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음진경(九陰眞經) 第 一 卷 저자 : 용 공 역자 : 박영창 타자,편집 : Zazeung 발행 : 1994.12.1, 황제출판사 ---역자 소개--- 박영창 : 중국문학 번역가. 주요 번역서로는 <천룡팔부>, <녹정기>, <화산논검>, <동방불패>, <소오강호>, <연성결>, <비호외전>, <아! 북극성> 등이 있다. ---역자 서문--- 한국에 최초로 소개된 중국무협소설은 1961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정협지(情俠誌)>인데, 위지문의 <검해고홍(劍海孤鴻)>을 김광주 선생이 번안한 이 소설은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을 받았으며, 김광주 선생은 곧이어 <비호(飛虎)>, <사자후(獅子吼)>,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고>, <풍운검(風雲劍)> 등의 번안 무협소설을 신문에 연재하여 호평을 받았다. 번안하여 신문에 연재하였던 김광주 선생의 작품들은 국내에 무협소설의 독자층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정협지>등의 신문 연재 소설이 서점용 책자로 출판된 것은 물론이다. 이 무렵, 무협소설의 영향을 받아 한국인이 창작한 무협소설이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하는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시대적 배경으로 나오고 김유신 등의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며, 일본의 사무라이 소설의 냄새를 풍기는 <뇌검(雷劍)>이 책으로 출판되었고, 서울신문에는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과 왜구가 창궐하는 시대에 애국심에 불타는 여자 검객 비연이 등장하는 방기환 선생의 작품 <낭자검(娘子劍)>이 연재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무협소설류의 책들이 잘 판매되자 너도 나도 중국무협소설을 출판하게 되는데, 가장 특기할 사실은 중국의 무협소설작가 와룡생의 작품들이 번역 소개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군협지(群俠誌)>, <비룡(飛龍)>, <무유지(武遊誌)>, <천애기(天涯記)>, <야적(夜笛)> 등의 와룡생의 대표작들이 번역, 출판되면서 국내에도 무협소설 애독자층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와룡생은 본명이 우학정(牛鶴亭)>인데 장개석 휘하의 군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처녀작은 <강호협은(江湖俠隱)>이며, 최고의 대표작은 뭐니뭐니 해도 <군협지>라고 할 것이다. 국내에 소개된 와룡생의 작품은 대부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무협소설의 특성상 많은 양의 작품을 모두 사서 읽는 것은 경제적인 부담도 크고, 한번 읽고 버리는 소설이므로 만화방용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국내에서 최초로 만화가게용으로 제작된 무협지는 1967년에 출판되었던 <침사곡>과 <정검지>라고 할 수 있다. 만화가게용으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던 무협소설로는 <마웅>, <마탑>, <마존>, <마혈>, <마룡>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와룡생의 지음으로 탈바꿈하여 발간되었다. 이때부터 무협소설은 만화가게용으로 제작, 배포되어 오다가 1985년 가을 만화가게용이 아닌 서점용 무협소설이 20년만에 서점가에 등장한다. 김용(金庸)의 소설 <영웅문(英雄門)>이 바로 서점용 무협소설의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역사와 무협이 결합된 흥미있고 문학성 높은 소설 <영웅문>은 엄청난 부수가 팔려나가면서 이 땅에 서점용 무협소설이 뿌리내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영웅문>에 이어 <천룡팔부(天龍八部)>, <녹정기(鹿鼎記)>, <연성결(連城訣)> 등의 김용의 다른 작품들이 연달아 출판되면서 김용의 애독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87년까지 김용의 진본 15종 가운데 <월녀검(越女劍)>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번역 출판되었다. 김용의 진본 15종은 다음과 같다. <비호외전(飛狐外傳)>, <설산비호(雪山飛狐)>, <연성결>, <천룡팔부>,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영웅문 1부)>, <신조협려(神雕俠侶:영웅문 2부)>, <의천도룡기(倚天居龍記:영웅문 3부)>, <백마 소서풍>, <녹정기>, <소오강호(笑傲江湖:동방불패)>,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협객행(俠客行)>, <벽혈검(碧血劍:열하성), <원앙도(鴛鴦刀)>, <월녀검(越女劍)>의 15종인 것이다. 김용은 이 15종의 무협소설만 집필했을 뿐인데 요즘 김용 이름 달면 많이 팔린다고 하여 가짜 김용의 작품들이 출판되고 있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 할 것이다. 소설 <영웅문> 3부작은 정말 나무랄데 없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하지만 <영웅문> 1부의 전편이 있어야 하는데도 김용이 집필하지 않고 1972년 <녹정기>를 끝으로 절필하여 다시는 무협소설을 집필하지 않고 있어, 김용 애독자들에게 안타까움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영웅문> 1부의 내용상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지흥, 북개 홍칠공, 중신통 왕중양, 이 전대(前代)의 다섯 기인들이 희대의 무공비급 <구음진경(九陰眞經)>을 차지하기 위해 제1차 화산논검(華山論劍)을 하는 이야기가 결여되어 있어 <영웅문>의 애호가들에게 많은 안타까움을 남겨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 홍콩의 용공(庸公) 선생은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영웅문 1부)>의 전편이라 할 <사조영웅전전(射雕英雄傳前)>을 집필하게 되니, 이야말로 제1차 화산논검의 이야기를 완결지은 소설 <영웅문>의 전편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걸작이라 하겠기에 번역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본인은 이 작품 <구음진경(九陰眞經)>을 끝으로 무협소설의 번역을 마감하려고 한다. 187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5년간 무협소설의 번역과 창작에 종사하여 오는 동안 부족한 본인을 성원하여 주신 독자제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여러분의 가정에 행운이 깃드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특별한 예외가 없다면 이 작품은 본인이 번역하는 최후의 무협소설이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저를 사랑하여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면서, 갑술년(甲戌年)도 저물어 가는 어느 겨울날... 박 영창 올림. 第 一 章. 구음진경을 찾아 나선 왕중양 구름 낀 파란 하늘, 누런 잎이 뒹구는 땅, 차가운 연기는 가을의 쓸쓸함을 더해 주는데 석양에 비친 산 그림자하늘과 맞닿아 있는 물결 무정한 방초(芳草)에 저녁 놀 서려 있고 시름에 젖어 고항을 그리는 나그네잠 못 이루어 아름다운 꿈도 꾸지 못하는구나. 달 밝은 밤에 홀로 누각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나 시름은 더욱 깊어져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도다. 송(宋)나라는 단연지맹(檀淵之盟)을 맺은 뒤로 잦은 이민족의 침략에 줄곧 소극적인 안무(安撫) 정책을 취하였다. 변경에는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수비에 급급할 뿐이었다. 변경을 지키던 범중엄(范仲淹)은 쓸쓸한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망향(望鄕)의 시름에 젖었다. 범씨의 우울한 심정은 그가 지은 소막차(蘇幕遮)라는 사(詞)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때는 북송(北宋) 인종(仁宗) 연간, 금나라 군사들이 중국의 북쪽 지방을 점거하고 백성들을 참흑하게 능멸하자 백성들은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져 유랑하고 있었다. 민간에서는 금나라에서 대항하는 의병이 일어나기도 했다. 의병의 무리들 가운데는 삼교구류(三敎九流)의 승려나 도사, 유생, 속인 등이 뒤섞여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도교(道敎)의 세력이 가장 많았다. 도교는 한(漢)나라 때의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에서 비롯되었다. 그보다 앞선 진나라 시대에도 도가가 있었으나 철학상의 유파에 지나지 않았다가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종교로 변한 것이었다. 금나라 군사들이 중국의 북방을 침입하여 섬서(陝西)와 산동(山東), 하북(河北) 일대의 백성들을 능멸하고 압박하자, 새로운 도교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교파들은 전진교(全眞敎), 대도교(大道敎), 태일교(太一敎)등이었다. 도교의 교도들은 평민들과 빈번한 접촉을 가지면서 지하에서 이민족의 통치에 대항했다. 그 중에서도 전진교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그 중에서도 전진교에서는 부적이나 연단을 만드는 것을 숭상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을 종지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전진교의 도사들을 존경하고 우러러보았다. 전진교의 교주인 왕중양(王重陽)은 본명이 왕철(王喆)이고 자호가 중양(重湯)이며 함양(咸陽) 태생이었다. 그는 청허산인(淸虛散人)의 대통을 이어받은 후에, 처음에는 사제 주백통(周伯通)과 여러 문하 제자를 데리고 하남성의 숭산(嵩山) 연하동(烟霞洞)에 은거한 채 조용히 수양하고 있었다. 숭산은 예로부터 외방(外方)이라고 불렀으며,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 예로부터 중악(中嶽)이라 일컬었다. 그 산세가 웅장한 것이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을 연상시켰고, 그 지세가 매우 험준하면서도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다. 왕중양은 그 천연적인 지세를 이용해서 전진교를 창립하고 금나라에 대항할 계획이었다. 화산(華止)은 서악(西岳)이라 일컬어지는 산으로 대륙의 서쪽 섬서성 화양현(華陽縣) 경내에 있었으며, 동관(潼關)과 서안(西安) 사이에 위치하였다. 화산은 태화(大華)와 소화(少華) 두 주봉(主峰) 나누어지는데 그 높이가 6천 6백여 자에 달했으며 둘레는 3백여 리나 되는 큰 산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화산은 태화를 뜻하며 태화봉에 이어진 바위로 뒤덮힌 산봉우리들은 구름을 찌르고 우뚝 솟아 있었다. 짙푸르고 힘차며 수려한 화산의 경치는 절로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 산에 있는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는 한결같이 기이하고 아름다웠다. 솔잎을 스치고 불어오는 바람과 몽몽하게 피어 오르는 안개, 그리고 흐르는 듯한 노을 빛은 그렇지 않아도 수려한 화산을 선경(仙境)처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날 전진교 교주 왕중양은 왕원빈(王元斌)을 데리고 화산 산자락을 접어들었다. 이곳에는 한 줄기의 맑은 개울이 있었는데 어옹석(漁翁石)은 물이 휘도는 개울의 언저리에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사람이 쭈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왕중양은 효자가 고기를 낚아 어머님의 병을 치료했다는 옛이야기를 떠올리고 감개에 젖었다. 왕원빈은 지리에 익숙한 듯 왕중양을 이끌고 조어석(釣魚石)을 돌아 앞으로 나아갔다. 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무성한 솔밭이 있었다. 공기가 맑고 그늘져 시원한 것이 소나무밭 속으로 들어가자 더위가 깡그리 사라져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선 것 같았다. 소나무밭 한 모통이에 한 칸의 조그만 초가집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초가집은 왕원빈 부자가 거처하고 있는 초가집보다도 더 누추해 보였다. 왕중양이 초가집에서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이르자 사립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한 명의 사내 아이가 문 밖으로 나왔다. 눈망울이 커다랗고 살결이 가무잡잡한 사내 아이였다. 윗통은 벌거벗었고 아랫도리엔 앞을 가릴 정도의 짧은 고의를 하나 걸치고 있었으며 두 발도 맨발이었다. 그 소년을 보자 왕원빈은 즉시 불렀다. [넌 어디로 가느냐? 혹시 고기 잡으러 개울로 가는 거냐?] 그 소년은 손에 들고 있는 고기를 담는 광주리를 쳐들어 보였다. [그래요. 고기를 잡아다가 아버님의 반찬을 해 드리려고 해요.] 왕중양은 앞으로 나서며 웃었다. [그럴 필요 없다. 우리는 너희 아버님을 찾아왔다. 아버님은 집에 계시냐?] 그 어린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왕중양과 왕원빈을 안으로 안내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가 보니 가구라고는 별로 보이지 않아 빈한한 기미가 역력하였다. 한명의 비쩍 마른 늙은이가 앉아 있는데 머리가 덥수룩하고 얼굴엔 병색이 완연하다. 그는 왕중양 등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중양은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노인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이 분은 자제분이신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늙은이는 성은 곡(曲), 이름은 천웅(天雄)이라 하오. 이 애는 내 못난 자식 곡승(曲勝)이오. 도장께서는 처음 보는 분이신데, 무슨 볼 일이 있어 누추한 저희 집까지 찾아 오셨는지요?] 왕중양은 대답했다. [한 가지 물건을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왕중양은 곡승을 향해 물었다. [얘야, 내가 너에게 부탁을 하나 해야 되겠다. 너는 나를 따라 앞에 있는 개울로 가자. 네가 물속에 뛰어들어 한가지 물건을 건져줄 수 있겠느냐?] 곡승은 왕중양이 물속으로 들어가 물건을 찾아 달라는 말에 흔쾌히 대답했다. [되고 말구요. 도장(道長), 솔직히 말해서 저는 종종 물밑으로 가서 고기를 잡는답니다. 도장께서는 조금 전에 조심을 하지 않아 그 개울에 어떤 물건을 빠뜨린 모양이군요?] 왕중양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물건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너에게 한마디 묻겠는데, 그 개울은 얼마나 깊으냐? 너는 그 개울 밑바닥의 모든 사정에 대해서 잘 아느냐?] 왕중양의 이 몇 마디의 말이 떨어지자 곡승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 개울은 깊다고 할 수도 없고 얕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물이 얕은 곳은 대여섯 자 정도이고, 물이 깊은 곳은 이 장도 넘지요. 도장, 저는 매일같이 개울에서 자맥질을 하면서 물밑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기 때문에 그 개울에 대해서는 손바닥 들여다 보듯 환히 알고 있으며 개울 바닥에 몇 개의 돌멩이가 있는지도 알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왕중양은 그의 말을 듣자 매우 기뻐했다. [그렇다면 정말 잘 되었다. 너는 한 조각의 바위를 건져 올리면 된단다.] 곡천웅 부자는 그 말을 듣고는 어리둥절해 했다. 곡승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바위라구요? 한 조각 바위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세요?] 왕중양은 대답했다. [얘야, 너에게 한마디 더 묻겠다. 어옹석 아래쪽의 개울 밑바닥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바위 모양이 물고기처럼 생겼다고 하더구나. 그런 바위를 본 적이 있느냐?] 곡승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맞아요. 개울 밑바닥에는 정말 그런 바위가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끌어 올리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 쉽지 않다는 거지?] [그 개울 밑바닥 일대에 가는 모래가 깔려 있고 한복판에 한 조각의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는데 그 바위는 정말 한 마리의 커다란 물고기 같아요. 하지만 이 물고기 모양의 바위는 길이가 석 자가 넘고 넓이가 한 자도 더 되니, 무게가 적어도 백 근은 나갈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것을 끌어 올릴 수 있겠어요?] 왕중양은 빙그레 웃었다. [얘야, 낙심할 것 없다. 물에는 부력이 있기 때문에 백 근이 나가는 물건도 물 속에서는 오십 근의 무게밖에 나가지 않는단다. 착하지, 한 번 시험해 보아라. 너에게 바위를 끌어올리는 방법을 알려 주마.] 곡승은 기뻐하며 왕중양을 데리고 깡충거리며 곧장 개울쪽으로 뛰어갔다. 왕원빈 역시 그들 두 사람을 뒤따랐다. 그들이 함께 개울 앞에 이르자 곡승은 효자가 고기를 낚았다는 그 바위 옆에 고기를 담는 광주리를 내려 놓고 하의를 벗더니 풍덩 하고 물탕을 튀기며 개울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왕중양은 어옹석 옆에 서서 두 눈을 크게 뜨고 개울 안의 동정을 살폈다. 대략 두 잔의 차를 마실 시간이 되자 갑자기 촤르륵 하는 소리가 나면서 곡승이 머리를 수면 위로 내밀며 솟아 올랐다. 그는 천천히 개울가로 헤엄쳐 오더니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걸어 나왔다. [도저히 안 돼요. 도장, 저는 그 바위를 끌어 올릴 수가 없네요.] 원래 곡승은 조금 전에 물밑으로 잠수했는데 자맥질에 능해서 얼마후에 밑바닥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개울물은 매우 맑아 물속의 풀들이나 노닐고 있는 고기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수초들이 둘러싼 한복판에 과연 한 조각 자흑색의 알록달록한, 물고기 모양의 이상한 바위가 있었다. 곡승은 두 손을 벌려 그 이상한 바위의 윗쪽 부분을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 바위를 들어올리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한 조각의 물고기 모양을 한 바위의 꼬리 부분이 깊이 모래바닥 속에 박혀 무쇠 덩어리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개울 밑바닥에 뿌리를 박은 듯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잇달아 몇 번이나 힘을 주었으나 잠자리가 커다란 바위를 잡고 뒤흔드는 것처럼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런데 너무 힘을 준 나머지 발밑의 흙모래를 걷어차게 되어 흙모래가 뽀얗게 일어 물밑이 혼탁해져 사물을 살펴 볼 수가 없었다. 잠수하는 사람들은 탁한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법이다. 왜냐하면 탁한 물속에는 흙모래가 섞여 있기 때문에 그 흙모래가 자맥질을 하는 사람의 눈이나 귀 또는 입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몹시 괴롭기 때문이었다. 곡승은 하는 수 없어 물 위로 떠올라 왕중양에게 물밑의 상황을 설명했던 것이다. 왕중양은 곡승의 말을 듣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가 이야기하자.] 그들은 곡 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밤 왕중양은 혼자 집 밖으로 나가 고개를 쳐들고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살펴 보다가 문득 북쪽 하늘에 찬연히 빛나고 있는 북두칠성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는 사부님이 전수한 천강북두진(天　北斗陣)을 연상하게 되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음진경을 얻을 생각이다. 하지만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이 책에만 의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음진경(九陰眞經)에 아무리 훌륭한 무공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너무 거기에만 의지할 필요는 없다. 구음진경의 무공만 훌륭한 것은 아니다. 천강북두진과 일양지(一陽指) 절기도 구음진경에서 배운 재간이 아니지만 매우 훌륭하지 않은가?) 왕중양은 일양지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좋은 영감이 떠올랐다. 옛날 그가 숭산 태실산(太室山) 동굴 속에 틀어박혀 일양지의 무공을 익히게 되었을 적에 한 손가락의 힘으로 동굴을 폐쇄하고 있는 석벽을 밀어 열어젖힌 적이 있었다. 그는 사부로부터 일양지는 그 어떤 딱딱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파괴할 수 있으며, 그 밖에도 많은 공효(功效)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불을 피울 수도 있고, 강물을 가를 수도 있다고하셨다. (그런데 나는 한번도 일양지를 물과 불에 응용한 적이 없다. 오늘밤에는 개울가에 가서 한번 시험해 보도록 하자.) 왕중양은 즉시 개울 쪽으로 걸어갔다. 밤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소나무 그림자는 울창하고 달빛은 천 리를 환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왕중양은 개울가에 이르러 한 조각의 바위를 찾아, 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묵묵히 현공(玄功)을 돋구었다. 마음속에 잡념이 없어지고 진기가 온몸을 거침없이 통하게 되자 왕중양은 벼락같이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뻗쳐 내어 개울물을 가리켰다. 정말 희한하게도 수면위에 즉시 소용돌이가 일면서 그 소용돌이의 한 복판이 움푹 꺼져들지 않는가? 물결이 마구 넘실거리면서 개울물은 사방으로 밀려났다. 왕중양은 일양지의 위력이 그토록 엄청난 것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그런데 마음이 홍분되자 진기가 즉시 흩어지면서 더이상 일양지의 지경(指勁)을 뻗쳐낼 수가 없었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개울물은 다시 합쳐지면서 그 소용돌이도 종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왕중양이 개울물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갈라진 시간이 반 잔의 차를 마실 시간도 채 되지 않는 것을 보자 중얼거렸다. [애석하구나. 내가 두 잔의 차를 마실 시간 동안만 소용돌이가 일어나도록 일양지를 연성했다면, 물밑에서 바위를 건져 올릴 시간이 생길 것이고, 전대미문의 장거(壯擧)를 성공시킬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왕중양은 재차 호흡을 가다듬고 잡념을 떨쳐 버렸다. 그리고는 진기를 단전으로 모으고 두 손을 비볐다 떼어 놓으면서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뻗쳐 수면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양지의 경력(勁力)이 이른 곳에 다시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 소용돌이는 처음에 세숫대야 크기에 한 자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으나 잠시 후에 소용돌이가 점점 커지면서 수면 역시 점차 밑으로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삽시간에 수면은 예닐곱 자 아래로 낮아지게 되었고 소용돌이의 표면은 둥근 탁자 정도로 커지게 되었으며 사면의 물은 담장처럼 벽을 이루었다. 왕중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일양지의 벽수공(闢水功)을 응용하여 이미 절반은 성공했다. 이제 소용돌이를 조금 더 확대시키고 수면을 조금 더 내려가도록 한다면 개울 밑바닥의 흙모래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구음진경이 숨겨져 있는 바위를 건져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왕중양은 속으로 약간 우쭐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등뒤에서 코웃음치는 쳇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것이 아닌가? 왕중양은 뜻밖의 사태에 깜짝 놀랐다. 그 바람에 심신을 안정시키지 못해 일양지의 지력을 쏟아낼 수가 없어 개울물은 다시 철썩 하는 소리를 내면서 합쳐졌고 소용돌이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왕중양은 자기를 비웃은 사람이 틀림없이 자칭 백타산주(白駝山主)라는 서독(西毒) 구양봉(歐陽鋒)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바위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입을 열었다. [독사를 기르는 친구, 빨리 나오시오. 등 뒤에서 남을 비웃는 사람이 어찌 호걸이겠소?] 왕중양의 그 한 마디가 끝나자 머리 위에서 냉랭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출가인은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욕심을 내지 않고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하거늘, 한밤중에 수양은 하지 않고 우쭐해서 무공 자랑이나 하고 있으니, 그러고서도 호걸이라 할 수 있겠소?] 왕중양은 귀가 무척 밝았다. 말하는 그 사람이 결코 구양봉이 아니고 황해(黃海)의 이름 없는 섬에 기문팔괘진(奇門八卦陣)을 펼쳐 놓았던 황약사라는 괴인의 음성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마음을 진정하고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귀하는 황량한 섬에서 만났던 자칭 동사(東邪)라는 그 친구가 아니오? 반갑소 반가워. 이리 와서 우리 대면이나 합시다.] 왕중양이 그와 같이 말했.안나 상대방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고, 대답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왕중양은 상대방이 대답하지 않자 부득이 몸을 돌려 개울가로 되돌아갔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맑고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당신과 대면하기 싫소. 왜냐하면 당신이란 사람은 조금도 우아한 구석이 없고, 말하는 것조차 너무나 속되기 때문이오. 하지만 꼭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그 곡씨 성을 가진 어린애는 근골이 무척 훌륭하오. 그 아이를 내 제자로 거두어 들이기로 작정했소. 따라서 당신이 그를 거두어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소. 당신이 내 말을 거역한다면 우리들은 원수지간이 될 것이니, 잘 기억해 두시오.] 그리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왕중양은 상대방의 그와같은 말을 듣고 흠칫 놀라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알고 보니 저 사람은 멀리서 상대방에게 음성을 전달하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재간에 능통하구나.] 이번에 왕중양은 화산에 와서 왕원빈을 제자로 삼았다. 따라서 마(馬), 구(丘), 손(孫), 담(譚) 네 사람을 합치게 되면 모두 다섯 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셈이었다. 이번에 그는 곡승이라는 그 어린애를 관찰해 보았는데, 곡승은 아직 무공을 익히지 못했지만 근골은 매우 훌륭한 편이고 마음씨도 속되지 않아 곡승을 자기의 제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기에게 여섯 명의 제자가 있게 되므로 사제 주백통이 가담한다면 일곱 명으로 구성되는 천강북두진을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동해의 황량한 섬에 살고 있는 그 괴인이 그 곡씨 성을 가진 어린애를 이미 점 찍어 놓고 왕중양이 제자로 거두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나서서 자기와 대면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 그 행동의 이상함과 괴기한 성격은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아 왕중양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허... 정말 괴상한 사람이야.] 그는 연달아 두 번이나 일양지 신공을 펼쳤기 때문에 원양진기(元陽眞氣)가 심하게 소모된 상태였다. 그런데다가 그 괴인이 그와 같이 시비를 걸고 나오자 그만 홍이 깨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다시 곡씨 노인의 초가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막 문앞에 이르렀을 때 흘깃 망막에 비친 광경을 보고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곡씨 노인의 초가집 창문 아래에 두 마리의 커다란 살모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지 않은가? 그 두 마리의 살모사는 길이가 여덟 자나 되었으며 어린애 팔뚝만큼 굵었다. 그러나 살모사의 목(七寸子)은 이미 두 토막이 나 있었괴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자색빛 피가 땅바닥에 홍건하게 고여 있었는데 그 피가 아직도 응결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방금 전에 목을 잘리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것은 그 두 마리의 등에 한 줄의 금빛이 번쩍이는 물체가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왕중양은 의아하여 앞으로 다가가 살펴 보니 두 줄의 못이 죽은 뱀의 등줄기에 나란히 꽂혀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자신이 일찍이 한번도 보지 못한 금침(金針)이었다. 그는 살모사를 죽여 집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구해준 사람이 틀림없이 전음인밀의 재간으로 자기에게 말을 걸었던 그 동사라는 괴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왕중양은 사실 그 괴인에 대해서 별로 호감을 느끼지 않았으나 이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자 그 사람이 한번 사귀어 볼 만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자기와 대면하는 것을 한사코 피하고 있으니, 그 사람과 사귀려고 해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왕중양은 잠시 이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집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왕중양은 잠결에 홀연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떠 보니 왕원빈과 곡승이 어느덧 자기의 짚으로 엮어 놓은 침상 앞에 서 있었다. 왕원빈은 왕중양이 눈을 뜨는 것을 보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사부님은 언제나 일찍 일어나시는데 오늘은 어째서 이토록 늦게까지 주무십니까? 혹시 독사에게 물려...] 곡승은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불길한 소리 말아요. 도장, 창 밖에 두 마리의 커다란 뱀이 죽어 있어요.] 왕중양은 무공을 연마하고 심신을 단련하는 사람이었다. 왕복(王福)의 집에 며칠 머무는 동안 아무리 밤 늦게 잠이 들었어도 아침이 되면 일찍 일어났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잇달아 두 번이나 일양지공을 펼쳤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쳐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잠에 빠져들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왕원빈이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왕중양은 왕원빈의 말에 웃었다. [나는 독사에게 물리지 않았으니 너무 염려 말아라. 그 두 마리의 커다란 살모사가 어젯밤에 집안으로 들어와 사람을 헤치려고 했다. 내가 암기를 날려서 두 마리의 살모사를 죽인 것이란다.] 그가 왕원빈의 집에서도 뱀을 죽이는 재주를 펼쳐 보였기 때문에 왕원빈은 왕중양의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곡승은 왕중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장, 저는 오늘 아버님께 그 물고기처럼 생긴 바위를 들어올리려면 아무래도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십여 개의 수거(水車)를 이용해서 개울물을 모조리 뽑아 올려야 가능할 거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그 한 개의 커다란 바위 덩어리에 무슨 대단한 보물이 있길래 도장께서 온갖 방법을 강구해서 그 바위를 끌어올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왕중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다시 너에게 묻겠는데, 만약 내가 그 냇물을 말라버리게 만든다면 너는 그 바위를 끌어올릴 수 있겠느냐?] 곡승은 웃었다. [저에게는 다른 재간이 없으나 뚝심은 좀 있어요. 백 근이나 되는 물건도 저는 욺겨 놓을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괴상한 물고기 모양의 바위 밑부분이 흙모래에 박혀 있으니, 아무래도 삽이나 곡괭이 같은 것을 사용해서 그 바위를 파내야 할 것 같아요.]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개울물이 비껴 나가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체력을 회복하고 숙달되도록 한 가지 무공을 연마해야 하니, 사홀 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리하여 왕중양 일행은 사흘 동안 곡씨네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원래 왕중양은 어제 선천공(先天功)을 돋구었기 때문에 오늘은 더 돋굴 수가 없었으며, 사흘을 쉬어 원기를 회복시켜야 재차 손을 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홀 동안에 왕중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음식도 먹지 않았으며 물도 마시지 않았다. 다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운기행공만 했다. 곡씨 부자는 그만 놀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왕중양이 병이 난 것이 아닌가 하고 크게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이 차분하고 평온한 것이 결코 벙이 난 사람의 모습이 아닌 듯하여 겨우 안심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갑자기 왕중양의 온 얼굴에 붉은 빛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되었다. 승아, 나와 함께 개울가로 가서 그 물에 가라앉아 있는 바위를 꺼내자.] 곡승은 왕중양이 사흘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말도 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자 놀랍고 기뻐서 말했다. [도장, 도장께서는 별일 없으시겠죠? 어째서 사흘 동안 꼬박 앉아 움직이지 않았어요? 우리 두 부자는 놀라 까무라칠 뻔했잖아요.] 왕원빈은 사홀 동안 옷을 벗지 않고 사부의 곁에 앉아 시중을 들었다. 그러다가 중양진인이 정신을 차리자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저 곡승 소형제는 사부님께서 병을 앓는 줄 알고 근심을 하였지요. 그래서 제가 어르신께서 병이 나신 게 아니고 기(氣)를 연마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 주었지요. 그런데도 그는 믿지 않으려고 드니 정말 우습지 않습니까?] 왕중양은 이미 가슴속에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띄우고 곡승과 왕원빈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잡담 할 것 없이 어서 나를 따라 개울가로 가자.] 곡승과 왕원빈 두 사람은 쓸 만한 연장을 가지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 세 사람은 곧장 개울쪽으로 걸어갔다. 곡승의 집에서 그 개울까지 가려면 반드시 한 곳의 소나무밭을 지나야 했다. 이 소나무밭은 둘레가 그렇게 넓지 못했고 겨우 마흔 그루 정도의 소나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왕중양이 그 숲 앞으로 다가갔을 때 갑자기 소나무 위에서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괴성이 들리더니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며칠 전 뱀의 진을 펼쳐 왕중양을 암해하려 했던 서독 구양봉이었다. 왕원빈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왕중양은 이 사람이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찾아 왔음을 알고 있었다. 상대방은 심보가 흉악하고 수단이 악랄하며 무공이 뛰어나 상대하기가 여간 껄끄럽지 않은 강적이었다. 하지만 왕중양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빈도와 귀하는 예전에 일면식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감정이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해서 자꾸만 원수진 사람처럼 달려드는 것이오? 더이상 빈도를 귀찮게 굴지 마시기 바라오.] 구양봉은 홍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갑자기 흉칙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잡도사, 우리 마음을 터 놓고 솔직히 말해 봅시다. 당신이 화산으로 온 것은 구음진경을 찾기 위함이고, 나 역시 화산으로 구음진경을 찾으러 온 것이오. 구음진경으로 말하면 무림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미 사라진지 수백 년이 지났으니 주인이 없는 물건이오. 그 누구라도 찾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이오. 하지만 우리들이 서로 피 튀기게 싸운다면 피차 이롭지 못할 것이오. 자, 그러니 나와 힘을 합해서 구음진경을 찾도록 합시다. 찾아내서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연구하고 익히게 된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 굳이 혼자서 독차지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본래 구양봉의 그와 같은 말은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나 왕중양은 몇 번이나 그를 상대해 본 결과 이 사람의 심보가 악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행동거지를 보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좌도방문(左道傍門)의 인물이었다. 만약 이 자가 구음진경을 가지고 간다면 그야말로 간악한 짓을 일삼게 될 것이고, 호랑이에 날개가 돋친 꼴이 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더군다나 자기는 이미 구음진경이 숨겨져 있는 곳을 알아냈기 때문에 언제라도 손에 넣을 수가 있는데, 굳이 그런 자와 손을 잡을 필요가 없었다. 왕중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하의 그 말씀은 틀렸소. 빈도가 이번에 화산에 온 것은 결코 구음진경을 찾기 위함이 아니오. 설사 내가 그 물건을 찾으러 왔다고 해도 길이 다르면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귀하는 자기 볼일이나 보도록 하시구려.] 구양봉은 그 괴이한 눈을 부릅뜨더니 느닷없이 낄낄거리고 웃었다. [흐흐흐... 그러고도 당신이 출가인이라고 할 수 있소? 내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하려고 해?] 그와 같은 말을 지껄이면서 손을 번쩍 쳐들더니 왕중양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쪼개 내었다. 왕중양은 그가 펼치는 것이 신타설산장(神駝雪山掌)이라는 장법임을 알았다. 그 사람이 자기 가슴을 향해 쪼개듯 후려쳐 오는 일초가 기수식(起手式)인 명타천리(明駝千里)라는 것도 헤아리고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왕중양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부르짖었다. [엇? 무서운 무공이군!] 이어서 그는 전진파의 무공 가운데 하나인 자연권(自然拳)의 흡인력을 이용해서 왼손의 소맷자락을 한번 떨쳐 적의 권초(拳招)를 받으면서 한번 내밀었다가 한번 슬며시 끌어당겼다. 이와 같이 한번 당기는 수법에 내력을 운용했기 때문에 그 힘은 엄청났다. 구양봉은 그 순간 몸의 균헝을 잃고 휘청거리며 자연권의 손짓에 따라 하마터면 왕중양의 가슴으로 쓰러질 뻔했다. 하지만 구양봉 역시 서역(西域) 백타산(白駝山)의 일대종주(一代宗主)였으니 권각법의 조예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해 보려고 했을 뿐인데 엉겹결에 상대방의 술수에 말려들고 만 셈이었다. 구양봉은 황망히 단전에 진기를 끌어모으고 회농귀학(回籠歸壑)이라는 수를 써서 한번 당기고 한번 뽑는 수법으로 상대방의 흡인력을 해소시키고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쓸어 쳤다. 이는 바로 금풍철우(金風鐵牛)라는 일초였다. 겉으로는 평범하게 보였으나 합마공(蛤模功)이 숨겨져 있는 장력이었다. 그의 손바닥은 왕중양의 오른쪽 태양혈을 쏜살같이 후려쳐 갔다. 왕중양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여전히 자연권 가운데 탱연수(撑緣手)를 써서 막았다. 펑펑 하는 소리가 두번 울리는 순간 상대방의 장력을 봉쇄해서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나게 되었는데, 두 팔이 화끈 달아 오르고 쑤시고 저리는 것이 아닌가? 지금 중신통(中神通)은 처음으로 서독(西毒)과 겨루는 것인데, 단 일초(一抄)에 번개와 같이 삼식(三式)을 휘둘러 구양봉이 잇달아 펼쳐낸 살수를 해소시킨 것이었다. 구양봉은 자기의 공세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상대방의 무공 조예가 상상외로 고명한 것을 알아채고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신타설산장법에 팔괘오행지식(八卦五行之式)을 섞어 착실하게 왕중양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삽시간에 사면 팔방이 구양봉의 팔 그림자로 뒤덮이는데 그 기세의 재빠름과 세참은 광풍폭우와 같았다. 왕중양은 침착하게 여전히 자연권으로 응수하고 있었다. 비록 수세를 펼 때가 공격할 때보다 많았지만 침착하고 여유가 있어, 마치 장강의 커다란 물결이 도도하게 홀러가는 것 같았다. 구양봉은 신타장법을 되풀이해서 몇 번이나 펼쳐냈다. 그러나 왕중양은 시종 털끝만큼의 헛점도 드러내지 않았다. 왕중양은 한참 싸우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귀하는 이만 물러나시오. 그렇지 않을 때 빈도는 더 사정을 봐주지 않겠소!] 구양봉은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실력껏 1백여 합을 싸웠으나 여전히 왕중양을 이기지 못하자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그 자신이 흉악하고 위험하며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초식을 다 펼쳐 보았고 몇 번이나 합마공의 공력을 장법에 섞어 사용했는데도 왕중양이 침착하게 상대하면서 여유있게 해소시켜 나간다는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중양이 자기의 초식을 해소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권법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이름난 화백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자유자재였다. 마치 구름이 홀러가고 물이 흐르는 듯 조금도 정체됨이 없는 것이, 마치 구양봉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구양봉은 이와 같은 처지에 놓이자 더욱 더 분기탱천하게 되었다. 그는 왕중양이 그와 같은 말에 호통을 내질렀다. [개똥 같은 소리 작작해라. 누가 당신보고 사정을 봐달라고 했는가? 절묘한 수가 있다면 어째서 펼쳐 내지 않느냐?] 호통소리와 더불어 권법을 일변시켰다. 갑자기 그는 패왕권(覇王拳)을 펼쳐 내었다. 처음에는 두 손으로 공을 받쳐 드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앞으로 밀어 내었다. 휙 하는 소리와 더불어 두 가닥 장력이 수평으로 뻗쳐 나가는데 이는 항우강정(項羽舡鼎)이라는 일초였다. 곧이어 왼발을 쳐들더니 두 팔을 교차하며 온몸을 내던지듯 왕중양에게 돌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살수는 무척 흉악했다. 본래 이는 패왕권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한수로서, <하늘을 증오하여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을 뽑아 내고, 땅을 증오하여 지축을 혼든다>는 별명이 붙여진 일초이기도 했다. 그가 처음 펼쳐낸 초식은 모두 허초에 지나지 않았고, 상대방이 손을 내밀어 막도록 유인하거나 혹은 몸을 날려 피하도록 했다가 느닷없이 몸을 날려 덮쳐들면서 왼발을 들어 적의 아랫도리를 한번 걸고 쓸어 차는 동시에 두 팔로 상대방을 와락 얼싸안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타법(打法)은 매우 위험해 자기 자신의 가슴 전체를 적에게 넘겨 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며 심지어는 전신을 적의 공격권 안으로 디미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자기의 외가공(外家功)이 탁월한 것을 믿고 적의 정면에서 뻗쳐 오는 일장을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몸을 날려 덮쳐 든 것이었다. 옆에서 구경을 하고있던 왕원빈과 곡승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어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왕중양은 태산같이 무겁고 침착했다. 구양봉이 덮쳐들자 그는 두 발을 꼿꼿이 하고 땅바닥에 우뚝 버티고 섰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태산과 같았다. 구양봉은 두 팔과 한 발을 움직여 금방이라도 왕중양의 몸을 들이받을 수 있다고 느낀 순간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별안간 왕중양의 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고, 서독은 그만 허공을 덮치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아차 하며 막 몸에 힘을 주고 팔을 돌리면서 뒤를 향해 후려치려고 하는데, 바로 그 순간 한 줄기의 세차고 매섭기 이를 데 없는 장풍이 뒤에서 임습해 오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뒷덜미에 있는 대추혈(大椎穴)이 어느덧 상대방에게 움켜잡히고 말았다. 곧이어 태산이라도 무너뜨리고 바다라도 뒤엎어 놓을 것 같은 힘이 서독을 허공 위로 내던졌다. 그 던지는 방법도 매우 이상했다. 포물선을 그리듯 위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쌍의 형체없는 커다란 손바닥이 허공에서 끌어올리는 듯, 곧장 사오 장이나 높은 허공까지 솟구쳐 올라갔던 것이다. 구양봉은 공중에서 균형을 잃고는 곧장 아래로 뚝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구양봉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볼품없이 내동댕이쳐지게 되었다. 사지백해가 엄청난 충격을 받아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왕중양은 자연권의 무공만을 사용하여 구양봉을 제압한 것이었다. 구양봉이 패왕권으로 그를 상대하게 되었을 적에 왕중양은 자기의 몸을 될수록 부드럽게 하여 교토입굴(狡兎入窟)의 신법을 써서 번쩍 몸을 날렸다가 후닥닥 몸을 날려 마치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을 피하는 산토끼처럼, 그물에서 빠져 나가는 미꾸라지처럼 구양봉의 주먹과 발사이의 빈틈으로 단번에 미끄러져 나가 구양봉의 등뒤로 돌아가 다시 어부반부(漁夫搬釜)의 수법을 써서 그의 뒷덜미를 움켜잡아 위로 던졌고, 그리고 난 후에 곧장 추창송영(椎窓送影)의 수법을 써서 서독의 볼기짝을 정확하게 겨낭하고 일장을 가격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구양봉은 구름을 뚫을 듯이 5장 높이 솟아오르게 되었다. 솟구치는 힘이 다하게 되었을 때야 곧장 일직선으로 아래로 떨어져 오체(五體)가 땅바닥을 내리찍은 것이었다. 이 일은 진정 구양봉이 서역에서 내노라고 뽐내다가 난생 처음 당한 참패였다. 왕원빈과 곡승 두 사람은 왕중양이 기다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움직이는 신법이 매우 경쾌하고 날렵한 것을 보았다. 그가 몇 번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구양봉으로 하여금 마구 빙글빙글 돌아가게 만들자 자신도 모르게 손삑을 치면서 갈채를 보냈다. 구양봉은 수직으로 곤두박질치자 등뒤에 있는 지당혈(志堂穴), 어깻죽지 뒤에 있는 풍지혈(風池穴)과 풍부혈(風府穴), 그리고 미룡골(尾龍骨)에 있는 독맥혈(督脈穴)이 딱딱한 땅바닥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돠었다. 커다란 충격을 받자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뻣뻣하게 그대로 땅바닥에 누워 있다가 잠시 후에야 아이쿠 하는 한마디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한잔의 차를 마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허리를 펴고 일어나 앉더니 손을 움직여 자기의 가슴팍을 문지르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서는 것이었다. 이때 구양봉의 안색은 무척 흉칙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창날같은 손가락으로 왕중양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당신이라는 개도사는 도호(道號)가 어떻게 되지? 그리고 배운 것은 어느 문파의 무공이지?] 왕중양은 열적게 말했다. [정말 미안하오. 빈도는 본래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소. 귀하가 너무 사람을 괴롭히고 핍박하기 때문에 부득이 손을 쓰게 된 것이오. 빈도의 속가(俗家)의 성은 왕씨이고 도호는 중양이라는 두 글자를 쓰오. 그리고 거처하고 있는 곳은 숭산의 연하동(煙霞洞)이오. 귀하가 빈도를 어여삐 보시고 어제의 적을 오늘의 친구로 만들고자 한다면 아무쪼록 중악으로 오셔서 한번 이야기나 나누도록 합시다.] 중양진인은 이겼으나 마음이 충후해서 상대방이 창피를 느끼게 하지 않으려고 무척 온화하고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구양봉은 별호가 서독이라고 불리워지는 만큼 심보가 악독하고 눈꼽만한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소인배였다. 그러한 그가 잇달아 좌절당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뱀의 진을 펼쳤다가 당했고, 방금 전에는 자신이 직접 무공으로 겨루어 보았으나 참패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미 왕중양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게 되었으니 어찌 그 자신의 똥배짱에 어울리지 않게 상대방에 빌붙어 사귀려고 하겠는가?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알고 보니 당신은 전진파의 왕중양이었군. 그것 참 잘 되었소. 3년 내로 이 구양봉이 반드시 숭산으로 찾아가겠소. 그때 우리 한번 더 고하를 가려 봅시다.] [흐흐흐...] 그 말이 끝나자 마자 허공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흐흐흐 하고 가벼운 웃음 소리가 들려왔으나 곧이어 맑고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는데 마치 사람이 구름 속에 숨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아련하게 들렸다.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양이란 성을 가진 양반, 허풍 떨 필요는 없어. 상대방은 그저 자연권만 사용해서 당신을 상대했으나, 당신은 일흔두 가지의 밑천이 되는 재간을 모조리 펼치지 않았어? 그러고서도 졌는데, 무슨 낯짝으로 다시 만나려고 하는 거지? 내가 볼 때 삼 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 짧아서 당신이 다시 숭산으로 간다 해도 얼굴에 똥칠만 한번 더 하게 될 뿐이야. 내가 보기엔 십 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에야 한번 도전할 수 있을 것 같군.] 구양봉은 자만심이 대단한 위인이었다. 이번에 그는 왕중양을 갑자기 공격해 볼 마음을 품고, 이곳에 올 때 휘하의 사노(蛇奴)를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는데 그 목적은 바로 무공을 겨룬 진상이 외부에 누설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대결하여 이긴다면 물론 크게 자랑할 수 있었다.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상대방과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렸다고 둘러댈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낭패한 모습을 다른 사람이 모조리 보았을 뿐만 아니라, 마구 조롱하여 속을 벌컥 뒤집어 놓는 것이 아닌가? 구양봉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호통을 내질렀다. [어디서 온 녀석이 감히 본 산주(山主)를 조롱하는 것이냐? 분수를 안다면 빨리 이리 기어나와라!] 왕중양 역시도 무척 흥미롭게 생각했다. 그 사람의 음성을 들으니, 지난번 황해의 황량한 섬에 놀러 갔을 적에 만났고, 며칠 전에는 곡승을 제자로 삼겠으니 눈독 들이지 말라고 엄포를 놓던 자칭 동사 황약사(黃藥師)라는 괴인이 분명한데, 그가 어째서 아직까지 화산에 남아있는 것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황약사도 구음진경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일까? 황약사는 수 마장 밖에 있었으나 전음입밀의 재간을 써서 음성을 숲속으로 전달한 것은 물른, 조금 전에 자기와 구양봉이 서로 겨루던 상황을 빼 놓지 않고 구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양봉이 어떻게 상대방이 전음입밀의 재간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겠는가? 그는 말하는 사람이 나무 위에 숨어 있는 줄 알고 악독한 마음이 번져 올라 호통을 내질렀다. [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고! 너에게 이 산주의 매운 맛을 보여주마!] 그러고 나서 두 손을 위로 쳐들어 합마공을 펼쳐냈다. 크게 참패를 당한 끝이었으나 그에게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힘이 남아 있었다. 우르릉 꽝 하는 소리가 크게 일면서 그와 왕중양 두 사람이 서 있는 방원 1장 둘레의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몇 그루 소나무 가지와 잎들이 한번 쓸어 치는 충격에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솔잎들이 어지럽게 뿌려지는 가운데 나뭇가지가 튀고 나무 줄기가 부러졌다. 왕중양은 그의 합마공에 이토록 엄청난 힘이 실려 있는 것을 보자 속으로 새삼 놀랐다. [형씨는 어찌해서 숲속의 나무들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오? 천연의 경치를 훼손하지 마시오. 말한 그 사람은 지금쯤은 벌써 몇 마장 밖에 가 있을 것이오. 그가 사용한 것은 전음입밀의 재간이기 때문에 소리가 마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람은 이 부근에 없단 말이외다.] 구양봉은 그만 창피해서 얼굴이 시뻘개졌다. 서독은 수치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그 역시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좋소 좋아. 이 구양봉이 오늘 진 것을 시인하겠소.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소. 어쩌면 팔 년이나 십 년이란 세월이 걸릴지도 모르겠소. 이제 내가 할 말은 끝났으니 다음에 만납시다.] 구양봉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곧장 숲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훗날 그는 제1차 화산논검에서 왕중양 앞에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왕중양은 눈으로 상대방의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사람의 타고난 자질은 나쁘지 않구나. 잘 가다듬어 올바른 길에 사용을 한다면 훌륭한 일도 할 수 있겠는데, 애석하게도 사악한 길로 접어들고 성격이 너무나 편협하기 때문에 무예의 성취도 한계가 있겠구나. 우리는 이만 개울가로 가 보자] 세 사람은 소나무 밭에서 걸어나가 개울가에 이르게 되었다. 왕중양은 한 커다란 바위에 올라서더니 갑자기 잠자리처럼 몸을 뽑아 올려 가뿐하게 다른 바위 위로 건너 뛰며 외쳤다. [승아, 나는 개울물을 양쪽으로 갈라 놓겠다. 너는 개울 밑바닥의 그 바위가 나타나면 즉시 뛰어내려 그 괴상하게 생긴 물고기 모양의 바위를 흙모래 더미에서 뽑아 놓도록 해라.] 곡승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왕중양의 무공에 대해서 감탄하고 있었지만 왕중양이 개울물을 갈라 놓을 힘이 있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일은 너무나 현묘(玄妙)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법술이지 결코 무술이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왕중양은 몇 마디의 말을 당부하고 나서는 바위 위에 앉더니 왼손 손바닥이 하늘을 항하도록 가슴 앞에 갖다 대고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갰다. 그 즉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왕중양은 오른손을 아래쪽으로 펼쳐 누르는 그 순간에 그 자신이 숭산에서 고되게 오랜 세월에 걸쳐 연마한 선천공(先天功)을 돋구어 진기를 몸 밖으로 뻗쳐내 물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그가 동굴 안에서 선천공을 연성한 후에 일장을 후려치게 되있을 적에 동굴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천 근이나 되는 석판을 밀어내 일 장 밖으로 넘이뜨리지 않았던가. 기초가 탄탄한 왕중양이기에 이처럼 벽수(闢水)하는 능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선천공으로 돋군 진기를 손바닥에서 곧장 뻗쳐 내었다. 거울처럼 잔잔하던 개울물은 즉시 변화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수면에 세수대야 크기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각이 흐르자 소용돌이는 점차 갈수록 커지게 되어 둥근 탁자 크기가 되었다. 그리고 수면 역시 수정과 같은 담장을 이루면서 밖으로 밀려 나가 합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소용돌이는 둥글둥글 확대되었으며 물결의 높이도 한 자 한 자 아래로 내려갔다. 이때 왕중양은 점점 힘이 들었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마치 피를 칠한 듯했고, 이마 위엔 푸른 힘줄이 불룩불룩 돋아나게 되었으며, 상투 끝에서는 마치 찜통 뚜껑을 열어 놓은 것처럼 뭉게뭉게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그는 온 힘을 다해 운기행공해서 소용돌이치는 수면을 마치 우물 파듯이 한 치 한 치 파내려 가며 내공의 힘으로 물의 기세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니, 정녕 무예의 심오한 경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흐르자 왕중양은 다시 눈을 감았고, 선천공의 잠경(潛勁)을 모조리 쏟아내었다. 소용돌이는 점점 아래로 내려가 개울 바닥의 흙모래와 돌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곡승은 그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자 큰소리로 외쳤다. [우와! 저길 봐요! 물고기 모양의 괴상한 바위가 나타났어요!] 왕원빈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아래쪽에 어렴풋이 길쭉하고 거무칙칙하면서도 알록달록한 바위가 보였다. 하지만 물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어서 그 바위가 정말 한 마리의 물고기를 닮았는지는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곡승은 왕중양의 분부를 받들어 옷을 벗고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우르릉 하는 소리와 더불어 소용돌이가 완전히 개울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그 한 조각의 물고기 모양의 괴석이 똑똑히 눈 앞에 드러나는 것을 보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후딱 몸을 날려 소용돌이 안으로 뛰어 들었다. 소용돌이 안쪽에는 물이 없었기 때문에 곡승은 평지에 뛰어 내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거대한 바위의 앞머리 부분을 얼싸안았다. 그리고는 몇 번 흔들어 젖히자 어느덧 그 바위를 가볍게 모래바닥 밖으로 뽑아 올릴 수가 있었다. 사실 물 밑바닥에서 어떤 물건을 다루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물의 압력이 내리누르기 때문에 무척 큰 힘을 써야 가까스로 그 물건을 밑바닥에서 뽑아낼 수가 있었다. 곡승은 지난번 물속에서 시험을 해 보았지만 그 한 조각의 물고기 모양을 한 괴석은 꼼짝도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바로 물의 압력 때문이었다. 더욱이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면 두둥실 몸이 뜨기 때문에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으니 어떻게 힘을 쏟아 백 근이나 되는 커다란 바위를 들어올릴 수가 있겠는가? 이제 물의 압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정은 달라진 것이었다. 곡승은 발로 땅바닥을 굳건히 디디고 서서 물고기 모양을 한 괴석을 혼들어 놓을 수가 있었다. 왕원빈은 그 모양을 보고 재빨리 사슴의 힘줄로 만들어진 질긴 밧줄을 던져 보냈다. 그리고 곡승이 그 바위를 몇 번 감기를 기다려 함께 힘을 합해 불끈 잡아 당기자 그 괴이한 바위를 개울 바닥에서 한자 정도 뽑아 올릴 수 있었다. 그제서야 왕원빈은 어옹석의 아래쪽에 밧줄 끝을 감아 놓았다. 왕중양은 이미 지질대로 지쳐 더 버티기 힘들었다. 그는 밧줄로 바위를 튼튼하게 묶은 것을 보자 곡승에게 물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곡승은 즉시 바위를 튼튼히 묶어 놓은 사슴의 힘줄로 만들어진 밧줄을 잡고 손과 발을 부지런히 놀려 재빠르게 기어 올라왔다. 곡승은 몇 번 손과 발을 움직이지 않아 언덕 위로 올라을 수 있었다. 왕중양은 억지로 버티고 있다가 곡승이 물 밖으로 빠져나온 것을 확인하자 머리를 쳐들고 용이 트림을 하듯 길게 휘파람을 내불면서 손바닥에 돋구었던 장경(掌勁)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펑, 하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개울물은 소용돌이 한복판을 향해 사면에서 합쳐지고 우르릉, 철썩, 하는 소리가 두 번이나 일면서 허공으로 물기둥이 솟아 오르면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겼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곡승이 조금이라도 늦게 올라왔거나 왕중양이 선천신공을 돋구고 있는 공력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여 조금이라도 일찍 내공을 거두었다면 곡승은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었을 것이고 물의 압력이 사방에서 쏘아 붙이는 바람에 뱃가죽이 터져 죽었거나 죽지는 않았다 해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왕중양은 성공을 눈앞에 두자 몸을 훌쩍 날려 바위에서 사뿐히 땅으로 내려서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무척 피로해 보였다. 그는 조금 전에 선천신공으로 개울물을 밥 한 끼 먹을 시간 동안 사방으로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는 땅 위에 올라서자 마자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왕원빈과 곡승 두 사람은 그 괴상한 물고기 모양의 바위를 밧줄로 꽁꽁 묶어 힘을 모아 차츰차츰 위로 끌어 당졌다. 그 돌은 확실히 백여 근의 무게는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냇물 속에 있었기 때문에 물의 부력(浮力)이 있어 본래 백여 근이나 나가던 바위가 훨씬 가벼워져 있어 삽시간에 그 괴상한 물고기 모양의 바위는 어느덧 물에 푹 젖은 채 언덕으로 끌어 올려지게 되었다. 왕중양은 비록 지칠대로 지쳐 있었으나, 위로 끌어올린 괴이한 바위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세히 그 괴이하게 생긴 바위를 살펴 보았다. 알고 보니 그 바위는 수성암(水成岩)인데, 물고기 모양의 형상으로 조각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의 사부 청허산인(淸虛散人)의 말씀과 꼭 들어 맞았다. [해운자(海云子)는 구음진경(九陰眞經)을 상자 안에 밀페해서 다시 물고기 모양으로 조각한 바위 안에 감추었단다.] 왕중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운자라는 사람은 정말 엄청난 사람이로군. 구음진경을 이처럼 은밀한 곳에 숨기다니!] 그는 왕원빈과 곡승에게 그 물고기 모양의 바위를 돌려 놓게 한 후에 자세히 살펴 보았다. 꼬리에 가까운 배 아래 부근에 한가닥 가느다란 틈바구니가 있었는데 그 틈바구니는 찰진 흙으로 막혀 있었다. 왕중양은 자세히 관찰을 해본 후, 이 바위가 바로 구음진경을 숨겨놓은 물고기라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기의 기운이 다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즉시 장력을 갈겨 물고기 모양의 바위를 두 쪽으로 깨뜨리고 그 속을 살펴 보았을 것이다. 왕중양은 왕원빈과 곡승에게 말했다. [이번에 너희들이 고생이 많았다. 떠메고 집으로 돌아가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사람은 앞서고 한 사람은 뒤에 섰다. 한 자루의 삼지창을 멜대 삼아 물고기 모양의 바위를 매달고 한걸음 한걸음 소나무 밭을 가로질러 집 쪽으로 향했다. 한데, 왕중양과 곡승, 그리고 왕원빈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은 썰렁하게 텅 비어 있었고, 옷가지들은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곡천웅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곡천응은 병을 앓고 있는 노인이었다. 1년 전에 그는 산속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가 독사에게 물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었다! 나중에 약초를 구해 치료를 했으나 몸은 이미 옛날과 달리 기력이 현저하게 감퇴되어 불구라고는 할 수 없어도 힘든 일은 할 수 없었고 불구와 다르지 않았다. 평소 그는 좀처럼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곡승은 그만 초조해서 소리 높여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 어디 가셨어요?] 연달아 십여 번을 불러보았으나 아무 대답도 들려 오지 않았다. 곡승은 미친 듯이 집 밖으로 달려나가 서쪽으로 줄달음을 치면서 불렀다. [야단났어요. 야단났어요. 우리 아버님은 그 구양이라는 날강도 같은 사람에게 살해당한 모양이에요.] 왕중양은 구양봉이 늙은이를 살해했다고는 믿지 않았다. 구양봉의 심보가 악독하긴 해도 일파의 종주였다. 스스로 자기의 명예에 손상이 가도록, 저항력이 없는 노인을 살해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가 달려나가 곡승을 불러 들이려고 했을 적에 갑자기 숲속에서 아이쿠,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도장, 구해 주세요. 저를 살려 주세요!] 왕중양은 깜짝 놀라 소맷자락을 떨치고 달려나가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숲속은 텅 비어 있을 뿐 곡승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지 않은가? 왕중양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에 곡승이 분명히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해서 눈깜짝하는 사이에 사라지고 만 것일까? 그가 사방을 자세히 살펴 보고 있는데 갑자기 집안에서 왕원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악!] 왕중양은 퍼뜩 곡 노인의 집에 물고기 모양의 바위가 있고 바위 모양의 뱃속에는 구음진경이 숨겨져 있는 것을 상기했다. 혹시 상대방의 조호이산계(調虎離山計)에 속아 그가 집 밖으로 나온 동안에 나타난 사람이 구음진경을 가로채 간다면 큰일이었다. 그는 재빨리 황학충천(黃鶴沖天)이라는 자세로 몸을 날려 재빨리 집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물고기 모앙을 한 괴이한 바위는 그대로 있었으며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것 같았다. 왕원빈은 창백한 안색으로 한쪽에 몸을 숨기고 벌벌 떨고 있었다. 왕중양은 즉시 호통을 내질렀다. [빈아, 어째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 왕원빈은 사부가 들어오자 그제서야 침착함을 되찾는 것 같았다. 그는 변명하듯 말했다. [사부님, 제자가 조금 전에 집안에 앉아 저 기이한 바위를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집 밖으로 통해 있는 창문에서 획, 하는 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돌렸더니 하나의 괴상한 얼굴이 나타나 있지 않겠어요? 그 얼굴은 세 푼은 사람을 닮았고, 네 푼은 도깨비를 닮았으며 얼굴색마저 싯누래서 일말의 혈색도 찾아 볼 수가 없었고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어요. 제자가 놀라 고함을 질렀더니, 그 괴이한 얼굴은 입을 벌리고 한 무더기의 하얀 물체를 뿜어내어 이 제자의 뺨을 후려치는 것이었어요. 뺨이 화끈거리고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 녀석은 사람인지 도깨비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정말이지...] 왕중양은 갑자기 왕원빈의 발밑에 종이 쪽지가 똘똘 말려 있는 것을 보고 집어서 살펴 보였다. 종이 뭉치는 하얀 선화지로 만든 것인데, 글을 쓴 자국이 보였다. 분명히 창 밖의 괴인이 던진 것 같았다. 왕중양이 그 쪽지를 펼쳐 보니 그 안에는 조그만 글자가 촘촘히 쓰여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양진인에게. 곡천웅 부자는 내가 데리고 가오. 곡승은 내 제자가 될 것이니, 신경을 써 가면서 찾을 생각은 마시오. 훗날 여가가 있으면 아무쪼록 동해에 있는 도화도(桃花島)로 와서 이야기나 나누면서 무공이나 서로 인증(認證)해 보도록 합시다. 간단히 적습니다.] 편지 끝에는 성명이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초서로 쓰여진 <中藥>이라는 글자가 있을 뿐이었다. 왕중양은 비로소 곡승 부자를 데리고 간 사람이 바로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말을 건네고 구양봉을 비웃던 동사 황약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제서야 가까스로 마음속의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왕중양이 황해의 황량한 섬에서 만난 황고(黃固)였다. 또한 동사(東邪)라고 일컬어지는 도화도의 도주인 황약사이기도 했다. 곡승은 바로 훗날의 곡영풍(曲靈風)인 것이었다. 왕중양은 종이 쪽지를 읽고 나서 쓴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한 번 부볐다. 그러자 그 종이 쪽지는 가루로 변해, 한 차례 바람이 불어 오자 훅 날려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왕원빈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그만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왕중양은 왕원빈에게 당부했다. [승아와 그의 부친을 다른 한 분의 고인이 데리고 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와 너는 이 괴이한 바위를 지키고 있다가 천천히 경문(經文)을 꺼내 돌아가도록 하자] 두 사부와 제자는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서로 마주 보았다. 하루가 지나게 되었을 적에 왕중양은 토납술을 운용하여 운기 조식을 했고 진화(眞火)를 귀원(歸元)하도록 조처했다. 그리하여 먼저번에 사용한 선천공의 소모된 진기를 보충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날이 훤하게 밝아 올 무렵에 왕중양의 원신진력(元神眞力)은 거의 태반이 회복되었다. 그는 바위 앞으로 다가가 손끝으로 그 물고기처럼 생긴 바위의 배 부분을 한번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물고기 모양을 한 바위가 배가 있는 쪽으로부터 두 쪽으로 쪼개졌다. 그 순간 틈바구니 속에서 한 개의 짙은 갈색의 얼룩이 진 네모난 곽이 때구르르 굴러 나왔다. 이 곽은 구리나 무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높이는 두 치 정도였는데 그 모양이 책을 넣는 상자 같았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그 곽은 전체를 조각한 것 같은데 뚜껑도 없고, 곽을 열고 닫는 틈바구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곽의 아래쪽에는 주홍빛으로 전자체(篆字體)의 글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그 전자체를 풀이하면 바로 구음진경(九陰眞經)이라는 네 글자였다. 그 곽을 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상자 안에 구음진경이 있는지 없는지 그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그 곽이 무척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 분명 한 채의 성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보물이라는 것을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그와같은 보물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지만 망가뜨리지 않으면 구음진경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중양은 별수없이 그 곽을 땅바닥 위에 놓고 왼손을 쳐들고 단전의 공력을 끌어 올려 팍, 하니 그 곽 한복판을 향해 내려쳤다. 그가 돋군 선천공의 장력은 얼마나 매서운가? 이번에 그가 돋군 진기는 적어도 5성 이상의 공력이었다. 그런 일장을 후려쳤으니, 정강(精鋼)으로 만들어진 곽이라고 하더라도 두 조각이 나고 말 일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가 일장을 후려쳤으나 곽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두어번 릉겨져 위치를 바꾸었을 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고 금이 가지도 않았다. 중양진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왕원빈 역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사부의 장력이 얼마나 웅후한지는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개울물을 가르던 사부님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조그만 곽 하나 쪼개지 못한단 말인ㄱP 그는 재빨리 다가와 곽을 집어들고 살펴 보더니 말했다. [사부님, 제가 보기에 이 곽은 무쇠도 아니고 돌도 아닌 골각질(骨角質)의 물건 같습니다. 혹시 사슴의 뿔이나 소의 뼈를 깎아 만든 것이 아닐까요?] 왕중양은 그 말을 받았다. [무슨 말을 하느냐? 뼈나 뿔의 질이 딱딱하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나의 일장에 실린 힘을 견뎌낼 수 있겠느냐?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서 보검을 가져 오너라. 그 물건을 검으로 토막내야 되겠다!] 왕중양은 왕원빈이 재빨리 갖다 준 송문고정검(松紋古定劍)을 뽑아들고, 이번에는 그 곽을 물고기 모양의 괴이한 바위 위의 평평한 곳에 올려 놓고는 검을 허공으로 쳐들었다가 세차게 내려쳤다. 그 순간 쩡, 하는 커다란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치 종을 치는 소리처럼 그 소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맴도는 것이었다. 동시에 곽의 위쪽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왕중양과 왕원빈이 살펴 보니 곽에는 여전히 아무 이상도 없었다. 칼날에 맞은 실날같은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중양진인이 검으로 곽을 깨뜨리는 방법도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왕원빈은 말했다. [사부님, 그 일검에 실린 힘이 모자랐는지도 모르니 몇 번 더 내려 쳐 보시지요.] 왕중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험해 볼 필요 없다. 나는 이 일검에 온 진력을 남김 없이 돋구었다. 설사 아흡 번 달군 순 강철이라 하더라도 잘라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끄떡없는 것을 보면 구음진경을 넣어 놓은 이 곽은 아마도 이 넓은 세상에서 좀처럼 구하기 힘든 이보(異寶)인 것 같구나. 더 후려치다가는 애꿎은 보검만 부러지고 말 게다. 내 한 사람의 재간으로는 결코 이 곽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구나.] 왕원빈은 혀를 차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는 곽을 들고 한동안 어루만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제가 보기에 이 곽은 뼈다귀나 뿔로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서각(犀角)인지도 모르겠네요.] 서각이라는 한 마디에, 왕중양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리 내놔 보아라.] 그는 손을 뻗어 왕원빈이 바치는 곽을 받아 들고 자기 뺨에 갖다 대 보았다. 서늘한 기운이 살속을 파고 드는 것 같았다. 다시 혓바닥으로 한번 핥아 보니 혓바닥 끝에 쓰고 매운 맛이 느껴졌다. 왕중양은 좋은 수가 생각나 그 뿔로 된 곽을 들고 아궁이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곡씨 노인의 집은 가난해서 부엌은 없고 아궁이만 있었다. 아궁이 옆에는 한 독의 물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 뿔로 된 곽을 물이 담겨져 있는 독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기이한 광경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원래 이 독에는 반 독 정도의 맑은 물이 담겨져 있었는데, 뿔로 된 곽을 넣자 독 안의 물이 즉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마치 끓는 물처럼 쏴, 하는 소리를 내면서 부글부글 넘쳐 흘러 온 바닥에 물을 내쏟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반 독의 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게 되었다. 왕원빈은 놀라 소리쳤다. [참 이상하네요.] 그는 다시 그 독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순간 더욱 눈을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알고 보니 그 곽은 독의 밑바닥에 놓여 있었으나 반 방울의 물기도 묻지 않은 상태였다. 왕중양은 경탄했다. [아, 정말 기이한 보물이로구나. 원래 해운자는 조야벽수서각(照夜闢水犀角)을 이용해서 이 곽을 만들었구나.] 중양진인의 말이 떨어지자 왕원빈은 무척 의아하여 물었다. [사부님, 조야벽수서각이 무엇인가요?] 왕중양은 대답했다. [원래 물소라는 짐승은 옛날 중국의 서강(西疆)이나 장서(藏西) 등 서쪽의 변경에 자리잡고 있는 험한 산속에서 살았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물소가 점점 멸종되었다. 물소는 사자와 함께 중국 대륙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서각은 사람들이 황금보다도 더욱 더 귀중하게 여겼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숫물소가 백 년 이상 살게 되면 피부색이 회어지게 되어 백서(白犀)로 변한다는 것이다. 백서의 뿔은 매우 천귀한데 그 놈을 뽑아 약과 배합하면 열이 있는 증세에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의 공효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백서가 다시 백년 이상을 살게 된다면 물소의 가죽이 짙은 녹색으로 변하게 되어, 창서(蒼犀)라고 부르는 것이란다. 암놈 창서의 뿔은 일명 벽수각(闢水角)이라고 하는데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와 같은 종류의 물소가 물속에 뛰어들면 냇물이 저절로 갈라져 헤엄을 칠 필요도 없이 냇물을 건널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창서는 백서보다도 더욱 더 진귀하단다. 물소라는 놈은 생식율이 매우 낮은 짐승이고 암컷이 종종 새끼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기 때문에 백 년 이상이 된 숫물소는 물론 찾기 어려운 바이지만 백 년 이상이 된 암컷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지. 만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찾아볼 수 없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와, 정말 그런 짐승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역사책에도 물을 가르는 물소의 뿔에 관한 기록이 있단다. 예를 들면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에 교지왕(交趾王) 월상씨(越裳氏)가 벽수서각을 진공했는데 이를 남해조야서(南海照夜犀)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빅수(闢水)의 효능이 있는 것 외에도 밤에도 빛을 내기 때문에 등불을 밝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명주(夜明珠)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외에도 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서역의 여러 나라에서 분수서각(分水犀角)을 진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해운자는 아마도 구음진경이라는 비급을 휴대하고 공동산에서 떠나게 되었을 적에 이미 백 년 후 자기가 늙어 죽게 되었을 적에 구음진경을 보관할 방법을 강구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그는 어디선가 벽수서각을 하나 구해서 이와 같은 곽을 만들고 죽을 임시에 곽 속에 구음진경을 숨겨 물고기 형태로 조각한 바위의 뱃속에 집어 넣어 그 바위를 개울물 속에 던진 모양이다.] 구음진경을 담고 있는 각이 벽수서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물고기 모양의 바위와 물밑에 가라앉아 백 년이라는 세월이 홀렀어도 곽 속의 구음진경은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자 서각 자체가 수축되어 원래의 곽에 있어야 할 틈바구니도 사라지고 점차 한 덩어리로 뭉쳐버린 모양이었다. 왕중양은 온갖 고생을 다해 구음진경을 물고기 모양의 바위 속에서 꺼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헛되이 고생만 했을 뿐, 곽을 내려다 보며 탄식만 불어내는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왕원빈은 사부의 그와 같은 설명을 듣고서야 곽이 그토록 단단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어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사부님, 벽수서각이 그토록 단단하여 어르신이 검으로 치고 손으로 내려치는 힘에도 견디어 냈는데, 해운자는 어떻게 이와 같은 곽을 만들 수가 있었을까요? 이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군요] 왕중양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나도 똑똑히 알 수 없다. 어쩌면 해운자는 달리 어떤 약물이 있어서 서각을 그 악물에 담가 부드럽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부질없는 이야기는 그만두자. 나는 내일 하남(河南)으로 돌아가겠다. 돌아가는 길에 너의 집으로 가서 노인장에게 인사를 드릴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왕원빈은 그 말을 듣자 크게 기뻐 재빨리 절을 하고 말했다.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제자는 마음속으로 그러고 싶었지만 감히 청을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왕중양은 그 뿔로 된 곽을 거두었다. 사부와 제자 두 사람은 이튿날 왕원빈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 별다른 일이 없어 황혼 무렵에 그들은 왕원빈의 집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왕중양은 왕원빈의 부친 왕복(王福)을 만나자 그의 아들이 여덟 달 동안 어떻게 지내 왔는지 들려 주었다. 왕복은 아들을 만나자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융숭하게 왕중양을 접대했다. 왕중양은 왕씨 집안의 두 부자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몹시 기뻐하는 것을 보자 두 부자끼리 그 동안 쌓인 회포를 풀 수 있도록, 홀로 방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을 운기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왕원빈은 왕중양을 따라 집을 떠나게 되었다. 부자 두 사람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홀렸다. 왕중양은 왕복에게 염려 마시라고 위로한 후에 왕원빈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사부와 제자 두 사람은 화산을 떠나 숭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길을 가는 동안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하고 갈증이 나면 물을 마셨다. 낮이 되면 길을 가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들면서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길을 갔다. 그들은 어느덧 섬서성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고, 동관(潼關)에 이르렀다. 왕중양은 왕원빈을 데리고 동관성(潼關城) 부근의 산봉우리 위에 올라 동관의 형세를 굽어 보았는데 그 지세가 과연 장관이었다. 왕중양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동관은 예서(豫西)의 길목에 해당하고 형세가 험준하니, 옛부터 병가(兵家)에서 반드시 다투던 군사 요충지에 부끄럽지 않구나.] 왕원빈은 예전에 사냥꾼들로부터 삼국지(三國志)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지금 왕중양의 말을 들으면서, 마초(馬超)가 동관에서 조조와 크게 싸웠으며 조조가 수염을 자르고 장포(袍)를 벗어 던지고 낭패한 모습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가 사부에게 과거 마초가 조조를 쫓던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동쪽 길에서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더불어 말방울소리가 울려퍼졌다. 동쪽에서 나는 듯이 한 필의 말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북쪽 지방의 사람들은 밀리 출타할 때는 주로 말을 탔다. 그러니 한 필의 말이 달려온다고 해서 별로 회한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말에 타고 있는 젊은이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그 젊은이는 무사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왼쪽 어깻죽지는 새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고, 몸뚱이를 말등에 납작 엎드리고 두 팔로 말목을 얼싸안고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가 꽤나 엄중한 듯했다. 그 젊은이의 뒤로 다섯 필의 기마가 쏜살같이 쫓아오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기사 한 사람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유(劉)가야, 어디로 도망치느냐? 오늘 이 호걸 나으리께서는 맹세코 네 녀석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왕원빈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즉시 중양진인에게 말했다. [사부님, 저 몇 사람은 얼굴 표정도 험상궂고 말투가 무례한 걸로 보아 십중팔구 좋은 사람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빨리 가서 저 상처입은 젊은이를 구해주세요.]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칠 층의 불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내가 저 젊은이를 구해줄테니 너는 이곳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그는 도포자락을 떨치더니 마치 비조처럼 표연히 산등성이 아래로 달려 내려가 뒤쫓아 오는 사람들을 향해 곧장 달려갔다. 왕중양은 곧 그들과 마주 서게 되었다. 상처입은 젊은이를 태우고 있는 그 한 필의 황표마(黃驃馬)는 성질이 매우 사나웠다. 왕중양이 앞길을 막아선 것을 보자 길게 울부짖더니 앞발을 번쩍 쳐들어 왕중양의 가슴팍을 걷어차려고 했다. 왕중양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슬쩍 몸을 날려 말의 배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에 어느덧 왼손을 뻗쳐 중상을 입은 젊은이를 끌어당겼다. 그 젊은이를 안장에서 끌어내리자 마자 즉시 자기의 옆구리에 끼었다. 뒤에서 말을 몰아 쫓아오고 있던 사람들은 그와같은 광경을 보자 엇, 하고 놀랐다. 왕중양은 한 사람을 옆구리에 낀 채 두 발로 가볍게 땅을 차고 쏜살같이 대로에서 몸을 3장이나 솟구쳐 올려 단숨에 길가에 있는 산비탈 위로 올라섰다. 그 다섯 명의 추격자들은 즉시 말고삐를 잡아당겨 속도를 늦추고 왕중양을 향해 접근해 왔다. 앞장을 선 한 명은 짙은 눈썹, 화등잔 같은 사나운 눈매, 솥 밑바닥처럼 검은 얼굴을 한 사내였다. 그 사내는 대뜸 소리쳤다. [어디서 온 개도사가 감히 우리 방(幇)의 원수를 구해주려 하느냐? 살기 싫어졌느냐? 빨리 그 놈을 내려 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개같은 목숨을 끝장내 주겠다.] 왕중양은 중상을 입은 젊은이를 땅 위에 내려놓고 껄껄 웃었다. [하하하, 여러분 실례하오. 이 젊은이는 아직도 나이가 어리니 더 살아야 하지 않겠소? 여러분은 이 젊은이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토록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이오? 빈도가 좋은 말을 할 때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다섯 명의 사내들은 일제히 욕을 했다. [개방구 같은 소리!] 그러더니 손을 번쩍 쳐들자 획휙, 하는 소리를 내면서 네 자루의 강철 표창이 유성처럼 곧장 왕중양의 안면으로 날아 들었다. 중양진인은 그 몇 자루의 날아드는 강표를 안중에 두지 않는 듯, 가만히 서 있다가 그 강표가 자기의 얼굴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손을 슬쩍 쳐들어 그 네 자루의 강표를 모조리 낚아채 손바닥에 거머쥐었다. 그러더니 주먹을 꾹 쥐었다가 손바닥을 폈다. 그와 같이 손을 한번 움켜 쥐었다가 펴는 사이에 네 자루의 강표는 어느덧 왕중양의 손바닥에서 쇳가루로 변하는 게 아닌가? 무쇠를 움켜쥐어 가루로 만드는 재간을 목격한 다섯 명의 추격자들은 그만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앞장을 선 사내가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도사, 당신은 어디서 왔소? 성은 뭐고 이름은 뭐요? 감히 우리들의 눈을 속이려고 하다니?] 왕중양은 소리내어 웃었다. [내가 어찌 눈을 속이는 잔재주를 피우겠소? 당신들은 어느 방파의 인물들이오? 방주는 누구요?] 앞장을 선 눈썹이 짙고 눈이 화등잔 같은 그 사내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나으리께서는 정체를 숨기는 소인배가 아니다. 나는 철장방(鐵掌幇)의 넷째 호걸로서 철면호(鐵面虎) 저갱(楮羹)이라는 사람이다. 이 개도사야, 네가 약간의 재간을 익혔다고 해서 까불지 말고 우선 이 물건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 보아라!] 그는 손을 품속에 집어 넣더니 한 조각의 강철로 만들어진 손을 꺼내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무척 기고만장해서 우쭐거리는 꼴이 실로 가관이었다. 왕중양은 오랫동안 강호에서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각지의 방파에 대해서 무척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무쇠로 만들어진 손을 보자 즉시 그 철장(鐵掌)이 바로 철장방의 신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중양은 장강의 중류에 있는 양호(兩湖) 부근에 철장방이라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철장방은 강도의 무리인데 호남성과 호북성, 그리고 광동성 일대에서 마구 날뛰고 있었다. 남의 집에 들아가 노략질을 하고, 행인을 죽이고 재물을 강탈하는 짓거리를 일삼았다. 하지만 이 방파의 사람들은 태반이 장강의 기슭에서 활동해 왔을 뿐, 황하 유역에는 출현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철장방의 무리가 동관에 출현한 것이었다. 중양진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 무쇠 조각이 몇 푼이나 나간다고 그렇게 뻐기는가? 그런 것이 한 방파의 신표가 될 만큼 가치가 있을까? 나는 이 젊은이를 구하기로 작정했소. 당신이 황제의 옥새를 내놓는다 해도 이 사람을 내줄 수 없으니 이만 가 보시지. 나는 이 젊은이를 급히 치료해야 하며, 더 이상 당신들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단 말이오.] 저갱은 발연대노해서 소리쳤다. [이 개도사야. 우리 방주의 신표를 보고서도 감히 무례한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느냐? 너의 뼈를 추려 놓겠다.] 그들 다섯 사람은 일제히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다섯 갈래로 나누어 산비탈 위로 올라왔다. 왕중양은 껄껄 웃었다. [고집불통의 녀석들이군. 체면을 세워주는데도 마다하다니, 감히 나와 겨루겠다는 것인가? 허허허, 아직 멀었다. 돌아가서 다시 명사(明師)를 찾아 무공을 익히도록 해라.] 저갱은 강호에서 거들먹거리며 스스로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멸시를 처음 당해 본 그는 노기충천해서 휙, 하고 휘파람을 불어냈다. 다섯 사람은 다섯 가지의 무기를 뽑아 들고 득달같이 왕중양을 향해 달려들었다. 왕중양은 태연자약했다. 얼굴에는 미소까지 띠고 전혀 이들 몇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저갱은 앞장 서서 달려오더니 칼을 냅다 휘둘러 역벽화산(力劈華山)이라는 초식으로 왕중양의 머리와 어깻죽지를 노리고 맹렬히 내려쳤다. 중양진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저갱이 내려친 한 칼이 왕중양의 어깻죽지를 사정없이 팍, 하고 후려쳤다. 그러나 왕중양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저갱은 마치 솜뭉치를 내려친 것처럼 아무런 감각도 없자 그만 깜짝 놀라 칼을 거두어 물러서려고 했다. 바로 이때 왕중양이 소맷자락을 들어 바깥쪽으로 살짝 떨치자 반쪽의 기다란 소맷자락이 저갱의 얼굴을 후려치게 되었다. 왕중양의 몸뚱이는 솜뭉치처럼 부드러웠으나 소맷자락은 강철판처럼 견고해서 저갱은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대뜸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저갱이 쓰러지자 철장방의 나머지 네 도적들은 주눅이 들어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억지로 용기를 내고는 무기를 치켜 들고 앞으로 조심조심 다가왔다. 왕중양은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옳고 그른 것을 모르는 녀석들아, 쓰레기같은 네놈들에겐 매운 맛이 제격이다. 빈도의 재간을 한번 보겠느냐?] 이 말을 끝내자 마자 소맷자락을 들어 바깥쪽으로 한번 가볍게 휘둘렀다. 그는 이와 같이 소맷자락을 가볍게 휘두를 때 태을현공(太乙玄功)을 실어 보냈다. 그 순간 우르릉, 하는 소리가 나면서 일진의 광풍이 일어나 모래와 자갈이 휘말려 올라가 철장방의 네 도적을 소나기 퍼붓듯이 후려쳤다. 모래와 자갈에 지나지 않았지만 보리자(菩提子)나 철련자(鐵蓮子) 같은 암기보다 더욱 세차, 뼈저린 극심한 통중을 안겨 주었다. 네 도적은 그만 아이쿠, 하는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일제히 머리를 감싸 쥐고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이 도적같은 도사는 요술을 쓰고 있다. 빨리 도망치자.] 그들은 머리를 감싸쥐고 사방으로 흩어져 줄행랑을 놓았다. 땅바닥에 쓰러졌던 저갱도 비실비실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왕원빈은 저쪽에서 그 광경을 보고 큰소리로 웃어댔다. 왕중양은 그들이 떠난 후에 그 유씨 성을 가진 젊은이를 내려다 보았다. 그 젊은이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이미 정신을 잃고 기절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옆으로 달려온 왕원빈은 그 젊은이가 까무러친 것을 보자 매우 당황해 했다. [이 사람이 위험하군요. 혹시 죽는 게 아닐까요?] 왕중양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염려할 것 없다. 그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일시 기절했을 뿐이다. 내가 손을 쓰면 곧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유씨 젊은이의 상처를 살폈다. 왼쪽 어깨에 거치도(鋸齒刀)를 맞았는지 살가죽이 터지고 살이 불거졌을 뿐만 아니라 상처가 깊어 뼈가 드러나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와 같이 심한 상처를 입자마자 즉시 땅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견뎌냈을뿐만 아니라 말을 몰아 나는 듯이 도망쳐 왔으니 정말 정신력이 대단한 젊은이였다. 왕중양은 즉시 항상 지니고 다니는 태을청링上太乙靑靈散)과 금창대환단(金創大還丹)을 꺼내 일부는 그 젊은이의 상처에 바르고 일부는 먹여 주었다. 이 두 가지의 약은 전진파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성약(聖藥)이었다. 잠시 후 유씨 젊은이는 천천히 두 눈을 뜨고는 악을 쓰며 절규했다. [개같은 도둑들아, 이 도련님께서는 너희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덤벼라. 삼백 합만 싸워 보자. 내가 네놈들을 겁낸다면 호걸이 아니다!] 왕원빈은 그 말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왕중양은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리며 불렀다. [젊은이, 정신 차리게. 도둑들은 이미 내가 쫓아버렸네.] 그 젊은이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망연한 눈길로 왕중양을 쳐다보며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 강도들은 정말 물러갔나요? 도장께서는 도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왕원빈은 옆에서 조금 전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유씨 성을 가진 젊은이는 아, 하고 놀라더니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왕중양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다. 왕중양은 손으로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자네의 성이 유씨인가? 이름은 뭐라 하는기 어떻게 하다가 저 사람들과 깊은 원한을 맺어 추살을 당하게 되었는가? 빈도에게 말하여 줄 수 없겠나?] 유씨 젊은이는 왕중양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이 유씨 성을 가진 젊은이는 이름이 군보(君保)이고 하남 언성(偃城)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왕중양의 고향인 진유현(陳留縣)과는 이웃이었다. 그 유씨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하는 집안이었다. 유군보의 부친 유광보(劉光普)는 항주절도사(沆州節度史)의 직위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6년 전에 동괜童貫)의 부관이 되어 요(遙)나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그때의 유군보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유군보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는 장성한 후에 훌륭한 무공을 익혀 변경으로 달려가 오랑캐를 무찔러 선친의 원수를 갚으리라 굳게 맹세했다. 그는 부친이 돌아가신 뒤에 책을 내던지고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무예만 익혔다. 석쇄(石鎖)를 들어올리고 칼쓰기를 연습했으며 봉술을 연마했고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는 무술을 연마했다. 어느 무술이든 정성을 다해 연마했으며 밤낮 없이 고된 수련을 쌓았다. 그리하여 스무 살 나던 그 해에 유군보는 자기 무술에 자신을 갖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공명(功名)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해 가을 변량(卞凉)으로 가서 무과에 응시했다. 송나라 때는 글을 중시하고 무예를 천시하여 3년에 한번 황제가 병부상서에게 위임하여 무과 시험을 치룰 뿐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해에 무과 시험을 주관하게 된 병부상서는 왕본동(王本棟)이라는 자로 지독한 탐관오리였다. 왕본동은 이미 팽총병(彭總兵)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먹고 팽총병의 아들 팽점오(彭占鰲)를 이번 무과 시험의 장원으로 내정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무과 시험은 조정에서 그 절차를 정해 놓고 있었다. 왕본동이 뇌물을 받고 미리부터 무과의 장원을 내정했지만 시험을 치루는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시험을 보는 날, 왕 병부상서는 일찍 일어나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는 교위(校尉)들을 전후좌후에 거느리고 의기양양하게 교장(校場)에 들어섰다. 무과 시험을 보는 교장은 바로 서문에서 5마장 쯤 떨어져 있는 공터였다. 왕 상서는 무과에 응시하러 온 시험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이 2천여 명이나 되는 것을 보자 눈쌀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속으로 한 가지의 계책을 생각해 냈다. 첫날은 필기시험인데 송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첩시(帖試)라고 했다. 즉 응시하는 모든 무거(武擧)들은 누구나 한 편의 글을 써야 했으며, 글의 내용은 병법의 책론(策論)이었다. 이튿날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시험하고 사홀째 되는 날은 정식으로 무예를 겨루게 되며, 주관을 하는 왕 상서가 무과의 장원을 뽑게 되는 것이었다. 왕 상서는 일부러 무과에 응시한 무거들에게 쓴맛을 보여주려고 햇빛이 쨍쨍 내려쬐는 정오에 첩시를 시행하면서 천막도 치지 않았다. 모든 탁자와 의자를 따가운 햇살 아래 늘어 놓고 응시한 무거들이 그 앞에 앉아 글을 짓도록 했다. 무거들은 두 시진 동안 따가운 햇살을 받자 그만 머리가 흐리멍텅해지고 땀을 뻘뻘 홀리게 되었다. 등줄기가 땀에 흠뻑 젖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비오듯이 땀을 흘렸다. 이와 같이 사납고 뜨거운 햇살을 쬐게 되었으니, 어떻게 좋은 문장을 지어내겠는가? 모두 얼렁뚱땅 시험을 치루고, 속으로는 왕 상서를 욕했다. 왕 상서는 2천여 장이나 되는 시험지를 거두어 가장 흘륭한 시험지 한 장만 남겨 두고 모조리 쓰레기통에 쳐 넣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용과 봉황을 바꾸는 수법으로 한 장의 홀륭하게 쓴 시험지에 팽점오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튿날에는 궁술과 기마술을 시험보았는데, 왕 상서는 교열대(校閱臺) 앞에 한일 자로 나란히 다섯 개의 무쇠로 만들어진 향로를 늘어 놓았다. 그 향로는 가장 무게가 가벼운 것이 2백 근이었다. 2백 근짜리 향로 다음에는 4백 근,6백 근,8백 근짜리 향로가 늘어섰고, 가장 큰 것은 천 근이나 되었다. 호포(號砲)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수천 명을 헤아리는 무거들이 입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교열대 앞에 나열된 다섯 개의 커다란 무쇠 향로를 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때 왕 상서는 교열대 위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 성에서 온 거자(擧子)들은 들으시오. 본관은 이번에 전시(典試)를 주관하게 된 병부상서이오. 나라를 위해 일할 어진 사람을 뽑으라는 어명을 받고 무과 시험을 주관하게 되있소. 황제 폐하께서는 가장 힘이 센 사람을 뽑으라고 하시었소. 그러므로 팔힘으로 가장 무거운 천 근짜리의 무쇠 향로를 쳐들어야 비로소 누대 위에 올라가 무술을 겨룰 수 있는 것이오. 잘 알아 들었소?] 그의 말이 떨어지자 거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무과 시험에서는 기마술과 궁술과 칼쓰기를 위주로 하는 것이었다. 물론 기운이 얼마나 센지 시험해 보는 조목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기껏해야 석쇄나 들어올리고 바위를 옮기는 데 불과했다. 그런데 왕 상서는 무쇠로 만들어진 향로를 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사실 무거들은 10년 이상 고되게 무술을 연마하는데, 태반이 궁술이나 기마술이나 칼쓰는 법에 치중하게 마련이며 부질없이 뚝심만 키우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왕본동의 그 말이 떨어지자 교장에 있던 무거들은 웅성거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왕 상서는 이를 보고 매서운 소리로 호통을 질렀다. [여러분은 조용히 하시오. 조정의 대전(大典)에 대해서 그 누가 감히 왈가왈부한다는 말이오? 옛부터 힘센 사람이 영웅호걸이었소. 맹분(孟憤)은 천균(千鈞)을 들어올렸으며 오획(烏獲)은 커다란 향로를 떠멜 수 있었소. 이 사람들은 모두 다 옛날의 유명한 용사들이 아니었소? 그리고 절세 영웅인 초패왕도 있소. 초패왕 항우는 오천 근짜리 무쇠 향로를 들어 올렸으며, 그런 역발산 기개세의 힘이 있었기에 수만 명의 적병을 상대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이오. 그런데 여러분들은 십여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 연마한 것이 고작 겉모양만 번지르르한 칼질과 창질과 말타기와 말타고 활쏘는 것 뿐이었으니, 그런 것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냔 말이오. 힘으로 다른 사람을 당해내야 진정한 영웅 호걸이 아니겠소? 누구든지 이 규칙을 따를 수 없다면 당장 과거 시험장에서 나가 주시오.] 이런 엄포에 수천 명의 무거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성이 났지만 감히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일부의 무거들은 금년의 시험에 합격할 희망이 없음을 알고는 일찌감치 교장에서 떠나갔다. 왕 상서는 무거들이 떠나가는 것을 개의하지 않고, 호병(號兵)에게 호각(號角)을 불도록 명하여 시험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했다. 거자들 속에서 수십 명이 걸어 나와 무쇠로 된 향로 앞에 서서 자기의 힘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겨우 2백 근과 4백 근짜리의 무쇠로 만들어진 향로를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6백 근 짜리의 무쇠 향로를 몇 명의 거자들이 잡아 보았으나, 들어 올릴 수가 없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까 천 근짜리와 8백 근짜리의 무쇠 향로는 들어 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이었다. 왕 상서는 간교한 계책이 성공한 것을 보고 속으로 좋아했으나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이 거자들은 정말 쓸모가 없군. 천 근짜리 무쇠 향로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말이 되는가? 용사를 이렇게 얻기가 어려우니 어찌 대 송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으랴?] 그가 그 말을 마치자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한 무거가 걸어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이곳엔 밥통들만 모였군. 육백 근짜리 무쇠 향로조차 들어 올리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천 근짜리를 들어 올리는 광경을 당신들에게 보여주지!] 이 무거는 바로 팽총병의 아들 팽점오였다. 그는 우쭐해서 가장 커다란 천 근짜리 향로 앞에 다가서더니 두 손을 뻗어 향로의 발을 움켜잡고 위로 번쩍 쳐들었다. 사람의 키보다 더 크고 물독보다도 더 굵은 천 근짜리 거대한 향로를 머리 위에 가볍게 들어 올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놀라 앗, 하는 탄성을 질렀다. 왕 상서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좌우를 둘러 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 나라에나 인재는 있는 법이지. 본관은 이번에 나라를 위해 일할 참된 인재를 찾아냈군!] 팽점오는 무쇠 향로를 머리 위까지 쳐들기를 연달아 세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나서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쇠 향로를 한켠에 내려놓고는 가슴을 펴고 머리를 쳐든 채 뚜벅 뚜벅 걸어서 교열대 위로 올라갔다. 왕 상서는 아래로 내려와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장사의 성명이 어떻게 되는고?] 팽점오는 대답했다. [대인께 아뢰옵니다. 만생(晩生)은 팽점오라 하며 하남성 창무현(彰武縣) 사람입니다.] 왕상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천 근을 드는 힘이 있고, 팔힘에 있어 이곳에 있는 무거들 가운데 으뜸이니 본관은 그대를 무과 장원으로 삼도록 하겠네.] 그 말이 끝나자 좌우를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이리 와서 무장원에게 꽃을 꽂아주게.] 두 명의 시종이 즉시 달려왔다. 붉은 꽃잎에 황금빛 술이 달린 커다란 꽃을 두 송이 받쳐 들고 달려와 무장원에게 꽂아 주려고 했다. 바로 그 때,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걸어 나오더니 소리 높여 외쳤다. [잠깐!]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무과 시험에 응시하러 경성에 온 유군보였다. 그는 팽점오가 천 근이나 되는 커다란 무쇠 향로를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드는 것을 보자 속으로 의심이 생겼다. 유군보는 팽가라는 무거가 결코 건장하지도 않고 허우대가 큰 대장부도 못 되는데 어떻게 단번에 천 근의 무쇠로 만들어진 향로를 들 수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즉시 교열대 앞으로 나가 손을 뻗어 그 천 근의 무쇠로 된 향로를 만져보았다. 왕 상서는 즉시 얼굴 빛이 변해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어디서 굴러온 망나니냐? 이번 무과의 장원은 이미 정해졌는데 너는 왜 이제서야 나서는 것이냐?] 유군보는 왕 상서의 표정을 보고 내막을 어느 정도 알아차리고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생은 장원의 자리를 가로채려는 것이 아니오. 다만 내 자신의 팔 힘으로 천 근의 무쇠 향로를 들어 올릴 수 있는지 시험해 보려고 하는 것 뿐이오!] 그는 왕 상서의 대답도 듣지 않고 즉시 손으로 향로의 발을 잡고 힘을 불끈 주었다. 그러자 무쇠 향로는 단번에 머리 위로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와! 엄청난 힘이다!] 여러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놀람에 찬 소리를 질렀다. 유군보는 무쇠 향로를 쳐들자 마자 즉시 모든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 이 무쇠로 된 향로에는 천 근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고 무쇠 향로 자체가 무척 컸다. 하지만 무쇠 향로의 무게는 무척 가벼워서 기껏해야 칠팔십 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유군보는 이번 전시(典試)에 어떤 농간이 숨겨져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군보는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대인, 이 향로가 천 근이 나간다는 말입니까? 만생이 볼 때 아무래도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 이것은 기껏해야 백 근도 나가지 않소이다!] 뭇 거자들은 그 말을 듣자 즉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왕 상서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바로 그 때 팽점오는 안색이 새빨개지더니 훌쩍 몸을 날려 교열대 위에서 뛰어내리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녀석, 어디서 함부로 날뛰느냐?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그는 주먹으로 유군보의 안면을 후려치려고 했다. 유군보는 금나수(擒拿手)를 써서 그의 주먹을 척하니 움켜잡고 호통을 질렀다. [쓰러져라!] 천 근의 향로를 쳐든 그 용사는 한번 잡아당기는 힘에도 견디지 못하고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그들이 부린 농간이 대뜸 폭로되고 말았다. 수십 명의 거자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무쇠 향로를 쳐들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십 근의 무게 밖에 나가지 않았다. 여러 무거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우리들이 십여 년 동안 고되게 무술을 연마하고 불원천리 시험을 보러 왔는데 뜻밖에도 시험관이 농간을 부리다니, 도대체 말이 되느냐?] 어떤 무거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와 같은 썩어 빠진 시험관들의 죄상을 황상에게 아뢰어 진상을 밝혀야 한다!] 왕 상서는 처음엔 벼슬아치의 위엄을 보이면서 잇달아 호통을 질렀다. [경비병들은 무엇하느냐? 어서 저 난동을 부리는 놈들을 교장 밖으로 몰아내지 못할까?] 그러자 경비병들이 무거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다가서며 함성을 질러댔다. [어서 물러가라!] [반항하는 자들은 엄벌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무과 시험에 응시하러 온 무거들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교장을 경비하고 있던 병사들은 겨우 2백 명 정도이니 중과부적이었다. 정말로 손을 쓰게 된다면 2백 명의 군사쯤은 일격에 쓰러지고 말 것이었다. 그 때 유군보는 번쩍 몸을 날려 교열대 위로 뛰어 올랐다. 그는 냅다 손을 뻗쳐 왕 상서의 멱살을 움켜쥐고 욕을 했다. [이 망할 탐관오리야.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하려고 하는데 너는 뇌물이나 받아 쳐 먹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허수아비 같은 무장원을 뽑았구나. 이 죽일 놈아.] 좌우의 군사들이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자 유군보는 왕 상서를 홱 돌려 자기 앞에 똑바로 세우고 벼락치듯 큰 음성으로 호통쳤다. [당신들이 함부로 달려든다면 나는 이 자의 목숨을 빼앗고 말겠다.] 이 몇 마디의 호통에 그 군사들은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 왕 상서는 처음에는 벼슬아치의 거드름을 피우며 연달아 <이 놈 잡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나중에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는 말투를 바꿨다. [이건 다른 시험관들과는 관계 없는 일이오. 팽 총병이 나에게 오천 냥의 황금을 주면서 자기의 아들을 장원으로 삼아 달라고 했기에 그렇게 한 것일 뿐이오.] 유군보는 그 말을 듣자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는 몸을 돌리고 교열대 아래를 향해 소리 높여 외쳤다. [여러분, 들었지요? 이 탐관오리는 팽 총병에게 오천 냥의 뇌물을 받고, 그의 아들을 장원으로 만들어 주려고 했소. 우리가 십여 년 동안 더위와 추위를 참고 개고생을 하면서 무술을 익혀 조정을 위해 힘을 바치고자 했건만, 이 염병할 벼슬아치는 재물을 탐해서, 위로 황상을 기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속였소. 여러분, 이 놈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소?] 그 곳에 있던 무거들은 모두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다. 왕 상서가 사사로이 뇌물을 받고 자기 멋대로 장원을 뽑자 끓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일제히 고함을 내질렀다. [때려 죽여라!] [그런 버러지 같은 놈은 살려 둘 필요가 없다!] 유군보는 왕 상서의 따귀를 몇 대 후려 갈기고 욕을 했다. [이 썩어 문드러진 탄관오리야, 너는 죽고 싶으냐?] 그러자 왕 상서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며 애걸했다. [장사,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오. 그러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이 때 다른 무거들은 화가 치밀어 우르르 교장의 언저리로 나와 천막을 찢어 발기고 목책을 마구 부숴댔다. 삽시간에 시험장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 제 모습을 도저히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말았다. 경비병들이 무기를 겨누고 달겨들자 성이 날 대로 난 무거들은 경비병들에게 달려들어 싸움을 벌였다. 경비병들은 숫자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해, 곤죽이 되도록 몰매를 얻어맞고 땅바닥에 쓰러졌고 어떤 경비병들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자 도망을 쳤다. 유군보는 왕 상서가 비록 탐관오리이고 못된 벼슬아치이긴 하지만 조정의 대신이니 왕법(王法)에 의해 처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군보는 따귀를 몇 대 더 때린 후에 왕 상서를 놓아주어 낭패한 몰골로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무거들이 한바탕 크게 소란을 피우자 경성을 수비하는 유수사(留守使)는 그 소식을 듣고 경성의 위군(衛軍)들을 교장으로 투입하여 난동을 일으킨 무거들을 잡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군사들이 교장에 도달하니 무거들은 이미 모두 도망치고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넘어져 있는 목책과 천막, 그리고 옆으로 쓰러져 있는 무쇠로 만들어진 향로 뿐이었다. 금군(禁軍)은 교장의 혼란된 기물들을 수습하고 경성으로 돌아가 유수사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황제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자 대노했다. 유수사는 무거들이 이와같이 교장에서 난동을 부린 것은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한 것으로, 만약에 이와 같은 난동을 방치한다면 조정의 위엄이 어떻게 서겠으며, 야심이 많은 도배들이 이런 기회를 빌어 반란을 일으키면 큰일이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무렵은 바로 방납(方臘)의 난이 일어나 천하의 민심이 흉흉할 때였다. 황제는 유수사의 상소를 받아들여 각 성(省)의 관부(官府)에 성지를 내려 이번에 무과에 응시한 자들을 모조리 체포해서 경성으로 압송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천하는 더욱 시끄럽게 되었으며 경성에는 송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옥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유군보는 그 날 경성에서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서 머무르지 않고 서둘러 재물을 챙기고 집안의 하인들을 모조리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 보낸 후 고향에서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유군보는 숙부 뻘이 되는 사람이 호남 악주성(岳州城)에서 목재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거기 가서 한 몸을 의탁하리라 생각했다. 물론 악주에도 관부의 이목이 있으니 그 곳으로 도망친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 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곧장 호남성으로 길을 떠났다. 그는 열흘 후에 호북성 경내로 들어 설 수 있었다. 그는 작은 샛길을 골라 동백산(桐柏山)을 지나 양강(襄江) 기슭에 도달했다. 이때 반역자 유군보를 체포하라는 해포문서(海捕文書)가 이미 각 현과 고을에 나붙었고, 그를 잡는 자나 그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사람에게는 현상금을 지급한다는 방문이 나붙어 있었다. 유군보는 그와 같은 방문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섕강즙으로 자기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여러가지 색깔의 고악을 사서 얼굴에 발라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길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이 날 그는 양강 나룻터에 도달한 것이었다. 중요한 나룻터에는 검문하는 관병들이 있으니 대낮에 강을 건너면 틀림없이 검거될 것 같아 야음을 틈타 나루를 건너기로 작정했다. 유군보는 우선 강기슭 언덕에서 으슥한 곳을 찾아 몸을 숨기고 한숨 잤다. 그가 잠에서 깼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유군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는 냇가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고는 깜짝 놀랐다. 원래 양강의 양쪽 기슭에는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강물 위에는 징발된 많은 민선(民船)들이 한창 양쪽 기슭을 오가면서 커다란 돌덩이를 운반하고 있었다. 유군보는 생각했다. (밤중에도 건너기 힘들구나. 관부에서 민선을 징발하여 화강석(花崗石)을 운반하고 있는 줄 몰랐으니 어떻게 이 난국을 돌파하지?) 황제는 태호(太湖)의 화강석을 가장 좋아하여, 지방의 벼슬아치들에게 대량으로 채굴해서 경성으로 운반토록 했다. 궁중을 호화스럽게 장식하려고 했던 것이다. 황제들이 태호 부근에서 나는 산석(山石)으로 화원이나 뜨락을 꾸미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화강석을 좋아하자 경성 안의 대신들과 귀족들까지도 하나같이 태호에서 나는 화강석으로 집을 치장하려고 야단이었다. 이렇게 되자 태호에서 나는 바위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강소성과 절강성의 지방 관리들은 바위를 캐내기 위해서 수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을 징발하여 태호에서 바위를 캐내어 배로 운반하게 했는데, 연도의 지방관들이 배와 수레를 동원하여 운반을 돕느라고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북송너匕宋)이 망하는데는 화강석도 한 몫을 단단히 했던 것이다. 훗날 휘종과 흠종 두 황제가 금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북쪽으로 압송되는 동안에 금나라 사람들로부터 능멸과 학대를 당했었다. 휘종은 금나라의 군관(軍官) 가운데 한나라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 역시 한족의 자손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자 그 한나라 출신의 금나라 군관은 그를 채찍질하면서 욕을 했다. [나는 본래 분수를 지키는 선량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늙고 어린 온 가족이 당신을 위해 화강석을 옮기느라고 개같은 벼슬아치들에게 수탈을 당해서 헐벗고 굶주렸다. 집안이 결단나 죽는 사람은 죽고 흩어지는 사람은 흩어지고 말았다. 오늘 당신은 나라를 망해 먹은 보답을 받게 되었거늘 뭐가 잘났다고 감히 주둥이를 놀리느냐?] 그 일화는 송나라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만 봐도 태호의 화강석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누를 끼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유군보는 관부에서 민선을 징발하여 태호에서 나는 바위들을 옮기는 것을 보고 오늘 밤에는 양강을 건널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기슭을 따라 걸어가며 다른 나룻터를 찾아 보려고 했다. 바로 그 때 강기슭에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명의 관병들이 수십 명의 옷차림이 허름한 어부들을 압송하여 강가에 이른 것이었다. 이 사공들 가운데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으며 늙은이와 젊은이도 있었다. 어부들을 냇가로 압송해 오자 한 커다란 배에서 한 명의 무관이 걸어나오더니 성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장 도두(張都頭), 명을 어기고 나라에서 징발하는 배들을 동원하지 않는 망할 자식들을 모두 잡아 왔는가?] 장 도두라고 불리운 사내는 손을 마주 잡아 보이며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통제(統制) 나으리, 소인은 그들을 모조리 압송하여 왔습니다.] 이 통제의 이름은 만세걸(萬世杰)이라고 했으며 화강석을 운반하는 것을 감독하기 위해 경성에서 파견한 총지휘사(總指揮使)였다. 그는 사공들을 향해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이 죽어 마땅한 놈들아,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해도 모두 황상의 땅이고, 황상의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황상의 신하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조정의 두터운 은덕을 입었는데도 관가를 위해 며칠 동안 화강석을 옮기라는 명령을 거절했단 말이냐? 황상의 성지를 어기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른단 말이냐?]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거기까지 말했다. 그러자 어부들 가운데서 두 사람이 일어나더니 큰소리로 맞섰다. [통제 나으리! 양강의 어부들이 당신들을 위해 화강석을 운반한지 이미 한 달이 지났소. 모든 사공들은 고기를 잡지 못해 굶어 죽게 되었소. 당신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것이오, 모르는 것이오?] 만세걸은 대노하여 호통을 질렀다. [저 두 놈은 누구냐? 빨리 잡아 무릎을 꿇리지 못할까?] 그 순간 그 두 명의 어부는 갑자기 손에 숨겨 쥐고 있던 물건을 던졌다. 휙획, 하니 각기 한 자루의 표창을 내던진 것이었다. 그 두 자루 가운데 한 자루의 표창이 만세걸의 오른쪽 가슴에 적중되었다. 만세걸은 암습을 당하자 악,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통제에게 암습을 가한 두 사공은 각자 품속에서 한가지 물건을 꺼내 높이 머리 위로 쳐들었다. 알고 보니 두 자루의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의 손이었다. 그러자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어부들과 인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관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관군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빼앗아 들었고, 어떤 사람은 선창에서 칼과 창을 꺼내 관병들을 마구 난자하기 시작했다. 인부들을 감독하는 관병은 불과 칠팔십 명에 불과한데 바위를 옮기는 사공과 인부들은 사오백 명이나 되었다. 인부들과 사공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관병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첨벙, 첨벙, 이곳 저곳에서 물방울이 튀는 가운데 몇 명의 관병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도망을 쳤다. 장 도두는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조금 전에 통제에게 표창을 날렸던 사공이 어느덧 한 자루의 박도(朴刀)를 뽑아들고 나는 듯이 달려들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백성을 해치는 이 개도적아, 어디로 도망치느냐?] 그는 장 도두의 등뒤로 바짝 쫓아가 칼로 장 도두를 내리쳤다. [으악!] 장 도두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고꾸라져 숨을 거두었다. 밥 한끼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아 칠팔십 명이나 되던 관병과 벼슬아치들은 약삭 빠르게 도망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사공들과 인부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 사공들과 인부들의 호통소리와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강가는 그야말로 차마 볼 수 없는 목불인견의 도살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유군보는 어두운 곳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똑똑히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무척 통쾌함을 느끼고 어두운 그늘 속에서 걸어 나갔다. 장 도두를 죽인 그 사공은 체구가 작달막한 사내였다. 그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자 칼을 쳐들고 호통쳤다. [너도 벼슬아치냐? 이리 와서 내 칼을 받아라.] 유군보는 황급히 포권을 했다. [여러 호걸들, 실례하오. 불초의 성명은 유군보라고 하며 결코 벼슬아치가 아니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바로 경성에서 탐관오리 왕 상서의 따귀를 때린 유군보 호걸이란 말이오?] 유군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바로 불초이오.] 그 왜소하고 다부진 사내는 박도를 거두고 웃었다. [당신이 경사에서 권세 있고 귀하신 분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당신이 호걸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소. 이 철배웅(鐵背熊) 최패(崔覇)는 철장방의 방주를 대신해서 귀하가 우리 방에 가입한 것을 환영하오. 형제, 어서 이리 오시오.] 그는 앞으로 나와 유군보의 손을 잡았다. 인부로 가장했던 철장방의 무리들도 우르르 앞으로 달려나와 유군보를 에워싸고 중구난방으로 한 마디씩 인사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第 二 章. 전진칠자와 주백통 철장방은 호광(湖廣) 일대에서 활약하는 방회(幇會)였다. 이 방회는 무리가 8천여 명인데 조직이 무척 은밀했다. 이 방회는 송나라 신종(神宗) 황제 때 생겨났다. 처음에는 백여 명이 떼를 지어 소금을 밀매하며 좀도둑질을 일삼는 조그만 조직이었다. 그런데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휘종이 즉위한 후에 조정의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간신인 채경(蔡京)과 동관이 차례로 권력을 잡고 농간을 부려 친지가 아니면 등용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해주지 않으며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 극심해지자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가족들과 헤어져 도적의 무리에 가담했고 도적이 되지 않은 선량한 백성들은 천하를 떠돌며 갖은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방납과 송강이 그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키니 세상 인심은 갈수록 흉흉해지고 백성들의 생활고는 더욱 극심해져서 철장방에 가입하는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이 무렵 철장방의 방주는 구천인(寇千刃)이라는 사람이 맡고 있었다. 철장방에 가입하는 무리가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자 구천인은 향당(香堂)을 크게 열고 방규를 제정하여 널리 천하 영웅들을 끌어 모았다. 그는 상서(湘西) 철장산(鐵掌山)에 철장방의 총타(總舵)를 건립하였다. 철방방의 두목들은 출타할 때는 언제나 무쇠로 만들어진 손 철장을 신표로 가지고 다녔으며 널리 세력을 펼쳐 민간에까지 파고 들었다. 철장방주 구천인은 계획을 세워 여러번 관군과 싸워 승리하곤 했었다. 이번에 관부에서 양강 나룻터에서 민선을 징발하여 조정을 위해 화강석을 운반하도록 하는데 한 달씩이나 어부들을 부역에 동원하자 어민들은 굶어 죽게 생겼고 백성들의 원성이 물끓듯 했다. 구천인은 이 기회에 철장방의 위세를 떨치고 백성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두 명의 두목을 양강으로 파견했다. 두목 가운데 한 명은 바로 철배웅 최패였고 다른 한 명은 산자위(山刺蝟) 사성(査城)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수십 명의 무리를 이끌고 양강 기슭으로 찾아와 인부들 속으로 침투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들고 일어나 관병을 습격해 죽인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유군보가 그와 같은 광경을 목도하게 된 것이었다. 유군보는 즉시 철장방에 가입했다. 사실 지금의 처지에서 철장방에 가입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유군보는 과거시험장인 교장에서 소요를 일으킨 주동자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해포문서를 각성(各省)에 보내 그를 수배하였고 그의 초상화까지 그려 붙이고 그를 잡으려 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몸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하는 유군보가 철장방에 선뜻 가입한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철장방은 관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조직이니 더욱 유군보의 비위에 맞았다. 유군보는 최패의 권고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철장방에 가입한 것이었다. 최패는 그가 가입하자 무척 기뻐했다.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려 상처입은 동료들을 구완하도록 하는 한편 배에 실려 있는 화강석을 모조리 강물 속에 내던졌다. 이 수백 명이나 되는 사공들과 인부들은 관병에 대항한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연히 철장방의 두목을 따라 고항을 등지게 되었다. 철장방은 이번에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망라해서 그만큼 세력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유군보는 최패와 사성 두 사람을 따라 상서(湘西)의 철장산으로 올라가 방주 구천인을 만나, 피를 입에 적시는 의식을 거쳐 정식으로 가맹(加盟)했다. 유군보는 가입식이 끝나자마자 즉시 철장방의 두목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구천인은 그를 호북성 명양현(溟陽縣)의 분타주에 봉했다. 유군보가 철장방에 가입한 목적은 결코 무슨 분타주 자리를 노려서가 아니었다. 그는 방주 구천인의 무술이 뛰어난 것을 알고 그에게 무예를 배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구천인은 그에게 무예를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유군보는 최패에게 부탁해서 방주에게 몇 번이나 자기의 뜻을 전달했으나 구천인은 언제나 완곡하게 거절하곤 했다. 이에 유군보는 무척 실망하게 되었다. 또 한가지 그의 마음을 언짢게 한 일은 철장방 안에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약간의 사람들은 훌륭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이 나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관부와 맞서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수시로 남의 집에 뛰어들어 재산을 약탈하고 양민들을 마구 해쳤다. 유군보는 그런 짓을 하는 부하들을 벌했지만 그럴 때마다 방주는 철장방의 부하들에게 지나친 제약을 가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달하곤 했다. 유군보는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점차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세월은 유수처럼 홀러 그가 철장방에 가입한지도 어느덧 4년이 지났다. 유군보는 시간어 흐를수록 철장방에 불만이 커져 갔다. 어느 해 그가 철장산으로 가서 방주를 배알하게 되었는데, 빈관(賓館)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이상야릇하고 말투도 틀리는 것이 중원 사람들 같지 않은 것을 느꼈다. 유군보는 무척 의아하여 재빨리 빈관 안에서 일을 보고 있는 철장방의 형제에게 물어 보았다. 그 형제는 나직히 말했다. [유 타주는 잘 모를 것이오. 저 몇 사람은 북쪽의 대금국(大金國)에서 보내 온 사자들이오.] 그 당시 금나라 사람들은 암암리에 북쪽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송나라 조정과 조약을 맺어 요나라를 공격하기는 등, 송나라의 우방이었다. 하지만 유군보는 금나라에서 사자를 철장방에 보내왔다는 말을 듣자 속으로 의심이 생겼다. 철장방의 형제들에게 여러번에 걸쳐 캐물은 끝에 약간의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금국에서 사자를 철장방에 보낸 것은 남방의 여러 성에 분포되어 있는 비밀 방회와 친교를 맺기 위함이었다. 훗날 요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금나라 군사들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와 송나라를 공격할 때, 비밀 방회가 금나라의 군대와 내응하여 송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킨다는 것이 금나라의 전략이었다. 비밀 방회에서 금나라 군대에 호응하여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주부(州府)를 점령하고 관리들을 도륙하는 등 송나라의 후방을 불안한 상태로 만들어, 금나라 군사가 쉽사리 송나라를 점령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철장방의 방주는 이미 금나라의 뜻에 동조하고 있었다. 유군보는 송나라의 탐관오리들을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으나, 철장방이 이민족과 내통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속으로 매우 못마땅했다. 그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했으나 속으로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송나라 조정이 아무리 썩어 문드러졌다고 해도, 우리들은 외적과 내통해서는 안 된다.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반민족적인 행위이다. 나는 방주 앞에서 도리를 따지겠다. 그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과 결별하는 수밖에 없다) 며칠이 지나자 구천인은 철장방의 방주가 거처하는 동굴로 유군보를 불렀다. 유군보를 부른 구천인은 이 몇 년 동안 유군보가 한 일을 칭찬해주고 몇 마디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유군보는 그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방주님, 불초가 빈관에서 몇 사람을 보았는데 북쪽 금나라에서 온 사자들이라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천인은 손을 내저어 그의 말을 가로막고 입을 열었다. [더 말하지 말게. 내 이야기를 들어 본 후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네.] 구천인은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한 달 전에 북쪽 지방에 있는 금나라의 완안(完顔) 부족의 추장 아골타(阿骨打)가 사람이 사람을 보내 우리 남방의 강호 방회와 연락을 취해 함께 일을 도모하자고 제의해 왔네. 조씨가 다스리는 송나라 천하를 무너뜨리고 부귀 공명을 함께 누리자고 했네. 아골타는 결코 한족의 땅을 점령할 생각은 없으며 그저 약간의 부녀자들과 옥백(玉帛)만 가져가겠다고 했네. 우리 한나라의 비밀방회가 땅에 줄을 그어 각지에서 왕 노릇을 하면 좋지 않느냐고 하더군. 이거야말로 우리가 부귀 공명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성공하면 왕이 되는 것이니, 그야말로 한평생 산골짜기에 숨어서 좀도적이 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느냔 말이야.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유군보는 분노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방주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구천인은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더 들어 보게. 내가 긴히 할 말이 있네.] 그는 품속에서 철장을 꺼내 손에 받쳐 들고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철장방이 방을 창립한 이래 방주는 지고무상의 위엄을 갖추게 되었네. 방주의 말은 곧 법이야. 무릇 본방의 사람이라면 결코 방주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네. 그 어느 누구라도 방주에게 불경스러운 태도를 취하면 방규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되네. 심한 경우에는 발가벗겨 오성동(五聖洞)에 처넣어 수많은 독사들이 몸을 깨물어 죽도록 만들기도 하네. 자네는 그래도 더 할 말이 있는가?] 구천인의 안색은 음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옆에 시립해 있던 철장방의 제자들은 일제히 무기의 손잡이를 움켜 쥐며 유군보를 흉악한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 유군보는 그와 같은 형세를 보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구천인은 그가 말을 할듯 하다가 그만두는 것을 보고는 매서운 어조로 못을 박듯이 물었다. [유 타주, 자네는 더 할 말이 없겠지?] 유군보는 분위기가 무척 흉흉하여 자기가 다시 한마디 말이라도 꺼낸다면 즉시 독형(毒刑)에 처해진다는 것을 짐작했다. 철장방이 금나라와 내통하고 있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으니 결코 자기 혼자 따진다고 해서 바로잡힐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공손히 말했다. [방주님, 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구천인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자네는 그만 물러가게. 빈관에서 묵다가 사홀 후에 분타로 돌아가도록 하게!] 유군보는 동굴에서 물러 나왔다. 그는 빈관에서 이틀을 머물렀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못마땅했다. 그는 철장방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다시는 그들과 한패거리가 되어 못된 짓을 하여 몸을 더럽히기 싫었다. 사흘째 되는 이른 아침에 그는 출발해서 명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분타에 돌아와 보니 총타에서 미리 한 명의 부분타주를 파견해 왔는데 이 사람이 바로 철면호 저갱이었다. 그는 방주 구천인의 심복이었다. 명목상으로는 부분타주였지만 그 자가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유군보를 감시하고 있었다. 유군보는 그와 같은 조처에 더욱더 분노를 느끼게 되었고 방에서 도망치겠다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반 달 정도 지났을 무렵의 어느 날, 그는 조정의 소식을 염탐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길을 떠났다. 세 명의 감시자가 그를 따라왔다. 유군보는 출발하기 전에 이미 도망칠 계책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는 명양 북쪽에 있는 한 조그만 고을에 이르자 객점에 투숙했다. 밤중에 그는 술에 수면제를 타서 그 세 명의 감시자들에게 먹였다. 그들 세 명이 대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자 유군보는 즉시 옷을 바꿔 입고 몰래 객점에서 빠져 나갔다. 그는 이미 점소이를 매수해 놓고 말까지 객점 문 밖에 매어 두고 있었다. 그는 몰래 빠져 나가자 마자 말에 뛰어올라 말을 몰아 나는 듯이 북쪽으로 도망쳤으며 밤을 도와 호북성에서 빠져 나갔다. 유군보 자신이 생각해도 자기의 이와 같은 금선탈각(金蟬脫殼)의 묘계는 추호도 빈틈이 없으니 귀신도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종종 예상 못한 사태가 생기는 법이었다. 철면호 저갱은 이미 방주 구천인의 밀명을 받고 유군보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유군보가 조정을 염탐하겠다고 나선 그 날 이미 사람을 시켜 미행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가 객점에서 도망을 친 지 몇 시진도 걸리지 않아 저갱은 이미 급히 보내 온 기별을 받고 즉시 철장방의 인마를 거느리고 추적한 것이었다. 유군보가 타고 있는 말이 건장하고 빨라 사홀도 되지 않아 호북성 경내에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철장방의 세력은 호광 땅에 뿌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유군보는 자기가 하남성으로 도망쳐 들어가기만 하면 무사하리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오산이었다. 그가 겨우 신양(信陽)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이미 철장방의 추적해 오는 인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 철장방은 하남성의 각 현에도 분타를 설치해 두고 있었다. 이는 유군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별수없이 그는 섬서성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막 동관현 경내로 들어섰을 때 저갱은 이미 철장방의 일곱 명의 고수를 이끌고 바짝 추격해 왔고, 바로 동관성 밖의 들판에서 유군보를 가로막았다! 쌍방은 마주치자 아무 말 없이 혈전에 돌입하였다. 유군보는 자기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을 깨닫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들의 포위를 뚫으려 했다. 잇달아 그는 철장방의 추격해 온 무리 가운데 세 명을 죽였고, 그 자신도 거치도에 한번 얻어맞아 하마터면 팔이 잘려 나갈 뻔했다. 유군보는 말등에 엎드려 죽어라 말을 몰아 도망쳤다. 다행히 그의 명이 다하지 않아 화산에서 구음진경을 얻고 돌아오던 왕중양을 만나게 되었고, 왕중양이 추적해 온 사람들을 물리쳐서 그의 목숨을 구해낸 것이었다. 유군보는 자기의 신세를 이야기한 후에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명성이 쟁쟁한 중양진인이라는 것을 알자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중양진인의 제자로 거두어 주십사 간청을 드렸다. 왕중양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미 다섯 명의 제자를 거두었다. 이번에 화산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교롭게도 유군보를 구했다. 만약에 이 유군보까지 거두어들이게 된다면 여섯 명의 제자가 되는구나. 천강북두진을 펼치려면 아직 한 사람이 모자라는구나.) 이와 같이 고려해 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부탁하니, 사람을 끝까지 구해주기 위해서 빈도는 너를 거두어 들이마. 하지만 나는 현문(玄門)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니 결코 속가의 제자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네가 내 문하로 들어오고 싶다면 반드시 상투를 틀고 도사가 되어야 하는데 너는 도사가 될 수 있겠느냐?] 유군보는 순순히 대답했다. [이 제자가 때를 잘못 만나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미 풍진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중이온데, 은사께서 제자를 삼청(三淸) 좌하(座下)에 귀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아무쪼록 은사께서 제게 도호(道號)를 내려 주십시오.]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그 자리에서 큰 절을 하여 사부님을 모시는 인사를 하도록 했다. 그런 후에 유군보에게 처현(處玄)이라는 도호를 내려주었다. 이렇게 되어 유처현은 마(馬), 구(邱), 손(孫), 담(譚), 왕(王) 다음으로 전진칠자(全眞七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왕중양은 두 명의 제자를 데리고 열홀 후에 숭산으로 돌아왔다. 그의 사제인 주백통과 마, 구, 손, 담, 네 제자는 태실봉 아래까지 내려와 영접했다. 일행이 연하동(烟霞洞)으로 돌아가 인사를 나눈 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왕중양은 먼저 유군보를 문하 제자들에게 소개시켰다. 그리고 그날 바로 상투를 틀게 했다. 유군보는 이미 처현이라는 도호를 받은 몸이라 그 즉시 사숙 주백통과 사형들에게 상견례를 올렸다. 그리고 난 후, 중양진인은 화산에서 구음진경을 찾기 위해 물속을 뒤져, 물속에 있는 물고기 모양의 바위 속에서 구음진경을 찾아낸 경과를 이야기했다. 그는 끝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옛날에 현장법사가 천축(天竺)으로 불경을 얻으러 가게 되었을 때, 몸소 일흔 두가지의 액난을 겪었고 유사(流沙) 삼천 리를 걸어야 했었다. 이것만 봐도 대도(大道)는 결코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번에 내가 화산에서 구음진경을 찾아 온 일은 비록 삼장법사가 불경을 얻으러 갈 때처럼 험난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은 끝에야 겨우 칠백 년 전에 유실되었던 구음진경의 원본을 찾아낼 수 있었느니라!] 구처기가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사부님, 이번에 화산에서 구음진경을 얻게 되셨으니, 그야말로 천고에 드문 업적을 이룩하신 것으로 본파를 크게 빛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사조님께서 창업(創業)하시던 때의 그 어려움을 몸소 체득한 바 있사오니, 이후에는 반드시 온 힘을 다하여 무술 연마에 진력 하겠습니다.] 주백통이 갑자기 불쑥 입을 열었다. [사형, 구음진경을 구해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 곽을 열어 젖힐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구음진경을 손에 넣고도 읽어 볼 수가 없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왕중양은 그 조야서각(照夜犀角)으로 만들어진 곽을 꺼내 동굴 안의 돌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구음진경을 갈무리하고 있는 곽이니라. 이 자체는 백년 묵은 서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칼과 검으로 쳐도 깨지지 않고 물이나 불의 침범을 받지 않는다. 모두들 방빕을 강구해서 어떻게 하면 이 곽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인지 잘 생각해 보도록 해라.] 전진교의 여섯 제자들은 자세히 그 구음진경이 갈무리 되어 있는 곽을 살펴보았다. 거무티티하고 암록색으로 번들거리면서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어찌 보면 흡사 옥 같았고 매끄러워 손에 잘 잡히지도 않을 것 같았다. 보기에는 지극히 연한 것 같은데 어찌해서 사부님이 온갖 방법을 다 써도 깨뜨릴 수 없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주백통은 중양진인을 바라보았다. [사형, 뼈와 뿔로 만들어진 물건은 단단하면서도 취약한 점이 많아요. 커다란 바위로 곽을 한번 내리치게 된다면 즉시 박살이 날 것이오!] 왕중양은 웃었다. [그렇게 수월한 노릇이라면 네가 얼마든지 시험해 보렴.] 주백통은 성격이 천진난만하여 어린애와 같았다. 즉시 곽을 땅 위에 놓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 맷돌만큼 큰 바위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그 바위를 높이 쳐들었다가 그 곽을 힘껏 내리쳤다. 그 순간 쾅, 하는 커다란 소리가 울려퍼졌고, 바위가 동굴안의 돌바닥을 내려치면서 불꽃이 마구 튀었을 뿐만 아니라, 돌바닥에는 그 충격에 커다란 구덩이가 움푹 파여지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힘이었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그 상자는 박살이 나긴커녕 털끝만큼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 주백통은 약이 오르는지 새로운 제안을 냈다. [이 곽은 정말 요상한 데가 있구려. 그렇다면 이렇게 해봅시다. 우리가 이 놈을 가지고 가서 높다란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밑으로 던져 봅시다. 그렇게 된다면 이 놈은 산의 바위에 마구 부딪히게 될 것이니 이 놈이 박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왕중양은 대뜸 핀잔을 주었다. [터무니 없는 소리. 그 조그만 곽을 높다란 봉우리 위에서 아래로 던지면 어디로 퉁겨 나갔는지 모르게 될 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 여섯 명의 제자들은 왁하니 웃었다. 마옥은 입을 열었다. [사부님, 물을 물리치는 물건은 대체로 불에 약한 면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불로 이 상자를 태워 보도록 합시다.] 구처기는 그 말을 받았다. [안 되오. 곽 속에 저장된 것은 구음진경의 원본이오. 구음진경의 원본은 종이로 만든 것일텐데 만약에 불로 태운다면 곽과 함께 구음진경 원본이 재로 변하지 않겠소?] 바위로 쳐도 부서지지 않고 불로 태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동굴 안의 여덟 사람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온갖 방법을 궁리해 보았다.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으나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처현이 갑자기 한가지 방법을 떠올리고 운을 떼었다. [여기 계신 사형들은 이태백(李太白)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잘 알지는 못해도 이름은 들어 보았겠지요?] 구처기가 아는 체를 했다. [이태백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적선(滴仙)이라는 아호까지 있지 않은가? 그가 지은 시는 무척 훌륭하고 천재적인 재치가 빛나고 있지. 그러나 이태백과 구음진경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유처현은 대답했다. [이태백은 어릴 때는 공부하려고 하지 않고 노는 데만 정신을 팔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큰 거리에 이르게 되었는데 길가에서 한 노파가 한 자루의 쇠막대기를 숫돌에 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태백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노부인에게 그 쇠막대기를 어디에 쓰려고 갈고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노파는 옷을 깁는 바늘이 있어야 하기에 쇠막대기를 갈고 갈아 바늘을 만들 계획이라고 대답했답니다. 이태백은 그 말에 큰 소리로 웃었답니다. 노파가 너무나 멍청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와 같이 굵은 쇠막대기를 어느 세월에 갈아서 바늘처럼 가늘게 만들겠소? 한평생 갈아도 바늘을 만들기 힘들 거요.>라고 말해주었더니, 그 노파는 정색하고 말했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네. 정성을 들이면 무쇠 기둥을 갈아서 바늘로 만들 수 있네. 우공(愚公)이 산을 옮겨 놓았는데 쇠막대기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단 말인가?> 이태백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온 뒤로 정성을 다해 공부를 한 결과 유명한 시인(詩人)이 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두들 유군보의 이야기를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왕중양은 물었다. [처현, 너의 뜻은 이 곽을 바위에다 계속 갈면 이 곽이 엷어지고 구멍이 생겨 구음진경이 저절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겠지?] [제자는 바로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왕중양은 구음진경의 곽을 쳐들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 곽의 두께가 겨우 반 치 정도에 불과하니 정성들여 갈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다만 1년을 갈아도 되지 않을 때는 2년을 갈아야 할 것이고 2년을 갈아도 되지 않을 때는 3년을 갈아야 되겠지만 곽이 언젠가는 뻥 뚫리는 날이 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처현의 말이 옳다. 오늘부터 너희 여섯 제자들은 번갈아 가며 이 곽을 바위에 갈도록 해라. 한 사람이 하루씩 번갈아 가며 갈도록 해라. 몇 달 갈아보고 난 후에 다시 의논하기로 하자] 구처기 등은 순순히 응했다. 이 날부터 마옥과 구처기 등 여섯 명은 매일처럼 번갈아 가며 곽을 바위 위에 문질러댔다. 왕중양은 손수 그들에게 천강북두진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진법은 일곱 명의 숫자를 채워야 하는데 왕중양은 겨우 여섯 명의 제자밖에 없었고 자기 자신은 밖에서 지시를 해야 하니 결코 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 천강북두진은 한 사람이 모자라도 위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왕중양은 부득이 자기의 사제 주백통에게 함께 천강북두진에 참여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주백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이것은 어린애 숨박꼭질과 같은 놀이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끼어든단 말이오? 난 안 배울래요.] 왕중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백통을 나무랐다. [사제, 이것은 전진파를 빛낼 지고무상의 무학인데, 어째서 자네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주백통은 투정하듯 말했다. [사형이 화산으로 간 후에 나는 구처기 등에게 나하고 놀자고 했소.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점잖을 빼면서 사숙하고는 놀 수가 없다고 했어요. 지금 사형이 나보고 그들과 숨박꼭질을 하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놀기 싫어졌소!] 그는 타고난 고집쟁이였다. 한번 안 한다고 하면 안 하는 사람이었다. 왕중양도 그를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어느덧 한 달이 넘게 홀러갔다. 구처기 등 여섯 제자는 꼬박 40일간 곽을 바위에 문질러 갈았다. 그러나 곽의 표면은 갈수록 빛이 나면서 매끄러워졌는데 아무리 갈아도 얇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왕중양은 계속 갈도록 했다. 어느 날 나무를 하러 갔던 주백통이 질풍과 같이 줄달음쳐서 돌아와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사형, 야단났소. 산 아래에 수백 명이나 되는 패거리가 나타났소.] 왕중양은 놀라서 물었다. [수백 명이 왔다고? 관병이냐, 아니면 강도떼냐?] 주백통은 대답했다. [그 한 떼의 사람들은 매우 이상 야릇하여 관병 같지도 않고 산채의 강도들 같지도 않았소. 강호의 비밀 방회의 무리 같았소.] 유처현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움쩔하며 입을 열었다. [사부님, 혹시 철장방의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들이 사부님께 따지러 온 모양입니다.]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왕중양이 동관에서 철장방의 사람들을 내쫓은 적이 있으니 철장방이 대거 숭산으로 몰려와 보복을 할 가능성이 짙었다. 왕중양은 즉시 모든 제자들을 자기 앞으로 불러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잘 들어라. 산 아래에 한 패거리의 사람들이 왔는데 친구인지 적인지 아직 분간할 수가 없구나. 모두 나를 따라 산을 내려가 상황을 보아 일을 처리하도록 하자.] 마, 구, 유, 왕, 손, 담, 여섯 제자는 주백통의 인솔 하에 산을 내려갔다. 중양진인까지 포함해서 모두 여덟 명이었다. 연하동을 나선 그들은 곧장 산 아래로 내려갔다. 산허리에 이르니 바람결에 지독한 비린내가 실려와 코를 찔렀다. 주백통이 먼저 코를 감싸 쥐고 부르짖었다. [사형, 지독한 비린내가 나는구려.] 왕중양은 그 비린내를 맡자 독사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음을 알아채고 어리둥절해졌다. (어디서 이토록 많은 독사들이 나타난 것일까? 혹시 구양봉이라는 자가 승복할 수가 없어서 독사진(毒蛇陣)을 이끌고 앙갚음을 하려고 찾아온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유처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철장방의 무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방주까지도 왔군요.] 중양진인은 즉시 높은 나무 꼭대기로 몸을 솟구쳐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산 아래에 수백 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새까맣게 몰려 오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옷을 입고 있는데 적어도 사오백 명은 될 것 같았다. 그 패거리들의 앞쪽에 있는 풀잎이 파도치듯 일렁거리고 있었다. 한 떼의 독사들이 선봉이 되어 기어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독사들이 떼를 지어 태실봉(太室峯) 위로 기어 오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주백통은 투덜거렸다. [이 한 떼의 사람들은 정말 요상하기 이를데 없군. 독사를 선봉으로 내세워 길을 열다니! 속담에도 뱀은 유황을 두려워한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우리에게는 유황이 없으니 이번에 야단나게 생겼군.] 왕중양은 그를 나무랐다. [터무니 없는 소리 말아라. 모두 칼과 검을 뽑아 들고 한일 자로 늘어서라. 독사가 가까이 오면 조금도 사앙하지 말고 쳐 죽여라.] 구처기 등은 칼과 검을 뽑아 들고 섰는데 그 기세가 자못 등등했다. 왕중양은 그 한 떼의 사람들이 가까이 오자 단전의 진기를 모아 소리쳐 물었다. [어느 분이 철장방주신가? 이 왕중양이 이곳에서 기다린지 오래 되었소.] 그 독사들은 인기척을 느끼자 속도를 빨리해서 쏜살같이 기어 올라왔다. 주백통은 뱀을 몹시 두려워하는지 다급한 어조로 호들갑을 떨었다. [야단났다. 야단났어. 독사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우리들은 모조리 죽게 생겼다.] 왕중양은 사방을 둘러 보았다. 산비탈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 높이가 석 자나 되고 둘레는 넉 자가 넘는 것이 꼭 맷돌 같았다. 그 바욋돌은 뱀떼와 자기들 사이에 있었다. 왕중양은 좋은 영감이 떠올라 단전의 진기를 끌어 모으고 선천공을 돋구면서 벼락같이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뻗쳐 그 바위를 한번 가리키며 외쳤다. [굴러라!] 회한하게도 육칠백 근은 나갈 것 같은 그 바위가 몇번 흔들거리더니 우르롱, 하는 소리를 내면서 파묻혔던 밑둥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즉시 산비탈을 따라 떼눌떼굴 산비탈 아래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 바윗돌은 뱀떼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수십 마리의 독사들이 짓뭉개졌다. 그 광경을 목도한 흑의의 사내들은 대경실색했다. 주백통은 신이 나는 듯 껄껄 웃더니 우렁차게 소리쳤다. [으하하, 이 개같은 도적들아, 똑똑히 보았느냐? 우리 사형께서는 신통광대한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을 수가 있다. 너희들 가운데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 있다면 얼마든지 덤벼도 좋다.] 그 말에 철장방의 무리들을 대뜸 주눅이 들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감히 더 기어 오르지 못했다. 이 때 흑의인들이 좌우로 길을 티워주는 가운데 한 명의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사내가 앞으로 썩 나섰다. 이 사내는 선비 옷차림인데 손에 강철로 만들어진 한 자루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 지팡이의 위로 두 마리의 뱀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는데, 입에서 혓바닥을 낼름거리고 있어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느낌을 던져 주고 있었다. 그 사내는 여러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유처현은 나직히 말했다. [사부님, 조심하십시오. 저 사람이 철장방의 방주입니다.]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 높여 외쳤다. [귀하가 바로 철장방의 방주요? 귀방과 우리 전진교는 우물물과 냇물처럼 아무 상관도 없는데 오늘 어째서 이곳까지 왕림했는지 알려주시기 바라오.] 철장방의 방주 구천인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중양진인이오? 그렇다면 잘 되었소. 당신은 귀파의 장문이고, 나도 한 방의 우두머리요. 당신은 강호의 규칙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어째서 우리 철장방의 반역도를 구해 제자로 삼았소?] [무랑수불, 유군보가 이 풍진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삼청에 귀의한 것은 그 자신의 뜻이었소. 그러니 빈도가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소. 그는 이미 상투를 틀고 도사가 되어 삼계(三界) 밖으로 물러났으니, 전 방주는 빈도의 얼굴을 봐서라도 너그럽게 한번 봐주시기 바라오.] 구천인은 냉소했다. [흥, 귀하는 동관에서 우리 철장방의 방우(幇友)들에게 손찌검을 했는데 손을 쓰게 되었을 직에 이 전모의 체면을 세워줄 생각을 왜 하지 않았소? 쓸데없는 잔소리는 그만둡시다. 어서 유가 놈을 내놓도록 하시오. 내놓지 않는다면 우리 철장방은 당신들을 도륙하게 될 것이오.] 주백통은 구천인의 말을 듣자 화가 나서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가 막 발작하려고 하는데 왕중양 먼저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빈도는 본래 사람을 해치는 것을 싫어하오. 하지만 전 방주가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흉흉하게 찾아와 소란을 일으키니 빈도는 부득이 전력을 다해 상대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구료.] 구천인은 쌍사장(雙蛇杖)을 한번 떨치더니 몸을 날려 앞으로 나오며 왕중양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가 막 한 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을 때 그의 등뒤에서 재빠르게 한 사람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중년의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사내인데 얼굴색이 멍이 든 것처럼 푸르죽죽했다. 그는 철장방의 부방주 가운데 하나로 축동(祝棟)이라는 자였다. 별호는 독사여(毒沙　)였다. 그는 독조공(毒爪功)을 익힌 사람으로 음흉하고 악독했다. 그는 앞으로 나서서 구천인에게 말했다. [방주님은 방의 지존이시니 하찮은 것들과 손을 쓰실 필요 없사옵니다. 소인이 전진파의 인물들을 상대해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구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지. 조심하게] 축동은 앞으로 나오더니 입을 열었다. [왕가야, 소문을 들으니까 전진파의 권법과 검법이 중원에서 독보적이라고 하더구나. 나는 너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눈앞이 번쩍하더니 비스듬히 한 사람이 달려 나오며 대뜸 욕을 해댔다. [이런 미친 놈이 있나? 네끼짓 놈이 감히 우리 사형의 성씨를 들먹여? 제기랄, 나의 일장이나 받아 보아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장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그 일장은 무척 표홀(飄忽)했다. 축동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날려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따귀를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그를 때린 사람은 주백통이었다. 그는 축동이 자기의 사형에게 도전하면서 건방진 것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득달같이 앞으로 뛰쳐나와 이상하기 이를데 없는 초식으로 축동의 따귀를 한 대 갈긴 것이었다. 축동은 대노해서 미친 듯이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두 손을 뻗어 맹렬히 주백통의 멱살을 움켜쥐려고 했다. 원래 축동이 익힌 무공은 독사장(毒沙掌)이었다. 두 손의 열 손가락을 매일과 같이 독사의 타액과 독약을 섞어 만든 즙에 담가 단련해 왔기 때문에 손에 한번 사람의 몸뚱아리가 움켜잡혔다 하면 바로 독사에 물린 것과 같은 결과를 나타냈다. 주백통은 몸을 야릇하게 흔들더니 부르짖었다. [아이구, 아이구! 간신히 잡히지 않았다!] 입으로 그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발로는 반룡요보(盤龍繞步)라는 신법을 펼쳐 축동의 손바닥 아래로 살짝 몸을 숙여 물러나는 것이었다. 축동은 그가 일부러 자기를 약올리는 것을 보고 골이 날대로 나서 한평생 고생해서 연마한 복호장법을 펼쳐냈다. 잇달아 금강복호(金剛伏虎), 나한과호(羅漢跨虎)라는 초식을 구사했다. 초식은 잇달아 펼쳐졌고 주먹을 힘차게 호려쳐 내는데 그 일거수일투족에는 독사장력이 서려 있었다. 주백통은 태을권법(太乙拳法)를 전개해서 오룡반수(烏龍盤樹), 신룡입해(神龍入海)라는 2초를 펼쳐 피해냈다. 주백통은 몸을 번쩍하더니 돌연 그의 뒷통수에 일장을 퍽, 하니 갈겼는데 이 일장에는 제법 힘이 실려 있었다. [아이쿠!] 축동은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하마터면 땅바닥에 주저 앉을 뻔 했으나 간신히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바로 세웠다. 전진파의 여섯 제자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왁, 하니 웃었다. 축동은 잇달아 두번 얻어맞자 주백통의 재간이 기이하고 야릇하다는 비로소 깨달았다. 다시는 감히 사납게 달려들지 못하고 주백통의 옆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주백통은 웃으면서 욕을 했다. [냄새 나는 도적놈아, 따귀와 뒤통수를 얻어맞은 맛이 어떠냐? 왜 겁이 나느냐? 어째서 덤벼들지 못하고 빙빙 돌기만 하느냐? 그렇다고 해서 얻어 터지지 않을 줄 알고? 으헤헤, 자, 봐라!] 그는 벼락같이 팔면선풍장법(八面旋風掌法)을 펼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며 축동의 몸 곁에서 왔다 갔다 했다. 축동은 갑자기 눈앞이 번쩍거리고 전후좌후가 온통 주백통의 그림자로 가득 차는 것을 보자 그만 당황한 나머지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가 순간적으로 당황해 하는 사이에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등짝을 주백통의 주먹에 얻어맞았다. 곧 이어 철썩,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오른쪽 뺨에 또 다시 한 대의 따귀를 얻어 맞은 것이었다. 그의 눈에 불똥이 튀고 현기증이 일었다. 축동은 미친 듯이 부르짖더니 갑자기 두 소맷자락을 걷어 붙이고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향하면서 휙휙, 두 줌의 미세한 모래를 던졌다. 주백통의 얼굴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두 줌의 모래는 독섬사(毒蟾沙)라는 것으로 음험하고 지독했다. 이와 같은 독섬사는 땅바닥 밑 30자 아래의 깨끗한 흙과 백여 마리의 두꺼비의 독액을 섞어 백 번 찌고 백 번 말린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모래알처럼 변한 것인데 일반 모래알보다 훨씬 미세하여 분말처럼 보이지만 맹독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사람의 몸에 묻으면 즉시 살이 부풀어 오르고 두꺼비의 거죽처럼 우둘두둘한 혹이 생겨나며 뼈에 사무치는 가려움을 느끼게 된다. 반 나절이 되기 전에 그 부풀어 오른 흑같은 것이 썩어 문들어지면서 피고름으로 화하게 되는데 전신의 가죽과 살이 모조리 썩어 문드러져 죽게 된다. 그래서 축동은 독사여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었다. 주백통은 짖궂은 개구장이 같았지만 무공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독모래가 펼쳐지는 찰나, 주백통은 몸을 훌쩍 솟구쳐 일진의 광풍처럼 축동의 머리 위를 뛰어 넘더니 허공에서 허리를 뒤틀며 두 발을 걷어찼다. 발끝이 잽싸게 축동의 잔등에 있는 명문혈(命門穴)을 걷어찬 것이었다. 축동은 크게 한소리 부르짖으며 입을 벌리고 몇 모금의 선혈을 울컥 토해내더니 털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곧이어 데굴데굴 산비탈 아래로 굴러 내려가, 잇달아 십여번이나 굴러가다가 커다란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주백통은 껄껄 웃으며 손뼉을 쳤다. [으헤헤, 훌륭한 재간이군. 홀륭한 재간이야. 거북이가 구르는 모양과 흡사하잖아? 굴러 내려가는 그 수법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면 서운해 할테지? 음, 오귀타곤(烏龜打滾)이 어떨까? 정말 절묘한 이름 아닌가?] 철장방주 구천인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돌연 훌쩍 몸을 날려 덮치며 손에 들고 있는 쌍사장을 휘둘러 주백통의 앞가슴을 찍어 갔다. 이 일초는 번개같이 빨랐다. 하지만 주백통의 재간 역시 그에 못지않아 즉시 몸을 빙글 돌려 쌍사장의 머리를 피하면서 냅다 발운견일(拔云見日)이라는 일초를 펼쳐 다섯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쌍사장을 나꿔채려고 했다. 한데 구천인의 이 쌍사장은 몹시 괴이했다. 별안간 그는 왼쪽으로 돌았고, 쌍사장의 끝에 있던 두 개의 뱀대가리가 갑자기 한 자 정도 불쑥 튀어 나왔다. 원래 뱀대가리 아래쪽에 용수철을 장치했기 때문에 힘을 주어 떨치면 뱀의 머리가 돌연 뻗쳐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 즉시 뱀대가리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뻗쳐 주백통의 오른쪽 손목을 콱 깨물었다. 주백통은 벌에 쏘인 것처럼 손목이 따끔한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가 일장을 반격하려고 하자 구천인이 뒤로 훌쩍 몸을 날려 물러서더니 낭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귀하는 나와 손을 쓸 필요가 없소. 곱게 돌아가서 뒷일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주백통은 고개를 숙이고 오른쪽 손목을 바라보았다. 손목 언저리에 두 군데 상처가 나 있었는데 그 상처는 쌀알만한 크기였다. 검붉은 피가 줄줄 홀러 나왔다. 별로 아프지는 않았으나, 상처 언저리가 점차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원래 구천인이 지팡이 윗부분에 조각해 놓은 뱀대가리는 서독 구양봉이 사용했던 무쇠로 만들어진 가짜뱀 못지 않게 지독했다. 해독약을 사용해도 쉽게 회복되지 못하거니와 가만 놔두면 죽게 되는 것이었다. 뱀대가리엔 독니가 장치되어 있어 저절로 사람을 물게 되어 있었다. 독니에 묻혀진 독은 맹독이었다. 일단 물리면 살모사에 물린 것과 같아 몇 시진 안에 독이 퍼져 죽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자기의 상처를 바라보며 구천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울화가 치밀어 호통을 내질렀다. [제미랄 놈, 네까짓 놈이 일방의 우두머리냐? 비겁하게 사람을 해치려고 하다니, 이 주백통은 너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다.] 1 그는 훌쩍 몸을 솟구치더니 독수리처럼 구천인에게 덮쳐들려고 했다. 주백통이 막 몸을 솟구쳐 앞으로 덮쳐 나가려는 그 찰나, 옆에서 휙, 하는 바람소리가 일었다. 한 사람이 후딱 그 곁에 떨어지며 손을 뻗쳐 주백통의 옷깃을 잡았다. [사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내가 가르쳐 주는대로 해라.] 그러더니 주백통을 잡아 끌었다. 주백통의 옷깃을 잡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중양진인이었다. 그는 주백통을 끌어당기고 말했다. [사제가 입은 상처는 대수롭지 않으니 너무 염려 말아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삼화취정(三花聚頂), 오심향천(五心向天)의 비결에 따라 운기행공을 해라.] 이것은 전진파의 운기행공을 하는 요결이었다. 주백통은 고분고분 말도 잘 들었다. 사형 중양진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왕중양 역시 주백통의 맞은편에 앉았다. 철장방의 방주와 수백 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왼손으로 주백통의 상처입은 오른쪽 팔목에 있는 곡지혈(曲池穴)을 움켜잡고 왼손으로는 주백통의 상처 입은 팔목의 가운데 손가락과 식지를 움켜잡았다. 잠시 후에 주백통은 한 줄기의 뜨거운 기운이 자기의 오른 쪽 손바닥을 통해 밀려들어 뜨거운 기운이 곧장 팔로 뻗쳐 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의 얼얼하고 마비되던 부분에 점점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두 개의 쌀알 크기의 상처가 갑자기 두 배 정도 커지면서 한 줄기 검은 피가 흘러 나왔다. 새까만 피는 방울방울 땅바닥에 떨어졌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지 않아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홀러 나왔다. 주백통은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사람처럼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찜통 뚜껑을 열어 놓은 것처럼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괴어 오르고 있었다. 왕중양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사제, 돌아가서 잠시 쉬도록 해라.] 구천인은 옆에서 왕중양이 자기 사제의 독상을 치료하는 광경을 보며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원래 중양진인의 치료 방법은 선천기공을 써서 독기를 몰아 내는 추혈법(推穴法)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재간을 공격할 때 사용하면 바로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신공이 되는 것이었다. 추혈법은 선천기경(先天氣勁)을 상대방의 몸 안으로 주입해서 상대방의 진기와 하나로 합치시켜 운행하면서 독혈과 독액을 상처 구멍을 통해 몰아내는 수법이었다. 제 아무리 무서운 독약을 묻힌 암기가 사람의 몸에 적중되었다고 해도 차 한 잔 마실 시간 안에 기공추혈법(氣功推穴法)을 사용하면 독혈을 상처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치료법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치료를 받는 사람과 치료하는 사람이 모두 다 기공에 정통해야 했다. 그러니까 일반인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치료법이었다. 주백통은 어렸을 때부터 왕중양과 함께 무공을 연마했고 기공에도 탁월한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중양은 잠깐 동안에 주백통의 몸안에 스며든 독혈을 몰아낸 것이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철장방의 무리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구천인은 왕중양의 재간이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한 것을 보고 더욱 더 간담이 서늘해졌다. 사실 구천인의 쌍사장에 매달려 있는 뱀대가리의 독니에 묻혀 있는 독은 지독하기 이를 데 없어, 구천인이 구출하려고 해도 해독약을 먹인 후에 식초에다 일곱번 몸을 담가 독기를 빼내야 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석 달 이상 조섭해야 비로소 체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왕중양은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되기 전에 주백통을 치료해 놓았으니, 구천인이 어찌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왕중양은 주백통을 치료한 후에 구천인을 향해 말했다. [철장방주, 당신에게 실망했소. 직접 만나 보니 소문과는 딴판이구려? 비겁하게 남을 암산하는 수법이 무척 훌륭하시더군!] 본래 그는 도를 닦는 사람이고 성격이 온화하고 겸손해서 좀처럼 다른 사람을 비양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구천인의 수단이 비루하고 심보가 악독한 것을 보자 그와 같은 몇 마디를 내뱉은 것이었다. 뭇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같은 조롱을 당하자 구천인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치가 분노로 변한 구천인은 쌍사장을 떨치더니 호통을 내질렀다. [왕중양, 당신이 동관에서 내 부하를 때려 상처를 입혔고, 내가 오늘 당신의 사제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피장파장이오. 자, 우리 두 사람이 높낮음을 한번 판가름해 봅시다!] 왕중양은 가볍게 코웃음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뒤로 돌려 손짓했다. 여섯 명의 제자들을 모조리 자기 앞으로 모여들자 왕중양은 입을 열었다. [마옥, 처기, 처단, 너희들이 나서거라.] 마옥, 구처기, 담처단, 세 젊은 도사들은 대답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중양진인 앞에 나란히 섰다. 왕중양은 손을 들어 구천인을 손가락질했다. [저 철장방주는 무공이 탁월하고 덕망이 높으시다. 너희들 세 사람이 나를 따른지 이미 몇 년이 되었으나 진정으로 남과 손을 써 본 적이 없다. 오늘 마음껏 전방주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해라!] 이 몇 마디의 말은 겉으로는 추켜 세우는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구천인을 비꼰 것이었다. 구천인은 한 방회의 우두머리로 왕중양과 대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왕중양이 몸소 그와 겨루어야 상대방의 신분에 어울리는 조처라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중양진인은 세 명의 제자를 불러 그를 상대하라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멸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천인은 큰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철장방의 세 사람이 그 콧소리를 듣고 우르르 달려 나오며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방주님,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나가 전진교의 재간을 한번 가르침 받겠습니다.] 이 세 사람은 철장방의 원로 고수들이었다. 한 사람은 추풍망(追風　) 후등방(候騰芳)이고, 한 사람은 금안망(金眼　) 초천정(焦天挺)이며, 또 한 사람은 적배망(赤背　) 주홍의(朱洪義)였다. 그들은 철장방에서 상서삼망(湘西三　)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었는데 심보가 악랄하고 손이 매우며 무공이 고강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구천인은 그들 세 사람이 나서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부하들이 왕중양의 제자들과 겨룬다면 자기의 체면이 서는 일이었다. 그는 쌍사장을 거두고 뒤로 뭍러서며 호통쳤다. [너희들은 앞으로 나가 저 세 명의 잡도사들을 쳐 죽여라!] 상서삼망은 대답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추풍망 후등방은 구처기에로 달려들었고, 큼안망 초천정은 곧장 마옥을 공격했으며, 적배망 주홍의는 담처단을 덮쳤다. 세 마리의 구렁이가 전진삼자(全眞三子)를 상대하게 된 것이었다. 전진삼자 가운데에는 구처기는 악을 원수처럼 미워했다. 그는 철장방의 사람들이 뱀으로 진을 치고, 누구 할 것 없이 사악한 것을 보자 사정없이 손을 쓰기로 결심했다. 구처기는 즉시 검으로 청란전시(靑鸞展翅)라는 일초를 펼쳐냈다. 추풍망 후등방이 사용하는 무기는 금사등사봉(金絲騰蛇棒)이었다. 그는 휙, 하니 금사등사봉을 떨쳐 채풍이수(彩風移獸)라는 일초를 펼쳐 구처기를 후려치려고 했다. 한데, 그의 금사등사봉이 막 펼쳐지는 그 순간, 그의 눈앞에는 찬란한 광채가 번쩍거렸다. 구처기가 어느덧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덮쳐든 것이었다. 추풍망 후등방은 그 순간 금사등사봉을 쥐고 있는 오른손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살펴 보니 다섯 손가락이 모조리 잘라지고 만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뼈에 사무치는 통증에 아이쿠, 하는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원래 구처기가 사용한 요결은 점자결(粘字訣)이었다. 이는 전진태을검(全眞太乙劍)의 절초였다. 상대방이 금사등사봉을 들고 공격하려 하자 구처기는 내공을 검의 끝에 주입했다. 그 순간 한번 당기고 한번 밀어 적의 금사등사봉이 한켠으로 미끌어지도록 만들고, 즉시 이자결(履字訣)을 펼쳐 검날을 상대방의 금사등사봉을 따라 쭉 베어 가자 눈 깜짝할 사이에 추풍망 후등방의 다섯개 손가락을 완전히 잘라버린 것이었다. 그가 검을 더 디밀면 석 자의 칼날은 적의 가슴팍을 꿰뚫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가에서는 살인을 금하고 있었다. 구처기는 왼발로 추풍망 후등방을 걷어차 1장 밖으로 나가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바로 추풍망 후등방이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그 찰나에 금안망 초천정과 적배망 주홍의 두 사람 역시 좌절당하고 있었다. 금안망 초천정은 마옥에게로 달려들었는데,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호두쌍구(虎頭雙鉤)였다. 쌍구로 난추채운(亂推彩云)이라는 초식을 펼쳐 마옥의 목덜미를 절단할 기세로 가위질을 하듯이 공격해 왔다. 마옥은 구처기보다 침착했다. 그는 장검을 휘둘러 한번 막았다. 쩡, 하는 소리가 나면서 금화가 뿌려지는 곳에 발운견일(拔云見日)이라는 일초를 펼쳐 즉시 적의 쌍구를 밀어냈다. 금안망 초천정은 대뜸 호구(虎口)가 마비되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쌍구를 내려뜨려 상대방의 하반신을 걸어 당기는 척하면서 옆으로 물러 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찬란한 광채가 번쩍했다. 마옥의 장검이 어느덧 그의 목줄기에 닿아 있는 것이었다. 초천정은 차가운 칼날이 목줄기를 누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마옥이 호통을 버럭 내질렀다. [당신의 재간은 아직 멀었소.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을 터이니 돌아가시오.] 마옥이 검을 거두어자 금안망 초천정은 온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우고 의기소침해서 본진(本陳)으로 돌아갔다. 적배망 주홍의는 한 자루의 안령절철도(雁珝折鐵刀)를 사용했는데 안령절철도를 휘드르면서 곧장 담처단에게로 달려 들었다. 칼빛을 번뜩이며 냅다 사벽오악(斜劈五岳)이라는 일초를 펼쳐 담처단의 머리를 사납게 내려쳤다. 담처단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몸을 흔들더니 유봉와예(游蜂臥蘂)라는 신법으로 피해버렸다. 적배망 주홍의는 안령절철도를 아래로 내려뜨리며 완저번운(腕低飜韻)이라는 일초를 펼쳐 칼을 휘둘러 상대방의 오른쪽 늑골을 베려고 했다. 그 순간 담처단은 갑자기 한소리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자 검날은 마치 바람이 불어오듯 적배망 주홍의의 가슴을 엄습하는 것이 아닌가? 주흥의는 상대방의 검이 상상외로 신속한 것을 보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재수류(倒栽垂柳)라는 수법으로 뒤로 몸을 날려 물러서려고 했으나, 담처단의 그 일초는 허와 실을 겸하고 있었다. 담처단이 별안간 찬란한 검화를 뿌려내며 철쇄횡강(鐵鎖橫江)의 일초를 펼쳐냈다. 칼날은 즉시 적배망 주홍의의 오른팔에 한가닥 길죽한 상처를 내었다. 피는 샘솟듯 홀러내려 방울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적배망 주홍의는 괴성을 내지르며 낭패한 모습으로 팔을 얼싸안은 채 뒤로 물러섰다. 상서삼망이 전진삼자를 상대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승부가 나고 만 것이었다.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은 겨우 1초를 펼쳤을 뿐인데, 추풍망 후등방과 금안망 초천정이 패했고, 담처단은 그들보다 한 수 더 많은 2초를 펼쳐 적배망 주홍의의 오른팔에 상처를 입힌 것이었다. 철장방의 무리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구천인은 자기의 제자들이 이와 같이 맥없이 패하자 어안이 벙벙했다. 실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막 손을 쓰자마자 패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상대방이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상서삼망은 벌써 황천에 가 있을 것이었다. 그는 전진교의 검법이 착실하고 정확하며 매섭고 쾌속하여 무림에서 보기 드물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왕중양이 세 명의 제자를 내세워 자기와 겨루도록 한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수치와 분노에 얽혀 있을 적에 왕중양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철장방주, 나는 세 명의 못난 제자들을 불러 당신과 겨루도록 할 생각이었소.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느꼈겠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구천인은 냉소했다. [강한 장수 밑에는 약졸이 없다고 했는데, 과연 전진파의 무공은 놀랍구려. 좋소, 좋아. 이 구모가 당신의 세 고제자와 겨루도록 하지.] 그는 담처단의 재간이 비교적 낮은 것을 알고 쌍사장을 떨치더니 소지천남(笑指天南)이라는 일초로 담처단의 가슴에 있는 혈조혈(血阻穴)을 찍어 갔다. 담처단은 우뚝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쌍사장은 금방이라도 그의 몸에 닿을 것 같았다. 바로 그 때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이 구천인을 좌우에서 공격해 갔다. 그들은 두 자루의 검을 비스듬히 세워 철장방주의 늑골을 찌르려고 했다. 구천인은 쌍사장을 되돌려 두 사람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을 때, 마옥과 구처기가 번개처럼 뒤로 물러서고 담처단이 그 순간 검광을 번뜩이며 춘운사전(春云乍展)이라는 초식으로 구천인을 공격했다. 구천인은 몸을 뽑아 올려 담처단의 머리 위를 뛰어 넘으며 쌍사장의 끝으로 마옥의 태양혈을 찍어 갔고 쌍사장의 꼬리 부분으로는 구처기의 현추혈(玄樞穴)을 찔렀다. 그 장법은 번개와 같았다.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은 각기 분화불류(分花拂柳)라는 신법을 써서 좌우 양쪽으로 번쩍 몸을 날려 피했다. 왕중양은 그의 재간이 탁월한 것을 보고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구천인은 전진삼자와 일초를 교환한 후에, 상대방이 일종의 진법을 펼쳐내고 있기 때문에 전진삼자 세 사람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음을 알았다. 공격을 펴냈다가 물러설 때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이 여간 민첩하지 않았다. [훌륭한 진법이다!] 철장방주는 탄성을 내지르며 쌍사장을 휘둘렀다. 그가 펼치는 것은 노지심(魯智沈)의 풍마선장법(楓魔禪杖法)이었다. 그야말로 미친 마귀가 마구 날뛰는 듯한데, 재빠르게 펼쳐지면 지팡이로 이루어진 산을 연상시키고 용이나 이무기가 뒤엉켜 허공을 누비는 것 같았다. 그의 풍마선장법은 겉으로 보면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끊는 등 초식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전(纏), 타(打), 반(盤), 교(絞), 쇄(鎖), 륵(勒)의 여섯 가지 요결이 깃들어 있었다. 지팡이에 매달린 두 개의 뱀대가리는 수시로 불쏙불쑥 뻗쳐나가 상대방의 몸을 물려고 했다. 그러나 전진삼자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세 사람의 검은 이쪽에서 공격하면 저쪽에서는 수비를 했고, 저쪽에서 나아가면 이쪽에서 물러서는 등, 그야말로 번갯불이 허공을 누비는 듯, 쇠사슬이 몸을 칭칭 감는 듯 현란했다. 이와 같은 상태로 일백여 초를 겨루었으나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철장방에는 본래 두 명의 부방주가 있었다. 한 사람은 독사여 축동이고, 또 한 사람은 갈미침(蝎尾針) 서광(徐廣)이었다. 독사여 축동은 주백통에게 얻어 맞아 기절해, 방의 무리들이 떠메고 진 안으로 들어가 치료하고 있는 중이었다. 갈미침 서광은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왕중양이 자기의 방주와 손을 쓰지 않고 세 명의 제자가 나오는 것을 보고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더욱이 방주가 세 명의 젊은 도사를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방의 세 줄기 검광 속에 갇혀 불리해 보이지 않는가? 갈미침 서광은 매우 다급했다. 방주가 세 명의 젊은 도사들에게 패하면 철장방의 위풍이 그 날부터 땅에 떨어지고 철장방은 앞으로 다시는 강호에서 발 붙일 곳이 없게 될 것 같았다. 그는 수하들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왜 가만히들 있느냐? 빨리 앞으로 나아가 저 한 떼의 잡도사들을 모조리 죽여라!] 철장방의 무리 수백 명은 방금 왕중양이 운기행공하여 커다란 바위를 뽑고, 전진삼자가 겨우 일 초만에 상서삼망을 잇달아 격퇴시키는 솜씨를 보았기 때문에 나서 보았자 도움이 될 리 없고, 자기들의 재간이 너무 뒤떨어지기 때문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갈미침 서광이 호통을 지르자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우물쭈물 감히 앞으로 나서지를 못했다. 갈미침 서광은 발끈 노하여 휙, 하니 허리에 두르고 있던 해망장편(海　長鞭)을 뽑아 들어 두 졸개를 후려쳐 쓰러뜨리고 욕을 했다.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천 일 동안 병사를 기르는 것은 하루의 싸움을 위해서다. 방주님께서 설마하니 밥만 먹고 똥만 싸라고 네놈들을 먹여 살리신 줄 아느냐? 빨리 공격하지 않고 뭘 꾸물거리느냐?] 그가 매섭게 호령하니 그제서야 철장방의 무리들은 억지로 용기를 내어 고함을 내지르며 각기 무기를 쳐들고 공격해 들어왔다. 철장방의 무리들이 공격해 들어오자 왕처일과 유처현, 그리고 손불이 세 사람이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왕중양은 그들을 말렸다. [함부로 나서지 말아라. 그들에게는 독사가 있다. 이 사부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그는 한 손으로 옆에 있는 돌덩이를 집어 들고 불진을 한번 떨치고는 마치 커다란 새처럼 솟구쳐 올라 허공을 가로질렀다. 일진의 광풍처럼 철장방의 무리들 안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이 때 철장방의 무리들은 우르르 앞을 향해 달려 나오며 서로 밀고 밀리고 있었다. 독사떼가 다시 꿈틀거리며 마옥, 구처기, 담처단, 세 사람의 발밑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왕중양은 허공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길게 휘파람을 내불더니 왼손을 한번 떨쳤다. 그러자 바스라진 돌부스러기가 비오듯 쏟아져 나갔다. 돌부스러기가 뱀의 머리와 몸뚱이에 적중되니, 돌조각에 머리를 얻어맞은 뱀은 대뜸 머리통이 터져 죽어 갔고, 몸뚱이를 얻어맞은 뱀들은 창자가 터져 나와 죽어 갔다. 뱀떼는 돌가루가 쏟아지자 놀라 뒤로 물러났다. 왕중양은 선뜻 몸을 날려 구천인의 앞으로 다가가 불진으로 그의 쌍사장을 바깥쪽으로 확 밀었다. 구천인은 몇 걸음 밖으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왕중양은 호통을 질렀다. [구 방주, 당신은 귀방의 많은 형제들을 인솔하고 이곳에 쳐들어왔지만 세 차례나 겨루어 본 결과 이미 승패가 가려졌소. 그런데도 곱게 물러가지 않겠다는 것이오? 정말 매운 맛을 보고 싶소?] 구천인은 얼굴을 붉혔다. 왕중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기는 상대방의 세 제자와 싸워서 열세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당당한 일파의 우두머리가 상대방의 제자보다도 못하게 되었으니 왕중양과 겨룬다면 패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이대로 물러간다면 철장방의 체면은 완전히 땅에 떨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지더라도 보기 좋게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천인은 노기 띤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왕 장문, 당신의 재간은 정말 고강하오. 하지만 나로 하여금 마음 속으로 승복하게 하지는 못했소.] 왕중양은 껄껄 웃었다. [당신은 부하들에게 공격을 멈추라고 하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마음속으로 승복하도록 만들겠소.] 철장방의 무리들은 왕중양이 나선 것을 보자 이미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다만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 모르는 몇 사람만 전진삼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구처기가 검으로 찌르는 단 일초에 상처를 입고 물러났다. 구천인은 도저히 승산이 없음을 느끼고 호통쳤다. [너희들은 모두 물러서라.] 철장방의 무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무기를 거두고,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부방주 서광은 속으로 못마땅하게 여기고 전진칠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구천인은 방의 무리들을 호통쳐 물러서게 한 후에 왕중양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와 한번 겨루어 볼 참이오? 무척 좋소. 나는 당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목숨을 걸고 전진파의 절묘한 초식을 가르침 받도록 하겠소. 자, 공격하시오.] 구천인의 말투는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왕중양은 껄껄 웃으머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더니 전진삼자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땀을 닦는 수건을 가지고 왔느냐? 이리 가져 오너라. 내가 쓸 데가 있다.] 마옥은 즉시 허리춤에 걸어 놓았던 수건을 뽑았다. 구처기와 담처단 두 사람도 수건을 내밀었다. 왕중양은 세 개의 수건을 한데 접어 숨박꼭질을 할 때처럼 자기의 눈을 가렸다. 구천인은 중양진인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눈을 싸매자 손에 들고 있던 불진으로 구천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전 방주, 나는 땅바닥에 앉아 이 불진으로 당신과 겨루겠소. 당신이 쌍사장으로 나의 몸 어느 곳이라도 건드리거나 심지어 옷자락만 건드려도 내가 지는 것으로 하겠소. 당신이 나를 일어서도록 만들거나 앉아 있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한다면 역시 내가 지는 것으로 하겠소. 이와같이 겨루는 것을 당신은 응할 수 있소?] 두 눈을 가리고 상대방과 손을 쓴다면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땅바닥에 앉아 움직이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웠으니, 더욱 더 불리할 것이었다. 철장방의 무리들은 그 말을 듣고는 즉시 웅성거렸고, 전진파의 여섯 제자들도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구천인의 재간이 아무리 사부보다 못하다고 해도 무공의 조예가 퍽 깊으니, 사부가 이토록 건방진 조건을 내걸었다가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전진파의 명예가 손상을 입게 될 것이고, 수치와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천인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원래 무림에는 폐목환장(閉目換掌)이라는 재간이 있었다. 폐목환장의 무공을 쓰려면 수건으로 두 눈을 가리고 청각으로 적이 공격해 오는 방항을 알아차리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했다. 이와 같은 재간은 수비만 했지 공격을 할 수 없었다. 동작의 폭도 무척 좁지만 손 씀씀이는 기이하도록 빨라 오로지 적의 손이나 발의 관절을 움켜 잡으려고 하는데, 한번 잡혔다 하면 그 자리에서 근육이 잘라지고 뼈마디가 부러지는 것이었다. 밤중에 싸울 때 사용하거나 동굴 안이나 칠흑처럼 캄캄한 환경에서 느닷없이 강적을 만나게 되었을 적에 즉시 폐목환장의 재간을 펼쳐 적을 상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재간이 정묘하고 금나수법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공격해 오는 적의 무기를 빼앗을 수도 있었다. 왕중양은 놀랍게도 여러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 폐목환장의 재간을 써서 자기를 상대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철장방주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와 같이 양보하는데도 자기가 대적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을 것인가? 구천인은 쌍사장을 한번 떨치며 부르짖었다. [좋소. 당신이 이 구모를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은데, 나는 당신이 폐목환장의 재간을 어느 경지까지 정묘하게 통달했는지 두고 보기로 하겠소.]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획, 하니 지팡이를 들어 왕중양의 가슴팍을 찔러 갔다. 왕증양은 귀로 바람소리를 듣고 상대방의 쌍사장이 자기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단정히 땅바닥에 앉은 채 아무렇게나 불진을 바깥쪽으로 휘둘러 불진외 꼬리를 두 자나 뻗쳐내 구천인의 쌍사장을 휘감으려고 했다. 이 천신도괘(天神倒掛)라는 일초는 본래 전진파의 검법인데, 왕중양은 불진에 응용한 것이었다. 구천인은 쌍사장을 앞으로 당겼다가 번개같이 왕중양의 허리를 쓸어 갔다. 이 한수는 탐해도룡(探海居龍)이라는 것으로 풍마장법의 절묘한 초식이며 위력이 어마어마한 수법이었다. 왕중양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불진의 자루를 옆으로 휘둘러 일격을 펼쳐냈는데 바로 철쇄침강(鐵鎖浸江)이라는 일초였다. 쩡쩡, 하는 소리가 두번 일면서 왕중양의 불진은 다시 구천인의 쌍사장을 봉쇄해서 밀어냈다. 구천인은 이번에는 수법을 바꿔 팔선장법(八仙杖法)을 펼쳤다. 팔선장법의 공세는 그야말로 광풍폭우와 같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쌍사장의 그림자만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 사람은 주마등처럼 빙글빙글 마구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절간 안에 모셔 놓은 불상과 같았다. 쌍방은 번개와 같이 3O여 초를 순식간에 교환하게 되었다. 구천인은 왕중양의 불진이 엄밀하게 수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왼쪽에서 들어오면 오른쪽으로 막고 오른쪽에서 들어오면 왼쪽으로 막았다. 자기의 쌍사장이 마치 금성철벽에 부딪친 듯했다. 이와 같이 싸우다가는, 적은 가만히 있는데 나는 번거롭게 땀을 흘려야 하니 설사 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이 지쳐서 나중에는 힘을 못쓰게 될 것 같았다. 갑자기 그는 훌쩍 몸을 날려 왕중양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허허실실의 수법을 써서 쌍사장으로 잇달아 네 차례나 허초(虛招)를 펼쳐 왕중양을 공격하는 척했다. 왕중양의 불진은 잇달아 몇번이나 휘둘러졌으나 적의 쌍사장과 부딪치지 않았다. 구천인은 갑자기 팔힘을 한껏 돋구고 선학탁어(仙鶴啄魚)라는 일초를 펼쳐 느닷없이 무쇠로 만들어진 쌍사장을 높이 쳐들었다가 왕중양의 잔등에 있는 명문혈(命門穴)을 짖이길 듯이 내리치면서 쌍사장을 한번 떨쳤다. 그러자 쌍사장 끝의 두 개의 뱀대가리가 곧장 튕겨 나가 왕중양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졌다. 이번에는 잇달아 2식이 펼쳐진 셈이었다. 전진파의 여섯 제자들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앗, 위험하다!] 왕중양은 갑자기 길게 소리내어 웃으면서 왼손의 불진을 냅다 휘둘러 불진의 총채를 뻣뻣하게 뻗쳐 쌍사장의 머리를 휘감는 순간 와락 잡아챘다가 끌어당겄다. 왕중양의 이와 같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힘은 사납고 맹렬하기 이를데 없어서, 구천인은 기우뚱하며 앞으로 쓰러져갔다. 곧이어 왕중양은 오른손을 뒤로 돌려 일지를 찍어 냈다. 이번에는 선천공을 이용한 것인데, 왕중양은 겨우 3푼의 내공을 실어 보냈을 뿐이었다. 구천인은 별안간 가슴팍에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기문혈(氣門穴)이 마치 무형의 예리한 검에 찔리운 것처럼 뼈속까지 저려 왔다. 자기도 모르게 구천인은 아이쿠, 하는 소리를 내며 휘청휘청 뒤로 열 걸음이나 물러나더니 몸을 잇달아 비틀어댔다. 마치 술에 취한 사내처럼 휘청거리더니 끝내 들고 있던 쌍사장을 내던지고 땅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칠장방의 무리들은 깜짝 놀라 벌떼처럼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들은 자기네 방주가 암기에 적중된 줄 알았다. 갈미침 서광은 다짜고짜 호통을 지르며 두 손을 번쩍 쳐드니 좌우 양손에서 여섯 개의 독침이 잇달아 쏘아져 나갔다. 이 독갈침은 쇠털과 같이 가늘고 길이는 다섯 치였다. 전갈처럼 생긴 무쇠통 안에 독갈침을 장전했는데 한 통에 세 대가 들어갈 수 있었다. 손을 번쩍 쳐들면 무쇠통 안의 용수철이 충격을 받고 퉁겨지면서 독침을 내쏘게 되는데 맞은 사람은 즉시 죽게 되는 것이었다. 서광의 갈미침이라는 별호는 그래서 얻어진 것이었다. 한데 독갈침이 날아 나갔으나 미처 왕중양의 몸에 닿기도 전에 왕중양은 소맷자락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독갈침들은 갑자기 되돌아서 서광의 몸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갈미침 서광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변변히 대응하지도 못하고 갈미침에 몇 대 맞고 말았다. 독갈침은 다른 암기와 달라 일단 사람의 몸에 적중하면 즉시 살속을 파고들어 혈맥을 따라 곧장 심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깜짝할 사이에 목숨을 잃게 되는데 독갈침을 맞는 즉시 자석으로 상처가 난 혈맥의 위쪽을 봉쇄하고 독침을 끌어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갈미침 서광이 자기의 갈미침에 맞고 땅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질러댔으나 손을 써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눈깜짝할 사이에 독이 퍼져죽고 말았다. 강호의 방회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가장 의리를 중시했다. 방주가 남에게 살해를 당하게 되었을 적에 그 방의 무리들은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원수를 포위 공격하게 마련이었다. 그들은 방주가 쓰러진 것을 보자 살해된 줄 알고 벌떼처럼 달려들어 왕중양과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했다. 왕중양이 갑자기 호통을 질렀다. [잠깐! 나는 암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방주는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늠름하게 일어섰다. 철장방의 무리들은 거세게 끓어 올랐던 분노의 감정이 즉시 가라앉았다. 모든 사람들은 왕중양이 성을 내지 않는데도 위엄이 넘치고 정기(正氣)가 늠름한 것을 보자 겨울 매미처럼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고, 감히 경거망동도 하지 못했다. 왕중양은 구천인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승복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지 않았소? 이제 승복했을 것이오. 내가 눈을 가리고 앉아서 대응했고, 당신은 눈을 뜨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나에게 덤볐는데도 당신이 패하고 말았소. 당신에게 묻고 싶소. 당신은 아직도 마음속으로 승복할 수 없는 것이오?] 구천인은 왕중양의 일지에 기문혈을 짚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을 천 근이나 되는 석판이 내리 누르는 것 같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으며 현기증이 일어 토할 것만 같았다. 기문혈이 짚히면 반 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왕중양의 말을 듣고 부끄럽고 골이 났지만, 상대방이 그와 같은 말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왕중양은 빙그레 웃고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쳤다. 구천인은 즉시 재채기를 한번 하더니 몸을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앙중잉은 즉시 뒤로 물러서서 읍을 했다. [전 방주, 우리들은 옛일을 따지지 않기로 맙시다.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했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합시다. 귀방의 무리들은 이만 호광 땅으로 돌아가도록 하시구려.] 구천인은 무예를 연마한 이래 한번도 이와 같이 패배한 적이 없었다. 오늘 참패를 당하자 수치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중양의 무공은 자신에 비해서 확실히 고명하니 훗날을 기약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흙으로 빚고 나무로 조각한 꼭둑각시처럼 보였다. 몇 명의 방우(幇友)들이 불렀다. [방주님, 서 부방주가 죽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원한을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천인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왕중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그 말은 사리에 맞지 않소. 그것은 자기의 입장만 생각하고 남의 입장은 전혀 돌아보지 않는 편협한 생각인 것이오. 조금 전에 우리 사제가 쌍사장의 암수에 걸려들어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소? 만약 빈도가 기공추혈법으로 치료하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소? 그리고 서 부방주는 독갈침으로 나를 암산하고자 했는데 만약에 내가 기공으로 반격하지 않았다면 내가 목숨을 잃게 되었을 것이 아니오? 이번에 서 부방주가 죽은 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소. 여러분들이 계속 소란을 피운다는 것은 너무나 분수를 모르는 일이오. 빈도는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밝혀 두고자 하오.] 구천인은 부하들을 향해 호통을 질렀다. [성공하면 왕이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법이다. 우리들이 싸움에 졌으니, 그 누구를 탓한단 말이냐? 시끄럽게 굴지 말고 빨리 떠나자.] 철장방의 무리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부방주의 시체를 거두어 소실봉에서 떠나 갔다. 철장방 무리들이 물러가자 왕중양 일행은 연하동으로 되돌아갔다. 구처기는 공손히 물었다. [사부님, 철장방이 이번에 대패를 당했으니 우리 전진교와 풀지 못할 원한을 맺은 셈이 되는데, 이후 강호에서 그들과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왕중양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오로지 무공의 조예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미 한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소림사에서는 무예를 어느 정도 익히고 사부의 곁에서 떠나게 되었을 적에는 반드시 목인항(木人巷)과 나한당(羅漢堂)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나무로 만들어진 사람과 나무로 만들어진 말들로 이루어진 장애물을 깨뜨려야 공행(功行)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고 하여 소림사에서 떠나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나 역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너희들의 무공을 시험한 후에야 너희들이 산에서 내려가 올바른 길을 행하도록 허락할 참이다.] 구처기 등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손불이가 입을 열었다. [사부님, 어떤 방법으로 우리들의 무공을 시험할 작정이신지요?] 왕중양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구음진경이 담겨져 있는 그 곽을 바위에 갈도록 했다. 여섯 명의 제자들은 다시 차례대로 무쇠 기둥을 갈아서 바늘로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을 시작했는데, 어느 결에 1년이 흘러가게 되었다. 그 엷디 엷은 서각으로 만들어진 곽의 표면은 자꾸 갈아대는 바람에 빛을 내게 되었고 그 두께 역시 반쯤은 엷어졌다. 왕중양은 자기의 염원이 곧 달성되리라는 것을 알고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그러나 그 곽은 갈수록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구처기 등 여섯 제자들은 잇달아 반년을 더 갈았으나 곽은 여전히 구멍이 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곽이 깨지지 않는다면 구음진경의 원본 역시 꺼낼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문득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해운자가 과거 이 곽을 만들게 되었을 적에 틀림없이 서각을 자르는 방법을 익혔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 그가 어떻게 그 곽을 만들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해운자는 이미 죽은지 백여 년이 지났으니 해운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곰곰히 며칠 동안을 생각해 본 결과 한가지의 방법을 생각해냈다. 왕중양은 물건은 그 가치로 따질 때 성을 한 채 살 수 있을 정도니까 부귀공명을 누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좀처럼 사들이거나 소장할 수가 없고, 오직 황궁 안에만 서각과 같은 종류의 물건이 있을 것이고 궁중에는 서각으로 만들어진 그릇이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 황궁 대내(大內)로 들어가 서각을 자르는 방법을 알아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중양은 곧 송나라의 도읍이 있는 임안(臨安)으로 갔다. 송나라 궁중에서 왕중양은 한 명의 골동품을 관리하는 태감을 통해 서각을 자르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 소금을 서각에 문질러 주면 반 나절도 되지 않아 저절로 진흙처럼 물러지게 되어 마음대로 자르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자 그야말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해결을 보지 못했던 문제가 방법을 알아내고 보니, 너무나 간단했던 것이다. 그가 흥분된 심정으로 숭산으로 되돌아와 연하동으로 들어갔더니 여섯 명의 제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옥과 구처기 등 여섯 제자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의 사제인 주백통마저도 어디로 가버리고 없었다. 구음진경의 곽 역시 종적이 묘연했다. 왕중양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틀림없이 외적이 들이닥쳐 구음진경을 빼앗아 갔으리라 생각했다. 주백통과 몇 명의 제자들이 함께 적을 뒤쫓아 갔기에 동부(洞府)가 텅 비어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왕중양이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한 것 같았다. 주백통으로 말하면 이미 전진파 내공의 진수를 터득하고 있었다. 마옥과 구처기 등 여섯 명의 제자들 무학 역시 범상하지 않은데, 어느 누가 그들 일곱 명의 손에서 구음진경을 빼앗아 갈 수 있겠는가? 그 자신이 원한을 맺은 구양봉과 철장방의 방주인 구천인이라 해도 그만한 재간이 없을 것이다. 왕중양은 가슴 가득 의문을 품고 연하동 뒷산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본래 이목이 영민하기 이를데 없어서 몇 마장 밖의 소리를 들을 능력이 있었다. 왕중양이 한 상봉우리를 넘으니 주백통의 외침이 저쪽에서 들려왔다. [됐다! 됐어! 곽은 곧 깨지게 되었다.] 왕중양은 주백통의 소리가 나는 곳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5리 정도 달려가니 주백통과 여섯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한 산비탈 아래에 북두칠성의 형세를 이루고 서 있었다. 모든 사람의 손에는 한 자루의 보검이 들려져 있었는데 각기 보검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있었다. 햇살 아래 번쩍번쩍 빛나는 물건이 허공에서 날아갔다 날아왔다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공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구음진경이 담겨져 있는 그 곽이 그들의 검에 얻어 맞아 이쪽 저쪽으로 날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그 곽은 주백통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주백통은 손에 들고 있는 검으로 곽을 후려쳤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그 곽은 검날에 세차게 얻어맞고 즉시 3장 높이 솟아오르게 되었다. 그 곽은 마옥의 머리 위로 떨어졌는데 마옥 역시 똑같이 검을 들어 그 곽을 한번 후려치자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서각으로 만들어진 곽은 옆으로 튀어 다시 구처기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구처기는 똑같이 검으로 그 곽을 베듯이 후려쳤다. 그 곽은 일곱 자루의 검에 의해서 이리 날아갔다 저리 날아갔다 하고 있었다. 곽은 검에 얻어 맞아 연신 쩡쩡, 하는 소리를 내면서 불꽃을 사방으로 튀겼다. 그 장난 비슷하게 휘둘러대는 검에는 내공이 실려져 있어 결코 하찮게 볼 수가 없었다. 주백통과 여섯 제자들이 냅다 검으로 후려치는 힘은 대단한 것이니 아무리 견교한 서각으로 만든 곽이라 해도 그와 같이 검으로 쳐서 날려 보내는 짓을 수십 번이나 반복하고 있으니 한쪽이 부서져 나가고 말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곽은 조야벽수서각으로 만들어진 보물임에 부끄럽지 않았다. 이 서각은 금속과는 상극이었다. 쇠로 무섭게 후려칠수록 서각은 더욱 더 굳어지는 것이었다. 주백통의 이와 같은 장난기 어린 수작은 얼핏 보면 멋있게 느껴지지만 애석하게도 실제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왕중양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천강북두진을 펼쳐 검을 휘두르는 광경을 보고 하나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머리속으로 천강북두진의 움직임을 상상해 보았다. 정해진 진도(陳圖)만 따라 충실하게 연마한다면 실전에 제대로 응용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각으로 만든 곽을 후려치면서 천강북두진법을 연마한다면, 곽이 예상 못한 방향으로 마구 날아 다니기 때문에 북두진법을 잘 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검을 휘두르면 위력을 틀림없이 배증시킬 수 있을 것이고 심지어는 연성한 후에 천하 무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소리를 질러 그들을 불러 보려고 하다가 그 문제에 생각이 미치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넋을 잃고 북두진법의 변화를 생각하고 있을 때 산비탈 아래에 갑자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두 사람은 무척 왜소했는데 한결같이 기름을 칠한 것처럼 번쩍거리는 잿빛의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와 전신을 가죽옷으로 감싸고 두 눈만 빡곰히 내 놓고 있었다. 그들은 주백통이 서 있는 뒤쪽에 이르더니 갑자기 괴이한 휘파람을 불어내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 사람은 주백통을 향해 날아 덮치면서 두 손으로 냅다 주백통의 머리를 후려쳤다. 다른 한 사람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구음진경이 든 곽이 날아가는 쪽으로 내닫더니 떨어지는 곽을 낚아채더니 떼굴떼굴 굴러 산 아래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일어난 변고에 주백통은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하마터면 그 가죽옷의 괴인에게 목을 졸릴 뻔했다. 다행히 그는 이목이 영민한데다가 내공이 정순하여 가죽옷의 괴인이 막 달려들어 손가락이 그의 목줄기에 닿기 직전에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며 일장을 비스듬히 뿌려냈다. 펑, 하는 소리가 났다. 그가 사용한 것은 대력천근장(大力千斤掌)으로 기운이 엄청난 것이었다. 가죽옷의 괴인은 그와 같이 얻어맞았으니 본래 근이 잘려지고 뼈가 부러져야 했다. 그러나 그 한 겹의 이상야릇한 가죽옷이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주백통은 일장이 그를 후려치는 순간 상대방의 몸뚱이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미끌미끌하여 장력이 대뜸 미끄러지는 것을 느꼈다. 가죽옷의 괴인은 재주를 넘으며 2장 밖으로 달려나가,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 사이로 빠져나가 그 곽을 나꿔챈 동료와 함께 황망히 도망치려고 했다.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은 재간이 약하지 않았다 가죽옷을 입은 괴인들이 그들의 중간으로 몸을 날려 끼어들자 마옥이 먼저 장검을 휘두르며 신룡두갑(神龍頭甲)이라는 일초를 펼쳐 상대방의 얼굴을 찔러 갔다. 그 가죽옷을 입은 괴인은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여 피하고 손을 뻗쳐 마옥의 손목을 움켜잡으려고 했는데 그 재빠름이 번개와 같아 마옥은 즉시 검을 뒤로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처기는 일장으로 상대방의 등줄기를 노리고 후려쳤는데, 가죽옷을 입은 괴인은 전혀 피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정확하게 적중되었지만, 그 순간 구처기는 자기의 손이 마치 한층의 두터운 기름 덩어리에 후려친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손이 자기도 모르게 한 옆으로 미끌어지면서 쏟아낸 장력이 허공을 후려치고 말았다. 괴인은 그 장력의 기세를 빌어 풍차처럼 한 바퀴 재주를 넘더니 1장 밖으로 날아가 산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이 때 서각의 곽을 빼앗아 앞장서서 도망치는 가죽옷을 입은 괴인은 이미 10장 밖에 있었다. 전진교의 여섯 제자들이 꼬리를 물고 뒤를 쫓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더니 황의를 입은 중년의 도사가 홀연 나타나 그 가죽옷을 입은 괴인의 앞을 우뚝 막아서는데 바로 중양진인이 아닌가? 주백통은 외쳤다. [사형, 그 나쁜 자식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 녀석은 구음진경이 들어 있는 곽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 가죽옷을 입은 괴인은 자기를 가로 막고 선 사람이 중양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두려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왕중양이 그를 가로막자 그는 갑자기 괴성을 내지르며 손과 발을 움츠려 둥글둥글한 공처럼 만들어 맹렬히 왕중양의 가슴으로 부딪쳐 들어왔다. 중양진인은 이와 같은 괴상한 수법을 처음 보았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고 두 손을 세워 그 공처럼 둥글둥글해진 사람을 후려쳤다. 펑펑, 하는 소리가 두번 일면서 정확하게 두 손은 상대방을 적중시킬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 사람의 몸은 마치 풍선처럼 곧장 하늘로 솟아 올랐고 허공에서 왕중양의 머리 위를 지나 산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왕중양은 다시 뒤로 3장 정도 물러나 이보환형(移步換形)의 경신법을 써서 다시 그 가죽옷을 입은 괴인을 가로막았다. 이 때 다른 가죽옷을 입은 괴인이 어느덧 뒤쫓아 오더니 앞장을 선 가죽옷을 입은 괴인과 합류했다. 그들 두 사람은 갑자기 두 팔을 뻗쳐 서로 껴안았다. 두 사람의 손과 발이 동시에 움츠러들면서 공 모양으로 합쳐져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왕중양 앞으로 돌진해 왔다. 맹렬히 뛰쳐 들어드는 그들의 위세는 갑자기 두 배나 증강되었다. 왕중양은 일찍이 이와 같이 괴상한 수법을 본 적이 없었다. 두 명의 가죽옷을 입은 사람은 가죽옷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중양이 그들을 때려도 그들이 상처를 입지 않았다. 만약 일장을 후려친다 해도 가죽공 같은 그들은 곧장 튕겨올라 허공에서 재주를 넘고 또 다시 자기의 머리 위를 지나갈 것이다. 중양진인은 이번에는 요령이 생겼다. 뒤로 세 걸음 뭍러서서 두 손을 합해서 앞으로 뻗쳐내었다. 그 손짓에 따라 한 줄기의 강기(　氣)가 수평으로 쏟아져 나가 두 가죽옷을 입은 괴인을 막을 수 있었다. 그들은 데굴데굴 굴러 오다가 강기에 맞자 저지당했다. 주백통과 전진 육자는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왔다. 주백통은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이 못난 머저리같은 놈들아, 빨리 진경이 든 곽을 내려 놓고 우리 사형에게 큰 절을 올려라. 그러면 너희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두 명의 가죽옷을 입은 괴인은 땅바닥을 굴러 주백통에게로 부딪쳐 가는데 그 기세가 맹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백통은 느닷없이 발생한 일에 그만 쿵, 하니 그들에게 부딪쳐 한 바퀴 재주를 넘어 온몸에 흙을 묻히며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전진파의 여섯 제자들은 주백통이 우스꽝스럽게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주백통은 두 괴인을 노려 보았다. 두 가죽옷을 입은 괴인들 역시 덩달아 몸을 뒤집더니 일어서는데 어느덧 그들 두 사람은 따로 떨어졌다. 그들은 한 사람은 왼켠에 한 사람은 오른켠에 서서 네 개의 손으로 구음진경의 곽을 들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은 사람의 수를 믿고 날뛰지 말아라. 당신이 앞으로 나서기만 한다면 우리들은 즉시 이 곽을 진경과 더불어 박살내고 말겠다. 한 번 후려쳐서 박살내어 당신들이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하겠다.] 그들은 그와 같이 위협하면 주백통이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뜻밖에도 주백통은 껄껄 소리내어 웃는 것이 아닌가? 한참 웃고 난 그는 갑자기 그 두 명의 괴인에게 혀를 낼름 내밀고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너희 두 머저리가 그 곽을 박살내겠다는 거냐? 그 곽에 털끝만큼이라도 손상을 입힌다면 우리 사형제는 구음진경을 너희 두 사람에게 바칠 뿐만 아니라 숭산 산자락에 있는 고을로 내려가 당신들이 설사를 할 때까지 술을 사 주겠다.] 그러자 두 괴인은 외쳤다. [그렇다면 당장 박살을 내겠다.] 이어 뿌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한 자 둘레의 서각 곽은 놀랍게도 세 치 정도 늘어났다가 다시 오므라드는 게 아닌가? 그러나 곽은 결코 금이 가지 않았다. 왕중양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두 사람의 내공이 약하지 않구나. 어떻게 알고 숭산으로 구음진경을 훔치러 왔을까? 어찌하여 그들의 수단이 이토록 희한할까?) 두 명의 가죽옷을 입은 괴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동안 곽을 어루만지더니 그 곽을 망가뜨릴 자신이 없었는지 곽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왼쪽의 가죽옷을 입은 괴인은 요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너무 우쭐거리지 말라구. 이 구음진경으로 말하면 주인이 없는 물건이야. 당신들이 화산에서 가져올 수 있었으니, 우리들도 당신들의 손에 있는 것을 가져갈 수 있어. 당신들에게 재간이 있다면 빼앗아 가란 말이야] 전진파의 여섯 제자 가운데 구처기는 성질이 불과 같아, 그 말을 듣자 발끈 대노해서 외쳤다. [당신들이 구음진경을 내놓지 않는 한, 살아서 이 산을 내려갈 수 없다. 내 검을 받아랏!] 검을 획하니 뻗쳐내더니 검끝을 빙글 돌려 싸늘한 광채를 폭사하며 가죽옷의 괴인을 맹렬히 찔러 갔다. 이 가죽옷을 입은 괴인은 조금도 서두르거나 당황하지 않고 숫제 움직이지 않았다. 구처기의 검끝이 가죽옷에 살짝 닿는 그 찰나에 갑자기 몸을 뒤틀면서 가슴을 쓱 움츠렸다. 그러자 구처기의 검이 마치 한 무더기의 면화를 찌른 것처럼 검끝이 미끌어지는 것이 아닌가? 가죽옷을 입은 괴인의 몸뚱이는 미꾸라지 같아, 어느 결에 번쩍 구처기의 등뒤로 돌아가, 냅다 일장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처기의 솜씨 역시 신속하고 민첩했다. 자기가 검으로 적을 찔렀으나 적중되지 않자 즉시 왼쪽으로 몸을 뒤틀고 옆으로 몸을 날리는 그 순간에 성횡두전(星橫斗轉)이라는 일식을 뻗쳐내 가죽옷을 입은 괴인의 장풍을 해소시키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호통쳤다. [훌륭한 초식이군. 처기야, 너는 물러나라. 이 스승이 한번 상대해 봐야 되겠다. 이 두 명의 괴인은 절대로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왕중양은 가죽옷을 입은 괴인들이 구처기와 손을 쓰는 그 찰나에 이미 상대방의 약점을 알아냈던 것이다. 그는 상대방의 무공초식이 요상하기는 하지만 한 겹의 가죽 옷의 기능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알았다. 두 명의 괴인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상어의 가죽을 약물에 담가 만든 것 같았다. 거기다가 겉에 기름을 발라 매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의 검법이나 각법은 일가를 이루고 있는 듯한데, 물뱀의 동작을 본딴 것 같았다. 절강성 동쪽의 바다와 가까운 곳 일대에는 백여 년 전부터 수랑권(水浪拳)이라는 권법이 유행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은거한 늙은 어부가 창안한 것인데, 이 권법의 특징은 자맥질을 하여 물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적에도 뭍에서와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상대방의 문호와 종파를 알아내자 속으로 이미 어떻게 그들을 깨뜨릴 수 있겠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두 명의 괴인에게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이름을 먼저 대시오. 숭산으로 오르는 사람은 십중팔구 명성을 떨치는 인물이오. 당신네들이 자라처럼 정체를 숨긴다면 어찌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겠소?] 두 명의 가죽옷을 입은 괴인들은 나직히 코웃음을 치더니 대답했다. [당신은 우리들의 별호를 묻는 것이오? 우리들은 동해의 조어기(釣鰲磯) 위에 살고 있는 음가쌍괴(陰家雙怪)인 음장하(陰長河)와 음장강(陰長江)이라고 하오. 당신들이 화산에서 구음진경을 손에 넣었으나 곽을 열어 젖힐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렇게 된다면 하늘이 내리신 보물을 썩혀 두는 꼴이 되지 않겠소?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대담하게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오. 본래 우리들도 한번 빌려 볼 생각이었는데 장문인이 없기에 조금 전에 가로채서 이곳을 떠나려고 했었소. 이제 당신을 만났으니 정말 잘 되었소. 구음진경을 우리들에게 삼 년만 빌려주시오. 삼 년 후에 귀하께서 동해육횡도(東海六橫島)로 찾아와 구음진경을 받아가시오.] 말이 끝나자 좌우로 나뉘어지더니 왕중양의 곁을 지나 가려고 했다. 주백통과 전진육자는 동해의 음씨쌍괴(陰氏雙怪)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왕중양은 일찍이 명산 대천을 두루 다녀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고, 따라서 갑자기 한가지 사실을 상기했다. 그는 절강(浙江) 성의 동해가에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동해에 두 명의 쌍둥이 형제 괴인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었다. 이 한 쌍의 괴인들은 바다의 한 황량한 섬을 강점하고 그 섬에 해라진(海螺陣)을 쳐 놓고는 다른 사람이 섬 위로 올라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가 사사로이 뛰어들면 반드시 죽이기 때문에 부근의 어민들도 그 황량한 섬 부근에 얼씬거리지 않고 있었다. 그 두 명의 괴인이 매우 잔인하고, 한번 마주치면 반드시 배를 부수고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어민들은 길을 돌아서 다녔지, 감히 그 금도(禁島)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중양진인은 그와 같은 소식을 듣자 그 당시 금도로 가서 그 두 괴인을 만나보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볼일이 급했다. 반드시 서둘러 중원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시종 그 두 괴인을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두 괴인이 숭산으로 찾아왔을 뿐만 아니라 구음진경이 든 곽까지 빼앗았으니 정말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음씨쌍괴는 말이 끝나자 바로 왕중양의 옆을 지나가려고 했는데, 왕중양은 갑자기 두 걸음 물러서며 손을 뻗쳐 막으며 부르짖었다. [잠깐!] 그는 한 걸음 물러서게 되었을 적에 두 가닥의 진력을 내쏟아 음씨쌍괴를 슬쩍 저지했다. 음씨쌍괴는 갑자기 자기들의 몸뚱아리에 무형의 잠럭(潛力)이 부딪치는 바람에 뒤로 물러섰다. 음씨쌍괴의 무공은 독특하고 스스로 한 파를 이루고 있었다. 예를 들면 조금 전에 손과 발을 움츠려 몸뚱이를 공처럼 둥글게 하여 사람들에게 부딪쳐 간 재간은 수모공(水母功)이라는 것인데, 정말 바닷속에서 살고 있는 수모라는 생물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들 두 사람이 한테 얽혀 두 몸뚱아리가 공처럼 뭉쳐 왕중양에게 부딪쳐 간 재간은 해왕성(海王星)이라는 것이었다. 해왕성은 바닷속에 사는 생물로 바위 밑에 잠복하고 있다가 다른 수족을 습격했다. 해왕성 자체는 납작할 뿐만 아니라 다섯 가닥의 발이 있었다. 일단 적을 만나게 된다면 그 복이 저절로 뻗쳐 적의 몸뚱이를 감싸고 졸라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 죽은 수족을 자기의 음식으로 삼는 것이었다. 음씨쌍괴는 두 몸뚱이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 적에게 달라붙을 수가 있었는데 주백통은 조금 전에 그런 내막을 몰랐기 때문에 하마터면 그들의 술수에 말려들 뻔했던 것이다. 하지만 왕중양은 이미 그들의 무공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알아내고 일부러 태을신공으로 그들을 막고 그들이 앞으로 더 나서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음씨쌍괴는 그의 내공에 부딪치자 대뜸 뒤로 물러나게 되어 속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그 압박해 오는 장력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땅바닥에 몸을 던져 한번 뒹굴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노기 띤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이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자, 우리 승부를 내도록 합시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소 좋아. 당신들은 사제와 제자까지 합쳐 여덟 명이나 되지만 우리 형제들은 두 사람 밖에 없소. 여덟 명이 두 명을 치게 된다면 그야말로 당신네 전진교의 체면이 말이 아니겠군? 하하하!] 그들 두 사람은 한차례 간사한 웃음을 터뜨렸다. 왕중양은 빙긋 웃었다. [당신들은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쓸 필요가 없소. 우리들은 여덟 사람이지만 당신네 두 사람을 요리하는 것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오. 당신들이 어떠한 간계를 쓰든, 어떠한 무공을 쓰든, 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오.] 음장하와 음장강 형제는 발끈 대노해서 이구동성으로 호통을 내질렀다. [무척 좋소. 그렇다면 한번 겨루어 보도록 합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우로 갈라지더니 맹렬히 왕중양에게로 달려들었다. 중양진인은 그들이 조금 전에 서각으로 만들어진 곽을 잡아당기는 것을 보고는 그들의 내공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매끄러운 가죽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더욱 상대하기 어려웠다. 왕중양은 동해의 음씨쌍괴를 상대로 할 때는 결코 흔한 권각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왕중양은 좋은 생각이 떠올라 여전히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고 음씨쌍괴가 자기 앞으로 들이닥치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소맷자락을 위로 쳐들면서 추창망월(推窓望月)이라는 일초를 펼쳐냈다. 그 일초에 태을신공을 잔뜩 돋구고 맹렬히 음씨쌍괴의 몸을 후려친 것이었다. 음씨쌍괴는 몸에 한 겹의 가죽옷을 입고 있어서 어떠한 내공으로 후려쳐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 전에 왕중양의 태을신공에 몇번 부딪쳤는데 비록 손상을 입지 않았으나 온몸이 화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들은 왕중양이 소맷자락을 떨치는 것을 보자 즉시 상대방이 다시 태을신공으로 공격해 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진기를 돋구고 몸을 가볍게 해서 일제히 위쪽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그들은 허공에서 한번 재주를 넘고 기회를 보아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으려고 작정했다. 그들은 왕중양의 머리 위를 뛰어 넘자마자 도망칠 심산이었다. 왕중양은 그들이 그렇게 나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음씨쌍괴가 나란히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자 왕중양은 이미 태을권의 안자결(按字訣)을 펼쳐냈다. 그는 벼락같이 왼팔을 위로 한번 쳐들었다가 아래로 쑥 누르는 시늉을 했다. 퍽퍽, 하는 소리가 두번 울려퍼지고 음씨쌍괴는 그 즉시 자기들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재주를 한번 넘더니 서로 박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부딪치는 힘이 엄청난 것이라 음장강과 음장하 형제는 꽝,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충격을 받은 나머지 눈앞에 불똥이 튀고 천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원래 왕중양은 이번에 태을권에 견(牽), 안(按), 두 요결로 기경(氣勁)을 쏟아내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해 후려친 것이었다. 그러니까 공력을 적절하게 응용해서 먼저 견자결을 펼쳐 두 사람의 몸뚱이를 끌어당겨 그들 두 사람이 하나로 합쳐지도록 만든 것이었다. 다시 안자결을 펼쳐 와락 힘주어 누르자 음장강과 음장하 형제는 자기도 모르게 허공에서 맴을 돌면서 정통으로 머리통끼리 부딪히게 되었던 것이다. 쿵,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일제히 땅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땅을 짚고 설설 기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두 마리의 거북이를 방불케 했다. 주백통과 전진육자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그만 소리내어 웃었다. 주백통이 소리쳤다. [그 한 수의 재간은 정말 절묘하기 이를데 없군. 바닷거북이가 모랫바닥을 기는 꼴이니, 초식 이름을 해구파사(海龜爬沙)라고 해야겠군.] 음씨 형제는 대꾸하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고 수모공을 펼쳐 한 몸이 되어 중양진인의 가슴으로 맹령하게 부딪쳐 갔다. 왕중양은 이빈에는 선천공을 이용해서 두 손을 확 뒤집더니 위로 후딱 치켜 올렸다. 그러자 음씨쌍괴는 그 힘에 맞아 자기도 모르게 곧장 허공으로 솟구치게 되었고, 마치 구름을 타는 것처럼 한참 동안을 허공으로 솟아오르게 되었는데 단번에 7장 높이 솟아 올랐다가는 운석처럼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쿵,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로 땅바닥을 내리 찍었다. 주백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손뼉을 쳤다. [절묘하군. 이 한 수는 자라 새끼를 꺼꾸로 매달은 모양이니, 초식 이름을 도조망팔(倒弔忘八)이라고 해야겠군.] 음씨쌍괴가 허공으로 치솟다가 땅바닥으로 나가 떨어지는 자태는 정말 낚시에 걸린 자라새끼가 쳐들렸다가 땅바닥에 곤두박질하는 듯해서 전진파의 여섯 제자들은 다시 와하니 웃음을 터뜨렸다. 음씨쌍괴는 잇달아 두번이나 나뒹글게 되었는데 일찌기 당해보지 못한 고통을 맛보았다. 조금 전 사람의 머리와 머리끼리 부딪칠 때만 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골통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으나 정신을 차릴 수는 있었다. 그런데 두번째는 높은 하늘에서 떨어져 콧방아를 찌었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간신히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켰으나 온몸이 저리고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몇번만 더 나가떨어지면 코가 찌그러져 없어지고 머리뼈가 흩어지고 말 것 같았다. 그들은 왕중양과 더 싸울 염두가 나지 않자 땅바닥에 엎드려 말했다. [전진파의 무학은 정말 명불허전이구려. 우리 형제는 오늘 비로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소. 정말 시야를 넓혔소.] 주백통이 옆에서 호통을 내질렀다. [이제야 항복하는 거냐? 냉큼 구음진경을 갈무리한 곽을 내 놓고 거북이처럼 기어서 내려가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음장강은 손을 품속으로 가져가더니 그 서각으로 만들어진 곽을 꺼내 들었다. 주백통은 소리쳤다. [이리 내놔.] 그가 손을 뻗어 그 곽을 잡으려고 하는데 음장강이 갑자기 곽을 힘껏 내던졌다. 그 바람에 그 곽은 10여 장 높이 날아 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한번 재주를 넘고 빙글 돌더니 곧장 산비탈 한쪽에 있는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상대방이 그와 같은 수작을 부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독학충소(獨鶴沖宵)의 신법으로 곧장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3장 넘게 몸을 뽑아 올렸다. 그는 상자가 떨어지는 방향으로 날아 가면서 손을 뻗쳐 허공에서 떨어지는 서각으로 만들어진 곽을 정확하게 받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몸을 틀고 선회하면서 땅으로 내려섰다. 구음진경이 들어있는 서각의 곽은 다행히 만 장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수난을 면할 수 있었다. 주백통은 그가 곽을 내던지는 것을 보자 그만 발끈 대노했다. 그는 즉시 음장강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음장강은 괴성을 한번 지르더니 몸을 눕혀 땅바닥 위를 굴렀다. 그 재빠름은 마치 질풍과 같았는데 어느덧 주백통의 발밑으로 굴러 가더니 손을 뻗쳐 그의 두 다리를 움켜 잡으려고 했다. 주백통은 화가 나서 일장을 내리쳐 음장강의 천령개(天靈蓋)를 정확하게 적중시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일장에 골통이 바스라져 숨을 거두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음장강은 상어의 가죽으로 만든 옷으로 그 장력을 맞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아찔한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는 손을 뻗쳐 주백통의 하반신을 끌어앉고 힘껏 잡아챘다. 두 사람은 즉시 땅바닥으로 나뒹굴어 한 덩어리가 되었다. 두 사람은 땅바닥에서 이리 저리 뒹굴면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난투극을 벌였다. 음장하는 그 기회를 틈타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이 어느새 그를 가로 막으며 호통치는 것이 아닌가? [이 도둑놈아, 꼼짝마라!] 마옥과 구처기의 두 자루 보검은 그의 몸을 득달같이 찔러 들어갔다. 음장하는 상어껍질로 만들어진 옷이 칼과 검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두 자루의 장검을 거머 쥐려고 했다. 수랑권 가운데의 해망전요(海莽纏腰)라는 수법을 펼쳐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이 지니고 있는 검을 꼼짝 못하도록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장검을 끼워 잡으려고 하면서 즉시 두 사람의 하반신을 향해 발길질을 해댔다.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의 재간은 역시 비범한 면이 있었다. 음장하의 두 손이 마옥과 구처기의 검에 닿기도 전에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은 어느덧 검을 거둬들이면서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 바람에 음장하의 두 발은 허공을 걷어차고 말았다. 왕처일과 담처단 두 사람의 검이 벌써 그의 몸을 노리고 찔러 갔다. 음장하는 갑자기 사지를 움츠리더니 온몸을 한 덩어리로 만들고는 땅바닥에 몸을 던져 한바퀴 굴렀다. 왕처일과 담처단의 검은 그의 몸을 찔렀으나 상어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에 닿자 검날이 슬쩍 미끌어졌다. 그들 두 사람의 공력이 비교적 약해 즉시 검을 거둬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음장하는 두 손을 뻗쳐 그들 두 사람의 장검을 움켜잡고 힘껏 한번 당겼다가 한번 옆으로 떨쳤다. 왕처일과 담처단 두 사람은 그대로 서 있지 못하고 그만 몸을 휘청거리며 쓰러지려고 했다. 왕중양이 이 때 마침 서각으로 만들어진 곽을 받아들고 허공에서 아래로 내려서게 되었는데, 주백통과 전진파의 여섯 제자들이 음씨쌍괴와 한 덩어리가 되어 떼어 놓기 어려울 정도로 어우러진 것을 보고, 즉시 선천공을 돋구고 왼손의 두 손가락을 바깥쪽으로 구부렸다가 땅바닥을 향해 한번 슬쩍 그었다. 그러자 즉시 일진의 광풍이 일었다. 이 일진의 광풍은 무척 세차고 맹렬해서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음장하와, 주백통과 한테 어울러져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음장강을 날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음장강은 황망히 손을 놓게 되었고 형제 두 사람은 데굴데굴 산비탈을 따라 굴러 내려갔다. 주백통은 음장하에게 움켜 잡혀 거의 숨을 못 쉴 지경이었는데, 사형이 선천공을 쏟아낸 덕분에 간신히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속으로 무척 화가 나서 훌쩍 뛰어 오르며 몸을 날려 뒤쫓아 가려고 했다. 왕중양은 소리쳐 불렀다. [사제, 궁지에 몰린 쥐를 쫓지 말아라. 그들은 이미 쓴맛을 단단히 보았으니 내버려 두어라.] 주백통은 어릴적부터 개구장이 짓만 했으며 누구에게 속박을 받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가 한평생 가장 존경하고 마음속으로 숭배하는 사람이 바로 사형이었다. 그는 왕중양이 그와 같은 말을 하자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음씨쌍괴, 형제는 산비탈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다가 산자락에 있는 한 조각의 툭 불거진 바위에 부딪치고 나서야 비로소 구르던 것을 멈추었다. 다행히 상어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이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손상은 입지 않았다. 음씨쌍괴는 한숨을 돌리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음장강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외쳤다. [전진파의 잡도사들아, 이 나리께서 너희에게 졌다. 그러나 오늘 너회들은 사람의 많은 수에 의지해서 이겼으니, 이겼다 해도 영광스럽지 못하다. 명년 단오절에 동해 육횡도(六橫島)로 찾아와 우리들과 한번 겨뤄볼 생각이 있느냐? 씨가 있는 놈들이라면 거절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진파는 많은 사람의 수를 믿고 남을 못살게 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겠다. 쥐새끼같은 도배들이라고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왕중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주백통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아, 누가 겁낼 줄 아냐? 명년 단오절에 나와 몇 명의 사제들이 육횡도로 찾아가 네놈들에게 참패를 안겨 주겠다. 그 때는 주둥아리를 짓뭉개 놓을 테니 알아서 해라. 이 빌어 먹을 도둑놈아.] 그가 이와 같이 경솔하게 응수하자 왕중양은 즉시 손을 혼들어 제지했다. [사제, 그만 둬라.] 이 때 음장강은 광소를 터뜨리더니 외쳤다. [흐흐흐. 좋다. 군자의 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했다. 명년 오월 오일 육횡도에서 너희들이 찾아 오기를 기다리겠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한 줄기 연기처럼 종적을 감추었다. 왕중양은 주백통을 나무랐다. [백통, 넌 정말 어린애 같구나. 그 따위 요사스런 자들에게 약속을 해서 무엇 하느냐? 말을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남들이 비웃을 것이고, 말한대로 실천한다면 번거로운 일을 불러 들이는 격이 아니냔 말이다.] 주백통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언제 말을 하고 실천을 안했던 적이 있었소? 그들 두 형제는 약간 요상한 데가 있으니까 그들과 승부를 내야 직성이 풀리겠소.] 과연 훗날 그는 동해로 그들을 찾아갔다가 많은 일을 만나게 되고 육횡도에 꼼짝없이 갇힐 뻔했는데 나중에 황약사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나게 된다. 왕중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본래 남과 다투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구음진경을 얻고 곽을 미처 열어 젖히기도 전에 이미 이토록 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곽을 열어젖히고 구음진경을 손에 넣게 되면 아무래도 더욱 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무림의 강적들이 떼를 지어 연하동으로 몰려들 것 같았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이상 갈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왕중양은 주백통에게 당부했다. [백통, 너는 사질들을 데리고 산속에서 구음진경이 들어 있는 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이 못난 형이 때 맞춰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구음진경을 그 두 마두가 가로채 갔을 것이 아니냐?] 주백통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좌하의 여섯 제자들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왕중양은 주백통이 천성적으로 짖궂고 개구장이 같아서 여러 사제들 앞에서도 어른으로서 존경받을 일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그 정도로 끝냈다. 그는 다시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경성에 가서 한번 돌아보았는데, 헛걸음은 하지 않았다. 우연히 곽을 여는 비결을 알아냈다.] 그는 서각을 소금으로 문지르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주백통은 홍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소금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소. 내가 산 아래로 내려가 사오겠소.] 왕중양은 막았다. [잠깐, 이 곽은 틀림없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고인에게 공경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러니까 목욕을 하고 향을 피운 후에 천 번 송경(頌經)을 하고서야 그 곽을 열 수가 있는 것이다.] 주백통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나의 곽을 여는데 그렇게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오?] 왕중양은 그를 무시하고 담처단을 산 아래로 내려보내 약간의 소금을 구해 돌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전진파의 노소 여덟 명은 목욕하고 송경을 한 후에 향불을 피우고 배례(拜禮)를 올리면서 하루 밤낮을 보냈다. 천번의 경문을 외우고 나자 왕중양은 공손하게 소금을 꺼내서 나무로 만들어진 물통 안에 넣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물통 안에는 맑은 물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소금과 물을 섞은 것이었다. 그리고 난 후에 서각의 곽을 나무 물통 안에 넣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도 망가지지 않던 서각의 곽은 그 자체가 물은 물리치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식염을 탄 물에 담그자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아 어느덧 누글누글해지는 것이 아닌가? 왕중양은 서각의 갑을 물속에서 건져 올려 돌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물기를 모조리 닦아냈다. 그리고 한 자루의 예리한 비수를 꺼내 곽의 뚜껑의 빈틈에 갖다대고 쭉 그었다. 그러자 쩍, 하는 소리가 나면서 곽은 그 자리에서 두 조각으로 쪼개지는 것이 아닌가? 곽이 열리자 열 여섯 개의 눈동자는 일제히 곽 속으로 옮겨졌다. 짐작했던 그대로 곽 안에는 두 권의 붉은 비단으로 겉장을 만든 책자가 놓여 있었다. 겉장에는 전자(篆子)로 구음진경(九陰眞經)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第 三 章. 주백통과 황약사의 만남 주백통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훌쩍 뛰어 다가가 구음진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왕중양은 나직히 말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잠깐 기다려라.] 주백통은 황급히 손을 움츠렸다. 왕중양은 그 책자를 집어 들고 살펴보았다. 구음진경 한 권은 상권이고 한 권은 하권이었다. 그러니까 두 권으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상권의 책장을 열었다. 거기에는 총강(總鋼)이 쓰여져 있었다. [하늘의 도리는 손상을 입기는 쉬우나 보충하기는 힘들다. 빈것을 채워서 넘치게 하기에는 부족하나 그저 채우는 데는 남음이 있는 것이다. 천하의 무학은 만 갈래가 근원은 하나이며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다. 무학에 정통한 자는 숨을 내뿜어 구름을 만들고 손으로 바위를 쳐서 불을 일으킨다.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의 두 혈도가 교통되면 천지의 조화(造化)를 부려 위로 푸른 하늘에 도달할 것이고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니 노자(老子)가 말한 바처럼 우주가 그 자신 안에 있느니라.] 중양진인은 여기까지 읽고 생각했다. (이 구음진경을 연마하면 정말 장생불로하고 신선(神仙)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어째서 해운자는 구음진경을 익혔는데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까?) 그는 상권을 한번 훑어 보았다. 자자구구가 무학의 요결이고 내공의 토납에 관한 이론이었다. 다시 하권을 보니 내용이 크게 달라졌는데 전적으로 무공을 연마하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모든 무공이 악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첫째 쪽과 둘째 쪽에 실려 있는 것은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라는 무공인데 이는 지공(指功)이었다. 그런데 중양진인이 과거 선천공을 연마했던 방법과 전혀 달랐다. 기초 재간을 닦은 후에 살아 있는 돼지와 양 몇 마리를 잡아다가 산 채로 그 골통에 손가락을 푹 쑤셔 넣으면서 익히는 것인데, 연마할 때 손가락 끝에 독약을 묻히면 더욱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셋째 쪽과 넷째 쪽에 실려 있는 것은 최심장(催心掌)을 연마하는 비결이었다. 이는 장법이었다. 그런데 벽공장(劈空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장력을 일단 쏟아내면 적의 심장을 짓이겨버리니 상대방이 도리없이 피를 토하고 죽어가야 했다. 다섯째 쪽부터 여덟째 쪽까지 실려 있는 것은 독갈신공(毒蝎神功)이었다. 이는 손톱을 가지고 연마하는 재간인데 연성하게 되었을 적에 그 손톱이 사람의 몸에 닿는 즉시 상대방은 즉사하게 되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여덟째 쪽까지 보고 나자 그만 안색이 변했다. 구음진경에 실려 있는 재간이 이토록 악독하니 만약 완전하게 연마하려면 얼마나 많은 생령(生靈)을 죽여야 할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구음백골조는 살아 있는 소나 양을 무공을 연마하는 도구로 삼아야 하며 최심장과 독갈신공 역시 고양이나 개와 같은 동물을 희생물로 삼아야 했다. 그런데 중양진인은 현문(玄門)의 제자이고 도가에서는 살생을 금하고 있는데 어찌 그러한 짓을 하겠는가? 문하 제자들에게는 더욱 더 연마하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 두 권의 비급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경계해야 했다. 이번에 자기가 구음진경을 손에 넣게 된 것이 도리어 커다란 짐이 되었을 뿐이라고 여겨졌다. 주백통과 전진의 여섯 제자는 공손히 옆에 서서, 중양진인이 구음진경을 펼쳐 보는 동안 안색이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손을 멈추고 아예 책장을 덮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간을 잔뜩 지푸리고 있는 것을 보자 속으로 더럭 의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주백통은 물었다. [사형, 그 구음진경을 보셨소?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오? 설마하니 가짜란 말이오?] 왕중양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손으로 돌로 된 탁자를 한번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돌가루가 분분히 날고 탁자 표면에는 손바닥 자국이 마치 칼로 새겨 놓은 것처럼 움푹 들어가 있었다. 모든 제자들이 아연실색한 가운데 중양진인이 갑자기 부르짖었다. [나의 잘못이다. 이 구음진경은 영원히 화산의 개울 바닥에 잠겨 있도록 했어야 했다. 이 구음진경에 실려 있는 무공은 결코 연마하면 안된다.] 그 말에 주백통과 여섯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주백통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큰소리로 항의했다. [사형, 무슨 뚱단지같은 말씀을 하는 것이오? 구음진경을 나에게 좀 보여주구려.] 그는 손을 뻗쳐 구음진경을 받으려고 했다. 왕중양은 별안간 소매를 한번 떨치며 외쳤다. [비켜라. 함부로 만지면 안된다.] 소맷자락을 한번 떨치는 순간 퍽,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주백통의 몸뚱이는 튕겨지듯 2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마옥과 구처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주백통의 무공은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승당입실(昇堂入室)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는데 사부가 소맷자락을 한번 떨치자 마자 즉시 저만치 튕겨져셔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 사부의 무공이 얼마나 고강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주백통은 땅바닥에서 한바탕 뒹굴고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소리쳤다. [사형, 어깨서 태을신공으로 나를 때리는 것이오? 내 뼈가 여물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 아니겠소?] 왕중양은 얼굴에 서리가 내린 듯 차가운 표정으로 나직히 말했다. [너희들 모두 분명히 알아 두어라. 구음진경이 천하에서 제일가는 기서(奇書)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실린 무공은 흉악하기 이를데 없으니 우리 현문 정종(正宗)의 제자들이 배울 재간이 못된다. 이 구음진경은 우리가 연마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아서도 아니 된다. 누구든지 한번이라도 훔쳐 보게 된다면 즉시 본문에서 축출하겠다. 알았느냐?] 중양진인은 언제나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이고 문하 제자들을 한번도 언성을 높여 꾸짖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평소의 태도와 판이하게 달랐다. 주백통과 여섯 제자들은 그만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마치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에 마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제자가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 안되겠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기에 감히 여쭈어 봅니다. 구음진경에 실린 무공이 도대체 어느정도로 흉악한지요? 사부님께서는 말씀해주시어 우리 제자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해주시옵소서.]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말해주마. 구음진경에 실려 있는 재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흉폭한가 하면, 일종의 조공(爪功)이 수록되어 있는데 살아 있는 소와 양의 골통에 손을 꽂으며 무공을 연마해야 한다. 이 한가지만 보더라도 그 외의 나머지 무공이 어떤지 헤아릴 수 있지 않느냐? 너희들도 말해 보아라. 그와 같은 무공을 우리가 연마할 수 있겠느냐?] 뭇 제자들은 그만 혀를 내 두르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천하에 그토록 잔인한 무공이 있습니까? 정말 연마해서는 아니 되겠군요.] 주백통이 말했다. [정말 김새는군. 천신만고 끝에 구음진경을 찾아 돌아왔는데 곽을 열 수가 없어 개고생을 일 년 동안 했었고, 이제 방법을 찾아서 곽을 열어 보았더니 구음진경의 재간을 연마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아서도 아니 된다니, 이것이야말로 보물을 얻었지만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게 된 셈이 아니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구음진경을 불질러 태워버리는 것이 깨끗할 것 같소.]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처기야, 불을 지펴라.] 구처기는 즉시 안으로 들어가 한 묶음의 땔감을 찾아왔다. 그는 삼청도조(三淸道祖)의 신위 앞에 땔감을 쌓아 놓고 불을 지폈다. 왕중양이 막 구음진경을 불속에 던져서 모조리 태우려고 했을 적에 갑자기 동굴밖에서 휙, 하는 바람 소리가 나더니 산바람이 세차게 불어 들어와 막 피워 놓은 불을 꺼버리는 것이 아닌가? 왕중양은 구음진경을 들고 보고 또 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옛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간수하신 물건을 내가 어찌 망가뜨릴 수 있겠느냐? 나는 역시 해운자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잘 갈무리해야 되겠다.] 주백통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형, 구음진경을 태워버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연달아 강적들이 몰려들 것인데 그렇게 되어도 괜찮소?] 왕중양은 나직히 한숨을 쉬고 말했다. [마난(魔難)이다, 마난이야. 따지고 보면 내가 구음진경을 물속에서 끌어 올린 것이 잘못이었다. 손에 넣느라고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냥 없앤다는 것도 애석한 노릇이구나. 역시 내가 소장하는 편이 낫겠다.] 그는 다른 하나의 석합(石盒)을 만들어 구음진경을 그 속에 숨겨 놓고 자기가 죽을 때까지 구음진경을 보호하여, 좌도방문(左道旁門)의 무리들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리라 결심했다. 자기가 죽기 직전에 그 구음진경을 없애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렇게 구음진경의 일은 일단락이 되었다. 세월은 유수처럼 홀러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온누리에는 봄빛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주백통은 문득 음씨쌍괴가 동해의 육횡도로 찾아오라고 했던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는 왕중양에게 육횡도로 가서 음씨쌍괴와 겨루고 싶다고 말했다. 왕중양은 그 이야기를 듣자 이렇게 말했다. [사제는 정말 번거로운 일만 골라 하는구나. 가고 싶으면 혼자 가도록 해라. 나는 동행하지 않겠다.] [그야 물론이지요. 음씨쌍괴의 재간이 평범하니 사형이 갈 필요는 없습니다. 나와 몇 명의 사질들이 함께 가도록 하지요.] 주백통은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을 데려가야 승산이 약간 있을 것 같아 왕중양에게 슬며시 운을 뗀 것이었다. 왕중양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돼. 나의 제자들은 아직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스승의 곁을 떠날 실력이 안된다. 내가 어떻게 그들을 위험에 빠지도록 할 수 있겠느냐? 너 혼자 가면 돼. 음씨쌍괴를 제압할 자신이 있다면서?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지 말아라.] 주백통은 볼멘 소리로 말했다. [좋소. 나 혼자 가라면 나 혼자 가지 뭐.] 이틀이 지나자 그는 숭산을 내려가 곧장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음을 옮겨 놓았다. 하남성에서 절강성으로 가려면 반드시 안휘(安徽)와 강서(江西) 두 성을 지나야 했다. 물길을 따라 절강성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 길이 천 리가 넘었다. 주백통은 난생 처음으로 그토록 먼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는 길을 가는 동안 이곳 저곳 걸음을 멈추어 가면서 주위의 풍경을 두루 구경하면서 천천히 발길을 옮겨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4월 하순에 출발한 것이 5월 초하루가 되어서야 안휘성 남쪽의 소현(巢縣)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때서야 주백통은 조바심이 났다. 이제 엿새만 있으면 약속 날짜인데 자기가 아직도 안휘성 영내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그 짧은 엿새동안에 어떻게 절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군다나 육횡도는 절강성 바다에 위치하여 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결코 하루 이틀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약속시간이 지나서 육횡도에 도달한다면 자기가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된다. 주백통은 뒷통수를 긁으며 한참동안 생각했다. 그는 잇따라 몇 사람들에게 물어 본 결과 끝내 한가지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엿새 안으로 동해로 가려면, 배를 타고 장강을 끼고 동쪽으로 내려가야 하며 강소성 숭명도(崇明島)에서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길만이 유일한 첩경이었다. 하지만 이틀 동안에 동해로 들어서는 문제는 풍향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마파람이 불면 그런대로 괜찮지만 동풍이라도 불면 맞바람을 맞으며 배를 띄워야 하기 때문에 도저히 약속한 시일 안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안휘는 장강 입구에 서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마파람이 불어야 순풍이 되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단오절날 육횡도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끝내 한가지 짓궂고 장난기 어린 묘계를 생각해내기에 이르렀다. 그는 소현의 나룻터를 찾아갔다. 이 나룻터가 있는 곳은 무위군(无爲軍)라는 조그마한 고을의 윗쪽에 있었는데 그 포구에는 강에 띄우는 배들이 많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주백통은 한참 살피다가 마음에 드는 한 척의 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배 위에는 노약자와 부녀자들이 없고 겨우 사공 부자 두 사람 뿐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 배를 세내어 강소성의 육합(六合)으로 가자고 했다. 사공은 그에게 배삯을 달라고 요구했다. 주백통은 의젓하게 웅락하고 즉시 배삯을 주고 사공에게 배를 띄워 강물을 따라 동쪽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주백통은 뱃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사공 부자를 상대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두 사공 부자 가운데 늙은이는 허노대(許老大)이고 젊은이는 허이모(許二毛)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들은 금나라 군사가 남쪽으로 침공해 내려온 후 곳곳에 전쟁이 일어나 생계를 꾸려가기가 옛날보다 훨씬 어렵게 되었다고 푸념을 늘어 놓았다. 주백통은 갑자기 코를 찡긋하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네 두 부자는 한평생 이 물 위에서 고기나 잡고 손님이나 건네주면서 살고 싶소, 아니면 한 밑천 크게 잡아 부귀를 누리고 싶소?] 허노대는 말했다. [그야 물론 부자가 되고 싶지요. 손님이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뭐요?] [당신들이 부자가 된다는 것은 수월한 노릇이 아니오. 하지만 내가 부자로 만들어 드리지. 지금 굉장한 재물이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소. 당신네 부자 두 사람이 만약에 나를 따라갈 용기만 있다면 당신들이 평생 동안 쓰고 남을 만큼 떼돈을 벌 수 있소.] 허노대 부자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즉시 노와 키를 놓고 주백통에게 그 사연을 물었다. 주백통은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그는 금나라 군사들이 남쪽 중원으로 침범해 오고, 장강의 남북 일대에서도 전란으로 인해 돈 있는 사람들은 다투어 북쪽에서 강남으로 피난을 간다고 말해 주었다. 한 달 전에 몇 명의 큰 부자들이 강에 띄우는 배를 전세내어 금은주보를 가득 싣고 바닷길을 따라 복건성이나 광동성 쪽으로 도망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강에 띄우는 배의 사공인 노대(老大)가 악독한 마음을 품고 해적들과 내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배가 겨우 장강의 입구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적에 해적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 부자의 집안 식구들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 해적들은 매우 흉폭하고 잔인해서 내친 김에 사공들마저도 죽여버리고 금은주보를 장강의 입구 바깥쪽에 있는 황량한 섬으로 가져가 묻었다. 이 해적들은 매우 욕심이 많아서 그들의 두목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시일을 두었다가 금은주보를 파내 서로 나누겠다고 약속했다. 피를 입술에 바르고 맹새까지 하면서 비밀을 지키자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주백통 자신이 길을 오다가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그 자신이 객점에서 어떻게 해적의 말을 훔쳐 듣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금은주보가 숨겨져 있는 장소를 알아 내었는지에 대해, 주백통은 뛰어난 말주변으로 그 한 토막의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들려 주었다. 허노대 부자는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고 머리가 단순해서 주백통의 떠벌리는 말솜씨에 그만 홀딱 넘어가 전적으로 믿게 되었다. 그런데 주백통은 이야기를 끝내고 갑자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이 소식을 알게 된 것이 좀 늦었다오. 바로 지금 달려가서 떼부자가 되려고 한다 해도 이미 때를 놓친 것 같구료.] 허노대 부자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감질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주백통이 그와 같은 말을 하자 안타까운 심정에 연신 소리쳐 물었다. [왜 그러시오? 그 숨겨진 보물을 다른 사람이 가져갔나요?] 주백통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가 있겠소? 해적들의 주고받는 말을 들으니 그 금은주보를 묻어 둔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다는 것이었소. 그들은 오월 초엿새날에 꺼내서 나눠 가지겠다고 말했소. 그러니 불과 엿새밖에 남지 않았소. 그런데 우리들이 어떻게 엿새 안에 장강의 입구에서 빠져나가 해적보다 한 걸음 먼저 도달해서 그 많은 금은보화를 차지할 수 있겠소?] 허노대는 핏대를 올렸다. [왜 못합니까? 이곳에서 장강 입구까지 가는 데는 기껏해야 이틀이면 됩니다. 설사 풍향이 순조롭지 못하다 해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들은 아예 배 안의 무거운 집기나 도구들을 모조리 강물 속으로 던져버리고 무게를 줄여 배를 저어 나간다면 이틀 안에 숭명도에 갈 수가 있을 것이고, 그때 어르신께서 지시하시면 우리 모두 일확천금을 하게 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소?] 주백통은 속으로 웃었다. (얼씨구, 이제 너는 내 술수에 말려들었다.) 사실 사공인 허노대와 허이모 두 부자는 한번도 금은주보를 본 적이 없었다. 주백통의 말을 듣자 의심하지 않고 많은 양의 금은이 장강 입구의 황량한 섬에 묻혀 있는 줄로 믿게 된 것이었다 재물에 홀리면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법이다. 속담에도 돈이 있으면 귀신을 부려 맷돌을 돌리게 할수 있다는 말이 있다. 허노대 부자는 떼돈을 벌 욕심에 닻을 올리고 힘껏 노를 저었다. 마침 하늘님께서 선심을 베푸시어 마파람을 불어주셨다. 순풍에 돛을 달고 하류로 내려가는 것이라 나흘도 되기 전에 그들이 탄 배는 장강의 입구를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숭명도를 지나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동해였다. 허노대는 주백통에게 보물이 숨겨져 있는 황량한 섬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주백통은 몸을 일으켜 동쪽을 두리번거리고 서쪽을 살피는 시늉을 하다가 대답했다. [되었소. 동남쪽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황량한 섬이 나올 것이오.] 허노대는 기운을 내어 순풍에 돛단배를 쏜살같이 물 위로 미끌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반나절을 나아가게 되었는데도 넓다란 바다만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고 섬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허노대는 의심이 생겨 주백통을 바라보며 물었다. [손님, 어째서 장강 입구에서 빠져나와 많은 바닷길을 저어 왔는데도 황량한 섬이 보이지 않지요? 우리들의 배는 이미 사포갑(乍浦岬)을 지났으니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 절강성의 수역이 되는 것이오.] 주백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 왔소. 다시 동남쪽으로 가도록 합시다.] 허노대는 다시 반나절을 갔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별수없이 잠시 바다 위에서 밤을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허노대 부자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앞쪽에 아니나 다를까 약간의 섬들이 나타났다. 허노대는 그 섬들의 형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안색이 변해서 주백통에게 대들었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들을 속여 이곳까지 끌고 왔소? 어디가 해적들이 보물을 숨겨 놓은 황량한 섬이란 말이오? 앞쪽은 심가문(沈家門)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주상군도(舟山群島)의 일부로써 장강의 입구에서 이미 이백 리가 넘게 저어 왔단 말이오.] 주백통은 담담히 말했다. [아, 주산군도에 도달했소? 그렇다면 매우 좋소. 배를 육횡도로 몰도록 하시오. 보물이 바로 그곳에 있소.] 허노대 부자는 육횡도라는 말을 듣자 그만 안색이 새파래져서 욕을 했다. [원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당신은 우리 부자를 속여서 그 악마가 살고 있는 섬으로 데리고 가 우리 부자들의 목숨을 잃게 할 작정이오?] 그들은 노를 놓고 방향을 틀어 되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갑자기 허리에 힘을 주고 털썩 주저 앉았다. 배의 갑판에서 쿵, 하는 소리가 크게 나면서 배가 바다 위에서 마구 일렁거렸다. 왼쪽으로 혼들, 오른쪽으로 흔들, 금방이라도 뒤엎어지고 말 것 같았다. 허노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손님,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주백통은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어쨌다는 것이오? 당신이 나를 육횡도로 보내주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네 배를 침몰시키고 말겠소. 모두들 용궁으로 가서 잘 사귀어 봅시다 그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다시 허리에 힘을 주고 갑판에 힘껏 엉덩방아를 찧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선채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더욱 무섭게 혼들거리기 시작했다. 주백통은 이번에 천근추(千斤墜)의 재간을 펼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다에서 띄우기는 좀 무리했던 강선(江船)이 커다란 파도에 횝쓸린 것처럼 마구 좌우로 혼들렸다. 허노대는 다급해진 나머지 소리 높여 외쳤다. [제발 얌전히 있어요! 난 당신이 무섭소. 당신을 육횡도로 보내드리겠으니 얌전히 앉아 있으란 말이오.] 허노대의 아들 허이모는 혈기방장한 젊은이였다. 자기네 부자가 주백통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 여간 못마땅하지 않아 짐짓 노를 젓는 척하면서 주백통의 곁으로 다가가 벼락같이 한 대의 주먹을 내질러 주백통의 등짝을 콱 때렸다. 주백통은 방비하지 않고 있다가 그 한 대의 주먹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그러나 허이모는 상대방을 때렸으나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주먹이 마치 철판을 힘껏 후려친 것처럼 아팠던 것이다. 허이모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아파라!] 허노대가 고개를 돌려 보니 자기 아들이 상대방을 주먹으로 때렸는데 얻어 맞은 주백통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오히려 아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이고 주먹이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그는 주백통이 재간이 있는 이인이라는 것을 알고 재빨리 갑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연신 절을 했다. [나으리, 저의 못난 자식놈이 무지해서 어른신의 위엄을 거슬리게 되었군요. 어르신께서는 한번만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백통은 소리내어 웃었다. [흐흐, 나는 서른 살도 못됐는데 무슨 어르신이란 말이오? 당신의 그 보배같은 아들이 손을 써서 사람을 치려고 하는데 부질없는 짓은 작작하시지. 나는 그가 반나절 동안 고통을 겪도록 해야 되겠소.] 허노대는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나으리, 그를 골려주면 누가 나으리를 도와서 노를 저어주겠소? 누가 나으리를 육횡도까지 보내드릴 수가 있겠소?] 주백통은 웃었다. [맞았어. 그 생각을 못했군. 좋아, 내 이번 한번은 용서해 주지.] 그는 허이모의 주먹을 붙잡고 몇번 주물러주더니 소리쳤다. [이젠 됐소.] 허이모는 대번에 통증이 가시고 부기가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 부자는 감히 주백통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면서 그를 시중들어 가면서 육횡도를 향하여 나아갔다. 하루를 더 가자 어느덧 단오날이 되었다. 주백통은 배를 타게 되었을 적에 이미 배를 내릴 날짜를 계산해 놓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를 지날 때마다 잠을 자기 전에 반드시 조그만 칼로 배에 한일자를 하나 그어 놓았다. 이 날 그가 칼로 자국을 낸 흠의 숫자를 헤아려 보니 바로 단오날이었다. 그는 동해쌍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속으로 기뻐하며 허노대 부자에게 물었다. [이것 보시오. 육횡도에 도달했소? 빨리 나를 섬으로 보내주시오.] 허노대는 먼 하늘가를 손가락질했다. [나으리, 바다 힌복판의 저 외따로 떨어져 있는 황량한 섬이 바로 육횡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육횡도에서 삼 마장 거리 안으로 들어서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고 하더군요.] 주백통이 바라보니 멀리 기이한 바위들이 울통불통 솟아있는 황량한 섬이 있었는데 정말로 육(六)자를 옆으로 써 놓은 것 같았다. 주백통은 큰소리로 웃었다. [으하하, 어떤 시러배 잡놈들이 육횡도에 가면 반드시 죽는다고 합디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뱃전의 왼쪽 수면에서 첨벙,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소용돌이가 일었다. 곧이어 획,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물속에서 두 조각의 허옇게 번뜩이는 물건이 날아 나왔다. 탁탁,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 물건은 배의 돛대에 적중되었다. 허노대 부자는 그 물건을 바라보는 순간 그만 놀라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원래 물속에서 튀어나와 돛대에 못처럼 밖힌 것은 두 자루의 이상하게 생긴 비어창(飛魚槍)이었다. 창대는 황양목(黃楊木)으로 만들은 것인데 앞쪽에 물고기 주둥이 모양의 무쇠가 달려 있었다. 허노대는 그 두 자루의 표창(標槍)을 보고 여간 놀라지 않았다. 부자 두 사람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주백통에게 애걸복걸했다.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제발 좀 좋은 일좀 해주십시오. 우리들은 이만 물러가야 하겠습니다.] 주백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쩍 몸을 날려 돛대 위로 올라가 두 자루의 비어창을 돛대에서 뽑았다. 그는 바다 위로 뿌옇게 두 줄기의 거품이 그어지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사람이 바다 수면 밑에서 잠수하며 질풍과 같이 앞쪽으로 헤엄쳐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일성을 대갈하며 팔을 번쩍 쳐들었다가 비어창을 내던졌다. 두 자루의 비어창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곧장 10여 장이나 날아가더니 착착, 하는 소리와 함께 그 하얀 포말로 이루어진 줄에 떨어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물에 부력이 있었기 때문에 바다 밑에서 헤엄치고 있는 사람을 정통으로 찌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수면 위로 짙은 잿빛의 둥근 물건이 두 개 떠올랐다. 주백통은 그것이 사람의 머리인 것을 알아채고 소리높여 호통쳤다. [네놈들은 음씨쌍괴의 부하들이냐? 빨리 섬으로 헤엄쳐 가서 두 음가라는 도적놈에게 왕중양의 사제 주백통이 오셨다고 아뢰어라!] 두 개의 둥근 공같은 것은 수면에서 몇번 흔들거리더니 첨벙,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물속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러더니 바다 위에 다시 두 줄기의 포말이 줄을 그으면서 육횡도 쪽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었다. 허노대 부자는 주백통의 말을 듣고 그제서야 그가 육횡도의 동해쌍괴에게 따지러 온 것임을 알아 차렸다. 선한 자는 오지 않고 오는 자는 선하지 않다는 말이 있듯이, 주백통에게 상당한 재간이 없다면 결코 동해쌍괴를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허노대 부자는 조늠 전처럼 그렇게 동해쌍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주백통을 바라보았다. 주백통은 고개를 돌려 허노대와 그 아들의 표정을 보고는 껄껄 웃으며 허노대의 어깻죽지를 토닥거렸다. [흐흐흐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나는 작년에 동해쌍괴와 이곳에서 싸우기로 약속했소. 당신들은 마음 푹 놓으시오. 사공이 나를 섬으로 태워줬다고 해서 동해쌍괴가 사공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오. 자, 염려 붙들어 매고 어서 육훵도로 갑시다.] 허노대 부자는 어쩔수 없는 상태에서 키를 잡고 노를 저어 바다의 조수와 풍항을 이용해서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어느덧 육횡도의 해안에 도달했다. 해안에는 눈처럼 흰 모래가 쭉 깔려 있었는데 바다의 언덕에서 안쪽으로 10장쯤 떨어진 곳에 있던 네 개의 짙은 잿빛의 둥근 공과 같은 물건들이 주백통의 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즉시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원래 그 네 개의 둥근 공같은 것은 사람의 머리였고 그 둥근 공 아래쪽에 사람의 몸뚱이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몸뚱이 전체를 모래벌판 속에 파묻어 놓고 있었다. 그들은 외부의 사람이 섬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서야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주백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모래바닥에 몸을 숨기고 뭘하고 있었을까? 필시 일종의 무서운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 놈들이 뒤집어 쓰고 있는 고기가죽으로 만든 물건은 보기에도 역겹게 생겨 먹었구나. 모조리 박살을 내야 내 속이 후련하겠다.) 그 놈들은 주백통이 도래한 것을 보자 약속이나 한 듯이 모래더미에서 벌떡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백통은 그제서야 그들의 전신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었다. 이들 네 사람은 물고기 껍질로 만든 봉두(縫頭:모자) 이외에도 목에서부터 가슴과 발에 이르기까지 한 겹의 물고기 껍질로 만들어진 옷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런에 이 한 겹의 옷은 매우 이상야릇해서 기름기가 돌고 빛이 번쩍번쩍 나면서도 단추나 단추구멍이 없고 허리띠도 없었으며 틈바구니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치 온 몸뚱이를 덮어 씌우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그와 같은 옷을 뒤집어 쓸 수 있는지 희한하기만 했다. 그들은 주백통에게 약간 허리를 구부려 절을 하는 시늉을 했다. 앞에 있는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 도주께서는 대협이 왕림해 오시기를 기다린지 이미 오래 되었소. 주 선배님께서 이렇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천리 길을 밀다고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실로 우리 섬의 영광이라 할 수 있겠나이다.] 주백통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광으로 안다니 다행이다. 자네들의 꼴 사나운 모습을 보니 틀림없이 음씨쌍괴의 제자들인 것 같군. 그들의 제자 노릇을 하느라고 수고가 많군 그래. 마치 자라새끼처럼 전신을 껍데기로 싸고 있으니 얼마나 가련한가? 자라는 그래도 머리를 내밀고 먹을 것을 찾아 먹지만 자네들은 똥을 쌀 수도 없으니, 아, 정말 불쌍하군. 불쌍해!] 배 위의 허노대 부자는 주백통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동해쌍괴의 부하들이 잔혹하고 사람을 파리처럼 죽인다는 소문을 들어 왔기 때문에 감히 소리내어 웃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네 명의 고기 껍질을 뒤집어 쓴 어피인(魚皮人)들은 동해쌍괴의 제자들이었는데 주백통이 비양거리는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앞에 선 그 어피인은 음산하게 대답했다. [주 나으리,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하시지요. 주 나으리께서 타고 오신 저 배는 버리도록 하십시오. 주 나으리께서 저 배를 타고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들을 먼저 돌려 보내도록 하십시오.] 이 몇마디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주백통이 오늘 육횡도에 도달한 이상 그야말로 죽으려고 찾아 온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돌아갈 배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주백통이 한마디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그 네 명의 어피인들이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두 명이 휙휙, 하는 소리와 함께 뱃머리 위로 올라서더니 허노대 부자의 멱살을 움켜잡고 번개처럼 비수를 뽑아 들고 허노대 부자의 심장을 찌르려고 했다. 뜻밖의 일에 허노대 부자는 그만 놀라 소리쳤다. [으악!] 주백통은 눈치가 빠르고 동작이 민첩하여 대뜸 금나수법을 쓰고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신공을 펼쳐 어피인들의 척추를 움켜잡고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이 한수에서 주백통의 총명하고 영특한 점이 여지없이 드러난 셈이었다. 그는 동해쌍괴의 문하들이 상어의 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있고 그 옷이 매끄럽고 번들번들 윤이 나면서 손으로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금나수법의 움켜잡는 수법으로 상대해도 전혀 쓸모가 없고 점혈법 역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는 대뜸 전진파의 점(粘), 흡(吸)의 요결을 써서 와락 잡아채었다가 이 두 명의 육횡도 쌍괴의 제자를 허공으로 내던졌던 것이다. 그가 두팔을 한바쿼 휘두르자 그 두 명의 어피인들은 허공에서 재주를 넘고 무겁게 모래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게 되었다. 주백통은 한수의 무공을 멋지게 펼쳐낸 후에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 배를 타고 돌아갈 수 없다는 거냐? 헤헤헤, 너무 웃긴다. 이 두 명의 사공을 누구든지 건드리기만 해 봐. 대갈통을 박살내고 말거야. 빨리 음장강과 음장하 두 형제를 불러 오너라.] 두 명의 어피인들은 주백통에게 내던져진 나머지 머리가 띵하고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감히 무례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못하고 바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저쪽으로 걸어갔다. 주백통은 한 덩어리의 은자를 꺼내 배의 간판에 던지고 허노대 부자에게 말했다. [이것은 배삯이니 가지고 가시오.] 허노대 부자는 이미 놀라 혼비백산해 있었다. 즉시 돛을 올리고 언덕에서 배를 떼어냈다. 주백통은 훌쩍 몸을 날려 언덕 위로 올라가 그들이 돛을 올리고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잠시 후 모래바닥 저쪽에서 한 때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약 50명은 될 것 같았다. 하나같이 물고기 껍질로 만든 모자로 머리통을 감싸고 몸에도 고기 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어서 잿빛 일색이었다.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오는 그들은 뭇 별들이 달을 전후좌우에서 모시는 듯 두 사람을 옹위하고 나타났다. 바로 음장강과 음장하 형제였다. 그들은 주백통을 보자 차갑게 말했다. [알고 보니 주형께서 어려운 걸음을 하셨구료? 귀파의 장교(掌敎)인 왕진인은 어째서 함께 오지 않았소? 설마하니 한번 찾아볼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우리 형제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오?] 주백통은 입심이 약하지 않았다. 그는 껄껄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하하, 동해쌍괴가 마음이 편협하다고 하더니 맞는 말이었군.] 음장강은 성이 나서 호통을 내질렀다. [우리가 어째서 편협하단 말이냐?] [당신네 두 사람이 숭산으로 올라가 구음진경을 훔치려고 했을 적에 우리 사형의 적수가 되지 못해 우리 사형에게 얻어 맞고 개망신을 당하지 않았소? 그 바람에 나는 당신들과 제대로 싸워 보지 못했소. 그 날 나 혼자 여기에 오겠다고 약속한 것 뿐이니 당연히 내 혼자 이곳에 와서 당신들을 만나게 된 것이오. 속담에도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설마하니 우리 사형이 친히 여기까지 오셔서 당신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오?] 동해쌍괴는 발끈 노했다. 음장하는 노호를 한번 터뜨리더니 그대로 달려나와 덮치려고 했다. 음장강은 위인이 음험했다. 즉시 손을 뻗쳐 음장하를 막으며 불렀다. [잠깐만.] 그는 주백통을 바라보며 냉소를 흘렸다. [허허, 무척 좋소. 당신이 그렇게 우리 형제들을 능멸한다면 우리들도 강호의 도의를 따지지 않겠소.] 주백통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모조리 덤비시지. 내 혼자서 얼마든지 당신들을 상대해 드리지.] 음장강은 말했다. [주백통, 당신 하나쯤 흔내주는 것은 우리 두 형제로 충분하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어찌 필요하겠소? 자, 받으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솟구쳤다. 바람소리가 획, 하니 일어나며 한 무더기의 짙은 잿빛 그림자가 맹렬히 주백통의 앞으로 덮쳐들었다. 주백통은 조금도 서두르거나 당황하지 않고 몸을 살짝 낮추면서 왼손을 바깥쪽으로 뿌려냈다. 태을권법 가운데 청룡출학(靑龍出壑)이라는 수법으로 음장강을 후려친 것인데, 그가 지금 사용한 것은 금강경(金剛勁)의 타법이었다. 이것은 주백통이 동해쌍괴를 상대하려고 일찍이 머리속으로 구상한 타법이었다. 그는 쌍괴의 무공이 특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 요결은 박(迫), 흡(吸), 도(跳), 찬(竄), 네 글자에 있었다. 거기다가 몸에 걸치고 있는 매끄러운 물고기 껍질로 만든 옷과 배합되어 상대방이 헤아리기 어렵도록 만들었고 어떻게 대항해야 좋을지 모르게 했다. 그래서 주백통은 지강(至剛)으로 지유(至柔)를 상대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그가 왼손으로 한번 휘두른 힘은 족히 4백 근은 되었다. 따라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음장강의 몸뚱이가 퉁겨지듯 일곱, 여덟 걸음 밖으로 물러났다. 음장하 역시 광풍처럼 주백통의 오른쪽으로 엄습하면서 왼손으로 당랑현조(螳螂現爪)라는 일초를 펼쳐 주백통의 왼쪽 태양혈을 움켜 잡으려고 했다. 음장하는 음조지경(陰爪之勁)을 이용해서 손바닥을 쫙 펴고 득달같이 달려드는데 그 모습이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주백통은 발걸음으로 을(乙)자를 그으면서 단봉조양수(丹鳳朝陽場手)를 써서 왼손을 바깥쪽으로 슬쩍 뽑아 올리면서 팔꿈치를 내질렀다. 음장하는 그 팔꿈치로 후려쳐 오는 기운은 천 근도 더 되는 것을 보자 자기가 비록 어피의(魚皮衣)를 입어 몸을 가리고 있지만 그 기운에 부딪치면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됨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옆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이에 주백통이 손을 반대쪽으로 돌리면서 쓸 듯이 후려치자 음장하는 대여섯 걸음 밀려나고 말았다. 2초를 겨루자 주백통은 어느 정도 동해쌍괴의 권로(拳路)를 짐작할 수 있었다. 동해쌍괴는 하나같이 음유한 기경을 이용하면서 어느 초식 하나 분명히 공격하고 똑바로 후려치지 않았다. 그러나 동작 하나하나에 음독한 살수(煞手)를 품고 있었다. 주백통은 나한권(羅漢拳)을 펼쳐내었다. 나한권은 소림사의 진산지보(鎭山之寶)의 권법으로 총 이십팔로(二十八路)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중양의 사부인 청허산인은 살아 있을 때 천하를 두루 주유했으며 밟아 보지 않은 땅이 없을 정도였고 각 문파의 권법을 자세히 연구했다. 더군다나 소림사가 바로 숭산에 있어 그는 때때로 절의 승려들이 절간 밖의 황량한 들판이나 숲속에서 무공을 겨루는 보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나한권을 저절로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나한권의 특징은 힘이 웅후하다는 것이었다. 일초 일식이 옆으로 밀고 직접 후려치기 때문에 음씨쌍괴는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 못하고 그저 왼쪽에서 몸을 혼들, 오른쪽에서 빙글, 주백통을 상대로 지구전을 펼쳤다. 모래바닥 위에 펼쳐져 있는 파란 하늘은 해맑기만 했다. 그러나 뜨거운 해가 바로 중천에 걸려 있었다. 세 개의 짧은 사람 그림자가 모랫바닥 위에서 오락가락하며 얽혔다가 떨어지곤 하면서 서로 공격과 수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30여 합을 겨루었다. 주백통은 한편으로 나한권의 장력을 가중시키고 또 한편으로 꼼꼼하게 동해쌍괴의 동작을 관찰했다. 쌍괴의 무공은 독특하여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일거수일투족마다 부드럽기 이를 데 없고 힘이 실리지 않은 것 같았으나 권풍이 넓게 뻗치는 것이 그야말로 수은이 땅에 뿌려지게 되었을 적에 미세한 구멍을 찾아 스며들 듯이 사람으로 하여금 방비할래야 방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주백통은 여러번이나 음조(陰爪)에 걸려들 뻔했다. 그는 놀란 나머지 식은땀이 솟아 올랐다. (내가 그 동안 너무 놀기만 했구나. 사형에게 선천공을 잘 지도 받았더라면 단지 손가락 하나만 써도 이 두 명의 괴물같은 녀석들을 바다속으로 처넣어 거북이의 먹이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10여 초를 겨루게 되었을 적에 주백통은 갑자기 사형이 평소에 하던 말을 상기했다. 음유한 무공을 상대하려면 발로 차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것이었다. 무가(武家)에서는 주먹으로 치는 것이 3푼이고 발로 차는 것이 7푼이라는 속담까지 있었다. 그들의 사부는 과거에 소림사의 십이로(十二路)의 용담퇴(龍潭腿)를 변화시켜 선풍퇴법(先風腿法)을 창안해서 자기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응용하지 않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백통은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자 일성을 대갈하며 선풍퇴를 펼쳐냈다. 그의 그림자가 토끼처럼 뛰어 오르고 매처럼 떨어지는가 하면 두 발을 잇따라 번갈아가며 움직였다. 왼쪽으로 가위질하듯 하고 오른쪽으로는 꺾어 도는가 하면, 왼쪽으로 웅크리고 오른쪽으로 솟구치는 등 눈부시게 번쩍번쩍 움직였다. 처음에는 한 발길질에 이어 한 발길질을 가하는가 했는데 나중에는 두 발을 일제히 날리게 되었고 갈수록 그 재빠름을 더해서 그야말로 기러기가 하늘에서 맴돌고 제비가 허공을 누비는 것처럼 음씨쌍괴를 연신 뒤로 물러나도록 몰아 세웠다. 이렇게 되자 음씨쌍괴는 피하기에 바빠 반격할 여유를 전혀 가질 수가 없었다. 동해쌍괴는 주백통의 재간이 이토록 대단할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주백통의 퇴법은 선풍처럼 잇따라 쓸어쳐 오기 때문에 자기들의 음유한 무공이 전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백통이 그와 같이 발길질을 하게 되자 음씨 형제들도 문득 한 가지의 절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절기 역시 발길질로 펼쳐내는 재간인데 이름은 답사퇴(踏沙腿)라고 했다. 답사퇴라는 것은 무엇일까? 원래 음씨 형제들은 어릴적부터 섬에서 자랐다. 섬에는 자연히 모래바닥이 있기 때문에 동해쌍괴는 무공을 연마할 때 매일과 같이 모래 위에서 줄달음질을 치곤 했다. 무림에서 모래 위에서 달리는 것은 경신법을 연마하는 기초였다. 그런데 그들이 모래바닥을 밟고 달려가게 되었을 적에 종종 모래먼지를 발끝으로 차올리곤 했다. 어느 날 음장강은 갑자기 하나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만약 모래바닥 위에서 적과 손을 쓰게 되었을 적에 모래를 발로 차서 적의 안면으로 날려 보내 상대방의 눈을 흐리게 한다면 자기들에게 크게 유리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영감이 떠오른 그는 답사퇴를 창안해 냈다. 그러니까 발끝을 모래바닥 안에 집어 넣었다가 냅다 한 무더기의 모래를 걷어차 올려 적의 얼굴을 향해 뿌리는 무공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것은 어린애들도 할 줄 아는 장난이었다. 그러나 음씨쌍괴는 두 발을 잇따라 움직여서 모래를 차낼 수 있도록 연마했다. 그리하여 발에다 힘을 돋구고 순식간에 30번의 발길질을 해서 모래를 상대방에게 끼얹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며 단숨에 수십번 발등으로 모래를 차 올려 적의 면상에 뿌릴 수 있었다. 이는 쉽게 배울 수 있지만 정통해지도록 연마하려면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들 두 형제는 이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자 일제히 휘파람 소리를 내불며 답사퇴라는 재간을 펼쳐냈다. 그들은 한편으로 주백통의 선풍퇴를 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답사공을 펼쳐 한 무더기의 모래를 맹렬히 주백통의 면상으로 끼얹었다. 이렇게 되자 주백통은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동해쌍괴가 하나는 앞에서 하나는 뒤에서 흙모래를 차서 소나기처럼 뿌려대니 도저히 방비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다. 삽시간에 주백통의 귓구멍과 콧구멍, 그리고 소맷자락 속으로 모래알이 가득 들어차게 되었다. 그는 다급해진 나머지 소리쳤다. [이 우라질 놈들아!] 입을 벌리자 마자 즉시 입안 가득 모래알이 튀어들었다. 주백통은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크게 낭패를 보게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불현듯 자기가 모래가 없는 곳으로 가면 지장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선풍퇴를 거두고 두 발로 모래바닥을 차며 연자천령(燕子穿嶺)의 신법으로 곧장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모래바닥에서 벗어나 나는 듯이 섬의 언덕 쪽으로 달려갔다. 음장강 형제는 주백통이 도망치자 호통을 내질렀다. [어디로 도망을 치느냐?] 두 형제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주백통의 뒤를 쫓아왔다. 주백통은 한참 동안 달려 모래바닥에서 벗어났다. 그는 삐죽삐죽 바위들이 널려 있는 곳으로 뛰어 오르며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훔치면서 입과 콧구멍, 그리고 귓구멍에 들어 있는 모래알들을 뱉어내고 털어냈다. 음장강이 먼저 쫓아와 응준하박(鷹準下搏)의 수법으로 맹렬히 주백통의 뒷통수를 움켜잡을 듯이 달려들었다. 주백통은 입안 가득 모래가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속으로 울화가 치밀던 판이었는데 음장강이 몸을 날려 덮쳐드는 것을 보자 냅다 뒤를 향해 추창망월(推窓望月)이라는 일장을 뻗쳐냈다. 음장강은 허공에서 아래로 덮쳐드는 순간, 느닷없이 뻗쳐오는 일장을 미처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강공으로 맞서지 않을 수 없었다. 펑,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주백통이 냅다 뒤로 후려친 공세는 그 공력의 맹렬함이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어, 음장강을 후려쳐 2장 밖으로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음장강은 다행히 상어 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어 한번 나뒹굴기는 했지만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그는 대뜸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음장하도 뒤따라 달려왔다. 주백통은 냅다 욕을 했다. [이 후레자식들, 그토록 비겁하게 망나니들이 사용하는 수작에다가 도깨비가 부적을 그리는 수작을 부리다니.] 음장강은 냉소했다. [이거야말로 힘과 더불어 지혜를 겨루는 것이다. 주가야, 모래벌판으로 가서 겨루자.] 음장강 형제는 강공으로는 주백통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지럽게 바위들이 늘어서 있는 석림(石林) 안으로 들어서면 낭패라고 판단한 그들은 서로 눈짓을 한 후에 주백통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자손이 끊어질 놈아, 덤벼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일 놈아, 용기가 있으면 따라와라!] 그들은 격장법을 써서 주백통을 모래바닥으로 유인하여 다시 답사공으로 그에게 일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한데 주백통은 장난기가 심하고 짖궂은 사람이었다. 음장강 형제들이 욕을 하자 분노하기는 커녕 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욕을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냐? 욕에 대해서는 내가 네놈들의 할아버지란 말이다.] 그는 몸에 묻은 모래알을 툴툴 털고 바위 위에 턱 앉아서 음장강 형제들을 향해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 자라같은 놈들아, 너희들은 자라 새끼다. 네놈들은 어머니인 자라를 죽여 그 고기를 돼지고기라고 속여 저자거리에 내다 팔았지만 아무도 그 고기를 사가지 않아 그 고기가 다 썩어 빠졌지 않느냐? 어머니 고기가 팔리지 않자 아버지 자라를 죽여 쇠고기라고 속였지만 그 누구도 자라 고기를 사가지 않아 본전도 못 건지고 거덜이 났지? 그래서 이 외딴 섬에 와서 네놈들의 불쌍한 자식놈들인 자라 새끼들을 잡아먹으며 가련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게 아니냐? 빌어 먹을 놈들, 불효막심한 짐승들아, 그래도 창피한 줄은 아느냐? 왜 낯짝을 내놓지 못하고 껍질로 덮어 씌워 놓았느냐?] 음장강 형제는 그가 말려들지 않자 소리높여 외쳤다. [주가야, 네가 오늘 육횡도로 온 것은 우리들과 무공을 겨루자는 것이냐, 아니면 혓바닥을 놀리려는 것이냐?] 주백통은 응수했다. [자라보다 못한 후레자식아, 누가 너와 혓바닥을 놀린다고 했느냐? 나는 물론 무공을 겨루려고 왔다. 그러나 너희 두 놈의 자라새끼들이 먼저 나에게 욕을 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음장강은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모래바닥에서 네가 감히 우리들에게 덤비지 못한다면 좋다. 우리 섬에 해라진(海螺陳)이라는 것이 있는데 너는 감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올 용기가 있느냐? 그렇다면 우리 형제는 너를 아버지라고 부르겠다. 감히 그럴 용기가 있느냐?] 주백통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나는 사람인데 어찌 자라새끼들을 아들로 삼겠느냐? 그만두자, 그만둬. 내가 오늘 육횡도에 온 것은 해라진이 아니라 바다진이라도 뛰어들어 너희 자라의 새끼들과 손자 새끼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함이다. 앞장서라.] 음장강은 무척 화가 났지만 문하 제자들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그리고는 수십 명이 육횡도의 한복판으로 이동했다. 주백통은 동해쌍괴의 뒤를 따라 한동안 걸음을 옮겨 놓았다. 갑자기 눈앞의 형세가 바뀌면서 한 높은 산이 나타났다. 원래 이 산이 육휭도의 한복판에 있는 주봉(主峰)이었던 것이다. 그 산자락에는 하나의 커다란 동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 크기가 성문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 안은 어두컴컴했다. 동해쌍괴와 그 문하 제자들은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음장강은 동굴 입구에서 주백통에게 손짓을 했다. [주가야, 이리 오너라. 이곳이 바로 해라진이다. 이 안에는 명당 자리가 있으니 너의 그 천한 뼈다귀를 묻는다면 자자손손 발복할 것이다.] 주백통은 소리내어 웃었다. [명당 자리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나. 내가 너희들의 뼈를 묻어주겠다.] 음장강은 그 말을 듣고는 냉소하더니 번쩍 몸을 날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주백통은 즉시 몸을 날려 뛰어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짖궂기는 해도 세심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음씨쌍괴의 이 해라진은 이름만 들어 봐도 틀림없이 소라껍질처럼 나선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길을 잃게 되면 나올 생각을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혼자 그들을 상대하는 이 마당에 도적놈같은 자들의 술수에 말려들지 말아야지!) 그는 뒷통수를 긁적긁적하며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중얼거렸다. [좋았어. 나에게 한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니 출구를 잃어버려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곳이 구곡십삼만(九曲十三灣)이라 해도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동굴 입구 쪽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가 막 동굴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어둠 속에서 휙, 하는 소리가 나며 한 대의 주먹이 비스듬히 옆으로부터 뻗쳐와 주백통의 늑골 아래에 있는 운태혈(云台穴)을 치려고 하는데 이 한 주먹에는 점혈의 수법이 내포되어 있었다. 주백통은 주먹으로 저격한 사람이 틀림없는 음씨쌍괴라고 생각하고 외쳤다. [어딜!] 그는 냅다 손을 뻗쳐서 상대방의 손목을 걸면서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와락 밀었다. 이것은 인호인림(引虎人林)이라는 초식인데 거는 것은 허초이고 미는 것이 실초였다. 주백통은 음씨쌍괴의 온몸이 고기껍질로 만들어진 옷으로 덮혀 있기 때문에 보통의 금나수법으로 맥이나 잡고 혈도나 찍는 방법은 그들에게 전혀 쓸모가 없고 오직 맹렬히 무겁게 격타해야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힘껏 후려친 것이었다. 어둠속에 숨어 저격한 사람은 음장강이었다. 그는 주백통이 반격하자 즉시 손을 거두고 발로 걷어 차려고 했다. 주백통은 막 동굴 안으로 들어와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눈은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었지만 귀는 여전히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발을 쳐들자마자 그는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주백통은 허리를 밑으로 낯추면서 두 손으로 무엇을 받쳐 드는 것처럼 둥글게 만들어 한번 벌렸다가 다시 합치면서 추창망월(推窓望月)의 금나수법으로 적의 발을 움켜쥐려고 했다. 음장강은 재빨리 발을 거두고 번개같이 주백통의 등뒤로 돌아가 왼손을 뻗어 금표현조(金豹現爪)라는 초식으로 그의 등뒤에 있는 풍부혈(風府穴)을 움켜쥐려고 하였다. 주백통은 뒤를 향해 비로 쓸 듯이 걷어찼다. 음장강은 왼쪽으로 몸을 날려 피하면서 부르짖었다. [주가야, 제이환(第二環)으로 진입하여라.] 일진의 가벼운 바람처럼 음장강은 주백통의 어깨를 스치고 안으로 들어서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어둠속으로 사라졌는데 어디로 내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백통은 눈을 껌벅거리며 다시 진기를 끌어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고 눈에 힘을 주고 사물을 살폈다. 약간의 윤곽을 살필 수 있었다. 그의 짐작대로 이 동굴 안은 정말 천연적인 소라 껍질처럼 생겨서 왼쪽으로 원을 그리고 오른쪽으로 꺾어지며 맴돌게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번 구비를 도는 곳마다 들쭉날쭉한 석순(石筍)들이 촘촘히 서 있는데, 칼날같기도 하고 톱날같기도 한 그 석순들은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주백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도적놈들은 나를 유인해서 출구를 못 찾도록 하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내가 어찌 너희들의 수작에 넘어가겠느냐?) 그는 천근추(千斤墜)의 무공을 써서 두 발로 땅바닥을 콱 눌렀다. 돌바닥에는 즉시 한 쌍의 발자국이 반 치 깊이로 찍혔다. 주백통은 발자국을 발길로 더듬어 보며 실소했다. [대사형은 눈을 밟아도 혼적이 남지 않는 경신술에 대하여 논하곤 했는데 오늘 나는 딱딱하고 견고한 돌바닥에 발자국을 남겼구나. 이 발자국을 도적같은 놈들이 칼을 가지고 와서 긁어도 없애기 힘들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생각하면서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구비를 한번 틀고 보니 그곳은 또 다른 하나의 동굴이었다. 주백통이 미처 똑똑히 그곳의 사물을 살피기 전에 등뒤에서 바람소리가 일면서 누가 달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몸을 돌려 공격을 받아낼 겨를이 없는 것을 느끼고 부득이 전진파의 내공 가운데 어(御) 요결을 운용하여 전신의 근육을 움츠렸다. 상대방이 몸을 숨기고 있던 곳이 가까웠고 또 너무 느닷없는 일격이라 주백통은 별수없이 몸으로 때우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등뒤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나며 음풍조(陰風爪)에 격중되었다. 다행히 그는 이미 방비를 하고 있었고 전신의 힘살이 이미 움츠러들어 있었기 때문에 적이 후려친 힘을 빌어 두둥실하니 저쪽으로 밀려갔다. 뒤에서 달려들어 그에게 일격을 가한 사람은 바로 음장하였다. 주백통은 앞으로 날려 가다가 곧 몸을 돌리면서 홍운탁일(烘云托日)이라는 일초를 펼쳐 음장하의 안면을 냅다 후려쳤다. 그러자 음장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손을 펼쳐 맹렬한 기세로 주백통의 손목 관절을 잡으려 했다. 주백통은 즉시 한 걸음 물러섰다. 두 사람은 어두운 동굴 안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기 시작했다. 이 일대의 동굴은 지형이 매우 복잡했다. 석순들이 삐죽삐죽 솟아있고 어지럽게 종형으로 줄지어 서 있었으며 땅바닥 역시 울퉁불통했다. 음장하는 그와 같이 복잡한 지세와 장애물들을 이용해서 해사공(海蛇功)을 전개했다. 석순이나 종유석의 틈바구니 안으로 날아 들었다가 뛰쳐 나오면서 주백통을 잡고 늘어지며 공격하는 것이었다. 해사(海蛇)는 바다속에 살고 있는 독사였다. 바다뱀에 물리면 치명적이었다. 어부들이 바다에서 본 바다뱀은 불과 서너 자 길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바다뱀이고, 깊은 바다속에 잠복하고 있는 바다뱀은 그 길이가 수 장이나 되었고 굵기는 커다란 기둥과 같았다. 어떤 것은 머리에 뿔이 돋아 있었고 아가미 옆으로 날개가 달려 있는 괴상한 놈들도 있어, 정말 요괴(妖怪)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바다뱀은 결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태풍이 몰아치기 전이나 기후가 갑자기 변할 때 드물게 나타나는데 마치 신룡(神龍)처럼 머리만 보이고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바다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어민과 항해객(航海客)들이 해괴(海怪)와 해룡(海龍)을 발견했다고 난리를 호들갑을 떠는 것이었다. 음장강 형제는 어릴적부터 바닷가에 살아 왔기 때문에 바다뱀이 헤엄을 치는 자세를 많이 보고 느낀 바 있어 톡특한 해사공을 창안한 것이었다. 이때 그는 종유석과 석순 사이에서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며 주백통과 수십여 합을 싸웠다. 주백통의 재간은 그보다 한수 더 높은 편이었으나 이와 같은 처지에서는 그를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주백통은 문득 깨달았다. (큰일이다. 이 녀석들은 분명히 차륜전법(車輪戰法)으로 나를 파김치처럼 지치도록 만들어 해라진의 깊숙한 곳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는구나.) 그는 문득 한 가지의 방법이 떠올라 연달아 2장을 쓸어내 음장하를 한 무더기의 석순 뒤로 몰아 붙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왼발을 들어 철소추(鐵掃鎚)의 재간으로 쓸어버리자 우지끈, 뚝, 와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몇 대의 석순을 깡그리 박살내서 조각난 돌을 반대편으로 날려보내 음장하를 때리도록 만들었다. 음장하는 뜻밖에 사태에 깜짝 놀라 옆으로 몸을 날려 도망쳤다. 주백통은 음장하가 도망치는 그 순간, 몸을 굽혀 땅바닥에서 바스러진 돌조각들을 움켜잡고 두 손을 한꺼번에 떨쳐냈다. 거의 두 웅큼이나 되는 돌멩이들은 마치 연주(連珠)처럼 세차게 쏘아져 나갔다. 주백통은 무공을 익히기 전에 에누리 없는 개구장이였다. 돌팔매질은 개구장이라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장난이었다. 나중에 무예를 익히게 되자 돌팔매질은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이르렀다. 주백통이 그 돌조각들을 벼락같이 던져내자 음장하는 단단히 쓴맛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그는 상어의 껍질로 만든 옷으로 몸을 보호했으나 주백통의 돌멩이는 날아드는 기운이 너무나 세차 바위에 구멍을 내고 나무를 관통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상어의 껍질로 만들어진 부드럽고 질기며 겉에 기름칠까지 해 놓은 옷 덕분에 주백통이 던진 돌멩이가 그의 몸뚱아리를 파고들 수는 없었지만 온몸이 저리고 아파 견디기 힘들었다. 음장하는 깜짝 놀라 숨을 곳을 찾았다. 그는 돌팔매질에 맞아 허둥지둥 괴성을 내지르며 몇번 몸을 날리더니 어느덧 석순들이 숲처럼 잔뜩 밀집해 있는 곳으로 들어가더니 종적을 감추었다. 주백통은 그와 같은 모양을 보자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그는 한차례 광소를 터트리다가 갑자기 캄캄한 동굴의 천정에서 가벼운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마치 새가 날개를 접는 소리 같기도 했고 어떻게 들으면 밤 고양이가 아주 나직하게 우는 소리 같았다. 주백통은 움찔해서는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니 캄캄한 동굴 천정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석순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다시 구비를 도는 모서리에 두 발자국을 찍어 남겼다. 그래도 그는 만족할 수 없어 백보낭(白寶囊) 안에서 약간의 송진 가루를 꺼내 땅바닥에다 뿌려 놓았다. 이와 같은 송진 가루에는 인(燐)의 성분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캄캄한 곳에 뿌려 놓으면 번쩍번쩍 희미한 광채를 내쏟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무예를 익힌 사람의 눈에는 뚜렷한 표식이 되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송진을 뿌린 후에 해라진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그는 7장 정도 나아간 후 다시 약간의 송진 가루를 뿌렸다. 다시 3O보 정도 걸음을 옮겼을 때 갑자기 맞은편에서 휙, 하는 소리가 나며 일진의 음산한 바람이 불어 오는데 차갑기가 얼음과 같아 주백통은 그 바람을 쐬자 몸서리를 쳤다. 본래 주백통은 전진파의 내공을 연마한 후에 정,신(精神)이 안정되어 결코 그와 같이 몸서리를 친 적이 없었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어, 어디에서 온 음풍인가? 이 육횡도에 자리잡고 있는 옛날 동굴에는 정말 무시무시한 것들이 많이 숨겨져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는 조금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잔뜩 긴장해서 앞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돌연 눈앞에 파란 빛이 번쩍하더니 동굴의 천정 위에서 살금살금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주백통은 그것을 살펴보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매달려서 떨어지고 있는 검은 그림자는 바로 목매달아 죽은 귀신이었다. 봉두난발에 두 줄기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리고 있었고 한 자 남짓한 혓바닥은 핏빛처럼 새빨갛게 턱 밑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거기다가 핏자국이 알록달록하게 하얀 삼베옷을 물들이고 있어 더욱 흉칙하고 공포스러웠다. 주백통은 그만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져 자기도 모르게 두 걸음 물러서며 부르짖었다. [아이쿠!] 그가 몸을 돌려 도망을 치려고 했을 적에 갑자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는데 그 사람의 말소리는 무척 뾰족하면서도 가느다란 것이 아닌가? [가짜 귀신이다.] 주백통은 전진교에서 손꼽히는 고수였다. 그 소리를 듣자 깨달은 바 있어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목이 졸려 죽은 귀신은 겉모습은 두려웠지만 표정이 딱딱한 것이 첫눈에 나무로 만들어진 꼭둑각시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기다랗게 빼 물고 있는 혓바닥도 가짜였다. 다만 그 꼭두각시가 입고 있는 한 벌의 하얀 삼베옷만은 진짜였다. 그런데 누가 가짜라고 주백통에게 알려준 것인지 주백통은 알 수가 없었다. 주백통은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은 도깨비를 무서워하지만 도깨비는 더욱 더 사람을 두려워하는 법이지. 이것 봐. 너는 그 위에서 매달려서 어쩌자는 것이냐? 사람을 놀라게 하겠다는 것이냐? 이리 내려와 나하고 놀자] 그 목을 매달아 죽은 귀신은 동굴 천정에 매달려 혼들거리다가 갑자기 손과 발을 한번씩 움직였다. 주백통은 그 가짜 도깨비의 손과 발에 검고 가느다란 끈이 매달렸는데 그 끝이 동굴 천정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줄로 인형을 움직이는 것이 분명했다. 주백통은 땅바닥에서 두 조각의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들고 소리쳤다. [내려와!] 손에 들었던 돌멩이를 내던지니 그 두 조각의 돌멩이는 쏜살같이 목을 매달아 죽은 귀신이 매달려 있는 동굴 천정으로 날아갔다. 다음 순간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그림자가 마치 낙엽처럼 동굴 천정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끈에 매달려 꼼지락거리던 가짜 귀신도 덩달아 떨어지니 땅바닥에서 쿵,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주백통은 껄껄 웃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목졸라 죽은 귀신이 땅바닥에 떨어지자 쩡쩡, 하는 금속성이 들리면서 귀신의 몸에서 일곱, 여덟 가지의 암기가 쏜살같이 쏟아져 나왔다. 싸늘한 광채를 눈부시게 번뜩이며 주백통에게 날아들었다. 주백통은 하마터면 그 암기를 맞을 뻔했으나 즉시 지당공(地堂功)을 써서 몸을 땅바닥에 몸을 던져 뒹굴었다. 그가 빨리 피한 셈이고 또 목졸라 죽은 귀신이 땅바닥에 떨어졌던 관계로 그 몸속에서 쏘아진 암기들은 정확한 겨냥을 잃고 있었다. 그리하여 획휙, 하는 소리가 몇번 나면서 주백통의 신변을 스칠 듯이 지나가 석순과 동굴벽에 부딪쳤다. 땅, 땅, 땅, 하는 소리가 잇따라 들리면서 불꽃이 튀는 것으로 보아 이 암기가 어느 정도 세찬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백통은 총망중에 몸을 돌리며 일장을 들어 장풍을 쏟아 그 목졸라 죽은 귀신을 후려쳐 석순의 밭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러자 우지끈,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나무로 만든 가짜 몸뚱이가 몇 토막으로 부러지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그제서야 몸을 벌떡 일으켜 똑똑히 살펴보니 그 목을 졸라 죽은 귀신은 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안쪽에는 구멍이 있었다. 그리고 가슴 부위에는 적지 않은 용수철이 장치되어 있었는데 암기를 발사하는 장치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꼭둑각시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암기를 자세히 살펴보니 일종의 특별히 고안하여 만든 삼릉비정(三稜飛釘)이었다. 시퍼런 빛이 나는 것이 분명 지극히 무서운 독약을 묻혀 놓은 것 같았다. 그는 싸늘히 코웃음을 쳤다. [죽어 마땅할 도적놈들 같으니. 사람을 놀래키는 목졸라 죽은 귀신을 만들고 거기에 암기까지 장치해서 사람을 암살하려고 하다니, 정말 고약하구나!] 그는 목을 매달고 죽은 귀신이 떨어진 곳 부근에 한 명의 잿빛의 고기껍질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백통은 즉시 몸을 날려 다가가 그 사람을 잡아 일으켰다. 이 사람의 정수리에는 주먹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주백통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그렇게 된 것으로 허연 골수가 홀러 내리고 있었다. 주백통이 그를 붙잡아 일으킬 때만 해도 한가닥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일으키자 사지를 부르르 떨더니 단말마의 신음 소리를 내뱉고는 그대로 황천객이 되고 말았다. 주백통은 무공을 연마한 이래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원래 전진파의 교규(敎規)는 사람의 목숨을 헤치는 일을 금하고 있었다. 과거에 청허산인이 그랬고 지금의 중양진인 역시 똑같았다. 그들은 명성을 날린 이래 한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 주백통은 오늘 육횡도에 와서 자기의 솜씨를 뽑내다가 그만 계율을 어기고 만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그 던진 석탄자(右彈子)가 그토록 흉악하고 매서워 상대방의 상어가죽으로 만든 봉두 모자를 관통하여 그 사람의 골통을 부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물론 화가 나서 던졌지만 막상 사람이 죽은 것을 보니 최책감이 느껴져 시체를 땅바닥에 내던지며 욕을 했다. [이 도적놈아, 누가 너보고 귀신처럼 꾸미고 사람을 놀라게 하라고 했느냐? 그 바람에 이 나으리가 살계를 범했지 않느냐?]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획,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일진의 음풍이 불어와 주백통의 살갗에 소름이 끼치게 했다. 주백통은 깜짝 놀라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날리고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음풍이 불어오는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원래 이 동굴 천정에는 한 줄의 정제한 석안(石眼)이 있었다. 이 석안은 바깥과 통하는 모양이고 또한 무척 긴 모양이었다. 그 동굴은 매우 길게 이어져 산꼭대기로 통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바람이 들어와 몇번이나 선회하는 사이에 얼음장같은 음풍으로 변한 모양이었다. 이것은 흔하지 않은 현상이었다. 이런 현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사천 아미사(峨嵋山)의 뇌신동(雷神洞)이었다. 유람객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음풍이 제법 세차게 불어와 횃불이 꺼질 지경이었다. 아미산의 산속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그 동굴 안에는 옛날 신선이 묶어 놓은 나쁜 짓을 한 용이 한 마리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는 와전된 것이고 위에서 말한 바와 똑같은 이치일 뿐이다. 주백통은 음풍의 비밀을 알아내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계속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왼쪽의 석순 밭에서 비조처럼 빠르게 손에 한가지 기이한 모양의 무기를 든 자가 달려들며 주백통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달려드는 기척을 듣고 고개를 숙이며 선풍퇴를 전개해 뒤쪽을 향해 쓸 듯이 걷어찼다. 그런데 그 인영(人影) 역시 잿빛의 가죽 옷을 입은 사람인데 솜씨가 범상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무기는 강철로 만들어진 쇠사슬이었다. 철커덕, 하는 소리와 더불어 주백통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주백통은 선풍퇴를 전개해 뒤로 쓸 듯이 발길질을 하려고 했는데 그 자는 쇠사슬을 쓸어 치는 힘을 빌어 몸을 위로 솟구쳐 정확하게 주백통의 일격을 피하는 것이었다. 주백통이 손을 쳐들어 공격을 가하려고 했을 때 별안간 사방에서 휙획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네 사람이 튀어 나왔다. 물고기 껍질로 만든 모자를 뒤집어 쓰고 물고기 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네 사람이 손에 사용하고 있는 무기는 모두 강철로 만들어진 쇠사슬인데 일진의 선풍처럼 급격히 공격해 왔으며 주백통을 한복판에 두고 에워싸는 것이었다. 이 네 명은 모두 동해쌍괴의 제자들이고 육횡도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현광(玄光), 현명(玄明), 부생(浮生), 부진(浮塵)이라 하는데 모두 어부 출신이었다. 음씨쌍괴는 옛날 그들의 부모를 죽이고 그들을 섬으로 잡아와 어릴적부터 부양해 키워 제자로 삼은 것이었다. 그들 네 사람은 매일과 같이 섬의 모래바닥에 몸을 숨기는 재간을 익히고 있었다. 조금 전 주백통이 처음 육횡도에 오르게 되었을 적에 잿빛 물고기 가죽옷을 입고 있던 네 사람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해라진의 제4관을 지키는 입장에서 주백통과 싸우게 된 것이었다. 그들이 쇠사슬로 펼치는 무공은 바로 해사편(海蛇鞭)이라는 것이었다. 일단 펼쳐내면 마치 네 마리의 괴상한 구렁이들처럼 아래 위로 날며 상대방을 한가운데 두고 덮어 누르듯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쇠사슬을 펼쳐내는 네 사람의 초식이 기이한 것을 보고 감히 얕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자기는 전진교의 장문 사제인데 이 네 명의 후생소배(后生小輩)들의 손에 패한다면 그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는가? 그는 감히 맨손으로 상대방과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허리에서 한 자루의 검을 뽑아 들었다. 주백통은 육횡도에 도달한 후 이번에 처음으로 검을 뽑아 든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가 그 검을 휘둘러 전개한 것은 전진파의 태을검법(太乙劍法)이었다. 그 순간 한가닥 서늘한 광채가 아래 위로 구불텅거리며 솟아 오르더니 삽시간에 한가닥의 은빛 무지개로 화해서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그리하여 네 사람의 쇠사슬을 밀어내고 10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어느덧 그들을 허둥거리도록 만들었다. 주백통은 숭산에서 20년 동안 고된 수련을 쌓았는데 네 사람이 어떻게 주백통의 적수가 되겠는가? 30초도 싸우기 전에 주백통은 갑자기 한소리 호통을 내지르더니 검의 광채를 번뜩이는 가운데 현광의 쇠사슬을 밀어내고 검끝을 한번 돌려 내려 긋자 쫙,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광의 왼쪽 어깻죽지에 상처가 생겨났다. 선혈이 그 찢어진 상처에서 홀러 내렸고 현광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말았다. 주백통은 신위(神威)를 크게 떠쳐 다시 현명과 부생 두 사람의 쇠사슬을 동강내고 여세를 몰아 그들의 어깻죽지와 다리에도 상처를 냈다. 주백통은 이 싸움에서 하나의 경험을 얻게 되었다. 동해쌍괴 본인들과 제자들의 상어 가죽옷은 결코 단단하여 꿰뚫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주먹질이나 발길질, 또는 곤봉 따위로는 아무리 때려도 절대로 상어 가죽옷에 손상을 입힐 수 없는 것이었다. 상어의 가죽옷이 질기고 겉에 기름을 먹여 놓았기 때문에 상대방의 힘을 미끄러뜨리고 무거운 것을 피하고 가벼운 것을 받아들이는 기능을 지니고 있어서 주먹이나 막대기로는 그들에게 어떤 손상을 입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칼이나 검같이 뾰족하고 예리한 무기로 맹렬히 찌르면 상어 가죽옷도 감당해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백통은 조금 전 모서리가 날카로운 돌조각을 던져 꼭둑각시를 조종하던 한 놈을 때려 두개골을 부수어 뇌수가 홀러 죽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전진파의 태을검법으로 현광 등 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었다. 이들 네 사람은 육횡도의 제자들인데 주백통의 검법이 무서운 것을 보고는 다시 감히 싸움에 미련을 두지 못하고 휙, 하니 휘파람을 불더니 몸을 돌리고 나는 듯이 철수하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음씨쌍괴 휘하의 제자를 붙잡아 위협해서 육횡도의 모든 것을 알아낸 속셈이었기 때문에 네 명의 제자들이 낭패해서 도망을 치는 것을 보자 몸을 날려 뒤따라가 가장 뒤쪽에서 도망치는 녀석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어두운 그늘속에서 획, 하는 소리가 나며 한 사람이 달려 나왔다. 이 사람은 몸에 짙은 남색의 가죽옷을 입고 있었는데 체구가 무척 장대했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않고 두 손을 흔들더니 쇠붙이로 곧장 주백통의 안면을 그어 오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너무나 느닷없이 당한 일이라 주백통은 하마터면 그의 공세에 당할 뻔했다. 하지만 무공을 상승의 경지에 연마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있다. 그 사람이 막 주백통 앞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을 적에 주백통은 어느덧 몸을 뒤로 젖히면서 백원도간(白猿跳澗)의 자세로 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남색의 가죽옷을 입은 사람은 솜씨가 무척 빨랐다. 공격이 빗나가자 재빨리 몸을 날려 뒤쫓아 왔으며 두가지의 시커멓고 날이 선 무기를 가슴 앞에 세우고 혼들더니 교차하며 찔러 왔다. 주백통은 이때서야 상대방이 사용하는 것이 한 쌍의 야릇하기 이를데 없는 무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 무기는 마치 게의 앞다리처럼 자유자재로 열었다가 닫았다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철로 만들었고 새카만 칠을 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날에서 짙은 광채가 빛나는 것을 보면 분명 무서운 독약을 발라 놓은 것이 틀림 없었다. 이 한 쌍의 무기는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손이 손목 부위에서 잘려 나가고 그 무기를 손목에 이어 붙인 것이었다. 사람과 무기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있어 마음 먹은대로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르면 무기도 덩달아 이르니 민활하기 이를데 없었다. 주백통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와 같이 이상야릇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즉시 철판교(鐵板橋)의 신법을 써서 몸을 뒤로 젖히면서 선풍퇴로 쓸 듯이 걷어차려고 했다. 그 괴인은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백통은 한수에 적을 물리치자 즉시 태을검법을 펼쳐 공작개병(孔雀開屛)이라는 일초를 펼쳐 휙, 하니 검을 휘둘러 탁자만한 크기의 검광을 떨쳐내며 그 사람의 머리와 얼굴을 찔러갔다. 그 사람은 몸뚱이를 낮추고 좌우 양손의 쇠집게를 번개같이 아래에서 위로 내밀었다. 주백통은 그의 수법에 걸려들 뻔했으나 재빨리 몸을 날려 피하고 욕을 했다. [후레자식, 네가 한 마리의 게냐?] 그 사람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이것은 방게의 재간이다. 나의 한 쌍의 무쇠집게는 바로 게의 집게다. 봐라!] 하는 소리와 더불어 그는 땅바닥으로 몸을 업드리더니 좌우 양쪽의 집게를 서로 교차시키면서 쉭쉭쉭, 잇따라 네번을 휘두르며 정말 바다의 게가 집게를 벌리고 달려드는 것처럼 주백통의 아래쪽을 세 갈래로 나누어 공격해 왔다. 주백통은 발끈 대노해서 호통쳤다. [구린내 나는 도적 같으니, 뭐가 방게의 잡게 손이고 자라의 집게 손이냐? 이 주 나으리는 너의 자라 집게를 잘라버리고 말겠다.] 그는 태을검법을 펼쳐 은빛 무지개를 그려내며 몸을 보호했다. 그래서 적은 함부로 한 쌍의 집게를 가까이 디밀지 못했다. 10여 초가 지나자 주백통은 왼쪽으로는 풍뢰교격(風雷交擊), 오른쪽으로는 오강벌계(吳剛伐桂)라는 일초를 전개했다. 검로(劍路)는 이리 돌고 저리 돌면서 되풀이하여 찍어대고 있었다. 그와 같은 수법으로 그는 착실하게 적의 두 팔을 자르려고 했다. 괴인의 해겸공(蟹鉗功)이 기묘하긴 했으나 역시 방문좌도의 무학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전진파의 정통파 검법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15초를 겨루자 어느덧 손발이 어지러워지게 되었다. 주백통은 그의 빈틈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일검을 휘둘렀는데 바로 영풍약영(迎風掠影)라는 일초였다. 쨍그렁, 소리와 함께 한 쌍의 집게를 밀어내는 동시에 검화가 그려지는 곳에 금사반수(金蛇盤樹)라는 일초가 펼쳐지면서 적의 기다란 쇠집게가 달려 있는 왼팔을 잘라버렸다. 선혈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적은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주백통은 그가 고통을 못 이기고 기절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자는 팔이 잘린 후에도 훌쩍 몸을 날리더니 일곱, 여덟 자 정도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주백통의 머리 위를 후딱 뛰어 넘어, 단 한번 몸을 날렸을 뿐인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닌기 이렇게 되자 주백통은 정말 뜻밖이라 탄식을 불어내었다. [아, 저 녀석은 팔이 잘렸는데도 잘도 도망치는구나. 제법이다.] 그는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덧 그는 동해쌍괴가 펼쳐놓은 해라진의 나선형 한복판에 이르게 되었다. 주백통이 나선진의 중심이 이르자 갑자기 껄껄 웃는 광소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우하하하...] 주백통은 음장강과 음장하 형제의 웃음 소리임을 알고 재빨리 살펴보니 원래 동굴 한복판에는 천연적으로 생겨난 커다란 소라의 껍질같은 것이 있고 그 한복판에는 백여 대의 석순이 심어져 있었다. 석순들은 높낮이가 달라 들쑥날쑥 정제하지 못했는데 음장강과 음장하 두 사람은 각기 한 석순의 위에 서서 주백통을 향해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주백통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욕을 했다. [이 도적놈들아, 왜 웃느냐? 너희들의 해라진은 이 나으리에 의해 거의 다 깨뜨려졌는데 너희들은 뭐가 그리 좋아서 웃고 있느냐?] 음장강은 주백통의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즉시 웃음을 멈추고 냉랭히 대꾸했다. [주가야, 우리들은 네가 극락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도 그 길로 가지않고 지옥은 문이 없는데도 한사코 뛰어드는 것을 보고 웃는 것이다. 네가 일단 이곳으로 들어서게 된 이상 살아서는 왕중양을 만날 생각을 말아라. 네가 해라진의 중심에 이른 것만 해도 대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잠시 후면 뼈마디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니 이야말로 애석한 일이 아니겠느냐?] 주백통은 대노했다. [개방귀 뀌지 말고 검을 받아랏!] 몸을 날려 곧장 음장강이 서 있는 석순 쪽으로 달려갔다. 음장강은 그와 겨루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주백통이 검을 들고 달려들자 즉시 몸을 뒤틀며 잠자리가 물을 차는 듯 날렵한 신법으로 뛰어 올랐다가 내렸다 하면서 잇따라 다섯 대의 석순을 건너 뛰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호통을 질렀다. [어디로 도망치느냐?] 그는 보검을 쳐들고 아래쪽에 있는 석순 위를 디디려고 했다. 그의 두 발이 막 석순의 꼭대기에 닿는 그 순간에 갑자기 음씨쌍괴가 손뼉을 치며 부르짖었다. [쓰러져라!] 회한하게도 주백통이 발로 디딘 석순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미처 진기를 돋구고 제대로 서기도 전에 갑자기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주백통은 즉시 중심을 잃고 실족하여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그 순간 즉시 허리를 비틀며 두번째의 석순 위로 올라서려고 했다. 한데 이 석순 역시 움직이는 것이었다. 주백통의 발끝이 막 그 석순에 닿자마자 이 석순도 왼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 석순이 비스듬히 넘어지자 근처에 있던 예닐곱 대의 석순마저도 줄지어 쓰러졌다. 그 바람에 주백통의 두 발은 허공을 디디게 되어 수직선으로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 줄지어 서 있던 석순들은 모두 가짜였다. 석순이 어떻게 가짜가 있을까? 사실 이들 석순은 본래 진짜였다. 다만 한 토막 한 토막의 석순을 허리께로부터 잘라 두 토막으로 나누어 놓았다. 욋쪽의 반토막을 세워 놓고 밑둥은 한 가닥 현(弦)으로 매어 놓았다. 이 현들은 동굴 벽을 뚫고 다른 한 칸의 밀실로 통해 있었으며 그 밀실에는 육횡도의 십여 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모든 석순마다 한가닥의 현이 연결되어 있었다. 적이 어느 석순 위에 오르게 되었을 적에 그 석순을 담당하고 있던 제자가 현을 당기기만 하면 석순은 즉시 옆으로 쓰러지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석순마다 이 모양이니 아무리 이곳에 뛰어든 사람의 경신법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아래쪽에 있는 늪 속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석순에게 수작을 부려 놓았는데 음장강과 음장하 두 사람은 어떻게 석순 위에 그대로 서 있을수 있으며 쓰러지지 않았을까? 원래 백여 대나 되는 석순들 가운데 열 대 정도는 허리도 자르지 않았고 어떤 수작도 부리지 않았다. 이와 같이 잘라 놓지 않은 석순에는 남이 알 수 없는 표식을 남겨 놓은 것이었다. 음장강 형제들은 척 보면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비밀 표식이 되어 있는 석순으로 몸을 날렸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주백통이 들이닥치자 동해쌍괴는 그를 자극해서 그로 하여금 생각도 해보지 않고 석순 위로 뛰어 오르도록 만들었으니, 주백통이 그 술수에 말려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주백통의 몸뚱이가 떨어진 곳은 바로 진흙이 잔뜩 깔려 있는 늪이었다. 진흙은 너댓 자의 깊이였다. 일단 떨어지면 사람의 몸뚱이는 빨려들어 자꾸 들어가기 때문에 몸을 뽑아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주백통 역시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사형 왕중양으로부터 진흙이나 부사(浮沙), 설갱(雪坑)같은 데 빠졌을 때는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절대로 손발을 함부로 움직이면서 허둥거리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더욱 더 깊이 빠져 머리통마저도 진흙이나 유사 속에 묻혀 질식해서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경신법을 써서 몸을 위로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한 치 한 치 몸을 뽑아 올리다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물건이 있으면 단단히 움켜잡고 몸을 솟구쳐 위로 오르면 되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진흙의 늪에 빠졌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고 즉시 진기를 돋구고 몸을 똑바로 진흙 바닥 위에 세웠다. 이렇게 되자 다리 부분만 진흙속에 파묻히게 되었고 그의 몸뚱이 태반은 여전히 진흙 바닥으로 나와 있게 되었다. 음씨쌍괴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음장하는 즉시 소리 높여 외쳤다. [제자들아, 빨리 칩룡(蟄龍)을 내보내라!] 주백통은 냅다 욕을 해댔다. [뭐가 칩룡이냐? 주 나으리는 너희에게 한 턱 내겠다!] 그는 두 손으로 한 줌의 진흙을 움켜잡고 두 손을 홱 뿌려 젖혔다. 진흙은 맹렬한 기세로 휙, 하는 소리를 내며 음씨쌍괴를 향해 날아갔다. 음씨쌍괴는 양쪽으로 번쩍 몸을 날리게 되었고 그 진흙은 저쪽에 떨어지고 말았다. 음장강은 화가 나 욕을 했다. [이 주가야, 너는 그 진흙 웅덩이의 저쪽을 보아라. 그 어떤 물건이 있는지 보란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너는 죽어도 뼈를 묻힐 곳이 없을 것이다.] 주백통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진흙 웅덩이의 한쪽에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일곱, 여덟 마리의 형체가 도마뱀과 같은 파충류가 기어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이들 파충류는 길이가 일 장이나 되었다. 기다란 주둥이에 허연 이빨이 톱날처럼 서 있고 예리한 발톱은 톱날을 연상시켰다. 그 놈들은 진흙 바닥에서 기는 것도 무척 빨라 삽시간에 2장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원래 주백통이 본 파충류는 그 당시 칩룡이라고 불렀으나 또 어떤 사람들은 악룡(鰐龍)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바로 악어였다. 중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동물이었다. 그러나 천 년 전 중국의 남쪽 지방에도 악어가 서식하고 있었다. 당나라 때만 하더라도 한문충공(韓文忠公)이 조주(潮州)에서 악어에게 제문을 올리지 않았는가? 그가 그 한 편의 악어를 상대로 한 제문을 올리고 조주 동문(東門)의 연못에 그 제문을 던지게 되자 광동성에 있는 모든 악어들이 남쪽으로 칠백 리 정도 옮겨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황당한 전설에 지나지 않지만 악어가 그 당시에 중국에서 상당히 번식하며 인축에 해를 입힌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동해쌍괴는 이 석순이 있는 늪을 악룡담(鰐龍潭)이라 불렀는데 사람을 복건성과 광동성 각처로 보내 많은 악어들을 구입해다가 이 늪속에 넣고 키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 악어들은 평소에는 늪의 한쪽에 있는 하나의 조그만 연못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가 늪에 빠지면 악어를 돌보고 있는 제자가 철책을 들어올려 악어를 옆에 있는 늪속으로 몰아 넣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중원에서 자라고 컸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와 같이 추악한 짐승을 보지 못했기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놀라고 있는데 앞장을 선 두 마리의 악어가 어느덧 문짝처럼 넓적한 주둥이를 벌리고 톱날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진흙을 헤치면서 맹렬히 주백통에게 돌진해 왔다. 커다란 입으로 한입에 주백통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주백통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한 자루의 보검은 그가 늪으로 떨어질 때 놓쳐버렸던 것이다. 지금은 맨손인데 어떻게 그와 같이 흉악한 짐승을 상대할 것인가? 다급해진 주백통은 즉시 대력금강권법(大力金剛拳法)을 펼쳐 맞은편을 향해 권풍을 뻗쳐내 그 두 마리의 거대한 악어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의 이 금강권은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다. 권풍이 이르는 곳에 펑,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게 되었고 진흙탕에서 다가오던 두 마리의 커다란 악어는 허공으로 날아 올라 철썩, 하니 늪의 언저리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들 두 마리의 커다란 악어는 장풍에 세차게 얻어 맞자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주백통이 그와 같이 힘을 내쏟게 되자 몸뚱이가 즉시 진흙 속으로 빠져들었다. 조금 전에는 허벅지까지 차 오르던 진흙이 이제는 아랫배와 수평을 이루었다. 두 마리의 악어를 죽이기는 했으나 그 자신이 도리어 한 자 정도 진흙 속에 빠졌으니 다시 두대의 주먹을 내지른다면 주백통은 머리통까지 진흙속에 빠져들 것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악어에게 물려 죽지 않을는지 몰라도 진흙 속에 파묻혀 질식해 죽을 것이다. 주백통은 자기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머지 여섯 마리의 비교적 작은 악어들은 무지한 파충류인지라 자기들의 동료가 죽어갔는데도 여전히 꼬리를 흔들어 젖히면서 주둥이를 잔뜩 벌리고 허연 이빨을 드러낸 채 주백통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백통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하늘이 나의 재능을 질투하여 죽게 만드는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늪의 가장자리에서 갑자기 쿵, 쿵, 하는 소리가 몇번 울려 퍼졌다. 누군가 땅바닥에 쓰러지는 모양이었다. 음장강과 음장하 형제는 무척 의아해서 재빨리 달려가며 소리쳤다. [게 누구냐?] 바로 이때 늪의 가장자리 욋쪽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쉬쉭쉭, 하는 소리와 더불어 잇따라 열 몇가닥의 금빛 광채가 진흙 바닥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그 금빛 광채들은 정말 공교롭게 하나같이 악어의 눈동자를 적중시켰다. 이렇게 되자 진흙 바닥을 기어 주백통에게 달려들던 일곱, 여덟 마리의 크고 작은 악어들은 모두 다 눈이 멀고 말았다. 파충류들은 고통스럽고 화가 나는지 마구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마구 기고 할퀴며 기다란 꼬리를 이리저리 쓸어댔다. 삽시간에 그들끼리 머리와 머리를 부딪치고 꼬리와 꼬리로 부딪치는 등, 한데 어우러져 나뒹굴며 서로 깨물고 덮쳤다. 이렇게 되자 늪속에서 대번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다. 뜻밖의 사태에 주백통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의 사형 왕중양이 찾아온줄 알고 목청을 높여 큰소리로 불렀다. [사형, 사형 정말 때 맞추어 와주셨군요!] 그러나 소리를 내어 부르짖게 되자 그의 몸뚱이가 자기도 모르게 반 자나 밑으로 꺼져 들어갔다. 한편 음씨쌍괴가 나는 듯이 늪의 다른 한쪽으로 달려가 보니 악어를 돌보는 제자들이 누구에게 해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제자들은 혈도를 찍혀 웅덩이 가에 누워 있었는데 몸이 뻣뻣하게 굳어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본래 동해쌍괴가 거둬들인 제자들은 하나같이 몸에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점혈 수법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가죽옷을 격하고도 남에게 혈도를 찍혔으니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제자들의 혈도를 찍고 악어때가 서로 죽고 죽이도록 유도하는 등 두번이나 솜씨를 보인 후에도 종적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음장강은 울분이 치밀어 올라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어디서 온 녀석이 감히 우리 제자들을 암산했느냐? 만약에 주가의 패거리라면 숨어 있지 말고 썩 굴러 나와 우리 형제들과 승부를 겨루도록 하자.] 잇따라 두번이나 외쳤으나 상대방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주백통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 나를 구해 준 사람은 결코 사형이 아니겠구나.) 왕중양은 주백통이 육횡도로 가는 것을 상관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었다. 주백통이 몇 명의 사질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으나 그는 거절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왕중양이 결코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만약에 이곳에 와 있다면 일파의 장문인인 그는 정정당당하게 해라진 안으로 들어섰을 것이며 이렇게 모습을 감추지 않을 것이었다. 주백통은 나타난 사람은 틀림없이 왕중양이 아니고 다른 무림의 고수일 거라고 판단했다. 주백통은 갑자기 가지가 해라진 안으로 들어서고 제1환에서 발자국을 찍는 그 찰나에 갑자기 머리 위에 바람을 가르는 기척이 일어났으나 그 소리를 듣고도 그 자신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제3환에서 목을 매달아 죽은 가짜 귀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그 누가 자기의 뒤쪽에서 그것은 가짜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는 분명히 달리 사람이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기를 따라 깊이 해라진으로 들어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행동이 무척 이상하여 친구인지 적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백통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연신 부르짖었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구나!] 음장강은 몇번이나 소리쳐 불렀으나 상대방의 대답을 들을 수 없자 분노했다. 음장하가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틀림없이 주가와 한패거리이고 주가가 이끌어들인 게 분명하다. 우리들이 먼저 저 주가를 생매장한 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그는 늪가에서 커다란 바위를 하나 들어 진흙 속에 빠져 있는 주백통에게 던졌다. 주백통은 속으로 야단났다고 외쳤다. 그 커다란 바위가 떨어지면 자기가 두 손으로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바위에 얻어맞아 머리가 깨지고 피를 홀리게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곤죽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손을 써서 받으면 자기의 몸이 진흙 속에 한두 자 파묻히는 결과가 되어 머리통만 진흙 위에 남게 될 것 같았다. 이 위기일발의 순간, 다시 뜻밖의 변화가 일었다. 그 커다란 바위가 음장하에게서 던져지고 주백통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려는 그 순간, 늪의 왼쪽에서 갑자기 획, 소리가 나면서 한 명의 청의인이 불쑥 나타났다. 이 청의인(靑衣人)은 얼굴에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면구(面具)를 쓰고 있었는데 훌쩍 몸을 날려 날아오더니 날아가는 큰 바위를 허공중에서 막아섰다. 청의인은 왼손을 뻗쳐서 그 큰 바위를 한번 와락 밀었다. 철썩,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백여 근이 됨직한 맷돌같은 큰 바위가 그가 밀치는 바람에 한번 방항을 틀더니 주백통의 머리 위를 지나 첨벙, 하는 소리를 내며 주백통과 멀지 않은 진흙에 떨어져 진흙이 마구 사방으로 튀었다. 진흙 속에 빠져 있는 주백통은 진흙이 튀어 온몸과 얼굴에 진흙을 흠뻑 뒤집어 썼지만 늪가에 서 있는 동해쌍괴에게도 적지않게 진흙이 튀어 몸이 더럽혀지게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동해쌍괴는 놀라 멍청해졌다. 음장하가 던진 그 커다란 바위는 2백 근이나 나가고 바위 자체도 연자방아처럼 컸다. 그런데 청의괴객은 단 일장을 후려쳐서 그 큰 바위를 허공으로 날려보내 저쪽으로 떨어지게 했으니 그 팔힘이 얼마나 놀라운지 짐작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는 그 바위를 떨어뜨린 후 몸뚱아리가 진흙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서 한번 방향을 틀더니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늪가로 올라서게 되었고 삽시간에 종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주백통은 튀는 진흙물에 얼굴과 옷을 더럽히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서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커다란 바위가 청의괴객에게 밀려서 떨어진 곳이 바로 그의 곁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백통이 손을 뻗치면 닿을 수 있는 위치였다. 주백통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두 손으로 커다란 바위를 잡고 눌렀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온 몸뚱아리를 진흙 속에서 곧장 뽑아 올렸다. 원래 무예에 정통한 사람들은 온몸에 일종의 기경(氣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무조각만 있어도 그 힘을 빌어 몸을 날릴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에 의지해서 몸을 일으키는 일은 너무나 수월한 일이었다. 청의괴객이 그 커다란 바위를 자기의 곁에다 떨어뜨린 것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명대를 던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주백통은 하반신이 진흙속에 빠져 있었으나 그의 일신에 간직한 내공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손으로 그 바위를 잡고 누르자 그 큰바위는 진흙 속으로 약간 들어가게 되었으나 그로 인해 그는 몸을 뽑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주백통은 두 발로 바위를 살짝 디디고 획, 하는 소리와 더불어 늪의 가장자리로 뛰어 올랐다. 주백통이 이와 같이 곤경에서 벗어나자 더욱 놀란 음장강과 음장하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날려 달려들어 그를 다시 늪속으로 빠뜨리려고 했다. 주백통은 이때 미친 호랑이처럼 노해서 호통 소리를 내지르며 휙휙, 하니 동해쌍괴의 정면을 향해 2장을 후려쳤다. 음씨 형제는 팔을 들어 막았다. 세 사람은 마치 수레바퀴가 도는 것처럼 늪가에서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은 세번째로 손을 쓰게 된 셈이었다. 주백통은 무척 분노했기 때문에 전진파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악독한 초식을 모조리 펼쳐내었다. 태을권에다가 흡인력을 돋구고 눌러대며 착실히 공격을 했는데 대력금강장의 공력까지 섞어 음씨쌍괴의 요혈을 노리고 마구 후려쳤다. 음장강과 음장하의 재간은 약하지 않은 편이지만 청의괴인이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에 비록 자기들과는 정면으로 싸운 것이 아니지만 언제라도 훼방을 놓을 가능성이 있어,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주백통의 광풍폭우와 같이 맹렬히 퍼붓는 공세에 그들 두 사람은 도저히 감당해 낼 길이 없었다. 30합을 싸우기도 전에 주백통은 갑자기 해저침(海底針)이라는 일초를 써서 음장강의 왼쪽 어깨를 후려치려고 들었다. 음장강은 그의 장풍이 무겁고 맹렬한 것을 보자 감히 맞받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패왕사갑(覇王似甲)라는 일초를 써서 몸을 낮추어 번쩍 피했다. 한데 주백통의 그와 같은 손찌검은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치는 수법이었다. 벼락같이 그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운룡도수(云龍掉首)라는 일초를 펼쳐 두 손을 일제히 뻗어 내었다. 펑펑,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의 2장은 음장하의 몸에 적중되었고 음장하의 몸뚱이는 그의 일장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뒤로 후딱 날려가게 되었으며 하마터면 늪안으로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그의 솜씨는 비교적 민첩한 편이라 허공에서 진기를 돋구고 몸을 두둥실 날려 늪가에 내려섰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역시 혼비백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백통은 다시 일장을 뻗쳐내 음장강을 쓸어치려고 들었다. 음장강은 그가 대력금강장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히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몸을 비틀어 1장 밖으로 몸을 날리며 부르짖었다. [사태가 위급하다.] 동해쌍괴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악룡담을 돌아 해라진의 다른쪽으로 도망쳤다. 주백통은 동해쌍괴가 도망치는 것을 보자 욕을 했다. [이 도둑놈의 새끼들, 어디로 도망치느냐?] 그는 그림자처럼 뒤따라 붙었다. 그는 쌍괴가 한 석순의 밭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훌쩍 몸을 날려 덮쳐들려고 했다. 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우수수, 하는 소리가 나면서 많은 양의 재와 모래가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동굴의 천정이 무너지는 줄 알고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하면서 한옆으로 몸을 날려 1장 밖으로 물러섰다. 한데 그의 발뒤꿈치가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머리 위의 잿빛 모래가 잇따라 마구 무너져 내렸다. 아무래도 온 동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주백통은 흙모래가 어지럽게 난무하는 가운데 연신 몸을 날려 10여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제서야 가까스로 흙모래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액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정경은 희부옇게 보일뿐이었다. 그는 동굴 천정이 무너져서 흙모래가 떨어진 것으로 알았다. 그러니까 그는 일종의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동해쌍괴의 간계 가운데 하나였다. 해라진 중심 일대의 동굴 천정은 판자대기로 만들어졌고, 그 받침대의 위에는 대량의 잿빛 모래를 쌓아 두었다. 물론 이 모래는 석순과 종유석을 박살낸 미세한 돌가루였다. 일단 적이 잠입하게 된다면 동해쌍괴의 제자가 장치를 누르기만 하면 나무판대기가 아래로 쳐지면서 그 위에 쌓여 있던 흙모래가 쏟아져 내리도록 하여 나타난 사람을 생매장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관에도 약점은 있었다. 한 조각 한 조각의 판대기를 한번에 열어 젖힐 수 없고 다만 한 토막 한 토막씩 이동해서 받침대 위에 쌓은 잿빛의 흙모래를 쏟아야 했기 때문에 기세가 세차지 못했다. 주백통은 조금 전에 악룡담에서 한차례 커다란 위험을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훨씬 침착해져 있었고 연신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동해쌍괴의 비사진(飛沙陳)은 결코 그를 해치지 못했으며 또한 그를 비사진에 가두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가 연신 뒤로 물러난 결과 들어 온 길을 찾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깊이 해라진의 기문사각(奇門死角) 안으로 빠져들었다. 쌍괴의 해라진과 무후팔진(武侯八陳)은 작용이 거의 비슷했다. 제갈량의 팔진도에는 여덟 개의 문호가 있었는데, 배열하면 두(杜), 경(景), 휴(休), 경(驚), 생(生), 사(死), 상(傷), 여덟개의 위치가 된다. 쌍괴의 해라진 역시 여덟 개의 문호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른 것이라면 그들은 여덟개의 문호를 동그란 모양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주백통은 사문(死門)으로 빠져들자 왼쪽으로 한번 돌고 오른쪽으로 한번 도는 등 동쪽에서 꺾어 들고 서에서 꺾어 들며 돌아 나아가게 되었는데 갈수록 모든 것이 모호해졌다. 반 시진을 걸어 갔으나 원래의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주백통은 그만 한숨을 쉬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이고, 내가 정말 멍청하다. 어째서 출구를 잊어버리게 되었지?] 이 말을 끝내게 되었을 적에 주백통의 귀에 갑자기 똑똑똑, 하는 소리가 몇번 들려왔다. 마치 손톱으로 퉁겨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는 그만 어리둥절해지게 되었는데 그 순간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딱, 하며 한 조각의 조그만 돌멩이가 떨어졌고 정확하게 주백통의 발밑에 와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처음엔 동해쌍괴가 일부러 수작을 부려 자기를 함정으로 유인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았으나 별다른 동정이 엿보이지 않자 그는 안심하고 몇 걸음 옮겨 놓았다. 앞쪽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다시 십여 걸음을 나가게 되었을 적에 앞쪽의 모퉁이에서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재차 한 알의 돌멩이가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이번의 돌멩이는 자기의 발밑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의 갈래가 난 동굴 입구 옆에 떨어졌다. 주백통은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누가 나에게 길을 인도해 주는 것일까? 설마하니 조금 전의 그 청의괴인이란 말인가?) 그는 해라진으로 들어선 후에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다. 마치 그 누가 자기의 등 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시종 그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돌멩이가 날아 온 것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그가 막 또 한 문호에서 돌아 들어서니 다시 돌멩이가 옆문에서 날아 나와 다른 한 문앞에 떨어졌다. 주백통은 그 돌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앞쪽으로 나아갔다. 매번 여덟 걸음이나 열 걸음을 나아가 모퉁이를 돌게 되었을 적에 반드시 돌멩이가 던져졌다. 주백통은 몇번이나 그 길을 인도해 주는 사람의 진면목을 보고 싶었으나 상대방의 신법이 너무나 빨라 주백통과 같은 재간을 지니고 있는 사람도 그저 푸른빛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는 줄곧 돌멩이의 인도를 받아 열 몇번이나 모퉁이를 돌게 되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교적 넓다란 곳에 이르게 되었다. 주백통은 문득 이곳이 바로 자기가 가짜 목 매달아 죽은 꼭둑각시를 보았던 제3환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처음으로 청의괴인을 만났던 곳이기도 했다. 주백통은 크게 기뻐서 중얼거렸다. [이거 정말 묘하게 됐구나. 나는 이제 해라진에서 빠져 나갈 수 있겠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차가우면서도 날카로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전진파의 장문 사제가 어처구니 없게 늪 속으로 빠져들어 남의 술수에 넘어가 미꾸라지 신세가 된 데다가 다른 사람이 있어서 인도를 해주어서야 가까스로 진 밖으로 나설 수 있었으니 그러고서도 잘났다고 할 수 있나? 흥!] 말이 끝나자 마자 잇따라 냉소를 흘렸다. 주백통은 그 사람이 자기를 구해 놓고 자기를 비아냥거리자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그 순간 다시 세찬 바람이 이는 곳에 한 명의 청의인이 나타났다가는 번쩍하는 찰나 해라진에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속으로 불쾌하게 생각했다. (저 녀석은 너무나 건방지고 오만하구나. 나를 무능한 도배로 여기다니, 만약 음장강 일당의 자라 새끼들이 달라 붙어 귀찮게 굴지 않는다면 정말 한번 저 자를 상대로 겨루어 보고 싶구나.)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해라진의 출구를 따라 고기가 물길을 따라서 헤엄을 치듯이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가 막 해라진에 빠져 나가자 갑자기 놀람에 찬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본래 해라진의 동굴 밖에는 새카맣게 한 떼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바로 음장강과 음장하, 그리고 육횡도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이 주백통을 보자 놀라 부르짖은 것이었다. 그들은 주백통이 해라진의 사각에 빠진데다가 다시 비사진이 그를 덮쳤으나 제아무리 재간이 있고 강하다 해도 그와 같은 매복에는 생매장을 당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섕각했던 것이다. 설사 그를 생매장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출구를 찾지 못해 산 채로 굶어 죽게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주백통은 마치 유령같은 몰골을 하고 동굴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조금 전 동굴에서 모래가 마구 쏟아지는 위험을 겪게 되었을 적에 날렵한 신법으로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랫가루를 잔뜩 뒤집어 쓰고 있었다. 거기다가 조금 전에 악룡담에 빠지게 되었을 적에 하반신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러니까 모래는 회색이고 진흙은 검은색인데 주백통이 입고 있는 것은 하얀옷이었다. 따라서 육횡도의 무리들 눈에는 해라진에서 빠져 나오는 주백통의 몰골이 괴상하게 보여 자기도 모르게 놀라 외쳤던 것이었다. 주백통은 음씨쌍괴를 보자 분노가 상투 끝까지 치밀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달려들며 두 손을 일제히 뻗쳐냈다. 이는 분화불유(分花拂柳)라는 태을권의 절초였다. 파공성이 일면서 두 가닥의 세찬 바람이 나누어 뻗쳐 음씨쌍괴에게 몰려갔다. 음씨쌍괴는 즉시 지당공(地堂功)를 펼쳐 몸을 땅바닥에 던져 뒹굴어 장풍의 예봉을 피했다. 그리고는 떼구르르 굴러 주백통의 발밑으로 달려들려고 했다. 주백통이 몸을 날려 옆으로 피할려고 했을 적에 놀랍게 옆에서 금빛 광채가 번쩍하더니 음장강이 처참한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땅바닥에 쓰러져 고통을 참지 못해 데굴데굴 구르며 두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마구 할퀴고 잡아당기며 무언가 끄집어내려고 했다. 알고 보니 그의 눈동자에 뭔가가 박힌 것이었다. 음장하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주백통이 암기를 내던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었다. 한데 그가 막 몸을 일으키게 되었을 적에 금빛 광채가 다시 번쩍하더니 한 무더기의 금빛 그림자가 곧장 그의 안면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음장하는 그만 당황해서 고개를 숙이고 그 금빛 광채를 피하려고 했다. 그 금빛 광채는 가늘고 작은 금침으로, 뿌리게 되었을 적에는 50십여 대가 한 무더기로 뿌려질 뿐만 아니라 안면으로 쏘아져 들어오게 되었을 적에 수십 대의 금침이 퍼지면서 몇 장 둘레의 면적을 뒤덮으니 음장하가 창졸간에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는 갑자기 몸에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일곱, 여덟 대의 금침이 살을 파고든 것이었다. 원래 음씨쌍괴는 상어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는 데다가 고기 기름에다가 담갔기 때문에 응지(凝脂)처럼 매끄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암기를 던져서는 뚫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몇대의 금침이 쏘아질 때의 세참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엄청나 한 대 한 대가 가죽옷을 꿰뚫었고 살속을 파고들어 통증을 안겨준 것이었다. 음장하는 그만 깜짝 놀라 몸을 돌려 도망을 치려고 했다. 바로 그때 다시 휙, 하는 소리가 들리며 맞은편에서 다시 수십 대의 금침이 뿌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 금침들이 곧장 음장하의 눈으로 날아들었다. 음장하는 그만 아이쿠, 하는 비명을 내지르게 되었다. 그 역시 음장강처럼 두 눈에 금침을 맞고 대번에 눈이 멀어 극심한 통증에 벌렁 땅바닥에 나자빠져 바둥거렸다. 동해쌍괴가 차례로 눈이 멀자 그의 패거리들은 깜짝 놀라 우왕좌왕 어쩔 줄 몰랐다. 주백통은 고개를 돌려 금침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한데 뒤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기의 눈에 비친 광경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원래 해라진의 출구가 있는 동굴 꼭대기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청색의 짧은 포자(袍子)를 걸치고 있었는데 보통 키에 머리 위에는 은사(隱士)들의 상투를 틀어 올려 놓고 얼굴에는 인피(人皮)를 약물에 담가서 만든 면구를 쓰고 있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강시와 같았다. 그런데 그는 산벽에 등을 붙이고 허공에 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금침은 소맷자락 안에서 쏘아낸 것 같았다. 본래 무공 가운데는 벽호공(壁虎功)라는 것이 있어서 한가닥 진기로 몸뚱이를 담벽에 붙여 놓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겨우 밥 한끼 먹을 시간밖에 유지할 수 없었고 오랜 시간이 흐르게 되면 먹혀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등을 벽에 붙이고는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움직일 수가 없으니 암기를 던지거나 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청의괴인은 바로 주백통을 해라진에서 끌어낸 사람이었다. 그는 잇따라 세 웅큼의 금침을 뿌려 동해쌍괴를 장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동해쌍괴의 부하들은 이 괴인이 나타나자 연신 고함을 질러내며 무기를 쳐들고 그 청의인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청의괴인은 그래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청포를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며 앉은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섬의 살고 있는 무리들이 10장 가까이 달려들자 청의괴인은 다시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쉭쉭, 하는 소리가 몇번 일면서 금침이 뿌려지고 앞장을 서서 달려가던 십여 명의 쌍괴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미친듯이 울부짖었다. 그들의 눈동자도 쌍괴처럼 완전히 멀어버린 것이었다. 주백통은 청의괴인의 수단이 악독한 것을 심감했다. 하지만 그 조그맣고 가벼운 금침을 10장의 간격을 두고서도 정확하게 적중시키는 것을 볼 때 그 손의 힘을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손을 썼다 하면 단 한수에 적의 눈을 멀게 만드는데 그 순단의 매서움은 정말 세상에서 보기 드물 정도였다. 십여 명의 앞장을 선 사람들이 모조리 장님이 되자 나머지 사람들은 그만 간담이 서늘해져서 어느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슬슬 물러섰다. 주백통은 이때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손을 뻗쳐서 그들을 막았으며 좌우 두 손을 함께 써서 음씨쌍괴 휘하의 도당(盜黨)들을 양손에 한 사람씩 잡아서 마구 던져대는데 그 모습은 마치 허수아비를 집어 던지는 것 같았다. 청의괴인 역시 그 재미있는 관경을 보자 손이 근질근질한 듯이 즉시 금침을 뿌려내 그들의 눈을 쏘아 맞췄다. 삽시간에 음씨쌍괴의 60여 명이나 되는 도당들은 모두 눈이 멀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 삽시간에 해라진 동굴 입구는 선혈로 얼룩지게 되었고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주백통은 청의괴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형씨, 내려오시오. 형씨는 좀 지나쳤소. 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이 살 수도 죽을 수도 없게 만들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지 않았소?]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그는 발목이 바짝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주백통의 하반신이 어떤 사람에 의해 움켜잡힌 것이었다. 그 사람은 와락 끌어당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주백통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원래 주백통이 청의괴인에게 말을 걸고 있을 때 음장강은 그의 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업드려 있었다. 그는 두 눈이 밀기는 했으나 몸에 지닌 무공은 여전히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음장강은 주백통의 음성을 듣자 주백통이 자기의 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음을 알아 차렸다. 음장강은 본래 악독한 도배였다. 그는 땅박에서 몸을 굴려 곧장 주백통 옆으로 다가가 주백통의 두 발목을 끌어 안고 와락 잡아채니 주백통은 미처 방비하지 못한 탓으로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주백통이 그렇게 쓰러지자 음장강은 즉시 달려들어 주백통을 휘감아 안았다. 그가 사용한 것은 장어공(章魚功)이었다. 장어는 바다속에 살고 있는 여덟 개의 발을 가진 낙지를 의미한다. 낙지나 문어는 기다란 발과 빨판으로 적을 휘감는데 능하다. 음장강은 죽어라 하고 두 다리로 주백통의 허리를 조이고 두 팔로는 주백통의 가슴과 목을 조르고 두 손으로는 주백통의 입과 코를 막아 숨을 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청의괴인은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고 그저 동굴 입구의 석벽 위에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꼴 좋구나!] 第 四 章. 도화도에 들어간 주백통 주백통은 창피하고 화가 났다. 그는 목덜미를 음장강에게 꽉 졸려 있었다. 다름 사람이었으면 삽시간에 숨이 막혀 죽고 말았겠지만 주백통은 전진파의 고수였다. 목을 조이자 금강공(金剛功)이라는 내경(內勁)을 돋구어 죽어라 항거했기 때문에 질식은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선천공(先天功)을 펼쳐 몸에 있는 땀구멍으로 호흡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순간에 숨이 막혀 죽지는 않았다. 주백통은 청의괴인이 보는 앞에서 이와 같이 창피를 당하게 되자 오장육부가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났다. 다급해진 그는 일성을 대갈하며 전신의 힘살을 움츠리면서 두 팔을 바깥쪽으로 획 내뻗어 음장강의 온 몸뚱이를 석 자 밖으로 밀쳐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금강휘저(金剛揮杵)의 수법으로 음장강의 골통을 향해 주먹을 내려쳤다. 이번에 주백통은 공력을 잔뜩 돋구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커다란 도끼가 산을 자르고 무거운 망치가 바위를 부술 듯한 위력이 깃들어 있었다. 따라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음장강은 골통이 바스라져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나가떨어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청의괴인은 주백통이 몸을 일으키는 그 찰나에 몸을 날려 음씨쌍괴과 육횡도 무리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음장하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백통이 바라보니 청의괴인이 일로(一路)의 퇴법(腿法)을 펼치고 있었다. 그의 퇴법은 무척 이상해서 상반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두 발만 움직이는데도 나는 듯이 앞으로 뻗쳤다. 발끝이 적의 이마와 뒷통수를 가볍게 한번씩 걷어차는데 즉시 숨을 거두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발길질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었고 거두어들일 때의 재빠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주백통은 그저 한 무더기의 푸른 그림자가 사람들 틈에서 몇번 오락가락하는 것을 느꼈을 뿐인데 육횡도의 무리들은 하나같이 몸뚱아리가 뻣뻣해지며 죽어갔다. 청의괴인이 눈깜짝할 사이에 일로의 퇴법을 써서 나는 듯이 춤추듯 오락가락했고 전혀 저항하지 못하는 60여명의 목숨을 앗아가버린 것이었다. 그와 같은 잔인한 살륙을 지켜 보던 주백통은 그만 부르르 진저리쳤다. 청의괴인은 동해쌍괴의 제자들과 부하들을 모조리 죽인 후에야 주백통에게 얼굴을 돌렸는데 한 장의 무표정한 면구가 얼굴을 덮고 있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때만큼은 주백통도 비록 무예가 고강하고 담이 큰 편이었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 딱딱한 얼굴을 대하자 으스스한 기분이 들고 오싹한 것을 느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청의괴인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주씨 양반, 당신은 내가 그들의 눈을 멀게하여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니 영웅호걸이 아니라고 했소. 정말 웃기는군. 내가 당신에게 한마디 묻겠는데 당신은 방금 마음이 좋은 척하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 아니오?] 주백통은 얼굴이 붉혔다. 그는 이 청의괴인의 행동이 요상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말에 일리가 있음을 느꼈다. 주백통 자신이 착한 마음을 품었던 결과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는가? 청의괴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속담에 사람은 호랑이를 해칠 마음이 없는데 호랑이는 사람을 해칠 뜻이 있다고 하지 않소? 음씨쌍괴는 동해에서 십 몇 년 동안 횡행하며 무수한 사람을 죽였고 바다 위의 어선들은 감히 육횡도 근처를 지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어민들이 그들에게 사로잡혀 가서 눈알이 뽑혀지고 머리통이 박살나는 재앙을 당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오. 나는 다만 만천화우(滿天花雨)의 수법으로 금침을 뿌려 그들의 눈을 멀게한 것 뿐인데 당신은 나의 수단이 잔인하다고 말했소. 그들이 조금 전 당신을 해라진 속에 가두었을 적에 당신은 출구를 찾지 못해 하늘과 땅에 호소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소. 그리고 당신의 사형인 전진교주 왕진인도 이곳으로 달려와 당신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은 그야말로 산 채로 굶어 죽게 될 판이었소. 놈들의 그와 같은 짓은 잔인하지 않고 독하지도 않단 말이오?] 주백통은 할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자가 어떻게 나의 성이 주씨이며 왕중양의 사제인 것을 알고 있을까?) 그 청의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슴을 편 채 걸음을 성큼성큼 옮겨 곧장 바닷가로 걸어 나갔다. 주백통은 큰 소리로 불렀다. [소제가 잘못을 깨달았소. 형씨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시오.] 청의괴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알았다면 무척 잘 됐소. 우리는 친구로 사귈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나서 그는 손을 내밀었다. 주백통 역시 손을 내밀었다. 청의괴인은 갑자기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번개같이 주백통의 손등에 있는 회종(會宗), 손목에 있는 자궐(紫闕) 및 유곡(幽谷)의 혈도를 움켜잡으려고 했다. 주백통은 상대방의 다섯 손가락이 손목 가까이에 이르자 온몸이 찌르르한 것을 느꼈다. 주백통은 즉시 손목을 홱 뒤집어 상대방의 손가락끝이 살갗에 닿을락 말락하고 지풍이 아직도 혈도 안으로 밀려들기 직전에 풍권잔운(風卷殘云)의 수법을 써서 오히려 청의괴인의 손목 관절을 움켜 잡으려 들었다. 청의괴인 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손을 한번 끌어 당겼다가 빙글 돌리면서 물속에서 고기가 헤엄치듯이 주백통의 손바닥 아래에서 매끄럽게 손을 빼버렸다. 그 바람에 주백통 역시 허공을 움켜잡는 꼴이 되었다. 청의괴인은 껄껄 웃었다. [하하, 정말 훌륭한 재간이군. 훌륭한 재간이야 중양진인의 사제에 부끄럽지 않구료.] 주백통은 물었다. [노형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어떻게 소제가 누구인지 알았소?] 청의괴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쓱 문질렀다. 그 사람이 쓰고 있던 인피면구가 마치 뱀의 허물처럼 벗겨지면서 참 모습이 나타났다. 주백통은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다가 놀라 멍청해졌다. 원래 그 청의의 괴인은 30 세도 채 못 되는 미장부였다. 칼날같은 눈썹에 별과같은 눈동자, 빨간 입술에 옥과 같은 얼굴, 풍채마저 훤칠한 그가 몸에 담청색의 옷을 걸치고 있어 그야말로 반안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전분하랑(傳汾何郞)이 환생한 것 같았다. 주백통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토록 준수한 젊은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놀라 입이 딱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미장부는 입을 열었다. [불초의 성은 황이고 이름은 고(固)이며 자는 약사(葯師)라오. 형을 한번 만나본 인연이 있소이다. 불초의 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같이 가 보시려오?] 주백통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러지요.] 황약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갑시다!] 주백통은 갑자기 떠오르 생각에 물었다. [댁이 이 섬에 있소?] 화약사는 빙긋 웃었다. 그는 주백통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몸을 뽑아 올려 높다란 등성이 위로 올라가더니 소맷자락 안에서 한자루 짧은 옥소(玉簫)를 꺼내더니 입가로 가져가 불었다. 그 음률이 가느다랗고 매우 우렁차 마치 봉황이 높은 하늘에서 우는 듯 그 소리가 저 높은 하늘까지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속으로 답답하게 생각했다. (내가 어디 사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통소를 불기 시작하니, 정말 괴상한 사람이로구나.) 스스로 황약사임을 밝힌 그는 퉁소를 한번 불고 나서 평지로 다시 뛰어내리고 고개를 쳐들어 바다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배가 왔소!] 주백통은 바다 쪽을 바라 보았다. 저 멀리 바다 위에 세 개의 푸른 돛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한 척의 누선(樓船)이 천천히 육횡도 쪽으로 다가왔다.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주백통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 저 화려한 누선이 그의 것이로구나. 그러니까 그가 그와 같이 귀티가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군.) 밥 한끼 먹을 시간이 지났을 적에 누선은 이미 언덕에 닿아 있었다. 황약사는 주백통에게 손짓했다. [갑시다.] 주백통은 몇 마디의 감사의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이와 같은 사람은 자잘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으며, 그 행동이 어느 정도 진(晋)나라 초의 죽림칠현(竹林七腎)과 비슷한 데가 있으니, 이런 종류의 사람은 예의에 구애받고 인사치례의 말을 하는 것을 꺼린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황약사를 따라 배 위로 올라갔다. 이 누선에는 몇 명의 사공이 있었고 두 명의 하인까지 있었다. 그들은 황약사가 배 위로 올라서자 허리를 굽혀 그를 맞이했다. 주백통은 뒤따라서 선실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선실로 들어가는 그 순간 더욱 더 놀랐다. 원래 이 한 척의 누선은 무척 정교하게 꾸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당당하면서도 화려했다. 사방에는 창문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모두 항주에서 나는 유명한 비단으로 그 위에 꽃, 새, 벌레, 물고기들이 수 놓아져 있었다. 조그만 탁자 위에는 골동품들이 놓여 있었는데 어떤 것은 진나라의 술그릇이고 또 어떤 것은 한나라의 방패였다. 하나같이 고색이 창연한 골동품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닥에는 북경의 새빨간 융단을 깔아 놓아 발로 디디니 부드럽고 착 달라 붙는 것이 잔디나 요 위에 선 것같은 기분이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선실의 또 다른 모서리에 적지 않는 서가가 놓여 있고 책이 가득 꼿혀 있는데 모두 옛날 책들이었다. 서가에는 또 하나의 오래 된, 구리로 만들어진 향로가 있었는데 그 향료에다가 서역(西域)에서 가져 온 향을 피우고 있어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선실 안이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주백통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황가가 이와 같은 한 척의 누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한 지방에서 으뜸가는 부호인 것 같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가 돈이 많은 부호라면 도대체 어느 방면에서 돈을 벌었으며 또한 어떻게 그토록 고명한 무공을 익힌 것일까?) 황약사는 주백통의 표정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한 듯 빙그레 웃더니 두번 손뻑을 쳤다. 그러자 두 명의 하인이 즉시 달려 왔다. 하인들은 잠시 후에 몇가지 술과 음식을 날라 왔고 한주전자의 소흥주(紹興酒)를 날라왔다. 주백통은 육횡도 해라진에서 반나절 동안 갇혀 있었던 관계로 뱃속이 여간 허전하지 않았다. 술과 찬의 냄새를 맡자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게 되었으며 이번만큼은 상대방이 자기의 뜻에 맞도록 술을 대접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황약사는 다시 하인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하인은 즉시 하나의 옷상자를 꺼내 왔다. 황약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씨의 옷이 너무 더러우니 먼저 옷을 갈아 입도록 하시오.] 주백통은 얼굴을 붉히며, 그제서야 자기의 모습이 꼴불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흙과 모래, 거기다가 땀으로 더럽혀져 있으니 아마도 3푼쯤은 도깨비같을 것이고 7푼쯤은 사람같은 모습을 겨우 하고 있을터인데, 상대방의 이와 같이 우아하고 운치있게 꾸며 놓은 선실에 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음식부터 먹을 궁리를 했던 것을 생각하니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옷상자를 받았다. 하인은 그를 뒷 선실로 안내하고 금대야에 세수물을 떠다 주었다. 주백통은 얼굴을 씻으면서 그 하인에게 물었다. [이것 보게, 자네의 주인은 어느 지방의 부호인가? 도대체 그는 어디서 살고 있는가?] 그 하인은 그저 고개만 가로젓더니 입을 크게 벌려 보였다. 그래도 주백통이 알아차리지 못하자 자기의 입안을 손가락질했다. 그제서야 주백통은 깨달았다. 원래 그 사람은 벙어리였다. 들을 수는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주백통은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충총히 선실로 갔다. 이때 황약사는 한 권의 책을 들고 등왕각서(騰土閣序)를 읽고 있었는데 그 책읽는 음성이 낭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책 읽기에 신명이 나서 주백통이 들어선 것도 보지 못한 듯했다. 등왕각서는 매우 긴 문장인데 그는 한 자 한 자 띄임띄엄 느릿한 음성으로 읽어가고 있었다. 주백통의 허기를 참고 그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최후에 황약사는 등왕각서에 실려 있는 한 수의 칠절시(七絶詩)을 읊었다. [등왕각은 높이 강변에 서 있고, 패옥(佩玉) 부딪치는 소리와 가무(歌舞)가 한데 어우러지는데, 하늘 저 멀리 남쪽 포구로 날아가는 구름이여, 붉은 휘장에 노을빛 서렸고 서산에는 황혼이 내리고, 한가한 구름은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흐르는 세월은 빠르기도 하구나. 몇번의 가을이 지나갔는가? 누각의 황제는 지금은 어디 있는가? 무심한 장강 물결만 하염없이 흐르는구나.] 황약사는 최후의 싯귀를 두번이나 읊어 보더니 그제서야 껄껄 웃으면서 책을 던지고 일어섰다. [주형, 정말 미안하오.] 그러면서 그는 주백통에게 자리를 권했다. 주백통은 사앙하지 않고 앉았다. 그리고 황약사가 권하는대로 마구 먹고 마셔댔다. 정말 보기에도 게걸스러울 정도로 순식간에 깨끗이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술과 밥을 먹고 나자 육횡도는 이미 보이지 않고 배는 넓은 바다 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파란 바다는 하늘과 맞닿은 듯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주백통은 한 잔의 차를 마시고 나서 황약사에 입을 열었다. [황형의 무학은 매우 탁월하시던데 실례지만 존사는 어느 분이시며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구료. 그리고 어쩌다가 이곳 동해까지 오셨소? 만약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알려 주실 수 없겠소?] 황약사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과찬의 말씀입니다. 소제가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나 자질이 우둔하여 그저 수박 겉핥기로 조금 배웠을 뿐인데 어찌 무공이 탁월하다는 칭송을 받을 수 있겠소? 그리고 나의 생업을 솔직히 말하는데 나는 언제나 도적질을 해 왔소. 이 선실 안에 있는 물건들 가운데 어느 하나 도적질해 오지 않은 것이 없소이다. 주형은 더 묻지 마십시오.] 주백통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황약사 스스로 자기가 도적인 것을 인정하고 지금 이곳에 있는 물건들이 모두 다른 곳에서 훔쳐 온 것이라고 하는 말에 놀란 것이었다. 황약사의 말하는 표정이나 태도를 볼 때 결코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는 어째서 벙어리 하인을 쓰고 있는 것일까? 주백통은 눈 앞의 이 사람이 보여주는 일거일동이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같이 요상한 데가 있고 하나같이 이상스럽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황약사는 말이 끝나자 형형하게 빛나는 눈초리로 주백통의 얼굴을 주시하더니 불쑥 물었다. [주형, 내가 도둑놈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주백통은 그 눈길을 받자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적질을 해도 상관이 없지요. 다만 도적의 도리를 지키기만 하면 될 것이외다.] 황약사는 빙그레 웃었다. [하하하, 맞았소. 도적질에도 도리가 있지요. 초라한 우리집이 바로 저 앞에 있소. 저기 보이는 저 섬이외다.] 주백통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창 밖으로 내다보니 수평선 위로 한 섬이 나타나 있었다. 그 섬은 푸른 산이 마치 고운 눈썹처럼 동그랗게 자리를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얀 구름이 섬 주위를 감실거리고 있는 것이 선경(仙境)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주백통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형은 바로 저 섬에서 살고 있구료. 저 섬의 이름이 무엇이오?] 황약사는 담담히 말했다. [아, 저곳은 도화도(桃花島)라는 곳이오. 소제의 누추한 집이 바로 저 섬 안에 있소.] 주백통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섬의 이름이 도화도라고 하니, 이름 치고는 꽤 우아하구나. 아무래도 저 섬은 푸른 들판에 꽃나무가 우거져 있겠구나. 아름다운 숲과 산등성이를 감상하게 되겠군.) 잠시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도화도는 점점 가까워졌다. 사공들은 어느덧 줄을 당겨 돛을 내리기 시작했다. 주백통은 이때서야 그 사공들 역시 벙이리로서 하나같이 손짓으로 언어를 대신하고 있으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속으로 놀랐다. 다시 반 시진이 흐르게 되었을 적에 누선은 점점 섬의 기슭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섬에는 돌로 쌓은 선착장이 있었다. 황약사는 선실에서 걸어 나가더니 몸을 한번 날려 언덕으로 올랐다. 주백통도 몸을 날려 그 선착장으로 올라섰다. 황약사는 그의 경신술 솜씨가 약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했다. [자, 올라갑시다.] 섬에는 파란 풀들이 잔디처럼 자라고 벌판 위에는 기화이초가 가득했다. 그리고 갖가지 이름을 알 수 없는 풀과 나무들이 그득해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었다. 주백통은 북쪽 지방에서 자랐고 오랫동안 사부와 사형을 따라 숭산에서 무예를 연마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별유천지와 기화요초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눈앞에 난생 처음 보는 히한한 꽃송이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꽃송이를 꺾으려고 했다. [우와! 이렇게 예쁜 꽃이 있다니! 무슨 꽃이 이리도 예쁠까?] 주백통의 손이 막 뻗어 나가게 되었을 적에 어깻죽지가 저려 오고 꽃송이를 꺾으려던 손은 맥없이 아래로 쳐지게 되었다. 그가 흠짓 놀라고 있는데 황약사가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주형, 꽃은 보라고 있는 것이지 꺾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오.] 곧이어 주백통은 등뒤를 무엇이 툭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마비되었던 팔이 즉시 회복되는 것이 아닌가? 그가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니 황약사는 옥소를 들고 차가운 눈초리로 자기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주백통은 약간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황약사는 조금전에 자기의 몸에 투골타혈(透骨打穴)의 재간을 펼친 것이었다. 투골타혈이라는 것은 결코 손가락으로 혈도를 치거나 찌르는 것이 아니고 허공을 격하여 내공을 발출하는 고명한 무공이었다. 황약사가 손에 들고 있는 한 자루의 옥소에다가 내가기경(內家氣勁)을 주입하여 주백통의 몸 안으로 스며들게 해서 혈도를 봉쇄했던 것이었다. 황약사는 조금 전에 옥소로 주백통의 혼문혈(魂門穴)을 눌렀던 것인데 이것은 손과 팔로 뻗쳐 가는 혈맥의 총 집합처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팔이 축 늘어지게 되었고, 곧이어 그가 손을 뻗쳐서 자기의 명문혈(命門穴)을 가볍게 쳐서 삽시간에 혈도를 풀었는데 혈도를 집고 푸는 것이 모두 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수법의 오묘함은 정녕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주백통의 무공도 결코 만만치 않은데,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경계를 하지 않고 꽃에 정신을 팔다가 허를 찔렸기 때문이었다. 주백통의 평소 성질대로 한다면 틀림없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겠지만 결코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황약사라는 사람이 사악한 사람인지 아니면 정파의 사람인지, 어떤 내력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데다, 그의 소굴에서 손을 쓰게 된다면 역시 자기가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백통은 이와 같은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속에서 치미는 울화를 억누르고 겸연쩍게 말했다. [소제는 그저 꽃을 대하고 보니 좋아서 한 송이 꺾어 보려고 했던 것이외다. 꺾지 말라면 꺾지 않겠소이다.] 황약사는 옥소를 소맷자락 안으로 디밀어 넣더니 주백통을 안내해서 꽃밭 속으로 들어갔다.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뛰어 드는가 하면 동쪽으로 구불구불 나아갔다가 서쪽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주백통은 녹색의 바다에 빠져든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황약사가 심어 놓은 이 꽃나무들은 결코 정원을 감상하고 눈요기를 하라고 심고 가꾼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모두 다 진법의 문호이며 모든 꽃송이들이 상생상극의 원리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황약사가 몸소 안내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들어 올 수 없을 것이고, 설사 잠입해 들어온다 하더라도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주백통은 속으로 놀라면서 생각했다. (다행히 조금 전에 황약사와 손을 쓰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손을 쓰게 되었더라면 야단이 났을 것이다. 나는 역시 현명하단 말씀이야. 상대방이 나를 화초더미 속으로 끌고 들어가 몇번 꺾어 돌면 나는 빠져 나가지 못하고 바로 이 화진(花陳)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니, 그야말로 해라진에 갇힌 것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잠시 후에 앞이 탁 트이고 한 채의 정사(精舍)가 나타났다. 황약사는 주백통을 그 정사로 모셨다. 주백통은 생각했다. (조금 전에 탔던 배가 그토록 고아하게 가꾸어져 있었지. 이곳은 자기의 처소이니 기진이보(奇珍異寶)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겠구나.) 한데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서 보니 자기의 생각과는 딴판이었다. 황약사의 이 정사는 그저 하나의 서재에 불과했다. 그 안에는 다른 가구나 장식품들도 없고 그저 탁자와 의자, 문방사우가 있을 뿐이었다. 황약사의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은 평범한 것들이었다. 다만 한복판의 벽에 오도다(吳道子)의 산수화가 한 폭 걸려 있었는데 그 양옆에는 대련(對聯)을 걸어 놓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왼쪽의 대련에는 <기몽퇴리매신검(綺夢堆裏埋神劍:아름다움 꿈속에 신검을 묻다)>이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고, 오른쪽의 대련에는 <소고성중노객성(簫鼓聲中老客星:퉁소소리와 북소리 가운데 늙어가는 나그네)>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주백통은 서재 안을 둘러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일부(一副)의 대련을 무슨 이유로 걸어 놓았을까? 무슨 깊은 뜻이 있는 듯하구나.) 황약사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주형의 사형인 중양진인은 무공이 절세적이지요. 이 황약사는 그 분을 잘 알고 있고 무척 우러러 보고 있소. 소문에 들으니 왕진인은 최근에 화산에서 구음진경을 얻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주백통은 상대방이 입을 열자마자 구음진경에 관해 묻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왕중양이 구음진경을 얻은 일에 대해서 알고있는 무림인은 없는 줄로 알고 있었다. 다만 서독 구양봉이 그 책을 차지하려고 두번이나 화산에서 중양진인의 길을 가로막고 빼앗으려고 손을 썼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해서 돌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황약사는 동해의 황량한 섬에 살면서 어떻게 그런 일을 알고 있는지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백통은 시치미를 떼었다. [아, 제 사형이 구음진경을 얻었나요? 구음진경이 어떤 책인지 모르겠구료. 우리 사형이 화산으로 갔던 것은 사실이지만, 구음진경을 얻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군요.] 황약사는 별안간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당신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군. 그렇다면 이만 가 보시오.] 수백통은 상대방이 겨우 두마디 말을 나누었을 뿐인데 즉시 축객령(逐客令)를 내리는 것을 보고 그만 발끈 대노해서 소매를 떨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다. 그가 막 문 앞에 이르자 황약사가 그를 불렀다. [잠깐만.] 주백통이 몸을 돌리자, 황약사는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냥 떠날 참이오? 당신은 이 도화도에서 곱게 나갈 수 있는 줄 아셨소?] 주백통은 문득 깨달았다. 이 한 칸의 정사 주변에는 꽃밭과 숲이 이루어 놓은 기문팔괘진(奇門八卦陳)이 펼쳐져 있었다. 황약사가 길안내를 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나갈 방도가 없었다. 황약사는 다시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느 누구라도 나의 도화도에 온 이상 반드시 한가지 규칙을 지켜야 하오. 설사 황제 늙은이가 이 섬에 온다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소.] 주백통은 물었다. [어떤 규칙이오?] 황약사는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도화도에 온 사람 가운데 내가 그 사람을 친구로 인정하지 않게 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은 몸에서 어떠한 물건을 남겨 두고 떠나야 하오. 나의 사공들이나 나의 하인들처럼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야 한다는 것이오.] 주백통은 조금 전 배에서 옷을 바꿔 입을 적에 하인에게 황약사에 대하여 물어 보았었다. 그러나 그 하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가로 저었는데 그 하인은 혓바닥이 없어서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 주백통은 그 혓바닥을 황약사가 자른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서야 주백통은 황약사가 하인들의 혓바닥을 잘라내 벙어리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오싹 소름이 돋았다. 황약사는 주백통의 혓바닥을 잘라내겠다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놀라는 한편 크게 분개했다.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인물이라서 하는 짓거리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황약사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내가 사마외도란 말이오? 맞았소, 나의 별명은 동사(東邪)라고 하오. 주형, 아무쪼록 내가 손을 쓰기 귀찮으니 당신 스스로 혓바닥을 잘라내시오!] 주백통은 냅다 쏘아 붙였다. [방귀 뀌는 소리 작작하시지!] 그리고 냅다 손을 들어 추산진해(推山鎭海)라는 일초를 펼쳐 황약사의 가슴을 후려치려고 했다. 황약사는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주백통의 공격을 안중에 두지 않는듯한 태도였다. 주백통은 일순 어리둥절해져서 재빨리 궁리를 했다. (나의 이 일장은 동해쌍괴와 재간이 있는 사람들도 받지 못했는데 어째서 이 녀석은 이토록 거만을 떠는 것일까? 아, 차력타력(借力打力)의 재간을 펼치려고 하는 모양이로구나. 이 녀석의 속임수에 말려들지 말아야지.) 그는 장세를 약간 늦추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주백통의 장풍이 막 황약사의 몸에 닿게 되었으나 황약사의 몸에 한 겹의 기름칠을 한 듯 미끄미끌한 것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일종의 무형의 흡입력이 솟아올라 주백통의 주먹을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깜짝 놀라 재빨리 주먹을 움츠렸다. 그의 이와 같은 수법은 태을권의 회룡귀학(回龍歸壑)이라는 초식인데 이 한 대의 주먹에는 수백 근의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의 흡입력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주백통은 속으로 조바심이 나서 중지와 식지를 모아 황약사의 얼굴을 노리고 양룡채주(兩龍采珠)라는 일초로 거침없이 두 눈을 후벼 파려고 했다. 황약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백통의 두 손가락이 찔러 오는데도 여전히 자기의 한가닥 혼원기공(混元氣功)으로 상대방의 주먹을 끌어 당기고 있었다. 주백통은 두 손가락으로 찔러대는 척하다가 갑자기 두 발로 선풍퇴법(旋風腿法)을 펼쳐 황약사를 걷어 차려고 했다. 황약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왼손을 아래로 뻗쳐서 날아드는 발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주백통의 그 일초 역시 허초였다. 그 순간을 이용해서 주먹을 거둬들이며 몸뚱이를 쏜살같이 날려 바깥쪽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닌가? 대뜸 허공을 움켜잡은 황약사는 그제서야 주백통이 동쪽에서 소리를 내면서 서쪽을 공격하는 성동격서지계(聲東擊西之計)를 펼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팔을 한차례 휘두르며 한 줄기 무형의 장경을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어 놓을 것처럼 밀어 붙였다. 주백통의 몸뚱이가 허공에 떠 있었고 아직 두 발이 땅바닥에 닿기 전이니 어떻게 그 힘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다음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뚱이가 곧장 저쪽으로 밀려가 정통으로 벽에 꽝, 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그 충격에 오도자가 그린 산수화가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황약사가 후려친 힘은 엄청났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부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주백통은 어릴적부터 내공을 연마해 왔기 때문에 기초가 튼튼했다. 그는 몸뚱이가 날려가자 즉시 내공을 써서 몸을 물렁물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황약사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여간 탄복하지 않았다. 주백통은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황약사의 공력이 자기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에 그와 다시 싸우다가는 패할 가능성이 더 많으니 이 집에서 도망치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발로 땅바닥을 박차고 연자사비(燕子斜飛)라는 신법을 구사해서 거침없이 바깥쪽으로 달려 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눈앞에 푸른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황약사가 어느덧 몸을 날려 달려와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황약사는 하얀 옥소로 주백통의 안면을 노리고 휘둘렀다. 주백통은 그만 황망히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는 황약사의 신법이 이토록 빠른 것을 보자 크게 놀랐다. [황씨 양반, 나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이 없소. 구음진경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우리 사형 왕중양을 찾아가야 할 것인데 어째서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이오?] 황약사는 싸늘히 코웃음쳤다. [중양진인의 무공에 대해서 소제는 무척 탄복하는 바이오. 하지만 형씨는 조금전에 일장으로 후려쳤고 또한 두 발로 소제를 걷어차려고 했소. 그러니 소제가 어찌 빚을 갚지 않을 수 있겠소? 주형도 나의 일장을 받아 보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두 팔을 엇갈리도록 교차하더니 주백통의 전면을 공격해 왔다. 주백통은 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전진파의 태을권법을 펼쳐 한손으로 자기의 몸을 보호하고 한손으로는 적을 상대했다. 그는 상대방이 흔원기공(混元氣功)을 구사하기 때문에 공격해도 소용이 없다고 판단, 아예 수비에 치중한 것이었다. 전진파의 태을권법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 권법은 나중에 태극권(太極拳)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 기세가 태산과 같고 그 기(氣)는 마치 강물처럼 도도했다. 그는 금성철벽보다 더 튼튼히 수비했다. 그리고 권풍이 한번 펼쳐질 때마다 용이 허공을 날고 호랑이가 도약하는 듯했다. 황약사의 수법은 독특하여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풍차처럼 주백통을 한가운데 두고 빠르게 돌아가니 사방이 온통 황약사의 그림자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바로 도화도의 낙영장(落英掌)이라는 수법이었다. 주백통은 난생 처음으로 이와 같은 무공과 겨루게 되었는데 그가 처음부터 수비에 치중하는 태을권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이미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조그만 서재 안에서 쌍방은 1백여 초를 겨루었다. 주백통은 서너 차례 집 밖으로 달려 나가려고 했지만 시종 황약사를 떨치고 나갈 수가 없었다. 황약사의 낙영장은 야릇하기 이를데 없고 초식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으나 태을권의 금성철벽과 같은 수비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주백통은 물론 이와 같은 싸움에 시달릴대로 시달렸지만 황약사 역시 속으로 여간 초조한 것이 아니었다. (전진파는 정말 명불허전이로구나. 내가 왕중양의 사제 한 사람과 싸워 이길 수 없다면 왕중양과 구음진경을 놓고 쟁탈전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두 사람은 다시 백여 초를 싸웠다. 주백통은 갈수록 고통스러웠다. 바로 이때, 황약사는 갑자기 낙영장을 거두더니 호통쳤다. [주가라는 양반, 당신의 태을권은 정말 오묘하군. 내가 당신에게 하루 쉬도록 하지. 그리고 모레 다시 와서 싸우리다. 나는 기필코 당신의 그 권법을 깨는 초식을 창안할 것이오!] 거기까지 말하더니 황약사는 주백통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솟구쳐 창밖으로 달려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덧 그는 꽃나무 숲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주백통은 황약사가 떠난 후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에서 땀을 홀리게 되었고 옷자락도 이미 축축히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선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아 전진파의 내공 구결을 운용해서 한차례의 토납공부(吐納功夫)를 했다. 약 밥 한끼 먹을 시간이 지나게 되었을 때 그는 가까스로 피로에서 회복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차, 야단났다. 나는 그 녀석의 술수에 말려 들었구나!] 그는 자기가 있는 이 집은 바로 황약사가 펼쳐 놓은 기문팔괘진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황약사가 안내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들어 올 수 없고 나갈 수 없는 것이니, 조금 전에 황약사가 물러나게 되었을 적에 자기가 그의 뒤를 따라 나갔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주백통은 즉시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방을 돌아보니 꽃나무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 마장 밖까지 구불구불 뻗쳐 있었고 곳곳에 문호(門戶)가 세워져 있을뿐만 아니라 종횡으로 교차되어 있었다. 주백통은 오행생극(五行生克)과 기문팔괘진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라 나갈 염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꽃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러 곳의 문호를 지나서 점점 나갈수록 더욱 혼동되기만 했다. 다행히 그는 들어올 때의 길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그 조금만 정사로 되돌아 갈 수가 있었다. 주백통은 해라진에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시 경솔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사로 되돌아가 앉아 자기도 모르게 길고 짧은 탄식을 연신 불어내야 했다. 주백통이 한참 한숨을 내쉬고 있을 적에 창밖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벼락같이 몸을 일으키며 호통 쳤다. [게 누구냐?] 한 사람이 문을 열고 곧장 안으로 들어서는데 알고 보니 한 명의 하인이었다. 그는 손에 식합(食盒)을 들고 있었다. 주백통은 그제서야 황약사가 밥을 갖다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주백통이 밥을 굶어 그와 싸울 힘이 없어지면 자기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하인에게 분부해서 밥을 갖다 주라고 한 것이었다. 주백통은 뇌리에 번개같이 한가지 생각이 떠 올랐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손을 뻗쳐 그 하인의 어깻죽지를 움켜잡고 한번 잡아챘다가 끌어 당겼다. 주백통은 이 하인들이 황약사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 틀림없이 무예를 익혔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사실 육횡도에서도 동해쌍괴는 무공에 능한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았던가? 한데 결과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주백통이 손으로 움켜잡자 그 하인은 무력하게 잡혔으며 항거하지 못하고, 한번 잡아채고 와락 끌어 당기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깜짝 놀라 재빨리 그 하인을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네. 정말 미안해. 내가 자네에게 장난을 좀 쳤으니 너무 탓하지 말게나.] 그 사람은 울상을 지으며 바둥거리면서 몸을 일으키고 입을 벌리더니 아아아, 하고 신음했다. 주백통이 바라보니 그 하인의 혓바닥이 반이상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그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 원래 이 사람 역시 벙어리였구나 배 위의 사공들이나 하인들이나 똑같은 처지로구나!] 주백통은 그 벙어리 하인에게 벙어리들의 흉내를 내서 손짓을 해보였다. 그리고 물었다. [이것 보게. 자네는 어떻게 하다가 벙어리가 되었는가? 황약사가 자네의 혓바닥을 잘랐는가?] 그 벙어리 하인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 손가락으로 자기의 귀를 가르켰다. 주백통은 다시금 놀랐다. [아, 이 사람은 원래 귀머거리까지 겸하고 있었구나!] 그는 본래 이 벙어리 하인을 통해 도화도의 비밀과 황약사에 관해 캐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황약사가 부리는 하인이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것을 알자 주백통은 맥이 빠지고 말았다. 그는 마음을 모질게 가다듬고 말했다. [제미랄, 우선 밥이나 먹고 보자!] 주백통이 식합의 뚜껑을 열어 젖히고 보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쌀밥이 있었다. 그 외에도 세 쟁반의 찬이 있었는데 청초하인(淸炒蝦仁), 동순육사(冬筍肉絲), 그리고 한 접시의 서호선호(西湖繕糊)가 있었다. 그밖에도 부추, 살코기, 겨울철의 죽순, 새우를 함께 섞어 바삭바삭하게 튀긴 춘권아(春卷兒)가 있었다. 정말 푸짐한 음식이었다. 주백통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찬합을 들고 퍼먹기 시작했다. 그는 쩝쩝거리고 먹으면서 말했다. [아, 맛 좋다. 하얀 쌀밥에 맛좋은 반찬까지 곁들였으니, 나를 이곳에 한평생 가두어 둔다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응하겠다.] 그는 밥과 반찬을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그러자 그 하인이 와서 그릇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주백통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저 하인이 들어온 길은 틀림없이 기문팔괘진의 문호를 따라 들어왔을 것이다. 내가 그를 뒤따라 한번 나가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주백통은 자기 나름대로 한번 헤아려 보고는 즉시 몸을 일으켜서는 집 밖으로 나갔다. 그가 그 하인을 따라 걸음을 옮겨 놓으려고 했을 적에 뜻밖에도 맞은편의 꽃나무 숲속에서 그 누가 호통을 내질렀다. [돌아가시오.]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무더기의 눈부신 금침이 곧장 주백통의 몸으로 쏘아졌다. 주백통은 황약사가 던진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다 위에서 행패를 일삼던 동해쌍악(東海雙惡)도 그의 이와같은 금침 아래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주백통은 황급히 몸을 땅바닥에 던져 뒹굴어 곧장 집안까지 몸을 굴려 들어갔다. 그가 빨리 피했으나 몇 대의 금침이 곧장 날아들어 그의 머리카락에 꼿혀 있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기 이를데 없어 주백통은 그만 손에 식은땀을 쥐어야 했다. 그가 일어나게 되었을 적에 하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맞은편의 꽃나무 밭도 조용하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조금전에 매복해 있던 황약사 역시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이 녀석은 나를 이곳에 감금해 두려는 모양이로구나. 그만두자, 그만둬!] 주백통은 가부좌를 틀고 정사 안에 앉아 다시 전진파의 내공을 운행했다. 이 날 밤은 별다른 일이 없었고 어느덧 날이 뿌옇게 밝아 왔다. 주백통이 집밖으로 나가자 푸른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어느덧 황약사가 꽃나무 숲속에서 나타나더니 주백통의 앞에 우뚝 서서 껄껄 웃었다. [하하하, 주형, 일찍 일어났구료.] 황약사의 갑작스런 출현에 주백통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즉시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외쳤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사마외도의 작자로군. 나는 당신이 나를 도화도에 데리고 올 때 무슨 좋은 일을 하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당신은 나를 이곳에 가두어 두고 구음진경을 뺏으려는 것이군. 허, 이거야 정말 정말 뻔뻔스럽군!] 황약사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당신의 짐작이 틀렸소. 당신은 내가 당신을 감금한 것이 구음진경 때문인 줄 아시오? 구음진경은 딱딱한 글자에 지나지 않소. 이 황약사는 글을 중시하지 않소. 솔직히 당신에게 말해 두지. 내가 당신을 이곳에 가둔 것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오!] 주백통은 울화도 치밀었지만 가소롭기도 해서 물었다. [나를 이곳에 가두고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는 의도가 뭐요? 밥과 반찬은 나쁘지 않더구먼!] 황약사는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은 전진교 교주의 사제이니 물론 전진교의 무술을 전수받았을 것이 아니겠소? 나는 당신을 이곳에 가두고 하루를 격하고 당신과 겨루어 전진파의 고명한 절초를 가르침 받으려 하고 있소.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 홀수 날에 겨루기로 하고 짝수 날에는 쉬기로 하지요. 오늘은 오월 초아흐레이니 흘수 날이고, 또 당신은 하루를 푹 쉬었으니 기력을 회복했을 것이오. 자, 이제 한번 겨루어 볼 수 있을 것이오!] 주백통은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원래 이 녀석은 나를 이곳에 가두고 무공을 연마하는 도구로 삼고자 하는구나. 비단 무공을 연마하는 연습 상대로 삼으려 할 뿐만 아니라 전진파 무술의 비밀을 캐내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정말 희한한 생각만 하는 고약한 놈이로구나.] 주백통이 입을 열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려고 하는데 황약사는 그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의 가슴에 일장을 후려쳤다. 주백통은 그가 다시 낙영장의 초식을 펼칠 줄 알았다. 그런데 황약사는 오늘은 전과 달랐다. 표홀하기 이를데 없고 종잡을 수 없으며 허초가 실초보다 많은 낙영장을 펼치지 않고, 마구 맞받아 치고 맞받아 밀어내는 혼원장(混元掌)을 펼쳤다. 장력이 무겁고 웅후하여 바람 소리가 휙획 일었다. 기세를 올리며 주백통이 장풍에 밀려 연신 뒤로 물러서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 주백통은 자기의 내공이 황약사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태을권법에 있는 유경타법(柔勁打法)을 펼쳐냈다. 그리하여 황약사가 후려쳐 오는 무겁고 맹렬한 장력을 일일이 바깥쪽으로 해소시키거나 빗나가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이삼십 초 겨루게 되었을 때 황약사는 갑자기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의 그 태을권 속에 있는 유경의 요령을 나는 이미 보았소. 그러니 이제 나의 발길질을 한번 구경하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약사는 갑자기 몸을 뽑아 올리더니 수직으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두 다리를 교차하며 걷어차 왔다. 왼쪽 발길질에 연달아 오른쪽 발길질이 가해졌다. 이것은 그가 도화도에서 연마한 소엽퇴(掃葉腿)였다. 원래 그는 북송(北宋) 시대의 무술명가(武術名家)인 주동(周棟)의 제자였다. 주동은 나중에 악비(岳飛)를 제자로 거두어 들였는데 악가권법(岳家拳法)은 바로 주동이 전수한 것이었다. 황약사는 주동의 초식과 수법을 약간 변화시켜 자기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미하여 소엽퇴를 창안해낸 것이었다. 이 소엽퇴는 잇따라 마흔 두번의 발길질을 가할 수 있었는데 마흔 두번의 발길질이 끝난 후에 다시 마흔 두번의 발길질을 거꾸로 펼칠 수 있었다. 오늘 그가 주백통을 상대로 소엽퇴법을 펼쳐내자 그 기세는 광풍폭우가 몰아 치는 듯하여 주백통은 연신 뒤로 물러나야 했다. 주백통도 본래 선풍퇴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약사가 발길질을 가해와 기선을 제압했기 때문에 부득이 이리저리 몸을 날려 피하거나 이리 돌고 저리 피하는 처지에 몰리게 된 것이었다. 황약사의 퇴법은 갈수록 빨라져 삽시간에 주백통은 이미 그의 발그림자에 휩싸이고 말았다. 황약사가 정반(正反) 사십이퇴를 펼쳐내는 동안에 주백통은 허겁지겁 피하는 재주밖에 피우지 못했고 전혀 반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황약사가 잇따라 여든 네번의 발길질을 가하게 되었을 적에 주백통은 벼락같이 호통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도 나의 퇴법을 시험해 보시오!] 그는 전진파의 선풍퇴법을 펼쳐냈다. 그의 두 발은 마치 베틀의 북처럼 교차하며 공격하는데 황약사의 퇴법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황약사는 한편으로 비키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퇴법을 살펴보며 연신 감탄했다. [훌륭한 재간이군, 훌륭한 재간이야] 이 한차례의 격돌에 흙모래가 뿌옇게 피어 올랐다. 쌍방은 이백여 합을 겨루게 되었을 때 가까스로 손을 멈추게 되었고, 황약사는 껄껄 웃으면서 꽃나무밭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말았다. 주백통은 소리쳤다. [가지 마시오!] 그러나 황약사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주백통은 황약사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튿날은 짝수 날이라 황약사는 나타나지 않고 벙어리 하인이 세끼의 음식을 갖다 주었다. 그리고 저녁밥을 갖다 줄 때는 한 주전자의 소홍화조주(紹興花雕酒)도 있었고 한 마리의 닭으로 요리한 총유계(蔥油鷄)도 있었다. 주백통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쩝쩝거리면서 먹고 마셔댔다. 닭의 잔뼈까지 꼭꼭 씹어 삼킨 것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은 홀수 날이었다. 황약사는 다시 와서 주백통과 무공을 겨뤘는데 이번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2백여 초를 싸웠다. 이 날 황약사는 낙영장과 소엽퇴를 아울러 펼쳐 주백통이 숨 돌릴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주백통이 위급하게 되었을 적에 그는 갑자기 손을 거두고 껄껄 웃으며 사라졌다. 나흘째 되는 날은 짝수 날이라 황약사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벙어리 하인은 이 날 다시 세 끼의 밥과 찬을 가져왔는데 무척 푸짐했다. 여정진소주(女貞陳紹酒) 외에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오리 한 마리를 요리해 입맛을 돋구고 있었다. 주백통은 오리를 뜯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나를 이 도화도에 가두어 두고 이틀에 한번씩 무공을 겨루는데, 이와 같이 오래 계속하다가 내가 지쳐 죽는 것이 아닐까? 설사 지쳐 죽지 않는다 해도 전진파의 무학 요결을 그가 배워 갈 것이니 역시 보람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반드시 계책을 써야 하겠구나!) 주백통은 머리를 짜낸 결과 한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닷새째 되는 홀수 날, 황약사는 다시 와 주백통과 무공을 겨루려고 했다. 이번에 그는 한 자루의 보검까지 지니고 있었다. 주백통은 그를 보자 갑자기 땅바닥에 털퍽 주저 앉으며 점잖게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과 싸우지 않겠소.] [아니, 당신은 나와 무공을 겨루지 않겠다는 것이오?] 주백통은 기지개를 켜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석류꽃이 활짝 핀 오월, 햇살이 따사로워 잠이 솔솔 쏟아지는구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번거롭게 당신과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오? 그런 짓은 정말 쑬데없는 일로 시큼한 땀냄새만 피우는 허튼 짓거리가 아니겠소?] 황약사는 얼굴을 굳혔다. [당신은 억지를 쓰려는 것이오? 그건 곤란하오.] 주백통은 대꾸했다. [당신이야 곤란하겠지. 하지만 이 몸은 한잠 자야 되겠소. 나를 강요할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고, 차라리 나를 죽이는 게 좋을 거야.] 황약사는 화를 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내가 당신을 도화도로 청해 온 것은 전진교의 고명한 재간을 가르침 받기 위해서였소. 당신이 나와 무공을 겨루지 않겠다면, 오늘부터 나는 밥을 갖다 주지 않을 것이오.] 주백통은 두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질렀다. [아니, 밥을 갖다 주지 않는다고? 나를 산 채로 굶겨 죽일 작정이오?] 황약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소. 주가 양반, 이 황약사는 한 섬의 우두머리로서, 한번 한다고 한 말은 반드시 실천하고야 마는 성질을 지니고 있소. 그러니 어서 무공을 겨룹시다!] [우리 전진교의 규칙상 함부로 본문의 절기를 남에게 전수해 줄 수는 없소. 더군다나 당신과 같은 사마외도의 인물에게 무공을 전수한다면 설사 당신이 나를 살려 돌려 보낸다 해도 우리 사형 왕진인께서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좋아, 좋아, 당신은 나에게 밥을 주지 말고 나를 굶겨 죽이도록 하시오.] 그는 무공을 겨루지 않겠다는 듯이 아예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어쩔 도리가 없어 발을 한번 구르고는 그 자리를 떴다. 이날 밤에 벙어리 하인은 밥을 갖다 주지 않았다. 주백통은 억지로 허기를 참고 잠을 잤다. 이튿날 날이 밝자 그는 허기를 참을 수 없어 정사 밖으로 나가 서성거려 보았다. 문득 그의 눈에 대나무들이 들어왔다. 때는 초여름이라 대나무 밭에서는 한창 죽순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죽순은 새순이라 강냉이처럼 연하여 능히 먹을 수 있었다. 주백통은 한 아름의 죽순을 따서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물로 깨끗이 씻어 생채로 먹었다. 하루가 지났다. 하지만 죽순은 비위를 건강하게 하고 식욕을 돋구는 작용이 있었다. 주백통은 이튿날 자리에서 일어나자 너무나 배가 고픈 것을 느꼈다. 그는 다시 정사 밖으로 나가서 살펴 보니, 정사의 동남 모서리에 적지 않은 말리화(茉莉花)가 심어져 있었다. 이 말리화는 광동 땅에서 나는 진귀한 품종이었다. 주백통은 말리화를 두 아름이나 따서 안아 들고 집안으로 들어와 꽃술을 따서 한 웅큼씩 입안으로 쑤셔 넣어 게걸스럽게 씹어 먹었다. 그가 꾸역꾸역 꽃송이를 먹고 있는데 창 밖에 푸른 그림자가 번쩍거렸다. 황약사가 걸어 들어오더니 온 얼굴 가득 노기를 띄우고 호통을 내질렀다. [주씨, 정말 이럴 수 있소? 당신이 나의 꽃을 먹다니, 이 말리화로 말하면 내가 광동에서 종자를 골라 사 온 것이란 말이오. 온갖 정성을 기울여 가꿔 놓았는데 당신이 그 꽃을 나물처럼 먹어 치우다니!] 주백통은 껄껄 웃었다. [당신은 너무 치사하군. 당신이 나를 굶겼으니, 나로서는 굶어 죽을 수가 없지 않겠소? 꽃송이는 물론이고 배가 고프면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라도 먹게 되는 것이오. 하늘의 옥황대제(玉皇大帝)한테서 사 온 선화(仙花)라 해도 나는 먹지 않을 수 없소. 이곳에는 꽃이 너무나 많구려. 나는 적어도 반 년 동안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오. 으하하하!] 황약사는 성이 나서 더 말하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주백통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꽃송이로 배를 채울 수는 없었다. 주백통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밖으로 나가 한 그루의 느릅나무를 골라 일장을 후려쳤다. 대접 굵기의 한 그루 나무를 분질러 집안으로 끌고와서 여린 잎만 따서 먹었다. 이는 꽃송이를 먹는 것보다 훨씬 허기를 채우기 좋았다. 주백통은 이와 같이 다시 하루를 견디어 냈다. 이튿날은 이곳에 온 지 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주백통은 여린 잎사귀를 다 먹고 난 후에 다시 나무 껍찔을 벗기고 나무의 안쪽 껍질을 벗겨 배를 채우고 있었다. 이때 황약사가 갑자기 걸어 들어오더니 주백통에게 입을 열었다. [주가 양반, 나갑시다. 당신의 사형이 왔소!] 주백통은 크게 기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양진인이 어떻게 도화도까지 왔을까? 주백통이 산에서 내려가 음씨쌍괴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동해로 떠난 후 왕중양은 여섯 명의 제자들과 여전히 숭산 위에서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주백통이 떠난 후 한 달 남짓한 세월이 홀렀으나 여전히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왕중양은 내공을 운행하는 도중에 갑자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주 사제가 이번에 아무래도 변고를 당한 것 같구나! 불길한 예감이 느껴지니...) 그는 주백통의 경박한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주백통은 그의 사제였다. 동해로 가서 싸움에 이긴다면 몰라도 만약 예측하지 못한 변고를 당하게 된다면 비단 전진파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한 명의 사제를 잃게 되는 것이었다. 중양진인은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나무가 조용히 서 있으려 해도 바람이 멈추지 않는구나. 나는 쓸데없는 일에 더 말려들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구나.] 이튿날 이른 아침, 먼동이 틀 무렵 왕중잉은 여섯 명의 제자들을 불러 앞에 앉히고 자기가 산을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마옥과 구처기 등 여섯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구처기는 물었다. [사부님, 어르신께서 며칠 전에 절대로 주 사숙의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뜻을 바꾸셨는지요?] 왕중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나는 본래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니 모른 척 할 수가 없구나. 이 사부에게는 오직 한 명의 사제밖에 없다. 그가 위험에 빠진 것을 보고도 팔짱을 끼고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도리가 아닐 것 같다. 나는 산을 내려가기로 했으니 너희들은 열심히 무공을 연마하도록 하라.] 이튿날 새벽녘에 숭산의 산자락에 짚신에 삿갓을 쓴 도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허리에는 보검을 차고 손에는 불진을 들고 터벅터벅 동쪽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바로 왕중양 진인이었다. 그는 이번에 숭산을 내려가자 봉양(鳳陽)을 지나 회상(准上)으로 들어섰다가 감성현(監城縣)의 해변에서 해선(海船)를 타고 온주(溫州)까지 항해했다. 이 바다의 노정에서 왕중양은 뱃사공들과 한담을 나누다가 그들에게 동해쌍괴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한 명의 사공이 말했다. [아, 도장께서는 음장강과 음장하 두 괴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근년 들어 그들은 육횡도에 틀어박혀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해에 한 분의 괴협(怪俠)이 나타나 그들을 추풍낙엽처럼 때려 눕혔기 때문에 감히 다시 나타나 흉악한 짓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왕중양은 궁금증을 느끼고 물었다. [아, 동해쌍괴는 무공이 매우 뛰어나고 밀리까지 악명을 떨치고 있는데, 그 누가 그들을 때려 눕혔다는 것이오? 그 말은 믿기 힘들군요.] 그 사공은 성을 내며 말했다. [강한 사람 위에 더 강한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산 뒤에는 더 높은 산이 있는 법이지요. 도사께서는 동해쌍괴의 무공이 천하 무적인 줄 아십니까?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그는 신명이 나서 동해쌍괴가 좌절당한 경과를 이야기했다. 원래 음장강과 음장하는 동해 일대에서 10여년간 횡행했으며 천인공노할 짓을 적지 않게 하고 어민들과 지나가는 상인과 나그네를 노략질했다. 어민들은 감히 육횡도 옆을 지나가지 못하고 길을 돌아 가야 했다. 어부들은 하나같이 그들 두 형제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했으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2년 전 갑자기 한 명의 서생이 나타났는데 그는 스스로 황약사라고 밝혔다. 어디서 재물을 긁어 모았는지 모르지만 엄청난 금은과 몇 명의 남녀 제자들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었다. 많은 하인들을 데리고 나타난 그는 육횡도에서 50리 밖에 있는 도화도를 점거하고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밭을 가꾸었다. 동해쌍괴는 언제나 동해를 주름잡아 온 터라 자기의 잠자리 옆에서 다른 사람이 코를 고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도화도로 올라가 황약사를 강제로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황약사의 무공은 기묘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단지 한 자루의 옥소로 음씨쌍괴와 겨루었는데 수십 초가 지나자 음씨쌍괴는 그에게 패하고 말았다. 만약 고기가죽으로 만든 옷이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동해쌍괴는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었다. 그들은 즉시 육횡도로 후퇴하여 감히 나서지 못했다. 무공을 좀 더 홀륭히 익힌 후에 황가를 상대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왕중양은 다시 도화도의 상황을 물었으나 그 어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화도가 어떤 섬인지 저희들도 모르는 일이지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그 황씨 성을 가진 사람은 성질이 괴퍅해서 동해쌍괴에 못지않게 까다롭다고 하더군요.] 왕중양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배가 온주에 도달해서 닻을 내리자 왕중양은 먼저 은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한 척의 커다란 화물선을 빌리고 여덟 명의 사공들을 고용했다. 화물을 정해(定海)까지 옮긴다고 하면서 왕중양은 상당한 액수의 은자를 사공들에게 주었다. 돈이 있으면 귀신으로 하여금 맷돌을 갈게 할 수 있다는 속담도 있다. 반나절이 되기도 전에 그 한 척의 커다란 배는 어느덧 온주를 떠나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큰 배가 항주만(杭州灣)에 이르게 되었을 적에 왕중양은 갑자기 그들에게 육횡도로 방향을 바꿀 것을 분부했다. 사공들은 놀라는 한편 화를 냈다. 왕중양은 이미 그러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사공들에게 호통을 질렀다. [내가 막대한 은자를 써서 당신들을 고용한 것이니 내 가고 싶은대로 가야 할 것이 아니겠소? 당신들이 감히 명을 거역할 셈이오? 그렇다면 빈도의 재간을 한번 보여주겠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손을 들어 돛대 위를 후려쳤다. 그 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배의 돛대는 대뜸 두 자 길이로 토막이 나 떨어져 바다 속에 잠기고 말았다. 뭇 사공들은 그만 깜짝 놀랐다. 왕중양은 차가운 얼굴빛으로 호통을 질렀다. [당신들 가운데 육횡도로 달려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내 일장을 얻어맞게 될 것이오. 머리통이 돛대의 나무보다 딱딱한지 두고보겠소.] 사공들은 왕중양의 무공에 놀라 멍청해지고 말았다. 그들은 겁이 났다. 그런데 한 명의 사공이 용기를 내어 왕중양에게 물었다. [도장, 육횡도는 동해쌍괴가 웅크리고 있는 곳이외다. 쌍괴는 어떠한 배도 오 마장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소. 그리고 그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틀림없이 죽었소. 우리들이 배를 육횡도로 몰고가게 되었을 적에 만약 동해쌍괴의 도당들이 우리들을 죽이려 한다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오?] 왕중양은 나무랐다. [터무니없는 소리. 내가 당신들의 배에 있는 이상, 그 누구든 결코 자네들의 털끝 하나 다치지 못하게 할 터이니 안심하고 배를 그쪽으로 몰도록 하시오. 빈도는 출가인이라 본래 좀처럼 사람을 죽이지 않지만 당신들이 분수를 모르고 날뛴다면 살계를 범할 수밖에 없소.] 사공들은 하는 수 없이 배를 육횡도 쪽으로 몰았다. 이 날은 바람이 잔잔하고 하늘이 맑은 데다가 순풍이 불어, 하루가 되기 전에 육횡도 가까운 곳에 이르게 되었다. 사공들은 하나같이 조바심을 내며 불안해 했다. 동해쌍괴의 제자들은 배밑바닥을 뚫고 사람을 바다속에 빠뜨려 죽이기를 즐겼다. 만약에 수면 위로 짙은 사람의 머리가 떠오르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의 신호였다. 동해쌍괴의 제자들이 검은 가죽옷과 봉두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배가 5마장에서 다시 3마장으로 간격을 좁히면서 1마장 정도로 간격을 좁힐 때까지도 동해쌍괴의 제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공들은 의아해했고, 왕중양 역시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에 배는 섬의 기슭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왕중양은 먼저 기슭 위로 올라가 사공들에게 함께 오르기를 권했다. 그런데 그 사공들은 한사코 그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그들에게 강요할 수도 없어서 혼자 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그 섬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산봉우리 아래에 이르게 되었을 적에 한 거대한 동굴의 입구에 시체들이 가득 널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시체들은 60구나 되었다. 왕중양은 너무나 뜻밖이라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고 시체들의 얼굴마저도 썩기 시작하고 있었다. 왕중양은 더러운 곳을 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그 사람들이 어떻게 목숨을 잃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몇 명의 시체들을 뒤집어 보았다. 그는 그들의 몸에 몇 대의 금침이 꼿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중양진인은 즉시 금침을 뽑았다. 그는 이 금침들이 지극히 눈에 익었다. 문득 그는 한가지의 사실을 상기했다. 3년 전에 그가 해선을 타고 산동의 황해를 지날 무렵, 중도에서 하나의 황량한 섬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황량한 섬에는 기문석진(奇門石陳)이 펼쳐져 있었다. 왕중양은 그 와같은 흔적을 발견하자 깊이 들어가 살펴 보기에 이르렀는데 한 명의 면구를 쓴 청의인이 갑자기 나타나 그에게 암습을 가해 왔었다. 중양진인은 그와 몇 수를 교환했는데 청의인은 한 웅큼의 금침을 뿌렸고 왕중양은 배운수(排云袖)의 재간으로 그 금침을 모조리 땅바닥에 떨어뜨린 바가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그는 그 몇 대의 금침을 잘 갈무리하여 보존하게 되었고 지금도 몸에 지니고 있는 터였다. 따라서 왕중양은 즉시 금침을 꺼내 손에 들고 새로 발견한 금침과 비교해 보니, 그 생김새가 똑같았다. 왕중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 동해쌍괴와 그의 제자 육십여 명이 모조리 죽어버리고 말았구나. 동해쌍괴를 죽인 사람은 틀림없이 그 날 황해의 황량한 섬에서 본그 사람일 게다. 아이쿠, 황약사가 도화도를 점거한 사람이란 말인가?] 왕중양은 즉시 섬의 기슭으로 되돌아갔다. 한데 섬기슭으로 되돌아 간 순간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그가 고용해 온 그 커다란 화물선은 이미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 배의 사공들은 왕중양이 섬으로 오르자 즉시 떠난 모양이었다. 그들은 기다려 볼 용기마저 없었던 것이었다. 왕중양은 무공이 절세적이지만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육횡도의 기슭을 따라 물에 띠울만한 물건이 없는지 살펴 보았다. 하늘이 무심치 않았는지 섬의 북쪽 계곡에서 여섯 척의 조그만 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해쌍괴와 그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배인 모양으로 노가 갖추어져 있었다. 왕중양은 즉시 한 척의 조그만 배를 골라 물속으로 밀어 넣고, 노젓는 소리를 내며 육횡도에서 떠나가게 되었다. 그는 배를 저을 줄 알았지만 바다의 조류와 풍향을 모르니 역시 넓은 바다를 건너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돌풍이나 커다란 파도를 만나게 된다면 왕중양이 타고 있는 이 일엽편주는 단번에 뒤집히고 말 것이고, 절세 무공을 지닌 중양진인이라 해도 그렇게 된다면 바다의 고기밥이 될 것이었다. 운이 좋아 마침 동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도화도가 보이는 곳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왕중양은 그 섬이 녹색으로 뒤덮혀 있는 것이 육횡도와 전혀 다르다고 느꼈다. 섬의 기슭에는 인공으로 가꾼 꽃나무들이 서 있어, 첫눈에 이 섬에 틀림없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양진인은 무척 기뻐 즉시 배를 몰아 도화도로 가게 되었고, 배를 버리고 기슭으로 올랐다. 꽃나무 숲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두 명의 젊은이가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이때 왼쪽의 소로길로부터 두 명의 하인이 나타났다. 황약사가 고용하고 있는 벙어리 하인들이었다. 왕중양은 그들의 내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 명의 하인들은 그저 어어, 하면서 반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 왕중양은 유심히 살펴본 결과 그들 두 사람이 혓바닥을 잘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바로 이때 꽃나무 숲속에서 우렁차게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황약사가 어느덧 꽃나무 숲속에서 걸어 나왔다. 왕중양과 황약사는 두번이나 맞대면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황해의 황량한 섬에서, 두번째는 화산의 꼭대기에서였다. 하지만 두번이나 그는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으며 한번도 왕중양에게 참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왕중양은 두 대의 금침에서 이미 그의 참된 신분을 알아낼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즉시 합장했다. [무량수불, 오늘 또 다시 만나게 되었구료.] 황약사는 그 말을 받았다. [도장께서는 정말 기억력이 훌륭하시구료. 그런데 어인 일로 중양진인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왕림하셨는지요?] 왕중양은 말했다. [빈도가 이번에 불원천리하고 이 동해에 발을 디딘 것은 우리 사제 때문에...] 황약사는 즉시 그 말을 가로챘다. [왕진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바로 이 도화도에 있소.] 왕중양은 크게 기뻐서 말했다. [아, 우리 사제가 언제 도화도에 왔소? 황형은 어떻게 그와 알게 되었소?] [내가 육횡도에서 그를 만나 이곳으로 안내해 왔소. 그리고 우리들은 친구로 사귀게 되었지요 영사제는 꼬박 아흐레를 이곳에서 머물렀지요.] 왕중양은 자기의 사제가 황약사에게 연금 당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렇다면 황헝이 빈도를 사제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주시구료.] 황약사는 빙그레 웃었다. [도장께서는 심려 마십시오. 영사제는 섬에서 쉬고 있으나 첫째로 외상이 없고 둘째로 내질(內疾)이 없으니, 지금 베개를 높이 베고 꿈나라에서 놀고 있을 것이오.] 황약사는 주백통이 육횡도에서 음씨쌍괴를 상대로 악전고투한 경과를 자세히 들려 주었다. 왕중양은 그와같은 이야기를 듣고 안색이 변했다. (사제 주백통이 황약사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미 육횡도에 뼈를 묻게 되었겠구나) 왕중양은 감사함을 느끼고 공손히 합장했다. [무량수불, 황형은 우리 사제의 생명을 구해 주셨구료. 그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하오이다. 빈도의 절을 받으시오.] 황약사는 재빨리 반례를 하면서 겸손한 어조로 말했다. [도장께서는 너무나 겸손하십니다. 소제는 그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한번 인정을 베푼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도장의 그와 같은 대례(大禮)를 받을 수 있겠소? 더군다나 소제에게는 도장에게 부탁드릴 일이 있소이다!] 왕중양은 속으로 바짝 긴장하였다. (제발 구음진경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왕중양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황형은 아무쪼록 분부를 내리시구료. 빈도의 능력이 미치는 한 전력을 다하겠소.] 황약사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왕진인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지요. 구음진경은 천하의 기서로, 그야말로 우주(宇宙)의 모든 이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소이다. 소제는 다른 사람의 업적을 가로챌 마음은 추호도 없소이다. 다만 학구심이 간절한 것이 탈이지요. 도장께서는 사흘 동안만 구음진경을 빌려 주실 수 없겠는지요. 읽은 후에 즉시 되돌려 드리고 후히 사례를 하겠소이다.] 황약사는 말이 끝나자 즉시 왕중양에게 읍을 했다. 왕중양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기어코 황약사가 구음진경을 들먹이는구나. 그 날 화산에서 황약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때 이미 오늘과 같은 일을 내다본 것이 아닐까? 황약사의 행동이 괴상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정직함을 잃지 않는 성격이구나. 사제가 큰 은혜를 입었으니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왕중양은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합장을 했다. [황형, 사실 구음진경은 내가 지니고 있소. 빈도는 많은 심혈을 기울여 가까스로 화산에서 구음진경을 찾아낸 것이오. 하지만 구음진경을 내가 이미 살펴 보니, 구음진경에 실려 있는 무공 수법이 무척 잔인하고 하늘의 호생지덕을 저버리는 것이었소. 따라서 빈도는 구음진경을 갈무리하고 결코 이 세상에 내놓지 않기로 하였소. 심술이 옳지않은 사람이 구음진경의 무공을 배우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늘에 맹세한 바 있었소. 만약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구음진경에 실린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백성들은 더욱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니 이는 곧 내가 죄를 짓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소?] 황약사는 안색이 변했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는 속담도 있소이다. 왕진인, 왕진인 혼자 구음진경을 차지하면 무림 후학들이 선인(先人)의 유저(遺著)를 한번 구경하고 싶어도 뜻을 이룰 수가 없지 않겠소? 왕진인은 구음진경에 실려 있는 무공 수법이 너무 악랄하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왕진인이 입으로 하는 말씀일 뿐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소? 왕진인은 이 몸을 세 살 먹은 어린애로 알고 있습니까? 내가 왕진인의 속임수에 넘어갈 줄 아셨소? 왕진인, 왕진인의 사제 주백통은 틀림없이 도화도에 있소. 하지만 내가 그를 놓아 주는 데는 한가지 조건이 있소이다!] 왕중양은 황약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로채듯 입을 열었다. [빈도가 구음진경을 황형에게 빌려 주어야 주백통을 내놓겠다는 것이오?] 황약사는 껄껄 웃었다. [그렇소. 왕진인, 왕진인은 정말 전진교의 장교에 부끄럽지 않게 대뜸 알아 맞추는구료.] 왕중양은 갑자기 땅바닥으로 손을 뻗어, 그 앞의 모래바닥에서 맷돌 크기의 한 조각의 초석(礎石)를 잡아 뽑았다. 그리고 한번 손으로 문질러대자 초석은 즉시 가루로 변했다. 이에 황약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초석은 단단하기 이를 데 없었으면 모래바닥에 박혀 있어서 무척 견고했다. 응조력(鷹爪力)의 수법을 쓴다 해도 단번에 뽑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왕중양은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손을 뻗쳐서 허공을 격하고 맷돌만한 크기의 초석을 모래바닥에서 뽑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의 지력과 손힘은 다른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한번 문지르자 초석이 바스라져 고운 밀가루처럼 우수수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왕중양이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겨우 열 몇 알의 손가락 크기의 잔돌만 남아 있었다. 그가 그 한 줌의 잔돌을 공중으로 던지자 휙획,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열 몇 알의 잔돌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 올라 곧장 9장이나 되는 높은 허공으로 솟아 올라 사방으로 흩어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한번 손짓을 하자 그 잔돌들은 왕중양의 손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가 보여준 이 한수의 무공은 그야말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잔돌을 툉겨서 허공으로 날려 보낸 것은 선천공(先天功)이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떨어지는 잔돌을 불러 모은 것은 견인장(牽引掌)이었다. 황약사 자신이 무공의 대가이니 어찌 그와 같은 이치를 모르겠는가? 왕중양이 다시 손바닥을 한번 부비자 잔돌은 가루가 나고 말았다. 그는 그 가루를 그 땅바닥에 뿌렸다. [무공의 길은 한 조각의 커다란 바위와 같아서, 제대로 이용하게 되면 이와 같은 돌가루와 잔돌이 되는 것이오. 그러나 만약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다면 한 조각의 커다란 바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구음진경은 딱딱한 책일 뿐이오. 책만 들여다 보고 재간을 익힐 수는 없는 법이오. 그리고 황형의 재간을 두고 말하면 당금 무림에서 적수를 찾기 드문데, 어찌 경본(經本)에 연연하면서 번뇌를 자초하며 쓸데없는 일을 불러 일으키려 하시오?] 왕중양이 상대방을 깨우쳐 주려고 그런 말을 했으나 황약사는 도리어 발끈 성을 냈다. 원래 황약사는 성격이 오만한 사람이었다. 성격이 오만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결함이 있는 법이다. 왕중양이 한수의 무공을 보여주자 황약사는 일부러 자기에게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왕중양은 무공을 연마할 때는 책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지 않는기 황약사는 왕중양이 혼자 구음진경을 차지하려고 꾸며낸 말이라 여기고 냉소를 날렸다. [중양진인, 아무리 감언이설을 늘어 놓아도 소용이 없소. 구음진경을 내놓지 않는 한 영사제를 데리고 갈 생각을 하지 마시오. 당신이 구음진경을 내놓지 않고도 나로 하여금 당신의 동생을 내놓게 하려면 당신이 무공을 펼쳐 나의 마음을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오.] 이 몇 마디의 말은 왕중양과 무공을 겨루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왕중양은 엄숙하게 말했다. [빈도는 천박한 재간을 좀 익혔을 뿐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 있겠소? 하지만 귀하가 그렇게 말하니 그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구료. 빈도가 어떻게 해야 당신이 마음속으로 승복할 수 있는지 말씀해 보시구료.] [나는 당신과 무공을 세번 겨루겠소. 당신이 이 세 차례의 대결에서 두번을 이길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의 사제를 내놓도록 하겠소.] [남아 일언은...] [중천금이오. 하지만 한가지 전제 조건이 있소. 세번 무공을 겨루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결정하는 것이고 당신은 내 의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오. 응락할 수 있겠소?]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그럼 먼저 첫번째의 무공 대결을 합시다. 당신이 어떻게 겨룰 것인지를 말해 보시오.] 황약사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조금 전 당신은 손으로 바위를 부수어 조각을 냈었소. 정말 고명했소. 나는 암기 면에 있어서 어느 정도 조예가 있다고 자부하고 있소. 옛날 사람들 가운데 활을 잘 쏘는 궁수들로는 유기(由基)와 봉몽(逢蒙), 비위(飛衛) 등이 있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백 보 밖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쏘아 맞췄다고 하오. 나는 당신과 백보천양(百步穿楊)의 재간을 겨루어 보겠소.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오?] 왕중양은 생각해 보았다. (황해의 황량한 섬에서 처음 황약사를 만나게 되었을 적에 그는 만천화우(滿天花雨)의 수법으로 금침을 뿌리는 절기를 펼친 적이 있었다. 그가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암기의 고수겠구나. 내 자신은 모든 무공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기틀을 쌓고 있지만 암기에 대해서만은 별로 뛰어난 점이 없다. 황약사가 하필 암기를 겨루자고 하니 실로 난처하구나.) 황약사는 왕중양이 걱정하는 표정을 재빨리 포착할 수 있었다. 그는 냉소하며 말했다. [전진파는 도교(道敎)의 정종(正宗)이오. 왕진인께서는 암기가 잔재주에 불과하여 배울 가치가 없다고 섕각한 나머지, 암기를 쓰는 무공에 대해서는 별로 조예를 쌓지 못한 것 같구료. 그렇지 않소?] 왕중양은 눈살을 찌푸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빈도가 오늘 도화도에 온 이상 목숨을 걸고 상대할 수밖에 없소. 그러니 귀하는 얼마든지 겨룰 방법을 이야기해 보시오.] 황약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왕진인, 내가 당돌하지만 말씀을 드리겠소.] 그는 손으로 먼곳을 손가락질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왕진인 저쪽을 보시오. 저쪽에 큰 느릅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지 않소?] 왕중양은 내공을 부리런히 익힌 사람이라 시력은 여느 사람이 미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황약사가 손가락질하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오래 묵은 느릅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잎사귀는 크기가 엽전만 했다. 황약사는 다시 설명했다. [우리는 암기로 저 느릅나무 위의 잎을 떨어뜨리는 것이외다. 물론 우리 앞에 선향(線香)을 피워 놓고 한 대의 향이 다 탈 때까지 아무 암기나 사용해서 나뭇잎을 맞춰 떨어뜨리되, 어느 쪽이든 더 많은 잎사귀를 빨리 떨어뜨리면 이기는 것이외다. 응할 수 있겠소?] 왕중양은 대답했다. [그 생각이 무척 훌륭하구료. 하지만 느릅나무의 잎사귀에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그 잎이 황형이 떨어뜨린 것인지, 내가 떨어뜨린 것인지 알 수 있소?] 황약사는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럼 이렇게 합시다. 느릅나무의 동쪽에 두 그루의 단풍나무가 있소. 나는 느릅나무의 잎사귀를 칠테니 왕진인은 단풍나무의 잎사귀를 떨어뜨리도록 하시구료. 그럼 먼저 저 나무숲 안의 낙엽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쓸어낸 후에 나뭇잎을 떨구도록 합시다. 이렇게 된다면 공평하기 이를데 없을 것이외다. 이 방법이 괜찮지 않소?] 왕중양은 응할 수밖에 없었다. 황약사는 두번 손뻑을 쳤다. 벙어리 하인이 두 대의 선항을 가지고 왔다. 황약사는 왕중양의 손을 잡고 느릅나무 앞으로 나아갔다. 여덟 그루의 느릅나무가 서 있고 한쪽에는 두 그루의 단풍나무가 서 있었다. 황약사는 벙어리 하인에게 그 몇 그루의 나무 아래에 있는 잎사귀들을 모조리 쓸어 깨끗이 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리고나서 황약사는 왕중양에게 물었다. [이제 손을 쓸 수 있겠소?]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벙어리 하인은 즉시 다가와 선향을 피웠다. 황약사는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더니 말했다. [먼저 실례하오.] 그리고 왼손을 쳐들더니 한 응큼의 금침을 느릅나무 쪽으로 홱 뿌려서 날려 보냈다. 그 순간 느릅나무 쪽에서 사사삭,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대뜸 20개 정도의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황약사의 이와 같은 솜씨는 정말 비범했다. 사실 그가 사용하는 암기는 금침이고 그 크기가 작아서 결코 충격으로 나무잎을 흔들어 떨어지게 할 수는 없었고 오직 나뭇잎의 꼭지를 맞춰서 떨어트리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잎사귀의 꼬투리를 완전히 끊어 놓아야 그 잎사귀가 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백 보 밖에서 한 개의 나뭇잎을 맞추는 것만 해도 어려운데 나뭇잎의 꼬투리를 쏘아 맞추는 것이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는 단번에 20여 대의 금침을 뿌려내 모조리 느릅나무 잎사귀의 꼬투리를 적중시킨 것이었다. 느릅나무 잎사귀들은 크기가 엽전만 하기 때문에 겨냥하기 어려운 판이니, 느릅나무 잎의 꼬투리를 맞추어 끊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황약사가 단번에 20여 잎이나 되는 느릅나무의 잎사귀를 떨어뜨린 것은 그의 손힘과 시력이 정녕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아주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자기가 암기를 구사하는 수법이 황약사보다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약사를 모방한다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하지만 전진교주는 역시 여느 사람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왕중양은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아 전진파의 내공을 운기했다. 그는 백금곡(白禽谷)에서 폐관하고 선천공(先天功)을 연마한 경험이 있었다. 정(精), 기(氣), 신(神)을 집중시켜 삼화취정(三花聚頂), 오심향천(五心向天)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운기 행공을 한 차례 하고난 후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니 눈앞의 사물이 똑똑하게 보였다. 단풍나무는 몇 배나 더 커진 듯 잎사귀의 무늬조차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내공토납(內功吐納)의 신비한 점이었다. 무림에는 정신이 집중되면 신을 끌어 모을 수 있다는 속담이 있다. 옛 사람 기창(紀昌)이 활쏘는 것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춘주전국(春秋戰國) 시대에 활의 명수였던 기창은 좀더 활을 잘 쏘기 위해서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사수인 비위(飛衛)를 찾아가 그를 사부로 모시고 활쏘기를 배우고자 했다. 비위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베틀의 아래쪽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드러누워 눈을 크게 뜨고 눈 한번 깜짝거리지 않고 베틀 위에서 베를 짜느라고 오락가락하는 북을 주시하는 훈련을 오래 계속하면 자연히 탁월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기창은 비위의 말을 듣고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 베틀의 아래쪽에 드러누웠다. 그의 부모와 처자들은 그가 실성한 줄 알았으나 기창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와같이 3년 동안 연습하니 과연 그의 안신(眼神)은 충왕(充旺)해져서 시력이 크게 증진 되었다. 한번은 그가 베개에 이가 기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눈에 뜨이는 이의 몸뚱이가 놀랍게도 수레바퀴처럼 커 보였다. 기창은 즉시 활을 가져와 활로 이를 쏘아 이의 가슴을 관통시켰다. 기창은 무착 기쁘게 느낀 나머지 즉시 달려가 비위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비위 역시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자네는 나에게 활쏘기를 더 배울 필요가 없네. 자네의 활쏘는 재간은 이미 성공했네.] 기창은 과연 청출어람(靑出於藍)하여 그 당시 비위와 나란히 명성을 떨치던 사수 봉몽(逢夢)을 쏘아 죽였다. 이것만 보아도 한 사람의 시력은 내공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결코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왕중양이 내공을 돋구자 시력이 크게 증진되었다. 그는 즉시 손을 뻗어 땅바닥에서 한 웅큼의 모래알을 움켜 쥐고 그 모래알을 암기처럼 퉁겨 보냈다. 과연 그가 퉁겨 낸 모래알들은 잎사귀의 꼬투리를 적중시켰고 단풍나무의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황약사는 그가 단풍나무의 잎사귀를 떨어트리는 방법을 보고 그만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황약사가 금침으로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재간은 그가 도화도에서 오랜 세월을 걸쳐 고생 끝에 연마한 절기였다. 그는 왕중양이 자기의 재간을 따라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전진교주는 그야말로 기묘한 방법으로 자기를 압도한 것이었다. 먼저 내시법(內視法)을 사용해서 자기의 시력을 돋군 후에 선천신공(先天神功)으로 모래알들을 통겨내 암기를 대신한 것이었다. 사실 황약사의 금침이 많다고 하지만 사오백 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왕중양의 곁에는 모래알들이 부지기수이니, 그는 끊임없이 모래알들을 퉁겨내 한 알의 모래알로 나뭇잎 한 개를 쳐서 떨어뜨릴 수 있었다. 따라서 황약사는 한정되어 있는 금침으로는 도저히 왕중양과 겨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두 그루의 단풍나무 잎들이 마치 비오듯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 그만 다급해진 나머지 황약사는 입안의 침이 말랐다. 왕중양은 그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자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못 본 체하며 계속 모래알을 한알 한알 퉁겨냈다. 황약사는 다급한 나머지 간교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있는 곳은 왕중양과의 간격이 1장도 되지 않았다. 황약사는 몰래 장경(掌勁)을 쏟아내 왕중양이 선천공으로 퉁겨낸 모래알의 겨냥을 틀어 놓아 단풍나무 왼쪽에 빈터에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가 이와 같은 농간을 부리자 왕중양은 즉시 알아 차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다시 모래알을 쥐고 허공으로 뿌렸다. 황약사는 그 한 웅큼의 모래도 나뭇잎을 때리는 줄 알고 똑같은 농간을 부려 왼손으로 다시 장풍을 밀어보내 모래알들을 옆으로 몰려 가도록 만들려고 했다. 한데 왕중양이 이번에 모래알을 던진 것은 결코 단풍나무 쪽으로 뿌린 것이 아니라 단지 허공으로 높이 던져 올렸을 뿐이었다. 황약사가 일장을 밀어 붙이자 그는 신속하게 손을 돌려 장풍을 쏟아냈다. 왕중양은 이 일장에 7성의 공력을 돋구었다. 황약사가 쏟아낸 공력은 본래 강하지 않았는데 세차기 이를데 없는 장풍에 막히자 뻗어냈던 장력이 다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 바람에 모래알도 장풍을 따라 황약사에게로 날아갔다. 황약사는 왕중양과 같이 침착하고 온건하며 충후한 사람이 그와 같이 사람을 골탕 먹이는 짓을 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전혀 방비하지 않고 있었고, 거리가 가까워서 피랄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눈에 즉시 모래알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다시는 금침을 정확하게 겨누어 잎사귀의 꼬투리를 맞출 수가 없었다. 황약사는 대뜸 장풍으로 자기와 왕중양의 앞에 놓인 두 대의 선향(線香)을 일제히 꺼버리고 부르짖었다. [되었소. 우리들은 이만 땅바닥에 쌓여 있는 나뭇잎을 헤아려 보기로 합시다.] 왕중양은 그가 간교한 수작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빙그레 웃으면서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모두 헤아려 보니 황약사가 금침으로 떨어뜨린 느릅나무의 잎사귀가 123 잎이었다. 그러나 왕중양이 모래로 때려 떨어뜨린 단풍나무의 잎은 137 잎이었다. 한 대의 향을 다 피울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황약사가 떨군 나뭇잎보다 14 잎이나 많은 것이었다. 황약사의 안색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왕중양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떠시오? 이번에는 당신이 이겼소? 아니면 내가 이겼소? 당신이 말씀을 하시구료.] 황약사는 눈을 까뒤집고 소리쳤다. [아니, 내가 당신에게 졌다는 말이오? 당신은 간계를 써서 모래알을 눈속으로 날아들도록 만들었는데 내가 졌다고 할 수 있소?] 왕중양은 그의 성질이 괴상하고 고집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너무 따지고 들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빙그레 웃었다. [좋소 좋아. 이번 시합은 무승부로 합시다.] 황약사는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좋소, 무승부로 합시다. 그리고 두번째 시합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왕중양은 담담히 말했다. [귀하가 어떤 식으로 겨루고 싶든지 좋도록 해 보시구료.] 황약사는 천천히 말했다. [암기는 겨루어 봤으니 이번에 우리들은 명백하게 승부가 결정되는 방법으로 겨루어 봅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허공에서 맞손질을 하는 것이 좋겠구료!] [허공에서 맞손질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오?] 황약사는 빙그레 웃으며 손으로 느릅나무와 단풍나무를 가리키며 설명하듯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이 두 그루의 나무를 무공을 겨루는 비무대로 삼는 것이오. 우리 두 사람은 경신법으로 나무 위로 올라가 휘파람을 불면서 당신은 이쪽으로 건너 뛰고 나는 저쪽으로 건너 뛰는데, 서로 어깨를 스칠 듯이 지나치게 되었을 적에 서로 절초를 펼쳐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오. 한차례 겨루고 나면 다시 한차례 겨루되 만약에 그 어느 누가 허공에서 실수를 하여 떨어지면 지는 것이오.] 왕중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자는 정말 잔꾀가 많구나) 황약사가 제안한 그 방법은 얼핏 보기에는 무척 공평한 것 같았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사실 사람이 나무 위에 서게 된다면 몸을 가볍게 하고 진기를 돋구는 재간에 의지해서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나무 위에서 몸을 날려 맞은편의 나무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왕중양처럼 솜씨가 있는 사람은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나무의 힘을 빌려 힘을 쏠 수가 있고 건너편으로 건너 뛰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점은 몸이 허공을 가로지르게 되었을 적에 적과 손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의 발밑을 조심해야 하고 적의 초식을 해소시켜야 하니 추호라도 소홀이 생각했다가는 큰일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중양은 무예를 익히고 명성을 떨친 이래 얼마나 많은 풍파와 위험을 겪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황약사의 그와 같은 요구에 대해서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 되었소. 그것 참 신선하겠군!] 황약사는 그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자 속으로는 몰래 기뻐했다. 그는 즉시 몸을 솟구치며 느릅나무의 꼭대기로 올라섰다. 왕중양은 그가 몸을 솟구치게 되었을 적에 어깨가 흔들리지 않고 그 가벼움이 마치 깃털같은 것을 보고, 그의 경신법에 대한 조예가 몇 년 전 황해의 어느 황량한 섬에 펼쳐 놓은 석진(石陳)에서 만나 손을 쓰게 되었을 때와 비교해서 훨씬 증진된 것을 알아차렸다. 이때 전진교주 역시 넓다란 소맷자락을 한번 떨치며 눈 깜짝할 사이에 단풍나무 꼭대기로 올라섰다. 몇 명의 벙어리 하인들은 그들 두 사람의 절묘한 재간을 보자 입을 쩍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황약사는 왕중양이 나무 위로 오르자 맑은 휘파람을 내불며 몸을 날려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마치 두루미가 구름을 타듯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왔다. 왕중양 역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몸을 뽑아 올려 마치 힘찬 매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허공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두 사람이 허공에서 금방이라도 부딪칠 것 같았다. 황약사가 먼저 승기를 제압하려는 듯 공세를 취해 왔는데 허공에서 왼손을 쳐들고 오른쪽의 주먹을 내 뻗더니 손가락을 창날처럼 세워 왕중양의 두 눈을 찌르려고 했다. 이와 같은 공격에 대해서 이치대로라면 왕중양은 오로지 두가지 수법으로 상대해야 했다. 첫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손을 들어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한다면 황약사의 계책에 말려들기 마련이었다. 왜냐하면 황약사가 두 손가락을 찔러내는 수법은 실초도 될 수 있었지만 허초도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중양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하거나 손을 들어 막으면 황약사는 그 순간에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소엽퇴법을 펼쳐 왕중양의 하반신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왕중양이 어찌 불리한 처지에 놓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왕중양이 어떠한 인물인데 그런 점을 간파하지 못했겠는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의 허실을 이런 겸비한 타법(打法)으로 나를 이기려고 했다면 너무 나를 우습게 안 것이다.) 중양진인은 대항하거나 피하지 않고 곧장 황약사의 손가락 쪽으로 맹렬히 몸을 부딪쳐 갔다. 황약사로서는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중양진인과 어떠한 원한이 없었는데 만약 자기의 두 손가락이 왕중양의 눈동자를 찔러버리게 된다면 왕중양은 장님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왕중양이 그런 위험한 수를 쓴 것을 보면 왕중양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지 않겠는가? 황약사가 순간적으로 망설이는 바람에 손가락이 안쪽으로 약간 구부러지게 되었다. 고수들이 초식을 교환함에 있어서 그 재빠름은 번개와 같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실날같은 차이로 생사와 승패가 판가름나기 마련이었다. 황약사는 멈칫하는 그 찰나, 늑골 아래쪽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자기의 오른쪽 옆구리 아래의 장문혈(章門穴)이 어느덧 왕중양의 손가락 끝에 한번 스치는 것이 아닌가? 장문혈은 사람의 몸에 있는 전신을 마비시키는 12개의 혈도 가운데 하나였다. 일단 짚히게 된다면 전신이 시큰시큰하면서 힘이 쭉 빠지기 마련이었다. 황약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진기를 돋구고 혈도를 보호하려고 했으나 그가 진기를 돋구자마자 몸뚱이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곧장 땅바닥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왕중양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가볍게 몸을 날려 맞은편의 나무위로 올라서서 껄껄 웃었다. [하하하, 허공에서 겨룬 소감이 어떠시오? 황형, 빈도는 황형이 양보해준 데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오!] 황약사는 자기가 손을 쓰자마자 아래로 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자기가 인정을 품어서 패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억울하여 벌떡 몸을 일으키며 부르짖었다. [누가 당신에게 양보를 했다는 것이오? 이번 판은 무효요.] 왕중양은 소리내어 웃었다. [어째서 무효라는 것이오?] 황약사는 말했다. [나는 분명히 손가락으로 당신의 눈을 찔러 밀게 할 수가 있었소. 그런데 당신은 얼굴을 디밀었기 때문에 나는 서로 원한이 없는데 그와 같은 독수가 써서 되겠느냐 생각을 하게 되었소. 그 찰나 흠칫했던 것인데 뜻밖에도 그 틈을 타서 당신이 승리했으니, 나야말로 송양공(宋襄公)와 같은 꼴이 되지 않겠소? 안 되오. 다시 한번 더 겨루어야 하오.] 왕중양은 껄껄 웃었다. [매우 좋소. 당신이 승복하지 못하겠다면 한번 더 겨루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백번이라도 빈도는 응할 수 있소. 자, 오시오. 당신은 다시는 사정을 두지 마시오. 알았소?] 황약사는 더 말하지 않고 훌쩍 몸을 날리더니 단풍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되자 그는 왕중양과 위치를 바꾼 셈이 되었다. 황약사는 몸을 뽑아 올리더니 단풍나무 이쪽에서 통겨지듯이 날아올라 마치 화살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왕중양에게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왕중양 역시 나무꼭대기 위에서 몸을 솟구쳤다. 황약사는 사정을 두지 않고 전신의 내공을 잔뜩 끌어 올리고 왕중양에게 부딪쳐 갔다. 그는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동시에 땅바닥에 떨어지게 된다면 이번 대결이 무승부를 이룰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한데 그가 왕중양의 앞 서너 자쯤 되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적에 왕중양이 갑자기 불쑥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황약사는 상대방의 몸 앞에 마치 형체 없는 기(氣)로 만들어진 담장이 세워져서 자기를 막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황약사는 그만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이것은 중양진인의 선천공(先天功)이라는 재간이었다. 그는 다만 3푼의 내공을 썼을 뿐인데 황약사는 이미 뚫고 들어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기운에 밀려 뒤로 날아갔다. 왕중양은 한쪽 손을 뻗어내어 약 한 자 정도의 간격을 두고 황약사 앞의 공간을 막아 놓고는 선회(仙姬)가 자식을 전송하듯 두둥실 황약사가 단풍나무 꼭대기 위로 되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왕중양 역시 단풍나무 위로 올라섰다. 두 사람은 거의 똑같은 찰나에 나무꼭대기 위로 올라섰으며, 두 사람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땅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왕중양은 앞으로 나아가 나무 꼭대기에 올라선 것이고 황약사는 뒤로 물러나 제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 황약사는 땅바닥에 떨어진 것보다도 더욱 치욕스러웠다. 상대방이 자기를 데리고 논 셈이었으니 자부심이 강한 그가 얼마나 창피했겠는가? 왕중양은 웃었다. [황형, 이번은 무승부로 합시다. 더 겨룰 것 없소.] 황약사는 발끈했다. 갑자기 그는 나무 꼭대기에서 몸을 솟구치더니 휙, 하는 바람소리와 더불어 3장이나 높이 솟아 올랐다. 왕중양은 한마디 외쳤다. [한번 더 겨루겠소?] 발끝으로 가볍게 차면서 덩달아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황약사를 바짝 따라붙었다. 황약사는 청색의 소맷자락을 떨치며 쉭쉭쉭, 하니 잇따라 금빛도 찬란하게 왕중양의 정면으로 금침을 쏘아 보냈다. 왕중양은 그가 금침을 내쏟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소맷자락을 슬쩍 뿌리치더니 한가닥 강기를 세차게 내쏟아 밀어 보냈다. 그 바람에 황약사의 금침은 몸 가까이 다다르기도 전에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다. 왕중양은 왼쪽 소매자락을 휘둘러 금침을 쳐서 떨어뜨리는 동시에 오른쪽의 소맷자락을 뿌리치면서 황약사 쏟아낸 장풍을 후려쳤다. 황약사는 냅다 손을 뻗쳐 그의 소맷자락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한데 왕중양의 소맷자락은 마치 뱀의 혓바닥처럼 벼락같이 뒤로 움츠려들면서 어느덧 황약사의 손목을 휘감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냅다 바깥쪽으로 한번 밀어 젖히자 그 힘이 너무 엄청나 황익사의 몸뚱이는 자기도 모르게 멀리 날려가게 되었다. 그는 갑작스런 변고에 다시는 몸을 가볍게 하고 진기를 끌어 올려 나무 꼭대기를 찾아 내려설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발이 허공을 디디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땅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왕중양은 원래의 자세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단풍나무 꼭대기로 내려섰다. 황약사가 떨어진 곳은 공교롭게도 벙어리 하인들의 앞이었다. 그런데 그 하인들 가운데 한 명이 주인이 낭패한 꼴로 떨어지는 것을 보자 그만 씩 웃었다. 황약사는 땅바닥에 떨어지자 마자 즉시 몸을 훌쩍 솟구쳤는데, 그 순간 홀낏 그 벙어리 하인이 웃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우라질 놈아!] 다짜고짜 일성을 대갈하더니 손을 들어 그 하인을 후려쳐 3장 높이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그 하인은 염통과 폐가 모조리 갈라져 저만치 모래바닥 위에 나가 떨어지게 되었는데 손과 발을 몇번 허우적거리더니 그대로 숨지고 말았다. 왕중양은 황약사가 자기의 하인을 죽여 화풀이하는 것을 보자 속으로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몸을 둥실 날려 나무꼭대기에서 땅 위로 내려섰다. [무량수불, 무공을 겨루다가 패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거늘 어찌 그 때문에 사람을 죽인단 말이오? 빈도는 매우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오.] 황약사는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자비스러운 척하지 마시오. 당신에게 알려주는데 나의 하인들은 모두 다 악인들이오. 내가 그들을 거두어 도화도로 데리고 와서 벙어리로 만들었으니 그런 악인들은 아무 때나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무관하오. 당신은 남의 일에 주제넘게 간섭하지 마시오.] 그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원래 도화도의 벙어리 하인들은 하나도 선량한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벙어리가 되지 전에 나쁜 짓만 일삼던 무리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쥐새끼처럼 도적질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불효한 짓을 저질렀으며 어떤 사람들은 삼강오륜을 저버리는 못된 짓을 하였고, 어떤 자들은 살인과 강도짓을 일삼았었다. 황약사는 생각이 무척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의 여느 사람들과 사물을 보는 안목이 달랐다. 이와 같이 극악무도한 사람들이기에 하인으로 만들고 마음껏 부려 먹었던 것이었다. 주백통은 이 섬에 온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여전히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 이제 방금 도착한 왕중양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왕중양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가 입을 열었다. [아, 알고 보니 그랬었구료. 그렇다면 이번에도 무승부로 합시다.] 황약사는 버럭 고함을 쳤다. [터무니 없는 소리! 누가 당신보고 양보해 달라고 했소? 나는 이번에 두번이나 떨어졌으니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소. 하지만 또 한번의 시합이 남아 있으니 계속 겨루어 보도록 합시다.] 왕중양은 말했다. [그럴 필요가 있겠소? 다시 겨루어 보았자 의미가 없으니 그만둡시다.] [더 겨룰 필요가 없다니, 그 말은 무슨 뜻이오?] 왕중양은 대답했다. [나는 당신과 첫번째 시합에서 암기를 겨루었으나 무승부가 되어서 승부를 낼 수가 없었소. 두번째 판에는 당신이 양보를 해준 덕택에 이겼으니 이미 일승일무가 된 것이오. 그런데 만약에 세번째 시합에서 당신이 이기게 된다면 당신 역시 일승일무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된다면 높고 낮음을 어떻게 판가름할 것이냔 말이오?] 황약사는 그 말을 받았다. [내가 이겨 일승일패가 된다면 나는 당신의 사제 주백통을 풀어주겠소.] 막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그는 후회했다. 왕중양은 승패를 불문하고 주백통을 구출해 가게 될 젓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황약사는 구음진경을 얻을 희망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약사는 역시 총명한 사람이었다. 눈살을 살짝 지푸리는 순간 마음속으로 이미 하나의 묘책을 마련해 놓았다. 그리하여 황약사는 중양진인에게 말했다. [왕진인, 우리 세번째 시합을 하도록 합시다. 기억하시겠지만 우리가 처음에 만났던 곳은 황해에 있는 어느 이름 모를 황량한 섬이었소.]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그때 당신은 기문석진을 펼쳐 놓고 이 불청객을 환영했었소.] 황약사는 싱긋 웃었다. [그때 나는 처음 기문팔진을 배웠소. 그때 그 석진은 무척 단순하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당신은 대뜸 진 안으로 들어설 수가 있었소. 이 몇 년 동안 나는 도화도에서 온종일 그와 같은 오행생극과 기문팔진이라는 학문을 연구해 왔소. 비록 대성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터득한 바가 있었소. 또 노고를 아끼지 않고 심혈을 소모해 가면서 도화도를 새로 가꾸어 놓아 한 그루의 꽃나무나 한 그루의 풀, 또는 한 그루의 나무나 한 조각의 바위에 이르기까지 기문팔진과 생극의 형태를 모방해서 배치하였소. 왕진인, 당신은 높은 나무의 꼭대기 위로 올라가 한번 사방을 굽어살펴 보시오.] 왕중양은 처음 도화도에 오르게 되었을 때 이 섬이 무척 이상야릇하게 가꾸어져 있다고 느꼈었다. 상대방이 그와 같이 말하자 더 겸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몸을 훌쩍 솟구쳐 가장 높은 한 그루의 백양나무 꼭대기로 올라섰다. 나무꼭대기로 올라선 중양진인은 눈을 들어 사방을 살피다가 황약사의 용의주도함과 설계의 교묘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 그의 시력이 미치는 8마장 이내의 섬은 모두다 꽃과 나무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꽃나무들을 얼핏 보면 파릇파릇하고 울창한 것이 무척 아름답고 우아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겹겹이 늘어서 있는 것이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호들이었다.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꺾어져야 할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하나의 거미줄처럼 곳곳에 구멍과 길이 나 있으면서도 겹겹히 그물이 잔뜩 깔려 있었다. 왕중양은 기문팔진과 오행생극의 학문에 대해 본래 상당히 깊은 조예를 쌓았고 또한 청허산인에게 배운 바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도화도의 기문팔진을 바라보니 변화가 복잡하고 오고가는 길과 순환됨은 물론이요, 배치의 기묘함은 그야말로 천하에 짝이 없을 지경이었다. 왕중양은 진법에 대해서는 대가라 할 수 있었지만 그 가운데의 오묘한 점을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한참 그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등뒤에서 바람소리가 들렸다. 즉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황약사 역시 뒤따라 뛰어오른 것이었다. 황약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떠시오? 저의 얄팍한 재간이 왕진인의 법안(法眼)에 차시오?] 왕중양은 빙그레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헤어져 있는 사이에 황형의 기문변화에 대한 조예가 이토록 정진되다니, 뜻밖이구료. 정말 괄목할 일이오. 진심으로 축하하오. 그런데 빈도가 이 기문팔진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오?] 황약사는 그 말을 받았다. [왕진인께서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구료. 우리들이 제갈공명이나 사마중달(司馬仲達)이 아닌데 어떻게 진을 펴서 싸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자자자,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세번째 시합을 합시다.] 그는 손을 들어 도화도의 동남쪽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진인, 보십시오. 저쪽에 초록색의 대나무 정자가 보이지요?] 왕중양은 선천공을 연마한 사람이라 시력이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동남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녹음이 우거진 곳에 백색의 석대(石臺)가 우뚝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석대는 둘레가 10여 장 정도 되는데, 그 위에 대나무로 만들어진 정자가 있었다. 황약사는 설명했다. [저 대나무 정자의 이름은 시검정(試劍亭)이라 하는데 정자의 기둥에 일부(一副)의 대련이 있소 대련의 구절은 이 황모가 가장 좋아하는 두 마디라오. 즉, <화려한 꿈속에 신검을 묻고, 피리 소리와 북소리 가운데에 늙어가는 나그네.>라는 구절이지요. 이 섬에는 오직 대나무 정자라곤 저것 하나뿐이며 저곳이 바로 제가 바람을 쐬면서 쉬는 곳이지요.] 왕중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성격이나 행위가 요상하고 괴퍅한 것 같지만 위인됨이 탁월하고 탈속한 면이 있구나.) 황약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바로 시검정에서 삼가 왕진인께서 납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소. 세 대의 선향을 다 태울 때까지 왕진인께서 시검정에 당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화도에 펼쳐 놓은 기문팔진의 현묘한 이치를 터득하지 못한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게 되었을 때 이번 시합에서 이 황모가 이기게 되는 것이지요.] 왕중양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이 시합도 무척 좋구료. 독특한 면이 있으면서 서로의 화기를 해치지 않으니 더욱 좋소이다. 한마디로 약속했소. 이 왕모는 세 대의 향이 다 타기 전에 시검정에 가서 귀하를 만나겠소.] 황약사는 벙어리 하인에게 손짓을 했다. 한 명의 하인이 한 대의 향에 불을 붙여 왕중양의 손에 건네주었다. 왕중양은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벙어리 하인은 손가락으로 동남쪽을 가리켰다. 왕중양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황약사는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벙어리 하인이 그에게 준 세 대의 향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져 있었으며 불은 가장 꼭대기에 피워져 있었다. 황약사는 세 대의 향이 다 타기 전에 시검정으로 와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는데, 자기가 공평하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세 대의 향을 왕중양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왕중양은 항을 받자 몸을 날려 오래 묵은 백양나무 위로 올라가 시검정의 위치를 살펴 보았다. 시검정은 5마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왕중양은 궁리해 보았다. (저 정자가 만약 복희팔괘(伏羲八卦)의 이치를 따라 세워졌다면 이괘(離卦)에 속하는 미제(未濟)와 태충(太沖)이라는 두 괘 사이에 세워졌을 것이고, 만약 제갈무후의 팔진도(八陣圖)의 원리에 따라 세워졌다면 휴문(休門)의 위치가 될 것 같구나.) 왕중양은 그 위치를 기억하고 몸을 날려 평지로 내려서서 곧장 동남쪽으로 달려갔다. 복희 팔괘와 무후팔진은 치밀하게 구성된 수학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서양의 기하(幾何)나 삼각함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중국의 수학 용어인 일고이현삼색(一股二弦三索)은 바로 오늘날의 기하학의 원형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조들의 위대한 발명을 후세 사람들이 계승,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심지어 무후팔진은 제갈량 이후에 원리를 전수받은 전인조차 없었다. 글공부를 하는 선비들은 한 편의 글을 짓는데만 정신을 쏟았으며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부귀공명을 구하기 위해 과거 시험을 보려고 했다. 자기가 장원이라도 하여 황제의 부마가 되고 재상의 사위가 되어 가문을 빛내기만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과학 발전의 길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중국의 옛문화는 찬란했으나 과학은 발전이 없어서 빈(貧), 난(亂), 우(愚), 사(私), 약(弱)의 5대 병폐가 만연하여 서양인들은 중국을 동방병부(東方病夫)라고 일컬었던 것이었다. 과거 제도의 병폐가 이토록 많으니 어찌 유감이 아니겠는가? 이때 왕중양은 복희팔괘의 방위에 따라 움직였다. 그는 출발하게 되었을 적에 동쪽으로 열 일곱 문호, 서쪽으로 열 다섯 문호, 도합 서른 두 곳의 문호를 돌아 나아가면 미제와 태충 두 개의 교착점에 이른다고 여겼다. 다시 말해 바로 시검정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한 손에 선향을 들고 한 손으로는 손가락을 꼽아 가면서 숫자를 헤아리며 걸음을 멈추지 않고 꽃나무 숲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나아가다가 꺾었고 오른쪽으로 나아가다가 방향을 트는 등, 밥 한끼 먹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윽고 그는 마음속으로 복희팔괘의 서른 두곳 문호라고 여기는 곳을 모조리 통과하게 되었다. 그는 틀림없이 시검정 부근에 자기가 왔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앞쏙을 바라보니 앞쪽에는 여전히 바다처럼 짙고 울창한 녹음이 우거져 있었고 빽빽하게 대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 시검정의 그림자는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첫번째의 선향은 거의 다 타들어 가고 겨우 반 치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왕중양은 속으로 다급해진 나머지 몸을 날려 한 그루의 단풍나무 위로 올라가 사방을 살폈다. 시선을 들어 바라보니 이상하게도 그 시검정은 여전히 5마장 밖에 있었다. 그 자신이 조금 전에 걸어 온 길은 헛고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토록 애를 쓴 것도 모두 다 헛될 뿐이었다. 왕중양은 다시 궁리해 보았다. (아, 이제 알겠다. 그가 펼친 것은 복희의 팔팔은 육십 사 괘가 아니라 기정상반(奇正相反)의 삼백 육십 다섯 괘이다. 복회왕의 신괘(神卦)보다 더욱 복잡하고 번거롭구나. 내가 그와 같이 돌자 시검정이 방향을 바꾸어 조금 전에는 동남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서북쪽에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좋다. 아직 두 대의 향을 피울 시간이 남아 있으니 두 대의 향이 다 타기 전에는 그곳으로 갈 수 있겠지.) 왕중양은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무후팔진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경문(憬門)이었다. 휴문(休門)에 이르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열여덟번 돌아야 하고 서쪽으로 스물두번을 꺽어야 하며 남쪽으로 스물일곱번을 꺽어 돌아야 했다. 67곳의 문호를 통과해야 비로소 시검정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선향을 들고 입으로 묵묵히 숫자를 세며 나아갔다. 동쪽으로 한번 돌고 서쪽으로 한번 꺽어지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야 했다. 이와 같이 밥 한끼 먹을 시간을 돌게 되자 두번째 토막의 선향이 모조리 타버렸다. 그제서야 가까스로 67곳의 문호를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억,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시검정은 보이지 않았다. 왕중양은 그만 초조해졌다. 그는 이번의 계산도 빗나갈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이제 겨우 한 대의 선향이 남았으니 시간이 많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그 안에 시검정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이번 시합에서 자기가 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호승심(好勝心)이 있기 마련이었다. 왕중양은 현문(玄門)에 귀의한 도사였지만,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황약사가 복희팔괘와 무후팔진 두 가지 이외에 세번째의 어떤 술수를 부렸다고는 믿지 않았다. 만번 변한다 해도 그 원래의 모양은 변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변화는 역경(易經)이라는 책의 복희 팔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왕중양은 다시 가까이에 있는 나무꼭대기 위로 올라가 살펴 보았다. 시검정은 여전히 동남쪽에 있었다. 하지만 그 위치가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고 자기와의 거리가 2마장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왕중양은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영감에 무릎을 치며 부르짖었다. [나는 정말로 바보다.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황약사의 간계에 말려들고 말았다니!] 원래 황약사가 도화도에 펼쳐 놓은 것은 무후팔진이었다. 하지만 팔진이란 두 글자에 다시 반(反)이라는 한 자를 더 보태서 반팔진(反八陳)라고 해야 했다. 반팔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팔진과 상반된 진도(陳圖)를 의미했다. 예를 든다면 이 문에서 저 문으로 갈때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야 한다면 반팔진에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반대 방향이 되는 것이었다. 무술에서도 반수권(反手拳)이니 좌수검(左手劍)이니 하는 것이 있는데, 그 권법이나 검법의 방향이 반대가 되는 것이다. 황약사는 그 방법에 의거해서 반팔진을 창안해낸 것이었다. 그런데도 왕중양은 정(正)팔진의 방향으로 걸어가게 되었으니 무슨 효과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왕중양은 그와 같은 오묘한 이치를 알아차리게 되자 너무나 기뻐서 나무에서 몸을 날려 아래로 뛰어 내렸다. 그는 여전히 복희 팔괘의 노선을 따라 곧장 걸음을 옮겨 놓았다. 하지만 그가 나아가는 방항은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다. 예를 든다면 마땅히 동쪽으로 가야 할 적에 그는 서쪽으로 갔고 마땅히 남쪽으로 가야 했을 적에 그는 북쪽으로 나아갔다. 잇따라 수십 곳의 문호를 지나게 되자 하얀 돌로 쌓은 석대(石臺)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두번 모통이를 돌자 시검정은 바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왕중양의 손에 들린 세번째 선향도 거의 다 타들어 가고 있을 무렵에 왕중양은 가까스로 시검정에 도착한 것이었다. 第 五 章. 화산논검의 막은 오르고 왕중양은 간발의 차이로 가까스로 내기에서 이긴 것이었다. 황약사는 시검정에 앉아 있었다. 그는 왕중양보다 약간 늦게 향을 피웠기 때문에 세번째의 향은 두 치 정도 남아 있었다. 왕중양이 홀연 시검정 위로 올라오자 황약사는 깜짝 놀라더니, 곧 마음을 진정하고 껄껄 웃었다. [하하하, 왕진인은 역시 전진파 역사상 가장 뛰어난 분이구료. <천하 영웅들 가운데 오직 그대와 조조가 진정한 영웅>이라는 말은 바로 오늘의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말 같구료.] 왕중양은 오늘 도화도에 와서 모두 세 차례 시합을 가졌는데 두 차례 모두 이겼다. 물론 첫번째의 시합은 무승부라고 했지만 기실 왕중양의 승리였다. 황약사가 방금 <천하 영웅들 가운에 오직 그대와 조조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했는데, 삼국시대에 조조가 술을 마시며 영웅을 논하게 되었을 적에 유비에게 한 말이었다. 이 한마디의 말은 다만 왕중양과 자기만이 영웅호걸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황약사가 얼마나 자부심이 강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중양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번째 시합도 끝났소. 우리 사제는 어디에 있소? 그를 데려오시오. 그가 어떤 점에서 황형의 비위를 거슬렸는지 모르나, 빈도가 그를 대신해서 사과하겠소.] 황약사는 껄껄 웃더니 몸을 일으켜 왕중양의 팔을 끼더니 말했다. [우리 그를 보러 갑시다. 솔직히 말씀드려 영사제 주백통이라는 분은 정말 생각하는 것이 어린애 같더군요. 그는 며칠째 단식을 하고 있소.] 왕중양은 놀랐다. [그가 단식을 했다니?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황약사는 웃었다. [왕진인은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영사제는 죽지 않을 것이오.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소.] 그는 왕중양을 안내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왕중양은 황약사가 걸어 간 방위를 머리속에 암기했다. 열 몇번 모롱이를 돌자 어느덧 주백통이 갇혀 있는 초가집에 이르게 되었다. 황약사는 먼저 집안으로 들어갔다. 주백통은 며칠 굶은 터라 증오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대뜸 욕을 퍼부었다. [흥, 이 도둑놈아, 싸우자고 나를 다그쳐 전진파의 고명한 절초를 훔쳐 배우려고 해? 꿈도 꾸지 마라. 나를 굶겨 죽이면 우리 사형이 너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황약사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사형이 왔소.] 주백통은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왕중양은 집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꾸짖었다. [사제, 너는 어째서 이곳에 있느냐?] 주백통은 사형을 보자 크게 기뻐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며칠 동안 굶었기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몸을 벌떡 일으키기는 했으나 발밑이 허해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주백통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형, 내가 어째서 이곳에 있겠소? 저 자가 나를 속여 이곳으로 데려왔소. 사형, 나는 서른 살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남에게 이토록 능멸을 당한 적이 없었소. 사형, 사형은 그를 실컷 두들겨 패서 내 화를 좀 풀어 주시오.] 왕중양은 호통쳤다. [터무니 없는 소리 작작해라!] 황약사는 부드럽게 말했다. [주형은 배가 고플 것이오. 소제가 음식을 좀 가져오도록 하리다.] 그는 정자에서 걸어 나갔다. 주백통은 땅바닥에 쓰러져 띠엄띠엄 왕중양에게 황약사가 자기를 감금하게 된 경과를 이야기했다. 왕중양은 침중한 안색으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잠시후에 황약사는 바깥에서 달려왔다. 그 뒤로 두 명의 벙어리 하인이 따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한 사발의 쌀죽을 들고 있었고 한 사람은 찬합을 들고 있었다. 찬합을 열어 보니 네가지의 앙주(楊州)에서 나는 정갈한 간식이었다. 닭을 기름에 튀겨 바삭바삭하게 만든 것과 봉리과자(鳳梨果子), 노즙간사(露汁干絲), 그리고 한 접시의 발효시켜 젓갈에 담근 고추가 있었다. 고기와 채소가 적당하게 어울려 감칠 맛이 나면서도 느끼하지 않았다. 주백통은 사양하지 않고 대뜸 일어나 앉아 죽과 간식을 단번에 먹어치웠다. 그가 그토록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왕중양은 혀를 끌끌 찼다. 주백통은 다 먹고나서 손으로 입을 쓱 문지르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휙, 하니 일장을 들어 황약사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왕중양은 깜짝 놀라 불렀다. [사제,멈춰라!] 황약사는 여전히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주백통은 일장으로 그의 가슴팍을 후려치게 되었는데 갑자기 상대방의 가슴팍이 움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황약사의 몸뚱이는 마치 기름칠을 한 듯, 주백통은 자신의 장력이 허공을 치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몸이 쏠리게 되었다. 그 순간 황약사는 움츠렸던 앞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주백통은 그의 반탄력에 뒤로 벌렁 나가떨어지려고 했다. 그 순간 왕중양은 왼손의 중지와 식지를 내밀어 주백통의 옷깃을 잡으며 외쳤다. [일어서라.] 가볍게 한번 당기자 황약사의 힘을 해소시킬 수 있었다. 왕중양의 이 한수는 눈부실 만큼 빨랐으며 힘을 꼭 알맞게 준 것이었다. 황약사는 속으로 탄복해마지 않았다. (전진교가 중주(中州)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구나. 왕진인의 조예만 하더라도 이미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할 수 있겠구나!) 주백통은 그래도 주먹을 휘두르며 황약사를 때리려고 했다. 왕중양은 그만 성이 나서 꾸짖었다. [사제, 정말 분수를 모르는구나. 나는 황형과 화해했는데 너는 한사코 싸우겠다는 거냐? 좋다. 나는 즉시 연하동으로 돌아가겠다. 너 혼자 이 도화도에 남아 있도록 해라.] 이 몇 마디의 말이 떨어지자 주백통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사형, 나를 버려두고 가지 마시오.] 왕중양은 입을 열었다. [황형은 대인대의(大仁大義)한 마음으로 네 목숨을 구해주었다. 다만 조그만 오해로 너를 이곳에 가두어 두었을 뿐이다. 이런 사소한 일에 그렇게 성질을 부려서야 되겠느냐? 빨리 황형에게 사과하지 못하겠느냐?] 주백통은 속으로 승복할 수 없었으나 가장 두려워하는 사형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황약사에게 읍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욕을 했다. (도둑 놈의 새끼, 내가 숭산으로 돌아가 다시 몇 년 더 고명한 무공을 절차탁마 연마한 후에 다시 도화도로 와서 너와 이레 밤낮 싸워 보겠다.) 왕중양은 사제를 찾아내자 도화도에 더 머물 필요가 없었다. 왕중양은 황약사에게 곡승 부자의 근황을 물었다. 황약사는 단오절 전에 이미 고향으로 속세의 일을 정리하러 가게 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인연이 닿지 않으니 만나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약사의 위인이 범속하지 않은 면은 있지만, 왕중양은 그의 성격이 너무나 괴퍅하고 자부심이 너무나 강해서 어울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왕중양은 황약사에게 작별을 고했다. 황약사는 말했다. [왕진인,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데 며칠 묵고 가지 그러십니까?] 왕중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이다. 빈도에게 중요한 볼일이 있으니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하나이다!] 황약사는 그들을 해변까지 전송해 주었다. 이때 도화도의 모래사장엔 한 척의 금색 휘황한 누선이 정박해 있었다. 원래 황약사는 벙어리 하인이 밥을 가져올 때 이미 다른 하인들에게 모든 준비를 해 놓으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왕중양과 주백통 두 사형제는 폐를 끼쳤다는 말을 남기고 황약사와 작별했다. 사공들은 돛을 올리게 되었고 천천히 도화도에서 떠나 곧장 서북쪽으로 방항을 잡았다. 누선에 오른 후에 주백통은 사형이 이번에 도화도에서 황약사와 겨루게 된 경과를 물었다. [사형, 사형의 재간은 그보다 훨씬 고명한 편인데 어째서 소제의 화풀이도 할 겸 흠씬 패주지 않으셨소?] 왕중양은 정색했다. [너 또 시작이냐? 원한은 풀어야지 맺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더군다나 그와 우리 사이에는 별다른 큰 원한이 없다. 이번에 네가 육횡도에서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 적에 그가 구해주지 않았느냐? 사제, 앞으로는 침착하고 무게 있게 행동하고, 이 사형의 말을 거역하고 함부로 뛰쳐나가서 말썽을 일으키지 말아라.] 주백통은 마지 못해 대답했다. [그러죠, 뭐.] 배는 바다 위에서 사홀간 항해한 끝에 가까스로 육지에 당도했다. 사공들은 왕중양 사형제가 언덕 위로 오르자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배를 몰고 떠나갔다. 왕중양은 언덕 위에 올라선 후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이곳이 염성현(鹽城縣)으로 강소성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장강 이북이었다. 왕중양과 주백통 두 사람은 함께 동대현(東臺縣) 경내로 들어서서 운하를 이용해서 뱃길로 곧장 산동으로 들어갔다가 산동에서 다시 하남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데 뜻밖에도 운하의 수로를 항해하던 중에 한 명의 제자를 거두어 전진칠자의 수를 다 채우게 되었다. 이 운하는 일명 대운하(大運河)라고도 하는데 수(隋)나라의 호색한 황제 수양제(隋煬帝) 광(廣)이 만든 것이었다. 수양제는 강남의 풍경을 흠모한 나머지 자주 남쪽 지방을 순시한답시고 강남으로 놀러 다녔다. 그러나 육로로 강남까지 가려면 무척 길이 멀고 평탄하지 못해 고생스러웠다. 이에, 그는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육지에서 배를 띄우는 것이었다. 즉, 인공으로 큰 강물을 만들어 곧장 강남으로 통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수양제는 대업(大業) 11년에 대신 마숙모(麻叔謀)를 운하공사의 총관으로 임명해서 운하를 뚫는 일을 감독하도록 했다. 대업 11년에서 14년까지 5년 동안에 걸쳐 하북성과 산동성 지역의 민간인 백칠십만 명을 부역에 동원했다. 운하를 파고 황하와 회하(淮河), 제수(齊水), 사수(泗水), 장강(長江) 유역을 연결시켰다. 그러니까 북쪽의 통주(通州)로부터 남쪽의 항주(杭州)에 이르기까지 뚫은 운하는 무려 2천 리나 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북에서 남을 관통하는 인공으로 만들어진 강물이 수양제의 폭정하에 완성된 것이었다. 운하를 뚫기 위해 수양제는 국고를 탕진시키고 끝내 백성들의 폭동을 불러일으켜 수나라의 왕조는 2대도 지속하지 못하고 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 중국에는 운하가 있어 남북을 연결하는 수로가 뚫리게 되어 장강 이남의 개발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공로는 황당하고 포악한 수양제에게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왕중양과 주백통은 동대현에 이르러 배를 타고 북쪽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운하를 오고가는 배는 두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한가지는 객선(客船)으로 손님들이 돈만 있으면 배를 세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조선(漕船)이라고 하는데 운하에서 화물을 운반하는 배로서 가는 길에 손님을 태우는데, 그 손님의 수는 일정하지 않았다. 똑같은 뱃길이지만 배삯이 천양지차였다. 왕중양과 주백통이 탄 배는 물론 조선이었다. 이 조선은 쌀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태운 손님들은 모두 여덟 명이나 되었다. 왕중양과 주백통 두 사람 외에는 모두 북쪽으로 물건을 팔러 가는 장사치들이었다. 주백통은 여전히 어린애처럼 금방 뱃머리로 가서 사공들과 이러쿵 저러쿵 한담을 나누다가 금방 선실로 들어가 같은 배를 탄 장사치들과 잡담을 나누곤 했다. 이는 그의 천성이라 왕중양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왕중양은 그저 혼자 배에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내공을 운기했다. 어느 날 조선은 청강포(淸江浦)에 도달했다. 이곳은 회음현(淮陰縣)이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옛날 그 유명했던 명장 한신(韓信)이 바로 이곳 출신이었다. 왕중양은 송나라가 강남에만 쳐박혀 안일을 꾀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으로 기울어진 것을 떠올리며, 회음현(淮陰縣) 출신의 명장 한신과 같은 장수가 없어 외적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여간 아쉽지 않았다. 왕중양은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마음이 여간 착잡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선은 청강포에 도달하자 정박했다. 청강포가 운하에서 몇번째로 손꼽히는 큰 나룻터였기 때문이었다. 도사공은 배를 언덕에 댄 후에 뭍으로 소금과 쌀을 구입하러 갔고 겨우 몇 명의 사공들만 갑판에 남아 놀음판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에 타고 있던 손님들 가운데 몇 명도 뭍으로 산보를 나갔다. 주백통은 사공들이 신나게 놀음판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자 그 역시 한몫 끼려고 했다. 왕중양은 호통을 내질렀다. [사제, 무엇하려고?] 주백통은 더듬거렸다. [사형,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 갑갑해서 한수 놀아보려는 것입니다.] 왕중양의 안색이 변했다. [전진파에서는 술주정과 도박을 금한다. 너는 잊었느냐? 네가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도박판을 벌이게 된다면 전진파의 체통이 어떻게 되겠느냐?] 왕중양이 그에게 몇마디 훈계를 하려고 했을 적에 갑자기 언덕 쪽에서 나는 듯이 한 사람이 달려오며 외쳤다. [사공, 사공, 이 배는 손님을 태우지 않소?] 그렇게 부르짖는 샤람의 음성은 마치 우렁찬 종소리 같았다. 왕중양과 주백통은 자연히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았다. 배와 저쪽 언덕을 연결하는 선판(船板) 위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이 사내는 얼굴이 대추빛이었고 구렛나루에 우람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는데 몸에 자회색의 바지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발에는 끝이 뾰족하고 물고기 비늘 모양이 새겨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범양(范陽)에서 만드는 삿갓을 목 뒤로 젖혀 놓고 비스듬히 한 자루의 보도(寶刀)를 메고 있었다. 그야말로 억세고 다부진 기운이 느껴지는 헌걸찬 사내 였다. 몇 명의 사공들은 놀음에 한창 정신이 쏠려 있다가 구렛나루의 사내가 갑자기 달려와 선판 위에 서서 소리치는 것을 보자 약간 마뜩치 않게 생각했다. 한 명의 사공이 대답했다. [도사공이 언덕 위로 물건을 사러 갔소. 이 배는 이미 손님을 많이 태웠으니 댁은 다른 배를 찾아 보시구료.] 그 구렛나루 대한은 발을 구르며 다급한 표정으로 부르짖었다. [제발 태워 주시오! 반나절이라도 늦으면 큰일난단 말이외다.] 한편으로 발을 구르며 한편으로는 수건을 꺼내 땀을 훔쳤다. 몇 명의 사공들은 계속 도박에만 정신을 쏟을 뿐 다시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구렛나루의 대한은 발끈 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망할 것들, 당신들은 도사공도 아닌데 어째서 손님을 다 태웠다고 말하는 것이지? 이 커다란 조선에 나 한 사람쯤 더 태워도 상관없지 않느냐?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사공들 가운데 형이모(邢二毛)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재수가 없어 돈을 잃어 화가 났는데, 구렛나루의 사내가 불쑥 나타나 툴툴거리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손님을 다 태웠다면 다 태운 것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초상이라도 났어? 그렇다면 은자를 들여 한 척의 객선을 전세내야지!] 이 몇 마디의 말은 본래 나직하게 말한 것이고 옆에 있는 동료들을 한번 웃기자는 말이었다. 한데 구렛나루의 대한은 귀가 무척 밝아 그 말을 듣게 되었다. 발끈한 그는 발끝으로 가볍게 선판을 차고 획, 하는 바람소리와 더불어 조선 위로 올라와 손을 뻗쳐 형이모의 멱살을 잡고 놀음판에서 끌어냈다. 그리고는 냅다 따귀를 한대 갈기자 철썩,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형이모의 입술이 터져 피가 홀러내리게 되었다. 구렛나루 대한이 이와 같이 손찌검을 하게 되자 사공들은 일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릇 배에서 거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질이 급하고 뚝심이 있었다. 그러니 구렛나루의 대한이 동료를 쳤는데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사공들은 다투어 몸을 일으키더니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 대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호통을 내질렀다. [이 학대통(　大通)은 한평생 개눈깔 달린 사람을 가장 미워한다. 너희같은 녀석들이 감히 덤볐겠다? 그렇다면 매운 맛을 봐야지] 한 명의 사공이 몸을 날려 덮쳐들자 그는 냅다 손을 뻗쳐 금나수법으로 그의 팔을 잡고 휙, 하니 그를 높이 쳐들어 바깥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그 사공은 선실 안으로 날아들어 데구르 구르게 되었는데 그 바람에 하마터면 주백통과 부딪칠 뻔했다. 그 대한은 다시 담퇴(潭腿)의 수법을 써서 옆에서 덮쳐오는 한 사공의 발을 걸어 물속으로 던졌다. 그 구렛나루의 대한이 펼치는 권법과 각법은 그야말로 용이 날고 호랑이가 도약하듯, 몇 명의 사공들이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었으며 이곳저곳에 나가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선실 안에 앉아 있던 주백통은 더 참을 수 없었다. 사공이 불손한 언사를 쓴 것은 사실이지만, 구렛나루의 대한이 그렇다고 자기의 억센 힘만 믿고 사람을 때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고 나는 듯이 달려 나가 소리높여 외쳤다. [친구, 잠깐만!] 바로 이때 구렛나루의 대한은 한 명의 사공을 붙잡아 바깥쪽으로 내던졌다. 그 사공은 물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주백통은 눈이 빠르고 손이 민첩한지라 후딱 앞으로 나아가 알맞게 그 사공의 잔등을 움켜잡고 배 위로 끌어올려 놓았다. 구렛나루의 대한은 소리높여 외쳤다. [아니, 어떤 병신같은 놈이 나타나 감히 학 나으리의 일을 간섭한단 말인가?] 주백통은 냉소했다. [네가 권각법을 좀 배웠다고 해서 함부로 사람을 친대서야 말이 되느냐? 이곳은 왕법이 없는 오랑캐땅이 아니니 말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학대통은 주먹을 한번 쳐들어 보였다. [말로 하라고? 하하하, 병란이 끝임없이 일어나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났으니, 주먹밖에 믿을 것이 더 있느냐?] 주백통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주먹을 믿고 그렇게 날뛰었단 말이지? 좋아, 나는 새끼손가락 하나만으로 너의 그 잘난 주먹을 꼼짝 못하게 만들겠다.] 그 대한은 발끈 노했다. 이때 왕중양이 선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여보시오. 고정하시구료. 모두 집을 떠나 온 몸인데 이렇게 화를 내서 뭘하겠소? 내가 좋은 말을 할테니 화해하도록 하시오.] 그 학가는 주백통을 노려보며 호통을 질렀다. [이 벽력호(霹靂虎) 학대통은 지금까지 감히 나에게 도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 당신이 처음이야. 자자자, 우리 한번 높고 낮음을 가려 보실까?] 왕중양은 다시 말했다. [그만두시오. 내 아우는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하며 입으로 상스러운 소리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니 이해하시오. 모두들 진정합시다.] 그러나 학대통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불쑥 한 걸음 내디디더니, 두 손으로는 이랑담산(二郎擔山)이라는 초식으로 주백통의 안면을 후려치면서 주백통의 옆구리를 걷어차려고 했다. 주백통은 가법게 손을 뻗쳐 학대통의 오른쪽 곡지혈을 슬쩍 짚어버렸다. 학대통의 손과 팔이 대뜸 마비되면서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주먹을 반쯤 뻗어낸 상태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왕중양은 사제가 손을 쓰자마자 점혈법을 쓰는 것을 보자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공들은 학대통이 엉거주춤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와, 하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소리높여 외치기까지 했다. [정말 훌륭한 재간이군. 자, 우리 일제히 저 놈을 밀어서 물속에 빠뜨리자.] 중양진인은 즉시 불진을 들어 학대통의 팔을 한번 슬쩍 치면서 불렀다. [여러분, 손을 멈추시오!] 그는 불혈수법으로 구렛나루 대한의 손목에 있는 회종혈(會宗穴)을 한번 친 것이었다. 학대통은 마비된 손과 팔이 풀어지면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주백통에게 노갈을 터트렸다. [네가 점혈법으로 사람을 암산하다니, 그러면서 영웅호한이라고 할 수 있느냐?] 주백통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점혈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호걸이 아니란 말인가? 무공을 익힌 사람치고 점혈법도 모른다면 집으로 돌아가 애나 봐야지, 뭣하러 강호 바닥에 나와서 못난 꼴을 보이느냔 말이야!] 학대통은 속으로 더욱 분노하게 되었다. 맹호처럼 호통을 내지르며 두 손을 일제히 뻗쳐내는데 그 억세고 맹렬한 힘은 태산이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그는 단 일장에 주백통을 쳐서 꺼꾸러뜨려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주백통의 가슴을 겨냥하고 두 손을 뻗쳐낸 것이었다. 주백통은 몸을 흔들하는 순간 어느덧 그의 오른쪽으로 돌아가 손을 뻗쳐 다시 그의 견정혈(肩井穴)을 짚으려고 했다. 왕중양은 주백통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한줄기 무형의 힘이 주백통을 밀어젖혔다. 동시에 중양진인의 불진이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학대통의 팔을 휘감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왕중양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손을 멈춰라!] 학대통은 불진에 휘감기자 즉시 꼼짝할 수 없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도사의 불진이 어째서 이토록 무서울까?) 그는 힘껏 뒤로 당겨보았으나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갑자기 불진을 위로 쳐들고 학대통의 몸뚱이를 허공으로 던졌다. 전진교주 왕중양은 한 자루의 불진을 이용해서 학대통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더니 마치 접시를 돌리는 것처럼 뱅글뱅글 몇 바퀴나 허공에서 맴돌도록 만들었다. 학대통은 허공에서 힘을 도저히 쓸 수 없자 소리높여 고함을 질렀다. [선배님, 이 후배가 이제서야 잘못을 알았습니다.] 왕중양은 그가 잘못을 시인하자 학대통을 내려놓았다. 학대통은 두 발이 배바닥에 닿자마자 즉시 무릎을 꿇고 갑판 위에서 큰절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 학대통은 오늘에서야 하늘 밖에 하늘이 있고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저의 재간은 실로 쓰잘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학대통을 문하에 거두시고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백통은 그 말을 받았다. [이봐, 어째서 나에게는 큰절을 하지 않지? 나도 자네를 이겼잖아? 한 사람에겐 절하고 한 사람에게는 절하지 않다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소?] 학대통이 얼굴을 붉히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적에 도사공과 손님들이 잇따라 돌아왔다. 도사공은 자기의 패거리들이 남에게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보자 화를 내려고 했다. 왕중양은 즉시 도사공을 한켠으로 데리고가 좋은 말로 달랬다. 그는 은자를 및 푼 꺼내 매를 맞은 사공들에게 주며 화를 풀라고 달랬다. 그리고 구렛나루의 대한을 태워주자고 권고했다. 도사공은 은자를 받은 몸이라 하는 수 없이 허락했다. 사공들은 돛을 달고 노를 저어 북쪽으로 배를 몰았다. 한편 학대통은 왕중양에게 여간 고마워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그를 선실로 데리고 가 자리에 앉히고, 어째서 급히 조선을 타려고 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의 출신 내력과 무공을 익히게 된 경과도 물어보았다. 학대통은 일일이 대답했다. 원래 학대통은 산동 해양(海陽) 사람이었다. 그의 집안 내력은 범상하지 않았다. 조상은 꽤나 명성이 있었으며 그의 부친만 해도 총병(總兵)의 벼슬을 했다. 금나라 군사들이 남쪽으로 쳐들어오게 되었을 적에 그의 부친은 부하들을 이끌고 장렬히 싸우다가 순국(殉國)했다. 학대통은 가문의 영향을 받아 어릴적부터 칼과 창을 휘두르고 주먹질하기를 좋아했다. 그의 부친은 살아 계실 적에 그를 세심히 지도해 주었다. 따라서 그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뛰어난 무예를 지니게 되었다. 학대통에게는 학금창(　金昌)이라는 사촌 형님이 있었다. 학금창은 본래 장사하는 사람이었으나 금나라 군사가 중원으로 침입해 들어오게 된 후 황하 남북 일대에 전란이 곳곳에 일어나 어지러운 세상이 되니 장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학금창은 병란이 일어나 좀처럼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주(曹州)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가 장사를 집어치웠다. 그는 금은과 패물을 뭉뚱그려 해양의 고향으로 돌아가, 잠시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보고 다시 장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가 기주(沂州)를 지나게 되었을 적에 공교롭게도 산적들을 만나게 되었다. 산적의 두목은 흑호자(黑胡子) 장천호(畏天浩)였다. 혹호자 장천호는 학금창을 사로잡아 산 위로 데리고 가 그가 지니고 있는 돈을 모조리 빼앗고, 졸개를 통해 해양의 집으로 편지를 보내, 한 달 안으로 1천 냥의 은자를 마련해 바치라고 했다. 한 달 동안에 1천 냥의 은자를 내놓지 않으면 인질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산동성과 화북성 일대의 향마적(響馬賊)들은 편지를 보내 사홀이 넘으면 인질의 귀를 잘라 사람을 시켜 그의 집으로 보내곤 했다. 그래도 상대방에서 반달이 지나도록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향마적들은 무자비하게 인질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잘라 집안 사람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다시 한달 동안 소식이 없으면 아예 사람의 머리를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어떤 자들은 심지어 시체를 공개적으로 육시해서 대로가에 놓아 여러 사람들이 보도록 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방 사람들은 일단 인질로 사람이 사로잡혀 가면 전전긍긍하며 애간장을 태워야 했다. 학금창의 처는 견(甄)씨였는데 남편이 산적의 소굴에 잡혀 있다는 소식과 향마적들이 돈을 내놓으라는 편지를 받자 그만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견씨는 남편에 관한 소식을 모든 친지들에게 알렸다. 친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가련하게도 견씨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으나 그녀에게는 큰돈이 없었다. 다만 몇 마지기의 밭이 있었으나 이와 같이 병란이 한창일 때 그 누가 밭을 사겠는가? 견씨가 헐값으로 밭을 팔려고 했으나 사들일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울고 있을 적에 학대통이 불쑥 이 집에 나타났다. 원래 학대통은 자기에게 약간의 용력(勇力)이 있고 또한 강호의 친구들과 사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자기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형수님, 괴로워 마십시오. 이 학대통이 책임지고 형님을 찾아 오겠습니다.] 견씨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둘째 도련님, 정말이에요? 도련님 흔자 맨손으로, 벼슬아치도 아니고 관에 있는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형님을 구출해낼 수 있겠어요?] 학대통은 말했다. [내 비록 권세는 없으나 많은 강호의 친구들을 사귀고 있습니다. 속담에도 돈이란 돌덩어리와 다를 바 없지만 의리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체면으로 볼 때 형님을 구출해줄 것입니다.] 견씨는 그가 그토록 자신있게 말하자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학대통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려고 즉시 사촌 형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먼저 두 명의 무림 친구들에게 흑호자 장천호를 설득시켜 보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장천호의 이름을 듣자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학형, 흑호자는 산동성의 향마적들 가운데 가장 뚝심이 센 인물이라네. 그에게는 음양면(陰湯面)이라는 별호가 붙어 있지. 어떤 사람의 체면도 봐주지 않는다네. 그에게서 사람을 빼내라구? 어렵네, 어려워. 어렵다니까.] 학대통은 그만 조바심이 났다. 그는 사촌 형수 앞에서 틀림없이 학금창을 구출해 내겠다고 큰소리치지 않았는가? 그런데 처음부터 거절당하고 만 것이었다. 학대통은 마음을 모질게 가다듬었다. (일은 사람의 노력에 달렀다. 흑호자가 비록 억세다고 하나 이 학대통의 재간 또한 약하지 않다. 무예를 지니고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 적에 친구에게만 의지하다니, 될 법이나 한 말인가? 흥, 나는 좋든 그르든 기주로 한번 가 보아야 겠다.) 그는 본래 강소성 부영현(臣寧縣)으로 가서 한 무림의 친구를 찾아보고 그 친구의 얼굴을 내세워 학금창을 돌려받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희망마저 없어지자 즉시 길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길을 빨리 가기 위해 부득이 운하의 조선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본래가 성질이 열화와 같아 오고 가는 말이 곱지 않자 그만 사공들과 크게 언쟁을 벌이고 곧 손찌검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다행히 왕중양이 말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사람이 목숨을 해치는 일도 벌어졌으리라. 비단 죽는 사람이 생기게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된다면 그의 사촌 형님을 구하는 일도 늦추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학대통은 일이 끝난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고는 속으로 원만히 일이 해결된 데 대해 여간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학대통은 자기의 신세와 내력을 이야기한 후에 두번 세번 왕중양에게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부탁했다. 왕중은 정색하고 물었다.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학대통은 두 눈만 크게 뜨고 대답하지 못했다. 주백통이 옆에서 말했다. [솔직히 자네에게 이야기하지. 이 분은 우리 사형이야. 다시 말하자면 전진교주 왕중양이라는 분이셔. 자네가 오늘 이 분을 만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세번 태어나도 만나지 못할 행운이란 말이야.] 학대통은 미친 듯이 기뻐했다. [정말입니까? 제자는 오래 전부터 왕진인의 대명을 들어 왔습니다. 만약 문하로 들어갈 수 있으면 그야말로 한평생 가장 큰 행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절을 하려고 했다. 왕중양은 주백통이 쓸데없이 주둥이를 놀려 많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신분을 발설하는 것을 보자 그만 못마땅한 나머지 그를 흘겨 주고 다시 학대통에게 말했다. [학 장사, 일어나게. 빈도는 몇 명의 제자를 거두어들였으나 본파에서는 제자를 거두어 들이는 일에 대해서 언제나 무척 조심한다네. 차라리 사람 수가 모자랄지언겅 아무렇게나 그 수를 채우지 않는다네. 오늘은 서로가 우연히 만난 것이니, 이 일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하기로 하세. 나와 자네는 함께 기주로 가서 흑호자 장천호로부터 자네의 사촌 형님을 돌려받도록 하세.] 학대통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형님을 구해낼 수만 있다면 우리 집안 사람들은 진인의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조선을 타고 계속 북쪽으로 올라갔다. 왕중양은 길을 가는 동안 학대통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았다. 학대통이 무척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말투가 비굴하거나 건방지지 않은 것을 보고 왕중양은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어느덧 배는 청강포를 지나 사흘낮 사흘밤을 갔다. 그리하여 끝내 산동성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기주는 육로로 가야 하며 결코 운하를 이용해서 갈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중양 일행은 임성현에서 곧 뭍으로 올랐다. 흑호자 장천호가 무리를 이끌고 횡행하는 산은 산개산(傘盖山)이었다. 그는 2천여 명이나 되는 졸개를 거느리고 산개산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기주 땅을 숫제 이 한 떼의 강인(强人)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왕중양은 기주에 이르러 길가는 사람에게 수소문해 본 결과 산개산 강도들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학대통은 왕중양에게 물었다. [왕진인, 저회들이 강호의 규칙대로 산채에 배첩(拜帖)을 올려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왕중양은 섕각도 해보지 않고 말했다. [배첩으로 방문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산개산으로 올라가면 되는 거지] 학대통은 깜짝 놀라 물었다. [왕진인, 그냥 산 위로 올라간다는 말씀입니까?] 주백통은 웃었다. [조그만 산채를 찾아가는데 무슨 놈의 배첩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냥 올라가면 돼. 배첩이 어쩌구 저쩌구 하지 마. 자네는 두려운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흑호자의 부하들이 이천여 명이나 되는데 우리들은 세 명밖에 되지 않으니 너무 불리하지 않습니까?] 주백통은 큰소리로 웃어댔다. [하하하, 뭐가 불리하다는 거야? 우리 사형께서는 한평생 수많은 용담호혈을 제 집 안방처럼 들락날락했을 뿐 아니라 커다란 풍파를 겪어본 분이야. 설마하니 한 채의 조그만 도적 소굴을 두려워하겠는가? 하하하!] 왕중양은 그 말을 가로챘다. [학 장사는 우리 사제의 터무니 없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지 말께. 어서 산 위로 오르세. 빈도가 이곳에 있는 이상 도적들은 결코 자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네.] 학대통은 왕중양이 그와 같이 말하자 겸연쩍은 표정으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개산 아래에 이르게 되었는데 길에 매복해 있던 졸개들이 낯선 사람이 오는 보자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숨어 있던 곳에서 우르르 달려 나오며 큰소리로 외쳤다. [길을 지나가는 주머니가 두둑한 양떼들이여, 통행세를 내라.] 주백통이 앞으로 썩 나서며 물었다. [통행세를 내라고 했느냐? 나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해. 네놈들의 돈을 꺼내서 나누어 가져야 되겠다.] 그 졸개들은 발끈 노해서는 일제히 달려 들었다. 주백통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번쩍 몸을 날리며 손을 썼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털썩, 쿵,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지더니, 삽시간에 달려들던 졸개들 가운데 이미 너댓 명이나 혈도를 짚혀 땅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머지 졸개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깜짝 놀라 즉시 나는 듯이 산채로 뛰어가 그 사실을 아뢰었다. 왕중양은 빙그레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채 1마장도 가기 전에 산위에서 한 떼의 인마가 우르르 몰려 내려왔다. 사오백 명이나 되었다. 앞장을 선 도적의 괴수는 호랑이 등에 곰의 허리, 얼굴은 짙은 자색빛인데, 세 사람을 발견하자 큰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온 멍청한 도사들이 감히 이곳에 와서 소란을 부리느냐?] 왕중잉은 태연자약하게 손에 불진을 들고 앞으로 마주 나아갔다. 도적들은 왁자지껄 떠들면서 휙획, 하니 몇 대의 화살을 쏘아댔다. 왕중양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아무렇게나 불진을 한번 휘두르자 화살들은 그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1장 밖에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다. 흑호자 장천호는 그와같은 광경을 보자 깜짝 놀랐다. 그는 거치낭아도(鋸齒狼牙刀)를 쳐들고 성큼성큼 다가오며 소리높여 외쳤다. [너희 잡도사들은 어디서 온 누구냐? 빨리 이름을 대지 못하겠느냐?] 왕중양은 대답했다. [빈도는 방문을 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을 찾으러 왔소. 그 사람의 이름은 학금창인데 대왕께서는 빈도의 체면을 보아 그를 풀어주시오.] 장천호는 대노해서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잡도사의 체면을 봐달라는 거냐? 개방구같은 수작!] 그 한마디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맞은편에서 새카만 물체가 날아들어 장천호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장천호의 얼굴에 검은 꽃이 확 피어났다. 장천호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얻어 맞자 악이 바쳐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원래 주백통은 길가의 나무덩굴 아래쪽에 한 조그만 웅덩이가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나뭇가지를 꺾어 그 웅더기에 있는 한 무더기의 더러운 흙을 떠서 장천호의 얼굴에 내던졌던 것이었다. 그가 나중에 늙은 개구장이라는 뜻의 노완동(老頑童)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가 동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남들을 골탕먹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주백통은 전진교주의 사제인 만큼 손힘이나 눈썰미는 여느 사람에 비할 수가 없었다. 이 한무더기의 진흙을 던지니 그 흙덩어리는 장천호의 얼굴을 온통 더럽게 칠해 놓고 만 것이었다. 뭇 졸개들은 와, 하니 큰소리를 내지르며 마구 떠들어댔다. 주백통은 큰소리로 웃었다. [으하하하, 보기 좋군, 보기 좋아. 흑호자가 니호자(泥胡子)로 변했구나!] 장천호는 노호를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거치낭아도를 휘두르며 몸을 날려 덥쳐 왔다. 왕중양이 서 있는 곳이 거리가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에 장천호가 한번 몸을 날리자 꼭 알맞게 왕중양의 앞에 설 수가 있었다. 그는 끓어 오르는 노화에 이성을 잃고 거치낭아도를 쳐들자마자 냅다 왕중양의 얼굴을 맹렬히 내리찍으려고 했다. 왕중양은 자연스럽게 불진을 들어 장천호의 거치낭아도를 막았다. 착, 하는 소리와 함께 불진은 장천호의 거치낭아도의 도신(刀身)을 휘감아버렸다. 장천호가 한칼을 내려치게 되었을 적에 갑자기 손목이 쩌릿해지면서 칼이 우뚝 정체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급히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니 자기의 무기를 휘감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한 자루의 조그만 불진에 지나지 않았다. 장천호는 놀람과 분노에 횝싸여 힘을 주어 거치낭아도를 뽑으려고 했다. 그 순간 왕중양의 입에서 호통소리가 터져 나왔다. [놓아라!] 그는 불진을 바깥쪽으로 한번 떨쳤다. 그렇게 되자 장천호는 더 칼자루를 쥐고 있지 못하고 스물 몇 근이나 되는 거치낭아도는 그의 손에서 불쑥 빠져나가 7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주백통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흑호자가 이번에는 홍호자(紅胡子)로 변했군!] 원래 산동사람들은 창피당한 사람을 홍호자라고 일컫었다. 장천호는 그 몇 마디 말을 듣자 더욱 수치와 분노를 느꼈다. 그는 호통소리를 내지르며 획, 하니 몸을 돌리더니 졸개의 손에서 한자루의 화창(花槍)을 빼앗아 들더니 곧장 왕중양에게로 달려 들었다. 그는 먼저 창날을 떨쳐내 창머리의 홍영(紅纓)이 탁자 크기로 보이도록 원을 그리더니 왕중양의 가슴팍을 겨누고 푹 찔렀다. 창은 십팔반(十八般) 무기 가운데 둘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창이란 본래 봉에서 변화해 나온 것이었다. 무가에서는 일도이창(一-刀二槍)이라고 했으며 팔힘이 센 사람이 아니면 결코 창을 휘두르지 못했다. 장천호는 창을 한번 떨쳐 석 자 둘레의 원을 그려냈는데 이로 미루어 그의 팔힘이 대단해 여느 사람이 도저히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오늘 마주친 적수는 전진교주 왕중양이었다. 장천호가 창으로 초식을 펼쳐 디밀게 되었을 적에 왕중양은 앞으로 몸을 훌쩍 날리면서 손을 번개같이 뻗쳐 왼손으로 금나수법을 이용하여 덥썩 창머리를 움켜쥐었고 오른손의 불진을 떨쳐 은사(銀絲)와 같은 총채로 어느덧 장천호의 안면을 쓸어 쳤다. 도적의 괴수 장천호는 눈 앞에 한 무더기의 은침같은 것이 날아드는 것을 보자 그만 아이쿠,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재빨리 손을 놓고 창을 버린 후에 뒤로 훌쩍 몸을 날려 피했다. 왕중양은 단 일 초만에 그의 화창을 빼앗고 힘을 불끈 주자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화창은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장천호는 재차 패배를 당하자 수치와 분노를 감당할 수 없어 얼굴은 일그러졌는데 진흙에 뒤덮힌 얼굴이라 더욱 흉칙해졌다. 주백통은 그 꼬락서니를 보고는 좋다고 껄껄 웃어 젖혔다. 장천호는 울화가 상투 끝까지 치밀었다. 미친 듯이 부르짖더니 다시 졸개의 손에서 한 자루의 칼과 하나의 방패를 빼앗아 들더니 나는 듯이 덮쳐오며 부르짖었다. [이 개같은 잡도사야, 너에게 재간이 있으면 나의 이 칼과 방패마저도 빼앗아 보아라.] 왕중양은 껄껄 웃었다. [하하, 너의 그 칼과 방패를 빼앗는 것이 뭐가 어렵겠느냐? 이 초가 지나기 전에 빼앗겠다.] 장천호는 노호를 지르더니 칼을 휘두르며 방패를 옆으로 쓸어쳐 왔다. 이것은 칼과 방패를 함께 사용하는 초식으로 선풍참초(旋風斬草)라고 했다. 방패를 먼저 적의 눈 앞으로 밀어내 상대방의 이목을 어지럽힌 후에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벼락같이 방패 아래쪽으로 쓸어내 상대방의 두 발을 자르는 수법이었다. 이 수법은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상대방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공격하는 비열한 수법이기도 했다. 무공이 평범한 사람이 이와 같은 일초를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왕중양은 껄껄 웃기만 하더니 장천호의 방패가 눈 앞을 가로막자 그대로 몸을 솟구쳐 방패의 앞면을 차버리고 말았다. 쇠가죽으로 만들은 방패는 놀랍게도 뻥하니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장천호는 그 발길질의 충격을 받고 붕하니 땅에서 솟아 올라 뒤로 날려갔다. 왕중양이 손목을 비틀면서 왼손으로 방패를 잡고 오른손으로 칼등을 나꿔채서 힘주어 떨치자 장천호는 벌렁 드러눕게 되었다. 칼과 방패는 그 찰나에 이미 왕중양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왕중양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어떠냐? 이 놈아!] 장천호는 자기가 세 차례나 적과 손을 썼으며 세번이나 무기를 바꿨지만 세번 다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싸움을 거듭할수록 더욱 더 흉칙한 꼬락서니를 보이게 되었다. 그로서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기분이었다. 그는 급히 땅바닥에서 몸을 데구르르 굴렸다가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다시 덤벼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주백통이 별안간 몸을 번뜩여 그의 앞으로 다가와 욕을 했다. [이 염치 없는 발랑 까진 도적놈아!] 그러면서 철썩, 철썩, 그에게 두 대의 따귀를 갈겨 다시 한번 곤두박질치도록 만들었다. 뭇 졸개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칼과 창을 모조리 쳐들고 앞으로 나서며 때싸움을 벌릴 자세를 취했다. 주백통은 발로 장천호의 가슴팍을 디디고 소리높여 외쳤다. [이것 봐, 이것 봐. 너희들의 대왕이 죽어도 좋으냐?] 그 졸개들은 산채의 대왕이 주백통의 발밑 깔려 있는 것을 보자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옆에는 중양진인이 서 있지 않온가? 이 도사는 조금 전에 세번이나 자기네 대왕을 때려 눕혔을 뿐 아니라 세번이나 대왕의 손에 들린 무기를 빼앗았는데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야말로 힘 한번 들이지 않고 빼앗아 간 것을 보았던지라 감히 경솔하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들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져 어쩔 줄을 몰랐다. 주백통은 소리높여 외쳤다. [학금창을 석방하여 이곳으로 데려 오너라. 그러면 너희들의 대왕을 놓아 주마. 한 사람을 한사람과 바꾸는 것이니 공평한 거래로 그 누구도 손해가 없다. 빨리!] 그는 그러면서 발끝에 살짝 힘을 주어 장천호의 미관골(尾關骨)을 한번 눌렀다. [으아악!] 장천호는 돼지 멱 따는 괴성을 내질렀다. 졸개들은 자기들의 대왕이 상대방의 수중에 떨어진 것을 보자 그 말을 기꺼이 쫓았다. 즉시 십여 명이 산채로 달려갔다. 잠시 후에 학금창이 여러 졸개들을 따라 내려왔는데 얼굴이 무척이나 초췌했다. 학대통은 달려가 학금창을 얼싸 안았다. 형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 안고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주백통은 그제서야 새삼 탄성을 발했다. [아, 내가 사람을 협박한 보람이 있구나. 참 잘했다. 그렇다면 한번 더...] 그러더니 다시 발에 힘을 주고 3푼 정도 기운을 썼다. 장천호는 염통이 아리고 배가 터질 것같은 압박감에 연신 괴성을 내질렀다. [나는 이미 사람을 석방했소. 그런데 어째서 다시금 나를 괴롭히는 것이오?] 왕중양은 자기의 사제가 너무 인정머리 없이 군다는 생각이 들어 저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주백통이 입을 열었다. [이 똥냄새 풍기는 멍청이, 그런다고 내가 너를 놓아줄 줄 알고? 너는 학가를 산 위로 잡아 갈 때 그가 지니고 있는 돈을 모조리 빼앗았다. 너는 장사 밑천마저도 깨끗이 빼앗아 가지 않았느냐? 그러니 돈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의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가 어떻게 먹고 살 수 있겠느냐?] 그는 다시 학금창에게 입을 열었다. [도적들이 당신의 돈을 얼마나 훔쳤소?] 학금창은 말했다. [제가 잡히게 되었을 적에 몸에 지닌 돈이라고는 스무 냥의 은자밖에 없었습니다. 그만두세요. 그에게 받아낼 필요 없습니다.] 주백통은 장천호를 내려다 보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고약한 녀석, 밑천에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한다. 천호, 너는 일천 이백 냥의 은자를 돌려주어라. 그렇지 않을 때 이 주백통이 발끝에 다시 힘을 더 주게 된다면 너의 척추골을 분질러 놓게 될 것이고, 너는 즉시 외할머니 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알았느냐?] 장천호는 주백통이 은자를 내놓으라고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1천2백 냥이면 자기가 노략질한 돈의 10배가 되지 않는가? 여간 아깝지 않아 그는 전전긍긍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건, 이건, 이건, 나는 겨우 백 냥 남짓 빼앗았을 뿐인데 열 배를 돌려주란 말이오? 천하에 이런 도리가 어디 있소?] 주백통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너는 은자가 아까우냐? 너의 돈은 모두 밑천을 들여 번 것이 아니다. 달 없는 캄캄한 밤에 사람을 죽이고 바람이 세찬 날에 불을 질러 얻은 것이 아니냐? 흥, 나는 네가 열 배로 변상할 것을 요구한다. 내가 너에게 열 배의 돈으로 갚으라고 해서 마음이 아프냐? 돈이 아까우면 목숨을 내놓고, 목숨이 아까우면 돈을 내놔!] 그러면서 발끝으로 아래쪽을 살짝 눌렀다. 장천호는 너무나 아파 큰소리로 외쳤다. [에구구, 돌려주겠소! 돌려준다구요!] 뭇 졸개들은 자기들의 대왕이 주백통에게 꼭두각시처럼 조롱을 당하자 성이 나서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대왕의 목숨은 상대방의 발끝에 달려 있지 않은가? 주백통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야말로 관을 보기 전에는 눈물 홀리지 않는다는 격이군. 흥, 빨리 돈을 가져오너라. 돈이 아까우면 목숨을 내놔! 이걸 그냥 곽 밟아버려?] 장천호는 별수없이 졸개들에게 돈을 갖다 주라고 명했다. 잠시후에 한 아름의 허연 은자가 땅바닥에 수북하니 주백통의 쌓이게 되었다. 주백통은 학금창에게 단단히 싸도록 이르고 힘을 주어 장천호를 한번 걷어찼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장천호는 2장 밖으로 굴러갔다. 주백통은 다시 한번 호통을 내질렀다. [제에미! 꺼져라. 꼴도 보기 싫다! 이 나으리께서는 이만 가봐야 되겠다.] 뭇 졸개들은 앞으로 달려나와 장천호를 부축해 일으켰다. 주백통은 그 모양을 보고 껄껄 웃더니 왕중양에게 손짓을 한번 했다. 네 사람은 횡하니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뭇 졸개들은 두 눈을 멀거니 뜨고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 감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상대방이 멀리 사라지자 그제서야 맥이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산채로 되돌아갔다. 산에서 내려오자 학대통은 중양진인 앞에 넙죽 업드렸다. 학대통은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저회 형님의 목숨을 진인께서 구해주셨으나 이 후배는 백골난망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말을 가로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다. 너의 골격은 그런대로 뛰어나니 한번 공들여 볼 만한 재목이다. 내가 너를 제자로 거두어 주겠다.] 학대통은 다시 절을 하며 은혜에 감사했다. [감사하옵니다.] [너는 먼저 사촌 형을 보호하여 해양 고향에 모셔다 드려라. 석 달 후에 숭산 태실산으로 나를 찾아 오너라.] 왕중양은 학대통에게 연하동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학대통은 무척 고마워하면서 큰절을 거듭 올리고 난 후에야 작별을 고했다. 과연 석달 후에 학대통은 숭산으로 찾아와 왕중양을 사부로 모시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왕중양과 주백통은 숭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구처기 등 여섯 제자들은 공손히 그들을 영접했으며 사숙 주백통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자 모두들 크게 기뻐했다. 여러 사람들은 연하동으로 가 앉게 되었다. 먼저 마옥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 산을 떠나신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잇따라 괴상한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주백통이 눈썹을 쫑긋하며 물었다. [괴상한 일이라... 설마하니 소림사의 화상들이 와서 시비를 걸었더냐? 이 고약한 땡초 녀석들...] 원래 왕중양과 주백통 두 사람이 무예를 갓 배웠을 적에 소림사와 충돌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백통은 자기가 산을 내려간 후에 틀림없이 소림사의 승려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린 줄 알았던 것이었다. 구처기 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뭐야? 뜸 들이지 말고 시원스럽게 말하란 말이다.] 구처기는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 원래 왕중양이 숭산에서 떠나 동해로 주백통을 찾아가게 된 후에 연화동에는 여섯 제자들만 남아서 부지런히 무공을 연마하면서 동부(洞府)를 지켰다. 이곳은 태실산에서 가장 외지고 동떨어진 두메라 낯선 사람은 하나도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구처기 등이 태실산 산봉오리로 가서 내공을 운기하고 검법을 익히게 되었다. 이는 그들 몇 사람이 매일과 같이 반드시 단련해야 할 아침 공부였다. 동녘의 햇살이 떠 오르면 산 위로 올라갔다가 해가 서너 발 정도 올라오게 되었을 때야 동부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날 연하동으로 돌아왔을 적에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들 여섯 제자들의 방과 왕중양 주백통 두 사람이 수진(修眞)하는 초려(草驢)가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들어와 어지럽혀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기물들이 제 위치에서 이탈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 책자, 단약(丹藥), 옷가지, 은자 등 일상에 사용하는 물건들은 하나도 모자라는 게 없었다. 구처기 등은 아연해지고 말았다. 연하동 안에는 값진 물건이 없기 때문에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이 찾아올 리가 없었다. 들어왔던 이 사람은 재물을 훔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물건을 찾아내려고 한 것 같았다. 마옥은 여러 사형제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 사제, 이 일은 너무나 이상하군.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이 우리 전진교의 동부를 뒤진 것은 필시 어떤 중요한 물건을 훔쳐가기 위함인 것 같네.] <제 1 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