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번 호 : 0/332 ▶ 등록자 : JBS197 │ │ ▶ 등록일 : 98년 11월 06일 20:45 │ │ ▶ 제 목 : [좌백] 혈기린 외전 1부 │ └───────────────────────────────────┘ 혈기린 외전 1부. 작성자 : 좌백. 올린이 : subin~* # 주의 : 이 작품은 법적보호를 받는 작품이므로 무단 연재를 금합니다. 책이 나온 후 혈기린 외전을 보유하고 계신분들은 개인용독서 로만 이용바랍니다. 아울러 모든 통신망에 올려져 있는 혈기린 외전의 삭제 전제하 에 연재하는 것이니 유념하십시오. 무협지(武俠誌)는 '무(武)'와 '협(俠)'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고들 합니다. 이 말을 돌려놓으면 무와 협이 없으면 무협지가 아니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멍청한 구석이 있어서인지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무협지를 쓰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머리를 긁적일 수밖 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굳이 말해보라고 한다면 아마도 더듬거리며 '그래서 공부하는 중입니다' 라고 밖에는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만히 둘러보면 세상에는 그런 일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4년간 철학(哲學)을 공부했는데도 지금 누가 '철학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역시 머리를 긁적이며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려고 공부하는 중입니다'라 고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만 유달리 멍청해서 그런 걸까요?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와 협이 없으면 과연 무협지가 아닐까요? 혹시 무와 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진 않을까요? 도대체 무라는 것은 뭐고, 협은 또 무얼까요? 질문은 끝이 없고, 해답이 명확하게 나오는 것은 그중 어느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 작품을 쓸 때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그 질문에 답하려 노력합니다. 이게 제 글쓰기의 방식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찾으려 하고, 그렇게 찾은 것을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작업 외의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글 '혈기린외전'에서도 마찬가지로 '과연 협객(俠客)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작업이 주인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시기를 독자들께 부탁드립니다. 이 글에 나오는 여러 인간군상(人間群像)들은 그 하나하나가 소위 협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들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길면 꿈도 길고, 말이 길면 실수도 많다는 것은 진리인 모양입니다. 저만 해도 지금 이러니 저러니 했다가 나중에 책임지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을까봐 걱정입니다. 그러니 이만 하지요. 바라는 것은 그저 이 별볼일 없는 글이 독자 여러분의 눈을 어지럽혀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 뿐입니다. 좌백이 드립니다. 序. 그 해 가을 그 해의 가을은 끔찍했었다. * * * 세월이 흐르면 아픈 기억들은 사라지고 청춘의 추억들이 옛 기억과 뒤섞이는 것이라,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과거는 항상 지금보다 좋은 것이지만, 그 해의 가을을 두고 '옛날은 좋았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봄부터 몰아친 황사 바람은 그 해 유독 심해서, 거의 이삭을 거둘 때가 된 겨울 밀밭을 흙먼지로 덮어 버렸다. 농민들은 누런 흙먼지만 보이는 밭을 헤집어 밀 이삭을 주워 모았지만, 하루종일 뒤져도 모은 것은 한두 줌을 넘기 어려웠다. 바람은 더욱 심해져 온 하늘이 황토 먼지로 가득한 날이 보름이 넘게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그 바람을 뚫고 이삭을 주우러 가다가 죽느니, 차라리 방안에서 굶는 쪽을 택했다. 그 다음은 대 가뭄이었다. 화북지방(華北地方)에서 봄 가뭄은 항상 있는 일이었다. 황사 바람이 불고 난 뒤에는 물도 마르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해의 가뭄은 팔월이 될 때까지 풀리지 않더니, 여름 가뭄으로 바로 이어졌다. 하늘과 땅,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타올랐다. 땅바닥은 거북 등처럼 갈라졌고, 사람들의 목도 그렇게 타올랐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당장의 목마름보다 벼를 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모내기할 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 수확의 계절이었어야 했을 가을. 일 년 중 그때만은 아무리 가난한 빈농이라도 얼굴의 주름살을 펴고 웃었어야 했을 그런 계절이었지만……,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가을을 반가이 맞이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가을이 되자 우려했던 일들이 사실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먹지 못해 약해진 아이들과 여자들이 쓰러져 누웠다. 그리고 하나씩 둘씩 죽었다. 표면적인 사인(死因)은 질병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굶주림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먹지 못한 몸에는 병과 싸울 힘도 없었다. 아이들의 팔이 가늘어지고, 어른들의 배도 올챙이처럼 부어오르자 본격적인 전염병이 돌았다. 역병(疫病)이라고들 불렀지만,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병의 이름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뭄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산동성(山東省) 청주부(靑州府) 창주현(菖州縣) 외곽, 기수(沂水)가 흐르는 강변의 작은 마을 갈흉점(葛洶店), 거기에서도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작은 농가에 두 사람이 찾아 들었다. * * * "어려워 보이는군!" 마당 구석에 앉아 낫으로 나뭇가지를 손질하던 청년, 왕일(王一)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진노육(陳老六)이 확인해 주지 않아도 사정은 어려웠다. 이 흉년에 어렵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는가. "그걸로 뭐할 참인가?" 진노육은 왕일이 자기를 쳐다보지도 않자 조금 화가 난 듯한 빛을 보이더니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붙였다. 단단한 물푸레나무를 불에 구워 휘어 놓고, 그 양끝을 여러 겹 꼰 삼끈으로 묶어 놓은 그것. 왕일이 다듬고 있는 나뭇가지는 어설프긴 하지만 활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산에 가서 토끼라도 잡으려고 그럽니다." "사람 살기도 어려운데 토끼라고 살아 있겠는가?" 마을의 개들이 자취를 감춘 지 이미 한참이 지났다. 혹은 사람에게 잡아먹히고, 혹은 눈치 빠르게 도망을 쳐버렸다. 가뭄에는 그들도 살기 어려웠으리라. 산 속의 토끼인들 그냥 거기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냥 이대로 굶어 죽을 수도 없지 않은가. 왕일은 집안의 장남으로서 뭔가를 하긴 해야 했던 것이다. 진노육은 왕일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손은 힘없이 멈춰진 것을 보았다. 자신이 하던 일의 무용함을 깨달은 것일 게다. '일이 생각 보단 쉽겠군!' 진노육은 내심 미소를 흘렸다. "집안 식구들은 다들 별일 없는가?" "아직은 괜찮습니다." 왕일이 고개를 들어 진노육의 기름기 흐르는 얼굴과 비단 옷을 노려보았다. 진노육은 갈흉점 제일의 부자인 진가장(陳家莊)의 집사(執事)였다. 갈흉점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진가장주(陳家莊主)의 개. 왕일은 평소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그가 오늘 왜 찾아왔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다행이군!" 진노육은 건성으로 말했다. 그는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물기 없이 바삭거리는 흙담벽에 칠은 벗겨지고, 지붕을 덮은 짚단들도 가뭄에 까맣게 타서 곧 무너질 듯이 초라한 흙집이었다. 그 흙담벽 아래에 여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어린 소녀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 옆으로 열 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 두 아이가 앉아 있을 힘도 없는지 맨 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진노육은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소문대로군!' 이목구비가 제법 또렷한 것이 시골 계집치고는 제법 반반해 보이는 소녀였다.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왕일의 누이동생이었다. '기루(妓樓)에 팔면 제법 돈을 받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너 때문에 온건 아니니…….' 진노육은 소녀의 생기 없이 공허한 눈에서 시선을 떼고 왕일을 바라보았다. 거친 베옷 사이로 마르고 거친 팔과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을 지탱해 나가려니 손마디가 닳을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다. '그런 책임감이 장난감 같은 활을 깎게 만든 것이겠지.' 겨냥도 할 수 없고, 멀리 나가지도 못할 그런 활. 그런 무용지물이라도 깎으며 굶주린 동생들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을 왕일의 심정이 진노육의 가슴을 잠시 약하게 했다. 진노육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이게 그에게 좋은 일일지도…….' 한참이 지나도 말이 없는 그가 이상했던 모양, 왕일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왜 오셨습니까?" 진노육은 그 말에 자신이 여기 온 원래의 의도를 생각하고 헛기침을 했다. 집안의 형편을 보니 더 이상 말을 돌려 가며 분위기를 잡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모시고 있는 분을 알지?" 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가 모시고 있는 사람은 진가장의 장주인 진대야(陳大爺)일 것이다. "그분 아드님, 그러니까 소장주(少莊主)께서 이번에 나라의 부름을 받으셨다는 것도 아는가?" 왕일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럴 리가……! 진가장에 왜 군역(軍役)이 떨어집니까요?" 어느새 방문이 열리고 고개를 내민 왕일의 아버지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혀를 찼다. 굶주림에 지친 듯 누렇게 뜬 얼굴이었다. 나라의 부름이라면 군역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아주 못살고, 가난해야 군역을 산다. 진가장의 소장주에게 내려질 군역이 아닌 것이다. 진노육도 혀를 찼다. "뭐, 원래는 소장주님께 내릴 일도 없고, 내린다 한들 안 가도 되는 것이지만 약간……, 그 뭐랄까…… 연유가 있어서." 그는 입에 올리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끄집어낸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술을 과하게 드시고 그……, 실수를 하셔서 지현(知縣)의 눈에 걸린 모양일세." 그 일이라면 왕일도 들은 소문이 있었다. 못된 부잣집 아들 세 놈이 산길에서 한 여인을 겁탈했는데 하필 지현의 친척 딸이었다던가. 그 결과가 강제로 군역을 부과하는 것. 즉, 충군형(充軍刑)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진노육은 그 대목에서 말을 끊고는 사립문 밖을 향해 손짓을 했다. "가져오너라!" 같이 온 장한이 나귀에 실어 두었던 짐을 들어 날랐다. 집안에 있던 모든 시선이 그 짐에 집중되었다. 왕일의 아버지, 아내, 그리고 어린 동생들의 시선이었다. "우선 쌀 다섯 섬일세." 왕일의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우선…… 이라굽쇼?" "앞으로 스무 섬이 더 올 걸세. 은자로 쳐서 열 냥이지. 굶고 있을 것 같아서 쌀로 가져왔네만 원한다면 돈으로 줄 수도 있고. 자네……." 진노육은 왕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들이 허락한다면 말일세." 왕일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노육이 왜 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진가장 소장주의 충군형을 대신 받으면 은자 열 냥을 준다는 뜻일게다. 지방에는 변란이 많고, 북쪽에서는 흉노(兇奴)가, 남쪽에는 왜구(倭寇)가 준동하는 때였다. 창을 들고 병사로 나가면 살아서 돌아온다는 희망은 버리는 것이 좋으리라는 상식 정도는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진노육의 제안은 은자 열 냥과 생명을 바꾸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왕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굶주림에 충혈된 눈동자들에서 뿜어지는 시선들이 그의 얼굴을 따갑게 찌르는 듯 했다. 그 시선들은 말로는 차마 못하는 기대를 가득 담고서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병든 아버지와 지친 어머니, 굶주려 죽어 가는 어린 동생들……! 그는 고개를 들어 진노육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은자 스무 냥이면 내가 가겠소!" 진노육은 한참을 더 생각한 다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래서 왕일은 이후 칠 년간 진가소(陳可昭)라는 이름으로 군역을 살게 되었다. 第一部 협객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俠客不忘怨]. 1 "욱!" 진가소는 신속하게 땅바닥에 엎드렸다. 한 자(尺) 이상 쌓인 부엽토(腐葉土)가 얼굴에 닿았다. 썩어 가는 낙엽들에서 배어 나온 검은 물이 입술에 기분 나쁜 축축함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기분 나쁜 것은 잠시였다. 진가소는 그보다 백 배는 더 강렬한 감정, 방금 그의 동료, 마달(馬達)이 내뱉은 신음이 조성한 위기 ㉮� 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썩은 낙엽, 동물의 시체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운이 모여 만든, 소위 장독이라 불리우는 독 구덩 結� 서 뒹굴게 된 지금의 상태보다 백 배는 더 위험한 것이 마달이 낸 소리였다. 그와 그의 동료는 지금 적진 중심에 와 있다. 붉고 흰 색칠이 가득한 몸에 문신으로 멋을 낸 야만인들이 우글거리는 땅, 남만(南蠻; 묘강(苗疆)이라 玆� 한다. 지금의 월남, 태국, 미얀마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말)에서도 가장 위험한 종족이라는 노족(怒族) �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노족. '노(怒)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이 이름부터가 거친 종족은, 그들 종족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 � 대 에서부터 노련한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은 어린아이조차도 명궁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의 활 솜씨를 가지고 있다. 덧붙여서 아직 식인의 풍습을 유지하고 있는 종족. 진가소는 배가 고프면 사람이라도 먹는다는 것에 그다지 큰 거부감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자신이 솥 속에 들어가 삶기는 신세가 되는 것은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조심스럽게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 �. 숲 속에서는 자연스런 움직임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노족의 예리한 눈과 귀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바닥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뱀처럼 몸을 꿈틀거려 뒤로 물러났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 고,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채 움직이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마달이 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가……소, 도와 줘. 제발……!" 억눌린 듯 나직하게 낸 소리지만 인근에 노족이 있다면 충분히 인기척을 느꼈으리라. 진가소는 잠시 인상을 썼으나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약간 일으켰다. 남의 눈에 띄기 쉬워졌지만 조금 전 보다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마달은 그에게서 이 장(丈)여 뒤편에 누워 무릎 어림을 움켜쥐고 있었다. 독장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독기를 맡지 않도록 코와 입을 감싼 두꺼운 천 사이로 신음 소리가 흘� 나 왔다. 그 천으로도 다 가리지 못할 정도로 덤불처럼 무성한 수염 사이에 구릿빛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잔 뜩 일그러져 있어,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진가소는 왜 그러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는 팔목에 매어 두었던 칼을 빼 들어 마달의 바짓가랑이를 찢었다. 그리고 찢어 낸 천으로 무릎 위를 동 여매었다. 그의 동작은 오랜 경험만이 가능케 할 신속하고 숙달된 손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달의 장딴지는 검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진가소는 부어오른 중심부에서 바늘 끝에 찔린 것처럼 미세한 구멍 두 개를 찾아내었다. 진액처럼 끈� 한 검은 피가 거기에서 솟아 나와 흐르고 있지 않았다면 쉽게 찾지도 못할 정도로 미세한 구멍이었다. 진가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달은 이 독장 속을 돌아다니는 독물들 중 하나에게 당한 것이다. 남만은 가히 독물들의 보고(寶庫)라 할만 했다. 그 중에서도 마달을 물고 달아난 놈은 작고, 재빠르고 독 한 놈임이 틀림없었다. 상처가 작으면 독은 더욱 독하다는 것이 남만의 상식이었다. 물린 즉시 응급 처치를 하지 않으면 즉사라는 것, 응급 처치를 해도 사는 쪽 보다는 죽을 가능성이 � 다 는 것도 상식이었다. 진가소의 칼은 짧지만 폭이 넓고, 예리한 것이었다. 그들처럼 비밀스럽게 밀림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 그 칼이 마달의 장 딴지를 열 '십(十)'자로 갈랐다. 검은 피가 뭉클 솟아올랐다. 새로 생긴 그 상처 자국에 진가소의 입이 닿고, 떨어졌다가 다시 닿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검은 피가 그치고 붉은 피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진가소는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 내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뱀의 특징은?" 마달은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몰라." "뱀의 종류를 알면 치료할 방도가 아주 없진 않았을 텐데……. 하는 수 없군. 선택하게!" "무…… 무얼?" "여기서부터……." 진가소는 칼끝을 들어 마달의 무릎 바로 위, 천으로 묶은 바로 아래께를 짚었다. "잘라 버리면 중독사(中毒死)는 면할 수 있다는 걸 보장하지." 마달의 검은 얼굴이 더욱 검어졌다. "다른…… 길은?" "내게 몇 가지 약초가 있네. 이런 경우 쓰는 것이긴 하지만 효과는 보장할 수 없어. 아마도…… 반반 � 도." "반반……?" "죽던가……, 살던가." 길은 단 둘이었다. 다리를 자르고 확실하게 살던가, 아니면 불확실하긴 하지만 약초를 쓰고 운에 기대던가 였다. 마달은 아무 소리 않고 땀만 흘리고 있었다. 그 고뇌에 가득한 얼굴을 보면서 진가소는 조용히 기다렸� . 사실 이렇게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결정 여하에 따라서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있고, 불구가 되어 평생 남의 짐이 되는 수도 있는 � 이 다. 그런 결정을 하는데 약간의 시간은 기다려 주는 것이 옳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니 보려 했다. 시간으로 보아서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이국적인 분위기의 나무들과 그 나무들을 감 고 올라간 등넝쿨들이 서로 얽히고 섥혀서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독장에 가린 나뭇잎들 사이로 뿌연 빛살이 한두 줄기 스며들고 있을 따름이 � 다. 장독이 깔려 있는 지역을 통과하려면 대개는 밤을 이용하기 마련이다. 혹시 그러지 못한다 해도 지� 처 럼 한낮은 극력 피하기 마련이다. 밤이 되면 가라앉고 낮이 되면 하늘을 덮을 듯이 치솟아 오르는 장독� 특 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과거 제갈공명(諸葛公明)도 남만정벌(南蠻征伐) 때 밤에만 이동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지금 진가소와 마달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장독지대에 들어와 있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어느 정 도는 예견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진가소는 그와 마달을 보낸 장군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일 때는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노족의 집결지를 찾기 위해 나왔고, 밤에는 노족이 어디 숨어 있는지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아� 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숨어 있을 때가 아니라 돌아다니고 있을 때, 먹고 배설하는 일상의 일들을 하고 있을 때, 차라� 그 들 한족(漢族)의 병졸들을 사냥하러 돌아다닐 때만이 그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달 또한 장군을 원망해서는 안 될 터였다. 그들 둘만이 아니라 그렇게 둘씩 짝을 이룬 정찰조가 적어도 십여 조는 더 이 장독 지대에서 헤매고 있 �, 그들 또한 진가소처럼, 또 마달처럼 늪처럼 무거운 이 독 안개의 숲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그들의 운명일 뿐이었다. 원망을 하려면 죄를 짓고 병졸이 된 자신들의 신세를 원망해야 했다. 원망을 하려면 이 지옥 같은 남만 땅에 정벌이랍시고 끌려오게 만든 시대를 탓해야 할 것이다. 진정 원망을 하려면 남만으로 온 첫해에 진작 죽지 않고 동아줄 같고 쇠심줄 같은 생명력으로 삼 년이 � 버텨 온 그들 스스로를 원망해야 할 것이었다. 진가소는 그 중 어느 것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죄를 짓고 할 수없이 병졸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스스로 온 것이므로. 돈을 받았으면 남만이 아니라 진짜 지옥으로 가라 해도 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부모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 돈이 반드시 필요했으므로. 그리고 산다는 것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하므로. 그래서 진가소, 아니 진가소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달고 칠 년째 살고 있는 왕일은 그 누구도 원� 하 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생과 사를 넘나들어야 하는 여기 남만에서 삶은, '산다는 게 뭐지'라는 생각의 대상이 아 灸�, '어떻게 살아남느냐'라는 행위의 목표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지상명제는 그에게는 너무나 크고 절실한 것이라 도 虛� 포기할 수 없는, 그래서 눈 돌릴 틈도 없이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 자르겠어!" 마달은 입술을 깨물고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그의 충혈된 눈, 뱀의 그것처럼 작은 눈동자에서 시퍼런 윤� 의 불꽃이 날름거렸다. "자르면 어차피 병신. 살아 나간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는 살고 싶지도 않아." 진가소는 묵묵히 마달을 보았다. 그 눈에서 진심의 빛을 확인하겠다는 것처럼. 이내 그는 허리춤을 뒤져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서 그는 몇 가지 약초와 가루약, 환약, 작은 옥병을 꺼냈다. 연초(煙草). 포도아(葡萄牙; 포르투갈의 假借)에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귀한 약초였다. 짓이겨서 물로 반죽하여 뱀에 물린 곳에 바르면 효과가 있고, 마늘과 함께 삶아서 그 물에 환부를 담가도 좋았다. 근채(芹菜; 미나리), 시자(枾子; 감), 비채(菲菜; 부추), 조아(棗兒; 대추) 등은 말려서 가루로 내어 역시 독 에 당한 상처에 붙이면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원래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곳 남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이것들을 구하려고 얼 떨� 애를 썼던가를 생각하면 그 가치는 절대 적은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여기 남만의 수풀 속에서만 구할 수 있는 이름 모를 약초들……. 그래서 가죽 주머니 안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귀한 대가를 지불하고 구한 것들이었다. 때론 그것� 을 위해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일들을 해야 했던 것이다. 원래는 불의의 일을 당했을 때 사용하려 했던 것이지만, 그는 그것으로 적지 않은 목숨들을 구했었다. 물 론 그건 또 그것대로 좋았다. 그 대가로 보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 사 람을 살렸다는 보람이든. 대개의 경우 그는 물질적인 것을 선호했다. 언젠가 그가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은혜를 갚겠다더니 그 다 음 전투에서 죽어 버린 이후부터, 그는 나중에 꼭 은혜를 갚겠다는 말은 믿지 않게 되었다. 주머니 안을 헤집던 그의 손이 작은 뭔가에 걸렸다. 그는 잠시 멈췄다. 그 주머니는 그의 보물 창고인 셈이었다. 적지 않은 물건이 들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을 그는 감촉� 으 로도 구별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손끝에 걸린 물건은 끈으로 친친 동여진 작은 가죽 덩어리일 것이다. 지금은 검게 때가 � 어 알아보기 어렵지만 원래는 사슴 가죽이었다. 펼치면 손바닥 하나 만한 가죽인데 이중으로 덧대어져 있고, 거기에는 일곱 개의 침이 꽂혀 있다. 언뜻 보기엔 의원이 사용하는 금침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용도에 쓰이는 물건이다. 강호 무림인들이 사 용하는 독살용의 암기라는 것이 이 물건의 정확한 용도인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칠독황봉침(七毒蝗蜂針)이라고 했다. 진가소의 손이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손끝이 거기 스치는 짧은 찰나, 끔찍한 생각이 머리를 스 튿�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임무에 방해만 될 마달을 차라리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 침을 뽑아 한 번만 찌르면, 아니 살짝 갖다 대기만 해도 마달은 고통 없이 쉴 수 있게 될 것인데…� ! 진가소가 가죽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마달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진가소의 표정은 시종일관 무표정하기만 해서 속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마달의 다리를 � 았 다. 2 마달은 불안해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의 치료는 간단하게 끝났다. 여기 남만의 묘족(苗族)이 독충, 혹은 독사에 물렸을 때 바른다는 이름 모를 풀잎 한 장을 이겨 붙이고, 그 주위로 연초와 여타 약초를 말린 가루를 뿌렸다. 비교적 장독이 덜 묻었 � 속 옷의 천을 찢어 환부를 감싸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진가소는 침을 꺼내지 않은 것이다. 진가소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고, 바로 옆에 선 거목의 가지 위에 마달을 올려놓고 늘어진 덩굴을 � 라 그를 묶었다. "뭐, 뭘 하려는 거지?" 마달의 겁먹은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진가소는 말했다. "다행히 해독이 되기 시작하면 고열이 나고 곧 혼수상태가 될 거야. 다리가 나무 등걸만큼 부어오를� 도 모르지. 그 상태에 움직여선 안돼. 여기 있으면 돌아올 때 데려가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나, 날 버리고 가겠단 말야? 제 제발 그러지 마. 그냥 돌아가자구." "임무를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면 어떤 꼴이 되는지 알면서 그런 소릴 하나?" 군법은 엄했다. 전쟁 중에 후퇴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된다. 그것은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가� 자 에게도 같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마달이 그런 꼴이 되었다고 해서 돌아가면 동료를 구한다는 명분과는 상관없이 가혹한 처벌만이 기다� 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 그래서……!" 나를 버리고 가겠다는 말이냐는 마달의 눈을 보며 진가소는 그렇다고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 �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만약 운 좋게 임무를 성공해서 돌아간다면 그땐 목숨도 구하고 벌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 돌아간다면 말이지?" 마달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는 비웃고 있었다. 내일, 아니 잠시 후도 기약할 수 없는 이 절박한 상황에서 최선이니 뭐니 따지는 진가소를 비웃고 � 는 것이다. 그런 말로 동료를 사지에 버리고 홀로 살려 하는 속셈을 모를 것 같으냐고 원망과 저주의 눈으� 바 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진가소는 그냥 돌아섰다. 이해를 하리라고 생각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다 사 실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없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충군형은 평생을 지게 되어 있었다. 한 번 형을 받아 병졸이 되면 죽을 때까지 병졸로 살아야 했다. 그것을 그는 진가소라는 이름으로 병� 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은자 스무 냥이 아니라 이백 냥을 준다 해도 대신 벌을 받겠 鳴� 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을 미리 몰랐기 때문에,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기 때문에 그는 은자 스무 냥에 평생을 바꾼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 열심히 싸웠다. 죽을 때까지 병졸로 살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어이없는 일로 생명을 버리긴 싫었다. 그것을 피하는 堧� 단 하나, 공을 세워 사면을 받는 것뿐이었다. 그는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웠고, 충성했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어김없이 세웠다. 죄를 �고 병사가 된 신분이 아니었다면 상을 받아도 여러 번 받았을 그였다. 신분이 아니었다면 웬만한 군관(軍官) 자리에도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帽� 지도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남의 이름으로 들어온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길은 하나뿐인 것이다. 진가소는 마달의 원망 서린 눈동자를 뒤로하고 다시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독의 숲은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이어졌고, 낮이 될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목이 칼칼해지고, 숨� 밭 아지고, 눈이 따가웠다. 중독의 초기 증상이었다. 진가소는 그 자리에 멈추어서 옥병을 꺼내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뿌연 액체를 얼굴을 가린 천에 뿌� 고 다시 썼다. 남만으로 들어오기 전, 군의 주둔지였던 운남(雲南)의 거리에서 구한 일종의 해독제였다. 아마도 묘족 � 전 통 처방으로 만든 약초 즙이나 동물 즙같은 것일 테지만 그 정확한 성분이나 이름 같은 것은 몰랐다. 중요한 것은 효과가 있다는 점이고, 그 효과는 여러 번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는 언젠가 운남에 다시 가면 더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였다. 지금은 이 숲을 � 져 나가는 것, 그리고 노족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 시급했다. 그는 다시 엎드려 기기 시작했다. * * * 진가소의 말은 정확하게 맞았다. 마달은 그가 떠난 지 반각(半刻;고대 중국의 시간 단위. 1각은 15분)도 안 되어 엄청난 고열에 시달리� 되 었다. 눈앞이 흐려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구멍이 부었는지 숨을 쉴 때마다 쌔액쌔액 바람 빠지는 소 리가 들렸다. 무엇보다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년 내내 여름만이 있는 남만의 한낮에 추위에 떨고 있다면 웃기는 얘기지만 사실이었다. 마달은 소위 오한과 발열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더러운 놈, 나쁜 놈!" 그는 주문처럼, 저주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할 수만 있다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울고 싶었다. 춥고 아프기도 했지만 남만의 밀림 속에 혼자 있다는 것이 더 두렵고 처량했기 때문이었다. 목이 막 �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그런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망가지고 있었다. � 이 약해지면 마음이 먼저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진가소를 저주하며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 * * '물소리!' 진가소는 땅에 귀를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흐릿하긴 하지만 어디선가 분명히 물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기고 있는 지형이 조� 씩 높아지고 있었다. 독의 숲을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장독이라고 하는 것은 낙엽과 짐승의 시체가 썩으며 뿜어내는 나쁜 기운이 오랜 세월 모여서 생기는 � 이 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썩은 기운이 오랜 세월 한 곳에 고여 있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바람이 통하지 않 는, 즉 웅덩이처럼 낮은 곳이어야 한다. 돌려서 말하면 장독이 있는 곳은 주변보다 낮은 지형이라는 의� . 그 러니 지형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장독의 지대를 빠져나가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물소리는 다른 방식으로 장독 지대가 끝났다는 증거가 된다. 자연이란 그 스스로 해독과 정화작용을 � 다. 물이 흐르는 곳에 독이 뭉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한 식경(食頃;고대 중국의 시간 단위. 대충 30분)을 더 기어가자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직 � 늘은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눈앞을 가리고 있던 독 안개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절벽이 가로막고 서 있고, 그 까마득한 위에서부터 한줄기 폭포가 떨� 져 소(沼)를 이루었다.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검푸른 소의 물이 넘쳐흐르며 다시 한줄기 가느다란 냇물이 흘렀다. 그 옆 으로는 짙은 녹색의 수목들이었다. 그가 들은 물소리는 여기에서 나는 것이었다. 진가소는 녹색 수풀 사이에 그대로 엎드려 한참을 기다렸다. 아까에 비하면 한결 신선한 느낌을 주는 풀잎들이 얼굴을 간질였지만 저 검푸른 물길 속에 뛰어드는 � 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눈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곳보다 그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갈 때가 오히려 더욱 � 험 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깊은 밀림 속을 며칠이고 걷다가 시냇물을 발견했을 때, 갈증을 참지 못한 동료들이 지시도 없이 먼저 뛰 어들었다가 어떻게 죽는지 그는 보아서 알고 있었다. 죽음처럼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사실은 단 일 각도 지나지 않았기가 쉬우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타오르는 갈증은 시� 의 흐름마저 뒤죽박죽으로 만들기 쉬운 것이다. 어쨌든 더 기다리고 있기 어려웠다. 이만큼 숨어서 지켜보았는데도 아무 이상이 없으면 여기는 위험이 없 는지도 모른다. 진가소는 수풀 속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냉정하게……!' 그는 느리게 심호흡을 하고 그가 있는 위치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혹시 그가 빠뜨리거나 놓친 점은 없 는지 생각해 보았다. 예전에 그가 고향에서 농사만 짓고 있을 때는 세상이 훨씬 단순했다. 목이 마르면 마시고, 배가 고프면 먹으면 그만이었다. 없어서 못 먹고, 없어서 못 마시는 경우가 아주 平� 는 않았지만 적어도 거기 뭔가가 숨어 있을까 봐 못 먹고 못 마신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단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죽음이었다. 그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고, 그러니 蜘� 쓸 머리를 지금 여기서 다 쓰는 한이 있어도 써야 했다. 그는 풀잎을 뜯어 씹었다. 쓴 물이 혓바닥을 얼얼하게 했지만 조금 전처럼 타는 듯이 목마르지는 않았다. 조금 정신이 드는 것 � 았 다. 여태 그가 온 도정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계속 내리막이다가 조금 전 어느 순간부터 오르막이었다. 그� 은 독장이 가장 심한 부분을 밑바닥으로 하는 얕고 넓은 웅덩이 바닥을 기어왔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琉� 고 그 웅덩이의 가장자리에는, 적어도 그가 지금 있는 곳에서는 이 깎아지른 절벽이 끝인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만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내려온 시간에 비하면 오르막은 너무 짧았다. 그것은 그가 있는 이곳이 아직은 웅덩이의 바닥에 가깝� 는 의미였다. 어쩌면 이 절벽은 웅덩이 가운데에 홀로 우뚝 선 안전지대일지도 모른다. '안전지대!' 진가소는 무엇에 찔린 듯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사람이라는 것이 못 갈 데가 없고, 안 사는 곳이 없는 듯하지만 사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는 것이다. 물구덩이를 지나갈 수는 있어도 거기 뒹굴면서 살 수는 없고, 일년 내�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열사의 지대에서 살 수는 있어도 집은 결국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에 짓기 마련이다. 陸� 이라고 다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한족보다 독에 대해 잘 알고, 혹시 내성이 훨씬 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독 구덩이에서 뒹 섯� 살 수는 없다. 독물만 마시고 살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런 안전지대를 그냥 뒀을까? 주변은 독의 숲으로 보호되고 안에는 깨끗한 물이 흐르는 이 천혜의 위치를. 진가소는 눈을 번뜩이고는 뱀처럼 조용히, 천천히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조금 더 관찰하기 쉬운 자리를 찾아야 했다. 사람이 산다면, 그의 짐작대로 노족이 이곳을 집단 거주� 로 삼고 있다면 어딘가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야 했다. 사박-! 진가소는 펄쩍 뛰어 일어났다. 사람의 발소리, 혹은 누군가가 나뭇잎을 건드려 내는 소리였다. 그것도 慕� 그의 뒤에서였다. '들켰다!' 그것은 곧 죽는다는 말과도 흡사했다. 진가소는 반쯤 일어선 자세로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면서 한 손은 칼 손잡이를 찾았다. 혹시 기회가 있� 면 상대를 먼저 죽여야 한다. 스스슥-! 상대도 그에게 들켰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 왔다. 도망가고 있 다는 뜻이다. 진가소는 그 방향으로 뛰며 제발 상대가 하나, 혹은 둘 이하이길 바랬다. 상대가 도망가는데 정신이 � 려 미처 소리낼 생각도 못하길 바랬다. 그렇지 않으면 그도 죽는 것이다. 다행히 상대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도망가는 방향도 단순히 그에게서 멀어지려 할뿐 방향을 틀어 유 리한 위치를 점한다거나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최대한의 속도로 상대의 방향을 가로질러 뛰었다. 나뭇가지, 늘어진 덩굴들이 그의 뺨을 긁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소리가 나겠지만 그것도 �제 가 아니었다. 스읏-! 수풀을 사이에 두고 그의 앞으로 스쳐 가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진가소는 손을 내밀어 그 어깨를 당기고, 다시 뻗어 뒤에서부터 얼굴 부위를 감아 안았다. 그리고 칼� 들 어 목을 베어 갔다. "악-!" 그의 팔뚝 사이로 억눌려 있지만 뾰족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귀를 찔렀다. 입을 막았는데도 그 가는 � 리 가 새어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보다 그는 그가 잡은 상대가 여자라는 것에 더 놀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칼을 멈춰 버렸다. 그의 팔뚝 안에는 사슴처럼 놀란 눈을 한 노족 소녀가 안겨 있었다. 3. 진가소는 소녀를 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혹시 누군가가 소녀의 비명 소리를 듣고 올지도 몰랐다. 만약 瀏� 다고 한다면 조금이라도 이동해 두는 것이 좋았다. 소녀가 버둥거리는 것이 온몸에 전해져 왔다. 벌거숭이 맨몸을 한 팔로 잡은 셈이라 자칫 잘못하면 � 칠 것 같았다. 그는 팔뚝에 더욱 힘을 주어 당겼다. 그때 소녀가 그의 팔뚝을 힘껏 깨물었다. "음!" 진가소는 자칫 내뱉을 뻔한 신음을 씹어 삼키며 그녀의 머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른 한 손에 든 칼이 그녀의 턱밑에 바짝 들이대어졌다. 하얀 칼날이 소녀의 거무스름한 목덜미와 대조되어 이리의 이빨처럼 희뿌옇게 빛나기 시작했다. 움직� 면 그대로 죽여 버리겠다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덜미에 붙은 칼날의 차가운 감촉도 무시한 채 진가소의 팔� 을 한층 힘주어 물어뜯으려 했다. 그의 팔이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져 있지 않았으면 벌써 한 두 점 뜯어 먹혔을 정도였다. 진가소는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잘 갈아 놓은 칼날이 소녀의 목덜미에 천천히 파고들기 시작했� . 거무스름한 목덜미에 하얀 자국이 생기고 그 자국은 이내 붉은 빛으로 변했다. 진가소는 소녀의 뺨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그녀의 상체는 그의 가슴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는 그렇게 바짝 붙은 그 등을 통해서 소녀의 심장이 격렬히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짝 대어진 귀 에는 가쁜 숨소리가 들려 오고, 코끝으로 뜨거운 숨결이 스며들었다. 여인의 냄새였다. 갑자기 그는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사람의 체온을 느낀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의 가슴과, 그의 아랫배와, 소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휘감은 그의 다리를 통해서 뜨거운 체온, 살� 있 는 사람의 느낌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분명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목을 타오르게 했다. 그는 갈증을 느끼게 되었지만 단순한 갈증은 아니었다. 물을 마셔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陋� 잡고 있는 이 소녀의 속에 들어가 쥐어흔들고 굴리고 한껏 괴롭히다가, 결국에는 파괴해 버려야 만족해 岵� 죽일 그런 불길에서 오는 갈증이었다. '우선 안전한 곳을 찾아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죽였다. 미세하게나마 풀잎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뱀이 움직일 때나 낼 법한 작은 소리, 그것이 노족의 環� 들이 움직일 때 내는 소리라는 것을 그는 몇 번이나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저 소리가 나고, 머리로 알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해서 원인 모를 소름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면 어� 새 독화살을 꽂은 채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발견하곤 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 나란히 앉아 고향 얘기를 나 ʼn� 했던 바로 그 동료들이었다. 그들이 죽고 그는 살아남은 것은 전적으로 운이 좋았던 덕분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한 � 투, 그리고 습격들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미칠 듯이 스스로를 저주했다.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여자에게 눈이 가려 죽음이 코앞에 들이닥치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진작 죽여 버리고 갔어야 했던 것인데……!' 도리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숨어 적들이 그를 발견하지 못하기만 바랄 수밖에. 진가소는 한 점의 소리도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기를, 숲 이곳 저곳을 달리며 만들었을 흔적들이 � 들 의 눈에 띄지 않기만을 빌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그의 몸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풀숲을 헤치며 노족의 전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와 달리 그들은 훨씬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 었다. 아마도 본거지에 가까운 만큼 은밀함을 유지할 필요를 덜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헤이달리, 이헤이달리!" "한두이꼬, 토호이에 이헤이달리!" "피리마오 토호이에 이헤이달리!" 노족은 물론 그들의 말을 사용하니 진가소가 듣고 그 뜻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몇 년간의 남만 생활 때문에 가끔은 아는 말이 있는데, 다행히도 노족과 같은 야만족의 말은 그 어 휘는 다양해도 말하는 법칙이 간단해서 어휘만 알면 대충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만 해도 가장 자주 반복되는 '이헤이달리'라는 말이 그가 잡고 있는 소녀의 이름인 것이 분명했다. 노족의 이름짓는 규칙에 따르면 시집가지 않은 여자의 이름에는 앞에 '이'자를 붙이고 시집간 여자에� 는 이름 뒤에 '마'자를 붙인다. 그러니 이 소녀는 시집가지 않은 여자고, 진가소가 아는 어휘를 종합해 보면 대충 '눈이 큰 애' 정도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토호이에'라는 말은 바구니, 혹은 그릇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만약 그게 맞다면 진가소의 실수가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셈이었다. 즉, 이 이헤이달리라는 소녀가 들� 왔 다가 그를 보고 놀라 떨어뜨리고 온 바구니 토호이에를 그들 노족의 전사들이 발견한 것이다. 아무리 소녀를 쫓아오기 바빴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은 놓치지 말고 들고 왔어야 했다고 그는 다시 한 � 후회했다. 혹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왔다고 해도 그런 증거물이 없었다면 그냥 잘못 들었거니 하고는 돌아갔을 � 도 있는 것 아닌가. 노족의 전사들은 주변을 뒤지는 모양이었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을 서로 나누더니 '이헤이달리'라는 이상한 어감의 단어를 낮게 부르면서 흩어져 뭬� 다니기 시작했다. 진가소는 달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대로 들켜 죽는 한이 있어도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움직이면 반드시 들킬 것이지만 � 직 이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진가소는 그 실낱같은 가능성에 목숨을 걸었다. 도박이라면 큰 도박이었다. 진가소는 그 도박에서 일단 승리를 얻은 것 같았다. 소녀를 찾는 목소리가 巒� 로 가까워졌다가 아슬아슬하게 비껴 가더니 이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진가소는 그래도 한참을 더 엎드려 있다가 아무런 낌새도 없자 일어나 이동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죽은 듯이 하다가 일단 움직이면 번개처럼 해야 하는 것이 살아남는 요령이었다. 거 기 숨어 있는 것을 못 찾았다가 괜히 꾸물거리고 있다 보면 온 부족 사람들이 몽땅 나와서 찾을 수도 있� 것 이다. 또한 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일어나 걷는 것이 소리가 덜 날 것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고 하는 행동이었� . 그는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가서 독안개 자욱한 숲의 초입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숨을 돌리고 본의 � 니 게 납치해 온 셈이 된 소녀를 관찰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소녀는 어느새 혼절해 있었다. 입가에 피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억센 팔뚝에 눌려 입술이 터진 모 양이었다. 그러다가 숨이 막혀 잠시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 그는 문득 이 소녀가 노족의 여인답지 않게 예쁜 용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알기로는 노족의 여인들은 용모와 체격 조건으로 값이 매겨졌다. 용모가 뛰어나고 체격 조건이 � 으 면 시집갈 때 지참금을 많이 받는다는 의미였다. 이때 용모가 뛰어나다는 기준이 한족과는 많이 달랐다. 즉, 그들은 뭐든 굵직굵직한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여자도 한족의 눈으로 봤을 때는 추녀에 가까운 얼굴, 넓 浩� 얼굴에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의 여자를 높게 쳤다. 체격도 마찬가지였다. 엉덩이 큰 여자가 값이 많이 나가는데 그것은 아이를 잘 낳는다고 해서였다. 그런 기준으로 치면 이 소녀는 값이 형편없을 것이다. 진가소는 피식 웃었다. '살게 되니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는군!' 사실 아직은 완전히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아직 여유 부릴 때도 아니었다. 그는 예의 가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결정한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소녀� 죽 이려 하는 것이다. 살려 두면 분명 돌아가서 그를 본 것을 알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근거지가 발각되었다는 것을 미리 � 고 대비할 것이니 토벌전이 실패하는 것은 물론이고, 추격대를 편성해 쫓아오기라도 한다면 그의 목숨도 보 洋�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고 잡아갈 수도 없었다. 혹을 하나 달고 다시 독의 숲을 헤쳐가기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데려� 봤 자 지휘관인 장군, 혹은 교위들의 노리개로 돌다가 죽여 버릴 것이 뻔하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 여 버리는 것이 본인에게도 좋을 것이다. 죽이는 데에도 주의가 필요했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으면 의심을 해 경계가 강화될 테니 안되고, 시체가 발견되더라도 칼에 찔려서, 혹� 목 이 졸려서 죽으면 타살된 것이 분명하니 차라리 시체가 발견되지 않음만 못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의심받지 않고 죽일 방법이 있었다. 그것을 지금 하려는 것이었다. 진가소는 주머니에서 칠독황봉침을 꺼내었다. 이것 한 방이면 소녀는 별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조용히 죽 을 것이다. 그러면 시체를 아까 소녀를 처음 발견한 곳 부근에 가져다 둔다. 노족의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 소녀는 이 미 중독 되어 죽은 시체일 것이다. 침을 맞은 자국은 보이지도 않을 것이고, 혹시 보여도 상관없었다. 여기 남만에는 그렇게 한 방에 사람을 죽이는 독물들이 하고많았다. 그는 조용히 손을 옮겨서 소녀의 어깨에 침을 가져다 대었다. 이제 찌르면 죽을 것인데, 왠지 손이 움 殆� 지지 않았다. 열 일곱, 혹은 열 여덟? 그는 다시 한 번 소녀의 애띤 얼굴과 검게 그을려서 더욱 매력적인 육체를 보� 다. 군살 하나 없이 단단해 보여도 사실은 손에 묻어 나올 것처럼 매끈하고 부드러운 저 가슴과 배를. 죽기� 너 무 어리고,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젊음이었다. 그때 소녀가 눈을 떴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어딘지 놀란 사슴의 그것처럼 크고 맑은, 그래서 더욱 애처로운 � 이 었다. 진가소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손은 그녀의 어깨에 침을 찔러 넣고 있었다. 소녀는 입을 벌렸다. 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짧고 예리한, 그러나 치명적인 입맞춤이었다. 소녀는 조금씩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진가소는 그녀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소녀를 들쳐업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수� 을 헤치고 아까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갔다. 주위에 아직 노족의 전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라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안 갈 수가 없었다. 시체를 - 아직은 아니지만 - 두고 오는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임무를 완전히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 �. 노족의 근거지를 밝혀 내는 것이었다. * * * 마달은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되었는지, 아니 어쩌면 새벽이 되었는지 사위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하루가 지났나?' 알 수 없었다. 몇 번째 밤이 되고 또 아침이 되었는지, 뱀에 물렸던 그때가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흐� 하 게 느껴졌다. 그저 아는 것은 목이 말라 타는 듯하다는 것, 그러니 어쨌든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죽은 � 람이 갈증을 느낄 리는 없었다. '그 놈은?' 그는 진가소를 생각했다. 그러자 잊었던 분노가 되살아났다. 그와 함께 이대로 버려진 것은 아닐까 하� 의 구심이 솟아올랐다. 어쩌면 그놈, 진가소는 그를 이대로 내버려두고 도망갔는지도 모른다.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 그를 구해서 들쳐업고 - 그는 도저히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 - 돌아가느니 그는 죽도록 버려두고 혼자 돌아가는 쪽이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쪽이 훨씬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나쁜 놈, 죽일 놈, 똥통에 빠져 죽을 놈!' 그의 평소 실력으로 보아 그보다 심한 욕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이쯤에서 그쳐야 했다. 없는 사� 을 두고 욕설을 퍼붓는 것보다 훨씬 현실에 밀접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머리 바로 위로 뻗은 나뭇가지에 사람 몸통만큼이나 굵은 구렁이 한 마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4. 이렇게 가까이 에서 뱀의 눈을 마주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 았 다. '다음이 있다면……!' 마달은 그럴 가능성이 지극히 적다는 것을 유리알처럼 반들반들한 뱀의 눈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사람은, 아니 대부분의 사람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오직 그 경우에만 다른 사람을 죽인다. 그 자 킵� 그랬다. 병졸이 되기 전에도, 그리고 병졸이 되어 전투라고 부르는 국가가 인정한 살인 행위를 할 때도 � 음에 는 분노, 혹은 공포에서 시작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취한 것처럼 멍한 심리상태 하에서 치르곤 했던 것이� . 그러나 뱀은 달랐다. 놈은 무감동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놈에게 고깃덩어리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놈은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식사'를 할 湛� 것이다. 나뭇가지에 꽁꽁 묶여 반항하지도 않으니 먹기도 편할 것이다. 놈의 처지에서 본다면 굴러들어 � 떡 인 셈이다. 뱀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둘로 갈라진 가는 혓바닥이 그의 얼굴을 핥고 다시 그 흉측한 입으로 돌아갔다. '미리 맛을 본 것이냐?' 그런 모양이었다. 뱀은 이제 망설이지 않았다. 마달의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몸뚱이가 길게 풀리는 듯하더니 그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 순간, 마달은 뱀에 칭칭 감겨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그 다음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압 박감이었다. 뱀은 그를 바스러뜨려 죽인 다음 삼키려는 것이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온몸의 뼈가 으드득, 소리를 내며 가닥가닥 부러지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보다도 이제 곧 죽는다는, 지금 죽어 가고 있다는 그 느낌이 더욱 괴로웠다. 그의 痔� 아직도 생존을 원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다행히 고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축복처럼 안온한 느낌, 무의식의 어두움이 그를 덮어 버렸다. 마달은 뱀에 감긴 채 의식을 잃어버렸다. 마달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는 진가소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마달은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진가소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옥인가?" "왜 지옥일 거라고 생각하나?" 마달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네가 여기 있으니까!" 진가소는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제 그만 가자!" "어디로? 염라대왕 앞으로?" 진가소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버리고 가서 원망하고 있다는 건 안다. 날 이해해 주길 바라지도 않아. 누구에게든 목숨은 소 峠� 것이니까. 하지만 그 소중한 목숨을 지키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 다. 욕을 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아." 진가소는 앉은 채로 뒤로 돌아서 마달의 팔을 목으로 둘렀다. 마달은 진가소의 등에 업혀 진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떠나며 돌아본 그 자리에는 목이 잘린 뱀이 뒹� 고 있었다. 처음 묘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광서(廣西)의 일부 지방과 운남(雲南)에서였다. 양 지방을 통괄해서 다스리고 있는 총독순무(總督巡撫) 동한신(董漢臣)의 학정에 반발해서 일어난 사태 늑� 만 원인 분석은 둘째고, 일단은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그러나 오랜 무능과 무관심의 아래에 내버려졌던 광서 운남, 양 성(省)의 병력들은 허약하기 짝이 없� 다. 장수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병졸들은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숨느라고 바빴다. 그런데도 중앙에서는 그 � 사 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의 무능이 드러날까 두려워한 동한신이 보고서를 조작했기 때문이었다. 반란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갔고, 운남은 더 이상 한족의 땅이 아니었으며 이제 곧 광서 지방도 � 런 운명이 될 찰나에 '그'가 등장했다. 광동성(廣東省)에 주둔한 호분좌위(虎賁左衛)의 지휘관이었던 참장(參將) 황보엄(皇甫儼)이었다. 보통 일개 위에 소속된 병사의 수는 5600명. 황보엄은 그 병력만을 이끌고 이웃 광서로 출전했다. 그리고 한달 만에 광서 지방을 평정하고 운남으로 진 격했다. 그보다 몇 배의 병력을 가진 묘족들이 그에게 연전연패, 질그릇 부서지듯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운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황보엄은 패잔병들을 수습해 휘하에 편입시키고, 연일 이동하는 가운데에서� 훈 련을 시켰다. 체계적인 수련을 쌓은 그의 병법 앞에 난폭하긴 하지만 오합지졸이라 할 묘족들은 상대가 틈� 었다. 결국 그는 일년이 넘도록 지속되던 묘족의 반란을 단 넉달만에 평정해 버렸다. 공이 있으면 당연히 상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황보엄에게 주어진 상은 '남만정벌'의 명령이었다. 애초에 반란은 없던 일이었다. 상부의 눈에는 그랬다. 보고가 올라온 적이 없는 것이다. 반란이 없으� 당 연히 토벌도, 평정도 없다. 그러니 주어질 상도 없다. 동한신은 조정의 내각수반(內閣首班)이자 이 시대 최고의 실력자인 동악(董岳)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戮� 누이가 당금의 황후(皇后) 동(董)씨였다. 그가 없는 일이라고 하면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도 아래에서 나오는 말은 막아야 했다. 백성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있었던 사실을 약간 바꾸어 놓았다. 황보엄이 패잔병들을 수습해 모아 두었던 것이 좋은 � 집 거리가 되었다. - 묘족의 도적들이 사소한 분란을 일으킨 바, 광동의 참장 황보엄이 평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기화로 껼� 엄은 휘하에 다수의 군병을 모아들였으니 장차 성상(聖上)의 우환이 될까 두렵다. 이제 적지만 공이 있으 � 상 을 주되, 상과 더불어 남만으로 도주해 간 적당을 토벌하는 임무를 같이 주면 불만을 사지 않으면서도 과 構� 모여진 힘을 소진하도록 할 수 있으리라고 사료된다. 그가 올린 상소문의 내용이었다. 물론 거액의 예물이 입막음 값으로 광동 총독에게도, 중앙의 간관(諫官)들에게도, 자신의 아버지와 누� 에게 도 보내어졌다. 회답은 신속했고, 간단했다. 당연히 그의 마음에 꼭 드는 내용이었다. -좋은 계책이니 속히 시행하라! 그래서 황보엄은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봉해짐과 동시에 그 옛날 제갈량이 했던 이후 1300여년 만의 남 만정벌을 떠나게 되었다. 황제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남만의 묘족들은 광서, 운남의 묘족들과는 격이 달랐다. 그들은 지난 1천여 년 간 단 한 번도 외세에 눌린 적이 없는 자존심 강한 민족들이었다. 비록 하나의 � 가 체제 안에 모여 힘을 뭉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땅에서 그들은 주인이었고, 결단코 이방인의 침입을 용서 舊� 않았다. 정벌은 기약 없이 길어졌고, 운남총독의 계략은 훌륭히 맞아 떨어졌다. 그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 황보엄이 빨리 죽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 이상 애초의 거짓말은 언제고 들통날 위험이 獵� 것이다. 만약 황보엄이 열병에라도, 아니면 눈먼 화살에라도 맞아 죽었다면 그는 당장 병력을 철수시키고, 역� 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쾌거를 잔뜩 부풀려서 보고했을 것이다. 그의 기분이 내키면 황보엄은 살아서는 영화를 누리지 못했으나 죽어서는 명나라 사백년의 역사에 기� 되 는 명장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삼 년이 지나도록 황보엄은 죽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악전고투 속에서도 차근차근 전진해 가서 이 제 단 한 번도 명나라 군대의 발이 닿지 않았던 남만의 오지에까지 깊이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노족을 만났다. 분노한 종족, 여태 만난 어떤 묘족보다도 끈질긴 저항을 해 오는 부족 潔� 다. "그게 단가?" 진가소는 뻣뻣하게 선 채 그가 만날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인물, 남만토벌군의 지휘자인 황보엄에게 대� 했 다. "그렇습니다." 황보엄은 장군이라기 보다는 유생이 어울릴 것 같은 인물이었다. 광서, 운남의 반란을 진압했던 것까지 치 면 사 년 간이나 전장에서 굴렀는데도 파리하게 보일 정도로 하얀 얼굴에, 결이 가는 수염, 순한 인상의 ダ� 보면 그의 손에는 시문(詩文) 나부랭이가 적힌 책이 어울리지, 부절(斧節 : 군을 출정시킬 때 지휘권의 � 징으 로 주는 도끼)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진가소는 두려웠다. 연약해 보이는 손이지만 거기에는 하잘 것 없는 병졸 한둘의 목숨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 버릴 권� 이 쥐어져 있다는 것을 진가소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 권력의 주인이 아무리 격의 없이 소탈한 태도로 진가 恬� 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군은 장군이고 병졸은 병졸인 것이다. 황보엄은 지난 석달간 숱한 피를 흘리면서 모은 정보로 만들어진 이 인근의 지도(地圖)를 가리키며 말� 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은가?" 진가소는 방금 그 자신이 노족의 근거지를 찍어 주었던 그 지도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저는 일개 병졸입니다, 장군님!" 황보엄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병졸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네." 장군이 병졸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진가소는 부담스러웠다. 이런 불안� 한 생활 속에서는 높은 사람의 눈에 좋게든 나쁘게든 뜨이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사양한다면 그건 항명으로 비춰질지도 몰랐다. 그건 눈에 띄는 것보다도 훨씬 더 불리� 다. 그래서 진가소는 지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제가 본 것으로는 그들의 본거지가 완전히 고립된 섬은 아닙니다. 여기 이…… 산줄기가 뒤쪽으로 연� 되 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거기 아니면 물줄기가 흘러들 곳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한쪽으로, 그러니 � 이 장독의 숲으로 병사를 보내 그들과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쪽의 이 산줄기를 따라서 뒤로 돌아가 기 응�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이 년 전, 산족(山族)과 싸울 때 그렇게……!" "말도 안되는 소리! 거긴 독충이 우글거리는 늪지와 나는 새도 올라가기 힘든 절벽들이 수두룩해! 열에 하 나도 제대로 도착하지 못할 걸?" 원래는 군의 행정을 담당하는 자리이지만 지난 사 년간 황보엄의 군사(軍師)로서의 역할도 수행해 왔던 경 력(經歷) 위광징(魏廣徵)이 진가소의 말에 반발해서 꾸짖었다. 진가소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황보엄이 위광징을 조용히 시키고 물었다. "왜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거라는 건가?" "땅과 벌레를 상대하는 것이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황보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짓으로 진가소를 돌려보냈다. 진가소가 나간 후, 그는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위광징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됩니다. 차라리 독장의 숲을 통과해서 정면으로 진격하는 것이 희생이 덜할 것입니다. 전에는 流� 의 근거지를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있으니 반드시 그들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황보엄은 그의 말에 수긍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갑자기 다른 얘기를 했다. "우린 이미 20여 회나 정찰조를 보냈었지. 매번 10조 이상씩……. 다 합치면 우리 군사들 중에 정찰조� 안 나가 본 사람이 없을 정도 일거야. 그렇지?" "정확히 23회입니다. 매번 13조씩이었고, 다 합치면……!" 황보엄은 고개를 젓고는 허리를 폈다. 그는 웃음 띤 얼굴로 위광징을 바라보았다. "자넨 다 좋은데 매사를 그렇게 정확하게 수치화(數値化) 시키는 것이 큰 문제야. 죽어간 병사들은 종� 위 의 숫자로는 환산을 할 수가 없는 법일세. 지금 중요한 것은 수치가 아니고, 내가 물으려 하는 것도 그게 아니 야." 그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뭔가 재미있는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전략을 짤 때 그가 흔히 하는 碩� 이었다. 그것을 보면 주변 사람들은 그가 이미 뭔가를 결정했다는 것을 알게 되곤 했다. "그 많은 정찰조가 하나같이 발견 못한 노족의 근거지를 이번 정찰조는 발견했다는 점에 대해 어떻게 � 각 하느냐는 거야. 어때 단지 운이 좋은 것일까?" 위광징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미 내려진 결정에 대해 뭐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모시는 장군� 결 정이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재미있는 건……!" 황보엄이 웃었다. 원래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요 근래 그가 웃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내가 이 년 전 실행했던 성동격서지계(聲東擊西之計)를 훌륭하게 응용해서 전략을 짰다는 거야. 가르� 볼 만한 제자인 셈이지." 5. 진가소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남만토벌군의 병력은 둘로 나뉘어져서 한쪽은 참장 여맹진(呂孟震)의 지휘 아래 장독의 숲을 가로질러 彭� 해 가고, 다른 한쪽, 황보엄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늪지대로 향했다. 진가소는 그 선두에서 황보엄이 탄 � 고삐 를 잡고 길을 안내해야 했다. 밀림을 빠져나가면 늪이고, 키만큼 큰 풀이 우거져 있는 늪은 곳곳에서 사람을 삼키기 위해 입을 벌� 고 있었다. 발목까지밖에 안 오는 진흙탕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 꼭대기까지 빠져들어 가고마는 경우를 진� 소 는 이미 여러 번 보았었다. 첫 번째 늪지에 다다랐을 때, 진가소는 멈춰 서서 더 나가지 않았다. 황보엄이 물었다. "왜 안가나?" "선발대를 보내어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그 선발대를 하면 안되나?" "말을 타고는 늪 속의 단단한 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장군님!" "그래? 그러면 내려서 걷지!" 황보엄이 말에서 내리려 하는데 진가소가 그 발을 잡아 막았다. "안됩니다, 장군님!" "이건 뭐하는 행동인가?" 황보엄의 온화하던 눈이 엄하게 굳어져서 진가소를 쏘아보았다. 진가소는 얼른 발을 놓고 물러서서 엎� 렸 다. "용서를……! 하지만 길을 찾는 것은 저희 병졸들이 해도 될 일, 장군님의 할 일은 따로 있을 줄 압니� ." "건방진 것! 네가 감히 내게 할 일을 일러줄 셈이냐?" 그들의 주위에는 몇 명의 참장들과 십여 명의 군관(軍官; 장교)들이 멈춰 서서 느닷없이 벌어진 사건� 지 켜보고 있었다. 진가소는 진땀을 흘렸다. 이건 호랑이의 수염을 뽑은 셈이었다. 그는 오랜 교훈을 잠시 잊었던 것을 뼈 倖� 게 후회했다. 높은 사람이야 뭘 어떻게 하든지 그냥 두고 구경이나 하라는 것이 그들과 같은 병졸들에게� 금 옥(金玉)과도 같은 양언(良言)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왕 호랑이를 탄 바에야 생각한 것을 다 말하기 전에는 내리지도 못할 것이었다. "저희들 같은 졸자(拙者)에게는 위험이 곧 먹고자는 것과도 같이 생활의 일부입니다만은 장군님께서는 注� 을 소중히 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 "점점 가관이 아닌가. 내가 이 보잘 것 없는 병졸에게서 인생의 교훈을 듣게 생겼군!" 군관들이 요란하게 웃었다. 황보엄이 물었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것이냐?" "저 같은 것은 여기서 죽든 다른 곳에서 죽든 아는 사람이나 슬퍼하겠지요. 내일이면 또 그렇게 잊혀지 憫� 요. 하지만 장군님은 다릅니다. 장군님이 돌아가시면 다른 사람들도 다 죽을 것입니다." "내 목숨이 그렇게 값어치가 있는 줄 몰랐군. 어째서냐?" "저희를 여기 데려온 분이니까요. 저야 저 혼자 여기 왔다가 죽어도 혼자 죽겠지만 장군님은 저희 모� 를 데려오셨으니 돌아가실 땐 모두 데리고 가시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저희들을 이 지옥에서 건져 주실 분� 장 군님뿐이니까요." 황보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정말로 분노하고 있는 듯이, 혹은 우연히 들은 한 마디에 상처라도 � 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부를 하는 건가? 아부라면 상대를 잘못 택했다. 게다가 요령도 없군!" 주위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적었다. 진가소는 고개를 번쩍 들어 황보엄을 정면으로 보았다. 그도 흥분하고 있었다. "아부가 아니라 충고입니다. 저는 저 하나의 목숨만 책임지면 그만이지만 장군님은 일만의 목숨을 책임 �야 한다는 것, 그러니 저희들을 다시 데리고 나갈 때까지는 목숨을 소중히 하셔야 한다는 충고입니다."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 보잘 것 없는 병졸의 입에서 나온 방자한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아무도 � 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황보엄이 중얼거렸다. "나보고 개죽음하지 마라는 것인가?" 진가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방자한 것!" 뒤에서부터 발길질이 가해졌다. 진가소는 앞으로 꼬꾸라졌다. 말을 타고 다가온 참장 하나가 그의 등을 걷 어차 버린 것이다. "보자 보자 하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감히 어느분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나불거려! 목이 떨어지고 痼� 냐?" 참장이 검을 뽑아 들었다. 황보엄이 그를 말렸다. "그만 두라!" 그는 진가소를 보며 웃고 있었다. "지옥으로 데려왔으니 다시 데리고 나가 달라는 데야 난들 할말이 없구나. 방자하긴 하지만 말은 옳으� 용 서하지." 위광징이 다가와 말했다. "말은 옳은 말이 맞습니다. 장군님이 직접 길을 찾을 필요는 없지요. 자 일어나 앞장서라! 네가 선발 釉� 하는 거다!" 황보엄이 손을 저어 위광징을 말렸다. "아니, 그러면 누가 내 말고삐를 잡는가? 따로 선발대를 구성해서 앞세우고 이 방자한 녀석은 그냥 말 自� 나 잡으라고 두지. 또 어떤 말을 하는지 들어봐야겠다. 어서 일어나 고삐나 잡아라!" 진가소는 그제야 일어났다. 오늘의 일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 당장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이 자리를 � 어 난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다시 고삐를 잡고 급거 꾸려진 선발대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황보엄을 힐끗 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 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방금의 호령들이 장난이기라도 한 것처럼. 황보엄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라는 평이 병졸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는 것을 진가소는 기억해 내 � 다. 병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을 보면 제갈량의 현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지혜로운 인� 이 라고 해야 했다. 방금처럼 두려움이 없는 것을 보면 생긴 것 답지 않게 용장(勇將)의 기질도 있는 것 같� 다. 그러나 여기 남만에까지 밀려와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었다. 동한신의 검은 속셈은 창들고 뛰라면 뛰고 기라면 기는 어리석은 병졸들도 알았다. 그걸 황보엄 혼자만 모 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 그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도저히 참지 못할 만큼 명백한 恍� 과 부정을 황보엄은 참고 있었다. 비단 참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충실히 그 명령을, 명백히 잘못된 그 疵� 을 따르고 있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지장이라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나쁘게 말해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꽉 막힌 인물이고, 좋게 말해도 충성만이 제일인줄 � 는 고지식한 인물, 그것이 병졸들 사이에 퍼진 황보엄의 인물평이었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이 지옥에서 뒹굴고 있는가?' 다시 본 황보엄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깔려 있었다. 진가소는 전에는 한 번도 군관이나 장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쩌면 그들도 진가소 자신처럼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만을 절실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 다. 그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들도 인간인 이상. 그런데 왜 전에는 그들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가. 진가소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진가소의 그것처럼 어두운 빛은 아닐 것이 �.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은 밝은 곳에 있는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진가소는 다시는 오늘처럼 주제넘은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아까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이 지 옥같은 곳을 빠져나가려면. 그리고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늪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만족할 만큼 많은 수의 사람을 삼키고야 그들을 통과시켜 주었다. 선발대는 몸에 서로 끈을 연결하고 일렬로 서서 걷다가 앞사람이, 때로는 뒷사람이 수렁으로 빠져들면 그 끈을 당겨 서로 건져 주었다. 그러나 아예 건져지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그럴 때에는 끈을 끊는 수밖에 騙� 다. 황보엄은 그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고 신음소리 같은 것을 토해 내었다. 진가소는 그런 그를 보며 이 사� 이 진정으로 병사들을 생각해서 저러는 것인지 의심하면서도 같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수렁 속에 빠져 세 瓚� 등지는 저 사람들의 운명은 내일이면, 아니 잠시 후면 그의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까 앞에 나서지 않게 되었던 것을 속으로는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 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껴야 했다. 늪지대가 끝났다. 이제 앞은 험준한 산악 지대였다. 이곳 남만의 산은 그 자체가 또하나의 늪과 다름없어서 위험했다. 조 鳧� 라도 긴장을 풀면, 사실은 긴장을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지만, 독충과 독사에게 당하고 만다. 곳곳에 파여진 구덩이, 혹은 자칫 미끄러져 굴러 떨어질 수도 있는 벼랑들은 독충보다도 더 위험한데, 渚� 피 그 안에는 독물들이 살고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황보엄도, 다른 군관들도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야 했다. 그들도 말과 함께 벼랑으로 � 러 떨어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밀림 속에서는 방향을 잘못 잡는 것도 치명적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수천의 병사가 밀림 속에서 � 아 가 되어 죽을 때까지 헤메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일찍이 귀곡자(鬼谷子)의 때에 이미 발명되었다는 지남기(指南器)를 가지고 있었다. 팔괘(八卦) � 이 십팔수(二十八宿)가 새겨진 동심원의 중앙에 지남침(指南針)이 장치된 그런 기구였다. 지남침이 이(離)� 가리 키면 정남(正南)인데 이것이 기본적인 위치였다. 그 상태에서 곤(坤)의 방향이 남서쪽, 태(兌)의 방향이 �쪽이 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확한 지남기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측정된 지도가 없다는 점이 � 다. 그러니 별 수 없이 척후병이 나무 위에, 혹은 산 위에 올라가 지형을 보고 방향을 찾는 수밖에 없었� . 오늘은 진가소가 그 역할을 했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곳에 가본 적이 있는, 그래서 지형을 보고 방향� 짐 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나무를 올라갔다 내려오고, 밟기만 해도 부스러질 것 같은 벼랑 옆 외길을 몇 굽이나 돌아서 겨 우 진가소는 목표를 찾을 수가 있었다. 남쪽을 바라보고 달린 산줄기의 끝에 삼면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마 치 혹같이 생긴 봉우리가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진가소의 정찰이 틀림 없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었다. 그때부터가 중요했다. 말의 발굽을 천으로 싸고, 병장기도 소리를 내지 않도록 감싸야 했다. 공격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천으� 입 을 싸고 침묵을 유지해야 했다. 오래 전부터 내려온 군률(軍律)에 의해서 이럴 때 입을 여는 자는 즉각에 � 참 살되었다. 그렇게 이동해서 노족의 본거지가 잡힐 듯이 보이는 곳에 닿자 밤까지 대기 상태였다. 모든 기습이 그� 지 만, 특히 묘족을 공격하는데는 낮보다는 밤이 낫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밤을 두려워하고, 불을 두려워하 � 종 족이었다. 그렇게 밤이 오자 공격이 시작되었다. 진가소가 염탐하고 돌아간지 사흘 후, 그들이 본영을 떠난 때로부터는 이틀 때가 되는 밤이었다. 6. 검푸른 융단 위에 보석을 뿌려 놓은 듯한 밤하늘……. 그 밤하늘 아래로 붉은빛 하나가 무지개처럼 반원으로 휘어지는 궤적을 그리고 떨어졌다. 이어 조금 � 의 그것과 같은,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수의 궤적들이 밤하늘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무수한 불화살의 비였 �. 노족은 불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것은 그들이 야만인이라서가 아니라 불은 그들의 터전 전부를 한 � 간 에 삼켜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밀림에 붙은 불은 하늘이 꺼 주거나, 삼킬 것을 다 삼키고나서 스스 � 지 쳐 사라지거나 하기 전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기 때문에 불을 외경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로서는 불을 사용한 공격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태우게 되는 것은 � 국 그들의 삶의 터전일 것이므로. 그러나 이방인에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사실은 그럴 가능성이나, 그 의미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 것 이었다. 그들에게 이 밀림은 되도록 빨리 빠져나가야 할 늪과 같은 것일 뿐 삶의 터전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노족이 그들의 근거지를 들켜 버린 것은 회복할 수도 없는 치명적인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 불행� 현 실은 이것이었다. 불바다를 이룬 마을. 그 속에서 아우성을 지르며 이리저리 쫓겨다니지만, 사실은 도망갈 곳이라곤 아무 곳도 없는 벼랑 끝의 현 실. 이윽고 충천한 화염을 등불로 삼아 토벌군이 진격해 들어왔다.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다시 말해 뗍� 적이고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연마해 온 정예의 군사들이 노족이 오늘 밤 당해야 하는 불행의 끝 마무리를 해주기 위해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선두의 한 무리 속에 진가소도 있었다. 훈련받은 병사일지라도 진격의 첫 북소리를 들으면 이성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한다. 사실은 그� 게 되도록 훈련을 받는 것이니 정예의 병사일수록 더욱 흥분한다. 진가소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엔 그 자신 뎬� 체 왜 그렇게 광분했을까 의아해 하며, 스스로를 혐오할 지라도 그 순간에는 살기를 번뜩이며 희생자를 ０� 되는 것이다. 두려운 것은 광분에 가까운 그 행위조차도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게끔 훈련된다는 점이 駭�. 하늘조차 태워 버릴 듯한 불길 아래 우왕좌왕하는 노족들을 활로 쏴 쓰러뜨리고, 언제라도 그 끝을 돌� 서 찌를 수 있도록 긴 창의 중동을 비껴 잡고는 마을로 달려들어간다. 보이는 사람 중 동료가 아닌 자들은 전부 적이요, 먹이. 그들은 지난 사 개월간 노족으로 인해 고생했� 한 풀이를 씨를 말림으로써 되갚아주려고 하고 있었다. 눈에 드러난 모든 생명을 죽이면 다음은 소탕이었다. 집안 구석구석까지 뒤져 아이와 여자까지 죽임으� 써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무차별의 학살, 하늘과 사람이 다같이 분노할 죄악을 그들은 � 포를 깔아 놓음으로써 반란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자행하고 있었다. 한 번 왔다가 돌아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 남 만의 오지에 그들은 한족의 공포를 심어 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가파른 절벽을 담처럼 둘러놓고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 족 부락의 외곽, 무엇에 쓰는 것인지 돌로 깎아 올린 제법 커다란 건물의 한 방에서였다. 진가소는 마을 중앙의 공회(公會)로 쓰였을 법한 건물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아니 그보다도 지금 이 퓜� 이 오히려 더 클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므로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하는 곳이라는 추측을 하며 건물의 안 막� 진입했다. 건물이 무슨 용도였던가 하는 것은 금세 알게 되었다. 중앙의 넓은 방에 장식처럼 둘러서 있는 무수한 석 상, 목상들과 거기에서도 중앙에 높이 세워진 팔 네 개, 다리 두 개의 여신상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 潔� 다. 여신은 오른손에 북을, 왼손에 불을 들고 있었다. 두 번째 오른손과 두 번째 왼손은 각각 하나는 앞을 銖� 손짓하고, 다른 하나는 왼발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이 신상이라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발로는 마 拷� 밟고, 뱀으로 팔찌, 팔 고리, 발목 고리, 그리고 양어깨의 띠까지 한 여인이 보통 사람일 수는 없을 것이 �. 그리 잘 만들어졌거나 세공이 정교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진가소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 들 야만인들이 모시는 신이나 마귀가 대개 그렇듯이 이 여신상도 무언가 짙은 공포감을 심어 주는 구석이 � 었 다. 더구나 이 여신상은 어쩌면 그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살육과 파괴의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자극적인 것은 사람을 빨리 지치게 하는 것인가. 역설적으로 진가소는 이 살기 짙은 여신의 모습 덕� 에 방금까지 살기에 젖어 광분하던 심기를 가라앉히고 한결 침착하게 건물 안의 나머지 방들을 뒤질 수 있었 �. 중앙의 신상들을 모셔 놓은 방을 중심으로 두 개의 문이 있는데 그가 들어온 반대편 문을 열고 나가자 거 기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십여 개의 방이 있었다. 진가소는 그 방들을 하나씩 뒤져 나갔다. 첫 번째 방은 침실 같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두 번째 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 번째 방에는 구석� 숨 어 떨고 있는 노파가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떨면서도 그 진물 흐르는 눈만은 증오로 번뜩이고 있는 � 파, 진가소는 창을 들었다가 다시 내리고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뒤늦게 동정심 따위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좀 더 그에게 어울리는 상대를 죽이고 싶을 � 이 었다. 저런 노파, 여자, 어린아이를 죽이면 다른 때보다 훨씬 악몽을 꾸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을 그는 경험 으로 알고 있었다. 다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방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벽에 걸린 장식품은 훌륭한 것 潔� 지만 값이 나갈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 구석에는 보석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부러 뒤져서 沮� 그런 것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황금, 혹은 보석을 열심히 모으는 녀석들을 본 적이 있지만 대개 그들은 옆� 의 손에 죽곤했다. 여기 남만에서는 쓰지도 못할 물건들 때문에 목숨을 버린 것이다. 일곱째 방에 바로 그런 것이 있었다. 그 방에는 돌로 된 제단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 점이 의� 스 러웠다. 진가소는 잠시 제단을 살펴보고 금세 그 장치를 알아차렸다. 그는 창을 겨누고는 제단의 옆을 발로 걷� 찼 다. 작은 계단. 그 아래에는 사방 여섯 자 가량의 좁은 지하실이 있고, 거기 울긋불긋한 복장을 한 사내 하나 가 숨어 있다가 그를 향해 덤볐다. 진가소는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이 자는 죽여도 된다'고 결정했다. 결정과 동시에 창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사내는 다른 노족의 전사들과는 달리 저항도 변변히 못하고 � 없 이 창에 꿰뚫려 죽었다. 그 뒤에 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금은으로 된 여러 가지 장신구들과 보석들이 들어있었 �. 아마도 이 사내는 그 상자와 더불어 토벌대의 눈을 피해 살아보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진가소는 사내가 이 노족의 지배자 중 하나일 거라고 추측했다. 지배자는 어디에서나 이 모양일 테니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양이의 눈처럼 생긴 보석으로만 골랐다. 다섯 개였다. 그는 그것을 발목을 덮� 신 발 안에 끼워 넣었다. 다른 보석들과 황금은 건들지 않았다. 그는 이 고양이 눈처럼 생긴 보석이 묘안석 猫眼 石)이라 불리며, 진주니 야광주 따위의 구슬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값이 나간다는 것을 운남에서 배 驩� 다. 묘안석은 둥글게 연마하면 그 중심에 가느다란 금이 생긴다. 이것이 영낙없이 고양이의 눈처럼 보이는 것 이다. 자세히 보면 그냥 한가닥의 눈이 생기는게 있고, 간혹 그 주위에 쌍거풀처럼 두 가닥의 선이 더 있 째� 있는데 이게 더 귀하고 비싼 것이었다. 지금 진가소가 고른 것이 그런 것이었다. 이 묘안석은 여기 남만� 서도 특정 지역에서만 나오는 것이고, 그 이외의 장소에서는 천하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는 보석이었다. 극히 드물 게 공물로나 들어오는 보석이니 그 값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 당연했다. 이것에 비하면 금강석(金剛石;다이아몬드)도 오히려 덜 귀중하게 취급되는데, 그것은 제대로 연마가 안 � 금 강석은 단지 강하고 투명하기만 할뿐 특유의 광채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금강석을 무슨 수� 연 마할 것인가. 몇몇 특이한 경우 자연적으로 팔각형의 결정상태에서 발견되기도 하는데, 물론 이것은 그 だ� 엄청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던 진가소가 다시 멈춘 것은 그가 죽인 사내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서였다. 보� 이 박힌 것도 아니지만 이상하게 그 칼이 마음에 들었다. 두께도 지금까지 그가 쓰던 것과 비슷하고, 길이도 그리 길지 않아 쓰기에 편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가지고 있던 칼을 칼집에서 빼내어 버리고 사내의 칼을 거기 끼웠다. 약간 빡빡하지만 나� 에 칼집을 조금 손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보았다. 마지막 여덟 번째 방에서였다. 이헤이달리. 그가 사흘 전 죽였던 그 여자가 여덟 번째 방의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한 순간 진가소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죽었다고, 그것도 그가 죽였다고 생각하고 애써 기억에서 지워� 린 여자가 살아서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밖에서 들려 오는 소음에 정신을 차렸다. 다른 병졸� 이 이 건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것이 그를 현실 속으로 다시 이끌었다. 진가소는 천천히 다가가 여인을 살펴보았다. 그는 이 여인을 독침으로 죽였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죽였다고 생각한 것일 뿐 죽인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숨을 멈춘 것을 확인은 하지 � 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여인은 중독은 된 상태지만 죽지는 않았다. 오히려 회복 단계였다. 진가소는 몸서리를 쳤다. 그의 독침은 여태 단 한 번도 누굴 죽이는데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너� 믿 었던 모양이었다. 여기 남만에는 독에 정통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쉽게 잊은 것이 �. 최초의 실패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도 지금 깨달은 교훈이었다. 만에 하나 이 여인이 � 신 을 차려서 그를 보았던 것을 말했다면, 그래서 그가 그들 노족의 근거지를 정탐하고 돌아갔다고 알려줬더 窄� 오늘의 기습은 여지없이 실패했을 것이다. 기습이 실패했더라면 당연히 그는 참형이었다. 황보엄이 아무� 온 화하다고 해도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돌아온 병사를 용서할 정도로 무른 사람은 아니었다. 진가소는 방금 그의 것이 된 칼을 뽑아 여인의 목에 대었다. 보다 확실하게 끝을 내는 것이 나으리라. 뗌� 니 뭐니 할 것 없이 지긋이 누르고 옆으로 긋기만 하면 된다. 그 순간 여인이 눈을 떴다. 처음 봤던 그때와 같이 큰 눈, 그리고 놀란 눈이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하다가 그의 얼굴� 확 인하고는 그 눈은 곧 공포에 질려 버렸다. 정신을 잃기 전에, 어쩌면 꿈속에서도 그녀를 죽이려 끝없이 쫓아다녔을 그가 이제 길고 괴로운 악몽 � 을 헤매다가 다시 깨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짧은 순간에 다시 앞에 나타난 것이다. 꿈속에서와 다름없이 �슬 퍼런 칼, 그 칼보다도 오히려 더욱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서. 그때 칼을 그었어야 했다. 아니, 그녀가 눈을 뜨기 전에 그냥 죽였어야 했다. 한 순간의 망설임이 조금 전까지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 일을 못하게 � 드 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지금 진가소가 그랬다. 한 순간 살기만이 존재하던 그의 눈이 그녀의 눈빛으로 � 염되 어 버렸다. 그는 내리그어 가던 칼날을 멈춰 버렸다. 이헤이달리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 공포의 그림자가 걷혀져 가고, 그 자리를 분노와 혐오 ㉯� 채우고 있었다. 진가소는 눈을 깜박였다. 이헤이달리의 눈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살기로 가득한 한 마리 짐승을 비추� 있 었다. 남의 땅에 들어와 무슨 권리로 아이와 여자를 죽이느냐고 그 눈은 묻고 있었다. 그 눈앞에서는 그� 단 지 한 마리 짐승일뿐이었다. 진가소는 눈을 감아 버렸다. 할 일은 빨리 해치우는 것이 가장 후회를 덜 남기는 방법 중 하나였다. 7. 문이 벌컥 열렸다. 발소리가 들렸다. "뭐야? 여기서 뭣해?" 그가 조금 전 말을 했다면 저랬을 법하게 살기로 가득한, 그래서 더욱 흉폭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때� 다. 돌아보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앞으로 나왔다. 안면이 있는 병사였다. "뭐야, 이거 여자 아냐? 야, 이거……!" 스물이 갖 넘었을 그 병사가 입술 가를 혀로 핥았다. 그 눈에 떠오른 탐욕을 진가소는 혐오스럽게 바� 보 았다. "야, 이거 맛있게 생겼는데……? 잠깐, 이제 얼마나 시간이 있지……?" 병사가 뒤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의 손은 벌써 바지춤으로 내려가 있었다. 진가소가 그를 밀쳐 버� 다. 병사가 눈을 부라렸다. "왜 이래? 난 그냥 잠깐 놀자는 거야! 원하면 네가 먼저 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잖아! 나도 차례는 안다 �!" 진가소는 그런 말을 하는 녀석의 입을 부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안으로 다시 집어넣으며 말 했다. 짐짓 어깨를 으쓱거려 보이며. 말보다는 이런 것이 더 위협이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 내가 먼저야. 넌 저쪽 건너편 방에 가 있어!" "뭘 그럴 필요가 있어? 그냥 여기서 구경이나 하며 기다리지. 재미있잖아?" 진가소는 다시 한 번 쥐어박아 주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대신 그의 어깨를 밀어 문밖으로 보냈다. 뭇� 에는 다른 병사들도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일곱째 방을 가리켰다. "저 방에 가면 내가 보낸 걸 고마워하게 될 거야. 서둘러!" 다시 돌아선 진가소는 이제 망설이지 않았다. 앞방과 같은 구조라면 여기에도 어딘가 지하실이 있을 � 이 다. 지하실은 여기도 침상 아래에 있었다. 진가소는 이헤이달리를 이불로 감아서 거기 밀어 넣었다. 어딘가 공 기가 통하는 구멍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묘족이라도 그런 것도 없이 지하실을 만들어놓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는 동안 이헤이달리는 그를 ㄴ치지 않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그가 말했다.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겠지." 알아 듣지도 못하겠지만, 혹시 알아듣는다고 해도 혐오에 가득한 그 눈을 향해 무슨 말을 더 할 것인가 진가소는 돌아서서 나왔다. 그리고 지하실의 입구를 침상으로 다시 막고, 거기 불을 붙였다. 방문을 나서서 복도를 걸어나오는 동안 그는 일곱 번째 방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보지 않아도 � 한 광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다행한 일이겠지만 한동안 병사들의 주의는 그 방에만 집중이 � 것 같았다. 살아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는 세 번째 방을 힐끗 들여다 보고 지나쳐서 걸었다. 짐작했던대로 노파가 죽어있었다. 처음 발견한 榴� 신 누군가가 손을 더럽힌 셈이다. 그는 다시 이헤이달리를 생각했다. 저렇게 되는 것보다는 숨막히는 지� 실에 숨어서라도 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살고나면? 부족이 몰살당하고 남은 빈터에 홀로 살아남으면 무얼하느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도 대답할 말이 궁� 질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사는 게 나았다. 무얼 하느냐는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두고두고 생각해보면 될 일이었다 노족의 집들은 불길 속에 무너져 가고, 살육에 지친 병사들도 피곤한 눈을 비비며 모여들고 있었다. � 시 전진이었다. 어디까지 가야 이 길이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황보엄과 남만정벌군의 길은 그후에도 한참을 더 남쪽으로 이어지며 무수한 피를 뿌렸지만, 진가소의 � 은 그로부터 석달 후 어느 날, 그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이상한 방식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그날 진가소는 황보엄에게 불려 갔다. 노족 토벌이 마무리된 이후 석달 만의 일이었다. 일개 병졸을 장군이 부른다는 것은 병졸의 처지에서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석 달 전 정탐이 성공했다고 해서 내려진 포상은 돼지고기 두 근과 술 한 병이었다. 그것이 다였고, 또 그 것으로도 만족했다. 고향을 만 리나 떠난 곳에서 돼지고기의 맛을 본다는 것은 작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부를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잘 한 일이 없는데 높은 사람이 부른다는 것은 그 반대의 경 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장군이 불러야 될 정도의 잘못된 일이라면 대개는 심각한 경우일 것� 다. 진가소는 유일하게 걸리는 일, 혹시 석 달 전 감춰 주었던 노족의 여인의 일이 발각되지나 않았는지 � 정 을 하며 백호당(白虎幢), 영자기(令字旗)를 위시로 숱한 기치(旗幟)들이 도열한 황보엄의 막사에 들어섰� . 황보엄은 그가 배례를 마치고 무릎을 꿇은 뒤에도 한참이 지나도록 탁자 위의 서류들만 들춰보며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진가소의 고개가 점점 처졌다. 이런 류의 일이 노골적인 질책보다도 더 무서웠다. 온갖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진가소는 속으로 되뇌었다. '난 잘못 한 게 없어! 잘못 한 게 없으니 겁낼 것도 없어!' 그는 입술을 깨물고 처지는 고개에 힘을 주었다. 그때 황보엄이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진가소입니다!" "진가소라……!" 황보엄은 그 이름을 처음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 속으로 굴리더니 불쑥 물었다. "무슨 자를 쓰지?" "예?" "가자는 무슨 자고, 소자는 무슨 자냐는 것이다." 너무 의외의 질문이었다. 진가소는 한참을 당황해 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옳을 가(可)자에 밝을 소(昭)자 입니다." "한번 써 보게!" "예?" "두 번씩 말하게 하는군! 여기 이 종이에 이름자를 한 번 써 보란 말이다!" 그러면서 내미는 종이를 진가소는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가 맞닥뜨린 사건의 종류가 이제 짐작이 갔� . '어떻게 발각되었나? 어떻게……?' 그는 찌르는 듯한 황보엄의 눈빛을 받으며 천천히 붓을 쥐어 진가소라는 석자를 종이 위에 썼다. 그런 것 이 드러날 리야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해서 외워 두었던 이름의 뜻, 혹시나 해서 연습해 둔 � 자 석자였다. 황보엄은 그 글자를 힐끗 보더니 집어던졌다. "형편없군!" 물론 형편없는 필체일 것이다. 애초에 그 석 자와 왕일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두 글자 외에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그였다. "원래 이름이 뭔가?" 진가소는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짐작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가 남의 충군형을 대신 살아 주� 있 다는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원래 충군형은 형벌 중에도 극형에 속한다. 사형 바로 아래가 바로 그것이었다. 형기도 그래서 종신(� 身), 즉 당사자가 죽을 때까지 하는 것과 영원(永遠), 즉 본인이 죽어도 자손과 친족이 대를 이어 형을 사는 � 종 류뿐이었다. 그런 극형을 받는데 속임수를 부렸으니 그 죄 또한 적지는 않을 것이다. "왕일입니다." 왕일. 그 이름을 입밖에 내놓은 것이 얼마만인가. 진가소는 자신의 이름이 마치 다른 사람의 이름처럼 낯설게 들리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 보 는 황보엄이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왕일이라……! 진가소보다는 좋은 이름인데 왜 남의 이름을 썼나? 강간으로 더럽혀진 이름보단 훨씬 � 지 않나?" 진가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이미 대부분의 것을 짐작한 상태일 것이니 더 말할 � 요 도 의미도 없었다. 황보엄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탁자 위에 쌓인 서류 중 하나를 들어 보였다. "진가소. 산동성 청주부 창주현 갈흉점의 토호 진고모(陳皐謨)의 자(子). 강간으로 종신 충군형을 받았 �. 그 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그는 순천부(順天府)의 뇌옥(牢獄)에 갇혀 있다는 군. 버릇을 못 고치고 적당을 꾸 � 강 도살인을 자행한 죄목으로. 그럼 여기에서 충군형을 받는 사람은 누구야? 어때, 이상하지 않나?" 일은 그렇게 된 것이었다. 황보엄은 진가소가 특이한 천품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문서를 찾아보았는데, 놀랍게도 강간범이었다. 瀏� 나 그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강간 따위의 범죄를 저지를 사람은 아니었다. 여기에 뭔가 흑 렝�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운남까지 가는 정기 연락편에 조사를 의뢰한 것이었다. 원래는 일개 병졸의 죄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당사자는 멀리 남만에 있 지 않은가. 그런데 일은 묘하게 되느라고 충군형을 받는 가짜 진가소를 잡아 처벌하라는 명령서가 삼 년 鰥� 이미 운남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황보엄은 미소를 지으며 진가소, 아니 이제는 왕일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은 병졸을 바라보았다. "어때? 세상 일이 묘하지? 삼 년 전에 제대로 명령서를 받았으면 난 자넬 운남으로 압송했을걸세. 그� 귀 찮으면 그냥 처벌했든지. 그런데 그곳 관리의 나태함이 자넬 살렸군." '살렸다'는 말에 왕일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황보엄을 쳐다보았다. 황보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미 많은 병사를 잃었네. 자네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내가 책임져야 할 죽음들이지. 그건 내가 지 斂� 이라서만이 아니라 나 때문에 여기 와서, 나 때문에 죽었다는 점에서 내가 져야 할 책임들이야." 그는 서글프게 웃었다. "나도 동한신이 나를 경계해서 이 사지로 밀어 넣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지. 바보는 아니니까 이미 오래 전 에 알고 있었어. 그러면서도 나는 그냥 명령에 따랐네. 그땐 달리 방법도 없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오기도 작용 해서 한 행동일세. 내 마음에 한 점 부끄럼도 없으면 그 따위 쥐새끼 같은 인물이 나를 어쩌랴하는 생각� 있 었던 거지. 언젠가 내막이 밝혀지면 그땐 굽었던 모든 것이 바로 펴지리라고 생각했던 것일세." 그는 다시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오만이었지. 세상을 너무 쉽게 본 것이고. 이젠 나도 그걸 알았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만큼 공평하 測� 않다는 것을." 왕일이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왜 뇌물을 쓰지 않으십니까?" 모든 병사들이 궁금해하고, 답답해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동한신이 뇌물을 쓰는데 그는 어째서 못 쓸 것인가. 동한신의 아버지가 제 아무리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한들 간관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나면 그 � 은 입을 다 막을 수는 없을 것 아닌가. 황보엄은 고개를 저었다. "뇌물을 쓸 돈도 없거니와, 쓰고 싶지도 않아. 이건 나도 잘 이해가 안되는 일이지만……, 그래서 일개 병졸 인 자네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정말 내가 잘못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 네. 명령을 따르고, 국가와 황상께 충성을 다하고……, 이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내 � 잘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진가소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원래 황보엄이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숨겨 두었던 묘안석을 내놓을 생� 도 했었다.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지만 여기에서 나갈수만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황보엄의 말을 들으면서 그 생각은 접어 버렸다. "장군님이 진정 이 남만을 못 나가시는 이유는 장군님의 마음 속에 있군요!" "그런가? 그런 것이겠지?" 황보엄은 허허 웃더니 다시 원래의 표정을 회복해서 탁자에 앉아 서류 하나를 작성했다. 그것을 그에게 던 져 주었다. "군역을 마치고 돌아가는 병사라는 증명서일세. 호패(戶牌:신분 증명서)도 으로인(路人:여행 증명서)도 이것 한 장으로 해결이 될 걸세. 물론 왕일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어." 진가소는 그것을 받아 들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칠 년이나 바래왔던 일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자 현실� 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황보엄이 그런 그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운남으로 가는 연락편이 오늘 출발하네. 잘 가게." 왕일은 병졸이 된지 칠 년하고도 사 개월이 더 지난 겨울에 끝없는 여름의 땅, 남만에서 군역을 마쳤다 집 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로부터 다시 칠 개월이 걸렸기 때문에 그가 창주로 돌아갔을 때는 다시 가을이었다 특이한 것은 마달도 그와 함께 중원으로 돌아왔다는 점이었다. 중독과 뱀에 당한 상처 때문에 앉은뱅� 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 군역 면제의 이유였는데, 놀랍게도 그는 운남에 도착하는 그 순간부터 들것에서 일� 나 걸어다녔다. 그 나름의 생존술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리라고는 둘 중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8. 황하의 북쪽에서 흐르는 물은 대개 그렇지만 기수의 강물도 흙탕처럼 혼탁한 물이었다. 왕일은 그 기� 의 강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강에는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이 흐린 강물이 요동치며 흘러가고, 강둑에는 누런 풀잎들이 바람을 따라 � 렁 이고 있었다. 왕일은 남만에서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하북(河北)의 역수(易水)를 지나간 적이 있는데, � 곳의 물도 여기처럼 혼탁했었다. 風蕭蕭兮易水寒 바람소리 쓸쓸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리.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러 가면서 불렀다는 노래였다. 왕일은 비록 배우지 못해 시는 읊지 못하지만 옛 땅을 보면서 옛 사람의 정취를 되새길 정도의 풍류는 알 았다. 속으로 형가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강변을 따라 걷는데 저만치에 나루터가 보였다. 강 건너편과 이 各� 오가는 나룻배가 서는 곳이었다. 거기 길가에는 인근의 아낙들과 장사치들이 좌판을 벌리고 차와 술, 떡 걋� 것들을 팔고 있었다. '셋째, 넷째에게 줄 떡을 좀 사가는 게 좋겠군.' 그에게는 동생이 셋 있는데, 둘째가 계집애로 왕령(王鈴), 셋째는 사내로 왕삼(王三), 막내도 사내로 � 말(王 末)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도 가난한 농사꾼으로 복잡한 이름은 짓지도 못하고 외우지도 못할뿐더러, 장차 아이 들이 커 봤자 쓰기도 힘들 것이니 그냥 쉽게 지어 준 것이다. 그래도 넷째를 왕사(王四)라고 짓지 않은 것은 죽는다고 할 때 왕사성(往死城)에 간다고 표현하니, 그 攬� 와 발음이 같아 재수가 없다고 해서였다. 사람들은 그가 여덟째를 나았으면 왕팔(王八)이라고 지었을 거 箚� 놀리곤 했다. 왕팔은 왕사보다도 못한 이름이다. 왜냐하면 자라 새끼라는 뜻의 왕바단(王八蛋)이라는 욕 � 흔 히 왕팔이라고 줄여서 하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제 어미와 붙을 놈'이라는 뜻의 욕이었다. 어쨌든 왕일은 길가의 장사치에게서 떡을 샀다. 그러다가 아버지 생각을 하고 술도 두 병 샀다. 운남� 서 묘안석 한 개를 팔아 그 일부를 여비로 쓰고, 남은 것을 가져왔기 때문에 돈은 많았다. 하나에 황금이 � 냥, 은자로는 이천 냥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가격을 받았으면 그 열 배는 받을 수 있� 을 것을 은밀히 거래하느라 그 정도 가격만 받은 것이었다. 일개 병사가 천금이나 나가는 보석을 판다고 하� 꺼 려야 할 것이 많은 법이었다. '이제 형편이 피는 거다.' 왕일은 가져온 돈으로 땅과 가축을 사서 농사를 크게 지을 생각이었다. 땅값은 잘 모르지만 아직 팔지 않 은 묘안석 네 개까지 합치면 이곳 갈흉점의 땅을 전부 사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는 필요 없었다 그 는 두 번 다시 배를 곯지 않을 정도의 재산이면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술을 파는 장사치의 태도가 이상했다. 이미 팔 년이나 지나 기억이 흐리기는 하지만 분명 몇 번 본 사람인데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많이 변했나?' 왕일은 속으로 웃음이 났지만 굳이 나서서 아는 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가면 친하게 될 사� 은 친하게 되고, 아니면 또 그것대로 좋았다. 장사치가 술을 내밀었다. 그는 술을 받아 들고 집을 향해 걸었다. 서둘러야 해가 지기 전에 집에 갈 수 있 을 것 같았다. 그 바람에 그는 뒤에서 장사치들이 혀를 차는 것을 듣지 못했다. 떡 장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떡을 사가 봤자 줄 사람도 없을 텐데." 술장수가 그 말을 받았다. "그래도 술은 필요하겠지!" "아마 많이 필요할거야." 천막 아래 긴 의자를 놓고 술을 마시던 노인 하나가 습관인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같이 앉아 있던 노 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어른 앞을 피해 저만치 나무 아래에서 술을 마시던 청년들 중 하나� 일 어서는 것을 노인은 보지 못했다. 물론 보았어도 별달리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술자리를 떠난 청년은 누런 흙에 붉은 수수밭, 그 사이로 난 넓은 황톳길을 걸어 옆 마을로 가고 있었 �. 수수밭은 바다처럼 일렁이고, 하늘은 그저 파랗기만 한데, 십리를 가도 사람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이 산동성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가을 풍경이었다. 창주도 이것에 예외일 수는 없다. 창주는 예로부터 땅이 척박하고, 물은 탁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땅은 아니었다. 봄여름으로는 가뭄이 휩 쓸고, 겨울이면 얼어붙는 추위에 키까지 오는 눈 더미에 갇혀 지내야 했다. 기름진 들판이라기 보다는 유 滑� (流刑地)라는 표현이 어울릴 땅이 창주인 것이다. 이렇게 거친 땅에 사니 사람들의 성격도 거칠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여기 사람들 중에는 유� 을 온 사람들이나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사람들, 혹은 그들의 자손이 많기도 했다. 말보다는 주먹이 빠르고,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도 어지간하면 칼을 썼고, 사소한 일에도 꼭 피를 봐야 물러났다. 그래서 천하를 종� 하는 대(大)표국의 표사들도 여기 창주를 지날 때는 기를 내리고, 칼은 가리고, 힘주어 치켜세워서 모양을 낸 어깨 를 세 치쯤 내려야 무사히 통과한다고도 했다. 창주에서 힘 자랑을 하다간 언제 맞아 죽는지도 모르게 � 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남북십삼성(南北十三省), 중원사십구주(中原四十九州)를 통틀어도 여기 창주, 그리고 창주 사� 들과 비견될 만큼 거친 곳은 광동성의 불산(佛山)밖에 없다고들 하는 것이 호사가들의 평이었다. 거칠다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타관 사람들에게 불친절하고, 어지간하면 반기지 않을 뿐 아니� 자 기들끼리도 무뚝뚝해서,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들 사나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은 의리를 중시 構� 한 번 정을 주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또 이들 창주 사람들의 기질이었다. 그런 사람 중에 손부자(孫夫子)가 있었다. 그는 삼, 사대쯤 전에 이곳으로 도망쳐 온 흉악범의 자손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그런 것은 이곳 창 翎� 서는 흉이 되니 감추고 말고 할 그런 일이 아니다. 물론 자랑도 아니다. 그런 것은 단지 옛날에 그랬다는 사실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손부자는 젊은 시절의 한 때 타관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마흔이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그의 얼굴에 길게 난 칼자국과 없어진 세 손가락에 대해서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타관에서 어떤 일을 했는� 자 세히 아는 사람도 없고, 알아도 다들 말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자신의 조상보다 조금도 덜 흉악하� 않 았으리라는 소문만 조용히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가 고향에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은 백부의 집에 가서 재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으� 서 물려준 유산을 백부가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백부는 재산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집에서 키우는 장정들을 손부자에게 보냈다. 손에는 흉기를 들 고서였다. 손부자는 고향에 돌아올 때 두 사람의 타관 사람을 데려왔는데, 그중 하나는 볼품없이 비쩍 마르고 왜� 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여덟 번째 장정의 팔목을 분질러 놓을 때쯤에는 아무도 그를 왜소하다고 비웃� 않 았다. 백부는 다시 강호에서 꽤 유명하다는 흑도의 고수를 데려왔다. 이것은 그가 동생의 재산을 갈취한 것� 다, 장정들을 보내어 조카를 위협한 것보다도 더 나쁜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 흑도의 고수가 손부자� 보 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절을 하고는 돌아갔을 때, 사람들은 이제 손부자가 백부의 목을 비틀어 버린다고 巒�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손부자는 백부를 죽이지는 않았다. 그저 백부의 전 재산을 빼앗고, 타관으로 쫓아 버렸을 뿐이었다. 정 聆� 대응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처럼 사람의 존경을 받게 된 데에는 뒷 이야기가 더 있었다. 그는 한 달이 지나자 타관에서 고생하는 백부를 다시 불러서 그가 가져갔던 재산에 이자까지 합쳐서 � 려 주고 고향에서 살도록 해 주었다. "마땅히 내가 받았어야 옳았을 재산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려 했을 뿐이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그가 한 말이었다. 이 한 마디로 그는 가장 사내다운 사내에게 붙여 주는 호칭인 '대형(大兄)'을 성 뒤에 붙이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 대형이라는 칭호가 '부자(夫子)'가 될 때까지 그가 한 일은 적지 않았지만 그중 어 � 것 도 의리에 어긋나는 일은 없었고, 사리를 탐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벼슬도 없고, 또 돈도 많지 � 았지 만 이 지방에서는 아직도 그가 나서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 손부자의 집 마당으로 청년이 들어간 것은 가을날의 서늘한 태양이 서쪽 들판을 붉게 물들인 수수밭 너 머로 반쯤 가라앉고 있을 즈음이었다. "왕일이 돌아왔습니다!" 손부자가 데려온 두 사람 중 하나, 왜소한 노인은 지금도 왜소했고, 물론 노인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타관 사람 정이노(丁二老)'라고 불렀다. 정이노인 것은 그가 스스로 정씨 집안의 둘째라고 한 때문이고, 여기 살기 시작한지 이미 삼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타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지방에서는 얼마나 오래 살 柰� 타관 사람은 항상 타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정이노는 달려와서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동전 몇 문을 술값으로 주고, 서재로 갔다. 손부자와 두다 � 바 둑을 계속 두기 위해서였다. 지금 전세는 '좌하귀에서 접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는 오랫동 � 숙 고한 끝에 우세를 점할 수 있는 한 수를 두었다. 이번에는 손부자가 장고에 들어갔다. 그 참에 정이노는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 던졌다. "왕일이 돌아오고 있다는군요." 손부자는 못 들은 것처럼 아무 대답도 않더니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얼마나 사내답게 되었는지 지켜보기로 하지." "그는 이곳을 떠날 때도 이미 사내다웠습니다. 가족을 위해 인생을 바친다는 건 작은 미덕이 아니지요. 손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저었다. 바둑판에 놓을 자신의 다음 수를 생각하며 그러는 것� 럼. 그러다가 말했다. "그가 도움을 청한다면 거절하지는 않겠다." 정이노는 말을 끊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움을 청하러 오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저는 그가 마땅히 미워해야 할 적도 찾아내지 못하리� 는 쪽에 돈을 걸고 싶습니다." 손부자는 혀를 찼다. 그를 만났을 때 정이노는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상태였었다. 그것을 구해 준 것이 恝� 이 되어 같이 다니기 시작한 이래 이미 사십여 년, 정이노가 도박을 끊은 것도 같은 세월이 흘렀다. 그런 � 아 직도 입에 그런 말이 붙어 다니는 것이다. "그 정도의 위인이라면 도와줄 필요도 없겠지." 간단한 문제였다.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는다. 청하지 않으면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칠십 평생을 지켜 온 신 뗄� 다. '하려고 들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공자(孔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들 중국인의 】옜� 수천 년을 전해 내려온 행동 격언인 것이다. 술장수의 예측은 빗나갔다. 왕일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는 땅바닥, 원래는 그의 집과, 아버지, 어머 �, 세 명의 동생이 살고 있었어야 옳았을 자리, 그러나 이제는 불타 버리고 남은 잿더미만 있는 그 땅바닥에 주 向� 아 있었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9. 아침이 오기전에 이슬이 내리고, 이슬의 차가움이 왕일의 정신을 현실로 돌이켜 놓았다. '누가? 그리고 왜?' 밤새도록 고민했던 두 가지 의문이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폐허가 자연스런 방� 으 로, 이를테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난 후에 세월에 쓸려서, 이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방화를 한 것이다. 그것도 서너달 전에. 창부의 거친 바람이 흙담벽에 남은 그을 습� 다 지우지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사를 간 것도 아니었다. 반쯤 무너진 흙담벽 사이에 낡고 깨어진 그릇들이 구르고 있는 것이 그 증� 였 다. 어머니는, 혹은 누이는 아무리 낡았다 한들 그릇을 버리고 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설혹 벼락부자가 � 어서 금수저 은그릇으로 밥을 먹게 되어도 귀퉁이 깨어진 낡은 오지 그릇 하나까지 부둥켜 안고 있을 사람들인 것 이다. 그리고 또 있었다. 그는 어젯밤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찾아낸 화살촉을 내려다 보았다. 이리의 이빨처럼 새하얗고, 뽀족한 삼각형의 밑변 양쪽으로는 날카로운 미늘이 돋아나 있어서 꽂히면 � 을 베어내지 않고는 ㅃ 수도 없는 화살, 소위 낭아전(狼牙箭)이라 부르는 화살이었다. 게다가 그가 지금 보 � 있 는 이 화살의 미늘은 아래로 갈수록 점점 긴 미늘이 삼중으로 돋아나 있는 것이었다. 이런 흉악한 형태, 잔인한 용도의 화살은 지옥같은 남만에서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 한 볕� 에서밖에는 사용하지 않는 화살이었다. 왕일은 고개를 저었다. "강호인들이 왜 가난한 농가를 건드린단 말인가!" 강호!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한 마리 눌러죽이는 것보다도 더 하찮은 일로 여기는 자들이 우글거린다는 그 �, 그곳에서는 이런 화살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의 가족들을 건드릴 것인가. 공간적으로는 같은 땅을 밟고 산다지만 그와 그의 가족들이 사는 세상과 강호라는 곳은 하늘 이쪽과 � 쪽 만큼이나 다른 곳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하늘만큼이나 두터운 벽이 가로질러져 있다. 그들은 서로 다� 하 늘을 이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 하늘이 무너졌다. 왕일은 고개를 들어 동천을 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들판을 메운 수수밭과 하늘뿐, 붉은 수수밭� 떠 오르는 태양이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움직일 때였다. 장이노(張二老)는 세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장대(張大)가 그중 맏이고 막내의 이름은 장소(張少)였다. 가난한 농가라 아들들에게 나눠줄 땅도 없고해서 그냥 결혼해서도 다들 한집에 모여 살았는데 다들 아� 를 낳아서 입은 많아졌지만 땅은 그렇게 늘지 않아 점점 더 궁핍해지기만 했고, 이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 가 없는 이상 당분간 점점 더 궁핍해질 예정이었다. 그 뾰족한 수를 막내가 가져왔다. 막내는 진가장의 집사인 진노육네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말하자면 하인의 하인인데 큰 돈을 만질 기� 가 생겼다고 희희낙락하면서 맏형에게 달려왔던 것이다. 과연 큰돈이 걸려 있었고 할 일이 어려운 일도 아니 駭�. 대신 양심을 팔아야 했다. 장대는 밤을 새워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바로 돈이 들어왔고, 그의 양심은 팔려 나갔다 양 자택일의 상황에서 마음은 항상 무거운 쪽으로 움직이는 법이고, 생존은 항상 양심보다 무거웠다. 그러니 이른 아침, 그래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니 이웃이었던 왕씨네 맏아들 왕일이 찾아왔을 때 � 의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계약을 이행할 때가 되었다. 팔아버린 양심을 다시 쳐다보아야 할 때가 � 것 이다. 왕일은 문간에 선채 어제 산 떡과 술을 장대에게 내밀었다. "초라한 것이지만 다시 뵈어 반갑다는 선물입니다." "무어 이런걸 다……, 고맙네." 어딜 가든 예물을 주는 것이 관습이고, 그 예물은 거절해선 안되는 것이 또한 관습이다. 시골은 특히 瀏� 으니 장대가 그걸 거절할 수는 없었다. 장대는 왕일이 내민 꾸러미를 뒤로 내밀어 집안으로 보내고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애써 웃어 보였다. "병역을 살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건강해보이니 다행일세!" "살아서 돌아온게 다행이었지요." "그래, 정말 그렇군! 살아서 돌아와 정말 반갑네!" 고개를 힘껏 끄덕이면서도 장대는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반가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자 신도 어느새 그 어떤 사람들 속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이……!" "집의 일은……!"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벌렸다가 동시에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장대가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먼 저 말을 꺼내었다. "집의 일은 정말 안 되었네. 그 못된 것들이……!" 그들은 여름의 비와 함께 왔다가 그 비가 그치기 전에 가버렸다.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도 없고, 어디� 근 거로 활동하는 자들인지도 모른다. 말발굽 소리가 울렸던 것도 같지만 빗소리에 가려져 제대로 못 들었고 나 중에 발자국마저 비가 쓸어가버렸다. 남은 것은 불에 탄 집과 다섯 구의 시체뿐이었다. 왕씨네 집과 이웃해 산다고 할 수 있는 몇몇 집에서 장정들이 나와 타다남은 뼈를 화장해서 이웃 묘당 廟 堂)에 안치하고나니 달리 할 일은 없었다. 관가에 알리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고, 자칫하면 알리러 간 � 람이 도적떼와 일당이라고 덤태기를 쓰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가려하지 않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유골을 안치한 묘당은 관리하는 사람이라곤 늙은 중 하나밖에 없어서 세월과 더불어 퇴락해가는 절간의 한 귀퉁이에 있었다. 누군가 왔다 갔는지 타다 남은 지전 부스러기가 가을 바람에 날리고, 유골함을 넣어둔 �감 의 문이 여기저기 부서져 있기도 한 초라한 묘당에 서서 왕일은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는 중간에 한 마디도 묻지 않았고, 미진한 구석을 캐물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 와 동생들의 유골 앞에 머리를 조아려 명복을 빌고는 돌아서서 장대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장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젠 진실을 말해 주십시오!" 장대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그러나 왕일의 눈을 정면으로 대하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눈을 내려깔고 침을 몇모금 삼켰다. 이 떱� 땀이 흐르는 것이 왕일의 눈에도 보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끝까지 잡아떼는 것 뺐� 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그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왕일의 눈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다 江�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다시 입을 벌렸지만 이미 했던 말과도 다르고, 방금 하려던 말과도 다른 것이었다. "동생 녀석이 진노육의 집에서 일을 하는데……!" 진노육의 집은 갈흉점에서 외곽으로 치는 한 귀퉁이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는 왕일의 집과 같았지만 � 외에는 비슷한 점이 한 군데도 없었다. 막막한 들판에 그래도 숲같이 생긴 나무 수십 그루가 집을 둘러� 고 있어서 방풍림의 역할을 해주고, 세 길이 넘는 높은 담장이 다시 바람을 막았다. 제법 허공을 차고 맵시 斂� 솟아오른 처마 끝에는 풍경이 달려 있고, 용마루의 양쪽 끄트머리에는 이름 그대로 용두머리가 달려서 하 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올해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진노육은 벌써 진가장의 관사 일을 그만두었다. 이만큼 재산을 벌고, 이 매� 살게 되니 한창 때 그 잘 구부러지던 허리도 뻑뻑해지고, 주인의 귀를 녹이던 혓바닥도 옛 부드러움을 잃 該�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그의 아들이 일을 이어받아 진관사라 불리게 만드는, 작은 차원에서의 권력 승계 � 제 대로 이루어 졌으니 그만 쉬어도 좋을 형편이기도 했다. 왕일은 지금 진노육의 집을 바라보는 숲 가장자리의 나뭇가지 그늘에 앉아 꼼짝도 않고 있었다. 땅거� 가 질 무렵 여기 와서 이제 달이 휘영청 밝으니 적어도 두시진은 이렇게 있었을 것이다. 하루종일 이리저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일가의 최후와 집을 태웠다는 그 도적들의 정체에 대해 묻고 � 니 는, 남들이 보기엔 당연하지만 이미 내막을 거의 짐작하고 있는 그로서는 무의미한 일을 하고난 후 주점� 가 서 죽도록 술을 퍼마시는 모양까지 보여주고는 은밀히 여기로 온 것이다. 우선은 진노육이 그를 경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음은 장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 나중에 일이 벌어졌을 때 그들은 최소한 누가 사건에 대해 불었는지 한 번쯤 고민은 할 것이다. 일을 다 틈� 사람이 장대 하나뿐이니 결국엔 장대가 고생을 좀 하겠지만 그것까지 그가 책임질 수는 없었다. 이런 상 꼬� 이 정도까지라도 신경을 써준 것을 그는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달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파고들어왔다. 왕일은 기대고 있던 가지에서 일어나 짐을 풀었다. 더러운 천으로 친친 동인 길쭉한 물건, 운남에서 여 瘦� 지 가지고 온 넓적한 칼이었다. 그 지옥같은 남만의 나날들을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원을 가로질� 오 는동안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가져왔던 것인데, 이젠 그나마 정같은 것이 들어 어찌어찌 몸에 지니게 되었� 것 이다. 그 칼을 꼬나들고 왕일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저택의 담 그늘에 몸을 가리고 뒷편으로 돌아� 다. 진노육의 처소가 대충 저택 뒤쪽에 있다는 것을 들은 때문이었다. 그가 볼일이 있는 사람은 진노육 하나뿐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벌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자세한 내막을 알아내기 위해서. 세 길이나 되는 담장은 결코 넘기 쉽지 않았다. 그가 밧줄이나 갈고리를 던져 넘어가는 수법 같은 것은 배 워보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알고있는 이상 준비는 되어 있었다. 왕일은 이미 준비된 길쭉한 나뭇가지 두 개를 들어 한쪽 끝만 묶었다. 그 중간쯤에 작은 가지 하나를 � 쪽 으로 묶으니 어설프나마 사다리 비슷한 것이 되었다. 그는 그것을 담장에 기대 세우고 조심스럽게 기어올 箚� 담장 위에 몸을 올렸다. 그런 다음 사다리를 끌어다가 담 이쪽 편으로 내려놓았다. 다시 도망가려면 이게 없으 면 안되는 것이다. 달은 밝았지만 정원은 조용했고, 그 한쪽에 늘어선 방들도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왕일은 정원 구석� 숨 어 장대에게 들은 집의 구조와 지금 보고있는 것들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진노육의 처소로 생각되는 것� 분 명해지자 거기 다가갔다. 방안에서는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왕일은 잠시 망설였지만 직접 들어가 확인해보지 않� 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문을 조금 당겨보고 안에서 문고리가 가로질려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칼을 문틈으로 집어넣어 � 고 리를 벗겨내었다. 퉁! 문고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고 그냥 잘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여 러모로 편하다. 왕일은 문을 조용히, 그러나 신속하게 열어젖히고 방 한쪽에 있는 침상을 향해 뛰었다. "누, 누구……?" 침상에서 한 사람이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왕일은 그 소리가 나는 곳 바로 아래, 진노육의 목덜� 에 칼날을 가져다 대었다. 10. "뭐, 뭐야? 누, 누구야?" 진노육은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듣지도 못할만큼 � 용 하고, 조심스러웠다. 어두운 방에서도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칼날의 차가움이 그를 조심스럽게 만 � 것 일게다. "나 왕일이요. 기억하시겠지?" "와, 왕일……! 자네가 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여긴 왜……?" 왕일은 진노육의 하얀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칼을 더 바짝 붙여 한줄기 칼집을 그 늙은 모가지에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이 그가 지금 충분히 살기에 젖어있음을 보여주었다. "난 당신과 승강이할 시간이 없소. 내가 알고싶은 것은 단 둘이오. 하나, 왜 은자 스무 냥을 주겠다는 善� 을 지키지 않았는가? 둘, 왜 도적떼를 가장해서 우리 집을 태워버렸는가? 아……, 미안하오! 한 가지 더 玲�. 그 도적떼가 누구인가도 말해줘야 겠소." 진노육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나이는 밥만 많이 먹는다고 공으로 그냥 같이 먹게되는 것이 � 니 다. 그는 이 짧고 위험한 순간에도 말해주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둘 중 어느쪽이 유리할지 머리를 굴리 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것을 아는 이상 그럴 시간을 줘서는 안될 일이다. 왕일은 진노육이 덮고자던 이부자리를 끌어당겨서 그 입에 틀어넣었다. 칼자루로 꾹꾹 눌러서 입이 메어 터질 정도가 될 때까지. 그리고는 말했다. "쉽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걸 아오. 오랫동안 진가장의 개노릇을 했으니 조금이라도 충성심이 남아있겠� 라 고 생각하는건 아니오. 당신은 아마 있는대로 얘기를 하면 살려줄까 의심하고 있는 것이겠지? 미안하지� 나 도 그걸 잘 모르겠소. 하나 내겐 시간이 없고,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다 듣고싶소. 그러니 알고있는 것 � 다 말할 수 있도록,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기억이 나도록 조금 도와드리겠소. 그럴 기분이 되면 고개를 끄� 이시 오!" 그는 양손으로 진노육의 팔을 잡고 뒤로 비틀어 관절을 뽑아버렸다. 특별히 힘이 많이 들지 않고 요� 만 있으면 되는 이 기술을 그는 남만에서 배웠다. 권법을 좀 배웠다는 동료에게서. 어떤 일이든 그렇지만 같 � 기 술이라도 숙련의 정도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나뉘게 마련이다. 이 경우에는 아프게 하느� 안 아프게 하느냐가 숙련의 척도였다. 안 아프게 하려면 다년간의 연습이 필요하지만 왕일은 그렇게까지 배우지는 못했고, 지금은 물론 그럴 필 요도 없다. 오히려 더 아프게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인 것이다. 진노육의 늙은 육신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안구가 눈을 빠져나올 정도로 튀어나왔다. 더 벌릴 수 � 을 것 같았던 입이 조금 더 벌어졌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콧구멍으로 거친 숨을 토해내는 것으로 陋� 지금 받고있는 고통의 극히 일부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더한 고통은 이제 시작될 참이었다. 진노육은 어깨 관절이 빠져 맥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는데 � 일 은 그의 손가락을 바닥에 가지런히 펴고 있었다. 그리고 칼자루를 아래로 들고는 공이질하듯 치켜들고 있 駭�. 진노육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빻아서 육포로 만들어버리려는 듯이. 진노육은 할 수 있는만큼 고개를 빼서 왕일이 하는 일을 보려고 애썼다. 정신을 잃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공포에 질린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눈에는 왕일이 하는 일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들어왔고, 어둠으로 가려진 부� 은 또 그것대로 공포를 가중시켰다. 무엇보다도 그의 눈에는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까지 잡힐 듯이 보이고 � 는 것이다. 왕일이 첫 공이질을 하기 전에 이미 그의 고개는 미친 듯이 위아래로 끄덕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정� 게 도 왕일은 칼자루를 내리 찍었다. 쿵! 첫손질에 손 가락이 화끈해지고, 두 번째 손질에는 그 감각마저 없어져 버렸다. 대신 칼자루를 들어올 굡� 마다 천개 만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유황불로 뼛속까지 태우는 듯한, 또 한겨울 얼음물 깊숙히 손을 � 었을 때처럼 뼛속깊이 쑤시고 저리는 고통과도 비슷한 고통이 진노육의 손가락을 타고 머리로 바로 연결되었다 그는 거품을 물고 혼절해버렸다. 아늑한 혼돈, 그러나 그 혼돈조차 길지 않았다. 그가 타오르는 고통� 다 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왕일이 두 번째 손가락을 육포로 만들려고 손을 들어올리고 있을 때였다. 진노육은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발버둥을 쳤다. 늙은 목이 피로해 떨어져 버릴 정도로 끄덕였다. 지금 藍� 이 그를 볼 수 있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이 미칠 듯한 고통이 멈추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 絹� 말할 수 있고, 무엇이든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일이 그를 힐끗보고는 손을 멈추었다. "생각보다 빨리 현명해지셨군. 너무 빨라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오. 하나쯤 더 뭉개드려야 진심� 나 올 것 같은데……!" 진노육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진심은 이미 나왔다. 아니, 나오려고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러니 제발 말할 수 있도록, 몽땅 털� 놓을 수 있도록 해달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말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젓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고, 그나마 慕�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바꾸었다. 혹시나 고개를 젓는 것이 부정의 뜻으로 받아들여지면 어쩌나, 아니 � 시나 이것도 왕일의 말이 맞는 것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몰랐다. 진노육은 젓지도 끄덕이지도 못하고 왕일의 눈만 애타게 바라보았다. 너무 다급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 고, 실제로 그는 이미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왕일은 그 눈물을 보고서야 비로소 진노육이 그에게 숨김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으리라고 확신하게 되었 �. 눈물을 쏟으며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이나 여인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남자에게는, 그것도 호령을 濱� 것보다는 남을 호령하면서 사는 것이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얘기부터 합시다. 왜 처음의 은자 열 냥 이후에는 더 주지 않았소? 약속은 분명 은자 스무 냥 潔� 을텐데?" 진노육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손가락이 여전히 아팠지만 더 뭉개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 는 충분히 힘을 내고 있었다. "내 잘못이네. 죽여주게." 왕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손가락을 까닥여서 진노육의 시선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잇사이로 뼈� 뱉었다. "한 번만 경고해 두지만 내가 묻는 것외의 말은 필요 없소. 당신 잘못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이 이미 다 알 고 있는 것이고, 죽여달라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있소. 난 진심에서 우러나 � 털 어놓는 소리만 필요하오.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그것까지 진심으로 받아들여 주겠소. 자, 죽여줄까� ?" "아니, 아닐세. 난 살고싶네. 제발……!" 진노육은 다시 한 번 자존심이 꺽였다. 동시에 빌 자유마저 허락되지 않는 극한 상황에 자신이 처해 � 음 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는 있는 그대로 불기 시작했다. 그날 왕일에게 교섭하러 갔을 때 본 누이동생 왕령의 미모가 이 모든 일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 리 고 사 년 전 진가소가 체포된 것이 파국의 불씨였다. 진노육은 왕령을 기루에 팔기보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여색을 좋아하는 진가소에게 바쳐 자� 의 충성을 증명함으로써 노후까지 보장받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왕령을 수중에 넣어야 했고, 그 전에 왕씨집이 계속 궁핍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 痼� 약속된 은자 열 냥을 더 주지 않은 이유였다. 왕일의 아버지 왕노인은 자식을 팔고도 받지못한 은자 열 냥을 받아내기 위해 뻔질나게 진노육의 집을 드 나들었다. 진노육은 돈은 주지 않고 왕노인을 구슬궈 딸을 내놓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 다. 집안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도록 왕령을 꼬드기는 것, 그녀를 보여주고 진가소의 넋을 빼놓는 것, 방 좡� 자식을 달래기 위해 미색이 고운 첩을 들여주는 것이 좋다고 진장주를 회유하는 것 등은 그리 어렵지 않� 일 이었다. 그러나 막상 왕령이 첩으로 진가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사단이 발생했다. 맛� 라지만 며느리를 맞으러 나온 진장주가 왕령의 미모에 혹해버렸던 것이다. 진장주는 그자리에서 아들의 혼례식을 취소하고 왕령은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였다. 왕령에게는 며느리� 다 는 자신의 첩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어머니보다는 자신의 첩이 더 급했던 사람, 진가소는 아버지의 이런 행동을 패륜이라고 생각� 고 광분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왕령의 신방에 쳐들어가 패악을 부렸고, 아직은 집안의 실권을 거머쥔 � 장주 의 명령에 의해 광에 갇혀버렸다. 나중에 풀려나자 진가소는 거액을 들고 집을 떠나 버렸다. 어쨌든 그것으로 일은 대충 마무리 된 것 같았다. 진장주는 첩을 얻어 행복하게 되었고, 왕노인은 부자 사위를 둬서 행복해졌다. 진노육 또한 사람은 달 鄕� 만 어쨌든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되어 행복했다. 나중에 진가소가 어디서 배웠는지 무공을 익혀서, 릴� 만 해도 두려움에 젖을만큼 흉악한 자들을 형이니, 아우니 해가면서 데려오기 전에는. 그가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하인들 중 가장 건장한 자를 한 주먹에 때려 죽이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새 어머니인 왕령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자기 방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진장주는 그 동안 아무 소리 못하고 驛� 에서 떨고 있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또 진가장 나름의 방식대로 왕령의 신분이 바뀌었다. 어제의 새어머니에서 오늘의 며느리, 그 리고 첩으로. 전과는 다르지만 왕노인은 여전히 행복했고, 진가소도 행복해 했다. 그리고 드디어 밖에서 사고를 치고는 진가소가 잡혀가는 날이 왔다. 하루아침에 진가장의 하늘이 바뀌� 다. 진가소과 목숨을 나눈다던 의형, 의제들은 혹은 도망가고 혹은 진장주에게 붙었다. 그들에게는 돈을 쥔 자 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왕령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왕노인은 여전히 행복했는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진장주가 아무리 여색을 좋아해도 아들놈과 한 구멍 동서가 되는 것을 원하� 는 않았다. 그는 그녀를 두들겨서 집으로 쫓아내 버렸다. 이전까지 왕노인에게 주었던 전답들이 몽땅 회수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왕노인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태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던 왕령도 마찬 ≠� 였다. 행복하지 않으니 불평이 나오게 되고, 한 사람이 계속 불평만 하게 되면 듣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 련 이었다. 게다가 진가장에서 일어난 일은 알려지지 않은 것도 많았고, 알고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은 일들이 駭�. 반면 본인들은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일이었다. 진장주는 고민했다. 그 고민의 해결은 진가소가 남겨준 장사들, 소위 강호의 협객들이 은인의 어려움을 보 고 참지 않고 나섬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들은 어디서 불러왔는지 모르는 도적단을 불러들여 불평의 진원지이자, 유일한 증인인 왕씨네 가족� 을 학살하고 불을 일으켜 흔적마저 없앤 뒤 사라져버렸다. 억수같이 비가 퍼부었던 지난 초여름의 일이었다. 11. 왕일은 그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진노육이 말을 끝내자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말� 게 하고 그것도 조용히 듣기만 했다. "한 번 더 말해 보시오!" 두 번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그는 또 한 번 이야기를 시켰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부적인 것까지 꼼� 히 묻고 따져 가면서 들었다. 세 번의 이야기가 모두 일치했다. 거기에는 사소한 망각이나 착오라고 생각되는 것 외에 특별히 상충� 는 사항은 없었다. 진노육은 성의껏 털어놓은 것이다. 왕일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그의 눈은 진노육을 향해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 고 있지 않았다. 그의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강렬한 분노가 솟구쳐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 분노는 그 다음에 치밀어 오른 깊은 슬픔과 타오르는 수치에 또 가려져 버렸다. 그가 없는 동안 누이가 당했던 모멸과 고통이 몸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가 없는 그 동안에 그의 가� 이 당한 모욕이 - 그렇다! 그것은 차라리 죽이는 것보다 더한 고통, 더 이상 심할 수가 없는 모욕이었다! - 그의 얼굴을 태워 버리는 것 같았다. 그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그러나 뜨 탓� 눈물이었다. 진노육은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표정 없이 굳어진 얼굴에 흘러내리는 두 줄기 눈물, 손에 들려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뭉툭한 칼 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오는 달빛 아래 또렷이 보이고 있었다. 흔히 보는 칼보다 폭이 넓고, 직선에 가깝게 뻗은 도신은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휘어진 곡선을 그리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끝은 부러진 것처럼 도신과 직각으로 잘려져 있었다. 언뜻 나무 할 때 쓰는 박도(朴刀 처럼 보이지만 거기 반사되어 부서지는 달빛의 섬뜩한 예기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진노육은 칼날을 보면 볼수록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칼은 날카롭든 그렇지 않든 칼이고,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도 그의 길고 행복했던 시간들로부터 미래를 잘 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칼을 든 사내는 그럴 이유도, 결의도 가지고 있다. 그는 왕일의 눈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오는 푸른 달빛,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푸른 칼날, 그리고 왕일의 눈꼬리에 매� 린 푸른 살기……. 이 셋은 지금 동일한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고, 그 어느 것도 차가운 살기에 젖어 있음에는 예외가 아� 었 다. 진노육의 뇌리로 온갖 생각들이 스쳐지나 갔다. 지난 오십여 년의 세월 동안 겪어 왔던 모든 일들이 � 꺼 번에 뭉뚱그려져서 혼탁한 강물처럼 그의 머리 속을 흘렀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생각만은 비수처럼 명확 構� 번뜩이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냐?' 가난한 집에서 사내가 팔려 가고, 계집아이가 팔려 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도,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溝� 아니다. 그냥 그게 현실일 뿐이다. 그렇게 팔려 간 아이들이 죽거나 망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 역시 현실이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더 드문 일인 것이다. 왕일은 팔려 갔지만 살아서 돌아왔다. 왕령도 팔려 가 기녀나 하녀처럼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여자가 洸� 의 첩으로 팔려 가는 것 이상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나마 호강했고, 두 사람의 �렬 한 아낌을 한 몸에 받지 않았던가. 덕분에 그녀의 가족들도 호강을 했다. 비록 한때의 일이고, 지금은 아니지만……! 그런데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준 공로자가 왜 칼 앞에 위협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진노육은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았다. 지금 그는 오히려 분노하고 있었다. 좋은 일에 합당한 대우를 些� 는 못할망정 목숨을 위협 당하다니……! 그때 칼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진노육의 분노는 한 순간에 사라지고 그는 다시 공포의 구덩이로 굴러 떨어졌다.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죽 음의 힘, 그 도구인 칼의 힘은 한 사람의 생각을 백짓장처럼 지워 놓고, 또 오십여 년 뻣뻣이 힘을 주었� 목 뼈를 녹여버리며, 한평생 지녀 온 자존심을 송두리째 버리고 개처럼 빌게 만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메어 말할 수도 없었다. 입술이 바싹 말라 잘 떼어지지도 않았다. 사 퓽�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단지 그를 노리는 칼끝만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 駭�. 그 저주스런 흉기를……. 왕일이 말했다. "당신에게 세 가지 죄가 있소. 내 몸값 은자 열 냥을 덜 지불한 것, 내 누이를 진가소에게 첩으로 팔았 만� 서도 그 아버지에게 넘어가도록 두어 부자가 교대로 농락하게끔 내버려둔 것, 마지막으로 내 가족이 몰살 풩� 록 방조한 죄요."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진노육은 어떤 사람은 불같이 화를 낼 때보다 얼음처럼 차가울 때 더 무섭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 � 다. 지금 왕일이 그렇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이 놈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 더욱 지독한 놈이 퓸� 돌아온 것이다. 그는 왕일의 손에 적어도 열 명 이상의 사람을 죽인 피가 묻어있을거라는 것에 내기를 걸 諍�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왕일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염라대왕의 판결처럼 들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일이 한 가지 한 가지 그의 죄목을 말할 때마다 그 목소리는 귀에 천둥처럼 울리고, 머릿속은 번갯� 이 비친 듯 창백하게 탈색이 되었다. 진노육은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는 개처럼 비굴한 눈빛으로 왕일을 바라 린�, 오직 자비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번쩍이며 그를 스치는 한 생각이 있었다. "잠시……, 잠깐……! 자네가 들으면……, 자네가 들으면 기뻐할 일이 있네!"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그렇게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한 생각이 떠오르자 섬광처럼 빠르게 흐르는 것 같 았다. 진노육은 왕일의 칼날이 금방이라도 목에 파고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급하게 얘기했다. "자네 누이는 살아 있네! 그들이 데려갔어!" 원래는 흥정을 한 다음에야 얘기할 일이었다. 목숨을 보장받고, 안전해진 뒤에야 천천히 얘기해 줄 일 潔� 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런 여유를 가질 때가 전혀 아닌 것이다. 어떤 때 사람은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왕일은 � 드 시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진노육 자신은 칠 땅도, 그럴 힘도 없게 풔� 것이다. "자네 누이는 구지룡(九指龍) 증국영(曾國英)이 데려온 그 도적 떼가 데려갔네. 채주에게 바치니 어쩌� 하 면서 데려갔으니…… 죽이지는 않았을 걸세." "구지룡 증국영……?" "소장주가 데려온 사람일세. 원래 소장주는 다섯 명을 데려왔었는데 강호에서 노산삼호(勞山三虎)와 황 絿� 룡(黃河雙龍)으로 알려진 사람들이라고 했네. 소장주가 잡혀간 뒤 노산삼호는 떠나 버렸지만 황하쌍룡은 팁� 남아 있지. 그중 대형이 그 사람 증국영일세. 다른 하나는 독각룡(獨脚龍) 송원도(宋遠道)라고……!" "그래, 그렇군……!" 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 분노와 슬픔만 가득하던 그의 가슴에 한 가닥 불꽃이 당겨졌다. 일껏 죽을 고생을 하고 돌� 온 집이 잿더미가 되어 버린 지금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이 원한을 풀어야 할지 막막하던 참이었다 무 엇보다 강력한 무기력감이 그를 휘감고 있던 중이었다. 누이의 얘기를 듣기 전만해도. 그러나 이제 한 가지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살아 있는 이상은 반드시 누이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원한보다 중요한……! '그래 원한이 있었지!' 왕일은 새삼 깨달은 것처럼 진노육을 내려다보았다. 어제까지는 없던 무엇이 그의 가슴에 새겨져 버렸다. 원한이었다. 집안을 파괴하고, 누이를 능욕하고, 琉� 속인 진가장에 대한 원한……! 피를 뿌려 씻어야만 지울 수 있는 상처, 그것이 원한이었다. 왕일은 천천히 칼을 들어올렸다. 진노육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가는 수염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바 싹 마른 입술이 벌어졌다. "나, 날 죽일 셈인가……? 누이의 행방까지 알려줬는데……? 제, 제발 용서해 주게……!" 그는 갑자기 방 한 구석으로 기어가더니 침상 아래에서 뭔가를 꺼내려 했다. 그러나 팔은 축 늘어져 � 직 이지 않았다. 그는 절박한 표정으로 왕일을 바라보았다. "여기, 여기 돈이 있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많아. 제발 목숨만 살려주게나 " 왕일은 천천히 발을 들어 진노육의 턱을 걷어찼다. 진노육이 침상 구석에 꼬꾸라졌다. 왕일은 다시 발� 들 어 진노육의 턱을 밟았다. 진노육의 목구멍으로부터 억눌린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왕일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사람을 처음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장에서……, 명분과 이유가 있는 살인이었다 그 런 것은 사살이라고 부르지 살인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진노육을 죽이면 그는 진짜 살인� 하 게 된다. 사람같이 보지도 않긴 했지만 어쨌든 어렸을 때부터 보던 동향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발에 힘을 주었다. "으어어어-!" 진노육의 비명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유를 설명해 줄 수가 없을 것� 다. 부서진 턱으로 오늘 밤 생긴 일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시간이면 繹� 했다. 왕일은 돌아서서 방을 뛰쳐나왔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하녀가 오는 것이 보였다. 진노육의 방에서 난 소 �를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는 하녀를 밀쳐 버리고 담을 타넘었다. 뒤에서 요란한 비명 소리가 퍼지고 羚� 다. 왕일은 들판 사이, 수수밭을 가로질러 뛰었다. 달은 이제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고, 하늘은 더욱 어두워 낫�. 그러나 이곳은 그의 고향, 어려서부터 그는 이 바다같이 넓은 수수밭 사이를 뛰며 술래잡기를 하곤 했� 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도 가고자 하는 곳에는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진가장은 특히 찾기 쉬우니 문제가 騙� 다. 그는 지금 진가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혈채(血債)에는 임자가 따로 있는 법이라고 했다. 이 모든 일이 진노육이 중간에 만들어 낸 것일지도 霽� 지만, 개를 시켜 물게 했다고 개를 때릴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책임은 주인이 져야 할 것이다. 진노육이 혹시 소식을 보내기 전에 먼저 가서 처리를 하고 빠져나와야 했다. 그가 돌아온 바로 다음날 사 실을 파악하고 들이닥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일이 밤새 뛰어 진가장에 도착했을 때, 담을 넘어 들어간 진가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 를 기다리고 있었다. 흑천(黑天). 달은 지고 해는 아직 솟지 않아 하루 중 가장 어두운 그때에 진가장의 마당도 그렇게 어두웠다. 그러나 왕 일이 담을 넘어 들어가 반쯤 허리를 구부려 주위를 돌아보는 그 순간에 진가장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왕일을 둘러싼 사방에 횃불을 든 하인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12. 횃불의 수는 열 둘, 사람은 아마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 왕일의 정면, 횃불을 든 사내들의 중심에는 비대한 체구의 사내가 서있었다. 흐릿한 윤곽 속에서도 그� 진 가장주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진가장주가 불빛 아래로 나와 호령했다. "네 이놈, 네놈이 누군지 내 안다! 병영에서 도망쳐 나왔으면 목숨이나 부지한 것으로 고마워하며 살� 야 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내 욕을 하는 것은 무슨 심사냐? 또 네가 내게 원한을 품을 이유는 뭐가 있길� 감 히 흉기를 들고 담을 넘어! 네가 그러고도 살길 바라느냐?" 평생 호령만 하고 살아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그 목소리에는 깔려 있었다. 평생 � 리 를 숙이고 살아온 가난한 농군, 왕일의 아버지 같은 사람은 연습을 해도 저런 목소리는 낼 수가 없을 것� 다. 그것이 왕일의 분노를 더욱 깊게 했다. 예전 같으면 듣는 즉시 본능적으로 허리부터 숙였을 것이지만 이제 그 목소리는 그의 가슴 깊이 가라� 아 있는 반항심과 원한을 더욱 격발시키고 있었다. 왕일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되도록 어두운 곳을 바라보았다.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하고 하는 행동� 었 다. 첫째로 눈이 불빛에 적응되도록 하는 것, 둘째로는 그가 겁먹은 것처럼 보이도록 해서 방심하게 만드 � 것 이었다. 방심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눈은 적응이 되었다. 사실 스무 명이나 둘러싸고 있다면 그 가 뭘 어떻게하든간에 이미 방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충분히 그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왕일은 칼을 꼬나 잡았다. 완만하게 휜 판자조각 같은 칼날이 불빛을 받아 군청색의 쇳빛을 발했다. 공 涌� 무두질을 해 종이처럼 얇게 가공한 쇠가죽을 겹겹으로 감은 손잡이가 손바닥에 착 달라붙어서 어깨에까지 힘 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오연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 눈이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 앉아 있었다. 이런 일련의 행동이 진가장의 마당을 짙은 살기로 채웠다. 이것은 열기에 들뜬 흉폭한 맹수의 살기 따� 가 아니었다. 적어도 열 손가락을 넘는 수의 사람을 죽여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살인자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진가장에 있는 하인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한 번도 이런 살기에 접해본 적이 없� 기 때문에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단지 왕일이 건방을 떨고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들 중 적어도 반은 왕일을 알고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왕일의 형뻘이었다. 그들이 코밑에 거뭇한 수염을 만져가며 후미진 동네 외곽에서 훔쳐온 오리를 안주로 술을 걸치고, 못된 짓 을 하고 있을 때 왕일은 젖내를 풍기며 개똥을 줏으러 돌아다니고, 넝마 같은 옷쪼가리를 걸치고 나무나 狗� 다녔던 꼬마에 불과했었다. 성질 거칠기로 유명한 이 창주 땅에서 그래도 다들 한 가락씩 하는 사람들만이 여기 진가장의 하인, � 원 무사(護院武士)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볼 때 왕일 따위가 칼을 들고 설친다는 것은 우습기 짝이 愎� 일이었다. 그들은 왕일과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비웃으며 저마다 곡괭이와 도끼, 혹은 삼지창과 귀두도(鬼頭刀)를 欲� 포위망을 좁혔다. 다른 한 손에는 횃불이 여전히 들려있었다. 보지 않고는 싸울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왕일은 보지 않고도 싸울 수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지옥에서 배웠다. 오랜 남만 생활은 그를 渙� 적인 싸움꾼으로, 적어도 보통의 병졸들이 하는 것보다도 더 전문적인 싸움을 익히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한 손은 횃불을 들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싸우겠다고 나서는 것은 진가장의 하인들이 싸움 �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일이었다. 한꺼번에 떼거지로 덤벼서 대충 쓰러뜨리기만 하면 그 다음 〈� 그냥 밟아버리면 되는 싸움, 동네 싸움이었다. 왕일은 재빨리 그것을 파악하고, 오늘의 이 승부는 그가 어떻게 진가장 패거리의 싸움 방식을 흔들어 � 고, 어떻게 자신의 싸움 방식을 유지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을 흔들어 놓고 자신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움직이게 하는 것, 거기에 생사가 판가름 될 것이다. 그는 진짜로 싸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두려워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지린다는 것 이 어떤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보여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공포를 보여줌으로써 〈� 해질 것이다. 진가장 하인들 중에 가장 앞에 선 하인 하나가 보기에도 거물스러워 보이는 귀두도를 든 손으로 머리를 쓸 어 넘기며 왕일을 보고 웃었다. 눈 바로 위로 엷게 그어진 칼자국이 그의 경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미친 개 노가(盧家)'라고 하면 근� 에서 는 모르는 이가 없는 인물, 일찍이 여덟 살이 막 넘으면서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있는 말종이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면서 예전의 광기는 잦아들고 제법 거물스런 티가 몸에 배이기도 했지만 아직도 � 끗 히끗 흘겨보는 눈 끝에는 시퍼런 살기가 묻어나는데, 그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칠 정도로 담력 강한 사람� 없 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왕일을 보니 우습기도 했을 것이다. 미친개 노가는 이런 싸움에는 이력이 난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싸움은 완력이나 무기로 하는 게 아니�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세가 문제였다. 기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다쳐도 다친 줄도 모른다. 그러 � 어 떤 계기로 해서 기만 죽으면 한 대도 안 맞고도 설설 기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때에는 죽이든 살리든 그� 마 음 대로였다. 여기 왕일이라는 작자는 그가 보기에는 제법 눈이 살아있는 친구였다. 경험상 이런 작자들은 허우대가 멀 쩡한 자들보다 오히려 더 다루기 힘든 자들이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한 손이 여러 손을 못 당하는 법이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실 그로서는 혼자서 붙어보는 것이 더 성질에 맞을 것이지만 수하들이 있는데 나선다는 것은 할 수 � 어 도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수하들의 기를 죽여 정말 못하게 하는 일이고, 宅� 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가 나서야 된다는, 말도 안되게 귀찮은 일을 떠맡는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미친개 노가는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왕일에 대한 공격을 대신했다. 손은 많고 칼은 날카� 우 니 몇몇이 다치더라도 곧 상황은 끝날 것이다. 미친개 노가가 잘못 생각한 것이라는 게 드러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요란스럽게 소리를 지� 며 달려드는 장정들에게 왕일의 모습이 가려지는 듯하더니 처절한 비명이 울리고, 이내 왕일의 모습이 다시 づ� 났다. 피묻은 칼을 정면으로 겨눠 들고서……! 처음부터 왕일은 한두 대 얻어맞고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씩 차근차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 � 다. 그게 누구든 상관은 없었다. 그가 칼을 휘둘렀고, 그래서 누군가가 그 칼에 죽는다는 것이 중요했다. 毬� 의 완벽한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공포는 완성될 것이다. 방어는 필요 없었다. 여럿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공격 을 피할 생각 따위나 하고 있으면 결국 아무도 다치게 하지 못한다. 처음 그를 향해 곡괭이를 휘둘러온 하인은 목표가 아니었다. 곡괭이에도 제대로 맞으면 죽을 수도 있� 만 지금 이 곡괭이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비스듬히 다가오며 삼지창을 내지르고 있는 하인 한 놈이 더 ㎸� 적이었다. 그것에는 배만 찔려도 곧 동작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므로. 왕일은 몸을 기울여 곡괭이를 휘두르는 하인에게 어깨부터 부딪쳐갔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온 곡괭� 는 그가 앞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처음 의도했을 목표에서 벗어났다. 손잡이 쪽을 아래로 해서 그의 등판을 봤� 맞았던 된 것이다. 대신 왕일은 그 하인의 가슴팍을 어깨로 내지를 수 있었다. "우욱-!" 하인이 답답한 콧소리를 내며 뒤로 비칠비칠 물러섰다. 왕일은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았다. 그는 곡괭� 를 든 하인에게 부닥쳤던 반탄력으로 몸을 반대로 틀어서 삼지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는 동안 칼은 계� 비 스듬히 치켜든 채였다. 언뜻 보기에는 삼지창의 정면으로 몸을 던지는 짓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戮� 목표는 이 삼지창을 든 하인이었다. 삼지창은 창날이 세 갈래로 갈라진 창들을 통칭하는 이름이지만 기실 그 속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 에도 자루의 길이가 다섯 자를 겨우 넘어서 창날까지 합쳐도 사람의 키보다 조금 크거나 작은 것을 차(� )라 고 부르고, 그보다 긴 것은 파( )나 당( )이라고 부르는데 이것들은 아주 길어서 두 길이 넘는 것이 보� 이었 다. 어쨌든 차나 파나 장병(長兵)이기는 마찬가지, 이런 장병을 상대하는 데에는 나름의 요령이 있었다. 왼손으로 창의 중동을 잡고 오른손으로 창대의 끝에서 한 자 떨어진 곳을 잡는 것이 창을 쥐는 기본자 �, 그 상태에서 창날을 앞으로 하고 찌르는 것이 공격의 기본이었다. 물론 창대로 후려치거나 창대의 끝으� 찍 는 등의 여러 수법이 따로 있지만 창은 기본적으로 찌르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이기 때문에 찌를 때 에 가장 위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약점도 거기 있다. 양손으로 창을 잡고 상대를 찔러 산적을 만들어버리면 그것으로 그만이겠지만 만약 상대가 피해서 오� 려 다가온다면? 그땐 물러서서 거리를 확보한 뒤 다시 찌르거나, 창날을 옆으로 휘둘러 베거나 치는 수밖에 없다. 창� 사 용하는 특별한 무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이때에도 일정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오른손잡이라서 왼손을 藍� 로 오른손을 뒤로 잡은 자세를 기준으로 해서 상대가 창의 왼쪽으로 덮쳐올 경우에는 뒤로 물러나며 창� 을 안쪽으로 돌려 찌르거나 걸어서 베어 버린다. 이 경우는 그래도 대응하기가 나은 편이지만 상대가 오른쪽 막� 덮쳐올 경우에는 여러 가지로 힘들게 된다. 사람 몸의 구조와 창의 길이 때문에 창대의 끝을 앞으로 내� 는 것처럼 해서 돌려 치는 것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오랫동안 수련하지 않았다면 신� 한 반응을 할 수가 없다. 왕일은 기본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으니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삼지창을 든 하인이 � 런 훈련은 받았을 리가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약점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왕일은 삼지창의 오른쪽으로 비껴 피하며 신속하게 세 걸음을 옮겨 거리를 좁혔다. 창대가 옆구리에 � 닥 쳤다가 미끄러졌다. 삼지창의 사내가 동그랗게 뜬 눈이 바짝 다가왔다. 거친 숨소리가 귓전에 울릴 정도 눼�. 왕일은 그 사내의 아무 것도 모르는, 심지어 바로 닥쳐올 그자신의 운명조차 미처 깨닫지 못한 눈을 정면 막� 보며 비껴 세우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촥-! 극히 힘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도끼로 힘껏 패도 돼지 다리 하나 일격에 떨어뜨리지 못하는 법이다. 운 좋 게 뼈와 뼈 사이를 때려도 근육과 힘줄이 그렇게 간단하게 잘려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그것 또한 그렇다. 도부수(屠斧手), 망나니가 그 흉악한 직업에도 불구하고 대접을 받는 이유가 그들 은 마음만 먹으면 사람의 목을 간단히 몸에서 분리시켜버릴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보통의 칼, 보통의 � 으로 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 른다. 그러나 지금 왕일이 휘두른 칼이 그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칼이 흰빛을 그으며 허공을 가르고 지나� 지 만, 곧 그 흰빛은 붉은 빛으로 변해 버렸다. 삼지창은 아직 허공에 내밀어진 채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 사 내의 오른쪽 팔은 어깨에서부터 떨어져 사방으로 피를 뿜고 있었다. 긴장된 손가락들이 창대를 움켜잡고 羚� 기 때문에 아직 땅바닥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더욱 처참했다. 평상시보다 세배나 더 길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이 또 한참을 더 지난 뒤에야 사내는 겨우 고통을 느낀 듯 했다. 사내의 목구멍으로부터 사람의 것이라고 믿겨지지 않는 긴 울부짖음이 새어나왔다. 일거에 덮쳐들던 하인들의 공세가 주춤해진 것도 그때였고, 그들로부터 가려진 것 같았던 왕일의 모� 이 부각되어 나타난 것도 그때였다. 왕일은, 그제야 쓰러져 뒹구는 하인의 모습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피묻은 칼을 들어 정면의 진가장 寧� 향해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13. 팔이 잘리면 죽는다. 아니,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팔만 잘려도 사람은 죽는다고. 구지룡 증국영은 그걸 알고 羚� 다. 무림에는 팔 다리 잘리고도 살아났다는 사람도 있고, 자기 목을 스스로 자르고도 자기 손으로 머리를 � 쳐 들고 죽었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림의 이야기이고, 내공이 조화지경� 이 른 고수들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보통 사람, 하수들의 경우에는 팔만 잘려도 대개는 죽기 마련이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 죽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기 팔이 잘려나가는 것을 본 충격 때문에 죽는 경우 � 더 많았다. 잘려나가는 그 순간까지 몸에 붙어 있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지체의 일부가 떨어져나 〈� 것을 보는 충격은 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는 자기 팔이 아니라 남의 머리가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고도 놀라 죽은 사람도 본 적이 있었다. 자 기 손으로 남의 목을 떨구고는 제풀에 놀라 오줌을 지리는 사람도 본 적이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간단� 게 죽을 줄은 몰랐던 탓일 것이다. 말로만 듣고, 머리로만 생각하던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손쉬 � 것 이면서 또 그렇게 확실히 생과 사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갈라놓는다는 것을 몰랐던 탓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팔이 잘려 그대로 죽어가는 진가장의 하인과 그것을 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굳어 있는 다 른 하인들을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음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너무나 순진한 것� 다. 그러니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 놓고, 그것도 단 한 번의 칼질에 그렇게 한 생명을 죽음으로 밀어� 리 고도 오연히 서서 칼을 겨누고 있는 저 왕씨 성 가진 청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 卵� 는 분명 여러 목숨을 죽여본 놈인 것이다. 그는 피식 웃고는 앞에 선 미친 개 노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보통 놈이 아닌데? 고생 좀 하겠어!" 그 한 마디로 그는 지금은 미친 개 노가가 나설 때라는 것을 깨우쳐 줌과 동시에 그 스스로는 지금 당 �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밝힌 셈이었다. 노가는 과연 그 말에 비로소 자신이 할 일을 깨달은 모양이 駭�. 그를 힐끗 돌아보더니 귀두도를 꼬나잡고는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방금까지 땅바닥에서 펄떡거리고 있던 팔뚝이 이제 조용해 졌다. 그러나 경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 �. 그것은 팔을 잃은 삼지창의 하인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인지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바 悶� 누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기운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도 둘러 �있 는 진가장의 하인들 중에 누구 하나 나서서 치료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노가는 끊어져 뒹구는 팔뚝을 슬쩍 발끝으로 건드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멍청히 섰지 말고 이거나 치워!" 그리고 그는 시체처럼 된 사내의 몸을 넘어 왕일에게 다가갔다. 돌아보지 않고도 하인들이 나와서 쓰� 진 자를 끌고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런 때 여유를 부린다는 것은 단지 겉멋 ㏏� 만이 아니다. 얼굴이 굳어 있으면 손발도 같이 굳는다. 위기의 순간에 한 번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邦� 일이 아니다. 어쨌든 노가는 칼질 한 번으로 왕일을 인정하게 되었다. 솜씨가 좋고 안 좋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 경 우는 얼마나 독한 놈인가가 핵심이었다. 어떻게든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그땐 이미 동네 싸움꾼 수준은 耭� 서는 것이다. 힘이 약하고 동작이 느리면 싸움에서는 질지 모른다. 그러나 살인을 하는 것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만약 한 번이라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인물이라면 힘이 쎄고 동작이 빠른 자보다도 오 湯� 그가 유리하다. 생명을 건 싸움에 있어서는. 지금 그와 왕일은 그 단계였다. 적어도 노가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는 눈빛을 빛내며 왕일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옆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왕일은 노가의 움직임을 따라 제자리에서 몸을 돌리며 거리를 재었다. 노가의 손에 들린 귀두도가 불� 에 반사되어 번뜩이고 있었다. 두터운 칼날과 넓은 도신, 끄트머리에 가서 두 갈래로 갈라져 뻗은 칼끝은 이 � 그 대로 귀신의 머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왕일은 그 모양은 실제의 용도와는 상관없이 과장되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칼은 베는 것이 주 목적이고, 벨 때에 그 지닌바 장점을 최대로 발휘한다. 그런 칼이 끄트머리가 갈라질 필요는 뭐고, 더구 � 그 것이 귀신 대가리를 닮아 뿔이 난 것처럼 보일 이유는 어디 있는가! 사람들을 겁줄 때나 필요할지 몰라도 실 제에 있어서는 불필요한 장식이었다. 게다가 귀두도는 두께와 길이, 폭이 하나같이 커서 무게가 많이 나간다. 칼 자체가 날카롭지 않으므로 グ� 워야 제대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나 드는 것이 아니라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泳� 만이 들고, 또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왕일이 볼 때는 귀두도를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식칼을 휘두르듯 자유롭게 휘두르기� 는 귀두도는 너무 무겁고 너무 길었다. 그래서 남만에서도 그는 고집스럽게 지금 들고있는 것처럼 짧은 칼, 껴� 의 야만인들이 사용한다고 만도(蠻刀)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했었다 도폭이 넓어 잘 부러지지 않고, 두께가 가늘어 날카로운 맛이 있었다. 게다가 길이가 짧아 무게도 얼� 나 가지 않는다. 이런 특징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칼은 그리 찾기 쉽지 않았다. 그 모양이 영 깡총해서 동료 병사 들이 부러진 칼을 들고다닌다고 놀려도 그는 웃기만 했을 뿐이었다. 겉보기에 그럴듯한 것보다는 실제 얼 떨� 쓰임새가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창보다는 활을 주로 사용한 것도 그 연장선상의 舅� 었고, 그것이 그의 목숨을 지켜주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잴 수는 없었다. 노가는 몇 바퀴째 왕일의 주위를 돌고 있었고, 왕일 피� 제자리에서 몇 바퀴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 매 번의 움직임마다 긴장이 가중되고, 살기는 더 농후해졌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긴장에도 한계가 있다. 사람에 따라 한계치가 다르지만 거기 다다르게 되면 그 � 전 에 해소하려는 행동을 하게 되거나 제풀에 지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노가가 왕일보다는 조금 빨랐던 助� 이었다. 그는 한 마디 괴성을 지르며 귀두도를 치켜들고 왕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와아악-!" 그의 칼이 연거푸 휘둘러져서 왕일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이 베어갔다. 마치 몽둥이 찜질을 하듯 반쯤 휘 두르다 말고 거둬들였다가 다시 휘두르고 하는 것인데 왕일의 상반신을 중심으로 칼빛이 번뜩여서 사방을 에 워싼 듯이 보였다. "저놈 봐라!" 구지룡 증국영은 피식 웃었다. 노가가 제법 칼질을 할줄 아는 것으로 보였기때문이었다. 무공을 배우지 않 아 거기 경력(勁力)이 깃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제법 완벽한 팔방풍우(八方風雨)의 도법이 아닌가! 강호에 널리 알려진 도법이긴 하지만 내공도 익히지 않은 사람이 저 길고 무거운 칼을 저렇게 휘두른다는 것은 쉬운 � 이 아니었다. "제법 재미있겠는걸……?" 팔방풍우는 기실 한 도법의 이름만은 아니다. 그것은 권법이나 검법, 혹은 다른 무기의 용법에도 널리 好� 되는 초식의 이름이었고, 그 어느 것도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묘용이 있었다. 월등히 수준이 薦� 어떤 고수를 만나거나, 혹은 초식 자체를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거나 하지만 않으면 적을 쓰러뜨리기에 충 槿� 초식이었다. 적어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왕일이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든 쉽게 승부가 나지� 않 을 것이라고 증국영은 생각한 것이다. 과연 왕일은 비칠비칠 뒤로 물러서면서 노가의 칼을 간신히 피하고 있었다. 부러진 것처럼 생긴 만도를 손 에 들고는 있지만 그것으로도 제대로 방어를 못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증국영이 볼 때는 잘하는 행동이� 다. 만약 왕일이 칼을 들어 귀두도를 막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노가가 원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힘을 겨루� 것 이야 말로 노가의 장점이었고, 팔방풍우의 장점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순간 왕일이 목을 겨누고 날아드는 칼날을 피하려는 듯 옆으로 기우뚱 몸을 움직였다. 그리곤 돌이� 도 밟았는지 그대로 넘어질 듯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노가의 눈에 불이 번뜩거리더니 귀두도를 머리 위로 � 이 치켜들고 아래로 그대로 내리 찍었다. 왕일이 약점을 보였다고 판단하고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증국영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저런 바보같은 자식!" 온 힘을 모아 머리 위에서부터 내리치는 일격, 일도단악(一刀斷嶽), 혹은 태산압정(泰山壓頂)이라 부르 � 초 식이었다. 지금 노가가 그 초식으로 왕일을 두쪽으로 갈라놓으려 한 것인데 증국영이 볼 때는 바보같은 �이 었다. 결정적인 일격이라는 것은 실패할 경우 그만큼 위기를 맞게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 왕일이 쳅� 를 가장한 것이라면? 또 설사 정말로 왕일이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굳이 그 수법을 쓸 이 �는 없었다. 포위망에 들어와있는 왕일이 그런다면 몰라도 노가가 승부를 빨리 결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왕일의 궁지는 가장된 것이었다. 주춤 쓰러지는 듯하다가 별안간 다리를 바로 세우며 옆으로 뛰쳐 일 어섰다. 노가가 온 힘을 모아 내려치는 일격이 그 순간 그의 어ㄲ를 스치며 지나갔다. 노가의 몸이 완전� 앞 으로 굽어 왕일의 전면에 드러났다. 실수를 깨달은 듯 노가의 눈은 공포를 가득 담고 크게 뜨여 있었다. 왕일의 눈은 반대로 가늘게 감겨져 있 었다. 먹이를 앞발로 누른 고양이의 그것처럼. 아니, 이제부터 시작될 참상, 그의 손에 저질러지게 될 � 인의 현장을 그 자신도 보기 싫다는 듯이. 왕일의 칼이 비스듬히 옆으로 휘둘러졌다. 노가의 목이 슬쩍 벌어졌다. 잠시 붉은 살이 보이는 듯 하� 니 파편처럼, 물보라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노가의 몸은 칼을 따라 앞으로, 그의 머리는 등 뒤로 굴러 � 어졌 다. "젠장!" 증국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여태 구경만 했지만 사실 노가는 그와 제법 배짱이 맞는 술친구였다 심 부름꾼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지만 술친구는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 그와 나누어 마신 수많은 항아리의 骸� 을 기념하는 의미에서라도 복수는 그가 해줘야 할 것이다. 왕일이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예민한 감각으로 그가 만만한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 � 인 지 그 표정이 금세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든 모르든, 느끼든 못 느끼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증� 영은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인물이 아니었다. 싸움을 잘하든 못하든 왕일은 그냥 평민이지만 증국영은 ジ� 인인 것이다. 증국영은 손을 내밀어 왕일을 잡아갔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잘려나가 네 손가락만 남은 손이었고, 陋� 구지룡이라는 말을 듣게 만든 그 손이 갈퀴처럼 구부러지며 왕일의 가슴팍을 움켜쥐려했다. 응사박(鷹蛇� )이 라 불리는 수법이었다. 왕일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단순히 손을 내미는 것에 불과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빠르기, 피할 곳� 없 어 보이는 완벽함을 그 손짓은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강적을 만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오늘의 일은 여기가 ÷� 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왕일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 생각보다 먼저 칼을 휘둘러 증국영의 � 을 베어갔다. 초식도, 노리는 것도 없이 본능적으로 휘두른 것이지만 오랜 전투의 경력이 배어있는 일격이었 藪� 제법 날카로운 맛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의 칼은 증국영의 손을 후려쳤지만 노가의 목처럼 잘라버리지는 못했다 맨 손을 칼로 친 것인데도 마치 강철을 두드린 것처럼 강한 반탄력이 전해졌다. 그는 하마터면 칼을 놓칠뻔 杉�. 증국영은 의외라는 빛으로 그를 잠깐 보고는 손을 거두더니 다시 뻗었다. 역시 응사박의 한 초식이었� 만 방금과는 달리 변화가 많은 수법이었다. 그 손이 왕일의 어깨를 움켜쥐고 뒤로 돌렸다. 그리고 손가락 하 ぐ� 모자르는 그 손으로 팔까지 꺾어버렸다. 왕일은 그대로 땅바닥에 굴렀다. 그 위로 진가장 하인들의 몽둥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14.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일은 무수히 매를 맞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단지 손 한 번 뻗쳐오는 일이었는데, 그 손이 보통 泳� 의 그것보다 강하고, 그 손놀림이 보통보다 빠르다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빚어졌다 어어, 하는 순간에 그의 팔은 뒤로 꺾이고,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비벼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 매 를 맞아야 했다. 무언가 차원이 다른 몸놀림. 그것이 이 네 손가락의 사내가 손을 뻗치는 그 동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 아마도 '무공'이라 � 짐 작되는 그 무엇에 완벽하게 제압된 것이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히. 다시는 만회할 수 없� 정 도로, 아니 만회할 것은 꿈에도 꾸지 못하도록 완벽히 제압된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고마운 것이다. 아무리 고약한 냄새도 잠시만 참으면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고, 아무리 가혹한 고통에도 곧 둔감� 게 된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떤 상태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곧 지옥일 것이다. 살 � 있 는 동안은 그런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좋으니, 기절이라는 좋은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은 그렇지 않다. 지금 왕일에게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비오듯 떨어지는 몽둥이가 주는 아픔이 아니라 바로 정신의 � 통 이었다. 이대로 죽으면, 아마도 곧 죽고야 말겠지만, 복수도, 만회도, 이후라는 시간을 예정하는 그 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시간은 여기에서 끝나고 '미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게 된다. 그리 � 이 후의 자신에 대한 '기대'도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복수는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앞으로 그 어떤 것도 꿈 � 수 없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 것도 꿈꿀 권리가 없어지는 것, 더 이상 나라고 주장할 그 무엇도 남지 않게 되는 것, 지금 눈앞� 드 리워지는 흐릿한 어둠만큼이나 두터운 암흑만이 남게 되는 그 어떤 것. 무화(無化)! 모든 것이 무화되는 그 고통! 지금 왕일은 죽음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빡-! 무언가가 머리를 쳤다. 둔탁한 고통이 왕일의 몸을 흔들었다. 그것이 그의 정신을 동일한 정도로 흔들어 일깨웠다. 왕일은 고 낯� 쳐들었다. 그의 흐릿한 시야에 진가장주의 모습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진가장주는 웃고 있었다. 뜨거운 그 무엇이 왕일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입으� 튀 어나온 것은 덩이진 피였지만 왕일은 그것이 분노라고 생각했다. 피로 갚지 않으면 지워지지 않는 분노. � 덩 이 피, 한 덩이 분노로 그의 의식은 흐려졌다. 진가장주의 웃는 얼굴만이 그 눈동자에 남았다. 증국영은 웃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을 보고 있었고, 거기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 嗤� 상처가 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오랫동안 최심수(催心手)라는 외가기공을 익혀 강철보다 오히려 단단한 손 募� 에 왕일이 칼집을 낸 것이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왕일이 결정적인 위기상황에서 꺾이지 않고 한 칼의 반 鳧� 했다는 점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절망으로 가려질 때 손을 한 번 움직일 수 있는 여력. 그것이 왕일에 � 있 었다. 그는 하인들의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있는 왕일을 묘한 감정을 담고 바라보았다. 이미 왕일은 완전히 � 신 한 듯 미동도 않았다. 저대로면 그냥 죽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미 회복불능인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 � 이 해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손을 치켜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둬! 물어볼 게 있다!" 그래도 몇 번의 몽둥이질이 더 있은 뒤에야 하인들이 물러섰다. 증국영은 왕일을 향해 다가가다가 인상을 썼다. 마당에 가득한 피비린내 속에 묘한 냄새가 섞여있었다. "똥을 질렀다. 똥을 질렀어!" "그럼 죽은 거야! 잘 됐군, 퉷!" 하인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증국영은 인상을 쓰며 왕일을 내려다보았다. 냄새는 왕일에게서 나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뭬� 섰다. 저 꼴로 당하고도 살아난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그냥 맞아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却� 가 없어졌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등덜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듯 杉�. 그게 싫어 그는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가장주가 침을 뱉고는 지시했다. "혹시 모르니 광에 처박아 둬!" 무얼 모른다는 것일까? 진가장주가 왕일이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뜻으로 말했다면 그것은 맞았다. 단지 잠시지만 왕일은 정신을 차 린 것이다. 그를 광으로 옮긴 하인들이 그의 품을 뒤지는 동안에 그는 부어터진 눈까풀 사이로 그것을 � 고 있었다. "이것 봐라! 이것 봐!" 하인 하나가 왕일의 전대에서 은자를 발견하고는 기뻐 소리쳤다. 같이 있던 하인이 얼른 그 입을 막았 �. 그리곤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쉿! 조용히 해!" 입을 막힌 하인이 영문을 모르고 그를 보았다. 그러나 곧 그 눈빛은 입을 가린 하인의 그것과 같은 빛� 로 물들었다. 말이 필요 없는 눈빛과 눈빛의 교감, 탐욕으로 번질거리는 눈빛의 전염이었다. 그렇게 그들 둘 � 아 는 비밀을 만드느라고 그들은 왕일이 잠시 움직였다는 것, 그리고 그의 속바지 솔기 사이에는 아직 묘안� 네 개가 더 있다는 것도 모르고 넘어가 버렸다. 그들은 왕일에게는 묘안석만큼이나 소중한 보물인 가죽주머 求� 그 안에 꽂혀 있는 일곱 개의 침을 힐끗 보고는 던져버렸을 뿐이었다. 그들이 나가고 광에는 어둠만이 가라앉아 있는 때, 왕일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지금은 보는 사람도 騙� 지만 횃불로 비춰가며 바라보아도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조금씩 그의 손가락은 움직여갔다. 하인들이 내버 졔� 고 간 가죽 주머니를 잡으려는 것이다. 똥을 지린다. 방광과 항문의 근육은 생각에 따라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긴 하지만 정상적으로는 넘지 않는 선이 있 �. 극히 긴장된 순간에 오줌이 나오지 않아 고생을 하는 것처럼, 다무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 것은 긴장을 푸는 것 외엔 조절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줌을 지리거나 똥을 지리는 경우는? 긴장이고 뭐고간에 근육 자체의 힘이 풀린 경우에 국한� 는 것이다. 극도의 공포를 느꼈을 때, 혹은 죽을 때 사람은 몸안에 있는 것들을 내뱉어 버린다. 지금 왕일은 그 과 ㅏ� 있었다. 온몸을 채우고 있던 무엇인가가 입으로 항문으로 줄줄 새어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 � 사 실이었다. 그의 입으로부터는 피와 음식물이 섞인 끈적한 침이, 그리고 항문으로부터는 푸른 빛 감도는 �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통은 없었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고통은 이젠 없었다. 온천에 몸을 담근 것처럼 그저 노곤한 기분이 그를 무력하게 하 고 있을 뿐이었다. 그 속에서 흐려지는 정신을 그는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눈앞으로 아른거리는 오색의 � 개들 사이로 자신이 지금 해야할 일들을 명확히 보려고 노력했다. 이렇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시간은 극히 순간일지도 모른다. 한발은 이미 저승문턱에 들여놓았다는 것 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전에, 다른 한발마저 거기 들여놓기 전에 할 일을 해야 하는 것� 다. 실낱같은 틈을 비집고서라도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한을 갚아야 한다. 누이를 구해야 한� . 그 생각을 하자 왕일의 눈앞에 빛이 번뜩였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죽기 직전에 정신이 맑아지는 상태. 지금 왕일의 상태가 그것인지� 모 른다. 어쨌든 그것이 왕일에게 힘을 주었다. 그가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하려고 했던 일이 명확하게 떠올 駭�. 극도로 강한 독은 사람을 죽이지만 때로는 살릴 경우도 있다는 말을 그는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남만� 서 직접 보기도 했다. 숨도 멈추고, 똥도 내지른 상태의 노인에게 부족의 제사장이 독사를 가져다 대었다. � 러자 한참 후 독사에 물린 노인이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 노인은 이후 보름을 더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림짐작일 뿐이다. 독침을 찌르자 마자 그냥 죽을지도 모른다. 혹은 보름� 에 더 못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그냥 이대로 죽는 것보다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실낱같은 틈이라도 있� 면 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왕일의 손끝에 가죽 주머니가 걸렸다. 그는 가죽주머니를 가슴언저리로 당겨왔다. 그리고 천천히 독침 毬� 를 빼서 스스로의 가슴을 찔렀다. 그 다음 독침, 그리고 또 다음의 독침. 그는 그렇게 일곱 개를 다 찌� 고서 가죽주머니를 다시 마무리하고, 그것을 똥으로 범벅이 된 샅춤에 묶는 작업까지 하고서야 숨을 돌렸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성공과 실패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만 찔려도 피를 토하고 죽는 뗑� 을 일곱 개나 맞고도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기회는 남은 것이다. 그때 광문이 열리고 횃불이 그를 비추었다. 그는 코를 막고 들어서는 진가장주의 모습과 그 뒤에 선 � 국 영, 아홉 손가락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장대. 왕일은 진가장주의 뒤로 숨을 듯이 서있는 장대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일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다. 왕일은 장대의 거동과, 그 얼굴에 떠오른 수치스런 표정을 린� 단박에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전날 온종일 이리저리 묻고다닌 것도 그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 � 다. 고향 아저씨라서 차마 위협도 못하고, 그저 무릎꿇고 부탁을 했던 것이 아무 효과도 없었던 모양이었 �. 왕일을 보고 다시 돌아온 양심이, 왕일이 눈앞에서 없어지면서 같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아니, 절박한 卉� 의 욕망과 농민의 본능적인 공포심이 협(俠)이나 의리보다는 가족과 자신의 안전을 더 중하게 생각하는 〕� 한 머리를 움직이고, 그 머리가 다리를 움직여 왕일이 사라지자마자 여기 진가장으로 달려오게 만든 것이 �라. 왕일은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그런 위험을 예상했으면서도 岵� 한 조치를 해놓지 않았던 그 자신의 태만함에 분노할 뿐이었다. 다시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母� 시작할 기회가 있다면. 그러나 그 기회는 지금 사라지려는 모양이었다. 진가장주는 코를 막고, 인상을 쓰며 왕일을 내려다보더니 손을 저었다. "에잇 고약하다! 벌써 반쯤 썩어버리지 않았나! 가져다 파묻어 버려라!" 왕일의 뒤통수가 띵하게 아파 왔다. 그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대로 땅속에 파묻어 버리면 거기� 서 어떻게 기어 나올 것인가! 그는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진가장주의 그 말이 그에겐 마지막 타격이 되어버렸다. 그는 그대로 의 컥� 잃었다. 그의 숨결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왕일을 파묻을 책임을 맡은 하인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게서 돈을 가져간 그 하인들이 아니었다. 그 들은 품속에 감춰둔 은자의 무게만큼 왕일에게 고마워하면서, 만약 그들에게 그 책임이 맡겨졌다면 성의� 고 이 묻어줄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왕일을 맡은 두 하인은 손톱만큼도 왕일에게 고마움을 느낄 이유가 없었고, 왕일의 손에 � 은 삼지창의 하인과는 호형호제했던 사이라 오히려 극도의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손길이 부드 �울 리가 없었고, 웬일인지 이미 온몸이 퍼렇고 검게 변해 썩은 냄새를 풍기는 왕일의 시체를 오래 만지고 싶 紵� 지도 않았다. 다행히 진가장의 뒤로는 강물이 흐른다. 오랜 세월동안 숱한 이야기를 그 속에 품고 흐른 혼탁한 강물. 거적에 둘러싼 시신을 메고 가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말로 어떤 일을 하는데에는 말이 필요 없 는 일도 있는 것이다. 왕일의 시신은 기수의 뿌연 황톳물 속으로 던져졌다. 거기 담긴 오랜 세월의 깊이를 말하려는 듯, 기� 의 강물은 소용돌이치며, 높이 소리치며, 울부짖으며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데, 시신을 싼 거적때기 하나는 킥� 잠겨 표시도 나지 않았다. 15. 훗날 다시 생각해도 그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사실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았다. 대충 아는 지식에 의존해서 독침을 자기 몸에 꽂은 것, 두 눈을 퍼렇게 뜨고 있어도 모자랐을 그 절대 절명의 순간에 스스로 죽음을 찾아간 것, 그래서 결국 반� 썩 은 것처럼 푸르둥둥한 시체 꼴이 되어 강물에 던져져 버린 것이 전부 그랬다.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봄� 로 초래한 일인 것이다. 아마도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죽도록 맞아서 � 리 가 어떻게 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그냥 빠져 나올 궁리를 � 을 것이다. 비록 나중에, 아주 나중에는 화가 복이 된 격이 되어 버렸지만,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고 해도 절대로 瀏� 게는 하지 않을 것이었다. 미래는 항상 불확실한 것이고, 결단은 항상 현재의 상황에 준해서 내려야 하는 것임 을 왕일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의 행운을 기대하고 현재를 포기하는 일은 한 번으로도 譴� 많았다. 비록 그 결과가 뜻밖의 행운으로 귀결되었다고 해도. 그러나 왕일은 그때 정상이 아니었고, 정상이 아닌 결단을 내렸다. 그러니 그가 다시 살아난 것은 그� 유 달리 운이 좋아서, 그의 명줄이 질기고 질겨 염왕이 직접 달려들지 않으면 자를 수가 없을 정도여서라고 謗� 달리 이유를 댈 수가 없을 것이다. 혹은 이 일이 결국에 어떻게 될지 하늘이 보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 다. 어쨌든 칠독황봉침의 독기에 일시적인 가사상태(假死狀態)에 빠졌던 왕일은 다시 살아났다. 그것도 물� 빠 진 그 즉시 정신을 차렸다. 물은 흐리고, 물살은 거칠었다. 표면에는 파도가 일어도 물 속은 고요하다는 속설은 기수의 강물에는 적용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단� 의 뜻 그대로 노도 같은 강물이 일렁이는 강물 속에는 분노처럼 격렬한 흐름이 있었다. 억만년 세월도 삭혀 逞� 못하는 분노와 같은 흐름, 용솟음과 뒤틀림이 기수의 깊은 곳에 있었다. 그 속에서 왕일은 뒹굴고 나자빠지고 팽개쳐지며 물과 함께 흘렀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분 Ａ� 차 할 수 없었다. 자기 몸인데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력감이 그의 전신에 퍼졌다. 내둘리고 휘저 沮� 는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철저하게 피동적인 느낌, 그를 감싼 강물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었지만 � 태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운명과 닮아 있었다. 이 속에서 그가 자신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고통이었다. 끊임없이 온몸을 두들겨 맞는 듯한 Я� 한 고통, 그것뿐이었다. 아니, 하나 더 있었다. 관 대신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물건, 그를 덮어 쌌던 거적의 거친 감촉이었다. 처음 에는 그것이 물과 고통 이외에 그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촉이었기 때문에 이유도 없이 잡고 늘어지던 痼� 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그는 그것만이 지금 그가 잡은 유일한 생명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왕일을 싸고 묶었던 새끼줄은 물살에 간단히 풀어져 버릴 것 같았지만 의외로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고, 이 제 왕일이 그 거적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거친 물살, 거친 강바닥과 기수에 떠다니는 나무토막과 같은 부유 물들의 거친 모서리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일은 어느 해 홍수에 떠내려온 시체가 물살에 찢겨져 누더기처럼 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 를 피하기 위해 걸친 거적때기가 상체는 보호해 준 모양이었다. 거적이 지켜 주지 않은 아랫도리는 뼈다귀� 붙 은 살점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지만 상체는 그래도 형체나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무얼 하려고 해도 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 � 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물은 사람을 띄워 준다. 얼굴이 내밀어지는 행운 같은 순간 � 조 금씩 호흡을 하면 된다. 부유물에, 혹은 강바닥까지 밀려가 칼날 같은 바위 모서리에 부딪치면 거적때기 걋� 것은 아무 소용도 없이 그대로 죽어 버리고 말겠지만 죽으면 또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더 이상 고민하� 애 달파 할 일은 없어지는 것뿐이다. 왕일은 그렇게 거적 하나를 생명줄과도 같이 움켜쥐고 물과 함께 흘러갔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왕일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살았나?' 식초에 담겨진 계란처럼 풀어진 그의 몸 어디에 힘이 남아 있었을까? 의식이 돌아온 그 순간에 어딘가 힘이 들어간 모양, 그의 몸은 무거워지고, 무거워진 몸은 물 속에 잠� 버 렸다. 그것으로 왕일은 두 가지를 깨달았다. 그는 아직 물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는 아직 살아 있다 � 것 이었다. 왕일은 최대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엷은 물을 통해 하늘은 여전히 푸르게 보였다. 그리� 곧 그의 얼굴은 다시 물 밖으로 떠올랐다. '나는 살아 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그 점이 중요했다. 조금 후에는 아닐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은 살아 있는 것이다. 琉� 고 겨우 잡은 이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면 그는 계속 살 수 있다. 계속 살아 있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 다. '이 이상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왕일은 생각했다. '지금이 최하다! 여기서 더 나빠질 수는 없다! 이제 더 잃을 것은 없다!' 왕일의 체력과 상태는 확실히 최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머리는 잘 닦은 거울처럼 맑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정신 상태를 유지한 적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의 정신은 투명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 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 스스로를 냉정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문득 물 속에 잠겨서 코끝만 내놓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자신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 은 착각을 일으켰다. 수면 바로 위, 허공에 떠서 물에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 허공� 뜬 스스로가 진짜고, 시체처럼 부어오른 채 물 속에 잠긴 모습은 단지 그림자뿐인 것 같은, 아니면 뱀처럼 � 물을 벗고 남은 껍질뿐인 것처럼 그렇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흐흐……! 왕일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왕일! 이 꼴이 뭐냐? 정말 보기 좋구나!' 그는 물에 잠긴 또 다른 자기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오랜 친구에게 하듯이 그렇게 반쯤 비웃듯이, 또 반 育� 애처로워하면서 말을 걸었다. '도대체 뭣하고 산거냐? 무얼 하려고 산거냐? 속아서 병역을 살았는데 그 주인공은 감옥에 있었으니 그 孤� 헛수고, 칠 년이나 지옥에서 뒹굴었는데 그 대가도 반밖에 못 받았지. 가족이나 잘 살라고 했더니 이제 � 죽 고, 네가 아끼던 누이는 돈도 못 받는 창녀 꼴이 되어 이리저리 구르다가 이젠 도적에게 잡혀갔잖느냐? � 년 지옥에서도 밤마다 꿈꾸어 오던 고향 하늘은……, 고향의 땅, 고향의 수수밭도 널 배신했지? 이럴거면 지 좆� 왜 갔고, 돌아오긴 또 왜 돌아온 거냐? 바보 같은 자식! 천하에 멍청한 자식!' 흐흐흐흐흐흐……! 왕일은 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얼굴이 뜨끈했다. 그는 웃으면서, 한편으로는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 . 푸 르둥둥한 얼굴, 부어오른 눈시울 사이로 미지근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좋아, 왕일! 힘 내! 바보짓을 한건 한거고, 이젠 힘을 내! 울 힘이 있으면 살 힘도 있겠지. 살아남으� 뭐든 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나빠지진 않을 거다. 떨어질 만큼 떨어졌으니 더 떨어질 나락도 없잖아. 이젠 다시 올라가는 것만 남았지.' 왕일이 입을 벌렸다. 물 속에 잠긴 껍질의 입이 벌어졌다. '어디로?' 가면의 입이 벌어지는 것처럼 무표정한 그 얼굴이 움직였다. 움직여 묻고 있었다. '어디로 올라가지? 이제 뭘 하지? 살아서 뭘 하지?' 왕일은 웃었다. 껍질의 질문이 너무 바보스럽다는 웃음이었다. '복수! 복수를 해야지!' 그의 눈빛이 핏빛처럼 붉어졌다. 복수라는 말에 더없이 어울리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으로 그는 말하고 있 었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지. 복수! 복수다! 하지 않고서는 억울해 죽을 수도 없는 일이 하� 있 지. 복수! 복수다! 하지 않으면 넌 사내도, 사람도 아니야. 복수를 하는 거다!' "보……!" 왕일의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머리가 다시 물 속에 잠겼다. 콧구멍으로 물이 榕� 가 매캐한 맛이 목구멍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왕일은 말을 그치지 않았다. 입 속에 들어온 물이 그 말을 따라 같이 뱉어졌다. "복수!" 그는 고개를 쳐들었고, 물이 튀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그는 사라졌다. 어느 것이 진짜든 간에 복수 遮� 한 마디와 함께 둘은 하나가 되었다. 그 하나는 복수심에 불타는 하나의 왕일이었다. 왕일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가 격렬한 통증을 느끼고 다시 쓰러졌다. 이번엔 얼굴을 아래로 했으니 � 어 진 셈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전율과도 같은 고통이 온몸을 타고 흘렀지만 그는 다시 쓰러지 � 않 았다. 사방은 한참 자라는 갈대로 가득했다. 어딘가의 강변, 물굽이로 흘러온 모양이었다. 물은 깊지 않았지� 진 흙탕이었고,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빨리 이 갈대밭에서, 적어도 물 속에서는 나가야 했다. 상처 입은 몸에 물은 좋지 않았다. 잘못하면 정말로 썩어 들어간다. 어쩌면 이미 썩고 있을지도 모르� 만. 그가 알기로는 썩은 상처는 잘라 내는 것외에는 치료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 수를 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위치도 좋지 않았다. 해는 떠오르는지 지는지 하늘만 보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 았을 것이다. 만약 하루 넘게 강물을 따라 흘러왔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반나절 그 정도밖에 안 왔으면 아직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은 셈이었다. 창주는 진가장의 세력권이라고 보 틉� 좋았다. 그가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떻게든 완전히 끝을 내려고 할 것이다. 왕일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갈대를 잡고 당겼다. 물에 반쯤 떠 있는 몸이라 쉽게 앞으로 ぐ� 수 있었다. 그러나 물보다는 진흙이 많아지고, 나중에는 수렁 같은 진흙만이 있는 곳에 이르자 한 치 한 � 전 진하는 것이 죽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다. 왕일은 한 손으로 당긴 만큼 전진하고, 쉬었다가 다시 한 손만큼 전진하는 일을 반복했다. 물에 불은 嵐� 닥 껍질이 금세 벗겨지고, 나중에는 살점마저 갈대의 억센 잎에 쓸려서 베어지고 있었다. 진흙에 끌리는 摸� 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아프다는 것은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심하게 맞은 몸이 자칫 마비되지나 않았을까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딘가로 가서 치료도 해야 했다. 맞은 곳도 걱정이지만 몸에 퍼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독이 더 걱정이� 다. 살아 남아도 병신이 되면 복수가 어려워진다. 할 일은 많았다. 그 모든 일이 이제 전적으로 왕일 그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우선은……!' 왕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갈대밭을 나가야 한다. 그 다음은……!' 복수였다. 16. 파면개(破面 ) 유삼성(劉三星)은 유파면(劉破面)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다. 사람의 이름이 파면(破面), 즉 깨어진 얼굴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그러니까 그가 � 살 때 마마를 앓아 얼굴이 얽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사십여 년동안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파면이라는 단어� 곰 보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는 곰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파면이란 즉 유곰보, 곰보 유가라는 뜻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불행은 얼굴이 얽었다는 것보다는 다섯 살 때 부모를 여의고 거지가 되어 지금까지 거� 라 는 직업으로 - 그것을 직업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 험한 세상을 길바닥의 먼지처럼 이리저리 떠돌고 있 募� 것을 꼽아야 하겠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이 곰보인 것을 더 불행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부모야 언젠가 떠나는 것이고, 누구든 언젠가는 혼자가 되는 법이지만 모두가 곰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 지 노릇이야 생각에 따라서는 하늘 아래 가장 편한 직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곰보라는 단어가 이름 대� 이 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유곰보는 유쾌하고, 또 행복했다. 때때로 사람은 모든 것을 갖고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한편, 때로는 하잘것없는 것을 가지고도 더 없이 � 복 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지금 유곰보가 그랬다. 그의 행복은 오늘 아침 길거리에서 붉은 물건 하나를 줍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길거리 한 복판에 떨어져 있는 붉은 물건, 언뜻 보아서는 마차 바퀴가 � 헤 치고 간 붉은 진흙 덩이와 크게 다르지 않고, 조금 더 눈썰미가 있고, 그 눈썰미가 좋은 것보다는 안 좋� 쪽 으로 더 잘 돌아가는 자라면 마차 바퀴에 깔린 시궁쥐의 주검과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붉은 물건 한 � 이. 그것이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고깃덩어리라는 것, 그것도 잡은지 하루가 넘지 않는 돼지의 옆구리 살이� 는 것을 유곰보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이 오늘 그가 느끼는 행복의 시작이었다. 아침 나절에 왜 길바닥에 돼지고기가 떨어져 있는가? 사태는 명백했다. 육방(肉房)이라 불리는 이 시대의 푸줏간에서는 끈에다가 고기를 꿰어 준다. 한두 � (斤) 이라면 이렇게 흘리지 않겠지만 다량의 고기를 사가다 보면 길바닥에 흘리는 것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 은 아니다. 왜 아침 나절에 그런 일이 생겼을까? 그것은 공자(孔子)님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었다. 그날 잡은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공자의 箏� 로운 입맛이 누천년을 내려오며 귀족들의 호사스런 버릇이 되었던 것이다. 새벽같이 고기를 잡아 육방에 첸� 놓으면 졸린 눈을 비비며 귀족, 부호들의 하인이 사 간다. 지난밤 못다 이룬 꿈을 되새김질하기에도 바쁜 그들 이니 무더기로 쌓인 고깃더미에서 한 근쯤 떨어져도 보이지도 않았으리라. 유곰보는 신중히 사태를 파악하고 재빨리 고기를 챙겼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강변, 기수와 능하(凌河) � 만 나는 노화만(蘆花灣)의 자갈밭에 나와 식사 준비를 했다. 그 중간에 몇 가지 재료를 더 구하느라고 아침 식사는 이미 늦은 점심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건 또 � 것 대로 좋았다. 아름다운 여인을 기다릴 때, 또 맛있는 음식을 주문해 놓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준비를 위한 챨� 이라는 것은 행복을 그 시간만큼 늘여 놓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그러모아 불을 지피고, 큼직한 돌 세 개를 불가에 모아 솥발을 삼는다. 그 위에 귀퉁이 깨 沮� 솥을 얹으면 간단하지만 더 이상 필요할 것도 없는 주방이 완성된다. 쇠고기는 오래 삶으면 질겨지고, 돼 側� 기는 오래 삶으면 물러진다. 쇠고기가 최고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고기를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求� 소리다. 쇠고기는 어떻게 요리해도 쇠고기 한 가지의 맛밖에 나지 않지만 돼지고기는 요리법에 따라, 같� 넣 은 향신료에 따라 무한한 맛의 세계를 펼쳐 놓는다. 돼지고기가 여기 있다. 이제 어떻게 맛을 내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요리사의 손에 달렸다. 양이 많았다면 그는 두고 볼 것도 없이 솥을 엎어놓고 구웠을 것이다. 요리도 간편할 뿐 아니라 구운 � 지 고기에 왕소금을 뿌려 먹는 맛이란 어떤 향신료를 넣은 것보다도 낫다. 이른바 진정한 음식의 풍미는 양 嶽� 많이 쓰지 않은 것에서 맛볼 수 있는 법이다. 짙게 화장한 여인보다는 아침에 잠에서 갓 깨어난 여인의 凋� 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에 왜 껍질을 씌울 것인가. 물론 이것은 화장이 아니라 ÷�, 혹은 변장이 필요치 않은 아름다운 여인의 경우일 것이다. 돼지고기는 여인으로 비유한다면 양귀비와도 걋� 여인이니 당연히 화장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지금 고기는 한 근밖에 없었다. 주린 그의 창자는 도저히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 니, 차라리 맛을 보지 않게 하는 것이 이후 그가 돼지고기 없이 견뎌야 할 기나긴 세월을 위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고민은 이것이었다. 한 근의 고기로 어떻게 열 근 스무 근의 쾌락을 느낄 수 있는가? 방법은 정해졌다. 삶아 먹는 것이다. 고기에서 기름을 떼어 솥바닥에 녹인 다음 고기를 넣어 반쯤 볶는다. 거기 물을 반쯤 담고 감자를 넣어 같 이 끓인다. 고기는 행운으로 떨어진 것이지만 감자는 노력으로 생겼다. 그 감자를 구하기 위해 강변 감자 瑛� 한참이나 기어다니지 않았던가. 좋은 감자를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이 퓐� 더욱 힘든 노역이었다. 감자와 돼지고기가 같이 익어 가며 구수한 냄새가 날 때, 뱃속의 창자는 요동치고 목젖은 쉴새 없이 � 직 여 침을 삼키게 한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한다. 요리는 아직 반도 안됐다. 저 구수한 냄새가 곧 맛으로 연결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제 그가 고기를 구한 후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며 구했던 것이 솥에 들어간다. 콩나물과 달걀, 토� 으 깬 것, 술지게미, 생강과 마늘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운이 좋으면 해파리까지 넣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따로따로 구별되어 있지는 않다. 어떤 것은 빠지고, 전혀 예상치 않은 다른 것이 들 載� 수도 있다. 그가 구한 이 나머지의 것들은 사실 기주현(沂州縣)에서 제일 큰 객잔인 만보각(萬寶閣)의 주 � 뒷 문밖에 있는 찌꺼기 통에서 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찌꺼기 통에도 순서가 있어서 유곰보처럼 타관에서 온 떠돌이 거지에게는 차례가 잘 돌아오� 도 않는다. 그가 제일 먼저 그 통에 손을 대고, 그 중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 올 수 있었던 것은 기주현의 � 박이 거지인 마(馬)짝귀가 그를 대접한 덕이었다. 준비한 것들을 넣고 이번에는 물을 솥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운다. 그 다음에는 양념이 배도록 불을 지� 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유곰보는 품안에서 대나무 젓가락을 꺼내 들고 - 십 년 전에 우연히 구한 이후로 지금까지 애용하는 � 이 었다 - 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기다렸다. 지금이 가장 참기 힘든 시간이고, 그런 만큼 가장 행복한 시� 이기 도 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저 돼지고기의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불청객이 나타났다. 손이 필요할 때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원하지 않을 때는 꼭 끼는 유형의 손님, 다른 거지였다. 유곰보는 솥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는 눈만 살짝 돌려서 새로 나타난 거지의 몰골을 훑어보았다. 그� 고 는 보이지 않게 인상을 썼다. 상대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긴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패배감이 짙게 脂� 있었다. 도저히 그가 상대할 수 없어 보이는 인물, 거지 중에도 상거지, 병든 거지가 나타난 것이다. � 것도 곧 죽어 가는 몰골을 한 거지였다. '고기 한 점에 감자 두 개는 날아가겠구나, 젠장!' 가슴이 아리고 쓰려 왔다. 그의 행복에 불운의 먹구름이 가득 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먹을 게 생기면 나눠 먹는다는 것은 그들 거지 세계의 불문율이었다. 그것도 그들 부류 전체의 생 존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최고의 규율이었다. 서로 돕고 나눠 먹지 않으면 거지가 어떻게 살 수 있� 것 인가. 유곰보는 구겼던 인상을 애써 풀고 새로 나타난 거지를 향해 물었다. "같이 좀 들지 않겠나?" 병든 거지, 왕일은 유곰보의 고마운 제안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갈대밭을 벗어 나와 근 한 시 坪� 지났는데도 아직 강변, 그 대부분의 시간 동안 지친 몸을 쉬게 했지만 아직도 그의 상태는 바닥이었다. 瀏� 그에게 있어서 음식은 최고의 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음식보다는 불기운이, 불기운보다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를 구해 줄 사람, 정확� 말 하면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몸을 회복하도록 도와주고, 앞으로 얼마 동안 그가 계획한대 � 움 직여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보는 거지, 곰보거지는 적합하지 않다고 왕일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한 상태였다. 탕� 는 거지이기 때문이었다. 거지는 단순히 하나의 직업이 아니라 하나의 신분이고, 하나의 규정이다. 그리고 그 규정은 대개 최악� 평 가에 의한 최하의 규정이다. 거지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거지인 것이다. 혹시 인간으로 쳐도 언제나 최하 � 인 간으로 들어가는 부류의 사람, 그들이 거지다. 운수 불길해서 거지가 되었다지만 운수가 불길하기 전에 譴� 그들의 생활이 망쳐졌고, 신세가 망쳐지기 전에 사람이 먼저 망가진 것이다. 그들이 거지가 되는 순간 이 � 사 람이기를 포기했다고,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그 최후의 기력마저 없어져 버렸다고, 그렇게 왕일은 판단하 � 있 었다. 그런 사람은 그의 목적에 소용이 없었다. 욕심이 있는 사람, 그래서 욕심만큼은 일을 제대로 해줄 수 獵� 사람, 차라리 그를 이용하려 할 위험한 인물이 필요했다. 그래야 제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유곰보는 왕일이 음식에 다가들지 않자 잠시 혼란에 빠졌다. 음식을 앞에 두고 망설인다는 것은 다른 � 우 에는 몰라도 지금 이 경우에는 있을 수가 없는 일 아니던가.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대나무 젓가락을 보고, 다시 펄펄 끓는 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순간에 Ⅶ� 은 사라지고, 세상은 다시 명확한 법칙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뜨거워서 못 먹는단 말이지. 나뭇가지라도 꺾어 들면 될 것 아냐. 그것까지 내가 해줘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유곰보는 그가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가에 앉아 허리를 세우고 있는 것만으� 도 젖 먹던 힘까지 내고 있는 듯한 초절정 거지에게 그가 봉사하지 않으면 어쩌랴. 그는 젓가락으로 감자를 廚� 왕일에게 내밀었다. 과연 왕일은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옷을 잠시 훑어보더니 개중 깨끗한 부분을 잡고 � 으 로 내밀었다. 그리고 유곰보가 거기 감자를 떨어뜨리자 고개를 숙여 조금씩 깨물어 먹었다. 그가 한 개의 감자를 다 먹자 유곰보는 이번에는 몹시 아까운 표정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주었다. 왕일은 고개를 저었다. 유곰보는 감탄한 표정으로 왕일을 보았다. 그리곤 감자를 집어 주었다. 왕일은 이번엔 받아먹었다. 사실 왕일의 행동에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변색된 피부가 독에 의한 것이 아닌지 의심� 고 있었기 때문에 음식물에까지 묻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고기를 거절한 것은 고기가 중독된 환자에게는 좋� 않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곰보는 왕일의 행동이 신중할 뿐 아니라 양심도 있는, 소위 예절을 아는 거지라고 인정하는 � 기 가 되었다. 그래서 갑자기 왕일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왕일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곰 맛� 표정이 자주 변하고, 의외로 그를 생각하는 것이 세심한 것을 볼 때 왕일은 유곰보가 아주 망가진 것은 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솥 하나에 가득한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포만감에 누워 있는 �곰 보에게 왕일이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것이다. "돈 좀 벌어 보고 싶지 않소?" 17. 유곰보는 사실 돈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아니다. 매일의 먹을거리를 찾기에 허덕이기는 하지만 막상 � 돈 이 생겨 봤자 달리 쓸 일도 없는 것이다. 먹을 것을 사고, 남은 돈은 감춰 둔다. 나중에 또 먹을 것을 사기 위해서……. 이런 식의 생각은 정상 括� 나 하는 것이다. 유곰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아니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 수 있었다면 지금 거지가 아닐 것이 �. 그러니 그가 왕일의 말에 흥미를 보인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황의 묘함 때문이었다. 유곰보는 포만감에 젖어 누워 있다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왕일을 바라보았다. "돈이라고?" "아주 큰 돈!" 왕일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구태여 목소리를 내려깔지 않아도 왕일의 태도에는 믿을 만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유곰보는 그렇게 판� 했 다. 찢어진 옷에 흐린 낯빛, 맞아서 생긴 것이 분명한 멍자국들에 불어터진 살갗. 그런 상거지 꼴의 사내� 큰 돈을 거론한다는 것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지만, 그런 몰골이기 때문에 또 믿을 만했다. 무언가 확실한 어 � 것 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런 말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왕일은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손톱 크기의 보석 하나, 호박(琥珀)색이 나는 둥근 구슬같은데 묘하게도 중심에 고양이의 눈동자 같은 牡� 하나 그어져 있었다. 왕일이 말했다. "묘안석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황금으로는 일 천냥 가치. 이걸 갖고 싶지 않소?" 유곰보는 흐릿한 눈으로 왕일을 응시하다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탐욕� 런 빛이 흘렀다가 재빨리 사라졌다. 왕일이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어떤 일을 해주면 그걸 주겠다는 뜻인 모양인데……, 물론 자네에겐 그런 것이 더 있겠지?" 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개가 더 있소." 유곰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은 이제 비어 버린 솥 귀퉁이를 잡고 있었다. 깨어진 귀퉁 肩� 짐작되는 두께가 만만치 않고, 거무튀튀한 쇳빛이 그 단단함을 짐작하게 했다. 솥은 유곰보의 손에 잡힌 拷� 으로 순간적으로 흉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왕일은 미동도 않고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역시 나직하게 말했다. "난 지쳐 있으니 그걸로 한 방이면 날 죽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땐 이것 외에는 가질 수가 없을 거� ." "다른 건 숨겨 뒀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데?" "보물을 모두 몸에 지니고 그중 하나를 보여줄 정도로 내가 바보로 보이시오?" 유곰보는 그 말에 새삼스럽게 왕일을 살펴보았다. 부어 터진 모습이지만 제법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 니, 제대로 말하자면 대단한 용모의 사내였다. 무엇보다도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유곰보는 입술을 비틀어 웃어 보였다. "아주 멍청해 보이지는 않는군. 하지만 난 게을러서 그냥 그것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지. 이러니저 �니 조건이 붙으면 귀찮거든." 왕일은 그를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날 죽이지 않을 거요." 유곰보는 여전히 비틀린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손에 목을 잡힌 닭을 보는 듯한 태도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게으르고 부지런함의 문제가 아니라 욕심의 문제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당신이 욕 �이 있건 없건 역시 날 죽일 수는 없소." "그건 또 왜 그런가?" "당신이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하나로 만족할 리가 없기 때문에 날 돕는 척 하면서 나머지의 행� 을 알아내려 할 것이오. 반대로 당신이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것 하나로도 만족할 것이기 때문에 그냥 舅� 돕고 말 것이오." 유곰보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떻게 하든 간에 일을 도울 거란 말이군." "그렇소." "난 이런 궤변은 처음 들어본다. 내가 욕심이 없고, 게으르기 짝이 없어서 그냥 자네 보석을 빼앗아 도 졀� 는 경우는 생각하지 않나?" 왕일은 유곰보를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날 도울 거요." "왜?" "게으른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묻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유곰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비틀린 웃음이 아니라 유쾌함을 참을 수 없어 발 산하는 웃음이었다. "천리마를 알아보는 것은 백락(佰樂)이라더니 날 알아보는 것은 이 거지가 아닌가." 한참을 더 웃고야 유곰보는 솥을 집어던지고 왕일의 앞에 앉았다. "자, 이제 얘길 들어보기로 할까?" "당신이 제일 먼저 할 것은 날 살리는 거요. 그러려면 이것부터 돈으로 바꿔야겠지요." 그 말에 유곰보는 왕일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이 급속히 굳었다. 왕일의 안색은 점점 더 흐려� 서 사색을 띠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의 몇 마디 대화가 그의 기력을 빼앗은 것이 분명했다. 왕일은 유곰보의 굳은 표정을 보면서 천천히 뒤로 기대 누웠다. 그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 �. "내겐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둘러야 할거요." 왕일은 그대로 혼절해 버렸지만 유곰보에게 남은 일은 적지 않았다. 우선 왕일이 죽지 않도록 조치를 � 하 고, 시킨대로 보석을 팔아야 할텐데 그것이 영 쉽지가 않았다. 한평생 떠돌이로 살다 보면 어지간한 상처, 특히 어디 가서 맞고 터진 상처는 대충 치료할 정도의 실� 을 갖추게 된다. 유곰보는 그 점에 있어서 남보다 낫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왕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우선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정상적인 경우라면 분명 죽고 살지는 못할 타박상이 왕일의 전신에 퍼져 있었다 게 다가 물에 오래 잠겨 있었던 모양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타박상 만이라면 일단 죽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치료할 방법도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왕� 이 그런 타박상을 입고도 죽지 않은 그 원인에 있었다. 그의 몸안에 흐르는 이상한 기운, 그것을 어떻게 처� 하지 않는 이상 왕일의 생명은 계속 저승에 한발을 걸친 상태에 머물 것이었다. 유곰보는 우연한 기회에 그것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으므로 왕일의 몸에 흐르는 이상한 기운을 바로 독 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왕일의 상처는 그의 손으로 해결할 정도가 아니라는 痼� 알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왕일의 기운을 보존하는 데에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기로 마음을 먹었 �. 그는 왕일을 강으로 데려가 씻겼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 양지쪽의 동굴을 찾아 건조한 풀을 깔고, 거� 눕 혔다. 일단 몸을 말리는 일이 중요했으므로 동굴 한쪽엔 모닥불을 피우고, 평소 갖고다니던 약을 온몸에 渗� 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였다. 그의 응급조치가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왕일은 곧 정신을 차렸다. 유곰보의 일은 그때부터가 진짜 시� 이 었다. 우선 옷을 구해야 했다. 왕일의 찢어진 옷을 대체하기 위해서, 그리고 왕일이 계획하는 다른 일을 위� 서 유곰보 스스로의 옷도 구해야 했다. 장래에는 엄청난 부자가 될지도 모를 두 사람이지만 우선 당장은 둘 다 돈이 없었으니 옷을 살 수는 � 었 다. 그렇다고 옷을 구걸할 수도 없지 않은가. 유곰보는 인근의 농가에서 빌리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 다. 물론 거지에게 옷을 빌려줄 사람도 없으니 밤에,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빌려야 했다. 유곰보의 옷은 그것으로도 해결이 안됐는데, 왕일의 계획을 위해서는 유곰보의 옷은 깨끗할 뿐 아니라 가 능한 한 좋은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곰보는 그로부터 닷새 동안, 그러니까 그들이 노화만� 떠 나 연주부( 州府)에 도착하기까지 계속 기회를 찾다가 어찌 어찌하여 어느 객잔의 들창문을 통해서 겨우 그 럴듯한 옷 한 벌을 빌릴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옷을 빌려준 사람도 그것 한 벌뿐인 듯했으므로 매우 미 훌� 면서도 고마운 일이라고 유곰보는 생각했지만 상황이 사람을 못살게 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하던 도둑질보다도 더 힘든 것은 팔자에 없는 시골 부자 흉내였다. 그는 옷이 갖추어지자 연주부성으로 들어가 비단, 장신구, 패물 등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선 상가를 둘 �보 기 시작했다. 그리곤 언뜻 보아 가장 규모가 큰 패물 가게, '부귀사(富貴舍)'라는 간판이 높게 걸린 곳� 로 들 어갔다. 산동성은 고대의 하(夏)나라 때부터 중국의 중심이던 곳이고, 연주( 州)는 그때부터 하나라의 구주(� 州) 중 하나로 손꼽히던 곳이다. 비록 지금은 역사의 중심에서 비껴 서 있지만 오랜 문화야 어디로 가랴. 고도(古都) 연주의 중심가에 자리한 가게답게 귀족, 거상들이 부귀사 안을 조용히 오가며 혹은 물건을 磁� 고, 혹은 점원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안 맞는 옷을 걸친 것처럼 어색한 행색에 볼품없는 곰보가 蓚� 들어 왔으니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유곰보는 부귀사 입구에서 한참을 서성거린 다음에 비로소 그를 발견한 것처럼 다가오는 점원을 보고는 이 번에는 자기가 되려 겁먹은 것처럼 부리나케 가게를 빠져나와 버렸다. 그리곤 다시 다른 곳에 들어가 같� 일 을 반복하고, 또 한 번 그런 일을 하니 누군가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웃는 낯이 인상적인 이십대의 점원 潔� 다. "노야(老爺)께선 패물 건으로 용건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잘되었습니다. 소인 호삼(胡三)이 좋은 곳을 추천해 드리지요." 그는 유곰보가 거절할 겨를도 없이 소매를 끌고는 걷기 시작했다. "소개해 드릴 곳은 진보당(珍寶堂)이라는 곳으로 사실은 소인 호삼이 목을 메고 있는 가게입지요. 하 嗤� 저희 가게라서가 아니라 정말 이 연주부 어디를 돌아다녀도 저희 가게 만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요. 겉이 �려 하다고 안까지 좋은 것은 아닙지요. 보기에 화려하다고 실속이 있는 것 또한 아니겠구요. 그런 면에서 본 摸� 저희 진보당이야말로 노야의 필요에 적합하고도 합당한 장소라는 것을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요." 사실은 유곰보가 찾던 곳, 왕일이 찾으라고 시킨 곳이 바로 진보당과 같은 곳이었다. 부귀사나 여타의 큰 곳에서는 출처가 분명해 나중에라도 문제가 없을 물건들만 취급한다. 그러나 왕일의 묘안석은 그런 곳에 �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진보당과 같이 손님의 등을 치려고 하는 언뜻 위험스러운 장소야말로 流� 의 필요에 적합하고도 합당한 곳이 틀림없었다. 일단 장소를 정하자 그 다음은 쉬웠다. 황금 일천냥의 가치라고는 하나 그렇게 팔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각 오하고 있었다. 오랜 흥정 끝에 황금 삼백냥을 받아 낸 것만으로도 유곰보의 수완이 좋았던 덕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흥정이 된 것, 그리고 예상외의 높은 가격을 끌어낸 것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 痼� 유곰보는 성문을 나서기 전에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어느새 건장한 사내 둘이 따라붙고 있 駭�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앞에서는 팔고 뒤에서 다시 거둬들이자는 속셈, 楹� 둘은 진보당에서 보낸 인물들일 것이다. 유곰보가 성문을 나서서 관도를 걸을 때도, 그리고 그 관도가 샛길로 변해 산으로 꼬불꼬불 들어갈 때 즈 음에도 사내들은 여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유곰보가 연신 뒤를 돌아보며 겁먹은 빛으로 걸음을 빨리하� 것 을 보면서도 사내들은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유곰보가 자기 말대로 시골 부자가 아 灸� 어쩌다 큰 것을 건진 좀도둑 나부랑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도둑이 강도를 만난다고 한들 누구에게 하소� 을 할 것인가. 유곰보에게는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다. '이것들을 어딜 부러뜨려 줘야 정신이 번쩍 들까?' 하지만 그런 고민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사내들이 이제 완전히 대담해져서 유곰보에게 바짝 붙어 � 의 어깨를 잡아채는 그 순간, 유곰보가 실력의 극히 일부분을 드러내 두 사내의 정신을 차리게 해주려는 그 彭�, 선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두 발의 화살이 날아와 연달아 두 사내의 목젖을 꿰뚫어 버렸기 때 �이 다. 18. 목을 뚫은 화살은 핏줄까지 끊어버렸다. 순식간에 두 장한은 구멍 뚫린 피주머니처럼 피를 뿜어내었다. 목 젖에 뚫린 구멍은 화살이 마개가 되어 막고 있었기 때문에 피는 상처에서 가장 가까운 구멍, 그들의 입� 로 역류해 뱉어졌다. 유곰보는 그들과 극히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뿜어지는 피로 세수를 해야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닦을 생 각도 않고 먼저 길옆 산비탈로 뛰었다. 그의 행동은 신속하고, 갑작스러우면서도 극히 신중했다. 그가 � 려가 는 곳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이고, 거기에는 아직 활을 쏜 누군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겨가며 산으로 올라가다가 네다섯 번 방향전환을 해서 다시 길이 내려다보이 � 산비탈의 한 지점에 덮쳐들었다. 거기에는 작지만 몸을 숨길만한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옆으로는 잎이 우 탕� 나무도 한 그루 있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반격을 대비할 수도 있는 장소였다. 거기에 활을 쏜 자가 있� 다. 왕일이었다. 유곰보는 눈을 부릅떴다. 달려오면서 이미 '혹시'라고 생각했던 것이긴 하지만 막상 왕일이 범인이라� 하 면 '설마' 하는 마음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성내로 들어갈 때만 해도 곧 죽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 속 에서 기다리게 하지 않았던가. 식초에 절인 파처럼 늘어졌던 몸 어디에 활을 당길 힘이 있었을까. 아니, 그보다 더 '설마'하는 마음을 갖게 했던 것은 그 단호함이었다. 유곰보도 사실은 무림인으로 사 汰� 죽여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적지 않은 사람을 다치게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윱� 본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말 그대로 눈 한 번 꿈쩍할 동안에 두 사람이 삶과 이별하는 장면을 보는 � 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만든 것,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던 왕일의 잔인함이 유곰보를 당황하게 했� . 분 노하게 했다. '살성(殺星)을 만났군! 처음의 그 심상찮은 눈빛이 바로 살기였던가.' 유곰보는 눈살을 찌푸리며 왕일을 보았다. 뭐라고 한 마디 꾸짖어주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어 버� 다. 왕일은 제대로 설 힘도 없는지 바위에 기대어, 아니 늘어져 있었다. 독기의 영향인 듯 유난히 파랗게 보 甄� 그 얼굴이 시체의 그것을 연상케하는데, 그 앞에서 생명의 귀함이니 뭐니를 주절거리고 싶은 생각이 들� 는 않았다. 또 어찌 생각하면 왕일은 그가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목숨을 구하려� 그 랬던 것이 아닌가. 죽어가는 몰골로 그를 살리기 위해 활을 당겼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유곰보는 한숨을 쉬고는 왕일을 당겨 어깨로 부축했다. 힘없이 끌려오면서도 왕일은 손에 든 활과 화� 을 놓지 않고 있었다. 유곰보는 활을 힐끗 보며 물었다. "어디서 난 건가?" "산 위에 사냥꾼의 초막이 있었소." "솜씨가 좋더군." 왕일은 잠시 침묵하더니 낮게 대답했다. "그럴 이유가 있었소." 그 눈빛에 무언가 처량한 빛이 스치는 듯했지만 유곰보는 그 일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더 중요한 일 이 있었다. "다음 계획은?" "의원을 찾아가는 거요." "의원?" "되도록 솜씨 있는 의원으로." 유곰보는 왕일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고, 그 푸른 얼굴을 보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지간한 솜씨로도 힘들겠군!" 강도였든 아니었든 사람이 죽었으니 시끄러워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들을 보낸 진보당에서 관에 � 저 고변하리라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 오가는 관도에 시체가 있으면 관가에 신고가 안 들 載�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면 여러 가지로 귀찮아진다. 유곰보는 왕일을 부축해 가다말고 시체부터 치우려 했다. 그러나 이미 그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 웅� 거 리고 있었다. "젠장!" 유곰보는 다시 왕일을 들쳐업었다.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되도록 멀리 가야했다. 왕일은 둘째치고 그 黴� 은 이미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곰보라는 특징은 그렇게 쉽게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대로 서 � 잠 시 망설이다가 결심을 하고, 숲으로 몸을 날렸다. 며칠간의 고생으로 해서 수척해졌다고는 하나 기본적으 灌� 건장한 사내인 왕일을, 그것도 축 늘어져 몇 배로 더 무겁게 느껴지는 그를 업고도 유곰보의 동작은 날� 새 처럼 표홀했다. 연주에는 봉현(峰縣), 자양(滋陽), 사수(泗水), 거야(巨野) 등 25개의 현이 있다. 그중 곡부(曲阜)는 � 자(孔子) 의 탄생지로 유명하여 지금도 그 묘소를 찾는 유생들이 인파를 이루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 십여년 동안 〈� 그 인파에 유생들과는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끼여들었다. 환자와 그 가족들이라는 부류였다. 제세의원(濟世醫院)은 곡부현성에서 남동쪽으로 십여리 떨어진 언덕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거� 정 총림(鄭叢琳)이 있다. 그는 전대 황제의 어의로 나이가 들어 은퇴한 이후 고향인 이곳에 와서 정착했다. 돈도 명예도 있을 만큼 있으니 그냥 안락한 노후를 보내어도 괜찮을 것인데, 백성을 구하고, 후진을 양성한다 臼� 의원을 열었다. 당연히 잘 되었고, 어의라는 이름보다 더한 명성과 찬사가 뒤를 이었다. 그의 명성을 따 � 곡 부에서만이 아니라 근동에서부터 많은 환자와 수발하는 가족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 중에 두 사람이 끼여 榕� 다. 유곰보가 왕일을 업고 제세의원의 돌담을 넘은 것은 달밤이었고, 담 너머에는 이미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 었다. 왕일은 유곰보의 등에서 그들의 손으로 옮겨졌다. 왕일을 부축해 든 두 사람과, 이제는 짐을 덜고 홀가 분한 유곰보, 그리고 축 늘어져서 거지반 죽은 꼴이 된 왕일은 그대로 제세의원의 후원에 자리한 한 방� 로 갔다. 정총림이 직접 환자를 볼 때 사용하는 방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었지만 그들이 들어간� 얼 마 되지 않아서 나온 백발의 의원이 정총림 본인이라는 것은 유곰보도 알고 있었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 結� 으니까. 정총림은 유곰보에게 눈짓으로만 아는 척을 하고는 바로 왕일의 옆에 붙어 앉았다. "옷을 벗겨라!" 왕일을 들고 온 두 사람이 그 지시에 따르는 동안 유곰보가 말을 붙였다. "갑작스런 부탁인데 들어주셔서……!" 정총림은 한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리곤 손가락을 입에 대고 흔들어 보였다. 유곰보는 머쓱해져서 �있 을 수밖에 없었다. 일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호감이 안가는 노인네라고 유곰보는 생각 杉�. 왕일이 완전히 벌거벗겨져서 정총림의 눈앞에 전신을 드러내고, 정총림이 보기 드문 유리 안경을 코� 에 걸치고 그 상세를 살피는 동안 유곰보는 방 한쪽에 서서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이미 원래의 옷, 탕� 복장을 되찾아 입고 있었다. 변장이라기 보다 그냥 편한 옷을 찾아 입은 것이었다. 어깨를 가로질러 짊어 � 마 대에는 여섯 개의 매듭이 지어져있다. 그것이 그의 신분을 말해주는 것이다. 개방( 幇)의 육결제자(六結� 子). 천하에서 가장 많은 제자를 가진 방파, 개방의 산동분타(山東分舵)를 맡고있는 분타주가 바로 그였다. � 리춤 에 달고 다니는 무쇠 솥은 배고플 때는 거기 밥을 끓이고, 비 올 때는 머리에 쓰고 다니는 것이기도 하� 만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 이름도 거무튀튀한 외관에 걸맞지 않게 여의정(如� 鼎) 이었다. 개방에는 남북 두 개의 총타(總舵)가 있고, 전국의 각성에 각각 한 개씩 해서 총 열세 개의 분타(分舵) � 있 다. 각 분타의 산하에는 다시 각 성의 상황에 맞추어, 그러니까 각 성에 소속된 주현(州縣)의 숫자만큼 � 타(支 舵)가 있다. 그러니 분타주라는 것은 낮은 위치가 아니었다. 특히 유곰보는 지닌바 무공과 꼼꼼한 일 처 �로 개방 내에서는 물론 무림에 적지 않은 명성을 얻고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 약간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왕일을 만난 것은 근 두달에 걸친 지타의 순회감찰을 마치고 � 아 오는 길이었다. 도둑질을 하고, 변장을 해가며 왕일의 말을 따른 것은 큰 일이 끝났다는 홀가분한 마음에 약간 의 호기심, 그리고 불행한 자를 돕는다는 의협의 차원에서 가볍게 생각하고 벌인 일이었지만 이젠 귀찮� 져 버렸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그 살기가 부담스러워 더 돕고싶지가 않았다. '대충 치료만 끝나면 떠나야겠군.'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있는데 일은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모양이었다. 벌거벗은 몸 구석구석을 살� 고, 진맥을 하던 정총림이 그들 돌아보며 고개를 젓는 것이다. 유곰보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가망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하네. 어디 묻을 곳이나 찾아보시게." 정총림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을 나가려 했다. 유곰보가 그를 불렀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니 뭐라도 처방을 해주셔야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늦었어." 그리고는 나가버린다. 유곰보는 다시 몇 마디 사정을 해볼까하다가 참았다. 정총림의 무뚝뚝한 태도가 羞� 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왕일에게 옷가지를 대충 꿰고는 이불로 싸서 들쳐 메고 방을 나갔다. 담을 銖� 가는데 먼저 나간 정총림이 앞에 걸어가다가 그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묻으러 가는가?" 유곰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다른 의원을 찾아갑니다." 이번에는 정총림이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우뚝 서더니 왕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맞아서 상한 것은 아무리 심해도 고칠 수가 있지. 그냥 중독이라면 그것도 괜찮아. 시간이야 걸리겠� 만 고칠 수도 있을 테니. 그러나 문제는 기력이 쇠했다는 것일세. 거기에 다른 게 겹쳤어. 천하없는 명의도 � 고 칠 걸세. 시간 낭비 말고, 환자 고생시키지 말고 그냥 눕혀뒀다가 임종하면 갖다 묻어." 유곰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의원이라는 작자가 할 말이야?' 뭐라고 한 마디 해주려다가 그는 다시 참았다. 존경받는 의원, 그보다도 그들 개방에서 데려온 연고지 愎� 환자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준 의원에게 예의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총림에게서 느낀 불쾌감은 錚� 게든 왕일을 살려보겠다는 기분을 생기게 했다. 그리고 그때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아직 방법이 남은 듯하니 마저 해보겠습니다." 유곰보는 그 말과 함께 담을 뛰어 넘었다. 유곰보의 방법이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왕일을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원은 아니었다. 정총림보� 나 은 의원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유곰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없었고, 그것은 일반적인 의술로는 왕일� 못 고친다는 뜻과 같았다. 그러니 이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할 때였다. 유곰보는 그 특별한 일을 할 수 있� 지도 모를 인물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할지 안할지는 유곰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의외로 그는 흔쾌히 그 일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왜 지금에야 데려왔냐며 가볍게 꾸짖기도 했다. "가망은 있습니까?" "물론! 물론 있지. 이 친구 같은 상세는 처음 보는 것이지만 내가 꿈에도 기다리던 바로 그 상태야. 弩� 완전중독(完全中毒)이라는 것이지. 흐흐흐!" 왕일은 정총림의 방에서와 같이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는 빽빽하게 � 이 꽂혀 있었다. 유삼성은 어딘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중독을 침으로 고친다는 말은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물론 없지. 이건 중독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중독된 현상을 더 !빨리 진행시키려는 것일세!" "뭐라고요?" 유삼성이 잔뜩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개방의 장로이지만 사이한 일을 주로 한다고 해서 거의 따돌 좋� 상태나 다름없는 독개(毒 ) 서문정(西門晶)은 마른풀처럼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사이로 누런 이를 드러내� 여 전히 웃기만 했다. 19. 완전중독이란 어떤 것인가? 유곰보는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독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지만, 사실은 단어 자체를 독개 서 �정 이 만든 것이니 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건 말일세." 서문정은 자기가 독에 대해 이룬 성취를 자랑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럴 � 도 한 것이 독에 관한 한 중원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전문가이면서도 막상 개방 안에서는 거의 대� 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그였다. 무림이라는 것이 또 묘한 것이라 보통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는 일도 정의라는 이름 아래 태연히 저� 르 곤 하기도 하지만, 또 나름대로는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어서 독이니 암기 같은 것은 경시하는 풍조가 있 駭�. 막상 싸움에서 이기는 데에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면서도 이 런 경향은 정파라고 칭해지는 구파일방(九派一幇)에서 더한데, 개방이 바로 그중 일방(一幇)이었다. 덕분 � 독 개 서문정은 개방에서도 아홉 명밖에 없는 장로의 일인이면서도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여기 산동성 맑� 의 이름도 외로운 고산(孤山) 기슭 후미진 골짜기 속에서 원치 않은 은거생활을 해야했다. 유곰보는 독개 서문정에게 무공을 배운 것도 아니고, 예전 서문정이 활동할 당시에도 친분 같은 것은 � 오 라기 하나 만큼도 없었지만 은거지를 구해주고, 좋아하는 독충이니 독초나 만지며 살 수 있도록 여러 가� 배 려를 해주었다. 그는 이 어딘지 음침한 장로가 무림에서 손꼽히는 독공(毒功)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방� 틀 안에 남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 는 달리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약간이지만. "이것봐!" 유곰보는 흠칫 놀랐다. 서문정이 그를 이상하다는 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어느새 잠깐 딴 생각에 잠 騈� 느라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는 것을 들킨 모양이었다. 서문정이 묻고 있었다. "알아 들었나?" 유곰보는 태연한 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서문정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렴풋한 기 억을 긁어모았다. "그러니까 이 친구가 한 번에 몇 가지 독을 썼는데 그게 몸 안에서 얽혀 그…… 상호작용을 하는 바람 � 살았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상생상극작용(相生相剋作用)일세. 정확히 일곱 가지 독이고, 그 일곱 가지 독에는 각각 다른 성질이 構� 가지씩 섞여있네. 그러니 총 마흔 아홉 가지 독이 몸 안에서 상생상극작용을 일으켜 원래 하나로도 단박� 염 라대왕 앞에 보낼 수 있었던 생명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것이지. 한 가지 재미 있는 것은 이 친구가 독� 쓰 기 전에 반드시 죽음 직전의 몸이었을 거라는 것일세. 몸 안에서 생기(生氣)가 빠져나가고 공동(空洞)이 만들 어지는 그 상태에서 마흔 아홉 가지나 되는 독기가 들어가는 바람에 거의 완벽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지. 幟� 에 이 친구의 몸 안에는 후천지기(後天之氣)가 사라지고 독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네. 한 가닥 남은 명줄� 선 천지기(先天之氣)가 잡고, 그 선천지기를 독기가 받치고 있는 형국이지. 이걸 완전중독이라고 부르는 것� 세." 처음에는 유곰보의 불성실한 청취태도를 꾸짖는 듯하더니 스스로의 말에 도취하여 방금 했던 말을 처� 부 터 다시 풀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알 듯 모를 듯 묘한 말들을 들으면서 유곰보는 하마터면 졸뻔 하다� 정 신을 차렸다. 방금도 그쯤 듣다가 말았던 기억이 났다. '이대로 두면 한정 없이 떠들겠군.' 유곰보는 서문정이 보라는 듯이 입을 크게 벌려 찢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얼른 사과했지만 이미 서 문정의 표정은 충분히 일그러져 있었다.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장광설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래 도 유곰보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생각해보면 그말고는 아무도 상대를 않아 주는 가련한 노인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제자는 무식하고, 말씀은 심오하기 그지없으니 통 알아듣질 못하겠군요." 서문정의 표정이 금세 다시 풀렸다. "그래,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겠지. 쉬운 말로 못해준 내 책임이 크네만 자네도 각성하게. 무림인이야 寧� 쎄면 끝이라지만 무식하면 배워야지 그냥 있어서야 되겠나. 분타주 씩이나 된 사람이 말야. 어쨌든 쉽게 뽀� 서 이 친구는 그 독 덕분에 목숨을 건진거야. 끊어지는 게 당연했을 생명 줄을 그 독이 잡고있는 셈이니 뼈� 세. 뿐만 아니라……!" 이유야 어쨌든 죽지는 않는다니 안심이 되는 유곰보였다. 핀잔에 가까운 서문정의 말도 그래서 웃어넘� 고 는 계속되는 그의 장광설을 참고 들을 수 있었다. "후천지기를 청소하고 선천지기만 남은 상태에서 독기로 몸을 씻었으니 어쩌면 벌모세수(伐毛洗髓) 환 紬� 태(換骨脫胎)를 한 격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면 내가 꿈꾸던 그것이 만들어질지도……!" 벌모세수에 환골탈태. 어떤 계기를 통해서 무공을 익히기 적합한 체질, 아니 인간으로서 완벽한 체질로 바뀐다는 용어였다. 궁� 지기니 후천지기라는 말보다 그다지 쉬운 용어가 아니지만 유곰보에게는 바로 들어오는 말이었다. 무공� 배 우는 사람이면 누구나 꿈에 그리는 일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영약이나 뭐 그런 걸 먹어서 된 경우는 있다지만 독으로 그렇게 된다는 건 금시초문� 데 요?" "나도 처음 보네!" "예?" 서문정은 묘한 눈빛을 흘리며 왕일의 몸을 훑어보았다. 유곰보는 그 모습이 어째 먹이를 보고 군침을 � 키 는 들개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서문정이 말했다. "실제로는 처음 보지만 오랫동안 이런 상태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꿈꿔왔지. 내 오랜 공부(功夫)의 결 퓽� 보게 될지도 모르는 기회가 이렇게 우연히 굴러 들어오다니……!" 그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져서 나중에는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되었다. 습기찬 동굴 벽에서는 냉� 가 뿜어져 나오고, 등불의 빛으로도 채 걷어가지 못한 어둠 속에 서문정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유곰보는 � 문정 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기 오래 있어서 좋을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움직일 수만 있게되면 떠나는 것이 좋겠군.' 유곰보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어쩌면 서문정이 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몸 을 떨었다. 대접을 받든 못 받든 그는 개방의 장로. 초절정의 독공(毒功)은 둘째치고 본신(本身)의 무공 맛막� 도 유곰보보다는 훨씬 상수인 것이다. 칠 일이 지났다. 왕일은 안색이 약간 파리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건강을 되찾았다.그것이 서문정의 말대로 독� 에 의한 자연치유인지, 아니면 그후 서문정이 먹게 한 여러 가지 약으로 짐작되는 액체들 덕분인지는 알 수 騙� 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왕일이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제 다시 복수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 募� 것이었다. 왕일은 정신이 든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젠 움직일 수 있다고 확� 이 들게 되었을 때 그는 가겠다고 말했다. 유곰보의 걱정과는 달리 서문정은 아무 조건 없이 그들을 보내주� 다. 그러나 유곰보는 떠나는 그들의 뒤에서 서문정이 웃은 것 같아서 한참동안이나 개운치 않은 기분이 되었� . 산에서 벗어나 길로 나오자 유곰보가 물었다. "이제 뭘 할건가? 아니, 누굴 죽일 거냐고 물어야 하나?" 그 말에 돋친 가시가 그를 제대로 찔렀다. 왕일은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유곰보를 보다가 동쪽 하늘어� 을 아무렇게나 가리켰다. "할 일은 더 있소. 당신 말대로 누굴 죽여야 하는 일이오. 열 명, 어쩌면 스무 명. 그 준비과정을 돕는 일을 부탁할 생각이었지만…… 여기서 그만 돌아가도 괜찮소. 혼자 해도 될 일이니까." 그는 길옆 나무 뒤로 가더니 한참이 지나서 다시 나왔다. 그의 손에는 묘안석 하나가 들려있었다. "지금까지 도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소." 유곰보는 묘안석을 내려다보며 한참 서 있다가 왕일을 보며 웃었다. "역시 몸에 지니고 있었군. 그날 내 말대로 자넬 때려눕히고 찾아가졌으면 어쨌을 텐가?" "그날 이미 말했듯이……!" 왕일은 묘안석을 던졌다. 유곰보가 받았다. "이게 내 몸에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소. 가능성만 있는 상태에서 당신은 선택했고, 난 성공한 셈� 오." 유곰보는 묘안석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그것을 왕일에게 던졌다. "일을 않으면 대가도 없다. 거지 아닌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면서? 난 그렇게 사는 걸 이미 포기했지만 이 돌은 받을 수가 없네. 거지가 돈이 많으면 타락할 위험이 있지. 대신 자네 일은 도와주겠네. 물론 대가는 필요 없네." 그는 무어라 말하려하는 왕일의 입 앞에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더 말하지 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어. 그냥 자네에게 호감이 가서 도와주려는 것이지만� … 내용을 많이 알게되면 내가 자넬 막아야 할지도 몰라." 왕일은 유곰보의 눈빛을 보고 그의 말이 헛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막겠다고 하면 � 을 사람이 분명했다. "좋소. 그럼 우선 어딘가 숨어서 일을 추진할 곳이 필요하오.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떨어져 있으면서 필 鄂� 여러 가지 물건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곳. 도회지 가까운 곳의 어디 산 속 움막 정도면 되겠소." 유곰보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런 곳이야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지." 그들은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 * * *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지는 법이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나 안 익힌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 통 하는 그 법칙에 손부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밤 달도 아직 밝은데 홀로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은 잠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 에 익히고, 앞에서 오는 창보다는 뒤에서 오는 화살이 더 무서운 세상, 강호에서 예리하게 갈려진 신경이 그 � 깨 운 것이다. 방금 창밖에 스치는 바람소리, 어쩌면 도둑고양이의 숨죽인 발자국소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戮� 늙은 뼈마디와 거친 피부에 배어있는 경험은 무슨 소리든간에 그것은 사람이 온 증거라고 알려주고 있었� . 손부자는 방문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밤이든 낮이든 내 집에 오는 손님을 거절해본 적은 없네. 들어오게."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것으로 손부자는 그 침입자가 대단히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소리로 보아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인데…… 이건 천성적으로 조심성이 많은 것인가, 아니면 그럴 이 유가 따로 있는 것인가……!' 거기까지 다가올 때의 발소리처럼 나직하게 방문이 열렸다. 그 뒤에 한 사람이 꿇어앉아 있었다. 복면� 쓴 사내였다. "늦은 밤에 찾아 뵙게 되어 망설였던 것일 뿐, 손부자께서 손님을 거절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모르는 痼� 아니었습니다." 손부자는 그를 유심히 보더니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어떤 사람은 복면이 어울리지. 자넨 아닌 듯하지만……. 안 그런가, 왕일?" 복면인이 복면을 벗었다. 손부자의 말대로 그는 왕일이었다.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손부자는 천천히 보료에 등을 기대었다. "뭐든지 말하게." 왕일이 죽었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 내색은 않았지만 손부자는 대단히 분노했었다. 그러나 그와는 어떤 연 고도 없는 처지에 원한을 대신 갚아줄 수도 없었다. 그것이 그의 오랜 원칙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냥 의 厦� 으로 나서기에는 너무 큰 싸움이 될 듯해서 망설여진 것이기도 했다. 이젠 달랐다. 왕일은 살아있고, 이제 장본인이 직접 부탁을 할 것이다. 그러면 젊었을 때의 열정, 그때 � 분 노를 다시 일으켜볼 준비가 그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일의 부탁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무림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특히 제 적들에 대해서……!" 20. "무림에 대해 말해 달라고?" 손부자는 같은 말을 한 번 더 되뇌인 다음에도 선뜻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 들었다. "그것도 사람이 모여 만든 세상이라는 것 말고는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사람이 만든 것이 맞습니까?" 손부자는 더욱 난감한 빛을 드러내었다. 왕일에게 어느 정도까지 설명해 줘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일이 무림, 그리고 무림인에 대해서 전혀 무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은 아니었다. 무� 인, 소위 무공이라는 것을 익힌 자들이 세력을 만들고, 사승을 이루어 만들어진 사회가 있다는 것은 촌노들� 잘 아는 이야기였다. 왕일이 궁금해하는 것, 그것 때문에 분노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사람의 자식이 분명하다면 어찌 그런 짓들을 할 수 있습니까?" 손부자는 그 말을 듣고서야 왕일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았다. 왕일은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질책을 한 � 이 었다. 손부자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무림, 그리고 무림인 전체에 대한 질책이었다. 손부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림……, 강호라고도 부르는 곳이지. 이런 말이 있더군. '강호가 어디냐고 묻지 말라. 사람 사는 � 상이 모두 강호이니'라고. 무림은 무공, 무술을 배운 사람만이 구성하는 세상은 아닐세. 자네도 이미 무림의 � 부인 것일세."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무거웠고, 말을 할수록 점점 더 무거워졌다. 왕일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이 痼� 현실'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사람의 자식이 어찌 그런 짓들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 난 이렇게 대답하겠네. 사람의 자식이니 그� 짓 을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오직 사람의 자식만이 그렇게 잔혹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그게 사람이기 때 �이 지. 제 아무리 잔혹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사람일세." 왕일은 침묵했다. 손부자의 말에는 무리가 없지 않았고, 왕일이 그 말을 모두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편으로 그는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만이 그런 짓을 한다……. 어쨌든 무림인도 사람이란 말이군요. 그럼 됐습니다." "뭐가 됐단 말인가?" "그들도 사람이니 배에 칼이 안 들어가진 않겠지요. 그럼 죽일 수 있습니다. 제 손으로요." 흉악한 말이지만, 그 말에 묻어 있는 살기에 비하면 말은 오히려 부드러운 편이라고 손부자는 생각했다 '이놈, 혼자서 복수할 생각을 하고 있군……!' 손부자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도와줘도 복수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 면 가능성이 있지만 돕지 않으면 아예 가능성이란 것은 전무하게 된다. 그는 그것을 깨우쳐 줘야 한다고 판 洑� 다. "배에 칼이 안 들어가지는 않겠지……. 옳은 말일세.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고 칼에 따라서는 � 들 어가는 배도 있는 걸세. 기공(氣功)을 익힌 고수를 만나면 보통 칼로는 그 배에 칼을 찔러 넣을 수 없지. 무림 인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네가 상대해야 할 사람 중에 적어도 한 명은 그런 고수 일걸세. 박천조 撲天 鳥) 이응(李應),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 중에 하나인 노애령(老崖嶺) 천부채(天富寨)의 주인일세." "노애령 천부채……, 그럼 그들이?" 손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애령은 경사대명부(京師大名府 : 경사(京師)는 북경(北京), 북경은 아홉 개의 직할부(直轄府)로 구 뭇퓸� 있는데 대명부는 그중 하나)에 있네. 녹림도의 관습상 통행세를 받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활동은 자기들� 본 거지가 소속된 부성(府省) 밖에서 하니까 그들이 여기 산동성까지 온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통행세는 자기 산에서 받는다고 해도 약탈은 다른 지방에 가서 한다는 의미였다. "녹림십팔채……, 천부채……. 어느 정도의 세력입니까?" "당금 무림은 셋으로 나누어져 있지. 최강 세력인 남련북맹(南聯北盟), 그 양 문파의 세력권에 걸쳐 있 만� 서도 중립적인 노선을 가는 녹림도(綠林道). 녹림십팔채는 녹림도의 중심 세력일세." 설명을 한다고 하지만 왕일로서는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뿐이었다. "남련북맹은 또 뭡니까?" "남련은 청룡신군(靑龍神君)이 세운 청룡방(靑龍幇)이 주축이 되어 구성한 강남 무림세력의 연합체고, 북맹 은 백호신군(白虎神君)이 만든 백호회(白虎會)가 주축이 되는 세력인데……!" 손부자는 말을 끊고 왕일을 한참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지. 옛날에, 그러니까 오십여년 전에 네 명의 천하제일고수가 있었네. 천 舊� 일고수가 네 명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는 것 같지만 그들 중 누가 제일인지 모른다는 뜻이라고 생 각하면 무방할 것일세. 기억하기 편하게도 그들은 사신(四神)이라 불리웠네." 사신(四神). 정확하게는 사대신군(四大神君)이었다. 천하에는 네 개의 방위가 있고, 각각의 방위에는 대표적인 영물이 있다. 이것을 사신이라고 부른다. 그 �고 무림고수였던 네 명의 인물들이 그와 똑같은 이름을 가졌다. 이것이 그들 스스로가 부른 것인지 말 만들� 좋 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붙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청룡신군(靑龍神君), 백호신군(白虎神君), 주작신군(朱� 神君), 그리고 현무신군(玄武神君)이 그들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도 수십 년 간 그 이름 아래 천하를 호령했었다. 그리고 늙었다. 사람이 늙으면 옛날 같지 않은 법이다. 그들은 젊었을 때의 고수가 늙은 뒤에도 고수는 아니라는 점을 예 리하게 간파했다. 그리고 젊은 고수들에게 창피를 당하기 전에 하나씩 은퇴했다. 하지만 옛말에는 또 이� 말 도 있다. 늙은 생강이 맵다. 또는 사람은 가도 그 해타(咳唾)는 남는다는 그런 말이다. 과연 그들도 하� 씩은 남겨 옛 천하제일고수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자네 혹시 당금 무림최고수가 누군지 아나?" 손부자는 말하다 말고 물었다. 그러나 왕일이 그걸 알 이유가 없다. "모르겠습니다." "혈기린(血麒麟)일세." 현 무림 최고의 고수는 혈기린이다.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혈기린에 대해 말하는 것에 그 이외의 다른 묘사는 필요하지도 않 다. 그 혈기린이 바로 전대의 천하제일고수 중 일인인 현무신군의 후계자였다. 혈기린이 얼마나 고수인가? 그와 비견(比肩)되는 고수는 단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고수다. 그가 남봉황(藍鳳凰)이다. 남봉황은 소문에 의하면 여자다. 그러나 그는, 아니 그녀는 강했다. 혈기린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 다. 그녀는 바로 주작신군의 후손인 것이다. 현무신군과 주작신군은 이렇게 후손을 남겼는데 다른 두 사람은 무얼 했는가? 그들도 제자를 키웠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으로서의 고수보다는 세력을 키우는데 더 힘을 쏟았다. 그� 서 지금의 무림을 휘어잡고 있는 양대세력이 나올 수 있었다. 그들을 남련북맹이라고 부른다. 남련(南聯), 강남칠성(江南七省)을 잡고 있는 제룡련(諸龍聯)을 가리킨다. 그 주축은 이미 말한대로 청 逆킥� 이 세운 문파인 청룡방, 전통적인 명문인 강남 팔대세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강남 무림세력들이 이 제룡 첼� 소속되어 있다. 북맹(北盟), 강북육성(江北六省)을 호령하고 있는 군호맹(群虎盟)을 가리킨다. 백호신군이 세운 문파, 蓉Ｈ� 를 중심으로, 역시 전통적인 명문정파인 구대문파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강북 무림세력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목하 그들 양대 세력은 분쟁 중이었다. "전대에서부터 그들 네 고수는 사이가 안좋았다더군. 소문에 의하면 혈기린이 남봉황과 싸운 적이 있다 玆� 하네. 남봉황이 고수 소리를 듣는 이유가 바로 그걸세. 혈기린과 싸워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거든. 소문 이 맞다면이라는 가정 하에서지만." "사이가 안 좋은 이유가 있겠지요?" "자세한 사정이야 누가 알겠냐만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지. 명예와 이익은 누구나 좋아하는 바의 痼� 니 그 앞에서 초연해진다는 것은 어렵지. 남련과 북맹만 해도 서로 무림제일 세력이라는 자존심 싸움에� 가 강남북의 상권과 조운(漕運)에 얽힌 엄청난 이권을 놓고 크고 작은 분쟁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다네. 그 � 적이 되는 것이 녹림도야. 녹림도는 장강수로십팔타(長江水路十八舵)와 황하수로연맹(黃河水路聯盟), 그리고 痢꼍� 팔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지리적으로 남련과 북맹을 걸쳐 있고, 양세력이 노리는 이권을 직접적으� 움 켜쥐고 있다네. 어느 한쪽이든 먼저 이들을 건드리면 전면전이 일어날 참이라 서로 견제만 하고 있지만 떳� 간 엄청난 피가 흐르게 될 거라는 건 머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일세. 그리고 그 피는 녹림 돋� 감싸고 흐르겠지. 싸움은 어떻게 시작되든 결국은 녹림도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쟁탈전의 양상으로 진행� 테 니까." 손부자는 결론을 내리듯 짧게 말했다. "이게 당금 무림의 모습이야." 왕일이 다시 물었다. "거기에서 천부채와 박산조라는 인물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무림 전체를 놓고 본 위치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류야!" 손부자는 설명을 덧붙였다. "녹림십팔채의 주인들을 강호에서는 녹림의 십팔천강(十八天 )이라고 부르네. 박산조 이응은 그중 천� 성 (天富星)으로 중하(中下) 정도의 인물이지. 엄격한 서열을 매기기는 어렵지만 강호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꼽으 면 오백 명 안에는 들어갈 걸세." "이류라……! 얼마나 강한지 짐작이 잘 안 가는군요." 손부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왕일의 얼굴에 아직도 푸르게 물들어 있는 멍자국을 가리켰다. "알기 쉽게 비교를 해보세. 자네 얼굴에 그 상처를 만든 사람이 증국영이지?" "예, 구지룡이라 불린다는군요." "구지룡은 무슨……!" 손부자는 피식 웃었다. "진가장의 소장주라는 망나니가 데려온 인물들은 노산삼호(勞山三虎)와 황하쌍룡(黃河雙龍)이라고 하지 사 실은 노산삼서(勞山三鼠), 노산의 세 마리 쥐새끼 도적과 황하쌍사(黃河雙蛇), 황하를 뒹구는 두 마리 � 이라 네. 정식 별호도 구지룡이 아니라 구지사(九指蛇)와 독각사(獨角蛇)고. 무림에선 삼류도 못되는 수적(水� )들일 세." "삼류도 못된다고요?" 왕일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그럼 삼류도 못되는 인물의 일격에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쓰러졌던 것 아 닌가. "그렇네!" 손부자는 왕일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게 현실이고, 그게 무림일세!" 왕일은 고개를 숙였다. 손부자에 관한 소문은 그도 듣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그가 손만 내밀면 도와� 것 이다. 지금도 그가 바라보는 눈빛은 도움을 청하라는 무언의 압력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부자에게 포권했다. "오늘 가르침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찾아 뵙고 인사 드리겠습니다." 손부자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왕일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왕 일이 나가고,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거기 정이노가 서 있었다. "호연(胡連)막내에게 뒤를 쫓으라고 시켰습니다." 정이노는 아무 대답을 않고 있는 손부자의 옆 얼굴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혹시 궁금해하실 지도 몰라서." 왕일은 초막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비수와 단도, 표창과 칼, 심지어는 창까지 포함한 여러 가지 ケ� 가 방바닥 가득 널려 있었고, 그 자신은 활 한 자루를 손질하고 있었다. "뭘 하려고?" 보고 있던 곰보가 물었다. 왕일은 손질하던 창을 전통에 넣고, 칼 한 자루를 허리에 찼다. 그리고 창까지 하나 집어들었다. 그 모 응� 로 초막을 나가며 비로소 한 마디 했다. "사냥이나 갔다 오겠습니다." 곰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빛으로 뒷모습을 보았지만 왕일은 그대로 문을 나가 숲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21. 사냥 같은 것을 하고 있을 때도 아니고, 그럴 정신도 없었지만 왕일은 실제로 사냥을 했다. 처음에는 楹� 꾼처럼 보이기 위해서였지만 나중에는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였다. 사냥꾼처럼 보이려면 실제 사냥꾼이 � 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에 있었을 때는 놀이 겸해서 토끼 사냥이나 했고, 남만에 갔을 때도 짐승이야 잡았지만 그것도 제� 로 된 사냥은 아니었었다. 믿는 것은 단 하나 활에는 제법 자신이 있다는 것 뿐, 사냥꾼으로 치면 완전 초보 � 가 까웠다. 왕일은 실수를 통해서, 때로는 진짜 사냥꾼들과 동행이 되어 따라다니면서 사냥에 대해 하나둘씩 배웠 �. 발자국을 읽는 법, 목표물에 접근하는 법, 기본적인 올가미를 치는 법, 그리고 기다리는 법……. 배워야 � 것 은 많았고, 왕일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배웠다. 그렇게 그는 산동성 남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들을 거쳐서 경사 순천부(順天府;명나라 때는 북경 � 근, 지금의 하북성을 이렇게 불렀다)로 접어들었다. 오랜 옛날부터 하북과 산동은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기 ㏏� 에 사람이 많았다.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산에 나무가 없는 것을 걱정할 지경이었으니 인적이 닿지 않은 �심 산골이란 것은 찾아보기 어렵고, 당연한 결과로 큰 짐승도 많지 않았다. 오악(五嶽)중 하나라는 산동성의 태산 (泰山)도 걸음마다 절이고, 길마다 유적이라 유람터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지경이니 다른 산은 말할 것도 없었 다. 그러나 왕일이 간 대명부의 아래쪽에는 그래도 제법 험준한 산이 있고, 깊은 골짜기도 남아 있었다. 북 堧� 로부터 가장 먼 곳이면서 과거 이곳의 험준한 지형에 의존해 관문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었 �. 그런 옛 관문 중에 노애령이 있었다. 만리장성이 설치된 팔달령(八達嶺)이나 거용관(居庸關)에 비하면 그 웅장 함이라는 면에서 떨어지지만 아스라한 산들이 양쪽으로 솟아 있는 가운데로 이 리(里)에 달하는 길고 구 耐� 불한 협곡이 있어 전략적 요충지라 할만 했다. 왕일의 목표가 바로 이곳이었다. 왕일은 산동성 청주부에서 노애령까지, 빨리 걸으면 닷새면 올 길을 보름 걸려서 온 뒤에 다시 사흘을 고 개 아래 마을에 있는 허름한 객잔(客棧)에서 지냈다. 지친 발을 쉬게 하고 본격적으로 사냥할 준비를 한 募�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인근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이야기가 모이고, 허접 쓰 묽� 라도 뒤져보면 쓸 만한 것이 걸리는 것처럼 잡다한 이야기 속에도 왕일이 필요로 하는 정보가 있을 것이 �. 바로 노애령 천부채에 관한 정보였다. 난세가 되면 영웅호걸, 기인이사들은 녹림으로 숨어든다고 했다. 지금이 왕조가 흔들릴 정도로 난세인 測� 모르겠지만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분명하고, 녹림에 숨어든 사람들 중에 기인이사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 Ａ� 만 도적들이 곳곳에 넘쳐 나는 것만은 분명했다. 먹고살기 힘들어 낫과 쇠스랑을 들고 나온 초적(草賊), 고기 잡던 작살을 꼬나 쥐고 배와 선객들을 노 �는 수적(水賊), 고갯마루 지키고 서서는 행인들을 터는 산적, 행정부재, 치안공백을 틈타서 아예 본격적으로 도당 을 결성하고 약탈을 주업으로 삼는 마적(馬賊)에다 심지어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가 도적떼로 돌 티� 버린 병졸들을 뜻하는 병비(兵匪)에 이르기까지 도적의 종류는 개개인의 내력이 다른 것만큼이나 다양한� , 그 들이 모두 녹림도의 이름을 덮어쓰고 있는 것이다. 왕일이 놀란 것은 마을에 천부채의 하수인, 혹은 정탐꾼으로 보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瀏� 나 사흘이 지나서 그는 다시 놀라야 했다. 마을에 천부채의 하수인, 정탐꾼 아닌 사람은 지나가는 여행객 謗�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노애령 인근 육 개 마을이 전부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 駭�. 이 인근 마을에서 녹림도가 되는 것은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물려주는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소위 '아 버지는 자식을 종용하고, 형은 아우를 강박하며, 아내는 남편을 꼬드겨' 녹림도가 되게 하는 것이다. � 것을 주저하는 자는 용렬한 인간이라고 경멸을 받고, 기꺼이 녹림도가 되면 기개가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 혹� 한 가문에서 녹림의 채주라도 나오면 문중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힘있는 자는 모두 산에 들어가 녹 껨� 가 되고,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녹림도의 부모, 형제, 처자들이었다. 유명한 녹림도, 특히 녹림의 십팔천강은 그들의 우상이었다. 마을의 아이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언행일치에 정의관철은 천추(天樞)와 천선(天璇) (言行一致正義凜然天樞和天璇) 찬찬한 제자에 존경할 스승은 천기(天璣)와 천권(天權) (督察弟子尊敬師長算天璣和天權) 온갖 책략 모든 관계 옥형(玉衡)은 꿰뚫어 보는데 (眼觀六路耳聽八方玉衡) 위험을 마다않고 개양(開楊)은 돌파하며 (不屈不撓始終不懈開楊) 귀신처럼 사람 죽이는 요광(搖光). (惡魔殺手嗜殺成性搖光) 노래 속에 나오는 천추, 천선, 천기, 천권, 옥형, 개양, 요광이 북두칠성의 이름이고 십팔천강에 들어� 는 이 름들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당금 녹림에서 가장 유명한 두목들의 이 ㎱� 라는 것도. 녹림 십팔천강에서도 유독 빛나는 일곱 개의 별이 바로 노래 속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노래까지 불러 가며 티를 내고 있는데도 처음에 눈치를 못 채었던 것은 그것이 감추어져 있� 보 다는 오히려 너무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다. 생활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 오히려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던 �. 또다른 이유는 그들만의 언어, 소위 흑화(黑話) 때문이었다. 채주를 쌍산(雙山)이라 부르고 산채의 모 �(謀 士)를 문신(門神)이라 부른다. 서기 노릇하는 서생을 백선(白扇)이라 하고 녹림도 스스로는 홍호자(紅 子 라고 칭했다. 그런 홍호자가 산채에만 이삼백 명이 있다는 것을 듣고서야 왕일은 이제 자신이 벌이려 하는 싸 遲�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여차하면 이 인근 마을에 널려 있는 무리� 이 모두 천부채의 병력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왕일은 그렇게 대충이나마 녹림도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주는 정보를 들은 후에 객잔을 나섰다. 그가 � 어 봤자 나올 것도 없을 듯한 가난한 사냥꾼 정도로 변장하지 않았다면, 아니 그 변장이 조금이라도 서툴렀 摸� 객잔을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호랑이 아가리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으로 협곡을 따라 걷다가 길옆 牡� 에 앉아 고민에 빠져들었다. 적은 그의 상상보다도 훨씬 강하고, 훨씬 많았다. 도저히 그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것이 �. '손부자에게 도움을 청해 볼까……?' 그는 불현듯 손부자의 생각을 떠올렸다가 바로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준비단계에서는 모 르지만 본격적으로 복수를 시작할 때에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그의 부모 그 의 형제자매들이 흘린 피를 그의 손으로 씻지 않고서는 복수를 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더구나 그자 탄� 다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무엇을 도모한다면 아무래도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원� 의 당사자가 막상 복수행에서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게 될 위험도 만만치 않았다. 왕일은 무거운 생각들을 털어 버리듯 다시 한 번 머리를 흔들고 짐짓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 �. 복수의 길은 멀고 힘들어 보였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었다. 그것이 지금 사명이고 의무였다. 그는 혼신 � 힘 을 다해 그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방법은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 것이고, 없으면 만들면 될 일이었다. � 시 작이 지금인 것이다. 왕일은 길에서 벗어나 험준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활을 꺼내 손에 들고, 한 손에는 화살을 들은 채� 다. 이제부터 그는 사냥꾼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정탐꾼이 되어야 했다. 한나절이 지나 객잔에서 준비해 온 교자를 씹어 먹을 때, 그의 허리춤에는 꿩이 두 마리, 토끼가 세 마 �나 매달려 있었다. 아직은 서툴지만 사냥꾼 모양은 내게 될 정도로 사냥을 배웠다는 증거였다. 왕일에게 있어서 사냥을 배우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발자국을 찾고, 목표를 쫓고, 다가가고 求� 이 모든 것들은 그 대상만 다를 뿐 남만에서 이미 거쳤던 과정이었다. 야수라 해도 별로 무리가 될 것이 愎� 묘족들을 그렇게 삼 년간이나 쫓고 죽이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는 명사수라 해도 좋을 정도로 활에는 자 탔� 있었다. 그 옛날 나뭇가지로 어설픈 활을 만들 때부터 그는 이상하게 활에 끌렸다. 그것은 절망의 순간에 그가 기 댈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고, 운명처럼 그를 감싸고 있던 낡은 생활방식,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는 농민� 삶 에서 탈출을 시도할 때 최초로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이전까지의 삶을 거부하고자 하는 몸짓에 최초로 銹� 것이 이것이라는 점은 그에게는 계시처럼 받아들여지는 면도 있었다. 그리고 남만. 그는 아마도 남만에서의 경험을 빼놓고는 그의 삶을 얘기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활에 있어서도 그랬다 남 만 정벌군 안에서 그는 명나라의 병졸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활들을 접했다. 말에 싣거나 수레� 실 어 소가 끌고다녀야 하는 궁노(弓弩)로부터 기관장치로 발사되는 것은 같지만 사람이 들고다닐 수 있는 諭� (弩弓), 흔히 볼 수 있는 모양이지만 그 반탄력이 강해서 제자리에서 쏠 사람이 없다는 정량궁(正兩弓), 쉽게 만들 수 있어서 전쟁터에 많이 쓰는 목궁(木弓), 장수, 혹은 궁수들이 전문적으로 쓰는 철태궁(鐵胎弓)… �. 나 라별로도 달라서 잔뜩 치켜올려도 땅에 끌릴 정도로 큰 왜국(倭國)의 활, 말에 타서 쏴야하기 때문에 왜 뮌� 활과는 반대로 극히 작고 간편하게 만들어진 몽고의 활, 물소뿔을 섞어서 만드는 조선의 각궁(角弓)에 이 １� 까지……. 그는 각궁, 그중에도 단목(檀木:박달나무)과 물소뿔을 사용해 몸체를 만든 단궁(檀弓)을 구해서 사용했 �. 지 금 들고있는 것도 그것인데, 왕곰보가 온갖 인맥을 동원해서 어렵사리 구한 것이었다. 숲 속에서 사용할 � 있 을 정도로 작으면서도 사람의 힘만으로 천 보(步)를 날아갈 정도로 강한 활은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 . 활 말고도 왕일이 자신을 갖는 분야는 하나 더 있었다. 지금 그가 발휘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정찰. 그는 남만에서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어쩌고 하는 어려운 말 灌� 표현하지 못하지만 적에 대해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알면 알수록 이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그에게는 자 灼�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노족과 같이 무너지지 않는 성처럼 생각되던 적들도 급소를 찔리니 어이없� 간 단하게 전멸하고 말았지 않은가. 그 모든 것이 그들을 알게 되어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가 운이 좋았기 � 문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 그때와 같은 운이 다시 필요한 때였다. 운은 다시 한 번 왕일을 찾은 모양이었다. 적어도 한 달은 노애령에서 살 작정이었는데 천부채는 생각� 다 빨리, 노애령에 들어온지 닷새만에 발견되었다. 협곡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삼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 , 험 준한 산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 골짜기에서는 샘이 넘쳐 냇물이 되어 흐르는 곳에 울창한 수림으� 몸 을 감싸고 천부채가 웅크리고 있었다. 왕일은 다시 닷새를 들여 천부채를 정탐했다. 주변의 지형과 조건, 건물의 구조와 배치, 돌아다니는 사 汰� 수까지……. 그는 시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머릿속에 담으려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에 무 昰� 가가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던 그의 길에 작지만 밝은 빛이 깜박거리� 나 타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왕일은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볼 것은 다 보았다. 이제 머릿속에 어렴풋이 구성된 그림을 맡� 적으로 그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언가 방법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 왕일의 운이 끝난 모양이었다. 아니, 운은 그가 천부채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만 허용했던 모양이었다. 닷새 동안 숨어 지내던 토굴에서 나오� 그 의 앞에 두 사내가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아무렇게나 차려입은 복장에 험상궂게 보이려고 노력이라도 한 것처럼 거친 용모, 사납게 치켜뜬 눈� 은 이마에 도적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듯했다. 왕일은 천부채의 순냉자(巡冷子:보초)들과 마주친 것이다. _____ 著者註 : 작품 속에 나오는 녹림도에 관한 부분 중 일부는 中國의 土匪文化(Phil Billingsley 著 / � 文昌 譯, 一潮閣, 1996)를 참고로 하였음을 밝힙니다. 22. 순풍이(順風耳) 강철(姜鐵)은 대명부 청양현(靑羊縣) 태생이다. 청양현은 노애령 천부채 아래에 흩어져 있는 마을 중 하나. 이곳 출신이면 으레 그러듯이 그도 어려서부터 도적을 동경하고, 채주인 쌍산이 되는 것을 평생 의 소원으로 꿈꾸어 오다가 열 여섯이 넘어서면서 양자(養子; 녹림도의 은어로 신입 도적을 가리킨다)가 퓸� 소원하던 것에 첫발짝을 내디디게 되었다. 직접 도적질, 물론 그들은 그것을 녹림행(綠林行)이라고 부르지만, 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녹림의 세계 � 그 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강철은 자신이 몸담은 세계에 금세 적응했고, 상당한 소질이 있음을 증명했다. 발이 빠르고 귀가 밝았다. 거기에 손이 재빠르고 성실했다. 어느 계통에서나 재능이 있는 사람은 튀어 맛� 기 마련이다. 거기에다 성실하기까지 하면 더 바랄 것이 없는데, 강철이 바로 그랬다. 도적의 세계에도 충의예지신(忠義禮智信)이라는 오상(五常)이 있다고 말하는 <장자(莊子)>를 굳이 들� 않 더라도, 녹림도 결국 사람이 사는 세상, 재능이 부러움을 받고 성실함이 인정되는 세계였다. 강철은 곧 � 자에 서 벗어나 홍호자가 되고, 곧 그 중에서도 특출난 인물로 손꼽히게 되어 순풍(順風; 녹림의 정찰대. 관군 � 거 취와 동향 파악은 물론 원정 전의 정보수집에 필요하면 첩자 노릇까지 하는 직책)이 되었다. 그가 자랑 막� 삼는 별호 순풍이가 이때 지어진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귀가 커서 소리를 잘 듣는다고 감탄 반, 놀림 반� 뜻 으로 지은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최고의 정찰대원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삼 년을 천부채의 순풍으로 이리저리 다니다가 이제 강철은 산채에 돌아와 거포(拒捕; 산채의 � 비 병)가 되었다. 말이 경비병이지 사실 산채의 거포가 된다는 것은 이제부터 진정한 산채의 식구로 받아들 ㈐� 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경로 저런 경로로 천부채에 연결된 천여 명의 사람 중에 산채에 들어올 � 있 는 사람은 백 명이 채 안되기 때문이었다. 거포가 되면 그 백 명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무공을 배울 수 있게 된다는 점이었다. 번듯한 사문(師門)을 가지고도 녹림� 투 신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들 중 대부분의 인물들은 칼 잡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 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약탈 하나 변변히 할 수 없으니 무공을 배우는 것이다. 대개는 � 두목 들에게서 기초무공을 배우고, 그 중 눈에 띄는 사람은 소두목들의 직전제자가 된다. 그 중에도 특히 재질 � 뛰 어난 사람만이 채주에게서 직접 무공을 배우는데 그렇게 되면 소두목 자리 하나 따는 것은 일도 아니게 � 어 버리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순풍이 강철이야말로 오년 안에 소두목이 될 것이라고 수군거리고, 이번에 산채에 들� 온 것은 채주가 그의 무공재질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말들을 하곤 했는데, 강철 본인도 내심 瀏� 게 기대를 하고 있었다. 자연 타인의 눈을 의식하게 되어 거동이 조심스러워지고, 평소에도 성실했지만 訣� 이전보다 몇 배나 더 성실해졌다. 그런 참에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강철에게는 행운일 수 있었다. 평소처럼 순찰을 돌고 들어가는 길 에 수상한 자를 적발한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거기서 나올 리가 없는 외진 장소에서 사냥꾼 하나� 걸 어나오는 것을 동료 유인걸(劉仁傑)과 함께 발견하고 강철은 그 앞을 막아섰다. 유인걸은 강철에게는 동향의 선배라 할만한 사람이었는데 좋은 이름과는 달리 사람이 왁살스럽고, 피를 보 기 좋아했다. "웬놈이냐!" 상대를 확인도 하기 전에 호통을 치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칼부터 꺼내었다. 더러운 얼굴과 시퍼� 칼 날은 상대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흉악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세는 물정 모르는 장사치나 농부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지만 목적을 가지고 침 �, 혹은 정찰을 하러 온 자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을 것이다. 가능성은 적은 일이었지만 강철은 마땅히 그것 〉�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같이 칼을 꺼내어 꼬나 잡고는 유인걸의 측면으로 비스듬히 나� 다. 한편으로 유인걸을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냥꾼의 퇴로를 봉쇄하는 위치였다. "어…… 어…… 저는……. 누구십니까……?" 사냥꾼은 일순 당황하더니 이내 침착해지고, 곧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어 손에 쥔 창까지 떨어뜨렸다. 肩� 일련의 태도 변화는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고, 창이 떨어져 땅에 뒹구는 것은 사람의 안색보� 도 훨씬 주의를 끌기 쉬운 것이었기 때문에 사냥꾼의 행동에서 수상한 점을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강철은 오랫동안의 정찰대 생활로 넓은 귀만큼이나 날카로운 눈도 단련해 놓았다. 지나치는 사� 들 의 태도와 실낱같은 기미도 허투루 보아 넘기지 않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는 다른 무엇보 姆� 먼저 사냥꾼의 안색, 스치듯 지나갔지만 이 상황에 가장 어울리지 않았던 그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표정� 각 인 되듯 남아있었다. 유인걸에게는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런 위세를 떨쳐 보였을 때는 언제나 그래� 듯 이 사냥꾼도 겁을 집어먹은 것에 만족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의 자식! 저는 누구십니까가 무슨 헛소리야! 오줌 질질 흘리지 말고 여기 뭐 파먹겠� 고 왔는지나 얼른 불란 말이다!" 손에 든 칼을 위협하듯 흔들며 다가서는 유인걸의 걸음에는 경계의 빛이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강철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그의 눈에 사냥꾼의 앞가슴에 묻은 흙, 그리고 엷긴 하지만 분 炸� 확인할 수 있는 풀물 든 자국이 또렷이 들어왔다. 놈은 어디엔가에 엎드려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던 것이� . 숲 속에서 짐승을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강철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이 머리에 떠오 르기도 전에 먼저 느꼈다. "조심해요!" 강철이 별안간 고함을 치며 유인걸의 좌측방으로 한 걸음 크게 뛰었다. 유인걸의 이동으로 인해 생긴 � 백 을 메꿈으로서 처음과 같은 대치자세를 만들 생각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어쩌면 그의 고함이 사냥꾼의 경 ♡� 을 촉발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사냥꾼의 눈빛이 흐려지더니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바닥의 창을 집어들려고 했다. 앞에 있는 사람이 � 먹 을 치켜들면 본능적으로 나오는 방어태세처럼 그에게도 무언가 의지가 될만한 것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유인걸은 강철의 고함에 흠칫 놀라 주춤하다가 사냥꾼이 창을 집어들려 하자 피식 웃었다. 그도 산채 � 활 십여 년에 제법 무공을 배웠다면 배운 몸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집는다는 것� 상 식 밖의 일이었다. 보라. 지금 당장 사냥꾼의 등판이 그대로 드러나서 눈감고 휘둘러도 베어버릴 수 있을 정도 로 넓은 빈틈을 만들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그대로 베어버릴까 하다가 순간적으로 마음을 돌려 그냥 芟� 창끝을 밟아버렸다. "어딜 서툰 짓을……!" 순간적이었다. 강철이 위험을 느끼고, 고함을 치고, 한 걸음 크게 뛰어온 것, 유인걸이 주춤하고, 웃고 창끝 을 밟은 것이 모두 순간적으로 진행된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사냥꾼이 창을 집어들려고 몸을 숙이며 손� 허 리춤으로 가져가서 칼날이 넓은 만도를 빼어 휘두른 것도 순간적인, 그래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갑작� 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 동작은 미리 예정된 것처럼 매끄럽게 연결되었다. 칼은 날카롭고, 동작은 매끄러웠다. 무엇보다도 사냥꾼의 공격은 예측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이러고도 彭� 이 성공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유인걸은 비칠거리며 물러서고, 칼은 애초 에 노렸을 다리 한 짝 대신 정강이 께에 칼자국 하나를 만들어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강철이 유인� 의 뒷덜미를 잡아 당겼기 때문이었다. "음……!" 사냥꾼이 낮은 신음을 토했다. 회심의 공격이 빗나간 것이 무척이나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통 사 람 같았으면 그 상황에서 욕이라도 한 마디 내뱉었을 것이다. 강철은 그것을 생각하고 사냥꾼을 더욱 경 完� 게 되었다. 적어도 사냥꾼은 소리 빽빽 질러가며 싸우는 경지는 벗어났을 정도로 싸움에 익숙한 것으로 맙� 기 때문이었다. "이런 니미……!" 유인걸이 이를 갈며 펄쩍 뛰었다. 방금은 강철의 손에 당겨 간 것이지만 이번에는 정강이의 통증 때문� 었 다. 피를 보기 좋아하는 성격에 통증이 불을 질렀다. 아파서 펄쩍 뛰면서도 어떻게 회를 뜨나 고민을 하 쨉� 오히려 그가 회가 떠지게 생겼다. 사냥꾼은 낮은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앞으로 다가오더니 비스듬히 틔� 에서부터 위로 칼을 휘둘러 유인걸의 배를 노렸다. 스치기라도 한다면 뱃속을 다 드러내 보일 상황이었다 유인걸은 이를 갈다 말고 황급히 칼을 당겨 배를 보호했다. 다급한 중에도 배운 가락이 나와 강호에 � 리 알려진 폐문호심(閉門護心)의 방어식과 제법 비슷한 초식을 펼칠 수 있었고, 그게 효과를 보았다. 사냥꾼 � 칼 은 옷자락을 조금 베고는 튕겨나가 버렸다. 반격은 강철의 칼이 했다. 강철은 유인걸의 좌측으로 나서며 독사출동(毒蛇出洞)의 초식으로 사냥꾼의 炷� 찔러갔다. 원래 독사출동은 권법이나 검법에서는 많이 사용하는 것이지만 도법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초식 甄�. 한쪽만 날이 선 칼을 사용하는 중국의 도법에는 찌르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강철과 유인걸� 사 용하는 칼은 귀두도(鬼頭刀), 칼 끝이 귀신의 대가리처럼 둘로 갈라져 뿔을 만든 형태였다. 찌를 수도 있 � 무 기인 셈이다. 게다가 지금 강철의 공격은 그와 사냥꾼 사이에 유인걸이라는 장애물이 반쯤 걸쳐져 있는 纘� 이기 때문에 가장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칙-! 강철의 귀두도가 사냥꾼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옷자락이 뜯어져 너풀거리고 피가 튀었다. 뼈가 드� 날 정도는 아니라 해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사냥꾼은 그 타격으로 잠시 주춤하더니 부상에도 耐� 하고 다시 칼을 휘둘렀다. 강철은 놀랐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손가락만 베어도 팔을 움직이기 불편한 것이 사람이다. 어깨에 그 정도 상처가 났으면 원래는 휘두르지도 못할 일이니 공격했다는 것을 칭찬할 수는 있어도 위력은 없는 � 이 당연했다. 그는 방어를 유인걸에게 맡겨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왼발을 비스듬히 앞으로 내밀고, 母� 오른발로 왼발을 스치듯 내디뎌 사냥꾼의 우측방으로 돌아갔다. 강호에서 가장 잘 알려진 보법(步法), � 공을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사용할 정도로 기본적이지만 그만큼 효과가 보장된 보법인 삼재보(三才步)였다. 세 걸음 안에 상대의 사각으로 파고들어 공격에 가장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가 사냥꾼을 잘못 보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냥꾼의 공격은 움직이기도 힘든 팔로 � 두 르는 칼이 아니라 왼손으로 전통에서 뽑아든 화살이 주였다. 사냥꾼은 칼을 휘둘러 눈앞을 가리고는 유인 �을 향해 화살을 던졌다. "억-!" 활로 쏘아지지 않은 화살이 무슨 위력이 있을까마는 지근거리에서 던져진 날카로운 활촉은 표창보다 � 히 려 나은 것이었다. 유인걸은 황급히 얼굴을 가렸고, 화살은 그 손등에 박혔다가 떨어졌다. 사냥꾼은 이 한 번의 성공을 기회로 삼아 유인걸을 밀어 제치고 뛰기 시작했다. 강철은 그제야 사냥� 이 도주하기 위해 그런 공격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욕이 절로 나왔다. 강철은 사냥꾼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기다려! 그놈은 내게 맡겨!" 유인걸이 강철의 뒤를 쫓아왔다. 강철은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발은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도 상관없어! 저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포를 뜨고 말 걸세!" 그 말속에 묻어 나오는 살기를 느끼고 강철은 인상을 썼다. 유인걸의 성질이 최대로 격발된 것이 분명� 다. 힐끗 앞을 보니 사냥꾼이 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산에서 오래 생활한 듯 제법 발이 날랬지만 초보적이 じ� 경공술을 배운 그들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강철은 고향 선배가 분을 풀도록 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 고 판단했다. "될 수 있으면 사로잡으셔야 합니다. 분명 관군의 정탐인 듯 하니까요." 분김에 잡아 죽여버릴까 염려한 강철의 말이었지만, 그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었다. 사냥꾼은 � 마 못 가서 풀뿌리에라도 걸린 것처럼 꼬꾸라지더니 그대로 땅을 한 바퀴 뒹굴며 무릎을 세우고 일어서 앉� 다. 묘한 것은 도망가는 방향과 반대로, 그러니까 추격해오는 강철과 유인걸을 향해 몸을 돌린 채 일어났다� 것 이었다. 그것이 사냥꾼의 마지막 반격을 위해 일부러 넘어진 것이었음을 강철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사냥 邦� 손에는 어느새 활이 들려져서 그들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강철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맹세코 그는 이렇게 빨리 활을 겨누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조심……!" 말보다 먼저 그는 땅에 엎드렸다. 유인걸의 목에 화살이 꽂히는 그 순간이었다. 23. 처음엔 아프지도 않았다. 단지 무언가 무거운 것이 어깨를 한 대 후려치고 지나간 것 같은 얼얼함만을 느 꼈다. 그러나 곧 얼얼한 느낌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또 불같이 뜨거운 어떤 느낌 � 차 지했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 아니, 왕일은 이 통증의 정확한 명칭을 알고 있었다. 칼에 베인 통 �, 움 직임도, 집중력도, 끈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생명력까지도 삼 할 이상 줄어들게 된 신체가 내는 경고� 이었 다. 피비린내. 물씬한 땀 냄새에 섞여 풍겨오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들릴 리가 없을 姆� 도 어깨에서 흐르는 피가 찢겨진 옷자락 끝에서 메마른 황토 바닥에 떨어져 내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 었 다. 마른 먼지가 피어올랐다가 붉게 물드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눈을 돌려 상처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이럴 때 견딜 수없이 치밀어 오른다. 그리곤 허옇게 드러난 � 와, 뒤집어진 속살이 끼니때 먹는 돼지의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다치고도 안 榴� 자신에게 놀라 그나마 남은 칠 할의 생명력마저 소진해 버리는 것이다. 왕일은 욕구를 눌러 삼켰다. 그의 눈은 아직도 보아야 할 상대가 있었다. 그의 어깨는 아직 해야 할 � 이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 그 활에 또 하나의 화살을 재고는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의 タ� 서 화살의 깃털까지, 거기서 다시 활촉까지 이어지는 직선이 그 끝을 연장해 닿는 그곳에 또 하나의 목� 남 아 있었다. 그는 물론 쉽게 시위를 놓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죽여버린 한 사람과 달리 남아있는 이 사내는 뭔가를 아 는 놈이었다. 사내는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도, 또 섣불리 도망치려고도 않았다. 잔뜩 웅크린 채 칼을 비� 듬히 치켜든 그 모습은 방어도 공격도 쉽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자세였다. 반면 왕일은 이번에 쏘고나면 다시 �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활은 충분히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야 최고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인 것� 다. 게다가 어깨의 통증이 있다. 왕일의 이마로 식은땀이 흘렀다. 실제로 몸이 싸늘하게 식어 들어가고 있� 다. 지나치게 피를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어서 지혈도 해야 하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시간을 끌면 � 수록 불리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험을 해야 했다. 왕일은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고, 겨누고 있는 화살의 끝을 약간 위로 움직였다. 눈에서 깃털까지, 거기 【� 다시 활촉까지 잇는 선이 같이 움직였다. 활촉은 이제 사내의 눈을 겨누고 있었다. 사내가 움찔했다. 왕일이 한 행동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궁술에 있어서의 금기사항을 범하는 것이었기 � 문 이리라. 생사의 대적을 다섯 걸음 앞에 두고 어깨가 움직일 정도로 큰 호흡을 하다니. 게다가 노렸던 곳� 바 꾸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느끼는 즉시 득달같이 달려와 목을 따 버려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 �지 않았다. 왕일이 한 행동이 그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탓일 것이다. 어쨌 � 결 과적으로 사내는 기회를 보고도 잡지 못했고, 심리적으로 한 발짝 후퇴한 셈이 되어 버렸다. 왕일은 사태 � 주 도권을 거머쥔 것이다. 왕일은 눈도 깜박 않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왕일의 시야에는 사� 의 눈만 있고, 사내의 시야에는 활촉만 있었다. 왕일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사내의 눈은 뜨겁게 � 아오 르고, 그 깊숙한 곳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럴 때 실제로 활을 쏘고, 피하고 � 우고 할 필요는 없었다. 쏘기도 전에 왕일은 이미 이겼고, 화살에 맞기도 전에 사내는 이미 진 것이다. 그러나 사내에게는 아직도 한 가닥 승기(勝機)가 남아 있었다. 그것을 왕일도 알고 있었다. 강궁을 당� 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깨에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는 더욱 힘든 일일 것이� . 왕 일이 지금은 사력을 다해 시위를 당기고 있지만 한 번 화살을 놓아 보내고, 다시 시위를 당기기는 어려� 것 이다. 아마도 사내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왕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그가 완전히 이기기 위해 서는 한 가지를 더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혹은, 그렇게만 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사내의 목숨을 끊어 버릴 수 있다면……. 차갑게 가라앉았던 왕일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사내도 그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순간에 땅 바닥을 안고 뒹굴 이유가 없었다. 왕일이 화살을 놓아 보내고, 그것이 거친 마로 묶어 올린 사내의 머리 ㅈ� 꿰뚫고 지나가기 바로 전에. 하필 그때에. 강철은 땅바닥을 뒹굴어 화살을 피하고 잉어처럼 땅을 박차고 튀어 올라 사냥꾼을 향해 돌진하려다가 � 추 어 섰다. 방금까지 살아 펄쩍거리던 잉어가 돌처럼 굳어 버린다면 아마 지금 강철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 . 사 냥꾼은 어느새 또 하나의 화살을 시위에 걸고 그를 겨누고 있었다. 게다가 무명지와 약지의 사이에 제 � 의 화살을 끼워 들고 있었다. 연속 사격을 할 준비를 갖춘 것이다. 그리고는 무릎 자세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뒷걸 음질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도 강철은 돌처럼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심장에서 역류한 피가 머리끝으로 몰리는 듯 � 리 가 터질 것처럼 울렁거렸다. 사신(死神)의 손톱이 닿은 듯 이마가 빠개질 것처럼 아파 왔다. 그는 평생 � 금처 럼 죽음을 가까이 느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경험을 느끼게 되지 않길 바랬다. 그의 눈에는 돤� 히 물러서서 나무 뒤로 돌아가 결국 사라져 버리는 사냥꾼의 모습이 그것처럼, 사신의 그림자가 사라지� 것 처럼 보여 좋았다. 사냥꾼이 사라지고, 온몸을 휘감던 공포의 차가움과 뜨거움도 사냥꾼과 함께 사라져 버리자 강철은 주� 앉 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붉은 석양은 서산 끄트머리에 걸려 있고, 동쪽 하늘에는 심해처럼 � 두운 청색이 번지고 있는데, 그 속에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이 떠 있었다. 한참을 그대로 앉아 하늘을 보다� , 고 개를 꺾어 땅을 보다가, 강철은 깊이 신음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오늘 졌고, 깊은 상처를 입었다. � 젠가 저 사냥꾼을 꺾지 않으면 그의 자존심은 두 번 다시 제대로 서지 않을 것이다. 왕일도 이 순간 무릎을 꺾고 있었다. 천부채로부터는 산봉우리 하나만큼도 채 벗어나지 못한 외진 산기슭에서 그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뒹 굴었다. 발은 천근처럼 무겁고, 무릎은 식초에 담긴 듯 시큰거렸다. 뱃속에서부터 가슴으로, 거기에서 다 � 정 수리까지 싸한 느낌이 파도처럼 쓸고, 지나갔다가 다시 몰아쳐 왔다. 이윽고 목구멍으로부터는 타는 듯한 갈증 이, 온몸의 관절로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경련이 일어나 한 순간에 그를 삼켰다. '이건…… 뭔가……?' 어깨를 베였다고 이런 증상을 보이는 것은 본 적도, 당한 적도 없었다. 유일하게 비슷한 증상은……. 藍� 은 문득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독이다!' 독사나 독충에게 물리면, 혹은 독물을 먹거나 마시면 지금의 그처럼 경련을 일으키며 뒹굴지 않던가. '칼에……? 아니면 전에 그 상처가……?' 이상했다. 전의 상처는 완전히 나았다고 독개 서문정이 그러지 않았던가. 도적의 칼에 독이 묻어 있었 鳴� 보기도 어려웠다. 거기 당했다면 발작은 좀더 일찍 일어났어야 했던 것이다. 왕일은 그 이상 생각을 진행하지 못했다. 살갗에는 소름이 돋는데 뱃속은 뜨거워 내장이 익을 것 같았 �. 온몸의 관절에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가려움증이 치밀어 오르다가 다음 순간에는 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 증 이 밀려들었다. 고통은 오색찬란한 빛무리처럼, 물에 떨군 기름방울처럼 혼란하고 자극적이었다. 그 속에 � 왕 일은 그자신의 존재조차 잊어 버렸다. 고통은 그를 삼키고, 어딘가 그가 모르는 곳으로 그를 밀어 넣고 羚� 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추위도, 더위도, 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고통조차도 卵� 서 솟아오르는 강렬한 욕구, 갈증이었다. 무엇인가가 보충되기를 절실히 바라는 욕구의 갈증, 다른 무엇� 다도 고통스러운 고통이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것을 삼키고 쉬게 해주는 무의식의 혜택조차도 그에게는 주어 痴� 않았다. 정신을 잃기에는 그의 갈증이 너무 크고, 강했다. 왕일은 누군가가 나타나 그를 들쳐업고 사흘을 달려 청주부의 움막까지 데려다 놓는 동안 내내 고통과 갈 증에 뜬눈으로 시달려야 했다. "분명히!" 왕일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사흘이 지난 후, 유곰보와 함께 만든 움막 속에서였고, 처음 들은 목소 �는 유곰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 속에는 분노가 스며 있었다. "다 나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뜨여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바라보는 왕일의 눈에 희미한 두 사람의 윤곽이 들어왔다. 그 중 하� 가 다른 하나에게 화를 내는 모습인데, 막상 화를 받는 그 사람은 왕일에게 몸을 굽힌 채 웃고 있었다. 몇 � 이나 눈을 깜박거린 뒤에야 왕일은 그가 부스스한 머리의 늙은 거지, 독개 서문정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유곰보가 화를 내건 말건 서문정은 웃고 있었다. "옳지, 옳지. 이제 정신이 들었군! 예상한 대로야." "예상한 대로? 뭘 예상하셨다는 겁니까? 이 친구가 이렇게 발작할 걸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까? 그러고 보 니…… 우릴 따라다녔군요!" "그래, 따라왔지. 난 자네들 뒤를 쫓아다녔다네." 유곰보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분기를 삭히려는 거친 숨소리가 왕일의 몽롱한 정신에도 크 게 들려오고 있었다. 간신히 자신을 억제한 듯 유곰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행을 하신 이유가 있으시겠죠?" "물론 있지." "그게 뭡니까?" "발작을 할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왜 발작을 하는데요?" "아직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지." "완전히 고치셨다면서요!" "완전히 고쳤지." "이게 무슨 정신없는 소립니까! 다 고쳤다고 해놓구선 발작은 왜 하며, 완전하지 않다는 건 또 무슨 � 집 과부 뒷다리 긁는 소립니까? 벌써 노망 드셨어요?" "난 과부 옆집에 산적 없네. 나이는 들었어도 아직 노망은 안 들었고." 서문정은 유곰보의 지나치다 싶은 공박에 역시 지나치다 싶게 진지하게 대답하고는 손을 저었다. "자세히 설명해 주지. 원래 이 녀석 증상은 예상은 했지만 확신은 못하던 거였네. 완전중독을 통해서 注� 을 건졌고, 완전히 나았고, 환골탈태까지 한 건 사실이야. 그러나 역시 완전한 신체는 되지 않은 걸세. � 래서 발작을 한 거지." "완전한 신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이 친구가 왜 그런 게 된다는 겁니까?" "완전중독이 됐으니까. 당연히 독인(毒人)이 돼야지." "독인이요?" "그렇네 독인! 전설상에만 내려오는 독인! 어떤 독에도 당하지 않고, 그가 원한다면 만지는 것만으로� 적 을 중독시킬 수 있는 자, 여태까지 그런 괴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들 강시 수준으로 의식이 없거나 겨 우 독가루나 몸에 바르고 다니는 정도였지만 이 녀석은 달라. 완전한 의식을 갖춘, 살아있는 독인이 되� 거 야. 자신의 몸에 있는 독을 완벽히 자기 통제하에 두는 자가 되는 것일세.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발작 � 일 어난 것은 그 과정의 첫발을 디뎠다는 증걸세!" 24.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한 마디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 맘대로!" 왕일은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다행히 목은 별 불편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신체에는 이상이 없는 모 瑛� 었다. "독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과 상관없이 그게 되고 안되고를 누가 결정한단 말이오?" 그가 깨어난 줄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 서문정이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흔들� 다. "하기 싫어도 하는 수 없네." 왕일의 몸은 독으로 깨끗이 청소가 된 상태였다. 원한다면 어린아이처럼 깨끗한 심신으로 무공을 배울 수 도 있고, 내재된 독기를 끌어올려 독공을 운기할 수도 있다. 적절한 방법을 익히기만 한다면. 그러나 대 � 그 의 생명은 독에 의지하게 되었다. 주기적으로, 서문정의 계산에 의하면 대략 보름에 한 번 정도로 일정량 � 독 을 섭취하지 않으면 발작이 일어날 것이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죽을 것이다. 주기적으로 독을 섭취한다면? 죽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결과로 왕일은 독인이 될 것이다. 서문정이 바라마지 않는 완전한 독인이 되� 것 이다. "머리가 많이 아프지? 숙취처럼 말일세. 발작이 일어난지 사흘이 지나서야 독을 써서 그렇네. 내부의 떡� 가 요동을 쳤기 때문에 진정시키느라 조금 강한 독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아직 양이나 강도에 대해 가� 이 되지 않아서 부작용이 일어난 걸세. 내가 주는 독을 주기적으로 섭취하면 앞으론 그런 일이 없을 걸세. 이 건……!" 서문정은 품에서 옥병 하나를 꺼내었다. 광택이 거의 죽을 정도로 오래된 검은 옥병인데 안에는 검고, 붉 고, 푸른 오색의 단환(丹丸)들이 담겨 있었다. "검은 것은 초오(草烏), 사간(射干), 부자(附子), 대극(大戟), 여로(黎蘆), 천선자(千仙子)와 상륙(商� ) 등 초본 (草本)의 독물들을 혼합해서 구워낸 것일세. 붉은 것은 학정홍(鶴頂紅), 푸른 것은 사독(蛇毒), 노란 것 � 싸우 는 두꺼비와 지네를 잡아서 독을 추출해낸 것이고, 하얀 것은……!" 그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자신의 수집품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그 누런 이빨에 흘렀 �. "사천당문의 비전독약을 빼낸 거야. 정말 귀한 것이지. 아껴서 먹게나." 여태 듣고 있던 유곰보가 불쑥 끼여들었다. "그 귀한 것을 왜 내놓으시는 겁니까? 장로님답지 않으신 행동이니 오히려 의심이 가는군요." "연구일세! 순수한 연구 차원의 일이지." 서문정은 유곰보의 말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비아냥거림을 무시하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무언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일을 해보고 싶었네. 그게 독인이야. 독인을 만들거나, 그 � 안 된다면 최초로 완전한 독인을 관찰한 사람이 되기라도 하고싶네. 이 친구는 달리 할 일이 없네. 나는 절� 이 친구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걸세. 그저 이 친구는 살기 위해 그 약을 먹으면 되는 거야. 난 조용히 따라다� 면서 증세를 관찰하기만 할 테니까. 이 친구가 그런 상태로 내 앞에 나타난 것, 그런 과정들을 거쳐서 독인이 풔� 것에 내 책임은 없네. 전혀! 그건 뭐랄까? 숙명 같은 것이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 치면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그런 것." 서문정은 처음에 한 말을 끝에 다시 한 번 반복함으로써 설명을 마쳤다. "하는 수 없는 일이지." 하는 수 없다. 대대로 농부의 핏줄을 이어온 왕일만큼 이 말을 많이 들어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가 안 내려도, 비� 많 이 내려도, 안개처럼 메뚜기 떼가 덮쳐도, 바람이 불어 곡식이 흙에 덮여도 농부는 하는 수가 없었다. 그 앞에 선 모든 것을 균질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숙명'의 육중한 무게를 지고 사는 사람, 그것이 농부였� . 왕일만큼 '하기 싫어도 하는 수 없다'는 말에 담긴 가공할 위력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도 흔치 않았다. 봉� 스무 냥에 전쟁터로 끌려나가도, 누이가 첩으로 팔려 가도,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가 한순간에 화살� 꽂 힌 시체가 되어 버려도 하는 수 없었다. 할 일이 없었다. 미래로부터 현재로, 아직 떠오르지 않은 숱한 � 양들 을 거슬러 올라와 불어오는 어두운 바람이 오늘과 같았던 어제,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의 樗� 쓸고 지나가면 그 허망한 대지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것밖에는 하는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왕일만큼 '하는 수 없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길지 않은 인생, 그러나 짧지 � 않 은 왕일의 세월은 한없는 포기와 굴종만을 허용했었다. 그에게 닥쳐온 모든 것들 앞에 그는 무릎을 꿇고 疸� 를 조아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이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인생은, 포기와 굴종의 삶� 그 에게 분노를 가르쳐주었다. 그는 이제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운명과 하는 수라고는 단 하나도 � 는 삶에서 분노를 배웠다. 손에 닿는 모든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움직이고 있 募� 것, 심지어는 그 자신마저 자신의 의지와 유리되어 움직여지고 있다는 자각이 그를 분노하게 했다. 그 � 간, 오랫동안 쌓여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분노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그 분노는 힘이 되었다. 불타버� 집 앞에서 그가 여태껏 분투해왔던 삶이 실은 헛되고 허망한 것이라는 느끼는 바로 그 순간부터 분노의 힘은 움 직이고 있었다. 강변 갈대밭에서 스스로를 보았던 그 순간부터 분노는 눈에 보이는,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전의 맹목적인 삶에서 이제는 무엇을 위한 삶으로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비록 그 '무엇'이 '� 수'라 는 지극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지라도 '무엇'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생존'은 그 속성상 어쩔 수 없이 피동적인 것이지만 '복수'는 능동적인 것이고, '이제 나는 하려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왕일은 깊이 침묵했다. 그가 '하려는 것'과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가 머릿속에서 복잡 하게 얽혀 들어가 그렇잖아도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더욱 아프게 했다. 그바람에 그는 머리맡에 앉아 있� 또 한 사람의 존재를 유곰보가 일깨워주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인사나 드리게! 자네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야." 그는 왕일의 머리맡, 대충 얽은 움막 지붕이 햇빛을 가려 그늘을 드리운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 었다. 이 지방에서는 움막을 만들 때 방 넓이의 반을 차지하게 침상을 만들고 두 개의 항( : 화덕)을 흙 막� 쌓은 침상 아래에 만들어 놓는다. 겨울에는 항에 불을 때고, 그 외의 계절에도 침상 위에 풀이라도 두텁� 깔 아놓기 때문에 적어도 침상 위에서만은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거기 앉은 사람은 뗑� 추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두터운 옷을 입고, 쪼그리고 앉은 무릎을 팔로 감싸안고 있었다. 무릎에 파묻 � 얼 굴도 낡은 천으로 머리에서 귀, 턱까지 감싸서 눈과 코만 빼곰히 보이는데, 졸린 듯 반쯤 감긴 그 눈이 � 일을 향하고 있었다. "호연 막내!" 왕일이 놀라 소리쳤다. 호연 막내. 갈흉점의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이렇게 부른다. 사실 형이라는 호칭은 모르는 사람도 부를 수 있지만, 퓻� 의리로 맺어진 '형제'가 아닌 사람이 그를 막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였다. 그러나 손부자와 정이노가 � 렇게 부르고, 그 자신 그렇게 불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은, 다른 식으로 불러도 싫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 지만, 이 호연 막내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떤 감정의 표현을 보여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제멋 酉� 생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손부자가 큰형, 정이노가 둘째, 그가 막내라는 것은 도원결의(桃園結 �)를 연상케 해 어울린다고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하지만 호연 막내는 도원결의를 한 막내, 장비(張飛)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졸린 듯한 눈과, 사계 를 가리지 않고 꼭꼭 동이고 다니는 행색을 보며 누가 연인(燕人) 장익덕(張益德)을 떠올릴 수 있으랴. � 다가 그는 벙어리로 알려졌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부자의 집에 자주 � 나들 던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손부자 앞에서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으니 어쩌면 단지 말이 적은 사� 일 지도 몰랐다. 이렇게 가려진 것이 많은 사람, 그 어딘지 모자란 듯 보이는 행색의 사람이 어떻게 손부자� 막 내로 대접받을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리곤 했다. 바로 그 호연 막내가 왕일을 업고 사흘� 달 려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이다. 왕일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포권하는 시늉을 했다. "호연…… 막내, 보잘 것 없는 저를 이렇게 돌봐 주셨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호연 막내는 그의 말도 들리지 않는지 웅크리고 앉은 채 말이 없고, 유곰보가 오히려 투덜거렸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간호해준 사람에겐 인사 한 마디 없더니 누구한테는 허리가 부러지게 인사를 차리� 군! 거지라고 차별하는 거야? 젠장!" 이번엔 왕일이 그의 말을 못 들은 체 했다. 유곰보로서는 왕일이 호연 막내나 손부자에게 대하는 태� 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유곰보가 제 아무리 천하의 대방파인 개방의 타주라고 해도 왕일에 都� 의미가 없는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손부자와 호연 막내는 왕일이 기어다니던 시절부터 마을의 전설이고, 대부 인 것이다. 왕일은 다시 절을 했다. 방금은 인사의 대상을 잘못 잡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였다. "손부자께 일간 찾아가 인사를 드리겠지만 우선은 호연 막내께서 대신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맞았다. 호연 막내는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뜨면서 허리를 반쯤 굽혀 그의 인사를 받았다. � 행 동으로 그는 왕일을 구한 것이 그의 뜻이 아니라 손부자의 뜻임을, 그는 어디까지나 손부자의 대리임을 �시 한 것이다. 유곰보가 다시 툴툴거렸다. 그는 어쩐지 심사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젠장! 부뚜막 신이 문간의 신보다 낫단 건가? 동네 불량배가 강호고수보다 낫단 말이지?" 왕일이 인상을 썼다. 유곰보가 흠칫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다문 것은 왕일 때문이 아� 었 다. 동네 불량배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그의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 기 운은 호연 막내의 반쯤 감긴 눈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유곰보는 호연 막내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추레한 몰골, 어딘지 덜 떨어진 듯한 인상, 거기 어디 【� 그를 흠칫하게 만들만큼 강한 살기가 뿜어져 나올 수 있었던가. '강호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유곰보는 한편으로 기억을 더듬고, 다른 한편으로는 손을 모아 흔들었다. "좋아, 좋아! 이 거지가 입이 더러워 실수를 했네. 용서해주게!" 호연 막내의 눈은 여전히 졸린 듯 감겨 있고, 눈빛은 여전히 혼탁했다. 방금 유곰보가 본 안광, 혹은 梨� 가 착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빠르게 그의 눈빛은 원래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유곰보는 내� 코 웃음을 쳤다. '너와 손부자가 누군지 못 알아내면 내가 유곰보가 아니다. 아무리 바빠도 그건 알아봐야 겠어. 특히 苛� 도살자의 냄새가 풍기는군. 피비린내가 온몸에 감도는구나.'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왕일은 밤새도록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침이 되자 칼을 들고 나왔다 그 리고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격식도 법도도 없는 단지 휘두르기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무림을 향해 디딘 왕일의 첫 걸음이었다. 25. 명(明)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당순지(唐順之)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字)를 응덕(應德), 호(號) � 형천 (荊川)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무진현(武進縣) 출신으로 어려서 회시(會試)에 급제하여 병부주사(兵部 マ�)가 되었고,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태복소경(太僕小卿)까지 올랐다. 그의 글은 깊이가 있고 반드시 근거 를 두고 쓴다고 하였으며, 율부(律賦)에 뛰어나 당대 삼대가(三大家)의 하나로 꼽혔다. 특이한 것은 그가 유림의 학자답지 않게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나아가 창술(槍術)의 명인이었다는 점� 다. 후에 <기효신서(紀 新書)>를 쓴 장군 척계광(戚繼光)을 만나 창술에 대해 논할 때 직접 창을 들고 시범을 보여 보는 이들을 감탄케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이 그가 직접 무술서(武術書)를 저술하 눼� 는 점이다. 그는 <무편(武編)>이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술을 연구하고 해설을 붙였 쨉�, 이것이 당금 명나라 군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무술서였다. 이 안에 도(刀)에 관한 부분도 있어 장수들뿐 아니 라 일반 병졸들에게 훈련시키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후에 정종유(程宗猷)라는 사람이 있어 명나라 군부의 도법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그는 일찍� 무 술에 뜻을 품고 소림사에 가서 곤법을 배웠고, 하남(河南)의 이극복(李克復)에게 창술을 배웠으며, 수춘( 杓�)을 여행했을 때는 동굴 속에서 기연을 얻어 노법(弩法)을 얻게 되었다. 또 절강(浙江)의 유운봉(劉雲峯)에� 서 도 법을 배웠는데, 이 유운봉이 전수한 도법이라는 것이 바로 일본음류도법(日本陰流刀法)이라고 불리는 왜 돌� (倭刀法)이었다. 왜도법은 가늘고 긴 왜도(倭刀)를 두 손으로 잡고 좌우로 도약하여 기괴한 기술을 쓰는 것을 주로 하는 도 법이었다. 정종유는 이것으로 당대에 도의 명인이라 불리는 호주(毫州)의 곽오(郭五)라는 사람을 찾아가 승리 하고, 이후 적수를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의 명나라 병서, 혹은 무술서에서 중국 전통의 춘 �도 (春心刀)나 청룡도(靑龍刀)를 쓰는 도법보다 왜도를 쓰는 도법이 더 비중 있게 다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이후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에 왜도법만 해설한 이유이고, 이것이 후에 조선의 무예� 보통 지(武藝圖譜通志)에 왜도와 왜검(倭劍)이 다루어진 이유이다. 왕일은 군역을 살았으니 당연히 이 두 가지 도법, 즉 당순지의 도법과 정종유의 도법을 배웠다. 물론 構� 병졸에게 진수가 전해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또 일반적으로 병졸에게는 도법보다는 창술을 주로 가르� 긴 하지만 황보엄은 병졸을 훈련시키기를 게을리 하는 장수가 아니었고, 왕일은 창술보다는 도법이 사용하� 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도법의 묘미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얄팍한 자신감은 고향에 돌아와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진가장에 들어가서는 미� 개 노가의 듣도 보도 못한 도법에 고전했고, 천부채의 도적을 만났을 때는 사용하기 불편하기만 하다고 생각 杉� 귀두도에, 장식으로만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그 머리 장식에 찔려 자칫 목숨을 날릴 뻔했던 것이다. 무언가가 더 있었다. 무림이라는 세계에는 그가 여태 알고 있던 무술의 경지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더 있 었다. 왕일은 지금도 그것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구지룡, 아니 구지사 증국영이 내민 그 손에 어떻게 당하는 層� 모르고 팔을 꺾여서 꼬꾸라지던 그 순간을. 그런데 그런 신묘한 수법을 쓰던 자가 무림에서는 삼류에도 � 끼 는 인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왕일은 미친 듯 칼을 휘두르며 그 생각을 하고, 또 했다. 그의 눈에는 증국영의 그 네 손가락밖에 없는 손 이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칼은 그 가상의 손들을 막고 베어 버리는 몸짓을 하고 羚� 고, 그것은 묘하게도 미친개 노가의 그 도법,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지만 팔방풍우의 그 도법을 흉내내 � 것 이 되었다. 쨍-! 손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정신을 차린 왕일의 눈앞에서 그의 칼은 반도막이 나서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 었다. 정신없이 휘두르다가 바위를 때렸던 것이다. 은자를 두 냥이나 주고 산 질 좋은 강도(鋼刀)가 간단히 부러져서 허공에 떠오르고 있었다. 왕일은 눈� 가 늘게 뜨고 그 칼끝을 보았다. 이제 중천에 떠오른 태양에 비쳐 허공에 떠오른 칼날이 눈부신 빛을 발산� 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그 빛이 반사되어 왕일의 가늘게 뜬 눈 속으로 바늘 끝처럼 와서 꽂혔다. 왕일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칼날은 이제 땅에 떨어지고, 그는 눈이 부셔서 몇 번 다시 눈을 감았 鳴� 다시 떴다. 얇은 눈물의 막이 덮은 듯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흐릿한 시야에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 . 그 리고 다음 순간 그림자에서 강력한 섬광이 빛났다. 왕일은 본능적으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림자는 다가오지 않았다. 왕일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帽� 보았다. 얼굴을 반쯤 가린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조는 듯한 눈매, 호연 막내였다. '빛은……?' 호연 막내의 손에서 뿜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섬광의 정체는 칼이었다. 중동에서부터 부러져 나간 듯 이 뭉툭한 칼, 바로 왕일이 진가장에서 정신을 잃을 때 두고 나온 그 칼, 왕일의 것이었다. 호연 막내가 손을 내밀었다. 칼날을 뒤로 손잡이를 앞으로 해서 잡고 내미는 손이었다. 그에게 칼을 돌 좋� 는 것이다. 왕일은 칼을 받을 생각도 못하고 얼떨떨해서 물었다. "이걸 어떻게……?" 호연 막내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한 번 더 움직여 얼른 받으라는 뜻을 표시했다. 왕일은 일단 두 손을 내밀어 칼을 받았지만 의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호연막내께서 찾아오신 것입니까?" 호연 막내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양쪽 소맷자락에 엇갈리게 두 손을 집어넣고서는 뒤돌아 서서 조 금 떨어진 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조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왕일은 칼을 내려다보았다. 칼집은 없어졌지만 역시 그가 남만에서 구한 그 칼이 틀림없었다. 그는 바� 같 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진가장에서 없어진 칼이 호연 막내에게 들려 있었다면, 그리고 이제 그에게� 돌 아왔다면 손부자가 움직인 것이 아니고는 해석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손부자가 그 “� 보내는 호의의 일단인 것이다. 왕일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서서히 칼을 들� 올 렸다. 잠시 숨을 멈추고, 그는 칼을 내리쳤다. 방금 그의 칼을 부러뜨렸던 그 바위를 향해서였다. 칵-! 이번에는 손이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타격을 받아 무거운 통증을 주긴 했지만 통증보다는 무언가 막� 던 것이 뚫어지는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바위는 그의 앞에서, 칼아래에서 두 조각이 나 벌어져 있었다 왕일은 호연 막내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여태 그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아� 의 흐린 안개가 한 순간에 걷혀 버렸다. 그는 약하고, 복수는 지상의 과제이니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다. 가지고 逞� 못한 것들을 애써 만들기보다는 지금 그가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승리를 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仄� 이 순간에도 그의 누이는 도적들의 발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지 않던가. 왕일은 호연 막내에게 다가갔다. 호연 막내가 천천히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호연 막내의 篤� 서 말이 새어나왔다. "좋은 도법이다!" 왕일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은 칼이라면 몰라도 좋은 도법이라는 건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았던 � 이 다. 호연 막내가 다시 말했다. 왕일의 의문을 풀어 주려는 듯이. "칼을 휘둘러 무엇이든 벨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기도 하고 반대로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야� 를 할 때가 아니고, 물어도 더 가르쳐 주지도 않을 표정이었다. 왕일은 공손히 포권하고 말했다. "손부자님께 전해 주십시오. 일간 시간이 나실 때 여기로 와 주시길 바란다고요." 호연 막내의 눈틈에서 강렬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햇빛에 비친 칼날이 뿜어내는 그것보다 오히려 � 렬 한, 보는 이를 한 순간에 주녹이 들게 만드는 그런 눈빛이었다. 왕일은 그 눈빛이 '네가 감히 손부자님을 오라 말라 해'라는 분노 섞인 의문의 표시임을 알았다. 그러� 그 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그것이 최선임을, 그리고 손부자가 주저 없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왕일 은 다시 포권했다. "그럼 수고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돌아섰다. 호연 막내가 그 뒷등을 노려보다가 한 순간 돌아섰다. 그는 나무숲 사이로 사라져 値� 다. 산동의 가을은 짧고 햇살은 강렬해도 따스하지는 않다. 일을 않아도 밥을 먹을 수 있는 복 많은 노인� 은 그래서 한낮이면 집 앞 골목에 긴 의자를 놓고 나와 해바라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 의 태양과 겨울의 난로 사이에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온기를 시들어 가는 육체에 쪼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개 서문정은 그런 일반적인 노인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는지 햇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 이 었다. 그는 왕일이 만든 오두막 뒤편 산기슭에서 동굴을 찾아 밤이고 낮이고 거기 틀어박혀 지냈다. 유곰보는 그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했었다. 독사니 두꺼비, 거미 같은 것들을 바리바리 들고 다니는 노 款� 따위는 멀리 할수록 좋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쪽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왕일이 찾아갔을 때, 서문정이 놀란 것도 아마 그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사람� 나 타났다는 것, 그 사람이 왕일이었다는 것이 의외였을 것이다. 서문정은 기어서나 드나들 수 있을 좁은 동굴 입구에 얼굴만 내밀고는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 예상보단 훨씬 빨리 나타났군. 헤헤! 좋아, 좋아, 어차피 올 줄은 알았으니까 빠를수록 좋은 일이� . 어 서 들어오게." 그리곤 동굴 속으로 다시 얼굴을 감추었다. 왕일은 유곰보의 말을 상기하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몸을 � 여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 조심, 조심! 애들 안 다치게 조심해서 들어오게!" '애들……?' 왕일은 그 뜻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그 덕에 바로 서문정이 한 말의 뜻을 알았다. 동굴 �에 는 시꺼멓고 꼬물꼬물 거리는 것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그것들이 거미떼라는 것을 왕일은 동굴 입구로 邨� 들어오는 흐린 햇살에 의지해서 겨우 알아보았다. 왕일은 순간적으로 다시 돌아 나갈까 망설였다. 더구나 밖에서는 몰랐는데 동굴에 머리를 들이밀자 역� 운 비린내가 코를 찌를 듯이 풍겨 왔다. 그것이 동물, 그것도 뱀 종류의 것이 내는 냄새라는 것을 그는 알 � 있 었다. 남만에서도 이런 냄새는 숱하게 맡아보았던 것이다. 그때 무엇인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코앞에 서문정의 얼굴이 바짝 붙었다. "헤헤……, 겁먹지 말고 들어오게. 자넨 알고 보면 우리 애들 겁낼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야. 웬만 � 놈 들은 자넬 물었다간 오히려 죽어버릴걸세." 왕일이 소위 독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왕일은 사실 서문정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독인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처음 듣 는 것이고, 별반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가 생각할 때에는 스스로의 몸 상태가 중독자와 흡사 杉�. 어떤 종류의 독에 중독되면 계속 그 독을 섭취해야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그런 증상이 있다는 것을 그는 江� 있었다. 남만에는 그런 묘족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왕일이 서문정을 찾아온 이유도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문정의 짐작대로였지만 다른 하나는 � 혀 예상하지 않던 그런 것이었다. 첫 번째 것은 그가 서문정이 시키는 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하는 것으로 간단히 해� 되 었다. 소위 독공의 기초공부였다. 26. "나는 개방의 장로이기도 하지만 다른 신분이 있다. 바로 독왕당(毒王堂)의 장문인이라는 것이다." 서문정은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독왕당은 태고적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파로, 신농씨는 너도 알겠지� 먹 어서 유익한 것과 독이 되는 것을 가리기 위해 수많은 풀을 씹어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의술의 시조라고� 불 리지.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수많은 풀을 씹어 그 중에 유익한 것만 골라내었다는 말은 ソ� 뜻일까? 역으로 말해서 독을 골라내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신농씨는 의술의 시조도 되지만 우� 독 왕당의 시조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싶지만……!" 말을 하다가 끊고 서문정은 왕일을 보며 음충궂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아니다. 흐흐흐……!" 그는 별로 우습지도 않은 상황인데도 한참이나 괴소를 흘렸다. 이것이 왕일로 하여금 그가 생긴 것과는 달 리 주책 맞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독왕당이란 이름은 내가 지은 것이지. 당연히 개파조사(開派祖師)도 나다. 하지만 거지 서문정이 개파 떻� 라면 남들이 좀 우습게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 신농씨를 끌어다 붙인 것이지. 어떠냐?" 서문정은 진짜 재미있는 부분은 여기라는 듯이 급히 말하고는 감탄을 구하는 눈빛으로 왕일을 바라보았 �. 왕일은 감탄은커녕 하품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가부좌라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자세가 아니었기 때문이� 다. 양발을 완전히 꼬아서 발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무릎 위에 얹어놓아야 하는데 어지간한 유연성으로는 � 게 가능하지가 않았다. 손으로 발을 잡고 억지로 끌어당겨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놓긴 했지만 그 자세로 계� 유 지하려니 장딴지가 뻑뻑하고 허리는 아파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 정신에 우습지도 않은 말을 듣고 ㉴� 할 일이 있는가. 왕일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시조를 아무 곳에서나 끌어다 써도 되는 겁니까?" "왜 안돼! 그게 뭐 이상해!" 서문정은 쭈글쭈글 짓무른 눈까풀을 한껏 치켜 뜨고는 왕일을 노려보았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어 � 격 을 받았다는 표정이었다. "개방의 시조가 누군지 알아? 이철괴(李鐵拐)야. 이철괴가 누군지 아나?" 왕일이 왜 이철괴를 모를 것인가. 이철괴는 민간신앙에서 관성제군(關聖帝君; 관우)이나 악왕(岳王; 악 �)정 도로 존경을 받고 있는 도교팔선(道敎八仙) 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의 원래 성은 이(李)씨인데 철 � 만 든 지팡이, 즉 철괴(鐵拐)를 들고 다닌다 해서 이철괴라 불렸다. 그가 하루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이랑 � 려고 육신은 땅에 두고 혼백만 빠져나가 상천에 올랐다. 며칠을 놀고 돌아왔더니 그가 죽은 줄 알고 제자들이 갹� 을 장사지내 버리는 바람에 다른 사람 시신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 시신이 절뚝발이 거 痔�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 지팡이를 짚은 거지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신선이 바로 이� 괴 였다. 그 이철괴를 개방에서 시조로 끌어다 쓰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뿐이 아니지. 개방의 조사야(祖師爺; 개파조사)는 누군지 아나?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일세 나라 에서 들으면 큰일 나겠지만 개봉 총타의 조사각(祖師閣)에는 홍무제의 영정이 이철괴와 나란히 걸려있단 뼈� 야." 거기에도 나름의 유래는 있었다. 주원장이 중노릇을 하다가 몽고의 관원을 죽이고 도망다닐 때 잠시 거지 생활을 했었다. 그 구걸방식이 독 특해서 소뼈다귀 두 개를 들고 다니다가 아무 집 문간에나 서서 뼈다귀를 맞부딪쳐서 소리를 내면 주인이 그 를 불러들여 융숭한 대접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개방의 거지들이 구걸을 할 때는 소뼈다� 두 개를 부딪쳐 장단을 맞추며 연화락(蓮花落; 구걸할 때 부르는 노래)을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개방에서 � 의로 끌어다가 쓴 전설이었지만 어느 문파인들 그런 거짓 시조와 전설이 없을 것인가. 그것이 서문정의 주장이 駭�. 왕일은 더 말하기 싫어졌다.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쩔 것인가. 주책 맞은 노인네가 그렇게 자위� 며 놀고싶다면 그렇게 두면 될 일이었다. 그보다 그는 가르쳐 준다던 무공은 안 가르쳐주고 사설을 늘어놓� 이 유가 궁금했다. 입을 벌려 그것을 물어보려고 하는데 서문정이 먼저 용건을 꺼내었다. "가부좌는 나중에 하고 일단 일어나서 절해!" "예?" 서문정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제자로 들어오지도 않고 무공을 배울 셈이냐? 날 사부로 모시면 네게 독왕각의 장문제자 자리를 주겠� 는 말이다." 그것이 목적이었다. 서문정은 자기로부터 시작되는 문파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원래 그가 독공을 배우게 된 연유는 왕일과 비슷했다. 개방의 별 볼일 없는 거지로 떠돌던 젊은 날의 한 때에 그는 기연을 만났다. 객사한 어느 시신을 뒤지다가 그 주머니에서 독약과 해약, 그리고 독에 관한 � 론이 적혀있는 책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십년, 여기저기에서 얻어들은 지식과 한자 두자 얻어 배운 글귀� 공 부를 하고, 그 나머지는 몸으로 때워가며 익힌 독공이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들었다. 강호에 그만큼 독을 � 다 루는 자는 다섯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스스로의 평가였고, 강호가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개인적으� 봐 서는 그는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 거지, 게다가 천성이 음침하고 주책스러우며, 독까지 다루는 그� 지라 친히 지내는 사람도, 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 그였다. 거기에 왕일이 나타났다. � 름대 로 설정한 최대 목표의 실험체이자 독공을 익히기에 가장 적합한 체질이 된 사람, 그것이 왕일이었다. 그 � 그 를 제자로 삼지 않고 누구를 제자로 할 것인가. 기대에 차서 왕일을 보는데 왕일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무릎을 꿇더니 꾸벅꾸벅 절을 하기 시작했다. 동 굴이 낮아서 제대로 된 큰절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바라지도 않았다. 서문정은 왕일이 대충 십여번 � 을 하자 그 어깨를 짚고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갖 탄생한 문파라고 서러워하거나 기죽을 필요는 없다. 자고로 금강불괴가 아니고서야 독에 당� 지 않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용독(用毒)과 해독(解毒)에 있어서 경지에 오르면 능히 천만인 중에 하나를 죽 � 수 도 있고, 혼자서 천만인을 다 죽일 수도 있다. 당금 무림제일고수라고 칭해지는 혈기린만 해도 독공과 암 綏�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겠느냐. 이 사부가 평생 독공만 연구하느라 암기 쪽에는 별 조예가 없다만 적어도 떠� 만 놓고 본다면 사천당문(四川唐門)도 부럽지 않고 혈기린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원래 너는 개방 사람이 아니니 개방의 무공을 배울 수는 없는 몸이다만 내가 그것도 몰래 가르쳐주마. 자 질구레한 몇몇 기술들은 쓸만할게다." 왕일은 서문정의 은밀한 눈빛이 어이가 없어서, 또 한편으로는 강호의 규칙, 지금 당장 서문정이 범하 졀� 하는 타문파의 비기(秘技) 노출이 얼마나 엄히 다스려지는 금기인지 잘 모르기도 해서 그저 가만히 바라 릴� 만 했다. 그가 서문정을 사부로 모시는 이유는 간단했다. 독공이 무공의 하나라면 배워두는 것이 손해는 틈�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배우려면 사부를 모시는 것이 당연했다. 그는 강호에서 소위 비전(秘傳)의 전수가 갖는 의미, 한 문파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서문정이야 개방의 제자면서 독왕 瑛� 시조일 수도 있지만 왕일은 독왕당의 제자일 뿐이니 개방의 무공을 배워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칫 그것� 발 각되었다가는 개방의 무공을 훔쳐낸 셈이 되어버린다. 그걸 모르고 가만히 있는 왕일의 태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서문정은 처음 맞아들인 제자 앞에서 � 호 의 금기사항을 어기겠다는 소리를 한 것이 스스로 켕겨서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앉았다. "으흠……! 이제 본격적으로 수련에 들어가자. 다시 가부좌를 하고 내가 하는 말을 따라 외어라!"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나직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거울에는 아무 흠이 없고, 장인이 다듬어 무늬를 이루었네. 청룡과 백호는 벽사(僻邪)를 이루고, 주작과 현무는 조율(調律)을 하네. 신선은 늙음을 모르니 옥천(玉泉)을 마시고 대추를 먹는다네. 한 번 따라 읊고는 왕일이 물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모른다." "예?" "책에 나온 거니까 그냥 따라하면 돼. 기공을 운기하기 전에 꼭 한 번씩 읊고 하도록 해라. 이건 규칙� 야." "책에 나온 규칙입니까 아니면……?" "내가 만든 규칙이다. 자 다음은……!" 서문정은 얼른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어했다. 왕일이 캐물어 봤자 별로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 래는 그가 구한 책의 앞머리에 실려있는 글귀인데, 그는 예전부터 뜻도 모르면서 열심히 읊곤 했었다. 시 갚� 도 하고 주문 같기도 한데 그 속에 뭔가 다른 뜻이 실려있는지는 그도 몰랐다. 그냥 왠지 그 글귀를 읊� 않 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뿐이었다. "이제 운기를 해야 하는데, 운기조식이란 건 단순히 숨을 고르는 게 아니다. 그것을 통해서 육근(六根; 사람 을 의혹케 하는 여섯 가지 근원)을 다스려 고요케 하고, 팔식(八識; 여덟 가지 인식작용)을 정하게 비추 � 보 며, 오온(五蘊; 일체의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을 텅비게 하고, 삼원(三元; 천.지.인)을 깨달아야 한다. 냅슴〈� 숨을 고르고 자기 속에 있는 기(氣)의 작용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곧 스스로를 잊게되면 그윽하고 諍� 운 가운데 안팎으로 만물을 제거하고 무위(無爲)에 이르게 될 것이다. 속으로 숫자를 세며 숨을 내쉬어� . 입 은 다물고 혀는 입천장에……!" 서문정은 반은 의미도 모르지만 책에 그렇게 쓰여있기 때문에, 또 반은 이것저것 얻어들은 지식과 경� 으 로 끼워 맞춰가며 스스로 이름 붙인 바, 독왕연진보경구환금단묘결(毒王煉眞寶經九還金丹妙訣)의 심법을 전수 하기 시작했다. 곧 왕일이 무아지경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서문정이 읊조리는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파도 恬� 처럼 일정한 곡조로 흘렀다. 그들의 주위에 가득한 독사와 독물들이 기어다니는 소리도 나직해져서 동굴 湛� 조용해졌다. 유곰보는 소리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왕일과 서문정은 덕분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후 한달 � 를 심법과 용독술을 배우는데 전념할 수 있었다. 기실 왕일이 서문정을 찾아간 두 번째 이유, 그리고 독공을 배우 는 것보다 더 기대를 했던 목적이었다. 이전까지 애매하게만 알고있던 독에 관한 지식을 좀 더 제대로, � 수 있도록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 목적은 훌륭하게 성취되고 있었다. 그러나 독공의 수련은 그렇게 순조� 지가 못했다. "그것 참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서문정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왕일은 환골탈태를 했고, 그렇다면 단전에 기가 弔� 는 응기(凝氣)에서부터 그 기가 모이는 축기(縮氣), 기를 사람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용기(用氣)의 단계� 지 순 식간에 진행되어야 했다. 한 달이면 강호 일류고수의 경지에는 못 미치더라도 상당 기간 수련한 사람 정 돛� 내공단계까지는 올라가야 하는 것인데, 묘하게도 왕일은 이제 겨우 미약한 기운이 단전에 쌓이고 있을 뿐 潔� 다. "이래가지고는 처음 무공을 배우는 사람의 진도와 다를 게 없지 않나." 운기를 하고 있는 왕일을 보며 그렇게 뇌까리는데 동굴 밖에서부터 그 말에 대한 대꾸가 들려왔다. "이제 처음 배우는 사람이 그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비좁은 동굴 입구에 유곰보가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27. 놈은 부풀어오른 거대한 배와 단단한 가슴을 갖고 있었다. 몸의 다른 부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머리는 금강석처럼 번뜩이는 네 개의 눈과 두 개의 갈고리� 럼 갈라진 턱, 그 사이로 삐죽이 솟아 나온 반월형의 이빨에 가려지고, 그 위에는 풀잎처럼 뻗어 나온 두 개 � 더 듬이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여러 개의 마디로 이루어진 네 쌍의 다리는 단단한 가슴으로부터 사방으로 퍼져 나와 땅을 그러쥐고 � 었 다. 이러한 모든 것이 가늘고 검은 털로 빽빽이 가려져 있어서 어두운 동굴 속에서는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아 니 유심히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 털 뭉치 같았다. 그러나 뻗어 나온 더듬이와 이빨, 치명적인 독이 흐르고 있을 저 이빨과 턱, 사방을 품에 감싸안을 것 낮� 보이는 저 다리는, 어둠 속에서 금강석처럼 번뜩이는 저 네 개의 눈은 일체의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투쟁 �과 만족을 모르는 탐욕을 증거해주고 있었다. "젠장!" 유곰보는 여우굴로 들어갔다가 콧잔등을 물린 개처럼 정신없이 동굴을 빠져 나와 주저앉으며 욕설을 � 었 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 동굴 속에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저 독거미의 모습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적수의 모습보다도 위압적이었 �, 그 가냘픈 두 개의 더듬이는 목젖에 대어진 푸른 칼날보다도 오히려 더 두려웠다. 유곰보는 그게 부끄러워 더욱 화가 났다. 순간적으로 안에 있는 사람이 장로라는 것도 잊고 소리를 � 럭 질렀다. "도대체 그 속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서문정이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징그러운 미소를 흘렸다. "이놈들이 지금은 배가 불러서 아무나 물진 않네. 괜찮으니 들어오게." 유곰보는 엉덩이를 땅에 댄 채로 비척비척 물러섰다. 서문정의 미소가 징그러워서가 아니라 그 머리에 앉아 꿈틀거리고 있는 독거미가 두려워서였다. "젠장!" 유곰보는 요즘 들어 입버릇처럼 된 가벼운 욕설을 다시 내뱉고는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나오세요! 얘기 좀 해야겠습니다." 유곰보가 하자는 얘기는 개방에 관한 것이었다. 거지들의 세계에 조직이 있다는 것은 언뜻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강호에는 분명 그런 것이 있다. � 것 도 소속 구성원의 수로는 강호 최대를 자랑하는 거대 방파, 개방이 그것이었다. 전통적으로 개봉(開 )에 총타를 두고, 다시 북경과 남경에 각각 하나씩 총타를 두었다. 남북십삼성에 � 나씩 의 분타가 있고, 다시 각 주, 부, 현에 하나씩 지타(支舵)가 설치되어 있으니 모두 해서 3개 총타, 13분� , 325 지타라는 엄청난 규모의 조직을 자랑하는 방파, 개방. 이 개방이 최근 흔들리고 있었다. 거지. 강호에서는 그들을 규화자(叫花子), 혹은 화자(化子, 花子; 양쪽 단어가 다 쓰임)라고 하는데 � 거지 들의 속성이라는 것이 묘한 구석이 있다. 한편으로는 세상사에 절망해서 하늘을 이불로, 땅을 베개로 삼� 무 소유의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없이 사는 것에 한이 맺혀 미친 듯이 재물을 탐� 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물론 개방에서는 전자를 장려하고 후자를 엄하게 다스린다. 거지가 범죄를 하면 그 資� 에서는 어떤 거지도 구걸을 못하게 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개방, 그 이전에 거지라는 부류 � 체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 개방이 무림에서 대표적인 협의(俠義) 단체로 손꼽히고, 그 구성원들이 그렇 � 않 은 거지들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무기력한 거지들로 어떻게 조직을 이룰 것인가. 조� 을 만들고 꾸려 나가자면 조직적인 사람, 무엇인가를 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니 개방이라는 것 � 욕 심이 없으면서도 무언가를 하려는 의욕이 있는 거지들에 기반을 둔 방파라는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는 토� 위 에 서 있는 조직이었다. 의욕이 있는 사람이 구걸만 해서 먹고살려 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모이면 힘이 逅� 고, 거기에는 이권이 개입되기 마련, 그러다 보니 몰래 치부를 하는 부자 거지들도 생기게 된다. 이런 � 람들 이 원래의 의도를 잊어버리고 아예 이권만 밝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세상에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보다 무서운 부류가 없다. 그렇게 친다면 인생의 가장 밑바닥 구렁텅이� 서 뒹구는 거지보다 무서운 부류가 달리 없을 것이다. 그 거지들이 돈맛을 알고 나면 어떤 악랄한 도적보다� 더 무서운 도적, 어떤 비열한 자들보다 더욱 비열한 무리가 되어 버린다. 남경총타를 중심으로 하는 개방남 린� 지금 그런 꼴이었다. 개방남타에 진정으로 곤궁하고 가난하여 하는 수 없어서 하는 거지는 극히 일부, 나머지는 돈벌기 쉬운 길 이 거지 짓이기 때문에 하는 자들이었다. 처음에는 연화락(蓮花落)을 부르며 알랑거리다가 돈을 주지 않으면 시끄럽게 떠들어서 강요를 하고, 그 〉� 주지 않으면 욕설을 해대는 노래를 부른다. 대개의 사람들은 남 보기 부끄러워 돈을 주고 마는데, 그래도 이것 은 배대강(背大强)에 비하면 점잖은 짓이었다. 이런 유형의 거지들은 병기를 숨기고 다니면서 평상시에는 구걸 을 하다가 호젓한 곳에서 사람을 만나면 폭행하고 살인까지 자행하여 재물을 빼앗는다. 때로는 아녀자와 팀� 들을 유괴해 팔아먹는 것을 업으로 하는 거지들도 적지 않았다. 지타의 타주급 아래로 한 지역의 거지 두목이 되는 자를 화자두(花子頭)라고 부르는데, 이런 자들은 구 �도 하지 않고 호의호식할 뿐 아니라 때로는 적지 않은 재물을 모으기도 한다. 그래서 강남에는 '화자두 되는 것이 고관(高官)보다 낫다'는 말까지 돌고 있었다. 협의를 지향하는 개방총타에서 이런 사태를 두고 보지만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 에 제룡련과 군호맹의 알력이 개입되어 사태는 복잡해져 버렸다. 개방남타를 징계하려는 개방방주와 북타를 ┠� 련이 제지하고 나선 것이다. 개방북타가 지리적 조건상 군호맹에 가까이 지내는 것을 견제한다는 것이 그 湧� 명분이었다. 그 기회를 틈타 개방남타의 일부 인물들은 이 기회에 북타와 분방(分幇)을 해서 독자적인 조 汰� 꾸리자는 주장을 한다고도 했다. 바야흐로 강호에 두 개의 개방이 생길 찰나였다. 유곰보는 개방 산동분타주로서 북타에 속해 있고, 당금 방주인 철괴장(鐵拐丈) 한상(韓常)의 여덟째 제 愍� 기도 했다. 젊어서 한 번 크게 좌절한 뒤에 세상사를 허무하게 보다가 한상의 제자로 들어가면서 아예 개 堧� 일원이 되긴 했지만 원래 성격은 호방하고, 협의를 추앙하는 자가 유곰보, 그런 그가 남타의 일을 불만스 눗�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일도 함부로 벌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제룡련의 비호를 받고 있는 남타를 잘못 건 드렸다가는 자칫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이고, 그것은 곧 제룡련과 군호맹의 전면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 래는 남련과 북맹이 싸우든 말든 개방과는 관계없는 일이었지만 개방의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전면전이 벌어진 摸� 그 최선봉에 서게 되어 버린다. 그것은 무슨 수를 써도 피해야 할 일이었다. 남련과 북맹의 전면전에서 � 선봉 에 선다는 것은 어느 쪽이 이기든 선봉에 선 문파로서는 곧 괴멸을 뜻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문정은 그게 그와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며 물었다. 유곰보는 울컥 화가 치밀어 � 랐 지만 눌러 참고 대답했다. "열흘 후에 이로정(李老亭)에서 개를 잡습니다." 개를 잡는다. 개방의 모임을 뜻하는 흑화(黑話; 은어)였다. 모임의 성격과 크기는 장소에 따라 규정되 쨉� 이로정에서 열린다는 것은 장로회의를 의미했다. 이로정은 개방의 장로당(長老堂)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문정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난 안가네." 유곰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참석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지만, 또 참석 않겠다고 말하기를 穗� 하기도 했지만 막상 저렇게 간단하게 잘라 버리니 부아가 치솟는 것이다. 그러니 말이 곱게 나올 수가 없 駭�. "왜 안가요! 장로회의가 애들 장난입니까!" "난 바빠!" "뭐가 바빠요!" "저 앨 가르쳐야 돼. 그리고……!" 서문정은 동굴 쪽을 가리키며 대답하고는 유곰보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미소도 짓지 않고 정색이 된 그 눈빛을 유곰보는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서문정은 그런 유곰보에게 물건 하나를 던져 주었다. 검은빛이 나는 대나무 패였다. "내가 가서 얘길 한다고 뭐 도움될 게 있나? 자네가 나대신 가게. 사람들도 그걸 바랄 거고." 유곰보는 속을 드러내 보인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서문정이 내놓은 물건, 개방의 장로임을 증 灼� 주는 신물(信物), 장로영부(長老令符)는 품에 집어넣었다. "방주님이 화내실 텐데……." "이 기회에 나는 장로직에서 물러나겠네. 그럼 한상도 화내진 않겠지. 그보다 뭐가 당연하다는 건가?" 서문정의 관심은 더 이상 개방의 일에 있지 않았다. 그는 유곰보가 동굴로 들어오며 내놓은 첫마디의 � 미 를 묻고 있었다. "저 애는 탈태환골을 한 몸이야. 그런데 왜 보통 사람과 같아야 하나?" 유곰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꾸 탈태환골 탈태환골 하시지만 그렇게 됐다는 증거가 없잖습니까! 또 탈태환골 탈태환골 말은 들� 지 만 그게 어떤 증상을 보이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 본 사람도 없잖습니까! 다들 말로만 그러지, 따지고 들 載� 면 누가 그러는 걸 봤다는 사람한테 들었다더라 식의 이야기들 아닙니까!" 서문정이 벌컥 화를 냈다. "저 앤 탈태환골 한 게 맞아! 내 명예를 걸고 보장하네!" "걸 명예나 있고서……!" 유곰보는 마주 고함을 치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존경심이라곤 눈곱만치도 갖고 있지 않은 � 람 이지만 그래도 장로 아닌가. 공경 받아야 할 노인 아닌가. 유곰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으로 확인시켜 드리죠!" 그는 동굴로 가려다가 주춤 서더니 서문정을 향해 말했다. "데리고 나오시죠." 독거미 우글거리는 동굴로는 다시 가기 싫었던 것이다. 서문정이 왕일을 데리고 나왔다. 유곰보는 오른 손을 내밀었다. "밀어 봐!" 왕일은 영문을 몰랐지만 잠자코 손을 내밀어 유곰보의 손에 마주 대고 밀었다. 유곰보가 휘청 뒤로 밀� 났 다. "좋아, 체격에 비해 힘은 있군. 못 먹어 비틀어진 나보단 낫네. 이제 다시 밀어 봐!" 왕일은 다시 밀었다. 그런데 이번엔 유곰보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바위를 미는 듯한 무기력감만이 손 바닥에 되돌아올 뿐이었다. "내공을 써 봐! 호흡을 조절하고, 숨을 멈추고, 손바닥에서부터 나를 관통해서 내 뒤의 나무까지 잇는 굼� 있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다! 팔이 거기까지 길어진다고 상상해 봐!" 왕일의 몸이 뜨거워졌다. 유곰보의 말처럼 한순간 팔이 길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彭� 에 불과했다. 그 순간 다음에는 거대한 철퇴에 가슴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고 피를 토해야 했다. � 신을 차렸을 때 왕일은 이장이나 뒤로 날아가 뒹굴고 있었다. "칼을 꺼내 봐! 그 칼로 나를 쳐봐! 무공이 뭔지 보여주지!" 왕일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고 칼을 꺼내었다. 그리고 유곰보를 향해 달려들며 휘둘렀다. 격식도 법 도� 없이 일직선으로 내려긋는 일도였다. 유곰보의 눈이 잠시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허리춤의 솥을 들어 왕일을 향해 휘둘렀 �. 깡-! 칼이 허공에 뜨고, 솥은 왕일을 후려갈겼다. 왕일은 다시 한 번 꼬꾸라져서 뒹굴었다. 28. 유곰보는 입술을 비틀어 왕일을 비웃었다. "이게 무공이란 거다. 말라비틀어진 내가 건장한 너를 던져 버릴 수가 있고, 나중에 움직여도 먼저 칠 側� 있는 것, 이게 무공이야." 그는 초막 앞 공터에 세워진 나무 한 그루를 발로 툭툭 찼다. "봐라. 제법 굵지? 이걸 발로 차서 부러뜨리려면 어떻게 하나? 가까운 곳에서 그냥 걷어차서는 나무를 管� 뜨릴 힘이 나오지 않아. 이렇게……!" 부웅-! 그는 선 자세에서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발을 뻗어 나무를 걷어찼다. 뒤돌려 차기, 소위 번신단각(飜 � 脚)의 초식이었다. 빠각-! 대접 만한 굵기의 나무가 중동에서부터 부러져 나갔다. "이런 건……!" 유곰보는 언제 몸을 움직였냐는 듯이 단정한 자세로 서서 말을 이었다. "연습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야. 회전을 해서 발뒤꿈치에 힘을 싣는 것이지. 그러나 이건 무공� 아 니야. 만약 적을 앞에 두고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큰 동작을 취했다간 당장에 맞아 죽어 버릴 거야. 무공 � 배 운 사람은 그럼 어떻게 하나?" 그는 다시 또 한 그루의 나무 앞으로 다가가 이번에는 가볍게 밑동을 걷어찼다. 왕일이 보기에는 그저 발 안쪽으로 툭 건드린 것으로 보였다. 우드득-! 나무는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게다가 껍질 부분이 길게 남지도 않고, 마치 도끼로 단번에 찍어서 넘어 蔘� 듯이 깨끗하게 부러져 나가 버렸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는 것, 이게 무공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내공(內功)이 필요한 거� , 내 공을 모르면 무공을 익혔다고 볼 수가 없는 거야. 기기묘묘한 초식? 좋지. 그러나 내공이 없으면 그 굼벵 � 같 은 손을 누가 못 피해? 반사 신경? 좋지. 하지만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지는 공격을 무슨 수� 피 할 거야? 모든건 내공이 근본이란 말이다." "그래서 내공을 익히고 있잖으냐!" 왕일이 욕을 먹는 것이 자기 살 베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처지가 된 서문정이 볼멘 소리로 중얼거렸� . 유곰보는 그를 휙 돌아보고는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왕일을 보며 말했다. 노골적인 무시였다. "문제는 내공이라는 것이 일조일석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나는 자그마치 삼십 년간 내공을 � 았 다. 그래서 겨우 이 정도다. 게다가 스물을 넘어서 처음 내공을 익힌다는 건 헛수고에 불과해. 적어도 열 � 이 전부터 수련을 해야 하고, 일류 고수가 되려면 다섯 살 이전부터 약을 먹어 가며 독문(獨門)의 심법수련� 해 야 하는 것이 내공이다. 그러지 않고는 평생 해도 삼류 무림인도 되기 힘들 것이다." 왕일은 아무 대꾸도 않고 묵묵히 서 있었다. 그것을 풀죽은 것으로 보았던지 유곰보는 언성을 누그러� 려 서 덧붙였다. "내공은 얼마나 수련했나? 내가 없던 동안이겠지? 그럼 한 달? 솔직히 말해 방금 밀어 본 바로는 네 성 諛� 적은 것은 아니다. 한 달 동안 한 것치고는. 그런 점에서 탈태환골을 했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지. 네 � 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성취를 보인 것이니까. 즉 다섯 살 아이가 수련한 것 같은 효과를 거두었� 말 이지. 아마도 이런 식으로 십년 쯤 꾸준히 하면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걸 바라� 게 아니겠지? 모르긴 몰라도 당장 무공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었던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안돼! 무슨 원한인지 몰라도 이제 와서 무공을 익혀 복수를 하려다간 너까지 죽고 말 거다. 그� 포 기하는 게 어때? 알고 보면 다 부질 없는 짓이다. 원한이니 복수니 하는 그런 것들은……, 지나가고 나면 잊혀 지고 마는 거야. 나이도 젊은 것이, 아직은 살아갈 세월이 살아온 세월 보단 많지 않으냐? 그냥 포기하� 그 돈으로 새 삶이나 꾸리는 게 어떠냐?" 서문정은 이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기만 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유곰보의 말이 옳았다. 왕일의 택� 는 그가 생각한 것처럼 대단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완전중독으로 인한 탈태환골의 효과는 기껏 瞞� 나이 들어 무공을 익히는 불리함이 없어졌다는 정도일 뿐이었다. 실망스럽게도……! 그러나 서문정과 대조적으로 왕일은 전혀 실망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부러진 두 그루의 나무를 � 찬 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무공이 뭔지 알 것 같소. 누군 온갖 사전 동작을 하며 애를 써야 가능한 일을 누군 간단하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후자가 이기겠지요. 그러나 나는 무공을 익히길 바란 것은 아니오. 익힐 수 있다면야 좋겠 嗤� 익힐 수 없어도 별로 상관은 없소. 복수만 할 수 있으면 되니까." 유곰보는 기껏 해준 얘기가 하나도 먹혀들지 않은 것이 불쾌한 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공을 모르고 어떻게 복수를 한단 말이냐?" 왕일은 그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칼은 나만 들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힘이 모자라면 摸� 방법을 쓰면 되고, 그래도 부족하면 도움을 얻으면 되지 않겠소." 그는 이번에는 서문정을 향해 말했다. "제가 사부님께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무공이 아니라 다른 것. 사람을 죽이는 다른 방법을 얻길 원� 것 입니다." 서문정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눈을 끔벅거리다가 한 순간 표정을 환하게 폈다. "독! 그걸 원한 거냐?" "물론입니다." 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남만에서 어떤 적보다도 무서운 적, 어떤 흉기보다도 두려운 흉기가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 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복수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거라면 얼마든지 가르쳐 줄 수 있지. 장담하건대 누구도 해독하지 못할 독약을 네게 주마!" 서문정은 히죽히죽 미소를 지었다. "적이 몇이든 단번에 몰살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아끼는 아이들도 네게 내주어 사용할 수 � 게 해주마. 그거면 백만 대군보다도 낫지." 유곰보가 그의 말을 잘랐다. "독이라고? 그런 비겁한……!" 그는 할 수 있는 만큼 인상을 찌푸려 경멸의 뜻을 표시했다. "강호에서는 독을 쓰는 자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것도 당하는 사람이 모르게 사용하는 것을 가장 경 鉞� 다. 독은 사내 대장부가 사용할 것이 못된다. 혈기린이 독의 고수라지만 그가 유명한 것은 독보다는 암기 � 고 수라는 데에 있어. 강호의 누구도 그의 암기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천하제일고수로 불리고 있는 것 訣� 천하의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독을 쓴다고 고수가 된 것은 아니다." 왕일이 벌컥 화를 냈다. "저는 복수를 원할 뿐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멸을 받아도 좋습니다. 복수를 못하고 참� 살 아야 하는 고통보다는 차라리 온 세상 사람들의 침을 뒤집어쓰겠습니다. 아십니까? 그들은, 무공을 안다� 그 들은 땅만 파고 살던 저희 일가를 몰살하고, 힘없는 누이는 끌고가 노리개로 만들었단 말입니다. 무림 括� 라…… 제 칼을 맨손으로 받는 그 무림인은 돈 몇 푼 때문에 더러운 돼지의 노예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 고 있습니다. 그들을 죽이는 데에 독을 사용하면 비겁하고, 칼을 사용하면 정당하다는 것은 어디에 기준한 � 씀입 니까?" 말을 하는 왕일의 눈은 충혈 되었고, 이는 저절로 갈려져 소리를 내었다. 여태 참고 있던 원한이 한꺼 貶� 되살아나서 온몸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원한을 풀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사내가 아니다. 네 생각은 옳다!" 늙었지만 힘있는 목소리. 정이노와 호연막내를 대동하고 초막으로 다가오는 손부자의 목소리였다. 그� 의 뒤로는 바리바리 짐을 실은 말까지 세 마리 따르고 있었다. 손부자는 왕일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형형한 눈빛으로 좌중을 쏘아보았 �. "요즘 같은 때에 요순(堯舜)의 치세는 바라기 어렵고, 설사 요순의 때라고 해도 강호의 일을 일일이 해 簫� 주지는 못한다. 그야말로 주먹은 가깝고 법은 먼 이 시대에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ʼn� 지켜 줄 것인가? 그래서 혐객이 일어나는 것이다." 유곰보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켰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지만 끝내 억누르고는 돌아서 버렸다. "퉤-!" 침 뱉는 소리를 끝으로 가 버리는 유곰보를 무시하고 왕일은 손부자에게 급히 포권했다. "직접 찾아 뵙지 않고 먼 길 오시라고 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아니!" 손부자는 손을 저었다. "정리할 일이 있어서 조금 늦었네. 부탁을 받지 않았으면 모르되 부탁을 받고서야 어찌 오지 않을 것인 �?" 그는 말을 끊고는 뒤에 시립한 정이노를 바라보았다. 정이노는 웃을 듯 말 듯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 다. 손부자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왕일을 향해 말했다. "좋아, 좋아. 솔직히 말하지. 나는 예전부터 진가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네. 단지 그가 나를 � 드리 지 않아 분노를 터뜨릴 기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야. 이번에 자네 일가가 당한 일은 마땅히 천인이 공� 할 일인데 알고서는 이미 일이 끝나 버렸고, 복수는 자네 몫이라 어쩌지 못했네. 남의 일에 너무 나선다 싶� 마 음이 없지 않아 있지만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서기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 이 내 심정일세. 돕도록 해 주겠지?" 왕일이 깊이 포권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마음이 있어도 차마 먼저 부탁을 드리지 못하던 일인데 이렇게 먼저 말씀해 주시니 어떻게 감사해야 � 지 모르겠습니다. 강호 협객의 의리를 듣기만 했을 뿐 믿지 않고 있었는데 과연 이러하군요. 감격할 따름입� 다." 정이노가 앞으로 나섰다. "인사는 그만하고 이제 좀 쉴 곳을 찾아야 겠습니다." 그는 말에 얹은 짐에 손을 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짐을 어디 부려야 하는데 여긴 좀 좁군요. 위치는 좋아 보이는데……!" 왕일이 말했다. "위치가 괜찮으시다면 초막을 몇 개 더 짓는 거야 문제가 아니겠습니다만, 우선 몇 가지 사소한 일을 � 결 한 뒤에 그러기로 하지요. 짐은 내려놓고 천막 같은 것으로 덮어놓으면……!" 유곰보는 초막의 벽에 기대어 왕일과 손부자 일행, 거기에 서문정까지 끼어서 혹은 짐을 내리고, 혹은 돋� 을 세워 야숙할 준비를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입장은 묘했다. 원래는 누군가 억울한 일� 당 했다고 하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지만 지금은 성미를 부릴 때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시기가 좋지도 않은 데다 상대가 너무 나빴던 것이다. 모르고 있는 것처럼 했지만 사실 그는 왕일이 당한 일을 거의 파악하고 있었다. 그 상대가 천부채라는 것 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곤란한 것이다. 아무리 개방이라지만 녹림십팔채 중 하나를 건드린다는 것� 쉬 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요즘같이 미묘한 시국에 함부로 건드렸다간, 아니 그 혼자만이라도 끼여들었다가 정체 가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금세 개방과 녹림도의 싸움으로 번져 버릴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싸움은 곧 남련과 북맹의 싸움으로 옮겨 붙고, 그것은 곧 개방이 가장 피하려 若� 사태, 즉 그들이 양쪽 거대 세력의 전면에서 싸워야 한다는 사태가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위험 봉� 생각하면 서문정도 이 복수전에 끼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어떻게 말리지……?' 유곰보는 그런 고민을 하며 상념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에 해가 지고, 사위는 어둠에 잠겨들기 시작했다. 저만치에서는 왕일 일행이 화톳불을 피� 고 저녁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생나무 가지를 태우는지 연기가 매캐하게 코를 자극했다. '불도 제대로 못 피우면서 야숙을 한다고……, 저녁이 준비되면 날 부를까……? 고기라도 굽나……?' 맥락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롭게 맴돌았다. 그러다가 번쩍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나무에 묶여 斂� 목에는 칼이 대어져 있었다. 그 칼 건너편에서는 왕일의 번뜩이는 눈이 그의 시야를 찌를 듯 쏘아보고 있 駭�. 29. "이게 뭐, 뭐야?" 입술이 말라붙었는지 말이 잘 되지 않았다. 머리는 깨어질 듯 아파 왔다. 유곰보는 이게 어떻게 된 일 适�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왕일의 뒤쪽 저편, 화톳불가에 외면하고 앉은 서문정을 린� 모든 일을 한순간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젠장! 독을 썼지!" 화톳불의 매캐한 냄새에 무언가 수작이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왕일이 무표정하게 그를 보며 말을 받았다. "그러지 않고 어떻게 대명이 자자한 개방 산동 분타주님을 묶을 수 있었겠습니까?" 유곰보는 묶인 끈을 풀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근육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가 버린 듯 무기력하기 � 지 없었다. 그는 서문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서문장로! 당신이 내게 이럴 수 있소? 그래도 명색이 장로라는 사람이 같은 편을 해쳐요? 오갈 데 없� 사 람을 거둬 주고 먹여 준 은혜를 생각하고도 이런 짓을 하다니, 당신이 사람이요? 에이 퉤! 개새끼도 이러 � 않 겠다!" 심한 욕설이 튀어나오는 데도 서문정은 외면하고만 있었다. 그리곤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난 더 이상 장로가 아니야." 왕일이 유곰보의 어깨를 두드렸다. "진정하고 말을 들으시오." 유곰보는 눈을 부라렸다. "너도 마찬가지다, 이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야! 목숨을 구해 줬더니 칼을 들이대? 이게 네 보은하는 방 萱� 냐? 이 더러운 놈의 새끼! 넌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더럽고 비루한 개새끼다. 넌 얼마 못가 개처럼 길거리 【� 죽을거고, 혹시 운이 좋아 살아남아도 비루먹은 개처럼 떠돌다가 개처럼 혼자 죽을거다. 어쩌다 운이 좋� 창 녀라도 하나 꿰차서 애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도 개새끼고, 그 새끼가 다시 새끼를 낳으면 그것도 개새끼� . 네 놈 자손은 대대로 개새끼라고 불리고, 네 놈 무덤에는 황구지묘(黃狗之墓)라고 붙을 것이다. 네놈 조상도 대대 로……!" 극도로 흥분한 듯 그의 입가로 침이 흘렀다. 그 침이 입을 벌릴 때마다 파편이 되어 왕일의 얼굴에 부� 쳤 다. 그러나 왕일은 피하지도 닦아 내지도 않았다. "내가 욕을 먹어 싼 것은 사실이오. 그러니 욕은 나중에 하고 일단 말을 들으시오!" 그러면서 다시 유곰보의 어깨를 두드렸는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유곰보가 조용해졌다. 왕일이 이번에는 손 이 아니라 칼로 두드렸던 것이다. 물론 다치지 않게 칼의 널찍한 옆면으로 두들긴 것이지만 그저 거기 � 는 것만으로도 한기를 풍기는 칼날은 유곰보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는 위협적이었다. 유곰보는 곁눈으로 칼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언제 흥분했냐는 듯이 침착하게, 놀랍도록 냉정한 표정이 퓸� 말했다. "장난이 아니군. 날 죽일 셈인가?" 왕일이 대답했다. 그의 눈빛도 유곰보에 못지 않게 냉정했다. "필요하다면!" "무슨 필요? 이 거지의 목숨이 어디에 필요하다는 건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요." "살인멸구(殺人滅口) 하겠다는 건가? 무얼? 내가 뭘 말하는 게 두려운 거지?"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이오." 왕일은 나직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그의 눈빛, 말투, 그 어디에서도 흥분된 빛이란 찾아볼 수 없 駭�. 그러나 그 싸늘하게 식은 감정이 정말 두려운 것이라는 점을 유곰보는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살인을 � 수 있는 상태는 이런 것이라는 것을 그는 오래 전부터 경험을 통해 배워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은 이대로 기가 죽을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유곰보는 툴툴거렸다. "너와 관련된 무얼 내가 알고 있다는 거지? 네가 갈흉점의 왕일이라는 거? 네 원수가 진가장이라는 거 분 수도 모르고 녹림십팔채와 싸우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는 거? 널 돕겠다는 저 세 자칭 협객분들이 營� 은 과거 녹림도상에서 악명을 날렸던 악산삼귀(惡山三鬼)라는 거? 도대체 이렇게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ゾ� 누구에게 말한다는 거지?" 마지막은 비아냥거림이었고, 한참은 더 그렇게 조롱조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유곰보는 그쯤에서 입을 � 물 어야 했다. 그가 말한 대로 악산삼귀의 대형인 손부자, 귀웅(鬼雄) 손일산(孫一山)이 왕일 옆으로 다가온 것이 다. "과연 개방 산동분타주 답소. 오랫동안 숨겨 온 우리 정체를 알아냈구려. 감탄하오." '감탄'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감탄하는 빛이라곤 한 점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뽀� 는지는 정이노, 악산삼귀의 둘째인 귀노(鬼奴) 정이봉(丁二峰)의 말에서 밝혀졌다. "당신은 죽어 마땅할 정도로 많이 알고 있군. 감탄하오." 두 번의 감탄. 그 뒤에 숨은 살기에 유곰보는 몸을 떨었다. 과연 호연 막내가 푸줏간에서 뼈와 고기를 발라낼 때 쓰는 뾰족한 식칼을 소맷자락에서 꺼내 쥐고는 � 가 오고 있었다. 그가 바로 도살자, 살인광으로 유명한 악산삼귀의 막내, 귀도(鬼屠) 호연삼강(胡連三崗)이� 다. 졸린 듯한 눈, 반쯤 감긴 그 눈이 지금은 흐리지 않았다. 호연삼강의 눈에서는 손에 쥔 식칼의 예리한 �날 보다도 더 서슬 푸른 안광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과거 강호비붕방(江湖飛鵬幇)과 그들의 싸움이 있었을 � 저 호연삼강의 손에서는 핏자욱이 마를 틈이 없었다고 했었다. 무공으로는 겨우 삼류를 벗어난 주제에 어떤 ジ� 고수들 보다도 더 많은 살인을 하고, 어떤 마두들보다도 더 악명을 날린 자들, 그들이 악산삼귀였다. 그들이 처음 강호에 나와서 강북칠우(江北七友)라는 이름으로 떠돌 때, 그때만해도 그들은 셋이 아니� 일 곱이었고 강호에서 흔히 굴러다니는 파락호, 건달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 중의 하나가 당시 사천성 � 도에 서 제법 쳐주는 방파인 강호비붕방(江湖飛鵬幇)의 인물들과 사소한 시비 끝에 타살되자 강북칠우의 살아 꼭� 여섯은 여섯 마리의 악귀로 변했다. 그들은 형제의 원한을 갚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그들은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어떤 비난도 ジ� 썼다. 그래서 석 달간의 싸움이 끝난 후 강호비붕방은 방주는 죽고, 수하들은 흩어져 버렸다. 여섯 악종 � 흑 도 방파 하나를 거꾸러뜨린 것이다. 대신 그들도 셋이 더 죽었고, 살아남은 셋도 이름 앞뒤로 "악(惡)' � '귀 (鬼)'라는 별로 부르기도 듣기도 좋지 않은 글자를 앞뒤로 붙인 별호를 얻었다. 사실 그들은 그들이 날렸던 악명만큼이나 대단한 고수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유명한 이유도 무공이 높� 서 가 아니었다. 한다면 하는 사람들, 사소한 원한도, 보잘 것 없는 은혜도 반드시 되갚고 마는 사람들, � 념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사람들. 좋게 말하면 열혈남아에 협객이고 깎아 말하면 세상에 그런 악� 이 다시 없다 할 사람들, 그들이 바로 악산삼귀였다. 유곰보는 눈을 감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마는 또 겁먹은 어린애처럼 공 포에 떨만큼 값싼 사람도 아니었다. 이렇게 무가치하게, 개죽음을 한다는 것이 억울했을 뿐이었다. 그 때, 왕일이 호연삼강을 막았다. "이 사람은 제가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그 소리가 유곰보의 염장을 질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개새끼야! 너는……!" 아까 하다만 개새끼 족보 읊기가 다시 시작될 참이었지만 유곰보의 목소리는 목구멍 속으로 다시 기어 들 어갔다. 눈을 뜨자마자 서슬 푸른 칼날이 시야를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호연삼강의 칼이 그의 목덜미로 탔� 파고들 찰나에 왕일이 잡고 말리는 모습이 그가 눈을 뜨자마자 본 광경이었다. 왕일이 말했다. "당신도 알 듯이 우린 어려운 싸움을 하려고 하고 있소. 성공할 가능성보다는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 은 싸움이오. 사실은 불가능에 가깝지요. 거기에 우리 일이 조금이라도 새 나가서 적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 면 일은 완전히 불가능해 질 것이오. 그게 당신을 묶은 이유요." 유곰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문득 왕일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었다. "너는 무서운 놈이다. 이제 알겠군. 너는 처음부터 날 죽여 입을 막으려고 했지? 내가 널 구해준 그때� 터! 보석을 보여주며 꼬셔서 일을 부려먹고는 필요 없게되면 죽이려고 했던 거야. 나쁜 놈! 살모사 같은 놈!" "다시 말하지만, 날 뭐라고 욕하든 상관없소. 솔직히 말해서 그런 생각을 않았던 것이 아니니까. 그러� 난 무슨 욕을 먹더라도, 나중에 어떤 천벌을 받게 되더라도 반드시 복수는 해야겠소. 자, 시간은 없고 할 일 � 많 으니 본론을 말하겠소. 당신이 선택할 것은 단 둘이오.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사� 냐, 아니면 약속을 않고 이 자리에서 죽느냐요. 어느 쪽을 선택하겠소?" "흐흐흐-!" 유곰보는 괴소를 터뜨렸다. "웃기는군! 처음 만났을 때도 선택을 하라더니 이제 또 선택하라는 건가? 세상 묘하군. 그땐 널 죽이 윰� 죽이지 않느냐를 걸었지만 지금은 내가 죽느냐 마느냐가 걸렸단 말이지. 한 가지 물어 보자. 내가 약속을 하면 그냥 살려주겠다고 말하는 모양인데, 도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거냐? 알고 보면 나 그리 입이 무거운 사람� 아 니야. 여기선 절대 말 안하다고 하고는 바로 천부채로 달려갈지도 모르지. 그러면 어떻게 할테냐?"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정말 궁금해지는군. 내가 그렇게 신의 있는 사람으로 보이나? 난 저기 계신 세 弼� 님들처럼 한 번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말은 비비꼬여서 나왔지만 유곰보의 표정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왕일은 칼을 거두었다. 유곰보가 벌써 약속이라도 한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였다. "당신이 신의가 없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남의 일로 죽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오 더 구나……!" 그는 모닥불 옆에 앉아 있는 서문정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분이 관련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불리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겠지요?" 유곰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애초에 그 또한 왕일의 행동과 결심을 그리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 다. 왕일의 원수가 녹림십팔채의 하나가 아니었으면 먼저 나서서 도와준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그가 녹림십팔채를 공격하는 데에 끼었다간 당장에 사태는 녹림십팔� 와 개방의 분쟁으로 비화될 것이고, 그것은 곧 남련과 북맹의 전면전에 도화선이 될 것이다. 그렇게 피하려 杉� 상황이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셈이다. 지금 서문정은 어차피 낀 상태지만 그마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젠장, 이길 수가 없군!" 유곰보는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된 이상 서문정을 개방과 다른 존재로 생 각하게 하는 일이 시급하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문정은 아마도 이번 일을 계기로 장로 汰� 내놓는 것뿐 아니라 파문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개방은 어쩌면 서문정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강호� 광 고하고 다녀야 할지도 몰랐다. 필요하다면 그것보다 더한 일을 해서라도 녹림맹과 원한을 만드는 일은 피 瞞� 하기 때문이었다. 유곰보는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그러는 자신이 비루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 는 일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네. 약속하지. 약속할테니 풀어 줘!" 30. 유곰보는 풀려났고, 모닥불 옆에 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독은 몽혼약(朦昏藥)에 불과했으니 심한 것 � 아 니었고, 그나마 해독됐지만 남은 약기운을 없앨 시간은 필요했다. 그게 아니라도 굳이 밤길을 더듬어 갈 缺� 가 없었다. 그러나 유곰보는 곧 기어서라도 그냥 갔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불가에 둘러앉은 여섯 사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아 분위기가 냉랭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참을 수 없게 된 유곰보가 먼저 말했다. "이왕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으니 난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얘기들 하쇼." 왕일이 고개를 저었다. "유 분타주를 믿기야 하지만, 우리 얘기를 많이 들어서 좋을 것도 없을 것이오. 그냥 쉬시오." 유곰보는 피식 웃었다. "자리가 바늘방석인데 쉴 수나 있나. 젠장, 눈총 더 받기 싫으니 난 그만 가려네. 가긴 가네만……!" 그는 서문정을 보며 주저주저하더니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서문 장로님! 부탁이 있습니다. 이건 개방의 한 일원으로써, 아니 그냥 장로님과 저의 개인적인 친분� 생 각해서라도 꼭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서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게. 사정이 이리되어 자네에게 불리한 일을 했지만 나도 사람인데 고마운 정을 모르겠는가. 말� 게. 힘닿는 데까지 들어주지." "음…… 저기……!" 유곰보는 서문정의 말을 듣고도 한참동안 다시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본론을 꺼냈다. "이 친구 일을 돕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직접 나서진 말아주십시오. 장로님이 개입된 사실이 드러나면 우 리 개방이 몹시 곤란해지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이야기! 돕긴 돕되 나서진 말라니. 그건 돕지 말라는 소리 아닌가!" 정이봉이 유곰보의 말을 끊고 나섰다. 서문정도 곤란한 듯 인상을 썼다. "자네 말은 다 들어주고 싶지만…… 그건 좀…… 곤란하군. 제자의 일인데……!" "돕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에게 정체를 발각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단 이야깁니다." 그는 왕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사정이 그리 되었네." 그는 간략하게 당금 무림의 정세와 개방의 일을 말해주었다. 원래는 방내의 치부까지 드러내는 셈이라 천 하가 다 알고 있어도 자기 입으로는 꺼내기 싫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사태는 그만큼 절박했던 痼� 다. 그의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돌았다. 악산삼귀는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잠자코 있었고, 서문정은 왕 構� 유곰보의 눈치만 번갈아 보았다. 유곰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젠장! 늘그막에 오대 독자 얻은 것처럼 하는군! 제자가 그렇게 갖고 싶었으면 아무 거지새끼나 데려� 길 렀으면 될 것 아냐! 하필이면 골치 아픈 일을 달고 다니는 놈이냐!' 이때 왕일이 말했다. "낮에도 말씀드렸듯이 제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독을 쓰는 방법, 그리고 독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지금 沮� 처럼 제게 가르침만 주시면 되니 직접 나서실 필요도 없으실 것입니다." 유곰보가 반색을 했다. "그럼……?" "제가 배우지 못해 대의를 모르고, 출신이 비천해 협의도 모르지만, 또 제가 아무리 복수에 급급하다 巒� 십만인의 피를 흘리도록 하면서까지 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행히 피해갈 길이 있는 듯도 하니 사부님께선 약 속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그제야 서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곰보는 기꺼운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믿고 있겠습니다." 서문정에게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왕일에게 인사를 하려는 양 머뭇거리다가 고개만 까닥 했다 "행운을 비네!" 왕일도 굳이 그를 잡고싶지는 않은 모양 따라 일어났다. 배웅이라도 하려나 보다 하는데 품속에서 뭔� 를 꺼내어 내밀었다. "가신다니 말리지 않겠소만 이건 가져가시오." 왕일이 내민 것은 호박색 보석 하나, 묘안석이었다. "전에 약속한 거요" 유곰보는 비웃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이죽거렸다. "목숨을 건진 것도 고마운데 보물까지 받아서야 황송해서 살 수가 있나요. 그건 그냥 넣어 두시지요. 努� 한 거지는 그냥 주린 배를 안고 가렵니다." 말투는 여전히 비비 꼬여 있었지만 왕일을 쳐다보는 눈빛은 이미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는 왕일의 어� 를 한 번 툭 치고는 돌아서서 불빛 밖,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서걱거리는 풀잎 소리가 멀어지고, 자� 깬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왕일은 유곰보가 가버린 후에도 한참이 지나도록 멍하니 그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 사이에 호� 삼 강이 일어서려다 손부자의 손짓에 그냥 물러앉고, 정이봉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것마저 손부자의 눈짓� 되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한참 후, 왕일이 다시 불가에 앉자 손부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천하를 속이지 천하가 나를 속이게 하지는 않겠다'라는 말 들어본 적 있나?" 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부자가 다시 말했다. "우리가 강호를 돌아다닐 때 가장 두려워 한 것, 그래서 가장 조심한 것은 고수가 아니라 그것이었네. 逵� 자!" 왕일이 물었다. "제가 그를 놓아준 것이 옳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손부자는 고개를 저었다. "옳은 일일지는 모르지만 잘한 일은 아니었지." 정이봉이 끼여들었다. "그를 놓아줌으로써 우리는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네. 하나는 우리가 하고자 � 는 일이 천부채에 알려져서 그들이 미리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게 되는 것. 또 하나는 녹림과의 분쟁을 피 歐� 위해 개방이 직접 나서서 우리를 제거하려 하는 것일세. 어느 것이든 가능성뿐이지만 매우 위험한 일이지 " 왕일은 잠시 침묵하다가 힘없이 대답했다. "우리도, 그도 약속을 했는데도요?" "약속을 지킨다…… 쉽고도 어려운 일이지. 그러나 그를 제거하면 우린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걱� 하 지 않아도 되고, 서문…… 노사(老師)도 그와의 약속에 얽매이지 않게 되지." 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를 놓아준 것이 썩 잘한 일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손부자가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지만 약기운이 떨어지기에는 아직 조금 더 여유가 있네. 그리고 우리 막내는 � 이 가볍고 날랠 뿐 아니라 어둠 속에서 사람을 치는 데에도 능하지." "그러나……!" 왕일은 손을 모아 말을 끊은 것을 사과하며 굳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전 위험을 익히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수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지만 은혜 또한 버릴 수 없 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를 구해주고, 일을 도와준 사람을 차마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서문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부자와 정이봉은 마주보며 혀를 찼다. 정이봉이 말했다. "독하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고, 사소한 것에 매이면 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일세. 명백한 위협을 보면 �도 화근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리가 아니라 어리석음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야." 정이봉은 호연삼강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의 의사는 명백했고, 호연삼강은 바로 반응했다. 왕일도 瀏� 다. 그는 일어서는 호연삼강의 앞을 막고 서서 손부자에게 말했다. "저는 큰 것보다는 사소한 것을 먼저 생각하고, 위협을 보면서도 화근을 차마 제거할 생각을 못하니 졸 佯� 인 모양입니다. 그래도 하는 수 없겠지요.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복수는 해야지요. 누이가 끌려가 고생을 하고 있으니 구해내기도 해야겠지요. 그러나 은인을 죽이도록 놔두지도 못하겠습니다. 네, 제가 졸장부인 탓입 求�. 죄송합니다." 손부자는 무표정했다. 정이봉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서문정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일이 이렇게 되어 英� 한 듯했다. 여태까지 말이 없었던 호연삼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졸장부다." 정이봉이 눈살을 찡그렸다. 호연삼강이 말하는 것도 오랜만에 들을 뿐 아니라 그 오랜만에 한 말이 � 우 묘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호연삼강은 그 말에 보충해 대답했다. 왕일을 노려보고 있 어서 시선은 분명치 않았지만 명백히 그에게 하는 대답이었다. "저도 억울한 일은 참지 못하며, 은혜를 잊지 못하니 졸장부란 말씀입니다. 이 친구는 저와 동류의 사 汰� 니 이해가 가는군요." "하하하하하하-!" 손부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웃음을 터뜨려 어울릴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그의 웃음은 높고 맑게 � 리 며, 호탕한 기운이 배어 있어 듣는 사람의 기분을 유쾌하게 했다. 그는 손을 저어 불가를 가리켰다. "다들 앉으시게들! 앉아서 술이나 마시세. 서문노사께서도 앉으십시오. 제가 얘기 한 마디 하지요."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왕노제와 막내에게 가르침을 받으니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게 되었네. 예전에 사마천(司馬遷)이 유협 (遊俠)은 어떤 일이든 스스로 원하여 하는데 그 목적은 이기(利己)에 있지 않고 이타(利他)에 있다'고 杉鳴� 하더군. 또 '그들의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에는 반드시 과감성이 있으며 이미 허락한 것에 대� 서는 반드시 성의를 다한다. 그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의 곤경에 뛰어들며, 벌써 생사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어도 � 능 력이 있음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라고도 했지. 젊어서 처음 강호에 ぐЮ� 때는 이 두 마디 말을 신조처럼 외우고 다녔었네만…… 정말 말하긴 쉬워도 하기 어렵다는 말이 꼭 들어� 는 다는 것만 배웠네. 그래도 한 가지는 지켰지. 하고자 한 일은 꼭 했지. 그리고 어떤 위험이 보여도 하지 말아 야겠다고 생각하면 역시 하지 않았다네. 이게 악명을 산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나는 내 생애를 후회하지 않는다네. 나도 졸장부라 그런가보네." 정이봉, 호연삼강이 마주 웃었다. 동감한다는 표정이었다. 손부자가 무릎을 때려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왕 일을 보며 말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세. 내게 왔다 간지도 꽤 되었고, 이렇게 부른 것을 보면 자네에게 어떤 계획이 斂� 지?" 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긴 해도 계획이 있긴 합니다만, 손부자께서 다듬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조사한 것과 거기 따른 계획을 설명했다. 일행은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정이봉이 말했다. "대체로 자네 계획이 옳은 것 같군. 소수로 다수를 상대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겠지. 그러나 계략이라� 것 이 대개 그래서 아무리 심사숙고해서 짜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고, 또 그렇게 짠 계략이라고 해도 계략대� 다 되는 것도 아닐세. 진행해 가면서 하나하나 수정하고 보완하기로 하세." 손부자가 말했다. "난 그냥 좋아 보이는데…… 원래 계략 쪽은 우리 둘째가 뛰어나니 잘 모르겠군. 이제 뭐가 더 필요한 건 가?" 왕일은 서문정을 보았다. "처음엔 대부분 사부님의 몫입니다. 독이죠." 서문정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천천히 말했다. "독이야 내게도 있다만 네 계획에 들어맞는 독은 가지고 있지 않다. 만들 수도 있는데 몇 가지가 부� 해 서…… 암기 같은 것도 있어야겠고……. 좋아!" 그는 눈을 깜빡이며 왕일을 보았다. "사천으로 가야겠다!" 31. 당삼표(唐三彪)는 올해 서른이다. 사내가 서른 살쯤 먹으면 어깨는 무거워지고 돈 쓸 곳은 많은데 주머 求� 가볍게만 느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당삼표처럼 신분은 높은데 막상 돈 생기는 곳은 없고, 마누라는 못 逅� 데다가 강짜까지 심한데 숨겨 놓은 애첩은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귀여워 버리면 아주 곤란한 � 지 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사천성의 제2 도시 중경(重京)의 으슥한 골목을 걷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도성은 마차 여러 대가 나란히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큰길을 종횡으로 내고, 그 길 과 길 사이에 생긴 사각형의 공간을 지방의 리(里)나 갑(甲)처럼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분류하였으니 이것 � 방 (坊)이라 부르는 것은 이미 당나라 때부터였다. 이렇게 방과 방을 구획하는 큰길을 대로(大路)라고 부르� , 하 나의 방안에 난 작은 길을 소로(小路)라고 하며, 집과 집이 밀집한 사이로 뚫린 작은 골목을 호동(胡同)� 라고 했다. 성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스스로 어디 산다고 할 때 가장 작은 단위는 이 호동이 되는 셈이었다. 그 중에서도 춘망방(春望坊) 유화호동(柳花胡同)은 거기 사는 사람도 좀처럼 거기 산다고 말하지 않는 汰� 니, 바로 거기가 사창가이기 때문이었다. 당삼표. 사천당문의 제삼 공자(第三 公子)인 백면랑군(白面郞君) 당삼표가 여기 유화호동을 걷는다는 것, 그것� 일 년에 서너 번씩이나 걷는다는 것을 안다면 집안이 뒤집어 질 것이다. 다행히 그 자신을 빼고는 아무도 모 ０� 있었다. 그 자신도 삼 년 전 술좌석에서 그 누군가가 접근해 오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었다. 그 주점, 煞� 제일의 기루인 청향각(淸香閣)의 후원 구석진 문이 유화호동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도 그때 안 일이었다. 중경 최고의 번화가인 조양방(朝陽坊),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기루로 들어가면 중경 최악의 빈민가로 나 육� 되리라고 누군들 짐작할 수 있었을까. 골목은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고, 군데군데 땅이 패인 곳에는 더러운 물 이 고여 썩고 있었다. 밤은 깊고, 골목은 어두워서 자칫 잘못하면 더러운 물에 발목까지 빠질 지경이라 � 삼표 는 고개를 푹 숙여 땅만 보고 걸었다. 사실은 대낮이라 해도, 대낮에는 절대로 안 올 테지만, 그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을 것이다. 혹시 그를 틈� 누군가에게 얼굴을 드러내기라도 하면 집안이 뒤집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집안이 뒤집히는 건 문제 � 아 닐 수도 있지만 여차하면 그의 머리가 어깨와 분리되는 수가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지금 그가 하 졍� 일, 이미 여러 번 해 온 일을 그의 아버지이자, 현 사천당문의 가주인 천수태세(千手太歲) 당대방(唐大方 이 알 기만 하면……! 당삼표는 뒷덜미로부터 엉치 끝까지 차가운 손이 스치고 가는 듯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 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젠장!" 돈만 아니면. 아버지가 그에게 그렇게 인색하지만 않았으면 이럴 일이 없는 것이다. 전통 있는 명문 세가의 자식이 돈 나갈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버지가 조금만이라도 헤아려 주기만 했어도 이렇게 가문의 금기를 어기는 � 은 없었을 것이다. '이번이 정말 끝이다!' 그는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골백번은 더 되뇌어 온 헛다짐을 한 번 더 하고는 좁은 골목 중간, 바 위 갈라진 틈처럼 움푹 패인 곳에 좁고 낮게 나 있는 나무문을 밀고 들어갔다. 거의 허리를 절반이나 접고서 간신히 들어선 문안은 문보다는 약간 넓긴 했지만 허리를 완전히 펼 정� 도 아니었다. 그렇게 토굴처럼 생긴 통로로 일장이나 들어가서야 비로소 허리를 펴도 좋을 만큼 넓은 공간� 나 오는데, 거기까지 오는 동안 그 토굴 안에 몇 명의 눈빛이 번뜩였다는 것을 당삼표는 느끼고 있었다. 토� 벽 속에는 누군가가 매복하고 있어서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을 감시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 정도만큼은 � 는 고수가 그였으니까. 생활의 지혜라고나 할까? 아니, 생존의 지혜일 것이다. 제 아무리 고수라도 그 안에서는 꼼짝없이 당� 고 말았을 정도의 지형을 이 집주인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의 纜� 나타난 사람, 병들어 죽어 가는 듯이 누런 얼굴의 중늙은이는 아닐 것이다. 당삼표의 앞에는 여기 몇 번 犬� 들리면서도 유일하게 얼굴을 본 사람, 그 옛날 그에게 처음으로 이 일을 권했던 술좌석의 그 사람이 서 羚� 다. "오시지요!" 중늙은이, 오관사(吳管事)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사람은 한 마디로 족할 일에 두 마디를 한 적이 없었다 손 을 뒤로 휘저으며 손님을 반가이 영접하는 듯하지만 말에는 열기가 없었고, 태도는 형식적이었다. 당삼표는 아무 대꾸하지 않고 오관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오관사가 그 옆으로 따라 붙으며 손 을 내밀었다. 당삼표는 그 물건을 받아 얼굴에 뒤집어썼다.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또 하나� 규 칙, 복면을 쓰는 것이었다. 오관사와 함께 들어선 방에는 이미 두 사람이 복면을 쓰고 서 있었다. 오늘의 거래 상대자인 모양이었� . 탁자가 있고, 오관사는 그 탁자 옆에 서서 탁자 양쪽에 선 거래자들을 향해 말했다. "물건과 가격에 대해서는 저희가 보장을 하고 있으며, 중계료는 양쪽에 공히 일 할을 받습니다. 여기� 이 의가 있으신 쪽은 나가셔도 좋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요, 거래 할 때마다 항상 듣는 말이지만 또 항상 믿음이 가는 말이었다. 당삼표는 이 규칙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상대편도 그런 모양이었다. "올려놓으십시오!" 당삼표는 품속에 고이 간직했던 상자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상대편에서는 부피가 커서 그렇게 할 수 없었는지 한 사람이 허리를 숙여 발치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탁자 위로 올려놓고 있었다. "물건을 확인하십시오!" 오관사는 탁자에 올려진 두 개의 상자를 서로에게 밀어 주며 말했다. 당삼표는 상대가 가져온, 그래서 未� 가 받은 그 상자를 열었다. 굵은 초 두 개가 뿜어내는 불빛 아래에서 상자 안의 물건이 휘황한 광채를 발 杉�. 금원보(金圓寶)! 배 모양으로 생긴 열 냥짜리 금덩어리였다. 그 금원보가 상잔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다. 당삼표는 그 금빛의 위력, 황금이 주는 위압감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금 일천 냥이라는 것은 천 舅� 사천당문 삼공자에게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가 넘긴 물건의 가치에 충분히 상응하는 가치인 것이다. 갬�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것보다 열 배, 백 배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지만 누가 이렇게 돈으로 바꾸어 줄 痼� 가. "반구혈장(盤鳩血漿) 반 냥, 자오분심(子午焚心) 반 냥, 신선폐(神仙廢)와 군자산(君子散) 각 한 냥, � 혼사(斷 魂砂) 약간에 광간강사(光稈鋼梭)가 다섯 개. 그 금액으로 황금 일천 냥. 만족하십니까?" 오관사의 말에 당삼표는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대도 역시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럴 것이다 당 문의 팔대 극독 중에 네 가지, 팔대 암기 중에 두 가지의 가치가 황금 일천 냥이라면 헐값이나 다름없는 痼� 다. 만족해야 옳은 일이었다. "중계료를 받겠습니다." 당삼표는 얼른 금원보 열 개를 꺼내 탁자에 쌓았다. 그리곤 상대를 보았는데, 그 눈이 튀어나올 것처� 커 졌다. 상대편에서는 그가 받은 것과 같은 크기의 상자를 하나 더 꺼내어 그 안에서 중계료를 계산한 것� 다. 그렇다면 적어도 황금 구백 냥은 더 가지고 왔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오관사는 그 황금에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중계료로 황금 이백 냥을 챙긴 것에 만족한� 는 듯 거래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거래를 끝내겠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망� 않다면……!" 그는 양쪽을 번갈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시겠지요?" 어떤 위협보다도 그 미소가 더 두려워 보였다. 당삼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상대로 나온 두 泳� 중 키가 작은 쪽 사람이 손을 들었다. "이 거래에는 만족하고, 어디 가서 입을 벌릴만큼 한가하지도 않으니 마지막 당부 말씀도 필요 없는 것 結� 만, 저기 저분과 한 가지 거래를 더 하고 싶은데 어떻소?" 늙수그레한 목소리인 것으로 보아 노인인데, 여태 한 마디도 않다가 갑자기 한 말이 의외의 것이라 당� 표 는 놀랐다. 그보다 오관사가 더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놀라고, 또 한 편으로는 애당초 약속했던 거래 � 외의 일이 생긴 데에 분노한 듯 평정을 깨고 있는 대로 인상을 긁었다. "그건 본점(本店)과는 관계없는 일이니 따로 하시오!" 복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참이오만 저쪽 분은 의사가 있으신지?" 당삼표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종일 고개만 끄덕이니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지만 황 금이 더 생긴다는데 어쩔 것인가. "그럼 이만!" 들어올 때의 가식적이지만 그래도 정중했던 태도와는 달리 오관사는 그들 셋을 개 쫓듯이 몰아냈다. 이렇게 해서 강호 흑도의 가장 비밀스런 방파이며 상인이기도 한 흑점(黑店)에서의 거래가 끝나고 다음 거 래는 음침한 유화호동의 그늘 아래에서 계속되었다. "한 가지만 알려주면 이 상자는 공자의 것이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그늘 속에 선 상대를 피해 당삼표도 그늘 속으로 최 대한 몸을 숨기면서 되물었다. "황금 구백 냥 가치의 답변을 내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공자 말고는 그 대답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요." 당삼표를 띄워 주는 말 같았지만 실제로 노인이 한 질문은 그밖에는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사천당문� 서 도 단 열 사람만이 아는 일, 그리고 절실히 돈이 필요한 그만이 할 수 있는 대답, 한 사람의 거처였다. "교수천공(巧手天工) 사마장여(司馬藏黎)를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소?" 사마(司馬)라는 성을 가진 가문중에 이 가문만큼 재능이 있는 집안은 드물었다. 그리고 이 가문만큼 세 璨� 안 알려진 가문 또한 드물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라면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가� , 그 옛적 명공(名工) 노반(魯盤)이 다시 살아온다고 해도 이 가문의 후계자에게는 한 수 양보해야 할 명공의 」�, 교수천환사마가(巧手千幻司馬家)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당대 가주가 바로 사마장여였다. 그 손 끝에서 불가능한 일은 하늘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는 불경한 명성을 달고 다니는 자, 노인은 � 늘 이 내린 신의 손을 찾고있는 것이다. 당삼표는 물론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답을 말하는 것은 당문의 삼대 금기 중 하나를 정면� 로 범하는 일이었다. 대대로 당문의 암기, 그것도 가장 세밀하고 위험한 암기만을 전문으로 만들어온 가문이 바로 사마가였다. 그 가문이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은 당문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인데 ─�. 당삼표는 마른 침을 삼켜가며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그늘 속의 노인과 상자를 번갈아 � 다 보고 있었다. 저 돈이면 정말 이런 거래를 그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헛 다짐은 이번에는 진짜 다짐� 될 수 있는 것이다. 당삼표는 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황금 천 냥!" 그는 노인의 발치에 있는 상자를 끌어 당기며 계속 말했다. "황금 천 냥을 더 내놓으면 그에게 데려다 주겠소. 나와 함께가 아니면 귀신도 그를 볼 수 없을테니까. 32. 청해(靑海)에서 발원(發源)해 사천으로 흐르는 민강(岷江)과 감숙(甘肅)에서 발원해 검각(劍閣)을 통 墟求� 가릉강(嘉陵江)이 합류하는 곳이 중경, 강은 여기에서부터 양자강(楊子江)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중원 십 회만� 를 흐른다는 장강(長江)의 본류가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장강의 줄기를 따라 중경에서 백여 리쯤 아래로 내려가면 강이 크게 굽이쳐 이룬 만(灣)을 따라 당가� (唐 家寧)이라는 마을이 있고, 이 마을 외곽 이십여 리 떨어진 숲과 절벽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에 사천당문의 킴� 한 장원(莊園)이 자리잡고 있다. 독과 암기의 종가(宗家), 사천당문. 강호에 이 이름보다 더 껄끄러운 이름은 없다. 그들의 절기와, 그들의 내막은 독 안개에 가려진 것처� 알 려진 것이 없고, 알려지지 않은 만큼 더욱 신비해, 그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들의 손에 죽지 않는 가 � 좋 은 길이라는 것을 강호인들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독을 쓰려면 독을 조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암 기를 쓰려면 암기를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당문의 지하에는 거대한 비밀 彭� 이 있고, 독이면 독, 암기면 암기 하는 식으로 대대로 그것만을 만드는 장인들이 거기 갇혀 일을 하고 있 鳴� 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 그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장로급 이상 만이라고 했다.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당삼표는 사천당문을 멀리 바라보는 당가령의 어느 산 속으로 두 복면 �, 왕일과 서문정을 데리고 들어갔다. 새들도 넘기 힘들다는 촉도(蜀道)를 따라 연이어 하늘과 맞닿은 산, 그 산이 높은 만큼 더 깊은 계곡� 중 어느 한 곳 음침한 그늘 속에 덩굴로 가려진 동굴이 있고, 동굴 속에는 다시 몇 겹의 철문이 있어서 그 醍� 것을 통과하면 지하에 조성된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여기가 당문의 비밀 제조창이었다. 당삼표가 가는 곳은 그 중에서도 외떨어진 어느 석실이었다. 제조창 안에는 여러 사람이 살 것 같았지만 당삼표가 두 명의 복면인을 데리고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 이 지 않았다. 시간이 삼경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었고, 일부러 그럴 시간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 . 자기가 이곳 제조창을 관리하고 장인들을 감시하는 책임자이면서도 당삼표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였 �. 외부인을 데리고 들어온 것을 당문의 누구에게라도 들킨다면 그날 부로 그의 목숨은 끝일 것이었다. 이� 장 인들에게 갇혀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감시 인원을 최소한으로 하긴 했지만 장인들 스스로가 하 ぐ� 이 당문의 사람이었다. 일가의 누구도 모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지금 찾아가는 그 사람도 모르게 譴� 일을 끝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기름이라도 듬뿍 칠해 놓았는지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어둠침침하고 복 잡해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한 방이 그 문 뒤로 펼쳐졌다.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널려 있는 선반이 세 개� 벽 면 가득 만들어져 있고, 선반이 없는 유일한 벽면에는 돌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는 한 사람� 앉 아 이제 막 들어선 세 사람에게 등을 보인 채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방은 어둡고 음침했지만 탁자와 의자, 그리고 사람이 있는 곳만은 그렇지 않았다. 등롱의 한쪽을 터서 璣� 으로만 비출 수 있게 되어 있는 장명등(長明燈) 세 개가 탁자 위를 비추고 있었다. 무언가에 집중할 필요 � 있 는 사람이 그렇게 하듯이 불빛은 거기 앉은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 모여 있었다. 당삼표는 그를 따라온 두 사람의 복면인에게 턱으로 신호를 했다. 비교적 건장한 복면인이 탁자로 다� 가 거기 들고 온 상자를 올려놓았다. "주문!" 이번에는 비교적 왜소한 복면인이 당삼표의 지시에 따라 입을 열었다. "주문할 것은 세 가집니다. 첫째, 천천히 녹는 껍질. 둘째, 시간이 되면 스스로 터지는 장치. 셋째, 여기 이……!" 그는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광간강사 다섯 개를 오십 개로 자르고, 그걸 한 번에 하나씩 발사할 수 있는 통� 넣 어 주는 겁니다." 의자가 움직이고, 그때까지 등만 보이고 있던 사람이 천천히 뒤로 돌아 앉았다. 홀쭉한 뺨에 매부리코 얄 상하게 빨린 턱에는 염소수염 몇 가닥이 달려 있는 노인, 눈이 있는 자리에는 둥근 유리 조각 두 개가 번 습� 고 있었다. 노인은 지금 시대에 보기 드물게도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코끝까지 흘러 내려온 안경을 새끼손가락 하나로 끌어올리면서 그 투명한 유리알 건너로 세 사� 의 방문자들을 훑어보았다. 생김새처럼 날카로운 안광이 순식간에 세 사람, 특히 당삼표의 표정을 샅샅이 훑 � 지 나갔다. 당삼표의 이마로 땀방울이 흘렀다. 노인은 입술을 삐죽이며 무언가 말하려 하더니 입술 꼬리를 일그러뜨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나야 네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될 테니까." 그는 다시 돌아앉았다. 당삼표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언제까지 되겠습니까, 사마봉공(司馬奉公)!" "사흘!" 사마봉공, 사마씨 성을 가진 봉공, 그가 바로 교수천공 사마장여였다. 사마장여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내가 지금 말하는 재료가 완비된 날로부터 사흘!" "뭐가 필요하십니까?" "가재 백 마리, 밀랍 열 근, 식초와 백반! 유황은 여기 어디 있고……, 됐다. 나가 봐!" 당삼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술을 깨물고는 최대한 담담하게, 복면인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 둘은 물건이 다 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렸다가 봉공께 물건을 받아서 오도록! 이 방에서 반경 오� 밖 으로 벗어나면 너희 둘 다 목을 따 버릴 테니 알아서 해!" 그는 다시 사마장여를 향해 말했다. "이 두 사람을 여기 대기시켜도 되겠지요?"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더 흘러내렸다. 마치 사마장여가 거절하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절실한 표� 인 데, 사마장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당삼표는 큰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시 幣� 표정이 되어 얼른 문을 나섰다. 시간은 길고 지루하게 흘러갔다. 시간의 진행을 짐작할 만한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는 밀폐된 방안이라 더 욱 그러했다. 사마장여는 무엇인가에 열중한 채로 손만 움직일 뿐 돌아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고, 두 � 면인 또한 석상이라도 된 듯 방 한 쪽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건장한 복면인, 왕일은 눈만 움직여서 방안을 둘러보다가, 선반에 놓인 물건들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 嗤� 도대체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물건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머리를 조금씩 움직여 사마장여가 하는 � 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팔목에 대는 가죽으로 만든 토시, 이것이 일상 생활에서 쓰일 때는 투수(套手)라고 하고 갑옷의 일부� 쓰 일 때는 비구(臂 )라고 하는데 지금 사마장여가 만지는 것이 그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그런데 가죽으로 � 들 어진 것은 아닌지 겉면의 일부가 열려 있고 그 안에는 용수철 등속의 기계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潁� 장여는 뾰족한 침같이 생긴 도구로 그 기계들을 조절하고 조이고, 혹은 톱니바퀴들을 새로 올려놓고 있었 �. 아무리 신기한 구경도 오래 하면 시들한 것, 왕일은 한참 동안 사마장여의 작업을 지켜보다가 슬슬 지� 해 져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때 사마장여가 입을 열었다. "어디에 필요한 물건들이야?" 서문정과 왕일은 서로 쳐다보았다. 잠시 망설인 뒤 서문정이 되물었다. "꼭 그걸 아셔야 하오?" "가지기 싫다면 말 안해도 되지." 왕일이 대답했다. "천천히 녹는 껍질은 독을 안에 넣기 위해 필요한 겁니다. 예를 들면…… 샘물, 우물, 혹은 시내에도 � 어갈 수 있지요. 되도록 긴 시간 동안 독이 퍼지도록 만들기 위해섭니다." "우물에는 한 번 독을 풀면 그만이니까 샘물에 넣으려는 거겠지. 항상 새물이 솟아 나와도 계속 오염된 상 태로 만들 작정이군. 그건 양피수통으로도 가능해. 양가죽으로 만든 물통은 조금씩이지만 항상 속의 것을 새어 나오도록 하고 있지. 독의 종류에 따라 물통 안에 이중의 막을 두르면 오랫동안 녹지 않게 하는 것도 가 �하 지. 예를 들면 가재의 껍질을 갈고 끓인 다음에 물통 안에 바르면 돼. 좋아, 다음은?" "시한장치는……." "관렬(管列)! 관렬이 제대로 된 이름이야." 왕일은 사마장여의 호통에 얼른 말을 고쳤다. "관렬은 독탄을 만들기 위한 겁니다. 불을 일으키는 화약과 불에 타서 연기를 일으키는 독을 같이 넣� 서 땅에 매설하면……!" "나중에 사람이 있을 때 독을 뿜어낸다 이거군. 그것도 간단하지. 역청에 유황, 마(麻)와 유향(乳香), 琉�고 소나무 톱밥을 섞으면 소이탄(燒夷彈)을 만들 수 있지. 활석과 용수철을 사용하면 거기 불을 당길 수 있� , 금 이나 은, 백반을 채워 용수철을 누르고, 거기 초와 같이 강한 약물을 넣으면 금은이 녹아서 용수철을 작� 시키 지. 그게 관렬이야. 통처럼 만들 수도 있고. 그 다음은?" 마지막은 서문정이 대답했다. "그냥 암기 하나를 만들어 달라는 거요. 광간강사를 이용해서." 사(梭)는 베틀의 북을 의미하지만 암기로 사용되면 손톱만큼 작은 도끼, 혹은 대충 그렇게 생긴 쇠붙� 를 모두 지칭하게 된다. 당문에서는 그 사를 일종의 특수한 암석에다가 약물 처리 한 것으로 만들어서 목표 걀� 부딪치는 순간 화염으로 변하게 되는 암기, 광간강사를 만들었다. 이것을 사용한 암기를 만들어 달라는 � 이었 다. 사마장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에 장인이 많아도 광간강사를 다룰 사람은 나밖에 없지. 좋아 해주지. 단, 너희들이 누군지 말� 주 면." 그러면서 그는 의자를 돌려 서문정과 왕일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음충궂은 미소가 흐� 고 있었고, 손에는 방금 만지던 토시가 들려 있었다. 그들의 가슴을 겨냥하고. 당문의 물건은 위험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마장여의 손에 들려 있으면 더욱 그러했다. 서문정은 이 의외의 사태에 놀라 잠시 말도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벌려 더듬거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가 누구냐니?" 사마장여는 파리를 쫓듯이 손을 휘저었다. "말할건지 여기서 죽을 건지나 결정해! 저 멍청한 당삼표가 왜 자기 무덤을 팠는지 모르겠지만 난 어리 �지 않아. 너희 둘이 당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내가 바보로 보였나?" 왕일이 말했다. "우리가 당문의 사람이 아닌걸 어떻게 알았는지나 말해 줄 수 있겠소?" "간단하지!" 사마장여는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당문의 멍청이들은 예로부터 내려온 자기 것들만 알지 응용이란 걸 모르거든. 너희들이 주문한 것은 � 문 사람들이라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 왕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서문정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저는 산동성 창주 사람 왕일입니다. 이분은 제 사부님이시고……!" 33. "비밀통로라……!" 왕일로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사마장여는 특히 그 부분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 비밀통로에 대해 좀 더 말해 주겠나?" 왕일은 대답했고, 사마장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었군! 그것이었어! 당삼표 저 바보 같은 놈이 그걸 마누라 모르게 밖으로 빠져나가는 데에 썼단 말 이지." 그는 한참이나 탄식하다가 문득 왕일을 보며 물었다. "그 통로가 어떤 건지 아나? 누가 팠는지, 거기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뿌려졌는지……!"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왕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마장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 답 을 말해 주었다. "내가 젊었을 때 판 거야. 내 아버님, 그 아버님의 아버님 때부터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파서 내 대� 드 디어 완성시켰던 것이지.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마가가 대를 이어 파 왔던 통로였네." 사마가와 당문에 얽힌 긴 이야기가 그 뒤를 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정교한 암기를 만들 수 있는 가문과 그 암기를 사용하는 가문의 관계, 몇 대를 거치도록 밀 폐된 공간에 갇혀 가둔 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가문의 역사였다. "처음엔 그냥 고용된 관계였지. 대우도 좋았고……. 하지만 쓸 기회가 없는 돈이 아무리 많은들 무엇� 겠 나? 그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여기서만 살아야 하는 인생은?" 그래서 굴을 팠고, 사마장여의 때에 완성되었고, 당문의 그늘 속에 묻혀 있던 사마가의 이름이 드러� 다. 사마장여가 교수천공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그 때, 강호에 도망 나와 살던 삼 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 . "그리곤 바로 끌려왔지." 사마장여는 말을 멈추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 을 왕일은 동그란 안경 가장자리로 흐르는 물방울을 보며 알아차렸다. 왕일이라고 해도 그랬을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하고 어떻게 울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분노가 치미는데. "잔혹한 일이지……!" 서문정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름난 명문가, 명문대파의 그늘 속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많아. 명문대파라는 것이 다 그런 이야기들을 밟고 선 것들이지. 수많은 시체와 희생물들 위에 선 똥무더기 같은 것들이……!" 사마장여가 그를 보며 물었다. "당신도 그들이 싫소?" "난 개방의 장로였소. 지금은 아니지만. 한낱 뱀이나 만지고 거미나 키우는 거지를 그들이 왜 장로까� 시 켜 주었을까? 독이 필요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오. 남에게 알려지면 안되는 일로 쓸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 " 사마장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왕일이 말했다. "우리가 당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으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저희가 주문한 것을 만� 어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만들어 주지." 사마장여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이 당문의 사람이 아니니까……." 주문한 것이 완성되기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그 동안 왕일과 서문정은 사마장여의 공방 구석에서 기다려야 했다. 지루하고 답답한 나날이었지만 불� 할 처지가 아니었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목적을 이루고 떠나려 할 때, 이 고역은 충분히 � 상되 었다. 사마장여는 왕일을 마음에 들어 해서 주문한 것 외에도 선물 두 개를 더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당문에서도 극비로 취급하는 암기의 하나일세. 검저유혼(劍低遊魂)이라고 하지." 사마장여가 보여준 것은 가늘고 얇은 철판에 불과했다. 어떻게 봐도 특이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물건� 었 지만 이것이 칼 손잡이에 장치되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사마장여는 왕일이 애용하는 만도(蠻刀)의 손잡이를 떼어 내고 거기 검저유혼을 장치하면서 용법을 설� 해 주었다. "사용법은 아주 간단하네. 칼을 휘두르거나 찌르면서 여기 이 돌기를 누르면 돼. 그러면 손잡이에서 미 션� 침이 튀어 나가지. 염왕소(閻王笑)라는 이름의 이 침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데다가 몸속에 들어가면 � 녹 는다네. 발려진 독도 아주 대단한 거라서 맞자마자 효과가 발휘되어 순간적으로 사람을 마비시키는 데다� 나 중에 중독된 증상도 보이지 않지. 근본적으로는 독이 아니니까. 남들 눈에는 칼에 찔려 죽는 것으로밖에� 보 이지 않을 거야." 서문정이 혀를 내둘렀다. 암기가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나도 독을 쓰지만 이렇게 비겁한 암기는 처음 보는군!" "비겁하니까 더 효과적인 것이오. 당문이 달리 이 암기를 비밀로 하고 있겠소? 다 이유가 있으니 그런 탕� 요." 서문정이 비난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일단 살고 봐야 하니까 이런걸 쓴다고 비난할 마음은 없지만……, 당문의 누가 무공으로 누굴 이겼다 瀏� 면 절대 믿으면 안 되겠어!" "하여튼 두 번째는……!" 두 번째 선물은 처음 왕일이 보았을 때 만지고 있던 물건, 나중에 그들을 위협했던 정체불명의 암기, 鵝� 였다. "심심해서 만든 것이네만 제법 쓸모가 있을 걸세. 철비갑(鐵臂甲)이라고 이름 붙였네." 철비갑은 손목 바로 위에서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팔뚝 전체를 감싸게 되어 있는 토시였다. 안에는 가� 을 대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강철로 만들어진 팔뚝 보호대. 사마장여는 거기에다가 교수천공의 솜씨를 쏟아 � 은 모양이었다. 할 줄 아는 것도, 취미도 그런 물건 만드는 것밖에 없는 사마장여가 반쯤 재미로, 반쯤은 갑자기 떠오� 영 감을 발휘하여 만들고, 버리고, 부수고 하던 많은 것들 중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철비갑, 누군가에 � 넘 겨주는 것도 이것뿐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해도 사실 적지 않은 자부심을 은근히 드러내며 사용법� 설 명해 주는 것이다. "누가 무얼 던지거나 후려치거나 하면 어떻게 하나? 무공을 배운 사람은 다른지 몰라도 대개는 일단 � 이 먼저 올라가지? 칼이 날아오는데도 우선 팔뚝으로 막으려 든단 말일세. 만약 팔뚝이 강철로 되어 있다면 錚� 까? 편하지 않을까?" 예전에 그가 강호에 나갔을 때 결투를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엔 칼과 검으로 싸우더니 한쪽이 무공이 딸리는지 무기를 떨어뜨리고 주저앉아 버렸다. 상대가 그 목 숨을 끊어주려고 칼로 내리치자 주저앉아 있던 자가 팔뚝으로 그 칼을 막았다. 그리곤 땅바닥에 떨어져 獵� 검을 들어 상대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물론 팔뚝은 잘려 나갔지. 그러나 그는 그 대가로 상대의 목숨을 취한 거야. 나는 생각했지." 서문정이 끼여들었다. "팔뚝이 강철이면 팔뚝도 무사하고 상대의 목숨도 취할 수 있다고?" "물론이오. 왜? 나완 다르게 생각하시오?" "아니, 아니오!" 서문정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지만 그 입가에는 미소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사마장여는 비웃� 의 찌꺼기로 받아들인 모양 얼굴을 붉혔다. "비웃는 거요?" 서문정은 다시 손을 휘저었다. "아이, 절대 아니오. 난 단지……, 단지 천하의 교수천공 사마장여가 만든 물건이 의외로 단순하다 싶 底� 그럴 뿐이오. 말씀하신 대로 팔뚝에 강력한 보호대가 있다면 적지 않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잘만 활용 玖� 대단히 독특한 무공이 나올 수도 있을 거요. 저기 산동 벽괘문(劈掛門)에서는 팔과 손을 쭉 펼쳐서 마치 疋� 이처럼 사용하는 수법으로 유명한데, 반드시 먼저 팔과 손을 강철처럼 단련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런 痼� 두르면 그럴 필요가 없으니 좋겠지요." 궁색한 변명을 하느라 이리저리 끌어다 대는 서문정과는 별개로 왕일은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다가 문 � 물었다. "왜 제게 이런 호의를 베푸십니까?" "물론 이 철비갑에는 다른 묘용도 얼마든지 있소. 칼날도 감춰져 있고, 독침도…… 뭐? 뭘 물었나?" "저는 이 보물에 적지 않게 감탄하고 있습니다. 제 일에 크게 도움이 되겠지요. 힘은 모자라고 할 일� 벅 차니 어떤 도움도 사양할 처지가 아닙니다만 보물을 받고 모른 척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요. 무언가 ┛� 도울 일이라도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사마장여는 더 이상 서문정을 상대로 열을 내지 않았다. 그는 왕일을 진지하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말하면 해줄 텐가?" 왕일은 고개를 저었다. "능력이 되는 범위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해 드려야 도리겠지요……만, 말씀 드린대로 제겐 일이 있으� 그 일이 최우선이 됩니다. 제 일을 마치고난 후에 하겠다고 하면 너무 뻔뻔스런 일이겠지요? 하지만 지금으 關� 는 그런 말밖에 드릴 수가 없군요." "우선 내 일부터 해 달라고 하면? 가령 지금 당장 날 데리고 나가 달라고 하면?" 왕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 보물들을 사양하는 수밖에 없군요. 지금 도저히 그럴 수 없으니까요." 흐흐흐흐-! 사마장여는 웃음을 흘렸다. "관두게.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까. 내가 한 번 준 물건을 다시 뺏을 사람으로 보이나? 내가 楣� 에게 물건을 준건 일단 자네에겐 이 물건이 필요해 보여서고, 나는 당문에 넘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물 론……!" 그는 심호흡을 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부탁은 있네. 그러나 이건 될 것을 바라고 하는 부탁은 아니야.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아 본다는 �정 일 뿐일세. 언젠가, 만에 하나라도 언젠가 자네에게 여유가 생기면 그 때에……!" "여기서 구해 드릴까요?" "아닐세!" 사마장여의 부탁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내가 강호에 나갔을 때 여자를 하나 알았지. 하북 청도현(靑陶縣)에 사는 심씨(沈氏)라는 여인 琯�, 그녀에게서 아들까지 하나 봤다네. 이젠 마흔이 넘었겠지만……. 이름을 사마도현(司馬導賢)이라고 지� 는데 당문에서 데리고 있을 거야. 그 아이를 찾아 주게." "당문에 있단 말씀입니까?" "아니! 감시는 할지 몰라도 절대로 당문에서 잡아 두지는 못하게 했네. 그냥 강호에서 자유롭게 살아가 돈� 내버려두게 약속을 받았지. 자네가 할 일은 그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걸세." 사마장여가 죽지도 못하고 당문의 뜻에 따르고 있는 것이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던 것이다. 자식� 큼 은 자기처럼 살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였다. 왕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노애령에 비가 내렸다. 가을의 끝자락에 선 산야에 때늦은 비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파멸은 이 비� 함 께 시작되었다. 산이 무너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빗속에 엎드려 있던 천부채의 거포(경비병)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아름드리 고목이 중동에서부터 천� 히 부러져 나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그때부터였다. 부러져 나간 고목의 구멍 안에서 뱀들이 기어 나오고 羚� 던 것이다. 34. 종두기(鍾斗己)도 한 때는 강호 만리를 철새처럼 떠도는 자유로운 몸이었다.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구 戀� 며 다니다가 노자가 떨어지면 길바닥에 자리 깔고 앉아 허풍을 떨어 엉터리 약이나 몇 봉 팔면 또 다른 � 으 로 떠나곤 하는 돌팔이 의원, 소위 강호낭중(江湖郎中)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노애령을 지나가게 되고, 재수 없게도 도적을 만나 가진 것 모두 빼앗기고 산채에 끌려와 천� 채 전속의 의원이 되어 버렸다.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대충 치료하다가 안 되면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도� 한 둘의 목숨이야 누가 소중히 하랴. 그보다는 두목급들의 정력제 만들어 주기가 더 큰일이었는데, 오히려 戮� 장점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제법 가치를 인정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별 차이가 없는 하루였다.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챙겨 두었던 술을 안주도 없이 홀� 이 고 있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몇 명이 들어왔다. 비에 흠뻑 젖은 쥐새끼 같은 세 졸개였다. 이 정도면 陋� 대충 다루어도 좋을 인물이다. "뭐야?" "뱀에 물렸는데요." "무슨 뱀인데?" "모르겠는데요." 종두기는 귀찮은 듯 자세를 바꿔 그들의 상처를 보았다. 작은 이빨 자국 두 개씩이 졸개들의 종아리, 蔘� 등지에 나 있었다. "독은 빨아냈어?" "예." "그럼 더 할 일이 없잖아! 약 줄 테니까 가서 바르고 자빠져 쉬어!" 뱀에 물린다고 금방 죽는 것은 아니다. 아니, 물려서 죽기까지 하는 경우조차도 좀처럼 없다. 뱀의 종 廈� 따라서 증상이야 조금씩 다르지만 건장한 사내들은 대체로 오한과 발열로 이삼일 고생하다가 툭툭 털고 � 어 나는 것이 일반적인 중독 증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상처에서 눈을 떼며 종두기는 물었다. "아프진 않나?" "예. 아무데도 아픈 덴 없는데요……!" 말을 하던 졸개는 튀어나올 듯이 눈이 커진 종두기를 보고 오히려 놀라 버렸다. "왜, 왜 그러십니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예. 정말 아무렇지도……!" 말을 하는 졸개의 코와 입에서는 선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병서생(病書生) 마낙기(馬洛機)도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하고, 집에는 면목이 없어 들어가지도 못하는 데 鳴� 어차피 마누라는 예쁘지도 않은 것이 강짜만 심했던 터라 아예 잘됐다 하고 돌아다니다가 천부채에 잡혀 온 사람이었다. 애초에는 녹림 졸개 중에 숫자를 제대로 세는 자도 변변히 없어서 돈 계산이나 시키려고 데리고 있던 � 인 데 제법 식견이 있음이 밝혀져서 나중에는 이것저것 참견 안 하는 일이 없는 군사(軍師)처럼 쓰이게 되� 다. 그래서 오늘도 중독된 졸개들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달려갔던 것이다. 그는 환자들이 있다는 오막에 한 발을 딛자마자 그대로 되돌아서 나왔다. 바닥에 잠시 오물을 토해 � 고 그는 직속상관 격인 부채주(副寨主) 염왕수(閻王手) 양백(楊柏)을 데리러 뛰어갔다. 그의 선에서 처리할 일이 아니었다. 양백은 대낮부터 벌거벗고 계집과 뒹굴다가 마낙기의 방문을 받고 투덜거리며 나왔다. "나무에서 뱀이 기어 나왔다고? 그게 어쨌다는 거야. 나무 구멍 안에 뱀이 산다는 건 당연한 일 아냐?"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벼락을 맞을 정도로 거대한 고목이면 큰 구멍이 있을 테고, 그 안에 큰 뱀이 없으면 그게 오히려 이� 한 일 아냐?" "그렇죠. 그렇긴 한데……!" "부주의하게 방금 벼락이 떨어진 장소로 기어간 놈들이 멍청한 것이지. 뱀에 물려도 싼 놈들이야. 벼� 에 안 맞은 게 다행 아냐?"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만……!" "자넨 말을 애매하게 하는 게 큰 단점이야. 할 말이 있으면 똑 부러지게 할 것이지 왜 그렇게 어물거� 다 말아? 이상한 게 있으면 말해!" 마낙기가 애매하게 말을 돌리는 것이 단점이라면 그렇게 말한 양백은 말을 너무 똑 부러지게 하는 것이 단 점이었다. 안 그래도 흉악한 얼굴에 왕부리 눈을 뜨고 따지듯 말하면 두려워서라도 할 말을 못하고 마는 痼� 다. '세상일이 그렇게 똑똑 부러지나, 젠장!' 속으로야 온갖 욕을 해도 상대는 상관, 그것도 천부채의 내부 일을 맡아 하는 총관 격의 인물이고 자� 은 서기에 불과했다. 마낙기는 얌전하게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뱀에 물린 거포들이 중독현상을 보여서요." "뱀에 물리면 중독 되는 게 당연하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게 저…… 처음 보는 증상이라서……!" 마낙기의 대답이 아무래도 흡족하지 않았던 모양, 양백은 소위 중독된 환자들이 있다는 오막의 문을 � 어 차 열고 들어갔다. 그리곤 얼어붙은 듯 멈춰 버렸다.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 오막의 안은 온통 피 범벅이었다. 뱀에 물렸다는 졸개는 세 명이었다. 그 세 명이 지금 피를 담은 주머니들처럼 일곱 구멍으로 피를 쏟아 내 고 있었다. 그들이 누운 나무 침상 위를 적시고도 남은 피는 이제 바닥까지 피바다로 만들고 있는데, 의� 이라 는 종두기는 손댈 도리가 없는지 한 구석에 오도카니 서서 손만 비비고 있었다. 강호에서 제법 굴러먹었다고 자부하는 양백도 이렇게 많은 피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 대 로 굳어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욕설을 뱉었다. "이게 뭐야, 젠장!" "중독 현상입니다." 양백은 종두기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누가 그걸 몰라? 무슨 뱀에 물리면 이렇게 되냔 말이다!" "음……, 그게……!" 평생 사기만 치며 살아온 종두기는 모른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입만 벌리면 본능적으로 거짓말이 � 아 져 나오는 것이다. "년전에 이인을 만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요. 일곱 색깔 요란한 몸뚱이에 닭의 벼슬 같은 붉은 점이 疸� 에 찍힌 뱀, 칠채홍련사(七彩紅蓮蛇)에 물리면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죽는다는 얘기를……!" 그는 말을 애매하게 흐리며 시선은 마낙기를 향했다. 양백의 뒤에서 마낙기가 열심히 고개를 젓고 있는 것 이다. '뭐가 잘못 됐나?' 종두기는 얼른 말을 돌렸다.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뱀으로 칠점화린사(七點火燐蛇)가……!" 마낙기는 더욱 크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종두기는 속으로 욕을 했지만 마낙기가 저럴 땐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또 칠점미백사(七點微白蛇)나 오색두견사(五色杜鵑蛇)도 같은 꼴로 사람을 죽게 합니다만……!" 마낙기는 이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종두기는 손을 들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었다. 짧은 시 ？� 네 개나 이름을 지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직접 보지 않고는 확정적으로 말씀드리진 못하겠군요." "얘들은 어떻게 되나?" 그것에 대해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곧 죽을 겁니다." 너무 힘차게 대접한 것이 찔려서 종두기는 최대한 목소리에 힘을 빼고 덧붙였다. "안됐지만." "하는 수 없지!" 양백은 고개를 설레설레 지으며, 손은 코를 움켜쥐고 나가 버렸다. "채주께 보고하도록!" 멀리 사라지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종두기는 물었다. "왜 그 이름이 안 된다는 건가?" 마낙기는 피식 웃었다. "칠채홍련사와 칠점화린사는 진짜로 있는 이름일세. 단지 묘강에만!" 종두기는 멍하니 섰다가 따라 웃었다. "젠장 어쩐지 귀에 익더라니……. 어디서 줏어들은 이름이었군. 아는 사람이 들었으면 큰 일 날뻔 했네 하 필 묘강에 있는 뱀 이름을 댈게 뭐람." 그는 피를 다 쏟아 낸 주머니처럼 된 졸개들을 힐끗 보며 다시 투덜거렸다. "비 구경하면서 한 잔 마시기에 딱 좋은 날에 이 꼴이 뭐람. 시체는 또 누가 치워, 젠장! 재수 더럽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졸개들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이미 시체로 비춰진 것이다. 그러나 종두기는 다음날 더욱 재수 없는 꼴을 당해야 했다. 비가 그치고, 하늘에는 산새들이 우짖으며 날아가는 늦가을의 아침. 늦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던 종두기는 갑자기 인상을 쓰며 코를 틀어막았다. "이게 웬 냄새야?" 어제 맡은 피비린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냄새. 종두기는 오만상을 쓰며 문을 열었다. "어디서 똥 푸나?" 똥냄새라는 것은 그가 맞췄다. 그러나 똥을 푸는 것은 아니었다. 똥은 그의 면전에 다가와 있었다. 도대체 다 큰 어른이 바지에 똥을 싸는 일이란 어떤 때 가능한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종두기에게 온 것이다. 종두기는 그의 앞에 서서 심오막측한 표정으로 몸을 비비꼬고 있는 졸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가 측간이냐? 여기! 내 방문 앞이!" "아닙니다." "그럼 왜 여기다가 똥을 퍼질러 싸고 있나?" "그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졸개의 표정이 더욱 심오해졌다. 그의 뱃속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가 종두기의 귀까지 때릴 정도였� . "바지나 까고 싸! 이것아!" 졸개는 진짜로 바지를 까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불순물은 배출되어 버렸다. 더욱 고약한 냄새가 공기를 오염시켰지만 종두기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멋있어 보이려고 억지로 지� 을 때도 이렇게 심각한 표정은 쉽게 나오지 않던 그였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군!' 그는 물었다. "몇이나 너 같은 증상을 보이느냐?" "오늘 같이 밥 먹은 사람이 모두……!" 종두기의 안색이 확 변했다. "독이다!" "독이라고?" 양백의 안색도 물론 변했다. 천부채의 거의 모든 식솔들이 배탈과 설사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태의 심각성이 아니더라도 천부채의 � 기 를 감싸고 있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라도 안색이 변해야 했다. 더구나 저기 채주인 박산조 이응도 배를 움켜쥐고 오고 있지 않은가. "원인은?" 양백은 부동자세가 되었다. "조사중입니다!" 이응은 사태 파악이 빨랐다. "음식에 독이 있었나?" 아침에 먹었다는 음식 찌꺼기를 하나하나 은침으로 찔러보고 있던 종두기가 그 말에 대답했다. "모든 음식에 독이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떤 방식으로 이 모든 음식에 독을 넣었을까요?" 대답은 주방에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아침으로 나온 모든 음식에 들어간 물을 푼 물통, 더 거슬러 가� 산 채의 중심에 있는 깊은 우물에 있었다. 그 깊고 차가운 우물에 전에 없던 것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두� 비였 다. 35. 두꺼비라는 것이 원래부터가 그다지 호감을 주는 생김새가 아니지만,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두꺼비는 정 말 친해지기 어려운 생김새의 놈이었다. 부스럼이라도 난 것처럼 우둘투둘한 피부에 빨갛고 노란 가시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다. � 어 나온 눈과 반쯤 덮인 눈까풀은 개구리와 같지만 개구리의 그것이 맑은데 반해 이놈의 눈은 진물에라도 � 여 있는 것처럼 흐렸다. 찢어진 입가에 흐르는 혼탁한 액체는 누가 봐도 몸에 좋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 . 이런 놈이 우물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응은 깊은 우물 속에서 건져져 나온 그 두꺼비를 보고 입을 가리며 한참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저런 놈이 헤엄친 물을 마셨단 말이지." 종두기가 얼른 아는 체를 했다. "음식도 모두 이 물로 했으니 물을 직접 마시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이응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보다가 양백을 향해 손짓했다. "목을 따 버려!" 종두기는 파랗게 질려서 목을 감싸쥐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입을 잘못 놀렸다고 죽이시기까지……!" "누가 널 죽이라고 했나! 요리한 놈을 죽이란 말이다!" '이 깊은 우물 속에 두꺼비가 사는지 용이 사는지 어떻게 알고 물을 펐다고 죄없는 요리사를 죽이나.' 마낙기는 고개를 숙이고 요리사의 원망을 대신 해주었지만 입 한 번 뻥긋거릴 수가 없었다. 한나절이나 설사를 하느라고 얼굴이 노랗게 뜬 졸개 둘이 씩씩거리며 달려가더니 잠시 후 비명소리가 � 졌 다. 다들 화가 나 있었던 탓인지 나서서 변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요리사의 목은 곧 장대에 높이 걸려 버렸 다. 이응의 입에서 이상한 단어 하나가 튀어나왔다. "왕눈이!" 다들 어리둥절해서 서 있는데 양백의 얼굴이 썩은 간처럼 시꺼멓게 변했다. "왕눈이!" 이응이 고함을 질렀다. 목청 가득 짜증이 배어 있었다. 양백이 주저주저하며 대답했다. "예, 형님!" 왕눈이는 과거 그들이 말단 졸개로 구를 때부터 불리던 양백의 별명이었다. 지금은 염왕수라는 멋진 � 호 가 있지만 과거를 들춰보면 결국 도적 왕눈이가 나오는 것이다. 염왕수를 한 순간에 왕눈이로 만들어놓고 이응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검게 변한 양백의 얼굴이 그 � 가 락으로 다가갔다. "이익!" 이응은 양백의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 독수리의 발톱처럼 거칠고 긴 손가락이 양백의 그리 적지 않은 머 리를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겨우 보이는 눈이 유난히 커 보였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만들어 놓고 이응은 이빨 사이로 흉악한 말을 뱉어 내었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일어나면 눈알을 빼서 까마귀에게 던져 주겠다!" 양백은 풀려났고 이응은 가 버렸다. 하초(下焦)에 힘이 없는지 비실거리는 걸음걸이였지만 아무도 그� 을 보고 웃지 않았다. 그들의 옆에는 또 다른 분노의 화신이 남아 있었다. 도적 왕눈이, 양백이었다. 아무도 그와 눈을 마주치려 들지 않는 긴 시간이 지나갔다. 양백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어 가슴속에서 타 오르던 열기를 뿜어내었다. 그 열기의 끝으로 이상한 단어가 묻어 나왔다. "까마귀 자식이!"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종두기와 마낙기를 노려보았다. 둘 다 얼어붙어서 서 있었다. "약 풀고, 대책 세워!" 양백 마저 가 버리고 난 뒤에도 한참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양백이 가 버� 다 는 것, 여기에서 어떤 소리가 나도 못 들을 것이라는 것이 확실해 지자 두 사람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자네 이거 아나?" 웃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종두기가 물었다. 물론 마낙기는 모른다. "뭘?" "사천왕(四天王)이 말야, 흐흐흐. 온갖 잘난 체는 다 하는 사천왕이 사실 다 저런 별명이 있다네." 사천왕은 천부채의 실질적인 고수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채주인 이응의 의형제들이기도 한 그들이 � 금 천부채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양백이 그중 하나. "염왕수 양백이 왕눈이라는 건 이미 들었고, 나머진 뭔가?" "천왕검(天王劍) 채염(蔡琰)은 왕돼지. 패왕극(覇王戟) 진탁(陳鐸)은 병아리. 혈왕도(血王刀) 위응물(� 應物)은 똥개라네." 두 사람은 다시 한참을 웃었다. 특히 마낙기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눈물까지 흘려 가며 웃었다. "흐흐흐하하하하하! 사천왕이 사실은 왕눈이, 왕돼지, 병아리에 똥개란 말이지!" "채주는 까마귀고. 하하하!" 웃음의 끝은 공허했다. 양백은 왕눈이로 불리든 염왕수로 불리든 양백이었고, 부채주였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왕눈이, 왕� 지, 병아리, 똥개에게 잡혀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자넨 일단 약을 풀어서 병이나 고쳐 보게. 가능한가?" "설사야 아무 것도 안 먹으면 그냥 낫는 것이지. 좀 빨리 낫게 하려면 높은 놈은 대추 삶아 주고, 졸개 湧� 마늘이나 삶아 주면 그만이야." "대추에 마늘이라…… 효과는?" "똑같지." "젠장……! 하여튼 그렇게 하게. 물은 정화할 수 있나?" "힘들어. 우물이 오염된 건 하루 이틀 사이에 풀리지 않아. 저 아래 두꺼비가 몇 놈이나 더 사는지. 뭐 � 해 독해야 할지……! 그냥 자연적으로 맑아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죽을 정도로 치명적인 독은 아니니 다행이군." "글쎄……, 다행일까?" 두 사람은 씁쓸하게 웃으며 마주 보았다. * * * "왜 극독을 쓰지 않았지?" "대량 살상을 할 정도로 제가 악독하진 않습니다." 왕일은 바위틈에 조심스럽게 흙을 뿌리며 대꾸했다. 거무스름한 바위틈에 벌집을 끼워 넣고, 끓였다가 식힌 밀랍으로 틈새를 메운다. 그 위에 흙을 엷게 � 려 대강 흔적을 감추면 벌집은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분 澧� 움직이는 벌들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자기들의 집을 수십 년간 거기 있었던 것처럼 만들어 놓을 것이다 단 하나 문제는 가을이 깊어졌다는 것이었다. 서문정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나는 그래도 극독을 써서 그들을 단번에 무력화시켰으면 나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첫 번째 � 격 이 가장 강한 법이야. 독을 쓰는 것은 더 그렇지.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독공의 위력은 절반 이하로 毛� 버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 계절이라면……!" 그는 바위 위에 앉아 늦게 거둔 제가가 독벌의 집을 설치하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위험하지, 위험해!" 겨울은 가난한 자와 산을 먼저 덮친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물에게 추위는 천적이었다. 천부채 우물만 해도 산 속의 깊은 물인 까닭에 얼음처럼 차가운 것이었다. 아무리 독한 두꺼비를 넣었� 고 해도 두꺼비는 결국 두꺼비, 그 차가운 물에서 제대로 활동을 할 리가 없었다. 적각룡(赤角龍)이라는 � 분한 이름을 가진 놈이지만 그 우물 속에서는 아마 반쯤 얼어 버렸을 것이다. 결국 우물에 탄 다른 독약을 눈� 채 지 못하게 하는 눈가림용으로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그걸로 끝을 냈어야 했어!' 방심하고 있을 때 극약 한 봉지면 천부채의 도적들을 거의 대부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서문정은 � 런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왕일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절대로 극약을 쓸 수 없는 사정이 그에겐 있었다. "그래도…… 여동생이 아직 살아 있으면 그 애도 마실 테니까요." "……!" 서문정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통 누이의 얘기를 않아서 포기한 줄 알았더니 왕일은 여전히 희망을 � 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문정은 화제를 돌렸다. "다음은 어떻게 할거냐?" 왕일은 하던 일을 마치고 일어나 허리를 폈다. 그의 시야에 무성한 수풀이 들어왔다. 그 아래에는 샘� 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들이 준비한 또 하나의 무기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보름 동안 땅벌레처 � 작 업하며 설치한 몇 가지와 함께 이 노애령을 저주받은 땅으로 만들어 버릴 무기였다. 저주받은 땅. 남만에서 보고 온 지옥을 이곳에 옮겨 놓는 것이 왕일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지옥에선 누구도 살 수 없지요. 지옥이 아닌 곳에서 살던 사람이면 더욱 더……! 그들이 흩어지기 시 徘� 면 그 땐 직접 그들의 목을 비틀어 줄 겁니다." "내가 도울 일은?" "사부님은 이미 충분히 하셨습니다. 사부님이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니까요. 산 하나를 지옥으로 侮� 놓는다는 것은." 서문정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알지 모르겠지만 나도 꽤 고수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네겐 거의 못 가르쳐 줬지만. 손이 필요할 때 柳� 놀게 두기엔 아까운 손이라는 거지. 그 때에는……!" 그는 씨익 웃었다. "곰보랑 약속은 했지만 피해 갈 길이 없진 않을 것이다." 왕일도 웃었다. 그는 이 더럽고 음침한 거지에게 어느새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문정도 마찬 ≠� 였다. "그 때 가서 보지요." * * * "바보 같은……! 시냇물도 오염됐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흐르는 시냇물이, 그것도 어제까지만 해도 바닥이 투명하게 비춰 보일 정도로 맑았던 시냇물이 하루아� 에 오염됐다는 것은 양백이 아니라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저녁을 짓기 전에 혹시나 해서 마낙기가 시험해 보지 않았으면 천부채는 다시 한 번 구린내로 덮여 버렸을 것이니 그나마 � 행 이라 할까. "조사해 봐! 아니, 내가 직접 가지!" 계곡이 여럿이니 시내도 많겠지만 천부채에서 가장 가까운 시내는 당연히 하나 뿐이었다. 양백은 종두� 와 몇 명의 수하를 데리고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며 조사하기 시작했다. 종두기가 비록 돌팔이 의원이었지만 무엇인가에 의해, 아마도 몸에 좋을 리가 없는 어떤 것에 의해 시� 가 오염되었다는 사실은 굳이 은침을 담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흐린 물빛, 코를 찌르는 물비린내, � 냇가 수초는 더러운 이끼에 감겨 있고, 여기저기 물고기들이 배를 보이며 떠 있었다. 하루만에 시내는 완벽히 類� 버린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가!" 종두기는 연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사를 가리키는 뜻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그것� 너 무나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그런 뜻까지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눈앞에 흐르는 물은 썩고 있었다. � 벽하 게 썩어 버렸다. 무언가 이 물을 썩게 만드는 것이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샘터까지 와서야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뱀의 시체가 샘물에 고개를 박고 있었던 것이다. 36. "거긴……, 우리가 아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염왕수 양백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왕눈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만든 그의 큰 눈은 지금 더욱 크게 뜨 여져 있고, 거기에는 분명한 두려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샘에는 큰 뱀의 시체가 있고, 붉고 검은 작은 구더기? 아니, 뱀들이 그 아래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美� 르고 뱀의 시체를 건드린 졸개 한 놈이 손을 잡고 뒹굴었죠. 작은 뱀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그 손에 반이� 파 고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졸개놈의 비명 소리가 끔찍하게 오래도 울려 퍼지더니 그쳤을 땐 이미 죽어 있 享� 니다." 그가 겪은 끔찍한 경험을 말해 주듯 양백의 손도 같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의 언변은 사라지지 않 았는지 경황 중에도 그의 말은 상황을 적절하게 전해 주고 있었다. 사실은 열에 들떠서 자기가 무슨 말� 하 는지도 모르고 떠들어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종두기란 놈이 그 뱀을 그…… 거머리인지 뱀인지, 고질혈사(蠱蛭血蛇) 어쩌구라며 말했습니다만 저� 일 단 졸개들을 수습했습니다. 당황하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다른 변화는 없는지 찾아보라 � 말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샘터는 이미 충분히 변해 있었습니다. 초목은 말라죽어 있고, 바위들은 기름 이 발려진 것처럼 번들거리는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속� 울 렁거리고 머리가 아파 오더군요. 전 그게 중독 현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서 물러서자고 말 狗� 하는데 졸개 한 놈이 바위에서 미끄러졌습니다. 그 순간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들� 왔 습니다. 눈앞이 어두워졌습니다. 졸개놈들이 벌떼에 둘러싸여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손가락만큼, � …… 엄지손가락만큼이나 큰 벌들이었습니다. 전 물러서서 정신없이 도망쳐 왔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저 혼 悶� 습니다." "그래서……!!" 한 때 까마귀라 불렸고, 지금은 천부채의 대두목이 된 박천조 이응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양백을 흘� 보 았다. 그가 비록 물탐이 심해 돈 되는 일이라면 체면을 돌보지 않는다는 평이 있긴 하지만 아직 수하들� 두 고 도망가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게 산채 하나의 두목이나 할 수 있도록 만든 미덕이라면 미덕이고 그� 장 점이었다. "졸개들을 다 내버려두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쳐 왔단 말이지? 살아 남은 게 자랑이란 말이군?" 양백은 벌에 쏘여 부어오른 얼굴, 거기 솟아오른 혹같은 살들에 경련을 일으켰다. 이응의 힐문이 죽으 遮� 소리처럼 가혹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완벽한 변명이군. 안 그래?" 이응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의 처소이자 산채의 회의실 격인 큰방에는 지금 그와 양백 말고도 세 명이 더 있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않았다. 이응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사실 양백을 더 힐난 構� 싶진 않았다. 단지 어떤 경우에도 수하를 버리고 달아나선 안된다는 교훈을 남겨 주고 싶을 뿐이었다. 적 諍� 그가 교훈을 줬다는 것이 산채에 소문이라도 나야 했다. 진심으로 수하들을 아껴서가 아니라 그렇게 알려 �야 만 수하들이 따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응은 밖을 보며 소리쳤다. "들여보내!"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양백은 그 사람을 힐끗 보고는 처음엔 놀라고, 그 다음엔 더욱 깊� 고 개를 숙였다. 들어온 사람은 그가 버린 졸개, 종두기였다. 그의 얼굴보다 훨씬 더 망가졌지만 분명히 살 � 있 는 졸개였다. 그는 살아 있는 졸개를 버리고 도망온 것이다. 이응은 종두기를 향해 경과를 물었고, 종두기는 대답했다. 방식은 달랐지만 양백이 말한 것과 거의 다름없는 이야기가 한 번 더 술회되었다. 종두기 역시 벌을 � 났 고, 정신없이 도망쳤으며, 살아남은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들 둘뿐인 듯했다. 양백은 무공이 높았기 때문 에, 그리고 종두기는 벌과 거기 대처하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곰도 한 방에 보내 버리는 벌이 있다지만 사실 그건 그렇게 흔히 보이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 � 한 벌에게라도 열 방, 스무 방을 맞으면 반드시 죽지요. 저는 개울물에 뛰어들어서 살았습니다." "물은 중독 됐다면서?" 질문한 사람은 턱살로 목을 가리고, 뱃살로 허리띠를 삼켜 버릴 정도로 비대한 사내였다. 그가 바로 과 탔� 도적 왕돼지, 지금은 천부채의 약탈 두목 지위에 있는 천왕검 채염이었다. 동료를 다그치는 일이 아니니 윱�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중독된 물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삽니다. 혹시 마셨다 해도 설사가 죽음보단 낫지요." 종두기의 대답이 나오자 이번에는 자라다 만 아이처럼 왜소한 체구의 사내가 질문을 던졌다. 병아리� 는 별명을 가진 주제에 일 장 삼 척의 방천화극(方天畵戟)을 무기로 사용하는 패왕극 진탁이었다. "물은 확실히 중독 되었단 말이군." "개울물이라 다행인 셈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이 두꺼비가 아니고 그 뱀들이었으면 우린 벌써 다 죽� 을 테니까요. 흐르는 물이라 독기가 약해진 모양입니다." "우물에 도대체 그런 뱀이 들어갈 이유가 없잖아!" "그건 두꺼비도 마찬가지지." 사천왕중의 마지막 하나, 혈왕도 위응물이 중얼거렸다. 흥분하면 부모형제도 몰라본다는 개같은 성질 毬� 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별명도 똥개. 돌려서 말하면 개같이 더러운 성질과 그 성질만큼 난폭한 �질 을 빼면 별 장점이 없는 인물이라는 뜻인데, 지금 무심코 던진 말이 왕돼지 채염의 무엇인가를 건드렸다. 아는 것이 많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많다는 말도 있지만, 채염은 정말 생긴 것과는 달리 교활하고 음흉� 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공처럼 둥근 몸집에 나뭇가지 같은 검을 들고 이리저리 뛸 땐 귀여워 보이기도 하 嗤� 그 두터운 비계 뒤로 무한대의 탐욕과 잔인성을 감추고 있는 인물, 그가 바로 채염이었다. 채염은 위 아래로 밀어 대는 살에 짓눌려 아무리 크게 떠도 가늘기만 한 눈을 깜박이며 방금 그의 신� 을 건드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러나 한 순간 번뜩인 그 무엇은 지금은 뿌연 안개에 싸인 것처럼 모� 을 가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묘해서 곰곰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가려져 버리는 것이다. 아예 생각을 않고 있는 게 � 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똥개, 너 방금 뭐라고 그랬지?" 똥개라 불리고도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위응물은 인상부터 썼지만 채염이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 고 있는 것을 보자 투덜거릴 수도 없었다. 악랄하기로 치자면 그의 열 배는 더 악랄한 인물이 채염이었으 歐�. "뱀이나 두꺼비나 우물에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단 말씀이었습니다." "그래, 두꺼비!" 채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다. "두꺼비랑 관련된 걸로 뭐 기억 나는 게 없나?" "두꺼비? 모르겠는데요?" 위응물은 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참 기가 죽은 양백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양산(粱山) 천기채(天機寨)의 두꺼비를 말하는 건가?" 이제 완전히 떠올랐다. 채염은 손바닥을 쳤다. "양산의 두꺼비! 그 놈, 아니 그 분입니다. 독섬여(毒蟾 ) 구륭(邱隆) 노선배를 모셔 오는 겁니다." 독으로 생긴 문제니 독공의 고수를 데려오면 된다. 언뜻 좋은 생각인 듯한데 이응은 별로 탐탁지 않은 빛 이었다. "와 줄까?" 독섬여 구륭은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독공의 고수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쉽게 � 직 이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당금 녹림맹 구대 장로중 일인인 것이다. 채염은 그래도 문제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손가락 두 개로 둥글게 원을 만들어 보였다. "돈을 주면 되지요." "구륭 선배에게?" "아니오!" 채염은 씩 웃었다. "구륭 선배가 녹림맹의 장로라지만 소속상 천기채주 휘하 아닙니까? 천기채에 돈을 주고 부탁하면 안 올 수 없지요." "많이 들텐데?" "하는 수 없지요." 채염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위기의식을 초인적인 자기 보호 본능으로 느끼고 있 었다. "이대로 진행되면 졸개들이 흔들릴 겁니다." 녹림이라는 말은 원래 전한(前漢) 말엽에 호북성 녹림산(綠林山)을 근거지로 해서 봉기한 농민군으로 壙� 유래한 단어다. 한 때는 그곳을 중심으로 호북성 전역을 삼키고 천하를 넘봤던 무리. 결국엔 후한(後漢) � 광 무제(光武帝)에게 토벌되어 씨가 말랐지만 이후로 굶주림에 못 이겨 쇠스랑 들고 나온 도적들의 대명사� 된 것이다. 같이 녹림으로 불리는 도적이라고 해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두 종류로 나뉘어지는데, 앞서 말했듯이 굶� 림 에 못 이겨 먹고살자고 도적이 된 부류와 아예 돈 벌어 보자고 편한 길로 나선 직업적 도적들, 이렇게 � 부 류였다. 어느 산채도 이 두 부류가 섞여서 이루어지며 천부채도 여기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말로 해서 칼끝에 사는 인생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원해서 하는 자들과 어쩔 수 없이 하는 자들 � 이 에는 동기와 행동방식에 있어서 천양지차를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첫 번째 부류의 졸개들에게는 생존이 翎� 선 목표인 것이다. "우선 졸개들이 도망을 가겠죠. 그러면 소문이 퍼지고, 소문이 퍼지면 산아래 마을들이 등을 돌릴 겁� 다. 녹림도가 물고기라면 산아래 마을은 물과도 같습니다. 물이 등을 돌리면 고기는 살 수가 없지요." 채염이 걱정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구륭 선배가 오면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첫째로 독에 대해 더 걱정을 않게 되지요. 둘째로는 채주 篤� 대한 신뢰도가 높아집니다. 녹림맹의 장로가 돕기 위해 오는 것이니까요." 이응은 잔뜩 인상을 구겼다. "아이들이 난 신뢰하지 않는다는 얘긴가?" 채염이 낯색을 바꾸며 펄쩍 뛰었다. "그럴리가요! 그게 아니라 제 말은……!" "됐네! 그만 두게!" 이응은 불쾌한 표정으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위응물이 채염을 향해 투덜거렸다. "형님은 공연한 말씀을 하셔가지구서는 큰 형님 기분만 상하게 하고 그러시우?" "시끄러! 네가 무얼 안다구 그래!" 채염이 짜증을 냈다. "돈이 아까워서 저러시는 거지 뭐……." 회의는 그렇게 별 뾰족한 대책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종두기는 밖으로 나오며 땀을 씻어 내렸다. 서늘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땀은 등덜미까지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는 오늘 생사가 갈라지는 곡예를 몇 번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뱃속에는 죽음의 씨앗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채주와 사천왕 앞에서 몇 번이나 거짓말을 했다. 오염된 물에 들어가도 마시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피부에 닿으면 부스럼이 나고, � 에 들어가면 실명할 수도 있다. 아주 하류라면 농도가 약해져서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상류에서는 약간만 마� 것 만으로도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그가 물에 들어가 벌을 피했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뱀 때문에 샘이 오염되었다는 말도 거짓말이었다. 고질혈사니 뭐니 하는 이름이야 애초에 엉터리였고, 營� 은 샘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뱀이 거기 살 수 있었다는 것이 정확한 말이었다. 샘 속에는 무언가 샘을 중 떽� 키는 것이 따로 있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조금씩 독을 흘려 보내는 무엇일 터였다. 결정적으로 그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그는 왕일의 손에 구해져서 억지로 독 敾� 먹고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해약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이 시킨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일은 왕일의 여동생을 찾는 것이었다. 37. 지옥을 만든다. 혹은 하나의 산(山)을 죽인다. 그것이 왕일이 하려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왕일은 그것처럼 쉬워 보이면서도 또 그것처럼 어려운 � 이 없다는 것을 이제 느끼고 있었다. 독을 풀고, 화약을 터뜨려 구조를 바꾸고, 독충과 독물들을 풀어 기존에 있던 생물들을 쫓아내는 그 � 든 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해도 산은 쉽사리 죽지 않았다. 지옥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 駭�. "산이라는 것이 의외로 끈질기군요!" "시기가 좋지 않아, 시기가……!" 서문정은 왕일의 감탄에 한탄으로 대답했다. 일이 시작되고부터 지금까지 수시로 내뱉는 한탄, 시기가 刻� 다는 것이었다. "봄이나 여름만 됐어도, 아니 같은 가을이라도 한 달만 빨랐으면……!" 여름과 가을은 독물들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시기, 번식을 해도 그 때 하고, 있는 독은 그때 � 욱 지독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의 초입, 곧 눈이 내리고, 눈이 내려 천지가 은빛으로 변하면 모든 것은 정지된다. 棺� 비든 뱀이든 할 것 없이 그땐 모두 우리로 기어 들어가 깊은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서문정은 회색으로 물든 산 저편 하늘을 보며 그 때가 멀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왕일 또한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희망을 잃지 않았다. 누이동생을 되찾을 때까지는 晝� 을 잃어서는 안되고, 희망을 잃지 않을 이유도 있었다. "아직은 한 수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 한 수! 한 수가 남아 있지." 서문정은 그들이 하고 있던 일들의 흔적을 둘러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서 있는 언덕으� 부 터 하얀 쌀알 같은 것들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그 하얀 쌀알들이 여섯 개의 다리와 날개를 가지고 있고, 머리의 절반이 넘는 큰 입을 가지고 있는 벌레, 흰개미 떼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눈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운 � 좋 아 식견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이야 흰개미라지만 사실 흰개미는 갈색에 가까운데 여기 이 흰개미들은 � 이 날 정도로 흰데다가 갈고리처럼 휘어져 뻗어 나온 그 이빨에 붉은 윤기가 흐른다는 것을 보고 그것이 그� 흰 개미가 아니라 극독을 품은 흰개미, 독문(毒門)에서는 혈염백주비(血染白胄 )라는 것을 알지도 모른다. "이것이면 하루 이틀 안에 천부채 주변을 폐허로 만들 수도 있지." 서문정은 품속에서 옥합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나무뿌리를 갉아 고사시키고, 그 배설물로 토양을 오염시킨다. 물리기라도 하면 작은 동물은 즉사, 소 � 말 같이 큰 동물도 사나흘은 고생을 할 것이다. 문제는……!" 그는 옥합을 열었다. 파라라락-! 요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눈부신 백광 서너 줄기가 옥합으로부터 뻗어 나갔다. 우우우웅-! 언덕 주변에 넓게 퍼져 있던 흰개미 떼가 날갯짓 소리에 반응해 술렁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벌떼� 럼 허공으로 날아올라 방금 옥합에서 뻗어 나간 백광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의후(蟻后), 소위 여왕개미들이 종족들을 불러 올린 것이다. 낯선 땅에 각자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였 다. 여왕개미의 수는 넷, 허공을 메우고 날아다니던 흰개미들도 네 무리가 되어 갈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첸� 에서 사라졌다. 서문정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고는 개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역시 시간이 없어……! 날씨가 추우니 집을 만들고 겨울을 날 준비부터 해야 할 시기야. 그런데 약을 祈� 서 당분간 활동만 하게 했으니……, 대부분이 죽고 말거야." 왕일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서문정은 요 며칠 사이에 급속도로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손부자 형제도 산에 따라 들어왔지만 시키는 대 로 노역이나 할뿐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독을 내리고, 독물들을 푸는 거의 모든 일을 서문정이 해야 했 � 때 문에 심력을 소모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가 혈육처럼 아끼던 독물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그렇게 된 탓이 더 컸다. 이번 일로 서문정은 그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써 버렸다. 추운 날씨에 무리하게 내놓은 두꺼비니 뱀 � 류 들은 거의 죽어 버렸고, 벌들도 하루에 수백 마리씩 죽어 나가 이미 반멸되었다. 이제 그가 지닌 독을 천 光� 주변에 대량으로 뿌려 놓고, 그 독을 먹이로 하는 혈염백주비들을 풀어놓았으니 거의 전력을 투입한 공� 을 한 셈이었다. 만약 이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면 거기 투자한 것이 큰만큼 타격도 크다. 누이를 구출하고 원수를 갚는� 는 애초의 목적을 포기할 순 없으니 다음 공격은 보다 직접적인 것이 되고, 그땐 그의 계획은 완벽하게 실� 한 셈이 되어 버릴 것이다. 왕일은 이번 공격이 천부채에 가할 타격이 그의 기대와 같이 결정적인 것이 되길 바라고 있을 수밖에 � 었 다. * * * 파멸의 조짐은 흐릿하지만 막상 수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퍼져 버린다. 천 부채의 경우 그것은 불길한 예감으로 시작해서 공포라는 모습으로 현실에 등장하더니 이윽고 저주와 파� 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저주받은 땅. 녹림십팔채의 하나로 인근 육 개 현의 민초들이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노애령 천부채가 어느날 갑� 기 저 이름으로 대신 불리게 되었다. 처음 뱀에 물린 졸개들이 나타나고부터 스무날이 지나서, 찬바람이 산봉우리를 휘감고 저편 하늘에는 � 색 무거운 하늘이 겨울의 도래를 알리는 때에, 그들은 몰랐지만 하루 이틀만 더 기다리면 막상 그 저주의 실 섟� 사라져 버릴 그 시점에 저주의 효과는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그리곤 한 순간에 노애령과 인근 육 개 현� 휩 쓸어 버렸다. 처음엔 밖으로 나간 졸개들이 하나 둘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도적놈들이 모인 집단이니 그렇게 소 리소문 없이 하나 둘 없어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 수가 십여 명이 넘어가면 신경이 쓰이지 � 을 수가 없었다. 도적 잡아먹는 호랑이라도 있는지 조사를 할 참에 마을에 양식 조달하러 갔던 졸개들이 또 이상한 소� 을 가져왔다. 양식을 주긴 주는데 마지못해 하는 것 같으며, 무엇보다도 천부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말 � 듣 고는 역병이라도 실어 온 듯이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더라는 것이다. 민심(民心)이, 그런 것이 있었다면, 이반 (離反)한 것이었다. 그것은 극히 중요한 일이었다. 녹림도가 물고기라면 그 산채를 둘러싼 마을은 물과 같았다. 물을 떠나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이� . 민심을 알아보러 마을에 조사대가 파견되고, 사천왕이 다시 모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때아닌 독충과 떻� 의 출현, 그리고 최근 천부채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사건들이 천부채에서 운이 떠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獵� 는 것이었다. 칼끝에 목숨을 건 녹림도만큼, 또 하늘에 명줄을 걸고 있는 농민들만큼 운에 민감한 사람들이 없다. � 수 없는 일을 당한 사람은 쳐다도 보지 않는 것이 그들인데, 유례없이 재수 없는 일을 연거푸 당한 천부채� 의 심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다. 한편으로는 마을에 사람을 보내 으르고 달래며, 다른 한편으로는 졸개들 입단속을 시키는 등 뒤늦게 � 책 을 세우느라 난리를 떨었지만 너무 늦은 모양이었다. 어느 무리에서나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증거로 보� 탈 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천부채와 그 자신의 운명을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무리들이 속속 빠져나가기 � 작 한 것이다. 그렇게 삼 년 비워 둔 폐가처럼 썰렁한 분위기가 감도는 천부채에서 강철은 채화루(採花樓)를 지키는 � 수 꾼으로 지내고 있었다. 채화루는 사실 이름 그대로 누각은 아니지만 채주의 거처 다음으로 화려한 곳이었다. 치장이 화려하기 때 문이 아니라 이곳에서는 꽃향기보다 진한 여인의 향기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 년 가야 여자 모� 한 번 제대로 보기 힘든 산중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잡아온 여인들을 가둬 둔 곳이 채화루였던 것이� . 산채의 졸개들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가 이것, 채화루 파수꾼인 것은 남자인 이상 모두가 공� 된 생각이겠지만 강철은 이 자리를 더 없는 치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어 달 전에 관군의 정탐으로 보 甄� 사냥꾼을 잡지 못하고, 동료까지 잃고 돌아온 벌로 받은 일이 이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 전도가 유망 求� 청년 도적이 여인네들 뒷수발이나 들며 청춘을 보내게 생겼으니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산채의 중심에서도 더 안쪽 깊은 곳에 자리한 채화루에서 지킬 것이라곤 특별히 채주가 찍어놓은 몇몇 반 반한 계집에게 졸개들이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것밖에 없으니 무료하기조차 한 일을 강철은 분노를 삼키� 하 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묘한 일이 채화루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너…… 혹시 왕씨 아니냐?"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탓인지 채화루의 여인들에게는 병이 많았다. 특히 화류병(花柳病)은 여인들만 � 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과 상대한 모든 사람에게 옮는 것이고, 걸리면 별 약도 없이 거기서 끝나 버리는 경 李� 많아 극히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의원인 종두기가 와서 진단을 하는 것인데……. 오� 종 두기는 유달리 말이 많았다. 그러나 종두기가 질문한 여인, 일 년여 전에 산동에서 똥개 위응물이 잡아온 여인은 풀로 붙이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달리 미색이 뛰어나서 채주만 맡아 놓고 상대하는 여인이라 콧대가 높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어 딘지 우울하고 평소에도 말이 없는 여인이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아무리 의원이라지만 사내에게 가랑이� 벌 려 부끄러운 곳을 보여주는 상황에서 무슨 대답을 하고 싶을 것인가. "뭐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말이다. 너 왕씨 아니냐? 아님 말 �. 음…… 내가 아는 사람은 산동 사람인데…… 청주인지 연주인지 하여튼 그 부근 사람인데 말야, 성이 왕 쒼� 든. 그 사람 누이랑 비슷해 보여 묻는 거다." 가랑이 사이를 살펴보는 의원 본연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흘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외면하고 서 있는 강철의 귀에는 그 목소리에 어딘지 집요한 구석이 있다고 느껴졌다. � 는 종두기와 여인 왕령, 산채에서는 빙매(氷梅)라고 불리는 그 여인 쪽에는 관심 없다는 듯 서서 귀를 쫑긋 셀� 다. 빙매는 침상에 누워 천장을 막연히 바라볼 뿐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종두기는 힐끔힐끔 강철의 눈치를 살피더니 위험수위를 건드리는 말까지 하고야 말았다. "내 친구 이름이 말야, 아주 평범한 이름이라 뭐 동명이인도 많을 것 같다만 한 일자를 쓰거든. 그러 歐� 왕일이라는 친구지." 빙매가 움찔 고개를 쳐들었다. 천부채에 잡혀 온지 일 년, 처음으로 그녀의 눈에 감정이라 할 만한 빛� 떠 올랐다. 종두기는 순간적으로 강철의 뒷등을 쳐다보고는 얼른 말을 이었다. "그 누이가 아주 예쁜 애였는데 이름은 왕소아(王小蛾)라고 했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눈썹이 매미 더 育� 같이 잘 빠졌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빙매의 눈이 몇 번 깜박이더니 다시 멍한 빛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열릴 것 같지 않은 입을 열어 말했� . "끝났으면 나가요!" 의심할 만한 아무런 뚜렷한 것 없이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강철은 이 일을 파고 들어봐야겠다고 � 심 했다. 종두기의 태도와 빙매의 태도 양쪽에 다 의심스러운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결심은 바로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두 달이나 채화루 파수꾼 노릇이나 하던 그� 게 그날 바로 맹주의 호출이 있었고, 명령에 따라 왕돼지 채염을 모시고 하남성 양산으로 떠나야 했다. 독섬 � 구 륭이라는 사람을 모시러 가는 길이었다. 양산은 멀지 않았고, 길도 험하지 않았다. 구륭이라는 두꺼비처럼 생긴 늙은이도 채염의 말을 듣자마자 짐 싸 들고 따라와서 임무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사단(事端)은 북경에 거의 다 와서 일어났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웬 늙은 거지가 구륭을 보자 뗌� 잘 만났다는 듯 덤벼들었던 것이다. 38.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왕일은 어리둥절했다. 약간은 분노스럽기도 했다. 일은 잘 되고 있었다. 천부채로부터 민심을 떼어놓� 일 은 여태껏 그의 주도하에 제대로 진행되었지 않은가. 암암리에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리고 종두기의 정 맙� 의하면 천부채의 도적들은 반으로 줄어들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런 일이 필요한 것일까? 왜 그에게는 사전 상의 한 마디 없이 서문정이 나가야 했을까? 왜 죽 음을 각오하고, 개방으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을 위험을 각오하고 사부가 나가 싸워야 한단 말인가? "반밖에 안 줄었기 때문이네." 정이노가 대답했다. 왕일이 어리둥절해 하고 분노스러워 하기도 한다면 그 역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 � 연 한 일을 따지듯 묻는 왕일이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자네 계획은 훌륭히 성공했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무척이나 노력했지. 아마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 면 저기 천부채의 졸개들은 다시 반으로 줄었을 수도 있겠네. 그러나 이젠 겨울이야. 자네 계획은, 서문선배 � 할 일은 여기서 끝난 것일세. 이젠 우리가 나설 때지." "그것과 사부님이 단독으로 싸우러 가신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정이노는 주위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손부자는 사람 머리 두 개만큼이나 큰 쇠뭉치가 달린 팔방추(八方錘)를, 그것도 두 개씩이나 꺼내 들� 는 천으로 닦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애용 무기였다. 호연 막내도 가슴팍을 풀어헤치고 거기 가로지른 띠에 꽂힌 식칼 다섯 자루를 하나씩 꺼내어 숫돌에 � 고 있었다. 하나같이 끝이 예리하게 빠진 도살용 식칼이었다. 그들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의 일은 결국 강호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네. 계략을 쓰고, 어깨를 흔들어 위세를 과시하고, � 소문 을 퍼뜨려 적의 심기를 어지럽게 해도 결국 끝을 내는 것은 칼이야. 내 손으로 직접 마지막 적의 목줄을 壺�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지. 이제 그럴 때가 된 것이야." "그래서 사람까지 불러들였습니까?" 왕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 그들이 여태 은둔처로 사용해 온 외진 동굴의 바깥에는 왕일에게도 � 이 익은 청년 십여 명이 무기를 챙기고, 혹은 쉬고 있었다. 손부자를 따르던 자들, 창주의 청년들이었다. "자네 계획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준비해 오던 일이네. 이제 곧 싸움이 시작되면 다섯보단 열 다섯이 � 을 테니까." "저는……!" 왕일은 억눌린 목소리를 하나하나 뱉어 놓듯 말했다. "제 일에 관계없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희생시켜 가며 복수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단 하나도……!" "착각하지 말게. 자네 때문에 온 사람들이 아니야." "그럼……?" "대형을 따라 온 사람들이지. 저 친구들은 자네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대형을 위해 목숨을 바 치려 하는 것이지. 그게 보람있는 일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분을 위해 목숨을 거는 그 일이……!" 손부자가 싱긋 웃었다. "나와 우리 형제들은 자넬 위해서 온걸세. 오해하지 말게나. 우린 자넬 위해 목숨을 걸고, 저 젊은이들 � 우 릴 위해 목숨을 걸지. 자네 사부는 제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그는 왕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상해 하지 말게. 참 사소한 것을 가지고 잘도 목숨을 거는구나 하겠지만 그게 강호의 삶일세. 따지� 보 면 전부 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는 잠시 표정을 굳히며 생각에 빠져드는 듯하더니 이내 표정을 풀고 웃었다. "전에 막내가 한 말대로 그저 하고 싶어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두게. 작은 약속을 중히 여기고 작은 분� 에 민감하다고……, 그래야 기분이 풀리는 것이 우리지. 뭐 듣기 좋게 말하자면야 도적을 쳐 강호를 평안케 構�, 천륜을 어긴 자를 베어 향리(鄕里)를 안녕케 하기 위해 지사들이 뭉쳤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 瞞� 기분이 나아질 것 같으면 그렇게 생각하게나. 중요한 것은……." 그는 다시 표정을 굳혔다. "싸움이 임박했다는 것이지.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걸세!" * * * 피는 하남성 개봉부와 경사 대명부의 접경인 황하의 강변, 죽림(竹林)이라 불리는 곳에서 이미 흐르고 羚� 다. 단지 그것은 심홍색의 피가 아니라 은은히 윤기까지 나는 녹색의 독혈이었다. 독섬여 구륭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는 녹색의 피가 고이고 있는 그릇을 바라보았다. 때가 꼬질 꼬질 � 어 마치 원래 그런 얼룩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것같이 보이는 사기그릇. 그러나 구륭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은 그 그릇이 더러워서도, 그릇에 독을 떨구고 있는 잘려진 � 의 목이 징그러워서도 아니었다. 그렇게 독혈을 붓고 있는 저 때묻은 손의 주인공이 그가 오랜만에 느끼는 爐� 감의 주원인이었다. "도대체!" 그는 이미 열 번은 더 이렇게 의문을 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기막힌 심정을 털어놓지 � 을 수 없었다. "당신과 내가 무슨 원한을 졌다고 여기서 내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 "내기라니!" 늙은 거지, 서문정은 모욕을 받은 듯이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그릇에서 벗어난 뱀의 목이 땅바닥에 또� 을 한 방울 떨구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땅바닥에는 거품이 일었다. 구륭은 그 연기와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상식으로는 뱀에게서 나올 수 없는 극독이었다. 榴� 분노한 눈으로 서문정을 노려 보았다. "날 죽이고 싶은 게로군!" "이건 내기가 아니라 무공을 인증하는 거야. 너나 나나 독공으로 유명해 졌으니 당연히 독공을 겨루어� 하 고, 독공을 겨루다 보면 둘 중 하나가 죽을 수도 있겠지! 그게 당연한 것 아니냐?" 결국 또 그 이야기였다. 구륭은 노성을 질렀다. "이 미친놈의 거지새끼야! 내가 왜 네놈과 독공을 겨뤄야 한단 말이냐! 누구 사주를 받고 그러는지나 � 어! 백호맹이냐? 아니면 제룡련? 개방놈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 날 이렇게 대하다간 녹림맹 전체를 적 막� 돌린다는 걸 몰라?" "개방이라……!" 서문정은 히죽히죽 웃었다. "내가 거기 장로에서 쫓겨났다는 걸 모르고 있었나? 꽤 정보가 늦군. 객쩍은 소리 말고 어서 네놈 독� 나 내놔 봐라! 개방이야 망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녹림맹이 호랑이랑 놀든지 용이랑 놀 瑩� 내가 알게 뭐야! 난 독중독왕(毒中毒王)이 되고 싶을 뿐이야. 그러기 위해선 너와 나머지 떨거지들을 굴� 시켜 야 한단 말이다!" 구륭은 입을 헤 벌렸다. 그리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놈…… 미쳤군! 완전히…… 미쳤어……!" 광인은 선악을 모르고 이해를 분별하지 못하니 위험하다. 위험한 무기를 든, 지금 서문정처럼 독이라는 가 공할 위험물을 든 광인은 더욱 위험하다. 구륭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상황을 따져 보았다. 일단은 서문정의 뜻대로 겨루어 줄 수밖에 � 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것이다. '일단은 맞춰 주고, 그 다음에……!' 그라고 선제 공격을 못하란 법이 없었다. 구륭은 품속을 뒤져 몇 가지 약물을 꺼내었다. 일부는 해독약, 일부는 독약이었다. 그리고 일부는 기 만� 보아 서문정을 독살시켜 버릴 별개의 극독이었다. "규칙은?" 서문정은 이제야 자기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는지 히죽히죽 웃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실없이 흘리는 � 소, 떨리는 손은 영락없이 광인의 그것이었다. "규칙이야 간단하지. 서로 가장 자신 있는 독을 풀어놓는 거야. 나처럼. 그리고 상대편이 준 걸 마시� 거 지. 살면 이기고, 죽으면 지는 거다." "둘 다 죽으면?" "재수 없는 것이지!" "이, 이…… 미친 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구륭은 노성을 지르며 손에 든 주머니 하나를 서문정에게 던졌다. 어느새 주 藍� 를 풀어놓았는지 그 안에서 반짝이는 청색의 가루들이 퍼져나왔다. 아무리 독공의 고수라도 천하의 모든 독을 해독할 수는 없다. 독으로 공격을 당하면 일단 후퇴해서 성� 을 알아보고 혹시 당하면 그때에야 견디든지 해독을 하든지 해야 한다. 구륭 역시 그것을 노리고 한 행동이� 다. 그런데 지금 서문정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구륭의 공격, 그의 얼굴로 날아오는 청색 》� 들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의 손에서 녹색의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그릇에 따른 뱀� 독 혈을 뿌린 것이다. "흡-!" 피할 틈이 없었다. 독을 다루는 자에게 있어서 이런 식의 대응이야말로 동귀어진 하자는 짓이나 다름� 었 다. 서문정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짐작 못한 구륭은 급히 숨을 멈추고 옷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창황 중 에도 소매에 진기를 불어넣어 부풀리며, 또 한편으로는 맹렬히 뒤로 몸을 날려 독혈에서 최대한 피하려 寧� 썼다. 녹림맹 장로다운 임기응변이었다. 쏴아아아-! 일만 마리의 개미가 동시에 달려들어 옷감을 갉아 먹으면 이런 소리가 날 것이었다. 독혈에 닿은 옷소� 와 가슴팍의 옷감은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구륭의 깡마른 팔뚝, 갈비뼈 앙상한 가슴팍에 검은 얼룩이 졌다. 얼굴 에 튄 독혈은 몇 방울도 되지 않았지만 피부를 지글지글 녹이고 있었다. 구륭은 뒤로 물러서는 기세 그대로 땅바닥을 뒹굴며 급히 품에서 약병을 꺼내었다. 그리곤 손바닥을 � 잡 고 눌러 병을 깨어 버렸다. 뚜껑을 열 틈도 없었던 것이다. 약병에서는 우윳빛 액체가 흘러나왔다. 손바 悶� 묻은 액체를 얼굴과 팔에 대충 문대어 바르자 독기는 더 이상 피부를 녹이지 않았다. 그렇게 응급처치를 하면서도 구륭의 시선은 서문정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 또한 고수와 고수가 겨� 는 무공의 대결, 아니, 시시각각으로 치명적인 독물이 튀어나올 수 있으니 칼과 칼이 오가는 것보다도 오히� 더 흉험한 대결이었다. 그러나 서문정의 몰골 또한 그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그의 얼굴과 가슴팍에 뿌려진 청색 가루는 지금 청 색 화염으로 변해 그를 태우고 있었다. 그 청색 가루야 말로 구륭이 자랑하던 삼대 독물 중 하나인 청린 �혈 사(靑燐化血沙)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응급처치를 하느라 구륭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검은 알 모양의 물건을 꺼내어 머리 위로 들고 깨뜨렸다. 그러자 알이 깨어지면서 뿌연 가루가 � 득 뿜어져 나와 전신을 덮었다. 청린화혈사에서 뿜어지던 푸른 화염들이 순간적으로 꺼져 버렸다. 구륭은 이를 갈았다. 이젠 싸울 이유고 뭐고가 중요하지 않았다.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고, 둘 중 하나� 죽 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익……! 이 미친 놈! 뱀독만 쓴 게 아니라 광물독도 같이 썼군!" 서문정은 가루를 뒤집어 쓴 얼굴로도 괴소를 터뜨렸다. "우히히! 그래, 그릇에 미리 담아 두었지! 맛이 괜찮지?" "죽어랏!" 천하의 독공고수도 광물독을 마시고 살 수는 없다. 황독(黃毒)이나 비소(砒素)는 목구멍 자체를 태워버 �기 때문이었다. 그런 독을 마시라고 내놓은 것은 독문에서도 비겁한 짓으로 치는 행위였다. 구륭은 분노에 휘감겨 손을 뻗었다. 검은 안개가 그의 손에서, 사실은 허리춤에 장치한 주머니로부터 맘� 나와 손목에까지 연결된 대롱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안개는 순식간에 사방 삼 장 이내를 덮어버렸다. 39. 서문정은 안개 속에 꼿꼿이 서 있었다. 안개, 수분 축축한 안개가 아니라 주변 대기를 태울 듯이 화끈화끈한 열기를 뿜어내는 건조한 안개였다 달 구어진 강철판 주변의 대기가 그렇게 되듯 서문정 주변의 대기는 잔뜩 일그러지고 있었다. 번개를 머금� 구 름과 같이 안개 속에서는 군데군데 파란 불꽃을 튀겨 그 부근만 잠깐씩 밝아지곤 했다. 곧바로 뇌수에까� 찔 러 들어올 것처럼 강렬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안개 속을 떠돌고 있었다. 표적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이리처 �. 독안개, 독무(毒霧)라고 하는 것은 독공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줄 아는 것이다. 독초를 태워서, � 로는 마른 이리의 똥을 태워서, 또 혹은 황을 태워서 연기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연기를 무기로 쓸 때는 바람과 지형, 그리고 불이 필요하다. 지금 구륭이 하는 것처럼 선 자리 【� 그대로 연기를 뿜어낸다는 것은 경지에 다다른 솜씨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아마도 이것이 구륭의 삼대� 기 중 하나라는 암염묵연(暗焰墨煙)일 것이다.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안개에 피부가 닿으면 물집이 생기고 호흡을 하면 호흡기가 타 � 린 다. 눈이든 코든 아무데로나 들어가면 그 순간 반은 죽은 셈이 되는 것이다. 서문정은 약병 하나를 꺼내 거기 든 액체를 드러난 살갗에 문질러 대고, 옷에 넓게 뿌렸다. 알약을 꺼 뻬� 입에 머금었다. 할 수 있는 대비책은 다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 부가 불 속에 들어간 것처럼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중독의 증거였다. 그러나 서문정은 더 이상의 방어를 하지 않고 공격에 들어갔다. 천부채를 공격하는 동안에도 내놓지 � 고 소중히 간직하던 주머니 하나가 벌어졌다. 언뜻 보면 바퀴벌레 정도로나 보일 크기의 검은 벌레들이 주머 臼� 서 튀어 나갔다. 벼룩처럼 빠르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그것은 의외로 전갈이었다. 그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독 걋� 흑갈자(黑蝎子), 활동반경 내의 어떤 것을 향해서도 무차별의 공격을 하는 흉물이 그것이었다. 구륭과 그 � 싸 움은 누가 먼저 쓰러지느냐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구륭은 자신이 풀어놓은 안개의 반경을 벗어나서 안개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움직임이 있으면 안 개도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마지막 무기를 날려보낼 수 있게 되고, 그것은 곧 적의 죽음을 의 鎌� 것이다. 그의 손에는 사발 굵기의 원통이 들려 있었다. 한쪽에 벌집의 그것과 같은 구멍들이 무수히 뚫어져 � 는 원통. 그것은 사실 보이는 그대로 벌집이었다. 어떤 암기보다도 빠르게 날아가 목표를 뚫어 버리는 독벌, 일선 침(一線針)의 집이었다. 몸에 있어서 코의 존재와 같이 한 부분에 불과한 침으로 오히려 존재를 대변하� , 나 아가 벌이라는 존재 자체를 삼켜 버린 괴물, 일선침을 준비하고 서문정을 노리는 것이다. 구륭 역시 중독된 상태였고,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다. 되도록 빨리 승부를 결하고 안정을 취해야 할 痼� 다. 칼로 싸우면 베이지 않고 이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독으로 싸우는 사람이 중독을 두려워 할 � 는 없다. 관건은 얼마나 적게 당하느냐,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 그리고 얼마나 쉽고 빠르게 해독하느냐에 걸 � 있 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구륭은 서문정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 했다. 광물독이면 광물독, 동물독이면 동물독을 사 淪� 지 두 가지를 섞어서 사용하는 경우는 오늘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문정은 광물독으로 피부를 상 構� 하고, 상한 피부로 뱀독을 밀어 넣지 않았는가. 오늘 그가 입은 손해는 확실히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구륭이 갑자기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독물만을 평생 다루던 독공의 고수� 게 순간적으로 비린내를 맡았던 것이다. 과연 방금 서 있던 곳에는 검은 벌레 한 마리가 있었다. 꼬리를 둥 方� 말아 붙이고, 침 끝에는 진주처럼 반짝이는 독 방울을 반짝이며 집게는 적의에 가득 차서 구륭을 향해 � 어 있었다. 구륭은 보자마자 그것이 전갈임을 알았다. 통상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작지만 코끝에 풍겨 오는 비� 내 만으로도 지독한 놈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구륭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런 것 한 마리가 보이면 � 어도 그 열 배만큼의 독물이 주변에 깔려 있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구륭은 급히 자기가 선 곳을 중심으로 둥글게 선을 긋듯이 노란 가루를 뿌렸다. 전갈이 가루를 피해 � 러 섰다. 그러나 도망가지는 않았다. 구륭은 남은 가루가 담긴 주머니를 쥐고 언제라도 뿌릴 수 있도록 준비 杉�. 미처 보지 못하는 사이에 겁 없이 그의 방어벽을 뛰어 넘어올 놈이 있을지도 몰랐다. 서문정은 품속에서 모래시계를 꺼내었다. 유리로 된 틀 안에 담겨 있던 반짝이는 금모래가 아래로 거의 다 흘려 내려온 참이었다. '시간이 됐다.' 구륭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재고 있던 시간이었다. '후회는?' 없지 않았다. 100살을 살고도 다시 100년을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인데 겨우 인생 70을 산 마당에 후� 가 없을 수가 없었다. '더 좋은 방법도 있었을 텐데……!' 하는 수가 없었다. 독공의 고수에게 독으로 치명상을 줄 수는 없었다. 혹시 있다 해도 확실치 않았다. 仄� 은 확실한 해결을 봐야 할 때고, 확실한 결말을 위해서는 그도 희생을 각오해야 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만날까!'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도록 멋있게 죽을 기회란 일생에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그는 알 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徨� 준, 주고 싶었던 제자에게. 독안개가 흔들렸다. 서문정이 움직이고 있었다. 구륭은 흑갈자에 신경 쓰느라 그것을 한 순간 늦게 발 峠� 다. 이 찰나의 시간이 생과 사를 갈라놓았다. 구륭이 일선침통(一線針筒)을 움직이고 있는 그것에 겨냥했을 때 서문정은 이미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 그 에게 덮쳐 오고 있었다. 무기도 없이. 구륭이 일선침을 쏘아 보내 서문정의 몸을 꿰뚫었을 때, 구륭의 � 굴에 부딪칠 듯이 다가온 서문정의 손에서는 모래시계의 반짝이는 금모래가 마지막 한 알을 떨구고 있었다. 콰-아앙-! 섬광과 불꽃, 그 다음엔 연기와 사방으로 흩어지는 살덩이 뿐이었다. 관렬. 사마자연이 만들어 주었고 �문 정이 품안에 간직해 두었던 시한장치가 이빨을 드러내 방원 삼 장 안을 할퀴어 버린 것이다. * * * 서문정의 죽음을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변동이 있을 경우 종두기가 알려주기로 했지만 종두기의 연� 도 없었다. 천부채의 수색대가 산을 덮고 올라오는 것이 그 어떤 연락보다도 먼저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지요?" 산등성이 수풀 사이로 눈만 내밀고 있던 왕일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본격적인 무림인의 싸움이 시작� 었 다고 선언한 다음부터 왕일 대신 무리의 군사(軍師) 격이 된 정이노가 역시 낮은 소리로 대꾸했다. "일단은 숨어야 하네." "언제까지요?" "들킬 때까지." 정이노는 입술을 움직여 미소짓고는 덧붙여 말했다. "들키지 않고 공격을 해야 하니 쉬운 일은 아니지. 사나흘만 안 들키면 적의 세력이 반으로 줄텐데…… 준 비는 됐겠지?" 마지막 말은 왕일에게 묻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왕일은 중얼거리듯 대답하고 엎드린 자세에서 그대로 뒤로 기어 자리를 떴다. 정이노가 그 뒤를 따랐다 * * * "지독하군!" 똥개 위응물은 잔뜩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입가를 천으로 가려서 드러나진 않았지만 흉악하기로 � 문 난 그의 인상이 열 배쯤은 더 흉악해졌다. 수색 사흘째, 그와 왕눈이 양백, 그리고 삼십 여명의 수하들은 독안개 가득한 계곡을 수색하고 있었다. 계곡은 분명 예전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그 수풀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 라 져 있었다. 물은 썩어 버렸고,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지금도 계곡 안은 이상하게 후덥지근했다. 지상으� 부터 십 척 가량은 뿌연 안개가 깔려 있는데, 이 안개가 독하기 짝이 없었다. 매운 연기라도 맡은 것처럼 눈이 따갑 고, 들이마시면 목구멍이 탁탁 막힐 지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침이라도 뱉고 싶은데 입을 가린 천 때문 � 그 것도 불가능해서 입이 더 텁텁하게 느껴졌다. "젠장! 하필이면 이리로 와서!" 사흘에 걸쳐 수색을 하는 동안 그들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적지 않은 발견을 했다면 했 鳴� 할 수도 있었다. 산은 완전히 죽었다. 사방에 여기처럼 썩은 물과 독안개 투성이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벌이나 지네, 李� 같은 독물들이 있었다. 그 바람에 적지 않은 수하들이 희생을 당했던 것이다. 날이 더 추워지면 그런 독� 들도 활동을 못할 것이라는 예상 말고는 그들이 독물들에 대항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섬여 구륭이 오 鳴� 죽어 버린 것은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는 불행이었다. "젠장! 하필이면 거기서 뒈져버려서!" 위응물은 연속해서 투덜거렸다. 이러다가 아무한테나 화풀이하는 버릇을 잘 알고 있는 수하들은 그런 � 를 피해서 되도록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려고 노력했다. 염왕수 양백도 마찬가지였다. 서열상 그가 위지만 위 윽� 이 성질을 부리기 시작하면 위아래도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심란하기는 위응물 못지 않았다. 졸개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떠돌고 있다는 것을 그는 � 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천부채는 하늘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었고, 그 마지막을 맺는 말은 되도록 빨� 이 곳 노애령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임도 알고 있었다.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때 이� 오십 명의 인원을 자랑하던 천부채는 어어 하는 사이에 이백으로, 다시 백오십으로 줄더니 이제 백여 명밖에 꼰� 않았다. 수색하는 동안 산채를 떠나 도망간 졸개들의 수가 더 늘었던 것이다. 이러다간 채주와 몇몇 심복 � 남 아 산채를 지키고 앉아 있게 생겨 버린 것이다. "그 전에 찾아야 하는데……!" 수색은 패왕극 진탁의 의견이었다. 진탁은 최근 산채가 맞고 있는 상황의 배후에는 분명 누군가가 있고, 그 누군가는 천부채 주변에 숨어 있 다고 보았다. 그렇지 않고는 갑자기 나타난 독물들과 죽은 물, 시기 적절하게도 죽은 독섬여 구륭의 일을 설명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염왕수 양백도 거기에 동의하고 있었다. 수색 사흘째, 천부채에서 가까운 곳부터 찾아볼만한 곳은 대충 다 뒤진 셈이었다. 그것은 이제부터 뒤질 곳에 암중의 적, 혹은 적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 했 다. 한층 더 조심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고 그것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알릴 참인데 마침 일이 벌어졌다. 가� 운 폭발음이 들리더니 계곡 깊숙이 들어간 졸개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독이다! 독!" 계곡 안쪽에서부터 자욱한 독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견뎌 왔던 안개처럼 옅은 � 이 아니라 황을 태웠을 때처럼 짙은 황색의 안개였다. "젠장……!" 양백은 그 순간 이 계곡 안 어디엔가에 암중의 적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일단은 물러나야 할 때 였다. 그는 급히 입을 벌려 후퇴를 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신음 � 먼 저였다. 발밑으로부터 솟아오른 것같이 한 사내가 나타났고, 그 사내의 손에 들린 서슬 푸른 칼날이 그의 명치 로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40. 양백보다 뒤에서 걷고 있던 위응물은 그가 살해당하는 광경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계곡의 바위틈 사이에서 솟아오르듯 튀어나온 사내,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뾰족한 칼은 마치 하나가 된 듯이 양백을 향해 달려들었고, 박혀 들어갔다. 사내와 칼은 그때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혹시 捉� 놓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두 손으로 칼을 감싸 잡고 온몸으로 양백의 품에 뛰어들었고, 그 품속으로 �과 함께 박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단 한 동작이었다. 뛰어나오고, 달려들고, 칼을 찌르는 그 세 동작이 단 한 동작으로 모두 처리되었다. 위응 물은 여태 저런 도법이라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도법이라고 말하기도 의심스러운 동작, 한 사람을 죽이 �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에 없는 사람, 그로 인해 스스로가 죽어도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을 사람이나 저� 식 으로 칼을 쓸 것이다. 그것은 도법이 아니라 단지 살인법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내는 살인의 달인이었다. 단 한 순간, 단 한 장면이지만 위응물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곧 양백을 죽인 사내가 그의 적� 을 깨닫고 등에 매어 둔 칼집에서 칼을 빼기 위해 손을 어깨 위로 올렸다. 그도 도법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다. 생전 처음 보는 도법의 소유자에게 그는 적개심 이상으로 맹렬한 투지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위응물이 정신을 차린 것은 너무 늦었다. 살인의 달인은 이때 벌써 그를 향해 덮쳐 오고 있었다 호연삼강은 양백을 찌르자마자 발을 들어 양백의 배를 차고 그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칼이 양백의 명� 에 서 완전히 빠져나오면서 피를 튀겼다. 양백의 목구멍에서 공기 새는 소리가 나오고, 비로소 그때에야 첫 탔� 을 토할 때, 호연삼강의 눈은 이미 위응물을 노려보고 있었고, 눈빛보다 빨리 칼이 방향을 바꾸었다. 핏방울이 날았다. 기름기 묻은 칼위로 번지던 선혈이 한 방향으로 쏠려 흐르면서 핏방울을 허공에 뿌려 대 었다. 핏방울의 앞에는 칼날이 먼저 반원형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호연삼강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재 � 것 없이, 약점을 노리지도 않고, 그냥 칼을 휘둘러 위응물의 가슴에서 배로 이어지는 사선을 따라 칼을 그으 � 들 었다. 뒤늦게 위응물의 칼이 칼집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는 늦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양백과 그의 거리는 세 �음 남짓이었다. 양백의 품에서 갓 벗어난 사내와 그의 거리도 그 정도였다. 사내의 칼은 두 자 정도 길이, � 기에 팔의 길이를 합쳐도 결코 그에게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혈왕도는 세 자 반의 길이였다. 한 걸음만 앞으로 다가가면 그의 칼은 사내를 벨 수 있� 만 사내의 칼은 그에게 닿지 않는다. 반 걸음 정도의 오차가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골치 아프게 후발선 �(後 發先至) 따위의 용어를 들지 않아도 먼저 한 칼을 먹이는 것은 그가 될 것이다. 식칼을 휘두르는 사내는 �을 거두어 자기자신부터 보호해야 할 것이다. 호연삼강은 칼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칼을 던졌다.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긋던 그의 칼은 이� 위 응물의 하반신을 향해 직선으로 뻗었다. 그의 손은 가슴팍에 들어가 또 하나의 칼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위응물의 내미는 발이 멈추었다. 무릎에 식칼을 꽂고는 누구도 더 걸음을 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예 璨� 의 전개와 현실의 고통이 그를 놀라게 하고, 그의 몸은 놀라움을 표시하듯 미세하게 굽었다. 상처를 확인 構� 싶어하는 본능이 시킨 일이었다. 위응물의 눈은 실수를 깨닫고 곧 다시 사내를 향했지만 그것이 그의 치 資� 인 실수가 되었다. 호연삼강의 걸음은 위응물과 달리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크게 한 걸음을 뛰어 위응물에게 바짝 � 근 했다. 그의 눈 또한 위응물의 그것과 달리 한 번도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 자욱한 독안개가 적들을 놀라� 하 는 사이 그는 이 두 명을 완전히 처리하고 싶었다. 양백과 위응물은 그의 먹이였다. 호연삼강은 칼을 그어 내렸다. 칼끝을 따라 긴 핏자국이 생겼다. 위응물의 얼굴이 죽음의 고통으로 일 瀏� 졌다. 그의 혈왕도는 힘겹게 적을 찾아 베어 갔지만 이미 바짝 파고들어 버린 호연삼강의 등짝을 후려쳐 毁� 기를 만드는 정도에 그쳐 버렸다. 그 사이에 호연삼강의 칼은 한 번 더 짧게 긋고 마침내 위응물의 늑골 瑛� 로 파고 들어갔다. 위응물의 입술 사이로 피가 튀었다. 허파를 찔린 결과였다. 호연삼강은 칼을 세 번 휘두름으로써 그의 먹이 둘을 완벽하게 처리해 버렸다. 왕돼지 채염은 별명이 말해 주듯이 비대한 사람이고, 비대한 사람은 대개 움직이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채 주 이응이 자기만 산채에 남고 나머지 사천왕을 개 쫓듯 내보내 산을 뒤지게 하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나 윤� 했지만 애당초 어디를 뒤진다거나 하는 일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 그였다. 그래서 양백과 위응물은 계곡� 조 사하러 보내고, 체구가 작아 몸이 날랜 진탁은 산봉우리마다 혹시 놓친 것은 없는지 뒤지게 해 놓고 막� 그 자신은 전체를 조망한다는 명목으로 천부채를 둘러싼 산곡들이 내려다보이는 봉우리에 자리를 깔고 앉아 値� 다. 사실 병법에도 지휘를 하는 사람은 전체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아주 그른 일은 � 니 지만 두더지처럼 땅을 뒤지고 있을 의형제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미안해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 보 상으로 다리 대신 머리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동안 그들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전반적 막� 재검토를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가……!' 누군가가 그들 천부채를 노리는 것은 확실한데 그럴 만한 인물도, 단체도 떠오르지 않았다. 구륭을 데 �러 갔던 졸개들 중 살아온 강철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독을 쓰는 거지, 서문정이었다고 했다. 그가 개방의 � 로임 에는 분명한데 문제는 개방이 그들을 건드릴 이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는 개방 장로직에서 쫓겨 ぐ� 파문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았던가. 녹림맹의 다른 산채라고 한다면 그건 개방보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인근 태행산(太行山)의 개양� (開 楊寨) 채주 혈전귀(血剪鬼) 노아자(盧亞子)는 똥개 위응물보다도 흉폭한 성질에 야심 또한 적지 않아서 � 시탐 탐 천부채를 노리던 자였다. '하지만 지금같은 때에……?' 아무리 불학무식한 노아자라고 해도 지금처럼 미묘한 상황에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녹림맹 전 체의 단결된 힘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 시점에 남의 산채에 군침을 흘리다간 자기 기반마저 잃을 수도 있� 때 가 지금이었다. '개인적인 원한인가?' 그쪽은 더욱 막막한 일이었다. 수 없는 약탈과 방화, 살인을 통해 무수한 원한을 만든 것이 그들이었다 일 일이 피해자를 기억할 수도 없을뿐더러 혹시 기억한다 해도 그중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하는지 알 방도도 騙� 다. '젠장!' 채염은 암중의 음모자를 밝혀 내는 것은 미뤄 두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일단 어디로 옮겨야……!' 그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뒤숭숭한 상태에서는 산채를 유지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당장 겨울을 나기도 힘들었다. 그들이 물 고기라면 산채 주변의 마을은 물이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물이 물고기를 떠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일� 어 딘가 다른 곳으로, 그러나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근거지를 옮긴 다음 음모자를 잡아죽이고, 다시 주변 마을의 기강을 잡아야 했다. 휴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적게 잡아도 삼 년은 걸릴 작업이었다. 한 번 옮기기는 쉽지만 정착하기는 결� 쉽 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그것밖엔 방법이 없지……!'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거려 가며 결의를 다졌다. 이제 산채에 돌아가면 채주에게 강력히 건의할 것이었 �. 그때 멀리서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염은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만치 아래쪽 어딘가에서 누런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채 염은 잠시 지형을 생각해 보고 연기가 나는 곳이 위응물과 양백이 뒤지기로 한 계곡임을 알아차렸다. 호 ♠� 리는 거기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뭘 발견했나?' 발견은 둘째치고 무언가 사단이 일어난 것은 분명했다. 그는 비대한 몸을 움직여 봉우리 아래로 내려� 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뚱거리며 내려가는 동안 산 이쪽저쪽에 흩어져서 뒤지던 진탁의 졸개 오십여 명이 호 ♠� 리가 울리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젠장, 똥개 자식! 급하긴 급한 모양이군! 약속한 암호는 어쩌고 저렇게 제멋대로 불어제끼는걸 보니… �!" 채염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아차!" 그는 경탄성을 토하며 무릎을 쳤다. 그리곤 지금까지의 그와는 다르게 전속력으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 다. 그의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함정이다! 거기 접근하지 마!" 왕돼지 채염이 갑자기 날개라도 돋은 것처럼 달려 내려오는 사이에 몸이 날랜 진탁은 이미 골짜기 입� 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는 미처 도착하지 못한 수하들을 기다리며 골짜기 안쪽을 쳐다보았다. 골짜기는 꽤 깊은 곳인 듯 입구쪽에 서서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단지 저만치 안쪽에서 피어오른 듯 싶은 누런 연기가 이젠 점차 흐려진다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호각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진탁은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거렸다. 양백과 위응물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 같긴 한데 수하들이 모이지 않 아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워낙 넓게 퍼져서 수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졸개들이 반도 채 모이지 않고 獵� 것이다. 그는 그의 이름을 날리게 한 무기 패왕극을 움켜쥐었다. 다섯 자가 겨우 넘는 키의 소유자였지만 그런 단 신의 열등감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그는 장장 일장 삼척의 창을 사용했다. 여포(呂布)가 썼다는 방천화극 方天 畵戟)을 닮아 반월형의 칼날이 창날의 양쪽으로 붙어 있는 것이었다. 언제든 그 창을 잡으면 진탁은 힘� 얻 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진탁은 창을 휘둘러 골짜기를 가리켰다. "뒤엣 놈들은 쫓아오라고 하고 우리끼리 일단 들어가자! 전진이다!" 진탁이 앞서고 졸개들이 그 뒤를 따랐다. 죽은 시내와 회색의 바위를 건너뛰고,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湧� 피해 달려가던 그들의 눈에 전의가 불탔다. 그러나 한참을 달려들어가도 골짜기 안은 조용하기만 하고, 분위기는 점점 음침해지기만 했다. 그들의 �음 이 점차 느려졌다. 진탁도 뭔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멈춰서 버렸다. '이렇게 무작정 들어가도 되는 일일까?' 물론 안되는 일이었다. 그것을 그제야 골짜기로 뛰어들어온 채염이 확인시켜 주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후퇴해!" 진탁은 멀리서 채염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뒤도 안 돌아보고 뛰기 시작했다.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 능 이 먼저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졸개들을 위해 한 마디 남겨 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후퇴하라!" 그 순간 땅 속에서, 골짜기의 바위틈에서, 죽은 나무 둥치 속에서 일제히 누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疇� 기 안은 순식간에 연기에 휩싸여 버렸다. 채염은 입을 막고 급히 뒤로 뛰었다. 거대한 공을 연상시키는 그의 비대한 몸이 공중에 떠서 쏘아지듯 뒤 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골짜기에 깊이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로서는 거의 초인적인 반응을 보인 것인 Ⅵ� 불구하고 순식간에 골짜기를 삼켜 버린 연기를 한 모금 들이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허파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나고 잠시 몸이 마비되었다. 채염은 그대로 입을 벌려 遂� 을 토하면서 골짜기에서 멀어지려고 뛰었다. 진탁의 졸개들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독한 � 기이 니 골짜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허리를 꺾고 기침을 토하던 채염의 머리� 떠 오른 첫 번째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생각은 또 하나의 함정에 대한 것이었다. 채염은 겨우 기침을 진정시키고 졸개들을 향해 손짓했다. "산채가 위험하다! 산채로 가자!" 41. 위응물과 양백이 호연삼강의 칼에 최후를 맞기 조금 전에, 그때까진 독연기도 없고 종말의 조짐도 보� 지 않던 바로 그 때, 진탁은 날래게 나무 사이를 헤집고 채염은 산봉우리 위에서 게으른 하품을 토하고 있� 그 때에, 왕일과 손부자, 그리고 열 명의 창주 청년들은 천부채의 통나무 울타리가 내려다보이는 얕은 언덕 위, 바위와 낙엽이 만들어 준 그늘 속에 숨어 있었다. 천부채는 뒤로 험준한 바위벽을 두르고, 앞으로는 울창 � 삼 림들로 몸을 가린 천혜의 요지. 그 삼림들을 천부채에서 오 장여 앞부터는 잘라 내 버리고 통나무 울타� 를 쳤는데, 그것은 감시와 방어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미 왕일이 정찰했을 때도 그런 것을 느꼈지만 위를 뾰족하게 깎아서 촘촘하게 박아 놓은 통나무 울� 리 는 성채와도 같이 견고하고 삼엄해 보였다. 게다가 십여 장씩 사이를 두고 높은 망루가 서 있고, 거기마� 산 채의 졸개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졸개들 대부분이 수색을 나가 지키는 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繭� 고 계산하면서도 왕일 일행이 섣불리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저 망루가 특히 문제군!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손부자의 얼굴은 삼십여 년에 걸친 안락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가 청년기에 겪어 온 고난을 말해 주� 이 험한 암벽처럼 흠집이 많았다. 그 흠집 많은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도록 내심을 가려 주는 역� 을 하곤 했는데 지금도 그랬다. 고민스러운 어조였지만 표정은 무뚝뚝하게 굳어 있어서 감정의 오라기가 걸� 있 지 않았다. 왕일은 손부자의 고민거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해결방안도 가지고 있었다. 손부자에게 별다른 방법� 없 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니 이제 그가 나설 차례였다. "망루는 제가 처리하지요. 그 다음엔 계획대로 움직이면 되겠지요." 손부자는 의심스러운 빛으로 왕일을 보았다. 왕일은 등에 매어 두었던 활을 꺼내 들어 보였다. 손부자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손을 들었다. 임박한 전투 때문에 바짝 � 장 한 청년들의 얼굴들이 돌처럼 굳었다. 손부자는 그 눈치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오히려 표정을 풀며 말했 �.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누구든 빠질 사람은 여기서 빠져도 좋다." 한순간에 청년들의 얼굴이 모욕이라도 받은 것처럼 붉어졌다. 손부자는 얼른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미안하네.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 그는 청년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자네들을 기억하겠네." 그는 고개를 돌려 왕일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처음의 그것으로 돌아갔다. 왕일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들의 표정이 손부자의 표정과 비슷해진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流� 은 이제 긴장보다는 투지가 우세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왕일은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활에 시위를 걸었다. 무릎을 세우고 시위에 화살을 건 다음 힘껏 � 겼 다. 목표는 그들로부터 가장 가까운 망루였다. 당연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온 것이지만 대폭 인원이 줄어든 산채에서는 망루에서 망루까지 이목을 � 간 할 정도의 거리 이내에 초병을 세워야 한다는 점을 무시하고 하나 건너 하나씩 초병을 세우고 있었다. 게 鳴� 다들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집을 지키는 격이라 긴장이 풀린 듯했다. 울타리를 넘어가기 전에 그들을 발� 할 가능성이 있는 두 망루의 졸개들만 미리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첫 번째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망루 위의 졸개 둘 중 하나가 소리 없이 뒤로 넘어갔다. 옆에서 딴 짓� 하 던 졸개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 두 번째 화살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손부자의 눈빛에 경탄의 빛이 번뜩였지만 지금은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앞을 향해 힘차게 손 을 뿌렸다. 청년들이 신속하게 울타리 아래로 붙었다. 다음 망루를 노린 왕일의 세 번째 화살은 잠시 시간을 두고 발사되었다.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겨냥할 시 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명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확하게 목표의 목구멍을 꿰뚫지 못했 쩝� 가냘픈 비명 소리가 새어나왔고, 다른 쪽을 보고 있던 나머지 졸개가 입을 크게 벌려 적의 내습을 알리� 했 다. 그 입에 왕일의 네 번째 화살이 꽂혔다. 졸개는 그대로 피를 뿜으며 망루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는 왕일로서는 할 도리를 다한 셈이었다. 들키고 안 들키고는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손부자� 청 년들이 울타리를 넘어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쫓으며 활을 거두고 대신 칼을 뽑아 들었다. 그 상태로 그� 손 부자들이 넘어간 울타리와 가장 떨어져 있는 울타리로 달려갔다. 울타리는 높았지만 통나무를 묶은 줄이 있고, 군데군데 채 다듬지 않은 옹이도 있어 넘어가기에 어렵� 는 않았다. 게다가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왕일이 울타리 위로 상반신을 내밀자 이미 산채 이쪽저쪽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몇 군데에서는 � 길 이 치솟고 있었다. 검은 연기는 사전에 왕일이 나눠준 미혼탄의 연기일 것이고, 불은 방화의 흔적일 것� 다.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왕일은 그대로 울타리 아래로 뛰어내린 다음 최대한 몸을 숨겨 가며 산채의 뒤쪽을 향해 달렸다. 손부� 와 청년들이 무차별 살상을 하며 산채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동안 그는 누이동생을 구한다. 이것이 그들의 계 뮌� 었던 것이다. 박산조 이응은 사십 평생을 살면서 취미라고는 단 두 가지밖에 안 만들었다. 하나는 가지고 있는 재� 을 점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를 탐하는 것이었다. 어느 것도 다른 하나에 뒤지지 않게 좋아하는 것 訣� 만 요즘처럼 일이 안 풀릴 때는 특히 후자를 즐겨 했다. 만지면 터질 것 같은 여인의 육체를 괴롭히고 탐 槿� 다가 아랫배에 쌓인 묵직한 것을 쏟아 내고 나면 가슴에 쌓인 울화도 같이 해소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 �. 그리고 난 뒤에 찾아오는 기분 좋은 나른함, 그 순간이야말로 사람이 사는 동안 느낄 수 있는 가장 평화 恝� 순간이며, 비로소 살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 같게 만드는 단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대낮부터 그 좋아하는 짓을 하면서도 영 마음 한구석에 쌓인 찌꺼기가 떨쳐지지 않� 다 고 느끼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여인을 갈아치워가며 힘을 쓰고 있는데도 영 흔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뼙� 럼 집중도 되지 않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가장 음탕한 생각을 떠올리고 몸은 혹시 식을까 두려워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데도 양물이 자 꾸 시들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계집의 감창소리라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없는 소리를 � 지로 꾸며 하고 있다는 것이 귀에 그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어코 그는 화를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망할 년이!" 그는 왕령의 몸에서 몸을 떼며 욕설을 뱉었다. 이응이 보지 않고 있을 때는 무감동을 넘어 짜증스러운 기 색까지 감추지 않고 있던 왕령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과연 욕설 바로 뒤로 손찌검이 날아왔다. "아악-!" 이응은 튀어나온 배 아래 아직 완전히 시들지 않은 양물을 감추지도 않고 씨근덕거렸다. "여태 배운 것이 그것밖에 안돼, 이 망할 년아!" 발이 날았다. 왕령의 가냘픈 비명이 대답처럼 튀어나왔다. 옆에서 시중이랍시고 알몸을 비벼 대던 두 ㈏� 이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바닥에 엎드렸다. 이응의 성질을 건드려서 방사 중도에 끌려나가 목이 잘려 버� 여 인이 적지 않다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렇게 걱정이 되지는 않는 것이 지금 이응의 성질을 건드린 여인이 왕령이었기 � 문 이었다. 천부채의 여인들 중에 가장 미색이 뛰어나 좀처럼 이응의 기분을 맞춰 주지 않는데도 가장 아낌� 받 던 왕령이니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응은 뺨을 움켜쥐고 웅크린 왕령의 모습에서 새로운 욕정을 느꼈는지 방사를 다시 진행할 모양� 었 다. "엎드려!" 왕령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응이 다시 명령했다. "개처럼 엎드리란 말야, 이 년아!" 왕령은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몸을 돌려 침상에 엎드렸다. 이응의 말대로 개처럼. 이응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왕령의 뒤로 다가갔다. 양물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즐거움이 쳄�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이응을 들뜨게 했다. 그러나 오늘은 역시 불쾌한 날이 되고 말 모양이었다. 갑자기 문밖에 소란스러워 진 것이다. 게다가 � 소 란스러움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이응은 한껏 인상을 쓰고는 신경을 귀에 모았다. 어디에선가 비명과 고함, 그리고 병장기 부딪는 소리� 들 려 오고 있었다. 그는 표정을 굳히고는 벽에 걸려 있던 옷을 집어 바지부터 꿰어 입었다. 윗도리는 입을 珝� 도 않고 손에 든 채 문을 걷어차 열었다. "무슨 일이냐?" 문밖에서 입직을 서던 졸개 둘은 이응의 말에 오히려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내공을 익힌 이응� 큼 청력이 좋지 않아 고함도 비명도 못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응은 그들의 뺨을 한 대씩 후려치고는 시야를 가린 지붕들 너머를 가리켰다. "네놈들 눈에는 저 모습은 보이지도 않느냐?" 검은 연기와 화광이 그제야 졸개들의 눈에도 들어왔다. 산채의 어딘가에 화재라도 난 것일까? 이응은 윗도리를 내던져 버리고 무기를 꺼내었다. 손에 끼울 수 있도록 쇠로 틀을 만들고, 거기 날카� 운 낫처럼 생긴 손톱들을 단 그의 애병, 구혼조(拘魂爪)였다. "따라와!" 이응이 앞장서고 졸개들이 뒤를 따랐다. 산채 곳곳에 붙은 불은 이제 더욱 거세져서 이곳 저곳 불덩어리를 이루고, 그 속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 라 허둥대는 졸개들이 섞였다. 개중에는 제풀에 꼬꾸라져서 일어나지 않는 놈도 있었다. 사방에서 고함소 �가 들려 오고 있었다. 분명히 적이 습격한 것이었다. 적은 곧 보였다. 산채의 졸개임이 분명한 사내 하나가 코와 입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려 하자 처음 보는 젊은 놈 하나가 칼로 쳐죽이는 것이 이응의 눈에 들어왔다. 이응은 졸개가 왜 쓰러지는 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求� 달려들어 젊은 놈을 후려쳤다. 구혼조가 젊은 놈의 등을 그어 길게 자국을 남겼다. 젊은 놈은 처절한 비 資� 지르며 쓰러져 굴렀다. 다시 확인해 봤지만 분명 처음 보는 자였다. 이응은 입을 벌려 소리쳤다. "채주가 여기 왔다! 천부채의 식구들은 어디 있나?" 대답이 없었지만 이응은 더 묻지 못했다. 고함을 지르고 숨을 들이쉬자 연기가 들어왔고, 연기를 들이 떽� 는 순간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연기 속을 빠져나왔다. 셈� 공기를 몇 번이나 심호흡하듯 들이마시자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얼음처럼 냉정해져 버렸다. 보통 상황이 아님을 느낀 것이다. 이응은 잠시 주위를 둘러 만�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가 알아차린 것은 적지 않았다. 적은 미혼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결코 많은 인� 은 아니었다. 이곳 저곳에서 고함소리가 나긴 하지만 그 목소리는 여럿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를 아는 사람이면 모두 따를 것이라고 기 대하면서. "적은 많지 않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히 응전하라! 살아남은 자들은 용호전(龍虎殿)으로 집결하라!" 세 번 연속해서 외치고 이응은 그 자신부터 먼저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의 별호에 새 조(鳥)자� 들 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이 바로 구혼조로 펼치는 조공(爪功)과 연비어 �(燕 飛魚躍)의 경공술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 번 도약에 삼 장여나 치솟아 올라가며 주변을 둘러보고, 허공에 � 한 번 회전하며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는 이름 그대로 새처럼 몸을 날려서 용호전으로 향했다. 연기를 뚫고 솟아오른 이응의 모습을 본 천부채의 졸개들이 비로소 갈 곳을 찾았다. 그들은 그때까지 � 왕 좌왕하던 것에서 벗어나 용호전을 향해 달렸다. 그곳에 가면 무언가 대책이 준비되어 있을 것을 기대하� 서. 그들은 어미 닭을 찾은 병아리처럼 몰려갔다. 42. 이응만이 아니라 천부채의 식구들에게 오늘 하루는 정말 재수 더러운 날로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었다. 특 히 채염이 더한 것은 평소 그렇게 움직이기 싫어하는 그가 오늘은 벌에 쏘인 소처럼 계속 뛰어야 했기 때 �이 었다. 진탁도 재수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일찍 빠져 나온 덕에 겨우 살아남기는 했지만 피부 곳� 이 쓰라린 것을 보면 분명히 중독이 된 상태였고, 산채로 돌아가지 못하면 치료할 방법도 없는 신세였다. 그렇게 재수 더러운 두 두목이 인솔해서 산채로 돌아가는 일당의 앞에 더욱 재수 없는 일이 생겼다. � 서 가던 졸개 몇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구르는 것이었다. 경계태세를 취하고 다가간 진탁의 눈에 묘한 같� 이 들어왔다. 가시를 뭉쳐 놓은 것같이 생긴 쇠붙이, 강호에서는 보통 철질려(鐵疾黎)라고 부르는 암기가 땅바 닥에 깔려 있었다. "젠장! 또 함정이야!" 진탁은 욕설을 뱉으며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땅바닥에 쓰러진 졸개들의 얼굴이 벌써 검게 물들은 � 으 로 보아 독이 발린 철질려임이 분명했다. 또다른 함정이 여기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채염은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졸개들이 슬금슬금 물러서고 있었다. 여기서도 독, 저기 �도 독이었다. 이젠 독이라는 말만 들어도 오줌을 쌀 지경이었다. 애초에 백 명이나 나왔는데 이젠 겨우 삼십 여명 밖에 안 남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독은 여기서도 그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머리를 풀어헤친 사내 하나가 � 옆 에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들을 향해 검은 물체를 던졌다. 누런 연기가 솟구쳤다. 당연히 독이었다. 제때 � 하지 못한 졸개 몇몇이 기침을 토하며 쓰러졌다. 채염과 용케 독연기를 피한 졸개들이 급히 뒤로 물러나는데 譴� 에는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도 검은 물체가 던져졌다. 양백은 소리쳤다. "젠장, 돌파밖에 없다! 숨을 참고 그냥 뛰어라!" 진탁이 그 말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숨을 멈추고 창을 흔들면서 앞으로 뛰었다. 몇몇 졸개 湧� 그 뒤를 따라 뛰었다. 뛰면서 숨을 참는다는 것, 그것도 오래 참는다는 것은 고수가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진탁과 소� 목 몇 명을 제외하고는 독연기를 뚫고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졸개들도 하나 둘 정도 겨우 연기를 뚫� 나 오더니 뒤늦게 발작한 독기 때문에 쓰러져 뒹굴다가 죽었다. 독 때문에 죽지 않은 사람들의 말로도 비참했다. 그들은 독기운만 두려워했을 뿐 그 독을 뿌린 사내, ？� 삼강의 칼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칼도 독만큼이나 확실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제일 먼저 뛰어나간 진탁의 가슴팍에 날카로운 물체가 날아들었다. 진탁이 본능적으로 방천화극을 휘� 르 며 몸을 움츠렸지만 이미 그의 아랫배에는 날카로운 칼이 틀어박히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꼬꾸라졌다. 호연삼강은 칼을 날려 진탁을 쓰러뜨리고는 양손에 각각 칼 한 자루씩을 들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진� 의 뒤로 나타난 두 소두목이 목표였다. 그들 역시 엉겁결에 무기를 휘둘렀지만 호연삼강의 기습을 막기에는 ず� 족이었다. 소두목 하나의 가슴팍에 뛰어들며 칼을 꽂아 놓은 호연삼강은 칼을 뺄 생각도 않고 몸을 떼며 다른 소� 목 을 향해 나머지 칼을 휘둘렀다. 소두목의 가슴팍에 길게 상처가 났다. 소두목은 비틀거리며 칼을 휘둘렀 嗤� 허공에 대고 휘두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팔 길이를 겨우 넘을 정도의 거리로 바짝 붙은 호연삼강 “� 그의 긴칼은 별 타격이 되지 않았다. 호연삼강은 어깨에 가벼운 타격을 받았지만 무시하고 다시 한 번 소두목에게 붙으며 칼을 휘둘렀다. � 두 목의 배가 갈라지며 피가 튀고 창자가 삐어져 나왔다. 호연삼강은 그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고 뒤로 물 �섰 다. 다른 목표물이 그때 연기를 뚫고 나왔다. 호연삼강은 그를 향해 칼을 던졌다. 목표물은 연기를 뚫고� 오자 마자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칼에 목구멍이 뚫리면 그렇게 않고는 별 도리가 없었다. 호연삼강은 다시 품속을 뒤져 칼을 꺼내었다. 아직 한 자루가 가죽띠에 남아 있었다. 마지막 한 자루, 岵� 없어질 때까지 잡고 휘둘러야 할 한 자루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휘두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의 등뒤 【� 부터 찔러들어온 창날이 배로 튀어나오는 것을 호연삼강은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 눈 으로 그 모습을 보고, 그 다음으로 궁금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도대체 누가 그를 찔렀 뺑�? 그러나 일장 삼척이 넘는 긴 방천화극은 그가 몸을 돌리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진탁은 죽기 직전의 마� 막 힘으로 방천화극을 비틀었고, 호연삼강은 누가 그를 죽이는지 확인하지 못한 채 그대로 꼿꼿이 서서 고� 를 떨구었다. 뚫고 나가라고 소리친 사람은 채염이었지만 막상 그는 진탁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 는 바람이 등뒤에서 앞으로 불어온다는 것을 알아내고 오히려 뒤로 뛰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뛰는 痼� 연기를 덜 맡는 방법임은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도 적은 있었다. 호연삼강과 함께 계곡에서 적을 穗� 리고, 다시 산채로 돌아가는 적을 방해하는 역할을 맡은 정이노였다. 정이노의 원래 특기는 권법이었지만 지금 그는 천부채의 졸개가 떨어뜨린 귀두도를 들고 있었다. 주먹� 로 때려죽이는 것보다는 칼을 사용하는 것이 대량학살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의도는 적중해서 냅� 몇 명은 간단하게 목을 떨구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채염쯤 되는 인물과 싸우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채염은 체구에 걸맞지 않게 가장 교활하게 피해 다녀 독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진� 과 달리 뒤에도 적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연기 속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그의 손에는 그� 유 명하게 만든 무기, 천왕검이 들려 있었고, 졸개들을 죽이는 정이노의 모습을 보자마자 장기로 삼는 천왕 薑� (天王劍法)에서도 가장 악랄한 초식을 펼칠 수 있었다. 천왕경혼(天王驚魂). 검을 휘둘러 적을 베어 가다 � 방 어동작이 들어오면 신속하게 찌르는 동작으로 변화하는 초식이었다. 채염이 검을 휘둘러 공격해 올 때 정이노는 막 한 졸개의 목을 떨구는 순간이었다. 검이 닿기 전에 그 차 가운 기운이 먼저 피부를 찌르는 것으로 보아 적은 상당한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정이노는 급히 칼을 令� 러 그 기세를 차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칼에 부딪치는 기세는 없었다. 칼은 아무 것도 베지도, 막지 � 못 하고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대신 날카로운 기세는 그의 목과 가슴, 배, 이 세 곳을 동시에 찔러 오고 있 駭�. 정이노는 이때 칼을 던지고 원래의 특기인 권법을 사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싸우는 도중에 무기를 버리� 것 또한 금기사항, 그는 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칼을 거두어들여 이어질 공격에 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칼� 무 겁고 검은 빨랐다. 그는 가슴팍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채염은 그 순간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알았다. 비무를 할 때는 거드름도 피우고, 사양도 하며, 적을 다 “� 하는 것보다는 먼저 자기 몸을 방어하는 법이지만 어차피 목숨을 건 싸움에서는 죽이지 못하면 자기가 � 는 법. 승부는 한 두수 안에 결판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대개는 선제 공격을 한 사람이 이겼다. 채염은 적이 물러서는 것을 보고 그대로 검을 찔러 들어가 가슴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는 � 을 돌려 상대의 목을 휘감았다. 천왕검법 제 이초식 천왕잔혼(天王殘魂)이었다. 정이노는 가슴에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도 칼을 들어 방어하려고 했지만 이미 검은 그의 목을 감고 있었 �. 그는 방어할 생각을 버리고 칼로 적을 마주 찔렀다. 같이 죽자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초식이었다. 그 순간 그의 목이 몸에서 떨어졌다. 채염은 적의 마지막 발악으로 생긴 팔의 상처를 감싸 쥐고는 씨근덕거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너무 많이 움 직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더 뛰어야 할 일이 있었다. "젠장!" 강철은 독섬여 구륭을 모시러 갔다가 살아 돌아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원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 한 죄로 목이 떨어졌어야 할 몸이지만 암중의 적을 찾아 죽인 뒤에 그들의 목과 같이 포장해서 천기채로 립� 다는 이응의 계획 때문에 죄인을 가둬 두는 토굴에 갇혀 있었다. 토굴이라는 것이 몇 사람을 겨우 집어넣을 정도로 얕게 파여진 곳인데다가 산채가 내려다보이는 암벽 � 턱 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소란이 일어난 것을 제일 먼저 안 것이 그였다. "부엉이 형님!" 얼굴이 둥글넓적한데다가 눈마저 튀어나와서 원래 이름보다는 부엉이라고 더 잘 불리는 토굴 담당 소� 목 이 그를 돌아보았다. "왜?" "산채에 변고가 생겼으니 저 좀 풀어주세요!" "변고가 생겼는데 왜 널 풀어 줘야 하냐?" "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도망가려고?" "제가 얼마나 채주님께 충성하는 지는 형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그런 제가 도망가려고 이러겠어요?" "곧 죽게 생겼으니 도망 안가고 어째! 나 같아도 도망가겠다." 강철은 가슴을 쳤다. 산채에 일이 생기자 마자 그의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芽� 한 부엉이라는 놈이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방법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곧 실천에 옮겼다. "좋아요. 그럼 저야 그렇다고 치고 형님은 여기 그냥 있을 참입니까?" "내가 어째야 하는데?" "가서 불을 끄든, 적을 막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냥 불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그러면 형님도 나중� 무 사하지 못할 걸요!" 부엉이가 그제야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럴까?" "당연하죠!" "그럼 어쨌으면 좋겠냐?" "일단 저를 풀어 주시고, 같이 채주님을 도우러 가지요. 공을 세우면 저도 용서받고, 형님은 출세하고 좇� 습니까!" 부엉이가 일껏 망설이는 그 때 이응이 공중에 치솟아 오르고 용호전에 모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세요! 다 모이라지 않습니까! 보통 상황이 아니라니까요!" "좋아, 열어는 주는데……, 도망가면 안돼!" 부엉이가 열쇠를 꺼내 토굴을 막은 목책을 열어 주었다. 강철은 목책이 열리자 마자 쏜살같이 뛰었다. "저런 나쁜 놈! 도망가지 말랬는데!" 부엉이가 그의 뒤를 쫓아왔다. 강철이 향하는 곳은 왕령이 있는 곳이었다. 전날 왕령과 종두기의 대화가 아무래도 걸렸던 차에 이런 � 이 있자 그의 본능은 왕령을 확인해야겠다는 쪽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왕령에게 아무 일이 없다면, 이 일과 왕령과는 아무 상 活� 없다면 그는 탈주자에다가 배신자로 몰려 영락없이 목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도박이 성공한다면 榴�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천부채에 큰공을 세우게 될지도 몰랐다. 그의 도박은 성공했다. 저만치에서 다른 길로 왕령의 처소로 달려오는 인물을 보는 순간 그는 그걸 알� 다. 일전에 그를 부상시키고 유인걸을 죽인 문제의 사냥꾼임을 먼 눈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왕일을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저놈입니다. 저놈을 잡으면 채주님이 크게 포상하실 겁니다!" 그를 쫓아오던 부엉이가 잠시 망설이다가 포상이라는 소리에 혹해서 왕일을 맞이해서 달려갔다. 강철은 그 틈에 왕령의 처소로 뛰어들었다. 43. 문이 부서져 나가고 문 뒤에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주워 입는 왕령과 엉거주춤 그를 돌아보는 종 두기였다. 강철은 그대로 몸을 날려 종두기의 턱을 걷어차 버렸다. 종두기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지만 그 � 것 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종두기가 반대편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턱이 부서졌는지 얼굴이 한순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철 은 그제야 종두기가 든 칼을 발견하고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이제 막 꿈틀거리며 일어서려는 종두기를 � 칼 의 첫 희생자로 삼았다. 한 칼에 종두기의 목이 떨어져 버렸다. 왕령이 비명을 질렀다. 종두기의 목에서 솟는 피가 그녀에게 튀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강철이 그녀의 � 을 잡아 비틀고 목에는 피와 기름기 번질거리는 칼날을 가져다 대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문 앞에 왕일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번개를 맞은 듯이 움직이지 못했다. 팔 년만에 만나도 누이동 萱� 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 누이동생의 목에 칼이 대어져 있는 이상 반가워 할 수도 없었다. 왕일은 강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강철도 그를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은 묘하게도 洲� 했다. 왕일은 그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공이야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독 을 배운 이상 당장이라도 쓰러뜨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적의 손에는 그의 가장 큰 약점이 쥐어져 羚� 다. 혹시라도 섣부른 짓을 하다가 누이를 잃고 만다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이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왕일은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무얼 원하나?" 강철이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입가에 떠올렸다. 그의 도박은 성공한 것이다. 그는 왕령의 목에서 칼 을, 왕일의 모습에서는 시선을 떼지 않고 천천히 방밖으로 움직였다. "지금 거리를 유지해! 한 발이라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면 이 계집의 피가 얼마나 붉은지 구경하게 될 거 야!" 용호전은 천부채의 본채라고나 할 장소였다. 그래서 천부채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고,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응이 이곳으로 퇴각하도록 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성질상 럭� 깔릴 수밖에 없는 독안개가 미치지 못할 정도로 높은 지대가 이곳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방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안개 속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독안개는 산채의 몇 군 �에 만 뭉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응의 추측은 맞았다. 침입자는 많지 않았다. 몽혼약도 그렇게 위력적인 것은 아니고, 풍족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은 듯했다. 게다가 하늘이 그를 돕고 있었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렸던 회색 하늘이 황혼 녘이 다 되어서야 꿈틀거리더니 드디어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응의 손등에 한 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 점, 또 한 점. 이윽고 쌀알 같은 눈이 籌� 럼 뿌렸다. 독안개, 독연은 살상 범위가 넓고 사용하는 독약에 따라서 다양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 이 지만 막상 그것으로 공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형이 맞아야 하고, 기후가 적당해야 한다. 바람� 라도 거꾸로 불어 버리면 공격한 쪽이 오히려 당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중간에 눈이나 비라도 오면 만사 끝이� . 연 기든 뭐든 눈과 함께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던 안개가 급속도로 엷어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시야는 여전히 흐 렸다. 비처럼 뿌려지는 눈발이 안개를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그 눈발을 뚫고 몇 개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 杉�. 이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림잡아 삼십 여명 정도의 졸개들이 서 있었다. 어떤 놈은 무기 대신 물� 을 들고, 또 어떤 놈은 옷도 채 갖춰 입지 않은 그대로 나와 있었다. 그나마 독에 쓰러지지 않고 용호전까지 모인 사람은 그게 다였다. 이들을 데리고 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적은 많지 않았다. 양손에 어른의 머리통 두 개만큼이나 큰 팔방추를 든 노인이 눈발을 뚫고 나타났다. 그가 우두머리인 � 양 이었다. 하나같이 칼로 무장한 청년들 다섯이 노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칼도 산채에 � 쓰 는 귀두도가 아니라 유엽도(柳葉刀)였다. 이응은 구혼조를 낀 손을 들어 노인에게 삿대질을 했다. "누구냐?" 손부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응을, 그리고 이응의 뒤에 선 졸개들을 살펴보았다. 서른 명만 남기고 � 충 다 처리를 했으니 그들은 오늘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남은 서른 명이 문제였다. 그들 ㈋� 으로 서른 명을, 비록 그 대부분이 오합지졸이라 해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저 중엔 소두목급의 인물들도 있겠지.' 일개 졸개면 몰라도 소두목급의 인물이라면 창주의 청년들이 상대하기 벅찰 것이다. 그는 이응을 상대� 야 하고, 그나마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이렇게 늙어 버린 몸으로는……! 그러나 싸우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오늘 이 순간이 아니고는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 문 이었다. 그는 손에 든 팔방추를 내려다보았다. 팔각형의 면 서른 두 개로 이루어진 쇳덩이, 그 하나 하나의 면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새겨져 있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는 순간, 그리고 이 순간 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의 무량 세계가 열리는 바로 그 순� 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후에야 공(空)에 들겠다고 맹세한 부처, 관세음보살� 었다. 적을 죽이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이 그림을 보고 살생을 자제하겠다는 생각에 새긴 그림이었지만 지금� 지 그의 팔방추는 무수한 피를 거기 묻혀 왔었다. '오늘 드디어 내 피를 묻히게 될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대로 그냥 그렇게 싸우고, 죽으면 될 舅� 었다. 손부자는 팔방추를 들어 이응을 가리켰다. 이응이 그렇게 한 것처럼. "하늘의 사자!" 이응은 뭘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고 귀를 기울였다. "뭐?" "네 죄악을 벌하러 보낸 천명(天命)의 대리인이다." 손부자는 싱긋 웃었다. 젊은 날의 호기가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팔뚝에 원인 모를 힘이 꿈틀거렸다. "죄인은 머리를 내밀어라! 악으로 가득찬 네 머리를 바수어 지옥으로 던져 버리리라! 그렇게 백 번을 � 죽 고 나기를 반복하면 혹시 극락으로 갈지도 모르니!" "미친 놈!" 이응은 이를 갈며 뛰어올랐다.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두 팔은 매의 날개처럼 펼쳐져 균형을 잡고, 양발은 학의 다리처럼 교차하며 손부자를 걷어찼다. 擥� 자의 팔방추가 그의 다리를 후려쳐 왔다. 이응이 기다린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한 모금 호흡을 삼키고 � 기를 운행시켰다. 한 순간 그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는 다리를 번갈아 움직여 손부자의 팔방추를 피 構� 오히려 발끝으로 그 팔방추를 찍었다. 이응은 새의 깃털처럼, 물을 박차고 나르는 제비처럼 공중으로 떠 철� 다. 이제 그는 충분한 상승력을 갖추었다. 절기인 박산조가 나올 준비가 된 것이다. 손부자는 몸을 웅크렸다. 첫 공격이 빗나가고 오히려 적이 그의 무기를 발판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를 때 그 는 이미 위험을 예감했다. 애당초 이응이 그보다는 고수인데다가, 그의 팔방추와 같이 무겁고 짧은 병기� 날 랜 동작을 주무기로 하는 이응과 같은 자와 싸울 때 쓸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손에 익은 병기를 두� 다 른 것을 드는 것은 더욱 금물이 아니었던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볼 수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이응이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쏘아져 왔다. 쥐라도 낚아챌 듯한 손, 그리고 그 끝에 달린 발톱, 구혼 떠� 매서운 섬광을 발하고 있었다. 창응박토(蒼鷹搏兎)의 일초였다. 손부자의 몸이 펴지며 팔방추가 어지럽게 움직였다. 촤앙-! 이응의 구혼조와 손부자의 팔방추 사이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그 불꽃 사이로 하얀 섬광이 빛나고, 擥� 자의 어깨죽지 살이 옷과 함께 찢어져 날렸다. 쉬잇-! 이응의 이사이로 뱀의 입김과도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방금의 격돌로 힘을 빌어 공중에서 � 시 몸을 회전시키고 있었다. '쌔엑'하는 소리와 함께 구혼조가 다시 손부자의 어깨와 등을 갈랐다. 손부자는 여전히 팔방추를 어지 눗�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응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것은 면하고 있 鄕� 만 이응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밭고랑 같은 상처가 그의 몸에 그어지고 있었다. 촤악-! 손부자는 비틀비틀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방금의 일격으로 또다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것을 알 수 있 었다. 다행히 이응은 이젠 진기가 떨어졌는지 땅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튀어 올랐다. 그의 � 격에 는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과 기세가 뿜어지고 있었다. 손부자는 몸을 웅크리고 다시 몇 걸음 물러나면서 곁눈질로 주위 상황을 훑어보았다. 창주의 청년들과 천 부채의 도적들은 이미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예상대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처음 기세로 봐서는 그들이 耳� 했지만 도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나마 기습한 덕분에 제대로 무장을 못한 자들이 많다는 것이 다행 潔� 다. 이응은 손부자가 물러서자 땅을 짚으며 다시 날아올라 덮쳐 갔다. 오늘 그는 무기의 유리함과 무공의 � 위 를 바탕으로 압도적인 싸움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절기는 공중에 떠서 공격을 하는 것이고, 적의 무기는 瀏� 도 상관없도록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만약 적이 채찍이나 창, 혹은 날랜 칼과 같이 예리한 무기를 들었다 � 싸 움이 이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적은 지금 계속 물러서고 있었다. 그의 박산조는 이렇 � 물 러서는 자에게 더 강했다. 도약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기세가 예리해지는 무공이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일격에……!' 적의 안면을 긁어 주리라고 생각하고 덮쳐 드는 순간 손부자가 몸을 폈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그의 � 에 서 포탄과도 같은 물건이 쏘아져 왔다. 이응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덮쳐 가던 기세에서 그게 그 린�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쏘아져 오는 물체도 하나가 아니었다. 손부자가 팔방추 둘을 동시에 던졌� 것 이다. 이응은 하나는 겨우 피해도 다른 하나까지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에는 발로 걷어차려 했 �. 발이 부서지는 것이 머리가 박살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빡-! 무거운 물체에 부딪혀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이응은 공중에서 곤두박질을 치며 날� 가 땅에 굴렀다. 발 하나가 박살이 났음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픈 발보다 더 다급한 문제� 이 때 그에게 닥쳐왔다. 손부자의 팔방추가 그를 박살낼 듯이 휘둘러 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손부자는 무기 자체를 날린 것이 아니었다. 그의 팔방추는 애초에 손잡이와 추가 분리가 되고, 그 사� 에 쇠줄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유성추처럼 쓸 수도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었다는 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약점을 보이다가 한 순간 반전을 시킨 셈이었다. 이응이 죽을힘을 다해 굴렀다. 팔방추가 목표를 놓치고 땅을 후려쳤다. 또 하나의 팔방추가 이응을 향� 휘 둘러졌다. 이응은 다시 굴렀다. 팔방추는 다시 목표를 놓쳤지만 이번에는 훨씬 가까웠다. 다시 한 번 공 鳧� 시도될 찰나, 이응은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 공격을 펼쳤다. 그의 구혼조 역시 긁는데만 쓰는 것이 아니 駭� 것이다. 팔방추가 이응에게 닥쳐왔다. 이응의 손에서 섬광이 뻗었다. 팔방추가 이응의 배를 후려쳤다. 그는 피� 토 하며 굴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눈은 구혼조가 뻗어 나간 곳을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손부자가 쓰� 지고 있었다. 이응은 미소를 지었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터져도 살수는 있다. 그러나 구혼조에 가슴을 뚫리 � 도 저히 살 수가 없다. 그는 살고 적은 죽으면 그게 바로 승리였다. 44. 왕일은 손부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도 강철의 손에 잡혀 있는 왕령 때문에 속절없이 용호� 까 지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본 상황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손부자가 쓰러지는 그 모습 뒤로 채 걋� 몇몇 수하와 함께 들이닥치고 있었던 것이다. 호연삼강과 정이노의 일이 완전하게 성공하지는 않았다는 貂� 였다. 싸움은 자연스럽게 끝났다. 천부채의 도적들을 제외하고 서 있는 사람이라곤 왕일 하나뿐이었다. 이응� 피 를 토하면서도 일어나 앉아 있었고, 채염은 왕일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채염은 오늘 피곤했기 때문에 질문도 짧았다. 대답 또한 짧기를 기대했다. 다행히 강철의 대답은 짧았� . "여자를 구하러 온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칼로 왕령의 턱을 들어올려 보여주었다. 채염은 왕일을 힐끗 보았다. "이 여자완 어떤 관계냐?" 왕일은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손부자가 쓰러져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채염은 늘어진 볼을 실룩거렸다. "강철! 대답이 늦게 나올 때마다 그년 살점을 한치씩 잘라 버려라!" "예!" 강철은 되묻지 않았다. 그가 잠시 망설인 것처럼 보인 것은 어디를 자를지 결정하느라 그런 것뿐이었다 그 는 주저 없이 칼을 움직여서 왕령의 어깨 살을 한 움큼 잘라 내었다. 뾰족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왕일은 눈을 부릅떴다. "이 여자와의 관계는?" 왕일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오빠다." "오늘 온 놈들은?" "내 일을 돕는 사람들!" "네가 주동자란 말이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넌 누구냐?" "왕일이다." "왕일? 흔해빠진 이름이군. 별호는?" "없다!" "별호도 받지 못한 것이 패거리를 데리고 다닌다고? 믿을 소리를 해야지!" 그가 강철을 향해 눈짓을 하려 하자 왕일이 급히 소리쳐 막았다. "내가 두목이 아니다. 이분들은 내 억울한 사정을 알고 돕는 협사들이시다!" "협사?" 채염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살다보니 별 소리를 다 듣는군. 어디 패거리냐?" 왕일은 잠시 망설였다. 강철의 칼이 다시 움직이고, 왕령의 비명이 다시 퍼졌다. 왕일의 악다문 입술 【� 피가 흘렀다. "창주의 손부자와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다." "창주 손부자……? 그게 누구냐?" "귀웅 손일산이다." "귀웅이라……!" 채염은 다시 볼을 실룩거렸다. 이제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들어본 이름이다. 확실히……! 그럼 아까 죽은 두 놈은 귀노와 귀도였겠군? 과연…… 사소한 일에 목 岵� 걸기로 유명한 작자들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만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군." 채염의 이 한 마디는 악산삼귀라는 이름이 아주 보잘것없는 이름은 아니라는 증거도 되었지만 그보다 � 요 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상처와 피로로 기진해 쓰러져 있던 손부자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울 정도로 중 鄂� 의미였다. "죽었다고? 둘째와 셋째가?" 채염이 득의한 모습을 지었다가 금세 낯빛을 바꾸어 이를 갈았다. "우리 사천왕 중에 셋을 데려갔으니 그놈들에겐 과분한 죽음인줄이나 알아라! 악산삼귀 따위의 손에 천 光� 사천왕이 셋이나 죽다니……!" 그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제 그 보복이 얼마나 가혹한지 맛보게 해주마!" 그의 손짓을 따라서 살아남은 천부채 졸개들이 분분히 앞으로 나섰다. 용호전으로 도망친 서른 명 남� 의 졸개들 중에 다시 반이 방금의 싸움으로 죽어 버렸다. 그러나 채염이 대여섯을 데리고 합세했으니 졸개� 이 십 여명이었다. 거기에 채염과 이응이 있고, 다시 강철과 인질이 있었다. "그렇군, 인질이 있지!" 채염은 흉측한 웃음을 지었다.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손발을 수고롭게 할 건 없지." 그는 왕일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여 보였다. "꿇어!" 창주의 청년들은 이미 거의 다 죽어 버렸다. 사실은 단 한 명만이 살아서 손부자를 부축하고 있을 뿐� 었 다. 그 조차도 상처투성이였다. 싸울 힘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왕일뿐이었던 것이다. 왕일은 꿇으라고 명령하는 채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만감이 교차하는 복잡한 빛이 � 렸 다. 온갖 준비를 하고 몇 명이나 희생을 해도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채염이 다시 인상을 썼다. 검을 들어 왕일을 가리키고 자유로운 한 손은 강철을 향해 들어 보이고 있는 것 으로 보아 명령을 듣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인질을 죽여 버리라는 표시임에 분명했다. 그는 왕일을 산채� 잡 아 괴롭히고 싶은 것이다. "꿇으란 말이다! 꿇어! 네 누이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싶나?" 그 말에 비로소 왕일이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누이를 향하고 있었다.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떨어져 獵� 가 오늘 다시 만난 누이였다. "령아. 고생이 많았지?" 왕령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왕일의 그것과 같이 만감이 교차하는 눈망울을 습기로 적시고 � 을 뿐이었다. 왕일이 다시 말했다. "이젠 고생하지 않아도 될 거다. 오빠가 책임지마." 왕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애써 웃음 짓고 있었다. 왕일도 웃으려 애썼다. 그러면서 그의 한 손은 소맷자락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외롭지도 않을 거야. 아버지 어머니, 둘째와 셋째가 기다리고 있고, 이 오빠도 곧 따라갈 테니까. 괜� 지?" "눈물 나는군! 눈물 나는 상봉이야. 헛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꿇지 않을 테냐!" 채염이 비웃으며 끼여드는데 왕일이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채염이 흠칫했다. 왕일의 눈에서 심 簒� 은 기색을 본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왕일의 태도가 묘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 . 왕일은 손에 든 원통형의 물건으로 채염을 가리켰다. "한 가지 물어 보자. 너도 창주에 왔었느냐?" "이 놈이 헛소리를……! 네 누이가 죽는 게 두렵지 않으냐? 기껏 구하러 왔는데 시체나 보겠단 말이지? "창주에 왔었느냐고 묻고 있다!" "그걸 너 따위에게 가르쳐 줄 이유가 뭐냐!" 말은 퉁명스레 하면서도 채염은 슬슬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위험한 어떤 것이 왕일에게 � 다 고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낌새를 들키지 않기 위해 여전히 인질의 목숨을 담보로 왕일을 위협했� . "좋게 말할 때 그냥 꿇어라! 그러면 인질의 목숨은 보장하지." 왕일은 피식 웃었다. "좋아, 내가 어리석었군. 누가 창주에 왔는지 알아서 뭣하겠다고……!" 그는 원통형의 물건, 광간강사를 발사하는 암기통을 조작했다. 당문 칠대 암기의 하나로 목표에 닿으면 죽음의 푸른 화염이 치솟는다는 광간강사, 실제로는 황과 초� 을 배합해 만든 화약에 다름 아니지만 그 효과 하나만은 확실한 암기가 암기통을 뛰쳐나갔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염은 눈치 빠르게 피하고, 재수 없는 졸개 하나가 가슴팍에 푸른 冷� 을 달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손으로 열심히 두들겨 끄려 했지만 화염은 오히려 그 손에 옮겨 붙고 있� 다. 곧 그의 상반신이 화염에 휩싸였다. 졸개는 땅바닥을 뒹굴었다. 내리는 눈도 불을 끄지는 못했다. 그는 � 덩어 리가 되어 굴렀다. 채염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언가 한 수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저런 것일 줄은 몰랐다. 藍� 은 다시 그를 향해 암기통을 겨누고 있었다. 채염은 급히 물러나며 옆에 선 졸개 하나를 잡아 앞을 막았� . "으아아아악-!" 졸지에 방패가 된 졸개가 화염 덩어리로 변하는 동안 채염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 보다는 거의 � 능 적인 감각으로 이 자리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를 찾아내고 그 뒤에 숨었다. 왕령의 뒤였다. 아무리 독한 � 이라 도 제 누이를 향해 쏘지는 못할 것이었다. 과연 그의 생각은 맞았다. 왕일은 더 이상 그를 향해 암기를 쏘지 못하고 대신 천부채의 졸개들이 무� 기 로 선 곳을 향해 암기를 쏴 대고 있었다. 아비규환이었다. 동작이 느려 피하지 못한 졸개들이 여기 저기 시체로 쓰러지고, 살아남은 놈들은 저� 다 왕일로부터 최대한 떨어지기 위해 뛰고 있었다. 손부자의 팔방추에 정통으로 일격을 당해 꼼짝도 못하는 것 같았던 이응도 구르다시피 해서 피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곧 전멸 당하고 말 것 같았다. "잠깐! 잠깐 멈춰라!" 왕일은 핏발 선 눈으로 학살을 자행하다가 채염의 고함에 손을 멈추었다. 그리곤 다시 섣불리 움직이지 못 했다. 채염은 어느새 움직여 손부자까지 인질로 잡고 있었다. "네 누이는 죽일 수 있어도 돕자고 온 사람까지 죽이진 못하겠지?" 채염의 짐작이 맞았다. 왕일은 차마 손부자의 목숨까지는 아무렇게나 취급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를 Ⅸ� 소리쳤다. "그 분에게서 떨어져라!" 그 말이 오히려 채염의 기를 살려주었다. "네 암기를 던지는 것이 먼저겠지. 인질들을 살리고 싶으면 암기를 던지고 꿇어!" "날 바보로 아나?" 왕일은 눈에 불똥을 튀겼다. 그는 오히려 채염을 향해 암기를 겨누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다 죽어보자!" "잠깐!" 채염은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쳤다. 눈이 뒤집힌 자를 상대로 해서는 계략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 은 것이다. "타협하기로 하지. 네가 곱게 물러나면 인질을 풀어 주겠다." 그 말에는 왕일도 반응을 보였다. "누굴 풀어 주겠다는 거냐?" "둘 중 하나다. 이 영감이거나 네 누이거나……, 둘 중 하나!" "둘 다 풀어 주면 물러서겠다." 이번에는 채염이 비웃었다. "너야말로 나를 바보로 아는구나. 그 놈을 가지고 있는데 둘 다 풀어줬다간 무슨 일을 당하라고. 그 암 綬� 던지면 둘 다 풀어 주지." 입장은 분명해졌고, 다른 길은 없었다. 왕일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노인을 풀어 주면 물러가겠다. 그러나!" 그는 아픈 심정을 담아 누이를 보았다. "내 누이를 다치게 하면 반드시 보복하고 말겠다." "너야말로!" 채염은 뒤늦게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이가 부러지도록 갈며 으르렁댔다. "서툰 짓 하면 네 누이의 시체를 볼 줄 알아라!" 왕일은 손부자와 살아남은 창주 청년 하나를 데리고 물러가고 그 며칠 후 천부채의 생존자들은 짐을 � 렸 다. 쑥밭이 된 산채에서는 겨울을 날 수 없었다. 그들은 채염의 의견을 따라 재물을 싸서 짊어지고 산채� 떠 났다. 일단 물러서기는 했지만 왕일이 언제 따라붙을지 모르기 때문에 잔뜩 경계를 하고, 왕령을 여전히 适� 로 삼은 채였다. 왕일이 뒤를 쫓아올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지만 채염에게도 계산은 있었다. 그는 문제의 암기에 대 적할 방법은 거리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암기는 아무리 위력적이라도 지근거리가 아니면 雌� 되지 않는다. 관건은 일정거리 이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채염은 활로 해결했다. 채염은 수하들에게 전원 활을 휴대하게 하고,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목적지는 천기채였� 데 거기 가는 동안 협곡이나 지형이 험한 곳에서는 혹시 접근이 가능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부러 평야를 택 漫� 이동했다. 천기채에 당도한 뒤에는 그깟 암기 따위를 두려워 할 이유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급한대로 빈틈없는 계획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상상도 못한 것이 있었다. 그들의 � 를 쫓는 자야말로 활에는 고수였던 것이다. 45. 왕일은 나지막한 바위산 꼭대기에 엎드려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새벽은 휘날리는 눈발, 두� 게 드리운 회색 구름 저 건너편으로 그 잿빛 창백한 얼굴을 잠시 비췄을 뿐이었다. 온 산과 온 하늘, 온 땅� 덮 은 흰 눈의 창백함. 그 속에 엎드린 왕일의 기분도 그렇게 창백하게 탈색되고 있었다. 그는 다시 혼자였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처럼. 그가 두고 온 저편 노애령 어느 곳에는 정이노와 호연삼강의 시신이 누워 있을 것이다. 아직은 아니� 만 곧 시신이 될 손부자가 그 옆에 누워 있고, 창주에서 온 청년 열 명 중 살아남은 단 한 명이 그들의 시� 을 수습하기 위해서 그 옆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악산삼귀의 최후를 지켜봐줄 단 한 명의 증인이었다. 그들이 할 일은 끝났다. 그들은 더 이상 왕일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확실해지자 손부자� 조 금의 아쉬움도 없이 왕일을 보냈다. 죽음의 그늘이 깔린 그 얼굴에는 정말 조금의 아쉬움도, 억울함도 없 駭�. 그들 형제들은 그렇게 칼끝 아래 이슬로 사라져가는 것이, 그렇게 이름 없는 산야에서 죽어 뒹굴게 되는 痼� 어울린다고 손부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이제 왕일은 다시 혼자였다. 은자 스무 냥에 팔려 머나먼 남만으로 떠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먼 훗날, 아니 어쩌면 오늘 이후 아무때나 손부자처럼, 호연삼강처럼 칼끝에 목을 떨구어 길 위의 먼지가 될 때까 지 계속 그럴 것처럼. 그때 그도 손부자처럼 후회 없이 세상의 끈을 끊어 버릴 수 있을까? 그때까지 뒹굴며 살아온 세계로� 터 이제 다가올 미지의 세계에로 그렇게 쉽게 눈을 돌릴 수 있을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 舅�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지금 그러기 위해 여기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왕일은 숨을 죽였다. 그치지 않고 퍼붓는 눈이 그의 몸을 거의 전부 덮어 버리다시피 했지만 그는 눈 � 으 로 더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목표가 나타났다. 노애령을 떠난 천부채의 잔당들이었다. 노애령을 떠난 지 사흘째, 어젯밤 그들은 이 바위산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잤다. 그리고 새벽같� 길 을 떠난 것이다. 방향은 처음부터 남쪽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그들은 남쪽만 바라보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 고 오늘 마을의 남쪽관문이라 할 이 바위산 아래를 지나가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지는 어딘가 남쪽에 있� 것 이다. 거기 도착하기 전에 복수를 마쳐야 했다. 왕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흩뿌리는 눈발 속에서 몇 개의 점으로만 보이던 천부채의 잔당들이 이젠 제 법 형체를 식별할 정도로 가까워지는 것과 맞추어서였다. 폭설은 그에게 유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杉�. 이 눈발 속에서가 아니면 그는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다. 잔당들 중에 적어도 두 명은 고수 눗�, 그가 운 좋게 하나를 죽인다고 해도 다른 하나의 손에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 눈은 그가 지금 의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의 사용을 어렵게 했다. 바람과 눈발 속에서 � 대 로 활을 겨냥한다는 것은 극히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눈 내리는 날이라는 것은 추격에도 � 리했 고, 잠복에도 불리했다. 몸이야 훌륭히 감춰 주지만 목표의 자취도 역시 가리고 있었다. 그의 목표들이 却� 명이나 되는 인원에 몇 필의 말까지 끌고 있고, 그 말잔등에는 오랜 도적질로 모은 재산을 바리바리 싣� 있 지 않았으면 이렇게 추적하기에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정체가 발각되면 안되기 때문에 시골길로만 돌아가는 천부채의 잔 당들은 그래도 시골 농가를 점거하고라도 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쫓아가는 왕일이 쉴 곳은 ス� 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죽 옷을 두텁게 입었다 해도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한기, 그리고 시간이 감에 따� 축 축이 젖어 들어가 얼어 버리는 이 습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불을 쬐지 않으면 동상에 �릴 지도 몰랐다. 그보다 먼저 활동이 불편해지고, 이 눈밭에 한 구 시체로 뒹굴지도 몰랐다. 그래서 시간이 중요해졌다.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목표물을 제거하고 누이를 구출해야 했다. 저들� 지 금 가려고 하는 곳이 어딘지 모른다는 것, 그러므로 언제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조력자들의 품에 안 姸� 도 모른다는 것때문에라도……. 시위가 조금씩 당겨졌다. 거기 얼어붙었던 얇은 얼음조각들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귓가에 날카롭게 스� 다. 왕일은 다음 번에 활을 사용할 때는 시위에 붙어 있는 얼음 조각들을 제거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 각 했다. 적들의 귀에 이 소리가 들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일차 목표는 말에 가장 가깝게 선 자였다. 이 눈보라가 아니었다면 채주와 두목급의 인물들은 분명히 � 에 올라탔을 것이고 그의 일은 훨씬 쉬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불어오는 눈보라 속에 말 위에 앉아 고 볘� 히 맞고 있을 멍청이는 없었다. 그러니 아마도 채주와 두목급의 인물들은 최대한 말에 붙어 있을 것이다 이 들판에서는 말만한 바람막이도 따로 없기 때문이었다. 권력 있는 자들은 손바닥만한 햇볕도, 눈곱만한 편 풩�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왕일은 남만에서 배웠다. 왕일은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 조금씩 내쉬었다. 당겼던 시위를 다시 거두어들였다. 북서쪽에서 남동쪽 막� 불어오는 바람이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다. 화살이 바람을 타는 것을 완벽하게 계산할 수는 없었다. 조금이 捉� 바람의 영향을 덜 받으려면 가까운 곳에서 쏴야 하지만 이보다 더 가깝게 접근할 수도 없었다. 바람의 방 袖� 바꾸어야 했다. 그는 잠시 더 엎드려서 기다렸다. 천부채의 잔당들이 바위산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 들의 뒷등이 보이기 시작할 때, 왕일은 다시 일어나 시위를 당겼다. 뒷바람이 옆바람보다는 백 배 나을 것이다 시위가 손을 떠나고, 한 사내가 쓰러졌다. 왕일은 연속해서 활을 메기고 다시 쐈다. 두 번째 화살은 아 サ� 쓰러뜨리지 못했다. 대신 말 한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길길이 날뛰다가 쓰러지고 있었다. 그것도 괜찮았� . 말 이 없으면 사람이 짐을 메고 가야 할 것이고, 그것은 적지 않게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세 번째 화살은 겨누기 어려웠다. 목표물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눈 속에서 날아온 화살로부터 몸을 숨 기려 하고 있었다. 왕일은 그 중에도 촐싹대지 않는 하나를 겨누고 시위를 놓았다. 졸개들의 앞에서 체면 � 구 기고 싶어하지 않는 두목급일 가능성이 컸다. 맞았다. 세 번째 화살과 함께 한 사내가 쓰러졌다. 네 번째. 역시 촐싹대지 않는 하나를 겨눈 것이었 쨉� 이번 화살은 피맛을 보지 못했다. 목표는 무기를 휘둘러 화살을 튕겨냈던 것이다. 두목급의 누구인 것이 �실 한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화살을 튕겨낸 사내가 ケ� 를 휘두르며 지휘를 하고 있었다. 왕일은 네 번째 화살을 겨누고, 쏘고, 신속하게 바위산 너머로 이동했다. 남은 목표물들이 말들을 중심 막� 쪼그리고 앉아 원형의 진(陣)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 상황에서는 더 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제 � 루어 질 반격에서 몸을 피하는 것이 급했다. 길은 이미 충분히 봐 둔 터였다. 미리 찾아 둔 길로 바위산을 내려와 바위를 뛰어 넘어가며 남쪽으로 � 달 렸다. 이틀 동안 충분히 쉬지도 못하고 눈밭에서 뒹군 데다가 극도의 흥분 상태 속에서 움직이고 있어서 岵� 배로 들었다. 숨이 가빠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걸음을 늦출 수도 없었다. 화살을 네 발이나 쏘는 동 � 그 가 숨은 위치를 들키지 않았을 리가 없고, 위치가 발각되었다면 쫓아오지 않을 리도 없었다. 가능한 한 � 속하 게 적이 예상 못한 위치로 피해야 했다. 그리고 반격의 반격을 준비해야 했다. 바위산 아래로는 기암괴석 군이 있었고, 그 너머로 눈에 덮인 수수들이 늘어선 띠밭이 길게 뻗어 있었 �. 왕일은 수수밭으로 파고 들어가 다시 납작 엎드려 기기 시작했다. 처음 출발한 바위 꼭대기로부터 서쪽� 로 내려와서 다시 남쪽으로 뛰고, 이제 북동쪽으로 기었으니 바위산 꼭대기를 출발점으로 하는 원형을 거의 다 그린 셈이었다. 그 끝은 다시 처음의 그 지점이었다. 왕일은 납작 엎드린 채 헐떡이는 숨을 최대한 참으며 앞을 보았다. 눈보라 속에서 몇 개의 검은 인영이 보 였다. 천부채의 잔당들은 아직도 처음 공격받은 그 위치에 원진을 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왕일의 예상을 깬 반응이었다. 그들은 왕일을 쫓아 바위산으로 올라와야 했다. 그리고 그가 남� 흔 적을 따라 기암괴석 군으로 접어들어서 그가 만들어 둔 함정에 빠져야 했다. 왕일은 지난 밤 내내 바위� 굴 리고 땅을 파며 함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를 쫓아오지 않음으로써 그의 모든 계획들, 비 � 그 것이 잔꾀라 해도 심혈을 기울인 수고들을 헛수고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왕일은 인상을 써 가며 생각에 잠겼다. 어렴풋이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전날 천 光� 에서 그가 선보였던 광간강사가 아직도 남아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광간강사의 가공할 위력에 놀라 彭� 을 받고도 감히 접근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왕일은 피식 웃었다. 입맛이 썼지만 하는 수 없었다. 광간강사는 원래 오십 개밖에 없었고, 전날 흥분 纘� 에서 아끼지 않고 다 써 버렸던 것이다. 독이나 암기도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듯이 무한정 솟아 나오 測� 않는 것임을 알려줄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다시 활시위를 잡았다. 목표물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생각하는 대로 놓아둘 일이었다. 그 생각들을 그 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적어도 지금 그는 몇 발의 화살을 더 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들 은 그가 아직 바위산 꼭대기에서 광간강사 통을 움켜쥐고 그들이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 다. 그러니 길가는 경계하지 않을 것이다. 천부채의 잔당들이 원진을 그린 그대로 움직였다. 쓰러진 동료들은 죽었는지 어쨌는지 그냥 내버려둔 � 로. 그들이 그린 진의 바깥쪽에는 화살을 메긴 활을 든 여남은 명의 졸개들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고, 그 안 却� 는 무기를 뽑아 든 서너 명이 말을 끌었다. 왕일은 무기를 든 자들을 겨냥하다가 순간 멈추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의 모습 중에서 누이의 그� 자 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기를 들지 않은 한 명, 다른 사람의 손에 밀려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한 資� 그의 누이가 아니면 누굴 것인가. 왕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나을 거라는 식으로 왕일이 버티는 바람에 인질로서의 효 과를 보이고 있지는 못하지만 분명 누이는 천부채의 잔당들이 잡고 있는 왕일의 약점이었다. 왕일로서는 �리 해지면 유리해질수록, 즉 누이를 구출해 낼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역으로 인질의 가치는 높아질 것이었다. 결국 엔 누이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 넘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왕일은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는 다시 목표를 고르고 있 었다. 천천히 활이 당겨졌다. 호흡이 멈추었다. 화살 끝이 조금씩 움직여 목표를 찾았다. 누이라고 짐작되는 琉� 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눈밭에 넘어진 모양이었다. 그 바로 뒤에 서 있던 사내의 모습이 화살 끝에 정면 막� 노출되었다. 왕일은 시위를 놓았다. 46. 강철은 마지막 순간에 왕일의 약점을 잡아챈 공으로 바로 그 약점의 관리를 책임지는 상을 받았다. 왕� 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는데 분명히 이것은 다른 졸개들보다는 나은 임무였다. 다른 졸개들은 활을 들고 화살 事� 로 선다는 모순적인 입장에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왕령을 관리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흘 연속으로 내린 눈은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지형에 따라서는 허리까지 파묻히는 눈 밭에서 여자가 두 손까지 뒤로 묶인 채 제대로 걸음을 옮긴다는 것은 더욱 힘들 것이다. '손목이라도 풀어 줬으면……!' 그가 왕령에게 동정을 아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한 생각은 단지 동정 때문만도 아니었다. 넘 어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고 다시 걷게 하는 일이 그에게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업고 가는 게 쉽겠군!'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왕령은 다시 넘어져 눈에 파묻혔다. 강철은 내심 투덜거리며 그녀를 일으켜 � 우 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어깨 죽지에 격통이 느껴졌다. 앞으로 구부러지던 몸이 충격을 받아 반 酉� 구부러지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뒤로 퉁겨져서 굴렀다.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고, 본능은 굳이 눈을 통하지 � 고 도 어디가 이상한 지를 아는 법이다. 강철의 손이 저절로 어깨 죽지로 가서 더듬었다. 딱딱한 막대기가 � 깨를 꿰뚫고 있다는 것, 그 막대기가 화살이라는 것을 그는 고통을 통해 알았다. "끄으윽-!" 참을 수 없는 신음이 뿜어져 나왔다. 왕령을 부축하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지 않았으면 바로 심장을 관� 했 을 것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으로 의식을 잃어 가는 강철의 머리에는 아직 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 . 그 의 앞에서 한 사람이 목을 움켜쥐고 쓰러지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이, 사실은 천왕검 채염이, 손을 뻗더니 날아 오는 화살을 후려쳐서 퉁겨 내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흐린 눈에 보인 마지막 광경이었다. 강철은 그대로 눈에 얼굴을 파묻고 혼절해 버렸다. "놈이다!" 채염의 경고는 너무 늦었다.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화살의 주인이 왕일인 것은 명백했고, 그 말을 신 ７� 반격을 하려 해도 이미 공격은 끝나 버렸다. 두 번의 공격을 받아 네 명이 죽었고- 채염의 눈에는 강철� 죽 은 것으로 보였다- 말 한 마리가 도망가고 한 마리는 부상당해 쓰러졌다. "젠장!" 일행은 아홉으로 줄었다. 게다가 그 중 하나는 별다른 쓸모도 없는 인질이었다. 인질을 잡아 몸값을 � 아 내는 것은 녹림의 큰 수입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경험이 풍부했다. 그 풍부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가족이 구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질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지금 왕령의 가족이 그런 것처럼 인질 潔� 죽든 말든 보복부터 하겠다고 날뛰는 경우에도 그랬다. 혹에 불과한 인질을 그나마 버릴 수 없는 것은 최 컥� 순간에 기댈 것은 그래도 그 인질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돈도 되지 않는 인질, 짐 하나 거들 수 없는 인질이지만 끌고 가야 하는 것이다. "젠장!" 채염은 다시 투덜거렸다. 사람은 줄어도 짐은 그대로였다. 말까지 줄었다. 한 마리는 짐을 싣고 도망� 버 렸으니 차라리 다행이지만 한 마리는 그냥 누워 버렸으니 더 문제였다. 그 놈 등에 실린 짐도 챙겨야 하� 것 이다. 물론 천부채에서부터 챙겨 온 재물이었다. 버리고 가면 그만이겠지만 그의 의형님이자 채주인 이응 � 그 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눠서 들어!" 졸개들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지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사단이 나겠군!' 사단은 그날 밤 바로 일어났다. 밤사이에 셋이나 도망가려고 시도한 것이다. 단지 시도였다. 미리 예 贊� 채염은 적을 대비하기보다는 졸개들을 감시하고 있었고, 덕분에 주모자라고 짐작되는 한 졸개의 목을 들� 겁 을 줄 수가 있었다. "이제 와서 배신을 때리면……!" 그는 꿇어 엎드린 두 졸개만이 아니라 다른 졸개들도 보게, 사실은 그쪽을 겨냥하고 손에 든 수급을 � 들 었다. 붉은 피가 하얀 눈에 점점이 뿌려지는 것은 확실히 효과를 기대할 만했다. "이렇게 된단 말이다. 또 도망가고 싶은 사람? 귀찮으니 아예 여기서 해결을 보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도 도망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새벽이 어 옳� 레 밝아 올 즈음을 틈 타, 간밤의 공포를 충분히 효과적인 것으로 속단해 버린 채염과 이응의 방심을 틈 타 마낙기를 포함해 세 명이 도망가 버렸던 것이다. 그것도 각자가 짊어지고 있던 재물을 몽땅 챙겨 들고서� …. 서기였던 마낙기의 잔꾀임이 분명했다. 일행은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 이응과 채염, 왕령과 졸개 둘이었다.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짐을, 그것도 주로 재물을 반으로 줄여 몸을 가볍게 하고 쉴 수 있는 곳을 ＞� 이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졸개들은 어차피 믿을 게 없으니 채염과 이응, 그들 둘만이라도 원 綬� 회복해야 했다. 왕일? 그의 주무기가 활이라는 것은 채염의 계산착오였지만 그래도 눈이 그치고 난 뒤면 管� 울 게 없었다. 이게 채염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삼백의 수하를 거느리고 경사 응천부를 휘젓던 대도 박산조 이응이 이제 단 세 명의 수하만을 곁에 두고 있는 딱한 처지가 되었지만 타고난 욕심은 쉽게 고쳐지지가 않았다. 그는 죽 諍� 재물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최소한의 식량만을 챙긴 채 나머지는 전부 금은보화로 이루어진 짐을 채 갚� 지 지게 되고 말았다. 온전치도 못한 몸에 이응조차도 짐을 지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길을 떠났다. 생각 같아서는 어젯밤 쉬었던 마을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바로 그 마을 앞에 시체들을 늘어놓고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 아무리 헐렁한 관원들이 捉� 그들의 정체에 의심을 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마을을 찾아야 했다. 마을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이 폭설 속에서는 길도 제 酉� 분간할 수가 없었으니 집도 절도 찾기가 어려웠다. 짊어진 짐은 어깨를 파고들고 눈은 허리를 넘고 있었� . 한 시진 동안 십 리를 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헤매다가 드디어 밤이 되었다. 그래도 쉴 수가 없 駭�. 눈밭에서 잘못 쉬다가는 모조리 얼어죽고 말 것이다. 제발 불빛이라도 보기를 바라고 그냥 가는 수밖에 騙� 다. 고생은 왕일이 더했다. 그는 이미 사흘 동안 거의 자지도 못하고 이응 일행의 뒤만 쫓고 있었다. 적을 摠� 지 않기 위해서는 쉴 수가 없었다. 이젠 채찍으로 후려치는 듯한 눈발도 그리 큰 위협이 아니었다. 극도� 피 로와 굶주림이 그의 가장 큰 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간 죽는다.' 새삼스러운 생각이 아니었다. 이미 두세 시진 전부터 그의 손발은 얼어붙고 있었다. 관절이 뻣뻣해지고 정 신은 흐릿해져 가는데 등은 축축했다. 멈출 수가 없었다. 저렇게 축축해질 정도로 흘린 땀은 그가 활동을 멈추 는 순간 바로 얼어붙을 것이다. 그럼 거기서 끝이었다. 목표를 놓친지가 이미 한참 되었다. 이응의 일행이 저만치 앞서 갔는지 아니면 뒤쳐졌는지, 그가 언제 流� 을 앞질렀는지, 아니면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하얀 눈 천지에 어둠이 깔 � 하 늘땅을 구별할 수도 없게 된 때에도 그는 여전히 걸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멈추면 죽는다는 한 가지 생 ▷� 에 없었다. 문득 그의 눈에 별이 보였다. '눈이 그쳤나?'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왕일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가 별이라고 생각한 것은 저 맣� 어딘가에서부터 새어나오는 불빛이었다. 눈앞을 가로막을 정도로 쏟아 붓는 폭설 속에서도 불빛은 또렷� 게 보이고 있었다. 왕일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얼어붙은 손발이 저 불빛만 보고도 녹아 들어가는 것 � 았 다. 그는 정신없이 뛰었다. 살려 달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입도 열리지 않았다. 불빛 아래 무엇이 � 는지 는 상관도 않았다. 그의 눈에는 불빛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손가락 끝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 증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맨손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왕일은 불에서 손을 빼내어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굳어진 손가락을 푸는 것이 다른 어떤 일보다도 급 했다. 겨우 손가락 끝에 고통 이외의 감각이 돌아왔다. 그제야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퇴락해서 한쪽 벽이 무너진 악왕묘(岳王廟), 그 한 가운데에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불가에는 이미 � 러 사람들이 둘러앉아 다짜고짜 파고들어 불길에 손부터 굽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 하나, 장 袖� 둘, 젊은이도 하나 해서 네 명이었는데 젊은이만 제외하곤 하나같이 수수한 옷차림이라 부잣집 도련님을 置� 하는 하인 셋의 일행으로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입이 얼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별반 죄송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게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 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불을 피운 주인을 보면 자리를 물러서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는 전� 그 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비비적거리며 파고들어 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 좋 은 자리. 연기도 안 마실 뿐 아니라 바닥에 마른 풀도 깔려 있어서 냉기가 올라오지 않는 곳이었다. "무례하군!" 역시 무례해 보였던지 노인이 한 마디 내뱉었다. 장년 둘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왕일을 노려보았다. 좁� 묘 당에 땔감도 적은지 조그맣게 피워 놓은 불이라 왕일이 바짝 붙어 있으니 자연 다른 사람들이 앉을 자리� 충 분치 못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왕일은 연신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역시 자리는 피해 주지 않았다. 장년 둘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젊 봉� 는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노인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가 짐짓 표정을 굳히고 왕일을 꾸짖었다. "대충 몸을 녹였으면 이제 그만 주인에게 양보할 때도 되지 않았나! 게다가 자네 앉은 곳이 제일 좋은 美� 아닌가! 저리 구석으로 가게!" "죄송합니다!" 왕일은 여전히 피해 주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이고 관절을 폈다 구부렸다 하면서 얼은 몸을 녹� 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장년 둘 중의 하나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금방이라도 왕일의 � 살 을 잡아 집어던질 태세였다. 그때 젊은이가 뒤로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마노삼(馬老三), 난 이제 충분히 불을 쬐었으니 자네가 이리로 앉게나!" 마노삼이라 불린 자가 말도 안된다는 듯 젊은이를 보았다. "공자! 그런……!"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이 그의 바지자락을 잡아당겨 신호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왕일이 � 상 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왕일이 벌떡 일어나 묘당의 무너진 벽 옆에 바짝 붙었다. 그의 손에 같� 화살이 들렸다. 마노삼은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왕일� 적 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 손가락을 녹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뻔뻔스런 놈이군!" 입으론 욕을 하면서도 이젠 별로 왕일을 비난할 마음이 없었다. 사실은 강호인, 그것도 내력 있는 강호 括� 로서 그에게 왕일의 행동은 생존을 위해서는 예의나 염치를 챙기지 않는 강호인다운 행동으로 비쳤던 것� 다. 이제 그의 관심은 묘당 저편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자들에게 쏠렸다. 어두운 밤이고 눈발이 시야를 막고 있었지만 마노삼은 이 무례한 손님의 적들을 환히 볼 수 있었다. � 래 서 그는 무례한 손님이 쏜 첫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는 채염의 모습도 또렷이 보았다. 47. "빌어먹을!" 채염은 왼쪽 어깨에 꽂힌 화살을 그대로 잡아 뽑았다. 극심한 고통이 살을 떨리게 했지만 그보다 분� 가 더 강하게 타올랐다. 그는 짊어진 짐까지 던져 버리고 앞으로 뛰었다. 왕일이 있는 곳은 분명했다. 불빛에 화살이 번쩍이는 것까지 보았으니까. 단지 화살을 보고도 못 피한 痼� 긴 하루 동안 내내 몸이 얼은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 가지 실수한 것은 화살을 보고도 피하지 못할 정� 로 언 몸은 분노로도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의 무기인 천왕검까지도 얼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 않 은 것이었다. 다시 화살 한 발이 날아왔다. 채염은 검을 뽑아 화살을 퉁겨 내고 그 기세 그대로 뛰어들어 왕일을 � 려 했다.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검집에는 얼음이 두껍게 얼어붙어 있고, 손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곱아서 价� 루조차 제대로 쥐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빈손을 들어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다. 채염은 소스라치게 놀랐 嗤� 화살은 이미 지척지간에 닥쳐오고 있었다. 한 순간 채염의 몸이 마치 얼음을 밟기라도 한 것처럼 미끄러져서 뒤로 넘어갔다. 그 엄청난 덩치가 � 리 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달려올 때도 그랬지만 이제 그대로 자빠져 버리니 엄청난 눈이 튀었다. 채염도, 琉� 향해 쏘아진 화살도 눈 속으로 사라졌다. 왕일은 악왕묘 담벼락 뒤에 숨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화살을 시위에 걸고 겨냥한 뒤 쏘고, 같은 일� 다 시 한 번 반복하는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고도의 정신력을 소모시킴으로써 백장 거리를 단숨에 뛰어온 사� 처 럼 헐떡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일은 다시 활을 쏠 준비를 했다. 화살 둘을 전통에서 뽑아 하나는 시위에 걸고 다른 하나는 � 명 지와 약지 사이에 끼워 들었다. 연발사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긴 숨이 뿜어지고 다시 긴 숨이 들어왔� . 왕 일의 숨결은 금세 다시 고르게 진행되고 눈빛은 매의 눈처럼 차가워졌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외면하던 묘당 안의 네 사람이 이 순간 왕일을 향해 이 채 섞인 눈빛을 보냈다. 제법이라고 생각하는 빛이 역력했다. 왕일은 그런 눈빛은 보지도 못했고, 혹시 봤다 해도 관심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채염보다 한참 하수� 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전에 구지룡 증국영에게도 한 순간에 당해 버렸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채염은 그 구지 룡 증국영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는 고수로 보였다. 삼류……! 손부자가 말한 삼류 무사라는 단어는 다시 정의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류가 보는 삼류와 그보다 훨씬 � 래, 도대체 몇 류라고 말할 것도 없는 무명소졸이 보는 삼류와는 같은 의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왕일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대로 복수도 못한 채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실한 위기감이 그의 온 몸 이 떨리게 할 정도로 두렵게 하고 있었다. 저 막강한 삼류무사의 뒤에는 박산조 이응이라는 이류무사, 명 품� 히 고수가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 이응은 나중 문제였다. 어떻게든 채염을 죽여야 그 다음 한 칼을 이응에게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왕일은 문득 활시위를 놓고 옆구리에 찬 칼을 꺼내 손에 닿기 편한 곳에 두었다. 이미 거리는 활이 위� 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만약의 경우에는 칼을 들어 휘두르는 것밖에는 길이 없을 것이다. "칼을 휘둘러 무엇이든 벨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다." 왕일은 문득 중얼거렸다. 몇 달 전에 호연삼강이 한 말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그가 칼에 관해 아는 痼�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무얼 베려면 칼을 꽉 잡아야지! 놓치지 말고!" 왕일은 돌아보지 않았다. 잠깐 들은 목소리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마노삼이라 불리던 장년임은 알 수 있 었다. 그보다 지금 자빠졌던 채염이 묘당의 담벼락 바로 앞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이 더 큰일이었다. 화살은 그를 죽이지 못하고 단지 상처를 입혔을 뿐이었다. 그리고 채염은 활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생� 하 고 그대로 하고 있었다. 눈밭에 바짝 엎드려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달려든 다음에 나타난 것이다. 얼어붙은 검은 굳이 뺄 필요가 없었다. 채염은 눈앞에 바짝 나타난 왕일을 향해 검집째 휘둘러 머리를 바 스러뜨리려 들었다. 왕일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당겼던 시위를 더 힘껏 당겨 눈앞에 나타난 그림자를 향해 쏘았다. 당장 育� 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명지와 약지 사이에 끼워 들었던 화살은 그냥 떨구어 버리고 활도 柳� 던져 버리고 뒤로 굴렀다. 칼이 그의 손에 잡혔다. 채염의 검이 방향을 바꾸어 몸 앞을 쓸어 가듯 움직였다. 공격보다는 방어를 먼저 생각하는 무공의 기� 법 칙이 그를 그렇게 움직이게 했다. 그는 그 순간에도 왕일이 활을 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별 위력이 없는 화살이었기에 간단히 퉁겨 나가 버 렸지만 그 사이에 왕일이 칼을 잡아들도록 여유를 준 셈이었다. 채염은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묘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검법이고 뭐고 발휘할 틈도 없이 그는 검을 휘� 렀 다. 눈발이 분분히 날리는 가운데 그의 검이 왕일을 베어 갔다. 왕일의 칼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실제로 움직인 것은 그의 칼이 먼저였다. 그러나 채염의 검은 그의 동작보다 몇 배로 빨랐다. 그의 칼이 상대를 변변히 가리키기도 전에 채염의 검이 그의 옆구리를 때 홱�. 왕일은 늑골이 몽땅 부러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옆으로 뒹굴었다. 검집에 들어간 채가 아니라 검 �을 그대로 받았다면 그는 이 순간 두 동강이가 났을 것이다. 채염은 뛰어들어온 기세 그대로 검을 휘둘러 왕일의 정수리를 노렸다. 그의 발이 모닥불을 밟아 불똥과 재 를 사방에 흩어 놓았다. 그러나 이번 일검은 성공하지 못했다. 왕일은 넘어지면서도 칼을 들어 머리를 방어했고, 그의 검은 기 摸� 고 있는 칼을 후려친 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내공이나 완력이 우세한 사람이 이기게 마련이었다. 왕일의 칼은 채염의 검에 밀려 주인의 머리통을 후려쳐버렸다. 왕일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다. 채염의 价� 다시 날아왔다. 왕일의 칼을 그대로 왕일의 머리에 박아버릴 것처럼, 망치로 못을 때리는 것처럼 그렇게 캠� 치고 있었다. 왕일은 이를 악물고 칼을 마주쳐 갔다. 다시 한 번 칼이 튈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刻� 다. 이번에 퉁겨 나간 것은 채염의 검이었다. 얼어서 곱은 채염의 손은 자신의 검자루조차 굳게 잡지 못 杉� 것이다. "어, 어……!" 하찮은 졸개와 무기를 부딪혀 자기 검을 놓쳐 버렸다는 황당한 사실이 채염을 한 순간 얼떨떨하게 만� 었 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기에게는 절대 잘못이 없고, 단지 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 리고 싶어하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 시간이란 없었다. 그가 그러는 동안 이미 왕일이 일어나 칼을 휘둘러 오고 있었 �. 아무런 기교도 법도도 없이 어깨 위에서 둘러메듯 한 자세에서 앞으로 휘두르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의 자 셀� 다. 채염은 그 동작 하나하나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와 같이 무공을 배운 자에게 있어서 무공을 배우지 않 은 자가 휘두르는 칼이라는 것은 나뭇가지보다도 못한 것이다. 그걸 굳이 분노한 김에, 또 놀리는 기분 � 으로 검을 부딪쳐 간 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채염은 손을 내밀어 왕일의 칼 옆면을 눌렀다. 내공으로 눌렀으니 떨구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왕 舅� 이번에도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왕일의 칼에는 속도는 없었지만 굉장한 기세가 숨어 있었다. 왕일은 칼을 떨구지도 않고, 단지 채염의 손에 약간 방향만 바뀐 채로 칼을 끝까지 휘둘렀다. 채염이 綢� 한 걸음 물러설 때까지. 채염은 옆구리를 만졌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과 함께 붉은 선혈이 묻어 나왔다. 무게로 단다면 한 牡� 너끈히 나갈 살점이 방금 왕일의 한칼에 떨어져 나가 버렸다. 연이은 실패가 분노를 일으키고, 그 분노가 그의 이성을 앗아가 버린 모양, 채염의 눈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이, 익!" 채염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돌진했다. 왕일이 다시 한 칼을 휘두르려고 칼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채 걋� 어깨가 그대로 왕일을 밀어붙였다. 왕일은 공중에 들린 채 묘당의 벽에 부딪쳤다. 장이 꼬였는지 그의 입 【� 붉은 선혈이 뿜어졌다. 채염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왕일의 목을 움켜쥐었다. 단번에 비틀어 버릴 기세� 다. 왕일의 눈앞이 순간적으로 노랗게 변해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막혀 심장이 터질 것 � 았 다.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꿈을 꾸기라도 하는 것처럼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손에 잡힌 칼은 훅� 깝게 허공을 긁을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를 누르는 압력이 약해졌다. 한 모금 숨을 들이키고 힘을 모을 여유 가 생겼다. 그는 온 몸의 힘을 두 손에 모으고 사력을 다해 내리쳤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그의 얼굴을 呼� 다. 그는 한 순간 자신의 머리가 주머니처럼 터져서 속에 든 것을 쏟아 내고 있다는 황당한 생각을 했다. 채염은 그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의 목도 부러뜨릴 수 있는 힘으로 왕일의 목을 조� 가 던 한 순간 비릿한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면서 깨진 항아리에서 물이 빠져나가듯이 온몸의 힘이 빠져버� 던 것이다. 그다음에는 왕일이 칼을 내리치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피할 수도 없었다. 채염의 머리 뒤꼭지에서부터 이마까지 서늘해졌다. 퍽 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전 혀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텐데도……! 그가 맡은 비릿한 냄새가 왕일이 토해낸 피냄새라는 것, 그 �고 그가 힘을 못쓰게 만들기 위해서는 왕일의 피속에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순간� 었 다. 잘 익은 수박처럼 머리가 쪼개져버리는 이 순간, 죽음이 그 차가운 손길로 그의 목을 움켜쥐는 그 순 ＠� 었다. '핏속에도 독이……?' 채염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왕일의 가슴팍에 무언가가 와서 부딪쳤다. 무거웠다. 둔탁한 소리가 귓가에 멀리 들리는 가운데 그는 溯� 정신을 잃었다. 영원처럼 긴 시간 같기도 하고 섬전처럼 짧은 한 순간 같기도 했다. 왕일이 깜박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차 렸을 때, 그는 악왕묘의 벽을 움켜쥐고 죽은 채염의 시신과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 . 그 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채염의 시신을 간신히 밀어젖히고 일어났다. 채염의 시신은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왕일이 사력을 다해 내려친 한 칼이 그의 커다란 머리통을 딱 절반으로 쪼개 놓았기 때문이었다. 왕일은 자신의 가슴에 와서 부딪친 것이 바로 그 쪼개진 머리통이었고, 지금 그의 가슴팍에 묻은 축� 한 것들이 그 쪼개진 머리통에서 흘러나온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마터면 토악질을 할 뻔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무너진 담벼락으로 기듯이 달려가서 밖을 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눈보� 속 이라 안 보이는가 했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응도, 그의 누이동생도. 48. "자네가 찾고 있는 게 이응이라면 그는 이미 한참 전에 도망갔다고 알려주고 싶군." 왕일은 말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노인이었다. 묘당 안에 있던 일행들은 어느새 다시 모닥불을 살려 놓� 그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놀라운 것은 묘당 안이 온통 피 칠갑을 했는데 그들 일행은 단 한 방울의 피도 却� 묻히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방금 일어났던 일들과는 徨� 다른 어떤 차원에서 갑자기 나타난 듯 극히 이질적인 존재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왕일은 그 묘한 이질감에 잠시 말을 못하고 있다가 겨우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언제요?" "아까 채염이 여기로 덮쳐 올 때!" 이번에는 마노삼이 대답해 주었다. 그는 왕일에게 호감 어린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실력은 형편없지만 기초는 제대로 배웠더군, 자네. 칼은 누구에게 배웠나?" '칼을 누구에게?' 왕일은 다시 어리둥절해 했다. 그가 칼을 누구에게 배웠단 말인가? 그의 솜씨가 배운 것으로 보였을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방금 대협께서 가르쳐 주셨잖습니까! 칼을 꽉 잡으라고……!" "잉? 그럼 내가 본의 아니게 제자를 거둔 셈인가?" 의외의 대답이었던 모양, 마노삼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웃음기 남은 얼굴로 『� 이고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칼을 꽉 잡고 휘둘러 적을 벤다. 칼을 쓰는 법은 이걸로 끝일세. 자넨 정말 제대로 배운 거야. 음홧 궐� 홧!" 마노삼은 웃어도 왕일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사라져 버린 이응과 이응이 데려간 누이 동생을 � 각 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이응이 도망간 것은 정말 의외였다. 설마 의형제까지 버리고 도망가버릴 줄이야. 아마 그가 채염을 도� 이 묘당 안으로 뛰어들었다면 오늘로서 왕일의 목숨은 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 때문에 의형제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왕일은 한숨을 내쉬고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일행을 향해 포권했다. "오늘 도움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다시 뵙게 되면 그 때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노인이 물었다. "그 몸으로 이응을 추격할 생각인가?" "하는 수가 없지요." "하는 수가 없다……, 정말 하는 수가 없는 일일까……?" 노인은 말을 길게 끌어가며 되묻더니 그에게 두 가지 물건을 던져 주었다. 하나는 옥합에 담긴 약이고 다 른 하나는 아직도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만두였다. "약은 강향산(降香散)이라고 하는데 지혈을 시키고 통증을 없애 주는 효능이 있네. 그리고 만두는……. 그는 미소를 지었다. "어떤 약보다도 지금 자네에게 필요해 보이는군!" 그 말이 옳았다. 왕일은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언제 다시 뵙게 될 때를 대비해서 존성대명을 알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노인은 가볍게 손을 저어 거절했다. "다시 보게 되면 그땐 알 거고, 다시 보게 되지 않으면 지금 알 필요도 없겠지. 자네 일이나 성공하길 帽� 네!"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노삼이 불쑥 나섰다. "난 마적삼(馬積三)일세!" 노인이 이맛살을 찡그리며 눈치를 줬지만 그는 노인의 암시를 무시하고 옆에 둔 짐보퉁이에서 칼 한 � 루 를 슬쩍 꺼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청룡삼도(靑龍三刀) 마적삼! 그게 내 이름이지. 자네는?" 고색창연한 청동빛 칼이었다. 칼자루는 별호의 상징인 듯 청룡 한 마리가 휘감고 있었다. 이렇게 호감을 보이고 있는데 솔직히 대하지 않고 어쩔 것인가. 왕일은 깊이 포권하며 말했다. "창주의 왕일입니다." 마적삼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청동빛 피부에 두꺼운 목, 울퉁불퉁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용모를 ≠� 원래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웃는 모습은 보기 나쁘지 않았다. "자넨 장남이군. 안 그런가? 난 셋째라 이름에 삼자가 붙었지. 장래 자네가 진짜로 칼을 배우고 싶으� 금 릉(金陵)……!" "노삼!" 노인의 꾸짖는 소리에 마적삼은 찔끔하며 말을 끊었다. 노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더니 미소를 지었다. "금릉에 와서 마적삼을 찾게나." 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에게도 오늘의 일은 말하지 않을 테니 심려 놓으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그는 마적삼 일행에게는 무언가 남에게 알려지면 안되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왕일은 � 것 이 무엇인지 알고싶지도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는 눈보라 속으로 걸어나가면서 다시는 이들 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금릉으로 가는 일이란 없을 테니까. 천하에 다시없는 사냥꾼도 눈이 오면 사냥을 멈추는 법이다. 발자국도 자취도 도저히 찾을 길이 없는 � 이 다. 왕일도 그래야 옳았을 것이다. 눈보라는 다음날 바로 그쳤지만 다시 하루가 지나도 이응과 누이의 행� 은 찾을 수가 없었다. 원래의 진로를 추측해서 길목이 될 만한 곳마다 가서 물어 봤지만 그들을 보았다는 사 汰� 없었다. 왕일은 참담한 기분으로 창주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이응은 놓쳤지만 또다른 원수, 진짜 원흉이 거기 아직 있을 것이었다. 진대야는 아직 거기 창주에 있었다. 그러나 진노육은 노환에 그날 밤 왕일에게 당한 충격으로 이미 � 은 후였고, 증국영과 그 의형제는 더 이상 진대야에게서 얻을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창주를 떠나 버렸다. 대� 전 혀 기대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 거기 있었다. 이응이 그의 누이를 데리고 거기 진가장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창주를 떠났던 열 명의 청년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그리고 손부자 형제의 시신을 운구해 온 청년, 고무삼(顧懋森)에게서 들었다. 지금 그를 미친 놈 쳐다보듯 쳐다 보고 있는 바로 그 청년이었다. "혼자서? 혼자 진가장에 잠입해서 이응을 죽이겠단 말입니까?" 왕일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행장을 챙겼다. 행장이래 봐야 칼 한 자루밖에는 없었다. 그것� 그 는 반 시진 동안이나 정성 들여 닦고 또 닦아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무언가 도울 길이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왕일은 냉정하게 고무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한 마디를 던졌다. "결국은 나 혼자 할 일이야. 난 더이상의 희생을 보고 싶지 않아." 그는 나가고 고무삼만 홀로 어두운 방안에 남겨졌다. 고무삼은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가 � 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유대가(柳大哥)라면……!" 유대가, 유동(柳動)은 손부자를 존경하고 따르던 창주의 청년들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 그래서 수장격� 청 년이었다. 그에게 상의하면 무언가 왕일을 도울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동이 사는 호와령(虎臥嶺) 아랫동네는 같은 창주현이라고 해도 고무삼의 집에서부터 삼십여 리나 떨� 진 곳에 있었다. 밤길로 삼십여 리를 어디가 깨어지는 줄도 모르고 달린 고무삼은 바로 유동의 방으로 뛰어 榕� 다. "그가, 왕일이 왔습니다!" 유동은 고무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 또한 어떤 식으로든 왕일을 돕고싶어했다. 그러려면 사� 이 많아야 했다. "동지들을 모으세!" 유동과 고무삼이 다시 밤길을 달렸다. 두 사람이 네 사람으로 다시 여덟 사람이 되기까지 반나절이 더 걸 렸다. 겨우 여덟 명의 동지가 꾸려지고, 돌아볼 것 없이 진가장으로 쳐들어가자는 결정이 내려진 것은 이 � 날 이 밝은 뒤였다. 한 동네에서, 아무리 상대가 악명이 높은 인물이라고 한들 아는 얼굴인데 대낮에 쳐들어갈 수는 없는 � 릇 이었다. 고무삼 패거리는 쳐들어갈 염은 못내고 진가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내부 사정을 들어보려고 애� 썼 다. 그러나 묘하게도 지난밤 진가장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왕일이 뛰어들었다는 낌� 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다시 밤이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왕일은 진가장의 구석진 창고에 숨어 있었다. 예전에 그가 초주검 상태로 끌려와 뒹굴던 바로 陋� 이었다. 지금은 이미 그때 그가 흘렸던 피와 오물들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아픈 기억들은 그 흙바 悶�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왕일에겐 그랬다. 이곳은 그의 첫 번째 죽음이 시작된 곳이고, 그래서 동시에 또 하나의 탄생이 시작된 곳이기도 했다. ゾ� 보다도 이곳은 평생 땅만 알고 살았을 농부 왕일을 피와 살육의 땅으로 내몰아 버린, 한 순간 비틀려 버� 인 생의 그 모든 모순이 상징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진가장이고, 진가장의 부와 악의 簒� 인 창고이고, 왕일의 묘이자 산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창고의 어두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흙을 만지작거리면서 밤을 기다렸다. 지난밤은 진가장 내� 의 동태를 염탐하느라 온전히 바쳐 버렸다. 구지룡 증국영과 그 의형제가 정말 진가장을 떠났다는 것을 확인 構�, 과거 삼십 명을 헤아리던 하인들이 그 반으로 줄었다는 것도 확인했다. 수하들을 모두 잃고 홀로 남은 이 응� 왕령 하나만 달랑 인질로 삼아 이곳에 와서 죽치고 있다는 것도, 그의 거처가 후원 별당이라는 것도 확인 杉�. 그는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대단히 신중한 행보를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했다. 아무리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이응과 맞서 싸워야 하는데 지 금의 왕일에게는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끌 능력이 없었다. 왕일은 무림이 결국 이런 곳이라는 것을 뼈저리� 느 껴야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해도 결국 끝을 맺는 것은 힘밖에 없는 세계, 어떤 원칙과 � 당 성보다도 힘이 우위에 서는 세계. 야수의 그것과 같이 '강자존(强者存)'이라는 세 글자가 의심의 여지도 없이 군림하는 세계, 그것이 무림이었다. 그 세계에 지금 왕일은 칼 한 자루만 가지고 뛰어든 것이다. 왕일은 누이를 생각하고, 그 자신의 비틀린 운명을 생각하고, 또 그의 원한과 분노와 의무, 무엇보다 뭡� 를 생각했다. 지척의 거리에 그 모든 것이 있었다. 입을 벌려 소리 한 번 지르면 돌이킬 여지도 없이 모� 것 이 가야할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그 길이 그가 원한 것이 되기를 그는 바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싸워 이 輧� 했다. 결국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힘껏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가 가진 것. 왕일은 그 생각을 하고는 눈을 빛냈다. 그는 품속을 뒤져 암기통을 꺼내었다. 광간강사를 발사했던 그 育� 었다. 광간강사가 떨어지면서 쓸모 없는 고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방금 그것을 쓸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칠독황봉침이었다. 49. 칠독황봉침. 사부는 그것이 전설적인 독의 명가, 묘강 오독문(五毒門)에서도 전설로 내려오는 암기라고 했었다. 그 痼� 어떻게 돌고돌아서 왕일의 손에까지 흘러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행운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 미 여러 번 썼던 것이라 아직도 독이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응에게 약간의 타격이라도 � 수 만 있으면 왕일에겐 큰 힘이 될 것이었다. 왕일은 암기통을 들여다보았다. 엄지손가락 굵기만한 은빛 원통. 앞부분은 계란의 작은 쪽처럼 유선형 막� 만들어져 있고 구멍이 있었다. 발사구였다. 몸체에는 중간에 긴 홈이 있고 거기 뾰족 튀어나온 발사장치� 있 었다. 한 번 발사한 뒤에는 다시 당겨서 용수철을 조인 다음 다시 발사하도록 된 장치였다. 뒤는 평평했 쨉� 마치 한 틀로 찍어 나온 것처럼 열 수 있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광간강사가 반의 반 치도 안되게 짧은 것인데 칠독황봉침은 한 치 길이가 넘는다는 점이었다. � 께 도 크게 차이가 나서 광간강사가 쇠털처럼 가는 반면 황봉침은 바늘 굵기는 족히 되었다. 이런 것이 광간 �사 가 발사되던 통에 들어가기나 할까? 과연 잘 되지 않았다. 구멍에는 겨우 비집고 들어가긴 하는데 이렇게 빡빡하게 넣었다간 발사도 되지 � 을 것이었다. 왕일은 칼로, 그것도 암기통에 비하면 무식할 정도로 큰 칼로 후벼파서 구멍 둘레를 넓힌다는 ソ� 하기 짝이 없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하는 수가 없었다. 왕일은 밤이 올 때까지 암기통을 만지며 끙끙거려서 어찌어찌 침을 밀어 넣는 데에 성공했다. 무식한 � 법 이 통한 것이다. 단지 한 번에 하나밖에 못 넣는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이게 어딘가. 이것만으로도 그에게 � 큰 힘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이제 이응을 이긴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한 발로 北� 시켜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밤이 깊었다. 왕일은 창고에서 나와 후원 별당을 향해 움직였다. 도적을 대비해서 세 겹으로 둘러싼 � 은 담장, 그 사이에 미로처럼 길이 연결되어 있고 길 끝에는 반드시 건장한 하인들이 경비를 서도록 만들어� 작 은 집이 있었다. 그러나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이고, 몇 번에 걸친 가정불화로 받은 타격 때문에 진가장도 퇴락해서 한� 때 에 비하면 하인들의 수는 거의 십분의 일로 줄어들어 버렸다. 왕일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응의 방 앞� 지 접근해 갔다. 전날 밤에 봤을 때는 이응 혼자만 이 방에 있는 것 같았다. 왕령은 이응과 같이 있지 않은 痼� 확실하지만 어디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이응을 처치한 뒤에야 누이를 찾는 것도 구하는 것도 뜻 酉� 할 수 있으리라. 살아남는다는 가정 하에. 단지 그때에만. 왕일은 그 생각을 하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방문을 걷어차고 뛰어들었다. "누구냐!" 이응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들어왔다. 왕일은 암기통을 겨누어 신속하 �, 그러나 신중하게 발사했다. 허나 왕일의 행운은 거기에서 끝난 모양이었다. 이응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불을 당겨 � 을 가렸고, 왕일이 발사한 침은 이불에 꽂혀 버렸다. 다음 순간 이응은 침상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이불을 집 � 던 졌다. 한 점 먹구름처럼, 태풍처럼 이불이 날아오더니 왕일을 후려쳐 밖으로 날려 버렸다. 이제는 소용없 � 된 암기통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굴렀다. 왕일의 손에서 반짝이는 물체가 떨어지는 것을 이응은 보았다. 그것이 암기통이라는 것을 그는 알아보� 다. 그렇다면 이젠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왕일이 방문으로 접근해 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 발 소리를 죽인다 한들 그의 귀를 속인다는 것은 무리였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저 발소리가 분명 왕일일 痼� 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는 기다렸었다. 사십 평생에 가장 참담한 실패를 가져다주었던 개자식을 기다리고 羚� 다. 이제 잡아죽이면 되는 것이다. 그는 번뜩이는 구혼조를 양손에 끼면서 방문을 나섰다. 왕일은 방문 밖으로 퉁겨 나온 김에 그대로 � 돌 위로 굴러 눈 덮인 뜨락으로 기고 있었다. 그것이 이응의 눈에는 겁먹은 쥐새끼가 매의 발톱을 피하려는 碩� 처럼 초라해 보였다. 이제 곧 목에 발톱이 박힌 뒤에는 발버둥거리며 죽어가는 일밖에는 남지 않을 불쌍� 쥐 새끼처럼. 이응은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날아올랐다. 왕일이 눈 덮인 정원으로 나가려 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도망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싸 움 장소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단 한 초에 榴�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의 죽음과 동시에 큰 소망이든 작은 소망이든 일체가 사라지고 마는 것� 다. 눈과 함께 공중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저 이응의 기세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그것을 잘 알려주고 있었� . 왕일은 전심전력으로 칼을 휘둘렀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칵-! 한 마리 매처럼, 발톱을 세운 한 마리 부엉이처럼 날카롭게 채오던 이응의 구혼조가 왕일의 만도에 걸� 다. 아니, 이응이 구혼조로 왕일의 만도를 걸었다. 어느 쪽이든 다 말이 되는 듯했다. 왕일의 만도가 제법 � 라서 덮쳐 오던 이응으로서는 피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이 김에 왕일의 칼 따위는 잡아 던져 버리고 다른 한쪽 纜� 낀 구혼조로 긁으려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이 박산조의 한 초식 승풍파랑(乘風波浪)의 투로(套路)이기도 했고, 또 내심 왕일을 무시하고 있기 � 했 기 때문이었다. 왕일은 눈밭을 구르며 도망가는 쥐새끼처럼 아래로 보였고, 그는 힘을 받아 덥쳐가고 있 駭�. 그의 손에 끼워진 여덟 개의 손톱이 쥐새끼를 노리고 번뜩이고 있었다. 그 손톱에 쥐새끼의 이빨이 걸렸� 한 들 무슨 상관일 것이냐! 그런데 상관이 있었다. 쥐새끼의 이빨이 여간 날카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오른손 손가락에 끼워진 맬� 조 네 가닥이 단번에 잘려 나갔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맥없이. 이응은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균형을 잃었다. 그 바람에 그의 나머지 한쪽 구혼조도 목표를 제대로 치지 못 하고 옷깃만 긁었다. 그 사이에 왕일은 눈밭을 굴러서 이응의 손톱 아래를 빠져나갔다. 이제 그는 생각대 � 눈 덮인 정원으로 싸움 장소를 옮길 수 있었다. 며칠째 내려 쌓여 허리까지 오는 눈 속에서 적을 기다릴 수 斂� 된 것이다. 이응은 왕일을 쫓아갈 생각도 않고 잠시 멍하니 서서 그를 바라보고, 또 자기의 애병 구혼조를 바라� 고 했다. 낫으로 풀잎 한줄기를 쳤는데 풀잎은 멀쩡하고 낫이 잘려진다면 지금 이응의 기분과 비슷해질까? 缺� 은 자기의 손가락이 모두 잘려져 나간 것처럼 그렇게 황당한 표정으로 손을 보고 있더니 갑자기 포효를 � 뜨 렸다. 그리고 맹수처럼 왕일을 향해 덮쳐 들었다. 여느 때처럼 허공으로 떠서 박산조를 시전할 수 없었던 것은 정원에는 눈이 허리까지 쌓여 있었기 때� 이 었다. 그러나 그도 내로라하는 고수였다. 애송이를 상대하는데 굳이 박산조를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 걸 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의 진로에 있던 눈과 얼어붙은 겨울 나뭇가지들이 폭발하듯 옆으로 갈라져 튀었다. 왕일은 그가 아는 단 한 가지 도법, 마구 휘두르기라고나 할 방식으로 만도를 휘둘러 이응의 공격을 � 받 았다. 그러나 이응의 이번 공격은 달랐다. 방금은 칼이 그렇게 날카로운 것을 모르고 방심해서 한 공격이 鄕� 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왕일의 칼과 정면으로 마주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에게는 그럴 � 력이 있었다. 이응의 구혼조가 왕일의 정면으로 뻗어 왔다. 왕일의 칼이 수평으로 휘둘러져서 구혼조에 부딪혔다. � 니, 그럴 뻔했다. 구혼조와 칼이 부딪히기 직전에 구혼조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상상하지도 못한 공격 이, 그러나 고수라면 절대로 당하지 않을 공격이 아래로부터 가해졌다. 이응의 발이 왕일의 배를 걷어차 値� 다. 내장이 진동하면 숨이 막히고, 구역질이 나고, 심한 경우 피를 토한다. 왕일이 지금 그랬다. 그는 눈밭 � 길 게 피를 토하며 세 걸음이나 날려졌다. 정원석에라도 부딪힌 듯이 등에도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눈앞이 」� 가물해 지는데 이응이 다시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아직 남아 있는 왼손의 네 가닥 손톱들이 그를 베어 육� 있었다. 왕일은 힘없이 팔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생각을 하고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 이었 지만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이응의 구혼겸이 그의 팔뚝에 막혀 버린 것이다. 무처럼 잘려버릴줄 알았던 � 팔 뚝에 두른 한 겹의 띠가 날카로운 구혼겸을 막아내었다. 철비갑! 왕일은 갑자기 그 이름을 떠올렸다. 사마장여의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던가! '여기에는 다른 장치도 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을 그는 이 절박한 순간에야 비로소 떠올렸다가 바로 지워 버렸다. 철비갑 안에 세상을 진동시킬 � 엇 인가가 또 있다고 한들 지금은 소용없었다. 그에게는 이응을 죽일 한 수가 필요했다. 왕일은 칼을 들어 � 응을 향해 찔러 갔다. "형편없는…… 애송이 놈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은 숨이 가빠서라기보다는 분노한 탓일 것이다. 이 형편없는 애송이 놈 덕� 에 이응은 기반을 완전히 날리지 않았던가. 졸개들은 다 죽거나 도망가고 의형제들도 싸그리 죽었으니 그는 訣� 강호 어디에서도 얼굴을 들지 못할 처지였다. 그래서 아예 천기채에도 가지 않고 여기로 발길을 돌렸던 痼� 아닌가. 이젠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어딘가 시골에 숨어서 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전에 이 일과 晥� 된 자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싶은 마음에 여기로 온 것인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해서 이응은 이를 갈았다. 한 주먹에 해치워 버릴 것 같았던 쥐새끼가 생각처럼 쉽 게 죽어주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끝이었다. 이응은 정면에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는 왕일의 가슴팍을 걷어차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린애 � 짓 같은 칼에 찔릴 그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날카로운 것이라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물 �선 다음에 다시 구혼조로 회를 떠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일은 다시 한 번 그의 통제를 벗어나 제 멋대로 흘 러갔다. '어, 어……!' 순간적으로 이응의 몸이 굳어 버렸다. 쇠망치에라도 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온 몸이 움직여� 지 않는 것이다. 왕일의 칼 손잡이에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무엇인가가 발사된 직후였다. 그리고 왕일의 칼이 있었다. 버들잎처럼 예리하게 빠진 보통의 칼끝과 달리 투박하게 꺾여 있어서 마치 중 간에서 부러진 것처럼 보이는 만도의 끝. 그러나 사람의 거죽을 충분히 뚫을 정도로는 예리하다는 것을 � 칼 은 이미 보여준 바가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이응이 피할 수 없을 정도로는 빠르게. 둔탁하게. 칼은 � 응의 거죽을 뚫고, 살을 파헤치고, 내장을 끊어 버리며, 이윽고 단단한 등뼈를 간단하게 절반으로 쪼개 버리면 � 등 으로 튀어나왔다. 이응의 안색이 갑자기 시꺼멓게 변했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의 손끝이 이제야 움직 堅� 시작했다. 처음의 목표가 그것이었던 듯 왕일의 얼굴 앞에서 손톱이 움직였다. 그러나 단지 허공을 긁을 湛� 었다. 이응의 머릿속에 한 가지 말만은 천둥처럼 울리고 있었다. '독의 명수!' 이응은 그것을 잊지 말아야 했었다. 그러나 한 순간 그것을 잊은 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림� 상 가장 비겁한 암기, 당문의 비밀, 검저유혼의 제물이 된 것이다. 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피는 조용히 흘러나와 정원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 왕일의 몸에서도 힘이란 힘은 모두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그렇게 정원에 널브러져서 이응의 시 체를 위에 얹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뒤늦게 뛰어든 창주의 청년들이 진가장을 불태우고, 그의 누이를 구 漫� 그의 앞에 데려올 때까지. 그리고 그들의 손에 진가장주의 목이 들려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그냥 왠지 무 �각 하기만 한 그 자신을 발견하고 오히려 놀랄 때까지. 왕일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누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감각하게, 무감동하게 식어 버린 눈이었� . 스 스로는 그것을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도 그런 눈으로 누이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었다. 격정에 지쳐서, 삶이 그들에게 주는 그 모든 악과 무의미함에 피곤해져 버린 눈으로. 그후로도 한동안 왕일과 그의 누이는 그런 눈을 하고 있지만 왕일은 곧 일상의 눈으로 돌아왔다. 그에� 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 위해 살아야 할 사람, 누이가 있었다. 그러나 왕령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고, 그녀는 오빠보다도 오히려 더욱 삶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 후� 도 오랫동안, 지금까지 그녀가 겪었던 일들보다 훨씬 더 많은 복잡한 일들을 겪은 후에까지, 더 이상 그 눈� 할 필요가 없게 될 때까지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 1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