했다. 어찌보면 화가휘가 너무도 분해 자신의 입에 자신의 검을 들이댄 듯한 광경인 것이다. 우아한 태도로 담소를 나누며 즐기고 있던 야외연회장이 순식간에 정적으로 뒤덮혔다. 이 광경을 대한 모든 귀족용병들의 얼굴이 돌 처럼 굳어져 있었다. "아니.... 사부! 왜 갑자기 그를 죽이는 것입니까?" 야작 율한극이 이 돌연한 사태에 울상을 지었다. 차손이 대수롭지 않은 듯 손을 흔들었다. "심심해서 죽였다. 왜, 불만이냐?" 야작 율한극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어이가 없는 듯 자 신도 모르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니 심심하다고 사람을 죽이면 어떻합니까? 사부 때문에 이 우 아한 분위기가 깨지지 않았습니까!" "우아한 거 좋아하네. 저 흰 돼지들 봐라!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야작 율한극이 울상을 지으며 좌우를 돌아보는 순간 우아한 야외 연회를 즐기던 수십여 명의 귀족용병들이 각기 살기를 머금으며 그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기세였다. 헌데 바로 이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야작 율한극과 차손에게 집중되어 있는 순간 하나의 그림자가 소리없이 그들의 뒤로 통과 해 가고 있지 않은가! 야외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초지의 십여 장 뒤쪽, 그곳에는 거대한 석성(石城)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마치 고대 황조의 신비가 감춰져 있을 듯 웅장한 가운데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석성, 투명한 녹색 유리기와로 지어진 녹색의 성은 바로 귀족난전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은하성단이었는데..... 은하성단의 가장 위에 자리한 성루(城樓)에는 거대한 창 하나만이 밖의 초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게 뚫려 있는 밀실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화복차림의 한 장년인이 예의 창문을 통해 일촉즉 발의 야외연회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사극(邪極)! 너는 그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문득 거대한 창문을 통해 야외연회장의 야작 율한극과 차손을 내 려다 보고 있는 화복장년인의 등 뒤에서 창노하면서도 자애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화복장년인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무서운 자들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외팔이 백포노인은 그 능력을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경지에 이른 것 같습니다." "잘 보았다." 질문을 던졌던 자애스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이어 감탄의 빛이 섞 인 창노한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저 외팔이 백포노인의 능력은 실로 불가사의할 정도이다. 모르기 는 해도 저 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손에서 살아 남을 사람 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화복장년인의 일장 뒤, 밀실의 정중앙에는 옥관(玉冠)을 쓰고 금 룡포(金龍袍)를 걸친 한 청수한 노인이 서 있었다. 불그스레한 동안(童顔)에 타는 듯한 눈빛, 세치 가량이나 늘어져 있는 백미(白眉). 노인의 전신에서는 그야말로 한 마리 학을 대하 는 듯한 청신(淸新)함이 흘러나오고 있어 어찌보면 선계(仙界)의 선인(仙人)을 대하는 듯 했는데..... "저 외팔이 백포노인과 우리 금문일천사해성의 후예들을 그동안 제압해온 역대 만승왕과 비교하면 누가 더....." 화복장년인의 질문은 중도에서 끊기고 말았다. 그의 말이 채 끝나 기도 전에 옥관을 쓰고 있는 금룡포의 노인이 대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히 저 신비 외팔이 노인이 역대 만승왕을 능가할 것이다. " "소손(小孫)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 외팔이 노인이 아 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정도라는 것은....." 옥관을 쓰고 있는 노인의 서슴없는 말에 화복장년인이 고개를 저 었다. 그러자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극! 너는 이 할아비가 과장해서 말한다고 생각하느냐?" "그, 그것은 아니지만....." "사극! 너는 최초로 대륙제일세가(大陸第一世家)의 영화를 이룩한 파촉만가림(巴蜀萬家林)을 세우신 파촉황(巴蜀皇)이 어떤 분이신 지 알고 있느냐?" 옥관 노인의 입에서 느닷없는 질문이 터져나오자 순간 화복장년인 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엄숙해진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파촉왕께서는 동영(東瀛)에 최초로 인자무예(忍者武藝)라는 것을 전파시킨 분이시고 아울러 살수연무술(殺手鍊武術)을 집대성시킨 살수(殺手)의 제황이라 알고 있습니다." 화복장년인의 은은한 자부심과 경건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대 꾸하자 옥관노인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분께서는 명실공히 무림최초의 살수이셨다." "......" "사극." "예" "너는 이 할아비가 이미 그 분의 모든 진전을 이어받았다면 믿을 수 있느냐?" 화복장년인의 눈에 놀람과 기쁨이 회오리쳤다. 불신과 터질 듯한 환희가 엇갈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 잔잔한 질문이 다시 그 의 귀로 흘러들고 있었다. "사극! 너는 이 할아비가 만약 만승왕이 다시 살아돌아온다 해도 이미 그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겠느냐?" 경악에 찬 화복장년인의 눈이 옥관노인에게 돌려졌다. 만승왕이 어떤 존재인가? 지난 일천여 년간 금문일천사해성의 후대들을 비무로 철저히 억눌 러온 것이 역대 만승왕들의 가공스러운 절기가 아닌가! 그런 만승 왕을 자신있게 죽일 수 있다고 옥관노인, 그의 조부가 서슴치 않 고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조부가 결코 허튼 소리를 입에 담을 사람이 아님을..... 화복장년인의 경악에 찬 표정을 바라보며 옥관노인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사극! 이 할아비는 살수다. 정면승부로 이길 수 없는 자라 해도 마음만 먹는다면 능히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조부님께서 혹 전대 만승왕을 암습....?" 화복장년인이 언뜻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린 듯 더듬거리자 옥관노인이 손을 저었다. "녀석! 정정당당히 선언을 한 후에도 죽일 수 있는 상대를 무엇때 문에 구태여 암습을 하겠느냐. 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조부님은 그런 능력을 감추고 계셨습니까?" 화복장년인의 눈에 더할나위 없는 의혹이 솟아났다. 그렇다. 만승왕을 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내 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화복장년인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허나 옥관노인이 얼굴을 굳히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 이유는 바로 두 사람 때문이었다." "두 인물?" "그렇다. 바로 용병육주비전의 여섯 행수 중, 십병태사(十兵太師) 사마천태랑(司馬天太郞)과 반선불(半仙佛) 때문에 나 역시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음이다." "....?" "사마천태랑과 반선불! 그 두 사람은 이 조부와 함께 금문일천사 해성의 당대 후대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다. 능히 만승왕과 비견할 수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허나....." "허나....?" "허나 어쩐 일인지 그들 두 인물은 오십여 년 전에 있던 만승대연 에 스스로 참가하지 않았다." "만약 그 당시 그 두 사람이 만승대연에 참가했더라면 우리의 천 년 한은 그 순간 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참 가하지 않은 것이다. 너는 그들이 무엇 때문에 만승대연에 참가하 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느냐?" 화복장년인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한 사실도 처음 알았거니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진정 짐작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옥관노 인의 눈이 창 밖의 암천으로 돌려지고 그의 입에서 탄식같은 음성 이 흘러나왔다. "사극! 너는 기억해 두어야 한다. 당대의 현 사태가 어쩌면 모두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화복장년인이 흠칫 옥관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옥관노인은 어 느새 담담한 신색으로 돌아와 손을 젓고 있었다. "그만 나가 보아라.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저들 손님 들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충돌해서는 안 되느니라." "알겠습니다. 그럼....." 사극이라 불리운 화복장년인이 조심스럽게 예의 밀실에서 빠져 나갔다. 헌데 순간, 옥관노인이 문득 미소와 함께 입을 열지 않는가! "손님께서는 이제 그만 나오시구료." 찰나 가라앉아 있던 실내의 기(氣)가 미미하게 파동치고 동시에 한 인영이 소리없이 밀실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아하기 이를데 없는 풀잎의 우의(雨衣)를 걸치고 그 허리에는 두 자루 도가 걸려 있다. 미려한 용모와 가라앉은 눈빛. 아! 바로 유빙이 아닌가! 소리없이 밀실에 들어선 유빙의 뇌리에는 이 순간 봉린주의 소천 주 채봉에게서 들은 말이 스쳐가고 있었다. ... 용병육주비전에는 능력을 추측할 수 없는 세 사람이 있어요. 십병태사 사마천태랑이 그중 한 명이고, 그리고 반선불과 귀족난 전의 전대행수인 은현인조(隱賢忍組) 만가령(萬加鈴)이 바로 그들이에요. ...은현인조 만가령! 그는 승부를 논하는 무인이 아니라 오직 삶 과 죽음만을 논하는 지상제일의 암살자(暗殺者)예요. 그의 무서운 점은 그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지닌 바 무예를 드러낸 적이 없다 는 점이에요. '은현인조 만가령! 무서운 심기를 지니고 있는 인물로써 용병육주 비전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굴복시켜야 할 세 명의 최고수 중 한 명이며, 또한 만승왕의 의문의 변사에 가장 많은 의혹을 지니고 있다는 인물이다!' 유빙은 자신의 전면에 서 있는 은현인조 만가령의 고요한 태도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눈 앞의 만가령이라는 인물을 대하는 순간 유빙은 마치 날카롭게 서 있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미세한 세침(細針) 앞에 노 출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만남! 이 만남은 지상최고의 암살자와 선천적 피의 예술사와의 만남이었다. ■ 팔왕예조 제2권 제18장 죽음(死)에의 초대! ━━━━━━━━━━━━━━━━━━━━━━━━━━━━━━━━━━━ ① 지상 제일의 암살자와 지상 최강의 피의 예술사의 만남. 유빙의 전신을 일별한 은현인조 만가령의 눈에 역시 이 순간 은은 한 감탄의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본능적으로 첨예화되고 정제(精製)되어 있는 선천적인 피의 살인술사이다! 천종예가의 후인이 팔왕 중 으뜸이라 불리우 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완벽해! 정말 완벽하다!' 만가령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자신의 눈 앞에 소리없이 나타난 유빙의 모든 것은 그야말로 완벽의 극치를 이루고 있음을 느낀 것이었다. '후후! 한 번도 흥정에 실패한 적이 없는 상평난전의 행수 천박사 책 전희궁이 왜 이 자를 자신있게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 만가령. 그는 유빙을 일별한 순간 무엇인가 자신과의 동질성(同質 惺)을 느끼고 있었다. 암살자와 피의 예술사.... 본능으로 서로를 의식했다고나 할까....? "그대가 소천주 채봉이 선택한 천종예가의 후예 유빙인가?" "만행수께서는 이미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듯 하구료?" 만가령이 천천히 입을 열자 유빙은 그의 질문을 무시한 채 오히려 반문을 던지고 있었다. 만가령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한계를 넘은 인간들은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는 법 이라네. 그래서 내가 그대라면 오늘쯤 나를 찾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훗! 해서 일부러 손자와 이야기를 하며 은연중 모든 일을 내게 들려준 것이었구료?" "그런 것 같네." 유빙의 입가에 문득 미소가 솟아났다. 우호적인 밝은 미소같기도 했고, 또 어찌보면 폭풍전야를 암시하는 듯한 그런 섬뜩한 미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만행수께서는 본인이 무엇때문에 이곳에 왔는지도 이미 알고 있겠구료." "어느 정도는...., 허나 그대가 직접 말하는 것을 듣고 싶네." 만가령의 입가에 역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유빙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나는 용병육주비전을 얻고 싶소이다. 더욱 쉽게 말하면 본인은 용병육주비전이 내게 굴복하기를 원하오." 실로 광오한 말이 아닌가. 허나 그 순간 만가령은 미소를 잃지 않 은 채 반문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겠는가?" 순간 유빙이 단호한 음성으로 내뱉았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제거하는 수밖에....." - 굴복하지 않으면 제거하겠다. 유빙의 광오한 말. 이것은 명예를 목숨보다 중시하는 무인들에게 는 그야말로 모욕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우기 금문일천사해 성처럼 천 년의 한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에게는 그야말로 지독한 모욕인 것이다. 헌데 의외에도 은현인조 만가령은 결코 노기를 드러내지 않고 있 었다. 오히려 유빙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마저 끄덕이고 있지 않은가! "내가 그대에게 굴복한다면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만승왕이 정해 놓은 금제에서 벗어나 저 드넓은 천하를 활보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이오." "훌륭한 선물이군." 만가령이 흡족한 미소와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금문일천사해성의 꿈은 바로 유빙이 말한 금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는데..... 은현인조 만가령이 문득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솔직이 말해 이것은 하나의 거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네. 자네 는 영리하군. 본전의 내막을 알게 되자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 았건만 스스로 행동에 옮기고 있으니 말이네." "......" "기실 우리는 자네가 아니더라도 얼마 후에는 천년금제에서 풀려 나게 되네. 허나 솔직이 개운치 않은 일이지. 우리 스스로의 힘으 로 벗어난 것이 아니기에 사실 우리들 역시 기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네." "천 년의 한...., 그 한은 질기고 끈질긴 것이었네. 우리의 천 년 한은 만승왕을 당당히 꺾고 금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지금처럼 석연치 않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네." "알고 있습니다." "좋네. 그렇다면 우리가 자네에게 은연중 굴복하고 싶어하는 이유도 아는가?" "그렇소. 지금 이런 상태에서 금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병육주비 전의 원로들은 원치 않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소이다. 금문일천사 해성의 후대들이 서로 반목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지만 무엇 보다도 천 년의 자존심 때문일 것이오." "후후.... 우리들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군." "......" "그렇다네. 우리 원로들은 자네가 채봉의 청을 수락하고 만승왕의 위를 계승해 주기를 바라네. 그리고 만승왕의 절기를 익히면 더욱 좋겠지. 연후...., 우리는 만승대연을 개최해 자네와 비무를 할 것이네." "....!" "그 비무에서 우리는 설혹 자네를 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더 라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네. 자네는 만승왕의 자격으로 초대 만승왕이 내린 금제를 파기하고 우리를 강호에 출도시킬 것이고 그 후 우리는 다시 그대에게 비무를 청하고 싶네." 만가령의 담담한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찌보면 처절 하기까지 한 금문일천사해성의 천 년 한이 응축되어 있는 작은 음 모이기도 했다. 먼저 외부인인 유빙을 만승왕의 위에 계승케 한다. 그후 그들은 그에게 만승대연에서 굴복한 후 강호로 통일된 세력으로 나가게 될 것이고 그리고 다시 유빙에게 도전을 해 유빙을 꺾은 후 천 년 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처럼 금문일천사해성의 후대들이 서로 견제하고 반목 하는 상태에서 강호에 나가는 것을 원치 않고 원로들이 하나의 통 일된 세력으로 강호로 진출하는 방법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는 계 획이었다. 허나 유빙은 용병육주비전의 현 상황을 알게 되자 단숨에 원로들 의 그같은 마음을 읽어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이용하고 있었으니..... 만가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는 그대의 뜻에 따르겠네. 자네는 본전의 최고고수 세 명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굴복시키며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고 있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 노부는 이미 굴복했으니....." "훗!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를 자인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네. 허나, 나는 살수일세. 살수란 완벽한 승산 이 서지 않으면 결코 승부를 서두르지 않는 법이지....." "....!" "나는 그대를 완벽하게 알 때까지 그대와 나와의 비무를 보류하겠 네. 한 마디로 가장 좋은 조건에서 그대와 한 번쯤 겨룰 날이 있을 것이네." 무서운 말이 아닌가! 완벽한 승산이 서지 않는 한 승부를 서두르지 않겠다. 이것은 실 로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인 것이다. "후후, 결국 나는 용병육주비전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얻게 되었군요." 유빙이 나직이 미소했다. 비웃음이 담긴 차가운 미소였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지!" "....!" "자네가 상대해야 할 반선불과 십병태사 사마천태랑 역시 노부처 럼 융통성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노부 역시 능력을 시험해 보지 않은 채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네." "......" "그대가 상대해야 할 반선불과 사마천태랑은 결코 만승왕에 못지 않은 인물들이네. 그대가 만약 그들을 꺾을 수 없다면 차라리 내 가 그대를 처치하는 것이 나을 것이네." "호.... 무슨 안배가 있는 듯 하군요?" "그렇다네. 노부 대신 그대를 시험해 줄 인물들이 있지." 만가령은 말과 몸을 돌렸다. 유빙은 내심 일말의 의혹이 솟아올랐으나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귀족난전의 한 구석에서 자리해 있는 거대한 천막은 무려 이십여 장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만가령이 유빙을 인도하며 도착한 곳은 바로 이 거대한 천막이었다. 헌데 그곳에는 실로 기이한 인물들이 침묵을 지킨 채 자리해 있지 않은가! 빠오의 중앙에 놓여 있는 거대한 탁자의 한쪽으로는 얼굴에 철가 면(鐵假面)을 쓰고 있는 열세 명의 기괴한 인물들이 각기 침묵을 유지한 채 눈을 내리감고 있었는데 거친 무명마의에 붉은 방갓을 쓰고 있는 그들의 행색은 실로 기이했다. 얼굴 또한 험상궂기 이를데 없는 철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어 나이 나 성별 따위를 아예 구분할 수 없었고 드러난 부위라고는 그들 의 눈뿐이었으나 그 눈마저 지금 이 순간 굳게 감겨 있어 실로 공 포스럽기까지 한 분위기가 그들 주위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헌데 그들 십삼 인의 괴인들의 맞은편에 또한 기이한 행색의 인물 들이 자리해 있었다. 거무틱틱한 철로 만들어진 듯한 세 대의 철가마를 메고 있는 흑포 인들. 거대한 세대 흑철교(黑鐵轎)를 메고 있는 그들의 전신은 그 야말로 백색(白色) 일색이었다. 거대한 백지(白紙)에 두 개의 점을 찍어 놓은 듯 두 눈만을 내놓 은 채 온통 백색의 천으로 감싸여 있는 백의인들은 천막 안이건만 메고 있는 세대의 흑철교를 내려놓지 않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 뿐이랴! 거대한 탁자의 한쪽 면(面)에 또한 그들 두 부류의 괴인 물들 못지 않은 인물이 서로 모르는 듯 침묵을 지킨 채 정좌해 있 지 않은가! 금빛 갑주에 거대한 장창(長槍)을 쥐고 있는 오순 가량의 중년거 한이 바로 그 인물이었다. 중년거한은 이글거리는 신광과 당당한 체구를 지니고 있어 그야말 로 백만대군을 호령하는 대장군(大將軍)의 신위였다. 이때, 천막의 휘장이 젖혀지며 만가령이 들어서고 그 뒤에 유빙이 따르고 있었다. 만가령의 뒤에 유빙이 들어서자 흑철교의 백포인 들이나 금빛 갑주 사내의 눈에 기광이 솟아났다. 내리감고 있던 열세 명 철가면의 괴인물들이 눈을 뜬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고, 순간 만가령이 미소와 함께 담담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먼저 이들을 소개하겠네." 만가령은 유빙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졌다. "아마 이 철가면을 쓰고 있는 분들은 그대 역시 이미 안면이 있을 것이네. 바로 제벌의 살인집행기관인 십만종단천인막의 막주 당결 이 자랑하는 그의 십삼 인(十三人)의 아들들이니까!" - 십만종단천인막의 막주 당결의 자랑 십삼 인의 아들들!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모습을 대한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그들의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치자 만가령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후후.... 그대는 아마 의아스러울 것이네. 이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 "이들은 바로 자네와 같은 목적을 지니고 귀족난전의 행수인 나를 만나러온 사람들일세. 허나 자네보다 통이 작아 겨우 본 귀족난전 을 포섭키 위해 온 것일세. 본 용병육주비전이 항차 강호에 나가 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 그중 본 귀족난전만이라도 자신들 편으로 삼으려는 것이지." "......" "허나 이들은 내가 거절할 경우 목숨을 내놓아야 될 것이라고 은 근히 시위하고 있다네." 만가령의 말투는 담담하기 이를데 없었다. 허나 그 내용은 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살막십삼천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는 것인 지라 실로 도발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것 같군요. 겁주려는 의도가 아니면 저렇듯 십만종단천인막 최고의 열세 명 고수가 모조리 출동할 리는 없겠지요." <살막십삼천(殺幕十三天).>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곧 죽음뿐이다. 지옥의 아들들이라 불리우는 십만종단천인막 최강의 고수들. 이들은 제벌내에서 가장 골치아픈 존재에 대한 살인청부만을 도맡 아 처리하는 최고의 살수들이었다. 평상시에는 막주 당결의 그림자가 되어 그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 는 것이 바로 이들일진데 이들 십삼 인 모두가 나타났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가령의 말에 살막십삼천의 눈에 일시 당혹과 노기가 스쳤다. 허나 만가령은 그들의 눈빛을 무시한 채 다시 흑철교를 메고 있는 백포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이 분들 역시 나를 만나러 온 분들일세. 아니 정확히 말하 면 귀족난전의 행수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지. 바로 법밀사의 총 율사인 잠린왕자가 멀리서 초대해온 분들이라네." "법밀사의 총율사 잠린왕자 주문빈이?" "그렇다네. 이들은 바로 동영(東瀛)을 어둠 속에서 지배하는 신궁 국원(神宮菊園)의 고수들이네." 세 개의 흑철교, 검은 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흑철교의 표면에는 분홍빛의 앵화(櫻花)가 정교히 수놓여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 영 신궁국원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으로써 밤의 군대(軍隊)라 일 컬어지는 한 가공할 세력이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있음을 의미하 는 것이었다.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검은 가마 앵화철교(櫻花鐵轎)에 타고 계신 세 분은 황실에서 특 별히 천자의 경호를 위해 동영에서 모셔온 특급인자(特級忍者)들 이나 어쩐 일인지 잠린왕자 주문빈의 명을 받고 본 용병육주비전 중 귀족난전을 접수키 위해 온 것일세." "호.... 이들 역시 표면적으로는 협상을 위해 온 것이나 그 내면 에는 위협의 뜻을 갖고 있군요." 유빙이 차갑게 웃었다. 백포인들의 눈에 미미한 당황의 빛이 스쳤다. '과연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은 당금 무림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군!' 유빙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자신들만이 독자적으로 귀족난전의 만행수를 찾아왔으리라 알고 있었던 삼파(三派)의 인물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자 내 심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태가 기이하게 돌아가자 더욱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만가령이 다시 홀로 앉아 있는 금빛 갑주의 중년거한을 응시했다. "저 분은 역시 본인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네. 물론 저 분 또한 금융대인이 자랑하는 금융무상단(金融武商團)을 이끌어 왔으니만 큼 그 정확한 의도는 본전을 포섭치 못하면 제거하려는 것이겠지." "훗, 귀족난전은 꼼짝없이 세 조각으로 분해되어야겠군요." 유빙의 눈과 만가령의 눈이 마주치며 미소했다. 순간 금빛 갑주를 걸친 중년거한의 얼굴에 역시 당황이 스쳤다. 만가령이 탄식처럼 말을 이었다. "헌데 자네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이미 자네에게 굴복해 본 귀족난전의 모든 것을 넘기려 하고 있으나 본전을 원하는 사람들 이 이렇게 많으니 말일세." "후후.... 저는 귀족난전뿐만 아니라 용병육주비전 전체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어찌 하겠는가?" 만가령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솟아나고 유빙 역시 점차 차가운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훗! 만행수를 대신해 저를 시험해 볼 인물들이 있다더니 바로 그 뜻이었군요." 만가령, 그는 자신이 직접 상대하지 않고 이렇듯 귀족난전을 요구 하기 위해 온 가공할 세력들과 유빙을 충돌시킴으로해서 유빙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만가령의 이 시험방법이야말로 가공 할 함정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 십만종단천인막 최고의 고수들, 단결의 십삼 인의 아들들! - 동영의 어둠을 지배하는 신궁국원의 특급인자. - 금융대인의 금융무상단! 그 어느 세력 하나 평범한 세력은 없었다. 금융대인의 금융무상단만 하더라도 중원의 백금전가와 맞서 변황 상권의 요체인 천산남북로(天山南北路)를 독점하기 위해 조직된 황금의 악마들이 아니던가! 금융무상단은 금융대인이 자신의 상권 을 보호하기 위해 그야말로 막대한 황금을 쏟아부어 탄생시킨 초 강세력인 것이다. 한편 유빙과 만가령이 주고받는 대화가 점차 기이하게 돌아가자 살막십삼천의 인물들과 신궁국원의 특급인자들 그리고 중년거한의 눈에 당황과 노기가 떠올랐다. 멍청히 앉아 있는 짧은 순간 그들은 만가령의 혓바닥 하나에 무참 하게 농락당하고 만 것이었다. 헌데 유빙 또한 태연히 만가령의 태도에 장단을 맞추고 있어 그들의 분노는 더욱 컸다. 만가령이 다시 유빙을 향해 입을 열었다. "후후.... 천종예가의 후대이자 팔왕 중의 일인인 그대를 시험해 보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훗! 만행수의 호의에 감사드리오." 유빙의 얼굴이 하나의 가면처럼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험이라고는 하지만 그야말로 완벽한 죽음의 함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공스러운 상황이었다. "천종예가의 후대?" "그, 그렇다면 그대가 바로 백찰무경의 대총사?" 만가령의 입에서 유빙의 정체가 밝혀지자 일순 모두의 눈에 긴장 이 어렸다. 하지만 유빙의 존재를 두려워하거나 경악해 하고 있는 인물은 또한 아무도 없었다. "호.... 이곳에서 천종예가의 후대를 만나다니 잘됐군. 그대를 죽 임으로써 만행수에게 우리의 능력을 보여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살막십삼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금빛 갑주를 걸친 중년거한 역시 몸을 일으키며 유빙에게 살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일단 유빙을 제거하고 보자는 의도인 듯했다. 촤- 아악! 헌데 그가 막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가 앉아 있던 뒤쪽의 천막이 그대로 찢어져 나가며 한떼의 인마가 천천히 밀려들어 오고 있지 않은가! 거대한 금빛 오륜철기(五輪鐵旗)가 마상에 꽂혀 있고 제각기 금빛 갑주에 장창을 들고 있다. 그 수효는 대략 오십여 기, 잔잔히 가 라앉아 있는 그들의 태도는 어느 누구 하나 평범한 인물이 없음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바로 금융무상단이라 불리우는 가공할 인물들이었다. 이 순간 세 대의 앵화철교를 메고 있는 백포인들 역시 긴장의 빛 으로 조금씩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스르르릉....! 유빙이 천천히 한걸음 나서며 오척에 달하는 장도(長刀)를 뽑아들 었다. 반월형으로 휘어진 새하얀 도신(刀身) 가운데 하나의 만월이 떠올 라 있는 장도, 예의 장도가 뽑혀지자 유빙의 등 뒤쪽에서 돌연 하 나의 거대한 만월이 솟아오른 듯한 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스릉! 다시 한 자 길이의 소도(小刀)가 검집을 벗어나며 무서운 한기(寒 氣)와 사악한 기운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한 자루의 장도와 소도, 그것은 바로 천종예가의 시조 백사 사형 예조 유군휘의 독문병기 쌍월(雙鉞)이었다. 우수에는 장도 그리고 좌수에는 반월형으로 휘어진 소도를 쥔 채 우뚝 서 있는 유빙의 모습은 실로 환상같기만 했다. 아름다움과 사이함, 고독함, 무서운 공포, 이 모든 단어가 그를 대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대하는 이의 뇌리 속에 떠오르고 있었 던 것이다. ② 유빙의 내부에서는 서서히 기이한 힘이 들끓기 시작했다. 서서히 들끓는 힘의 응집, 그것은 그 자신마저 폭발시켜 버릴 듯 강렬한 힘의 집약이었다. 바로 파괴와 피의 본능...., 잃어버린 피의 향 기를 그리는 선천적 야수의 본능이었다. 천종예가의 선대들이 그 자신 스스로도 조절할 수 없어 두려워하 던 죽음의 파괴력, 사형종혈의 무서운 피의 예술성, 그 가공스러 운 힘이 격렬히 몸부림치며 유빙의 내부에서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밀려오는 해일을 막을 수 없듯이 그 힘을 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 그 미증유의 파괴본능 을 폭발시킬 대상을 찾는 일뿐이었다. 장내에는 은은히 기이한 공포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빙의 체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무서운 기질에 전염된 때문이었다. '음....!' '숨, 숨이 막힌다!' 살막십삼천의 눈에 긴장이 어렸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련가! 그들은 서로 눈을 주고 받은 후 유빙의 전신에서 점차 강렬해지고 있는 죽음의 향기에서 벗어나고자 오히려 먼저 유빙을 향해 다가 들기 시작했다. 처.... 벅! 처벅! 십삼 인의 살인자들.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사전에 약속해 놓은 듯 일치했다. 마치 하나의 몸체가 움직이듯 그렇게 호흡조차 일치 된 채 살기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훗!" 유빙의 입가에 실날같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뇌 리에서는 하나의 뚜렷한 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살 막십삼천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는 광경, 선홍색의 선혈(鮮 血)로 채색된 붉은 영상이었다. 찰나, 살막십삼천이 일제히 머리 위에 쓰고 있던 방갓을 벗어들며 유빙을 향해 쳐냈다. 순식간에 열세 개의 붉은 방갓이 허공에 현란한 궤적(軌跡)을 그 리며 무서운 죽음의 기병이 되어 사면팔방에서 유빙의 전신으로 쇄도해 들었다. 뿐이랴! 팟! 눈을 현혹시키는 열세 가닥의 홍광(紅光)을 그림자처럼 뒤따르며 살막십삼천의 신형이 유빙을 향해 덮쳐 들고 있었다. 스- 슷! 유빙의 우수가 그 순간 열 세 가닥의 홍광 사이로 움직이고, 동시 에 그의 우수에 쥐어져 있던 쌍월 중 장도가 열세 개의 방갓을 꿰 뚫으며 뻗어 나갔다. 팍! 파파팍! 일순 열세 개의 방갓을 꼬치 꿰듯 꿰뚫은 장도는 천장을 향해 박 혀가고 동시에 유빙의 전신이 기이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 윽! 슷! 목은 마치 건성으로 달린 것처럼 좌우로 덜렁덜렁 돌려지며 움직 이고, 그의 팔과 두 다리, 그리고 심지어 긴 흑발조차 일정하지 않은 형태로 전신이 따로따로 움직이며 기묘하게 열세 명의 살인 자들 사이로 파고들지 않는가! - 살인팔비전조(殺人八臂戰操)! 그렇다. 인체의 여덟 부분인 두 팔, 두 다리, 두 무릎 그리고 두 손을 이용하여 상대를 처참하게 살상시키는 초령왕 여율령의 악마 의 무공이 일천삼백 년만에 유빙에 의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머리는 머리대로 기이하게 덜렁거리며 움직이고, 팔과 다리는 또 한 팔과 다리대로 그렇게 유빙의 전신은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 윽! 스스슷- ! 그의 두 발 또한 마치 아무런 형식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술취한 사람의 그것인 양 따로 움직이고 있었으나 기묘하게도 그의 옷자 락 하나 건드리는 인물이 없었으니..... 카카카- 카앙! 전신에서 가공할 사기(邪氣)가 회오리쳐 나오고 머리털 하나마저 제각기 움직이며 각기 무서운 병장기가 되어 살막십삼천을 몰아쳐 간다. 아아! 이것은 곧 피의 향기를 떠올리며 희열에 몸을 떨던 초령왕 여율령의 악마성이 담긴 죽음의 동작과 선천적 살인술사의 명료한 살인의지(殺人意志)가 한데 어우러진 죽음의 춤이 아니겠는가! "십지사아기- !" 문득 유빙의 입에서 나직한 호통과 함께 그의 열 손가락이 허공을 찢었다. "크- 악" 살막십삼천 중 한 명의 전신에 악마의 손톱자국같은 열 줄기의 깊 은 상흔이 생겨남과 동시에 짙은 피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실로 처참한 광경, 마치 야수에 찢긴 듯한 엄청난 광경이었다. 허나 그 순간 유빙의 신형은 이미 반대 방향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살인철각" 퍽! 와- 직! "크윽....!" 또 한 명의 살인자가 지면에 나뒹굴었다. 그 순간 처절한 비명성 은 또 다시 반대 방향에서 터져 나왔다. 유빙의 신형은 실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끊임없이 번뜩이 며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각기 상대를 억압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으....!" "이, 이럴 수가....!" 순식간에 두 명이 너무도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가자 중인들의 눈 에 은은한 공포가 어렸다. 유빙의 전신은 더욱 격렬히 풍차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비봉풍란....!" 와득! "끅!" 유빙의 두 팔은 그대로 하나의 철봉 풍차처럼 회전했고, 정신없이 몰아치고 있는 그의 전신은 그야말로 번개가 번뜩이듯 무서운 속 도로 순식간에 살막십삼천의 전신에 작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세 명의 살인자가 그야말로 너무도 끔찍스러운 형 태로 지면을 구르기 시작한 것은 실로 눈 한 번 깜짝할 순간이었다. 설명은 길다. 허나 살막십삼천이 방갓을 유빙에게 쳐내고 다음 순간 유빙이 살 인팔비전조로 그들을 공격한 후 다시 우뚝 몸을 멈춰 세우기까지 소비된 시각은 그야말로 촌각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인가 전쟁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듯한 느낌 후에 중인 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살막십삼천의 부서지고 찢기운 시신 들뿐이었다. 헌데...., 그들의 죽어있는 지금의 모습이 바로 유빙이 공격하기 전 뇌리에 떠올린 죽음의 영상과 일치하고 있었음을 뉘라서 짐작 이나 할 수 있으랴! "밀, 밀어 붙여라!" 짧은 순간 죽음의 공포가 장내를 휘어감았다. 공포에 떨리는 음성 이 일순 장내의 정적을 밀어냈다. 금융대인의 금융무상단을 대표 하고 있던 중년거한이 공포에 억눌려 자신도 모르게 외친 것이었다. 두두두두- ! 두두두! 그러자 멍청히 공포에 질려있던 금융무상단의 오십 여 기마대가 자신도 모르게 유빙을 향해 밀려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유빙의 신위에 발작적으로 취해진 공격이었다. 두두두두- ! 히히힝- ! 거대한 빠오의 천막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오십여 기의 인마 가 폭풍처럼 유빙의 한 몸을 향해 밀어닥쳤다. 유빙의 신형이 환상처럼 천막의 천장에 붙었다 떨어지고 다음 순 간 그는 천장에 박혀있던 쌍월의 장도를 다시 우수에 쥔 채 허공 을 내리 그었다. "크아아악!" 히히힝! 머리 위쪽으로부터 허공에 한 바퀴의 흰선이 그어지며 환상처럼 하나의 원이 형성되고, 그 원이 형성하는 선(線)이 지나가는 곳에 위치한 모든 것이 베어졌다. 우르르....! 털썩! 장도의 검날이 이루고 있는 궤적 안에 걸려든 모든 것은 말이고, 병기이고 모조리 파괴되며 순식간에 십여 기의 인마가 그대로 무 너져 내린 것이었다. 찰나, 유빙의 신형은 쌍도를 나눠진 채 다시 미끄러지듯 오히려 기마대의 사이로 뛰어들며 또 다시 하나의 원을 그려내고 있었다. - 원월도법(圓月刀法)!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의 악마의 도법이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원이 그려지는 동안 일천의 초식이 마무리지어진다는 죽음 의 도법 원월도법! 이 땅에 역사가 만들어진 후 한 인간이 최초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신화를 지니고 있는 백사 사형예조 유 군휘의 무공이었다. 번- 쩍! 무서운 은광(銀光)이 사면으로 뻗어 나갔다. 파팟! 파파파- 팍! "와- 왁!" "끅!" 처절한 비명성이 울려 퍼지고 동시에 베어진 병장기들이 허공에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방원 이십여 장 크기의 천막 안에 죽음의 대혼란이 펼쳐진 것이었다. 놀란 말들이 말발굽을 치켜들고 멈추려 했으나 말과 사람이 함께 피를 뿌리며 한 덩어리가 되어 지면을 굴렀다. 한쪽에서 이 엄청난 광경을 대하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서 있던 백포노인들이 돌연 세 대의 앵화철교를 그대로 멘 채 소 리없이 격전장으로 뛰어 들었다. 쉬- 이익! 다음 순간 그들의 손에서 기이하게 생긴 은사슬들이 수천 가닥으 로 나눠지며 유빙의 몸으로 뻗어갔다. 앙증스러운 형태의 은빛 사슬 끝에 하나의 은경(銀磬)이 매달린 기이한 병기였다. 얇고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은사슬들은 유빙의 몸을 그물처럼 뒤집어 씌우고 있었고 그 끝에 매달린 은경에서는 기이한 홍광(紅光)이 끊임없이 일렁이며 유빙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훗!" 유빙의 입에서 다시 기오한 미소가 번져 나오며 그의 손에 하나의 기이한 금선(金扇)이 쥐어졌다. 금광이 영롱한 금빛 부채, 그것은 바로 초령왕 여율령의 사망도첩이 하나의 금선을 이루고 있는 형태였다. 허나, 다음 순간 예의 금선은 와르르 형태를 무너뜨리며 그 중 한 개의 금척이 허공을 타고 흘러 나왔다. 사르르륵....! "천홍사영비 제일초식, 화일락 가인루- ! " 사-악! 섬칫한 절단음이 미처 유빙의 대갈성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들려왔다. 어느새 백포인 중 한 명의 목에 홍선(紅線)이 그어졌다. .... 한 개 꽃잎이 떨어짐은 미인의 눈물. ㅊ- ! 두 개의 금척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크- 악!" "욱!" 예의 금척들은 두 명 백포인의 허리를 소리없이 통과해 다시 유빙 의 손으로 회수되고 그제야 그들의 허리에서 피가 번지고 있었다. "쌍편비 사성고- !" 어느새 유빙은 두 개 금척을 회수하며 담담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 두 개의 꽃잎이 허공을 가르매 죽음의 비명이 허공을 떠돈다. 털썩....! 세 대의 앵화철교를 메고 있던 백포인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 자 앵화철교가 지면으로 쓰러지며 부서졌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세 대의 앵화철교가 산산조각나며 엄청난 파편을 사면으로 폭사시 키지 않는가! 그 파편 속에서 세 개의 그림자가 번개처럼 유빙을 향해 폭사해 들었다. 동영의 밤을 지배하고 있다는 신궁국원의 특급인자들, 그 가공할 신비의 인물들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채 유빙을 공격해 들고 있는 것이었다. 허나, 유빙은 마치 앵화철교가 저절로 부서지는 순간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덮쳐드는 그들을 향해 손을 쳐내고 있었다. 쐐애애액! 그의 손에서 수십 여 가닥의 금광이 폭발하고 마흔아홉 개의 금척 들이 일순 하나의 금빛 해일이 되어 세 가닥의 그림자를 향해 뻗 어 나갔다. 이렇게 되자 신궁국원의 특급인자들은 오히려 유빙의 공세 속으로 뛰어든 상황이 되고 말았다. 촤- 아악! 하나의 금빛 해일이 수평선 위를 치달리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금빛 해일이 계속해서 밀려나간다. 마흔아홉 개의 금척들은 끝없 이 밀려 나가며 허공을 물샐틈 하나 없이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크-윽!" "이, 이럴 수가!" 일순 허공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금빛 파도에 의해 첩첩이 베어지 고 그 금광의 해일 속에서 불신과 경악이 어우러진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금빛 해일의 파편이 폭풍처럼 그들의 몸을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그것도 한 사람에게 마흔아홉번씩의 가공할 금빛 살인 광선(殺人光線)이..... "......" "....!" 은현인조 만가령의 눈이 부릅떠졌다. 유빙의 엄청난 무위에 그저 망연해진 것이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신궁국원의 세 명 특급인자들을 난도질한 금 빛 광선들이 허공에서 돌연 하나로 합쳐지는가 싶은 순간 마치 기 나긴 하나의 띠처럼 연결되며 순식간에 그의 목줄기로 쏘아져 오 지 않는가! 촤르르.... 륵! 촤악! 마흔아홉 개의 금척이 하나로 이어진 제일 긴 면도(緬刀). 예의 면도는 마치 길이가 사 장여에 달하는 거대한 은사 한 마리가 허 공을 휘어 감은 채 이리저리 몸을 틀며 미끄러져 오는 듯했다. 눈으로 보고도 피할 수 없었고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듯한 가 공할 위력이었다. 은현인조 만가령의 전신이 굳어졌다. 막을 엄두도 피할 생각도 언뜻 뇌리에 떠오르기도 전 지상에서 가 장 긴 금도(金刀)가 어느새 그의 단정히 손질된 백염을 가르고 다 시 그의 목줄기를 스쳐지나가며 유빙의 품으로 회수되고 있지 않은가! 촤르륵! 촤악! 눈 하나 깜짝할 순간에 유빙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 다. 그 무서운 금색의 죽음을 연출해내던 기병 사망도첩이 어느새 그의 품안에 갈무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와 죽음의 향기.... 그리고 공포만이 어우러져 있는 천막 안에 유빙의 음성이 조용히 번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나를 시험하는 것이오." "....!" 은현인조 만가령은 등에 한 줄기 식은 땀을 흘린 채 망연히 유빙 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시험하는 것은 그대의 자유이나 한 가지만 명심해 두시오. 다음에 나를 시험할 때는 그대의 수염이 아니라 목이 베어진다는 사실을....." "......" "그리고 나는 오늘중으로 반선불과 십병태사 사마천태랑이라는 인 물에게도 굴복받을 것이고, 만행수는 그들을 내가 굴복시켰다는 전제하에 용병육주비전의 모든 용병들을 오늘밤 낭리낭전의 백사 장으로 모이도록 해주시오." "......" "그곳에서 나는 스스로 굴복하지 않는 용병들의 도전을 하나하나 받아 줄 것이오." 슷! 유빙의 낭랑한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마치 하나의 신기루처럼 잔상(殘像)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제야 만가령이 천천히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음....! 아마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대를 시험해 보거나 도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일세." 만가령의 음성은 죽음만이 남아있는 천막 안에 공허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허나 언젠가 그대를 시험할 날이 있을 것이네. 어제의 강자가 오 늘의 강자일 수 없고, 오늘의 약자가 내일의 강자일 수 있을 것이 네. 훗!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살수의 특기가 아니겠는가." 은현인조 만가령, 중원 최초의 살수라는 파촉황의 후대이자 지상 제일의 암살자. 허나 어쩐지 그의 음성은 공허하기만 했다. 난세를 주도해 가는 팔왕 중 한 명인 유빙은 그의 계획대로 용병 육주비전을 취한다. 허나 그것은 만승왕의 음모에 대한 안배였음이 밝혀지고..... 중원을 휘감는 제이차(第二次) 팔왕(八王)의 난(亂)은 만승왕의 새로운 등장과 잠천의 살인혈황 적리운의 중원귀환으로 더욱 얽혀 들기 시작하는데..... ■ 팔왕예조 제2권 제19장 죽음(死)의 상인(商人) ━━━━━━━━━━━━━━━━━━━━━━━━━━━━━━━━━━━ ① <십병태사 사마천태랑.> 금문일천사해성이 탄생된 이래 고금을 통틀어 단연코 최강의 무인 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 열 가지의 기병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고 무인의 꿈인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신체를 이룩했으며 이미 역대 만승왕을 능가하는 절대의 경지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허나 기실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모습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인물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는 신비에 가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다른 행수들과 달리 두 개 비전(秘廛)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항시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무공연마에만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힘이 곧 법이라는 패도적이고 도전적인 철인용병들의 단체인 철혈 난전(鐵血亂廛)과 낭인용병들의 단체 낭리난전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는 용병육주비전 최강의 인물, 그는 암석군(岩石群)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봉린주의 북단(北端)에 위치한 한 채의 철각(鐵閣)을 그 거처로 삼고 있었다. "으으음....!" 가느다란 여인의 비음(鼻音). 거대한 태사청에서 절정(絶頂)에 들뜬 여인의 신음성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누워도 될만큼 거대한 태사의는 암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태 사의 위에는 일남일녀가 서로 마주보는 자세로 밀착되어 열락의 세계를 더듬고 있었다. 희미한 잔광(殘光) 아래 새하얀 여인의 나신은 한 마리 뱀처럼 전 신을 경련시키고 있고 그에 반해 서로 안듯이 기이한 자세로 태사 의 위에 앉아 있는 사내의 눈은 물처럼 차갑기만 했다. 가냘픈 여인의 허리를 움켜쥐고 있는 손에는 굵은 매듭이 맺혀있 고 간간이 드러나는 상체는 돌처럼 억세 보이는 가운데 바둑무늬 처럼 무수한 상흔들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땀이 물처럼 흐르고 후덥지근한 열기가 실내를 휘어 감고 있었는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인의 가녀린 교구가 경련을 일으킨 후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내의 거친 손이 여인을 밀어냈다. 흡사 수백여 마리의 구렁이가 뒤엉켜 있는 듯한 상흔투성이의 건 장한 상체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위에 바위로 빚어놓은 듯한 각진 턱과 얼굴이 확연히 떠올랐다. 사자코에 두터운 입술, 산발되어 있는 반백의 머리, 그의 용모는 참으로 신비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더할나위 없이 강인한 느낌을 줌과 동시에 고매한 수양을 쌓은 대 학자에게서나 느껴질 어떤 초연함같은 것이 배어있어 도무지 그의 존재가 확연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뿐이랴! 그의 얼굴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세 개의 상흔이 길게 그 어져 있는데다 아무리 보아도 부서진 암석조각을 연상케 하는 얼 굴이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주 보기도 두려운 무서운 위압감..... 누구인가? 그가 과연 누구이기에 이토록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단 말인가? <십병태사 사마천태랑.> 그렇다! 이제 마악 여인과의 정사를 끝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호흡 한점 흐 트러짐이 없는 장년인, 그는 바로 오십여 평생을 적자생존이라는 철혈의 율법을 스스로 세우고 그 길을 걸어온 패도의 철인 사마천 태랑이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릴 일이 있거나 어떤 격렬한 수련이 있기 직전 여인과 정사(情事)를 치룬다는 괴벽을 지닌 인물이 바로 사마천태 랑인 것이다. 체내(體內)의 한 방울 정기(精氣)까지 격렬하게 배출시켜야만 참 다운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마천태랑. 그래서일까? 정사를 끝낸 그의 두 눈은 이 순간 무섭게 불타고 있었다. 이때 언제부터인가 예의 태사청의 구석에 어둠과 동화(同和)된 듯 조용히 서 있던 이 인(二人)이 조용히 사마천태랑에게 다가들었다. 화려한 금빛 구룡포를 걸친 육순노인과 또 한 인물, 화려하기 이 를데 없는 구룡포를 걸친 육순노인의 기태는 범상치 않았다. 어딘가 자색(紫色)을 띄우고 있는 피부이다. 그러나 그 피부는 깨 끗하기 이를데 없는데다 은은히 자광을 머금고 있어 더할 나위 없 이 신비스럽지 않은가. 네 치 길이에서 깨끗이 다듬어져 있는 백염(白髥), 그리고 웃음을 머금고 있는 듯한 눈빛. 육순노인은 사마천태랑이 아직도 나신임 을 개의치 않은 채 포권했다. "노부는 모문용(謨文龍)이외다." <금융대인 모문용.> 꼬리를 감추고 있는 변황의 신룡. 스스로를 모문용이라 밝힌 육순노인은 바로 제벌의 오대세력 중 하나인 백금전가와 맞서 변황의 상권을 독점하고 있는 대상인(大 商人)이자, 천하제일의 모사(謀士)인 금융대인이었다. 상인이라기보다는 뛰어난 모사이고 또 모사이기 이전에 천하 십대 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는 인물. 구름 속의 신룡인 양 모 든 것을 암중에서 조종할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금융대인 모문용이 바로 이 사람이었던 것이다. 금융대인 모문용이 스스로를 소개하며 예의를 갖추고 있건만 사마 천태랑은 천천히 옷을 걸치고 있을 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실로 거만하기 이를데 없는 태도였다. 허나 금융대인 모문용은 사 마천태랑의 거만한 태도는 처음부터 각오하고 왔다는 듯 엷은 미 소만을 머금었다. 동시에 가벼운 박수소리가 그의 두 손에서 터져 나왔다. "사마태사님께 균천자도(鈞天紫桃)를 올리거라." 금융대인 모문용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태사청 내로 한 여인이 소 리없이 들어섰다. 그녀의 두 손에는 은쟁반이 들려 있었고 그 위 에는 어린아이 머리만한 거대한 과일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예의 거대한 과일로부터는 실로 심신이 상쾌해지는 황홀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십병태사 사마천태랑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여인이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내미는 기이한 형태의 과일에 흥미를 느낀 듯한 태도였다. "그 균천자도는 노부가 사마태사님께 드리는 조그마한 성의이니 부담없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사마천태랑의 눈에 관심의 빛이 떠오르자 금융대인 모문용이 회심 의 미소와 함께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 균천자도. 만년공청석유 속에서만 자생한다는 전설의 선과(仙果), 도가(道 家)에서는 이 균천자도를 평가하기를 불로장생의 무가지보(無價之 寶)로 손꼽는다. 이 균천자도는 만년삼왕이나 규통내단의 효능에 비견할 수 있는 희귀(稀貴)한 보과인 것이다. 허나 이 균천자도의 껍질은 금강석 처럼 단단하고 불에도 녹지 않아 범인으로서는 손에 쥐어준다 해 도 복용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금융대인 모문용이 문득 하나의 소도(小刀)를 꺼내 들었다. 길이 반 자에 불과한 새파란 소도이다. 하지만 자금색의 휘황한 광채와 함께 무서운 예기가 소도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균천자도의 껍질은 그 어떤 것으로도 깎아낼 수 없는 금강피(金 剛皮)이기는 하나 단 하나 천하제일보도인 이 자금비(紫禁匕)로는 능히 깎아낼 수 있지요." 금융대인 모문용이 자금비를 내밀자 순간 사마천태랑이 손을 저었다. "....?" 금융대인 모문용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사마천태랑은 시비의 두 손에 들려있는 균천자도를 마주 선 후 직 시했다. 그의 태도는 마치 맨손으로 균천자도를 깨뜨릴 수 있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맨손으로 깨뜨려 보겠다는 것인가?' 금융대인 모문용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균천자도는 그 외피(外皮)뿐만 아니라 그 내피마저 암석처럼 단단 해 웬만한 보도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기물이었다. 사마천태랑은 균천자도를 전면에 둔 채 좌우로 가볍게 양쪽 발을 벌리고 무릎을 느슨하게 구부린 후 허리를 낮추었다. 양팔은 양쪽 겨드랑이 옆에 늘어뜨린 대로였다. 이어 사마천태랑은 양 팔을 가볍게 밖으로 틀었다. 틀었던 팔을 모아 당기며 그 반동을 이용하는 듯 양 팔을 열어 위로 올리고 활 짝 편 두 손바닥으로 균천자도를 싸는 듯 하더니 펑! 하고 양쪽에 서 마주쳤다. 소리가 났을 때는 이미 두 손바닥은 균천자도로부터 떠나있고 사 마천태랑은 움직이지 않았다는 듯 그대로 서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럼 그렇지. 맨손으로야.....' 금융대인과 그의 노복 만보산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은쟁반의 균 천자도가 말짱하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 헌데 순간, 사마천태랑이 가볍게 한 손가락을 균천자도에 대었다 떼지 않는가? 순간이었다. 슈우- 욱! 균천자도에 손가락 크기의 구멍이 뚫리고 예의 구멍으로부터 붉은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균천자도의 국물이었다. "흠....!" 사마천태랑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뿜어져 나오는 균천자도의 국물을 모조리 입으로 받아 삼켰다. 한참동안 국물을 뿜어내던 균 천자도는 바삭바삭 바스러지더니 이내 쪼그라 들었다. 이 광경에 금융대인 모문용과 그와 함께 온 노복 만보산의 눈이 커졌다. '껍질은 그대로 두고 균천자도의 안쪽부터 깨끗이 바스러뜨리다 니....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이, 이럴 수가!' 만보산과 금융대인 모문용이 멍청히 사마천태랑을 응시하는 순간 사마천태랑이 입가를 닦아내며 눈을 돌렸다. "그대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금융대인 모문용이 황급히 정신을 가다듬으며 입을 떼었다. "사마태사를 모시기 위해 왔소이다." "나를 사겠다는 것인가?" 십병태사 사마천태랑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금융대인 모문용이 흠칫 사마천태랑을 바라본 후 고개를 저었다. "물론 용병육주비전의 수좌들인 비전육행수는 흥정을 할 수 없다 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허나 이제 곧 사마태사께서는 강호로 나 가실 터.... 그때 본인과 함께....." 금융대인의 말은 중도에서 끊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마천태랑의 싸늘한 음성이 그의 말을 중도에서 짜른 것이었다. "그대는 나의 능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금융대인은 그의 돌연한 질문에 의혹을 느낀 듯 했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능히 역대 만승왕을 능가하는 당대 제일의 무인으로....." 사마천태랑이 냉소하며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능력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상인의 능력은 지닌 바 재력과 상술(商術)에 있지요. 미흡하나마 본좌는 능히 천하를 살 수 있는 재력과 상술을 지니고 있다고 자 부하는 바이외다." 금융대인의 말투 역시 광오하기 이를데 없었다. 사마천태랑은 냉 소와 함께 담담히 질문을 계속했다. "하면 그대가 나에게 줄 대가는 무엇인가?" "무림왕(武林王)! 나는 그대에게 무림(武林)을 주겠소이다." 사마천태랑의 입가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실로 기이한 미소였다. 쓰- 윽! 헌데 다음 순간, 아직 상의를 걸치지 않아 흉터 투성이의 상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사마천태랑이 기이하게 움직여 순식간에 금융 대인 모문용의 코 앞에 우뚝 서지 않는가. 사마천태랑은 금융대인의 눈에 자신의 얼굴을 닿을 듯 가까이 댄 후 차갑게 입을 열었다. "헌데 너는 누구냐?" "그, 그게 무슨 말이오?" 금융대인이 주춤 뒤걸음쳤다. 사마천태랑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의 빛이 떠올랐다. 죽음의 미소였다. "너는 금융대인이 아니다. 적어도 진정한 금융대인이 너 정도의 인물은 아닐 것이다." "....!" "그리고 무림왕이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탄생하 는 것이다. 그것을 대가로 주겠다고? 훗! 네가 진정한 금융대인이 었다면 스스로의 재력과 능력을 자랑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한 조건을 걸지도 않을 것이다." "으으....." 금융대인 모문용의 얼굴이 굳어졌다. "강자란 언제 어느 때고 스스로의 강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뛰 어난 상인이라면 자기 개인의 능력을 더더욱 자랑하지 않는 법이다." 사마천태랑의 두 눈에 점차 무서운 살기가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본인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세 치 혓바닥으로 이루려는 자를 가 장 싫어한다. 특히 네놈같이 거짓을 말하는 장삿군은 절대로 살려 두지 않는다." "으....." 사마천태랑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금융대인이 점차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허나 제아무리 뒷걸음쳐도 사마천태랑의 무서 운 눈은 그의 한 치 앞에 있었다. 팟! 일순 금융대인은 손에 쥐고 있던 자금비로 발작적인 공세를 뻗어냈다. "죽엇!" 쥐어짜는 듯한 기합성과 함께 단금절옥(斷金切玉)의 무서운 보도 자금비가 사마천태랑의 가슴으로 짓쳐갔다. 그들의 거리는 겨우 반 자 정도이니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는 거리였다. 퍽! 섬뜩한 음향과 함께 자금비도가 사마천태랑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금융대인의 뇌리에는 이 순간 선연한 핏줄기를 뿜으며 쓰러져 가 는 사마천태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허나 단 한 방울의 피는 커녕 사마천태랑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차가운 미소조차 지워지지 않았으니..... "으- 악!" 분명히 자금비가 가슴에 박혀 있건만 사마천태랑이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자 금융대인은 뒤로 물러섰다. 허나 사마천태랑의 가슴 에 박혀 있는 자금비는 한 치도 꿈쩍이지 않았다. 휘- 익! 금융대인이 무의식중에 문이 있는 방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어떻게 움직였는지 문 앞에는 사마천태랑이 우뚝 서 있었 다. 금융대인의 얼굴 앞에 사마천태랑의 가느다란 눈이 여전히 못 박혀 있었던 것이다. '으.....' 속에서부터 짓눌린 듯한 비명소리가 금융대인의 입술에서 새어 나 왔다. 순간 사마천태랑의 그때까지 축 늘어져 있던 양 손이 뻗어 나왔 다. 그의 양 손바닥이 자금비를 쥐고 있는 금융대인의 오른팔을 펑! 하고 때리듯 쳤다. "으아아아악!" 무엇인가가 가볍게 터지는 듯한 기분나쁜 소리가 나지막하게 방을 울렸다. 동시에 지옥의 절규가 금융대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금융대인의 손이 축 늘어졌다. 힘없이 늘어진 그의 오른쪽 팔꿈치 아래쪽이 삽시간에 시퍼러퉁퉁하게 부풀어 올랐다. 팔의 형태를 한 고무포대 안에 자색의 액체를 주입하고 있는 것처 럼 보고 있는 중에 점점 더 금융대인의 팔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순간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금융대인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을 수평으로 뻗은 사마천태랑의 오른손이 날아 왔다. 쉭!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금융대인의 위아래 이빨이 부서지면서 사마 천태랑의 수도가 금융대인의 입쪽으로 여지없이 박혀 들었다. 금융대인의 신음소리가 그쳤다. 사마천태랑이 손목까지 금융대인 의 입속에 쑤셔 박았던 오른손을 빼냈다. 붉은 동굴처럼 된 금융대인의 입으로부터 가느다란 소리가 새어나 왔다. 입으로부터 붉은 피를 뿜으면서 금융대인은 막대기처럼 앞 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얼굴 아래 지면 위로 샘물과 같이 붉은 피 가 번져 나갔다. 이때, 이 무서운 광경을 대한 금융대인의 노복 만보산이 돌연 감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훌륭한 솜씨외다." "......" 사마천태랑이 고개를 돌렸다. 이어 그는 만보산의 얼굴을 의미심 장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진짜 금융대인인 듯 하군." "허허헛....! 그렇소이다. 믿을 수 있겠소이까?" 아아, 금융대인의 노복 만보산의 말이 실로 놀랍지 않은가. 그 자신이 진짜 금융대인 모문용이었다니....! "재미있군. 노복으로 행세하던 인물이 진짜고 주인으로 행세하던 자가 오히려 노복이었다니.... 후훗! 재미있어....." 금융대인의 노복으로 알려져 있던 만보산의 기도는 이 순간 확연 히 바뀌어 있었다. 그 초라한 모습 속에 어느덧 끈끈한 저력과 태 산같은 관록, 그리고 감히 넘볼 수 없는 어떤 위엄같은 것이 도도 히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본좌에게 꼭두각시 놀음을 해보인 이유가 무엇이오?" 사마천태랑이 태도가 다소 변했다. 진짜 금융대인이 밝혀지자 오 히려 다소 정중해진 것이다. "상술은 물건을 팔고 사는 것. 좋은 상인은 파는 쪽도 중시하지만 무엇보다 사는 것을 더욱 중시하는 법이외다. 곧 좋은 물건을 골 라 살 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상인이랄 수 있는 것이외다." "호....." "상품으로 비교할 때 사마태사는 그야말로 최고의 상품이외다. 허 나 사람이니 만큼 그 내부의 가치는 알 수 없는 법.... 해서 그 내부의 가치마저 알아내기 위해 가짜를 내세웠소이다." "......" "쉽게 말해 사마태사가 진짜 좋은 상품이라면 진정한 나를 가려내 는 안목을 지녔으리라 믿은 것이오." "내가 만약 가려내지 못했다면....?" "허허헛! 그렇다면 그만한 강자가 못되는 것이고.... 역시 가짜하고나 상대해야 했겠지요." 실로 의미심장하면서도 모욕적인 말이었다. 금융대인 모문용의 말 은 솔직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광오하다고 해야 옳을 정도로 직선적 이었다. 그러나 사마천태랑은 별반 노기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만보산, 진짜 금융대인 모문용에게 흥미를 느낀 듯 했다. "그래, 그대는 내게 무엇을 원하시오?" "몇 사람과 함께 내가 지목하는 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 협조해 주시면 되오." 사마천태랑의 눈에 일순 어이없어 하는 빛이 스쳤다. "내가 어떤 한 인물을 죽이는데 다른 사람과 합작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소." 사마천태랑의 눈빛이 차가와졌으나 금융대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서슴치 않고 대꾸했다. 사마천태랑의 입에서 비릿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후후훗! 그래 내가 합작해야 할 놈들은 누구이며.... 또 그렇게 해서 죽여야 할 인물은 누구요?" 사마천태랑의 음성이 더욱 차가와졌다. 그가 누구인가? 스스로 천하최강이라 자부하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 그에게 한 인물을 죽임에 있어 다른 몇 명도 합작을 해야 한 다고 말하고 있었으니 어찌 분노하지 않으랴! 사마천태랑이 노기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직시하고 있건 만 금융대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냉담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흥정이 성립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 "그렇다면 흥정이 성립되기 전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인가?" 사마천태랑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듯한 금융대인의 이런 태도는 사마천태랑의 분노를 사기에 족했다. 사마천태랑의 음성은 마치 얼음가루가 휘날리듯 차가와졌고 동시에 다소 예의를 지키던 말투 도 하대(下待)로 변하고 있었다. "물론이오. 흥정이 성립되기 이전에는 당신과 나는 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사마천태랑의 전신에 살기가 어렸다. 사마천태랑은 결코 자신에게 무례하는 자를 용납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단순히 분노로 따진 다면 그는 벌써 서너차례는 더 금융대인에게 살수를 전개했어야 했다. 허나 기이하게도 그는 금융대인에게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마천태랑이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금융대인의 대화는 실로 기묘해 상대로 하여금 분노케 하면서도 자꾸 그 자신 의 말에 말려들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② 사마천태랑이 문득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여전히 노기를 띈 눈으로 금융대인 모문용을 직시한 채 입을 열었다. "좋소. 허나 그 전에 죽여야 할 자를 말해야 될 것이오." "그렇다면 흥정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오?" 금융대인 모문용이 흡족한 듯 미소짓자 사마천태랑의 음성이 더욱 차가와졌다. "본좌는 결코 두 번 말하지 않소." "후후.... 그렇다면 말해 드리리다. 당신이 죽여야 할 인물은 제벌의 대벌주외다." "제벌의 대벌주....!" 사마천태랑이 놀람에 찬 일성을 터트렸다. 금융대인의 음성이 조용히 이어졌다.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제벌의 대벌주를 상대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세인들은 팔왕(八王)이 고금을 통틀어 최 강의 무인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제벌의 대벌주만이 지상 최강이라 단언할 수 있소이다." 착각이련가? 이 순간 금융대인 모문용의 두 눈에 무서운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는 듯 느껴진 것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단신으로는 제벌의 대벌주 도당문비를 죽 일 수는 없소이다. 단지 팔왕 중 이인이 합공한다면 가능할까....?" 금융대인 모문용의 중얼거리는 듯한 말에 사마천태랑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 제벌의 대벌주 도당문비. 단연코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당연한 것이 제벌조차 천하 위에 군림하되 신기루처럼 그 존재가 신비에 가려져 있으니 그 대벌주 도당문비의 이름이야 세인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합작해야 할 인물은 누구인가?" 감탄의 빛을 떠올리던 사마천태랑이 다시 가라앉은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금융대인이 나직이 대꾸했다. "노부의 주인이요." "그대의 주인....?" 사마천태랑은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금융대인 모문용의 배후에 또다른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대는 팔왕 중의 일인(一人)인 새왕(塞王)이란 이름을 들어보았소?" "새왕?" <새왕(塞王).> - 지상에서 가장 높고 존귀한 신의 영역, 애불륵사봉(埃拂勒斯峯) 에는 백색 수정으로 이루어진 팔만사천계단(八萬四千階段)이 존재 하나니 팔만사천비계(八萬四千飛階)에는 변왕 새외의 전 영웅들이 잠들어 있도다. - 먼 후일 변황의 전설이 이 팔만사천비계에서 탄생될 지이니 그 를 일러 새왕(塞王)이라 할지어다. 그것은 변황의 전설이었다. 또한 수천 년 동안 중원에 억눌리고 수모를 받아온 변황과 새외의 희망이요, 상징이었다. 허나 새왕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전설로만 회자될 뿐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본좌는 새왕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다. 변방의 종족들이 중원에 대한 한을 달래기 위해 지어낸 말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마천태랑이 고개를 흔들었다. 금융대인 모문용이 미소했다. "그렇소. 새왕의 전설은 팔백 년 전, 중원왕조에 의해 짓밟힌 누 란왕조(樓蘭王祖)의 마지막 군주인 호극달뢰(豪剋達雷)가 지어내 퍼뜨린 말이오. 자신의 대(代)에서 망국(亡國)을 겪어야 했던 한 (限)과 변황인들의 한이 담긴 노래이지요." "......" "허나, 그 전설은 호극달뢰의 후대들에 의해 실현되었소이다." "무슨 말이오?" "팔백 년 전...., 너무도 뛰어나 중원인들에 의해 짓밟힌 누란왕 조의 마지막 군주인 호극달뢰는 변황인들의 한을 풀기 위해 천년 대계(千年大計)를 세운 것이오." "......" "그 천년대계란, 새왕이라는 가공(可恐)의 전설을 만들어 퍼뜨리 고 그 전설이 변황인들에게 인식된 후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이었 소이다." 사마천태랑의 눈에 호기심이 일었다. 만들어진 전설...., 그리고 실현된 전설! 형용할 수 없는 신비감이 들지 않는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풍요한 중원의 대지를 꿈꾸던 변황의 영웅 들은 존재했었소이다. 그들은 전설이 인식되자 스스로 천수(天壽) 를 다했다고 느낀 말년이면 모두 전설을 실현키 위해 애불륵사봉 의 팔만사천비계를 찾아가 그곳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남긴 후 죽어갔소." "으음....." "그들의 모든 것이 하나하나 쌓여 그들 자신은 이루지 못했으나 먼 후대라도 변황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소." "아....!" 사마천태랑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어찌 놀랍지 않으랴! "이렇게 팔백 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팔만사천비계에 쌓여진 전대 변황고수들의 모든 비학(秘學)은 엄청난 것이 되어갔소." "....!" "결국 팔만사천비계가 모두 채워지고 그리고 한 인물이 탄생된 것이오." "새왕?" "그렇소. 바로 노부의 하늘이신 새왕 호극습도(豪剋習道)외다." - 새왕 호극습도. 아아....! 이렇게 해서 팔왕 중 또다른 일인이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니..... 수천여 년 변황의 한이 탄생시킨 초극의 고수. 그의 이름은 바로 새왕 호극습도였다. "사마태사만 도와준다면 천하는 우리의 것이 되오. 그때 사마태사 는 노부의 주인인 새왕과 함께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오." "으음....!" 사마천태랑은 금융대인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느끼며 내심 침음했다. 헌데 바로 이때였다. 어디선가 한줄기 바람처럼 무감동한 음성이 그들 사이로 흘러들지 않는가? "좋은 흥정이로군. 허나 사마태사는 아직 그런 흥정에 응할 자격 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돌연 들려온 누군가의 음성은 그렇다치고 사마천태랑은 그 내용에 노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격....?" 사마천태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곳을 응시했다. 바로 조금전 까지만 해도 그 자신이 앉아있던 거대한 돌 태사의 위에 한 인물 이 조용히 앉아 있지 않은가! 미백색과 영롱한 녹색이 어우러진 초의를 걸치고 허리에는 두 자 루 쌍월이 늘어뜨려져 있다. 얼굴은 가면처럼 희디 흰데다 더할나 위 없이 수려했으니..... 유빙! 그렇다. 바로 유빙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그렇게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톡톡톡..... 유빙은 태사의의 팔걸이에 편안하게 올려져 있는 오른 손으로 가 볍게 팔걸이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사마천태랑! 그대는 아직 만승왕의 금제에 묶여있는 몸이고 앞으 로도 영원히 그 금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오. 허니 자격이 없 는 것은 당연하지." "그대는....?" 사마천태랑은 유빙의 단아하고도 고요한 기도에 내심 적지 않게 놀란 눈빛이었다. 더우기 그 자신의 무공으로도 그가 언제 들어와 있는지 감지하지 못했음이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본좌는 만승왕의 후예이외다." 유빙은 빙긋이 미소했다. "만승왕? 후후.... 재미있군. 천종예가의 후대인 천왕이 또한 만승왕이 되었다니!" "훗! 만승왕의 유일한 후대인 봉린주의 소천주가 내 여인이 되었 으니 당연히 만승왕을 승계한 것이 아니겠소?" "그럴 수도 있겠지." 사마천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그 역시 유빙의 존재와 그가 만승왕으로 된 경위를 알고 있는 듯 했다. 뿐이랴! 그는 마 치 유빙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태도가 아닌가? 금융대인 모문용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의 후예인 천왕! 그가 만승왕마저 승계받으 며 팔왕 중 두왕의 좌(座)를 거머 쥐었단 말인가?' 유빙의 눈은 흠칫해하는 금융대인을 직시했다. "용병시장의 총행수는 당연히 만승왕이외다. 그대는 나와 흥정해야 할 것이오." 금융대인이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자 사마천태랑이 입을 열었다. "금문만승대연은 이제 겨우 십삼 일이 남았을 뿐이오. 금융대인은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나와 흥정하면 되오." 사마천태랑의 말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곧 그가 유빙을 꺾을 자 신이 있다는 뜻인 것이다. 이어 그는 유빙을 응시했다. "어떤가? 내 말이....." "훗! 내가 진정으로 그대를 꺾지 못한다면 차라리 용병육주비전이 분산되더라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겠소. 허나 그대는 굳 이 만승대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소." "좋군. 그렇지 않아도 이대로는 금제에서 풀려나기가 허전했었지. 문제도 있고 말이야." 사마천태랑은 유빙의 말뜻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사마천태랑 역시 원로 중의 한 명, 그는 용병육주비전이 분산되어 강호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아 유빙이 만승왕이 되어 용 병육주비전을 취한 후 통일된 세력으로 강호에 나서기를 내심으로 바라고 있는 사람이었다. 허나 그는 만약 유빙이 자신을 꺾을만큼 강하지 않다면 그는 차라 리 육주비전이 분산되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으로 유빙에게 굴복할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슷! 사마천태랑이 태사청의 한 곳 벽면을 건드려 은밀히 감추어진 벽 장(壁欌)을 연후 그 안에서 몇 개의 기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먼저 수십 개의 은엽비도(隱葉秘刀)가 꽂혀 있는 긴 가죽끈이 그 의 어깨에 십자로 걸쳐졌다. 그는 자신의 기병을 하나하나 몸에 두르며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노부는 승부를 가리기 전 전신의 모든 기(氣)를 탈진시키는 습관 이 있다네. 무의식 상태에서 감춰진 무한대의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함이지." 철- 컥! 양 팔목에 원형의 날이 박혀 있는 기병이 섬뜩한 음향과 함께 걸 쳐지고, 예리한 비침들이 수없이 꽂혀 있는 청피갑(靑皮甲)을 천 천히 착용하며 사마천태랑이 말을 이었다. "본인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능력이 있다네. 그것은 상대의 능력 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지....." 끼드득....! "나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네. 나의 본능이 그대가 오고 있음을 말해준 때문이네." 스르르릉! 다시 하나의 거대한 사인금부(邪刃金斧) 한 쌍이 그의 허리에 착 용되었다. "배부른 야수보다는 굶주려 있는 야수가 더욱 본능이 예민하다고 나 할까? 그런 이치로 나는 그대가 오기 전에 이미 나의 모든 기 력을 탕진시켜 놓았네." 패- 앵! 거대한 십척 장검이 사마천태랑의 두 손에 쥐어졌다. 이로써 그의 전신에 열 가지에 달하는 기병이 완전히 갖춰진 것이었다. "사부님이 나에게 그러더군. 나는 선천적으로 죽음의 기운을 타고 난 죽음의 파괴자이며 지상에서 가장 무서운 승부사(勝負師)가 될 거라고..... 그 말에는 나도 동감일세. 나 자신조차 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 열 가지의 기병을 모두 갖춘 사마천태랑은 서서히 유빙을 향해 몸을 돌려 마주섰다. 마치 하나의 바위가 눈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아니면 거 대한 해일이 몸을 멈추고 이제부터 공략할 대상을 내려다보고 있 는 듯 하다고나 할까....? 실로 엄청난 패도적인 기운이 유빙을 압박해 들고 있었다. 허나 더욱 무서운 것은 그런 그를 대하고 있노라면 온통 죽음이 그를 휘어감고 슬며시 다가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헌데, 그의 말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곧 그가 유빙이 올 것을 기 다려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전신에 십병(十兵)을 걸친 사마천태랑의 기도는 실로 놀라운 것이 었다. 흡사 어둠을 뭉쳐놓은 죽음의 기운만이 감돌고 그리고 넘을 수 없는 벽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기도였다. 유빙이 내심 감탄했다. '진정 죽음으로 빚어 만든 죽음의 파괴자로군. 아마 그의 무위는 만승왕을 능가할 것이다.' 유빙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강호출도 이래 최강의 인물을 만 났음을 직감한 것이었다. 유빙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지고 그리고 하나의 만월이 그의 전신에서 떠오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일기 시 작했다. ③ 삭! 사삿! 십병태사 사마천태랑의 암석과도 같이 강인해 보이는 몸이 소리없 이 움직였다. 동시에 그의 두 손에 굳게 쥐어져 있는 한 자루 대 검(大劍)이 환상처럼 공기를 갈랐다. 삭- ! 사사삭! 그것은 정녕 무서운 공세였다. 사마천태랑의 몸은 일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유빙이 움 직일 모든 방위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고 동시에 그의 검은 일순 에 십여 번 이상을 허공을 베어내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그것은 결코 육체의 힘이 아 니었다. 그의 내부에 깃들어 있는 기묘하고도 무서운 힘. 사마천 태랑 자신조차도 조절할 수 없는 죽음의 파괴력이 이 순간 격렬히 몸부림치며 풀려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 악! 카카- 캉! 사마천태랑의 전 신경은 마치 실오라기 하나 놓치지 않는 악마의 눈처럼 유빙의 전신을 빈틈없이 꿰뚫고 있었다. 심지어 유빙의 마 음 속에서 일고 있는 마음의 파장(波長)마저도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캉! 와득! 유빙의 상체가 휘청였다. '으음.... 놀라운 무예이다. 이 자의 전신전령(全神全靈)이 나의 움직임에 맞춰져 있다. 심지어 내가 생각하는 것마저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유빙이 내심 한기를 머금고 있는 순간, 사마천태랑의 두 손에 굳 게 쥐어져 있던 대검이 그의 오른손으로 옮겨졌다. 쐐- 애- 액! 파파파팟! 찰나, 사마천태랑의 우수에 쥐어져 있는 대검이 소리없이 허공을 베어듬과 동시에 그의 왼손으로부터 이십여 개의 은엽비도가 동시 에 뻗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고오오- ! 쌍월이 천천히 한 차례 원을 그렸다. 동시에 유빙의 주위에 거대 한 만월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파파파팍- ! 이십여 개의 은엽비도와 대검이 그 원 안에 빨려드는 듯 무서운 압력으로 끌려 들어가 퉁겨졌다. 허나 그 순간 사마천태랑의 수많 은 비침이 박혀 있는 청피갑의 철권이 유빙의 가슴으로 박혀들고 있지 않은가! 팍! 파파팍! 이 순간, 유빙의 검에 의해 퉁겨나간 이십여 개의 은엽비도는 오 히려 사마천태랑의 전신에 박히고 있었다. 허나 사마천태랑은 미 동도 하지 않은 채 이미 유빙의 가슴을 쳐가고 있었다. 빠직- ! 유빙의 몸에서 기음향이 터져 나오고 그의 신형이 주춤 일장 뒤로 밀려났다. 유빙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으음! 은라초의 덕분에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만 너무 방심했구나!' 유빙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때 자신의 은엽비도에 부상당한 사마천태랑의 두 눈에서는 점차 기이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 일 초의 격돌이었으나 유빙과의 격돌로 그의 내부에서 음험한 힘이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힘의 존재는 그가 자신의 내부에 도사린 흉악한 힘을 느낀 순간부터 이제까지 그를 놓아주 지 않았던 죽음의 파괴력이었다. 그 자신과 함께 자고 일어나는 그 음험한 힘은 그 자신의 것이 아 닌 것 같았다. 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오히려 그 파 괴적인 본능에 이끌려 행동한 적이 많았던 것이다. 카아- ! 와득! 사마천태랑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실로 인간으로 보기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허나 놀랍게도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타앙! 사마천태랑의 대검을 막아가던 유빙의 손아귀가 그대로 터져나가 며 피가 흘러내렸다. 실로 너무도 거대한 힘이 사마천태랑의 대검 에서 전달되어 온 것이었다. "윽!" 유빙의 신형이 태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삼 장 뒤로 휘날려 가고 그 순간 사마천태랑이 한 마리 독수리인 양 허공을 밟으며 유빙에 게 덮쳐 들었다. 꽈아아- ! 무서운 기세로 사마천태랑의 대검이 유빙의 전신을 그대로 내리쳤 다. 유빙의 전신이 영락없이 양단되어야 할 듯한 가공할 기세였다. 쓰- 윽! 허나 유빙은 허공에서 하늘을 보고 누운 자세 그대로 불가사의한 각도로 몸을 빼내 이미 태연히 바닥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의 내심에는 놀람이 가득해 있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는 사마천태랑의 전신에서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불가사의한 힘의 존 재를 느낀 때문이었다. 사마천태랑의 거구가 허공에서 가볍게 방향을 틀며 다시 유빙을 덮쳐왔다. 섬전을 방불하는 짧은 순간에 칠십이검(七十二劍)이 유 빙의 몸 주위로 스쳐갔다. 허나, 유빙은 단 한 치의 간격만을 둔 채 사마천태랑의 검을 비껴 내며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폭풍처럼 덮쳐오고 있는 검의 폭우 속에서 놀랍게도 더도 덜도 아닌 정확히 한 치의 간격만을 둔 채 피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난감하군. 정면대결을 하게 되면 둘 중 의 한 명은 죽는다. 그러나 나는 이자를 굴복시켜야지 죽여서는 안 된다!' 유빙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실로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헌데 바로 이때 피에 젖어 있던 쌍월 중 장도의 손잡이에서 기이 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가? 유빙은 여전히 폭풍처럼 쏟아져 내리는 공세 속에서 호기심을 감 추지 못하며 쥐고 있던 장도의 손자루를 내려다 보았다. 사마천태랑의 가공할 힘을 정면으로 맞받아쳐 터져나간 손사이로 선혈이 흘러 내리고 있었고 놀랍게도 장도의 손자루가 피에 젖자 점차 희미하게 글귀가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미세한 요철을 이루고 있던 손자루의 굴곡들이 피에 젖는 순간 원 래의 손잡이 색과 구별되며 하나의 글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 쌍월낙화송(雙月落花頌)이 영원히 이 세상에 선보이지 않기를 기원한다. 이것은 인간의 무학이 아니라 악마(惡魔)가 만 들어낸 피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유빙은 무섭게 몰아치고 있는 사마천태랑의 공세를 계속 젖혀내며 쌍월의 손잡이에 나타나는 글귀를 빠르게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 다. 글귀는 놀랍게도 쌍월을 기병으로 사용하던 천종예가의 시조 백사 사형예조 유군휘가 남긴 글귀였다. <이 쌍월낙화송은 원월도법 중의 초식이기는 하나 또한 별개의 초 식이다. 그 위력이 너무도 가공스러워 수십 번도 더 사장(死藏)시 키고자 했으나 무(武)를 아끼는 무인의 본능 때문에 끝내 따로이 남겨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쌍월낙화송을 쌍월의 손잡이에 은밀히 남긴 이유는 후일을 대 비코자 함이었다. 먼 훗날 나의 독문기병 쌍월을 사용하는 후대가 만에 하나 쌍월의 손잡이에 자신의 선혈을 흘릴 정도로 엄청난 강 적(强敵)을 맞이했을 때를 대비했음이다.> 실로 놀라운 안배였다. 너무도 가공스러운 위력에 스스로 사장시키려 했으나 후일을 대비 해 기이한 방법으로 남긴 무공. 그 가공할 무학이 이렇게 엉뚱한 상황에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쌍월의 손잡이에까지 선혈이 흐를 정도라면 본가의 후대는 그야 말로 최대의 위기를 맞이 했을 터..... 이 쌍월낙화송은 원월도법 을 익힌 후대라면 순식간에 체득해 실전(實戰)에 사용할 수 있도 록 창안되었다. 후대여....! 이 쌍월낙화송은 악마의 초식일지니 될 수 있으면 사용치 말아주기 바란다.> - 제일초, 쌍인단파(雙刃斷波)- 십자월(十字月). - 제이초, 월락편린(月落片鱗)- 혈화송(血花頌). 쌍월낙화송은 단 두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월도법이 단 일 초식이면서 일천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도법 이라면 이쌍월낙화송은 변화가 전혀 없는 두 개 초식이었다. 그 위력은 실로 가공스러워 그 패도적인 위력은 원월도법을 능가하고 있었다. 쌍월도법은 또한 속성(速成)으로 익힐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 어 원월도법을 익힌 사람이라면 단지 그 진체(眞體)를 깨닫는 것 만으로 펼칠 수 있었다. '아....!' 유빙의 내심으로 기쁨이 물결쳤다. 이 쌍월낙화송을 잘 이용하면 사마천태랑을 큰 부상을 입히지 않은 채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마천태랑의 몸은 그림자가 움직이듯 여전히 환상처럼 유빙을 따 라오며 덮쳐들고 있었다. 파파파- 팟! 쐐- 애액! 양 팔목에 걸쳐져 있던 기이한 철반 하나와 청피갑에 박혀 있던 무수한 세침 그리고 수십여 개의 은엽비도와 사인금부 한 쌍이 폭 발하듯 일제히 쏘아져 나왔다. 십병태사 사마천태랑의 전신에 걸 쳐져 있던 십병(十兵)이 모조리 각자 생명을 지닌 물체인 양 유빙 을 덮쳐들고 있는 것이었다. 고오오- ! 유빙의 우수가 다시 허공에 거대한 원을 형성했다. 사마천태랑이 발출한 열 가지 기병은 유빙이 만들어낸 달무리같은 원에 닿기 무섭게 퉁겨져 나갔다. 꽈- 아! 꽈꽈꽝! 우르르르....! 거대한 태사청이 단숨에 무너져 내리고 유빙의 신형이 무너져 내 린 철각 위로 솟아올랐다. 휘이이익! 사마천태랑의 거구 역시 한 마리 검은 독수리처럼 허공을 활보하며 솟아올랐다. "쌍월낙화송- 십자월- !" 순간 쌍월이 십자로 교차하며 돌연 믿어지지 않을 위세로 오히려 덮쳐들고 있는 사마천태랑을 덮쳐가고 있지 않은가! 사사삭! 기이한 섬광이 번개튀듯 작렬하며 사마천태랑의 신형이 퉁겨졌다. 동시에 허공에 떠 있는 만월이 십자형태로 갈라진 듯한 환상이 드 러나고, 사마천태랑은 십여 장 아래 지면에 우뚝 서서 비틀거리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아....! 그의 가슴을 보라! 어느새 십자 형태로 교차된 상흔이 한 치 깊이로 베어져 있지 않은가! "내가 졌는가....?" 사마천태랑은 믿어지지 않는 듯 유빙을 응시했다. "나를 살려준 이유가 무엇인가?" 공허하기 이를데 없는 사마천태랑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그대의 목숨은 내것이기 때문이오." "나는 나의 목숨을 남에게 맡기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내 목숨을 거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사마천태랑이 허탈과 분노가 교차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유빙이 손을 저었다. "그대에게는 죽을 수 있는 자격도 없소. 그 이유는 이미 내게 생 명의 빚을 졌기 때문이오. 내게 그 빚을 갚지 못하는 이상 절대로 죽음을 택할 수는 없는 것이오." 모욕이라면 실로 엄청난 모욕이었다. 더우기 십병태사 사마천태랑같은 인물에게서야..... 십병태사 사마천태랑의 허탈과 허무에 차 있던 눈빛에 강렬한 살기가 이글거렸다. "좋아.... 좋아! 그 빚은 갚지! 허나 언젠가 그 빚을 갚는 순간 그대는 나에 의해 죽게 될 것이네." 투혼(鬪魂)이랄까? 사마천태랑은 엄청난 분노를 삭이며 몸을 떨었다. 허나 분명한 것 이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스스로의 죽음 따위를 생각하지 않 는다는 것이었다. "훗! 그것은 그때 가보아야 알 일이고 그 전에 그대는 저 손님을 어찌할 생각이시오?" 유빙의 눈이 한쪽에서 감탄과 경악의 눈으로 조용히 서 있는 금융 대인 모문용을 바라보자 사마천태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이미 나의 주인이 되었소. 그대의 뜻에 따르겠소." "고맙소." 유빙이 금융대인을 직시했다. "어떤가? 사마태사 대신 나와 흥정하는 것이....?" 금융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상인이 어찌 흥정을 마다하겠소. 더우기 확실한 특등상 품인 대총사같은 사람과의 흥정이야 진정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바이오." "허나 내 조건은 항시 까다롭다네." "우선 대총사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오." 유빙의 음성이 점차 비웃음을 띄어가고 있었으나 금융대인은 마치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듯 말을 받았다. 유빙이 내심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 허나 그전에 한 가지 질문할 것이 있네." "무엇이오?" "만약 그대의 능력으로 내가 제시하는 조건을 수락할 능력이 있다면 흥정에 응하겠는가?" "물론이오." 유빙의 입가에 기오한 미소가 번져갔다. 어딘가 섬뜩하리 만큼 차가운 미소였다. "그렇다면 말하겠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새왕 호극습도의 목이네." "....!" "제벌의 대벌주를 죽이는 대신 새왕 호극습도의 목이라면 사실 다 소 손해보는 흥정이기는 하지. 허나 그대에게는 더 이상 내게 줄 것이 없으니 그것으로 족하겠네." 금융대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해갔다. - 대벌주를 죽이는 대신 새왕 호극습도의 목을 다오! 유빙의 이말은 곧 금융대인과 흥정하고 싶지 않다는 명백한 선언 이었다. 헌데 금융대인은 유빙의 말에 노기를 터뜨리거나 경악해 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가? "옳은 말이오." "흥정에 응할 용의가 있단 말인가?" 유빙이 오히려 놀람의 빛을 드러냈다. "이 세상에 이루어지지 않는 흥정이란 있을 수 없소이다. 굳이 조 금 어려운 흥정이라고 해서 대상인이라 자처하는 내가 먼저 그 흥 정을 깰 필요는 없지 않소이까?" 한 마디로 천천히 흥정해 보자는 뜻일게다. 실로 의미심장한 여운을 담고 있는 기이한 태도인 것이다. 유빙의 뇌리에 문득 차손이 금융대인을 평가한 말이 떠올랐다. - 저 두꺼비같은 늙은이는 조심해야 할 인물이다. 차손, 그는 금융대인이 만보산의 신분으로 도수명인세류표를 만날 때 이미 그를 주의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때 금융대인이 의연히 포권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대총사께 볼 일이 있는 분이 오신 것 같으니 노부는 이만 실례하겠소이다." "......" "허나 노부는 대총사가 제시한 흥정을 결코 잊지 않고 있을 것이외다." 미소..... 그리고 금융대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사라져 갔다. 눈 으로 웃는 인물이 있다면 그가 사내이든 여인이든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이라 했던가....? 얼굴은 굳어 있었으나 눈만이 희미하게 웃고 있는 미소. 금융대인 의 미소는 그런 미소였다. ■ 팔왕예조 제2권 제20장 제벌(帝閥)을 사냥한다! ━━━━━━━━━━━━━━━━━━━━━━━━━━━━━━━━━━━ ① 금융대인 모문용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사라지는 순간 마치 엇갈리듯 한 인영이 나타나 유빙에게 다가들었다. 다 떨어진 핏빛 가사를 걸치고, 마치 세존의 고행불(苦行佛)을 연 상시키듯 뼈만 남은 앙상한 얼굴에 길게 수염이 늘어져 있다. 도 저히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없으리만큼 주름진 얼굴은 실로 안스러 울 정도였으나 그 얼굴에 충만해 있는 것은 자애스러움 뿐이었다. 헌데 그 미간을 보라! 보기에도 섬뜩한 핏빛의 점 세 개가 나란히 찍혀 있지 않은가? 손에는 기이한 목판경을 들고 있었다. 노화상의 모습은 실로 기괴했다. 얼굴 전체에서는 끊임없이 자애 로운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전체적 기도는 오히려 무섭도록 사이(邪異)했던 것이다. '용병육주비전 최대의 세력인 법륜난전의 행수, 반선불이다!'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법륜난전.> 이곳은 용병육주비전의 여섯 개 비전 중에서 가장 특이한 곳이었다. 보통 일인난전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단 한 명만으로 이 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법륜난전은 대대로 단 일 인(一人)에게 만 그 진전을 잇게 해 오직 일 인이 하나의 비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 반선불. 용병육주비전에서 가장 신비한 인물이다. 나이는 물론이고 그의 무공화후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단지 추측 할 수 있다면 대략 잡아도 이백여 살은 넘었을 것이고 무공 역시 엄청날 것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미타불....! 간밤의 꿈에 한 마리 천룡이 노납을 집어 삼키더니....." 반선불이 천천히 다가와 유빙을 일별했다. 다음 순간, 그는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지 않는가? 유빙이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선사께서는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유빙의 태도에는 긴장이 어려 있었다. 반선불마저 굴복시켜야만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 전체를 굴복시키는 것이 된다. 유빙의 태도는 지금 이 자리에서 비무를 하겠냐는 의미였는데..... 반선불이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헐헐헐.... 하늘의 흐름을 어찌 노납이 막을 수 있으리오. 그것 이 순리인 것을....! 노납은 생각이 없소이다. 시주의 뜻대로 하시게." "그렇다면 내가 용병육주비전의 총행수(總行首)임을 인정하겠다는 뜻입니까?"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반선불은 여전히 자애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노납은 이미 모든 것을 시주의 뜻에 맡기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노납의 말은 원로들처럼 일단 그대가 만승왕의 노예가 되어 우리의 금제를 풀어주면 강호에 나가서 다시 그대에게 도전 하겠다는 것이 아니네." "....?" "노납은 진정으로 본전을 그대에게 맡기고 싶음이네." "음....!" 반선불의 뜻밖의 태도에 유빙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그렇다. 기실 유빙의 진정한 무공으로 용병육주비전 최고의 고수 들을 꺾어 그들을 굴복시킨다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묵계 (默計)된 안배에 지나지 않았다. 즉 유빙이 만승왕이 되어 그들에 게 펼쳐져 있는 천년금제를 풀고 그들을 일통된 세력으로 강호에 나가게 해주면 그 대가로 유빙의 일을 도와준 후 유빙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그런 의도가 아니던가. 허나 반선불은 그런 묵계를 무시한 채 진정으로 유빙에게 용병육 주비전을 맡기고 싶어하고 있었으니..... "글쎄요. 저도 임시 총행수 따위가 되려면 아예 이곳에 오지도 않 았을 것입니다." 유빙이 빙긋이 미소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반선불이 흠칫 유빙을 바라보았다. 일순 그의 눈에 스치는 것은 감탄의 빛이었다. '거목, 거목이로고....! 헐헐헐.... 어쩌면 늙어서 죽지 못하는 괴물들이 짜낸 안배가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군!' 반선불은 다음 순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자꾸 미소했다. 이어 그는 유빙을 향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자, 이미 낭리난전의 백사장에 용병육주비전의 모든 사람들이 모 여 있네. 자네를 기다리는 것이지." "....!" 반선불의 말에 유빙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용병육주비전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린 밤의 어둠은 점차 여명(黎明)에 의해 밀려나고..... 멀리 거대한 일륜(日輪)이 이글거리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봉린주의 해변, 낭리난전의 드넓은 백사장 위에 수많은 용병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의 수효는 대략 이삼천. 용병육주비전의 낭인 용병들과 귀족용병 등 모든 용병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드넓은 백사장을 완전히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유빙과 반선불이 그들 가운데 마련되어 있는 공지에 다다르는 순 간 상편난전의 행수인 철박사책 전희궁이 조용히 유빙에게 다가들었다. "우리 모든 용병들은 그대가 만승왕위를 승계해 본전의 최고 도전 자들을 굴복시켰음을 알고 있소이다." 천박사책 전희궁의 음성은 담담했다. 허나 그의 음성은 기이하도 록 낭랑해 멀리 삼십여 장 밖에 있는 용병들의 귀에까지 벼락치듯 웅장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대는 이제 진정한 만승왕이 되어 본전의 모든 용병들을 통솔할 수 있는 총행수가 된 것이오. 그렇다면 이제 총행수는 무엇을 할 계획이시오?" 천박사책 전희궁의 질문은 실로 안배된 교묘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훗! 이제 묵계된 대답을 할 수밖에 없겠군. 용병육주비전의 용병 들, 즉 금문일천사해성의 천년금제를 해제한다는.....' 유빙이 내심 고소했다. 그는 묵묵히 입을 떼었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강호로 나갈 것이오." "아.... !" "오오....!" 일순 모든 용병들의 입에서 격동에 넘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강호(江湖), 사나이의 뜨거운 피가 들끓고 사랑과 우정, 그리고 뜨거운 야망이 담겨 있는 곳. 그 얼마나 갈망하던 대지이던가! "그, 그렇다면.... 우리의 천년금제를 만승왕의 신분으로 해제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천박사책 전희궁이 격동에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용병육주비전의 운영과 체계를 담당하고 있던 인물답게 확실히 매 듭을 지으려는 질문인 것이다. "그렇소! 금문일천사해성의 후대들은 이제 강호로 나갈 수 있는 것이오."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 "와하하하하!" 순간 드넓은 백사장이 일시에 떠나갈 듯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 왔다. 심지어 어떤 용병들은 격동에 넘쳐 눈물을 흘리는 인물들도 있었다. 유빙의 가슴 깊은 곳에 일순 그들의 격동이 전해졌다. '이들이 나의 진정한 수하가 될지 안될지는 아직 모르기는 하나 어쨌든 이들에게 자유를 준 것은 진정 잘한 일인 듯하다.' 천박사책 전희궁이 격동에 떨리는 눈빛으로 다시 유빙을 응시했다. "총행수! 우리는 총행수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헌데 우리가 강호에 나가 첫번째로 할 일은 무엇입니까?" "....!" "......" 일순 모든 용병들의 눈에 한 가닥 기대의 빛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유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사냥할 것이 있소." "사냥....?" "....?" "사냥이라....? 그럴 듯 하군. 그래, 그 사냥감은 무엇이오?" 유빙이 문득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더할나위 없이 차분히 가라 앉은 눈으로 용병들을 쓸어 보았고, 그리고 더욱 차분한 음성을 흘려냈다. "제.... 벌! 사냥감은 바로 제벌이오!" "제벌!" "제.... 벌?" 사방에서 경악이 극에 달한 듯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 제벌을 사냥한다. 아아, 어찌 광오하다 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어찌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천하 그 자체라고 인정되는 제벌!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무림이 생긴 이래 가장 완벽하게 천하를 장악했다고 인정받고 있는 제벌 을 사냥하겠다니....! 주위에 개미떼처럼 꾸물거리며 몰려 있던 용병들의 눈에 기이한 광채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놀랍게도 항시 염세적(厭世的)으로 가라앉아 있던 그들의 눈 깊숙 한 곳에 이 순간 생의 활기같은 기광이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훗....! 어쩐지 우리가 멋있는 총행수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드는 구료.) (총행수! 우리는 어쩌면 그대를 영원히 총행수로 삼고 싶어질지도 모르겠구료.) 엄청난 충격의 여파가 서서히 가라 앉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용병 들의 전음성이 유빙의 귀를 찌르기 시작했다. 용병들의 눈(目), 유빙을 응시하고 있는 그들의 눈에는 이 순간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의 훈훈한 무엇이 감돌고 있었으니..... 유빙의 말 한 마디에 의해 진정한 사내들인 용병들의 가슴에 하나 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곧 천하를 뒤덮을 폭풍의 불길이었는데..... ② 원단(元旦). 대륙 최대의 명절(名節). 전후로 삼 개월 여를 축제의 분위기에 흥청거리게 만드는 중화인 (中華人) 최고의 길일(吉日)로써 이날만큼은 제아무리 극악무도한 수인(囚人)일지라도 웃는 얼굴로 대해주고 또 이날 만큼은 걸인들 조차 손을 내밀지 않아도 배부르게 얻어 먹을 수 있다. 중원의 원단은 그야말로 하던 전쟁마저 멈추는 최대의 경축일이었는데..... 이 날, 근래에 보기드문 대설(大雪)이 중원대륙을 뒤덮고 있는 이 날..... 제이차 팔왕의 난을 예고하는 한 고독한 사나이의 발길이 중원을 향하고 있었다. 백룡퇴(白龍堆). 저 아득한 북방에서 풍요의 대지 중원으로 이르는 천로여정(千路 旅程)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폐허의 대지.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눈에 뜨이지 않고 또 땅 위에조차 생명체 라고는 일체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땅이다. 서역에서 중원으로 이르는 백룡퇴의 하늘은 온통 건곤일색(乾坤一 色) 백설(白雪)로 뒤덮혀 있었다. 연일 내린 눈으로 대지는 아득히 설원(雪原)을 이루고 있었고 분 분히 날리는 백설이 차츰 기세를 누그러뜨리자 설원 위에 뜬 태양 이 흰눈에 반사되며 기경(奇景)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한 대의 마차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빈 설원 위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중원을 향해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한 대의 마차는 실로 고독해 보였다. 하찮은 걸인들조차 이날 만큼은 구걸을 하지 않은 채 축 제를 즐긴다는 원단에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마차는 백룡퇴의 아득한 풍경과 어울려 실로 쓸쓸하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의 마부석에는 한 인영이 조용히 전면만을 응시한 채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마부석에 은라초의를 가린 장포를 걸친 채 앉아 있는 인물은 바로 유빙이었다. 따가닥! 따-각! 눈보라조차 잠들어 버린 설원은 고요하기만 하고 유빙은 언제까지 조용히 전면만을 응시한 채 마차가 가는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유빙의 눈에 한 가닥 감회의 빛이 어렸다. "내가 할아범의 등에 업혀 중원을 떠난 지도 어느덧 사 년이 흘렀군." 더할나위 없이 고요한 음성, 허나 그의 독백에는 일말의 쓸쓸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 사 년 동안 중원은 많이도 변했겠지? 할아범이 오면 그 변화 를 알 수 있겠으나 무척 궁금하군." 유빙은 나직이 고개를 저은 후 채찍을 들어 내리쳤다. 두두두- ! 따가닥! 조는 듯 천천히 움직이던 마차가 다시 빠르게 설원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빙은 마차가 다시 속력을 내자 채찍을 내려놓은 채 좌우를 살펴보았다. "할아범은 좀 늦는 것 같군. 원단의 새벽 백룡퇴의 입구에서 기다린다 하였는데....." 유빙은 다소 근심의 빛을 띄우다가 문득 눈을 빛냈다. 바로 그 순 간 무엇인가 한 물체가 설원 위를 달리고 있는 그의 마차로 소리 없이 스며듬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할아범이오?" "예! 소주! 좀 늦었습니다." 유빙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마차 내부의 휘장을 젖혔다. 헌데 마차의 안에서 단두백정 학거비가 빠르게 움직이며 무엇인가 를 분주히 차리고 있지 않은가? "새해라서 그런지 술과 고기를 구하기가 좀 힘들어 지체되었습니다." 학거비는 유빙이 휘장을 젖혀 내부를 바라보자 다소 민망하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학거비의 전면, 그곳에 한 병의 술과 약간의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유빙의 입가에 고소가 스쳤다. "할아범같은 사람도 명절에 신경을 쓰는 거요?" 학거비가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후후.... 이 늙은이야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소주께서 쓸쓸해 하실 것 같아....." "훗! 이제보니 할아범은 나를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있구료." "후후! 물론이지요. 예전에는 이 날만 되면 소주께서는 온 마을을 휘젓고 다니셨지요. 제게는 앞으로 몇십 년이 흘러도 소주가 그때 의 어린아이로 느껴질 것입니다." "......" 유빙의 눈에 격동이 솟아났다. 그는 짐짓 말을 돌렸다. "그래 알아본 일은 어찌 되었소?" "모든 것이 소주의 예상대로 입니다. 백찰무경은 제벌의 압력을 받아 해체되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경준(警俊)들은 오히려 더욱 열 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호....!" "그들은 몸을 숨긴 채 오히려 더욱 집요한 수사력과 추적능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후후.... 백찰무경은 외부의 압력으로 해체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지요. 오히려 경준들은 더욱 활동이 편해졌습니다." "......" "그리고 이것은 그동안 백찰무경의 경준들이 조사해서 작성해 놓은 흑서(黑書)입니다." 학거비가 문득 하나의 얇은 책자를 유빙에게 건네주었다. <흑서(黑書).> 일단 백찰무경의 흑서에 오른 인물은 잡힐 때까지 처절한 공포로 피가 말라야 한다. 백찰무경의 추적망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흑서의 명단은 팔왕의 난을 맞이해 새로이 작성된 것입니다. 난 세를 주도해 가고 있는 인물들만을 철저하게 가려놓은 것이지요." 학거비의 설명에 유빙의 눈이 차가와졌다. "몇 명이오?" "마흔네 명 입니다. 모두 소주께서 해치워야 할 자들이지요." "흠.... 이들만 제거되면 난세가 종식된다는 것이오?" "예! 거렁뱅이에서 황족(皇族)에 이르기까지 온갖 모습으로 치장 하고 있으나 하나같이 천하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는 난세의 주역들입니다." "......" "하지만 그 흑서에는 한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창랑왕....?" "그렇습니다." "경준들이 창랑왕만을 흑서에서 제외한 이유라도 있소?" "예! 그가 팔왕 중의 한 명인 낭왕, 창랑왕임은 밝혀졌으나..... 한 가지 기이한 점이 있어 경준들은 그를 제외한 것입니다." "....?" 유빙의 눈에 의혹이 어리자 학거비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하 백찰무경의 수사에 의하면 창랑왕은 어쩐지 본경과 깊은 연 관이 있는 듯 했습니다." "창랑왕이 본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창랑왕의 휘하에는 대천람 이외에도 백팔 인의 절대마인들로 이 루어진 군마장성(群魔長城)이란 세력이 있었습니다." "군마장성?" "예! 그들의 행사가 워낙 은밀하여 아직까지 천하인들 중 아는 사 람이 없으나 지하로 숨어든 본경의 경준들에 의해 밝혀진 것입니다." "일백여덟 명으로 이루어진 군마장성이라....?" "창랑왕이 본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짐작한 것은 바로 그 군 마장성 때문이었습니다." "......" "군마장성을 이루고 있는 백팔마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가공스러 운 것이었습니다. 헌데,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다면 그 들 모두 과거 무림의 공적(公敵)이 되어 본경에 의해 체포된 전설 적인 마웅들의 후예라는 점입니다." "그럴 수가....!" 유빙의 눈이 커졌다. 학거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들 군마장성의 인물들이 모두 과거 일천칠백여 년 동안 본경에 의해 소리없이 제거된 마인들의 후예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악마 의 표본실 적전마람에 표본으로 진열된 마웅들의 후예인 것입니다." "......"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창랑왕이 소주의 가문과 밀접하다는 점입니다." "으음....." 유빙은 머릿 속이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현세에서 군마장성이란 초강 세력을 키워낼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적전마람을 소유한 천종예가의 인물들 뿐입니다. 군 마장성의 인물들은 그들 선조의 모든 무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군. 창랑왕이 오히려 본가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다니....." 잠시 후 유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생각에 잠겨 전면에만 눈을 두고 유빙의 유현 (幽鉉)한 눈 속에 한 가닥 이채가 스쳤다. 마차가 나아가고 있는 전면 아득히 펼쳐져 있는 설원 위에 기이한 흔적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지 않은가? '....?' 무엇인가 육중한 물건을 눈 위로 끌고 간 듯한 흔적, 그 흔적은 설원 위에 선명히 드러나 지평선 아득히 저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 었다. 예의 파여 있는 흔적 주위에는 두 개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한 눈에 누군가가 무거운 물체를 끌며 설원 위를 걸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눈덮힌 백룡퇴를 걸어서 건너는 인물이 있다....? 누군지는 몰라 도 꽤나 고독한 인물이로군. 그것도 무거운 물체를 끌고 간듯 하 니 알 수 없는 일이군!' 유빙은 다시 시선을 거뒀다. 헌데 채 십여 장이나 갔을까? 파인 흔적은 중원으로 향하고 있는 듯 우연히도 유빙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과 일치해 있었는데 그 흔적 주위에 몇 구의 시신이 나 뒹굴어 있지 않은가? 유빙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설원 위에 나뒹굴고 있는 시신들을 살펴 보았다. '이 시신들의 상흔이 실로 괴이하구나!' 유빙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적 좌우에는 모두 네 구의 시신이 있었는데 예의 시신들에는 기 이한 형태의 상흔이 남겨져 있었다. 한 중년인은 뇌문(腦門) 위에 세 개의 구멍이 있는데 그 모양으로 보아 세 개의 손가락으로 뚫어 놓은 듯 했다. 엄지와 검지, 그리 고 중지로 뚫어 놓은 듯 정확히 손가락 위치와 일치하고 있었다. 또 다른 시선은 목줄기에 예의 세 개 구멍이 나 있었고 나머지 한 인물은 놀랍게도 딱 벌리고 있는 입의 천장에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기이하도록 무서운 살상수법이다. 단 일 초의 공격이었던 듯 싶은데....?' 유빙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후 마부석 위로 올랐다. 전진해 갈수록 점차 길게 이어져 있는 흔적의 좌우로 많은 수효의 시신들이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벌써 일곱 명 째다. 죽은 이들의 무공 또한 평범한 것 같지는 않 은데 모두 일 초에 당했다. 재미있군!' 유빙은 마차를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극도의 호기심을 느낀 것이 었다. 두두두두-! 히히힝! 순식간에 일백여 장을 나아 갔을까? 유빙의 눈에 다시 이채가 스 쳤다. 오십여 장 전면의 허공 위에 기이한 물체들이 떠 있지 않은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빙빙 맴돌고 있는 물체들은 바로 수십 마 리의 흰 독수리떼였다. '백응은 홀로 다니는 영물인데 저렇게 떼를 지어 맴돌고 있다니....?' 유빙은 허공 저쪽에서 맴돌고 있는 백응들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 보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길게 파여 있는 흔적과 백응 들이 떠 있는 허공을 차례로 바라 보았다. 백응들이 떠 있는 지점 을 향해 파여 있는 흔적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렇군. 저 백응들이 맴돌고 있는 지점에 이 기이한 흔적을 남기 며 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로군." 유빙은 조금만 더 속력을 내면 흔적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가 속력을 낸 지 반각이 채 못돼 그는 설원 위를 한 인영이 긴 물체를 끌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파란 청의(靑衣)에 희디 흰 털모자를 눌러 쓴 한 인영이 거대한 한 개 백색의 관(棺)을 길게 끈을 연결해 어깨 위로 걸고 끌며 걸 어가고 있었다. 반대쪽 어깨 위에는 한 마리 거대한 백응이 조는 듯 앉아 있고, 머리 위쪽 허공에는 수십여 마리의 백응들이 마치 그의 속도에 맞 추려는 듯 천천히 맴돌며 따라가고 있었다. 굵은 밧줄로 관을 연결한 채 끌고 가고 있는 인물은 유빙의 마차 가 점차 가까와져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있었다. 섬뜩하다고나 할까? 아무도 없는 빈 설원 위에 한 개 관을 끌며 홀로 걸어가고 있는 사내의 전신에서는 실로 기이한 분위기가 느 껴지고 있었다. '기이한 자로군!' 유빙은 마차가 점차 가까이 접근해도 일체 고개 한 번 돌려보지 않는 인물에게서 호기심을 느꼈다. 마차가 삼 장 가까이 다가가 그 인물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유빙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는 대략 십사오 세 정도로 보인다. 새하얀 피부에 희디 흰 털 모자가 이마를 가리고 있어 더욱 피부가 희게 느껴지고 있었다. 헌데 그 용모가 실로 소녀를 방불하리만큼 아름답지 않은가? 어딘가 거친 사내다움이 풍기면서 또한 귀엽기 이를데 없는 미소 년(美少年)이었다. 크고 검은 눈에는 지혜가 감돌고 있었고 전신 에서는 어딘가 고귀한 신분임을 느끼게 하는 위엄이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백룡퇴의 빈 설원 위에 한 개 관을 끌며 가고 있는 인물이 아름답고 귀여운 미소년이었던 것이다. '이 소년이 그 기이한 상흔을 남기며 사람들을 죽인 인물이란 말인가?' 유빙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차를 천천히 몰아 기이한 소년의 옆을 스쳐가며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극히 우호적인 미소를 베어물었다. "태워 줄테니 마차에 타지 않겠나?" "......" 처- 벅! 처벅! 소년은 대답은커녕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걸음을 옮겨갔다. 쓰으윽! "자네는 벙어리인가?" 유빙의 이어지는 질문에 소년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나는 벙어리가 아닙니다. 단지 할아버님이 남에게 신세를 입지 말라고 하셨기에 마차를 탈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미소년의 말은 실로 솔직했다. 음성 또한 치기를 못벗어난 순진한 일개소년의 그대로였다. 환하게 미소하며 말하고 있는 태도 또한 티 한 점 없는 밝은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유빙은 내심으로 의혹과 놀람이 교차했다. '이 소년이 과연 기이한 상흔을 남기며 사람들을 죽인 그 장본인일까?' 아무리 소년을 살펴봐도 유빙은 소년이 그런 살인을 저지렀을 것 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유빙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훗! 신세라고 할 것까지는 없네. 나 역시 중원으로 가는 길에 태 워다 주는 것일 뿐이니....." 유빙이 다시 권하자 미소년이 환하게 웃었다. "아!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약간 피곤을 느끼고 있던 참이니 소제가 마차를 타는 대신 형장에게 술을 대접 하는 것으로 그 신세를 갚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미소년의 엉뚱한 말에 유빙이 고소를 머금었다. "굳이 부담스럽다면 그 방법도 좋겠군. 헌데 자네는 술을 지니고 있는가?" "하하.... 물론이지요." 미소년이 문득 허리를 굽혀 끌고 가던 백색의 거대한 관의 뚜껑을 한 쪽으로 밀었다. 스르륵! 관뚜껑이 밀려나며 그 안의 내용물이 유빙의 눈에 드러났다. 헌데 보기에도 섬뜩한 관의 안쪽에는 사람의 시체가 있는 것이 아 니라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예쁘기 이를데 없는 한 짝의 당혜(唐鞋)와 우아한 털옷, 그리고 어린아이들이나 좋아 할 몇 가지 장난감 등등..... 그 한 쪽에는 약간의 건량(乾糧)과 몇 병의 술호로병이 들어 있었 다. 미소년은 술이 들어 있는 듯한 호로 두 병을 꺼내들며 밝게 웃었다. "마차를 태워주는 대신 제 술을 함께 마십시다. 그러면 내가 신세 진 것도 아니고 서로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훗! 좋은 방법일세." 유빙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소년은 거대한 관을 마차 뒤쪽에 싣고 유빙과 함께 마부석에 앉았다. 미소년이 바로 옆에 앉자 유빙은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욱 가까워진 미소년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두 눈, 그리고 얄팍한 입술이 굳게 닫혀 있는 얼굴은 실로 보기 드물게 영준했다. 게다가 그 영준함 속에 는 화강암과 같은 강인함과 함께 해맑은 천진함이 공존해 있었다. 미소년은 마부석 옆에 앉기 무섭게 술병을 거꾸로 입에 털어 넣으 며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실로 능숙한 태도였다. "자네는 술을 무척 잘하는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세 살 때부터 말술을 즐기는 조부님과 대작(對酌)했기 때문이지요." 미소년이 입술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맑게 웃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술병을 유빙에게 불쑥 내밀었다. 유빙은 아무 말없이 술병을 받아들어 역시 통째로 입에 대며 한 모금 마셨다. 기이하게도 눈 앞의 미소년과 이제 마악 만났고, 상대는 아직 일 개 소년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호기가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술병은 금세 동이 났다. 미소년은 그의 말대로 엄청난 말술이었다. 그는 두 병의 술을 게 눈 감추듯 들이키면서도 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모자란 듯 입 맛을 다실 뿐이었다. 미소년은 다시 자신의 관 속에서 두 병의 술을 꺼냈으나 그것 역 시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소년은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러나?" 술을 마시는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주고 받지 않았다. 그저 주거 니 받거니 술병만을 건네며 마차가 가는대로 몸을 맡긴 채 술을 즐겼을 뿐이었다. "이제 내려야지요. 술을 마실 동안만 마차에 타기로 한 것이 아닙니까?" 유빙은 미소년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 않네. 나는 이미 자네의 술을 마셨으니 자네는 가고 싶은 곳까지 마차를 타고 있어도 되네." 미소년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미 백여 장을 더 왔습니다. 이제 술도 떨어졌으니 더 이 상 타고 있는 것은 신세지는 것이 되지요. 백여 장을 더 타고 온 것은 제가 다음에 만나게 되면 한 잔을 사기로 하지요." 유빙은 미소년의 말투에서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음을 느꼈 다. 내심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미소년은 어느 새 자신의 관을 내리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헌데 자네의 이름이 무엇인가?" 유빙은 점차 뒤쳐지기 시작한 미소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무엇 때문에 나의 이름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순식간에 네 병의 술을 혼자 마시다시피했으나 미소년의 얼굴에는 일점의 취기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유빙이 자신에 대해 묻자 돌연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유빙이 미소했다. "훗날 자네를 찾아 술 한 잔을 얻어 먹으려면 자네의 이름 정도는 알아두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군요." 미소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후 유빙을 응시했다. "소제의 이름은 적리운입니다." '천응소공 적리운!'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빈관을 끌며 백룡의 설원 위를 홀로 걸어가고 있던 이 괴이한 소 년이 바로 위정부의 부주 육합단종 적리노단의 손자 적리운이었단 말인가! 천응소공 적리운, 적리노단의 손자이자 잠천의 신비를 깨고 그 잠천의 천주, 살인혈 황이 된 팔왕 중의 한 명. 놀랍게도 이 황폐한 북방의 설원 위에 서 당금 천하를 주도하는 팔왕 중 두 명이 이렇게 우연히 조우한 것이었다. 유빙은 놀람을 가라앉히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는 유빙이라 하네?" "유빙....? 백찰무경의 대총사....?"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적리운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허나 그는 이내 눈을 돌려 천천히 관을 끌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웬지.... 헤어지기가 섭섭해지는군!' 유빙은 어쩐지 짧은 만남이었으나 섭섭함을 느꼈다. 우연히 마주친 팔왕 중 두 명의 조우(遭遇), 그것은 이렇게 기이한 우정으로 시작되었다. ③ 따가닥-! 따각! 유빙은 적리운이 점차 뒤떨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문득 입을 열었다. "할아범! 할아범은 그 소년에 대해 아는가?" "예! 중원제일의 풍운아 육합단종 적리노단이 천하와 바꾸자고 해 도 싫다고 할 정도로 총애했다는 손자입니다." 지금까지 마차 안에서 조용히 입을 열지 않고 있던 학거비가 대답 하자 유빙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적리운의 허리에 걸려 있는 검(劍)을 보았소?" "글쎄요....! 그것을 어찌 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학거비가 고소하며 반문했다. 그렇다. 적리운의 허리에 걸려 있는 물체, 시커멓게 녹이 슬어 있 는 예의 물체는 검이라고 할 수 없는 기이한 병기였다. 석 자 길이의 뭉툭한 쇠붙이 끝에 매의 발톱같이 구부러진 세 개 의 날이 달려 있는 기병(奇兵), 어찌보면 흡사 살아 있는 매의 다 리를 잘라 놓은 듯한 기병이었다. 유빙 역시 고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분명히 검이었소. 그것도 창궁혈(蒼穹血)이라는 이름을 지닌 아주 유명한 검이지요." "창궁혈!" 유빙의 말에 학거비의 입에서 놀람에 찬 일성이 흘러 나왔다. 유빙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할아범! 창궁성월가(蒼穹聖月歌)라는 노래를 알고 있소?" "창궁성월가....? 성월(聖月)은 유아독존(唯我獨尊)이고 창궁은 핏빛이니.... 하는 노래말입니까?" "그렇소. 그 창궁성월가는 바로 두 가지 기병에 관해 노래한 것이오." "......" "창궁성월가에서 말하는 창궁이란 바로 신비의 살인혈황이 사용하 던 창궁혈을 의미하고 성월이란 바로 본가의 시조이신 사형예조께 서 사용하시던 쌍월을 말하는 것이오." "음.... 그렇다면 적리운은 이미 살인혈황의 모든 진전을 얻었단 말씀이십니까?" "그런 듯하오. 내가 보기에.... 적리운은 이미 천하의 어느 누구 도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무서운 무학을 지닌 듯 하오." 유빙의 말을 학거비는 결코 부정하지 못했다. 단지 좀전에 헤어진 순진하기만 한 소년이 그러한 고수라는 사실에 어쩐지 기이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차손이 불가사의한 실전의 달인이라 평가했던 단두백정 학거비 역 시 이미 적리운의 작은 몸에 숨겨져 있을 엄청난 무공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는 반 시진 가량 더 달려 백룡퇴를 건너 양관(陽關)에 이르렀 다. 양관은 옥문관과 함께 중원의 이대관문 중 한 곳. 이곳 양관 은 중원인과 변방의 호족들이 섞여 살고 있는 경계지역이었다. 이 양관은 또한 변방을 경계하는 북관대군벌(北關大軍閥)의 십만 대군이 거주하고 있어 어느 성도(盛都)에 못지 않게 문물이 풍성 한 곳이었는데..... "할아범! 저 객점에서 잠시 쉬었다 갑시다." 양관의 풍물을 잠시 살피던 유빙이 돌연 마차를 세웠다. 오늘은 걸인들조차 쉰다는 원단인지라 양관에서 문을 열고 있는 객점은 많지 않았다. 그 중 제일 가까운 주루를 발견한 유빙이 고 개를 끄덕이며 그 전면에 마차를 세운 것이었다. "천응소공 적리운이라는 소년을 기다리시렵니까?" 학거비는 유빙의 내심을 눈치챈 듯 조용히 질문을 던지며 유빙의 뒤를 따랐다.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훗...! 아마 이 양관으로 들어서면 만나게 되겠지." 유빙은 부인하지 않은 채 성큼 주루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객점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표사( 士)로 보 이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한 쪽에서 음식을 들며 담소하고 있었고 그들 이외에도 곳곳의 탁자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한 노인과 소녀, 단죽(短竹)을 입에 물고 있는 극히 평범한 용모의 노인과 그에 비해 눈이 번쩍 뜨이도록 아름다운 소녀가 유 빙의 눈을 찔러들지 않는가! 단삼에 홍색 댕기를 매고 있는 소녀의 용모는 어딘가 촌스러운 복 장임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극히 평범한 황의노인이 연신 연초를 빨아대며 입 을 열고 있었다. 그렇다. 기이한 이야기를 팔고 다니는 취설서란 노인과 취려홍이 아닌가. '저 사람들을 이곳에서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유빙과 취려홍과 취노인을 일별한 후 빈 좌석을 찾기 위해 눈을 돌렸다. "이쪽입니다! 이리로 오십시요." 헌데 이때 누군가가 유빙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반색하지 않는가? '도수명인세류표!' 자신을 향해 서슴없이 손을 흔들고 있는 흑의청년을 발견한 유빙 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영준한 용모이기는 하나 창백하기 이를데 없어 가면처럼 느껴지는 얼굴, 놀랍게도 유빙을 향해 반색을 하며 손을 흔들고 있는 인물 은 바로 용병육주비전의 낭인용병 중 한 명인 도수명인세류표였다. 유빙은 그가 너무도 반갑게 손을 흔드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도 수명인세류표의 탁자로 다가갔다. "하하하.... 이곳에서 이렇게 우연히 만날 줄은 몰랐군요. 자!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도수명인세류표는 밝게 웃으며 자신이 따라 놓았던 술을 단숨에 들이킨 후 다시 유빙에게 한 잔을 따라 내밀었다. 유빙은 다소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용병시장에서 본 도수명인세류표는 할말 외에는 아예 입을 열지 않은 채 차가운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무서운 손칼의 명인이었다. 허나 지금의 도수명인세류표는 비록 얼굴이 가면처럼 창백하기는 했으나 마치 활달한 명문자제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기이하군. 용병시장에서 볼 때는 무척이나 말이 없는 소년으로 보이더니....!' 유빙은 도수명인세류표가 활달히 웃고 떠들며 술을 권하자 자리에 앉으며 술잔을 받았다. "헌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 도수명인세류표가 싱글벙글하며 대답했다. "하하하.... 한 마리 짐승을 쫓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헌데 유형(劉兄)은 어떻게....?" "유형....?" 도수명인세류표의 호칭에 유빙이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이 친구는 아직 내가 총행수가 되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유빙의 뇌리에 한 가닥 의혹이 스치는 순간 도수명인세류표가 문득 나직이 속삭였다. "하하.... 물론 유형이 본전의 총행수가 되었음을 소제도 이미 알 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아직 본전에 돌아가지 않았고 임무를 끝 내지 않았기에 아직은 본전의 계율에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 니 유형이라 불러도 섭섭해 하지는 마십시요." 유빙은 도수명인세류표의 너무도 활달한 태도에 다소 어이가 없었 다.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뜻밖이었던 것이다. "하하.... 제가 변한 것 같습니까?" "음.... 솔직히 그렇다네. 나는 자네가 무척이나 말이 없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네." "하하하.... 그것은 봉린주에 있을 때만 그렇습니다. 이처럼 좋은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중원에 나온 이상 무엇 때문에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겠습니까?" "그렇기도 하군....." 유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딘가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도수명인세류표에게 받은 것이었다. "하하.... 한 잔 받으십시요. 유형(劉兄)은 좀 통하는 데가 있을 것 같이 느껴져 그렇지 않아도 중원에서 대형을 만나게 되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한 번 마셔 볼 생각이었습니다." "자네도 술을 잘하는가?" 유빙은 가슴 한 곳이 문득 따스해짐을 느끼며 미소했다. 도수명인세류표가 의아스럽다는 듯 눈을 들었다. "예? 그렇다면 유형도 술을 잘하신단 말씀입니까?" "아, 아닐세. 그게 아니라.... 오다가 술을 잘 마시는 친구를 한 명 만난 적이 있는데 문득 그 생각이 떠올라서 물어본 것일세." 유빙은 도수명인세류표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문득 적리운과 도수 명인세류표가 어딘가 비슷한 점이 있음을 느꼈다. 놀랍게도 도수 명인세류표 역시 말술이었다. 가공할 무학을 일신에 지니고 있으 면서도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활달한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 적리운과 도수명인세류표가 어쩐지 비슷한 성품이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 자! 어서 드십시요." 도수명인세류표는 순식간에 세 병 이상의 술을 마시고 있었다. 헌데 이때, 도수명인세류표와 대작을 하고 있는 유빙의 귀로 귀가 번쩍 뜨일 내용의 말이 흘러들지 않는가! "할아버지! 그럼 제벌의 힘이 황실보다 더욱 굳건하다는 말씀이에요?" "그렇단다."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그럼 제벌의 역사는 어떻게 되죠?" 유빙과 도수명인세류표가 앉아 있는 탁자의 반대편, 그곳에 앉아 있는 취노인과 취려홍은 누군가의 술을 얻어 마신 듯 다시 이야 기를 팔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실로 놀라운 내용인지라 주루 안은 갑자기 찬물 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며 어느 누구할 것 없이 취노인의 말에 귀 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취노인 취설서(醉舌書)는 장내의 이런 분 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려는 듯 천천히 한 잔의 술을 들이킨 후 장 내를 휘둘러 보았다. 제벌의 역사! 뉘라서 궁금하지 않으랴! 하다 못해 제벌 내의 인물조차 제벌에 대해서 모른다고 알려져 있 는 신비단체가 바로 제벌인데 그런 제벌의 역사를 한낱 이야기를 파는 노인이 알고 있다니..... "제벌은 지금부터 정확히 사백 년 전에.... 그러니까 대송(大宋), 휘종(輝宗)때 탄생되었다." 취설서의 말이 조용히 장내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의 음성은 너무도 나약한데다 가끔 기침소리마저 뒤섞여 알아 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내용은 모든 이들로 하여금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당시 중원 최대의 학파(學派)인 금오학파(金烏學派)의 총수이며 유림(儒林)의 대문성(大文聖)이었던 천문성(天文聖) 도당금궁(度 唐金弓)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 무림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었지." "천문성 도당금궁....? 그 사람은 무인이 아닌 문인인 것 같은데 어떻게 무림을 일통시켰단 말인가요?" 취설서와 취려홍이 독특한 대화는 여전했다. 한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며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은 마침 듣는 이들이 의 혹을 느끼고 있던 것인지라 사람들은 점차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중원은 황제가 변방의 오랑캐에게 불모로 잡혀 갈 정도로 어지러운 시국이었다. 제벌은 정사(正邪)를 불문하고 중원인이라 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세워졌기에 무림이 총망라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벌의 탄생에 관해서 그들이 대충 알 고 있는 사실과 부합했던 것이다. 취설서 취노인의 이야기가 끊어 질 듯 이어질 듯 계속되었다. "당시 제벌의 면모를 살펴볼 것 같으면 정도의 핵인 소림을 위시 한 구파일방은 물론 마도의 영원한 대맥(大脈)이랄 수 있는 마교 의 천마일맥(天魔一脈)과 천사일맥(天邪一脈)마저 가세, 무림이 존재한 이래 가히 최대의 세력이었다." "......" "여기에 도당금궁은 비록 무인은 아니나 그 뛰어난 인품과 지략으 로 제벌을 이끌게 되니 제벌은 탄생 오십여 년 만에 굳건한 뿌리 를 내리게 된 것이지." 취려홍이 맑은 눈을 깜빡이며 질문을 던졌다. "정말 이상하군요. 마도와 정도는 물과 기름같은 사이..... 중원 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뭉친 것은 이해가 가나 어떻게 수백 년 동안 계속 존속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취려홍의 질문은 그렇지 않아도 중인들이 느끼는 의혹이었다. 실 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대송이 무너지고 변방의 오랑캐인 몽고의 대원제국(大元 帝國)이 중원을 지배했기 때문이란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대원은 중원의 혼이 무림에 있음을 깨닫고 무림을 말살시키려 했 었지. 대원시절에는 정사를 불문하고 모든 무림문파들이 지하로 숨어야 했던 수난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벌은 같은 목적 아래 더욱 굳건히 뭉쳐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벌은 대원이 중원을 지배함으로써 더욱 음성적으로 거대해지고 강해졌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 대원 지배하의 암흑기에서 제벌은 중원인들에게 야인황 조(野人皇朝)라 불리울 정도로 모든 중원인들의 꿈이었던 것이다." "......" "제벌은 또한 실질적으로 힘이 약한 모든 중원인들의 어려움과 억 울함을 들이 주었다." "제벌은 어떤 일을 했나요?" "예를 들어...., 몽고족에 지배당한 중원인들 중 재물을 강탈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원의 관부에 어려움을 호소하지 않고 제벌에 호소했다. 제벌은 휘하 백찰무경을 동원시켜 그 일의 진부 를 가려내고 흉한을 잡아 법밀사로 하여금 죄인을 심판하게 한 후 강탈한 재물을 돌려주었다." "정말 재미있군요. 무인으로 이루어진 제벌이 야인황조라 일컬어 진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렇다. 중원인들은 대원의 관부에 호소할 수가 없었다. 허나 제 벌에 억울한 일을 호소하면 제벌은 암중에서 그런 부당한 일을 정 확히 해결해 주었지." 취설서 취노인은 다시 한 모금의 술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취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의 음성은 기침소리 에 뒤섞인데다 점차 어지러워졌으나 모든 이들의 귀에 똑같이 파고 들었다. "그 후.... 대원이 중원을 지배한 지 이백여 년, 중원인으로 태어 나 가입하기만 해도 최대의 영광으로 여기는 제벌의 세력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고 끝내 대원은 제벌이 주도하 는 끝없는 반란에 무너지고 말았다." "화아! 사상 최강의 대원제국이 무너진 원인이 그렇다면 제벌 때문이었단 말인가요?" 취려홍이 눈을 크게 떴다. 어느 누구라도 그녀가 다소 과장된 몸 짓을 해보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용모는 실 로 깜찍하면서도 아름다워 그런 과장된 표현이 오히려 귀엽기만 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제벌은 곧 중원 그 자체였으니까. 허나....." "허나....?" "중원 최대의 난제라는 제이차 팔왕의 난 또한 제벌로 인하여 벌 어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제이차 팔왕의 난이 제벌로 인하여 벌어지게 되다니....?" 대화를 유도하는 것은 취려홍이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가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탄식하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모두 교묘히 대화를 이끌어 가는 수단임을 느끼며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원제국이 무너지고.... 쿨럭!" 취설서는 잠시 기침을 터뜨리며 괴로운 듯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취려홍이 황급히 그를 부축하며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할아버지는 오늘 너무 많은 말씀을 하셨어요. 저희는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취려홍의 말에 중인들의 눈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그러자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제기....! 또 술이 떨어졌군. 소저! 이번에는 이 모가(慕哥)가 한 잔 사리다. 이야기를 계속하시구료." 표사차림의 중년대한의 말에 중인들은 취설서 앞에 놓인 술병을 바라보았다. 과연 술병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 서둘러 다시 한 주 전자의 술이 나오자 취설서, 취노인은 한모금 들이킨 후 입을 닦았다. 거짓말처럼 그의 기침은 어느새 멈춰져 있었다. "대원제국이 무너지고 중원은 다시 한 쪽의 손에 돌아와 평화를 되찾게 되자 제벌은 할 일이 없어졌다. 그러자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천하를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 며 제벌은 내분되면서 난세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인들이 침을 삼켰다. 당당한 제벌 천하 아래 뉘라서 이렇듯 당당히 제벌의 치부(恥部) 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허나 취설서 취노인의 이야기는 기이하게도 마치 먼 고대의 이야 기를 하는 듯 담담해 중인들조차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취노인의 음성은 이어졌다. "제벌은 내벌(內閥)과 외벌(外閥)의 두 개의 세력으로 구분되어 있지. 외벌은 위정부와 백찰무경, 그리고 법밀사, 십만종단천인막 등, 가히 중원최대의 다섯 세력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이 분열되 면서 팔왕의 난이 시작된 것이란다." "아! 맞아요. 그 외벌의 다섯 세력의 수뇌들은 대부분 팔왕의 후예들이었어요." "그렇다. 위정부의 적리노단은 잠천의 천주인 살인혈황의 후예이 고 백금전가는 금왕의 후예, 그리고 백찰무경은 천왕이라 일컬어 지는 천종예가의 후예가 아니더냐!" "......" "허나 진정 무서운 것은 제벌의 내벌(內閥)이 분열되고 있는 것이다." "내벌은 어떤 것인가요?" "제벌의 이대세력 중 내벌은 사실 정사연합체의 힘이 총망라된 것 이라 할 수 있다. 그 힘은 오벌의 다섯 세력을 합친 것보다 크면 컸지 절대 아래가 아니다." "......" "헌데 그 내벌이 현임 대벌주 도당문비의 실종으로 그 체계가 무 너지면서 본격적으로 암투를 벌이기 시작했단다. 그 파문은 이제 곧 중원을 뒤덮고 그렇지 않아도 가열되기 시작하고 있는 팔왕의 난을 부채질 할 것이란다." "정말 큰일이로군요. 제벌 예하 일개 세력의 암투만 하더라도 천 하가 어지러울텐데 황실보다 더욱 거대한 세력을 지닌 제벌 전체 가 암투를 벌이게 되다니....." - 제벌의 내분과 암투! 이는 곧 천하의 난세를 뜻함이니..... '취설서! 저 노인은 과연 누구이기에 그 누구도 모르고 있는 일들 을 팔고 다닌단 말인가? 천하의 모든 정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명확히 알고 있다니 평범한 인물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한곁에서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 있던 유빙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취설서 취노인과 그의 손녀 취려홍의 정체에 대 해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취설서 취노인의 이야기를 흥미없다는 듯 무시한 채 연신 술 만 들이키고 있던 도수명인세류표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유형! 소제는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일을 하러 갈 시간이 되었거든요....." "일?" 유빙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도수명인세류표가 자신의 목을 향해 장난처럼 한 손가락을 그어보 이며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살인?' 그의 익살스러운 태도에 유빙은 느끼는 것이 있었다. "금융대인의 청부....?" "예! 그 자의 청부로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이곳으로 왔는데 이제 그 자가 돌아와 있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빨리 끝내고 돌아와 다 시 유형과 술을 마시겠습니다." 도수명인세류표는 유빙이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휘적휘적 주루를 빠져 나갔다. 그의 이런 태도는 마치 살인을 하러가는 것이 아니 라 장터에 물건을 사러가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놀랍군. 살인을 하러가는 인물이 진탕 퍼마시고 있다가 휘적휘적 다녀오겠다니.....' 유빙이 내심 어이가 없었다. 허나 도수명인세류표에 대해 별반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미 도수 명인세류표의 가공할 능력을 목격한 때문이었다. 이때, 취설서 취노인과 취려홍은 또 한 주전자의 술을 받아들고 또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유빙에게 있어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 팔왕예조 제3권 제21장 제벌(帝閥)! ━━━━━━━━━━━━━━━━━━━━━━━━━━━━━━━━━━━ ① 주루 안의 모든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취설서 취노인의 이 야기는 심지어 무림이나 천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개 촌부 (村夫)조차 사로잡고 있었다. "려홍아! 일명, 붉은 늑대라 불리우는 낭왕을 아느냐?" "예! 휘하에 대천람과 군마장성이라는 막강한 세력을 거느리고 얼 마전 위정부를 무너뜨린 창랑왕을 누가 모르겠어요." 취려홍의 대꾸에 대부분의 중인들은 경악에 몸을 떨었다. 위정부 를 무너뜨린 것이 바로 창랑왕이라는 사실과 그 창랑왕 아래 대천 람과 군마장성이라는 세력이 있음을 취노인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서 알게 된 인물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창랑왕과 백찰무경의 총수인 유빙이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알고 있느냐?" "글쎄요.... 헌데 내가 알기로는 창랑왕과 유빙 대총사는 불구대 천지 원수관계인데 어떻게 그런 소문이 났을까요?" "거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단다." "까닭이라니요?" "원래 창랑왕이 거느리고 있는 군마장성의 인물들은 과거 백찰무 경에 의해 사라진 악마의 후예들이다." "아....!"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선조들의 무공을 모두 이어받고 있는 상 태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창랑왕이 천종예가의 인물이 아 닌가 의심하는 것이다." "천종예가의 인물이 아니라면 군마장성과 같은 초강세력을 단숨에 키워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을 했단 말인가요?" "그렇다. 결국 유빙과 창랑왕은 같은 편인 것이지. 어쩌면 천종예 가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무림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이런 터무니 없는!' 한쪽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유빙의 눈이 커졌다. 너무나도 엄청난 오해가 아닌가! 취려홍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창랑왕에 의해 유빙 대총사가 살해되었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요?" "사람들은 그것을 조작된 음모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상을 속이기 위한 음모라고....." 취설서의 대꾸에 무엇보다 유빙의 경악은 극에 달했다.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음모(陰謀), 누군가의 치밀하고도 무서운 음모인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취려홍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짐짓 과장된 태도를 해보였다. 취설서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기는 하나 이미 천하인들은 그것을 사실로 간 주하고 유빙을 천하의 공적으로 단정했단다." "......" "제벌 역시 유빙과 창랑왕을 천하의 평화를 위협하는 최대의 공적 으로 단정한 후 이미 전 제벌 내에 추살령(追殺令)을 발동하고 제 벌의 고수들을 천하에 내보냈단다. 그들은 아마 지금쯤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양관에 많은 무인들이 운집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단 말이에요?" "그렇다! 어쩌면 지금 이 객점 안에도 제벌의 고수들이 있을지 모르지." 우연이었을까? 취설서 취노인의 이야기는 바로 유빙에게 위급한 상황을 경고하는 듯 하지 않은가! 순간 주루 안에 앉아 있던 몇몇 인물들의 눈에 기광이 스쳐갔다. 취려홍이 고개를 흔들다 질문을 던졌다. "헌데 할아버지는 유빙 대총사와 창랑왕이 한편이라는 사실을 믿나요?" 취설서 취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 할아비는 그따위 소문은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문은....?" "조작이지. 누군가 제벌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유치한 음모인 것이다." 취설서 취노인이 단언하듯 내뱉았다. 이때였다. "취설서란 노인은 이 세상에서 모르는 것이 없다 하던데 그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듯 하군." 한 명의 도인(道人)이 천천히 취설서에게 다가들었다. 백색 도관(道冠)의 가슴에 태극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태극도포를 걸친 인물, 그의 손에는 먼지털이가 한 개 들려져 있었는데 누구 도 그의 출현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돌연 주루 안에 나타나 취설서를 향해 다가가고 있 었던 것이다. 그의 용모는 청수하기 이를데 없는 반면 어딘가 음험한 기운이 감 돌고 있기도 했다. "취노인! 그대는 모르는 것이 없다지만 과연 빈도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는가 궁금하군." 도인의 말에 취설서가 흐리멍텅한 눈으로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가 서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제벌 십대장로세(十大長老勢)의 일세(一勢)인 칠정각(七鼎閣)을 이끄는 칠정(七正)의 한 분이신 도정(道正) 태극우사(太極羽士)를 어찌 모를리 있겠소이까." 취설서의 말에 중인들의 눈에 극도의 경악이 스쳐갔다. 천천히 다 가들던 도인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멍청해졌다. 설마하니 취설서가 자신을 단숨에 알아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칠정각(七鼎閣). 제벌의 십대장로세(十代長老勢)의 한 세력. 이 칠정각은 모두 일곱 명의 제벌 장로들로 이루어진 최고의 원로세력이었다. "허....! 나의 도호마저 알고 있다니 그렇다면 빈도에 대해서도 알겠군?" "물론이지요. 중원정통 도교(道敎)인 원교(圓敎)의 유일한 계승자 로 도가십대기학(道家十代奇學)을 섭렵하고 특히 도가제일기병인 태극적채(太極赤彩)로 펼치는 태극칠원사(太極七圓死)라는 절학은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분이지요." "......" "....!" 취설서의 입에서 서슴없이 흘러나오는 말에 중인들은 모두 멍청해 졌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은 이제야 취설서 취노인이 단순히 이야 기 장사꾼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겉보기에 허름한 촌로가 알 아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때문이었다. 중인들의 경악을 무시한 채 취설서 취노인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허나 태극우사는 이단(異端)의 도학(道學)에 심취해 외모와는 달 리 그 성격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잔 혹해졌다고 하지요?" "으음....." 태극우사는 노했다기보다는 어이가 없는 듯했다. 그의 눈빛이 더 할나위 없이 차가와지기 시작했다. "좋아. 조금도 틀리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알 고 있나?" "물론 이 늙은이를 죽이려 하겠지요. 그러나 혀만 살아있는 이 폐 물을 죽여 무엇하시겠습니까....!" 취설서 취노인의 태도는 처연하기 이를데 없어 태극우사의 눈에 또다시 의혹이 스쳤다. 그는 취노인이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니고 있는 무림고인이라 생각했으나 아무리 뜯어 보아도 범상한 구석이 느껴지지 않아 내심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허나 그대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그것이 바로 죽을 이유가 되지." 취설서 취노인이 돌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이곳에 이 늙은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답니 다.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그의 말은 실로 의미심장했다. 동시에 그는 기침을 터뜨리며 자연 스럽게 유빙을 응시했다. 그러자 태극우사 역시 취노인의 눈길을 따라 유빙을 훑어보며 미소하고 있었다. "훗! 유빙 대총사 말인가? 허나 염려하지 말게! 그는 그대보다 먼저 죽을테니....." '음....! ' 유빙의 내심으로 한 가닥 놀람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태극우사는 물론이고 취노인마저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뿐이랴! 태극우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루 안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긴장된 빛을 떠올리지 않는가! '호.... 알고보니 이 객점 안의 모든 인물들은 나를 영접하기 위 해 모여있던 제벌의 수하들이었군!' 유빙의 눈이 어두워졌다. 상황이 명백해졌다. 취노인과 취려홍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제 벌의 수하들로서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방심했군. 이들의 이목이 이토록 영민할 줄이야!' 유빙의 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상대는 이미 유빙의 길목에서 완벽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 었다. 단두백정 학거비조차 마차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어 그는 스스로 완벽한 함정에 빠져든 셈이었다. "유대총사! 우리는 같은 제벌 내에 있으면서도 이제야 처음으로 대면하는군." 태극우사가 차가운 미소와 함께 유빙에게 포권해 보였다. "그랬구료." 유빙은 앉은 자세 그대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범도 공격을 받고 있을까?' 그의 뇌리로는 이 순간 단두백정 학거비의 안위가 못내 궁금하기 이를데 없었다. 각기 변장을 한 채 손님으로 가장해 있던 무인들이 서서히 일어나 퇴로를 차단하며 살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창 밖은 어느덧 석양이 내리깔리고 있었다. ② 한편 이 시각, 도수명인세류표는 짙어지기 시작한 땅거미 속을 소리없이 전진해 가고 있었다. 그가 가고 있는 곳은 양관의 남단(南端)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장원이었다. 도수명인세류표가 걷는 듯 뛰는 듯 소리없이 다가가고 있는 장원 은 조용하기 이를데 없었다. '늙은 개! 금융대인이 너를 죽여 달라고 청부할 때 그 이유를 네 가 흑궐의 일원으로서 법밀사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수명인세류표는 장원이 가까워지자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잠시 장원 내의 기척을 살피기 시작했다. '허나 금융대인이 너를 죽이려는 진정한 이유는 네가 강북의 상권 (商圈)을 움켜쥐고 있어 금융대인이 자꾸 위축받기 때문임을 나는 알고 있다!' 도수명인세류표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훗! 백금전가의 강북상권을 맡고 있는 대상인이면서 또한 흑궐의 인물이라....? 게다가 법밀사와도 관련을 지니고 있다니 포인산 (布引山)! 정말 구역질 나는 놈이로구나." <철장(鐵掌) 포인산. > 중원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백금전가에서 강북의 상계를 한 손 에 휘어잡고 있는 상계의 거두, 그는 지세가 험한 강북의 광산(鑛 山)들을 모조리 독점한 채 엄청난 부를 쌓아올린 거상(巨商)으로 서 표면적으로는 무림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슷-! 도수명인세류표는 어깨 한 번 움직이지 않은 채 소리없이 철장 포 인산의 거룡장(巨龍莊)으로 잠입해 들었다. 이미 땅거미조차 어둠 에 묻혀들어 사위는 어둡기 이를데 없었는데다 그의 신법이 실로 은밀해 아무도 그의 행적을 발견해 내는 인물이 없었다. 쓰윽! 도수명인세류표는 마치 사전에 거룡장의 지형을 익힌 듯 소리없이 수 채의 전각을 뛰어넘어 깊숙한 곳으로 전진해 들기 시작했다. 곳곳에 수많은 호장무사(護莊武士)들이 매복해 있었으나 그의 행 적을 눈치챌 수는 없었다. 채 일백여 장이나 갔을까? 도수명인세류표는 한 채의 전각 앞에서 몸을 멈췄다. 바로 철장 포인산의 거처였다. "어떡한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기절초풍하게 해놓고 단숨에 쓱....? 아니면 소리없이 들어가 조용히 재워 줄까?" 도수명인세류표는 잠시 망설이다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가 처치하 기로 마음먹었다. 상대의 무공이 제아무리 고절하다 해도 그는 자 신이 있었다. 일단 결정이 되면 실행은 빠르다. 꽈앙! 도수명인세류표의 신형은 번개가 번뜩이는 것처럼 일순에 창문을 부수며 실내의 정경을 한눈에 쓸어보았다. 포인산이 눈에 뜨이는 순간 다짜고짜 살수를 전개할 심산이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이 멍청해졌다. 실로 엉뚱한 광경이 그의 눈에 비쳐 들었다. 실내의 중앙, 그곳에는 거대한 체구의 중년 금포인이 두 팔과 가 슴을 격중당한 채 경악과 불신의 눈빛을 띄운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고 그 전면에 한 검은 인영이 우뚝 서 있지 않은가? 검은 인영은 결코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서 있지 않았다. 마치 하나 의 검은 연기 같다고나 할까? 놀랍게도 흑영의 두 발은 치렁한 흑 포에 가려진 채 바닥에서 한 자 가량 허공에 떠 있었던 것이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등까지 치렁한 흑포로 뒤집어 쓰고 있는 흑영 (黑影)이 걸치고 있는 흑포는 실로 괴이해 마치 거대한 검은 포대 자루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놓은 듯했다. 무서운 사기(邪氣)가 흑영의 전신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도수명인세류표가 뛰어 들어오자 흑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심하기 이를데 없는 흑영의 두 눈을 대하자 도수명인세류표는 어쩐지 공포를 느꼈다. 쏴- 앙! 찰나, 검은 그림자가 번뜩이는가 싶자 흑포 속에서 하얀 손이 튀 어나오며 흑영의 몸이 도수명인세류표에게 덮쳐 왔다. 그 속도는 가히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 도수명인세류표는 내심 한기를 삼키며 냉소했다. "흥!" 그의 두 손이 무서운 기세로 뻗어오는 손과 마주쳐 갔다. 팍! "윽!" 도수명인세류표의 신형이 다음 순간 뒤쪽의 벽면을 부수며 퉁겨져 나갔다. 실로 엄청난 힘이 그의 몸을 태풍처럼 날려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도수명인세류표의 눈에 극도의 경악이 어렸다. 자신의 도수(徒手) 에 상대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데 반해 그 자신은 삼 장이나 퉁겨져 나가며 내부가 진탕된 것이었다. 쏴앙! 허나 경악도 일순이었다. 어느새 흑영이 허공에서 몸을 틀며 무서 운 기세로 덮쳐들고 있었다. 도수명인세류표는 도저히 그의 일장 을 감당할 수 없음을 느끼며 지면을 뒹굴어 일장 옆으로 피했다. 꽈앙! 흑영의 손은 그가 서 있던 지면을 강타하며 반 자 깊이로 파여 나갔다. 이 모든 것은 실로 눈 한 번 깜짝할 순간의 일로써 도수명인세류 표가 포인산의 거처로 뛰어들고 흑영과 눈이 마주친 후 그에게 두 번의 공세를 당한 것은 그야말로 번개가 번뜩이는 순간적인 것이 었다. 그동안 흑영은 단 한 순간도 지면에 발을 딛지 않고 있어 진정 유 령을 대하는 듯했다. 허나 두 번의 공세에도 도수명인세류표가 무 사하자 흑영의 눈에 역시 이채가 솟아났다. 쏴아앙! 헌데 어쩐 일인지 흑영은 더 이상 도수명인세류표를 상대할 이유 가 없다는 듯 허공으로 솟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신법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밤하늘에 거대한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소리없이 사라진다고나 할까? '방 안에 죽어 있던 자는 분명히 철장 포인산이었다. 양 팔과 가 슴이 단 일초에 으스러져 죽은 것이다!' 흑영이 밤하늘 저쪽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며 도 수명인세류표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 자가 누구이길래 내가 죽이려던 포인산을 죽였단 말인가? 포 인산 역시 무시못할 고수인데 과연 일 초에 죽은 것일까?' 도수명인세류표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자객이다!" "대인께서 암습당하셨다!" 헌데 바로 이 순간, 거룡장의 사방에서 경악성과 함께 무수한 횃 불이 솟아 오르며 십여 명의 호장무사들이 도수명인세류표에게 덮 쳐들었다. "나는 아니다!" 도수명인세류표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신형을 솟아 올렸다. 삭! 사삭! 장난처럼 휘둘러지는 그의 손길에 두 명의 무인이 짚단처럼 쓰러 졌다. 그들의 몸은 이미 예리한 보도에 당한 듯했다. '흥! 내 몫을 남이 먼저 차지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 허공 십여 장 높이로 솟아오른 도수명인세류표는 차갑게 웃으며 흑영이 사라져간 방향을 향해 질주해 가기 시작했다. 흑영을 끝까 지 쫓아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③ 도수명인세류표는 곤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흑영은 단 한 순간도 지면을 밟지 않은 채 날아간 듯 아무리 살펴 보아도 지면에서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라면 결국에는 지면에 발을 딛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지면 에 내려섰다면 제아무리 미세한 흔적이라도 나의 눈을 벗어날 수 는 없다!' 도수명인세류표는 잠시 멈춰선 채 망연히 허공만을 응시했다. 도 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어찌 계속 허공에 떠 있을 수 있겠는가! 허나 어디에도 흑 영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제기.... 진짜 귀신이란 말인가?" 도수명인세류표가 다시 신형을 뽑아 올렸다. 무턱대고 흑영이 사 라져 간 방향으로 추적해 볼 심산이었다. 헌데, 한 방향으로 질주한 지 채 일각이나 지났을까? 어둠에 묻혀 있는 하나의 야산이 나타나고, 막연히 질주해 가던 도수명인세류 표의 몸이 일순 소리없이 멈춰졌다. 그의 십여 장 전면, 거대한 공지 위에 파르스름한 월광이 내리비 치고 있었는데 그 공지의 중앙에 도수명인세류표가 뒤쫓던 흑영이 한 자 가량 지면에서 떠있는 채 우뚝 서 있지 않은가. 전면에는 세 명의 복면인이 마치 흑영을 가로막 듯 대치해 있었다. "......" 도수명인세류표는 소리없이 십여 장 뒤쪽의 한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흑의괴영을 막아선 세 명의 흑의인은 역시 복면을 하고 있어 그 용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 허나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기도는 그들이 엄청난 고수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흥! 복면대 복면이라? 세상에는 얼굴을 감추고 다니는 인물들이 꽤 많군!' 도수명인세류표는 세 명의 복면인이 흑영을 가로막은 채 대치해 있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냉소했다. 쏴아앙! 이때 흑영의 신형이 돌연 검은 그림자처럼 번뜩이며 세 명 중 한 복면인에게 덮쳐갔다. 꽈앙! "으악!"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흑영의 공격을 받은 복면인은 미처 막아내 지도 못한 채 피를 뿜으며 뒤로 퉁겨졌다. 팍! 찰나, 흑영의 신형이 허공에서 기이한 각도로 꺾어지며 두번째 복 면인을 향해 뻗치고 있었다. 도수명인세류표가 그 순간 볼수 있었 던 것은 단지 헐렁한 소매자락 속에서 번개처럼 튀어 나왔다 사라 지는 흰손 하나뿐이었다. 꽈앙! 와....득! "으윽!" 또 다시 처절한 신음성과 함께 두번째 복면인의 몸도 가랑잎처럼 굴러갔다. 바로 그 순간 세번째의 복면인이 소리없이 검을 뽑아들어 흑영에 게 덮쳐들었다. 흑영의 손이 두번째 복면인의 가슴을 쳐가고 있는 그 순간 그의 검은 이미 흑영의 몸을 스치고 있었다. 허나 두번째 복면인을 쳐낸 흑영의 흰 손은 그 순간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르게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카득! 마악 흑영의 몸에 다가가던 검이 장난감처럼 부서지고 그 순간 흑 영의 흰 손은 무서운 힘으로 세번째 복면인을 향해 파고들었다. 이 모든 것은 그야말로 환상같았다. 새파란 월광 아래 흰 손이 번 뜩이며 선렬한 피의 분수를 연출해 내고 그 순간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세 명의 복면인이 퉁겨져 나가는 것, 이 모든 것은 흑 영의 몸이 계속 허공에 떠있는 그 짧은 순간에 끝나버린 일막의 환상이었던 것이다. '....!' 도수명인세류표의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스쳐갔다. 그의 예상보다 도 흑영의 무공이 더욱 가공스러움을 깨달은 것이었다. 쏴.... 앙! 세번째 복면인의 가슴에서 흑영의 흰 손이 떼어지기 무섭게 그의 몸이 다시 허공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도수명인세류표는 숨도 쉬지 못한 채 흑영이 사라져간 방향을 응 시하다가 천천히 바위 뒤에서 나왔다. "저런 가공할 고수가 있었다니!" 도수명인세류표는 고개를 흔들며 쓰러져 있는 세 명의 복면인에게 다가가 그중 한 명의 복면을 벗겨 보았다. 그것은 그저 무심한 행 동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복면인들이 누구인가 궁금해 복면을 벗 겨본 것이었는데..... "헉!" 복면인의 얼굴을 확인한 도수명인세류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 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사람처럼 그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이, 이 사람은 십 년 전, 봉린주에서 실종되었던 귀족용병!" 도수명인세류표가 다음 순간 미친 듯 나머지 두 복면인의 복면 역 시 벗겨 내렸다. 그의 입에서 또 다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천랑형(天狼兄)! 이 사람 역시 십 년 전에 실종되었던 사람이다! 낭리낭전 최고의 기재로 손꼽히던 천랑형이....?" 도수명인세류표는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흑영과 대치해 있던 세 명의 복면인이 모조리 용병시장, 용병육주비전에서 십 년 전 사라졌던 젊은 기재들이었던 것이다. 당시 용병육주비전에서는 사라져 버린 젊은 기재들이 단지 자유가 그리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 았다. 헌데 놀랍게도 그들이 십 년이 흐른 지금 함께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무엇인가가 있다!" 도수명인세류표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십 년 전에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용병들이 무림에서 은밀 히 활동하고 있었다니!' 도수명인세류표는 흑영이 사라져 간 방향을 직시했다. '이들은 저 흑영이 포인산을 죽이고 이쪽으로 지나갈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하다. 그렇지 않고 우연히 마주쳤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져 버린 용병들은 무엇때문에 그 자와 적대(敵對) 하고 있으며.... 그들은 또 무림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도수명인세류표의 눈에 기이한 것이 이글거렸다. 그것은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강렬한 호기심이었다. "후후.... 좋다! 이렇게 된 이상 흑영을 악착같이 뒤쫓아 갈 수밖에....." 도수명인세류표는 흑영의 뒤를 쫓는 것이 실로 위험천만한 일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실로 예측할 수도 없는 무공을 지 니고 있는 것이다. 허나 공포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쓰윽! 그의 신형이 다시 은밀히 흑영이 사라져 간 방향으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④ 폐장(廢莊). 양관에서 남단을 십여 리 떨어진 가릉산(嘉陵山)의 중턱에는 한 채의 장원이 숨은 듯 자리해 있었다. 허나 말이 장원이지 곳곳의 담장이 허물어지고 편액마저 떨어져 있는 폐장원이었다. 장원의 규모는 실로 거대했으나 일체의 인기척도 없고 잡초만이 우거져 있었던 것이다. '찾았다!' 예의 폐장원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한 곳. 도수명인세류표는 긴장 된 눈으로 폐장원을 살피고 있었다. 귀기(鬼氣)가 흐른다고나 할까? 교교한 월광 아래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있는 폐장원에서는 일체의 인기척도 느낄 수 없어 어쩐 지 음산하기만 했다. 도수명인세류표는 조용하기 이를데 없는 폐장원을 응시하며 한 차 례 몸을 추스렸다. 그답지 않게 공포가 엄습해옴을 느꼈던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는 없지!' 그는 홀로 고개를 끄덕인 후 소리없이 폐장원으로 스며들었다. 폐 장원 전체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허나 후원의 한 별채에 은은히 불이 밝혀져 있어 누군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도수명인세류표는 더욱 조심스러운 신법으로 불이 밝혀져 있는 별 채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전각의 지붕처마에 발을 건 채 불이 밝혀져 있는 한 내실의 창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치 한 마리 박 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 실내를 살피는 자세같았다. 다음순간, 그의 몸이 굳어졌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실내의 중앙 에 과연 흑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흑영의 전면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현의노파가 공손한 태도 로 시립해 있었다. 피폐한 피부에 주름살이 가득해 있는 얼굴이 다. 허나 노파의 전신에는 어쩐지 단아한 기품이 배어 있었다. 헌데...., 신비 흑영의 전면에 서 있는 현의노파는 바로 천문왕부 의 노대부인이 아닌가! 황사(皇師), 만품대부 화우백의 모친이자 대문벌 천문왕부의 최고령자. 아아! 그녀가 어떻게 이 황량한 폐 장원에 있단 말인가? 도수명인세류표는 노대부인을 알지 못했다. 그는 단지 시비처럼 흑영에게 공손히 대하고 있는 노파는 무시한 채 흑영의 동태만 살 피고 있었다. 이때, 노대부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흑영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씨! 수고 하셨어요. 자, 목욕을 하셔야지요?" 노대부인의 말투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했다. 이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흑영의 흑포를 벗겨주기 시작했다. 흑영은 노 대부인에게 모든 것을 맡긴 듯 우뚝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스르륵....! 커다란 흑포가 벗겨지며 먼저 긴 흑발이 드러나고, 이어 백옥처럼 희디 흰 피부와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린 듯한 아미와 주사빛 입술, 그리고 긴 속눈썹. 놀랍게도 그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 흑영은 바로 소녀가 아닌가! 대략 십팔구 세? 드러난 신비여인의 용모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창백한 안색과 갸름한 얼굴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여자였다니!' 도수명인세류표는 드러난 흑영의 정체에 내심 아연했다. 이 순간 노대부인은 놀랍게도 신비여인의 옷을 하나하나 모조리 벗겨가고 있었다. 기이하지 않은가? 신비한 괴여인은 노대부인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일체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스르륵....! 가슴으로 이어지는 구릉이 백옥으로 조각한 듯 현란함을 발하며 드러나고 곧이어 길게 뻗어내린 두 다리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 지 않은 채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양지유(羊肢油)를 부어 만든 듯 늘씬하게 뻗어내린 지체(脂體)를 대하는 순간 도수명인세류표는 가슴이 진탕됨을 느꼈다. 너무도 환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허나 이 순간 그는 의아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이하 게도 신비여인은 옷이 모두 벗겨지고 있는 순간에도 멍청히 서 있 을 뿐이었던 것이다. 도수명인세류표는 기이함을 느끼며 여인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은 마치 백치처럼 촛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백치....? 그럴 수가! 백치가 어떻게 무공을!' 도수명인세류표는 불가사의함을 느낀 채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여인의 옷은 모두 벗겨져 그녀는 완전한 나신(裸身)이 되 어 우뚝 서 있었다. "자, 어서 목욕을 하세요." 노대부인은 여인의 옷을 모두 벗긴 후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 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러자 여인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멍청한 눈으로 노대부인의 뒤를 따랐다. '정녕 백치였단 말인가?' 도수명인세류표는 그녀가 노파의 손에 이끌려 멍청히 뒤따르는 모 습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이때였다. 돌연 백치처럼 표정없는 여인의 눈이 창문 밖에서 몰래 엿보고 있 던 도수명인세류표의 눈과 마주쳤다. '....!' 도수명인세류표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왔다. 그 순간 그는 보았던 것이다. 백치처럼 아무런 감정도 담겨져 있 지 않은 채 멍청하던 여인의 눈에 이채가 스치며 싸늘한 한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도수명인세류표는 자신이 그녀에게 발각되었음을 깨닫고 식은 땀 을 흘렸다. 꼼짝없이 그녀의 손에 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순 간이었다. 헌데 천운이랄까? 백치여인의 눈 속에 서서히 살기가 어리는 순간 노대부인이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씨! 어서 목욕을 하시라니까요." 순간, 도수명인세류표를 향해 고정되어 있던 그녀의 눈이 다시 풀 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순식간에 그녀의 눈이 멍청해지며 순순 히 노대부인이 잡아끄는대로 욕실(浴室)인 듯한 휘장 뒤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후유....!' 도수명인세류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황급히 몸을 날려 장 원 밖에 내려서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도 놀라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난 기분으로 휘적휘적 장원에서 멀어져 가며 머릿속에 맹렬히 피어오르고 있는 의혹을 풀어내기에 전전긍 긍하기 시작했다. ■ 팔왕예조 제3권 제22장 죽음(死)의 축제(祝祭) ━━━━━━━━━━━━━━━━━━━━━━━━━━━━━━━━━━━ ① 유빙을 향한 천라지망(天羅之網), 위기는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주루 안에 있던 십여 명의 무인들이 서서히 병장기를 뽑아들고 그 가운데 태극우사가 사이한 미소와 함께 유빙에게 다가들었다. 팟! 찰나, 바람을 끊는 음향과 함께 태극우사의 태극적채가 유빙의 가 슴 중궁혈(中宮穴)을 노리고 뻗어왔다. 힘 하나 없이 흔들거리던 먼지털이가 마치 예리한 창끝처럼 꼿꼿이 선 채 유빙의 가슴을 쩔 러들어온 것이었다. 그 속도는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좋은 초식이요." 유빙이 담담히 외치며 우수를 뻗었다. 일견 느린 듯한 손이었으나 그 순간 태극우사의 먼지털이는 이미 그의 장세 안에 갇혀 있었다. 그의 출수(出手)는 분명 태극우사보다 느렸으나 오히려 태극우사 의 출초(出招)보다 훨씬 빨리 그의 얼굴을 쳐가고 있었다. "흥!" 태극우사의 몸이 냉소와 함께 소리없이 좌측으로 이동했다. 동시 에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태극적채 역시 목표를 바꾸어 유빙의 손목을 휘감아 왔다. 뿐이랴! 태극적채는 다음 순간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며 엄청난 속 도로 유빙의 전신대혈을 휘어 감아오고 있었다. 수십여 대의 먼지 털이가 유빙의 전후, 좌우, 상하로 번뜩이며 철벽같은 강기의 막 을 형성하고 있었다. 광풍노도를 방불하는 태극우사의 공세 속에서 유빙은 담담히 우수 를 거두어 들이고 좌수를 허공에 내리 그었다. 그 일초는 행운유 수 같이 산뜻하고도 자연스럽게 펼쳐진 것이었는데 일순 하나의 수영(手影)이 허공중에 떠오르며 번뜩이지 않는가? "헉!" 태극우사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한창 공격일변도로 나가던 그는 상반신의 전체 방위(方位)가 어느새 유빙의 수영(手影)아래 휩싸 여 버린 것을 깨달았다. "일견사수!" 피할 수도 없었고 막을 수도 없다. 유빙의 장세는 부드러운 가운데 믿을 수 없으리만큼 빨랐고 태극 우사의 무기는 부드럽기 이를데 없는 적채인지라 어지럽게 허공을 휘어감을 뿐 느린 듯 하면서도 빠른 유빙의 공세를 막을 수가 없 었다. 파앙! 팽팽해졌던 공기가 터져나가는 듯한 음향과 함께 태극우사의 몸이 뒤로 퉁겨졌다. 그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빙의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무서운 일초에 그는 굴욕적으로 자신의 병기를 집어 던지며 몸을 빼낸 것이었다. 유빙은 어느새 태극우사의 태극적채를 손에 쥐고 담담히 미소했다. "원단 선물치고는 별로 마음에 안 드는군." "......" 태극우사의 얼굴이 노기로 달아올랐다. 천하 최고의 고수라 자처하던 그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른 채 얼떨결에 자신의 병기를 빼앗긴 셈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담담 할 수 있으랴! 허나 그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놀랍군. 자네를 다소 경시한 것을 사과하겠네. 일체 무공을 모르 던 그대가 삼 년만에 이러한 경지에 오를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허허허.... !" 태극우사는 담담히 미소한 후 주위의 무인들을 쓸어보았다. "잠시 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네." 이어 그는 가볍게 손뼉을 친 후 서슴없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유빙은 그의 돌연한 태도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태극우사의 눈짓을 받은 무인들은 엄밀하게 유빙의 퇴로를 차단한 채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휘익! 한 개 장창이 똑바로 유빙을 찔러 들었다. 유빙은 태극우사가 조용히 사라진 것이 어떤 안배를 위한 것임을 느끼며 가볍게 손을 휘둘러 장창을 잡은 후 되돌려주듯 밀어냈다. "으악!" 장창으로 공격을 했던 무인은 자신이 쥐고 있던 장창의 손잡이에 가슴을 난타당하며 뒤로 퉁겨져 나갔다. 그의 가슴에는 어느새 그 자신의 장창이 거꾸로 자리해 있었다. 다음 순간, 가만히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겨있는 듯 하던 유빙은 번쩍 눈을 들더니 무서운 기세로 무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까득! "윽!" 순식간에 처절한 비명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몸을 흔들하며 무인들 사이를 헤쳐나가는 순간 그의 그림자가 스 쳐지나는 곳마다 한 사람씩 쓰러지기 시작해 순식간에 십여 명의 무인이 모조리 지면을 구르고 있었다. '이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것이다. 이 주루 안에 있는 인물들만 해도 이렇다 할 고수 가 없다. 단지 우연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유빙은 한 마리 물고기가 물살을 헤치듯 빠르게 십여 명의 무인들 을 모조리 제압한 후 천천히 취설서 취노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태극우사는 분명 더욱 완벽한 천라지망을 펼치기 위해 몸을 빼낸 것이다!' 유빙은 다소 다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빙이 말없이 주루를 빠져나가려 하는 순간 취설서 취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공자! 공자는 이 늙은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합니다." 유빙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흐리멍텅한 취노인의 두 눈 속에 기광이 솟아났다. "헌데 왜 묻지 않는 것인가?" "노인장께서 가르쳐 주고 싶었으면 벌써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가르쳐 주고 싶지 않은 듯 한데 무엇 때문에 물어보겠습니까?" 취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만한 젊은이로군. 그러나 조심하게. 제벌은 팔왕의 힘을 모으기 전에는 절대 무너뜨릴 수 없지. 용병육주비전의 힘만으로 는 어쩔 수 없을 것이네." "기억해 두겠습니다." 유빙은 가볍게 포권해 보인 후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향해 취려홍의 맑은 눈이 쫓아오고 있었다.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주루 밖으로 한 걸음 나서던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펑! 퍼퍼펑! 슈우우욱! 수많은 폭죽이 어둠에 잠겨있는 허공에 치솟아 오르고 다음 순간 무수한 불꽃이 화려하게 암천(暗天) 위에 피어나고 있었다. 폭죽과 불꽃놀이였다. 뿐이랴! 그야말로 엄청난 사람들의 행렬이 각기 기이한 탈을 쓴 채 양관의 대로를 누비고 있지 않은가. 나찰(羅刹)의 탈을 쓴 사람을 비롯하여 인왕(仁王), 수라(修羅), 십팔동자불(十八童子佛) 등등 온갖 형상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물 결처럼 양관의 대로를 온통 메운 채 이리저리 밀려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용의 탈을 쓴 채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용무(龍舞)를 추는 사람들이 선두에 서고 그 뒤쪽으로는 징이며 꽹과리 등 온갖 악기 를 연주하며 많은 사람들이 원단의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행렬 중앙에는 거대한 세존의 열반상이 올려져 있는 거 대한 꽃상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원단의 경축일에 중원 어 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풍습이었다. 유빙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 이 원단 축제는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인지라 양관의 모든 사람 들이 모두 참가해 있었고 그 즐거운 모습을 대하자 유빙은 문득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공자의 만수축원을 기원합니다." 사람들의 행렬이 물결처럼 밀려가는 것을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유빙에게 나찰의 탈을 쓰고 있는 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실로 자애스러운 노파의 음성이었다. "저 역시 할머님의 만수무강을 축원드립니다." 유빙이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유빙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뿅!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은 채 미소짓고 있는 유빙의 얼굴을 향해 돌연 하나의 비침(飛針)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 왔다. 슈우우-! 예의 비침은 가늘기 이를데 없었는데 놀랍게도 바로 노파의 입에 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들의 거리는 겨우 반 장여, 피한다는 것 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공격이었다. '....!' 유빙은 크게 당황해 얼굴을 굳히며 자신의 입으로 예의 비침을 받 아냈다. 비침은 순식간에 그의 이빨 사이에 낀 채 파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유빙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유빙이 고개를 들어 노파를 찾는 그 순간 노파는 이미 사람들의 행렬 속에 묻혀 사라져 버리 고 없었다. "아저씨는 즐겁지 않으세요? 왜 그렇게 혼자 인상을 쓰고 있어요?" 이때 익살스럽게 생긴 동자탈을 쓰고 있는 소년 한 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유빙의 턱 밑에서 빤히 그를 올려다 보고 있지 않은가! 유빙은 비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훗! 왜 즐겁지 않겠니. 나도 즐겁단다." 유빙은 고소를 머금으며 소년을 부드럽게 내려다 보았다. "이거 받으세요." 순간 소년은 손에 쥐고 있던 폭죽을 유빙의 손에 쥐어주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 후 사람들의 행렬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 얼떨결에 소년이 건네주는 폭죽을 받아든 유빙의 눈에 다음순간 경악이 솟아났다. 파파파파박! 돌연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폭죽이 요란한 폭음을 발하며 불타오 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폭죽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이 가공할 기세 로 유빙의 전신을 휘어잡았다. "훗! 지옥녹린화(地獄綠燐火)!" 유빙이 고개를 저으며 소매를 휘둘렀다. 화르르- ! 유빙을 집어 삼키려는 듯 솟아오르기 시작하던 불꽃이 다음순간 그의 소매 속으로 빨려들어가며 사그러 들었다. 이 순간, 양관의 대로로 물밀듯이 밀려가던 축제의 행렬이 돌연 방향을 바꿔 유빙을 가운데에 두고 그의 주위에서 맴돌기 시작했 다. 펑! 퍼퍼펑! 폭죽과 불꽃은 여전히 터져오르고 숱한 사람들은 여전히 몸을 흔 들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더 이상 축제 행렬이 아니었다. '인(人)의 장막이다. 나의 죽음을 기다리는....!' 천천히 주위를 쓸어보던 유빙의 눈이 굳어졌다. '이들은 양관의 사람들이 아닌 제벌의 무인들이다!' 번쩍! 화르르- ! 이 순간, 하나의 기이하게 생긴 폭죽이 허공 높이 치솟으며 불꽃을 터뜨렸다. 헌데 예의 불꽃은 하나의 국화 무늬를 형성하지 않는가? 아아.! 그것은 바로 제벌의 문장(紋章)이었다. '으음.... 이곳 양관의 사람들을 모조리 제벌의 수하들로 바꾸었 단 말인가....!' 유빙은 차라리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쏴아아앙! 아수라의 형상을 하고 있는 탈을 쓴 대한이 돌연 계도를 벼락같이 유빙의 머리를 향해 쏘아갔다. 드디어.... 그 엄청난 인의 장막이 유빙 한 사람의 죽음을 위해 공격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번쩍! 유빙은 가만히 계도가 머리 반 자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귀영 (鬼影)처럼 미끄러지며 손을 뻗어냈다. 그의 손은 가볍게 대한의 가슴에 닿았다 떨어졌다. "윽!" 아수라탈을 쓴 대한의 몸이 부르르 진동되다 다음 순간 털썩 지면 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는 어느새 검붉은 선혈이 흘러 나 오고 있었다. 그것이 신호인 양 엄청난 공세가 파상적으로 유빙을 향해 밀려오 기 시작했다. 고오오-! 유빙의 신형이 물결 흐르듯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꽈꽈꽝! 무수한 공세 속의 그의 신형은 마치 한 점 공기인 양 공세의 물결 을 타기 시작했다. 그는 그저 한 개 가벼운 깃털인 양 공세 사이 를 빠져나갈 뿐 좀처럼 반격을 펼치지 않았다. '난감하군. 이 많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 고.....' 쏴아앙! 한 개 강전(强箭)이 돌연 허공을 타고 흐르는 유빙의 등으로 덮쳐 왔다. 공기를 끊는 예의 강전에 유빙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실 그의 신법은 상대의 공세에서 일어나는 미미한 경풍을 타고 흐르 는 것인지라 상대의 공세가 제아무리 빠르다 해도 그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이렇게 공기를 끊으며 가공할 위세로 날아드는 강전 앞에서 는 그런 신법조차 무용지물인 것이다. 팍! 강전이 양단되며 지면에 떨어졌다. 흰 빛이 유빙의 허리에서 솟아나 강전을 베고 다시 허공에 하나의 원을 형성했다. 어느새 유빙의 손에는 사형예조의 기병 쌍월이 쥐 어져 있었다. 팍! 사삭! 유빙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인해(人海)의 공세에 양손에 쌍월을 나 눠쥐고 원형을 그리며 번갈아 공세를 퍼붓고 물러서곤 했다. "와악!" "크윽!" 꽈꽝! 왼손의 소도(小刀)가 작은 원을 그리고 물러나는가 하면 오른손의 장도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뒤이어 인의 장막을 덮쳐들었다. 큰 원, 작은 원, 수평 원, 수직 원에 겹쳐 또다른 원이 비스듬하 게 밀려 나가며 그 원이 그리는 곡선(曲線) 내의 모든 것을 베어 버리기 시작했다. "큭!" 사악! 유빙의 운검(運劒)은 면면히 그침이 없었다. 흰 구름이 창천(蒼天)을 날 듯 유유자적하며 하나의 원둘레가 다 돌기도 전에 또 하나의 원이 떠올랐다. 사악-! "와아악!" 그때마다 쪼개진 탈과 부서진 병장기가 허공에 우박처럼 쏟아져 내린다. 원월도법(圓月刀法), 그 가공할 악마의 초식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헌데 이때, 양관의 대로 저쪽에 한 기이한 인영이 서서히 나타나 의혹의 눈으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거대한 관을 끌고 어깨 위에 한 마리 백응을 올려놓은 십오 세 가 량의 미소년! 바로 적리운이었다. ② 엄청난 인해(人海)의 공세를 펼치고 있는 제벌의 수하들 뒤쪽 대 로상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적리운은 문득 걸음을 옮겨 제벌의 수하중 한 명의 등을 툭툭! 쳤다. "왜 싸우는 거야?" 적리운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상대는 전면의 유빙에게만 신경 을 쓰고 있어 그것을 의식치 못하고 있었다. "어? 왜 싸우는 거냐니까?" 적리운이 다시 그 자의 등을 툭툭 쳤다. '....?' 아수라탈을 쓰고 있던 상대가 의혹의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 나 상대가 아직 소년인지라 그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뭐 이따위 꼬마가 있어!" 그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조는 듯 적리운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백응이 돌연 그 자의 얼굴을 덮쳐가지 않는가! 카.... 아! 그것은 실로 번개같은 공격이었다. "으악!" 아수라탈을 쓰고 있던 자의 탈이 그대로 깨져 나감과 동시에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틀거렸다. 얼굴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선혈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백응은 그 순간 이미 적리운의 어깨 위로 돌아와 다시 조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적리운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비응! 너....." 그는 자신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백응의 머리를 한 손가락으로 톡 톡 치며 어이가 없다는 듯 더듬거렸다. "너 왜 내 승낙도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공격하는 거지? 그래도 되는 거야?" 적리운이 질책하듯 질문을 던지자 백응이 부리를 그의 어깨에 비 비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것은 마치 애교를 부리고 있는 듯 귀여 운 모습이었다. "너어...., 앞으로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있으면 혼내 줄 거야!" 적리운은 엄하게 으름장을 놓은 후 다시 격전장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비켜!" 그는 밧줄에 길게 연결된 백색의 관을 끌며 돌연 유빙을 포위하고 있는 제벌의 수하들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 중인들의 눈이 커졌다. 살벌하기 이를데 없는 격전장에 돌연 수려하기 이를데 없는 미소 년이 관을 끌고 나타나 비키라고 소리치니 멍청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넌 뭐하는 놈이냐?" "어디서 저런 게....?" 제벌의 수하들은 아예 적리운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허나 적리운은 태연히 입을 열었다. "나? 길가는 사람..... 헌데 왜 길을 막고 있는 거야?" 순간 별안간 일검(一劍)이 좌측에서 적리운을 향해 날아들었다. 서늘한 기운이 이미 적리운의 가슴에 이르러 있었다. "죽어!" 호통성은 그 뒤에 들려왔다. 허나 순간 백광이 번뜩임과 동시 소리를 지르며 일검을 쳐냈던 인 왕탈을 쓰고 있던 대한의 눈이 커졌다. "크....윽!" 아아, 그의 목을 보라! 어느새 그의 목에는 세 개의 발톱자국같은 기이한 상흔이 생겨 있고 예의 상흔으로부터 검붉은 선혈이 흘러 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 어느 누구도 적리운의 손이 움직이는 것 을 본 사람은 없었다. 어느새 적리운은 매의 다리를 잘라놓은 듯한 기병을 다시 허리에 걸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때요? 당신의 검이 빠른가요? 아니면 내 검이 빠른가요?" 적리운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대한의 곁을 지나가며 천 진난만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 이미 싸늘히 식어버린 대한이 대답할 리 있겠는가! "으....!" "저, 저자가 누구이기에....." 제벌의 수하들은 돌연 출현한 적리운의 등장에 공포를 느꼈다. "왜 길을 막고 있지요?" 번쩍! 적리운은 장난처럼 손을 저으며 계속 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 순 간마다 정확히 한 명씩 기이한 형태의 상흔을 남기며 쓰러져 갔 다. 허나 적리운의 음성은 끝까지 밝고 쾌활해 일개 소년의 태도 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제벌의 수하들이 적리운의 존재를 느꼈을 때는 이미 많은 인물들 이 지면을 구르고 있었다. 그의 검기(劍氣)는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활달하고 천진한 표정 뒤에 숨겨진 가공할 살인비기(殺人秘技)는 실로 공포를 느끼게 하 기에 충분했다. 적리운은 순식간에 포위망을 뚫고 유빙 앞에 이르렀다. "유형! 왜 싸우는 거야?" 유빙이 미소했다. "이들이 나를 죽이려 하기에 할 수 없이 상대해 주고 있을 뿐이네." 적리운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얼굴을 감추는 자들치고 좋은 사람은 없다고 할 아버지가 말씀하셨었지. 헌데 언제까지 이렇게 싸우고 있을 거야?" "왜? 급한 일이라도 있는가?" 격전은 이미 멈추어져 있었다. 유빙의 가공할 무학만 해도 공포스 러운 것이었는데 여기에 적리운마저 태연히 나타나 무서운 무공을 드러내고 있으니 아무도 감히 더 이상의 공격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빙의 질문에 적리운이 환하게 미소했다. "응! 아주 급한 일이야." "무슨 일인데....?" 유빙은 그의 순박한 태도에 부드럽게 미소했다. "하하....! 술 마시는 일이지." "술....?" 유빙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것이 그렇게 급한 일인가?" 적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정색하며 빤히 유빙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어!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싸 우면서도 술을 즐기셨는데...., 그리고 유형에게 술을 대접할 일이 있잖아." 유빙이 머리를 흔들었다. "이래가지고야 어디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유빙은 아직 물러가지 않은 채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제벌의 수하들을 들러보았다. 적리운이 문제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내게 방법이 있어." "....?" "이런 조무래기들은 내 친구들이 알아서 할 거야." 유빙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순간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적리 운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삐이익! 예의 휘파람소리는 길게 이어져 끝없이 퍼져 나가는 듯 오랫동안 장내를 뒤흔들었다. 쏴아아.....! 카아아! 다음 순간, 돌연 아득한 허공 위에서 한무더기 흰 구름같은 것이 쏜살같이 내려오지 않는가! 카...아! 그것은 한떼의 백응(白鷹)들이었다. 희고 흰 털이 탐스럽기 이를 데 없는 흰 독수리떼의 수효는 결코 적지 않았다. "으윽!" "피, 피해라!" 어림잡아도 일천여 마리가 넘는 흰 독수리떼가 덮쳐들자 제벌의 수하들은 기겁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이 독수리떼에 의해 죽어갔다. 독수리떼의 위력 은 마치 하나의 해일(海溢)이 덮쳐오는 듯했다. "어때....?" 적리운이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유빙을 바라보았다.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부하들이군. 헌데 술은 어디서 먹는 것이 좋겠는가?" 적리운이 끌고 온 관에서 두 병의 술을 꺼내며 사면을 휘둘러 보 았다. 그는 양관에 당도하기 무섭게 술부터 사서 관에 채워놓은 듯 그 안에는 십여 병이 들어 있었다. "음....! 저기가 어떨까?" 적리운이 가리킨 곳은 한 채의 전각 지붕 위였다. "지붕 위....?" "응! 얼마나 좋아. 달빛도 좋고.... 운치도 있으니 말이야." "하하....! 그럴 듯 하군." 유빙이 크게 웃었다. 동시에 유빙과 적리운은 손을 나란히 잡고 허공을 밟으며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서 월광(月光)을 받으며 술을 마시는 기분은 실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쾌했다. "하하....! 할아버지께서 가끔 위정부의 지붕 위에서 홀로 술을 잡수시곤 했는데 그것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적리운은 박장대소하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그의 말투는 실로 기이해 때로는 존칭(尊稱)을 사용하다가 또 때 로는 응석받이 어린아이처럼 하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의 말투도 유빙에게는 듣기 좋았다. 순식간에 한 병의 술이 바닥났다. '오늘 하루만 해도 벌써 두 명의 주당(酒黨)을 만났군. 그것도 나이어린 주당을.....' 유빙은 내심 고소를 머금으며 문득 적리운을 바라보았다. "듣기에 적리대인께서 누군가에게 피습을 당하셨다는데 자네는 복 수를 위해 돌아온 것인가?" 적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세인들은 내가 팔왕 중 일인이니, 난세의 주역이니 하는데 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적리운은 마치 남의 말을 하듯 가볍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천하의 패권에는 진정 관심이 없다는 뜻인가?" "하하....! 저는 단지 저 관에 할아버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할아버님을 죽인 자를 만날 수 있다면 그때 할아버지의 복수를 해드릴 수도 있지요." "......" "그런데.... 유형은?" "나는 할 일이 좀 있네!" "하하....! 저는 단지 할아버님의 시신만 수습하면 되니 간혹 유 형의 일을 도와드릴 수도 있겠군요."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잠시 적리운을 바라보다가 그의 눈에 진정(眞情)이 감돌고 있음을 느끼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줄 수 있겠나?" "하하....! 물론이지요. 제가 유형의 일을 도와주어야만 함께 대 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을 테니까요." "하하....! 단지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해 도와준다는 것인가?" 유빙이 밝게 웃었다. 적리운의 태도가 일체의 가식(假飾)도 없는 순박한 것인지라 어느새 그에 대한 훈훈한 정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삐이이익! 돌연 그들의 머리 위쪽 암천에 길게 기이한 음향이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적리운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빙은 적리운이 당황해 하는 표정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암천을 쓸어보았다. "......" 그들이 앉아있는 지붕 위쪽 허공 저쪽에서 무엇인가가 똑바로 그 들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 일백여 장 저쪽에 있었으나 유빙이 발견한 순간 이미 오십여 장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 속도는 실로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물체는 한 마리 거대한 백학(白鶴)이었다. "이크! 저 계집애가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적리운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백학의 등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녀의 용모는 실로 앙증스러웠다. 겨우 십이삼 세나 되었을까? 입고 있는 것은 팔과 종아리가 그대 로 드러난 짧은 녹의단삼(綠衣短衫)이었고 한 손에는 기이한 형태 의 작은 적궁(赤弓)이 들려 있다. 소녀는 백학을 타고 순식간에 적리운과 유빙의 머리 위쪽으로 날 아와 허공에서 한 바퀴 맴돈 후 적리운을 향해 날카로운 일성을 흘려냈다. "흥! 날 따돌린 이유가 이제 보니 이렇게 다른 사람하고만 술을 먹으려한 것이었구나." 소녀가 백학 위에서 매섭게 노려보자 적리운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흥, 뭐가 아니란 말이야!" 소녀는 날카롭게 외친 후 백학의 등에서 뛰어내려 사뿐히 지붕 위 로 내려섰다. 이어 그녀는 다짜고짜 적리운이 꺼내놓은 술병을 집 어들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 유빙이 멍청해졌다. 느닷없이 앙증맞기 이를데 없는 녹의단삼 소 녀가 백학을 타고 나타난 것도 그렇거니와 이제 겨우 십 이삼 세 가량 밖에 되지 않은 소녀가 대뜸 술을 마시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그뿐이랴! 술을 마시는 그 태도가 너무도 능수능란해 아무리 보아 도 그녀 역시 적리운에 못지 않을 말술임을 알 수 있었다. '놀랍군! 이런 어린 소녀까지 말술이라니....!' 유빙은 맛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음미하고 있는 단삼소녀를 바라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누구인가....?" 유빙이 적리운을 향해 조용히 질문했다. 적리운이 시무룩한 음성으로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남황(南荒), 은붕성(隱鵬城)의 소성주인 취봉란(醉鳳蘭) 여홍옥(呂紅玉)이야." "은붕성?" 유빙이 이채를 떠올렸다. <은붕성(隱鵬城).> 남황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환상의 성(城)이다. 이 은붕성은 신비 한 전설처럼 알려지지 않은 은자의 단체로써 구름 속을 노니는 한 마리 대붕처럼 세상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은 채 남황 일대의 신 (神)처럼 숭상받고 있는 신비단체였다. "잘 아는 사이인가?" 유빙은 내심 놀람을 감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몰라. 이제 겨우 세번째 만나는 거야. 백응 때문에 알게 됐어." 적리운이 골치 아프다는 듯 대꾸하자 순간 취봉란 여홍옥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잘 몰라....? 나를 잘 모른다고? 이제 겨우 세번째?" "....!" "그게 어디 겨우냐! 세번씩이나지..... 아니, 그래 세번씩이나 만 난 사이인데 잘 모른다는 것이 말이 돼!" "....!" "그리고 너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취봉란 여홍옥의 말은 번개처럼 이어졌다. 그 긴말이 어떻게 그렇 게 빠른 속도 안에 튀어나올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건 그렇지만....." 적리운이 쩔쩔맸다. 그러나 그는 억울하다는 듯 눈을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번 만난 것은 사실이잖아." "흥, 날 좋아하면 됐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끄응....!"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거야? 또 저번처럼 도망가려고....?" "아, 아니야!" 적리운이 깜짝 놀라 손을 저었다. 그러자 여홍옥이 매서운 눈으로 잠시 적리운을 쏘아보다 다짐하듯 입을 떼었다. "또 도망가지 않겠다는 말.... 약속할 수 있어?" "그, 그게....." "약속하지 않겠다는 거야?" 여홍옥의 눈이 앙칼지게 부릅뜨여지자 적리운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아니야. 약속할께." 여홍옥의 얼굴이 순간 활짝 밝아졌다. "좋아. 난 네가 정말 마음에 들어. 술도 잘 마시고.... 음! 얼굴 도 잘 생겼고 우린 앞으로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오늘 마음껏 마시는 거야. 좋지?" '좋은 부부?' 한곁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빙은 멍청해졌다. 여홍옥의 말은 그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음! 그리고 술을 마신 후 우리는 중원을 여행하는 거야. 같이 구 경도 하고...., 실컷 술도 마시고...., 어때, 좋은 생각이지?" "......" 적리운이 고개를 숙인 채 대꾸하지 않았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유빙의 내심으로 미소가 솟아났다. '후후....!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구나!' 이때, 지금까지 한 번도 유빙을 쳐다보지 않던 여홍옥이 돌연 유 빙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화살을 유빙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유빙이라는 사람이야?" "그렇다네." "운아 보다는 좀 못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데....?" '그런대로 괜찮아?' 유빙이 또다시 멍청해졌다. 순간 여홍옥이 무엇을 생각하는 듯 잠시 눈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좋아! 그 정도면 내 고모부가 될 자격이 있어." 여홍옥은 이어 유빙의 주위를 빙빙 돌며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키도 그만하면 됐고.... 분위기도 괜찮고.... 좋아! 뜯어볼수록 괜찮은데!" 유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매(小妹)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여홍옥은 유빙의 질문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은 지금 곧 가주어야겠어." "누, 누구를....?" "우리 고모야." "내가 왜 소매의 고모를?" "무슨 사람이 이렇게 꽉 막혔어! 가서 만나보면 알 것 아니야! 내 고모부가 되려면 일단 두 사람이 만나야 무엇이 진행되도 될게 아 니야? 그리고 고모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유빙은 차라리 어이가 없었다. 유빙이 곤혹스럽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떠올리자 여홍옥은 짜증스럽다는 듯 손짓했다. "이리 와봐! 귀좀 빌려줘!" 빌려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녀의 고사리처럼 귀여운 손은 이미 유빙의 귀를 잡아당기고 있었으니까. "사람이 척 보면 알아야지." "....?" "난 지금 운아하고 있고 싶단 말이야. 단 둘이만 있을 테니 좀 알 아서 자리를 비켜주어야 할 게 아니야? 이 자리에 당신이 껴서 뭘 하겠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 상큼한 난향(蘭香)의 향기와 함께 유빙의 귓속으로 흘러들기 시작 한 말. 유빙은 여홍옥의 말에 아예 질려버렸다. "알, 알겠네." 유빙이 떨떠름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괴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여홍옥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고모가 있는 곳으로 가란 말이야! 그리고 고모에게 내 염려하지 말고 기다리지도 말라고 꼭 전해주어야 해!" "알, 알겠네." 유빙은 어색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도리없이 여홍옥의 고모 라는 알지 못하는 여인을 만나러 가야 하는 것이다. "어딘지 알고 가는 거야?" 유빙이 말없이 몸을 일으키자 여홍옥이 짜증스럽게 질문했다. "아, 아니....가르쳐 주게나." "저쪽으로 십리 쯤 가면 한 채의 장원이 있어. 겉보기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폐장원처럼 보이나 그 안에 고모가 있어." "......" "이제 가봐!" '끄....응!' 유빙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되자 유빙은 꼼짝없이 그녀의 분부대로 행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유빙의 완패(完敗)였다. ■ 팔왕예조 제3권 제23장 구파일방(九派一幇)의 고인(高人)들! ━━━━━━━━━━━━━━━━━━━━━━━━━━━━━━━━━━━ ① 월광(月光)..... 새하얀 눈(雪) 위로 쏟아지는 월광은 실로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눈과 월광이 송림(松林)과 함께 어우러져 있어 진정 쓸쓸하면 서도 어딘가 시정(詩精)을 느끼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림 사이로 나있는 소로(小路)에 유빙은 미소와 함께 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인을 만나러 가게 되다니....!" 유빙은 여홍옥에 의해 쫓겨나오다시피한 자신을 생각할 때마다 고 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그의 눈 깊은 곳에는 한 가닥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솔직이 그녀의 고모가 어떤 여인인지 궁금해지기도 하는군." 부드러운 기분에 젖어있던 유빙의 눈이 천천히 굳어진 것은 바로 이때였다. 전면, 송림의 끝부분에 한 인영이 그를 기다리듯 우뚝 서 있지 않은가! "태극우사....!" 푸르스름한 월광 아래 서 있는 한 명 도인 그는 바로 태극우사였 다. 태극우사는 유빙을 향해 사이한 미소를 보냈다. "어떤가? 이곳의 경치가 그대가 묻히기에는 아주 좋은 명당(明堂) 같지 않은가?" "호.... 죽어 묻힐 명당까지 신경써 주다니 가짜 도사치고는 무척 이나 친절하구료." 유빙의 대꾸는 차가왔다. 그러나 태극우사는 더욱 사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천기와 풍수(風水)를 살피는 것은 도인의 기본이 아닌가. 기왕이 면 죽여야 될 사람을 좀 더 좋은 명당자리에 묻히게 하고 싶은 것 이 나의 소망일세." "훗! 걱정되는구료. 명당자리를 골라주었으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 해야 할텐데 내게는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외다." "안심하게. 대가는 받지 않을 생각이네. 아니, 받으려해도 받을 수가 없겠지. 죽은 사람에게 풍수비를 청구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일세." "그래도 걱정이 되는구료. 천종예가의 후예가 풍수비를 떼먹고 죽 었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소." "정 그렇다면 내가 묻는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게나." "......" "취설서, 그가 누구인가?" "그것을 묻는 이유를 다시 내가 물어도 되겠소?" 유빙의 말은 혼란스러웠다. 명백히 태극우사를 조롱하는 말투였 다. 허나 태극우사는 노기를 드러내기는 커녕 오히려 순순히 입을 열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 취설서가 내가 아는 한 명과 어딘가 비슷한 것 같아서일세." "그대가 알고 있는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태극우사가 잠시 유빙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유빙은 그의 질문 에 대꾸하지 않은 채 오히려 반문만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제벌의 대벌주.... 도당문비일세." 태극우사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 결국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도당문비라는 이름을 꺼내는 그의 음성이나 표정은 이 순간 은은 한 공포에 떨리고 있었다. 단지 그 이름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긴 장과 공포를 느낀 듯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재미있구료. 제벌의 내벌 중 중추적인 그대가 제벌의 대벌주를 모른다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나 기실 제벌 내부의 인물이라 해도 대벌주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네." "그것 참 이상하구료. 그토록 신비한 대벌주를 이제 제벌의 인물 이 아닌 내게 오히려 묻다니?" "이유가 있네." 태극우사는 잠시 유빙을 죽이러 온 자신을 망각한 듯 기이한 표정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이유?" "그렇다네. 칠 년 전...., 대벌주는 자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네." "......"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것은 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일 인 것이다. 칠 년 전이라면 그가 백찰무경의 대총사로 있을 당시의 일이었다. "대벌주는 결코 남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 사람일세. 허나 유 독 자네에 대해서만은 언급한 적이 있었네. 자네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라 한 것이었지." "왜 나에 대해 알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아마 자네의 재질이 후계자로...." 태극우사는 유빙의 말에 대답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어 굳어진 음성으로 말을 돌렸다. "우리는 사실 대벌주와 같은 초인(超人)이 또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네."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극우사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했다. 곧 대벌주의 관심을 끌 만한 인물이라면 가히 엄청난 재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만약 그 런 인물이 대벌주의 후계자가 된다면 영원히 이인자(二人者)가 될 수밖에 없어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인 것이다. 이는 곧 유빙이 창랑왕과 관련이 있다며 추살령을 내리게 된 진정 한 이유가 바로 대벌주의 후계자로 지목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랬구료....! 그래서 내게 누명을 뒤집어 씌웠구료." 유빙은 별반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자네도 취설서의 정체를 모른다니 더 물을 것도 없겠군. 시작해 보지." 태극우사가 돌연 사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파파파파팍! 찰나, 유빙의 바로 일장 전면 지면 속에서 돌연 눈발이 튀어오르 고 한 은의괴영(銀衣怪影)이 솟아 올라 유빙에게 덮쳐 들었다. "흐흐흐....!"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무서운 힘이 덮쳐왔다. 은빛 그림자 속에 서는 핏빛 혈광이 번뜩이고 있었고 예의 혈광은 음침한 웃음소리 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미 유빙의 몸에 네 번이나 작렬하고 있 었다. 그 어느것 하나 유빙의 몸에 적중된 것은 없었으나 순식간에 네 번의 공세를 펼쳤다 거두는 상대의 공세는 가히 신기(神技)라 할 수 있었다. 은빛 그림자는 유빙이 간단하게 네 번의 공세를 막아내자 어느새 눈 위로 내려서며 몸을 드러냈다. "흐흐흐....!" 귀신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기이한 몰골을 하고 있는 괴인(怪人)의 모습이 유빙의 눈에 들어왔다. 키는 채 사척에도 못미친다. 얼굴 또한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발그 스레한 홍안(紅顔)인지라 수염이 없었다면 영락없는 일개소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헌데, 난장이처럼 왜소한 괴인의 우수(右手)는 기이하도록 커 마 치 손만 자란 듯 기이하기 이를데 없었다. 부풀어 올랐다고나 할 까? 놀랍게도 오른손 하나의 크기가 보통사람들 머리통만 했던 것이다. "단왜고불(短倭孤佛)! 보아하니 칠정(七鼎)이 모두 오신 듯 하구료." 유빙의 말이 끝나기도 전 또다시 유빙의 발 아래에서 기이한 회오리가 일었다. 쏴쏴.... 아! 거대한 은빛 그물이 마치 땅 속에서 솟아난 듯 유빙의 발아래로부 터 그의 전신을 덮어씌우고 있었다. "흥!" 유빙이 귀영처럼 삼장을 미끄러졌다. "여기 눈 먼 늙은이도 있네." 우르르- ! 유빙의 신형이 채 자리잡기도 전에 무수한 은빛 광망이 그를 덮 쳐왔다. 어느새 유빙의 좌측에 한 명 흑의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십칠여 종의 암기가 벼락처럼 그의 손에서 쏟아져 나와 유빙의 몸 을 휘어감은 것이다. "호....!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 스스로 눈을 멀게 했다는 암기술 의 제황, 만암정(萬暗鼎) 단엽표(丹葉彪) 단노선배도 오셨구료." 유빙의 신형은 삼장 좌측으로 미끄러져 이제라도 흑의노인이 쏟아 낸 무수한 암기에 적중될 듯 했으나 그의 신형은 어느새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반대방향에 내려서고 있었다. 허나 그 자리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느새 거대한 체구 의 백의노인이 한 자루 화극(火戟)을 쥐고 있다 벼락같이 내리쳐 오고 있지 않은가?! "노부는 천극무존(天戟武尊)일세!" 땅! 유빙이 허리에서 쌍월 중 장도를 끌렀다가 다시 회수했다. 그의 신형은 미미하게 휘청이고 있었다. 눈부신 속도로 천극무존의 화 극을 막아내기는 했으나 너무도 거대한 내력에 균형을 잃은 것이 었다. "......" 유빙은 심호흡을 해 기혈을 안정시킨 후 천천히 주위를 쓸어보았 다. 그의 주위에는 어느새 일곱 명의 괴영이 우뚝 서 있었다. 거대한 은빛 그물을 쥐고 있는 어부(漁夫)차림의 황의노인 한 명 과 강시처럼 마른 몸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흑의노인등..... '만암성 단엽표, 은자천(隱者天)이랄 수 있는 종남(終南)과 동백 (冬栢)의 비전을 이었다는 한천어은(寒天魚隱) 당고(唐高).... 천 극무존 상무인(常巫仁), 단왜고불.....' 유빙은 나타난 인물들을 한차례 쓸어본 후 내심 고개를 저었다. 어느 한 명 무시못할 고수들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벌 십대장로세중 최대세력인 칠정각의 칠정이 모조리 출동했구나!' 유빙은 자신도 모르게 한기(寒氣)를 느꼈다. - 은자천의 비전을 이은 한천어은. - 암기술의 제황 만암정 단엽표. - 서역소림(西域少林)의 일인자 단왜고불. - 천극무존 상무인. - 원교의 계승자 태극우사. - 천하제일방이라 불리우는 개방( 幇)의 궁신비법(窮神秘法)을 십이성 대성시킨 철금 소전파(蘇全波). - 십지종학(十指宗鶴). 아아! 이들은 바로 내벌의 십대장로세 중 칠정각의 칠정들로서 실 로 엄청난 인물들이 아닌가. 태극우사가 유빙을 향해 미소했다. "이미 알고 있을지 몰라도 아무튼 초면인 듯 하니 빈도가 소개하겠네." 태극우사는 자신을 포함한 칠정 일곱 명을 모두 차례로 소개했다. "자네는 무림을 가장 오랫동안 지배해오며 가장 막강한 성세를 구 가하고 있는 세력이 어떤 세력들이라고 생각하는가?" 태극우사는 그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함과 동시에 유빙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허허헛! 그 문파들은 바로 구파일방(九派一幇)일세. 그 어떤 세 력이라도 백 년을 넘기지 못했으나 구파일방은 천년무림을 이어오 며 군림해 왔다고 볼수 있지." "......" "당금에 이르러 구파일방의 성세가 약화된 것은 오히려 그들의 무 학이 너무 심오하기 때문일세. 그 어려운 것을 제대로 소화해낼 기재를 찾지 못한데다 과거의 성세에 자만해 힘껏 노력하지 않았 던 것일세." "......" "그대는 오늘 우리 칠정에 의해 진정한 구파일방의 진재절학을 구 경할 수 있을 것이네. 허나 그리 걱정할 것은 없지. 그래도 우리 는 선배고인인데 합공이야 하겠나." 태극우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거대한 체구에 청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는 백삼노인을 바라보았다. "상형이 먼저 가르침을 주시겠소이까?" "그러지." 천극무존 상무인이 무뚝뚝하게 대꾸한 후 한 걸음 나섰다. 거대한 화극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그의 기도는 가히 대장군을 방 불했다. 단지 한 걸음을 나선 것 뿐이었는데도 이미 하나의 대산 이 성큼 다가선 듯한 엄청난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내벌의 십대장로세 중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칠정각. 이 칠정각의 칠정들과의 대결은 유빙의 막강한 인맥(人脈)을 구성 하는 일대기연으로 종결된다. 한 명 고독한 복수자로 출발한 유빙 은 엄청난 인맥을 구성하며 점차 제벌과 대립하게 되니..... ② 천극무존 상무인, 제벌의 중추세력인 내벌(內閥)의 십대장로세 중 칠정각의 일원으로서 금년 세수(歲壽) 일백여든 세의 노웅(老雄)이다. 대곤륜(大崑崙)의 마지막 영광이라고 불리우는 그는 구파일방 중 곤륜파의 전대고인으로서 그 화후(化侯)는 추측하기 불가능할 정 도였다. 구척이 넘는 장대한 체구와 준미한 용모는 촉(蜀)의 오기 장군 중 한 명인 관운장을 연상케 하는 풍도였는데..... 부.... 웅! 캉! 천극무존 상무인의 화극(火戟)이 바람을 가르며 유빙에게 밀어닥 쳤다. 기교나 변화 따위는 무시한 힘과 속도만이 담겨있는 가공할 초식이었다. '윽!' 벼락같이 덮쳐오는 화극을 밀어낸 유빙의 신형이 휘청였다. 마치 철벽과 맞선 듯한 엄청난 힘이 쌍월을 통해 체내로 밀려들었던 것 이다. 쌍월이 평범한 병장기였다면 단숨에 부서져 나갔을 듯한 가 공할 내력이었다. 쏴아앙! 휘청이는 유빙의 머리를 향해 천극무존의 화극이 또다시 밀어닥쳤다. 머리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단순한 초식, 놀랍게도 천극무존은 매번 같은 초식만으로 유빙을 덮쳐들고 있었는데 기다란 한 자루 노(弩) 만큼이나 거대한 화극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맹한 기운은 유빙의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땅! 유빙의 손바닥이 터져 나갔다. 너무도 강대한 힘에 쌍월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자 유빙은 깜짝 놀라 내력을 끌어올렸다. 쏴앙! 무지막지하다고나 할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며 계속 한 가지 초식으로만 내려패는 천극무존의 기세는 담담한 가운데 패도적인 위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힘으로 맞선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유빙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어 그의 신형은 천극무존의 엄청난 힘을 교묘히 빗겨내며 원월도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쏴아앙! 삭! 순식간에 십여 초가 흘렀다. 유빙의 원월도법이 화려한 가운데 현란하다면 천극무존 상무인은 계속 한 가지 초식으로 맞서고 있었다. 허나 힘이 변화를 압도한다고나 할까? 유빙의 신형은 그야말로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번뜩이는 듯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천극무존의 주위에 도영(刀影)을 연출해 내 고 있었으나 그 어느 것 하나 천극무존의 몸에 이르지 못하고 있 었다. 쏴아앙! 천극무존 상무인은 태산처럼 한 자리에 고정되어 위에서 아래로 화극을 내리긋고..... 파파파팍! 그때마다 유빙의 신형은 물처럼 흐르며 예리하게 번뜩였다. 헌데, 번개같이 십여 초가 흐르며 단 한 순간도 두 사람의 병장기 가 격돌하지 않은 채 지나자 천극무존 상무인이 돌연 굵은 검미를 찌푸리지 않는가! "피하지 말게." '....?' 유빙이 내심 멍청해졌다. 놀랍게도 천극무존의 음성에 단 한점의 살기도 담겨있지 않았다. 쏴아앙! 캉! 유빙은 자신도 모르게 천극무존의 벼락같이 덮쳐오는 화극을 쌍월을 들어 막아올렸다. '윽!' 비릿한 선혈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실로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손 을 타고 그의 체내로 흘러들어 단숨에 단전(丹田)을 진동시킨 것 이었다. 부-- 웅! 그 순간에 이미 두번째 화극이 날아들고 유빙은 홀린 듯이 휘청이 면서도 쌍월을 들어 막았다. 따앙! 손이 터져 나가는 듯한 엄청난 힘이 다시 덮쳐왔다. "윽!" 유빙의 신형이 지면을 굴렀다. 허나 이 순간 그의 내심으로는 기 쁨과 의혹이 교차하고 있었다. 천극무존의 엄청난 내력이 자신의 단전을 강타하는 순간 단전에서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 천극무존의 내력과 맞서기 시작하 며 일시지간 전신이 상쾌해지지 않는가! 주르륵....! 유빙의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 내렸다. 허나 유빙은 이 순간 웃고 있었다. 천극무존의 엄청난 내력, 그 내력이 자신과 한 번씩 격돌할 때마 다 그의 체내로 한 줄기 뇌전인 양 덮쳐들고 그때마다 자신의 단 전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용솟음치며 점차 강대해지기 시작한 것이 다. 예의 노도처럼 체내에서 들끓기 시작한 힘은 순식간에 천극무존이 쏟아낸 내력과 맞서기 시작하는 듯 하다가 여섯번째의 격돌부터는 오히려 그 힘을 흡수하고 있었다. 쏴아아앙! 캉! 유빙의 단전에서 솟아 오르기 시작한 노도같은 힘은 천극무존의 힘이 손바닥을 통해 벼락처럼 쏟아져 들어올 때마다 그 힘을 흡수 하기 시작해 순식간에 유빙의 체내를 일주(一周)했다. 유빙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천극무존 상무인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막강한 내력을 이용해 유빙의 체내에 잠재해 있는 잠재력을 끌어 올리려 하고 있었으며 또한 실전(實戰)의 비기를 깨우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유빙은 기실 수많은 초식과 절학을 일신에 지니고는 있으 나 그 많은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킨 상태는 아니었고 여기 에 그의 내력 또한 이제 겨우 기초적인 것에 불과한 정도였다. 무릇 무공이란 기초로부터 시작해 오랜 세월을 거쳐 점차 상승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바..... 유빙은 삼 년이라는 짧은 시일 안에 수많은 절학을 익힘으로 해서 초식의 변화나 무리(武理)에는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올랐으나 그 지닌 바 내공이나 실전응용의 묘(妙)는 삼류고수의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카앙! 또다시 천극무존의 화극이 유빙의 장도(長刀)를 강타했다. 그러나 이제 유빙은 천극무존의 엄청난 힘에 대항하기보다는 끌어 당기고(引), 밀고(推), 끊고(絶), 거부하면서도 되돌려 보내는 (返) 등 자유자재로 내력을 응용시키고 있었다. 놀랍게도 십여 번의 격돌로 그는 체내의 잠재력을 극대화시켜 천 극무존의 힘에 못지 않은 내력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본래 그의 체내에 사형종혈(死刑宗血)의 막대한 힘이 잠재 해 있었던 것이 십이성 그의 내력으로 화해 그 운기(運氣)가 자유 스러워진 때문이었다. 어느 한 순간, 천극무존 상무인은 대소를 터뜨리며 돌연 공세를 멈추었다. "와하하하....!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 낸다더니....정말 대단하구료. 대총사." 천극무존 상무인이 돌연 공격을 멈추고 포권해 보이며 물러나자 유빙은 얼떨결에 마주 포권해 보였다. 쏴아아....! 이때 돌연 수많은 은빛의 편린이 우박 쏟아지듯 유빙의 몸으로 덮 쳐 들었다. 어느새 검은 장포를 걸친 시체같은 얼굴을 지닌 만암 정 단엽표가 수많은 암기를 쏟아내며 덮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명문 구대문파 중 청성파의 제자이면서도 사천당문(泗川唐門)의 암기술을 이었다는 만암정 단엽표의 단정사학기(斷情死學技)는 혈 연(血緣)의 정과 우정 등 인간의 모든 정을 끊어야만 연성할 수 있다는 죽음의 절기..... 쏴아아! 파파파파팟! 그의 암기술은 실로 독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마치 한 조각의 비단띠가 이어지듯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암기술의 정화다! 일반적으로 암기는 한 번 발출하면 그만이거늘 어찌 허공에 떠 있는 암기를 이토록 다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유빙은 크게 감탄하며 연신 암기들을 쳐냈다. 암기들은 지면에 떨 어지는 것이 아니라 퉁기듯 되돌아 오고 있어 실로 공포스럽지 않 을 수 없었다. 사악! 유빙은 원월도법을 전개해 끝없이 작은 원 큰 원을 형성하며 암기 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은 암기들은 유빙이 펼쳐내고 있는 수많은 원안으로 파고 들려는 듯 끝없이 맴돌며 짓쳐들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유빙은 예의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쉬지않고 덮쳐드는 암기들을 쳐내면서 한 가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으니..... '아아! 원월도법! 그 요체를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마음을 쓸 것이지 힘을 구사해선 안 된다. 원은 둥글게 퍼져 나 간다. 이것을 중간에서 끊어지게 하면 안 된다. 기와 세(勢)를 잡 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뿌리를 끊도록 해야 한다!' 유빙의 전신에 한 가닥 전율이 흘렀다. 그것은 진정한 검리(劍理) 를 깨우친 법열(法悅)이었다. 원월도법은 끝없이 원을 형성해 그 원이 점차 물 위에 번지는 파 문인 양 주위로 퍼져 나가게 되는 도법이다. 그 중간의 파문이 끊 기게 되면 파문이 맞은편 호반에 이르지 못하듯 원월도법의 오묘 한 힘이 중도에서 끊기게 되는 것이다. 허나 무엇인가가 그 파문을 막게 되면 그 물체의 주위로 파문이 몰리듯 엄청난 힘이 방해물 주위로 휩싸인다. 유빙은 만암정 단엽표의 물결처럼 끝없이 덮쳐드는 암기들을 쳐내 면서 자연스럽게 원월도법을 펼쳤고, 그로인해 자신도 모르게 깨 우치지 못하고 있던 원월도법의 요체(要諦)를 완벽히 깨우친 것이 었다. 이제 만암정 단엽표의 수많은 암기들은 그에게 아무런 위력을 발 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유빙의 얼굴에 한 가닥 기쁨이 떠올 라 있고 장엄한 빛까지 보이자 감탄과 함께 손을 멈추었다. 만암정 단엽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물러섰다. 그것은 그의 성격인 듯했다. "부당하다. 부당해! 저 조그마한 아해에게 늙은 것들이 차륜전법 (車輪戰法)을 펼치는 게 아니냐!" 단왜고불이 혀를 차며 한 걸음 나섰다. 거대한 오른손을 휘휘 내젓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익살이 떠올라 있었다. "하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유빙이 정중히 포권했다. 이제 그는 칠정(七鼎)이 자신에게 악의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돕고 있음을 알게 되어 자신 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르르! 웃음을 머금고 있는 유빙의 얼굴로 벼락같이 단왜고불의 거대한 오른손이 들이닥쳤다. 제일수(第一手)가 번뜩이는가 싶은 순간 제이수(第二手)가, 그리 고 그 뒤에 또다른 수영(手影)이 연이어 밀려 들었다. 놀랍게도 끝없이 번뜩이는 장세(掌勢)는 맨 뒤의 것이 가장 먼저 도달하며 유빙의 얼굴을 쳐왔다. '분뢰천수(分雷天手)!' 유빙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벼락같이 덮쳐드는 단왜고불의 거대한 수영은 밀밀히 겹쳐 종내에 는 거대한 해일처럼 하나가 되어 밀려오고 있었다. 단왜고불은 소림(少林)의 제자로서 자파(自派)의 뿌리를 찾기 위 해 달마조사의 고향인 서천축 향지국(香池國)에까지 성지순례(聖 地巡禮)해 서역소림(西域少林)의 기학을 완벽히 익혀온 인물이었다. 그의 분뢰천수는 중원소림에조차 전파되지 않은 가공할 기학으로 써 번개가 번뜩이는 순간 이미 일천장세(一千掌勢)를 펼친다고 알 려져 있었다. 꽈앙! 유빙은 쌍월을 거두고 쌍장을 들어 맞섰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유빙의 신형이 휘청였다. 그가 막아낸 것은 분뢰천수의 일장(一掌)일 뿐 나머지 수십여 장 (掌)이 이미 그의 전신에 작렬한 것이었다. 허나 단왜고불은 유빙을 살해할 의사가 없는 듯 그 힘의 강약(强 弱)을 적절히 조절해 유빙은 별 부상을 입지 않았다. 우르르! 쏴아앙! 또다시 엄청난 분뢰천수가 회오리쳤다. 유빙의 흰 손이 떠올라 그 중 몇 개의 장과 마주쳤다. 따다다다닥! 그것은 바로 일견사수로서 중원의 공포로 군림하던 죽음의 손이었 다. 허나 유빙은 그 일견사수의 마학으로도 분뢰천수를 모두 막아 내지는 못했다. 우르르르! 꽈광! 산악이라도 밀어낼 듯한 경력(勁力)이 폭풍우처럼 덮쳐오고 유빙 은 십여 초가 흐르는 동안 그야말로 수백여 장(掌)에 적중되었다. 그 짧은 순간 분뢰천수의 위력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그는 점차 분 뢰천수의 묘(妙)를 터득해 가고 있었다. 뿐이랴! 그는 분뢰천수의 운용을 익혀 나가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일견사수를 융화시키고 있었으니..... 이십여 초나 흘렀을까? 우르르르....! 파파팍! 유빙은 점차 그 엄청난 분뢰천수를 모조리 막아내며 오히려 간간 이 반격을 시도해 보기까지 했다. 단왜고불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너무도 빨리 유빙이 터득해 버 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유빙이 이미 일천여 종이 넘는 절학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저 모든 무학은 줄기는 다를지라도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 가지로 상통되는 바, 이미 일천여 종이 넘는 무학을 연성 한 유빙이기에 분뢰천수의 묘를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빨리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가 깨달은 것이 반드시 분 뢰천수는 아니었다. 단지 그가 알고 있던 모든 장법(掌法)을 혼합 한 그만의 독특한 장법이랄까? 단왜고불이 돌연 비명성을 터뜨렸다. "어이쿠! 이런 귀신같은 놈이 있나. 이 늙은이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다. 자, 어서들 도와주게." 단왜고불이 짐짓 죽는다고 칠정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태극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뛰어들었다. 쏴쏴아! 휘이이익! 그의 수중에는 어느새 십여 가지에 이르는 기병들이 춤추고 있었 다. 판관필 섭선(攝扇), 매채, 홀(笏=먼지털이), 소도(小刀) 등등 십여 가지 기병이 그의 손 위에서 마치 곡예하듯 춤추며 유빙을 덮쳤다. 뿐이랴! 띠잉! 띵! 돌연 한 가닥 금음(琴音)이 유빙의 머릿속을 진동시키고 있지 않 은가! 천하제일대방 개방의 철금 소전파가 묵묵히 철금을 퉁기고 있었던 것이다. 도가(道家)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화산파(華山派)의 전대고인인 태 극우사에다 개방의 대장로까지 가세하자 유빙은 발이 어지러웠다. 쏴아아앙! 천극무존 상무인 역시 가공할 기세로 때때로 벼락치듯 화극을 휘 둘렀다. 물러났던 만암정 단엽표 역시 수백여 종의 암기를 삼장 밖에서 쏟아내기 시작해 그야말로 구파일방의 진정한 절예가 유빙 의 한 몸에 작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빙은 그들의 합공에 손발이 어지러워 무수한 공세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기실 엄청난 무공절학을 일신에 지니고 있 기는 하나 순식간에 어떤 초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무공은 아직 종심소욕(縱心所慾), 무불여의(無不如意)의 심 오한 경지에 올라있지 않아 신(神)이 의(義)를 따르는 경지에 이 르러 있지 못했고, 또한 그 엄청난 많은 초식이 오히려 그의 정신 을 산란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상대방 한 초식 한 초식을 생각해내고 그에 대응하는 초식을 떠올 려 막아내려 하고 있었으나 상대방은 전대의 고인들인지라 아예 생각할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공세를 받아내려 면 그야말로 무불여의의 심오한 경지에 올라 뜻이 이르는 곳에 이 미 손이 나가는 상태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순식간에 이백여 초가 흐르자 유빙은 미망(迷妄) 속을 헤맸다. 칠정의 공세는 그의 몸에 작렬하기만 할 뿐 힘이 들어 있지는 않 았다. 허나 그 공세는 벼락치듯 어지럽게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 어 몸을 빼내기는커녕 아예 이제는 방어조차 할 수 없었다. 이때였다. "모든 것을 버리게" 천극무존 상무인이 돌연 벽력같은 호통성을 발했다. "....!" 순간 유빙은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일천종이 넘는 마학들로도 오히려 그들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아예 모든 초식을 잊어 버리라고 외치는 천극무존의 말은 어찌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허나 칠정이 합공해 펼치면서 유빙이 깨우치기를 기다리는 것은 이제 오히려 실전무학이 아니라 무의(武意)였던 것이다. 초식에 구애받지 않는 이의어기(以意馭氣)의 정수(精髓)! 그 참다 운 무리(武理)가 한 순간 번개처럼 유빙의 머리를 환히 밝히고 있 었다. 쓰윽! 펑! 찰나, 유빙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번뜩이며 칠정의 공세 사이를 물 흐르듯 빠져 나가고 가벼운 격돌음이 작렬했다. "윽!" "으음....." 칠정이 모두 비틀거리며 신형을 바로 세웠다. 유빙이 기쁨에 넘친 음성으로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늘의 이 가르침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칠정 등은 유빙이 이토록 짧은 시간에 자신들의 의도를 이해하자 어이가 없고 또 한편 기쁘기도 했다. "은혜랄 것은 없네. 자네의 신지(神智)가 하늘에 닿지 않았더라면 백 년을 노력한다 해도 헛일이었을 테니....." "......" 유빙이 감읍하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의혹이 어려 있 었다. 제벌의 장로들이라 할 수 있는 구파일방의 전대고인들이 자 신을 도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헌데...., 어찌....?" 태극우사가 한 걸음 나섰다. "이미 칠 년 전 대벌주는 자네를 지목했네. 후계자로 말일세!" "......" "어쩌면 자네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난 역시 대벌주의 안배에 의한 것일 수도 있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음....!" 유빙의 뇌리에 더 큰 의혹이 자리했다. 허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벌주는 초인(超人)이네. 그리고 대벌주는 자네 역시 초인으로 성장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라고 있네. 우리들 역시 자네가 초 인이 되는 것을 원하네. 허나.... 대벌주가 생각하고 있는 후계자 가 아닌 대벌주를 꺾어줄 초인으로 성장해 주기를 원하는 것일세." "아....!" 유빙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실로 놀라운 내용이 아닌가. "자네는 제벌을 어찌 생각하는가?" 태극우사가 돌연 질문을 던졌다. 유빙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극우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벌은.... 무너져야 하네." - 제벌은 무너져야 한다! 흔히 할 수도 있는 말이다. 허나 그 말이 제벌의 장로 입에서 흘 러나온 말임에야 어찌 놀랍지 않으랴! 이어지는 태극우사의 말에 유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벌이 탄생된 사백 년 이래.... 무림은 단 한 순간도 무림인의 것이 아니었네. 허나 이제 반이복한(返夷復漢)의 대의(大義)도 달 성된 만큼 무림은 무림인의 것으로 돌아가야 하네." 반이복한(返夷復漢), 이민족의 손에서 중원을 되찾는 것. 제벌의 창업 동기가 이 반이복한에 있었으니 만큼 제벌은 이제 무너져야 한다. 태극우사는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적지 않네. 그리고 자네에게 사심이 없음을 모두 믿고 있네. 그것은 자네의 가문 천종예가가 제벌보다 먼저 중원을 지켜온 가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네." 순간, 유빙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자신의 가문이 지니고 있는 후광(後光)으로 인해 그 자신이 알지 도 못하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암중으로 자신을 후원하고 있음을 느낀 때문이었다. 유빙의 눈과 칠정들의 눈이 잠시 얽혔다. "......" "....!" 유빙은 그들의 눈에서 무림의 안위를 염려하는 진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허나 제벌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익히 알 고 있기에 우리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다네. 자네가 아직 완벽하지 못할 때 십대장문(十大長門)과 마주칠까 두려워 이 늙어 죽지도 못하는 노물들이 서둘러 달려온 것일세. 그들을 만나면 각별히 주 의하기 바라네." "십대장문?" 태극우사가 쓴 웃음을 지으며 입을 떼었다. "대벌주 휘하에는 아무도 모르는 십대장문이 있네. 일왕(一王), 이종(二宗), 삼환(三幻), 사상(四象), 오비(五秘), 육합(六合), 칠정(七鼎), 팔로(八老), 구궁(九宮), 십사(十社)가 바로 그들이지." - 십대장문(十大長門). - 일왕, 이종, 삼환, 사상, 오비, 육합, 칠정, 팔로, 구궁, 십사! 유빙의 눈이 커졌다. 이어지는 태극우사의 말이 너무도 가공스러웠던 것이다. "본 칠정각 역시 십대장문에 들기는 하나 기실 우리 늙은이들은 십대장문 중 가장 약체에 불과함을 명심해야 하네." 아아! 구파일방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칠정, 이들이 십대장문 중에 서 가장 약체라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도대체 제벌의 진정한 힘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유빙은 많은 의혹이 머릿속에 맴돌아 혼란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실종된 대벌주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사실 과 자신을 죽이러 온 칠정이 오히려 자신을 돕고 있는 것! 무엇인지는 모른다. 허나 확실한 것은 유빙은 무엇인가가 자신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벌주와 깊은 관련이 되어 있는 일이 분명했다. 하나의 초상화만으로 천하 를 지배하는 대벌주 도당문비의 안배에 따라 움직이는 어떤 음모 인 것이다. '십대장문.... 십대장문.' 유빙은 마음 속으로 십대장문이라는 엄청난 이름을 되뇌이며 서서 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멀리 여명(黎明)이 움터오고 있었다. ■ 팔왕예조 제3권 제24장 미령군주(美玲君主) 여은금(余銀琴) ━━━━━━━━━━━━━━━━━━━━━━━━━━━━━━━━━━━ ① 유빙은 여명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을 뿌리고 있는 눈을 밟으며 걸 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지금 취봉란 여홍옥의 고모라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폐장원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저기로군!' 유빙은 여홍옥의 설명에 따라 소로를 걷다 이내 한 채의 낡은 장 원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바로 이때, 누군가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의 앞을 막아서 지 않는가? "아니.... 유형! 이곳에는 웬일이십니까?" 그의 앞을 막아선 인물은 바로 도수명인세류표였다. "자네야말로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유빙은 느닷없이 마주친 도수명인세류표의 위아래를 쓸어 보았다. 어딘가 초췌해 보이는 그의 표정과 행색에서 기이함을 느낀 것이었다. "그,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누군가의 부탁으로 바로 저 폐장원에 가는 중일세." 유빙이 무심코 대답하자 일순 도수명인세류표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저 폐장에 말입니까?" "....?" 도수명인세류표의 놀란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유빙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도수명인세류표가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시 질문을 던졌다. "거기는 왜?" "누구를 만날 일이 있네." "그, 그것이 혹시 여자 아닙니까?" "그것을 어찌 알고 있는가?" 유빙의 눈에 더욱 의혹이 어렸다. 그러자 도수명인세류표는 행여 누가 볼세라 유빙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겨 소로에서 다소 벗어난 곳으로 이끌었다.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헌데 유형이 저곳에 간다 니 더욱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 도수명인세류표는 자신과 마주친 신비여인에 관한 것을 모두 들려 주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이 죽이려던 철장 포인산을 먼저 죽였 고 그후 십 년 전에 봉린주에서 실종되어버린 용병들과 대적한 일 등등..... 유빙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수명인세류표 정도의 고수가 공포를 느낄 정도의 인물이 있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십 년 전에 사라진 용병들이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일이 어쩐지 괴이하지 않은가! "그녀의 무공은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헌데 무슨 일로 그녀를 만나러 가신단 말씀입니까?" "....!" 유빙은 적리운과 만난 일부터 취봉란 여홍옥의 일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유빙이 말을 마치자 도수명인세류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그 신비여인이 은붕성의 인물이겠군요." "....." 유빙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번쩍 눈을 들었다. '어찌됐든 부딪치고 볼일이다!' 유빙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폐장원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도수명인세류표가 망연히 서 있다가 번쩍 유빙의 뒤를 따랐다. 그 의 신형은 이내 유빙의 머리를 뛰어넘어 폐장원의 뒤쪽으로 사라져 갔다. "저는 이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겠습니다."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폐장원의 대문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이미 은붕성의 소성주 취봉란 여홍옥이 적리운을 찾아와 자 신을 따돌리며 이 폐장원에 보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닫고 있었다. 이것은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초청이었던 것이다. 쓰읏! 도수명인세류표가 숨어든 곳은 폐장원의 후원 별채였다. 바로 신 비여인과 천문왕부의 노대부인이 기거하고 있던 별채로서 그곳에 서는 아직도 불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도수명인세류표는 먼저의 방법으로 다시 실내를 엿보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쳐갔다. 의외에도 실내에는 아직 신비여인과 노대부인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씨의 활약으로 이제 십이야로(十二夜路) 중 사로(四路)에서는 아씨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용정차의 그윽한 향기가 실내를 휘어감고 있는 가운데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신비여인은 이때 그 괴이한 흑포를 벗어버리고 산뜻한 녹의(綠衣) 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은 실로 눈부실 정도였다. 다소 창백해 보이는 피부가 어울려 신비여인의 전신에서는 감히 마주할 수 없는 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이 명단에 적혀있는 자들만 완벽히 제거하면 흑궐내에서는 아무도 아씨를 부정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노대부인의 말에 도수명인세류표의 눈이 커졌다. 흑궐이라면 바로 제벌에 반대되는 지하세력이 아닌가! 녹의여인이 문득 탄식을 터뜨렸다. "모모(母母)의 말뜻은 이미 알고 있어요. 흑궐은 일통(一統)되어 야겠지요. 그러나 지금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계속해야 한다는 것 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그녀의 음성은 실로 맑았다. 마치 맑은 계류가 계곡의 암석 사이 로 구비치는 듯 청량한 음성이었다. 녹의여인의 말에 노대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씨의 고귀한 손에 피가 묻는 것은 이 할멈도 원치 않는 일입니 다. 그러나.... 흑궐이 일통되지 않고서는 결코 제벌을 상대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 녹의여인은 망연히 탄식했다. 그녀가 탄식을 토하며 아미를 찌푸리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도 수명인세류표는 자신의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헌데 이때 돌연 노대부인과 녹의여인의 음성이 끊기는 것이 아닌가? "....!" 도수명인세류표는 의혹을 느껴 다시 실내를 들여다 보았다. '늙은이는 어디 가고 혼자 있는 것일까?' 도수명인세류표가 실내에서 눈을 뗀 것은 촌각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그 짧은 순간 노대부인은 어느새 사라져 없고 녹의여인이 홀 로 아미를 찌푸린 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이런 자태 는 아름다운 반면 성스럽기까지도 해 도수명인세류표는 황홀하기 이를데 없는 심정이었다. 이때였다. "웬 쥐새끼냐" 돌연 도수명인세류표의 등 뒤에서 엄청난 폭갈과 함께 무서운 기 세가 내리 덮쳤다. 쏴아앙! 한 개 거무틱틱한 용두괴장(龍頭怪杖)이 어느새 그의 머리를 덮쳐 오고 있었다. 꽝! 도수명인세류표의 신형이 날아오는 괴장을 막아낸 후 가볍게 허공 에서 회전하며 지붕 위에 내려섰다. 그의 전면에는 어느새 실내에 있던 노대부인이 한 개 용두괴장을 든 채 무서운 눈으로 우뚝 서 있었다. '큰일났군!' 도수명인세류표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눈 앞의 노파야 문제될 것 이 없었으나 실내에 있는 녹의여인마저 나타나면 꼼짝없이 개죽음 을 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쏴아앙! 또다시 노대부인의 괴장이 날아들었다. 그 힘은 실로 엄청난데다 그 기세 또한 괴이하도록 빨라 어느덧 머리 한 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도수명인세류표의 우수가 소리없이 움직였다. 삭! 섬뜩한 음향과 함께 노대부인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아아! 그녀의 괴장이 어느새 예리한 보도에 잘린 듯 중간부분에서 깨끗이 잘려 있지 않은가. 도수명인세류표는 이 순간 초조한 눈으로 사면을 쓸어보고 있었 다. 녹의여인이 나타나기 전에 몸을 빼내려는 것이었다. "어딜 가려느냐!" 도수명인세류표가 신형을 솟구치자 노대부인이 폭갈과 함께 반토 막 괴장을 휘두르며 다시 덮쳐들었다. "내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귀찮게 하는 거요?" 도수명인세류표는 초조하기 이를데 없어 손을 저으며 다시 몸을 빼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반토막이었던 용두괴장은 다시 손잡이 만을 남겨놓고 잘려나갔다. 쏴아아아! 이때 돌연 그의 전면으로 어둠처럼 검은 물체가 벼락같이 덮쳐들 었다. 검은 흑포에 양팔을 대붕처럼 벌린 채 허공을 단축해 돌고 있는 흑영, 바로 신비여인이 아닌가! '제기랄! 빠르기도 하군!' 도수명인세류표는 녹의여인이 어느새 흑포를 쓴 채 자신의 퇴로를 차단하며 덮쳐들자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크게 놀랐다. 쏴아아앙! 흑포의 소맷자락 속에서 하나의 손이 벼락같이 튀어 나오며 치달 려 왔다. 그 손은 마치 질풍이 몰아칠 듯 빨라 도수명인세류표는 막아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휘이익! 꽈꽈꽝! 도수명인세류표가 서 있던 지붕의 한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삼장 떨어진 지점에서 퉁기듯 몸을 일으키며 다시 몸을 빼내 려 했다. 허나 일격을 실패한 흑영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며 다시 도수명인 세류표를 덮쳐오고 있었는데 지면을 밟지 않은 채 허공에서 재차 덮쳐들고 있는 신법은 불가사의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어이쿠! 이 술귀신이 오늘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는구나!' 도수명인세류표는 상대의 손이 한 번 움직인 것 같으면서도 이미 전신대혈이 그 장세 아래 노출되어 버림을 느끼며 질끈 눈을 내리 감았다. 피한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할 속도였고 막는다는 것조차 언 뜻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가공할 기세였던 것이다. 띵! 도수명인세류표의 머리 반 자 앞에서 기이한 폭음이 일며 흑영이 퉁겨졌다. "사정 좀 봐주십시요." 느닷없이 낭랑한 음성이 들린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 도수명인세류표는 크게 의혹을 느껴 자신의 좌측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모르게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지 않은가. "유형....!" 나타난 이는 바로 유빙이었다. 그는 도수명인세류표가 위기에 처한 것을 목격하고 벼락같이 덮쳐 들어 흑영과 일장을 교환했으나 그의 내심으로는 이 순간 놀람이 가득해 있었다. 흑영 역시 자신의 일장을 막아낸 유빙의 출현에 잠시 놀란 듯 이 채를 떠올린 채 유빙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신형은 여전히 허 공에 둥둥 떠있는 채 단 한 번도 내려서지 않고 있어 실로 귀영 (鬼影)을 대하는 듯했다. 허나 흑영의 눈에 이채가 스친 것도 찰나지간의 일. 쏴아앙! 흑영은 다시 벼락이 번뜩이듯 유빙을 향해 덮쳐들었다. 이 모든 동작은 마치 도수명인세류표에게 퍼부으려던 공세를 유빙에게 쏟 아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 었다. 한 번 퉁겨져 나갔다가 다시 덮쳐드는 동작이 모두 이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 속도는 가히 불가사의할 정도가 아니겠는가. "....!!" 유빙은 흑영의 공세를 대하고 크게 놀랐다. 어찌보면 느리기 이를 데 없는 한 번의 손 움직임이 다음 순간 그의 코 앞까지 다가와 있지 않은가! 우르르! 유빙은 황급히 일견사수를 끌어올렸다. 유빙의 손은 한 번 움직인 것 같으나 이미 십여 장이 뻗어나갔고 그 속도 또한 흑영의 장세에 못지 않았다. 딱! 따따딱! 유빙이 휘청 한 걸음 물러섰다. 동시에 흑영의 몸도 허공으로 퉁 겨져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형이 퉁겨지고 있는 모습을 본 그 순간에 흑영의 몸은 팔구 장 정도를 되짚어 날아오며 다시 유빙에게 덮쳐 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단 한 동작이었다. 쏴아아아앙! 흑포의 소맷자락 사이에 너무도 투명한 흰 손이 튀어나오고 그 손 은 이미 무서운 기세를 발동하고 있었다. "멈추세요." 돌연 노대부인이 우렁차게 외쳤다. 순간 흑영의 흰 손이 유빙의 반 자 거리에서 딱 멈춰졌다. '....!' 유빙은 상대가 이미 자신의 코 앞에서 허공에 둥둥 떠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내심 혀를 내둘렀다. 뿐이랴! 그 엄청난 공세를 순식간 에 멈춘 흑영의 동작은 그야말로 가공지경인 것이다. "그대는.... 유공자인가?" 노대부인이 유빙의 얼굴을 세밀이 뜯어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노대부인." 유빙이 빙긋이 미소하며 포권해 보였다. 허나 그는 내심 천문왕부의 노대부인이 신비괴영과 함께 행동하고 있음에 의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는....?" 노대부인은 유빙의 눈에 의혹이 스치건 말건 도수명인세류표를 힐 끔! 바라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제 아우되는 사람입니다." "......" 유빙의 말에 노대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기를 지웠다. "현무청(玄武廳)에 가 있게. 곧 아씨를 모시고 가겠네." 노대부인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아직도 허공에 떠있는 흑영의 손 을 잡아끌며 가볍게 몸을 날려 사라졌다. '천문왕부의 노대부인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노대부인은 역시 은붕성의 인물이었단 말인가....?' 도수명인세류표가 뒤통수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유형이 아니었으면 망신당할 뻔 했습니다. 헌데....." 도수명인세류표는 속삭이듯 이제 마악 녹의여인과 노대부인이 실 내에서 주고 받던 말을 들려주었다. "흑궐....?" 유빙이 노대부인과 신비흑영이 흑궐에 관계되어 있음을 알게 되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제의 추측으로는 저 신비여인이 흑궐의 새로운 대종사로 떠오 른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초령왕이라던가? 뭔가....? 팔왕 중의 일인인 듯 합니다." 유빙은 이미 도수명인세류표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맹렬히 생각하고 있었다. '초령왕 여율령....! 흑궐의 비조인 초령왕의 후대가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은붕성과 초령왕은 그렇다면 어떤 관계란 말인가....?' 유빙은 문득 초령왕의 모든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의 입가에 의 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만약 저 여인이 초령왕의 후대라면 더욱 잘된 일이다. 생각보다 더욱 간단하게 흑궐을 수중에 넣을 수가 있을 것 같구나!' 유빙의 눈이 도수명인세류표를 직시했다. "자네는 이제 무엇을 할 생각인가?" "예? 아직 금융대인이 청부한 일이 끝나지 않아서....." "그렇다면 그 일을 끝내게, 그리고 청부받은 일이 끝나더라도 봉 린주로 돌아갈 필요는 없네. 봉린주의 모든 용병들은 이미 은밀히 강호로 들어와 있으니....." "아!" "일이 끝나는 대로 십병태사 사마천태랑을 찾아 그의 지시에 따르게." "예....!" 유빙은 도수명인세류표를 돌려보낸 후 노대부인이 말한 대청으로 들어섰다. 말이 대청이지 사방에는 온통 거미줄이 쳐져 있고 반 자 두께로 먼지가 뒤덮여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는 대청의 가운데 놓여있는 먼지투성이의 의자에 앉으며 천문왕 부의 노대부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진정한 정체가 궁금하기 이를데 없었던 것이다. ② 차 한 잔 마실 시각쯤 흘렀을까? 유빙은 가벼운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현무청으로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화사한 녹의를 걸친 십팔구 세 가량의 아름답 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이 들어서고 그 뒤에 노대부인이 따랐다. '저 노대부인은 마치 이 여인의 노복처럼 행동하고 있군. 실로 괴이한 일이다!' 유빙은 노대부인의 태도에 더욱 큰 의혹을 느꼈다. 노대부인이 문득 유빙을 향해 입을 떼었다. "인사 드리게. 이 분은 미령군주(美玲君主)이시네." '군주? 대명에 미령군주라는 인물이 있었단 말인가?' 유빙은 크게 놀랐다. 허나 그는 태연을 가장하며 손을 맞잡았다. "유빙이라 합니다. 몰라 뵙고 결례를 했습니다." "호호....!" 녹의여인이 탄식같은 교소를 터뜨렸다. 웃고는 있으나 그 웃음 소 리에는 어쩐지 깊은 한이 배어있지 않은가? "군주라 하나 이미 삼백 년 전에 멸망한 송(宋)의 군주이거늘 지 금에 이르러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어려워 하지 마세요." '송제국의 군주? 송이 멸망한 지가 언제인데 무슨 송의 군주가 있단 말인가!' 유빙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여은금(呂銀琴)이라 합니다. 군주니 뭐니 하는 것은 모모의 말에 지나지 않으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녹의여인, 여은금은 짐짓 노대부인을 꾸중하는 듯 일별한 후 자리에 앉았다. 노대부인은 더욱 정색한 채 입을 열었다. "이 분은 대송 말년 송 재건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가진왕(加 珍王)의 후손일세. 이 분의 가문은 후한(後漢) 시절 몸을 일으킨 초령왕 부마도위의 가문으로서 황조가 바뀌어 내려오는 그 숱한 세월 동안 왕호를 이어오신 정통 명가일세." '초령왕 여율령의 후손들!' 노대부인의 말에 유빙의 내심으로 전율이 흘렀다. 후한의 초령왕으로 제수 되었던 흑궐의 비조 여율령, 그 초령왕 여율령은 백찰무경에 의해 제거되지 않았던가. 그 후대가 면면히 왕호를 받으며 이어져 내려와 당대에까지 이어졌다 함이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은붕성은 바로 송 재건을 위해 뭉친 송의 후예들이란 말인가?' 유빙은 무엇인가 확연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는 내심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백여 년 전에 멸망한 송 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실 로 어이없었던 것이다. 여은금은 유빙의 마음을 눈치챈 듯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유총사는 대송의 재건 운운하는 것이 망상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 는 짓이라 생각하시겠지요." "......" 유빙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여은금의 탄식이 이어졌다. "그것은 이미 저희들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송의 재건 따위는 포기한 지 오래 되었어요." "아, 아씨!" 노대부인이 당황한 음성으로 외쳤다. 여은금은 개의치 않은 채 유빙을 응시할 뿐이었다. 맑고 그윽한 눈, 우수에 잠겨 있는 듯 순박한 그 눈을 대한 유빙의 가슴이 진 탕되었다. 청초하면서도 아무 생각도 담겨있지 않은 듯 백치미를 풍기고 있는 여은금의 맑은 눈은 너무도 아름다왔던 것이다. 유빙이 너무도 아름다운 여은금의 자태에 멍청히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자 여은금은 무엇을 느낀 듯 돌연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궜다. "음....." 유빙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황급히 시선을 떨궜다. 여은금의 얼굴은 더욱 달아올라 능금처럼 붉어져 있었다. 생전 처 음 대하는 야릇한 감정의 파문이 그녀의 가슴 한곳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유빙은 그 어색함을 깨려는 듯 질문을 던졌다. "헌데, 소저는 과연 흑궐과 무슨 관계에 있소이까?" 여은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적지 않은 시간을 망연히 유빙의 눈을 바라보다가 탄식처럼 입을 열었다. "기실 흑궐은 본가의 시조께서 세운 단체였어요. 그 당시만 해도 흑궐은 암중에서 거의 천하를 지배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지요."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그는 잘 알고 있 었다. 초령왕 여율령은 암흑의 제황으로서 정변을 일으키기 직전 은밀히 백찰무경에 의해 제거되었으나 그의 흑궐은 완전해져 있었 던 것이다. "저희들은 이제 대송의 재건은 꿈꾸지 않아요. 그러나 한 가지 해 결해야 할 것이 있어요." "......" "그것은 바로 제벌을 무너뜨리는 일이에요. 흑궐이 나약해지고 지 하에 숨어온 것이 모두 제벌 때문이었으니까요. 천하제패의 야욕 따위는 없어요. 단지 본가의 세력이었던 흑궐을 다시 찾고 그 힘 으로 흑궐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던 제벌을 무너뜨리는 것만이 저 의 욕심이에요." 유빙은 눈 앞의 이 나약해 보이는 여인이 좀전에 가공할 무공을 드러내던 흑포괴영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쥐면 한줌 에 쥐어질 듯 하고 불면 날아갈 듯 청초한 가운데 보호해 주고 싶 으리만큼 나약하게만 느껴지는 여인. 눈 앞의 여은금과 흑포괴영 을 연관시킬 그 무엇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교묘한 방법으로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그대가 흑궐 을 일통시키는 것을 도와 달라는 뜻이었소?" "호호....! 그래요. 허나 흑궐은 제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대 역 시 제벌의 붕괴를 원하고 있으니만큼 두 사람이 함께 상의하면 무 슨 좋은 방법이 생길 것 같아 만나고자 한 것이었어요." "......" "그리고 그대를 만나고자 한 사람은 소녀 하나만은 아니었어요." "또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자 한단 말이오?" "예. 오늘의 이 계교는 바로 그 사람의 계획이었어요." "그가 누구요?" "호호호....! 좀 있으면 아마 이곳으로 올거에요." '....?' 유빙은 제 삼의 인물이 여은금을 조정해 자신을 만나려 한다는 사 실에 내심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더 이상은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 문득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본인은 소저의 계획에 찬성할 수 없는 입장이구료." "....?" "흑궐을 재정비해 새로운 세력으로 만드는 것은 나를 위해 좋은 일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본인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외다." 유빙의 돌연한 말에 여은금의 얼굴에 망연한 빛이 떠올랐고 순간 노대부인은 폭갈을 터뜨리며 유빙에게 덮쳐 들었다. "이놈! 무슨 망발을!" 쏴아아앙! 노대부인의 신형은 마치 한 줄기 폭풍처럼 덮쳐 들었다. 허나 다 음 순간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 뜬 후 허공에서 몸을 멈춰 세웠다. 빙긋이 미소짓고 있는 유빙의 손에 한개 기물 체가 들려 있음을 본 것이었다. "사, 사망도첩!" 노대부인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여은금의 두 눈에도 경악이 가득해 있었다. 촤악! 촤르르....! 금광이 영롱한 채 섭선처럼 펼쳐지고 있는 물체는 바로 초령왕 여 율령의 신물(神物), 사망도첩이 아닌가! "조, 조사령(組師令)을 대합니다." 여은금이 망연히 서 있다가 황급히 배례했다. 노대부인 역시 크게 망설이는 빛을 띄우다가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자, 흑궐이 나의 것이라는 말을 이제 믿을 수 있겠소?" "......" "후후....! 불복하는 모양이구료?" 여은금이 당황에 찬 음성을 흘려냈다. "어찌 감히.... 허나 본가의 조사령이 어떻게 백찰무경의 대총사인 그대의 손에....?" 기실 초령왕 여율령의 죽음은 아무도 모르게 자연사(自然死)한 것 으로 꾸며졌다. 허나 그의 실종과 함께 그의 모든 것들이 사라져 여율령의 후대들은 흑궐을 지배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유빙은 자신의 백찰무경에서 초령왕 여율령을 암중으로 제거했다 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초령왕의 모든 것을 이어 받았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소?" 유빙의 태연한 말에 여은금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본가의 시조이신 그 분의 모든 것을 이으셨다면.... 충분....합니다." "그럼 됐소. 일어들 나시오." 유빙의 전신에서 자연스러운 위엄이 형성되었다. 여은금과 노대부 인은 아직까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 지도 모르겠다는 망연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 들인 듯 다소 밝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면 소녀는 굳이 그 자와 합작할 필요가 없게 되었군요." "무슨 뜻이오?" "기실 소녀는 흑궐을 일통시키기 위해 한 세력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게 누구요?" "예! 법밀사의 잠린왕자입니다." "법밀사!" 유빙이 크게 놀란 빛을 떠올렸다. 법밀사는 바로 제벌의 외벌 중 오대세력으로써 살인자와 광인의 피를 지니고 있는 주씨황조의 이단아 잠린왕자 주문빈이 이끄는 세력이 아닌가. "소녀가 비록 흑궐을 세우신 초령왕의 후대이기는 하나 그 사실만 으로 흑궐 전체를 지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해서 그와 손을 잡고 흑궐을 정비하려 한 것이었지요." "그가 요구하는 것이 있었을 게 아니오?" "예! 자신이 제벌을 장악하는데 힘을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호....!" "기실 저의 가문은 이미 오래 전에 주씨황조에 의해 배반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명 태조 주원장은 대원을 무너뜨리기 위해 저 히 은붕성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는 대원을 무너뜨리고 다시 송을 재건하자고 우리를 설득했습니다." "......" "허나 그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그의 황조를 세웠던 것입니다." "헌데도 그 주씨황조의 한 인물과 다시 손을 잡았단 말이오?" "그러나 이번만큼은 배반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도움으로 흑 궐이 완전해지기만 하면 오히려 흑궐은 제벌을 무너뜨리려 했으니까요." "......" "흑궐 비조의 신물을 지니고 있고 진정 그 분의 모든 진전을 이어 받았다면 흑궐은 간단히 일통될 것입니다. 그대의 무릎 앞에....." 유빙을 직시하는 여은금의 눈에는 기이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열기(熱氣)랄까? 그녀의 백지처럼 맑고 깨끗한 눈 속에 서서히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야망도, 패기도 아닌 여인의 그것이었으니..... 이때였다. 딸....랑! 딸랑! 돌연 어디선가 은은한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여은금이 황급히 시선을 거두며 정색했다. "잠린왕자 주문빈이 오고 있군요." "....!" "대종사님!" "......" "만약 그를 만나게 되더라도 대종사님이 흑궐의 종사령을 지니고 흑궐을 일통시키게 된다는 사실은 비밀로 하셔야 할 것입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소이다." 여은금과 유빙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공통된 비밀을 지니고 이제부터 만날 인물을 상대해야 하는 때문이었을까?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벽도 없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 팔왕예조 제3권 제25장 여명(黎明)의 눈동자(目) -1 ━━━━━━━━━━━━━━━━━━━━━━━━━━━━━━━━━━━ ① "칠정(七鼎)의 손에서 벗어나다니 실로 경하할 일입니다. 어쩌면 유총사야말로 대벌주를 제외한 당세제일인일 것이오." 화사한 음성과 함께 더욱 화사한 청년이 들어섰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백의에 실핏줄이 그대로 드러나 보일 듯 투명하고도 깨끗한 피부, 번개보다 희고 준수한 그 얼굴은 실 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몇 배나 능가하고 있었으니..... - 잠린왕자 주문빈. 대내(大內)에서조차 극비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자 황권을 능가하 는 권위를 지니고 있는 법밀사라는 신비단체를 이끌고 있는 총율사. 주문빈은 먼지 투성이 대청에 들어서자마자 유빙을 향해 미소를 머금었다. 유빙과 주문빈은 결코 초면이 아니었다. 제벌의 중원 오대 외벌세력을 이끌고 있는 두 세력의 장(長)으로써 이미 안면 이 있었던 것이다. "......" 유빙이 침묵하자 주문빈은 유빙의 전면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 며 말을 이었다. "허나 대벌주조차 어쩌지 못하는 제벌을 유총사 힘만으로 감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오." 유빙이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흡사 그대만이 제벌을 감당해 낼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료." "후후....! 역시 유총사와는 말이 통할 것 같소." 유빙의 말투에는 조소의 빛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주문빈은 개의 치 않은 채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한곁에 앉아 있던 여은금이 돌연 몸을 일으켰다. "자, 이 자리는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듯 하군요. 그럼 두 분 이 말씀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사르르- ! 청아한 패옥소리와 함께 여은금은 소리없이 물러났다. 주문빈은 마치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은금을 만류하지 않았다. 여은금의 모습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주문빈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유빙을 직시했다. "천하를 통털어 제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본인뿐이오." 유빙이 흠칫했다. 잠린왕자 주문빈의 말은 광오하다기보다는 확신에 차 있음을 느꼈 기 때문이다. 더우기 유빙이 알고 있는 주문빈은 결코 허언을 하 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빙이 경악한 듯 감탄한 듯 입을 열었다. "주총율사의 뛰어남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구료. 실로 믿을 수 없는 말이외다." "물론이오. 천하에 뉘라서 감히 제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장담 할 수 있겠소. 허나 이것을 보면 그대는 나의 말이 결코 허장성세 (虛張聲勢)가 아님을 믿을 것이오." 문득 주문빈은 품 속에서 낡은 죽간(竹幹) 한 권을 꺼내 유빙에게 내밀었다. 죽간으로 이루어진 죽책(竹冊)은 상당히 오래 전의 것 인 듯 고색이 창연했다. "이게 무엇이오?" 유빙은 주문빈이 느닷없이 죽책을 꺼낼 줄은 예상치 못해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주문빈은 엷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화실에는 역대 제왕들이 사용하던 기물들과 유품을 보관하는 황 성유진금고(皇聖遺眞禁庫)가 있소." "황성유진금고?" <황성유진금고.> 이곳은 역대 제황들의 위패와 유품을 모신 사당(祠堂)이랄 수 있 다. 이른바 종묘(宗廟)라고 불리우는 곳으로써 한 황조의 정신적 지주(支柱)라 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황성유진금고인 것이다. "본인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그 황성유진금고 안에 갇혀서 보내 야 했었소. 그 이유는....." "....?" "본 주씨황조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살인자와 광인의 피가 나의 부친의 몸에서 드러났기 때문이었소." '살인자와 광인의 피....?' 유빙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대명황실의 최대 비밀, 그 엄청난 비밀이 주문빈의 입에서 서슴치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나는 그곳에서 오히려 기연을 만날 수 있었소." 마치 남의 과거를 밝히듯 담담한 음성이었다. 허나 그 담담함이 오히려 듣는 이의 뇌리에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성유진금고에는 대명만이 아니라 중원에서 명멸해간 숱한 황조 의 모든 것들이 남겨져 있소.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대송제국 휘 종(輝宗)이 남긴 친필 밀서(密書)였소." "대송의 휘종이 남긴 밀서....?" 유빙은 도무지 주문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이유와 대송 휘종의 밀서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대송의 휘종! 휘종....?' 유빙은 대송의 휘종황제와 제벌의 관계를 머릿속으로 굴려 보았으 나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내심 고개를 저었다. "기실 제벌은 바로 그 분에 의해 세워진 것이었소." 허나 이어지는 주문빈의 말에 유빙은 놀람과 경악을 금할 수 없었 다. 유빙의 다소 놀람에 찬 눈을 바라보며 주문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읽어보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오." 유빙은 더 이상 무어라 입을 열지 않은 채 대송의 휘종 황제가 남 겼다는 죽간을 펼쳐들었다. <영원한 만승지존으로 군림해오던 중원 천자인 짐이 오늘에 이르 러 북방의 오랑캐에 볼모로 잡혀가는 수모를 겪어야 하다니.... 이 모든 것이 음락(淫樂)에 젖어 정사를 돌보지 않은 짐의 불찰이었도다.>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풍요와 번영의 낙토(樂土), 중원은 오랑캐에게 짓밟혀 망국 의 길을 걷고 있음이니..... 이에 짐은 중원의 안녕을 위해 현우(賢友)인 도당공(屠唐公)과 함 께 어떤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을 회천대계(廻天大計)를 수립하기 로 하였도다. 황실에 남아있는 모든 재물과 엄청난 분량의 무서(武書)들, 그리 고 온갖 영약과 기진이보들을 모두 사용하더라도 언젠가 중원을 되찾을 수 있는 비밀조직을 세우려는 것이다.> 유빙의 눈에 서서히 긴장과 놀람이 솟아났다. 초무림세력 제벌의 진정한 탄생 동기가 밝혀지고 있는 것이었다. <제....벌! 대륙은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처럼 많은 바, 실로 중 원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우리의 대지이도다. 허나 초야 의 기인이사들은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은 채 속세의 풍진(風塵) 을 묻히기를 싫어하니 대륙이 이민족에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들은 방관만 할 것이다. 이에 짐은 도당공을 내세워 초야의 기인이사들 을 규합케 하고 여기에 황실의 모든 힘을 쏟을 것이도다. 제벌은 드러나지 않으나 그 어떤 황조도 능가할 수 없는 최강의 세력이 될 것이다. 그 힘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더욱 완벽해질 것 이고 더욱 거대해질 것이니 중원에 비록 이민족의 황조가 들어서 더라도 중원은 중원인의 것이 될 것이다.> 아아, 실로 놀랍고, 또 격동스럽지 않은가. 황조는 무너져도 중원은 영원히 중원인의 것이다. 그 중원혼을 위 해 탄생된 것이 바로 제벌이었다니..... 휘종의 밀서 하단에는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어 있었다. 그것은 오 히려 제벌의 후사를 염려한 글이었다. <허나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세월이 흘러 제벌이 그 누구도 어 쩔 수 없는 괴물로 성장했을 때 그 제벌이 오히려 악용(惡用)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중원을 위해 탄생되어진 제벌이 오히려 중원 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을 결과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 던 것이다. 이에 짐은 항차 일어날지도 모르는 제벌로 인한 난세를 대비하여 제벌만을 전문적으로 견제할 하나의 비밀 결사를 만들게 되니 이 를 일러 용화사(龍華社)라 명하도다.> <용화사가 하는 일은 단 하나...., 제벌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 다가 그 제벌이 오히려 천하를 어지럽힐 때 제벌의 수뇌라 할 수 있는 대벌주와 십대장문을 은밀하게 살해해 제벌을 붕괴시키는 일이다. 이 용화사를 움직이는 모든 일을 여명지안(黎明之眼)이라 부를 것 이며 여명지안의 발동 방법은.....>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밀서의 하단 부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 았다. 바로 여명지안을 발동시키는 방법이 기록된 부분만이 고의 적으로 없어진 것이었다. 중원을 위해 제벌을 탄생시키고 다시 그 제벌을 붕괴시킬 방법을 기록한 밀서, 그 모든 내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제벌이라는 엄청난 초무림세력의 탄생동기와 그 제벌을 다시 붕괴 시킬 비밀살수들의 존재에 대해 밝혀져 있는 기록. 유빙은 이 모든 것이 결코 만들어진 조작극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주문빈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 뒷부분은 여명지안을 움직이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외다.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양해 바라오." "으음....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그대는 제벌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겠구료?" "그렇소.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여명지안을 시험해 본 적이 있 었소. 한 특정인물에 대해서만 여명지안을 움직여 그를 제거해 본 적이 있는 것이오." "누구를....?" "훗! 그 인물은 바로 일왕(一王)이외다. 바로 십대장문 중 최고의 서열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소. 그는 대벌주의 유일한 아들로서 이미 후대 대벌주로 지목되었던 인물이었소." "음....." "그의 무공은 가히 대벌주에 버금가는 것이었으나 그런 인물조차 여명지안이 움직임에 따라 영원히 말살되고 말았던 것이오." "도당곤(屠唐昆)! 일왕 도당곤의 실종에 그런 사연이 있었단 말이오?" 대벌주 도당문비의 후계자 일왕 도당곤이 이십 년 전 의문의 실종 을 당한 것은 대벌주 도당문비의 엄청난 분노를 불러 일으켰던 일이었다. 당시 대벌주 도당문비는 천하를 샅샅히 뒤지도록 명을 내렸으나 흉수에 대해 단 한 점의 단서도 찾지 못했다. 그 이후 대벌주 도 당문비는 거의 두문불출 제벌의 일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으니..... '으음....!' 유빙은 여명지안이라는 가공할 힘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명지안이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그것을 멈출 수가 없소. 물론 백찰무경의 대총사였던 그대 역시 여명지안의 범위 안 에 해당되오." "본가에조차 용화사의 인물이....?" "그렇소. 누가 그대를 죽일 용화사의 비밀살수인지는 아무도 모르오." 주문빈이 화사하게 웃었다. 한 마리 뱀이 웃는 듯 차가운 미소였다. "용화사의 비밀살수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오. 그들은 수백여 년간 가문으로 세습되어 오며 한 가지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이오. 그들은 죽여야 할 인물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르며 그 측 근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오." 유빙은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또 언제 발동할지 모르는 살인명령을 위해 수백여 년간을 가문으 로 이어져 내려오는 용화사의 비밀살수들, 무엇으로 변장해 있을 지도 모르는 그들의 존재는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유빙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렇다면 나조차 간단히 제거할 수 있을 텐데 굳이 나를 만나고 자 한 이유는 무엇이었소?" "그것은 현 천하가 완벽한 제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제벌이 강대하다고는 하나 천하는 제벌 말고도 많은 세력들이 꿈 틀거리고 있소. 때문에 내가 여명지안을 발동해 제벌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해도 그것이 천하의 대세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오." "결국 내게 이 모든 것을 서슴치 않고 밝힌 것은 나와 손을 잡고 천하를 일통시키자는 뜻이었소?" "그렇소. 유총사와 본인이 힘을 합치면 이 난세를 충분히 종식시 킬 수 있을 것이오." "그 다음에는?" "그 후에는 유총사와 내가 진정 완벽해진 제벌을 건립해 영원히 제벌천하를 이룩하면 될 것이오." 문득, 유빙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만약 내가 그대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주문빈이 고개를 저었다. 확신에 찬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는 유총사가 거절하지 못하리라 믿고 있소. 나의 제의를 거절 하기에는 그대는 너무 많은 적을 갖고 있소. 게다가.... 여명지안 의 가공함을 알고 있는 이상 거절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훗! 결국 친구가 되든가 아니면 적이 되란 말이오? 실로 그대다 운 흥정이오." 순간, 유빙의 눈이 차갑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무서 우리만큼 똑바로 주문빈의 눈을 정시했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소이다." "무엇이오?" 주문빈은 돌변하는 유빙의 태도에 의혹과 불안이 솟아남을 느꼈다. "훗! 내게 여명지안을 발동시켜 주시오. 나는...., 나의 가장 가 까운 측근 중의 누가 과연 나에게 칼을 겨눌지 그것이 무척 궁금하구료." 주문빈의 눈이 커졌다. 이 순간 속삭이는 듯 나직한 음성이 유빙의 입에서 한 자 한 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문빈, 그대는 한 가지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천 종예가의 후예는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 고 더더욱이나 그대와 같은 편집광적인 권력욕을 지니고 있는 벌 레들과는 함께 일을 하지 않는다네." 실로 지독한 모욕이 아닌가! 주문빈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 올랐다. 그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살기 또한 짙어져 갔다. "후후.... 권하는 술을 마다하고 벌주를 먹겠다는 것인가?" 주문빈은 짙어가는 미소와 함께 유빙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훗!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네. 자네가 여명지안을 움직 여 제벌의 중추인물들을 제거한 후 제벌을 장악할 것이라면 나는 오히려 그들을 도와 항차 제벌을 완벽하게 붕괴시킬 것이네." ... 무너뜨리기 위해 그들을 오히려 살려줄 것이다. 유빙의 말에 주문빈의 얼굴이 굳어졌다. 허나 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반면에 더욱 화사해졌다. "도리가 없군. 그대를 죽이는 수밖에....." 의미심장한 말이 주문빈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순간 허공에서 돌 연 괴이한 환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스쓰....! 손(手), 하나의 손, 백옥같이 희고 여인의 그것처럼 갸름하며, 실핏줄이 그대로 드러날 것 같은 투명해 보이는 하나의 손이 거짓처럼 솟아 나 유빙의 완맥을 움켜 잡아가고 있지 않은가! 소수(素手), 환상처럼 허공에서 솟아나 유빙의 완맥을 움켜쥐고 있는 소수의 주인이 이어 서서히 형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신을 두른 희디흰 백포, 얼굴은 가면인 양 일체의 표정도, 감정 도 없다. 여기에 분을 바른 듯 희디흰 피부. 아아, 바로 법밀사의 수호신이라 일컫는 냉월고성검무정이 아닌가! "후후! 어쩔 수 없었네. 그 손의 임자는 냉월고성검무정..... 바 로 나의 분신이네. 원래 그는 여명지안이 발동하면 법밀사의 총율 사를 죽일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본좌가 이미 그 여명지 안을 알고 있었기에 나의 수하로 삼은 것이네." 주문빈의 설명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법밀사의 수호신이라고 알려져 있는 냉월고성검무정이 원래 여명 지안이 발동하면 오히려 그 법밀사의 총율사를 살해할 용화사의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니....! "그는 단연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인물일 걸세. 그의 능력은 본좌 조차 아직 다 모르는 실정이네." "호....." 유빙은 냉월고성검무정의 소수에 완맥이 움켜 잡혀 있는 상태였 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채 미소만을 머금고 있었다. "후후후.... 유총사, 그대는 이제 냉월고성검무정의 무서움을 실 감하게 될 것일세. 허나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린다면 기회는 있을 것이네." "주문빈, 그 이전에 자네의 목숨부터 돌봐야 하지 않을까?" 유빙이 오히려 주문빈을 직시했다. 주문빈이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후후.... 그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네. 나는 스스로 죽고 싶어 도 마음대로 죽을 수 없는 사람이네. 그 이유는 냉월고성검무정이 나의 죽음을 원치 않고 있기 때문이네." 허나 이 순간, 말을 마치려던 주문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음처럼 차고 비수처 럼 예리한 음성이 그의 귀로 흘러들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친구! 그런 말은 저승에 가서나 하는 게 좋을 거야. 계속 소주님의 손을 잡고 있는 저 괴물을 내보내지 않는다면 말일세." "누, 누구냐?" 벌떡 몸을 일으키려던 주문빈의 신형이 엄청난 힘에 의해 제자리에 앉혀졌다. 쓰윽! 무지막지한 손 하나가 어느새 그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아래로 힘을 가한 때문이었다. "나는 단두백정 학거비라는 사람일세." 냉월고성검무정의 출현 만큼이나 신비스럽게 출현한 인물의 형상 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를 방불하는 용모에 칠흑처럼 검은 가죽옷, 여기에 두 눈은 끝없는 무저갱을 대하는 듯 전율스럽기만 했는데..... "학거비!" 주문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인간 공포의 끝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느닷없이 자신의 목줄기를 움켜쥔 것이었다. "젊은 친구! 살고 싶으면 저 괴물을 꺼지라고 말해 주게." 학거비는 일체 다른 곳에 눈을 두지 않았다. 그의 공포스러운 눈 은 오직 주문빈의 동공(瞳孔)에 못박혀 있을 뿐이었다. "으음.... 무정! 대총사의 손을 놓고 물러나 있게." 경악성을 발하던 주문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냉월 고성검무정의 신형은 순식간에 허공 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빙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할아범! 죽일 가치도 없는 인물이니 그만 놓아주게." 대청의 입구를 벗어나고 있는 유빙의 입에서 흘러 나온 것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마치 주문빈 따위는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젊은 친구! 내 그대에게 충고하는 거네. 되도록이면 앞으로는 소 주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네. 오래 살고 싶다면 말일세." 학거비 역시 가벼운 말투로 내뱉은 후 유빙의 뒤를 따랐다. 주문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시를 당해도 너무 철저하 게 무시를 당한 것이 아닌가! 마악 대청을 빠져나가던 학거비가 고개를 돌려 진정 공포스러운 눈으로 주문빈을 응시한 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너였군. 이십 년 전 나를 공격한 것이 제벌의 인물들인 줄 알고 제벌에 혐오를 느껴 그곳을 떠났건만 그것이 바로 네가 한 짓이었군." 학거비의 이글거리는 눈과 담담하면서도 공포를 부르는 독백에 주 문빈은 찬물을 끼얹은 듯 몸을 진동시켰다. "그, 그대는....?" 그의 뇌리에 번개같이 한 인물이 스쳐갔다. 준미하면서도 당당했 던 체구를 지녔던 인물, 바로 일왕이라 불리운 도당곤이라는 인물이었다. '일왕! 단두백정 학거비가 바로 그였단 말인....가?' 주문빈은 너무도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허나 그 순간 학거 비는 이미 유빙의 뒤를 따라 조용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아....! ② 주문빈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유빙은 곧바로 여은금을 찾았다. 폐장원의 후원에 이르자 그는 연못 가운데에 위치한 정자로 다가 들었다. 정자의 중앙에는 연록색의 부드러운 비단 적삼을 걸친 여 은금이 조용히 앉아 었다. 한 손에는 찻잔을 또 한 손으로는 책 을 펼쳐든 채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여은금의 자태는 너무도 아 름다운 것이었다. 여은금은 유빙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책에서 눈을 들어 조용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이리로 오르시지요." 유빙은 여은금이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아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여은금이 읽던 책자를 한곁에 밀어 놓으며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요." "무엇이오?" 여은금은 잠시 망설이다가 탄식처럼 입을 떼었다. "기실 본가는 초령왕의 후대이면서도 그 분의 진전을 잇지 못했어 요. 그 분은 아무도 모르게 실종되셨고 그 당시 본가에 남아있던 것이라고는 그 분이 창안한 미완성의 무공 한 가지였지요." "미완성 무공?" "예! 그것은 하나의 심법(心法)으로서 엄청난 효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어요. 허나 기이하게도 예의 심법은 일반의 초식을 통해 쏟 아낼 수가 없는 것이었어요." "....?" "건곤대나이(乾坤大拿移)라 이름지어진 초령왕이 남긴 심법은 모 두 마흔아홉 세류로 구분되는데 전체적으로 칠단공(七段功)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이 내공심법의 특징은 그 효용이 엄청나 천하의 어떤 내공심법보다도 강한 내공을 익힐 수 있는 것이었어요. 하지 만 건곤대나이의 칠단공은 그에 맞게 창안된 초식으로 펼치지 않 으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해요. 그뿐 아니고 그것이나마 겨우 오단공밖에 남겨져 있지 않았어요." 유빙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그는 자신과 격돌하던 여은금의 무공 을 생각해내며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펼친 무공이 칠단공 중 겨우 오단공만으로 펼친 것이었단 말이오?" "예! 초식은 어떻게 그것에 맞게 만들어 냈으나 칠단공을 모두 익 히지 못해 기실 저는 그것을 익히기가 두려운 실정이에요. 기실 건곤대나이의 오단공에 지나지 않는 무공을 계속 펼치게 되면 점 점 백치로 변하게 되요." "......" "그리고 제가 흑포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건곤대나이가 완 성되지 않아 그것을 펼칠 때마다 전신에 일곱가지 색이 떠올라 무 척 끔찍스러운 형상을 하기 때문이에요." "음....!" "완성되지 않은 심법과 융화되지 못한 초식의 운용.... 그 때문에 소녀는 점점 백치로 변해가고 있어요. 그리고 얼굴 또한 일곱색으 로 변하는 끔찍한....." 여은금은 말을 잇지 못하고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유빙의 놀람은 컸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 무공을 펼치지 않으면 될 게 아니겠소?" "예! 허나 흑궐을 일통시키고 제벌을 무너뜨려야 하는 대업 때문 에 나 자신을 희생시키기로 했던 것이었어요." "음....! 그 일은 이제 내가 맡을 것이오. 여소저는 다시는 그 무공을 펼치지 마시오." 유빙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고마와요." 유빙의 눈에서 진정이 뻗어나오자 여은금은 기쁨에 찬 눈빛으로 그윽히 유빙을 직시했다. 그러다가 유빙의 눈과 마주치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유빙과 그녀의 거리는 겨우 한 자에 지나지 않아 유빙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난초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유빙은 그녀의 백옥같은 목덜미와 아름다운 머리결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진탕되어 그 역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 리고 말았다. 그는 어색한 듯 잔기침을 터뜨리며 입을 떼었다. "흠, 헌데.... 내게 부탁할 일이란 무엇이오?" 여은금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제게 초령왕의 신물인 사망도첩을 한 번 보여달라는 것이었어요." "....?" "소녀의 생각으로는 초령왕께서 결코 미완성의 무공을 남겼을 것 같지가 않아요." 유빙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사망도첩 어딘가에 건곤대나이의 나머지 이단공이 숨겨 져 있을 것이라는 뜻이오?" "예! 반드시 그럴 거예요." 유빙은 여은금의 확신에 찬 눈빛을 대하며 서둘러 사망도첩을 꺼냈다. "사망도첩은 내가 이미 세밀히 살핀 바가 있으나 그런 심법구결은 없었소. 그러나 소저가 한 번 살펴보겠다면....." 유빙이 사망도첩을 내밀자 여은금은 마흔아홉 장의 금척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사망도첩에 기록되어 있는 사망도첩의 사용초식 천흥 사영비를 발견하고 기쁨의 탄식을 터뜨렸다. "아아! 건곤대나이로 펼칠 수 있는 초식이 바로 이거예요." 여은금이 정신없이 천흥사영비의 마흔아홉 초식을 들여다 보는 것 을 대하고 유빙의 뇌리에 문득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으음.... 어쩐지 천흥사영비를 펼칠 때마다 어딘가 답답함을 느 끼곤 했다. 그 이유가 바로 내공심법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던가?' 이때 여은금은 사망도첩의 마흔아홉 장 금척 하나하나에 돌연 진 기를 주입해 가며 살피기 시작했다. 유빙은 그녀의 행동에 의혹을 느껴 조용히 지켜보았다. 헌데 사망도첩 중 유일하게 비어있는 세장의 금척에 돌연 글귀가 나타나지 않는가! "찾았어요." 여은금이 기쁨에 찬 탄성을 토하며 유빙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유빙을 향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건곤대나이는 모두 칠단공으로 무토진기(武土眞氣), 이화진기(離 火眞氣), 계수(癸水), 감리(坎離), 경금(庚金)의 오행(五行)과 음 양(陰陽)이기인 태을(太乙), 무극(無極)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그 중 본가에 전해진 것은 오행의 다섯 진기의 운용법 뿐이었지요. 여기 칠단공 중 나머지 이단공이 있는 거예요." 여은금은 황급히 외친 후 칠단공 중 이단공을 앉은 자리에서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유빙은 그녀를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초령왕 여율령 의 무학이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은금의 얼굴이 점차 일곱 가지의 색채 로 변화해 나가다가 점차 원래의 얼굴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백회혈(百會血) 위쪽으로 안개같은 기류가 피어올 랐다가 한 줄기 미세한 기류로 변하며 그녀의 코를 통해 다시 체 내로 흡수되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체내를 일주한 건곤대나이의 진기가 이제야 거침 없이 사지백해로 퍼져나가고 있음을 유빙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는 퍼렇게 변하고 또 때로는 검 은 빛을 띄우기도 해 처음에는 실로 끔찍했으나 조식(朝息)이 거 의 끝나갈 무렵에는 오히려 맑은 청기를 띄워 성스럽기만 했다. 유빙은 그녀의 변화를 신기한 듯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여은금의 맑은 눈이 뜨여졌다. 그녀는 눈을 떠 유빙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수줍은 듯 얼 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고마와요. 이제야 선조의 무학을 완성시킬 수 있었어요. 그것은 모두....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여은금의 기뻐하는 모습에 유빙도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축하드리오." "호호호.... 이젠 제가 당신에게 이 건곤대나이를 가르쳐 드리겠어요." 여은금은 너무도 마음이 들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살그머니 유 빙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아니예요. 사망도첩의 초식 천흥사영비가 제 위력을 발휘하려면 건곤대나이를 반드시 익혀야 해요. 그리고.... 당신의 내공은 사 실 뛰어난 편이 아니예요." "......" "건곤대나이를 완전히 연성하려면 칠 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 하 나 당신은 이미 천흥사영비의 초식을 완벽히 알고 있으니 그 시일 이 단축될 수 있을 거예요." 여은금은 유빙이 극구 사양을 해도 막무가내로 건곤대나이의 구결 을 하나하나 들려주기 시작했다. "제일단공 무토진기의 운용법은 천흥사영비의 칠초식까지와 관계 가 있어요. 초식 하나하나에 심법의 운용이 잠재해 있기는 하나 정확한 구결을 모르고서는 익힐 수가 없어요." 유빙은 그녀가 들려주는 제일단공 무토진기를 듣고 나서는 그녀의 말이 맞음을 알 수 있었다. 천흥사영비의 일초식에서 칠초식까지에 모두 한 가지 내공심법을 운용하는 운기의 묘(妙)가 내재되어 있었고 그 위력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결을 알고 그 구결에 따라 운기해야 하는 것이 었다. 유빙은 천흥사영비의 초식과 건곤대나이의 일단공을 연결시켜 생 각하며 조용히 운기(運氣)하기 시작했다. 진기는 막힘없이 단전에 서 솟아나 그의 체내를 일주하기 시작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쯤 지났을까? 유빙은 일단공을 완벽히 터득한 후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 단지 일단공을 터득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지며 진 기가 무궁하게 전신 기경팔맥 곳곳에 뛰놀고 있지 않은가! '헌데 이것이 무어 그리 어렵다고 칠 년씩이나 걸린다는 것일까?' 유빙이 의혹의 눈을 드는 순간 여은금은 단정히 앉아 제이단공 이 화진기의 운용법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유빙은 다시 이단공의 구결에 따라 진기를 움직여 나갔다. 이단공 역시 단 한 번 운기한 것만으로 그의 마음대로 움직여 나감을 느 끼고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반나절이 순식간에 흘렀다. 여은금은 유빙의 진전이 예상보다 더욱 빠름을 보고 놀라는 한편 기쁘기 이를데 없어 단숨에 건곤대나이의 칠단공까지 유빙에게 들 려 주었고 유빙은 칠단공까지 단 한 번도 막히지 않은 채 순식간 에 하나하나 터득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건곤대나이의 칠단공 무극진기는 음양을 일치시키는 마지막 단계 로써 유빙은 벌써 자신의 내공이 엄청나게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사형종혈의 막대한 잠재력조차 완전하게 그의 것으로 융화 되어 그야말로 대해와 같은 진기가 그의 체내에서 뛰놀고 있었던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것 같고, 듣지 않아도 이미 깨달을 것 같은 유실 반허(有實返虛), 자진귀박(自眞歸博)의 심오한 경지까지 자신의 성취가 급성장했음을 느낀 유빙은 너무도 기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의 성취가 너무 빠르군요." 유빙이 조식을 마치며 눈을 뜨자 여은금이 기쁨에 찬 일성을 토했다. 유빙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모두 그대 덕분이오." "......" 자신의 두 손이 유빙의 손에 잡히자 여은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기쁜 듯, 얼굴을 숙이면서도 흘기듯 유빙의 얼굴을 바라보 고 있었다. 어딘가 이지적이면서도 내면에 불덩어리를 안고 있는 듯한 관능적 인 매력을 겸비하고 있는 여은금의 자태에 유빙의 가슴이 다시 일 렁였다. 유빙은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을 놓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밤이 되었구료." 유빙은 자신이 정자에서 보낸 시간이 적지 않음을 깨닫고 다소 놀 란 빛을 띄웠다. 여은금은 유빙이 잡아끄는 대로 몸을 일으키다 기웃하면서 유빙의 가슴에 몸을 기대왔다. "좀 어지러워요. 너무 기뻐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유빙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나도 그렇소.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게요." "됐, 됐어요." 여은금은 유빙의 품에서 빠져나갈 듯 몸을 뒤채더니 허리를 잡았다. 유빙은 가슴 양편에 폭신하게 눌려오는 따뜻한 압감(壓感)을 받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때, 섬뜩하리 만큼 신선한 감촉이 그의 입술로 전해져왔다. 여은금의 두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두 발을 곤두세운 채 유빙의 목을 안고 입을 맞대었다. "공기가 차오. 이제 그만 잠을 자야 할 시간이....." 유빙은 입술이 떼어지자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아요." 여은금은 대담하게 유빙을 직시했다. 그녀의 이런 태도는 혜성(彗 星)처럼 느닷없이 나타난 자신의 사랑을 결사적으로 붙잡으려는 의지가 엿보여 사랑스럽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유빙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을 느껴 와락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 고 힘을 주었다. 여은금은 마른침을 넘기며 어쩔 줄 모르고 가뿐 숨결을 흘려냈다. 유빙의 우악스런 두 손이 그녀의 몸을 끌어당겨 밀착시키자 그녀 는 자지러지는 신음소리를 울렸다. 굶주린 늑대 앞에 놓인 먹이처 럼 여은금은 유빙에게 모든 것을 내맡겼다. 어느새 다시 온누리를 내리비치고 있는 월광은 진정 교교스럽기만 했다. .... "아아!" 여은금은 마침내 찾고 있던, 그렇게 애타게 찾아 헤매던 보석을 찾은 듯 환호성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 환호성은 곧 탄식으로 이 어진다. 슬픈 탄식이 아니라 온몸이 기쁨의 늪 속으로 산산이 흩 어지는 듯한 열락의 탄식이었다. 유빙과 여은금은 수십 번을 만나 사랑하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 다. 단 한 번의 만남, 그 단 한 번의 만남이 있은 후 그들은 자연 스럽게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맑은 하늘에 청뢰(靑雷)가 번뜩이는 듯 그들의 정신 과 몸을 불태운 사랑이었다. 마치 번뜩이며 순식간에 다가온 사람 이 그와 함께 번뜩이며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는 듯 안타까움마저 담겨있는 행동이었다. 유빙은 자신도 모르게 불타고 있는 여은금 의 몸을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가만 계세요." 폭풍이 지나가자 여은금은 젖은 입술로 땅 속으로 꺼져드는 듯 소 곤거렸다. 그녀는 놓치면 사라져버릴 것처럼 느껴지는 듯 언제까 지고 유빙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잠시 후 유빙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장삼을 벗어 월광에 하얗게 반사되고 있는 여은금의 나신을 덮어주었다. 여은금은 기쁜 듯 몸을 일으켜 옷을 걸친 후 사망도 첩을 내밀었다. 그녀는 이어 유빙의 눈을 가까이 들여다 보며 속삭였다. "당신은 하마터면 죽을 뻔 했어요. 제 손에 의해....." 유빙은 깜짝 놀랐다. 여은금은 장난스럽게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사망도첩의 금척에 운기한 것은 바로 건곤대나이였어요. 그 건곤대나이의 내공이 아니면 글씨가 나타나지 않게 되어 있었지요." "......" "과연 건곤대나이를 운기하자 사망도첩에는 건곤대나이의 나머지 구결과 함께 한 가지 명령이 남겨져 있었어요. 초령왕이 후대에게 남긴 명령이 무엇인지 알아요?" "모르겠소." 여은금은 더욱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원래 건곤대나이는 본문에만 전해졌어요. 그리고, 사망도첩에 나 머지 구결이 있었던 거예요." "그것은 이미 나도 알고 있지 않소?" "초령왕께서는 만약 자신의 후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사망도첩을 얻을 것을 대비해 그런 안배를 한 것이었어요. 건곤대나이를 익힌 후대가 만약 사망도첩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망도첩을 지니고 있 는 사람을 죽여야 해요. 그것이 바로 초령왕이 남긴 명령이었어요." "......" "만약 사망도첩이 후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면 건곤대나이를 익힌 후대가 사망도첩에서 나머지 구결을 익혀 그를 죽이게 한 것이에 요. 건곤대나이가 완성되면 그 누구라도 이미 상대가 되지 않아요." 여은금의 말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유빙은 그녀의 말에 내심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진정 한 무학이 반드시 후대에게만 전해지길 원한 초령왕의 안배는 잔 인한 것이었다. 여은금은 건곤대나이를 완성한 순간 유빙을 죽이도록 명령받은 셈 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건곤대나이만으로도 대등한 무공을 지니고 있던 여은금이 건곤대나이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면 유빙을 살해하 는 것은 과연 간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놀랍구료." 유빙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자 여은금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망도첩에서 살인명령을 읽은 저는 건곤대나이를 완성시키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실은 고민을 했던 것이지요. 초령왕의 명령 을 따르자니 당신을 죽여야 하는데.... 솔직이 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그 이유는....?" 유빙이 짓궂게 질문했다. "몰라요!" 여은금이 얼굴을 붉히며 외친 후 정색했다. "해서 저는 한 가지를 생각해 냈어요. 선조의 유시를 지키는 것도 되고, 또 당신을 해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방법 말이에요." "호.... 그 짧은 시간에 그런 묘안을 찾아냈다는 말이오?" "예!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한 집안으로 합치는 일이었어요. 그 렇게 되면.... 당신 역시 외인(外人)이 아니니 죽을 이유가 없게 되어.... 흡!" 여은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유빙은 돌연 가슴 벅차 오르는 사랑을 느껴 와락 그녀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이 여인이 대담하게 나를 유혹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단 말인가!' 유빙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커다란 기쁨이 그의 가슴에 가득했다. 진정한 사랑을 획득한 느낌이었다. 굳게 얽혀 있는 두 사람 위로.... 월광(月光)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 팔왕예조 제3권 제26장 이수(離水)에 내리는 비(雨)! ━━━━━━━━━━━━━━━━━━━━━━━━━━━━━━━━━━━ ① 이수야우(離水夜雨). 이수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주팔경(神洲八景)의 하나로 꼽히는 이수는 그 풍광이 아름답기 이를데 없어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 들이 즐겨찾는 명소였다. 이 이수의 중앙에 은은한 궁등(宮燈)이 걸려있는 한 채의 화선(花 船)이 밤비를 맞으며 떠 있었다. 화선의 갑판 위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활 처럼 휜 허리와 거친 피부를 지니고 있는 꼽추 사공이었고 그 한 쪽에 간단한 주안을 마련한 채 대작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유빙과 학거비였다. 운치 있다고나 할까?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이수 위에 한 척의 배를 띄우고 술 잔을 들고 있는 유빙과 학거비의 모습은 어찌보면 한 폭의 그림같았다. 허나 이 순간 학거비의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소주....! 이곳에 배를 띄운 지 벌써 이틀째입니다. 이곳에 머무 르고 있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훗! 할아범은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는 듯 하구료." 유빙의 담담한 태도에 학거비가 문득 선미에서 키를 잡고 있는 꼽추노인을 일별했다. "걱정이랄 것은 없으나.... 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드는군요." "무슨 뜻이오?" 학거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소주께서는 이미 많은 적을 지니고 계십니다." "....!"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른다는 것은 적을 불러 들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기에....."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는 학거비의 불안을 대수롭지 않 게 여기는 듯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오히려 그렇게 불안해 하는 할아범이 이상하게 느껴지는구 료. 할아범!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거북하오?" "그게 아니고....." 학거비는 얼굴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후후.... 천하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은 없소. 우리는 이미 많은 적을 상대하고 있느니 만큼 위험이 닥칠 때는 닥치더라도 이렇게 술을 즐길 때는 마음껏 술만 즐겨야 하는 것이오." 유빙의 담담한 태도에 학거비는 오히려 더욱 답답한 듯 내심 고개를 저었다. 학거비의 안색을 살피던 유빙이 입을 열었다. "후후.... 아무래도 할아범에게 말을 해야 하겠구료. 기실 나는 이곳에서 한 가지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바로 여소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 여소저와 나는 흑궐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정비할 방법을 의논했었소이다. 아마 멀지않아 좋은 결 과가 있을 것이오." "헌데 그 연락을 꼭 이곳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소." 학거비는 그제야 유빙이 이틀간이나 이수에서 머무르는 이유를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이때, 유빙과 학거비가 타고 있는 화선으로 한 척의 소선(小 船)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소선 위에 앉아 있는 십팔구 세 가량 된 녹의단삼의 소녀, 그녀는 바로 이야기를 팔고 다니는 취설서 취노인의 손녀 취려홍이었던 것이다. '취려홍....?' 유빙은 취려홍이 타고 있는 소선이 똑바로 다가들자 내심 의아스 럽기 이를데 없었다. 그녀가 마치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오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헌데 그녀의 소선이 다가오자 화선의 키를 잡고 있던 꼽추노인이 취려홍을 향해 반색하지 않는가! "려홍아! 네가 웬일이냐?" "염숙부를 만나러 왔어요." 취려홍이 꼽추사공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것 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네가 나를 만나러 오다니....?" 꼽추 사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순간 유빙 역시 내심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이 우연히 세낸 화선의 사공이 취려홍과 알고 있을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유빙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무엇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염숙부라 불리운 꼽추 사공이 취려홍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헌데 네 할아버지는 어디 가시고 너 혼자 다니는 것이냐? " "호호.... 할아버지께서는 볼 일이 있어 어디론가 가셨어요. 저는 심심하기도 하고 해서 염숙부나 뵈려고 온 것이에요." "네 할아버지가 볼일이 있다니 그것 믿기지 않는 일이로군." 취려홍은 꼽추 사공의 말에 개의치 않은 채 화선 위로 올랐다. 이 어 그녀는 유빙을 그제야 발견했다는 듯 반색했다. "유총사 아니세요? 정말 우리는 인연이 깊군요.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유빙이 고소했다. "소저는 마치 이곳에서 우리가 우연히 만난 듯 말씀하시는구료?" "그렇다면 제가 이곳에 유총사가 있는 것을 알고 왔다는 말인가요?" "하하.... 분명히 그럴 것이오. 취설서와 그 손녀는 이 세상에서 모르는 것이 없다 하던데 어찌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몰랐겠소이까." 취려홍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유빙의 말을 부인하지 않은 채 예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군요. 하지만 저는 오늘 하나뿐인 염숙부 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에요. 물론 유총사를 만났으면 하는 바램 도 없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반 정도는 우연이라는 말씀이시오?" "맞아요. 헌데 제가 이 술자리에 끼어도 괜찮을까요?" 유빙이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뻗어 짐짓 자리를 권했다. "소저와 같은 가인을 어찌 마다할 수 있겠소. 앉으시오." 취려홍은 사뿐히 유빙에게 다가들며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유총사께서는.... 그동안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군요." "심경의 변화?" 유빙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혹의 눈빛을 떠올렸다. 취려홍이 밝게 웃었다. "호호호.... 예전에는 만년빙처럼 차갑기만 하던 유총사였는데 오 늘은 풍류공자처럼 여인에게 칭찬까지 할 줄 아시니 분명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 같이 느껴졌어요." 유빙의 내심에는 경악이 스쳤다. 그녀의 말 한 마디는 실로 날카 로와 그의 변화를 꼬집은 것이었다. 기실 그는 중원에 나선 이래 점차 성격이 변해오고 있었던 것이 다. 음울하고 차갑기만 했던 성격이 다소 여유롭고 대범해졌다고 나 할까? 게다가 여은금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는 정신적으로 매우 성숙해졌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유빙이 미소하며 결코 그녀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내 이미 소저가 평범하지 않은 고인(高人)임은 알고 있었으나 이 토록 예민한 관찰력을 지니신 분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그만 두세요! 저는 당신보다 키가 작은데 어찌 고인이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취려홍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유빙의 말을 그녀는 재치있게 받 아넘긴 것이었다. 유빙은 그녀가 무척 재미있는 소녀라고 생각했 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떼었다. "소저!" 헌데 그가 채 말을 잇기 전에 취려홍이 다시 그의 말을 자르는 것이 아닌가! "저의 이름은 소저가 아니예요. 그런데 어째서 시종 소저라고만 부르지요?" 약간 토라진 듯한 취려홍의 태도에 유빙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 올랐다. 취려홍은 유빙이 빙긋이 미소하자 쏘아붙이듯 말을 이었다. "저의 이름은 취려홍이에요. 그러니 앞으로는 여홍이라 부르도록 하세요." "알았소이다. 여홍! 나를 만나려는 이유를 들려주실 수 있겠소?" 유빙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여유로운 태도와 부드 러운 미소를 입가에 담고 있는 그의 이런 모습은 확실히 과거와는 달리 여유가 있어 보였다. 유빙이 계속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취려홍이 얼굴을 굳혔다. "저는 당신과 한 번 겨뤄보고 싶었어요." 유빙이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대체 무엇을 겨루자는 것입니까?" 유빙의 태도에 다소 익살기가 섞여 있었다. 취려홍이 여전히 정색한 채 말을 이었다. "당신은 천하제일 무인의 한 사람이니 무공으로 겨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요. 또 당신은 천종예가의 후인이니 문(文)과 예(藝) 로써 겨루는 것 또한 제가 질 게 뻔해요. 허나 단 한 가지 제가 당신에게 이길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게 무엇이오?" 유빙은 취려홍의 도전에 얼떨떨! 하면서도 흥미가 없지 않았다. "호호호.... 바로 주량(酒量)을 겨루는 거예요. 저는 어렸을 때부 터 주선(酒仙)이랄 수 있는 할아버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제법 주 량이 늘었거든요. 그래서 당신과 술로 한 번 승부를 겨루고 싶어요." "술먹기 시합이라.... 그것 재미있겠구료." 유빙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어째 만나는 사람들마다 주당(酒黨)이 아닌 사람이 없으니.... 참 재미있는 일이로군!' 유빙이 내심 쓴 웃음을 머금고 있는 순간 취려홍이 진지한 눈빛으로 유빙을 응시했다. "승낙하는 건가요?"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택하시겠어요?" "주량을 겨루는 데도 방법이 있단 말이오?" "호호.... 그렇다면 그저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라고 아셨나요?" "솔직히 그렇소." "당신은 정말 주법(酒法)이나 주도에 대해서는 많이 부족하군요." '주도(酒道)....?' 유빙은 취려홍의 조소에 내심 곤혹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여인이 술마시기 시합을 걸어오는 것도 난생 처음이려니와 술의 학문까지 논하고 있음이니 차라리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취려홍은 연신 진 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고 있었다. "주량을 겨루는 데도 문(文)과 무(武), 이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마치 강론조로 나오는 취려홍의 설명에 유빙은 아예 바보가 되기 로 내심 작정했다. 그는 감탄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말 을 세이경청(洗耳敬聽)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말한, 그저 술이나 마시는 방법은 무에 속하는 방법으로 써 천하에서 가장 무식한 시합이에요. 그것은 소가 물을 마시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지요." "호.... 과연 그런 것 같구료. 헌데 소저는 어떤 방법으로 겨루겠다는 것이오?" 유빙은 점차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어요. 그 방법은 신기할 뿐 아니라 아주 재미가 있고 그리고 운치 또한 있어요. 당신은 아마 그 방법을 찬 성할 거예요." 취려홍이 말하는 태도는 마치 어린아이가 조잘대는 듯했다. 그녀 의 이런 말투는 상대를 대화 속으로 잡아끄는 기이한 마력을 지니 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유빙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차려진 술상이니, 어서 그 방법이나 말해보시오." "그것은 문답법(問答法)이에요. 만약 제가 어떤 일을 그대에게 질 문했는데 만약 그대가 그 질문의 대답을 할 수 있으면 제가 지는 것으로 해서 저는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해요. 그리고 당신이 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때는 당신이 술을 한 잔 마시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계속 서로가 문제를 내면 되는 거예요. 이것이야말로 문과 무를 겸비한 술 시합이랄 수 있지 않겠어요?" "그거 참 신기한 시합이구료. 헌데.... 여홍은 그렇다면 과연 나 에게 무엇을 물을 것인지....?" "그것도 질문으로 여기겠어요. 저는 아까 할아버님이 볼일이 있어 누군가를 찾아갔다고 했는데 과연 할아버님이 누구를 만나러 가셨 는지 아느냐고 질문하려 했어요. 나는 이미 당신의 질문에 대답을 한 셈이니 어서 한 잔을 드세요." "....!" 유빙은 멍청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반드시 틀렸다고만 할 수 없어 쓴 웃음과 함께 술 한 잔을 마셨다. 이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나는 당신이 대답한 말 가운데 들어 있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거요?" "그것도 질문의 하나예요. 맞아요. 당신은 대답해야 해요. 자, 또 술 한 잔을 드세요." 유빙은 취려홍의 말에 깜짝 놀랐다. 실질적으로 취려홍은 시합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두 번이나 거푸 이긴 셈이 되지 않았는가. 유빙은 이제부터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함을 깨달으며 다시 한 잔 을 마셨다. 그리고는 그녀의 교묘한 질문에 다시 대답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어이없는 듯 얼굴을 이그러뜨렸다. "당신 할아버지가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 하나 과연 누구를 만나러 가셨는지 나는 모르겠소이다." "그렇다면 또 한 잔 드세요." "여홍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물론이지요. 그는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사람이에요. 지금 할아 버님이 만나고 있는 사람은 낭왕이라 불리우는 창랑왕, 바로 그 사람이에요." 취려홍의 말은 유빙의 질문에 대답을 한게 된다. 유빙은 쓴 웃음 과 함께 또 한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술잔을 입에 대는 유빙의 눈 깊은 곳에서는 이채가 솟아나고 있었다. 취설서 취노인이 창랑왕을 만나고 있다니 어찌 태연할 수 있겠는가. 이때 취려홍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는 지금 술을 마시고 싶은데 당신은 단 한 번도 저를 이기지 못하는군요." "......" "이번에는 제발 제 대답에 대답할 수 있기 바래요. 자, 우리 할아 버님께서 창랑왕을 만나고 있는 이유를 아시나요?" 유빙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을 뿐더 러 그는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금 취 려홍과 더불어 시합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황급히 입을 열고 있었다. "창랑왕! 그는 어디에 있소?" 유빙의 질문에 취려홍이 생긋 웃었다. 그녀는 유빙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종류의 시합에는 한 가지 금기사항이 있어요. 그것은 질문 하는 사람이 그 질문의 답을 확실히 알고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것을 질문해서는 안 되요. 당신은 실수를 한데다 제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으니 두 잔을 마셔야 해요." '이러다가는 나 혼자 만취하겠군!' 유빙은 내심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취려홍의 교묘한 시합요청 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한 안배임을 어렴풋이 느끼며 다시 두 잔의 술을 마셨다. "할아버님이 창랑왕을 만나고 있는 이유는 그에게 한 가지 물건을 전해주기 위함이에 요." 취려홍은 자신의 질문 중 유빙이 대답하지 못한 것을 자신은 확실 하게 알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 물건은 바로 철국령(鐵菊令)이에요." 말과 함께 취려홍은 어느새 품 안에서 한 개 기물체를 꺼내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정사각형 물체, 철(鐵)로 만들어진 듯 검은 바탕에 무거운 질감을 드러내고 있는 사각 패의 중앙에는 한 송이 국화문 양이 정교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 철국령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아세요?" "모르오. 나는 또 한 잔을 마시겠소. 어서 말이나 하시오." 유빙이 서둘러 술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취려홍이 미소와 함 께 말을 이었다. "이 철국령을 지니고 있는 것은 곧 제벌 대벌주의 후계자임을 상징하는 것이에요." 유빙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외치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창랑왕이 바로 제벌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이오?" "그래요." 취려홍은 이번 만큼은 관용을 베풀겠다는 듯 시합의 규정을 따지지 않았다. 유빙은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에 잠시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창랑왕, 그가 돌연 제벌의 후계자로 떠오르다니 실로 놀랍지 않은가! 유빙이 경악해 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자 취려홍이 문득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나 이 철국령은 하나가 아니고 모두 다섯 개이고 후계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닌 다섯 명이에요. 호호호....! 창랑왕은 그 다섯 명 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일 뿐이에요." "음....!" 유빙은 이어지는 취려홍의 말에 정신이 다 없었다. 허나 창랑왕이 대벌주의 후계자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소 안도할 수 있었다. "후계자를 나타내는 영패는 모두 다섯 개로 철국령, 취국령(翠菊 令), 설국령(雪菊令), 백국령(白菊令), 황국령(黃菊令)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취려홍은 문득 손에 들고 있던 철국령을 유빙에게 흔들어 보이며 질문했다. "당신은 이 철국령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나요?" "모르오." "호호....! 그 자신의 것조차 모른다니 정말 그대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군요." 유빙은 철국령이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에 눈을 들었다. 이는 곧 그 자신도 대벌주의 다섯 후계자 가운데 한 명으로 선택 되었음을 나타내지 않은가. 헌데 이 순간 취려홍의 품에서 다시 한 개의 영패가 나왔다. "이것은 설국령이에요. 이것의 주인은 누구인지 아시나요?" 취려홍은 설국령을 꺼내는 한편 무심한 동작으로 철국령을 유빙에 게 건네 주었다. 유빙은 무의식 중에 철국령을 받아들고 있다가 그녀가 또 하나의 영패를 꺼내자 문득 취려홍의 신분에 대한 의혹 이 솟아났다. "이 설국령은 바로 흑궐의 새로운 대종사로 떠오른 신비인물의 것 이에요.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흑궐은 조만간 그 사람에 의해 정비될 것이라고 했어요. 때문에 그 역시 후계자로서의 자격이 있 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래요. 제벌의 대벌주는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는 다섯 명을 선 택해 아예 그들을 한데 불러들여 제벌의 후계자 쟁탈전을 벌이게 유도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 다섯 명의 후계자는 누구, 누구요?" "창랑왕, 흑궐의 대종사, 그리고 당신.... 여기에 대벌주의 유일 한 대제자(大弟子)인 백국청장(白菊靑長) 화국봉(華菊鳳)이라는 신비 속의 인물, 그리고 법밀사의 총율사 잠린왕자예요." "백국청장 화국봉?" 유빙은 대벌주의 후계자 명단에 들어있는 새로운 명호에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백국청장 화국봉. 이것은 결코 이름이 아니었다. 하나의 명호인 것이다. 대벌주의 유일한 제자라고는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명호만이 떠도는 완벽 한 신비 속의 인물인 것이다. '아예 제벌을 공개해 천하를 놓고 다투고 있는 효웅들을 모조리 끌어들인다? 으음....! 천하의 난세를 종식시키는 방법으로써는 실로 교묘하구나!' 그렇다. 이것은 실로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제벌에 대한 야망 때문이 아 닌가! 제벌을 아예 공개하고 그 후계자를 선발한다는 것은 천하의 혼란 을 극도로 극소화시킬 수 있는 놀랍고도 기발한 계책이었다. '대벌주가 이러한 방법을 공표할 줄은 미처 예상도 못했다!' 유빙은 문득 취려홍을 직시했다. 이렇게 되자 주량시합을 빙자하 여 은연중 제벌의 급변하는 정세를 알려주고 있는 취려홍의 정체 에 대해 더욱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헌데 이때 돌연 유빙의 얼굴이 굳어졌다. 휘이이이잉! 후드득! 후득! 이수의 고요한 수면 위로 밤비는 내리는데 마치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빗소리 같기도 한 기이한 음향이 돌연 유빙의 귀를 파고들지 않는가? 그것은 바람(風)소리도 비(雨)소리도 아니었다. 일반인들 이 들으면 도저히 바람소리나 빗소리와 구분할 수 없는 음향이었 으나 이 순간 유빙의 귀에는 하나의 암호가 되어 전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흑궐의 비밀전음(秘密傳音)인 우풍설후(雨風雪吼)이다. 은금이 나를 부르는 신호이다!' 유빙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신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해 일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이제.... 흑궐을 정비할 시간이 된 것 같군!' 유빙이 돌연 몸을 일으키자 취려홍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놀람에 찬 얼굴을 바라보며 유빙이 담담히 미소했다. "오늘의 술 시합은 부득이 후일 계속해야 할 것 같구료." 다음 순간, 취려홍의 놀람에 차 있는 동공 속으로 유빙이 밤비 속 으로 물을 밟으며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뒷모습이 투영되어 왔다. ② 궁륭산(穹隆山), 이수에서 삼십여 리 가량 떨어져 있는 궁륭산은 그 산세가 완만하 기 이를데 없어 하나의 고원을 대하는 듯한 형세였다. 완만한 가 운데 숨어있는 험악한 지세는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리 만큼 흉험 해 사시사철 죽음의 적막에 잠겨있는 곳이었다. 이 궁륭산의 중턱에는 그 규모가 사방 백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능(陵)이 있었다. 그것은 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성(城)에 가까왔다. 대원 태조 성길사한의 유체가 안장되어 있다고만 알려져 있는 패 릉(覇陵)은 대원제국이 멸망해 버린 이후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 초만이 우거져 있었다. 후드득! 쏴아아..... 여기저기 도굴(盜掘)당한 흔적이 지옥의 입구처럼 펼쳐져 있는 곳. 이 패릉에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음산한 가운데 귀기 마저 어려있는 패릉 전체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예의 패릉의 주위로 소리없이 다가서고 있는 인영들이 있지 않은가! 스슷! 스스슷....! 패릉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인영들의 수효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궁륭산을 올라 패릉을 향해 몰려들고 있는 흑영(黑影)들의 수효는 거의 수천여 명, 놀랍게도 그 엄청난 인마가 운집하고 있건만 숨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들이 대체 누구이기에 인적이 없는 패릉에 밤비를 맞으며 모여들고 있단 말인가? 탁! 타탁....! 흑영들이 들고 있는 횃불만이 미미한 음향을 발하고 있는 가운데, 그 횃불에 의해 드러나고 있는 흑영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 해 있었다. 그들의 행색은 실로 각양각색이었다. 승인(僧人)을 비롯하여 걸인 과 도인 등등.... 뿐이랴! 유복한 명문의 자제같아 보이는 인물 등등, 실로 다양한 행색인 것이다. 그들에게서 공통되는 것이 있다면 단지 하나, 그것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모조리 검은색 상복(喪服)이라는 점이었다. 놀랍게도 승인조차 검은색 가사(袈裟)를 걸치고 있었다. 사방 백여 장 규모의 패릉에는 모두 일곱 개의 도로가 사면을 향 해 뻗어 있었다. 그것은 생전에 성길사한이 천하를 향해 뻗어 나 가던 위세를 본딴 듯 어찌보면 장엄하기 이를데 없는 풍경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두두두....! 두두두! 수천여 명의 흑영들이 패릉을 호위하듯 포진되자 예의 일곱 대로 에 각기 다른 일곱 대의 마차가 나타났다. 그들이 과연 누구이기에 밤비 내리는 패릉에 유령처럼 모여들고 있단 말인가? 헌데 언제부터인가 궁륭산의 정봉에서 이 기괴한 집회를 내려다 보고 있는 이인(二人)이 있었다. "흑궐은 모두 십이야로(十二夜路)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중 오로 (五路)는 이미 삼 년 전부터 제가 장악해 왔으나 여기 모여들고 있는 칠로(七路)의 수하들은 아직까지 굴복하지 않고 있어요." 머리 끝에서 발등까지 치렁한 흑포를 뒤집어 쓰고 있는 인물이 조 용히 입을 열었다. 낭랑하기 이를데 없는 여인의 음성이었는데 바로 초령왕의 후예 미령군주 여은금이었다. 그의 옆에는 미백색 광휘를 발하고 있는 은라초의를 걸친 유빙이 우뚝 서 있었다. 문득 여은금이 한 벌의 장포를 유빙에게 내밀었다. "흑궐의 대종사는 영원히 신비에 가려 있어야 해요. 당신은 이 백포를 걸치세요." 유빙은 여은금이 내미는 백포를 받아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 썼 다. 그러자 두 눈만이 드러난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변했다. 여은금의 복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장포는 백색이라는 점 뿐이었다. "패릉 속으로 사라진 일곱 대의 마차에 실린 관에는 십이야로 중 칠로의 패주(覇主)들이 들어 있을 거예요. 그들은 나의 정통성을 부정한 채 서로 연합하기 위해 모인 것이에요. "......" "십이야로의 회합은 그 모이는 방법에 따라 회합하는 목적을 알 수 있어요." "....?" "예를 들어 혼인식에 참석하는 복장으로 모이면 그것은 단순한 결 속을 다지기 위한 모임을 나타내죠. 그리고 누군가의 회갑연에 참 석하는 형식으로 모이면 그것은 서로 분할하고 있는 영역에 대한 이권(利權)을 결정짓기 위한 모임....." "그렇다면 오늘 이들이 모인 것처럼 상복을 하면 무슨 뜻이오?" 유빙의 질문에 여은금이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것은 흑궐 전체의 존망이 걸린 의제를 다루기 위함을 나타내 요. 바로 결전의 마음을 다지기 위한 것이지요." "호.... 그렇다면 그대가 초령왕의 신물을 지니고 있음을 공표했 음에도 불구하고 십이야로 중 일곱 세력이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 이오?" "그래요. 저들은 오히려 저를 숙청하고 자신들이 흑궐을 장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음....!" "어차피 잘된 일이에요. 저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굴복시킨다는 것 은 너무도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각로의 패주 들을 제외한 수하들 중 많은 수효가 내심으로는 저의 존재를 인정 하고 있어요." "모두 죽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오?" "예! 대항하는 자만 죽이면 될 거예요." 말과 함께 여은금의 신형이 둥실 밤하늘로 솟아 올랐다. 허공을 부유(浮遊)하는 귀영을 방불하는 놀라운 신법이었다. "저는 북쪽으로부터 패릉으로 밀고 들어가겠어요. 당신은 남쪽에서부터 덮치세요." "그럽시다." 유빙의 신형 역시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비에 젖은 밤하늘에 흩 어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헌데, 놀랍지 않은가! 흑궐의 십이야로 중 절반이 넘는 칠로의 정 예들, 그 엄청난 고수들을 유빙과 여은금은 단 둘만으로 굴복시키 려 하고 있었으니..... 쏴아아아앙! 흑궐 수하 한 명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어둠에 잠겨있는 밤하늘 그곳에서 무엇인가 희끄무레한 물체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허나 그것은 단지 느낌으로만 끝났다. 쏴아아앙! 꽈득! "크악!" 벼락같이 허공에서 솟아난 흑포괴영의 손이 번개처럼 번뜩이고 흑 궐의 수하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무너졌다. 포진해 있던 모두의 눈이 돌려졌다. 그리고 보았다. 한 흑영이 유령처럼 허공에 둥둥 떠있는 모습과 자신의 동료 한 명이 스르륵 무너지고 있는 것을..... 허나, 쏴아아아앙! 보았다고 느낀 그 순간 흑영은 이미 또다른 자의 몸에 붙었다 떨어지고 있었다. "끄윽!" 마치 검은 그림자가 움직인다고나 할까, 아니면 검은 악령(惡靈) 이 번뜩인다고나 할까? 쏴아아아앙! 팍! "아아악!" 순식간에 사면팔방에서 처참한 비명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팟! 파파파파! 흑궐의 수하들이 흩어지며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로 부각되어 오고 있는 흑영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일 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나 흑영의 움직임은 그대로 하나의 태풍이었다. 죽음을 부르는 살인태풍(殺人颱風), 사면에서 부서진 병장기와 처절한 비명성이 난무했다. 흑포괴영의 움직임은 너무도 공포스러운 가운데 믿을 수 없도록 빨라 아무도 그의 일초를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캉! 와- 직! 검을 들어 막으면 검이 그대로 터져 나가며 죽음의 손은 여전히 밀려들고, 설혹 피했다 해도 어느새 몸의 다른 부위가 베어나간다. "대, 대종사!" "대종사님이시다!" 흑궐 수하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너무도 가공스러운 그 흑영의 모습에 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자 흑궐의 수하 중 몇몇은 황급히 지면에 머리를 박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 흑영이 지나갔다. 지면에 오체투지해 흑영의 존 재를 인정하고 있는 자는 그대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각, 패릉의 반대 쪽에서는 하나의 백포괴영이 솟아나 환상처럼 죽음의 춤을 추고 있었다. 백포괴영은 바로 유빙이었다. 유빙은 초령왕 여율령이 남긴 살인 팔비전조를 펼쳐냄과 동시에 두 손으로는 끝없이 사망도첩을 쳐내 고 있었다. 패앵! 삭! 마흔아홉 개의 금빛 해일이 끝없이 밀려 나갔다. 사망도첩의 위력 은 실로 엄청났다. 상대의 팔이나 다리, 혹은 허리 등을 그대로 짓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끅!" "크....윽!" 사망도첩에 관통된 인물들은 그저 몸의 한 부분이 시원해지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허나 그 다음 순간 몸이 베어진 듯한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몸에서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 는 것을 목격해야 했고, 그리고 그제야 비명과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촤르르륵....! 와악! 사망도첩은 때때로 길게 이어져 한 폭의 비단처럼 인의 장막을 헤 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마흔아홉 개로 분리되어 부채살처럼 사면 팔방으로 번뜩인다. 그때마다 사망도첩의 진행 방향에 서 있는 물체는 그것이 검이건, 사람이건 모두 베어가고 있었다. 뿐이랴!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 리대로, 그리고 머리는 머리대로 움직이며 인의 장막을 헤치고 있 는 유빙의 모습은 말그대로 광풍(狂風)이요, 해일(海溢)이었으니..... 폐릉 내부, 거대한 대전(大殿)이 회백색 음울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는 가운데 일곱 명의 흑의인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더할나위 없이 고요한 눈과 물처럼 가라앉은 태도, 그 어느 한 명 평범해 보이는 인물이 없는 가운데 그들의 전신에서는 죽음과 어 둠의 관록이 입고 있는 옷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탁자의 정중앙에는 한 송이 흑화(黑花)가 요염하게 꽂혀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돌연 은은한 비명성이 사면팔방에서 터져나오고 있음을 들은 때문이었다. 그 비명성은 처음에는 오십여 장 밖에서 들려오는 듯 했으나 그것 을 느꼈을 때는 이미 폐릉 바로 밖에서 울려오지 않는가! "괴이한 일이군. 누가 과연 우리 흑궐의 집회를 알아내고 공격해 오고 있단 말인가?" 십이야로 중, 칠로의 패주 중 한 명이 점차 솟아나는 공포심을 억 누르며 입을 떼었다. "알 수 없군. 호위하고 있는 수하들은 모두 정예들로써 그 수효만 해도 이천 명이 넘거늘 천하에 어떤 세력이 있어 그들을 이토록 단숨에 돌파하고 있단 말인가?" "으음.... 우리는 대거 포위되어 있는 듯 하오. 알 수 없는 일이오." 칠로의 패주들은 불가사의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엄 청난 속도로 호위망을 돌파할 만한 세력이 당금 무림에 존재한다 고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허나 그들이 어찌 알 수 있으랴! 이것이 바로 단 두 명에 의한 일임을..... 이때 사면팔방에서 들려오던 비명성이 마치 칼로 자른 듯 멈춰졌 다. 순식간에 기이한 정적이 밀려들자 오히려 더욱 공포스러운 느 낌이 들었다. '적이 물러갔단 말인가....?' 모두의 뇌리에 의혹이 스쳤다. 헌데 이때 그들이 앉아있는 대전의 한쪽 입구가 조용히 열리며 한 인영이 들어서지 않는가! 흑의를 걸친 비대한 몸집의 중년인이 공 포와 당혹이 어우러진 눈빛으로 대전에 들어서며 허리를 숙였다. "칠로의 패주들께 보고합니다. 대종사님께서 납시었습니다." 순간 칠로의 패주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종사? 누가 대종사란 말이냐! 우리에게 대종사는 없다. 우리는 단지 서로 연합한 십이야로의....." 누군가가 보고해온 중년흑의인을 향해 날카롭게 외치다 입을 다물 었다. 흑의중년인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그의 눈에 한 흑영이 둥 실 허공을 밟으며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 비쳐든 것이었다. 쓰윽! 흑포괴영은 허공을 밟으며 대전 안에 들어서 칠로의 패주들을 쓸 어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눈, 마치 유리알처럼 투 명하며 깊은 그 눈빛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팍! 칠로의 세주(勢主) 중 한 명이 돌연 벼락같이 흑포괴영에게 덮쳐들었다. 그의 신법은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뿐이랴!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한 개 묵빛 철추는 어느새 흑포괴 영의 가슴에 이르러 있었다. 허나 흑포의 소맷자락 속에서 희디흰 손이 번뜩이고 그 손은 덮쳐 든 인물의 머리에 닿았다 떨어졌다. 덮쳐들던 인물은 불신과 경악 의 눈으로 몸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선명한 한 개 장인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그 장인을 중심으로 전신이 미세하게 균열되어 가지 않는가! 쿠- 웅! 한 개의 인체는 순식간에 수천 개의 미세한 가루로 허물어졌다. 이 모든 것은 눈 한 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그야말로 꿈 속의 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으.... 인간도 아니다!' '대, 대종사....! 그대를 부정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이제야 알겠구료!' 칠로의 세주 중 남아있는 여섯 명의 눈에 극도의 공포가 어렸다. "대종사님을 뵙습니다!" "어둠의 황제, 초령왕을 대합니다!" 다음 순간 그들은 일제히 지면에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 위쪽에 둥둥 떠있는 흑영이 천천히 손을 내저었다. '.... ?' '대종사가 아니란 뜻....?' 칠로의 세주들은 정신이 없었다. 허나 그 순간, 꽈직! 꽈꽈꽈!하는 소리와 함께 대전의 한쪽 벽면 이 그대로 터져 나감과 동시에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한 개 백영 이 허공을 부유하며 소리도 없이 들어섰다. 흑포괴영과 흡사한 복장의 백포괴영의 손에는 마흔아홉 개의 금척 이 교묘히 얽혀 형성된 섭선이 들려 있었다. "사망도첩!" "아아....!" 칠로의 세주들은 다시 황급히 백포괴영 유빙을 향해 오체투지했 다. 유빙은 그들의 머리 위 허공에서 몸을 세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둠의 질서는 나 초령왕의 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바람결같은 음성, 그 음성을 대한 중 인들의 몸이 진동했다. - 어둠의 질서는 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아아! 항거할 수 없는 위엄과.... 어둠의 힘이 담긴 단 한 마디! 그 단 한 마디로 이렇게 그 어둠의 단체 흑궐이 이로써 일통된 것 이었다. 이수에 밤비가 내리던 그 밤, 그 밤에 어둠의 단체 흑궐은 완벽하 게 정비가 되었다. 이것은 지난 삼 년간 초령왕의 후예 여은금이 흑포를 입고 반대자들을 제거해온 것이 그들의 마음에 무서운 공 포로 부각되어 있는데다 나머지 오로에 의한 정확한 정보, 그리고 여은금과 유빙의 가공할 무공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십이야로로 흩어져 있던 흑궐 수하들의 뇌리에 강력한 지배자 를 요구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이다. 그리고 삼일 후, 완벽하게 흑궐의 대종사가 된 유빙에게 한 개의 영패와 밀서가 전달된다. 영패는 바로 제벌의 후계자 중 한명임을 나타내는 설국령이었고, 밀서는 제벌 대벌주의 친서(親書)였다. <본 제벌은 중원의 천웅(天雄)들의 협력으로 인해 지난 사백여 년 간 중원 혼으로 군림할 수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 바..... 당대에 이르러 중원에 피의 난세가 도래한 것은 오로지 본인의 무 능이라 사료됩니다. 이에 본인은 능력있는 몇몇 중원 천웅을 모셔 당대의 혼란을 타계하고자 합니다. 그대를 후계자 다섯 명 중 한 명으로 인정하고 설국령을 내리는 바, 부디 탄금천새(彈琴天塞)로 왕림, 다른 천웅들과 자웅을 결하 여 항차 제벌을 이끌어 가주시기 바랍니다. - 도당문비 서(書).> 유빙은 제벌의 대벌주 도당문비의 제의를 수락했다. 그는 이미 천 종예가의 후예라는 신분으로 또 하나의 후계자 영패를 지니고 있 는 신분이었다. 해서 그는 흑궐의 대종사라는 신분과 유빙이라는 두 개의 신분으 로 제벌의 총성(總城)인 탄금천새로 향하니..... 진정한 풍운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팔왕예조 제3권 제27장 총성(總城)으로 가는 길 ━━━━━━━━━━━━━━━━━━━━━━━━━━━━━━━━━━━ ① 파촉령(巴蜀嶺). 촛대를 거꾸로 박아넣은 듯한 형상은 올려다 보기만 해도 눈이 어 지럽고 가파른 산세는 구름조차 쉬어갈 정도이다. 물결처럼 잇대 어 있는 산악마다 손 잡을 곳 없는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파 촉령의 정상에 두 사람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새도 감히 쳐다보지 못할 엄청난 파촉령 위로 오르는 사람은 바로 유빙과 학거비였다. "은공이 흑궐의 대종사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염려스럽구료." 유빙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파촉령을 거슬러 올라가며 입 을 떼었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학거비 역시 호흡 한 번 거칠 어지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낼 것입니다. 허나 소주는 이제부터 소주 자신만을 조심하 셔야 합니다. 제벌의 총성에 들어가셔서 가장 조심해야 할 인물은 바로 대벌주입니다." 학거비의 눈 깊은 곳에는 은은한 긴장이 어려 있었다. 그렇다. 지금 유빙과 학거비가 가고 있는 곳은 제벌의 총성이 있는 탄금천새인 것이다. "대벌주 도당문비! 그는 심기가 매우 깊은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껏 소주가 만난 인물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유빙은 그 자신이 대벌주 오대장령 중 한 명이었으면서도 아직까 지 대벌주 도당문비를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음을 상기했다. 군림하되 드러나지 않는 신비의 존재, 그 대벌주 도당문비를 만날 생각을 하면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었다. 학거비의 담담하면서도 한 가닥 염려지정이 담긴 음성이 이어졌다. "소주! 그가 소주를 어떻게 대하든간에 소주는 절대 그를 친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희생 시킬 수 있는 그런 인물인 것입니다." 문득 유빙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할아범!" "예....?" "할아범은 마치 대벌주 도당문비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느껴지는구료." 학거비의 몸이 몹시 흠칫했다. 허나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 유빙의 말에 부정도 시인도 하지 않았다. 유빙은 한 가닥 의혹을 느꼈으나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새 정상에 이르러 있었다. 파촉령의 정상, 입고 있는 장포자락을 찢어버릴 듯 날카로운 바람 과 암석만이 있는 그 정상의 중앙에는 한 개의 깃발이 꽂혀 있었 다. 그리고 세 사람, 삼인은 마치 유빙과 학거비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중히 예를 표했다. "제벌의 총령(總嶺), 일척도건곤(一尺到乾坤) 규염창응( 髥蒼鷹) 관룡장청(貫龍長靑)! 삼가 유대총사님을 배알합니다." 금의 화복을 걸친 중후한 인상의 장년인, 좌우에 두 명의 호위를 거느리고 있는 그의 기태는 당당한 가운데 마치 대학사의 단아함 을 풍기고 있었다. 유빙이 마주 포권하며 미소했다. "이 파촉령의 정상에 제벌 총성이 있는 탄금천새로 이르는 입구가 있다던데 도무지 그말 뜻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유빙은 허리를 피며 파촉령의 사면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이라 고는 오로지 발아래 꿈틀거리는 흰 구름과 구비구비 물결을 이루 고 있는 산악뿐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에서 이어지는 길이 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빙은 제벌을 이루고 있는 외벌의 오대장령 중 한 명이었으나 그 는 단 한 번도 내벌(內閥)이 있는 총성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해서 제벌의 존재는 더욱 신비하게 천하 위에 군림하고 있었는 데..... 규염창응 관룡장청이 문득 미소했다. "이제 잠시 후면 모든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유빙은 천천히 뒷짐을 졌다. 허나 그의 뇌리에는 여전히 의혹이 가득해 있었다. 실로 황당한 이야기가 아닌가! 바람과 암석들, 그리고 구름과 허 공만이 존재하는 이 파촉령의 정상이 탄금천새로 이르는 입구라니..... '총성의 위치는 신비에 가려있다. 제벌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내벌 의 인물들이 아니면 결코 알지 못하고 있다!' '과연 어떤 곳인지 무척이나 궁금하군!' 헌데 바로 이 순간. 휘이이익! 돌연 아득한 허공 위에서 기이한 음향이 들려오지 않는가? 유빙의 눈에 놀람이 솟았다. 그의 머리 위쪽 창공에서 무엇인가 흰 물체가 천천히 미끄러지며 다가오고 있었다. 길이는 일장 정도, 두께는 반장에 달했다. 둥그런 원형으로 이루 어진 흰 물체는 마치 흩어지지 않는 한무더기 구름처럼 점차 파촉 령의 정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예의 은색의 원반을 대한 유빙은 순간 한 가지 사실을 미루어 짐 작할 수 있었다. '저 물체를 타고 탄금천새로 가는 것이란 말인가?' 어떻게 생각해 보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구름만이 잇대 어 있는 파촉령에서 다른 곳으로 이르는 방법은 그런 방법밖에 없 을 듯 했다. 규염창응 관룡장청이 유빙의 의혹을 풀어주려는 듯 담담히 설명했다. "저것은 배운주(排雲舟)라는 것입니다. 대벌주께서 만드신 것으로 가죽주머니에 부력(浮力)을 지닌 뜨거운 기체(氣體)를 넣어 허공 으로 떠오르게 만든 것이지요." "배운주....?" "배운주를 타면 허공을 마음대로 날아 다닐 수 있습니다." 규염창응 관룡장청은 천천히 다가오는 배운주를 잡은 후 유빙을 향해 미소했다. "자, 오르시지요. 한 시진이면 당도하실 것입니다." 유빙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배운주 위로 올랐다. 그러자 배운주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득한 창공 위로 서서히 미끄러져 나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구름을 타고 날으는 듯 편안하 면서도 신기해 유빙은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배운주 자체도 놀랍지만 이러한 기기를 이용해 총성의 위치를 은폐하다니 실로 기상천외한 착상이로구나!' 유빙은 자신이 타고 있는 배운주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배운 주의 아랫부분에는 가느다란 천잠사와 연결되어 있어 방향을 조종 하고 있는 듯 했다. 구름 사이를 헤치며 천천히 미끄러지고 있는 광경, 아득한 창공 위에서 구름 아래로 간간이 드러나는 산하의 풍경은 실로 일대 장 관이었다. 가물가물 내려다 보이는 산과 집들, 그리고 한줄기 띠 처럼 펼쳐져 있는 강 등..... 배운주는 일견 대단히 느리게 움직이는 듯 했으나 기실 그 속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더우기 직선으로 움직여 지상에서처 럼 돌아가야 하는 지세가 없어 그 속도는 진정 믿지 못할 정도인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유빙은 배운주가 이미 수천 여리를 날아 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배운주가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처럼 작게 보이 는 하나의 호수가 아득히 내려다 보였고 하강지점은 바로 그곳인 듯 했다. 호수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갈대와 잡초들이 우거져 있는 호수 위에는 한 척의 철선이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배운주는 순식간에 예의 배위로 떨어져 내렸다. 길이 십오륙 장, 선채 전체가 거무튀튀한 철판으로 이루어져 있는 괴선(怪船)이었다. 괴선의 위에는 용포를 걸친 한 노파가 배운주 위의 사람들이 내리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규염창응 관룡장청은 배운주에서 내리기 무섭게 예의 노파에게 깊 숙이 예의를 표한 후 유빙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 분은 이 용지(龍池)를 관장하는 수모(水母) 음희(陰姬) 선배님이십니다." "수모.... 음희?" 규염창응 관룡장청의 소개에 유빙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모 음희.> 전설처럼 신비하게 알려져 있는 수중제일궁 신수궁(神水宮)의 궁주. 수모 음희는 신수궁의 존재를 최초로 중원인들에게 부각시킨 전대 의 기인이었다. 그는 대명과 마지막 일전을 불사하려고 장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던 대원의 십만 수군(水軍)을 신수궁의 제자들을 이 끌고 단숨에 수장시켜버린 존재인 것이다. 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신수궁의 귀와 눈이 있다는 공포스럽고 도 신비한 신화는 그때 이후로 중원인들의 뇌리에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었는데..... "수모 음노선배님도 제벌의 인물이었단 말씀이십니까?" 유빙은 너무도 놀라 조심스럽게 수모 음희에게 입을 열었다. 수모 음희가 냉소했다. 그러자 규염창응 관룡장청이 황급히 입을 떼었다. "유총사님! 수모께서는 본벌의 인물이 아니십니다. 단지 대벌주님 과의 깊은 교분으로 본벌을 도와주시고 계실 뿐입니다!" 규염창응 만룡장청은 황급히 유빙에게 주의를 준 후 수모 음희의 눈치를 살폈다. "이 분은 대벌주의 귀빈이십니다. 아무쪼록 음선배님의 자상한 인도를 부탁드립니다." "흥!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어서 선실로 들어가기나 해라." 수모 음희가 냉소하며 차갑게 내뱉았다. 실로 모욕적인 태도였으 나 관룡장청은 얼굴만 붉힐 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괴선의 갑판처럼 보이는 선체위에는 기이한 뚜껑이 붙어 있었다. 수모 음희가 예의 뚜껑을 열자 그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묵묵히 관룡장청을 따라 선실로 들어서던 유빙의 눈에 다시 놀람 이 스쳤다. 그가 타고 있는 배는 그 형태가 일반의 배와는 크게 달랐다. 돛대 나 갑판따위의 보통 배에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이 전혀 없었 고 사면이 강인하기 이를데 없는 현철(玄鐵)로 강판을 만들어 선 체를 이루고 있었다. 뿐이랴! 선실내에 또한 배를 젓는 노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단지 기이하게 생긴 하나의 기륜(奇輪)이 선체의 앞부분에 달려있을 뿐이 아닌가! '이것이 배란 말인가? 사면이 공기 한 점 통할 수가 없게 꽉 막혀 있고 돛대도 없는데 어떻게 배라고 할 수 있을까?' 유빙이 의혹을 느껴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규염창응 관룡장청이 입을 열었다. "유대총사, 이제 곧 진귀한 것을 구경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철선(鐵船) 속에 갇혀 있는데 무슨 구경할 게 있겠소?" "하하하.... 기다려 보십시요." 규염창응은 모든 사람들이 선실로 들어선 것을 확인한 후 뚜껑을 닫았다. 순간 철선은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헌데 놀랍지 않은가! 철선은 앞으로 미끄러져 가는게 아니라 곧바 로 물 속으로 잠수(潛水)해 들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꽉 막혀 있는 선실의 사방에 달려있는 수정벽을 통해 물 속의 광경이 드러 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물 속을 항해하는 배가 존재하다니!' 유빙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배는 분명히 물 속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흐느적 거리는 온갖 수초들과 그 사 이를 헤엄치고 있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 그것은 환상적인 광경 이었다. 수정벽 가까이 다가온 어떤 물고기는 마치 철선 안에 있는 사람들 을 구경하듯 머리를 맞대고 들여다 보기도 하고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한 마리 거대한 물고기는 마치 철선과 경쟁을 하듯 따라온다. 온갖 색채가 어우러져 있는 물 속의 광경, 태양광선이 기이하게 반사되어 실로 알 수 없는 현란한 색채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물 속의 광경에 유빙이 내심 입을 딱 벌렸다. "이 배의 이름은 신수잠주(神水潛舟)입니다. 이 배 역시 대벌주께 서 만들어 신수궁에 선물한 것입니다." 규염창응 관룡장청의 설명에 유빙이 혀를 내둘렀다. '본가의 엄청난 장예(匠藝)도 대벌주 앞에서는 무색해지는구나. 대벌주! 그의 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 유빙의 가슴으로 다시 한 가닥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 은 제벌의 대벌주라는 인물에 대한 경외지심이었다. 배운주와 신수잠주! 이 두 가지의 기기(機器)와 수모 음희라는 존재만 보더라도 대벌 주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유빙의 마음을 모르는 듯 신수잠주는 점차 물 속을 헤치며 나아가 고 있었다. 위치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제벌의 총성, 그 총성으로 향한 신비하고 기괴한 여행이었다. ② 깎아지른 듯 솟아있는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잇대어져 있는 곳. 예 의 봉우리들은 사면 팔방을 가로 막은 채 원형으로 돌아가며 병풍 처럼 잇대어져 있고 내부에는 마치 분화구(噴火口)를 확대해 놓은 듯한 분지(盆地)가 자리해 있었다. 그 넓이는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놀랍게도 완벽하고도 은밀한 천연의 요새(要塞)가 수많은 봉우리로 의해 은폐되어 있었 던 것이다. 그리고 예의 분지의 한쪽에는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호수가 자리해 있었다. 유빙이 타고 있는 신수잠주가 도착한 곳은 이 호수였다. 분지안의 호수는 그 지하수로를 통해 밖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유빙은 호수의 가장자리에 내려서며 눈을 들었다. 그의 눈에 감탄 이 어렸다. 호수에 접해있는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들 그리고 그 분지 중앙 에 웅장하게 서 있는 대성(大城). 그 대성의 규모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펄럭이는 수많은 깃발이 꽂혀 있어 환상의 섬처럼 아름다운데다 하늘의 요새인 듯 병풍처 럼 늘어선 봉우리들을 끼고 몸을 누이고 있었던 것이다. "총성에 당도했습니다." 규염창응 관룡장청이 예의 대성을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유빙은 격동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대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금빛 국화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거대한 철문(鐵門)이다. 철문의 크기는 실로 거대했다. 바로 총성으로 들어서는 입구로서 높이가 무려 십장에 달했던 것이다. 그그그긍! 유빙 일행이 다가들자 거대한 철문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 뒤쪽에 는 수많은 검사들이 좌우로 도열한 채 유빙을 향해 영접하고 있었다. 오십 여 장 길이로 늘어선 검사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유빙은 그 끝에 또하나의 철문이 막혀 있음을 보았다. 거대한 구층석탑 (九層石塔), 총성의 내부로 들어서려면 예의 석탑의 일층에 있는 또 하나의 입구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관룡장청이 삼가 금문(禁門)을 열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규염창응 관룡장청은 구층석탑의 하단에 이르자 공손히 안에 대고 외쳤다. 순간 석탑 안에서 냉랭한 일갈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영부(令符)를 보여라!" 규염창응 관룡장청이 유빙이 지니고 있던 철국령을 건네 받아 석탑에 흔들어 보였다. 석탑의 일층이 열렸다. 거대한 암도(暗道)처럼 총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드러났다. 그 전면에 한 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노인은 등을 돌린 채 기이한 형체의 병기를 든 채 길을 터주지 않 고 있었다. 회의노인의 전신에서 번져나오고 있는 기운은 너무도 차가왔다. 규염창응 관룡장청이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회의노인을 일별한 후 조심스러운 말투로 유빙에게 입을 떼었다. "이 분은 이곳 제룡탑(帝龍塔)을 지키시는 도성(刀聖), 천승만도 (千乘萬刀) 비노선배님이십니다." "도성 천승만도 비녕자(丕寧慈)?" 유빙의 얼굴에 미미한 경악의 빛이 물결쳤다. 뉘라서 그 이름을 모르랴! 천하제일교(天下第一敎)라던 전진교(全眞敎)를 단신으로 유린했 고, 대원 말년에 대원의 최강고수 일만여 명을 잠재웠다는 전설의 도왕(刀王). 놀랍지 않은가! 그 전설적인 고수가 제벌 총성의 일개 문지기로 있는 것이다. 유빙은 아예 정신이 없었다. 사라졌던 전대의 고수들이 모조리 제 벌의 총성에 아무도 모르게 존재하고 있을 줄이야 진정 예상도 못 했던 것이다. '도대체 제벌에는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존재한단 말인가?' 유빙이 내심 경악을 삼키고 있는 순간 규염창응 관룡장청은 난색 을 떠올리고 있었다. 제룡탑의 문은 열렸으나 등을 돌린 채 그 길 을 막고 있는 도성 천승만도 비녕자의 태도는 유빙 일행을 통과시 키지 않을 듯이 보였던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비녕자의 등에 대고 입을 열었다. "비노선배님! 이 분들은 대벌주님의 귀빈들입니다. 아량을 베푸시 어 제룡탑에 오르게 해주십시요." 도성 비녕자가 등도 돌리지 않은 채 관룡장청의 말을 잘랐다. "이곳을 통과시키고 안 시키고는 오직 노부의 뜻에 따른다는 것을 잊었느냐!" "하지만 이 분들은 대벌주님의....." 관룡장청이 난색을 떠올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알 수 없군. 무조건 통과시키면 되는 것을 왜 유독 유대총사에게 만 이런단 말인가?' 관룡장청은 내심 의혹이 가득했으나 뭐라 말할 수는 없는 처지였 다. 관룡장청이 머뭇거리자 도성 비녕자는 오히려 냉소를 터뜨렸다. "흥! 네놈들은 그저 대벌주의 이름만 대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 되 리라 믿고 있지만 나에게는 어림없는 짓이다." "그, 그렇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관룡장청은 도성 비녕자가 예상치도 않았던 태도로 나오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도성 비녕자가 차갑게 외쳤다. "총성의 수하가 아닌 인물이 이곳을 지나려면 나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관룡장청은 당황해 쩔쩔매며 유빙을 바라보았다. 유빙은 관룡장청 의 태도에서 이것이 대벌주가 시킨 일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유빙이 차가운 음성을 흘려냈다. "비노선배님! 대벌주의 손님인 나를 가로막다니 귀하의 신위는 정말이지 대단하구료." 유빙의 조소에 도성 비녕자가 거칠게 내뱉았다. "이 세상에서 노부의 뜻을 막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대벌주 라 할지라도 노부를 마음대로 하지는 못한다." "호.... 그런 대단한 분이 겨우 일개 문지기라....?" 유빙의 음성은 더욱 차가와졌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도 발적인 것이었다. 순간 도성 비녕자가 흠칫 몸을 떨다 천천히 몸 을 돌렸다. 유빙의 조소성에 비위가 상했음이 틀림없었다. 잿빛 머리칼과 잿빛의 수염, 나무껍질처럼 피폐한 피부. 게다가 그 눈은 뜨고 있는 것인지 감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리만큼 가 늘어 그 인상은 마치 하나의 칼날을 대하는 듯했다. 그의 가느다란 눈에서는 무서운 예광(銳光)이 번개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해치울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기도였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일촉즉발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도성 비녕자의 질문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유빙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조용히 대꾸했다. "유빙! 천종예가의 말학(末學)이외다." "유빙? 과거에 사라져 버린 일왕 도당곤이라는 놈을 제외하고는 천하에 쓸만한 놈이 없을 줄 알았더니.... 오랜만에 눈에 차는 놈이로군." 유빙의 눈이 멍청해졌다. 도성 비녕자를 도발시킨 것인데 오히려 그의 마음에 들었다 하지 않는가! 문득 도성 비녕자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앙천광소를 터뜨리기 시 작했다. 그 장소성은 마치 용음(龍音)처럼 길게 울려 퍼져 나갔 다. 계룡탑의 벽면이 들썩일 정도로 가공할 내력이 담겨 있는 웃 음소리였다. 어쩐지 통쾌해 하는 장소성이 아닌가? 규염창응 관룡장청은 돌연한 분위기에 다소 마음을 놓으며 입을 열려고 했다. 헌데 순간 도성 비녕자의 웃음소리가 칼로 자른 듯 멈춰지며 그의 무서운 기세로 유빙을 직시하고 있었다. "너는 내 마음에 들었다. 허나 다른 사람은 다 통과시킬지라도 네 놈만은 통과시킬 수 없다." "노, 노선배님....." 관룡장청이 당황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도성 비녕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그, 그러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 "관룡장청! 네 놈마저 이곳에서 이 늙은이와 살고 싶다는 말이냐!" 도성 비녕자의 무서운 태도에 관룡장청이 움찔해했다. 유빙이 차분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할아범, 먼저 들어가 있으시오. 내 곧 뒤따를 것이오." 유빙의 말에 학거비는 조용히 도성 비녕자의 곁을 스쳐 지나가 제 룡탑의 위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그는 조금도 불안 한 빛을 띄우지 않고 있었다. 관룡장청 역시 황급히 사라지고 제 룡탑의 일층에는 유빙과 도성 비녕자만이 남게되었다. 유빙이 태연히 입을 열었다. "비노선배! 내가 어떻게 하면 이곳을 통과할 수 있겠소이까?" "네 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후후.... 어렵다고는 생각치 않고 있소이다. 귀하와 일전을 겨루면 될 게 아니겠소?" 도성 비녕자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스쳤다. "흐흐.... 노부와 일전을 겨루겠다고? 나 천승만도와 싸우겠다고....?" 그는 차라리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유빙은 자신을 아예 어린아이 취급하고 있는 비녕자의 태도에 불 쾌감을 금할 수 없었다. '괴이하군. 이 자는 내가 대벌주의 후계자 쟁탈을 위해 왔음을 알 고 있을텐데 나를 이렇게 가볍게 여기다니.....' 천승만도 비녕자, 그가 제아무리 전대의 도왕(刀王)이라 할지라도 유빙을 완전히 무시할 입장은 못된다. 허나 기이하게도 천승만도 비녕자는 광오하리만큼 유빙의 무공을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 "흐흐흐.... 천하의 어느 누구도 노부와 싸울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 "천하의 도당문비도 노부의 제자이거늘 네 놈이 어찌 나와 함께 손을 쓰겠다는 것이냐!" 유빙의 눈이 커졌다. 마치 광기를 드러내고 있는 듯한 도성 비녕 자의 태도는 둘째로 치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너무도 놀랍지 않은가! '대벌주가 이 사람의 제자....?' 유빙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순간 비녕자의 눈이 유빙을 직시했다. "꼬마야! 잔소리는 그만 하고 어서 관문이나 통과할 준비나 하거라." "준비....?" "이제부터 노부는 한 가지 도법을 펼칠 것이다. 나는 이 도법을 말년에 창안해 내기는 했으나 아직 시험해 볼 기회를 얻지 못했 다. 너는 내가 도법을 펼치는 것을 지켜본 후 그 도식(刀式)이 어 떠한 변화를 일으켰는지 알아 맞추기만 하면 된다. 알아 맞추면 통과시켜 주겠다." 유빙은 비녕자의 뜻밖의 제의에 내심 어리둥절했다. 그는 비녕자를 제압하지 않고서는 통과될 것 같지 않아 내심 긴장 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비무가 아니라 단지 그의 도식 변화를 알아맞추는 것이라니 별반 어려울 것이 없으리라 생각된 것이었 다. 뿐이랴! 이렇게 되면 둘 중 한 명이 다치지 않아도 되니 참으 로 다행으로 여겨졌다. 유빙이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무척 간단한 일이구료." "간단하다고?" 유빙의 말에 비녕자의 얼굴은 기이하게 이그러뜨렸다. 울지도, 웃 지도 못하겠다는 듯한 익살스러운 표정이었다. "노부가 일평생을 연구해 이룩한 천승만기일도향(千乘萬騎一刀香) 이 간단할 것이라고? 허허허.... 어디 네가 과연 그 도법을 눈으 로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아야겠다." 천승만기일도향. 유빙은 예의 도법의 명칭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도법임을 짐작했 다. 유빙이 다소 긴장된 표정을 띄우자 비녕자는 수중에 쥐고 있 는 기병기를 곤두 세우며 문득 정색했다. "노부의 나이는 이미 이백이 넘었다. 이제 기력이 없어 이 도법을 전력으로 펼치지는 못한다. 너는 이제 내가 펼치는 도법을 지켜보 고 그 변화를 알아 맞추어야함은 물론 본 후에는 그 모든 초식을 잊어야 한다." 유빙은 비녕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초식의 변화를 알아낸 후에는 깨끗이 잊으라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자신의 도법을 익힐까 두려워 잊어야 한다는 것일까?' 유빙은 단순히 생각하고 조용히 비녕자의 행동을 기다렸다. 번- 쩍! 고오오! 헌데 바로 그 순간 가만히 서 있던 비녕자의 손이 움직이는 것처 럼 느껴진 순간 무수한 유성(流星)이 암천으로 쏟아져 내리는 듯 한 도광이 번뜩이지 않는가! 그것은 한 순간이었다. 단지 한 순간.... 눈 깜짝일 수도 없는 찰나지간에 허공에 밤하늘 의 온갖 별들이 폭포가 되어 한쪽으로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환상처럼 사라져 버렸 다. 놀랍게도 비녕자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유빙은 너무도 엄청난 도식에 내심 경악과 감탄,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듯한 기분을 동시에 떠올렸다. 무겁게도 빠르고 환상적인 도 식이 아닌가! 마치 한바탕의 꿈을 꾸고 난 느낌이었다. '천하에 이토록 빠르고 변화무쌍한 도법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유빙은 자신이 알고 있는 원월도법을 떠올려 보았다. 원월도법이 면면히 이어지는 물 같다면 비녕자의 도법은 밤 하늘에 번뜩이는 유성(流星)의 폭우라 할 수 있었다. 비녕자가 유빙을 향해 눈을 주었다. "이 놈! 모두 보았느냐?" "예!" 유빙이 홀린 듯 정중히 대꾸했다. "초식의 변화를 모두 보았느냐? 그리고 모두 잊었느냐?" 유빙이 멍청히 고개를 저었다. 기억하지도 못했는데 잊을게 무어 있겠는가! 비녕자가 담담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한 번 더 펼쳐 보이마. 이번에는 반드시 잊어야 한다." 비녕자는 말을 마치자 천천히 기병기를 왼손으로 쥐더니 오른손으 로 검결(劍訣)을 맺었다. 이어 두 손을 받들어 올려 고리의 형상 을 저었다. 천승만기일도향의 기수식(起手式)인 듯했다. 이어서 펼쳐지고 있는 도법은 이번에는 느려도 너무 느려 유빙의 눈에 의혹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성의 비처럼 쏟아지는 도식을 천천히 한 초식 한 초식 풀 어 펼쳐보이고 있는 듯 했으나 유빙은 이미 그 도식이 처음에 펼 쳐보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비녕자는 연자초수(燕子抄水), 대괴성(大魁星), 좌란소(左 掃), 우란소(右 掃) 등등의 그의 도식은 면면히 이어지다 최후도식 지 검귀원(指劍歸原)을 이루었다. 유빙은 홀린듯이 그의 도법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는 비녕자의 도식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았다. 오로지 정 (情)이 검(劍)에 앞서 면면히 이어지는 요결을 유심히 관찰할 뿐 이었다. 그것이 바로 신재검선(神在劍先), 면면부절(綿綿不絶)의 검의(劍意)였던 것이다. 유빙은 비녕자가 몸을 멈춘 후에도 눈을 감은 채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야말로 무수한 도식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마악 유성의 비처럼 쏟아졌던 가공할 환상쾌도의 수만초식과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원월도법의 요체가 뒤죽박죽 그의 머릿 속에 가득했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했느냐?" 비녕자가 돌연 기대에 찬 눈빛으로 유빙을 직시했다. "기억한 것은 없고 잊은 것뿐입니다." 유빙이 격동에 떨리는 음성으로 조용히 대답하자 비녕자는 일시 놀란 듯 유빙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탄식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이 도법은 나 역시 깨우치기는 했으나 아직 잊지 못한 채 연연하 고 있다. 헌데 어린 네가 벌써 잊었다니 실로 놀랍구나." 비녕자가 유빙에게 보여준 것은 그 자신이 말년에 어렴풋이 실체 (實體)를 깨달은 하나의 검의(劍意)였다. 형태가 없으되 만변(萬 變)을 내재한 무상검리(無上劍理)인 것이다. "일시적으로 깨우쳤다 해도 그 무궁한 묘용을 완전히 얻으려면 평 생을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 가거라." 비녕자가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표정을 하며 몸을 돌렸다. 유 빙은 비녕자가 자신을 막은 것이 하나의 호의에서 였음을 이제야 절실히 깨닫고 기쁨의 빛을 띠우며 예의를 갖추려했다. 허나 허탈과 환희 등 기이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얼 굴을 대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문 채 천천히 제룡탑 위 로 오르기 시작했다. 유빙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비녕자가 고개를 들었다. "도당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본 것 같구나." 비녕자의 입가에는 흐믓한 미소만이 어려 있었다. "유빙이라 했던가....? 훗! 부디 네가 살아나는데 나의 도법이 힘이 되어 주기 바란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비녕자의 음성에는 기쁨과 한 가닥 불안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가 어찌 이십 년 전에 실종되었다는 일왕 도당곤을 입에 올리고 있으며 또 어찌 유빙을 도우려 한단 말인가? ■ 팔왕예조 제3권 제28장 풍운(風雲)은 시작되고....! ━━━━━━━━━━━━━━━━━━━━━━━━━━━━━━━━━━━ ① 제벌의 총성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제룡탑은 외부인들을 영접하기 위한 영빈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구층은 하나의 대전으로 이 루어져 있고 천하 모든 곳을 관장하는 듯한 신의 기도를 풍겨내고 있는 대벌주의 초상화가 전면의 벽을 장식하고 그 아래 거대한 대 리석 탁자가 놓여 있다. 탁자의 주위에는 지금 신태비범한 여섯 명의 금의인(錦衣人)이 앉 아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다소 긴장된 표정 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 제룡탑의 구층계단으로 누군가 조용히 걸어오는 음향이 들리 고 곧이어 한 인영이 대전에 들어섰다. 들어선 인영은 대전 안에 여섯 명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대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 다. 이채를 띠운 대전 안의 육인을 살펴보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유 빙이었다. 유빙이 들어서자 전면의 태사의 위에 앉아있던 창백한 안색의 중년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모습은 실로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푸른 빛이 도는 피부와 목상같이 딱딱한 표정, 약간 마른 듯한 체 구에 굳어있는 몸짓. 중년인에게서는 어쩐지 시체가 움직이고 있 는 듯한 섬뜩함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유총사!" 쇠가 긁히는 듯한 금속성의 음성, 약간 쉰 듯한 음성에 기계적인 어조는 그 용모만큼이나 대하는 이에게 공포를 주고 있었다. "......" 유빙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강시(疆屍)같은 풍모의 중년인이 기계적으로 말을 이었다. "먼저 본인부터 소개하겠소이다. 본인은 유총사와 함께 다섯 명의 후계자 중 한 명으로 선택된 대벌주님의 유일한 제자....." "백국청장 화국봉....!" "흐흐흐.... 그렇소이다. 오늘은 본인이 대벌주님을 대신해 유총 사를 영접하고 있는 것이오." '기분나쁜 자로군!' 유빙은 다섯 명의 후계자 중 한 명인 대벌주의 대제자 백국청장 화국봉이 눈앞의 강시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에 내심 적지않이 놀랐다. 백국청장 화국봉은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는 기이한 동작으로 말을 이었다. "이 분들은 현 본벌의 총성을 이끌고 계시는 육대장령(六大掌令) 들이십니다. 장차 유총사께서 대벌주가 되시면 측근에서 유총사를 보필할 사람들이오." '총성의 육대장령....!' 유빙은 눈 앞의 인물들을 알지 못했다. 허나 제벌의 총성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은 그들 이 곧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에 그는 조용히 그들을 살펴 보았다. 백국청장 화국봉의 바로 옆 좌석, 이마에 기이한 혹이 달려있는 대머리 노인이 눈을 내리감고 앉아 있었다. 그의 행색은 실로 기 이했다. 놀랍게도 전신에 철사를 칭칭 동여감고 있지 않은가! "본벌의 제일장령이신 천마장령(天魔掌令), 독각농왕(獨脚 王) 최산공(崔山孔) 대인이십니다." 유빙의 눈이 대머리 노인을 바라보자 백국청장 화국봉이 소개했다. "십대장문 중 육합마루(六合魔樓)와 팔로세(八路勢)의 진전을 이 어받은 총성 최고의 고수로서 과거 실종된 일왕과 더불어 총성 이 대 고수로 불리웠던 분이오." 유빙이 독각농왕 최산공을 향해 포권해 보였다. 독각농왕 최산공이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고개 만을 끄덕이는 태도는 실로 오만해 보였으나 어쩐지 오만하게 느 껴지지 않는 그런 인물이었다. "이 분은 지기인 일왕께서 실종되자 그 후부터 스스로 철삭을 온 몸에 감고 폐관했으나 이번에 대벌주의 간곡한 청으로 출관하셨 소." 유빙의 눈이 그 옆의 인물로 옮겨졌다. 무인이라기보다는 대문사 (大文士)로 느껴지는 단아한 백의노인, 그는 바로 백금전가의 가 주이자 금왕(金王)으로 불리우는 사선유사 예운림이 아닌가? "예가주.... 오랜만이구료." 유빙은 사선유사 예운림이 제벌 총성의 육대장령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에 다소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제벌의 내외벌 중 외벌인 한 세력을 이끌고 있으며, 천하제일의 재력과 놀라운 지모(智謀)로 팔왕의 난을 불러 일으키는 팔왕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는 인물. 그가 대벌주의 진정한 심복이었으 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하.... 유총사! 이렇게 만나 뵐 줄은 나 역시 예상치 못했구 료." 예운림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부드러움 뒤에 잔혹함이 깃들어 있 을 듯한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세번째 인물은 회색장포에 회색의 피부를 지닌 갸름한 얼굴의 노 인이었다. 손톱보다 작은 기이한 눈에 세 가닥 회색빛 수염, 여기에 부패한 듯 느껴지는 회색피부 등은 어쩐지 역감(逆感)을 주고 있었다. "이 분은 제 삼장령인 회회천사(灰灰天邪) 귀영계(歸英契)! 십대 장문 중의 하나인 십사(十社)의 사주(社主)이십니다." 유빙이 그를 향해 가볍게 포권해 보였다. 회회천사 귀영계 역시 마주 포권해 보였다. 백국청장 화국봉이 다시 네번째 인물을 소개했다. "제사장령 천군제룡(天軍帝龍) 관조양(貫朝陽) 대인이십니다. 유 총사께서도 한 번 대하신 바 있는 칠정의 공동전인이지요. 관대인 은 또한 이종(二宗) 중 한 명의 신분이기도 하오." 백국청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군제룡 관조양이 부드러운 미소 와 함께 입을 떼었다. "내 이미 일곱 사부께 유총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반갑소." 유빙은 천군제룡 관조양의 눈에서 진정 반가와 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역시 밝게 미소하며 목례했다. 육대장령 중 다섯번째 인물은 의외에도 한 명의 여인이었다. 대략 이십 칠팔 세? 입고 있는 자색궁장이나 그 태도 등으로 보아서는 대략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허나 그 용모는 어쩐지 이제 겨우 십이삼 세로밖에 볼 수 없는 기이한 얼굴이었다. 얼굴은 소녀티가 나고 몸은 성숙한 여인의 그것이랄까? "자잠미후(紫潛美后)! 육대장령 중 한 명이오" 다른 인물들과 달리 자잠미후를 소개하는 백국청장 화국봉의 말투 에는 일말의 존경심이나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 존칭 마저 생략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자잠미후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 가볍게 유빙을 향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유빙은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분위기와 겉도는 여인, 기이하게도 자잠미후에게 그런 느낌을 받 은 것이었다. '기이하군. 이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치 앉아 있지 않고 있는 듯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으니.....' 유빙은 그녀의 소외당하고 잊혀져 있는 듯한 묘한 분위기에 오히 려 흥미가 있었다. 일단 여인의 몸으로 육대장령 중에 꼽혔다면 엄청난 일인 것이다. 그러한 여인이 주위의 일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 떨어져 있고 그녀 역시 따돌림을 당한 백치소녀처럼 그 렇게 앉아 있었다. 유빙의 호기심을 자극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녀의 용모가 놀랍도 록 아름다운 가운데 기이한 분위기인지라 어쩐지 자꾸 마음이 흔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인물은 유빙도 몇 번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십만종단천인막의 막주 당결! 천하에서 가장 비대하며 가장 느린 몸을 지니고 있는 인물, 앉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피곤하다는 듯 눈조차 크게 뜨지 못하고 있 는 인물은 바로 당결이었다. "후후.... 오랜만이오. 어쨌든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 당결은 유빙을 향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제벌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기를 기원하겠소." 당결의 태도는 의미심장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훗! 그 말이 진심인지 궁금하구료." 유빙 역시 차갑게 웃었다. 그러나 당결은 자신이 할 말만을 할 뿐 유빙의 태도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제벌은 몹시 위험한 곳이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또 나 당결은 빚을 지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나 당결은.... 대벌주의 후예가 아니면 그 누구도 후계자로 용납 치 않는다는 사실을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이오." 당결은 너무 많은 말을 해 힘이 든다는 듯 연신 두툼한 손바닥으 로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그 희고 통통한 손가락에 꽂혀있는 열 개의 휘황찬란한 보석반지가 유독 눈을 찔러왔다. 대벌주에 대한 충성심이 광적으로 깊은 인물, 당결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후후.... 명심해 두겠소. 나역시 그대에게 받을 빚이 있는 듯 하니....." 유빙은 그 자신이 창랑왕의 수하들에게 부상을 입었을 때 십만종 단천인막의 살인자들이 추적해 왔던 사실을 떠올렸다. 당결의 눈은 가늘게 뜨여진 눈까풀 사이에 섬광처럼 번뜩였고, 유 빙의 눈은 담담한 가운데 차가운 한기를 뿜어내며 허공에서 얽히 고 있었다. 유빙이 자리에 앉자 백국청장 화국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후계자 쟁탈전은 시작되었소. 그대가 이곳으로 들어선 바로 그 순간부터 그대는 그대의 목을 주의해야 하는 것이오." 백국청장 화국봉의 음험하고도 감정없는 눈이 유빙을 정시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섬뜩한 것이었다. "후계자 쟁탈전은 기실 이곳에 들어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 는 것이오. 나머지 후계자들은 이미 열흘 전에 입성을 완료해 사 태를 관망하고 있소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신의 수하세력을 이끌고 입성했소이다. 단신으로 입성한 후계자는 그대 한 명뿐이 오." "호.... 들어오는 것 자체에서 이미 승부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멋모르고 단신으로 입성한 본인은 약간 미련했구료."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소." 유빙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 이것은 확실히 유빙이 허를 찔린 것이었다. 다른 후계자 들이 자신의 휘하세력을 모조리 이끌고 입성한 반면 그 자신은 단 신으로 입성한 것이었으니 이미 패배가 결정지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실 대벌주의 초청서신에는 반드시 단신으로 입성해야 한다는 것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허나 유빙은 어쩐 일인지 가벼운 미소만을 머금은 채 백국청장 화 국봉을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으니.....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소. 그대는 그대의 수하들을 입성시킬 수 있소. 허나 그들이 입성할 때까지는 꼬리를 감추고 격돌을 피해야 만 할 것이오." 백국청장 화국봉의 말에는 조소의 빛이 담겨 있었다. 미련하게 단 신으로 입성한 유빙을 마음껏 비웃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대는 이 제룡탑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사지(死地)에 들어선 것 이나 진배없소. 어떤 음모나 귀계, 그리고 책략을 사용해도 좋소. 단지 모든 후계자들을 꺽고 그대 혼자만 남으면 되는 것이오." "......" "본인을 비롯하여 총성의 인물들은 그대들이 서로 격돌해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어느 누구의 편도 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기다릴 것이오." "......" "그리고 단 한 명이 남았을 때, 그는 본인과 비무할 것이오. 총성 의 어느 누구도 또한 나를 돕지는 않을 것이오." "제법 공평한 방법이구료." 유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헌데, 그 질문의 내용이 실로 놀라왔다. "그건 그렇고, 나는 어디에서 자야 하는 것이오? 먼 길을 왔더니 제법 피곤하구료." 백국청장 화국봉의 눈이 일시 멍청해졌다. 그는 멍청히 유빙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대를 위해 본성의 남단(南端)에 위치해 있는 백타성(白駝城)이 비어져 있소. 십대장문 중 삼환(三幻)의 거주지였으나 지금은 아 무도 없소." "다른 후계자들은....?" "그것은 알려줄 수 없소. 그대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것이오. 그 것 자체가 승부의 시작이니....." "알았소. 이제 가도 되겠소?" 유빙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키며 몸을 추스리는 그의 태도는 전혀 사지에 들어선 사람같지 않았다. 백국청장 화국봉과 육대장령들은 유빙의 너무도 태연한 태도에 어 이가 없는 듯했다. 유빙은 그들의 어이없어 하는 눈빛을 뒤로 돌린 채 천천히 대전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돌연 그는 대전의 입구에서 몸을 돌린 채 백국청장 화국봉을 향해 미소와 함께 질문했다. "헌데.... 살아남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소?" "그, 그렇소." 백국청장 화국봉이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자신을 향해 미소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질문하는 유빙의 말에 어떤 저의가 깔려 있 는 듯 느껴진 것이었다. "후후.... 알았소.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총성의 인물들과 가까워져야 할 것 같군." 유빙이 돌연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오?" 백국청장 화국봉이 차갑게 질문했다. 유빙이 미소했다. "하하.... 나는 다른 후계자들과는 달리 단신으로 입성했소. 그러 니 그들을 꺽으려면 천상 총성의 인물들을 포섭해야 하지 않겠소? 어떤 방법이라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말이오." 백국청장 화국봉과 육대장령이 아연해 유빙을 바라보았다. 유빙은 대소를 터뜨리며 이미 대전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천하, 그 자체라고 일컬어지는 제벌의 총성. 이 총성에 팔왕의 난 을 주도하던 대부분의 인물이 모여 후계자 쟁탈전을 벌인다. 허나 유빙의 계획은 후계자 쟁탈전에 있지 않았으니..... ② 백타성(白駝城). 제벌 총성의 남단에 위치해 있는 총성 십대성 중의 한 곳. 제벌 총성의 규모는 실로 방대했다. 총성 내에 위치해 있는 백타성 하나만 하더라도 능히 일천 명 이 상이 거주할 수 있는 대성으로써 방원 이십 여리에 달할 정도이니 총성 전체의 규모야 말해 무엇하랴! 수십 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인 채 분지(盆地)처럼 은폐되어 있는 총성의 규모가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인 것이다. 이 대파란(大破瀾)의 장(場)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유빙의 거처로 정해진 백타성에 역시 어둠이 내리고..... 백타성은 총성의 다른 곳과는 달리 어둠과 함께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그 이유는 드넓은 백타성에 유빙과 학거비 단 이인만이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후계자들의 동태는 어떻소?" "알 수 없습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이곳 총성에 각기 정예세력을 이끌고 입성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소." 어둠에 잠겨 있는 백타성의 한 곳에 은은한 궁등이 밝혀져 있고, 그 불빛 아래 유빙과 학거비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학거비의 얼굴 에는 긴장이 떠올라 있었다. "단신으로 입성한 사람은 유일하게 소주뿐입니다." "훗! 결국 천하의 모든 세력이 이곳에 집결했다고 볼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이곳이야말로 이제 천하의 패권을 가름하는 풍운(風 雲)의 격전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입성한 나머지 후 계자들은 이미 은밀히 활동을 개시한 듯 합니다." "하하.... 죽고 죽이는 대혈투 말이오?" "아직은 관망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다른 후계자들을 위한 완벽 한 죽음의 함정을 계획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후후.... 그러나 섣불리 먼저 움직이는 세력은 없을 것이오. 먼 저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후계자들에게 어부지리를 허용하 는 것이 될 테니....." "......" "할아범!" 문득 유빙의 전신에서 기이한 기세가 일어났다. 학거비조차 숨을 죽일 무상의 위엄이었다. "한 가지 할아범이 알아내 주어야 할 일이 있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학거비의 눈에 의혹이 솟아났다. 유빙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에 가장 늦게 도착했소. 허나 행동은 제일 먼저 개시할 것이오." "....?" "총성의 육대장령 중 대벌주의 모든 것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 물은 누구일 것 같소?" 유빙의 돌연한 질문에 학거비가 흠칫했다. 허나 그는 내색치 않은 채 잠시 상념에 잠겼다. "대벌주의 모든 것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은 역시 대제자 백 국청장 화국봉일 것입니다. 허나 제벌의 모든 것을 가장 많이 알 고 있는 인물은 아마 자잠미후일 것입니다." "자잠미후?" "예! 그녀는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으나 실은 가장 주의해 야 할 인물입니다. 그녀는 십대장문 중 가장 지고한 신망을 얻고 있는 문종(文宗) 십기장생(十技長生) 공설초(空雪初)와 무종(武 宗) 천무제종(千武帝宗) 담패후(膽覇侯)의 기명제자이고 뿐만 아 니라 대벌주조차 어쩌지 못하는 신수궁의 수모 음희의 손녀이기도 합니다." "호.... 대단한 여인이었구료." "그렇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이미 육대장령 중 한 명으로 꼽힐 수 있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닌 것입니다. 허나 그녀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기이한 능력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예! 육대장령의 한 명이면서도 같은 육대장령들조차 그녀의 존재 를 간혹 잊고 있습니다. 마치 그림자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눈 앞에 있지 않으면 그녀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게 만드는 신비한 능 력을 그녀는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음....." 유빙은 자잠미후를 대면했을 때 느꼈던 그녀의 인상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녀는 그림자와 같이 묻혀 있는 존재였다. "좋소. 내가 할아범에게 알아봐 달라고 한 것은 육대장령 중 누구 를 포섭해야 대벌주에 관한 것을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할아범이 알고 있었구료." "헌데 대벌주의 일은 왜....?" 학거비가 의혹을 드러냈다. 유빙이 기오하게 미소했다. 무상의 위엄이 자연스럽게 뻗어나고 해일이 몸을 일으키는 듯 엄청난 패기가 담겨있는 그런 미소였다. "할아범! 잊고 있었구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후계자가 되기 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 "후후....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후계자 자리를 위해 다투려 온 것 이 아니오. 나의 진정한 목적은 제벌을 무너뜨리는 것에 있는데 그 제벌의 후계자가 되어 무엇하겠소." "아....!" "대벌주....! 나는 그를 만날 것이오. 그리고 꺽을 것이오. 영원히....." "......" "대벌주는 기실 무서운 사람이오. 나를 비롯하여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모두 제벌이 가장 꺼리는 숙적(宿敵)이오. 허나 대벌주 는 우리를 적으로 삼기는커녕 오히려 후계자라는 미끼를 던져 자 신의 성안으로 불러 들었소." "......" "후후....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되든 간에 제벌은 무너지지 않는 그런 놀라운 방법을 택한 것이오." "음....." "내가 만약 대벌주라면 단 한 명의 후계자가 남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오. 그리고, 그가 진정 제벌을 위해 몸을 바칠 사람이 아니라 면 제거할 것이오." 학거비는 침묵했다. 유빙의 판단이 몸서리치도록 정확하다고 느껴 졌기 때문이다. 문득 유빙이 학거비를 직시했다. "할아범! 그 자잠미후를 포섭하는 방법이 없겠소?" "......" 학거비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잠시 후 단호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인을 포섭하는 방법으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녀를 취하는 것입니다." 유빙의 질문에 대답하는 학거비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떤 고뇌의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허나 유빙은 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 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 "고맙소. 내 생각도 그것이었소. 할아범! 지금 곧 자잠미후에게 통보해 주시오. 내가 방문하겠다고....!" "예? 지금 당장 말입니까?" 학거비는 어이가 없는 듯했다. 허나 유빙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학거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제벌의 총성에 도착한 첫 날, 그 첫날의 밤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③ "놀랍군요. 이렇게 파격적으로 예상을 깨며 움직이실 줄 미처 몰랐어요." 방(房), 여인의 그윽한 체향(體香)이 감도는 방이다. 바로 자잠미후가 거처하는 자잠궁(紫蠶宮)내의 깊은 내실이었는데 유빙은 거의 기습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상치 못한 시간에 자 잠미후를 찾은 것이다. "미후께서는 본인이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알고 싶지 않소?" "궁금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자잠미후는 무슨 일이고 간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심지어 유빙이 자신을 찾아오는 일조차 별반 놀랍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항시 그늘에 묻혀 지내려는 여인, 퍽이나 조용하면서도 잊히기 쉬 운 그런 여인이었다. 맑고 혜광(慧光)이 감도는 눈빛에 비해 그 표정이 백치소녀처럼 멍청해 보이는 그녀의 전신에서는 폭발할 것 같은 관능과 자신만 의 껍질 속에 안주해 아무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한 자폐 성(自閉性)이 함께 번져 나오고 있었다. '볼수록 기이한 여인이군!' 유빙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허나 그의 입가에서는 반대로 미소가 솟아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알고 있다니 오히려 그 대답을 내가 듣고 싶어지는구료." "호호.... 간단하지 않을까요? 그대는 다른 후계자들과 달리 단신 이니 저라도 포섭해 보자는 것이 아니겠어요? 하나 실패한다 해도 괜찮겠지요. 그대가 나를 만났다는 사실로도 이미 그대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일 테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료." "호호.... 그대는 다른 후계자들을 의식한 것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그대의 동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 한 행동.... 그들에게 한 가지 의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목적이 아니겠어요?" "호.... 그러니까 단지 내가 제벌의 인물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는 추측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이곳을 찾았단 말이오?" "그럼 아닌가요?" "아니오. 나는 진정으로 그대를 포섭하기 위해 온 것일 뿐이오." 관심없는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 받던 자잠미후의 눈에 처음으로 재미있다는 듯한 이채가 스쳤다. "제룡탑에서 백국청장 화국봉에게 듣지 못했나요? 총성의 어떤 인 물들도 이 쟁탈전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소. 허나.... 또한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고 들었소이다." "호호호.... 재미있군요.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나를 포섭할 것인가요?" 유빙이 웃었다. 돌연 그의 입꼬리에서 시작해 귀밑까지 번져나가 기 시작한 그의 미소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거의 황홀하다고나 해야 할까! 자잠미후는 이런 기분을 난생 처음 느꼈다. 남자의 미소가 아름답 다고 느낀 적도 처음이었고 또 가슴 한쪽에 아련한 통증같은 물결 이 번지기 시작한 감정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여인을 포섭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여인을 취하는 방법이 아니겠소?" "......" 기이한 감정에 젖어있던 자잠미후의 등골을 타고 한 가닥 전율이 흘렀다. 무엇인가 배신당한 분노였다. "흥! 그대는 한 가지 자신감으로 나를 택했던 것이었군요. 바로 그대가 사내라는 점, 모든 여인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것이 라는 생각으로....." "......" "하지만 그대는 또 한 가지를 모르고 있어요. 그것은.... 내가 천 하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류가 바로 그대같은 남자라는 사실을....." "훗! 소저께서 남자를 혐오하고 있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구료." "흥! 그래요. 그대와 같이 자신의 외모와 재능을 믿고 여인들을 농락하려는 사내를 나는 증오하고 있는 것이에요." "후후.... 그 병을 내가 고쳐주겠소." "병(病)....?" 자잠미후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허나 유빙은 여유롭게 말을 잇고 있었다. "모든 병에는 근원이 있는 것.... 미후께서 그토록 남자들을 혐오 하는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소?" "....!" 자잠미후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굳어졌다. 터질듯한 분노에 그녀 의 전신은 폭풍만난 나뭇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유빙의 오른 손이 어느새 그녀의 귀밑머리를 만져오고 있지 않은가? 자잠미후는 유빙이 언제 손을 뻗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였다. 터질듯한 분노와 함께 한 가닥 기이한 전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 다.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전신을 돌연 수천 마리의 개미로 물어 뜯기는 듯한 고통이랄까.... 허나 그것이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자잠미후는 너무도 잘 알고 있 었다. 그것은 명확히 말해 고통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애타게 갈구 하는 갈증이었던 것이다. 욕정(欲情)이라 이름붙여진 더럽고 추잡한 욕망, 자잠미후가 느끼 고 스스로 깨닫고 있는 감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럴 수가!' 자잠미후는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단연코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남자를 상대해 보지 못한 자신에게서 이런 강렬한 욕 정이 끓어 오르다니! '사성교조 동맥! 희첩(嬉妾)의 수효만 삼천을 거느리고 있던 사도 비전(邪道秘傳)의 대가....! 그의 사술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유빙의 입가에 사이한 미소가 어렸다. 아아! 사성교조 동맥!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괴무비한 사술로 천만교도를 이끌어들인 인 물, 손짓 하나에 그를 포위하려던 인물들이 오히려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고 눈짓 한 번에 수천여 명의 여인들이 단장(斷腸)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인물. 그 사성교조 동맥의 가공할 사도비전이 유빙의 몸에서 재현되고 있단 말인가! '헉!' 자잠미후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녀의 전신에 단 한 점의 힘 도 남지 않은 듯 늘어졌다. "정략(政略)이라고만 생각하지는 마시오. 그대를 처음 본 순 간.... 그대의 기이한 아름다움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사실이니....." 유빙은 천천히 자잠미후의 겉옷을 벗겨갔다. 기이하게도 자잠미후 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뿐이랴! 오히려 유빙의 손길이 너무 느린 듯 느껴지며 자신이 헌신하고 싶어지는 강렬한 충동이 들끓지 않는가! '아아! 어째서.... 이런 일이....!' 자잠미후는 증오와 분노가 오히려 유빙에 대한 사모지정으로 변화 하고 있는 것에 정신이 없었다. 의식 그 자체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자잠미후의 옷이 순식간에 한 겹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차례씩 옷이 몸을 떠날 때마다 자잠미후는 하얀 두 발을 바르르 떨며 고 사리처럼 오그렸다 펴곤했다. .... 흠씬 비를 맞고 난 사람들처럼 유빙은 땀을 흘리며 자잠미후를 데 리고 긴 산책길을 나선다. 이윽고 두 사람은 늪에 이르러 배에 올 라 노를 젓기 시작했다. 고기떼가 지나가고 흐느적거리는 수초(水 草)가 물 속에 떠 있다. 격류에 휩쓸린다.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두 사람은 좀더 빨리 노를 저으며 기를 쓴다. 그럴수록 방주(房舟)는 낭떠러지 쪽으로 다가간다. 조금만 더 가면 낭떠러지이다. 여자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더욱 애 를 태우며 매달린다. "아아!" 두 사람은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벼락치는 격류 소리에 귓속이 멍해질만큼 이명이 일어났다. 정신 은 혼미해지고 훌쩍 날아서 어디론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착각이 온다. 벼랑으로 떨어진 것이다. .... 익사하고 난 사람들처럼 두 사람은 움직임을 잃고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직까지 자잠미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누워 본 적이 없는 깨끗한 침상 위에 두 사람의 땀이 흠뻑 젖어 있었다. "흐흑....." 자잠미후는 엎드린 채 그대로 눈물을 흘렸다. 왜 울고 있는지 그 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팔왕예조 제3권 제29장 지상최강(地上最强)의 살인자(殺人者), 당결 ━━━━━━━━━━━━━━━━━━━━━━━━━━━━━━━━━━━ ① 십만종단천인막의 막주 당결, 그는 대벌주 도당문비라는 한 인간 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한 천하 에서 가장 느린 몸을 지니고 있으며 또 천하제일의 미식가(美食 家)로 자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하루 일과 중 거의 대부분은 음식을 먹는 일이었다. 희고 통 통하며 열 개의 보석 반지를 끼고 있는 그의 손에서 음식이 떨어 져 본 적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헌데 지금 이 순간 놀랍게도 당결은 손에 쥐고 있던 음식을 내려놓고 있었다. "미후를? 그가...., 그가 소공녀(小公女)를!" 당결은 눈도 크게 뜨기 싫어하는 비대한 몸을 지니고 있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 눈이 최대한도로 뜨여져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십만종단천인막의 수하인 듯한 회의인이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 있었다. "그, 그렇습니다. 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 다. 미후께서는 그와 함께 밤을....." "사실이냐? 그럴 리가 없다. 소공녀는 남자를 사갈처럼 증오한다. 대벌주 때문이지....!" "허나 사실.... 입니다. 신음소리마저.... 확인했....." 회의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당결의 비대한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다음 순간 그는 믿어지지 않을 속도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자!" "어, 어디로....?" "자잠궁으로 간다. 도저히...., 도저히 유빙, 그 자를 용서할 수 가 없다. 유빙! 그가 감히 대벌주의 손녀인 소공녀를....." 파악! 당결의 비대한 신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번뜩이며 사라져 갔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신법이었다. 헌데 들었는가? 자잠미후가 대벌주의 손녀였단 말인가? "비켜라!" 당결의 신형은 자잠궁의 호위무사들에게 가로막혔다. 당결의 비대 한 몸에서는 연신 땀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당막주! 지금은 밤입니다. 내일 정식으로....." "비켜라!" 당결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열두 명의 자잠궁 호위무사들을 짜 증스럽다는 듯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에 가까운 광기가 이 글거리고 있었다. "안 됩니다. 아무리 막주님이라 해도....." 삭! 당결의 비대한 허리에서 검광(劍光)이 작렬했다. 말을 잇던 호위무사 한 명이 비명과 함께 지면을 굴렀다. 언제 검 을 뽑아 그를 베었는지도 모를 가공할 속도였다. "나를 가로 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 당결은 순식간에 검을 거두며 주위를 쓸어 보았다. 팟! 허나 순식간에 동료 한 명이 쓰러진 것을 목격한 호위무사들은 오 히려 병장기를 뽑아들며 포진하지 않는가! "이 놈들이....! 나는 지금 유빙을 죽이러 가는 길이란 말이다. 비켜라!" "정식으로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기다리십시요." "그럴 시간이 없다." "하오나....." 삭! 또다시 당결의 비대한 몸이 믿어지지 않을 속도로 번뜩였다. 동시 에 두 명의 호위무사가 손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천하에서 가장 느린 몸을 지니고 있는 당결, 그 천하에서 가장 느 린 몸에서 가장 빠른 검이 쏟아진 것이었다. ② 유빙은 자잠미후의 젖은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자잠미후는 유빙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눈 에서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믿어지지가 않아요." 문득, 자잠미후의 입에서 꿈결처럼 몽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소녀는.... 어제까지만 해도 그대를 몰랐잖아요? 헌데 이렇게....." "......" "이렇게 되고 나자 이미 오래 전부터 그대를 안 것 같은 느낌, 아 니 전생에서부터 끈이 이어진 듯한 느낌이 드니 참으로 알 수 없 는 게 여자인 것 같아요." "......" "그대가 이렇게 무지막지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허나 그런 그 대가 오히려 좋아질 줄은 더더욱 몰랐으니....." 유빙은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 리칼을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어디서.... 어떻게 내 인생에 뛰어 드셨나요?" 자잠미후의 말은 결코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에게 들려주는 놀라움인 것이다. 언제나 잊혀져 지내는 여인, 스스로 남에게 잊혀지려 노력했던 여 인. 허나 지금 이 순간의 자잠미후는 이제 유빙의 뇌리에 강렬히 인식되고자 애쓰고 있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염세적(厭世的)이고 자폐적(自閉的)이던 그녀의 기 질은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관능만이 남아있지 않은가! 유빙이 천천히, 그러나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남자들을 증오했었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소?" "....!" 자잠미후가 흠칫했다. 그녀는 망설이는 듯 하다가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저의 할머님 때문이었어요." "할머님? 수모 음희 말이오?" "예!" "......" "호호호.... 헌데, 저의 조부가 누구인지 아세요?" 자잠미후가 돌연 처절한 한이 담겨 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다 고는 하나 우는 것처럼 처연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저의 조부는 바로.... 대벌주예요" "그대의 조부가 대벌주라고?" 자잠미후가 한 자 한 자 끊어 내뱉자 유빙의 눈이 커졌다. 실로 예상도 못했던 일인 것이다. "허나 그것은 핏줄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저에게 그 분은 단지 대 벌주에 지나지 않아요." "음....!" "할머님은 중년의 나이 때 대벌주를 알게 되셨어요. 그리고....무 척이나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자잠미후의 말이 조용히 이어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내용이었다. "그 당시 대벌주는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었어요. 허나.... 그는 저의 할머님을.... 할머님을 신수궁을 끌어들이기 위해 취했던 것이에요." "......" "대벌주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예요. 그 분은 악인은 아니니까요. 허나 오직 제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인간의 정을 무 시하기 때문에....." "......" "그 분은 제벌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망설이지 않아요. 과 거 자신의 혈육이었던 도당곤이 실종되었을 때도.... 그 분은 단 지 강하지 못하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음....!" "그 후로부터 저는 남자들이 싫어졌어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 들에 대한 정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오직 일에만 매달리는 남자들 이 혐오스러웠던 거예요." "음.... 그대가 대벌주의 혈연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 그대를 만나지 않아야 했는데....." 유빙이 당황에 찬 탄식을 흘려냈다. 자잠미후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전신이 노기로 흔들렸다. "그, 그렇다면.... 당신 역시 일을 위해 여인의 정 따위는 무시해 버리는 그런 사람인가요?" "그것은 아니오. 허나 거북해진 것만은 사실이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유빙이 문득 굳어진 얼굴로 입을 떼었다. "대벌주! 그는 누구요? 어디에 있소?" "......" "기실 나는 이곳에 후계자 자리를 다투기 위해 온 것은 아니오. 단지 대벌주를 알아내기 위해 온 것이었소." "아!" 자잠미후가 탄식했다. 그녀는 유빙의 목적을 알게 되자 어쩔 줄 몰라했다. 헌데 바로 이때. "대벌주에 대해 알고 싶으냐? 그것은 내가 가르쳐 주마." 돌연 유빙과 자잠미후가 있는 내실 밖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유빙이 흠칫했다. 그는 들려온 음성이 바로 십만종단천인막의 막 주 당결의 음성임을 알고 있었다. 유빙은 천천히 옷을 입었다. '대벌주의 미친 개! 자잠미후가 대벌주의 손녀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네가 분노해 쫓아오리라고 예상했었다!' 유빙은 가볍게 미소하며 밖으로 나섰다. 자잠미후의 침실과 연해 있는 후원의 뜰, 휘황한 월광이 뜰에 가 득해 있는 가운데 달빛을 받으며 한 개 교자가 서 있었다. 네 명의 건장한 흑의인들이 메고 있는 교자 위에는 당결이 비대한 몸을 비스듬히 누인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십만종단천인 막의 살수들로 보이는 이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검을 뽑아들고 우 뚝 서 있었다. 유빙이 후원으로 내려서자 당결의 가느다란 눈에서 섬광이 일었다. "나는 원래부터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헌데 후계자 쟁탈전 을 벌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소공녀를 건드리다니....!" "훗! 그것이 자네와 무슨 관계가 있나?" "네가 한 행동은 대벌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 "용납 못한다면 어쩌겠는가?" 유빙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미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허나 당결은 자신이 할말만을 잇고 있었다. "대벌주를 만나는 것은 네가 다른 후계자들을 물리치고 너 하나만 이 남게 되면 자연히 이루어진다. 허나 너는 그럴 기회를 잃었다. 내 손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니....." 당결이 가볍게 주위를 쓸어보았다. 팟! 파파팍! 순간, 그의 전면에 서 있던 이십여 명의 흑의인이 일제히 유빙을 향해 덮쳐들었다. 헌데 그들의 공격 방법은 실로 악랄했다. 전면에 세 명, 그리고 좌우로 여덟 명, 뒤쪽으로 세 명이 겹쳐들며 공격해 들고 있었는 데 이것은 자신의 동료 몸뒤에 일단의 흑의인들이 숨어들며 검을 쳐내고 있어 유빙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동료들을 희생시키는 그 런 공격이었던 것이다. 쉬이익....! 유빙의 손이 둥글게 원을 그렸다. 그의 손에 의해 순식간에 세 명 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뒤로 퉁겨나갔다. 동시에 그의 한 손에는 쌍월이 쥐어지고 드러난 시야 속으로 뛰어드는 흑의인들의 검이 쌍월에 의해 베어졌다. 삭! "크악!" 유빙의 신형이 눈부신 속도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십여 명이 포진하고 있었으나 마치 한 명을 상대하는 듯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였다. 공격해 들어오는 적을 무시한 채 반드 시 점찍은 인물들만을 차례차례 해치워 나가는 그의 움직임은 놀 랍도록 빠른 가운데 유효적절했다. 삭! "헉!" 몇 번의 격돌음과 비명성이 울렸을 때는 흑의인들은 이미 모조리 지면을 구르고 있었다. "놀랍군." 교자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당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 동시에 마치 한무더기 유성처럼 그의 비대한 신형이 폭사해 들었 다. 검광은 이미 유빙을 똑바로 찔러들고 있었다. 유빙은 비대한 당결의 검이 이토록 불가사의하게 움직이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뜻이 이르면 이미 손이 움직이는 이의여기(以意如氣)의 경 지에 오른 그의 몸은 당결의 검이 한 치 앞에 이르렀을 때 이미 뒤로 퉁겨나가고 있었다. 카아! 삭! 당결의 검은 무서운 속도로 유빙을 따라 붙으며 사방을 휘어감았 다. 공기를 끊으며 쏘아져 오는 그의 검은 마치 유빙의 그림자럼 한 치 앞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따라오고 있었다. 허나 유빙의 몸은 그때마다 마치 검기(劍氣)에 가볍게 날리는 듯 움직이고 있어 검은 한 치 가까이 접근해 있었으나 언제까지고 유 빙의 몸에 닿지는 못했다. 거의 환상적인 움직임. 다음 순간 유빙의 손에 쥐어져 있는 쌍월 이 느릿한 속도로 당결의 몸을 베어갔다. 동(動)으로 정(靜)을 제 압하는 지극히 느린 초식이었다. 그러나 당결은 그 움직임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피해낼 수가 없었다. 사악! 유빙의 쌍월이 당결의 비대한 몸을 꿰뚫었다. 스르륵....! 당결의 비대한 몸이 무너져 내렸다. 지면에 닿아 있는 열 개의 보 석반지로 장식된 희고 통통한 손에 월광이 반사되고 있었는데 이 순간 당결은 자신이 오히려 유빙에게 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이제.... 시작인가....?" 순식간에 잠들어 버린 당결을 내려다 보며 유빙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피(血)와 월광(月光)..... 총성에서의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 팔왕예조 제3권 제30장 술(酒)취한 소녀(少女) ━━━━━━━━━━━━━━━━━━━━━━━━━━━━━━━━━━━ ① 명성 내의 빈청(賓廳). 흑궐의 인물들이 머물고 있는 명성의 빈청에는 두 명이 앉아 있었 다. 치렁치렁한 흑포를 머리 끝에서 발등까지 덮고 있는 흑포괴영 과 단아한 용모의 중년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중년인의 용모는 눈이 아프도록 전율스러운 마력을 발하고 있었는 데 그는 바로 법밀사의 총율사인 잠린왕자 주문빈이었다. "총율사께서 이곳을 방문한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듯 한데....?" 흑포괴영의 입에서 문득 쇳소리가 나직이 흘러 나왔다. 흑포괴영은 바로 유빙이 여은금 대신 변장하고 있는 것으로써 주 문빈은 상대가 유빙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그녀 는 완성되지 않은 괴이한 무공으로 인해 항시 무공을 끌어올릴 때 는 흑포를 쓰고 있어 아무런 의심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알려드릴 일이 있소이다." "......" "먼저 군주 단독의 힘으로 흑궐을 정비한 것을 진정으로 축하드리 오. 그리고 우리의 합작에 대한 것은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군주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주문빈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 오르고 유빙은 단지 여은금 이 흑포를 쓰고 있을 때처럼 백치처럼 무감동한 눈빛을 마주 보낼 뿐이었다. 주문빈이 말을 이었다. "군주께서는 유빙이 제벌의 후계자인 백국청장 화국봉과 손을 잡 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들은 적이 있소. 허나 낭설이라 생각하오." "물론 낭설일 수도 있소이다. 허나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오." 유빙은 내심 웃었다. 허나 그는 여은금의 태도를 흉내내 일체 감 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주문빈은 자신의 말에 확신을 지니고 있다는 듯 다소 격앙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기실, 제벌의 대벌주는 이미 오래 전에 한 사람을 후계자로 지목 주시하고 있었소. 그는 바로 백찰무경의 유빙 대총사였소." "믿기 어렵군요. 그렇다면 백국청장 화국봉이라는 인물은 허수아비란 말씀이시오?" 유빙은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목소리 조차 완벽하게 여은금을 흉내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허나 주문빈은 흑궐의 수하들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흑궐의 대 종사로 자처하고 있는 눈 앞의 인물이 여은금이 아니라고는 아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는가. 유빙이 초령왕 여율령의 무공을 이었음을 모르 는 그로서는 흑궐과 유빙이 어떤 연관이 되어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빙의 질문에 주문빈이 다시 그 특유의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백국청장 화국봉.... ! 그는 결코 제벌의 후계자가 될 수 없소이다. 그 이유는....." 주문빈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는 바로 여인의 몸이기 때문이오." "여인? 백국청장 화국봉이 여인이란 말이오?" 유빙은 깜짝 놀라 자신의 원래 목소리로 반문한 후 내심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주문빈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그렇소. 그녀는 바로 취설서 취노인과 함께 다니는 취려홍이라는 소녀외다. 바로 대벌주 도당문비의 손녀이지요." "대벌주 도당문비의 손녀? 취려홍....?" 유빙의 내심으로는 더 큰 경악이 스쳐갔다. "그렇소. 자잠미후는 정실이 아닌 부인의 몸에서 난 손녀이고 취려홍은 바로 도당려홍 으로서 도당문비의 정실 손녀인 것이오. 일왕 도당곤의 딸이지요." 유빙은 놀라운 사실을 주문빈으로부터 알게되자 내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허나 주문빈의 이어지는 말은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유빙이 대벌주의 후계자로 오래 전부터 지목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또 있소. 대벌주 도당문비의 아들 일왕 도당곤이 오 래 전부터 유빙과 함께 있기 때문이오." "일왕 도당곤이 유빙과 함께 있다고?" 유빙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애써 평정을 유지한 채 귀를 기울였다. "그렇소. 단두백정 학거비라는 인물은 분명히 일왕 도당곤의 변신이었소이다." "음....." 유빙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경악성이 흘러 나왔다. 실로 충격적인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취설서 취노인이 대벌주 도당문비....?" 문득 유빙은 한 가지 생각이 뇌리에 스침을 느끼며 질문했다. 주문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그가 바로 제벌의 대벌주인 것이오." "으음....!" 아아! 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를 팔러 다니는 노인, 그 취설서 취노인이 바로 대벌주 도당문비였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이가 없군. 이미 몇 번이나 만났으면서도 그의 정체를 예측도 못했다니....!' 유빙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이런 행동을 지켜보던 주문빈은 그가 자신의 말을 믿는 것으로 오해하고 말을 이었다. "대벌주의 생각은 도당려홍을 유빙과 짝지워 주려는 것이오. 결국 두 사람이 은밀히 만난다는 것은 사실인 것이오." "....!" "대벌주가 창랑왕과 나, 그리고 미령군주를 후계자 명단에 넣어 우리를 초청한 것에는 무서운 음모가 계획되고 있는 것이오. 항차 제벌에 거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우리 삼 인을 한 자리에 모아 없애려는 것이지요." "그럴 리가....!" "사실이오.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오. 본인 역시 이곳 총성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런 의심은 하지 않았 으나 유빙이 백국청장 화국봉, 아니 취려홍과 노골적으로 은밀히 합작을 꾸미고 있으니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소." ".... !" "이제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게 무엇이오?" "그것은 바로 유빙을 제거하는 것이오. 유빙은 아직은 단신이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대와 내가 함께 공격하면 결코 피 할 수가 없소." "......" "어쩌시겠소? 나와 손을 잡고 먼저 그를 제거하시겠소?" 유빙은 내심으로 고소가 스쳤다. 자신의 죽음에 동의해 달라니 어 찌 우습지 않겠는가. 유빙은 짐짓 오랜 상념을 하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모든 계획은 그대에게 맡기겠소." 주문빈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솟아났다. "이제 유빙과 취려홍이 만나는 순간만을 기다리면 될 것이오." "잠깐, 당신은 그녀마저 한꺼번에 제거할 계획이오?" "그렇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총성의 인물들이 가만 있지 않을텐데?" "후후.... 그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오. 기실 이곳 총성은 빈 성이나 다름없소." "....!" "총성은 비어 있소. 우리가 입성할 때쯤 총성의 모든 고수들이 거 의 대부분 밖으로 은밀히 빠져 나갔소이다." 유빙의 눈에 또다시 놀람이 스쳤다. "그 이유는?" "새왕 호극습도 때문이오." 주문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빙의 눈에 더욱 짙은 의혹이 솟아났다. "새왕 호극습도? 그렇다면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 제벌의 고 수들은 모두 그를 막기 위해 은밀히 밖으로 나간 것이란 말이오?" "그렇소. 새왕 호극습도의 북방이 은밀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대벌주는 이런 고육지계를 꾸민 것이기도 했소. 중원의 혼란을 일 시 멈추게 한 후, 그들을 상대하려는 것 역시 후계자 쟁탈전이라 는 명분 하에 숨어있는 것이오." 유빙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대벌주 도당문비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와 같이 깊은 안배에 의한 것임을 뼈저리게 느 끼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대벌주.... 실로 무서운 인물이로구나!' 유빙은 문득 눈 앞의 주문빈을 응시했다. '내가 취려홍과 만날 순간을 기다릴 것 까지는 없다. 나는 바로 내일 그녀를 만날 계획이니....!' 유빙의 내심으로 스쳐가는 미소, 그 미소와 함께 총성에서의 두번 째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② 호수(湖水). 제벌의 총성 한복판에 자리한 곤호(崑湖)의 미려한 물결 위로 안 개같은 실비가 뿌려지고 있었다. 그 뿌연 우연(雨煙) 너머로 노랗 게, 또는 간혹 뒤섞인 백설같은 흰 빛으로 일렁이는 거뭇한 섬의 그림자가 보인다. 국화(菊花)의 섬, 사시장철 황국(黃菊)과 설국(雪菊)이 흐드러지 게 피어있는 환상처럼 아름다운 호중도(湖中島)였다. 그 섬 한가운데 은은한 푸른빛이 떠도는 유리와도 같은 느낌을 주 는 취옥(翠玉)으로 전체를 꾸민 한 채의 전각이 조용히 실비에 젖고 있었다. <국헌(菊軒).> 전각 전면에 단아한 필치로 이렇게 쓰여진 현판은 국화의 섬 한가 운데 자리한 전각 위 분위기와 어우러져 주인의 품격을 자연스럽 게 설명해 주는 듯했다. 실비는 이 모든 수려한 풍경을 안개처럼 감싸며 부드럽게 흩뿌리 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국헌의 안 채에 정갈한 술상이 차려져 있고 그 앞에는 막 한 잔씩을 서로의 잔에 따라 놓은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유빙과 백국청장 화국봉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한자리에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이 순간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 마주 앉을 때 으례히 그 렇듯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묘한 웃음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유총사, 자잠미후를 통해 본인을 만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이오?" 얼마의 침묵이 흐른 뒤 백국청장 화국봉이 입을 열었다. 유빙의 입꼬리가 가느다랗게 말려 올라갔다. "훗....! 그대와 한 가지 겨루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소." "겨룬다? 호...! 그것 참 마음에 드는 제안이구료. 헌데 무엇을 겨룬다는 뜻이오?" 백국청장 화국봉이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반문하자 유빙의 입가에 다시 예의 미소가 솟아났다. "나는 무(武)는 물론 문(文)과 예(藝)에 있어서도 단 한 번도 패 배한 적이 없소. 허나.... 언젠가 술로써 승부를 걸어왔던 한 소녀에게만은 예외였소." 백국청장 화국봉의 어깨가 흠칫 파문을 일으켰다. 유빙은 화국봉의 반응을 못 본 척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해서 그후 나는 주도(酒道) 연마에 일층 박차를 가하여 이제는 그 소녀를 만나도 패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소. 하지만 그 전에 정 진된 주도 실력을 점검해 볼겸 그대와 한 번 술을 겨루어 보고 싶어졌소." "재미있는 생각이외다. 헌데 어찌 갑자기 그런 생각을 다 하게 되셨소?" 화국봉이 어쩐지 파동을 일으키는 듯한 눈빛을 누르며 담담하게 되묻자 유빙의 미소가 더욱 묘하게 빛났다. "그 소녀에게 참패한 날도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비를 보 자 불현듯 그녀 생각이 떠오르고 또 그대와 한 번 겨루고 싶은 생각이 났다오." "단순히 술 생각이 난거라면 자잠미후가 나보다 더 적격이었을 터 인데 날 찾았다니 실로 모를 일이외다." "어찌 자잠미후를 그 소녀와 비교할 수 있겠소." 유빙의 담담한 대꾸에 화국봉의 눈에 이상한 기쁨의 빛이 퍼뜩 스쳐갔다. "유총사는 그녀를 무척 사랑하시는 모양이군요." 유빙의 입가에 떠오른 기오한 미소가 점점 짓궂은 빛을 띠어갔다. "글쎄..... 아마 그럴지도 모를 것이오." 일순 화국봉의 눈에 희열의 빛이 빠르게 스쳐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빙의 두 눈을 천천히 응시했다. "그래 어떤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겠소?" "그녀에게 패배한 방법이 문답법이니 바로 그 문답법으로 겨루어 보는 것이 좋을 듯 하오." "문답법이라.... 무슨 뜻이오?" 화국봉의 태연한 물음에 유빙은 내심 터지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짐짓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문답법이란 서로 한 가지씩의 질문을 상대편에게 하고 상대가 답 을 못할 때 패배한 것으로 간주하여 한 잔 씩의 벌주를 마시는 방 법을 말하오." "호....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방법이외다. 그럼 누가 먼저 시작하는 것이 좋겠소?" "내가 먼저 질문을 하겠소." 유빙은 짧게 숨을 끊은 후 복면 너머로 기이한 눈빛을 하고 있는 화국봉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내가 그대의 거처인 이곳 국헌까지 찾아온 것은 술시합 외에도 한 가지 일을 확인할 목적이 있어서였소. 무엇을 확인하러 왔는지를 아시겠소?" "글쎄요....?" "그대가 졌소. 먼저 한 잔의 벌주를 마셔야겠소이다." 화국봉은 일시 멍한 눈빛을 지었으나 이내 술을 거침없이 입에 털 어 넣으며 유빙을 직시했다. "벌주를 마셨으니 그대가 정답을 말해야 할 차례요." 순간 유빙의 입에서 실로 엉뚱한 정답(?)이 튀어나왔다. "그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확인하러 왔소." 복면 속에서 화국봉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대됐다. 유빙은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 마디를 덧붙혔다. "그대는 그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알고 있소? 이것이 두번째 질문이오." 물음치고는 정녕 기상천외한 물음이 아닌가! 화국봉은 잠시 벌어 진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이윽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몰라요!" 세상에 자신의 성별도 모르는 멍청이가 있을까? 게다가 지금 그의 음성은 황망했던 탓인지 뾰족한 여인의 교성을 닮아 있었으니..... "그대가 또 졌소." 냉엄하게 내뱉은 유빙의 음성에 화국봉이 저항이라도 하듯 높은 음성으로 외쳤다. "그럼 당신은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고 있....소?" 그의 목소리는 전반부에서는 전형적인 소녀의 교성인 듯 하더니 후반부에 가서야 간신히 굵직한 음성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원래의 화국봉의 차갑고도 묵직한 음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유빙은 짓궂은 미소를 띄며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당신은 여자임에 틀림없소." "그,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그것은 당신의 옷을 벗겨 보거나 혹은 내가 손으로 당신의 가슴 을 만져보면 명약관화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오." 유빙은 마치 그녀의 가슴을 정말 만지기라도 할 듯 손을 쭈욱 뻗 어내는 것이 아닌가! 화국봉은 소스라치게 놀라 두 손으로 가슴을 방어하며 발작적으로 외쳤다. "좋아요. 난 여자예요! 이젠 또 무엇을 물을 건가요?" 유빙의 태도는 시종일관 침착했다. "그럼 세번째로 묻겠소. 당신은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화국봉은 다시금 멍해졌다. 설마하니 유빙이 그런 것 까지 물을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럼 말해 보면 될 것 아니오?" 앙칼지게 반문하던 화국봉은 그만 말문이 막히며 주춤거리다 끝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몰.... 라요." "그럼 당신이 또 졌으니 벌주 한 잔을 마셔야 할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이 내 이름을 알기라도 한단 말예요?" 유빙이 사뭇 냉정한 얼굴로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본명은 도당려홍이요. 가명은 취려홍.... 어떻소, 내 말이 틀리오?" 유빙의 입에서 그 한 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이제껏 충격과 놀람 으로 갈팡질팡하던 화국봉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으 며 믿어지지 않도록 침착해진 손으로 천천히 복면을 풀어 내렸다. "흥! 이제보니 아주 나쁜 사람이군요.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날 놀리다니....." 벗겨진 복면 너머로 드러나는 얼굴, 과연 그녀는 취려홍이었다. 이제는 도당려홍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이때 유빙은 그녀와 반대로 돌연 느닷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새침해진 옥용을 직시했다. "하하하....! 그거야 려홍 역시 다 알고 있으면서 나한테 술을 먹 였으니 피장파장이 아니오?" "피이! 그거하고 이거하고 어떻게 같죠? 난 무언가를 당신에게 알 려 주려고 한 것이지만 당신은 순전히 날 놀리고 있는 거잖아요!" 도당려홍의 교갈을 들으면서도 유빙의 모습은 빙글빙글 태연자약했다. "하하....! 이제부터 려홍이 모르는 사실을 내가 가르쳐 주면 될 것 아니오?" "흥! 무엇을 가르쳐 줄 것인지 빨리 물어 보세요." "하하하....!" 유빙은 들고 있던 술잔의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잠시 웃음을 터 뜨리다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내가 려홍의 신분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시오?" "흥!" 도당려홍은 코웃음을 치며 스스로 한 잔을 따라 마시고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자 이젠 벌주까지 미리 마셨으니 어디 말해 보시죠."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토라진 척 유빙을 쏘아보는 그녀의 모습은 귀엽고도 도발적인 상큼한 유혹을 가득 발산하고 있었다. 유빙은 내심 가슴이 은은히 진탕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빈이 말해 주었소." "주문빈이? 그가 어떻게....?" "훗! 려홍, 당신이 또 졌으니 다시 벌주를 마셔야 할 것 같구료." "흥....! 좋아요. 누가 마시라면 못 마실 줄 알구?" 쪼르륵....! 그녀는 다시 거침없이 한 잔을 스스로 따라 마셨다. 허나 이때 태연자약하게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빙의 얼굴에서 일순 웃음기가 싸악 걷히고 있었다. '낭, 낭패다! 알고 보니 술 한 잔도 제대로 못먹는 쑥맥이었지 않은가....!' 그렇다! 그는 이제야 천하제일 주당이라고 떠벌리던 도당려홍의 정체를 깨달았던 것이다. 허나 느꼈을 때는 이미 그녀가 취하기에 딱 알맞을 만큼 술을 마셔 버린 후였다. 마지막 음성이 완전히 혀가 꼬부라진 비음으로 변해 버린 것과 그 리고 다시 한 잔을 마신 후 그녀가 취하고 있는 행동이 그것을 입 증시켜 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돌연 유빙의 품에 쓰러질 듯 바삭 다가 앉으며 귓속말이라 도 하듯 그의 귓전에 단내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자, 빨....리 물어봐....요! 또 한 잔 따라 마시면 되....니까....." 유빙의 느낌대로 분명 낭패는 낭패였다. "내가 다 말해 줄테니 이제 술 시합은 그만 하는게 좋겠소." "누구 맘대로 그만 한다는 거예요!" "그야.... 려홍이 너무 취했으니....." "흥, 누가 취.... 했다는 거죠? 난 끄떡없다고요. 어서.... 물어 봐요. 안 그러면 내가 물어....." "좋소. 그럼 려홍이 물어 볼 것을 들어 봅시다." 유빙은 귓가에 부딪쳐 오는 도당려홍의 입술에서 멀어지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며 말을 끊었다.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아요?" 순간 그녀의 입에서 조금 전 유빙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기상천외 한 물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 그것은....." 유빙의 얼굴이 당혹으로 붉게 물들었다. '으음....! 술도 마실 줄 모르는 려홍에게 술을 먹여 놨으니.... 이러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가 다시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유빙을 직시하며 말을 꺼내자 유빙은 다급히 그녀의 말을 잘랐다. "려홍! 이제 그만...., 이곳은 위험하오. 주문빈이 곧 우리를 해치러 올 것이오." "그런 것.... 염려할 필요 없어요. 이곳은 수.... 많은 기관매복 들로 싸여 있어 누구도 접근.... 하지 못.... 해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다. 듣기에 따라선 상당히 미묘한 의미로 해 석될 수도 있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유빙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다시 무어라고 말을 이으려 했다. 도당려홍이 그대로 무너지듯 유빙의 품에 안긴 것은 바로 그 순간 이었다. 그녀는 이어 두 팔로 우람한 유빙의 몸을 끌어 안고는 꼬 부라진 음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주정의 시작이었다. "이봐요!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예요? 그 리고 당신....! 얼마나 잘났다고 날.... 무시하는 거.... 야!" 숫제 반말까지 섞어 마구 내뱉고 있는 도당려홍의 태도에 유빙은 정신이 다 없었다. "려홍.... 내가 다 잘못했으니 그만 하구료." 유빙이 어디까지나 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말투로 다시 입 을 열자 도당려홍은 고개를 똑바로 쳐들어 웬지 젖어있는 듯한 눈 으로 유빙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럼.... 입맞춰 줘요." "....!" 유빙은 둔기로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 멍청해졌다. 허나 그의 망연한 눈 속에 강렬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그녀의 앳 된 얼굴과 발갛게 달아오른 두 볼, 그리고 두 눈에 그렁한 맑은 눈물이 비쳐지는 순간, 그의 고개는 천천히 도당려홍을 향해 떨구 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뜨거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허나 이 순간은 유빙은 한 가지 사실을 진정 모르고 있었는데..... 도당려홍의 술실력은 절대 과장된 게 아니었다. 그녀의 주도야 말 로 그야말로 천하제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하제일의 주당은 결코 몇 잔의 술로 취하는 법이 없었으니....! ③ 한 폭의 그림같은 광경이었다. 유빙과 취려홍은 그렇게 굳게 엉켜 언제까지고 떨어질 줄 몰랐다.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광경이군." 돌연 그들의 귀로 싸늘한 음성이 흘러 들었다. 취려홍과 유빙이 황급히 떨어졌다. 곤호의 물결 저쪽, 삼십여 장 떨어진 호면 위에 수많은 인영들이 우뚝 서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물을 그대로 밟으며 점차 유빙 과 취려홍이 앉아있는 국헌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주문빈....!" 취려홍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허나 그 놀람은 이내 분노와 당혹 으로 바뀌고 있었다. 유빙과 입맞추고 있는 광경을 목도 당하고 말았으니 소녀의 몸으로서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으랴! 유빙은 마치 그의 출현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별반 놀라지 않은 채 신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호수의 물을 밟으며 다가오고 있는 인영들, 그들은 주문빈과 흑포 를 뒤집어 쓰고 있는 여은금 등 수십여 명에 달했다. 뿐이랴! 전면에 주문빈 일행이 나타나는 순간 곤호의 사면팔방으 로부터 무수한 흑영들이 나타나 호수를 가르며 점차 다가들고 있 지 않은가! "법밀사와 흑궐의 수하들이 모조리 모였군." 유빙은 좌우를 쓸어본 후 담담히 중얼거렸다. "주문빈! 네 놈이 어떻게 여기를?" 주문빈이 점차 다가오며 화사하게 웃었다. 꽃뱀의 미소를 닮은 소 름끼치는 미소였다. "총성의 기관 따위로 나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지. 나 역시 총성 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 말이오." 주문빈은 취려홍을 향해 비릿한 조소를 흘린 후 유빙을 직시했다. "유총사! 그대는 질투가 날 정도로 운이 좋은 사람이군." "호....!" "허나 그 운도 이제 다한 것 같군." "운이 다했다.? 그 말은 실로 믿기 어렵구려." "훗! 너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이 많은 고수들을 눈 앞에 두고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운 담력이구나."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물체를 천 천히 꺼내들며 주문빈을 직시했다. "운이 다한 것은 본좌가 아니라 자네인 듯 하군.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주문빈은 유빙의 너무도 태연한 태도와 돌연한 질문에 어리둥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기물체를 바라보았다. 금광이 영롱한 기물체, 그것은 바로 초령왕의 신물 사망도첩이 아닌가! "대종사님을 대합니다- !" "초령왕을 대합니다!" 유빙의 품에서 사망도첩이 튀어나오는 순간, 돌연 법밀사의 수하 들과 함께 뒤섞여 국헌으로 다가들던 일천여 명의 흑궐 수하들이 일제히 우렁찬 음성으로 복창하며 그대로 오체투지 하지 않는가! 호수 위를 걸어오고 있던 자는 그대로 물 위에 엎드리며, 국헌의 주위에서 나타난 자는 국헌을 향해 일제히 유빙을 향해 대례를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엄숙한 가운데 일사불란해 일순 주문빈의 눈에 경악과 불신이 스쳤다. "주문빈! 그대는 한 가지를 실수했네. 흑궐의 대종사는 여소저가 아니라 바로 이 유빙이었네." "으....!" "헌데 내게 나를 죽이자고 제의해 오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그, 그렇다면 내가 만난 흑포인은?" "바로 본좌였네. 이제 누가 죽음의 함정으로 초대된 것인지 알겠는가?" "이, 이럴 수가....!" 주문빈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꽈꽈꽝! "으아아악-!" 순간 처절한 비명성과 격돌음이 번개치듯 사면에서 일었다. 정신 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법밀사의 수하들에게 흑궐의 수하들이 공 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캉! "으악!" 법밀사의 수하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이미 흑궐의 수하 세 명에 한 명 꼴로 포위당해 있는 형세였는지라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괴멸되기 시작했다. 주문빈은 자신의 수하 들 사이에 흑궐의 수하들이 교묘히 뒤섞여 있는 것이 모두 안배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치를 떨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대역전극이 아닐 수 없 었다. 한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취려홍조차 영문을 알 지 못해 눈을 부릅뜨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주문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훗! 살인자와 광인의 피를 물려받은 천하의 잠린왕자가 이까짓 일에 식은 땀을 흘리다니 좀 이상하군." 유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라-!" 찰나, 주문빈의 신형이 발작적으로 유빙을 향해 뻗어왔다. 단숨에 이십여 장 거리를 압축해 드는 가공할 공세였다. 허나 그의 신형 은 유빙의 삼장 전면에서 우뚝 멈춰졌다. 멈추고 싶어서 멈춘 것 이 아니라 허공중에서 어떤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며 그의 목을 움켜쥔 것이었다. "큭....!" 주문빈은 허공을 미끄러지고 있는 자신을 중간에서 잡아챌 수 있 는 인물이 있음에 정신이 없었다. 그의 전면에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끔찍스러운 용모의 가죽 옷 사나이. 바로 단두백정 학거비, 아니 일왕 도당곤이 아닌가! "당.... 당신은....!" 주문빈의 눈이 공포로 젖어들었다. 학거비의 입에서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음같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미 말해준 바 있지만 내가 바로 너의 손에 의해 이십 년 전 제 벌을 떠나야 했던 도당곤이다." "당, 당신이....!" 주문빈의 눈에 죽음의 공포가 짙게 깔렸다. 이때 학거비가 돌연 깊고 무서운 눈으로 그의 눈을 직시했다. "너는.... 주문빈이 아니군. 누구냐?" 학거비의 무서운 외침에 주문빈으로 변장했던 자의 신형이 부르르 진동했다. 허나 그는 악독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을 떼었다. "그렇다. 총율사께서 어찌 네놈들 따위를 상대하기 위해 몸소 나 서시겠느냐! 나는 그 분의 분신이랄 수 있는 삼절담화(三絶淡花) 오량(吳梁)이다." "쥐새끼같은 놈! 과연 음흉한 놈이로군." 꽈득! 학거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삼절담화 오량의 목이 꺽여졌다. 하지만 전세는 순식간에 흑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법밀사 의 수하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함정에 빠진 셈이었고 이미 주문 빈이 없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전의를 상실해 사방에서 짚단처럼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쏴아앙! 까득! 그중 여은금의 무공은 가히 눈부신 것이었다. 허공을 밟으며 번개 처럼 번뜩일 때마다 두세 명이 한꺼번에 날아가고 있었다. 헌데 바로 이때, 돌연 어디선가 날카로운 늑대의 표효성이 장내를 진동시켰다. 카우우우! 카우....! 처절한 늑대의 표효성! 동시에 일백여 장 밖 총성의 한 전각 지붕 위에 한 인영이 환상처럼 솟아났다. 한 마리 늑대가 그 옆에서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 가운데 휘황한 황금 늑대가면에 펄럭이는 검은 도포! 바로 창랑왕, 창랑왕이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늑대의 기성이 터져나온 곳으로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일백여 장 밖 아득한 지붕 위에 한 인물이 고독하 면서 환상적인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을..... "창랑왕!"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창랑왕이 이렇게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일백여 장의 거리를 마주 두고 창랑왕을 직시했다. "창랑왕....! 드디어 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유빙의 전신에 무서운 살기가 일었다. 터질 듯한 복수의 불길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촤아아악....! 이때였다. 돌연 곤호의 물 속 사방에서 수많은 인영들이 솟구쳐 오르며 흑궐의 수하들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물 속에서 기 습적으로 솟구쳐 오른 그들의 무공은 실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왁!" "크악-!" 흑궐의 수하들이 사방에서 무너져 내렸다.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가공할 기세로 덮쳐들고 있는 그들의 무공은 흑궐의 수하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군마장성과 대천람!" 유빙은 나타난 인물들의 무공을 훑어본 후 내심 경악성을 삼켰다. "주문빈....! 과연 주문빈이로군. 이곳에 창랑왕마저 끌어들이다니....." 유빙은 새삼 주문빈의 치밀한 음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는 자신은 빠지고 창랑왕마저 끌어들여 네 명의 후계자가 한 자리에서 격돌하게끔 꾸며 놓은 것이었다. 쏴아앙! 꽈꽝! 여은금이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일장에 세 명의 군마장성 인물들 이 허공을 퉁겨져 나갔다. 팍! 꽈득! "와아악!" 그 어느 누구도 여은금의 일장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허나 군마장 성의 인물들은 이미 흑궐의 수하들을 물밀듯이 몰아치고 있어 상 황은 오히려 흑궐이 크게 불리한 것이었다. 악마의 박물관, 적전마람에 올라있는 일천 마인의 무공을 익힌 마 인들. 그들의 무공은 진정 가공스러워 여은금이 순식간에 서너 명 을 죽이는 순간 흑궐의 수하들은 반 수 이상이 처절한 비명과 함 께 지면에 구르고 있었다. 피가 튀고 부러진 병기가 허공을 난무한다. 들리는 것은 처절한 비명성, 고함과 신음소리뿐이었다. 유빙은 검미를 찌푸리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헌데, 이 순간 어디선가 천진난만한 소년의 음성이 죽음의 전장 가운데 울려 퍼지지 않는가? "거봐! 이곳에 가면 창랑왕은 물론이고 너의 고모와 유총사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잖아!" "정말....! 운아는 이제보니 무척 똑똑하구나." 일남일녀의 음성은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허공 위쪽에서 울려왔다. 곤호의 아득한 상공 위에 한 마리 거대한 백학이 떠있고 그 위에 귀엽게 생긴 소녀와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소년이 앉아 있었다. 바로 살인혈왕 적리운과 취봉란 여홍옥이었다. 여홍옥은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서운 싸움을 내려다 보며 아미를 찌푸렸다. "헌데 저들은 누구인데 우리 고모와 유빙 오빠를 공격하는 거야?" 여홍옥의 질문에 적리운이 천천히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저들은 바로 창랑왕의 수하들인 군마장성의 인물들이야." "그렇다면, 운아! 너도 싸워야 하잖아?" 적리운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네 고모편이 밀리고 있기는 하나 나는 싸울 수가 없어. 저 쪽에 있는 창랑왕을 쫓아야 해!" "그럼 어쩌지....? 나는 별로 무공이 세지 못해 도움이 되지 못할 텐데....." 여홍옥이 걱정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적리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군마장성의 인물들과 싸울 분은 따로 있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여홍옥이 의혹의 눈으로 적리운을 바라보았다. 적리운이 한 곳을 가리켰다.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곤호의 반대편 에 흰 도포를 펄럭이며 작고 왜소한 한 그림자가 무서운 속도로 격전장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 독수리처럼 허공을 활보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격전 장에 도달하고 있는 인영은 바로 차손이었다. "나는 저 노인을 알아. 저 노인은 군마장성의 인물들을 뒤쫓고 있 었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손으로 군마장성의 인물 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했었어." 여홍옥은 그 작고 왜소해 보이는 노인이 어떻게 군마장성의 고수 들을 해치운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듯한 눈빛이었다. 허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은 찢어질 듯이 커지고 있었다. "갈-!" 격전장에 당도한 차손의 입에서 엄청난 분노의 외침이 터져 나오 고, 그 외침은 아득한 허공 위에 떠 있는 백학마저 깜짝 놀라 주 춤거릴 정도로 거대했다. 모든 이들의 숨이 멎을 듯한 엄청난 외침을 발한 차손은 이어 유 령처럼 군마장성의 수하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쏴아아앙! 차손은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군마장성의 인물 중 한 명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 늙은이가!" 돌연 공격을 받은 그 자는 노호성과 함께 몸을 빼내려 했다. 허나 그의 신형은 이미 삼백여 장 밖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 었다. 차손이 그대로 집어던진 것이었다. 무서운 힘이었다. "누구냐? 네놈들에게 적전마람의 마공들을 가르쳐 준 놈이 누구냐?" 차손의 분노에 떨리는 음성이 연이어졌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도 않고 닥치는대로 손에 잡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걸려든 인물들은 마치 썩은 나무처럼 순간적으로 허공을 날아가 지면에 처박히며 죽어가고 있었다. "이 벌레같은 놈들!" 차손은 무서운 분노로 떨고 있었다. 그의 손에 걸리는 것은 모조 리 으깨어졌다. 순식간에 이십여 명이 부러지고 찢긴 시신으로 화했다. 유빙조차 차손의 이 무서운 신위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그대로 하나의 신기(神技)였다. 노란색의 망령(亡靈)이 그림자처 럼 사방을 누비며 군마장성의 인물들을 쳐 없애가고 있는 것이다. 펑! 쏴앙! "으아아아악!" 차손은 결코 힘을 쓰지 않은 듯했다. 그는 오히려 적의 힘을 이끌 어 다른 적을 치고 있는 듯 했는데 그 속도가 워낙 빨라 눈에 보 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한편, 일백여 장의 전각 지붕 위에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꿈 속의 망령처럼 우뚝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던 창랑왕의 눈에 경악 이 스치고 있었다. 차손의 모습을 발견한 그의 전신이 미미하게 진동하고 있지 않은가? "차.... 손....!" 신음성같은 중얼거림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순간, 누군가 제 삼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기(氣)를 감지했음인가? "....!" 차손이 돌연 몸을 멈춘 채 기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일백여 장을 격하고 마주쳤다. 차손의 눈빛이 멍 청해졌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너번 깜짝거렸 다. 창랑왕은 이때 황금 늑대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차손의 눈은 이미 그것을 꿰뚫은 듯 했다. "양룡(梁龍)....!" 놀람과 불신에 가득 찬 중얼거림이 차손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순 간 창랑왕의 신형이 전각 너머로 소리없이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차손은 그를 뒤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망연히 그가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차손의 등장으로 인해 흑궐의 수하들은 사기가 올라 순식간에 군 마장성의 인물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고, 점차 비명성과 격돌 음이 잦아지고 있는 격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차손은 언제까지 창랑 왕이 사라져간 곳만을 망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놈이....! 양룡, 그 놈이 창랑왕이었다니....." 실성한 듯 중얼거리고 있는 차손의 머리 위로 어느새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 팔왕예조 제3권 제31장 하늘(天)과 하늘(天)의 만남....! ━━━━━━━━━━━━━━━━━━━━━━━━━━━━━━━━━━━ ① 싸움은 이미 멈춰져 있었다. 총성내에서 순식간에 휘말린 네명 후 계자의 싸움이 유빙의 승리로 결정되며 끝난 것이다. 붉은 선혈로 물들어 있는 곤호와, 산처럼 쌓여 있는 시신으로 뒤 덮여 있는 국헌..... 유빙은 그 엄청난 잔해 속에 우뚝 서서 망연히 중얼거리고 있는 차손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차손의 실성한 듯한 중얼거림에 유 빙의 뇌리로는 이때 하나의 의혹이 스쳐가고 있었다. '양룡.... 차양룡? 창랑왕이 바로 그란 말인가?' '차양룡이라면 언젠가 죽었다던 차손의 아들....?' 유빙의 얼굴 역시 차손에 못지 않게 굳어 있었다. 그의 뇌리로 아 득한 어린 시절 부친과 함께 적전마람에 처음 들어섰을 때 차손이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스쳐간 것이었다. ... 차손은 왜 나같은 아들이 없지? ... 한 놈 있었단다. ... 이름이 뭐야? ... 차양룡! 아주 똑똑하고 귀여운 놈이란다. 바로 너처럼..... ... 차양룡? 에이 무슨 이름이 그래, 헌데 어디 가고 보이지 않는 거야? ... 나를 두고 아주 먼 나라로 갔단다. ... 아주 먼 나라....? ... 응! 월국이라는.... 곳, 바로 빙아의 어머니가 있는 곳이지. ... 월국이라면 죽은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던데....? ... 그래! 그 놈은.... 죽었단다. '설마...., 설마 죽었다던 차손의 아들이 창랑왕이었단 말인가....?' 유빙은 휘청이며 차손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은 차손의 노안을 바 라보며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차손의 얼굴이 무섭게 씰룩거렸다. "양룡....! 창랑왕은 바로 그 놈이다." 유빙이 확인하듯 차손의 눈을 직시했다. "차손! 양룡은 죽었습니다." 차손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고뇌와 번민이 뒤섞인 안타까운 몸짓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 놈은 죽지 않았었어. 그 놈은 도망친 것 이었어. 종의 아들이 싫다고 도망친 것이었어." "종의 아들? 차손이 본가의 종이었단 말입니까?" 유빙이 깜짝 놀라 애절한 눈으로 차손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유 빙이 알고 있는 차손의 가문은 가신이라기보다는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 떨어질 수 없는 형제의 가문이었던 것이다. "그래....! 나는 결코 천종예가의 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너 역시 내 아들이니까....! 허나 그 놈은, 그 놈은...., 우리 가 문을 천종예가에 귀속된 종의 가문으로 생각한 거야." "그럴 수가....!" 차손의 전신이 무섭게 진동했다. 유빙 역시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 에 놀람과 회의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유빙은 차손이 이렇게 격 동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망연히 서 있었다. 그로서도 차손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 되어 다가온 것이었다. 허나 그 충격 속에서도 유빙은 모든 것을 확연히 깨닫기 시작했다. '제벌의 후계자 싸움도 이렇게 끝난 것인가....? 이제 주문빈과 대벌주....! 두 사람만이 남았군!' 그렇다. 다섯 명의 후계자 중 여은금과 취려홍은 이미 유빙과 한 몸이랄 수 있고 창랑왕은 차손을 본 후 어디론가 몸을 숨긴 상태가 아니겠는가! '허나 주문빈은 이미 내 상대가 아니다. 대벌주....! 그만이 남았다!' 유빙은 문득 눈을 돌려 학거비 일왕 도당곤의 모습을 찾았다. "할아범!" "소주....!" 일왕 도당곤이 여전히 유빙에게 학거비로서의 예를 취했다. 그의 이런 태도가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유빙에게는 영원히 할아범으 로 남고 싶은 그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할아범....! 이제 대벌주를 만나는 일만이 남은 것 같구료. 부탁하오." "......" 학거비의 신형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바로 자신의 부친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인 것이다. "소주....!" 학거비의 음성에 번민이 어렸다. 유빙이 미소했다. "할아범! 나는.... 그 분을 존경하오. 백찰무경의 대총사 위에 군 림하는 그 분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있는 것이오." "음....!" 학거비의 몸이 다시 떨렸다. 유빙의 말이 이어졌다. "그 분을 만나려는 것은 모든 것을 떠나 순수한 인간적인 욕심일 뿐이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 분을 뵙기를 원했소. 바로 나의 꿈이었으니까....!" "......" "허나 이제 그 분은 물러나야 하오." 학거비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유빙의 진정을 이해한 듯한 표정이었다. 얼마 후, 학거비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유빙이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가고 있는 길, 그 길이 곧 대벌주와의 만남의 길인 것이다. 총성대전(總城大殿)! 웅장하며, 그지없이 강해 보인다. 이것이 총성대전으로 들어서면서 유빙이 받은 첫번째 느낌이었다. 뭐랄까, 수천 년 이래 인간의 투쟁의지와 생존의 몸부림을 담담히 휘감으며 흘러온 그런 역사의 체취라고나 할까? 들어서는 이의 가 슴에 야망을 넘어선 무욕(無慾)과 그 무욕을 넘어선 삶에의 투지 를 잔잔히 끓어오르게 만드는 그 어떤 기운이 대전의 공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조용히 깃들어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위대한 건축의 정면에는 대전의 분위기에 가장 걸 맞는 한 담담하고 강인한 노인의 초상(肖像)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대벌주....!' 유빙은 천천히 거대한 초상 앞으로 다가가며 조용히 뇌까렸다. 그렇다. 역사의 굴곡 위에 우뚝 선 이 시대 초유의 거인, 제벌의 대벌주. 그의 초상이었다. 초상 아래에는 칠옥(漆玉)으로 만들어진 주렴(珠簾)이 숙연히 드 리워져 있고 그 너머로는 태사의에 깊숙이 기대어 앉은 듯한 누군 가의 그림자가 어슴푸레하게 보이고 있었다. 유빙은 주렴 아래로 녹피화(綠皮靴)를 신은 두 개의 발만이 은은 히 엿보이는 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결코 과하지도 모자 라지도 않는 자세로 예를 취했다. "백찰무경의 대총사 유빙, 삼가 대벌주를 뵈옵니다." "어서 오게. 우선 자네가 진정한 나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치하하네." 주렴 속에서 노년의 원숙한 위엄이 알맞게 조화된 잔잔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대벌주, 바로 그의 음성이었다. 유빙은 천천히 허리를 펴며 주렴을 아니 정확하게는 주렴 속의 인 물을 형형히 직시했다. "그 치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제가 찾아온 것은 후계자의 자격으로서가 아닌 적(敵)으로서이기 때문입니다." "......" - 후계자가 아닌 적의 자격으로 왔다. 그 한 마디는 총성대전을 들어서는 유빙의 심회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일시 침묵하는 대벌주를 향해 유빙은 조용히 그러나 더없이 강하 게 들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는 대벌주께서 제게 모든 것을 맡기고 물러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육중한 침묵이 주렴 너머에서 잔잔히 흘러 나왔다. 허 나 이내 그 침묵은 예의 원숙한 위엄을 갈무리한 음성으로 바뀌어 유빙의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물러나야겠지....! 자네와 같이 훌륭한 후대에게 뒤를 맡기고 물 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네." "......" "아직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일세." "새왕 호극습도와 잠린왕자 주문빈의 여명지안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유빙은 어깨 위로 깔리는 대벌주의 음성의 무게를 떨쳐 버리기라 도 할 듯 더욱 의연히 눈을 빛내며 반문했다. 주렴 안에서 대벌주 의 고개가 찬탄한 듯 가볍게 끄덕여졌다. "그렇다네. 그것은 제벌이 꼭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지."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제벌이 세워진 이유를 되묻자면 분명 그것은 변방의 침공으로부터 중원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놀랍게도 이때 유빙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허나 그것은 이미 대벌주께서 걱정해야 할 문제의 한도를 뛰어 넘은 것입니다. 제가 이미 모든 대비책을 강구해 둔 때문이지요." "....!" "제가 총성에 단신으로 들어온 까닭을 아십니까? 그것은 새왕 호 극습도와 주문빈의 여명지안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가?" "저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이미 여명지안을 막기 위해 제벌의 수 뇌들의 주위를 그림자처럼 감싸고 있으며 또 제벌의 수뇌들과 함 께 호극습도의 세력을 완벽히 저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흠....!" 끝내 주렴 속에서 낮은 침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럴만큼 유빙의 조치는 완벽하고도 주도면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빙은 환한, 그러나 결코 오만하거나 방자해 보이지 않는 웃음을 얼굴 가득 떠올렸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대벌주와 저와의 승부(勝負)일 뿐입니다." - 남은 것은 승부뿐이다.! 마침내 최후의 그 한 마디가 떨어졌다. 멀리는 제벌의 출범으로부터 씨를 묻어 이제는 팔왕난세라는 미증 유의 혼란을 거치고, 마침내 최후의 한 정점만을 남겨 놓은 채 장 렬히 발화하려 하는 이 시대의 역사가..... 새로운 자와 묵은 자의 정해진 하나의 승부를 끝으로 마감되려는 때가 온 것이다. 주렴 속에서 대벌주의 허망한 듯, 또 대견한 듯이 한 담담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허허....! 그렇군. 허나 모든 일을 해결한 뒤에 나를 찾아도 늦 지는 않을 것 같지 않나?" "감사합니다. 저를 적수로 인정해 주어서....." "아닐세. 자네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네." 대벌주의 온화한 음성을 들으며 유빙은 잠시 포권을 취했던 자세 에서 허리를 펴고 다시 주렴 너머를 직시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대벌주의 적수로 인정받은 자로서....!" "무엇인가?" "대벌주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적수로 인정된 자의 첫 부탁으로서 조금은 뜻밖의 말이다. 주렴 너머의 느낌도 그러한 듯, 의외롭다는 듯한 웃음 소리가 나직하게 터져나왔다. "허허.... 자네는 이미 나를 보았네." 그러나 유빙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습니다. 대벌주께서 곧 취설서 어른임을.... 하지만 저는 대벌주께서 직접 보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촤르륵.... ! 순간 칠옥 주렴이 경묘한 소리와 함께 걷혀지며,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은 거인의 모습이 유빙의 시야를 메워 왔다. 거인은 잔잔히 웃고 있었다. "자네는 고약한 데가 많은 사람이네. 허헛....." "하하....! 아마 대벌주를 닮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유빙도 거인의 미소를 받아 한 점의 사심도 깃들이지 않은 햇살같 은 미소를 얼굴 가득 떠올렸다. 큰 거인과 작은 거인! 그들의 미소는 닮아 있었다. 그것은 정상에 설 수 있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으므로..... ② 여명(黎明)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빛나는 가을날의 신선한 새벽이었다. 대지(大地)에는 국화 향기가 가득했고, 그 향기를 따라 나비와 벌들이 부지런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으음....." 아침 일찍 일어난 손노인(孫老人)은 이 아침이 유난히 싱그럽다고 느끼며 뜨락을 거닐고 있었다. 헌데 어느 한순간이다. 손노인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얼어붙은 듯 고정되었다. '저건....?'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멀리 만형산(卍形山)의 까마득한 산등성 이, 그곳에선 막 찬란한 햇살로 뒤덮이는 하늘을 메우고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는 마치 거대한 흑룡(黑龍)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형상 이었다. 그 연기를 대한 손노인은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한 충격이 전신을 엄습함을 느꼈다. "누가 포사대(布沙坮)에 봉화(烽火)를 피워올렸지?"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당혹성. 그렇다. 그것은 개세동지(蓋世動地) 의 겁난이 일어났을 때나 피어올리는 봉화였다.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타오르지 않았던 포사대에 봉화라 니.... 무슨 난리라도 났나?" 허나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가까워진 노인은 어떤 일이든 곧 담 담히 받아들여 버리는 법이다. 손노인은 의아하였으나 곧 시선을 돌려 정원에 가득 핀 국화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그 국화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싱그럽다고 느낀 순간 손노 인은 만형산의 봉화같은 건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무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봉화(烽火)! 그 봉화가 이 순간 중원의 전 지역 산봉우리에서 피어오르고 있으 며.....무심코 지나간 이 일이 지상최강의 세력 제벌을 궤멸시키 는 운명의 적신호임을....! 그렇다! - 여명지안(黎明之眼)! 여명지안의 적신호는 이 새벽과 함께 계속되고 있었다. 이름없는 황하(黃河)의 한 소촌(小村)을 향하여.... 황성(黃城)의 구중심처를 향하여.... 빈민굴 파난시의 밀실(密室)을 향하여.... 그리고 명문대가의 어느 혼인식을 향하여..... "와하하....!" "정말 훌륭한 혼인식이야....!" 모여든 하객들은 여기저기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걸친 화등(火燈)과 푸짐한 잔칫상을 보며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가운데 혼례 예복을 입은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 흡족한 미소 를 머금고 있었다. <오성총영(五星總領) 구사독.> 명친건흥군(明親建興軍)의 수장으로 대병 군부 제 삼인자(第三人 者)의 반열에 올라 있는 무장이다. 그는 무예와 방법에 있어 이미 대명 군부의 제일로 평가받고 있으 며, 나이 이십에 영락제로부터 무장으로 최대의 영광인 면사철권 (免赦鐵券)을 하사받은 명장(名將)이었다. 가히 대명천하를 이끄는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그였는데..... 하지만 그에게는 기실 또 하나의 신분이 있었다. 제벌 예하 십팔 사(十八社) 중의 하나인 병화사(兵華社)의 사주가 바로 그의 감춰 진 신분이었다. 오늘은 바로 오성총영 구사독의 혼례식 날이었다. 나이 사십에 이르러 북경 제일의 미인이라는 경화옥(瓊華玉)을 아 내로 맞이한 그의 얼굴은 희색이 만면했다. "자....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껏 드시오." "허허.... 금대인께서 오셨구료. 이렇게 찾아주셔서 뭐라 감사 드려야 할지....." 화려한 금의예복을 입고 하객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던 그는 문 득 혼인식장의 입구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청의 노인을 발견했다. "오.... 빙장어른!" 구사독은 호탕한 대소를 터뜨리며 청의노인에게 다가섰다. 노인은 바로 그의 아내가 된 경화옥의 부친이자 이 소주의 세가(勢家)인 문경가(文瓊家)가주 경자생(瓊子生)이었다.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혹시 따님을 준걸 뒤늦게 후회하시는 것 아닙니까? 헛헛....!" 구사독이 힘있게 그의 손을 잡자 경자생은 노안에 자애로운 웃음 을 떠올리며 그를 마주 껴안았다. "허허! 큰일날 소리." 헌데 착각이었을까? 구사독은 자신을 껴안은 경자생의 팔이 미미 하게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음?' 구사독은 의아하여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빙장어른, 어디 편찮은 데라도?" "아니네. 단지....." 경자생은 갑자기 소리죽여 구사독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가 죽는게 너무나도 아까워서 그런다네." "그, 그게.... 무슨 뜻입....." 돌연 구사독은 말을 멈춘 채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흐윽!' 심장 부위가 불에 덴듯 화끈해짐을 느낀 때문인데..... 구사독은 보지 않고도 한 자루 비수가 자신의 심장을 손잡이 부분 까지 파고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빙장.... 당신이.... 왜....?" 엄청난 불신과 경악으로 구사독의 안면이 온통 일그러지는 순간이 었다. 경자생은 여전히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띄운 채 주위를 천 천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난 여명지안의 명령을 받은 용화사(龍華社)의 살수라네." "빙장.... 당.... 신이 설마....?" 그 말을 끝으로 구사독의 고개가 경자생의 어깨위로 푹 꺽여졌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경자생은 그의 몸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등을 토닥거렸다. "허허.... 이 사람 술이 많이 취했구먼." 그때까지만 해도 하객들은 두 사람이 다정하게 서로 포옹한 채 정 담을 나누는 줄만 알았다. 바로 그 순간이다. 휘이잉....! 장내에 느닷없이 한 줄기 회오리가 일었다. 동시에 하객들은 극히 허름한 갈색 폐포를 입은 한 초립인이 경자생 옆에 추뚝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 뭐냐?" "웬 놈이....?" 하객들이 일제히 당혹성을 터뜨리는 바로 그때 초립인이 경자생을 향해 검을 뽑아 들고 느릿느릿 다가섰다. "ㅋ! 조금 늦었군. 허나 오성총영 역시 살아있을 필요가 없는 놈이니 잘 되었다." 음성은 전율스러우리만큼 무심했고, 그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객들은 한 줄기 창백한 섬광이 경자생을 향해 뻗어감을 느꼈다. 번쩍! 그것뿐이었다. "허억....!" 쿵! 경자생은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사위 구사독을 껴안은 채 쓰러져 나뒹굴었 다. 휘이잉....! 그리고 회오리 바람과 함께 초립인이 유령처럼 사라진 그 자리에 는 경자생과 구사독이 한 자루 검에 관통당한 채 쓰러져 바닥을 흥건히 피로 적시고 있었다. 하객들은 일시 넋을 잃었다. '맙소사!' 여명지안(黎明之眼), 이른바 수백 년 이상을 이어 내려온 죽음의 명령..... 바로 그 여명지안의 시작이었다. ③ 금릉(金陵)에서 제일 복많고 행복한 사람은 누군가? 누군가 그렇 게 묻는다면 사람들은 입모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거야 말할 것도 없이 서대인(徐大人)과 추대인(雛大人)이 아니겠는가? 서대인과 추대인, 그들은 금릉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대부호들이었다. 그리고 대 부분의 부호들이 서로의 이익을 다투기 위해 사이가 나쁜 것과는 달리 이 두 부호는 서로 목숨이라도 내줄 만큼 절친했다. 그것은 무려 칠대(七代)에 이르는 조상때부터 이어 내려온 친분이었다. 서대인은 몽고(蒙古)산 말을 중원에 사다들여 파는게 주업이었고, 추대인은 역시 몽고 근처의 세외국(世外國)에서 나는 비단을 수입 해 파는 장사를 해왔다. 때문에 말을 사들여 옴과 동시 수만 필의 비단을 그 말들이 이끄는 마차에 운송해오는 도움을 얻을 수 있었 던 것이다. 자연히 두 가문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화목한 관계가 되지 않 을 수 없었다. 게다가 서대인과 추대인은 대대로 양가 가주(家主) 들 중 특히 사이가 절친하여 그 우애는 모든 이의 부러움을 샀다. 때문에 서대인과 추대인이 두 달 전 서로의 자식들을 혼사시켜 사 돈관계가 된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연꽃이 만발한 연못이 중앙에 그림같이 솟은 연화정(蓮花亭)이다. 서대인은 추대인이 자신을 방문할 때면 늘 이 연화정에서 접대를 하곤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헛헛....! 경추(京秋)나 추모(雛某)가 자네의 집에서 부러워하는 게 있다면 단 하나 이 연화정이네." "허허....! 그렇다면 이 연화정이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게 실로 다행이네." 주안상은 푸짐했고 두 사람은 이미 취흥이 도도하게 무르익어 있 었다. 그러다 문득 추대인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서대인을 응시하 며 입을 열었다. "취해 쓰러지기 전에 내 자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줄 게 있네." "선물?" "헛헛....! 이것이네." 추대인은 등뒤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은은한 황 금색 광채가 서린 비단 한 필이었다. "내 평생 비단 장사를 해왔지만 이런 명품은 처음이네. 바로 그 전설에나 나오는 황금잠(黃金蠶)의 실로 짠 것이라네." "오....!" 서대인은 만면에 경이와 기쁨의 빛을 띄웠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이건 평생 구경도 해보기 어려운 물건이군." 이어 그는 비단을 받아들고는 조심스럽게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 자 눈이 현란해질 정도로 화려한 단폭에 용(龍), 봉(鳳)이 절묘하 게 수놓아진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오.... 대단하군!" 서대인은 흥분으로 몸을 가볍게 떨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헛헛....!" "만져보면 감촉이 신비로울 지경이지." 추대인이 다시 말하자 서대인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단폭 을 애무하듯 천천히 매만졌다. "과연.... 동정녀(童貞女)의 속살처럼 부드럽군." 바로 그때였다. "서대인, 너무 좋아하시지 마오." 느닷없이 그들의 귓속을 후벼파는 낭랑한 음성이 있었다. '음?' 서대인이 흠칫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정자 위로 한 준수한 자의문 사(紫衣文士)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대략 사십대 초반, 마치 풍류 공자처럼 여유로운 분위기에 깊숙한 눈빛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웬 놈이냐?" 서대인은 내심 놀랐으나 위엄이 서린 일갈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 섰다. 순간 자의문사의 입에서 기묘한 웃음이 소리없이 스쳤다. "제벌 예하 백만마점(百萬馬店)의 점주(占主) 서경추, 당신의 목 숨을 살려주러 온 사람이오." "....!" 서대인은 안색이 확! 변했다. '이 자가 어떻게 내 신분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의문사가 허리의 요대에서 번개같이 연검 (軟劍)을 뽑아들더니 서경추를 향해 내뻗었다. "흑!" 번- 쩍! 서경추는 신음성과 함께 비틀 물러섰다. 그의 오른 팔은 어느새 비단포 위에 떨어져 있었다. "너.... 넌....!" "나를 원망하지 말고 감사해 하는게 좋소. 당신은 팔을 잃은 대신 에 목숨을 구했으니까." 서경추가 그 말에 흠칫 당혹하여 자신의 잘려진 팔을 응시했다. 동시에 그의 안색이 누렇게 뜨고 말았다. 오오, 그가 보고 있는 그 순간에 비단포 위의 팔이 삽시간에 시커 멓게 탈색되더니 한 줌 흑수(黑水)로 변해 녹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대연(大燕), 설마.... 자네가....?" 서경추는 홱 고개를 돌려 추대인을 무섭게 노려 보았다. 추대인의 안색은 이 순간 섬칫하도록 냉막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렇다, 경추. 이 비단에는 무형지독(無形之毒)이 발라져 있다. 그건 자네가 제벌 예하의 백만마점 점주라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자네는....?" "용화사(龍華社)의 살수(殺手), 신행대마(神行大馬). 그것이 내 진정한 신분이지." 휘리릭!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추대연은 무형지독이 발린 비단폭을 서경 추와 자의문사에게 덮어 씌어갔다. 허나 자의문사의 동작은 그보다 휠씬 빨랐다. 그는 섬전같이 십지 (十指)를 날려 추대연의 전신 십대요혈(十大要穴)을 제압했다. 그 속도는 실로 가공스러워 추대연은 순식간에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네.... 네 녀석은....?" 경악과 분노로 뒤섞인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자의문사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용병(傭兵) 천세기(千世基)라는 사람이오. 용화사...., 그대들은 적수를 잘못 선택했소. 우리의 주인께선 결코 그대들을 좌시하지 않을 테니까." "용...., 용병육주비전!" 추대연이 신음성같은 일성을 흘려내는 순간 용병 천세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비단폭을 칼끝으로 들어올리더니 천천히 추대인의 몸 위에 씌웠다. "이건 당신처럼 훌륭한 풍채에나 어울릴 것 같소." "흐.... 윽!" 추대연의 안색이 납빛으로 변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전신은 비단폭의 무형지독에 휩싸여 시커멓게 변색되었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허나 그 끔찍한 비명도 그리 오래 가 지는 않았다. 삽시간에 그의 육신은 비단폭 속에서 뼈마디까지 녹 아내려 한 줌 흑수로 변했고 그 화려한 황궁장의 비단폭이 물결치 듯 독수로 변한 용화사의 살수 추대연의 시신 위를 내리 덮은 것이었다. "추대연! 그대가 여명지안의 살수였다니.... 수십 대를 이어오며 우정을 약속한 그대가....." 순식간에 벌어진 이 사태에 서경추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넋을 잃은 듯 선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여명지안은 피어나지 못한 채 쓰러지고 용병육주비전 의 용병들의 진정한 신위가 천하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하나의 죽음의 손이 유빙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④ 소주(蘇洲). 꿈과 낭만의 미항(美港). 예로부터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고 소주 팔경(蘇洲八璟)이라 불리우는 천하절경에, 중원 학파를 이끌어온 수많은 대유(大儒) 석학(碩學)들을 배출한 문파의 성도! 이 소주를 더욱 빛내주는 하나의 명소가 있었다. 화예(畵藝)에 관한 한 가히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고 있는 중원 제일의 화방이자 바로 천종예가의 산실인 천향화방(天香畵房)이 그것이었다. 헌데 이 천향화방이 실로 오랜만에 그 주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천향화방의 화청, 한쪽으로는 온갖 화구(畵具)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은은한 묵향(墨香)이 감돌고 있어 화예의 명가다운 고아한 풍취가 느껴지는데..... 언제부터인가 침상에 누워 그 풍취를 음미하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유빙, 바로 그였다. "오 년만이로군. 이 묵향에 취해 보는 것도....." 유빙은 뭐라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평온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 년만의 휴식! 유빙은 모든 것을 잊고 묵향에 몸을 내맡긴 채 스스로 눈을 감았 다. 그 동안의 모든 긴장이 졸음으로 변하여 밀물처럼 밀려왔다. 마침내 유빙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밤의 소리들이 방 을 가득 메웠다. 허나 유빙은 꿈 속에서 그 소리들을 하나하나 구 별해내고 있었다. 무의식의 상태에서도 유빙의 본능은 주위 상황 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먼 어느 곳에선가에서 처량하게 울부짖고 있는 이리의 소리와 그 메아리.... 조그만 들짐승들의 비명소리, 술 취한 주객들의 주정, 그리고 누군가가 유빙이 누워있는 화청으로 다가서는 소리..... 스르르....! '누구일까? 이 야밤에 천향화방을 거니는 사람은.....' 유빙은 무의식 상태에서 유령같은 미세한 소리 하나를 감지했다. 스르르....! 유령이 움직이듯 그 소리는 실로 미세한 것이었는데 그 소리는 문 득 유빙이 누워있는 화청 앞에서 멎었다. '사라진 것일까?' 허나 이내 유빙의 본능은 하나의 기척을 감지해 내고 있었다. '벽이다! 괜찮은 자로군. 소리를 감추기 위해 벽을 타다니.....' 바로 이 순간, 유빙이 누워있는 침상 뒤 벽면이 흐물흐물 녹아내 리는 듯 하더니 하나의 얼굴이 환상처럼 솟아나지 않는가? 창백하도록 새하얀 피부에 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붉디붉은 입술, 사슴처럼 크고 맑으면서도 안개에 잠겨있는 듯한 몽롱한 눈. 여기에 백치미와 청초함이 한데 어우러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새하얀 벽 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이어 새하얀 벽 속에 떠오른 새하얀 얼굴주인의 몸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눈(雪)처럼 새하얀 백의로 전신을 감싼 여인, 대략 십여 세나 되었을까? 눈부신 백옥요대로 허리를 질끈 동여맨 현란한 몸매의 여인, 흡사 눈(雪)의 요정과도 같은 여인인데..... 차갑다. 미치도록 아름다우나 그녀에게서는 북풍한설보다도 매서운 한기가 발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런 기도(氣度)를 지닌 여 인은 맹세코 단 한 사람뿐이다. 설도(雪桃)! 그녀는 바로 악마의 표본실 적전마람의 입구인 금마백로를 지키는 맹인소녀 설도였던 것이다. 설도는 한참동안 그윽한 시선으로 유빙을 응시하였다. 허나 한순 간 그녀의 눈동자에는 매서운 살기가 어리기 시작하며 서서히 한 손이 치켜져 올라가고 있었다. 치켜져 올라가는 그녀의 손에는 섬 칫한 광망을 뿌리는 비수(匕首)가 들려져 있었다. '....!' 유빙은 무의식 상태에서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기, 나를 죽이려는 자는 여인이다. 헌데, 그 여인 뒤에 접근한 인물은 누구냔 말인가?' 유빙의 첨예화된 본능과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무섭게 곤두섰 다. 유빙은 태어나 처음으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위기감과 곤혹 감에 전신을 떨었다. '나의 전신의 기가 지배당하고 있다. 대체 여인 뒤에 접근한 사람 이 누구이길래 기(氣) 하나 만으로 나의 심신을 억제한단 말인가?' "......" '그의 기와 맞서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모든 것을 잊고 긴장을 푼 것이 실수였다!' 유빙은 전신이 기의 거미줄에 묶였음을 깨달았다. 이미 화청 안은 설도 뒤에 다가선 인물의 기세에 지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기세란 무형의 힘, 그 기세가 제압되었다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설도의 한 손에 들려진 비수는 서서히 유빙의 가슴에 닿아 갔다. 유빙의 눈이 자연스럽게 뜨여졌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가슴 위에 비수를 세우고 있는 여인이 설도임을 발견하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설도....! 설도 왜?' 불현듯 한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여명지안! 용화사의 비밀살수....! 본가에 심어져 있는 그 용화 사의 비밀살수가 바로 설도였다 말인가!' 설도는 맹인이다. 유빙이 눈을 뜬 것을 결코 알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그녀의 비수는 끝내 유빙을 찌르지 못하고 있었다. "흑!" 설도가 비수를 던지며 유빙의 가슴으로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뒤에는 유령처럼 한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다. 설도의 행 동을 지켜보고 있던 인물은 바로 차손이었던 것이다. '차손이었군. 어쩐지....?' 유빙은 설도의 뒤쪽에서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게 서 있는 인물이 차손임을 발견하고 내심 쓴 웃음을 머금었다. 차손은 설도가 유빙 을 죽이려는 것을 막기 위해 미행해 왔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유빙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미.... 깨어 있었구나." 설도가 깜짝 놀라 얼굴을 뗐다. "나, 나는....." 이어 그녀는 와락 얼굴을 감싸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유빙 의 한 손이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에 품었다. "설누이! 아무말도 하지 말시오. 이미 들을 필요가 없지 않겠소?" 설도의 몸이 떨렸다. 그렇다. 여명지안이 어떻게 설도의 가문으로 파고들어 설도를 용 화사의 비밀살수로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허나 설도는 결코 유빙 을 죽이지 못했으니 유빙으로서는 더 이상 알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흑....! 유빙!" 설도의 흐느낌이 천향화방에 조용히 울려 퍼지고.... 유빙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혹시 여명지안을 발동시킨 진짜 주문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설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성대에서 용화사의 비밀살수들이 임무를 끝내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졸음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어 그는 꿈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천성대(天星坮)....! 이젠 주문빈 차례로군!' 유빙은 이내 설도를 가슴에 안은 그 자세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 년만의 휴식인 것이다. ■ 팔왕예조 제3권 제32장 거인(巨人)의 몰락(沒落)! ━━━━━━━━━━━━━━━━━━━━━━━━━━━━━━━━━━━ ① 천성대(天星坮). 망루처럼 높다랗게 솟아있는 거대한 천성대 위에 어둠을 사르며 화염이 솟구치고 있었다. 암천을 휘감아도는 불길은 실로 선렬했다. 그것은 또한 봉화가 지니고 있는 원래의 특정한 목적을 나타내 듯 사방 백 리 이내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난세의 대지 위에 흐르는 선혈처럼 극렬한 붉은 빛, 허나 오늘의 이 봉화(烽火)는 곧 여명지안의 발동을 알리는 불길이었으니..... 헌데 봉화의 불이 암천을 휘감고 있는 천성대의 정상, 사방 십여 장 넓이의 그 중앙에 한 구의 시신이 쓰러져 있지 않은가? 허옇게 뒤집혀진 동공과 불빛에 반사되는 탈색된 피부,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숨이 끊어진 한 구의 시신이었다. 석고처럼 굳어진 그의 입가에 아직도 한 줄기 선혈이 흘러 내리고 있어 그가 죽은 것이 아직 채 일각도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갓 중년을 넘긴 듯한 나이에 준미하기 이를데 없는 용모, 누구란 말인가? 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여명지안의 시작을 알리는 천성대 의 봉화 밑에서 죽어있단 말인가? 이때였다. 바람을 끊으며 돌연 한 인영이 천성대의 정상에 내려섰다. 유빙, 유빙이었다. 유빙은 예의 시신을 발견하고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시신의 용모 를 살피던 입에서 경악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이 자는.... 잠린왕자 주문빈?" 놀라운 일이 아닌가! 봉화 아래 시신으로 누워 있는 이 사내가 정 녕 잠린왕자 주문빈이었단 말인가! 대종말을 향해 치달려 가는 난세의 마지막 장을 여명지안으로 불 사르려 했던 일세의 대효(大梟) 잠린왕자 주문빈, 살인자와 광인 의 피라는 저주의 숙명을 일신에 묻어둔 채, 그래서 더욱 가공했 던 거역의 검으로 난세의 대륙을 장막 저편에서 뒤흔들었던 그가 어떻게 스스로 밝힌 봉화 아래 뒹구는 시신이 되어야 했으며 또 그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유빙은 한동안 머릿속이 혼란되어 옴을 느끼며 묵묵히 잠린왕자 주문빈의 시신을 응시하다 문득 낮게 뇌까렸다. "누가 이 자를....?" "그는 바로 내가 죽였네." 등뒤에서 은은한 위압을 담은 음성이 잔잔하게 들려오며 반사적으 로 고개를 돌리는 유빙의 시선 속에 어느 사이엔가 환상처럼 나타 난 한 인물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 중년인, 어깨에 앉아있는 요사한 눈동자를 가진 붉은 고양이가 괴 이로운 압박감을 불러 일으키는 장대한 기골의 중년인이었다. 한 손에는 핏빛 목판경(木板經)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서늘한 예기 를 발하는 검을 빼어든 모습. 그 기이한 자세에서 무섭도록 배어 나오는 천생의 위엄이 붉은 고양이의 모습과 어우러져 사이롭도록 강렬한 인상을 전해오고 있었다. 퍼뜩 유빙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빠르게 스쳐갔다. '본 적이 있다. 이 모습은.....' 그렇다. 바로 금문일천사해성을 굴복시킨 용병육주비전을 세운 만 승왕의 초상화 속에서 눈 앞의 중년인을 본적이 있었던 것이다. "만.... 승왕!" "그렇다네. 노부가 바로 만승왕이라 불리는 채일기 채모일세." 중년인의 고개가 담담히 끄덕여지자 유빙은 놀람으로 흐트러지려 는 마음을 수습하며 칼날같은 눈빛을 던졌다. "실종되었다던 채봉의 부친이 바로 당신이오?" "잘 보았네. 노부가 바로 봉아의 아비가 되는 사람일세." 유빙의 얼굴이 무섭도록 차갑게 굳어갔다. "이제야 알 것 같구료. 채봉의 조부가 왜 식물인간이 되고 당신이 왜 실종되었던 것인가를....! 용병육주비전에서 비전육행수 등 몇 몇 사람들이 보여줬던 애매모호한 행동들과 더불어 용병육주비전 에 얽혀 있는 흑막을 이제야 확연히 알 수 있을 듯 하오." "하지만 자네는 너무 늦게 깨달았네." 중년인, 아니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만승왕 채일기의 입가에 부 드러운 미소가 스쳐갔다. 스슷! 스스슷....! 순간 몇 줄기 파공성이 어둠을 가르며 잇달아 한 사람 두 사람 검 은 인영들이 차례로 봉화대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로 잠린왕자 주문빈을 제거함과 동시에 여명지안의 발동 을 저지했던 용병육주비전의 용병들이었다. 점점 불어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승왕 채일기의 미 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어 그는 불길이 뻗어나오는 듯한 시선으로 유빙의 두 눈을 직시했다. "본인이 이 지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용병육주비전을 세우셨 던 초대 만승왕이네. 허나 그 분은 금문일천사해성에게는 물론 그 분의 후예들에게 너무 가혹한 금제를 내리셨네." 유빙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았다. 만승왕의 실종에 얽힌 용병육주비전의 흑막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 오려 함을 깨달은 것이다. 두 사람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불꽃으로 작렬했다. "나는 자유가 그리웠네. 허나 금문일천사해성과 얽힌 금제 때문에 그 지긋지긋한 용병의 섬, 봉린주를 벗어날 수가 없었지." "......" "물론 한 가지 간단한 방법은 있었네. 금문일청사해성의 후예에게 내가 패배하는 것이지. 하지만 초대 만승왕 어른의 피를 이어받은 나의 자존심은 그런 방법을 허용하지 않았네." "....!" "헌데 어느날 나는 금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마침내 발견했네." "그 방법이란 것이 바로 실종이오?" 유빙이 비웃듯 만승왕의 말을 자르자 만승왕의 미소가 차갑게 반 짝였다. 순간 유빙은 겨울산에 흩뿌려지는 차가운 빗발 한 줄기가 폐부를 꿰뚫고 지나가는 듯한 한기를 느껴야 했다. 만승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만승왕의 유일한 후예인 내가 실종되면 되는 것이었네. 물론 이 방법에는 비전육행수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말일세."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당신의 제안에 동의했겠구료." "바로 그랬네. 결국 나의 계획은 성공한 것이지. 그런데.... 그대가 나타난 걸세." "....!" "그대 역시 용병육주비전의 자유를 원하고 있으니 계획에 차질은 없는 셈이지. 허나 한 가지 불만이 있었네." "....?" "그대가 있음으로 해서 나는 물론이고 금문일천사해성이 꿈에도 그리던 자유가 보장되지 않게 되는 것이네. 그래서 비전육행수와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네. " "자유를 위해 나를 제거한다.... 그런 말이오?" "이해해 주리라 믿네." 만승왕은 천천히 말을 맺으며 한 걸음 내딛었다. 이때 봉화대의 주위는 어느덧 금문일천사해성의 후예들로 완벽한 포위망을 이루고 있었고 수뇌급에 해당되는 몇몇의 인물들은 천천 히 봉화대 위로 병장기를 번뜩이며 올라오고 있었다. 실로 완전한 함정이었다. '불가능이군....!' 묵묵히 주위로 시선을 돌려보던 유빙의 고개가 천천히 가로 저어 졌다. 그렇다. 아무리 유빙이라 한들 금문일천사해성의 후예들 전 원을 상대로 해서 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말 그대로 그것은 절대에 해당하는 불가능이었다. "실컷 이용한 후에 죽이면서 이해해 달라니.... 그런 개같은 경우 를 어떻게 이해하란 말이야! 난 죽어도 이해 못해." 헌데 이때, 용병들 속에 뒤섞여 봉화대 위로 오르던 인물들 중 하 나가 나직히 외치며 느릿하게 유빙의 옆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도수명인세류표! 놀랍게도 그는 바로 도수명인세류표였다. 도수명 인세류표는 유빙 곁에 멈추어 서자마자 날카로운 눈으로 만승왕을 쏘아보았다. "만승왕!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날 이해해 주시오." "....!" "난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총행수는 유총사라고 생각하오. 해서 난 유총사의 편이 될테니 이해해 달라는 말이오." "음....!" 만승왕은 이 의외의 상황에 노기를 느끼기 이전에 오히려 망연해 진 듯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때였다. "이 놈아 무슨 말이 그리도 복잡하냐! 그냥 만승왕을 쳐죽이면 될 것이지....." 늙수그레한 음성이 터지며 또 하나의 인물이 유빙 옆에 멈춰서고 있었다. 앙상하고 왜소한 체구에 말라 비틀어진 상체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하의만을 빛바랜 바지로 가리고 있는 기이한 분위기의 노인. 그는 바로 도수명인세류표의 부친이었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버님." "어, 이 녀석이 자유인이 됐다고 이젠 이 아비한테까지 대들어?" 도수명인세류표의 준미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그의 부친이 짐 짓 싸늘한 음성으로 호통을 터뜨렸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유빙에게 죽음의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수많 은 용병들 속에서 돌연 일제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오지 않 는가! "그렇지. 우린 자유인이니까 우리 마음대로 편을 정해 싸울 수 있지." "맞아! 자유인인 우리들이 비전육행수인지 뭔지 하는 것들이 뒷구 멍에서 지랄한 것을 지켜줄 필요는 없지." "뭐 그런 이유가 필요하냐? 유총사가 좋으면 그냥 유총사 편에 서면 될 것을....." "그래. 난 만승왕 저 놈이 워낙 응큼해서 벌써부터 마음에 안들었 었지. 아주 이번 기회에 혼을 내주는 것이 좋겠군." 제각기, 그야말로 분방한 자유로움이 가득한 음성으로 한 마디씩 을 내뱉으며 봉화대에 오른 용병들 대부분이 오히려 유빙 곁에 호 위하듯 다가서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오히려 유빙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 이런 결과가....." "유빙, 저 자가 벌써 형제들의 마음을 완저히 사로잡고 있었을 줄이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만승왕 곁으로 주춤주춤 다가서고 있던 비전 육행수들의 얼굴이 말할 수 없는 충격과 당혹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야, 비전육행수! 만승왕과 싸우라고 행수시켜 줬는데 너희는 거 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놔둬라, 놔둬. 그래도 그동안 우리들의 자유를 위해 노심초사했 는데 우리가 이해해 주지 못하면 누가 이해해 주냐?" "맞다. 하지만 만승왕과 배맞댄 꼴은 영 보기가 싫은 걸 어쩌지?" 이때 유빙을 에워싼 수많은 용병들이 비전육행수를 향해 조롱 반, 비웃음 반의 신랄한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비전육행수 중 한 인물이 침중히 굳은 얼굴로 나서며 유빙과 만승 왕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우리 금문일천사해성은 이미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인 터....어쩔 수 없구료. 두 분께서 승부를 결하시면 우리는 승리한 분을 총행 수로 모시겠소." "와하하하....! 저 돌머리들이 오랜만에 그럴 듯한 생각을 해냈군!" "멋진 생각을 짜낸 대가로 죄는 묻지 않기로 하지. 유총사! 한 판 벌여 보시구료!" "자....! 조용 조용! 멍석은 없으니 분위기라도 마련해 드려야지. 만승왕께서 마지막 일검을 겨루고 속연을 정리하실 순간인데....." "와하하하하....!" 유빙을 에워싸고 있던 용병들의 입에서 장내가 떠나갈 듯한 환성 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들의 이런 태도에 잠자코 바라보던 만 승왕의 얼굴은 물론이고 유빙의 얼굴에조차 쓴웃음이 피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군." 잠시 후 만승왕은 천천히 유빙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그렇다! 웃고 떠들썩한 가운데서도 이 일전(一戰)은 돌이킬 수 없 는 숙명과도 같은 의미로 그의 등을 떼어밀고 있었던 것이다. .... 순식간에 용병들은 만승왕의 걸음을 따라 좌우로 썰물처럼 물러서 고 여명지안을 상징하는 봉화가 어둠을 사르는 그 한복판에 화광 (火光)으로 벌겋게 빛나는 공터가 이루어졌다. 슈우우우! 만승왕의 신형이 일순 수백, 수천 개로 분리되며 유빙의 좌우에서 맴돌았다. 실로 느닷없이 수백 수천 개의 검이 유빙을 완벽하게 포위하며 압축해 들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검 하나라도 허상(虛像)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허상이면서도 실체(實體)가 되어 유빙을 향해 유성의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 작한 것이다. 유빙의 눈에 감탄이 스쳤다. 고대무림 최고의 정화(精華)가 눈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슈파아아아아! 허나 그 순간, 아아! 환상이련가! 쏟아져 들고 있는 수많은 검영 위로 돌연 엄청난 도광이 작렬했다. 암천(巖泉)에 하나의 은하수(銀河水)가 돌연 솟아난 듯한 느낌, 넓은 유성의 강을 형성한 채 번개처럼 흐르고 있는 도광의 기세는 만승왕의 검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천승만기일도향, 그 가공할 악마의 도법이 재현된 것이었다. "....!" 만승왕은 고개를 숙인 채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눈이 머물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검,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은 수천 조각으로 베어져 그의 발밑에 나뒹굴고 있었다. "졌군." 만승왕은 눈 앞의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그는 허탈한 눈 으로 멍청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다가 문득 유빙을 직시했다. "헌데....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가?" 유빙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는.... 그대의 아버님을 암습하면서까지 강호로 뛰쳐 나오려 한 좋지 못한 사람이기는 하나 또 한 소녀의 부친이기도 하오." "채봉....?" "그렇소. 그녀의 부탁이 있었소." "채봉이....? 그 아이가 내가 죽지 않았다는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만승왕의 눈에 경악과 고뇌가 어렸다. 순간,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그의 귀로 흘러들지 않는가? "그렇다. 네 놈은 이 아비를 암습한 극악무도한 놈이지만 봉아는 나에게 너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돌연 들려온 음성에 만승왕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십 장 뒤쪽 에서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한 노인과 한 소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소녀는 바로 채봉이었다. 헌데 놀랍지 않은가! 그녀와 함께 서 있 는 노인은 바로 식물인간이 되어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던 전대의 만승왕이었다. 채봉의 조부로서 누군가의 암습을 받고 정신적인 충격에 자폐증 환자가 되어 버렸던 인물, 바로 그가 나타난 것이 었다. "아.... 버님!" 만승왕의 신형이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너는 이 아비가 너의 암습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알고 있었느냐?" 노인의 눈은 차가왔다. 허나 어딘가 연민의 정이 담겨 있는 눈빛이기도 했다. "나는.... 내 아들이 나를 암습했을 때.... 너무도 놀랐다. 몸은 다시 회복될 수 있을 정도의 상처에 불과했으나 정신적인 충격이 더욱 컸던 것이다." "아.... 아버님!" "허나 내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꼼짝하지 않고 있는 그 많 은 세월동안 네가 낳은 채봉은 나를 극진히 보살폈다." "......" "옷을 갈아 입히고.... 씻기고.... 그리고 직접 자신의 손으로 먹 여주고.... 그 어린 것이 너의 죄를 씻기 위해 너무도 고생한 것이다." "......" 만승왕의 꿇어 엎드린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노인의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채봉의 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론 봉아는 네가 한 짓을 모르고 단지 혈육이기에 나를 간호했 다. 그것이 혈육이라는 것이거늘....." 망연히 허공을 올려다 보는 노인의 눈에서도 한 줄기 눈물이 맺혔다. "가자....! 너무 오랜 기다림이었다. 용병들은 이제 그들의 길을 갈 것이다. 나 역시 그들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이제 모든 것이 아주 잘 되었다. 아주 잘 된 일이야....." 노인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이어 채봉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만승왕이 따르고..... 멀어져 가던 채봉이 문득 고개를 돌려 유빙을 응시했다. 눈물에 젖어있는 아름다운 눈이었다. 유빙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약속, 여심(女心)을 부드럽게 하는 그리고 환희에 들뜨게 하는 약속이었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채봉에게서 눈을 돌리던 유빙의 눈에 이채가 스치지 않는가? 아득한 허공 저쪽에서 한 개의 점이 무서운 속도 로 점점 가까와지고 있었다. '적리운의 천응? 적리운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신호다!' 유빙은 적리운의 천응이 머리 위에서 선회하며 안타까운 날개짓을 하는 것을 발견한 후 다급히 신형을 뽑아 올렸다. 쏴아아아앙! 그의 신형은 무서운 속도로 천응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② 비월구(飛月丘), 만월의 달빛이 산산이 부서지며 허공에 흩뿌려진다 해서 비월구라 이름 붙여진 곳. 이 비월구는 강소성 북단에 자리한 구릉처럼 이 어진 초원지대였다. 비월구의 곳곳에는 아직도 누렇게 마른 풀이 남아 있었다. 겨울의 잔해였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그 겨울의 잔해가 드문드문 남아있는 비월구 위의 달빛 아래 두 사람이 대치한 채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월광에 묻혀 서 있는 이인(二人)중 매의 다리같은 기이한 병기를 늘어뜨린 채 우뚝 서 있는 소년은 바로 살인혈황 적리운이었고 그 전면에 휘황한 금빛 늑대 가면을 쓰고 있는 인물은 바로 창랑왕이었다. 차갑게 걸려있는 만월.... 비릿한 안개, 그리고 요기를 머금은 듯 한 야풍(野風)..... 창랑왕의 주위에서 점차 어둠의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헐렁한 검은 도포와 매체, 부릅뜬 늑대 가면의 이빨이 하얗게 은 색을 뿌리고 있다. 창랑왕의 오른 손이 양당 속에서 튀어나와 흰 곡선을 그리며 머리 위에서 한 바퀴 맴돌았다. 마치 몽환 속의 동작인 양 소리없는 움직임.... 그 흰 손이 선명 하게 요기를 뿌리며 월광 속에 번뜩이기 시작했다. 아아! 전설의 춤, 창랑왕파진곡이 시작된 것이었다. 만월이 걸린 밤.... 저주받은 늑대의 아들이 춤을 춘다. 얼굴에는 휘황한 황금늑대 가면.... 손에는 붉은 적아낭채.... 너울거리는 검은 도포와.... 은파를 휘감아 도는 조용한 몸짓, 아름다운 선율에 붉은 악령의 공포를 싣고, 늑대의 아들은 죽음을 찬미한다네. 신조차 죽어버린 냉월이 떠오르면.... 저주받은 늑대의 아들이 춤을 춘다. 빠른 걸음과.... 은파를 휘감아 도는 흰 손, 우아한 학의 춤을 닮았네. 휘이익! 바람이 따르고 창랑왕의 신형이 적리운의 머리를 뛰어 넘어 하늘 로 솟아 올랐다. 삭! 적리운의 기병이 창랑왕의 몸을 스쳤다. 두 사람 사이의 대기가 일순간 찢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소용돌이쳤다. 그들의 위치는 바뀌어 있었다. 적리운은 자신의 공세가 창랑왕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함을 깨닫고 식은 땀을 흘렸다. 비로소 창랑왕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보는 사람의 등골이 저 도 모르게 오싹해지는 무시무시한 웃음이었다. 드러난 늑대 가면 의 이빨 사이로 그의 얇은 입술이 가늘게 흰선을 그은 것이다. "치잇! 잘 안 되는데....!" 적리운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천진난만한 일개 소년의 태도 그대로였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적리운의 뒤쪽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어떤가? 잘 안 되면 나에게 양보하는 것이....?" 동시에 천천히 한 인영이 달빛 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유빙이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 나는 할아버님의 원수를 갚아야 한단 말이야. 저 자를 꼭 내손으로 꺽어야 해." 적리운은 느닷없이 들려온 음성이 바로 유빙의 음성임을 잘알고 있는 듯 고개로 돌리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허나 소형제는 그를 꺽기에는 아직 실력이 모자라네." 유빙이 단호히 내뱉았다. 적리운의 얼굴에서 치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허나 유빙은 다소 모욕적인 말을 서슴치 않고 계속하고 있었다. "무인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스스로의 실력을 자인하는 일이 지. 대부분의 무인은 죽을지언정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기 싫어하 네. 나는 소형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네." "......" "나는 그런 점에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그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노력해 보는 그런 사람을 진정한 무인이라고 보고있어." 유빙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그의 말투는 적리운을 향한 진정이 어 려있는 것이었다. "나는 소형제의 조부를 존경하네. 그 분은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자네와 같은 후계자를 남긴 것이 아닐까....?"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해? 결론이 뭐야?" 적리운의 입가에 다시 치기가 떠올랐다. "내 말은 복수에 연연하기보다는 당세제일의 풍운아였던 조부의 기질을 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네. 아마 객기를 부리지 않고 일단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을 조부 또한 좋아할 걸세."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물론이네." 유빙이 부드럽게 미소하자 적리운은 창랑왕과 유빙을 번갈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 눈에는 또 한 눈물이 고여 있어 당장이라도 흘러 내릴 것만 같았다. 무인으로서 자신의 모자람을 솔직이 인정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어 려운 일, 하물며 재기발랄한 소년에 지나지 않는 적리운으로서는 창랑왕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인 것이다. 허나 적리운은 결국 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아. 창랑왕! 나는.... 나는 당신의 적수가 못됨을 시인하고 이 만 물러나겠어. 허나 언젠가는 내가 당신을 꺽을 때가 있을 거야. 살아만 있다면 말이야." 적리운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을 마친 후 몸을 돌렸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눈 앞에 두고 몸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의지가 아닐 수 없었다. 적리운은 한 옆으로 물러선 뒤 거 대한 흰 관에 연결된 끈을 집어들어 어깨에 두르며 유빙을 바라 보았다. "친구.... 됐어?" "됐네!" "좋아, 나는 이제 할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다시 떠날 거야. 허 나 다시 강호에 나오게 되면 그때에는 가장 먼저 친구를 찾겠어. 그리고 도전하겠어. 부디 창랑왕을 꺽고 지상최고의 무인이 되어 주기 바래." "훗! 기다리지." 유빙이 고개를 끄덕이자 적리운이 환하게 미소한 후 천천히 관을 끌며 사라져 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유빙은 문득 적리운이 무척 거대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소형제! 그대가 다시 강호에 나왔을 때는 아무도 그대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 같군. 허나.... 친구는 될 수 있을 것이네!' 유빙이 천천히 창랑왕을 직시했다. 그의 두 눈이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창랑왕! 이제야 그대와 나 단 둘이 되었구료." "......" "창랑왕! 당신이 차손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소. 바로 천종 예가의 이대 가신(家臣)중 선문차가(禪門車家)의 후예라는 것을....." 유빙의 그 어느 질문에도 창랑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시간이 흐를 수록 기이한 압박이 되어 유빙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유빙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계속 입을 열었다. "알고 싶소. 왜 본가와의 관계를 끊고 오히려 나의 부친을 죽인 것인지....?" 문득 창랑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허나 흔들리는 듯한 그 눈빛 역 시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네. 선문차가가 천종예가의 노복으로 남아있는 것이 싫었을 뿐이네. 나는 지상최강의 가문이라는 본가, 선문차가 가 천종예가의 일개 가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었네." 창랑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고독하면서도 차분한 음성, 마치 몽환 속에서 누군가가 입을 열고 있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의 아버님을 해친 이유가 단지 그뿐이었단 말이오?" "그렇다네. 천 년 동안 본가를 부려온 대가랄까? 또 천종예가가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 본 것이었네." 유빙의 전신에서 서서히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복수의 불길,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응집된 복수의 힘이었다. "그렇다면 그때 나 역시도 해칠 수 있었는데 왜 나를 살려둔 것이었소?" "기다린 것이네. 네가 천종예가의 모든 것을 익히기를....! 그리 고 그때 겨루고 싶었기 때문에 기다린 것이었네." "결국 당신의 목적은 이루어졌구료." "그렇다네. 나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네. 일천 여 년 동안을 종의 가문으로 이어온 선문차가의 한을 풀 이 순간을....." 서서히 창랑왕의 호흡이 대기 속에 가라앉으며 그의 주위로 요기가 물결쳤다. 창랑왕의 흰 손이 어둠 속에서 맴돌았다. 다음 순간 앞서 올라간 손을 쫓듯 또 하나의 손이 올라가며 흰 뱀 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오른쪽 무릎이 올라가고, 왼쪽 다리를 축으로 하여 그의 몸이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춤, 고대왕조의 신비가 몽환 속에 나타나는 창랑왕파진곡이었다. 창랑왕의 한 동작 한 동작에는 붉은 악령의 공포와 죽음의 찬미가 담겨 있었다.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그 춤사위가 기실은 무서운 죽음의 춤인 것이다. 만월 속에 떠올라 있는 그의 신형은 너무도 신비로왔다. 허나 이 순간 유빙의 신형도 이미 만월 속에 잠겨 있었다. 두 자 루의 장도를 늘어뜨리고..... 미백색의 은라초의가 월광에 반사된다. 거대한 만월의 월륜(月輪) 을 등에 이고 있는 듯한 형상, 그리고 유빙의 쌍도도 서서히 움직 이기 시작했다. 끝없이 크고 작은 원이 창랑왕에게 밀려갔다. 창랑왕의 몸 전체에서도 거대한 원이 밀려 나왔다. 두 원은 무서 운 굉음과 함께 허공에서 격돌한다. 꽈꽈꽈꽈아! 캉-! 뇌성과 함께 월광이 흩어진다. 창랑왕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져 갔다. 소란성에서 난서로 그 춤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유빙의 움직임도 격렬해졌다. 아름답고 장엄한 움직임이었다. 보는 이의 혼을 뒤흔드는 만월 속의 움직임, 일순 창랑왕의 우아 한 동작과 모가 지지 않는 원형의 움직임 속에 유빙의 쌍월이 흘 러들어 갔다. 그것은 거대한 파도 속으로 더욱 거대한 해일이 밀 려 들어가는 듯 자연스러웠다. 팍! 유빙의 쌍월이 창랑왕의 늑대가면에 붙었다 떨어졌다. 창랑왕의 신형이 뒤로 퉁겨지며 무너졌다. 쓰고 있던 가면이 두 동강이 나고 그의 얼굴 역시 그 가면과 함께 분리되어 있었다. "졌.... 는가....?" 가면 뒤에서 기괴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지옥의 얼음 구덩이에서 흘러 나오는 저승의 소리였다. 헌데 죽어가던 창랑왕의 눈이 한 순간 크게 흔들렸다. 유빙은 그 의 눈이 자신의 뒤를 응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의 바로 일 장 뒤, 어느새 한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나 있지 않 은가! 유빙과 같은 엄청난 고수로서도 그의 출현을 의식하지 못하 고 있었으니 실로 가공스러운 일이었다. 희디흰 도포가 야풍에 펄럭인다. 월광에 반사된 그 얼굴은 창백하 기 이를데 없고 소매뿐인 왼팔이 유독 쓸쓸하게 눈을 찔러드는 인 물, 바로 차손이었다. "아.... 버님!" 창랑왕의 급격히 풀어지기 시작한 눈에 자책과 고뇌가 어우러졌 다. 차손이 소리없이 창랑왕이 쓰러져 있는 몸 위로 미끄러졌다. "왜 피하지 않았느냐?" 차손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차갑기 이를데 없는 음성이기는 했 으나 그 음성은 젖어 있었던 것이다. "유빙의 얼굴 위로.... 아버님의 분노한 얼굴이 겹쳐....." 창랑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차손이 침묵했다. 유빙은 소리없이 자신의 뒤에 나타난 차손이 창랑왕 앞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씁쓸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차손에게 자신 을 죽이려는 의사가 없었음을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그의 기분은 실로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손은 분명 손만 뻗으면 자신을 죽이고 아들인 창랑왕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손이 문득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죽어가는 창랑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점차 의식의 끈을 놓고 있는 창랑왕에게 들려주려는 듯 외치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는 기쁘다. 네가 바로 위대한 선문차가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너를 받아 들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느냐?" 벽력같은 외침에 죽어가던 창랑왕이 눈을 떴다.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버님을 버렸을지라도 아버님 은 저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허나 아버님이 그토록 존경하 고 사랑하시는 천종예가에 죄를 지어...." 툭! 창랑왕은 말을 맺지 못한 채 고개를 꺽었다. 팔왕 중의 한 명으로 난세를 주도해가던 창랑왕, 그가 죽은 것이었다. "잘 죽었다. 너같은 놈은 죽어야 마땅했다." 차손이 망연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허나 선문차가에는 네 놈처럼 아비를 버리는 놈은 있어도 아들을 버리는 아비는 없다." 차손은 허리를 숙여 창랑왕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괘씸한 놈! 이 늙은 아비를 두고 먼저 죽다니.... 이렇게 죽을 것을 뭐하러 세상에 나왔단 말이냐?" 차손의 눈에는 언제부터인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눈물 을 대한 유빙의 가슴이 아려왔다. "가자....! 세상은 우리같은 사람이 있을 곳이 못된다." "아들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저주한다 할지라도 선문 차가의 선조들은 너를 따뜻이 맞이해 줄 것이다. 아들....아!" 차손의 신형이 점차 달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어느새 유빙의 곁 에 야작 율한극이 나타나고 그들은 언제까지고 망연히 서서 차손 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③ 만리장성(萬里長城) 너머 서 북방으로 일백 오십 리, 그 아득한 곳에 더욱 아득한 대초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달목분지(始達木盆地), 갈색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대초원, 멀리 보이는 고원(高原)은 그 상단이 이미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시달목분지에는 아직 양떼들이 뛰놀고 있을 뿐이었다. 이 시달목분지의 중앙에 언제 세워졌는지 모를 한 채의 정자가 우 뚝 서 있었다. 사면이 확 트인 형태로 지어져 있는 팔각정(八角 亭)이었다. 대초원의 중앙에 세워져 대초원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팔각정은 아무도 없는 빈 초원 위에 세워져 있기는 했으나 어쩐지 그리 쓸 쓸한 것은 아니었다. 그 팔각정 안에는 한 개 돌의자가 놓여 있었고, 언제부터인가의 예의 돌의자 위에 한 청년이 화구를 펼쳐놓고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텅빈 황야에 서있는 쓸쓸한 팔각정에 홀로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 는 청년의 기태는 범상치 않았다. 태양은 천천히 시달목분지의 서쪽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 다. 하지만 청년은 이미 해가 지고 있건만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 하고 있는 듯 무아지경에 빠져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때였다. 시달목분지의 저쪽에 돌연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타난 인영의 모습은 석양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 다. 때문에 그는 유난히도 신비롭고 고독해 보였다. 시달목분지의 저쪽에서 중원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인영의 발걸음 은 무척 빨랐다. 마치 구름을 밟고 있는 듯 경쾌한 가운데 그의 신형은 어느새 정자와 십장 거리로 다가들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황금색 장삼, 짧게 손질된 수염과 온화한 얼굴은 준 미한 가운데 일대종사의 기품이 넘쳤다. 황금색 장삼을 걸친 중년 인은 그 용모와 행색이 고아해 보여 먼길을 오면서도 먼지 한 점 묻히지 않은 듯했다. 특이한 것은 그의 눈빛 또한 은은한 금광(金 光)으로 빛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금의중년인이 정자로 가까워진 무렵에는 땅거미 역시 길게 정자까 지 이어져 있었다. 청년은 여전히 단죽을 그림을 그리며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 제야 금의중년인의 걸음이 멈춰졌다. 바로 청년, 유빙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금의중년인은 정자 앞에 우뚝 석상처럼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느릿느릿 정자 위로 올라 유빙 앞에 조용히 섰다. 유빙은 정자에 누군가가 나타난 것을 깨닫지 못한 듯 화구만을 들 여다 보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금의중년인 역시 아무말도 없이 유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유 빙의 동작 하나 하나를 아주 세밀히 주시했다. 유빙은 일견해 느릿한 동작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나 그 손은 매우 온정(溫情)했다. 한 획, 한 획을 그으며 하나의 그림을 완성 시켜 나가고 있는 그의 태도는 마치 태산같기만 했다. 금의중년인은 유빙의 손놀림을 보다 눈을 들어 그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어느 누구도 상대의 얼 굴을 보지 않았다. 허나 유빙이 그려 나가고 있는 그림을 대한 금의중년인의 얼굴에 는 놀람이 떠올라 있었다. 금의중년인은 정자에서 자신을 기다리 고 있는 듯한 청년에게서 어떤 비범함을 읽었고 그가 그려낸 그림 을 자신의 확인이 맞았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하나의 산악이 화폭에 담겨 있었다. 허나 그 웅장한 산세는 일반 적인 산세를 나타내고 있지 않았다. 장구한 세월마저 그 그림 안 에 담겨져 실로 산악이 겪어온 영겁의 세월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듯했다. "청년은.... 누구인가?" 금의중년인이 감탄한 듯 입을 열었다. 느릿느릿하면서도 중후한 음성, 만인을 억누르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귀하는 어디로 가는 길이십니까?" 유빙이 지나가는 말처럼 오히려 반문했다. "저쪽이네." 금의중년인이 중원 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순간 유빙이 담담한 음성을 흘려냈다. "귀하가 기르던 새(鳥)는 이미 그곳에 없소. 모두 떠났소이다. 아 마 갈 필요가 없을 것이오." 금의중년인은 유빙의 말에 이채를 떠올렸다. 이내 그의 말뜻을 헤 아렸는지 크게 놀란 빛을 떠올렸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나의 새들은 주인의 말이 아니면 듣지 않는다네." 그는 확인하려는 듯 유빙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유빙이 입을 떼었다. "나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허나.... 귀하는 새를 풀어놓을 때 매떼들 사이에 풀어놓지 말았어야 했소." "매떼....?" "그렇소. 다섯 마리의 크고 건장한 매가 한곳에 모였는데 그 매들 이 싸우고 있는 동안 크고 작은 많은 매들이 마음껏 활개를 펴며 그대의 새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이오!" 금의중년인의 신형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제야 확실히 깨달은 듯했다. "그, 그대는....?" "유빙이라 하오." "팔왕 중 한 명인 천왕....?" 금의중년인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외치듯 입을 연 후 한참동안 뚫어지게 눈 앞의 유빙을 직시했다. 정자 안은 이내 살기로 충만되었다. 유빙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채 붓을 쥐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 리고 불쑥 허공에 화선지가 있는 듯 금의중년인의 얼굴 앞에서 붓 을 휘둘렀다. 금의중년인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하나의 그림을 본 것이다. 허공에 붓이 지나간 잔영(殘影)이 생성해낸 거대한 산악의 형상을..... 그것은 참으로 신비한 손놀림이었다. 붓이 허공에 스쳐가고 있는 잔형으로 만들어진 산악은 점차 거대 한 산세와 강, 그리고 평원의 형상을 만들며 퍼져 나갔고 그리고 이내 천하를 나타내는 거대한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금의중년인은 유빙의 손놀림이 하나의 무공이자, 또한 완벽한 우 주 자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는 살기를 거두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오. 본인은 이제야 무도(武道)의 끝을 본 느낌이오." "......" "게다가 제벌의 후계자 쟁탈전에 자신은 단신으로 뛰어든 채 수하 들을 동원해 중원에 침투해 있는 본인의 수하들을 모두 막아낸 사 람이 바로 공자였음이니....." "......" "본인 새왕 호극습도는 수십여 년간을 한 가지 일에 노심초사했으 나 공자의 상대가 못됨을 이제 깨달았소이다." 금의중년인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채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렸 다. 그렇다. 그는 바로 새왕 호극습도인 것이다. 잠시 후 그는 무거운 어깨로 몸을 돌렸다. 그의 신형은 이내 휘적 휘적 대초원 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지는 석양에 묻혀가는 그의 뒷모습은 더할나위 없이 쓸쓸한 것이었다. 한 가닥 띠처럼 남아있던 석양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버리고 어둠 은 순식간에 정자를 휘어감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야망이 이렇게 종식되었음을 의미하 듯 죽음처럼 기척도 없이 다가온 어둠이었다. 이때였다. 완전히 어둠에 잠겨버린 초원 저쪽에서 다시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정자로 향해 다가들고 있었다. 헌데 그림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환한 얼굴에 더할 나위없이 밝은 미소를 머금은채 다가오고 있는 여인들... 그들은 바로 여은금과 도당려홍, 그리고 채홍과 설도 등이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