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음진경(九陰眞經) 第 二 卷 저자 : 용 공 역자 : 박영창 타자,편집 : Zazeung 발행 : 1994.12.1, 황제출판사 第 六 章. 화산의 다섯 기인들 구처기가 말했다. [혹시 구음진경이 아닐까요?] 마옥은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 전진파는 무림의 정종인데 남이 이렇게 찾아와 뒤진다는 것은 우리 전진파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니, 숭산에 어떤 수상한 사람이 잠복해 있는지 한번 뒤져보기세.] 이날 그들은 아예 공부를 하지 않고 온 산을 뒤졌다. 붉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샅샅이 찾아 보았으나 여전히 낯선 사람들의 그림자나 종적을 찾을수가 없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모두들 동부에서 떠나지 못하고 연하동 안에서 공부를 했다. 이 날은 별일이 없었다. 그러나 밤중이 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초생달이 막 솟아 오르고 북두칠성이 모습을 드러내게 될 무렵, 전진파의 여섯 제자들은 연하동 안에서 밤공부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연하동 밖 물 받는 곳에서 꽥꽥꽥, 하는 세 마디의 괴성이 들렸다. 이 세 마디의 괴성은 매우 우렁찼다. 마치 두꺼비가 울부짖는 소리 같았으나 그 우렁참이 두꺼비보다 만 배나 더 세차고 강했다. 마옥 등 여섯 제자들은 이 세마디 괴성에 심신이 흔들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면서 마음이 들뜨게 되어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구처기와 유처현 두 사람이 벌떡 몸을 일으켜 달려나가 어떻게 된 노릇인지 살펴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다시 꽥꽥꽥,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조금 전의 소리보다 더욱 우렁찼을 뿐만 아니나 소리가 난 곳이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진 것 같았다. 구처기와 유처현 두 사람은 대뜸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은 충격에 그만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마옥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큰일이다. 저 사람은 상승기공(上乘氣功)으로 우리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모두들 빨리 앉아서 사부님께서 전수하신 금관옥쇄이십사결(金關玉鎖二十四決)을 운용하여 사마에 대항하여라.] 여섯 사람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았다. 마옥은 왼손을 가슴팍에 대고 오른손을 구처기의 어깻죽지에 얹었다. 구처기 역시 대사형을 본받아 오른손을 유처현의 어깨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유처현은 왕처일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고, 왕처일은 담처단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으며, 담처단은 손불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 여섯 사람은 내식공부(內息功夫)를 돋구어 마음을 경건히 하고 뜻을 모아 전진교의 좌공(坐功)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원래 무술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니며 사방의 소리를 모조리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옛사람들, 예컨대 공공(空空), 정정(精精), 곤륜(昆侖), 마력(摩勤)과 같은 사람들은 기를 움직여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천 리를 오고 갔다고 한다. 이는 물른 과장된 전설이니 믿을 게 못 되었다. 하지만 무공이 가장 고강한 사람들은 기공을 이용해서 사람을 해칠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산을 격하고 소를 때려 죽인다든지 담장을 격하고 불을 끈다든지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겐 정(精)과 기(氣)와 신(神)이 있는데, 정기신(精氣神)이 없게 된다면 그 사람은 목숨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어 한 구의 사체로 화하고 마는 것이다. 무릇 무공이 내외오행(內外五行)을 모조리 갖추게 된 사람은 꽃잎을 날리거나 잎사귀를 던져 사람을 살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손짓 발짓 한번 하는 순간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오묘한 무공을 익힌 사람은 괴성을 내질러 사람의 심신에 충격을 줄 수가 있는데 불다(佛家)의 사자후(獅子吼)가 바로 그런 무공이었다. 그 몇번의 꽥꽥꽥, 하는 괴성이 전진육자의 혼백을 흔들어 놓게 되면, 그들 가운데 내공이 비교적 얕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의 심신을 가다듬지 못하게 되어 동문과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것이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날뛰기 때문에, 이 괴성은 그 어떤 무공보다도 더욱더 음험하고 악독한 것이었다. 마옥은 전진육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 즉시 위험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섯 사제들에게 금강옥결이십사결을 이용해서 함께 대항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금관옥쇄 이십사결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성명(性命)을 함께 갈고 닦는 정신공(精神功)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불가에서 말하는 정력(定力)이었다. 지금도 인도와 버마 일대에서는 고행(苦行)을 하며 온종일 자기의 육체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못으로 자기의 몸을 찌르고 어떤 사람들은 커다란 쇠사슬에 자기의 가슴을 묶어 들어올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도 한다. 심지어는 맨발로 숯불 위를 올라가는 등, 일반 사람이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데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정력인 것이다. 마옥은 동문 다섯 사제들이 재간이나 조예가 깊고 낮음이 일정하지 않고 개성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모두들 다른 사람의 어깻죽지에 손을 얹고 엄지손가락으로 상대방의 대추혈(大椎穴)을 누르고 중지와 식지로 견정혈(肩井穴)을 잡고 무명지를 풍부혈(風府穴)에 갖다 대고, 자기 자신의 정신으로 상대방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도록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여섯 사람이 한덩어리가 되어 사마외도에 대항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관옥쇄 이십사결을 일단 펼치게 되자 원래 울렁거리고 뒤흔들리던 심신이 즉시 안정 되었다. 그 꽥꽥거리는 괴성은 잇따라 세 차례나 울려퍼졌다. 전진교의 여섯 제자들이 정력이 굳건해지고 마음과 뜻이 맑아진 것을 상대방도 알아차리고 손을 써봤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내다본 듯, 그 자는 깨진 징소리와 같은 괴소를 흘렸다. [으흐흐흐!] 구처기가 더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부으려고 했을 적에 마옥이 힘주어 그의 대추혈을 눌렀다. 구처기는 갑자기 고통을 느끼고 즉시 고개를 돌려 마옥을 바라보았다. 마옥은 왼손으로 땅바닥 위에 참을 인(忍)자를 썼다. 구처기는 황연히 깨닫고 즉시 마음을 가다듬고 기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 깨진 징소리와 같은 웃음소리가 한동안 들려온 후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왕가가 거두어들인 이 제자들이 제법 한수의 재간을 익혔구나. 좋다. 나는 연화동으로 들어가 너희들을 번거롭게 하지는 않겠다. 나는 골짜기 입구에 표시를 해 놓을 터이니 너희들이 보고 사부에게 아뢰도록 하여라.] 그 말소리는 메아리쳐 밤 하늘을 울리더니 한참 후에야 사라지게 되었다. 그 사람의 음성은 우렁차고 음산해서 한번 들으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구처기는 주위가 잠잠해지자 몸을 일으켜 뒤쫓아 나가 살펴보려고 했다. 마옥이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나타난 사람의 무공은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우리 여섯 사람이 함께 나가야 할 것이다.] 전진파의 여섯 제자들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밤바람이 처절하게 불어와 나뭇잎이 스산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어지럽게 솟아오른 바위들이 달빛을 받아 갖가지 다른 형태의 그림자를 땅바닥에 드리우고 있어 더욱 음산함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들이 막 연화동의 골짜기 입구에 이르게 되었을 적에 문득 그 골짜기 입구에의 자갈길에 핏자국이 낭자하게 나 있었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 핏자국이 나 있는 옆에는 두 마리의 검은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커다란 사람 비슷한 물체가 놓여 있었다. 손불이는 큰소리로 외치더니 다짜고짜 손을 쳐들고 획휙, 두 대의 암기를 던졌다. 암기는 차례로 그 털이 부숭부숭한 그 물체에 적중되었다. 그러나 그 검은 그림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냥꾼 출신 왕처일이 돌연 외쳤다. [저 두 무더기의 검은 그림자는 괴물이 아니라 두 마리의 죽어 있는 곰이오.] 전진육자는 우르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두 마리의 검은 곰이었는데 황소같은 커다란 몸뚱이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죽어 있었다. 마옥이 앞으로 나아가 자세히 살펴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무섭군, 무서워. 이 검은 곰들은 어떤 사람의 무섭기 이를데 없는 장공(掌功)에 목뼈가 부러져 죽었군. 숭산에서도 이와같은 맹수를 보지 못했으니, 이 두마리의 검은 곰이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정말 이상하군.] 여러 사람들은 한동안 생각을 해 보았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 곰의 뱃가죽을 보니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터진 상처 밖으로 창자가 삐져나와 있었고 선혈이 그 옆에 가득 고여 있었다. 두 마리의 죽은 곰의 피로 땅바닥에 써 놓은 글자가 달빛 아래 보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양진인, 내년 12월 화산에서 논검대회(論劍大會:비무대회)를 개최하겠으니, 구음진경을 가지고 오시오. 천하 무림 고수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우숭자가 구음진경을 차지하기로 합시다.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으리라 믿소.] 그 아래에는 시삘건 피로 글자 같으나 글자 같지가 않은 커다란 서명이 적혀져 있었다. 여섯 명의 전진교 제자들은 잠시동안 살펴보았다. 역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마옥이 봉(鋒)자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이 봉자를 서명한 사람이 그 괴성을 내지른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마옥은 중얼거렸다. [봉이라면, 누굴까? 그리고 이 두 마리의 검은 곰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가 맨손으로 커다란 곰의 목뼈를 부러뜨리고 뱃가죽을 후려쳐 터뜨렸으니 이는 우리 여섯 사람으로서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짐승의 핏자국으로 글을 남긴다는 말은 무림에서 일찌기 들어 보지도 못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 자가 음홍하고 악랄한 성격인 것이 분명하구나.] 여섯 제자들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 후에 마옥이 두 마리의 죽은 곰을 옮겨 가까운 곳에 있는 깊은 골짜기 밑으로 떨어뜨렸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왕중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백통은 대뜸 입을 열었다. [사형, 그 봉자를 어떤 녀석이 써 놓았을까요? 말만 하세요. 내년 섣달까지 기다릴 필요가 어디 있겠소? 내 당장 그 놈의 소굴로 찾아가 박살을 내버리겠소.] 왕중양은 나무랐다. [사제는 좀 점잖아 봐. 항상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하니 말썽이 나는거야.] 왕중양은 갑자기 한 사람을 생각해 냈다. 그 사람은 지난번 화산에서 구음진경을 빼앗으려던 구양봉이었다. 구양봉이라는 사람은 본래 서역 사람이고 마적 출신이었다. 그가 어떻게 무예를 익히게 되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강호인들은 언제나 그를 서독(西毒)이라고 불렀다. 이로 미루어 이 사람이 얼마나 음흉하고 악랄한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왕중양이 처음으로 구양봉과 화산에서 마주쳤을 때 구양봉은 합마공을 아직 제대로 연성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연달아 중양진인에게 얻어 맞아 두번이나 곤두박질친 끝에 창피해서 도망치고 말았으며 감히 구음진경을 빼앗겠다고 나서지 못했다. 그런데 2년이라는 세월이 겨우 흘렀을 뿐인데 그의 재간이 이토록 정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머나먼 서역에서 중원으로 달려와 공공연히 중양진인과 화산에서 무공을 겨루어 억지로 구음진경을 빼앗아 가겠다고 나섰으니, 중양진인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왕중양은 속으로 걱정이 되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는 침착함을 보였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은 팔월 하순이고 구양봉이 무공을 겨루자고 한 날짜는 명년 섣달이니, 아직 일 년 남짓한 여유가 있구나. 모든 준비를 갖추고 상대할 여유가 있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놀라거나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이미 그가 누군지 알았다. 모든 일은 내가 처리하겠다. 너희들은 아직도 재간을 다 익히지 못했으니 바깥 일에 신경쓰지 말고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의 재간을 제대로 연마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구처기 등은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섰다. 구양진인은 일을 차분하게 처리했다. 그는 먼저 여섯 제자들에게 열심히 무공을 전수했다. 두 달이 지나자 학대통이 연화동을 찾아왔다. 왕진인은 그를 제자로 거둬들이는 간단한 의식을 갖추었다. 이렇게 하여 전진파에서는 칠자(七子)의 수가 채워졌다. 왕중양은 어떻게 그들에게 천강북두진을 가르칠까를 생각해 보았지만 그 진법은 결코 일조일석에 연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들 일곱 사람 가운데 마옥과 구처기 두 사람 이외에, 나머지 제자들은 아직 무공이 높지 못해 진법을 억지로 가르친다고 해도 그 진법의 위력을 나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역시 화산논검 이후에 천강북두진법을 전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왕중양은 이와 같이 생각하자 천강북두진을 연마시키려고 하던 당초의 게획을 잠시 덮어두고 더 들먹이지 않았다. 이 날부터 왕중양은 강호에 근년에 걸출한 무림인물이 나타났는지 그 여부를 유심히 수소문하게 되었다. 천하의 일류 고수들과 화산에서 무공을 겨루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본래 그 당시 송나라 때의 중국 무술의 원류(源流)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소림파와 무당파(무당남파를 말하며 장삼봉의 무당파는 북파였다가 나중에 무당파가 되었음:편집자 註)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북쪽 지방에서는 개방(　幇)이 우두머리였는데, 적지 않은 풍진괴협(風塵怪俠)들과 무림의 고수들이 대부분 개방에 모여 있었다. 개방의 방주 홍통(洪通)은 근년에 먼곳까지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는 바, 사람들은 그를 구지신개(九指神　) 홍칠공(洪七公)이라고 불렀다. 동쪽 지방에서는 황약사가 도화도에 웅크린 채 제자들을 거두어 들이고 있었다. 그의 무공은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있었으며 무궁무진한 재간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오행(五行)과 기문팔진(奇門八陳)에 특히 정통했다. 무림인들은 황약사의 무공을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서역 일대에서 무림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구양봉이었다. 남방에서는 단노황야(段老皇爺) 단예(段譽)가 이미 붕어했고 단금(段錦)이 지흥(智與)으로 이름을 바꾸어 황제가 되어 있었다. 단지흥은 천하제일고수 단예의 진전을 이어받은 사람으로서, 황야(皇爺)의 신분으로 무림에서 으뜸가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중원의 무림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중양진인 자신이 이끄는 전진파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물론 전진파 외에도 철장방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철장방에서도 최근에 방주 구천인이 새로운 무공을 익혔다고 했다. 구천인은 한 쌍의 철장(鐵掌)으로 강호를 주름잡고 있었다. 구천인은 호남에 자리잡고 있는 형산파(衡山派)의 인물들과 손을 쓴 적이 있었는데 한 쌍의 무쇠와 같은 철장(鐵掌)으로 잇따라 형산파의 고수 이십여명을 대패시켜 그 위명을 떨치고 있는 상태였다. 왕중양은 수소문을 한 결과 이 세상에서 자기와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들 다섯 명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구양봉이 공공연히 자기와 맞서고 있는 반면에 단황야는 자기와 교분이 두터웠다. 황약사는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어중간한 관계의 사람이지만 왕중양과는 커다란 원한이 없는 사람이었다. 홍칠공을 왕중양은 한번 만나본 인연이 있었다. 구천인은 어떤가? 왕중양은 그의 이름만 들어 보았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으니 적인지 친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사흘낮 사흘밤을 생각한 끝에 결국 구양봉을 가장 껄끄러운 상대로 지목했다. 어느 날 왕중양은 사제 주백통을 자기 앞으로 불러 입을 열었다. [사제, 오늘부터 네가 나를 위해서 한가지 일을 해줘야 되겠다.] 주백통은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사형이 나보고 어떤 사람과 싸움을 하라고 한다면 끓는 물속이나 타는 불속이라도 나는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왕중양은 꾸짖었다. [너는 정말 싸움밖에 모르느냐? 그저 나오는대로 지껄여대는구나.] 주백통은 사형의 일갈에 입을 다물고 다소곳하한 태도를 지었다. 왕중양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진파의 첫번째 계율은 남과 함부로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어찌 싸움을 하라고 하겠느냐? 내일부터 너는 즉시 숭산에서 떠나 여러 곳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무림에서 어느 정도 명성이 알려진 인물을 만나는 족족 구음진경 원본을 내가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한다. 알겠느냐?] 주백통은 깜짝 놀랐다. [만나는 족족 알려주라니, 그렇게 된다면 쓸데없는 번거로움을 자초하는 일이 되지 않겠소?] 왕중양은 빙그레 웃었다. [세상에 본래 비밀이란 없는 것이다. 구음진경이라는 것은 결코 내가 다른 사람의 손에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고 화산의 개울 밑바닥에 있는 것을 찾아낸 것이니, 천하의 사람에게 알려준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만약 심지가 옳고 밝은 사람이라면 결코 구양봉처럼 음흉하게 다른 사람을 암산하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너는 마음 놓고 떠나도록 해라.] 주백통은 공손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틀이 지나게 되었을 적에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정말 숭산에서 내려갔다. 마옥 등은 주백통이 숭산에서 내려 간 후에 무척 걱정을 했다. 많은 적들이 구음진경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틀림없이 숭산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뜻밖이었다. 주백통이 떠나간지 어느덧 반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으며, 겨울이 가고 봄이 왔지만 숭산은 조용하여 아무 일도 없었고 연하동에는 아무 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결과에 마옥 등은 너무나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이 해 여름에 주백통이 돌아오게 되었다. 왕중양은 일곱 제자들을 물리치고 사형제 두 사람끼리 은밀히 반나절을 두고 상의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왕중양은 일곱명의 제자들을 앞에 불러 들이고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금년 섣달에 이 스승이 서독 구양봉과 화산에서 무공을 겨루기로 한 것을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주 사숙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도록 해라. 반 년 동안 주사숙이 나를 대리하여 무공을 전수하게 된다. 알았느냐?] 마옥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아직 기일이 되려면 멀었는데, 사부님은 어디로 가시려구요?] 왕중양은 대답했다. [내일부터 이 스승은 태실산 뒤쪽에 있는 어느 동굴 안으로 가서 거처하며 본문의 선천공(先天功)의 오묘함을 터득하겠다. 너희들은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왕중양이 이와같이 말하자 뭇 제자들은 그저 예, 예, 하고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날부터 주백통은 히히덕거리던 태도를 고치고 제법 의젓하게 왕중양을 대리해서 일곱 제자들에게 무공을 전수하기에 이르렀다. 왕중양은 뒷산으로 올라갔다. 최초의 반 달 동안에 마옥과 구처기 등이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수시로 산골짜기 위로 올라가 사부님의 근황을 살펴보려고 했다. 그러나 태실산의 높은 곳에는 세찬 바람이 사정없이 불고 있었으며 일년 내내 구름바다를 이루어 어디가 어딘지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왕중양이 어느 동굴에 은거하고 있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는가? 마옥과 구처기 등은 몇번이나 살펴보았으나 사부님을 찾지 못하자 맥이 빠져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여름이 가고 가올이 왔다. 북쪽 지방은 날씨가 추운 편이라 중양절(重陽節:9월9일)을 지나자 온누리에는 서리가 내려 들판을 뒤덮기 시작했다. 더욱이 숭산의 꼭대기에는 시월에 접어들자 눈보라가 마구 휘몰아쳤다. 전진칠자는 연하동 안에서 사부님이 나타나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어느 눈보라가 사정없이 몰아치는 날 밤에 왕중양이 갑자기 연하동으로 되돌아 왔다. 마옥 등은 크게 기뻐했다. 반년 동안 헤어져 있던 왕중양의 얼굴 모습은 훨씬 수척해져 있었으나 정신은 무척 건왕(健旺)한 편이었으며 온 얼굴에는 붉그레한 윤기가 감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그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반 년 동안 너희들은 나를 걱정했겠구나? 이 사부는 이 반 년 동안 선천공을 한층 더 깊이 연마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로(一路)의 재간을 이용하여 사람의 몸에 있는 기경팔맥을 짚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아무리 중상을 입은 사람이라도 내가 한번 기경팔맥을 짚게 된다면 즉시 기사회생하게 될 것이다. 본래는 사람을 죽이는 재간이나 내가 이와같이 꺼꾸로 변화시켜 사람을 구하는 재간이 되었단다. 하하하.] 모두들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중양진인은 다시 일곱 제자들이 반 년 동안 익힌 무공을 차례대로 펼쳐 보이도록 하고 바로잡아 주었다. 스승과 제자가 반 년 동안 헤어져 있다가 오늘 다시 모이게 되자 자연 봄날처럼 화기애애한 웃음꽃이 피게 되었고 모두들 마치 연하동 밖의 한기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마옥 등이 그 동안의 단련으로 무공을 한층 더 깊이 연마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다시 한 달이 지나게 된 어느날, 갑자기 왕중양이 일곱 제자를 앞에 불러 앉히고 입을 열었다. [이 스승은 오늘 떠나겠다. 이번의 화산논검(華山論劍)은 길흉을 예측하기 어렵다. 만약 나에게 불측한 일이 생긴다면 주 사숙이 문파의 장문인이 될 것이다. 너희들은 사숙의 가르침을 받들도록 해라.] 일곱 제자들은 그만 침울해졌다. 구처기가 입을 열었다. [사부님, 군사를 천일 동안 길러서 하루에 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형제들이 어르신을 따라 함께 화산으로 가겠습니다.] 왕중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 서독 구양봉은 한평생 보기 드문 고수다. 그 날 그는 너희 사형제들의 금관옥쇄진(金關玉鎖陳)에 놀라서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는데, 그 때 만약 그가 연화동으로 들어서게 되었더라면 너희 여섯 사람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구양봉 이외에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무공을 지닌 다른 무림의 고수들이 구름처럼 몰려올 것이다. 너희들의 재간으로는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없으니 간다 해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숭산에서 무공이나 잘 연마하고 있도록 하여라.] 갑자기 잠자코 있던 주백통이 입을 열었다. [사형, 내가 사형을 도와주면 어떨까요?] 왕중양은 천천히 말했다. [사제, 너의 책임이 막중하니 연하동에 머물러 있도록 해라.] 주백통은 사형이 이번에 화산으로 떠나면서 구음진경과 생사를 같이할 뜻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헤아릴 수 있었다. 물론 무척 상심되는 일이긴 하지만, 사형이 기꺼이 화산논검에 참가하는 것은 무림의 안녕을 위하고 구음진경 때문에 서로 잔인하게 죽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포부를 지니고 있는 것을 헤아려 볼 때 존경심이 우러났다. 이튿날 왕중양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죽장망혜(竹杖芒鞋)에 한 자루의 불진(拂塵)과 한 자루의 보검을 지니고 구음진경 원본을 품속에 갈무리한 채 말없이 숭산을 내려갔다. 뭇 제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전송하려고 했을 적에 그는 이미 멀리 떠나가 버린 후였다. 모두들 감개에 젖어 탄식을 불어냈다. 왕진인은 구음진경을 갈무리하고 지팡이로 땅을 짚어 가며 서쪽으로 나아가 완락(宛洛)의 땅을 지나 동관으로 들어 섰다가 다시 섬서성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10일 후에는 어느덧 화산의 산자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왕진인이 산자락에 이르게 되자 소화산 비탈의 숲속에서 갑자기 북으로 가락을 연주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갑자기 그와 같은 가락을 듣자 그는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부근의 사냥꾼이나 화전민이 시집 장가를 가는 일이라도 생겼나?) 그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숲속에서 한 떼의 하안옷을 걸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물 살이 못 되는 젊은들로 하나같이 관현악기(管弦樂器)를 연주하고 있었다. 앞장을 선 한 백의인(白衣人)이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백학처럼 고고하신 전진교주께서 이렇게 왕림해 주시니 영광이옵니다. 우리 구양산주(歐暘山主)께서는 이미 이곳에서 기다린지 오래 되었사옵니다.] 구양산주는 바로 서독 구양봉을 일컫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곧장 숲속으로 들어섰다. 그는 숲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원래 그 둘레 3만여 평이나 되는 숲속에 오색찬란한 천막들이 쳐져 있었는데 모두 영해(寧海)나 사천성에서 나는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사실 이 두 가지의 비단은 매우 진귀해서 역대 황제들도 이 비단을 진상품의 하나로 지정해 놓고 지방의 관부(官府)에 명하여 매년 조정에 바치도록 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놀랍게도 그와 같은 비단으로 천막을 만들고 휘장을 만들어 나무 꼭대기 위에 걸어 놓고 햇살을 막으니 그 호사스러움을 가히 상상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왕중양은 그와 같은 관경을 보고서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에 불진을 비껴 들고 그 영반(領班)인 백의인에게 입을 열었다. [구양 산주는 어디에 계신가?] 그 백의인은 빙그레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입술을 누르더니 한번 휘파람을 내 불었다. 그러자 숲속 깊은 곳에서부터 오색의 휘장이 어른거리는 가운데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왕중양은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원래 그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은 구양봉의 문인 제자들이 아니고 또한 초청을 받고 나타난 무림 친구들도 아니라, 하나같이 눈처럼 흰 살결에 꽃같이 아름다운 미녀들이었다. 이 두 줄의 미녀들은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반은 강소성이나 절강성에서 골라 온 미녀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서역의 여자들로 엉덩이가 펑퍼짐하고 젖가슴이 높이 부풀어 올랐으며 체구가 크고 훤칠했다. 섣달의 추운 날씨인데도 미녀들의 몸에는 백라의(白羅衣)가 걸쳐져 있어, 눈처럼 뽀얀 허벅지와 복숭아처럼 볼록하게 솟은 젖가슴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미녀들은 별과 같은 눈동자에 추파를 담고 앵도같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풍정(風情)과 색정을 도발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능숙하게 차례로 줄지어 나서더니 와, 하니 함성을 지르며 수십 마리의 하얀 나비떼처럼 미인진(美人陳)을 펼쳐 왕중양을 한복판에 두고 에워쌌다. 그녀들은 왕중양을 에워싸고 즉시 통통한 엉덩이를 혼들고 하얀 팔을 움직여 옥과 같이 흰손을 마주 잡고 2장 둘레의 육병풍(肉屛風)을 만들고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나 되는 백의인들은 가락을 울리며 박자를 맞추어 예상우의곡(　裳羽衣曲)을 연주했다. 뭇 미녀들은 가락의 장단에 맞추어서는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삽시간에 하얀 다리들이 일제히 허공에서 날게 되고 꽃과같은 젖무덤이 출렁거리는 가운데 엉덩이가 물결치는 일막(一幕)의 천마섭혼무(天魔攝魂舞)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만약 정려(定力)이 없고 혈기방장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유혹적이며 넋을 빼앗는 화사한 춤에 이미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었으리라. 그야말로 모란꽃 아래서 귀신이 되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욕정을 발산하기 위해서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진교주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첫눈에 이것이 구양봉의 독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독이 미인들을 미끼로 삼아 중양진인의 순양동자공(純陽童子功)을 깨뜨려 중양진인의 내공을 약화시키려는 수작이라고 내다본 것이었다. 따라서 왕진인은 그만 발끈 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자기의 마음이 명경지수와 같고 도력(道力)이 굳건하니, 이 요사스러운 미녀들을 옥면나찰(玉面羅刹)로 보고 절세적이고 간들어진 미녀들을 살을 붙인 해골로만 본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진교주는 이와같은 생가이 들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그 수십 명의 미녀들이 온갖 색정적이고 음탕한 짓거리를 펼치도록 했고 모든 미태를 다 지어 보여도 일절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듯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 미녀들은 왕중양이 자기들의 유혹에 걸려들지 않자 그만 조바심이 났다. 앞장을 섰던 한 명의 콧날이 우뚝 서고 하얀 살결의 금발미녀가 갑자기 세번 손뼉을 쳤다. 그러자 수십 명의 미녀들은 몸에 입고 있는 백라의를 손으로 모조리 벗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삽시간에 넋을 빼앗고 눈앞을 아찔하게 하는 젖무덤과 꽃과 같은 젖꼭지들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심지어 허벅지가 번쩍 들리면서 은밀한 숲이 드러나기도 했다. 왕중양은 구양봉이 이토록 몰염치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만 노여움이 치솟아 올라 이 미녀들을 어떻게 골탕먹일까 그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숲속의 나무 꼭대기에서 한차례 옥소(玉簫)를 부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 맑음은 봉황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이 한 곡의 퉁소 소리는 너무나 느닷없이 들려오게 되었는데 왕중양의 사방에서 춤을 추던 한 떼의 미녀들은 그 가락에 놀라 허둥거리는 것이 아닌가? 원래 이 미녀들은 모두 구양봉이 서역에서 사들인 사람들이었다. 어떤 미녀들은 강제로 붙잡아다가 백타산(白駝山)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녀들은 노예가 되는 외에도 가무를 익혀 서독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자기의 내공 조예가 왕중양보다 못하기 때문에 이 미인계를 쓴 것이었다. 구양봉은 그 미인들이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이미 춘약(春藥)을 먹였다. 이 춘약이 뱃속으로 넘어가면 온몸이 타는 듯이 화끈거려 엄동설한에도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구양붕은 그녀들을 회생해서라도 왕중양을 유혹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간계를 달성하기도 전에 옥소소리가 일어나면서 그녀들이 크게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서독이 백타산에서 데리고 온 이 여노(女奴)들은 모두 48명인데 하나같이 춘약을 먹었기 때문에 불타는 듯한 욕정을 느끼고 있었으나 왕중양은 좀처럼 깊은 함정에 빠져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일단 왕중양이 욕정을 참지 못하게 되면 그녀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왕중양을 땅바닥에 눕혀 놓고 윤간을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옥소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자 40여 명이나 되는 여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흩어지게 되었고 가슴속으로부터 이상야릇한 느낌이 치밀어 올라 하나같이 몸뚱이를 돌려 옆에서 가락을 연주하머 흥을 돋구던 백의의 남자들에게 나는 듯이 달려갔다. 삽시간에 백여 명이나 되는 남녀들은 수십 쌍으로 엉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여인들은 교성을 지르며 덤벼드는 반면, 남자들은 처참한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원래 이 백의의 남자들은 구양봉의 남노(男奴)들이었다. 구양봉의 위인이 매우 악독해서 백타산 속에 수백 명이나 되는 남노와 여노들을 기르고 있었지만 그들끼리 서로 짝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남노들에 대한 감시를 삼엄하게 했으며 대우가 아주 가혹했다. 만약 남노가 여노와 사통하게 된다면 남자는 즉시 불에 태워 죽였고, 여노는 뱀이 우굴거리는 구덩이에 밀어 넣어 산 채로 독사들에게 물려 죽어야 했다. 심지어 남노가 여노에게 한마디 농담만 해도 혓바닥을 잘라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남노들은 여노들이 자기네들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자 오히려 사갈처럼 두려워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노에게 붙잡히지 않은 남노들은 몸을 돌려서 도망치게 되었고 여노들에게 붙잡혀 안기게 되어 땅위를 마구 뒹굴게 된 남노들은 큰소리로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던 것이었다. 바로 이와 같이 남노와 여노들이 겉잡을 수 없는 북새통을 이루게 되었을 적에 숲속의 또 다른 한쪽에서 한 차례 급박하고 재빠른 쟁(箏)을 연주하는 소리가 딩동딩동,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살벌하여 마치 가을바람에 천 명의 군사들이 철마를 몰아 갑자기 달려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녀 노예들의 광란이 그 가락을 듣자 즉시 멈춰졌다. 남노들을 안고 있던 미녀들은 다투어 손을 놓았다. 어떤 미녀들은 몸을 일으키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쟁소리도 덩달아 뚝 그치고 말았다. 바로 이때 깨진 징소리같은 커다란 음성이 울려퍼졌다. [어느 친구가 나무 위에서 통소를 부는 것이오? 내려오시오. 만약 왕중양을 도우러 왔다면 광명정대하게 도와야 할 것이 아니겠소?]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퉁소 소리가 갑자기 멈춰지면서 껄껄 광소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하!] 한 그루의 나무 위에서 한 청의인(靑衣人)이 사뿐히 내려섰다. 왕중양이 바라보니 그 청의인은 바로 도화도의 황약사였다. 그는 손에 한자 정도 되는 옥소를 들고 껄껄 웃어 젖히더니 입을 열었다. [구양(歐陽) 노독물(老毒物), 당신이 숲속에 숨어서 사람을 암산하는 것은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오? 어서 나오시오.] 황약사 이 몇 마디의 말에 숲속에서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어 오색의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십여 명이나 되는 백의의 남녀들이 한 중년인을 옹위하고 걸어 나왔다. 짙은 눈썹, 커다란 눈망울, 구렛나루를 기른 중년인은 바로 서독 구양봉이었다. 그는 먼저 왕중양에게 읍을 했다. [왕진인, 이 구양봉이 멀리까지 마중나가 환영하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오.] 왕중양은 반례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이런 요란한 환영은 사절하겠소.] 구양봉은 고개를 돌려 황약사를 바라보더니 냉소했다. [형씨는 도화도의 황도주 같구려. 이번에 화산으로 틀림없이 왕중양을 도우러 온 것이겠지?] 황약사는 오만하게 대답했다. [터무니 없는 소리!] 구양봉은 그가 왕중양을 돕는다고 하지 않자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황약사는 조금 전에 옥소로 봉구황곡(鳳求凰曲)를 불어내 자기 여노들의 구혼연무(勾魂戀舞)를 망쳐 놓지 않았던가? 서독 구양봉은 안색이 변해 입을 열었다. [황도주, 당신이 왕중양을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이 화산까지 왔소?] 황약사는 대답했다. [당신과 왕중양이 싸우는 것을 보러 왔소. 나는 이긴 사람과 겨루고자 하오. 나를 이기지 못하고는 누구도 구음진경을 가져갈 수 없을 것이오.] 구양봉은 발끈했다. 그는 언제나 서역에서 턱으로 사람을 부리던 사람이고 제맘대로 행동하던 사람이었다. 왕중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꺼리는 바가 있었지만 황약사 쯤이야 어찌 안중에 두겠는가? 서독 구양봉은 노호를 터뜨리더니 왼손을 흔들며 오른손을 엇갈리도록 뻗쳐내면서 휙, 하니 황약사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후려쳤다. 황약사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슬쩍 몸을 흔들었다. 청포(靑袍) 자락이 흔들리는 가운데 몸뚱이가 물뱀처럼 어느덧 구양봉의 등뒤로 돌아갔다. 구양봉은 냅다 뒤로 몸을 돌리면서 손으로 상대방을 잡으려고 들었다. 황약사는 짐짓 놀란 소리를 내질렀다. [아이쿠!] 그러면서 몸을 흔들어 피해버렸다. 서독 구양봉이 아무리 악랄하게 손을 써도 황약사는 낙엽처럼 장풍을 따라 두둥실하니 피해 나가는 것이었다. 구양봉은 그렇게 되자 더욱 화가 끓어 올라 합마공을 펼치려고 했다. 바로 이때 숲속에서 몇 사람이 달려 나왔다. 바로 서독 구양봉의 남노들이었다. 그들은 허둥지둥 달려나오더니 황급히 부르짖었다. [산주님, 야단났습니다. 뒷산에 한 명의 거지가 나타나서 우리가 미리 펼쳐 놓았던 사진(蛇陣)를 깨고 뱀들을 모조리 죽이고 쫓아버렸습니다.] 이 한마디가 떨어지자 서독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원래 구양봉은 이번에 중원으로 들어오기 위해 서역을 떠나게 되었을 적에 구음진경을 반듯이 손에 넣으려고 작심한 바 있었다. 그는 화산 산자락의 숲속에 미녀미진(美女迷陣)을 펼쳐 놓은 외에도 뒷 숲속에 수만 마리의 독사들을 풀어 놓아 필요할 적에는 왕중양을 사진으로 끌어들일 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한마디의 호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수만 마리의 뱀들이 일제히 달려들 것이니 상대방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어도 살아나기 어렵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독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니 그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으며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독 구양봉은 대노해서 외쳤다. [그 거지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냐? 어떻게 내 사진을 깨버렸는지 빨리 말해 보아라.] 이 몇 명의 뱀을 모는 사노(蛇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저희 몇 명이 명을 받들고 뱀때를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그 누가 우리의 등뒤에서 크게 기침을 한번 하기에 고개를 돌려 바라 보았더니, 한 명의 얼굴 생김새가 우스꽝스러운 거지였습니다. 우리들이 그를 쫏아보내려고 했을 적에 그 거지는 매우 당돌하게 저회들에게 일천 개의 사담(蛇膽)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막 그에게 욕을 하자 그 거지는 대뜸 저회들의 혈도를 짚어버리고 말았지요. 그래서 저희들은 목석으로 깎아 놓은 것처럼 땅 위에 서 있게 되었지요. 그 거지는 손에 한자루 비췻빛의 투명한 죽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일진의 바람처럼 뱀떼 안으로 뛰어들더니 먼저 손을 한번 휘둘러 두 개의 유황연탄(硫黃烟彈)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뱀떼들은 그 유황냄새를 맡자 크게 어지러워졌지요. 그는 죽장으로 한동안 치고 찌르고 때리기 시작했는데 뱀들은 단번에 수십 마리씩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독사들은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뒷산 쪽으로 도망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삽시간에 한 마리도 남지 않고 사라졌지요. 그 거지는 독사들을 모조리 쫓아보낸 후에야 다시 죽장을 들고 저희들의 몸을 가볍게 한번 치고 한번 짚어 저희들의 혈도를 풀어주고 입에 담기 거북한 말들을 지껄이는 것이었어요.] 서독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길길이 뛰며 화를 냈다. 그는 왕중양과 황약사 두 사람이 자기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노호를 연신 터뜨렸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숲 밖에서 갑자기 연화락(蓮花落)을 부르는 노래소리가 들려오면서, 다 헤어진 두건에 여러 곳을 기운 옷을 입고 호로(葫蘆)를 등에 맨 중년의 거지가 죽장을 짚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왕중양은 그 사람을 보자 크게 기뻐 불렀다. [정말 잘 됐군. 홍방주마저 도달했구료.] 구지신개 홍칠공은 예전에 왕중양과 연경성 안에서 한번 만나 적이 있었다. 그 역시 웃으면서 왕중양에게 손을 마주잡아 보이며 말했다. [전진교주, 별래무양하시오?] 왕중양이 그에게 몇 마디 인사말을 하려고 하는데, 홍칠공이 서독 구양봉을 향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노독물! 당신이 화산으로 와서 구음진경을 빼앗겠다고 하는 것야 탓할 수가 없지만 정정당당하게 굴어야 하지 않을까? 뱀떼를 데리고 와 한 채의 풍경이 수려한 화산을 온통 뱀들로 뒤덮히게 하고 비린내를 콱콱 풍겨 살풍경하게 만들 수 있느냔 말이오. 내가 쫓아버렸소. 당신이 승복할 수 없다면 나와 한번 겨뤄 봅시다.] 구양봉은 그와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눈 앞에는 지금 무공이 절정에 도달한 인물들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만약에 자기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른다면 목숨을 잃을 우려가 있었다. 그는 연신 괴성을 질렀다. [좋아, 당신네들 세 사람이 함께 나서서 나를 상대하겠다, 이것인가?] 그 말이 막 끝나자 마자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나는 듯이 몇 필의 말이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구양봉이 그 괴상하게 생긴 눈을 홱 뒤집고 바라보니 숲속으로 달려 들어온 말들은 모두 세 필인데 체구가 작고 다부진 사천성에서 나는 조랑말들이었다. 그리고 앞장을 서서 말을 타고 들어온 사람은 서른 남짓한 젊은이인데 영기발랄하고 훤칠한 풍채였다. 그는 금실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비단 장포를 걸치고 있어 남다른 의젓함과 부귀의 기상을 옅보이고 있었다. 왕중양은 껄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잘 되었군. 오늘 이번 화산의 모임에는 정말 오방(五方)에서 여러 사람들이 달려 왔으니 그야말로 뭇 어진 사람들이 모조리 도달한 셈이군. 남쪽 나라 대리국(大理國)의 단황야(段皇爺)도 오셨군!] 단황야는 이미 옛날의 태자가 아니었다. 왕중양은 오랜만에 만나는 단황야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체구가 건장하고 두 눈에서 영기발랄한 기상이 밖으로 뻗쳐나고 있었으며 의젓하면서도 노련해 보이는 것이 결코 옛날의 치기 어린 소년의 티를 엿볼 수가 없었다. 그의 등뒤, 두 필의 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마도 대리국에서 단황야를 호위하기 위해 파견된 무사 같았다. 단황야는 숲속으로 들어서자 먼저 말에서 내리더니 왕중양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이며 웃었다. [왕진인, 오랜만이군요.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원래 왕중양은 주백통을 숭산에서 내려보낼 때, 홍칠공과 단황야 두 사람을 화산논검에 참가해 달라고 초청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황약사는 초청하지 않았었다. 왕중양은 전진교주의 명의로 잇따라 석 장의 배간을 발송했는데 한 장은 개방방주 홍칠공에게 갖다 주는 것이었고, 한 장은 단황야에게 갖다 주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한 장은 철장방의 방주인 구천인에게 갖다 주는 것이었다. 이 석 장의 배첩을 발송한 결과 홍칠공과 단황야는 차례로 도달했으나 구천인만이 아직도 간첩에 응해서 약속대로 달려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북개, 남제, 중신통, 동사, 서독, 다섯 사람이 일제히 화산에 나타난 것이었다. 구양봉은 천하에 자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명성을 떨치는 네 명의 고수들이 일제히 화산에 나타난 것을 보고는 여간 마뜩치 않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와 왕중양이 구음진경을 놓고 다투는 일이 무연중에 확대되어 천하의 사람들이 다투는 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섯 명의 무림에서 절정의 인물들이 구음진경을 쟁탈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다섯 사람들 가운데 왕중양은 구음진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구양봉은 바로 왕중양과는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홍칠공과 단황야는 명목상 구음진경을 빼앗으러 왔다고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왕중양쪽에 서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다만 황약사만이 초연해서 어떤 편에도 서지 않았다. 구양붕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음흉한 사람이라 남노와 여노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너희들은 모두 다 물러가라.] 그 남노와 여노들은 즉시 마치 성지를 받든 사람처럼 깨끗이 물러가고 말았다. 구양봉은 깨어진 징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구양봉은 서쪽의 외진곳에서 자란 사람이라 견문이 좁고 왕래가 없던 차에 오늘 천만다행 이와 같이 네 분의 무공이 고강하고 현명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구료. 하지만 구음진경이라는 것은 한권밖에 없으며 이 진경은 왕진인의 손에 들어 있으니 우리들이 어떻게 다투어야 할 것인지를 먼저 명백히 할 필요가 있소이다. 공평한 비무의 방식을 결정하면 좋을 것 같은데 여러분들의 고견은 어떠신지 아무쪼록 아낌없는 가르침과 성원을 기대하는 바이외다.] 서독의 이 몇 마디 말은 겉으로 볼 때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골자는 음흉하기 이를데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첫마디가 구음진경이 바로 왕중양의 손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한다면 왕중양 한 사람이 혼자서 구음진경을 독차지하려 하고 있다고 비춘 것이었다. 구양봉은 자기의 재간으로는 왕중양을 절대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이 몇 마디 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자는 의도가 있었고, 그리하여 이 몇 사람들과 손을 합해서 전진교주를 상대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램이었다. 먼저 왕중양을 패배시키고 구음진경을 자기 손아귀에 넣든가, 아니면 황약사 등 세 사람이 먼저 왕중양과 손을 쓰게 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게 한 후에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속셈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니 구양봉의 심보가 얼마나 음흉하고 악독한가? 하지만 왕중양 역시 강호에 노련한 사람이라 구양봉의 그와 같은 음흉하고 셈빠른 속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빙그레 웃고서는 입을 열었다. [봉형의 말은 틀렸소. 이 왕중양이 오늘 화산으로 달려오고 또한 여러분들을 이렇게 초청한 목적은 바로 구음진경을 내놓아 상품으로 삼으려는 것이오. 그 어느 누가 재간이 뛰어나서 나머지 네 사람을 압도하게 된다면 그가 바로 구음진경을 얻는 주인이 되는 것이오. 천고의 기경이자 선현의 심혈의 결정체이니, 마땅히 천하에서 무술이 으뜸가는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이오. 여러분도 이와 같은 조처에는 모름지기 입으로나 마음으로 모두 숭복할 거요] 홍칠공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것 참 훌륭하군요! 구음진경이라는 하잘것없는 다 헤진 책자를 다른 사람들은 보배처럼 여기지만 이 거지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소. 우리들이 먼저 겨루어 어느 누가 천하에서 무술의 일인자인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구양봉은 냉담히 그 말을 받았다. [홍방주, 홍방주는 어떻게 겨룰 참이오?] 홍칠공은 대답했다. [어떻게 겨루다니? 물론 주먹과 발, 그리고 칼이나 창으로 싸우는 것이오. 설마하니 독사로 사람을 물겠다는 것이오?] 이 몇 마디의 말은 서독의 음흉한 속셈을 여지없이 파헤치는 말이기도 한지라 구양봉은 음흉하기 이를 데 없다 하겠으나 그만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거지 같으니, 감히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사람을 비방하다니!] 그리고는 휙 하니 일장을 들어 맹렬하고도 무거운 장풍으로 홍칠공의 왼쪽 어깨를 치려고 들었다. 구양봉은 조금 전에 이장을 후려쳤으나 황약사를 맞히지 못하고 모두 다 빗나간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만큼은 요령이 생긴 나머지 일장을 후려치되 보기에는 죽을 목숨을 다하는 것 같았으나 기실에 있어서 겨우 삼성의 장력만을 내쏟았을 뿐이었다. 홍칠공이 손을 들어 자기의 장력을 밀어 붙이려고 한다면 구양봉은 즉시 장력을 증강시키면서 신속한 우뢰소리에 미쳐 귀를 막지 못하는 타법을 운용하여 먼저 허초로 상대했다가 뒤에는 실초로서 홍칠공이 미처 손쓸 여유를 주지 않고 때려 눕히자는 것이었다. 홍칠공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서둘지 않고 손을 들어 아무렇게나 막았다. 구양봉이 사용하는 것은 설산신타장(雪山神駝掌) 가운데 병천도개이고 홍칠공이 사용하는 것은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의 용전우야(龍戰于野)라는 일초였다. 두 가닥의 장력이 서로 엇갈리게 되자 구양봉은 갑자기 입으로 '꽥' 하는 괴성을 내지르면서 합마공을 펼쳐 내 홍칠공의 가슴팍을 향해 일장을 밀어젖혔다. 이렇게 두손으로 쏟아내는 경(勁)력이 만약에 뻗쳐나게 된다면 정말로 산을 물리치고 바다를 뒤엎는 위력이 도사리고 있어서 홍칠공은 반드시 불리한 입장에 놓여질 판이었다. 한데 구양봉의 장력이 막 쏟아질까 말까할 찰나에 왕중양이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와 불진을 흔들어 총채를 떨치며 일직선으로 구양봉의 팔굽에 있는 삼리혈(三里穴)을 슬쩍 건드리며 부르짖었다. [잠깐.] 왕중양이 그와 같이 한번 떨치는 수법은 보기에 평범했으나 구양봉의 팔은 그가 총채로 슬쩍 찌르는 바람에 즉시 시큼해지고 맥이 빠져 구양봉으로서는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후닥닥 손을 거두어들이고 뒤로 물러서며 흉칙한 웃음을 띄웠다. [전진파는 천하 정종이라 자부하면서도 이 교주님께서는 이 대 일의 싸움을 벌이려고 하시니 실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군.] 왕중양은 그 말을 받았다. [뭐가 삔뻔스럽다는 것이오 봉형. 우리들은 모두 다 일파의 우두머리로 신분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외다. 이번 일은 결코 마구잡이로 싸워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홍칠공은 그 말에 찬성을 하고 나왔다. [옳소 옳아. 노독물, 우리는 결코 어린애들이 아니오. 무공을 겨루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누대가 있어야 하고 누대 위에서 시합을 가지려면 규칙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러니 우리들은 먼저 규칙을 정하고 난 뒤에 싸우되 제기랄, 이레낮 이레밤 동안 싸워 봅시다.] 황약사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숲속은 무공을 겨룰 만한 곳이 못 되오. 무공을 겨루려면 먼저 화산의 꼭대기로 올라갑시다.] 모두들 그 말에 찬동했다. 구양봉은 미리 이 숲속에다가 적지 않게 수작을 부려 놓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두 다 화산 꼭대기로 가서 무공을 겨루자니 그의 속셈은 헛물을 켜고 만 셈이 되고 말았다. 구양봉은 냉소하고 말했다. [좋소, 좋아. 우리 함께 갑시다.] 오로(五老)는 일제히 경신법을 펼쳐 나는 듯이 위로 치달았다. 잠시 후 다섯 사람의 그림자가 어느덧 화산의 꼭대기로 옮겨져서 눈바닥 위에 어른거리게 되었다. 화산의 꼭대기에는 눈보라가 막 멎은 참이었으나 하늘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산꼭대기에는 석 자 두께의 적설이 쌓여 있었고 싸늘한 바람은 뼈를 에이는 듯했다. 만약에 여느 사람이라면 아마 위로 오른지 반각이 되지 않아 골수까지 얼어붙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오로의 무공은 거의 다 노화순청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까짓 추위쯤이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홍칠공은 봉우리 위에 이르게 되자 녹장(綠杖)으로 바위를 한번 치더니 부르짖었다. [누대에 도달했소. 노독물, 우리들은 이곳에서 무공을 겨루도록 합시다.] 구양봉은 대답했다. [좋소! 늙은 거지. 반드시 상대해 드리지!] 왕중양은 손을 뻗어내 막았다. [두 분은 잠깐, 불초는 아직 드릴 말씀이 있소!] 그는 구양붕과 홍칠공의 사이에 들어서서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무공으로 친구를 사귀자는 것이오. 피차에 깊은 원한이 없기 때문에 빈도는 여러 사람이 무공을 겨룸에 있어서 먼저 규칙을 정하되 피차간에 손이 닿는 것으로 끝내고 절대로 상대방의 털끝이나 머리카락 하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규칙에 응한다면 빈도는 상대를 해드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 이 왕모는 숭산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소!] 구양봉은 그 커다란 눈을 까뒤집으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단황아와 황약사가 손삑을 치며 웃었다. [왕진인 말씀이 옳소이다. 우리들은 손이 닿는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홍칠공 역시 찬성이었다. [무척 좋소이다. 무공을 겨루되 사람을 해코지 하지 않기로 한다는 이 규칙이야말로 진정 천고에 드문 것이지요. 이것 봐! 노독물, 당신은 동의하오? 하지 않소?] 구양봉은 마뜩치 않은 표정이었으나 네 사람이 모두 찬성을 하는데 그 혼자서 어떻게 자기 의견만을 고집할 수 있겠는가. 그는 눈을 한번 굴리더니 악독한 계책이 떠올랐는지 흉칙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도 좋겠지. 나도 결코 당신들의 털끝 하나 머리카락 한 오라기 다치지 않도록 하겠소.] 홍칠공은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이 우리의 털끝이나 머리카락 한 올을 다칠 수가 있을까? 노독물, 아마도 당신은 그만한 재간이 없을 걸?] 오로 가운데 홍칠공은 말끝마다 상대방을 깎아 세웠고 구양봉과는 언제나 첨예하게 맞섰으며 한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 홍칠공이라는 이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널리 교분을 맺어 온 터라 서독 구양봉 위인이 아량이 좁고 음흉하며 독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본래 서독 구양봉은 그의 형인 구양열(歐陽烈)과 함께 백타산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의 형이 갑자기 죽게 되었고 그 죽은 원인이 아직도 애매모호했다. 일반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구양봉과 그의 형수가 무척 더러운 사이라는 것이었다. 홍칠공은 언제나 악을 원수처럼 여겼기 때문에 구양봉을 보게 되자 그만 차가운 조소는 물론 뜨거운 조롱을 서슴치 않았고 조금도 상대방의 체면같은 것은 봐주지 않았다. 구양봉은 그만 발끈해져서는 홍칠공과 무공을 겨루려고 했다. 왕중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칠형, 오늘 우리는 이 무공으로 친구를 사귀자는 것이고 입과 혀로서 원한을 맺자는 것이 아니오. 우리들은 지금 모두 다 다섯 사람이니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것이 낫겠소. 모두들 제비를 뽑아 결정을 하되 만약에 그 어느 두 분이 겨루기로 된 제비를 뽑게 되면 그들이 각기 자기의 장점을 살려서 세 차례 결투를 벌이도록 허락을 하되 한 사람이 두 번 이상을 싸워 이기게 된다면 숭리로 간주하는 것이오. 그리고 승부가 난 후에 다시 제비를 뽑아 다른 두 사람이 나서서 겨루기로 하는 것이오. 이 방법이 여러분들은 공평하다고 생각하시오?] 모든 사람들은 생각해 보았다. 왕중양의 이 방법이 그런대로 공평한지라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우리들은 왕진인의 분부를 따르기로 하지요.] 왕중양은 바릿대에서 다섯 개비의 죽첨(竹簽)을 꺼냈다. 길고 짧은 것이 똑같았다. 그는 그 죽첨들을 황약사와 구양봉, 홍칠공, 그리고 단황야 네 사람이 차례로 살펴보도록 했다. 모두들 다른 표시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왕중양은 그제서야 죽첨들을 나누어서 두 대의 죽첨 중간에 암호를 찔러 남기는 등 표시를 하고서야 죽첨을 다시 손아귀에 귀고 다른 네 사람들에게 죽첨을 뽑도록 했다. 전진교주는 공평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들 네 사람이 먼저 뽑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고 난 후에 자기 손의 나머지 것을 자기 몫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추첨을 한 결과 왕중양과 구양봉, 단황야 세 사람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죽첨을 뽑게 되었고 홍칠공과 황약사가 먼저 몰래 표시를 해둔 죽첨을 뽑게 되었다. 중양진인은 소리내어 웃었다. [무척 잘 되었소. 두 분은 혼신의 절기를 쏟아내도록 하시오. 그래서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었으면 고맙겠소.] 홍칠공과 황약사는 함께 한복판으로 나섰다. 왕중양과 구양봉 그리고 단황야는 한켠에 서서 지켜보았다. 홍칠공은 황약사에게 먼저 말했다. [약형, 우리가 처음 손을 쓰게 되는 것인데 어떻게 겨뤘으면 좋겠소?] 황약사는 대답했다. [만저 권법을 겨루도록 하지요] 홍칠공은 좋다는 대답을 하고 녹죽청을 눈바닥에 싹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푹 꽂았다. 그런데 홍칠공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푸른 그림자가 번쩍이는 곳에 황약사가 언뜻 몸을 날려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는 대뜸 낙영장법을 펼쳐 휙휙 하고 네 번이나 바람소리를 일으키면서 잇따라 기이한 초식을 펼쳐 내는데 그 재빠름이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했다. 그와같은 수법을 펼쳐 그는 사정없이 홍칠공을 공격했다. 왕중양은 황약사의 손을 쓰는 것이 무척 괴이하여 삽시간에 네 대의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얼핏 볼 때 마치 네 개의 손바닥이 동시에 후려쳐 오는 듯한 것을 보고 역시 하며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식의 재빠름은 그야말로 그 무엇에도 견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홍칠공은 조금도 서둘거나 당황해 하지 않고 무척 여유를 보였다. 그는 몸을 흔들하더니 팔을 돌려 뒤로 후려쳤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항룡십팔장 안에 있는 신룡도미(神龍掉尾)를 펼쳐 황약사가 잇따라 네 번 펼쳐 낸 초식을 동시에 막아 버리는 것이었다. 이 일초에 구양봉을 제외한 왕중양과 단황야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동시에 갈채를 보냈다. 황약사는 공격을 펄쳤으나 빗나가게 되자 권초를 곤두세우며 낙영장법을 잇따라 펼쳐 냈다. 그러자 그의 몸뚱아리가 허공에 붕 떠서 뭉게구름처럼 이리저리 구불텅거리게 되었고 권초는 마치 빗방울처럼 촘촘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권풍은 번개와 같이 빨라 정녕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았다. 홍칠공은 어떤가? 그는 황약사와는 정반대였다. 황약사는 속공으로 그를 공격했으나 그는 느릿하니 항룡십팔장을 펄쳐 앞을 가리고 뒤를 막는가 하면 왼쪽을 봉쇄하고 오른쪽으로 저항했다. 그의 손 씀씀이는 매우 느릿했으나 장초가 펼쳐지게 될 때마다 지극히 커다란 장력이 뻗쳐 나매 거의 금성철벽을 이루어 황약사가 낙영장법을 오허일실(五虛一實), 팔허일실(八虛一實), 또는 허실상승(虛實相乘)이 될 정도로 빗방울처럼 촘촘히 퍼부었지만 홍칠공의 몸뚱아리 석 자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눈깜짝할 사이에 칠팔십 초를 겨루었다. 말은 무공으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었으나 정세의 아슬아슬함과 생사의 판가름은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왕중양과 단황야는 그 광경을 보고 거의 넋을 잃고 있었다. 구양봉은 연신 눈살을 찌푸리고 아미로 찡그리며 주먹을 지었다가 손으로 허공을 쳤다가 했다. 그는 한편으로 황약사의 표홀하고 일정하지 않은 장초를 음미하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홍칠공의 웅혼하고 맹렬하기 이를 데 없는 장력을 세밀히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 두 사람의 장점을 천천히 되씹어 보면서 다음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에 거울로 삼으려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왕중양은 간혹 고개를 돌려 그가 짓는 표정이나 짓거리를 보고서는 매우 가소롭게 생각했다. 이때 홍칠공과 황약사가 한 사람은 빠르고 한 사람은 느릿하게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백여 합을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별안간 황약사는 맑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소엽퇴를 펼쳐 냈다. 그는 먼저 장초를 거두어 들이고 다시 몸뚱아리를 아래쪽으로 낮추더니 발길질을 하려고 했다. 홍칠공의 항룡장법은 지극히 공격을 함으로써 수비에 유리한 장법이었다. 적이 자기를 공격할 때에 그는 무척 근엄하게 방비를 했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금성철벽을 연상시켰으며 반가닥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적의 공세가 거두어지게 되거나 또는 초식을 거두어 들였다가 일단 다른 초식으로 바꾸게 되었을 때에 그의 벼락치듯한 공세는 펄쳐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황약사는 처음으로 항룡장과 초식을 교환하게 되었으므로 그 허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낙영장을 거두어 들이게 되자 홍칠공은 갑자기 싸늘히 코웃음을 치더니 왼손을 홱 뿌리면서 오른손으로는 반원을 그리면서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일장을 휙 하니 펼쳐 황약사의 어깨를 후려치려고 들었다. 이 일장은 너무나 느닷없이 펼쳐진 것이었고 황약사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완전히 황약사의 의표를 찌르는 적의 반격이라 그야말로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재빨리 외다리로 땅바닥을 살짝 딛고 도발수양(倒拔垂楊)의 신빕을 펼쳐 곧장 몸을 솟구쳐 올렸다. 그런데도 홍칠공의 장풍은 그의 발밑을 삼킬 듯이 몰아쳐서 그의 온 몸뚱아리가 자기도 모르게 튕겨 나가게 되었다. 그런 후에 그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 한계보(寒鷄步)를 펼쳐 죽어라 하고 몸뚱아리를 가다듬고서 가법게 하려고 했으나 땅에 내려서는 그 순간 발밑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나면서 한 조각의 돌이 어느덧 그의 발에 밟혀서는 쪼개지고 말았다. 명가가 초식을 교환할 때에는 실낱 같은 차이라 하더라도 이미 대패로 간주하는 법이었다. 황약사는 즉시 두손을 맞잡아 보였다. [칠형의 권법이 고명하구료. 탄복했소이다, 탄복했소이다!] 홍칠공은 겸손의 말을 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구료. 방금 한수 양보를 해 주어서 정말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이오!] 구양봉은 홍칠공의 장법을 보고 속으로 여간 놀라워 하지 않았다. (늙은 거지 권법이 강경(剛勁)하고 웅혼(雄渾)을 장점으로 삼고 있구나. 내가 만약에 저자와 손을 쓸 때에는 반드시 유좌강(柔挫剛)의 재간을 펼쳐야만이 이길 수가 있겠다.) 황약사는 일초를 지게 되었으나 자존심이 강한 그는 속으로 시종 마뜩치 않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홍칠공에게 입을 열었다. [칠형, 소제는 장법면에 있어서는 기꺼이 졌다는 것을 시인하겠소. 그러니 다음 한 차례는 칠형과 경신법을 겨루고 싶은데 칠형은 상대를 해 주시겠소?] 홍칠공은 소리내어 웃었다. [늙은 거지는 무엇이든지 상대를 해 드리리다. 다만 다른 사람이 심혈을 기울인 결정을 훔친다거나 다른 사람의 위기를 틈타는 따위의 비루한 짓은 이 늙은이가 죽는다 하더라도 하지 못 하겠소.] 이 한마디는 서독 구양봉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 서독 구양봉은 그를 한번 홀겨보았다. 황약사는 정중히 말했다. [소제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기문술수(奇門術數)를 가장 좋아하오이다. 이제 한 가지 조그만 장난 같은 것을 칠형에게 보여드리지요.] 그러면서 그는 한 웅큼의 삼각첨(三角簽)을 꺼냈다. 하지만 이 삼각첨은 왕중양이 꺼냈던 죽첨과는 달리 무쇠로 만든 것이었다. 홍칠공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말들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하는 철질려이구료. 약사 형은 그와 같은 물건을 어디서 구했소? 정말 신통력이 대단하구료.] 황약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세모꼴의 철첨(鐵簽) 가운데 다섯 대를 뽑아서 손바닥에 쳐들더니 바깥쪽으로 홱 뿌렸다. 그러자 그 다섯 대의 철첨이 마치 유성이 흐르는 것처럼 곧장 이장 밖으로 날라가더니 눈바닥 위에 착착착 하고 하나씩 꽂혔는데 꽂혀 있는 그 모양이 정확하게 한송이의 다섯잎 모양을 한 매화(梅花)의 꼴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왕중양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갈채를 보냈다. [정말 훌륭한 암기수법이구료!] 황약사는 차례로 다섯 대의 철첨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가는 한웅큼씩 뿌려냈다. 그는 눈한번 깜박이지 않고 발걸음도 옮기지 않았으며 손목도 한번 쳐들지 않았는데 철첨은 손가락에 튕겨서는 마치 시위줄에서 떠나간 화살처럼 곧장 쏘아져 나가는 것이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 눈바닥 위에는 븟처럼 꼿꼿하게 다섯 송이의 매화 모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모두 다 합하면 마흔네 대의 철침이 거무튀튀하게 눈바닥 위에 꽂혀 하얀 적설에서 비추는 빛을 반사하고 있어 무척 보기에 아름다웠다. 가장 훌륭한 것은 바로 한 대 한 대가 정제하게 똑같이 꽂혀 있다는 것이었다. 길거나 짧지도 않은 것이 그야말로 농사꾼이 심는 벼도 이토록 정제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홍칠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속으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 마흔네 대의 철첨을 모조리 완전하게 꽂아 놓은 황약사는 홍칠공에게 입을 열었다. [칠형, 소제의 이 조그만한 이 매화첨(梅花簽)은 보잘것없는 모양으로 펼쳐졌지만 그런대로 미미하나마 형태를 이루고 있으니 우리들은 바로 저 위에서 초식을 겨루도록 합시다.] 말은 그토록 평범하게 했으나 골자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무가에서 무슨 매화춘(梅花椿)이니 청죽장(靑竹張)이니 하는 것들은 대개 대나무로 꽂아서 만들기 때문이었다. 무릇 대나무로 꽂은 것은 다소 탄성(彈性)이 있어서 힘을 빌려서 사용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황약사는 철첨으로 매화진을 꽂아서 만들었으니 이렇게 된다면 또한 사정은 달라지는 것이었다. 철첨은 딱딱한 것이라 절대적으로 탄력이란 있을 수 없었고 또한 요령을 부릴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와 같이 전쟁터에서 말에 대항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철질려는 칼날처럼 예리했다. 거기다가 위에서 초식을 교환하며 무공을 겨루게 되었을 때에는 몸을 가볍게 하고 진기를 돋구는 등 유난히 조심을 해야 했다. 만약에 발아래에다가 조금이라도 힘을 주었다가는 그만 발바닥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다. 홍칠공 역시도 자기 경신법이 자기의 장점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매화철첨진(梅花鐵簽陳)이 결코 자기에게 만만치가 않으리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이와 같은 싸움판을 만들어 놓았으니 그 자신 결코 응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방의 방주는 결연히 말했다. [무척 좋소. 약형, 나는 목숨을 걸고 군자를 상대하도록 하겠소.] 황약사는 몸을 뽑아 올려 흔들 하더니 날렵하게 매화첨 위로 올라섰다. 그는 발로 감위(坎位)에서 이궁으로 한 발을 내디뎌 남쪽 양화(兩火)의 위치를 차지했다. 홍칠공은 어떤가? 그는 몸을 비틀어서는 휙획 하니 두 번 소리를 내면서 잇따라 매화첨이라는 진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가 밟는 것은 진궁(震宮)이었다. 즉 동쪽의 을목(乙木)이라는 위치였다. 그리고 둘은 서로 먼저 하니 하고 양보의 말을 내뱉은 후에 동사와 북개는 바로 매화첨 위에서 공격의 초식을 전개했다. 황약사가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낙영장이었다. 그가 이 장법을 매화첨 위에서 펼쳐 내게 되자 크게 다른 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황약사의 경신법은 오로 가운데서도 일절이라 일컬어지고 있었고 낙영장 또한 허초가 실초보다 많은 장법이라 표홀하고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화철첨진 위에서 전개하자 더더욱 상승의 효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홍칠공의 항룡십팔장은 어떤가? 그의 항룡십팔장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 장법은 평지에서 사용하게 되면 그 위력이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몸을 가볍게 하고 진기를 돋구는 장합(場合)에서 전개하자니 자연히 크게 그 위력이 약화되었다. 한 사람은 위력이 줄어들게 되고 한 사람은 위력이 더 살아나게 되니 서로 반비례를 이루게 된 가운데 두 사람은 매화철첨진 위에서 육칠십초를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홍칠공은 점차적으로 지탱해 내지 못하는 형세를 드러냈다. 그러나 황약사의 낙영장법은 일단 우세를 차지하자 그 되풀이되고 중첩되는 변화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장법은 마치 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며 노니는 듯이 빨랐고 제비가 허공을 누비는 듯 빨랐다. 홍칠공은 항룡십팔장으로 겨우 수비에만 급급했지 반격할 기회를 엿보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그야말로 자유자재로 펼치던 것과는 크게 다른 면이 있었다. 구양봉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는 흐뭇하게 생각했다. (정말 묘하게 됐구나. 황약사가 홍 늙은 거지를 일장으로 후려쳐 매화철첨진 위에서 나뒹굴어지도록 한다면 매화첨이 그의 온몸을 숭숭 뚫어 놓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불구의 몸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한 명의 구음진경을 노리는 강적을 줄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구양봉은 별호가 서독이라 하는 만큼 한평생 남들이 공경에 빠지는 것을 가장 행복해하면서 구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기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적이든 친구이든 그는 심보도 고약할 뿐만 아니라 수단마저도 악랄하게 상대했으며 무자비하게 안면을 바꾸기도 해왔다. 그는 동사와 북개라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워서 한쪽이 지게 되어 자기의 강적이 한 사람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때 흥칠공은 자기의 항룡십팔장이 철첨 위에서 사용할 때에는 크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에 진다고 하더라도 황약사와는 무승부가 되리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남에게 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홍칠공은 대성인도 아니고 유명한 현인도 아니니 어찌 예외가 될 수 있겠는가. 구지신개 홍칠공은 벼락같이 고함소리를 길게 내불며 두 발에 살짝 힘을 주고서 몸을 일장 높이 뽑아 올리더니 갑자기 다른 신법을 펼쳐 냈다. 그의 몸뚱아리는 마치 자색빛의 제비처럼 이리저리 꺾으며 돌고 도는데 마치 제비가 날으는 것 같았다. 그는 그와 같은 신법으로 황약사와 누가 빠른지 시합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단황야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어이쿠, 구지신개께서 어떻게 도화도의 장법을 알고 있지?] 원래 홍칠공의 재간은 연쌍비(燕雙飛)라고 했다. 완전히 제비가 둥지에서 떠나 이리 꺾이고 저리 꺽어지면서 허공을 누비는 모습을 본딴 것으로 삼십육로(三十六路)의 신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만약에 내공이 정순하다면 단숨에 삼십육로를 다 펼쳐낼 수 있었다. 사실 무공이라는 것은 각기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홍칠공과 황약사의 재간을 두고 말할 때 외공(外功)에 있어서의 장법이나 각법에 대한 조예는 황약사가 홍칠공에게 뒤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경신법의 진기를 응용하는 제간은 홍칠공이 황약사보다 못한 것이었다 이 연쌍비 신법을 펼쳐서 만약에 구양봉이나 단황야를 상대한다면 조금이라도 덕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황약사를 상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작은 무당이 큰 무당에 견주는 것과 같았다. 홍칠공이 연쌍비를 막 펼쳐내게 되었을 때에 황약사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그는 장법을 결변시켜 오허일실(五虛一實), 팔허일실(八虛一實)에서 오실일허(五實一虛), 팔실이허(八寶二虛)로 바꾸어 펼쳐 냈다. 일권이나 일장을 내솟을 때마다 지극히 커다란 장풍을 일으키는데 홍칠공의 강룡십팔장과 비슷했다. 홍칠공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때 황약사가 별안간 일장을 들어 옆으로 비스듬히 후려쳤다. 홍칠공은 팔을 들어 맞으려고 들었다. 황약사는 그 순간 손을 꺼꾸로 돌리더니 홍칠공의 손목을 누르면서 손을 빙글 돌리는 동시에 왈칵 밀어젖혔다. 홍칠공 역시 조금 전의 황약사처럼 그만 이장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홍칠공 역시 명성을 떨치는 인물이라 지긴했어도 여전히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즉시 몸을 비틀면서 두둥실 하니 땅위에 내려섰다.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한차례 지고 만 것이었다. 동사와 북개는 각기 한 번씩 이겼기 때문에 판가름하지 못한 무승부로 보아야 했다. 홍칠공은 평소에도 호승심이 강한 편이라 자기가 이번에 진데 대해서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는 소리높여 외쳤다. [황형, 우리 다시 한번 더 겨루어 봅시다. 세 판을 겨루어 두 번을 이기는 사람이 승자로 합시다.] 왕중양은 웃음을 띄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되었소 되었소. 두 분은 누가 못하고 잘하는 것을 분간할 수가 없소. 흥이 남아 있을 때에 그치는 게 좋겠소.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두 번째 시합을 가지도록 합시다.] 두 번째 차례는 단황야와 구양봉의 대결이었다. 서독 구양봉은 구음진경을 차지해야겠다는 욕심에서 왕중양을 제 적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홍칠공과 황약사 그리고 단황야 세 사람은 구양봉의 눈에는 그저 들러리밖에 되지 못했다. 이제 왕중양이 자기와 단황야가 손을 써야 한다는 말을 하자 서독 구양봉은 단황야를 한번 바라보았다. 단황야는 키가 크고 마른 사내였다. 세 가닥의 입을 가리는 수염은 별로 뛰어난 면이 없었고 얼굴 모습도 그렇게 놀라운 바가 못되었다. 구양봉은 그의 몸과 얼굴을 관찰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왕이 호강만 하고 살았으니 무슨 진짜 실력이 있겠는가. 그에게 매서운 맛을 보여 주어 어려움을 알고 스스로 물러서도록 해야겠다) 단황야는 그와는 반대로 깍듯이 예를 차려 구양봉을 향해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봉형, 우리는 어떻게 겨루면 되겠소?] 서독 구양봉은 약간 상대방을 얕잡아 보고 대답했다. [겨루는 방법이 뭐 따로 있겠소. 서로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맨손으로 몇 수를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소.] 단황야는 고개를 끄떡였다. [무척 좋소이다.] 그리고 그는 팔을 벌리고 가슴을 안을 듯이 하면서 한복판에 가서 서서 말했다. [이 단모는 남쪽 오랑캐 땅에서 온 사람이라 견문이 좁으니 노산주께서 가르침을 베플어 주시구료!] 서독 구양봉은 살며시 코웃음을 쳤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재간은 합마공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합마공을 남겨서 왕중양을 상대하게 될 때 사용할 심산이었기 때문에 단황야와 상대할 지금 이 마당에서는 좀처럼 그의 진짜 실력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곧이어 서독 구양봉은 실례한다는 소리를 외치면서 신타 설산장을 펼쳐 명타천리(明駝干里)와 대막낭연(大漠狼烟)이라는 일초를 펼쳐서는 획휙 하고 단황야를 공격했다. 이 신타 설산장은 구양봉과 구양열 형제가 온갖 심혈을 기울여 서로가 인정하고 연구하여 창출해낸 절기였다. 전체 장법은 모두 다 팔십사로가 되었는데 정체가 없어 사면 팔방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타장이 중권무술의 권각과 다른 것은 바로 축심(軸心)이 없다는 것이었다. 축심이라고 하는 것은 남쪽 지방 사람들은 요마(腰馬), 북쪽 지방 사람들은 장보(粧步)라고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태극권을 말한다면 무극(無極)에 포함된 한 가닥의 정기를 이용한 남작미(南雀尾)를 기수식으로 삼게 되었을 때에 태극권의 축심은 바로 오른발 뒷꿈치쪽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 뒷꿈치는 전신의 무게중심으로서 부드러움으로 꿋꿋함을 제압하고 몸을 구부리거나 뒤로 제치는 것을 마음대로하면서 적을 상대할 수가 있었다. 다른 예를 든다면 소림사의 제자들이 궁마보(弓馬步) 혹은 오른발을 똑바로 디디고 왼쪽발을 앞으로 화살처럼 살짝 내밀게 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을 때에 두 다리가 바로 지축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타 설산장은 크게 달라 전신이 모두 다 지축이 되었다. 무가에서 많은 기력을 쏟을 수 없는 부위까지도 설산장은 똑같이 운용할 수 있었다. 구양봉은 처음부터 명타천리를 펼쳐서는 왼쪽 주먹을 한번 흔들 하더니 오른쪽 주먹을 곧장 뻗쳐 내서 상대방의 허리와 허벅지 사이를 내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는 몸을 휙 뒤집으면서 다음 일초인 대막낭연(大漠狼烟)을 펼치게 되었을 때에는 왼쪽 주먹을 오히려 자기 뒷쪽으로 돌렸고 몸을 돌리는 기세를 빌어 느닷없이 적의 뒷통수를 후려치려고 들었다. 이와 같은 타법은 천하의 장법에는 없는 것이기도 했다. 구양봉이 서독이라고 일컬어지는 데는 전문적으로 악독한 장법을 쓰는게 빌미가 되기도 한 것이었다. 단황야는 구양봉이 왼쪽은 주먹으로 오른손은 장법을 구사해서 곧장 공격해 들어오자 옥동진인(玉洞眞人)이 자랑하는 제자인 그로서는 즉시 그 한 수에 실보다 허가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여전히 우뚝 버티고 서서는 거짓으로 받는 척했다. 아니나 다를까, 구양봉은 주먹 바람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벼락같이 주먹을 거두어 들이더니 도리어 등뒤로 돌아가서는 주먹을 뻗쳐서 뒷통수를 치려고 들었다. 단황야는 상대방의 손이 어느쪽으로 펼쳐지는가를 똑똑히 보고서는 악(岳)씨 집안의 탱연수를 펼쳐서는 슬쩍 막아 구양봉의 초식을 해소시켜 버리고 말았다. 구양봉은 단황야가 자기에게 이상 야릇한 장법을 깨뜨리는 것을 보자 속으로는 흠칫 놀랐다. 두 손을 엇갈리도록 휘두르며 잇달아 칠초를 펼쳐 내는데 이 칠초의 이름은 칠성누수(七星漏手)라고 했다. 손가락의 잡는 힘을 이용해서 상대방의 얼굴에 있는 오관이나 혈도 요혈을 질러 공격하는 것이었다. 단황야는 이리저리 비끼고 뛰기도 하면서 잇달아 그의 여섯 번의 초식을 피해 버렸다. 그리고 제 칠초에 이르러 구양봉이 덥석 그의 허리께를 움켜잡으려고 들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와 같이 움켜잡는 힘이 엄청난지라 허벅지의 뼈가 즉시 부러지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단황야는 천생적으로 천품을 타고난지라 태자 때에 금성선왕의 보혈(寶血)을 들이켰기 때문에 한 겹이 거북의 등껍질 같고 고기 비늘 같은 것이 자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독 구양봉이 움켜잡았으나 그에게는 상해가 되지 않았다. 서독 구양봉은 갑자기 자기 손가락이 떨어지는 곳에 마치 한 조각의 철갑(鐵甲)이 둘러쳐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벼락같이 초식을 거두고 몸을 날리며 굴렀다. [잠깐!] 단황야가 대력금강권법(大力金剛拳法)을 펼쳐서 구양봉에게 반격을 시도하려고 했을 때 그가 갑자기 멈추라고 외치자 그만 일순 어리둥절해져서는 무엇 때문에 그러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서독 구양봉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번 시합은 더 겨룰 필요가 없소. 단가는 그의 연갑(軟甲)을 입고 있소.] 홍칠공은 슬며시 웃으며 앞으로 나아가며 외쳐 물었다. [노독물, 그래도 당신이 서역 일파의 종주(宗主)라 할 수 있소? 남과 무공을 겨루게 되었을 때에 상대방이 연갑을 입는지 안 입는지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오? 단황야는 한 나라의 임금이고 공명정대하게 무공을 겨루는 이 자리에 어찌 연갑을 입겠소. 노독물 당신은 하나의 쇠솥을 가지고 와서 뒷등에 둘러메도록 하시오. 이 홍칠이 당신에게 일장을 갈겨 당신이 둘러업고 있는 무쇠로 만들어진 솥이 깨어지지 않는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왕중양은 몰래 고개를 끄떡였다. 무공이 만약에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에는 마치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을 뿐만 아니라 힘을 무쇠 갑옷으로 주입시켜 상대방의 몸을 해칠 수가 있었다. 흥칠공은 개방의 우두머리에 부끄럽지 않았다. 그의 몇 마디 말은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서독 구양봉은 수치가 분노로 변해서는 매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단황야는 왕이니, 당신네들이 물론 아첨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그는 분명히 몸에 연갑을 걸치고 있는데 당신들은 여전히 그를 도와 변명을 하겠다는 것이오?] 단황야는 빙그레 웃고 두손을 허리께로 가져가면서 금빛의 만(卍)자를 쓴 허리띠를 풀더니 금포를 벗고서 말했다. [봉형, 당신은 내가 연갑을 입고 있다고 했는데 당신이 똑똑히 살펴 보도록 하시오.] 그가 금포를 풀자 안에는 그저 한 벌의 초피 가죽으로 만든 옷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그 단비의 가죽을 들추자 하얀 배로 만들어진 배자가 덩그렇게 입혀져 있을 뿐 어느 곳에서도 연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홍칠공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노독물 당신은 똑똑히 보았는가? 단황야의 몸에는 연갑이 없지? 당신의 재간이 남보다 못하다면 일찌감치 화산에서 내려가 서역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지. 이 늙은 거지는 비록 더럽기는 하지만 결코 개방귀같은 소리를 듣기 좋아하지는 않지!] 서독 구양봉은 수치와 분노에 얽혀 흉칙하게 웃음을 지었다. [좋소, 좋아. 내가 잘못 보았소. 이번 무공 시합이 끝나지 않았으니 단황야, 당신은 착실하게 초식을 받아내도록 하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두 손을 뻗어내더니 놀랍게도 합마공을 펼쳐서는 한 줄기 산이라도 무너뜨리고 바다라고 뒤엎을 것 같은 장력으로 맹렬히 단황야의 아랫쪽을 후려쳐 보냈다. 서독의 이 한 수는 무척 음습하고 악랄한 것이었다. 단황야가 옷을 벗게 되었을 때에 느닷없이 합마공으로 부딪쳐 간다면 밝은 곳에서 날아드는 창은 발견하기가 쉬우나 뒤에서 날아드는 화살은 막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느닷없이 가해지는 암산을 어떻게 견디어 낼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 왕중양은 오른손이 빠르고 눈썰미 또한 예리하여 왼손의 두 손가락을 앞으로 쭉 내 뻗으면서 선천공으로 구양봉의 합마공을 슬쩍 막아서머 막는 즉시 절반의 공력을 해소시키고 말았다. 단황야 자신은 그제서야 몸을 날려서는 뒤로 물러나 서독 구양봉의 합마공의 상해에서 피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단황야는 발끈하게 되어 두 눈썹을 곤두세우고는 화를 터뜨리려고 했다. 구양봉은 오히려 두 손을 거두어 들이고서는 깨어진 종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소리내어 웃더니 부르짖었다. [대명이 쟁쟁한 단황야도 별것이 아니군. 남이 중간에서 끼어드는 한 수로 도와주는데에 의지해야 하다니 이것도 일 대 일의 겨룸인가? 흐흐흐... 이 구양봉이 이겼소!] 규칙대로 하면 왕중양은 그와 같이 손을 써서는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가 만약에 선천공으로 구양봉의 합마공을 해소시키지 않는다면 단황야가 반드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었다. 만약에 단황야가 옷을 벗고서 자기의 결백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서독 구양봉 역시 그와 같은 하수를 쓰지 못했으리라. 그런데도 서독 구양봉은 왕중양이 가운데에서 훼방을 놓았으니 억지로 자기가 이긴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이었다. 홍칠공은 첫째로 승복할 수가 없어서 소리 높여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단황야는 갑자기 안색이 변해서는 구양봉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졌소. 그런데 당신은 감히 두 번째로 도전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소?] 서독 구양봉은 상대방이 이겼음을 시인하자 의기양양해져서는 말했다. [어째서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두 번째는 물론이고 세번째도 상대해 드리지. 쓸데없는 잔소리는 그만두고 두 번째는 어떻게 겨룰 것인지 말해 보게.] 단황야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당신의 무쇠로 만들어진 철쟁은 가져왔소?] 구양봉은 속으로 무척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에게 한 자루의 철쟁이 있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알까?) 그는 자기가 십 년 전 운남(雲南)성 망창산(莽蒼山)에서 암산했던 옥동진인이 바로 단황야의 사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때 서독 구양봉은 철쟁에다가 두 마리의 용수철을 이용한 가짜 뱀을 장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짜 뱀은 진짜 독하게 옥동진인을 물어버린 탓에 옥동진인은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단황야는 자기의 사부가 겪은 한번의 경험에서 이미 구양봉이라는 위인을 잘 알고 있었다. 이때 그와 같은 질문에 구양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았소. 나에게는 철쟁이 있소. 당신은 나와 무기로 한번 겨루어 볼 참이오?] 단황야는 빙그레 웃었다. [맞았소. 우리가 첫번째는 손으로 겨루었으니 두 번째는 당연히 무기를 가지고 겨루어야 하지 않겠소.] 구양봉은 산아래로 내려가 자기의 행낭에서 그 철쟁을 꺼내 들었다. 이 철쟁은 길이가 약 넉 자나 되었으며 쟁의 표면을 숱덩이처럼 검게 칠해서 번적번쩍 윤이 나며 매끄러웠다. 반면에 단황야는 옥동진인이 내린 곤오검(昆五劍)을 뽑아서 손에 들고 흔들어 보더니 호통을 쳤다. [봉형, 공격하시오.] 서독 구양봉은 짙은 눈썹을 모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무기에서 덕을 보려고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철쟁을 혼들 하더니 오현교명(五弦文鳴)과 금풍전우(金風戰雨)라는 초식으로 철쟁을 잇달아 튕기듯 하면서 휘두르는데 대뜸 이초를 펼쳐 허실실의 수법이 서로 보완되도록 하면서 맹렬히 단황야의 허리를 후려치려고 들었다. 그러나 단황야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운불검법(雲拂劍法)을 펼쳤다. 이 검법은 모두 다 삼십육 수인데 옥동진인의 부친, 즉 운불(雲拂)에서 변화해 나온 것이었다. 그는 먼저 우희구운(羽姬驅雲)이라는 일초를 펼쳐 검날을 한번 반대로 세웠다가 한번은 둥글게 원을 그리듯 하면서 철쟁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을 후려쳤다.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구양붕의 철쟁이 밀려나가고 말았다. 철쟁을 밀어내는 수법이 너무 수월해서 전혀 기운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서독 구양봉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서독 구양봉은 이초를 한꺼번에 펼쳤으나 빗나가게 되자 잇달아 살수를 펼쳐 냈다. 그는 한 자루의 철쟁을 마구 휘둘렀는데 때로는 바람이 소용돌이치고 구름이 돌고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구 부딪쳐 올 때는 막대기와 같았고 덮어씌울 때는 방패와 같있으며 찌를 때는 검을 대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됐던간에 구양봉은 이 한 자루의 철쟁으로 막대기와 방패, 칼이나 검의 수법을 모조리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판관필로 혈도를 짚는 초식까지 곁들이고 있었다. 때로 공격을 해들어오는 찰나 한 손으로 철쟁의 현을 튕겨서는 딩딩동동 하는 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가락은 처랑하고도 살벌해서 심신을 뒤혼들어 놓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홍칠공과 황약사는 옆에서 그 모앙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서독에게는 원래 이런 한 수가 있었구나. 단황야는 어째서 분명히 이와 같은 살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철쟁을 꺼내서 싸우자고 했는지 모르겠구나. 정말 이상하다.) 당황야는 매우 여유가 있었다. 곤오검으로 앞을 가리고 뒤를 겨냥하면서 싸늘한 광채를 눈보라처럼 뻗쳐 내며 애써 적의 철쟁에 대항했는데 때로는 도법, 검법, 흑은 봉법, 방패의 초식도 아울러 사용했다. 서독 구양봉의 쟁 소리는 결코 그의 이목을 어지럽히지 못했다. 두 사람이 화산 꼭대기에서 풍차처럼 돌아가며 일백여 초를 싸웠으나 승부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날이 점차 어두워지고 화산 꼭대기의 적설은 번쩍번쩍 하고 빛을 반사했다. 구양봉과 단황야는 다시 백여 초를 겨루었다. 서독은 상대방의 검법이, 연신 펼쳐 내는 것이 기껏해야 삼십여 수 밖에 되지 않고 공격보다 수비가 많고 감히 자기와 더불어 승리를 다투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자기보다 공력이 못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와 같은 판단이 서자 서독은 그만 간담이 커지게 되어 궁리했다. (나는 또한 왕중양과 같은 심복대환의 강적과 겨루어야 한다. 쓸데없이 단황야와 길게 싸움을 끌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일찌감치 철쟁 안에 숨겨 놓은 살수를 펼쳐서 그에게 상처를 입힌 후에 일찌감치 왕중양과 더불어 구음진경의 쟁탈전을 벌려야 밤이 길어 꿈이 많아지는 경우를 면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 그는 짙은 눈썹을 성큼 치켜올리면서 즉시 살수를 펼쳐 냈다. 그는 철쟁의 밑을 받쳐 들고 갑자기 위의 철쟁의 머리를 빙글 돌리며 문희조현(文嬉調賢)의 초식을 펼쳐 철쟁을 아래쪽으로 쭉 내려들더니 옆으로 비스듬히 쓸어 쳐 왔다. 마치 일부러 채찍으로 단황야의 하삼로(下三路)를 후려치려는 것 같았다. 단황야는 몸을 솟구쳐 평보청운(平步靑雲)신법을 펼쳐서는 여섯 자 남짓 높이의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가 곤오검과 더불어 한 덩어리가 되어 바깥쪽으로 가볍게 두둥실 하고 떨어져 내려왔다. 서독 구양봉은 이 순간 한 소리 섬뜩한 웃음을 홀리면서 왼팔을 앞으로 뻗어 내며 오른손으로 철쟁을 거꾸로 홱 뿌려냈다. 순간적으로 딩동 하는 소리와 함게 두 마리의 가짜 뱀이 철쟁의 머리쪽으로부터 불쑥 튕겨 나왔다. 뱀의 머리는 쏜살같이 신속하게 곧장 단황야의 허리 뒤쪽을 물어 뜯으려고 들었다. 왕중양은 똑똑히 그 광경을 보고 속으로 그만 섬뜩하며 초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이 선천신공으로 도와줄 수는 없었다. 단황야는 금방이라도 두 마리 뱀의 주둥이에 정통으로 물리고 말 것 같았다. 그 순간 싸늘한 광채가 번쩍하더니 쩡쩡 하는 소리가 두 번이나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커먼 것이 금빛속에서 방사되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쨍그렁 쨍 하면서 땅에 떨어지더니 곧이어 사람의 그림자가 되어 둘로 나뉘어졌다. 단황야는 검을 거두고 떡 버티고 서 있었는데 온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서독 구양봉은 철쟁을 안고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단황야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궁양산주의 무기 속에 다른 장치가 있을 줄은 몰랐구료. 나는 오늘에서야 어쨌든 구경을 하게 된 셈이외다!] 원래 단황야는 사부 의부로부터 구양봉이 철쟁 안에다가 뱀을 숨겨놓는 살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그와 무기로 싸우자고 제의를 해서는 그와 같은 한 수를 쓰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단황야의 곤오검은 결코 그저 수비만 하고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많은 승기를 제압하여 공격을 펼치는 초식들을 거두어들이고서는 서독 구양봉과 겨루어 서독 구양봉이 그만 우쭐해져서는 가짜 뱀을 튕겨 내도록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제서야 검을 번개같이 거두어들였다가 앞으로 뻗쳐 내서는 상대방 뱀머리를 잘라 서독 구양봉이 멎는 꼴을 보이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서독 구양봉은 늙고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지만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그만 얼굴이 시뻘겋게 부풀어오르게 되었고 창피 막심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칠공은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독물, 자네의 그 물건이 망가졌는데도 졌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텐가? 이번에야 말로 당신이 이겼다는 소리는 못하겠지?] 서독 구양봉은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한번 진다고 해서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모두들 역시 무승부로 끝나지 않았던가?] 왕중양은 언제나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으로서 붙임성도 있었다. 구양봉이 서역 일파의 종주(宗主)이기 때문에 너무나 그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게 해서 난처해서 어쩔줄을 모르는 처지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되었소, 되었소. 여러분들은 모두 난형난제라 삼국지의 주유나 제갈량에 견줄 수가 있겠소. 빈도가 요행히 여가를 얻게 되었구료. 자, 다시 한번 더 제비를 뽑아서 무공을 겨루도록 합시다.] 서독 구양봉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왕진인, 제비뽑는 방법은 너무나 불공평하오. 내게 한 가지 방법이 있소.] 홍칠공은 입을 열었다 [뭐가 불공평하오? 노독물 당신이 말해 보시오.] 구양봉은 흥칠공을 바라보았다. [홍 늙은 거지, 당신은 언제나 밥만 먹고 술만 먹어 창자가 곧바로 뚫린 사람이니, 이 전진교주의 신기묘산(神機妙算)과 지모를 어떻게 알 수 있겠소? 그는 산속에 눌러 앉아 호랑이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듯 우리 네 사람이 싸우다가 지쳐서 꼼짝 못하게 되었을 때에 나서서는 우리들을 작살내고 구음진경을 가져가려는 것이오.] 홍칠공은 대뜸 쏘아붙였다. [터무니없는 소리.] 왕중양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봉형,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구양봉은 답했다. [나는 서역에서 온 시골뜨기로 조야한 사람이라 별다른 방도가 있는 것이 아니오.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은 있소.] 그리고 그는 손을 품속으로 넣어 더듬더니 한 닢의 오주전을 내놓았다. 오주전이라는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한(漢)나라 때 주조된 일종의 화폐라고 할 수 있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한문제 때 주조된 것이라고 했다. 청동에 소량의 금을 섞었기 때문에 오주전의 문자가 새겨진 면에는 만약에 사용한 날짜가 오래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금빛을 번쩍번쩍 빛낸다고 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오주전은 얼마 되지 않는데 설사 있다 하더라도 거액을 주고 사야 할 골동품이었다. 구양봉은 두 닢의 오주전을 손바닥에 받쳐들고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자자, 우리 문배(門杯)로 점을 쳐 봅시다.] 문배는 중국 고대의 짓거리였다. 옛날에는 백성들의 지혜가 아직도 미개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여느 사람들은 자기 몸밖의 일에 대해서는 운명에다 맡기고 있었다. 심지어 황제도 물난리나 한발을 겪게 되거나 태풍이나 지진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에는 하느님이 특별히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얘기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황제들은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맑게 하고 회개하여야 했다. 그렇다면 백성은 어떻게 했을까?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혼사를 위시한 크고 작은 잔치는 물론이고 멀리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 출타를 하게 될 때에 문배를 하여 신의 뜻을 받들어 일을 처리했다. 문배는 각처의 풍속이 서로 달랐다. 어떤 곳에서는 신 한 짝을 이용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접시를 이용하되 허공으로 던져서 그 물건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 정면이 되느냐 아니면 이면이 되느냐 하는 것을 보았다. 정면이 되면 승배(勝杯), 반면이 되면 부배(不杯)였다. 잇달아 세 번 던져서 정면과 반면의 수를 비교한 후에 그 일을 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잇달아 아홉 번을 던지는데 세 번으로 나누어 승부를 가리고서는 결정을 했다. 어쨌거나 이것은 운수를 한번 알아보는 짓거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우둔한 사내와 아낙들은 매우 융숭하고도 중대하게 이 일을 치루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을 모셔 놓고 절간으로 가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조상의 위패 앞에서 문배를 하여 결정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서독 구양봉이 그와 같은 말을 하자 홍칠공은 크게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서독 구양봉은 그런 것을 무시하고는 설명했다. [여기에 두 닢의 오주전이 있소. 모두들 차례대로 문배식으로 던집시다. 그리하여 돈의 정면이 나오면 승인 것이고 반면이 나오면 부인 것이오. 그리하여 한 사람마다 세 번을 던지되, 만약에 그 누구든 세 번이나 부를 던지게 되면 나서야 하는 것이오. 그리고 나머지 네 사람이 세 번을 던지되 그 어느 사람이 부가 많고 승배가 적거나 또는 두차례 모두 부배가 나오게 되었을 때에는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는 적수와 겨루어야 한다는 것이오.] 왕중양은 웃었다. [좋은 생각이오. 누가 먼저 던지겠소?] 홍칠공은 서독을 바라보았다. [노독물, 당신이 생각해낸 방법이니 당신이 먼저 던지지!] 서독 구양봉은 그를 한번 홀겨주고는 대답도 하지 않고 오주전을 들더니 말했다. [여러분들은 잘 보시오. 이 돈의 금빛쪽이 정면이고 그 뒷쪽이 반면이오] 그리고는 퍽퍽 하니 소리가 나도록 잇달아 세 번을 던졌다. 이상하게도 그가 잇달아 세 번을 던졌으나 모두 다 승배였고, 금빛 문자가 들어난 면이 하늘쪽을 향하는 것이었다. 홍칠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쳇, 야단났구나. 우리는 노독물의 술수에 말려들었다.) 원래 구양붕의 이 두 오주전은 평소에 손가락 힘을 기르기 위해서 마련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전의 겉모양은 별로 대단치 않았지만 오주전 구멍이 있는 중심의 언저리는 서독의 지력에 부벼져서는 완전히 엷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양붕이 지력을 이용해서 던져내게 될 때에는 물론 세 번 모두 다 승배라는 괘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왕중양 등 세 사람이 어찌 알아채지 못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 무림에서는 일대종사라 일컬어지고 있었고 제각기 제 나름대로의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양봉처럼 그런 교활한 술수를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 네 사람이 차례로 오주전을 던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왕중양과 황약사 두 사람은 모두 두 번은 승배이고 한 번은 부배인데, 단황야는 두 번이 부배이고 한 번이 승배인 반면에 홍칠공은 세 번 다 부배였다. 규칙에 따라 홍칠공은 여러 사람의 테두리에서 빠져나가게 되고 다시 왕중양 황약사 단황야 구양봉 네 사람이 두 번째로 문배를 던지게 되었다. 홍칠공은 갑자기 불쑥 부르짖었다. [잠깐!] 구양봉은 골이 난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잠깐이오? 홍 늙은 거지, 당신은 또 조금 전에 약속한 바를 저버리겠다는 것이 아니오?] 홍칠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노독물, 이 두 오주전은 당신의 것이니 당신이 물건의 주인이라 마땅히 행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저분들 세 사람이 먼저 던지도록 하고 맨 나중에 당신이 던져야 옳은 것이오!] 구양봉은 괴이한 눈망울을 번득이머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 두 닢의 오주전에 이미 수작을 부려 놓았는데 먼저 던지나 뒤에 던지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오주전을 왕중양에게 내밀었다. 왕중양과 황약사, 그리고 단황야는 각기 세 번을 던졌다. 그 결과 왕중양은 이승일부(二勝一負)고 황약사와 단황야는 이부일승(二負一勝)이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좋아하면서 자기가 오주전을 받아서는 여전히 먼젓번의 그 수법을 써서 위를 향해 던졌다. 그는 똑같은 방법으로 썼으니 세 번의 승배가 나올 거라고 자신만만해 했다. 그렇다면 황약사와 단황야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홍칠공과 무공을 겨루어야 하니 자기로서는 편안히 앉아서 어부지리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한데 구양봉이 힘주어 던지자 그 오주전은 일곱 자 여덟 치 정도로 솟아을랐다가는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반면이 땅바닥으로 향해서는 넘어질 것 같았다. 한데 거의 다 땅바닥에 넘어지려는 그 찰나 오주전이 갑자기 비틀 하더니 반면이 위쪽으로 향해지고 정면이 아랫쪽의 땅바닥과 닿아서는 뎅그러니 땅바닥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승배인데 부배로 바뀐 것이었다. 구양봉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급히 눈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왕중양과 황약사, 그리고 단황야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었다. 오직 홍칠공만이 입술에 미소를 띄우고서는 미미하게 냉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독 구양봉은 속으로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그는 홍칠공이 일부러 일을 꾸민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증거를 잡지 못했으니 성질을 누르고 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동전을 두 번째로 공중에다가 던졌다. 서독 구양봉은 이번에야 말로 주의를 기울였다. 오주전이 아래쪽으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 홍칠공의 왼쪽 두 손가락이 미미하게 튕겨지면서 한 알의 조그마한 흙덩이 같은 것이 쏘아져 나왔다. 그 쌀알처럼 조그마한 것은 바로 그의 몸에서 문질러낸 것이었다. 그 흙덩이 같은 것과 오주전이 부딪치게 되자 본래는 승배이던 것이 땅바닥에 몌구르르 구르면서 땅바닥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는 부배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구양봉은 울화가 치밀어 두눈에 불을 켜고 매섭게 소리를 내질렀다. [홍 늙은 거지, 너무 뻔뻔스럽지 않느냐?] 홍칠공이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 늙은 거지는 본래 뻔뻔스럽다오. 하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더 뻔뻔스러운 사람이 있지. 철쟁 안에다가 물건을 감춘 것보다 더 뻔뻔스러운 얼굴이 있겠소?] 구양봉은 노화가 상투 끝까지 솟아올라 다짜고짜 포효하듯 호통소리를 내지르며 홍칠공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홍칠공은 소리내어 웃었다 [무척 좋소. 노독물, 우리 시원스럽게 한번 더 싸워 보지!] 구양봉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신타설산장을 펼쳐서는 천리유사(千里流沙), 삭풍진막(朔風振漠)이라는 이초를 좌우 앙손으로 활을 쏘는 듯한 자세로 펼쳐 내면서 공격해 들어왔다. 그는 또 합마공의 재간까지 곁들여서 단 한 수에 홍칠공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했다. 홍칠공은 여유만만한 모습으로 강룡십팔장법을 펼쳐 비룡재천(飛龍在天)이라는 일식을 펼쳐서는 훌쩍 몸을 솟구쳐서 허공으로 뛰어올라 구양봉이 정면에서 후려쳐 온 장력을 피하더니 냅다 일장을 들어 전용재야(戰龍在野)라는 수법으로 구양봉의 뒤허리께를 때려치려고 들었다. 서독 구양봉은 두손을 둥글게 하면서 몸을 선회시켰다. 그리고는 설용운산(雪擁雲山)이라는 일초를 펼쳐 한번 밀고 한번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면서 놀랍게도 홍칠공의 일장을 맞받았다. 펑펑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려퍼지면서 홍칠공은 가슴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황급히 몸을 비틀어 옆으로 날려 피했다. 서독 구양봉 역시 홍칠공의 장력에 걸리듯 비스듬히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와 같이 강공대 강공으로 맞서서 초식을 정면으로 교환한 결과 여러 사람들은 구양봉과 홍칠공의 외공 조예가 백중지간에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홍칠공의 강룡십팔장법은 언제나 강맹함을 장점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구양봉의 설산신타장법 역시 표홀하고 포착이 어려우며 때로는 지극히 부드러웠다. 이렇게 되자 쌍방은 모두 경솔하게 강공으로 맞부딪칠 생각을 못하고 네가 오면 내가 비키고 네가 물러가면 내가 앞으로 나가는 등 사람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어른거리는 가운데 순식간에 이백여 합을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달은 이미 중천으로 옮겨지고 삼경이 가까운 시각이 되었다. 단황야와 구양봉이 손을 쓰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땅거미가 지려고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질 무렵이었다. 구양봉이 다시 홍칠공을 상대로 겨루게 되었을 때에는 어느덧 어스름 빛이 온누리에 나직히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왕중양은 그들이 이미 이백여 합을 싸우고 아마 다시 더 겨루게 된다면 한쪽에서 상처를 입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화산에서 무공을 겨루는 본뜻과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소리 높여 외쳤다. [더 겨룰 필요 없소. 그만둡시다. 이제 날이 샐 때까지 쉬었다가 내일 다시 겨루도록 합시다.] 구양봉은 그 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재빨리 질풍과 같은 공격을 퍼붓더니 갑자기 꽉하는 괴성을 내지르면서 몸을 웅크리고 두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두 뺨을 불룩하니 부풀어 올리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커다란 두꺼비를 연상시켰다. 홍칠공은 첫눈에 서독 구양봉이 합마공을 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몸을 뽑아 뒤로 물러서며 갈룡십팔장으로 자기 자신의 문호(門戶)를 지켰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서로 바짝 수세만 취할 뿐 서둘러 공격을 하지 못하였다. 왕중양은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그들 두 사람이 무공을 겨루는 것이 어느덧 가짜가 진짜로 변한 듯했고 서로가 자기네 본문 최상승의 무공을 펼쳐서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하니 이게 어디 무공을 겨루어서 친구로 사귀겠다는 애초의 뜻과 부합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대결해서 서 있는 두 사람은 생사가 간일발의 아슬아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왕중양은 바로 이때에 한 가지 방법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불쑥 달려나가 구양봉과 홍칠공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서 똑바로 서며 외쳤다. [흥이 다하기 전에 그만두어야 하오. 두 분은 이미 이백여 합을 교환했으니 한 차례의 대결로는 충분한 것이오. 그러니 역시 다른 분이 다음 차례에 한바탕 겨루어 보도록 합시다.] 구양봉으로서는 왕중양이 갑자기 앞으로 나서서는 자기네 두 사람의 대결을 제지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불현듯 그는 악독한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별안간 '꽉' 하는 소리를 크게 내지르며 합마공의 공격을 잔뜩 돋구고서 두손을 나누어 뻗쳐 냈다. 그야말로 산이라도 밀어내고 바다라도 뒤엎을 것 같은 장풍을 왕중양의 가슴팍으로 와락 밀어보낸 것이었다. 서독은 조금 전에 단황야를 암산하려 한 적이 한번 있었으나 왕중양에게 제지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만약에 광명정대하게 마주보고 있는 상태에서 왕중양에게 목숨을 걸고 덤벼든다 하더라도 좀처럼 이길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철쟁에다가 가짜 뱀을 만들어 놓고 특별히 훈련시킨 사진 등을 펼쳐 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인데 이는 오로지 왕중양을 상대하기 위해서 갖추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화산의 모임에는 매사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진은 홍칠공이 깨뜨려 버렸고 철쟁의 비밀은 단황야가 폭로해 버린 것이었다. 따라서 구양봉은 중양진인에 대해서는 정녕 증오와 더불어 두려움을 잔뜩 느끼고 있던 판이었는데 이번에는 그야말로 한번 손을 써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셈이라, 단번에 적을 거꾸러뜨렸으면 하는 바램에서 벼락같이 손을 쓰게 된 것이었다. 왕중양은 이미 그와 같은 사실을 헤아리고 있었는 듯 구양봉이 합마공을 돋구어서 산이라도 물리치고 바다라도 뒤엎을 것 같은 기경(氣勁)을 뻗어 내 핍박해 오자 갑자기 사부님이 남긴 천강북두진을 떠올리게 되었다. 영기가 떠오르게 되고 황연히 깨닫게 된 그는 두 발을 옮겨 먼저 천선(天璇)의 방위를 밟았다. 그 순간에 구양봉의 장력이 와락 들이닥치자 중양진인은 발걸음을 틀어 옥형(玉衡)의 방위에 가 섰다. 그리고는 암암리에 선천공을 돋구어서는 가볍게 한번 옆으로 끌어당기자 구양봉은 여전히 합마공의 경력을 지닌 채 저쪽으로 곧장 부딪혀 갔다. 이것은 왕중양이 처음으로 천강북두진을 응용한 것이었다. 그가 구양봉의 합마공의 공력을 아주 수월하게 한켠으로 해소시키는 바람에 구양봉은 자세를 가다듬지 못하고 펑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저쪽에 있는 하나의 커다란 암석에 부딪히고 만 것이었다. 그 다음 순간 우르릉, 쾅 하는 소리가 잇달아 크게 울려 퍼지면서 일곱여덟 자 키에 너댓 자 둘레의 커다란 바위가 그만 합마공의 경력에 얻어맞은 나머지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구양봉 자신도 쓴맛을 단단히 보아야 했다. 사람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뚱아리이고 암석은 역시 굳은 물건인지라 구양봉이 바위를 박살내게 되었을 때에 반탄되어 되돌아오는 힘은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구양봉은 가슴팍에서 양쪽 늑골 있는 데까지 충격을 받게 되었고 등줄기가 후끈 달아오르면서 두 눈에 불똥이 튀었다. 하마터면 데구르르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그가 죽으라고 진기를 돋구고 뒤를 향해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는 바람에 데르르 굴러서 떨어지는 액운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왕중양은 소리내어 웃었다. [백타산주, 당신이 그와 같이 커다란 바위를 부딪쳐 박살내었으니 체면은 크게 세운 셈이 아니겠소. 그러니 서로 다투지 말고 잠시 쉬면서 휴식이나 취하도록 합시다.] 구양봉은 그야말로 사지가 뻐근하고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서는 맥없이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누어 방위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모두들 입정(入定)하여 운기조식의 좌공(坐功)에 들어갔다. 다섯 사람의 타좌(打坐)의 자세는 각기 달랐다. 왕중양은 두눈을 내리감고 두손을 무릎 위에 얹고 있었는데, 그것은 삼화지존의 마음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마치 노승이 입적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황약사는 사방을 살펴보면서 입으로 뭐라고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화산의 눈으로 뒤덮인 야밤의 광경을 보고 시홍이 크게 솟구쳐서는 몇 수의 칠절시(七絶詩)를 읊고 있는 것 같았다. 단황야 역시 왕중양과 똑같이 눈씨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코를 가슴쪽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홍칠공은 죽장을 무릎 위에다 가로 놓고는 나직이 가락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눈을 끊임없이 이리저리 돌리고 안색이 수시로 시름에 잠겼다가 노기를 띄었다가 하는 것이 내심의 불안과 번뇌를 나타내고 있었다. 기나긴 밤이 다 가고 동녘 하늘이 뿌옇게 밝아 왔다. 구양봉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늙은 거지, 당신의 기력은 회복되었소? 우리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소. 다시 계속해서 싸웁시다.] 황약사는 입을 다물었다. [두 분의 이번 싸움은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또 무엇을 겨루겠다는 것이오?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소.] 홍칠공은 고개를 들어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약형에게 어떤 고견이라도 있으시오?] 황약사는 대답했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한 사람씩 싯귀를 한번 읊어보도록 합시다. 그 어느 누구든간에 싯귀를 읊지 못하거나 제대로 홀륭하게 읊지 못한 사람이 나서서 대결을 하지요.] 홍칠공은 그 말을 받았다 [약형, 그건 나로서는 상대를 해드릴 수가 없구료. 이 늙은 거지의 뱃속에 든 먹물이 얼마 되지 못해 시사가부(時詞歌賦)에 대해 나는 정말 먹통이란 말이오.] 왕중양은 정중히 입을 열었다. [시사란 학문은 모든 사람들이 다 제대로 익혔다고는 할 수 없소. 그리고 또 어느 누가 홀륭하게 읊었다고, 또 싯귀가 통한다든가 하는데에는 공정하게 평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지 않소? 그러니 차라리 우리 모두 옛이야기를 합시다. 그리하여 누가 재미없이 이야기를 한다면 바로 그 사람들이 무공을 겨루는 것이오.] 홍칠공과 단황야는 좋다고 소리를 질렀고 황약사는 역시 이의를 대지 않았다. 구양봉은 어떤가? 그는 본래 회족의 마적 출신이라 음풍농월(吟風弄月)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판이라 부득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 왕중양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리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했다. [오래 전에 한 명의 노화상이 어느날 자기의 제자인 소사미를 데리고 고을의 저자로 가게 되었소. 그런데 중도에 한 그루 커다란 나무 아래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소사미는 갑자기 땅바닥에 하나의 보따리가 놓여 있고 그 안에 누런 금덩어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소.] 홍칠공은 그 이야기를 받았다. [이 늙은 거지가 봤다면 즉시 손에 들고 저잣거리로 나가서 술과 바꾸어서 밤을 세워가며 퍼 마시겠소.] 왕중양은 웃으며 그 말을 가로챘다. [칠형, 농담은 그만두시오.] 그러고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소사미는 무척이나 기뻐서 노화상에게 말했소. <사부님 우리들은 횡재를 하게 되었군요. 이것이 바로 황금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 즉시 환속을 하게 되었으며 부자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 노화상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호통을 쳤소이다. <터무니없는 소리, 이것은 황금이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독약이다. 믿을 수 없다면 두고 보려므나.> 그리고 그는 소사미를 데리고 나무 뒤로 가 숨었소이다. 잠시 후에 저쪽에서 세 사람이 걸어왔는데 그들은 모두 다 흙일을 하고 나무를 다루는 미쟁이와 목공들이었소이다. 그들은 다 도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성안으로 들어가서 어느 부잣집의 집을 보수해 주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았소. 그런데 갑자기 그들은 땅바닥에 황금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소. 한 명의 목공이 입을 열었소 <우리는 오늘 정말 재신(財神)을 만난 셈이군. 이 한 보따리의 황금만 있으면 다시는 막일을 할 필요가 없겠네. 본 사람에게는 모두 다 몫이 있다고, 우리 세 사람이 모두 다 나누어 가지도록 하세.> 그러자 다른 한 명의 미쟁이가 말했소. <잠깐, 이후 우리들은 다시 가난하게 살 필요가 없어졌네. 그러니 한차례 기쁨을 나누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내가 가진 돈이 좀 있으니 자네가 앞쪽에 있는 고을로 가서 술과 고기를 좀 사서 오게. 모두 배불리 먹고 마시고 난 후에 금을 나누도록 하세. 그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먼저 말을 했던 목공이 즉시 찬성했소. 그리고 그는 돈을 가지고 고을로 들어가게 되었고, 동료들을 남겨 놓아 황금을 지키도록 하였소. 얼마 되지 않아 고을로 들어갔던 목공이 술병을 들고서 돌아왔소. 연닢에 술안주까지 싸서 돌아온 것이었소. <돌아왔소.> 그런데 그 남아서 지키던 두 명의 미쟁이와 목공이 갑자기 서로 약조했던 휘파람을 내불며 나무를 자르는 도끼를 뽑아들고 술을 사온 목공을 내리쳐 죽이고 말았소.] 홍칠공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이쿠, 황금을 두 사람만 나누어 가지겠다는 수작이군!] 왕중양은 그 말을 받았다. [그렇구 말구요. 원래 그 미쟁이와 목공은 한 보따리의 황금을 두 사람이 나눈 것보다 세 사람이 나누면 액수가 적어진다고 생각한 나머지 마음을 모질게 먹고 동료를 죽이고 황금을 나누어 가지자고 약조를 한 것이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을 죽인 후에 싱글벙글하면서 시체를 묻어 주고 핏자국을 닦아낸 후에 두 사람이 죽인 목공이 사온 술과 고기를 퍼마시기 시작했소. 그런데 먹고 마신 지 얼마 되지 못해 그들 두 사람은 갑자기 배가 아픈 것을 느끼게 되었고 온 땅바닥을 데굴데굴 몸을 굴려야 했소. 그렇게 한동안 구르다가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갔소. 원래 그 죽음을 당한 목공의 심보는 더욱더 악독해서 술과 고기를 사오게 되었을 때에 비상이라는 독을 술과 고기에 타서 두 동료를 독살하고 자기 흔자서 황금을 독차지하려고 했던 것이었소!] 홍칠공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악독하군, 한 사람은 반근의 모자람이 없고 다른 사람은 여덟 냥에서 조금도 에누리가 없군. 노독물, 당신의 심보 역시 그 세 명의 미쟁이와 목공과 똑같을 걸?] 구양봉은 홍칠공을 한번 흘겨 주었다. 성이 나서 노려보긴 했지만 감히 무슨 말을 하지는 못했다. 왕중양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순식간에 세 사람은 고스란히 숨을 거두고 말았소. 그 한 보따리의 황금은 여전히 멀쩡하게 길바닥에 놓여 있었소. 노화상은 그제서야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오며 소사미에게 말했소. <제자야, 너는 똑똑히 보았느냐? 저 한 보따리의 황금은 역시 독약이 아니냐?> 그리고 나서 그는 제자를 끌고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갔소.] 중양진인의 이 이야기는 의미심장한 바가 있었다. 그는 구음진경을 한 보따리의 황금에 비유했다. 천하의 무림영웅을 다투고 있는 호걸과 인사들이 백여 년 동안이나 구음진경을 찾아 서로 손에 넣기 위해 죽고 죽이기를 얼마나 했던가! 멀쩡한 사람이 어째서 한 권의 책을 위해서 피를 흘리며 싸워서 죽여야 한다는 말인가? 따라서 그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끝내자 홍칠공과 단황야는 암암리에 칭찬해 마지 않았다. 중양진인은 이야기를 끝낸 후에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빈도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소. 그러니 이제 여러분들이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되었소.] 황약사는 입을 열었다. [왕진인의 비유를 우리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있겠소? 하지만 나에게도 첨예하게 맞서는 이야기가 있소이다. 이 이야기는 본 황조(皇朝)의 재상인 진회(秦檜)와 관계된 것으로...] 홍칠공은 분연히 입을 열었다. [약형, 당신은 장삼(張三) 이야기나 이사(李四)의 이야기는 제쳐 두고 어째서 그 간신 역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오?] 원래 그 당시 휘종과 흠종이 사로잡히고 송나라가 강남으로 천도해 있었다. 그리하여 송고종(高宗)은 임안(臨安:지금의 항주)에서 즉위하여 대륙의 한쪽에서 안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는 여전히 송나라를 그냥 두려고 하지 않았다. 금나라의 사태자인 완안을술(完顔兀術)이 수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서는 건강(建康)을 꺾고 지금의 남경(南京)을 깨뜨리고 무자비하게 고종을 몰아서 바닷속으로 처넣으려고 했다. 다행히도 남송에서는 문무를 겸비한 대 장수가 나타났으니 몇 년 후에 무목이란 시호를 받게 되는 악비였다. 그는 한세충(韓世忠), 류기(劉錡), 장준(張俊), 오개(吳蓋), 오린(吳璘) 등의 장수들과 연합해서 누차에 걸쳐 금나라 장수들을 크게 무찔렀다. 악비가 지용을 겸비하고 귀신같이 용병을 하자 금나라 장수인 올솔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크게 패배당하여 금나라 군사들은 낙화유수처럼 죽었고, 남쪽 송나라는 가까스로 버텨낼 수가 있었다. 악비는 또한 금나라 군사를 추격하여 수 차례에 걸친 싸움에서도 금나라 군사 수십만을 섬멸했다. 거기다가 주선진의 싸움에서 금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금나라의 수도 부근까지 진군했다. 겨우 18리를 남겨놓게 된 거리였다. 그러니까 북송이 경성을 거의 수복하려는 마당이었다. 第 七 章. 이야기 보따리 그런데 뜻밖에도 그 당시 조정의 재상으로 있던 간신 진회가 한사코 화평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송고종은 어땠는가? 그 역시 악비가 송나라의 강산을 모조리 수복하게 된다면 금나라의 수중에 사로잡혀 있는 휘종과 헌종 두 황제를 맞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황제의 자리를 내주게 되어 황제를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그는 진회의 뜻을 받들어, 진회에게 12번이나 군사를 후퇴시키라는 금패(金牌)를 잇달아 내려서 악비를 불러들여 억울한 누명을 씌워 옥살이를 시켰다. 그리고 지용쌍전(智勇雙全)의 악비 장군을 산 채로 풍파정(風波亭)이라는 감옥에서 죽이고 말았다. 그런 후에 비굴하게도 회수(淮水)를 금나라와 송나라의 경계선으로 삼아 편안하게 임안에서 반쪽 중국의 황제 노릇을 했다. 이후 송나라의 백성들은 하나같이 진회를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다. 그리고 진회는 악비를 누명을 씌워 죽인 후 3년도 되지 못해 갑자기 병을 얻어서 죽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그가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효종(孝宗) 황제가 즉위하자 진회가 살아생전에 누렸던 재상과 태사(太師)의 관직을 박탈하고 악비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백성들은 진회와 그의 부인 왕씨 상을 무쇠로 조각해서 악왕의 무덤 앞에 꿇어 앉혀 악왕의 무덤을 찾는 모든 사람이 조각을 채찍으로 치고 침을 뱉으며 욕을 하도록 했다. 당시 어떤 사람은 그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싯귀를 읊었다. [푸른 산에 다행히 충신의 뼈를 묻으니무쇠는 무고한데 간특한 신하로 만들어졌구나.] 또 한 명의 진(秦)씨 성을 가진 선비가 악왕의 무덤을 참배한 이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송나라 왕조 이후에 좀처럼 회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고 나는 무덤 앞에 이르러 진씨 성을 가진 것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여느 백성들은 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사람이 얼싸안은 모양을 만들어 기름솥에 넣어 튀겼는데 이를 유작회(油炸檜)라 불렀다. 즉 지금 북쪽 지방 사람이 유작이라 부르고 남쪽지방 사람이 유작귀(油炸鬼)라고 부르는 음식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사람들이 진회라는 간신에 대해 얼마나 통한스럽게 여겼는지 알 수 있으리라. 따라서 황약사가 진회라는 두 글자를 들먹이자 마자 홍칠공은 큰소리로 말한 것이었다. 황약사는 변명했다. [나는 다만 진회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지 결코 그를 위해서 좋은 말을 하자는 뜻은 없소.]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진회는 천하에서 이름난 간신인 것을 여러분도 다 알고 계실 게요. 그러나 진회 그 자신의 총명함과 재질은 정말로 여느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것이었오.] 황약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진회가 살고 있는 상부(相府)의 후원에 한 그루의 귤나무를 심어 놓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 귤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되었다. 진회는 볼일이 없어 한가할 때에 후원으로 걸어가서 구경을 하던 중 하루는 암암리에 귤나무에 맺혀 있는 귤의 숫자를 헤아려 보고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그가 다시 후원으로 가서 귤을 세어보자 갑자기 나무에 매달렸던 귤들이 20-30개쯤 모자라는 것이 아닌가! 진회는 틀림없이 하인들이 훔쳐 먹은 것을 알았지만 상부에 사람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누가 귤을 훔쳐 먹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회는 역시 총명이 뛰어난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에 떠오르는 계책이 있어 그는 즉시 상부의 모든 하인들을 후원으로 모아 놓고 여러 사람 앞에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이 나무에서 열린 귤은 맛이 없어서 먹을 생각이 없으니 이 한 그루를 남겨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즉시 삽을 가지고 와서 이 한 그루의 나무를 잘라버리도록 해라.] 진회가 그 말을 끝내자 한 명의 하인이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대감님, 이 한 그루의 나무에 열린 귤은 무척 달고 맛있는데 어찌 해서 톱으로 잘라 버리려고 하십니까?] 진회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좋다, 좋아. 나는 귤을 먹은 사람을 이제야 알아냈다. 네가 만약에 귤을 훔쳐 먹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 나무에 달려 있는 귤이 단지 알겠느냐? 네가 그러고도 귤을 훔친 도둑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 사람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별수없이 자기 죄를 묵인한 셈이었다. 황약사는 웃으며 말했다. [이로 미루어 얼마나 진회가 총명합니까?] 홍칠공은 웃었다 [재밌군, 재밌어. 진회 그 녀석은 정말 총명하군. 재주가 없으면 간신도 할 수 없다는 한마디가 역시 맞긴 맞는 모양이군.] 왕중양은 잠자코 있었다. 그는 황약사의 이야기가 분명히 자기를 비유해서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왕중양을 진회로 비유하고 구음진경이 도둑질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째서 굳이 소장하려 하는가 하고 비꼬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진회가 거짓으로 귤나무를 톱으로 자르라고 하인들을 속인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도화도주의 혓바닥은 그야말로 검이나 창날처럼 진정 무섭기 이를 데 없었다 구양봉은 안색이 무겁고 음침해져서는 코웃음을 치더니 나직히 말했다. [개방귀 같은 소리!] 홍칠공은 그의 그 한마디가 바로 황약사를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갑자기 남을 골탕먹이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왕진인과 약형은 모두 다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마땅히 이 늙은 거지 차례인 것 같소. 이 늙은 거지는 역시 거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개 입에서 상아(象牙)가 자랄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더러울지도 모르겠으니 여러분들은 나중에 탓하지 마시오.] 왕중양은 웃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오? 칠형은 이 세상을 조롱하며 살아가는 분이 아니시오. 그 점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고견에 귀를 기울이겠소.] 홍칠공은 말했다. [좋소이다. 내가 이야기를 하지요.] 그는 이야기했다. [관운장은 어느 날 밤에 촛불을 켜 놓고 춘추를 읽고 있었고,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은 바로 관공의 등뒤에 있었는데, 갑자기 관공은 슬그머니 도둑방귀를 뀌고 말았소.] 왕중양 등 네 사람은 우습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홍칠공은 웃음을 참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모두 다 방귀를 뀌어 보았을 것이니까 경험으로 아시겠지만 소리나는 방귀에는 냄새가 나지 않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 방귀는 그야말로 여간 구린 것이 아니라오. 그런데 관공이 그와 같은 소리없는 도둑방귀를 뀌어 놓았으니 한가닥 구린내가 사정없이 관평과 주창의 콧속으로 스며들었겠지요. 그리하여 관평이 큰소리로 욕을 했답니다. <어느 후레자식이 방귀를 뀌었지?>] 홍칠공이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여러 사람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들의 웃음 속에 홍칠공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주창은 더욱더 화가 나서는 관공의 청룡언월도를 들고 슬금슬금 방귀를 뀐 사람을 베겠다고 나갔소. 밖에는 밤에 순찰을 도는 몇 명의 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외다. 그런데 관공은 주창이 밖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에 고개를 돌리고서는 관창을 꾸짖었소. <당돌하구나. 방귀는 너희 애비가 뀐 것이다. 이 애비가 방귀를 뀌었다고 해서 무엇이 대수로운 일이라고 너 이 고약한 녀석은 그렇게 호들갑을 피우느냐?>] 홍칠공의 이 우스개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들 눈물을 찔금거릴 정도로 웃어젖혔다. 오직 구양봉만이 예외였다. 그는 구렛나루가 덮힌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하고 있었다. 원래 그는 홍칠공의 이 이야기가 자기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그는 황약사의 이야기를 개방귀 같은 소리라고 했는데 홍칠공은 구양봉을 황약사의 아들로 비유한 것이니 진정 커다란 고욕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독은 음침한 위인이었다. 그는 오늘 화산에 모여든 4명의 적들이 하나같이 절정의 고수이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와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홍칠공이 자기를 빗대 놓고 조롱하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반박해서 같이 조롱해서 맞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독 구양봉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도 거지를 한바탕 비꼬아 주어야겠구나.) 서독 구양봉은 작정을 하고 즉시 입을 열었다. [왕진인과 황도주, 그리고 홍방주는 이미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이 형제의 차례가 된 것 같구료.] 홍칠공은 대뜸 그 말을 받았다. [노독물, 당신은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시구려. 그 누구도 당신을 막지 않았소. 다만 방귀나 뀌지 마시오.] 모든 사람은 다시 한차례 소리내어 웃었다. 서독 구양봉은 살며시 코웃음치고 이야기했다. [옛날에 한 명의 늙은 거지가 있었는데 오호애재라, 목숨이 끊어져 음조지부(陰曹地府)로 끌려가게 되었소. 그 혼백은 염라대왕을 만나게 되었는데 염라대왕은 경당목을 두드리며 호통을 쳤소. <이봐라, 너의 양수(陽壽)는 아직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이토록 빨리 죽었더냐? 누가 너를 죽인 것이냐? 빨리 대 보아라.> 그러자 그 거지는 대답했지요. <대왕께서는 들으십시오. 소인은 한 명의 관상쟁이 선생에게 해침을 받아 죽게 된 것이오이다!> 염라대왕은 그만 의아한 얼굴이 되어서는 관상가가 어떻게 해서 그를 해꼬지 해서 죽였는가를 물었지요. 그러자 그 거지는 흐느끼면서 대답했지요. <나는 본래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밥은 모자라지 않았고 집안도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었지요. 그런데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일을 하고야 말았답니다. 어느 날 제가 성황묘(城皇廟) 앞에 있는 관상가 장철구(張鐵口)라는 사람에게 관상을 보게 되었는데, 장철구는 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소이다. <축하하오. 당신은 한평생 20만 냥이라는 은자를 소유할 부자이구료. 이승에서는 아무리 먹고 마셔도 모자라지 않겠소이다.> 소인은 장철구의 말을 듣고서는 집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과 같이 앉아서 밥만 먹으면서 20만 냥의 은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소이다. 그런데 몇 년 동안 기다린 결과 집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팔아 먹게 되었으나 20만 냥의 은자가 나간다는 재물은 들어오지 않아 끝내 거지가 되었다가 굶어 죽고 말았답니다.> 염라대왕은 발끈해서 부르짖었소. <원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장철구라는 자가 함부로 사람의 관상을 보아 주어 남을 죽게 하다니, 그런데도 그를 이승에 남겨서 관상을 보도록 해야 한다는 말인가? 거기 누구 없느냐!> 이리하여 저승사자들이 염라대왕 앞에 장철구를 대령시켰소. 염라대왕께서는 발끈해서 노기등등하니 꾸짖었소. <장철구, 너는 스스로 잘 알아맞춘다는 관상쟁이로서 저 사람에게 20만 냥의 재물이 들어온다고 말해서 저 사람을 산 채로 굶어 죽도록 만들었으니 무슨 최를 지었는지 알 것이다. 이 염라대왕은 17층 지옥으로 보낼 것을 선고하는 바이다.> 그러자 장철구는 극구 억울하다고 호소했소. 그 거지는 20만 냥 은자의 커다란 재물을 가질 수 있었으며 믿을 수 없다면 재백성군(財帛星君)을 시켜 조사를 해보면 알 것이라고 아뢰었지요. 염라대왕은 그가 한사코 주장하는 바람에 반신반의하게 되었소. 그는 즉시 저승사자를 재백성군에게 보내 조사를 하게 되었소. 반나절이 지난 후에 저승사자가 돌아와 거지야말로 정말로 20만 냥 은자의 재물이 있다고 아뢰었소. 염라대왕은 공안목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소. <정말로 20만 냥이라는 은자가 있었는가? 재백성군은 어째서 그에게 주지 않았지, 망할 녀석 같으니라구.> 저승사자는 사정을 아뢰었소. <대왕님, 재백성군은 이 사람이 부귀공명을 취하기 위해서 과거에 응시하리라 생각하고 20만 냥의 은자를 문곡성(文曲星)에게 맡겼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놀고 먹느라고 과거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문곡성은 그가 재간을 익혀 무거(武擧)에 응시해서는 변방에서 출세를 하려는가 보다 생각하고 20만 냥의 은자를 무곡성(武曲星)에게 맡겼답니다. 그러나 그는 무거에도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극성은 별도리가 없어 재물을 그에게 주기로 작정하고 별수없이 지장왕(地藏王)에게 맡겼답니다. 지장왕은 20만 냥의 은자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의 땅바닥에다 갈무리를 하고서는 그가 그 묻혀져 있는 재물을 파내기를 바랬다나요. 그런데 뜻밖에도 이 녀석이 한없는 게으름뱅이라, 집안 청소도 하지 않고 매일같이 재물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만 기다렸지만 하늘에서 떨어질 리가 없지 않겠소?. 그래서 산 채로 굶어 죽었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모두들 소리내어 웃었다. 구양봉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염라대왕께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그 거지를 꾸짖었지요. <너는 이승에서 20만 냥의 재물을 지닐 수가 있었다. 그러나 너는 첫째 학문을 익히지 않았고, 둘째 무예를 연마하지 않았으며, 집안 청소도 하지 않으니 어디서 그 재물이 생기겠느냐? 이 대왕께서는 너에게 두 가지의 방도를 제시하겠으니 네 스스로 알아서 선택해라. 첫째는 18층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를 이승으로 다시 보내되 고양이로 변하는 것이다.>] 홍칠공은 소리내어 웃었다. [거지가 고양이가 되다니 재미있군, 재미있어.] 구양봉은 그를 바라보았다. [홍방주는 그 거지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그는 염라대왕에게 말했소이다. <대왕님께 아룁니다. 소인은 차라리 환생해서 고양이가 되겠습니다. 18층 지옥으로 떨어져 고통을 당하기는 싫습니다. 하지만 대왕님께서 저를 고양이로 변하게 해 주실 때 온 몸뚱아리를 칠흙과 같이 검은 고양이로 만들어 주시되 코끝만은 한 뼘쯤 하얀 점으로 남겨 주소서.> 염라대왕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거지에게 어째서 코끝에는 하얀 점과 같은 것이 남겨지는 검은 고양이가 되려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거지는 대답했지요. <대왕님, 고양이는 이승에서 쥐를 잡는 짐승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워낙 게을러서 쥐새끼도 잡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잡지 않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차라리 검은 고양이가 되어서 어두운 곳예 웅크리고 있겠습니다. 저의 코는 하얀 빛이니 쥐새끼는 음식을 탐하다가 틀림없이 제 코끝에 떡 조각이 묻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달려나와 먹으려고 저의 입 앞에까지 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단번에 그 쥐새끼를 깨무는 거지요.> 염라대왕은 거지가 고양이가 되어서도 너무나 게을러서 쥐를 잡으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만 너무나 울화가 치밀어 크게 한소리 부르짖고는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지요. 그때부터 십전(十殿)의 염라대왕 가운데 한 사람이 모자라게 되어 구전(九殿)으로 변했다고 하더구료!] 서독 구양봉의 이야기도 무척 우스꽝스러워 뭇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어야 했다. 홍칠공은 서독이 자기를 비웃는 뜻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관상쟁이 장철구를 왕중양에 비교하고 거지를 자기에게 비유하여 홍칠공이 왕중양 비위를 맞춘 것은 구음진경을 얻고자 하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비꼰 것이었다. 홍칠공은 속으로 욕을 했다. (노독물,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이때 왕중양은 입을 열었다. [구양 산주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으니 이번에는 단황야가 이야기를 할 차례이구료!] 단황야는 대답했다. [내가 이야기 하자는 것도 염라대왕의 이야기오이다!] 홍칠공은 그 말을 받았다. [또 염라대왕 이야기라고? 이번에는 거지를 심문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단황야는 빙그레 웃고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느 날 염라대왕께서는 도깨비를 내보내 세 사람의 혼백을 삼라전(森羅殿)으로 끌고 왔소이다. 이 세 사람은 이남 일녀인데 두 남자 가운데 한 명은 살아생전에 병을 고치는 떠돌이 의원이었고, 다른 한 명은 월장을 하는 좀도둑이었으며, 그 여인네는 살아생전에 기녀였지요! 염라대왕께서는 먼저 그 기녀를 심문하여 물었소이다. <너는 살아생전에 무엇을 했는고?> 그 기녀는 대답을 했지요. <대왕님께 아룁니다. 소녀는 살아생전에 문 앞에 서서는 홀로 가는 남자 손님이 잠잘 곳이 없으면 우리집으로 모셔서 잠을 재워주었습니다.> 염라대왕은 크게 칭찬을 했지요. <무척 훌륭하군. 너는 살아생전에 널리 착한 일을 했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인간세상의 부귀를 마음껏 누리도록 해주마!> 그리고는 도깨비에게 기녀의 혼백을 데리고 가서 윤회하도록 했다는군요. 그리고 나서 염라대왕은 그 좀도둑에게 물었지요. <너는 살아생전에 무슨 일을 했는고?> 그 좀도둑은 매우 교활해서 눈살을 살짝 찌푸리는 순간에 좋은 생각이 떠올라 대답을 했지요. <대왕님 저는 매일밤 남의 집의 지붕 위에 올라가 그 어느 집에서 옷을 말린답시고 널어 놓았다가 거두는 것을 깜빡 잊은 사람들을 위해서 옷가지를 갈무리했었지요.> 염라대왕은 다시 그에게 칭찬의 말을 했소. <무척 훌륭하구나. 너 역시 살아생전에 착한 일을 했으니 다음에는 부자로 태어나도록 해주마.>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도깨비에게 좀도둑의 혼백을 데리고 가서는 환생토록 조치했소. 그리고 나서 끝으로 염라대왕은 그 의원에게 물었소. <자네는 살아생전에 무엇을 했는고?> 그 의원은 대답을 했지요. <대왕님, 소인은 살아생전에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습니다. 그 누가 병이 들어 다 죽어가려고 한다면 소인이 그를 도와 주었습니다.>] 단황야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러분들은 염라대왕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소이까?] 홍칠공은 대답했다. [기녀는 공주로 태어나게 하고 좀도둑은 부자로 태어나게 했으니 의원은 물론 대정승이나 대장군이 되도록 해주었겠지요.] 단황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요. 염라대왕께서는 이 의원의 말을 듣고는 발끈해서 욕을 했지요. <어처구니가 없구나. 원래 내가 내보낸 저승 사자들이 이승의 혼백을 데리고 오는 횟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구나. 알고 보니 네 녀석이 죽은 사람을 모조리 치료해 놓았군. 그렇게 된다면 저승의 귀신들은 매일같이 줄어들게 되고 이승의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많아지게 되어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죄 아주 크구나. 이 녀석을 17층 지옥으로 내려보내 영원히 환생하지 못하도록 하여라.>] 단황야가 그 이야기를 하고 나자 구양봉을 포함해서 네 사람이 모두 다 껄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도깨비는 염라대왕의 판결을 듣자 다짜고짜 의원을 끌어다가는 17층 지옥으로 내려보냈지요. 그곳은 음흉한 바람이 슬슬 불고 있었지요. 의원은 너무나 상심이 되어 울음을 터뜨렸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18층 지옥에서 어느 귀신이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는 소리를 듣게 되자 의원은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다는군요. 자기가 17층 지옥에서 이미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데 어느 귀신이 18층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가 살아 생전에 이승에서 무슨 죄를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그 의원은 즉시 아랫층 지옥을 향해 부르짖었지요. <친구, 당신은 살아생전에 무슨 짓을 했길래 18층 지옥으로 떨어졌소?> 그 귀신은 신음하면서 대답했답니다. <아! 나는 살아생전에 글을 가르쳤소이다. 죽은 후에 염라대왕께서는 내가 세상에서 아무런 공도 없고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 나를 짐승으로 환생토록 하겠다고 하시길래 나는 암캐로 환생하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답니다.>] 왕중양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연신 웃음 지으며 물었다. [하하하, 이상하구료. 그 서생이 왜 다른 짐숭은 마다하고 굳이 암캐가 된다고 하였소?] 단황야는 대답했다. [그래서 그 의원 귀신도 무척 의아하게 생각하여 그 서생 귀신에게 물었지요. <친구, 당신은 어째서 암캐로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오? 암캐가 된다면 뭐가 좋은 점이 있소?> 그러자 그 서생인 귀신은 대답했지요. <어찌하여 좋은 점이 없소? 공부자 서생은 논어에서 재물이 생기게 된다면 암캐가 얻게 되고,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되서는 암캐가 면할 수 있다(臨財母苟得,臨難母苟免)라고 하지 않았느냔 말이오? 생각해 보시오. 암캐가 된다면 재물도 얻고 난을 피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좋소? 그런데 염라대왕께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공안을 두드리며 크게 욕을 했소. 내가 논어를 곡해하였다고 해서 나를 18층 지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오.>] 그가 그 이야기를 끝내자 구양봉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포복절도했다. 왜냐하면 서생은 논어 안의 임재모구득(臨財母苟得), 임난모구면(臨難母苟免)이라는 두 마디의 가운데 글자를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풀이에 있어서 천지의 차이가 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왕중양과 황약사 홍칠공 등 세 사람은 글공부를 한 사람들이라 포복절도를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서역에서 자라, 논어가 어떤 물건인지를 몰라 그저 망연히 남들이 웃는 모앙을 지켜 보다가 소리높여 외쳤다. [우리 다섯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 다 끝났소. 어느 사람의 이야기가 재미없는지 그 사람이 나서서 무공을 겨루도록 하십시다.] 홍칠공은 입을 열었다. [황도주의 이야기가 좋지 않소. 약형, 당신은 간신 진회를 크게 부풀려서 이야기를 했으니 마땅히 당신이 나서서 무공을 겨루어야 할 것이고, 노독물의 이야기는 너무나 황당하니 마땅히 황도주와 무공을 겨루어야 될 것으로 보오.] 구양봉은 대노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나의 이야기가 그토록 재미있었는데 어찌해서 나보고 이 한차례의 시합에 나서라고 하는 거요?] 두 사람은 다시 언쟁을 벌이려고 했다. 단황야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더 언쟁을 벌일 것 없소. 내가 황도주의 고명한 일초를 한 번 받아 보겠소.] 구양봉은 그제서야 노기를 가라앉혔다. 단황야는 황약사에게 포권했다. [황도주, 조금 전의 장법은 정묘하기 이를 데 없더구료. 이 몸은 비록 재주가 없으나 한번 가르침을 받아 볼까 하오이다!] 원래 단황야는 황약사의 장법이 허초가 실초보다 많으면서 변화가 복잡다단하여 구양봉의 설산신타장법에 비해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모자라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었다. 단황야는 무척 무공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장법을 인정하고 싶었고 자기가 이후 무공을 연마하는데 거울을 삼고 싶어서 황약사와 무공을 겨루자고 한 것이었다. 황약사는 단황야가 조금 전에 구양봉과 무공을 겨루게 되었을 때에 권법에 어떤 독특하게 뛰어난 점이 없던 것을 보았던 관계로 이번에는 자기가 틀림없이 이기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호통 소리를 내질렀다. [실례하오!] 그리고 두 소맷자락을 흔들며 손을 홱 뒤집어서는 눈깜짝할 사이에 잇따라 칠초를 펼쳐 냈는데 초식이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황야는 상대방이 대뜸 괴이한 초식을 써오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관계로 몸을 이리저리 날려서 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철썩철썩 하는 소리가 네 번이나 일었다. 단황야는 앞가슴과 뒷덜미에 잇따라 황약사의 사장을 얻어맞은 것이었다. 홍칠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황야는 역시 황야로구나. 그의 장법은 되어먹지 못해 이번 무공의 겨룸에서는 틀림없이 지고 말겠군!) 한데 단황야는 사장을 얻어맞고도 태연자약했으며 되려 왈칵 금강권법(金剛拳法) 가운데 추운발무(推云拔霧)라는 일초를 펼쳐서는 획 하니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맹렬히 황약사의 가슴팍으로 주먹을 왈칵 뻗어내는 것이 아닌가? 황약사는 예상하지 못한 단황야의 반격에 흠칫하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 그가 단황야를 사장이나 때렸던 것이고 그리고 그 힘은 가법지 않아 단황야가 설사 횡련공부(橫練功夫)를 했다 하더라도 상처를 조금 입게 되는 것은 면할 수 없으리라고 내다 보았던 것인데, 자기의 장력이 이르는 곳에 그의 몸뚱아리를 맞추기는 했으나 마치 모루를 후려친 듯이 손가락이 오히려 무척 아파 오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그는 구양봉이 그가 연갑을 입었으리라고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황야의 그와 같은 주먹질이 뻗어나는 것을 본 황약사는 소맷자락을 흔들며 막았다. `펑'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면서 마치 천근이나 되는 철추에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왔다. 만약에 도화도주가 공력이 심후하지 않았다면 그 한 대의 주먹에 이미 곤두박질치게 되었으리라! 이렇게 되자 가슴 가득히 적을 얕보던 생각을 깨끗이 씻어 냈다. 즉시 낙영장법을 펼쳐 칠허일실(七虛一實), 오허일실(五虛一實)의 수법을 써서는 푸른 그림자를 어지럽게 어른거리는 가운데 전후좌우에서 마치 분분히 떨어지는 꽃비처럼 상대방을 가운데 두고 돌아갔다. 여러 사람들이 얼핏 보기에는 마치 십여 명의 황약사가 단황야를 빈틈없이 에워싸고서는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황야는 조금도 서두르거나 당황하지 않고 금강권을 펼쳐 냈다. 권풍이 무겁고 맹렬하고 휙휙 하는 소리가 잇따라 일었는데 그 모양은 커다란 도끼로 산을 뚫는 것 같았고 철추로 바다를 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장풍이 이르는 곳에 흙모래와 눈송이들이 분분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정녕 황약사의 표홀하여 예측할 수 없는 낙영장법을 충분히 맞서고도 여유가 있었다. 홍칠공은 옆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속으로 찬기운을 들이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의 항룡십팔장은 위맹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단황야의 금강권과 비교해 볼 때는 이미 삼푼 정도는 양보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단황야의 재간이 억센 데 대해 이를 여러 사람들은 모두 다 뜻밖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백여 합을 교환하게 되었을 때에 황약사는 갑자기 두 번 후려치는 시늉을 하더니 테두리에서 밖으로 뛰어나가서는 부르짖었다. [잠깐.] 단황야는 권초를 거둬들이고는 웃었다. [황도주, 우리의 이번 무공 대결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는데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소?] 황약사는 대답했다. [나와 당신의 주먹은 강유상생(剛柔相生)하며 일정일극(一正一剋)하므로 다시 오백여 합을 싸운다 하더라도 승부를 낼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겨루는 것이 어떻겠소?] 단황야는 그가 다시 홍칠공을 상대로 하게 되었을 때처럼 무슨 칠성장이니 하는 따위를 펼치려고 하는가 보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황도주께서는 또 진을 펼칠 작정인가요? 좋도록 하시구료.] 황약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을 펼친다는 것은 너무나 속돼 보이는 것 같구료. 우리는 아예 세 번의 채찍질과 두 번의 망치질로 바꾼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세 대의 주먹을 허락하고 당신이 나에게 세 대의 주먹을 허락하는 식으로 서로 세 번씩 교대로 치는 것이 어떻겠소?] 단황야는 소리내어 웃었다. [무척 좋소. 그렇다면 누가 먼저 칠 것인지 말씀을 해 보시지요!] 황약사는 대답했다. [이 방법은 이 형제가 생각해 낸 것이니 물론 내가 먼저 얻어 맞아야지요. 자, 치시구료.]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발끝으로 눈바닥 위에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자기는 그 원 한복판에 서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귀하가 나를 한 대의 주먹으로 이 테두리 밖으로 물러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즉시 화산에서 떠나 도화도로 돌아가겠으며 다시는 무공을 논하지 않겠소.] 단황야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자기의 금강권은 맹렬하기 이를 데 없으며 대리의 황궁에서 주먹의 힘을 연습해 보기 위해 손을 들어 한주먹으로 태호석(太湖石)으로 만들어진 사람키 크기의 바위를 박살낸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띠라서 그는 황약사의 재간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역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뚱아리인데 자기가 한 대의 주먹을 내지르게 된다면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약사가 이와 같이 분명히 밝히고서 도전을 해오는데 그 자신은 또 황약사를 때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겨우 말했다. [황도주, 황도주가 반드시 땅에 줄을 그어 감옥처럼 만들겠다고 고집한다면 소제로서도 부득이 실례해야 하겠구료!] 황약사는 냉소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의 주먹을 견뎌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시오? 얼마든지 시험을 해 보구료!] 단황야는 좋다고 한마디를 내뱉고는 왼팔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칠성의 기경(氣功)을 돋구고 팔굽을 쳐들면서 손으로 주먹을 쥐고는 황약사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내지르려고 했다. 이는 그가 사정을 봐주는 너그러운 성품을 보여 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전력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황약사가 중상을 입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고, 어깻죽지를 때리는 것도 더더욱 적당한 데서 멈추어 손에 사정을 둘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데 그외 주먹이 상대방 어깻죽지에 가 닿게 됐을 때에 일찌기 느끼지 못했던 반응이 왔다. 원래 단황야의 한 대 주먹이 황약사 어깻죽지에 적통되는 순간 갑자기 황약사의 몸뚱아리가 미미하게 떨리면서 자기의 주먹은 하나의 탄력이 있는 물건을 때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또한 상대방의 몸뚱아리에는 마치 기름칠을 해 놓은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다. 따라서 단황야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해소되어 하마터면 탈골이 될 뻔했다. 다행히 그는 전력을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에 아차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주먹의 힘을 거두어 들인 것이었다. 황약사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좋았소. 한 대를 친 것이오!] 구양봉과 홍칠공은 단황야가 분명히 한 대의 주먹을 내질러 황약사의 몸뚱아리를 적중시키는데도 어떻게 된 노릇인지 힘을 다 기울이지 않고 느닷없이 주먹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보고는 크게 의혹을 느꼈다. 오직 왕중양만이 그 가운데 오묘한 점을 깨닫고 속으로 생각했다. (황가는 정말 마음쓰는 것이 영민하면서도 교묘하고 무공은 갖은 재간을 다 피우는구나. 무당파의 첨의십팔질(沾衣十八跌)과 기문(奇門)의 무공을 함께 응용했으니 단지흥이 그의 술수에 말려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로구나) 단황야는 한대의 주먹이 빗나가게 되자 이제는 조금도 소홀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사정을 두지 않고 반걸음 앞으로 내디디면서 오른 주먹을 앞으로 뻗쳐내며 구성의 공력을 돋구고서는 황약사의 가슴팍을 향해 힘껏 내질렀다. 그 순간 우두둑 우두둑 하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이것은 뼈에서 나는 소리였다. 홍칠공은 한마디를 재빨리 내뱉었다. [야단났군. 이번에는 늑골이 부러졌겠는 걸!]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단황야의 주먹이 황약사의 가슴팍을 내지르게 되었을 때에 후닥닥 그의 가슴이 안쪽으로 움츠러들었다. 원래 황약사는 가슴팍의 뼈를 모조리 움츠린 것이었다. 사실 무공을 익힌 사람이 주먹으로 사람을 때리게 되었을 때에 살에 상처를 입는 것보다 뼈를 상하게 하는 것이 더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었다. 가죽과 살에 상처를 입은 것은 그저 몸뚱아리 바깥쪽의 곧 아물 수 있는 상처라고 할 수 있겠으나 뼈마디가 뿌러지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가볍다고 하더라도 내장에 압박을 가해 상처를 입히게 되어 심하면 생명도 위태롭게 되는 것이었다. 황약사가 뼈를 안으로 거두어들이게 되자 단황야의 한 대 주먹은 마치 하나의 속이 빈 구멍안으로 질러넣은 듯하여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단황야의 성격은 본래 충후했으나 자기의 주먹이 제대로 상대방의 몸을 맞추지 못한 것을 보고 그만 마음이 바쁘게 되어 냅다 한 대의 주먹으로 금강벽산(金剛劈山)이라는 일초를 펼쳐서 황약사의 머리통을 노리고 주먹을 뻗쳤다. 황약사가 머리를 옆으로 숙이게 되자 단황야의 주먹은 그만 그의 어깻죽지를 다시 치게 되었고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골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따라서 단황야의 주먹은 되려 상대방의 팔을 따라 곧장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이 아닌가? 황약사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서 길게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제는 되었소. 당신은 세 대의 주먹을 내질렀으니 이번에는 내가 해답을 할 차례이요!] 단황야는 황약사의 그 세 대 주먹을 좀처럼 막아내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자기가 이미 상대방에게 세 대의 주먹을 내지른 이상 상대방이 세 대의 주먹질을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지라 부득이 똑바로 섰다. 황약사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퍽 하고 단황야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이 일장에 대해서 단황야의 몸에는 비늘이 있어 막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어찌 되었든간에 견디어 낼 수가 있었다. 황약사는 다시 일초를 펼쳐 냈는데 낙영장의 화심탐예(花心探蘂)라는 절초를 펼쳐 다섯 손가락을 망치처럼 만들어서는 퍽 하고 단황야의 늑골 아래쪽에 있는 태을혈(太乙穴)을 적중시켰다. 단황야의 몸뚱아리는 그 자리에서 흔들했다. 그는 과거 산 채로 선왕의 단혈을 마셨기 때문에 온몸에서는 비늘이 돋아나게 되었지만 비늘 조각의 두텁고 엷음이 각기 달랐다. 앞가슴쪽과 뒷등에 있는 비늘 조각은 비교적 두터운 편이나 양쪽 늑골 아래의 비늘은 비교적 엷은 편이었다. 황약사가 손가락을 구부려서 망치처럼 만든 것은 바로 투골타혈법(透骨打穴法)을 펼치자는 것이라 비늘이 막을 수도 없었고 또한 별 효용도 없었다. 다행히 단황야는 무척 눈치가 빠르고 영민한 사람이라 즉시 운기하여 요혈을 지켰기 때문에 상대방의 술수에 말려들지 않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어찌 되었든간에 황약사의 두 대 주먹을 맞은 셈이 되었다. 황약사는 호통소리를 내질렀다. [아직도 한 대가 남았소!] 그리고 손을 들더니 단황야의 얼굴을 노리고 손을 뻗쳐 왔다. 이 일장이 뻗쳐 오는 기세는 무척 표홀했다. 그리하여 단황야는 상대방이 자기의 오관에 상해를 입히게 될까 봐 즉시 머리를 흔들었다. 한데 황약사는 되려 손등으로 그의 태양혈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손등이 단황야의 관자놀이를 후려침에 따라 하늘이 통하는 재간이 있다 하더라도 더 견뎌낼 수 없게 된 단황야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한쪽으로 넘어지려고 했다. 만약에 그가 땅바닥에 넘어져서 쓰러지게 된다면 남제(南帝)의 영명은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단황야는 허리를 뻗대면서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 몸을 벌떡 세우고서는 그 자리에 우뚝 버티고 서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그의 체질이 천품을 타고난 덕을 본 셈이었다. 단황야는 영약을 먹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몸뚱아리에는 일종의 잠재력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후닥닥 몸을 일으켜 세웠던 것이었다. 태양혈을 얻어 맞기는 했으나 결코 정신을 잃고서 쓰러지는 일 없이 되려 벌떡 몸을 일으켰던 것인데 이에 황약사에게는 뜻밖의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도화도주는 단황야가 그 기세를 빌어 공격을 가해 올까봐 즉시 바깥쪽으로 몸을 날렸다. 단황야는 큰소리를 내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황도주, 이번에는 내가 졌소이다!] 왕중양은 황급히 앞으로 나아가며 입을 열었다. [아니오. 두 분은 모두 싸워 이겼으며 결코 지지 않았소. 하하하!] 그가 적절한 말로 쌍방의 긴장을 풀어 주는 바람에 양쪽은 서로 겸연쩍어 하는 국면에서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다. 이때 구양봉이 그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걸어나오더니 입을 열었다. [황도주, 이번에는 내가 당신의 낙영장법을 가르침받도록 하겠소.] 이번에 그는 상대방이 지쳐 있는 틈을 타서 공격을 하려는 심산이었다. 서독 구양봉은 황약사와 단황야가 백여 초를 싸워 진원지기가 적지 않게 소모되었고 자기는 막 정신을 충분히 기르고 기운을 되찾았으니 만약에 이때에 황약사와 손을 쓰게 되고 그와 더불어 지구전을 펼쳐 백수십여 합을 교환하게 되었을 때에 느닷없이 합마공을 펼치게 된다면 틀림없이 황약사를 사기 손아래의 패장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내다본 것이었다. 황약사가 미처 뭐라고 대답을 하기 전에 홍칠공은 어느덧 소리높여 부르짖었다. [안돼, 노독물은 차륜전(車輪戰)을 벌이려고 하는군.] 구양봉은 성이 나서 외쳤다. [뭐가 차륜전인가? 늙은 거지, 당신이 기력을 회복했다면 우리 오백여 합을 한번 겨뤄 보는 것이 어떠시오?] 황약사는 입을 열었다. [칠형, 구양산주는 나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데 이 형제가 상대를 해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소? 그리고 봉형, 조금 전에 철쟁을 사용하는데 아마도 가락에 틀림없이 고심한 조예를 쌓은 모양이더구료.] 구양봉은 웃었다. [아니오이다. 소제는 서쪽의 벽지에서 온 거친 사람인데 무슨 가락의 조예를 쌓았겠소. 다만 수박 겉핥기로 좀 알 뿐이라오. 황도주께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구료.] 황약사는 제의했다. [그렇다면 이 형제는 당돌하나마 봉형이 철쟁을 꺼내서는 한 곡의 동파철판(銅琶鐵板)에 대강동거(大江東去)를 튕겨서 이 형제의 눈과 귀를 뚫어 주었으면 고맙겠구료.] 구양봉은 되물었다. [나보고 철쟁을 튕겨보라는 것이요? 그런데 한 가지 무척 불편한 점이 있소.] 황약사는 그를 바라보았다. [말을 해 보시요.] 구양봉은 손을 들어 산 뒤쪽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나의 사진(蛇陳)은 모두 다 저곳에 있소. 만약에 내가 철쟁을 튕기게 된다면 그놈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것이오. 따라서 여러분들을 놀라게 한다면 오히려 불미스럽지 않겠소?] 홍칠공은 웃으면서 비난했다. [노독물은 또 흰소리를 치는군. 몇 마리의 지렁이 같은 길다란 벌레로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하는 수작이라니, 이 늙은 거지의 뜻은 역시 아랫사람들을 시켜 그놈들을 모조리 서역으로 데려가도록 조처하는 게 좋겠소. 늙은 거지 수하에는 큰 거지고 중간 거지고 작은 거지고, 모두 다 뱀을 잡는데는 능수란 말이외다.] 구양봉은 발끈해졌다. [좋소. 그렇다면 그 뱀들을 당신이 얼마든지 잡아 보도록 하시오.] 황약사는 말렸다. [두 분은 또 언쟁을 벌이는 구료. 봉형이 철쟁으로 뱀을 몰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형제는 마음속으로 그 광경을 한번 보고 싶어하던 참이었소. 그러니 사양 마시고 한 곡조 뜯어 보시오.] 구양봉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만약에 모든 뱀을 몰아서 이쪽으로 끌고 온다면 너는 살아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독은 황약사가 뱀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서는 콧속으로 싸늘히 코웃음을 치고 즉시 철쟁을 꺼내서는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아서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살짝 폈다가는 띵 띵똥 띵똥 하면서 튕기기 시작했다. 철쟁은 진쟁(秦箏)이라고도 하며 그 소리가 맑고 우렁찬 것이 무척 격앙한 데가 있었다. 구양봉은 한 자루의 철쟁에 대해서 이미 이십여 년이라는 세월을 두고서 다뤄 온 경험이 있었다. 그가 튕기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말을 모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강적이 변경쪽으로 몰려들게 되고 천군만마가 나서서 대치를 하게 되며 쌍방에서 진을 동그랗게 치고 얽혀 마구 싸우게 되는데 마치 악비가 우두산(牛頭山)에서 크게 싸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양흥옥(梁紅玉)이 북을 쳐서 지혜로 황천탕(黃天蕩)을 상대로 싸우는 마당에 금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러 적진을 격파하고 적의 원수 목을 베어 오랑캐를 쫓아내고 조국의 산하를 되찾는 것 같기도 했다. 주위의 몇 사람은 모두 다 뜨거운 피를 끓게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그와 같은 가락을 듣고서는 정서적으로 격양하게 되었고 뜨거운 피가 불꽃처럼 끓어올라 마치 화산 아래쪽이 바로 하나의 커다란 전쟁터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따라서 모두들 당장에 미친 듯이 아래로 달려가 고함을 지르며 싸움을 거들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황약사는 구양봉의 쟁소리에 무한한 살기가 서려 있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다. 구양봉의 쟁소리는 점점 갈수록 울려 퍼졌고 또 점점 갈수록 높다랗고도 우렁차게 울려 퍼져 자기의 심장마저 쟁소리를 따라 재빠르게 약동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도화도주는 그와 같은 생각에 미치게 되자 흠칫 놀라서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노독물은 정말 악독하구나. 그는 이 한 곡의 대강동거로 나를 죽음으로 몰아 넣으려고 하는구나.) 황약사는 적의 심사를 알아차리게 되자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느끼고 손을 소맷자락 속으로 집어 넣더니 한 자루의 옥소를 꺼내서는 입으로 가져가 맑고도 가느다란 가락을 불어 내서는 구양봉이 튕겨 내는 철쟁의 가락에 대항했다. 서독의 쟁소리는 눈이 내린 차가운 밤중에 처량하고 쓸쓸하기 이를데 없어 그의 쟁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이 저 서북쪽의 변경지대에 가 있는 듯했고, 눈 앞에는 만리나 되는 누런 모랫바닥이 펼쳐져 있으며 하늘은 침침하기만 한데다가 강풍이 마구 몰아치고 있어 사람과 말들이 울부짖는 듯했다. 황약사의 옥소 소리는 어떠했을까? 전혀 상반된 가락을 불어내고 있었다. 맑고도 그윽한 가락은 조금도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삼월의 봄날을 맞이한 것 같았다. 백화는 일제히 흐드러지게 피고 귀여운 새들은 다투어 노래 자랑을 하는 가운데 해맑은 재자(才子)와 연뿌리처럼 살결이 고운 미녀는 다정스럽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을 잡은 채 푸르고 싱그러운 버드나무 아래에서 거닐고 있고 꽃나무 그늘 사이에서 한껏 아름다운 광경을 더불어 구경하며 즐거운 심사를 논하는 등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듯했다. 퉁소 소리와 쟁 소리는 마치 남원북철(南轅北轍)처럼 전혀 다르다고 할 수가 있었다. 홍칠공은 고개를 돌리고 왕중양에게 웃어 보였다. [왕진인, 저들 두 사람은 한창 자기네들의 절기를 뽐내며 다투고 있구료.] 왕중양은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황야외 귀에는 갑자기 화산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바람에 물결이 소리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화산은 바다가 아닌데 어째서 조수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그는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다. 왕중양은 갑자기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두 분은 조심하시오. 구양산주의 사진이 들이닥쳤소.] 홍칠공은 즉시 긴장해서는 배낭안으로 손을 집어 넣더니 뱀약을 꺼내서는 사기의 두 손에 발라 만일에 대비했다. 왕중양은 입을 열었다. [칠형, 백타산의 사진은 무척 무섭소. 아마도 삼사만 마리는 될 것이니 그 뱀약은 반드시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소.] 홍칠공은 말했다. [제미랄. 효과가 있듯 없건 간에 그놈의 냄새나는 뱀들이 이 늙은 거지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이 늙은 거지는 죽장으로 아예 개를 때릴 생각을 하지 않고 뱀을 잡는데 사용하도록 하겠소.] 이와 같은 말을 하는 사이에 봉우리 저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리며 달빛은 침침하고 눈이 쌓인 곳 아래쪽에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뱀들이 곧장 산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홍칠공과 단황야 두 사람은 처음으로 백타산의 사진을 대하는 처지였다. 눈이 쌓여 허옇게 뒤덮힌 산봉우리 아래에 처음에는 한 폭의 음영이 드러나더니 곧이어 뱀과 구렁이들이 꼬리를 물고 백수십 가닥의 사홍(蛇虹)을 이루며 구불거리면서 오는데 그 형세가 엄청나서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고 두 눈이 훠둥그레지게 만들었다. 홍칠공은 놀랍다는 듯 탄성을 발했다. [엇, 지금은 한창 추위가 심한 계절로서 뱀이나 벌레들이 모두 다 칩복(蟄伏)할 터인데 설마하니 노독물의 뱀들은 전혀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는 구양봉 형제가 오독기경(五毒奇經)에 실려 있는 방법으로 뱀을 길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독의 형제들은 맵고 쓴 음식들을 뱀에게 먹여 뱀이 추위에 저항하는 힘을 기르도록 하는 이외에 수시로 뱀을 나무 광주리에 담아서는 논바닥 위로 갖다 놓고서는 한랭한 기운에 견뎌 내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서 무릇 백타산에서 기른 뱀들은 동면이나 구덩이를 찾아 들어 칩복을 하는 습관이 없었고 따라서 엄동설한에도 출동을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홍칠공이 남몰래 답답하게 여기고 있을 때에 그 백여 가닥의 사홍은 만가닥의 길다란 노끈처럼 먼곳에서부터 가까운 곳으로 옮겨 오고 있었다. 구양봉은 흉칙한 입에 미소를 띠고서는 손으로 철쟁에 더욱더 세찬 소리를 내도록 튕겨대고 있었다. 잠시 후 한 가닥의 사홍이 구불텅거리며 화산 위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황약사가 앉아 있는 곳과는 십 장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왕중양 역시 의아하다는듯 '어'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그해 화산에서 구음진경을 찾으려고 했을 때에 서독 구양붕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사진은 옛날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뱀떼들의 숫자가 몇 배나 불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렬이 정연하고 한 마리가 꼬리를 물고서 사홍을 이뤄 놓고 있는데 마치 한차례 훈련을 받은 모습이라 옛날의 마구 얽히고 설켜서 일정한 법도가 없던 사진과는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중양진인은 속으로 만약에 수만 마리의 뱀과 구렁이들이 일제히 기어올라 오게 된다면 황약사에게 설사 하늘에 통하는 재간이 있다 하더라도 막아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는 앉아서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서독과 깊은 원한을 맺는 한이 있더라도 도움의 손길을 뻗어야 한다고 작정했다. 중양진인이 이와 같은 궁리를 하고 있을 때에 사홍은 흉악하고도 거세게 올라오고 있었다. 바로 이때 황약사의 퉁소 소리가 갑자기 일변했다. 그는 구양봉의 철쟁소리와 맞서서 퉁소를 불게 되었을 적엔 그야말로 봄철의 화창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에 개구리들이 지저귀고 까치들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듯한 분위기의 가락을 불어냈었는데 갑자기 음률이 일변하면서 가을바람에 철마가 달리며 창과 칼을 휘두르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분위기의 가락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구양봉의 쟁소리와 똑같은 분위기의 가락을 불어내는 것이었다. 다만 통소 소리는 음유(陰柔)한데 비해 쟁의 소리는 격앙되었을 뿐이었다. 희한하게도 황약사가 퉁소의 음률을 변화시키고 나자 그 사홍들은 갑자기 조용히 멈추어지게 되고 모든 뱀들은 동료의 꼬리를 물었던 것을 풀고 뱃가죽을 땅바닥에 댄 채 머리와 목을 쳐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먼젓번의 사홍 진형은 완전히 흐트러지고 만 셈이었다. 그러자 구양봉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황약사의 통소 소리가 뱀을 훈련시키는 위력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처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약사가 음률을 불어 젖히게 되자 뱀떼들이 일제히 소동을 일으키며 크고 작은 뱀들 할 것 없이 모두 다 고개를 쳐들고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그 뱀들이 춤을 추는 자세는 무척 아름다웠다. 어떤 놈은 꼬리를 높다랗게 쳐들고 머리와 목을 땅바닥에 대고 마구 오락가락하며 풍차처럼 돌아갔고 어떤 놈은 몸뚱아리를 똬리를 틀듯이 하고서는 빙글빙글 돌아갔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물결에 파문이 이는 것 같았다. 홍칠공은 그 모양을 보고 껄껄 웃었다. [하하하, 노독물의 뱀들이 재주를 피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군. 재밌다, 재밌어.] 서독은 그 황약사의 퉁소 소리가 일어나자 뱀떼들이 크게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철쟁을 퉁기는데 있어서 음조를 바꾸어 대강동거라는 가락에서 부드럽고 흐느적거리는 가락으로 바꾸어서는 뱀떼들의 광란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쟁소리가 본래 우렁찬 것이라 쟁으로 웅장한 소리를 내도록 하는 것은 여분이 있으나 부드럽고도 흐느적거리게 한다는 것은 잘 되지 않았다. 황약사의 퉁소 소리는 더욱더 급해지게 되었고, 뱀떼들의 광란의 기세는 더욱더 심해져 갔다. 어떤 뱀과 구렁이는 견뎌 내지 못하고 자기의 꼬리를 물기도 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다짜고짜 자기의 동료를 물어뜯었다. 이렇게 해서 구양봉은 사람들을 해치려다가 되려 자기 자신을 해치는 꼴이 되었다. 그는 황약사의 통소 소리가 멈추지 않는 한 이 수만 마리의 뱀들과 구렁이들이 서로 잔인하게 싸워서 죽게 되고 자기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기울인 심혈이 물거품이 되고 말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만 다급해진 나머지 재빨리 궁리를 하던 구양봉은 갑자기 한 악독한 꾀가 떠올랐다. 원래 서독 구양봉의 이 진쟁 안에는 이상야릇한 물건들이 무척 많은 편이었다. 두 가닥의 용수철로 조정하는 가짜 뱀 이외에도 쟁의 목언저리에는 암기까지 남모르게 숨겨 놓고 있었다. 구양봉은 자기의 뱀떼들을 구해 내기 위해서는 위명과 체면이 떨어지는 것을 돌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는 갑자기 철쟁을 쳐들었다. 그러자 띵똥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점의 검은 별이 철쟁에서 불쑥 쏟아져 나와 쏜살같이 황약사의 양쪽 태양혈을 향해 날아 들었다. 구양봉의 이 두 점 암기는 사두추(蛇頭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모두 다 다섯 대가 쟁의 머리안 텅 빈 부위에 장치되어 있었다. 만약 사용을 하게 되었을 때에 손으로 철쟁의 뒷쪽에 있는 장치를 누르기만 하면 사두추는 번개처럼 격사되어 나가게 되어 있었으니 그야말로 음랄(陰辣)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독은 황약사가 암기의 대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기가 이 두 대의 사두추를 쏘아 낸다고 해서 그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통소 소리를 중단케 하게 된다면 자기는 자기의 쟁 소리를 그 순간에 튕겨 내어 뱀떼들을 진압하는 효과를 거두겠다는 것이었다. 한데 그 두 점의 검은 별빛 같은 것이 황약사의 앞으로 날아들게 되었을 때에 황약사는 피하지 않고 여전히 입술을 퉁소에 갖다 댄 채 퉁소의 머리를 왼쪽으로 살짝 쳐들어 통소의 꼬리로 오른쪽을 막았다. 다음 순간 띵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매의 사두추가 퉁소에 부딪쳐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황약사의 통소 소리는 시종 멈춰지지 않았다. 구양봉은 수치와 분노에 휩싸여서는 나머지의 세 대나 되는 사두추도 함께 쏘아 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뱀떼들이 갑자기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단황야는 이번 화산에 달려오게 되었을 때에 태자 적에 우연히 거두어들이게 되어서 기르게 된 금사왕(金蛇王)을 가져 온 것이었다. 이 금사왕은 대리 황국으로 들어가게 된 이후 단황가가 즉시 그를 값나가는 구슬처럼 여겨 특별히 만들어 낸 금광주리에 가두었다. 그런데 이튿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금 광주리는 모두 다 박살이 나고 금사왕은 대전의 용봉주(龍鳳柱) 위에 꽈리를 틀고 있었으며 결코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단황야는 그제서야 금사왕이 광주리 속에 갖혀 지내는 것을 마다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는 숫제 그를 어화원 안에다가 놓아 주었다. 그런데 이 금사왕은 무척 순해서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며 다만 약간의 쥐나 참새들을 잡아서 배를 채웠으며 화원에서만 기어다녔다. 때로 단황야가 휘파람을 불 때 금사왕은 즉시 나무 그늘이나 꽃 덤불 속에서 기어 나왔다. 그야말로 고양이와 개보다도 사람의 뜻을 잘 따르고 순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가 대리 황궁에 들어서게 된 이후 궁전 안에서 화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모기나 나방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단황야는 이 금사왕을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애완동물로 여기고 여가만 있으면 금사왕을 찾아서는 같이 놀았다. 그러나 대신들은 자기네 황제가 뱀에게 다정하게 군다는 것은 꼴사나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당시 남조(南詔)라는 조그만 나라는 개방을 하지 않고서 자기네들의 생산만으로 살림을 꾸려 나갔기 때문에 태평성대를 이루다시피 하고 있었고 산물이 풍성하여 백성들 또한 배를 두드리며 살아갈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솔직히 말해서 조정의 일을 몸소 다스리거나 할 건덕지가 없었으므로 황야가 하는대로 대신들도 내버려 두게 되었다. 이번에 단황야는 화산의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흥이 나서는 금사왕을 하나의 바람이 통할 수 있는 대롱에다 넣고서는 자기의 행랑 속에 다른 물건들과 함께 갈무리를 해서는 길을 떠나오게 된 것인데 화산에 도달한 이후 단황야는 자기의 행랑을 호위 무사에게 돌보도록 맡기고 자기 자신만이 산위로 올라 무공을 겨루는 모임에 참가를 하게 된 것이었다. 한데 금사왕은 대롱과 더불어 배낭 안에서 굴러 나왔다. 그는 마치 영물처럼 단황야의 발 아래까지 굴러 온 것이었다. 단황야는 그만 금사왕의 그러한 짓거리를 보고서는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생각을 했다. (하하하, 이 녀석도 설마하니 무공을 겨루는 것을 구경하겠다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는 대롱을 집어서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에 쓸모가 있게 되었고, 또한 구양봉의 사진을 깨트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금사왕이 어떻게 해서 구양봉의 사진을 깨트린 것일까? 사실 이 금사왕은 단황야와 구양봉 그리고 황약사 등이 무공을 겨루게 되었을 때에는 순순히 대롱 안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동사와 서독 두 사람이 서로 악기로 무공을 인정하게 되고 구양봉이 뱀을 부리는 쟁소리를 쏟아내게 되자 금사왕은 대롱 안에서 답답하고 불안한 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서독의 사진이 들이닥치자 금사왕은 동료의 비린내를 맡게 되어 대롱 안에서 마구 날뛰며 주인에게 자기를 놓아 달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단황야의 주위는 완전히 사진에게 빼앗긴 터라 자기 품속에 있는 금사왕에 대해서는 고스란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관계로 그와 같은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황약사가 천마무곡(天魔舞曲)의 가락을 불어 내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가락은 비단 사람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세차게 불어제치게 되면 사람의 넋을 빼앗아 술에 취하거나 실성한 것처럼 만들어서는 손짓발짓 해가며 춤을 추다가 끝내 죽게 되었을 때에야 멈추게 되는 것이고 뱀이나 벌레, 참새나 새와 같은 종류에게도 똑같은 효과가 있었다. 금사왕은 단황야의 대롱 속에 숨어 있었으나 황약사 천마무곡의 느낌을 받게 된 나머지 사진 안에 뱀이나 구렁이와 다를 바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롱 안에서 몇 번 구른 끝에 갑자기 머리로 대롱의 마개를 부딪쳐 열어제치고 단황야의 가슴팍 안쪽에서 빠져 나와 땅바닥에 내려서자 마자 쏜살같이 사진쪽으로 달려갔다. 금사왕은 뱀들 가운데에서는 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몸길이가 한 자도 되지 않았으나 모든 뱀이나 구렁이들의 극성(克星)이었다. 그가 뭇뱀들 앞에 이르러서 허리를 몇 번 웅크려서 둥글게 만들자 온몸에서 번쩍번쩍 금빛을 발했다. 정말 희한하게도 구양봉의 뱀떼들은 황약사의 천마무곡에 그만 평소의 성질을 잃고 서로 춤추면서 죽고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금사왕이 나타나자 마자 광란의 형세가 즉시 멈추어졌다. 금사왕은 정말로 뱀들 안에서는 지고무상의 황제처럼 고개를 쳐들고서는 곧장 뱀떼들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엄청나게 크고 길이가 일장도 넘는 큰 뱀이나 구렁이, 그리고 독하기 이를 데 없는 독사와 청사(靑蛇)들도 금사왕이 가까이 다가오자 즉시 은몸이 마비되는 듯 땅바닥에 온몸을 늘어뜨리고는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구양봉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그만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지게 되었다. 황약사 역시 불던 옥소를 멈추었다. 왕중양은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서는 사진의 변화를 지켜보기만 했다. 금사왕은 머리를 쳐들고서는 사진의 중심으로 기어가더니 쉬쉬 하는 소리를 몇 번 냈다. 그러자 희한하게도 그 몇 만 마리의 뱀들과 구렁이들도 쉬쉬 하는 소리를 내질렀는데 그 소리가 세 번이나 이어졌다. 홍칠공은 소리내어 웃었다. [정말 묘하군. 뱀들에게도 황제가 있는 모양이네. 그들은 세 번이나 만세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금사왕은 땅바닥에서 몇 바퀴 맴을 돌았다. 그러자 사진 안에서 여덟 마리의 길이가 일 장쯤 되고 사발만한 굵기의 몸통을 한 푸른 꽃무늬가 있는 허연 구렁이가 나서더니 구불텅거리며 금사왕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마치 장군이나 대신들이 황제의 좌우로 늘어서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자 조그마한 금사왕이 쉭쉭 하는 소리를 내지르더니 촘촘한 송곳 같은 예리한 이빨을 입을 벌리고서 들어내더니 자기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한 마리의 푸른 꽃무늬가 있는 구렁이의 정수리를 단번에 콱 깨물었다. 홍칠공은 소리쳤다. [아이구, 저 녀석도 밥을 먹을라고 하는구만.] 그 푸른 무늬의 뱀은 금사왕에 비해서 몸뚱아리가 몇 배나 더 컸다. 그러나 금사왕이 입을 벌리고 그의 정수리를 깨무는데도 그놈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땅바닥에 너부죽하게 엎드려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금사왕은 대번에 그의 머리통을 이빨로 깨물어서는 찢더니 몇 번 뱀의 골수를 들이켰다. 그러자 그 푸른 뱀은 죽어버리고 말았다. 금사왕은 다시 일곱 마리의 뱀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정수리를 물어 뜯고서는 그 뇌수를 몇 모금씩 빨았는데 차 한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 여덟 마리의 커다란 구렁이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나뒹굴게 되었다. 구양봉은 자기가 고심해서 몇 년 동안 훈련을 시킨 사진이 그만 한 마리의 조그마한 금사에게 눌리어 금사가 하는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고는 그야말로 수치와 분노가 이는 것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서독은 본래 뱀을 기르는 재간이 있었다. 그는 그 조그만 금빛 뱀이 자기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뱀의 종류라는 것을 알고, 분노 가운데 욕심이 싹트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늑 흉칙하게 한번 웃고는 황약사와 무공을 겨루는 것을 돌볼 여가도 없이 철쟁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뻗쳐 한 웅큼의 뱀약을 꺼내 자기의 두손에 바르더니 나는듯이 바위 위에서 내려와 곧장 사진쪽으로 걸어갔다. 서독은 백타산에서 뱀을 길러온 만큼 그 뱀들이나 구렁이들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다투어 길을 비켜 주었다. 그리하여 구양봉은 줄곧 뱀들이 치고 있는 진 한복판에 이르게 되었다. 그 금사왕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몸뚱아리를 몇 번 돌려서 꽈리를 틀어 사진의 모양을 하고서는 두 볼따구니를 불룩하게 부풀리고는 입으로 휙휙 하니 괴이한 소리를 냈다. 구양봉은 한 소리 웃고는 입을 열었다. [하, 제법이구나. 너는 나를 따라가자. 편안한 곳에서 살게 해 주며 맛있는 것을 먹여 주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왼손의 두 손가락으로 번개와 같이 아래로 뻗쳐서는 뱀의 칠촌(七寸)이 있는 곳을 꿰어 잡으려고 했다. 그는 자기가 이와 같이 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독사의 칠촌인 곳을 정확하게 잡아 끼울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서독은 뱀을 훈련하는 노련한 사람이었고 또 손에는 뱀약까지 발랐기 때문에 그가 절세무공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설사 여느 땅군이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금사왕을 정확하게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잡을 수가 있을 것이었다. 한데 그 조그만한 금빛 뱀은 조금도 뱀의 약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땅바닥에 똬리를 튼 채 교묘하게 몸을 비틀더니 놀랍게도 구양봉의 왼손 두 손가락을 피하고는 되려 입을 벌리고서 덥썩 구양봉의 손목에 있는 맥문(脈門)을 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금빛 뱀의 반응은 적의 의표를 찌른 것이기 때문에 구양봉은 하마터면 금빛 뱀에게 정통으로 물릴 뻔했다. 다행히도 그는 무학의 종사(宗師)라고 할 수가 있어서 초식을 변화시키며 민첩하게 손목을 틀어서 휙 하니 한 가닥 강렬하기 이를 데 없는 장풍을 일으켜서는 후려쳤다. 금빛 뱀은 장풍에 날리어 이장 밖으로 날아가 몇 마리의 적연사(赤練蛇) 몸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사진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구양봉이 다시 서둘러서 일초를 펼쳐 금빛 뱀을 잡으려고 들었을 때에 뜻밖에도 동뒤에서 바람소리가 휙하니 이는 가운데 한 가닥의 검풍이 그의 등심을 향해 부딪쳐 오는 것이 아닌가. 그에게 검풍을 밀어 보낸 것은 황약사가 아니고 남제 단황야였다. 그는 구양봉이 자기의 금사를 해치는 것을 보고 더 말하지 않고 바로 달려가 한 대의 주먹을 뻗쳐 내서는 구양봉의 어깻죽지를 후려치려고 들었던 것이었다. 구양봉은 바람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얼핏 느끼고서는 즉시 손을 들어 막았다. 단황야가 펼치는 금강장은 세차기 이를 데 없어 구양봉의 팔과 그의 주먹이 맞부딪치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대뜸 뒤로 두 걸음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자 울화가 치민 서독은 대뜸 꼬집고 나섰다. [단지흥, 당신이 감히 손을 써서 암산을 하다니 정말 뻔뻔스럽군.] 단황야는 담담히 말했다. [저 금사는 내것이오. 당신이 저 뱀을 어떻게 해볼 생각은 하지 마시오. 더더욱 당신이 그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소. 알았소?] 구양봉은 그만 발끈해져서는 폭발을 터트렸다. [개방귀 같은 소리!] 그리고 두 손을 합해서는 함께 뻗쳐 냈다. 그 순간 '웅' 하는 바람소리가 크게 일었다. 이것은 서독이 한평생 쌓아온 합마공이라 한 가닥의 산이라도 밀쳐버릴 것 같은 세찬 기운이 단황야 몸뚱아리로 부딪쳐 갔다. 얼마 전에 서독은 남제와 권장을 겨루게 되었을 적에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며 합마공으로 단황야를 해치려고 들었지만은 왕중양의 선천공에 의해서 무의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구양봉은 또다시 같은 수작을 벌여 합마공을 단황야의 가슴팍에다가 왈칵 밀어보냈으나 단황야는 이미 방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깊이 한 가닥의 숨을 들이마시더니 벽력과 같은 기공(氣功) 가운데 약간 몸을 한두 번 휘청거렸으나 입을 열고 웃었다. [노독물, 정말 뛰어난 합마공이구려!] 원래 단황야가 방금 사용한 재간은 혼원공이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몸뚱아리 안에는 본래 한 가닥의 선천혼원지기(先天混元之氣)가 있기 마련이었다. 선천혼원지기가 충족되면 몸뚱아리가 건강하고 선천혼원지기가 부족하게 되면 몸뚱아리가 연약하여 쉽게 병에 걸려서 앓고는 하는 것이었다. 단황야의 선천혼원지기는 원래 무척 훌륭한 편인데다가 어릴 때 취호(翠湖)에서 멱을 감다가 위기를 맞아 금선선왕(金線鮮王)의 단황보혈(丹黃寶血)을 마시게 됨으로써 선천혼원지기는 더욱더 증진되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옥동진인의 지도하에 그의 내장공부(內壯功夫)는 점차 충실해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 몇 년 동안 그는 자기의 몸안 천지지교(天地之橋)를 유통시키는 데 대해 어느덧 점차적으로 터득한 바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줄기 선천혼원지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뜻대로 때에 대항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었다. 구양봉의 합마공은 겉으로 볼 때에는 일종의 대단한 절기처럼 보이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역시 선천적인 한가닥의 혼탁지기(渾濁之氣)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장(外壯) 방면에 더 중심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단황야의 혼원공과는 방도를 달리하나 똑같은 결과를 가져 온다고 볼 수 있었다. 남제와 서독 두 사람의 내공 조예는 모두 다 백중지간이었다. 따라서 구양봉이 합마공을 와락 밀어내게 되었을 때에 단황야는 혼원공의엄청난 기운을 돋구어서 막아낸 것이었다. 더군다나 가슴팍의 비늘 조각들도 중수(重手)에 항거하는 효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양봉이 합마공의 세찬 기운에 밀어닥쳤지만 단황야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것이었다. 이때 홍칠공은 소리내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이상하군. 뱀은 뱀들끼리 싸우고 사람은 사람들끼리 싸우는군!] 구양봉은 홍칠공이 그와 같이 하는 말에 후닥닥 깨닫는 바가 있었다. 자기의 사진이 조그마한 금사에 제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었다. 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만물의 생극(生剋)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어떻게 억지를 부려 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그가 억지로 끼어들어 손을 쓰게 된다면 천하의 영웅 호걸들에게 비웃음만 사게 될 것이었다. 서독은 별수없이 성질을 누르고 손을 거두어들이고서는 말했다. [좋소. 우리들은 먼저 사진을 거두고 나서 잠시 쉰 이후에 다시 통쾌하게 한바탕 겨루어 봅시다.] 단황야는 금사왕을 불렀다. [금아(金兒), 돌아오너라!] 그는 대롱을 땅바닥에 던지고서는 두 번이나 휘파람을 불었다. 그 조그마한 금사왕은 정말 영민하기 이를 데 없어서 사람의 뜻을 잘도 알아차리고 즉시 뱀떼들 가운데서 구불텅거리며 달려나오더니 쏜살같이 단황야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발을 가운데 두고 한바퀴 기어서 돌더니 대롱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구양봉은 반평생을 두고 뱀을 길러 왔지만 지금껏 이와 같이 말을 잘듣는 뱀이나 구렁이를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속으로 희한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홍칠공은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여보게 노독물, 상대편에서는 금사를 거두었으니 자네도 그 냄새나는 길다란 벌레들을 마땅히 거두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몸통은 크면서도 별볼일없고 많아도 소용되는 데가 없구만.] 구양봉은 하마터면 치미는 울화에 가슴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억누르고 고개를 돌려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황약사는 소맷자락으로 옥소를 슬쩍 닦고 있는 것이 또다시 옥소를 불 채비를 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서독은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철쟁을 퉁겨서는 띵띵동동 하고 구슬픈 가락을 퉁겨 냈다. 뱀떼들은 즉시 한차례 소동을 일으키더니 입으로 앞쪽 뱀의 꼬리를 물고 여전히 사홍(蛇虹)을 이루고 구불구불 화산 아래로 물러갔다. 홍칠공은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난장판에 고약한 냄새까지 피웠던 것들이 가버리고 나니 화산이 다시 깨끗해지는군.] 구양봉은 이죽거리는 말을 듣게 되자 그만 대노해서는 화를 터트리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갑자기 다른 생각이 떠올라 즉시 치미는 울화를 억눌렀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이제 날이 어두워지려고 하니 모두들 하릇밤 푹 쉬고 내일 다시 겨루도록 합시다!] 다른 사람들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재차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화산에서 무공을 겨루게 된 이튿날이 이와 같이 해서 홀러갔다. 사흘째 되는 이른 아침에 해가 막 떠오르자 마자 홍칠공은 갑자기 소리높여 외쳤다. [아이고. 야단났구나. 이 늙은 거지가 목숨이 살아 남지 않게 되었구나.] 왕중양은 그만 아연해져서는 물었다. [칠형, 무슨 일이요?] 홍칠공은 대답했다. [우리들은 이틀 동안이나 무공을 겨루었으나 밀가루떡 한 조각도 뱃속으로 넘기지 못하지 않았소? 이래 가지고 다시 무공을 겨루게 된다면 이 늙은 거지는 그야말로 산 채로 굶어 죽지 않겠소!] 여러 사람들은 그만 실소를 했다. 기실 상승내공을 터득한 사람은 기(氣)를 연마하여 신(神)을 메우곤 하기 때문에 이틀이나 사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홍칠공은 오로들 가운데서 성품이 가장 음식을 탐하는 사람이었다. 산해진미가 없으면 설사 두부나 채소라 하더라도 한바탕 먹어대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이와 같이 말을 꺼내자 황약사는 입을 열었다. [칠형, 배가 고프시오? 이 황약사는 속에 먹을 것은 없으나 구화옥로환(九花玉露丸)이 있어서 배고픈 것을 넘길 수가 있으니 몇 알 잡수어 보구료!] 원래 황약사는 도화도에서 온갖 꽃나무를 다 심어 놓고 있었고 남북 각처에 있는 유명한 꽃들이나 기이한 종자는 므조리 수집해 와서는 뿌리채 옮겨심는 등 온 정성을 기울여 가꾸기 때문에 그야말로 백화가 만발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황약사는 이렇게 꽃나무를 심는데 정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술에서도 뛰어난 조예를 쌓고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새벽의 이슬이 미처 마르지 않았을 때 백화 위에 떨어져 있는 이슬을 채집해서 몇 가지 진기한 약초와 혼합하여 아홉 번을 찌고 아흡 번을 햇빛에 말린 끝에 구화옥로환을 만들어 내었다. 이 구화옥로환은 독을 제거하고 고통을 멎게 하는 기이한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을 왕성하게 해주고 몸을 건강하게 해주는 효과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복을 하게 되면 병을 없애고 수명을 늘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와 같은 말이 떨어지자 홍칠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당신의 알약을 먹겠다고 했소? 몇 알의 알약으로는 이 늙은 거지의 이빨 사이에 끼우기도 모자라는 판이오. 빌어먹을, 무공을 이틀간 겨루었더니 입안이 여간 심심하지 않구만.] 왕중양은 빙긋이 웃고 말았다. 홍칠공은 입을 열게 되자 먹는 일을 논하기 시작했다. 무슨 연경(燕京)의 산양육(酸羊肉), 항주(杭州)의 초류어(醋留魚), 소주(蘇州)의 전로갱(專爐羹), 호남(湖南)의 회과육(回鍋肉), 사천(泗川)의 초수(抄手)와 혈두부(血豆腐), 그리고 계림(桂林)의 과교미선(過橋米線)과 마육분(馬肉粉)이 그의 입에서 거론되었다. 그는 잇따라 수없이 많은 음식들의 이름을 지껄이는데 마치 식경(食經)을 외우고 있는 것 같았다. 홍칠공이 이와 같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자 오히려 여러 사람들의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구양봉은 먼저 입을 열었다. [늙은 거지가 먹는 이야기를 하니 나마저도 배가 고파지는군. 우리 정말이지 음식을 좀 구해서 먹어 봅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무공을 겨룰 기력이 없어질 것 같소.] 홍칠공은 그를 바라보았다. [노독물, 당신도 먹고 싶소? 내가 당신과 내기를 하고 싶은데 당신이 응해 줄 수 있겠소?] 第 八 章. 칠일간의 싸움 구양봉은 웃으면서 응수했다. [얼마든지 상대를 해드리겠소.] 홍칠공은 심각하게 말했다. [이 화산에서 장안까지는 백팔십여 리요. 내가 당신과 함께 가되 오늘 오시 전에 여러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좀 마련해서 돌아와야 하는데 먼저 돌아온 사람이 이기는 것이고 나중에 돌아온 사람이 지는 것이오. 그리고 그 어느 누가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더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면 이기는 것이고 맛이 없는 것을 가져오는 사람은 지는 것이오. 당신은 응할 수가 있겠소?] 왕중양은 그만 실소했다. 홍칠공은 정말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었다. 먹는데까지 겨루다니 말이다. 구양봉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대답을 했다. [좋소, 하지만 그 방법이 좋기는 하지만 빈틈이 한 군데 있소.] 홍칠공은 그만 성이 나서 말했다. [뭐가 빈틈이란 말이오? 노독물, 쓸데없는 방귀는 뀌지 마시오.] 구양봉은 이번 만큼은 점잖게 말했다. [화산에서 장안에 이르기까지 그 길가에 크고 작은 고을들이 적지 않소. 현성(縣城)도 몇 채 있소. 만약에 당신이 장안까지 달려가지 않고 산아래에 있는 고을에서 먹을 음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대신 나는 멀리 장안까지 달려가게 된다면 당신에게 지는 것이 아니겠소? 음식은 장안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지방의 것인지 표시가 없지 않소!] 왕중양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독이 비록 욕심이 많고 악랄한 데가 있지만 생각이 치밀한 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칠공은 그제서야 탄성을 발하더니 곧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노독물 정말 제법이구료. 맞았소, 맞아. 내 당신에게 묻겠는데 당신은 장안에 가 보았소?] 구양봉은 대답했다. [나는 멀리 서역에서 중원으로 오게 되는데 그러려면 장안은 반드시 지나야 할 길이 아니겠소. 어찌 가보지 않았겠소만 당신이 그렇게 묻는 뜻이 어디에 있소?] 홍칠공은 대답했다. [장안의 동성문(東城門)에 음식과 술을 파는 주루(酒樓)가 있는데 이름은 태백거(太白居)라 하오. 당신은 알고 있소?] 구양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건 나로서도 기억하지 못하겠구려. 하지만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이오!] 홍칠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잘 되었소. 태백거 주루에서 사용하는 사발이나 접시는 강서(江西) 경덕진(景德鎭)의 천남시오(天藍柴窯)에서 구워낸 물건들을 사용하고 있소. 장안 온 성안의 주루나 음식점에서는 시오에서 구워낸 자기를 사용하는 집은 그 집밖에 없고 달리 찾아 볼 수가 없소. 더군다나 다른 고을이나 현성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바이오.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이 길을 나누어 산을 내려가 태백거로 가서 먹을 음식을 가져오되, 시오에서 구워낸 사발이나 접시를 증거로 삼읍시다. 어떠시오?] 구양봉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거 정말 재밌군. 좋소, 우리 즉시 출발합시다!] 원래 시오는 강서 경덕진 자기에서 가장 진귀한 일종이었다. 경덕진은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자도(磁都)로, 생산해 내는 여러 가마 가운데 시오(柴窯) 것이 가장 정교했다. 그럼 시오라는 글자는 어떻게 유래된 것일까? 원래 오대(五代) 시대에 후주(后周) 태조인 곽위(郭威)로 인해 얻어진 이름이었다. 태조는 경덕진의 자기를 수집하는 것을 가장 즐거운 낙으로 삼았기 때문에 경덕진에다가 어요(御窯)를 설치하게 되었다. 한번은 그릇을 구워 내는 일꾼이 태조에게 어떤 빛깔로 구워 내는 것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후주 태조는 대답을 했다. [비가 그치게 되고 파란 하늘이 깨어진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들어내게 되었을 때의 빛깔로 만들어 내도록 하라!] 그는 본래 하늘의 푸른 빛을 가장 좋아했다. 그리하여 그 일꾼은 그 명령에 따라 같은 빛깔로 구워서 자기 그릇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후에 곽위는 시영(柴榮)을 태자로 삼게 되었고, 그래서 여느 사람들은 그 자기를 시오라 일컫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송나라대에 이르러서는 일반 돈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자기도 모두 다 시오에서 생산되는 물건이었고, 홍칠공은 먹보라서 그와같은 속사정을 알아내게 된 것이었다. 이때 북개 방주와 서독은 함께 산을 내려가게 되었는데 홍칠공은 동쪽으로 향하게 되고 구양봉은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서로 소리쳤다. [돌아와서 다시 만납시다!] 두 사람은 동시에 경신법을 전개해서 별이 흐르듯 삽시간에 산허리께에 감도는 구름 속으로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홍칠공은 개방의 방주인지라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이 이 세상에서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화산에서 장안까지 가는 길에 대해서 홍칠공은 손바닥 들여다 보듯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느 길이 멀고 어느 길이 지름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이 점만 하더라도 이미 구양봉보다 유리했다. 그는 길에서 달려가는 말처럼 나아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길에서 전혀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한 시간 이후에는 장안성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홍칠공은 장안의 거리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해 있는 편이라 대번에 태백거로 찾아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몰래 음식을 저장해 두는 곳간으로 들어가 메고 있던 술호로를 내려서는 술독의 마개를 뽑고서 술독의 술을 호로에 가득 채우고는 꿀꺽꿀꺽 마셔대기 시작했다. 한바탕 마신 홍칠공은 쩝쩝거렸다. [정말 맛좋은 술이군. 정말 맛좋은 술이야!] 그는 두 번 세 번 술독의 마개를 따서는 잇따라 세 번이나 호로에 술을 따라서 다 마시고서야 마시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숙수간으로 미꾸라지처럼 살짝 들어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앞쪽에서 깨어진 징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장, 이곳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오? 은자는 얼마가 되었든간에 상관 없으니 빨리좀 만들어 주시오.] 홍칠공은 그 음성이 바로 구양봉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라서는 생각했다. (노독물이 무척 빨리도 달려왔구나.) 원래 구양봉은 길에 익숙치 못했다. 서역에서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중원의 길에 대해서 잘 알턱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양봉이 서독으로 일컬어지는 만큼 그 나름대로의 수단과 방법이 있었다. 그는 산을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에서 서쪽으로 가는 두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세우고 입을 열었다. [이보게. 자네의 이 수레는 장안으로 가는 것인가?] 수레를 몰고 있는 사람은 한 시골뜨기인데 마침 화음현(華陰縣)에서 물건을 사서는 장안으로 달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구양봉의 얼굴이 험상궂은 것을 보고 전전긍긍하면서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구양봉은 즉시 수레 위에 오르더니 거만하게 수레 안에 버티고 앉아서는 잇따라 이장을 쪼개 내어 수레에 실려 있던 화물들을 모조리 땅바닥으로 밀어 떨어뜨리고는 호통을 내질렀다. [빨리 나를 장안으로 모시게, 빠르면 빠를수록 좋네. 알았는가?] 그 촌뜨기는 구양봉이 이와 같이 어거지로 나오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구양봉에게 마음을 다잡고 대들려고 하자 서독이 냉소를 하더니 덥석 그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그리고 그 시골 사내를 높다랗게 머리 위까지 쳐들어올리고는 호통을 쳤다. [자네 말을 들을 텐가, 안 들을 텐가? 만약에 나를 장안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즉시 땅바닥에다 팽개쳐 자네의 개 같은 목숨을 빼앗고 말테다.] 그 사람의 앞섶을 잡은 구양봉의 두 손은 그야말로 쇠갈고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시골의 사내는 너무나 아파서 재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소리를 치게 되었고, 서독은 그제서야 그를 마부석에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장포 안에서 한 덩이의 금을 꺼내서는 그의 코앞에 갖다대고 흔들어 보이고는 그를 꾸짖었다. [이 눈이 먼 것 같으니라고, 너의 이 나리께서는 금덩어리가 얼마든지 있네. 허드레잡것 같은 화물이 도대체 몇 푼이나 나간다는 것인가. 빨리 나를 장안으로 모시게. 그러면 이 금덩이는 자네의 것이 될 것이네.] 그 시골의 사내는 황금을 보자 화물을 잃게 된 것은 고사하고 몸뚱아리가 아픈 것도 잊어 버리고서는 연신 대답했다. [네, 네, 소인이 나리를 위해 수레를 몰겠으니 나리께서는 똑바로 앉아 계십시오!] 그리고 그는 즉시 채찍을 휘둘러서는 말을 갈기게 되었고 말은 즉시 달리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 가량 달리자 앞쪽에 역마가 다니는 길이 나타났다. 구양봉은 이 역마가 달리는 길을 따라가면 곧장 장안으로 도달할 것이라고 가늠할 수가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수레에서 내려 그 금덩어리를 그 시골 사내에게 던져 주고는 곧장 장안으로 줄달음을 쳤다. 그런데도 하나 홍칠공은 그보다 한걸음 먼저 태백거에 도달을 한 것이었다. 만약에 그가 술을 탐내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물건을 먼저 사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 구양봉은 그에게 지고 말았을 터였다. 그런데 홍칠공은 곡간 속으로 들어가 술을 훔쳐 먹게 되는 바람에 거의 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고 거의 같은 무렵에 구양봉마저 그곳에 도달한 것이었다. 홍칠공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야단났구나. 노독물이 나와 똑같이 달려 왔으니 이번에야 말로 무승부가 되겠구나. 안 되지, 내가 어떻게 하더라도 그 녀석에게 한번쯤은 창피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개방의 방주인 홍칠공은 유심히 바깥쪽에 귀를 귀울였다. 그러자 구양봉이 주인장과 주고 받는 이야기가 들려 왔다. 그는 그 주인에게서 모두 다섯 마리의 구운 오리와 다섯 마리의 풍계(風鷄), 그리고 열 근의 마육건(馬肉乾)의 분권아(粉卷兒)를 사서 점소이에게 자기 그릇째 달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늘밤 안으로 그 그릇은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었다. 홍칠공은 갑자기 손으로 자기의 이마를 가볍게 툭 치고는 웃었다. (내가 이렇게 해서 노독물에게 한번 골탕을 먹여야지.) 번득이는 영감이 떠오르게 되자 그는 조르르 숙수간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대여섯 명의 숙수들이 그곳에서 고기를 자르고 채소를 씻는가 하면 불기를 올려서는 볶을 것을 볶고 데칠 것은 데치고 있었다. 솥과 국자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도마 위의 칼이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홍칠공은 대들보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양봉이 주문한 구운 오리를 미약한 불로 천천히 구워 내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풍계를 벌꿀과 기름에 튀기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항룡십팔장 가운데 비룡재천(飛龍在天)이라는 일장을 펼쳐 '펑' 하고 숙수간의 천정을 후려쳐서 지붕을 뻥 뚫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흙먼지와 기왓장 조각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홍칠공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야단이다. 집이 무너진다!] 그 몇 명의 숙수들은 한창 음식을 만드느라고 골몰해 있는 터에 갑자기 집이 무너진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흙먼지와 기왓장 조각들이 마구 떨어지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 우르르 바람처럼 칼과 국자들을 내던지고는 다투어서 숙수간에서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홍칠공은 사뿐히 숙수간에 내려서서는 곡간에서 훔쳐내온 기름 종이와 마른 연꽃잎을 꺼내 솥안에서 한창 익어가고 있는 풍계와 구운 오리들을 모조리 쌌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몇 개의 시오에서 구워낸 자기 그릇을 들고서는 몸을 살짝 솟구쳐 연쌍비(燕雙飛)의 신법으로 몸을 날려서 자기의 장력으로 구멍을 낸 지붕 천정으로 잽싸게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한가닥 연기처럼 화산으로 되돌아 갔다. 이때 그 몇 명의 숙수들은 달려 나오기는 했으나 한번 와르르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 후에 집이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자 가까스로 놀란 혼을 진정시키고는 숙수간으로 되돌아갔다. 한데 얼마 되지 않아 잇따라 부르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래 그 서역의 손님이 산 구운 오리와 풍계가 그만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한 명의 숙수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틀림없이 호선(狐仙)의 비위를 거슬린 모양일세. 그렇기 때문에 호선이 내려오셔서 우리를 벌한 것일세.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멀쩡한 지붕에 구멍이 뻥 뚫리게 되고 물건이 없어지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숙수간에서 시끌벅적하게 한 덩어리가 되어서는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댔다. 한편 구양봉은 주루의 객청에서 한참 동안을 기다렸으나 음식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자 울화가 치밀어서는 탁자를 두드리며 냅다 고함을 지르고 욕을 했다. 주인장은 별수없이 다가가 좋은 말로 사과를 했다. 구양봉은 홍칠공과 내기를 했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행패를 부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억지로 노기를 가라앉혔다. 그리하여 밥 한끼 먹을 시간이 지나서야 숙수간에서 모든 것을 가까스로 수습할 수가 있었다. 숙수들은 빨리 닭과 오리를 골라서는 제대로 굽고 만들어서 내 놓았던 것이다. 구양봉은 몇 개의 시오에서 구워낸 그릇들과 함께 음식들을 싸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서 화산을 향해 달려갔다. 홍칠공은 계략을 써서 태백거의 술과 음식을 먼저 차지하고 화산에 도달해서 화산 꼭대기로 오르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지난번 자기가 내려왔던 길을 따라 화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화산의 꼭대기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중천문(中天門) 부근에 이르게 되었을 때 홍칠공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틀림없이 이겼다. 하지만 노독물의 얼굴이 창피한 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서 못난 얼굴에 더욱더 못나지도록 해야겠다. 그러면 이후에는 다시 안하무인격으로 놀지 않겠지.] 이와 같은 생각이 미치게 되자 그는 또다른 좋은 꾀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구양봉이 산위로 오르게 될 때 틀림없이 중천문을 지나게 되리라고 생각을 했다. 중천문의 지형은 무척 가파른 편이라 이곳에서 자기가 그를 한바탕 골탕먹여야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었다. 홍칠공은 우선 구운 오리 등 음식물들을 나무 꼭대기에 걸어 놓았다. 그러고 난 후에 나무 아래 쪽으로 내려가 무성한 솔잎 속에 모습을 감추고서 기다렸다. 약 밥 한끼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에 구양봉이 어느덧 음식물을 가지고서 산 아래쪽으로 해서 돌아오고 있었다. 홍칠공은 소나무 옆에 한조각의 커다란 바위를 잘 봐두었던 터라 항룡십팔장의 절초인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일초를 펼쳐서는 획 하고 바위를 후려쳤다. 그러고는 다시 두손으로 바위를 밀어쳤다. 그러자 수백 근이나 되는 바위가 중천문의 즙은 산길을 따라 도르르 굴러 내려가 곧장 구양봉이 오고 있는 길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구양봉은 손에 음식물을 받쳐들고 오다가 바위가 무단히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만약에 힘을 주어 경신법을 펼치게 되면 손에 들고 있는 음식물이 그릇째로 산아래에 떨어지고 말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피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백타산주는 그 나름대로 수단과 방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한 생각을 떠올려 음식을 담아 놓은 아주 큰 대접과 같은 그릇을 머리 위에 이고서는 기공(氣功)으로 찰싹 달라붙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세를 가다듬어 우뚝 버티고 섰다. 그의 발은 마치 무쇠 말뚝처럼 땅바닥에 찰싹 달라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합마공을 펼쳐서 두손을 들어 앞쪽으로 와락 밀었다. 평생의 공력을 돋구어 그 굴러 내려오는 바위를 향해 맹렬히 후려 친 것이었다. 서독이 이 두손으로 와락 밀어내는 힘은 그의 필생 공력이 모인 것이라 '펑'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바위는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토록 커다란 바위인지라 합마공의 일격을 맞은 끝에 박살이 나긴 했지만 바위 자체가 무수히 크고 작은 돌들로 바스라져서 산길을 따라 굴러 내려왔다. 구양봉은 깨어진 돌조각들이 비오듯이 위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별수없이 위쪽으로 후닥 몸을 솟구쳤다. 그런데 그가 그와 같이 몸을 솟구치게 되자 머리 위에 있던 높다랗게 포개져 놓여 있던 음식들이 즉시 발아래로 굴러떨어지게 되었다. 구양붕이 사 가지고 오는 풍계와 구운 오리는 기름 종이와 마른 연잎으로 잘 싸서는 해청완(海靑碗)이라는 그릇 속에 담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위로 훌쩍 뛰자 해청완이라는 큰 그릇이 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서독은 다급한 김에 손을 뻗쳐서 낚아챈다고 번쩍하니 연잎으로 싼 음식물을 낚아챌 수는 있었지만 두 개의 해청완 그릇은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서독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시오에서 구운 해청완이라는 그릇을 박살내고 말았으니 자기의 음식물을 표시할 물건이 없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서서 장안까지 달려가 재차 해청완이라는 그릇을 가져와 증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만 울상이 되어서 화산 꼭대기로 걸어 올라갔다. 한데 그가 화산 꼭대기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홍칠공은 이미 싱글벙글 웃으면서 왕중양등 세 사람과 마주 앉아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풍계와 구운 오리 그리고 음식물을 담았던 그릇과 쟁반이 놓여 있는데 바로 놀랍게도 하늘빛의 시오에서 구워낸 그릇들이었다. 그러니까 장안 태백거의 물건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홍칠공은 구양봉이 돌아온 것을 보자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노독물 이번에 자네...] 구양봉은 공연히 성이 나서 부르짖었다. [졌으면 진 것이지 무엇이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요. 나는 화산에서 장안까지 가는 길을 잘 몰라 큰길을 따라서 갔지만 당신은 지름길로 줄달음을 쳤으니 당신이 나를 이겼다 하더라도 그렇게 자랑할 것까지는 없으리라고 보여지는군.] 홍칠공은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서독이 가지고 온 음식을 싼 연잎의 봉지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부르짖듯 입을 열었다. [정말 챙피한 줄 모르는 노독물이군. 당신의 음식은 장안의 태백거에 가서 사온 것이오? 어째서 시오에서 구워낸 그릇이 보이지 않소? 안되오, 노독물은 숫제 장안으로 가지 않고 그저 산아래에 있는 고을에 들려서 약간의 음식을 사가지고 와서는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는 수작이군.] 구양봉은 그만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서는 펄펄 뛸 듯이 하며 말했다. [늙은 거러지, 개방귀 같은 수작 하지 마시오. 나의 그릇은 산허리께에서 깨어지고 말았소. 만약에 태백거에서 구워낸 것이 아니라면 이토록 맛좋게 생긴 붉은 화롯불에 구운 오리 고기를 본 적이 있소? 그리고 이토록 벌꿀과 기름으로 만들어낸 풍계를 본 적이 있소?] 홍칠공은 웃었다. [아, 실수해서 그릇들을 깨뜨렸단 말이오. 그거야 흔히 있는 일이지. 노독물, 그렇다면 당신은 그 사금파리들을 줏어 와야 했지 않소?] 구양봉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자기가 그릇들을 깨뜨린 것은 사실이나 그 사금파리들을 집어 오면 증명이 될뻔 했는데 이제 증명할 물건이 없으니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자기가 산위로 오르던 상황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고 산의 바위가 갑자기 굴러 내려오던 광경이 아무래도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그와 같은 생각이 들게 되자 그는 갑자기 깨닫는 바가 있어서 냅다 고함을 질렀다. [늙은 거지. 알고 보니 당신의 간계였군.] 홍칠공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것은 간계가 아니라 슬기와 힘을 겨루는 것이오. 이 늙은 거지는 한평생 광명정대하게 살아 왔으며 버젓이 대낮에 행사하는 사람인데 어두컴컴해서 저지르는 짓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소. 노독물, 내가 설명을 하지.] 그는 자기가 장안에 먼저 들어가 곡간에서 술을 훔쳐 마셨고 숙수간으로 들어가서는 도깨비 장난을 하고 음식물을 훔쳐서 화산에 이르렀다가 다시 산허리께에서 바위를 밀게 된 경과를 이야기했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은 왕중양 등 세 사람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하여 서독 구양봉의 얼굴은 그만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중양진인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모두 한 시대의 주유와 제갈량처럼 높고 낮음을 분간할수가 없구려. 자, 음식을 먹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모두들 풍계와 구운 오리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홍칠공은 가장 먹보여서 모든 음식물의 반을 거의 그가 먹어 치웠다. 음식을 먹고 난 후 왕중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무공을 겨루는 사흘째 날이오. 이 왕중양이라는 사람은 기꺼이 네 분에게서 각기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홍칠공은 입을 열고 물었다. [아, 왕진인은 혼자서 네 사람을 상대하겠다는 것이오?] 황약사는 콧속에서 흥하니 코웃음을 쳤다. 암암리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었다. 오직 서독 구양봉만이 기뻐하며 속으로 궁리했다. (이 도사는 너무나 건방지게 나오는구나. 네가 아무리 훌륭한 재간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어찌되었든간에 우리 네 사람을 모조리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좋다, 내가 그의 성질을 돋궈 놓아야겠다.) [물론이지, 전진파는 천하 무림의 정종이고 우리 몇 사람은 모두 다 시골의 촌뜨기 늙은이들인데 어떻게 왕진인이 하나의 손가락으로 펼쳐내는 재간에 견딜 수가 있겠소.] 왕중양은 어찌 그의 말 속에 숨어 있는 뜻을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따라서 그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봉형, 당신은 빈도의 얼굴에다가 금칠을 하지 마시오. 내가 혼자서 네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것은 결코 동시에 네 분에게 겨루자는 것이 아니고 각기 한 분 한 분에게서 그분의 뛰어난 재간을 가르침받겠다는 것이오. 예를 든다면 칠형의 항룡십팔장, 황형의 소엽퇴와 낙영장, 단형의 혼원공 및 금강장, 봉형의 합마공은 모두 무림에서 절정에 손꼽히는 재간이 아니겠소? 이 왕중양은 한평생 다른 특별히 뛰어난 재간은 없고 모든 재간에 약간 섭렵을 했을 뿐이오. 그렇기 때문에 네 분이 가장 특기로 자랑하는 재간을 가르침받고자 하는 것이오.] 그리고 그가 다시 이야기를 하려 하자 황약사는 질문을 던졌다. [전진교주, 우리들은 어떻게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지요?] 왕중양은 대답했다. [내가 먼저 칠형으로부터 항룡십팔장을 가르침받겠소. 그런 연후에 황형의 낙영장의 잇점을 가르침받기로 하겠소. 그리고 나서 단형의 금강권과 봉형의 합마공을 가르침받도록 하겠소. 그렇게 된다면 네 분에게 모조리 가르침받는 셈이 아니겠소?] 홍칠공은 반대를 했다. [안되으 그것은 차륜전법이외다. 설사 우리 네 사람 가운데 그 어느 누가 이겼다 하더라도 진짜 실력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오!] 구양봉은 냉소를 했다. [그걸 두고 무예가 고강하고 담력이 크다는 것이 아니겠소. 여러분도 알겠지만 왕진인의 무공이 얼마나 절정의 경지에 도달해 있소. 그러니 우리들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기꺼이 열세에 놓여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오.] 황약사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겨룬다는 것은 불공평하오. 그러니 우리 공평하게 짜보도록 합시다. 오늘 황혼 전에 왕진인이 칠형과 손을 쓰되 높고 낮음을 판가름하게 되었을 때에 내일 아침에 소제가 왕진인을 상대해 드리겠소. 그리고 중참 때는 무공을 겨루는 것을 멈추고 왕진인께서 정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여유를 두는 것아오. 그리하여 미시에 이르러 다시 단황야와 무공을 겨루고....] 거기까지 말하게 되었을 때에 구양봉이 불쑥 그 말을 가로챘다. [안되오, 나는 꼴찌가 싫소. 내가 처음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소.] 원래 구양봉은 차륜전법으로 왕진인을 지치게 한 이후 자기가 나서서는 여보라는 듯이 그에게 무자비하게 살수를 펼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약사가 나서서 그와 같이 한다면 최후에 가서야 자기 차례가 되어 왕중양과 겨룰 수가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왕중양이 하루반 동안에 잇달아 세 명의 무림고수를 상대하지만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에는 왕중양이 이미 하룻밤을 쉬게 되므로 소모된 정력도 회복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따라서 구양봉은 세번째에 자기가 나서겠다고 주장을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번째는 왕중양이 황약사와 격렬하게 겨루고 난 후가 되기 때문이었다. 황약사의 재간은 구양봉이 이미 본 바가 있지만 왕중양과 별 차이가 없었다. 설사 왕중양이 그를 이긴다 하더라도 무척 힘겨워 할 것이고, 그러면 자기 자신은 왕중양이 피로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가하게 되어 크게 유리할 것이 아니냐 하는 맥락에서 구양봉은 혼자에게 자기의 뜻을 말한 것이었다. 이때 홍칠공은 갑자기 불쑥 입을 열었다. [안되오. 그 방법은 불공평하오.] 구양봉은 속으로 다급해진 나머지 노해서 눈을 부라렸다. [늙은 거지. 당신은 또 개방귀 같은 수작을 할 참이오. 약형의 그와 같은 안배는 더없이 공평하단 말이오.] 홍칠공은 지지 않고 맞섰다. [노독물 우리가 이번에 화산으로 와서 논검(論劍)을 하자는 것은 무공을 빌어서 친구를 사귀자는 뜻 이외에 그 어느 사람을 상대하자는 것이 아니오. 그 어느 누구가 재간에 의해서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압도한다면 그의 무공이 천하 제일인 것이고, 그 어느 누가 지게 되었더라면 하하 웃고서 털털 털어버리고 털끝만치도 원망하는 감정이 없어야만이 영웅호걸의 소행이라 할 수가 있소. 오늘은 무공을 겨룬지 사흘째 되는 날로 우리 몇 사람이 모두 다 손을 써보았지만 오직 왕진인만이 전혀 우리들과 손을 써보지 않았고, 노독물과 약형도 제대로 겨루어 보지 않았소. 그리고 나 또한 단황야와도 한번 초식을 맞추어 보지 않았소.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것이 공평하다는 것이오.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합시다. 왕진인이 우리와 네 차례에 걸쳐 무공을 겨루는 동안에 우리 한번 맞서본 적이 없는 네 사람이 피차에 나서서 각기 두 차례를 겨루어 매화 사이에 대나무를 심는 것처럼 하잔 말이오. 그러니까 매화간죽(梅花間竹)이라고 왕진인이 우리 네 사람과 두 차례에 걸쳐 손을 쓰도록 하고 우리 네 사람끼리 또한 스스로 한 차례씩 손을 쓰자는 것이오. 어떠시오?] 황약사와 단황야는 연신 좋다고 부르짖었다. 구양봉은 홍칠공의 그런 제안에 이가 근질근질해지도록 미워졌다. 그러나 홍칠공은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자 되었소. 이제 해도 좀 기울어진 것 같으니 내가 먼저 전진교주와 첫번째로 겨루도록 하겠소.]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물었다. [칠형은 권각법을 겨루자는 것이오, 아니면 무기를 겨루자는 것이오?] 홍칠공은 대답했다. [이 늙은 거지에게는 무기가 없소. 오직 한 자루의 개를 때리는 지팡이가 있지만 그 지팡이는 개를 때리고 쫓기 위해서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 늙은 거지는 한번도 그 지팡이를 가지고서 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소이다. 왕진인이 방금 나의 항룡십팔장을 받아 보겠다고 말씀을 하셨으니, 나도 항룡장으로 상대를 해드리리다.] 왕중양은 좋다고 대답을 하고 한복판으로 나가서는 우뚝 버티고 서서 두 주먹을 살짝 쥐는 형태로 자세를 가다듬고서는 부르짖었다. [칠형,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오.] 홍칠공은 응했다. [그럼 실례하오!] 왼손을 들어 원을 그리듯 하다가 오른팔을 떨쳐 허공에다가 하나의 반원을 그리더니 휙하니 항룡유회라는 일초를 펼쳐서는 왕진인의 가슴팍을 후려치려고 들었다. 전진교주 왕중양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여유있게 두 소맷자락을 휘둘러 태을권법 가운데 노자휘수(老子揮袖)란 일초를 펼쳐서는 한가닥 장력을 쏟아내 홍칠공의 장력을 한켠으로 밀려나도록 해소시켰다. 홍칠공은 한마디를 던졌다. [훌륭한 초식이오!] 그리고 오른팔을 뻗쳐서는 견룡재전(見龍在田)이라는 일초를 펼쳐서 전진교주의 어깨죽지를 옆으로 후려치려고 했고, 왼손으로는 곧이어 술병으로 오른쪽 팔굽 있는 곳으로부터 뻗쳐 내더니 광룡재야(狂龍在野)라는 일초를 펼쳤다. 잇달아 이초를 펼쳤으나, 왕중양의 허리께를 후려치려고 들었다. 왕중잉은 무척 심오한 공력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 보였다. 왼쪽 어깨를 슬쩍 떨구면서 먼저 도제금정(倒提金鼎)이라는 일초를 펼쳐 홍칠공의 맞은편에서 뻗쳐 오는 장력을 해소시켰다. 이어서 몸뚱아리를 웅크렸다가 빙글 돌리며 용행분랑(龍行分浪)이라는 일초를 펼쳤으며 다시 홍칠공의 팔굽밑으로 비스듬히 뻗쳐 오는 왼쪽 주먹의 권풍을 해소시켰다. 이 두 번 쓸어 친 것은 꼭 알맞아 마치 물이 흐르고 구름이 떠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황약사와 단황야는 옆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전진교주는 홍칠공의 삼초를 해소시키고 나더니 태을권법을 갑자기 전환, 공격의 수법으로 바꾸어서 천근추와 연환장이라는 이초의 수법을 펼쳐 냈다. 겉으로 볼 적에 그 두 수는 한 수의 이식으로 나누어져있는 것 같았으며 눈깜짝할 사이에 잇달아 사초의 공세를 퍼부었다. 이에 홍칠공은 후닥닥 뒤로 한 번 물러서더니 신룡도미라는 일초를 펼쳐서는 냅다 팔을 쓸 듯이 반격을 가함으로써 중양진인의 그와 같은 절초를 해소시켰다. 이 개방방주는 항룡십팔장을 펼쳐내기 시작했는데, 일초 일식이 맹렬하기 이를데 없어 장풍이 휙휙 소리가 났다. 왕중양은 태올권으로만 응수를 했는데 초식을 보는 대로 해소시켜 나가거나 깨뜨렸다. 그리하여 이백여 합을 겨루게 되었을 때에는 해가 서쪽 하늘로 지고 초생달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또 두 사람은 여전히 승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황약사가 이미 날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그만두라고 고함을 지르려 할 때에 홍칠공이 갑자기 한 소리 호통을 내지르며 두손을 일제히 뻗쳐 내 쌍롱봉주라는 일초를 펼쳐서는 왕중양의 가슴팍으로 와락 장력을 밀어 보냈다. 그러나 왕중양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살짝 뒤로 반걸음 물러서더니 왼손의 주먹을 쳐들면서 두 손가락을 모아 창칼처럼 세우고는 홍칠공의 공세를 맞아 찌르려고 들었다. 회한하게도 그가 그와 같이 찌르려고 하는 수법은 정말 너무나 수월해 보여 전혀 힘을 들이는 것 같지 않았는데 홍칠공이 휘청 하더니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그리고는 두손을 거둬들이며 부르짖었다. [이 늙은 거지가 졌소이다. 정말 선천공이란 재간이 홀륭하구료!] 홍칠공이 두손으로 격출해 내는 힘은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에 상대방이 황약사나 단황야 그리고, 구양봉 세 사람 가운데 어떠한 사람이라도 맞바로 그의 그와 같은 한 수를 받을 엄두를 내지는 못했으리라. 그러나 왕중양은 선천신공으로 두 가닥의 장풍을 맞아서 그 빈틈 사이로 일지를 찍으려고 들었던 것이었다. 예를 든다면 선천공으로 쏟아낸 경력은 마치 한 자루의 형체없는 예리한 검과 같이 홍칠공의 가슴팍을 찌르려고 들었기 때문에 흥칠공은 부득불 뒤로 물러선 것이었다. 그는 위인이 무척 강직한 사람이라 왕중양이 태을권으로 자기와 초식을 겨루고 있으나 겨우 칠성의 공력을 썼을 뿐이기 때문에 자기가 조금 전 그와 이백여 합까지 치룰 수가 있었지만 만약에 전진교주가 처음부터 선천공이란 절기를 펼쳐 내었다면 그 자신은 이미 패퇴하게 되었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홍칠공이 이와 같이 졌음을 시인하게 되자 사흘째의 대결은 끝이 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모두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타좌하여 운기헹공하면서 기나긴 밤을 보냈다. 구양봉은 가부좌를 틀고 타좌법으로 운기행공을 하면서 궁리했었다. (왕중양이 그저 손가락으로 가볍게 한번 짚었을 뿐인데 홍칠공은 즉시 졌음을 시인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떠한 권법일까? 틀림없이 그것은 구음진경에 실려 있는 재간일 것이다) 서독은 생각하고 생각하던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밤빛이 무르익어 삼경을 알리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더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질문을 던졌다. [왕진인, 이 몸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일을 당신에게 가르침 받을까 하오.] 왕중양은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을 해 보시오.] 구양봉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왕진인, 조금 전 홍방주를 물리친 재간은 구음진경에 실려 있는 재간이 아니시오.] 왕중양은 대답했다. [아니오. 이것은 선사께서 남기신 재간이오. 구음진경에 실려 있는 재간은 태반이 방문좌도로, 빈도는 한 가지도 연마한 적이 없소. 도가의 제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소. 만약 거짓말을 했다면 영원히 진흙바닥의 지옥으로 떨어져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오.] 구양봉은 코웃음을 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시였다. 홍칠공은 그를 바라보았다. [노독물,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 나중에 당신이 손을 쓰게 되었을 때에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요!] 구양봉은 한소리 냉소를 흘렸을 뿐 다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어느덧 밤이 지나가게 되고 다시 새벽이 찾아왔다. 이제는 화산에서 무공을 겨룬 지도 나흘째가 되는 셈이었다. 황약사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서는 입을 열었다. [왕진인 이번에는 소제의 차례이오. 아무쪼록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구려.] 과거 황약사는 왕중양과 세 차례나 손을 쓴 적이 있었다. 첫번째는 황해에 있는 어느 황량한 섬에서였고, 두 번째는 화산 꼭대기에서였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도화도에서 겨룬 것이었다. 세 번 다 황약사는 열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이번 화산에서 무공을 겨루게 된다면 그가 왕중양을 상대로 겨룬 것이 네번째가 되는 셈이었다. 왕중양은 선뜻 응했다. [얼마든지 상대를 해드리리다. 황도주 먼저 초식을 펼쳐 보시오!] 황약사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손을 들어서는 휙 우르릉 하니 벽장을 펼쳐 내 왕중양의 가슴팍을 내지르려고 들었다. 뭇사람들은 그가 틀림없이 도화도의 밑천이 되는 재간이라고 할 수 있는 낙영장을 펼치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뜻밖에도 황약사가 처음부터 벽공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뜻밖이라 일순 어리둥절해 지는 표정이었다. 왕중양은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고 서둘지 않고 기다란 소맷자락을 한번 휘둘러 여전히 태을권 안에 있는 어(御)자결을 이용해서 황약사의 벽공장력을 바깥쪽으로 올려 나가도록 만들었다. 황약사는 앞으로 슬쩍 달려들면서 휙휙 하고 잇달아 삼장을 공격해 왔는데 모두 다 낙영장법이었다. 그리고 삼장을 디민 이후에 한번의 발길질까지 가해진 것이었다. 홍칠공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그는 삼장에 한 발길질을 곁들이고 있구나. 그렇다면 두 가지의 재간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닌기) 왕중양은 여유작작한 모습을 보이며 태을권을 자유자재로 뿌려 냈다. 동쪽을 가리고 서쪽을 막는 등 억지로 힘을 들여서 손을 쓰는 것 같지가 않았다. 황약사는 한 수 한 수마다 숭기를 제압하기 위해서 공세를 펼치게 되었는데 때로는 세 번의 손질에 한 번의 발길질을 가하기도 했고, 때로는 다섯 번의 손질에 한 발길질을 하는가 하면 때로는 잇달아 두 번이나 세 번의 발길질을 했다가 다시 낙영장을 펼쳐 내곤 했다. 변화가 다단해서 상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어지럽게 만들었다. 왕중양은 포원수일(抱元守一)의 수법을 쓰는 한편 태을권법으로 억세게 봉쇄하거나 부드럽게 해소시키는 등 상대방이 허초를 펼치면 자기도 허초를 펼쳤고, 상대방이 실초를 펼치면 실초를 펼쳐서 상대를 했다. 따라서 황약사가 허색상숭(虛塞相乘)의 재간을 펼쳐 냈지만 왕중양은 시종 여유있게 상대를 해주고 있었다. 쌍방이 이와 같이 한 사람은 공격하고 한 사람은 서위하는 가운데 휘청거리면서도 점점 초식들을 연신 펼쳐 내 이백여 합을 싸웠으나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도화도주는 몇 년 동안 낙영장과 소엽퇴를 열심히 연구하고 익혔기 때문에 이번에 왕중양과 손을 쓰게 되었을 때에는 중양진인을 쓰러뜨렸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한데 한번 겨루어 보는 순간 쌍방의 재간이 격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양봉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대명이 쟁쟁한 도화도주도 여전히 저처럼 별볼일 없구나. 책을 읽고서 써먹을 때가 되어서야 적게 보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는 말이 있는데 이 한마디의 말은 정말 틀리지 않았구나.) 쌍방은 다시 오십여 초를 겨루었다. 황약사는 갑자기 손을 뻗쳐 옷깃쪽으로 가져가더니 그 옥소를 뽑아서 손에 들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낙영장을 펼쳤고 오른손으로는 옥소를 판관필로 혈도를 짚는 초식을 펼쳐 내서는 움츠렸다 뻗쳐냈다 하면서 착실하게 왕중양의 몸에 있는 혈도를 겨누고서는 공세를 해왔다. 이렇게 되자 그의 위세가 대뜸 한 배나 더 증가되었다. 왕중양은 비웃더니 태을권을 가볍고도 부드럽게 펼쳐서는 여유있게 해소를 시켜나갔고, 혹간 그 가운데에 두 대의 무서운 반격을 곁들여서는 황약사를 연신 뒤로 물로서도록 만들곤 했다. 홍칠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한숨을 내뿜었다. (아, 왕진인은 하늘이 내린 기재로군. 이 늙은 거지가 젊었을 때에 너무 게으름을 피운 모양이야. 아이쿠!) 원래 홍칠공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을 때에 황약사가 옥소를 뻗어내 주양진인의 중봉혈(中封穴)을 짚으려고 들었을 때 왕중양의 손이 번개같이 바깥쪽으로 뻗쳐 나면서 덥석 옥소의 윗쪽을 거머쥐고 말았다. 황약사는 속으로 다급해진 나머지 왼손으로는 한 대의 벽공장을 후려쳐 왕중양의 아랫도리를 갈기려고 들었다. 그러면 왕중양이 틀림없이 몸을 솟구쳐서 피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자기가 옥소를 다시 나꿔채서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었다. 한편 왕중양은 옥소를 쥐고 있던 손을 갑자기 한번 떨쳐서는 선천공을 쏟아냈다. 그러자 황약사는 자기의 손에 들려 있는 옥소가 화끈 달아 오르는 것을 느꼈으며 막 커다란 화로에서 꺼낸 낙철(烙鐵)처럼 뜨거운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황약사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놓고 말았다. 왕중양은 그 바람으로 옥소를 밀어서는 황약사 가슴팍에 있는 장문혈을 살짝 짚었다. 도화도주는 운기해서 혈도를 지키려고 했으나 이미 때늦은 감이 있어 자기는 틀림없이 땅바닥에 쓰러지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왕중양의 그와 같이 짚는 힘은 무척 교묘했다. 그저 그의 혈도를 가볍게 한번 댔을 뿐이며 그 찰나에 경력을 뻗쳐 내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그 즉시 옥소를 황약사의 손아귀에 넣어 주고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면서 몸을 날리더니 뒤로 물러서고는 말했다. [황도주, 양보해줘서 고맙소.] 황약사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왕중양이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틀림없이 쓰러지고 말았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화도주는 옥소를 거두고 말했다. [전진교주는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려. 이 황모는 진정 승복했소이다.] 왕중양은 잇달아 두 번의 무공겨룸에서 이긴 것이었다. 그런데 구양봉은 옆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서 속으로 여간 켕기지 않았다. (홍칠공과 황약사 두 사람의 재간으로 말하면 내 자신과 백중지간에 있다. 그러한 그들 두 사람이 왕중양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니 내 자신이 만약 그와 겨룬다 하더라도 이길 가망은 전허 없는 것이 아닌가.) 홍칠공은 고개를 돌리고 구양봉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노독물, 똑똑히 보았소. 그 어느 누가 천하 무공의 일인자인지. 당신은 세번째 시합에 나서겠소, 나서지 않겠소?] 구양봉은 매서운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어째서 나서지 않는단 말이오. 늙은 거지, 우리 다시 한번 겨뤄봅시다.] 왕중양은 두 번의 겨룸에서 이겄으나 표정은 무척 겸손하고 온화했다. 그들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자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 함께 잠시 쉰 후에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이때 구양봉은 왕중양에 대해서 어느 정도 꺼리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아무 말도 못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홍칠공은 이번에는 오래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지루한 듯 몸을 일으키더니 주변으로 산책을 간다고 자리를 떴다. 한 시간이 지나게 되었을 때에야 홍칠공이 그제서 어슬렁거리며 돌아오더니 소리높여 부르짖었다. [시간이 되었소. 이제 마땅히 그 어느 누가 무공을 겨뤄야 하는 것이오?] 단황야는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칠형, 이번에는 내가 나서서 한몫 거들어 흥을 돋구도록 하겠소. 고명한 절초를 베풀어 주시오.] 홍칠공은 그 말을 받았다. [이 늙은 거지야, 무슨 고명한 절초니 멋난 초식이니 하는 것이 있겠소. 나는 다만 항룡십팔장으로 당신의 혼원공과 금강권을 받아 보리다. 이 늙은 거지가 지게 된다면 엉덩이를 툭툭 털고 떠나겠소. 그러나 만약에 요행히 지지 않는다면 무공을 다 겨룬 후에 다시 태백호로 가서 술을 좀 훔쳐서는 이레낮 이레밤을 두고 마시도록 하지] 단황야는 빙그레 웃었다. 그들 두 사람은 더이상 인사치레를 다지지 않고 한복판으로 나아가 섰다. 그리고는 각기 주먹을 들고 발을 움직였다. 홍칠공은 처음부터 항룡십팔장을 펼쳐서는 차근차근 기선을 제압하려는 공세를 펼쳐 냈다. 단황야 역시 금강권으로 맞아 싸웠다. 그들 두 사람은 마치 구리종이 무쇠로 만들어진 북에 부딪치는 강공으로 맞섰다. 그 바람에 장풍이 일게 되고 눈들이 다투어 분분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두 사람이 이백여 합을 싸웠으나 여전히 승부는 가릴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다. (오늘 화산에 무공을 겨루러 온 저들은 내 자신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사람 각자가 특기를 가지고 있다. 홍칠공과 단황야는 모두 다 외장에 치우친 재간이라 너무나 굳건하게 변했고, 황약사와 구양봉은 내경에 치우쳤기 때문에 너무나 부드럽다는 결점을 지니게 되었다. 만약에 이들을 서로 섞어서 나누어 놓는다면 전무후무한 무림의 고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완전한 사물이 없는데 더더구나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왕중양은 그야말로 감격에 젖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 홍칠공과 단황야는 근 삼백여 합을 겨루게 되었다. 단황야는 여전히 침착했으나 홍칠공은 약간 지리한 듯 보였다. 갑자기 그는 한소리 호통을 내지르더니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서는 열 손가락을 마치 독수리의 발톱처럼 만들어서는 단황야의 머리 위로 덮쳐 내리며 손가락으로 찍을 듯이 공세를 취해 왔다. 왕중양은 그만 깜짝 놀랐다. 정히 입을 열고 그만두라고 부르짖으려고 했을 때에 단황야는 피하지도 않았고 손을 들어 막지도 않았다. 다음 순간 '펑'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두 사람의 그림자가 좌우로 나뉘어졌다. 홍칠공은 일고여덟 걸음 밖으로 내닫게 되었는데 하마터면 털썩 쓰러질 뻔했다. 구양봉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고소하다는 듯 소리 높여 외쳤다. [늙은 거지가 졌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황야는 쿵쿵 소리를 내면서 휘청휘청했다. 하마터면 벌렁 나자빠질 뻔했다. 다행히 그는 즉시 천금추의 신법을 써서 몸을 비틀며 흔들 하고는 발끝을 땅바닥에 콱 짚고 서서 힘을 주었기 때문에 요행히 쓰러지지 않을 수가 있었다. 쌍방은 서로 인삿말을 하고는 적당히 이번 겨룸을 일단락 매듭지었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하늘에는 저녁의 노을빛이 고스란히 사라져 버린 뒤 밤의 장막이 천천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겨울철의 대낮은 너무나 짧아서 황혼 무렵의 석양은 볼 것이 없었다. 홍칠공은 속으로 생각을 했다. (내일은 노독물이 왕진인과 무공을 겨루게 될 차례다. 어디 그가 어떤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지 두고 봐야지.) 모두들 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운기행공에 힘쓰고 있었다. 한데 해가 서산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사물이 회끄무레하게만 보일 정도로 어둠의 장막이 온누리를 뒤덮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노독물이 슬그머니 일어나 다른 네 사람을 한번 가볍게 쓸어 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남쪽으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갔다. 그 모습은 흡사 산책을 가는 것 같기도 했다. 북개 홍칠공은 서독이 몸을 일으키자 벌써 정신을 가다듬고서는 눈을 반쯤 뜬 실눈을 하고 서독이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서독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자 고개를 한번 기웃거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달려갔다. 북개는 서독이 나간 방향으로 나는 듯이 쫓아갔다. 향 반대 탈 시간도 되지 않아 어느덧 산 뒤쪽에 이르게 되었는데, 원래 화산은 북쪽을 향해 서 있는 꼴이어서 산뒤쪽이 바로 남쪽의 햇살을 받게 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둔턱쯤에 세 개의 하얀 천막이 쳐져 있고, 천막 앞에는 십여 명의 하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있었다. 앞서 달려간 구양봉은 이미 천막 앞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십여 명의 백의인들은 허리를 땅에 닿을 정도로 구부리며 서독에게 절을 했다. 보기에는 신하가 황제에 대하는 것보다 더욱더 공경하는 태도였다. 홍칠공은 한가닥 연기처럼 몸을 날려서는 천막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천막 밖의 땅바닥에 뭔가 새까맣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홍칠공은 눈썰미가 날카로와 서독이 백타산에서 데리고 온 뱀떼들이란 것을 즉시 알아볼 수가 있었다. 수만 마리나 되는 뱀떼들이 꾸불텅거리며 모여서는 늘어서 있는데 그 수가 너무나 엄청나서 종횡으로 반마장의 산기슭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시피 했다. 홍칠공은 그만 난처해졌다. (만약에 내가 다가간다면 독사들이 낯선 사람의 냄새를 맡고는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니 그때 내가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는가?) 갑자기 그는 단황야의 조그마한 금사왕을 떠올렸다. 그 한 마리의 금사는 뱀들 가운데 왕이며 세상의 모든 뱀이나 구렁이의 극성이니 차라리 단황야에게 한번쯤 빌려 사용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하지만 홍칠공은 곰곰히 생각해 보니 갔다가 오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 자신이 서독의 음모를 알아내는데 빠지는 부분이 생겨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금사를 빌리지 않고는 도저히 뱀떼들이 이뤄 놓고 있는 사진을 가로지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홍칠공은 그만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흥칠공이 진퇴유곡에 빠지게 되었을 바로 그때 구양봉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이후에야 다시 나왔다. 그리고 그는 깨진 짐수레 같은 음성으로 곁에 있는 백의의 사내들에게 말했다. [오늘밤 나는 일종의 신공을 연마할 것이니 빨리 연장을 가져오도록 하라!] 한 명의 백의의 사내가 그 말에 즉시 한 자 두 치 길이의 잔의 주둥이만큼 굵은 은으로 만든 관, 즉 은관을 바쳤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은 한 자루의 무쇠로 만들어진 집게를 바쳤다. 원래 이 백의의 사내들은 모두 다 구양봉이 백타산에서 길러낸 사노들이었으며 또한 구양봉 본인의 노복들이었다. 멀찍이서 홍칠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천하에 하룻밤만에 연성할 신공이 어디 있겠는가. 구양봉이란 저 녀석은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모르겠구나.) 이때 구양봉은 은관을 받아들더니 소리높여 외쳤다. [가장 독이 강한 뱀을 열 마리만 잡아오도록 해라. 빨리.] 사노는 대답을 하더니 즉시 뱀떼들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그 사노들의 몸에는 뱀약이 발라져 있는 모양으로 뱀들이 다투어 길을 비켜 주었다. 그리하여 두 명의 사노들은 뱀떼들 안에서 네 마리의 적복사(赤腹蛇), 네 마리의 과수청사(過樹靑蛇), 그리고 한 마리의 금각대사(金脚帶蛇)를 잡아 들고 구양봉의 곁으로 다가갔다. 구양봉은 오른손으로 은관을 쥐고 왼손으로는 한 마리 한 마리 적복사의 꼬리를 손가락으로 휘어잡더니 아래를 향해 내려쳤다. 무릇 구렁이나 뱀의 종류는 그와 같은 수법에 당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의 꼬리를 잡고 한번 패대기를 치기만 한다면 아무리 흉악하고 독이 많은 뱀이라 할지라도 전신이 마비되어 꼼짝을 못하는 법이었던 것이다. 구양붕은 곧 늘어진 듯한 적복사를 은관의 한쪽 끝에다가 디밀었다. 그리하여 뱀이 모조리 은관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겨우 한토막의 꼬리만이 바깥쪽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독사가 은관속으로 들어가게 되니 온몸이 거북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하여 획하는 소리와 함께 뱀 머리가 다른쪽의 은관끝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구양봉은 손이 빠르고 눈이 예리한 듯 어느덧 사노의 손에서 받아든 집게로 뱀의 머리를 꼭 알맞게 뱀의 칠촌자를 끼웠다. 이렇게 되자 뱀은 꼼짝을 못하게 되고 입만 쩍 하고 벌렸다. 구양봉이 힘주어 집게로 누르자 독사는 입으로 한점 한점 검은빛 즙액을 뱉아 내었고, 사노는 즉시 조그만한 그릇을 갖다 받쳐 그 즙액을 받았다. 홍칠공은 확연히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그는 독사의 독액을 거두고 있구나.] 구양봉은 그 적복사가 모든 독액을 뱉어내자 집게를 풀어 주었다. 독사는 그제서야 은관속에서 빠져 나와 땅바닥에 떨어져서는 맥빠진 기색으로 뱀떼들에게로 돌아갔다. 구양봉은 다시 두 번째의 뱀을 똑같은 방법으로 해서 독액을 뽑았다. 구양봉은 이와 같이 독사의 즙액을 짜내는 수법에 무척 익숙하고 숙달된 것 같았다. 삽시간에 십여 마리 독사들의 독액이 모조리 흘러내리게 되고 그릇 속의 즙액도 반쯤은 차게 되었다. 그러자 구양봉은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아서는 두손의 열 손가락을 그릇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는 결코 손가락을 독액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릇의 주둥이와 두세 치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삽시간에 그의 머리 위에서는 허연 기운이 서려서는 피어올랐다. 홍칠공은 상당히 먼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시력이 기이하도록 좋았기 때문에 구양봉의 머리위에서 끊임없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그릇 속의 독사의 독액이 점차적으로 줄어들다가 끝내는 없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릇의 밑바닥에는 이미 아무 것도 없는 빈 그릇이 되었다. 홍칠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깨닫는 바가 있어 속으로 욕을 했다. (정말 악독한 노독물이군.) 원래 오독기경 안에는 여러 가지 이상야릇한 무공을 연마하는 방법이 쓰여 있었다. 구양봉과 구양열 형제는 옛날 백타산에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오독진인의 유해 곁에서 그 기술을 발견하게 되고 형제 두 사람이 똑같이 연마를 한 결과 피차에 초절하기 이를데 없는 절기를 일신에 지니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구양봉은 형의 처와 놀아나게 되고 남에게 알리지 못할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 구양봉은 형의 개성이 언제나 손 씀씀이 악독하고 심보가 악랄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라 아예 먼저 손을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의 형을 죽이고 흔자 오독기경을 차지해서는 합마공을 연성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하지만 오독기경 안에는 합마공 이외에 많은 무공을 연마하는 방법이 실려 있었다. 오독기경 안에는 또한 일종의 독사신공(毒蛇神功)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방법은 열 마리의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뱀들로 부터 방법을 강구하여 뱀의 이빨 흠 속에 들어 있는 독액을 짜내어서는 일종의 특수한 운기행공의 방법으로 독액을 자기의 몸속으로 홉수해 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독액이 일단 몸안으로 스며들게 되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승강공(升降功)을 돋구어서 독액을 열 손가락의 첫번째 토막에다가 억눌러 넣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필요하게 되었을 때에 공력을 쏟아서 사람을 해칠 수가 있고, 손가락 끝이 적의 몸을 찌르게 되었을 때에는 독기가 덩달아 주입이 되어 독사에게 물린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독사가 문 것보다 더욱더 무서운 면을 지니게 되는 것이었다. 무릇 사람이 독사에게 물리게 되었을 때에 어찌 되었든간에 너댓 시간은 지탱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독사신공에 상해를 입은 사람은 반 시간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신공은 다만 일주천의 시각, 즉 열두 시간 동안에만 유지되는데 일주천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독사신공은 그대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사신공을 연마한 사람은 해약을 먹어서 뱀의 독을 제거해야만이 무사할 수가 있었다. 구양봉은 과거 그와 같은 독사신공을 연마하는 것이 무척 번거롭고 또한 열두 시간의 효력 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독기경에 실려 있는 비결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을 뿐 결코 그 방법대로 연마를 하진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일의 대결에 써먹기 위해서 그만 이 음독(陰毒)한 재간을 연마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야말로 서독이 서독이라고 불리워질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홍칠공은 오독기경을 본 바가 없었다. 그러나 개방의 우두머리인 만큼 천하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여서 견문이 넓었다. 그 역시 어렴풋이 남에게 그와 같은 무공을 연마하는 비결을 들은 것 같았는데 구양봉이 신공을 연마하는 모습을 보고 칠팔성정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야단났구나. 이 일은 왕진인에게 알려주어야 마땅하다. 만약에 이 거러지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내일 왕진인이 정말 저 녀석의 술수에 말려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칠공 역시 명성을 떨친 인물이며 무림의 규칙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 오로가 화산에 모인 것은 명목상으로는 구음진경을 다투는 것이었지만 기실에 있어서는 무공으로 친구를 사귀자는 것이었고, 그 누가 모든 사람들을 재간으로 압도하게 되었을 때에는 천하제일무공의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양봉의 이와 같은 신공 역시 재간 가운데 하나인지라 그가 다른 사람을 암산해서 해치려고 한다고 해서 영웅호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홍칠공은 속으로 구양봉의 소행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명명백백하게 그러한 사실을 자기의 입으로 털어놓아 전진교주를 감싸고 돌았다는 혐의를 받는 일은 결코 달가와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홍칠공은 이와 같은 생각에 도달하게 되자 그만 맥이 빠져서 입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돌려서 곧장 화산꼭대기를 향해 되돌아갔다. 이 무렵 어둠의 장막은 이미 온누리를 덮고 있었고 드문드문 별들도 반짝이고 있었으며 상현달도 은은히 빛을 비춰 주고 있었다. 홍칠공이 화산의 꼭대기로 올라서 보니 왕중양과 황약사 그리고 단황야 이 세 사람은 가부좌를 틀고서 품(品)자 모양으로 앉아 있었다. 단황야는 어제 홍칠공과 한차례 대결을 벌이게 되었을 때에 개방방주의 신공절기에 충심으로 탄복했던 터이라 홍칠공이 산아래에서 어슬렁거리며 올라서는데 그 얼굴 표정이 무척 기이한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입을 열고 물었다. [칠형, 어디 갔다 오시는 길이오?] 홍칠공은 빙그레 웃고 대답했다. [이 늙은 거지가 가면 어디로 가겠소. 뒷산으로 가서 뱀을 잡았을 뿐이오.] 단황야는 그 말속에 서려 있는 뜻이 있는 것 같아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칠형은 무슨 뱀을 잡아서 돌아왔소. 나에게 구경을 시켜 줄 수 없겠소?] 왕중양은 조용히 말했다. [여러분들은 더 말하지 마시고 정신을 기르도록 해서 내일 준비를 하도록 하시구려.] 홍칠공은 그 말을 받았다. [왕진인 이 늙은 거러지의 입은 첫째로 먹는 것을 좋아하고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좋아하오. 그러니 왕진인은 왕진인의 운기행공을 계속하도록 하구려. 이 늙은 거지는 오늘밤 한차례 이야기를 해야겠소.] 단황야는 실소했다. [칠형, 그날의 이야기는 정말 노독물을 너무 괴로워할 정도로 조롱했더구려. 그런데 이제 또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죠?] 홍칠공은 이야기조로 말을 이었다. [옛날에 한 마리의 독사가 있었는데 살기가 귀찮아졌소. 그래서 그는 자결을 하려고 했는데 뱀이 무슨 방법으로 자결을 하는지 아시오? 오직 한 가지 방법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의 꼬리를 깨무는 것이오.] 단황야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고, 왕중양마저도 그만 빙그레 웃고 말았다. 홍칠공은 전진교주를 한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독사는 죽기로 결심을 했기 때문에 몸뚱아리를 다리처럼 틀고서는 무자비하게 독이 서려 있는 이빨을 쩍 벌리고 자기의 꼬리를 깨물려고 했소. 그러나 그 이빨이 자기의 꼬리에 닿게 되었을 때에는 그만 깨물 수가 없었소.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지난날에 자기의 먹이를 깨물게 되었을 때에 먹이가 독이 퍼져 죽는 참혹한 광경을 떠올렸기 때문에 그만 간담이 떨리고 서늘해져 도저히 자기의 꼬리를 깨물 수가 없었소. 그는 몇 번이나 시험을 해 보았으나 도저히 자기의 꼬리를 깨물 용기가 없었다오. 그래서 끝내...] 이야기에 푹 빠져 있던 단황야는 잠시 열을 두자 재빨리 물었다. [끝내 어떻게 되었지요? 물에 뛰어들어 죽었나요?] 홍칠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는 같은 종류의 독사를 찾아내서는 그 독사에게 자기를 깨물어 죽여 달라고 부탁했소. 그런데 그 독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는 것이었소 <안되오. 우리 동료를 물지는 않소. 당신이 죽고 싶으면 역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시오.> 그 독사는 한동안 생각을 해보고 나서 별수없이 산아래로 기어서 내려가 사람들에게 모습을 들어내 산 채로 사람들에게 얻어맞아서 죽게 되었소. 이와 같은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이 비록 천하의 영물로 자처하고 만물을 강아지처럼 여기지만 언제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볼 수가 있으니 정말 뱀만도 못한 것이 아니겠소!] 단황야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고, 왕중양 역시 총명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라 즉시 홍칠공의 이야기 속에 깊은 뜻이 서려 있는 것이며 결코 우스개 소리로 지껄이는 말투가 아니라 반드시 그 어떤 빌미가 있어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홍칠공이 단황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단형, 뱀을 잡아본 적이 있소? 독사를 잡을 때에 독사의 머리가 자기의 몸에 절대로 닿도록 하지 않았겠지요?] 단황야는 대답했다. [그거야 물론이지요. 만약에 독사에게 물리게 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소이까?] 홍칠공은 다시 왕중양에게 말했다. [왕진인 잘 들었소? 이후에 독사를 만나게 되거든 절대로 독사에게 몸을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왕중양은 깨닫는 바가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이날밤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런데 기나긴 밤이 사라지려 하고 날이 회뿌옇게 밝아을 무렵 화산 아랫쪽에서 한 백의의 인형이 나타났다. 홍칠공은 그 백의의 인형을 바라보며 혼자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독사가 왔군. 그가 오늘 무슨 술수를 부리는지 두고 봐야지.] 왕중양은 더욱더 속으로 짚이는 바가 있었다. 삽시간에 구양봉은 어느덧 그들과 가까운 곳에 이르게 되었고, 소리높여 불렀다. [왕진인, 홍방주, 약형, 그리고 단형 어젯밤에는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려. 나의 사노들이 못나서 뱀떼들이 흩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하룻밤 동안 정성을 들여서 가까스로 뱀떼들을 다시 모아 놓을 수 있었소.] 홍칠공은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았다. [그렇지, 노독물은 자기의 독사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지. 아마 자기의 애비에게도 그렇게 효성을 다하지는 못할껄.] 구양봉은 그를 한번 흘겨 주고는 왕중양을 향해 말했다. [왕진인, 이 구양봉은 오늘 당신의 고명한 절초를 가르침받도록 하겠소.] 왕중양은 응락했다. [별말씀을 다 하시오. 자 오시오.] 그러면서 그는 날렵하게 한복판으로 가서 섰다. 구양봉은 즉시 달려들지 않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서 한 쌍의 괴이한 눈동자를 부릅뜨고 왕중양의 두 손만 노려본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도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왕중양은 그가 펼친 것이 합마공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구양봉은 아마도 자기의 권장법이 홍칠공이나 황약사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홍칠공과 황약사마저도 왕중양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서자 마자 합마공을 펼친 모양이었다. 왕중양은 합마공이 서독의 밑천이 되는 재간이니 만큼 무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자신에게는 합마공을 제압할 수 있는 선천공이 있었지만 선천공은 가장 정기(精氣)를 소모시켰다. 그래서 그 역시 이정제동(以靜制動) 수법으로 느긋하게 참고서 공격을 펼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화산의 꼭대기에서 하나는 웅크리고 하나는 선 채로 대치한 가운데 한 시간을 흘려 보냈다. 붉은 해는 어느덧 높다랗게 솟아올라 산맛을 그려 놓은 것 같았으며, 숲속의 나무끝에 소복하게 쌓인 눈들은 얼음처럼 딱딱하게 밤새 굳어졌다가 점점 녹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왕중양과 구양봉은 그 누구도 먼저 손을 쓰려고 하지 않는 듯 여전히 두 채의 바위처럼 그곳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대치하고 있었다. 단황야는 무척 의아한 생각이 들어 홍칠공에게 물었다. [칠형, 설마하니 그들은 사흘밤 사흘낮을 두고 시루는 게 아닐까요?] 홍칠공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갑자기 왕중양이 한걸음 내디디며 먼저 공세를 취해 손을 들어 추산새해(推山塞海)의 일초를 펼쳐서는 구양봉의 왼쪽 눈썹을 후려치려고 들었다. 구양봉은 '켁' 하는 큰소리를 내지르며 두손을 위로 쳐들면서 온 몸뚱아리를 위로 직선으로 도약시켰다. 그 모양은 그야말로 높이 뛰기를 하는 커다란 두꺼비 같았다. 그리고 두손을 쳐드는 곳에 한줄기의 엄청난 공력을 내쏟아 와락 밀어 보내는데 그 기세의 맹렬함은 우뢰가 별안간 터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왕중양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태을권의 사자결을 써서 가볍게 바깥쪽으로 당김으로써 합마공력을 바깥쪽으로 홀러가도록 만들었다. 구양봉은 일격이 빗나가게 되자 다시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는 조금 전과 다름없이 왕중양과 대치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약 밥 한끼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에 구양봉은 그제서야 '끼약' 하는 큰소리를 내지르며 왕중양에게 덮쳐 드는 시늉을 했다. 두 손을 뻗어 내는 곳에 세찬 공력이 산이라도 밀어내고 바다라도 뒤엎어 놓을것처럼 몰려 들었다. 왕중양은 다시 태을권으로 슬쩍 당겨 그 세찬 공력을 해소시켰다. 그러나 전진교주가 팔을 쓰윽 아래로 내려뜨리면서 반격을 시도코자 했을 때에 구양봉이 다시 몸을 날려 되돌아가 일련의 땅바닥에 쭈그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앞으로 나아가 공격을 하지 않았고 구양봉도 쭈그리고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시에서 오시에 이르기까지 세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모두 다 오초를 겨우 교환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한다면 반 시간만에 일초식을 교환한 셈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싸우는 것이 답답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기실은 저들 두 사람이 이와 같이 대결을 벌이는 것은 진정 목숨을 걸고 생사를 다투는 시초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좀처럼 쉽게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손을 써서 공격을 하게 된다면 혼신의 공력을 내쏟게 되고 그 재빠름은 번개와 같아 단 일격에 적의 목숨을 빼앗아야만이 시원하겠다는 식으로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털끝 같은 차이나 겨자알 같은 간격이라 할지라도 생사와 승부를 판가름할 수가 있었다. 홍칠공은 속으로 조바심이 났다. (왕진인은 선천공의 재간이 있는데 어찌하여서 펼쳐 내 단 일격에 그를 때려 눕히지 못하고 이토록 시간을 끌면서 기운을 빼는 것일까. 저 노독물이 어젯밤 연성한 무공을 어찌하여서 펼치지 않는지 또 모르겠구나. 정말 이상하다.) 기실 구양봉은 어젯밤에 독사신공을 연성했던 만큼 그 역시도 펼치고 싶었다. 하지만 무릇 고수들의 무공을 대결함에 있어서 순간순간이 그야말로 놀란 기러기나 매가 찰나적으로 허공을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처럼 한번 상대방과 소맷자락이라도 닿는 순간에 떨어지곤 했다. 뿐만 아니라 주먹을 쓰든 손을 쓰든간에 좀처럼 적의 팔이나 손목과 접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십중팔구 상대방의 몸 석 자 밖에서 훌쩍 스칠 듯이 지나가기 때문에 더더욱 몸과 몸끼리 부딪치는 일이 드물었다. 따라서 그는 독사신공을 시종 준비만 했지 사용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서독은 잇달아 몇 번이나 합마공을 펼쳐서는 산이라도 무너뜨리고 바다라도 뒤엎을 것 같은 경력을 쏟아내었지만 시종 왕중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별안간 그는 기경(氣勁)을 거두고 신타설산장법을 펼쳐냈다. 먼젓번에 합마공을 사용할 때의 그 느릿하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서는 질풍같이 종잡을 수 없도록 빙글빙글 사면 팔방에서 마구 돌아가며 왕중양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홍칠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자 즉시 알아차리고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구나. 그는 독사신공을 사용하려고 하는데 왕진인이 내가 말한 이야기를 깨닫고서 일찌감치 경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왕중양은 서독과 손을 쓰게 되고 사오초를 교환하게 되었을 때에야 구양봉의 합마공이 맹렬하고 사납기 이를데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지 그 공경(功勁)만 따진다면 황약사의 벽공장이나 단황야의 금강권, 홍칠공의 항룡십팔장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그와 같은 합마공은 왕중양 자신이 선천신공만 펼쳐내기만 한다면 단 일격에 깨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왕중양은 역시 전진교주이요, 넓고 넓은 도랑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구양봉이 이 정도로 재간을 익히는 데는 정말 많은 노력을 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자기는 구양봉과 그 어떤 커다란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절정의 재간을 펼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고 생각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여러모로 사정을 봐주게 되었던 것인데, 구양봉이 신타설산장법을 펼치게 되자 왕중양은 속으로 마땅치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합마공을 펼쳤어도 나를 쓰러뜨릴 수 없었는데 이미 모든 재간을 다 쏟아 나와 더불어 시루어 왔는데, 이와 같은 신타설산장법으로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지? 가소롭군!) 그런데 그와 같은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구양봉은 두손을 바짝 다가들며 빙하주지(憑河周地)라는 일초를 펼쳐서는 왼쪽은 주먹으로 오른손은 손바닥으로 잇달아 공세를 펼쳐서는 사초를 휘두르며 달려드는데 그 재빠름이 질풍과 같았다. 왕중양은 그의 수법이 교활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보고서는 조금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즉시 태을권법의 이(履)자결을 써서는 구양봉의 손목을 슬쩍 잡아당기면서 그의 경력(勁力)을 한쪽으로 밀려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구양봉은 벼락같이 두팔을 활짝 벌리고 주먹을 갈고리처럼 만들었다. 마치 열 손가락이 새꼬리처럼 만들어서는 움츠렸다 뻗치면서 왕중야의 팔을 나꿔채려고 들었다. 홍칠공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야단났다.] 그는 왕중양이 틀림없이 서독의 술수에 말려들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구양봉이 독사 신공을 사용하게 된다면 중양진인은 반드시 사독에 중독이 되어 바닥에 쓰러지리라고 내다본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토가 엇갈리게 되고 왕중양의 너털웃음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쿵' 하는 커다란 소리와 더불어 한 사람의 그림자가 삼장밖으로 날아갔다. 하마터면 화산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이 느닷없이 일어난 변화에 홍칠공은 뜻밖으로 여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황약사와 단황야와 같이 내외공을 겸비하고 두눈이 번갯불처럼 예리한 무림의 고수들마저도 아리송함을 느끼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을 때에 왕중양은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안색이 태연자약했다. 구양봉은 시퍼러죽죽한 얼굴을 하고서는 목석으로 깎아 놓거나 빚어 놓은 것처럼 멍청하니 저쪽에 서 있었는데, 잠시 후에야 서독은 갑자기 몸을 틀더니 곧장 산아래 쪽으로 달려갔다. 흥칠공은 불렀다. [노독물, 이번 대결은 그만두고서 혼자 떠나는 것인가?] 구양봉은 목쉰 소리로 대답을 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다시 한 시간 후에 틀림없이 달려와 다시 여러분들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소.] 그 한두 마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이미 십장 밖에 달려가고 있었고, 삽시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홍칠공은 탄식했다. [저와 같은 재간을 지니고서도 좋은 일을 하려 하지 않으니 정말 애석하군요.] 단황야는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왕중양에게 물었다. [왕진인 조금 전의 그 대결은 도대체 왕진인이 이긴 것인지요., 아니면 서독이 진 것인지요.] 중양진인은 웃었다. [나는 지지도 않았고, 그 역시 이기지도 않았소. 이번 대결은 무승부라고 해야 할 것이오.] 원래 구양봉은 조금 전 왕중양진인의 팔과 자기의 손이 맞닥뜨리게 되는 찰나 갑자기 독사신공을 펼쳤다. 그리고 열 손가락을 한번 튕기고 쓸면서 손가락 끝으로 경력을 뻗쳐냈다. 이와 같은 재간은 외공에서 절기로 꼽히는 비파수(琵琶手)와 비슷한 바가 있었다. 그는 사독을 진력으로 몰아내어서는 왕중양의 몸안으로 스며들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양진인이 어떤 인물인가. 그는 구양봉이 갈고리처럼 하고서 달려들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홍칠공이 어젯밤에 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고 속으로 모든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강기를 돋구고 태을신공을 펼쳐서는 구양봉의 손가락을 향해 소맷자락을 휘두르게 되었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소맷자락은 손가락과 세차게 부딪치고 말았다. 구양봉은 지력을 뻗쳐내 상대방의 몸에 스며들도록 하려고 했을 때에 왕중양의 소맷자락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그 순간 상대방의 소맷자락이 마치 무쇠로 만들어진 듯 여간 단단하고 딱딱한 것이 아니며 자기의 지력과 사독이 막 뻗쳐나는 순간에 강제적으로 부딪쳐서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구양봉은 열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왕중양은 그 기세를 빌어 오른손을 쓸쩍 뻗쳐서는 선천공으로 서독의 가슴팍을 붙들고서 바깥쪽으로 홱 뿌린 것이었다. 만약에 중양진인이 팔성의 공력을 돋구게 되었더라면 선천공의 경력은 즉시 구양봉의 심맥을 짓이겨 버리고 말았을 것이며 일세를 풍미한 서독 또한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왕중양은 역시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겨우 삼푼의 공경을 내뻗쳐서는 한 번 잡아채고 한번 밀어버림으로써 구양봉의 온 몸뚱아리를 자기도 모르게 삼장 높이로 내던져 버린 것이었다. 서독은 역시 눈치가 빠르고 상대방의 선천공이 한번 쏟아지지 않으면 모르는데 한번 쏟아져 나오게 된다면 그 위력이 비길 데 없이 엄청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 공력이 공간에서 차 한잔 마실 정도까지는 체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지게 되었을 때에 즉시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 공력과 맞닥뜨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으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래서 그는 즉시 허공에서 둥실 하고 삼장 밖으로 허공을 가로질러서는 봉오리 꼭대기의 과녘에 있는 한 불쑥 불거진 바위 위에 내려섰다. 第 九 章. 치열한 화산논검 그는 두 발이 바위 위에 닿게 되었을 때에 자기의 가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구양봉은 자기가 남을 헤치려다가 오히려 사독이 상대방에 의해 되돌려 보내지게 되고 독기가 자기의 폐부로 스며든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만약에 즉시 조용한 곳에 찾아가 타좌로 운기조식을 하여 사독을 밀어내지 않는다면 수시간 안으로 목숨을 잃게 될 형편이었다. 그래서 서독은 말도 몇 마디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나는 듯이 줄달음을 쳐서 그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왕중양과 구양봉의 한차례 무공의 대결은 어찌되었든 간에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홍칠공은 입을 열었다. [노독물이 이번에는 정말 적지 않은 곤두박질을 치게 된 셈이군. 화산에서 무공을 겨룬 지 이미 닷새가 되었고, 아직도 하루 반이라는 시일이 남아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이며 또 어떻게 무공을 겨뤄야 될 것인지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소?] 왕중양은 웃으며 말했다. [봉형이 올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그는 몇 시간 후에는 틀림없이 다시 돌아올 것이외다. 빈도는 이번 무공대결에 마음속으로 한가닥 방법을 어느 정도 구상하고 있는 중이외다.] 홍칠공은 그게 어떤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왕중양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나자 구양봉이 어슬렁거리며 산아래서 올라왔는데 그 표정과 태도는 무척 맥이 빠져 있었다. 홍칠공은 속으로 웃었다. (네가 왕진인을 암산하려다가 이번에는 자승자박을 하게 되어 그 맛을 단단히 보게 되었으니 진정 즉석에서 보답을 받은 셈이 되는구나.) 구양봉에 대한 홍칠공의 예측은 들어맞은 셈이었다. 구양봉은 한번 던져지는 힘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독기가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봉우리 뒤쪽으로 달려가서는 바람이 잔잔하여 운기행공을 할 수 있는 동굴을 한곳 찾아서 안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진원지기(眞元之氣)를 끌어올려서 일주천을 돌도록 만들었다. 그때 몇 모금의 선혈을 토하고서야 가까스로 사독을 모조리 몸밖으로 몰아낼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은 낭패를 당한 끝에 원기는 크게 손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구음진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정신이 약간 회복되자 그는 즉시 화산의 꼭대기로 달려온 것이었다. 홍칠공은 일부러 그를 이죽거렸다. [노독물, 이번에는 마땅히 자네와 약형이 겨뤄야 할 것이외다.] 구양봉은 매섭게 홍칠공을 한번 노려보았다. 왕중양은 웃으며 말했다. [칠형, 내가 보기에 이번 시합은 더 겨룰 필요가 없소. 구양산주와 황도주는 모두 주유와 제갈량으로 높고 낮음을 분간하기 어려우니 다시 삼백여 합을 교환한다 하더라도 어떤 결과를 맺지 못할 것인데 굳이 다시 겨루어서 무엇하겠소. 빈도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봉형이 한차례 휴식을 취하고 난 이후에 다시 말씀을 드리기로 하겠소.] 구양봉은 악독하기는 했으나, 중양진인이 그와 같이 말을 하자 속으로 여간 고맙게 생각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조금 전에 운기행공해서 독을 몰아내느라고 이미 원기를 크게 소모했기 때문에 만약 이때 다시 황약사와 손을 쓰게 된다면 틀림없이 퇴패하게 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퇴패를 당하게 된다면 한번더 창피를 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왕중양이 자기를 위해 편을 들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지경이었다. 홍칠공이 이것을 속으로 무척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재차 입을 열려고 하자 왕중양이 그에게 눈짓을 했다. 홍칠공은 그제서야 부득이 입을 다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황약사가 궁금한 듯 입을 열었다. [왕진인 다음에는 어떻게 겨룰 것인지 이야기를 해 보시지요. 나로서는 감질이 나고 답답해서 견디기가 어렵군요.] 왕중양은 빙그레 웃고서는 입을 열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내놓는 방법은 무척 특별한 것이외다. 우리는 모두 다섯 사람이니 한차례 다섯 나라가 크게 접전을 벌이는 식으로 하자는 것이외다.] 홍칠공은 의아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마당놀이에 여섯 나라의 승상이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다섯 나라가 크게 접전을 벌인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구료.] 왕중양은 설명을 했다. [이 다섯 나라가 크게 접전하는 방식은 우리 다섯 사람이 오행(五行)의 방위(方位)에 모두 앉되 한 사람이 각기 하나의 방위를 차지하는 것이외다. 거기에다 모두들 내공의 경력으로써 서로 겨루는 것인데 그 어느 누구든 몸을 움직이게 되면 진 셈이 되어 싸움의 테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으로, 이와 같이 손을 쓰는 것이 가장 공평하여 털끝만치도 요령을 부릴 여지가 없는 것이외다. 거기다가 이와 같이 무공을 겨루는 데는 또 하나의 특색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로 싸우도록 제한을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공격할 수 있고, 또는 세 사람이 두 사람을 공격하거나 심지어는 네 사람이 한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이외다. 다만 한 가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적수를 선택해서 그 사람과 손쓰기를 좋아한다면 바로 그 사람과 손을 쓰는 것이고 그 어느 누구를 도와주고 싶다면 바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외다. 엣날 분들은 어문(語文)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는 무공의 대결에서 일정의 법칙이 없는 대결을 벌여 보자는 것이외다. 이와 같이 겨루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찬성하시오?] 중양진인의 그 한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홍칠공은 소리질렀다. [그것 참 묘하군. 그런 타법(打法)은 비단 신선할 뿐만 아니라 매우 재미가 있을 것 같군요!] 황약사, 단황야, 그리고 구양봉 이 세 명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 다섯 사람은 일제히 자리를 찾아 앉게 되었다. 왕중양은 무예가 고강한 것만큼 사람됨도 대담해서 중앙의 무토(戊土)라는 방위에 앉았다. 황약사는 동쪽의 을목(乙木)의 자리에 앉았는데 왕중양과는 약 일장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홍칠공은 바로 북쪽의 계수(癸水)의 자리에 앉았다. 황약사와는 삼거 일장이요. 왕중양과는 이장 이상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구양봉은 그들이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늙은 거지는 언제나 우비자(牛鼻子)를 편들어 왔으니 모름지기 좀 더 가까이 앉아야 하는데 어째서 저토록 멀리 떨어져 앉는 것일까.) 정히 그가 이와 같은 의심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 단황야는 남방 병화(丙火)의 자리에 앉았다. 왕중양과 홍칠공과의 간격은 똑같이 일장 정도였다. 그리하여 구양봉은 별수없이 서쪽의 경금(庚金)의 자리에 앉았다.이렇게 하여 다섯 사람은 공교롭게도 오행의 진세(陣勢)에 따라 앉았기 때문에 한송이의 매화꽃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왕중양은 진기를 조절한 이후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겨뤄도 되겠소?] 그 한마디의 말이 끝나자 마자 구양봉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합마공의 공력을 잔뜩 돋구고는 '꽉' 하는 소리를 크게 내지르며 두손을 들어서 한 손으로는 밀어제끼는 시늉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끌어당기는 시늉을 하면서 맹렬히 왕중양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장력을 왈칵 떠밀어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내쏟는 공력은 그야말로 산이라도 밀어내고 바다라도 뒤엎어 놓을 것 같았다. 그러나 왕중양은 가볍게 소맷자락을 떨쳐서는 즉시 그 장력을 무형으로 해소시켰다. 이윽고 오로들은 무공의 대결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다는 식으로 몇 차례 대결을 거치게 되었는데 왕중양은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은 듯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일일이 받아내었다. 그야말로 예전에 옛날분들 가운데 왕중양과 같은 사람이 없었고, 후세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천하무공 제일이라는 이 명칭은 그야말로 그가 차지해도 조금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그만 안색이 시퍼래졌다.. 그러나 재간이 남만 못하니 부질없이 한숨만 내쉴 뿐 어떻게 해볼 도리는 없었다. 홍칠공이 한마디 했다. [노독물, 당신이 왕진인에게 보낸 도전적인 글에는 이렛밤을 싸우자고 했던데 당신은 그 비린내 나는 길다란 벌레들 위에 더 고명한 초식이 있는 것이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 보시오.] 구양봉은 홍칠공을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지만 왕중양 앞에서는 다시 감히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그는 그저 콧속으로 코웃음을 치고는 왕중양을 향해 물었다. [왕진인, 구음진경을 가져오셨소? 가져오셨다면 좀 꺼내서 우리들 몇 사람에게 보여주시면 좋겠소이다!] 홍칠공과 황약사 등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구양봉의 그 몇 마디 말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왕중양은 잇달아 사로(四老)를 이겼으나 여전히 일관된 겸손함과 온화함, 그리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구양봉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구음진경은 바로 내 품속에 있소. 봉형이 나보고 보여달라고 하는데 안될 것은 없겠지요.] 중양진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품속으로 넣더니 하나의 서각으로 만들어진 곽을 꺼내 손에 들어서는 한번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나서 두손으로 곽을 잡고 힘을 주자 철컥' 하고 둘로 나누어지면서 구음진경 상권과 하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홍칠공은 정말로 구양봉이 벼락같이 일어나 공격을 하면서 구음진경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을까 햐고 걱정을 했다. 왕중양진인의 재간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가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된 것이었다. 더군다나 서로 다투게 되어 구음진경이 만약에 훼손이라도 되면 이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드문 무림의 보배덩어리가 그와 같은 쟁탈로 인해서 사라지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도 그가 걱정하는 바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암암리에 잔뜩 경각심을 돋구고서는 서독이 어떤 불칙한 행동을 할까봐 경계를 했다. 그러나 천만뜻밖이었다. 구양봉은 결코 어거지로 구음진경을 빼앗으려는 행동같은 것은 취하지 않았고 구음진경을 한 번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한두 번 웃고 입을 얼었다. [헤헤. 왕진인 진경의 원본을 가져왔으니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소이다. 나는 바로 저 진경을 보고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는데 왕진인께서는 응낙을 할런지 모르겠군요.] 왕중양은 찬찬히 말했다. [봉형에게 어떤 고견이 있는지 아무 염려 마시고 말씀해 보시구려!] 구양봉은 그 괴이한 눈망울을 까뒤집듯 하고 입을 열었다. [왕진인, 당신은 천하의 정도를 지키는 인사로 자처하면서 자기 자신도 구음진경 안에 실려 있는 재간을 연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사람이 구음진경을 손에 넣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조금 전에 사용한 선천공은 역시 구음진경 안에 실려 있는 무공이 아니겠소.] 왕중양은 재빨리 설명했다. [천만의 말씀이요. 나의 선천공은 선사께서 전수하신 것이며, 전진교 진파의 무공으로 화산으로 구음진경을 찾으러 올라가기 이전에 벌써 익힌 것인데 어찌 구음진경의 무공일 수 있겠소? 봉형은 오해하지 마시구려!] 구양봉은 흉측하게 웃었다. [매우 좋소이다. 우리는 왕진인의 말씀을 믿기로 하지요.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생각해낸 방법인데 지금 왕진인께서는 구음진경을 바로 자기 자신 앞에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놓아두는 것이오. 그리고 하루낮 하루밤을 기한으로 해서 그 천하의 기서를 지키도록 하고 우리 네 사람은 각기 여러 가지 방법을 다해 그 구음진경을 가져가 보도록 하겠소. 물론 알게 가져가나 모르게 훔쳐가거나 또는 교묘한 방법을 써서 손에 넣거나 큰 힘을 써서 빼앗거나 구음진경을 우리쪽에서 빼앗기만 하면 되는 것이외다. 왕진인이 이 하루낮 하룻밤 동안에 여전히 그 한 권의 구음진경을 보존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즐거이 졌음을 시인하겠고, 차후에는 다시 구음진경에 대한 글자 하나 언급하지 않겠소이다. 설사 진경이 우리의 눈앞에 놓이는 그날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구음진경을 한번 바라보지 않을 것을 한마디로 약속드리는 바이외다. 왕진인께서 만약에 응낙을 하신다면 천하 제일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이 헝제는 기꺼운 마음으로 숭복을 하겠으며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인정을 하겠소이다.] 서독의 이와 같은 방법은 겉으로 볼 때에는 무척 당당하고 의젓한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음손(陰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래 그는 왕중양에게 구음진경을 지키도록 하고 자기네들이 알게 모르게 모든 방법을 다해서 도둑질을 하든 억지로 빼앗든 맘대로 해보게 허락을 하라는 것인데, 이는 무형 중에 왕진인이 뭇사람들의 과녁이 되고 눈앞에 있는 네 사람의 공통된 적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루낮 하루밤 동안 구음진경을 지키도록 하되 구음진경을 바로 자기의 앞에다 놓아두게 된다면, 왕중양의 무공이 절세적이라 하더라도 온갖 정신을 쏟아서 주의를 해야 하며 만약에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게 된다면 그야말로 구음진경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이때까지의 수고가 모두 다 물거품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었다. 홍칠공이 서독의 말을 듣고서 입을 열어 반박을 하려고 하자 뜻밖에도 왕중양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봉형의 그 생각이 무척 고명하구료. 봉형의 명령대로 하리다!] 황약사와 단황야는 본래 구양봉의 그 방법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막 이의를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뜻밖에도 왕중양이 선뜻 응낙하고 나서는 지라 그만 일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이에 홍칠공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왕진인 하루낮 하루밤을 두고서 이 구음진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결코 장난으로 하는 일이 아니외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엉망이 되고 말 것이외다.] 이 몇 마디의 말은 암암리에 왕중양에게 구양봉은 간계가 많은 사람이고 심보가 악독하여 구음진경을 정말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여 그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야말로 예측할 수 없는 커다란 재앙이 되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왕중양은 물론 그 말을 못 알아 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여유를 보였다. [칠형, 소제가 응낙을 한 이상이야 물론 진경을 지킬 만한 재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소. 여러분들은 얼마든지 마음을 놓고 가져가 보도록 하시구려.] 단황야 역시 한마디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왕진인께서는 너무나 불리하오이다. 나의 우견(愚見)으로는 역시 한곳의 동굴을 찾아 왕진인께서 동굴 안에 앉아서 구음진경을 지키도록 하시죠...]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말을 하려고 하는데 전진교주가 어느덧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말을 가로채듯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가 없소. 굳이 번거롭게 동굴을 찾아서 무엇 하겠소. 나는 바로 이 화산의 꼭대기에 앉아서 구음진경을 지키도록 하오리다. 여러분들은 온갖 방법을 다해서 가져가 보도록 하시오. 힘을 쓰거나 지계를 쓰거나 또는 부드러운 방법을 쓰거나 아니면 억압적인 방법을 쓰든간에 그 수단만큼은 따지지 않겠소이다. 빈도가 일절 책임을 지리다. 할말은 끝났소이다. 지금은 신시에서 미시로 넘어갈 시각이외다. 따라서 유시부터 계산해서 열두 시간으로 제한을 하겠소이다. 여러분들은 바로 열두 시간 안으로 방법을 강구해서 구음진경을 손에 넣도록 해 보시구려.] 이때는 황혼이 한참 짙어지고 있을 때였으며 붉은 해는 두둥실 하고 화산의 꼭대기 저쪽에서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고 있었고, 어스름 빛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온갖 사물이 뿌옇게 보일 때였다. 그리고 밤이 닥쳐오는 것을 예고라도 하는 듯 미미하게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는데 그 바람이 또한 뼈를 에일 것처럼 차가웠다. 구양봉은 하늘을 한번 바라보더니 왕중양에게 말했다. [왕진인 한마디로 약속을 했소이다. 그럼 우리들은 먼저 물러가겠소이다.] 왕중양은 말했다. [좋도록 하시오.] 구양봉은 휘파람을 불어서 황약사와 단황야 두 사람에게 말했다. [산을 내려갑시다.] 황약사와 단황야는 잠시 망설였으나 곧 서독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 홍칠공은 왕중양에게 한마디 했다. [진인은 조심하시오!] 왕중양진인은 웃었다. [칠형의 호의를 무척 고맙게 생각하오!] 그리고 그는 전송을 한다는 뜻으로 두손을 살짝 잡아 보였다. 홍칠공 역시 산을 내려갔다. 왕중양은 구음진경의 곽을 들어서는 바로 자기의 무릎 앞에다 놓고 가부좌를 틀고서 앉았다. 약 반 시간이 되었을 때에 멀리 산머리에서 갑자기 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매우 격양하여 마치 가을바람에 철기군이 달려가는 것 같았다. 한 소리가 왕중양의 고막으로 전해져 왔다. 중양진인은 무공을 겨룬 사흘째 되는 날에 구양봉의 쟁 소리를 들은 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구양봉이 또다시 뱀을 몰아서는 사람을 번거롭게 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서독이 기르는 뱀이나 구렁이들은 많고 또 독하지만 지난번 몇 번이나 손을 써서 모두 다 나에게 얻어맞고서 추풍낙엽처럼 죽거나 도망을 쳤는데 그는 여전히 그 짓거리가 지리하지도 않은지 되풀이 해서 뱀과 구렁이를 이곳으로 몰아보내 죽도록 만들 것인가?) 전진교주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지극히 엄청난 정력(定力)을 응용해서 자기의 심마(心魔)를 억눌렀다. 그러나 구양봉의 쟁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는 반대 방향에서 갑자기 그윽한 퉁소 소리가 들려왔다. 왕중양은 속으로 그 롱소 소리는 황약사가 부르는 것임을 대뜸 깨달을 수가 있었다. 황약사의 퉁소 소리는 자기 자신이 두 번이나 가르침받았기 때문에 이미 마음속으로 대뜸 짐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통소 소리가 나자 쟁 소리는 즉시 멈추어졌다. 그런데 퉁소 소리는 무척 부드럽고 아름다와 마치 아리따운 여인이 춘정을 이기지 못해 고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원한이 많은 아낙이 지아비를 생각하는 듯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자제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왕중양은 숙근(夙根)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출신 가문은 돈많은 부잣집이었으나. 어릴 적부터 청허산인(淸虛散人)에게 구원을 받아서 척박한 골짜기 안에서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해왔으며 상투를 틀어서 도사가 되었으니 이 세상의 부귀공명과 성색견마(聲色犬馬)를 전혀 섭렵해 보지 못한 터였다. 선천적으로 이미 그러한 바탕인데다가 정력(定力)마저 심오해지게 된 지금 황약사의 통소 소리가 어떻게 그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왕중양은 그만 픽 웃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구양봉의 쟁 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그 쟁소리는 황약사의 퉁소 소리 속에 섞여서는 착실하게 왕중양의 정신을 흐뜨리려고 침입해 왔다. 이렇게 되자 형세에 즉시 변화가 일었다. 퉁소 소리는 부드럽고도 매력적이며, 쟁의 소리는 격앙하여 두 자루의 망치로 도가니 속에서 끌어낸 낙철(烙鐵)을 두드리는데 한번은 가볍고 한번은 세게 두드리는 것과 흡사했다. 왕중양의 심경(心境)에는 즉시 하늘을 덮칠 것 같은 세찬 파도가 일어나게 되고 마음이 이상야릇해져서는 제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속으로 혼자서 몰래 중얼거렸다. [야단났구나. 그들 두 사람이 합해서 나를 상대한다면 정말 대항해 내기가 어렵겠다.] 바로 그의 심신이 동요를 일으키게 되었을 때에 화산의 꼭대기 아랫쪽에서 한 소리 맑은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봉황이 울부짖는 듯 무척 귀를 즐겁게 했다. 휘파람 소리가 일어나자 쟁소리의 격앙함과 통소 소리의 부드럽고 화사한 멋은 즉시 어느 정도 엷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왕중양의 심경 또한 단번에 차분함을 되찾게 되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어낸 사람이 홍칠공이란 것을 알았으며 확연히 깨닫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칠형은 몰래 나에게 가만히 앉아서 적을 상대하지 말고 모름지기 선기를 쟁취하도록 깨우쳐 주고 있구나. 그들이 쟁 소리와 퉁소 소리로 나를 공격하는데 설마하니 나는 칠형처럼 휘파람 소리로 대항할 수 없다는 말인가?) 전진교주가 이와 같이 그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을 때에 홍칠공의 휘파람 소리는 이미 멈춰지고 있었다. 왕중양은 즉시 단전의 기운을 조절해서는 두손으로 무릎을 얼싸안을 듯하고는 하늘을 우러러 유유히 기다란 휘파람 소리를 휙 불어냈다. 왕중양의 이 한 소리 기다란 휘파람에 정녕 산이 메아리 치고 골짜기가 더러렁 울렸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혼백을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자 삽시간에 쟁 소리와 퉁소 소리는 아예 멈춰지고 말았다. 한참 기다렸으나 쟁소리와 퉁소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왕중양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데 그가 막 걸찍한 웃음을 한차례 터뜨리고 났을 때에 산봉우리 아래서 갑자기 이상야릇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뽕누에가 뽕잎을 따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바다의 파도가 크게 일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왕진인은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력을 다해서 살펴보았다. 그러고 한참을 보니 수십 가닥의 새카만 끈들이 구불구불하게 꼭대기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왕중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 구양봉은 정말 뻔뻔스럽구나. 그는 또 사진을 몰아서 오는군.] 한데 이번에 그는 겨우 반쯤 알아맞췄을 뿐이었다. 그렇다 구양봉은 사진을 몰고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수천수만의 독사들이 꾸불텅거리며 산봉우리 아래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는 왕중양이 앉아 있는 산봉우리를 겹겹이 에워쌌다. 결코 지난 몇 번처럼 적이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니었다. 왕중양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서 속으로 무척 궁금하게 생각했다. (구양봉이 뱀과 구렁이를 몰아서 이 산봉우리를 에워싸는 것은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겠다는 것일까.) 왕중양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산붕우리 아래의 뱀떼들이 갑자기 소동을 일으켰다. 봉우리 꼭대기와는 아직도 열몇 바탕의 활을 쏠 거리가 남아 있었는데 그 뱀들은 스스로 열몇 겹의 사홍을 이루더니 모든 뱀들이 머리를 하늘쪽으로 쳐들고는 끊임없이 쉭쉭거리며 숨을 내뱉는데 삽시간에 비릿한 냄새가 산봉우리 위로 뻗쳐왔다. 중양진인은 확연히 깨달았다. [아, 원래 그는 사진을 이용해서 독기를 뿜어내는 방법으로서 나를 상대하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내가 내전(內典)에 정통한 사람이라 숨을 죽이고서 내시(內息)을 한다면 어떻게 그의 암산에 넘어가겠는가?] 원래 독사라는 짐승들은 독이빨로 사람을 깨무는 이외에도 안개와 같은 독기를 뿜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남쪽지방의 시정(市井)에 떠도는 속담에 의하면 독사가 아니면 안개를 뿜어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로 미뤄보아 독이 없는 뱀은 안개를 피울 재주가 없는 것이었다. 운남성이나 귀주성은 높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종종 연람독장(烟嵐毒障)이 생겨나곤 했다. 소택지와 웅덩이에서 그리고 썩은 식물에서 뻗쳐 나온 기운 이외도 독사가 뿜어내는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었다. 한 마리 독사가 뿜어내는 독기란 것은 안정이 있지만 수만 마리의 독사가 합쳐서 뿜어내는 독기는 문제가 달라지는 것으로 정녕 한 폭의 독장성운(毒障腥雲)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왕중양이 만약에 내공에 정통하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독장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되었으리라. 전진교주는 온 하늘을 가득히 뒤덮는 독장이 두둥실 하니 위로 솟아올라서는 한 폭의 짙고 붉은 빛나는 안개를 이루고 곧장 산꼭대기로 옮아 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불어오는 바람이 매섭다고는 하지만 그와 같은 독장을 흐트러뜨려 쫓지 못하고 있었다. 왕중양은 틀림없이 구양봉이 뱀을 기르기 시작했을 때에 뱀의 머리 안에다가 특수한 약재를 섞었다는 것을 헤아릴 수가 있었다. 전진교주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아서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벽독약(避毒葯)을 꺼내 자기의 콧구멍에다가 발랐다. 그리고는 숨을 멈추고 진기를 차분히 가라앉히고서는 하늘을 뒤덮는 듯한 독사들의 독기에 대항했다. 바로 왕중양이 내공으로 숨을 멈추고 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혀서는 뱀의 독기들에 대항하게 되었을 때에 봉우리 아래쪽에 한 사람의 훤칠한 그림자가 나타났고, 그 그림자는 차츰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왕중양은 속으로 지금 나타난 사람이 틀림없이 구양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유심히 산아래쪽을 살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타난 사람은 서독 본인이었다. 봉두난발에 맨발을 하고 푸른 옷을 걸치고 품속에는 하나의 무쇠로 된 쟁을 안고서 다가오는데 철쟁 위와 어깻죽지에는 몇 마리의 붉고 파란 얼룩점이 있는 독사들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거나 꾸불텅거리며 아래위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가로지르는데 두 눈에는 흉찍한 광채가 번득이고 있었고, 입가에는 냉소가 번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빼서는 윗쪽을 두리번거렸다. 왕중양은 그가 뱀의 독기로 이루어진 안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자 갑자기 골탕을 먹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숨을 멈추고서 기를 가라앉히고 있는 상태에서는 선천공을 사용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한번 골려 주어야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구양봉은 자기가 무공으로는 구음진경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격장(激將)의 말투로 왕중양에게 구음진경을 지키도록 하되 자기는 마음대로 계락을 써서는 교묘하게 손에 넣든지 힘으로 빼앗든지 하도록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먼저 화산의 산꼭대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봉우리 위에 몸을 숨기고서 철쟁을 튕겨서는 소리를 전하는 절기를 펼쳐 왕중양의 심백(心魄)을 압도하여 그가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되도록 만들려고 했다. 그렇게 된다면 자기 자신은 단번에 구음진경을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넣을 수 있으리라고 내다본 것이었다. 한데 왕중양의 진력은 너무나 심오해서 구양봉의 쟁소리에 전혀 유혹을 받지 않았다. 정히 실망의 늪에 빠지려는 순간 황약사가 마침 옆 봉우리 위에서 옥소를 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구양봉은 무형 중에 한 명의 유력한 조수를 얻게 된 셈이었다. 그는 격앙된 쟁 소리에 부드러운 퉁소 소리를 섞어서는 왕중양에게 협공을 펼쳤으며, 이번에는 틀림없이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한데 전진교주는 홍칠공의 제때에 울린 휘파람소리를 듣고 진기를 돋구고서는 한마디의 맑은 휘파람 소리를 하늘 저쪽까지 울려 퍼지도록 토해 놓는 것이 아닌가. 구양봉은 그당시 왼손을 한 가닥의 현 위에 얹어 놓고 있었는데 심신이 그 휘파람 소리에 충격을 받고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어서는 당기게 되어 그만 그 현을 잘라 버리게 되었다. 현이 한 가닥 잘라지게 되자 쟁 소리는 즉시 제 소리를 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구양봉은 수치가 분노로 화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기의 내공조예는 상대방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정력에 있어서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갑자기 사진으로 안개를 뿜어내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 즉시 그는 뒷산으로 달려가 명령을 내려 뱀떼들을 불러 모아 왕중양이 앉아 있는 산봉우리를 겹겹이 에워쌌다. 그리고 나서는 뱀들에게 위쪽을 향해 독기를 뿜어내도록 명한 것이었다. 구양봉은 자기가 기른 뱀들의 독기로는 무공이 평범한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며 만약 왕중양과 같이 내공이 정순한 사람을 헤치는데는 물론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의 악독한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 왕중양이 숨을 멈추고 기를 차분히 가라앉혀 독사의 독기에 저항하게 되었을 때에는 틀림없이 내가(內家)강기를 펼쳐 내지 못하리라는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왕중양이 가장 무서운 선천신공을 펼쳐낼 수가 없게 되면 자기쪽에서 크게 노릴 수 있는 빈틈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그 기세를 빌어 구음진경을 손에 넣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속으로 제멋에 겨워서 사진을 가로질러서는 한걸음 한걸음 산꼭대기로 걸어 올라갔다. 왕중양은 일부러 눈을 내리감고 숨을 죽이고서 내시를 하고 있는 척하며 애써 독기에 항거하는 모습을 지어 보였으며 구양봉의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시치미를 뗐다. 서독은 그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왕가야, 너는 오늘날 내 꾀에 넘어가고 말았구나. 이제 구음진경은 나의 주머니 속의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철쟁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 슬금슬금 봉우리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그가 왕중양 앞으로 다가가 약 십팔 장 정도의 간격을 남겨 두게 되었을 때에 왕중양이 별안간 두눈을 부릅뜨고 서독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구양봉은 그 웃음빛을 보고 즉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막 몸을 날려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을 때, 갑자기 우르릉 꽝꽝 하는 소리가 두 번이나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고 나자 그가 서 있던 산꼭대기의 땅조각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면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는 가운데 모래와 돌들이 마구 튀었다. 칠팔 장 둘레의 흙이 그냥 무너져 사진으로 떨어지자 뱀떼들이 대번 분란을 일으켰다. 원래 왕중양의 선천신공은 전신에 있는 한 가닥의 선천혼원지기에 내외오헹(內外五行)을 병합하여 연성한 것으로서 결코 숨을 죽이고서 내시를 한다고 해서 펼쳐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독사의 독안개에 갇히게 된 나머지 경력을 쏟아내지 못하리라고 계산한 구양봉의 생각은 그야말로 엄청난 착각이었다. 전진교주는 구양봉이 선천공경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들어서게 되자 즉시 선천공에서 가장 강한 벽력장(霹靂掌)을 펼쳐 구양봉이 서 있는 한 조각의 표면을 모조리 잘라내서는 많은 모래와 돌, 그리고 흙과 더불어 아래로 쏟아져 내리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 바람에 구양봉의 몸뚱아리는 허공에 둥하니 내동댕이 쳐지게 되었고 잇달아 재주를 넘으면서 마구 아래로 떨어지는 흙비와 더불어 산봉우리 아래쪽으로 나는 듯이 굴러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서역무림에서 일파의 종주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무너져 내리는 땅과 함께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지만 제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구양봉은 이장이 그렇게 해서 떨어지기 이전에 즉시 몸을 비틀면서 몸뚱아리를 가볍게 해서는 한 잎의 낙엽처럼 허공에 띄울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아래로 떨어지는 기세가 대뜸 한번 늦추어졌다. 그러자 서독은 황급히 철쟁을 뻗쳐 내 산허리께에 불쑥 불거져 있는 바위를 이용해 한번 짚었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한번 재주를 넘고서는 산비탈 아래쪽의 조그만한 평지에 내려섰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그는 놀란 나머지 온몸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게 되었다. 서독은 이와 같이 크게 낭패를 당하게 되자 이제는 더 감히 머뭇거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즉시 휘파람 소리를 내불어서는 모든 뱀떼들을 불러 모아 낭패한 꼴로 줄달음을 쳤다. 그는 이번 일을 겪고서야 가까스로 자기의 재간이 왕중양의 적수가 되기에는 아직도 밀었다는 것을 고스란히 인정하게 되었고, 아무리 잔꾀를 짜아내고 온갖 기지를 다 펼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뱀떼들을 이끌고서는 이웃 봉우리로 물러나 무공을 겨룬 결과를 기다리게 되었다. 한데 왕중양은 이 반나절 동안 선천공을 펼쳐 냈기 때문에 원기나 정력에 있어서 적지 않은 소모를 가져오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원기대상(元氣大傷)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역시 피폐할대로 피폐해져 일어설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만약에 이때 황약사와 홍칠공, 그리고 단황야 세 사람 가운데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어서 공격을 해온다면 왕중양 앞에 놓인 한권의 구음진경은 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다행히도 그가 방금 보여준 선천공 벽력장은 구양봉을 쫓아보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세 사람마저도 완전히 압도해서 반나절의 밤이 지새도록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꼭대기로 오르지 못했다. 그 이튿날 동쪽 하늘이 밝아오게 되고 햇살이 비치게 되었을 때에야 왕중양의 진기나 원기가 가까스로 대반 회복되었다. 전진교주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 한번 커다랗게 숨을 내뱉었다. 신시가 이미 지나가게 되고 어느덧 사시가 되어 있었다. 황약사와 홍칠공 그리고 단황야 세 사람은 갑자기 화산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리고 황약사가 왕진인에게 읍을 했다. [왕진인, 밤에 펼친 선천공에 대해서 이 황약사는 무척 탄복하고 있소이다. 그러나 왕진인의 선천공을 운용한 것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특별히 가르침을 받고자 올라왔소이다. 아무쪼록 교주께서는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오.] 왕중양은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낮 하루밤 동안 잇달아 일고여덟 번 선천신공을 펼쳤기 때문에 이미 쇠퇴한 지경에서 거의 고갈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이었다. 만약에 황약사가 홍칠공과 단황야 두 사람과 더불어 전력으로 공격해 온다면 눈앞의 이 구음진경은 지킬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황약사가 이장밖에 서서 말을 하고 있으며 감히 앞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왕중양은 그가 어느 정도 자기의 선천신공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약형, 빈도에게 선천공이 도대체 어떤 재간인지 설명해 주길 바라는 것이오? 아니면 다시 한번 더 가르침을 받자는 것이오.] 황약사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대답을 했다. [우리들은 이미 패군지장으로 기꺼이 아랫길에 드는 것을 시인하는 바이며 천하무술 제일이라는 명칭은 이미 왕진인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레 동안의 무공 대결에서 우리는 자꾸만 진 것이 좀 아리송하게만 느껴지는데 왕진인께서는 선천공을 다시 한번만 펼쳐 우리들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지고서 돌아간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승복할 수 있을 것 같소이다.] 왕중양은 그와 같은 몇 마디의 말을 듣고서야 안심을 했다. 도화도주 황약사는 자기의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왕중양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중양은 아직도 정력이 회복되지 못해 조금 전에 구양봉을 놀라게 해서 도망치도록 만든 것처럼 한차례 신공을 펄쳐 보인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한 가지 방법이 떠올라서는 황약사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약형, 약형의 벽공장은 스스로 한파를 이르고 있으며 천하에서 다시 그 짝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우리 한번 더 한수를 교환해 봅시다.] 황약사는 생각해 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소제는 명을 받들지요.] 왕중양은 설명하듯 말했다. [이 구음진경이 들어 있는 곽은 무게가 매우 가볍소. 구음진경 원본이 안에 들어 있어도 별로 무게가 나가지 않소. 약형, 내가 선천공으로 이곽을 꼼짝 못하도록 붙들고 있을 것이니 만약에 악형이 벽공장을 밀어보내 이 곽을 한치 밖으로만 옮겨 놓는다면 빈도는 두 손으로 이 구음진경을 바치겠소.] 이 가벼운 몇 마디는 왕중양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황약사는 뜻밖으로 느끼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홍칠공과 단황야 두 사람도 무척 답답한 심정을 가누지 못했다. 황약사의 벽공장으로 말하면 화산에서 무공을 겨루는 이레 동안의 모임에서 모두들 잘보고 또한 겪었던 터였다. 벽공장을 펼쳐내는 기세는 느릿했으나 그 힘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왕중양은 자기의 선천공으로 구음진경을 넣어 놓은 곽을 꼼짝못하게 고정시켜 놓고는 황약사의 벽공장에도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고 말했는데 그들의 생각으로는 그와 같은 일이 그야말로 전에 없었던 일로 여겨졌다. 도화도주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왕진인 그 말이 사실이죠. 결코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시겠죠.] 왕중잉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약형, 당신과 나는 이미 처음 만난 것이 아니오. 어떻게 해서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할 수 있으며 약속을 하고도 신의를 저버릴 수가 있겠소. 하지만 다시 강조하는데 다만 약형과 빈도 두 사람만이 다투는 것이지 제 삼자가 손을 써서는 안되며 약형도 벽공장만 이용해야지 다른 수단을 써서는 아니 되는 것이오.] 황약사는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터라 순순히 대답했다. [그거야 물론이지요!] 도화도주는 속으로 가늠을 해보았다. (나의 벽공장의 공력은 반드시 당신을 이길 수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설마하니 구음진경이 든 상자마저도 움직일 수 없더란 말인가? 더군다나 남의 힘을 빌리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뿐만 아니라 벽공장은 이미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재간이라 할 수 있으니 다른 무공을 써서 상보(相輔)하도록 하여 어떤 기이한 수법으로 상대방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둘 필요가 어디 있느냐 말이다.) 이때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여 말했다. [좋소. 약형, 그렇다면 초식을 펼쳐 보시오.] 그는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아서는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약간 구부리듯 하고서는 구음진경이 들어 있는 서각의 곽 위쪽을 겨누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 간격은 약 한 자 정도였다. 황약사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두 손을 들어 원을 그리듯 하더니 수평으로 땅바닥을 쓸듯이 휙 하니 거센 광풍을 일으켜서는 곧장 곽쪽으로 밀어붙였다. 정말 회한한 노릇이었다. 구음진경이 든 곽은 황약사가 처음 벽공장을 뻗쳐 내게 되었을 때에 겨우 한번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곽은 정지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황약사가 아무리 억센 장경을 왼손으로 밀어보내고 오른손으로 밀어내도 구음진경의 곽은 시종 그 자리에 못박힌듯 털끝만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왕중양으로서는 이번에야 말로 대담하게 한번 시도를 해본 것이었다. 그는 서독과 손을 쓰게 된 이후 원기가 크게 소모된 이후 선천공의 경력도 덩달아 약해져서는 예전만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만약에 정말 황약사의 벽공장과 겨루게 된다면 결코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 영감을 떠올려서 이와 같이 공력을 다투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중양진인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으로 구음진경의 곽을 꽉 눌러 놓고 있었다. 왜냐하면 선천공의 경력은 한 자의 간격을 두게 되었을 적에 그 힘이 가장 강했기 때문이었다. 설사 극도로 피폐하게 되었을 때에도 엄청난 힘을 보전하기 마련인데 왕중양은 지금 오성 이상의 공력을 지니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황약사는 잇달아 몇 번 더 시도해 보았으나 구음진경이 든 곽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러자 그는 그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으며 귀밑까지 붉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상황이 이렇게 다급하게 되자 팔괘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한걸음 한걸음 좌우로 거닐면서 잇달아 벽공장을 펼쳐 내 일장씩 땅바닥 위로 장력을 세차게 밀어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음진경의 곽은 여전히 이동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황약사는 잇달아 십여장을 후려쳐 보았으나 시종 곽을 털끝만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자존심이 강하고 오기가 많은 도화도주도 그제서야 왕진인의 선천신공은 아니나 다를까 무림의 절학이라 자기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만 오체투지(五體投地)할 정도로 탄복한 나머지 즉시 두손을 거두어 들이고 테두리 밖으로 물러나가서는 껄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정말 신기(神技)예요 탄복했습니다.] 왕중양은 다시 한번 더 선천신공을 펼쳤기 때문에 실로 지쳐서 더는 기운을 쓸 여유가 없었으나 여전히 얼굴에 억지로 웃음빛을 띄우고는 말했다. [황도주는 이미 시험을 해 보았소. 칠형과 단형은 한번 겨루어 볼 의향이 있으신지 모르겠구료.] 이번 화산에서 무공의 대결을 벌인 사로 가운데 구양봉은 전진교주에게 가장 큰 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황약사 역시도 약간은 순순히 승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홍칠공과 단황야 두 사람은 왕중양에 대해서 그저 존경하고 탄복해 하는 사람들이었고, 이번에 화산으로 무공대결을 벌인답시고 오기는 왔으나 결코 구음진경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그들 두 사람은 구양봉과 황약사 두 사람이 차례로 인정하고 승복을 하자 물론 더 다툴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홍칠공과 단황야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했다. [원, 별말씀을 다하시오. 우리들은 왕진인의 신공절기에 대해서 이미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데 또 어떻게 감히 다시 못난 꼴을 보이겠소. 왕진인, 그 구음진경은 어찌 됐든 간에 진정한 주인을 찾게 된 것이니 우리들은 이후 결코 망령된 생각을 갖지 않겠소. 그리고 천하 무술 제일인이라는 명칭도 왕진인이 가지도록 하시구려.] 한 막의 화산논검은 이렇게 해서 마무리되었다. 이번에는 잇달아 이레낮 이레밤을 두고 겨루었던 것이며 여러 형식을 빌어서 십여 차례나 대결을 벌인 셈이었다. 왕중양은 선천신공에 의해서 끝내 구음진경을 보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하 무술 제일이라는 명호까지도 얻게 된 것이었다. 이들 몇 사람은 흉금이 넓고 활달한 사람들이었다. 승리를 했다고 해서 결코 자기의 무공에 대해서 공치사를 할 사람이 아니었고, 실패를 했다고 해서 감정을 품고서 원한을 맺거나 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두들 스스로 손을 잡고서 소리내어 웃었다. 화산의 꼭대기 위로는 따사로운 햇살이 높다랗게 떠올라서는 온누리를 비춰 주고 있어, 한기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저 흐뭇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황약사는 전진교주의 손을 잡고서 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왕중양의 손이 얼음같이 차가운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전진교주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야단났구료. 왕진인께서는 정력이 허탈되었구료. 그러나 상관이 없소이다. 소제에게는 이미 만들어 놓은 보약이 있소이다!] 그러면서 그는 몸안에서 하나의 비단쌈지를 꺼냈다. 비단쌈지 안에는 오동의 열매만한 크기의 알약들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몇 알을 집어서 내밀며 왕진인에게 말했다. [왕진인, 이것은 소제가 도화도에서 채집한 백화약초정영(百花藥草精英)으로 제련한 구화옥로환(九花玉露丸)이외다. 큰 용도는 없지만 보중배원(補中培元)의 효과가 있으니 몇 알 잡숫도록 하시구려.] 왕중양은 억지로 웃었다. [약형, 약형이야말로 정말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친구이구려!] 그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고개를 쳐들더니 황약사가 내미는 구화옥로환을 받아서는 입안에다 몇 알을 털어 넣었다. 네 사람은 다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그런데 단황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는 하마터면 한 분의 구양산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했군요. 아예 그까지 함께 모셔다가 서로 이제까지의 감정을 풀고 친구가 되기로 하지요.] 홍칠공은 몸을 일으켰다. [맞아요 맞아. 내 즉시 노독물을 찾아 오리다.] 그리고 홍칠공은 몸을 한번 흔들하더니 화산 꼭대기에서 곧장 산 뒤쪽으로 달려갔다. 밥 한끼 먹을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 때에 홍칠공은 혼자서 돌아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양봉은 정말 도량이 좁은 사람이구려. 그는 초식을 겨루다가 실패한 이후 개방귀 같은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혼자 달아난 모양으로 그가 가져왔던 냄새나는 긴 벌레마저 깨끗이 사라지고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구려!] 왕중양은 구양봉이 인사도 없이 떠났다는 말을 듣고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단황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녀석은 심보가 악랄하기는 하나 실로 무림에서 보기 드문 기재임에는 틀림이 없소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힘써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을 하지 않으니 야단이구료. 그렇지 않을 때는 정말 서쪽의 척박한 땅에서나마 한 가닥 이채(已采)를 빛냈을 젓이외다. 정말 아쉽소, 아쉬워.] 왕중양은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그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의 생각을 정하고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은 화산 꼭대기에서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모인 지 여드레째 되는 이른 아침에야 작별을 하게 되었다. 이별을 하는 자리에서 단황야는 정중히 말했다. [장교진인, 금후 십년 안으로 만약 남쪽을 유랑할 일이라도 있으면 아무쪼록 대리(大理)로 오셔서 손님이 되어 주십시오. 이 소왕(小王)은 그렇게 부유하진 못하지만 동도주(東道主)의 정을 다할 데니 아무쪼록 한번 오셔서 소왕의 체면을 세워주십시오.] 왕중양은 웃음을 띠우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궁전의 난을 평정했을 때를 돌이켜 보니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이란 세월이 홀러갔구료. 인생은 조로(朝露)와 같다고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초청에 응하겠소이다. 빈도는 금후 수 년 안으로 남쪽땅으로 내려갈 테니 그때 다시 만납시다!] 황약사 역시 겸손하게 전진교주에게 도화도로 놀러와 달라고 청을 했다. 오직 홍칠공만이 놀러오라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왕진인, 단형은 한 나라의 왕의 팔자로 태어났고 약형은 해외의 도주이니, 모두 집이 있고 기업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 늙은 거지만은 하늘을 이불로 삼고 땅을 요로 삼으며 사해(四海)를 내 집처럼 여기는 사람이라 그대를 초청할래야 초청할 곳이 없구료. 설마하니 그대를 청해서 찬반찬을 대접해야겠소? 훗날 내가 숭산으로 가서 신세를 좀 지도록 하겠소.] 여러 사람들은 껄껄 소리내어 웃고서는 헤어졌다. 왕중양은 서독 구양봉이 미래 무림의 심복대환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숭산으로 돌아간 이후에 암암리에 제압할 방법을 강구하기에 이른다. 한편 황약사는 화산에서 무공의 대결을 한 이후에 마음속으로 그토록 오매불망하며 바라던 구음진경을 손에 넣지 못한 데 대해 무척 서운하고 안타까운 심정이었으나 도화도로 되돌아가서 문을 닫아 걸치고 십년 동안 고생해서 무공을 연마한 이후 다시 중원으로 들어올 결심을 굳혔다. 그러니까 그는 화산논검과 같은 기회를 만들거나 찾아서는 전진교주와 다시 한번 자웅을 겨뤄보리라는 것이었다. 황약사는 이와 같이 어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그야말로 마음은 화살처럼 바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재촉한 나머지 한 달도 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이미 누런 황토길이 뻗쳐 있는 진(秦)땅에서 풍광이 아름다운 강남으로 들어설 수가 있게 되었다. 화산 오절이 화산에서 무공대결을 벌이게 되었을 때에 섣달의 아주 추운 때였으나, 황약사가 강남으로 들어서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이월의 봄철이었다. 더군다나 강남은 봄이 일찍 찾아오니 만큼 북쪽지방에 견준다면 삼월의 늦봄이나 다를 바가 없어 곳곳에 만화가 방창하게 되고 풀이 길게 자라있었을 뿐만 아니라 꾀꼬리들이 즐겁게 나뭇가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황약사는 성격이 비록 고고하고 괴팍한 데가 있었지만 재치와 감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외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어 속세의 무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머리속에는 학문과 경론(經論)이 가득했으나 부귀공명을 지푸라기처럼 여기고 탁류(濁流)에 휩쓸려서 묘당(廟堂)에 이름이 걸리는 것을 초개와 같이 여겼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임화정(林和靖) 선생과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차라리 숲속의 옹달샘을 찾아다니면서 매화꽃을 반려로 삼고 학을 아들로 여기면서 혼자 자아도취에 빠지는 길을 택해 도화도에서 거처하며 무학의 종사가 되어서는 동토(東土)의 무술을 위해 한 가닥 이채(已采)를 피워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이 세상을 등진 이후에 그를 지도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재간은 비록 정교하고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었으나 아직도 상승조예(上乘造詣)를 쌓았다는 경지에까지 들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번 화산논검 대회에 나갈 때만 하더라도 구음진경을 손에 넣어서는 도화도로 가져가서 연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한데 왕중양의 재간이 한 수 더 높아 천하 제일이라는 명호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구음진경까지도 왕중양의 손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약사는 그만 실의에 빠져서는 길을 가게 되었는데 길을 가는 동안 정신 또한 맑지 못하고 흐릿하기만 했다. 이날 그는 강소(江蘇)성의 가흥부(嘉興府)에서 의흥(宜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도자기를 구워 내는 유명한 곳이었다.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게 된다면 바로 만경창파라 할 수 있으며 일흔 두 봉우리가 호수를 에워싸듯이 있고, 호수의 둘레가 십만팔천경(十萬八千頃)이 된다는 태호(太湖)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태호는 옛때에 이름난 다섯 호수 가운데 하나로 그 위치는 강소성과 절강성이 맞닿는 곳이었다. 태호의 언저리에 널려 있는 토지는 비옥하고 물살은 풍부해서 자고로 미지향(米之響)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태호는 둘레가 너무나도 넓어 호수의 한복판에는 동서로 나누어지는 동정산(洞庭山)과 많은 섬들이 기라성처럼 펼쳐져 있었고 항구나 여울들이 종횡으로 뻗쳐 있었다. 오래 전부터 태호는 이미 강인(强人)인 수구(水寇)들이 출몰하는 곳이었다. 더욱이 송나라가 남천을 하게 된 이후 금나라 군사들이 몇 번이나 장강을 건너서 곧장 강남으로 쳐들어 가게 될 때에 태호는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 되곤 했었다. 그리하여 호수 일대의 주민들은 병란의 화를 엄청 당하게 되었으며 흩어진 군졸들이나 순하디 순한 백성들은 살길이 없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호수 속에 무리를 지어서는 한떼의 수구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태호의 항만이나 포구의 험악한 지리적인 형세를 빌려서 자기들이 가로채서는 소굴로 삼고 부근의 민가를 노략질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태호 연안의 선량한 어민들과 백성들은 더욱더 고통이 심해지게 되고 온종일 그야말로 깊은 물속 뜨거운 불속에 빠진 듯 생사를 알길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황약사가 화산으로 갈 적에는 동해에서 배를 타고 장강의 입구로 들어와서는 물길을 따라 곧장 사천(泗川)성으로 갔다가 사천성에서 다시 섬서(陝西)성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태호를 지나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남쪽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공교롭게도 태호의 동쪽 연안을 지나가게 된 것이었다. 황약사는 길을 오는 동안 고을이나 큰 마을들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이 보기 힘든 것을 보고는 금나라 군사들이 노략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상흔에 호수의 도적들이 마구 포악을 자행한 영향이라는 것을 알고 탄식해 마지 않았다. 이튿날 황약사는 의흥현에 속하는 오교진(烏橋鎭)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오교진 안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모두 다 백성들로서 남녀노소가 남부여대하여 고을을 나서고 있는데 하나같이 수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색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모양이었다. 한 집안이나 두 가구 정도 이사를 간다는 것은 평소에도 흔히 있는 일이지만 수백이나 되는 사람들이 함께 이사를 간다는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일로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노릇이었다. 사실 백성들은 언제나 편안히 자기의 고향에서 살기를 원했으며 이사를 가는 일을 벅차게 여겼다. 그러니 만약에 중대한 변고가 없으면 어찌 무단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겠는가. 황약사는 이 한 떼의 난민들 무리 가운데 적지 않은 수레들이 섞여 있고 수레 위에는 상자나 광주리 같은 봇짐들이 잔뜩 실려 있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고을에는 분명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모양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남부여대해서는 집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 것이로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한 그는 즉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여러분들 실례합니다. 여러분들은 어째서 온 고을 주민들이 모조리 이사를 가는지요? 그리고 또 어디로 가실 참인지요?] 한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는 황약사가 선비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했다. [상공은 글공부하는 사람이라 많은 일들을 모를 것이오. 우리는 호랑이에게 핍박을 받아 도저히 마음놓고 살수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살 길을 찾아 이사를 할 수밖에 없다오.] 황약사는 의아해 물었다. [호랑이라니 무슨 호랑이란 말입니까? 이곳은 태호 연안이라 높고 험준한 산이나 재가 없는데 어디서 호랑이가 나타난다는 것입니까? 어디서 나타난 호랑이길래 여러분들이 이 고을에서 살지 못하고 피난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까?] 황약사에게 대답을 했던 늙은이는 한 대의 나무판대기로 만들어진 수레 위에 앉아 있었고 그 곁에는 한 명의 팔구 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도 타고 있었다. 그 남자애는 이목이 청수하게 생겼는데 황약사의 말에 대답을 했다. [아저씨, 우리들을 해친 사람은 깊은 산속의 호랑이가 아니라 태호오호(太湖五虎)예요!] 그 남자애의 그 몇 마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몇 명의 어른들이 호통을 치며 부르짖었다. [어린애가 무서운 것을 모르고 터무니없는 소리만 지껄이는구나.] 황약사는 웃음을 띠었다. [태호라, 틀림없이 호수 속의 호걸들이구료. 그렇지 않소이까?] 그 노인은 익숙치 않은 듯 대답했다. [상공께서는 아시면 됐소이다. 우리들 이 한 떼의 사람들이 떠날 수 있도록 길을 치워주시오. 날이 이제 어두워지게 된다면 오호는 사람들을 데리고 호수 속에서 달려나와 공격을 해오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될 것이오.] 황약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까짓 몇 명의 좀도적에 지나지 않는 수구들을 두려워해서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사를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몸이 여러분들을 위해 도적들을 쫓아보내도록 하지요] 여러 사람들은 황약사의. 말을 듣고서는 그만 왁자 하니 떠들어댔다. 그리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듯 말했다. [이 책벌레는 아마도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그는 태호 안의 오호대왕(五虎大王)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아!] 황약사는 냉소를 띠우고서는 입을 열었다. [오호대왕이라는 자들이 무언데 여러분들이 이토록 두려워하십니까? 여러분들은 나에게 여러분들을 보호해 줄 재간이 있다고 믿지 않으십니까? 자 그럼 보십시오.] 그러면서 그는 손으로 자기의 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오백(烏柏)나무를 손가락질했다. 이 한 그루의 나무는 둘레가 적어도 반 자는 되었으며 키는 일장 남짓 했는데 바로 대로변에 심어져 있었다. 황약사는 왼손을 쳐들고 호통을 내질렀다. [쓰러져라!] 암암리에 벽공장의 기경(氣勁)을 돋구고서는 천천히 앞으로 밀어부쳤다. 우르릉 꽝 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커다란 나무가 즉시 쓰러졌다. 그리고 보니 나무 뿌리마저도 모조리 뽑혀져 있었고, 흙들은 사방으로 튀어 있으며 가지와 나뭇잎들은 다투어 허공으로 날아올라서는 우수수 하고 다시 비처럼 떨어졌다. 한 떼의 사람들은 황약사가 커다란 나무와 일장을 격하고서 가볍게 일장을 뿌려 반아름이 될 것 같은 오백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을 보고 그만 놀란 나머지 눈이 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지게 되었다. 황약사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똑똑히 보았소이까? 나의 재간이 어떻소이까? 여러분들을 보호할 수 있겠소이까?] 잇달아 질문을 던지자 사람들 틈에서 한차례 소동이 일었다. 그리고 몇 분의 연세가 들었음직한 노인들이 걸어나오더니 황약사에게 읍을 하고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는 원래 몸에 절기를 지니고 있는 분이시군요. 우리들은 정말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생의 성씨는 어떻게 되시오?] 황약사는 당당히 말했다. [나의 성은 황씨고 이름은 없소이다. 여러분들은 나의 성명을 묻지마시오.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 나서서 여러분들의 시름을 덜어 주려고 무슨 태호오혼가 하는 자들을 상대하고자 하는 것이외다.] 그러자 그 몇 명의 노인들은 모든 사정을 털어 놓았다. 원래 이 오교진은 명목상으로 의홍현의 관할이나 실제에 있어서는 태호연안의 한 고을이었으며 태호와는 오마장도 되지 않는 위치에 놓여 있었고, 또 고을에는 천호나 되는 민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송나라가 남천을 한 이후에 오교진은 두 번이나 금나라 군사들에게 약탈당한 나머지 열집 가운데 아홉집은 텅비게 되었고, 줄곧 십여 년이란 세월이 흐른 이후에야 지방의 원기가 차츰차츰 되살아나게 되었다. 하지만 인구는 이미 줄어서 옛날의 반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태호 동정산에 갑자기 한 떼의 수구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이 한 떼의 수구들은 원래 장강에서 활약을 하던 도적들인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태호로 옮겨 와서 원래 있던 몇 되지 않는 수적들을 완전히 병합을 해버리고는 달이 없는 어두운 밤에 사람을 죽이고 바람이 세찬 날에 불을 지르는 짓거리를 했다.이 한 떼의 수구들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두목이 있었는데 큰 두목은 백액호(白額虎) 상통(常通), 둘째 두목은 황면호(黃面虎) 상인(桑仁), 세째 두목은 적모호(赤毛虎) 학대강(壑大剛)이라고 했으며, 넷째 두목은 상면호(傷面虎) 초신(焦信), 다섯째 두목은 여도적으로 백액호 상통의 마누라인데 이름은 연지호(咽脂虎) 시수영(柴秀英)이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별호에는 하나같이 호랑이 호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들을 태호오호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호가 처음 태호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는 호수 연안의 어민들에게 그저 약간의 규비(規費)만을 억지로 받아 갔다. 선량한 어민들이나 사공들은 산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는 까닭에 관부의 세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성질을 누르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빼앗기는 수 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태호오호는 정말 욕심이 많았다. 관부(官府)에서 그들을 어떻게 하지 못하자 더욱더 날뛰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태호 동쪽 연안에 있는 오교(五橋)와 청어(靑魚), 백사(白沙), 적풍(赤楓), 홍화(紅花) 이렇게 다섯 고을의 백성들에게 으름장을 놓고 그들에게 매년 호수의 산채에 대량의 규비를 바치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매년 건장한 장정과 처녀 각 오십 명을 동동정산에 바쳐서 남자는 도새(盜塞)의 노공(奴工)이 되고 처녀들은 도둑의 무리들에게 욕을 보는 신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태호오호는 그들에게 사흘안으로 대답을 하라고 오금을 박았으며 관부에 알리지 말아야 하되 만약에 현성(縣城)의 관부에 알리게 되거나 관병에게 보호를 해달라고 요청을 하게 된다면 도적들은 조금도 사정없이 무자비하게 온 고을을 도륙해서는 개나 닭 한 마리 남기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다. 이 협박이 전달된 이후에 호수 연안에 위치한 다섯 고을의 백성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다섯 고을에는 본래 약간의 자기네 스스로 지키는 무력(武力)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사람의 수가 너무나 적어 태호오호가 거느리는 도적의 무리들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꼬마제비가 수레의 앞을 막는 꼴로 일격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청어진의 지방 이정(里正)이 즉시 관부에 그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흥부에서는 즉시 이백 명의 관병을 보내 그 고을에 주둔토록 했다. 그런데 사흘도 되기 전에 화근이 터지고 말았다. 어느 달이 없고 바람이 세찬 날 밤 청어진 고을안 대여섯 곳에서 갑자기 연기와 불이 일면서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자 삽시간에 온 고을 안은 질서가 크게 어지러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틈을 타서 불길이 이는 곳에 많은 고수의 수구들이 고을 밖에서 공격해 들어왔는데 그야말로 조수처럼 몰려드는 것이었다. 고을에 주둔하고 있던 관병들은 황망히 나서서 대항했다. 그러나 태호수구들의 사람수는 사오백 명이나 되어 관병보다 두 배도 더 되었다. 거기다 하나같이 흉악하기 이를 데 없어 사람을 보기만 하면 죽였고, 집을 보기만 하면 불을 질러댔으니 그 밥통 같은 관병들이 어떻게 당해낼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반 시간도 되지 않아 온 고을은 불바다 속에 잠겨 들게 되었고 곳곳에 시산혈해(尸山血海)를 이루어 그야말로 귀신도 호곡을 할 정도였다. 날이 밝게 되었을 때에 온고을 안은 그저 잿더미만 남게 되었다. 고을의 사람들은 십중팔구 명이 죽은 것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 모습이 완전히 바뀌고 만 것이었다. 청어진이 이와 같이 참혹하게 주민들이 살해를 당하고 집을 온통 불태우는 참극을 치르게 된 이후에 태호오호의 흉행은 더욱더 가흥 근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의흥부에서는 무단히 이백 명이나 되는 관병들을 잃게 되자 물론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 명의 통제(統制)에게 천 명의 관병을 거느리고 호수 안으로 들어가 도적들의 소굴을 수색해 내서는 토벌을 하도록 명했다. 한데 태호오호들은 숫제 이 관병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들은 호수 일대의 항만이나 포구에 천라지망(天羅地罔)을 펼쳐 놓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관병이 호수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곧장 호수 속으로 들어가기를 십리쯤 했을까 말까 했을 때 갑자기 한 소리 고함소리가 들리면서 호수 속에서 무수한 수귀(水鬼)들이 올라왔다. 수귀라함은 바로 태호 수구들 안에서 자맥질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물길에 익숙했기 때문에 물속으로 뛰어들어서는 관병들의 배밑바닥에 호통소리와 더불어 도끼와 칼을 일제히 휘두르고 움직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관병이 타고 있는 배의 밑바닥에는 그만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리게 되고 호수물이 콸콸 배안으로 솟아오르게 되었다. 본래 관병들은 수전(水戰)에 익숙지 못한 대오들이었다. 그들은 배에 구멍이 뻥 뚫리게 되자 그만 손발이 어지럽게 되었다. 곧이어 항만이나 기석의 갈대밭 속에서 적지 않은 석회를 이은 병들이 쏘아지게 되고 석포(石包)가 날아드는가 하면 강궁경라(强弓硬拏)가 비오듯 배위로 날아들어 관병들을 그야말로 지리멸렬시켰다. 태호오호 가운데 우두머리인 백액호 상통과 황면호 상인은 친히 사자쾌정(梭子快艇)을 몰고서 좀도적들을 거느리고서는 관병들에게 공격을 해왔는데 그 통제라는 벼슬아치는 사오합을 싸우지도 못하고 상통의 한칼에 물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관병들은 그야말로 머리없는 용이 된 꼴이라 더욱더 투지를 상실하게 되어 허둥지둥 다투어 낭패해서는 도망을 쳤다. 그러나 그들은 곧 겹겹이 퍼져 있는 그물에 한 사람도 도망을 치지 못하고 고스란히 도적들에게 살상을 입거나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천명이나 되는 관병들이 하루도 되지 않아 전멸당하고 만 것이었다. 이후 관부에서는 관병들을 태호로 보내 도적들을 소탕하겠다는 것이 대참패라는 결과를 낳게 되자 다시는 감히 호수 속으로 들어가 수구들을 물리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 승리로 기세가 등등해진 태호오호는 다시 오교진 등 네 고을에 재차 쪽지를 보내 그들에게 하루 안으로 자녀들과 재백을 호수까지 가져와서는 그들의 수를 헤아려 챙기도록 하라고 협박을 했다. 그런데 가련하게도 이 몇몇 고을의 백성들은 병란을 겪은 이후에 잡곡을 심어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는 형편이었으니 어디서 그토록 많은 돈이나 은자가 생기겠는가. 더군다나 도적들은 몇 명의 건장한 장정과 몇 명의 처녀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천하의 부모된 사람으로서 그 어느 누가 자기의 아들딸을 강도 소굴에다가 보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렇게 도적들의 세력은 날로 창궐하고 관부에서는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하자 주민들은 오직 고통을 참고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온고을 주민들이 나서서 이사를 가려는 경과였다. 황약사는 그들이 하소연하는 말을 듣고 그만 발끈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역시 약간 괴팍했다. 황약사는 극도의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으나 오히려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좋소이다. 그 좀도적들이 그토록 날뛰다니 원래 그들에게는 몇 명의 두목들이 있었구료. 여러분들은 고을로 돌아가시오. 이몸은 사흘 안으로 무슨 태호오혼가 하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와서는 높다랗게 나무 위에 매달아 여러분들이 채찍으로 후려쳐 화풀이를 하도록 하겠소이다.] 이에 백성들은 황약사가 그와 같은 능력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자신있게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한 조금 전에 나무를 뿌리채 뽑아서 넘어뜨리는 재간을 보았는지라 믿지 않을 수가 없기도 했다. 그리하여 모두들 왁자 하니 다투어 수레를 묶고서 다시 오교진 안으로 들어갔다. 황약사는 가장 먼저 이야기를 걸었던 늙은이와 남자애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그 노인의 이름은 무중순(武仲舜)으로서 이 고을에서는 몇 명 되지 않는 생원(生員)이었다. 강남땅은 문풍(文風)이 무척 성해 오교진과 같은 조그만한 고을에도 과거를 보아 생원이 된 사람이 네 사람이나 되었다. 하지만 무중순은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아서 모든 사람들이 남다르게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황약사 역시 공부하는 사람이라 무중순과는 이야기가 잘 통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무중순의 말 속에서 그 남자애는 무중순의 손자이며 이름은 무홍광(武洪光)이라고 하는데 금년에 겨우 아흡 살이지만 총명하고 영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황약사는 처음 화산으로 오르게 되었을 때에 이미 곡풍을 거둬 들인 바 있었다. 그런데 그는 무홍광이 나이가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이마팍이 번듯한 것이 무척 귀엽게 생겼는지라 제자로 거두고 싶은 마음이 또 일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해 보니 아직 시기가 되지 않은 것 같아 자기가 태호오호를 처치한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날밤 황약사는 무중순의 집에서 총총히 한끼니를 얻어먹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서 무중순에게 말했다. [이제 이 몸은 호랑이를 잡으러 가겠습니다. 노인장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오늘밤 만큼은 안심하고 푹 자도록 통지를 해 주십시오.] 무중순은 겉으로는 순순히 대답을 했으나 속으로는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빙그레 웃고서는 무씨집의 대문을 나서서는 곧장 오교진 밖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새 태호가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선곳에서는 멀리 태호 연안의 금타봉(金駝峰)과 막리봉(莫厘峰)이 멀리 바라다보이고 정제한 호수의 제방이 쭉 뻗어 있었으며 양쪽으로는 가지런히 공손수가 두 줄로 심어져 있었다. 황약사는 이미 작정한 바가 있었던 터라 훌쩍 몸을 날려서는 공손수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멀리 호수 위의 모든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감시하듯 지켜보았다. 그는 무중순의 입으로부터 태호 수구들이 여러 고을에 자녀와 재백을 내놓으라는 기한이 다 되어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태호오호는 자기네들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틀림없이 고을의 백성들이 다 도망을 쳤든 말든 불을 질러서는 일벌백계의 효시를 삼아 호수 연안의 백성과 어민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황약사는 자신을 가지고 그 한 줄의 나무꼭대기 위에 몸을 숨기고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호수가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이경 무렵이었다. 잠시 후 달이 중천에 오르게 되고, 별들이 삼경의 시간을 알려 주게 되었을 때에 넓고 넓은 호수 위의 일렁거리는 물결 위로 한 떼의 조그만 배들이 나타났다. 꼬리에 꼬리를 문듯한 배들은 모두 다 서른 척이나 되었다. 이 조그만 배들에는 덤으로 배 한복판을 가리는 선실 같은 것은 없었고, 대신에 새까맣게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한 척에 적어도 팔구 명이 더 될 것 같았다. 다시 말한다면 이 한 떼의 조그만한 배에는 이미 삼백여 명이나 타고 있는 셈이었다. 황약사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짐작대로였구나. 호수의 수구들은 대거 출동해서 언덕으로 올라가 노략질을 하려고 하는구나.) 바로 도화도주가 정신을 가다듬고서 기를 차분히 하여 호수 한복판을 주시하게 되었을 때에 그 한 떼의 배들은 이미 일사불란하게 호수가로 다가들었으며 두 척이 한 줄로 늘어선 배들은 바로 방파제에다가 대려고 했다. 황약사는 속으로 자기가 솜씨를 보일 기회가 왔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나무 위에서 몸을 일으켜서는 벽공장력을 돋구워 두손으로 왈칵 호수쪽으로 밀어붙였다. 이날 밤에는 미풍만이 감돌고 있었고, 호수는 본래 거울처럼 잔잔했다. 그러나 도화도주의 벽공장력이 그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는가 말이다. 다음 순간 우르릉 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풍은 호수 위를 후려쳐서 하나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만들었고, 물기둥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가운데 물길의 담장이 높다랗게 솟아올라 소용돌이 언저리의 네 척이나 되는 조그만한 배들은 그만 세찬 파도에 휘말려서는 대뜸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하여 네 척의 배위에 서른 명이나 되는 호수의 수구들은 모두다 텀벙텀벙 하니 물속으로 빠졌다. 그리고 나머지 배에 타고 있던 도적들도 너무나 뜻밖의 이러한 커다란 변고에 그만 기세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다행히도 침몰한 배에 탔던 호수의 수구들은 하나같이 자맥질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호수가에 뭍이 나타나자 단번에 밖으로 기어나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기나 화살들은 모두 다 호수바닥에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에 무척 낭패한 꼬락서니가 되었다. 황약사는 나무 위에서 벽공장의 절기로 네 척의 도적 배를 침몰시켰는데 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그는 도적들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도적들의 소란이 잠깐 멎게 되고 태호의 수구들이 배를 기슭의 방파제에 대려고 할 무렵에 다시 두손을 천천히 휘둘렀다가 재차 벽공장력을 내쏟았다. 이번에 그가 쏟아낸 힘은 더욱더 커서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호수 위에 하나의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게 만들었고 둘레 삼사장 안의 물결을 마치 수정벽처럼 위로 솟아오르게 하였다. 우르릉 꽝꽝 하는 소리가 두 번이나 울려 퍼지면서 다시 네 척의 조그만 배들이 소용돌이에 말려서는 대뜸 침몰을 하게 되고 배에 탔던 수구들은 모조리 물에 빠졌으며 다른 도적들 또한 일제히 다시 한번 더 고함을 내질러야 했다. 태호의 수구들이 미처 배를 기슭에 대기도 전에 삽시간에 잇달아 여덟 척의 배들이 가라앉아 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비록 한 사람도 물속에 빠져 죽은 사람이 없다고는 하나 수구들은 겁을 집어먹게 되었다. 이때 얼굴이 살짝 얽은 호수의 수구 두목이 소리 높여 외쳤다. [야단났군, 오늘은 아마도 우리가 호신(湖神)의 비위를 거슬린 모양이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요상하게 호숫가에 무단히 커다란 파도가 일어서 우리의 배를 잇달아 두 번이나 침몰시키겠는가.] 태호연안 일대에는 신권(神權)을 무척 중시했으며 태호의 수구들 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즉시 댓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두목이 호신을 모시고 있는 사당에다가 향불이나 등을 밝힐 기름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고, 어떤 사람들은 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짐승을 제대로 깨끗이 씻지 못했기 때문에 호신님께서 성질을 부려 두 번이나 자기네의 배를 가라앉혔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밤과같이 바람도 불지 않는데 배가 어찌 무단히 침몰을 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때 도적의 지휘선(指揮船)이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 호수의 도적들은 해적과 같은 기세는 없었다. 지휘선이라 해야 불과 한 척의 비교적 큰 편으로 배 한복판을 가릴 정도의 목선에 불과했다. 뱃머리에는 한 명의 얼굴에 흉터가 있는 두목이 서 있었는데 이는 태호오호 가운데 상면호초신(傷面虎焦信)이었다. 그는 선실 안을 향해 불렀다. [학노삼 빨리 나오게. 그리고 약간의 초지와 종이돈을 불사르도록 하세. 호신님께서 화가 나셨네. 우리들은 빨리 사죄를 하세.] 초신의 이 몇 마디의 말이 끝나자 덤으로 가린 선실쪽에서 한 명의 체구가 우람한 도적 두목이 나타났다. 第 十 章. 황약사의 강호 행적 그 두목의 모습은 매우 이상야릇하였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약간 붉으며 귀밑부리에는 큼지막한 붉은 점이 있었으며 들개의 눈초리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어 첫눈에도 사람을 죽일 때 눈한번 깜박이지 않는 마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등뒤에는 후배어린도(厚背魚鱗刀)를 메고 있었는데 그는 언덕쪽을 한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얘들아, 금은지백(金銀紙帛)을 가져 오너라!] 그는 태호오호 안에서 세째 채주인 적모호 학대강이었다. 두 명의 졸개가 대답을 하고 뱃머리로 다가갔다. 그들의 손에는 커다란 금칠과 은칠을 한 지폐처럼 그려 놓은 종이들이 들려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뱃머리에 메달고는 불을 붙여 태웠다. 그리고는 거기다가 폭죽을 터뜨렸다. 황약사는 도적들이 호신의 수작이란 데에 대해서 긴가민가 여기는 표정을 보고 하마터면 소리내어 웃을 뻔했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참고서 폭죽이 다 터지기를 기다려 다시 두 손을 둥글게 했다가는 벽공장력을 펼쳐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호수에 다시 하나의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리고 와르르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이 용솟음쳤으며 다시 두 척의 배가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가라앉았다. 이렇게 되자 학대강과 초신, 두 도적의 두목은 즉시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서적모호 학대강이 노호를 터뜨렸다. [어디서 온 망나니가 감히 암수를 쓰느냐!] 말이 끝나기 전에 그는 두 손을 잇달아 쳐들어서는 차례로 비어대(飛魚袋)에서 열두 자루의 비차(飛叉)를 꺼내더니 호수 언덕 방파제 언저리에 서 있는 공손나무 꼭대기쪽으로 쏘아 보냈다. 한데 그가 이쪽에서 비차를 막 던지게 되었을 때에 저쪽의 나무꼭대기 위에서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 일어서며 두 손을 번쩍 쳐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희한하게도 적모호 학대강이 던진 열두 자루의 비차는 저절로 머리를 돌더니 되려 도적들의 배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곧이어 쿵쿵 하는 소리가 잇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예닐곱 명의 졸개들이 쓰러졌다. 몇 대는 도적의 몸에 맞지 않아 바로 배 갑판에 못박히게 되었는데 나무 속으로 몇 치 정도 파고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뭇수구들은 그만 안색이 홱 변해서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바로 이때에 획 하는 바람 소리가 일면서 황약사의 푸른옷 그림자가 어느덧 공손나무 꼭대기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도화도주가 그와 같이 모습을 들어내는 자세는 그야말로 가볍기가 버들강아지와도 같아 땅에 내려서는 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도적들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아이고, 호신님께서 현령하셨다!] 적모호 학대강은 큰소리로 외쳤다. [저건 호신이 아니다. 이봐, 당신이란 망나니는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감히 당돌하게 태호오호와 맞서다니!] 황약사는 냉소했다. [눈이 먼 좀도적 같으니. 너희들도 오호라고 불리울 자격이 있느냐? 고양이로 불리울 자격도 없다. 너는 뭍으로 올라 오교진을 노략질하려는 거냐.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빨리 도적의 소굴로 돌아가거라.]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은 노해서 부르짖었다. [후레자식. 너는 사악한 술수로 우리들의 배를 침몰시키고....]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도화도주는 몸을 흔들 하더니 어느덧 도적의 배위에 올라 있었다. 그 솜씨의 재빠름은 그야말로 필설로써 형용하기 어려웠다. 적모호 학대강이 어린도를 뽑아들었고, 상면호 초신은 적동간(赤銅竿)을 뽑아들고서는 황약사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화도주의 무공이 어떠한가. 그들이 그저 눈앞에서 푸른 그림자가 번쩍했음을 느끼게 되었을 때에 손에 들렸던 무기가 어느덧 황약사의 수중으로 들어가 있었다. 텅텅텅 하는 소리가 몇 번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 자루 칼과 두 자루의 간이 여섯 토막으로 나누어져서는 배 갑판위에 내동댕이쳐졌다. 곧이어 그들 두 사람은 허리께가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상대방의 두 손가락에 짚힌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몸뚱아리는 마치 한 무더기의 진흙으로 빚어 놓은 것처럼 털썩털썩 쓰러졌다. 황약사는 몸을 구부리고 그들 두 사람을 잡고 일어서는데 그야말로 어른이 갓난아기를 드는 것처럼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머지의 수구 무리들이 그만 깜짝 놀라서는 일제히 무기를 들고 구하려고 들었다. 도화도주는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두 두목을 휙 하니 배 갑판에다 내던지고 부르짖었다. [너희들 가운데 그 누구라도 감히 앞으로 나선다면 나는 즉시 이 두 놈의 목숨을 빼앗고 말겠다.] 수구의 무리들은 아니나 다를까 그 말에 겁을 집어 먹고서는 감히 한 사람도 앞으로 나서지를 못했다. 황약사는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두 사람을 갑판의 선실쪽으로 밀어붙이고는 냉소를 했다. [너희 둘, 개 돼지만도 못한 것들이 감히 나와 손을 쓰겠다고? 너희들이 백년을 두고 재간을 더 연마한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자격을 얻지 못할 것이다. 본래 나는 너희들을 당장 죽일 수가 있으며 손바닥 뒤집는 힘조차 쓸 필요가 없지만, 이 황약사에게는 한 가지 이상야릇한 습성이 있는데 그것은 한두 사람을 죽이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 여우떼 같고 들개의 무리들 같은 도적들은 졸개로부터 두목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함께 달려와야만이 나는 살수를 쓰게 될 것이다. 아무튼 너희들 개 같은 도적들은 첫째 칼과 창을 사용하지 않고, 둘째로 암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셋째로는 내 직접 손을 쓰지 않고서도 하나하나 곱게 죽어가도록 만들 수가 있다. 알겠느냐?] 황약사의 이 몇 마디의 말소리는 우렁차지 않았으나 그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의 내공의 수법을 써서 뱉어내었기 때문에 호수 위의 크고 작은 수십 척의 수구들 배의 도적들은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지지 않고 모두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황약사가 자기네들 수채의 사람들을 칼과 창을 사용하지 않고 암기도 사용하지 않으며 더더욱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죽인다는 말에 정말 천고에도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말이라고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살아 있는 신선이란 말인가. 하지만 태호의 수구들은 황약사가 자기네들 두 채주를 짚어서 쓰러뜨리는 솜씨를 보았던 터라 감히 믿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어 하나같이 사색이 되어서는 장숭처럼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황약사는 그 몇 마디의 말이 끝난 이후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서는 두 발을 내밀어 두 두목의 엉덩이를 한번 걷어찼다.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을 차서는 선실 안으로 넣는 것이었다. 희한하게도 도화도주가 그와 같이 발길질을 하자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두 사람은 즉시 혈도가 풀어지게 되었고, 손발을 본능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회복이 되었다. 황약사는 혈도를 풀어준 후에 즉시 몸을 솟구쳐서는 언덕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몇 번 몸을 날리지 않아 호수가의 밤빛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두 사람은 놀람과 두려움에 횝싸여서는 근질근질해지는 이빨에 우드득 이를 갈았지만은 별수 없이 모든 수구들의 배에 되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황약사는 오교진으로 돌아갔다. 그제서야 하늘의 별들은 사경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무중순의 집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이튿날 이른 아침, 고을 안의 주민들은 태호오호 휘하의 도적 무리들이 아니나 다를까 나타나 노략질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황약사는 무중순과 그 손자와 더불어 집밖으로 나와서는 웃으며 궁금하게 여기는 주민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어젯밤 한잠 푹 주무셨겠죠? 그렇지 않소이까? 오늘 한나절 안으로 여러분들은 옷을 널어 말리는 장대를 마련해 주어야겠소이다. 오백여 대의 장대만 있으면 되는데, 그토록 많은 장대를 구할 수가 있겠소이까?] 오교진은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는 고을이라 대나무는 그야말로 가장 흔하디 흔한 물건이었다. 고을의 주민들은 황약사가 그와 같이 말을 하자 무척 의아하게 생각하고는 물었다. [황상공, 대나무 장대는 가져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지요? 장대로써는 무기를 만들 수 없지 않소이까?] 도화도주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여러분들은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은 말을 하는구료.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는 줄을 아시겠소. 빨리 가서 장대나 모으십시오. 모두 다 오백 개인데 하나도 많아서는 안되며, 한 대도 적어서는 아니 묍니다. 여러분들이 그 장대를 가져오게 된다면 천군만마가 지키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만 미리 말씀을 해드리지요.] 여러 사람들은 긴가민가 하면서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장대들을 찾아내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되지 않아 오백 개나 되는 장대를 수집할 수가 있었다. 황약사는 고을의 오십 명이나 되는 건장한 주민들을 불러서는 그들보고 장대를 떼메서는 고을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는 그 한 떼의 사람들을 데리고 고을의 바로 바깥쪽에 이르러서는 먼저 땅바닥에 다가가 이리저리 일정하지 않는 줄을 그었다. 그러고 나서는 몸소 장대를 하나하나 땅바닥에다 꽂았다. 이 장대들의 간격은 일정하지가 않아서 촘촘할 때도 있었고 버성길 때도 있었다. 어떤 것은 한 자의 간격이고 어떤 것은 두 자의 간격이었다. 이렇게 하여 반 시간도 되기 전에 이 빈터에는 수백 자루의 장대가 심어지게 되었다. 멀리서 볼 때는 마치 하나의 대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 같았다. 고을의 주민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아리숭해 했으며 황약사가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대를 다 꽂은 후에 황약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되었소. 여러분들은 모두 고을 안으로 돌아가 평소처럼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시오.] 모든 사람들은 그 대나무가 도적들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마음이나 편하게 갖자고 생각했다. 황약사는 옷깃 뒤쪽에서 한 자루의 옥소를 뽑아 들더니 대나무밭 속에 떡 버티고 앉아서는 때를 기다렸다. 태호오호 가운데 상면호 초신과 적모호 학대강 두 사람은 황약사에게 크게 당한 나머지 낭패한 몰골로 동동정산의 수채로 돌아갔다. 그런데 백액호 상통은 이미 염탐군들이 전해온 기별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소식에 깜짝 놀란 나머지 즉시 처인 시수영과 둘째 채주인 황면호 상인과 함께 충의당을 나섰다. 그리고 보니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두 사람이 마치 싸움에 진 장닭처럼 풀이 죽어서 낭패한 몰골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백액호 상통은 의아해서 물었다. [두 분 아우들, 자네들이 어찌 이렇게 형편없이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책벌레에게 이 지경을 당했더란 말인가]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두 사람은 울상을 지으며 경과를 상통에게 이야기했다. 황면호 상인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 녀석의 벽공장이 물을 쳐서 물결을 일으킬 정도라면 우리가 어찌 그와 대항할 수 있겠소. 우리들은 역시 이 수채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갑시다. 태호에 남아서는 아니 되겠소.] 연지호는 발끈해져 입을 열었다. [둘째, 미쳤어요? 우리가 동동정산의 기업을 일조일석에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니예요. 일개 책벌레 때문에 우리들이 모조리 포기하라는 것이예요? 만약에 이 사실이 소문나게 된다면 강호의 호걸들은 정말로 이빨이 빠지도록 우리들을 비웃을 것이예요.] 상면호 초신은 갑자기 머리가 좋아진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큰형님, 나의 짐작으로는 그 책벌레는 비단 무공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사악한 술법이 있는 것 같소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어떻게 칼과 창 등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 모든 형제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소. 오늘밤 그가 손으로 호수물을 쳐서 우리 배를 침몰시킨 것은 요술이 아닌지 그 누가 알겠느냐 말이오.] 백액호 상통은 확연히 깨달은 듯 말했다. [맞았네 맞아. 우리들이 그 사악한 수법을 깨뜨리는 방법만 생각한다면 그 녀석을 상대해 낼 수 있을 것일세. 만약에 단지 무공만 가지고 논한다면 나는 우리 전 수채의 이천 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그 한 사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의 손아귀에서 곤두박질을 쳤다고는 믿어지지가 않네.] 그리고 나서 그는 수하의 도적들에게 몇 마리의 검은 개를 잡아서는 가죽주머니에다가 검은 개의 피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종류의 물건들을 마련한 이후에 전체 수채의 인마들을 거느리고는 기세등등하게 이천 명의 도적들을 이백여 척이나 되는 조그만한 배에 태우고 오교진으로 향했다. 그들이 출발을 하게 되었을 때에는 날이 샌 새벽녘이었는데 배가 기슭에 닿게 되었을 때에는 어느덧 정오가 가까왔다. 백액호 상통은 도적의 무리들에게 명령을 내려서는 벌떼처럼 기슭 위로 오르도록 했다. 그들은 조금도 저지를 받지 않고 모두 다 무사히 기슭으로 오를 수가 있었다. 백액호 상통 등 도적의 무리들이 모조리 언덕 위에 오르게 된 이후에야 명령을 내려서는 대오를 지어 오교진으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밥 한끼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아 그들은 고을의 초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오교진의 초입에 이르게 되자 초입의 빈터에 수백대의 장대가 꽂혀 있고 한 명의 청의문사(靑衣文士)가 장대밭 속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두 사람은 청의의 선비를 보자 즉시 소리 높여 고함을 질렀다. [아이고, 바로 저 책벌레는 정말 대담하군. 혼자서 저곳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니!] 백액호 상통은 호통을 내질렀다. [저 녀석은 어떤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모른다. 얘들아 앞으로 달려나가 그를 짓이겨 피떡을 만들고 갈기갈기 찢어 수만 토막을 내도록 해라.] 그러자 뭇도적들이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칼과 창을 모조리 쉽게 들고는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상면호 초신은 갑자기 부르짖었다. [잠깐만, 그가 이 장대로 우리들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슨 요술인 것 같소.] 백액호 상통은 즉시 깨달은 바가 있는 듯 부르짖었다. [그렇구나. 저 녀석은 요술을 쓰려고 하고 있다. 빨리 검정 개의 피를 가져오도록 해라.] 가죽주머니를 들고 있던 몇 명의 도적들이 즉시 앞으로 나아가 가죽주머니의 매듭을 풀어헤치고서는 멀찌감치서 장대밭의 빈터쪽에다가 검정개의 피를 뿌렸다. 수십 명의 태호 수구들은 더욱더 가소롭게도 아낙네가 월경할 때 사용하던 베조각을 꺼내서는 창자루나 막대기에 메달고서는 연신 고함을 질러대며 사면팔방에서 장대밭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황약사의 이 장대밭은 본래 기문팔진의 오행생극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도화도에 설치된 것과 똑같은 진법이었다. 그는 도적들이 자기의 기문술수에 관한 학문을 요술로 알고 개피를 쏟고 더러운 베조각을 쳐들고서 휘두르는 등 한마디로 말해서 그야말로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무척 가소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곳에 앉아서는 멸시의 눈빛을 빛내며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었다. 도적의 무리들은 대나무밭 속으로 들어가자 즉시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지게 되었다. 원래 도적들의 무리를 이끌고 기문의 죽진(竹陳)안으로 시도해 들어간 것은 바로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 삼백 명이나 되는 도적들의 무리를 이끌고서는 대나무밭 속으로 파고들게 되었는데, 일단 파고들고 난 이후에는 그야말로 하느님 맙소사하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 장대들은 죽진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드문드문 버성기게 꽂아 놓아서 가로지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보였으나, 죽진 안으로 들어서게 된 이후에는 문들이 겹겹이 겹쳐져 있어 온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나무밖에 없는 것이 마치 하나의 대나무 그물을 이루어 놓은 것 같았다. 도적들이 아무리 좌충우돌하고서 이리 빠지고 저리 빠져 보아도 장대는 전혀 줄어들기는 커녕 갈수록 더욱더 많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수백 명의 도적들은 대나무밭 속에서 머리를 서로 부딪치며 뺑뺑이를 돌았으나 시종 죽진에서 나올 방법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마치 대나무의 그물에 걸려든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당혹감에 사로잡혀서는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다. 이 태호의 수구들이 기문팔진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여전히 황약사가 펼쳐 놓은 것이 요술이라 생각했다. 무릇 기문술수와 같은 일문(一門)의 것들은 마음이 당황하게 되면 더욱더 불리해지는 법이었다. 죽진 안에 갇히게 된 사람은 그야말로 은 천지가 칠흙 같은 어둠에 횝싸인 꼴이 되었다. 백액호 상통 등 한떼의 사람들은 죽진 밖에 서 있었는데 자기네들의 패거리가 죽진 안으로 들어간 이후 장대밭 앞의 빈터에 갑자기 일진의 연기같고 구름같은 기체가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전체 장대밭이 희뿌연 연기나 구름같은 기체에 횝싸이게 되고 안개 속에 사람의 그림자가 우왕좌왕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백액호 상통 수하의 한 때 도적들은 그만 깜짝 놀라서 부르짖었다. [야단났소. 요술이외다!] 정히 소리를 질러대느라고 난장판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에 황약사가 어느덧 대나무 밭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옥소를 입에 물고서는 천마무곡(天魔舞曲)을 불어냈다. 피리 소리가 울려퍼지게 되자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금새 멎고 말았다. 장대밭 속에 갇힌 도적의 무리들이나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적들이나 하나같이 소동을 멈추고서는 귀를 기울여서 천마무곡을 자세히 듣는 것이었다. 퉁소 소리가 한 토막의 가락을 불어내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더욱더 달큼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가슴 가득히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겠다는 악념(惡念)이 모조리 깨끗하게 가셔지게 되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달콤한 웃음마저 떠올랐다. 다시 한동안의 시간이 흐르게 되자 태호의 수구들은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손짓발짓을 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역시 가락에 맞춰서 빠르거나 느리게 운치 있는 춤을 추었으나, 춤을 출수록 빨라지게 되어 전혀 법칙을 이루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털썩 쿵 하는 소리와 더불어 땅바닥 위에서 데굴 데굴 굴렀고, 어떤 자들은 고함을 질러댔으며 또 어떤 자들은 자기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도적들은 울부짖음을 연신 토해내면서 자기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냈다. 마치 미치고 실성한 것 같은 것이 미치광이만 살고 있는 동네에 들어선 것 같기도 했다. 황약사의 이 천마무곡은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진정 구혼섭백(勾魂攝魄)의 마력이 있어서 사람이 제정신을 잃고 평소의 습성마저 어지럽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때 화산에서 무공을 겨루게 되었을 때에 서독 구양봉의 사진마저도 그의 옥소 소리에 뭇뱀들이 미친듯이 춤을 추는 등 질서가 크게 어지러워지는데 그까짓 태호의 수구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황약사가 막 천마무곡을 반쯤 불게 되었을 때에 뭇도적들은 미친듯이 춤을 추기 시작하여 족히 반 시간을 그렇게 춤을 추었다, 그리하여 하나같이 탈진이 되어서는 땅바닥에 쓰러져서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를 못했다. 도화도주는 태호오호와 모든 도적들이 모조리 장대밭 안팍에서 쓰러지게 되자 그제서야 불던 옥소를 멈추고서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는 죽진을 가로질러서는 다시 오교진 안으로 들어가 고을의 주민들에게 말했다. [모든 도적들을 모조리 내가 제압을 해 놓았소. 지금 조금 전의 장대밭 안팍에 쓰러져 있으니 여러분들은 즉시 달려가 밭줄로 그들을 꽁꽁 묶도록 하시오.] 오교진의 백성들은 황약사가 오백 대의 장대로 죽진을 펼치게 된 이후 비록 집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좌불안석이었다. 그들로서는 수백 개의 대나무로 태호의 수호들을 가로막아 고을안으로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태호 수구들의 고함소리가 고을의 초입쪽에서 하늘마저 진동하게 되었을 때에 고을의 주민들은 그만 놀라 오줌을 질금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한참 이후에 고함소리가 멈춰지게 되고 고을 초입쪽에서 갑자기 창과 창이 부딪치게 되고 철마들이 달리는가 하면 세찬 파도가 출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이후에는 그 바람에 휘몰아치는 파도 소리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그윽한 퉁소 가락만이 들려왔다. 그래서 곧이어서 황약사가 털털거리며 고을 초입에서 고을 안으로 들어서서는 도적들을 이미 사로잡아 놓았다고 했을 때에도 여전히 긴가민가 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몇 명의 비교적 대담한 사람들을 고을의 초입으로 보내서 살펴 보도록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고을 초입의 죽진 안에는 도적들이 가득 쓰러져 있었고, 무기는 어지럽게 널려 있는가 하면 땅에 꽂혀 있기도 했다. 장대밭 안팍에 도적들이 수없이 쓰러져 있는 지라 그만 크게 기뻐하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고을로 돌아가서는 뭇사람들에게 도적들의 무리가 이미 모조리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그제서야 백성들은 가까스로 마음속의 천근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약간의 밧줄들을 가지고서는 고을 초입쪽으로 달려갔다. 황약사는 그들이 먼저 죽진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모든 장대들을 뽑아서는 기문 죽진을 철거했다. 그리고 난 이후에 여러 사람이 손을 써서 태호의 수구들을 결박하도록 분부했다. 가소롭게도 태호오호의 한 떼 도적들은 퉁소 소리를 듣고 미친듯이 춤을 춘 나머지 모두 정럭이 탈진되어 진흙처럼 맥이 빠져 있었던 지라 백성들이 마구 그들을 꽁꽁 묶어도 반항은 커녕 몸을 한번 뒤적이는 힘조차도 없어서 고스란히 몸을 백성들의 손에 내맡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태호 수구들은 순한 양처럼 순순히 따라 주었다. 얼마되지 않아 그들은 밧줄에 꽁꽁 묶이게 되고 백성들의 압송하에 고을 안으로 들어섰다. 황약사는 고을의 입구쪽 빈터에다가 자리를 마련하고 태호오호 휘하의 한 떼 크고 작은 도적들의 우두머리들을 모조리 압송해 오도록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무중순네 고을의 몇명의 노인들과 한복판에 앉아서는 명령을 내렸다. [비적의 두목을 데려오너라.] 그리하여 백액호 상통 등 태호오호는 황약사의 앞으로 끌려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썹을 곤두세우고 두눈을 부릅뜬 채 똑바로 서서는 무릎을 꿇려고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코웃음을 치고는 입을 열었다. [개 같은 도적들 같으니라고. 나는 무기를 쓰지 않고 둘째로 주먹질을 하거나 발로 차지도 않고서 너희들을 사로잡겠다고 말했다. 이제 내 말은 어김없이 들어맞아 실현이 되었다.] 백액호 상통은 매섭게 황약사를 한번 노려보고는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아니, 너희들은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인가?] 연지호 시수영은 벼락같이 고함을 내질렀다. [이 염치없는 것아, 너는 약간의 눈가림의 법술에 의지해서 우리들을 사로잡았을 뿐이다. 너는 결코 무공으로 우리들을 때려 눕힌 것이 아니니 우리들이 설사 너에게 잡혀서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약사는 그만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너희들 이 한 떼의 도적들은 정말 불쌍할 정도로 우둔하구나. 우둔해!] 그리고 그는 웃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안색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 이 몇 명의 돼지처럼 우둔한 녀석들을 상대로 설사 설전한다 하더라도 부질없이 입술과 혓바닥을 말릴 뿐일 것이다. 내가 요술로써 너희들을 사로잡았다고? 그리고 너희들은 승복할 수 없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승복을 하겠느냐?] 백액호 상통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답을 했다. [당신이 우리들을 풀어주시오. 우리들은 아예 일 대 일로 진짜 칼과 창이나 진짜 주먹과 발길질로 승부를 겨루도록 합시다. 그래도 만약에 당신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면 죽는다 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오.] 황약사는 소리내어 웃었다. [일 대 일이라고? 흐음, 너희들 이 못난 도적들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을 줄 아는가!] 그는 좌우에 늘어선 몇 명의 젊은 고을의 자제들에게 부르짖었다. [이 다섯 명의 도적놈들을 묶었던 밧줄을 모조리 풀어 주게.] 여러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백액호 상통 등 다섯 명까지도 어안이 벙벙해진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황약사는 입을 열었다. [내가 기문 술수로 너희들을 사로잡았는데, 너희들은 돼지와 소같이 어떻게 해서 나자빠지게 된 줄도 모르고 있으면서 나에게 요술을 썼다고 그러느냐? 나는 아예 끝까지 너그러움을 베풀어 너희들을 풀어 주고 무기를 되돌려 주어 너희들 다섯 사람이 나 한 사람을 상대하도록 해주겠다. 그렇게 한다면 죽는다 한더라도 원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중순은 황약사의 바로 아래쪽에 앉아 있었는데 황망히 입을 열었다. [황상공, 그건, 그건...이 마두들을 풀어 주어서는 안됩니다. 일단 풀어 주어서 호랑이들을 산으로 돌려보내게 된다면 무궁한 재앙을 낫게 될 것이오이다. 군자는 덕을 베풀 때 반드시 푹 젖어들게 만들고, 악을 제거하되 반드시 뿌리를 뽑으라고...] 그는 고개짓을 하면서 계속 책에 있는 글귀를 인용하려고 들었다. 황약사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까짓 머저리 같은 물건들은 이 황모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어찌 마음에 둘 수가 있겠소. 그들 다섯 사람이 일제히 덤벼든다 하더라도 나는 다만 한 손으로 이들을 모조리 잡아죽일 수가 있소이다. 이 몇 명의 개새끼와 같은 녀석들이 나의 손가락 사이에서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보시는지요.] 태호오호는 땅바닥에서 황약사의 말을 듣고 그만 울화가 치밀어 온 몸을 벌벌 떨었다. 오교진의 사람들은 황약사가 그와 같이 말하자 그만 왁 하니 소리내어 웃으면서 환호를 질러댔고, 손삑까지 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에 모두들 황약사의 재간을 믿게 되었고, 몇 명의 나서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은 즉시 앞으로 나와 태호오호를 꽁꽁 묶었던 밧줄을 풀어 주었다. 백액호 상통은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키더니 호통을 내질렀다. [황가야, 너는 다만 한 손으로 우리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에 책임질 수가 있느냐?] 황약사는 냉소했다. [사내대장부는 반드시 자기가 한 말에 실천을 하는 법이다. 그 어느 누가 말해 놓고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이 있더냐... 여보게들.] 몇 명의 젊은이가 다시 다가왔다. 황약사는 그들에게 명했다. [이 다섯 사람의 무기를 꺼내서 되돌려주도록 하게. 그리고 그들이 나와 무공을 겨룰 수 있도록 해 주게나.] 젊은이들은 우렁찬 대답소리와 함께 몸을 돌려서는 달려갔다. 그리고 삽시간에 태호오호의 무기들이 그들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백액호 상통의 무기는 한 쌍의 점강낭아좌(点鋼狼牙挫)였고 황면호 상인의 무기는 표미삼절곤(豹尾三截棍), 적모호 학대강의 무기는 후배어린도(厚背魚鱗刀), 상면호 초신의 무기는 분수아미자(分水峨嵋刺)였다. 그런데 여도적인 연지호 시수영의 무기는 특별했다. 왼손에는 한 자루 구엽연화판(九葉蓮花瓣)의 동추(銅錘)이고 오른손에는 하나의 사람 염통을 닮은 구리로 만들어진 방패, 즉 동순(銅盾)이었다. 동순의 바깥면에는 아흡 자루의 시퍼런 갈고리가 주조되어 있었다. 황약사는 그와 같은 무기들에 대해서 한번 바라보지도 않고 태호오호에게 말했다. [무기를 찾았으면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덤비도록 하라. 나는 아직도 밥을 먹지 못했다.] 태호오호는 황약사의 그와 같이 방약무인이라고 할 만한 기염에 대해 그야말로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연지호 시수영은 매우 표독한 성질의 여인이었다. 단번에 몸을 구부리고는 구협연화추와 동순을 집어들더니 악을 쓰며 욕을 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일 놈 같으니라고. 자 덤벼라. 도대체 그 어느 누구를 잡을 수 있는지 두고 보기로 하자.] 황약사는 그녀와 상대를 하고 싶지 않아 무중순의 곁에 서 있는 무홍광에게 말했다. [얘야, 넌 착하지. 노끈을 한 토막 가져 오도록 해라.] 여러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했으나 무홍광은 총명하고 영리해서 황약사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땅바닥에 태호오호를 묶었던 밧줄 가운데 한 토막을 들고 다가왔다. 황약사는 오른손을 뒤로 돌리고는 말했다. [내 손을 묶어라.] 여러 사람들은 그제서야 황약사가 정말로 한 손으로만 태호오호를 상대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만 놀람과 의아함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무홍광은 역시 어린애의 심성으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황약사의 오른손을 허리께에 묶었다. 황약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호통을 쳤다. [자 덤벼라. 너희들 다섯 사람이 일제히 앞으로 나와 나를 협공하되 다른 사람을 해꼬지 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만약에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분을 풀려고 한다면 나의 마음이 악독하고 손씀이 매서운 것을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 몇 마디의 말을 했다. 태호오호 가운데 연지호 시수영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네 사람은 어떻게 된 것인지 가슴속으로부터 약속이나 한 듯이 찬기운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두 사람은 황약사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눈앞의 이 원수의 무공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약사의 말이 끝나자 마자 적모호 학대강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벼락같이 후배어린도를 휘둘렀다. 칼날을 옆으로 비스듬히 벌리듯 하더니 휙 하는 소리와 더불어 안시사전(雁翅斜展)이라는 일초를 펼쳐서는 황약사의 어깻죽지와 등줄기를 비스듬히 베려고 내리쳤다. 상면호 초신은 학대강이 손을 쓰자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분수아미자로 좌우를 나누어서 황약사의 뒤허리께를 찌르려고 들었다. 이들 두 사람은 일제히 벼락 같은 공격을 펼쳤으며 그들 자신은 그들의 공격이 아주 빠른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한데 푸른 그림자가 혼들리는 곳에 맑은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약사는 어느결에 두 사람의 무기 틈바구니 사이로 물뱀처럼 빠져나가더니 이장 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연지호 시수영은 호통소리를 내질렀다. [이 도적아, 도망치지 말아라.] 그리고는 방패를 흔들하고 동추를 쳐들어 선풍과 같이 황약사의 곁으로 내닫더니 무자비하게 살수를 펼치려고 들었다. 황면호 상인은 소리높여 외쳤다. [형수님, 등뒤를 조심하십시오.] 바로 그 순간에 황약사는 연지호 시수영의 등뒤로 돌아가서는 왼손을 뻗쳐서 덥석 그 여도적의 뒤꼭지에 있는 머리카락을 움켜 잡고는 힘주어 팽개쳤다. 그러자 쿵 퍽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시수영의 몸뚱아리는 거꾸로 떨어져서는 이장 밖까지 굴러갔다. 온 몸에 흙을 묻혀서 흙투성이가 된 것은 물론이요, 동추와 방패 두 무기도 일고여덟 걸음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이렇게 되자 여러 사람들이 그만 크게 소연해졌다. 백액호 상통은 자기의 처가 상대방에게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한 것을 보자 노기가 충천해서는 조금 전의 두려움을 잊은 듯 나는 듯이 달려와 점강낭아좌를 좌우로 나두더니 황약사 등뒤에 있는 풍시(風市)와 신유(腎逾)의 두 혈도를 노리고 찌르려고 들었다. 그의 이 낭아좌는 혈도를 짚는 무기로써 모양이 커다란 붓과 같았다. 백액호 상통은 장강 수도(水盜)의 우두머리를 하게 되었을 때에 한때 이 점강낭아좌로 진강(鎭江)의 북고산(北固山)에서 잇달아 장강의 물위에서 활약하던 일곱 명의 호걸들을 패배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도화도주에 걸리게 되자 이는 마치 태산에 자갈돌이 부딪치는 격으로 그의 한 쌍 점강낭아좌가 황약사의 등뒤를 노리고 찔러 갔으나 황약사는 피하기는 커녕 도리어 등을 구부려서는 백액호 상통의 점강낭아좌를 맞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서 백액호 상통은 너무나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순간 한 쌍의 점강낭아좌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황약사의 혈도를 적중시켰다. 그러나 점강낭아좌의 끝이 상대방의 몸에 닿는 순간 마치 상대방의 몸에 기름칠을 해 놓은 것처럼 점강낭아좌가 얼떨결에 옆으로 와락 미끌어지는 바람에 그는 하마터면 무기마저 손에서 놓칠 뻔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황약사는 후딱 몸을 돌리더니 왼손을 들어 철썩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백액호 상통의 따귀를 사정없이 후려치고 말았다. 황면호 상인의 표미삼절곤이 이때에 땅을 휘몰아치듯이 황약사의 몸으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황약사는 슬쩍 몸을 솟구쳐서는 표미삼절곤의 끝을 피하더니 소엽태법을 펼쳐 발로 삼절곤의 중간쯤 되는 곳을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황면호 상인은 표미삼절곤과 더불어 예닐곱 밖으로 휘청거리며 밀려나더니 털썩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황약사가 잇달아 다섯 명에게 공격을 가한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정말로 한쪽의 왼손만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묶었던 오른손은 여전히 등뒤에 꼼짝없이 묶여 있었는데도 태호오호들은 그에게 얻어맞아 땅에서 벌벌 기어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교진의 주민들은 우뢰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게 되었고, 사로잡힌 도적의 무리들은 두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백액호 상통은 매섭게 부르짖었다. [형제들, 오늘 우리들은 곤두박질치게끔 정해져 있는 것 같네. 모두다 달려들어 어찌되었든간에 그와 함께 동귀어진(同歸於盡)하도록 하세.] 그리하여 황면호 상인, 적모호 학대강, 상면호 초신, 연지호 시수영 등은 다시 매서운 기세로 공격을 해 왔고, 백액호 상통 역시 점강낭아좌를 휘두르며 나는 듯이 달려 들어 다섯 종류의 무기가 일제히 황약사의 몸을 향해 죄어들었다. 황약사는 가볍게 몸을 번쩍 날리더니 왼손을 뻗쳐서는 적모호 학대강의 후배어린도를 잡고 반대쪽으로 손목을 비틀어서는 그대로 빼앗아 왔다. 그리고 오른손을 훌쩍 들어서는 상면호 초신을 냅다 곤두박질 치도록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도화도주는 이번엔 낙영장과 소엽퇴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서 그 오묘함은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태호오호의 이까짓 얄곽한 재간으로 어찌 그의 적수가 되겠는가.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두 사람은 고스란히 당하고 말았다. 적모호 학대강은 무기를 잃게 되었고, 상면호 초신은 이장 밖으로 굴러가게 되었다. 황약사는 적모호 학대강의 무기를 빼앗아 들었으나 그것을 사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길게 소리내어 웃더니 후배어린도를 허공으로 내던지고 곧이어 손가락을 뻗쳐서는 한번 탁 튕겼다. 그러자 쩡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 칼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백액호 상통의 앞면을 향해 격사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백액호 상통은 황망히 점강낭아좌를 바깥쪽으로 밀어내 황약사가 던져 보낸 어린후배도를 때려서 땅바닥에 떨어뜨리려고 했다. 한데 도화도주가 펼친 것은 탄지신통의 재간이었다. 그 한 자루의 후배어린도는 쏜살같이 날아가는 기세가 삼석강궁(三石强弓)으로 쏘아버린 경노(硬弩)처럼 세차게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음 순간에 창창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려 퍼지게 되고 후배어린도는 그만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지만 그의 두팔마저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얼얼해지게 되고 손아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거기다가 칼끝이 그의 팔을 스칠 듯이 미끄러지듯 지나가게 됨으로써 그가 입고 있는 옷을 찢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같은 결과에 백액호 상통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몸이 후들거려졌다. 도화도주는 한 손으로 적을 맞아 싸우는 데도 몇 번 몸을 움직이지 않아 태호오호를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게 만들었으니 시로 볼 때 태호오호는 마땅히 졌음을 시인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 망명도배들이라 성격이 포악해서 잇달아 곤두박질을 치고 땅바닥에 기어야 했음에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자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황약사는 호통을 내질렀다. [이 개 같은 도적놈들아, 이제는 쓴맛을 단단히 보았겠지. 다시는 너희들과 장난을 치지 않겠다.] 말이 끝나자 마자 푸른 그림자가 번쩍이는 곳에 일진의 바람처럼 그는 백액호 싱통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백액호 상통은 그만 간담이 서늘해져서는 감히 점강낭아좌를 디밀지를 못하고 후닥닥 몸을 구부려서는 지당공을 펼쳐서는 굴러서 한 옆으로 비껴났다. 한데 황약사 몸놀림의 신속하고 민첩함은 무엇에 견줄 수가 없었다. 왼손을 한번 휘두르는데 그 일장은 보기에 가벼운 것이 전혀 힘이 실리지 않은 것 같았지만 손을 내밀어 흔드는 그 수법이 무척 교묘했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백액호 상통의 머리통이 목둘레가 있는 곳으로부터 잘라져서는 피를 분수처럼 곧장 입쪽으로 뿜어냈다. 황면호 상인은 첫째가 목숨을 잃게 된 것을 보자 혼비백산해서는 분수아미자를 흔들 하더니 싸움의 테두리 밖으로 물러나려고 했다. 바로 이때 그의 몸뚱아리가 막 위로 솟구치려는 찰나 황약사는 어느덧 바람처럼 덮쳐 와서는 왼손을 들어 뻗치더니 황면호 상인의 옷깃을 잡고서는 땅바닥에다가 팽개쳤다. 그러자 황면호 상인의 몸뚱아리는 마치 고무딱총의 탄환처럼 삼장이나 높이 솟아오르더니 쿵하니 떨어졌다. 황약사가 그렇게 팽개치는 자세는 무척 교묘해서 황면호 상인의 두 발이 하늘을 향하도록 하고 머리통이 땅바닥을 들이받게 되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직통으로 땅가죽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마치 절구로 방아를 찢는 것 같기도 했다. 따라서 황면호 상인의 두개골은 그만 박살이 나게 되고 처참한 울음소리가 반쯤 울려퍼졌을 뿐 곧 그는 땅바닥에 나뒹굴어서 죽어갔다. 이렇게 하여 태호오호 가운데 가장 무서운 백액호 상통과 황면호 상인이 미처 이초도 교환을 하기 전에 도화도주 손아래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적모호 학대강과 상면호 초신 연지호 시수영 세 사람은 간담이 찢어지는 듯한 경악을 느끼고 일제히 몸을 날려서는 바깥쪽으로 도망을 치려고 들었다. 황약사는 황면호 상인을 내던져서 죽이더니 갑자기 획 하고 곧장 몸을 날리면서 왼손을 뻗쳐 내 적모호 학대강의 천령개를 후려쳤다. 그 즉시 그 대갈통이 모조리 으깨지게 되었는데 그 순간에 황약사는 오른쪽 발을 날려서는 상면호 초신의 옆구리를 걷어차 버렸다. 상면호 초신은 가슴팍에 염통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갈기갈기 찢어지게 되었다. 태오호오 가운데 셋째와 넷째 또한 도화도주의 낙영장과 소협퇴 아래에 목숨을 잃고 만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겨우 남은 한 사람은 연지호 시수영밖에 없었다. 그녀는 평소의 성질이 표독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남편과 세 분의 채주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자 정녕 가운데 삼혼(三魂) 가운데 이혼(二魂)이 사라지게 되고 칠백(七魄) 가운데 육백(六魄)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녀는 이빨을 깨물며 구엽연화추를 밖으로 뻗어 내더니 구엽연화추의 연꽃 꽃잎 모양의 장치를 빙글 돌리면서 오점의 싸늘한 불빛과 같은 것을 황약사의 오관과 일곱 구멍을 향해 쏘아 붙이는 것이 아닌가. 연지호 시수영의 구엽연화동추는 둥그런 무쇠로 만들어진 공 같은 것 한복판을 속을 비게 해서는 안에다가 다섯 대의 강철로 만들어진 화살을 장치했는데 그 화살은 또한 맹렬하기 이를 데 없는 독약을 묻혀 놓아 사람의 피를 보기만 한다면 목숨을 빼앗았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동추의 머리에 숨겨 두었다가 사용할 때에는 동추의 자루 위쪽을 한번 치기만 하면 구엽동판(九葉銅瓣)이 바로 터지면서 독노(毒弩)들도 동추의 머리에서 튕겨 나오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동추에 암기를 숨겨 놓고 쏘아내는 재간은 무척 엄청난 것이었다. 연지호 시수영은 이와 같은 절기로 얼마나 많은 영웅호걸들을 해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이와 같이 음손한 암기로 황약사에게 상해를 입힌다는 것은 대낮에 꿈을 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독침이 막 날아 나오자 황약사는 커다란 소맷자락을 쳐들었다. 그러자 한 줄기의 강기가 뻗쳐 나면서 다섯 대의 독침은 방향을 틀어서는 되날아갔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마치 다섯마리의 독사처럼 연지호 시수영의 오관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연지호 시수영은 처참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더니 땅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이 여도적은 그런대로 굳센 데가 있었다. 땅바닥에 쓰러지자마자 동추를 들어서는 자기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러자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골수가 튀었다. 이렇게 하여 오호 가운데 겨우 남은 한마리의 호랑이마저도 염라대왕에게 끌려가고 만 것이었다. 황약사는 잇달아 오호를 죽이는데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을 들쳐 밧줄을 끊더니 당부했다. [이 몇 명의 시체들을 교외로 끌어내 구덩이를 파서 묻어 주도록 하게.] 여러 사람들은 황약사가 손짓발짓 하는 사이에 다섯 명을 쳐죽이는 것을 보고 정말 수박을 자르고 무우를 절단하는 것보다 수월하다는 느낌과 더불어 하나같이 간담이 찢어질 것처럼 서늘해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무홍광은 총명하고 영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즉시 달려가서는 몇 명의 젊은 사람들을 지휘해서 몇 개의 돗자리를 가지고 와 다섯 구의 시체를 싸서는 교외 밖으로 끌어내다가 묻어 주었다. 몇 명의 노인들은 황약사가 도적의 우두머리를 죽이자 재빨리 물었다. [황상공, 저 도적들은 어떻게 하지요?] 황약사는 고개를 돌리고 손을 내저었다. [이 좀도적들이야 죽일만한 가치가 있겠소. 관부에 넘기도록 하지요.] 모두들 순순히 그러마 하고 대답을 했다. 황약사는 무중순의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무홍광은 태호오호의 시체를 묻어 주고 돌아와서는 황약사에게 아뢰었다. [나리, 태호오호의 시체는 이미 묻어 주었습니다.] 도화도수는 빙그레 웃고서는 손으로 무홍광의 머리를 만져 주고 웃었다. [훌륭하구나. 너는 정말 총명하다. 내가 너를 제자로 삼아서 훌륭한 곳으로 데려가 재간을 익히도록 해 주마.] 무홍광은 자신이 입을 열어 부탁을 드리기도 전에 황약사가 이미 자기의 심사를 꿰뚫고 있었다는 듯 미리 말을 해주자 그만 크게 기뻐서는 털썩 무릎을 꿇고서 쿵쿵 하고 잇달아 네 번의 큰 절을 올렸다. 이튿날 오교진의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주민들은 황약사가 태호오호를 제거하여 지방의 백성들에게 다시 평온한 삶을 되찾아 준 데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고 특별히 고을 앞쪽에서 융숭한 환송식을 거행했다. 황약사는 무홍광을 데리고 고을의 백성들이 섭섭해 하는 가운데 걸음을 옮겨 하포(霞沛)로 출발했다. 걸어가는 동안 풍광은 아름답고 두 사제지간은 연신 재미나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웃음을 홀렸다. 더구나 무홍광은 더욱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뜻밖으로 황약사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며칠의 길을 오는 동안 더욱더 견문을 넓히게 되어 무척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약사는 제자 무홍광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하나만 열거하면 서넛을 깨닫는 것을 보고 역시 무척 느긋해 하는 한편 크게 위안이 되고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오교진을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 황약사와 제자 무홍광은 하포에 도달했다. 하포는 동해로 나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조그만한 고을이었다. 황약사는 이곳에서 배를 빌려서는 주산(舟山)을 거쳐서 곧장 도화도로 향할 셈이었다. 그런데 사부와 제자 두 사람이 포구에 이르러 배를 한 척 사서 바다를 건너가려고 할 때에 갑자기 바닷가에 한 떼의 어민들이 그 무엇을 둘러싸고서 떠들썩하게 말들을 주고 받는 것이 보였다. 황약사는 다가가 여러 사람을 헤치고 보는 순간 그만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바닷가에는 조수에 한 척의 조그만한 배가 밀려가 얹히게 되었는데 조그만 배에는 사람의 핏자국을 제외하고도 안팎으로 기다란 화살이 잔뜩 꽂혀 있었다. 그리고 한 명의 붉은 옷을 입은 묘령의 소녀가 옷자락이 흐뜨러진 상태로 선실안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녀의 온몸은 모두 다 상처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약사는 조그만 배에 올라서 즉시 손을 내밀어 소녀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그는 품속에서 구화옥로환을 꺼내 소녀의 입안에 몇 알을 넣어 주고는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이 처자에게는 한 가닥 생기가 남아 있구료.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면 칠층의 불탑을 세우는 것보다 낫다고 했으니, 여러분들께서는 불초가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이 처자가 몸을 누일 곳을 마련해 주지 않겠소이까.] 뭇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한차례 소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백발 노인이 나섰다. [상공, 앞쪽은 바로 청운촌(靑云村)이외다. 우리집으로 가서 치료를 할 수 있기는 하오이만, 이 처자를 구완할 수 있겠소이까?] 무홍광은 즉시 앞으로 나아가 백발 노인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우리 사부님께서 구원을 하신다면 바로 구원을 할 수 있는 것이니 빨리 안내를 해 주세요. 시각을 그르치지 않게 말이예요.] 황약사는 제자가 그토록 큰소릴 지르는 것을 보고 그만 말없이 실소하고 말았다. 그 즉시 그는 두 손으로 상처입은 처자를 받쳐 들고는 백발 노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청운촌은 포구에서 불과 삼 마장의 거리밖에 되지 않아 삽시간에 백발 노인의 집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상처입은 처자는 황약사의 치료에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펴보며 두려워 해 마지 않았다. 황약사는 처자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소저 두려워 마시고 정신을 차리시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하구려.] 그 처자는 눈에서 콩알 같은 눈물을 뚝뚝 홀리며 입술을 달싹였으나 소리가 되어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무척 격동돼 있는 상태였다. 황약사는 혹시나 소녀의 심지(心智)에 상해를 입히게 될까 봐 즉시 손가락을 뻗쳐서는 처자의 옥침혈(玉枕穴)을 짚어 혼곤히 잠이 들도록 만들어 주었다. 원래 이 묘령의 처자는 성은 풍(馮), 이름은 향접(香蝶)으로서 절강 사람으로서 대대로 제기부(諸淇府)에 살아왔다. 집안은 괜찮은 편이었으며 부친인 풍래(馮萊)는 거인(擧人)이었다. 풍향접은 젊고 아름다운데다가 또한 선비 집안이라 제기부에서는 이름이 높은 재녀(才女)였다. 그런데 제기의 지부(知府)인 견제민(甄濟民)은 용렬한 탐관오리로서 한평생 재물만 탐해 온 사람인데, 더욱이 그의 아들 견희순(甄希順)은 자기 아버지의 세력을 업고서 사람을 업수이 여기고 어민들에게 행패를 하는가 하면 평소에도 거드름만 피우며 마구 날뛰는 형편이었다. 어느날 풍향접이 외출했다가 견희순을 만나게 되었는데, 견희순은 그녀를 보고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풍씨 집안은 제기 일대에서는 명문족이라 견희순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즉시 집의 내하로 들어가서는 부친인 지부대인 견제민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렸다. 견대인은 언제나 자기의 아들을 총애했는데, 이제 아들이 장가를 가겠다고 하자 기꺼이 동의를 했다. 더욱이 자기가 제기현을 다스리고 있으니 못할 일이 없다고 자처해 온 터라 즉시 수하인 압사(押司) 염문도(閻文道)를 풍씨 집안에 보내 중매를 서서 일을 추진토록 했다. 하지만 풍래는 일개 선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지조는 꿋꿋했고, 기품은 청고한 편이었으며, 악을 원수처럼 여겼다. 평수에 견지부의 악풍에 대해서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던 차에 자기의 외동딸을 견지부가 며느리로 달라고 하는 데는 절대로 응락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염문도는 풍씨 집안에서 그만 머쓱해져서는 앙심을 품고서 지부로 돌아가 견대인에게 알리게 되었을 때에 다시 더 있는 말 없는 말을 마구 보태서 아뢰었다. 견대인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발끈 대노했다. 그로서는 당당한 지부대인인데 퇴짜를 맞으리라고는 섕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을 생각해서 그만 성질을 누르고 참는 도리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하인들을 두 번 세 번 풍씨 집에 보내 설득을 하도록 했다. 허나 풍래는 결코 응낙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더더욱 늙은 청지기에게 지부에서 사람이 오면 모두 다 거절하라는 당부까지 했다. 이렇게 되자 견대인은 더욱더 체면이 서지 않게 되고 성이 나서 그야말로 씩씩거리며 두눈을 부릅떠야 했다. 그는 즉시 염문도와 은밀히 책략을 꾸며서는 가슴속의 맺힌 한을 풀려고 했다. 염문도는 잔꾀가 많은 사람이라 즉시 이렇게 하면 될 것이라고 견대인에게 묏말로 꾀를 짜서 설명해 주었다. 견지부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서는 싱글벙글 웃으며 연신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앞길과 명성을 그르치고 단절하게 되리라고는 그로서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이튿날 염압사는 풍씨 저택에 몰래 포졸들을 풀어 놓았다. 또 사람을 보내 풍씨댁의 부근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풍씨댁 안마당 안쪽에 있는 돌계단 위에 보따리 하나를 던져 넣었다. 늙은 청지기 성복청(成福淸)이 아침 일찍 일어나 정원에 떨어진 낙옆들을 청소하다가 갑자기 마당안 돌계단 위에 보따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달려나가서 살펴 보았다. 늙은 청지기는 호기심이 나서 보따리를 풀어 보았던 것인데 그만 그 순간 두눈이 회둥그레 지고 입이 딱 벌어지게 되었다. 보따리 안에는 금은과 패물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몇가지 매우 정교한 보물과 같은 노리개들도 있어 금은은 오히려 별것이 아니었다. 그 몇가지의 진주꿰미는 그야말로 성을 한채 살만한 보물이었으며, 모든 알의 진주는 용안(龍眼) 정도로 컸다. 이것을 본 늙은 청지기는 그만 정신이 오락가락 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재빨리 대문을 닫아 걸치고는 보따리에 싸인 진기한 보물들을 들고서 안채로 달려들어가 주인에게 알렸다. 그러나 풍래는 늙은 청지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내저었다. [이롭지 못한 재물은 얻어서는 아니 되는 것일세. 게다가 이 재물은 내력이 분명한데 왜 가지고 들어왔는가. 빨리 문밖으로 내던지도록 하게.] 부인이 병풍 뒤쪽에서 걸어나오며 부르짖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그와 같은 재물은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인데, 어찌해서 버려야 한다는 것이예요. 당신은 미쳤나요?] 풍래 노인이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미쳤소. 이 풍지계(馮芝溪)는 한번도 남의 이롭지 못한 재물을 가져본 적이 없소. 성복 자네는 빨리 대문을 열고 바깥에 내버리게.] 성복은 물론 늙은 청지기의 이름이었다. 두 부부가 한참 시끌벅적하게 싸우는데 대문쪽에서 갑자기 우뢰와 같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풍래는 그만 아연해져서는 물었다. [거기, 누구요?] 청지기는 황망히 다가가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문이 활짝 열어 젖히면서 벌떼처럼 십여 명이나 되는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늙은 청지기는 깜짝 놀라 물었다. [여러 나리께서는...]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앞장을 선 포졸이 어느덧 왼발을 들어 서서는 청지기를 걷어차 곤두박질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우르르 몰려들어 객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마침 탁자위에는 여전히 그 주보가 들어 있는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포졸은 그 보따리를 흘낏 보더니 소리쳤다. [이런 도적놈 봤나. 장물이 원래 이곳에 숨겨져 있었군.] 두 명의 포졸들은 다짜고짜 철커덕 하니 풍래의 목을 감고는 힘을 다해 바깥쪽으로 끌어 당겼다. 풍래는 소리 높여 외쳤다. [망했군 망했어. 나는 글공부 하는 선비로서 청백한 사람인데 당신네들의 공문(公門)의 벼슬아치들이 감히 함부로 선량한 사람을 잡아간다는 말인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철썩철썩 하고 얼굴에 잇달아 따귀를 몇 대나 얻어맞게 되자 그만 두눈에서는 불똥이 마구 튀었다. 풍래는 생김새가 점잖으며 빕을 준수하는 선비였다. 속담에도 수재가 병졸을 만나게 된다면 옳은 일인데도 제대로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하여 풍래는 이 이리와 같고 호랑이 같은 포졸들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해서 대문 밖으로 나가게 되었고 끝내는 관아로 송치되었다. 집안 사람들은 서로 울며불며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야단법석을 피웠다. 풍래는 포졸들에게 잡혀서는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끌려서 관아로 들어서게 되었고, 눈깜짝할 사이에 동헌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견지부는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견지부의 얼굴은 딱딱한 것이 무쇠와 같았고, 아래쪽으로는 두 줄의 호랑이 같고 이리와 같은 아전들이 늘어서 있어서 그야말로 십전염왕(十殿閻王)을 연상시켰다. 풍래는 울화가 치밀어올라 여전히 거만하게 태연자약한 자태로 서서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러자 견지부는 경당목을 두드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풍지계, 너는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한 선비라고 일컬으며 문덕(文德)이 뛰어난 사람이라 했는데, 어찌하여서 바다의 대도적과 결탁해서는 장물을 숨겼는가. 이 한 보따리의 진보는 지난달 영파성(寧波城)의 부호인 호축부(胡祝富)가 잃어버린 물건이며, 그 당시에 수십 명이나 되는 도적들이 횃불을 환히 켜놓고서는 노략질을 해갔는데 그 안건(案件)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호씨 집안에서 잃어버린 물건이 어찌하여서 너희 집에서 나왔느냐. 빨리 사실대로 불어라. 그렇지 않으면 살가죽이 성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 몇 마디의 말을 하고서는 공안(供案) 위의 첨통(簽筒)을 거머잡았다. 양쪽의 아전들도 다 고함을 질렀다. [자, 빨리 말씀하랍신다.] 풍래는 책벌레였지만, 이때 만큼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지부가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수치가 분노로 변해서 장물을 집안에 던져 놓고는 화를 증가시켜서 자기에게 매질을 가하게 공초를 받아내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따라서 풍래는 그만 노기충천해서는 가슴을 펴고 낭랑히 입을 열었다. [공조대인(公祖大人)은 들으시오. 만생(晩生)은 집안이 그렇게 풍성하지는 못한 편이나 입고 먹는 것이 모자라지는 않아 근근히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을 수 있었소. 그런데 어떻게 해서 도적놈의 장물을 숨긴다는 것이오. 우리 풍씨 집안은 삼대째로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소. 밖으로는 법을 어기는 사내가 없었고, 안으로는 재가한 아낙이 없었는데, 어떻게 바다나 물에서 노는 큰 도적들과 내통을 했다는 것이오. 더군다나 이 한보따리의 진보는 오늘 이른 아침 청지기가 문을 열고 칭소를 하게 되었을 때에 밖으로부터 던져진 것이오. 그러니 어떤 원수가 일부러 해치려고...] 견지부는 발끈해서는 말을 가로챘다. [닥쳐라. 너는 청렴결백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어찌하여서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해를 끼친단 말이냐. 분명 그 말 자체가 모순되어 있다. 너는 선비의 모자를 쓰고, 남몰래 간악하게도 법을 어기면서 못된 짓을 마구 하고 있다. 여봐라, 저 녀석에게 곤장 스무 대를 안겨라. 그래도 그가 감히 억지를 쓰는지 두고 보겠다.] 견지부는 그를 괴롭히려고 즉시 첨통에서 네 대의 붉은 머리 죽첨(竹簽)을 뽑아 들고서는 땅바닥에다가 홱 뿌렸다. 한 대의 죽첨이 다섯 대의 곤장을 뜻하는 것이니 네 대의 죽첨은 스무 대의 곤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속담에도 관의 법은 가로와 같다고 하지 않던가. 이 사령들은 즉시 달려와서는 풍래를 땅바닥에 엎어뜨리고는 아랫바지를 벗기고 다리를 꼼짝없이 묶고서는 철썩철썩 하고 볼기를 스물 대나 때렸다. 가련하게도 풍래는 닭잡을 힘조차 없는 연약한 서생이라 어찌 그와 같은 무거운 매질을 견디겠는가. 스물 대의 곤장을 맞게 되자 살가죽이 터지고 살이 드러나게 되어서는 기절을 해버리고 말았다. 스무 대의 곤장을 안긴 이후 지부는 다시 명령은 내렸다. [물을 가져다가, 그에게 끼얹어라. 어디 그가 부는지 안부는지 두고 보겠다.] 한 명의 동인이 풍래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대접을 받아서는 그의 얼굴에다가 일단 입에 머금은 몰을 몇 번 뿜었다. 그러자 풍래가 간신히 눈을 떴다. 견지부는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풍가야, 오늘 장물을 모두 너희 집에서 찾아냈다. 본관은 결코 네가 교활하게 쁜뱀을 한다고 해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호씨 집의 노략질한 도적은 어느 누구인지 빨리 불어라.] 풍래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견제민이라고 하오.] 견지부는 풍래가 자기 앞에서 자기를 강도의 우두머리쯤으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게 되자 그야말로 울화가 치밀어서 펄쩍 뛰다시피 했다. 그는 다섯 구멍에서 연기를 내뿜을 정도로 울화가 치밀어서는 부르짖었다. [다시 스무 대의 곤장을 안겨라!] 그리고 그는 첨통을 들어서 다시 네 대의 죽첨을 뽑아 땅바닥에다 던졌다. 사령들은 다시 곤장을 들고서는 잇달아 일고여덟 번을 때렸다. 풍래는 다시 기절을 했다. 그 바람에 매질은 멈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견지부는 호통을 내질렀다. [이 고약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어째서 매질을 하지 않느냐.] 한 명의 사령이 입을 열었다. [대인, 범인은 몸이 허약해서 다시 더 때렀다가는 아마도 견뎌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견지부는 다시 때리게 된다면 풍래의 목숨이 끊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한 명의 백성을 죽이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역시 자기의 다음 계책에 지장을 가져오는지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부득이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그 녀석의 주둥이는 무척 단단하구나, 그와 같은 매질에도 견뎌 내다니. 여봐라, 그를 사형수의 뇌옥에 가두어라. 내일 다시 논하기로 하자] 그는 명령을 내려 일단 물러갔다. 모든 사람들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풍래는 공당(公堂)에서 스물몇 대의 곤장을 맞은 나머지 그야말로 뼈마디가 부러질듯이 욱신거리게 되고 겨우 한가닥 숨만 붙어 있게 되었는데 동인들의 부축을 받어서는 뇌옥에 갇히게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홀렀을까. 풍래는 가까스로 천천히 정신을 차리게 되자 즉시 도적 같은 벼슬아치니, 개놈의 벼슬아치니 하고 마구 욕지거리를 해대는데 옥졸들은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풍래는 한동안 욕지거리를 하다가 그만 목이 쉬고 힘이 달려서 다시는 더 욕을 하지 못했다. 때가 되어 옥졸이 들어와 밥을 주자 풍래는 그 밥을 밥그릇째 땅바닥에다가 내팽개치고 욕을 했다. [이 풍모는 하늘을 떠받들고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 차라리 굶어 죽었으면 굶어 죽었지. 도적 같은 탐관오리의 밥은 먹지 않겠다.] 무릇 옥졸이나 압사 따위는 언제나 방자하고 제멋대로의 고약한 인사들이었다. 옥졸은 풍래가 밥을 땅바닥에다가 내땡개치는 것을 보고는 그만 발끈해져서는 풍래를 한바탕 실컷 매질을 가하려고 했다. 이때 쇠창살 밖에서 그 누가 갑자기 부르짖었다. [염압사께서 오셨도다!] 두 명의 옥졸은 염압사가 도달했다는 말을 듣고는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압사 염문도는 옥사등을 데리고 쇠창살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염압사는 땅바닥에 엎어진 밥과 반찬을 보더니 즉시 옥졸을 욕했다. [죽어 마땅할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거칠고 하찮은 음식을 풍상공에게 갖다드려서 잡수라고 한 것이냐. 빨리 꺼져라. 그렇지 않을 때는 즉시 너의 개다리를 분질러 놓겠다.] 옥졸은 염압사가 자기를 그토록 꾸짖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바로 위의 상관이 앞에 서 있는데 그가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는 공손히 대답을 하고는 물러갔다. 풍래는 염압사와는 한번 상면을 한 인연이 있는지라, 염압사가 옥졸들을 욕하는 소리를 듣게 되자 그만 어리둥절해지게 되었다. 옥졸이 창살 밖으로 나가자 염문도는 온 얼굴 가득히 웃음빛을 띠우고는 옥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옥졸도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풍래는 그제서야 옥사장의 손에 하나의 찬합이 들려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염압사는 먼저 풍래에게 웃으면서 인삿말을 했다. [풍형, 좀 전에 공당에서 정말 고생이 많으셨소이다. 이곳에 한 보시기의 삼탕이 있으니 좀 마셔서 중기(中氣)를 보충하도록 하시죠.] 풍래는 고개를 젖혀서는 두 눈으로 뇌옥의 해두부쪽을 바라보며 오만하게 응시했다. [염압사, 이 삼탕은 당신이 가져온 것이오? 그 도적 같은 탐관오리가 쥐새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고양이처럼 거짓 인정을 베푼답시고 보내온 것인지 말씀을 해보시오.] 염문도는 웃음을 띠었다. [풍형은 오해했구료. 대인이 오늘날 공당에서 매질을 가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었소. 이 일에는 따로 사정이 있는 것이니 삼탕을 먹고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지요.] 풍래는 냉소를 했다. [청혼을 했다가 이뤄지지 않으니까 선량한 사람을 도적으로 몰고 장물을 집안에다가 던져 놓고는 화를 증가시키지 않았소. 그것이 바로 달리 사정이 있다는 것이오. 이 풍래는 죽게 된다면 체념을 하겠소. 그 지랄같은 삼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원장옥액(瑗漿玉液)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마시지 않겠소.] 염문도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풍형은 선비니 잘 아실 것 아니겠소. 시류를 아는 사람만이 준걸이라고 하지 않았소. 물론 이 한마디의 말에 대해서 이 형제가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이다. 풍형은 이와 같이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 불효라는 사실을 모르시오?] 풍래는 노해 되물었다. [턱없는 소리 마시오. 나는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 죽는 것인데, 그 어느 누가 나를 불효하다고 하는 것이오.] 염압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한참 웃고서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으나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고 했소. 지계형, 지계형에게는 딸 하나밖에 없으며 아들이 없소. 만약에 억지를 끝까지 부리다가 나중에 죽게라도 된다면 풍씨 집안의 자손이 끊어지게 될 것이고, 조상님들께서는 통탄의 눈물을 흘리지 않겠소? 그 결과 딸애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크게 불효한 것이 아니겠소.] 이 몇 마디의 말은 풍래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이 녀석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만약에 이렇게 해서 탐관오리의 손에 죽게 된다면, 딸애도 그물에서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안된다, 나는 방법을 강구해야겠다.) 풍래가 이와 같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자 염압사는 자기의 말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 줄 알고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기실 공조대인께서는 풍형에 대해서 어떤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오이다. 영애를 지부대인의 아드님과 혼례를 올리게 된다면 그야말로 주련벽합(珠聯璧合)이으 천생배필이 아니겠소. 풍힝은 굳이 그렇게 고집을 피울 이유가 어디 있소. 사람이란 언제나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무릇 매사에 있어서 늘어날 줄도 알고 움츠러들 줄도 알아야 할 것이오. 풍형은 총명한 사람이니 잘 생각해 보시오. 이 염모가 쓸데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풍래는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을 하더니 불쑥 질문을 던졌다. [견지부가 당신을 보내온 것은 설마하니 그 몇 마디의 말을 시키기 위해서이요? 무슨 다른 일이 있는지 상관없으니 솔직히 말씀을 해 보시구려.] 염압사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두손으로 삼탕그릇을 들고 권하며 웃었다. [풍형, 먼저 한 모금이라도 마시도록 하시구려.] 풍래는 생각을 바꾸었다. 마셔주자는 생각과 더불어 마시고 나서 이야기 하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삼탕의 그릇을 받아서는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염문도는 그제서야 말했다. [견지부대인의 뜻은 무척 단순하오. 풍형께서 혼사를 응낙해 주기만 한다면 아무리 큰일이라 하더라도 없었던 걸로 하겠다는 것이외다. 영애가 장래에 지부대인의 며느리가 되고 작은 마나님이 된다면 이후 만약에 벼슬길에 승진이 되고 한 계단씩 곧장 올라가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고(紫誥)는 틀림없이 영애에게 내려질 것이며, 결코 이에는 거짓이 없을 것이외다. 따라서 풍형의 반평생 입고 먹는 것도 보장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이와 같은 혼사를 응낙하지 않는다면 좋은 일에 마가 들어 어떤 흉악한 일이 벌어질런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오이까. 소제로서는 지계형을 위해서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풍래는 잠시 동안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일에 대해서 나는 일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구료. 내일 밤에 다시 말씀을 드리면 어떻겠소.] 염압사는 웃었다. [상관이 없소. 이 형제는 내일 저녁에 다시 오리다. 풍형께서는 술과 밥이나 드시도록 하구료.] 옥사장이 찬합을 여니 그 안에는 몇 가지의 정교한 찬이 있고, 한 주전자의 맛좋은 술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염압사는 그 두 명의 창살밖에 서 있는 옥졸을 향해 외쳤다. [자네들은 풍상공께 시중을 잘 들도록 하고,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될 것이네. 내 분부를 알아 받들겠지.] 그 두 명은 처음 매우 거드름을 피우고 흉신악귀처럼 험상궂은 얼굴을 하던 옥졸이었으나, 염압사가 그들에게 죄인을 시중들라고 하자 얼굴에 무척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별수없는 일인지라 두 손을 공손히 늘어뜨리고 연신 대답을 했다. 풍래는 더 상관하지 않고 술과 밥을 퍼먹기 시작했으며 거나하게 취할 정도가 되고 배도 불렀다. 염압사는 그가 음식을 모조리 먹어 치우자 그제서야 작별을 고했다. 이날 밤에 풍래는 뇌옥안에서 밤새도록 눈 한번 붙이지 않고 속으로 이궁리저궁리를 했다. 그는 거의 밤새도록 생각을 한 이후에야 이를 갈며 한이 맺힌 어조로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는 한평생 신의를 지켜왔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 나는 간사한 수단을 쓰지 않을 수가 없구나. 좋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정을 하게 되자 그는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그 이튿날 황혼 무렵에 염압사는 다시 뇌옥으로 찾아왔는데 다른 한 사람까지 데리고 왔다. 그 사람은 제기부의 배통판(裵通判)으로 일컫는 자로 이름은 배문해(裵文海)인데 역시 견지부의 심복이었다. 풍래는 본래 이들 두 사람에 대해서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조그만 일을 참지 않으면 큰 일을 그르치기 쉬운지라 부득이 성질을 누르고 몸을 일으켜서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염압사는 그에게 깍듯이 몇 마디의 인삿말을 하고는 풍래에게 입을 열었다. [풍형, 하룻밤 잘 생각해 보셨으니, 이제는 아마도 취사선택을 하셨겠구료.] 풍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내가 응낙하지 않으면 안되겠금 되어 있지 않소. 하지만 지부대인께서는 저의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셔야 겠소이다. 만약에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안된다면 이 풍모는 차라리 곤장 아래 매질을 당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명을 받들지 않겠소.] 염압사는 궁굼한 듯이 물었다. [어떤 세 가지를 말하는 것이오?] 풍래는 즉시 자기의 마음속에 새겨 두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첫째는 향접이 견지부의 댁으로 시집을 가는데 정실(正室)로 받아들이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결코 희첩(姬妾)을 데려가듯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의 딸이 이후에 첫번째 낳은 아들에 대해서는 풍씨 집안의 자손으로 해줄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풍씨 집안의 대를 잇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로는 자기가 이번에 커다란 변고를 당해서 원기가 크게 손상을 입었으니 반드시 한달간 휴식을 해야만이 혼례를 올릴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게 된다면 한달 이후에야 딸애를 시집보낼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설명을 한 풍래는 견지부 대인이 그 세 가지의 조건을 모조리 응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염압사는 즉시 배통판을 한켠으로 끌고가서는 한참 동안 귀엣말을 속삭였다. 첫번째 일은 응낙할 수 있는 일이고, 두 번째 일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풍래에게는 딸애 밖에 없으니 데릴사위를 맞아들이듯 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세번째 한달 이후에야 혼례를 올릴 수 있다는 데에는 그들로서도 감히 함부로 응낙을 할 수가 없었다. 염압사와 배통판 두 사람은 모두 다 눈치가 빠르고 잔꾀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풍지계가 견지부의 음위(淫威)하에 흔사를 응낙하지만 그것은 물론 억지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만약에 풍래가 시일을 벌기 위해서 한달간이라는 유예를 두어서는 나중에 금선탈각(金蟬脫覺)의 수단을 쓰게 된다면 자기네들은 크게 속아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 두 사람은 한동안 의논을 했으나 좀처럼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배통판은 여전히 귀엣말로 말했다. [저 책벌레는 고집이 무척 세오. 만약에 그 세 가지 조건을 다 좋다고 응낙하지 않는다면 이번 혼사는 아무래도 순조롭게 이뤄 놓을 수 없을 것이외다. 한달이란 시일이야 그렇게 긴 것도 아니고, 우리들 쪽에서 사람을 보내 감시를 하게 된다면 일개 닭잡을 힘도 없는 가난한 선비가 도망을 친다고 해도 어디로 도망을 치겠소. 우리가 모두 신경을 좀 쓰도록 하고 그러겠다고 응낙을 합시다.] 염압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풍래에게 말했다. [풍형, 그 세 가지 일에 대해서 공조대인께서는 응낙할 수 있을 것이오. 안심하고 이곳에서 반나절만 기다리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이외다.] 그는 옥사장을 불러들여서는 풍지계의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도록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배통판 두 사람은 사형수들만이 가둬 두는 뇌옥에서 나와 견지부에게로 가서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견지부는 염압사와 배통판 두 사람이 말하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듣고, 첫번째와 두 번째의 일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세번째 일을 듣더니 두 가닥의 장닭 같은 눈썹을 대뜸 위로 곤두세우며 코웃음을 쳤다. [그 책벌레가 한달 후에야 딸애를 시집보내겠다고. 염문도, 자네가 보기에는 시일을 늦추자는 기색이 아닌가?] 염압사는 배통판의 말을 그대로 한번 되풀이해서 설명을 했다. 견지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일 그 책벌레를 돌려 보내게. 자네 역시 그의 집으로 가서 한달만 살도록 하게. 그리고 혼례를 올리는 그날 돌아오도록 하게. 그러면 그가 금선탈각 계책을 선다고 해서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염압사는 황망히 대답했다. [네네, 그렇습니다. 만생이 틀림없이 공조대인을 위해 힘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일은 결정이 되었다. 이튿날 풍래는 명을 받고서 보석이 되어 관아 밖으로 나오게 되었으며, 집에서 심사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유는 증거가 부족해서 아직도 조사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인데, 견지부의 이와 같이 조령모개식의 이랬다 저랬다 하는 조처는 보기에도 무척 가소로왔다. 그러나 전제시대에 있어서는 흔하디 흔한 일이라 백성들은 하나같이 속으로만 환히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풍래는 한 대의 수레를 타고 배통판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진(秦)씨 부인과 향접 모녀 두 사람은 풍래가 집으로 돌아오자 너무나 기뻐서 그만 앞으로 달려나와 풍래를 얼싸앉고 대성통곡을 했다. 풍래 역시 주름진 얼굴에 눈물을 연신 흘렀다. 그러나 배통판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무슨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배통판은 조금도 눈치를 보거나 하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서 자기가 들어가서 잘 방을 정리하도록 했다. 원래 그는 두 사람의 하인까지 데리고 왔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주복 세 사람은 함께 풍래 집안에 들어가 살았는데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들 한집안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풍래는 밤이 되어 자기의 방으로 되돌아갔을 때에야 모든 것을 진씨부인에게 말할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다.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꽃과 같이 귀여운 딸애는 반드시 그 탐관오리의 아들에게 시집가야 하겠군요. 접향은 어렸을 적부터 당신의 훈도를 받아 언제나 열녀전(烈女傳) 인물로 자처해 왔으니 아마 죽는 한이 있어도 듣지 않으려고 할 거예요.] 풍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낙하지 않는다면 무슨 방법이 있겠소. 도적 같은 탐관은 나를 산채로 때려서 죽일 것이고, 접아 역시도 그의 독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그래서 나는 거짓으로 때답을 하고 뇌옥에서 빠져 집으로 돌아온 것인데, 나의 계책이란 것은....] 그는 부인에게 귀엣말을 한동안 했다. 진씨 부인은 얼굴이 붉어져서는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그건 너무나 위험해요.] 풍래는 정색을 했다. [당신은 적지 않은 책을 읽었소. 병빕에도 사지에 놓인 이후에야 살아나게 된다는 한마디의 말을 모르는 것이오. 당시의 황개(黃盖)가 고육계(苦肉計)를 써서는 주유에게 수십 대의 볼기를 맞고서야 조조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그런 연후에야 불을 질러서 연환선(連環船)을 모조리 태울 수 있지 않았소.] 부인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서야 다시 이 일을 따지지 않았다. 너댓새가 지나가게 된 어느 날, 풍래는 갑자기 진씨 부인과 언쟁을 벌였다. 안채에서부터 벌어진 언쟁이 사랑채까지 이어졌다. 진씨 부인은 엉클어진 머리를 하고서는 울며불며 늙어 죽지 않는 것이 양심도 없다고 마구 욕을 해댔다. 풍래는 주먹을 쥐고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부인을 잡고서 마구 매질을 했다. 부부 두 사람은 그야말로 한덩어리가 되어서 돌아갔다. 배통판은 황망히 나서서 싸움을 말렸다. 이때 진씨 부인은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양심도 없는 것 같으니라고. 딸애가 지부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게 되니까 그만 우쭐해져서 제 분수도 모르게 된 늙은이 같으니라고. 육십 세가 다된 나이에 첩을 두겠다니, 인두겁을 써도 분수가 있지.] 풍래는 진씨 부인을 손가락질하며 욕을 했다. [불효는 세 가지라 하지만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크다고 했네. 누가 자네 보고 못나게스리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들 하나 낳지 못하라고 했는가 말이야. 옛날에 아낙이 자식이 없으면 칠거지악의 하나로 꼽아서는 내쫓았어. 내가 자네를 어지간해서 내쫓지 않고 첩을 하나 두자는 것은 그야말로 자네에게는 다행한 일이란 말이야.] 第 十一 章. 기구한 내력 풍래는 배통판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배형, 배형이 한번 평해 보시오. 공조대인께서 나를 예쁘게 보시고 우리 딸애를 며느리로 삼자고 했소. 그러니 나도 젊은 첩을 한명쯤 얻어서 말년을 한번 즐겨 보자는 것인데, 그것이 잘못되었소?] 배통판은 대답했다. [아니 그럴만하죠. 아주머님, 여자는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의 뜻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주머니께서 풍형의 뜻을 따르도록 하십시오.] 진씨는 죽자고 남편이 첩을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며 쿵쿵 뛰면서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풍래는 노해서 말했다. [이 표독한 여편네가 너무나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군. 복성, 이리오게. 자네는 이 계집을 대문 밖으로 내쫓아 자기의 친정으로 돌아가도록 하게.] 그는 잇달아 늙은 청지기를 불러서는 진씨 부인의 옷과 보따리를 챙기도록 했다. 그리고는 수레를 고용하도록 했다. 진씨 부인은 내친걸음이라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내가 가지, 왜 쫓겨나야 해. 어디 너희 늙은 영감쟁이 어떤 좋은 꼴을 보나 두고 보자구.] 부부 두 사람이 이 지경으로 말을 막 하는 판이니 결판이 난 것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진씨 부인은 눈물을 질질 짜며 수레에 올라서는 풍씨댁의 대문을 나섰으며 말끝마다 친정댁으로 간다고 말했다. 풍래는 부인을 쫓아 내보낸 후 의기소침해서는 배통판에게 말했다. [배통, 너무 욕하지 마시오. 어질지 못한 여편네가 돼서 정말 배형이 속으로 웃었을 게요.] 배통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부인께서야 일시 화가 치밀어 친정댁으로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너댓새 후면 마음을 바꾸어서 돌아올 겁니다.] 풍래는 갑자기 웃음을 띠우고 입을 열었다. [내가 하마터면 잊을 뻔했구료. 오늘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의 제삿날이구료. 자자, 우리 술이나 한잔 합시다.] 배통판은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었으나, 조금 전에 그들 부부가 싸우던 광경을 떠올리고는 풍래가 마음이 답답해서 술기운을 빌려 시름을 쫓아내려고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는 본래 갈대처럼 강한 쪽에 붙는 인물이었다. 풍래가 견지부의 미래의 사돈영감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비가 딸 덕을 입어 귀하게 되는 판인데 그 자신으로서는 그의 비위를 맞추어 주고 싶은 지라 웃으면서 응낙을 했다. [술 한잔 하지요. 상대를 해드리지요. 그리고 술기운을 빌어 싯귀라도 몇 줄 읊는 것도 인생의 일대 즐거운 일이 아니겠소이까.] 풍래는 즉시 늙은 청지기에게 밖에 나가서 술을 사오도록 했다. 배통판은 막았다. [풍형, 시중에서 파는 술은 좋지 않아 마시기가 역겹소이다. 소제가 두 명의 화주를 가지고 왔으니, 풍형께서 돈을 쓸 필요가 없소이다.] 원래 배통판은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비록 풍가의 집에서 살고는 있으나, 음식은 자기것을 가져와 먹었지 풍가의 밥이나 반찬을 먹지 않았다. 이에 풍래는 그저 그래도 되겠다는 대답을 했다. 여기는 옛날의 소흥부였다. 소흥부(紹與府)는 중국에서 유명한 술고장이었다. 무슨 여정진소(女貞陳紹)니 화조죽엽(花雕竹葉)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다 빼어난 술들이었다. 풍래와 배통판은 서재에 앉아서 한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삽시간에 한 주전자의 술을 비우게 되었다. 풍래는 늙은 청지기인 성복에게 말했다. [성복, 이 화조술이 엷어졌으니 가져가 좀 데워 오게나.] 늙은 청지기가 응낙을 하고서는 술주전자를 들고 나갔다. 잠시 후에 그리고 다시 술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풍래는 두 잔의 술을 가득 따르고는 배통판에게 입을 열었다. [배형, 이 한잔을 건배합시다.] 배통판은 술잔을 들어서는 단숨에 죽 들이켰다. 풍래는 술을 입가로 가져가더니 갑자기 손이 미끄러워졌는지 잔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한잔의 술이 바닥에 쏟아지게 되었다. 배통판은 갑자기 안색이 홱 변해서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풍래를 손가락질했다. [당신은 무척....] 다음 말을 미처 말하기도 전에 털쌕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쓰러지더니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고 마는 것이 아닌가. 배통판이 쓰러져 죽자 늙은 청지기가 즉시 달려들어왔다. 풍래는 급히 물었다. [성복 그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배통판이 데리고 온 두 명의 하인이었다. 늙은 청지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역시 그들의 주인과 똑같은 꼴이 되지 않았겠소이까.] 원래 조금 전에 일어난 모든것은 풍래가 미리 안배한 묘책이었다. 그는 첩을 두어야겠다고 해서 부인과 일부러 언쟁을 벌이고 부인을 대문 밖으로 쫓아냈으나, 기실 그때 이미 풍씨 집안의 모든 금은이나 값진 물건들을 가져간 것이었다. 풍래는 사흘 이전에 벌써 늙은 청지기에게 밖에서 약간의 학정홍(鶴頂紅)을 사 가지고 오도록 했다. 학정홍은 유명한 독약으로 술에 타게 된다면 삽시간에 사람을 죽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구실을 붙여서 처를 내쫓고 술로 시름을 달랜답시고 배통판과 대작을 하게 된 것이었다. 술이 약간 거나해지게 되자 그제서야 그는 술을 데운다는 구실로 늙은 청지기에게 독을 타도록 했으니, 제 아무리 배통판이 눈치가 빠르고 잔꾀가 많은 사람이지만 결국에는 풍래의 묘책에 말려들고 말았던 것이었다. 배통판이 데리고 온 두 하인은 늙은 하인이 독약을 술에 탄 이후에 그 즉시 부엌에서 두 가지의 안주를 장만하고 한 주전자의 독이 탄 술을 그들에게 갖다 주고서는 주인이 내린 것이라고 했다. 그들 두 명의 하인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 즉시 술을 몇 모금씩 먹은 결과 역시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가고 만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풍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 세 사람을 독살했다. 이야말로 벌이 비록 작지만 쏘면 그 독이 말과 부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누가 서생을 함부로 능멸할 수 있다고 하겠는기 묘책이 성공하게 된 이후 풍래는 태연자약한 안색으로 늙은 청지기에게 배통판 등 세 사람의 시체를 그들의 침실로 떠메어 들어가게 하고 일곱 구멍에서 흘린 피를 닦아내고 이부자리를 깔아서 눕힌 후 다시 사랑채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그의 집안에는 처와 딸 이외에는 오직 한 명의 늙은 청지기와 또 한 명의 여자 하인이 있을 뿐이었다. 이틀 전에 아가씨를 시집보낸다는 구실을 붙여 시집을 보냈기 때문에 자기네들도 모두 다 관아의 안채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는 구실을 붙여서는 물리친 것이었다. 이렇게 귀신도 모르게 감쪽같이 일을 해치운 풍래는 딸애를 불렀다. [향접아, 너는 성복과 동성(束城)의 복태잔(福泰棧)으로 가서 어머님을 찾아라. 나도 잠시 후에 그곳으로 가마...] 원래 그는 이미 도망칠 기회를 안배해 놓았던 것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처를 집안에서 쫓아내는 것이었지만 기실에 있어서는 진씨에게 동성의 복태라는 객점에 잠시 머물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기 부녀 두 사람과 합류해서는 함께 도망을 치기로 한 것이었다. 향접은 공손히 대답하고서는 늙은 청지기와 함께 대문을 나섰다. 늙은 청지기는 한 채의 교자를 빌려서 향접을 모시고 동성으로 갔다. 이렇게 되자 넓다란 집안에는 겨우 풍래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는 매우 여유있게 집안에서 몇 시간 동안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게 되었을 때야 느릿하게 혼자서 대문을 나섰다. 집앞에는 아무도 없는지라 뒷짐을 지고 옛날 문주회(文酒會) 나가듯이 흥얼거리면서 걸음을 옮겨 놓아서는 곧장 복태잔으로 찾아들었다. 늙은 청지기는 이미 객잔의 문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이 온 것을 보자 청지기는 즉시 객잔으로 들어가서는 진씨 모녀에게 통지를 하고 모든 것을 챙겨서는 객점에서 떠나도록 준비를 시켰다. 한집안 네 식구가 두 대의 마차를 빌려서 성문이 닫히기 전에 제기현성을 나왔다. 그야말로 옥으로 만들어진 조롱을 깨뜨리니 채봉은 날아가고 금으로 만들어진 자물쇠를 비틀어서 이무기가 종적도 없이 도망치도록 놓아주더라는 두 마디의 속담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 일은 이튿날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견지부에게 발각되었다. 원래 견지부는 배통판을 풍래의 집으로 가서 거처하도록 하면서 풍래부녀를 감시하도록 했지만 여전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하여 매일 아침 일찍 한 명의 통인을 풍씨의 집으로 보내 동정을 살피도록 한 것이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견지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한 명의 아전을 풍씨집으로 보냈다. 한데 그 아전이 풍씨집앞 문앞에 이르게 되어 문을 두드리려고 했을 때에 문이 그저 닫혀 있을 뿐 빗장이 질려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풍씨집안의 여러 곳은 썰렁하게 텅 비어 있었고, 한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아전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닫게 되고 재빨리 큰 소리로 배통판을 불렀다. 그러나 목청이 터지도록 불렀으나 전혀 대답하는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당황해진 아전은 방으로 들어가 찾아보게 되었는데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배통판과 두 명의 하인이 침대 위에 죽어자빠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고, 이부자리도 정결하게 깔려 펴져 있었다. 다만 그들의 얼굴이 시커매져 있어 무척 공포스러웠다. 그 아전은 그만 혼비백산해서는 대뜸 그집 대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소리 높여 외쳤다. [귀신이다. 귀신이 나타났다.] 그와 같이 고함을 질러대니 삽시간에 그 동내의 이정(里正)을 놀라게 했고, 이정과 더불어 동네사람들이 들어가 보고서야 배통판 추곡 세 사람이 맹렬한 독약을 먹고서는 독이 퍼져 죽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풍래집안의 네 식구는 어디로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견지부는 그와 같은 소식을 듣게 되자 길길이 뛰며 화를 터뜨렸다. 그는 명령을 내려 성문을 닫아 걸고는 제기부의 모든 집을 수색하도록 하는 한편, 해포문서(海捕文書)를 각처로 보내서는 풍래 부녀를 잡아 대령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늦어지고 만 것이었다. 진정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인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편 풍래는 그와 같은 금선탈각의 연극을 꾸미고 견지부의 그물에서 빠져나가자 마차를 연신 몰아 자꾸만 앞으로 나갔다. 멀리 제기병력에서 빠져 나가 조아강(曹娥江) 강변까지 이르러서야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마차를 버리고 한 척의 덤으로 배 한복판에 선실을 만드는 것처럼 차일을 친 오봉선(烏蓬船)을 몰아 강 어귀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이곳은 바로 황암현(黃岩縣)의 지역에 속하는 곳이었다. 풍래는 견지부의 해포문서가 황암까지 보내지게 된다면 자기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서 겨우 하룻밤을 묵고서는 이튿날 즉시 총총히 일어나서는 한 척의 해선(海船)을 세내서 타고는 바다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돛을 올리고 파도를 헤치며 곧장 강소(江蘇) 성으로 나아간 것이었다. 원래 풍래는 자기가 이번에 제기에서 떠나게 된다면 삼사 년 또는 사오 년 안으로 돌아을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까 견지부가 지부로 남아 있는 한 자기로서는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별수없이 고향을 오랫동안 등져야 한다고 각오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배통판을 독살하고 도망치기 전에 이미 이후에 어디로 가서 목숨을 부지하느냐 하는 계획을 모조리 세워 놓고 있었다. 풍래가 진사(進土)에 오르게 되었을 때에 종사(宗師)를 한 분 모신 바 있었다. 송나라 때에는 무릇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은 반드시 과거장을 주관했던 종사의 문하로 들어가 그분에게 문생(門生)이라는 첩자(帖子)를 올려야 했다. 이 종사 이름은 조효산(趙曉山)이라 했고 그는 천성이 강직했다. 그는 건강(建康-지금의 남경)에서 병마지휘사(兵馬指揮使)로 있었다. 풍래는 절강에서 탐관오리의 박해를 받고 도저히 발붙일 곳이 없게 되자 만부득이 과거의 종사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해선을 세내어서는 말끝마다 사공에게 강소성의 남통(南通)으로 가자고 당부했다. 일단 남통에 도달하게 된다면 배를 버리고서 언덕으로 올라 육로로 찾아갈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날 바람은 무척 잔잔한 편이었고, 파도도 일지 않았다. 풍래는 뱃전에 기대어서는 넓고 넓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경치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크게 넓어지면서 흐믓해지기조차 했다. 그는 흥이 나서는 진씨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우리가 비록 그 탐관오리의 박해를 받아 도망치는 험한 길을 걷게 되었지만 이와 같은 경치를 보니 역시 이번 길이 허행은 아닌 것 같구려] 진씨 부인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풍래는 기분이 좋아서 스스로 한 주전자의 차를 끓여서는 술을 대신해서 마시면서 싯귀절을 읊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의 대련(對聯)을 떠올리고 딸애인 향접을 불러서는 그녀에게 댓귀를 지으라고 하려 하는데 갑자기 사공이 '읔' 하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야단났군. 동해왕(東海王)의 형제가 왔소이다!] 풍래는 이때 동해왕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 깜짝 놀라서는 물었다. [사공, 사공, 그 동해왕이라는 자는 어디 있는 것이오?] 예닐곱명의 사공들은 그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황망히 뒷선실로 가더니 선실의 판자벽 안에서 한폭의 남색 바탕의 세모꼴을 한 조그마한 깃발을 꺼냈다. 풍래가 그 깃발을 보니 바탕은 남색인데 금빛실로 하나의 해가 수놓아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사공들은 허겁지겁 돛대의 밧줄을 걸어 내려서는 깃발을 밧줄에 묶어서 돛대 위쪽으로 올렸다. 풍래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서는 어리둥절해지기만 했다. 바로 이때에 수평선상에 세 척외 커다란 배가 나타났다. 이 세 척의 거대한 배는 금빛이 찬란할 정도로 호사스럽게 꾸며져 있었으며 하나의 품자꼴을 이루고서는 바람을 맞으며 물길을 헤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커다란 배가 모습을 드러내자 해선의 사공이나 키잡이는 크게 숨 한번도 제대로 쉬지를 못하고 하나같이 전전긍긍하는 것이 마치 깊은 물가에 이른 것 같기도 하고 염은 얼음 위를 걷는 사람 같기도 했다. 풍래는 이와 같은 광경을 보자 얼떨떨해져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딸애인 향접이 약간 알아차린 듯 말했다. [아버님, 저것은 해적들의 배예요. 오늘 우리들은 해적을 만난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르니, 역시 하늘의 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요.] 풍래는 해적이라는 말을 듣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동해왕은 원래 해적들이었다. 그러니까 사공이 나타나는 배를 보고 허겁지겁 두려워하는 양을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해가 수놓여진 남색의 세모꼴 깃발을 올리는 것은 어떤 의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씨부인은 도적들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서 딸애를 얼싸안듯 하고는 선실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풍래는 선비의 기질을 고스란히 나타냈다. (나야말로 험난을 피해서 도망치는 가난한 선비인데 무슨 돈이나 재물이 있어서 해적에게 빼앗기겠는가?) 속담에 태산이 무너져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아야만이 장수가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선비도 마땅히 그와 같이 크게 용감한 기개의 기질을 나타내야 옳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판단한 풍래는 오히려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는 책광주리 안에서 한 권의 춘추를 꺼내서는 옷깃을 가다듬고서 낭랑히 읽기 시작했다. 아무리 칼날이 목에 와닿고 커다란 화분이 머리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는 두려운 모습을 들어내지 않으리라 작정을 한 것이었다. 바로 이 찰나에 세척의 커다란 배는 어느덧 이쪽의 해선으로 가까이 다가 왔으며 서로의 상거가 일이십장 밖에 되지 않게 되었다. 해선 위의 사공이나 키잡이들은 즉시 돛을 내렸다. 그리고 바다 한복판인데도 닻마저 내렸다. 마치 명령을 받고 검사를 받는 배처럼 바다 위에 세우고는 꼼짝하지 않는 것이었다. 맞은편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던 배 가운데 한복판의 커다란 배가 천천히 해선쪽으로 다가왔다. 진씨부인은 선실 안에서 빈틈 사이로 그와 같은 광경을 지켜보며 벌벌 떨었다. 그리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관음경을 외우며 하늘이 자기네 한집안 사람을 편안무사하게 보호해 달라고 빌었다. 풍래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여전히 그곳에 앉아서 춘추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배의 갑판 위에는 새카맣게 이삼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이 모시고 있는 한 사람은 표범의 머리에 호랑이 눈을 하고 온 얼굴에 구레나룻을 길렀으며 붉은 얼굴빛에 코가 우뚝 솟은 청년의 도적 괴수였다. 그 도적 괴수는 돛대에 올려져 있는 남색의 세모꼴 깃발을 올려다보더니 소리 높여 외쳤다. [너희들은 해마다 내는 인정전을 바쳤느냐? 선실에는 어떤 사람이 있느냐.] 풍래는 그제서야 사공이 그 파란 기를 올리는 것은 해적들에게 자기네들을 보호해 주십사 하고 인정전을 냈다는 표시라는 것을 알고 약간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다시 도적의 괴수가 선실에 타고 있는 승객이 누구냐는 질문에 그만 또 걱정이 되었다. 이때 두 사공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번에 태우신 분은 한 분의 선비인 상공(相公)입니다. 그분은 처와 자식을 데리고 황암에서 출항을 한 것이며 강서성의 남통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붉은 얼굴의 도적 괴수는 호통을 쳤다. [자네가 태운 사람은 알고 보니 선비였군. 그것 참 잘 되었다. 이봐라 너희들은 가서 한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이 배에 태우도록 해라. 그리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갑판위의 해적들은 이리와 호랑이처럼 우렁찬 대답소리를 터뜨리면서 뱃전으로 모여들었다. 거대한 배의 뱃전 위에서 두 척의 산판이 떨어지더니 바다 위에 놓여지게 되고 칠팔 명이나 되는 해적들이 일제히 그 산판 위로 내려서더니 노 소리도 우렁차게 곧장 해선이 있는 쪽으로 저어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그들은 해선의 옆에 와 닿았다. 그러자 이 해적들은 뱃전을 잡고서는 질풍과 같이 잽싸게 기어오르더니 다짜고짜 선실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풍래는 여전히 선실에서 고갯짓을 해가며 좌씨춘추(左氏春秋)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한 명의 해적이 걸어들어오더니 다짜고짜 풍래의 따귀를 한 대 갈기고는 손을 뻗쳐서는 그의 좌씨춘추를 빼앗았다. 그러자 풍래가 부르짖었다. [당신은 어찌해서 선비를 능멸....]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풍래는 배를 그 도적의 발길질에 걷어차이게 되어서는 나무판자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해적들은 뒤에 있는 선실의 문을 깨어지도록 와락 잡아채서는 진씨모녀를 안에서 잡아서 끌어냈다. 해적들은 향접의 자색이 뛰어난 것을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 묘하게 되었는걸. 이곳에는 또 한 명의 아름다운 암컷이 있었으니 이 계집애를 세째 대왕에게 데려다 준다면 틀림없이 많은 상금을 내리겠군.] 이 해적들은 흉악하게 노는 것이 습성이 된 듯 곱게 자란 아가씨를 아끼고 쓰다듬을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진씨 모녀들이 우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즉시 밧줄로 그녀들을 묶어 버리는 것이었다. 풍래마저도 함께 뒷손으로 결박을 당해서는 산판에 내려서서는 커다란 배쪽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붉은 얼굴의 도적괴수는 호통을 쳤다. [사공은 들으라. 이 서생이 남긴 옷이나 은자는 모두 다 너희들에게 내리도록 하마. 그러나 너희들은 쓸데없는 일에 참관하지 말고 또한 관아에도 알려서는 아니 되느니라.] 사공은 동해왕과 그 수하의 도적들을 사갈처럼 두려워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아니올시다라는 말을 하겠는가. 그저 순순히 닻을 올리고는 배를 띄워 떠나갔다. 해적들은 풍씨 집안의 부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늙은 청지기까지 네 사람을 묶어서는 해적선 위로 데리고 올라서는 선실 안에다가 처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울며불며 소리치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선실의 문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난 이후에 몇몇의 해적들이 감시하듯 지켰다. 진씨 부인은 울면서 부르짖었다. [이젠 글렀다, 글렀어. 조금 전에 도적 같은 탐관오리의 그물에서 벗어났다 했더니 이제는 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개 같은 도적떼들을 만나게 되었구나.] 풍래는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성이 나서 말했다. [울기는 왜 우는거요. 생사는 운명이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았소. 기껏해야 한칼에 두 토막이 나겠지. 무슨 큰 고통을 당하겠소. 떠들어서 내마음을 흐트러 놓지 마시오.] 원래 그는 도적의 괴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에 세 치의 민활하게 움직이는 혓바닥을 놀려서는 동해왕이라는 자를 설복시킨 이후에 다시 한번 커다란 액난에서 벗어나 보자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철썩철썩 들려오고 바닷바람은 휙 하고 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거대한 배는 바다 위에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반나절이 지나게 되었을 때에 날이 점점 어두워지게 되면서 바다 저쪽에 반쪽의 일그러진 달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커다란 배는 어느덧 한 채의 괴이한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고, 바위들이 울퉁불퉁한 섬앞에 도달해서는 닻을 나리는 것이 아닌가. 이 한채의 섬은 결코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섬이 아니었다. 바닷가 언덕쪽에는 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고, 동굴빛이 번쩍번쩍 기라성처럼 촘촘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래 이곳이 동해왕의 대채(大寨)였던 것이었다. 이 한 채 섬의 이름은 흑사도(黑沙島)라고 했는데 섬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해적들과 그들의 가족이 살고 있었다. 송나라가 남천을 한 이후에 금나라 사람들이 중원으로 침입함에 따라 병란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어 백성들은 고달픈 생활에 쪼들리게 되었고, 그리하여 억센 사람들은 태반이 바다 쪽으로 도망을 쳐서는 떼를 모아 일어난 것이 바로 커다란 한 떼의 해적이었다. 동해왕이 이끄는 이 해적들은 그래도 최근에서야 일어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무리들에게는 모두 다 세 명의 대왕이 있었는데, 큰 괴수는 탄해장경(呑海長鯨) 정천운(鄭天云)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 괴수는 구두은사(九斗銀斯) 무원경(武元庚)이라 했으며, 셋째 두령은 팔미구(八尾龜) 도종경(陶宗敬)라 했다. 이 세 명의 대왕들은 각기 일신에 빼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어 뭇호걸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었다. 동해의 해적패거리로는 예전에는 손봉고(孫鳳姑)를 위시한 한 떼의 사람들이 우두머리 격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손봉고가 전진교주 왕중양에게 감화되어 상투를 틀고 도가에 몸을 던져 이름마저도 손불이(孫不二)로 바꾸게 되자 남겨진 지역은 정천운이 거느리는 이 한 떼의 해적들이 대신 들어서게 된것이었다. 그리고 전후에 걸쳐 몇 년 되지 않는 사이에 그들의 형제들은 자꾸만 불어나게 되고 배들도 점점 많아져 동해상에서 패왕노릇을 하게 된 것이었다. 풍래의 한집안 사람들 역시 운이 아주 좋지 못해 공교롭게도 이 한 떼의 도적들과 그만 맞닥뜨리게 되어서는 그들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흑사도까지 잡혀오게 된 것이었다. 붉은 얼굴의 도적 괴수는 동해왕 세 두목 가운데 둘째 괴수인 구두은사 무원경이었다. 그는 순시선으로 해안에 닻을 내리게 한 후에 즉시 해적들을 지휘해서는 풍래의 한집안 네 사람을 끌어서 섬으로 오르게 하고는 곧장 대채로 압송을 했다. 대채의 안쪽에는 놀랍게도 한 칸의 아름답게 꾸며진 충의당(忠義堂)이 있었다. 땅 위쪽에는 한일자로 세 개의 호피교의(虎皮交椅)가 놓여 있었는데 무원경은 호피교의 쪽으로 다가가더니 한 호피교의에 앉아서는 소두목에게 명령했다. [대채주와 셋째채주를 모시고 나오도록 하게.] 잠시 후에 병풍 뒤쪽에서 두 사람의 우람한 체구를 한 대한들이 걸어나왔다. 앞장서서 걸어 나오는 사람은 대괴수인 탄해장경 정천운인데 안색이 엷은 금빛을 띄우고 있었고, 호랑이 얼굴에 제비의 턱을 하고 있는 것이 무척 위무(威武)적인 기개가 엿보였다. 뒤를 따르고 있는 사람은 셋째괴수인 팔미귀 도정경으로 검은 얼굴에 짙은 눈썹, 거기다가 살결마저 시꺼먼 숯덩이 같았다. 두 대왕은 모두다 바람막이를 걸치고 안으로는 영웅(英雄) 바지저고리를 입고서 어슬렁 어슬렁 당앞으로 나섰다. 정천운은 한복판에 있는 교의에 앉고 도정경은 오른쪽에 앉는 등 세 명의 대왕이 일제히 자리에 앉게 되었다. 무원경은 큰괴수와 셋째괴수가 앉길 기다려서는 호통을 쳤다. [그 가난한 선비를 끌고 오너라. 말을 시켜 보자.] 풍래는 세 대왕의 살기등등한 모습을 대하게 되자 처음에는 약간 두려운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복이라면 화러니 하면서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으니 두려워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갑자기 용기를 내어서는 소리 높여 외쳤다. [대왕은 어째서 예로써 선비를 대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선비를 능멸하고 짓밟으려 하는 것이오. 이것이 큰일을 이룰 수 있는 행위라고 여기시오.] 그가 머리를 움직이면서 그와 같이 소리치자 세 명의 대왕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정천운은 광소를 한차례 터뜨리더니 무원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우, 저 책벌레는 그런대로 배짱이 좀 있구만.] 그리고 그는 다시 풍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의 성명을 대보아라.] 풍래는 자기의 이름을 대고 막 자기가 탐관오리인 견제민의 박해를 받아 가족들을 거느리고 도망을 치는 길이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정천운이 어느덧 혀를 차며 호통소리를 내질렀다. [닥쳐라. 이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사람들이 너희들 선비들이다. 우리들은 선비를 보기만 하면 즉시 죽이되 목숨을 남겨 두지 않아 이 세상사람을 위해 해를 제거하는 것이다.] 풍래는 가슴팍을 내밀었다. [대왕, 그 몇 마디의 말은 이치가 닿지 않소이다.] 정천운은 냉소를 띠었다. [이치를 말이냐? 물론 있지. 이 세상을 돌아볼 때에 천고 이래로 오랑캐와 통해서 나라를 팔아 먹고, 백성들을 잔인하게 해치는 벼슬아치들 가운데 그 어느 누가가 선비 출신이 아니냐 말이다. 이사(李斯)는 선비인데 그는 진시황에게 분서갱유(焚書坑儒)등의 잔인무도한 일을 시켰다. 이것이 바로 그 좋은 하나의 예이다. 그리고 송나라의 간신인 채경(蔡京), 동관(童貫), 왕보(王輔), 장방창(張邦呂), 그리고 진회(秦檜) 따위 가운데 그 어느 누가 가슴 가득히 경론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 하지만 그들은 조정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자 충성스럽고 어진 백성들을 죽이거나 해치고 나라를 송두리째 팔아 먹으려고 했다. 생각해 보아라. 그러니 선비들은 마땅히 죽여야 하지 않겠느냐?] 풍래는 빙그레 웃었다. [대왕의 말씀은 틀렸소이다. 만생(晩牛)이 한마디 묻겠는데 선황(성황) 때에 금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한 악무목(岳武穆)은 글공부한 선비가 아니었소이까?] 원래 송나라 때의 백성들은 하나같이 악비를 존경했는데 그 이유의 하나는 한편으로 그의 장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풍파정에서 화를 당해 간악한 승상인 진회에게 산 채로 죽음을 당한 것을 아쉬워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누차에 걸쳐 금나라 군사들을 무찔러서 대송나라의 반쪽 천하라도 지킨 훌륭하고도 위대한 업적을 기린 것이었다. 여느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악무목을 악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악비가 송나라 백성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존경받는 우상인가를 알수가 있으리라. 이때 풍래가 그와 같은 두 마디를 내뱉자 충의당 위쪽의 세 대왕은 그만 어리벙벙해졌다. 갑자기 무원경이 호통소리를 내질렀다. [개방귀 같은 소리 하지 말아라. 악무목은 충용무쌍(忠勇無雙)한 영웅호걸이시지, 어떤 면에 있어서 선비라는 것이냐. 너의 시큼한 글쟁이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풍래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악나리께서 만약에 글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면 그토록 귀신처럼 용병을 할 수 없을 것이며, 몇 차례나 금나라 군사를 깨뜨리지 못했을 것이오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글재주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만강홍(滿江紅), 오악맹사기(五岳盟祠記)와 같은 문장을 쓸 수가 있었겠소이까. 설마하니 영웅호걸이 그저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싸움만 할 줄 알고 계책을 설 줄 모른다는 말씀이오.] 충의당상의 세 대왕은 그만 머쓱해져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팔미귀 도종경이 졸개들이 압송해온 진씨 모녀를 한번 바라보더니 갑자기 손가락으로 섬돌아래를 가리키며 풍래에게 물었다. [저 아가씨의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인가? 당신의 딸인가?] 풍래는 속으로 흠칫했다. 그는 자기의 한가족 네 사람이 제기지부 견제민의 박해를 받고 도망친 경과를 쭉 이야기했다. 팔미귀 도종경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책벌레, 이것이야 천리문 밖의 사람이라도 인연의 줄이 닿으면 혼사를 이룬다는 것이 아니냐. 당신의 딸이 지부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기 싫다 해서 바다쪽으로 도망을 쳐 와서는 내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마침 나는 여편네가 없는 사람인데, 이것이야말로 천생배필이 아니겠는가. 당신의 딸을 나에게 다오. 당신네들은 이후에 이 흑사도에서 강남으로 가 무슨 병마지휘사를 찾을 필요 없이 이곳에서 눌러살도록 하지] 이 몇 마디의 말이 떨어지게 되자 풍래부부는 그만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원래 풍래는 한평생 이 딸애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딸애가 장래에 문장이 뛰어나고 훤칠한 미장부인 사마상여(司馬相如) 같은 종류의 인물에게 시집을 갔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가 죽기를 다해서 딸애를 견지부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한데 온갖 계책을 다 써서 도망을 쳐 나오고 보니 다시 이 바다의 대왕이라는 자들의 수중에 들게 되었고, 시커먼 숯덩이 같은 대왕이 자기의 딸애를 아내로 맡겠다는 것이 아닌가. 풍래는 그만 울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기절을 할 뻔 했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 딸이야 보잘것이 없는 자색인데, 어떻게 높은 나무를 쳐다볼 수가 있겠소이까. 대왕께서는 그만두시죠.] 팔미귀 도종경은 그런 수작에 넘어가지 않고 호통을 내질렀다. [터무니없는 소리. 당신들은 나에게 사로잡혀 왔으니, 이 본 대왕이 어떻게 하고 싶은대로 처리를 하는 것이다. 감히 누가 당신에게 높은 나무를 쳐다보라니, 낮은 나무를 쳐다보라니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봐라! 화촉동방을 마련하고, 합환주를 차리도록 해라!] 풍래는 그만 울화가 치밀어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그만 기절을 해 버렀다. 풍향접은 이 검은 얼굴의 도적 괴수가 자기를 아내로 맞아들이겠다는 말에 울화와 더불어 한없이 부끄럼을 느꼈다. 그녀는 이미 손을 뒤로 해서 묶여 있었고 한 명의 졸개에게 붙잡혀 있는 꼴이었는데, 이 처자는 어디서 솟아난 용기인지 갑자기 입을 벌리고 고운 이빨로 그를 잡고 있는 졸개의 목덜미를 콱 깨물어 버렸다. 그 바람에 그 졸개는 아이쿠 하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잡았던 포승줄을 놓고 말았다. 풍향접은 도적이 손을 놓는 그 찰나 몸뚱아리를 기울이며 머리를 숙이고서는 충의당 앞의 장군주(將軍柱)를 향해 무참히 부딪쳐 갔다. 장군주 옆에는 마침 한 명의 소두목이 서 있었는데, 그는 이 아리따운 미녀가 기둥에 부딪쳐 자살을 하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몸을 틀어서는 장군주 앞을 가로막으며 손을 뻗쳐서는 그녀를 안으려고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머리를 숙이고 세차게 달려드는 바람에 그만 공교롭게도 그 소두목의 아랫배를 들이받게 되었다. 그 도적은 그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한걸음 물러서게 되었고, 등줄기가 장군주에 퍽 하고 부딪쳤다. 그 바람에 그는 아파서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다시 뒤쪽으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런데 풍향접은 너무나 세차게 달려 들었던 판이라, 그만 자결을 하지 못하고 앞쪽으로 곧장 고꾸라지듯 나가게 되면서 그 소두목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꼴이 되었다. 이와 같은 소란이 빚어지자 주위의 해적들이 왁자 하니 떠들어댔다. 그 소두목은 풍향접이 또 죽을까봐 바짝 힘을 주어서는 그녀를 품안에 끌어안았다. 향접은 혼신의 힘을 다해 바둥거렸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얽혀서 나뒹굴게 되었고, 충의당은 그만 북새통을 이루는 꼴이 되었다. 팔미귀 도종경은 갑자기 흉칙한 웃음을 흘리더니, 몸을 일으키고 두 눈에서 흉칙한 광채를 내쏟았다. 그는 금배어린도(金背魚鱗刀)를 금빛의 칼집에서 뽑아들더니 장군주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다짜고짜 칼빛을 번쩍하니 한칼을 휘둘렀다. 짝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그 소두목의 머리가 일고여덟 걸음 밖으로 날아가게 되고, 목구멍에서는 울컥하니 피가 흘러나와 사방으로 튀었다. 풍향접은 처참한 소리를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원래 세 명의 대왕들 가운데 팔미귀 도종경이 가장 음탕하고 호색적이었으며, 성격도 난폭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서 그는 눈썹을 한번 꿈틀하고 눈을 한번 부릎떴다 하면 사람을 죽였다. 심지어는 사람의 배를 생째로 가르고 살아 있는 사람의 껍질을 벗기는 것을 밥먹듯이 해온 자였다. 그는 소두목이 풍향접을 얼싸안고 있는 것을 보자 질투심이 복받쳐서는 칼을 뽑아 단칼에 소두목의 목을 잘라 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옆에 있던 두 명의 졸개가 자기도 모르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이쿠!] 그 한 소리에 노기가 다시 복받쳐 오르는 듯 팔미귀 도종경은 몸을 돌리더니 그 두 명의 졸개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세째 대왕인 내가 그 어느 누구를 죽이고 싶으면 그 어느 누구를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또 너희들이 감히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두 명의 졸개는 황망히 무릎을 꿇고서 팔미귀 도종경에게 빌려고 했다. 그러나 팔미귀 도종경은 다짜고짜 한칼에 한 명씩 그들의 머리를 잘라 땅에 떨어지게 하고 몸뚱아리도 픽 쓰러지도록 만들었다. 진씨부인과 청지기 성복은 그와 같이 잔인무도하게 사람을 무 자르고 수박 쪼개듯 쳐죽이는 것을 보자 그만 놀라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잇달아 정신을 잃고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풍래 일가족 네 명은 모조리 기겁해서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팔미귀 도종경은 침을 탁 뱉았다.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그리고 그는 좌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세 체의 시구를 끌어내 묻어 주어라. 그리고 핏자국은 깨끗이 닦아라. 늙은 것 세 명은 잡아가서 뇌옥 속에 가두도록 하라. 오늘밤에 나는 임과 혼례를 올리도록 하겠다.] 그는 몸을 돌리더니 정천운과 무원경 두 사람에게 인사로 당돌했다는 말을 던지고 웃으면서 말했다. [큰형님과 둘째 형님, 소제가 오늘밤 외람된 짓을 하게 되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요.] 정천운과 무원경 두 사람은 팔미귀 도종경이 이와 같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흔히 보아온 모양으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웃으며 대꾸를 했다. [아우, 무슨 말을 하는가. 오늘밤은 큰 경사일로 이 우형은 축하를 하려고 하던 참일세.] 팔미귀 도종경은 무척 기뻐서 수하들에게 모든 것을 준비시켰다. 산채 안이라 등불을 켜고 오색종이를 치렁치렁 매달지는 않았지만 이날밤 만큼은 도적의 소굴이 온통 홍청망청하고 시끌벅적했으며 잔치기분이 완연했다. 초경 무렵이 되었을 때에 팔미귀 도종경은 신랑의 예복을 입고서 십여 명의 모자에 생화를 꽂은 졸개들이 사방으로 호위한 가운데 혼례청에 이르러서는 신부가 나와서 천지교배(天地交拜) 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가 혼례청에 나서서 한참 동안 서 있고 북과 가락이 몇 번이나 울려 퍼졌는데도 들러리 아줌마들이 신부를 데리고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도종경이 정히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몇 명의 졸개들이 황망히 허둥지둥 달려와서는 부르짖었다. [대왕님 큰일났습니다. 신부가 어디에서 그 누구에게 빼앗았는지 한 자루의 가위를 가지고 사람을 보기만 하면 찔러댑니다. 이미 그녀에게 세 명이 찔렸습니다요.] 팔미귀 도종경은 발끈해져서는 호통을 내질렀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그 계집년이 나와서 혼례를 올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살기가 싫어진 게로군.] 그는 더이상 신랑의 신분을 돌보지 못하고 성큼성큼 줄달음치듯이 신방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풍향접은 한 자루의 시퍼런 가위를 들고서는 신방에서 두 명의 들러리가 되어 그를 돌볼 아낙들과 죽어라 함께 얽혀서는 돌아가고 있었으며 온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팔미귀 도종경은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끼고 다짜고짜 앞으로 나아가 한팔에 하나씩 두 명의 아낙을 걷어차 너댓 걸음 굴러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풍향접은 땅바닥에서 바둥거리며 일어났다. 몸에 입고 있던 신부옷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서 모양새가 아니었다. 도종경은 호통을 내질렀다. [너 미쳤느냐? 천지교배를 하여 부부가 되려고 하는 마당에 이 무슨 훼방이냐?] 풍향접은 고운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갑자기 손에 들고 있는 가위를 쳐들더니, 팔미귀 도종경의 가슴팍을 향해 질렀다. 하지만 그는 역시 연약한 여자에 불과했다. 무공으로 연마하고 힘이 억세며 무예에 정통한 강인(强人)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는가? 가위가 도종경의 몸에 닿기도 전에 철썩 하니 어느덧 그녀는 도적괴수의 따귀를 얻어 맞게 되고 더 서 있을 수가 없어서는 곧장 뒤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팔미귀 도종경이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서는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풍향접이 앵두와 같은 입술을 벌리고 도적 괴수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그러자 팔미귀 도종경은 아파서 펄쩍뛰며 한 다리를 들어 그녀를 대자로 나가떨어지도록 걷어차 버렸다. 풍향접은 그래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고, 신음 소리 한번 내뱉지 않으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을 들어서는 도종경에게 마구 던졌다. 처음에는 하나의 거울이 날아들고 다시 몇 개의 찾잔들이 날아들었으며 한 웅큼의 이쑤시개도 모조리 바닥에 떨어져서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팔미귀 도종경은 발끈해져서는 호통을 내질렀다. [이 계집을 묶어라.] 몇 명의 졸개들이 벌떼처럼 앞으로 달려나와 풍향접을 잡아서는 땅바닥에 쓰러뜨리고서는 내리눌러서 밧줄로 꽁꽁 묶어 버렸다. 도적의 괴수는 노기가 충천해서는 묶인 풍향접에게 통렬한 매질을 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자기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지라 즉시 손가락을 들어 풍향접을 바라보며 냉소를 띠우고 입을 열었다. [분수를 모르는 계집년 같으니라고. 네가 죽자 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이 셋째 대왕이 너를 용서할수 있을 것 같으냐. 좋다, 너의 마음이 저미도록 해주마] 그는 옆에 있는 몇 명의 졸개들에게 몇 마디 무슨 말로 분부를 내렸다. 그러자 졸개들이 대답을 하고서 물러갔다. 잠시 후 일남일녀를 잡아서 데리고 왔는데 풍향접이 그 두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그만 안색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묶여서 붙잡혀 들어 온 사람은 바로 자기의 친부모였던 것이었다. 팔미귀 도종경은 좀도적들에게 풍래와 진씨를 대롱대롱 매달아서는 그네 타듯이 대들보 아래에 매달고는 풍향접에게 입을 열었다. [이 계집년아, 네가 나와 혼례를 올릴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부모님을 매달아서 채찍질을 가하겠다. 그래도 네가 마음이 아픈지 안아픈지 두고 보기로 하지.] 그는 호통을 내질러 졸개에게 한 자루의 해망피편을 받아쥐었다. 이 도적의 괴수는 정말 극악무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손을 뻗어 가죽채찍을 받아들더니 휙 하니 풍래의 몸을 후려쳤다. 그 순간 풍래의 옷자락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나오면서 그의 입에서는 돼지를 잡을 때와 같은 처참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팔미귀 도종경은 다시 채찍을 한번 둥글게 휘감으려는 듯 허공에다가 한번 철썩 하니 소리를 내게 만들더니 진씨 부인을 때리려고 했다. 풍향접은 보다 못해 갑자기 한 소리 부르짖었다. [당신의 말을 따르겠어요. 그러니 우리 부모님을 때리지 마세요.] 팔미귀 도종경은 채찍을 거두고 껄껄 미친 듯이 웃어제쳤다. [하하하. 이 계집애는 경의로 바치는 술을 마다 하고 벌주를 마시는 꼴이고, 관을 보기 전에 눈뭍을 홀리지 않는 성격이군. 하하하!] 그는 손을 내저어 졸개들이 풍래와 진씨 부인을 내려 놓도록 했다. 풍향접은 벼락같이 달려들어 진씨 부인을 얼싸안고는 울었다. [어머니, 이 딸자식이 불효한 것을 용서해 주세요.] 풍래는 도적들에게 반나절이나 고통을 당하게 되고 또한 도적 괴수에게 등줄기를 채찍질에 맞았기 때문에 염통까지 저리는 듯 아파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얘야...... 이 애비는 죽어도 상관이 없으니 절대로 지조를 굽혀서는 안되느니라.] 풍향접은 마음이 쓰리고 눈물이 샘솟듯 홀러나와 부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울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 딸애가 어찌 아버님의 가르침을 어기겠습니까. 저는 먼저 아버님이 십년간 길러 주신 은혜에 고맙다는 표시로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큰절을 부친에게 올렸다. 풍래는 딸애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참담하게 웃었다. [좋다, 좋아. 너는 너는...... 그렇게만 해 준다면 이 애비가 구천지하에 있어도 눈을 감을 수가 있겠구나.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너를 잉태하여 열달 동안 고생을 했으니, 너의 에미에게도 큰절을 올려야 할 것이다.] 향접은 흐느껴 우느라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팔미귀 도종경은 더 차마 견디기가 지루한 듯이 호통을 내질렀다. [왜 우물쭈물하며 시간만 늦추고 있는 것이냐. 빨리 신부의 옷으로 갈아입고 바깥에 있는 혼례청으로 가자.] 풍향접은 자기가 이제 바깥으로 나서게 된다면, 영원히 부모님들과는 만날 기약이 없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척 참담한 마음이 되었고, 창자가 에이는 듯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그러나 도적 괴수의 위협에 핍박을 받게 된 이 마당에 나가서 천지교배를 하지 않을 수도 없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눈물을 샘솟듯 홀리며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몸 보중하십시요. 이 딸애는 갑니다.] 진씨는 말 속에 서려 있는 뜻을 알아차리고, 딸애를 부둥켜안고서는 한 덩어리가 되어 울음을 터뜨렸다. 팔미귀 도종경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무척 불쾌한 듯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네들 두 늙이는 딸애와 무슨 말을 그렇게 자꾸 주고 받는 것인가. 설마하니 장사를 치르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빨리 손을 놓아라. 그렇지 않을 때는 이 대왕께서 너희들에게 사정을 두지 않겠다.] 그리고 그는 다시 좌우에 늘어서 있는 졸개들에게 명령했다. [이 늙고 귀찮은 것들을 데리고 나가도록 해라.] 곧이어 그는 잇달아 들러리를 서는 아낙네들에게 호통을 내질러 신부에게 옷을 갈아입히도록 명령을 했다. 풍향접은 속으로 이미 작정을 하고 나니 되려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는 이끄는 아낙네들에게 떠받들리듯 해서는 비녀를 꼽고 쪽두리를 쓰는가 하면 붉은 꽃을 머리카락에 꽂고서는 부촉을 받아 혼례청으로 나아가 도종경과 천지교배를 하게 되었다. 모든 의식은 북소리와 나팔들이 가락을 울려대는 가운데 이뤄지게 되었고, 팔미귀 도종경은 거나해진 기분에 연신 벙글거렸다. 그는 오늘밤에 귀여운 미녀와 원앙새 부럽지 않은 사랑을 나누고 어수지락(魚水之樂)을 즐길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경이 지났을 무렵 팔미귀 도종경은 앞의 창에서 뭇사람들이 권한 술을 받아 마시고는 온 얼굴이 시뻘게 지고 이미 술기운에 거나해져서는 신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신방에는 또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풍향접은 고개를 숙인 채 침대언저리에 앉아 있었고, 아낙네들은 옆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팔미귀 도종경은 신방으로 들어서자 마자 즉시 아낙네들에게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나가거라.] 아낙네들은 판습대로 몇 마디 괴상스런 말을 하고는 신방에서 물러갔다. 신방에 둘만 남게 되자 팔미귀 도종경은 풍향접에게 야릇한 웃음을 흘려 보였다. [우리는 이제 부부가 되었으니 부끄러워 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한잔하지] 풍향접은 암암리에 이빨을 깨물며 억지로 즐거운 표정을 짓고서는 입을 열었다. [대왕님. 저는 오늘밤 대왕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응낙해 주시겠어요?] 팔미귀 도종경은 그녀의 봄꽃처럼 아름답고 화사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괴성을 홀렸다. [낭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보지.] 풍향접은 일부러 교태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의 아버님은 연세가 많으시고 어머님 또한 몸이 약하신 편인데다가 잔병이 많은 분이예요. 그분들은 이 섬에서 살기 싫어 하니 그분들에게 약간의 노잣돈을 주어서 조그만 배에 태워 육지로 보내도록 하지요. 지금 즉시 그분들이 이곳을 떠날 수 있도록 조처를 해 주시면 좋겠어요.] 팔미귀 도종경은 이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곳에서 살기 싫다는 것인가? 흑사도에서 살게 된다면 좋지 않을까? 적어도 그 견지부 따위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풍향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되어요. 그분은 손에 닭잡을 힘조차 없는 선비인지라, 강인들의 소굴에 머물러 있게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닿겠어요. 그분은 또 그렇다고 대왕님들을 도와 남의 집을 털거나 할 수도 없고, 그저 앉아서 밥만 썩힐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차라리 건강으로....] 팔미귀 도종경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 양반이 이곳에 살기 싫다면 나도 붙잡아 두진 않겠소. 날이 많이 어두워졌으니 내일 배로 그분들을 보내 주도록 하지.] 풍향접은 얼른 그말을 받았다. [그분들은 오늘밤 떠나고자 해요. 그러니 대왕님께서는 즉시 그들에게 배를 내주어 떠나도록 해 주세요. 네?] 만약에 다른 때 같았더라면 팔미귀 도종경은 틀림없이 의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오늘밤 만큼은 여간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거나하게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생각도 해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즉시 그양반들이 떠나도록 해주지!] 도적의 괴수는 한 명의 졸개를 불러들여서는 몇 마디 당부를 했다. 물론 그것은 한 척의 배를 준비해서 늙은 부부들을 이 섬에서 육지로 들여 보내도록 당부한 것이었다. 졸개는 순순히 대답을 하고는 그 일을 처리하러 갔다. 풍향접은 자기의 부모들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자 그제서야 안심했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짓고서는 금주전자를 들어 도적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팔미귀 도종경은 흐뭇해져서는 껄껄 괴소를 홀리며 아래위로 손을 움직이면서 추태를 연신 보였다. 풍향접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피했다. [대왕님, 저는 이제 대왕님의 사람인데 뭐가 그리 급하세요. 먼저 술 한잔 마시세요.] 팔미귀 도종경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옳아, 옳은 말이야.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게 되고 온유향(溫柔鄕)에서 살지 않고 어느 곳에 가서 머물손가. 낭자 술을 마십시다.] 그는 술잔을 들어서는 단번에 비웠다. 풍향접은 다시 고했다. [대왕님. 좋은 일에는 쌍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다시 한잔의 원앙술을 마시도록 하세요.] 다시 두번째의 술을 따랐는데, 도종경은 따라주는 대로 넙죽 받아마셨다. 풍향접은 잇달아 그에게 일고여덟 잔의 술을 퍼먹였고, 팔미귀 도종경은 거나하게 취했던 터라 일고여덟잔의 술을 받아먹게 되자 슬슬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자 그는 몸을 비틀 하더니 태사 위에 앉아서 그대로 눈을 감고서는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풍향접은 그를 가볍게 밀고서는 나직히 불렀다. [대왕님] 팔미귀 도종경은 몽롱한 상태에서 그저 한마디 대답하는 소리를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이미 곤드레만드레가 된 것이 틀림없었다. 풍향접은 이빨을 깨물고 머리에 썼던 봉관을 벗고서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베갯머리 아래에서 한 자루 시퍼런 가위를 꺼내 들었다. 이는 그녀가 들러리 아낙네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숨겨 두었던 것이었다. 풍향접은 가위를 들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가위로 도적 괴수의 목줄기를 향해서는 힘껏 찔렀다. 원래 그녀는 글을 읽는 선비의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온종일 부친의 훈도를 받아 머릿속에 온통 정녀전(貞女傳)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열녀전(烈女祠) 따위의 이야기를 들을라치면 종종 이야기 속의 주인공을 자기처럼 여기고 그녀들의 언행을 배웠던 터라 어찌 강인에게 몸뚱아리를 빼앗기고 시집을 가겠는가. 따라서 그녀는 부친의 암시를 받고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여자의 순결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욕금고종(欲擒故縱)적 사로잡기 위해서 일부러 풀어주는 옛 방법을 사용하여 거짓으로 은근하게 굴어서는 술로 도적의 괴수를 잔뜩 취하게 만들었던 것이고, 그리고 난 이후에는 미리 숨겨 놓았던 가위를 들고서는 태사의 곁으로 다가가 섬섬옥수를 쳐들었다가 획 하니 팔미귀 도종경의 목줄기를 향해 내리찍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연약한 여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총애만 받고 자라왔으며 호강만 했지 한 마리의 닭도 죽여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수월하게 죽일 수가 있겠는가. 풍향접은 역시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도적 괴수의 급소의 목줄기를 찌른다고 찌른 것이 겨우 도적 괴수의 귀밑부분의 목언저리를 찌르게 되었다. 물론 찌른 것은 사실이나 치명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팔미귀 도종경은 가위를 목언저리에 꽂은 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벼락 같은 호통소리를 내질렀다. [이 악독한 계집년 같으니라고.] 그리고는 손을 들어 퍽 하니 풍향접을 후려쳤다. 그 바람에 풍향접은 일곱 걸음이나 달려가다가 쿵 하니 그만 조그마한 궤안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가위에 찔린 도적의 괴수 역시 그 상처가 역시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장으로 풍향접을 후려쳐서 쓰러뜨리기는 했으나 목에서 샘처럼 피가 홀러내리자 즉시 손을 뻗쳐 상처를 눌렀다. 다른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동방화촉을 밝히는 길일이라 도적도 무기를 몸에 지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수나 단도 따위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술자리 옆의 만당홍(滿堂紅)을 거머쥐고 풍향접의 머리통을 후려치려고 들었다. 이 한 자루의 만당홍은 숙동(熟銅)으로 만든 것인데, 머리에서부터 끝까지 넉 자 남짓한 길이였고, 머리쪽에는 하나의 연꽃 모양의 연화탁(蓮花托)이라는 것이 있었다. 본래는 이를 촛대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동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십여 근은 족히 나갔다. 만약에 이 만당홍으로 머리를 후려치게 된다면 풍향접 역시 목숨을 잃고 말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땅바닥에 나뒹그러지게 되었을 때에 하나의 의자를 부딪쳐서 뒤엎어 놓았었다. 도종경은 상처가 너무나 아프고 술에서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라 발밑을 미처 살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성큼성큼 내딛는다는 것이 그만 발밑에 엎어져 있는 의자에 걸려 쿵 하니 몸뚱아리가 중심을 잃고서 앞쪽으로 엎어져 누렁이가 똥을 더듬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쓰러진 것까지는 좋았으나 만당홍이 먼저 땅에 떨어지게 되고 도적 괴수가 쓰러지게 되자 태양혈이 공교롭게도 만당홍의 머리에 있는 연화탁(蓮花托)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연화탁은 모두 열두 닢의 연꽃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같이 그 잎파리 모양새가 지극히 엷으면서도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구리 조각들이었다. 팔미귀 도종경 역시 너무나 많은 죄를 지어 죄값을 받느라고 그랬는지 쓰러지면서 연화탁에 부딪친 힘이 너무나 세차 몇 조각의 구리로 된 잎사귀가 태양혈로 깊이 파고 들게 되었다. 따라서 처참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팔미귀 도종경은 대뜸 목숨을 잃고 말았다. 풍향접은 도적 괴수가 만당홍을 쳐들게 되었을 때에 이미 눈을 감고 죽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나면서 도적이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도종경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의 죽은 모습은 무척 험상궂었다. 오관은 한곳에 모여 있고 입은 커다랗게 벌려져 있었는데 태양혈과 목덜미에서는 새빨간 피가 홀러내리고 있었다. 풍향접은 놀라 두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한참 후에 그는 도적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고, 신방 밖에서도 들어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 전 몇 번 커다란 소리가 나기는 했으나 아무도 듣지 못한 모양으로 달려 온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풍향접은 대뜸 담이 커지고 용기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도적의 괴수를 가위로 찌르게 되었을 적에 본래 반드시 죽게 된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또 그만큼 상대방과 더불어 동귀어진(同歸於盡)하겠다고 결심을 한 터였다. 그러나 이번에 요행히 성공을 하게 되자 그만 불현듯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고개를 쳐들게 된 것이었다. 풍향접은 갑자기 자기가 하늘의 덕으로 요행히 온갖 죄를 저지른 날강도를 죽인 지금 도적들에게 발견을 당하지 않고는 있지만 내일이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 자신은 참혹한 혹형을 받게 되어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고 죽을려고 해도 죽을 수가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되리라는 것을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조용한 밤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도망을 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곳은 널따란 바다의 한복판에 있는 외딴 섬이고 둘레에는 끝없이 바다가 펼쳐져 있기는 하지만 만약에 한 척의 배라도 찾게 된다면 달아나서 목숨을 건질 한 가닥 회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설사 바다에 빠져 물고기의 밥이 된다 하더라도 도적의 손에 떨어져서 온갖 능욕을 당하고 고통을 겪다가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먼저 신부의 옷을 벗어 버리고 신방에서 나아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 보았으나, 술을 들거나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회랑에서 달려나가 곧장 바깥쪽으로 줄달음을 쳤다. 신방의 위치는 해적들의 소굴 뒤쪽에 있었는데 여기에 한 줄의 나지막한 담장이 있었다. 이 담장을 따라 달려가게 된다면 바닷가로 나가게 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이곳에 몇 명의 졸개들이 보초를 서서 지켰다. 하지만 오늘밤은 채주가 장가를 드는 날이라 책임을 지고 지키기로 되어 있는 졸개들마저도 잔칫술을 마시고 난 이후 어디로 가서 놀음판을 벌이고 있는지 아니면 잠을 자러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밖은 썰렁하니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풍향접은 대담하게 나지막한 담장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책문(柵門)이 자물쇠로 잠궈 놓지 않은 것을 보고는 힘주어 밀자 그대로 밀렸다. 그녀는 다시 더 생각해 보지 않고 그 책문을 나서서는 담장을 따라 바닷가로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 한 척의 조그만 배가 바닷가에 정박해 있었는데, 배위에서 어렴풋이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바람결에 흘러 오고 있었다. 풍향접은 그 말소리를 듣자 속으로 짚히는 바가 있어 곧장 그 배가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한 척의 조그만 배는 조금 전에 팔미귀 도종경이 명령을 내려 풍래 부부를 흑풍도에서 떠나 보내려고 준비했던 배였다. 풍래 부부를 책임지고 육지로 보내주기로 한 사람은 졸개 두 명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셋째 채주가 동방화촉을 밝히는 길일이라 한 명이 안쪽으로 들어가 술을 마시러 갔고 한 사람은 아직도 뱃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반쪽의 풍계(風鷄)를 들고 한잔 한잔 술을 따르며 즐기고 있었다. 풍래는 몇 번이나 그에게 배를 띄우자고 재촉을 했으나, 이 졸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가 그리 바쁘시오? 우리 동료는 아직 오지 않았소. 혼자서 어떻게 배를 저으라는 것이오. 술을 몇 잔 마신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풍래는 마음이 초조해져서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그 졸개는 몇 잔의 술을 들이키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서는 곡조도 되지 않는 노래를 홍얼거리고 있었다. 풍래는 조바심이 났지만 그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반 시간이 홀러가게 되었다. 다른 사람은 하루를 보내기를 일년을 보내는 것처럼 여기지만 풍래는 그야말로 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 년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는 졸개가 거나하게 술에 취해서는 숫제 배를 띄울 뜻이 없고 다른 동료 역시 배로 찾아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자 역시 술에 만취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풍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잇달아 야단났다고 혀를 차며 다시 재촉을 하려고 했을 때에 풍향접이 어느덧 모래바닥 저쪽에서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딸애를 대하게 되자 풍래는 꿈이 아닌가 하고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형(阿衡), 너는... 너는 어떻게 쫓아 나왔느냐?] 아형은 풍향접의 어릴 적의 이름이었다. 그 졸개는 술을 마신 끝에 취안에 몽롱해진 터라 그 말을 듣고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책벌레 양반, 형이라니 누가 형이란 말이오. 나 혼자서는 형이 아니라 애비라고 불러줘도 배를 저어갈 수 없다오.] 풍향접은 줄곧 배 가까이까지 달려갔다. 그녀는 자기 부모님을 발견하게 되자 어디서 난 용기인지 모르지만 두손으로 모래바닥 위에 뒹굴고 있는 한 커다란 돌조각을 주워서는 그 졸개의 뒤통수를 한번 쳤다. 그러자 그 졸개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어이쿠 하는 외마디의 비명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기절을 해버렀고 그만 뱃전에서 재주를 넘는 듯이 뒤집혀서는 모래바닥 위에 던져져 사지를 쭉 뻗었다. 풍향접은 즉시 몸을 솟구쳐 조그만 배 위로 올라가 부모님들과 부둥켜안았다. 풍래는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형, 너는 살아 있는 사람이냐, 아니면 귀신이 나를 만나보러 온 것이냐.] 원래 그는 자기 딸이 틀림없이 죽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풍향접은 흐느꼈다. [아니예요. 아버님, 저는 귀신이 아니예요. 제가 도적의 괴수를 찔러 죽이고 해변가로 달려나은 거예요. 빨리 도망을 쳐요. 그렇지 않으면 늦게 될 거예요.] 풍래는 그만 허둥지둥했다. 그 자신은 그야말로 손에 닭잡을 힘조차 없는 문약한 서생이고 처인 진씨 또한 담이나 용기가 없는 아낙이며 딸애는 또 커다란 규수가 아닌가 말이다. 세 사람 모두 다 배를 타본 경력이 없기 때문에 배를 어떻게 띄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풍향접은 다짜고짜 배의 밧줄을 풀고 노를 들고서는 마구 저었다. 그들이 이렇게 한데 엉켜서 달아나고 있을 때에 바닷가 언덕쪽에 어느덧 너댓 명이나 되는 졸개들이 달려왔다. 섬에서 술을 나르던 졸개들이 바다에 배가 서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 오게 되었을 때에 상황이 이상한 것을 보고 소리 높여 크게 외쳤다. [이것 보게. 잠깐, 배를 띄우지 말게. 배에 탄 사람은 누구지?] 풍래는 그만 놀라서 흔비백산하게 되어서는 연신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도적이 왔다.] 진씨 부인은 더욱더 당황해서는 선실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어린 풍향접이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한집안 사람이 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고스란히 이 짧은 여유를 쟁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삿대를 들어서는 언덕쪽에 있는 바위를 향해 쿡 찔렀다. 마침 일진의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들이 탄 이 조그만한 배가 한번 일렁이더니 언덕에서 떨어져 일장 남짓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몇 명의 졸개들이 마침 이때에 배가 묶였던 곳에 달려오게 되었는데 풍향접이 뱃머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소리 높여 외쳤다. [야단이다. 저 계집애가 도망을 쳤다.] 풍향접은 허둥지둥 서둘렀다. 그녀는 힘주어 노를 들어 텀벙거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배를 몰 줄을 몰라 조그만 배는 뭍에서 떨어져 나오기는 했으나 멀리 가지를 못하고 그저 뭍과는 2,3장의 간격을 두고서 맴돌 뿐이었다. 몇명의 도적들은 풍향접이 죽어라 하고 노를 저어대는 것을 보고 마음이 다급해진 나머지 두 사람이 활을 꺼내 들고는 부르짖었다. [빨리 노를 멈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활을 쏘겠다.] 풍향접은 그 위협하는 말에 노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러자 한 명의 도적이 시윗줄을 당겼다가 놓았다. 씽 하는 소리와 함께 배로 한 대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넓고 넓은 허공을 나르는 화살은 밤하늘을 뚫고서 정확하게 선실쪽으로 곧장 날아들어서는 진씨 부인의 두개골을 관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진씨 부인은 그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풍래는 처가 화살에 맞아 숨진 것을 보자 미친듯이 그녀의 시체를 안고서는 처참한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영,아영.] 아영은 부인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불러 봐도 소용이 없었다. 부인은 이미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는 쌩쌩하는 소리와 함께 잇달아 서너 대의 화살이 날아들었는데 한 대의 화살은 선실의 판자벽에 적중되었고, 한 대는 뱃전의 횡목에 적중되었으며 세번째의 화살은 획 하는 소리와 함께 풍래의 등줄기에 꽂혔다. 풍래는 크게 한 소리 내짖고는 그만 처의 시체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풍향접은 황급히 노를 던지고 선실로 달려들어 풍래를 껴안고 울부짖었다. [아버지, 아버지, 딸만을 내버리고 먼저 가시려는 거예요?] 풍래는 화살이 요해(要害)에 적중되어 스스로도 다시는 살아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저미는 가슴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아형, 네가 순결한 몸을 보존한데 대해 이 애비는 구천지하에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나는...] 거기까지 말했을 때 피는 샘솟듯 흘러 나오게 되었다. 풍래는 흐릿한 음성으로 몇 귀절의 시를 읊었다. [머리가 잘라져도 뜻을 욕되게 하지 못하리. 몸은 죽어도 마음은 항복치 않으리! 완벽한 사람이 없는 법이니 죽어도 후회는 없으리라!]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서는 즉시 숨을 거두었다. 처와 더불어 같은 운명의 원앙이 되어서는 함께 글공부를 하라는 부름을 받고서는 떠나간 것이었다. 풍향접은 대성통곡을 했다. 모래바닥의 해적들은 울음 소리를 듣게 되자 즉시 부르짖었다. [활쏘는 것을 멈추어라. 저 계집애는 세째 채주의 새 부인이니 죽이면 안 된다. 그리니 빨리 쫓아가서 그녀를 잡아와야 한다.] 그들은 활쏘던 것을 멈추었고, 몇 명이 근처에 있는 작은 배들을 찾았다. 풍향접은 줄곧 부모님의 시체 위에 엎드려 우느라고 몸밖의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하늘에 갑자기 한 조각의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크게 바람을 일으켰고, 파도가 세차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풍향접이 탄 그 조그만한 배가 놀랍게도 흐르는 조수물을 따라 두둥실 하고 십여 장을 떠내려 가는 것이 아닌가. 섬의 도적들은 일제히 큰 소리를 내질렀다. 몇 명의 도적들이 한 척의 산판을 찾아내어 물에 띄웠다. 그리고 그들이 그 산판에 올라타고 산판을 밀어냈다. 풍향접의 조그만 배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광풍이 더욱더 갈수록 세차게 몰아쳐서 도망치는 조그만 배는 갈수록 자꾸만 멀리 떠내려갔다. 그래서 도적들은 별수없이 사로잡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조그만 배쪽을 향해 연신 화살을 쏘아댔다. 풍향접은 그저 흐느껴 우느라고 피할 줄도 몰랐다. 획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대의 날카로운 화살이 창문을 꿰뚫고 날아들더니 바로 그녀의 목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풍향접은 그 순간 화끈거리는 고통을 느끼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막 기절을 하자 하늘에서는 갑자기 번개가 치고 우뢰가 마구 울어제치기 시작하더니 대야로 퍼붓는 것처럼 빗줄기가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고 커다란 파도는 바람을 따라 마구 머리를 쳐들었다. 도적들이 바다로 나와 풍향접의 조그만 배를 뒤쫓기 위해서 타고 나왔던 산판은 도저히 그와 같이 커다란 물결에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황급히 노를 저어 되돌아가고 말았다. 풍향접의 조그만 배는 두 구의 시체를 실은 채 크고 세찬 파도에 밀려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고 삽시간에 어느덧 비바람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풍향접은 부모님의 시체 위에 쓰러진 채 정신을 잃게 되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까, 가까스로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보니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풍향접은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목이 칼로 찢어 놓은 것처럼 아파 손으로 만져 보니 끈적끈적한 새빨간 피가 묻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목둘레는 화살촉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길다란 상처가 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그 화살이 약간 한쪽으로 기울어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녀의 목을 꿰뚫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풍향접마저도 어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고통을 참고 몸을 일으켜서는 사방을 살펴 보았다. 그저 넓고 넓은 푸른 바다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흑풍도는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도적의 배들도 뒤쫓아 오는 걸 볼 수가 없었다. 풍향접은 자기 자신이 어찌되었든간에 위험한 경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들은 액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화살에 맞아 돌아가시고 만 것이었다. 거기다가 이 조그만 배에는 돛도 없었고 양식이나 물 같은 것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으니 육지를 찾아 낼 때까지 어떻게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는가가 큰 문제였다. 이 무렵 풍향접은 오히려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그저 죽은 시체 옆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바람에 그 한 척의 조그만 배는 바다의 물결을 따라 제멋대로 표류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상태하에서 하루낮 하루밤을 보낸 것 같았다. 풍향접이 타고 있는 조그만 배는 아직도 육지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저 멀리 약간의 섬들이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풍향접은 키를 잡거나 노를 저을 줄 몰라 그 조그만 배를 섬쪽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할 수가 없었다. 배는 고프고 갈증이 심하게 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가장 괴로운 것은 날씨가 무더운 까닭으로 부모의 시체가 이미 섞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분들의 시체를 바닷속으로 내던지지 않는다면 배에는 구더기가 생겨날 것 같았다. 풍향접은 이때 어쩔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서 부모님의 시체를 커다란 바닷속에 던져 넣었다. 그녀는 부모님의 시체를 던져 넣은 이후 더욱더 마음이 텅 빈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앞에는 헛것이 보였다. 그리고 머리속으로는 갑자기 자기가 제기의 고향집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또한 마치 자기 부모님들이 구름끝에서 자기에게 손짓을 하며 부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이 어린 풍향접은 뾰족한 음성으로 불렀다. [아버님, 어머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이 딸애가 갑니다.] 목이 메이도록 그녀는 몇 번이나 부르짖었다. 그러자 눈앞이 갑자기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캄캄해지면서 재차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풍향접이 탄 조그마한 배는 파도를 따라 표류한 끝에 하포라는 포구에 닿게 되었고 황약사에게 구원을 받게 된 것이었다. 황약사는 그녀를 청운촌으로 데리고 가서는 정성껏 간호를 했다. 풍향접이 정신을 차리게 된 이후에 흐느끼면서 그녀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힌 것이었다. 황약사는 모든 이야기를 듣자 그만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백성을 해치는 탐관오리와 무도한 개도적들이 떼를 지어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니 정말 가증한지고!] 무흥광은 사부의 눈동자에 횡횡히 날카로운 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그만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고 진저리를 친 이후 물었다. [사부님, 풍소저를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십니까.] 황약사는 발끈했다. [사부의 일을 네가 상관하겠다는 것이냐?] 무홍광은 핀잔을 받자 깜짝 놀라 다시 감히 묻지 못했다. 황약사는 잇달아 냉소를 홀리더니 뒷짐을 지고 방안에서 몇 번이나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발걸음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이 소저를 잘 지켜 주시오. 나는 한번 갔다 와야겠소.] 그리고 그는 한쪽에서 한덩이 은자를 꺼내 탁자 위에 던지고는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은 그녀를 잘 보살펴 줘야 하오. 내가 이번에 가더라도 사흘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약에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시중을 잘못 들었다면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부지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그 말이 끝나자 마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방에서 걸어 나갔다. 청운진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그를 보고 모두 다 의아해 했다. 황약사는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고 곧장 제기로 달려갔다. 하포에서 제기까지는 본래 일백이십여 리나 되는 노정(路程)이었다. 도화도주가 경신법이 탁월해서 발걸음을 빨리 하자 한나절이 다되기 전에 제기부의 성안으로 들어설 수가 있었다. 그는 부성(府城)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에게 풍래가 살고 있는 곳을 물어 보았다. 잇달아 대여섯 사람에게 물어 보았으나 모두들 고개를 흔들며 감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피하는 것이 아닌가. 황약사는 그제서야 커다란 거리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자기에게 대답을 못해 주는 이유가 날아들지 모르는 횡화(橫禍)를 당하게 될까 봐 두려하기 때문임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생각을 돌린 그는 한 조그만 골목길로 들어섰다. 마침 맞은편에서 한명의 대추떡을 파는 장사치가 마주오고 있었으므로 황약사는 앞으로 나가 물어 보려고 입을 열었다. [실례하오. 한마디 묻겠는데 풍 선생은 어디에 사시는지요.] 그 떡장수는 황약사를 바라보더니 그가 점잖은 것을 보자 되물었다. [아, 선생께서는 무슨 일로 풍선생을 찾으시오. 그와는 어떻게 되는 사람이죠?] 황약사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분과 옛날 한 동창이었소. 항주에서 온 것인데, 오랫동안 만나 뵙지 못해 그를 찾아 뵐려고 하는 것이외다.] 그 떠돌이 떡장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공께서는 그를 찾지 마십시오. 그의 집안은 횡화를 당해 어디로 도망쳤는지 모른답니다.] 황약사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 [그의 집안 사람들이 어떤 횡화를 당했다는 것입니까? 화잽니까, 아니면 날강도들의 노략질을 당했다는 것이오?] 그 떠돌이 떡장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도들에게 노략질을 당한 깃보다 더욱더 무서웠소이다. 나로서는 말할 수가 없구만요. 그의 집은 바로 쌍류항(雙柳巷) 오른쪽에서 첫번째 집이고 문앞에는 두 그루의 커다란 버들나무가 있으니 상공께서는 직접 찾아가 보시구려.] 말을 끝마치자 마자 그는 고개도 한번 돌리지 않고 충총히 골목 입구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황약사는 쌍류항을 찾아가서 풍래의 대문을 바라보니 나무판대기가 가로로 못박혀 있었고 그 위에는 관아의 봉인까지 되어 있었다. 황약사는 풍향접의 말이 틀림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지부의 못된 행적을 수소문하기 위해서 다시 번화한 곳으로 찾아들었다. 그는 한 칸의 손님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찻집에 가서 앉았다. 막 한 주전자의 차를 시키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한 동켠에 있는 상인 모양의 사람이 차를 다 마시고는 한 명의 관아에서 일을 보는 입성의 사람을 문밖까지 전송하며 웃음을 짓고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염압사, 부탁하오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황약사는 그제서야 명연히 깨닫는 바 있었다. 풍향접은 지부의 수하에 한 명의 압사가 있는데 이름은 염문도이고 지부에게 내미는 뇌물을 거두어들이고 사람을 해치는 계책을 짜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약에 그 사람이라면 쉽게 놓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화도주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마침 차박사(茶博士)가 앞으로 다가와 염압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염압사와 몇 마디 할 말이 있소. 이 엽전 한 꿰미는 차값으로 받고 나머지는 당신 술값이나 하구려.] 차박사는 웃었다. [상공께서는 차도 마시지 않으시고 가시렵니까. 염압사께서는 매우 바쁘시답니다.] 황약사는 슬금슬금 차 뒷문을 나섰다. 스물이나 서른 걸음쯤 옮겨놓게 되었을 때에 어느덧 염압사를 뒤쫓아 갈 수가 있어서 불렀다. [압사,압사.] 염압사는 그 누가 자기를 부르자 즉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 그가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금빛 광채가 번쩍이게 되고 몇 대의 금침이 그의 목줄기에 날아와 꽂혔다. 그리하여 그는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는데 염압사가 무단히 땅바닥에 쓰러지고 손발을 몇 번 버둥거리다가 그만 숨이 지는 것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크게 외쳤다. [야단났다. 염압사가 중풍에 쓰러졌다. 빨리 손을 쓰자.] 소리지르는 사람은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 누구 한 사람 앞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한 명의 간악한 도배를 죽인데 대해 흡족하고도 통쾌함을 느끼고는 곧장 지부의 관아로 들어갔다. 송나라 때의 관부아문(官府衙門)에는 반드시 명원고(嗚寃鼓)라는 북이 달려 있었다.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는 북채를 들고 북을 쳤다. 그러면 지부나 현감이 명원고를 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즉시 동원 마루에 올라 안건을 심의하게 되어 있었다. 견지부의 아문 앞에도 하나의 명원고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견지부 본인이 탐관오리에다 법을 어기는 사람이라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길이 없었다. 설사 명원고를 친다 하더라도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또 잘못하면 곤장까지 얻어 걸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호소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북 앞으로 걸어가 북채를 들고 한차례 둥둥둥 하니 마구 북을 두들겼다. 그러자 관아에서 일하는 사람이 나와 흐통을 내질렀다. [어디서 온 책벌레인가. 그 북은 함부로 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공조 대인이 한바탕 매질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껄.] [이 명원고는 억울한 사정이 있을 때에 두들기기로 되어 있소. 어떤 사람들이 재물을 노리고 목숨을 해치는 자들에게서 세 사람이나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명원고를 두드릴 수 없다는 말이오?] 관아의 사령은 살인 사건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조금도 소홀하지 못하고 별수없이 견제민에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견지부는 즉시 동헌에 납시게 되었고 사렁들이 황약사를 데리고 들어갔다. 도화도주는 견지부 앞에 세워지자 무릎을 꿇지 않고 꼿꼿이 서서는 견지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견제민은 발끈 대노해서는 경당목을 탕하니 한번 두드리고는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무엇하는 사람인고? 어떤 사정이 있길래 본관을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는고?]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