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왕(劍王) 序章 Ⅰ 神秘의 高手 ----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는 누구냐? 지난 백년동안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육십년전의 일성일마(一聖一魔)가 사라진 이후 수많은 기인고수(奇人高手)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중 어느 누구도 천하제일고수의 여섯 글자를 쟁취한 사람은 없었다. 허나 몇년전부터인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인물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 옥면청삼(玉面靑衫) 절정신검(絶頂神劍) 육청운(陸靑雲)! 그를 천하제일의 고수로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체 그는 누구이기에 기인이사가 구름처럼 모여있고 광활하기 그지없는 무림천하(武林天下)에서 제일고수(第一高手)로 불리우는 것일까? 그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강호무림에는 육청운이라는 신비한 인물에 대한 소문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듯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인물이 칠척(七尺) 장신의 청삼을 즐겨입는 대장부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도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자가 없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千差萬別)이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할 때마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그를 정파(正派)의 대협객(大俠客)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전신에 사악한 기가 넘쳐 흐르는 일대마두(一大魔頭)라고도 했다. 문무(文武)를 모두 겸배한 완벽한 인물로, 얼굴은 전설의 미남자인 송옥(宋玉)이나 반안(潘安)을 훨씬 능가할 뿐 아니라 기상은 한마리 학(鶴)처럼 고고하고, 시서금화(詩書琴畵)에 고루 능하다고 했다. 특히 그의 검술은 가히 무적(無敵)의 경지에 달해 지난 몇년 동안 그의 손에서 삼초(三招)이상을 견뎌낸 적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삼초무적검왕(三招無敵劍王)이라고도 했다. 도대체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은 몇살이나 먹었길래 이토록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만능(萬能)의 인간으로 신격화(神格化) 되어 있을까? 이것 역시 제멋대로였다. 열 몇살의 소년, 이십대의 청년, 삼 사십대의 중년인, 심지어는 오십이 넘은 노인이라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가 얼마나 변장을 잘하며 신비스러운 인물인지 짐작이 갈 일이었다. 아무튼 육청운은 그 정체는 물론이고 내력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전 무림인으로부터 천하제일고수라는 공인을 받고 있었다.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 마치 밀폐된 상자속의 보석처럼 너무나 신비스럽기만 한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것이 흑백도(黑白道)를 막론한 모든 무림인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초미(焦眉)의 관심사였다. 육청운! 그는 과연 누구인가? 序章 Ⅱ 殺人牒 <건곤령(乾坤令) 제 삼십칠호(三十七號). 아래와 같이 살인첩(殺人牒)을 발동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척살(擲殺)하라. 척살일위(擲殺一位) :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 척살이위 : 새장자(塞莊子) 남궁봉(南宮蜂). 척살삼위 : 걸신(乞神) 악구천(岳九天). 건곤교주(乾坤敎主).> 第 1 章 風波無雙 춘삼월(春三月), 날씨는 청량했고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 섬서성의 고도(古都), 장안(長安)은 봄날의 따사로운 기운에 휘감긴 채 인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구맥(九脈)이라 불리우는 동서남북의 아홉개의 커다란 거리는 사방에서 모여드는 객상(客商)들과 유람객들, 그리고 온갖 사람과 수레와 기마(騎馬)로 붐볐다. 길 양 옆에는 주루와 찻집, 형형색색의 점포로 번잡하고 호화롭기 그지 없었다. 미시(米時)경. 장안 동쪽의 성문 부근에 있는 동문대로(동문대로)에 두명의 중년장한들이 길을 걸으며 나직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왼쪽에 있는 청삼장한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제 보경루(寶經樓)에서 벌어진 사건을 자네는 들었나?] 오른쪽 장한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말고. 도박귀신(賭博鬼神)이라 불리우는 헌원당(軒轅堂)이 화씨세가(華氏世家)의 망나니 가주(家主)인 화일로(華一露)와 도박을 했다가 가진 돈을 몽땅 털리고 입고 있는 옷까지 빼앗겨 알몸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 말인가?] [그래, 헌데 그 뒤에 또다시 일이 벌어졌다는데 그것도 알고 있나?] [그건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말해주지. 헌원당이 개망신을 당하고 도망친 직후에 장안대호(長安大豪) 금경만(金鯨萬)이 흉명(凶名)이 자자한 파동삼귀(巴東三鬼)를 데리고 화일로 앞에 나타났다네.] 오른쪽 장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파동삼귀라면 산동(山東) 지방에서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고 알려진 흉인(凶人)들 아닌가?] [그렇다네.] [금경만이 왜 그들을 데리고 화일로를 찾아왔나?] 왼쪽 장한은 입술에 침을 바른 후 입을 열었다. [금경만은 자네도 알다시피 장안에서 제일가는 부자(富者)가 아닌가? 그런데 하루는 화일로가 금경만의 집으로 불쑥 쳐들어와 다짜고짜 은자 십만냥만 빌려달라고 했다네.] [그래서?] [금경만이 어떤 인물인데 남에게 호락호락 돈을 빌려주겠나? 더구나 화일로 같은 망나니한테...... 당연히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을 했지.] 오른쪽 장한은 혀를 찼다. [저런...... 금경만은 호랑이 콧수염을 건드렸군. 그래.] [그렇지. 금경만은 아무리 화일로라도 설마 자기에게 허튼 수작을 부리랴 싶었겠지만 화일로가 어디 그런걸 가리는 인물인가? 한번 그 작자의 눈 밖에 벗어나면 천자(天子)라도 봉변을 당하고 말텐데...... 헌데 웬일인지 화일로는 아무 말도 없이 금경만에게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나오고 말았네.] 오른쪽 장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 말을 끝까지 좀 들어보게. 그 다음날 금경만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자신의 보물창고로 들어가보니 자신이 가장 애지중지하던 취와미인상(醉臥美人像)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네. 어디 그뿐인가? 산더미 같이 싸놓았던 금화가 물경 십만냥이나 없어졌지 뭔가?] [허......!] [금경만은 단번에 그것이 화일로의 수작임을 알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어 속으로 이만 부드득 갈았다네.] [쯧! 화일로의 비위를 건드렸을 때는 그 정도 손해는 각오했어야 했는데......]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그날 저녁에 누군가가 금경만에게 작은 옥합을 보내왔다네. 금경만이 옥합을 열어보니 산산이 박살이 난 취와미인상의 조각이 수북히 들어 있지 뭔가? 그리고 그 안에는 (이건 십만냥에 대한 이자요.)라고 쓴 쪽지가 있었다네. 금경만은 그것을 보고 기절을 했다더군.] 오른쪽 장한은 괴이한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정말 화일로다운 솜씨로군. 그래서 금경만이 파동삼귀를 데려다가 그 복수를 하려고 했던 건가?] [그렇지. 금경만은 단단히 화가 나서 아주 비싼 돈을 주고 파동삼귀를 모셔다가 화일로를 혼내달라고 부탁했다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어떻게 되긴...... 파동삼귀는 처음에는 제법 큰소리를 치며 화일로에게 덤벼들었으나 모두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네.] [아,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네. 그 화일로의 무공은 소문보다 더욱 매서워 파동삼귀는 몇수 받아보지도 못하고 차례로 쓰러졌다는군. 안된건 금경만일세. 그 자는 돈까지 뺏긴데가 늘씬나게 두들겨 맞았다거군.] 오른쪽 장한이 돌연 탄식을 했다. [제길...... 그 놈은 정말 불한당이로군. 화씨세가라면 그래도 제법 전통이 있고 명문세가(名門世家)로 이름이 높은 곳인데 어쩌다 그런 망나니같은 놈이 가주가 되었는지...... 그 놈은 제 어미 뱃속에 있을 때 뭘 잘못 먹고 태어난게 아닐까?] 왼쪽 장한이 질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쉿! 목소리를 낮추게. 그렇게 함부로 지껄이다가 그 놈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된통 경을 칠테니......] 오른쪽 장한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한결 조심스러워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자는 지금 어디에 쳐박혀 있나?] [만화루(萬花樓)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아니야, 그건 믿을 수가 없네. 그놈은 곳곳에서 사고를 저질러 원수가 허다하게 많네. 그런 입장에 고정적인 곳에 처박혀 있다면 모가지가 열개 있어도 부지할 수 없을걸세.] 왼쪽 장한이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은자 오백냥 벌기가 정말 힘드는군.] 오른쪽 장한도 맞장구를 쳤다. [그야 그렇지. 파동삼귀는 차치하고라도 그동안 그놈에게 목숨을 잃은 인물들을 생각해 보게. 정말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이번에 그놈을 찾는데 고용된 것은 그놈과 싸우는 것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걸세. 우린 다만 그 놈을 찾아내기만 하면 은자가 손에 들어오네. 또 그 놈을 지정된 장소까지 유인해 갈 수만 있으면 다시 일천냥을 더 얻을 수 있으니 그런 일은 한번 해볼만 하지 않나?] 오른쪽 장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내가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우리의 그 하보주(何保主)꼐서 무엇 때문에 그놈을 찾는 일에 이토록 많은 은자를 서슴없이 쓰시는가 하는 것일세. 말이 나왔으니 말이네만 화일로, 그놈은 비록 화씨세가의 가주라고 해도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계집질과 싸움질뿐이었네. 그래서 그 많던 화씨세가의 재산도 다 거덜내먹고 마치 떠돌아다니는 거지처럼 천하를 유랑하며 좋은 일은 한 가지도 해본 적이 없고 쳐먹고 마시는데만 열중했다 네. 오죽하면 풍파무쌍(風波無雙)이라고까지 불리우겠나? 헌데 그런 사고뭉치를 무엇 때문에찾는단 말인가?] 왼쪽 장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거라면 내게 짐작되는 점이 있네.] 오른쪽 장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건 무언가?] 왼쪽 장한은 막 입을 열려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동료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여보게. 저...... 저 소리를 들어보게.] 과연 바로 이 순간 맞은편 주루위에서 낭랑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게 아닌가? 술을 드세. 잔을 놓아서는 안되네. 그대들을 위해 한 곳 노래하리니. 그대들은 나를 위해 귀 기울여 들어주게. 종이나 북소리에 옥같이 멋진 요리 무엇이 대단한가. 그저 바라는 것은 깊이 취하여 깨지 않는 것이다. 엣부터 성인(聖人)이나 현인(賢人)도 죽고 말면 그뿐이었나니. 오직 술마시는 사람만이 그 이름을 남겼느니라...... 여기까지 들리던 노랫소리가 순간 뚝 멈췄다. 뒤이어 들려오는 것은 요란한 박수갈채였다. 두명의 장한은 숨을 죽이고 그 노랫소리를 듣더니 온통 기쁜 표정을 지었다. 오른쪽 장한이 다급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가세. 그 놈이 틀림없네.] 두명의 장한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중심가를 벗어나 맞은편의 그 술집을 향해 나는듯이 달려갔다. 그들이 주루에 들어서서 막 계단을 밟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오! 전(錢)형과 문(門)형이 아니오?] 알고보니 두 장한의 성(性)은 전가와 문자인 모양이었다. 전, 문 두 사람은 뜻밖의 소리에 흠칫하여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들을 부른 사람은 두명의 흑의인들이었다. 흑의인들은 층계 옆의 한 좌석에 않아있었다. 두 흑의인이 앉은 탁상에 아무 음식도 놓여있지 않은 것을 보면 이들도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가와 문가 두명은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자 내심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두 흑의인은 이곳 장안에서 제법 유명한 위원표국의 표두들이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은 싫은 내색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문가는 뛸듯 기뻐하는 표정으로 반색을 했다. [아! 학표두와 이표두였군요? 이거 오래간만입니다. 두 분께서는 친구분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까?] 그러자 학표두라고 불리운 흑의인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오. 두 분께서는 마침 잘 오셨소. 이리 오셔서 함꼐 앉읍시다. 여보게 의자를 좀 옮기게나.] 전, 문 두 사람은 거절할 수가 없어 마지못해 다가가 앉았다. 뒤이어 이표두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두 분께서는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셨나요?] 두 사람은 이 말을 듣자 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만약 식사를 했다면 술과 음식을 파는 주루에 들어올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허나 두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전노대(錢老大)라 불리운 장한이 헛기침을 하고는 어색하게 되물었다. [두 분께서도 아직......?] 학표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씁쓸하게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요? 말도 마시오. 정말 말하자면 부끄러운 일이오.] 뜻밖의 대답에 전노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부끄럽다니요?] 학표두는 이층을 턱으로 한번 가리켰다. [두 분께서는 이 주루에 들어설 때 그 노랫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소?] 이 말에 문가, 즉 문노삼(門老三)이 다그치듯 물었다. [들었소만...... 그건 왜 묻소?] 학표두는 한층 목소리를 죽여 나직하게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은 바로 그 놈 때문에 왔소.] 이 말을 들은 문노삼은 깜짝 놀란 기색을 가장하며 모르는 척 물었다. [그 놈이라니요?] 학표두는 장탄식을 하고 입술을 악물었다. [풍파무쌍(風波無雙) 화일로 말고 또 누구겠소?] 전노대가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말을 받았다. [그 놈이 귀 표국과 무슨 관계라도......?] 그러자 이표두가 분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말했다. [아무 관계도 없소. 그 놈이 점심 무렵에 우리 표국에 들어와서는 계산대에 떡 기대고 한다는 말이 (국주(局主) 어디 갔느냐? 어서 도련님을 모시고 술을 마시러 가자고 전해라.) 하지 않겠소?] 이때 문노삼은 내심 오백냥의 은자가 수중에 들어오면 무엇에 쓸까를 계산하면서 한편으로는 안됐다는 듯이 동정조로 한마디 거들었다. [거참, 재수가 더럽군요.] 학표두는 쓴웃음을 지으며 동의라도 구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뭐 은자 몇냥쯤 쓰는건 대단치 않소. 하지만 이건 정말 분통이 터질 노릇이 아니오? 명망(名望)이 높은 화씨세가에 그런 작자가 가주로 앉아 있으니......] 그는 반쯤 자리에서 일어나며 짐짓 말했다. [이왕 두 분께서도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면 함께 올라갑시다. 이 전모가 한턱 내겠으니 함께 몇잔 하시는게 어떻소?] 학표두는 이미 입맛까지 잃은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뜻은 고맙소만 두 분께서나 올라가 보십시오.] 전, 문 두 사람은 더이상 강요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의 예를 취한 뒤 이층으로 올라갔다.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났기 때문에 이층의 넓다란 객석에는 다만 십여명의 손님밖에 없었다. 객석 중앙의 여덟명이 앉을 수 있는 둥근 탁자에 한명의 화의청년(華衣靑年)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화의청년의 얼굴은 취기가 올라 붉게 물들어 있었으나 매우 영준했고 키도 몹시 훤칠했다. 자세히 보면 나이가 채 서른을 넘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젊은 나이임에도 눈꼬리는 치켜 올라가 있었고 약간 야윈 얼굴에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를 하고 있었다. 이 화의청년이 바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골머리를 썩히게 하고 이름만 들어도 넌덜머리를 낸다는 화씨세가의 당대가주, 풍파무쌍 화일로였다. 그의 풍파무쌍이란 외호는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반드시 한 차례의 풍파가 휘몰아 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얼큰하게 취한 것 같았다. 화일로의 좌우로 나뉘어 앉은 사람은 대머리가 훌렁 벗겨진 늙은이와 중년 나이의 장한이었다. 윗 좌석에 앉아 있는 대머리 노인은 바로 위원표국의 국주인 일월금륜(日月金輪) 조태복(曹泰輻)이었다. 그리고 아랫 좌석에 앉은 중년인은 표국의 총표두인 칠화창(七花槍) 사중백(査重百)이었다. 전노대와 문노삼이 객청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막 객청 구석의 자리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느닷없이 화일로가 두 사람을 손짓해 부르는 것이 아닌가? [두 분꼐선 이리 좀 오시오!] 두 사람은 내심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화일로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쓴맛밖에 돌아올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전,문 두 사람은 즉시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풍파무쌍 화일로는 두 사람이 좌석 앞까지 걸어오자 취기로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그들을 주시하며 허죽 웃었다. [흐흐...... 두 분께선 마침 알맞게 오셨군.] 전노대, 문노삼은 화일로의 말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잘못 하다가는 뼈다기도 추리지 못하고 골로 가는 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곳에 온 것조차 후회막급이었다. 이것을 본 국주 일월금륜 조태복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당황해 하실 필요가 없소. 우리 화가주(華家主)님의 말은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분께서 하필이면 왜 이런 때 오셨느냐 하는 거요.] 이 말을 들은 화일로는 오만한 표정으로 말을 가로챘다. [국주...... 잔소리는 하지 않는게 좋소.] 조태복은 찔끔하여 목이 자라목처럼 쏙 들어갔다. [예예. 노부가 죽을 죄를 졌소......] 황급히 변명을 한 조태복은 전,문 두사람을 향해 계속 말했다. [가주께서 방금 말하기를 가주의 노래가 끝난 뒤에 제일 먼저 이 주루로 올라오는 사람은 가주를 대신해서 오늘의 술값을 치뤄야 한다고 했었소.] 전노대와 문노삼은 비로소 암암리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비록 남의 술값을 물기는 억울하기 짝이 없으나 재물이 목숨보다 귀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이들이 순순하게 응낙하자 화일로는 거나하게 취한 두 눈을 들어 엉뚱하게 입을 열었다. [어? 두 분의 말투를 들어보니 은자깨나 있는 모양이구료?] 전가와 문가 두 명은 어이가 없었다.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생벼락이 떨어질 판이라 한 마디로 승낙을 해버리니 이제와서는 약까지 바싹 올리는 것이 아닌가? 두명은 부아가 터질 지경이었으나 행여나 겉으로 나타날까 두려워 동시에 허리를 굽신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예, 뭐 약간은 있습죠. 헤헤헤......] 화일로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히죽 웃으며 칠화창 사중백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것 좀 보시오. 남의 술값을 치뤄줘야 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대하다니...... 어허...... 나 화일로에게 이런 두 놈의 종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 사중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딴청을 부렸다. [가주께선 술을 더 드시지 않겠습니까? 안주도 거의 다 식었으니 아예 이 접시들을 다치우고 다시 따끈한 안주로 시키는 것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문노삼이 화일로 앞으로 한걸음 다가서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헤헤...... 가주께서 싫어하지만 않으신다면 저희들이 가주님을 모시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화일로의 취해 게슴츠레한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인가?] 문노삼은 재차 허리를 굽혀 코가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정말이구 말굽쇼. 저희들도 약간 무공을 알고 있어 오래전부터 가주님의 풍채를 흠모해 왔습니다. 만약 가주님께서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저희들에게는 다시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화일로는 다시 전노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분은?] 전노대도 급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전모는 가주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부터 가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전모는 평생토록 따라갈 것인즉 가주님께서는 그저 밥만 먹여 주십시오.] 화일로는 입을 벌려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밥만 먹여달라고? 으하하하핫! 이게 얼마나 우스운 얘기요? 당신들에게 말하지만 본 가주를 끝까지 따라다니면 당신들은 먹을 것, 입을 것, 놀 것 등등 한 가지도 걱정없이 해줄 수가 있소. 뿐만 아니라 영원히 남에게 업신거여김을 당하지도 않고 어딜 가나 위풍이 당당할 거란 말이오. 하하하......] [고...... 고맙습니다.] 전, 문 두명은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공수의 예를 취했다. 알고보니 두 사람은 이미 아무도 모르게 눈짓을 교환한 뒤였다. 기왕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든 이상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제 이차의 공작을 진행시켜 화일로를 지정된 장소까지 끌고가 달리 하사하는 일천냥의 은자까지 벌어놓자는 심산이었다. 천오백냥이라는 막대한 은자가 수중에 들어온다면 이 넓은 천하에 몸 담을 곳은 얼마든지 있는 판이었다. 꽃같이 예쁜 기녀를 끼고 진탕 먹고 마셔도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다. 이때 화일로는 웃음을 뚝 멈추고 갑자기 조태복과 사중백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두 분께서는 이제 가보시오. 본 가주에게 이런 마음에 드는 두명의 종이 생겼으니 이곳에는 이제 당신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소.]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조태복과 사중백은 내심 뛸듯이 기뻤으나 감히 분부를 거역하지 못하는듯 황망히 좌석에서 일어나 예를 취하고는 작별을 고했다. 두 사람이떠나가자 화일로는 즉시 양쪽의 빈 좌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이리와 앉게나.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과 본 가주의 종이 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네. 그리고 본 가주는 자네들과 나눌 얘기가 있네.] 이제는 아예 하인 취급을 하는지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늙은이에게 해라를 하는 것이었다. 전, 문 두명은 군말없이 화일로의 분부대로 각각 자리에 앉았다. 화일로는 즉시 물었다. [너희들은 이름이 뭐냐?] 전노대가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소인은 성이 전(錢)이며 이름은 다익(多益)이라 합니다. 친구들은 소생을 항상 전노대라 부릅니다.] 화일로는 탄복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이름이군. 돈(錢)이란 많을 수록 좋은(多益)것이지......] 이어 그는 문노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예. 소인은 문불개(門不開)라 합니다. 그러나 남들은 문노삼이라고 합니다.] 화일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문(門)이 안열린다(不開)고? 정말 이름 한번 희한하군 그래.] 문불개는 멋적은 듯이 뒤통수를 긁었다. [그 이름은 소인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시면 가주님께서 소인을 위해 이름을 하나 지어 주십시오.] 화일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남들이 기왕 자네를 문노삼이라고 부른다니 구태여 고칠 필요는 없네. 그럼 이제부터 나는 너희들을 전노대와 문노삼이라고 부르겠다.] 전노대와 문노삼은 암암리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은 이 타락한 명문세가의 젊은 가주가 상당히 취해 있다는 것을 완연히 알아볼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두 사람에게 일종의 안전하다는 보장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화일로는 심하게 딸꾹질을 하면서재차 물었다. [너희들은...... 이 성안에...... 또 무슨 볼만한 곳이 있는지 모르느냐?] 전, 문 두사람의 가슴은 재차 방망이질을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완연히 달랐다. 지난번은 두려움 때문에 그랬지만 이번에는 비할데 없는 흥분 때문에 방망이질을 한 것이다. 문노삼은 일부러 생각에 잠긴 척하고 신통치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곳 성안의 몇몇 군데는 가주님께서 가보지 않은 곳이 없어 이미 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놀아도 그게 그거라 재미가 없습니다.] 화일로는 그렇다는 듯이 몇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네 말이 옳아. 제기랄, 아무리 놀아봐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니 재미가...... 꺼억...... 하나도 없어. 없단 말씀이야.] 얼마나 퍼마셨는지 혀가 꼬부라져 말도 제대로 못하는 형편이었다. 전노대가 은밀하게 권고하는 척 했다. [가주님께선 먼저 쉴 곳을 찾아 좀 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화일로는 취중에도 급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 아니야. 괜찮아. 나는...... 나는 거의 매일 이래서...... 이제는 습관이 되었네.] 그러자 문노삼이 말했다. [가주님께서만 흥미가 있다면 소인이 한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소인이 어제 한가지 기막힌 얘기를 들었습죠. 다만 길이 좀 멀고 이 근처에 있지 않은 것이 흠이긴합니다만......] 슬쩍 말꼬리를 흐리자 과연 화일로는 취한 술이 확 깨는 득 다급하게 말했다. [김이 먼 것쯤은 문제가 안되네. 무슨 기막힌 일이란 말인가? 빨리 말해보게.] 문노삼은 강권에 못이기는 척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주꼐서는 혹시 낙양(洛陽) 근처에 한 채의 커다란 보(堡)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화일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말하는 보란 혹시 풍운보(風雲堡)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바로 무림삼보(武林三堡) 중 하나인 풍운보입니다.] 화일로는 김이 팍 상한 듯 눈쌀을 찌푸렸다. [풍운보라면 별로 흥미가 없네. 풍운보주인 용호풍운검(龍虎風雲劍) 하조천(何朝天)은 비록 검술이 뛰어나지만 별로 재미있는 인물이 아닐세.] [헌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번에 풍운보에서 열리는 비무초친(比武招親) 은 필시 가주님께서도 큰 흥미를 느끼실 겁니다.] 화일로의 귀가 쫑긋했다. [비무초친이라니? 풍운보에서 비무대회라도 연단 말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주 기발한 비무대회입니다.] [오! 좀더 자세하게 얘기할 수 없겠나?] 화일로의 바싹 몸이 달은 표정을 슬쩍 바라보고 문노삼은 태연하게 입을열었다. [듣자하니 풍운보주인 하조천에게는 자식이 오직 달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딸이 이미 시집을 갈 나이가 되어 하보주는 사윗감을 고르기 위해 특별히 무술시합을 열어 천하의 영웅과 호걸을 모으고 있답니다.]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조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로군.] 이때 전노대가 화일로의 흥미가 가실새라 잽싸게 말을 받았다. [특히 하보주의 따님은 그 용모가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 침어낙안(沈魚落雁)의 절세미녀로 구천의 선녀나 달나라의 상아보다도 더 아름답다 군요. 하보주는 이번에 그녀의 배필을 고르게 되면 그에게 풍운보의 모든 직무를 인계하고 자신은 은퇴할 생각이랍니다.] [흐음......] 전노대가 넌지시 의향을 떠보았다. [가주께서 한번 가보셔서 행운을 잡아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가주님의 실력이시라면 충분히 비무대회의 승리자가 되어 아름다운미녀를 부인으로 삼고 더구나 무림의 삼대보(三大堡) 중 하나인 풍운보의 대업을 계승하게 되어 평생토록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실겁니다.] [음...... 자네는 말을 썩 잘하는군.] 전노대는 화일로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입을 놀렸다. [풍운보주인 하조천은 당금 무림에서 내노라는 절정검객중 한 사람이니 그런 분을 장인으로 모시게 되면 가주께서 장차 무림에 커다란 명성을 떨치실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갑자기 화일로의 눈꼬리가 실쭉해졌다. [장차라니...... 그럼 지금은 내가 별 볼일 없는 존재란 말인가?] 전노대는 아차 싶어 떨리는 음성으로 급히 말했다. [그......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강호인들이면 가주님의 함자만 들어도 모두 벌벌 떠는 형편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단지 소인의 말은 그런 일로 해서 가주님의 위풍이 더욱 세워질 수 있다는 뜻이올시다.] 그제서야 화일로의 안색이 풀어졌다. [음, 그럴 듯 하군.] 문노삼이 뒤질세라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 그곳에 가신다면 우승은 따논 당상일 겁니다. 그리고 사실 하소저(何少姐) 같은 천하 절색의 미녀는 가주님같은 영웅께서 품으셔야 옳은 일이 아닙니까?]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미녀와 영웅이라...... 확실히 가볼 필요가 있겠군.] 전, 문 두 사람은 이 말을 듣자 내심 펄쩍 뛸 듯이 기뻤다. [그...... 그럼 가시겠습니까?] 화일로는 마음을 결정한 듯 호쾌하게 말했다. [좋아, 그럼 내일 당장 길을 떠나세.] 화일로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노대는 뛰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주님은 지금 어디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만화루다.] 만화루가 장안 제일의 기루(妓樓)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第 2 章 닭쫓던 개 다음날 진시(辰時)경. 장안에서 동관(童關)으로 향하는 넓은 관도에서 말밥굽 소리와 함께 세 사람과 한 필의 말이 나타났다. 오연한 표정으로 말 잔등위에 올라타고 있는 사람은 화의를 걸친 준수한 청년이었다. 청년이 탄 말의 양 옆에는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장한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이 세사람은 전노대와 문노삼, 그리고 가는 곳마다 풍파를 일으키는 화씨 세가의 망나니 가주 화일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화일로는 걷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도 없이 느긋하게 말위에 올라탄 채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정오 무렵, 세 사람은 화음현(華陰縣) 부근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때 화일로가 두 사람에게 넌지시 물었다. [자네들 몸에는 아직 얼마의 은자가 있나?] 전노대는 멋적은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소인의 수중에는 칠팔냥가량 남았습니다.] 문노삼도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소인에게도 그만한 액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화일로는 손가락을 꼽으며 혼자 계산을 했다. [음...... 칠팔냥을 곱해도 모두 이십냥이 안되는군. 그만한 은자로 우리 세 사람이 낙양까지 갈 노자가 충분할까? 자네들이 보기엔 어떤가?] 전노대가 잠시 생각한 끝에 자신있게 대답했다. [약간 절약해서 쓰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화일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퉁명스럽게 쏘아부쳤다. [그건 자네들의 일이지. 본 가주는 절약이라는 것을 모른다.] 본의 아니게 하인이 된 두 사람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 걸? 주인이 종놈의 은자를 쓴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한 천고의 기문(奇聞)이로구나.) 그러나 화일로는 두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건 아랑곳 없이 말에서 뛰어내려 말고삐를 잡고는 마을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음식점으로 걸어 들어갔다. 음식점에 들어서자 화일로는 과연 자기가 말한대로 행동을 했다. 그는 자기의 상을 가득히 채울만큼 요리를 주문하고 게다가 최상의 술까지 시켰으나 두 사람은 다른 자리에 앉히고는 다만 한 접시의 최하급 밀가루로 만든 만두와 한 그릇의 제일 값싼 음식을 시켜주었을 뿐이었다. 화일로는 두 사람에게 뻔뻔스럽게도 그럴 듯하게 해명을 했다. [강호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규칙과 법도일세. 기왕 명분상으로도 주인과 종의 사이라 피차 한계를 두지 않을 수가 없군. 그렇지 않은가?] 두 사람은 이 말을 듣자 속에서 분통이 끓어 올랐다. 그러나 곧 수중에 들어올 천오백냥을 위해 울며 겨자먹는 식으로 공경하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당합니다. 가주님.] 결국 이런 식으로 해서 화일로는 가는 곳마다 최상급의 객잔에 묵었고, 식사때는 언제나 고기와 술이 빠진 적이 없었다. 화일로는 상방(上房)에 묵고 말까지도 최고급의 사료를 먹였다. 반면전노대와 문노삼은 이를 악물고 허기진 배를 움켜진 채 헛간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동장군(冬將軍)의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그들은 추위를 견뎌 나가야만 했다. 허나 불과 열여덟냥의 은자로 얼마나 지탱해 나갈 수 있겠는가? 나중에 일행이 가까스로 하남성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한푼도 남지 않은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 하남성에 도착하자 화일로는 두 사람을 가까이 불러놓고 넌지시 물었다. [자네들은 이 근방에 아는 사람이 없는가?] 전, 문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두 사람이 이 일대에서 정말 아는 사람이 없었을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이 타락한 젊은 가주가 묻는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는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기만 하면 그 뒷말은 물어볼 여지도 없이, [은자 좀 꿔 쓰자.] 라고 할 판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제아무리 모자란다 해도 단맛을 보기도 전에 먼저 빚을 질 정도로 바보들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아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고는 서로 의미심장하게 눈짓을 주고 받았다. (우리는 저 놈이 또 우리들에게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한번 두고 보자.) 그러나 뜻밖에도 화일로는 실망하는 기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쁜 표정을 지으며 무릎까지 탁 치는 것이 아닌가? [잘됐어! 정말 아는 사람들이 없단 말이지?] 전, 문 두 사람은 영문을 몰라 아연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 풍파무쌍 화일로가 무슨 농간을 부리려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일로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성 밖 노상(路上)에 있는 그 술집을 아나? 화춘루(華春樓) 인가 뭔가 하는 술집 말일세.] 두 사람은 의아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표정을 살피며 화일로는 만족한 듯이 씨익 웃으며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본 가주의 뜻을 자네들은 알겠는가? 오늘밤은 달도 밝지 않으니 일을 하기가 제일 좋은 때지. 가서 한탕 뛰고 오게.] 두 사람은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이 화씨세가의 젊은 가주가 설마하니 강도질을 하라고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때문에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청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화일로는 난처해하는 두 사람을 주시하며 싸늘하게 눈빛을 빛냈다. [어떤가?] 전노대는 머뭇거리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그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일로의 입에서 엄포가 터져나왔다. [그건 뭐란 말인가? 한탕 뛸 용기가 없다는 건가. 아니면 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문노삼도 안나오는 헛기침을 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뭐, 우리 두 사람은 별 지장이 없으나 만약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가주님의 명예에 혹시......] 화일로는 대뜸 그의 말을 가로챘다. [맞았어. 내가 자네들더러 가라는 것도 바로 그 뜻이네. 자네들은 뭘 걱정하는가? 자네들은 자네들이고 나는 나지. 만약 소문이 퍼진다해도 나와 무슨상관이란 말인가?] 실로 어처구니없는 궤변이 아닐 수 없었다. 전노대가 뭐라 대꾸를 하려 하자 문노삼이 돌연 손을 내저어 전노대를 잡아끌었다. [여보게, 가주님께서는 이미 명백하게 말씀하셨는데 자네는 무엇을 주저하고 있는가?] 전노대는 할 수 없이 문노삼을 따라 나섰다. 화일로는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오자 전노대는 원망하는 투로 투덜거렸다. [여보게, 자네는 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불쑥 대답하나?] 문노삼은 냉소를 쳤다. [내가 생각해 보지 않았다구? 흥! 내가 보기엔 자네가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보네. 자네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끝까지 버티고 나갈 텐가?] 전노대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제기랄......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한다지?] 문노삼은 탄식을 하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다니? 다행히 이곳에서는 낙양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아 도리없이 우선 성밖의 내 작은 마누라 집에 가서 얼마라도 얻어내 봐야지.] 이 말을 들은 전노대는 정신이 번쩍 드는지 문노삼의 어깨를 탁 쳤다. [참! 나는 하마터면 이곳에 자네의 어부인이 한분 계시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군. 그럼 늦지 말고 빨리 갔다 오게.] 문노삼은 돌연 정색을 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 하지만 나는 사전에 말해둘 것이 있네. 친형제끼리라도 계산이란 항상 분명히 해야 하니까 말이네. 그 은자가 얼마가 되든 우리는 반반씩 부담을 해야 되네. 알겠나?] 전노대는 쾌히 승낙했다. [그거야 여부가 있나? 당연한 일이구 말구!] [그럼 자네는 이곳에 잠시 기다려 주게. 내 곧 갔다 올테니...... 그리고 은자를 수중에 넣으면 우리는 먼저 조용한 곳을 찾아 한식경 가량 시간을 보내세. 저 놈은 굉장히 상대하기가 어려우니 우리가 이미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 이상 가장을 해도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네.] 전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가보세.] 성밖, 문노삼은 어둠을 더듬어 천천히 한 채의 집에 다가서더니 몸을 날려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리고는 발소리를 죽여가면서 서쪽방의 창문 밑으로 다가섰다. 그는 내심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감히 소리쳐서 문을 열게 하지는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 똑...... 그러자 즉시 방안에서 나직하게 외치는 여연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요? 장씨(莊氏)예요?] (장씨냐구?) 문노삼은 순간 멍청해지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즉각 어찌된 일인지를 깨닫고 분기가 충천했다. 뒤이어 창문이 열려지고 옷매무새가 고혹적인 여인의 머리부터 밖으로 나왔다. [들어와요. 이 영감탱이야!] 분명히 이 계집은 문노삼이 아닌 다른 놈팽이와 아기자기한 정을 통해온 모양이었다. 달빛이 흐려 여인이 문노삼의 얼굴을 미처 분간하지 못한 것도 크나큰 불찰이었다. 문노삼은 아무 말 없이 방안으로 덮쳐 들어가자마자 계집의 허리를 발길로 걷어찼다. 퍽! [요 앙큼한 년!] [아악!] 호되게 허리를 차인 계집은 방 한 구석에 나가 떨어져 비명을 지르다가 나타난 사람이 바로 문노삼임을 확인하자 대뜸 죽을 상이 되어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했다. 문노삼은 눈이 벌컥 뒤집혀 거센 주먹으로 계집의 골통을 내리치고 말았다. 한편, 거리 한 구석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전노대는 문노삼이 등에 한 보따리 짊어지고 오는 것을 보자 뛸 듯이 기뻐했다. 즉시 뛰어 일어나 마중을 하며 문노삼을 치켜세웠다. [과연 자네의 솜씨에는 탄복해 마지 않네 그려.] 문노삼의 입맛이 소태를 먹었을 때 만큼 썼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음날, 다시 길에 오르자 화일로는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보게. 본 가주의 말이 옳았지? 바람이 크면 불이 나기 쉬운 법이오, 밤이 어두우면 사람을 죽여도 성공률이 높기 마련이네. 마음을 크게 먹기만 하면 또 손쉽게 은자가 생기지 않겠는가?] 전, 문 두 사람은 쓴웃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두번째의 은자가 거의 달랑달랑할 무렵에야 겨우 낙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자 즉각 풍운보의 비무초친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소식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비무대는 서문(西門) 성끝에 위치한 풍운보의 중앙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수많은 청년협객들이 저마다의 꿈을 안고 풍운보로 모여 들었다는 소문이 낙양성을 떠들썩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어느 호화로운 객잔에 여장을 풀자 화일로는 주먹으로 자기의 가슴을 탁치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일 자네들은 본 가주만 믿게. 내가 풍운보의 사위만 되면 틀림없이 자네들에게 은자와 황금을 무더기로 안겨줄 것이니 앞으로의 여생은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을걸세.] 그가 제멋대로 씨부렁거리자 전노대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입을 열어다. [소인은 가주님께 한 나절동안 휴가를 얻었으면 합니다.] [뭘 하려고?] [예. 소인에게는 고모님 한 분이 계시는데 이곳의 동쪽 마을에 살고 계십니다. 이 기회에 다녀올까 하고......] 화일로는 쾌히승낙을 했다. [허! 자네에게 그런 효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 좋아, 다녀오게.] 전노대가 인사를 하고 떠나자 화일로는 넌지시 문노삼에게 물었다. [자네에게는 이곳에 고모님이 없는가?] 문노삼은 황급히 대답했다. [소...... 소인에게는 없습니다.] 화일로는 다시 엉뚱한 질문을 했다. [이것봐, 전노대 그 놈은 믿을 만한 놈인가?] 문노삼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자 화일로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내가 쓸데없이 의심을 한 모양이지.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그 녀석이 이대로 가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 문노삼은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그렇다. 그 놈이 만약 내 차지까지 타간다면 은자는 무려 삼천냥이나 된다. 만약 나와 입장을 바꿔놓고 보더라도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만약 이놈의 말대로라면 나 문노삼은 여지껏 누구를 위해서 고생을 해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초조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화일로는 찢어지게 하품을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저 농담으로 해 본 말이네. 설마하니 그런 일이야 있을라구. 기왕 내일이면 한바탕 뛰어야 하니 나는 먼저 자겠네. 그리고 자네는 뭘 먹고 싶으면 혼자 점원에게 시켜 먹게.] 그는 방안으로 들어가 옷을 입은 채 침상에 벌렁 누워 버렸다. 잠시 후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노삼은 안절부절하며 뜨락을 배회했다. 날이 저물어가니 그의 마음속은 점차 불안감이 확대되어 갔다. 얼마를 망설이던 끝에 그는 기어코 결단을 내렸다. 거리가 얼마되지 않으니 즉시 달려가 본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화일로는 이미 잠에 떨어져 세상 모르고 코를 골고 있다. 그리고 자기는 사람을 이미 이곳까지 데리고 왔으니 임무를 완수한거나 진배가 없다. 그런데 무엇하러 이곳에 계속 남아 있겠는가? 하지만 일이란 항상 공교로울 때가 많다. 문노삼이 막 객잔을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한쪽에서 그에게 손짓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다름아닌 전노대였다. 문노삼은 전노대를 보자 납덩이같이 무겁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르르 사라져 마음이 턱 놓였다. 그가 전노대에게 급히 달려가자 전노대가 나직히 물었다. [그 놈은 어떻게 되었나?] [잠이 들었지. 그래 은자는 받았나?] [아직은 못 받았네.] 문노삼은 아연실색하여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 그건 왜?] [응. 이총관(二總官)께서 곧 오셔서 확인을 한 뒤에 한 사람 앞으로 이천냥씩 주겠다고 했네.] [뭐? 이천냥씩이나?] 찢어질 듯 입이 벌어지는 문노삼에 못지않게 전노대도 방금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후후후...... 내가 무엇 때문에 자네를 속이겠나? 아! 소리를 낮추게. 저기 이총관께서 오셨네.] 이총관이라는 자는 뚱뚱보였다. 혈색이 좋고 옷차림새가 깨끗하며 제법 위풍이 당당한 체구였다. 하인이 무언가 등에한 짐 짊어지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문노삼은 그 속에 들은 것이 금덩어리가 아니면 필경 은덩어리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총관은 그들 두 명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굽신거리는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후원으로 들어갔다. 문노삼은 어깨로 전노대를 툭 치며 의기양양하게 속삭였다. [우리도 들어가 보세.] 그러나 전노대는 황급히 그를 가로막으며 핀잔을 주었다. [아니야.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는게 좋겠어. 총관이 방을 보는 것은 일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라 곧 돌아올텐데 무얼 그리 급히 서두르는가?] 전노대의 예상대로 이총관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후원에서 걸어나왔다. 전, 문 두 사람은 마치 파리가 썩은 고기 냄새를 맡은 듯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이총관 앞에서 허리를 굽신거리고 나직하게 물었다. [틀림없지요. 총관어른?] 그러자 이총관은 표정을 굽힌채 싸늘하게 대답했다. [틀림없다. 너희 두 명은 정말 일을 잘 하는구나!] 동시에, 철썩! 철썩!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전노대와 문노삼의 빰에서 난 소리였다. [병신같은 자식들......!] 이총관은 기분이 잡친 듯 포대를 짊어진 하인을 데리고 휑하니 객잔을 나가버렸다. 맑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총관과 하인이 나가는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면서 전노대는 화끈거리는 뺨을 어루만졌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지?] 문노삼도 돌부처인 양 한참 우두커니 서 있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얻어맞는 바람에 부러져 나간 이빨 하나를 퉤하고 뱉어냈다. [혹시...... 그 놈이 가짜가 아닌가?] [가짜라구?] 전노대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실성한 듯이 소리쳤다. [그렇지! 그놈이 정말 화일로였다면 며칠 전에 우리들더러 강도질을 하라고 하진 않았을 거네. 빨리 가보세. 내 이놈을 그냥 찢어죽이고 말겠네.] 두 사람은 눈을 부릎뜨고 후원으로 달려갔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질탕하게 마시고 즐길 이천냥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것은 둘째치고라도 지금까지 갖은 고생을 하며 유인해 온 놈이 가짜라는 점에 분기가 탱천한 것이다. 후원 상방에는 밝은 등불이 켜져있었다. 그러나 방금까지 코를 골며 잠들어 있던 화일로는 유령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한장의 종이쪽지가 등불 밑의 벽 위에 붙어져 있을 뿐이었다. <본 가주는 고모님을 만나러 가네. 본 가주는 두 분께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깍듯이 시중해준데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네. 화씨세가 십삼대 가주 화일로.> 第 2 章 比武招親 낙양의 서성(西城)문을 막 나서면 한채의 웅장하게 지은 장원이 나타난다. 이 장원은 겉으로만 보아도 사람으로 하여금 일종의 위압감을 느끼게 하였다. 높다랗게 쌓아올린 청색 담장 안에는 대궐과도 같은 집이나 정자들이 호화찬란하게 꾸며져 있었고, 돌난간이며 창문 할 것 없이 모두 지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져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이곳이 바로 천하무림에서 삼대보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풍운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풍운보의 거대한 대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고, 문밖에는 형형색색의 천막들이 쳐져 있었다. 해가 뜬지 얼마 되지도 않아 풍운보로 향하는 넓은 대로는 벌써부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시(巳時) 무렵, 풍운보로 향하는 대로에 갑자기 시선을 끄는 세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이가 서른 서넛 가량에 옷차림이 똑같았다. 더구나 생김생김도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도록 완전히 똑같았고, 심지어는 허리에 찬 장검도 똑같은 기형검(奇形劍)이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첫눈에 보아도 그들이 세 쌍둥이 형제라는 것을 알 수있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누가 형이며 누가 동생인지를 분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침 길을 가고 있던 볼따구니에 칼자국 흉터가 있는 장한이 우연히 뒤를 돌아보다가 이들 세 사람을 발견하고는 움찔 놀라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이크!] 그러다가 뒤에서 걷고 있던 회색옷을 입은 늙은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멋적게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노인장도 풍운보로 가시는 길입니까?] 회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런 흥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칠 수야 없지.] 칼자국 장한은 잽싸게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요. 더구나 이번 대회는 쟁쟁한 인물들이 많이 참석해서 정말 볼만할 것 같습니다.] 이어 그는 세 쌍둥이 형제를 슬쩍 가리키며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노인장은 저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노부도 제법 사람보는 눈은 있네. 저자들은 관동(關東) 지방에서 명성이 자자한 철가 삼형제(鐵家三兄弟)가 아닌가?] [알아보시는군요. 소문에 듣기론 저 찰가 삼형제는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특히 합격술(合擊術)에 능해서 금릉(金陵)의 팔보추혼(八步追魂)도 저들의 검진(劍陣)에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번 비무대회에서는 검진을 펼칠 수가 없으니 그들도 별로 이득을 보지 못할 걸세.] 칼자국 장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런데 신부감은 하나이고 그들은 세 사람인데 과연 그들 중 누가 나갈까요?] 회의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잠시후면 알게 되겠지.]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에 그들은 어느새 풍운보의 정문 가까이에 다가서고 있었다. 정문은 그야말로 대궐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도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문의 좌우에는 경사를 축하하는 희(囍)자가 쓰여진 큰 초롱이 걸려 있었으며 오른쪽 청색의 담벼락에는 황색 종이에 고시(告示)가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회의 노인은 마침 정문 앞에 서 있는 풍운보의 인물 하나를 발견하고 그에게 물었다. [여보게. 저 고시에는 뭐가 적혀 있나?] 풍운보의 인물은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던 듯 지체하지 않고 재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저 고시에는 저의 보주(堡主)님이 이번 시합에 대한 목적과 지시 사항이 적혀 있습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가 있으며또 절대 사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승패가 가려지면 즉시 손을 거두어야 합니다.] 회의 노인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는 듯 피식 싱겁게 웃으며 물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모두 참가할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예를 들면 팔다리 병신이나 출신이 정파(正派)인지 사파(邪派)인지도 구별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풍운보의 인물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물론 규칙이 정해져 있지요. 일단 무슬시합을 하는 사람은 몸이 건강하여야 하며 정신이 뚜렷하고 질병에걸려 있지 않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이는 마흔살 이하여야 합니다.] 그는 지겹지도 않는지 입술에 침을 살짝 바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출신이 정파인지 사파인지는 가리기가 힘들어 그것만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출신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마음이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가 없으며 출신이 부정하다고 해서 꼭 마음이 나쁘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회의 노인은 그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자네는 말재주가 퍽 좋군 그래.] 풍운보의 장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멋적게 웃었다. [헤헤헤...... 과장된 말씀이십니다. 사실 이번 일은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만약 품덕(品德)이 좋은 사위를 얻게 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후일 우리는 그를 감화시켜야 합니다. 그 속에는 역시 우리 아씨의 운명과 연분도 따르겠지요.] [말은 그렇게 간단하지만 만약 당신네 보주께서 정말 덕행이 좋지 않은 친구를 사위로 삼게 되면 그를 감화시키기에는 그리 간단하지 않을걸세.] 장한은 급급히 부인했다. [아마 그렇게까지 재수가 없지는 않겠지요.] 회의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칼자국 장한과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 정면은 지극히 넓은 광장이 있고, 지면은 대리석으로 깨끗하게 단정되어 있었다. 광장의 넓이는 못되어도 반경 오십장은 충분히 되었고 광장 한 가운데는 이미 비무대가 세워져 있었다. 비무대는 느릅나무 원목을 깍아 만든 것이며 강철로 묶여져 있었고, 거대한 못들이 박혀 있었다. 이것을 열 두개의 통나무 다리가 지탱하고 있어 매우 튼튼하게 보였다. 비무대 위에는 햇빛을 가리는 천막이 높다랗게 처져 있었고, 비무초친(比武招親) 이란 네 글자가 금빛을 발하며 걸려 있었다. 비무대 위에는 사회석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팔자(八字) 수염을 기른 사나이 하나가 사회석에 앉아서 약상자를 든 몇 명의 사람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특별히 초빙된 의원들인 것 같았다. 비무대 뒤에는 거대하고 웅장한 대청이 있었고, 대청 뒤로는 많은 누각과 호화스럽게 지어진 집들이 즐비했다. 회의 노인은 칼자국 장한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광장 한쪽으로 걸어갔다. 칼자국 장한은 사방을 휘둘러 보며 감탄한 듯 큰소리로 말했다. [노인장, 정말 대성황이로군요.] 회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풍운보의 명성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헌데 노부는 이상하게생각되는 일이 한가지 있네.] 회의 노인은 돌연 목소리를 낮추어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보주 같이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 왜 이런 대회를 열어 자기 딸의 종신대사(終身大事)를 결정하려는지 알 수가 없군. 하보주가 원하기만하면 얼마든지 명문 세가의 자손을 사위로 맞이 할 수 있을텐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자기 딸을 맡기려 하다니 이건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네.] 칼자국 장한은 조심스런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노인장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하보주님께 피치못할 사저이 있는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많네. 그렇다면 그 사정이란게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군.] 칼자국 장한은 실없이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노인장, 우리는 시합에 참가하지도 않을건데 상관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회의 노인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번 일은 노부로 하여금 옛말을 생각해 내게하는군.] [무슨 말입니까?] 칼자국 장한이 궁금한듯 묻자 회의 노인은 나직하게 말했다. [바로 옥보천(玉寶川)과 설평귀(薛平貴)의 고사(故事)라네.] 그러자 칼자국 장한은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크큭...... 채루(彩樓)에서 수놓은 공을 던져 사위를 구했다는 고사 말입니까?] 회의 노인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옥보천은 한(漢)나라의 상국(相國:재상)이었다. 그에게는 한 명의 아리따운 딸이 있었는데 평소 술을 좋아하던 옥보천은 어느날 기루에서 다른 고관(高官)들과 술을마시다가 취중(醉中)에 기루의 창문 밖으로 오색칠을 한 공을 던지며, [이 공을 주운 사람에게 내 딸을 시집 보내겠다.] 하고 공언(公言) 해 버렸다. 헌데 그때 마침 설평귀라는 거지가 동냥을 하러 기루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그 공을 줍고 말았다. 술이 깬 옥보천은 이 사실을 알고 대경실색했으나 수많은 고관대작들 앞에서 재상의 신분으로 발설한 말인지라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어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거지인 설평귀를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는 이야기였다. 칼자국 장한도 이 고사를 알고 있는지 해죽거리며 말했다. [옥보천도 자기가 던진 공을 알거지인 설평귀가 받을 줄은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회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노부도 하보주가 걱정된다는 말일세. 만약 그 역시 설평귀와 같은 사위를 얻게 된다면 옥상국(玉相國)처럼 후회를 하게 될 것 같아서 말일세.] 칼자국 장한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술시합이니 만큼 고사의 내용보다는 좀 더 나을게 아닙니까?] 회의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무공이 고강한 사람이라고 성품도 좋은 것은 아니네.] [노인장의 말이 맞습니다. 요즘 악명(惡名)이 자자한 풍파무쌍 화일로라는 놈도 제법 얼굴이 번듯하고 무공이 상당히 높다더군요. 게다가 화씨세가하면 누구나 명문 중의 명문(名門)으로 꼽는 집안이 아닙니까? 그 놈은 누구나가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내젓는 사고뭉치에 악질 중의 악질이 아닙니까?] 회의 노인은 화일로가 화제에 오르자 언뜻 생각이 났는지 무릎을 탁 쳤다. [참! 듣자니 그 화일로가 낙양 근처에 나타났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듣자 입에 침을 튀기며 화일로의 악평(惡評)을 하던 칼자국 장한의 얼굴이벌레를 씹은 것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엣?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더군.] 칼자국 장한의 얼굴이 갑자기 싯누렇게 변하며 불안한 눈초리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회의 노인은 그의 마음을 짐작하듯 빙그레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설마하니 그 자가 이 근처에 있을리 있나?] 칼자국 장한은 조금 안심이 되는지 표정이 풀어졌다. 허나 그는 감히 더 이상은 화일로에 대한 험담을 하지 못하고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제길...... 그런 줄 알았으면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는 않았을텐데...... 어쨌든 노인장의 말대로 그자가 이 근처에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회의 노인은 히죽 웃었다. [그 자가 그렇게 무섭나?] 칼자국 장한은 소리를 죽여가며 말했다. [말도 마십시오. 노인장께서도 그 자에 대한 대한 소문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무튼 천하에서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두 명의 괴물(怪物) 중 하나가 아닙니까?] 이렇게 소근거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회의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의 생각으론 그 풍파무쌍 화일로가 이번에 낙양에 온 것은 비무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설까요?] 회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크지.] 칼자국 장한은 매우 흥미가 생기는지 가볍게 떨기까지 했다. [그...... 그렇다면 이번 대회는 그야말로 두번 다시 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되겠군요. 제 생각에는 그 화일로가 적어도 우승 할 가능성이 반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노인장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의 노인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글쎄...... 하지만 이번에 참가하는 다른 인물들도 결코 얕볼 사람들은 아니지 않나?] 바로 이때였다. 둥둥둥......! 요란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비무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비무대 주변은 인파들로 가득 메워졌다. 장내는 수많은 군웅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고함소리로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그때 사회석에 앉아 있던 팔자수염의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림의 친구분들께서 이렇게 많이 왕림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곧 저희 보주님께서 나오시겠습니다!] 그 자의 말이 막 끝나자 두번째로 북소리가 울려왔다. 둥둥둥......! 수백명의 군웅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대청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때 대청에서 육십여명의 회색 경장 차림의 사나이들이 두줄로 나뉘어 질서정연하게 뛰어나왔다. 그들은 머리에 회색 두건을 쓰고 가벼운 신을 신고 있었으며 손에는 모두 귀두도(鬼頭刀)를 든 채 비무대 양쪽으로 뛰어왔다. 이어 그들은 팔자진식(팔자진식)으로 나뉘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막 자리를 잡고 나자 대청 문에서는 다시 칠팔 명의 대한이 나이가 육십 가량 되는 한 노인을 에워싸고 모습을 나타냈다. 노인은 전신에 회색꽃을 수놓은 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상투를 높이 틀어 올렸다. 그러나 두 분은 나이에 비해 유난히 번뜩였으며 얄팍한 입술이 바싹 마른 얼굴에 보기좋게 어울리는 노인이었다. 얼굴과 마찬가지로 몸도 깡말랐으나 그의 행동과 용모는 매우 위엄이 있어 보였다. 노인을 호위하고 있는 여덟명의 사나이들도 제각기 특색을 가지고 있었으며 호걸다운 기풍이 역력했다. 그들은 지극히 빠른 걸음으로 비무대 앞에 도착했다. 여덟명의 장한들은 비무대를 등지고 앞에 모인 군웅들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시하며 정열했다. 노인은 큰 걸음으로 나무 층계를 올라서더니 비무대 가운데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은 우선 비무대 밑에 모인 군웅들을 한 차례 쓸어보다가 포권의 예를 취하고 나서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풍운보의 보주인 용호풍운검 하조천이오. 이번 여러분들을 이렇게 모이시게한 목적은 여러분께서도 모두 알고 계시니 생략하기로 하겠소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목적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소.]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의 귓전에도 아주 똑똑하게 들렸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내공이 얼마나 정심(精深)한지 알 수 있었다. [이번 무술시합을 개최하는 목적은 노부의 딸인 하옥령(何玉鈴)을 혼사시키는 한편 본보(本堡)의 지위와 사업을 계승할 후계자를 찾는 것이오. 또 규칙에 대해서도 여러분꼐서는 이미 잘 아시리라 믿고 요점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소.]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사방을 휘둘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첫째, 승리자는 자만해서는 안되오. 또 패했다고 해서 실망을 해서도 안되오. 더구나 후일에 그것으로 원한을 삼는 분이 없기를 바라겠소. 둘째, 겨루는 동안 승부가 판가름나면 즉시 손을 거두어야 하며 절대로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죽게 해서는 안되오. 세째, 마지막 승자는 이달 안으로 노부의 딸과 성혼을 하는 동시에 노부의 사업을 계승하게 되어 노부가 백 살이 되는 해에 모든 권한을 물려드리겠소. 마지막으로 이곳에 오신 모든 분들에게는 전문은(纏紋銀) 열냥씩을 증정해 드리겠다는 것을 약속하겠소.] 하조천의 인사가 끝나자 광장에는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와아......!] [하보주 만세......!] 하조천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정숙해 달라고 하고는 최종적으로 말을 맺었다. [어느 분이시건 전력을 다해서 노부와 친척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소이다.] [와아......!] 다시 박수갈채와 터져나갈 듯한 함성이 일었다. 하조천은 만면에 미소를 띄고 포권을 하여 군웅들의 갈채에 답례를 하고는 층계를 내려와 여덟명의 인물들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때 세번째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둥둥둥...... 이와 동시에 사회석에 앉아 있던 팔자 수염의 사나이가 우렁차게 외쳤다. [그럼 이제부터 시합을 개최하겠습니다. 어느분께서 먼저 등장하시겠습니까?] 비무대 밑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도 먼저 올라가는 사람이 없었다. 칼자국 장한은 의아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째서 아무도 올라가지 않지요?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먼저 올라갈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회의 노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네. 노부가 보기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수법을 본 후에 그 상황에 따라 올라갈 것 같네. 그렇다고 절대 해로울 것은 없으니까......] 바로 이때였다. 휘익! 하나의 인영이 눈앞에 어른거리더니 체구가 엄청나게 큰 사나이 하나가 비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 사나이의 몸집이 얼마나 컸던지 그토록 튼튼한 비무대가 한번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거대한 사나이는 광장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소생은 신력웅(神力熊) 포화(鮑火)라고 하오. 어느 분이 나와 겨루겠소?] 칼자국 장한은 감탄한 음성으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 자는 아주 기세가 당당하군요.] 회의 노인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저녀석은 틀림없이 쫓겨 내려올걸세.] 그 순간 키가 작달막하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나이가 날렵하게 비무대위로 뛰어올라갔다. 그 사나이는 포화와 마주서더니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희궁(姬穹)이라 하오. 사람들은 나를 독비응(毒飛鷹)이라 하오. 자! 친구는 어서 손을 쓰시오.] 포화는 두 말 하지 않고 앞으로 씩 나서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들어 마구 후려쳐 왔다. 쐐앵! 그의 주먹은 제법 빠르고 상당한 힘이 있어 보였다. 허나 희궁은 독비응이란 외호답게 발바닥을 땅에 붙인 채 유유하게 몸을피했다. [이얏!] 날카롭게 고함을 지른 포화는 재차 우직하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자 희궁은 조그마한 몸집을 한 차례 맹렬히 회전시키더니 훌쩍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발로 상대방을 걷어찼다. 쐐액! 이 단 한번의 공격에 포화는 도리없이 뒤로 두발짝 물러섰다. 포화는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재차 공격을 가하려 했다. 이때 밑에 있던 하조천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크게 소리쳤다. [포친구, 당신은 졌소!] 포화는 즉시 공격을 멈추고 발을 한번 쾅 구르더니 비무대에서 뛰어내려와 뒤로 돌아보지 않고 장원 밖을 향해 달려갔다. 하조천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비무대 위에 있던 희궁은 점잖게 포권의 예를 하더니 자신있게 웃었다. [그럼 어느분이 나오시겠습니까?] 이때 또 하나의 인영이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사뿐히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는 바싹 마르고 키가 멋없게 컸으며 인상이 몹시 차가웠다. [나는 고등(古燈)이다.] 희궁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상대방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바로 사망유자(死亡幽子) 고등이오?] 고등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나 고등이 강호에서 둘이 있을 수 있겠느냐?] 오만한 고등의 대꾸에 희궁은 화가 치밀었음인지 목줄기에 굵은 심줄이 튀어나오도록 악을 썼다. [당신의 사망유자라는 별명이 나를 겁주지 못하오!] 고등은 징글맞게 웃었다. [어디 그렇다면 한번 시험을 해보시지. 흐흐흐......] [이얍!] 희궁은 갑자기 날카로운 기합을 지르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삼장(三掌)을 갈겨댔다. 파파팍! 과연 독비응이라는 외호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눈부신 속도였다. 고등은 싸늘한 눈으로 희궁을 노려보고 있다가 번개같이 쌍장을 밀어냈다. 싸싸싸......싹!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가 장내를 진동하더니 희궁은 대번에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으음......] 깜짝놀란 희궁이 급급히 몸을 가누고 재차 공격을 가하려는 찰나, 쐐액! 어느 틈엔가 고등의 비수같은 손끝이 희궁의 아랫배를 뚫고 들어가고 있는것이 아닌가? [크악!]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희궁은 멍청히 서 있다가 배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썩은 고목이 넘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이미 숨이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아......] [과연 악독하구나......!] 비무대 밑에서 경악과 탄성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두 명의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가 즉시 뛰어 올라와 총총히 희궁의 시체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광경을 본 하조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고친구, 손속에 정을 남겨 살생을 삼가하는게 좋겠소. 그렇지 않으면 이 대회는 빛을 잃게 되고 마오.] 그러나 비무대 위에 있는 고등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하보주,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공력이 모자라는 탓이지 소생이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입맛이 쓴 듯 하조천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고등은 자만히 넘치는 오만함을 드러내며 비무대 밑을 쓸어보았다. [나는 얼머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올라오는 사람이 없다면 하보주께서는 그만 종을 치십시오.] 종소리는 바로 이 시합의 최후 승리자가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다. 다시 말해서 종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풍운보의 계승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칼자국 장한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직히 말했다. [노인장, 저 놈은 소문대로 매우 악독하군요.] 회의 노인은표정 하나 없이 대답했다. [저런 놈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네. 역시 당하고 말걸?] 둘이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을 때였다. 돌연 입술이 붉고 치아가 백옥같이 깨끗하며 풍채가 당당한 청년유생(靑年儒生) 하나가 바람을 타고 오는 듯 경쾌하게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유생의 의젓한 자태는 그야말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고등은 약간 의외라 생각했는지 그 청년유생을 집어삼킬 듯이 매섭게 노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름을 대라!] 청년유생은 멋들어지게 웃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이름을 댈 필요도 없다. 고등! 네가 살아서 이 풍운보를 나가고 싶다면 나는 지금 기회를 주겠다. 내가 너에게 내가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 주게 될 때 너의 일생은 여기서 종지부를 찍게 되며 두번 다시 나의 이름을 불러볼 기회도 없게 될 것이다.] 고등은 상대가 아까 각어풍(脚馭風)의 경신술을 쓰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바로 내가(內家)의 고수들만이 전개할 수 있는 신법이었다. 고등은 자기가 상대방 청년유생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허나 그는 자신의 위신도 있고 해서 억지로 격동하는 가슴을 억눌렀다. 그렇다고 해도 명색없이 물러설 수도 없는 처지이며 또 섣불리 덤빌 용기도 나지 않았다. 고등은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으나 겉으로는 호기롭게 소리쳤다. [개수작부리지 마라. 나 고등이 그런 공갈에 넘어갈 위인이 아니다. 만약 네가 진짜 맛을 보고 싶다면 우리 장소를 바꾸어 대결하자. 공연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 전에......] 청년유생은 고등의 엉큼한 속셈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등의 그 말은 스스로 자기의 약점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년유생은 두 팔을 뒤로 돌려뒷짐을 지더니 조용하면서도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모두가 풍운보의 비무초친에 참가하기 위함이니 무슨 일이건 이곳에서 해결하자. 공연히 얕은 수작을 부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고등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이놈, 내가 너를 무서워하는 줄 아느냐?] 청년유생은 유유하게 미소를 던졌다. [원래 너는 나의 안중에 있지도 않다는 걸 아느냐?] 고등은 치욕으로 인해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네놈이 정말 발악을 하는구나. 어서 신분을 밝혀라!] 그러자 청년유생은 담담하게 웃으며 지극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이미 죽기로 마음을 정했느냐?] 고등은 두 손을 쫙 벌리더니 열 손가락을 꼿꼿하게 세우며 마치 호랑이가 여우를 잡아 먹으려는 것 같은 자세로 사납게 이를 갈았다. [내 오늘 기어코 네 놈을 지옥으로 보내주마.] 청년유생은 표정이 추호도 변하지 않고 태연했다. [그렇다면 말해주지. 나는 생사판(生死判) 여절심(呂絶心)이다.] [으엣?] 고등은 대경실색했다. 그만 놀란 것이 아니라 밑에 있던 군웅들도 모두 크게 놀라 동요를 일으켰다. 무수한 눈들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모두 여절심에게로 집중되었다. 생사판 여절심은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일대살성(一代殺星)이었다. 그는 싸움을 했다하면 절대로 상대방을 살려두지 않기 때문에 생사판이란 외호가 붙은 것이다. 군웅들은 살명을 떨치고 있는 생사판 여절심이 이토록 준수한 청년유생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라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등은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하니 뒤로 물러섰다. [여절심이라고......?] 第 4 章 芭面飛叉 이미 여절심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고 싸늘한 살기만이 자욱하게 서려 있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고등은 마음을 악독하게 먹고 즉시 쌍장을 높이 쳐들어 십이성의 공력으로 장력을 밀어냈다. 꽈르릉! 사나운 경력이 비무대 위를 채우고도 남아 밖으로까지 거세게 몰려나갔다. 그러나 여절심은 고등 보다 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쐐액! 그가 가볍게 손을 휘젓자 한 가닥 광채가 고등의 몸을 향해 번뜩이며 날아갔다. [흑!] 나직하게 신음을 토한 고등은 즉시 뒤로 물러났으나 그의 안색은 완전히 핏기를 잃고 있었다. 허나 고등은 몇 번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재차 번개같이 몸을 날리며 두 손과 두 발을 동시에 사용하며 공격을 가했다. 파파파팍! 이 특이한 수법은 고등이 비장의 절기로 생각하고 있는 팔권참(八圈斬)이라는 것이었다. 여절심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서 있다가 그의 몸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갑자기 비조처럼 몸을 날렸다. 이어 그는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 고등의 머리통을 향해 내질렀다. 푹! 둔한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여절심의 네 손가락이 고등의 머리통을향해 파고 들어갔다. [으아악!] 소름이 오싹 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공중에 떠있던 고등의 몸뚱아리가 그대로 비무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쿵!] 비무대 바닥에는 고등이 흘린 선혈이 낭자했다. 고등도 자기가 죽였던 희궁처럼 두 사람에 의해 치워졌다. 밑에 있던 군웅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 중에는 부푼 꿈을 지니고 온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토록 무공이 고강하고 수법이 잔인한 여절심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한결같이 풀이 죽어 있었다. 뒤에 서 있던 회의 노인은 장탄식을 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일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하는군. 정말 소름이 끼치는 혈투일세.] 칼자국 장한은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장, 저 여절심의 기세가 아주 당당하군요. 아무도 올라가서 도전을못하니 그가 뽑힐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걸세.] 칼자국 장한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고도 할 수 없지.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법이니 그 누구도 여절심보다 강한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걸세. 그리고 몇 수 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일찍 나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네.] 그때 사회석에 있던 팔자수염의 사나이가 소리쳤다. [또 도전할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셋을 셀 때까지 나오지 않으시면 이것으로 시합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사나이가 군웅들 틈에서 걸어나오며 말했다. [자...... 잠깐만, 아직 내가 있소!] 그렇게 말하는 사나이는 온통 곰보에다 눈이 밑으로 축 쳐졌는가 하면 심한 들창코였다. 더구나 걷는 발길조차 정확하지 않고 뒤뚱거렸다. [와하하......!] 한바탕 비웃음소리가 군웅들에게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괴상한 사나이는 개의치 않으며 고르지 못한 걸음을 비무대 위로 옮겼다. 그 시합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이번 시합을 주선하여 자기의 사위를 고르려 하는 풍운보의 보주인 하조천이 있었다. 하조천은 도전한 사나이를 보자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별 미친 놈이 다 나서는군.) 그는 옆에 앉은 까만 얼굴의 장한을 툭 쳤다. 그 사람은 하조천의 의중을 짐작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몸을일으키며 소리쳤다. [친구, 잠깐 기다리시오!] 괴상한 사내는 비무대에 올라서서 그 소리를 듣자 몸을 돌이켰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한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를 부른거요?] 까만 얼굴의 사내는 냉랭하게 웃었다. [그렇소!] 괴상한 사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껄껄 웃었다. 누구도 이 지독하게 더럽고 무질서한 이를 보면 메스꺼움을 느낄 것이다. [무슨 일로 나를 부른거요?] [나는 본 보의 팔대총관(八大總官) 가운데 삼총관(三總官)이오. 그런데 친구에게 몇가지 의문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소?] [물어보시오.] [우선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괴상한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세라니 무슨 연세 말이오?] [나이가 어떻게 되셨느냐는 말이오?] 괴상한 사내는 다시 누런 이를 드러내놓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하...... 서른 아홉살이오. 그 정도 밖에 먹지 않았소? 그리고 아직 미혼이오.] 삼총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좋소, 하지만 또 다른 규칙이 있소. 무술 시합을 할 사람은 몸이 건전하고 병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친구께선 아시지 않소?] 또다시 악취가 물씬 풍길 것 같은 입을 쩍 벌리고 사나이는 괴상하게 웃었다. [이만하면 건강하지 않소? 다리가 없소? 팔이 없소? 이것이 바로 건강이 아니고 또 무엇이오?] 삼총관은 속으로 화가 치밀었으나 애써서 참았다. [하지만 친구께서는 다리를 절고 있지 않소?] 사나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것은 날 때부터 그런 것이오. 하지만 다리는 어디까지나 다리가 아니오?] 삼총관은 고개를 저었다. [다리는 다리지만 저는게 문제란 말이오!] 그러자 괴상한 사나이는 분연히 말했다.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하오. 왜 나를 당신들은 따돌리려 하는 거요? 당신들이 직접 고시판을 한 번 보시오. 절름발이는 응모할 수 없다고 되어 있나? 이것은 불공평한 모욕이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행위요!] 입이 막히게 된 삼총관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돌아 하조천의 눈치를 살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하조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삼총관은 즉시 사나이에게 말했다. [좋소. 친구의 말이 맞다고 칩시다.] 사나이는 만면에 희색을 띄며 그 흉칙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그렇지. 내 비록 이렇게 생기기는 했지만 당신네 아가씨께서도 좋아할 것이오. 하하...... 사람이란 얼굴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오. 바닷물을 어찌 다 되로 담을 수 있겠소?] 그의 말은 비록 그럴 듯 했지만 그의 말투나 행동이 너무 우스워 비무대 밑에 있는 군웅들은 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삼총관은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어 오만상이 일그러졌다. [이제 제발 그만 두시고 빨리 시합이나 하시오.] 사나이는 히죽이 웃어보이더니 몸을 돌려 여절심을 바라보았다. [아주 준수하게 생겨 먹었군.] 여절심은 빙그레 웃음을 날렸다. [내가 보기에도 귀하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소.] 이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은 다시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괴상한 사나이는 코를 휑 풀어 비무대 밖으로 팽개쳤다. 그리고는 손등으로 콧구멍을 쓱 닦더니 낄낄거리고 웃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너는 이 두 마디를 들은 적이 있는가?] 여절심은 유들유들하게 빈정거렸다. [귀하, 무슨 말씀이시오?] 사나이는 괴상망칙하게 웃으며 말했다. [옛말에 자신이 없으면 심산(深山)으로 가지 말라고 했으며 또 내자불선(來者不善) 선자불래(善者不來)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아는가?] 여절심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전히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게 어떻다는 거요?] 사나이는 답답한 듯이 자기의 머리를 박박 긁는데 이 바람에 그의 머리에서 허연 머리비듬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너는 본인의 뜻을 모르느냐?] [어디 얘기해 보시오.] [나의 뜻은 기왕 내가 이곳에 올라왔으니 너를 처단할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만약 두렵다면 일찌감치내려가는 것이 좋을 거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여절심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이런 심리적인 방법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흐흐...... 당신은 정말 나를 처치할 자신이 있소?] 괴인은 연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사람이 아니다.] 여절심은 준수한 얼굴에 조롱의 빛을 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믿지 못하겠는걸?] 괴인은 만면에 실망의 빛을 떠올렸다. [정말 믿지 못하겠나?] [그렇소. 믿지 못하겠소.] 여절심이 자신있게 대답하자 괴인은 다급하게 추궁했다. [무엇 때문에 믿지 못하는 거냐?] 여절심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이유는 간단하오. 첫째, 노형은 별로 무서운 인물 같지가 않구려. 둘째,최소한 당신의 무공이 어떻다는 것을 한 수만이라도 보여줘야 할 것이 아니겠소?] 괴인은 눈을 크게 뜨며 진지하게 물었으나 그의 이러한 꼴은 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한 수를 시전해 보라고? 어떤 수를 보이면 좋겠나?] [어떤 수를 쓰건 노형에게 달려 있소.] 괴인은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이윽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내 한 수를 펼쳐 보이겠다.] 그는 고개를 돌려 비무대 밑에 있는 군웅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어느 분께서 내게 잠시 칼을 빌려 주시겠소?] 그러자 비무대 옆에서 사회를 맡고 있던 사나이가 그 소리를 듣고 차고 있던 귀두도를 비무대 위로 던졌다. 번쩍이는 광채를 빛내며 귀두도는 허공에서 서너번 돌더니 착하는 소리와 함께 비무대 위에 꽂혔다. [고맙소.] 괴인은 뒤뚱뒤뚱 걸어가더니 손을 내밀어 귀두도를 뽑아들고 한번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는 칼날을 왼손에다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땅! 땅!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예리하고 날카로운 귀두도가 오른손으로 내리칠 적마다 뎅강뎅강 부러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괴인은 나중에 그 부러진 칼날들을 한데 모아 주먹을 불끈 쥐고 한 차례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난 다음 그가 손을 펴자 그의 왼손에는 강철부스러기가 한 주먹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괴인은 그 쇳가루를 비무대 밑으로 털어버리더니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여보게, 이 한 수면 충분하겠나?] [와아......!] [굉장하다!] 이때 비로소 사방에서 놀라운 외침과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모든 군웅들은 괴인의 무서운 솜씨에 경악의 빛을 나타냈으며 하조천까지도 몹시 놀란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군웅들은 보기에도 흉악한 괴인에게 이토록 놀라운 무공이 있을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절심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하하하...... 좋소! 친구의 단옥수(斷玉手)와 혼원일기공은 매우 좋았으나 아직 약간 모자라오.] 괴인은 눈쌀을 찌푸렸다. [아직도 모자란다고?] [그렇소. 아직 모자라오.] 괴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참 후에야 품에서 크기가 오리알만한차돌 한개를 꺼냈다. [이것은 차돌이다. 매우 단단하지.] 여절심은 아직도 여유가 만만한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괴인은 더이상 말하지 않고 그 차돌을 공중으로 휙 내던졌다. 차돌이 공중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순간 그는 탁하고 누런 가래침을 뱉었다. 순간, 쾅! 가래침이 차돌에 가서 부딪치자 차돌은 산산조각이 났다. 깨어진 차돌이 사방으로 튕겨지는 순간 괴인은 번개같이 몸을 날리며 두 손을 쫙 내뻗었다. 휘이이이...... 그의 옷소매에서 세찬 바람소리가 일어나며 부서진 차돌들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한 톨도 남지 않고 모두 소매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실로 귀신도 곡할 솜씨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여절심의 얼굴에 처음으로 짙은 불안이 떠올랐다. [옥금강(玉金剛)과 대흡력(大吸力)!] 괴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맞았어, 바로 그것이다.] 말을 마친 괴인은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자 그의 몸은 마구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몸이 점점 커졌다. 우우웅...... 뒤이어 그의 몸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커졌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는 비무대 오른쪽에 있는 공지를 향해 신음 비슷한 소리를 지르더니 거대하게 늘어난 쌍장을 번쩍 밀어냈다. 꽈르릉! 꽝! 엄청난 폭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뒤이어 와장창 하며 무엇이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로 가공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의 십장(十丈)이나 떨어진 곳에 깔렸던 네모난 대리석이 무형의 거센 강기에 의해 산산히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비무대 밑에서 관전을 하고 있던 하조천은 대경실색했다. [아...... 저 무공은 이미 오래전에 실전되었던 대유장(大幽掌)의 절예가 아닌가......?] 하조천이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괴인은 온 몸을 한 번 크게 흔들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냄새가 풍기는 이빨을 드러내며 여절심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이제는 되었나?] 여절심은 심각한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 수를 더 보여야 하오.] 괴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히죽 웃었다. [또 한 수를 보이란 말인가?] 이때 여절심의 안색은 핏기를 잃어 약간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그러나 그는 애써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소. 이번에는 나도 심사숙고하여 측정하겠소.] [만약에 내가 해낸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여절심의 목소리는 어느틈에 오만함이 없어지고 음침하게 변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린 시합을 할 필요도 없소. 나는 즉시 물러나겠소이다.] [그게 정말인가?] 여절심은 그의 행동이 밉살스럽기 짝이 없어 발로 비무대를 한번 쾅 구르며 냉랭하게 외쳤다. [친구, 너무 기뻐하기에는 이르오. 아직 결과를 보아야 하니까.] 괴인은 음푹 들어간 두 눈을 반짝이며 쾌히 승낙했다. [좋아! 단 마음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네.] [물론!] 소리친 여절심은 즉시 비무대 밑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보주, 사람을 시켜 목판(木板)을 하나 올려 보내십시오.] 하조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수하에게 목판을 가져오라는 분부를 내렸다. 곧 회색옷을 입은 건장한 대한 한명이 관을 짜는 나무와 같은 두께의 널판지 하나를 들고 비무대 위로 올라가더니 두 손으로 공손히 여절심에게 바쳤다. 여절심은 그 널판지를 매만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 당신의 장력과 내공은 과연 놀랍소. 진심으로 감탄하는 바이오. 하지만 나는 귀하가 손을 쓰는 속도가 어떤지 한번 보고 싶소.] 괴인은 추악하게 생긱 얼굴에 미묘한 표정을 떠올렸다. [당신은 나더러 이 목판을 가지고 시험을 해보란 말이오?] [그렇소. 칼, 검, 주먹, 다리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쓰시오. 단 흔적을 남겨야 하오. 당신이 손만 쓰면 나는 친구가 이 방면에 대해 나보다 고명한지 판단할 수가 있소.] 괴인은 소리없이 웃었다. [절대로 안심하시오. 귀하를 실망시키지 않겠소.] 여절심은 귀찮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 시작하시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괴인은 서 있는 상태에서 쌍장을 내밀더니 열 손가락을 쫙 펴 목판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파파파팍! 이 한 차례의 동작에 여절심이 들고 있던 널판지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야말로 눈깜짝하는 사이였다. 동작을 멈춘 괴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천천히 널판지를 뒤집어 본 여절심의 안색은 그대로 흑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손가락 사이마다의 거리와 간격은 모두가 똑같았으며 신기하게도 길이까지 모두 일정했다. [아...... 저럴 수가......!] 경악에 가득찬 탄성이 파도처럼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여절심의 안색은 파랗다 못해 하얗게 변했고 이마에서는 구슬같은 땀이 배었다. 그는 널판지를 내동댕이 치고 막 몸을 돌려 내려가려 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친구의 존성대명과 사승(師承)을 가르쳐 주시지 않겠소?] 괴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의 사부께서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미안하지만 거절해야겠구료.] 여절심은 사악하게 눈알을 부라렸다. [강호인이라면 이름이나 사부는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인데, 친구는 어찌 말을 하지 않으려 하시오? 설마 떠돌아다니는 낭인(浪人)은 아닐테고......] 괴인은 곰보투성이 얼굴에 당혹한 빛을 떠올리더니 도리없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별명이 파면비차(芭面飛叉)이고 이름은 우풍광(禹風狂)이라 하며,나의 사부는 색명무상(索命無常) 정구살(丁九殺)이라 하네.] [새...... 색명무상 정구살?] 여절심의 안색은 순식간에 칠면조처럼 변했다. 비무대 밑에 있던 많은 군웅들도 그제서야 그가 누군지를 알고 제각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절심은 한참 후에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만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보니 정 노선배님의 전인(傳人)이셨군요.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우형, 오늘의 일전은 귀하가 승리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생사판 여절심은 자기의 쟁쟁한 대명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몸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무공이 고강한 여절심도 꽁무니를 빼자 참가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여러 응시자들도 제각기 탄식을 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第 5 章 뛰는 자 나는 자 비무초친을 주최한 하조천은 일이 이렇게 되자 화를 낼 수도 없고 놀랍기도 하여 거의 넋이 빠진 상태였다. 하조천은 벌써부터 색명무상 정구살의 대명을 수천 수만번이나 들어왔던 터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듣자하니 정구살의 공력은 이미 최절정에 달했으며, 거의 불가사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가장 무서운 것은 그의 편협된 마음이었다. 그는 너무도 성격이 괴팍하여 사람을 죽일 때도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는다고 했다. 색명무상이란 별호도 그의 비위를 건드린 사람치고 아직 살아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당금 무림에는 가장 다루기 힘든 인물이 열명이 있었다. 그들을 통털어 일검(一劍), 이괴(二怪), 삼사(三邪), 사절(四絶)이라 칭한다. 색명무상 정구살은 그들중 삼사(三邪)의 한명인 것이다. 강호에서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누구를 막론하고 이 파면비차 우풍광을 상하게 하거나 패배시키려면 색명무상 정구살과 적대시하는 위험을 각오해야만 한다. 정구살을 꺽을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감히 그를 격패시키겠는가? 더구나 이 우풍광만 하더라도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 정도의 고수였다. 하조천은 먹은 음식이 꽉 체한듯 마냥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이 추한이 색명무상의 제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이 놈을 이겨내는 사람이 없다면 이 놈이 당선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하조천은 애초부터 이번 비무대회로 자신의 사위를 고를 생각은 털끝 만큼도 없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 은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허나 상대가 우풍광이라면 계획대로 일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섣불리 행동을 하다가 탄로가 나는 날이면 색명무상 정구살이 이 풍운보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릴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추악한 인물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경우에는 어찌 되었건간에자기의 사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지지리 못생긴 곰보에게 어떻게 자신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을 맡긴단 말인가? 이 세상에 이토록 어처구니 없는 일도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제서야 하조천은 자신의 계획에 커다란 맹점(盲點)이 있었음을 깨닫고 깊이 후회하며 탄식했으나 만시지탄이었다. 하조천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수석총관(首席總官)인 현학(玄鶴) 단홍(端紅)이었다. 단홍은 비단 무공만 고강한게 아니라 지략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 하조천이 가장 믿는 수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 비무초친도 그의 머리속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단홍은 하조천의 침통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나 꾀주머니라 불리우는 그도 일시지간은 하조천처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하조천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보주, 일이 귀찮게 되었습니다.] [흐음......] 하조천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몰아쉬더니 침울한 표정으로 비무대 위에서 기고만장하여 상대를 기다리는 우풍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하조천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 놈이 될 것 같군. 단노이, 어떻게 하면 좋겠나? 만약 저 놈을 당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건 내 딸을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라는 격이 아닌가?] 단홍은 고개를 돌려 군웅들을 휘둘러보더니 가만히 입을 열었다. [보주, 너무 조급히 서두르지 마십시오. 아직은 도전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조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려운 일이네. 만약 저 놈이 자기 사부의 이름을 들먹거리지 않았다면 혹시 도전을 하려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이미 그 놈이 자기 사부가 누구라는 것을 밝힌 이상 그 누구도 감히 섣불리 도전을 하지 못할 것세.] 단홍은 주먹을 불끈 쥐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게 다 여절심이란 놈의 실책 때문입니다. 저 놈의 출신내력을 묻지 않았어야 하는건데......] 하조천은 갑자기 단홍을 향해 짜증스럽게 말했다. [단노이, 자네의 그 신기한 계책이란 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자네는분명 화일로, 그 놈이 이 시합에 나설거라고 단언하지 않았었나?] 단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놈이 이 근처에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종적이 묘연해져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는군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자네의 계책대로라면 화일로는 이 시합에 참가해서 당연히 우승을 해야 하지 않나? 헌데 그 놈은 콧빼기도 보이지 않고 난데없이 낮도깨비 같은 녀석이 우승하게 생겼으니...... 자칫하다가는 쥐새끼를 잡으려다 장독마저 깨뜨려 버리는 꼴이 되지 않겠나?] [그럴리가 있습니까? 화일로는 호기심이 강하고 남에게 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놈이니 필시 이 근처에 와 있을 겁니다. 그러니 보주께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이때 비무대 위에 있던 우풍광은 몇년 동안이나 이를 닦지 않았는지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기고만장하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빨라 올라오시오. 여러분 중에서 어느 분이 한 수 가르쳐 주시겠소? 그래도 올라오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이만 징을 치라고 하겠소. 징소리만 들리면 당신들은 가망이 없소.] 이것을 본 하조천은 좌불안석, 앉았다 일어섰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 아직 화일로, 그 놈이 나타나지 않지? 자네 말대로라면 지금쯤 그놈이 비무대에 나타나야 옳은 일이 아닌가?] 단홍은 급히 고개를 빼내 군웅들을 두리번거렸으나 화일로는 커녕 그와 비슷하게 생긴 인물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비무대 위에 있는 우풍광은 어색한 몸집으로 몸을 흔들며 왔다갔다 하고 큰 소리로 악을 썼다. [아무도 상대할 사람이 없소? 내가 보기에는 그만 징을 울려야 할 것 같군.] 그리고는 사회를 맡고 있는 사나이를 향해 소리쳤다. [여보시오. 당신이 세번 소리를 지르시오. 그래도 올라오는 사람이 없으면 그때는 징을 울려야지.] 하조천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수시로 변했다. 그러나 좌우에 시립한 여덟명의 총솬들도 속수무책인 듯 서로 얼굴만 마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사회자의 귀에 거슬리는 흐늘흐늘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빨리 해라. 만약 소리치지 않으면 내가 화를 내겠다!] 가뜩이나 겁을 집어 먹고 있던 사회자다. 그는 날벼락이 떨어질까 두려워 즉시 소리를 높이 외쳤다. [또 도전하실 분이 없으십니까?] 이렇게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는 컸다 작았다 하여 극히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수백명이 넘는 군웅들은 서로 얼굴만을 마주볼 뿐 누구 한 사람 대답하지 않고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사회를 맡은 사나이의 목소리는 마치 목구멍에 한 줌의 모래가 들어간 듯 가까스로 다시 터져나왔다. [도전하실 분이 없습니까?] [......] 역시 광장은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만 흐를뿐 마치 공기마저도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때 비무대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회의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칼자국 장한을 바라보았다. [이제 노부는 그만 자네와 헤어져야겠군.] 칼자국 장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갑자기 어딜 가려 하십니까?] 회의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노부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네. 그들을 더 실망시킬 수야 없지.] 노인이 몸을 돌리자 칼자국 장한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아직까지 노인장의 성함도 모르고 있었군요. 실례했습니다. 소인은 담대경(譚大經)이라 하며 외호는 흑표자(黑豹子)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인장의 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회의노인은 담담하게 웃으며 알쏭달쏭한 대답을 했다. [노부의 이름은 자네가 얼마전에 꺼내지 않았는가?] 엉뚱한 대답헤 칼자국 장한은 일순 멍청해졌다. [제가 언제 노인장의 이름을 꺼냈습니까?] 회의노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노부의 성이 화(華)씨이고 이름은 일로(一露)라고 하네.] [네?] 칼자국 장한은 기겁을 하게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그럼 당신이 바로......] 회의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렇소. 본인이 바로 그 풍파무쌍이라는 화일로요.]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몸을 솟구쳐 사장여쯤 올라간 후 허공에서 빙그르르 몸을 돌리더니 마치 바람결에 흐르는 연기와 같이 군웅들의 머리위를 넘어 비무대 위로 날아갔다. [와아......!] [굉장한 신법(身法)이다!] 화일로가 비무대위에 사뿐히 내려서자 온 장내에서는 우뢰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군웅들은 설마 정구살의 위명에 겁을 먹지 않고 우풍광에게 도전하는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라 하나같이 놀라고 경악스러워 했다. 화일로는 비무대의 중앙에서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우풍광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비무대 아래 군웅들을 향해 포권의 예를 올리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께서 열렬한 성원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웅들은 비무대에 오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고는 다시 한번 눈이 휘둥그래졌다. 원래 화일로는 노인으로 분장을 했었지만 다만 약가루를 얇게 발랐을 뿐이었다. 따라서 오관(五官)과 얼굴의 형태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었다. 그가 아까 몸을 날려 비무대 위로 날아갔을 때 이미 약가루를 지워버렸기 때문에 지금 군웅들과 마주하고 있는 얼굴은 그의 진짜 영준한 얼굴이었다. [화일로!] [와, 화일로다!] [저 사람이 바로 풍파무쌍 화일로다!] 광장에는 마치 강의 물이 갑자기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 같이 괴소, 찬탄,경악, 비명의 소리가 쉴사이 없이 터져나왔다. 한 마디로 말해 열광의 도가니였다. 잔뜩 찌푸려졌던 하조천과 단홍의 얼굴도 활짝 펴져 마치 오랜 가뭄끝에 단비를 맞은 사람들 같았다. 단홍은 하조천을 돌아보며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도 했다. 일단 비무대 위에 오른 화일로는 발로 바닥을 두드려서 그 탄력을 시험해 본 다음 우풍광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다. 우풍광의 괴상한 두 눈이 촛점을 화일로에게 맞추더니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까지는 전혀 보지못했던, 아니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은 표정이 돌연 우풍광의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몹시 불안한 것처럼 보였으며, 지금까지 전혀 느껴보지 못한 위축감 같은 것을 의식하는 듯 했다. 드디어 이 색명무상의 고명한 제자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당신이 바로 풍파가 무쌍하다는 그 화일로요?] 화일로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은 왜 이제야 올라오는 거요?] [하하...... 본 가주의 신분으로 어찌 조무라기들과 겨룰 수가 있겠소? 적어도 색명무상의 제자 정도는 되야 상대할 기분이 나지 않겠소?] 바짝 긴장한 채 이들을 주시하고 있던 군웅들은 이 말을 듣자 와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풍광의 괴상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당신은 내 사부님이 두렵지도 않단 말이오?] 화일로는 느긋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남들은 그를 두려워할지 몰라도 나는 아직까지 누구를 두려워 해본 적이 없소. 그리고 당신이 진정한 남자라면 사부를 가지고 거들먹거릴게 아니라 자신의 순수한 실력으로 위세를 나타내야 하오.] 우풍광의 얼굴이 흥분으로 인해 더욱 시뻘개졌다. [내가 언제 사부님을 내세웠단 말이오? 당신 정도는 굳이 사부님이 아니더라도 나 혼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소!] [그건 당신의 희망사항일 뿐이지. 당신의 사부가 직접 와도 나를 어쩌지 못할텐데 당신 혼자 나를 당해낼 수 있겠소?] 화일로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대꾸하자 우풍광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화를 냈다. [이...... 이놈! 감히 함부로 지껄이다니...... 너는 나의 사부를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나까지 비꼬았으니 내 기필코 네 놈의 목을 베고 말겠다!] 우풍광이 화를 낼수록 화일로의 표정은 여유만만해졌다. [우풍광! 너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마시오. 산넘어 산이 있다는사실을 알아야 하오. 본 가주가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테니 어서 내려가도록 하시오!] 우풍광의 얼굴이 온통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목에다 핏발을 세우며 큰 소리로 외쳤다. [네 이놈, 어서 병기를 뽑아라! 단번에 박살을 내버리겠다.]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당신에게 병기를 쓴다면 당신의 사부가 나를 욕하지 않겠소?] 우풍광은 어리둥절하여 급히 물었다. [사부님이 왜 너를 욕한단 말이냐?] [하하...... 어린 아이를 너무 심하게 다룬다고 말이오.] 이 말을 듣자 비무대 아래에서 폭소가 터졌다. [우하하하하......!] 그제서야 우풍광은 화일로가 자신을 놀렸음을 깨닫고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이놈이......] 우풍광은 너무도 화가 치밀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벼락같은 노호성을 지르며 화일로를 향해 덤벼들었다. [어헝!] 그의 동작은 생긴 것과는 달리 비호처럼 재빠른 것이었다. 파파팍! 순식간에 그는 화일로의 코앞으로 달려들며 두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화일로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가 우풍광의 주먹이 거의 자신의 지척으로 다다랐을 때야 슬쩍 두 발을 움직였다. 휘휘휙! 그 순간에 화일로의 몸은 어느새 우풍광의 공세속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우풍광의 몸이 한번 움직이는 순간에 화일로는 무려 열일곱번이나 위치를 바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빠른 동작이었는지라 다만 그 숫자의 인영만 나타나 보였다. 허공으로 떠 오른 화일로는 오른손을 슬쩍 흔들었다. 스스스슷...... 갑자기 허공에 수백 수천겹의 장영(掌影)이 장막처럼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여러겹으로 된 그믈을 덮어 씌우듯 우풍광의 전신을 휘감아갔다. [앗! 천전수......!] 우풍광은 경악성을 내지르며 재빨리 몸을 솟구쳐 그 장영의 범위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 다음 단옥수(斷玉手)를 최대한의 공력으로 발휘하여 맹렬하게 휘둘렀다. 꽝! 허나 겹겹이 뭉친 천전수의 장영을 뚫지는 못했다. 천전수는 마치 거미가 실을 뽑아 먹이를 옭아매듯 수백, 수천가닥의 장여이 상대를 칭칭 휘감는 절정의 수법이었다. 이 장세속에 한번 말려들게 되면 제아무리 내공이 막강한 고수라도 거미줄처럼 끊임없이 휘감아오는 장영을 뚫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파파파파! 우풍광은 질풍처럼 연거푸 마흔 여덟번이나 장력을 내갈겼다. 그의 단옥수는 맹렬하고 거셌으며 예리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특히 그의 혼원일기공은 당금 무림에서 십대공력(十大功力)중의 하나로 불리울만큼 위력이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우풍광이었으나 한번 빠져든 천전수의 공세를 격파할 수는 없었다. 우풍광은 사력을 다해 단옥수를 내갈겼으나 마치 수백겹의 비단처럼 자신을 휘감아오는 천전수의 장영을 뚫을 수 없자 입술을 악물었다. 다음 순간, [으야압!] 우풍광이 고함을 지르는가 싶자 뜻밖에도 가늘고 마른 그의 몸은 두배로늘어났다. 그는 거장(巨掌)을 마구 휘둘러 강력하기 그지없는 강풍을 일으켰다. 쿠르르르릉! 꾸아아아앙! 그 맹렬한 대유장의 공력은 처음 사용한 단옥수에 비할 수 없는 위력적인 것이었다. 화일로는 두 눈을 반짝 빛내며 오른손으로 실을 잡아 뽑는 듯한 자세를취했다. 고오오...... 그러자 수백겹으로 늘어서 있던 천전수의 장력이 급속도로 하나로 뭉쳐들며 우풍광이 내갈긴 대유장력을 향해 몰려드는 것이 아닌가? 꽈꽝!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엄청난 폭음이 터져나왔다. [크으윽!] 그와 함께 우풍광이 신음을 토하며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우풍광은 무려 십여걸음이나 정신없이 격퇴되어 자칫했으면 비무대 밑으로 떨어질뻔 했다. 그의 어깨 부분은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으며,안색은 백지장처럼 핼쓱하게 질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멍청한 얼굴로 화일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와아...... 과연 화일로다!] [와아아...... 풍파무쌍 만세!] 비무대 아래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군웅들은 우뢰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박수소리가 주위를 온통 뒤흔드는 가운데 여덟 팔자로 서 있던 육십여명의 사내들은 벌써 비무대 밑으로 모여들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시합이 이미 끝난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서 구경하고 있던 풍운보의 하인들까지도 연신 박수를 치며 함성을 울렸다. 특히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조천이었다. 그는 만면에 희색을 보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주노구(周老九)! 주노구! 빨리 징을 울려라!] 비무대 아래에서 징을 들고 서 있던 주노구라는 사내는 매우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보주! 또 도전할 사람이 없는가를 세번 불러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물어보는 주노구를 보던 하조천은 발을 구르며 호통을 질렀다. [이 바보같은 놈! 네 놈은 정신이 나간게로구나!] 옆에 서 있던 단홍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색명무상의 제자도 패했는데 또 누가 도전을 하겠느냐? 네 놈이라도 도전해 보겠다는 것이냐?] 주노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이 소리쳤다. [징을 울려라!] 바로 그때였다. 비무대 위에 있던 우풍광이 돌연 펄쩍 뛰며 다급히 말했다. [자...... 잠깐......] 우풍광은 마음이 너무도 급했기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할 뿐더러 목에는핏대가 벌겋게 섰다. 그는더욱 다급해져서 말도 못하고 입만 보기 흉하게 움직였다. 결국 자기 성질을 참지 못한 우풍광은 재빨리 달려가더니 주노구를 번쩍들어서 일장 밖으로 던지고 말았다. 쿵! [어이쿠!] 뜻밖의 공격을 받은 주노구는 그만 낯빛이 새파랗게 질린 채 사지를 쭉 뻗고 나가 떨어졌다. 第 6 章 最後의 勝者 다시 우풍광이 입을 열었다. [자......잠깐만...... 내 아직 할 말이 있소......] 한편 징을 울리려던 사람은 막 두드리려던 상태에서 동작을 멈추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드디어 하조천이 낯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우친구...... 시합은 이미 끝났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승패가 결정되었으면 빨리 내려올 일이지 또 어떤 비겁한 짓을 하겠다는 건가?] 이번에도 역시 단홍이 메아리처럼 그 다음 말을 했다. [우친구, 당신에게 패한 사람이 누구 하나 당신처럼 그렇게 비겁한 짓을했소? 우리가 꼭 강제로 끌어내려야만 하겠소?] 분위기가 삽시간에 험악해졌다. 그때 한 고수가 나서며 소리쳤다. [저 놈이 주노구를 집어 던지기까지 했으니 단단히 혼을 내줘야겠다!] 그러자 우풍광은 두 손을 마구 흔들며 마치 우는 것처럼 말했다. [그...... 그게 아니오. 여러분,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소. 다만 너무 급한 김에 그만......] 다시 하조천이 소리쳤다. [승부는 이미 끝났는데 무슨 할 말이 또 있단 말인가?] [아까 나는 너무 자만해 있었소. 그래서 매우 후회하고 있소.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후회를 하는데는 그 원인이 있소.] [대체 그 원인이 무엇인가?] [원래 내 장기는 월아권(月牙圈)인데 상대를 경시해서 미처 병기를 사용하지 못했소. 맨손으로 싸웠기 때문에 패했다는 사실을 나는 후회하고 있소.] 다 듣고난 하조천은 우풍광을 크게 꾸짓기 시작했다. [그건 자네 자신이 한 일이 아닌가? 승부가 가려진 이 마당에 자네가 화가주를 가볍게 보고 무기를 사용하지 않아서 패했다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화가주도 분명히 맨손으로 자네를 상대하지 않았나?] [내...... 내가 잘못했소. 내 잘못을 시인하겠소. 다만 저 자의 특기는 장력(掌力)이고 나는 병기를 잘 쓰는데 이대로 끝난다면 너무 억울해서 미쳐 버리고 말거요. 저 자와 다시 한번 공평하게 겨뤄보고 싶은게 내 마음이오.] 하조천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자네의 일방적인 생각일세. 본 대회에서는 그런 법이 없네.] 단홍이 나서서 하조천을 거들었다. [우친구, 어서 내려오시지. 열냥의 문은(문은)이 준비되어 있으니 내려오는 즉시 드리도록 하겠소. 또한 사람을 시켜서 보 밖까지 안전하게 모시리라!] 우풍광은 땀을 뻘뻘 흘리며 안절부절했다. [제발 날 좀 도와주시오. 내가 이런 꼴로 돌아가면 사부님께 다리가 부러져도 한이 없겠지만 나는 아직 자신의 능력을 다 사용해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무기도 사용못했지 않았소?] 하조천은 냉랭하게 말했다. [안되네. 보아하니 우리 사이에는 일가(一家)의 인연을 맺을 연분이 없는가 보네. 자, 이제 그만 내려오게. 만일 꼭 억울하다면 그 보상을 하는 의미에서 은자 천냥을 주도록 하겠네. 이건 전에 없던 일이니 우리가 자네를 얼마나 우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네.] 단홍이 뒤를 이었다. [여봐라, 즉시 일천냥을 올리도록 해라!] 그러자 우풍광은 더욱 다급히 말했다. [그 은자는 받지 않겠소. 나는 다만 당신의 딸을 갖고 싶을 뿐이오.] 드디어 하조천의 분노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우풍광! 너는 무뢰하기 짝이 없구나. 이 풍운보가그러헤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역시 단홍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서더니 우풍광에게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소리쳤다. [우가야! 우린 네 사부가 바로 색명무상 정구살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가 네 사부를 존경하고 있다. 정선배께서는 무림의 영웅이실 뿐더러 그 분의 신분을 보아서라도 너는 그렇게 무례한 요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소문이 무림에 퍼지는 날이면 누가 더 난처해 하겠느냐? 이것은 어디까지나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지금까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화일로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하보주님, 나는 이 친구가 다시 시합하자는 제의에 동의하겠습니다.] 그순간 모든 중인들은 깜짝 놀라 안색이 변했다. 하조천 또한 반색을 한채 급히 말했다. [안되오. 하가주! 승부는 이미 끝난 일, 더할 필요가 없소. 그러니 공연히 우풍광의 무례한 부탁에 동의하지 마시오.] 이번에도 단홍이 나서더니 간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이쪽 일은 우리가 적당히 처리하도록 할테니까 염려놓으십시오.] 그러나 화일로는 담담한 미소를 지은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군웅들은 이 사고뭉치 가주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 호기심과 의아함을 느낀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조천과 단홍 또한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으로 화일로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화일로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이미 말했지만 난 그와 무기를 가지고 다시 겨루는 일에 동의하기로했소.] 단호한 화일로의 말에 단홍은 매우 당황했지만 애써서 태연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화가주님, 구태여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가주께서는 분명히, 그것도 정당하게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러니 공연히 귀찮은 일을 하실 필요가 어디......] 화일로가 그 말을 중단시켰다. [귀찮은 건 당신이 아니지 않소? 더구나 본 가주는 저 자가 이 일을 두고 영원히 고민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만은 없소. 그러다가 저 자가 미쳐죽기라도 한다면 그 원귀(怨鬼)가 나를 죽도록 따라다닐텐데 난 귀신이라면 아주 질색이오.] 단홍은 그의 말에 웃을 수도 없고 울을 수도 없어 엉거주춤하니 서 있었다. 그때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하고 있던 하조천이 지어낸 미소와 함께 입을열었다. [화가주, 내 가주께 묻고 싶은게 한가지 있소.] [물어 보십시오.] [가주는 저 우풍광과 다시 겨룬다면 꼭 승리할 자신이 있소?] 화일로는 그가 묻는 뜻을 알았지만 일부러 어리둥절한 척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조천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만일 가주가 꼭 승리할 자신이 있다면 문제야 간단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공연한 모험 같은 짓은 하지 않는게 좋을 게요.] [하보주께서 보기에 제가 모험이나 할 사람 같습니까?] 화일로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하조천은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니오. 절대로 오해는 하지 마시오. 만일 가주와 우리가 서로 연분을 맺을 인연이 있다면 그 현실은 바로 눈앞에 두고 있소. 그래서 공연히 실수라도 하면 안된다는걸 말해두려는 거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노부 역시 가주의 종신대사를 생각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소.] [하하...... 보주께서 그토록 나를 걱정해주시니 정말 감사하군요. 하지만 내 종신대사는 내가 결정합니다. 그러니 보주께서는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화일로가 이렇게 까지 말하는데야 하조천도 더이상 막을 명분이 서지 않았다. 결국 그는 눈쌀을 살짝 찌푸린 채 다시 자리에 앉고 말았다. 그때 비무대 위에 있는 우풍광의 얼굴에는 다시 희망의 빛이 물결쳤다. [당신은 정말 좋은 친구요. 내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어 정말 고맙소.난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일줄은 미처 몰랐소. 정말 소문은 믿을게 못되는구려.]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아직 좋아하기에는 이르오. 당신이 이번에도 나를 꺾지 못한다면 하보주의 아름다운 따님은 내가 차지하게 될테니 당신은 단단히 힘을 써야 할거요.] 우풍광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번에야 말로 당신은 내 실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알게 될거요.] 이어 그는 한 손을 품속에 넣더니 하나의 괴상하게 생긴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초생달 모양으로 생긴 길이가 약 한자 정도되는 물건이었다. 그 물건은 소가죽으로 싸여 있었는데 그가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내자빛이 번뜩이며 한 쌍의 월아권(月牙圈)이 모습을 나타냈다. 우풍광은 그것을 양손으로 나누어 쥐고 화일로를 노려보았다. 흉악하게 생긴 사나이와 월아권의 그 번쩍이는 광채는 충분히 사람의 간담을 떨어지게 만들었고 음산한 기운을 불러 일으켰다. 화일로는 그것을 주시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이 물었다. [우풍광, 그게 당신의 사부가 준 무기요?] 우풍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이건 보기보다 상당히 날카로우니 당신은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거요.] 화일로는 씨익 웃으며 여유있게 말했다. [별 걱정을 다하는군. 그 월아권도 당신 얼굴처럼 별로 신통해 보이지 않는구려. 난 당신이 이번에도 패하면 얼굴색이 어떻게 변할지 그게 궁금할 따름이오.] 우풍광의 얼굴이 다시 분노로 시뻘개졌다. [이런 제기랄...... 좋다, 언제까지 큰소리를 치는가 한번 보자!] 우풍광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그의 신법은 과연 우악스럽도록 빨랐다. 그는 몸을 움직이는가 싶었는데 어느틈엔가 월아권에서 바람을 일으키며허공으로 몸을 날려 쏜살같은 속도로 화일로의 뒤에 내려서더니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파파팍! 수십줄기의 날카로운 섬광이 화일로의 등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흥!] 나직이 코웃음을 친 화일로는 몸을 움직이지도 않은채 오른손을 뒤로 휘저었다. 펑! 즉시 폭음이 터지며 그의 등으로 날아오던 월아권이 경기에 부딪쳐 허공으로 튕겨올라갔다. [앗?] 우풍광은 질겁을 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명을 지르더니 급급하게 튕겨나가는 월아권을 억지로 움켜잡고 재차 화일로를 향해 휘둘러갔다. 그 순간 화일로는 어느새 몸을 돌리며 우풍광의 머리통을 향해 우수를 쭉 내뻗었다. 쾌액! 한 가닥의 뇌전같은 섬광이 우풍광의 머리통을 향해 폭사되어갔다. 그것은 낙화섬수(落花閃手)라는 초상승의 수법이었다. 우풍광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빠른 신법으로 그것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싸움은 급속도로 거칠어져 갔다. 우풍광의 손에서 월아권이 교차되는 순간, 팽! 날카로운 음향이 터지며 화일로의 급소를 노려 월아권이 무시무시하게 날아들었다. 화일로는 두 발을 기이하게 움직였다. 팍! 팍! 두개의 월아권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귀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화일로는 거의 믿을 수 없도록 신속한 동작으로 우풍광의 팔을손아귀에 잡아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야말로 속도와 방위가 완벽한 금나수(擒拿手)였다. 우풍광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손목을 잡혀 고통스러움에 마구 비명을질렀다. [으아...... 으아아......] 우풍광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화일로는 우풍광의 손목을 잡은손을 잡아당기며 다른 손으로 우풍광의 뺨을 후려갈겼다. 찰싹! [악!] 경쾌한 음향이 이는 가운데 우풍광의 오른쪽 뺨이 퉁퉁 부어오른채 보기좋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가 떨어졌다. 그의 두 자루 월아권은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화일로가 조금만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우풍광의 머리는 이미 박살이 나버렸을 것이다. 뺨이 퉁퉁 부운 채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 있는 우풍광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경악에 가득찬 눈으로 화일로를 바라보고 있을뿐 한마디의 말도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중인들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신에 거의 초인적인 무공을 지닌 우풍광이 단 오초도 넘기지 못하고 간단하게 제압당해 버린 것이다. 더구나 그 상대는 다름아닌 무림에서 망나니로 유명한 풍파무쌍 화일로가 아닌가? 다음 순간, [와아..... 최고다!] [과연 화일로다!] 군웅들은 주위가 떠나갈 듯한 함성과 박수를 내질렀다. [휴우......] 하조천과 그의 수하들도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멍하니 앉아 있던 우풍광은 갑자기 땅바닥을 치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내 자신이 밉구나...... 흐흐흑...... 미워...... 이 일을 어떻게 하면좋으냐?] 다 큰 어른이 싸움에 졌다고 울줄은 몰랐는지라 천하의 화일로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신은 빨리 일어나지 않고 앉아서 무슨 넋두리를 하고 있는 거요?] 우풍광의 추악한 얼굴은 온통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 나는 당신에게 졌소. 나는 정말 당신을 이길 수가 없었소. 당신은 너무 빠르고 너무...... 강했소. 더구나 당신은 손속에 사정을 두었으니......] 화일로는 빙그레웃었다. [아니 다행이구려. 만약 상대가 달랐다면 당신은 이렇게 온전하지는 못했을 거요.] 우풍광은 여전히 어린애처럼 목을 놓아 울었다. [나는 당신에게 졌소...... 나는 돌아가 사부님께 어떻게 말해야 하오?] 화일로는 순진한 우풍광을 좋은 말로 타일렀다. [우풍광, 당신이 내 손에 진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오. 어차피 두 사람이 싸운다면 어느 한 사람이 패하기 마련 아니오? 자, 빨리 일어나시오. 창피하지도 않소?]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에 우풍광은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저......정말 오늘 나는 재수가 없소. 사부님께선 내가 필경 승리할 거라고 했는데 여자는 커녕 이렇게 당했으니......] [어찌 세상일이 당신네들 뜻대로만 되겠소?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신에게는 다행한 일이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화일로가 이 말을 할 때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기 때문에 대 아래의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우풍광은 납득이 안간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렇게 되었는데도 다행이라니......?] 화일로는 빙긋 웃으며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만약 또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으면 그때 그 원인을 가르쳐 주겠소. 이젠 가 보시오.] [......] 우풍광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쪽에 떨어져 있는 월아권을 집어 품속에 간직한 후 비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몇 발자국 가다가 몸을 돌리더니 그제서야 깜박 생각난 듯 물었다. [당신이 마지막에 나를 제압한 수법은 무엇이오? 그걸 가르쳐줘야 돌아가 무슨 무공에 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게 아니겠소?] 화일로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추뢰수(追雷手)라는 무공이오.] 우풍광은 눈을 크게 떴다. [추뢰수? 맞았소...... 정말 번개가 쫓아오는 것처럼 빨랐소.] [돌아간 후 당신 사부에게 추뢰수를 쓰는 사람에게 패했다고 하면 욕을 먹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 그 무공의 내력에 대해 알게 되면 당신도 한결마음이 가벼워 질거요.] 우풍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길게 탄신을 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절룩거리며 풍운보를 걸어나갔다.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뒤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화일로가 비무대에서 내려오자 하조천이 달려나오며 만면에 미소를 띄고말했다. [화가주, 정말 축하하오. 어서 대청으로 갑시다.] 화일로는 하조천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며 보무도 당당히풍운보의 보내(堡內)로 걸음을 옮겼다. 第 7 章 陰凶한 凶計 그날 저녁, 풍운보의 대청에서는 성대한 환영연회가 베풀어졌다. 연회는 이경이 가까와서야 겨우 끝이 났다. 화일로는 기분좋게 술이 취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제 그만 실례해야 되겠소. 온종일 운동을 했더니 정말 피곤하군요.] 하조천이 빙그레 미소를 띄면서 말했다. [자기 전에 간단하게 차를 한잔 하는 것이 어떻겠나? 술도 깰겸 말일세.] 그는 이제 화일로를 자신의 사위로 완전히 인정하듯 말투가 아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화일로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군요. 그렇지 않아도 갈증이 나던 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리를 바꾸어 한 채의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하조천이 서재로 사용하는 곳으로 고아하면서도 우아한 풍취가 넘치고 있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아 곧 시녀 한 명이 차를 내왔다. 화일로는 술기운이 가득한 게슴츠레한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 방은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보주님의 풍취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조천은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게 보아주니 고맙네. 듣자하니 자네의 기풍도 대단하다고 하던데 이런 방이 눈에 차겠나?] 그때 단홍이 찻잔을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차가 식기 전에 어서 드시지요.]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고 냄새를 음미했다.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차의 향기를 감상하자 하조천이 빙그레 웃으며물었다. [어느 지방의 차(茶)인지 알겠나?] 화일로는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절강성(浙江省) 장흥(長興)에서 나는 양선(陽羨)이군요.] 하조천은 껄껄 웃었다. [하하...... 정말 대단한 안목일세. 아직까지 향기만을 맡고 이 차가 양선인지를 알아낸 사람은 없었는데......] 화일로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양선은 나개(羅介)라고도 하는데 장흥에서 나는 것이 제일 좋지요.형계(荊溪)에서도 생산되지만 질은 좀 떨어집니다. 값은 천지(天池)보다배나 비싸고 질은 용정(龍井)에 버금가지요.] 하조천과 단홍은 화일로의 박학다식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설마 이 풍파가 가실 날이 없다는 명문세가의 망나니 가주에게이와같은 해박한 지식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단홍이 감탄성을 연발하며 화일로를 잔뜩 추켜세웠다. [정말 화가주님의 학식은 천하제일이로군요. 게다가 인물이 준수하시고 무공 또한 고강하시니 가히 강호제일의 기남아(奇男兒)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무림인들이 쓸데없는 소문에 현혹되어 가주님의 진면목을 모르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화일로는 남이야 칭찬을 하던 말던 멀거니 찻잔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몇 모금을 입속에 흘려 넣었다. 그것을 보자 하조천과 단홍의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번뜩였다. 허나 화일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차맛을 음미하고 있다가 크게 고개를끄덕였다. [맛이 그야말로 일미(一味)이군요. 더욱이 갈증을 느낀 때라서인지 마치 꿀맛 같습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허기진 사람처럼 차를 마시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조천과 단홍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화일로는 고개를 들어 하조천을 바라보았다. [실레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 하소저(何少姐)의 옥안(玉顔)을 볼 수 있을까요?] 하조천은 조금 뜻밖인 듯 몸을 움찔했다. [지금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 혼인을 할 사이이니 밤이 좀 깊었기로서니 흉이 되지는 않겠지요.] 하조천의 입가에 문득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누가 자네와 혼인을 한다고?] 화일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하소저 말입니다. 보주님의 따님이신......] 하조천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씩 차갑게 굳어졌다. [누가 자네같은 망나니에게 딸을 준다고 했나?] [네?] 화일로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팠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조천은 음산하게 웃으며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못 알아들은 모양인데 다시 한번 말해주지. 너같은 놈에게는 내 딸을줄 수가 없다!] 화일로는 안색이 변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일순, 안색이 확 변한 화일로는 눈을 부릅뜨고짤막하게 고함을 쳤다. [하조천, 네가......!] 그는 말을 다 하지도 못한채 스르르 눈을 감더니 곧 잠들어 버렸다. 그러자 하조천은 득의만면한 웃음을 띄우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네놈이 비록 꾀가 많고 약삭빠르다고 해도 어찌 노부에비길 수 있겠느냐?] 더구나 감히 노부의 딸을 넘보다니...... 노부가 정말 사람이 없어서 너같은 놈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한줄 알았느냐?] 단홍이 아부의 웃음을 가득 흘리며 말했다. [헤헤...... 보주! 축하드립니다. 일단 첫번째 계획을 보기좋게 성공했으니 나머지 일도 순조롭게 풀릴 것입니다.] 하조천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단노이가 묘책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자네일세. 훗날 이번 일이 완벽하게 성공하여 교주(敎主)께서 큰 상을 내리신다면 자네에게도 당연히 한 몫이 있을 것이네.] [보주님의 깊은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이 놈은 비록 여색(女色) 때문에 쉽사리 걸려 들었지만 이 놈의 사부는 절대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닙니다.] 하조천의 표정도 조금 심각해졌다. [노부도 새장자(賽莊子) 남궁봉(南宮蜂)이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그놈이 가장 아끼는 제자가 우리 손에 들어온이상 그 놈을 처치하는게 반드시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고 보네.] [남궁봉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제일의 괴인(怪人)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공과 지략이 뛰어나고 속임수가 많은 늙은이인지라 모두들 새장자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를 싸매고 도망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걸신(乞神)악구천(岳九天)과 남궁붕을 무림의 이괴(二怪)라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악구천보다는 남궁봉이 훨씬 더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하조천은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자네는 너무 비관적인 말만 하는군. 하지만 우리에게도 이로운 점이 있네. 첫째는 그 늙은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본교(本敎)에서도 그 늙은이에 버금가는 무공과 지략이 뛰어난 고수들이 많다는 것일세. 그리고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조천은 말을 잠깐 멈추고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화일로를 내려다보았다. [흐흐...... 그 놈이 자신의 분신(分身)처럼 아끼는 화일로란 놈이 우리의 수중에 있다는 것일세.] 단홍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다만 제 말은 남궁봉을 상대하려면 좀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뜻일 뿐입니다.] [하하...... 것정하지 말게. 이 놈을 지하감옥에 가두면 머지않아 남궁봉이 이 놈을 찾으러 본 보에 들릴 걸세. 그때 우리가 계획한 대로 그늙은이를 유인하여 손을 쓴다면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을 걸세. 흐흐......] 하조천은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나는지 연신 괴소를 흘렸다. 단홍이 잽싸제 그 뒤를 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보주께서 건곤교(乾坤敎)의 팔대영주(八大令主) 중 수좌(首座)가 된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아울러 이곳 하남성과 하북성(河北省)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되실게고요.] 하조천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비무초친으로 화일로를 유인하자는 자네의 계략은 정말 훌륭했네. 노부가 하남, 하북성의 책임자가 된다면 자네에게 본 보를 맡기겠네.] 단홍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가...... 감사합니다. 보주님!] 하조천은 한바탕 앙천대소를 한 후 손을 저었다. [어서 이 망나니녀석을 지하에 있는 감옥으로 감금시키고 삼공주(三公主)께 사람을 보내 알리도록 하게.] [예.] 단홍은 대답하고 두 명의 회의인을 불러 화일로를 들고 가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그도 몸을 돌려 걸어가려고 했다. 이때 하조천이 그를 불러 세웠다. [단노이, 그런데 누구를 보내려나?] 단홍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오살(五殺)이 어떻겠습니까?] 하조천은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라면 안심할 수 있지. 그들에게 삼공주님께 경과를 보고드리고남궁봉을 유인 할 때 합공할 고수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단홍은 고개를 조아린 후 방을 나섰다. 하조천은 한동안 허공을 응시한 채 무언가 생각에 잠기다가 자신도 방을 빠져 나갔다. X X X 초경 무렵, 캄캄한 밤이었다. 하늘에는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두꺼운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가슴속까지 스며드는 으스스한 바람이 쌩쌩 몰아치며 나뭇잎을 흔들었다. 가끔 어디서인지 여우의 구슬프기까지한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우...... 우...... 어미를 잃은 새끼의 울음소리인지 아니면 암놈을 그리워하는 숫놈의 울부짖음인지...... 휘잉! 바람이 불때마다 소름이 오싹 끼치게 들려오는 여우의 울음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고 들려오다가 끊어지곤 했다. 오늘밤 대지는 음산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때였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스스스......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어둠속을 비호처럼 치달리는 그림자는 모두 다섯개였다. 그들은 풍운보주인 하조천의 밀명(密命)을 받고 특파된 오살(五殺)이었다. 그들은 섬전과 같은 신법으로 막 하나의 수림을 통과했다. 이때 맨 앞에서 달려가던 대살(大殺) 송무광(宋無光)이 갑자기 손짓을 하여 뒤따라오는 네 사람에게 멈추라고 했다. 이살(二殺) 전립생(錢笠生)이 쉰 목소리로 소리쳐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송무광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대고 귀를 기울이더니 돌연버럭 소리를 질렀다. [웬 놈이냐?] 다른 사살은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숲속에서 하나의 괴영이 솟구쳐 올라 수림밖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송무광은 괴영을 보자 안광을 무섭게 번뜩였다. [첩자다! 놓치면 안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신형은 비조(飛鳥)처럼 허공을 날아 괴영의 뒤를 쫓아갔다. 다른 사살들도 일제히 몸을 솟구쳐 그 뒤를 따랐다. 괴영은 오살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음을 알았는지더욱 빨리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오살들은 어욱 의구심이 솟구쳐 신법을 배가해 괴영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괴영은 이리저리 수풀사이로 몸을 날리다가 멀지않은 곳에 한 채의 다허물어져가는 절간을 발견하자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인영이 절간 속으로 사라진 직후 오살은 절간앞에 도착했다. 이어 그들중 몇명이 절간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잠깐!] 그들중 가장 생각이 깊고 행동이 신중한 삼살(三殺) 오등(吳騰)이 그들을 제지했다. [이렇게 무작정 쫓아들어가다가 그 자가 반대쪽으로 도망치거나 어두운 곳에서 숨어 암습을 한다면 낭패가 아니겠소?] 막 절간으로 몸을 날리려던 사살(四殺) 조충(趙忠)이 그 말을 듣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멈추었다. [그럼 세째 생각은?] 오등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무작정 따라 들어갈 것이 아니라 네 사람은 주위를 감시하고 있고 한사람만 안으로 들어가서 그 놈을 해치우자는 거요.] 이살 전립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만약 그 놈에게 당하기라도한다면......?] 오살(五殺) 방극(方極)이 피식 웃었다. [별 걱정도 다 하시오. 우리 오살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들이란 말이오? 장담이 아니라 제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도 내 섬전삼도(閃電三刀)를 막을 수는 없을 거요.] 삼살 오등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의 신법으로 보아 결코 우리 형제보다 무공이 뛰어난 놈은 아닌 것 같소. 그보다 그 놈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우리를 보자 그토록 죽어라고 도망을 쳤는지 모르겠구료.] 그때 대살 송무광이 입을 열었다. [그런건 잠시 후면 알게 될걸세.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그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기 전에 어서 해치우세. 누가 들어갈텐가?]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오등이 앞으로 나섰다. [이번 일은 내가 계획한 것이니 내가 가겠소. 다른 분들은 사방으로 포위해서 그 놈이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게만 막고 있으시오.] 송무광은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세째는 시원시원해서 좋군. 자, 내친 김에 빨리빨리 해치우고 약속장소로 가세.] 오등은 중인들에게 고개를 까닥거린 후 몸을 날려 절간의 담장을 넘어갔다. 송무광, 전립생, 조충, 방극 등은 각자병기와 암기를 꺼내 들고 은밀한 곳에 숨어 오등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각이 지나도 그에게선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전립생이 지루함을 느꼈는지 투덜거렸다. [제길...... 왜 이렇게 오래 지체하지?] 송무광이 말을 받았다. [세째는 모든 일을 하는데 있어 침착하게 행동하네. 우리들은 도저히 그의 침착성을 따를 수 없지. 이 일은 그리 급한 것도 아니니 좀더 기다려 보도록 하세.] 이렇게 해서 또 한식졍이 지나갔다. 하지만 소슬바람만이 불어와 그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오등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방극이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섰다. [아니 오등은 왜 이렇게 늦지? 도대체 애가 타서 견딜 수 있어야지. 에이구...... 쯔쯧! 세째도 이젠 늙었나 보군.] 이번에 송무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살 중의 첫째인 그도 점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지금 방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방극은 수중의 철련자(鐵蓮子)를 가죽주머니에 넣은 후 절간의 담장으로 뛰어 올라갔다. 휘익! 그의 몸이 한번 번뜩이더니 이내 절간의 짙은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일은 더욱 이상하게 변해갔다. 방극도 가더니 마치 바닷물속에 빠진 조약돌처럼 영 돌아올 줄을 몰랐다. 일이 이쯤되자 이번에는 전립생이 성질을 참지 못하고 눈섭을 치켜 올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욕을 퍼부었다. [다섯째도 역시 입만 놀릴 줄 알았지 실상 아무 쓸모도 없구나! 풍운오살 중에 이런 쓸대빠진 놈들이 있으니...... 제기랄, 이거 사람 미치겠구나.] 이때 송무광이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둘째,왜 이렇게 성급히 굴고 야단이냐? 좀 더 기다려 보자.] 그러자 전립생은 눈을 사납게 부릅떴다. [뭘 더 기다리란 말이오? 언제까지 이곳에 죽치고 앉아 있으란 말이오? 이제 반시진 후면 삼공주께서 약속장소로 오실텐데 그때까지 그곳에도착하지 못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이오?] 송무광은 손을 저으며 나직하게 타일렀다. [둘째, 우선 네째를 다시 한번 보내보도록 하세. 세째와 다섯째의 무공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그들이 호락호락 남에게 당할 인물들인가?] 이어 그는 조충을 쳐다보며계속 말했다. [네쩨, 약속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해도 큰 문책은 없을 것이다. 그건 내가 책임을 지지. 그러니 이번에는 자네가 한번 가보도록 하게.] 조충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이 심상치 않을수록 소홀히 생각해선 안됩니다. 제가 지금 가서 그쪽의 상황을 알아본 뒤에 상의하겠습니다.] 송무광과 전립생은 그를 빤히 주시했다. 조충은 그들의 의중을 짐작했는지 그들을 주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쪽 상황이 어떻든간에 나는 꼭 돌아오겠습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절대로 세째나 다섯째처럼 흐리멍텅하게 일을 처리하진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 후 그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고 수중에 들고 있던 금극(金戟)을 빙글빙글 돌리며 절간의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오살 중의 네째인 조충은 오등과 방극보다 훨씬 세심했다. 그는 절간으로 들어서자 마자 재빨리 가까운 담벽밑에 몸을 숨겼다. 그는 머리를 빠끔이 내밀어서 주위를 한차례 훑어본 후 몸을 날렸다. 동시에 양팔을 벌려서 삼장 밖으로 날아가 대웅전의 처마끝을 잡았다. 이어 다리를 올리며 한바퀴 빙글 돌았다. 대웅전 위에 올라간 그는 눈에서 신광을 쏟아내며 사방을 살려보았다. 절간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대웅전을 비롯해 세 채의 건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인적이 끊긴지가 오래인지 건물은 거의 허물어져 가고 있었고,마당에는 잡초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다시 몸을 나리며 두 팔을 허공에다 휘둘러댔다. 그러자 그의 몸은 유령처럼 허공을 날아 반대편 지붕위로 올라서게 되었다. 발이 기왓장에 닿기 무섭게 조충은 넙죽 엎드렸다. 그렇게 얼마동안 엎드린 채 그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엉금엉금 기어서 지붕 꼭대기까지 올라가 고개를 들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고요한 적막속에 바람소리만 일뿐 주위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거, 정말 이상한데...... 세째와 다섯째는 어디로 갔지?] 바로 이때, 건너편 건물의 담벽에 사람의 그림자가 번뜩였다. 조충이 자세히 보니 틀림없이 방극 같았다. 방극을 발견하자 조충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암중의 인물에 발각될까염려되어 소리를 내어 부르지 못하고 몸을 뒤집어 물구나무를 서서 살짝 마당에 내려섰다. 이어 다시 맞은편의 담으로 번개같이 뛰어올라 두 팔을 휘저으며 건너갔다. 그는 담벽에 몸을 붙이고나서 조금전에 번뜩였던 그림자를 자세히 살펴본 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래쪽 지붕 꼭대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이 나란히 엎드려 었는데 바로 실종되지 않았나 하고 의심했던 오등과 방극이었다. 헌데 지금 두 사람은 그곳에 엎드려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두 사람 옆에 기왓장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지붕에다 구멍을 뚫고 아래의 동정을 살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괴영은 방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충이 온 것을 눈치챘는지 방극의 팔이 약간 치켜 올려졌다. 마치 소리내지 말라고 신호하는 것 같았다. 이 광경을 보자 조충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픽하고 실소를 했다. 두 사람의 맞은 편에 엎드린 후 천천히 지붕위에 뚫린 구멍으로 얼굴을 돌렸다. 순간 조충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방안에는 칠흑같은 어둠만이 깔려 있을 뿐 불빛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지금 그들 두 사람은 빈 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조충은 은근히 울화통이 치밀었다. (이 놈들이 누굴 놀리나?) 그는 두 사람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려고 가까이 있는 방극의 몸을 살짝 떠밀었다. 순간, 탕! 한 차례 맑은 음향이 일며 철련자 한개가 방극의 손에서 떨어졌다. 지붕위에 떨어진 철련자는 기와지붕의 골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시 탁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철련자는 마당으로 떨어졌다. 조충은 깜짝 놀랐다. 그는 조심성있기로 짝이 없던 다섯째가 오늘 이토록 조심하지 않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다행히 바람소리만 들릴뿐 기척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그는 방극과 오등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으헉!) 그 순간 그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다. 도대체 조충은 무엇을 목격했기에 이렇듯 놀라는 것일까? 第 8 章 內幕 探査 방극의 한쪽 팔은 여전히 허공에 들려져 있었다. 오등은 고개를 반쯤 돌린 채 팔베개를 하고 있어 얼핏 보기에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새빨간 피가 입가를 타고 흘러 그의 손등에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옆으로 번지며 꽃무늬를 이루었다. 손등에 떨어진 시뻘건 피는 한 군데에 몰려 있다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마치 굵고 검붉은 밧줄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조충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이때 돌연 그의 등뒤에서 누군가 차갑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흐흐...... 염라대왕께선 사정이 있어 오시지 않고 본인이 직접 오셨다. 좀 안됐구먼......] 이때 조충은 오랜 강호의 경험으로지금 뒤에서 말한 사람이 누군가 돌아볼 시간으로 도망가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는 조금전 방극의 손에서 떨어진 철련자처럼 재빨리 몸을 굴려 마당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는 이 방법이 바로 위험속에서 모험을 하고 죽음속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절호의 동작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상대방은 이미 그의 거동을 눈치채고 있었다. 조충이 마당으로 뛰어내려 몸을 일으켰을 때 그의 앞에는 이미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본인은 오늘밤 너희들 오살 중 한 놈은 살려주려고 한다.그런데 너는 운수가 썩 좋지 않았구나. 한발짝만 늦었어도 괜찮았을 걸, 정말 안됐구나.] 괴인의 말을 듣고 조충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말을 더듬었다. [다...... 당신은 누구......] 괴인은 음산하게 한바탕 웃어젖혔다. [으흐흐흐...... 내가 누구냐고? 궁금하냐? 말해주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염라대왕의 대리자, 살성(殺星)의 총관이고 아울러 너희들의 목숨을 앗으러 온 저승사자이시다!] 그는 태연히 앞으로 걸어나오며 일장을 밀어냈다. 조충은 비록 겁을 집어먹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려 상대방의 매서운 일장을 피했다. 뒤이어 상대방이 초식을 바꾸기도 전에 먼저 속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파파팍! 금광(金光)을 번쩍이며 마치 번개처럼 비스듬히 상대방의 면상을 향해부딪쳐갔다. 이 일초는 빠르기가 번개 같았고, 강맹하기가 그지없어 오살의 명성이소문대로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알려진대로 극(戟)은 여덟가지 외문병기(外門兵器) 중에서 사용하기가제일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터득만 하면 제일 다루기 쉬운 것이기도 했다. 또한 그 기세가 너무나 강맹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매우 막기가 어려웠다. 이것은 다른 병기보다 특이하여 창(槍), 도(刀), 곤(棍), 탈(奪) 등을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때문에 상대방이 그것을 막는데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날에는 여지없이봉변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때 조충은 뻗어낸 일극(一戟)에 십성의 공력을 주입시켜 휘둘러댔지만 일극에 적을 해칠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앞을 가로막고 있는 괴인을 뒤로 후퇴시킨 다음 그 사이에 도망치려고 했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절 바깥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검과 칼을 사용하는 첫째, 둘째가 합치기만 하면 괴인쯤은 염려할 것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일 뿐 사실 일은 그의 뜻대로 되어주지를 않았다. 그가 일극을 후려친 뒤 막 몸을 솟구치려고 했을 때였다. [하하하......!]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번뜩이는 사이 괴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조충의 등뒤에서 괴인의 차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보아하니 친구는 금극에 많은 심혈(心血)을 기울인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나는 더 이상 견식을 넓힐 시간이 없구나. 오늘 친구는 아무리 바둥거려도 재수가 없는 건 마찬가지야. 정말 안됐네. 안됐어!] 말을 하면서 괴인은 조충을 향해 느닷없이 일장을 내밀었다. 고오오오...... 그러자 괴이한 기운이 소리없이, 또한 형체도 없이 유유히, 그러면서도 힘차게 공기를 헤치며 조충에게 덮쳐갔다. 이때 조충은 상대방의 손을 내밀었는데도 아무런 이상이 없자 멍하니괴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조충은 괴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이......이제보니 당신은 화......!]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오려는 순간, 콰콰콰콰......! 부드러웠던 무형의 기운은 갑자기 가공할 위력을 지닌 강기로 변해 조충의 몸을 휩쓸어 버렸다. 그와 함께 조충은 목구멍이 칼칼해짐을 느꼈다. [으웩!] 그는 입으로 선혈을 토해내며 땅에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조충은 손에 들고 있던 금극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하직하게 된 것이다. 허나 자신을 죽인 수법이 백년동안 절전(絶傳)되었던 무영쇄심장(無影碎心掌)임을 안다면 지하에서나마 그는 조금도 억울해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절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송무광과 전립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조함을 느꼈다. 이때 송무광은 머리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있는 전립생을 불렀다. [둘째!] 전립생이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냉소를 던졌다. [흥! 이젠 나더러 가보란 말이오?] 송무광은 한숨만 쉬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립생은 불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오살이 오늘과 같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무슨 일이든지 일제히행했기 때문이오. 그런데 오늘 당신이 무슨 꿍꿍이 속으로 애들을 하나 하나 보냈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건 모두가 당신 책임이오!] 송무광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둘째, 자네의 불같은 성격은 언제끔 고쳐지겠나? 어찌 그토록 함부로얘기할 수 있나?] 전립생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 내 성격이 어때서 그러시오? 괜히 그런 걸로 얼버무리지 마시오!] 송무광은 혀를 차며 손을 저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이번 일을 계획한 것은 세째일세. 그러니......] [흥, 다섯명중에 세명밖에 가지 않았으니 한명쯤 더 가도 괜찮다 그 말이오?] 그들이 한창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들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지. 나머지 두 놈 중에서 한 놈은 죽어야 된다. 최후에 남는 사람만이 살 수 있다. 본 가주는 최후의 일인(一人)은 살려줄 것을 약속한다.] 송무광과 전립생은 일순 움찔 놀랐다. 전립생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저 놈을 죽입시다!] 담벽위에서 다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덤비는 자는 일찍 죽는다. 알아서 해라!] 과연 이 한마디의 고함소리는 무한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이미 담벽까지 덮쳐갔던 전립생은 중도에서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돌아서고 말았다. 그때 송무광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색이 대변했다. [가주라고......? 귀...... 귀하는 혹시 풍파무쌍 화일로가 아니오?] 그러자 다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본 가주가 누구인지 알아차렸군. 본 가주의 실력은 너희들도 비무대에서 봐서 알겠지? 너희들 중에서 살기가 귀찮아진 사람, 또는 하루라도 일찍 죽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언제라도 좋으니까 나와서 내 솜씨를 구경해도 좋다.] 송무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릎떴다. [다...... 당신은 독에 중독되어 지하감옥에 갇혀 있을텐데......] [하하...... 그깟 미혼약(迷魂藥)으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으냐? 한 가지만 말해주지. 본 가주는 이미 다섯살 때부터 천하의 온갖 독약(毒藥)들을 가지고 논 사람이다. 미혼약이 아니라 미혼약 할아버지라도 내 머리털 하나 쓰러뜨릴 수 없다.] 송무광은 전립생에게 기회를 봐서 뚫고 나가자고 손짓을 하고는 말을 받았다. [가주께서는 우리 두 형제 중에서 또 한명을 제거해야 한다면서 왜 우리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거요?] 화일로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두 명중에 한 놈을 제거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신성한 절간에서 더 이상 피를 보기 싫기 때문이기도 하지.] 송무광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다시 화일로에게 물었다. [무슨 방법을 사용할 작정인지 우리 형제들에게 알려줄 수 없소?] [흐흐...... 너희들 중에 누가 죽고 사는지는 너희 자신들 손에 달렸다. 그러니 신중히 생각해 본 후에 행동을 하도록 해라.] 전립생이 크게 노하여 고함을 질렀다. [에이 망할 놈의 자식, 죽여 버려야겠다!] 송무광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조용히 하라고 눈짓을 했다. 이어 담벽위를 향해 다시 물었다. [가주께선 우리 형제끼리 먼저 골육상잔을 벌이란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지만 어딘지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화일로는 차갑게 웃었다. [너희들은 결의형제니까 물론 우정이 두터울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일은 할 수 없겠지. 본 가주의 뜻은 너희들이 그 방법을 생각하라 그 말이다. 너희들이 어떻게 해결하든지 간에 본 가주는 관계치 않겠다.] 그의 말에 송무광은 완강하게 대항했다. [우리 두 형제가 힘을 합하면 비록 적수는 못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버틸 수 있소. 그러나 만일 한명이 없어진다 해도 가주께서 한명을 놓아준다고 누가 보장하겠소?] 전립생이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첫째, 당신은 어찌......] 송무광은 전음술로 전립생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빠져 나갈 궁리를 하고 있네. 시기가 임박하기 전에 우선 이놈을 얌전히 있게 해야 되네. 그래서 나는 그와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있을 뿐이네.] 이때 담벽 위에서 가벼운 기침소리가 들렸다. [너는 조만간 죽음을 면치 못할 몸이니 아예 지금 이리로 달려와서 다른 한 사람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함이 어떠냐? 이럴 땐 형된 도리를 해야지.] 송무광은 일단 시인을 했다. [좋소. 그건 그렇다치고 가주께서 우리 오형제중에서 단 한사람만 살려두려는 이유는 뭐요? 죽더라도 그 이유나 알고죽읍시다.] [뭐, 이유랄 것도 없지만 있다면 아주 간단하다. 본 가주는 살아남은 사람에게 몇마디 물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한 사람만 남으면 비밀을 지키기도 하지.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하자 그 말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송무광은 다그치듯 물었다. [다 묻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하겠소?] [석방한다.] [입을 봉쇄하기 위해 남은자 마저 죽여버리는 것은 아니오?] 돌연 담벽 위의 화일로는 냉랭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흥! 내가 너희들 같은 줄 아느냐? 그런 치사한 수법은 너희 같은 피라미들이나 쓰는 전문수법이다. 본 가주가 한 말에 신용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너희들이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니 알아서 아서 결정해라.] 송무광은 화일로의 말만 듣고 있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밤의 이 난관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를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고개를 떨군채 송무광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담벽 위의 화일로도 잠자코 기다릴 뿐 재촉하지않았다. 어느덧 약 한식경이 지났다. 이때 송무광은갑자기 얼굴에 회색을 띄우더니 전립생에게 전음술로 전했다. [둘째, 나에게 좋은 방법이 떠올랐으니 이리 가까이 오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으니 어서......] 전립생은 이 말을 듣고 얼른 송무광에게 다가갔다. [무슨 기발한 방법이라도 생각났소?] 송무광은 손으로 그의 귀를 끌어당겨 입 가까이에 갖다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바로 이 방법이다!] 동시에 오른손에 쥐고 있던 장검으로 전립생의 옆구리를 푹 쑤시며 손목을 한 바퀴 비틀었다. [크윽!] 전립생은 그의 갑작스런 암습에 미처 대비하지 못해 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송무광에게 찔림과 동시에 마치 물에서 뭍으로 나온 새우처럼 공중으로 높이 뛰어오르더니 퍽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때 그의 옆구리는 송무광의 장검에 의해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동그랗게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뱃속에서 삐져나온 내장은 땅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담벽 위에서 화일로가 축하하는 뜻인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친구, 성공했는가?] 송무광은 전립생의 몸에서 장검을 뽑다말고 이 말을 듣고 약간 어리둥절해 버렸다. 그는 초점 잃은 시선으로 선혈이 묻어 있는 검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그는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나 송무광이 전율을 느낀 것은 전립생의 선혈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송무광이 몸서리치도록 공포를 느낀 것은 다름아닌 화일로의 그 말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명을 제거하면 다른 한명은 정말 살아날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으로 그것을 보장할까? 생각해 보니 화일로의 마지막 답변은 이런 것 같았다. [본 가주가 한 말에 신용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너희들이 본 가주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을 일종의 보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 송무광은 도대체 이 풍파무쌍 화일로를 어느 정도나 알고 있을까? 지금까지 그가 화일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겨우 두가지 뿐이었는데그중 하나는 무공이 매우 고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같이 여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때 담벽 위에서 화일로가 의아한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친구, 너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그의 물음에 송무광은 깜짝 놀랐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더듬거렸다. [네. 소...... 소인은 이미 가주님의 분부대로 이행했습니다......!] 화일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분부대로 했다고? 본 가주가 너더러 그렇게 하라고 언제 말했느냐?]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송무광은 다시 더듬더듬 말했다. [아...... 아닙니다. 소인의 혀가 비뚤어져 말을 잘못했으니 가주께선용서하십시오. 소인은 이미 성공했습니다. 가주께서 묻고 싶은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소인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곧이어 화일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건 급하지 않다. 넌 우선 둘째의 시체를 이쪽으로 던져라!] 송무광은 나직히 대답을 한 뒤 전립생을 담 저쪽으로 던퉢다. [가주께선 다른 분부는 없으십니까?] 거의 동시에 화일로가 말했다. [혹시 네 손에 피가 묻지 않았으냐?] 그쪽에서 보이지도 않을텐데 송무광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왼손에 조금 묻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일로가 물었다. [손가락에 묻었느냐?] [네.] [어느 손가락에 묻었느냐?] 송무광은 공손히 대답했다. [왼손의 엄지와 무명지입니다. 그런데 왜......] 말끝을 맺기도 전에 화일로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 두개밖에 묻지 않았느냐?] [네. 그것밖에 묻지 않았습니다.] 돌연 화일로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그거 잘됐구나. 그럼 그 두 손가락도 잘라서 이쪽으로 던져라.] 송무광은 놀라 펄쩍 뛰었다. [가...... 가주......!] 화일로는 묵직한 음성으로 기침을 두어번 했다. [일러 두지만 그 피가 다른 손가락에 묻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렇지 않으면 또 잘라야 될 것이다.] 울상이 된 얼굴로 송무광은 애원하듯 말했다. [가주께서 말씀하시길......] 화일로는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 나는 오늘밤 너희들 오살 중에 한명을 꼭 살려주겠다고 말했다. 본 가주가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때가 되면 단 한사람만 갈 수 있다. 그 외엔 어느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물론 선혈로 포함해서 말이다. 알아들었느냐?] 송무광은 어금니를 악물고 검을 휘둘러 자신의 손가락 두개를 잘라버렸다. 第 8 章 內幕 探査 화일로는 송무광이 두개의 손가락을 던졌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좋다. 이제부터 질문을 시작하겠다. 오늘밤 너희들이 풍운보를 떠난 것은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냐?] 송무광은 조금 머뭇거렸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공주님입니다.] 이미 화일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송무광이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았던 것이다.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갔다. [좋다. 너희들이 속한 집단은 무어라고 부르느냐?] [건곤교(乾坤敎)입니다.] [풍운보주인 하조천도 건곤교의 인물이냐?] [그렇습니다.] 화일로는 이미 질문할 것을 생각해 놓았던 듯 쉬지않고 물었다. [하조천의 지위는 건곤교에서 어느 정도이냐?] 송무광은 머리를 조아렸다. [하보주께선 본교의 팔대영주(八大令主)중 한분이십니다.] 화일로는 조금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그건 본 가주도 알고 있다. 내가 물어보는 건 팔대영주가 건곤교에서어느 정도 위치에 있느냐는 것이다.] 송무광은 움찔하여 급히 입을 열었다. [팔대영주는 본교에서 그리 높은 지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본교의 서열은 교주님 밑으로 좌우쌍위(左右雙衛)와 삼대공봉(三大共奉), 사방천왕(四方天王)이 있고 그 아래로 팔대호법(八大護法)이 있으며 팔대영주는 그 다음입니다.] 화일로는 무림의 삼대보중 하나인 풍운보를 이끌고 있는 하조천이 건곤교에서 이류급 인물이라는 말을 듣자 내심 건곤교의 방대함에 경악을금치 못했다. 그는 잠시 침음하다가 물었다. [건곤교주는 누구냐?] 송무광은 울상을 했다. [말해도 아마 가주께선 믿지 않으실 겁니다.] 화일로는 호쾌하게 말했다. [너는 거기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만일 믿어지지 않으면 본 가주는 참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 물을 것이다.] 송무광은 거의 죽어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인이 무슨 배짱으로 가주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럼 염려하지 말고 말이나 해라. 누구냐?] [사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본교에서도 교주님의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사방천왕 이상의 신분을 가진 어른들 뿐입니다.] 화일로는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쌀이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하조천도 교주가 누구인지 모른단 말이냐?] [물론입니다. 솔직히 그 분 정도의 지위로는 본교의 자세한 내막을 알수 없습니다.] [흠. 악인(惡人)들일수록 자신의 정체를 신비스럽게 하려고 애를 쓰지.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총타는 어디에 설치되어 있느냐?] 송무광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안휘성 황산(黃山) 부근에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직 총타도 한번 가보지 못했느냐?] 송무광은 어깨를 움찔했다. [소인같은 신분으로 어찌 총타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얼핏 듣기로는 하보주께서도 딱 한번 가보셨는데 눈과 귀를 가리고 마차를 타고 가는 바람에 총타가 어느곳에 있는지를 모르신다고 합니다.] 화일로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를 잘못 살려준 모양이구나. 이제보니 네 놈은 내가알고 싶어하는 것은 단 한가지도 알고 있지 못하니 살려줘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송무광은 사색이 되어 급히 부르짖었다. [아...... 아닙니다. 소인은 가주께서 흥미를 느끼실 일을 한가지 알고 있습니다.] 화일로는 별 관심없다는 투로 말했다. [너같이 변변치 못한 신분으로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보나마나 또 쓸데없는 말이나 지껄이겠지.] 송무광은 고개를 내저으며 열심히 변명을 했다. [아닙니다. 이건 진짜로 중요한 기밀입니다. 소인도 이번에 하보주님의 밀명을 삼공주님께 전하는 일을 맡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겁니다. 더구나 이건 가주님의 사부에 관한 것이니 가주님과도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그제서야 화일로는 조금 구미가 당기는척 물었다. [흠, 그래? 네가 본 가주의 사부님이 어느 분이신지 알고 있단 말이냐?] 송무광은 아첨어린 웃음을 띄며 머리를 조아렸다. [헤헤...... 바로 무림제일의 귀인이신 새장자 남궁봉, 남궁대협이 아니십니까?] [흠...... 제법이구나. 본 가주의 사부가 그 분이시라는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헤헤...... 과장이 아니라 본 교의 이목(耳目)은 가히 무림제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방(빌어먹는 幇)의 소식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본 교보다는 못할 겁니다.] [그래? 건곤교의 충신 하나가 나타났군. 네가 말해주려는게 바로 그거냐?] [아...... 아닙니다. 사실은 본교에서는 교주님의 특명으로 남궁대협을 제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화일로의 표정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그거야 본 가주도 짐작한 일이다. 하조천이 비무대회를 핑계로 나를 유인했던 것도 바로 내 사부님을 끌어들여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냐?] [헤헤...... 알고 계셨군요. 하지만 본교에서 남궁대협 외에 다른 두사람에게도 살인첩(殺人牒)을 발송한 것은 모르시겠죠?] 그제서야 화일로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살인첩? 그건 또 무엇이냐?] [살인첩이란 본교의 교주님이 발송하시는 것으로 그 첩에 적힌 인물은본교의 필생대적(必生大敵)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흠, 그 살인첩에 사부님 말고 다른 두 사람의 이름도 함께 적혀있단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송무광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로 옥면청삼 절정신검과 걸신 악구천입니다.] 화일로의 얼굴에 흠칫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강호의 십대고수(十大高手)중에서 일검과 이괴가 모두 살인첩에 올라 있군.] 화일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삼사와 사절은 왜 살인첩에 오르지 않은 것이냐? 설마 건곤교에서는 이미 그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 그들 정도로는 본교에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일검과 이괴만 사라지면 천하에서 본교를 막을수 있는 인물은 없다는 것이지요.] 화일로는 눈쌀을 살짝 찌푸린 채 침음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무광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소인이 우연히 듣기로는 삼사와 사절중 몇몇은 이미 본교에 포섭되었다고......] 화일로는 급히 물었다. [그들이 누구냐?]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화일로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꼭 결정적인 것은 모르는군.] 송무광은 오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화일로는 그의 신분으로는 이정도만 알고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너는 삼공주를 어디서 만나기로 했느냐?] 송무광은 마지막 물음이란 말에 크게 기뻐하며 급히 말했다. [만나기로 한게 아니라 이곳에서 동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사당에서 오늘밤 삼경에 본교의 비밀회합이 있습니다. 그곳에 삼공주님이 오시기로 했기 때문에 하보주께서 저희들을 보내 그분께 일의 진척상황을 보고드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묻지 않는 말까지 순순히 말해주었다. [저희들이 가지 않아도 삼공주님께서는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흐흐...... 과연 자네는 운이 좋은 친구로구먼. 아참! 삼공주는 건곤교주의 딸인가?] [그렇습니다. 그분께는 모두 세명의 공주님이 계신데 대공주(大公主),이공주(二公主),삼공주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이번에 남궁대협을 제거하는 일의 책임자는 바로 삼공주님이십니다.] 화일로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수소했다. 이젠 가도 좋으니 가보도록 해라.] 그러나 송무광은 넙죽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두 팔을 맹렬하게 휘두르며 나는 듯이 달아나 버렸다. 화일로는 잠시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곰곰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송무광이 알려준 장소로 몸을 날렸다.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십여리를 달리자 과연 멀리서 어둠에 잠신 사당이 은은히 모습을 드러냈다. 화일로는 야조(夜鳥)처럼 허공을 날아 사당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당은 황폐되어 있어 담 여기저기가 허물어진 곳에 낙엽만 뒹굴었다. 달도 떠 있지 않은 어두운 밤이라 사당은 더욱 쓸쓸해 보여 이런 곳에인적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송무광의 말대로라면 이곳에 건곤교의 비밀회합이 있어야 한다. 화일로는 한쪽 담에 몸을 찰싹 붙이고 먼저 주위의 동정과 안의 인기척을 살폈다. 사당은 대전(大殿)외에 상방(湘房)과 선당(禪堂)이 하나씩 있을 뿐 다른 것은 담벼락 뿐이었다. 화일로는 주위 나무들을 한번 더 살펴본 다음 허물어진 담으로 해서 왼쪽의 선당으로 숨어들어갔다. 아직 삼경이 되지 않아서 인지 사당안에는 사람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화일로는 몸을 숨길만한 곳이 있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곳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시 밖으로 나와 대전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과연 대전의 지붕에는 큰 절에 의례 있기 마련인 종루(鍾樓)가 우뚝 솟아 있었다. 화일로는 서슴없이 종루로 몸을 날렸다. 종루에는 벌서 누가 종은 떼어갔는지 텅 비어 있었으나 한 사람이 몸을 숨길만한 공간이 있었다. 화일로는 종루속으로 들어가 쭈그리고 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숨어 있어도 인기척은 고사하고 쥐새끼 한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 놈이 나를 속일테는 없을텐데......) 화일로는 눈쌀을 잔뜩 찌푸리고 다시 얼마동안을 더 기다렸다. 그래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제기랄! 그놈에게 감쪽같이 속았구나.) 속으로 투덜거리며 막 종루에서 나오려는데 갑자기 옷자락이 날리는 소리가 멀지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왔구나!) 화일로는 얼른 종루속으로 몸을 숨기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사당에서 북쪽으로 삼십여장 떨어진 논둑길로 십여개의 인영이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어둠속의 인영들은 눈깜작할 사이에 사당 앞 넓은 공지에 다다랐다. 가까이 다가온 그들은 모두 열여덟명인데 똑같이 황의장삼을 입은 중년인들이었다. 수중에 병기가 들려 있지 않았으나 양쪽 발목에 비수 두 자루씩을 꽂은 모습이었다. 열여덟명의 황의인들은 즉시 사방으로 흩어져서 사당 주위를 철저하게수색하기 시작했다. 약 일각의 시간이 지난 후, 스스슥! 이번에는 남쪽에서 또 열여덟명의 황의인들이 사당에 도착해 수색을 도왔다. 허나 그들은 사당의 내부와 지붕, 담벽에만 신경을 썼을 뿐, 설마 종루에 누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다시 일각의 시간이 지나자 한 인영이 종루 옆을 스치고 지나 대전 지붕에 우똑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밑으로 내려섰다. 종루에 있던 화일로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 나타난 사람의 신법은 전광석화와도 같아 하마터면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드러낼 뻔 했던 것이다. 그 인물은 보통 키에 건장한 체력이고 얼굴도 준수한 중년의 황의장삼인이었다. 황의중년인은 황의인들이 수색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돌연 앞으로 나서며 찌렁찌렁 울려지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서방사왕(西方獅王)과 삼공주(三公主)께서 곧 오실테니 어서 이곳의 지저분한 것 부터 치워라!] 황의인들은 즉시 사당 안팎의 지저분한 것들을 치우고 쓸고 하여 대번에 깨끗한 곳으로 만들었다. 다시 황의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중년인은 명을 내렸다. [수색을 중지하고 각자 자기 위치로 돌아가라!] 명이 떨어지자, 사사삭! 열여덟명의 황의인들은 대전 앞 공지에 두 줄로 배열해 섰고, 다른 열여덟명은 사당 주위로 흩어졌다. 그들의 행동은 마치 대적을 눈앞에 맞이하는 것처럼 신속하고 익숙해보였다. 화일로는 그것을 보며 내심 크게 감탄했다. (아! 건곤교의 위세가 놀라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 일줄은 몰랐군. 저들의 일거일동만 보더라도 건곤교의 조직이 얼마나 방대한 것인가를 알수 있겠다.) 황삼중년인은 천천히 공지를 서성거리며 가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때였다. 돌연 사당 문쪽에서 가늘고 긴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삼공주꼐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여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지붕에서 일곱개의 인영이 낙엽처럼 사뿐히 내려섰다. ------------------------<第 八 章>------------------------------- ------------------------<第 一 圈 終>---------------------------- 第 9 章 西方獅王 모두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도 그 몸매가 날씬하고 키도 작은 것으로 보아 여인들 같았다. 이들 일곱명의 흑의여인들이 사당 앞에 나타나자 주의는 그렇지 않아도 긴장이 감돌고 있었는데 더욱 공포스런 분의기가 되었다. 일곱 흑의녀들은 얼굴을 흑사(黑莎)로 가리고 있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체가 흑색이고 눈빛만 반짝거렸다. 황의중년인은 일곱 흑의녀들에게 허리를 크게 굽혔다. [개봉분타주(開封分陀主) 곽진(郭震)이 공주님의 칠사자(七使者)를 뵙니다. 그런데 삼공주께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전 안에서 싸늘하면서도 듣는 사람의 가슴을 울렁케 하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본 공주는 이미 대전안에 들어와 있다. 곽타주(郭陀主)는 눈이 없느냐?] 황의중년인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황급히 몸을 돌려 대전 어둠속으로 포권의 예를 올렸다. [삼공주님의 옥체(玉體)는 남에게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불초 곽진이 미처 몰랐습니다. 그 죄는 백번 죽어 마땅한 줄 알고 있사오니 너그러운 용서를 바랍니다.] 이 사이 일곱명의 흑의녀들은 미끄러지듯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 안에는 다시 냉기(冷氣)와 요기(妖氣)를 동시에 띄고 있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곽타주, 너는 오늘밤 이곳에 누가 오는지 알고 있느냐?] [삼공주님외에 서방사왕께서 오십니다.] [알고는 있구나. 그럼 너는 서방사왕이 본방에서 어떤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느냐?] 곽진은 허리를 굽혔다. [서방사왕께선 본교 사방천왕(四方天王)중의 한 분으로서 삼십육당(三十六堂)을 관할하시고 칠십이분타(七十二分陀)의 생살(生殺) 대권을...] 돌연 대전 안 어둠을 뚫고 날카로운 외침이 들여왔다. [닥쳐라!] 곽진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곽진! 네가 본교의 비밀조직을 남에게 누설시켰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그래서 본 공주는 그 일방적인 밀고를 믿을 수 없어 직접 시험해 보려고왔는데 이제보니 과연 네 입이 가벼운 것이 사실이로구나. 이놈, 또 할말이 있느냐?] 순간 곽진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저...... 저는......] 대번에 혀까지 굳어져 버린 듯 무어라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전안에서 다시 삼공주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왕존자(獅王尊者)! 곽진의 죄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른지 사왕(獅王)께서 직접 결정하세요.] 이 말에 사당 밖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소스라쳐 놀랐다. 곽진 뿐만 아니라 종루에 숨어 있는 화일로까지도 잠시 멍청해졌다. 종루의 화일로는 일곱 흑의녀가 나타났을 때 한 인영이 사당 왼쪽담을 그림자처럼 뛰어넘어 대전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것을 보았었다. 다만 곽진만은 일곱 흑의녀들에게 눈길을 빼앗겨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기에 대전에서 삼공주의 음성이 들려온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뿐이다. 헌데 이번에는 화일로조차도 그외 다른 사람이 대전안에 또 와있을 줄은 미처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그럼 서방사왕이란 인물은 삼공주보다 먼저 대전에 들어가 있었단 말이 아닌가? 화일로는 대전으로 안력을 집중시켰다. 어두침침한 대전 가운데 여러개의 흑영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신단(神壇)이 있는 곳에 또 하나의 거대한 인영이 우뚝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인영이 서방사왕이란 인물인가?) 이때 대전안에서 뇌성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개봉분타의 전 인원과 분타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도리밖에 없소.] 삼공주의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이미 결정을 내리셨으니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고맙소이다.] [사왕께서 이곳에 들어오실 때 이미 개봉 분타의 사람들 서른 여섯명에게 암습을 가해 격살시키셨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앞에 있는 곽진 한사람뿐이군요.] 이 말에 화일로는 또 한차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밖에 서 있는 서른여섯명의 황의인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허나 삼공주가 괜히 거짓말을 지껄일리가 없으니 그들은 죽은 것이 확실할 것이다. 화일로는 새삼 건곤교의 악랄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전 안에서 서방사왕이라는 인물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삼공주의 눈은 과연 예리하구료. 본좌(本座)의 일거일동을 모두 살피고 있었다니 정말 탄복을 금치 못하겠소.] [사왕께선 과찬을 하시는군요.] [아니요, 과찬이 아니오.] [본 공주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사왕께서 향주(香主)들을 살해하는 수법을 보았겠어요? 다만 사왕의 음성으로 그런 일이 있었음을 추측해 낸 것 뿐이예요.] [오! 그렇소? 하하...... 삼공주는 비단 무공만 고강할 뿐만 아니라 기지(機智) 또한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헛소문이 아니었구료. 하하하.....] [사왕께선 자꾸 지나친 칭찬을 하지 마세요. 곧 본 공주를 문책하시게 될 거예요.] [삼공주의 그 말은 무슨 뜻이오?] 삼공주의 한숨소리가 길게 새어나오고 음성에 풀이 죽었다. [사왕께서 불원천리 이곳까지 오신 목적은 새장자 남궁봉을 제거하는 일을 도와주시기 위함인데...... 그러나 본 공주는 아직 그의 행방조차 알아내지 못했어요.] 서방사왕의 의아해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삼공주께서 이 일을 시작하신지가 얼마나 되었는데 아직 남궁봉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단 말이오?] [면목이 없군요.그 자는 마치 꼬리를 감춘 신룡(神龍)처럼 좀처럼 행적을 찾기가 힘이 들어요. 그래서 벌써 한달째 수하들을 풀어 그자의 행방을 조사했으나 아직 확실한 거처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흐음......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 자의 행방만 탐문할 수는 없지 않소?] [그래서 우선 한가지 계책을 세웠어요.] [그게 무엇이오?] [그 자의 제자인 풍파무쌍 화일로를 사로잡아서 그를 미끼로 그 늙은 여우를 유인한다는 것이지요.] 이어 그녀가 나직하게 서방사왕에게 무어라고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방사왕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방법이 통하겠소? 듣자하니 화일로, 그 녀석은 제 사부를 닮아 약기가여우보다도 더하고 간계가 무궁무진하다는데......] [물론 그 놈을 사로잡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행히 그 놈은 여색(女色)을 즐겨하고 행동이 경솔하니 남궁봉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예요.] 종루위에서 삼공주의 말을 듣고 있던 화일로는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군. 대체 내가 처신을 어떻게 했다고 보는 놈마다나를 여색에 눈이 멀었다고 하지?) 다시 사방사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헌데 언제쯤이면 그 놈을 잡을 수 있겠소?]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에 하영주(하영주)에게서 연락이 올거예요. 그러니사왕께선 며칠간만 이곳에 계셔야겠어요.] [알겠소. 그럼 본좌는 이곳에서 삼일동안 기다리겠소. 하지만 그때도 별다른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총타로 돌아가서 교주님께 사실을 고하겠소.] 삼공주는 억지로 웃었다.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만일 일이 실패한다면 본 공주가 직접 그 사실을 상세히 적어 천리신합(千里伸Ｘ)으로 교주님께 전하겠으니 사왕께선 굳이 총타로 거동하실 필요가 없을 거예요.] [아니오. 본좌는 교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명을 받아 삼공주를 도와 남궁봉을 제거하라는 임무가 있는데 어찌 무책임하게 물러날 수 있겠소? 그때는 공주께서도 본좌와 함께 교주님을 뵈러 가겨야 하오.] [그건 각오하고 있어요. 그건 그렇고 사왕께선 곽진을 어떻게 처리하겠어요?] [삼공주께선 좋은 의견이라도 있으시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최근에 사왕께선 시위(侍衛)를 한 사람 잃었다던데그를 시위에충당시키시죠.] 서방사왕은 눈쌀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본좌의 시위가 되려면 무공이 고강함은 물론 용맹하기가 따를 자가 없어야 하는데 저 자가 어찌 그 조건에 합당하겠소?] [어쨌던 한번 시험을 해 보세요.] 삼공주는 뒤로 두어걸음 물러나 대전 중앙을 비우고 밖으로 크게 소리쳤다. [곽진!] 곽진은 밖에서 전전긍긍하여 서 있다가 재빨리 허리를 굽혔다. [예!] [곽진은 듣거라! 네가 지난날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가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사실 여부야 어찌되었건 너는 본교에 물의를 일으켰다는 죄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네가 본교에 충성을 바친 것을 참작해서 특별히 한번의 기회를 주겠다. 네가 사왕의 시험을 통과한다면 살아서 사왕의 시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곽진은 그 말을 듣고 대전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사왕과 공주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종루의 화일로는 저절로 눈쌀을 찌푸렸다. 조금전에 본 곽진의 신법으로 보아 그의 무공은 중원무림의 어느 누구에 못지 않게 고강한데 그는 상대가 자신의 생사(生死)를 마음대로 결정해도 조금의 반항도 내보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건곤교의 세력과 규칙이 얼마나 엄하고 서방사왕과 삼공주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때 대전안에서 서방사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본좌의 삼장(三掌)을 받고도 살아날 수 있다면 너를 본좌의 시위로 삼겠다.] 곽진은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사왕게선 부디 손속에 인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흐흐...... 네 무공이 본좌의 기대대로라면 너는 살아날 수 있다. 허나 그렇지 못할 때는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것이다. 자, 준비해라. 본좌는 손을 쓰겠다!] 곽진은 대전이 빤히 보이는 사당 앞 공지에서 자세를 취하고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침중하기 그지없어 주위의 공기 또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실로 그로서는 허무하게 생(生)을 마치느냐, 아니면 사왕의 호위가 되어 다시 한번 영예를 누리느냐하는 생사의 길목이라 할 수 있었다. 곽진은 두 손을 느릿느릿 가슴 앞으로 끌어올린 채 언제라도 손을 쓸 수 있는 태세를 취했다. 일순, [일장(一掌)이다!] 굉량한 음성과 함께 대전안에서 먹물같은 강기가 노도처럼 곽진을 향해 몰아닥쳤다. 꽈르르릉! 곽진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낸 채 미동도 않고 서 있다가 강기가 거의 자신의 앞에 도달했을 때 가슴 부근으로 끌어올렸던 양 손을 힘차게 뿌려댔다. 꽝! 폭음이 터지며 먹물같은 강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곽진은 강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을 휘청거리다가 한걸을 물러섰다. [엇?] 대전안에서 뜻밖인 듯한 서방사왕의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제법이군. 본좌의 상섬(三成) 경력이 실린 흑살장(黑殺掌)을 제자리에서 막아내다니......] 놀랍게도 조금전에 가공할 기세로 휘몰아쳤던 강기가 겨우 서방사왕의 삼성공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서방사왕이 전력을 다한 장력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장(二掌)이다!] 서방사왕의 호통소리와 함께 조금전보다 두배는 강력할 듯한 강기가 곽진을 향해 퍼부어졌다. 꽈르르르릉! 지축을 울릴 듯한 굉음과 함께 밀어닥치는 강기는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듯 엄청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곽진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곽진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악문채 사력을 다해 쌍장을 휘둘렀다. [이야압!] 꽈꽝!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음이 터지며 사당안이 온통 강기의 여파로 인해 금시라도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으음......!] 곽진은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쓰러질 듯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후퇴했다. 허나 그는 간신히 몸을 버티며 똑바로 섰다. 대전안에서 서방사왕의 굉량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좋은 벽공장(劈空掌)이다. 곽진! 이제 마지막 공격을 받아보아라!] 서방사왕은 왼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손에서는 어떠한 강기도 뿜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단지 마치 아지랑이처럼 부드러운 기운만이 밤바람에 섞여 날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그것을 보자 삼공주는 안색이 변해 다급한 외침을 토해냈다. [사왕께선 손에 사정을 베푸세요!] 허나 어느새 부드러운 기운은 곽진의 지척에 육박하고 있었다. 곽진은 삼공주의 외침을 듣고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오오오...... 봄바람처럼 유유하기 그지없는 기운은 그의 지척에 다다르는 순간 가공할 강기로 바뀌어 그의 전신을 짓눌러오는 것이 아닌가? 그 엄청난 중압감에 못이겨 곽진의 장삼자락은 먼지로 화해 그의 두 팔이 송두리째 드러나 버렸다. 곽진은 얼굴을 더이상 심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굳힌 채 두 눈을 번뜩이고 있다가 벼락같은 삼장(三掌)을 내갈겼다. 그의 삼장은 무척 특이해서 두번째 장력이 첫번째 장력보다 빨랐고, 세번째 장력은 두번째 장력보다 빨랐다. 그래서 삼장이 목표물에 도달했을 때는 거의 하나의 장력으로합쳐지게 되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격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음......] 돌먼지 속에서 미약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먼지가 가라앉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곽진의 모습이 중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한채 입가로는 가느다란 선혈을 흘려내고 있었다. [으웩!] 마침내 그는 참지 못하고 한 덩어리의 핏덩이를 게워내고 말았다. 허나 피를 토해내자 오히려 속이 시원해지는지 그는 휘청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하하하하......] 대전 안에서 한차례 득의에 가득찬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더니 서방사왕의 천둥같은 음성이 이어졌다. [훌륭한 연환삼장(連環三掌)이다. 훌륭했어. 본좌의 칠성경력이 담긴 약류장(弱柳掌)을 받고도 가벼운 내상만을 입다니...... 네 무공은 본좌의 기대 이상이다.] 곽진은 입가에 핏줄기를 닦고는 급히 허리를 구부렸다. [사왕님의 넓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그럼 이제부터 너는 본좌의......] 이때 삼공주가 불쑥 뛰어나왔다. [잠깐!] [삼공주, 무슨 일이오?] [사왕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애초의 내 말을 조금 변경하겠어요. 곽진의 무공은 의외로 고강하군요. 당금 교주님의 건곤위대(乾坤衛隊)로 만들겠어요.] [하지만......] [왜요? 교주님께 보내는 것이 불만이신가요?] 서방사왕은 매우 불쾌한 것 같았으나 감히 삼공주와 다투지를 못했다. [아...... 아니 잘한 생각이요. 곽진의 무공실력으로는 교주님 신변의 건곤위사가 될 자격이 충분하오. 하지만......] [하지만 무엇인가요?] [교주께선 건곤위사를 선출하는데 있어서 무공이 고강한 것보다 교주님에 대한 충성심을 더욱 관심있게 보시는데......] [호호...... 사왕께선 그런 것까지 염려하지 마세요. 곽진에 대한 충성심은 본 공주가 천천히 교육시키겠어요.] [그러시겠다면 본좌는 더이상 할말이 없소. 이곳의 일은 거의 끝난 것 같으니 어서 떠납시다.] [그러죠. 곽진, 오늘부터 너는 잠시동안 본 공주의 칠사자와 함께 다녀라. 한달 후 너를 교주에게 천거해 주겠다. 만약 네게 행운이 있어 교주께서 마음에 드신다고만 하면 넌 본교의 중요한 직책을 담당할 수 있다.] 곽진은 얼굴 가득히 희색을 띄고 공손히 허리를굽혔다. [삼공주께서 소인을 천거해주시는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됐다. 본 공주는 이후 너의 충성심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겠다.]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곽진, 어서 대전으로 들어와 일곱 사자와 같이 서라. 명심해야 할 것은 사자와 같이 있는 동안 본 공주를 높이 받들어야 한다.] 곽진은 허리를 굽힌채 어두운 대전안으로 들어갔다. (곽진의 무공은 생각보다 뛰어나군. 저런 자가 건곤교의 일개 분타주에 불과하다니......) 화일로는 내심 침음하며 혹시 서방사왕과 삼공주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종루에서 아래로 목을 길게 내밀었다. 이때 대전안에서 인영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대전 앞 계단 입구에 마치 철탑(鐵塔) 같은 한 사람이 우뚝 섰다. 전신에 은광(銀光)이 번쩍이는 장포를 입었고 머리카락도 은발이었다. 뒤이어 등에 바람막이 옷을 걸친 흑의여인이 나오고 그 뒤를 따라 곽진과 일곱 복면 여인이 나란히 나왔다. 바람막이 옷을 걸친 흑의여인은 키가 늘씬하고 밖으로 드러난 손이 백옥(白玉) 같았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어느새 서쪽 숲속으로 치달렸다. 언뜻 보아 그들의 몸이 휘청한 것 같은데 벌써 담을 뛰어넘은 것을 보아 신법이 과연 절륜해 보였다. 화일로는 그들을 따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일단은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우선은 그들을 따라가는 것보다 살인첩에 올라 있는 인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종루에서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로 오른쪽 사당 담쪽에 한 황의인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 몸을 움찔했다. [음?] 그는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번쩍 치켜들려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손을 멈추고 상대를 살펴보았다. 과연 상대는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황삼인은 이미 숨이 끊겨져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에 두 눈은 평소의 모습이지만 빛을 잃고 있었으며 피부가 뻣뻣하게 굳어 이어 흡사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人形) 같았다. (과연 서른여섯명의 황삼인은 서방사왕에게 죽음을 당했나 보구나.) 호기심에서 사당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여기저기에 석상처럼 우뚝 선 채 숨이 끊어진 황삼인들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새삼 서방사왕의 악독한 손속에 입술을 깨물었다. (악랄한...... 대체 그자의 정체가 누구이길래 이토록 사람을 함부로 죽인단 말인가?) 그는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급히 가까운 곳에 있는 황삼인의 시체로 다가가서 가슴팍 부근 옷자락을 헤쳐보았다. 황삼인의 가슴에는 마치 매화꽃 모양의 붉은 반점이 나 있었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는 붉은 얼룩 같았는데 자세히 보면 다섯개의 크고 작은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화일로의 안색이 싹 변했다. (이것은 혈흔지(血痕指)......!) 그 붉은 자국은 그로 하여금 강호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한 마인(魔人)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면 서방사왕이 바로 그자란 말인가?) 화일로는 내심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론 그 인물은 벌써 오십년전에 이미 죽은 것으로 소문이 났던 것이다. 헌데 그가 황삼인의 시체를 앞에 두고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였다. [후후......] 바로 등뒤에서 음흉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오늘 정신이 없군.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하다니......] 화일로는 고개를 돌려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보지 않고서도 그 웃음소리만으로도 일이 무척 난처하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씁쓸히 웃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第 九 章>-------------------------------- 第 10 章 花一露의 神威 언제 나타났는지 공지에는 아홉개의 인영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삼공주라는 바람막이 옷을 걸친 흑의여인과 일곱 흑의복면여인, 그리고 곽진이었다. 화일로는 이미 그들임을 짐작했기 때문에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입맛이 썼다. 그가 멋적게 빙그레 웃으며 무어라고 말을 꺼내려 하는데 삼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흥! 내 그럴줄 알았다. 사당에 사람이 숨어 있는 것 같아 가다가 다시 돌아왔더니 네 놈이 걸려 들었군. 네 놈은 누구냐?] 순간 화일로는 한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삼공주꼐선 어찌 그리 건망증이 심하시오? 나를 몰라 본단 말이오?] 삼공주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화일로를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무어라고 했느냐?] 화일로는 태연히 어깨를 쭉 폈다. [나를 몰라보느냐고 했소.] [이놈! 감히 본 공주에게 희롱을 하는 것이냐?] [희롱은 삼공주가 내게 하는 것 같소.] 삼공주는 발을 구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이놈! 찢어죽이기 전에 어서 이름을 대라!] 화일로는 상대의 늘씬한 몸매를 쓰윽 훑어 보았다. [모르겠다고 하니 그럼 내가 나 자신을 소개하겠소. 나는 교주님 휘하의 건곤위대 가운데 한 사람이오. 삼공주께선 생각나지 않으시오?] 그리고는 짐짓 원망이 섞인 듯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공주께선 정말 건망증이 심하시군요.] 삼공주가 싸늘히 코웃음을 쳤다. [이놈! 잠꼬대같은 소리 하지 말아라!] [어? 정말 나를 모르십니까?] [모른다!] 화일로는 쓴 입맛을 다시며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삼공주께서 나를 모르신다니 저로서도 어쩔수 없군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려 드려야겠소. 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교주님의 영지(令旨)를 전하려는 것이었소.] 이 말에 삼공주의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이때 곽진이 불쑥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교주님의 영지를 가지고 오셨으면 어서 내놓으시오!] 화일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이 영지는 매우 긴요한 일이라 비밀을 지키기 위해 글로 쓴게 아니라 내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 당신들 앞에 무얼 내놓고 말고가 없소.] [그럼 어서 말하시오!] 화일로는 곽진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는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친구는 누구요? 본교에서 어떤 직책이신지?] 삼공주가 대신 대답하고 나섰다. [본 공주의 유일한 남자시위이다.] [어떻든 교주님의 영지는 삼공주 한분에게만 말씀드려야 되는 것이오.] 삼공주는 돌연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네 놈의 연기력은 무척 능란하구나. 하지만 애석하게도 네놈은 본교의 내막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 네 놈의 세마디 말 가운데서 두 마디만 틀렸더라도 난 네게 깜빡 속았을 것이다.] 화일로는 여전히 태연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삼공주의 말은 무슨 뜻이오?] [닥쳐라!] 이때 일곱 흑의복면여인들 중 두명이 화일로에게 덮쳐들었다. 그 순간삼공주가 얼른 손짓을 보내 그녀들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물러나 있거라!] 화일로는 그들 두 복면여인을 차갑게 쏘아보며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공주의 시위라면 교주님의 영지를 전하러 온 건곤위사에게 덤벼들 수 있느냐? 이 건방진 것들, 나와라!] 두 복면여인은 화일로의 기세등등한 말에 움찔하여 뒷걸음으로 삼공주의 뒤로 물러났다. [안 나오느냐?] 화일로는 계속 소리치며 그 두 복면여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순간 삼공주가 백옥같이 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멈추어라! 더 움직이면 손을 쓰겠다!] 화일로는 빙그레 웃으며 정말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삼공주,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흥! 교주님께선 천리밖에 계시니 영지를 보내시려면 천리신합을 이용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교주님께선 우리에게 명을 전하실 때는 항상 영지(令旨)를 사용하셨다.] 화일로는 짐짓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래서 나를 못믿으시겠다는 말씀이구려.] [그렇다. 어서 네놈의 정체를 밝혀라!] 화일로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매달았다. [삼공주는 무엇인가 잘못 알고 계시군요. 삼공주께선 지금 교주님이 어디까지 행차하셨는지 알고나 있으시오?] [......] [그리고 이번 영지는 너무나 중하고 급한 것이라 영지를 글로 내리실 시간도, 준비도 없었소.] 삼공주는 다시 잠깐 머뭇거리다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사실이라고 믿지. 그럼 건곤위대의 건곤위사 신물(信物)을 내놓아 보아라.] 화일로는 내심 난처해졌다. (제길...... 건곤위사한테도 신물이 있었다니...... 이 계집은 정말 여우처럼 잘 속아넘어가지 않는군.) 허나 화일로가 누구인가? 당대 제일의 망나니인 풍파무쌍이 아닌가?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되물었다. [건곤위사 신물을 보여주면 나를 믿겠단 말이오?] [물론이다. 어서 내보여라!] 화일로는 품속으로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처럼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삼공주, 미안하지만 신물은 보여줄 수 없소.] [야, 이놈! 이제서야 네 놈이 정체를 드러내는구나.] [좋소! 그럼 삼공주께선 내 신물을 본 후 교주님의 문책이 있으시더라도 내게 책임을 돌리려 하지 마시오.] 삼공주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교주께선 무림에 불원간 큰 일을 처리하시기 위해 비밀리에 건곤위대중에서 특별 사자(使者)를 선별하셔서 교주님을 제외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신분을 누설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소. 덧붙여서 강제로 신분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교주님께 알리라 하셨소. 지금 삼공주께서 내게 신물을 내보이라고 핍박하는 것만으로도 교주님께 대죄(大罪)를 지으시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대죄?] 삼공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직히 뇌까렸다. [그렇소. 공주가 비록 교주님의 딸이지만 교의 규칙을 어기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리라 믿소.] [호호호......] 삼공주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갑자기 표정을 싸늘하고 무섭게 바꾸었다. [이놈,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청산유수처럼 늘어놓는구나. 곽진, 나가서 저 놈을 사로잡아라!] [예!] 곽진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화일로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잠깐!] 화일로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다급히 소리쳤다. [곽진, 이놈! 더 움직이며 네놈 삼대 가족들에게 벌을 내리겠다. 교주님의 위력이 어느정도임을 네놈도 잘 알고 있겠지?] 삼공주가 안색이 새파래져서 앙칼지게 소리쳤다. [곽진, 잡아라! 어서 잡아라!] 곽진이 다시 허리를 굽히며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화일로는 몸을 돌려 사당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삼공주, 훗날 봅시다. 그때는 나를 원망하게 될 것이오. 이 길로 교주님께 돌아가 삼공주와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아뢰겠소. 교주님의 영지를 몰라보더라고 말이오.] 그가 문을 막 나서려는데 삼공주의 다급한 외침이 등덜미를 낚아챘다. [멈추어라!] 화일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일부러 거드름을 부리며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왜 그러시오? 삼공주는 생각을 바꾸셨소?] 삼공주는 화일로를 무섭게 쏘아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본 공주는 네게 잠시동안 연극을 계속케 하겠다. 그러나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언제라도네 놈이 본 공주를 속였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즉시 네 놈의 사지를 찢어 죽여버리겠다!] 화일로는 겁을 먹기는 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웃어제쳤다. [하하핫...... 삼공주가 손해를 보는지 아니면 내가 손해를 보는지 두고 봅시다. 곧 결과를 알게 될 것이오.] 삼공주는 곽진에게 손짓을 보냈다. [곽진, 네가 그 놈을 감시해라! 놓치면 절대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가자!] 삼공주는 말을 끝낸 후 먼저 앞장서서 사당 뒤쪽으로 해서 죽림이 있는 곳으로 질풍같이 내달렸다. 그 뒤를 곽진과 화일로가 따르고 또 그 뒤를 일곱 흑의 복면인들이 따랐다. 헌데 앞에서 나는 듯 질주해 가던 삼공주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 뒤를 따르고 있던 사람들도 얼른 걸음을 멈추었고, 화일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몸을 멈춰세웠다. 주위는 잡초만 무성한 벌판으로써 찬바람이 세게 몰아쳤다. 삼공주는 우뚝 선 채 앞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홱 돌려 화일로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시퍼렇다 못해 불그스레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무서운 살기였다. [호호호...... 이 놈! 본 공주는 하마터면 네 놈에게 속아 큰 실수를 저지를 뻔 했다. 어떠냐, 네 손으로 죽겠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죽겠느냐?] 화일로는 내심 움찔했으나 태연하게 물었다. [삼공주는 지금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오?] 삼공주는 손짓으로 화일로를 가리켰다. [너다, 대담한 놈! 네놈의 배짱이 두둑하고 얼굴이 제법 준수한 것으로 보아 네놈은 풍파무쌍 화일로가 아니냐?] 일은 기어코 터지고야 말았다. 화일로는 더이상 그녀를 속일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잘생긴 것도 죄로군. 그렇소, 내가 바로 화일로요.] 막상 화일로가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넉살좋게 시인을 하자 삼공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우두커니 선 채 그를 쏘아보고만 있었다. 화일로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입을 놀렸다. [삼공주께서 본 가주와 사부님을 찾으신다길래 불원천리 하고 이렇게 달려왔소. 다행히 삼공주께서 본 가주에게 관심이 많아 단번에 나를 알아보시니 정말 영광이외다.] 삼공주는 멍청하게 그의 말을 듣고 서 있다가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호호호...... 정말 소문대로군. 아주 괴짜야. 하지만 오늘 본 공주에게 걸린 것은 네 놈의 일생일대의 실수가 될 것이다.] [하하, 공주를 만난게 어찌 일생일대의 실수란 말이오? 일생일대의 인연이면 몰라도......] 그러면서 화일로는 그녀의 굴곡이 완연한 몸매를 쓰윽 훑어보는 것이 아닌가? [본 가주는 지난 몇달동안 삼공주같이 몸매가 뛰어난 여인을 본 적이 없소.어떻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통성명이나 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화일로의 능글맞은 말에 삼공주는 분통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너무나 화가 치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곽진! 십 초 이내에 저 놈을 죽여라! 그렇지 못한다면 넌 건곤위대에 끼일 생각을 말아라!] [예!] 곽진은 허리를 굽히고는 화일로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화일로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보게 친구, 보아하니 자네는 제법 신체가 건장한 대장부인 것 같은데저런 아녀자의 치마폭에 휩싸여 있어서야 쓰겠나? 본 가주의 아래로 온다면내 자네를 하인들의 우두머리로 임명하겠네. 그 자리는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정말 귀하디 귀한 자리일세.] 곽진은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살기어린 눈으로 화일로를 노려보다가 별안간 벼락같이 양손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파파팍! 무수한 장영(掌影)이 구름처럼 일어나며 화일로의 전신을 뒤덮어갔다. 화일로는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장영속으로 한 걸음 뛰어들며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쾌액! 그의 손은 마치 한가닥 뇌전처럼 장영을 뚫고 곽진의 이마를 향해 다가갔다. [앗?] 곽진은 설마 상대의 공격이 이토록 빠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지라 다급한 경호성을 지르며 황급히 머리를 옆으로 비틀며 발길질을 해댔다. [하하...... 원앙퇴(鴛鴦腿)로군.] 화일로는 가볍게 웃으며 슬쩍 옆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곽진의 발이 헛되어 허공을 가르고 그대신 그의 앞 가슴이 훤하게 화일로의 장세에 노출되었다. 화일로는 재빨리 앞으로 다가서며 오른손으로 곽진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꽝! [크윽!] 곽진은 가슴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대여섯걸음이나 물러섰다. 허나 화일로는 더이상 공격하지 않고 뒷짐을 지며 여유있게 미소를 흘렸다. [하하...... 아무래도 자네를 하인의 우두머리로 삼는 문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 되겠군. 자네 무공은 본 가주의 기대에 훨씬 뒤떨어지네.] 곽진은 화일로의 손에 정통으로 가격당했는데도 별다른 내상을 입지 않자 의아해 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다시 화일로를 향해 덤벼들었다. 바로 그때 삼공주가 손을 내밀어 그를 제지했다. [물러서라, 너는 저 자의 적수가 아니다.] 곽진은 내심 불만이 가득했으나 감히 그녀의 분부를 거역할 수 없어 뒤로 물러났다. 삼공주는 날카로운 눈으로 화일로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과연 듣던대로 몇 가닥 무공의 재주가 있구나. 허나 본 공주의 칠사자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어 그녀의 좌수가 슬쩍 쳐들리는 순간, 스스슥! 석상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던 일곱명의 흑의복면 여인들이 유령처럼 움직여 화일로를 에워쌌다. 화일로는 그녀들이 서 있는 방위를 쓰윽 훑어보다가 눈에 이채를 띄웠다. [칠절쇄혼진(七絶碎魂陣)은 다 좋은데 단지 여인들이 펼치기에는 너무 거친게 흠이지.] 그의 넋두리같은 음성을 듣자 삼공주는 깜짝 놀라 경악성을 터뜨렸다. [네놈이 어찌 칠절쇄혼진을 안단 말이냐?]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시오? 그리고 공주는 여자인데 말끝마다 남자에게 반말을 해서야 되겠소, 이 계집애야?] [뭐...... 뭐라고?] 삼공주는 화일로가 욕을 하자 한동안 망연자실,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불같이 노해 소리쳤다. [감히 본 공주를 계집애라고? 네 놈을 반드시 육시(戮屍)를 내버리겠다! 쳐라!] 그녀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일로를 에워싸고 있던일곱 흑의복면녀들의 신형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휘휙! 그녀들의 움직이는 속도는 점차 빨라져 나중에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일곱 줄기의 흑선만이 화일로 주위를 휘감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화일로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찌보면 유람을 나온 문사(文士)처럼 유유자적하기 짝이 없는 모습같기도 했고, 달리보면 생(生)을 포기한 사람같기도 했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흑의복면녀들은 좀처럼 공격을 하지 않고 그의 주위를돌고만 있었다. [당신들은 어지럽지도 않소? 언제까지 빙빙 돌고만 있을 참이오?] 화일로가 불쑥 입을 여는 순간, 파파파파...... 그녀들은 일제히 손을 휘두르며 그의 전신을 짓쳐들었다. 그녀들의 공세는 그야말로 질풍과도 같아서 장내에는 수백, 수천개의 손그림자만이 가득할 뿐 그 안에 갇힌 사람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원래 칠절쇄혼진은 이미 오래전에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려진 마도(魔道)의 절진(絶陣)이었다. 그 위력은 가히 살인적이어서 아직까지 그 안에 갇혀 살아난 사람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과연 화일로는 반격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피하기만 했다. 누가 보기에도 그가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헌데 한동안 장내를 주시하던 삼공주는 문득 의아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쯤이면 제 아무리 내공이 강한 고수라도 진력이 빠져 제대로 몸을 움직을 수 없을텐데 왜 저놈은 별로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는 걸까?) 그때 계속 피하기만 하던 화일로가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몸을 멈추었다. 그러자 일곱 흑의복면녀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벌떼처럼 그를 향해 덮쳐갔다. 그것을 보자 삼공주의 안색이 대변했다. [조...... 조심해라!] 허나 그순간, [하하하하......] 절진속에서 화일로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며 엄청난 굉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콰콰쾅! 그와 함께 벌떼처럼 덤벼들었던 복면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악!] [아악......!] 삼공주와 곽진은 눈을 부릅떴다. [저...... 저럴 수가......!] 놀랍게도 화일로는 선 자리에서 단번에 무려 칠십이장(七十二掌)을 갈겨냈던 것이다. 그 칠십이장은 하나같이 강맹하고 완벽한 방위를 점하고 있어 마치 그의 주위에 하나의 강기막을 형성한 것과 같아서 그를 향해 덤벼들던 복면녀들은그 장력의 강기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격퇴당하고 만 것이다. [칠십이복랑수(七十二覆浪手)!] 삼공주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화일로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공주의 안목은 과연 대단하구료. 생각 같아서는 좀더 이곳에 머물면서 밤이 새도록 공주와 정담(情談)을 나누고 싶으나할 일이 있어 나는 이만 가봐야겠소. 다음에 또 봅시다.] 이어 그는 삼공주가 가로막을 사이도 없이 어둠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신법은 비호처럼 빨라 삼공주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삼공주는 설마 그가 도망칠 줄은 몰랐는지라 멍청해져 있다가 그제서야 날카롭게 소리쳤다. [잡아라! 도망가게 해서는 안된다!] 바닥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일곱 흑의복면녀들과 곽진은 황급히 화일로의 뒤를 쫓았으나 어둠은 잠깐 사이에 화일로를 집어삼킨 후였다. 삼공주는 밤바람이 차가운줄도 모르고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第 十 章 끝>-------------------------- 第 11 章 索命無常 화일로가 다시 낙양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멀리서 먼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화일로는 우선 가까운 객점으로 가서 세수를 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성의 동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성의 동쪽에는 한 채의 거의 허물어져 가는 낡은 절이 있었다. 절 앞의 빈터에는 각양각색의 노점(路店)들이 즐비해 있었다. 화일로는 그 중의 한 상점에서 볶은 땅콩을 한 봉지 샀다. 그는 땅콩을 먹지 않고 엉뚱한 곳에 사용했다. 그는 하나의 돌기둥 뒤로 돌아가 한 알의 땅콩을 집어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탁! 그러자 그 땅콩은 계단 앞에 앉아있는 어린거지 머리에 적중했다. [제길...... 이게 뭐야?] 어린 거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몇마디 욕설을 퍼붓더니 다시 이를 잡기 시작했다. 화일로는 약간 몸을 드러낸 채 다시 한 알의 땅콩을 튕겨냈다. 이번에도 땅콩은 에누리없이 거지의 머리에 적중했다. 이번에 어린 거지는 정말 화가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고개를 돌리고 욕설을 했다. [어떤 놈이......] 이때였다. 퍽! 또 한알의 땅콩이 거지의 입안으로 날아 들어가 그의 말을 중단시켜 버렸다. 그와 동시에 화일로는 돌기둥 뒤에서 천천히 걸아 나와 땅콩을 까먹으며 절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린 거지는 부아가 머리끝가지 치밀어 입안의 땅콩을 퉤하고 내뱉은 후 죽장을 집어 들고 뒤쫓아 오며 고함을 질렀다. [이봐, 사람을 때리곤 도망을 치느냐?] 화일로는 못들은 척 계속 걸음을 옮겨 대전(大殿) 앞에까지 가서야 멈춰서서 몸을 돌렸다. 뒤쫓아온 거지는 화가 잔뜩 치민 얼굴로 화일로의 앞을 가로막았다. [넌 내가 거지라고 맘대로 골리느냐?] 화일로는 그의 약을 살살 올려주었다. [너같은 어린 거지를 좀 골려주었기로서니 뭘 그렇게 화를 내느냐?] [너희들 계집애같이 생긴 공자(公子)들은 조상의 더러운 은자로 배를 채우고 할 일이 없어남을 골리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내가 오늘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 어린 거지는 고함과 동시에 죽장을 휘둘렀다. 허나 눈앞의 공자는 벌써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이때 뒤에서 예의 그 공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나는 여기 있다.] 어린 거지는 일이 심상치 않았음을 느꼈는지 급히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겁이 나지 않으면 여기서 기다려라.] 하며 소리치고는 대전 아래로 뛰어내린 후 나는 듯이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화일로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내심 혼자 중얼거렸다. (만일 얌전하게 네놈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면 네 놈은 절대 이렇듯 급하게 달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석 제법 총기가 있어 보이는데...) 얼마 후, 어린 거지는 한 명의 중년 거지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어린 거지는 화일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식입니다.] 중년거지는 화일로의 아래 위를 훑어본 뒤 물었다. [귀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오? 나의 조카가 귀하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를 땅콩으로 수차례나 희롱을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소.] 화일로는 암암리에 중년거지를 훔쳐보았다. 중년거지의 옷자락에 매듭이 세개 있는 것을 본 화일로는 그의 신분이 개방(Ｘ幇)에서 결코 낮이 않음을 눈치챘다. 화일로는 얼른 열개의 손가락을 서로 깍지끼며 손가락 끝을 뒤로 하여 우산 모양을 한 후 웃으며 말했다. [본인은 화일로라 하며 조금전의 장난은 고의로 한 것이 아니니 귀하의 조카에게 사과드리겠소.] 화일로가 취한 손자세는 개방의 인물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신호였다. 중년거지는 화일로가 이런 손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고 남이 아님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듣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는 급히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며 얼른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화가주이셨군요. 소인이 몰라뵈어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어 중년거지는 다시 물었다. [가주께서 이번 낙양에 오신 후, 폐방에 협조를 구할 일이라도 있으신지......?] 화일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원래 귀하를 오시게 한 것은 그 점 때문이오. 긴한 일로 귀방의 악장로(岳長老)를 만났으면 하는데 연락 좀 해주시겠소?] 중년거지는 내심깜짝 놀랐다. 악장로란 개방의 최고고수(最高高手)이며 강호무림에서 새장자 남궁봉과 함께 이괴(二怪)로 불리우는 걸신(乞神) 악구천(岳九天)을 말한다. 악구천은 개방사상(Ｘ幇史上) 드물게 보는 무학(武學)의 기재(奇才)일뿐 아니라 협의심이 강하고 괴행(怪行)을 일삼아 개방제자들의 절대적인 성원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분 어른께선 오일전만 해도 이곳에 계셨는데 지금은 아마 한중분타(漢中分陀)에 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을 파견해도 늦진 않을겁니다. 가주께선 이곳에 며칠이나 머무르실 생각이신지요?] [그건 아직 잘 모르겠소.] [그럼 악장로님을 찾은 후 가주와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합니까?] [고생스럽지만 그 분더러 이 절에 며칠간만 머무르시라고 하면 내가 찾아오겠소.] 중년거지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가주의 분부를 받들어 소인은 분타로 돌아가 사람을 파견하겠습니다.] 화일로는 어린거지가 중년거지를 따라가려고 하자 얼른 손짓을 했다. [너는 잠시 남아 있거라. 네게 할 말이 있으니까.] 어린 거지는 그의 자자한 악명(?)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터라 그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울상이 되었다. 중년거지는 뒤를 돌아보며 어린 거지를 타일렀다. [넌 남아서 가주님과 얘기를 나누거라.]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총총히 사라져갔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화일로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죽장을 이리 내놓아라!] 어린 거지는 급히 죽장을 내밀었다. 화일로는 죽장을 받으면서 빙긋이 웃었다. [조금전 본 가주가 서너번 네게 땅콩을 던졌다고 너는 이 죽장으로 나를 때렸느냐?] 어린 거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내가 휘두른 것은 적중하지 않았습니다.] [적중하지 않은 것은 네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니 그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어쨌든 넌 죽장을 휘두른 것만은 사실이지?] 어린 거지는 귀여운 얼굴을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비긴 것으로 간주하지요.] [그럼 처음 네가 욕을 한 것은 어떻게 하겠느냐?] [가주께서 저를 땅콩으로 때리지 않았다면 욕도 하지 않았을테니 피장파장이지요.] 화일로는 돌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넌 말재주가 보통이 아니구나.] [그럼 가주께서도 저를 욕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본 가주는 사람을 때리기는 해도 욕은 하지 않는다.] 어린 거지는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말을 더듬거렸다. [가...... 가주께서 저를 때리시면 전 틀림없이 죽을 것입니다.] 화일로는 웃음을 참으로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맞는 대신에 내가 시키는 일을 하겠느냐?] 어린 거지는 그제서야 안색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화일로는 마당으로 내려가 죽장으로 땅바닥에 큰 네모를 그린 후 그 안에 다시 열두개의 작은 네모를 그렸다. 그 열두개의 네모안에 다시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것에는 동그라미, 또 어떤 것에는 곱하기 표를 그린 후 대전 앞의 어린 거지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어린 거지가 다가오자 화일로는 작은 네모를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먼저 이쪽으로 가서 저쪽으로 돌아오너라. 건너갈 때는 동그라미가 그려진 네모를 밟고 가고 올 때는 곱하기 표가 있는 네모만 밟되 만약틀리는 날에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팔백번만 반복해라.알겠느냐?] 어린 거지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팔백번은 너무 많습니다.]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잘했다. 그럼 천번으로 고쳐주마.] [이건......] [왜, 그 숫자를 다시 개정하고 싶으냐?] 어린 거지는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아...... 아닙니다. 천번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화일로가 시키는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하더니 어린 거지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고 느꼈는지 걸음걸이에다 재주까지 부렸다. 화일로가 천천히 하라고 했으나 그는 더 빨리 행동하더니 마지막에는 마치 잠자리가 물위에 사뿐히 앉았다 다시 날으는 것 같았다. 화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관전하고 있었다. 어린 거지는 한차례 뛰고 나더니 득의만면하여 큰소리로 물었다. [몇번 뛰었습니까?] [이백육십여덟번이다. 하지만 걸음이 틀렸으니 다시 시작해라.] 어린 거지는 맥이 빠져 걸음을 멈추었다. [다리가 부러질 것 같습니다.] 화일로는 죽장을 집어들며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매를 맞겠느냐?] 어린 거지는 질겁을 하며 급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뛰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세번이나 돌며 반시진 이상이 되어서야 간신히 천번을 뛰었다. 그리고 나서 땅바닥에 쭉 뻗어버렸다. 화일로는 하늘을 쳐다본 후 땅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는 어린 거지에게 물었다. [다음에 또 본 가주에게 욕을 할테냐?] 어린 거지는 야무지게 말했다. [저에게 다시 뛸 힘이 생길 때 그때 가서 보아야 되겠습니다.] 화일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과연 총명한 아이로구나.] 그가 절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어린 거지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가주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화일로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린 거지는 땅 위에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가주께서 가르침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화일로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네놈은 역시 두뇌가 총명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어린 거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초일풍(楚一風)이라고 합니다.] [일풍,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 한도내에서 계속뛰어라. 네가 마지막으로 절을 한 댓가로 한 마디 더 해주지. 그렇게 십만 번만 뛰면 욕을 한 후 상대방을 당하지는 못하더라도 도망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第 十一 章 上>------------------------- 第 11 章 索命無常 X X X 화일로는 객점으로 돌아가려다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라 서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하조천이 어떤 상판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 그는 서북 성문의 수림을 지나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히 보니 풍운보의 정문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러나 얘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단 두 사람 뿐이며 나머지는 죽은 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중앙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은 풍운보의 보주인 하조천이었다. 하조천의 앞 육장 떨어진 곳에는 한명의 괴인(怪人)이 우뚝 서 있었다. 그를 가리켜 괴인이라 했지만 조금도 지나칠 것은 없었다.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진 머리, 누렇게 빛이 바랜 듯한 눈썹하며 거의 감겨지다시피한 두 눈과 여기다주독(酒毒)이 올라 빨간 코 밑의 두툼한 입술, 그것을 벌려 말을 할 때마다 누런 이빨이 한 마디로 가관인 인물었다. 그러나 이 괴인에게서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그의 두 손이었다. 그의 손은 마치 여인의 옥수(玉手)처럼 새하얗고 윤기가 자르르 흘러괴인의 용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마디가 유난히 길고, 손톱은 길게 길러 끝을 뽀족하게 다듬어 마치 칼날을 손가락에 끼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그 백옥같은 옥수는 아름답다기 보다는 그의 괴상한 외모와 더불어 특이하고 괴상한 기운을 풍겨내고 있었다. 번쩍이는 괴인의 눈빛은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오싹 끼치게 만들었다. 화일로는 그를 보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앞에 있는 고목나무 위로 올라가 장내를 주시했다. 그렇다. 그 괴인은 천하무림에서 대명이 자자한 삼사(三邪)중의 하나이며 그의눈밖에 벗어난 인물은 염라대왕 앞으로 직행할 수밖에 없다는 색명무상정구살인 것이다. 사방에 삥 둘러 서 있는 풍운보의 사람들은 줄잡아 이백명은 되었다. 그들은 모두가 바싹 긴장해 있으며 한결같이 손에 무기를 들은 것이 마치 백만 대군을 맞이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사람들마다의 표정 속에는 경악과 공포가 나타나 있었고, 하조천과 단흥은 낭해의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바싹 긴장한 탓인지 머리칼이 곤두서있었다. 그러나 정구살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중인들을 쓸어보며 거만스럽게 우뚝 서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귀왕(鬼王)처럼 보여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다. 역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우풍광도 그의 한쪽 옆에서얌전하게 손을 내린 채 서 있었다. 과연 그 사부와 그 제자였다. 둘의 모습은 거의 똑같았으며 단지 우풍광이 맥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것이 다를 뿐이었다. 한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하조천의 얼굴은 누렇게 변해 있었고,온통 비지 같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대협! 우리가 어찌 일부러 대협의 제자를 업신여길 수 있겠소? 하지만 그 무술대회는 벌써 규칙이 정해져 있었고 최후의 승자가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소.] 말하기조차 힘든 듯 하조천은 잠시 깊이 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정녕 정대협의 제자가 우리들과 친분을 맺기를 희망했었소. 그러나 사실과 규칙을 어길 수가 없어 마음이 아팠으나 꾹 참고 포기했던 것이오.] [흥!] 정구살은 코웃음을 몇번 치더니 그 특유의 쉰 듯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개소리 하지 마라. 내 평생 이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너희들의 초친에 응하여 보낸 것은 너희들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의 영광이다!] 정구살은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제자가 이겨도 이겨야 하며 이기지 못해도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는 것은 즉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죄를 지은 행위는 곧 나와 원수가 되는 것이다.] 생판 억지떼가 아닐 수 없었다. 하조천은 화일로를 사로잡으려고 함정을 팠다가 화일로를 놓쳐버리고 애럺은 정구살이 찾아와 시비를 걸자 미칠 지경이었다. 허나 화일로를 놓친 이 마당에 정구살같은 흉인에게마저 원수를 질 수가 없어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건 오해요. 우리가 어찌 정대협의 체면을 세워드리지 않고 원수를 맺겠소? 아까도 말했지만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소.] 그러자 정구살은 퉤하고 누런 가래침을 내뱉더니 눈에 쌍심지를 돋구었다. [규칙? 무슨 놈의 빌어먹을 규칙이란 말이냐? 내가 한 말이라야 말이며 노부가 정한 규칙이어야만이 규칙이다. 너희놈들이 뭔데 규칙을 따지느냐?] 원래 성격이 괴팍한 정구살이기는 했으나 그는 하조천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하조천은 가까스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얼굴에 억지 미소를 떠올렸다. [정대협, 말씀이 너무 과중하신 것 같소.] 이것을 본 단흥이 얼른 앞으로 한발짝 나서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폐보의 보주께서는 대협을 극히 존경하시고 흠모하셨는데 어찌 감히 대협께 불손한 행동을 하겠습니까?] 정구살의 조그만 독수리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야, 이놈아! 넌 또 뭘하는 놈이냐? 어느 쥐구멍에서 기어나온 놈이지?] 단흥은 내심 울화가 치밀었으나 도리가 없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생은 본보의 수석총관입니다. 성은 단이고 이름은 외자로 흥이라고합니다. 그리고 별호는 현학(玄鶴)이라고 합니다.] 정구살은 눈알을 부라리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놈아! 누가 너더러 이름을 대라고 했느냐? 빨리 그 더러운 입을 닥치고 한쪽으로 꺼져라!] 단흥은 급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는 정구살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정구살이 한번 분통을 터뜨리면 자기 같은 것은 정말 한 줌거리도 되지 않을게 뻔했던 것이다. [퉤!] 정구살은 또 한번 가래침을 뱉으며 천천히 말했다. [하조천! 노부는 너희들의 비무초친의 결과를 무혀로 선포한다. 동시에마지막 승자가 나의 제자라는 것도 아울러 선포한다. 그는 바로 너의사위다.] 하조천은 날벼락이 자기를 때리고 지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다급하게 외쳤다. [정대협! 그건 너무 지나친 처사요.] 정구살은 독수리같은 눈을 번뜩이며 괴상하게 웃었다. [흐흐흐...... 뭐가 지나치다는 거냐?] [그건 비무초친의 규칙에 너무 어긋나오. 게다가 이미 우승자가 정해진 이 마당에......] 정구살은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네가 정한 비무초친의 규칙이 내 비위에 맞이 않기 때문에 취소하는 거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그 화일로인지 뭔지 하는 놈을 어서 내 앞으로 대령해라. 내 그 놈의 면상을 아예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겠다.] 하조천은 움찔하여 급히 말했다. [그...... 그자는 지금 없소.] 정구살은 눈을 부라렸다. [뭐라고? 너는 지금 노부를 놀리려는 거냐?] [그...... 그게 아니라 그 자는 지금 본 보에 없소. 이건 정말이오.] [퉤! 이놈 하가야, 거짓말도 좀 그럴 듯하게 해라. 그 화가놈은 어제 비무대회에서 이겨 네 놈의 환대를 받으며 보로 들어갔다는 것을 만천하인들이 다 아는데 그새 그 놈이 어디로 꺼졌단 말이냐? 설마 그 놈이 밤새 급살이라도 맞았단 말이냐?] 하조천은 속이 탓으나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사실대로 밝힐 수도 없어 안절부절했다. [아니...... 저 그게...... 사실은......] 그가 더듬거리자 정구살은 더욱 화가 치밀어 마구 악을 썼다. [오냐, 이놈! 네 놈이 이미 그 놈을 사위로 인정하고 계속 감싸고돌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정구살은 진득한 살기를 떠올리며 하조천을 향해 다가갔다. 하조천은 당황해서 손을 마구 내저었다. [정대협, 너무 이러지 마시오. 그는 정말 지금 이곳에 없소. 노부의 신분으로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헌데 바로 이때였다. 휘익! 멀지 않은 수림속에서 난데없이 팔뚝만한 나뭇가지 하나가 광장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계단 위에서 입에 게거품까지 뿜으며 시부렁거리던 하조천과 정구살은 머리위에서 날아오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단흥이 버럭 소리쳤다. [수림속에 사람이 있나 보다!] 고함소리와 함께 번개같이 몸을 솟구쳤다. 그때 정구살은 눈을 번뜩이며 광장에 날아온 나뭇가지를 손으로 움켜쥐고 자세히 살려보았다. 굵은 나뭇가지의 한쪽 면은 깨끗하게 잘려져 있었는데, 그 위에 손톱으로 새긴 듯한 글씨가 씌여져 있었다. <이번 비무초친은 하보주께서 미리 나를 우승자로 내정(內定)하시고 일을 추진했기 때문에 약간의 무리가 있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겠소. 때문에 본인은 사위자리를 사퇴하고 아울러 정대협의 제자인 우풍광이 비무초친의 승리자 임을 인정하겠으니 하보주께선 널리 양해하시고 기쁜 마음으로 새 사위를 맞도록 하시오. 물론 하보주께서 정대협을 죽도록 혐오하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나와 하보주는 인연 이 없는 것 같으니 본인은 이만 물러가겠소. 화일로> 정구살은 으시시한 냉소를 던지며 하조천에게 나뭇가지를 집어던졌다. [이래도 할말이 있느냐? 하가야, 이래도 할 말이 있다면 어서 해보아라!] 하조천은 엉겁결에 자신에게 날아온 나무조각을 받아들고 그 위에 적힌 글을 읽어 보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에잇!]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나무조각을 바닥에 팽개쳤다. 팍! 그가 얼마나 힘을 주어 집어던졌는지 나무조각은 단단한 땅속에 거의 박혀 들어버렸다. 하조천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발로 나무조각을 힘주어 밟아 버렸다.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화가 놈! 다시 한번 노부의 손에 걸리기만 해봐라. 노부는 네 놈의 주둥아리를 비틀어 놓고 손모가지를 꺽어 놓을테다.] 정구살은 코웃음을 쳤다. [흥! 아주 그럴 듯하군. 어디 잘 놀아봐라! 뭐? 화가가 네 놈의 집에없다고?] 이 말을 듣자 하조천은 정말 화가 극에 달했다. 그는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노성을 질렀다. [당신은 정말 이치를 따지지 않을 거요?] [오라.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군. 네 놈이 정말 노부의 비위를 거슬리고 싶지 않다면 어서 내 제자를 사위로 삼아라. 화가놈도 그러마고 물러나지 않았느냐?] 하조천은 그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당신과는 더이상 말이 통하지 않으니 우린 이만 돌아가겠소.] 정구살은 소름끼치게 웃으며 그를 쏘아보았다. [흐흐...... 네 놈이 노부를 혐오해서 애럺은 내 제자에게까지 모욕을주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제는 네 놈이 노부의 제자를 사위로삼겠다고 해도 가만 있지 않겠다!] 마침내 하조천은 참지 못하고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욕을 퍼부었다. [이 벼락맞아 죽을 정가 놈아! 네 놈은 정말 이 풍운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인줄 알았으냐? 노부가 미쳤다고 저런 지저분한 놈을 사위로 삼는단 말이냐?] 정구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반쯤 벌리고 허허거리다가 벼락같이 손을 내뻗었다. [그래, 어디 네 놈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보자!] 그의손길은 너무도 신속하여 하조천은 황급히 옆으로 옆으로 피했으나 옷자락이 찢어지는 것을 면할 수는 없었다. 찌익! 하조천의 옷은 가슴팍에서 아랫배까지 길게 찢어져 속살이 다 드러났다. [헤...... 제법이군! 이번에는 머리털을 홀라당 벗겨주마.] 정구살은 음산하게 웃으며 허깨비처럼 몸을 날려 하조천의 머리위로 떨어져내렸다. 하조천은 다릅한 김에 체면불구하고 땅바닥에 떼구르르 구르며 소리쳤다. [어서 이 놈들을 죽여 버려라!] 그는 고래고래 악을 쓰며 바닥을 다섯번이나 굴렀다가 일어섰다. 그의 옷은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그야말로 낭패스럽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다행히 그때 때맞춰 풍운보의 인물들이 정구살을 가로막지 않았다면그의 머리털은 정말로 홀라당 벗겨졌을 지도 몰랐다. 하조천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정가 놈의 손이 이 정도로 빠를 줄이야......) 정구살은 풍운보의 고수들이 구름처럼 자신과 우풍광을 에워싸며 덮쳐들자 분기가 치밀어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좋다!이놈들, 오랜만에 마음껏 몸좀 풀어보자!] 그는 두 팔을 활짝 펴며 풍운보의 인물들을 향해 덮쳐갔다. 파파파팍! [크아악!] [케에에엑!] 마치 순한 양떼 속에 한 마리 굶주린 늑대가 뛰어든 것 같았따. 정구살이 한번 손을 휘저을 때마다 서너명의 풍운보 고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정구살은 살심(殺心)이 마구 치미는 듯 쉬지않고 양손을 휘두르며 풍운보 인물들의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펑! 꽈꽈꽝! [케엑!] [아아악......!] 순식간에 광장안은 선혈과 비명으로 넘쳐 흘렀고, 바닥에는 수십여개의 시체가 즐비하게 쓰러져 버렸다. 하조천은 한동안 우두커니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정구살을 향해 날아갔다. [이놈! 정가야, 오늘 네 놈을 반드시 찢어죽이고야 말겠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허리춤에서 뽑아든 풍운신검(風雲神劍)이 날카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한참 신나게 풍운보 인물들을 주살하고 있던 정구살은 눈부신 섬광과 함께 예리한 검기가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자 고개를 들어 그곳을바라보다가 이내 흉소를 날렸다. [흐흐흐...... 오냐, 잘왔다!] 그는 오른발을 휘둘러 다시 한명의 풍운보 고수를 박살내 버리고는 슬쩍 허리를 뒤틀어 하조천의 일검(一劍)을 피하며 쌍수를 휘둘렀다. 꽝!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하조천은 정구살의 막강한 장력을이기지 못하고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채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정구살은 쉴사이 없이 아직도 비틀거리고 있는 하조천을 향해 덮쳐들었다. 한편, 숲속에 숨어 있던 화일로는 그들의 싸움이 점입가경에 접어들자 히죽 웃으며 몸을 날려 장내를 떠나갔다. 그는 이미 하조천은 정구살의 상대가 되지 못해 한바탕 호되게 당할 것을 짐작했던 것이다. 나중에 들리는 말로는 하조천은 이때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이 부러지는중상을 입은채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도망쳤고, 풍운보에서는 거의 백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 정구살은 그것으로도 분이 안풀려 풍운보의 보내에 뛰어들어 건물이란건물은 모두 박살을 내고 나중에는 불까지 지른 다음 그 불에 옷을 말렸다고 한다. 결국 하조천은 풍파무쌍 화일로를 잘못 건드려 패가망신(敗家亡身) 당하고 자신도 병신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第 十一 章 下>------------------------ 第 12 章 은자 한냥 낙양의 중앙대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일리쯤 걸어가면 한채의 고색창연한 건물이 나타난다. 그 건물은 겉에서 보기엔 마치 덕망 높은 문중의 사당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경험이 있는 자라면 이곳이 사당이 아니라 도박장이란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부근 오백리 이내에서 규모가 제일 큰 도박장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이 건물의 내부는 겉에서 본 것과는 달리 호화스럽고 또한 재미가 있었다. 휘황찬란한 등불이 밝혀져 있는 대청안에는 서너 발자국 간격마다 커다란 밥그릇 모양의 해완이 놓여 있었다. 해완 주위에는 마치 쓰레기통에 모여든 파리떼같이 도박꾼들이 우글우글했다. 주사위가 굴러가는 매혹적인 음향에 따라 열을 올리는 도박꾼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는 도박장을 소란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주사위가 멈추기만 하면 사방은 쥐죽은 듯 잠시 고요가 감돌다가 이내 득의의 웃음 소리와 투덜대는 소리가 또다시 시끄럽게 들리곤 했다. 계단을 올라서면 더욱 흥미롭고 신비스러운 장면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골패(骨牌)라고 하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 모두 다섯대의 도박대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한가운데 있는 도박대에 사람이 제일 많이 모여 있었다. 물주를 잡고 있는 사람은 붉은 얼굴에 눈에서 푸르스름한 광채를 내뿜는 사나이였다. 안색이 붉은 사나이는 억세게 재수가 좋은지 아니면 손속이 좋은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앞에는 은자가 높이 쌓여 있었다. 그의 옆에는 두 명의 조수가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외쳐대고 있었다. [자, 어서 걸으시오. 자, 어서요. 어서......!]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슬슬 눈치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선뜻 은자를 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 여러 사람이 몇차례씩 은자를 잃은 모양이었다. 두 명의 조수는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걸지 않겠다면 이만 걷어치우고 가겠소.] 이 다부진 한 마디의 뇌까림은 과연 교과가 있었다. 은자를 잃은 사람들은 물주가 물러나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이다. 위협적인 한 마디의 뇌까림에 주위의 사람들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서로 앞으로 다투어 은자를 걸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도박대 위엔 다시 은자가 그득히 쌓였다. 두 명의 조수들은 그제서야 만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물주의 눈가에도 의미심장한 미소가 맴돌았다. 물주를 잡고 있던 얼굴색이 붉은 사나이는 두 개의 주사위를 수중에 쥐고는 비비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이렇게 외쳤다. [이번에도 몽땅 내 것이구나!] 주사위가 물주의 손에서 벗어나 떼굴떼굴 굴러가더니 이내 멈췄다. 하나는 이점, 다른 하나는 삼점, ** 죄송스럽게도 여기서 한 페이지가 완전히 찢어져 나가 있어서, 그 냥 넘길수 밖에 없게 뻍네요. ..별다른(?) 내용도 없는데 왜 찢었는지.. 굵은 것은 점수가 많은 것을 뜻하며 가는 것은 점수가 적은 것을 뜻하는 은어(隱語)였다. 상문의 다른 골패를 쥐고 있는 사람은 골패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살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궁금해 못견디겠다는 듯이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됐소? 굵은가, 아니면 가느다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 사람은 골패를 확인하자 이내 안색이 노랗게 변한채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그는 골패를 도박대 위에 집어던졌다. 두점이었다. 그러니 다른 한쪽의 골패가 여덟점이나 아홉점이니 상문의 끝 수는 겨우 한끝이나 아니면 영이 되는 셈이다. 이때 상문에 은자를 건 사람중에 하나가 크게 외쳤다. [아직 모른다, 더 두고보자.] 만약 물주가 영이 된다면 한끝으로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상문에 은자를 건 사람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이밖에 천문, 하문도 골패를 젖혔으나 천문은 네점, 하문은 한점이었다. 물주는 신이 나는 듯 익숙한 솜씨로 골패를 젖히며 크게 외쳤다. [이얏! 다섯 점만 나와라!] 골패가 젖혀지자 하나는 열점, 다른 하나는 다섯점, 합해서 끝수는 다섯점이 되었다. 물주는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으하하하...... 감히 덜빌 것이냐?] 조수들은 희희낙락하여 도박대위에 놓여 있는 은자들을 송두리째 물주앞으로 끌어모았다. [이에 제기랄......]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누구 하나 자리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자, 도 거시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핀채 머뭇거렸다. 바로 이때 꼬질꼬질한 손때가 묻은 은자 한냥이 도박대위에 떨어졌다. [이 돈을 몽땅 천문에 걸겠네.] 중인들 틈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겨우 은자 한 냥을 걸면서 마치 거금(巨金)이나 되는 듯한 음성에 중인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다음 순간, [와하하......!] 중인들 틈에서 요란한 폭소가 터져나왔다. 잔뜩 늘어서 있는 사람들 틈을 기를 쓰며 뚫고 들어오려는 인물은 실로 우스꽝스럽게 생긴 괴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키가 오척도 안되는 작달막한 노인이었는데 손에는 무려 칠척이나 될 듯한 긴 담뱃대를 쥐고 있었다. 괴노인의 키는 엄밀히 말하면 오척도 안된다고 하기보다 사척이 조금 넘어 보인다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 정도로 아주 작았다. 그 괴노인은 다 해진 장삼을 입고 그 위에다 검은색 비단 마고자를 걸치고 있었다. 검은색 비단 마고자는 고급품에 속해 보였으나 벌써 십년전에 벗어 던졌어야 할 정도록 다 떨어지고 해진 것이었다. 어찌나 많이 해졌는지 지금은 양쪽 소매가 없었으니 억지로 마고자로 인정해 줄 수 있을 정도의 헌 옷이었다. 하지만 머리에 쓰고 있는 차양이 없는 동그란 모자는 매우 산뜻한 것이었다. 꼭대기에 달린 모자방울은 한 알의 앵두 같았고, 산 지 얼마되지 않은듯 신품이었다. 그 모자가 너무 산뜻한 까닭에 다 떨어진 마고자나 장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매우 어색해 보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광대를 연상케 할만큼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괴노인이었다. 게다가 노인의 얼굴을 보면 그야말로 희극(喜劇)중의 희극을 보는 듯 했다. 조붓하고 길다란 얼굴, 유달리도 큰 딸기코가 얼굴의 삼분의 이나 되는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볼품없는 뻐드렁니가 드러나 있어 그야말로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다. 양쪽의 얇고도 삐쭉한 귀는 뒤로 바짝 쳐져 있어 정면에서 보노라면 보이지가 않았다. 한 쌍의 귀와 대조적인 조화를 이루는 유난히 작은 두 눈은 도대체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만이 그가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일 때 눈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생김새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으스대는 걸음걸이는 어느 고관의 자세를 흉내내고 있으니 중인들의 폭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고 남았다. 괴노인은 도박대의 앞으로 와서 수중에 들고 있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담뱃대로 도박대를 두들기며 소리쳤다. [빨리 주사위를 던지게. 노부는 시간이 없단 말일세. 시간이......] 물주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노인을 보고 있다가 쓴 웃음을 떠올렸다. [누구 더 걸 사람은 없소?] 사람들은 괴노인의 출현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터라 누구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괴노인은 사방으로 침을 마구 튀기며 떠들어댔다. [자네는 괜히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어서 주사위나 던지게. 설마 노부의 전 재산인 이 밑천이 너무 적다고 안된다는 것은 아니겠지?] 물주는 한번 더 중인들을 쓸어보다 모두 구경만 할 셈인 것을 보고 약간 망설이는듯 하더니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좋소!] 그는 겨우 한 냥을 먹기 위해 판을 벌려야 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이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는 여덟 점이 나와서 짝수이기 때문에 괴노인이 먼저 골패를 집어들었다. 괴노인은 부들부들 떨며 골패를 손에 쥐고는 마구 상하로 흔들며 중얼거렸다. [제발...... 아홉점이다...... 아홉점!] 괴노인은 중얼중얼거리다가 떨리는 손으로 골패를 살짝 뒤집었다. 순간, [푸하하하......!] 잔뜩 기대어린 표정으로 골패를 주시하던 중인들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두개의 골패중 하나는 다섯 점이고 하나는 일곱점이었다. 그러니 모두 합해도 단지 두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본 물주는 조소를 떠올리며 아무 골패나 두개를 집어 활짝 펼쳤다. [아무렇게나 해도 너덧 점은 나을 것이다.] 첫번째 골패는 두 점이 나왔다. 두 점이 나왔으니 여덟점이나 아홉점이 나오지 않는 한 괴노인의 전 재산인 은자 한냥은 물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물주는 자신에 찬 표정으로 또 다른 골패를 뒤집었다. 헌데 뜻밖에도 그것은 아홉점이 아닌가? 결국 물주의 끝수는 한 점에 불과해 노인이 승리한 것이다. [와...... 노...... 노부가 이겼다! 내 전재산이 순식간에 두배가 되었구나!] 괴노인은 경련까지 일으키며 환성을 질렀다. 물주는 재수가 옴붙었다고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괴노인을 꼬나보았다. [노인장, 재산이 불어났으면 그만 가지고 가시는게 어떻겠소?] 그깟 두 냥은 벌어도 그만 잃어도 그만이니 귀찮은 노인을 떨쳐버리려는 속셈이었다. 괴노인은 양 손에 은자 한 냥씩을 쥐고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그 말을 듣자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음...... 이대로 갈까? 아니야...... 오늘 일진을 보니 재운(財運)이 철철 넘친다고 했는데 한번 더 전재산을 걸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벌려봐?] 중인들은 작달막한 키의 노인이 양손에 은자를 한냥씩 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너무도 우스워 킥킥거렸다. 괴노인은 한동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고민에 잠기더니 굳은 결심을 한듯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좋아! 대장부로 태어나서 이대로 물러설 수야 없지. 이보게 젊은이, 노부는 한판 더 별려야겠네.] 괴노인은 흡사 생사(生死)를 결정한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두냥의 은자를 다시 천문에 탁 놓았다. 물주는 절로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허나 돈을 건 사람이 있으니 판은 벌려야 하는 것이 도박장의 규칙이었다. 물주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서들 더 거시오.] 허나 사람들은 이번에도 구경만 할 심산인지 아무도 돈을 거는 사람이없었다. 할 수 없이 물주는 두 냥의 은자 때문에 다시 주사위를 집어들고 아무렇게나 던졌다. 이번에는 다섯점이 나와 물주가 먼저 골패를 집게 되었다. 물주는 두개의 골패를 집어 패를 확인하더니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 이제야 말로 저 늙은이는 알거지가 되었구나.) 그는 자신에 찬 표정으로 두개의 골패를 뒤집었다. 하나는 삼점, 다른 하나는 오점, 끝수는 도합 여덟점이나 되었다. 이 점수는 거의 필승(必勝)의 점수였다. 중인들 틈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쯧...... 쯧......] 괴노인은 거의 울상을 하고 몸을 떨었다. [아이고...... 망했구나...... 망했어! 이것으로 난 쫄딱 망하게 생겼구나.] 괴노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개의 골패를 집어들었다. 하나의 골패를 까니 십점이었다. 따라서 두번째 골패의 점수가 바로 노인의 끝수가 되는 셈이었다. [제발...... 제발......] 괴노인은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하나 남은 골패를 떨리는 손으로 뒤집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아홉점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야아......!] 사방에서 놀란 감탄이 튀어나왔다. 노인은 입이 딱 벌어진 채 눈을 까뒤집었다. 아마 뒤에 있는 사람들이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벌렁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내...... 내 전재산이 무려 네 배나 되었구나. 난 이제 부자다!] 중인들은 이것을 보고 껄껄거렸고, 물주는 떫은 감을 씹은 듯 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빌어먹을 놈의 늙은이! 운도 억세게 좋군.) 난생 처음(?)으로 수중에 네냥의 은자를 쥐게 된 괴노인은 실감이 나지 않는듯 은자들을 일일히 손으로 쓰다듬고 이빨로 깨물어보고 하며 수선을 피웠다. 물주는 은근히 약이 오르고 화가 치밀어서 괴노인을 보며 말했다. [한판 더 운을 시험해 보지 않겠소?] 괴노인은 그 말을 듣자 작은 두 눈을 번쩍 떴다. [한판 더?] 괴노인은 회가 동한 듯 곰곰히 생각하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아무래도 오늘 노부가 재신(財神)을 만난 것 같으니 놓치면 언제 거금을 손에 넣어 보겠나] 이렇게 해서 물주와 괴노인은 다시 한번 더 골패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물주가 삼점이 나오고 괴노인이 일곱점이 나와 다시 괴노인이 승리를 했다. 연거푸 세판이나 승리를 하자 괴노인은 도박에 완전히 빠져들었는지 망설이지도 않고 계속 전 재산을 걸고 판을 이어나갔다. 물주 또한 약이 바짝 올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계속 골패를 던졌다. 순식간에 열판을 계속 했다. 그 결과는 십전십패(十戰十敗), 물주가 몽땅 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산같이 쌓아 놓았던 물주의 은자는 반밖에 남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괴노인의 앞에 쌓이게 되었다. 중인들은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 한냥의 은자만을 달랑 가지고 왔던 괴노인이 어느새 천냥이 넘는 돈을 따게 된것이다. 괴노인은 입을 함지박막하게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의 앞에 쌓아져 있는 은자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주는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괴노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빠...... 빨리 거시오!] 이제는 오히려 그가 다급해져서 노인에게 빨리 돈을 걸라고 성화를 했다. 괴노인은 히죽 웃으며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무 서드르지 말게, 이번에도 패한다면 자네는 알거지가 될텐데 그 래도 괜찮겠나?] 물주는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건 상관할 필요가 없소! 어서 돈이나 거시오! 설마 이대로 물러나려는건 아니겠지?] 그의 기세는 자못 흉흉하기조차 했다. 괴노인은 겁먹은표정으로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닐세. 노부의 운은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어찌 그냥 물러가겠나? 몽땅 천문에 걸겠네.] 물주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급히 주사위를 던졌다. 여섯점이 나와 물주가 먼저 골패를 집게 되었다. 물주는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손을 들어 두개의 골패를 집었다. 골패를 뒤집는 그의 손끝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만큼 확연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나의 골패는 이점이 나왔다. 물주의 눈에는 벌건 핏발이 섰고, 관자놀이에는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은 하나의 골패를 뒤집었다. [아......!]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가 뒤집은 골패는 여섯점이었다. 따라서 그의 골수 합계는 모두 여덟점이었다. 평상시라면 물주가 여덟점을 잡았을 때는 거의 물주의 승리가 확실하게 된다. 허나 지금 물주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긴장과 불안의 표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이...... 이제 노인이 집으시오.] 괴노인은 히죽 웃으며 아무렇게나 두개의 골패를 집어들고 훌러덩 뒤집었다. 순간, [와아...... 아홉점이다!] 중인들은 장내가 떠나갈 듯한 환호성과 함성을 내질렀다. 괴노인이 펼친 골패는 다섯점과 네점, 도합 아홉점이 나왔던 것이다. [헤헤...... 정말 미안하네. 노부가 또 이겼군!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했으니 자네는 너무 상심하지 말고 다음 기회를 노리도록 하게. 자네는 아직 젊으니까 언제 재신이 찾아올지 모르는 일 아닌가?] 괴노인은 입을 찢어져라 벌리며 황급히 물주의 앞에 놓인 은자더미를 두 팔로 가득 안은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척! 손 하나가 괴노인의 어깨에 얹혀졌다. 마디가 굵고 솥뚜껑만한 손으로써 손등엔 시퍼런 힘줄이 돌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네 손가락의 길이는 똑같고 손톱은 보이지 않았고 손바닥은 굳은살로 뭉쳐져 있었다. 설사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손의 주인은 다년간 철사장(鐵沙掌) 종류의 무공을 연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매를 맞아보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손에 맞으면 뼈가으스러지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웃음소리와 환호섬, 갈채는 일순간에 사라졌다. 손의 주인은 바로 물주였던 붉은 얼굴의 사나이였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범이 되어 있었으나 분빛은 이상하리만큼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는 괴노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것은 가죽만 움직이고 살은 움직이지 않는 그런 웃음이었다. [노인장의 성은 뭐요?] 괴노인은 물주에게 어깨를 잡히고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노부의 성은 복성(復姓)으로 남궁(南宮)일세.] 물주는 고개를 억지로 두어번 끄덕거렸다. [음, 남궁노인이었구료. 내 성은 손(孫)이라 하며 남들은 모두 나를 철파장(鐵巴掌)이라고 부르오.] 괴노인은 여전히 덤덤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런가? 지금까지 계속 자네와 도박을 했으면서도 아직 자네의 성도 물어보지 않았다니 미안하네. 헌데 도박은 이제 끝난 것 같은데 노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철파장은 징그럽게도 마치 속삭이듯 일부러 음성을 낮추었다. [남궁노인과 밖에 나가 얘기를 하고 싶소.] 괴노인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겐가?] 철파장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아무 얘기라도 좋소.] 괴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그의 청을 승낙했다. [좋네. 노부는 몇 판만 더하고 나갈테니 우선 밖에 나가 기다리도록 하게.] 철파장의 얼굴은 드디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금 나갔으면 좋겠소.]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괴노인의 어깨에 얹혀놓은 손에도 힘을 주게 되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괴인인을 위해 손에 식은땀을 흘렸다. 철파장은 낙양 일대에서 악명이 자자한 흉인(凶人)이었다. 특히 그의 별명처럼 손바닥 무공이 고강해 그의 손에 걸리게 되면 어깨가 으스러지지 않더라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괴노인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입가엔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만약 지금 꼭 노부하고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하도록 하게.] 철파장의 안색은 급기야 흉악하게 번하며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순순히 말할 때 따라오지 않고 꼭 내가 늙은이의 정체를 밝혀야만 되겠느냐? 늙은이가 만약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열두판을 연거푸이길 수가 있단 말이냐? 나는 십년이 넘게 골패를 했지만 아직 다섯판 이상을 계속 이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괴노인은 화를 내지도 않고 히죽 웃었다. [그건 자네의 견문이 짧아서 그렇네. 노부의 제자는 연거푸 스물두판을 이긴 적도 있다네. 그리고 노부는 오늘 일진이 더없이 좋아 이긴 것이니 자네는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네.] 철파장은 우악스럽게 외쳤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스물두판을 계속 이기는 사람이 천하에 어디있느냐?] 버럭 외치며 그는 솥뚜껑만한 손을 들어올려 괴노인의 얼굴을 향해 후려쳤다. 그러나 그는 괴노인의 얼굴을 격중시키지 못했다. 그의 몸뚱아리가 이미 멀미 날아갔기 때문이다. 괴노인은 살짝 그의 손목을 낚아 잡아 마치 주사위를 던지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떨쳤는데 철파장은 열댓명의 머리위를 가로질러 날아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둥에 머리를 쳐박았다. 쿵! [크악!] 그 즉시 그의 머리통은 붉은 혈화(血花)가 피었다. 도박장안에 있던 중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도대체 괴노인이 무슨 수로 철파장을 공깃돌처럼 간단하게 던져버렸는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괴노인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품속에서 하나의 마대자루를 꺼내 도박대위에 쌓여 있는 수북한 은자들을 주워담았다. 은자들은 모두 삼천냥이 넘어보였다. 은자 백냥이면 오인 가족이 일년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돈이었으니삼천냥이라면 실로 대단한 액수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거금(巨金)을 불과 몇시진만에 그것도 단돈 한냥만을 달랑 가지고와서 따갔다는 것은 실로 드물게 보는 기문(奇聞)이었다. 괴노인은 은자가 가득 담긴 마대자루를 어깨에 짊어진 채 중인들의 부러움과 경이에 가득찬 시선을 받으며 도박장을 벗어났다. --------------------------<第 十二 章>--------------------------- 第 13 章 局主의 毒計 이날 황혼 무협, 낙양의 남문(南門) 큰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대통표국의 입구에 한 명의 괴노인이 나타났다. 괴노인은 어깨에 커다란 마대자루를 메고 있었는데 대통표국의 정문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큰 마음을 먹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앉아있던 서기(書記)는 괴노인을 보자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는 얼마전에 우연히 도박장에 갔다가 괴노인이 삼천냥이라는 거금을 단돈 한냥으로 따는 기막힌 광경을 보았던 것이다. 서기는 괴노인을 대청으로 안내한 후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들어가 국주인 금응검(金鷹劍) 조일기(曹一騎)에게로 가서 괴노인에 대한 것을 말해주었다. 금응검 조일기는 괴노인이 삼천냥이라는 거금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철파장을 단 일초에 쓰러뜨릴 만큼 고강한 무공을 지닌 기인(奇人)이라는 것을 전해듣고 급히 대청으로 달려갔다. 괴노인은 마대자루를 꼭 끌어안은채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조일기가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조일기는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본인이 표국을 맡고 있는 금응검 조일기입니다. 노인장께선......] 괴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가로챘다. [쓸데없는 잔소리는 집어치우고 이 표국에 믿을만한 표사가 몇 명이나 있는지 말해보시오.] [표사요?] [그렇소. 다는 필요없고 그중에서 가장 무공이 고강하고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자들만 말하시오.] 조일기는 내심 의아하기 짝이 없었으나 잠시 생각해 보고는 말했다. [본 표국에는 모두 열두명의 정표사와 스물네명의 부표사가 있습니다. 허나 그중에서 가장 무공이 고강한 사람은 총표사인 삼살장(三殺杖) 막동(莫東)이고 그외 정표사인 다정마도(多情魔刀) 위현(魏玄)과 벽력장(霹靂掌) 엄패(嚴覇)의 무공도 일류급입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은부표사인 백호리(白狐狸) 종흠(鐘欽)인데 무공은 좀 떨어지지만 눈치가빠르고 지혜가 뛰어나 아주 쓸모가 많습니다.] [그렇소? 그럼 지금 그들 네 사람을 어서 부르시오.] 금응검 조일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안고 계신 은자더미를 저희들더러 운반해 달라는 말씀이시지요? 헌데 어느 곳으로......] 괴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 늙은이는 성격이 좀 괴팍해서 재물을 절대로 남의 손에 맡기지 않소. 더구나 이 어마어마한 재물을 당신들에게 배상해내지 못할지도 모르오.] 조일기는 내심 얹짢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럼 무슨 일로......] [당신들더러 보호해 달라는 것은바로 이 늙은이 자신이오.] 조일기는 서기에게서 괴노인이 철파장을 단 일초에 쓰러뜨렸다는 말을 전해들었기 때문에 피식 웃었다. [노인장께선 농담도 잘 하시는구료.] 괴노인은 눈을 부라렸다. [농담이라니...... 당신은 이 낙양땅이 태평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소?] [말은 그렇지만 노인장께 감히 어느놈이 엉뚱한 짓을 하겠소이까?]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요. 호랑이도 졸 때가 있다는 말을 모르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이 많은 은자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놓고 객점에 묵을 용기가 있겠소?] [그렇다면 노인장의 뜻은 저의 표국에서 하루 이틀 묵고 가겠다는 것이 아니외까?] [그렇소. 하룻밤을 묵는데 은자 열냥을 드리겠소. 술과 안주값은 별도로 계산하고......] [별 말씀을 다 하시오. 노인장같은 고객은 초청을 해도 안 오실 분인데 노인장께서 몸소 표국에 왕림해 주셨으니 이것은 본 표국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은자 얘기부터 꺼내시면 오히려 저희들 입장이 어떻게 되겠소?] 괴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까 말한 네 사람은 모두 안에 있소?] [예. 모두있소이다. 노인장께선 무슨 술을 즐기시오?] [아무거나 가지고 오시오. 온종일 노름을 했더니 정말 피곤하구료. 우선 깨끗한 방이나 준비해 주시오.] [알겠소이다.] 잠시 후, 국중(局中)의 네 표사가 부름을 받고 달려왔다. 그들은 이미 서기의 말을 듣고 괴노인이 자신들을 부른 이유를 짐작하고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괴노인은 네 사람을 쓸어보고 나서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는지 표국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한 사람에게 삼천냥의 은자가 생긴다면 한바탕 즐겨야 한다고들 생각지 않소?] 네명의 표사가 괴노인의 말을 듣고 조금 불쾌했으나 표국생활을 오래한 노련한 인물들답게 전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금응검 조일기는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종흠, 자네가 가서 방을 깨끗이 정리해 놓았는지 보고 오게. 이분 노인께선 아까부터 피곤하시다고 하니 빨리 정리하라고 이르게.] 백호리 종흠은 머리를 조아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괴노인이 길게 탄식을 했다. [정말 불쌍한 일일세. 이 늙은 것이 방금 말한 뜻은 편안하게 한잠 푹잤으면 하는 것이었네. 은자가 없을 때는 벼락부자가 되기를 그렇게도 바랐는데 막상 은자가 많아지고 보니 더욱 고생이 되는군 그래. 아...!] 조일기가 웃으며 말했다. [노인장께선 쓸데없는 근심을 하고 있소이다. 노인장께서 도박장에서 보여주는 한 수(수)로 이미 낙양땅에서 노인장을 만만히 보는 사람은 없소. 게다가 본 표국의 네명의 표사들이 노인장을 안전한 곳까지 호위해 드린다면 천하의 어느 누가 노인장에게 허튼 수작을 부릴 수 있겠소?] 괴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네.] 이때 한 하인이 들어와 조일기에게 보고를 했다. [국주님, 술과 안주는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조일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괴노인을 뒤뜰에 있는 넓은 객청으로 안내하고 상석(上席)에 모셨다. 삼살장 막동, 다정마도 위현, 벽력장 엄패, 조일기 등은 양쪽에 각각앉았다. 괴노인은 좌석을 둘러보고 나서 물었다. [종흠이란 분은?] 조일기가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우리 종표사는 항상 무슨 일이든지 직접 처리하기를 좋아하지요.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마음을 놓을 수없다는 겁니다.] [사람이란 마땅히 그래야지.] 조일기는 말을 이었다. [정리를 끝내면 곧 올 것이오. 기다릴 필요 없소이다. 자, 제가 한잔 올리겠소이다.] 괴노인은 돌연 손을 내저었다. [가만, 가만...... 이 안주들은 모두 깨끗하오?] 조일기는 일순 어리둥절하다가 웃음을 띄며 대답했다. [그 점만은 안심하셔도 되오. 어찌 깨끗하지 못한 음식을 귀빈을 대접하는 상에 올려놓을 수 있겠소이까?] [이 늙은이가 말하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의미는설사 불결하다 해도 기껏해야 배탈이 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냐 하는 것이오.] 그제서야 조일기는 괴노인의 말뜻을 알아듣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안주속에 독(毒)이 들어 있을까봐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런 의심을 하면 안되나?] 조일기는 내심 못마땅하기 그지 없었으나 억지로 미소지었다. [노인장께선 농담도 잘하시오.] 괴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농담? 물론 듣기에는 농담 같겠지만 이 늙은 것은 좀 더 살고 싶소.] [그럼 어떻게 해야만 안심하시겠소?] [당신이 먼저 모든 안주를 한입씩 시식(試食)해 보시오.] 조일기는 울화통이 치밀었으나 하는 수 없이 젓가락을 들어 모든 안주를 한입씩 시식을 해보였다. 괴노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떫은 표정을 짓고 있는 조일기에게 말했다. [됐소. 이젠 술을 권해도 되오.] 조일기는 울화통이 가슴을 찢고 터질 지경이었으나 억지로 참았다. 본래 강호 경험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담력이 작아지는 법이다. 그는 강호의 경험이 아주 풍부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은자를 버는가를 잘 알고 또한 어떻게 하면 목숨을 오래 보존하는가도 알고 있었다. 부자(富者)가 되는 방법은 매우 많으나 목숨을 보존하는 길은 단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인내(忍耐)! 즉 참을 수 있으면 참고, 참을 수 없는 일도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곧 웃음을 지으며 아무일 없었던 양 말했다. [좋소이다. 제가 한잔 올리겠소이다.] 이런식으로 서로 권하고 올리고 해서 몇순배 돌아가자 어느새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화기가 감도는 가운데 술을 들다가 괴노인이 갑자기 물었다. [다른 한분은 어째서 아직도 오지 않소?] 조일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 볼까요?] [그렇게 하시오. 방 하나 정리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빨리 하라고 분부하시오.] 조일기는 총총히 자리를 떠나 뜰로 나왔다. 그때 갑자기 후원으로 통하는 복도 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흠!] 조일기는 사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날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종흠, 자네인가?] [네, 접니다.] 어둠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바로 백호리 종흠이었다. [다른 표사들은 어떻게 했나?] [소인이 돈을 줘서 밖에 나가 술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의심을 안할까 모르겠군.] [안할겁니다. 소인이 그들에게 저 늙은이가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국주께서 무슨 사고가 생길까봐 나가라고 했다고 말했더니 그들은 혼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버렸습니다.] [밖의 상황은 어떤가?] [그 늙은이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자 다시 대화가 계속되었다. [그 물건은 준비되었나?]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조일기였다. 종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비됐습니다.] 대답하는 종흠의 음성은 약간 흥분으로 들뜬 감이 있었다. [국주께선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드신게 아닙니까?] 조일기는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네. 그 늙은이는 정말 약은 놈일세.] [그럼 그 늙은이가 벌써 눈치를 챘습니까?] [아직은......] [그렇다면 국주께선 무엇을 꺼리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늙은이를 건드리기가 꺼림칙한 것 같네.] [하지만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습니다. 더군다나 은자 삼천냥이면 저희 표국에서 십년 동안 꼬박 일을 해도 벌 수 있을지 모를 큰 돈이 아닙니까?] 조일기는 마침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결과가 어떻게 되는 간에 한번 부딪쳐보세.] [두번째 주전자술에 타는 것이 어떨까요?] 조일기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았다. [안돼, 절대로 안돼!] [어째서요?] [그 늙은이는 음식물을 하나 하나 다 조사했다네. 술에 독을 탄다 해도 그의 눈을 속여 넘기지 못할 것이네.] [그럼 어떻게 하지요?]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세.] 종흠은 눈쌀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있다가 손뼉을 탁 쳤다. [아참! 한가지 일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무슨 일인데......?] [내일 아침 저 늙은이가 보이지 않아 모두들 물어보면 국주께선 어떻게 대답하실 작정이십니까?] 조일기는 징그럽게 웃었다. [그거야 쉬운 문제가 아닌가?] [소인은 잘 모르겠는데요?] [이러면 되지 않는가? 자네가 모른다고 하고 나도 모른다고 하면 어느누가 알겠느냐 하는 말이네.] 종흠은 기쁜 듯이 웃었다. [그렇군요. 그건 매우 간단한 문제군요. 모두들 필시 그 늙은이가 공짜 술을 퍼마시다가 밤중에 도망간 걸로 생각할 겁니다. 저 늙은이가 원래부터 괴짜니까 모두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아참! 한가지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조일기는 귀가 번쩍 뜨이는지 급히 물었다. [무슨 방법인가?] 종흠은 뽐내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엽차에다 타는 겁니다.] 조일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술에다 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아닙니다. 소인의 뜻은 엽차에다 독을 타라는게 아니고 찻잔에다 독가루를 바르자는 겁니다. 늙은이가 제아무리 약다고 해도 찻잔에 독이 묻어 있으리라고는 아마 꿈에도 생각치 못할 것입니다.] [음, 그 방법이 꽤 쓸만하군.] [소인에게 또 한가지 묘안이 있습니다.] [무슨 묘안?] [조금 있다가 두개의 찻잔이 들어가면 가루약이 묻은 찻잔을 주인어른께서 쓰시라는 겁니다.] 조일기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라고? 자네 미쳤나?] [소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인의 진정한뜻은 그 늙은 귀신이 술을 들었으니 필경 차를 마시려고 할 겁니다. 그러나 그때 안심을 하지 못해 혹시 주인어른과 찻잔을 바꾸자고 할지도 모른다는 얘깁니다.] [만약 그가 찻잔을 바꾸지 않는다면?] [먼저 해약(해약) 한 알을 입에 물고 계십시오.] 그제서야 조일기는 얼굴을 활짝 펴며 종흠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매우 좋은 생각이네. 종흠, 자네의 두뇌는 정말 비상하군.] 종흠은 그의 칭찬을 받자 크게 기뻐했다. [뭘료.] [아뭏든 나에겐 자식이 없으니 장차 모든 재산은 전부 자네에게 넘겨줄 수 것인즉 나를 위해 힘을 좀 기울여 주게. 이제 가보게.] 복도에서 두 사람은 갈라졌다. 종흠은 뒤뜰로 가버렸고, 조일기는 다시 괴노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괴노인은 그가 돌아온 것을 보자 곧 물었다. [방은 정리해 놨소?] 조일기는 얼른 대답했다. [예, 정리되었소이다.] [그런데 종흠이란 분은 왜 여태껏 오지 않는거요?] 조일기는 생각해 둔 것이 있기 때문에 서슴없이 대답했다. [나갔소이다.] 괴노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갔다니요?] 조일기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성안의 몇집 객점에 들려 봐서 거동이 수상하거나 의심할만한 사람이 없는지를 살폅보고 노인장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 노인장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볼 겸해서 나갔소이다.] [과연 세심한 사람이군.] 괴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일기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노인장, 술을 더 드시겠소?] [아니, 관두시오.] [그럼 엽차는?] [엽차는 안 마실 수 없지. 하지만 좋은 것으로 해야 하오. 이 늙은이는 세가지만 마신다오. 용정(龍井), 철관음(鐵觀音), 작설(雀舌)이오.] 조일기는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이 사람도 항상용정차만 마셔왔기에 며칠전에 두 근(斤) 사둔 것이 있소이다. 차를 여기서 마시렵니까, 아니면 노인장의 방에서 마시렵니까?] 괴노인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방으로 보내 주시오.] 조일기는 삼살장 막동, 다정마도 위현과 벽력장 엄패등 세 사람에게 분부했다. [자네들은 물러가서 차를 끓여서 뒷방에 보내드리라고 전하게. 그리고 자네들은 먼저 가서 휴식을 취하고 당번 차례를 기다리게. 막동은 삼경에서 사경까지 책임지고, 위현은 사경에서 오경까지 책임지도록 하게. 그리고 그 이후에는 엄패가 책임지고 나와 종흠은 숙직방에서 대기할 테니까 일이 생기면 곧 깨우게.] 괴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의 말을 했다. [매우 훌륭하오. 정말 세심하고 빈틈이 없소이다.] 삼살장 막동등 세 사람이 물러가자 금응검 조일기는 몸소 초롱불을 들고 괴노인을 가운데 뜰 옆에 자리잡고 있는 객방으로 인도했다. --------------------------<第 十三 章>--------------------------- 第 14 章 기절초풍 잠시 후, 백호리 종흠이 쟁반 하나를 받쳐들고 괴노인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엽차 두 잔을 따라서 괴노인과 조일기 앞에다 놓은 뒤 공손히 예를 올리고물러나갔다. 조일기가 찻잔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자, 차를 드시지요.] 괴노인은 찻잔을 들고 차의 빛깔을 자세히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입가로 가져갔다. 조일기는 그것을 보자 속으로 혀를 찼다. (아뿔사, 이젠 틀렸군!) 허나 괴노인은 찻잔을 입에 대려다 말고 갑자기 손을 멈추더니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조일기는 짐짓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넌지시 물었다. [왜, 차맛이 이상하오?] 괴노인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찻잔을 살펴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조일기의 손에 있는찻잔을 힐끗 보더니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우리 차를 바꿔 마실 수 없겠소?] 조일기는 쓴웃음을 지으며 탄식조로 말했다. [참, 노인장도 의심이 지나치게 많군요.] 말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찻잔을 넘겨주고 이어 괴노인의 찻잔을 가져왔다. 괴노인은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 늙은 것이 오늘날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별다른 비결이 있어서가 아니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신중을 기하면서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오. 천하에는 별의별 약물이 다 있어서 개중에는 색깔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는 독약도 있다오. 거기에 대해 적당한 예방책으로 바로 상대방과 차를 바꿔 마시는 거요. 당신도 앞으로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요.]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조일기를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나서 찻잔을 입가에 갖다대고 입으로 훅훅 불어서 열기를 좀 식힌 다음 한방울도 남김없이 단숨에 마셔버렸다. (이젠 됐다!) 조일기는 속으로 탄성을 토해냈다. 그는 괴노인이 차를 마시는 동안 손에 식은 땀을 쥐고 있었다. 그 까닭은 종흠이 차에 탄 독의 분량이 알맞는지, 또 만약에 독성(毒性)이 발작하기도 전에 발각된다면 어떻게 할가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러가지 생각이 잇달아 떠오르는 사이에 두 손이 미미하게 떨려왔고,마음이 긴장되었다. 갑자기 조일기는 몰래 눈길을 돌려 방문쪽을 훔쳐보았다. 만일에 무슨 불히한 변화가 생긴다면 방문을 박차고 도망갈 준비를 해두려는 속셈이었다. 이때 괴노인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숨을 길게 내신 후 입술을 빨면서칭찬을 했다. [과연 좋은 차로군.]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그는 오만상을 무섭게 찡그리며 갑자기 두 손으로 가슴패기를 쥐어뜯었다. [으으윽......!] 이어 고개를 맥없이 옆으로 떨구고 두 눈이 새하얗게 뒤집어지는가 싶더니 두 손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쿵! 무척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괴노인이 쓰러지자 조일기는 그야말로 뛸듯이 기뻤다. 당장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그는 황급히 문쪽으로 뛰어나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불렀다. [종흠! 종흠!] 그러자 어둠속에서 종흠이 달려나왔다. 조일기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성공했네...... 성공했어! 자넨 문밖에서 지켜 서 있게. 내가 안에서 정리를 할테니까. 누가 오면 기침소리를 내게. 절대 당황하지 말아야 하네.] [알겠습니다.] 조일기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온 조일기는 먼저 창문의 휘장을 내린 다음 괴노인의 시체를 침상 밑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은자가 가득 담겨 있는 마대자루를 침상 뒤쪽 벽 앞으로 가지고 가서 기관단추를 눌러 비밀금고속에 감추어 놓고 다시 괴노인의 담뱃대를 몇 토막으로 부러뜨려서 품속에 감추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자 그는 그제서야 몸을 돌려 나직히 불렀다. [종흠, 들어오게.] 종흠은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나서 사방을 살펴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시체를 어디에 감추었습니까?] [침상 밑이네.] [은자꾸러미는요?] [시체와 함께 감추었네.] [그렇게 하면 안심할 수 있을까요?] 조일기는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침상밑에 두는 것이 적당치 않겠군. 그렇다면 다시 꺼내서 다른 곳에다 잠시 놔두는 것이 더 안전할 거야.] [잠시동안 소인의 방에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괜찮겠군. 바로 침상 밑에 있으니까 자네가 꺼내게.] 종흠은 곧 침상가로 걸어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손으로 침상밑을 더듬었다. 조일기가 다가서며 물었다. [찾았나?] 종흠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직 못찾았는데요. 도대체 어느쪽에 두었습니까?] 조일기는 다시 한걸음 다가서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저쪽으로 밀어 넣었는데...... 그렇지. 조금 더 아니...... 조금 더 와야지. 옳지, 됐어. 바로 거기야. 어때? 찾았나?] 종흠은 고개를 쳐들고 눈썹을 찌푸렸다. [아직 못찾았습니다. 이상한데......?] 조일기는 갑자기 두 눈에서 이상한 광채를 쏘아내며 말했다. [아직도 못찾았단 말인가? 저리 비키게. 밥통같이 그것도 못찾나? 내가 찾겠네.] 종흠은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군.] 순간, 꽝! 그는 뒤통수에 강맹한 일장을 얻어맞았다. [으윽!] 그의 머리통이 깨어진채 입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느닷없이 종흠의 뒤통수를 가격해 살해한 조일기는 그의 몸뚱이를 발로 걷어차서 침상밑으로 밀어넣은 다음 음흉하게 웃으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흐흐흐...... 네놈은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게야. 이 세상의 돈이 너무 탐스러운 것이 죄라면 죄지. 네 놈에게 적게 분해해주면 네 놈은 앙탈을 부릴 것이고, 그렇다고 많이 나누어 주면 내 마음이 아플게 아니냐?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속편하다.]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그는 등잔불을 꺼버리고 방을 나왔다. 이?날, 동녘이 튼지 얼마안되어서 조일기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양 세명의 정표사를 대동하고 담소를 하면서 가운데 뜰 옆에 있는 객방으로 갔다. 뜰에 이르자 조일기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것이 아닐까?] 삼살장 막동이 나서며 용감하게 말했다. [제가 먼저 가서 살피고 오지요.] 조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만약 그 늙은이가 아직도 자고 있다면 말이네. 한 사람이 남아서 지키도록 하고 우리들이 다시 오기로 하세.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짓으로 먹고 사는 한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참아야 한다는 것이네. 참을 수 있는데 까진 참아야지 결코 화를 내거나 해서는 안되네.] 막동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가운데 뜰을 지나 그는 빠른 걸음으로 객방을 향해 걸어갔다. 조일기는 위현과 엄패와 함께 뜰 입구에서 막동의 신호를 기다렸다. 막동은 디딤돌 위에 올라가서 방문을 열고 안을 힐끗 살펴보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이쪽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빨리 와 보라는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조일기는 태연한 신색으로 말했다. [아마 그 늙은이가 깨어난 모양이니 어서들 가보세.] 세 사람이 객방으로 가까이 갔을 때 돌연 막동이 방안을 향해 허리를굽혔다. [네, 네.] 그는 황급히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조일기는 크게 어리둥절하여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막동, 자네 누구와......] 그가 실언(失言)을 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무리 되고 말았다. 그는 지금 막동이 누구와 얘기하든 간에 그걸 물을 처지가 못되었다. 그때 막동이 몸을 돌려 쓴웃음을 지으며 조일기를 향해 말했다. [이분 노인장께서 담뱃대가 없어졌다고 하시면서 어제 여기에 누가 왔었느냐고 물으시기에 저는 어젯밤에 국주께서 제일 나중에 이 방에서 떠났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국주께서 혹시 담뱃대를 어디다가 보관해 두지않았느냐고 물으시는 거였습니다.] 순간 조일기는 쇠망치에 얻어 맞은 듯 머리가 띵해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다. 방안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혹시 밖에 있는 분은 조국주가 아니오?] 이 음성의 주인공은 분명히 괴노인이었다. 혼비백산하도록 놀란 조일기는 눈이 휘둥그래지고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면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는 벽력장 엄패가 몸을 살짝 떼밀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나직히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으음......] 이때 위현이 나직히 말문을 열었다. [상관없습니다. 설사 담뱃대가 파손되었다 하더라도 잘 이해하게끔 설명해서 배상해 주면 될게 아닙니까?] 이때 막동이 몸을 옆으로 비키자 괴노인이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벽력장 엄패와 다정마도 위현은 얼른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노인장,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괴노인은 거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도 잘 주무셨소?] 이어 조일기를 바라보았다. [국주께서 어젯밤 어제 내방을 떠났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정말 이 늙은이가 망녕이 들었나 보오. 이곳이 표국이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도둑의 소굴이었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겠소?] 조일기는 번개같이 빠르게 생각을 굴렸다. (일이 이쯤 됐으니 탈출한다고 해도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모든 것을 천명(天命)에 맡기자......) 이렇게 생각을 굴린 조일기는 마음을 가다듬고 즉각 포권의 예를 취했다. [노인장의 담뱃대와 은자꾸러미는 모두 잘 보관해 두었다가 곧 가지고 나올테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하는 조일기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무슨 기상천외(奇想天外)의 묘안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선 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조일기는 전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괴노인의 무공이 제아무리 심후하다 하더라도 독약을 먹은 이상 설사 독약이 아무런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해도 취기(醉氣)를 돋구었을 가능성이 짙었다. 또 금응검 조일기가 금응검이라는 외호를 얻게 된 것은 일신의 경공술(輕功術)이 남달리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지금 조일기와 괴노인의 사이는 대략 일장 다섯척 정도였다. 거기다가 위현과 엄패 두 사람이 중간에 끼어 있으니 진상을 모르는 그들이 한몫 끼어들어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도주할 수 있다. 조일기는 이런 생각을 머리속에 그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괴노인은 도리어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포권을 취하는것이었다. [고맙소이다.] 조일기는 일순 어리둥절해졌으나 빠르게 평온을 되찾고 후원을 향해 걸어가면서 생각을 굴렸다. (이제 어떻게 한다지? 지금 도주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될까?) 만약 지금 그가 이대로 도주한다면 종흠의 시체는 즉각 발각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금응검 조일기의 추문(醜聞)이 온 무림에 퍼지게 될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표국의 생명은 신용(信用)이었다. 헌데 오히려 고객의 돈을 노리고 목숨을 해치려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의 무림인으로서의 생명은 끝장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후에 몸담을 곳이 어디란 말인가? 더구나 대통표국의 재산은 상당한 액수여서 은자로 따진다면 최소한도 오천냥 이상은 되는데 그런 대통표국을 순순히 남의 손에 넘겨준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던 조일기는 마침내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사람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꼭 죽어야 한다. 어차리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경우라면 그는 차라리 표국 안에서 죽는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또한 괴노인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있는 이상 스스로 겁을먹고 도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일단 도주할 생각을 단념했다. 괴노인의 담뱃대가 이미 파손되었다고는 하지만 표국에는 두 자루의 옥(玉)으로 된 담뱃대가 있다. 묘한 핑계를 대서 잘 이해시키면 옥담뱃대를 대신 받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마음을 위안한 조일기는 문득 종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조일기가 사용한 독약은 분명히 효력이 뛰어난 약인데 종흠이 잘못 사용했던 탓으로 괴노인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일기는 은자꾸러미를 객방의 비밀금고에 숨긴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만약 은자꾸러미를 숨기지만 않았다면 태연하게 내어줄수도 있지만 비밀금고에 숨겼기 때문에 얼른 내어줄 수가 없었던 까닭에서였다. 조일기는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될대로 되라지. 아뭏든 그때 가서 생각나는대로 얼버무려 보자.) 이렇게 생각한 그는 옥담뱃대를 가지고 객방으로 들어갔다. 객방에서 세 명의 표사와 괴노인이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조일기는 마음이 놓였다. 그는 옥담뱃대를 괴노인에게 바치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노인장, 죄송합니다. 노인장의 담뱃대는 계집종들이 가지고 놀다가 실수를 해서 그만 떨어뜨렸습니다. 제가 이 담뱃대를 대신 가지고 왔는데 마음에 드실는지요?] 담뱃대를 받아들고 자세히 살펴보던 괴노인은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구, 이거 골동품이 아니오?] 조일기는 괴노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 은자꾸러미는......] 괴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오. 급하지 않소.] 조일기의 입에서는 나직이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괴노인은 정색을 하며 조일기를 주시했다. [이렇게 합시다. 미안하지만 국주께서 나 대신 은자를 황금으로 바꾸어다 주시오. 은자는 너무 부피가 많아가지고 다니기 불편하니 황금으로 바꾸면 한결 간편할거요.] 조일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괴노인은 돌연 안색을 굳혔다. [아니, 은자를 황금으로 바꾸기가 어렵다는 거요?] 조일기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아닙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될 수 있는대로 꼭 바꿔 보겠습니다.] 괴노인은 즉시 만면에 웃음을 띄었다. [빨리 다녀오시오.] [예.] 조일기가 뜰로 나왔을 때 그의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원만하게 해결되는 모양이구나. 하마터면 큰일날뻔 했다. 만약 저 늙은이가 은자꾸러미를 가지고 오라고 했으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늙은이가 보는데서 비밀금고를 열고 은자꾸러미를 꺼내줄 수도 없고 큰 봉변을당했을게 아닌가? 다행이 은자는 금고안에 있으니 황금은 얼마든지 구할수 있다.)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쉰 그는 성중(城中)의 몇몇 큰 점포를 찾아다니며 조금씩 황금을 빌렸다. 평상시 신용이 있었던 그는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아 삼백냥의 황금을 빌릴 수 있었다. 황금 한냥은 은자 열냥과 같은 값어치가 있으니 황금 삼백냥은 곧 은자 삼천냥과 마찬가지 액수였다. 조일기가 허겁지겁 표국으로 돌아왔을 때 괴노인은 이미 떠날 준비를 끝낸 뒤였다. 황금 삼백냥은 과연 그 부피가 한결 작아 괴노인의 품속에 집어넣자 조금도 표가 나지 않았다. 조일기는 세 명의 표사와 함께 대문밖까지 정중하게 괴노인을 전송했다. 괴노인은 막 떠나기직전에 조일기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나직히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그런 일을 할 때는 절대 남의 손을 빌리지 마시오.] 조일기는 얼떨떨해했다. [무슨 뜻인지......] 괴노인은 히죽 웃었다. [내가 떠난 후에 빨리 침상 밑을 정리하란 말이오. 그 놈은 동정할 만한 가치가 없는 놈이오. 우리는 모두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하니 무슨일이든지 실수없이 할 수 있소. 그러니 무슨 일을 할땐 직접 하던지, 아니면 꼭 믿을만한 사람을 구해 하란 말이오.] 하고는 싱긋이 웃어보이고 신형을 날려 이내 멀리 사라져버렸다. 조일기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석상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늙은이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한가지 생각이 퍼뜩 떠오른 그는 급히 표국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조일기는 단숨에 괴노인이 묵었던 객방으로 달려가서 침상의 뒤로 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조일기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벽에 붙은 기관장치의 단추를 눌렀다. 비밀금고의 문이 열리자 조일기는 급히 손을 내밀어 안을 더듬었다. [앗?] 조일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 비밀금고 속에 있어야할 은자꾸러미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끄응!] 순간 조일기는 눈앞이 캄캄해지는가 싶자 그 자리에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第 十四 章>--------------------------- 第 15 章 南宮蜂 낙양의 서북쪽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빈민촌(貧民村)이 있었다. 이곳은 빈민초에서도 가장 지저분하고 난잡한 좁은 골목이었다. 한 명의 키가 나장이 똥자루만하고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생긴 노인이 큰 보따리를 동에 멘채 골목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노인의 머리에는 아이들이나 쓰는 방울달린 모자가 얹혀져 있어 희극속의 인물같았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키가 작은데다 이렇게 큰 보따리까지 짊어지고 있으니 걸음걸이가 몹시 힘겹게 보이며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져 버릴 것같았다. 노인의 뒤에는 잡화점의 어린 점원이 따르고 있었다. 점원은 어깨에 백미(백미)와 들기름, 소름, 식초 등 일용품을 짊어진채 노인을 따라가고 있었다. 노인은 골목안으로 얼마 가량 들어가더니 한채의 다 쓰러져 가는 움막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길게 부어냈다. [이제 다 왔다!] 움막 안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으며 사흘에 죽 한 그릇도 못 먹었는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부인이 조그만 걸상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버선을 깁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낡을대로 낡은 돗자리가 깔려 있는데 돗자리 위에는 두명의 대나무처럼 비쩍 마르고 얼굴엔 때가 더덕더덕 묻은 사내아이가 힘없이 누워있었다. 이들 두 사내아이는 각각 빈 나무그릇을 하나씩 들고 울다 지쳤는지잠이 들어 있었다. 노인은 점원에게 백미와 일용품을 움막 안에 내려놓게 한 다음 나직한목소리로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희용(姬蓉)! 내가 왔는데 빨리 맞이하지 않고 무엇하느냐?] 부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냉막하게 대꾸했다. [탕이(탕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며 집안에는 돈 한푼 없어요!] 부인은 가벼운 탄식을 불어내더니 움막 안으로 들어가 두 사내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나직히 중얼거렸다. [탕이 그 작자는 매일같이 술만 쳐마시고 도박을하느라 내 두 아들을이렇게 굶겨 놓았으니 나는 그 놈을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구나......] 부인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들고 노인을 자세히 바라보더니 만면에 의아스러운 빛을 가득 떠올렸다. [노인장, 노인장은 뉘시오?] 노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듯이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질렀다. [미쳐도 완전히 미쳤구나! 이 삼숙(三叔)은 멀리 팔십리 밖에서 밤잠도 자지 않고 달려왔는데 내가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키운 조카딸까지도이 영감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이냐?]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만면에 경악의 빛을 가득 떠올리고 있는 부인에게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은 보따리를 가리키며또 고함을 질렀다. [이 삼숙은 너희 모자(母子)를 위해 특별히 세 필의 포목을 사왔다!그리고 그 보따리 속에는 약간의 황금까지 들어있으니 이 집안을 깨끗이정리하고 이제부터 아이들도 잘 보살펴라! 나는 얼마후 한번 더 찾아오겠는데 그때도 여전히 이런 꼴을 하고 있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테니 그리 알아라!] 그는 화를 풀 길이 없다는 표정을지은채 점원과 함께 움막 밖으로 횅하니 나가버렸다. 이 부인의 이름을 희용이라 부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술주정뱅이이자 도박꾼인 그녀의 남편 이름도 탕이가 분명했다. 다만 이 노인이 정말 그녀의 삼숙인지는 오직 그 노인 혼자만 알고 있을 뿐이다. 최근 이삼일 사이에 이 일대의 빈곤한 집에는 집집마다 친척이 다녀갔다. 다녀간 사람은 대부분이 그들 집안의 어른이었다. 어떤 집안에는 외할아버지가 다녀갔고, 또 어떤 집안에는 먼 친척뻘 되는 당숙이 다녀갔으며, 심지어 칠순 가까이된 외로운 노인 혼자만 사는 집안에는 삼십 여년동안 서신연락도 없던 처남(妻男)이 다녀가기도 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이 일대의 빈곤한 가가호호(家家戶戶)에 다녀간 친척이 비록 그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양식과 옷가지, 그리고 많은 황금을 주었지만 그들은하나같이 자기를 집안에 이런 친척이 있는지 기억을 하지 못했다. 하나 한가지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놀라워 할 것이다. 그들의 집에 찾아왔던 친척들은 모두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때로는 가는 곳마다 존경과 사랑을 받고, 때로는미움과 두려움도 받는 새장자(賽莊子) 남궁봉(南宮蜂)이었다. 도박장에 나타나 단돈 한냥으로 은자 삼천냥을 따간 사람도 남궁봉이며, 대통표국의 국주로 오랫동안 은밀히 악행(惡行)을 저지르며 자기 욕심을 채워왔던 금응검 조일기에게 황금 삼백냥을 사기해 간 사람도 바로남궁봉이었다. 남궁봉! 당금 무림에서 이 이름은 공포(恐怖)와 경이, 외경(畏敬), 찬탄, 폭소,그리고 괴행(怪行)의 대명사였다. 무수한 악한들이 그에 의해 봉변을 당하고 꼬리를 말고 도망쳤고,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그의 도움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슴없이 그를 천하제일의 괴인으로 부르고 있었다. 남궁봉이 낙양에 나타난 지는 이미 사흘이 되었다. 그는 이 사흘의 시간을 잠시도 쉬지 않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는 평생동안 노총각으로 혼자 살면서 제자 한명만 두었을 뿐 양아들조차 두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이 삼일 사이에 그는 다른 사람의 어른이 되고, 외할아버지가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당숙, 처남까지 되었다. 지금 그는 조그만 주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마시고 있는 술은 값이 제일 싼 백주(白酒), 일명 백건아(白乾兒)여였다. 그의 상 위에는 땅콩과 두부조림, 그리고 곱창이 각각 한 접시씩 놓여있었다. 이 세 접시의 안주 역시 값이 제일 싼 음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니고 있던 삼천냥의 은자와 삼백냥의 황금을 모두 써버리고 남은 돈이라고는 술값과 안주값 뿐이기 때문이었다. 남궁봉에게는 한가지 철칙(鐵則)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궁(窮) 해도절대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뺏지 않고 또 공짜로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친한 친구를 만나 돈을 빌린 후 갚지 않는 것은 예외였다. 더욱이 그는 낙양성에 오기만 하면 마치 자기 안방에 들어온 것처럼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낙양성내에는 그의 친구가 유난히 많을 뿐 아니라 하나뿐인제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만 다른 사람에게서 물건을 훔치지도, 탈취하지도 않는다는 신조를 지킬 뿐 그의 친구나 제자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버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만나는 친구마다 돈을 빌렸고, 빌린 돈을 갚는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의 친구들 또한 그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다시 받으리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는 지금 비록 제일 값싼 술과 요리를 먹고 있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이 가볍고 유쾌했다. 남궁봉은 한 그릇의 백주를 모두 마시고 두번째 그릇을 들려고 하는중이었다. 그때 문득 주점의 앞에 있는 작은 골목에 한명의 어린 거지가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남궁봉은 어린 거지를 바라보다가 큰 소리로 소리쳐 불렀다. [꼬마야, 이리 오너라!] 어린 거지는 난데없이주점에서 나장이만한 노인이 자신을 부르자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를 불렀나요?] 남궁봉은 꽥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이곳에 너 말고 꼬마가 또 어디 있단 말이냐?] 어린 거지는 생면부지의 노인이 대뜸 욕부터 하자 화가 나서 입을 삐죽거렸다. (제길...... 난장이 똥자루만한 노인네가 누굴 꼬마라고 해? 누가 더 꼬마인지 키를 한번 재봐?) 남궁봉은 얼굴에 핏대까지 올리며 바락바락 악을 썼다. [이 놈아! 정말 노부에게 뜨거운 맛을 보아야 달려 오겠느냐? 머리통을 흑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냉큼 이리 오지 못할까?] 어린 거지는 내심 못마땅하기 그지 없었느나 그가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부를까 궁금하여 졸레졸레 걸어왔다. [왜요?] 어린 거지가 탁자 앞에 다가와 아니꼬운 음성으로 물어보자 남궁봉은 쌍심지를 돋구며 오른손으로 냅다 어린 거지에게 알밤을 매겼다. [요 녀석아! 노인장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쾅! [아얏!] 어린 거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머리통에 알밤을 맞고는 오만가지 인상을 썼다. 남궁봉이 살짝때린 것 같았는데도 손이 무척 매운지 어린 거지는 너무나 아파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왜 때려요?] 어린 거지는 화가 잔뜩 나서 남궁봉을 째려보며 험악한 인상을 썼다. 남궁봉은 의외로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히죽 웃었다. [헤헤...... 그거야 노부 마음이지. 아직 젊은 놈이 노인네의 주먹도 제대로 못 피하니...... 그렇게 동작이 느려서야 어디 동냥질이나 제대로 하겠느냐?] 그 말을 듣자 어린 거지는 흠칫 놀랐다. (정말...... 난 왜 이 늙은이의 손을 피하지 못했을까?) 어린거지는 다름아닌 일전에 화일로가 만났던 초일풍이란 녀석이었다. 초일풍은 화일로에게서 한가지 기묘한 보법(步法)을 배운 후로는 아직까지 남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어제는 일부러 다섯명의 건달들에게 시비를 걸었으나 다섯명의 건달들도 그에게 덤벼들다 한대도 때려보지 못하고 모두 제 풀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었다. 헌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남궁봉이 알밤을 때리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고 말았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초일풍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남궁봉은 제법 점잖은 음성으로 물었다. [악늙은이는 낙양에 왔느냐?] 그의 때아닌 질문에 초일풍은 어리둥절하여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악늙은이라뇨? 난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남궁봉은 눈을 부라리며 다시 오른손을 들어 초일풍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 놈아! 걸신 악구천도 모른단 말이냐?] 이번에는 초일풍도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궁봉의 주먹이날라오자 잽싸게 화일로가 가르쳐준 보법대로 몸을 움직였다. 허나, 짝! [아이고 대가리야!] 바가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초일풍은 까지집같은 머리통을 붙잡고 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어찌된 일인지 분명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남궁봉의 주먹은 여지없이초일풍의 머리를 정통으로 가격했던 것이다. 남궁봉은 아픔을 참지 못하고 깡총깡총 뛰는 초일풍을 보며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흐흐...... 이 놈아! 노인을 공경하지 못하고 함부로 아가리를 놀린죄다! 개방 제자가 악구천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느냐?] 한동안 팔짝팔짝 뛰며 머리통을 문지르던 초일풍은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나며 남궁봉을 꼬나보았다. [이 빌어먹을 늙은이가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내 머리통이 무슨동네북인줄...... 아이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궁봉의 주먹이 다시 날아왔다. 초일풍은 이미 두 번이나 당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먹이 날아오는 반대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허나, 위잉! 어느새 남궁봉의 주먹은 그가 움직이는 곳에 와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아닌가? [요놈!] 딱! [케엑!] 초일풍은 눈앞에서 별이 번쩍함을 느끼고 머리통을 싸잡았다. 얼마나 아팠는지 그의 커다란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이구 머리야...... 나 죽네...... 나 죽어!] 초일풍은 꼬질꼬질한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문지르며 비명을 질러댔다. 남궁봉은 히죽 웃으며 물었다. [노인에게 불손한 인사를 쓰면 그런 꼴을 당한다. 어떠냐? 이제 악늙은이가 이곳에 왔는지 말해줄 수 있느냐?] 초일풍은 연신 머리통을 문지르면서 조금 겁먹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 노인장께선 누구십니까? 왜 본방의 악장로님을 찾으시는 거예요?] [녀석, 이제야 말투가 좀 공손해졌구나. 하지만 노부가 누구인지는 알것 없고 어서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하지만......] 초일풍이 머뭇거리자 남궁봉은 다시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몇대 더 맞고 입을 열테냐?] 초일풍은 질겁을 하고 급히 말했다. [아...... 아닙니다. 악장로님께서는 이미 어제 낙양에 도착하셨습니다.] 남궁봉은 여전히 오른손을 쳐든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말해주어 고맙다. 사례로 알밤이나 한대 더 맞아라.] 남궁봉은 다시 초일풍의 머리통을 향해 오른주먹을 내뻗었다. [아이고...... 어르신네!] 초일풍은 사색이 되어 머리통부터 싸잡았다. 그는 더이상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어서 날벼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아아......!) 남궁봉의 주먹은 먼저번과는 달리 아주 느릿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헌데 그 주먹은 느린 속도로 전진하면서도 좌우로 가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흔들림이 너무도 빨라 얼핏 보기에는 조금도 흔들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남궁봉이 일부러 주먹을 느릿느릿 펼치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 주먹이 이토록 세차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초일풍은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남궁보의 주먹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그 주먹은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자세히 보니 그 주먹은 비단 좌우로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상하(上下)로 움직이기도 했고 때로는 뒤로 물러서기도 했다. 그런대로 전진하는 속도는 변함이 없었다. 단 한번의 주먹에 이와같이 수많은 변화가 내포되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치 못할 것이다. 그 변화는 무려 백팔가지에 달했다. 허나 초일풍은 그중에서 겨우 마흔 여덟가지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남궁봉이 일부러 주먹을 최대한 느리게 전개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아니라 제아무리 안력이 날카로운 고수라도 그 중단 한가지 변화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초일풍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남궁봉의 주먹은 어느새 그의 머리통에 거의 다가와 있었다. 그제서야 초일풍은 퍼뜩 정신이 들어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어느새 남궁봉의 주먹은 그의 뒤통수를 갈기고 있었다. 딱! [아이고......!] 초일풍은 다시 머리통을 싸잡았으나 조금전처럼 고통스러워 하지는 않았다. 남궁봉은 손을 거두고 싱겁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보았느냐?] 초일풍은 갑자기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며 공손히 절을 했다. [노선배님의 가르치심에 감사드립니다.] 남궁봉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물었다. [너는 몇가지나 보았느냐?] 초일풍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마흔 여덟가지입니다.] 남궁봉은 흠칫 하다가 이내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과연 총명한아이로구나. 한번 보고 사십팔변(四十八變)을 알아내다니.... 이 주먹의 이름은 백팔번뇌권(百八煩惱拳) 이라는 것으로 모두 백팔가지의 변화가 있다. 네가 좀더 노력해서 백팔가지의 변화를 모두 익힐 수 있다면 주먹으로는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남궁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악늙은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초일풍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성 동쪽에 있는 낡은 절입니다.] [음, 그런데 네게 보법을 가르쳐준 녀석도 그곳에 있느냐?] 초일풍은 흠칫 놀랐다. [그 분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그 녀석은 노부의 하나뿐인 제자다. 그 말썽꾸러기 녀석이 그곳에 있다면 당장 달려가 단단히 혼을 내주어야겠다.] [그...... 그분은 지금 그곳에 안계십니다.] 남궁봉은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어디로 갔느냐?]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낙양성 내에 계실 겁니다. 헌데 노선배님의대명(大名)은......] 남궁봉은 빙그레 웃었다. [그 녀석이 말해주지 않더냐?] 초일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화가주님께선 노선배님에 대한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일로, 그 녀석이 버릇이 없다는 건 알지만 사부인 내가 올줄을 뻔히알면서도 꼬리를 내빼다니...... 노부는 남궁봉이다.] 순간, [꽥! 새...... 새장자...... 남궁봉?] 초일풍은 너무도 놀라 입에 게거품을 흘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자신이 빌어먹을 늙은이라고 욕까지 했던 노인이 바로 살성(殺星) 중의 살성이고, 괴인(怪人) 중의 괴인인 새장자 남궁봉임을 알자 까무러치고 만 것이다. --------------------------<第 十五 章>--------------------------- 第 16 章 毒 手 저녁 무렵, 하늘은 잔뜩 찌푸러져 있어 금시라도 빗방울이 뿌릴 것 같았다. 이런 날씨는 술마시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그러나 상상외로 성안의 몇 집 주루에는 손님이 별로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짜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은 분위기에 도취될 뿐이지 술이 좋고 나쁜 것과 안주의 많고 적음을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의 동쪽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절 안의 대전에 누운채 술을 마시고있는 거지노인이 바로 좋은 예이다. 거지노인의 의삼은 얼마나 해졌는지 온갖 색깔의 천으로 누덕누덕 기워서 도저히 원래의 색깍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머리는 잔뜩 풀어 헤쳤고 신발도 오른쪽은 어디로 도망갔는지맨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거지노인의 얼굴은 벌겋게 주독(酒毒)이올라 있었는데 의외로 눈썹과수염은 새하얀 백색이어서 얼굴이 더욱 붉어보였다. 거지노인의 옆에는 회백색 호리병과 금색실이 감긴 지팡이가 비스듬히놓여 있었다. 이 거지노인은 주루에 갈 형편이 못되어서 다 쓰러진 절로 온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었다. 그는 비록 거지의 신분이지만 그의 이름은 대강남북(大江南北)에 널리 떨쳐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 주루에나 들어가서 그의 이름만 대면 주루의 주인이 맨날로 달려나와 맞이할 것이고, 음식값 같은 것은 아예 받으려 하지도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찾아온 것을 금생(今生)의 영광으로 알고 황송해 할 것이틀림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거지노인이야말로 만 천하 거지들의 우상인 걸신 악구천이기 때문이었다. 악구천은 비단 개방사상 제일의 고수일 뿐만 아니라 강호무림에서 누구나가 두려워 마지 않는 이대괴인(二大怪人) 중의 한 명이기도 했다. 그토록 대명이 자자한 그가 주루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적적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해 이런 분위기를 그는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지금그의 호로병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삼원방(三元坊)의 장원홍(壯元紅)이며 옆에 놓여 있는 것은 새로 볶은 남전(南田)의 특산인 땅콩이었다. 만일 주루 안에서라면 그는 지금처럼 편하게 누워서 두 다리를 높이 치켜 올린채 술을 마시며 노랫가락을 흥얼거릴 수는 없으리라. 분위기도 좋고 기분도 만점이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처음 술을 마실 때 그는 땅콩을 큰 것만 골라서 먹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큰 땅콩을 다 집어 먹었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먹다 남은 찌꺼기 속에서 조그만 것을 골라 먹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아무나 나타나서 자기 대신 땅콩을 한봉지 사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사람에게 행운이 닥치려면 곧 나타나기 마련이다. 걸신 악구천이 사람 좀 나타났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절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과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나이가 젊은 꼽추 장한이었다. 이 장한은 머리에서 귀까지 덮을 수 있는 가죽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목에는 목도리를 둘렀는데 거의 얼굴을 반이나 가렸다. 그는대전 위에 올라서서 사방을 훑어보더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모퉁이를 찾아 앉았다. 털썩 주저앉은 후 그는 악구천의 술호로를 힐끗 쳐다보고 입가에 희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 속에서 남색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이 장한이 보따리 속에서 꺼낸 것은 마치 모양이 두꺼비처럼 생긴 술주머니였다. 악구천은 그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긴 한숨을 불어냈다. 만일 이 장한이 다른 신분이라면 악구천은 상대의 술을 사기해 낼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허나 취미가 똑같은 사람에게 그는 차마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악구천은 못본 걸로 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생각을 잊으려고 코를 벌렁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드러눕기가 무섭게 눈을 번쩍 뜨고니 벌떡 일어났다. (오, 이것은 어디서 풍겨오는 냄새일까? 참 기막힐 정도로구나. 이거...... 사람 미치게 만드네.) 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때 한쪽 모둥이에 있는 꼽추 장한은 술주머니를 꺼낸 후 다시 품속에서 장방형의 기름 종이을 꺼내고 있었다. 그가 종이를 다 풀자 그 속에는 기름에 볶은 개의 넓적다리가 나왔다. 악구천은 그것을 보는 순간 자신의 체면도 잊고 군침을 꼴깍 삼켰다. 볶은 개의 다리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는 급히 시선을 돌려 대전 밖을 바라보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허허...... 저까짓 한쪽의 개다리 때문에 조그만 수작이나마 부릴 값어치가 있을까?) 그때 뒤에서 그 장한의 온화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 노인장께선......] 악구천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상대방의 말을 받았다. [말투를 들어보니 아마 자네는 아직 노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나 보군?] 장한은 멍청한 눈빛으로 악구천을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노인장께서 소금을 가지고 계시면 잠시 빌릴려고......] 악구천은 코웃음을 쳤다. [흥! 소금? 그런 걸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리고 노부가 화를 내기 전에 살고 싶으면 얼른 잘못을 사과하고 멀찌막이 물러나라.] 장한은 악구천의 기세등등한 음성에 눈동자를 디룩디룩 굴리며 겁먹은목소리로 물었다. [노인장,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뭣 때문에 역정을 내십니까?] [누구를 막론하고 노부를 아는 사람이면 노부의 허락없이는 그 누구도감히 노부 앞에서 음식을 먹지 못한다. 그런데 하물며 안면도 모르는 새파란 네가 소금까지 빌려 달라고......?] 장한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정말 몰랐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소인은 장소를 옮기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노인장?] 그는 말을 마치고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때 악구천이 또 고함을 질렀다. [잠깐, 섯거라!] 장한은 의아한 빛을 띄며 휙 돌아섰다. [노인장께선 또 무슨 분부가 계시온지요?] 악구천은 장한을 노려보며 눈을 부릅떴다. [너는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그래, 너는 그 볶은 개다리를 가져가려고 하느냐? 채식(菜食)을 좋아하는 노인 앞에서 이런 물건을 내보이는 것은 어떤 죄에 속하는지 너는 알고 있느냐?] 장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거참, 오늘 이상한 일을 다 보는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악구천은 악을 썼다. [뭐가 이상해, 이놈아! 원칙이지, 몰라서 그런다고 하지는 않고 네 놈은 오히려 변명을 늘어놓는구나!] 장한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변명은 무슨 변명입니까? 내 은자 주고 산 물건 내가 가지고 가는데 무엇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참 성질도 괴팍하시군요.] 악구천은 또 고함을 질렀다. [잔소리 말고 그것을 얼마나 주고 샀느냐? 내가 물어 주겠다.] 그 소리에 장한은 일순 머뭇거렸다. [음, 다섯푼에 샀는데요. 왜 그러십니까?] 악구천은 다시 고함을 쳐 그 장한의 입을 막았다. [이놈 말이 많구나! 입을 찢어놓기 전에 여러말 말고 여기 일곱 푼이 있으니 어서 받아 가지고 가라.] 장한은 전화위복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힘 안들이고 은자 두 푼을 벌게 되자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악구천에게 다가갔다. 장한은 개다리와 은자를 바꿔 가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第 十六 章 上>------------------------ 第 16 章 毒 手 악구천은 장한의 모습이 절문 밖으로 사라지자 마치 열흘 동안이나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가 개다리를 집었다. 순간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시켰다. 그는 득의한 웃음을 띄며 입을 쩍벌렸다. 그가 막 입을 놀려 개고기를 뜯으려고 했을 때였다. 돌연 대전 처마 뒤에서 능청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와 악구천의 귓전을 때렸다. [이봐, 악 늙은이! 맛있는 개고기를 혼자 먹으려고 이곳에 왔나? 혼자 먹으면 치질이 생긴다는 말은 악 늙은이도 잘 알고 있을텐데?] 말소리와 함께 하나의 그림자가 사뿐히 뛰어내렸다. 그는 바로 악구천과 함께 무림의 이대괴물(二大怪物)로 통하는 새장자 남궁봉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남궁봉을 돌아본 악구천은 재빨리 개다리를 등뒤로 감추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면서 말했다. [다른 음식이라면 언제든지 나눠먹을 수 있지만......] 남궁봉이 싱긋이 웃었다. [그 개고기만은 나눠먹을 수 없다 그 말이지?] 악구천은 또 뒤로 주춤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과연 남궁 늙은이로구나. 벌써 그것을 알고 있다니...... 제기랄, 이럴 땐 죽지도 않아......] 남궁봉은 웃기만 하더니 악구천의 옆으로 다가와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악 늙은이, 그까짓 개고기 때문에 그렇게 긴장하기나? 자, 너무 떨지 말고 앉게. 우리는 친구인데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했구먼. 땅바닥에 마주 앉아 그동안의 회포를 푸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악구천은 고개를 저었다. [흥! 자넨 남을 등칠 때 쓰던 수법을 내게 써 먹으려는 모양인데 잘 안될걸 아마. 괜히 친한척 하면서 개고기를 조금이라도 얻어 먹을까 생각하나 본데 어림도 없는 소리일세. 안면 돌리게.] 남궁봉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거 정말 뭐 주고 뺨맞는 격인데? 자네는 아마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모르고 있을 것이네. 다 자네 때문에 온 건데 말일세.] 순간 악구천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나 때문이라고? 무슨 일이 있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가 있네. 자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된단 말일세. 괜히 말을 걸고 싶으니까 어떻게 하면 개고기를 좀 얻어 먹을까 하고...... 에잉!] 남궁봉은 껄껄 웃었다. [으하하하...... 잘도 지껄여 대는군. 하지만 자네가 할 수 없는 일일세.] 악구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인가?] 남궁봉이 고개를 끄덕이자 악구천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말을 던졌다. [그렇다면 노부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지. 하지만 그 일은 이 개다리와 아무 상관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네.] [그래, 악 늙은이 말대로 아무 상관없네.] 그제서야 악구천은 안심이 된다는 듯 개고기를 앞으로 내놓으며 말했따. [그럼 말해보게. 귀를 씻고 들을테니......] 남궁봉은 식지로 코를 비비며 킁킁댔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악 늙은이, 자네는 자네의 일신 무학을 조그만 책에 기록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어쩔텐가?] 남궁봉은 진심어린 어조로 재촉했다. [악 늙은이, 그 책은 어디다 두었나? 그리고 자네는 그것을 누구에게 줄 작정인가? 자네가 나를 믿는다면 사실을 말해주게. 나는 꼭 책임지고 그것을 마땅한 후계자에게 전해 주겠네.] 악구천은 화가 치밀어 올라 눈동자를 뒤룩뒤룩 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뭐라고? 남궁 늙은이, 이 노부가 자네 앞에서 죽기라도 한단 말인가?] 남궁봉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담담한 음성으로 계속 말했다. [이봐, 악 늙은이! 속담에 하늘에는 예측할수 없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사람에게는 하루 아침에 복(복)과 화(화)가 뒤바뀐다고 했네. 그 말대로 사람의 운명을 누가 감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도 좋은 일이지.] 악구천은 왕방울만한 눈을 껌벅거리며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앙천대소했다. [크하하하핫......!] 남궁봉은 머리칼을 곤두세우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가? 미친 계집의 볼기짝이라도 봤는가?] 악구천은 한동안 여전히 큰 소리로 웃어젖히고나서 말했다. [노부가 자네에게 개고기를 나누어주지 않았더니 아주 악담을 하는 것 같아서 그랬네. 왜 안됐나? 자네도 참 끈질기군.] 악구천은 개고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익살스럽게 남궁봉에게 눈짓을했다. [이리 오게. 남궁 늙은이, 좌우지간 어린애 앞에선 아무것도 못해. 이거 절반씩 나눠 먹세.] 그러면서 그는 짐짓 크게 선심을 쓰는 듯 말을 이었다. [이것은 은자 세냥 다섯푼을 주고 산 것이지만 친구의 정을 생각해서 노부는 자네에게 조금도 이익을 남기지 않겠네. 은자 한냥 여덟푼만 내놓고 먹게.] 남궁봉은 속으로 냉소를 던졌다. (일곱푼에 산 걸 눈깜짝할 사이에 세냥 여덟푼이나 받으면서 한 푼도 남기지 않는다고? 허...... 정말 큰일날 친구로군.) 악구천은 껄껄대고 웃은뒤 말을 계속했다. [왜 비싼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남궁 늙은이, 자네는 이것을 먹지 못했다고 나를 원망하지 말게. 자네 형편이 그래서 그런 거니까.] 남궁봉은 헛기침을 했다. [험험...... 악 늙은이, 자네와 나의 친구지간에 겨우 한냥 여덟푼으로 의(義)가 상해서야 되겠나? 그래서 말인데 우리는 그전의 규칙대로 행사하는게 어떻겠나? 그게 공평하지 않겠나?] 악구천은 눈을 반짝 빛냈다. [내기를 하자 그 말인가?] [그렇네. 진 사람은 은자를 모두 내고 이긴 사람은 그 고기를 공짜를 먹는 것일세.] 악구천은 잠시 생각하는 척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 늙은이, 자네가 공평한 제목만 붙인다면 노부도 반대하진 않겠네.] 남궁봉은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잽싸게 말했다. [노부가 언제 자네와 불공평한 내기를 한 적이 있나?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하는 말인데...... 나는 강호에서 자네보다 본 것도 많고 들은것도 많다고 자부하네. 자네는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악구천은 냉소를 쳤다. [흥,웃기지 말게.] 남궁봉은 번개같이 말을 받았다. [그럼 이제 내기 제목은 성립된 걸세. 누구의 견문이 더 넓은가 말일세. 그렇지?] 악구천은 고개를 크게 아래 위로 흔들었다. [그렇네!] 남궁봉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제 결정된 걸세. 자, 이제 내가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겠네.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는 안다고 단언하지 못할 걸세.] 악구천은 이 말을 듣고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했다. [푸하하핫! 남궁 늙은이, 자네가 말하는 사람이라면 노부는 단숨에 열명이라도 댈 수 있네. 장삼(張三), 이사(李四), 곰보, 왕이(王二) 자넨그들이 누군지 아나?] 남궁봉은 실소를 했다. [그런 뜻이 아닐세. 그 속에는 한계가 있어야 하네. 기정사실 말일세.] 악구천은 눈동자를 굴리며 다그치듯 물었다. [어떤 한계인데 기정사실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서로 제시하는 사람은 필히 강호에서 명성을 떨쳐야 하네. 다시 말해서 호인이라면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야 한다 그 말일세.] 악구천은 눈을 껌벅거렸다. [그래, 자네가 말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독나타(毒那駝) 갈홍(葛洪)일세.] [독나타 갈홍?] 악구천은 눈쌀을 찌푸렸다. 강호경험이 그 누구보다도 해박한 그로서도 갈홍이라는 이름은 일시지간 떠오르지 않았다. 남궁봉은 빙긋이 웃었다. [그렇네. 그 사람이 누구인줄 아는가? 어때 졌지?] 악구천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고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이 없자 당황하여 머리를 마구 흔들어댔다. [자...... 잠깐 기다리게. 아직 이르네. 노부가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해도 자네는 그 사람이 강호에서 어떤 명성을 떨치고 있는지를 노부가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네. 그리고 노부에게도 아직 한 사람의 이름을 제의할 기회가 있네.] 그는 여기서 잠시 멈추었다가 숨을 돌리며 다시 말했다. [그러니 패배를 인정하기는 아직 시기상조일세. 우선 노부는 강호에 그런 인물이 있는지나 알아봐야겠네.] 남궁봉은 담담하게 웃으며 악구천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그럼 사공표(司空彪)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 보았는가?] 악구천은 어이없다는 듯 허허거리며 즉시 대답했다. [아니 자네는 노부가 그 사공녀석도 모르는줄 아나? 사공표는 우리와 같이 강호무림의 십대고수에 속해 있는 삼사(三四) 중의 한명이 아닌가? 그 놈은 사천당가(四川唐家)와 함께 용독(用毒)의 대가(大家)이며 수법이 악랄하고 독살스러워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로운 놈이지. 그 놈은 자칭 담소탈혼(談笑奪魂)이라고도 하지. 맞는가?] [제법 잘 알고 있군.] 악구천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우리는 독나타 갈홍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 담소탈혼 사공표는 왜 들추어내는가?] 남궁봉은 피식 하고 웃었다. [다 이유가 있지. 그 독나타갈홍은 바로 담소탈혼 사공표의 셋째 제자이며 또한 사공표가 제일 신임하는 제자이기 때문이지.] 악구천은 흠칫 놀라 다시 물어 보았다. [자네는 그 작자를 만나 보았는가?] [그렇네.] [언제?] [방금......] 이 말을 듣고 악구천은 하마터면 펄쩍 뛸뻔 했다. 그제야 그는 남궁봉이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뭐...... 뭐라고? 자네 말은 방금 여기서 나간 꼽추놈이 바로 갈홍이란 말인가?] 남궁봉은 빙그레 웃었다. [그 자식은 자기의 사부에 비해 많은 차이가 있어 담소를 하면서도 자네의 생명을 빼앗진 못했네. 이젠 자네 차례일세. 자넨 누구를 제시할 작정인가?] 악구천은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들고 있던 개고기를 아까와 하는 눈초리로 힐끗 쳐다보았다. 사공표의 문하(門下)가 준 개다리라면 절대로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개다리를 힘껏 내던졌다. 그는 이빨을 바득바득 갈았다. [가세!] 남궁봉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어딜 가잔 말인가?] [그 놈을 찾으러 가잔 말일세. 이 난도질을 해도 시원치 않을 놈! 그 놈을 잡아서 살껍데기를 벗겨 버리겠네. 그 자식부터 처치해 버린 후 다시 사공표를 찾으러 가세!] 이때 남궁봉은 악구천의 호로병을 집어서 연달아 몇모금 꿀꺽꿀꺽 마셨다. 악구천은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지 입맛을 다셧다. [남궁 늙은이, 조금만 마시면 안되나?] 남궁봉은 호로병을 내려놓고 입을 닦으며 씩 웃었다. [오늘 하마터면 자네의 이 호로병은 내 것이 될뻔 했다는 것을 알아야지.] 그는 또다시 거침없이 몇모금 들이켰다. 악구천은 눈망울을 뒤룩뒤룩 굴렸다. [그것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겠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지체할수록 그 놈은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깊숙히 숨어버릴게 아닌가?] [뭐가 그리 조급한가? 사람을 찾는 것은 자네들 거지들의 장기가 아닌가? 이곳 분타의 인원을 총동원한다면 그 자식이 설사 하늘로 솟고 땅으로 꺼진다고 할지라도 찾아낼 수 있을 걸세.] 악구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 하지만 이런 일로 본방의 제자들을 동원하고 싶지는 않네. 이건 어디까지나 그 자식과 나와의 개인적인 일이 아닌가?] 남궁봉은 피식 웃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자네에게 한가지 일을 깨우쳐 주겠네.] 악구천은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일인가? 서슴치 말고 말해보게.] 남궁봉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에게 잘려진 머리는 말하지 못함을 깨우쳐 주겠네.] 악구천은 혀를 찼다. [농담은 그만 하게. 잘려진 머리가 말을 못함을 누가 모를까봐 그러나?] 남궁봉은 헛기침을 했다. [그럼 내 말은 농담이라고 해 두겠네.] 그리고 나서 그는 몸을 일으켜 대전을 빠져나갔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악구천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급히 대전아래로 내려가며 고함을 질렀다. [어이, 남궁 늙은이! 잠깐만 기다리게.] 남궁봉은 이미 그가 자신을 불러 세울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뒤로 돌아서며 짐짓 어리둥절한 척 물었다. [또 무슨 분부가 있기에 그러나?] 악구천은 그의 앞에까지 달려와서 말했다. [자네 뜻을 이제야 알겠네. 미안하네.] 남궁봉은 빈정대듯 입을 씰룩거렸다. [농담에도 무슨 뜻이 있나?] 머리를 긁적거리며 악구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자네는 확실히 기인(奇人)일세. 노부는 사공표 사도와는 아무런 원한이 없네. 그런데도 그 놈이 나에게 독수(毒手)를 쓴 것은 필시 남의 남의 지시를 받고 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네.] [이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모양이군.] [너무 비꼬지 말게. 그 자식을 잡더라도 그 배후의 주모자를 찾지 못하면 안되니 자넨 이왕 손을 댄 김에 끝까지 노부를 도와주게. 그러면 노부는 일을 성취시킨 후 단단히 한턱을 내......] 이때 남궁봉이 크게 기침을 하자 악구천은 얼른 말꼬리를 흐려버렸다. 남궁봉은 기침을 한 후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살지 못하게 하려면 꼭 그에적합한 이유가 있어야 하네. 자네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손을 썼다면 그들의 해부에는 아주 든든한 있어야 하네. 자네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손을 썼다면 그들의 배후에는 아주 든든한 배경이 있음이 틀림없을 것세.] 여기서 말을 마친 남궁봉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내가 여기서 자네에게 한마디 일러 두겠네. 보이는 칼은 피하기 쉬워도 보이지 않는 화살은 막아내기 어려운 법일세. 아마 그 빌어먹을 놈을 찾기 전에 자네가 먼저 죽음을 당할지 모르네.] 악구천은 왕방울만한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자넨 나더러 그런 피라미 같은 놈 하나 때문에 어디로 가서 숨어 있으란 말인가?] 남궁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닐세.] [그럼 어떻게......?]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네를 죽이려는 생각을 버리게 해야 하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네는 정말 죽은 것처럼 보여야 하네.] 악구천은 그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남궁 늙은이, 헛소리는 작작하게! 나보고 일생동안 두번 죽으란 말인가? 개방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나 악구천이......]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돌연 말끝을 흐렸다. [아...... 아닐세. 내가 잘못 생각했네. 하하..... 나는 또 자네의 뜻을 알겠네. 이거 오늘따라 영 머리가 돌지 않는군. 노부는 언제나 이 쇠뿔같은 성격을 버리지 못하니 자네가 이해하게.] 남궁봉은 담담히 말했다. [친한 친구인데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나?] [헤헤...... 맞네. 정말 자네같은 친구를 둔걸 하늘에 감사하고 있네.] 남궁봉은 품속에서 한개의 조그만 약병을 꺼냈다. [이 장난감을 사용하는 방법은아마 자네도 잘 알고 있을걸세. 이것을 살에 바르면 자흑(紫黑)색으로 변해 꼭 독에 중독된 것 같이 보이지.] 그는 약병을 앞으로 내밀었다. [만일 내 예측이 틀림없다면 오늘 해질 무협, 그 자식은 분명히 자네가 죽었는지를 확인해 보러 올걸세. 그러니 그때 자네는 절대로 숨소리도 내선 안되네. 알겠나?] 악구천은 계면쩍게 웃으며 약병을 받아들었다. [염려말게. 노부도 풋나기는 아니니까. 그런데 자네는......?] [나는 이 근처에 숨어있다가 그 녀석이 자네의 시체를 확안하고 돌아갈 때 뒤를 쫓아가겠네.] 악구천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불쑥 말했다. [노부도 따라 가겠네. 그 놈을 사주한 작자들이 어떤 놈들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네.] [아니, 그럴 것 없네. 내게 짐작가는 자들이 있으니까. 그보다 자네는내 대신 한가지 일을 해줘야겠네.] 이어 남궁봉은 악구천에게 몇마디의 말을 속삭거렸다. 악구천은 진진한 안색으로 그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가 힘차게 말했다. [알았네. 꼭 그렇게 하지.] [그럼 조금 힘들더라도 수고좀 하게.] 남궁봉은 그의 어깨를 툭 친 후 대전 밖으로 나가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가 나간 후 악구천은 계획대로 머리, 얼굴, 손, 발 등 각 부분에 약을 발랐다. 그런 다음 대전 앞에 꾸부정하게 누웠다. --------------------------<第 十六 章 下>------------------------ 第 17 章 談笑奪魂 어느 덧 해가 서산 마루에 걸리고 어둠이 서서히 찾아들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절에도 구석구석에 석양이 물들었다. 그때 잡초가 무성히 자란 대전 지붕위에 검은 그림자가 소리없이 날아들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그때마다 눈에서 신광(神光)이 번쩍거렸다. 행동 또한 다람쥐처럼 잽쌌고, 표정은 꼭 고양이에게 쫓기는 생쥐처럼굳어있었다. 그는 바로 조금전에 악구천에게 개다리를 주었던 곱추장한이었다. 꼽추장한은 대전 지붕 위에 나타나더니 마치 야밤중에 먹이를 찾으러 나온 쥐새끼처럼 잠시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꼽추장한은 가을 바람에 살랑이며 떨어지는 낙엽처럼 가볍게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한 손에 칼자루를 불끈 쥔채 살금살금 걸어가 삼사보 간격을 두고 서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악구천을 한참동안 자세히 훑어보았다. 순간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여 괴이한 웃음을 던졌다. [흐흐...... 이것으로 본교의 살인첩에 오른 인물들 중 악구천이 제일 먼저 제거되었군.] 그는 이내 몸을 솟구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꼽추장한은 기분이 좋은 듯 두 팔을 연신 휘두르며 질풍같이 달려갔다. 허나 그의 뒤를 하나의 허깨비같은 인영이 은빌히 뒤따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꼽추장한은 낙양의 북성(北城) 근처에 있는 어느 장원앞에 도착하더니 주위를 돌아보고는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장원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정원은 상당히 넓었다. 주위에는 어둠이 덮히고 있었는데 장원에는 불빛 한 점 없어서 음침한느낌을 주었다. 장원의 군데군데에는 엄밀한 매복이 있었는데 꼽추장한은 수월하게 그들을 통과하여 장원의 깊숙히로 들어갔다. 장원의 본채는 이층 누각이었다. 그 누각의 아래층은 커다란 대청이었고, 떫층은 침실이었는데 불이 꺼져 있었다. 허나 대청의 창문에 두터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어서 밖으로는 조금의 불치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꼽추장한은 누각의 앞에 와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사부님, 갈홍입니다.] 누각 안에서 굵으면서도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 오너라.] 곱추장한은 누각의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안은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는데 중앙에 있는 커다란 태사의 위에 한 명의 키가 크고 검은 수염을 기른 오십대 초반의 중늙은이가 거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검은 수염의 노인은 이목이 제법 청수했는데 기이하게도 눈빛이 암록색으로 빛나고 있어 섬칫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노인이 바로 삼사 중의 일인이며 사천당문과 함께 우내쌍독(宇內雙毒)이라고 불리우는 담소탈혼 사공표였다. 사공표는 별호 그대로 웃고 떠들면서도 다른 사람의 목숨을 귀신도 모르게 빼앗고 마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갈홍이 대청안으로 들어와 머리를 조아리자 사공표는 급히 물었다.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갈홍은 득의만면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부님의 예측은 귀신과도 같았습니다. 악가 늙은 거지는 제자가 준 개다리를 뜯어 먹다가 편안하게 죽어 있었습니다. 머리와 얼굴, 손은 모두 까맣게 변해 있었습니다.] 사공표는 눈을 번쩍 빛냈다. [음, 잘했다. 그런데 개다리는 가져 왔느냐?] 갈홍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개...... 개다리는 무엇 때문에......?] 사공표의 음성이 냉랭하게 굳어졌다. [가져오지 않았단 말이냐?] [예, 그...... 그게 이젠 필요없을 줄 알고......] 갈홍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더듬더듬 말하자 사공표는 갑자기 음성을 높혔다. [홍아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갈홍은 즉시 그의 앞으로 다가가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섰다. 사공표는 곧 그에게 물었다. [너는 이번에 악구천에게 무슨 독을 사용했느냐?] 갈홍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상린남영(祥麟藍影)입니다.] 사공표의 질문은 이어졌다. [그 상린남영은 본문(本門)의 삼대극독(三大極毒)중 하나로 조금만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지 않겠느냐?] 갈홍의 이마에 조금씩 비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그렇습니다.] 사공표는 계속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악구천은 개방의 장로이므로 그가 독살되었다면 필시 개방에서는 전 고수를 풀어 그를 독살한 범인을 찾을게 아니냐?] 갈홍의 음성은 어느새 떨리기 시작했다. [예......] 사공표는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렇다면 왜 상린남영이 묻어 있는 개다리를 회수하지 않았느냐? 개방의 인물들에게 본문의 사람이 개다리를 이용하여 그를 독살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냐?] 갈홍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덜덜 떨었다. 사공표는그를 어떻게 하겠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몸을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웃으면서 살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웃지 않아도 남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갈홍은 몇년 동안이나 사공표를 가까이서 섬겨왔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마음이 악랄하고 수단이 잔혹한지를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갈홍은 그 자리에서 털석 무릎을 꿇었다. [제자가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어서 손을 쓰십시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음성에서 비장한 빛마저서려 있었다. 사공표는 잠시 냉엄한 눈으로 갈홍을 내려보다가 이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은 네 첫번째 실수이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해주겠다. 일어나거라!] 갈홍은 처음에는 자신의 귀가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기쁨에 가득찬 얼굴이 되었다. 그는 최소한 팔 하나는 자를 각오를 했던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공표를 쳐다보는 갈홍의 눈동자에는 감격과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사공표는 다시 그에게 말했다. [너는 지금 곧 그곳으로 다시가서 개다리를 회수하고 악구천의 머리통을 잘라 오너라.] 갈홍은 조금 머뭇거렸다. [그 늙은이의 머리통은 왜......] [악구천은 강호에서도 남궁봉과 함께 이대괴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강호경험도 누구보다도 많고 노련하지 그지없지. 만에 하나 그 늙은 거지가 허튼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니 일을 보다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다.] 갈홍은 악구천의 몸이 자흑색으로 변해 버린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하려다가 자신이 당시 그의 숨소리를 들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 사공표의 얼굴에 이상한 빛이 떠올랐다. 사공표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어느 친구분이 이곳까지 노부를 찾아 오셨소?] 갈홍은 돌연한 사공표의 외침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 [허허헛......! 자네는 정말 개처럼 귀도 밝군 그래.] 카랑카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지붕위에서 한 인영이 창문을 통해 대청안으로 들어왔다. [웬 놈이냐?] 갈홍은 깜짝 놀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그 인영에게 덤벼들려 했다. 허나 사공표가 급히 제지하는 바람에 손을 멈추고 말았다. [잠깐!] 이어 사공표는 나타난 인영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유난히 작달막한 키에 괴상하게 생긴 얼굴, 그리고 수중에 들고 있는 담뱃대를 보자 사공표는 눈을 번쩍 빛냈다. [귀하는 혹시 새장자 남궁형(南宮兄)이 아니시오?] 나타난 인영, 남궁봉은 껄껄 웃었다. [크하하...... 과연 자네의 이목은 개같이 영민하군. 노부가 바로 남궁봉일세.] 사공표는 남궁봉이 두번식이나 거푸 자신을 개에 비유하자 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괴짜 중의 괴짜로 알려진 그가 불쑥 이곳에 나타난 것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여 간신히 화를 눌러 참았다. 그는 태사의에서 일어나며 포권을 해보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남궁형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정말 영광이오. 헌데 이렇듯 늦은 시작에 이곳까지 무슨 일로......] 남궁봉은 히죽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별일 아닐세. 그저 지나가다가 자네 제자가 길에 아까운 음식을 흘리고 갔길래 노부가 대신 주워왔네.] 이어 그는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을 보자 사공표와 갈홍의 안색이 모두 대변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기름에 볶은 개의 넓적다리가 아닌가? 갈홍은 한 눈에 그 개다리가 자신이 상린남영을 발라 악구천에게 주었던 바로 그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남궁봉은 개다리를 왼손에 든 채 그것을 이리저리 돌리며 웃음띤 어조로 말했다. [자네 제자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모르지만 이런 맛있는 음식을 함부로 버릴 수가 있나?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도록 자네가 따끔하게 혼을 내주게.] 사공표는 일이 심상치 않게 되었음을 깨닫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담담한 안색이 되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고마울데가...... 그렇지 않아도 이 녀석이 성질이 급하고 덜렁대서 그렇게도 타일렀지만 천성이 그런지 잘 고쳐지지가 않아 고민중이었소. 남궁형의 말씀대로 이 놈을 단단히 교육시켜 두번 다시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겠소이다.] 그의 대답은 아주 묘해서 갈홍이 길에다 음식을 흘린 것을 꾸짖는 것인지, 아니면 일을 잘 확인도 해보지 않고 서둘러 이곳으로 찾아온 것을 나무라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갈홍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서 있었다. 남궁봉은 몇가닥 나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듣던대로 자네는 아주 시원시원하군. 자, 그럼 이 개다리를 받게.] 남궁봉이 들고 있던 개다리를 던지려 하자 사공표가 급히 손을 흔들었다. [그러실 필요 없소. 남궁형께서 그것을 주으셨으니 그건 당연히 남궁형의 것이오.] 남궁봉은 헤하고 멍청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럼 노부가 이것을 먹어도 괜찮겠나?] 사공표는 속으로 크게 기뻤으나 겉으로는 별 관심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거야 남궁형이 좋으실대로 하시오. 노부는 상관없으니......] [고맙네. 정말 고마우이......] 남궁봉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개다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사공표는 노련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으나 이때만은 자신도 모르게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어서 먹어라...... 어서!) 남궁봉은 입가에 구침까지 가득 흘리며 막 그것을 뜯어먹으려고 입을 쩍 벌렸다. 사공표와 갈홍은 애타는 시선으로 남궁봉이 개다리를 물어 뜯기 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만일 남궁봉마저 상린남영으로 쓰러뜨릴 수 있다면 이들 두 사제(師弟)는 반나절 동안에 강호무림의 이대괴인을 모두 처치하게 되는 것이다. 허나 남궁봉은 개다리가 입에 닿기 직전 돌연 히죽 웃으며 개다리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아니지, 생각해 보니까 노부 체면에 남이 먹다 남긴 것을 먹을 수야없지.] 옆에 서 있던 갈홍은 절로 다급한 심정이 되어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노선배님! 저는 그것을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마음놓고 드십시오.] 남궁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하지만 그동안에 상하지 않았을까?] 갈홍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튀긴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안전합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오! 그렇다면 자네가 먼저 한입 먹어보게.] 남궁봉이 개다리를 던져주려 하자 갈홍은 질겁을 했다. [아...... 아닙니다. 전 방금 식사를 했기 때문에 배가 불러서 생각이 없습니다.] [한입인데 뭘 그러나? 자네가 먼저 입을 댄다면 나머지는 내가 깨끗이 먹어치우지.] 남궁봉이 개다리를 든채 갈홍에게 다가오자 갈홍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어찌 노선배님의 음식을 먼저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남궁봉은 싱글벙글 웃으며 개다리를 갈홍에게 내밀었다. [괜찮네. 어차피 누구 입으로 들어가던 배설되는 건 똑같은 거 아닌가? 사양하지 말고 한입 뜯어보게. 이걸 먹고 싶어서 비싼 돈을 주고 샀을 텐데 한입도 먹지 않는다면 얼마나 아깝겠나?] [저...... 저는 개고기를 못 먹습니다.] 남궁봉은 눈알을 부라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넨 이걸 먹기 위해서 산게 아닌가?] 갈홍은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랐다. [저...... 그...... 그건......] 그때 사공표가 불쑥 입을 열었다. [홍아야, 남궁형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한입 먹도록 해라. 나머지는 남궁형께서 모두 드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의 음성과 표정은 아주 부드러웠고 온화한 미소까지 떠올라 있었다. 허나 갈홍은 그 웃음을 보자 소름이 쭈욱 끼쳤다. 그는 사공표가 어떤 악독한 계책을 생각했을 때 습관적으로 이런 미소를 짓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공표가 생각해 낸 계책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사공표는 갈홍을 제물로 삼아 남궁봉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상린남영은 사공표의 삼대극독(三大極毒)중 하나로 해약(解藥)이 없는맹독(猛毒)이었다. 허나 한가지 약점이 있다면 약이 발동하는 시간이 좀 더디다는 것이었다. 갈홍이 먼저 개다리를 한입 먹는다면 남궁봉은 안심을 하고 나머지를 맛있게 먹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록 남궁봉은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만 갈홍 또한 그와 함께 지옥길을 동반해야 하는 것이다. 갈홍은 절대로 죽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머뭇거리자 사공표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것은 그의 가슴에 진한 살심(殺心)이 떠올랐다는 것을 뜻한다. [홍아야, 무엇을 망설이느냐? 설마 이 사부가 직접 먹여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 말을 듣자 갈홍은 학질이 걸린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는 정말 이판사판이었다. 개다리를 먹는다면 상린남영에 중독되어 죽을 것이고, 그것을 먹지 않는다면 사공표의 손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남궁봉은 한쪽세어 재미있다는 듯 히죽히죽 웃으며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 들게. 노부를 생각하지 말고 개고기의 진미(眞味)를 마음껏 음미하게나. 노부는 그저 자네가 먹다 남긴 찌꺼기만 먹어도 만족하겠네.] 갈홍은 다시 애원이 담긴 눈으로 사공표를 돌아보다 그의 눈빛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남궁봉이 내민 개다리를 잡았다. [어서 먹게. 노부도 빨리 먹고 싶군.] 남궁봉은 아주 자상한 미소를 보내며 먹으라고 재촉을 했다. 갈홍은 개다리를 느릿느릿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헌데 개다리가 막 그의 입에 닿으려는 순간, [난 못해!] 갈홍은 버럭 외치며 개다리를 사공표에게 집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사력을 다해 밖으로 몸을 날렸다. 허나, [흥! 네놈이 감히......] 이미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사공표는 슬쩍 고개를 움직여 개다리를 피한 후 오른손을 바깥으로 휘둘렀다. [크악!] 막 대청을 벗어나던 갈홍은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쿵! [크으으......] 갈홍은 벌레처럼 꿈틀거린채 기를 쓰며 일어서려 했으나 어느새 그의 내장은 사공표의 음공(陰功)에 산산이 박살이 났는지 입을 벌릴 때마다 잘려진 내장조각과 함께 검붉은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공표는 차가운 눈으로 갈홍을 쏘아보았다. [감히 사부의 명을 거역하다니 네 놈은 죽어도 마땅하다!] 사공표는 냉랭한 음성으로 소리치며 힐끗 남궁봉의 눈치를 살폈다. 헌데 웬걸? 남궁봉은 그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갈홍이 내던진 개다리를 다시 주워들고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공표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혹시 저 놈이......) 남궁봉은 개다리를 코에 대고 킁킁 냄새까지 맡아보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개다리는 아직 상하지도 않았는데 왜 저 녀석은 기를 쓰고 먹으려고 하지 않는 거지?] 그러더니 덥썩 개고기를 뜯어먹는 것이 아닌가? 사공표는 그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뻤다. (옳지, 이제 됐다!) --------------------------<第 十七 章>--------------------------- 第 18 章 玄字護法 [쩝...... 쩝...... 아이구 맛있어. 이 맛있는 걸 남에게 줄뻔 했으니나도 눈이 멀었지.] 남궁봉은 혀까지 차며 정신없이 개다리를 뜯어먹었다. 그가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사공표 조차 한입 뜯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곧 개다리는 뼈다귀만 남은 채 모조리 남궁봉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꺼억...... 어! 잘먹었다!] 그제서야 남궁봉은 한바탕 긴 트림을 하며 만족한 듯 배를 두르렸다. [헤헤...... 미안하네. 혼자 먹어서.] 사공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짐짓 점잖게 말했다. [흐흐...... 아니오. 남궁형께서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오. 술이라도 내올걸 그랬소.] [아닐세. 개고기를 공짜로 얻어 먹었는데 술까지 얻어먹을 수야 있나?] 두 사람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갈홍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자네 제자가 왜 바닥에 쓰러져 있나? 벌써 잠이 든 겐가?] 사공표는 내심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으나 남궁봉도 머지 않아 독이 발작하여 쓰러질거라고 생각하며 화를 억눌렀다. [그게 아니라 저 놈이 감히 사부인 노부의 명을 거역하고 밖으로 달아 나려 하길래 쓴 맛을 보여주어쓸 뿐이오.] 남궁봉은 작은 머리통을 갸우뚱거리며 갈홍에게로 다가갔다. 갈홍은 이미 숨이 끊어지기 직적이었지만 아직 정신이 조금은 있는지 필사적으로 눈을 치켜뜨며 남궁봉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남궁.... 개.... 다리.... 도.... 독(毒).... 조.... 심....] [쓴맛치곤 호되게 당한 모양이군. 어? 그런데 날 보고 뭐라고 중얼중얼거리는데......?] 사공표는 가슴이 덜컥 대려앉음을 느끼고 급히 말했다. [죽기 전에 헛소리를 하는가 보군요. 자, 그놈에게 신경쓰지 말고 이곳에 좀 앉으시오.] 남궁봉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닐세. 이 자의 표정을 보니까 노부에게 꼭 할 말이 있는 것 같네. 그 말을 못하고 죽으면 눈도 감지 못할 것 같은 억울한 얼굴이군.] 이어 그는 쓰러져 있는 갈홍의 입에 귀를 가까이댔다. 갈홍은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개다리... 도... 독이... 사공표... 꼭 죽여... 보... 복수...] 그의 말은 채 ?나지 못했다. 갈홍은 두 눈을 부릅뜬채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남궁봉은 나직히 혀를 찼다. [쯧, 무엇이 그리 원통하길래 눈도 감지 못하고 죽었나 그래.] 남궁봉은 갈홍의 눈을 감겨 주었다. [자네의 부탁은 곡 지켜주겠네.] 느긋한 표정으로 남궁봉을 응시하고 있던 사공표는 남궁봉이 일어나면서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빛냈다. [갈홍이 죽기 전에 뭐라고 했소?] 남궁봉은 그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알고 싶나?]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소.] [아닐세. 자네도 관련된 얘기니까 들어두는게 좋을 걸세.] 이어 그는 사공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갈홍은 두가지 얘기를 말하려고 했네. 첫째는 개다리에 독이 묻어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의 복수를 꼭 해달라는 것일세.] 사공표는 움찔했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지금까지 보다 더욱 밝은 웃음이었으나 웬지 모르게 음산하면서도 섬칫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흐흐...... 갈홍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남궁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사공표는 상린남영의 독기가 이미 남궁봉의 골수에까지 파고 들었다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말했다. [흐흐...... 갈홍이 못다한 얘기를 마저 해주지. 남궁 늙은이, 네가 먹은 개다리에는 상린남영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의 절친한 친구인 걸신 악구천이 먹다가 죽은 개다리이기도 하다. 결국 네 놈들은 친한 친구사이답게 개다리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먹고 죽게 된 것이다.] 사공표는 말을 하면서도 득의의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크하하...... 갈홍은 죽기 전에 네게 사실을 말해주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 놈의 복수를 하기는 커녕 오히려 너도 곧 갈홍의 뒤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남궁봉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닐세.] 사공표는 남궁봉이 너무도 태연한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음산하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니......?] [갈홍의 얘기가 쓸데없다고 한건 그가 너무 늦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노부는 이미 그 개다리에 독이 묻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미 자네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일세.] [뭐라고?] 사공표가 대경실색하여 주춤 뒤로 물러날 순간, 쐐액! 남궁봉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개다리의 뼈다귀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아아...... 그 순간의 가공함이란......! 사공표는 아직까지 인간이 이토록 빠르게 손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적이 없었다. 그가 무엇인가 눈앞에 번쩍거리는 것 같다고 느낀 순간 개뼉다귀는 어느새 그의 목구멍을 꿰뚫고 있었다. 팍! [끄으으으......!] 그의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남궁봉을 노려보았다. 남궁봉은 개뼉다귀에 목을 관통 당한 채 경악에 가득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공표를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원래는 자네를 좀 더 놀려준 다음 사로잡아서 건곤교의 내막을 알아보려고 했네. 하지만 자네가 순순히 말을 해줄 것 같지도 않고 갈홍의 원혼(怨魂)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그냥 보내주기로 했네. 지옥에서 갈홍을 만나거든 노부가 안부를 묻더라고 전해주게.] 이어 그는 몸을 돌려 몇 발자국 걷다가 고개를 돌려 아직도 우두커니서 있는 사공표를 쳐다보았다. [아참! 독이 잔뜩 묻은 개다리는 다른 사람이 먹다 변을 당할까봐 이미 땅에 묻어버렸네. 조금전에 노부가 먹은 것은 오늘 저녁에 노부가 직접 산, 아주 깨끗하고 맛있는 진짜 개다리였네.] 남궁봉은 말을 마치자 서슴없이 몸을 돌려 대청을 벗어났다. 쿵! 그제서야 목이 관통당한 사공표는 피를 분수처럼 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몸은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허나 그의 부릅뜬 눈은 아직도 자신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는 듯 경악과 불신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막 대청을 벗어나려던 남궁봉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대청이 있는 이층 누각의 앞에는 어느새 황삼을 걸친 황의인들이 약 십명가량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대청의 입구에서 정면으로 약 오장쯤 떨어진 곳에는 네 사람이메는 사인교(四人驕)가 놓여 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복면을 하고 청의를 입은 네명의 여인들이 서 있었다. 그 사인교는 매우 특이하여 일반의 사인교보다 아주 작아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십여명 가량의 황삼인들의 손에는 짤막한 곤봉과 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는데 거기서 붉은 빛이 쏟아져나와 누각 앞을 밝히고 있었다. 헌데 그 불빛은 몹시 괴이하여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으며 심지어는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까지 변하고 있었다. 그 빛의 괴이한 조화(造化)는 석상처럼 묵묵히 서 있는 황삼인들과 어울려 주위를 으시시한 분위기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남궁봉은 우두커니 대청의 입구에 선 채 황삼인들을 훑어보다가 청색 가마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노부는 가마를 부른 적이 없는데 이들이 왜 이곳에 온 것일까?]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위가 원체 조용했기 때문에 멀리 있는 사람들도 아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돌연 가마안에서 차가운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누구예요? 그리고 우자호법(宇字護法)은 어디 있길래 본 공주가 왔는데도 나와서 영접을 하지 않는 거지요?] 남궁봉은 그 음성을 듣자 이들이 나타난지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공표가 우자호법이었던 모양이군.) 남궁봉은 히죽 웃으며 비실비실 앞으로 걸어왔다. [헤헤...... 노부는 사공 늙은이의 둘도 없는 친구라오. 헌데 그 늙은이는 잠이 깊이 들었는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길래 노부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려던 참이오.] 가마 안의 여인은 남궁봉의 말의 진위를 판단하려는 듯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남궁봉은 실없이 웃으며 계속 가마 앞으로 걸어왔다. 이때 돌연 가마안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를 막아라!] 순식간에 가마 앞을 청의복면녀들이 막아섰다. 뿐만 아니라 좌우로 벌려 서 있던 황삼인들도 남궁봉을 둘러싸고 있었다. 남궁봉은 사면세어 적이 둘러싸오는 걸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는 의미 모를 미소를 띄우면서 여전히 가마에 접근해 가고 있었다. [쳐라!] 한소리 호통과 함께 황삼인 셋이 남궁봉에게 덮쳐들었다. 남궁봉은 모른 척 가만히 있다가 그들의 공세가 반자 거리까지 다다르자 번개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순간, 픽! 피------익! 둔탁한 소리가 잇따라 아니 거의 동시에 마치 한번의 소리인 양 주위를 울려퍼졌다. 다음순간 남궁봉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가마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세명의 황삼인들이 안면이 완전히 뭉개져 쓰러지고 있었다. 실로 그 정확함과 빠름, 그리고 손속의 악랄함은 놀랍기 이를데 없었다. 이것은 선전수(旋轉手)라는 초절정의 내가수법(內家手法)이었다. [앗!] 가마 안의 여인은 결과가 이토록 허무할 줄은 뜻밖인지 나직한 탄성을 토해냈다. 남궁봉은 귓전으로 황삼인들이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앞을 가로막고있는 청의복면녀들을 바라보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노부는 다리도 아프고 해서 저 가마를 타고 가야겠으니 낭자들은 잠시만 비켜주지 않겠나?] 네명의 청의복면녀들은 일제히 남궁봉을 향해서 검을 겨누었다. 그런데도 남궁봉은 마치 그 검에 찔리기를 바라든 듯 계속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나오고 있었다. [에잇!] 앙칼진 함성과 함께 네명의 청의복면녀들고 빙글 돌면서 두명이 검을쳐왔다. 파앗! 그 기세로 보아 충분히 강호의 절정고수의 자격이 있었다. 동시에 남궁봉의 등뒤에서도 나머지 황삼인중 네명이 공격을 해왔다. [아이고...... 웬 가마꾼들이 이렇게 험악하냐?] 남궁봉은 우거지상을 지으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다음 순간, [아악!] [크아악!] 구슬픈 비명성이 터지고 놀람에 찬 외마디 비명성이 엇갈렸다. 어느 누구도 똑똑히 보지 못했는데 남궁봉의 앞에는 청의복면녀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청의복면녀는 자신의 검을 황삼인의 가슴에 찔러 놓고 혼이 빠진 듯 멍청히 서 있었다. 나머지 황삼인 세 명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팔이 베어져나가 있었다. 실로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남궁봉은 그 짧은 시간에 두 손에서 막강한 접인력(接引力)을 발출하여 두 복면녀의 검을 끌어당겨 오히려 뒤에서 ?쳐오는 황삼인들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멍청히 서 있던 청의복면녀들이 분노한 함성을 지르면서 재차 남궁봉에게 덮쳐 가려고 했다. [물러서라! 너희들이 상대할 사람이 아니다!] 차가운 음성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청의복면녀들은 독기어린 눈으로 남궁봉을 노려보면서 검을 거두었다. 이로 보아 가마안의 여인이 평소에 수하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것이었다. 가마 안에서 다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굉장한 이화접목(移花接木)이군요. 귀하는 혹시 새장자 남궁봉, 남궁대협이 아닌가요?] 남궁봉은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어이구...... 귀하디 귀하신 이공주(二公主)께서 노부같은 쓸모없는 늙은이의 이름을 알고 있다니 이거 정말 영광무지로소이다.] 가마 안의 여인은 크게 놀란 듯 경호성을 터뜨렸다. [아니...... 내가 이공주라는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남궁봉은 능청스레 말했다. [그걸 노부가 어떻게 알겠소? 단지 건곤교에 공주가 세명이 있다 길래 어림 짐작으로 말했을 뿐인데 용케도 맞았구료. 헤헤......] 남궁봉은 경망스럽게 웃었으나 가마 안의 여자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놀란 듯 안에서는 한참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건곤교는 아직 정식으로 강호무림에 개파(開派)를 알리지 않은 비밀집단이었기 때문에 당금 무림에서는 건곤교라는 이름은 커녕 그런 문파가 있는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건곤교에 세명의 공주가 있다는 사실은 건곤교 내에서도 영주(令主)급 이상의 인물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헌데 남궁봉은 단번에 그녀가 건곤교의 이공주임을 알아보았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한동안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던 이공주는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과연 소문대로 남궁대협은 범상치 않으신 분이군요. 본 교에 대해서 얼마나 더 알고 있으세요?] 남궁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많지 않소. 에...... 교(敎)니까 교주(敎主)가 있을테고......] [그래요.] [그리고 교주를 호위하는 위사(衛士)들이 있을 것 같군. 예를 들면 건곤위사라던지 뭐 그런거 말이오.] 이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알고 계시군요. 그리고요?] [헤헤...... 팔대호법이나 팔대영주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분타가 일흔 두곳인지 아닌지는 노부도 잘 모르오. 하지만 사방천왕인지 사대천왕이니 하는 작자들이 설치고 있다는 말은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나는군.] 이공주는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이제보니 남궁봉은 건곤교의내부조직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공주는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음성을 토해냈다. [정말 놀랍군요. 남궁대협께서 본 교에 대해 그토록 소상하게 알고 계시다니......] [헤헤...... 노부를 너무 치켜올리지 마오. 노부는 어지럼증을 타니까. 이공주 또한 삼공주와는 달리 아주 침착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지셨구료.] 이 말에 이공주는 다시 한번 깜작 놀랐다. [남궁대협게선 삼공주를 만나신 적이 있으신가요?] 남궁봉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제자놈에게서 말만들었소. 그 놈 말로는 삼공주는 아주 사납고 암팡진 암사자 같다고 하더군. 헌데 살인첩이란게 뭐요?] 이공주는 아무렇지도 않은척 되물었다. [살인첩이라뇨?] 남궁봉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글쎄. 노부도 잘 모르겠소. 헌데 그 위에 노부 이름 석자가 적혀 있다고 하던데 이공주는 뭔가 짚이는 점이 없소?] 남궁봉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야 이공주도 더이상 시치미를 떼고 있을수만은 없었다. 그녀의 음성은 어느새 처음과 마찬가지로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남궁대협께서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실줄은 몰랐군요. 확실히 본교에서는 남궁대협을 척살하기 위해 살인첩을 발동했어요. 그것도 제자분에게서 들으셨나요?] 남궁봉은 무엇이 그렇게도 좋은지 연신 배실배실 웃었다. [헤헤...... 노부의 제자 녀석은 술마시고 여자 꼬시는데만 쓸모가 있는게 아니라 제법 귀동냥도 한다오. 이공주께서 그놈에게 관심이 있다면 노부가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겠소이다.] [풍파무쌍 화일로 말이요?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본 공주는 바람둥이는 질색이거든요.] 남궁봉은 혀를 찼다. [어이구 저런...... 그 녀석이 들으면 눈물 꽤나 흘리겠군. 할 수 없지. 본인이 싫다는데야...... 그렇다면 이공주와 노부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 것 같으니 노부는 이만 가보겠소.] 이어 남궁봉은 성큼성큼 걸어가려 했다. 건곤교에서 그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판에 그가 스스로 나타났는데 쉽사리 보내줄리가 만무했다 남궁봉이 채 한 걸음을 떼어 놓기도 전에 어디선가 홍소(洪笑)가 터져 나왔다. [하하...... 하하하......]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는지 누각의 지붕에 있는 기왓장이 금시라도 떨어져 내릴듯 들썩거렸다. 동시에 어둠속에서 한 인영이 불쑥 남궁봉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남궁형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실 수야 있겠소? 본교는 그렇게 야박하지 않으니 남궁형께서 원하신다면 아주 편안하게 모시겠소.] 남궁봉은 나타난 사람의 신법을 보고 눈쌀을 찌푸렸다. (저것은 내가상승의 어풍신법(御風身法) 같은데......] 신법 한 가지만 보아도 나타난 인영이 절정의 고수임을 알아차릴수 있었다. --------------------------<第 十八 章 上>------------------------ 第 18 章 玄字護法 남궁봉이 그를 살펴보니 얼핏 보기에 삼십대의 중년인 인것 같았는데 눈이 가늘고 안색이 음침한 것이 매우 심기가 깊어보였다. 허나 남궁봉을 형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겉모습보다는 상당히 나이를 먹은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황색장포를 입고 등에는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었다. 남궁봉은 태연한 신색으로 물었다. [자네의 신분은 어떻게 되는가?] 황의중년인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본인은 팔대호법중의 현자호법(玄字護法)이오.] 남궁봉은 자신의 손에 죽은 사공표가 우자호법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가 더 지위가 높은지는 알 수 없었다. 황의중년인이 그 눈치를 챘는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본교에는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의 팔대호법이 있소. 본인의 위치는 팔대호법 중 세번째요.] 사공표가 우자호법이니 황의중년인의 지위는 사공표보다 높은 것이 틀림없었다. 남궁봉은 고개를 그떡이며 말했다. [잘 알았네. 헌데 자네가 노부의 앞에 나타난 것은 노부에게 빚진게 있어서인가?] 황의중년인은 냉소를 날렸다. [잘 아실텐데...... 본인은 남궁형에게 빌릴 게 한가지 있소.] 남궁봉은 싱겁게 웃었다. [목 위에 있는 머리통 말인가?] [흐흐...... 바로 그렇소. 나는 이미 그것을 떼어버리기로 작정했소.] 남궁봉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껄껄 웃었다. [허허...... 그렇지 않아도 노부는 이 머리통이 너무 커서 영 불편하기 짝이 없었네. 어서 떼어주게 제발 부탁이네.] 황의중년인의 눈빛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흐흐...... 원한다면 소원대로 해주지!] 동시에, 파앗! 그의 등뒤에서 차가운 검광이 뻗어나왔다. 그가 검을 뽑는 동작과 발초하는 동작은 단숨에 이루어져서 남궁봉 주위의 삼장 가량이 대번에 그의 검세하에 들어갔다. 매섭고도 신랄하기 이를데 없는 초식이었다. 그의 검은 호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궁봉과 한자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접근해 왔다. 무서운 살수였다. 남궁봉은 상대의 검법이 의외로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자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우우웅...... 황의중년인의 검은 남궁봉의 몸과 반자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자 부르르 떨리더니 다섯개의 검화(검화)를 발출해내어 공격해갔다. 마지막의 이 변화는 너무도 뜻밖이고 빨라서 미리 준비하고 있어도 당할 것 같았다. 헌데, 남궁봉은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황의중년인의 눈가에 회심의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허나 그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놀랍게도 남궁봉의 몸은 검세에 밀리듯 두둥실 경쾌하기 이를데 없이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황의중년인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도망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마라!] 그는 전력을 장검에 모으고 남궁봉의 가슴을 여전히 노렸다. 파파파팍! 검광에 눈이 어리는 가운데 황의중년인의 장검은 순식간에 다섯 차례나 초식을 바꾸었고 여섯번이나 변화시켰다. 실로 매섭고도 악랄하기 이를데 없는 초식이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그 신랄무비한 검세가 남궁봉의 곁에 이르기만 하면 남궁봉의 몸은 무엇에 떠밀리는 것 같이 그 사정권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황의중년인은 갑자기 무엇을 깨달은 듯 검을 거두며 외쳤다. [부영수형(浮影隨形)!] 그는 매우 놀란 듯 조금전까지 남궁봉을 금방 쳐 죽일 것 같던 안색이창백해졌다. 게다가 목소리마저도 경악과 불신에 가득차 있었다. 부영수형이란 경신법은 일단 펼치기만 하면 전신이 가볍기 이를데 없어져서 한줄기 미풍만 불어도 몸을 날릴 수가 있는 초절정의 신법이었던것이다. 이 절기는 지난 백여년동안 실전되어 강호에는 나타나지 않았었는데 오늘 남궁봉에 의해 펼쳐진 것이다. 남궁봉은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칠절산화검법(七絶散花劍法)은 매우 훌륭했네. 자네는 칠령검(七靈劍) 방건(方乾)이로군 그래.] 그의 담담한 웃음은 담담한 목소리와 결합하여 이상한 중압감을 띄고황의중년인에게 뻗쳐갔다. 황의중년인은 미처 놀란 심신을 가다듬기 전이라 도저히 그 기세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얼핏 중년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나이가 벌써 육십을 넘어선 강호의 초절정고수였다. 칠령검 방건은 이미 삼십년전부터 화북(華北) 일대를 주름잡은 절세의 검객으로 당금 무림을 통털어 오대검객(五大劍客)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절세의 검객이 건곤교에서 겨우 호법의 자리에 올라 있는것이다. 각설하고, 남궁봉이 웃으면서 뻗쳐낸 기세는 무섭기 이를데 없어 방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순식간에 그는 주동의 입장에서 피동으로 몰리고 만 것이었다. 이것은 별 것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들과 같은 절세고수들간의 겨룸에있어서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에잇!] 한걸음 물러난 방건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대갈하면서 비스듬히 일검을 후려쳤다. 쐐액! 그 일검은 평범해 보였지만 기실 심오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바로 그가 자랑하는 칠절산화검법의 삼대절초중 하나인 낙화일섬(落花一閃)이었다. [허허...... 너무 성급하군. 그렇게 빨리 죽고 싶나?] 남궁봉은 껄껄 웃으며 오히려 앞으로 두 걸음 전진했다. 동시에 그는 아무렇게나 양손을 마구 흔들기시작했다. 파파파팍......! 그의 손은 무질서하기 짝이 없었으나 방건은 자신의 낙화일섬이 그 손에 의해 산산히 파괴됨을 깨닫고 안색이 대변했다. [광마사십팔수(狂馬四十八手)로구나......!]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외치며 사력을 다해 칠절산화검법으로 맞서갔다. 허나 그의 검은 남궁봉의 괴이한 장세에 휘말려 완전히 그 날카로움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으악!] 별안간 처절한 비명성이 터지며 방건이 뒤로 물러났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두개의 구멍이 뚫어져 붉은 피가 샘솟듯 솟아나고있었다. 방건은 안색이 창백해진채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고 있었다. 그때 가마속에서 이공주의 다급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어서 물러서요!] 비틀거리며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방건을 향해 남궁봉이 괴이무쌍한 일장(一掌)을 후려갈기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동시에, 파앗! 가마속에서 하나의 청영(청영)이 섬전처럼 폭사해 나오더니 남궁봉을 향해 날아갔다. 청영은 몸매가 유난히 호리호리한 복면여인이었는데 그녀의 손바닥에 시퍼런 청색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남궁봉은 힐끗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보다가 놀란 음성을 토해냈다. [청염장(靑焰掌)이구나!] 동시에 그는 벼락같이 몸을 반전시키면서 일장을 마주 펼쳐냈다. 남궁봉의 손에서는 보일듯 말듯한 황색의 경기(勁氣)가 주위의 공기를 진탕시키며 쏟아져 나갔다. 끄아아앙! 기이한 음향이 터졌다. 동시에 주위에는 막강하기 이를데 없는 회오리 바람이 퍼져나갔다. --------------------------<第 十八 章 下>------------------------ 第 19 章 北方鷹王 [으음......] 청의복면녀, 이공주는 막강한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덮쳐가던 기세를 멈추고 땅에 내려서면서 비틀거렸다. 반면에 남궁봉은 움찔거리다가 반걸음 가량 물러서고 있었다. 헌데 그 순간, 쐐액! 방건이 악독하기 이를데 없는 검식으로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그는 남궁봉을 꼭 죽이기로 마음 먹은 듯 그 검세는 놀랍도록 빨라 마치 검풍(검풍)이 일어나기도 전에 검이 도달하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그의 검이 남궁봉의 등을 꿰뚫을 듯 보였다. 남궁봉의 왼손 중지(中指)가 장난처럼 살짝 튕겨졌다. 동시에, 채------앵! 매서운 금속성이 터지며 방건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밀종(密宗)의 검원지(劒元指)마저 익히고 있다니......] 방금 남궁봉이 내갈린 지공(指功)은 방건의 검을 막았을 뿐 아니라 그에게 적지않은 내상까지 입혔다. 그 위력은 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남궁봉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담담한 신색으로 말했다. [두 사람이 합공을 하니 이제 조금 싸울 맛이 나는군. 사실 자네 혼자로는 노부의 제자도 당해내지 못할 걸세.] 방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시뻘개졌다. 그의 육십평생에 언제 이런 수모를 당해보았겠는가? [미친 놈의 늙은이......!] 방건이 이를 갈아붙이며 다시 남궁봉에게 덤벼들려는 순간, [휘------익!] 돌연 멀리서 야음을 뚫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는 실로 무지막지한 공력이 스며있어 내공이 약한 사람은 그소리만 듣고도 고막이 파열돼 죽사할 것 같았다. 그 휘파람 소리를 듣자 방건을 비롯한 건곤교도들의 얼굴에 일제히 희색이 떠올랐다. [북방응왕(北方鷹王)께서 오신다!] 남궁봉은 주위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사방천왕의 무공은 하나같이 당세(當世)에 필적할 인물이 거의 없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이 자도 결코 서방사왕에 못지 않은 절대고수다!) 이때 다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익!] 놀랍게도 이번의 휘파람 소리는 백여장 밖에서 들려왔다. 단숨에 휘파람소리가 이백여장을 다가온 것으로 보아 휘파람을 부는 사람의 경공이 어떠한 경지에 이르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방건은 대뜸 용기백배하여 대갈일성을 하며 전력을 경주하여 칠절산화검법중의 최절초인 만화조락(萬花凋落)을 시전해 남궁봉에게 덮쳐갔다. [이얍!] 그의 장검에서는 무서운 검광이 폭발하듯 터져나와 남궁봉에게 덮쳐갔다. 쏴쏴쏴쏴쏴쏴...... 실로 경인할 위세였다. 그와 동시에 이공주도 앙칼진 호통을 치면서 잇따라 삼장(三掌)을 후려쳐 내면서 남궁봉에게 덮쳐갔다. 파르르릉! 순식간에 허공에는 뼈를 에이는 듯한 한기로 가득찼다. 남궁봉은 두 눈을 횃불처럼 빛내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가 번개처럼 양손을 휘둘렀다. 순간, 콰콰쾅! 째쨍! 귀청을 찢는 요란한 음향이 폭죽이 터지듯 터졌다. [으악!] 동시에 처참한 비명성이 터져 나오면서 장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남궁봉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신색은 평온하기 그지 없어 어찌보면 조금도 손을 쓴 사람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공주는 넋나간 듯 남궁봉의 오른쪽에 서 있었는데 양쪽 소매가 마치 걸레 같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어 백옥같이 고운 팔뚝이 송두리째 드러나보이고 있었다. 가장 비참한 것은 방건이었는데 조금전의 비명소리는 그가 지른 것 같았다. 방건의 검을 쥔 오른팔은 어깨죽지에서 잘려져 나가 있었다. 그는 혼비백산한 듯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데도 지혈(止血)할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남궁봉의 무공이 이 정도 일줄이야..... 소문보다 배는 더 강하지 않은가?] 그때, [휘익!] 장원에서 이십여장 떨어진 곳에서 매서운 소성이 울려퍼졌다. 방건은 이 소성에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들며 들뜬 음성으로 소리쳤다. [북방응왕이 왔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궁봉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양손을휘둘렀다. 파아앗! 그의 양손이 움직이자 황삼인들이 들고 있던 괴이한 빛을 내는 곤봉과 같은 물건이 모조리 빛을 잃고 말았다. [어엇?]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지자 방건은 경호성을 내지르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그 짧은 사이에 남궁봉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멀리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헤헤...... 오늘은 이만하고 그냥 가겠네. 다음에는 좀 더 센놈을 보내게......] 그 소리의 마지막 말은 이미 백여장 밖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때 남궁봉에 의해 빛을 잃었던 황삼인들의 곤봉의 빛이 되살아났다. 실로 촛불이 한번 일렁인 것 같은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에 남궁봉은 허깨비처럼 사라진 것이다. 방건과 이공주는 어이가 없는 듯 한동안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쐐액! 하나의 길쭉한 흑영이 섬전처럼 그들 앞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는 앙상한 체구에 흑포를 걸친 매부리코의 노인이었다. 흑포노인의 눈빛은 유난히 음침했는데 피부가 쩍쩍 갈라진데다 마치 시체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어 흡사 유령을 보는 것 같았다. 무어라고 꼬집을 수 없는 괴기(怪奇)하고 머리끝이 쭈뻣한 분위기가 흑포노인에게 있었다. 흑포노인은 전광같은 눈으로 남궁봉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저 자는 누구냐?] 그의 음성은 갈라터져 있어 마치 들쥐가 고목나무를 갉아먹는 듯 듣기역겨운 것이었다. 방건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새장자 남궁봉입니다.] [남궁봉!] 흑포노인의 안광이 갑자기 수백개의 인광(燐光)을 합친 듯 번뜩거렸다. 그는 방건의 잘려진 오른팔을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 놈의 솜씨냐?] 방건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습니다.제 솜씨가 부족하여 그만......] 그때 이공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응왕(鷹王)께선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흑포노인은 거만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녀에게만은 약간 태도를 바꿨다. [오다가 과거에 약간의 은원(恩怨)이 있던 자를 만났소. 그 자와 과거의 은원을 푸느라 조금 지체되었으니 공주께선 이해하시오.] 이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 자는 처치하셨나요?] 의외로 흑포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몇 수 겨루다가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 그냥 헤어졌소.] 이공주는그의 말에 내심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알기로는 당금 무림에서 이 북방응왕의 적수가 될 수 있는 인물은 그야말로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니, 그 자가 누구인데요?] 북방응왕의 메마른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스치가 지나갔다. [철선무적(鐵扇無敵) 운남행(雲南行)이오.] [아니......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었나요?] [본좌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그 자라고 살아있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소? 그 자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본좌의 발길을 지체시킬 수 있었겠소?] 북방응왕의 음성에는 광태에 가까운 오만의 빛이 담겨있었다. 허나 이공주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철선무적 운남행이라면 벌써 삼십년전에 강호무림에서 선법(扇法)의 제 일인자로 손꼽히는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물됨이 준수하고 풍류(風流)를 즐겨 당시 무림에서는 제일가는 풍류남아(風流男兒)이기도 했다. 이십년전에 그와 북방응왕은 여자 문제로 인한 사소한 시비가 붙어 한바탕 격전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무공은 그야말로 막상막하인지라 거의 삼일 밤낮을 두고 싸웠으나 승패를 가르지 못했었다. 그 싸움 이후 그들은 무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고, 무려 이십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북방응왕은 두 눈에 벽돌색 광망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헌데, 남궁봉 그 늙은이가 이곳을 어찌 알고 찾아왔단 말이오?] 그 말에 이공주의 안색도 가볍게 변했다. [참, 그 자는 우자호법을 찾으러 왔다던데...... 혹시......?]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대청안으로 뛰어들었다. [아......!] 누구의 입에서인지 짤막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두구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살펴보지 않아도 그게 누구의 솜씨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남궁봉...... 그 놈이......] 북방응왕의 눈에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공주는 눈쌀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일이 심상치 않군요. 우자호법과 갈홍은 걸신 악구천을 독살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어요. 그들은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어 성공시킬 확률이 뮏았는데 남궁봉에게 격살당하다니......] [남궁봉은 악구천과 둘도 없는 친한 친구요. 필시 이들이 악구천을 해하려는 것을 알고 남궁봉이 손을 쓴 것일게요.] [본 공주의 생각도 그래요. 그럼 이번 계획은 보기좋게 실패한 셈이군요.] 북방응왕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일전에 삼공주와 서방사왕도 남궁봉을 유인하기 위해 그의 제자를 사로잡으려던 계획이 실패로 끝나 교주의 꾸지람을 들었소. 헌데 우리는 일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제발로 걸어온 남궁봉마저 놓쳤으니 교주의 진노를 살게 틀림없소.] 그의 음성에는 은근히 그를 놓친 책임이 이공주와 방건에게 있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이공주는 총명한 여인인지라 대번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미를 찡그렸다. [북방응왕께서 지체하지만 않았다면 그를 놓치지 않았을 거예요. 원래그들을 유인하는 일은 삼공주와 내가 맡고 그들을 직접 처치하는 일은 두분 천왕께서 맡은 임무가 아니던가요?] 북방응왕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는지라 더이상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세 명의 공주는 비록 교주의 친딸은 아닐지라도 의녀(義女)였다. 따라서 교주의 총애도 각별했고 신분도 높아 아무리 사방천왕이라도 그녀들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북방응왕은 잠시 눈을 번뜩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쩌겠소? 이대로 돌아가 복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그 놈들을 찾기도 쉬운 일은 아닐텐데......] 이공주의 아름다운 눈이 지혜롭게 반짝였다. [본 공주에게 한가지 생각이 있어요.] 북방응왕은 귀가 번쩍 뜨이는 지 급히 물었다. [그게 뭐요?] [남궁봉은 모르지만 악구천은 개방의 장로이므로 낙양에 왔다면 필시 개방의 낙양분타에 들렸을 거예요.] [하지만 그곳에 계속 있으란 보장이 없지 않소?] [그러니가 그를 불러내야지요.] 북방응왕은 그녀의 말에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시오?] [사람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건물은 그렇지 못해요.] 북방응왕의 눈이 번쩍 빛났다. [공주의 말뜻은?] [악구천은 비록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지만 개방의 낙양분타는 계속그 장소에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그곳으로 그를 유인해야 되요.] 북방응왕은 무릎을 탁 쳤다. [이제 알겠소. 공주께선 개방의 낙양분타를 공격하라는 뜻이구료?] [그래요. 낙양분타가 위기에 처하면 악구천은 나오지 말라고 해도 나타날 거예요.] [허허...... 과연 절묘한 생각이오. 이공주의 지략이 세 분 공주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하더니 과연 사실이로군. 본좌는 다시 한번 감탄했소이다.] [과찬의 말씀......] [아니오. 이건 본좌의 진심이오. 공주의 말대로 낙양분타로 쳐들어 가서 거지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면 악구천은 불같이 노해 저절로 나타날 거요. 흐흐...... 그가 일단 본좌 눈에 띄기만 하면 본좌는 그를 수습할자신이 있소.] 이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획은 결정되었군요. 하지만 굳이 거지들을 모두 죽일 필요는 없어요. 그곳을 포위한 채 위협만 가하만 악구천은 곧 나타날 거예요.] [흐흐...... 그런 일은 본좌에게 맡기시오. 공주의 말씀대로 그를 처치하는 일은 본좌의 몫이니까.] 북방응왕은 벌써부터 피맛이 그리운지 입가에 연신 살소(殺笑)를 흘렸다. 이공주는 그의 흉식악귀같은 모습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다만눈쌀만을 잔뜩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第 十九 章>--------------------------- 第 20 章 기이한 文士 다음날 동이 틀 무협, 북방응왕은 팔이 잘린 방건 대신 황자호법(黃字護法)과 주자호법(宙字護法), 그리고 열 두명의 수하들을 데리고 북문밖 개방 분타를 향해 달려갔다. 개방분타가 눈 앞에 보이는 곳까지 당도하자 그는 두명의 호법에게 각기 여섯명씩의 수하를 데리고 두 갈래로 갈라지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자신은 태연히 혼자서 정문으로 향했다. 그의 몸이 막 정문으로 들어서자 황자호법과 주자호법은 제각기 동.서양쪽으로 뒤따라 들어왔다. 북방응왕은 높은 문로(門Ｘ)에 올라 사방을 한번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다가 절로 멍해졌다. 이곳 개방 분타는 본래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 도(道)를 닦는 도장(道場)이었다. 그리고 관내(觀內)에는 앞뒤로 제각기 대전(大殿)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는 넓은 정원이 있었다. 그곳은 예전에 관내 도사(道士)들이 집회하는 장소로 쓰여진 곳이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항상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신분의 상하(上下)를 막론하고 모두 이 장소에 모여 무공을 연마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장소는 바로 개방제자들의 연무장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며 어찌된 일인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동 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황자호법과 주자호법 역시 이곳의 상황이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때 두 사람은 북방응왕의 분부가 있기도 전에 이미 몸을 날려 제각기 대전을 향해 달려갔다. 북방응왕은 이 두 사람이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가는 것을 알고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얼마 후 두 사람과 열두명의 부하는 모두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북방응왕은 눈쌀을 찌푸렸다. [어떻게 되었느냐?] 황자호법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대답했다.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거지 새끼들은 아마 우리가 온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도망친 모양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주자호법이 이어 말했다. [이 기회에 아예 이 거지 새끼들의 소굴을 불질러 버리는게 어떻겠습니까?] 북방응왕은 또다시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한 것을 깨닫고 분노가 치밀었다. [모두 불질러 버려라!] 그는 버럭 노성을 지르며 발로 땅을 찼다. 두 명의 호법을 비롯한 열 두명의 부하들은 불을 지르기 위해 마른 장작을 구하러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때였다. [앗?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풀숲을 뒤적거리던 수하 한명이 놀라는 음성으로 외쳤다. 북방응왕은 귀가 번쩍 뜨여 두 명의 호법과 함께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날아갔다. 과연, 동쪽에 있는 대전의 뒤꼍 풀밭에 청색 신발을 신은 남자의 발이밖으로 솟하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풀밭 속에 누워 있는 듯 그 발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북방응왕은 싸늘한 눈으로 그 발을 노려보다가 냉소를 날렸다. [웬 놈이냐?] 그의 음성은 상당히 커서 주위가 쩌렁하게 울릴 정도였다. 그러나 풀밭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죽은듯이 누워있었다. 북방응왕의 눈빛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황자호법, 가서 저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보아라.] 황자호법은 대답을 하고 즉시 앞으로 발을 떼어 놓았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서 양 팔에 공력을 가득 끌어올린 채 풀밭 밖으로 뻗쳐나와 있는 그 청색 신발 앞으로 다가갔다. [여봐라......!] 그러자 갑자기 풀잎을 헤치고 사람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런 제기랄...... 이곳은 좀 조용할까 해서 일부러 찾아와서 잠을 청하려 했는데 역시 편히 잠잘 수가 없구나. 방금 누가 나를 불렀소?] 양손으로 두 다리를 안고앉아 졸린 눈을 비비는 그는 푸른 장삼을 걸쳤는데 늠름한 풍채였다. 허나 얼굴은 비교적 못난 편이었다. 밑으로 축 쳐진 팔자 눈썹에 얼굴은 핏기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황자호법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서 있자 그는 아래 위를 훑어보고 나서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이 순간 북방응왕 등 일행은 번개같이 황자호법 곁으로 날아왔다. 황자호법은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네 놈은 누구냐?] 청삼문사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번쩍 뜨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아니, 조금 전엔 분명 한사람이었는데 어느새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늘어났단 말인가? 내가 잘못 보았나, 아니면 이곳에 귀신이 있다더니 지금 나타났단 말인가?] 황자호법은 냉랭하게 소리쳤다. [연극은 집어치워라. 네 놈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를 밝혀라.] 그러자 청삼문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을 한차례 쭈욱 훑어보고 짤막하게 탄성을 지르면서 덧붙였다. [그러고보니 당신들은 귀신이 아니라 전부 사람이었는데 내가 공연히 놀란 거로군. 나는 방금도 말했듯이 이곳이 하도 조용하기에 잠을 자러 온 것 뿐이오.] [흐흐...... 젊은 놈이 아가리를 함부로 놀리는군. 더이상 시치미를 떼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당장 네 놈의 숨통을 끊어버리고야 말겠다!] 황자호법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곧바로 앞으로 다가서려고 했다. 청삼문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너무 이러지 마시오. 나 육청운(陸靑雲)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아니니까.] 이 말에 황자호법은 물론이고 북방응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깜짝놀랐다. 황자호법은 대경실색하여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아...... 아니......당신이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이란 말이오?] 그의 말투 또한 어느새 한결 정중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무림인들의 머리속에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청삼문사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하면서 나직히 속삭였다. [쉿, 조용조용 하시오. 이곳에서 큰소리로 떠들어서는 안되오. 그러다잠자고 있는 귀신이라도 깨어난다면 당신들은 한바탕 봉변을 면치 못할거요.] 황자호법은 멍청해져서 우두커니 그를 주시했다. 청삼문사는 놀란 토기같은 그의 모습을 한번 쓸어보고 빙그레 웃었다. [당신들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며칠전 부터 이곳에서는 밤마다 귀신이 나타난다고하오. 그래서 이곳에 거처를 잡고 있던 개방의 거지떼들도 모조리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고 말았소. 덕분에 나는 이렇게 편하게쉴 곳을 찾았지만 말이오.] 황자호법은 퍼뜩 정신이 들어 반신반의하는 어조로 물었다. [당신이 정말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이오?] 청삼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옥면청삼인지 절정신검인지는 모르지만 내 이름은 분명히 육청운이오.] 황자호법은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좋을지 몰라 한동안 망설였다.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은 강호무림의 제일고수로 자타가 공인하는인물이었다. 더구나 문무에 고루 능하고 얼굴은 전설의 미남자인 송옥이나 반안을 훨씬 능가하며, 한마리 학처럼 고고한 기상을 풍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허나 눈앞의 이 인물은 비록 청삼을 입고 있었지만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고 준수한 얼굴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육청운의 진면목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은 드넓은 강호무림 에서도 한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황자호법은 청삼문사의 추악한 얼굴을 응시하며 싸늘한 냉소를 흘렸다. [흥! 당신이 정말 육청운이라면 소문이란 것은 믿을게 못되는군.] 청삼문사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사람을 너무 그런 식으로 얕보지 마시오. 그러면 서로 감정이나 상할 뿐이오. 나는 수백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데 어떤 때는 나자신가지도 어떤 얼굴이 나의 참 모습인지조차 모르고 있을 지경이오.좌우지간 나는 제법 영준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때도 있소. 하지만 내가 만일 영준한 얼굴을 지니게 되면 천하의 미남(美男)들이 모두 질투 할까봐 되도록이면 삼사하고 있소.] [그렇다면 그런 영준한 모습을 한번 구경시켜 주시오.] 자칭 육청운이라는 청삼문사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무모하게 화근을 만들고 싶지 않소. 그러다가 당신이 괜히 애꿎게 질투해서 트집을 잡고 내게 덤빈다면 골치 아픈 일이 아니오?] 황바호법이 다시 뭐라고 입을 열려 할 때 뒤에 서 있던 북방응왕이 앞으로 나서며 냉랭하게 말했다. [긴말 할 것 없이 해치워 버려라. 그러면 그 놈이 진짜 육청운인지 아닌지 알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황자호법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허나 막상 청삼문사를 마주 노려보며 손을 쓰려 하자 망설여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청삼문사가 진짜 육청운이라면 자신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미친 짓을 하는 격이 되는 것이다. 허나 북방응왕의 싸늘한 시선을 등뒤로 느끼자 황자호법은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진짜 육청운이라면 그 유명한 검술 솜씨 한번 보자!] 황자호법은 날카롭게 외치며 힘껏 도를 뽑아 앞으로 휘둘렀다. 쐐액! 그의 도법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빨라 칼날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청삼문사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슬쩍 옆으로 한걸음움직였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는데 기이하게도 그토록 날카로웠던 황자호법의 칼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엇?] 황자호법이 흠칫 놀랄 때, [절영도(絶影刀) 동립(童立)! 당신 정도로는 내 검을 받을 자격이 없지!] 청삼문사는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가볍게 내밀었다. 스윽! 마치 벽이 움직이는 듯 청삼문사의 손은 그림처럼 허공을 날아 황자호법의 전신을 압박했다. 황자호법은 강남제일(江南第一)의 쾌도(快刀)로 소문이 난 절영도 동립이었다. 동립은 청삼문사의 간단한 손동작이 비할데 없는 현기(玄耭)를 띄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이야압!] 그는 대갈을 터뜨리며 있는 힘을 다해 칼을 사방으로 질풍처럼 휘둘러 십팔도(十八刀)를 갈라쳤다. 파파파팟! 주위가 온통 칼 그림자에 휘감긴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로 동립이 가장 자랑하는 십팔연환참(十八連環斬)이라는 수법이 펼쳐진 것이다. 허나 청삼문사가 장난처럼 가볍게 내민 오른손은 엄밀하기 그지없는 그지없는 도영(刀影)을 너무도 간단하게 뚫고 들어왔다. [앗?] 동립의 다급한 외침이 터지는 순간, 꽝! [크윽!] 폭음과 함께 도영이 씻은 듯이 거치며 한 사람이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중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니 어느새 동립은 입가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구도 청삼문사가 어떤 수로 동립을 쓰러뜨렸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강남제일의 쾌도라는 동립이 불과 단 한 수만에 허무하게 쓰러질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었다. [지...... 진짜 옥면청삼 절정신검이구나!] 북방응왕이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음성을 중얼거렸다. 청삼문사는 그를 돌아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이제야 그걸 아셨소. 북방응왕?] 북방응왕은 해연히 놀라 부르짖었다. [아니, 네가 어찌 노부의 정체를......] [하하......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시오? 건곤교에 네 명의 천왕이 있으며 그 중 북방응왕이 가장 변변치 못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소?] 북방응왕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뭐라고? 노부가 감히 누구인줄 알고......] 육청운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당신 유령무영마(幽靈無影魔) 음구유(陰九幽)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북방응왕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말로는 모른다고 하면서도 너무도 정확하게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나 유령무영마 음구유, 그가 누구인가? 아마 다른 사람이 이 이름을 들었다면 그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말았을것이다. 그것은 음구유가 거의 사십년전에 천하무림을 휩쓸고 다니던 환우칠마(Ｘ宇七魔) 중의 일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환우칠마의 흉명(凶名)은 너무도 대단하여 무림에서는 그 이름만 들어도 모두를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고 한다. 헌데 이제 사십여년이 흐른 지금 그들 중 한 사람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한동안 북방응왕은 멍청한 얼굴로 육청운을 응시하다가 돌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로군! 감히 노부인줄 알면서도 아가리를 함부로 놀리다니......] 그의 웃음에는 막강한 공력이 담겨 있어 주위의 나무와 돌들이 무섭게 흔들렸다. 오죽했으면 그의 근처에 있던 주자호법과 열두명의 건곤교도들이 귀를 싸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까...... 허나 육청운은 여전히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돌연 낭랑하게 소리쳤다. [그만 웃으시오!] 그의 음성은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큼이나 담담 했다. 그런데도 이상한 위력이 담겨 있어 음구유의 광소는 저절로 그쳐 버렸다. 음구유는 광소를 멈추고 음산하게 입을열었다. [왜 견디기 힘드느냐?] [그게 아니라 당신이 웃건 말건 상관없지만 애럺은 당신 부하들이 희생될까봐서 그렇소.] 그제서야 음구유는 퍼뜩 생각이 나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주자호법은 간신히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지만 나머지 열두명의 수화들은 입과 코로 선혈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비록 목숨은 건졌으나 심각한 내상을 입어 당분간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음구유는 육청운의 기를 꺾어 놓으려고 한 일이 오히려 자신의 수하들 만 상하게 하자 약이 바짝 올랐다. [상전 하나 잘못 만나서 부하들만 죽을 고생이군. 그러길래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나서 다리를 뻗어야 한다니까.] 육청운이 나직히 혀를 차는 소리가 그의 가슴을 박박 긁어놓았다. [흐흐...... 이놈! 그렇지 않아도 네 놈은 이미 본교의 최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다. 오늘 노부의 손에 걸린 이상 네놈도 이제 끝장이다!] 음구유는 흉악하게 외치며 육청운을 향해 덤벼들었다. [하하...... 당신은 너무 늙어서 상대하기엔 별로 재미가 없소. 가서좀 더 젊은 사람을 보내도록 하오.] 음구유의 얼굴이 더이상 차가울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하게 굳어졌다. 스으으...... 갑자기 그의 호리호리한 신형이 희뿌애지더니 갈고리같은 손이 육청운의 목덜미로 날아들었다. 음구유의 유령무영마라는 별호는 그의 신법이 보이지도 않을(無影) 정도로 빠르고 수법이 유령처럼 괴이막측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었다. 사실상 그의 유령구조(幽靈九爪)는 마도사상(魔道史上) 최강의 조법(爪法)으로 알려져 있었다. 허나 육청운은 이미 그것을 짐작하고 있던 듯 조금도 놀라지 않고가볍게 몸을 날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쯧...... 너무 무리하지 마시오.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가 노쇠해진 당신의 뼈마디가 상하기라도 하면 어쩌겠소?] 음구유는 이미 살심(殺心)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는지 입술을 꼭 다문채 더욱 빠르게 육청운을 덮쳐갔다. 슈우우우...... 허공이 온통 그의 쭈글쭈글한 손그림자로 뒤덮여 버렸다. 육청운의 훤칠한 몸은 놀랄 정도로 신속하게 그 엄밀한 수영(手影)을 뚫고 움직이고 있었다. 음구유는 비록 노련하기 비할데 없는 인물이었으나 지금 자신이 한가지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혈전(血戰)을 치루는 것은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 명가고수(名家高手)일수록 상대방을 이기기 전에 먼저 자신을 이겨야 한다. 자신의 기분을 이길줄 알아야만 당황하지 않고 출수(出手)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허나 음구유는 육청운의 교묘한 화술(話術)에 말려 혈기(頁氣)에 휩싸여 버렸다. 그는 절정고수들간의 싸움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금기(禁忌)를 무의식중에 깨버린 것이다. 슈슈슈슈.... 눈깜박할 사이에 음구유는 무려 사십오초를 공격했다. 허나 육청운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날렵한 동작으로 그것을 모두 피해버렸다. 음구유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개졌다. 그는 더욱 무서운 속도로 양손을 마구 휘둘렀다. 허나 그에 따라 육청운의 움직임도 빨라져 도저히 그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음구유는 이가 부서질 정도로 깨물고 자신의 절기인 유령구조를 연거푸 펼쳐냈다. 육청운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그것을 피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음노인(陰老人), 벌써 손이 느려지는 구려. 그것 보시오. 내가 뭐라고 했소? 아무리 날뒤어도 나이는 속일 수 없다니까.] 음구유는 그의 말을 듣자 분노보다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말 내 손이 느려진 것일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육청운의 격장지계(擊將之計)에 넘어가 더욱 빨리손을 휘둘렀다. 다시 수십초가 지나갔다. 음구유는 점차 자신의 진력(眞力)이 고갈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일격에 육청운을 격살하려고 온몸에 뺏뺏하게 힘을 들어가 쓸데없는 힘을 너무 많이 소비한 것이다. 그가 더 빨리 움직이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손은 무리한 힘에 의해 더디어졌다. [헉...... 헉......!] 음구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주름지고 비쩍 마른 얼굴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토록 섬전처럼 움직였던 그의 손도 눈에 띄게 느려졌고, 마도제일이라 일컬어졌던 그의 신법도 점차 무거워졌다. 실로 음구유로서는 평생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힘든 순간순간들이었다. 그 순간 이제껏 피하고만 있던 육청운이 갑자기 달려들며 양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파앗! 그의 손은 시기가 적절하고 너무 갑작스러워 음구유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어이없게도 그대로 적중당해 버렸다. 꽝! [크악!] 음구유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오장이나 날아갔다. 그의 벌려진 입에서는 시뻘건 피분수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쿵! 바닥에 나가떨어진 음구유는 바둥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했다. [크으으...... 네...... 네가......] 실로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십년동안이나 강호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환우칠마중의 한 사람이 상대의 옷깃 조차 건드려 보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주자호법은 너무도 놀라고 경악스러워 멍청하게 서 있었다. 육청운은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을 올려보며 바둥거리고 있는 음구유를 내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너무 서둘렀소. 그러지만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았을텐데...... 당신의 무공은 제법 그럴 듯 했지만 마음이 너무 편협하고 성질이 급해 나로 하여금 검을 뽑을 필요도 없게 만들었소. 당신은 스스로를 탓해야 할 거요.] 음구유는 기를 쓰며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입으로 피를 토하며 고개를떨구었다. 실로일세(一世)의 흉마(凶魔)답지 않은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제서야 육청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자호법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자 주자호법은 퍼뜩 정신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경악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육청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육청운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소. 가서 건곤교의 교주에게 전하시오. 이 육청운은 비록 변변치는 않지만 청해오는 도전은 기꺼이 받아주겠노라고. 하지만 그것을 빙자해서 무림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선량한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이오.] 주자호법은 다시 한바탕 몸을 격하게 떨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보시오.] 주자호법은 마치 사형직전에 사면(赦免)을 받은 사람처럼 큰 한숨을 불어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육청운은 정신없이 달아나는 주자호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쯧...... 아무리 급하기로 부상당한 부하들을 버리고 가다니......] 그는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열두명의 건곤교도를 내려보다가 그들에게 다가가 일일이 혈도를 눌러주었다. 그런 다음 품속에서 환약을 꺼내 한 사람앞에 두 알씩 입에 넣어 주었다. 환약을 먹고 나자 열두명의 건곤교도들은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육청운은 그들을 한 차례 쓸어본 후 아직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몸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바닥에는 두 구의 시체만이 피비린내를 풍기며 나뒹굴어져 있을 뿐이었다. --------------------------<第 二十 章>--------------------------- 第 21 章 어처구니 없는 내기 이곳은 한 채의 아늑한 찻집이었다. 이 찻집은 낙양성에서도 가장 번잡한 중앙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조금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차 맛이 뛰어나게 좋고 실내의 모든 가구를 죽제품(竹劑品)으로 만들어 고아한 풍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찻집은 문을 연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 네 사람의 손님밖에 없었다. 창가에 마련된 자리에는 화의청년(華衣靑年)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훤칠한 키에 이목이 수려했고 두 눈은 지혜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동쪽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은 남루하기 그지없는 옷을 입은 노인이었다. 거지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듯 한데 얼굴에 주독이 올라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노인은 기다란 머리를 갸웃거리며 술 호로병 하나를 귓가에 대고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마치 호로병 속에는 술이 얼마 남지 않아 마시기엔 아깝고 해서 흔들어 소리를 듣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른 한 구석에 앉아 있는 손님은 표사차림을 한 두 명의 중년 사나이였다. 그 두 명의 중년 사나이는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었는데 무슨 일로 의견 다툼을 하는듯 싶었다. 이때 한 중년인이 손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틀렸어!] 다른 한명도 지지 않으려는 듯 따지고 들었다. [어째서 틀린가?] 처음 소리친 중년인이 냉큼 말을 받았다. [오형(吳兄), 풍운보주인 용호풍운신검 하조천이 낙양 남쪽의 이궐용문(伊闕龍門)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 그 풍파무쌍의 걸작이 아니라면나 구모인(邱慕人)은 낙양성 동문에서 서문까지 기어다니겠네.] 오가라 불리운 중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구형은 무엇을 근거로 삼아 그런 말을 하나?] [물론 확실한 근거가 있네. 첫째,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그 풍파무쌍 화일로를 제외하면 누가 또 있겠나? 과거의 낙양태세(落陽太歲), 하북인원(河北人猿), 파동삼귀(巴東三鬼)도 좋은 예가아니겠나?] 오가가 고개를 끄억이자 구가는 계속 말을 꺼냈다. [둘째, 화일로는 하조천이 개최한 비무초친에서 우승을 하여 그의 사위가 되어야 했네. 헌데 어찌된 일인지 두 사람은 사이가 멀어져 결국 나중에 정구살이 풍운보를 찾아왔을 때 화일로는 중간에서 수작을 부려 하조천을 골탕먹였네. 하지만 하조천은 목숨은 멀쩡한채 부상만 입고 화일로를 보기만 하면 찢어죽이겠다고 떠들고 다녔지. 화일로가 어떤 작자인데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겠나?] [설마 그렇다고 자신의 장인이 될뻔했던 사람을 죽이기가지야 했겠나?] 구가는 돌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오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 풍파무쌍 화일로가 살인을 하는데 언제 이유가 있었는가? 그저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해치우는데......] 창문가에 앉아 잇는 화의청년은 이들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구가란 중년인이 내뱉는 말이 몹시 공감이 가는 모양이었다. 한편 동쪽 구석에 앉아 있는 노인은 끝내 술냄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이미 호로병의 술을 깨끗이 마셔버린 뒤 지금은 상위에 놓여있는 열냥의 동전을 세고 있었다. 그는 동전을 여러 무더기로 나누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아침 차값이고, 이것은 점심값, 가만있자...... 음...... 하나, 둘, 셋, 모두 열 한개가 남았군. 아무리 거지의 신분이지만 술까지 얻어마실 수야 없지. 암, 술은 제돈을 내고 먹어야 맛이 나는 법이지.] 그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계산을 한 결과가 만족스러운 듯 흐믓한 웃음을 입가에 흘린 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층계 입구에서 다시 손님이 올라왔다. 앞장서 올라온 사람은 백의를 입고 체구가 뚱뚱한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백의청년의 이목구비는 제법 반듯하게 생겼다. 허나 살이 너무 쪄 본래의 준수한 면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치 하나의 비곗덩어리를 연상케 했다. 백의청년 바로 뒤에는 눈이 번쩍 뜨이는 아리따운 홍의미소녀가 올라오고 있었다. 홍의미소녀는 그야말로 기차게 생겼다. 앵두알같은 입매, 성숙하고 한창 물이 오른 팽팽한 육체, 그리고 사나이들의 넋을 앗아갈 듯한 눈매...... 이런 것들은 술기운을 빌지 않더라도 한번 미친척하고 이루만져 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던 두 중년인들은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갔는지입가에 침을 흘린 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허나 홍의미소녀는 그런 시선에 몹시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백의청년을 따라 한쪽 구석에 가서 앉았다. 헌데 이상한 것은 창문가에 앉아있는 화의청년의 태도였다. 그는 한창때의 젊은이이므로 의당 아리따운 홍의미소녀에게 관심을 가져야 마땅한데 오히려 그들이 찻집에 올라올 때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푹 떨군 채 차만 마시고 있었다. 이때 점원이 차를 들고 올라와 먼저 낡은 옷을 입은 노인에게로 다가가 착잔을 내려 놓은 후 이어 표사 차림의 두 중년인에게 가려고 했다. 그러자 노인은 손을 쳐들어 점원을 불러 세웠다. [이봐!] 점원은 얼른 허리를 굽실거렸다. [네, 노인장! 분부가 있으십니까?] 노인은 손가락으로 상위의 동전무더기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차값이니 우선 갖고 가고 만두 두개와 땅콩 한 봉지, 그리고 에또...... 그렇지. 술 반근만 사다주게.] 점원은 내심 못마땅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이때 화의청년은 아예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길가는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점원이 차를 모두에게 날라주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직후, 돌연 뜻하지 않은 장면이 전개되었다. 낡은 옷을 입은 노인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겨 표사차림의 두 중년인 곁으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당겨 태연스레 앉았다. 두 중년인은 잠시 대화를 중단했다. 두 장한 중 구가라는 사나이가 자기들의 좌석에 뛰어든 이 늙은이가 못내 못마땅한 듯 먼저 입을열었다. [노인장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은 대뜸 말을 가로챘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은 피차가 전연 낯선 사이이니 이것이 초면일세.] 오가라는 사나이는 멍해지며 물었다. [그럼 무슨 일로......?] [우선 내 얘기를 차근차근 들어보게. 난 지금 수중에 한닢의 동전도 없네. 몇개 남은 동전으론 술을 사버렸거든. 이렇게 말하면 자네들은 내말뜻을 알아듣겠나?] 두 사나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 마주 바라보았다. 그들은 혹시 자기네들이 잘못 듣지나 않았나 하고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객지(客地)에서 노자가 떨어지면 구걸을 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허나 이 경우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이 찻집엔 은자깨나 있어 보이는 화의청년이 있고, 또 부유한 집의 자제로 보이는 백의청년과 홍의미소녀가 있거늘 하필이면 표사차림의 두 중년인을 택한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또한 그 노인은 구걸을 하는 주제에 마치 두 사람에게 받을 것이라도 있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두 중년인은 틀림없이 이 늙은이가 시비를 걸러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암암이에 경각심을 돋구었다. 낡은 옷을 입은 노인은 눈알을 굴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생각을 잘못 하고 있는 것 같군?] 구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노인장께선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신지요?] [있고 말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쾌하게 태꾸한 뒤 이내 정색을 했다. [자네들은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이 늙은이는 비록 거지 신세지만 아무 댓가없이 구걸을 해 본적은 없다네. 다시 말해서 정정당당히 협상을하여 보수를 받는단 말일세.] 구, 오 두 사람은 움찔 놀라 자신들도 모르게 동시에 소리쳤다. [협상이라고요!] [그렇지. 완전히 협상이네. 지금 이 늙은이가 하고자 하는 협상은 자네들의 의사에 따라 보수의 많고 적음을 결정할 수 있지. 우선 한 가지 묻겠는데 지금 자네들 두 사람이 합쳐서 지니고 있는 은자는 얼마나 되는가?] 구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오가 사나이에게 묻는다. [오형은......] 오가 사나이는 품속에서 은자를 꺼내 대강 세어본 후 입을 열었다. [아마 열냥쯤 되는군.] 구가도 품속에서 은자 주머니를 꺼내 세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도 역시 그 정도네.] 자기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은자는 합쳐서 대략 스무냥쯤 된다고 하자노인은 대뜸 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몽땅 이리 내놓게.] 구가는 서슴치 않고 두개의 주머니를 그에게 던졌다. 노인은 잠자코 주머니를 받아 품속에 깊이 간직하고는 땟국이 흐르는 더러운 손수건으로 찻물을 찍어 상위에다 커다랗게 썼다. [어서 떠나라!] 쓰기를 마친 노인은 헛기침을 두어번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본래의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구가는 울화통이 치밀어 막 발작을 하려는데 오가란 사나이가 급히 상밑으로 그를 살짝 걷어차 그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구가는 영문을 몰라 오가 사나이를 멍청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오가를 주시하던 구가는 그가 암시해주는 대로 시선을 창가로 돌리는 순산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창가에 앉아 있는 화의청년은 다름아닌 풍파무쌍 화일로였던 것이다. 두 중년인은 마치 날뛰던 쥐가 고양이를 만났을 때처럼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소리도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허나 화일로는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던진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아무런 눈치도 못챈 듯한 모습이었다. ------------------------<第 二十一 章 上>------------------------ 第 21 章 어처구니 없는 내기 두 사나이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점원이 이층으로 올라왔다. 그는 첫눈에 두 사람이 없어진 것을 보자 얼른 그들이 앉았던 자리로 다가가 상위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리 살펴도 상 위엔 찻값이 없자 점원은 눈쌀을 찌푸리며 욕설을 하려고 했다. 이때 그 낡은 옷의 노인이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점원의 입은 다물어졌다. [여보게, 그들의 찻값은 내가 내겠네.] 그 말을 듣자 점원은 금새 안색이 밝아지며 노인에게로 달려가 허리를 굽신거렸다. [예예...... 알겠습니다. 여기 조금 전에 부탁하신 술과 만두, 그리고 땅콩을 가져왔습니다. 헤헤......] 점원에게서 술호로병을 받아든 노인은 대뜸 마개를 열고 코끝을 갇다 댄 뒤 냄새를 맡아보더니 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이런 술을 어떻게 마시겠나?] 그는 술호로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후 품속에서 은자 두 냥을 꺼내 상위에 소리가 나도록 세게 놓으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가서 제일 좋은 술로 삼백근 사오고 통닭 한마리, 새우볶음, 해삼탕, 에 또...... 싱싱한 놈으로 골라서 생선회도 가져오너라.] 점원은 이 말을 듣자 몹시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에게 갑자기 없었던 은자가 생겼단 말인가? 허나 상위의 은자는 분명히 진짜이지 않은가? [어서 갖다 주게나.] 점원은 노인의 재촉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굽신거린 뒤 이내 사라졌다. 이 노인은 당연히 개방의 괴물인 걸신 악구천이었다. 악구천은 화일로의 사부인 남궁봉의 친구이므로 화일로를 알고 있음이 분명한데 무슨 심산인지 아는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화일로는 마침내 차를 다 마셨다. 그는 망설임없이 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내 탁자위에 올려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막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이때 아래층에서 다시 한명의 손님이 올라왔다. 올라오는 사람은 들창코에 다리를 몹시 저는 곰보장한이었다. 곰보장한은 막 이층으로 올라오려다 화일로를 보자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아니? 귀하는 화일로...... 화가주가 아니오?] 화일로는 아차 싶어 곰보장한을 자세히 바라보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입을 헤벌쭉 벌리며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파면비차 우풍광이었던 것이다. 이때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백의청년과 홍의미소녀는 우풍광이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란 듯 황급히 고개를 돌려 층계쪽을 쳐다보았다. 화일로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백의청년의 뚱뚱한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백의청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층계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한편 화일로는 고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시었소, 우형? 이런 곳에서 우형을 만나다니 뜻밖이구료.] [헤헤...... 화가주와 나는 아무래도 인연이 많은 모양이오.] 화일로는 대충 인사를 하고 그와 헤어지려 했으나 우풍광은 계속 앞을 가로막은 채 입을 놀렸다. [일전에 화가주께선 풍운보에 계셨으면서 왜 나오시지 않으셨소? 그 때문에 일이 이상하게 꼬여 사부님이 풍운보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소.] 화일로는 마음이 다급했으나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만 했다. [그건 영사께서 너무 기세등등하게 나오셔서 내가 얼굴을 내밀었다간 영사께 뼈도 못 추릴 것 같아서였소.] 우풍광은 바보같은 웃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맞아! 헤헤...... 화가주가 그때 안나오기를 잘했소. 난 사부님께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그 분은 내가 패했다는 말을 듣고 불같이 노하셔서 화가주를 찢어죽이고겠다고 펄펄 뛰셨소. 정말 내 본심은 아니었으니 이해해 주시구려.] [이해하고 자시고 할게 뭐 있겠소? 그럼 나는 이만 바빠서......] 이때 이미 화일로의 등 뒤 가까이까지 다가온 백의청년은 화일로의 얼굴을 확실히 보자 얼른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반색을 했다. [화형, 그토록 찾아다녔는데 여기 계셨군요? 하하...... 정말 잘 만났소?] 아까 화일로가 얼굴을 창가로 돌리고 시종 사람들을 보지 않은것은 어떤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허나 그것은 걸신 악구천이 아니고 바로 눈앞의 이 뚱뚱보 백의청년이 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백의청년이야말로 도박귀신이라 불리우는 헌원당(軒轅當)이었기 때문이다. 헌원당은 명문세가(名門世家)의 자손이었으나 도박을 광적(狂的)으로 좋아해 아무나 만나면 무슨 내기든지 벌렸다. 일전에 화일로는 그를 골려줄 셈으로 그와 도박을 벌여 그의 돈을 몽땅 빼앗고 옷까지 홀라당 벗기게 만들어 헌원당은 비곗살을 내보인 채 알몸으로 도망가야만 했었다. 허나 헌원당은 그때의 치욕을 앙갚음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화일로를 찾아헤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화일로는 골머리르 싸맨 채 피해다니고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때 아니게 우풍광이 층계를 가로막는 바람에 그에게 붙들리고 만 것이다. 화일로는 하는 수 없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헌원형은 잘 있었소? 나를 그렇게 찾았다니 뜻밖이구료. 나는 항상 넓고 번잡한 곳으로만 다녀 찾기가 수월했을텐데......[ 헌원당은 구슬이라도 숨길 수 있을만한 볼우물을 양쪽뺨에 움푹 매며 이죽거렸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소. 나는 화형이 낙양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벌써 일주일째 낙양 성내를 통통 털며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으나 화형을찾을 수가 없어 포기하려던 참이었소. 헌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하늘은 과연 무심치 않으시구료.] [무슨 일로 나를 그토록 간절하게 찾으셨소?] 헌원당은 화일로의 세배는 됨직한 뚱뚱한 비곗살을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않소? 화형과 다시 한판 벌리기 위해 찾아왔소.] 화일로는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헌원당이 직접 입으로 말하자 여간 입맛이 쓰지가 않았다. [설욕전을 갖자 그 말이오?] [그렇소.] [그런데 이를 어쩌오?] [뭐가 말이오?] [도리상으로 보나 헌원형과 나와의 의리로 보나 당연히 설욕전을 받아주어야 하는데......] 화일로가 말꼬리를 흐리자 헌원당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런데 어쩐단 말이오?] 화일로는 씁쓸하게 웃었다. [마침 내 사부님께서 이 근처에 계시오. 만에 하나 도박을 했다는 것이 그 분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나는 손가락이 모두 작살나고 다리 몽뎅이도 부러지고 말거요.] 헌원당은 그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통통한 손을 내저었다. [염려하지 마시오. 우리의 이번 대전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곳에서 단둘이 벌일 텐데 화형의 사부님이 어떻게 아시겠소?] [설사 그렇더라도 제자된 도리로써 어찌 사부님을 속일 수가 있단 말이오?] 화일로가 자꾸 안되겠다는 쪽으로 말을 하자 헌원당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그래서 안되겠다는 말이오?] 화일로는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쩔쩔맸다. [그...... 그게 아니라......] [그러면 됐소. 만일 화형의 사부님이 그 일 때문에 화형을 벌하신다면 내가 대신 그 벌을 받겠소. 그러니 화형은 더이상 그 일에 신경쓰지 마시오.] 헌원당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야 화일로로서도 더이상 버팅길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떫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 좋소. 그런데 내기는 뭘로......] 헌원당은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서슴치 않고 입을 열었다. [도박은 먼젓번과 같이 주사위로 합시다. 하지만 이번에 거는 것은 먼젓번과는 좀 특이하오.] 화일로는 갑자기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그때 헌원당은 고개를 돌리고 홍의미소녀를 손짓해 불렀다. [소선(小仙)아! 이리 오너라.] 홍의미소녀는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지은채 그들에게 걸어왔다. [이 아이는 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오.] 홍의미소녀는 화일로의 앞에 와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헌원소선(軒轅小仙)이예요. 오빠에게서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그녀의 음성과 미소는 그야말로 사나이라면 누구나 간이 녹을 듯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허나 화일로는 엉거주춤하니 서서 고개만 까닥거렸다. [안녕하시오. 화일로요.] 그는 건성으로 인사를 하면서도 머리속으로는 왜 헌원당이 느닷없이 자신의 여동생을 불렀을까 하고열심히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헌원당은 그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즉시 입을 열었다. [이번 내기에 나는 내 여동생을 걸겠소.] [옛?] 화일로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하게 놀랐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도박에 여동생을 걸다니......]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내 여동생에게도 승낙을 받았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 내기에서 내가 패한다면 내 여동생은 화형의 소유가 되는 거요. 그녀를 어떻게 하던 나는 일체 상관하지 않겠소.] 화일로는 그야말로 아연실색,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실로 듣도 보도 못한 기문(奇聞)이 아닐 수 없었다. 내기 도박에 자신의 여동생을 걸다니...... 그것도 본인으로부터 직접 승낙을 받았다니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닌가? 화일로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헌원소선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아...... 아니 헌원소저! 헌원형의 말이 사실이오?] 헌원소선은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뚫어지게 화일로를 쳐다보고 있다가 그의 물음에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사실이예요. 오빠가 내기에서 패하신다면 화가주께서 절 어떻게 하시든 상관없어요.] [만일 내가 소저를 첩으로 삼겠다면......?] 헌원소선의 대답은 단호했다. [첩이 되겠어요.] 화일로는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다. [만일 평생동안 식모를 하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평생 식모가 되지요.] [아이구 맙소사......!] 그렇다. 정말 아이구 맙소사였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답고, 명문의 자손이며, 한창 피어오를 젊음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무엇이 아쉬워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한단 말인가? 화일로가 어떻게 생각하던 말던 헌원당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데 없었다. [우리 헌원세가(軒轅世家)는 한번 내뱉은 말은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걸 화형도 알거요. 여자라고 예외는 아니오. 소선은 꼭 약속을 지키는 아이이니 화형은 안심을 하시오.] 화일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르며 물었다. [내가 패한다면 무엇을 걸어야 하오? 난 여동생도 없는데......] 헌원당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보자 화일로는 다시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헌원당의 입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간단하오. 화형은 그저 옷을 홀딱 벗고 낙양성을 한바퀴만 돌고 오면되는 거요.] [......!] 화일로는 할말을 잊었다. 이건 정말 엄청난 보복이었다. 화일로에게 옷을 빼앗기고 알몸으로 도망쳤던 헌원당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복수의 방법이었다. 상상해보라. 멀건 대낮에 다 큰 사내가 알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낙양성내를 질주하는 모습을...... 더구나 그 사내는 당당한 화씨세가의 가주일 뿐만 아니라 무림인들로 골머리를 썩히게 했던 풍파무쌍 화일로가 아닌가?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마 모르긴 해도 전 무림인들이 이 희한한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낙양성으로 총 집결할 것이다. 뿐인가? 화가들은 이 장면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너도 나도 장면 장면을 화폭에 담으려 할것이오, 아낙네들은 말로던 듣던 화일로의 알몸을 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바탕 소란을 부릴 것이다. 화일로는 자신이 알몸으로 낙양양의 거리를 질주한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고 몇년전에 먹은 음식이 넘어오려고 했다. 헌원당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소?거절하지 않겠지?] 화일로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헌원형은 정말 지독한 사람이오.] 헌원당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나 뿐만 아니라 우리 헌원세가에서는 남에게 빚을 지고는 참지 못하는 성미요......] [피에는 피, 알몸에는 알몸이라 이 말이오?] [그렇지.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화형은 그리 손해도 아니지 않소? 이기면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미녀를 첩으로 맞이할테고 진다고 해봤자 그저 알몸을 잠깐 보이는 것 뿐이지 않소? 아마 목욕한다고 생각하면 될거요.]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그런 목욕이라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데...... 엇? 사부님, 언제 오셨습니까?] 화일로는 돌연 헌원당의 등뒤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헌원당과 헌원소선은 엉겁결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있을리가 없었다. (아차......!) 헌원당이 무언가를 느끼고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 사이엔가 화일로의 모습은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하...... 헌원형! 그 내기는 다음에 합시다. 나는 우선 때라도 좀 밀어야 되겠소......] 그의 마지막 말은 어느새 백여장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그제서야 헌원당이 속았음을 알고 땅을 찼으나 화일로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헌원당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훗...... 재미있는 사람이야!] 헌원소선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떠올리며 화일로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헌원당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며 몸을 날렸다. [가자! 지옥 끝이라도 그 놈을 쫓아가 반드시 옷을 벗겨버리고야 말겠다!] 헌원당은 끌다시피 헌원소선을 붙잡고 화일로의 뒤를 따라갔다. 장내에 혼자 남게된 우퐁광은 실없이 히죽히죽거리고 있었다. [그거 참 재미있겠는데? 반드시 따라사서 누가 이기나 봐야지.]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따라가긴 뭘 따라가? 이녀석아!] 딱! [아이쿠!] 우풍광은 눈앞에서 별이 번쩍함을 느끼고 뒤통수를 싸잡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걸신 악구천이 호로병을 든채 웃으며 서 있었다. [당신은 누군데 날 때리는 거요?] 우풍광이 화가 나서 버럭 외치자 악구천이 히죽 웃었다. [어쭈, 정노제(丁老弟)가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을 제자로 두었구먼.] 우풍광은 막 발작하려다 정노제라는 말에 찔끔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사...... 사부님을 아십니까?] [알다 뿐이냐? 정노제는 노부가 나타나면 깍듯이 형님이라고 부르며 밤새도록 술을 사주곤 했지. 흐흐...... 정말 정노제는 아량이 넓은 아우야.] 우풍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부님에게 그런 면이 있었던가? 나한테는 항상 구두쇠 노릇만 하시는데......) 그가 반신반의하자 악구천은 다시 사정없이 그에게 알밤을 매겼다. 꽁! [이 녀석아, 뭘해? 어서 노부를 네 사부에게 모시고 가지 않고.] [아이쿠! 자꾸 머리를 때리지 마십시오. 머리가 나빠진단 말입니다.] [이놈아! 넌 더 나빠질 머리도 없어. 어서 길이나 안내해라. 한대 더 맞기 전에......] [예. 헌데 노선배님의 존함은......?] [네 사부가 말해주지 않더냐?] [예. 아직......] [그럼 노부도 말하지 않으련다.] [......!] [아직도 이 녀석이 정신을 못차렸군. 몇대 더 맞아야 정신이 들겠느냐?] [아...... 아닙니다. 어서 따라 오십시오.] ------------------------<第 二十一 章 下>------------------------ 第 22 章 철면피들 계절은 어느덧 봄의 정점을 지나 날씨는 제법 후덥지근해졌다. 아직 여름이 오려면 멀었건만 사람들의 이마에는 조금씩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허나 길 옆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정자는 그늘이 진데다가 바람이 잘 통하여 매우 선선했다. 위에는 지붕이 태양을 가리고 아래는 통풍이 잘 되어 무더운 날씨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한번 들어오면 쉽사리 나가고 싶지 않은 정자였다. 이 정자 안에는 지금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남자 둘에 여자가 한 사람인데 일행은 아닌 듯 했다. 두 남자는 청의대한으로 얼굴빛이 모두 음산하고 불길해 전신에서 살기가 흘러넘쳤다. 여자는 이십세 가량의 낭자였는데 미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약간 야윈게 옥(玉)의 티라고나 할까. 어딘가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일면(一面)을 풍기는 낭자였다. 정자 안은 원래부터 시원했지만 여자가 한 사람 끼어 있으니 더욱 구름위에 올라 앉은 것처럼 시원하기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천성적으로 매우 차갑게 보였던 것이다. 낭자는 아름답기는 했지만 터질듯 부풀어 오른 두 볼은 냉혹하리만치 싸늘한 서리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신을 오싹 떨리게 했다. 여자는 정자 안이 매우 시원한지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지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두 청년대한은 아름다운 미녀가 눈앞에 있기 때문에 떠나지 않고 암내를 맡은 수캐처럼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백의미녀는 정자 밖의 대지만 망연히 바라보며 다른 곳으로는 한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속에는 싸늘한 냉기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두 청의대한은 연방 그녀의 전신을 샅샅히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그들의 시선은 측윽하게도 터질 듯한 그녀의 볼을 점액처럼 끈적끈적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다시 풍만한 유방으로, 또 다음으로 치마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자의 허벅지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럴 대마다 두 청의대한의 눈도 흡사 허기진 늑대가 수풀속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어린양을 염탐하고 있는 꼬락서니였다. 너무나도 사악하고 음탕한 눈길이었다. 그런데 이 백의미녀는 너무나 겁이 없고 한심한 여자였다. 아니면 시원한 산들바람을 즐기고픈 욕심이 너무 컷던 탓일까. 바로 옆에서 굶주린 두 마리의 늑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갈 생각도 없이 태연스런 자태로 앉아있는 것이다. 이때 별안간 한명의 청의대한이 백의미녀가 앉아있는 돌의자쪽으로 몸을 옮겼다. 청의대한은 음성을 잔뜩 가다듬고 은근히 말했다. [낭자, 날씨가 몹시 덥군요.] 그러나 백의미녀는 고개를 돌리기는 커녕, 들은척 하지도 않고 눈도 한번 깜박거림이 없이 태연자약하게 앉아있었다. 청의대한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 앉았다. [낭자, 이렇게 더운 날씨에 낭자 혼자 어디로 가십니까?] 한걸음, 한걸음씩 청의대한은 이제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백의미녀몸에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대꾸는 커녕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청의대한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더욱 참기 어려운 흥분에 휩싸인 사악하고 음탕한 눈빛으로 가지런한 백의미녀의 조그만 섬섬옥수를 바라보았다. 그 손은 길다란데다 희고 부드러워 슬쩍 만지기만 해도 물이 솟아나올것 같았다. [낭자, 낭자의 손은 매우 곱고 부드럽군요.] 이 말과 함께 청의대한은 손을 앞으로 내밀어 백의미녀의 손을 덥썩 잡으려고 했다. 바로 이때, 백의미녀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청의대한은 짐짓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멈추고 물었다. [무엇을 기다리라는 것이오, 낭자?] [......] 백의미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여전히 정자 밖을 바라보았다. 만일 정자밖에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녀가 정자 밖의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라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문득 백의미녀가 고개를 돌리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들은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흐흐...... 낭자,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새침을 뺄건 없잖소?] 청의대한이 음흉스럽게 응수했다. 백의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뾰족하게 말했다. [청천백일하에, 더구나 이런 곳에서......] [흐흐...... 이곳엔 우리 세 사람 밖에 없으니 삼경야반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당신의 말은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나는 사전에 당신들한테 분명히 해둘 것이 있어요.] [무슨 말이오?] [나는 불길한 여자이니 누구든지 내 몸에 손을 대면 좋은 결과를 초래하진 못해요.] 백의미녀가 추상같이 말하자 청의대한은 씩 웃었다. [낭자, 우리 두 사람은 그런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오. 당신은 모란꽃 밑에서 죽으면 귀신이 되어도 풍류해진다는 속담을 못들었소?] [호호호......] 백의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간드러지고 아름답기 짝이 없었으며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요.] [그렇지. 아무렴 더 이상 말할 건덕지조차 없지......] 청의대한은 갑작스레 두 팔을 벌리고 백의미녀를 껴안으려고 덤벼들었다. 그는 두 팔을 내밀긴 했으나 실상 백의미녀를 껴안지는 않았다. 이때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 돌연 그의 동작이 어떤 힘에 의해 멈춰지고 말았던 것이다. 동작이 멈춰졌을 뿐 아니라 그의 두 팔이 점점 아래로 내려지더니 육신(肉身)마저 쓰러지기 시작했다. 쿵! 그는 흡사 허물어지듯 돌의자 아래 꺼꾸러진 후 이내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허나 백의미녀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않고 있었다. 눈도 한번 깜박거리지 않았다. 백의미녀가 무표정한 얼굴을 한채 입을 열었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지요? 나는 불길한 여자예요. 당신은 더욱 빨리 화를 입어 내 몸에 손도 대기 전에 죽어버렸군요. 쯧쯧......] 다른 한 명의 청의대한은 금새 얼굴빛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사실 백의미녀가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동반자는 벌써 감쪽같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는 얼른 뒤로 물러나 달아나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정자밖까지 달려나갔다. 다음 순간, [크으으......] 그는 햇볕이 무섭게 내리쬐는 땅위에 쓰러져 뒹굴더니 일어나지도 못하고, 또한 더 이상 꿈틀거리지도 못했다. [당신들에게 나는 불길한 여자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백의미녀가 말을 마치자 정자 밖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백의미녀는 난데없는 소리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정자 밖에 쓰러져 있는 청의대한 옆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체격이 작달막한 청의노인이었다. 이 청의노인은 약간 특이한 일면이 있어 살이 디룩디룩 찐 얼굴이 흡사 술을 마신 것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청의노인이 냉랭하게 물었다. [우리 청룡보(靑龍堡) 사람을 네가 죽였지?] 청룡보라는 말을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청룡보는 풍운보, 밀운보(密雲堡)와 함께 강호무림의 삼보(三堡)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백의미녀는 그 아름다운 눈을 들어 한번 깜박거릴 뿐이었다. [당신은 내가 그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나요?] 청의노인은 냉소를 날렸다. [옥미인(玉美人), 너의 그 수법으론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노부는 못 속있다. 그들 둘은 즐거움을 누릴 복이 없었지만 대신 노부가 멋지게 즐겨야겠다.] 그가 움직이는것은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그는 바람을 일으키며 정자 안으로 날아와 백의미녀를 향해 날아갔다. 쓰아악! 그의 동작은 조금도 기이하지 않았지만 이상한 점이 약간은 있었다. 어느새 정자 안의 절반은 이미 그의 손바닥 아래 덮여 있었고, 그의 손바닥은 수시로 어디든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변화를 품고 있었다. 백의미녀는 안색이 일변하더니 백옥같은 손을 들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청의노인의 손바닥을 향해 찍어갔다. [흥!] 청의노인은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리더니 손가락으로 오히려 백의미녀의 손목을 잡아갔다. 두 사람의 출수는 모두 기쾌무비했다. 청의노인은 일어선 채로, 백의미녀는 앉은 채로 눈깜박할 사이에 열두초식을 주고 받았는데 공격목표는 하나같이 상대방의 급소였다. 일순, 쐐액! 청의노인은 다섯 손가락을 뒤집더니 놀랄만한 동작으로 백의미녀의 옷소매를 움켜잡았다. 백의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손을 움츠릴 순간, [찍!] 그녀의 소매는 청의노인에 의해 팔꿈치에서부터 찢겨져 희고 고운 팔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청의노인은 눈에서 기광(奇光)을 발산했다. [매우 고운 피부로구나. 이런 것을 남에게 먼저 빼앗겼더라면 정말 아까울 뻔 했지.] 청의노인은 찢어낸 소맷자락을 내버리기가 무섭게 전광석화처럼 또다시 백의미녀의 어깨를 향해 잡아갔다. 백의미녀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즉시 몸을 뒤로 돌리며 정자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청의노인이 음흉스럽게 웃었다. [그렇지. 풀밭에 누워야 노부가 즐길 수 있지.] 그는 곧장 밖으로 몸을 날려 두 손으로 백의미녀의 두 다리를 잡아나갔다. 백의미녀는 정자밖으로 뛰어나간 후 미처 몸을 솟구치기도 전에 청의노인이 이미 뒤따라 나와 아슬아슬하게 붙잡히게 되었다. 만약 다리를 그에게 잡히는 날이면 백의미녀의 결과는 도저히 상상치 못할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 위기일발의 순간, 툭! 툭! 어떤 사람이 뒤에서 청의노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다 늙은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오?] 청의노인은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몸을 솟구쳐 일장 가량 뛰어나가 뒤로 홱 돌아섰다. 그의 뒤에는 화의를 입은 준수한 청년이 신기한 동물을 보듯 청의노인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백의미녀는 땅 위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머리는 산산히 흩어졌고, 옷도 구겨져 몹시 낭패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채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는 네놈을 갈기 갈기 찢어버리고 뼈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덮쳐가려고 했다. 그런데 영준한 화의청년이 그녀의 행동을 말렸다. [낭자, 화내지 마시오. 당신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굴육을 자초할 뿐이오.] [그도 죽이고 나도 죽겠어요.] 그러나 화의청년은 빙긋이 웃었다. [그건 더욱 손해요. 그는 이미 죽을날이 멀지 않은 노인이고, 낭자는 아직 죽기엔 젊은 꽃다운 나이요. 그는 그는 당신 몸에 아직 손을 못 대지 않았소?] 백의미녀는 얼굴을 붉히며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화의청년은 청의노인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머금으로 입을 열었다. [난 또 누군가 했더니 청룡보의 총호법(總護法)인 갈장홍(葛長紅) 나리시군요. 정말 실례를 했습니다.] 청의노인은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너는 노부를 아느냐?] 화의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나는 나리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리는 나를 모르시지요?] [노부는 정말 네가 누군지를 모른다.] 갈장홍이 말하자 화의청년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관계 없습니다. 이번은 처음이라 낯설지만 다음에 만나면 낯설지 않지요.] [너는 누구냐? 이름이나 밝혀라!] 화의청년은 빙긋이 웃었다. [내가 한사람의 이름을 밝히면 나리께서도 그 분을 알고 있을 겁니다. 나리는 남궁봉이란 사람을 아시지요?] 갈장홍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림의 괴물인 새장자 남궁봉 말이냐? 그라면 노부도 알고 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나는 그 어른의 유일한 수제자입니다.] 그 말에 갈장홍은 깜짝 놀랐다. [뭣이? 그...... 그렇다면 너는 혹시 풍파무쌍 화일로가 아니냐?] 화일로는 장난스럽게 허리를 굽혔다. [소인을 알고 계시군요. 정말 영광입니다. 소인은 그 분을 대신해서 나리께 안부를 여쭙겠습니다.] 화의청년이 풍파가 가실 날이 없다는 화일로임을 알자 갈장홍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허나 그는 화일로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포권을 하자 그가 자신에게 겁을 먹었다고 판단하고 냉랭하게 웃었다. [노부에겐 그따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을 걸지 마라. 옥미인은 청룡보의 사람을 두명이나 죽였다. 그러니 노부가 그녀를 처벌하는건 잘못이 아니다.] 화일로는 정색을 하며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요. 나리는 조금도 잘못이 없습니다. 성인(聖人)도 먹을 것과여색(女色)은 인간의 본능이라 했으니 놀라운 일은 결코 아니지요. 옥미인은 귀보(貴堡)의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도 나리께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갈장홍은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너의 그 말은 무슨 뜻이냐?] [나리, 이건 사실입니다. 그럼 내 말이 틀렸단 말입니까?] 갈장홍은 냉소를 날렸다. [네 말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노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건 당연하지요.] 화일로는 넌지시 상대방을 조롱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리는 무슨 일이든 대단하게 여기는 법이 없지요. 내가 지금가지 말했어도 나리는 얼굴도 붉히지 않았으니...... 아! 아니지, 나리의 얼굴은 원래 붉군요.] 옥미인은 그의 조롱섞인 언사를 참지 못하고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매달았다. 갈장홍은 눈에서 독기를 발산하며 버럭 언성을 높였다. [젖비린내 나는 놈이 노부를 놀리느냐?] 그러자 화일로도 이제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갈가(葛家)야! 만악(萬惡)중 간음(간음)이 제일 큰 죄악이라 했는데 너는 죽을 날도 멀지 않았는데 왜 애써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려 하느냐? 청천백일하에 이런 불미스런 일을 저지르려고 하니 그야말로 후레자식이 아니고 무엇이냐?] 갈장홍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앞으로 덮쳐왔다. [이...... 이 찢어죽일 놈!] [낭자, 빨리 피신하도록 하시오.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이 덤벼들고 있소.] 화일로는 손을 내저어 옥미인에게 약간 물러서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나 갈장홍은 대노한 나머지 기쾌무비한 행동으로 화일로가 몇마디말을 내뱉는 순간을 이용해서 한걸음 간격을 두고 가까이 덮쳐와 화일로는 물론 옥미인까지 장력의 범위 안으로 몰아 넣었다. 꽈르릉! 폭풍노도와 같은 경기가 밀어닥치자 옥미인은 피하려고 해도 도저히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낭자, 용서하시오.] 말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화일로는 손을 내밀어 옥미인의 허리를 겨안더니 그녀와 함께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갈장홍의 장력 범위 밖으로삽시간에 탈출했다. 옥미인의 얼굴빛은 이제 창백한게 아니라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화일로는 겸연쩍은 듯 양해를 구했다. [낭자, 부득이한 일이었소.] 옥미인도 문득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대답했다. [아니예요.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감사해야 해요.] 두 사람이 다정스레 주고 받는 모습에 갈장홍은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는지 노성을 지르며 또다시 돌진해왔다. [에익!] 화일로는 옥미인에게 피하라는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앞으로 나가 갈장홍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그의 이 일장은 빠르지도 않았고, 또 그렇다고 조금도 사납지도 않았다. 그러나 갈장홍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막아내지도 못했다. 찰싹! 맑은 음향과 함께 그는 왼쪽 빰을 세차게 한대 얻어맞았다. 순간 옥미인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곡이장삼보(一谷二莊三堡)는 모두 무림에서 명성이 대단했다. 옥미인은 자기가 청룡보의 총호법인 갈장홍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한 무림에서 아무도 이 청룡보 총호법 갈장홍을 적수로 만들려는 사람이 없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무림에서 그의 따귀를 때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목전(目前)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이만저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일순 갈장홍은 어리둥절해 하더니 곧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또다시 덮치려고 했다. 이때 화일로가 정색을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시오? 따위 한 대로는 부족하단 말이오? 당신은 이제 보니 그야말로 낯짝이 두꺼워 수치심도 느낄줄 모르는구료. 나같으면 벌써 바위를 들이받고 자살을 했을 것이오.] 그는 잠시 생각을 굴리는 빛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좋소. 당신이 그렇게도 간절히 원한다면 특별히 한대 더 때려주겠소.] 화일로는 또다시 손을 들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속도로 일장을 후려쳤다. 찰싹! 갈장홍은 이번에도 피하지 못하고 따귀를 얻어맞았다. 이번에는 왼뺨이 아니라 오른뺨이었다. 그의 원래부터 붉은 얼굴은 그야말로 시뻘겋게 상기되었다. [우와아!] 갈장홍은 새삼 어안이 벙벙한 빛이더니 거의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돌연 쌍장을 들고 열개의 손가락을 굽히며 화일로를 향해 잡아나갔다. 화일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 [너는 죽음을 당하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구나. 내가 이제 너의 생명줄인 삼양최혼장(三陽催魂掌)을 파괴해 버리면 너는 청룡보의 총호법 노릇도 해먹지 못한다.] 화일로는 엄포를 지르고 나서 오른손을 내밀어 식지와 중지로 멀리서 갈장홍의 두 손 바닥을 엄숙하게 겨냥했다. 그러자 갈장홍은 돌연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떨더니 뒤로 홱 돌아서서 몸을 솟구쳐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하하......] 화일로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낭랑히 웃어주고는 천천히 손을 밑으로 내렸다. --------------------------<第 二十二 章>------------------------- 第 23 章 美女의 戀情 옥미인은 이채를 발산하는 눈으로 화일로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다가가서 나직이 말했다. [구출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마와요.] 화일로는 뒤로 돌아서서 그녀를 마주보았다. [약간의 수고였을 뿐이니 너무 겸손해 하실 것 없소.] 옥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보통 은혜가 아니에요. 당신은 나의 순결을 보존해 주신 은인이예요.] [그것은 대단한 일이 못되오. 낭자, 다른 사람이라도 그런 일엔 구원의 손길을 뻗었을텐데......] 화일로는 잠시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낭자, 낭자는 어쩌다 청룡보 사람들한테 미움을 사게 되었소?] 옥미인은 곧 얼마전에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소상히 이야기 해주었다. 얘기를 다 듣고난 화일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두 놈은 죽어 마땅하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그놈들을 아주 눈물이 핑 돌도록 혼내주었을 텐데......] 옥미인이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당신은 정말 남궁 노선배님의 제자세요?] [낭자는 믿지 않소?] 화일로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고 반문했다. 옥미인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게 아니라 이번일로 해서 당신네 사도가 청룡보와 원한을 맺게 된다면 괜히 저 때문에 너무 큰 번거로움을 초래하게 된게 아닌가요?] [낭자, 자랑이 아니라 사부님과 나는 청룡보 따위는 안중에 두고 있지 않으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 이건 결코 괜히 하는 말이 아니오.] [그 말을 믿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군요.] 화일로가 돌연 정색을 했다. [그렇다면 낭자, 나를 좀 도와 주시지 않겠소?] [도와 드리고 말고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화일로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자 그는 곧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처음보다 더욱 어엿한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빛은 희었지만 혈색이 잇어 여자들보다도 피부가 고왔다. 옥미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화일로는 한 손으로 옥미인의 손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먼 곳을 가리키며 웃었다. [낭자, 저기 먼 산과 나무를 보시오.] 옥미인은 어리둥절해 하더니 곧 얼굴빛이 새빨갛게 변했다. 바로 이때였다. 휘익! 한 차례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화형, 이곳에 계셨구료.] 화일로가 깜짝 놀라 홱 몸을 돌려보니 십장 밖에 두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헌원당과 헌원소선 남매였다. 화일로는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물었다. [두 분은 나를 아시오?] 두 남매는 상대의 얼굴이 화일로가 아닌 것을 보자 흠칫 놀랐다. 헌원당이 어리벙벙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미...... 미안하외다. 우리 남매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보오.] 화일로는 빙긋이 웃었다. [형장께선 겸손해 하실 필요가 없소이다. 사람을 잘못 보는 일은 많지요.]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자 헌원당이 급히 물었다. [한 가지만 묻겠는데 두 분은 혹시 화의를 입은 젊은 청년이 이곳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시지 않았는지요?] [보았습니다. 방금 이곳을 지나갔습니다.] 화일로가 대답하고 손짓으로 정자쪽을 가리켰다. [저 두 사람은 바로 그가 죽였습니다.] 헌원당은 정신을 번적 차리며 다시 물었다. [두 분은 그자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보셨소?] 화일로가 고개를 돌리며 옥미인에게 물었다. [소매, 방금 그 사람은 남쪽으로 갔지요?] 옥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고맙소이다. 두 분!] 헌원당은 고개를 조아리고는 헌원소선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떠나면서 화일로와 옥미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헌원소선의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발산되었다. 헌원소선은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이팔청춘으로 이성에 눈이 뜨일 나일라 이 다정스런 한쌍의 남녀를 보자 부럽지 않을리가 없었던 것이다. 화일로는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 후 여전히 꼭 쥔 옥미인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말했다. [낭자, 고맙소.] 옥미인은 손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화일로의 연극을 십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을 가지고 감사하다니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은 왜 당신을 찾고 있나요?] 화일로는 빙긋이 웃었다. [그 뚱뚱한 백의청년은 강호에서 유명한 도박귀신인데 나만 보면 도박을 하자고 덤벼들어 할 수 없이 그를 피하게 된거요.] 옥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정말 도박귀신인가요?] [그렇소.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자는 내기 도박에 자기 여동생가지 걸려고 하고 있소.] 옥미인은 깜짝 놀랐다. [그..... 그럼, 함께 있던 그 홍의소녀가......] [그렇소. 그러니 내가 어찌 도망다니지 않을 수 있겠소?] 옥미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녀는 상당히 아름답던데 내기에서 이긴다면 당신에게는 오히려 더 잘된 일이 아닌가요?] 화일로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 자도 그런 얘기를 했었소. 하지만 나는 비록 여색을 멀리 하지는 않지만 도박으로 여자를 품고 싶지는 않소. 더구나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사람을 도박에 걸었다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오.] [오! 당신은 진정한 군자(君子)로군요.] 옥미인이 미소를 머금고 말하자 화일로도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남들이 그 말을 들으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을 거요. 나는 풍파가 많기로 이름이 난 사람인데 어찌 군자라 불리울 수 있겠소? 사실 그 도박을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오.] 그가 어떻게 말하던 옥미인은 방실방실 웃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느닷없이 화일로를 유심히 응시하더니 엉뚱한 질문을했다. [당신이 방금 얼굴에서 벗긴 것은 인피면구(人皮面俱)인가요?] [그렇소. 나는 여기저기에 사고만 치고 다녀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사람들이 적지 않소. 그래서 때로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약간의 변장을 할 때도 있소.] 화일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나의 진면목은 몹시 추악하여 남에게 보일 수 없으며 또 남이 놀라까 두려워서 할 수 없이 얼굴을 바꾸었소.] [그게 정말이세요?] [정말이오.] [나는 믿기지 않아요.] 옥미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자 화일로는 빙긋이 웃었다. [지금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인데 만일 낭자가 믿지 못하겠다면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지요.] [내게 당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실 수 없어요? 나는 당신의 진면목이 얼마나 무섭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서 그래요.] 화일로는 돌연 히죽 웃었다. [낭자는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당신과 나는 비록 오다가다 길에서 만나긴 했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는 바가 있으니 끝가지 낭자는 내게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남겨두는게 좋을 성 싶지 않소? 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그건 잘못된 생각이예요. 어떤 사람에 대한 인상이 좋고 나쁨은 결코 그 사람의 용모에 달려 있는게 아니예요. 그러니 당신이 만일 세상에서 제일 추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당신에 대한 인상은 처음과 조금도 변함이 없을 게예요.] [그렇다면 낭자는 왜 꼭 내 얼굴을 보려고 하시오?] 그러자 옥미인은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방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비록 당신과 나는 초면이긴 하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는데 내가 만약 당신의 진면목도 못보고 헤어진다면...... 그건 너무도......] 다음말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너무 소리가 작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화일로는 그녀의 다음말을 듣지 못했다. 실상 다음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쯤은 지금 이런 상황아래선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든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화일로는 두 눈에서 신광을 번뜩이며 차분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낭자, 방금 내가 말했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든 추악한 일면이 있소. 만약 당신이 일시적으로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건 상대방의 은폐술이 능하기 때문이지 결코 추악한 면이 없기 대문은 아니오. 낭자는 내 말을 알아듣겠지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럼 됐소. 낭자는 또 이 점을 알아두시오. 은폐술이 능한 사람은 은폐술이 없는 사람 보다 더욱 무섭소. 은폐술이 없는사람에 대해선 당신도 처음부터 경계를 하게 되니 오히려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적소. 하지만 은폐술이 능란한 사람은 당신으로 하여금 조금도 방비하지 않게 만든 다음 당신 자신도 모르는 눈깜짝할 순간에 그의 손아귀에 빠져들게 하오. 나중에서야 당신은 그의 추악한 일면을 발견하게 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셈이지요.] [당신의 뜻은 충분히 알겠어요. 하지만 은폐술이 능란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것을 남에게 말하지 않아요. 그렇지요?] 옥미인은 깜찍스럽게도 화일로의 헛점을 찌른 것이다. 그러나 화일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도 않소. 그것도 일종의 수법이 될 수 있소. 그런 수법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 사람이 악인(惡人)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케 하는 거요. 하지만 사실 그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악마지요.] 옥미인은 고개를 저었다. [겁주지 마세요. 나는 두렵지 않아요. 최소한 나는 당신이 악마라고는 믿지 않아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화일로는 기를 쓰고 자기 자신이 악인이라고 강변하고 옥미인은 또 절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화일로는 눈빛을 번뜩였다. [정말이오. 낭자?] [정말이예요.] [그럼 낭자는 나와 함게 정자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있소?] [못갈게 뭐 있어요. 정자 안이 아니라 어떤 곳이라도 나는 당신을 따라갈 용기가 있어요.] 화일로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옥미인을 정자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런 다음 그녀를 돌의자에 앉힌 후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낭자, 악마의 징그러운 진면목이 벌서 노출되었소. 나는 지금부터 낭자를 잡아먹을 터이오.] 옥미인은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면서도 그의 허리를 꼭 부둥켜 안았다. [괜찮아요. 당신은 내 손을 잡았었고, 내 몸을 만졌으니 이미 당신과 살을 맞댄 사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지금과 조금전과는 아무 것도 달라진게 없어요.] 화일로는 빙긋이 웃었다. 그는 옥미인이 툭 터 놓고 마음을 바치려고 할 대마다 열심히 자신은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이고 색마(色魔)라고 설명하기에 바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옥미인은 더욱 그를 선량하고 정인군자라고 착각을 했다. [이 점으로 보아 내 수법이 완전 성공한 것 같으니 이제 나는 다른 행동으로 옮기겠소.] 화일로는 옥미인을 더욱 힘있게 끌어안고 그녀의 몸을 완전히 품안에 넣었다. [낭자, 지금은 어떻소?] 오미인은 가벼운 경련을 일으킬 뿐 거부의 몸짓은 조금도 하지 않은 채 나직이 대답했다. [오십보 백보인걸요.] 그래서 화일로는 그녀의 뺨을 받쳐 올린 후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옥미인은 얼굴을 앵두처럼 붉히며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길다랗고 시커먼 그녀의 속눈썹은 가볍게 떨렸고 호흡도 몹시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피하지도 않았고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 [낭자, 당신은 이래도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소?] 화일로가 한 손으로 그녀의 풍만하면서도 탄력있는 엉덩이 부분을 더듬으며 말하자 옥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기꺼이......] 기꺼이 순결을 바쳐 모시겠다는 것이다. 화일로의 눈에 기광이 번쩍 스쳐가더니 돌연 그녀를 두 팔로 잡고 품속으로부터 밀쳐내며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낭자,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요?] 그녀는 조용히 눈을 뜨고 온유한 눈빛으로 화일로를 올려다 보았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화일로는 고소를 금치 못하며 그녀의 팔을 놓았다. [낭자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중에 제일 괴이한 여자요.]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중에서 처음보는 군자예요.] 화일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내가 군자라고요?] [이런 상황 아래서 이성를 잃지 않는 사람이 고금(古今)을 통해서 과연 몇사람이나 될가요? 그런데 당신은 조금도......] 화일로는 돌연 커다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 밑바닥에 막혀 있던 체중에 시원하게 뚫리는 것처럼 통쾌한 웃음이었다. [하하하하! 낭자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소. 나는 괴팍한 성격이 있는데 쉽게 얻어지는 것은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오.] [내가 당신을 이렇게 대하는게 쉽게 얻어졌다는 건가요?] 화일로의 얼굴에 발견하기 어려운 격동이 스쳐지나가더니 곧 미소로 변했다. [낭자, 나는 한 여자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오. 나는 자주 기방(妓房)을 출입하기도 하여 나의 갈증을 해소시키기도 하지만 때문에 내 마누라는 만천하에 쫙 갈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실정이오. 그녀들은 모두 내게 몸을 허락했으니......] [괜찮아요. 당신에게 여자가 그렇게 많다면 내가 한명 더 붙어난다고 개의친 않겠죠?] [그녀들은 현재 처지가 몹시 비참하오. 어떤 여자는 배가 불러 부모에 게 쫓겨났으며 어떤 여자는 병상에 앓아 누워 있고......] 옥미인은 태연히 말을 받았다. [공연히 겁주기 마세요. 나는 아무리 그래도 두렵지 않아요.] 화일로는 냉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낭자는 그런 비참함이 직접 자신에게 떨어져야만 정신을 차리겠소?발등에 불덩이가 떨어져야만......] [시고, 달고, 스고, 매운 맛을 골고루 보는게 인생의 산 경험이예요.] [좋소, 그럼 낭자는 천천히 맛을 보시오.] 화일로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가시려는 거예요.] 옥미인이 돌의자에 앉은채 묻자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만 가야겠소. 나는 아무리 정이 많은 여자에게도 항상 이렇소.] [나는 운산화(雲散華)라고 해요. 잘 기억해 두세요.] 화일로는 담담하게 웃었다. [나는 너무나 많은 여자 이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설사 안다고 해도 곧 잊어버릴것이오.] [괜찮아요. 나는 당신 이름을 알고 있으며 잘 기억하고 있으니 당신이 내 이름을 잊더라도 언젠간 생각이 날 거예요.] [묘한 말이군.] 화일로는 걸음을 떼어 놓았다. [당신은 가시려는 거예요?] 운산화가 물었다. 화일로는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도 만날지 모르겠군요. 몸조심하세요.] 운산화가 따라 나서지 않고 정자 안에서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화일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쌀쌀한 음성으로 말했다. [염려마시오. 나는항상 나 자신을 보호할 줄 아오.] 그래서 운산화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멀어져가는 화일로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얼굴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이제 화일로의 모습은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옥미인 운산화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머리를 가다듬은 후 정자 밖으로 나와 천천히 광야속으로 걸어나갔다. 백옥같은 피부와 백설같은 의상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방불케 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평정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정자는 점점 멀어지고 나중에는 보이지 않았다. --------------------------<第 二十三 章>------------------------- 제 24 장 사랑의 승리자 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기울었다. 바람은 저녁이되자 한낮보다 약간 강하게 불었다. 저녁놀이 핏빛으로 붉게 서쪽 하늘을 색칠하고 있었다. 황량한 벌판. 개미 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일모(日暮) 무렵 바햐으로 옥미인 운산화는 망연히 부동자세를 하고 선 채 서쪽 하늘의 피처럼 붉은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속에 그림움처럼 아니 저녁 노을처럼 번져가기 시작하는 그 무엇이 있었지만 실상 그녀 자신은 그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아득히 먼 곳으로 데려다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고픈 심정 이었다. "아....어머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 입 밖으로 탄성을 질렀다. '어머니는 나의 이 불덩이같은 비애(悲哀)를알고 계실까? 아니, 나와같은 시절의 어머니의 비애를 우리 아버지는 알고 계셨을까?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에게 바람둥이 였을 뿐일 것 같다.사내들이란 여자가 생각하는 것만큼 여자를 생각하거나 그리워하지 않는 괴물이니까' 운산화는 왠지 자꾸만 심란한 심정이었다. "험!" 이 때 뒤에서 가벼운 기침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 사람의 괴이하게 생긴 노인이 서 있었다. 그 노인은 남루한 검은 마고자를 입고 머리에는 고깔 모자를 썼는데 키가 유난히도 작았다. 운산화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노선배님께선.....?" 그러자 키가 작은 노인이 말을 받았다. "노부는 남궁봉이라 하네." 운산화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곧 얼굴에 기쁜 빛을 숨기지 못하고 깍듯이 허리를 굽혀 포권의 예를 드렸다. "운산화가 노선배님께 인사 드리겠습니다. 후배는 실레했습니다." "운낭자는 겸손해 할 것 없네.운낭자의 미명(美名)은 그 전부터 익히 듣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소문보다 훨씬 더 아름답구만.." "별 말씀도 다 하십니다." 운산화는 부끄러워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기쁜 감정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사실 옥미인 운산화는 당금 무림에서 삼대미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여인이었다. 옥미인과 사갈미인, 무명미인을 일컬어 삼대미인이라 하거니와 그녀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미모와 개성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의 우열을 가를 수 없었다. 남궁봉은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는 한 가지 운낭자에게 물어볼 일이 있는데 운낭자는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무슨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후배가 아는 일이라면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어요." 남궁봉은 히죽 웃었다. "고맙네. 운낭자는 이 일대에서 혹시 화의를 입은 젊은이를 본 적이 있는가?" 운산화는 재빨리 되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영제자를 말씀하시는게 아니신지요?" 남궁봉은 너무나도 쉬운 그녀의 대답에 어리둥절 했다. "그럼 운낭자는 그 녀석을 만났단 말이지?" 운산화는 곧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화일로를 만났었다는 것과 또 그가 그녀에게 알려준 말을 전부 남궁봉에게 말했다. 물론 그녀는 보류해 둘것은 숨겼지만 매우 총명한 낭자인지라 자신과 화일로 사이에 모종의 감정이 통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이야기 했다. 남궁봉은 묵묵히 듣고 나더니 눈쌀을 조금 찌푸렸다가 다시 웃었다. "그럼 잘 되었구나. 노부는 그 녀석의 행방을 찾아 낙양성을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는데도 그 녀석이 나타나지 않아 조금 걱정했었다네.... 운낭자 알려줘서 고마우이. 그럼 노부는 이만 가겠네." 그가 막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옥미인 운산화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노선배님, 잠시더 머무르시지 않겠어요?" 남궁봉은 운산화를 주시하며 물었다. "운낭자는 노부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예. 후배는 노선배님께 부탁할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어?" 남궁봉은 짧게 외치고는 입맛을 다시는 듯 입을 움직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운낭자, 노부에게 무슨 도움을 청하려는 건가?" 운산화는 그제서야 얼굴을 붉히며 방금 보류했던 것을 말했다. 그러자 남궁봉은 미간을 좁혔다. "그 놈은 또 한차례 빛을 졌구나" 운산화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행여나오해할세라 소상히 소신을 밝혔다. "비록 초면이지만 후배는 그에게 정을 너무 쏟아 마침내 헤어날 수 없게되었습니다. 그러니 노선배님께서 후배의 깊은 정을 생각하셔서라도 저희들의 일을 성취시켜 주십시오." "낭자는 그와 한번 밖에 만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남궁봉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운산화는 망설이지 않고 서슴없이 말했다 "후배도 알고 있어요. 후배가 방금 말씀 드린대로......" "낭자 그 녀석이 어떤 놈인지 아는가?" "예. 알고 있어요." 남궁봉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한 번밖에 만난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운산화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밑으로 떨구었다. "노선배님. 연분만 있으면 한번 만나는 것으로도 부족하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는 비록 단 한번 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그동안 겪은 일로 치면 십년은 될 거예요." 그러나 남궁봉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운낭자 그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을 걸세.그건 모두 사실이네. 노부는 그놈을 직접 키웠기 때문에 그놈에 대해선 낭자보다 훨씬 잘 알고 있네. 그 녀석은 다른건 다 좋은데 애정관계에 있어선 한 여자에게 전념하지 못하는 나쁜 폐단이 있네.좋게 말하면 풍류가 있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한 마디로 아무 여자에게나 손을 뻗치는 손 버릇이 안 좋은 놈일세.."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소 시간을 두고 또 입을 열었다. "그런데도 여인들 중에서 그 녀석의 반반한 용모를 보고 반해버리는 낭자들이 의외로 많다네. 그리고 그녀석은 그런 재주가 뛰어나서 그런 여자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내 맡긴다네. 그래서 노부는 여러차례나 그놈을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 었네. 노부는 그 놈이 언젠가는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이나 하지 않을까하고 두렵네. 하기야 이런 일은 완전히 그 놈만 탓할 순 없지. 여자 쪽에도 책임이 있어.그러나 결국은 그 놈이 남의 집 낭자의 일생을 망쳤으니 노부는........" 남궁봉이 잠시 멈추려던 말을 덧붙였다. "만일 아직 늦지 않았다면 노부는 낭자가 마음을 고쳐먹고 그 놈에게 희생되지 않기 바랄 뿐이네." 운산화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의 호의는 정말 고마와요. 하지만 이건 때가 늦고 빠른 문제가아니예요.후배는 조금도 마음을 고쳐먹을 생각이 없어요.왜냐하면 후배는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도 잘못 보지 않았기 때문이 예요." "하지만 낭자......" 남궁봉이 쓴 웃음을 짓자 운산화가 잽싸게 말을 받았다. "노선배님 후배는 또 할 말이 있읍니다. " "말해보게." "애정은 절대 죄악이나 범죄가 아니예요.후배는 자기 몸을 아낄 줄 알며 귀중히 여겨 지금까지도 청결한 처녀의 몸이예요.그리고 후배는 아직 한번도 남에게 정을 준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후배는 항상 신중을 기하므로......" 남궁봉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낭자, 노부가 한마디 조언을 해주겠네.이번 일에는 낭자가 너무 신중을 기하지 않는 것 같네." "노선배님. 이건 후배가 자청한 것이며 어느 누가 후배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후배는 앞으로 모든 결과를 감수할 작정이예요." 남궁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의 그 가련한 낭자들도 모두 지금 운낭자와 똑같은 말을 했었다네. 그러나 그녀들은 지금 모두 후회하고 있으나 이미 때는 늦어 버렸지." "노선배님 후배는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낭자는 구태여 노부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뭐 있는가?" 운산화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그의 말은 그녀의 약점을 찔렀던 것이다. 그러나......그녀로서는 어찌 단념할 수가 있겠는가? "사실 후배는 혼자 그를 짝사랑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순 남궁봉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살펴 보았다. "운낭자 혼자서 짝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그럴 리가 없네. 낭자는 용모가 천하의 절색인데 그 놈의 방탕한 성격으로 ....그놈이 어찌.....십중 팔구 그 놈이 무슨 수작을 부렸음이 틀림없네." 운산화는 고개를 완강히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노선배님.후배는 알고 있어요.화공자는 절대로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았어요. 또 그는 수작을 부릴 필요도 없었어요." 남궁봉은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네. 노부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그 녀석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있네. 낭자의 미색을 보고 그놈의 성격으로 절대로 낭자를 가만 둘 놈이 아니네." 두 사람의 언쟁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후배가 방정맞은 말씀을 드리겠으니 용서해 주세요.노선배님은 실상 그를 잘 모르고 계십니다." 남궁봉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 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이 세상에서 사부인 노부가 그 놈의 성격을 잘 모른다면 누가 잘 안다는 말인가?" "후배는 비록 오늘 그를 단 한번 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감히 그를 제일 잘 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 "낭자......" "노선배님, 사실이 증명되었는데 그는 확실히 성인군자예요. 그가 풍류한 것은 다만 그가 거짓으로 행동했기 때문이예요.사실 그는 진짜 정도불사(正道不邪)한 기남자(奇男子)예요. 그는 한 여자도 해치지 않았어요.그녀들은 그의 용모를 보고 좋아했을 뿐 진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건 애정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남궁봉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미쳤어도 단단히 미쳤다는 느낌 뿐이었다. 처녀가 일단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는 속담이 그럴듯하게 생각될 따름이었던 것이다. 남궁봉은 그답지 않게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햇다. "낭자 무리 두 사람중 한 사람의 말은 맞소. 노부는 낭자의 말이 옳기를 바랄 뿐이요." 그가 측은한 느낌으로 하는 말에 운산화는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노선배님 옳은 건 후배이지 노선배님이 아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노부도 십여년 동안이나 그 놈을 완전히 잘못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남궁봉은 쓴 웃음을 지으며 넋두리처럼 입을 열었다. "다만,운낭자!다른 일이라면 노부가 그에게 따르게 할 수도 있지만 이런일 만큼은 그 놈에게 강요할 수가 없네. 이런 점에서 노부보다도 경험이 월등한 그 녀석의 판단이 앞장 서 있을 지도 모르니까 말일세." 그러자 운산화는 땅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꿇어앉는 것이 아닌가? 남궁봉은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고 몸을 피했다. 다음 순간 그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낭자 이....이건....빨리 일어나시오." 운산화가 울먹이는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후배는 감히 지나친 요청은 드리지 않겠어요.그리고 후배도 애정은 절대로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잇어요. 오직 후배가 바라는 것은 노선배님께서 그에게 나의 이 감정은 구김살 없는 진심이니 다른 여자들에게 대하던 것처럼 아무렇게나 후배를 대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전해주세요." 그녀의 간절한 애원에 마침내 괴팍하기 그지없던 남궁봉도 감복되고 말았다 그녀가 연민스러워서 더이상 어떻게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낭자...빨리 일어서게. 그렇게 전하겠네." "그럼 후배는 우선 노선배님께 감사드리겠습니다." 운산화는 큰 절을 올린후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남궁봉은 그녀를 힐끗 돌아보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아무래도 노부가 낭자를 해치게 될까 염려스럽구나." "절대로 그렇지 않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남궁봉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길 바라네.사실 노부는 천하의 모든 정인들이 사이좋은 부부가 되길 원하며 또 노부도 낭자를 매우 좋아하네.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 녀석에게 그런 복이 있는지 어디 앞으로 두고 보겠네. " "아니예요. 노선배님!" 운산화는 그를 부르고 난 다음 다시 정감이 가득한 음성으로 또렷이 말했다 "마땅히 그런 복이 후배에게 있는지 두고 봐야 한다고 말씀 하셔야 합니다." 어느덧 주위는 땅거미가 조용히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에 한 점 붉게 타고있던 저녁 노을은 잿더미 속으로 사스러 든 것 같았다. 어둠이 차 올라 머지않아 그들을 잡어삼킬 것 같았다. 운산화는 일생에 단 한번,참으로 아름다운 석양을 지켜 보았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오늘 하루는 마지막 이구나'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은 하루였다. 그녀의 가슴속 깊숙히 가로걸린 오색 무지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사실 그녀는 그러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남궁봉은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낭자 노부는 더이상 말하지 않겠네, 또 다른 볼일이 있어 오래 지체할 수도 없으니 이만 해어져야 겠구려." 그가 포권을 하자 운산화도 얼른 답례를 하며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후배를 난처하게 만들지만 말아 주십시오.선배님 그럼 몸조심 하십시오." 남궁봉은 잠시 망설이더니 생각이 떠오른 듯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일은 노부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으니 낭자가 잘 해보길 바라네. 낭자가 그를 만나고 싶으면 남동쪽으로 가보길 바라네. 그럼 이만 가겠으니 낭자도 몸조심 하게." 그는 뒤로 돌아서더니 곧 몸을 솟구쳤다. 그가 뒤로 돌아설 무렵 그의 두 눈에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이상야릇 한 광채가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운산화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다만 남궁봉의 따뜻한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들떠 있었던 것이다. '아 나는 이제 사랑의 승리자가 된거야.그에게 아무리 많은 여자들이 있어도 나만큼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자는 없어.그리고 아무리 수많은 여자들이 있다고 해도 나는 기꺼이 싸워 이길 수 있지. 이젠 모두 끝난 거야......' 그녀의 입가에는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오! 이것을 사랑의 기쁨이라고 하나? 처음 느낀 행복감, 만약 그를 다른 여자한테 빼앗긴다면 나는 그가 보는 눈앞에서 혀를 깨물고 자살이나 할테야.그의 사부가 아무리 시큰둥하게 여긴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모든건 오로지 내 마음속에 있는데.........." 운산화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남궁봉은 벌써 어디론가 간곳 없이 종적을 감춰 버렸다 . 저쪽 무성한 갈대밭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는 그쪽으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운산화는 그쪽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노선배님 고맙습니다.!" 제 25 장 후개의 실종 낙양성에서 동쪽으로 십리쯤 되는 곳에 한 채의 오래된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설가사당(薛家祠堂) 이라고 하는데 설가가 이미 십여년 전에 대가 끊기는 바람에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헌데 잡초와 폐허만이 무성할 이 설가사당에서 지금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이연회는 뜻밖에도 개방의 제자들이 벌이는 것이었다. 건곤교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서 임시로 낙양분타를 벗어난 개방제자들은 바로 이 설가 사당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 없는 거지떼들인 개방제자들이 연회를 베풀게 된 것은 순전히 화일로 때문이었다. 개방 제자들이 막 저녁을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화일로가 나타나 술상을 차리자고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었다. 화일로는 또한 선뜻 연회비용으로 거금 이백냥을 내놓았다.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개방제자들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즉시 음식을 장만하랴 술을 사오랴 한바탕 소란 법석을 부린 끝에 개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지게 된 것이다. 개방제자들에게 이러한 대연회는 전례에 없었던 것이다. 개방제자들은 언제나 의결(衣結)로써 배분의 고하를 정확하게 분별한다. 방주는 아홉매듭으로 방 중에서 의결수가 제일 많다. 방주 이하는 순서대로 장로는 칠결이고 총타와 각당의 당주는 오결이며, 각 당의 호법은 사결이다. 그리고 분타주는 삼결이며 각 분타의 개목은 이결도 있고 일결도 있다. 처음 입문한 제자는 삼년동안 백의개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의결이 없다는 뜻이다. 개방에서 팔결과 육결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항상 두 사람 밖에 없다. 이 두 사람의 지위는 매우 특이했다. 육결을 달고 있는 사람은 배분이 장로 아래이고 각 당의 당주 위이며 법개라고 칭했다. 팔결을 단 사람은 방주를 게승할 사람으로 후개라고 불렀다. 후개는 전례적으로 오결 이상의 제자중 무공이 출중하고 탁월한 영도력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평소에 소행이 단정해야 하며 전체 장로의 동의를 얻어 방주가 임명한다. 후개의 신변은 장로가 책임을 지고 , 평소에 외계와 접촉을 하지 않으며 어떤 때는 개방의 제자들 까지 도 방중의 후개가 누군지 모르는 때가 있다. 법개는 전체 방중에서 의결을 달고 있는 제자들이 철저한 비밀 선거를 통하여 뽑기 때문에 일결인 개목도 당선될 수 있고 칠결인 장로도 당선될 수 있다. 만약 일결인 개목이 당선되면 단번에 다섯 계급이 승진하여 육결의 법개가된다. 그리고 칠결인 장로가 당선되면 일계급 강등하여 육결이 되는 것이다. 당선된 장로는 이를 수치스러워 하기는 커녕 오히려 영광스럽기 그지없이 한다. 왜냐하면 개방제자중 규칙을 잘 지키고 노력 분투하면 누구나 장로로 승진될 수 있지만, 법개는 전제자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당선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힘들기 때문이다. 법개로 당선되는 제자는 요구조건이 엄격하기 때문에 후개에 비해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 하지는 않았다. 당선된 제자가 법개로 인정되면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하나라도 결격함이 없어야 한다. 첫째, 필히 방규(幇規)를 모두 알아야 하고 방내의 사정에 훤해야한다. 둘째, 필히 두뇌가 총명해야 하고 사리판단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세째, 필히 이기심(利己心)을 버려야 하고 강직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네째, 비록 추남일지라도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한다. 개방에서 시중들기가 제일 어려운 것이 법개이며 제일 존경을 받는 것도 법개이다. 일반 제자들은 법개의 이름을 들으면 모두들 방주의이름을 듣는 것보다 더욱 무서워 한다. 이런 점으로 보아 법개의 권위가 개방 내에서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이 당금 무림에서 제일가는 방파중 하나인 개방의 내부조직 상황이었다. 오늘 밤 낙양분타에서 거행되는 이 연회가 전례에 없던 것이라 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개방의 엄격한 규칙에는 배분이 이결 이상 차이가 있는 사람들은 한 자리에 마음대로 서거나 앉을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오늘밤 연회를 연 주객(主客)인 풍파무쌍 파일로에 의해 완전히 깨져 버렸다. 화일로는 고의로 장난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개방의 규칙이 불합리함을 일깨워 주려는 것인지 륚이곳의 삼결 분타주를 자신의 탁자로 불러 앉혔다. 그외에 초일풍과 그의 사부인 강구, 두 사자도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화일로는 주객이므로 가장 신분이 높은 칠결 장로인 걸신 악구천과 동석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의개와 일결, 삼결이 감히 칠결과 함께 앉는 괴상한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연회석상에는 화일로 외에 두 명의 손님이 있었다. 바로 색명무상 정구살과 그의 못생긴 제자인 파면비차 우풍광이었다. 원래 정구살은 악구천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악구천은 우풍광의 안내를 받아 정구살을 만나서 이곳으로 함께 와 회포를 풀려고 했는데 화일로가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한 차례 난처한 장면을 맞이 했었다. 정구살은 화일로를 보자 불문곡직하고 덤벼들려 했으나 악구천이 도중에서 가로막는 바람에 손을 쓰지 못했다. 이어 화일로가 새장자 남궁봉의 제자임을 알게 된 정구살은 그만 화를 거두고 말았다. 아무리 정구살이라 해도 남궁봉같은 인물을 적으로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미 풍운보에 가서 한차례 울화를 풀었지 않은가? 이런 연유로 해서 정구살과 우풍광, 화일로는 한 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연회의 주인인 걸신 악구천은 탁상 앞에 앉을때부터 줄곧 입을 나불거렸다. "에구......그 개다리... 남궁늙은이 때문에...아이구...." 그는 비록 푸짐한 요리가 탁상 위에 가득 차려져 있었고, 술도 삼원의 장원홍이었지만 전에 다 허물어져 가는 절간에서 먹으려고 했던 개다리를 잊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화일로가 들으라는 듯이 줄곧 남궁봉이 마땅히 개다리 한개를 개상해야 한다고 주절거렸다. 화일로는 미소를 띤채 그 말을 듣고 있다가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나는 사부님 대신 악장로님이 주장하는 것에 대한 보완책을 한가지 생각해 냈습니다." 악구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뜸 말했다. "한번 말해 보게." 화일로는 천천히 말했다. "악장로께서는 지금 곧 개방 장로의 신분을 버리시고 개장수가 되십시오. 그러면 개다리 뿐만 아니라 드시고 싶은 개고기의 모든부위를 매일 드실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동석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배꼽을 잡으며 파안대소 했다. 악구천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개다리 하나 때문에 노부보고 장로직을 버리라니......" 정구상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이죽거렸다. "왜 어때서? 자네에겐 그 둘이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게 아닌가?" 다시 요란한 폭소가 터졌다. 그 때 화일로가 표정을 굳히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데 분타의 제자 가?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무거운 것으로 보아 필시 무슨 일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이어 모든 사람들은 숨소리를 죽이고 소리나는 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과연 발자국 소리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 25장 후개의 실종 2/2 잠시 후 한명의 이결 개목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결 개목은 손에 둘둘 말은 황지(黃紙)를 들고 있었으며 몹시 겁에 질려 있었다. 개방에서는 오결 이상의 제자만이 황지로 편지에다 쓸 수 있다. 악구천은 그 종이 빛깔을 보고 대번에 안색이 싹 변했다. 이결 개목은 방 중의 규칙대로 먼저 황지를 분타주에게 었다. 분타주는 다시 황지를 악구천에게 넘겼다. 악구천은 편지를 받지마자 즉시 뜯어 보았다. 이어 그는 얼굴이 백지장같이 창백하게 변하며 멍해졌다. 정구살은 눈을 껌벅 거리며 의아해서 물었다. "총타에서 보내온 것인가?" 악구천은 그의 물음을 듣고서야 정신이 든 듯 했으나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서서히 탁상위의 술잔을 들어서 단숨에 쑥 마셔 버렸다. 동석한 분타주들과 강구, 초일풍 그리고 편지를 전하러 온 이결 개목은 이 상황을 보고 분분히 물러 갔다. 악구천은 그제서야 비로소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본 방의 후개가 실종되었네...." 화일로와 정구살은 그의 말을 듣자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휘둥그래 떴다. "뭐라고 ? 그게 정말인가?" "그렇네.." 악구천은 입가에 쓴 웃음을 지으며 또 한차레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칠결들은 이제 큰일 났네." 화일로와 정구살 등은 개방의 금장로인 악구천의 말뜻을 알았지만 무슨말로 그를 위로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개방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강호인물이라면 개방의 규칙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 후개가 탄생하는 날로부터 방중의 칠결들은 후개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액운이 다꼉쳐 후개가 갑자기 실종되어 버렸으니 그의 안전을 책임진 장로들은 어떠하겠는가? 화일로는 잠시 사색에 잠기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귀방의 후개에 대해 장로께서는 요약해 말씀해 주십시오." 악구천은 여전히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들의 후개는 이름이 진반천(秦半天) 이며 별호는 철골개 라 부르네 . 그가 후개에 당선되기 전에는 방중에서 오결 제자 였네" "그럼 당주였습니까?" "그렇네." "어느 당 입니까?" "강무당 이네."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됩니까?" "아마도 서른 몇살이지......" "좋습니다. 장로께선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악구천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년전. 낙양에 어느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는 재산이 수없이 많았으나 아들은 하나밖에 없었제." 그는 또 꺼질 듯한 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 집 주인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혥하기를 갈망하여 글봉부를 엄하게 시켰네. 그러던 어느 해 겨울밤에 그 아들은 책을 읽다가 과로한 나머지 그만 실수로 등불을 쓰러뜨려 불의의 대화재가 발생했네." 이어 화일로가 말을 받았다. "그 후 진공자는 집안이 기울어서 거지가 되었습니까?" "그렇네. 하지만 당년의 대화재는 노부가 알기로는 우리들의 후개가 개방에 입문하게 된 원인중의 한가지에 불과하네." "그게 무슨 말씀 입니까?" "당연 진공자의 가세는 비록 기울어졌지만 많은 친척들과 친구가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의지할 수도 있었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항상 하늘과 땅을 집으로 삼는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다네." 듣고 있던 정구살이 내쨮듯이 말했다. "완전히 타고난 거지로군 ." 악구천은 농담할 기분도 나지않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파일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분이 불과 서른 姐荑?강무당의 당주가 되고 또 개방 방주의 후계자인 후개로 당선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군요." 악구천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할 것 같으면 우리들의 후개는 정말 얻기 힘든 인재일세. 그는 무공이 매우 고강하고 인품이 뛰어났으며 매사에 결단력이 강해 조금도 결점을 찾을 수가 없네." 화일로는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방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인재를 아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내와 대외의 일은 모두 한가지 입니다. 그가 강무당의 당주를 맡고 있는 기간동안에 다른 사람과 무슨 원한을 맺은 적이 없는지 장로께서는 모르십니까?" "없네." 화일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생각에 잠기더니 돌연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한가지 건의를 하겠는데 장로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나는 머리가 어지러우니 자네에게 좋은 고견이 있으면 사양하지말고 말해보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받아 들이겠네." "저는 앞으로 며칠 더 이곳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그동안에 장로께서는 귀방의 후개가 실종된 시간과 장소를 알아낸 후 이일을 제게 맡기십시오." 화일로는 만면에 웃음을 띄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한 , 또 귀 방의 후개가 여태까지 살아있는 한 저는 한달내로 꼭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정구살이 무릎을 탁 쳤다. "과연 그 사부에 그 제자군. 풍광 이 녀석도 자네처럼 앞뒤가 분명하면 얼마나 좋겠나?"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던 우풍광은 이 말을 듣자 얼굴이 시뻘개 졌다. "사...사부님 , 저도 앞뒤는 가릴줄 압니다. " 정구살은 눈을 부라렸다. "이놈아! 그럼 네 나이가 몇살인데 아직 앞뒤도 못가리느냐?" 악구천은 잠깐 그들 사도를 주시하고는 화일로에게 물었다. "자네는 먼저번에 사람을 시켜 노부를 한중에서 이곳까지 불렀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랬나?" 화일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이제 중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가 악구천을 부른 이유는 건곤교에서 그를 제거하기로 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 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미 악구천은 건곤교의 암습을 한번 받고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악구천은 조금 겸연쩍은 듯이 말했다. "본방의 변고 때문에 자네가 자신의 일을 제쳐놓고 본 방을 도와 모험을 하겠다니 노부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 화일로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장로께선 제가 사심을 품지 않았음을 어떻게 아십니까? 난 표면상으로는 귀방의 후개를 찾는척 하면서도 실제적으론 제 개인의 일을 처리하려는 겁니다. " "그것은 자네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자네개인의 일은 자네 혼자서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는데 구태여 어떤 명목을 빌릴 필요가 있는가?" 그는 돌연 정색을 하며 진지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자네는 노부에게 매우 무거운 약속을 했네. 노부도 노부대로의 생각이 있으니 자네는 서슴치 말고 말해보게. 무슨 일이든지 힘껏 돕겠네." 화일로는 술잔을 들며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우리 술이나 마십시다." 이때 정구살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잠깐 이건 순전히 노부의 생각인데 이번 일이 혹시 그 건곤교인가 뭔가 하는 놈들의 소행이 아닐까?" 악구천의 눈이 번쩍 빛났다. "건곤교?" "그렇네. 자네는 조금전에 건곤교에서 살인첩인지 뭔지를 내려 자네를 해치려 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보기좋게 자네를 독살시키는데 실패하자 다시 이 단계 작전을 펼친게 아닌가 해서 말일세." 악구천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럴듯한 말이네만 시일이 너무 촉박하군 ." "시일이 촉박하다니...." "그들이 노부를 살해하려고 했던건 이틀전 일일세. 한데 그 사이에 벌써 그들이 실패한 걸 알고 다시 본방의 후개에게 손을 썼다는 건 너무 빠르지 않나? 아무리 그들의 소식이 영민하다고 해도 말일세." 화일로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 제가 건곤교의 인물에게서 직접 들은 바로는 그들의 소식통이 몹시 빠르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그 인물은 귀방보다 빠를거라고 장담했습니다. 그 말이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틀이라면 그들의 총타에서 장로님을 제거하는데 실패한 것을 알고 다시 새로운 지시를 내리기에모자라지 않는 시간인것 같군요." 정구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생각도 그렇지? 역시 수준이 같은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군 그래." 악구천은 굳은 얼굴을 조금 풀며 피식거렸다. "수준 좋아하네." 정구살이 눈을 부릅떴다. "내 수준이 어때서 그런가?" "거울 한 번 들여다 보게. 그런 얼굴을 가지고 수준을 찾게 생겼나." 정구살의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팍 구겨졌다. "뭐라고? 이 늙은이야! 네얼굴은 어디가 얼마나 잘나서....." 악구천은 손을 내저었다. "그만 두세. 노부는 지금 자네와 입씨름할 기분이 아닐세. 그나저나 그 말대로라면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군. 아무래도 노부가 직접 나서는게 좋지 않을까? " 화일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들의 꾀에 넘어가는 일이 됩니다. 그보다는 처음의 계획대로 제가 나서고 장로께선 은밀히 그들의 행적을 탐문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악구천은 한참 생각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군 제길...... 그놈들의 총단이 어디인지만 알게 되면 당장에 개방의 전 고수를 이끌고 가서 박살을 내버리고 말겠네." 화일로는 빙그레 웃음을 지며 천천히 잔을 들었다. "자 술이나 마십시다. 이 술을 마신후 우리는 유쾌히 헤어지고 또 인연이 있으면 만납시다." 제 26 장 야무진 女心 휘잉! 갑자기 세찬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드높은 하늘엔 시커먼 먹구름이 잔뜩 뒤덮였다. 곧 폭우가 쏟아질 거라는 신호였다. 한 명의 백의미녀가 바람을 안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녀는 풍망하고 탐스러운 몸매에 보는 사람을 아찔하게 만들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무림의 삼대미인중 하나인 옥미인운산화였다. 휘이잉! 다시 세찬 바람이 불자 바람에 실려온 모래들이 사정없이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쏴! 돌연 그녀의 머리를 싸매고 있던 경사(經莎)가 바람에 날려 벗겨지고 말았다. "앗?" 운산화가 급히 손을 쳐들어 붙잡으려고 했으나 약간 늦어 경사는 눈깜짝할 사이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운산화는 은근히 약이 올랐으나 워낙 바람이 세게 불어 경사를 찾기가 귀찮아 그냥 쳐다보고만 있다가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송두리째 빠져 버릴듯 흩날렸고, 호흡하기에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자태는 너무도 아름다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선녀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등뒤에서 굵고 낮은 매력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 이 경사는 혹시 낭자의 것이 아니오?" 운산화는 흠짓 놀라 급히 몸을 돌렸다. 어느틈에 나타났는지 그녀의 앞에는 한 사나이가 우뚝 서 있지 않은가? 정말 영준하게 생긴 젊은이였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 그처럼 영준하게 생긴 남자를 한번도 구경해 본 적이 없는것 같았다. 심지어 남궁봉의 제자인 화일로도 눈앞에 있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역시 무엇인가 뒤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훤칠한 키에 청의를 걸친 늠름한 모습 . 더우기 그의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것 같은 기이한 안광, 누구든지 그와 정면으로 마주보는 사람이면 넋이라도 몽땅 주고 말 것같은 미끈한 사내 대장부 였다. 청삼문사는 석장처럼 버티고 서서 바람에 날아갔던 운산화의 경사를 든채 멍청히 바라보고있었다.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에 홀딱 반한 모양이었다. 운산화도 마음이 매우 울렁거리는지 오랫동안 상대방을 훑어 보다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 감사해요" 청삼문사는 경사를 내주었다. "나는 무심결에 이 경사를 주웠소. 바람이 이렇게 세차게 불어오는데 머리를 싸매는 경사가 없서서는 안될 것이오. 어서 머리를 싸매도록 하시오." 운산화는 다시 사의를 표하며 경사를 받았다. "고마와요." 헌데 청삼문사는 경사를 건네준 후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려 앞으로 질주해 가는게 아닌가? 청삼자락을 펄럭이며 번개같이 질주하는 그의 모습은 실로 늠름하기 짝이 없었다. 이상한 미련이라고나 할까? 묘한 아쉬움이 운산화의 뇌리를 엄습했다. 얼떨떨한 듯 연방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점으로 변해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 . 어째서 물건을 전해준 후 그냥 떠나 버릴까? 후후......여자를 만나도 추근거리지 않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이야말로 전형적인 남자로구나!" 이게 호감이라는 걸까? 좌우지간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절세미녀를 만난다면 바보천치라해도 말을 걸며 핑계를 대서 어찌 해보려고 들 것이다. 더구나 청삼문사는 아까 그녀의 등뒤까지 접근해 왔는데도 그녀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때 그의 무공이 절정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어떤 사악한 마음을 품었다면 능히 사욕을 채울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나연 호감이 갈 수 밖에.... 세상에 성인 군자를 좋아하지 않는 여인이 어디 있는가? 더구나 상대방은 너무도 멋있고, 또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운산화는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힘드는 듯 연방 심호흡을 했다. 어느덧 바람은 언제 극성을 부렸었냐는듯 잠잠해 졌다. 똑똑...우두둑.... 그러나 이번에는 빗방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운산화는 조급해져서 급히 앞으로 질주했다. 빗방울이 커져 옷이 금방 축축해졌기 때문에 그녀는 있는 힘을 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그마한 산이 나타났고 산 맡에는 동굴이 있었다. "옳지! 저 곳에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해야 겠구나!" 운산화는 쾌재를 부르며 더욱 진기를 끌어올려 단숨에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르릉! 꽈앙.......! 하늘도 그녀를 물에 빠진 생쥐꼴로 만들기에는 그녀가 너무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동굴 속으로 들어서자마자 뇌성벽력과 천둥, 그리고 폭우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굴 입구에서서 하늘을 응시하던 운산화는 빗방울이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몇걸음 뒤로 물러났다. 헌데 바로 이순간, 그녀의 등뒤에서 돌연 그 매력적인 음성이 들려오지 않은가? "오!비가 몹시 오는군요." 운산화는 무의식중에 목을 홱 돌렸다. 바로 그 준수한 청삼문사였다. "어머나, 당신도....." 운산화의 야릇한 말이 떨어진 탓인지 청삼문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넷다. "하하하 ....낭자, 우리는 인연이 있어서 또 만나게 되었군요. 정말 우연중의 우연이외다." 운산화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낀 터라 생긋 웃으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호호.... 글쎄요. 당신도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왔고......" 청삼문사는 들은 척도 않고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엉뚱한 말을 지껄이는게 아닌가? "흐음...하필이면 지금 비가와서 이런 곳에서 발을 묶이게 할게 뭐람!" "그래요 하지만 황량한 벌판에 이런 동굴이 있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거예요." 청삼문사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잔뜩 찌푸렸던 얼굴을 확펴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하하...사실 나는 이 비를 원망할게 아니라 마땅히 고맙다고 해야 하오. 만일 이 비가 없었다면내가 어찌 낭자를 다시 만날 수가 있겠소?" 운산화를 주시하던 그의 눈가에 야릇한 기운이 감돌았다. ".....!" 운산화는 가슴이 철렁하여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동굴 밖으로 시선을 돌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만 응시했다. 청삼문사는 계속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본심을 드러내는 것일까? "낭자. 아무래도 비가 금방 멈출것 같지 않으니 앉아서 잠시 쉬는게 어떻겠소?" 그렇다 보아하니 비는 좀처럼 멈출것 같지가 않으니 계속 이렇뉯 서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장소가 기분 나빴다. 또 성인군자로 보이던 인물의태도도 변한 지금 약간 걱정스러웠다. '설마.......' 운산화는 잠시 주저하다가 편한대로 생각을 고치고는 앉아버렸다. 정말 청삼문사가 그녀의 곁으로 가까이 옮겨 앉으며 동굴밖을 힐긋 쳐다본 다음 수작을 부리는게 아닌가? "낭자 마음이 잔잔할 때 이런 곳에 앉아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 일종의 행복감이 들지 않소?" 운산화는 담담히 웃었다. 황홀한 미소 였다. "후후훗.... 그것은 마음이 잔잔할 때 한해서익캚지요.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군요." 청삼문사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그럼 낭자에게도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이오?" "길을 걷는 사람은 모두 볼일이 있다고 할 수 있잖아요. 당신에게 볼일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운산화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청삼문사는 궁금한 빛을 띄며 은근히 물었다. "옳은 말씀이오. 헌데 낭자는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운산화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한 사람을 찾으러 가요." 청삼문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찾는 사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몰라요" "아니 그런데......?" 청삼문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껌벅거리자 운산화는 생긋 웃었다. 그러나 어딘가 처량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동남쪽으로 갔어요. 그래서 가면서 계속 수소문을 하고 있는 중이예요." "그랬군요. 도데체 낭자가 그토록 애를 써서 찾는 사람이 누구요?" "나의 약혼자예요." 결정적인 말이라고나 할까? 청삼문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그럼.....낭자는 이미 약혼을 .....누군지는 모르지만 낭자와 같이 절세미인을 부인으로 맞이할 분은 무림의행운아이외다." 운산화의 눈에서 신광이 번쩍였다. "아니? 당신은 제 약혼자가 무림인 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죠?" 청삼문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후후훗.... 단지 그렇게 추측해 본 것 뿐이외다, 낭자가 무림에 몸을 담고 있으니 배필도 무림에서 구하리라는 것은 극히 자명한 일이 아니오?" 운산화는 예쁘게 웃으며 밖을 쳐다보면서 이야기 한다. "후훗 , 정확한 말이예요." 그녀의 눈에서 달콤한 빛이 번쩍거렸다. 약혼자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유쾌해지고 행복감에 도취되는 모양이었다. 청삼문사는 그것을 보고 몹시 부러운듯이 물었다. "대체 그 행운아가 누구요?" "당신도 무림인이니 새장자 남궁봉이란 분을 알고 있겠군요?" 청삼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변을 토했다. "물론 잘 알고 있소. 그 분은륚 무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제일 괴인이 아니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사람을 들먹이시는 거요? 약혼자가 그 분은 아닐텐데....." 운산화는 자랑스러운듯 태연하게 말했다. "나의 약혼자는 바로 그분의 제자예요." 청삼문사가 입을 딱 벌리며 무릎을 탁 쳤다. "오! 알고보니 화일로 그 친구로군." 운산화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그 분을 알고 있나요?" 청삼문사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알다 뿐이겠소? 나는 그에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소." "정말이세요?" 운산화가 기절할 것처럼 놀라 반문하자 청삼문사는 돌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수심이 떠올랐다. "흠.... 내가 낭자에게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군." 운산화는 궁금한 듯 체면도 생각지 않고 재촉했다. "무슨 이야긴가요?" 청삼문사는 정색을 하며 신중하게 물어 보았다. "낭자가 그와 약혼하게 된 것은 부모의 명령이오? 아니면 중매를 해서 맺어지게....." "아니예요. 내가 직접 그를 만나서 알게 되었어요." 운산화의 말이 떨어지자 청삼문사는 근심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흠, 낭자는 그를 알게 된지 얼마나 되었소?" 운산화는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얼마 안됐어요. 사실 이것은 연분이라고 하는게 옳아요. 나는 그를 알게 된지가 하루밖에 안됐거든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는 듯 청삼문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후.... 그럴 것이외다.그러니 일이 그렇게 된것도 무리는 아니오."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그냥 넘길만큼 운산화는 바보가 아니었다. 곧 눈꼬리를 치켜 세우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청삼문사는 잠깐 머뭇거렸으나 곧 심호흡을 하며 무겁게 내뱉었다. "사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되나 낭자에게만은 꼭 해야되겠소. 혼인이라는 것은 평생의 운명을 죄우하는 중대한 일이지, 결코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오. 도대체 낭자는 그에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만난 지가 하루밖에 안된 사람과약혼을 했소?" 운산화는 여유있는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풍류를 즐기는 경향이 심해 가는 곳마다 정을 남기죠.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는 여태껏 수많은 여자를 짓밟았다는......." "아니, 낭자는 모두 알고 있지 않소?" 청삼문사가 아연실색하여 물어보자 운산화는 얄미울 정도로 교태스럽게 웃었다. "호호홋..... 제가 이 정도 알고 있으면 뻍나요?" "나는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낭자와 같은 여자는 처음이오." "그러니까 아까 처음부터 제가 연분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나요? 나는 그가 그런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요." 이런걸 고집이라고 하면 어색할까? 미녀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고집,소유욕,자만심이라면족하리라. 청삼문사가 돌연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색을 하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낭자 내가 직언을 할테니 용서하시오.지금 낭자가 그에게 깊이 빠져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오." "좋아요. 사랑이 아니고 죄악이라도 상관없어요.아마 내가 전생에 그에게 무슨 빚을 진게 있어서 그러는 거라도괜찮아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청삼문사도 어안이 벙벙해진 모양이었다. "아... 정말 그자가 부러워 질투가 날 정도요." 청삼문사는 갑자기 운산화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엉뚱한 말을 꺼냈다. "낭자는 정말 이렇게까지 자신의 일생을 경시해 가며...." "잠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이 자신의 일생을 경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휴...! 안타깝소. 낭자는 지금 완전히 그에게 미친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낭자가 그토록비참하게 자신의 일생을 망쳐버리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 는 없소." 청삼문사의 입에서 뚱딴지같은 소리가 새어 나오자 운산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청삼문사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 이어 그의 입에서 청천벽력같은 말이 떨어졌다. "낭자, 나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완전히 매혹당하고 말았소. 또 나는 속으로 나야말로 낭자의 배필감이 될 자격이 있다고 자부하였소. 만일 낭자가....." 일은 벌어졌다. 운산화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재빨리 그의 말을 중지 시킨 후 부드럽게 타일렀다. "호호홋..... 당신의 호의에 나는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사실 당신의 준수한 외모는 세상의 모든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요. 만일 내가 당신을 먼저 만났다면 지금 내가 그를 사랑하듯 당신에게 빠져들 지도 모르는 일이예요.하지만 우리는 인연이 없는지 나는 그를 먼저 만나게되었으니......." 청삼문사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낭자. 그 자는 낭자의 일생을 망치게 할 것이오.지금 낭자의 마음을 고쳐도 늦지는 않소이다." "아니예요. 나는 이미 마음을 송두리째 그에게 주었어요.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내세에서나 맺어지길 바라세요." "낭자 도대체 그자의 어떤점이 그렇게 좋소?"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가 당신보다 뒤진다고 여겨지겠 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떤 사람도 그를 따를 수가 없어요." "그게 정말이오?" "정말 이예요." 청삼문사는 숨을 길게 들이킨 후 음침하게 협박을 가했다. "흠 낭자! 나는 낭자로 하여금 반드시 나와 결혼을 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소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운산화는 쏜살같이 동굴 안쪽으로 물러났다. 제 26 장 야무진 女心 2/2 정말 기민한 반응 이었다. 그녀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강경하게 반박했다. "그에게 풍류를 즐기는 기질이 있다지만 그는 줄곧 내게 군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지요. 그런데 당신은 겉보기에는 얌전하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생각을 하고 있군요." 청삼문사는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후훗.... 낭자, 이것은 모두 낭자를 위한 행동이오." 운산화는 싸늘하게 냉소를 날렸다. "흥! 그렇다면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겠군요." 청삼문사는 노골적으로 추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헤헤헤 ..... 낭자, 이 동굴에는 출구가 하나 밖에 없소." "나도 알고 있어요. 나는 눈앞에 있는 동굴 입구로 나가겠어요. 내가 그렇게 하는걸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나가세요." "후후후..... 낭자는 밖으로 나갈 수 없소.또 나를 쫓아낼 수도 없을 거요." 이어 서서히 운산화에게 접근하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뜻하지 않게 위기를 맞이한 운산화는 앙칼진 고함을 지르며 일장을 뻗었다. "받아랏!" "흥!" 청삼문사도 코웃음을 치며 손을 쳐들어 일장을 날렸다. 펑! 쌍방의 장력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순간 "아악!" 운산화는 심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아픔이 전신을 뒤덮는 듯 했으나 운산화는 얼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쌍방의 실력 차이가 너무 심한 것 같았다. 청삼문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서서 이죽거리는 것이 아닌가? "후후후....... 낭자 어떻소?" 운산화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다가 앙칼지게 말했다. "흥! 나는 도저히 당신을 당해낼 자신이 없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몸에 손을 댈 생각은 말아요. 만일 더 이상 접근 한다면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살 해 버리겠 어요." 그녀는 즉시 손을 갈고리처럼 오무려 자기의 가슴에다 바싹 갖다 댔다. 정말 야무진 여인의 비장한 각오였다. 정절이라는게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청삼문사는 상대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못한 듯 걸음을 멈추었다. "낭자 만일 부질없이 자결을 하게 된다면 영원히 그를 만나볼 수 없을텐데... 그래도 좋단 말이오?" 운산화의 표정은 더욱 비감하게 변했다. 그러나 태도는 더욱 강경했다.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군요. 내가 만일 죽지 않고 남에게 농락을 당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그를 만날 수 있겠어요." 청삼문사는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운산화를 노려보며웃음을 쳤다. "흥!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당신이 그토록 정조관념이 강한 여자라고는 맏지 않소." 그는 다시 한걸음 접근하기 시작했다. 운산화는 원망에 가득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좋아요. 두고 보면 알거에요." 이렇게 내쨮고 난 운산화는 손에 힘을 주어 번개같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찔러 버리는게 아닌가? 헌데 그녀의 손가락이 막 가슴에 닿으려 할 때 팟! 그녀의 팔꿈치가 무엇에 찔린 듯 하더니 팔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팔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윽!"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최후의 수단으로 혀를 깨물어 자결하려다 멍청해지고 말았다. 눈앞에 있어야할 청삼문사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운산화는 귀신에 홀린 듯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훑어 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청삼문사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라져 버리다니....... 운산화는 짙은 의혹에 빠져 멍청히 서 있었다. 어느덧 빗방울은 작아졌다. 그토록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도 이 괴면에 놀라 버린 모양이었다. 공허한 정적만이 운산화의 전신을 억누를 뿐이었다. <제 3 권 끝> 제 27 장 雲散華의 執念 비는 멈추었다. 다시 태양이 방긋 웃기 시작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무섭게 비가 쏟아졌고, 하늘은 칠흑처럼 어두웠는데 금방 무더운 폭염이 대지를 녹일 듯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운산화는 정처없이 걸어 대차집(大車集)까지 당도했다. 대차집은 낙양에서 남동쪽으로 오십리 되는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비록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낙양이 멀지 않아서 상당히 번화하여 없는게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막 대차집에 당도하여 어느 쪽으로 갈까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휙! 맞은편에서 흰 물체 하나가 쏜살처럼 날아오더니 그녀의 발 앞에 툭 떨어지는게 아닌가? 그것은 종이 쪽지였다. 운산화는 흠칫 놀라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오고가는 행인이 많아 누구의 짓인지알 수가 없었고, 특별히 의심이 가는 인물도 발견할 수 없었다. "흠...." 운산화는 한숨을 내쉬며 종이쪽지를 집었다. 그것은 한 폭의 지도였다. 한 쪽 귀퉁이에 대차집이라는 세글자가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지도인 모양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지도를 ..... 내가 길이라도 잃어 버릴까봐.......' 운산화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도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지도에는 화살표가 있었고 마지막에 화살표 하나가 자그마한 원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 원안에는 한 쌍의 사자 석상이 있었다. 헌데 첫번째 화살표가 있는 것은 공교롭게도 바로 그녀가 지금 서 있는 지접이 아닌가?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나보고 화살표대로 찾아가라는 뜻인데... 누구의 짓인지 알수가 없으니........' 사람들은 신비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법. 그녀는 짙은 의혹에 빠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이쪽지를 품속에 집어놓고 화살표가 가리킨 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까 동굴속에서 청삼문사를 만나 곤경을 치루었기 때문에 또 그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아 찾아가고 싶지 않았으나 미묘한 호기심이 본능을 자극하여 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운산화는 붉은 대문 앞에 한 쌍의 사자 석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 했다. 이곳은 대차집 안에서도 최고로 웅대한 집 같았다. 그러나 떠들석하지 않고 조용한 것이 왠지 기분 나쁠 정도 였다. 운산화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문을 조금 더 열며 크게 소리쳤다. "안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런 대꾸도없고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계속 불렀다. 그러나 역시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어 마치 빈집같은 인상을 주었다. 운산화는 호기심이 크게 작용한 듯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닫아 버렸다. 넓은 정원.....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허나 이상하게도 사람의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운산화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청석이 갈린 좁은 길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돌연 뒤뜰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꺄르르......."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 미치게 녹여버릴 것 같은 묘한 웃음소리였다. 운산화도 여자였으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무의식중에 웃음소리가 나는 뒤뜰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둥그런 대문을 지나 뒤뜰로 들어서자 추녀가 하늘을 찌를 듯이 위로 휘어져 올라간 정자와 주각들이 꽃밭속의 길 양쪽에세워져 있는게 보였다. 운산화는 귀를 기울여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호호홋..." "하하하..."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에 남자의 웃음소리와 말 소리가 섞여운산화의 귀를 자극시켰다. 음탕한 장난을 하고 있는 듯 웃음소리는 교성에 가까웠다. 소리는 정자 안에 있는 아담한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운산화는 남자의 음성을 듣자 대경실색을 하여 유령처럼 몸을 날렸다. 놀랍게도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으나 그녀는 방문 안쪽으로는 갈수가 없어 소리없이 옆으로 돌아섰다. 동쪽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한 운산화는 쾌재를 부르며 꽃밭 속에 몸을 숨기고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다음순간, '아니.....?' 그녀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무었을 보았길래 이토록 놀랄까? 운산화가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사람 즉 남궁봉의 제자인 파일로가 술과 안주가 푸짐한게 차려진 둥근 탁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는 양쪽 무릎에 녹의와 자의를 입은 절세미녀를 걸터 앉히고 양손으로 두미녀를 얼싸 안은채 즐겁게 놀고 있었으니.... 두 미녀는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술잔에 술을 따라 받아 마시게 하는 등, 안주까지 먹여주고 있었다. 화일로는 연신 얼굴을 두 미녀의 뺨에 비벼댔으며 두 미녀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몸을 비비틀고 있었다. "호호홋....호호홋...." "꺄르륵....꺄르륵...." "하하...하하하하..." 이 교성.... 이 추대.... 순간 운산화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자의 짓이로구나! 그 자가 나를 이곳으로 유인했구나!' 운산화의 뇌리에 동굴 속에서 추행을 하려던 청삼문사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화일로의 방탕한 모습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골탕을 먹이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어쨌든 운산화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같은 좌절감과 노도같은 분노가 치솟아 즉시 이곳에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독한 여자의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흥분이 가라앉은 탓인지 자리를 차고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화일로는 그녀에게 직접 자신은 그런 사람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고, 남궁봉까지 그녀에게 충고를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이것은 자신이 자초한 일이니 이런 고통과 어려움은 참고넘길 줄 알아야 된다고 모질게 마음을 고쳐 먹었다. 별안간 화일로가 투덜거렸다. "이봐, 밖에서 인기척이 있는 것 같아!" 녹의미녀가 사나이를 뇌쇄시킬 것 같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아이 안심하세요. 그 늙은이는 집으로 마누라를 만나러 돌아 갔으니 최소한 열흘 안에는 돌아올 리가 없어요. 지금 집안에는우리 밖에없어요.호호......." "두 분 아주머니......." 화일로가 입을 열자 녹의미녀가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리고는 몸을 찰싹 밀착시키며 마냥 흔들었다. "아이, 또 잊었군요.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를 부르려면 이렇게....." 하고는 입을 화일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화일로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뺨에 입술을 비벼 댔다. 이때였다. 운산화가 무슨 생각인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꽃밭속에서 나와 열려진 방문을 통해 안으로 불쑥 들어서는 게 아닌가? 두 요염한 여인은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화일로의 무릎에서 벌썩 일어났다. "어머나...!" "아앗?" 화일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운산화를 응시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두 여인은 다 풀어 헤쳐진 앞가슴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운산화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두 눈에서 독기만 뿜어내지 않으면 불룩 솟아 파도처럼 넘실 거리는 하얀 젖가슴등이 아름답게 느껴지겠지만......... "다..... 당신은 누구세요?" 운산화는 빙그레 웃으며 손으로 화일로를 가리켰다. "후후훗 .... 저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거예요." 그녀는 앞으로 다가와 의자를 하나 끌어 내더니 털썩 앉는게 아닌가?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 대범하고 당당하자 두 여인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선뜻 맞서지 못했다. 삽시간에 방안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참 운산화를 쳐다보던 녹의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화일로에게 물었다. "이....이 여자가 누구예요?" 하도 기가 막힌 탓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화일로는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 앉혔는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무림에서 당당한명성을 지닌 삼대미인중의 한 분으로써 성은 운이고 이름은 ....이름은....뭐더라?" 운산화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침착하게 굴었다. "운산화예요." "그렇지. 바로 운산화 낭자요." 화일로가 황급히 말을 옮기자 녹의미녀는 불쾌한 듯이 토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흥! 당신은 이 여자와 잘 아는 사이인가요?" "단 한번 만났을 뿐이오." 녹의미녀의 눈꼬리가 위로 사납게 솟았다. "그런데 이 여자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 왔고 또 뭣때문에 왔나요?" 화일로는 어깨를 으쓱 들어올리며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난들 어떻게 알겠소?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시오." 녹의미녀는 상대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차갑게 훑어 보았다. 이 때 운산화가 먼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나는 저 사람이 어떻게 여인들과 놀아나길래 그토록 소문이 자자한가 구경하러 왔을 뿐이예요." 그러자 화일로는 번개같은 동작으로 두 여인의 뺨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런 다음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핫....이 정도 밖에 안되오. 이만하면 됐소? 만약 낭자가 오래 큫아 계신다면 더욱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있을 것이옹." 운산화는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방긋 웃었다. "호호홋....좋아요. 그럼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기다리겠어요. 내가 이번에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헛걸음이 되지 않기를바라겠어요."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있을까? 아무튼 화일로는 이게 왠 떡이냐는 식으로 천연스럽게 물었다. "하하하.....좋소 역시 운낭자는 여걸중의 여걸이오. 그럼 똑똑히 보시오." 그는 고개를 숙여 술을 입속으로 들이키고는 자의여인의 앵두같은 입술을 포개갔다. "어마....." 자의미녀는 대경실색하여 얼른 피했다.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한 얼굴을 감싼 채 투덜거렸다. "미쳤어요? 이런 상황에서......" 화일로는 입속에 담고 있던 술을 삼킨 후 입밋을 다셨다. "아니 남은 부끄러워 하지 않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망설인단 말이오? 저 여자가 이곳에 온것이 헛걸음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한 말을 잊었소?" 그렇게 말하고는 또 다시 술을 마시려고 했다. 그러자 자의미녀가 술잔을 먼저 집어들고 몸을 비틀어 피해버리는 바람에 허사가 되어 버렸다. 화일로는 실소만 터뜨렸다. "허허허 야단났군!" 녹의미녀가 못마땅하다는 듯 운산화를 응시하며 따졌다. "이봐요 당신은 정말 계속 이곳에 앉아 있을 거예요?" "지금도 앉아 있어요." 운산화가 담담하게 대꾸하자 녹의미녀는 기가 막히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휴.... 나 원 세상에. 정말 당신같은 여자는 처음이예요." 운산화는 생긋 웃으며 실랄하게 반박했다. "호호호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니예요? 나도 당신같은 여자들은 여태것 보지 못했으니까요." "나는...나는.." "괜히 나를 실망시키지 말고 계속 술을 마시세요" 화일로가 신난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두 분도 똑똑히 들으셨을꺼요. 남에게 무시당하지 말고 어서 잔에다 술을 따라 나에게 주시오." 하지만 녹의미녀는 부끄러움이 극에 달한 듯 꼼짝도 하지않았다. "........" 화일로는 짜증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제기랄..당신도 내게 술을 먹여주지 않겠다는 거요? 그럼 내가 먹여주겠소." 그는 녹의미녀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그녀도 미꾸라지처럼 몸을 돌리며 피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화일로 체면에 숨바꼭질하듯 계속 따라 붙을수는 없는 일. 그는 운산화를 향해 양팔을 벌린 채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흠. 운낭자! 한손으로는 제아무리 휘둘러 봤자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이오. 아무래도 낭자는 이번에 헛걸음을 하신것 같소." 운산화는 피식 웃었다. "후후훗...섭섭한데요. 내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흥이 깨져 버렸단 말인가요?" "그렇소."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술을 한잔 들이켰다. 그런 다음 무언가 생각할 일이 있는지 입을 굳게 다문채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운산화도 역시 아무말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방안에 감돌기 시작했다. 두 명의 요염한 여인은 화일로와 운산화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서로 시선을 주고 받더니 웬일인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더욱 더 무거운 공기가 두 사람을 짓눌렀다. 천하의 바람둥이 화일로도 이런 어색한 분위기는 참고 견딜 수가 없는듯 침묵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운낭자. 가사를 만나 보셨소?" "예. 당신이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사를 만났어요." "사부께서도 낭자가 훌륭한 여인이라고 극찬하셨소. 하지만..." 화일로가 갑자기 말을 끊고 머뭇거리자 운산화는 궁금하다는 듯 곧 다그쳤다. "계속하세요. 하지만 어떻다는 거에요?" 화일로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의 착실한 제자가 못되니..." 운산화는 날카롭게 못을 박았다. "아는군요. 그게 옥의 티라는 거에요." 화일로의 표정이 갑자기 숙연해졌다. "낭자. 만일 귀중한 옥에 티가 있다면 그것은 진가를 발휘할 수 없소." "흥! 당신은 뭣 때문에 그 흠을 제거해 버리지 않지요?" "하하.. 어려운 일이요. 사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소." 운산화의 표정이 갑자기 약간 굳어졌다. 두눈에서도 슬기에 찬 영롱한 빛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그렇소. 바로 나는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천성이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는 일 아니겠소?" "참 이상한 일이군요. 자신의 근본적인 단점을 알고 있으면 서도 왜 고칠 수 없다는 거에요?" "맞았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리석고 못난이, 병신이외다." 운산화는 생긋 웃으며 입으 삐죽거렸다. "호호홋...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낭자는 그래도 애당초의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는 거요?" 운산화는 정색을 하며 매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나는 성격이 괴팍하여 좀처럼 남자에게 연정을 품지 못했어요. 그런데 요사이 싹트기 시작해서 그런지 고쳐먹을 수가 없군요." 화일로의 표정은 난감하게 변했다. "운낭자. 그렇다면 낭자는 평생을 기구한 운명속에서 보내게 될 것이오." 운산화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여유만만하고 자신에 찬 표정이었다.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지금 처럼, 또 소문처럼 그렇게 방탕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때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고 또 내가 아낌없이 드릴 생각이었는데도 나를 정복하지 않았을리가 없어요." 그녀의 지적이 너무 날카로운 탓일까? 화일로는 돌연 딴 소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운낭자. 가사께서는 낭자가 매우 선량한 사람이라고 했소이다." 운산화는 재미있다는 듯 예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호호홋... 이런 점만 봐도 그래요. 당신은 절대로 여자를 함부로 정복하는 탕아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어요." "운낭자! 그럼 나보고 낭자를 범해보라는 것이오?" 운산화는 정색을 하며 그의 눈을 주시했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나는 우리 사이에 진실한 애정이 싹트길 바라는 거에요. 하지만 만일...만일의 경우 당신이 성급하게,또 야비한 수단으로 나를 정복하려 한다고 해도 나는 아낌없이 모든 것을 드리겠어요." 순간 화일로는 먹을 것을 본 강아지처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28장 神秘한 香車 운산화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물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가 크게 열려있는 듯한 눈은 열기에 젖어 있었고, 많은 말을 하고 있는 듯 했다. 화일로는 천천히 운산화 곁으로 다가가며 그녀의 얼굴 에서 활활 타오르는 듯한 열정을 주시했다. 리기만 해도 터져 버릴 듯한 얼굴...... 윤기가 감도는 입술........ 오똑 솟아 얼굴의 선을 이루고 있는 코........ 머리카락에 감춰져 보일듯 말 듯한 두귀....... 그리고 열려진 두눈........ 그 모든 것들이 무섭게 그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운산화는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흑단 같은 머리결을 소중한 보물이라도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쓸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는 꼼작도 않고 온 몸을내맡긴듯한 태도로 앉아있었다. 돌연 그의 손길은 흐르듯 어깨로 흘러내린 머리결을 따라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손은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멈추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손가락은 옷의 맨 위에 있는 단추를 끌렀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의 단추를 또 끌렀다. 세번째의 단추를 끄를 때까지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번째의 단추를 끄른 다음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는 눈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더이상 단추를 끄르지 않자 한참만에 머리를 쳐들어 나무라듯 말했다. "왜요? 왜 더 손을 못대지요?" 그는 그녀의 눈을 응시한 채로 아주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나 의문나는게 있소." "무슨 일이죠?" "당신은 내가 이곳에 있는 줄 어떻게 알았소? 그리고 나를 찾아온 목적이 뭐요?" 운산화는 품안에서 꼬깃꼬깃 접혀진 지도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당신을 속이지는 않겠어요. 이것을 보세요." 그는 지도를 찢어지지 않도록 펴들고 보다가 눈이 둥그랗게 커졌다. "이건 어디서 났소?" "다른 사람이 준거예요. 내가 방금 대차집에 들어왔을때 이 접혀진 뭉치가 내 앞에 날아와 떨어졌어요." "그래요? 이건 할일이 없는 작자의 짓이오." 운산화는 생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으니 당신은 그 사람을 탓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그래 이게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고 있소?"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까닥거렸다. 그녀의 긴 머리채가 위에서 어깨까지 물결치듯 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대강 짐작은 하고 있어요." "그게 누구요?" 운산화는 하나도 꺼리지 않고 청삼문사를 만났던 일을 얘기 했다. 끝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화일로는 그녀의 얘기가 끝나자 코웃음을 쳤다. "난 또 누구라고....이제보니 그 사람이었군. 다른 사람들은 그를 한 번 만나는게 평생 소원인데 당신이 그렇게 쉽게 만날 줄이야........." "당신도 그 사람을 아세요?" "아다마다 여부가 있소? 그사람 역시 나를 잘 알고 있소.사부님 또한 잘 알고 있소." 운산화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물었다. "그가 누구지요? 어서 이름을 말해 보세요." "바로 육청운이란 인물이오. 천하 무림에서 옥면청삼 절정신검 이라는 외호로 불리우고 있는........" "뮈예요? 그가 육청운이란 말이예요?" 어찌나 놀랐는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소 그가 바로 무적검왕이라 불리우는 육청운이오.나는 사부님과 함께 그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말도 못하오." 운산화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육청운이라니........" "당금 무림에서 한 번이라도 그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우리 사도외에는 없을 거요. 그는 변장술에 능해서 사람들은 그가 눈 앞에 나타나도 못알아보기 일쑤요." 운산화는 돌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가 만약 정말로 육청운이라면 우리는 그를 숭배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조금도 없어요. 그는 경망스럽기 그지없는 파렴치한이니까요.세인들이 그렇게 그를 떠받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낭자는 그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소?" "글쎄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별로 대단치 않은 인물인 것...." "그 사람은 경박하기 짝이없소. 그런데도 무림의 여자들은 그러한 그의 성격을 좋다고 하며 반해버리는데는 영 질색 이란 말이오." 화일로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 운산화는 그의 시선을 끌어들일 듯이 눈을 빛내며 정에 넘치는 음성으로 소근거렸다. "다른 여자들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당신이 더 좋아요. 당신은 그에 비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어용." 그는 어이가 없는 모습으로 일부로 위엄있는 태도를 취했다. "그게 사실이오? 공연히 질투심이 일어나서 그러는 것은 아니오? 낭자는 그를 직접 보았다면서........" "그 사람이 진짜 육청운이라면서요?" "낭자도 역시 여자가 아니오? 그것도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절세가인이 아니오?" 운산화는 몸을 비꼬며 교태를 부렸다. "나....나는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또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동하지도 않아요." "그걸 어찌 알겠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던데....." "나를 그렇게 밖에 안보세요? 아........정말 분하군요. 내가 그에게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어요." 그녀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그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약한게 여자의 마음이라지만 그래도 여자는 일단 마음에 한 남자를 새겨 넣은 다음에는 일편단심인데 그는 그걸 모르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슬이 고인 시선으로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낭자가 그에게 마음이 통하길 바라고 있소." "왜요?" "그러면 낭자는 나를 더이상 추근추근 따라다니지 않을테니까. 만일 그렇게 하면 언젠가 나에게 몸을 버리고말 위험도 없고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소?" "당신은 정말 진심에서 그런 말을 하시는건가요? 방금 그 두 여인을 모르세요?" "아니 내말은 그런 뜻이 아니오. 그녀들과 낭자는 다르오. 그녀들은 멋대로 행동하는 버릇이 있어서 내가 어느 낭자와 어울려도 관계치 않소." "그런데 왜 서운한 말을 해서 나를 화나게 하세요?" "낭자는 그녀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착하고 아름답소. 그래서 나는 낭자가 더 두려운거요. 이 강산은 변하지 않겠지만 내 마음은 쉽게 변하고 말거요. 이 성질은 고치기가 어렵소. 나는 그런 재가 두려워서 낭자를 피하는 거요." 운산화는 그의 솔직한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좋을 찌 몰랐다. "그렇지만 내가 원한다면 당신은 어떻하겠어요?" 도전적인 태도였다.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화일로는 운산화의 얼굴을 뚫어져라 하고 응시했다. "당신은 어찌 그런 말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소?" 힐책하는 듯 쓰다듬는 듯한 말에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요.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겠지만....나는 내 마음을 전혀 몰라요.나는 내 눈이 정확한지 시험해 보고 싶은 심정이예요." "그렇다면 너무도 크고 위험한 도박을 하는 것이나 다를게 없소." "그럴지도 몰라요.그러나 나는 억울할 것도 손해볼 것도 없어요. 나는 크고 위험한 도박에 도전할수록 내가 유리한것 같아요." "만일 당신이 진다면?" "나는 도박을 일삼는 사람도 아니고 또 점장이도 아니예요. 하지만 나는 이번의 도박에서 꼭 이기고 말 자신이 있어요." "당신은 재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중에서 제일 이해하기가 어려운 성격을 지니고 있소."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중 제일가는 군자예요." 화일로는 마침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문득 그는 방에서 마주 보이는 담장위로 하나의 조그만 얼굴이 불쑥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때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은 다름아닌 초일풍이었다. 초일풍은 화일로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무엇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휙! 난데없이 밖에서 무언가 희끗한 것이 안으로 날아들자 운산화는 화들짝 놀랐다. "앗?" 허나 화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손으로 받아 들었다. 초일풍의 모습은 다시 담장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운산화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게 뭐예요?" "별거 아니오." 화일로는 담담하게 말했으나 내심으로는 커다란 경악과 희열 을 느끼고 있었다. 이 집은 사실 개방의 비밀 장소중 하나로 화일로는 이곳에서 악구천과 연락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일로는 악구천이 이렇듯 빨리 후개의 실종 이유를 알아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화일로는 운산화의 의혹에 찬 시선을 받으며 재빠른 동작으로 초일풍이 자신에게 던진 쪽지를 펼쳐 보았다. 그 쪽지에는 간단하게 몇 자적혀 있었으며 그 필체는 마치 발로 쓴 듯 형편없었다. <동관, 이달 초 이틀> 화일로는 그 쪽지를 보고 난 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 쪽지를 보고 화일로는 모든 것을 알았다. 그 쪽지의 뜻인즉 후개인 철골개 진반천이 실종된 지점은 동관이고 그 날짜는 삼일 전인 이달 초 이틀이란 뜻이었다. 동관은 섬서성과 하남성의 경계 있는 요충지었다. 유명한 명승지인 풍릉도와 황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며 황하를 건너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할 관문이기도 했다. 화일로는 탁자위의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자리에 서 일어났다. 운산화는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가 그가 말없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벌떡 일어나며 그를 불렀다. "잠깐만요." 그가돌아섰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가는 거예요? 그 쪽지는 대체 뭐지요?" "이건 내 친구로부터 온 극히 개인적인 서신이오. 그리고 나는 따로 볼일이 있어 이만 가야겠소.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원래 부터 여인과 헤어질때 말하고 떠나는 사람이 아니오."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볼일이 있으시다면 어서 가세요.나는 붙잡지 않을 테니까" "그건 현명한 생각이오. 붙잡아도 소용없을 테니까." 그는 매정한 말을 남기고 홱 몸을 돌렸다. 몇 걸음 옮기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가지 않소?" 그녀는 방긋 웃었다. "아! 이제야 내개 관심을 갖기 시작했군요. 먼저 가세요. 당신이 어디로 가든 나는 당신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왜 꼭 나만 찾으려 하오?" "당신이 승낙하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어요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외골이고 절개가 있는 것인지 보여 드릴께요."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당신을 해치는 존재가 되는 거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화일로는 운산화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녀의 두 눈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있는 듯한 그런 눈이었다. "여자와 남자가 서로 사귀게 되면 남자는 조금도 손해보지 않소. 당신이 이것을 일찍 깨우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후회와 비탄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거요." 화일로는 한 번 더 그녀를 유심히 본 후 땅을 박찼다. 휙! 그의 몸은 한 마리 비조처럼 허공을 날아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운산화는 기이한 빛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그가 사라져 간 곳을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나를 꼭 받아들일 거예요. 나는 그걸 믿고 있어요......" 제 28장 신비한 향차 2/2 흑룡구! 흑룡구는 섬서성 낙남현의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동관에서 풍릉도를 거쳐 섬서성 내로 오십여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고, 마을 한 가운데는 임동으로 통하는 관도가 뚫려 있었다. 또한 이곳은 상,섬을 왕래하는 상인들이 거쳐가는 요로이기도 했다. 석양이 서산 마루에 걸리고 핏빛으로 물든 황혼이 황홀하게 대지를 비치고 있을 때였다. 하나의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향차가 흑룡구 의 성문으로 들어섰다. 그 향차는 그야말로 한 번 본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휘둥그렇게 만들만 큼 아름다우면서도 독특했다. 차창의 좌우와 뒤의 삼면과 정면에 연한 휘장에는 살아서 날아갈 듯하게 정교한 봉황이 그려져 있었다. 천장에도 두 날개를 활짝 펴고 공중을 향해 치솟을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봉이 금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정교한 솜씨야 말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봉과 다름이 없었다. 향차의 앞에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네 마리의 준마가 매어 있었다. 그 말들은 하나같이 천 마리 말중에서 고르고 고른 준마였다. 마부석에는 사십 세 가량의 흑의 중년 미부가 앉아 있었다. 비록 흑의를 입고 있었지만 그 옷감은 매우 비싼 상등품이었다. 또한 중년부인의 용모는 수수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감히 독바로 쳐다볼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더욱이 그녀의 눈에서 발산되는 냉랭한 광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편적으로 마차를 모는 마부는 십중팔구 남자인데 이 호화로운 네 필의 준마가 끄는 향차의 마부는 왜 여자일까? 뿐인가? 향차의 앞에는 눈처럼 휜 백마를 탄 여덟 명의 미소녀들이 길을 트고 있었고, 뒤에는 두 명의 청의 부인과 한 명의 음침하게 생긴 흑의 노인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하고 태양혈이 불쑥 솟아 나온 것으로 보아 절정 고수들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황제가 출어한다해도 이토록 위세가 당당하고 웅대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향차가 지나가는 곳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고 제각기 경의의 눈으로 바라다 보았다. '저 향차 안에는 어떤 인물이 타고 있을까? 황제일까? 아니면 황제의 친척일까?' 그들은 제멋대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향차속에 황제나 남자는 물론 아니고 아마 공주가 아니면 지극히 신분이 높은 귀비가 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그 모든 궁금증은 애석하게도 차창에 긴 휘장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향차 속을 조금도 살펴볼 수없었다. 향차는 흑룡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안락거라는 객잔의 문 앞에 멈추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호기심을 느끼고 걸음을 멈춘 채 향차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향차의 주인이 곧 차에서 내려 객점으로 들어가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향차의 주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그가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고정시키고 지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너무도 의외라 모든 사람들은 멍청히 혀를 내둘렀다. 향차가 멈추자 같이 왔던 남녀노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렸건만 마부석에 앉아 있는 흑의 중년부인만은 여전히 마부석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네 명의 흑의 장한이 향차를 끌던 네 필의 천리준마를 풀어 끌고 갔다. 그제서야 흑의 중년부인은 비로소 마부석에서 지리를 옮겼다. 곧이어서 여덟 명의 녹의소녀들이 앞으로 나와 향차의 네 귀퉁이 에서 굵기가 팔목만하고 길이가 약 여섯 자 가량 되는 단목곤을 꺼내 향차의 양 옆에 있는 쇠고리에 걸어서 차체아래 튼튼하게 잠겨 있는 자물쇠를 연 뒤 차체를 들어 바퀴를 밀었다. 차는 곧 한 대의 가마가 되었다. 그러자 여덟 명의 녹의 소녀들은 향교를 들고 안락거 안으로 들어갔다. 중인들은 이 향차가 차체와 바퀴 사이에 이런 교묘한 장치가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기 때문에 일견 신기해 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망을 해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말았다. 향교로 변한 향차와 그의 수하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안락거는 금세 소란스러워 졌다. 다섯망의 점원들이 그들의 시중을 드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주인까지도 직접 나와 후원에 가서 이 귀한 손님들의 뒷 바라지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 때 한 청삼문사가 느릿느릿 안락거 안으로 들어왔다. 청삼문사는 그야말로 인세에 보기 드문 절세의 풍모를 보이고 있었다. 칼날같은 눈썹과 밤 하늘에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매끈하게 다져진 것같이 오똑한 코와 새빨간 입술. 또한 살결은 어찌나 희고 고왔던지 백옥도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당대 제일의 미남이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준수하기 그지없는 용모였다. 게다가 그의 훤칠한 몸을 감싸고 있는 푸르디 푸른청삼은 그의 모습을 한층 더 헌창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청삼문사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섰다. 허나 안락거에는 점원이고 주인이고 할 것없이 모두들 향차주인과 그 일행들의 시중을 드느라 정신이 없어 아무도 그를 맞는 자가 없었다. 청삼문사는 꺼리낌없이 태연한 자세로 계속 후원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문 입구에는 한 명의 황의장한이 지키고 있었다. 청삼문사가 막 후원의 입구에 다다르자 그 황의 장한이 곧 소리를 질렀다. "멈춰라! 안으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한다." 청삼문사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안으로 걸어갔다. 이것을 보자 황의장한은 화가 치민듯 손을 들어 그를 지했다.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네 놈은 귀가 먹었느냐?" 청삼문사는 걸음을 멈추고 반문했다. "당신은 왜 나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오?" 그의 음성은 낭랑한 가운데 한 줄기 위엄을 담고 있어 황의장한은 자신도 모르게 태도가 한결 누그러워졌다. "후원은 모두 우리가 빌렸단 말이오." 청삼문사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 아니라면 내가 당신을 속인단 말이오?" "하지만 나는 믿지 못하겠소. 그러니 내가 직접 이곳 주인에게 물어 보겠소이다." 청삼문사는 말을 마치자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하여 황의장한 옆을 재빨리 지나갔다. 황의 장한은 일개 서생이 갑자기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한 어조로 고함을 쳤다. "이 녀석! 발을 멈춰라. 정말 죽고 싶어서 이러느냐?" 동시에 바람과 같은 속도로 청삼문사의 앞으로 달려와 막아섰다. 청삼문사의 준수한 얼굴이 살짝 찌푸려몸다. "왜 이러시오? 묻지도 못하게 하니 당신의 거짓말이 로가 날까봐 그러시오?" 황의 장한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묻는 것은 좋지만 이집 주인이 나오면 물어 보아라." "뭐 그 분을 기다릴 것 까지 있겠소? 내가 들어가서 물으면 더 간단할 텐데." "안돼! 어쨌든 들어갈 수 없다." "왜 그렇소?" "우리 주인께서 거처하시는 곳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가서 귀찮게 굴면 안된다." "나는 이집 주인을 만나러 가지 당신의 주인을 찾아가는게 아닌데 어찌 그를 귀찮게 하겠소?" 황의장한은 갑자기 눈을 부라렸다. "이 기생 오라비 같은 놈아. 여러 말 말고 빨리 저쪽에 가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거라. 정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어르신께서혼을 내 줄테다." 청삼문사는 여전히 바보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니 어떻게 혼을 낸단 말이오? 이곳의 포졸들을 불러 나를 잡아가게 하겠단 말이오?" 이 한심한 말에 황의장한은 어이가 없어 한바탕 낄낄거리고 웃었다. "으흐흐흣, 이 녀석아! 포졸이 뭐 그리 대단한 자들이라고...이 어른은 그런 잡졸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네가 말을 듣지 않고 이 어른을 화나게 한다면 너를 당장에 짓뭉개 버리겠다는 말이다." 청삼문사는 간덩이가 단단히 부었는지 여전히 태연하게 대꾸했다. "귀하! 이곳은 왕법이 있는 곳인데 당신은 왕법이 두렵지 않소?" "으하하하.... 이 어른은 강호를 몇 년동안 누비고 다니며 무수한 사람을 죽였는데 그 따위 왕법을 두려워 하겠느냐?" 청삼문사는 다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면 귀하는 강호의 무뢰한이겠군요?" "이놈아! 방금 뭐라고 그랬느냐? 누가 강호의 무뢰한이란 말이냐? 미 어른은 강호의 영웅호걸이시니라." 그드름을 피우는 황의장한을 바라보며 청삼문사는 부러운 시선을 던졌다. "귀하는 정말 강호의 영웅호걸이시오?" 황의장한은 가슴을 쑥 내밀면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이다. 이 어른께서는 너같은 서생나부랭이에게 어찌 허풍을 떨겠느냐?" "당신이 강호의 영웅호걸이라면 참 잘 되었소.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강호의 영웅들은 모두 의리가 두텁고 강압을 하지 않는다던데 귀하도 의리가 있소?" "그야 물론이지." "그렇다면 나를 막지 말아야 하지 않소?" "이놈! 내가 너를 못들어가게 막는데는 이유가 있다. 이건 나의 직책이다. 주인나리는 필요없는놈은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만일 너를 들여보내 주인나리를 귀찮게 굴면 그 죄를 내가 감당할 수 없단 말이다." 청삼문사는 이 얼간이 같은 황의장한이 자기의 유도심문에 슬슬 끌려오는 것을 보자 슬쩍 미소를 띄고 말을 꺼냈다. "당신의 주인나리는 그렇게 엄하시오?" "그렇지 주인나리는 비록 매우 엄하시긴 하지만 상벌은 분명하시다." "그렇다면 당신도 주인나리는 무척 영리하고 밝은 분이시겠 군요?" 황의장한은 얼굴에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이 맞다. 우리 주인나리께서는 비단 매우 영명하실 뿐만 아니라 재질도 뛰어나시고 인물또한 천하에 제일가는 절세의 미녀이시다." 그러자 청삼문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광채가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야 그 향차의 주인이 여자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귀하의 주인나리가 아름다운 낭자이시오?" "그렇다. 우리 주인나리는 선녀보다도 더 아름다워 너같은 녀석은 아마 한 번 보기만해도 홀랑 반해 버려 사족을 못쓸게다." "아니 당신 주인이 그렇게 아름다우시다면 도데체 이름이 뭐요?" 황의장한은 비록 청삼문사에 대해 아무 경계도 하지 않았지만 진일보 하여 이렇게 물으니 대번에 얼굴빛이 변하며 경각심이 확 일어났다. 바로 이때였다. 향교를 놓아 둔 바로 앞의 방에서 녹의소녀 하나가 나오며 소리쳤다. "조표! 공주께서 그 분 공자를 들여 보내시라는 분부시다." 조표라 불리운 황의장한은 뜻밖의 말에 급히 허리를 굽혔다 "소인은 분부대로 받들겠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청삼문사를 돌아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귀하는 들어가시오." 청삼문사는 우스꽝스럽게 변하는 황의장한에게 징긋이 한 차례 웃어보이고는 서슴치 않고 녹의소녀 앞으로 걸어갔다. 녹의소녀는 방문앞에 서서 청삼문사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붉어졌다 아마도 청삼문사의 준수한 용모에 방심이 끓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청삼문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몸을 비켜서면서 방안을 향해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방안에서 방울을 굴리는 듯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께서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녹의소녀는 고개를 떨군 채 청삼문사에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청삼문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젓한 태도로 방안으로 들어갔다. 제 29장 琴文君 여기는 방과 소청이 같이 붙은 상방이었다. 청의 중간에는 이미 주렴이 드리워 있었기 때문에 본래 별로 크지 않은 소청을 내외로 갈라 놓았다. 이 주렴은 이 객잔에 원래 있던 물건이 아니라 향차의 주인자신이 가지고 와서 임시로 쳐 놓은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화려한 것이었다. 주렴 밖에는 세 명의 녹의 소녀가 왼쪽에 한 명,그리고 오른 쪽에 두명이 부동자세로 시립해 있었다. 주렴안에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얼굴에 엷은 망사를 쓴 자의여인이 중앙에 단정히 앉아 있고, 그 좌우에는 청의중년부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청삼문사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주렴안에서 곧 자의여인의 맑고도 상냥한 음성이 들려 왔다. "공자는 자리에 앉으십시오." 이 말에 청삼문사는 서슴치 않고 방문 옆에 놓여 있는 비단 방석이 깔린 의자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런 시골의 객잔 의자에 이처럼 화려한 방석이 깔려 있을 까닭이 없었다. 이것 또한 당연히 향차 주인이 가지고 온 물건이 틀림없었다. 여행하면서 주럼과 비단방석같은 물건까지 가지고 다니는 점으로 보아 기타 일상 소비 물품은 더 말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정말 너무도 웅장하고 세밀한 행차가 아닐 수 없었다. 청삼문사가 자리에 앉자 주렴 안쪽에서는 다시 자의여인의 고운 음성이 들렸다. "공자께서는 나를 찾아오셨읍니까?" 청삼문사는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불초는 이곳에 숙박을 하러 왔소." "공자는 이 후원의 상방에 숙박하려고 하세요?" "그렇소. 왜냐하면 이 후원의 상방이 비교적 뙾끗하고 조용하다고 들었기 때문이오." "저 문 입구에서 지키고 있는 수하인니 공자에게 이 후원은 이미 내가 모두 빌렷다는 말을 하지 않던가요?" "분명히 말했소. 그렇지만 스무 칸이 넘는 상방을 다 쓰신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공자는 그 사실 여부를 알아보려고 후원으로 들어오려고 했다는말인가요?" "아니오. 보려고 한게 아니라 물어보려고 했을 뿐이오." "점원에게 물어보려고 했어요?" "그렇소. 저쪽에는 이미 아무도 없고 점원과 주인은 모두 후원으로 왔소." "공자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예요?" 위엄이 서린 자의 여인의 물음에 청삼문사는 당당한 태도로 대답했다. "불초는 어려서부터 성현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타고난 성격이 바르며 거짓말을 하지 않소. 그리고 이런 조그만 일에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소." 자의여인은 실소를 흘렸다. "호호호.....어려서부터 성현의 책을 읽고 타고난 성격이 곧아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니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예요."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내 쌀쌀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나는 공자의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청심문사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웃었다. "허허허.... 사실이 분명한데 낭자께서는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시오?" 자의여인의 냉랭한 말이 다시 울려 나왔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 이유를 공자는 들어 보겠어요?" "물론이오. 낭자께서 말씀하신다면 귀를 씻고 듣겠소이다." "공자는 이십리 밖에서 부터 내 뒤를 따라왔으며, 우리가 이 객잔 앞에 멈추었을 때도 공자는 오십 장 밖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고, 지금은 또 이 객잔의 후원까지 따라 들어왔으니 한 마디 묻겠어요. 도대체 공자의 목적은 무엇이에요?" '내가 처음부터 따라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다만 모른체 하였으니 이 여자는 과연 예리한 기지와 참을성이 있구나' 허나 그는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낭자 그일에 대해 불초가 해명을 하겠소." "좋아요. 그럼 어디 공자의 해명을 들어 볼까요?" 청삼문사는 청산 유수처럼 말을 이었다. "첫째, 이십리 밖에서 뒤를 따라온 것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우연한 일일 뿐이오." 자의여인은 입을 다문채 청삼문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둘째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날이 저물어 가고 있으니 이곳을 지나칠 것 같으면 앞으로 삼십리 안에는 촌락이 없어 길가에서 밤을 새워야 하오. 때문에 이 객잔에 투숙하려한 것은 결코 낭자의 뒤를 따라 들어온 것이 아니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낭자께서 방금 불초가 먼 곳에 서서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은 불초도 부인하지 않겠소.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향차가 너무도 호화스럽고 웅장하며, 수행하던 남녀들도 모두 건장하며 준수하고, 여자들 또한 보기 드물게 청순하고 아름다와 불초는 평생 처음보는 광경이라 속으로 이 향차의 주인은 대체 어떤 인물일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났기 때문이오." 자의여인은 조용하게 청삼문사의 해명이 뢧날 때까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공자는 향차속의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여기까지 들어 왔다는 말인가요?" 이 말에 청삼문사는 더 이상 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만약에 다른 말을 더 한다면 자의여인은 계속해서 끝까지 이유룰 추궁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욱 귀찮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낭자의 기지는 정말 고명하오.사실 불초가 따라온 목적은 바로 그 점이었소." "향차속의 사람은 바로 나탻요. 공자는 소원대로 나를 보았으니 이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낭자께서 그렇게 물으시니 불초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몸둘 바를 모르겠소." "왜 그러지요? 공자의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말하기가 난처해서 인가요?" "비밀같은 건 없소. 나는 다만 일시적인 호기심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소." "공자의 말씀을 믿어도 좋을까요?" "불초의 말은 모두 사실이오." 그러나 자의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긋이 미소를 지었다. "공자께서는 내 성명과 내력을 알고자 하는 생각도 없으신가요?" 청삼문사는 빙그레 웃었다. "물론 말고 싶소. 하지만 불초는 무엇보다도 먼저 낭자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 싶소." "그래요?" 자의여인은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공자께선 내가 예쁜가 추한가를 보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낭자께선 정말 고명하시오.불초의 뜻은 바로 그것이었소." 자의여인은 또 가벼운 웃음을 짓고는 나직한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발을 걷어 올려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렴이 걷혀졌다. 그러자 자의여인은 쓰고 있던 망사를 활짝 벗었다. 순간 드러나는 아름다운 모습이란........ 푸른하늘에 피어오른 뭉게구름처럼 곱고 부드럽게 핀 화사한 모습. 인간의 탈을 쓰고 태어난 사람이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월궁의 항아가 제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는없을 것이다. 당장에 방안은 등불이라도 비친듯 밝은 기분이 감돌았다. 그린 듯 고운 눈썹이며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꽃빛보다 더 고운 볼과 샛별같은 눈동자!!! 청삼문사의 시선은 그만 그녀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는 숱한 미녀들을 상대해 왔다. 그렇지만 그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했던 너무나도 황홀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당금 무림에서 미녀라고 이름난 여인들은 거의 모두 만나보았고 그들 중 대부분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정을 받았다. 개중에 몇몇 미녀는 그 자신도 절세의 미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의 자의여인의 얼굴은 그녀들과 비교하기에는 너무도 아깝도록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아름다움속에는 남들이 지니지 못한 독특한 개성과 정숙이 깃들어 있었다. 바라보고 있자니 온 넋이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속으로 빨려드는 듯 했다. 심지어는 한 걸음에 달려가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마저 불러 일으켰다. 자의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맑고도 고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님은 이제 똑똑히 보셨어요?" 그 은구슬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 역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월의 흐름을 멈추게 하려는 듯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또한 생긋 웃는 웃음은 더욱 달콤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어릿어릿하게 만들었다. 청삼문사는 문득 정신을 가다듬고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불초는 똑똑히 보았소." 자의미녀는 가볍게 미소띈 얼굴에 다시 엷은 망사를 썼다. "공자께서는 나를 보고 어떤 감상을 느꼈나요?" "진정 선녀보다도 아름답소. 불초가 낭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영광은 불초가 복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자의미녀의 얼굴에는 배시시 뜻모를 미소가 번졌다. "공자님은 다만 그것밖에 느끼지 못했어요?" "그렇소." "나의 성은 금이며 이름은 문군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나는 황산에서 왔어요." 청삼문사는 그녀가 자신의 내력과 출신을 말하리라고는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듯 뜻밖이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황산이라고? 그러면 역시 그녀는......!' 금문군은 별처럼 반작이는 눈으로 청삼문사를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공자께선 이미 나의 진면목을 보셨고. 또 이름까지 알았지만 나는 아직 공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비로소 청삼문사는 금문군이 자기의 신분을 밝힌 의도를 깨달았다. '이 금문군의 심기는 매우 깊고 날카롭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즉시 대답했다. "불초의 성은 임이고 이름은 백령이라 부르며, 절강성 항주에 거처하고 있소이다." "어쩐지 공자의 인품이 비범하고 용모 또한 너무도 준수하다고 생각했더니 호광산색이 수려하기로 천하에 이름난 항주에 사시는군요." 금문군은 잠시 말을 멈추고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항주는 이곳에서 삼천리가 넘는데 공자님은 이곳에 유학을 오셨나요?" "그렇소. 불초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이렇게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가련한 서생이오." "그럼 공자의 댁은 항주의 어느 곳에 있습니까? 성안입니까? 아니면 성 밖입니까?" "성 남쪽 전당강 남안의 문가 방죽에 있소." 금문군의 목소리가 돌연 차갑게 변했다. "공자의 대답은 모두 거짓말이죠?" 금문군의 돌변한 태도에 청삼문사,임백령은 일부러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만의 말씀이오. 불초는 한 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소." "만일 제가 믿지 못한다면?" "낭자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불초도 어쩔 도리가 없소." "공자는 내가 믿을 수 있을만 한 증거를 댈 방법이 있어요?" "불초는 다른 방법이 없소. 그리고 또 모두가 사실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소." "그렇지만 나는 반드시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그건 왜 그렇소?" 금문군의 두 눈에서 한 줄기 날카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나 자신을 위함이고 또 공자의 생명의 안전을 위해서예요." 임백령은 바보같이 흐리멍텅한 표정을 내보였다. "불초는 낭자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만일 모르겠다면 더 이상 묻지 마세요." 그녀는 한동안 유심히 임백령의 모습을 주시하고는 이윽고 말을 이었다. "나는 공자의 말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진부를 가려낼 방법이 있는데 공자는 내 방법을 받아들이겠어요?" "어떤 방법이오?" "불편하겠지만 공자께서 이곳에 며칠만 거처하셨다가 내가 사람을 보내 공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확증을 얻은 후 이곳에서 보내 드리겠어요." "낭자께선 불초의 고향에 사람을 보내 조사를 하시겠다는 뜻이오?" "그래요. 공자가 정말 과거에 낙방하여 유람하는 서생인가를 확인해야 겠어요." "항주는 이곳에서 삼천리나 되는데 그 먼 곳까지 사람을 보낸 다는 것은 너무 귀찮고 또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소?" 금문군은 그 고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물론 그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기는 하나 그 방법외에 다른 방법은사용하기가 약간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그건 또 어떤 방법이오?" "내가 꺼리는 그 방법을 공자에게 말해서 무얼 하겠어요?" 금문군이 말한 또 하나의 방법이란 무엇일까? 임백령은 총명하기가 그지없는 인물이므로 당연히 그 말뜻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베기만 하면 된다는 금문군의 암시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낭자의 모습은 천사보다 아름답고 고귀한 품위가 있어 따를 자가 없소. 불초가 낭자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더 없는영광이고염복이 많은 탓이라 믿소. 그러나......" 임맥령은 꺼질 듯이 한숨을 훅 불어내쉬고는 말을 끊었다. "그렇지만 어떻단 뜻인가요?" 금문군은 다그쳤으나 임백령은 씁쓸한 고소를 머금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공자는 내 방법을 받아들이기가 싫은가요?" "싫은게 아니라 받을 수가 없소." "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말씀이세요?" "사실 불초가 이번에 이곳으로 온 이유는 이모부님의 회갑연에 창가하기 위해서였소. 헌데 회갑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낭자의 명령에 따르지 못하오." "이모부 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그 분은 노씨성에 중자 량자를 쓰시오." "노중량이라.....혹시 그 분은 무림의 인물이 아닌가요?" 임백령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분의 외호는 철솔선생이라 하오. 낭자는 그 분을 아시오?" "얼핏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그 분의 거처는..." "그 분은 보계성 동남쪽 십리 되는 곳에 한 채의 장원을 짓고 그곳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계시오." "그렇군요. 헌데 공자의 집안은 무림과는 거리가 멀텐데 어떻게 무림인을 이모부로 모시게 되었나요?" 금문군의 물음은 집요했으나 임백령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그건 순전히 우연인데 예전에 이모께서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무뢰한들에게 큰 봉변을 당할 뻔 하셨소. 때마침 지나가던 무림의 협객 한 분이 그 광경을 복고 무뢰한 들을 내쫓고 이모님을 구하셨소." "그 분이 바로 노중량이로군요." "그렇소 그 분은 이모님을 집에까지 모시고 왔는데 그 인연으로 인해 두 분은 결합하시게 외었던 거외다." 임백령의 말은 매우 조리가 있고 빈틈이 없어 금문군은 의심할 곳을 찾지 못하고 정말로 믿었다. 보계성에는 확실이 노가장이란 곳이 있으며 그 장의 장주는 철솔 선생 노중량이었다. 노중량은 비록 이름이 나있는 강호의 명숙은 아니었으나 강호의 견식이 넓은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한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가 회갑을 맞게 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허나 그가 과연 임백령의 이모부인지는 임백령 자신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금문군은 섬서성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노중량이 회갑을 맞이 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임백령의 말을 사실로 믿게 되었다. 금문군은 내심으로 임백령의 음름한 풍채와 준수한 용모를 경모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금문군이 생각에 열중하고 있을때 갑자기 임백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초의 일시적인 호기심으로 낭자에게 폐를 끼쳐서 죄송하오. 그 점을 용서하시오. 지금은 날이 이미 어두웠으니 다른 객점을 찾을 까 하오." "임공자!" 임백령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낭자 이직도 할 말이 있으시오?" 금문군의 입이 벙긋했다가 다시 닫혔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가보세요." 임백령은 날카로운 눈으로 한참동안 그녀의 표정을 내리 훑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금문군은 그가 뚫어지게 쳐다볼 때는 얼굴을 붉혔다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러나 그가 나가자 대뜸 고개를 쳐들고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이상야릇한 감회가 부풀어 올랐다. 돌연 그녀는 소리쳤다. "아향아 황자호법에게 임공자를 미행하라고 일러라." 아향은 네 명의 녹의 소녀중 하나이며 방금 임백령을 방으로 안내했던 낭자였다. 그녀는 명을 받자 허리를 굽히고 말없이 명을 전달하러 나갔다. 금문군은 묵묵히 천정을 응시한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제 30장 옥면청삼 절정신검 임백령은 금문군과 헤어져 다른 객점으로 찾아들지 않고 시가지를 따라서 서쪽으로 걸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왜 객점에 들지 않는 것일까?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걷다가 가끔 고개짓을 하고 눈꼬리가 처지곤 했다. 그의 표정은 밝아져 있었다. 이때 그와 대여섯장 떨어져서 한명의 흑의노인이 걷고 있었다. 그 흑의노인은 향차뒤를 따라다니던 두명의 호법중 한 사람인 황자호법이었다. 그의 별호는 쌍수탈명이라 했으며 이름은 진월륜이었다. 임백령은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띄고 갑자기 걸음을 빨리 했다. 진월륜도 걸음을 빨리 했다. 그는 임백령과의 간격을 대여섯장으로 유지했다. 시간은 흘러 반시진이 지났다. 그들은 흑룡구에서 삼리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앞에서 걷고있던 임백령이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오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쌍수탈명 진월륜은 임백령이 갑자기 몸을 되돌려 올 줄은 미처 생각지 않은 탓인지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임백령은 진월륜의 앞에까지 와서 우뚝 섰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상대방을 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노인장. 잠깐 이야기를 할까요?" 쌍수탈명 진월륜은 또 한번 놀랐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우리는 아는 사이도 아닌데 무엇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오?" 임백령은 담담하게 웃었다. "노인과 나는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이야기를 하고싶소." "무엇 때문이오?" "그것은 노인께서 나를 삼리나 뒤슛아왔기 때문이오." 진월륜은 어색함을 숨기려는 듯 크게 웃었다. "어허허허....그래요? 노부는 대협이 오해했다고 말하고 싶구료." "오해라구요?" "그렇소. 노부가 대협의 뒤를 따른 것은 우연의 일치요.이 길은 관도이기 때문에 사람이 다니는 길이오. 그런데 대협이 의심을 가져서야 되겠소?" "아! 그렇군요. 내가 오해했나 보군요. 그럼 노인장은 어디를 가시는 길인가요?" 진월륜은 눈을 번뜩이며 되물었다. "그럼 대협은 어디를 가시오?" "보계성으로 가오." 진월륜은 피식웃었다. "아! 그래요? 노부도 보계로 가는 길이오. 우리는 동행할 수 있겠군요. 우연 치곤 묘하군요." "그렇소. 확실히 묘한 우연이오. 보계는 무슨 일로 가시오?" "장사 관계 일로 가오.대협은?" "이모부의 회갑연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오.노인은 무슨 장사를 하시오?" "약재피화를 판매하오." "하하...좋은 장사군요. 약재피화를 판매한다면 돈벌이가 잘 되겠군요." "으흐흐...별말씀을 다하시오. 노부는 장사를 시작한 지가 오년도 채 안되오. 자본도 넉넉치 않아서 신통치도 않고 거리도 멀어 일년에 두어번 정도밖에 나다니지 못하오. 한번 나올 때는 은자로 일이백냥밖에 벌이가 되지 않아 근근히 살아가오." "하하... 너무 겸손하시군요. 그런데 노인장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며 어디에 사시오?" "노부의 성은 진이며 이름은 외자로 륜이라 하오. 완남에 살고 있소. 대협은?" 그가 진륜이라고 했지만 임백령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성명이나 내력을 말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노인장, 이번의 장사는 그만두시오." 진월륜은 눈빛을 빛냈다. "왜 그러시오?" 임백령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듣자니 요사이 이 길은 어수선하여 다니기가 불편하다고 하오." 진월륜은 억지로 놀라는 시늉을 해보이며 물었다. "대협, 그게 정말이오? 누구에게 들었소? 노부는 어째서 듣지 못했을까?" 임백령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빤히 건네보았다. "노인장, 방금 훅룡구에서 매우 호화로운 향차를 보시지 않으 셨소?" "보았소. 그 향차는 시설이 잘 되었더군요. 대협은 그럼 그..." 진월륜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매의 눈을 부릅뜨고 크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으흐흐흐.. 대협의 심기는 참으로 고명하시오." 임백령은 담담히 말을 받았다. "이것은 나의 심기가 고명한 것이 아니오. 진노인이 나를 미행하려면 변장을 하셔야지. 그렇지 않았으니 나는 대번에 알아 볼 수가 있었소. 진노인은 향차의 뒤를 따르던 두분 중 한 분인 줄을 알고 있소." 진월륜은 깜짝 놀랐다. 그는 내심으로 임백령이 자기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속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크게 웃으며 대꾸했다. "허허허...대협이 노부의 신분을 알았다고 해서 어떻게 할것이오?" "어떻게 한다는 것이 아니오. 나는 아무런 힘도 없는 연약한 서생에 불과하오. 그런데 완남에서 제일가는 패주인 쌍수탈명을 어떻게 하겠소?" 진월륜은 또한번 놀랬다. 그는 자기의 별명까지 알고 있는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협이 노부의 별명까지 아는 것을 보니 보통인물이 아니구료." "사실 나는 미약한 서생에 불과하오. 내 친구 가운데 무림인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들어서 노인의 별호를 알게 되었소." 진월륜은임백령의 말이 이치에 맞기에 의심을 하지않고 물었다. "그 친구분의 성명이 무엇이오?" "그의 성함은 잠시 후에 알려주겠소. 우선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주시오." "대협은 노부가 왜 미행했는지 알고 싶소?" "그렇소. 금소저가 노인을 미행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싶소." "대협이 무림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라는 것이었소." "만약 무림인이라면 어떻게 한다는 것이오?" "대협의 출신성분을 자세히 알아달라고 부탁했었소." "그녀는 노인이게 나를 살해하라고 명한 것이오?" "아니오. 그 반대요, 노부보고 보계까지 대협을 보호해서 호위하라고 했소." 임백령은 짐짓 놀란 척을 했다. "어? 그런가요. 나를 미행한 것은 호의에서 나온 것이군요." "으흐흐... 낭자께서는 대협에게만은 특별히 호의를 가졌소." "그래요? 금소저는 소생에게 어떻게 호의를 가지셨는가요?" "그 분의 신분으로서 대협을 우대한 것은 여태껏 없던 일이오." "금소저는 어떤 신분이오?" "그 분의 신분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게 될것이오." "금소저가 노인장에게 나를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 말해보시오." "노부가 보기에는... 말을 한다면 대협은 놀라서 화를 낼 것이니 그만 두겠소." 진월륜은 눈을 빛냈다. "대협이 추측할 수 있다고?" "그렇소. 금소저는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잠시 살려 두었다가 사람을 시켜 내 출신내력을 조사한 후에 그 결과를 봐서 나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려고 했을 거요." 진월륜은 앙천대소했다. "으하하하... 정말 지혜가 출중하시군요. 이제 친구분의 존함을 알려주시오."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나는 아직도 물어볼 말이 있소." 진월륜은 미간을 찌푸렸다. 금문군이 임백령의 내력을 알기 전에는 함부로 손을 쓰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무엇을 묻고 싶소?" 임백령은 담담하게 물었다. "금소저의 신분에 대해서 알려 주시오." "그분의 신분은 봉황신차의 주인이시고 황산에서 오신 분이오." "그건 전노인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녀 자신이 이미 말했소." "그렇다면 아실텐데 왜?" "금소저의 진실한 신분과 황산의 확실한 지점을 말해 주시오." 진월륜의 표정이 변했다. "그런건 그분에게 직접 묻지 않았소?" "그녀가 사실대로 말할 것 같소?" "그 분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 노부는 더욱 그럴텐데....." 임백령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내 생각으로는 진월륜 당신은 틀림없이 사실대로 말하리라 생각하오." "그 점은 어찌 그리 잘 아시오?" "만약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당신의 입을 열게 할 수도 있소." "뭣이라고? 어떻게?" "당신의 입은 단단할 지 모르나 뼈마디는 내 손보다 단단하지 않을 거요." 진월륜의 표정이 싹 변했다. "당신의 손은 구리로 만든거요? 아니면 강철로 만든 것이오?" "내 손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진월륜! 당신의 뼈마디는 내 손바닥 힘을 견디지 못 할거요." 진월륜은 그의 말을 알아차렸다. 상대방은 보기에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무공이 고강한 절세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큰소리를 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표정이 변해지면서 차가운 눈빛이 뿜어 나왔다. "귀하는 내색을 하지않는 무림의 고수가 틀림없구료." 임백령은 담담히 웃었다. "나는 무림고수가 아니오. 또 그런 자격도 없소. 다만 쌍수탈명 당신보다 손속이 약간 매섭다고 자신하는 바이오." 진월륜은 이미 두개의 손바닥으로 수십년동안이나 무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쳤고 특히 완남지방을 거의 제왕처럼 군림했던 일대의 고수였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 연약한 서생같은 임백령이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으흐흐흐.....노부는 믿지 못하겠는데....한번 시험해 보고 싶소." 그는 큰 걸음으로 한발씩 앞으로 나서더니 오른쪽 손바닥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약간 구부려 임백령의 왼쪽 어깨를 향해 천천히 뻗어왔다. "진월륜! 내가 타이르겠는데, 시험하지 않는게 좋을 거요. 괜히 고통만 자초하지 마시오." "으흐흐흐..노부는 이미 손을 내밀었는데..." 동시에 진월륜의 다섯 손가락은 임백령의 옷을 움켜쥐려고 했다. 임백령은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오른쪽 손목을 조심하시오." 그는 왼손을 치켜들어 진월륜의 오른손목의 맥문을 내리쳤다. 쐐액! 그의 동작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라 할만큼 빨랐다. 진월륜이 무언가 섬짓한 기운을 느꼈을 때에는 그의 오른손목의 맥문은륚 어느새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월륜은 힘이 빠진듯 비실비실하며 뒤로 세발짝이나 물러섰다. "으....." 임백령은 담담하게 웃었다. "어떻소? 이젠 내 말을 믿겠소?" 진월륜은 경악에 가득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귀하는 대체 누구시요? 노부는 아직까지 당금무림에서 귀하와 같은 고수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소." "당신은 거짓을 듣고 싶소? 아니면 진짜를 듣고싶소?" "거짓을 듣고 싶다면 어떻게 할거요?" "그야...나는 머꾲대로 가짜 성명을 말하겠소." "노부는 진짜를 듣고 싶소. 그렇지 않으면 물으나 마나가 아니오?" "그렇다면 진성명을 말하겠소.그러나 당신은 내 조건에 따라야 하오." "어떤 조건이오?"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하면 되오." "그 분의 신분과 내력에 관한 것이오?" "그것 말고도 더 있소." "또 무엇이오?" "하여간에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되는 거요." 진월륜은 눈망울을 굴렸다.. "좋소 귀하의 말대로 하겠소." 임백령의 표정은 엄숙해 몸다.. "진노인!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말이 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내 손속에 인정이 없다고 탓하지 마시오." 진월륜은 내심 섬뜩 했으나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척 했다. "안심하시오 노부가 아는 것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대답하겠소." 임백령은 냉엄한 눈으로 진월륜의 위아래를 훑어 보았다. "그럼 좋소." 임백령은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않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창! 용이 울부짖는 듯한 검명과 함께 어느 사이엔가 그의 손에는 하나의 눈부신 검광을 발하는 신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제보니 그의 허리띠는 하나의 연검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보검은 우유빛 검광을 뿌리고 있었다. 검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인세에 두번 다시 보기 힘든 절세의 신병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임백령은 신검을 손에 비껴쥔 채로 담담하게 웃었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소.?" 진월륜은 안광을 빛내고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신검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휘이잉.... 때마침 세찬 바람이 불어와 임백령의 청의자락을 펄럭거렸다. 순간 진월륜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주구도 견줄 수 없는 준수한 옥면....바람에 휘날리는 푸른 청삼..그리고 눈부신 신검! 그의 입에서 경악에 가득찬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오....옥변청삼 절정신검! 당신은 육청운이 아니오?" 임백령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육청운이오." 아아..... 강호무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고수이며 거의 신격화되기까지 한 전설과 신비의 사나이 육청운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보기 위해 헤매고 다녔던가? 그런 점에서 진월륜은 다른 누구보다도 행운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암들이 그렇게도 단 한번이라도 만나보기를 갈망하는 천하 제일의 신비인을 직접 만나고 게다가 손속까지 겨루어 보았으니..... 진월륜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당신이 진짜로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대협 이시오?" 임백령, 아니 육청운은 신검을 다시 허리춤에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청운은 결코 둘이 아니오." 진월륜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갑자기 진월륜은 질풍같이 빠른 속도로 머리위의 천령개를 오른손으로 내리쳐갔다. 육청운은 두 눈에 전광같은 빛을 번뜩이며 왼손 중지를 살짝 튕겼다. 팟! 진월륜의 손바닥은 자신의 천령개를 때렸지만 이미 그전에 혈도가 짚혀 매우 연약하고 힘이 없었다. 그는 자결이 실패하자 곧 눈을 부릅뜨고 날카롭게 외쳤다. "대협은 날 죽여 주시오." 육청운으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진월륜. 속담에 하잘 것 없는 개미도 살고자 한다는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사볍게 죽기를 원하오? 또 남아 대장부는 명예를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는 법인데 당신이 죽으려면 약속을 지켜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한 후 죽어야지 그냥 이렇게 죽으면 명예를 더럽히는 행동이 아니오?" "죽으면 모든것이 끝나는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비굴한 생각을 갖지 마시오.." "그것은 대협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 간섭 마시오." 육청운은 눈썹을 치켜떴다가 가벼운 웃음을 머금었다. "나도 당신의 뜻은 잘 알겠소. 당신이 자결하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하기가 곤란해서 그렇소?" "사실 그렇소." "당신의 그 장부같은 태도에 탄복했소, 그러나 당신은 사리판단을 할 줄 모르고 어리석고 아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오." 진월륜은 욕설을 듣고 격노했다. "육청운 당신......." "잠깐 노기를 고정하시오. 내가 당신을 욕하는 이유가 있소. 당신은 그 이유를 들으시겠소?" 진월륜은 노기띤 눈길로 육청운을 훑으면서 냉랭히 소리쳤다. "말하시오." 육청운은 담담하게 웃었다.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소?" "흥! 당신의 말은 쓸데없는 말이오. 내가 죽음을 두려워 했다면 왜 자결을 하려 했겠소? 그것이 연극인지 아시오?" "방금 그 거동은 연극이 아니지만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거동도 아니었소. 그것은 다만 죽음을 두려워 하는 심리일 뿐이오." "뭐라고?" "바꾸어 말해서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그런 동작이 발생했던 것이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공포에 사로잡힌 심리의 반사작용이오." 진월륜은 만면에 의아한 빛을 띄었다. "육대협의 뜻을 잘 알지 못하겠구료. 그 말은 나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구료." 육청운은 가볍게 웃었다. "당신께 묻겠는데 왜 자결하려 했소?" 진월륜은 약간 당황한 빛을 띄었다. "그야 물론......." "당신들의 비밀을 누설하기가 두려워서지요?" "알고 있으면서 왜 물으시오?" "또 하나 묻겠는데 당신이 비밀을 누설하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되오?" "죽음을 당하오." "죽음을 당한다...그 죽음을 당하는 방법이 잔혹하고 고통이 심하오?" "그렇소." "다른 사람이 죽음을 당하는 장면을 보았소?" "그렇소. 그 장면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보았기 때문에 두렵고 무섭다는 것이오." "당신은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기가 두렵다는 거요?" 진월륜은 부인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 죽이는 방법은 어느 누가 한번만 보면 평생에 잊을 수 가 없을 것이오. 그러니 누구든지 그러한 참혹한 죽음을 당하기 원할 사람은 없소." "바로 스서요. 당신이 자결하려고 한 것은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심리적인 자연현상일 뿐이오. 비밀을 누설하게 되면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니 당신은 자결함으로써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 또한 고통스런 죽음을 피하려고 했던 거요. 만약 당신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왜 자결하려고 했소? 그러니 딱 잘라 말해서 당신은 죽음이 두려운 거요. 내말을 이해 하겠소?" 이 말은 논리정연한 사실이었다. 진월륜이 방금 자기의 손을 들어 자결하려고 한 것은 비밀을 누설한 후에 당하는 참혹한 죽음이 두려웠기에 심리적으로 일어난 자연적인 행동이었지 죽음이 두렵지 않아서 한 행동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눈만 멀뚱멀뚱하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육청운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사실 아무리 참혹하고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이라도 그것은 모두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들려는 옹졸한 수단이오. 왜냐하면 사람은 한번 밖에 죽지 않는데 당신이 죽음을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면 무슨 말을 못하겠으며 어떠한 비밀이라도 누설하기를 꺼려하겠소? 그리고 당신이 비밀을 누설한 후 나를 믿고 내 말대로 움직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죽는다고 할 수도 없지 않겠소?" 그는 주위를 살피고 나서 갑자기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지금 이 순간은 바로 당신이 생과 사,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서 있는 것이오. 그러니 심사숙고하여 하나를 선택하시오." 진월륜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쳐들고 입을 열었다. "노부가 비밀을 누설한다면 대협은 노부를 어떻게 안배할 것이오?" "당신만 승락한다면 절대 안전한 장소로 데려가서 잠시 은거케 할 것이오. 그리고 일이 완전히 끝난 후에 당신의 자유대로 몸을 풀어 주겠소. 당신이 금소저를 찾아간다 해도 탓하지 않겠소." "그 절대 안전한 장소가 어디요?" "그것은 묻지 마시오." 진월륜은 잠시동안 생각하다가 결심을 굳혔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육대협께서 알고 싶은게 있으시다면 죄다 물으시오." "알고 있는건 모두 사실대로 말해야 하오." "노부는 사실대로 털어놓겠으니 염려하지 마시고 물으시오." 육청운은 의미있는 눈빛을 번쩍였다. "금문군 소저의 진정한 신분은 건곤교의 대공주가 아니오?" 진월륜은 얼굴에 경악의 빛을 떠올렸다. "아니.....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소?" "그렇다면 나의 추측이 틀림없군." "그렇소 그 분의 신분은 바로 대공주요." "그녀는 황산의 어디서 왔소?" "연화봉 아래에서 왔소." "건곤교 총단도 그곳에 있소?" "그렇소 바로 연화봉 아래의 계곡이오." 육청운은 눈을 빛냈다. "건곤교주는 지금 총단에 있소?" 진월륜은 고개를 저었다. "없소." "그럼 그는 지금 어디 갔소?" "그건 잘 모르겠소." "금소저는 알고 있소?" "아마 알고 있을 거요." 육청운이 화제를 돌렸다. "개방의 후개인 철골개 진반천은 당신들이 납치해 갔소?" 진월륜은 새삼스럽다는 듯 경탄어린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나 이말이오? 둘더하기 둘은 넷이라는 지극히 기초적인 계산일 뿐이오. 진반천이 실종된 곳은 이곳에서 멀지않은 동관이고 당신들은 칠일전에 동관을 지나왔지 않소? 진반천도 꼭 그 시기에 실종되었고, 더구나 그가 속한 개방과 건곤교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 바보천치라해도 이 정도는 짐작할 수 있소." "육대협은 정말 모르는게 없군요." "건곤교에서 그를 납치한 이유는 무엇이오?" 진월륜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를 이용해서 개방을 전복하려는 것 같소. 육청운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진반천이 벌써 건곤교에 귀의 했단 말이오?" "그렇지는 않소 아마 본교에서는 무슨 약물을 이용하여 그를 세뇌시키려는 모양이오." "음....그는 지금 어디있소?" "이틀전에 본교의 천리신마에 태워 이미 총단으로 보냈소." "그를 호송한 자는 누구요?" "교주를 호위하는 건곤위사들이었소. 모두 세명인데 하나같이 일당백의 절정고수들이오." "그렇다면 지금쯤 벌써 총단에 도착했겠군." "아마 그럴거요." 육청운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총단에는 어떤 고수들이 있소?" "교주님과 좌우쌍위, 그리고 건곤위대가 있고 그외 사방천왕과 세명의 공봉이 있으며 세 분 공주님이 계시오." "교주가 없을 때는 누가 총단을 지휘하오?" "총호법이오." "그는 누구요?" "그는 성씨가 우가라는 것밖에 자세히 모르오." "그를 만나본 적이 있소?" 진월륜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같은 총단 안에 있기 때문에 그자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소." "그의 무공 정도는?" "노부는 그의 십초지적도 되지 않소." "그들은 나이가 얼마나 되오?" "그건 정확히 모르겠소. 어떻게 보면 오십을 넘기지 않는 중년인 같기도 한데......." "그는 평상시에 무슨 옷을 걸치고 있소?" "언제나 금포를 걸치고 있지요." "그의 성격은 어떻소?" "입을 잘 열지 않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누구나 그를 두려워 하고 있소. 그의 마음이 사갈보다 더 독랄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현재 황산 총단의 모든 일은 그 자가 전부 책임지고 있겠군요." 진월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주께서 총단에 계실 때는 대공주께서 일을 결정했으나 그 외의 일들은 대부분이 그 자가 책임지고 있지요." "그녀는 강호에 자주 나오시오?" "아니오. 삼년동안 황산에 있으면서 강호에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일 거요." "귀하는 건곤교에 가입한 지 얼마나 되시오?" "이년 조금 넘었소." "귀하의 신분은?" "팔대호법중 황지호법이오." "그렇다면 총단 사람이 아니겠군요?" "그렇소 팔대호법은 원래 총단에 거주할 수 없소. 하지만 나는 대공주를 모시기 때문에 특별이 예외로 인정받소." 육청운의 눈이 번쩍 빛났다. "총단에서 대공주의 위세가 대단한가 보군요?" "대공주는 교주님의 세명의 의녀중 첫째이지만 특히 신임이 두터워 총호법도 대공주만은 두려워하고 있소." "그녀가 강호에 출현한 의도는 단지 진반천을 납치하기 위해서요?" "그것 말고도 한 두가지 일이 더 있는 걸로 알지만 자세한 것은 대공주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거요." 육청운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해 주어 감사하오. 그럼 귀하는 나의 안배에 따라 한동안 안전한 곳으로 가서 쉬시는게 어떻겠소? 결정을 내리시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결정을 내렸소이다. 노부는 대공주 대공주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오." 육청운은 눈을 번쩍 떳다. "그럼 귀하는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작정이오?" "아니오.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늘 저녁 일은 육대협과 노부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므로 육대협이 입을 열지 않는다면 영원히 비밀이 되는 것이오. 그러나 노부는 대공주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구료. 만약 돌아가지 않는다면 스스로 마각을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이오." "그 말도 그럴 듯 하구료. 그러나 지금은 갈 수가 없소." 진월륜은 흠짓 놀랐다. "왜 그렇소?" "귀하는 명령을 ㎤고 왔는데 미행을 중지하고 돌아갈 수 있겠소?" 그 말에 진월륜은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육대협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구료. 그럼 어쩌지..." "그녀가 뭐라고 분부했소?" "육대협의 거처를 알아낸 후에 무림인인지의 여부를 알아보라고 했소." "만약 내가 무림인이 아니라면 암암리에 보계까지 호송하라고 했소?" "그렇지요." "그렇다면 나는 밤의 경치를 구경하는 척 하며 다시 흑룡구로 돌아가 투숙을 하겠소." "육대협은 보계에 가려는 것이 아니오?" 육청운은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원래 진반천의 실종을 탐문하러 오다가 향차를 발견하고 의혹을 느껴 뒤쫓고 있었소. 보계에 간다고 한 말은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말일 뿐이오." "육대협은 모든 것을 알았는데 그래도 추적을 하시겠소?" "금소저가 강호에 출현한 의도와 목적을 알기 전에는 계속 추적할 것이오." 진월륜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노부가 곤란한데요." "내일 아침 일찍 보계로 가시오." "보계로요?" "그렇소. 다른 사람을 나와 똑같이 변장을 시킨다음 귀하가 따라가면 될 거요." 진월륜은 내심 육청운의 기지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절묘한 생각이로군요. 그렇게 하면 마각이 드러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하하하...그럼 나는 먼저 갈테니 귀하는 뒤를 따르시오." 육청운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흑룡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31장 향본가인 흑룡구에서 동남쪽으로 가면 낙남현이 있고,거기서 또 남쪽으로 가면 화산이 나온다. 육청운은 먼 거리에서 봉황신차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번에 그는 인피가면을 쓰고 본래의 면목을 숨겼지만 여전히 청삼을 입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봉황신차의 뒤를 따르기 사흘째 정오가 되었다. 봉황신차는 화산전면에 있는 석두성에 머물렀다. 육청운은 금문군이 이번에 강호에 출현한 목적은 화산을 가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화산 화산은 오악중 서악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하는 천하의 명산이다. 산의 높이는 오천길 넓이는 백여리나 된다. 산 동쪽에는 선인봉이 있고 서쪽에는 연화봉, 남쪽에는 낙안봉이 있어 모두가 구름을 뚫고 하늘에 닿을 듯이 우람하게 솟아있다. 이 연화봉의 정상에는 상궁이 있다. 이 상궁이 바로 무림의 정통파인 화산파의 근원지였다. 봉황신차는 이 화산파의 대문앞에서 멈췄다. 금문군은 향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녀 속하의 남녀노소들만 모두 말에서 내려 향차옆에 섰다. 잠시 후 육중한 대문이 열리며 화산파 안에서 한 떼의 인물이 앞으로 나와 섰다. 가장 앞에 나오는 인물은 눈빛이 유난히 맑고 이목이 청수한 중년인 이었다. 그가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인 일자매화검 매지환이었다. 그의 뒤로는 화산파의 정예인 화산노조와 화산오검, 그리고 열다섯명의 일대제자들이 줄지어 걸어나왔다. 그들의 얼굴 표정은 흡사 대적을 만난 듯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매지환은 향차에서 두어장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향차 안에서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장문인 본교의 건곤령을 받으셨지요?" 일자매화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받았소." "잘 생각해 보셨는가요?" "이미 생각해 보았소." "무슨 의견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무런 의견도 없소." "그렇다면 당신은 본교의 임명을 받들어 무림의 평화를 위해 수고를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본 파는 의견도 없지만 귀교의 임명도 받아들이지 않겠소." "그럼 당신은 본교와 적대관계를 맺자는 거예요?" "귀교가 본파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귀교와 적대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소." 금문군의 맑고 아름다운 음성이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매지환! 본교 교주께선 본교의 제자들에게 두 글자만이 있을 뿐이라고 영을 내린 사실을 모르겠어요?" "두 글자라니?" 금문군은 냉랭히 소리쳤다. "적과 벗!" "어떻게 하면 벗이되는 거요?" "본교의 임명을 받아들인다면 벗이되고 그렇지 않다면 적이되요." "이 문제는 한 마디로 대답하겠소." "말하세요." "뜻이 같지 않으니 협력할 수 없소." 금문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말했다. "다시 한 번 고려해 보세요." "더 이상 고려할 것도 없소. 한 번 결정한 일에는 변함이 없소." "그렇다면 당신은 고집때문에 대를 희생시키겠다는 것인가요?" 매지환은 냉랭히 대꾸했다. "낭자의 말씀이 옳구료. 노부는 바로 그럴 생각이오." "이렇게 고집을 부리고 뉘우치지 않는다면 화산파를 무림에서 멸망시켜 버릴 거예요." 매지환의 안색이 변했다. "지금 당장에 무림에서 졔명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더러운 이름을 남겨놓고 영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소." "좋아요. 나는 이미 힘껏 타일렀는데 매장문인은 고집을 세우고 뉘우치지 않으니 더 이상의 방법이 없고 다만....." 그녀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큰소리로 냉랭히 말했다. "좌위는 명령을 받들어라." 흑의노파가 향차의 좌측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금문군은 천천히 말했다. "화산장문 매지환은 고집을 세우고 본교의 임명을 받아 들이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좌위는 허리를 굽히고 답했다. "사로잡아서 본교로 압송해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를 사로잡을 수 있겠느냐?" "삼십초내에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삼십초 이내에 사로잡아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좌위는 대답을 하고는 화산장문인 매지환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일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 매지환의 뒤에 있던 화산오검의 첫째인 마여비가 날쌔게 튀어나오며 말했다. "늙은 할멈! 발을 멈춰라!" 좌위는 마여비의 와침에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 곧장 걸어갔다. 마여비는 눈썹을 치키며 외쳤다. "할멈! 어른께서 발을 멈추라는 말씀이 들리지않느냐?" 좌위는 비로소 냉랭히 대꾸했다. "아직 젖비린내 나는 녀석이 어른이라고 자칭하니 매좀 맞아야 겠구나?" 그녀는 말을 마치자 마자 손을 치켜뜨며 일장을 가했다. 꽈광! 마여비는 화산오검의 우두머리로써 화산파중의 일류고수이기 때문에 좌위가 일장을 내자 그도 지지않고 곧 강력한 일장을 받았다. 꽝! 굉량한 폭음과 함께 마여비의 몸이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우욱!" 마여비는 앞가슴이 답답해지며 목구멍이 시큼해지더니 참지 못하고 선혈을 한 입 쨮어냈다. 일자매화 매지환은 이 광경을 보고 깜짝놀랐다. '저 늙은 노파가 대체 누구이기에 저런 심후한 공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이때 좌위는 이미 그의 여덟자 가까이에 걸음을 멈추고 냉랭히 소리 쳤다. "매지환! 노신은 대공주께 삼십초내에 너를 사로잡겠다고 장담을 했으니 다른 사람을 내보내지 말고 깨끗이 손속을 겨루자. 그렇지 않을 바에는 손속에 정을 두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말아라." 매지환은 눈썹을 치켜 뜨며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 때 화산 오검중의 세째인 철필강장 오풍운이 재빨리 뛰어나오더니 좌위를 노려보며 냉랭히 소리쳤다. "이 늙은 할멈아. 우리 화산파 앞에서 네년이 어찌 감히 미쳐 날뛰 느냐? 네년의 공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선 노부의 일장부터 받아 보아라" 그는 쌍장을 무섭게 밀어 부쳤다. 쏴아앙! 오풍운은 별호 그대로 장력에 대한 조예가 심후했다. 특히 그의 태을미리장은 화산파에서도 익힌 사람이 거의 없는 절학중의 절학 이었다. 좌위는 차가운 미소를 흘리고는 손을 들어 상대의 태을미리장을 정면 으로 맞받아쳤다. 꽝! 주위가 온통 뒤흔들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오풍운은 큰 걸음거리로 두 발쯤 후퇴했다. '우욱!' 그는 가슴속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하마터면 마여비처럼 피를 토할 뻔 했다. 매지환은 이것을 보고 더욱 놀랬다. 오풍운의 태을미리장은 자신도 호락호락 받아낼 수 없는 뛰어난 장력인데 단 일장만에 좌위에게 밀리다니 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허나 그는 화산파를 이끌고 있는 장문인의 신분이 아닌가? 매지환은 깊은 숨을 몰아쉰 후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할멈의 공력은 매우 심후한대 대명은 무엇인지요?" "흐흐흐....그만두시오 노신은 당신들 화산파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성명따위는 묻지 말고 빨리 손속이나 겨루기로 하지요." 매지환은 좌위가 이름을 말할 것 같지 않음을 알고 미소를 흘리며 소리쳤다. "할멈 조심하시오." 동시에 번개같이 빠른 신법을 뀫접근하면서 좌위의 어깨죽지를 잡아 채려 했다. 스윽! 그의 손길은 일파의 장문인 답게 쾌속하면서도 영활했다. 좌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슬쩍 우수를 내밀어 반격했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당대무림에서 일류고수여서 싸움이 시작되자 일신공력을 다해 선수를 다투고 있었다. 펑! 파파파파! 삽시간에 주위는 온통 장영과 권풍으로 휘감겨 버렸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이십여초를 주고 받았다. 좌위의 출수초식은 기괴하고 동작도 빠르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매지환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정세는 갈수록 좌위의 무공신수가 매지환보다 뛰어남을 알 수가있었다. 육청운은 오십장밖의 아름드리 고목나무 뒤에서 몸을 숨기고 쌍방의 대화와 일장의 격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안력은 탁월하기 그지없어 이미 장내의 정세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매지환의 무공신수는 좌위보다 못하기 때문에 이런 상태로 나간다면 십초 이내에 결판날게 뻔했다. 그렇게 판단한 육청운은 번개같이 빠르게 몸을 날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손을 멈추시오] 그의 몸은 마치 한마리 비조처럼 순식간에 오십여장을 날아 장내로 내려섰다. 중인들은 그의 기경한 신법에 놀라 일제히 경호성을 내질렀다. [앗!] 육청운의 외침소리에는 막강한 내공이 담겨있어 좌위와 매지환은 손을 멈추고 다섯장씩 물러났다. 좌위는 다 이겨가던 싸움에 방해꾼이 나타나자 눈을 차갑게 빛내며 냉랭히 소리쳤다. [귀하는 누구시오?] 원래 그녀는 흑룡구의 안락거에서 육청운을 보았으나 지금은 육청운이 인피면구를 쓰고 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육청운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강호의 인물이오] 좌위의 표정이 싹 변했다. [귀하는 이름도 없단 말이오?] [이름은 있으나 함부로 말하기 싫소.] [이름을 말하기 싫으면 어서 비키시오.] [노파께서 비키시오. 내가 비킬수는 없소.] [노신을 비키라고 하니 그건 쉬운 일이오.하지만 귀하의 공력을 보여주시오.] [노파,내가 손을 써서 당신을 밀어내라는 것이오?]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으면 그렇게 해보시오.] [그럼 조심하시오.] 육청운은 손을 들어 장난처럼 가볍게 휘저었다. 꾸우웅...... 그러자 한 가닥의 괴이무비한 무형강기가 좌위에게 몰아쳤다. 좌위도 재빨리 공력을 돋우어 날쌘 신법으로 몸을 지탱하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파아아.... [으윽.] 그녀는 무서운 무형강기에 밀려 여덟 걸음이나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좌위는 깜짝 놀라 상대방의 공력을 경솔하게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내심 상대의 공력에 잔뜩 겁을 집어 먹었으나 자기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육청운에게 달려들려 했다. 바로 그때 봉황신차에서 금문군의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좌위, 우매한 행동은 삼가라.] 좌위가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곧이어 향차의 발이 걷히고 금문군이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자의를 입었고 안면에 가벼운 망사를 걸쳤다. 사뿐히 걸어서 육청운을 여섯장 앞까지 다가서서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반짝이며 육청운의 위아래를 훑은 그녀는 고운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의 공력은 정말 고강하시군요.] 육청운도 담담히 대꾸했다. [칭찬해 주시니 감사하오.] [공자는 화산파와 어떤 관계가 있으신가요?] [아무런 관계도 없소.] [화산파에는 공자와 친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아무도 없소] [그렇다면 고의로 이번일에 관여하는 것이군요?] [고의는 아니었으나 그의가 되어버렸소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더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육청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게 걸려든 일은 간섭하지 않을 수 없소.] [그래요? 굳이 간섭을 하겠다는 거군요?] [그렇소 . 나는 강호인이기 때문에 강호상의 일을 못 본체 할 수가 없소.] 금문군은 냉랭히 소리쳤다. [이런 일을 간섭쏛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강호무림에서 일어나는 일들중에 내가 간섭하지 않은 일이 없는 걸로 알고 있소.] [허풍이 대단한데..........] [속담에 (일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뜻을 낭자도 알고 있소?] [물론이예요.그래서 공자께서 보계로 가다말고 이곳으로 오신 거로군요?] 금문군의 마지막 말에 육청운은 허가 찔린듯한 표정을지었다. [보계라니..그건 무슨 말이오?] 금문군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시치미를 떼시다니 임공자 답지 않으시군요.] 육청운은 이미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음을 알고 쓴 웃음을 머금었다. [이거 정말 창피하군. 소저는 나인줄 어떻게 아셨소?] [얼굴이 조금 달라졌다고 어제 만났던 사람을 몰라볼만큼 어리석지는 않아요. 더구나 공자의 기도는 몹시 특이해서 한번 본 사람이라면 쉽게 잊혀지지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는 묘한 뜻이 담겨 있었다. 육청운도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금문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 추악한 인피면구를 쓰고 있으실 건가요?] 육청운은 고소를 금치 못하고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러자 주위가 환해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실로 절세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당당한 미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금문군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헌데 임공자께선 혹시 한 사람을 못 보셨나요?] 육청운은 빙그레 웃었다. [쌍수탈명 진월륜 말이오?] [그를 알고 계셨군요.] [하하....귀동냥을 했을 뿐이오.] [그를 어떻게 하셨지요?] [어떻게 하긴....그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소.] [그렇다면 그는 지금 어디 있지요?] [아마 지금도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을 거요.] [자신의 일이라뇨?] [하하......나를 미행하는 일 말이오. 소저께선 그에게 그런 분부를 내리지 않으셨소? 그는 아마 지금쯤 보계에 거의 다 가 있을거요.] 육청운은 이곳에 있는데 그를 미행하던 진월륜은 어찌 보계로 간단 말인가? 다행히 금문군은 총명하기 때문에 단번에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공자는 금선탈각의 게교료 그를 속였군요?] 육청운은 다시 한번 감탄한 듯 무릎을 탁 쳤다. [정말 소저는 고명하기 그지없어 한번에 알아내시는 구려.] 여자들은 모두가 남에게 칭픣받는걸 좋아한다. 그녀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여걸이든 혹은 사람을 죽여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흉악한 여마든 아느면 천하절세미녀이든 인물이 구역질나도록 추악한 박색이든 간에 남들이 자기를 칭찬할 때는 틀림없이 희열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법이다. 육청운의 이 대수롭지 않은 칭찬이 만약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금문군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너무도 잘 생기고 은근히 마음속으로 사모의 정을 느끼고 있던 육청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만큼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색다른 충격을 받았다. 때문에 그의 말이 끝나자 금문군은 별안간 정을 담뿍 담은 다정한 눈매로 변했다. 금문군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런데 공자님의로 가장한 사람은 누구예요?] [내 친구요] [그 분의 인품과 용모는 공자님과 꼭 닮았나요?] [용모는 비록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옆에서 보거나 뒤에서 보면 매우 비슷하오.] 그러자 금문군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럼 큰일 났는데] [큰일이라니 도데체 무슨 일이오?] [진월륜의 손속은 몹시 맵기 때문에 그가 만일 사람을 잘못 미행했다는 것을 알면 그는 화가 난 나머지 곧 공자의 친구에게 화풀이를 할 거요.] [아! 소저의 말씀은 진월륜이 화가나서 내 친구에게 손을 쓴다는 말이오?] [그는 틀림없이 그럴거에요.] 육청운은 근심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 일 같으면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진월륜은 잘못 미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손을 쓰지 않는게 더 현명할 거요. 그렇지 않으면얻어 맞는 사람은 진월륜 자신일 테니까.] 금문군의 표정이 밝은 빛으로 변했다. [그럼 친구분의 무공도 매우 강합니까?] [그의 공력으로 말하자면 쌍수탈명은 단 십초의 적수도 되지 않소.]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나중에라도 진월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금문군은 깜짝 놀란 빛을 띄고 있다가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 천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잠시 육청운의 준수한 모습에 시선을 못박았다. [공자님의 성이 진짜 임씨에요?] [그럼 내 성이 무엇이라야 정말일것 같습니까?] [천첩은 갑자기 절세 고수 한 분이 머리에 떠올랐어요. 그 분은 인품과 용모 그리고 옷차림까지 공자와 매우 흡사해요.] 육청운이 바보가 아닌이상 금문군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모를 리가 없다. 허나 그는 일부로 바보같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그 사람은 낭자의 친구시오?] [아닙니다. 천첩은 한 번도 그 분을 만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낭자는 그 분의 인품과 용모를 어떻게 나와 비슷하다고 단정하시오?] [천첩은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어요.] [그럼 그 분의 인품과 용모가 어떤지 한번 말씀해 보시겠소?] [그 분은 여자보다 살결이 곱고 인물이 누구도 따를 수 없을만큼 준수할 뿐 아니라 훤칠하고 큰 키에 언제나 청삼을 즐겨 입습니다.] 육청운은 짐짓 탄성을 터트렸다. [오! 듣고 보니 과연 나와 비슷한 점이 조금은 있구료. 특히 이 청삼을 즐겨 입는다는게 말이오. 그 분은 대체 누구시오? 몹시 호기심이 동하는 구료.] [그 분의 무공은 절정에 달했고 천하에서 제일가는 기재로써 강호의 악도들은 이름만 들어도 쥐구멍을 찾는다고 해요. 그 분의 성은 육씨이고 이름은 청운이라고부르는 옥면청삼 절정신검이지요. 공자께서도 그 이름은 들어 보셨을 거예요.] [아.....물론 나도 그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소. 소저는 내가 바로 그 육청운이라고 의심하시오?] 금문군은 자신있는 듯 흑진주처럼 까만 눈동자로 육청운을 주시했다. [천하에 용모가 비슷하고 체격도 같은 사람이 적지 않아 꼭 공자님이 그 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천첩이 의심하는 점은 공자의 용모가 너무도 뛰어나고 무공또한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공강하다는 것이예요.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지만 이처럼 모든게 일치되는 일이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예요.] 그녀의 말은 논리가 정연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육청운도 더 변명할 여지가 없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소저는 내가 바로 그 유명한 육청운이라고 단정하셨군요?] 금문군은 예리하게 그를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천첩이 옥면청삼 절정신검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 아무리 비슷하더라도 공자 자신이 아니라고 하면 단정지을 순 없군요.하지만.....] 그녀는 말을 흐리고 배시시 엷은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분 육대협은 강호무림의 제일가는 고수이시고 기협이시니 만일 그라면 결코 자기 신분을 속이려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듣기와는 달리 겁장이이고 비겁한 사람일테니까요.] 그녀는 말을 끊고 육청운의 멋적은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공자님은 천첩의 말이 옳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과연 육청운은 난처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의 말은 교묘하기 그지없어 육청운은 하마터면 자기의 신분을 말할 뻔 했지만 문득 그녀의 신분이 생각나자 생각을 고쳐 먹었다. [소저의 말씀에 나는 진정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오. 또한 내가 바로 그 육청운이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오.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가 아니니 당대의 제일고수라는 영에를 얻을 복이 없군요.] 금문군은 비록 그가 육청운일 거라고 추측은 했지만 꼬치꼬치 파고 들어 끝까지 추궁할 생각이 없었던지 소리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천첩은 단지 그렇게 추측했을 뿐이고 공자께서 스스로 아니라고 한다면 이젠 그만 둡시다.] 육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소저는 나의 요청을 들어주실 수 있겠소?] [만일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소저께서 저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도 어쩔수 없는 일이오만 소저께서 뜻을 이루려면 먼저 나를 쓰러뜨린 후에야 될것이오.] 금문군의 눈이 상큼하게 치켜 떠졌다. [공자께서는 천첩으로 하여금 손을 쓰도록 자극을 주는 거예요?] [나는 소저께서 손을 쓰기를 바라지 않소. 나는 다만 소저께서 내 청을 받아달라는 생각 뿐이오] [공자는 화산파와 아무런 관계도 없고 또 친구도 없는데 왜 꼭 이 일에 간섭을 하려고 하시죠?] [나는 타고난 성격이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오.그리고 또한 무림의 정의를 위해서도.........] [그럼 천첩이 오늘 공자님을 쓰러뜨리지 않고는 일이 안되겠군요?] [그렇소 소저! 나는 분명히 이 일에 간섭하겠다고 말했으니까 끝까지 그 결과를 봐야 하겠소.] [공자는 내가 공자를 쓰러뜨리지 못하리라고 자신하세요?] [천만의 말씀. 나는 손속을 가늠하기 전에는 망언을 하지 않소.] 금문군은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천첩이 만일 공자의 청을 받아들여 화산파를 놓아준다면 공자께서도 제가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 주시겠어요?] 육청운은 약간 의외인듯 눈을 치켜떴다. [무슨 요구가 있는지 우선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천첩이 요구하는 것은 이후로 공자께서는 저의 일에 더 이상 간섭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예요.] 육청운의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이것이 소저의 교환 조건이오?] 금문군은 부인도 승인도 아닌 모호한 눈으로 육청운을 주시했다. [공자는 승낙하시는 거예요?] 육청운은 쾌히 대답했다. [승낙하겠소.소저] [그러시다면 천첩은 먼저 감사를 드리겠어요.] 금문군은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육청운도 따라서 포권의 예를 취했다. [이건 교환조건이니 감사하실 건 없소. 그리고 나는 소저에게 몇 가지 글을 올리겠으니 화를 내지 마시고 들어주기 바라오.] [공자께서는 꺼리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천첩은 귀담아 듣겠어요.] [내가 소저에게 들려줄 네 자는 어떤말 중의 앞 구절인 경본가인이오] 금문군은 게속하여 혼자 중얼거리듯 다음 말을 이었다. [경본가인 나하작적(당신은 원래는 가인인데 왜 도적이 되려 하느냐)이라........] 그녀는 다시 한번 읊조리고 나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공자는 천첩을 도적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소저는 지극히 총명해서 내가드린 말의 전의가 무엇이니지 아시면서도 일부로 모른 체 하시는 거요?] [공자의 이 네마디 글자는 일시적인 생각에서 천첩을 가련해 하시는 말인가요?] [일시적인 생각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오.] 금문군은 두 눈에 반짝 광채를 띄고 의미있는 시선으로 육청운을 주시했다. [감사합니다. 그 말씀과 온정을 천첩은 마음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 사뿐이 몸을 돌려 향차 쪽으로 걸어갔다. [돌아가자.] 그녀는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향차에 올라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봉황신차는 길고 긴 먼지를 뒤로 남기고는 화산을 내려가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잔뜩 긴장해 있던 화산파의 장문인 매지환은 그제서야 긴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즉시 육청운의 앞으로 나서서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대협께서 본 파의 위난을 구해주신 은혜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더 이상의 큰덕은 바랄 수 없으나 대협의 상성고명만은 이곳에 남겨 주시어 본 파의 제자들로 하여금 영원히 가슴에 새겨두게 해 주십시오] 머리를 조아리는 매지환을 바라보며 육청운은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강호인이 강호의 일에 간섭하여 악마를 제거하고 정의를 지키는 일은 무림의 협사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 장문인께서는 너무 지나친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대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노부는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만 대협의 성함만은 계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장문인께서는 꼭 저의 이름만 알고 싶습니까?] [대협께서 속된 말씀을 싫어하시니 더 속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대명만은 꼭 알고 싶습니다.] 육청운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불초는 육청운이라고 합니다.] 매지환은 기절할 듯이 놀라 크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정녕 대협께서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대협이시오?] 그러자 한쪽 옆에 서 있던 화산삼노와 화산오검 그리고 많은 화산제자 들은 장문인의 외침에 모두 안색이 대변했다. 그들은 조금전에 금문군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 하다가 육청운이 스스로 이름을 밝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대 무림의 천하제일고수! 무림제일의 기남이며 신비인! 그에 대한 너무도 많은 전설과 신화가 주마등처럼 중인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육청운은 유성처럼 찬란하세 빛나는 시선으로 모든 사람들을 한차례 훑어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로 육청운 입니다.그러나 대협이란 칭함은 받을 수 없습니다.] 제 31장 향본가인 매지환이 황송하다는 듯 재빨리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육대협의 옥면청삼 절정신검이란 여덟 글자를 당금 무림의 어느누가 흠모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파에서 육대협의 존안을 뵈올 뿐아니라 크나큰 은헤를 입게 외었으니 둘도 없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찬의 말씀에 송구스럽군요. 그런데 오늘 금소저는 일이 어려움을 알고 물러났지만 건곤교주만은 결코 이쯤으로 손을 떼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또 틀림없이 사람을 보내 귀파에게 임명을 받으라고 할테니 그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매지환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이 어두워졌다. [육대협의 말씀이 지당합니다.그렇지만....] [그렇지만 적을 상대할 힘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육대협께서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오늘의 일만 하더라도 육대협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노부는 지금쯤 독수에 걸려 갈데 없는 혼이 될 뻔했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방금육청운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오랜 역사를 가진 명문정파인 화산파는 그 봉황신차의 일행에게 여지없이 흔적을 감추어버릴 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육청운은 매지환의 축 늘어지 어깨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적을 상대할 만할 힘이 없다면 장문인께서는 건곤교와 타협하실 생각이오?] 매지환은 정색을 하고 힘있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눛니다. 노부는 열번 죽는 한이 었더라도 그들과는 타협을 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장문인께서는 자신이 죽은 후의 결과가 어찌 되리라는 점을 생각해 보신 적은 있습니까?] [비록 화산파가 모두 죽어 무림에서 당장 제명되는 한이 있어도 노부는 두렵지 않소이다.] 육청운은 매지환의 다부진 말에 감탄의 빛을 띄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장문인의 그 굳건하신 뜻에 존경을 금치 못합니다.그러나 그 뜻이 현명한 행동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매지환은 급히 허리를 구부렸다. [육대협 고견을 말씀하시어 화산파를 위기에서 구해 주십시오.] [저의 좁은 소견을 장문인께서 받아 들이실지......] 매지환은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이 일은 본파의 명예와 요욕,그리고 존망에 관한 일입니다. 더구나 당금 무림의 제일기인인 육대협께서 고견이 있으시다면 노부는 결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육청운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저의 얕은 소견을 말씀드리지요. 장문인께서는 건곤교가 재차 귀파에게 명을 받으리고 협박을 하기 전에 우선 귀파 전체의 종적을 잠시 감추었다가......] 육청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지환은 분연한 태도로 말을 가로챘다 [육대협께서는 양해해주십시오. 조부는 본파가 궤멸되고 제자들이 몰살하는 한이 있어도 천하 무림인들에게 죽음이 두려워 피했다는 치욕은 받을 수 없습니다. ] 육청운의 준수한 얼굴에 소리없는 웃음이 스쳐갔다. [장문인께서는 제 뜻을 오해하셨군요. 제 뜻은 귀파가 어디로 숨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잠시동안 건곤교와 맞서지 말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척 하다가 시기가 성숙되면 다시 무림의 군협들과 손을 잡고 일거에 악적들을 섬멸하시라는 말입니다.] 매지환은 곰곰히 생각을 해 본 후 확실히 그 의견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육청운의 엄숙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장문인께서 만일 저의 생각이 과히 틀리자 않는다고 인정하시면 즉시 행동으로 옮겨 친히 개방총타에 다녀오십시오.] 매지환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육대협께선 노부에게 개방으로 가서 도움을 청하라는 말씀이시오?] 육청운은 손을 저으며 침착하게 설명했다. [아닙니다.그곳에 가셔서 개방방주와 만나 무림의 협사들과 연락 아여 건곤교와 맞설 대책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노부는 지금까지 개방과 별다른왕래도 없었는데 이제 가서 상의를 한다면 아무런 결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 대해선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만일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개방방주에게 제가 장문인을 보냈다고 전하십시오.] 매지환은 문득 밝은 빛을 띠었다. [육대협은 개방방주와 친까 깊은 사이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하지만 당금 무림에서 건곤교와 그래도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세력은 오직 개방뿐입니다.더구나 개방에서는 이미 건곤교에게 면차례 피해를 당해 그들에게 경게심을 품고 있으므로 장문인께서 가신다면 크게 환영할 것입니다.] 당금무림은 전통적인 무림의 거대문파인 구파일방중 구파의 힘이 쇠약하고 일방인 개방방인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구파를 이끌고 있는 소림과 무당산에서 별다른 인재들이 배출되지 않아 그들의 힘은 눈에 띄게 저하되었으나 개방은 결신 악구천을 비롯하여 수많은 기재들과 고수들이 줄지어 나타나 그야말로당금무림의 제일 방파라 할 만햇다. 건곤교에서 무림장악의 제일보로 개방을 무너뜨리려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매지환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다면 노부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그러나 우선 본파의 일들을 대략 지시한 후 내일 아침 일찍 개방총타가 있는 개봉으로향하겠습니다.] 육청운이 매지환을 향해 포권을 하자 매지환은 다급하게 그를 만류했다. [날도 이미 저물었으미 육대협께선 이곳에서 하룻밤만 주무십시오. 그러면 노부가 비록 차릴것은 없지만 조촐하게 잔치를 벌이겠습니다.] 육청운은 진정으로 권하는 매지환의 말에 가벼운 미소를 보낸다. [하하...그 말씀은 너무도 감사합니다만 저는 계속해서 봉황신차의 뒤를 추적하여 다른 무림 협도들의 위기를 건져야 하겠습니다.] 이 말에 매지환은 더이상 만류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노부도 더이상 만류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도 즉시 포권을 하고 육청운을 전송했다. 육청운은 빙그레 웃음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그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과도 같이 눈부신 속도로 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매지환을 비롯한 화산파 인물들은 경이와 존경의 빛이 가득한 시선으로 언제까지고 육청운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32 장 逍遙莊 달은 황학루의 서쪽 누각을 비추고 내 마음은 장강 만리를 거슬러 달린다. 봄바람은 이미 서른 번을 되풀이 불었는데 이 몸은 멀리서 무창성을 그리네 원래 이별이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대를 보내자니 술잔도 기울일 수가 없구나....... 무창(武昌) 무창은 호북성(湖北省)의 성도였다. 양자강의 동안에 위치하며 예전에는 강하,악주라고도 불리웠다. 성 서쪽에는 천하에 유명한 황학루가 있고 그 외에도 명승고적이 많아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무창성의 남쪽에서 일 리쯤 되는 곳에 한 채의 아담한 장원이 있었다. 장원은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고아하면서도 우아한 풍취가 있어 누구나가 한번쯤 거쳐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이 장원은 당금 무림에서 일곡이장삼보중 이장(二莊)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소요장(逍遙莊)이었다. 무림이장이란 항주의 군자장(君子莊)과 바로 이 무창의 소요장을 일컫는 것으로 무림삼보와는 달리 이들 장원의 주인들은 정파에 이름높은 명숙들 이었다. 소요장의 장주는 학식이 높고 지혜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소요거사 담백우(譚白羽)였다. 담백우는 비록 무공이 고강한 절정고수는 아니었으나 박학다식하고 견문이 넓어 많은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황혼무렵. 무창성 교외(郊外)에 자리잡고 있는 소요장 앞에 네명의 장한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사십을 넘은 중년인들이었으며 유생 차림에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었다. 이들 네 명의 유생차림의 중년인들은 기세등등하게 소요장 앞에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중 얼굴이 흰 사람이 굳게 닫친 소요장의 검게 칠한 대문을 쳐다보고는 왼 쪽에 서있는 얼굴이 약간 네모진 유생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네째는 앞으로 나가 문을 두드려라.] [예.대형!] 네째라 불리운 유생은 계단을 올라가 문앞에 달려있는 문고리를 세 번 두드렸다. 탕...탕..탕....... 그러자 신발끄는 소리가 대문안에서 들려오더니 대문 맞은 편에 우뚝섰다. [문을 두드리는 분은 뉘시온지요?] 네째는 점잖게 대꾸했다. [우리들은 삼상(三湘)에서 특별히 소요거사께 문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나 안에서는 엉뚱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장주께서는 일이 있어 나가셨으니 다음날 오십시오.] 네째 유생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소요거사께서 안 계시면 그럼 우리는 한총관(韓總官)이라도 만나 볼테니 문을 열어 주십시오.] 문안의 사람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사람은 흑의 장한이었다. 흑의 장한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네명의 유생들을 쭈욱 훑어 본 후 물었다. [귀하는 본 장의 한총관님을 아십니까?] [아니오.다만 이름만 들었을 뿐 만나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한총관님께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허허.......볼일이 없다면 무엇하러 그 먼 삼상에서 이곳까지 왔겠소?] [그럼 귀하의 대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삼상의 천중사수(天中四秀)요.] 원래 이들 네 명의 중년유생들은 강호무림에서 이름이 높은 천중사수였다. 천중사수는 삼절수사(三絶秀士) 맹일화(孟一華), 소서생(笑書生) 방린(龐麟), 냉면절사(冷面絶士) 양한빙(楊寒氷), 그리고 정유(情儒) 곽서춘(郭西春)의 네 사람이었다. 이들은 무림에서 정사의 중간을 걷는 인물들로 문(文)과 무(武)에 고루 능통해 명성이 대단한 인물들 이었다. 흑의장한은 이들이 천중사수임을 알고 흠짓 놀랐다. [아! 바로 사수이셨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곧 들어가서 한총관님께 아뢰어 영접을 나오시게 하겠습니다.] [그럼 귀하가 수고해 주시오.] 흑의 장한은 허리를 구부리고는 즉시 몸을 돌려 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체격이 우람하고 얼굴이 허옇고 턱밑에는 검은 수염이 가슴까지 내린 위풍당당하게 생긴 중년인이 점잖게 걸어나왔다. 그는 천중사수의 앞에 까지 다가와 포권의 예를 올린 뒤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귀한 손님들이 행차하신 줄도 모르고 이 한모가 영접을 나오지 않았으니 널리 용서를 바라오.] 천중사수의 우두머리인 삼절수사 맹일화도 포권의 예를 취하며 껄걸 웃어 제쳤다. [허허허...원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저희들 형제가 무모하게 연락도 없이 찾아왔으니 오히려 한총관께서는 너그럽게 아량을 베풀어 주시오] 한총관의 이름은 한송(韓松)이고 별호는 철장생사판(鐵掌生死判)이라 했다. 그는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며 성격이 불같아서 강호무림에서 이름이 자자한 철한영호(鐵漢英豪)였다. 한송은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맹대협께선 너무 겸손하시어 이 한모는 감당하기 어렵소이다.] 그는 천중사수를 비록 한 번도 만난적이 없었으나 그들의 소문을 자주들었기 때문에 곧 맹일화를 알아본 것이다. 곧이어 한송은 옆으로 비껴서며 말했다. [네 분은 어서 객청으로 드시어 차라도 드십시오.] 맹일화는 사양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안으로 들었다. 한송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앞서 갔으며 방린,양한빙,곽서춘, 세 사람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소요장은 이름 그대로 아주 한적하면서도 우아한 정취가 흐르는 곳이었다. 장원안에는 온갖 기화요초들이 만발하였고,건물들은 하나같이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아담하면서도 깔끔했다. 객청은 장원의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별다른 장식이 없었으나 주인의 성격을 말해주듯 깨끗하고 우아했다. 그들이 객청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곧 두 명의 동자가 향명(香茗:차의 싹을 끓인것)을 올렸다. 동자들이 물러가자 한송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네 분께서는 무슨일로 저의 초라한 장으로 행차하셨습니까?] 삼절수사 맹일화가 즉시 말을 받았다. [저희 형제들은 특별히 귀장의 장주이신 소요거사를 방문하러 왔습니다] 한송은 얼굴에 난처한 기색을 나타냈다. [허! 네 분께서는 택일을 잘못 하셨습니다. 장주께서는 나가시고 안계십니다.] [그럼 언제쯤이나 돌아오실까요?] [글쎄올시다. 정확한 날짜를 말하지 못하겠군요.곧 돌아오실지 아니면이삼 개월이 걸릴지는.....] [한대협은 담장주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십니까?] [친구를 방문하러 가셨습니다.어쩌면 관외(關外)에 가셨을지도 모르고 남해(南海)로 가셨는지도 모릅니다.] [담장주께서 떠나실 때 한대협께 어디로 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맹일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허어.....그럼 지금 찾을 도리가 없겠군요?] [예,맹대협께서 별안간 이렇게 행차하신 목적은 다만 방문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그렇습니다. 실상 저희들이 찾아온 목적은 긴요한 일이 있어 담장주님과 의논을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제게 말씀하실 수는 없습니까?] [아니오.한형에게 하지 못할 말은 아니지만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한송이 자기를 약간 무시하는 태도에 눈을 치켜뜨고 말없이 맹일화를 주시하자 맹일화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담장주 본인이 아니면 안되는 일이가 때문입니다.] [제가 책임질 수 없는 일입니까?] 맹일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담장주께선 언제 출타하셨습니까?] [약 한달 전입니다.] 맹일화는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공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시선을 한송의 눈에 집중했다. [그러면 건곤령이 이곳에 전달되었을 때 담장주께선 이미 출타하신 뒤였군요?] 한송은 건곤령이란 말을 듣자 얼굴빛이 창백하게 변하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맹일화를 주시했다. [맹대협께선 건곤령 때문에 왔소?] 맹일화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우리들 형제는 소요거사의 회답을 받아 오라는 명령을 받고 왔소이다.] [허나 장주께선 이미 출타하신 뒤에 건곤령이 도착했기 때문에 그 분께서는 회답을 하실 수가 없소.] [한형은 건곤령을 받은 후 사람을 시켜 담장주를 찾아 보았소?]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러지 않았소.] 맹일화의 미간이 잔뜩 찌푸러졌다. 그 때 냉면절사 양한빙이 별안간 말을 꺼냈다. [큰 형님! 이제 대공주님께서 오실 때도 되었으니 우리는 밖에 나가서 기다려 봅시다.] 천중시수는 비록 친형제는 아니지만 버의 이십년동안을 같이 사귀어 오는 동안에 언제나 똑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서로 상통(相通)했다. 양한빙이 말을 마치자 맹일화는 즉시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양한빙의 뜻은 한송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큰형님께서 수고 하실 필요가 없이 대공주가 온 다음에 대공주께서 처리하라고 하자는 암시였다. 맹일화는 한송과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지라 고개를 약간 끄덕여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송은 의아한 듯 물었다. [맹대협, 대공주란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맹일화는 가볍게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조금 있으면 대공주께서 행차를 하실 터이니 그때 가면 한형도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 한송이 다시 무엇인가를 물으려고 할 때였다. 다가닥.다가닥...... 멀리서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한송도 오랫동안 강호를 드나들던 무림인이었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듣자 이쪽으로 달려오는 일행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맹일화는 갑자기 긴장한 빛을 띄며 급히 말했다. [대공주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빨리 나가서영접을 하자.] 그는 말을 마치자 세 명의 아우들을 데리고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한송은 호기심이 생겨 그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장문(莊門)앞에는 이미 한채의 호화로운 봉황신차가 멈춰서 있었다. 천중사수는 재빨리 앞으로 나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소인들은 대공주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맹일화가 머리를 조아리자 향차 내에서는 금문군의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옥구슬을 굴리듯이 새어 나왔다. [사수는 허리를 펴세요. 당신들은 언제 이곳으로 왔어요?]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소인들은 방금 도착했습니다.] [소요거사는 만나 보았어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소요거사는 한 달전에 출타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예.소요장의 총관인 철장생사판 한송이 그렇게 전했습니다.] [아.그래요?] 금문군은 가볍게 외치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계단위에 서 계신분은 한총관 입니까?] [네.그렇습니다.] [그럼 저분에게 이리 가까이 오라고 전해 주세요.] 맹일화는 즉시 대답을 하고 한송에게 몸을 돌렸다. [한총관! 대공주님께서 앞으로 나오시라고 하십니다.] 한총관은 별안간 냉랭히 대꾸했다. [가까이 갈 것 없습니다. 나는 귀가 먹지 않았으니 그곳에서 말해도 다 다들을 수 있소.] 그러자 맹일화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한송! 대공주 앞에서 당신은 어찌 이렇게 무례하오?] 그의 입에서 막 험한 말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금문군이 갑자기 말을 가로챘다. [한총관의 말이 옳아요. 그 분은 귀가 어둡지 않으니 그곳에서 들으나 가까이 와서 들으나 마찬가지예요.] 금문군은 말을 마치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여전히 부드럽게 물었다. [한총관. 담장주께서는 정말 출타중입니까?] 한송은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조금도 거짓이 아니라 그 말이예요?] [낭자는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호호...약간 믿지 못 하겠군요.] 한송의 대답은 다시 냉랭해 졌다. [낭자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멋대로 해 보시오.] 금문군의 부들럽던 음성이 별안간 앙칼스럽게 변했다. [흥! 한총관이 내 멋대로 하지 못하게 해도 안되요.] 한송의 굵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낭자의 말씀은 무슨 뜻이오?] [내 말은 담장주가 지금 장중에 계시며 출타중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낭자는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입니까?] [그 문제는 한총관이 더 잘 알고 있지요. 그렇지만 나에게는 담장주께서 자기 발로 걸어나오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도대체 어떤 방법이오?] 한송의 반문에 금문군은 얼음장처럼 싸늘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한총관, 당신만 사로잡는다면 담장주가 얼굴을 내밀지 않을까요?] [그 분은 지금 장중에 계시지 않으니 낭자가 나를 죽인데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요? 정 그러시다면 제가 한 번 시험을 해 보지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낭랑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홍자호법(洪字護法)은 명을 받아라.] 그러자 인상이 음침하게 생긴 늙은이가 향차 앞으로 달려와서 허리를 굽혔다. [소인. 여기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쌍수탈명 진월륜과 함께 향차의 맨 뒤에서 따로 걷고 있던 노인이었다. 그는 한강조수(寒江釣羞) 사거년(史去年)이라는 인물이었다. 새북(塞北)일대에서는 거의 사신(死神)과도 같은 무서운 존재로 군림하고 있으며 무공이 고강하고 손속이 악랄했다. 금문군의 맑은 목소리는 사람을 위압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십 초 이내에 한송을 사로잡아라.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 [예] 한강조수 사거년은 즉시 공손하게 대답하고 허리를 쭉 펴고는 게단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한송! 문 앞에 서 있지만 말고 이리로 와서 손속이나 한 번 가름해 보자.] 무뚝뚝한 한송의 얼굴에는 굵은 핏줄이 보기 싫게 이마에 나타났다.그는 급히 아래로 내려왔다. [귀하는 누구시오?] [흐흐흐.....지금은 통성명이나 할 때가 아니다.너는 더 묻지 말고 싸울 준비나 해라.] 사거년은 말을 마치자 갑자기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잽싸게 손바닥을 내밀어 한송을 잡아 채려 했다. 휙! 한송의 무공도 절대로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재빨리 철장을 휘둘러 공격을 피하면서 오히려 사거년의 완맥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흐흐흐.......제법이군!] 사거년은 괴소를 날리며 우측의 완맥을 약간 아래로 내리는 동시에 왼손을 급히 뻗어 전광석화와도 같이 한송의 오른쪽 팔목을 찍어갔다. [앗?] 한송은 사거년의 초식이 기이할 뿐만 아니라번개와 같이 빠른 것을 보자 대경실색했다. 그는 재빨리 오른 손을 뒤집어 위맹하기 짝이없는 일초를 받아낸 후 다시 찔러오는 상대방의 섬광같은 금나수를 피하기 위해 두 철장을급히 휘둘렀다. 꽈르릉! 그의 멸호가 철장생사판이니만큼 그의 장력은 몹시 정묘하고 독특한 힘이 서려 있었다. 두 철장으로 한꺼번에 공격을 하니 그 위세는 과연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사거년은 과연 새북에서 사신으로 불릴만 했다. 파파파파....... 그의 수법은 갈수록 괴이하고 기기묘묘하게 빨랐을 뿐 아니라 권(拳) 장(掌),지(指)를 모두 사용해 때리고 ,갈기고,잡고 나꿔채며 짚는 수법까지 겸비했다. 또한 공격할 때와 물러날때의 신법은 마치 한 마리 물찬 제비같은 광경이었다. 한송의 일신 무공도 보통을 넘었으나 무림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거년의 괴이한 무공과 신법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완전히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한송이 앞으로 일 이초를 더 버텨내지 못할 일촉즉발의 순간...갑자기 장원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멈추시오!] 동시에 나이가 예순에 가까운 회포노인이 위풍당당한 모습 으로 걸어나왔다. 제 33장 逍遙居士 한송과 사거년 두 사람은 즉시 손을 멈추고 각자 몇 발짝씩 물러섰다. 회포노인이 나타나자 한송은 약간 어리둥절한 빛을 띠었다. 그러나 회포노인은 계단위에까지 나와 걸음을 멈추고 한 차례 위엄있는 표정으로 봉황신차를 훑어 보고는 사거년에게 말을 걸었다. [귀하의 성명은 어떻게 되시오?] 사거년은 움푹 들어간 눈에 정광을 쏟으며 음흉스럽게 웃었다. [흐흐흐...노부는 사거년이라 하오. 귀하가 바로 소요거사이시오?] 회포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노부가 바로 소요장주인 소요거사 담백우요. 귀하는 건곤교에서 어떤 신분이시오?] [노부는 팔대호법중의 홍자호법이오.] [홍자호법께서는 여기에 오신 분들의 우두머리이시오?] [아니오. 노부가 어디 그럴 힘이 있겠소? 대공주께서 오늘 일의 주재자이시오.] [대공주라니 어느 분이시오?] 봉황신차의 안에서 금문군이 말을 받았다. [바로 저예요. 성은 금이고 이름은 문군이예요. 거사를 뵙자고 방문했어요.] [대공주가 특별히 노부를 방문했다면 왜 차에서 내리지 않소?] 금문군은 가볍게 웃었다. [거사께서는 그럴 필요가 있으시다고 생각하나요?] [방문할 때의 예의를 모르시오?] [그렇다면 거사께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거야 낭자가 예의를 아는지 모르는지에 달렸지요.] 향차의 휘장이 올려지며 금문군이 내려왔다. 그녀는 여전히 자의를 입었으며 가벼운 망사로 얼굴을 가렸다. [거사의 말솜씨는 대단히 날카롭군요. 과연 당대 무림의 뛰어난 고인다우세요.간단한 두 마디 말로 저를 차에서 내리게 하시니 말이에요.] 소요거사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바로 낭자가 예의가 바른 때문이오. 그리고 고심한 수련을 닦은 무림의 일대기녀(一大奇女)라는걸 중명하는것이기도 하오.] [거사의 그 말씀은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비웃고 있는게 아니세요?] 소요거사는 정색을 했다. [노부의 말은 모두 폐부에서 우러난 것이지 조금도 비웃는 말이 아니오.] 금문군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시다면 거사의 칭찬에 감사해요.] [낭자. 너무 겸손하시오.헌데 낭자께서 이렇게 오신 것은 노부의 회답을 받자는 것이오?] [당대 무림의 고명하신 고인앞에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어요.거사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왔어요.] [귀교주께서 직접 오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오?] [교주께서는 다른 일이 있어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그래서 특별히 제가 대신 왔어요.] [귀교주는 진실로 노부를 성의있게 대하려는 것이오?] [교주께선 인재를 구하고 계시지요.만일 거사께서 건곤령의 임명을 받아 본교의 참기선생(參機先生)직을 맡겠다고 허락만 하신다면교주께선 선생을 보다 더 성의있게 대할 거예요.] 소요거사는 갑자기 냉랭하게 소리쳤다. [그것은 귀교주가 직접 오셔서 의논하라고 하시오.] [만약 교주께서 직접 오신다면 수락하시겠어요?] [그야 지금 결정할 수 없지요.귀교주와 의논한 후에 결정을 지어도 늦지 않으니까.] 금문군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거사의 뜻은 교주가 어떤 분인지 확인한 다음에야 결정하시 겠다는 것인가요?] [확실히 낭자는 지혜가 대단히 뛰어나시구료.] [칭찬해 주심에 감사드리겠어요.제게 보잘것 없는 소견이 있는데 받아 주시겠어요?] [어떤 고견이오?] [거사께서 본교에 일차 왕림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거예요.] 소요거사는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낭자의 고견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소.] [거사께선 데가 딴 뜻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시나요?] [낭자,용서하시오. 노부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만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소.] 금문군은 가볍게 웃었다. [거사께서 만일을 생각한다는 말을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지는 않겠어요. 그러나 거사께서는 당대 무림의 제일지자(第一智者)이십니다. 제가 거사께 무력을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처음부터완강하게 나왔지 이런 심기로써 거사를 모셔가려고 하지는 않았을거예요.] [노부가 낭자의 고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강제로 데려갈 생각이시오?] [저는 다만 거사께서 도리를 알아달라는 것이지 강제로 거사를 데려가겠다는 뜻은 아니예요.] [그렇다면 노부가 괜한 의심을 했구료.] [그렇지요.] 소요거사는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낭자의 말씀을 들어보니 재질만 출중할 뿐 아니라 기녀중의 기녀라 남자들도 따르지 못하는 호기가 넘쳐 흐르는 군요. 낭자께서 노부에게 보증을 하겠다는 승낙을 해 주시겠소?] 금문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사께선 무슨 보증을 하라는 거예요?] [노부는 낭자와 같이 귀교에 가기를 승락하겠소.그러나 만약에 귀교주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노부가 귀교를 안전하게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보증을 해달라는 것이오.] 금문군은 갑자기 질식할 것 같았다. 이것은 큰 문제였다. 그녀는 소요거사가 갑자기 이러한 문제를 제시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가 비록 지혜와 기지가 제아무리 뛰어난 절세의 기녀라 할지라도 잠시동안은 퍽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지를 몰라서 당황했다. 금문군은 곧 대답을 하지 않고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사께서 저를 이렇게 높이 평가해 주시니 저도 거사의 신임에 어긋남이 없게 하기 위해서 거사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승낙하겠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말이오?] [그래요. 어떤 상황 아래서도 거사의 안전을 책임지겠어요.] 소요거사는 곧 정색을 하고 포권의 예를 취했다. [낭자의 호의에 감사드리는 바이오.] 금문군은 손을 내저었다. [거사는 너무 겸손하실 것 없어요.] [오늘은 날도 이미 저물었으니 비록 누추하지만 저의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떠나시는 것이 어떻소?] [그것도 괜찮겠군요. 그러시다면 거사께 폐를 끼치기로 하겠어요.] 삼경(三更). 주위는 칠흙같이 어두웠고, 소요장은 깊은 정적속에 잠겨 있었다. 소요거사의 서재는 후원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 서재의 지하 밀실에는 지금 세 가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중앙에 있는 사람은 소요거사 담백우였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총관인 철장생사판 한송이었다. 헌데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요거사의 왼편에 앉아 있는 사람 또한 소요거사가 아닌가? 소요거사가 어찌 두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두 사람중 한 사람은 가짜일 것이고 한 사람만이 진짜일 것이다. 그러면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란 말인가? 중앙은 주인석이고 왼편은 객석이니 분명히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이 진짜 소요거사일 것이며 왼편에 있는 사람이 가짜일 것이다. 주인석에 있는 소요거사가 가벼운 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총관, 바깥 동정은 어떠한가? 모두 잠이 들었나?] 한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앞뒤엔 경계가 매우 삼엄합니다.] 객석에 앉아있는 소요거사가 말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오. 금문군의 신분은 건곤교의 대공주 이며 권세 또한 높아서 건곤교주 다음이오.] 진짜 소요거사가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건곤교에 같이 가겠다고 승낙하였겠소?] 한송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귀하의 거동이 너무나 위험한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짜 소요거사는 미미하게 웃었다. [내 거동이 매우 위험한 모험이긴 하지만 속담에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건곤교주가 누구인지 어찌 탐지해 낼 수 있겠소?] [귀하는 금문군이 말로 보증하는 것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한형께서 염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금문군은 말로만 보증하는 가벼운 사람은 아닐 것이오.] [그렇지만 난처한 입장에 처해 그녀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가짜 소요거사는 눈빛을 빛냈다. [그것도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오. 가령 정말로 그런 일이 성립된다면 큰 소리가 아니라 건곤교가 비록 동(銅)과 쇠(鐵)로 만들어진 금성철벽(金城鐵壁)이라 하더라도 나를 가두지는 못할 것이오.] [너무 지나친 자신이 아니오?] [한형은 믿지 못하겠소?] [솔직히 그 말을 맏을 수가 없구려.] 가짜 소요거사는 담담하게 웃었다. [한형을 업신여기는게 아니라 내가 터득한 무공으로 말한다면 한형은 나의 일초의 적수도 안될 것이오. 한형이 믿을 수 없다면 한 번 시험해 보시구려.] 이 말은 너무도 지나친 광언이었다. 한송도 이름이 나 있는 무림의 일류고수이니 이 말을 듣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때 진짜 소요거사가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어 한송을 준엄히 나무랐다. [한송은 무례한 짓을 삼가라.] 한송은 꾸지람을 듣자 입을 다물었다. 진짜 소요거사는 가짜 소요거사를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노제는 속인이 아니니 도와줘서 고맙다는 속세의 말은 하지 않겠소. 그러나 노제는 당대 무림의 어느 고인이신지 숨기지 말고 알려주시오.] 가짜 소요거사는 미소를 머금은채 고개를 저었다. [장주. 용서하시오.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충이 있소.] 진짜 소요거사는 고충이 있다는 말을 듣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후에 진짜 소요거사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노제는 건곤교의 총단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소문에 의하면 황산 연화봉 아래의 산속에 있다고 하오.] [노제는 모험을 해가면서 건곤교 총단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뜻이 무엇이오?] [건곤교주가 대체 어떤 자인지 알고 싶은 것과.....꼭 구해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친한 사람이 건곤교에 잡혀 있기라도 한단 말이오?] [그렇소.]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가짜 소요거사는 고소를 머금었다. [미안하오. 그것도 알려 줄 수가 없군요.] 진짜 소요거사는 의혹을 느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가짜 소요거사는 빙그레 웃고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장주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오?] 진짜 소요거사는 뜻밖의 질문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잠시 어리둥절 했다. [어떤 작정을 말하시오?] [장주께선 앞으로 계속 이곳에서 거처하실 수 있을 것 같소?] 진짜 소요거사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왜 이곳에서 계속 거처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건곤교에 가면 어떤일이 있더라도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오. 오래 있어야 열흘이나 보름 후에 그곳을 떠날 것이오. 금문군이 비록 나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승낙은 했지만 건곤교주는 가볍게 놓아 주지 않을 것이오. 틀림없이 수하들을 시켜 이곳까지 미행해 올 것이니장주께서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겠소?] 그제서야 진짜 소요거사는 비로소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노부는 빨리 거처를 옮기는게 상책이겠군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장주께선 잠시동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제일 좋은 상책일 것 같소.] [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어디로 옮겨야 한다는 말인가요?] 가짜 소요거사는 마치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안전한 장소를 알고 있는데 장주께서 그곳을 가실지........] [그곳이 어디요?] [개봉에 있는 개방총타요.] [노제는 개방과 친한 사이요?] [그건 차차 알게 될 것이오. 지금쯤 화산장문인인 일자매화검 매지환도 개방총타에서 개방방주와 함께 건곤교를 섬멸할 계획을 논의하고 있을 거요. 장주께서 그곳으로 가시면 탁월한 지략을 발휘하여 주시오. 그 건곤교의 세력이 비록 방대하고 막강하다지만 개방과 화산등 무림 각파의 실력과 장주의 지혜가 합쳐지면 능히 뵹해낼 수 있을 거요.] 진짜 소요거사는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노제는 그들이 노부의 말을 들을 것으로 생각하시오?] [아마 들을 것이오.] [그들이 듣지 않으리라 생각되는군요.] 가짜 소요거사는 이 문제는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장주께선 개방총타로 가서 잠시만 머무르시겠소?] 진짜 소요거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노부는 싫지 않으나 개방방주가 날 싫어하면 어떻게 하오?] [장주께서 잠시 그곳에 머무르시겠다면 내가 소개서를 써 주겠소. 그러면 개방방주도 거절하진 않을 거요.] [노제가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니 어찌 마다 하겠소?] 가짜 소요거사는 웃음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한송을 돌아보았다. [한형, 수고스럽겠지만 붓, 벼루, 먹과 종이를 갖다 주시겠소?] 한송은 아무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종이등을 가져왔다. 가짜 소요거사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께서는 잠시 조용히 앉아 운기조식을 하시오.] 두 사람은 즉시 그 말 뜻을 알아듣고 가짜 소요거사를 힐끔 쳐다보고는 눈을 감고 조식을 취했다. 두 사람은 비록 눈은 감았지만 도저히 편안히 운기조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마음은 경의와 미혹에 충만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가짜 소요거사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고, 그 의 한마디 한 마디가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다. 짐시후.... 가짜 소요거사는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고 밀봉하여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눈만 감고 있는 것을 아는 듯 말했다. [두 분은 눈을 뜨시오.] 두 사람은눈을 뜨고 바라보니 탁자위에 놓인 봉투의 겉봉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개봉방주 친전> 한송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편지 봉투에는 서명을 하지 않으시오?] 가짜 소요거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형께서 개방총타에 도착하시면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그는 잠시 주위를 살핀 후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일찍 금소저와 내가 떠난 후 장주와 한형은 곧장 장중의 사람들을 해산 시킨 후에 개봉으로 떠나시오. 지금은 밤도 이슥했으니 이제 휴식을 취하지요.] 아침 안개가 자욱한고 동이 틀 무렵. 가짜 소요거사는 봉황신차 일행과 함께 총관 철장생사판 한송의 환송아래 소요장을 출발했다. 제 34장 호로곡 황산! 그 위치로 말하면 안휘성 검현에서는 동북쪽이며 태평현에서 바라보면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태평현과 휴영현 사이에 있으며 검산이라고도 한다. 산 높이는 수천 길. 기봉준령들은 우뚝 우뚝 구름을 뚫고 사시사철 백설을 덮어쓴 채 솟아 있었다. 거기에 깍아세운듯한 석벽이며, 수 백길이 넘는 단애들이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었다. 황산의 주봉은 천도봉이며 양 옆으로 광명정과 연화봉이 호위하듯 우뚝 서 있었다. 소요장을 떠난 후 오일째 되는 미시경. 봉황신차 일행은 황산의 옥녀봉 아래에 있는 이름모를 계곡에 당도했다. 계곡의 폭은 유달리 좁아서 봉황신차가 간신히 통과할 정도였다. 좁다란 협도를 따라서 얼마쯤 가자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며 끝없이 늘어선 누각의 지붕들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건곤교의 총타였다. 총타는 산 속에 건립되어 있었지만 궁전,누각,연못,화원 등 갖출 것은 골고루 갖추었다. 궁전누각은 높게 솟아 있었고 벽은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또한 그 주위를 에워싸듯 솟아 있는 누각들은 하나같이 화화롭기 그지 없었다. 그야말로 중원천하에서도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웅장하고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소요거사는 그 웅장한 건축물들을 보고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연 건곤교주는 어떠한 인물이기에 이토록 외진 산속에 이와같은 건축물들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건곤교 총타가 있는 계곡은 호로곡이라 했다. 소요거사는 이 이름이 너무나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이 호로곡의 지형은 마치 술 호로병과 같아서 출구라고는 그들이 들어왔던 좁은 협도뿐이었고 나머지는 천길 만길의 높다란 절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따라서 바깥에서 이 호로곡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협도뿐이며 나갈 수 있는 길도 그 협도뿐이었다. 그 중요성때문에 건곤교에서도 협도의 경비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인 모습이 역력했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고수들은 건곤교주를 호위하는 건곤위대 중에서도 특별히 가르고 뽑은 열 두 명의 절정고수들이었는데 건곤교에서는 그들을 십이추혼수라 불렀다. 호로곡에 들어간 후 금문군은 곧장 봉황신차에서 내려 얼굴을 가렸던 얇은 망사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너무도 아름다운 면목이 드러났다. 호수처럼 맑은 눈과 초생달처럼 가는 눈썹. 곱고 해맑은 얼굴과 까맣고 긴 머리채가 돋보였다. 더구나 수양버들처럼 갸냘픈 몸매가 천상선녀 처럼 부각되었다. 또한 그녀는 독특한 위엄이 있어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금문군이 가는 동안 모든 사람들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이 점만으로 보아도 그녀가 나이는 어리지만 신분과 지위와 권세가 건곤교주에 못지않게 높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금문군이 그날은 소요거사를 건곤교주에게 인사시키지 않았다. 소요거사도 언제 인사를 시키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빈관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초경. 소요거사는 목욕을 끝내고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이때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소요거사는 점잖은 음성으로 말했다. [들어오시오.] 문을 열고 두 명의 궁장시녀가 들어왔다. 그녀들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꾀꼬리같은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공주께서 손님을 후궁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읍니다.] 소요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스럽지만 길을 안내해 주시오.] 두명의 시녀는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앞장 섰다. 소요거사는 뒤를 따랐다. 후궁은 호로곡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았으나 궁이란 칭호에 걸맞게 아름다우면서도 화려했다. 후궁의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들은 그를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에는 이미 산해진미로 차려놓은 주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소요거사는 서재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방안이 훤해짐을 느꼈다. 서재의 중앙에는 금문군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목욕을 한 후 연한 남삼을 입고 눈썹만 엷게 그렸고 얼굴에 지분은 바르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더욱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소요거사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넋을 잃고 황홀감에 도취한 듯 하자 금문군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거사는 처음으로 본교에 왕림하셨으며 외인으로는 이 호로곡에 처음으로 찾아오신 귀빈입니다. 그리고 거사께서 먼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 터이니 좀 위로해 드릴까 하고 조촐한 주안상이나마 마련했어요. 너무 초라하다고 비웃지 마세요.] 소요거사는 암암리에 한숨을 몰아쉬고 곧 포권을 취했다. [원 천만에 말씀을 다하시오. 낭자가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노부가 송구스러워지는 군요.] 금문군은 방긋 웃으며 백옥같이 하얗고 보드라운 손을 들어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감사하오.] 두사람은 주석과 객석에 앉았다. 그러자 녹의시녀가 두 사람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공손히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서 있었다. 금문군은 술잔을 들어 소요거사를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 술은 천년명주는 아니지만 맛은 괜찮은 편이니 어서 한 잔 드세요.] 소요거사도 술잔을 들고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감사하오.]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순식간에 쭉 들이켰다. 그러자 녹의시녀가 다시 조심스레 술잔에 술을 따랐다. 두 사람이 요리맛도 보고 서너 순배 둘자 금문군은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좌우에 시립해 있는 시녀들을 향해 말을 했다.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거라.] 시립한 시녀들은 허리를 공손히 굽혀 예를 올리고 아무 말 없이 물러갔다. 녹의시녀만이 술잔에 눈길을 주며 서 있었다. 금문군은 시녀에게 명령했다. [너는 밖으로 나가서 누구도 얼씬 거리지 않도록 지켜라.] [예.] 녹의시녀는 즉시 고개를 숙이고는 서재밖으로 나갔다. 소요거사는 금문군이 시녀를 모두 밖으로 내보내자 의아한 눈빛으로 금문군을 응시했다. 금문군의 아름다운 얼굴이 엄숙해졌다. 그녀는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담이 크시군요.] 소요거사는 깜짝 놀라 내심으로 아차했으나 겉으로는 짐짓 의아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건네 보았다. [낭자의 말은 무슨 뜻이오?] 그러자 금문군이 눈을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정말 시치미를 떼시겠어요?] 소요거사는 내심으로 당황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낭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금문군은 싸늘한 눈빛을 발했다. [정말 시치미를 떼시긴가요? 그렇다면 담백우는 지금 어디 있지요?] [낭자. 노부가 바로 담백우 아니오?] [귀하의 정체를 제가 말해야 옳단 말인가요?] [낭자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금문군이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임백령이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는 더 이상 부인할 수가 없어서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낭자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소?] [당신의 역용술이 고명하다고 해도 내 눈을 속일 순 없어요.] [허허.....낭자는 정말 고명하시오.헌데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면 어찌 이곳으로 데려왔소?] [나는 당신이 소요거사로 번장하여 이곳에 온 목적을 알고 싶었지요.] [그렇다면 낭자는 노부의 신분을 지금 간파한 것이군요.] [나는 당신의 용심을 추측했어요.] [낭자는 당대의 재녀이시고 재질이 출중한신 분이니 낭자의 추측이 틀림없소.]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것이니 적중하리라곤 장담할 수 없어요.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두가지뜻이 있을 거예요.하나는 교주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자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곳의 지형을 탐지하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금문군의 지혜는 과연 총명했다. 육청운의 용심을 반쯤은 꿰뚫은 것이다. 육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허허허.....낭자의 추측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않소. 노부의 용심은 바로 그것이었소.] [흥! 아직도 노부라고 자칭하나요? 부끄러운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말인가요?] [지금 나의 연령과 용모로는 노부라는 말이 적합하오.] [나의 서재에서만은 그럴 필요가 없어요.] [모든 일을 조심스레 해야 하오.] [나의 이 후궁은 독립된 건물이니 조금도 걱정마세요.] 육청운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노부가 나라고 개칭하면 어떻겠소?] 금문군은 맑은 눈을 깜박이며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교내로 들어온 목적이 이것 뿐인가요?] [낭자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내 생각으론 더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알아 맞춰 보시오.] [당신 스스로 말씀 하세요.] [낭자께서 나의 목숨을 보장애 준다는 사실은 변함없겠소?] [나는 비록 남아대장부는 아니지만 일언이 중천금이라는 말은 알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당신과 적이 된다 할지라도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며 당신이 안전하게 본교를 떠나도록 할 거예요.] [낭자의 호기는 장부도 따르지 못하겠구료.] [세속적인 말은 그만하시고 당신의 목적이나 말씀해 주세요.] [낭자의 명을 받들어 모시겠소. 나의 또 다른 목적은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오.] [어떤 사람이요?] [낭자가 동관에서 납치했던 개방의 후개 진반천이오.] 금문군은 눈을 크게 뜨고 얼굴에는 경악의 빛을 띠었다. [그 일까지도 아시나요?] 육청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원래 처음부터 낭자의 뒤를 뒤쫓았던 것은 진반천이 실종된 경위를 알기 위해서였소. 그가 지금 어디에 구금되어 있는지 말해줄 수 있겠소?] [그를 구출할 생각 인가요?] [그렇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모험을 하는 거요.] 금문군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진반천은 당신의 친구인가요?]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오.] [그런데 왜 그를 위해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는 건가요?] [무림의 정의를 위해서요. 또한 친한 친구의 부탁도 받았소.] [당신의 친구는 누구인가요?] [낭자. 용서하시오 . 그건 밝힐 수가 없구료.] [왜요? 당신은 나를 맏지 못하나요?] [그건 절대 아니오. 나는 이미 낭자의 사람됨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소. 단지 그 친구의 당부를 받았기 때문이오.] [당부라고요?] [그렇소 .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이름을 남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것이었소. 나는 그와의 약속을 어길 수가 없구료. 그런데 낭자는 무엇 때문에 그런 일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거요?] 금문군은 천천히 말했다. [조그만 것이라도 당신을 돕고 싶어서지요. 그리고 당신이 위험속에 아무렇게나 뛰어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육청운은 눈에 광채를 발했다. [낭자의 성정에 충심으로 감사하는 바이오.] [당신은 내 도움이 싫은가요?] [허허허......낭자는 어떻게 도울 생각이오?] [기회를 보아서 그를 구출하겠어요.] [그것은 너무도 위험하오. 이 일을 귀교주께서 아시게 된다면 낭자는 엄한 처벌을 받으니 심려스러워 낭자의 도움을 받고싶지 않소.] 이 말은 거절하는 말 같았으나 실은 그녀를 염려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금문군이 발각되어 처벌을 당한다 할지라도 상관없는 일인지라 쾌히 응낙했을 텐데 무엇때문에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겠는가? 그러나 육청운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도 있었다. 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더욱이 단 두번 밖에 만나지 못한 낭자에게서 이 이상의 호의를 받아 들이가가 내키지 않았다. 또한 그녀에게 모험을 시킬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강호무림의 제일고수이니 무림제일의 기협이니 하는 말이 육청운에게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육청운이 거절하는 이유를 금문군은 즉시 직감하고 방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점에 대해선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기회를 보아서 구출하겠다는 말은 제가 직접 모험을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기회를 보아서 저의 의부를 설득시켜 그분 자신이 직접 진반천을 석방하게끔 한다는 뜻이예요.] 육청운은 그녀의 얼굴을 주시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낭자는 낭자의 의부를 설득할 자신이 있소?] 금문군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한번 시험해 보겠어요.] [시험해 보겠다구요? 그건 찬성할 수 없소. 건곤교주가 만일 승낙을 하지 않고 다른 의심을 품게 된다면 그 다음의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오.] [그건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제게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설득하는 방법이 있으니 설혹 그분께서 승낙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분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만들겠어요.] 육청운은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머리를 돌렸다. [낭자는 무엇때문에 이렇게까지 나를 도우려고 하시오?] 돌연한 질문에 금문군은 일순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의 의부와 당신을 위해서 입니다.] 육청운의 얼굴에 알 수 없다는 빛이 스쳐갔다. [낭자의 의부를 위해서라면 수긍이 가지만 나를 위해서라면 어딘가..] 그가 말끝을 흐리자 금문군은 연연하게 그를 주시하며 애원의 눈빛을 띄웠다. [당신은 믿지 못하시겠어요?] [믿지 못하는게 아니오. 낭자는 도대체 나의 무엇을 위한다는 것이오?] [저는 당신과 저의 의부 사이에 적대관계가 맺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예요. 이렇게 말하는 제 뜻을 아시겠어요?] [아하! 낭자의 뜻을 알겠소이다.낭자는 그런 수단으로 나를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지요?] 금문군은 분한 듯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세요? 이건 저의 호의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하나요?] 육청운은 담담히 웃으며 무거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낭자의 호의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오. 그러나 나는 그 호의를 받아 들일 수가 없소.] [왜 없다는 말씀이세요?] [나는 타고난 성격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남에게 은혜를 입기 싫어하오] 금문군의 얼굴에 짙은 구름이 덮이는 듯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저의 의부와 꼭 적대관계를 맺겠다는 말인가요?] [낭자!그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낭자의 의부에게 달려있소] [저의 의부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낭자의 의부는 지금 당장 구금되어있는 진반천을 풀어주고 발동했던 살인첩을 취소시키고 무림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면 되오.] [아....당신은 살인첩도 알고 있군요.] 금문군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본래 그녀는 진반천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육청운이 품고 있는 적의를 해소시키려고 했는데 상대방은 이미 자기의 의부가 무림을 제패하기 위해서 강호무림의 최고 고수인 일검이괴를 제거하려는 살인첩을 발동한 것까지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한동안 잠자코 육청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힘없이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이미 저의 의부와 적대관계를 맺겠다는 결심을 하셨군요?] 금문군의 애소하는 듯한 표정을 바라보며 육청운은 힘있게 대답했다. [낭자! 무림인이 무림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오. 나도 무림인의 한 사람인데 낭자의 의부가 천하 무림을 손아귀에 쥐어 공공연히 무림의 주인으로 군림하려는데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소?] 금문군은 진정이 어린 눈으로 다시 말을 받았다. [당신은 제가 진심으로 권하는 충고를 받아들이겠어요?] 육청운은 고소를 머금었다. [낭자는 나에게 낭자의 의부와 대적하지 말라는 말 밖에 더하겠소?] [맞아요. 저의 의부와 건곤교에는 절정고수들이 수없이 많아요. 만일 당신이 적대행위를 한다면 조금도 유리한 일은 없으리라 믿어요.] 육청운의 얼굴에 소리없는 웃음이 스쳐갔다. [낭자의 충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결정을 한지 오래라 비록 건곤교내에 고수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고 모두가 다 범처럼 무섭고 위맹스럽다 해도 나는 호랑이의 밥이 되는 한이 있어도 수염을 뽑아봐야 겠소.] 금문군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의 심장은 쇳덩이로 만들어 졌나요?] [하하..나는 미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쇠로 만든 심장만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또한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정의심도 가지고 있소이다.] 태연한 대답에 금문군은 길게 탄식을 토해냈다. [그만둬요. 이 이야기는 그만 둬야겠어요.] 그녀는 어설프게 웃으며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들었다. [자! 또 드시지 않겠어요?] 육청운도 말없이 웃음을 띤 채술잔을 들어 잔숨에 쭈욱 들이켰다. 이윽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술과 안주를 먹었다.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제일가는 기재일 뿐 아니라 도량이 매우 넓은 미인이요, 천하의 영웅인지라 이 문제에서 화제를 돌리자 즉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삼경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육청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두 명의 궁장시녀가 달려와 그를 빈관으로 안내했다. 육청운은 속으로 빈관에서 적어도 사오일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금문군은 그 다음날 오후 사람을 시켜 건곤교주를 만나보라고 청했다. 그를 건곤교주에게 안내하기 위해 온 사람은 금의를 걸친 당당한 체구의 청년무사였다. 청년무사의 복장은 몹시 특이했는데 일신에는 호화찬란한 금의를 걸쳤고, 한 자루 금도를 앞가슴에 차고 있었다. 칼을 허리춤이나 등에 매고 있는 사람은 있으나 이렇게 앞가슴에 차고 있는 사람은 무림에서 흔치 않았다. 나중에야 육청운은 이 금의 청년무사가 건곤교주를 호위하는 건곤위대의 건곤위사중 한 명임을 알 수 있었다. 금의 청년무사는 그를 호로곡의 깊숙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가는 도중 건곤위사가 안내한 때문인지 조금도 검문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허나 육청운은 그들이 지나온 길에 아주 철저한 매복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매복은 은밀하면서도 하나같이 절정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어 육청운이 아닌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이었다. 빈관에서 일각쯤 걸어가자 중앙에 한 채의 웅장한 누각이 나타났다. 그 누각은 모두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에 용사비등한 글씨가 금빛으로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건곤지존궁> 이곳이 바로 건곤교주가 거처하는 건곤지존궁이었다. 건곤교 사람들은 줄여서 그냥 지존궁이라고 불렀다. 지존궁의 앞에는 네명의 금의무사들이 우뚝 서 있었다. 육청운을 안내했던 청년무사는 그들중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금의무사에게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다. [이분은 소요거사이신데 교주님을 배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금의무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육청운의 전신을 쓸어보았다. 육청운은 그 준빛이 마치 독사의 그것처럼 예리하다고 생각했다. 금의무사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들어가라. 교주님과 대공주님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시다.] [알겠습니다.] 청년무사는 다시 육청운을 안내해서 지존궁 안으로 들어갔다. 지존궁의 내부는 밖에서 볼때보다 한결 웅장하고 화려했다. 육청운 또한 이처럼 호화스런 건물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주위에 있는 아름드리 기둥은 모두 묘강의 홍옥수를 깎아 만든 것이었고, 천정에는 일장 마다 주먹만한 야명주가 박혀 있어 항상 대낮같이 환했다. 바닥은 운남의 특산인 백석옥이었고, 주위의 벽에는 진귀한 명화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육청운은 일부러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청년무사를 따랐다. 다시 하나의 거대한 대청에 다다르자 청년무사는 중앙을 향해 부복했다. [소요거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그러자 호화로운 대청의 중앙에서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거사를 들여 보내고 물러가라.] [존명을 받들겠습니다.] 청년무사는 더이상 공경할 수 없을만큼 정중하게 대례를 올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갔다. [들어가십시오.] 육청운은 청년무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심호홉을 하고는 천천히 대청으로 들어갔다. <제 4권 끝> 제 35 장 一代梟雄巨擘 제 36 장 幽靈谷 제 37 장 鬼諸葛 句會會 제 38 장 봉변당하는 鬼諸葛 제 39 장 哮天狐 제 40 장 惡人의 最後 제 41 장 美女의 수난 제 42 장 幽靈谷으로 제 43 장 세 개의 關門 제 35장 일대효웅거벽 대청의 중앙에는 크고 호화로운 금색 태사의가 있었다. 태사의 위에는 금빛의 편복(便服)을 입고 금사(金絲)로 복면을 한 당당한 체구의 인물이 앉아 있었고 금사복면인의 맞은편에는 금문군이 자의 궁장차림을 한 채 그린 듯 고요하게 앉아서 들어오는 육청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금사복면인이 앉아있는 태사의 뒤쪽 양 옆으로는 여덟 명의 건곤위사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육청운은 한 눈에 중앙에 앉아 있는 금사복면인이 신비로 점철된 건곤교주임을 알고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건곤교주는 점잖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앉으시오!"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거역할 수 없는 위엄과 패기(覇氣)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육청운은 겸손을 보이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호피 의자에 앉았다. 그가 앉은 자리는 금문군과 비스듬히 마주보는 위치였다. 잠깐동안의 침묵이 흐른뒤 건곤교주는 비로소 침묵을 깨뜨렸다. "군아(君兒)의 말을 들으니 거사께서는 본좌(本座)와 만나 얘기를 하고 싶다던데......." 육청운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노부에게는 많은 의문이 있으니 자세히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건곤교주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거사께서는 어떤 의문이 계신지 서슴치 말고 얘기하시오." 육청운은 약간 긴장된 모습으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 노부가 묻기전에 교주께서는 제게 진면목을 보여주실 수 없겠습니까?" "거사의 의견에 따르겠소." 건곤교주는 담담하게 말한 후 금사의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누에가 가로 누워 있는 것 같은 굵은 눈썹에 광채가 번쩍이는 눈동자 그리고 뾰족한 코에 점잖은 얼굴이 나타났다. 나이는 대략 오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실로 당댐]聆玖庸??준수한 용모를 지닌 초로(初老)의 노인이었다. 육청운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건곤교주는 가벼운 웃음을 던지며 말을 꺼냈다. "자. 이제 거사께선 본좌의 얼굴을 보았으니 그럼 의문점을 말해보시오." "노부가 묻는 말에 교주께서는 모두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지요. 본좌는 거사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하기로 작정을 했소." "노부의질문에 만약 부당한 점이 있더라도 교주게서는 나무라지 않겠습니까?" 몇번이고 다짐하듯 이야기하는 육청운의 말에 건곤교주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사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본좌는 절대로 탓하지 않겠소." 그의 말투와 어조는 마치 육청운이 이미 건곤교의 수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육청운은 포권을 하며 허리를 굽혔다. "그렇다면 교주께선 노부의 당돌함을 용서하시고 우선 교주의 귀성대명(貴姓大名)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육청운은 속으로 건곤교주가 이 물음에는 필경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본좌의 성은 복성(複姓)으로 서문(西門)이고 이름은 외자로 승(勝)이라 하오." 건곤교주는 즉]떡訃?주저하지 않고 이름을 말했다. 서문승! 이 이름을 육청운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들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육청운은 몰래 미간을 찌푸렸지만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서문교주(西門敎主)이셨군요? 노부는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건곤교주 서문승은 갑자기 호탕하게 껄껄거렸다. "하하하! 소요거사 담백우는 당대무림의 지자거사이신데 어찌 이렇게 속인처럼 행동을 하시오? 서슴치 말고 계속해서 물어보시오." "그렇다면 노부가 여쭙건데 교주께서 사람을 시켜 건곤령을 전달하여 노부를 참기선생으로 임명하셨는데 그것은 명령입니까? 아니면 초빙(招聘)입니까?" 서문승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것은 초빙이오. "그럼 어째서 건곤령을 하달하셨습니까?" 서문승이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건곤령은 본교의 신물(信物)이며 또한 본좌를 대신하기도 하오. 건곤령이 도달하는 곳에는 본좌가 직접 가는 거나 마찬가지요. 본좌가 건곤령을 전달하는 것은 실상 거사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뜻이니 거사는 물리치기 마시기 바라오." 이 말은 매우 듣기 좋은 말이었다. 이것만 보댐]囑捉?건곤교주는 확실히 일대의 거간효웅(巨奸梟雄)이 분명했다. 걘뼁樗?건곤령을 하달한 진정한 용의(用意)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말한 이우가 빈틈이 없었기 때문에 반박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때문에 육청운은 크게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꺼냈다. "아! 그러시다면 노부는 오히려 교주의 성의를 오해하고 있었군요." "본좌의 말은 모두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얘기요. 더구나 거사는 당금 무림의 일류지사(智士)이시니 본좌가 대업(大業)을 이루고자 하는데 거사의 무한한 협조가 필요한데 어찌 성심것 대하지 않겠소?" 서문승의 상대방을 한껏 치켜올리는 말솜씨는 정말 일품이었다. 이 소요거사가 육청운이 변장한 가짜였기에 망정이지 만일 진짜 소요거사 담백우였다면 제아무리 지사라 하더라도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교주께서 이렇게 아껴주시고 믿어주시니 노부는 충심으로 감사하며 또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그러나......" 육청운은 잠시 말끝을 흐리고 슬며시 말머리를 돌렸다. "교주께서 충심으로 노부를 원한다면 그 원대한 대업의 전망과 종지(宗旨)를 알려주십시?오," "허허허.....거사게선 장말 좋은 질문을 하셨소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거사께서 묻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마땅히 자세하게 알려 드렸을 것이오. 우선 한가지 묻겠는데 거사는 강호상(江湖上)에서의 분쟁과 서로 모략하고 중상하는 일, 그리고 모든 은원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육청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강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비록 뜻있는 사람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한심한 소행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천만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그런 일은 마치 무림의 전통과 패습으로 되어 버린 것이니 달리 말하면 일종의 강호의 고유한 특색이 되어 버렸지요. 그렇지 않다면 강호라 불리울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서문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허허....그렇게 말하시는 것으로 보아 거사께서는 강호의 특색을 언제까지나 지켜나가며 어떤 분쟁이나 유혈사건도 앞으로 영원히 지속해 나가야 한다 그 말씀이시오?" "이 일에 대해서는 무림인들마다 제각기 생각이 다르고 보는 눈이 같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는지는 노부의 좁은 소견으로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허허허.....거사께서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본좌는 진심으로 거사의 고견을 듣고자 하오니 더이상 겸손하시지 말고 노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허심탄회하게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 바라오." 이 말에 육청운은 눈을 빛내며 서문승을 응시했다. "교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노부도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졸렬한 소견이나마 제시해 보겠습니다." 육청운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한번 사방을 훑어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금문군도 한쪽 호피의자에서 말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강호상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원한관계는 자손대대로 물려지지요. 사부에서 제자까지 물려지는 끔찍한 사건일 뿐 아니라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현재 천하무림에서 어느 누가 그것을 제지할 방법이 있으며 또 어느 누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육청운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나 했던 것 처럼 서문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거사의 말씀은 모두 지당하오. 현재 천하 무림인 가운데는 그것을 제지할 만한 방법과 능력을 지닌 사람이 없소. 그러나....." 서문승은 말끝을 흐리고는 이윽고 타는 듯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육청운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거사께 사실대로 말하면 본좌의 대업과 웅심대지(雄心大志)가 바로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참혹한 분쟁과 피비린내가 풍기는 유혈사건을 제지하는데 있소이다." 육청운의 얼굴에 감탄하는 표정이 역력히 나타났다. "교주께서 그런 포부를 지니신데 대해 노부는 충심으로 흠모하는 바이며 또한 천하 강호인들이 바라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돌연 서문승은 다그치듯 물었다. "이제 거사께선 본좌의 대업굉도(大業宏圖)와 웅심대지의 종지(宗旨)를 아셨으니 어떠시오? 본좌의 한쪽 팔이 되어 주시겠소?" 잠시 긴장된 순간이 흘렀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기필코 심삼치 않은 무언가가 벌어질 판이었다. 그러나 육청운은 슬쩍 화제를 돌려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교주께선 어떤 방법으로 그런 대사(大事)를 치루실 작정입니까?" "본좌는 우선 천하무림에서 뜻이 같은 지사(志士)들을 모아 무림맹(武林盟)을 창립할 생각이오. 그런 연후 무림맹에서 순수(巡狩), 영사(令使), 검사(劍士) 등의 직무를 임명하고 조문(條文)을 정하여 천하무림에 선포하는 것이오. 그리고 이 규칙을 엄수?하게 하며 사적(私的)인 원한과 다툼은 금지시키고 일체의 원한과 감정은 한데 묶어 무림맹에서 공정하게 처리하기로 합시다." 서문승은 이미 오래전부터 머리속으로 숙고하고 있었던 듯 조금도 쉬지 않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한 이 법규를 위반하는 자는 무림맹에 대한 반역으로 보고 사람을 보내 그 자를 사로잡아 조문에 정한 규칙에의해 징벌을 하는 것이오. 거사께선 이 방법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육청운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강호는 앞으로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청운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한차례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교주께선 맹주의 직책을 무림의 어느 고인(高人)에게 맡기실 작정입니까?" 서문승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허.......거사가 생각하기엔 누가 적당한 것 같소?" 육청운은 생각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렵습니다. 어려워......맹주라는 직책은 매우 중대한 것이오. 그러니 이 직책의 책임자를 선택하는데는 신중을 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서문승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본좌가 어떻겠소?" 비록 농담처럼 지껄이는 서문승의 말이었으나 육청운은 속으로 냉소를 쳤다. (흥! 드디어 여우의 꼬리를 나타내기 시작하는군....) 그는 이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노부가 생각하기엔 적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갑자기 서문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그렇소? 거사께선 본좌가 천하무림에 이름을 떨칠 고인의 자격이 없다는 말이오?" "그건 아니올시다." "그럼 거사께선 적당치 않다는 이유를 말해 보시오." 육청운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노부가 교주께 우선 한가지 여쭙겠는데 교주의 진의는 천하무림을 위해섭니까? 아니면 교주 자신을 위해서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두가지 다요." 육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싸늘한 눈빛을 던졌다. "그러시다면 교주께서 무림맹을 창설하시려는 취지는 스스로 맹주가 되어 천하무림을 요리하자는데 목적이 있군요?" 서문승의 얼굴에 오만한 미소가 넘쳐 흘렀다. "하하하....본좌가 생각하기에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강호가 온통 피바다가 되건 쑥밭이 되건 본좌와는 상관이 없는 ?일 아니겠소? 또한 본좌가 이렇게 심혈(心血)을 기울여 무림맹을 창립하려 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그러나 노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교주께서는 맹주가 되려는 생각을 버리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대한 계획도 실현될 가망이 어려우리라 믿습니다." "거사의 뜻은 본좌가 맹주의 자리에 앉기로 마음 먹는다면 무림천하가 이에 따르지 않고 반대할 것이라는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당연히 무림의 각대문파에서 맨 먼저 반대하고 나서지 않겠습니까?" 서문승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날카롭게 뿜어나왔다. "그들이 감히 그럴 수가 있겠소?" "노부가 생각하기엔 그들이 그러지 못할 것도 없다고 판단됩니다. 무림 각대문파의 세력은 비록 예전같지 않으나 여전히 막강하여 쉽사리 쓰러지지 않습니다. 교주께서 아무리 높은 포부를 지녔다 해도 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일을 성취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돌연 서문승이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거사의 말씀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본좌에겐 이미 그들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게 하는 계책이 마련되어 있소이다." 육청운은 잠시 댐]ジ?껌벅이고 있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노부가 삼가 여쭙겠소이다만 교주의 그 계책이란 어떤 것입니까?" 서문승은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흐....아직 시기가 이르고 극히 귀중한 기밀이니 누설할 수는 없소." 육청운은 슬쩍 미간을 찌푸려 보았다. " 교주께선 노부가 비밀을 지키지 않을까 두려워 하십니까?" 서문승은 구태여 부인하려 하지 않았다. "본좌는 거사를 철썩같인 믿지만 본좌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일에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소." 육청운이 어찌 이 비꼬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랴? 그는 탐탁치 않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그렇다면 노부는 일단 물러가겠습니다." 순간 서문승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적의가 떠오르더니 이내 다시 부드럽게 변했다. "허어.....거사는 화가 나셨소?" 육청운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조금도 타협할 여지가 없으니 노부도 별 수 없소이다." 서문승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번졌다. [허허.....본좌가 만일을 위해서하고 했기 때문이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거사께선 본좌가 조금도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노부는 남에게 기만을 당하기 싫습니다. 더욱 남에게 모욕과 농락을 당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거사는 너무 다급하게 결정을 내리지 마시고 우선 자리에 앉으시오. 본좌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눌게 있소이다.] 서문승은 만면에 위엄을 띄고 압박감을 주는 눈빛으로 육청운을 응시했다. 실상 육청운의 본심은 이대로 돌아갈 심산은 아니었고, 다만 짐짓 한번 연극을 해본 것에 불과했다. 육청운은 한동안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마지못한 듯 자리에 앉으며 쌀쌀하게 말했다. [교주께서는 아직 무슨 말씀이 계시오?] [있지 않으면 무엇하러 도로 앉으라고 하겠소? 그런데 거사는 본좌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진담을 듣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거짓말을 듣고 싶습니까?] 서문승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거짓말이라면 어떤 거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왜 진담을 먼저 묻지 않고 거짓말부터 들으려 할까? 육청운은 잠시 생각을 하고 위엄있게 시선을 들었다. [교주의 재지는 정말 감탄할 정도이시니 머지않아 장래에 건곤교는 천하에 위세를 떨치게 되고 교주의 대명도 천하를 뒤흔들게 될 것입니다.] 서문승은 담담하게 웃었다. [다음은 짐담을 ?들어 봅시다.] [진담은 하기 매우 거북한 말이어서 교주께서 들으신다면 필경 대노하실테니 그만두겠소이다.] [아니, 괜찮소. 본좌의 성격은 남들과 달라서 그 말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비록 귀에 거슬리더라도 본좌는 참겠소이다.] 육청운의 시선은 줄곧 서문승의 표정을 더듬었다. [조금도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어찌 화를 내겠소? 속담에 충언은 귀에 거슬리고 양약은 입에 쓰다는 말을 본좌는 잘 알고 있으니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육청운의 입가에 보일 듯 말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교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럼 노부가 말하겠습니다. 노부의 진담은 다만 여섯 글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육청운은 힘있게 말을 꺼냈다. [일대효웅거벽 이오.] 이 일대효웅거벽이란 뜻은 학식이 풍부하고 몹시 용맹스러우나 마음이 바르지 못하여 천하를 자기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가진 효웅이란 뜻이다. 지금까지 말없이 이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금문군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이 소요거사가 가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건곤교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가짜 소요거사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건곤교주를 만나려는 의도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결코 건곤교의 수하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군말없이 육청운의 소원대로 그를 건곤교주와 대면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만 가짜 소요거사 임백령이 비록 건곤교의 수하가 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건곤교에 대한 적의만은 감努쳔갬졍?갸냘픈 희망 때문이었다. 금문군은 왜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여자의 모순된 심리였다. 비록 그녀는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줄곧 방망이로 두들기는 것처럼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일은 육청운이 한 마디라도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여 자기의 의부가 격노할 경우 서로의 대립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육청운의 입에서 일대효융거벽이란 말이 떨어지자 그녀는 얼굴빛이 창백해 졌다. 그렇지 않아도 두근거리던 심장은 아예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허나 이 자리에서 입을 열 처지도 되지 않는 그녀는 다만 바싹 가슴을 조일 뿐이었다. 금문군이 이렇게 초조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서문승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달리 안색을 변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사는 당대 무림의 지사이시니 절대 근거없는 말을 하실리는 없고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필경 근거가 있을 것이오. 그건 무엇을 근거로 하신 말씀이오?] [노부는 교주의 말씀 가운데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본좌가 무림맹을 창립하고 난 뒤 아무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내 자신이 맹주 자리에 앉는다고 말했기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교주께서 만일 천하무림에 유아독존으로 군림할 야심이 없다면 왜 무림 각파가 반대하여 들고 일어날 위험도 불사하고 맹주가 되시려고 하겠습니까?] 육청운의 조리있는 말에 서문승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제쳤다. [으하하하.....거사는 과연 당대무림의 제일지사라는 이름에 조금도 손색이 없소. 분명히 그렇소. 본좌가 아무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맹주 자리에 앉겠다고 말한 뜻은 본좌가 바로 천하무림에 군림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오. 본좌는 천하의 제이인자가 되기는 싫소.] 서문승은 한마디로 잘라 자기가 천하의 제일인자가 되겠다고 호언했다. 육청운은 서문승이 이렇듯 태연하게 자기의 야심을 말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곧 정신을 가다듬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교주의 웅심은 더없이 높으며 호기 또한 따를 자가 없습니다. 노부는 진정 탄복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육청운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허나 교주의 이런 웅심도 만일 각대문파의 지지와 찬동을 얻지 못하면 이룩되기가 어렵소이다.] 서문승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본좌는 무림 각파가 전력을 다해 지지하고 협조해 줄것을 믿어 의심치 않소.] [그건 교주께서 이미 각파들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고 명령에 따를 상책을 전달했기 때문입니까?] 서문승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본좌는 이미 수하인들에게 건곤령을 각파에 전달하라고 지시했으니 머지않아 기쁜소식이 오리라 믿소이다.] [만일 각파에서 승낙을 하지 않는다면?] 서문승의 눈가에 싸늘한 살기가 떠올랐다. [흥! 그들이 만약 거역한다면 다만 멸망의 길밖에 없소.] 육청운은 약간 놀라는 기색을 띄고 즉시 소리를 높여 웃었다. [하하하....그렇다면 교주께서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그 상책이 무엇?인가를 알겠습니다.] [거사께서 그걸 아셨다면 어디 말씀해 보시오.] [노부가 교주의 상책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명령에 따르는 자는 살고 교주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죽는다는 거요.] 서문승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나왔다. [크하하하! 거사는 과연 고명하시군요. 거사의 해석은 과연 본좌의 상책과 매우 비슷하오.] 서문승은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웃음을 거두며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이제는 거사께서 본좌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오. 임명을 받아들여 본좌가 대업을 성취하는데 보좌를 해 주시겠소?] 육청운은 잠깐 생각을 한 뒤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만일 노부가 그 호의를 거절한다면?] 서문승의 두 눈에서 싸늘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본좌는 거사를 좌우의 양 팔로 삼아서 거사의 지혜와 계략에 의지해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데....] 육청운은 황급하게 서문승의 말을 가로 막았다. [교주의 재지는 천하에서 따를 자가 없습니다. 또한 심중에 많은 기지를 춤고 있어서 지혜나 기지가 모두 노부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웅대한 계획은 교주 자신이 직접 세우시는 것이 나을텐데 노부가 도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거사의 말씀은 겸손이 아닐는지도 모르나 한번 생각해 보시오. 본좌가 대업을 이룩하려면 천하무림을 상대하여 싸움을 벌려야 하오. 이때 거사께서 본좌를 보좌해 준다면 아무 염려없이 그들과 상대할 수 있소.] [교주께서 염려하시는 점도 매우 당연하기는 하나 작전의 중임은 노부가 담당할 필요가 없소이다.] 서문승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육청운은 천천히 금문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금소저의 재지는 노부보다 훨씬 뛰어났으니 교주께서는 그 중임을 금소저께 일임하십시오.] 서문승은 유쾌한 듯 껄껄거리고 웃었다. [허허허......거사의 말이 맞소. 군아의 재지는 확실히 당대무림의 제일가는 기녀라 할 수 있소. 본좌도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오. 그러나 군아는 본좌 직속의 삼대공주 중의 첫째이니 본좌와 함께 대외적으로 행동을 해야 하므로 이 일까지 담당할 수가 없소이다] [그렇다면.....] 육청운이 다시 입을 열려하자 서문승은 손을 내저어 말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자! 거사는 너무 겸손하지 마시오. 본좌를 보좌할는지의 여부는 좀더 자세히 고려하신 후 본좌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해 주시기를 바라오.] 그러자 육청운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의 예를 취했다. [그러시다면 노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서문승의 놀란 눈이 크게 하늘로 치켜떠졌다. [아니. 거사는 어찌 가신다는 말씀만 하시오?] [예. 노부는 교주의 말씀대로 심사숙고한 후 다시 대답을 올리겠습니다.] [아! 거사의 뜻이 그러시다면 빈관에 돌아가셔서 삼사일 조용히 생각해 보시오.] 육청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닙니다. 노부는 다시 소요장으로 돌아가 약 보름동안 곰곰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서문승의 얼굴이 쓴 약을 마시는 듯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오?] [이 일은 너무도 중대한 일이니 노부는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좌에게 확답을 한 후 돌아가면 안되오?] [노부는 한번 먹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성미입니다.] 이 말에 서문승은 싱긋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거사는 본좌의 권고대로 빈관에서 며칠간 머무르시어 확실한 결정을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믿소.] 육청운의 말투도 냉랭해 졌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문득 서문승의 얼굴에 잔인스런 표즉]ㅐ?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흐흐흐.....본좌의 명령없인 거사가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혔다 해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오.] [그렇다면 교주는 노부를 강제로 붙들어 놓겠다는 말슴인가요?] [사실상 본좌가 거사를 강제로 붙들어 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돌연 육청운은 냉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과연 노부가 예측했던 대로군.] 그는 즉시 금문군에게 눈길을 던졌다. [낭자는 노부에게 뭐라고 말했소?] 이 물음에 금문군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서문승을 쳐다보며 방울을 굴리는 듯 아름다운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아버님은 저의 말을 들어주시겠어요?] 서문승은 금문군을 끔직히 위하는지라 즉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렴! 무슨 말인지 서슴치 말고 해보아라. 너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 줄테니.] 금문군의 방긋 웃는 얼굴에 얄밉도록 깊은 보조개가 패이었다. [고맙습니다. 아버님!] [인사는 그만하고 빨리 말을 해라.] [아버님께서는 소요거사를 소요장으로 돌아가시게 하여 신중하게 생각한 뒤 결정하도록 해주세요.] 서문승은 뜻밖이라는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너는...?.?] 서문승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 나오려 하자 그녀는 황급하게 가로챘다. [아버님. 용서하세요.소요거사께서 이곳에 오시기 전에 그분에게 절대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서문승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너는 무엇을 보장한다고 했느냐?] [네. 저는 소요거사가 별탈없이 소요장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서문승은 금문군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너는 언제나 재지가 뛰어났는데 이번에는 어찌 그런 멍청이 같은 약속을 했느냐?] 서문승의 꾸지람에 금문군은 깊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님. 어찌되었든 소요거사를 돌려보내 드리겠다고 승낙을 하신 뒤 천천히 말씀하기로 해요.] 서문승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진 채 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본교의 비밀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는데 어찌....] [아버님, 그 점은 걱정하실 것 없어요. 소요거사는 당대무림의 재사이신데 결코 가볍게 본교의 기밀을 누설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있게 말하고 동의를 구하는 듯 육청운을 돌아보았다. [그렇죠, 거사님?] 육청운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려다가 금문군을 너무 난처하게 ?만들 것 같아서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노부는 기밀을 누설하지 않습니다.] 서문승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억지를 부리기 전에는 그를 잡아둘 수가 없으리라 판단하고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다. [네가 거사에게 그렇게 말했다니 그럼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이 말이 떨어지자 금문군은 어리광을 부리듯 교태를 지었다. [호호호....아버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에요. 저의 약속을 지키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서문승은 이런 금문군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허어....아버지에게 고마울게 있느냐?] 그러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육청운을 노려보았다. [본좌가 먼저 경고해 두겠거니와 만일 거사께서 본 교의 기밀을 누설한다면 본좌의 마음이 악독하다고 원망하지는 마시오.] [허어....교주께서는 그런 경고를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노부가 길을 개?뒤 만일 교주께서 노부의 목이 필요하시다면 곧 부하들을 시켜 뒤를 쫓게 하십시오.] 서문승은 한 차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거사의 그 솔직 담백한 기백이 본좌의 마음에 들었소이?다.] 이윽고 그는 금문군을 돌아보며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군아야! 아버지는 좀 쉬어煞愍릿?네가 사람을 시켜 이분을 내보내 주어라.] 서문승은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켜 천천히 대청 뒤로 사라졌다. 태사의 양 옆에 서 있던 여덟명의 건곤위사들도 질서 정연하게 그의 뒤로 갈라져 따라갔다. 금문군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는 즉시 육청운에게 속삭였다. [거사! 이제 가십시다.] 육청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왔다. 제 36 장 幽靈谷 지존궁을 나온 금문군은 육청운을 돌아보았다. "지금 바로 떠나시겠어요?" 육청운은 잠시 생각을 기울이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은 날도 이미 저물고 몸도 피곤하니 빈관으로 가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겠소." "그럼 그렇게 하세요." 금문군은 그를 빈관으로 안내한 후 자신은 후궁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금문군은 다시 시녀를 시켜 육청운을 자신의 거처로 청했다. 육청운이 그녀의 서재로 들어서자 그녀는 자색 궁장을 입고 엷은 화장을 한 채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 자태는 마치 천상(天上)의 선녀(仙女)가 하강한 듯 눈부?시게 아름다워 육청운은 마음이 산란해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나직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리에 앉으세요." 육청운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금소저의 옥안(玉顔)을 대하니 노부가 마치 선계(仙界)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억제할 수가 없구료." 금문군의 사슴같은 목덜미가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녀는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며 그윽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너무 짓궂으시군요. 저를 오늘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 허허.... 내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오. 소저는 볼때마다 더욱 아름다워 지시는 것 같소이다." 금문군의 얼굴에는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가득했으나 그렇다고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맑은 두 눈에는 은은한 기쁨의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육청운은 헛기침을 한 번 한후 담담하게 물었다. "헌데 소저께서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무엇이오?" 금문군의 눈빛이 유달리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꼭 이유가 있어야만 당신을 볼 수가 있나요?" "물론 그런 건 아니오. 소저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달려오겠소이다." 육청운은 계면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금문깍]봉?돌연 정색을 했다. "당신은 혹시 구화산(九華山) 깊은 곳에 하나의 아주 은밀한 계곡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육청운은 그녀가 난데없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몰라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안색이 약간 변했다. "소저가 말하는 곳은 혹시 구화산 쌍룡봉(雙龍峰) 아래 있다는 유령곡(幽靈谷)이 아니오?" 그의 음성에는 희미한 경악의 빛이 담겨 있었다. " 그래요. 바로 유령곡이예요." ---유령곡! 유령곡은 당금 무림에서 위세가 대단한 일곡이장삼보(一谷二莊三堡)중 가장 세력이 강한 일곡(一谷)이었다. 유령곡이란 이름이 무림에 퍼진지는 이미 이십 년도 더 되었지만 지금까지 그곳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그 안에 들어가 보았다는 사람도 없었다. 허나 가끔씩 무림에 출도(出道)하는 유령곡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무공을 지닌 절정고수들이어서 그들의 명성은 천하무림에 자자하게 퍼지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무림에 알려진 유령곡의 인물은 강호최고의 고수인 일검이괴삼사사절중 삼사(三邪)의 하나인 유령귀수(幽靈鬼手) 우문환(宇文環)이었는데 그가 유령곡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헌데 금문군이 왜 갑자기 유령곡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육청운은 즉시 물었다. "헌데 그건 왜 물어보시오?" 금문군은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했다. "유령곡에는 모두 세 명의 곡주(谷主)와 다섯 명의 집사(執事), 열 명의 염라(十閻羅). 스물 네 명의 판관(判官)이 있어요. 그들 중 가장 말석(末席)인 판관만 하더라도 강호무림에서는 능히 일류고수로 행세할 수 있고, 세 명의 곡주와 오집사는 가히 절정고수라 할 수 있어요." 육청운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유령귀수 우문환은 세 명의 곡주중 하나요?" 금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삼곡주(三谷主)예요. 그의 무공은 강호무림에서는 최정정이지만 유령곡에는 그보다 무공이 높은 인물이 적어도 세 사람이나 있어요." "그들이 누구요?" "일곡주와 이곡주, 그리고 수석집사(首席執事)예요." "수석집사의 무공이 곡주인 그보다 높단 말이요?" "제가 알기론 그래요. 뿐만 아니라 수석집사는 심기(心機)가 뛰어나고 계략이 많아 실?질적으로 유령곡의 이인자(二人者)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내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거요?" 육청운이 의아한 듯 묻자 금문군은 담담하게 반문했다. "당신은 철골개 진반천의 행방을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요?" 육청운은 그제서야 그녀의 말뜻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그렇다면 진반천은 지금 유령곡에 있단 말이오?" "그래요. 그는 유령곡 내에 있는 곡하곡(谷下谷)이란 곳에 갇혀 있어요." 육청운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소저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소?" "조금전에 유령곡의 수석집사가 이곳에 왔었어요." "그가 무슨 일로?"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는 이곳에 오자 바로 지존궁으로 가서 의부와 밀담을 나누었어요. 저는 조금 늦게 그곳에 갔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다 듣지는 못하고 끝부분만 들었는데 그때 수석집사가 의부께 진반천을 곡하곡이란 곳에 가두었으니 안심하라고 말하더군요." "음....." 육청운은 나직하게 침음했다. 그녀의 말은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호의 초강세력인 유령곡이 이미 건곤교와 손을 잡았거나 아니면 그 휘하에 포섭되었다는 것이었다. 건곤교 하?나만으로도 이미 강호에서 개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상대할 문파(門派)가 없는 실정인데 거기에 유령곡까지 합세한다면 실로 너무도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 진반천마저 그들에게 세뇌되거나 굴복하여 개방을 전복(顚覆)하는 일에 가담한다면 생각하기도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육청운은 사태가 예상보다 더욱 엄중함을 깨닫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금문군은 샛별같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무거운 안색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육청운은 문득 고개를 내렸다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금문군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금문군은 화들짝 놀라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허나 그녀의 가슴은 작은 새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육청운은 어두웠던 표정을 풀고 이내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소저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귀중한 사실을 알려준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금문군의 얼굴에 다시 엷은 홍조가 피어 올랐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 아니예요. 이 일은 제가 도와드리기로 약속한 것이니 감사해 할 필요는 없어요." " 하하..... 소저는 과연 당대무림의 기녀이시오. 헌데 곡하곡이라는 이름이 몹시 특이한데 소저께서는 그곳에 대해 더 알고 계시는 것이 없소?" "저도 처음 듣는 이름이예요. 하지만 유령곡의 중요한 인물들을 붙잡아 족치면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육청운이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눈빛을 빛냈다. "곡하곡이라.....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필시 지하에 있겠군요." "그것은 확실히 모르겠어요." "그 수석집사는 아직도 이곳에 있소?" 금문군은 기녀답게 단번에 그의 속마음을 짐작했다. "당신은 그를 붙잡아 곡하곡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거예요?" "바로 그렇소. 그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는 귀제갈(鬼諸葛) 구회회(句會會)라고 해요. 그는 무공 뿐만 아니라 심기도 깊고 용독(用毒)의 대가(大家)이니 그를 사로잡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육청운은 빙그레 웃었다. "쉬운 일은 나도 별로 재미가 없소." 금문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이런 일을 재미로 하시나요?" "하하..... 그런 건 물론 아니지만 어차피 할 일이라면 재미를 느길 수 있는 일이 더 좋지 않겠?소?" "그럴 듯한 말이군요. 그는 아마 내일 오후에나 이곳을 떠날 거예요. 그의 뒤를 밟는다면 어렵지 않게 유령곡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금문군의 말은 육청운에게 쓸데없는 모험을 하지 말고 구회회를 미행해 유령곡의 소재나 알아두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육청운의 무공을 직접 보았는데도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귀제갈 구회회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허나 육청운은 말없이 담담한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금문군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 알 듯 모를 듯한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정말...... 그런데 당신은 내일 이곳을 벗어나게 되어도 계속 소요거사의 분장을 하고 계실거예요?" 육청운은 그녀가 이렇게 묻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건곤교주가 육청운의 입을 막기 위해 수하들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그에게 호로곡을 빠져나가면 변장을 바꾸라는 암시를 준 것이다. 허나 그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이 분장이 아주 마음에 들어 앞으로 계속 하고 다닐 생각이오." 금문군은 자신도 모르게 아미를 상큼하게 찌?푸렸다. "당신은 절세적인 풍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굳이 그런 흉칙한 면구로 그걸 가리려고 하나요?" "하하..... 소저는 왜 굳이 나에게 변장을 풀으라는 거요?" "그건......" 금문군은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총명한 그녀는 그제서야 육청운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성난 눈초리로 육청운을 노려보다가 쌀쌀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건 당신의 일인데 내가 간섭할 이유가 없군요. 실례했어요. 오늘은 피곤하니 당신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아주 노골적인 축객령(逐客令)이었다. 육청운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소저의 분부대로 따르겠소. 하지만 그 전에 우선 소저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소."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제가 원해서 한 일이니......" "하하..... 소저는 용모만 뛰어난 절세의 미인이 아니라 지혜와 심기가 뛰어나고 게다가 남을 위하는 마음마저 가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기녀 (奇女)중의 기녀이시오." 육청운이 그녀를 잔뜩 치켜세우자 그녀는 화가 눈녹듯 풀어지며 동시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여심(女心)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비록 일대기녀라고는 하지만 은근히 깊숙한 방심(芳心)속에서 연모하고 있던 육청운으로부터 칭찬하는 말을 듣자 무한히 즐거워 하는 것이니 이 점이 여자다운 점이라고나 할까? 육청운은 금문군이 얼굴에 이상한 빛을 띄고 눈을 흘기는 것을 보고 그 역시 마음이 이상해졌다. 금문군은 애정이 담뿍 어린 그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게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소저의 부탁이 무엇인지 어서 말씀하시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거절하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소저. 아직 사례하지 마시오. 나는 아직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승낙도 하지 않았소." "내가 당신에게 요청하는 것은 내 의부를 놓아주고 적대관계를 맺지 말아 달라는 것이예요. 당신은 그것을 승낙하시겠어요?" 육청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안광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지만 조건이 있소." 금문군은 눈썹을 치키며 물었다. "무슨 조건이예요?" "다만 소저의 의부?께서 무림의 패권(覇權)을 잡으려 하지 않고 무림동도를 참살(慘殺)하지만 않는다면 절대로 그분과 적대관계를 맺지 않겠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가 입을 다물었지만 금문군은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미간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말했다. "제 의부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소저의 의부는 소저를 귀여워 하시오?" "그래요. 저의 의부께서는 친자식보다도 더 귀여워 하세요." "그러시다면 소저는 내게 더 이상 말씀하실 필요가 없이 영의부로 하여금 야심(野心)을 버리라고 권유하는 방법이 훨씬 더 효과적일 거요." 이 말은 틀림없이 이치에 합당한 말이었다. 오직 그녀의 의부가 무림의 패권을 잡겠다는 야심만 버린다면 육청운과 적대관계를 맺을 염려도 없는 것이다. 금문군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이치에 합당하지만 제 의부가 저를 귀여워한다고 할지라도 이 일만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소저는 이미 의부께 권유해 보았소?" "아뇨." "소저가 아직 권유를 하지 않았다면 적당한 기회에 한 번 권유하셔도 나쁘진 않을 것이오." " 이것은 시험할 필요조차 없어요. 제 의부가 그런 생각을 한다 해도 능력이 모자라요." 육청운은 눈을 치뜨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금문군의 안색에 어둠이 깃들더니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제 의부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예요." 육청운은 눈을 껌벅이며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 불쌍한 사람......? 영의부께서는 무슨 말못할 고충이라도 있소?" 금문군은 승인도 부인도 않고 묵묵부답인 채 허공을 응시하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 당신은 무림의 기남(奇男)이니 이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시지 않는게 좋을 거예요." 육청운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 금문군은 눈을 깜박이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당돌한 말을하여 당신의 마음을 산란하게 했으니 용서하세요." 육청운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별말씀을 다하시오. 실은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삼가했어야 했지요. 소저의 말씀은 당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이오." 금문군은 생긋 웃고 말았다. "당신의 넓으신 도량에는 진정 감탄할 수밖에 없군요. 이제 당신은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거죠?" 그녀는 육청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온통 갈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육청운은 잠시 생각하다가 정색을 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영의부의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고 승낙하겠소." 금문군은 숙연해지며 감사의 소리를 발했다. "감사해요. 당신의 대덕(大德)을 영원히 가슴에 길이길이 새겨 두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존경하는 뜻을 표하지 육청운은 허리를 굽혀 답례를 하면서 말했다. " 소저, 이러지 마시오. 너무 이러면 감당하기 어렵소." 이어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문군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 가시게요?" 육청운은 빙그레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 하하..... 소저는 피곤하실텐데 그만 쉬시구료. 나는 아직 낯짝이 그리 두껍지 못해서 소저의 분부를 거역하지 못하겠소." 금문군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피어 올랐다. 조금전에 그녀는 분명히 피곤하지 그만 돌아가 달라고 말했었다. 허나 그것은 홧김에 한 소리일뿐 그녀의 본심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언제까지나 그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그것을 겉으로 나타낼 수는 없댐]?일.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저는 내일 당신을 배웅하지 못하겠군요." 육청운은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소. 소저가 그동안 베풀어주신 정분은 결코 잊지 않겠소이다." 그는 곧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금문군은 두 눈에 기이한 빛을 반짝이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 흐음......" 그녀의 탄식소리는 그녀의 심사(心思)를 말해주듯 무겁기 그지 없었다. 제 37 장 鬼諸葛 句會會 다음 날. 육청운은 아침 일찍 빈관을 나섰다. 어제 말한대로 금문군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의 시비 한 명만이 그를 호로곡의 입구까지 안내해 주었다. 호로곡을 빠져나온 육청운은 금문군이 암시를 준대로 변장을 바꾸었다. 육청운 역시 건곤교주 서문승이 금문군과의 약속을 이행시켜 주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호로곡을 내보내준 뒤, 암암리에 부하들을 시켜 자기의 뒤를 추적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육청운은 당대무림의 제일가는 고수(高手)이니 물론 졸개들의 추적을 두려워 했을리는 없었다.? 처음에 육청운은 읿러 변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가 자신을 추적해 오는 서문승의 수하들이 어던 인물들인가를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허나 육청운은 곧 그 마음을 고쳐 먹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달리 꼭 해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 × × 적석평(赤石坪). 적석평은 이름 그대로 붉은 적암(赤岩)들로 이루어진 평평한 암반지대였다. 미시(未時)경. 중천에 떠 있던 햇살이 점차 서산마루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때 돌연 적석평의 입구에 몇 명의 인영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선두에는 칙칙한 흑포를 걸친 비쩍 마른 노인이 걷고 있었고 그 뒤를 흑색 장삼을 걸친 네 명의 중년인들이 호위하듯 따라오고 있었다. 흑포노인은 육순가량 되어 보였는데 눈빛이 음침하고 피부가 유달리 창백해서 왠지 음산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흑포노인과 네 명의 흑삼중년인들이 적석평의 중앙부근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앞에서 십 여장 되는 곳에 하나의 커다란 암석위에 한 명의 인영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는 화의를 입은 청놂]袖潔駭쨉?팔베개를 한 채 아주 편안한 자세로 누워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흑포노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화의청년을 응시하고 있다가 별 이상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흑포노인과 흑삼중년인들은 무표정한 안색으로 묵묵히 걸음을 재촉했다. 헌데 그들이 막 화의청년의 앞을 지나가려 할 때였다. " 이보시오. 노인장! 물어봅시다." 팔베개를 한 채 누워 있던 화의청년이 돌연 반쯤 몸을 일으키며 불쑥 입을 열었다. 흑포노인은 우뚝 멈춰선 채 독사의 눈빛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섬칫한 시선으로 화의청년을 돌아보았다. 화의청년은 제법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는데 흑포노인이 아무대꾸도 없이 묵묵히 자신을 쏘아보고만 있자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 혹시 이 근처에서 제갈귀신(諸葛鬼神)이란 자를 못보셨소?" 흑포노인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 제갈귀신........?" 그의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음성은 마치 지옥의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으시시한 한기를 담고 있었다. 화의청년은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소. 제갈귀신..... 아니, 귀신제갈이던가?" " 귀신제갈?" 갑자기 흑포노인의 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피어 올랐다. 흑포노인은 귀기(鬼氣)어린 눈으로 화의청년을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 혹시 귀제갈이 아닌가?" 화일로는 손뼉을 탁 쳤다. " 맞소. 맞아! 바로 귀제갈이오. 이거 갈수록 정신이 흐리멍텅해지니 큰일났군. 헌데 노인장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소?" 흑포노인의 얼굴에 괴이한 빛이 퍼뜩 스치고 갔다. 허나 그는 이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네." 화의청년은 반색을 하며 급히 물었다. " 아! 그게 정말이오? 그를 어디에서 만났소?" " 그전에 노부가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 자네는 무엇때문에 귀제갈을 찾는가?" 화의청년은 누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으며 빙그레 웃었다. " 미안하오. 노인장, 그건 귀제갈 본인에게만 말할 수 있소." 흑포노인의 시선이 먹이를 본 독사의 그것처럼 예리하게 변했다. " 그럼 말하게. 노부가 바로 귀제갈이니까." 화의청년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 아니 정말 노인장이 귀제갈인지 제갈귀인지 하는 구회회란 말씀이오?" 흑포노인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연 화의청년이 땅이 꺼?져라 탄식을 했다. " 아! 정말 못믿을 게 사람의 말이로구나." " 그게 무슨 말인가?" " 그렇지 않소? 노인장은 어디로 보아도 자상하고 인자하게 생긴 분인데 그런 노인장이 독사처럼 악랄하며 사라갈처럼 잔인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더구나 귀제갈이 뭐요? 귀제갈이.... 노인장의 어디가 귀신같이 생겼단 말이오? 난 정말 무림의 소문이 이처럼 허무맹랑한 것인줄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소." 흑포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멀거니 화의청년을 쳐다보았다. 말로는 자상하다, 인자하다 하면서도 결국은 악랄하고 잔인하며 귀신같이 생긴 늙은이라고 실컷 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흑포노인은 유령곡의 수석집사인 귀제갈 구회회였다. 유령곡은 무림의 육대세력 중 가장 강한 일곡(一谷)일 뿐 아니라 구회회는 그 유령곡에서도 세 명의 곡주를 제외하고는 신분이나 무공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그러니 언제 이와 같은 모욕적인 말을 들어 보았겠는가? " 이런 찢어 죽일 놈이..... 감히 이 분이 누구신줄 알고......" 구회회의 뒤에 서있던 네명의 흑삼중년인들이 노성을 지르며 화의청년에게 달려들려했다. 그때 구회회가 그들을? 제지했다. 이어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화의청년에게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왠지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으시시한 것이었다. " 아주 재미있는 젊은이로군. 자네는 누구인가?" 화의청년은 활짝 웃었다. " 하하..... 과연 예상대로 구노인은 화통하신 분이군요. 나는 화일로란 무명소절입니다." 구노인이란 말에 구회회의 눈가에 짙은 살기가 떠올랐지만 그 다음 말을 듣자 그의 얼굴에 기광(奇光)이 번뜩였다. " 누군가 했더니 남궁 늙은 여우의 버릇없는 제자 녀석이었군." " 사부님을 아시오?" " 노부가 남궁봉같은 늙은 여우와 사귈 것 같으냐?" 구회회의 말은 아주 모욕적인 것이었으나 화일로는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 옳소. 사부님 같으신 분이 구노인과 사귈 리가 없지. 나도 참 멍청하지." 그의 말은 아주 묘해서 구회회의 말을 그대로 시인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내용은 완전히 바꿔지고 말았다. 즉, 구회회의 말은 남궁봉 따위가 어찌 감히 자신과 사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고 화일로의 말은 남궁봉이 구회회같은 악랄한 인물을 상대할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구회회가 어떤 인물인데 화쟁]狗括?말뜻을 못 알아 듣겠는가? 그의 눈빛에 다시 진득한 살기가 떠올랐다. " 흐흐.... 듣던대로 주둥이가 여문 놈이로군. 네 놈은 무엇때문에 노부를 찾았느냐?" 화일로는 장난스럽게 히죽 웃었다. " 헤헤..... 다름이 아니라 옛날부터 유령곡의 경치가 가히 천하의 명승(名勝)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와서 이번에 특별히 귀곡을 방문하기로 했으니 구노인께서 수고스럽겠지만 귀곡까지 나를 안내해 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리려고 하오." " 안내?" 구회회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직이 뇌까렸다. 그렇소. 구노인께서 승낙해 주신다면 내 귀곡을 모두 구경한 후에 섭섭치 않게 사례할테니 보수는 걱정하지 마시오." 구회히는 처음에는 자신의 귀가 잘못 되었나 하고 우두커니 듣고 서 있다가 이내 얼굴이 온통 살기로 뒤덮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누군가? 유령곡의 수석집사이며 실질적인 이인자가 아닌가? 그런 자신에게 두둑히 사례를 해 줄테니 유령곡을 안내해 달라니...... 혹시 이 녀석은 오전에 무엇을 잘못 먹어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 지금의 구회회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가뜩이나 메마르고 강팍하댐]?그의 얼굴이 살기로 덮이자 마치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놈이 점점 귀엽게 노는군. 네 놈들 사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지 몰라도 노부의 눈에는 가소로운 하루살이들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 하하.... 하루를 살아도 하고 싶은 일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내 성미요. 나는 이미 무슨 일이 있어도 유령곡을 구경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구노인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마시오." 구회회의 미간에 떠오른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 흐흐..... 만일 노부가 거절하겠다면?" " 인자하신 구노인께서 그럴리야 있겠소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구노인에 대한 나의 인상도 바뀔 것이고 그노인도 조금 고달파 지지 않겠소?" 화일로가 유들유들하게 대꾸할수록 구회회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살심도 강해졌다. 화일로의 음성은 비록 부드러웠으나 그 내용은 완전히 위협이었다. 구회회는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을 위협해 본 적이 수없이 많지만 자신이 남에게 위협을 당해본 일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헌데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구회흥]린?발작하지 않은 것은 그의 참을성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허허..... 뭐라구? 노부가 고달파 질거라구.......?" 한동안 나직히 뇌까리고 있던 구회회의 눈빛이 서서히 붉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 소문에 네 놈이 미친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고 해서 믿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사실이로군. 어디 네 놈이 노부를 어떻게 고달프게 할 지 한번 보겠다." 구회회는 슬쩍 뒤에 서 있는 흑삼중년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흑삼중년인 중 두 명이 번개같이 재빠르게 화일로에게 덮쳐왔다. 그들은 이미 눈앞에 있는 이 시건방진 녀석이 얄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지라 일단 손을 쓰자 그 빠르기와 악독함이 놀라울 정도였다. " 이 놈!" 쐐액! 그들이 휘두른 네 개의 주먹은 흡사 네 가닥의 뇌전(雷電)인양 무시무시한 속도로 화일로의 미간과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화일로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피식 웃었다. " 나는 그래도 구노인이 말이 통하는 사람인줄 알았더니 영 눈과 귀가 막힌 모양이군. 그렇다면 시원하게 뚫어 드려야지." 그는 흑삼중년인들의 주먹이 자신의 코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장난처럼 가볍게 우수를 휘둘렀다. 스윽! 마치 별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의 우수가 슬쩍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빡! 빡! 수박통이 깨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 크아악!" " 아악.......!"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던 흑삼중년인들은 처절한 단말마를 내지르며 각기 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한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올때는 생생히 살아 숨쉬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두 구의 시체라는 점 뿐이었다. 구회회의 안색이 처음으로 창백하게 변했다. 흑삼중년인들은 유령곡의 이십사(二十四) 판관(判官)중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유령곡의 최일류고수들은 아니었으나 강호무림에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다. 헌데 그들은 단 일수(一手)만에 격살시키다니..... 구회회 자신도 물론 그들을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지만 단 일초만에 그렇게 할 자신은 없었다. 화일로는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여유자작한 모습으로 구회회를 바라본 채 빙그레 웃었다. " 구노인의 눈이 이제 약간 뚫린 모양이구료. 자, 이제 구도 마저 뚫어드릴테니 나머지 두 사람도 내게 보내시오." 구회회는 정신이 번쩍 들어 힐끔? 뒤를 돌아 보았다. 남은 두 명의 흑삼중년인들은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에 넋이 나가 있다가 화일로의 말을 듣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는지 모두 안색이 푸르뎅뎅해져 있었다. 구회회의 미간이 살짝 찌푸러졌다. 허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이내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매달았다. " 흐흐..... 자네의 무공은 노부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군." " 뜻밖이오?" " 확실히 그렇네." " 그런 나를 귀곡까지 안내해 주시겠소?" 구회회는 잠시 생각에 잠긴 척 하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 자네가 본 곡에 가려는 이유는 정말 그곳의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서인가?" 화일로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소. 그럼 내가 그곳에서 평생 살려고 하는 줄 알았소?" 구회회는 웬일인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 그게 아니라 본 곡의 경치는 사실 그리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네. 그러니 자네가 잔뜩 기대를 하고 그곳에 갔다가 실망할 것이 염려되어 하는 말일세." " 오! 자상도 하시구료.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소. 나는 진흙탕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독특한 안목이 있으니.... 어떻소? 내 부탁을 승낙해 주시겠소?" "사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네. 본 곡에서는 방문을 원하는 무림의 군호(群豪)들에게 언제든지 문호(門戶)를 개방하고 있으니, 허나 한 가지 조건이 있네." " 그게 무엇이오?" " 간단하네. 자네가 그 자리에 서서 노부의 삼장(三掌)을 받아낸다면 자네를 본곡까지 안내해 주겠네." 화일로의 눈이 번쩍 빛났다. " 그게 정말이오?" " 물론이네. 허나 피하거나 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정면으로 노부의 삼장을 받아내야 하네." 화일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별로 주저하지도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 좋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구회회의 입가에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음산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흐흐...... 네 놈이 아무리 약은 척 해보았자 노부에 비하면 아직 애송이일 뿐이다. ) 허나 그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앞으로 두 걸음 걸어나왔다. " 그럼 이제 노부는 손을 쓸테니 자네는 조심하게." 화일로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 하하..... 걱정하지 말고 마음놓고 공격해 보시오." 구회회는 입가에 스산한 웃음을 깨어물며 양손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그의 손은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꽈르릉! 한 줄기 거대한 노도와도 같은 경력이 화일로의 가슴을 향해 몰아쳐갔다. 화일로는 슬쩍 우측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순간, 꽝!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이 터져나오며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 음......" 몸을 휘청이며 두 걸음 물러난 사람은 다름아닌 구회회였다. 구회회의 비쩍마른 얼굴에는 희미한 경악의 기색이 떠올랏다. 화일로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낭랑하게 웃었다. " 하하.... 나이를 많이 잡수셔서인지 구노인의 팔힘은 생각보다 조금 약하군요. 좀더 분발하셔야겠소." 구회회의 두 눈이 온통 살기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앞으로 다가들며 괴이무쌍한 일장(一掌)을 내갈겼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강풍이 이는 것 같지도 않았으니 그 일장에 실린 힘은 능히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를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화일로의 눈가에 약간 뜻밖이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 귀왕인(鬼王印)이로군......"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왼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파아아아....... 그의 손에서 마치 수십, 수 백개의 파도가 몰아치듯 거센 강기가 뿜어 나왔다. 그것은 바?로 초절정의 내가수법(內家手法)인 칠십이복랑수(七十二復狼手)였다. 꽈꽈꽈꽝! 마치 수백 개의 북이 연이어 울리는 듯한 폭발치는 듯한 음향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구회회는 마도(魔道)의 칠대장력(七大掌力)중 하나인 귀왕인을 펼쳤는데도 다시 또 화일로에게 다섯 걸음이나 정신없이 격퇴당했다. " 으음......." 구회회는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해지더니 돌연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리며 " 세 번째 장력을 격출해냈다." " 으히히히.......!" 이 일장은 먼저 번의 이장과는 완전히 달랐다. 놀랍게도 한 가닥 보기 힘든 엷은 강기가 보였으며 아주 멀리서 천둥이 치는 듯한 희미한 굉음을 동반하고 있었다. 꾸르르르릉........ 화일로는 태연히 미소를 띈 채 느릿느릿 양손을 들어올렸다. " 하하.... 설마 구노인께서 음부유강 마저 터득하고 있을 줄은 몰랐소. 정말 내가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 했......" 별안간 화일로의 표정이 홱 변했다. 구회회가 쏘아보낸 음부유강의 강기속에서 검은 공같이 생긴 물체가 함께 섞여져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눈에 보아도 강력한 위력을 지닌 화기(火器)임이 분명했다. 음부유강은 이미? 오래전에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려진 사악하기 그지없는 무서운 마공강기였다. 이것의 위력은 실로 무시무시해서 금석(金石)이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더구나 강력한 화기를 동반한 것이라면 제 아무리 막강한 공력을 지닌 고수라 해도 인간의 육신(肉身)으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몸을 날려 피한다면 처음에 정한 규칙에 위배되는 것이 된다. 그제서야 화일로는 어째서 구회회가 이런 결투를 제의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 악랄하기 짝이 없는 독계(毒計)가 아닐 수 없었다. " 이런 야비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화일로는 버럭 호통을 지르며 오른손으로 천전수(千纏手)를 펼쳐 음부유강을 막고 왼손으로는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수법으로 검은 공같은 물체를 십장 밖에 이쓴 바위 쪽으로 유도했다. 꽝! 굉음과 함께 금석을 두부처럼 으스러뜨린다는 음부유강은 천전수의 강력한 기운을 당하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공같이 생긴 물체는 십 장 밖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에 가서 부딪쳤다. 그 바위의 높이는 일 장이 넘었고, 넓이도 일곱 평도 더 되었다. 그러나....... 꽈꽈꽝! 깍]稿뼈?떨어지는 듯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리며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그 거대한 바위는 산산이 박살나 버렸다. 동시에 부서진 돌조각들이 구름처럼 떴다가 우박이 오듯 사방으로 쏟아졌다. 그 크고 넓다란 바위는 흔적조차 제대로 찾아볼 수 없을만큼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그 어린 아이의 주먹만한 크기의 검은 물체가 그토록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화일로는 이 무서운 위력을 보고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가슴 한 구석이 써늘해졌다. (저걸 멋도 모르고 맞받아쳤다가 큰일날 뻔 했구나...... ! ) 그의 동작이 조금만 굼떴거나 엉겁결에 그 물체를 장력으로 내리쳤더라면 그의 육체는 콩가루가 되어 종적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화일로는 분노가 치밀어 살기어린 눈으로 구회회를 노려보았다. 허나 어느사이엔가 구회회와 남은 두 흑삼중년인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화일로는 흠칫 놀라 안력을 돋구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북쪽으로 이백 여장 밖에 세 줄기의 희미한 인영이 빛살처럼 질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약아빠진 구회회는 흥]?狗寬?검은 물체를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튕겨내는 것을 보고 일이 뜻대로 안될 것을 짐작하여 꽁무니를 빼고 만 것이다. 그 재빠른 판단력과 기민한 동작에는 난다 긴다하는 화일로조차도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화일로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동안 아득히 멀어져가는 구회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피식 웃었다. " 내가 저 늙은이의 귀제갈이란 호를 너무 무시했군. 하지만 일단 내 손에 걸린 이상 아무리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안의 손오공 신세일 뿐이다." 화일로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히죽히죽 웃으며 천천히 구회회가 사라진 곳을 향해 몸을 움직여갔다. 제 38 장 봉변당하는 鬼諸葛 ---예전 구강(九江)에서 멀리 구화봉(九華峰)을 바라보니, 녹수는 천하에 걸려 있고, 찬란한 햇살은 방긋이 미소 짓는다. 그대가 손을 휘두르면 만인이 따를 것이니, 군은 동도주요, 이곳에서 구름과 소나무를 벗 삼는다....... 이것은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의 시로서 구화산(九華山)은 이태백과 깊은 인연을 지녔다. 구화산은 안휘성(安徽省)의 남동부에 있다. 남쪽으로는 능양(陵陽)을 굽어보?며, 서쪽으로는 추포(秋浦)가 있고, 북쪽으로는 오계대통(五溪大通)이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으로는 쌍룡봉(雙龍峰)이 이어져 있다. 봉우리는 마흔여덟개, 두개의 연못, 열네개의 절벽, 다섯개의 동굴, 열여덟 곳의 샘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을 구자산(九磁山)이라고 했는데 이태백이 마은여덟 봉우리가 마치 아홉 송이의 연화(蓮花)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구화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정오 경, 계절은 어느덧 여름의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어서 정오의 햇살은 제법 따사로웠다. 하천문(霞天門), 하천문은 구화산으로 올라가는 첫 관문이었다. 이곳을 지나야 비로소 구화산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으며 산세 또한 험준해지기 시작한다.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하천문으로 들어서는 세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구회회와 그를 수행하는 두 명의 판관들이었다. 그들의 어깨와 머리위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고, 표정은 피곤에 지친 모습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화일로를 따돌리기 위해 적석평에서 이곳 하천문까지 이백리가 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던 것이다. 구회회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그보다 공력이 ?한참 떨어지는 두 명의 판관들은 아주 죽을 상을 하고 있었다. 구회회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지 이를 부드득 갈며 빠른 걸음으로 하천문을 통과했다. " 이놈.... 두고 보자. 감히 유령곡을 건드리다니.... 곧 뼈저리도록 후회하게 만들어 줄테다." 그는 자신이 새파랗게 젊은 화일로를 피해 도망쳤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수치심을 억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 이 밥통같은 놈들아! 어서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뭘 하느냐?" 그는 괜히 애꿏은 두 명의 수하들을 득달하며 산을 올라갔다. 하천문을 통과하자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아담한 정자(亭子)가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용천정(龍泉亭)이었다. 헌데 박 용천정을 지나던 구회회의 눈쌀이 잔뜩 찌푸러졌다. 용천정의 정자 그늘에 한 명의 남루한 의상을 입고 머리에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작달막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노인은 정자그늘이 무척 시원한 듯 코를 골며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의 두 발이 정자밖으로 빠져나와 길을 반쯤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구회회는 그렇지 않아도 화풀이할 상대를 찾고 있는데 이것을 보자 쌍심지를 곧두세웠다. 그는 노인의 앞에 도착헬]舅?냅다 발길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 이 망할 놈의 늙은이야! 이곳이 네 놈 안방인줄 아느냐? 냉큼 일어서지 못할까?" 구회회의 발길질은 정확하게 노인의 엉덩이에 격중되었다. 퍽! 구회회는 홧김에 공력을 오성(五成)이나 끌어올렸기 때문에 그의 발길질에는 황소라도 즉사할만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헌데 의외에도 노인은 꿈쩍도 않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간지럽다는 듯 구회회의 발에 격중된 엉덩이 부분을 손으로 벅벅 문지르며 계속 잠에 취해 있었다. " 음냐...... 음냐......" 구회회의 눈에 흠칫하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잠시 노인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발길질을 했다. 쐐액! 이번에 그는 거의 구성이나 되는 공력을 끌어올렸기 때문에 천근 거석이라도 박살낼만한 무서운 힘이 담겨 있었다. 쾅! 그의 발은 추호도 사정없이 노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허나 웬걸? 의당 피를 토하며 십여장 밖으로 나가떨어질 줄 알았던 노인은 까딱도 없는데 오히려 발길질을 한 구회회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으윽.......... 노인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순간 그는 마치 강철을 발로 찬 듯한 극심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 구회회는 발이 부러지는 듯한 아픔보다도 커다란 경악에 사로잡혀 귀신에 홀린 듯 노인을 내려다 보았다. 그때 노인이 옆구리를 매만지며 부시시 눈을 떴다. " 어이구 따가워..... 이곳에 웬 모기가 이렇게 극성을 부리지?" 노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벌겋게 충혈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모양이었다. 구회회는 멍청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구성의 공력이 실린 발길질을 당하고도 모기에게 물린 줄 아는 노인이 그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그제서야 자신의 앞에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 듯 눈을 비비며 고개를 쳐들었다. 지독히도 우스운 몰골을 한 노인이었다. 더구나 머리위에는 아이들이나 쓰는 고깔모자를 쓰고 있어서 마치 희극배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어? 당신들은 누구요?"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흐리멍텅한 음성으로 물었다. 구회회 자신이 조금전에 직접 눈으로 보고 겪은 일만 아니었다면 눈앞의 이 꾀죄죄한 몰골의 노인이 절세의 공력을 지닌 무림의 고수라는 것을 절대로 믿지 못했을 것쟁]甄? 구회회는 날카로운 눈으로 노인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 우리는 이곳 구화산의 절경을 유람하러 온 유람객들이오. 헌데 노인장은 뉘시오?" 노인은 히죽 웃었다. " 그런가? 그거 잘됐군. 노부도 마침 이곳을 구경하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왔소. 당신네들도 이곳을 구경하러 왔다니 우리 함께 다닙시다. 자고로 유람이란 사람이 많을수록 재미있는게 아니겠소?" 구회회는 이 노인이 단순히 산천(山川)을 구경하러 떠돌아다니는 유람객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달리 반박할 말도 없이 조금 눈쌀을 찌푸렸다. " 우리는 서로 초면(初面)이라 잘 알지도 못하는데 동행한다면 서로 어색하지 않겠소?" 노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 허허..... 세상에 처음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이 어디 있소? 비록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자꾸 어울리다보면 어느새 친해지는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겠소? 혹시 또 알겠소? 우리가 이런 일을 인연으로 삼아 둘도 없는 생사지교(生死之交)가 될지......." 노인은 특히 생사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 말음 마치 구회회의 생사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듯이 들렸다. 구회히는 눈?앞의 이 노인이 귀찮기 그지 없었으나 상대의 정체도 모르는체 섣불리 대할 수도 없어 쓴웃음을 머금었다. " 귀하의 말이 옳소. 하지만 우리는 번잡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귀하와 동행하기 보다는 우리들끼리 가는게 더 좋을 것 같소." " 허허..... 그거 참 안타깝구료. 노부는 유령도 아닌데 당신들이 굳이 노부와 동행하는 것을 꺼려하다니..... 사실 노부는 제자녀석을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웬일인지 그 녀석이 도통 나타나지를 않아 할 수 없이 당신들과 합류할까 생각했던 거라오." 구회회는 움찔했다. 상대의 말중에서 유령이라는 단어가 꼭 자신들을 빗대어 한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러다 돌연 그의 눈에서 괴이한 빛이 번뜩였다. 그는 급히 물었다. " 이곳에서 제자를 만나기로 하셨소?" " 그렇소. 그 녀석과 함께 이곳 구화산을 구석구석까지 두루두루 구경하려고 하오. 귀하의 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노인은 히죽 웃었다. "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 그 녀석은 화일로라고 하는데 남들은 풍파무쌍리고 부른다고 하오." 그 말을 듣자 구회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불쑥 " 그렇다면 귀하가 바로 생장자 남궁봉이란 말이오?" 노인, 남궁봉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구회회를 빤히 쳐다보았다. " 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소? 혹시 오다가 내 제자녀석이라도 만났던 말이오?" 구회히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는 설마 이 노인이 누구도 상대하기 꺼려하고 이름만 들어보 벌벌 떤다는 무림최고의 괴물(怪物)일 줄은 정녕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는 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 아..... 아니오. 나는 단지 무림의 소문을 들었을 뿐이오." " 그랬구료. 난 또 당신이 하도 우거지상을 짓길래 내 제자녀석에게 무슨 봉변을 당한 적이라도 있나하고 걱정했었? 아무튼 그 녀석이 여기저기에서 사고만 치고 다니는 바람에 노부의 체면만 잔뜩 구겨졌지 뭐요. 내 그놈을 만나기만 하면 그냥......" 남궁봉은 화일로가 앞에 있기라도 한 양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으며 씨근거렸다. 구회회는 상대가 남궁봉임을 알자 더이상 단 한시도 그와 같이 있고 싶은 뗌습?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궁봉을 따돌릴 속셈으로 황급히 입을 열었다. " 영제자를 찾으려면 남쪽으로 가보시오. 그럼 우리는 이만 가겠소." 이어 깍]陋?두명의 판관들에게 눈짓을 하고 몸을 날리려는 순간, " 남쪽으로 가면 정말 내 제자녀석을 만날 수 있소?" 어느 사이엔가 남궁봉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히죽 웃고 있지 않은가? 구회회는 남궁봉이 어떻게 몸을 움직였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안색이 변한채 주춤 몸을 멈춰섰다. " 그렇소.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소?" 남궁봉은 고개를 갸우둥거렸다. " 노부도 당신 말을 믿겠소. 그런데 당신은 내 제자를 알지도 못한다면서 어떻게 그 녀석이 남쪽에 있는지 알고 있소?" 구회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그..... 그건.... 누구에게선가 귀하의 제자가 황산부근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였소." 남궁봉은 눈을 번쩍 빛냈다. "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누구요?" " 그.... 글쎄...... 나도 주루에서 얼핏 들은 이야기인지라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구료." 남궁봉은 미심쩍은 듯 구회회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 음.... 당신은 혹시 내 제자녀석을 만났던게 아니오? 그런 일이 있으면 솔직히 말해 보시오. 그 녀석이 당신엑 무언가 시비를 걸었다면 노부가 혼구멍을 내줄테니까......." " 아.... 아니오?. 정말 그런 일은 없었소. 나는 영제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도 못하오." " 그 녀석이 보복할까 두려워서 그런다면 안심하시오. 노부는 결코 당신이 말했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남궁봉이 자꾸 추근댈수록 구회회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러다가 화일로가 뒤쫓아 오는 날이면 골치아픈 일이 벌어질게 뻔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정말 아니라는데 왜 자꾸 이러시오? 나는 화일로가 어떤 후레자식인지도 모른단 말이오?" 남궁봉은 그의 고함에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 아니면 아니지 미친놈처럼 왜 소리는 지르고 야단이오? 그리고 뭐, 후레자식? 나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제자가 후레자식이라고? 이 영감탱이가 갑자기 돌았나? 어디다 함부로 입을 놀리고 있어?" 남궁봉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지르자 마침내 구회회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 이 늙은 여우같은 놈아! 네 놈 제자가 후레자식이라는건 천하가 다 아는데 무슨 헛소리냐? 그리고 나는 네놈에게 볼일도 없는데 왜 자꾸 바쁜 사람을 붙잡고 헛수작이냐?" 남궁봉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가만히 ?구회회의 욕설을 듣고 있다가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히죽 웃었다. " 헤헤..... 노부는 호의에서 한 말인데 왜 그렇게 역정을 내시오? 그리고 노부의 제자가 무림에서 어떤 평판을 받고 있는지는 몰라도 당신은 그를 만난 적도 없다면서 함부로 욕할 수 있는 거요?" 남궁봉이 갑자기 점잖게 말하자 구회회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해졌다. " 그..... 그건....." " 보아하니 당신은 풍채도 범상치 않고 얼굴에 위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문파(門派)를 이끌고 있거나 적지 않은 제자들이 있을 텐데 누가 당신 제자를 욕한다면 기분이 좋겠소?" " 그야......" " 물론 기분이 나쁠게 아니겠소?" " 그..... 그렇소." 구회히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남궁봉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그런데 왜 남의 제자를 욕하고 야단이냐? 이 귀신 후레자식같은 늙은이야! " 남궁봉의 돌연한 욕설에 구회회는 어안이 벙벙해서 일시지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는 발연 대노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이...... 이 놈이......" 그는 너무도 화가 치밀어 올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언제 이런 욕설을 당해 보았겠는가?? 구회회의 비쩍 마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하는 것을 남궁봉은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다가 이죽거렸다. " 말을 못하는 것을 보니 이제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모양이군. 이것만 보아도 당신이 영 구제불능의 인간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 암..... 당신은 입이 약간 더럽고 조금 재수없게 생겼지만 그래도 잘만 가르치면 한두 가지 써먹을 구석이 있겠어." 마침내 구회회는 더이상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남궁봉에게 덤벼 들었다. " 이 찢어죽일 놈의 늙은이.......!" 그의 비쩍 마른 양 손은 마치 갈고리처럼 변한 채 섬전같은 속도로 남궁봉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 들었다. 쐐액! 남궁봉은 히죽 웃으며 슬쩍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 헤헤..... 백골마조(白骨魔爪)를 익혔다면 문지기 정도는 할 수 있겠군." 그가 물러서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으나 시기가 적절하여 구회회의 백골마조는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구회회는 흠칫 놀라며 양손을 번개같이 회수함과 동시에 중지(中指)로 남궁봉의 눈을 찔러갔다. 그 찔러오는 속도와 수법이 어찌나 악랄한지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칠? 지경이었다. " 어쭈.... 냉살지(冷殺指)까지....." 남궁봉은 혀를 차며 다시 우측으로 두 걸음 떼어 놓았다. 실로 기이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다. 그 간단한 동작에 구회회가 자신의 삼대절학(三大絶學)중 하나로 꼽고 있는 냉살지가 아슬아슬하게 남궁봉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구회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쌍수(雙手)를 질풍같이 휘둘렀다. 파파파파....... 사방이 온통 구회회의 창백한 손그림자로 뒤덮였다. 남궁봉은 껄껄 웃으며 오히려 그 손그림자 속으로 뛰어 들었다. " 허허..... 마마천겁수(魔魔千劫手)라..... 조금만 가르치면 노부의 몸종 정도는 될 수 있겠군." 그와 함께 그의 오른손이 작은 원호를 그렸다. 순간, 꽝! 엄청난 폭음과 함께 주위를 뒤덮고 있던 손그림자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 크윽........!" 동시에 구회회는 가슴팍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주르르 밀려나 버렸다. 어느 사이엔가 남궁봉의 오른손이 마마천겁수의 엄밀한 장영(掌影)을 뚫고 그의 가슴팍을 가격한 것이다. 슬쩍 스치기만 한 것 같았는데도 구회회는 가슴뼈가 모두 박살이 난 듯한 고통을 댐]윰◀?십여 걸음이나 물러섰다. " 우엑!" 그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시커먼 핏덩이를 게워네고 말았다. 제 39 장 哮天狐 남궁봉은 어느새 그의 앞 일장쯤 되는 곳에 선 채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어떤가? 노부가 특별히 자네를 노부의 몸종으로 삼고자 하는데 자네는 이의가 없나?" 그의 말투 또한 아랫사람을 대하듯 변해 있었다. 구회회는 간신히 비실거리며 일어선 채 무서운 눈초리로 남궁봉을 노려보았다. " 으.... 이..... 이 악마같은 늙은이.....! 노부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 자네야말로 노부에게 무슨 억한 감정이 있길래 미친 놈처럼 덤벼들었나? 이건 모두 자네가 자초한 일이니 노부를 탓하지 말게. 그리고 노부를 주인으로 삼고 싶으면 크게 절을 세번 하게. 미리 말해두지만 노부의 몸종 자리는 결코 아무나 될 수 없는 귀한 자리일세." 구회회는 남궁봉의 놀리는 듯한 말에도 분노보다는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그는 아직까지 무공을 익힌 이래 이처럼 처참하게 당해본 적이 없었다. 유령곡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안에 드는 고수인 자신이 남궁봉의 손에 의해 마치 장난감췹]낮?맥없이 격퇴당한 것이 아닌가? 그는 꿈에도 남궁봉의 무공이 이 정도이리라고는 생각치 못했었다. 허나 그는 아직도 완전하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도 한가지 비장(秘藏)의 살수(殺手)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얼마전에 화일로에게 사용했던 화기였다. 그것의 이름은 효천호라 했다. 효천호는 화기제조의 달인(達人)인 유령곡의 이곡주(二谷主)가 수십년동안 천하의 모든 화기들을 연구하여 만들어낸 사상최강의 화기였다. 위력은 가히 파천황(破天荒)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절대무쌍한 것이었다. 유령곡에서는 그동안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들여 얼마전에야 비로소 이 효천호를 완벽하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들은 이 효천호만 있으면 능히 천하무림을 주름잡을 수 있다는 확신 아래 본격적으로 무림에 진출하려다가 무림패권의 야욕을 가진 건곤교와 의기투합하여 그들과 손을 잡게 된 것이다. 효천호의 강대무비한 위력을 떠올리자 구회회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때 남궁봉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 자네가 만약 노부의 몸종이 된다면 여러가지 생각지도 못한 혜택을 누리게 될 걸쇽]? 우선 어느 누구에게도 괄시를 당하지 않을 것이고 숙식(宿食)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틈틈히 노부에게서 몇가지 절학을 익힐 수도 있네." 구회회는 속으로 불같은 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무공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그는 느릿느릿 품속으로 손을 가져가며 남궁봉을 노려보았다. " 남궁늙은이, 장난은 그만 해라. 노부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다." " 오, 그러신가? 헌데 내가 보기에는 영 별볼일 없는 졸짜인 것 같은데......?" " 남궁늙은이! 자신 있다면 노부의 일장을 받을 용의가 있느냐?" " 자네같은 졸짜의 장력이라면 일장이 아니라 백장이라도 받아주지." " 흐흐......" 구회회는 음산한 미소를 날리며 오른손으로 자신이 가장 자랑하는 음부유강을 잔뜩 끌어올리고 왼손은 품속으로 집어넣어 효천호를 꺼낼 태세를 취했다. 그는 이번에 유령곡을 나올때 모두 세개의 효천호를 가지고 왔었다. 그중 하나는 그 빌어먹을 화일로란 놈에게 사용했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는 보지 못했었다. 허나 나머지 두개의 효천호를 음부유강에 섞어 동쏙]첼?날려 보낸다면 남궁봉이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콩가루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 확실했다. 남궁봉은 구회회 정도는 아주 간단하게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하는지 히죽히죽 웃으며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흐흐..... 이 망할 놈의 늙은 여우야! 이제 곧 네 놈에게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 죽기 전에 실컷 웃어둬라! ) 구회회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분명 왼쪽 가슴 밑에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두개의 효천호가 도통 잡혀지지 않는 것이다. 그는 안색이 홱 변해 남궁봉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품속을 샅샅히 뒤져보았다. 너무도 조제하기가 힘이 들고 귀해서 유령곡 내에서도 집사 이상의 고수들만이 겨우 몇개씩 소지할 수 있는 귀하디 귀한 효천호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이럴 리가 없는데......." 구회회는 체면불구하고 가슴이 온통 드러나도록 상의를 풀어헤친 채 이잡듯이 뒤적거렸으나 없어진 효천호가 다시 나타날리가 만무했다. 남궁봉은 그가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채 미친 늙쟁]봉見떨?웃통을 벗어젖히고 있는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소맷자락속에서 무언가 꺼내서 흔들어 보였다. " 이걸 찾고 있소?" 구회회는 퍼뜩 고개를 쳐들어 남궁봉이 손에 쥐고 있는 물체를 바라보다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놀랍게도 그토록 깊숙히 간직했던 두개의 검은 구슬같은 효천호는 남궁봉의 손바닥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구회회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입을 딱 벌린 채 망연자실하니 남궁봉을 쳐다보았다. " 그..... 그게 어떻게......" 남궁봉은 장난감이라도 만지는 양 천하에서 가장 폭발력이 강한 효천호를 손바닥위에 톡톡 굴리며 히죽 웃었다. " 이거 말인가? 조금전에 노부가 자네 가슴에서 슬쩍 한 걸세. 미안하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옛날 버릇이 자꾸 나온단 말이야....." 그제서야 비로소 구회회는 조금전 남궁봉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그것으 ㄹ빼내간 것임을 깨닫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 이.... 이런 도둑고양이 같은 늙은이....." 남궁봉은 구슬처럼 효천호를 허공으로 던졌다가 다시 받으며 배실배실 웃었다. "이건 별로 귀한 것 같지도 않은데 뭘 그렇게 아쉬워 하나?" 구회회는 효천호가 남궁봉의 손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다시 떨어질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와 남궁봉의 거리는 삼장 정도밖에 안되었다. 만약 민감하기 그지없는 두개의 효천호가 터지는 날에는 반경 십장 이내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 그.... 그걸 그렇게 던지지 마시오......" 남궁봉이 아주 높이 효천호를 던졌다가 다시 받자 구회회가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남궁봉은 히죽 웃으며 이번에는 두 개의 효천호를 번갈아 허공으로 던졌다가 다시 받는 묘기를 부렸다. " 어떤가, 내 솜씨가? 옛날에 한창 날릴 때는 이런 구슬을 열개씩이나 동시에 던지고 받았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뻐기던 남궁봉은 한눈을 팔다가 그만 한개의 효천호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 으악!" 구회회는 물론이고 제법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두명의 판관들도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바닥에 넙쭉 엎드렸다. 허나 효천호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 슥! 남궁봉은 익숙한 손길로 다시 잽싸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구회회와 두명의 판관은 그야말로 간이 콩알만해져서 자쏙]킵俑?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휴우........!" 남궁봉은 히죽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 자네들은 발에 쥐라도 났나? 왜 그렇게 바닥에 누워 있나?" 말을 하면서도 남궁봉은 여전히 두개의 효천호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 그러다가 두 손으로 하는 것도 싫증이 났는지 이번에는 아예 한손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하고 있었다. 구회회는 엉거주춤 일어서다 얼굴이 푸르죽죽해지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두명의 판관들은 이미 재빠른 속도로 바닥을 기어 십여장 밖으로 피한 후였다. 구회회는 남궁봉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남궁봉이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고 효천호를 가지고 노는데만 몰두하고 있지 비호같이 십여장 밖으로 날아갔다. " 휴우....." 그제서야 그는 십년은 감수한 듯 길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분노에 가득찬 눈초리로 남궁봉을 노려보았다. 남궁봉은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연신 히죽거리며 두개의 효천호를 가지고 놀다가 손가락으로 두들기기도 했다. 구회회의 손바닥에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고였다. (그래..... 터져라..... 어서 터져라! ) 그는 주먹을 쥔 채 마음속으로? 외쳐댔다. 허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효천호는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봉은 고개를 돌려 구회회를 돌아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 당신들은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거요? 이리 좀더 가까이 오시오. 이 장난감은 아주 재미있구려." 구회회는 오히려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내저었다. " 아니오. 그 물건이 귀하의 마음에 든다면 가지도록 하시오. 노부는 상관없으니...." 남궁봉은 입을 헤벌쭉하게 벌리며 웃었다. " 헤.... 이런 고마울데가..... 난 당신을 다치게 하고 게다가 이것도 엉겁결에 슬쩍한 것인데 이 귀한 걸 내게 주겠다니.... 당신은 정말 생긴 거와는 달리 마음이 넓고 인자하구려. 헤헤......" 그는 두개의 효천호를 서로 툭툭 부딪치며 이빨로 깨물어 보기도 했다. 구회회는 이제나 저제나 하고 눈을 크게 뜨고 기다렸으나 애간장이 타도록 효천호는 터지지 않았다. 그때 돌연 남궁봉이 고개를 흔들며 심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아니야. 그래도 노부 체면에 남에게 슬쩍한 물건을 가질 수야 없지. 암.... 나중에 제자녀석이 이 일을 알기라도 하면 그게 무슨 망신인가?" 남궁봉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두 개의 효천호를 구회회를 향해 던지려 했다. " 자, 받으시오. 노부는 이것을 가지지 않을테니. 주인인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구회회는 그야말로 기절초풍을 했다. " 아.... 아니오! 그건 내게 필요없소. 귀하가 가지시오!" 그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댔다. 막 효천호를 구회회에게 던지려던 남궁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당신이 이렇게 마음이 좋은 사람인줄 알았다면 절대 당신 물건을 슬쩍 하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노부는 이것을 가지지 않기로 했으니 당신에게 돌려주겠소." 이어 그는 두 개의 효천호를 구회회와 두명의 판관이 있는 쪽으로 던지려 했다. " 으헉!" " 끼약!" 구회회와 두 명의 판관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무니가 빠지게 몸을 날렸다. 허나, 휘익! 어느 사이엔가 남궁봉은 거의 이십여장을 단숨에 날아 그들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 그냥 가면 되오? 물건을 가져 가야지." " 헉!" 귀신을 만나도 이토록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구회회는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구회회는 학질 걸린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채 웃고 있는 남궁봉을 바라보았다. " 귀..... 귀하의 뜻은 무엇이오?" " 금방 말했지 않나? 이 물건들을 돌려주겠다고. 자, 받게!" 남궁봉은 그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친절하게 그의 손에 두개의 효천호를 꼬옥 쥐어 주었다. 구회회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남궁봉과 자신의 손에 들린 효천호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는 도무지 남궁봉의 속셈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허나 남궁봉이 효천호를 쥐어주고 등을 보이며 물러나자 그는 눈가에 흉학한 빛이 감돌았다. (이 바보같은 늙은이..... 흐흐.... 이게 어떤 건줄 알고 다시 돌려주다니.... ) 남궁봉은 자신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도 모르고 태연히 걸어갔다. 구회회는 남궁봉과 자신의 거리를 신중히 재다가 효천호의 폭발범위를 벗어났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음산한 흉소를 날렸다. " 흐흐.... 잠깐 멈추실까?" 남궁봉은 걸음을 멈춘 채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 왜 그러나? 노부는 자네 물건도 돌려줬는데 아직도 무슨 볼 일이 남아 있나?" 구회회는 양 손에 효천호를 쥔 채 징그럽게 웃었다. " 흐흐.... 그렇다. 이 늙은 여우야!" 그의 음성과 표?정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 나타나 있었다. 남궁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렇다면 어서 말해보게." " 흐흐..... 사실 얼마전에 네 놈의 구 후레자식같은 제자놈을 만났었다." 남궁봉은 짐짓 탄성을 질렀다. " 오! 그랬나? 노부도 그러리라고 짐작은 했었네. 그런데 노부의 제자가 자네를 각별하게 대해주기라도 했단 말인가?" 구회회는 이를 부드득 갈아 붙였다. "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은 감히 노부의 수하 두 명을 살해했을 뿐 아니라 노부를 위협했다." " 오! 그것 참 안된 일일세. 그 녀석의 버릇은 형편이 없어서 노부도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고민한 적도 있었다네. 그래서 자네는 허겁지겁 도망을 쳤단 말이지?" 구회회는 움찔하다가 이내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 " 흥! 노부가 그깟 애송이가 두려워 도망쳤을 것 같으냐? 어쨌든..... 네 놈의 제자가 노부의 수하들을 해친 이상 네 놈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남궁봉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제자가 저지른 일을 사부가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지. 그래 어떻게 책임지면 되겠나?" " 흐흐..... 본곡(本谷)의 신조는 핏빛은 피로 갚는다는 것이다." " 본곡??" " 흐흐... 노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바로 유령곡의 수석집사이다." " 오! 그렇다면 그 심보가 더럽고 만나면 재수가 없다는 귀제갈이 바로 당신이오?" 구회회의 쌍심지가 곤두섰다. 허나 그는 남궁봉이 이제 곧 산산이 박살날 처지라는 것을 생각하고는 화를 눌러 참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 흐흐.... 아무렇게나 씨부렁거려라! 이제 네 놈에게 본 곡의 제자 두 명의 목숨값을 받겠다!" 남궁봉은 히죽 웃었다. " 헤헤..... 자네 말은 노부보고 제자놈 대신 죽어달라는 말이로군?" " 바로 그렇다!" 돌연 남궁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어려워..... 어려운 일이야......" " 무엇이 어렵다는 거냐?" " 노부는 목숨줄이 질기기가 고래심줄보다 더해서 아무리 죽으려고 해도 잘 죽어지지가 않는다네. 자네의 처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네만 질기디 질긴 노부의 목숨줄을 누가 끊어 놓는단 말인가? 구회회는 징그럽게 웃었다." " 흐흐.... 그런 일이라면 걱정을 하지 마라. 노부에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 " 그게 무엇인가? 어서 말해주게." 구회회는 수중에 들고 있던 두 개의 효천호를 들어보이며 물었다. " 네 놈은 이 물건들이 무엇인지 억]틈윰?" 남궁봉은 힐끗 그것을 쳐다보다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 글세. 자네가 심심할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겠지." " 흐흐..... 네 놈같이 어리석은 늙은이가 무림제일의 괴물이라니 믿어지지가 않는군. 이것은 효천호라는 것으로 되臼【?가장 강력한 화기의 일종 (一種)이다. 이제 알겠느냐?" 남궁봉은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휘둥그래 떴다. " 그게 정말인가?" " 흐흐.....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제 곧 이것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테니까." " 자.... 잠깐. 자네의 말은 그걸 지금 나에게 던지겠다는건가?" " 흐흐..... 이제야 그걸 깨달았군. 허나 너무 늦었다." 구회회는 흉악하게 웃으며 두 개의 효천호를 힘껏 남궁봉을 향해 던졌다. 남궁봉은 너무도 뜻밖의 일에 몸이 굳었는지 피할 생각도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구회회는 무림제일의 괴인(怪人)을 자신의 손으로 처치한다는 사실에 흥분과 쾌감을 금치 못하며 통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 크하하하.......!" 헌데 이상하게도 천지를 뒤흔들 듯한 폭음이 터져 나와야 하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구회회는 의아하여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다가 갑자깍]?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 저.... 저럴 수가......" 그가 던진 두 개의 효천호는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남궁봉의 발앞에 떨어졌다. 헌데 바닥에 살짝 닿기만 해도 터져버려야 할 효천호가 무려 십 여장이나 날아가 떨어졌는데도 터지지 않고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남궁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효천호를 발로 툭툭 건드려 보고 있었다. " 이게 무림최고의 화기라고.......?" 남궁봉은 허리를 구부려 효천호를 집어 들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멀리로 홱 집어던졌다. " 자네도 농담을 무척 잘하는군. 이건 그냥 평범한 쇠구슬이 아닌가?" 남궁봉이 집어던진 효천호는 근처의 바위에 가서 부딪쳤다. 그런데도 터지기는 커녕 맥없이 바위에 맞고 아래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인가? ) 구회회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때 남궁봉이 그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 자네의 화기는 잘 구경했네. 그런데 마침 노부에게도 별로 위력은 대단치 않지만 그런데로 쓸만한 화기가 하나 있는데 한 번 보겠는가?" 남궁봉은 처음에 효천호를 꺼냈던 반대 소맷자락속에서 하나의 물체를 뀐]㉢?들었다. 구회회는 그것을 보자 더욱 눈을 크게 떴다. 기이하게도 남궁봉이 꺼낸 물체는 효천호와 매우 흡사하게 생긴 검은 구슬이었던 것이다. 구회회가 던졌던 두 개의 효천호는 모두 남궁봉이 다른 데로 던져 버렸으니 그것이 효천호일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 모양과 크기가 효천호와 너무도 흡사하여 구호회는 어리둥절해 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굴리며 입을 열었다. " 이것으로 말하면 이름은 에..... 효유령(울부짖는 유령)이런 것인데 자네의 효천호와 위력이 어떤지 한 번 비교해 보게." 남궁봉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은 구슬을 십 여장 밖의 거석(巨石)을 향해 집어 던졌다. 순간, 꽝...... 꽈르르릉....... 꽝!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집채만한 바위가 완전히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날렸다. 구회회는 깜짝 놀라 그 쪽을 바라보다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크기가 무려 이 장에 육박했던 거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거석이 있던 자리에는 잘게 부서진 돌조각들만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세상에 이와 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화기는 한 가지 밖에 없었다. " 효..... 흥]올된? 네 놈은 그걸 어디서 구했느냐?" 구회회는 너무도 놀라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남궁봉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자네는 기억력이 나쁘군. 이것은 효유령이란 것으로 노부가 오랜 세월동안 연구한 끝에 직접 만들어 낸 물건일세. 그런데도 쓸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그건 본곡에서 만들어낸 효천호가 분명하다. 어디서 그걸 훔쳤는지 순순히 말해라!" " 허, 왜 이렇게 사람을 못믿을까? 이것은 분명히 노부가 직접 만든 효유령繭遮歐? 노부는 이것을 딱 두 개만 만들었기 때문에 자네의 그 효천호인지 효천구인지와는 차원이 틀리다네." 이어 남궁봉은 소맷자락에서 다시 하나의 검은 구슬을 꺼내들었다. " 보게. 이게 마지막 하나 남은 효유령일세. 어디 효천호를 닮았단 말인가?" 구회회는 그것을 보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 이제 보니 네놈은 그것을 바꿔치기 했구나.......!" 남궁봉은 돌연 머리를 긁적거리며 계면쩍게 웃었다. " 이거 정말 영원한 비밀은 없군. 미안하이. 아까 내가 자네에게 준 건 노부가 평소에 심심풀이로 가지고 놀던 쇠구슬이었고 진짜는 내가 가지고 있었네.? 그걸 알아차리다니 자네는 정말 눈치가 빠르군. 귀제갈이란 외호가 절대로 부끄럽지 않아." 그제서야 구회회는 어째서 아까 자신이 던진 효천호가 터지지 않았는지 알았다. 남궁봉은 미리 두 개의 쇠구슬을 가지고 있다가 구회회의 품에서 효천호를 훔친 뒤 슬쩍 쇠구슬과 바꾼 뒤 천연덕스럽게 그것을 진짜랍시고 구회회에게 돌려주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구회회는 이게 웬 떡이냐 하고 희희낙락해 했으나 이 얼마나 창피막심한 일인가? 어쩐지 남궁봉이 그렇게 가지고 놀았는데도 터지지 않는다 했더니 가짜 효천호였으니 터지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구회회의 얼굴은 솟구치는 수치때문에 칠면조처럼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남궁봉은 하나 남은 효천호를 손에 쥔 채 껄껄 웃었다. " 허허.....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이것은 노부가 지금 돌려줄테니......" 남궁봉은 효천호를 구회회에게 던지려 했다. 이번의 것은 진짜 효천호이니 던진다면 구회회의 몸은 가루로 변해 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마침내 구회회는 무거운 탄식을 토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 그만두시오. 남궁봉. 노부는 완전히 귀하에게 굴복했으니 노부에게 용곤]퓽? 있으면 이서 물어 보시오." 남궁봉은 막 던지려던 효천호를 회수하며 빙그레 웃었다. " 구노인은 과연 영리하구료. 노부의 속셈을 단번에 꿰뚫어 보다니....." 구회회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 노부가 진짜 영리했다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거요." " 허허.....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자꾸 그러면 노부가 너무 미안하지 않겠소?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궁봉의 얼굴에는 조금도 미안해 하는 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 40 장 惡人의 最後 " 어쨌든 시세(時勢)를 아는 자는 준걸이라 했으니 구노인은 준걸이오. 노부가 묻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 뿐이오." " 그게 무엇이오?" " 유령곡이 어디에 있는 지를 좀 알려주시구료. 이왕 구화산에 왔으니 절경으로 유명한 유령곡을 안찾아 가볼 수야 없지 않소?" 구회회의 눈쌀이 살짝 찌푸러졌다. " 애초에 귀하의 목적이 그것인 줄을 짐작했어야 했는데..... 귀하 사도는 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 본 곡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거요?" " 노부의 제자 녀석도 구노인에게 그걸 물어보았소?" " 시치미를 떼지 마시오. 당신들에게 다른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구화산에 다른? 뛰어난 절경도 많은데 굳이 본 곡만을 찾으려고 하겠소?" " 허어..... 노부의 소원은 천하에 이름난 명소(名所)들을 두루 돌아다니는 거요. 구화산에 비록 절경이 많다해도 유령곡만큼 이름이 알려진 곳이 어디 있소? 구노인은 괜히 쓸데없는 의심을 하지 말고 어서 귀곡의 소재나 알려 주시구료." 구회회는 남궁봉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불쑥 물었다. " 내가 알려 주지 않는다면?" 남궁봉은 담담하게 웃으며 효천호를 들어 보았다. " 그런다고 노부가 구노인을 어쩌겠소? 단지 이 효천호의 성능을 다시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노부가 억제하지 못할 것 같구료." " 본 곡의 소재를 알려준다면?" " 허허.... 그럼 노부는 힘들겠지만 그런 충동을 억제하고 구노인과 구노인의 두 수하를 고히 보내드리겠소." 구회회의 눈이 약삭빠르게 빛났다. " 그게 정말이오?" " 노부에 대한 온갖 좋지 못한 소문이 많지만 아직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라는 소문은 듣지 못했을 거요." 구회회는 잠시 생각하는 척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좋소. 그럼 귀하의 인격을 믿고 말하겠소. 본 곡은 쌍룡봉에서 ?동쪽으로 오십 리쯤 떨어진 약운봉(掠雲峰)의 아래에 있소." 말을 마치자 구회회는 곧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순간, 파파팍! 갑자기 남궁봉이 번개같이 달려들며 구회회와 두 명의 판관의 혈도를 짚어 버렸다. 그 손속이 어찌나 빠르게 갑작스러웠는지 구회회는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눈을 멀거리 뜨고 제압당해 버렸다. 그는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뜬 채 남궁봉을 노려보았다. " 이.... 이 비겁한 늙은 여우야! 네 놈이 이러고도 무림의 고수라고 행세할 수 있느냐?" 남궁봉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 화내지 말게. 노부는 한 번 뱉은 말은 꼭 지키는 성미일세." " 그런데 왜......" " 물론 노부야 자네?말을 믿네. 자네는 유령곡의 수석집사이니 절대로 허튼 소리를 할 리가 없지.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네. 만에 하나라도 자네가 말을 실수했거나 깜박 잊고 다른 장소를 말했다면 괜히 노부만 헛걸음 하는게 아닌가?" 남궁봉의 말인즉 한마디로 구회회가 말한 장소가 유령곡의 정확한 소재인지를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었다. 남궁봉은 화가 나서 안색이 시퍼렇게 변해 있는 구회회의 홀쭉한 뺨을 톡톡 건드렸다. " 너무 그렇게 구겨진 종이조각같은 얼굴을 하지 말게. 노부가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기만 하면 곧 자네를 안전하게 풀어줄테니......" 남궁봉의 말은 그럴 듯 했지만 무슨 수로 구회회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확인한단 말인가? 구회회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사라지고 불안한 빛이 떠올랐다. " 그..... 그럼 노부를 이렇게 두고 약운봉까지 갔다 오겠단 말이오?" "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뭐 있겠나? 이곳에서도 간단하게 알 수 있는데....." 구회회는 남궁봉이 무슨 꿍꿍이 속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 그걸 무슨 수로......." " 염려하지 말게. 잠깐이면 되니까." 남궁봉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명의 판관에게로 다가갔다. 이것을 보자 구회회는 더욱 불안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 별거 아닐세. 노부는 단지 자네 수하들의 의견을 듣고 싶을 뿐이니까." " 흥. 귀하가 정말 본 곡의 소재를 모르고 있는 이상 그들은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소?" 구회회의 이 말은 수하들에게 장소를 거짓말로 말하라고 암시를 해?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허나 남궁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 그 말은 꼭 자네도 거짓말을 했으니 그들보고 따라 하라고 하는 것 같이 들리는군." 구회회는 찔끔하여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남궁봉은 태연하게 두 명의 판관중 한 명을 잡아 일으켰다. " 자네의 수하들을 따로 따로 불러서 대답을 들으면 보다 더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노부의 생각이네." 구회회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 순간에 남궁봉은 한 명의 판관을 붙잡고 조금 떨어진 바위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 그 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노부에 대한 소문은 자네도 귀가 따갑도록 들어보았을 걸세. 그 중에는 틀린 소문도 많지만 노부가 백 마흔 여덟 가지의 고문수법(拷問手法)을 알고 있다는 소문은 추호도 과장이 없는 분명한 사실일세." 판관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 노부는 물론 자네에게 심한 고문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네. 하지만 자네의 대답이 노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부득이하게 노부가 알고 있는 수법을 동원해야 할지 모르네. 제발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헬]蠻斂?" 판관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서..... 선배님은 어서 물어보십시오. 소인은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궁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야지. 사실 조금전에 구가 늙은이가 말한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노부도 이미 알고 있네. 자네는 사실대로 대답해 주겠지?" 판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남궁봉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말했다. " 노부가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게." 이 말을 듣자 판관은 마음을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좋습니다. 대신에...... 노선배님께서는 저의 안전을......." " 그건 염려하지 말게. 구가 늙은이는 절대로 유령곡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걸세. 자네가 사실대로만 말한다면 자네와 노부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어 각자 갈 길을 가면 그뿐 일세." 판관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 곡은 쌍룡봉에서 서쪽으로 삼십 여리 떨어진 낙안봉(落雁峰) 아래 있습니다." 판관이 말한 장소는 구회회가 말한 곳과 완전히 반대가 되는 곳이었다. 남궁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 과연 자네는 현명하고 신용이 있군. 그렇다면 노부도 신용을 지켜야지." 남궁봉은 서슴없이 판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판관은 남궁봉이 이렇게 순순하게 자신을 풀어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포권을 했다. " 노선배님, 감사합니다." " 노부가 한 가지 도움말을 해 주지. 자네는 되도록이면 유령곡으로 돌아가지 않는게 좋을 걸세. 그곳은 머지않아 불길한 장소가 될 게 틀림없네." 판관은 남궁봉의 말뜻을 알아듣고 머리를 조아렸다. "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어 그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남궁봉은 그의 몸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바위뒤에서 나와 구회회와 나머지 한 명의 판관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구회회는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가 남궁봉 혼자만이 바위뒤에서 나오자 안색이 변했다. " 임판관(林判官)은 어디에 있소?" 남궁봉은 싱겁게 웃었다. "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갔네." 이어 구회회가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나머지 한 명의 판관을 붙잡고 다시 바위 뒤로 사라졌다. 구회회는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이 되어 남궁봉과 판관이 사라진 바위쪽을 쳐다보았다. 한참 후에야 남궁봉은 배실배실 웃으며 바위 뒤에서 걸어나왔다. 이번에도 그가 끌고갔던 판관이 보이지 않았다. 구회회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음을 느끼며 급히 물었다. " 귀하는 그들을 어떻게 했소?" 남궁봉은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와 히죽거리며 웃었다. " 그들은 다른 볼 일이 있다고 해서 먼저 가라고 보냈네." 구회회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 그들이 뭐라고 했소?" "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네가 천하에 둘도 없는 못되고 흉악한 거짓말장이이니 절대로 살려두지 말라고 하더군." " 뭐라고?" 구회회가 안색이 대변해 크게 소리치는 순간, 팍! 남궁봉은 간단하게 손을 내뻗어 그의 사혈(死穴)을 짚어 버렸다. " 끄윽........" 구회회는 두 눈을 까뒤집은 채 몸을 부르르 떨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남궁봉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의 시신을 내려다 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 자네가 바른대로만 말했어도 노부는 자네를 살려주었을 걸세. 물론 무공은 폐쇄시켰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이십 년은 충분히 더 살아 숨쉴 수 있었을텐데 안됐구먼."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데 그때였다. " 혹시 그 앞에 계신 분은 남궁노선배님이 아니세요?" 남궁봉의 뒤에서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남궁봉은 이미 뒤에누군가가 나타난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조금도 놀라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에게서 오륙 장 떨어진 곳에 한 명의 백의여인이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남궁봉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눈을 크게 떴다. " 오, 이제보니 운낭자로군. 낭자가 여긴 웬일인가?" 백의미녀는 바로 옥미인 운산화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반가운 듯 말했다. " 선배님의 제자가 구화산 근처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길래 달려오는 길이예요. 그런데 이곳에서 노선배님을 뵐 줄은 몰랐군요." 남궁봉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거렸다. " 허.... 아직도 그 놈을 쫓아다니고 있나? 낭자같이 아리따운 미녀가 무엇이 부족해서 그 녀석을 못잊는지 모르겠군." 운산화는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떳떳하게 말했다. " 소녀는 단 한 순간도 제 자신이 그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가 소녀에게 과분할 지 모르죠." " 허허..... 이것 참! 낭자의 속을 도무지 모르겠군. ?" 남궁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운산화는 빙긋 미소지었다. " 그건 아마도 제가 젊은 여자이기 때문일거예요. 선배님께서는 비록 강호의 경험도 많으시고 다른 누구보다도 노련하신 분이지만 여자가 아니시기 때문에 지금 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남궁봉은 아무 말도 없이 고소를 머금고만 있었다. 운산화는 귀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물었다. " 저..... 혹시 선배님께선 제자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남궁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알고 있네." 운산화의 두 눈이 기쁨과 설레임으로 샛별처럼 반짝거렸다. " 노선배님께선 그 분이 있는 곳을 제게 알려 주시겠어요?" 그녀의 음성과 남궁봉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간절한 기대와 애원의 빛이 담겨 있었다. 남궁봉은 그녀의 기대섞인 눈빛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어 씁쓸하게 웃었다. " 정말 노부가 너무 늙어서 그런지 낭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군. 허나 이게 낭자를 불행한 길로 이끄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네." 그녀는 잽싸게 고개를 흔들었다. " 아니예요. 그건 저를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예요. 만에 하나 제가 불행해진다해도 그건 모두 제가 원한 일이니 절대로 노선배님을 탓하거나 원망하진 않겠어요." " 허허...... 정말 낭자는 무척 끈질기군. 낭자가 정 그 놈을 만나고 싶다면 동쪽으로 한 번 가보게. 운이 닿는다면 그 놈을 만날 수 있을거네." 운산화는 크게 기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 감사합니다. 노선배님.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 허허..... 이것 참, 그럼 노부는 바쁜 일이 좀 있어 이만 가봐야 겠네." 남궁봉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몸을 돌렸다. 이어 몇 번 몸을 날리는가 싶자 그의 작달막한 몸은 순식간에 산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운산화는 감사와 존경의 빛이 가득한 눈으로 그의 모습이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동쪽으로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제 41 장 美女의 수난 구화산은 단 한 구석도 버릴 곳이 없어 산 전체가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처럼 뛰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 나를 듯한 구름...... 울창한 숲....... 괴상망측하게 생겨 제멋대로 서 있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그리고 흑석(黑石)과 이끼 ?틈을 비집고 나와 도도하게 버티고 선 소나무들..... 그야말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자연의 조화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구화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낙안봉(落雁峰)은 유달리 산세가 가파르고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곳이었다. 저녁 무렵, 주위가 어두어둑해 질때 운산화는 낙안봉 근처에 당도했다. 그녀는 남궁봉의 말대로 구화산의 동쪽 줄기를 따라 쭉 걸어왔으나 어디로 가서 화일로를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녀는 남궁봉에게 좀더 자세하게 물어보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어두워져 가는 낙안봉을 바라보았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 누가 감히 본 곡의 입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느냐?" 그녀의 뒤에서 싸늘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방향을 잡기 위해 서 있는 그녀는 깜짝 놀라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근처의 어두운 바위뒤에서 웬 중년의 흑삼인(黑衫人) 한 명이 음산한 얼굴을 한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흑삼중년인은 상대방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절세의 미녀임을 알자 눈을 이상스럽게 빛냈다. 운산화는 상대의 거만하면서도 무례한 시선을 보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흑삼중년인은 비호처럼 몸을 날려 그녀의 앞에 내려서더니 은근한 음성으로 수작을 걸어왔다. " 낭자는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소?" 그녀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토록 깊은 산중에 불쑥 나타난 사나이의 정체가 의심스러워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흑삼중년인의 눈썹이 조금 찌푸러졌다. " 낭자는 내 말이 들리지 않소?" " 나는 귀머거리가 아니예요.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오건 말건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참견을 하는거죠?" 그녀는 쌀쌀한 투로 그의 말을 묵살시켰다. " 흐흐..... 낭자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소?" " 이곳은 구화산이 아니예요?" " 흐흐.... 내가 묻는 말뜻은 그게 아니오. 이곳은 물론 구화신이지만 이 일대는 본 곡의 관할지이기도 하오. 낭자는 지금 본 곡의 영내를 허가없이 침범한 것이오." " 본 곡이라니요?" " 흐흐..... 본 곡은 유령곡이라 하오." 운산화는 흠칫 놀랐다. 그런가요? 유령곡이 구화산에 있다는 말은 얼핏 들었지만 설마 이곳에 있는 줄은 몰랐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귀곡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녀는 냉랭하게 말하며 그의 몸을 피해 앞으로 걸어나가려 했다. 흑삼중년인의 입꼬리에 음산한 미소가 어리더니 그는 잽싸게 몸을 움직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낭자는 왜 자꾸 나를 피하려 하오? 내가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한단 말이오? 운산화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왜 자꾸 이러는 거죠? 흑삼중년인은 그녀의 전신을 음탕한 눈초리로 연신 훑어보며 집적거렸다. 다른 이유는 없고 다만 낭자와 애기나 눴으면 하오. 나는 당신과 할 말이 전혀 없어요. 운산화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아예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아미를 찌푸렸으나 흑삼중년인은 징그런 미소를 지었다. 흐흐..... 얼마든지 있소. 예를 들어 낭자가 이 어두운 저녁에 혼자 깊은 산속을 정처없이 헤매고 있는 것은 누군가 다정하게 애기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게 아니겠소? 운산화는 즉시 냉소를 머금고 흑삼중년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밤에 혼자 다니건 춤을 추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지요? 흐흐.... 나는 호의로 한 말이니 낭자는 그렇게 화를 내지 몌]떽첼? 낭자처럼 뛰어난 미모를 지닌 아가씨가 깊은 산길을 홀로 거닌다는 건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오. 그러니 만일을 대비해서 내가 보호해 드리겠소. 흑삼중년인은 히죽거리며 서슴치않고 그녀의 앞가슴으로 손을 내밀었다. 운산화는 날카롭게 외쳤다. 이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놈아! 이서 썩 비켜라! 그녀는 벌레를 털어내듯 잽싸게 일장을 갈겼다. 쏴아앙! 제법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사나운 장력이 날아들자 흑삼중년인은 헛기침을 토하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헛.......!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비틀거리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 이제보니까 제법 무공을 할줄 아는구나. 좋아! 이렇게 되면 더 마음이 움직이는구나. 한바탕 어울려 보자. 흑삼중년인은 성난 얼굴로 덤벼들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날카로운 소리가 흑삼중년인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어둠속에서 대 여섯 사람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다. 가장 앞에는 이목이 뚜렷한 흑의청년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흑의청년은 인품이 비범하고 걸음걸이도 당당했다. 다만 안색이 창백하고 눈 주위가 냉엄헬]?기운이 돌고 음흉스럽게 보인 점이 옥의 티라면 티였다. 얼굴이 창백한 건 문제될 것이 없으나 눈 주위가 냉엄하고 음흉스런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뒤에는 몸에 흑포를 걸치고 머리에 오사모(烏紗帽)를 쓴 중년인이 따르고 있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가 등뒤에 귀두도(鬼頭刀)를 맨 흑삼인들이었다. 흑의청년은 가까이 다가오다 운산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두 눈에 이상한 빛을 떠올렸다. 그는 창백한 얼굴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줄곧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사모를 쓴 중년인과 나머지 세 명의 흑삼인들까지도 힐끗거리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오사모를 쓴 중년인은 엄숙한 얼굴로 운산화에게 수작을 걸었던 흑삼중년인에게 다가가며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흑삼중년인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집사(四執事)님께 아룁니다. 이 여자가 본 곡안으로 걸음을 옮기기에 제지시키고 있는 중에..... 운산화가 코웃음을 치며 흑삼중년인을 노려보았다. 뭐라고요? 왜 조금전에는 기세당당하더니 이젠 굽실거리고 거짓말을 하지요?? 비고는 말에 흑삼중년인은 허리를 펴며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언제 그런..... 닥쳐! 사집사의 날카로운 오침에 흑삼중년인은 찔끔해 버렸다. 사집사는 고개를 돌려 운산화를 향했다. 사실대로가 아니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슴치말고 말해 보시오. 운산화는 숨기지 않았다. 내가 혼자 걷는다고 시비를 걸더니 손짓을 해가며 나더러 애기를 나누자는 거예요.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는 직접 물어 보세요. 사집사는 성난 얼굴로 흑삼중년인을 힐책하려는 순간, 흑의청년이 점잖게 가로막았다. 조집사(曺執事), 잠시 뒤로 물러서시오. 내 할말이 있소. 예. 소곡주(小谷主)님. 사집사는 즉시 응답을 한 후 공손히 뒤로 물러났다. 흑의청년은 싸늘한 시선으로 흑삼중년인을 노려보았다. 내막을 자세히 애기해라. 추호도 거짓말이 없어야지. 섣불리 내 눈을 속이려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흑의청년은 풍채부터가 범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있었다. 흑삼중년인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와들와들 떨었다. 소.. 속곡주님께 말씀.... 드립니다. 저..... 저는.... 거기 꿇어앉아라. 흑의청년의 찬물을 끼얹는 듸]灼?말에 흑삼중년인은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소.... 소곡주님..... 제발...... 본 유령곡의 체면을 따에 떨어뜨린 놈.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추상같은 호령에 벌벌 떨고 서 있던 흑삼중년인은 홱 돌아서더니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내닫기 시작했다. 조집사! 흑의청년은 흑삼중년인을 노려보며 사집사를 불렀다. 예. 소곡주님. 어서 처치하시오. 담담한 말이었다. 사집산느 한 번 몸을 솟구치더니 벼락같이 흑삼중년인의 등 가까이에 내려서며 주먹을 내뻗었다. 꽝! 케엑........! 처절한 비명소리가 야음을 뚫고 주위에 울려퍼졌다. 흑삼중년인은 일 장 밖으로 날아가 사지를 쭉 뻗었다. 그러자 운산화는 얼른 흑의청년 쪽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정말 고맙군요. 말을 마친 그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흑의청년은 얼른 포권을 하며 만면에 부드러운 웃음을 담았다. 낭자, 잠시만 멈춰주시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는가요? 혹 제가 실수한 거라도 있나요? 실수라니 당치 않소.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시고 잠시만..... 그럼 무슨 가르침이라도 쟁]聆맒키×? 그렇다면 기꺼이...... 흑의청년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원 별 말씀을...... 흑의청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 낙안봉은 밤에 혼자 거닐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오. 그러니 어디로 가는 길인지 바래다 드릴까 하오.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호의는 정말 고맙군요. 하지만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다시 사뿐 몸을 돌렸다. 잠깐만. 이번에는 사집사가 다시 나섰다. 그는 유령곡에 있는 다섯 명의 집사 중 네번재 집사로, 별호는 음부귀판 (陰府鬼判)이며 이름은 조홍(曹洪)이라 했다. 그는 섭추음을 돌아보자 징그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돌하게 나선 것을 용서하시오. 또 할 말이 있나요? 굉장히 번거롭군요. 이곳을 지나가기가. 낭자에게 묻고 싶은게 있어서 그러니까 서슴치 말고 대답해 주시오. 혹시 낭자는 옥미인 운산화 낭자가 아니시오? 그래요.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지요? 운산화가 놀란 얼굴로 묻자 흑의청년이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오! 이제보니 강호의 삼대미인 ?중 한 분이신 운낭자였군. 일직 말하지 않았으면 실수를 할 뻔 했군. 이어 그는 운산화를 향해 포권을 했다. 운낭자. 나는 유령곡의 소곡주인 우문찬(宇文贊)이라 하오. 운산화는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그가 먼저 인사를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제보니 우문소곡주이셨군요. 처음 뵙겠어요. 나는 오래전부터 낭자를 흠모해 왔소이다. 소문대로 낭자는 정말 아름답고 뛰어난 자태를 지니고 있구료. 이렇게 만나니 큰 영광이오이다. 본 곡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낭자를 모시고 싶소. 소곡주께서 그렇게 칭찬을 해주시니 영광이예요. 하지만 나는 지금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소곡주의 양해를 구해야 겠어요. 그녀는 정말 미안한 듯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우문찬은 그 말에 당황하여 급히 손을 들어 제지하며 더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혹시 내가 실례되지는 않았소? 그렇다면 용서해 주시고 잠시만 시간을 허락해 주시오. 그녀는 머리를 까닥 숙여 보인 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운낭자, 거절하지 말고 잠시만 본 곡에쇽]?쉬시다가...... 그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운산화는 우문찬의 뜨거운 시선을 외면하며 조용히 말했다. 소곡주의 호의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지만 워낙 바쁜 몸이라 그럴 시간이 없군요. 그러자 조횽이 성큼 나서며 약간 격한 투로 말했다. 운낭자. 어찌 우리 소곡주의 체면을 전?생각하지 않는거요? 잠시만 쉬었다 가면 우리 소곡주께선 사람을 시켜 낭자를 무사히 목적지까지 바래다 드릴텐데 말이오. 운산화는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된 자신을 깨달았다. 그래서 약간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이미 몇 번 말했지만 나는 지체할 수 없을만큼 급한 일이 있어요. 자꾸 肩?첩?나를 괴롭히는 결과밖에 안되는 거예요. 조홍은 우문찬을 향해 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운낭자는 너무 겸손을 부리니 할 수 없습니다. 강압적으로라도 끌고 갈 수 밖에. 우문찬은 음산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낭자가 자꾸 겸손의 말만 하니 하는 수 없군. 그렇게라도 대접을 할 수 밖에.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세 명의 흑삼인은 어느새 그녀의 뒤를 차단했고, 조홍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앞길을 가로막았다. 우문?찬은 기분이 좋은 듯 앙천대소를 하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으하하...... 낭자, 이제는 됐소? 운산화는 그들이 설마 이렇게 노골적인 수작을 부릴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떨려 나오는 음성으로 날카롭게 대꾸했다. 정말 고맙군요. 윗물이 이꼴이니 아랫물이 흐릴 수 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치죠. 운산화는 손을 들어 일장을 쳐냈다. 쑤아앙! 세 명의 흑삼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히죽 웃더니 쌍장을 들어 맹렬하게 반격을 가해왔다. 파파파팍! 꽈르르릉! 그들은 모두 유령곡의 이십사판관(二十四判官)들 중의 하나로 개개인의 무공이 강호의 일류고수에 조금도 못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 삼인(三人)의 합공을 그녀 혼자의 힘으로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꽝! 장풍이 맞닥뜨리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녀는 비실비실 몇 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흐흐.... 권주(勸酒)를 마다하고 굳이 벌주(罰酒)를 들려 하다니..... 뒤에 서 있던 조홍이 음흉한 웃음을 떠올리며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으려 했다. 그녀는 아직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조홍의 갈고리같은 손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움켜 쥐려는 쇽]彭? 더러운 손을 치워라! 어디선가 벼락같이 외치는 소리가 그들을 움찔하게 했다. 동시에, 쾌액! 어둠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그야말로 섬전처럼 튀어나오며 조홍을 향해 괴이한 일장을 격출해냈다. 제 42 장 幽靈谷으로 으헛? 조홍은 괴영(怪影)의 너무도 신속한 공격을 보자 헛바람을 들이키며 황급히 그녀에게 뻗치려던 손을 재빨리 거두며 몸을 돌려 장풍으로 맞섰다. 꽝! 굉음과 함께 조홍은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다섯 걸음이나 주르르 밀려나 버렸다. 그는 몸을 크게 휘청거리다 참지 못하고 시뻘건 선혈을 한 덩어리 게워내고 말았다. 우엑! 중인들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조홍은 유령곡 내에서도 열 손가락안에 드는 절정고수였는데 돌연히 나타난 괴영의 일장(一掌)에 맥없이 격퇴당한 것이다. 단 일장에 조홍을 격상시킨 괴영은 화의를 입은 준수한 청년이었다. 운산화는 그를 보자 두 눈을 환하게 빛내며 기쁨에 가득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이었군요. 화의청년은 그녀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화일로였던 것이다. 화일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나요. 낭자가 설마 이곳?까지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소. 처음에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반신반의 했을 정도였소. 운산화는 막상 그를 만났으나 너무도 가슴이 설레고 벅차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얼굴을 사과처럼 발갛게 물들인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남궁선배님을 만나셨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낭자는 이곳에서 꼼짝없이 변을 당했을거요. 화일로는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중인들을 돌아보았다. 다큰 남자들이 다수의 힘을 믿고 연약한 여자를 괴롭히다니 당신들은 스스로가 너무 몰염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우문찬은 화일로가 나타날 때부터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가 그가 운산화와 다정스레 이야기를 주고받자 두 눈에 진한 살기(殺氣)를 떠올렸다. 그러다 이내 음산한 눈길을 보내며 천천히 화일로의 앞으로 다가왔다. 귀하는 누구요? 하하..... 본인의 하잘 것 없는 이름을 당당한 유령곡의 소곡주께서 알아서 무엇하시겠소? 우문찬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화일로의 말속에 짙은 조소(嘲笑)가 담겨 있으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화일로를 쏘아보다가 냉랭하게 웃었다. 흐흐....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몌]幣求?겁장이로군. 본 소곡주가 누구인지 안다면 본 곡의 무서움 또한 잘 알고 있을텐데...... 이름을 밝히는 것도 겁이 난다면 본 소곡주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썩 꺼지는게 신상에 이로울거요. 하하.... 본인의 신상까지 염려해 주어서 고맙소. 하지만 원래 나는 아무 이유가 없어도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성미인데 이번에는 더구나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 관계된 일이니 싫어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구료. 우문찬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귀하는 그녀와 어떤 사이요? 화일로는 빙긋 웃었다. 누가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걸 보면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만은 없을 정도의 관계는 있는 사이요. 그의 말은 묘해서 우문찬은 정확하게 그와 운산화가 어떤 사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친밀하다는 貫瓚?받았다. 그는 눈쌀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그녀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말이오? 운산화가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 우문소곡주, 조금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솔직한 게 좋을 거예요. 유령곡에는 왜 그렇게 하나같이 철면피들만 모였지요? 말 다했소? 우문찬은 불꽃이 튀는 시굼막膠]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직 남았어요. 당신은 부하가 경박하게 내 몸에 손을 대려하자 즉결처분을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한술 더 떠서 당신은 이제 거짓말까지 하는군요. 당신은 부하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어요. 우문찬의 얼굴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운낭자, 본 소곡주가 참고 있다고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모양인데 본 소곡주의 인내심은 그리 많지 않소. 그는 금시라도 그녀에게 손을 쓰려는 듯 양손에 공력을 끌어 올렸다. 이때 화일로가 눈치빠르게 얼른 말을 받았다. 옳은 말이오. 운낭자,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유령곡의 소곡주께서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그건 아마도 낭자가 잘못 생각한 걸 게요. 자.... 내가 중간에 화해를 시켜 드릴테니 운낭자는 갈 곳이 있으면 어서 걸음을 계속하시오. 아무도 더는 낭자를 괴롭히지 않을 거요. 운산화는 오직 화일로를 만날 일념(一念)으로 천리만길을 달려왔는데 그를 눈앞에 두고 혼자갈 리가 만무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선 채 정감이 듬뿍 담긴 눈으로 화일로를 응시했다. 당신은요? 화일로는 그녀의 마음을 훤하게 꿰뚫어본 듯 입가에 담담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유령곡의 풍광(風光)이 수려하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이왕 이곳까지 온 김에 유령곡을 구경하고 가려고 하오. 이 말을 듣자 우문찬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쩍였다. 귀하는 정말 본곡을 구경하고 싶소? 화일로는 서슴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만약 소곡주께서 나를 귀찮아 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이 기회에 말로만 듣던 유령곡의 절경을 한번 감상하고 싶구료. 운산화는 불안한 마음이 드는지 초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왜 하필이면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나요? 하하..... 운낭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니 운낭자는 내 일에 상관을 하지 말고 어서 갈 길이 있으면 가보시오. 화일로의 말은 운산화에게는 몹시 서운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운산화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당신이 유령곡에 간다면 나도 따라 가겠어요. 화일로는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하다가 고갤르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안되오. 왜 안된단 말이예요? 그건...... 화일로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으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입을 ?다물었다. 운산화는 불어오는 밤바람에 흐트러진 모리카락을 귀밑으로 쓸어올리며 생긋 웃었다. 호호.....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니 당신도 내가 하는 일에 상관할 필요가 없어요. 아무튼 나는 당신을 따라 가기로 했으니 당신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녀가 조금전에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자 화일로는 쓴웃음을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우문찬은 운산화가 화일로를 따라 유령곡으로 가겠다고 하자 입가에 절로 회심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흐흐..... 본 곡은 외인(外人)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지만 만약 두 분이 본곡을 구경하고 싶다면 본 소곡주의 재량으로 특별히 승낙을 하겠소. 화일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운산화를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정말 낭자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구료. 운산화는 방긋 웃었다. 호호.... 당신도 모르는게 다 있군요. 염려마세요. 당신을 따라 가더라도 절대 폐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을테니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오. 아! 이런 애기는 이제 그만 합시다. 화일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우문찬을 돌아보았다. 소곡주께서는 정말 귀곡으뤄]?우리를 안내해 주시겠소? 우문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본 소곡주는 절대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니 귀하는 안심하시오. 또한 두 분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본곡에서 내보내 드리겠소. 화일로는 돌연 빙그레 웃었다. 소곡주의 친절에 감사드리오. 정말 소곡주께선 내가 처음 느낀 인상 그대로 사려깊고 예의바른 분인 것 같소. 운산화는 우문찬이 보기와는 달리 음흉하고 질이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문찬은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먼저 걸음을 떼었다. 하하.... 밤바람이 찬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본곡으로 갑시다. 부친께서도 두 귀한 손님이 오셨다는 것을 아신다면 크게 기뻐하실 것요. 그는 마치 오래 사귄 친구라도 되는 양 아주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화일로와 운산화를 안내했다. 운산화는 조금 불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화일로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서슴없이 우문찬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세 명의 판관과 사집사인 조홍이 뒤따르고 있었다. 밤은 어느새 깊어져 중천에는 환한 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쟁]?달빛을 받으며 낙안봉의 뒤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얼마쯤 가니 깎아지른 듯한 계곡의 좁은 길이 나타났다. 우문찬은 가장 선두에 서서 비호처럼 앞으로 달려나가며 소리쳤다. 이제 거의 다 왔소. 화일로와 운산화가 그의 뒤를 따라 가니 큰 연못을 돌게 되었다. 동시에, 쿠우우우........! 갑자기 세찬 물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문찬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석벽을 돌아 물소리가 나는 쪽으로 번개처럼 달려나갔다. 화일로와 운산화도 급히 석벽을 돌았다. 그러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천길 절벽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절벽 위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렸고, 폭 오 장 쯤되는 연못이 흰 거품을 솟구치며 자리잡고 있었다. 쿠쿠쿠쿠........! 사방으로 튕기는 물방울은 일대를 안개로 덮은 듯 뿌옇게 흐려놓고 있었다. 절벽은 아주 높고 미끄러운 이끼가 끼어 있어서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이었다. 우문찬은 절벽의 앞에 당도하자 몸을 멈춘 채 그들을 돌아보며 득의만면하게 웃었다. 이곳이 바로 본곡의 입구요. 운산화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구라고요?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흥]?狗寬?주위를 살피다가 눈을 번쩍 빛냈다. 혹시 귀곡은 저 폭포수 뒤에 있는 게 아니오? 우문찬은 움찔 놀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하의 안력은 보통이 아니구려. 그렇소. 본곡은 저 폭포수를 돌아가면 도착할 수 있소. 이어 그는 섬전처럼 몸을 날려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수의 좌측으로 날아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몸은 폭포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운산화가 놀란 음성으로 소리치자 화일로는 슬쩍 그녀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가보면 알게 될거요.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문찬이 사라진 폭포의 좌측으로 날아갔다. 과연, 폭포수의 좌측에는 겉으로 보아서는 잘 알 수 없는 작은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은 폭포수의 뒤쪽으로 향해 있었는데 아주 교묘하게 폭포수에 가려 있어 이곳의 지형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폭포의 뒤쪽에 이런 통로가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운산화와 화일로가 폭포의 뒤를 돌아 앞으로 나가자 하나의 동굴이 나타났다. 헌데 그들보다 먼저 들어왔던 우문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운산화는 뒤를 돌아보다 뾰즉]렷?음성으로 소리쳤다. 앗? 그들도 없어졌어요. 어느 사이엔가 그들의 뒤를 감시하듯 따라왔던 세 명의 판관과 조홍의 모습도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졸지에 두 사람만 어두운 통로의 앞에 휑뎅그레하게 남게 되었다. 화일로는 주위를 둘러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근처 어디에 유령곡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는 모양이오. 그럼 어쩌죠? 운산화가 조금 불안한 듯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자 화일로는 돌연 그녀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왜 이제 슬슬 무섭기 시작하오? 운산화는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았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는 모양이군요. 농담이 아니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차츰 두려워지기 시작하는데...... 운산화는 피식 웃었다. 괜히 겁주지 마세요. 화일로는 한쪽에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을 가리켰다. 저 동굴은 왠지 음산하면서도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소. 보아하니 저곳이 바로 유령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 같구려. 낭자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를 따라 유령곡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바꾸는게 어떻겠소? 내 생각은 변함없으니 당신은 괜?히 애쓰지 마세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유령곡으로 가려고 하세요? 정말 그곳의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서 인가요? 그건 차차 알게 될거요. 화일로는 천천히 동굴앞으로 다가갔다. 동굴 안은 칠흙보다 더 어두웠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자 일시적으로 눈앞이 가려진 듯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동굴이 얼마나 깊은지, 누가 있고 뭐가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운산화는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 들어오며 조그맣게 물었다. 여긴 왜 이렇게 어둡죠? 화일로는 눈을 빛내면서 동굴안을 살피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마 유령이 살고 있는 곳이라 그런 모양이오. 운산화는 어둠속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요염하게 미소지었다. 당신과 함께라면 나는 진짜 유령이 있어도 겁나지 않아요. 때로는 유령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오. 자, 안으로 들어가 조사를 해봅시다. 낭자는 내 뒤를 떨어지지 말고 바싹 따라오시오. 그는 진기를 모아 만약의 암습에 대비를 하며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퍽 크고 긴 모양이었다. 천연적인 것인지, 인공(人工)으로 파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안이 퍽 깨끗한 것쟁]막?보아 가끔 사람의 발자국이 오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차 한잔을 마실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때, 갑자기 앞이 환해졌다. 더 걸어 나가니 삼 장쯤 밖에 출구가 똑똑히 보였다. 동굴 밖으로는 굵은 모래가 깔린 길이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발짝 안쪽에서 걸음을 멈춘 그들은 유심히 출구 밖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밖은 퍽 넓은 골짜기였다. 바닥에는 온통 잔돌과 왕모래가 깔려 있을 뿐, 거칠어서인지 풀은 한 포기도 자라 있지 않았다. 골짜기에는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 집들의 외곽에는 성곽처럼 생긴 돌담이 빙 둘러쳐져 있었다. 집들은 백여 채 가량 되었으며 거대한 보문 꼭대기에는 패루(牌樓)가 있고, 문 입구의 양편에는 귀두도를 찬 흑의 장한 넷이 지키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보 안에는 등불이 휘황찬란히 빛났고, 사람들이 분주히 왔다갔다하며 경계를 엄하게 하고 있었다. 화일로는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고 나서 담담하게 말했다. 이 계곡이 바로 유령곡인 모양이오. 보나마나 그 우문찬이란 녀석이 통지를 했을테니 몰래 들어가긴 틀렸고 이왕 발각당할 바에는 정정당당하게 들어갑시다. 운산화댐]?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전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테니까요. 화일로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려갑시다. 그는 앞장서서 골짜기로 내려갔다. 운산화도 아무 말없이 뒤를 따랐다. 제 43 장 세 개의 關門 문 양쪽에서 파수를 보던 흑의 장한들은 화일로와 운산화를 보았으나 못 본 척하고 자리를 뜨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옷깃을 밤바람에 휘날리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태연스럽게 골짜기를 내려갔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패루에서 다섯 장쯤 떨어진 곳까지 당도했다. 그러자 네 명의 흑의장한들이 일제히 시선을 던지며 쏘아봤다. 그 중에서 장한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멈추시오. 그리고 성명을 대시오. 화일로는 아무 대답도 없이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려고도 않고 성명을 말하지도 않으니 흑의장한은 화가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친구, 귀머거리시오? 걸음을 멈추고 성명을 대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지 않겠소. 화일로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가만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셈이오? 이 어른이 놂]?놈을 콩가루로 만들겠다! 흑의장한은 버럭 소리치며 갑자기 일장을 날렸다. 쑤아앙! 제법 매서운 장력이 날아들자 화일로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 정도 무공으로는 날콩도 가루로 만들지 못할거요. 동시에 그는 우수를 쑥 내뻗었다. 팟! 흑의장한의 눈앞에서 무언가 번쩍하고 스친 순간, 그의 손목은 어느새 화일로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앗! 흑의장한은 대경실색하여 안색이 싹 변했다. 그 흑의장한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변변치 않아 보이는 화의청년이 이 정도로 무서운 무공을 지닌 고수일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화일로는 유령곡의 문지기 따위를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곧 그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그러자 흑의장한은 뒤로 크게 한 발짝 물러나서 화일로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귀두도를 뽑아서 휘두르며 덤비려고 했다. 화일로는 급히 손을 저으며 소리 질렀다. 잠깐. 흑의장한은 칼을 비스듬히 치켜든 채로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화일로는 다시 물었다. 소곡주는 돌아왔소? 흑의장한은 냉랭히 반문했다. 친구는 소곡주를 아시오? 나는 당신듸]湧?소곡주와 약속을 하고 왔소. 흑의장한은 의외라는 듯이 놀라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이오? 친구의 존함은 무엇이오? 소곡주가 당신들한테 알맂 않았소? 말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물을 필요도 없소. 흑의장한은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그럴 수는 없소. 친구가 성명을 말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본곡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소. 화일로는 눈빛을 번쩍 빛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그는 늠름한 자세로 흑의장한에게로 다가갔다. 쳐라! 흑의장한이 고함을 지르자 다른 세 명의 흑의장한들이 동시에 귀두도를 휘두르며 맹렬한 기세로 화일로를 공격했다. 파파파파....... 주위가 온통 그들이 휘두르는 도기(刀氣)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화일로는 서슴치 않고 그들의 한가운데로 신형을 날렸다. 동시에 그의 양 손이 질풍처럼 사방으로 휘둘러졌다. 팍! 팍! 팍! 수 십, 수 백개의 장영(掌影)이 겹겹이 나타났다. 바로 절세무적(絶世無敵)의 천전수가 펼쳐진 것이다. 땡그렁! 땡그렁! 흑의장한들의 수중에 있던 귀두도가 연거푸 땅위로 떨어졌다. 크앗! 악! 동시에 비명이 연거푸 들리며 네 사람은 깡그몌]?땅위로 쓰러지더니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죽어버린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머리카락 하나 상처입지 않았고, 단지 화일로에 의해 혈도를 봉쇄당했을 뿐이다. 화일로는 담담한 얼굴로 쓰러진 흑의장한들을 쓱 훑어보고는 패루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들리더니 패루 위에서 일백일흑(一白一黑)의 두 인영이 번개처럼 재빠르게 날아 내려와 화일로의 면전에 일 장 앞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버티어 섰다. 두 사람의 나이는 오십을 넘어 보였다. 왼편에 서 있는 사람은 머리에 백모(白帽)를 쓰고 몸에는 백의를 입었다. 그리고 신발도 하얗고 전신이 백설같이 하얀 차림이었다. 또한 등뒤에 차고 있는 검집과 검까지도 흰색이었다.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은 그와는 반대로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두 흑색의 차림이었고, 역시 검집과 검까지도 흑색이었다. 화일로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쓸어 본 후 입을 열었다. 소문에 듣기로는 유령곡에는 모두 열 명의 염라(閻羅)가 있는데 그 중 두 사람은 특히 무공이 고강하고 의기(義氣)가 상통해서 그들을 흑백염라?(黑白閻羅)라고 부른다던데 두 분은 혹시 그 사이가 남달리 각별하다는 흑백염라가 아니시오? 왼쪽의 백의인이 움찔하다가 이내 흐흐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소. 친구의 견문은 보통이 아니구려. 헌데 친구는? 소곡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소沮濂꼈?친구의 성명은 알지 못한다고 하셨소. 하하..... 그렇구료. 그러고보니 아직 소곡주에게 내 이름도 밝히지 않았구료. 난 화일로라는 사람이오. 화일로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백염라(白閻羅)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화일로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물었다. 귀하가 바로 풍파무쌍 화일로란 말이오? 화일로는 담담하게 웃었다. 내 이름이 이렇게 유명할 줄은 몰랐군. 백무상은 눈쌀을 찌푸리다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풍파무쌍이란 이름이 무림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본 곡에서는 별로 두려움을 주지 못할거요. 화일로는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그야 그렇겠지요. 유령이 어찌 사람을 두려워 하겠소? 그가 은근히 유령곡이란 이름을 빗대어 그들을 유령에 비유하자 백무상은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백무상은 눈썹을 치키며 소몌]??질렀다. 귀하가 무엇때문에 본곡으로 와서 시비를 거는거요? 시비라니 당치 않소. 나는 분명히 우문찬에게 승낙을 받고 귀곡을 방문하러 온거요. 소곡주가 무어라고 했던 귀하가 본곡에 들어오려면 무엇을 내보이시오. 그렇지 않고서는..... 흐흐.... 어림없는 수작은 하지 않는게 좋을거요. 나는 가진 것도 없는데 무엇을 내보이란 말이오? 흐흐..... 본곡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소. 진실한 실력이 있는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이오. 화일로는 두 눈을 번쩍 빛냈다. 그렇다면 귀하는 나에게 이곳을 뚫고 들어가라는 말이오? 이때 지금껏 말이 없이 서 있던 흑염라(黑閻羅)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긴 말은 할 것 없소. 패루에서 대청까지는 모두 세 개의 관문이 있소. 그리고 곡주는 지금 대청에 계시니 귀하가 세 개의 관문만 뚫는다면 곡주를 만날 것이오. 화일로는 갑자기 소리높여 껄껄 웃었다. 하하..... 당신은 제법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드는구료.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유령곡에서 어떤 솜씨를 가진 자가 나를 막아낼지 모고 싶구료. 또한 그 신통한 효천호의 위력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 흑백염라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지면서 경악의 빛을 띄웠다. 귀.... 귀하는 본곡의 효천호를 아시오? 화일로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것의 맛도 톡톡히 보았소. 백염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귀..... 귀하는 어디서 효천호를 보았소? 구화산 입구에서 웬 비쩍 마른 늙은이를 만났소. 그런데 내가 그 늙은이에게 유령곡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갑자기 실성한 노인네처럼 마구 덤벼드는게 아니오? 화일로는 손짓 발짓을 섞어가면서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는 점잖게 타일렀으나 그 늙은이가 하도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길래 약간 매운 맛을 보여줬소. 그랬더니 그 늙은이가 돌연 품속에서 하나의 검은 구슬같은 물건을 꺼내드는게 아니겠소? 백염라가 부르짖듯 소리쳤다. 그..... 그 노인은 어떻게 생겼소? 화일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앙상하게 마르고 검은 장포를 입고 있었소. 그리고 인상이 지저분하고 재수없게 생긴 늙은이였소. 그 노인의 이름은...... 제갈귀인지 귀제갈인지라고 하더군. 아무튼 그 미친 늙은이가 그 검은? 물체를 내게 던지길래 약간 찜찜해서 일단 몸을 피했소. 그랬더니 정말 볼만한 광경이 벌어지더군. 흑염라가 신음을 토했다. 귀..... 귀하는 그분을 어떻게 했소? 화일로는 히죽 웃었다. 어쩌긴..... 그냥 좋은 말로 타일러서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따끔한 충고를 해 주었소. 헌데 그건 왜 물으시오? 흑백염라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들은 화일로가 말한 늙은이가 바로 유령곡의 수석집사인 귀제갈 구회회임을 알 수 있었다. 구회회는 비단 무공이 고강하고 심계가 뛰어날 뿐 아니라 평소 성품이 자신의 눈밖에 난 자를 살려두는 법이 없었다. 헌데 그와 만나 시비까지 벌였다는 화일로는 멀쩡히 왔는데 구회회는 아직까지 유령곡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은 바보가 아니므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흑염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본곡의 효천호는 위력이 대단히 무섭고 파괴력이 강한데 그것이 귀하를 어떻게도 하지 못했단 말이오? 화일로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것이 나를 처치해 버렸다면 어찌 살아서 이곳까지 왔겠소? 흑백염?라의 안색이 또 다시 변했다. 이 패루 안래의 제일관(第一關)은 당신들 두 사람이오? 흑염라는 암암리에 깊이 숨을 들이키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우리가 바로 제일관이오. 그럼 두 분은 준비하시오. 나는 안으로 뚫고 들어가겠소. 화일로는 큰 걸음으로 흑백염라 앞으로 다가갔다. 흑백염라는 화일로가 천천히 다가오자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치고 식은 땀이 흘렀다. 자신들보다 무공이 훨씬 고강한 귀제갈 구회회가 효천호를 사용했는데도 화일로를 쓰러뜨리지 못한 것을 안 이상 그들의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허나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 이윽고 그들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전력을 다해 공력을 돋구었다. 화일로는 태연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자세는 전혀 싸움을 앞둔 사람같아 보이지 않았다. 화일로가 두 사람의 다섯 자쯤 육박했을 때, 에잇! 받아라! 흑백염라는 더이상 참지를 못하고 갑자기 고함을 치며 쌍장을 힘껏 밀어냈다. 꽈르릉! 백염라의 백살진기(白煞眞氣)와 흑염라의 흑마강이 제각기 희고 시커먼 강기를 쏟아내?며 뿜어나왔다. 화일로는 신형을 슬쩍 움직여 백염라의 백살진기를 피했다. 동시에 번개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흑염라의 흑마강을 맞받았다. 꽝!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나오며 흑염라는 십 여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으윽.......! 그는 밀려나서도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가슴속에서 거꾸로 솟구쳐 올라온 기혈을 억제하지 못하고 선혈을 토해냈다. 우엑! 백염라는 대경실색하여 급히 흑염라를 붙잡아 흔들면서 소리쳤다. 노흑(老黑), 상처가 대단한가? 흑염라는 그 소리에 놀라 정신이 드는 듯 어깨를 펴보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싹 변한 안색으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젖고 말했다. 나는 괜찮네. 노백, 빨리 저 자를 막게. 절대 통과시킬 수는 없으니. 이 말을 듣고 백염라는 급히 몸을 돌렸다. 허나 이미 한 발이 늦었다. 화일로와 운산화는 벌써 대문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화일로와 운산화는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또 다른 방벽에 부딪혔다. 다섯 장도 가지 않아서 키가 큰 흑의인 세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십 오륙 세 정도 되어 븝]맙느만?제각기 팔뚝만큼이나 굵은 빈철곤(濱鐵棍)을 쥐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두목격인 흑의인이 소리쳤다. 멈춰라! 화일로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훑어 보았다. 세 분은 뉘시오? 두목 흑의인이 소리질렀다. 이곳이 어딘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유령곡이 아니오? 알면서 왜 묻느냐? 내가 묻는 것은 당신이 무슨 유령이냐는 것이오. 흑의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 흉광(凶光)을 발산하면서 소리쳤다. 이놈아! 죽고 싶으냐? 내 말이 틀렸소? 유령곡에 사는 놈들이 유령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흑의인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왕방울 같은 눈을 부릅떴다. 이놈아! 쓸데없는 소리 작작 지껄여라. 무엇하러 이곳까지 왔는지 용건이나 말해라! 화일로는 껄껄 웃었다. 유령을 잡으러 왔소. 하하하........! 흑의인의 눈에서 파란 불이 일어나는 듯 눈꼬리가 위로 치켜지며 꽹과리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찢어죽일 놈.....! 어서 용건이나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흐흐...... 하하...... 날도 이미 저물었으니 방에 들어가 잠이나 주무시지 주책스럽게 그 무거운 빈철곤]岾?들고 왜 쓸데없이 고래고래 악을 쓰고 야단이오? 우리는 명령을 받고 어떤 자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사람을 기다리시오? 모가지를 바치러 오는 놈을 기다리고 있다.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내가 바로 당신들이 기다리던 사람이오. 하지만 난 모가지를 바치러 온게 아니라 그 반대로 목을 받으러 온 사람이오. 흑의인은 몸을 움찔하더니 화일로의 위 아래를 훑어 보았다. 네 놈이 본곡에 시비를 걸러 온 놈이라고? 흐흐.... 난 또 얼마나 대단한 무림고수인가 했더니 얼굴만 조금 반지르르한 놈이로구나. 흑의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계속 물었다. 네 놈은 어떻게 들어왔느냐? 패루 아래의 대문으로 걸어서 들어왔소.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느냐? 있었지만 그들은 나를 제지하지 못하고 통과시켰소. 흑의인은 두 눈을 크게 치켜뜨고 쳐다보았다. 본곡의 흑백염라도 너를 제지시키지 못했단 말이냐? 그들은 생긴건 제법 그럴 듯 했지만 실력은 형편없었소. 유령곡의 무공이 그 정도라면 나는 이대로 돌아가는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소. 흑의인은 화일로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너는 누구냐? ? 나는 화일로라 하오. 흑의인은 흠칫 놀랐다. 풍파무쌍 화일로? 그렇소. 속담에 사람은 이름이고 나무는 그늘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화일로의 이름을 알자 흑의인은 감히 더이상 조금전처럼 거만을 떨지 못했다. 화일로는 담담히 물었다. 당신들은 이제 어떻게 하겠소? 흑의인은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의 말투 또한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당신들은 길을 비키겠소. 아니면 내가 뚫고 들어가는게 좋겠소? 흑의인은 음산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귀하의 생각은 어떻소? 내 생각으로는 당신들이 이대로 조용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잠이나 자는게 현명한 일인것 같소. 우리가 그렇게 할 것 같소? 하하..... 그러기 싫다면 준비를 단단히 하시오. 나는 손을 쓰겠소. 흥! 흑의인이 입을 다물고 코웃음을 치자 그것을 신호로 하여 세 사람은 각자 다섯 자 간격을 두고 흩어졌다. 그들은 빈철곤?비스듬히 치켜잡고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의 신분은 십염라(十閻羅)중에서 무공이 가장 고강한 금은동(金銀銅) 삼염라였다. 두목 흑의인이 십염라의 우두?머리인 금염라(金閻羅)였고, 좌측의 흑의인이 둘째인 은염라, 그리고 우측의 흑의인이 동염라였다. 이들은 세 명의 곡주와 다섯 명?집사를 제외하고는 유령곡내에서 무공이 가장 고강할 뿐아니라 삼상합마진(三象合魔陣)이라는 특이한 합격술을 연마하여 강호의 초절정고수라 해도 그들의 손에 걸리면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허나 그들의 진세가 채 갖춰지기도 전, 쓱! 화일로는 돌연 앞으로 한 발짝 나서더니 금염라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서 재빨리 손바닥을 내밀어 금염라가 쥐고 있던 빈철곤을 잡아챘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으헛? 금염라는 화일로의 공력신수(功力身修)가 매우 고강하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놀라 고함치며 두 손을 밑으로 내려 나꿔채 오는 두 손을 피한 후 빈철곤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빈철곤은 이미 화일로의 오른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 순간, 쾌액! 쾌액! 두 개의 빈철곤이 소리없이 경기를 일으키며 맹려무비하게 좌우 양쪽에서 화일로를 향해 공격해 왔다. 은염라와 동염라가 금염라의 위급함을 알고 일제히? 손을 쓴 것이다. 은염라의 빈철곤은 태산도 둘로 쪼갤 듯한 기세로 묵중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왔다. 또한 동염라의 빈철곤은 허리를 향해 옆으로 한 치의 여지도 없이 휘둘러졌다. 하하하..... 화일로는 가볍게 웃으며 신형을 슬쩍 옆으로 날렸다. 그의 오른 손에는 여전히 금염라의 빈철곤이 쥐어져 있었으므로 왼손을 급히 내밀어 허리를 향해 휘둘러오는 동염라의 빈철곤을 나꿔챘다. 팟! 어찌나 재빠른 동작인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신형이 희끗하다 싶자 어느새 동염라의 빈철곤은 화일로의 왼손안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삼염라의 빈철곤은 팔뚝만한 굵기에 길이는 일장이 넘었고 무게는 거의 팔십 근에 육박하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삼염라의 공력은 당대 강호에서도 내노라 할 만큼 고강해서 그들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빈철곤에는 각기 엄청난 위력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도 화일로는 순식간에 양 손으로 금염라와 동염라의 빈철곤을 빼앗아 쥔 것이다. 허나 그 순간, 쾌애액! 은염라의 빈철곤은 추호의 사정도 없이 맹렬한 위세로 화일로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설명은 길지만 그 상황은 실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순간인지라 화일로가 양 손으로 빈철곤을 움켜쥔 순간 이미 은염라의 빈철곤은 그의 머리위에 거의 당도해 있었다. 앗?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운산화가 자신도 모르게 뾰족한 비명을 토해냈다. 찰나, 얍! 화일로는 동염라의 빈철곤을 나꿔채는 동시에 두 개의 빈철곤을 번쩍 치켜들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은염라의 빈철곤을 맞받았다. 은염라는 화일로가 양손으로 빈철곤을 붙잡은 채 거의 무방비 상태로 서 있자 내심 크게 기뻐했었다. 허나 화일로가 갑자기 두 개의 빈철곤으로 자기의 빈철곤을 맞받자 대경실색했다. 그는 급히 빈철곤을 거두어 들이려 했으나 내리친 힘이 너무도 강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꽝! 굉음이 울려퍼지며 화일로의 머리통으로 떨어져 내리던 빈철곤이 반동에 의해 일 장쯤 위로 솟았다. 큭........! 은염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의 중심을 잃고 밑으로 곤두박질해 버렸다. 그의 양 손은 호구가 모두 찢겨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편 금염라와 동염라 또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빈철곤을 놓은 채 뒤로 물러났다. 그 쇽]彭?화일로는 두 개의 빈철곤을 내려놓고 그들에게 달려들며 십지(十指)를 튕겼다. 파파팍! 열 가닥의 뇌전같은 지공(指功)이 그물처럼 그들의 몸을 뒤덮었다. 큭! 으윽.......! 금염라와 동염라는 무엇이 어찌된 영문인지 알기도 전에 혈도게 제압당해 맥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실로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령곡이 자랑하는 금은동 삼염라가 채 이초도 되지 않아 모조리 제압당해 버린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의 장기인 삼상합마진은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쓰러져 버린 것이다. 삼염라들도 어이가 없는지 바닥에 쓰러진 채 눈만 말똥말똥 뜬 채 멍청히 화일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화일로는 그들을 내려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지 아무렇게나 살상을 하러 온 것이 아니오. 그래서 손속에 정을 둔 것이오. 세 분은 모두 지혜로운 사람이니 알아서 처신들 하시오. 이어 그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빈철곤을 집어들어 땅에다 꽂고는 운산화와 같이 유유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아무렇게나 꽂은 빈철곤은 땅속에 깊이 박혀 손잡이 부분만 간신히 ? 드러나 있었다. 삼염라는 멍하니 그들 두 사람의 거동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운산화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화일로를 바라보았다. 이제보니 당신의 무공은 소문보다 더욱 대단하군요. 나는 아까 당신이 그들 손에 쓰러지는 줄로만 알았어요. 화일로는 담담하게 웃었다. 내 무공은 모두 사부님에게서 배운 것이지만 아직 그 분의 반도 따라가지 못했소. 운산화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이예요? 내가 무엇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소? 아! 남궁노선배님께서 괴행(怪行)만 일삼는 괴인(怪人)인줄만 알았는데 그 분의 무공이 그토록 뛰어나시다니.... 당신들 사도가 뭉치면 무림에서 당할 사람이 없겠군요? 화일로는 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지도 않소. 그럼 당신들도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예요?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있게 이긴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사람이 있소. 그녀는 커다란 흥미를 느끼는지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가요? 화일로의 두 눈이 기이하게 번쩍 거렸다. 바로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이오. 육청운이라고요? 그렇소. 그 자는 당?금 무림에서 사부님에게 유일하게 필적(匹敵)할 수 있는 인물이오. 운산화는 어이없어 하며 잠시 눈을 깜박거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육청운의 무공이 그 정도란 말인가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요.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 자는 파렴치하고 가면을 쓴 위선자일 뿐이예요. 하지만 사실이오. 그에 대한 소문은 당신도 들어보았을 거요. 그건 절대로 헛소문이 아니오. 하지만 난 믿지 못하겠어요. 화일로는 빙긋 웃으며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믿지 못한다 해도 하는 수 없소. 그렇게만 알고 있으시오. 이어 그는 그녀가 뭐라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마지막 관문으로 온 것 같구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서라! 냉랭한 고함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동시에 두 개의 야위고 긴 연영이 그림자처럼 그들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신형이 어찌나 표흘하고 신속하던지 마치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 허깨비 같았다. 그들은 육십 가량된 괴노인(怪老人)들이었다. 똑같이 흑포단삼(黑袍短衫)을 걸쳐 무릎이 송두리째 드러나 보였는데, 기다란 종아리에는 검은 털들이 생선뼈처럼 제멋대로 돋아나 ?있어 징그럽기 그지 없었다. 그들의 키는 장대처럼 길쭉하게 뼈마디만 앙상한 모습이 도깨비와 흡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고 안색은 음산한 빛을 띄고 있었다. 더구나 얼굴에는 광대뼈가 튀어나와 살점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고, 눈이 움푹 패여져 마치 시체가 관속을 뛰쳐나와 서 있는 형상과 같았다. 그들은 정말로 꿈에라도 나타날까 싶은 보기 싫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화일로는 그들을 훑어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이내 껄껄 웃었다. 하하.... 새북(塞北)을 주름잡던 새북쌍추(塞北雙醜)가 이곳 유령곡의 수하가 되었을 줄은 미처 생각치 못했는 걸. 새북쌍추! 그들은 새북지방에서는 오래전부터 제왕처럼 군림하던 일세의 흉인(凶人)들이었다. 그들이 중원의 십대고수(十大高手)인 일검이괴삼사사절에 속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들이 새북지방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새북쌍추의 형인 대추(大醜) 묘취봉(苗取峯)이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좁쌀만한 놈이 제법이군. 노부를 알아보다니.... 노부 형제의 위명을 알았거든 얌전히 항복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놈쟁]?뼈다귀를 분질러 버리겠다. 화일로는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뼈는 단단해서 여지간해서는 부러지는 법이 없소. 그보다 당신들은 새북에서 편안하게 노년(老年)을 지내다가 무덤속으로 들어갈 것이지 무엇때문에 중원으로 들어와서 귀찮은 일을 자초하는거요? 묘취봉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이 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감히 노부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다니....... 화일로는 히죽히죽 웃으며 한 술 더 떠서 말했다. 이보시오. 노인장! 새북에서는 당신들이 목에 힘을 주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이곳은 중원이란 말이오. 당신이 제아무리 눈을 까뒤집고 목에 핏대를 올려도 당신을 무서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러니 괜히 봉변을 당하지 말고 어서 비켜주시오. 이.... 이 놈이...... 묘취봉은 너무도 화가 치밀어 올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새북에서 제왕같은 생활을 지내다가 이번에 유령곡의 특별한 초청을 받고 유령곡으로 초빙되었던 것이다. 유령곡주는 그들에게 이대공봉(二大公奉)의 직위를 주고 부귀와 영화를 약속하며 극?진하게 환대했다. 그러니 그들이 언제 이런 수모를 당해 보았겠는가? 화일로는 마지막으로 그들의 속을 확실하게 뒤집어 주었다. 당신들이 무덤으로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임을 참작해서 특별히 아량을 베푸는 것이니 두 분은 이 길로 곧장 새북으로 돌아가서 두 번 다시 중원으로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마침내 묘취봉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호통을 내지르며 화일로는 향해 덤벼들었다. 이 놈! 죽어라! 꽈르릉! 그의 고목같이 앙상한 손에서 붉으스름한 강기가 노도처럼 흘러나왔다. 그것은 묘취봉이 회심의 절학(絶學)으로 생각하는 자사장(紫邪掌)이었다. 화일로는 피하지 않고 우측 소맷자락을 가볍게 휘둘러 맞서갔다. 순간, 꽈앙! 폭음과 함께 묘취봉의 몸이 휘청하더니 뒤로 다섯 발짝이나 물러섰다. 그에 비해 화일로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꿈쩍도 않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확연히 우열이 판가름될 정도였다. 묘취봉은 안색이 푸르죽죽해지더니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조금전에 네가 사용한 것은 혹시 반선수(盤禪袖)가 아니냐? 화일로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나이를 지깍]謬?먹은 분답게 견문이 해박하시구료. 묘취봉은 물론이고 한쪽에 서 있던 이추(二醜) 묘취강(苗取岡)의 안색 또한 흙빛으로 변했다. 반선수는 이미 실전된지 오래인 불문(佛門)의 상승절학(上乘絶學)으로 자사장과는 극성(剋性)이 되는 무공이었다. 어떻소? 두 분의 생각이 이제 조금 바뀌었소? 화일로의 조소어린 말에 묘취봉과 묘취강은 서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친형제로 오랫 동안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고개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하게 끄덕여졌다. 순간, 이얍! 이 놈! 그들은 일제히 폭갈을 터뜨리며 화일로의 좌우측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그들의 두 손은 어느새 손목까지 시커먼 색으로 물들은 채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이것은 악마조(惡魔爪)라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이 수법에 걸려들면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갈라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이것을 익히려면 백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의 정혈(精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아무도 익히는 사람이 없었댐]? 그런데 그 악마의 무공을 새북쌍주가 익히고 있을 줄이야....... 쐐쐐쐐쐐액! 파파파팟! 주위가 온통 그들이 휘두른 검은 조영(爪影)에 휩싸여 버렸다. 화일로의 얼굴이 처음으로 무겁게 굳어졌다. 동남동녀 백 명을 희생해야 익힐 수 있는 악마조를 연마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로군. 화일로는 미동도 않고 있다가 그들의 손가락이 거의 몸에 닿을 때가 되어서야 슬쩍 양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그의 양 손이 기이하게 흔들리는 순간, 스스스스....... 돌연 그의 양 손이 수십, 수 백개로 불어나며 폭죽처럼 사방으로 비산되었다. 그것은 마치 그의 손이 수 백개의 파편으로 변해 터져나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앗? 폭포십환수다.......! 피..... 피해라! 묘취봉과 묘취강은 사색이 된 채 악마조를 회수하며 있는 힘을 다해 뒤로 몸을 날렸다. 허나, 파파파파팡! 마치 수십 개의 쇠북이 동시에 터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두 가닥의 처절한 비명이 야음(夜陰)을 뚫고 울려퍼졌다. 아아악......! 크악! 묘취봉과 묘취강은 입으로 폭포수같은 선혈을 뿜어내며 십 여장 밖으로 훨훨 날아갔다. ? < 第 5 卷 끝 > 제 6권 저 자 : 용대운 제 44 장 塞北雙醜 제 45 장 幽靈谷의 決鬪 제 46 장 谷下谷은 어디에 제 47 장 秘密通路 속에서 제 48 장 谷下谷의 秘密 제 49 장 뱁새와 황새 제 50 장 鐵骨 의 行方 제 51 장 閻王刀法 제 52 장 劍刀雙聖 제 53 장 奇才와 奇女 제 44 장 塞北雙醜 그들의 신형은 어느새 수십 개의 쇠몽둥이에 얻어 맞은 듯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실로 무서운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폭포십환수는 노도와 같은 열 겹의 강기가 마치 폭발하듯 주위 사방을 휩쓸어 버리는 가공할 수법이었다. 악마조가 제아무리 살인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절학중의 절학인 폭포십환수에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화일로는 두 개의 핏덩이로 변한 시신을 내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모두 당신들이 자초한 일이니 나를 탓하지 마시오. 당신들은 애초에 악마조 같은 사악한 마공(魔功?)을 익히지 말았어야 했소. 그가 고개를 돌리자 운산화가 고운 아미를 찌푸린 채 두 구의 시신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일로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그만 갑시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 수법이 너무 지나친 것 같소? 운산화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고 무공만 폐지시켜도 되지 않았을까요? 화일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낭자가 몰라서 하는 말이오. 악마조같은 사악한 마공을 인간의 심성(心性)마저 변화시키기 때문에 그들을 살려둬봤자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는 어렵소. 오히려 이번 기회에 무림에 해(害)가 되는 저런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세상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오. 운산화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일로도 더이상 입을 열지 않고 그녀와 함께 앞으로 걸어나갔다. 스무 장쯤 가자 대낮처럼 휘황찬란한 불빛이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와 함께 고대광실같은 웅장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한 채의 극히 호화로운 대청이었다. 대청 주위에는 쇽]治?개의 등불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어 대청 안의 광경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가 있었다. 대청 한가운데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중앙의 호화로운 태사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육순이 넘어 보였고, 오른쪽의 인물은 오십 세 정도 되어 보였으며, 왼쪽에는 사십 안팎으로 보이는 중년문사가 앉아 있었다. 그들 세 사람의 좌우에는 두 명씩의 흑포노인들이 앉아 있었고, 대청문 밖의 양편에는 각각 여덟 명씩의 판관들이 귀두대감도(鬼頭大坎刀)를 차고 서 있었다. 이런 형세로 보아 대청 중앙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사람이 바로 유령곡의 곡주들임에 틀림없었다. 또한 그들의 좌우에 앉아 있는 네 명의 흑포노인중 한 명은 조금전에 보았던 사집사인 음부귀판 조홍인 것을 보아 그들이 귀제갈 구회회를 제외한 유령곡의 오집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유령곡의 소곡주인 우문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화일로와 운산화는 멈추지 않고 대청앞의 계단까지 당도했다. 그 계단은 백옥석(白玉石)으로 되었고, 아홉 개의 층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이 옷깃을 날리며 막 계단 위로 발을 옮겨 놓으려 할 때, 멈췹]泳? 양 편에 서 있는 열 여섯 명의 판관중에서 네 명이 돌계단 앞으로 나와 그들 앞을 막아서며 고함쳤다. 화일로는 몸을 멈춰세운 채 대청 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문대곡주(宇文大谷主)! 이것이 귀곡의 손님을 접대하는 도리요? 대청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태사의 위에 앉아 있는 육순 가량의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노인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들을 들여보내라. 곤룡포노인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으나 눈썹과 수염이 유난히 검은 색이어서 위맹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인상이었다. 그가 바로 유령곡의 대곡주인 유령마왕(幽靈魔王) 우문력(宇文靂)이었다. 네 명의 판관은 즉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길이 트이자 화일로와 운산화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화일로는 대청 안으로 들어가 우문력의 삼 장쯤 떨어진 곳에 멈춰서며 포권을 했다. 강호의 무명소졸 화일로가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유령곡의 세 분 곡주께 인사드리오. 귀곡의 세 관문에서 후하게 맞아준 성의에 감사드리는 바이오. 이 말을 듣기에는 매우 겸손하고 예의바른 말 같았지만 사실을 정반대였다. 우문력은 그 말뜻을 알아듸]榕珦립?수양을 많이 쌓은 탓인지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껄껄 웃었다. 허허... 화가주(華家主)는 너무 겸손하네. 찾아오는 사람이 화가주인줄 알았다면 좀더 극진히 모셨을텐데 본곡의 수하들이 무능하여 자네를 후히 접대하지 못했음을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네. 화가주는 양해하게. 그는 포권을 하고 두 손을 흔들었으나 여전히 태사의에 앉아서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의 말투와 행동거지로 보아 관문을 지켰던 수하들로부터 화일로의 이름을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화일로는 담담하게 웃었다. 대곡주께선 겸손하신 말씀은 그만하시고 달리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텐데 어서 해보시오. 우문력은 뜻밖이라는 듯 굵은 눈썹을 치켜 뜨다가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자네는 정말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군. 과연 영웅호걸다운 점이 있으니 탄복할 만 하네. 대곡주께서 자꾸 나를 칭찬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하지만 그런 칭찬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니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우문력의 두 눈에 스산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흐흐.... 본론으로 들어가고 말고가 없네.? 자네가 이곳에 오기 전에 노부는 이미 작정했네. 그것은 자네가 두 갈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는 것일세. 화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생(生)과 사(死)의 두 갈래 길이란 말이지요? 과연 고명하군. 단번에 알아 맞추었으니. 생의 길이란 어떤 것이오? 본 곡에 투항해서 총순찰(總巡察)의 직위를 담당하는 것일세. 이것은 파격적인 제안인만큼 자네의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을 것犬? 내가 그것을 원할 것 같소? 우문력의 음성이 냉랭하게 변했다. 원하지 않을지라도 총순찰 직을 맡아야 하네. 그렇지 않다면 살아서 본 곡을 떠날 수 없을 것일세.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우문대곡주. 귀하는 혹시 선자불래(善者不來)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소? 흐흐.... 자네는 선자가 아니기 때문에 본곡을 상대하기가 어려울 것일세. 우문대곡주는 혹시 효천호를 믿고 큰소리를 치는게 아니오? 노부는 노부 자신의 실력외에는 아직 어느 것도 믿어본 적이 없네. 오!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료. 나도 마침 그렇소. 어떻소? 서로 자기 실력을 믿는 사람들끼리 실력을 한 번 시험해 보는 ?것이. 우문력의 눈빛이 무섭게 번뜩였다. 자네는 노부와 단독으로 일전(一戰)을 벌이겠다는건가? 하하.... 내키지 않았다면 세 분이 모두 덤벼도 좋소. 듣던대로 광오하군. 하지만 무림인의 실력이란 말솜씨를 말하는게 아닐세.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오. 우문대곡주께선 언제까지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입만 놀리고 계실 작정이시오? 우문력의 얼굴에 진한 노기가 떠올랐다. 미친 놈....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45 장 幽靈谷의 決鬪 바로 그때 그의 좌측에 앉아 있던 중년문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닭 잡는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겠습니까? 큰 형님께선 뒤로 물러나서 소제가 이 놈을 수습하는 광경이나 구경하십시요. 우문력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조심해라. 이 놈은 절대 만만히 볼 놈이 아니다. 그는 다시 태사의에 앉았다. 그러자 중년문사는 자신있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안심하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중년문사는 침착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걸어나와 화일로의 일 장 앞에 우뚝 몸을 멈춰세웠댐]? 병기를 뽑아라. 화일로는 중년문사의 전신을 쓸어보다 담담하게 물었다. 귀하의 존함은 무엇이며 직함은 몇 번째요? 내 이름은 너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내가 바로 우문환(宇文環)이다. 화일로는 눈을 번쩍 빛냈다. 아! 이제보니 그 유명하신 유령귀수(幽靈鬼手) 우문대협이셨군. 몰라뵈어 죄송하오. 나는 밤눈이 조금 어두워서...... 화일로는 비록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우문환은 절대 장난스럽게 대할 인물이 아니었다. 유령귀수 우문환은 바로 일검이괴삼사사절의 강호무림 십대고수중 삼사(三邪)의 일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무공은 같은 삼사에 속해 있는 색명무상 정구살이나 담소탈혼 사공표보다 한 단계 높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우문환은 유령곡의 삼곡주(三谷主)였다. 화일로는 강호무림의 고수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유령귀수 우문환을 앞에 두고도 무슨 배짱인지 넉살좋게 입을 열었다. 우문대협의 무공이 아주 대단하다고 들었소. 특히 그 중에서도 지법(指法)에 조예가 깊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우문환은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싸워보면 알텐데 웬 잔소리를 하느냐? 어서 병기나 뽑아?라. 화일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필요없소. 나도 마친 지법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정통하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이 기회에 누구의 지법이 더 고명한지 확인해 봅시다. 이 말은 너무나 교광(驕狂)했다. 우문환은 수십 년동안 오직 수공(手功)과 지법을 연구하며 보낸 인물이었다. 그의 다른 무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히 지법에 관한한 그는 당금무림에서 가장 강한 네명의 고수중 하나로 항상 꼽혀왔다. 심지어는 그의 대형이자 유령곡의 대곡주인 유령마왕 우문력조차도 지법으로만 따진다면 그에게 한 수 뒤쳐진다고 스스로 시인할 정도였다. 그런데 화일로가 다른 것을 다 마다하고 굳이 지법으로만 겨루겠다고 했으니 우문환의 입장에서 보면 실로 가소롭기 그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놈이 제 사부를 닮아서인지 너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군. 하지만 이제는 곧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 우문환은 두 눈을 악독하게 번뜩이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어디 네 놈의 지법이 얼마나 뛰어난지 한 번 보자! 그는 번개처럼 오른 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중지(中指)를 가볍게 튕겼다. 쾌액! 한 줄기 뇌전같은 섬광쟁]?그의 중지에서 뿜어나와 화일로의 미간으로 폭사되었다. 화일로의 미간이 그 섬광에 그대로 꿰뚫리는 듯한 착각이 드는 순간, 흠.... 멋진 파홍지력이오. 화일로는 태연히 중얼거리며 머리를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팟! 별로 빠른 행동같지 않았으나 그 시기가 실로 적절하여 우문환이 쳐낸 파홍지는 아슬아슬하게 화일로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화일로는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움직이며 왼손 약지와 검지를 번갈아가며 퉁겨냈다. 파팍! 두 가닥의 부드러운 기운이 우문환의 좌우측 옆구리를 향해 밀려나갔다. 그 지공은 방위가 기이하도록 완벽하면서도 속도 또한 물흐르듯 빨라서 피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우문환은 화일로가 자신의 파홍지를 간단하게 피하며 반격을 가하자 흠칫했으나 호승심(好勝心)이 치솟는 지 대소를 터뜨리며 허공을 박차고 날아 올랐다. 유운지(柔雲指)로구나. 좋다. 이놈! 그는 양 쪽 소매를 번개같이 휘둘렀다. 파파팍! 유운지력은 그의 소맷자락에서 뿜어나오는 강기의 벽(壁)에 부딪혀 튕겨나왔다. 그 순간 우문환은 번개같이 화일로의 앞으로 달려들며 오른쪽 손가락 다섯 개를 연거푸 폄]?屛쨈? 슈슈슈슈슉! 다섯 줄기의 백선(白線)이 허공을 그물처럼 수놓았다. 오류지흔(五流指痕)! 화일로는 나직한 탄성을 터뜨리며 몸을 빙글 돌렸다. 스슥! 그의 몸은 마치 유령처럼 허공을 삼 장이나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그것은 바로 절정의 신법인 이성환두(移星換斗)였다. 그와 함께 화일로는 왼손 중지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쾌액!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하얀 백광(白光)이 뿜어나올 순간, 흥! 기다렸다! 우문환은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백광을 향해 내뻗었다. 쑤웩! 괴이무비한 시뻘건 혈광(血光)이 노도처럼 뻗어나와 백광을 강타했다. 그것은 마도(魔道)의 오대지공(五大指功)중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혈지관(血指關)이라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우문환이 설마 정면으로 지력을 마주 대할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화일로는 중지를 거둘 엄도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혈지관과 마주 부딪혔다. 우문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생각으로는 화일로의 무공이 제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내공(內功) 방면에서는 그보다 뒤질게 분명했다. 내공은 재질이나 순발력으로 익혀지는게 아니었기 때문쟁]甄? 더구나 그의 혈지관은 내공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격중당하면 전신이 벼락 맞은 것처럼 진력(眞力)이 전부 소실되고 만다. 그리하여 평생을 폐인으로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혈지관의 무서운 점이었다. 설명은 길지만 순간은 짧았다. 화일로의 왼손 중지와 우문환의 오른손 중지는 마치 정면으로 마주쳐 오는 두 개의 뇌전처럼 정면으로 격돌을 하고 말았다. 순간, 뚝! 뼈마디가 부러지는 음향이 들리며 짤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큭! 그와 함께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구경하고 있던 우문력을 비롯한 유령곡의 인물들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놀랍게도 오만상을 찌푸린 채 뒤로 물러나는 인물은 바로 우문환이 아닌가? 그는 손가락이 부러졌으는지 오른손을 움켜잡은 채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대..... 대력금강지(大力金剛指)를 익혔구나.......! 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으로 떨리고 있었다. 대력금강지는 불문의 무상지공(無上指功)으로 혈지관에는 유일하게 극성이 되는 무공이었다. 우문환은 자신의 고강한 내공과 혈지관만을 믿고 정면으로 격돌했다?가 커다란 낭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우문환은 지법의 달인(達人)이라고 자부했던 자신이 새파랗게 젊은 화일로에게 지법으로 패하자 분노와 수치심이 극에 달했다. 이 놈......! 그는 손가락이 부러진 통증도 잊은 듯 이를 갈며 재차 덮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삼제, 손을 멈춰라. 유령마왕 우문력이 번갯불처럼 재빠르게 날아왔다. 우문환은 할 수 없이 손을 거두며 그를 돌아보았다. 큰형님, 소제는 아직 완전히 패한 것이 아닙니다. 우문력은 손을 저어 보이고는 형형한 눈빛으로 화일로를 노려보며 냉랭히 말했다. 과연 큰소리치고 사람을 깔보더니 자네의 무공은 고명하군 그래. 화일로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대곡주께서 덤벼보시오. 우문력은 아무 말없이 음산하게 웃더니 돌연 두 손바닥을 쳐들어 번개처럼 재빠르게 화일로의 어깨와 가슴을 짚어왔다. 쐐액! 그 속도는 그야말로 신속하기 그지없어 누구라 해도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허나 어느새 화일로의 신형은 한 자쯤 옆으로 이동해 있었다. 동시에 화일로는 왼손으로 우문력의 왼쪽 어깨를 향해 일장을 갈겼다. 음.......! 우문력은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내며 몸을 비틀어 화일로의 공격을 피하면서 두 주먹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기이하게도 그의 주먹은 거무틱틱한 빛을 띄고 있었다. 철혈마권(鐵血魔拳)이구나! 화일로는 나직히 탄성을 토하며 피하지 않고 자신도 주먹을 날렸다. 빠빠빠빠! 그들의 주먹은 허공에서 스물 네 번이나 격돌했다. 음! 으음! 그들은 각기 신음을 흘렸으나 아무도 뒤로 물러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격돌에서는 뒤로 물러서거나 조금의 빈틈을 보인다면 그것은 거의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번에는 화일로가 먼저 손을 오므려 우문력의 늑골을 잡아갔다. 우문력의 허리를 기묘하게 움직여 화일로의 손을 벗어나게 만들고는 화일로의 정수리를 향해 팔꿈치로 찍어갔다. 화일로는 뒤로 휘청이듯 그것을 피하면서 쓰러질 듯 오른 발을 휘둘렀다. 곡예를 하듯 하는 이 발길질은 위력이 강맹한 원앙철각(鴛鴦鐵脚)이라는 수법이었다. 어엇? 우문력은 설마 그가 한 발을 고정시킨 채 발길질을 해 댈지는 몰랐는지라 깜짝 놀라며 급히 몸을 뒤로 뉘였다. 그의 몸이 바닥과 거?수평으로 비스듬히 눕혀졌다. 허나 땅에 닿지는 않았다?. 이 수법은 강호에서도 절정고수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철판교(鐵板橋)라는 수법이었다. 슈슈슈슈! 화일로의 발길질이 허공을 가르자 우문력은 뻣뻣하게 몸을 일으키며 중심을 잃은 화일로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왔다. 쓰아악! 그?손가락은 어느새 매의 발가락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대응조력(大鷹爪力)이라는 무시무시한 절기였다. 화일로는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피할 사이가 없음을 알자 허공에 있는 다리를 구부려 무릎으로 그의 턱을 강타해갔다. 우문력은 자신이 대응조력으로 화일로의 허리를 끊는 순간 그의 무릎에 자신의 얼굴이 박살날 것을 짐작하고는 잽싸게 손을 후퇴하며 화일로의 무릎을 피했다.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의 박투(搏鬪)는 실로 무림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운산화와 유령곡의 고수들은 그저 손에 땀이 홍건히 괴는 것도 모른채 정신없이 그들의 결투를 구경하고 있었다. 파파파팍! 화일로의 발이 풍차처럼 돌며 마흔 여덟 번이나 우문력을 향해 퍼부어졌다. 한 발은 땅에 고정시킨 채 공격하는 이 수법은 광마사십팔퇴법(狂馬四十八腿法) 이라는 것으로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의 결투에서는 그 위력이 대단한 수법이었다. 우문력은 반격 한 번 제대로 못해 보고 계속 뒤로 피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마흔 여덟 번째의 발길질이 허공을 가르자 이번에는 그가 양손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쐐쐐쐐쐐쐐액! 몸을 마구 돌리면서 두 주먹을 번갈아 가며 아흔 아홉 번이나 내갈기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선풍구십구수(旋風九十九手)라는 것이었다. 화일로는 미처 반격할 틈을 찾지 못한 듯 계속 피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주먹과 주먹이 휘둘러지는 촌간(寸間)의 사이를 뚫고 빛살처럼 돌진해왔다. 동시에 그의 우수가 그림자처럼 쾌속하게 우문환의 왼쪽 어깨를 강타했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무영지경(無影之境)이라 할 만했다. 우문력은 크게 놀라며 몸을 피하려 했으나 화일로의 출수가 너무도 빨라 그대로 격중당하고 말았다. 팍! 음..... 우문력은 뒤로 삼 보 밀려났다. 헌데 기이하게도 일장을 정통으로 맞은 왼쪽 어깨 부근에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문력은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사정을 보아서 전력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사정쟁]?두지 않았다면 그의 왼쪽 팔은 부러졌을 게 틀림없었다. 우문력은 뒤로 밀려난 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화일로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암암리에 숨을 들이킨 후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본곡의 수석집사인 귀제갈 구회회를 해쳤다는 것을 알고 있네. 하지만 그 원한은 이것을 끝맺고 본곡은 이후에도 자네에게 절대로 원한을 갖지 않겠으니 자네는 그냥 돌아가게. 우문력의 말은 상상외였다. 화일로는 의아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무엇인가 생각한 것처럼 갑자기 고개를 젓고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해야겠소. 대곡주는 지금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수를 단념한다지만 나는 지금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소. 우문력의 얼굴이 잔뜩 찌푸러졌다. 그는 본래 화일로가 손속에 인정을 베풀었고, 화일로의 무학공력이 생각보다 더욱 고강하여 자기네 세 사람의 곡주가 합세해도 이긴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유령곡의 명성을 보존하기 위해 분한 마음을 억제하고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우문력의 생각으로는 화일로가 유령곡과 원래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기 때문에 이것으로 끝맺?고 더이상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상대방은 틀림없이 이곳을 물러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기의 예상을 뒤엎고 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우문력은 안색이 돌변하여 소리치듯 물었다. 자네는 왜 본곡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인가? 화일로는 희미하게 웃었다. 오해는 하지 마시오. 유령곡의 형세는 몹시 기이하고 험악하여 들어오기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오. 그러니 이런 곳에 들어온 이상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간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니오? 우문력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잠시 눈쌀을 찌푸리다가 무언가 느낀 듯 소리질렀다. 그렇다면 자네는 우연히 본곡을 찾아온 게 아니라 다른 엉뚱한 목적이 있었군? 하하... 과연 대곡주께선 영민하시기 그지 없소이다. 확실히 나는 귀곡을 구경하는 것 외에 다른 한 가지 목적이 있소. 우문력은 안색이 돌변해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화일로는 대답하지 않고 담담히 웃다가 화제를 슬쩍 바꾸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곡주께선 귀곡의 이곡주(二谷主)를 소개시켜 주시오. 애기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거요. 우문력은 눈을 껌벅곤]타?鳴?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는 우측 의자에 앉아 있는 오순 가량되어 보이는 흑포인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흑포중년인은 허깨비처럼 유연하게 몸을 날려 우문력의 우측에 내려섰다. 그러자 부러진 오른손가락을 부여잡고 있던 유령귀수 우문환도 몸을 날려 합세했다. 흑포중년인은 차가운 눈으로 화일로를 쏘아보다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입?열었다. 나는 유령신뢰(幽靈紳雷) 우문당(宇文撞)이라 하오. 화일로는 가볍게 웃으며 포권의 예를 한 후 갑자기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효천호는 이곡주께서 제조하신 것이오? 유령신뢰 우문당의 안색이 약간 변해졌다. 그렇소. 바로 내가 만든 것이오. 그러시다면 이곡주께서는 신화자(神火子) 요굉(姚宏)의 전인이겠구료. 우문당의 안색이 싹 변해지더니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신화자 요굉은 오십 년전에 천하무림에서 제일가는 화기제조(火器製造)의 달인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전신이 화약덩어리라 할만큼 수많은 화기들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위력이 하나같이 가공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라 당시 무림에서는 누구나 그를 두려워 마지 않았다. 요굉은 자신이 제?조한 화기들을 믿고 방약무인하게 무림을 휩쓸고 다녔는데, 나중에는 결국 전 무림인들의 공분(公憤)을 사서 무림에서 제명당하고 말았다. 아울러 그의 무시무시하던 화기들도 무림에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화일로는 차가운 눈빛을 번쩍이며 냉랭히 꾸짖었다. 이곡주, 왜 거짓말을 하시오? 내가 승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 나는 그 분의 전인이 아니오. 그렇다면 사승(師承)은? 우문당은 주춤하며 대답했다. 나의 사부는 무명노인(無名老人)이시오. 그 효천호의 제조법도 그 분이 전했소? 그렇소. 영사는 지금 어디 계시오? 그 분은 이미 별세하셨소. 화일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담담히 말했다. 이곡주가 신화자 요굉의 전인이라고 승인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할 말은 없소만.... 지금부터 효천호를 제조하지 마시오. 만약 나의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나를 무정하다고 원망하게 될거요. 흐흐...... 우문당은 입가에 비릿한 조소만을 떠올릴 뿐 입은 열지 않았다. 제 46 장 谷下谷은 어디에 화일로는 우문당이 차가운 냉소만 날리자 더 상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유령마왕 우문력쟁]?보며 정색을 했다. 대곡주, 이 일에 대해서는 이곡주에게 압력을 가해 주셔야 겠소. 효천호같은 끔찍한 화기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오. 우문력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눈빛이 차갑게 번쩍였다. 그러나 그는 꾹 눌러 참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말대로 따르겠네. 대곡주께선 너무 겸손하시오. 화일로는 담담히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귀곡에는 곡하곡(谷下谷)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안에 들어갈 수 있겠소? 그 말을 듣자 우문력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지더니 놀라서 소릴르 질렀다. 아니 누구에게 그 말을 들었나? 그 점은 묻지 마시오. 우문력은 낯빛이 침중하게 굳어지더니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 일은 허락할 수 없네. 왜 그러시오? 그곳은 본곡의 가장 은밀한 곳일세. 화일로는 눈빛을 번쩍였다. 설마 그 곡하곡이란 곳에 음흉한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단 말씀이오? 우문력의 얼굴에 먹구름이 감돌며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곳은 본 곡의 중지(重地)이므로 외부인에게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네. 내가 꼭 보고 싶다면? 우?문력의 음성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 사람을 과분하게 들볶지 말게. 나는 원래 호기심이 많아서 누가 만류하면 할수록 기어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요. 우문력은 끓어오르는 노화를 참지 못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노부를 더이상 참지 못하게 하지 말게. 노부가 화가 난다면 효천호를 사용해서 자네를 대적할 지도 모르네. 화일로는 돌연 껄껄 웃었다. 대곡주, 효천호로 나를 위협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나는 구화산 아래에서 이미 그것의 맛을 보았소. 효천호는 위력이 대단하여 강호에서 필적할 만한 것이 없지만 그것은 당신들이 사용한다고 해서 두려움을 가졌다면 애초에 유령곡을 찾아 오지도 않았을 거요. 그는 예리한 눈초리로 우문력을 쏘아보며 다시 냉랭히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앞으로는 효천호를 가지고 어지럽히지 마시오. 물론 오늘부터요. 만약에 그것을 사용한다면 추호도 용서치 않고 당신들을 모두 이슬로 변하게 하겠소. 화일로의 뚜렷하고 힘있는 목소리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우문력과 우문당 등 세 명의 곡주들은 그의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 졌는지 안색이 연방 붉으락푸르락 헬]杉? 화일로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주위를 휘둘러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대곡주,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곡하곡에 꼭 가야겠소.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어서 그곳으로 안내해 주시오. 우문력은 암암리에 크게 숨을 몰아쉬고 잘라 말했다. 이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네. 그렇다면 손속을 써야만 하겠소? 나를 죽인다 해도 안될 것이네. 화일로는 담담히 웃으며 물었다. 우문대곡주, 정말이오? ....... 우문력은 코웃음만 치고 입을 열지 않았다. 화일로의 눈빛이 차갑게 번쩍였다. 할 수 없군. 그럼 나는 손을 쓰겠소. 화일로는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오른손으로 우문력의 어깨를 잡아갔다. 흥! 우문력은 냉소를 치며 다섯 걸음 물러나더니 두 손을 허리춤에 집어 넣어 한 쌍의 적수괴(赤手拐)를 꺼내 들었다. 그 적수괴는 사람의 손같이 생겼는데 길이는 여덟 푼 정도되어 보였고, 한쌍의 거령지강(巨靈之掌)같았다. 그리고 손톱처럼 생긴 뒤쪽에는 손잡이가 있었는데 그것의 길이는 한 자가 넘었고, 손잡이 끝에는 한 가닥의 가느다란 쇠줄이 ?매어져 있었다. 우문력이 뒤로 물러나서 적수괴를 꺼낼 때 우문당과 우문환도 각자 병장기를 뽑아들고 화일로를 포위했다. 유령신뢰 우문당의 손에 들린 것은 한 자루의 무겁고 두꺼운 톱날같이 생긴 귀두도였다. 또 우문환은 옷속에서 날카로운 빛을 뿌리며 단검을 쥐고 있었다. 화일로는 그들이 서 있는 방위를 훑어보고는 내심 흠칫 놀랐다. 원래 우문력 등이 서 있는 형태는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의 방위를 적절하게 배열한 것으로, 삼절쇄혼진(三絶碎魂陣)이라는 것이었다. 이 삼절쇄혼진은 얼마전에 금은동 삼염라가 시전했던 삼상합마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고(上古)의 절진(絶陣)이었다. 화일로가 우문력 등에게 삼절쇄혼진으로 포위를 당하자, 운산화도 네 명의 집사들에게 포위를 당했다. 네 명의 집사가 운산화를 포위한 자세는 일정한 진식(陣式)이 아니었으며 즉시 출수할 태세도 아니었다. 그 점으로 보아 그들의 목적은 운산화가 삼절쇄혼진을 파괴하지 않도록 방비만 하려는 것 같았다. 화일로는 삼절쇄혼진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오히려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세 분은 공력이 심후한 ?무림의 절정고수들이신데다 삼절쇄혼진을 연마하셨으니 그 위력이란 말하지 않아도 알만 하오. 허나 안타깝게도 오늘 세 분은 나를 만났으니 별로 득을 보지 못할 거요. 우문력은 안광을 번쩍 빛내며 음산한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 자네의 배짱에는 정?감탄을 금치 못하겠네. 하지만 노부는 자네가 삼절쇄혼진을 깰 수 있으리라고는 절대로 믿지 않네. 동시에 그는 왼손의 적수괴를 휘저었다. 순간, 휙! 휙! 세 사람의 몸들이 번개처럼 번뜩이는가 하더니 어느새 공세를 발동했다. 쐐액! 유령신뢰 우문당이 무거운 귀두도를 한 번 휘두르자 한 줄기 세찬 도풍(刀風)이 일어나 삼삼(森森)한 한기(寒氣)를 발하며 화일로의 머리통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우문당의 도법은 분뢰마도(分雷魔刀)라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일단 그의 도가 발출되자 마치 뇌성벽력보다 더 빠르게 차가운 도기를 발하며 엄습해가니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화일로는 이미 허리춤에서 연검(軟劍)을 뽑아들고 있었다. 그의 연검은 무척 특이해서 한 눈에 보아도 절세(絶世)의 신병(神兵)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왼쪽으로 반 보 옮겨 우문환의 단검을 피?한 후 검을 한 번 떨쳤다. 파스스........! 그러자 휘황찬란한 검광이 사방으로 피어 올랐다. 동시에 맹령히 아래로 떨어재 재려오는 귀두도를 봉쇄해갔다. 화일로는 우문당의 분뢰마도가 얼마나 위력이 있는가를 시험해 보고 싶었으므로 검을 치켜올려 방비할 때 검날로 막은게 아니라 검신(劍身)으로 봉쇄했다. 순간, 땅! 날카로운 금속성의 음향과 함께 우문당의 귀두도는 곧 위로 한 자 가량이나 튕겨 올라갔다. 그 반동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우문당은 팔 전체가 시리고 저려와서 하마터면 귀두도를 떨어뜨릴 뻔 했다. 우문당은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뒤로 세 발짝 물러났다. 찰나, 쓰아악! 괴이한 파공음과 함께 우문력의 적수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화일로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져왔다. 우문력의 적수괴를 휘두르는 방법은 무척 교묘해서 제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적수괴의 끝부분에 달려 있는 쇠사슬을 이용해서 공격을 가해왔다. 화일로는 지체하지 않고 수중의 신검으로 한쌍의 적수괴를 막아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우문환이 단검으로 화일로의 앞가슴을 찔러왔다. 그들의 공세는 시기가 아주 적절하게 배합되어 피하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다시 말해서 적수괴를 막는다면 단검에 가슴이 꿰뚫릴테고, 그렇다고 단검을 막는다면 적수괴에 머리가 박살날 판인 것이다. 화일로는 적수괴를 막아가던 검을 슬쩍 돌려 우문력의 미간을 향해 그으며 몸을 비스듬히 누윈 채 우문환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그의 이 일검일퇴(一劍一腿)는 그 위력이 대단해서 단번에 우문력과 우문환의 공세를 격퇴시킬 수 있었다. 허나 그의 몸이 다시 서기도 전, 파파파팍! 우문당의 귀두도가 섬칫한 파공음을 내며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물러난 줄 알았던 우문력의 적수괴 도한 허공에서 기이한 각도로 선회하며 화일로의 정수리로 내리 꽂혔다. 화일로는 차가운 안광을 번뜩이며 검을 흔들었다. 슈슈슈! 수십 개의 검화(劍花)가 찬연히 피어올랐다. 허나 그 검화가 채 완전히 피어오르기도 전에 우문당과 우문력은 재빨리 병기를 거두어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쐐액! 이번에는 다시 우문환의 단검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예리한 검기를 뿌리며 날아들었다. 동시에 물러났던 우문당도 우문환의 뒤를 바짝 달려들며 귀두도를 무섭게 그어댔다. 파파팍! 삽시간에 도광(刀光)이 날고 검울]?劍影)이 난무하여 장내는 치열한 격전이 전개되었다. 삼절쇄혼진은 한쪽에서 공격하면 한쪽은 후퇴하여 그 배합이 매우 교묘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공격하는 사람이 항상 두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세 사람의 진퇴(進退)하는 속도와 병기를 수발(收發)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천하의 화일로라 할지라도 일시지간은 그들을 격파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십여 초가 지나갔다. 그동안 네 사람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누구도 결정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허나 십 오초가 막 지나는 순간, 하하..... 삼절쇄혼진은 잘 구경했소. 세 분은 이제 그만 쉬셔야 겠소. 절진속에서 화일로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차차차차창! 요란한 병장기 부딪치는 음향과 함께 다급한 비명성이 연거푸 들려왔다. 엇? 으흑? 허억........! 중인들이 놀라 보니 그토록 엄밀하던 삼절쇄혼진은 어느새 산산이 깨어져 있었고, 우문력을 비롯한 세 명의 곡주는 비실비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병장기는 모두 짤막하게 잘려져 있었고 그들의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우웩! 그들중 우문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뻘건 핏덩이를 토해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우문력과 우문당은 비록 피를 토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후들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화일로의 검에서 뿜어나오는 검경(劍勁)을 감당하지 못하고 격상(擊傷)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무공은 검경불경진맥(劍勁拂輕震脈)이라는 초상승의 내가검학 (內家劍學)으로, 수십년 \을 검과 함께 살아온 노검호(老劍豪)라 해도 익히기가 힘든 절학중의 절학이었다. 그들의 겉모습은 멀쩡했지만 그들의 심맥(心脈)은 이미 완전히 뒤흔들려 치명적인 내상을 당한 후였다. 한쪽에서 운산화를 포위하고 있던 네 명의 집사들은 이 광경을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 앉도록 놀랐다. 이 계집이라도 사로잡아 곡주님을 구하자. 네 집사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이집사(二執事) 반혼도(返魂刀) 임정해 (任程亥)가 소리치며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다른 세 명의 집사인 삼집사 상문검(喪門劍) 강맆(姜立), 사집사 음부귀판 조홍, 오집사 뱄]タ뎠拷?無影鬼魅) 담개신(譚凱新)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파파파팍....... 쐐쐐쐐쐐쐐액! 네 명의 절정고수가 일제히 손을 휘두르자 그 위력은 실로 놀라웠다. 운산화의 무공은 그들 중 한 명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인데 네 사람의 합공을 어찌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녀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있는 힘을 다해 대항했으나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바로 그때였다. 정말 파렴치한 작자들이군. 그래도 명색이 일곡(一谷)의 집사들인데 네 명이 여인 하나를 협공하다니..... 비웃음이 가득담긴 음성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장내로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화일로가 십 여장을 날아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일검을 기이하게 그어댔다. 쓰아아아...... 마치 바람이 갈라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물밀듯한 검기가 몰아닥치자 네 명의 집사는 대경실색하여 일제히 가장 자신있는 절학을 펼쳐 맞서갔다. 쨍그랑! 쨍!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이 연거푸 울려퍼지며, 크앗! 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놀랍게도 네 집사의 병기는 모두 두 동강이가? 나버렸고, 삼집사인 상문검 강립과 오집사인 무영귀매 담개신이 싸늘한 시체로 변해 땅바닥에 쓰러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검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 화일로를 향해 덤벼들려던 열 여섯 명의 판관들은 그 광경을 목도하자 간담이 서늘하고 혼비백산하여 정신나간 사람들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화일로는 넋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두 명의 집사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당신들은 꼼짝말고 그 자리에 서 있으시오. 누구든지 내 말을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바닥에 쓰러진 자들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오. 간신히 살아남은 이집사 임정해와 사집사 조홍은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의 무공이 자신들과 비슷하여 고하를 가려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이 상대방의 단 일검을 받지 못하고 검하고혼이 되어 버렸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 받더니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화일로는 운산화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소? 운산화는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방긋 웃었다. 괜찮아요. 구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오늘? 하루 동안 벌써 두 번씩이나 신세를 지게 되는 군요. 화일로도 빙그레 웃었다. 우리들은 이제 그런 인사치례는 하지 않아도 될 사이인 것 같은데.... 친한 사이일수록 예의를 잘 지켜야 하는 법이예요. 화일로는 담담히 웃으며 두 명의 집사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에게는 이제 두 갈래 길이 있소. 그중 어느 것을 택하겠소? 이 말은 조금전에 우문력이 그에게 했던 말인데 지금 그가 그대로 써먹고 있었다. 임정해와 조홍은 재차 서로 눈길을 주고 받더니 모두 입을 다물고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겠소. 두 갈래 길이란 생과 사의 길인데 당신들이 만약 곡하곡이 어디 있는지 말한다면 생로(生路)가 열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이 사로(死路)를 걷게 될 것이오. ...... 그들이 그래도 아무런 대꾸가 없자 화일로가 검끝으로 두 사람중 조홍을 가리켰다. 조집사는 나와 구면(舊面)이니 아무래도 말하기가 수월할 거예요. 그렇지 않소? 조홍은 화일로가 자신을 지적해 물어오자 움찔하여 눈알을 굴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모르오.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무얼 모른단 말이오? 곡하곡이? 어디 있는지 나는 정말 모르오. 하하.... 이거 조집사가 나를 자꾸 실망시키는군. 나를 실망시키면 결과가 좋지 못할거라는 생각은 안해 보셨소? 조홍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애원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돌연 화일로는 번개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조홍의 앞가슴을 향해 삼지(三指)를 격출했다. 파팍! 윽! 그의 지공은 너무도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조홍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혈도를 제압당했다. 다음 순간, 으드득! 뼈마디가 부딪치는 음향이 들리며 조홍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크으으....... 아무리 이를 악물고 참으려 해도 신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백 마흔 여덟 가지의 고문수법중에서 가장 변변치 않은 오음착골(五陰錯骨)이라는 것이오. 이 정도쯤은 조집사께서 충분히 참아내시리라 믿소. 으.... 이..... 이 놈..... 조홍은 신음소리를 내며 악에 바친 눈초리로 화일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화일로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조집사는 내 짐작대로 뼈마디가 제법 단단하구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손을 써 볼까 하오. 화일로는 느릿느릿 손을 들어 올렸다. 조홍의 눈가에 숨길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의 빛이 떠올랐다. 사람의 육체는 혈육(血肉)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결코 쇳덩어리나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조홍은 이미 오음착골만으로도 두 번 다시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을 겪었는데 이제 그보다 훨씬 심한 수법을 쓰겠다고 하자 그 고통을 상상하고도 남았다. 화일로는 담담한 표정으로 조홍의 어깨죽지를 향해 손을 뻗어갔다. 순간 조홍은 떨리는 목소리로 급히 소리쳤다. 자.... 잠깐 기다리시오. 화일로의 손끝은 조홍의 어깨죽지에 거의 닿을락말락하게 멈춰섰다. 과연 조집사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구려. 곡하곡은 어디 있소? 조홍은 안면근육을 실룩거리다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고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곳은 바로...... 그때 갑자기 이집사인 임정해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질렀다. 조형! 수혼(搜魂)의 참형(斬刑)이 두렵지 않소? 그 말을 듣자 조홍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화일로는 임정해를 힐끗 쳐다보고는 조홍을 버려두고 임정해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돌울]?우수로 임정해의 왼쪽 어깨를 바싹 움켜잡았다. 뿌드득!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음향과 함께 임정해의 왼쪽 어깨가 몸통에서 이탈되어 갔다. 크아악! 임정해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왼쪽 어깨는 완전히 탈골(脫骨)되어 제멋대로 흔들거렸다. 화일로는 그의 몸을 일으킨 채 탈골된 어깨를 다시 움켜잡고 뼈마디를 맞춰주었다. 따딱! 탈골되었던 뼈마디가 맞춰지자 고통이 사라지기는 커넝 더욱 심한 고통이 임정해의 전신을 엄습했다. 크으으...... 임정해의 왼쪽 어깨는 금세 퉁퉁 부어올라 마치 붕대를 칭칭 동여맨 듯한 모습이 되었다. 화일로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오는게 있으면 가는게 있는 법이오. 당신이 조홍의 입을 막았으니 대신 말하는게 도리 아니겠소? 임정해는 고통을 억누려 악독한 눈빛으로 화일로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개새끼같은 놈아! 잠꼬대는 그만해라. 네 놈이 나를 죽인다 해도 이 어르신네는 말하지 않겠다! 화일로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이거 정말 흥미가 당기는군. 난 당신같이 배짱이 두둑한 사람만 보면 아주 깍]蠻廢?모시고 싶어진다오. 말과 함께 그는 번개같이 임정해의 가슴과 칠개대혈(七個大穴)을 짚어 버렸다. 파파팍! 크음. 임정해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이건 오음착골의 한 단계 위인 칠성수음(七星搜陰)이라는 것인데 당신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수법이오. 화일로의 말과는 달리 임정해의 이마에는 어느새 푸른 핏줄기가 툭툭 불거져 나왔고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온 몸의 신경근육을 개미데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에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마구 떨었다. 허나 화일로는 눈쌀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임정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뻗어 그의 명치끝을 가볍게 짚었다. 이것은 역혈점혈(逆血點穴)이라는 것인데 피가 거꾸로 도는 맛이 아주 각별할 거요. 끄으으..... 임정해의 얼굴이 피처럼 시뻘개지며 그의 입에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역혈점혈이란 말 그대로 전신의 피가 거꾸로 돌게 하는 고문수법이니 그 고통을 어찌 필설로 혀용할 수 있겠는가? 화일로는 한동안 느긋한 표정으로 임정해의 고통에 가득찬 얼굴을 지켜보다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지옥음화분신(地獄陰火焚身)을 시전하겠는데 이건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약간 차원이 다른 것이니 참기 어렵더라도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는 마시오. 임정해는 조홍에게 곡하곡의 소재지를 말하지 말라고 제지시켰지만 화일로의 고문수법을 몇가지 받고는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조홍에게 경고한 (수혼참형이 두렵지도 않소? )하던 말을 까맣게 잊어 버렸는지 화일로가 지옥음화분신을 시전하려 하자 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 화일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멈추었다. 벌써 굴복하는거요? 이거 실망인데. 난 그래도 당신쯤 되는 인물이면 적어도 스무 가지는 견딜줄 알았는데 겨우 두 가지에 손을 들다니..... 임정해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고통을 참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곡하곡은 후원의 지하에 있다....... 입구는 어디에 있소? 가산(假山)옆이다.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인 채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때 운산화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곳의 위치를 알았으니 어서 이 사람을 풀어주세요. 그녀는 지금까지 한쪽에서 말없이 화일로?가 사람들을 고문하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더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이다. 마음이 착한 그녀는 아무리 악한 사람들일지라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더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화일로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의당 그렇게 해야지요. 임정해가 급히 말했다. 내 말은 추호도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화일로는 그의 말을 묵살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헌데 말이오. 나는 얼마전에 유령곡의 수석집사인 귀제갈 구회회라는 인물을 만났는?그 자의 말로는 유령곡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음흉하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니 절대로 그들의 말을 쉽사리 믿어서는 안된다는 거였소. 임정해는 안색이 대변해 부르짖 듯 외쳤다. 아니다..... 그 분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하하..... 어쨌든 나는 그 자에게 당한 경험도 있고 하니 당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을 해봐야 겠소. 어떻게 확인을 한단 말이냐? 간단하오. 당신과 운낭자는 이곳에 있고 나는 조집사를 데리고 그곳으로 가겠소. 만일 귀하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집사를 조내 운낭자에게 석방하라고 이르겠소. 하지만 만?에 하나 당신의 말이 거짓이라면 다시 돌아와 당신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소. 그 순간 임정해와 조홍의 얼굴에 각기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임정해의 눈가에는 악독하면서도 회심의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고, 반대로 조홍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과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화일로의 내심 지피는 구석이 있었으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조홍의 손목을 잡고 몸을 날리려 했다. 자, 가산입구로 함께 갑시다. 자..... 잠깐. 조홍이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왜 그러시오? 조홍은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꼭 나를 데리고 가야 되겠소? 화일로는 일부러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야 임집사를 석방하라고 당신을 돌려보낼 수 있지 않소? 저....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면 안되겠소? 안되오. 나는 처음 볼 때부터 조집사가 왠지 마음에 들었소. 그러니 함께 갑시다. 조홍은 임정해를 힐끗 돌아보며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다. 순간 임정해는 흉악한 빛이 떠올렸다. 조형! 어서 가지 않고 무얼 그리 망설이시오? 본 곡의 계율을 벌써 잊었소? 그의 말은 짐짓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은근히 유령?곡의 엄격한 계율을 들먹거려 조홍을 위협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조홍의 얼굴에 짙은 망설임의 빛이 떠올렸다. 화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조홍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옳은 말이오. 이미 밤도 늦었으니 어서 갑시다. 곡하곡의 입구만 확인하면 당신을 무사히 돌려 보내겠소. 집에서 당신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서둘러야 하지 않겠소. 자신의 가족에 대한 말이 나오자 조홍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곳에 갈 필요없소. 그가 다부지게 말하자 임정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조형, 자네..... 조홍은 그를 돌아보며 격앙된 음성으로 말했다. 임형, 이해하시오. 나는 나만 바라보며 살고 있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두고 죽을 수 없소. 조형은 수혼의 참형이 두렵지도 않소? 참형을 당해 죽으나 이대로 죽으나 마찬가지요. 그럴바에야 나는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길을 택하겠소. 임정해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눈을 부릅뜬 채 조홍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화일로는 한쪽에서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쟁]羚駭? 조홍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곡하곡의 입구는 가산에 있지 않소. 화일로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이미 조집사께서 본심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소. 과연 내 짐작이 맞았구료. 조홍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를 억지로 추켜세울 건 없소. 나도 목숨이 귀하지만 않았다면 절대로 이러지는 않았을 거요. 하하.... 목숨이 귀하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소. 곡하곡은 어디 있소? 후원의 곡 밑이오. 입구는? 조홍은 이미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는지 추호도 머뭇거림이 없이 즉시 대답했다. 입구는 두 군데가 있소. 하나는 후원 산벽(山壁)간의 협곡으로 들어가는데 그 협곡은 한사람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정도라 매우 위험하오. 그리고 또 다른 길은 대곡주의 침실에서 통한다고 들었소.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가산 옆의 입구는 무엇을 하는 곳이오? 조홍은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임정해를 힐끗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그곳은 이곡주가 효천호를 비롯한 화기들을 제조하는 벽력동(霹靂洞)이오. 그곳에는 무슨 특별한 기관?장치가 되어 있지 않소? 그렇소. 무턱대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기관이 발동하여 그 안에 있는 화기들이 모두 폭발하게 되어 있소. 이 말을 듣자 천하의 화일로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일로는 함참동안 임정해를 노려보다가 조홍을 향해 포권을 했다. 조집사께서 사실대로 말씀해주신 점에 감사드리오. 조홍은 어색하게 웃었다. 별말씀을.... 나는 다만 목숨이 두려워 구걸한 졸장부에 지나지 않소. 조집사는 너무 겸손하시오. 화일로는 이어 몸을 돌려 임정해의 앞으로 다가갔다. 귀하는 나를 너무 실망시켰소. 그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소? 임정해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두 눈에 악독한 빛을 떠올렸다. 이 약아빠진 놈! 조홍, 저 배반자만 아니었으면 네 놈은 벽력동에서 갈가리 찢겨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여지가 없는 자로군. 화일로는 싸늘히 중얼거리며 수중에 들고 있던 신검을 휘둘렀다. 팟!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임정해는 싸늘한 시체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몸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주위를 시뻘겋게 적셨다. 화일로는 검을 다시 허리춤에 차며 운산흥]??돌아보았다. 그녀느 고운 아미를 잔뜩 찌푸린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예요. 그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소? 그녀는 씁쓸한 웃음을 떠올렸다. 문득 내가 아직 세상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는 임정해의 거짓말에 깜박 속았던 자신을 책하는 것 같았다. 화일로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건 당신이 너무 착하기 때문이니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소. 오히려 사람을 믿을 수 없게된 세상이 잘못된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채 힘없이 웃어보였다. 그때 조홍이 헛기침을 하며 화일로를 바라보았다. 화가주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화일로는 미미하게 웃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시오. 조홍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본곡은 이제 화가주에 의해 거의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요. 그러니 세 분 곡주를 해치지는 말아주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내가 직접 화가주를 모시고 곡하곡으로 가겠소. 화일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주인의 목숨을 구하려는 조홍의 노력이 가상헬]構? 여겨졌다. 염려마시오. 나는 절대로 그들의 생명을 해치지 않겠소. 조홍은 안생이 활짝 펴져서 급히 포권을 했다. 그러시다면 정말 감사하오. 화일로도 허리를 약간 굽히며 답례했다. 조집사는 겸손하실 필요 없소. 그럼 우리는 곡하곡으로 가봅시다. 조홍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 서서 우문력의 침실쪽으로 걸어갔다. 제 47 장 秘密通路 속에서 비도(秘道)안은 어두컴컴하고 음산했다. 비도에 진입한 후 조홍은 앞장을 서고 화일로와 운산화는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석장 뒤에서 따라갔다. 얼마쯤 들어갔을까? 화일로는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급히 외쳤다. 조집사, 조심하시오. 조홍은 아직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않았으므로 이 경고를 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쐐액! 통로의 어두운 전면에서 소털같이 시커먼 암기들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그 암기들은 시퍼런 남색(藍色)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눈에 보아도 무서운 극독(極毒)이 발라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의 위세는 대단하여 매서울 뿐 아니라 너무나 갑작스럽게 날아왔기 때문에 조홍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양손을 번개같이 휘두르며 벽공?장력 (劈空掌力)을 날렸다. 꽈르릉! 조홍의 내공은 당대 강호의 이류고수답게 몹시 심후하여 그의 벽공장력에 대다수의 남색 암기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허나 그중 몇 개는 조홍의 체내에 박혀 버렸다. 그 남망(藍芒)은 수화침(繡花針)같이 생겼는데 길이는 여섯 푼이나 되었다. 조호은 여러 군데에 모기가 무는 것 같은 따끔따끔한 아픔을 느꼈으나 별로 다른 이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홍은 잠시 눈쌀을 찌푸렸으나 다시 계속 걸어갔다. 그때 갑자기 어둠속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멈춰라! 고함소리는 오른쪽 석벽 사이에서 울려왔다. 그것으로 보아 석벽 뒤쪽에는 또다른 통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홍은 비록 유령곡에서 사집사의 신분으로 있었으나 이곳에 들어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따라서 이 안의 지형이 어떻고 누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조홍은 석벽을 훑어보며 냉랭히 소리쳤다. 그 안에 누구요? 내가 누구인줄 아시오? 석벽뒤의 사람은 음산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흐흐.... 물론 알고 있소. 귀하는 사집사인 음부귀판 조홍이 아니오? 친구는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나를 암산하려 했소? ? 석벽뒤의 사람은 냉랭히 대꾸했다. 나를 나무라지 마시오. 나는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소. 만약 이곳에 난입(亂入)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소. 조홍은 크게 소리쳤다. 그렇지만 나는 본곡의 사집사요. 사집사가 아니라 수석집사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오. 조홍은 흠칫 놀라며 말했다. 대곡주께서 나에게 들어가라고 특별히 허락을 내리셨소. 석벽뒤의 사람은 갑자기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세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오. 내 말이 거짓말 같소? 흐흐....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거요. 정말 대곡주께서 허락하셨다면 그 분이 직접 동행하거나 다른 곡주께서 동행하실텐데 그렇지 않고 당신만을 보냈을 리가 없소. 조홍은 내심 난감했으나 가는데까지 가보자는 심산에서 계속 물었다. 세 분의 곡주께서 출타하셨다면? 이곳에 통지를 하는 경종(警鐘)이 설치되어 있으니 세 분의 곡주가 모두 안 계실 때는 이 경종을 올려 통지를 하오. 조홍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친구, 당신은 누구요? 나는 아직까지 본곡에 당신같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소. ? 흐흐....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이름을 말해도 당신은 모를 것이니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그렇다면 당신은 본곡에서 아무런 직함도 없는 무명지배(無名之輩)로군. 이 유령곡 안에서는 확실히 무명지배에 불과하오. 하지만..... 나의 무명지배라는 말은 조금 다르오. 어떻게 다르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우문력도 나한테만?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오. 왜 그렇소? 나는 근본적으로 유령곡의 수하가 아니오. 다시 말해서 우문력은 나를 수하로 만들 자격이 없소. 조홍은 뜻밖의 말에 흠칫 놀랐다. 친구는 본곡의 수하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명령을 받들어 이곳을 지키고 있소? 그 명령은 대곡주께서 내리신게 아니오? 그렇소. 우문력은 그럴 자격이 없소. 조홍은 의아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친구는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곳을 지키고 있소? 석벽뒤의 사람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폐상(弊上). 친구의 주인은 당대 무림의 어느 고인이시오? 석벽뒤의 사람은 냉랭하게 말했다. 그것은 묻지 마시오. 조홍은 미간을 찌푸리고 화제를 바꾸었다. 친구가 방금 암산하려 했던 암기댐]?어떤 것이오? 칠독황봉침(七毒黃蜂針)이오. 흐흐... 누구든지 이 독침을 맞은 사람은 설사 대라신선이라 할지라도 한시진 이상을 살지 못하오. 그래서 당신에게 충고해 두지만 지금 당장 되돌아가서 우문력을 찾아 상의하는게 상책일거요. 조홍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화일로가 앞으로 나서며 석벽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귀하, 이곳으로 나와서 애기할 수 없소? 화일로는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은 이 석벽을 단단히 믿고 있나본데 당신이 정 나오지 않겠다면 이 석벽을 무너뜨려 버리겠소. 석벽뒤의 사람은 음산하게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만한 역량이 있으면 해보시오. 화일로는 껄껄 웃더니 소리쳤다. 하하..... 그럼 각오하시오. 동시에 그는 공력을 가득 돋구어 석벽을 향해 귀이무비한 일권(一拳)을 내뻗었다. 고오오..... 어마어마한 강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주위의 공기가 그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순간, 꽝! 꽈르르르........ 천지가 진동하고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부서진 돌맹이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면서 흙먼지가 안개췹]낮?자욱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폭이 한자나 되는 석벽은 화일로의 일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실로 가공할 권력(拳力)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이미 실전(失傳)된지 백년이 넘는 전설의 권법인 파황신권 (破荒神拳)임을 중인들이 어찌 알겠는가? 헌데 그 순간 괴변이 일어났다. 구멍이 뚫림과 동시에 석벽 뒤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든 것이다. 쐐쐐쐐쐐쐐........! 기이하게도 화살들은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한 크기에 진한 핏빛을 띄고 있었다. 때문에 주위가 일시지간 핏빛으로 물든 듯한 착각이 들었다. 흥! 색혈전(索血箭)이로군. 화일로는 냉소를 흘리며 양쪽 옷소매를 휘저었다. 파파파팍! 색혈전들은 모두 그의 옷소매에서 일어나는 강기에 의해 흩어져 버렸다. 운산화는 화일로의 바로 뒤에 서 있었으므로 조금도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조홍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석벽에서 화살이 날아오자 급히 소바닥을 휘둘렀으나 조금 늦은 탓인지 그중 한두개에 격중당하고 말았다. 크윽! 그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몸에 색혈전이 계속 날아와 박히니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 화쟁]狗灌?그것을 보고도 지금 그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석벽 뒤에 기관을 조종하는 장치가 되어 있어서 우선 석벽을 무너뜨리고 그 장치를 조종하는 자를 제압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화일로는 옷소매로 색혈전을 물리치고 나서 두 손을 질풍같이 석벽에 강력한 일장을 갈겼다. 우르릉........ 꽈꽝! 뇌성벽력같은 폭음이 터지며 짙은 안개가 끼듯 먼지가 자욱히 일어났다. 동시에 처음의 구멍보다 훨씬 큰 구멍이 뚫렸다. 화일로는 비호처럼 구멍을 통해 석벽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석벽안으로 들어간 화일로는 재빨리 석벽안을 둘러 보았다. 한명의 황의장한이 오른쪽 벽에 찰싹 달라붙어서 한 손에는 검을 쥐고 한 손에는 석벽위로 불쑥 튀어나온 붉은 단추를 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붉은 단추는 틀림없이 암기를 조종하는 기관같았다. 화일로가 보고 있는 동안에도 황의장한은 그 단추를 누르려고 했다. 화일로의 눈빛이 차갑게 번쩍이며 그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이 번개처럼 튕겨졌다. 쾌액! 화일로가 석벽으로 들이닥칠 때 석벽이 무너져서 일어난 자욱한 먼지 때문에 황의장한은 그를 미처 보지 못했다. 그런데? 화일로가 손을 들때 인기척을 들었는지 고개를 홱 돌렸다. 허나 그 순간 화일로가 격출한 지공(指功)은 어느새 그의 가슴과 현기혈(玄機穴)을 가격하고 있었다. 팟! 큭! 황의장한은 즉시 전신이 마비되면서 붉은 단추를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아버리고는 벽에 기대섰다. 그는 벽에 기댄채 꼼짝달싹 못하고 두 눈을 희멀거니 뜨고 화일로는 바라보기만 했다. 화일로는 아무 말없이 허리춤에서 연검을 뽑아서 석벽위의 기관을 부숴버렸다. 그리고는 검을 다시 집어넣고 황의중년장한을 병아리 움켜쥐듯 가볍게 잡아들고 석벽밖으로 뛰쳐나왔다. 그가 두께가 한자나 되는 석벽을 부수고 그 안에 들어가서 황의장한을 제압하여 다시 나오기 까지는 그야말로 숨을 한두번 올마쉴 정도의 촌각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운산화는 그저 놀라운 눈으로 화일로의 눈부신 동작을 경탄한 듯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화일로는 혈도가 제압당한 황의중년장한을 한쪽에 세워놓은 채 조홍의 상세를 살폈다. 조홍은 허벅지와 왼팔에 세 자루의 색혈전이 꽂혀 있었다. 그 꽂혀 있는 화살들은 모두 두푼 이상이나 깊숙히 박혀 있었다. 조홍은 처음에? 칠독황봉침을 맞고 심한 통증은 騙珦립?갈수록 고통이 심해왔다. 그러다가 색혈전마저 맞자 심후한 내공을 지닌 그였으나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화일로는 조홍의 상세르 살핀 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운산화가 급히 다가와 물었다. 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요? 살릴 수는 있지만 매우 힘이 드오. 화살에 맞은 상처는 별로 대단치 않으나 그 칠독황봉침의 독기가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오. 그러니 빨리 해독약을 구해서 칠독황봉침을 뽑아내야만 신속히 치료할 수 있소. 운산화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내게 방법이 있소. 이어 화일로는 한쪽에 세워둔 황의중년장한 앞으로 다가갔다. 황의중년장한은 약 사십여세쯤 되어 보였고 야위고 큰 키에 하얀 얼굴이었다. 턱에는 수염도 없었고 불쑥 솟은 매부리코, 붉고 엷은 입술, 길게 찢어진 독수리 눈등이 시선을 끌었다. 화일로는 그의 얼굴을 한번 슬쩍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짐작이 갔다. 이런 인간들은 거의가 다 간사하고 교활하며 악독한 자들이었다. 화일로는 평상시에 이런 종류의 인간을 제일 싫어하고 ?경멸했다. 자연히 그의 음성이 냉랭해질 수밖에 없었다. 귀하는 죽고 싶소. 아니면 살고 싶소? 황의중년장한은 혈도를 짚혔으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어도 말은 할수가 있었다. 그는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대꾸했다. 살기를 원한다면? 살고 싶다면 칠독황봉침의 해독약을 내놓고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시오. 황의중년인은 눈을 교활하게 굴리며 물었다. 해독약을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소. 헌데 무엇을 물으시겠소? 그건 알 것 없소. 다만 내가 묻는 대로만 대답하면 되오. 내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화일로의 눈빛이 어둠속에서 유난히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때는 살아있는 것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소. 황의중년인은 음악(陰惡)하게 웃었다. 나를 죽인다는 말이오? 그럼 어서 죽이시오. 죽음이 두렵지 않소? 흐흐.... 죽는게 두렵다면 이렇게 말하지도 않소. 그러고 보니 귀하는 진짜 영웅이고 대장부로군. 흐흐.... 본 어르신네는 원래부터 대장부요. 화일로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내가 조금전에 한 말은 귀하를 죽이겠다는 뜻이 아니었소. 황의중년인은 눈을 치켜떴다. 깍]瀏?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오? 화일로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일찍이 맛보지 못했던 따끔한 맛을 보여줄 생각이오. 즉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이오. 황의중년인의 안색이 노랗게 변했다. 그러더니 악에 바친 음성으로 소리질렀다. 그 따위 말로 나를 위협할 생각은 마시오. 고문 따위는 두렵지 않소. 화일로는 담담하게 웃었다. 과연 귀하는 깨끗이 죽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구려. 죽음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라면 무엇을 두려워 하겠소? 그동안 백가지가 넘는 고문수법을 익히고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내가 오늘 운수가 대통 (大通)하여 귀하같은 사람을 만났구려. 정말 반갑소. 부디 오래오래 버텨서 나를 기쁘게 해주기 바라겠소. 말을 마치자 화일로는 황의중년인의 오른팔을 비틀어 잡아당겼다. 우둑! 괴이한 음향과 함께 그의 오른쪽 어깨가 쑥 빠져버렸다. 과연 그자는 지독한 인물이었다. 어깨가 빠졌는데도 미간만 약간 찌푸리고 입술을 꼭 깨물 뿐, 신음조차 발하지 않았다.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는 과연 나를 쏙]퓔좃쳔걍?않는군. 이번에 펼칠 수법은 절맥역혈 (截脈逆血)이란 것인데 대단한 것은 아니니 쉽게 참아주리라 믿소. 하고는 갑자기 일지를 점해갔다. 절맥역혈은 얼마전에 화일로가 조홍에게 시전했던 역혈점혈보다 훨씬 발전된 수법으로 고통도 그만큼 심한 것이었다. 일지를 점하자 황의중년인의 체구가 부르르 떨리더니 체내의 혈맥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수백마리의 개미가 심장을 찢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그 고통은 혈육으로 만든 인간이라면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끄으으...... 마침내 황의중년인의 입에서 참고 참았던 신음이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잠깐 사이에 황의중년인의 전신은 뒤틀리고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화일로는 냉정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다가 다시 일지를 튕겼다. 팟! 이번의 수법은 일지수혼(一指搜魂)이라는 것이었다. 크윽..... 황의중년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성이 별안간 커졌다. 화일로가 시전한 절맥역혈과 일지수혼은 고문수법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들중의 하나였다. 화일로가 처음부터 이런 모진 수법을 사용한 것은 황의중년인이 웬만한 수법들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쟁]愍湛?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 효과는 탁월한 것이었다. 삽시간에 황의중년인은 전신을 마구 비틀었고 눈알이 툭 불거져 나왔다. 그 고통은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극심한 것이었다. 끄으으...... 황의중년인은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식은땀을 비옷듯 흘리더니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나.... 나는 당신의 말에 따.... 따르겠소. 화일로는 그제야 손을 뻗어 일지수혼 수법을 풀었다. 헉헉..... 황의중년인은 완전히 탈진한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제 48 장 谷下谷의 秘密 화일로는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해독약은 어디 있소? 황의중년인은 숨을 들이쉬고는 품속에서 하나의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여기 있으니 가져가시오. 화일로는 유리병을 건네받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어린아이의 엄지손가락만한 굵기의 금빛 환약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화일로가 금빛 환약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운산화가 급히 다가왔다. 이분의 상태가 몹시 위중해요. 어서 해독약을 주세요. 그녀가 유리병을 잡으려는 순간 화일로는 슬쩍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도 있지 않소? 그녀는 고운 아미를 상큼히 찌푸렸으나 그를 철썩같이 믿고 있는지라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화일로는 그녀에게 찡긋 눈짓을 한 뒤 황의중년인을 돌아보았다. 이게 정말 칠독황봉침의 해독약이 분명하오? 황의중년인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 말이 믿어지지 않소? 이해하시오. 세상이 원체 험악하다 보니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게 습관이 되었소. 화일로는 히죽 웃으며 돌연 황의중년인의 품속을 뒤졌다. 무.... 무얼 하려는 거요? 황의중년인은 안색이 대변해 소리 질렀으나 화일로는 못들은 척 그의 품을 뒤적거리다 하나의 가죽주머니를 끄집어 냈다. 화일로는 황의중년인을 향해 방긋이 웃어보이며 가죽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수십개의 칠독황봉침이 으시시한 남색 광망을 뿌린채 가득 들어 있었다. 화일로는 신중한 동작으로 그중 하나를 꺼내 들고 천천히 황의중년인을 향해 다가왔다. 황의중년인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무.... 무슨 짓을..... 나는 천성저으로 의심이 많아서 무엇이든지 직접 시험해 보지 않고는 믿지몌]? 못하는 성격이오. 그제서야 황의중년인은 화일로의 의도를 깨닫고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화일로의 의도는 명백했다. 칠독황봉침으로 직접 황의중년인을 찌른 후 금빛 환약을 복용시켜 해독약임이 확인되면 사용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화일로는 칠독황봉침을 황의중년인의 목덜미쪽으로 가져갔다. 조금만 참으시오. 아프지 않게 살살 할테니..... 이어 황의중년인이 무어라고 하기도전에 칠독황봉침을 그의 목에 꽂았다. 윽! 황의중년인은 짤막한 신음을 토하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목은 인체의 혈맥이 지나가는 곳인지라 독기가 침투하는 속도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빠른 곳이었다. 화일로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금빛 환약을 하나 꺼낸 뒤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이어 그의 입속으로 환약을 집어넣으려 하자 황의중년인은 질겁을 하여 소리쳤다. 자... 잠깐만! 어찌나 다급했던지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홍건히 고여 있었다. 화일로는 손을 멈춘채 빙그레 웃었다. 왜 그러시오? 이 약이 먹기가 싫소? 황의중년인은 눈꼬리를 실룩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귀하가 이겼소. 칠독황봉침을 해독하고 싶으면? 그 환약의 껍찔을 깬 후 속에 든 액체를 마시게 하면 되오. 껍찔을 깨지 않고 그냥 복용하면 어떻게 되오? 황의중년인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 환약의 겉껍찔에는 칠독황봉침의 독기를 촉발하는 촉진제가 발라져 있어 즉사를 면치 못하오. 화일로는 내심 그 자의 교묘한 독계(毒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겉에는 독을 바르고 속에는 진자 해독액이 들어 있으니 그 효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대로 비명횡사를 면치 못할게 아닌가? 화일로는 들고 있던 환약의 껍질을 깬 후 그 안에 고여있는 액체를 황의중년인에게 먹여주었다. 이번에는 해독약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황의중년인은 아무 말도 없이 해독액을 고스란히 받아마셨다. 그제서야 화일로는 환약이 든 유리병을 운산화에게 건네주었다. 어서 해독액을 먹이고 그의 몸에 꽂힌 화살을 뽑은 후 금창약을 발라 주시오. 운산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유리병을 받아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조홍에게로 달려갔다. 그제서야 화일로는 황의중년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솜씨는 제법 고명했소. 내가 아니었다면 다른 누구라도 속아넘어 갔쟁]?거요. 황의중년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결국 귀하에게 발각되었으니 모두 공염불이 되었소. 이제 당신의 이름을 말해 보시오. 나는 요봉(姚峰)이라 하오.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곳을 지키고 있었소? 폐상이오. 귀상은 누구요? 건곤교주요. 화일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계속 물었다. 당신은 건곤교에서 어떤 신분이오? 요봉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교주휘하의 건곤위사 중 제 팔호요. 이 말에 화일로는 내심 약간 놀랐다. 그가 먼젓번에 건곤교의 총타로 갔을 때 금문군에게 들은바로는 건곤교주를 호위하는 건곤위사는 모두 백스물한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상위(上位)의 열 명은 일명 십대위사(十大衛士)라 하여 그 무공과 권세가 당당하다는 것이었다. 십대위사의 교내 서열은 사방천왕에 조금도 못하지 않으며 건곤교주의 그들에 대한 신임도 두터워 건곤교내에서는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했다. 곡하곡을 지키는 요봉이 십대위사중의 팔호인 것만 보아도 건곤교주가 이곳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 파견?된지 얼마나 되었소? 약 보름쯤 되오. 건곤교주가 왜 당신을 이곳에 파견하여 지키게 했소? 이 곡하곡 내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소? 요봉은 주저주저했다. 그건..... 요봉이 주저하면서 다음말을 잇지 않자 화일로는 눈썹을 치키며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이걸 명심하시오. 내가 이곳까지 온 것은 절대 우연이나 심심풀이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이곳의 비밀을 귀하에게 물은 것은 단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일뿐이란 말이오. 요봉은 움찔하는 기색이다가 눈망울을 굴리며 말했다. 바깥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소? 우문력 일당들을 묻는 것이오? 그렇소. 당신은 우문력 등 세 곡주와 수하들을 모두 죽여버렸소? 우문력 등은 혈도만 봉쇄당했고, 집사들은 조홍외에는 모두 죽었소. 요봉은 눈을 휘둥그래 뜨고 물었다. 그외에 다른 사람들은? 십염라와 이십사판관들도 눈에 띄는 자들은 모두 혈도를 짚었으나 여섯 시진이 지나야 움직일 수 있소.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만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소. 요봉이 제아무리 교활하고 악독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사정이 어떻다는 걸 ?알게 되니 가슴이 떨리고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요봉은 두 눈을 교활하게 굴리다가 물었다. 곡하곡의 비밀과 실정을 말한다면 나를 풀어주겠소? 아무리 악인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 마리의 개미 새끼라도 생에 대한 애착을 갖는 법인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화일로는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으나 겉으로는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마시오. 귀하가 사실대로 말하고 속이지 않는다면 조금도 고통을 주지 않고 풀어주겠소. 요봉은 다짐하듯 말했다. 장부일언 중천금이오. 나 화일로는 비록 천하의 기남(奇男)은 아니지만 그래도 스스로 대장부라고 자신하고 있소. 그러니 어찌 두 말을 하겠소? 귀하는 조금도 걱정할 것 없소. 오... 당신이 바로 풍파무쌍 화일로요?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그렇소. 내 이름을 들었다면 내가 평판은 비록 좋지 않을지라도 한번 내뱉은 약속은 꼭 지키는 성격이라는 것도 알거요. 그러니 귀하는 솔직히 대답하시오. 상대가 천하에 악명(?)이 자자한 풍파무쌍 화일로임을 알게 되자 요봉은 한가닥 품은 기대마저 사라져 더이상 ?버텨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맥풀린 음성으로 말했다. 이 곡하곡에는 무슨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숨겨져 있을 뿐이오. 화일로는 눈을 번쩍 빛내며 물었다. 어떤 사람들이오?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한 당대무림의 중요한 인물들이오. 화일로는 짐작은 했으나 개방말고도 다른 문파들의 인물들마저 갇혀 있다고 하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두 몇 사람이나 되오? 스무명쯤 되오. 화일로는 요봉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는 중에 또 제지시키는 사람이 있소? 없소. 매복도 없단 말이오? 모든 매복은 당신이 방금 파괴했소. 이 이십여명의 무림고수들은 모두 귀교에서 사로잡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들이오? 그렇소. 흠.... 그렇다면 귀하는 당장 그들을 석방하여 내게로 데리고 오시오. 요봉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렇게 되면 나는 본교의 엄벌을 피할 수 없게 되오. 나의 강압에 의해서였다고 말한다면 귀교주도 귀하를 해치지는 않을 거요. 요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들을 특별히 구출하러 온 것이오? 그?렇소. 그들이 이곳에 갇혔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소? 세상에는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오. 그러니 나도 귀교에 대한 일은 제법 상세하게 알고 있소. 요봉은 독수리 눈알을 굴리고 교활하게 웃었다. 무림인들은 당신의 이름만 들어도 모두 눈쌀을 찌푸리는데.... 그리고 이곳에 감금당해 있는 정파의 고수들은 모두 당신을 마땅치 않게 생각할거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들을 위해 이런 위험을 무릅쓰는 것요?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면 그뿐이오. 그러니 석방을 하겠소? 하지 않겠소? 요봉은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귀하의 말대로 따르겠소. 하지만 그 전에 우선 내 혈도를 풀어주어야 하오. 화일로는 서슴치 않고 손을 내뻗어 그의 막힌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는 요봉의 무학수준을 가늠하고 있었으므로 설사 그가 허튼 수작을 부린다 할지라도 능히 다시 그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요봉은 몇 차례 팔다리를 움직인 후 천천히 몸을 돌렸다. 기다리시오! 이어 그가 무림고수들을 석방하기 위해서 석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하하.... 요위사(姚衛士)께서 굳이 그러실 필요가 억]遍弩甄?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십여명의 인영들이 석실 입구에 불쑥 나타났다. 중인들이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유령곡의 소곡주인 우문찬이 열두명의 수하들을 대동하고 석실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중 네 명은 사염라중에서 호일로가 아직 만나지 못했던 풍운외우(風雲雷雨)의 사염라였고, 다른 여덟명의 험상궂게 생긴 흑의장한들은 팔판관이었다. 그들 열세사람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사염라를 중심으로 해서 염라 하나가 두명의 판관을 대동하여 각자가 알맞은 위치에서 식실문을 막아섰다. 화일로는 그들을 쭉 훑어보고는 내심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들 사염라와 여덟명의 판관들은 모두 수중에 거무스름하고 주먹만한 물건들을 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위력이 절륜한 효천호였다. 천하무쌍의 화기인 효천호가 무려 열두개나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제 49 장 뱁새와 황새 화일로는 그들의 이러한 대담무쌍한 정세를 관찰하고 전신에 힘이 쭉 빠졌으나 안색은 여전히 평온했다. 소곡주는 어째서 이제야 오셨소? 우문찬은 음?흉스럽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흐흐.... 지금이 꼭 알맞소. 독에든 쥐를 붙잡을 수 있으니까. 이어 그는 냉랭하게 소리를 질렀다. 화일로, 이제 포승을 받아라!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당신은 사염라가 있다고 큰소리 치는 거요? 흐흐.... 눈을 크게 뜨고 봐라. 그들의 손에 뭐가 있는지를..... 벌써 봤소. 그건 바로 당신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들고 있는 효천호가 아니오? 알고 있으면 됐다. 그것으로 나를 위협한다고 해서 순순히 포박을 받을 것 같소? 네놈이 쇳더어리로 만들어진 몸뚱아리를 가졌을지라도 가루로 만들 수가 있다. 네 놈이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고 있을지라도 속으로는 오금이 저리도록 두려울 것이다. 그 말이 옳긴 하오. 무쇠라도 그 많은 효천호가 폭발하면 감당하기 어려울 거요. 하지만 목전(目前)의 정세로 보아 귀하는 그것을 사용하지 못할 것 같구료. 우문찬은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목전의 정세가 어떻단 말이냐? 네놈에게 말해두지만 목전의 정세가 어떻든 간에 이것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소곡주는 이 석실안에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울]移?昰?주위를 살피고 말했다. 요위사와 조집사가 있으니 내가 그들을 염려할 것이란 말이냐? 그렇소. 그러면 소곡주는 그들의 생명은 돌보지 않겠단 말이오? 두 분의 운명은 결정되었으니 참변을 당해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두 분은 무림의 괴물이며 고수중의 고수인 풍파무쌍과 같이 매장될 것이니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요봉은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우문찬, 저 놈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구나. ) 화일로는 요봉을 돌아보며 가볍게 웃었다. 당신은 우문찬의 말을 들었소? ....... 요봉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실상 지금 이런 정세에서 그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으랴. 화일로에게 석실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부탁을 할까? 아니면 우문찬에게 효천호를 사용하지 말라고 부탁할 것인가? 또 그가 말한다고 해서 화일로가 승낙하겠는가. 아면 우문찬이 승낙하겠는가? 우문찬의 냉혹하고 매정한 마음씨로 보아 허락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를 비웃고 창피를 줄 가능성이 많았다. 우문찬은 석문 밖의 일장 가까이 서 있었으므로 석실안의 요봉의 표정을 똑똑히 살필 쇽]?있었다. 허나 그는 못본척 화일로를 바라보며 소리질렀다. 네놈은 무엇을 할 생각이냐? 공연히 허튼 수작을 부리지 마라. 화일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눈빛을 번쩍 빛냈다. 그는 이내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곡주는 대청쪽으로 왔소? 그렇다. 그건 왜 묻느냐? 그렇다면 영존을 보았겠구료? 우문찬의 눈쌀이 자신도 모르게 찌푸러졌다. 만나봤다. 화일로는 담담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분들의 혈도를 풀어 보았소? 풀어 보았다. 그래 풀었소? 우문찬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만일 혈도를 풀었다면 네 놈은 벌써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하하.... 그래서 소곡주가 주저하며 효천호를 던지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구려. 네 놈의 제혈수법(制穴手法)은 어떻게 푸는 것이냐?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내가 그걸 가르쳐 줄 것 같소? 우문찬은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정말 알려주지 않을테냐? 이런 것을 보면 소곡주는 아직도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구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네 놈이 말하지 않겠다면 효천호로 네 놈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 하하...... 나를 위협해도 소울]毓遍? 소곡주가 나를 머리칼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나의 제혈수법은 몹시 특이해서 당대의 무림에서는 사부님외에는 어느 누구도 풀 수가 없소. 그 말은 믿을 수 없다. 믿는게 좋을 거요. 우문찬은 눈쌀을 찌푸렸다. 건곤교주께서는 무공의 조예가 신(神)의 경지에 다다랐다. 고금(古今)의 어느 누구도 그 분을 당할 자가 없고, 천함무림의 각 문파의 무학비결을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 그러니 그 분조차 풀지 못하리라고는 생가가지 않는다. 화일로는 담담히 웃으며 대꾸했다. 그릿摸?효천호를 던지라고 명령하시오. 내가 죽게 된다면 영존 등 세 분은 하루 이상은 살지 못할 거요. 정말 천하무쌍의 배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일로가 오히려 효천호를 던지라고 재촉을 하자 우문찬은 더욱 망설이며 어찌할 바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명령을 내려 이 얄미운 놈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계속 주저하며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문찬의 성격은 몹시 냉혹하고 매정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아주 없는 동물은 아니었?다. 그는 요봉이나 조홍을 돌보지 않고 다른 두 사람의 곡주인 우문당이나 우문환의 생사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허나 자기의 부친인 우문력의 생명만은 구하고 싶었다. 화일로가 얼마나 고명한 사람인데 우문찬의 주저하는 모습을 놓칠소냐. 화일로는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곡주, 우리는 피자 조건을 말하는게 서로 좋을 것이오. 우문찬은 고개를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물었다. 무슨 조건이냐? 나는 영존 등에게 혈도를 풀어주고 당신은 이곳에 감금되어 있는 무림고수들을 나에게 맡겨 내가 데려가게 해주면 어떻겠소? 우문찬은 고개를 젓고 대꾸했다. 그런 조건은 내가 승낙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할 능력도 없소. 소곡주는 건곤교의 문책이 두려워서 승낙할 수 없다는 것이오? 그렇지는 않소. 본곡은 건곤교의 수하가 아니므로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소. 그렇다면 왜 승낙하지 않소? 승낙을 못하는게 아니라 할 수가 없소. 왜 그렇소? 그들은 건곤교에서 본곡으로 옮겨와서 구금하고 있으니, 본곡 사람은 경계하는데 협조하는 의무는 있지만 석방할 권한은 없소. 그 일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울]嶽㎉怜?그들을 석방하겠다고 했으니 소곡주는 다만 그를 가로막지만 않으면 되오. 우문찬은 눈을 번쩍 빛냈다. 그게 정말이오? 못 믿겠다면 요위사에게 직접 물어 보시오. 우문찬은 요봉을 돌아보며 물었다. 요위사, 이 자의 말이 사실이오? 요봉은 얼굴을 찡그렸으나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오. 우문찬은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럼 먼저 가부와 두 곡주의 혈도를 풀어 주시오. 아니오. 소곡주가 먼저 무림고인들을 석방하시오. 우문찬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화가주, 내 말을 믿지 못하겠소? 화일로는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남에게 한번 속으면 결코 두 번 속는 법이 없소. 소곡주의 신용에 대해서는 이미 유령곡의 입구에서 한차례 교훈을 얻었소이다. 어찌 또 소곡주의 속임수에 넘어가겠소? 그의 말은 구구절절이 사실이었으므로 우문찬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요봉을 향해 소리쳤다. 요위사, 수고스럽지만 그들을 석방해 주시오. 분부대로 따르겠소. 요봉은 특히 분부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 말은 마치 이 일이 ?자의에 의해서가 아닌 우문찬의 명령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듯한 뜻을 담고 있었다. 그는 아주 교묘하게 무림고수들의 석방에 대한 책임을 우문찬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었다. 우문찬도 요봉의 속셈을 알아차렸으나 눈쌀을 살짝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일로는 석실 문 밖에서 문을 등지고 서 있다가 요봉이 나오자 곧 옆으로 비켜섰다. 요봉이 사람들을 석방하러 가자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히 기다렸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조홍도 어느 사이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채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화일로는 천천히 사염라와 팔판관을 훑어보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희미하게 웃으며 우문찬을 바라보았다. 소곡주, 당돌한 청이 있는데 들어 주겠소? 우문찬은 이 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나 싶어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청이오? 눈요기를 하고 싶소.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효천호가 얼마나 위력이 있는가를 알고 싶구료. 그 중의 하나를 터뜨릴 수 없겠소? 당신은 지난번에 수석집사를 만났을 때 효천호의 위력을 직접 보았다고 하지 않았소? 그 당시는 너무나 다급헬]漫?구회회에게만 정신을 쏟았지 효천호의 진정한 위력은 보지 못했소. 우문찬은 눈을 껌벅이더니 알겠다는 듯 히죽 웃었다. 나는 당신의 마음 속을 알겠소. 당신은 이 효천호가 혹시 가짜가 아닌가 의심을 하는게 아니오? 화일로는 짐짓 탄성을 토했다. 소곡주는 정말 고명하시오. 우문찬은 득의만면하여 웃으면서 말했다. 흐흐..... 무림에서는 모두 당신이 지략이 많고 심기가 뛰어나 상대하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나에게만은 안될 거요.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시험하겠소? 화일로는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즉시 대답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던지면 어떻겠소? 좋소. 지적하시오. 화일로는 천천히 사염라와 여덟명의 흑의장한들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오른쪽에 있는 뇌염라(雷閻羅) 옆에 있는 흑의장한을 가리켰다. 바로 저 사람이 들고 있는 것으로 정하겠소. 우문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흑의장한에게 말했다. 너는 그것을 던져 위력을 보여 주어라. 그 흑의장한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후 들고 있던 효천호를 오장 밖으로 던졌다. 바로 그때 갑자기 한 인영이 허공을 가르며 솟아 올랐다. 휘쟁]? 그 인영은 다름아닌 화일로였다. 그는 모두의 눈길이 흑의장한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가 효천호를 던질 때 거의 동시에 몸을 솟구쳐 공중에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으윽! 절세의 접인신공(接引神功)이 전개되며 허공을 날던 효천호는 그의 손바닥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우문천은 너무도 돌연한 일에 멍하니 있다가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지며 급히 외쳤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화일로는 효천호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태연스럽게 웃었다. 소곡주, 이것이 내 본래의 의사요. 우문찬은 그제서야 화일로의 속셈을 알아차렸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우문찬은 놀라고 분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것으로 어떻게 하려는 거요? 어떻게 한다는게 아니오. 다만 이것을 손에 넣고 만일의 변에 대비하려는 것 뿐이오. 그것으로 우리를 상대하려는 거요? 그럴 마음은 전혀 없소. 다만 이것이 내 수중에 있으면 소곡주께서 보다 더 신용을 잘 지키리라고 생각하오. 말은 부드러웠으나 속뜻은 명백한 것이었다. 만일 우문력 등의 혈도를 풀어준 후에 우문찬이 좋지 않은 움직임을 보여 신용을 잃는다면 쟁]?효천호로 유령곡을 떠날 때까지 방패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우문찬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과연 귀하는 고명하구료. 소곡주의 칭찬은 과분하오. 사실 이것은 내가 고명해서가 아니라 소곡주가 너무 자만하고 나를 얕본 탓이오. 내가 바지저고리가 아닌 다음에야 무림에서 괜한 명성을 날리겠소? 우문찬은 눈알을 교활하게 굴렸다. 과연 귀하를 얕본 것은 나의 불찰이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귀하는 심기를 잘못 썼소. 그게 무슨 말이오? 그것은 가짜 효천호요. 화일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이오? 우문찬은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냉랭히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소? 솔직히 그렇소.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시험해 보시오. 화일로는 벌써 우문찬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내심 냉소를 날렸으나 겉으로 어리벙벙한 척 물었다. 어떻게 시험하오? 그것을 던지면 될게 아니오? 이것을 던져서 폭발하면 진짜고 폭발하지 않는다면 가짜라는 말이오? 바로 그렇소. 화일로는 미미하게 웃었다. 그러면 이것을 어디로 던져 시험하는 것이 좋겠소? 우문찬은 일이 자기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고 회심의 뱄]抉恬?금치 못했으나 짐짓 무관심한 듯 냉랭하게 대꾸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여하간 그것은 가짜이니 어디에나 던지나 마찬가지요.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의 말이 옳구려. 가짜니까 아무 곳에나 던져도 상관 없겠지요. 그럼 소곡주는 조심 하시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우문찬을 향해 효천호를 던질 자세를 취했다. 우문찬은 질겁을 하고 급히 소리쳤다. 자..... 잠깐 기다리시오. 화일로는 던지려는 자세로 대꾸했다. 무슨 의견이라도 있으시오? 그것을 어디로 던지려 하는 거요? 소곡주의 발밑으로 던질까 하오. 우문찬은 크게 소리쳤다. 농담은 그만 두시오. 화일로는 정색을 했다. 농담은 아니오. 왜 하필이면 내 발밑으로 던지려 하시오? 이것은 가짜니까 주인에게 되돌려 주려는 것이오. 우문찬은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가짜는 남의 눈을 속이자는 것뿐이지 다른 용도는 없소. 그러니 그것을 다른 곳으로 던지시오. 이게 비록 쓸데없는 가짜지만 만드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낭舟像뼜姆? 당신에게 되돌려 주겠소. 화일로는 다시 효천호를 던지려 했다. 그러자 ?우문찬은 급히 손을 내저으며 비명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던지지 마시오! 그러면서도 불안했던지 그는 갑자기 두 세장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화일로는 껄껄 웃으면서 효천호를 던지려던 자세를 거두었다. 하?.... 소곡주, 긴장할 것 까지는 없소. 나는 당신을 조금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오. 그제서야 우문찬은 이미 화일로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안색이 경직되어 화일로를 노려보다가 싸늘하게 말했다. 화일로, 정말 고명하시오. 화일로는 담담하게 웃었다. 소곡주의 심계는 비록 그럴 듯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린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오. 그러길래 원래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오. 화일로의 조소에 우문찬의 얼굴은 칠면조처럼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그는 자기가 제아무리 심기를 써보았자 화일로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으나 그만큼 분노도 더 했다. 허나 이때 마침 요봉이 갇혔던 무림고수들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우문찬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제 50 장 鐵骨 의 行方 무림인듸]湧?승인(僧人)과 도인(道人), 속인(俗人)들이 섞여 있었는데 숫자는 대략 이십여명쯤 되어 보였다. 그들이 걸음을 멈추자 화일로는 그들을 쭉 훑어보다가 무심결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이십여명 중에서 자기가 찾던 철골개 진반천이 끼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비록 아직 진반천을 만난적은 없지만 그가 개방의 후개(後 )이므로 걸인의 행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헌데 무림고수들 중에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있었으나 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화일로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들을 불렀다. 여러분들은 이쪽으로 오시오. 헌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 무림고수들은 화일로의 말을 들었을텐데 한 사람도 대꾸하지도 않았고 걸음을 옮길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화일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다시 외쳤다. 여러분, 내 말이 들리지 않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때 운산화와 조홍은 이미 석실에서 나와 화일로의 옆에 서 있었다. 운산화는 무림고수들이 모두 차가운 안색을 하고 아무 말없이 움직이지도 않는 것을 보자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모두 귀머거리인가요? 아니면 벙어리인가요? 화가주는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들을 구출했는데 왜 한마디 대꾸도 없단 말인가요? 중인들중 청색 도포를 입은 사십여세 되어 보이는 중년도사(中年道士)가 냉담하게 말했다. 두 분께서 우리를 구하러 이곳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오신데 대해서 충심으로 감격하는 바이오. 그러나...... 중년도사는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물었다. 두 분의 대명은 어찌 되시오? 운산화가 대꾸했다. 저는 운산화라 하며 이 분은 화씨세가의 가주인 화일로예요. 청포도사는 화일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두 분의 열성에 감사하오만..... 두 분은 돌아가 주시오. 운산화는 어처구니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곳을 나가기 싫단 말이세요? 호랑이굴을 떠나서 늑대집으로 간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소. 화일로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약간 어리둥절했으나 당대의 기재인지라 곧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요봉을 쏘아 보고나서 청포도사를 향해 물었다. 요봉이 여러분께 뭐라고 했소? 청포도사는 눈을 치뜨고 반문했댐]? 요봉이 누구요? 여러분을 석방하여 이곳으로 안내한 사람이오. 청포도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별말 하지 않았소. 다만 풍파무쌍 화일로가 우리들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한다고만 말했을 뿐이오. 그는 내가 여러분들을 어디로 데려간다고 말하지 않던가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소.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귀하의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소. 이것만 보아도 무림인들이 평소에 화일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화일로는 입가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도장과 여러분들은 요봉의 말을 믿소? 청포도사의 태도는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빈도와 여러 동도들은 그의 말을 믿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운산화는 이곳까지 계속 화일로와 동행했던지라 그가 무림인들을 구하려 한 것에는 아무런 사심(邪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이 화일로를 불신하고 자꾸만 배척을 하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도사께선 정말 시비도 분별하지 못하시는군요. 청포도사의 안색이 변해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시주는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운산화는 화가 잔뜩 나 있는지라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고운 아미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제 말이 틀렸나요? 왜 여러분들은 눈앞에 벌어진 일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지요? 청포도사는 두 눈에 한광(寒光)을 발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관두겠소. 빈도는 이미 나이를 먹었으니 여시주같은 젊은 사람과는 다투기 싫소. 운산화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화일로가 손을 저어 그녀를 만류했다. 운낭자, 그만 두시오. 이어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다 그들 중 허연 수염을 기르고 황색 승포를 걸친 노승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사님의 법호(法號)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황포노승은 고개를 내저었다. 빈승은 마난(魔難)에 빠져 있어서 법명을 말하기가 부끄러우니 묻지 마시오. 화일로는 정색을 했다. 대사의 법호를 묻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꼭 알아야 할 일이 있으니 사양마시고 알려 주십시오. 노승은 약간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시주, 무슨 이유이오? 대사께선 먼저 법명을 말해 주십시오. 빈승의 법명은 백선(白善)이오. 이 말에 운산화와 조홍은 깜짝 놀랐다. 백선대사는 소림사(少林寺)의 ?당대 방장(方丈)인 백결대사(百潔大師)의 사제로서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고승이었던 것이다. 그는 비단 불심(佛心)이 깊을 뿐 아니라 무학수준도 상당하여 소림내에서의 위치도 굉장히 높았다. 화일로는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로 놀라지 않으며 포권을 했다. 이제보니 백선대사이시군요. 저는 대사께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백선은 눈쌀을 약간 찌푸리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대사께서는 무림동도들을 인솔하여 즉시 이곳을 떠나 주십시오. 어디로 가라는 말이오? 우선 출곡(出谷)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선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빈승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소이다. 대사께선 그렇게 하실 능력이 없으십니까? 아니면 그렇게 하기 싫으십니까? 백선은 결연히 말했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오. 빈승은 그렇게 할 능력도 없고, 또 그렇게 하기도 싫소. 우문찬이 갑자기 음산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화일로, 그만 두시오. 백선대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당신 말을 절대로 듣지 않을 거요. 화일로는 우문찬의 말에는 상대도 않고 백선대사만 ?바라보고 있다가 웃으며 물었다. 대사께서는 왜 싫다는 것입니까? 방금 정수도장(靜修道長)께서도 말씀한 바와 같이 호랑이굴에서 나와 늑대집으로 간다는 것은 별로...... 화일로의 눈이 별빛처럼 찬란하게 반짝였다. 대사께선 혹시 귀사의 장문인으로부터 이년전 달마동(達磨洞)에서 만난 사람에 대해서 들으신 적이 있소? 이년전 달마동? 백선대사는 어리둥절한 듯 나직히 뇌까리다가 돌연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럼 시주께서 바로 그...... 백선대사가 경악에 가득찬 음성으로 외치자 화일로는 급히 그의 말을 막았다. 그렇소. 내가 바로 당시의 그 사람이오. 백선대사는 격동을 금치 못하는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합장을 하고 허리를 굽혔다. 아미타불...... 빈승이 대협을 몰라보고 죄를 범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별말씀을.... 모르고 한 일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대사께선 사과하실 필요 없소. 그보다 이제 대사께선 내 부탁을 들어주시겠소? 백선대사는 송구스럽다는 듯 다시 허리를 굽신거렸다. 빈승은 대협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분부라니 당치 않소. 대사께선 우선 여러분들께 물어보시오. 깍]瀏【? 좋다는 사람들만 데리고 즉시 출곡하여 나를 기다리시오. 혹시 싫다는 사람에게는 강요하지 마시오. 백선대사는 이제 화일로의 정체를 알았으니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몸으르 돌려 무림고수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중에서 출곡을 원하시는 분은 외쪽으로 서 주시고, 원치 않는 분은 오른쪽으로 서 주시오. 백선대사는 무림에서 유명한 고승이므로 그의 말은 중인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백선대사의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의 반 수 이상이 왼쪽으로 옮겨섰다. 나머지는 제 자리에 선 채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청포도사 정수도장이 백선대사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대사, 저 자가 대체 누구요? 정수도장은 무당(武當)의 절정고수인 무당칠검(武當七劍)중의 수좌(首座)였다. 따라서 무림에서의 배분이나 무공으로 보아 백선대사에 거의 필적할 만큼 명성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백선대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수도우는 말씀을 조심하시오. 저 분은 본사의 대은공(大恩公)이시며 당대무림의 제일가는...... 바로 그때, 대사, 내 정체는 당분간 비밀로 해 주시오. 백선대?사의 귓전으로 화일로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에 백선대사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정수도장은 백선대사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자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왜 말씀을 그만두시오? 백선대사는 돌연 나직히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정수도우는 빈승을 믿으시고 일단 빈승을 따라 오시오. 추후에 빈승이 도우에게 상세한 설명을 해 드리겠소. 정수도장은 더이상 묻지 않고 화일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여태껏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사람들도 줄줄이 정수도장을 따라 왼쪽으로 옮겨섰다. 화일로는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들의 수를 눈으로 헤아려 보았다. 모두 스물 네명이었다. 화일로는 백선대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대사께서는 이곳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이 모두 몇 분이나 되는지 아시오? 백선대사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릅니다. 瀏??요봉이 큰 소리로 말했다. 화가주, 모두 스물 네분이오. 나는 이미 모두 석방했소. 화일로는 냉랭히 쏘아붙였다. 요봉, 당신엑 묻지 않았으니 입을 다물고 있으시오. 요봉이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화일로는 무림고?수들을 돌아보았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는 분은 없으시오? 무림고수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화일로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여러분, 정말 모르시오? 아니명..... 그때 중인들 중 흑의를 입은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화가주, 요봉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소. 내가 아는 바로는 이곳에 구금되어 있는 자는 스물네명 뿐이오. 이 흑의노인은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으며 이목이 청수하고 눈동자가 빛났다. 콧대도 우뚝 솟아 보기 좋게 생겼고, 턱에는 긴 수염이 가슴팍까지 내려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기도가 출중하고 정직한 인물 같았다. 화일로는 흑의노인의 인상에 호감이 가는지 정중하게 물었다. 노인장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오? 흑의노인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노부는 교성악(喬星岳)이라 하오. 이 이름을 듣자 화일로는 눈을 번쩍 빛냈다. 이제보니 천하에 이름 높으신 철궁옥환(鐵弓玉環) 교대협이셨군요. 저는 그동안 교대협의 인심협골과 강직한 성품을 흠모하고 있었소만 인연이 없어 뵙지 못했던 터에 이렇게 만나 뵈오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철궁옥환 교성악은 당대 무림에쇽]?유명한 협객이었다. 그는 비단 한 자루 철궁과 옥환으로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을 뿐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신의를 철썩같이 지키는 철담협골로 더욱 이름이 난 이름이었다. 교성악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 정말 부끄럽소. 화가주께서 이렇게 칭찬해주시니 정말 감당할 수가 없구려. 교대협께서 구금당하실 때 모두 몇 분이나 되었는지 아십니까? 모두 스물 다섯 분이었습니다. 화일로는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갔습니까? 어제밤에 건곤교의 고수 두 명이 와서 그를 압송해 갔습니다. 화일로는 급히 물었다. 그들이 그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 아십니까? 교성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화일로는 눈쌀을 살짝 찌푸린 채 잠시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교대협께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는 개방의 고수인 것 같은데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그를 모르신다면서 어떻게 개방의 고수인줄을 아셨습니까? 그는 전통적인 개방의 오의(汚衣)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쟁]?외모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교성악은 지그시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이는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고 아주 강직한 인상이었습니다. 허나 그는 이곳에서도 우리와는 달리 따로 독방(獨房)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자세한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군요. 화일로는 고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꼬치꼬치 캐물은 이유는 어제밤에 건곤교의 고수들에 의해서 끌려간 인물이 철골개 진반천이 확실한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교성악의 말대로라면 그는 철골개 진반천임이 거의 틀림이 없었다. 헌데 왜 유독 진반천만 어젯밤에 갑자기 다른 곳으로 호송되어 갔단 말인가? 화일로는 일이 참 공교롭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요봉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디로 압송되어 갔소? 요봉은 눈알을 굴리며 대꾸했다. 나는 모르오. 아직도 쓴 맛을 봐야 입을 열겠소?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오. 어젯밤에 갑자기 총타에서 특사(特使)들이 파견되어 그를 데리고 갔기 때문에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소. 특사라니.... 그들은 누구요? 요봉은 우물쭈물하니 머뭇거렸다. 그..... 그들은 내궁(內宮)의 소속이기 때문에 나는 모르댐]?인물들이오. 내궁? 화일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아직 건곤교의 총타에 내궁이란 곳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내궁은 뭐하는 곳이오? 그곳에 대해선 정말 아는 바가 없소. 다만 교주님께서 가끔 그곳을 출입한다는 것 밖에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요봉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내 말이 별로 미덥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내궁에 대해선 정말 모르오. 본교에서도 교주님을 제외하고는 내궁의 내막을 아는 사람이 없소. 화일로는 미심쩍은 눈으로 요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요봉의 신분은 건곤교주를 호위하는 건곤위사들중에서도 서열 팔위에 속하는 대단한 것인데도 내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니 정말 의아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 어제 온 자들이 내궁에서 왔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내궁의 특사들은 모두 특이한 영패를 가지고 있소. 그럼 그들의 영패를 보고 알았단 말이오? 요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들은 영패 오호와 영패 칠호였소. 내궁의 특사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오? 정확힌? 숫자는 모르지만 열 명 안팎인 것으로 알고 있소. 화일로는 미궁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건곤교내에서 그토록 신비스러운 곳이 있다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하필이면 그들이 왜 진반천을 압송해 갔단 말인가? 그리고 이제 어디가서 진반천을 찾는단 말인가? 제 51 장 閻王刀法 화일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우문찬을 돌아 보았다. 소곡주, 나는 요봉을 데려가려는데 반대하지 않겠소? 우문찬은 주저하지 않고 잘라 말했다. 반대하오. 요봉은 귀곡의 수하도 아닌데 왜 반대하시오? 우문찬은 눈썹을 치키며 냉랭히 대꾸했다. 요위사는 본곡의 수하는 아니지만 현재 본곡에서 거처하고 있으니 본곡의 보호를 받아야 하오. 소곡주는 내가 이렇게 말하는 뜻을 알아야 하오. 내가 말하는 뜻은 당신을 존중하고 당신의 체면을 생각하는 것이오. 실상 내가 요봉을 데려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귀곡에서 보호하고 싶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가 없을 거요. 당신 마음대로 쉽게 되진 않을 거요. 소곡주는 내가 출수하기를 재촉하는 거요? 화가주. 이것은 내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내게 너무 즉]惻つ“? 압력을 가하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소곡주는 무공을 사용하겠소. 아니면 효천호로 대항하겠소? 우문찬은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물론 전부 다 사용하겠소. 과연 그렇구료. 무공으로 상대한다면 당신의 수하들중엔 내 손에 삼초도 당할 자가 없소. 또 당신들이 합세한다 할지라도 내 검에 십초도 넘기지 못할 것이오.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당신의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효천호는 당하지 못할 것이오. 화일로는 담담히 웃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효천호의 위력은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오. 하지만 마침 내 손에도 한 개의 효천호가 있으니 당신의 목숨을 뺏을 수 있소. 더욱이 영존과 곡주들의 봉쇄된 혈도는 무림에서 단 하나뿐인 독분수법(獨門手法)에 의해 제압당했소. 그러니 그것을 풀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거요. 만일 나를 없앤다면 당신은 끝장이 나오. 요봉은 보호할 수 있어도 영존과 곡주들도 끝장이 나는 것이오. 이 도리를 모르겠소? 우문찬은 바보도 아니고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러니 화일로의 자세한 설명을 어찌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우문찬은 비록? 요봉을 보호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부친의 목숨까지 위험에 내걸수는 없었다. 우문찬이 머뭇거릴때 갑자기 요봉이 화일로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화가주! 나는 분명 약속대로 사람들을 석방했는데 왜 귀하는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는거요? 설마 무림인으로서의 신의를 저버리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화일로는 껄껄 웃었다. 물론 나는 약속을 지킬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비록 무림고수들을 석방했다 할지라도 가장 귀중한 한 사람은 석방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아직 약속을 완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오. 요봉은 움찔했다. 그게 무슨 억지요? 억지가 아니라 당연한 도리일 뿐이오. 아무튼 내가 마지막 한 사람을 구하게 되면 약속대로 당신을 안전하게 풀어주겠소. 그동안은 조금 불편하겠지만 당신은 나와 동행해야 하오. 요봉은 냉소를 흘리며 소리높여 대꾸했다. 잠꼬대는 그만 하시오. 이 어르신의 생명은 단 하나요. 내가 당신을 따라 간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며 당신 마름대로 되지는 않을 거요. 하하...... 그런지 아닌지 한 번 봅시다. 화일로는 낭랑하게 웃으며 요봉을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내듸]燦駭? 요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며 우문찬을 재빨리 돌아보았다. 허나 도움의 손길을 줄 것으로 기대했던 우문찬은 눈쌀을 찌푸리고만 있을 뿐 나설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요응?두 눈을 교활하게 굴렸다. 그는 자신의 무공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화일로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믿었던 우문찬마저 수수방관만 하고 있자 그는 한가지 악독한 계책을 생각해 냈다. 그는 즉시 움추렸던 어깨를 펴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좋다. 화일로! 내가 지금까지 네 놈이 두려워서 가만히 있을 줄 아느냐? 내 오늘 네놈에게 본 교의 건곤위사가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 주겠다! 지금까지 꽁무니만 빼던 요봉이 갑자기 기세등등하게 나서자 화일로는 어이가 없어 실소가 절로 나왔다. 그는 피식 웃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 대단한 기백이오. 당신이 이토록 뼈골이 단단한 사람인줄도 모르고 얼마전에 대접이 너무 소홀했던 것 같소. 앞으로는 그런 실수가 없이 아주 각별하게 모시겠소. 흐흐..... 이 놈! 받아라! 요봉은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화일로를 향해 덤벼 들었?다. 아니, 덤벼들려 했다. 그러다가 그의 몸은 번개처럼 빠르게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흑의장한을 향해 덮쳐갔다. 억? 흑의장한은 기세등등하게 화일로를 덮쳐가던 요봉이 설마 자신에게 덮쳐올 줄은 상상도 못했었고, 또 너무도 갑자기 돌발한 일이라 엉겁결에 고함을 지르며 손바닥을 쳐들어 요봉의 가슴을 쳤다. 흑의장한의 반응은 매우 민첩했고, 쌍장의 초세 또한 번개처럼 빨랐지만 한 발 늦었다. 팟! 어느새 요봉은 여우처럼 재빠르게 흑의장한의 수중에서 효천호를 뺏아 들어던 것이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요봉은 벌써부터 효천호를 뺏으면 흑의장한이 출수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효천호를 뺏앗자 즉시 뒤로 여덟 장 물러나는 동시에 오른 손으로 효천호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시오! 허나 흑의장한은 불같은 노여움과 살기에 휩싸여 있었는지 조금 머뭇거렸으나 다시 몸을 솟구쳐 요봉을 덮쳐갔다. 요봉은 흑의장한이 살기등등하여 계속 덮쳐오자 마음속으로 겁을 먹고 급히 다시 일 장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친구,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면 이것으로 소곡주를 죽이겠다. 이 한 마디는 흥]?픽?효과가 있었다. 이 말을 듣자 흑의장한은 덮쳐가던 공세를 멈추고 우문찬을 힐끔 쳐다보며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우문찬은 두 눈을 부릅뜨고 요봉을 향해 냉랭히 소리질렀다. 요봉! 무슨 짓이냐? 요봉은 음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소곡주는 물을 필요가 없지 않소? 우문찬은 눈빛을 차갑게 번쩍이며 소리쳤다. 너는 효천호로 화일로를 상대하겠느냐? 아니면 나를 상대하겠느냐? 물론 화일로를 상대하려 하오. 그렇다면 방금 뭐라고 했느냐? 흐흐.....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당신의 수하는 출수를 멈추지 않았을 거요. 이 말을 사실이었다. 요봉이 우문찬의 생명을 빼앗겠다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효천호를 빼앗긴 흑의장한은 분노하여 손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우문찬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요봉, 너의 그러한 수단은 비겁하고 졸렬한 것이다. 흐흐.....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에 이르면 비겁이니 졸렬이니 하는 것을 가릴 여유가 없어지오. 그러니 소곡주는 부득이한 일이라고 용서하시오. 요봉, 나는 너에게 명령하겠다. 지금 곧 효천호를 돌려줘라. 그럴 수는 없소. 나는 이것으로 생몌]資?보호해야 겠소. 우문찬이 눈썹을 치키며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화일로가 앞으로 나섰다. 소곡주, 내 말을 들어주겠소? 우문찬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말하시오. 소곡주는 요봉의 문제로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내 혼자 단독으로 처리하겠소. 우문찬은 조금 생각하더니 물었다. 귀하가 직접 출수하여 요봉을 생포하겠소? 요봉이 목숨을 뺏는 장난감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직접 손을 쓸 수 밖에 없소. 자신있소? 화일로는 담담하게 웃었다. 소곡주는 구경만 하시오. 우문찬은 생각에 잠기더니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수수방관하겠으니 귀하가 알아서 하시오. 화일로는 들고 있는 효천호를 운산화에게 건네주며 전음술로 당부했다. 우문찬을 조심해서 감시하시오. 그 자가 만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그것으로 생명을 뺏겠다고 위협하시오. 운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 자는 매우 교활하니 각별히 조심하겠어요. 당신도 주의하세요. 화일로는 가볍게 웃으면서 천천히 요봉이 서 있는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때 요봉은 흑의장한이 덮쳐오는 바람에 두 차례나 거푸 물러났으?므로 우문찬과의 거리는 불과 이 장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다 화일로가 천천히 다가오자 겁을 잔뜩 집어 먹고 큰 소리로 외쳤다. 멈추시오. 화일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눈빛을 번쩍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요봉은 다시 소리쳤다. 화가주, 그 자리에 선 채로 꼼짝 마시오. 그리고 이곳으로 오지도 마시오. 만약 瀏??않으면 흐흐.....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말을 잇지 않고 그는 음산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화일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효천호를 내게 던지겠단 말이오? 내 뜻을 알면 됐소. 요봉. 한 개의 효천호로 생명을 보호하고, 나를 위협할 수 있으리라 믿소? 요봉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무학공력이 고절하다지만 이것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는 없을거요. 화일로는 껄껄 웃었다. 하하.... 내가 그것을 무서워하는지 어떤지 시험해 보시오. 요봉은 눈꼬리가 위로 치켜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를 자극시키려 하지 마시오. 나는 바보?아니니 당신의 술수(術數)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안전하게 유령곡을 탈출하겠소. 그렇게 마음대로 될 것 같소? 내 생각으론 자신이 있다고 보는데...... 그렇지만 나는 난데없이 풍파를 일으키고 같은 편 사람까지 적으로 만들어 버린 당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오. 말을 하면서 화일로는 한 발짝 크게 다가섰다. 그러자 요봉은 당황하여 세 치 가량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시오. 그리고 더 이상 나를 화나게 하지 마시오. 그런다면 어떻게 하겠소. 간단하오. 당신도 죽고 나도 죽는 것 뿐이오. 그 말은 효천호를 터뜨려 나와 함께 동귀어진 하겠다는 뜻이오? 그렇소. 화일로는 흠칫 놀라더니 요봉의 태도가 결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귀하의 수법은 정말 고명하오. 보아하니 나는 당신이 이곳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을 두 눈을 멀거니 뜨고 보고 있어야 되겠구려. 요봉은 득의의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 이걸 두고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아아..... 말을 하다 말고 요봉은 갑자기 신음소리를 내더니 두 눈을 부릅뜨고 안색이 창백해지며 분노에 가득찬 음성으로 소리질렀다. 화일로! 정말 비겁헬]歐립?...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암산을 하다니..... 요봉이 득의만면하여 조잘거리는 틈을 타서 화일로는 무음지력(無音指力)으로 요봉의 가슴과 양쪽 어깨, 양쪽 다리 등 다섯 군데의 대혈을 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무음지력이란 것은 소리도 나지 않고 형체도 없는 그야말로 전설상의 지법(指法)으로 그동안 무림에서는 그런 무공이 있다는 소문만 들렸을 뿐 누구도 익힌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화일로에 의해 처음으로 무림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요봉이 신음을 토하며 악을 쓰는 순간, 휙! 화일로는 비호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몸을 날려 요봉이 쥐고 있는 효천호를 나꿔챘다. 그런 다음 다시 몸을 날려 운산화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화일로.... 이 악독한 놈아! 감히 암산을 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무림의 고수라고 행세할 수 있느냐? 요봉은 머리끝까지 울화통이 치밀어 혈도가 제압당했는데도 계속 고래고래 악을 썼다. 운산화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화일로를 바라보았다. 저 자가 지금 뭐라고 떠드는 거예요? 화일로는 싱겁게 히죽 웃었다. 암습은 자신만의 특권이라고 우겨대고 있구려. 그녀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정말 몰염치한 작자군요. 자기가 한 짓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남만 탓하다니..... 그러길래 사람은 자기의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오. 화일로도 따라 웃으며 운산화의 옆에 서 있는 조홍을 돌아보았다. 조집사, 수고스럽지만 당신이 이 자를 데리고 백선대사 등과 함께 먼저 곡외(谷外)로 나가시오. 이어 그는 백선대사와 정수도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사와 도장은 여러분들을 이끌고 지금 곡외로 가시오. 백선대사와 정수도장은 이 말을 듣고 허리를 굽혀 예의를 올리며 여러 무림고수들을 인솔하여 갱도를 나와 곡외로 나갔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화일로는 한쪽에 서 있는 우문찬을 돌아보았다. 이제 요봉의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영존등의 혈도를 풀어주겠소. 우문찬은 눈을 빛내며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감탄했소. 화가주. 확실히 귀하는 나보다 수법이 고명하구려. 과찬의 말씀이오. 나는 남보다 재수가 약간 더 좋을 뿐 실력은 보잘 것 없소. 아니오. 나는 그동안 무림에 퍼진 화가주의 소문만을 믿고 귀하가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만 하는 망나니쟁]适?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소. 나는 솔직히 귀하에게 뒤쳐진다고 시인하겠소. 우문찬이 정색을 하며 자신을 추켜 올리자 화일로는 약간 어리둥절해 했다. 너무 나를 추켜 세우지 마시오. 소곡주도 당대 무림의 인재라고 할 수 있소. 우문찬은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모습이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화가주에게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소. 말씀하시오. 사실은..... 건곤교의 내궁에 대해서 나는 몇가지 들은 바가 있소. 우문찬의 말에 화일로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소. 내가 알기로는 건곤교의 내궁은 건곤교주의 사부가 기거하는 곳이라고 하오. 화일로는 흠칫 놀랐다. 건곤교주의 사부? 그가 누구요? 그건 나도 모르오. 하지만 얼핏 듣기로는 그는 이미 오래전에 무공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도달해 반인반선(半人半仙)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하오. 그의 무공은 말 그대로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 건곤교주도 그의 십 초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소. 이 말에 화일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건곤교주는 천하무림의 패권을 꿈꾸는 일대 효웅(梟雄)인 만큼 그의 무공 ? 또한 천하를 오시(傲視)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건곤교주뗌?십초지적(十招之敵)이 되지 않는다면 천하의 어느 누가 대항할 수 있겠는가? 화일로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져 침음했다. 음.....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있는 것이 없소? 우문찬은 허공을 응시하더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소. 화일로는 내심 실망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의 무공내력에 대해서도 모르겠소? 그 말에 우문찬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소. 어서 말씀하시오. 내궁에는 모두 열 명의 특사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건곤교주의 사부가 직접 가르친 고수들인지라 그 무공이 건곤교주를 제외하고는 건곤교 내에서도 거의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오. 나는 우연히 그들 중 한 명이 사용하는 무공을 알게 되었소. 그게 무엇이오? 우문찬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원래 본곡의 수치인지라 밝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실은 본곡이 건곤교와 손을 잡게 된데는 한 가지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소. 그것은 아버님께서..... 건곤교쟁]?인물과 비무(比武)를 하여 패하셨기 때문이오. 총명절세한 화일로는 그 말을 듣자 대충 사정이 짐작이 갔다. 내기를 건 비무였소? 우문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패한 쪽은 이긴 쪽을 도와 무림을 재패하는데 협조하기로 했소. 말은 협조였지만 그것은 귀속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소. 건곤교에서는 누가 나왔소? 내궁의 특사 일호(一號)라는 인물이었소. 화일로가 결과를 묻기도 전에 우문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결과는 부친의 참담한 패배였소. 그 분은.... 구초(九招)만에 패하시고 말았소. 이 말을 듣자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유령곡주인 유령마왕 우문력이 단 구초만에 패했다면 천하의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건곤교주도 아닌 일개 특사였으니 말이다. 우문찬은 스스로의 입으로 유령곡의 수치스런 일을 들춰내는 것이 몹시 가슴아픈 듯 표정이 침울하기 그지 없었다. 그때 특사 일호라는 인물이 사용한 무공은 무엇이었소? 화일로의 물음에 우문찬은 퍼뜩 정신이 든 듯 입을 열었다. 그것은 하나의 괴이무쌍한 도법(刀法)이었소. 하지만 아름은 모르오. 그때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말해 주쏙]챨靡? 우문찬은 지금도 당신의 기억이 선하게 떠오르는 듯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 도법은 한 번 본 사람은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무섭고 잔인한 도법이오. 나는 지금도 무림에서 그와같이 무시무시한 도법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오. 그것은 그야말로 악마(惡魔)의 도법이라 할 만 했소. 화일로는 묵묵히 그의 말에 신경을 기울였다. 처음 그 자가 칼을 뽑아든 채 자세를 잡았을 때는 나를 비롯해 구경을 하던 모든 사람들이 실소를 금치 못했었소. 그 자는 엉뚱하게도 마치 도끼를 잡는 것 처럼 칼을 머리높이 치켜올린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으니까. 이 말을 듣자 화일로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도끼를 든 것 같았다고.......? 그렇소. 마치 나뭇꾼이 장작을 패기 위해 도끼를 든 듯한 모습이었소. 그 자세는 헛점투성이여서 우리는 부친이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소. 헌데 일단 그 자의 칼이 휘둘러지는 순간 그게 아니었소. 우문찬의 얼굴에 공포스런 빛이 떠올랐다. 대체 그 도법이 얼마나 강공스럽길래 단지 떠올리기만 해도 이토록 두려워 하는 것일까? 그 자의 도법이 펼췹]컨測?순간..... 세상은 마치 암흑에 휩싸인 것 같았소. 보이는 것은 오직 시퍼런 칼날과 귀신의 호곡소리같은 소름이 오싹 끼치는 음향뿐이었소. 그 악마의 이빨처럼 꿈틀거리는 도기(刀氣)앞에서는 세상의 어떤 것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파괴되어 버리고 말 것이오. 우문찬의 말은 너무도 생생해서 중인들의 뇌리에는 흡사 직접 목격한 듯한 선연한 광경이 떠올랐다. 무섭게 꿈틀거린 채 세상의 무엇이든지 파괴해 버리는 악마의 칼날이....... 화일로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물었다. 소곡주, 분명 그 자가 도법을 펼칠 때 귀신의 호곡성 같은 음향이 들려왔소? 우문찬은 고개를 자신있게 끄덕였다. 틀림없소. 뿐만 아니라 그 소리는 그 자가 도법을 펼칠 때마다 커져서 나중에는 듣기만 해도 고막이 터져 버릴 것 같았소. 정말 무서운 귀성(鬼聲)이었소. 화일로는 담담해 대꾸했다. 그것은 귀성이 아니라 귀곡호(鬼哭號)라는 것이오. 우문찬은 흠칫 놀랐다. 귀곡호? 그렇소 그 자의 무공이 완전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 자가 그 도법을 칠성(七成)이상 익혔다면? 그 소리만으로도 영존은 물론이고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참변을 면치 못했을 거요. 아니..... 귀하가 그 자가 사용한 도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그것은 염왕도법(閻王刀法)일 것이오. 염왕도법? 우문찬은 금시초문인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화일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염왕도법은 무림사상 공전절후(空前絶後)한 최강(最强)의 도법(刀法)이오. 그 도법을 펼치면 기이한 소성(騷聲)이 울리는데 시전하는 사람의 무공이 칠성을 넘어서면 단지 그 소성만으로도 사람을 살해할 수 있소. 그래서 그 소성을 귀곡호라 부르는거요. 우문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하구료. 내가 직접 본 사실이 없었다면 무림에 그와같은 도법이 있다는 것을 절대로 믿지 못했을 거요. 그도 그럴 것이 단지 도가 발출될 때 나는 음향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도법이 있다면 천하의 어느 누가 곧이 듣겠는가? 문득 우문찬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 듯 불쑥 물었다. 헌데 귀하는 어떻게 말만 듣고도 염왕도법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소?? 화일로는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될 날이 있을 거요. 어쨌든 소곡주 덕분에 내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 소곡주께 감사드리오. 우문찬은 귀신에 홀린 표정이 되었다. 아니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무림 역사상 염왕도법을 익힌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이오. 특사일호가 내궁주인에게서 무공을 익혔다면 내궁주인이 바로 그 사람일 것이오. 그가 살아있지 않기를 바랬는데...... 화일로의 마지막 말은 너무 나직해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우문찬이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요? 그는..... 화일로는 돌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마 영존께서는 알고 계실거요. 그러니 소곡주께서는 영존에게 물어보시오. 우문찬은 입맛이 썼으나 화일로가 그 인물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더이상 묻지 않았다. 이윽고 화일로는 우문찬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자, 지금 가서 영존 등의 혈도를 풀어줄테니 어서 나갑시다. 우문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묵묵히 갱도의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화일로와 운산화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곧, 그들의 모습은 어둠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제 52 장 劍刀雙聖 유령곡의 입구로 향하는 동굴 속, 화일로와 운산화는 우문력 등의 혈도를 풀어준 후 그들과 헤어져 백선대사 등이 기다리고 있는 유령곡의 입구를 향해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판이하게 달랐다. 운산화는 모든 무거운 짐을 해결한 듯 홀가분하고 기쁨에 찬 표정이었으나 화일로는 세상의 모든 고민을 한 몸에 진 듯 표정이 무거워 보였다. 그들이 유령곡으로 들어갈 때는 날이 막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무렵 이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삼경(三更)을 지나고 있었다. 밝은 달이 중천에 환하게 떠 있는 밤이었다. 저곳에서 잠시 쉬어가요. 운산화가 근처에서 멀지 않은 풀밭을 가리키며 화일로의 소매를 살짝 잡아 끌었다. 화일로는 뿌리치지 않고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융단같이 부드럽고 곱게 펼쳐져 있는 풀밭 위로 나란히 앉았다. 화일로는 계속 말이 없었다. 운산화는 그의 곁에 앉아 달빛에 젖은 채 풀잎을 뜯어 뿌렸다. 그들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특별히 나눌 말이 없는 듯 헬]杉? 그녀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화일로는 영문을 몰라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낭자, 왜 그러시오? 나는 어려서부터 이러는 일이 많았어요. 혼자 밖에 나와 멍청히 앉아 달을 바라보고 별을 세노라면 밤은 어느덧 깊어지기가 일쑤였어요. 하지만 오늘 밤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어요. 그게 무엇이오?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가자 천천히 쓸어넘기며 조용히 말했다. 달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아요. 그렇소? 당신은 지금 내 말을 듣고서도 나처럼 느끼지는 못할 거예요. 내 마음속에 들어온다면 모를까.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수없이 많았소. 운산화는 잠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의 마음을 읽으려 했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서운한 듯 그의 눈을 그대로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난 후, 오늘 처음 그것을 알았고, 또 처음 애기한 거예요.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수없이 많이 애기했다고 했지만 그 말의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모르고 그뤄]?말을 했을 거예요. 그 말은 아마 틀림없을거요. 나는 진정으로 달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또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아보지 못했소. 아마 우리는 서로 심정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조차 다른 모양이오. 괜찮아요. 당신도 언젠가는 저 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탄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오. 혹시 당신은 나보다도 더 일찍 저 달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애기를 　하면 내가 알 수 없는 거지요. 낭자 생각에 내가 그럴 것 같소? 운산화는 생글거렸다. 그녀의 눈이 밝게 열리는 듯 했다. 나는 다만 그렇게 추측하고 있을 뿐이고, 그러기를 바라는 심정이예요. 낭자는 무엇때문에 나처럼 아무 보잘 것 없는 사람한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요? 운산화는 머리를 살살 흔들며 그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내 자신이 옳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족한 거예요. 화일로는 풀밭에 팔을 베개삼아 벌렁 누웠다. 낭자, 그렇게 되면 앞길이 구만리같은 낭자의 희망이 모두 깨지고 말거요. 나는 조금도 낭자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가 않아? 계속 참고 있는 거요. 하지만 언젠가는 더 참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낭자는 몸과 마음을 망치게 되오. 당신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어요. 설사 그렇더라도 내가 원한 일이니까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결심한 듯 차분한 음성으로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그의 귀에 소근거렸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의 사람으로 생각해 왔어요. 당신이 참든 못참든 그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화일로는 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 낭자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소. 그녀는 풀잎을 뜯어 바람에 날리며 말했다. 그것은 간단해요. 바로 정(情)때문이죠. 당신이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한다면 나는 앞으로 더 이상 낭자의 일에 참견하지 않겠소. 나를 부인으로 맞이 하겠다는 말인가요? 화일로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소. 결혼은 나에게 오히려 짐만 될 뿐이오. 어떤 여자고 간에 단지 이슬같이 인연만 맺을 뿐이오. 그래도 좋아요. 화일로는 그녀의 말에 자신을 얻은 듯, 갑자기 그녀의 백옥같이 희고 보드라운 손을 덥썩 잡았다. 운산화는 조금도 반항하는 ?빛이 없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화일로는 그녀를 가볍게 끌어당겨 풀밭위에 눕히고 나서 그녀의 곁에 누우며 한 팔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와락 감싸 안았다. 운산화는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묵묵히 마주보고 있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운산화는 가늘게 뜨거운 한숨을 내쉬며 소근거렸다. 왜요, 마음이 내키지 않나요? 아니오. 그녀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러지요? 웬일인지 낭자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구료.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바싹 파고 들었다.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의 감촉이 그의 건장한 가슴으로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이러면 되나요? 그는 머리를 저었다. 역시 마찬가지요. 그녀는 손을 들어 화일로의 가슴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래도 화일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더 대담하게 손을 움직여 그의 아랫배를 쓸어갔다. 화일로는 갑자기 몸을 꿈틀거려 그녀의 손길을 피한 후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낭자는 정말 후회하지 않을거요? ? 그녀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얼굴에 엷은 홍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제발..... 부탁해요. 그녀의 뜨거운 숨을 불어내며 소근거린 마지막 음성이 화일로의 마음을 움직였다. 돌연 화일로는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음...... 그녀는 피하지 않고 마주 끌어안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두 개의 입술과 입술이 마주치며 서로의 뜨거운 타액이 교환되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끝없는 황홀감에 도취되어 정신없이 서로의 혀를 탐닉하고 있었다. 화일로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녀의 옷깃을 더듬어 젖가슴을 만져갔다. 그녀는 몸을 흠칫 떨었으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의 거친 손이 그녀의 옷깃을 뚫고 봉긋하니 솟은 탄력있는 젖가슴을 말아쥐었다. 으음....... 그녀의 입술을 뚫고 나직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빨고 있었다. 화일로의 손은 이미 그녀의 터질듯한 가슴을 한아름 쥐고 있었다. 봉긋하고 한없이 탄력있는 그녀의 가슴이 손안에 가득 느껴왔다. 아.....! 그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더욱 세?차게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화일로는 그녀의 입술을 빨며 탐스럽게 솟아오른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다가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었지만 반항하지는 않았다. 백의가 벗겨지고 눈부시게 희고 아름다운 그녀의 몸이 나타났다. 마치 조각품을 빚어 놓은 듯한 그녀의 몸은 옷을 입고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요염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 화일로는 천천히 그녀의 몸을 음미하다가 그녀의 조그만 어깨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감싸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술이 벗겨진 그녀의 상체를 따라 목을 타고 내려갔다. 아아......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가늘게 새어나왔다. 화일로는 서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굴을 노을처럼 붉힌 채 그가 옷을 벗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사르르 감았다. 곧 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느껴지며 둔중한 사내의 체중이 자신의 몸위로 실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사내의 등을 힘껏 껴안았다. 한참을 쾌적한 기분으로 졸다가 낮은 목소리뤄]?소근거리기도 하고, 다정하게 서로를 어루만지면서 두 사람은 누워 있었다. 당신은 제 첫 남자예요. 그녀는 그의 건장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소근거렸다. 그걸 아시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을 반짝 빛낸 채 속삭였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화일로는 그녀를 내려다 보다가 짤막하게 웃었다. 지금쯤 백선대사와 정수도장들이 우리를 기다리다가 목이 길게 빠졌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소. 그녀는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전 당신이 후회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화일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후회하다니..... 무얼 말이오?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조금전의 일 말이예요...... 내가 무엇 때문에 후회하겠소? 당신이라면 몰라도..... 정말 제 마음을 모르세요? 화일로는 그녀를 내려 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별빛처럼 반짝인 채 그를 뚫어지게 올려보고 있었다. 화일로는 한동안 그녀의 눈을 응시하다가 미소를 띄우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알고 있소. 그녀의 두 눈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알겠소. 화일로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소. 무엇이예요? 조금 있다가 백선대사 등을 만나게 되면 그들과 함께 개방 총단으로 가시오. 운산화는 그를 빤히 올려보았다. 당신은요? 나는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소. 무슨 일인데요? 다른 사람들이 기다릴테니까 우선 옷을 입고 천천히 걸으면서 애기하는게 어떻소? 그의 말에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들이 아직도 옷을 벗은 채 알몸으로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두 눈을 내리 깔았다. 화일로는 빙긋이 웃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쳐 입었다. 그가 옷을 입고 몸을 돌리자 그녀는 어느 사이엔가 단정한 모습으로 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무슨 옷을 그렇게 빨리 입었소? 운산화는 교태스럽게 웃었다. 당신이 너무 늦게 입은 거지요. 허 참.... 우선 빨리 갑시다. 화일로는 혀를 차며 그녀의 손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운산화는 걸음을 빨리하여 그와 보조를 맞추며 다시 물었다. 급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이예요? 내궁특사들에게 끌려간 진반천을 찾아야 하오. 그곤]?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찾나요? 그걸 알고 있을만한 사람이 있소. 그가 누군데요? 그가 아니라 그녀요. 여자라고요? 누군데요? 화일로는 여자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다급히 묻는 운산화를 장난스럽게 바라보았다. 금문군(琴文君)이란 여자요. 금문군? 그녀는 어떤 여자예요?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화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질문의 화살을 던졌다. 당신은 내궁주인(內宮主人)이 누구인지 안다고 했는데 그는 누구예요? 화일로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게 아닐텐데...... 그게 아니라니요? 나는 지금 내궁주인이 누구냐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무슨 말이지요? 그녀는 성을 발끈 내며 다그쳤으나 화일로는 빙글거리며 대꾸했다. 묻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을텐데 순서가 바뀌지 않았나 염려해서 하는 말이오. 누굴 놀리는 거예요? 그녀는 언성을 높여 날카롭게 반박했으나 그는 천연덕스러웠다. 당신은 마땅히 금문군에 대해서 물어 보았어야 했소. 안그렇다고 우겨도 나는 다 알?고 있소. 운산화의 얼굴은 순식간에 복사꽃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잠시 말이 없었다. 입술을 꼭 다문 채 귀밑까지 붉어져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든 듯 했다. 화일로는 그녀의 귀밑으로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붉게 물든 얼굴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물으려고 했지만 모두 당신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나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하하.......! 웃지 마세요. 나는 애써 내 본심을 당신에게 밝혔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어어요. 질투한다는 말을 듣기 싫었던 모양이구료? 맞았어요. 당신은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지요? 마치 내 마음속에 들어가 본 것 처럼........ 다 방법이 있소. 운산화는 겨우 붉어진 얼굴을 바람에 식히며 억지웃음을 얼굴에 담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 뒤를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니며 질투를 한다면 당신은 아마 화병이 나서 죽을 거예요. 화일로는 계속 히죽히죽 웃었다. 안그래요? 내 말이 옳지요? 하하..... 정 반대로 애기하는군. 당신이 먼저 화병이 날 거요. 여자가 너무 많?이 모여드니까. 운산화는 샐쭉한 표정으로 그의 소매를 잡아 흔들었다. 어서 물은 말에 대답이나 하세요. 화일로는 머리를 끄덕이며 다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을 짧았지만 빛을 뿜으며 마주쳤다. 내궁주인은 염왕도법의 주인이오. 그리고 무림사상 염왕도법을 익힌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밖에 없소. 그 말은 아까 했잖아요. 들어보시오. 지금부터 오십 년전에 강호무림에는 두 명의 절세고수(絶世高手)들이 나타났소. 그들의 무공은 어찌나 가공스럽던지 당시 무림에서는 누구도 그들의 손에서 삼 초 이상을 견뎌낸 사람이 없었소. 운산화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낸 채 화일로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검(劍)을 사용했고, 다른 한 사람은 도(刀)를 사용했소.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검도쌍성(劍刀雙聖)이라 불렀소. 검도쌍성! 이 이름은 이제 하나의 전설(傳說)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무림인(武林人)으로서 이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룩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고금제일(古今第一)의 검객(劍客)과 도객(刀客)으로 불리웠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확고한 영역을 구축했다. ---검성(劍聖?) 연환노인(連環老人)! ---도성(刀聖) 구양외(歐陽畏)! 이들은 모든 무림인들의 우상(偶?이자 외경(畏敬)의 대상이었다. 염왕도법은 바로 도성 구양외가 오십 년전에 천하를 독보(獨步)할 때 사용하던 그의 독문무공(獨門武功)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내궁주인이 바로 도성 구양외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렇소. 염왕도법은 그 위력이 가공한 만큼 익히기도 힘들어 아직 구양외에는 누구도 익힌 사람이 없소. 운산화는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검도쌍성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어렸을 적에 아버님에게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나요. 하지만 그는 이미 오십 년전의 인물인데 아직까지 살아 있을리가 있나요? 나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많소. 만일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상하군요. 그는 이미 오섭 년전에 천하무림에서 제일인자로 군림했는데 무엇이 아쉬워 이제와서 다시 무림을 장악하려고 한단 말인가요? 화일로는 운산화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보니 당신의 머리도 제법 날카롭구료. 그것에는 나도 약간 짐작가는 점이 있소. 무언데요? 구양외는 오십? 년전에 천하제일인자(天下第一人者)가 아니었소. 그러니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무림을 장악해 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는건 당연한 일이오. 운산화는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구양외는 비록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로 불리웠지만 당시에는 검성 연환노인이 있었기 때문에 천하제일고수는 되지 못했소. 두 사람의 무공은 그야말로 백중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연환노인이 약간 더 높았소. 아!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 겨룬 적이 있단 말이예요? 그렇소. 구양외가 연환노인에게 도전을 했소. 허나 그는 하루 밤낮을 꼬박 싸운 끝에 결국 반초를 패하고 말았소. 헌데 왜 검도쌍성이 서로 겨루었다는 소문이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건 그들이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곳에서 싸웠기 때문이오. 그 후에 그들은 신비스럽게 사라져 두 번 다시 무림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어느 누가 그들이 싸운 것을 알 수 있겠소? 운산화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일로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 화일로는 빙긋 웃었다. 사부님에게서 들었소. 남궁선배님 말인가요? 내게 삼]瀛灌纛?그 분 말고 또 누가 있겠소? 그분은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거야 내가 어찌 알겠소? 나중에 당신이 그 분을 만나거든 직접 물어보구료. 운산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그것 말고 그들에 대해 또 알고 있는 것은 없나요? 한 가지 더 있소. 어서 말씀하세요. 화일로는 정색을 했다. 검도쌍성이 서로 사형제간(師兄弟間)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를거요. 운산화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뭐라고 했지요? 연환노인과 구양외가 서로 사형제라고 했소. 구양외는 바로 연환노인의 사제요. 구양외가 연환노인의 사제라고요? 그런데도 왜 그들은 서로 싸웠나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화일로는 미소를 지을 뿐 말이 없었다. 운산화는 그가 그럴수록 안타까운 듯 발을 동동 굴렸다. 애기 좀 해봐요. 그들을 왜 사형제간이면서 서로 싸워야 했고. 동문(同門) 이면서도 한 사람은 검을 쓰고 다른 사람은 칼을 사용했나요? 자, 더 이상 묻지 마시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머지 않아 알게 될거요. 화일로는 화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려 했지만 그녀는 쉽사리 단념하려 들지 않았다. 왜요? 울]?지금 말해 주지 않는 거예요? 꼭 알고 싶소? 화일로는 빙그레 웃으며 귀여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단시간에 다 애기하기 어려운 것이고, 얽히고 설킨 것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말하기는 정말 어렵소. 그래도 대충은 할 수 있잖아요? 더구나 이 일은 무림의 중대한 비밀이기 때문에 누설되면 곤란하오. 아직은 시기상조이니 좀 참고 기다리시오. 운산화는 자기를 믿지 못하는 듯 말해 주지 않는 그가 원망스럽기까지 했으나 사나이가 되어 그쯤 입이 무겁지 않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싶어 꾹 참기로 했다. 그럼 언제쯤 알 수 있을까요? 화일로는 끈질긴 그녀의 태도에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애기해 주지 않아도 당신은 자연히 알게 될테니 두고 보시오. 그때 가면 내 설명이 필요치 않을테니까. 그럼 왜 금문군이란 여자를 만나려고 하는지 애기해 주세요. 그녀가 돌연 화제를 바꾸어 묻자 화일로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 53 장 奇才와 奇女 그 여자를 만나려고 하는 건...... 화일로는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웬일일까 하고 쳐다보던 그녀와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 이제 보니까 참을성이 대단한데? 내가 말하기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셈이었소? 자, 이제 애기해 주겠소. 내가 그 여자를 만나려는 건 그 여자를 이용해서..... 운산화가 끼어 들었다. 그 여자를 만나 무엇을 이용하渼?거예요? 그 여자의 힘이 필요하오. 그 여자의 힘을 빌어 진반천이 갇힌 곳을 알아내고 그를 구출하려는 거요. 그녀가 어떻게 진반천이 갇힌 곳을 알고 있다니 생각하세요? 그녀는 건곤교주의 의녀(義女)요. 이번에는 운산화가 움찔 놀랐다. 건곤교주의 의녀라고요? 그렇소. 건곤교주에게는 세 명의 공주가 있는데 금문군은 그들 중의 대공주(大公主)로 건곤교주의 신임이 두터워 건곤교내의 제반 대소사(大小事)를 거의 모두 파악하고 있소. 운산화는 머리를 끄덕이는체 듣고 있다가 미소 지으며 반문했다. 그런데 당신은 언제부터 그 세도가 당당한 대공주를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녀의 거처는 어디에 있지요? 겹치기로 물어보는 그녀의 말에 화일로는 찔끔하여 말했다. 나는 그녀를 모르오. 모르다니요? 질투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말해 주?세요. 아니,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어찌 말할 수 있겠소? 정말인가요? 화일로는 그녀의 애를 태울 속셈인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운산화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그녀는 알몸을 그에게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림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냥 물어보았을 뿐이예요. 오해하진 마세요. 화일로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하는걸 애써 참으며 시치미를 뚝 떼고 대꾸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지금 뭐라고 했소. 운산화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잠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얼마 후, 그녀는 다시 소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신은 참 재주도 좋군요. 뭐가 말이오? 어떻게 한번도 못 만났다고 하면서 금문군이란 여자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지요? 화일로는 기가 막혔지만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야 남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도 있는 일인데 뭐가 그리 신기하단 말이오? 나는 육청운의 말을 통해서 알았소. 육청운은 그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소. 육청운은 흠칫 놀랐다. 그럼 당신은 육청운을 만났단 말이예요? 그렇소. ?진반천이 유령곡에 갇혀 있다는 것도 그에게 들어서 알았던 거요. 그는 나의 스승과 약간의 교분이 있어 나와도 안면을 트고 있소. 화일로는 그녀가 궁금해 하자 주저하지 않고 육청운이 유벽향차를 뒤따라 갔다가 금문군을 만나고 건곤교의 총단까지 들어갔던 일을 애기해 주었다. 운산화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활짝 개인 얼굴로 웃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제야 의심을 푼 모양이니 나도 마음을 놓겠소. 그런데 그녀는 당신을 알지도 못할텐데 선뜻 당신을 도우려고 할까요? 그래서 나는 우선 육청운을 찾으려고 하오. 그에게 우선 도움을 청하고 그가 승낙만 한다면 그에게 직접 금문군을 찾아가라고 말할 참이오. 육청운이 선뜻 승낙을 할까요? 아마 할거요. 그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는 괜찮은 사람이오. 중원무림을 위하는 일이라면 두 발 벗고 나설게 분명하오. 그녀는 화일로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당신은 아주 그의 열렬한 추종자로군요. 하하.... 다 같이 무림의 정의를 위하자고 하는 일인데 추종하고 자시고 할게 있겠소? 운산화는 미소띈 얼굴로 또 질문을 댐]平낫? 당신은 그의 거처를 아세요?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안될게 어디 있소?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는 동안 어느새 그들을 유령곡의 입구에 거의 당도했다. 동쪽 하늘이 훤히 밝아오는 듯 주위가 뿌옇게 밝아져 갔다. 길가의 풀더미나 돌 위에는 차가운 이슬이 영롱한 빛을 띄기 시작하고 있었다. 날이 밝은 것이다. 화일로는 그런 모두를 가슴 깊이 들이마실 듯이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하루가 지나고 또 다른 아침이 밝아 오는구나..... 정말 피곤하겠군요?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계속 싸움만 했으니..... 화일로는 벌써 그 일을 잊은 듯 감개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어젯밤은 정말 지루하고 피로한 밤이었던 것 같소. 고생을 무척 했더니 몸이 솜처럼 피곤한데..... 운산화는 눈을 빛내며 그를 다정하게 어루만질 듯 했다. 좀 쉬는게 어때요? 화일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이 없소. 이 일은 촌각을 다투는 것이니 이 길로 육청운을 찾아가겠소. 당신은 백선대사 등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과 합류하여 개방총단으로 향하시오. 여기서 헤어지게요?? 운산화는 몹시 서운한 듯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화일로는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지 않아 다시 만날테니 서운해 하지 마시오. 그리고 원래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이 더욱 각별한 법이오. 궤변이로군요. 하하..... 궤변이 아니라는건 다음에 다시 만나보면 알게 될거요. 화일로는 낭랑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음 순간, 스읏! 그의 신형은 어느새 허공을 날아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개방총단에 가거든 개방방부( 幇幇主)에게 내가 안부를 묻더라고 전해 주시오.... 그의 마지막 말은 벌써 백여장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운산화는 한동안 멍하니 그가 사라져 간 곳을 바라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무언가 커다란 것을 잃어버린 듯 허전하고 아쉬움만이 가득했다. 휴우....... 그녀는 뜻모를 한숨을 내쉰 채 고개를 떨구다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 × × 능양(陵陽). 능양은 구화산의 남동쪽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남쪽 지방에서 구화산으로 오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객점과 주루가 일찍부터 번성하였다. 해가 중천으로 떠오를 무렵, 안휘성의 명산(名山)인 구화산의 남쪽에 위치한 능양성에 한 채의 호화로운 향차(香車)가 나타났다. 향차의 전면에는 금시라도 날아오를 듯한 금빛 봉황이 생생하게 수놓아져 있었고, 주위에는 꽃다운 아리따운 소녀들이 호위하고 있어 위엄이 당당했다. 능양성의 주민들은 비록 많은 무림인들의 행렬을 보았으나 이 향차의 일행같이 웅대하면서도 호화로운 행렬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호기심과 의혹어린 눈길을 던졌다. 향차는 능양성에서 가장 큰 주루인 취화루(醉華樓)의 입구에서 멈춰섰다. 향차 일행은 취화루의 후원(後園)을 통째로 빌린 후 그 안에 들어가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향차를 호위하던 소녀중의 한명이 취화루의 주인을 불렀다. 이곳에 용설음(龍舌飮)이 있어요? 오십세 가량된 뚱뚱보 주인은 허리를 굽신거리고 있다가 용설음이란 말을 듣자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헤헤..... 그..... 그건 없는뎁쇼. 용설음은 차(茶)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으로 차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 천하일품(天下一品)으로 치는 것이었다. 허나 그만큼 희귀하고 진품(眞品)을 구하기가 힘이 들어 능양같은 작은 고장에서는 이름만 들었을 뿐 직접 본 사람조차 없었다. 소녀는 고운 아미를 상큼히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천지(天池)나 용정(龍井)은? 뚱보주인의 얼굴이 더욱 우거지상이 되었다. 천지나 용정은 비록 용설음보다는 약간 떨어지나 역시 진품(眞品)들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어.... 없는데요. 아니 그것도 없어요. 소녀의 앙칼진 호통에 뚱보주인은 어쩔 줄 몰라하며 손바닥만 비벼댔다. 그러면 철관음(鐵觀音)은 있어요? 그제서야 뚱보주인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 그건 있습니다. 철관음은 절강성(浙江省) 천목산(天目山)에서만 나는 것으로 천지나 용정보다는 비록 한 단계 뒤떨어지지만 그래도 다도(茶道)를 아는 사람들은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차였다. 소녀의 안색이 약간 풀어졌다. 아쉽지만 그거라도 있으니 다행이군. 빨리 철관음을 끓여 후원 내실로 가져 오세요. 뚱보주인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낭자,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소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려 후원으로 사라져갔다. 그제서야 뚱보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며칠 전에 간신히 비싼 돈을 주고 철관음 두 냥을 겨우 구했으니 망정이지 큰일날 뻔 했구나. 비록 내가 먹으려고 사둔 것이지만 할 수 없지. 나중에 두둑히 계산해서 받으면 되니까. ) 뚱보주인은 열심히 계산을 굴리며 주방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차를 가져왔습니다. 젊은 점원 한 명이 손에 차주전자와 찻잔을 든 채 후원 입구에서 소리쳤다. 그러자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조금전 차를 주문했던 소녀가 불쑥 나타났다. 가져왔으면 조용히 나를 부를 일이지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냐? 어서 안으로 들어오너라. 점원은 송구스러운 듯 머리를 숙인채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후원에는 모두 열두개의 방이 있었는데 소녀는 점원을 데리고 그 중 가장 가운데 있는 상방(上房)으로 향했다. 상방의 앞에 도착한 소녀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채 안에 대고 입을 열었다. 대공주님, 차를 대령했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그윽하면서도 영롱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 오너라. 소녀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문을 열고 점원과 함께 들어왔다. 상방의 안에는 비단 휘장이 쳐져 있었고 휘장의 건너편에는 얼굴을 면사로 가린 자의여인(紫衣女人)이 그린 듯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차를 놓고 물러가거라. 자의 면사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점원은 차주전자와 찻잔을 든채 쭈뼛거리며 휘장앞에 있는 작은 탁자로 가서 찻잔에 차를 따랐다. 철관음 특유의 맑고 그윽한 향기가 실내에 풍겼다. 점원은 차를 따른 후 탁자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소녀가 눈에 쌍심지를 돋구며 그를 노려보았다. 다 따랐으면 빨리 나가지 않고 무얼 하는 거냐? 점원은 움찔 놀라며 급히 차주전자를 들고 문쪽으로 걸어갔다. 헌데 그의 몸이 막 소녀의 곁을 스치려 할 순간, 쐐액! 돌연 점원의 우수가 번개처럼 움직이며 소녀의 혈도를 짚는 것이 아닌가? 그 출수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갑작스러웠는지 소녀는 무엇이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채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점원은 그녀의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 빠른 몸놀림으로 그녀의 몸을 안아 소리나지 않게 한쪽에 뉘었다. 자의망사녀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댐]쩝?여전히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허나 망사를 통해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은 싸늘한 한광(寒光)을 담고 있었다. 귀하는 이곳의 점원이 아니로군요. 물론이오. 건곤교의 대공주 아가씨. 점원은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음성을 듣자 자의망사녀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당신은......? 점원은 슬쩍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실로 절세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천하제일 미남자(美男子)의 준수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자의망사녀의 눈빛이 환하게 밝아졌다. 당신이었군요. 그는 바로 임백령이었다. 아니, 그녀가 임백령으로 알고 있는 육청운이었다. 육청운은 빙그레 웃으며 자의망사녀, 금문군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일시적으로 금소저를 놀라게 해드려 죄송하게 되었소. 하지만 이런 방법외에는 소저를 조용히 만나기가 힘들 것 같아 부득이 무례를 저질렀으니 이해하시오. 금문군의 눈가에 수줍은 미소가 감돌았다. 당신은 너무 겸손하시군요. 그렇지 않아도 저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어요. 육청운은 짐작하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일부러 시선을 끌기 위해 요란한 행차를 하셨구료. 당신은 과연 고명하시군요. 제 의중(意中)을 단번에 알아차리시다니. 소저께서도 나를 보러 이곳으로 급히 오신 것은 혹시 진반천에 관한 일 때문이 아니오? 금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래요. 당신은 과연 유령곡을 다녀왔군요? 그렇소. 하지만 한발 늦어 진반천은 벌써 다른 곳으로 압송된 후였소. 저도 당신이 떠난 직후에 그것을 알았어요. 당신이 떠난 날 밤에 진반천은 다시 호로곡으로 끌려왔어요. 그는 지금 어디에 갇혀 있소? 금문군은 입을 다문채 두 눈을 반짝이며 육청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 第 6 卷 끝 > 제 7 권 저 자 : 용대운 제 54 장 無上牢獄 제 55 장 절묘한 計略 제 56 장 總護法의 正體 제 57 장 龍虎風雲神 郭崇陽 제 58 장 개방을 섬멸하라! 제 59 장 雙魔의 죽음 제 60 장 무저니는 乾坤敎 제 61 장 나타난 刀聖 제 62 장 劍聖의 後裔 제 63 장 세 얼굴의 사나이 제 54 장 無上牢獄 그 전에 한가지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군요. 당신은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육청운은 의아했으나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것이라면 말씀드리겠소. 그녀의 눈에 기이한 빛이 반짝였다. 저는 당신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싶어요. 육청운은 움찔하여 말했다. 그건 소저께서도 알고 있지 않소? 나는 항주태생의 임백령이라고..... 당신은 아직도 저를 속이실 생각이세요? 그녀는 싸늘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는 이미 항주로 사람을 파견했어요. 당신이 말한 곳에는 과연 임백령이란 사람이 살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벌써 이년전에 사고로 죽음을 당했다고 해요. 설마 죽었던 임백령이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니겠지요? 육청운은 얼굴에 고소가 떠올랐다. 그는 설마 금문군이 자신의 정체를 알기 위해 일부러 머나먼 항주까지 사람을 파견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쓴 웃음을 머금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과연 소저는 일대의 기녀(奇女)답게 매사에 철두철미하구려. 나는 진정으로 감탄?했소. 과찬의 말씀. 그럼 이제 본명(本名)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육청운은 나직히 헛기침을 한 후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육청운이라 하오. 그 동안 본의아니게 소저를 속인 점 사과드리겠소. 금문군의 두 눈이 샛별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과연 당신은 제 짐작대로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대협이었군요. 대협이란 말은 내게 너무 과분하오. 그런 말씀 마세요. 당금 무림에서 천하제일고수로 공인(公認)된 옥면청삼 절정신검을 대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누구를 대협이라 하겠어요? 천하의 무림인들이 모두 당신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라도 한번 보기를 염원한다는데 저는 몇번이나 당신을 만나 대화까지 나누었으니 정말 둘도 없는 영광이예요. 허허.... 소저는 나를 너무 추켜세우고 있구료. 나는 그런 칭찬을 감당할 수 없소. 육청운은 담담하게 미소지은채 금문군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 정체를 아셨으니 진반천의 행방을 말씀해 주시겠소? 금문군은 기광이 반짝이는 눈으로 육청운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무상뇌옥(無上牢獄)에 갇혀 있어요. 무상뇌옥? 그곳은 어디에 있소? ?내궁의 지하에 있어요. 이름으로 보아 무시무시한 곳 같구료. 무상뇌옥은 본교에서 가장 중대한 죄를 저지른 죄인(罪人)들만을 수감하는 곳이예요. 그곳은 내궁에서 직접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본교에서 가장 감시가 삼엄한 중지(重地)라고 할 수 있지요. 육청운은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 진반천은 귀교의 수하도 아닌데 왜 그곳에 갇혀 있는 거요? 본교에서는 그를 휘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런데도 그가 꼼짝도 않자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무상뇌옥에 가두고 마지막 시도를 해보려는 것이지요. 육청운의 눈이 번쩍 빛났다. 진반천은 아직 괜찮소? 그는 정말 끈질긴 사람이예요. 하지만 무상뇌옥에 갇힌 이상 굴복하지 않으면 비참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거예요. 육청운은 잠시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다시 물었다. 무상뇌옥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소? 잠입은 어려워요. 그곳은 본교에서도 가장 경비가 철저하고 지세가 험악하여 발각당하지 않고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해요. 금문군의 대답은 단호했다. 육청운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무상뇌옥의 경비가 억]窄떨?삼엄한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허나 육청운은 포기하지 않았다. 들어가기가 불가능한 곳이란 없소. 어떤 장소든지 인간이 들어가라고 만든 법이니까 말이오. 무상뇌옥은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소? 조금전에 말씀드린데로 본교에 중대한 죄를 지은 죄인들만이 수감될 수 있어요. 귀교의 소중한 포로들을 석방시킨 일도 중죄(重罪)에 들어가오? 금문군은 그의 속셈을 알 수 없어 약간 어리둥절했다. 그게 어떤 포로들인가 하는 것에 따라 다르지요. 예를 들어 이번에 유령곡의 곡하곡에 갇혀 있던 자들이라면 어떻소? 그렇다면 중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하하.... 그렇다면 곡하곡을 지키다 포로들을 풀어준 인물이라면 무상뇌옥에 갇힐만 하겠구료? 그제서야 금문군은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듯 안색이 변했다. 당신은 곡하곡을 지키던 요봉으로 변장하려고 하세요? 과연 금소저의 재지(才智)는 따를 자가 없구료. 내 생각은 바로 그렇소. 안돼요. 그건..... 그녀는 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불쑥 말했다. 왜 그렇소? 당신의 역용술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본교의 사뱄]宴동?이상인 고수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어요. 게다가 당신은 본교의 사정을 거의 모르니 설사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 할지라도 행동이 어색해서 금방 발칵당하고 말거예요. 내 생각은 약간 다르오. 우선 그들은 요봉 정도의 인물을 눈여겨 살피지 않을테니 역용이 발각당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오. 그리고 호로곡 내의 사정에 대해서도 소저가 내게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별 문제가 될 것은 없소. 그의 말은 논리가 정연해서 그녀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고운 아미를 찌푸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위험한 모험인 것 같군요. 육청운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 정도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서야 어찌 무상뇌옥에서 사람을 구출할 수 있겠소? 금문군은 육청운의 결심이 이미 굳어진 것을 알고 더이상 그를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일이란 어렵게 생각할수록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으니까. 그 안에 들어가는건 그렇다 치고 나오는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건 아무래도 소저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 같소. 제가 어떻게 하면 되지요? 내궁에서는 ?저도 별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데..... 육청운은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무상뇌옥에 들어간 후에 소저는 며칠 있다가 핑계를 대어 나를 석방해 주시오. 금문군은 별로 자신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노력은 해보겠지만 어떨지 모르겠군요. 소저는 이렇게 하면 될거요. 우선 소저는 유령곡에 갔다가 그곳이 습격을 당해 곡하곡에 갇혔던 포로들이 모두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여 요봉을 잡아온 것처럼 행세하시오. 그런 다음 사오일 후에 건곤교주에게 부탁을 하시오. 유령곡을 습격한 인물을 추적하는데 아무래도 요봉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이오. 그러면 건곤교주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요봉을 석방할거요. 육청운의 자세한 설명이 끝나자 금문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절묘한 계략이예요. 과연 당신은 저보다 훨씬 고명하시군요. 과찬의 말씀이오. 그럼 이제 좀더 세밀한 계흭을 짜봅시다. 이어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댄채 나직하게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죄인을 끌고 와라! 음산하면서도 냉랭한 음성이 어두운 석실안을 울려퍼졌다. 꾸릉! 나직한 굉음과 함께? 두께가 무려 일장에 육박하는 거대한 석문(石門)이 열리며 죄수복을 걸치고 머리를 산발한 중년인 하나가 쇠사슬에 묶인 채 두명의 흑의인에 의해서 끌려 들어왔다. 이름은? 다시 예의 음산한 음성이 어둠속에서 들려왔다. 산발한 중년인은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요봉이요. 직위는? 교주휘하의 건곤위대 제팔호 위사요. 죄명(罪名)은? 이번에는 중년인의 양쪽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던 흑의인중 하나가 대신 입을 열었다. 본교의 중요한 포로 스물네명을 놓친 죄입니다. 어둠속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냉혹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를 칠호(七號) 뇌옥에 수감하라. 어떤 사람과도 면회가 되지 않고 밥은 하루에 두끼만 주어라. 예. 흑의인들은 다시 중년인을 끌고 석문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어두운 통로를 이리저리 돌아 하나의 석벽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석벽은 밋밋하기 그지없는 아무런 출구나 입구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석벽의 한쪽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을 뿐이었다. 흑의인중 하나가 석벽 앞에 가서 구멍을 통해 무어라고 속삭였다. 깍]瀏?? 덜컹! 분명 출구도 없던 밋밋한 석벽에 하나의 문이 불쑥 나타났다. 두 흑의인은 중년인을 붙잡고 문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서자 문은 다시 언제 열렸냐는 듯 굳게 닫혀 조금도 문이 여닫힌 흔적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실로 절묘한 기관장치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그들은 돌문을 지나 뇌옥들이 길게 늘어선 좁다란 통로로 들어서서 일곱번째 감방으로 들어갔다. 뇌옥들은 하나같이 몹시 비좁았고 황량했다. 마치 돼지우리같은 뇌옥에는 중간 중간에 돌문이 달려 있었고 그 수는 열두개쯤 되었다. 열두개의 좁은 뇌옥은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 발돋움을 한다면 건너편 뇌옥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다. 두 명의 흑의인들은 중년인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이윽고 그들이 뇌옥 밖으로 나가자 두껍고 견고한 뇌옥문이 서서히 닫혔다. 그제서야 중년인은 느릿느릿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비쩍 야위고 큰 키에 매부리코의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건곤팔위(乾坤八衛)인 요봉,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요봉으로 분장한 육청운이었다. 그는 금문군의 도움으로 요봉으로 역용한채 무사히(?) 무상뇌옥에 갇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두 흑의인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쇠고랑을 끌면서 뒤쪽으로 가 툭 튀어나온 돌 위에 앉았다. 그는 다시 뇌옥의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실내에는 빛이 전혀 없어 자신의 손조차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호흡할 때는 별로 지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위쪽 어딘가에 통풍시설이 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통풍구멍이 혹시 죄인의 동정을 살피는 구멍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주위의 다른 뇌옥들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육청운은 그중 어느 뇌옥에 진반천이 갇혀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허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반천은 지금 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육청운은 자고 있는 그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이 얻기 어려운 한가한 자기만의 시간을 이용해 사전에 짜놓은 계흭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뇌옥의 열두칸은 연달아 있어 비록 말을 하면 들릴 수 있어 대화를 나누기에는 편리하나 출입구가 각각 따로 있었다. 또한 뇌옥을 갈라놓은 석벽은 높이가 별로 높지 않지만 천정과의 간격이 븝]柰? 다섯 치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을 통해서 다른 뇌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무상뇌옥의 경비는 그의 예상보다 더욱 치밀하여 무력으로 뚫고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밖에도 또 한가지 크게 염려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철골개 진반천이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제지를 받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만일 건곤교에서 사전에 그에게 강제로 독약을 복용시킨다면 비록 그를 무사히 구출한다 해도 한 구의 산송장이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되면 걸신 악구천을 대할 면목이 없는 것이다. 사람을 구하러 갔다가 오히려 그를 죽게 했다면 무슨 낯으로 남들을 대하겠는가? 육청운은 새삼 이번일이 결코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는 곧 투지를 불태웠다. 임무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리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닥칠수록 기필코 이겨내겠다는 굳은 신념이야말로 지금의 그를 있게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세상 일중에서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는 법이다. 육청운은 능히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라면 능히 나갈 수도 있다고 믿고 있었?다. 여러가지 생각끝에 그는 우선 잠이나 실컷 자 두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눈을 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들려오는 여인의 음성에는 그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그곳에 계신 분은 혹시 개방의 철골개 진대협이 아니세요? 육청운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그 음성이 이곳이 아닌 다른 뇌옥에서 들려온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벽쪽으로 다가가 머리를 쳐들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가 있는 뇌옥에서 옆으로 두번째 건너에 있는 구호뇌옥에서 한명의 아리따운 미녀가 얼굴을 반쯤 내민채 육청운의 바로 옆에 있는 팔오뇌옥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이런 뇌옥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말 요염하기 그지없는 절세의 미녀였다. 앵두알 같은 입매.... 성숙하고 풍만한 육체..... 그리고 사나이들의 넋을 앗아갈 듯한 요염한 눈매...... 이런 것들은 아무리 철담간장의 냉혈한이라도 한번 미친척하고 어루만져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금상첨화랄까?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은 타오르는 듯한 짙은 홍의(紅衣)를 입고 있어 남자들을 뇌쇄시킬 듯한 몸매가 송두리째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신이 요염함으로 똘똘 뭉친 여인같았다. 허나 육청운은 그녀를 보자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 (저 요부(妖婦)가 어떻게 이곳에 있을까? ) 그녀는 강호에서 유명한 요녀(妖女)인 미혼낭랑(迷魂娘娘) 단소교(段小嬌)였던 것이다. 그녀는 별호 그대로 사람을 미혹시키는 기술이 뛰어나고 특히 방중술(房中術)에 정통해 뜻있는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눈쌀을 찌푸리는 일대탕녀(一大湯女)였다. 육청운은 무림의 요녀인 단소교가 무상뇌옥에 감금되어 있는 것에 의문을 품었으나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진반천이 부드러운 타이름에도 듣지 않고, 강압적인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자 건곤교주는 미인계(美人計)로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이때 제팔뇌옥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대는 누구요? 육청운이 석벽틈으로 바라보니 제팔뇌옥에 앉은 사람은 기골이 장대하고 수염이 덤수룩하게 기른 삼십대 초반의 장한이었다. 그는 봉두난발에 의복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눈빛만큼은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만큼 강렬했고 네모진 턱과 굳게 다문 입술이 몹시 고집스러워 보였다. (저 자가 바로 진뱄]吩돛肩慣립? ) 육청운은 진반천이 자신의 바로 옆인 제팔뇌옥에 수감되어 있음을 알게 되자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그를 위해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제구뇌옥의 문틈에서 단소교가 매혹적인 얼굴을 내밀었다. 희미한 빛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단소교는 일부러 눈을 내리감으며 수줍은 듯이 대답했다. 소녀의 이름은 도쌍쌍(陶雙雙)이라 하며 낙양 사람이예요. 진반천은 더이상 아무말도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자색(恣色)이 뛰어난 한 여자가 어두운 뇌옥에 갇혀 있는 일도 별로 그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 모양이었다. 육청운은 몹시 통쾌했다. 진반천은 과연 철골개라는 별호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단소교가 제아무리 예쁘다지만 이런 강철같은 인물을 만났으니 아무리 유혹해 보았자 모두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소교는 진반천의 냉담함에 저으기 실망했는지 더이상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진반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몇바퀴 돌며 몸을 움직인 후 바닥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제서야 육청운은 진반천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쇠고랑쟁]?채우지도 않았으며 혈도도 봉쇄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육청운은 이것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진반천은 개방의 차기방주로 내정된 후개인 만큼 그의 무공은 개방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만큼 고강한 것이었다. 건곤교에서도 진반천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을텐데 어째서 이렇게 방심하고 있는 것일까? 육청운은 진정한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필시 이 안에는 무슨 곡절이나 수작이 들어 있을 거라고 단정했다. 이윽고 그에게도 저녁밥이 나왔다. 붉은색 나무 밥그릇을 보니 육청운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몇년동안 풍진강호를 누비면서 온갖 종류의 밥을 다 먹어본 그였지만 뇌옥밥은 먹어보지 못했었다. 두개의 밥그릇 뚜껑을 열어보니 한 그릇에는 채소와 두부무침이 들어 있었고 또 한 그릇에는 하얀 쌀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죄인(重罪人)에게 이렇게 좋은 음식을 주다니 대우가 괜찮군. 이것은 그의 신분이 건곤교주의 직속인 건곤위사였기 때문에 특별히 배려한 것이었으나 그는 이를 알 길이 없어 맛있게 밥을 먹은 후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는 피곤했던 탓인지 곧 잠에 골아 떨어졌다. 다음?날 하루동안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단소교는 하룻밤동안 생각하여 무슨 묘책을 강구해냈는지 또 나직한 음성으로 진반천을 불렀다. 진대협. 진반천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오? 단소교는 응석을 부리며 어린애처럼 애교를 떨었다. 이런 곳에 있으니까 무척 무서워요. 어젯밤 이 몸은 한잠도 자지 못했어요. 몇번이나 대협의 방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그런데 왜 건너오지 않았소? 이 몸은 무공을 할 줄 몰라요. 그럼 무공을 하는 사람이면 이 석벽 틈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오? 웬일인지 진반천은 오늘 따라 그녀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를 했다. 단소교는 신이 나서 더욱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소근거렸다. 그럼요. 이 몸이 들은 바에 의하면 어떤 무공은 터득하기만 하면 사람의 몸을 크게도 하고 작게도 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대요...... 그것은 뼈를 부드럽게 하는 유골공(柔骨功)이라는 무공이오. 얼마동안 연마했으나 아직 부족하오. 연마했다면 이 석벽 정도는 문제 없잖아요?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았소. 그럼 한번 시험해 보시지 그래요.? 단소교의 음성에는 유혹하는 기운이 충만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마지막에 가서는 육청운의 초인적인 청각이 아니었다면 거의 듣지 못할 뻔 했었다. 아무튼 육청운은 내심 약간 초조했다. 하룻밤 사이에 옆방의 진반천이 딴사람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진반천은 이런 견디기 어려운 곳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기 때문에 심경의 변화을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단소교의 수단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일까? 허나 옆방의 진반천은 더이상 단소교의 말을 듣지 않고 벌써 누워 있었다. 그는 조금도 흥분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단소교는 진반천이 의외로 침착한 태도를 보이자 다시 그를 불렀다. 진대협..... 진반천은 졸리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시오. 나는 잠좀 자야겠소. 단소교도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또 지리멸렬하고 답답한 하루가 지나갔다. 밤중에 단소교는 자기 뇌옥안에서 야릇한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또 여러가지 유혹적인 음향과 동작소리를 냈다. 그러나 진반천은 코를 골며 늘어지게 자고 있을 뿐 시종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육청운은 단소교 때문에 시종 진반천과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진반천의 영민한 이목(耳目)이라면 자신의 옆방인 칠호뇌옥에 다른 사람이 들어있음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그는 자신의 일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성미이기 때문에 육청운이 들어와서 이틀밤을 지냈지만 그는 그쪽으로 옆눈질조차도 하지 않았다. 밤낮을 분간할 수 없는 뇌옥속에서는 완전히 하루에 두번 갖다주는 식사로 시간을 가늠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저녁, 단소교는 밥을 몇 술 뜨다 말고 원망 비슷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젯밤이 이 몸은 대협께서 건너오실 줄 알고 밤새도록 기다렸어요. 당신은 왜 그렇게 신용이 없으세요? 진반천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언제 건너가겠다고 승낙했소? 그렇지만 당신은 이 몸이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어요. 어제 우리가 어떻게 애기했는지 당신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제 나는 비록 승낙은 하지 않았지만 또한 거절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오. 그것 봐요. 그렇지만 나중에 자세히 생각해 보니 이 석벽을 넘어가는 것은 별로 어려운 것 같지 않으나 문제는 건너갔다가 다시 건너오려면 결코 용의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울]?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당신은 알고 있을 거요. 당..... 당신의 말뜻은..... 우리가 만일 그 짓.... 그런 일을 하고 나면 당신의 일신무공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가요? 그렇소. 어떤 약을 먹는 경우보다 그 정도가 아주 심하오. 한번 그러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나요? 최소한 삼일은 가지. 삼일이면 긴 날짜가 아닐텐데요. 당신이 제방에서 삼일간 있으면 되지 않겠어요? 삼일간 그 방에 있게 된다면 나는 뼈골이 말라 죽을 거요. 진대협께선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제가 그런 탕녀로 보이나요? 그건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거요. 어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수가 있지요? 보다 더 듣기 거북한 말을 할 수도 있소.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당신이 무슨 이유에서 이곳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나에게 하던 수법을 이곳의 인물들에게 사용한다면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을 거요. 그 말씀은 너무 모욕적이예요. 나는 단지 내가 보고 느낀대로만 말했을 뿐이오. 당신은 정조니 지조같은 것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니 내 제안대로 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너무해요. 정몌]?너무해요...... 단소교는 부르짖듯 외치며 훌쩍훌쩍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진반천은 조금도 미안쩍은 표정이 없이 크게 하품을 하더니 또 잠을 청했다. 육청운은 진반천이 이미 단소교의 진짜 신분을 알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한결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또 이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날이 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육청운의 마음은 점차 더 초조해졌다. 단소교가 뇌옥에 있는 이상 진반천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또 이곳을 빠져나갈 계흭을 상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만약 금문군과 약속한 기일이 지나 그가 뇌옥에서 석방된다면 다시는 이 뇌옥에 들어올 기회가 없게 되는 것이다. 헌데 그때 돌연 좁은 길 저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육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는 양 손에 공력을 가득 끌어올린 채 언제든지 출수할 준비를 했다. 왜냐하면 지금 들어온 사람의 목적이 그를 석방하기 위함이든지, 혹은 진반천을 처벌하기 위해 끌고 나가는 경우라면 그에게 이것 저것 선택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들어온 사람이 건곤교주나 내궁주인만 아니라면 육청운은 능히 그를 쓰뤄]?蔘?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괜히 긴장한 셈이었다. 발걸음은 단소교가 갇혀 있는 구호뇌옥 앞에 멎었다. 알고보니 그 사람은 단소교를 그 뇌옥에서 데려가기 위해 왔던 것이다. 진반천이 도저히 단소교에게 넘어갈 것 같지 않자 미인계로 그를 굴복시킬 계흭을 포기한 것이다. 육청운은 숨을 길게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 55 장 절묘한 計略 단소교가 나간 후, 육청운은 석벽 옆으로 가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여보시오. 우리 객담이나 하는게 어떻겠소? 진반천은 관심없다는 듯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애기할 게 뭐 있소? 애깃거리야 무척 많지요. 예를 들자면 하루 두끼식 먹고 배가 부르면 잠이나 자고 잠에서 깨면 또 먹고 하는 아주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귀하는 아마 전연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오만 귀방에 대해서 말이오. 귀하가 실종된 후 귀방의 장로(長老)들은 어떤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지 아시오? 진반천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육청운이라 하오. 진반천은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놀랐다. 아.... 아니 귀하가 뱄]慕?당대무림의 제일고수이신 옥면청삼 절정신검이란 말씀이오? 과찬의 말씀이시오. 진반천은 두 눈을 별빛처럼 반짝인 채 고개를 내밀어 육청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육청운은 그의 의중을 알고 빙그레 웃으며 슬쩍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어두운 뇌옥안이 환해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절세적인 그의 풍모가 드러났다. 아! 진반천은 짤막하게 감탄성을 발하더니 돌연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진반천이 육대협을 뵈오. 육청운은 손을 내저으며 담담하게 웃었다. 진형은 어서 예의를 거두시오. 지금은 그런 격식을 차릴 때가 아닌 듯 하오. 허나 진반천은 공손하게 포권을 하고 나서야 허리를 들었다. 대협의 정체를 몰랐다면 모를까 절세적인 풍모를 뵙고서도 어찌 무례할 수 있겠습니까? 헌데 조금전 대협께선 누구의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까? 요봉이란 인물이오. 그 자는 누구입니까? 건곤교주를 호위하는 건곤위사 중의 한 명이오. 진짜 요봉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내가 사람을 시켜서 개방총단으로 압송시켰으니 아마 지금쯤은 귀방의 감옥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 거요. 아직 대협의 신분은 발각당하지 억]刻努윱歐? 아직까지는 괜찮소. 그런데 어떻게 이 뇌옥에 갇히게 되었습니까? 육청운은 지금까지의 경과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진반천은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감격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대협께서 그 모든 어려움을 불사하고 또한 위험을 무릅쓰고 이 뇌옥안으로 들어온 것은 모두 나 때문이란 말입니까? 육청운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강호의 풍파를 피할 곳이 없어서 이곳으로 왔겠소? 진반천은 당금무림의 천하제일고수가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서 갖은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을 알자 너무도 감격하고 송구스러워 일시지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육청운은 다시 입을 열어 급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우선 건곤교가 귀하를 이곳에 납치해 온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주시오. 진반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야 물론 개방을 그들의 심복으로 만들려는 속셈에서입니다. 지금 당신의 신분으로는 전 개방에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지 않소? 만약 그들이 그런 목적이었다면 왜 귀방의 방주에게 직접 손을 쓰지 않은 것이오? 그 놈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비깍]냅?안전하며 또 다른 무림인들의 의심을 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승낙하면 그들은 곧 개방방주를 제거할 작전을 세우고 있습니다. 당신이 거짓으로 승낙하여 일단 자유의 몸이 된 후에 그들의 흉계를 폭로할 수도 있지 않소? 그들은 이 점을 계산에 넣지 않았소? 진반천은 길게 탄식을 했다. 그 점은 확실히 중요한 문제인 동시에 제가 염려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대협의 이번 호의를 거절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당신에게 무슨 금제(禁制)를 가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는 처음 사로잡힐 때 한가지 약을 강제로 복용당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산공독(散功毒)입니다. 그 약의 잠복기간은 사십오일이며 제가 그들에게 납치된 날자는 오늘로 꼭 한달이니 앞으로 십오일만 지나면 저의 일신무공은 물거품처럼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제서야 육청운은 건곤교에서 어째서 진반천을 쇠고랑으로 묶지도 않고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게 내버려 두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지금 당신의 감각은 어떻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먹을 수 있고 잠을 잘 수?도 있으며 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운기행공(運氣行功)만은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까 단소교, 그 요녀가 어찌 나갈 수 있겠습니까? 육청운은 나직히 감탄했다. 이제보니 당신은 그녀가 바로 미혼낭랑 단소교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구료. 그녀는 얼마전에 본방의 고수 세명을 유혹하여 살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모를리 있겠습니까? 당신은 벌써 행공하는 능력을 잃었으니 지금 해약을 복용한다 해도 아무런 도움이 없겠군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다만 잠시동안의 현상이지요. 기한이 다 차기 전에 해약을 먹으면 여전히 공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참 다행이구료. 진반천은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해약은 고사하고 이 뇌옥을 나가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설사 이 뇌옥에서 나갈 수 있다 해도 이 호로곡은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조금도 요행 같은 것은 바라지 않고 오직 대협만이라도 하루 속히 이곳을 떠나서 대신 개방에 제 말을 좀 전해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저는 여러 장로들을 뵈올 면목이 없고 방주께서 키워 주신 쟁]뵉煊?답하지 못하는 것이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입니다. ....... 그리고 또 방에서는 조속한 시일내에 다시 후계자를 한 분 선출하고 동시에 시시각각 건곤교를 경계하여 다시는 저 같은 경우를 당하지 않게 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죽어 말이나 소가 되어서라도 대협의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진반천은 이미 죽음을 결심한 듯 음성에는 비장한 기운마저 담겨 있었다. 육청운은 내심 그의 강직한 성품에 감탄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과연 개방에서 차기 방주로 내정(內定)할 만한 인물이로군. 하지만 너무 강직하면 부러지기도 쉬운 법이니 그게 조금 문제가 되겠군. ) 육청운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것은 없소. 궁(窮)하면 통(通)하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이니까 말이오. 진반천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이대로 제 인생을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달리 다른 방도가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대협께서 괜히 저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시게 될까봐 걱정이 되는군요. 육청운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이쪽으로 와서 얼굴을 좀 들어 보이쏙]챨靡? 진반천은 어리둥절하여 석벽 앞으로 와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당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관상을 좀 봐 드리겠소. 대협께서는 농다도 잘 하시는군요. 농담은 아니오. 이곳은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으니 좀 더 가까이 와 보시오. 진반천은 내심 상대의 뚱딴지 같은 말에 의혹을 느꼈으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감히 거절할 수가 없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선 후 고개를 치켜 들었다. 이러면 똑똑히 보입니까? 똑똑히 보입니다. 어떻습니까? 제 관상을 보니까 일방의 방주가 될 복(福)이 있습니까? 육청운은 잠시 동안 그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 광대뼈가 너무 불거져 나왔고 눈썹이 너무 짙군요. 이것들은 별 문제가 아니나 골치 아픈 것은 이마의 칼자국 흉터가 좀....... 진반천은 얼른 입을 열었다. 듣고보니 그렇군요. 이 칼자국 흉터로 말미암아 저는 이 뇌옥에서 죽을 상입니까? 육청운은 들은척도 않고 계속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칼자국도 별로 문제가 아니오. 제일 귀찮은 것은 역시 이 수염이오. 다행히 나는 앞을 내다본 바가 있어 돼지털을 ?지니고 왔소. 됐소. 이젠 돌아서 보시오. 당신의 등을 봅시다. 육청운의 중얼거리는 말을 듣자 그제서야 진반천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 대협! 육청운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시오? 대협께선 역용술을 이용하여 서로의 위치를 바꿀 생각이시군요? 과연 당신의 눈치가 비상하구료. 진반천은 부르짖듯 외쳤다. 왜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십니까? 그렇게 하는게 타당하지 않단 말이오? 대협과 저는 처음 만나는 사이로서 서로 말투와 거동이 생소하기 짝이 없는데 비록 용모는 바꿀 수 있겠지만 다른 것은 어떻게 모방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확실히 보통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오. 그러나 지금 당신은 당당한 개방의 방주 후계자이고 나도 그런데로 재주가 둔한 사람은 아니니 이틀동안 배우면 능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진반천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해서 무슨 이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육청운은 담담하게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마찬가지로 나도 이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해로울 것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구려. 첫째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대협께서 저로 변장하신 후 또 무슨 수단으로 건곤교주를 대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일이니 당신이 염려할 필요까진 없소.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두겠지만 어떤 환경 아래에서도 나는 절대 당신들 개방의 체면을 손상케 하는 행위는 하지 않겠소. 진반천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대협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건곤교의 산공독을 먹었으므로 며칠만 지나면 폐인(廢人)이 되니.... 육청운은 다시 말을 가로채고 힘차게 말했다. 며칠 후면 당신은 호로곡을 빠져나갈 기회가 올 것이며 늦어도 칠일 후면 개방총단에 도착할 수 있소. 개방방주는 당대의 기인(奇人)인 만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해독시킬 방법을 알고 있을 테니 당신은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진반천은 육청운의 말에 추호도 틀림이 없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당대의 개방방주는 개방역사상 제일가는 고수일 뿐 아니라 천하무림에서도 달리 짝을 찾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인물이니 산공독 쯤은 간단히 해독시킬 수 있을 곤]痼甄? 하지만.... 이런 곳에서 역용약을 어떻게 구한단 말입니까? 육청운은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건 안심하시오. 나는 마침 항상 역용약을 가지고 다니니까 말이오. 내가 여기에 들어올 때 몸을 수색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그들의 큰 실책이오. 하여튼 여기까지 무사히 들어왔으니 이젠 내가 솜씨를 부려볼 차례요. 그의 태도와 음성은 사뭇 자신에 차 있어서 진반천으로서는 듬직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진반천은 더이상 거절하지 않고 그의 지시에 순응을 했다. 이틀 후, 예상한대로 이날 저녁에 요봉으로 변장한 진반천은 뇌옥에서 석방되었다. 진반천은 육청운이 일러준대로 뇌옥에서 나온 후 시종 죄를 뉘우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결국 하늘의 도움인지 이튿날 아침 대공주 금문군의 연극에 가까운 훈계를 한바탕 듣고 나서 진반천은 호로곡을 나오게 되었다. 명분은 죄를 지었으니 대신 그만한 공을 세워야 하므로 한시바삐 도망친 스물네명의 포로들과 그들을 석방해준 괴인물의 행방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육청운은 진반천의 신분으로 계속 팔호 뇌옥에 갇혀 있었다. 구금된 방이 바뀌어 짐에 따?라 나오던 음식도 바뀌어졌다. 요봉의 신분으로 있을 때는 하얀 쌀밥에 잘 양념된 채소와 두부무침이었고 가끔은 고기반찬도 나왔다. 물론 그것들은 금문군이 뒤에서 은밀히 배려를 했기 때문이었지만 진반천의 식사는 그에 비하면 너무도 떨어지는 것이었다. 육청운은 신분을 바꾼 후 아무 맛대가리도 없는 맨밥에 양념도 되지 않은 채소무침 밖에 없는 음식을 두끼 먹고 나니 이젠 신물이 나서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에서야 그는 개방 제자들이 그것이 일종의 근성인지도 모르지만 어떤 음식도 잘 먹고 어디에나 잘 적응하는 점에 마음속으로 감복했다. 철골개 진반천은 이런 음식을 한달이나 먹었으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만약 육청운이었다면 그는 도저히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뇌옥밥을 먹으면서 그가 언제까지 견디어 낼 것인지는 자뭇 큰 의심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진반천이 나가고 하룻밤이 지난 후, 뇌옥의 간수가 또 밥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 육청운은 밥그릇을 발길로 차 버리며 고함을 질렀다. 가지고 냉큼 꺼져라! 흑의간수는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고 소리쳤다. 그럼 무엇이 먹고 싶다는 거냐? 통닭?, 칠면조구이, 사슴고기, 난자, 좋은 술, 그리고 예쁜 계집도 한명 보내라. 흑의간수는 처음에는 약간 어리둥절해 하더니 곧이어 회심의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 그것 말고 또 없느냐? 또 있으면 내가 나중에 다시 분부하겠다. 알았다. 기다리고 있어라. 흑의간수는 순순히 밥그릇을 들고 돌아갔다. 반시진쯤 지나자 다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육청운은 전혀 발자국 소리를 못들은 척 하고 벽에 기댄채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윽고 뇌옥문이 열리며 예의 흑의간수가 맨 먼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등잔이 들려 있었다. 뒤에는 두 명의 흑의장한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나무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한 쟁반에는 젖가락, 술잔, 그리고 술병이 있었고, 다른 한 쟁반에는 먹음직스러운 네가지 요리가 올려져 있었다. 이 네가지 요리는 육청운이 아까 지적한 것들이었다. 두 장한 뒤에는 두 명의 청의비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절제미녀를 부축하고 들어왔다. 자색옷을 입고 있는 그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옆모습에서부터 타고난 미색(美色)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육?청운은 조금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태연히 앉아 있었다. 흑의간수는 장한들에게 술과 안주를 내려 놓으라고 분부한 후 한쪽에서 서서 헛기침만 토하고 있었다. 육청운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외쳤다. 너희들은 왜 아직도 여기에 서 있느냐? 이 말은 몹시 거칠었으나 흑의간수는 엄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공손히 대답하고 두 흑의장한과 함께 즉시 물러났다. 육청운이 두 청의비녀에게 시선을 던지자 비녀들도 인사를 한 후 조용히 물러갔다. 마침내 자의여인만 남게 되자 육청운은 비로소 술병을 들어 연거푸 몇모금 마신 후 자의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 자의여인은 수줍은 얼굴로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제 56 장 總護法의 正體 두 시진이 지난 후 자의여인은 다시 팔호뇌옥에서 나왔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자락도 구겨져 있었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그녀의 앞으로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금포를 입은 체구가 건장한 복면인이었다. 금포복면인쟁]?보자 그녀는 안색이 대변해 급히 무릎을 꿇었다. 초.... 총호법님! 금포복면인은 건곤교 내에서 건곤교주를 제외하고는 가장 지위가 높은 총호법이었다. 그는 실질적인 건곤교의 제이인자(第二人者)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총호법의 복면 밖으로 내보이는 안광은 유달리 강렬했다. 어떻게 되었느냐?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의여인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사와요. 아마 술을 너무 마셨기 때문인 것 같사와요. 나는 그런 것을 물은 게 아니라 그가 술을 마실 때 무슨 불만을 말하지 않더냐? 자의여인은 움찔하여 가느다란 어깨를 약간 떨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래 뭐라고 말하더냐? 그는 저더러 나리께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전하라 했사옵니다. 나리께서 동의하신다면 그는 본교가 당초에 제의한 요구를 생각해 보겠다고 했사와요. 총호법의 눈빛이 무섭게 번뜩였다. 세 가지 조건이란 무엇이냐? 첫째, 그들의 방주를 제거하는 일은 절대로 서두르지 말고 약간의 시일을 두고 해야만 방중(幇中)의 제자들이 의심하지 않을거라고 했사옵니다. 둘째, 개방이 ?본교와 병합한 후 대외적인 명의상으로 독립체제를 유지해야만 방 안의 제자들을 통솔할 수 있다고 했사옵니다. 셋째, 이 세 가지 조건을 그는 절대 양보하지 않을 거라며 나리께 여쭈어 잘 말해 달라고 했사옵니다. 총호법은 나직하게 침음했다. 음, 첫째와 둘째 사항은 이치에 합당하니 문제가 없지만 부교주의 직분을 주는 일은 본좌가 대답할 수 없는 일이다. 총호법께서 결정을 내리시지 못하면 교주님께 보고하여 결정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까진 없다. 그가 언제까지 대답하라고 말하지 않더냐? 그런 말은 없었사옵니다. 그럼 네가 나올 때 그에게 물어 보지 않았느냐? 저는 그가 술에 취해 잠든 것을 보고 나왔습니다. 아무튼 이 일은 본좌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비녀들에게 두 개의 침상과 이불을 뇌옥으로 가져가게 한 후 너는 오늘밤 그와 함께 지내라. 그가 깨어나면.... 흐흐흐.... 어쩌면 그의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자의여인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나지막하게 대답하고 총총히 물러갔다. 총호법은 한동안 허공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자신도 몸을 돌려 사라져갔다. 쟁]걘뼁樗?잠을 깨고 보니 뇌옥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뇌옥에는 훌륭한 침대와 이불이 깔려 있었다. 이불속에는 자의여인이 속이 훤하게 비치는 얇은 망사만을 걸친 채 잠들어 있었다. 육청운은 그들의 속셈을 짐작하고 내심 코웃음을 쳤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불속의 자의여인을 흔들어 깨운 후 물었다. 내 말을 전했느냐? 자의여인은 얼른 일어서며 대답했다. 예, 전했어요. 그래 총호법이 뭐라고 말하더냐? 자의여인은 머리를 쓸어올리고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몸을 그에게 가까이 갖다대며 은근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총호법께선 교주님에게 상의할 시간이 없어서 아직 확실한 결정은 내리지 못하셨어요. 하지만 그 세 가지 조건은 문제없으니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리께선 술을 좀 더 드시지 않으시겠어요? 좋아! 자의여인은 곧 흑의간수를 불러 술과 안주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육청운은 여간 우습지가 않았다. 똑같은 수인(囚人)이었지만 진반천은 온갖 고생을 했으나 그는 마치 귀빈처럼 술과 고기안주에 미인까지 향락할 수 있었다. 그는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세상일이란 ?어렵고도 쉬운 법이로군. ) 이튿 날, 총호법은 두 명의 호법을 수행하고 직접 육청운을 팔호뇌옥에서 석방시켜 주었다. 두 호법은 모두 육청운이 한 번씩 만난 적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한 명은 육청운이 낙양에서 북방응왕 유령무영마 음구유를 살해할 때 간신히 도망쳤던 주자호법(宙字護法)이었다. 그의 이름은 철조비응(鐵爪飛鷹) 연운천(燕雲天)이라 했다. 다른 한 명은 그에게 팔?잘려졌던 현자호법인 칠령검 방건이었다. 하지만 진반천은 그들을 만났을 리는 없었기 때문에 육청운은 전혀 모르는 척 했다. 총호법은 곧 육청운에게 한 알의 흑색 알약을 주었다. 육청운은 그것을 받아서 손가락으로 살짝 비벼 알약을 없애 버린 후 입을 벌려 약을 먹는 시늉을 했다. 육청운이 만일 지금 기습을 가하면 이들을 일거에 황천으로 보낼 수가 있었다. 허나 그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으므로 그는 꾹 눌러 참았다. 총호법은 조금도 그에 대해 방비를 하지 않고 육청운을 빈궁의 대청 안으로 안내했다. 대청안에는 이미 주연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육청운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았다. 모두들 자리에 앉자 주악(奏樂)이 울려퍼?지고 어여쁜 소녀들이 들어와 날아갈 듯한 춤을 추는 가운데 연회가 시작되었다. 술이 몇 순배 돈 후 육청운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떼었다. 내 세 가지 조건은..... 총호법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자네가 제의한 세 가지 조건을 본좌는 자세히 고려해 본 결과 조금도 지나친 요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교주님을 대신해 모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네. 만일 자네에게 또 다른 조건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한꺼번에 밝혀도 무방하네. 이제 우리는 서로 남남이 아니니 조금도 망설일 것이 없이 허심탄회하게 말하게. 육청운은 즉시 물었다. 교주님께선 지금 곡안에 안계십니까? 그렇다네. 어제 일이 있어 잠깐 나가셨네. 육청운은 그의 말을 별로 믿지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부교주 직분 문제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총호법께서 보시기에 귀교주께서 난처하게 생각하실 것 같지 않습니까? 총호법은 나직하게 웃었다. 자네는 엄연히 개방 방주의 후계자가 아닌가? 그러니 본교와 합병한 후 본교의 부교주가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네. 폐교주는 사리에 밝은 분이시니 이 방면의 이해관계를? 절대 간과하지 않으실 걸세.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선 조금도 염려하지 말게. 그럼 나는 언제 곡을 나갈 수 있습니까? 그야 자네 자신에게 달린 문제일세. 곡을 나간 이후의 여러 가지 문제를 자네는 벌써 작정하고 있나? 어느 방면의 문제를 말하는 겁니까? 예를 들어 이 일개월 동안 자네보고 누가 어디 갔었느냐 묻는다면 자네는 어떻게 대답할 생각인가? 그건...... 육청운이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자 총호법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귀방의 네 장로는 후계자의 안전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데 그들이 자네를 만난다면 그런 질문을 안할 것 같은가? 그렇군요. 그럼 나는 총호법의 의사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들이 만일 그 점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좋겠습니까? 귀방의 네 장로는 모두 보통인물이 아니고 특히 수석장로인 걸신 악구천은 비상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이므로 그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게 하려면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네. 어떤 방법입니까? 조금도 빈틈없는 애기를 지어 내는 것이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지어 낸단 말입니까? 총호법은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자신있는 음쇽]봉막?대답했다. 자네는 그날 풍룡도의 건널목에서 갑자기 두 복면 장한에게 기습을 받아 중상을 입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중에 다행히 군자장(君子莊)의 장주(莊主)가 그곳을 지나다가 자네를 발견하고 구출해 주었다고 말하면 어떻겠나? 육청운은 흠칫했다. 군자장이라면 항주(杭州)의 군자장 말입니까? 그렇네. 항주의 군자장은 무창의 소요장과 함께 일곡이장삼보중의 이장(二莊)에 속하는 곳이었다. 일곡과 삼보가 사파(邪派)에 속하는 반면 이장은 당당한 정도(正道)를 걷는 세력들이었다. 특히 소요장의 소요거사 담백우가 지략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라면 군자장의 장주는 무공과 담력, 지략이 모두 탁월한 일대의 고수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일검이괴삼사사절의 천하무림 십대고수에서 사절(四絶)중 조절(爪絶)로 더욱 유명한 절세의 고수였던 것이다. 육청운은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건 안됩니다. 왜 안된다는 건가? 육청운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네 분 장로께서 만일 내가 명예스럽지 못한 일을 당한 후 다행히 죽지 않고 군자장의 장주(莊主)에게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예의상 사람을 항주로 보내 사의를 표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들통이 나면 어떻게 합니까? 총호법의 눈가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네. 절대 들통나지 않을 것이네. 본좌가 보장하겠네. 총호법께선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장담하십니까? 총호법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야 매우 간단하네. 자네는 방금 건강이 회복되었으니 길을 걸으려면 돌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마침 자네와 동행하는 사람이 바로 군자장의 장주일세. 육청운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어느 분이 군자장주로 변장하실 겁니까? 총호법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바로 본좌일세. 육청운은 눈을 번쩍 빛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총호법의 함자도 여쭙지 못했군요. 실례지만 총호법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본좌의 성은 우(宇)가이고 이름은 일환(一環)이며 별명은 오조군자(五爪君子)일세. 총호법께선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누가 농담을 한단 말인가? 오조군자 우일환은 항주 군자장의 장주의 이름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묻는 것은 바로 총호법쟁]?본명입니..... 으하하하....... 총호법은 한바탕 광소를 터뜨리고 나서 천천히 얼굴에 쓴 복면을 벗었다. 본좌가 누구인지 다시 자세히 보게. 육청운은 상대방의 진짜 얼굴을 보고는 그만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나타난 얼굴은 이목이 청수하고 턱에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오십 대 초반쯤 된 중년인의 모습이었다. 수정같이 맑게 빛나는 두 눈과 날카로운 선을 그리고 솟은 코...... 그 얼굴은 다름아닌 오늘날 무림에서 혁혁한 협명(俠名)을 떨치고 있는 군자장의 장주 오조군자 우일환이었다. 육청운은 정의(正義)와 협도(俠道)를 누구보다도 주장하던 오조군자 우일환이 바로 건곤교의 총호법일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동안 멍하니 우일환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짐짓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총호법께서 우장주이신 줄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절대 지금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았을 겁니다. 지난 한 달 동안의 고생을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군요. 그가 지금 이 좌석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적합했다. 그 말속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그는 원래 건곤교를 대수뤄]潭?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초에는 죽어도 합작을 원치 않았었다. 그러나 천하무림의 십대고수 중의 한 명이며 협명이 자자한 오조군자 우일환이 오래전에 건곤교에 가입하였으니 건곤교의 위세를 능히 짐작할 만 하다. 이 마당에서 개방의 후계자 신분으로 내가 부교주에 임명되었으니 결코 나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육청운의 그러한 말을 듣고 우일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 놈이 이제야 모든 고집을 버리는구나. ) 이 연회는 처음 시작할 때는 약간 서먹서먹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것이 썩 좋았다. 그날 연회에서 육청운은 우일환과 다른 두 명의 호법의 입을 통해 몇 가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현재 건곤교에서는 비록 교주가 있으나 실질적으로 교를 암중지휘하는 것은 바로 내궁주인이라는 점이었다. 이 사실은 육청운으로서도 이미 어느 정도 짐작했던 일이었다. 그는 전에 건곤교주가 무림재패의 야심을 포기하고 싶어도 능력이 모자라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금문군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건곤교주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뱄]ジ꼭羚龜?꿈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둘째는 팔대호법 중에서 그가 아직 만나지 못했던 천자호법(天字護法)과 지자호법(地字護法)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다. 놀랍게도 천자호법은 십대고수 중 사절의 일인인 곤도살(滾刀煞) 금무외 (金無畏)였다. 금무외는 사절중의 도절(刀絶)로서 당금무림에서 제일가는 도객(刀客)중 하나로 꼽히는 절세의 고수였다. 또한 지자호법의 내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마도(魔道)의 절설적인 고수인 혈관마조(血棺魔爪) 곽태(郭泰)였다. 곽태는 조법(爪法)으로만 따진다면 우일환에 조금도 못지 않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최후의 놀라운 비밀은 바로 사방천왕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육청운에게 살해된 북방응왕을 제외한 나머지 세 천왕들도 모두 하나같이 과거 천하를 떨쳐 울리던 환우칠마(還宇七魔) 중의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동방용왕(東方龍王)은 칠마중의 백마(白魔) 위혼이고, 서방사왕(西方獅王)은 구지마(九指魔) 좌락(左洛)이었다. 그리고 남방호왕(南方虎王)은 천수인마(千手人魔) 당백(唐魄)이었으니 이미 죽은 북방응왕 유령무영마 음구유까지 합치면 칠마중의 반 이상이 이미 건곤교에 포섭듸]퓸?있는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칠마중의 나머지 세 명도 건곤교내에서 어떤 직책으로 있을지 모르니 결국 환우칠마는 거의 모두가 건곤교내에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환우칠마의 무공은 거의 전설적인 것이라 십대고수중에서도 그들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게다가 십대고수의 사절 중 두 사람이 총호법과 천자호법으로 있고 그 외에도 건곤교주와 건곤위대, 내궁의 고수들까지 있으니 건곤교의 위세와 세력은 가히 가공스러운 것이 분명했다. 육청운은 건곤교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겉으로는 우일환 등과 담소를 나누면서도 속으로는 이 엄청난 세력을 깨부술 방법을 궁리하기에 골몰했다. 연회는 거의 이경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연회가 파하자 우일환은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는 식으로 곧 두 필의 말을 준비하라고 명한 후 여장을 꾸몄다. 이튿날, 두 사람은 말을 타고 호로곡을 벗어나서 길을 떠났다. 그들의 목표는 개방총단이 있는 중조산(中條山)이었다. 두 명의 호법과 건곤위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호로곡을 나오면서 육청운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놂]뺐?다시 이곳에 돌아오는 날이 바로 건곤교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이 될 것이다. ) 제 57 장 龍虎風雲神 郭崇陽 중조산(中條山). 중조산은 산서성(山西省)과 하남성(河南省)의 경계에 있는 산이었다. 달리 수양산(首陽山), 뇌수산(雷首山)이라고도 하며,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어 죽은 곳으로 유명하다. 산신(山神)은 길신(吉神) 태봉(泰逢). 중조산에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수경주(水經注)에 따르면 원래 중조산과 화산(華山)은 한 산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하신(黃河神)이 손으로 밀고 발로 차서 두 개의 산으로 쪼개고 그 가운데 물이 통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중조산과 화산에는 그 당시 황하신의 손자국과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것을 고장(高掌)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두 산의 한쪽 면은 유달리 산세가 가파르면서도 깎아지를 듯한 벼랑이 많았다. 개방총타는 중조산에서도 가장 가파르고 험한 첨인봉(尖刃峯)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닷새 후, 육청운과 우일환은 일로 말을 재촉하여 무사히 중조산 아래 당도했다. 두 필의 말이 첨인봉의 아래에 도착하자 갑자기 개방의? 제자 한 명이 불쑥 나타났다. 멈추시오! 벼락같은 호통을 지르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개방제자는 두 사람중 육청운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래 뜨고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육청운은 지금 실종되었던 개방의 후개인 철골개 진반천의 모습으로 역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청운과 우일환이 말에서 내리자 그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갑자기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했다. 제.... 제자가 후개를 뵈옵니다. 이어 벌떡 일어나더니 나는 듯이 산으로 달려갔다. 개방 총타는 첨인봉의 아래에 위치한 넓고 평탄한 산골짜기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백 여칸의 단층 돌집이 주위의 산벽을 따라 거대한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삼 백 여평쯤 되는 넓은 빈터가 있었고, 빈터의 중앙에는 육각형의 정각(亭閣)이 지어져 있었다. 무림에서 제일 큰 집단이라 불리우는 개방의 총타는 천연적인 장애도 없고, 삼엄한 경계도 없어 건곤교의 총단인 깔때기 모양의 호로곡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이 총타가 주는 인상은 평범, 소박, 그리고 우아함과 조용함이었다. 그 제자가 들어간 후 육청운은 의젓함 모습으로 우일흥]??함께 곡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막 입구를 지났을 때, 둥둥둥둥! 돌연 광장 중앙에 있는 정각 안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북을 치고 있는 사람은 아까 그 제자였다. 육청운은 이 북소리가 무슨 신호인지 몰랐으나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북소리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후개가 돌아왔음을 뜻함이 분명했다. 북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자 사방의 돌집안에서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 수백명의 거지들이 뛰어 나왔다. 육청운은 사방을 돌아본 후 거지들 사이에서 네 명의 장로들을 찾아내었다. 장로들은 금지팡이를 들고 의결이 일곱 매듭이기 때문에 알아보기가 수월했다. 그중 가장 앞에서 달려오고 있는 사람은 네 장로중의 수석인 걸신 악구천이었고, 그 뒤에는 삼라절개(三羅絶 ) 색사굉(索嗣宏), 항룡복호개(降龍伏虎 ) 장손명(長孫名), 신풍취개(神風醉 ) 낙일남(洛一南)의 세 장로가 뒤따르고 있었다. 와! 후개가 돌아오셨다. 정말이다! 거지들이 함성을 지르는 가운데 네 장로의 뒤를 이어 또 하나의 네모진 얼굴에 키가 크고 야위었으며 얇은 베옷을 입은 중년거지가 왔다. 그의 헬]媤?荑〈?여섯 개의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육청운은 이전에 이 중년거지를 만나 보지 못했지만 상대방의 의?숫자를 보고 이 거지가 개방의 치안을 맡은 법개(法 ) 철나한(鐵羅漢) 누대연 (婁大衍)임을 알았다. 지금 지위가 적지 않게 높은 후개가 한 달 가량이나 실종되었다가 갑자기 아무 이상없이 돌아왔으니 개방으로서는 대단히 큰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방의 예법(禮法)까지 담당하고 있는 법개 누대연은 치루어야 할 예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일행은 조사당(祖師堂)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개방 제자가 화로에 땔감을 넣고 술과 안주를 가져왔을 때 밖에서 다시 길게 소리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방주님께서 납시오! 장로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체구가 크고 낡은 파의(破衣)를 걸친 인물이 여덟 명의 중년거지들의 호위를 받으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파의거지는 비록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있었으나 수염과 눈썹이 바늘같으며 눈에서는 정광(精光)이 넘치고 있어 위엄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양 손이 기이할 정도로 새하얗고 허리에는 ?아홉 개의 매듭을 묶었으며, 우수에는 취옥장(翠玉杖)을 들고 있었다. 그가 바로 오늘날 무림에서 명성이 구파일방의 장문인중 가장 쟁쟁한 개방의 용두방주(龍頭幇主)인 용호풍운신개(龍虎風雲神 ) 곽숭양(郭崇陽)이었다. 그는 개방사상( 幇史上) 제일의 고수일 뿐 아니라 지략이 탁월하고 영도력이 뛰어나, 개방을 맡은지 채 십 년도 되지 않아 개방을 당금 무림의 제일가는 방파로 만들어 놓은 일세(一世)의 영걸(英傑)이었다. 그의 좌우를 호위하듯 서 있는 여덟 명의 중년거지들은 개방에서도 무공이 가장 뛰어난 일대 제자들만을 골라 뽑은 수신팔걸(修身八傑)이었다. 만 천하 거지들의 존경과 신망(信望)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곽숭양은 안으로 들어서자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육청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빙그레 미소지었다. 네가 돌아왔구나. 육청운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방주님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무사히 돌아온 것 만으로도 다행이다. 곽숭양은 이어 육청운의 옆에 서 있는 우일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분은? 이 분은 항주 군자장의 장주이신 오조군자 우일환, 우대협이십니다. 이 븝]隙? 아니었다면 제자는 벌써 한 좀의 고혼이 되었을 겁니다. 육청운의 대답은 짤막했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있었다. 곽숭양은 껄껄 웃으며 우일환에게 다가왔다. 하하.... 이제보니 대명(大名)이 천하에 자자하신 우장주이셨구료. 몰라뵈어 죄송하오. 우일환도 빙그레 웃으며 포권을 했다. 별말씀을. 천하제일 거파(巨派)인 개방의 곽방주께서 이토록 환대해 주시니 우모는 몸둘바를 모르겠소이다. 곽숭양은 호탕하게 웃으며 반갑게 그의 팔을 덥썩 잡았다. 우장주께서 본인의 불민한 제자놈을 구해주셨다니 정말 고맙소. 우일환은 담담하게 웃으며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표정이 약간 변했다. 자신의 팔을 잡은 곽숭양의 손에서 무서운 힘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팔을 빼려 했다. 허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파팍! 어느새 그의 옆에 바싹 서 있던 육청운이 벼락같이 손을 내뻗어 그의 십삼개 대혈(大穴)을 일제히 짚어 버렸던 것이다. 그 속도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더구나 일수에 십삼개의 대혈을 모조리 짚는다는 것을 우일환으로서도 듣도 보도? 못한 가공스러운 일이었다. 우일환은 안색이 대변해 육청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 네놈은 누구냐? 육청운은 담담하게 웃었다. 오 일동안이나 동행하고도 벌써 잊었소? 나는 철골개 진반천이오. 우일환은 혈도가 짚여 옴짝달싹 할 수 없었으나 입은 열 수가 있기에 노호성을 질렀다. 이놈! 거짓말 하지 마라. 진반천의 무공이 이렇게 뛰어날 리가 없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허.... 내가 이름을 말해도 믿지 않으니 정말 답답하구려. 나를 자세히 보시오. 나는 분명히 진반천이오. 당신이 직접 뇌옥에서 나를 석방해 주고 성대한 연회까지 베풀어 주지 않았소? 이 말을 듣자 우일환은 얼떨떨해졌다. 상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팔호뇌옥에서 자신이 석방해준 진반천임이 틀림없었다. 진반천은 이미 한 달이 넘게 갇혀 있었으므로 도중에 절대로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질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진반천은 그동안 자신의 진정한 실력을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던 말인가? 진반천의 무공이 이정도라면 개방방주인 곽숭양의 무공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우일환이 어리둥절하고 의혹에 쌓여 입을 다물자 ?육청운은 곽숭양을 돌아보았다. 방주님, 이 자가 제자의 말을 믿지 않는군요. 방주님께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더욱 이상한 것은 곽숭양의 태도였다. 그는 이미 혈도가 제압된 우일환의 손목을 놓으며 이번에는 육청樗?손을 덥썩 잡았다. 허나 그것은 조금전과는 달리 조금도 공력이 들어 있지 않은 동작이었다. 이어 그는 격동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육노제(陸老弟)! 정말 오랜만이군. 노제가 진반천 대신 그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걱정했었다네. 곽숭양은 평소에 냉정하고 침착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헌데 육청운을 보자 그는 격동을 참지 못하고 두 눈에는 뿌연 물막까지 피어 올라 있었다. 육청운 또한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반갑게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곽노형(郭老兄)의 모습은 여전하시군요. 하하.... 곽노형은 소제의 실력을 잊으셨습니까? 육청운이 듬직하게 웃자 곽숭양도 서서히 격동을 가라앉히고 따라 웃었다. 하하.... 그렇지. 어찌 건곤교 따위가 천하무림의 제일고수인 옥면청삼 절정신검을 가둘 수 있단 말인가? 이제보니 개방방주인 용호풍운신개 곽숭양과 육청운은 오래?전에 결의형제 (結義兄弟)를 맺은 사이였던 것이다. 곽숭양과 육청운은 둘도 없는 친우(親友)일 뿐 아니라 천하에서 그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육청운이 화산장문인이나 유령곡에서 구출한 무림고수들을 마음놓고 개방총단으로 보낸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허나 그들에게 이런 교분이 있다는 것은 그들 두 사람외에는 아무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이들의 대화를 듣자 비단 우일환 뿐 아니라 걸신 악구천을 비롯한 개방의 모든 고수들은 일제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진반천으로 분장한 이 인물이 강호의 전설적인 고수인 옥면청삼 절정신검임을 알자 모두 경외(敬畏)와 흠모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사람은 이름이 나고 볼 일이었다. 육청운은 문득 생각이 난 듯 곽숭양을 보며 물었다. 참, 진반천은 산공독을 해독했습니까? 곽숭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건곤교에서 그에게 사용한 것은 산공독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군자산 (君子散)이란 것인데 다행히 우형(愚兄)의 친구인 약왕(藥王) 노중량(盧重亮)에게 군자산의 해독약이 있다길래 그에게 보냈네. 며칠내로 다시 쟁]隔汰막?돌아올걸세. 약왕 노중량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제일의 신의(神醫)였다. 곽숭양은 육청운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자, 우선 내당(內堂)으로 들어가세.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애기도 많이 있으니. 이어 그는 법개 누대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일환을 하옥(下獄)시키고 잘 감시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누대연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곽숭양은 육청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내당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육청운은 곽숭양에게 이제까지의 경과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자신이 파악한 건곤교의 세력을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그의 예측대로 곽숭양은 건곤교의 방대한 세력에 크게 놀라는 모습이었으나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한 번 싸워볼 만 하다고 투지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육청운과 곽숭양은 건곤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략과 인원이 필요하다는데 동감하고 소림을 포함한 구파(九派)에 무림첩(武林帖)을 발송하기로 했다. 다행히 유령곡에서 구원을 받은 무림고수 중에는 구파의 중요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그들의 도움을 얻는다면 어렵지 않게 구파의 힘을 한 군데로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그들은 무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건곤교 내에 내분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계흭도 상세하게 수립을 했다. 그들은 며칠밤에 걸쳐 계흭을 분석하고 미비점을 보완해서 허술한 점이 없도록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에 오 일의 시간이 물같이 흘러갔다. × × × 육일 째 되는 날, 육청운은 이른 아침에 아무도 모르게 다시 개방 총단을 벗어났다. 그르 배웅한 사람은 오직 곽숭양 뿐이었다. 곽숭양은 그의 모습이 아득히 사라질 때까지 근심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육청운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그 뿐이었다. 그리고 육청운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도 그 뿐이었다. 곽숭양은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육청운의 하는 일이 무사히 끝마칠 수 있도록 또 그가 무사하길 빌고 또 빌고 있었다. 제 58 장 개방을 섬멸하라! 총호법께서 돌아 오셨다! 길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호로곡의 입구가 활짝 열렸다. 동시에 몇 명의 인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댐]? 그들 중 가장 선두에는 백포를 걸치고 허리춤에는 고색창연한 검을 매고 있는 칠순 가량 되어 보이는 깡마른 노인이었다. 노인의 뒤에는 금의를 입고 가슴에는 금도(金刀)를 찬 독특한 복장의 건곤위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곡구(谷口)로 들어서고 있는 사람은 건곤교의 총호법인 오조군자 우일환이었다. 우일환은 백포노인을 보자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허허..... 위지형(慰遲兄)께서 직접 본좌를 마중 나오시다니 정말 뜻밖이구료. 백포노인은 우일환의 전신을 쭈욱 훑어보고는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총호법이 벌써 십 일이 넘도록 소식이 없어 교주께서 몹시 기다리고 계시오. 총호법은 왜 肩린?늦게 오셨소? 일이 예상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미처 소식을 전할 경향이 없었소. 교주님께선 지존궁에 계시오? 그렇소. 따라오시오. 백포노인은 먼저 휑하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 우일환은 뜻모를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백포育括?백 이십 여명의 건곤위사들을 이끌고 있는 건곤위대의 대장(隊長)이었다. 그는 건곤교주의 제일가?는 호위대장답게 위명이 쟁쟁한 인물이었다. 바로 환우칠마중의 칠절검마(七絶劍魔) 위지황(慰遲荒)이 그의 정체인 것이다. 칠절검마 위지황은 환우칠마 중에서도 서열 일이위를 다투던 절세의 검객 (劍客)으로, 백년 내무림에서 검으로만 따진다면 검성 연화노인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고수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위지황은 우일환을 데리고 건곤교주가 기거하는 지존궁으로 갔다. 그의 신분이 건곤위대장인 만큼 지존궁을 지키는 건곤위사들은 모두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할 뿐 누구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존궁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대청 입구에서 일단 걸음을 멈추었다. 총호법이 왔습니다. 위지황이 대청을 향해 나직하게 말하자 대청안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위지황과 우일환은 나란히 대청안으로 들어갔다. 대청안에는 이미 몇 명의 인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의 태사의에는 건곤교주 서문승이 앉아 있었고, 그의 좌측에는 세 명의 여인들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금문군을 비롯한 두 명의 공주들이었다. 이공주(二公主)의 이름은 막희옥(莫姬玉)이었고, 삼공주?(三公主)는 백교운 (白巧雲)이었다. 서문승의 우측에는 세 명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북방응왕을 제외한 세 명의 천왕들이었다. 백의를 입은 노인이 동방응왕인 백마 위혼이었고, 흑의를 걸친 체구가 큰 노인은 서방사왕인 구지마 좌락, 그리고 갈의를 입고 키가 큰 노인은 남방호왕인 천수인마 당백이었다. 그들외에 다시 두 명의 인물들이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천자호법과 지자호법이었다.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빛이 싸늘한 중년인이 천자호법인 곤도살 금무외였고, 비쩍 마르고 손톱이 유난히 긴 말상의 노인이 지자호법인 혈관마조 곽태였다. 그야말로 건곤교를 이끌고 있는 수뇌인물들은 모두 모인 셈이었다. 대청안으로 들어간 위지황은 건곤교주 서문승에게 목례를 하고 그의 옆에 마련된 의자에 가서 앉았다. 혼자 남게 된 우일환은 서문승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서문승은 번쩍이는 눈으로 그를 내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앞자리에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우일환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앞자리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천?자호법 금무의와 지자호법 곽태도 그의 양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제보니 그들은 자신들보다 지위가 높은 우일환이 아직 앉지 않았기 때문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평소 이들이 얼마나 우일환을 어려워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서문승은 우일환이 앉기를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다. 진반천은 어디 있소? 그는 개방총타에 있습니다. 그를 믿을 수 있겠소? 우일환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속하가 이미 몇 차례의 시험을 해보았으나 그는 아주 훌륭하게 통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진해서 스스로의 충성심을 나타내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그는 이미 개방에서 방주인 곽숭양을 제외하고는 무공이 가장 높고 자신에게는 사부나 다름이 없는 걸신 악구천을 제거했습니다. 이 말에 서문승은 물론이고 중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오? 속하가 직접 눈으로 확인을 했습니다. 서문승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물었다. 그 일로 의심을 사진 않겠소? 안심하십시오. 개방에서는 누구도 악구천이 살해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반천이 교묘하게? 핑계를 대어 악구천의 행방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악구천의 시신이 몹시 손상됐기 때문에 대신 증거품으로 이것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내민 것은 하나의 술호로병이었다. 그 호로병은 평범해서 시중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허나 안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 호로병의 바닥에 깨알만한 글시로 (악(岳).)이라고 씌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글씨는 어찌나 작았는지 공력이 초절한 고수가 아니면 도저히 새길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호로병을 등불에 비치자 호로병의 표면에 희미한 그림이 떠올랐다. 그것은 한 마리 학(鶴)이 홀로이 구천(九天)을 배회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호로병을 보자 동방응왕 백마 위혼이 눈을 번쩍 빛내며 말했다. 저 호로병은 악늙은이가 항상 손에서 떼놓지 않는 구천호로(九天壺蘆)가 확실합니다. 백마 위혼은 과거에 걸신 악구천과 삼일 밤낮을 싸운 적이 있었다. 그러니만큼 악구천의 유명한 호로병을 못 알아 볼리가 없었다. 중인들도 모두 이 호로병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으므로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호로병은 특이한 취신목(醉神畝]?으로 만든 것으로, 나무 자체에서 술냄새가 나기 때문에 이 안에 술을 담아두면 아무리 오래 있어도 맛이 변하지 않아 악구천이 생명처럼 아끼는 것이었다. 악구천은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도 결코 이 호로병을 빌려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잠을 자건 식사를 하건 손에서 떼어 놓는 법이 없었다. 이 호로병이 우일환의 손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곳에 있는 중인들은 모두 뛰어난 인물들인만큼 그 연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흐흐.... 악늙은이의 말로(末路)도 비참하군. 믿었던 제자의 손에 쓰러지다니.... 악구천과 원한이 깊었던 백마 위혼이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서문승 또한 내심으로는 기쁘기 그지 없었다. 걸신 악구천은 그가 무림을 제패하는데 가장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건곤령을 내려 제거하려던 삼인(三人)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동안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척살(擲殺)에 실패했던 그를 이렇게도 수월하게 해치우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허나 그는 속마음을 나타내지 않고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총호법은 수고했소. 진반천은 믿을 수 있다 치고 개방방주에 대한 일은 언제부터 시쟁]徘?거요? 사실은 그 일 때문에 이렇게 지체되었습니다. 우일환은 입술에 침을 살짝 축인 후 말을 이었다. 어쩌면 개방방주를 제거하고 개방을 본교에 포섭하는 일이 생각보다 더욱 쉽게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서문승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급히 말했다. 좀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개방방주인 곽숭양에게는 한 가지 남이 모르는 고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 년에 한 번씩 십이정경(十二正經)중의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과 족태음경(足太陰經)이 막히고 기경팔맥(奇經八脈)중의 양유맥(兩維脈)의 흐름이 탁해져 그때는 반드시 비밀연공관에 들어가 십일동안 연공(練功)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서문승은 아직 곽숭양에게 그런 병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크게 의아했다. 곽숭양에게 그런 병이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진반천의 말로는 곽숭양은 개방의 비전(秘傳)인 한 가지 절세신공(絶世神功)을 연마하다 실수하여 주화입마(走火入魔)는 간신히 면했지만 그런 고질병에 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흠.... 그런 줄은 몰랐군. 그게 무슨 신공인줄 아시오? 구전현양공(九轉玄陽功)이라고 하댐]超봇? 구전현양공? 서문승은 금시초문인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개방에 대해 정통한 백마 위혼이 불쑥 입을 열었다. 구전현양공은 백 년 전의 개방제일인( 幇第一人)이었던 절대이개(絶代異 )의 절학입니다. 절대이개! 중인들 틈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절대이개는 이미 백 년전에 고인(故人)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개방을 오늘의 거대문파로 이끌게 한 밑거름이 된 인물로서, 당시 무림에서 천하제일고수로 공인되었던 불가일세(不可一世)의 고수였다. 당시 그의 무명(武名)은 그야말로 전설적인 것으로, 당대에 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백마 위혼은 구전현양공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설명했다. 구전현양공은 절대이개의 최대최고의 무공인데 절대이개가 죽은 후 개방에서 신비스럽게 실전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허나 사실은 실전된 것이 아니고 절대이개 이후에 그 무공을 익힌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왜 그렇소? 백마 위혼과 가장 절친한 구지마 좌락이 물었다. 그건 절대이개 이후에 그 무공을 익히려던 개방의 고수들이 모두 주화입마 되었기 때문이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절대이개 못지않은 기재(奇才)를 지녔다는 인물도 있었지만 한 사람도 요행을 면치 못하고 주화입마되어 비명횡사하고 말았소. 아! 그런 일이 있었구료. 만일 절대이개의 후인(後人)들 중에서 구전현양공을 익힌 자가 있었다면 아마 당금 무림은 완전히 개방천하( 幇天下)가 되어 있었을 거요. 그제서야 중인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곽숭양이 구전현양공을 익히다 고질병을 얻게 되었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우일환은 백마 위혼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다. 곽숭양은 타고난 무골(武骨)인지라 비록 주화입마는 면했으나 치명적인 고질병을 얻었습니다. 그 고질병이 도질 때는 반드시 십일연공(十一練功)을 해야 하는데 그때 만일 조금이라도 외부의 방해를 받게 되면 즉시 즉사를 면치 못한다고 합니다. 서문승은 무언가 느낀 듯 안광을 번뜩였다. 곽숭양의 고질병이 도지는 시기는 언제요? 바로 이달 보름입니다. 우일환의 말이 떨어지자 중인들의 눈가에 일제히 쾌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총호법의 말은 그때를 노려 개방을 급습하자는 것이로군? ? 그렇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곽숭양이 비밀연공관에 들어간 후 진반천이 그를 암습해 살해할 것입니다. 그 직후에 본교에서 일제히 개방을 공격한다면 어렵지않게 그들을 몰살할 수 있습니다. 백마 위혼이 더 볼 것 없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이 본교에게 천하무림을 제패하라고 내려준 절호의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오? 이번 기회에 그 얄미운 거지떼들을 모조리 쓸어 보십시다. 서문승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우일환은 나직히 헛기침을 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위형의 말대로 이 기회는 놓치기 아까운 기회입니다. 저는 이미 진반천에게 개방의 내부에 불만이 있는 세력을 포섭해 놓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저는 늦어도 오 일내로 자세한 지시를 내리겠다고 했으니 교주님께서 해량하여 주십시오. 서문승은 나직하게 뇌까렸다. 보름이라..... 오늘이 초 사흘이니 십 이일이 남았군. 그렇습니다. 십 이일이라면 결코 많이 남은 시간이 아닙니다. 서문승은 우일환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있다가 돌연 고개를 돌려 자신의 좌측에 앉아 있는 금문군을 바라보았다. 깍]봅틴?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곳에는 기라성같은 고수들이 즐비한데도 서문승이 굳이 그녀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 그녀에 대한 서문승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운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금문군은 물같이 차분한 시선으로 우일환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녀의 눈은 마치 우일환에게 무언가 찾아내려는 것처럼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허나 우일환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줄기 이상야릇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의혹같기도 했고, 희미한 불안감 같기도 했다. 허나 그녀는 결국 알듯 모를 듯한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제 생각에도 총호법의 말씀대로 이번이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그녀의 말 한마디로 서문승의 마음은 결정되었다. 서문승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다. 이달 보름이 바로 개방이 멸망(滅亡)하는 날이다. 그의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빛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중인들도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아..... 교주님 만세! 건곤교는 영세불멸(永世不滅)하리라......! 그들?의 음성은 거대한 외침이 되어 대청을 쩌렁쩌렁 울렸다. 다만 한 사람, 우일환만은 허공을 올려다 보며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 × × 개방을 섬멸할 작전은 」槿構?준비되었다. 건곤교주 서문승을 필두로 건곤위대장 위지황 이하 백 스무 명의 건곤위사중 엄선된 팔십 일명, 사방천왕, 팔대호법 중의 천자호법과 지자호법, 그리고 열 명의 영주(令主)등 도합 이백 칠십 오명의 정예(精銳)들이 개방섬멸에 나서게 되었다. 세 명의 공주들은 서문승의 지시로 호로곡에 남게 되었으나 대공주 금문군만큼은 서문승에게 조르다 시피 하여 이번 일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줄곧 총호법 우일환에게 쏠려 있었다. 금문군은 우일환이 혹시 육청운의 변장이 아닌가 하여 몇 번이고 그를 불러 물어보려 했으나 만의 하나 그가 육청운이 아닐 경우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생각해서 간신이 마음을 억눌러 참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보름을 삼 일 앞둔 날 새벽, 이백 칠십 오명의 건곤교 고수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호로곡을 벗어났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개방의 총타가 있는 중조산 ?첨인봉이었다. 제 59 장 雙魔의 죽음 만월(滿月)이 떠올라 있는 중조산의 밤, 둥근 보름달은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줄 듯 환하게 떠올라 있었다. 허나 그 밝은 달빛도 채 닿지 않은 듯 어둡기 그지없는 깊숙한 골짜기가 있었다. 그곳은 중조산에서도 가장 험한 첨인봉의 아래 위치한 넓다란 분지였다. 삼경(三更), 사위는 깊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헌데 모두다 잠들어 있을 야심한 시각에 첨인봉을 향해 소리없이 움직이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의 수효는 근 삼백 여명에 가까웠다.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물어볼 것도 없이 개방총타를 습격하기 위해 출동한 건곤교의 고수들이었다. 바로 저 곳입니다. 그들 중 가장 선두에서 전진하고 있는 금포를 입은 중년인이 하나의 골짜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곳이 바로 천하 거지들의 소굴인 개방총타가 있는 복룡곡(伏龍谷)입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킬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 입을 열었던 금포중년인이 무서운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쏘아보았다. 어느 놈이 함부로 아가리질을 하느냐? 그러자 킬킬거렸던 사람들은 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이것으로 보아 금포중년인의 위세가 몹시도 당당한 것 같았다. 일행의 선두에는 두 개의 호화로운 가마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전면에 비상하는 천룡(天龍)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었고, 다른 한 가마에는 봉황이 금시라도 날아오를 듯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금포중년인은 그중 천룡이 양각된 가마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교주님, 이제 잠시후면 진반천이 곽숭양을 살해하고 천리신화(千里信火)가 쏘아올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속하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은 없으십니까? 천룡가마에 타고 있는 인물은 다름아닌 건곤교주 서문승이었다. 그렇다면 비봉가마에는 당연히 대공주인 금문군이 타고 있을 것이다. 천룡가마 안에서 서문승의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총호법의 노고가 많았소. 금포중년인, 우일환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본교를 향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한 것 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번의 일이 성공한다면 본좌는 총호법의 공을 잊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일을 진행하기 전에 총호법은 앞으로의 계흭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오?. 우일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룡가마의 좌우에 서 있는 세 명의 천왕들을 비롯한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본교의 인마(人馬)는 모두 삼로(三路)로 나뉩니다. 중아에는 교주님과 대공주님, 그리고 천절검마 위지형과 건곤위대가 맡을 것이고 그 좌측으로는 천수인마 당형이 천자와 지자호법을 대동하고 갈 것입니다. 그리고 백마 위형과 구지마 좌형은 본좌를 따라가면 될 것이오. 백마 위혼과 구지마 좌락을 향하는 그의 말투와 행동은 완전히 아랫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위혼과 좌락은 내심 아니꼽고 배알이 틀렸으나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우일환이 주동이르모 꾹 눌러 참았다. 허나 그들은 언제고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을 단단히 혼내주리라고 벼르고 있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일환은 여전히 당당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중앙을 제외한 양로(兩路)는 각기 백 명씩의 고수를 인솔할 것이며 삼로의 인마가 최종적으로 만나는 장소는 바로 개방의 조사당 앞이오. 백마 위혼이 음충맞게 웃었다. 흐흐..... 그때 쯤이면 개방이란 글자는 무림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겠군. 우일환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냉랭한 음쇽]봉막?말했다. 그거야 여러분들이 얼마나 열심히 분투하느냐에 달렸소. 괜히 말만 앞세우고 뒤에서 꽁무니만 뺀다면 나중에 논공행상(論功行賞)할 때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위혼의 얼굴이 홱 변했다. 총호법은 지금 본좌를 빗대 하는 말이오? 그럴 리가 있겠소? 위형은 당대의 고인이신데 내가 어찌 감히 위형을 흉? 수 있겠소? 위형은 너무 자괴심(自愧心)이 강하시구려. 그의 말은 겉으로는 공손한 것 같았지만 속에는 은근히 위혼을 비웃는 뜻이 담겨 있었다. 위혼같은 노련한 마두(魔頭)가 어찌 그런 것을 눈치 못채겠는가? 즉시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안광에서 살기가 뿜어나왔다. 총호법은 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소? 우일환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위형께서 너무 지나치게 신경과민인 것 같소. 나는 좋은 뜻에서 한 말인데 왜 그렇게 역정을 내시오? 위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말 너무 겁없이 날뛰는군. 그때 서문승의 위엄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이제 그만 두시오. 대적(大敵)을 앞둔 마당에 어찌 자중지란 (自中之亂)을 일으키려 하시오? 듸]?사람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허나 그들은 서로 무섭게 노려본 채 험악한 눈길을 주고 받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앗! 돌연 개방총타가 있는 복룡곡 안에서 하나의 눈부신 불꽃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왔다. 그 불꽃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어두웠던 주위가 금세 환해지는 것 같았다. 천리신화다! 중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모두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서문승은 즉시 우렁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자! 이제 때가 되었다. 본교의 제자들은 전력을 다해 적을 무찔러라! 순간, 와아.......! 와.... 죽여라! 건곤교의 고수들은 일제히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을 내지르며 세 패로 갈리워져 쏜살같이 복룡곡을 향해 치달려 갔다. 우일환도 백마 위혼과 구지마 좌락과 함게 백 명의 고수들을 대동하고 몸을 날려 복룡곡의 우측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쯤 갔을까? 하나의 작은 산등성이를 넘자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며 넓직한 분지가 나타났다. 분지의 넓이는 거의 천 여장에 육박했는데 수 백 개의 크고 작은 돌집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헌데 분지의 여기저기에는 화광(火光)이 충천해 있곤]?사람들이 사방으로 분주히 오가고 있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마 위혼은 그 광경을 내려보며 음산한 미소를 날렸다. 흐흐.... 꼴좋군. 거지떼놈들이 불길을 피해 메뚜기데처럼 날뛰고 있는 모습이라니.... 십년 묵은 체중이 내려가는 것 같구나. 그의 옆에서 묵묵히 아래를 내려보고 있던 우일환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무얼 잘못 먹었길래 십 년 동안이나 체중을 묵히고 있었소? 위혼은 눈을 부릅뜨며 무섭게 우일환을 노려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소? 우일환은 시큰둥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까지 먹으셨소? 한 번 한 말을 못 알아듣다니.... 위혼의 눈썹이 분노로 마구 떨렸다. 정말 참자 하니까 정녕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그렇소. 본좌는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를 도무지 모르겠소. 위형은 알고 있소? 우일환의 말은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보다 못한 구지마 좌락이 우일환을 쏘아보며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총호법의 말씀이 아까부터 너무 지나친 감이 있소. 우리의 신분은 결코 총호법의 아래가 아니란 걸 명심하시오. 허나 우일환은 조금도 기가 죽?기는 커녕 오히려 좌락을 향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좌형은 위형과 같은 환우칠마중의 인물이라고 편을 드나본데 환우칠마라는 이름은 삼십 년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남에게 위세를 부릴 수 없소. 좌락의 눈꼬리가 꿈틀거리며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정말 말 다했소? 그렇게 나를 쏘아보면 어떻게 할 거요? 설마 두 사람이 합세하여 내게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오? 그의 말이 끝나자 백마 위혼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좌형, 나를 막지 마시오. 내가 오늘 저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지 못한다면 환우칠마라는 이름을 떼어 버리겠소. 좌락도 단단히 화가 치밀었는지 이번에는 말리지 않고 옆으로 비켜섰다. 우일환은 그것을 보고 냉랭하게 웃었다. 과연 당신들은 한 구멍속의 두더쥐들이구료. 그깟 환우칠마라는 이름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떼어버리느니 마느니 그러시오? 우일환이 그들을 두더지로 비유하자 위혼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노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이 천둥벌거숭이같은 놈아! 노부가 네 놈에게 환우칠마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주겠다! 동시에 그는 우수를 내밀어 우일환의 목덜미?를 잡아채 왔다. 그의 손길은 쾌속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으나 우일환은 피식 웃으며 슬쩍 옆으로 몸을 이동해 가볍게 피했다.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그렇게 큰 소리를 쳤소? 이거 정말 실망인데..... 위혼은 상대의 몸놀림이 예상보다 빠른 것을 알고 움찔 놀랐으나 그의 비꼬는 소리를 듣자 더욱 분노하여 이를 부드득 갈며 다시 삼장(三掌)을 내갈겼다. 쑤아아앙! 그의 삼장은 독특한 위력이 있어 삼장이 모두 속도와 위력이 틀렸다. 그것은 마치 전혀 다른 내공(內功)을 익힌 세 사람이 동시에 공격한 듯한 모습이었다. 회마삼환장(廻魔三環掌)이로군. 우일환은 대수롭지 않은 듯 중얼거리며 슬쩍 오른손을 쳐들어 허공에 다섯 개의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냈다. 순간, 꽈꽝! 주위가 떠나갈 듯한 폭음이 터지며 무서운 기세로 공격해 왔던 위혼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우욱! 위혼은 여덟 걸음이나 후퇴했다가 몸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의 가뜨이나 새하얗던 안색은 아예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이.... 이것이 무슨 무공이냐? 그는 자신이 상대의 단 일장에 맥없이 격퇴당한 것이 믿어지지 않댐]?듯 우일환을 노려보고 있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우일환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그 자리에 꼼짝도 않은 채 서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철비파수(鐵琵琶手) 가운데 오현비파(五絃琵琶)라는 초식이오. 당신의 회마삼환장에는 비할 수 없지만 그런데로 쓸만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위혼의 얼굴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그는 다시 쌍장을 휘두르며 번개같이 우일환에게 덤벼들었다. 이 찢어죽일 놈! 이번에 위혼은 전력을 다했는지 주위가 온통 그의 쌍장에서 뿜어나오는 강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꽈르릉! 반경 십 장 이내의 땅이 금시라도 무너질 듯 마구 뒤흔들렸다. 실로 무시무시하기 이를데 없는 장력이었다. 이것이 바로 위혼이 가장 자랑하는 천마군림수(天魔君臨手)였다. 우일환의 얼굴도 약간 굳어졌다. 그는 아무 말없이 상대의 공세가 자신의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묵묵히 서 있다가 양쪽 소매를 크게 휘둘렀다. 순간, 고오오오..... 허공에 하나의 커다란 원이 그려지며 위혼이 쏟아낸 천마군림수의 무지막지한 강기가 모조리 그 원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쪽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이들의 격전을 구경하고 있던 좌락은 이 광경을 보자 안색이 대변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위형.... 빨리 물러나시오. 그건 바로 태인장(太印掌)이오! 그 음성을 듣자 우혼은 사색이 된 채 몸을 빼려 했다. 허나 어느새 그의 신형은 우일환이 그려낸 거대한 원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안돼.....! 절규하는 듯한 비명과 함께, 꽈꽈꽈르르르릉!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반경 십 장 이내는 땅거죽이 뒤집히고 돌멩이들이 허공으로 휘날려 한동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먼지가 가라앉고 장내의 광경이 드러났다. 순간, 이.... 이럴수가......! 좌락은 몸을 부르르 떤 채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장내에는 우일환만이 우뚝 서 있을 뿐 위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있었다. 허나 그것은 위혼과 수십 년을 동고동락해온 좌락으로서도 도저히 위혼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하나의 짓이겨진 살덩어리였다. 놀랍게도 수십 년 동안 강호를 주름잡아오던 환우칠마 중의 백마 위혼이 한줌의 핏덩어리로 변해 버린 것이다. 좌락은 한동안 망연자실하니 ?서 있었다. 휘잉...... 차가운 밤바람이 한차례 몰아치자 그제서야 좌락은 몸을 으시시 떨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우일환을 노려보았다. 우..... 우일환! 네 놈이 감히 같은 편 사람을 죽이다니..... 우일환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었소.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을거요. 좌락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한 발 한발 앞으로 다가왔다. 네가 죽었을 거라고? 거짓말 하지 마라. 이놈! 위형은 분명 손을 거두고 물러나려 했다. 헌데 네 놈은 손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무공을 펼쳐 위형을 살해한 것이다! 이 살인자 놈! 이래도 할 말이 있느냐? 우일환은 묵묵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림인이 무공이 약해 죽었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법이오. 좌형은 나를 탓하지 말고 그의 무공이 너무나 모자람을 탓해야 할거요. 좌락은 분기탱천하여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이 놈!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그는 더이상 솟구치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두 손을 기이하게 구부리며 우일환에게 달려 들었다. ? 허나 그는 몇 가지 소홀히 한 것이 있었다. 백마 위혼의 무공은 좌락과 엇비슷한 정도였다. 헌데 위혼이 몇 초 받아보지도 못하고 패한 상대를 그가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또 한가지는 우일환이 방금 사용했던 태인장이라는 무공이었다. 태인장은 도가(道家)에서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최강의 장공(掌功)이었다. 이것은 천하의 모든 마도장공에 극성이 되는 것으로, 아직 당금 무림에서는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우일환의 무공이 제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위혼을 불과 몇 초만에 이길 정도는 되지 못했다. 더구나 그의 무공은 유가(儒家)에 속하기 때문에 태인장 같은 도가의 신공은 익힐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좌락이 조금만 더 냉정했다면 우일환의 정체에 대해서 의심을 느꼈을 것이다. 허나 그는 위혼의 죽음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터라 너무도 분노하고 흥분하여 미처 그런 점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파파파파팍! 좌락의 양 손이 기이하게 움직이며 허공을 뒤덮을 듯한 지영(指影)이 그물처럼 뿜어 나왔다. 좌락의 외호는 구지마인 만큼 왼손의 약지 손가락 하나가 없었고, 대신 나머지 아홉 손가락으로 펼치는? 지공(指功)이 일품이었다. 지금 그가 펼친 것은 혈망지(血網指)라는 것으로, 그 그물처럼 뒤덮여 내려오는 지영의 어느 한쪽에 몸이 살짝 닿기만 해도 전신이 썩어 문드러지고 마는 살인적인 수법이었다. 우일환은 지체하지 않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놔락의 혈망지를 피하며 오른 손을 쭈욱 내뻗었다. 쾌액! 갈고리처럼 모아진 그의 우수가 빛살처럼 좌락의 미간을 향해 폭사되었다. 그것은 폭뢰조(暴雷爪)라는 가공할 수법이었다. 좌락은 상대의 질풍같은 공세에 움찔 놀라며 황급히 머리를 옆으로 이동시켰다. 쾅! 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폭포조는 땅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파 놓았다. 그 구멍이 거의 일장에 달하는 것을 보고 좌락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허나 그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 쐐쐐쐐쐐! 우일환은 그림자처럼 그의 코 앞으로 육박해 오며 섬전같이 양손을 휘둘렀다. 좌락의 눈에는 온통 우일환의 손그림자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좌락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양 손의 아홉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세차게 튕겨냈다. 구환마지(九環魔指)! 아홉 가닥의 뇌전같은 섬광이 사방으로 폭사해갔다. ? 허나 그 섬광들은 허공을 온통 빽빽이 수놓고 있는 손그림자에 닿자 눈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다음 순간, 콰콰쾅! 가죽북이 연달아 치는 듯한 음향과 함게, 크아아악! 좌락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훌훌 날아갔다. 그는 입에서 폭포수같은 선혈을 내뿜으며 거의 십 여장이나 날아갔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쿵! 크으으...... 땅바닥에 나가떨어진 좌락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했다. 허나 어느새 그의 내장은 산산히 박살이 나서 그가 꿈틀거릴 때마다 입에서 검붉은 선혈과 함께 잘려진 내장부스러기가 섞여 나왔다. 좌락은 시커먼 피를 흘리면서 필사적으로 우일환을 올려보았다. 너.... 너는 진짜 우일환이 아니구나...... 진짜 우일환이라면 절대로 환우칠마중의 두 사람을 이토록 간단하게 처치할 수가 없었다. 우일환은 냉정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네..... 네 놈은 누구..... 좌락은 채 말을 맺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지?말았다. 그의 눈은 부릅떠진 채 원망스러운 듯 우일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우일환은 천천히 다가가서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 일세(一世)를 풍미(風味)하던 두 거마(巨魔)들은 이렇게 해서 파란만장한 생의 종지부를 직게 되었다. 흐음..... 우일환은 뜻모를 탄식을 토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당신은 과연 우일환이 아니었군요. 싸늘한 여인의 음성과 함께 한 명의 여인이 불쑥 그의 앞에 나타났다. 제 60 장 무저니는 乾坤敎 그녀는 자색 궁장을 곱게 차려 입은 훤칠한 키의 미녀였다. 바로 대공주인 금문군이었던 것이다. 우일환은 그녀를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웃었다. 대공주이셨군요. 교주님은 어떻게 하고 혼자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금문군은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시치미를 떼지 말아요. 당신의 정체가 아무래도 수상해서 일부러 핑계를 대고 살짝 빠져 나왔어요. 당신은 누구지요? 그녀가 다그칠수록 우일환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공주께서 한번 알아맞춰 보시지요. 금문군의 눈빛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당신은 육청운이지요? 우일환은 껄껄 웃었다. 하하.... 나같은 것이 어찌 천하무림의 제일고수인 옥면청삼 절정신검에 비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럼 아니란 말인가요? 그렇소. 금문군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녀는 숨어서 우일환이 환우칠마중의 두 사람을 간단하게 처치하는 것을 보고 그가 육청운이라고 확신하여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금 무림에서 육청운을 제외하고 누가 환우칠마중의 두 사람을 불과 몇 초만에 쓰러뜨릴 수 있단 말인가? 헌데 상대가 철저하게 부인을 하자 그녀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졌다. 육청운이 아니라면 이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이 자는 혹시 육청운과 자신과의 관계를 알아차린게 아닐까?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지요? 그녀가 초조한 음성으로 묻자 우일환은 담담하게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자 이목이 뚜렷하면서도 준수한 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얼굴은 비록 수려하고 재기(才氣)가 발랄해 보였으나 그녀가 학수고대하던 육청운과는 약간의 손색이 있었다. 그녀는 상대가 육청운이 아님을 알자 실망 반, 불안 반인 심정이 되어 다시 물었다. 귀하는 누구세요? 청년은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불초는 화일로라 하오. 금문군의 봉몌]炷?크게 떠졌다. 그렇다면 귀하가 바로 화씨세가의 망나니 가주인 풍파무쌍......? 그녀는 말하는 도중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허나 화일로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지 이내 껄껄 웃었다. 하하.... 금소저의 말씀이 맞소. 불초가 바로 무림인들이 풍파가 무쌍하다고 꺼려하는 화일로요. 금문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가지 물어보겠어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어떻게 불초가 우일환으로 분장했느냐는 거지요? 그거라면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소. 불초는 육대협의 부탁을 받았소이다. 그 말을 듣자 금문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육대협이란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소. 그제서야 그녀는 불안과 초조로 범벅되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마음은 더욱 뛰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불안과 초조 때문이 아니라 기이한 설레임 때문이었다. 그녀는 급히 물었다. 그 분도 지금 이곳에 왔나요? 화일로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분은 지금 불초의 사부님과 함께 모종의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오시지 ?못했습니다. 대신 오늘 일은 불초가 맡기로 했소. 귀하의 사부님이라면.......? 사부님의 성함은 새장자 남궁봉이라 하오. 아........! 그녀는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허나 그녀의 마음은 짙은 실망감과 함께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 건곤교에서 개방을 침공한 일은 그야말로 무림전체의 안위가 달린 중대사였다. 헌데 육청운은 대체 이 중대한 일을 버려두고 무슨 일에 매달려 있단 말인가? 설마 개방의 멸망보다 더 중대하고 시급한 일이 생겼단 말인가? 아니면, 눈앞의 이 당대제일의 망나니가 이번 위기를 거뜬히 넘기리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육청운의 의도를 몰라 다시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듯 화일로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불쑥 물었다. 금소저께선 나를 믿지 못하시겠소? 금문군은 내심 그의 비상한 머리에 감탄하며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번 일은 너무도 중차대해서 조그만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개방은 물론이고 무림 전체의 안위가 어지러워질 거예요. 하하..... 소저는 안심하시오. 나 화일로가 비록 무림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쟁]립?그래도 瑁痔解磁??아니니까. 오늘 이곳에 온 건곤교의 고수는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갈 수가 없을 거요. 그녀는 화일로가 대체 무엇을 믿고 이렇게 큰소리를 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화일로는 그녀가 믿던 말던 자신의 할 말을 계속했다. 아마 지금쯤은 건곤교주와 위지황이 이끄는 건곤위대를 제洑構煮?나머지 인마들은 모두 정리가 되었을 거요. 소저는 가보시지 않겠소? 화일로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그녀는 대경실색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하하.... 소저는 이번 계흭을 누가 세웠는지 잊지 마시오. 건곤교의 모든 행사는 내 눈을 벗어날 수 없소. 그 말을 듣자 그녀는 내심 수긍을 했다. 이번 계흭은 처음 발단부터 실행에 옮길 때까지 거의 모든 일에 우일환이 참여를 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인마를 삼로로 나누고 인원을 배치하는 것은 모두 그의 계흭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절대로 허튼소리를 할리가 없었다. 그녀는 문득 불안해져서 화일로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혹시 육대협에게서 무슨 말씀을 듣지 못했나요? 화일로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저?의 의부에 대한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그분의 지시를 받았으니 건곤교주의 목숨은 절대로 해치지 않겠소. 그제서야 금문군은 마음을 놓으며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럼 어서 가봐요.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봉룡곡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럴 수가.......? 서문승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로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팔십여명의 건곤위사들과 함께 개방총타의 중앙으로 진격했던 서문승은 거의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개방총타의 중심부까지 진격을 했다. 그동안 개방의 반격이라고는 너무도 미미하여 반격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문승은 내심으로 개방의 세력이 생각보다 너무 약소하다고 득의만면해 하고 있었다. 아니면 개방방주인 곽숭양이 살해된 여파가 너무 커서 개방의 제자들이 싸울 의욕을 잃고 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헌데 개방의 중앙에 있는 조사당 근처 공지에 오자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어디서인지 개방의 고수들이 물밀듯이 나타나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개방고수들의 무공과는 찍]殆坪?다른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자신이 철썩같이 믿고 있는 건곤위사들의 그것에 조금도 못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이곳의 지형을 이용한 특이한 진세(陣勢)를 펼치고 있어 더욱 위력이 대단했다. 그것은 바로 개방사상 최초로 나타나는 대연환타구봉절진(大連環打拘棒絶陣)이었다. 이것은 곽숭양이 오랜 세월동안 개방의 타구봉절초(打拘棒絶招)를 연구한 끝에 창안해낸 것으로 무려 이백오십명의 고수들이 펼치는 무림사상 초유(初有)의 대진(大陣)이었다. 그 위력은 소림의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이나 무당의 대오행검진(大五行劍陣)을 오히려 능가하는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진법이었다. 차차창! 크아악! 케에엑.......! 서문승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가 자랑하는 건곤위사들은 하나 둘씩 처절함 비명을 지른채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건곤위대의 대장인 철절검마 위지황은 거듭된 부하들의 죽음에 분노하여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으나 그 또한 홀연히 나타난 세 명의 고수들에게 협공을 당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위지황을 에워싸고 있는 인물들은 색명무상 정구살?과 백의노인, 그리고 청삼을 걸친 중년인이었다. 백의노인은 십대고수의 사절 중 수절(手絶)로 불리우는 백의신수(白衣神手) 헌원송(軒轅松)이었다. 그는 도박귀신 헌원당과 그의 여동생인 헌원소선의 부친으로, 당대무림에서 장법(掌法)의 일인자였다. 그리고 눈부신 검광을 발하며 위지황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고 있는 청의중년인은 역시 사절중의 검절(劍絶)로 알려진 단홍검 위향풍(葦香風)이었다. 색명무상 정구살은 삼사중의 한명이니 결국 당대무림의 십대고수중 세 사람이 합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지황이 제아무리 한우칠마의 우두머리로 검술이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해도 이들 세 절세고수의 합공을 뚫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점차 뒤로 밀리고 있었다. 이것을 확인하자 서문승의 얼굴은 핼쓱하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각기 좌측과 우측을 공격하던 두 파의 인물들도 도통 보이지 않았다. 천수인마 당력이 이끄는 좌로(左路)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그가 은연중에 굳게 믿고 있는 총호법 우일환이 이끄는 우로(右路)의 인마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일환의 우로에는 그 말고도 백마 쟁]㎹Ⅰ?구지마 좌락의 두 절세 고수가 있으므로 자신이 이끄는 중앙로의 고수들에 절대 뒤지지 않는데 영 소식이 없는 것이다. 서문승이 초조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하하..... 당력을 기다리시오? 그는 여기 있으니 실컷 보시오! 어디선가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문승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급히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개방고수들의 한쪽에는 백여명의 무림고수들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천차만별이라 개붕에는 승인도 있고 도인과 속인도 골고루 섞여 잇었다. 바로 개방을 제외한 구파의 고수들인 것이다. 그들의 선두에는 가슴까지 허연 수염을 기른 청수한 이목의 노승(老僧)과 검은 도포를 걸친 노도(老道)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서문승은 한 눈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안색이 대변했다. 그들은 바로 당금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소림과 무당의 장문인들이었던 것이다. 수염이 허연 노승은 당금의 소림방장(少林方長)인 백결선사(百潔禪師)였고, 흑의노도는 무당의 장문인인 현수도장(玄修道長)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차례의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듯 하나같이 옷에 선혈이 잔뜩 묻어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허나 그들의 기상만큼은 실로 위풍당당하여 하늘이라도 찌를 것 같았다. 조금 전 입을 연 사람은 무당장문인인 현수도장이었다. 그는 서문승이 자신을 바라보자 손에 들고 있던 보자기로 싼 물체를 앞으로 집어던졌다. 툭! 물체는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억! 그것을 보자 서문승의 이에서는 도저히 억제하기 어려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피를 낭자하게 흘린채 보자기 속에서 나온 것은 바로 사람의 수급이었다. 서문승은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천수인마 당력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당력은 좌로의 인마를 이끄는 책임자인데 이 지경이 되었으니 좌로의 고수들이 어찌 되었을는지는 삼척동자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서문승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무서운 눈으로 현수도장을 노려보았다. 네가 당력을 죽였느냐? 현수도장은 힘없이 웃었다. 무량수불, 빈도는 오늘 태상노군(太上老君)께 큰 죄를 범하였소이다. 일파의 장문인의 신분으로 백결도우와 합세하여 한 사람을 협공했으니 이 죄를 어찌 씻어야 좋을지 모몌]０愍릿?시주께서 좋은 방도가 있으면 알려 주시구료. 그의 말인즉 소림의 백결선사와 합세하여 당력을 처치했다는 것이었다. 당력이 비록 환우칠마중의 일인이라고 하나 소림과 무당의 양대거파 장문인들의 합공을 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문승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현수.... 네 놈이 감히..... 허나 그는 분노하기는 했으나 아직 이성(理性)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우일환이 이끄는 우로의 인물들만 합세한다면 아직도 한번의 승부를 겨뤄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한 소리 굉량(宏量)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이 음성이 어찌나 우렁찼던지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던 개방과 건곤교의 고수들은 귀청을 틀어막으며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총호법! 서문승의 입가에 반색의 미소가 떠올랐다. 홀연히 장중(場中)에 내려선 사람은 그가 그렇게도 기다렸던 총호법 우일환이었던 것이다. 더욱 기쁘게도 우일환의 옆에는 갑자기 사라졌던 금문군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헌데 반색을 하며 그에게 다가서려던 서문승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우일환쟁]?뒤에 의당 있어야 할 백마 위혼과 구지마 좌락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로서는 처음 보는 몇 명의 인물들이 그를 호위하듯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늙고 어린 거지 두 명과 남매인 듯한 뚱뚱한 청년과 요염한 홍의미소녀, 그리고 눈이 번쩍 뜨이도록 아름다운 백의여인과 그와는 반대로 지지리도 못생긴 황의청년이었다. 그들은 걸신 악구천과 소신풍(小神風) 초일풍, 헌원당, 헌원소선, 그리고 운산화와 파면비차 우풍광이었으나 서문승으로서는 모두 처음보는 얼굴들이었다. 서문승은 그들을 쭈욱 훑어보다 걸신 악구천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악구천은 그의 시선을 받자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헤헤.... 이 늙은이는 악구천이라 하오. 교주께서 내리신 건곤령 때문에 그 좋아하던 개고기를 딱 끊고 아끼던 호로병마저 날린 사람이외다. 서문승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우일환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우일환, 이게 어찌된 일이냐? 우일환은 아무 대답없이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서문승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위혼과 좌락은 모두 어디 갔느냐? 우일환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서문승의 음성은 마?치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네가 이끌고 있던 백 명의 고수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느냐? 너는 왜 아무 대답이 없느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냐? 위혼, 좌락, 당백......! 너희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이냐? 어디로.......! 우일환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물음은 당신답지 않소. 서문승. 서문승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그제서야 우일환의 음성이 젊은 청년의 그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안색이 대변해 소리쳤다. 너는 우일환이 아니로구나.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니 실망이오. 네 놈은 누구냐? 우일환은 천천히 인피면구를 벗었다. 나는 화일로라 하오. 서문승은 드러난 얼굴을 보자 확연히 알 수 있도록 몸을 격하게 떨었다. 화일로.... 육청운도 아니고 화일로란 말이냐? 그렇소. 서문승은 한동안 무서운 눈으로 화일로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금문군을 바라보았다. 군아야....... 금문군은 그의 시선을 받자 얼굴에 처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버님, 소녀를 용서헬]究셀? 서문승은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들은 듯 멀뚱멀뚱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너마저.... 너마저 나를 배신했단 말이냐? 너마저..... 그의 음성에는 억제할 수 없는 울분과 분노, 고통이 담겨 있었다. 아버님........ 금문군은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렸다. 크하하하.....! 한동안 미친듯이 광소를 터뜨리던 서문승은 돌연 한 덩어리의 피를 토해냈다. 우엑! 아버님! 금문군은 깜짝 놀라 자신의 처지도 잊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한덩어리의 피를 토하자 서문승은 정신이 돌아온 듯 광소를 멈추었다. 그는 애끓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금문군을 뿌리치며 화일로를 노려보았다. 이건 모두 자네의 솜씨인가? 그는 한결 내정을 되찾은 듯 음성이 나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화일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형과 나와의 합작이오. 의형..... 서문승이 나직히 되묻자 대연화타구봉절진중에서 한 사람이 불쑥 앞으로 걸어나왔다. 하하.... 본 방주가 아쉬운대로 그에게서 형님소리를 듣고 있소이다. 그는 바로 개방의 용두방주인 용호풍운신개 곽숭양쟁]潔駭? 서문승은 불길같은 시선으로 곽숭양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곽숭양도 피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한쪽은 천하무림을 제패하기 위해서 야망을 불태우던 일대의 효웅(梟雄)! 그리고 다른 한쪽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 거파를 이끌고 있는 일대의 영걸! 양웅(兩雄)의 대치는 죽음같은 침묵을 동반한 채 장내를 긴장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서문승이었다. 귀하가 개방방주인 용호풍운신개 곽숭양이오? 곽숭양은 빙그레 웃으며 포권을 했다. 이 몸이 개방을 이끌고 있는 곽모요. 늦게나마 서문교주에게 인사를 드리오. 서문승도 예의를 잃지 않고 답례를 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소. 두 사람은 마치 오래 사귄 친구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서문승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본인에게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곽방주께선 대답해 주시겠소? 본방주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대답해 줄테니 어서 말씀하시오. 서문승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번에 본교를 끌어내어 개방총타를 공격하게 한 것은 곽방주의 계략이었소? 곽숭양은 빙그레 웃으며 화일로를 가리켰다. 본 ?방주에게 그런 지략이 있겠소? 이번 계흭은 모두 화노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오. 서문승은 날카로운 눈으로 화일로를 바라보았다. 과연 자네의 계흭이었군. 화일로는 미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어쩔 수 없었소. 호로곡의 형세는 너무도 기이하여 그곳에서 싸운다면 우리의 승산이 희박하다고 생각했었소. 그래서 귀교의 고수들을 이곳으로 유인한 것이오. 악구천의 호로병과 곽숭양의 고질병은 모두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었군. 그렇소. 본의 아니게 귀하를 속인점 이해해 주시오. 서문승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킨채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네의 계흭은 매우 치밀했네. 과찬이시오. 나는 이 천하에서 본교의 대업(大業)을 방해할 수 있는 인물은 육청운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네. 헌데 자네에게 이토록 당할 줄이야 정말 상상치도 못했네. 실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이니 귀하는 너무 애통해 하지 마시오. 서문승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는 모르네. 이것은 내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네. 화일로는 어리둥절하여 그를 향해 물었다. 귀하의 나이는 아직 한창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오? 서문승의 얼굴에는 점점 표정이 없어져 나중에는 무표정에 가까와졌다. 말 그대로 일세. 내게는 다음 기회란 없네...... 돌연 그의 입술에서 시커먼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버님! 금문군이 이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려 했으나 서문승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다가올 필요 없다. 아버님! 금문군이 애통이 부르짖자 서문승의 눈가에 처음으로 따스한 빛이 흘러나왔다. 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네 마음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무림을 제패하려는 것을 항상 못마땅해왔지. 하나..... 그의 입에서는 더욱 많은 핏물이 흘러나왔으나 서문승은 꿈쩍도 않은 채 계속 말했다. 내게도 너에게 말못할 고충이 있었다. 내가 무림을 제패하려고 했었던 것은 피를 최소한으로 흘리기 위해서였다. 애꿎은 생명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서였다. ...... 중인들은 모두 영문을 몰라 그의 입을 주시했다. 서문승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그동안 어떤 번민에 쌓여 왔는지는.... 내가 무림을 제패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그가 나섰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체가 산을 이루고 무림인들의 피가 강을 이루었을 것이다....... 중인들은 그의 음성에 담긴 기이한 힘에 어떤 전율을 느꼈다. 그는 너무 막강하고.... 너무도 잔인하다. 그가 무림에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무림을 제패해야만 했다. 그의 상대가 무림에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다. 헌데 나는 그것을 실패했다...... 이제 곧 그가 무림에 나타날 것이다. 성질이 급한 악구천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가 대체 누구요? 서문승의 입가로 흐르는 선혈은 이미 그의 가슴을 적시고 발밑까지 홍건하게 고여 있었다. 그는..... 그는...... 돌연 서문승의 몸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아버님! 금문군이 애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몸을 부둥켜 안았다. 서문승은 그녀의 품에 안긴채 거의 꺼져가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군아야.... 이.... 이제는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아버님..... 왜 이런 짓을..... 금문군이 울먹이며 말하자 서문승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네.... 네가 우는 것을 처음 보는 것 같구나. 너는 철이 들면서부터 한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지...... 그 말을 듣자 금문군은 자신을 친자식처럼 다정하게 돌보아주었던 서문승과의 추억이 생각나 더욱 많은 눈물을 흘렸다. 서문승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경직되며 그의 입가로 다시 시커먼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 심맥을 끊었던 것이다. 금문군은 자신의 옷이 피에 젖는 것도 모르는 듯 그를 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다. 서문승의 몸이 격하게 떨렸다. 그.... 그를 막아야 한다.... 내가 실패한 이상..... 그가 나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무림이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가 될 것이다. 그..... 그를 막아야..... 그가 누굽니까? 헌원당이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제 61 장 나타난 刀聖 그..... 그는..... 서문승의 입이 벌어지려는 순간, 서문승! 난데없이 어디선가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괴이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장내에 있는 모든 인물들의 귀에 옆에서 속삭이는 듯 아주 똑똑히 들렸다. 또한 그 음성에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듯한 기이한 마력(魔力)이 담겨 있었다. 누구든지 ?그 음성이 어떤 舅?지시하면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그... 그가 나타났다.... 모... 모두 도망가라..... 군아야..... 어서! 순간, 서문승! 노부와의 약속대로 이제 그만 네가 가야할 길을 가거라. 예의 기이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서문승의 몸이 급격히 떨렸다. 구.... 군아야..... 어서 도망..... 그는 미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문군은 그의 시체를 붙잡은 채 망연자실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텅빈 공간처럼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중인들은 그 음성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앗! 저기다! 중인들 중 한 사람이 위를 올려다 보며 손가락질했다. 고개를 쳐든 중인들은 모두 대경실색했다. 놀랍게도 그들이 있는 복룡곡의 꼭대기인 첨인봉의 정상에 한 인물이 표표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있는 곳에서 첨인봉의 정상까지는 거의 삼백여장이 넘었다. 다행히 이곳에 모인 인물들은 모두 한 지방을 주름잡는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으므로 비록 어렴풋이나마 삼백장 밖의 첨인봉 정상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허나 깍]瀏릿摸?그 인영의 음성이 삼백장을 격해 중인들의 귀까지 전해져 왔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무림에는 허공을 격해 음파를 전달하는 여러가지 전음술(傳音術)이 발달해 있었다. 개중에는 공곡회음(空谷回音)이나 육합전성(六合傳聲)같은 것도 있고, 전설적인 수법이라는 천리전음술(千里傳音術)도 있었다. 물론 천리전음이라 하여 실제로 천리밖까지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기껏해야 백장 안팎의 거리가 한계였다. 그것도 내공이 극고(極高)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전력을 다해 천리전음을 시전할 때 에서야 비로소 백장밖까지 소리를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헌데 그 인물은 백장의 세배가 넘는 삼백여장의 거리를 격해 음성을 보냈으니 그 자의 무공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헌데 더욱 놀랄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중인들이 보고 있는 사이에 첨인봉 정상의 인영은 땅을 박차고 허공을 훨훨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 인영은 눈깜박할사이 백장, 이백장을 날아 중인들이 있는 복룡곡 안으로 날아들었다. 인간이 새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삼백장의 거리를 훨훨 날아올 수 있겠는가? 중인들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와같은 일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중인들이 놀라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사이에 괴영(怪影)은 순식간에 삼백장을 날아 장내에 내려섰다. 중인들은 경악에 가득찬 눈으로 나타난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에 문사건을 매고 전신에 하늘색 유삼을 걸친 중년이 문사(文士)였다. 그는 이목이 아주 청수했으며 누구에게나 호감이 가는 용모였다. 만약 조금전에 직접 본 일만 아니었다면 누구도 눈앞의 이 중년문사가 절세의 무공을 지닌 무서운 고수라는 것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중년문사는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서문승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스르르........ 기이하게도 그는 발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마치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곽숭양의 입에서 억눌린 듯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초연물외(超然物外).......! 그의 음성을 듣자 몇몇 견문이 넓은 고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초연물외는 무림에서는 아직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전설적인 신법 (身法)이었다. 초연물외란 무엇인가? 모든 사물로부터 초연하여 한없이 자유롭다는? 뜻이 아닌가? 이 초연물외신법도 그와 마찬가지로 천하의 어떤 공격이나 무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고 스스로의 마음만으로도 몸이 움직이는 그야말로 신화적인 신법이었다. 그것은 마도의 부영수형(附影隨形)이나 불문의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神法), 도가의 무유신보(無遊神步), 유가문(瑜伽門)의 어룡인신법(魚龍印身法)을 훨씬 능가하는 그야말로 고금제일의 경공이라 할 수 있었다. 중년문사는 서문승의 시신을 안은채 흐느껴 울고 있는 금문군의 앞에 우뚝 멈춰섰다. 아이야, 그는 죽었느냐? 금문군은 나직이 흐느껴 울고 있다가 그 음성을 듣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래요.... 당신은 대체 누구지요? 중년문사는 서문승의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바로 내궁의 주인이다. 그의 웃음을 보자 금문군은 소름이 쭈욱 끼쳤ㄷ. 그의 얼굴은 비록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가죽이 약간 움직이는 것 같은 섬칫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금문군은 호로곡내에서 거의 평생을 지냈으나 내궁이 있다는 것만 알뿐 내궁의 주쟁]括?누구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중년문사가 내궁의 주인임을 알자 그녀는 흠칫 놀랐다. 내궁의 주인이시라고요? 그릿? 서문승이 네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냐? 그는 중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는데도 거리낌없이 금문군에게 반말을 했다. 그런데도 금문군은 감히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이 내궁주인이 서문승의 사부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부께선 제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決윱求? 서문승은 약간 둔하고 독하지 못했지만 고집이 세어서 약속은 잘 지켰지. 과연 이번에도 그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구나. 중년문사는 담담히 중얼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와의 약속을 지킨 댓가로 그가 평소에 가장 아끼던 너만은 오늘 이곳에서 특별히 살려주마. 그의 말을 들은 중인들은 머리끝이 쭈빗거렸다. 중년문사의 말은 비록 부드럽기 그지 없었으나 그 안에 내포된 뜻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토록 온화하고 부드럽게 생긴 중년문사의 입에서 이와같은 말이 나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중년문사는 돌연 허공을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첫짼느 ?어디에 있느냐? 중인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허나 그 순간, 제자 여기 대령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허공에서 하나의 인영이 뚝 떨어져 내리더니 중년문사를 향해 오체복지하는 것이 아닌가? 장내에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았지만 누구도 그가 어떻게 해서 나타났는지를 알아차라지 못했다. 그것으로 보아 나타난 인물의 공력은 최상승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홍의를 입은 청년이었다. 중년문사는 홍의청년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 아이를 곡 밖으로 데려다 주어라. 알겠습니다. 홍의청년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 후 금문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낭자. 금문군은 그 홍의청년이 열두명의 내궁특사중 제 일호특사임을 알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도리질을 했다. 전 가지 않겠어요. 홍의청년은 무표정한 안색으로 말했다. 주인어른의 분부이십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금문군은 딱 부러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난 이곳에 남겠어요. 홍의청년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중년문사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가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중년문사는 금문군쟁]?힐끗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머지 열한명과 함께 곡 입구에 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홍의청년은 정중하게 절을 하고는 신형을 일으켰다. 순간, 스읏!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모습은 마치 허깨비처럼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중년문사는 담담한 시선으로 주위를 쓸어보다 곽승양에게 잠깐 시선을 멈추었다. 허나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마침내 화일로를 바라보았다. 화일로 또한 별로 표정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중년문사의 시선은 몹시 특이했다. 안광은 무색 투명했고, 아무런 빛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쳐다보고 있으면 칼로 찌르는 듯한 섬칫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중년문사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정력(定力)이 대단한 아이구나. 나의 심마안(心魔眼)을 정면으로 대하고도 멀쩡하다니..... 화일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원은 넓습니다. 구양(歐陽) 노선배님. 중년문사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일렁거렸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곤]?있구나. 그렇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염왕도법의 주인은 무림 역사상 선배님 한분밖에 없지 않습니까? 중년문사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이들이 염왕도법을 펼친 것은 단 한번 뿐이다. 너는 유령곡에서 그것을 알았구나? 노선배님의 추측은 정확합니다. 중인들은 화일로가 아직 중년인 그를 노선배라고 부르자 처음에는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그가 염왕도법의 주인이라는 말을 듣자 그들중 걸신 악구천과 백결선사, 현수도장 등 무림의 명숙(名宿)들은 일제히 경악에 가득찬 음성을 토해냈다. 아.... 도성 구양외다! 도성 구양외! 이 음성은 곧 커다란 울림이 되어 장내를 뒤흔들었다. 중인들은 너무도 엄청난 사실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성 구양외가 누구인가? 이미 오십년전에 천하무적의 고수로 군림하던 검도쌍성중의 한 명이 아닌가? 그런 그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여전히 중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구양외는 중인들의 경악에 찬 시선을 받으며 허공을 응시한채 담담히 중얼거렸다. 서문승은 나의 첫번째 제자였다. 허놂]?그는 마음이 너무 유약하여 번번히 나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았다. 내가 천하의 모든 무림인들의 씨를 말려 버리기로 결심했을 때도 그는 결사적으로 나를 제지하려고 했다. 그의 중얼거림은 비록 나직했으나 중인들은 모두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든 무림인들이 씨를 말려 버리려 했다는 구양외의 말을 듣자 내심 전율을 금치 못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 세상 천하 어딘가에 있을 나의 유일한 숙적(宿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꽁꽁 숨어 벌써 오십년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인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면 언제고 그가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중인들은 계속되는 그의 말을 듣고 아연실색해졌다. 단지 적수를 만나기 위해서 천하무림인들의 씨를 말리려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오십년전에 천하제일의 고수로 불리웠던 도성 구양외가 그런 마음을 먹는다면 천하의 누가 감히 제지할 수 있겠는가? 서문승은 나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알자 한가지 제안을 했다. 그것은 자신이 내 대신 천하무림을 완전히 제패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말인즉 나의 제자인 자신이 천하무림을 무사흥]?제패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 더이상 나의 적수가 없는 것이니 애꿏은 무림인들을 몰살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가지 조건을 내걸어 그의 제안에 승낙했다. 구양외의 음성은 기이한 위력을 담고 중인들의 뇌리에 선명히 파고들고 있었다. 첫째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일체의 비밀에 붙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만에 하나 그가 천하무림을 재패하는데 실패한다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 조건에 승낙을 했고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구양외는 천천히 시선을 떨구어 화일로를 응시했다. 너는 서문승을 물리친 첫번째 인물이다. 동시에 내 손에 쓰러지는 첫번째 무림인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듣자 화일로의 뒤에 서 있는 운산화의 얼굴이 핼쓱하게 질렸다. 허나 화일로는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서 천하무림을 피로 씻으려는 것은 단지 노선배님의 무공에 필적할 만한 적수를 찾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 노선배, 사람은 만족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무학은 원래 하늘과 같이 그 끝이 간곳을 모릅니다. 어찌 이 세상에서 노선배의 적수가 한 ? 사람뿐이라고 자신하고 있습니까? 구양외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다가 냉랭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감히 나를 훈계하는구나. 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다. 무림에서 나의 염왕도에 상대가 될 수 있는 무공은 오직 하나뿐이다. 노선배의 무공은 이미 천하무적입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만족을 느끼는게 어떻습니까? 만족을 아는 것이 인생의 낙(樂)이요. 그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은 질투라는 것입니다. 너는 감히 나에게 질투를 운운하는 거냐? 만일 질투가 아니라면 노선배는 왜 사형인 연환노인에게 도전을 했습니까? 그리고 왜 오십년이 지난 지금에야 다시 그를 찾는 겁니까? 구양외의 거울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이 깨어졌다. 그는 몸을 가늘게 떨더니 눈을 실룩거리며 화일로를 노려보았다. 너는 어디서 그런 애기를 들었느냐? 누가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렸느냐? 어떻게 노선배의 내력을 알게 되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지만 노선배는 검성 연환노인의 사제가 분명합니다. 닥쳐라! 구양외는 몸을 떨며 그를 단번에 삼킬 듯 입을 딱 벌렸다. 나는 그의 사제가 아니다. 좋습니다. 노선배가 그렇게 부즉]ㅐ?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노선배의 무예는 무극문(無極門)에서 나온 것임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너.... 너는 무극문도 알고 있구나. 화일로는 경악에 찬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는 구양외를 마주 바라보며 위엄어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노선배, 연환노인은 노선배의 유일한 사형이었소. 하지만 노선배는 언제나 그의 무공을 질시하여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소. 나를 탓하지 마라. 그건 모두 연환의 잘못이었다. 그는 내게 본문의 절기를 숨기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건 노선배의 오해요. 사실 연환노인은 아무런 잘못도 없었소. 무극문의 무공은 검도장지공(劍刀掌指功)의 다섯가지로 나뉘는데 그중 어느 것을 익혀도 십이성에 도달하면 천하무적이 될 수 있소. 연환노인이 노선배에게 그중 도법만을 가르쳐 준 것은 나머지 잡다한 무공을 익히느라 심력(心力)이 소모될 것을 염려해서였소. 노선배가 그분에게 패하고 무극문을 떠난후 연환노인은 노선배만을 걱정하면서 그 안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않았소. 그분이야 말로 진정한 성인(聖人)이시오. 이 말에 구양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댐]? 닥쳐라! 네 놈은 어디서 그렇게 주워들은 것이 많으냐? 어디서 들었건 내 말은 모두 사실이오. 만약 노선배께서 다섯가지의 무공을 모두 익혔다면 절대로 지금같은 성취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거요. 그건 결국 연환노인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뜻하오. 하지만 그 늙은 것은 나머지 네 가지를 익혔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그 늙은 것에 패했겠느냐? 그건 당신의 호승심(好勝心)이 너무 지나쳐 염왕도 본연의 위력을 완전히 재현(再現)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연환노인의 쇄천검(碎天劍)과 노선배의 염왕도는 그 위력면에서 똑같은 무공들이오. 흥, 그런 것은 이미 나도 다 이해하고 있는지 오래 되었다. 나는 무학에 대해서는 이미 관심을 버린지 오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조용한 무림에 풍파를 일으키는 거요? 나는 연환과 겨루고 싶다. 꼭 그와 겨루어야 한다. 그래야 두 눈을 감을 수 있다. 연환노인은 조금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하오. 그 분은 무극문을 벗어나 본 적도 없고 무공을 연습조차 하지 않았소. 하지만 그는 내 평생 유일하게 내게 패배?쓴맛을 안겨준 인물이다.? 나는 꼭 그것을 설욕해야만 한다. 오직 나만이 고금천하의 진정한 제일인임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절대로 연환노인을 정복할 수 없을 거요. 나는 무공으로 겨루고자 할 뿐이다. 다른 것은 관심에도 없다. 노선배는 무엇을 믿고 그보다 낫다고 자부하는 거요? 나는 오랫동안 피눈물나게 수련을 쌓아왔다. 지금의 내 무공은 오십년전 그와 겨룰 때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정진되었다. 노선배, 하늘 밖에는 또 하늘이 있는 법이오. 모든 학문이나 무학도 마찬가지요. 아무리 수련을 쌓고 피눈물을 흘린다 해도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는 거요. 나는 놈위에는 더 높이 나는 놈이 있소. 감히 네가 나를 훈계하는 거냐? 내 말은 조금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소. 천하에는 노선배보다 뛰어난 이인 (異人)이 많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구양외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네가 바로 그런 모양이구나? 나 같은 인물은 천하에 모래알보다 더 많소. 네가 그처럼 자신만만하다면 어디 나하고 겨뤄보자. 만일 내가 진다면 나는 두번 다시 무림에 나타나지 않겠다. 화일로가 기다리고 있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얼른 한 걸음 나서며 되물었다. 대단히 좋은 생각이오. 분명히 노선배 입으로 한 소리겠지요? 물론이다. 하지만 네가 패한다면 오늘 이곳에 있는 자들은 살아날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다. 그거야 노선배의 능력에 달린 일이니 나는 상관치 않겠소. 이어 화일로는 뒤를 돌아보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모두 십여장 밖으로 물러서 주시오. 금문군 등은 즉시 십여장 밖으로 물러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허나 운산화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선채 걱정에 가득찬 눈으로 화일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자신있어요?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화일로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무림의 운명을 어깨에 지고 있소. 물러나서 조용히 기다리시오. 악구천과 정구살이 동시에 다가와 속삭였다. 불리하면 언제든지 소리를 지르게.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나갈테니 저런 자에겐 무림의 도의 같은 걸 지킬 필요가 없네. 화일로는 빙긋 웃었다. 두 분의 마음은 고맙게 받겠소. 이번에는 헌원당이 헌원소선을 이끌고 그에게 다가왔다. 화형, 우리의 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 화형은 아?직 나와 한판 더 벌여야 한다는 걸 잊지 마시오. 알겠소. 하지만 옷을 벗긴다는 내기만은 제발 사양하겠소. 헌원소선은 한쪽에서 서서 기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화일로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가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오빠를 따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물러났다. 이번에는 못생긴 우풍광이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화.... 화형, 당신같이 좋은 사람은 꼭 살아야 하오. 아직 장가도 가보지 못하고 죽는다는건 너무 억울한 일 아니오? 악구천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에라, 이 녀석아! 기껏 한다는 애기가 장가 못가고 죽는다는 애기냐? 아이구.... 노선배님, 그게 얼마나 억울한 일인데요..... 우풍광은 계속 그에게 머리를 쥐어맞자 머리통을 싸잡아 매고 한쪽으로 달아났다. 이번에는 개방방주인 곽숭양이 다가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화일로에게 다가와 말없이 그의 손을 움켜 잡았다. 잠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은채 따사로운 눈길을 교환했다. 그런 다음 화일로는 몸을 돌려 구양외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구양외는 묵묵히 그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놂]堉국? 서로 겨루기 전에 미리 말하고 싶은게 있소. 전광석화같이 빠른 세월속에서 사는 우리가 무공의 우열을 가리면 뭘하고, 자웅을 가리며 무얼 하겠소? 수십년이란 세월동안의 수련은 결코 쉬운게 아니오. 그러니 이만 만족을 느끼고 물러가는게 어떻겠소? 남자가 한번 내뱉은 약속을 어찌 어기려 하느냐? 너는 어서 출수하거라. 화일로는 눈을 번쩍 빛냈다. 노선배는 내게 한 수 양보하는 겁니까? 구양외는 돌연 껄껄 웃었다. 무공의 겨룸에서 양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나는 너보다 무공을 수련한 기간이 훨씬 기니 공평을 기하자는 것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내 무공이 결코 노선배에게 뒤진다고는 생각지 않소. 너는 너무 광오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나의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구나. 네 재질은 비록 어떨지 몰라도 세상에는 재질만 가지고 안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공이다. 나의 내공은 못되어도 너의 세갑절은 될테니 내가 손을 쓰고 나면 너는 공격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손을 쓰도록 해라. 화일로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느릿느릿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세상에는 종종 예외라는 것이? 있는 거요. 노선배! 동시에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쳐들어 가볍게 일장을 내뻗었다. 제 62 장 劍聖의 後裔 꾸아앙........! 별로 빠르지 않은 일장이 둔중하게 구양외를 향해 밀려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다정한 사람에게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허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당금 강호의 최절정을 달리는 고수들이므로 그 일장에 실린 위력을 알아차리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그 흔들거리는 듯 느릿느릿하게 밀려오는 장풍안에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만큼 강력무비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구양외는 경험이 더없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 일장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내공력을 짐작하자 약간 놀라는 빛을 띄었다. 허나 약간 주춤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펄럭.......! 갑자기 그의 옷자락이 한차례 심하게 휘날렸다. 구양외는 슬쩍 소맷자락을 허공으로 후려치며 뜻밖인 듯 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의 내공은 나이를 훨씬 초과하는구나. 이 정도면 나의 내공의 절반 수준은 되는 것이다. 화일로는 담담하게 웃었다. 노선배께선 내 공력이 바람을 쏘이면 마구 불어난다는 것을 아직 모르시는?구료. 이 말에 금문군을 비롯한 중인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운산화는 잔뜩 긴장해 있다가 덩덜아 따라 웃기는 했지만 걱정의 빛이 채 가시지 않은 어색한 웃음이 잠시 얼굴을 스쳤을 뿐이다. 구양외의 얼굴에 차가운 빛이 떠올랐다. 네가 감히 나를 놀리는구나.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더 시험해 보기로 합시다. 화일로는 다시 손을 들어 전처럼 가볍게 흔들었다. 구양외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그의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파라라락! 구양외의 옷자락은 세찬 태풍은 만난 듯이 휘날렸다. 동시에 그의 두 다리가 약간 휘청거렸다. 구양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너는 나에 거의 필적하는 공력을 가지고 있구나! 화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팔을 내려뜨리고 선 채 담담히 말했다. 잠시 바람을 쏘였더니 공력이 갑자기 불어난 모양이오. 구양외는 자기가 상대편을 너무 얕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알겠군. 너는 다른 사람의 공력을 주입받은 게로구나. 과연 노선배의 안목은 고명하시오. 네게 공력을 주입시킨 사람이 누구냐? 노선배는 공력이 심후하시고 경험이 많으니 충분히 누구인지 알 쇽]?있을 겁니다. 구양외는 그를 쏘아보고 있다가 두 팔을 느릿느릿 들어올렸다. 좋다. 이제 내가 출수하겠다. 구양외는 머리 위까기 치켜든 손을 갑자기 허공으로 후려치며 기교하게 휘저었다. 돌연, 파파팟! 화일로의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거렸다. 구양외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그의 몸에 가해지는 압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화일로의 옷자락은 더 거세게 찢어질 듯 펄럭거렸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깊은 곳에 뿌리를 내고 있는 고목나무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악구천은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과연 도성이로구나. 칼을 뽑지도 않았는데 공력이 저 정도라니.... 오늘 화일로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가 없었다면 정말 큰일날뻔 했구나..... 정구살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나마 깨달았기에 다행이지 저렇게 화가주의 공력이 뛰어날 줄은 몰랐네. 남궁봉 늙은이의 공력을 짐작하고도 남겠어. 그런줄도 모르고 한때는 저들 사도에게 날뛰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나? 바로 이때였다. 받아라! 구양외의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모두 그를 주시했다. ? 콰콰콰콰콰콰악! 칼날같이 예리한 장력이 화일로를 향해 폭풍우처럼 휘몰아쳐갔다. 화일로는 얼른 왼팔을 앞으로 내밀어 칠십이복랑수를 펼쳐 맞서갔다. 꽈꽈꽈꽝!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두 사람은 잠시 물러났다. 허나 그들은 다시 맞붙었다. 그들의 동작은 아주 둔하게 여겨질만큼 느렸다. 전혀 힘을 쏟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십장 밖까지 밀려나온 장풍은 악구천과 곽숭양을 비롯한 중인들의 몸을 마구 흔들고 있지 않은가? 헌원당이 놀라움과 기쁨의 표정이 뒤섞인 얼굴로 외쳤다. 이제서야 하늘위에 하늘이 있음을 깨달았소.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그의 옷을 벗기려고 덤벼들었으니 내 눈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모르겠소. 이때 두 사람의 느린 동작은 서서히 빨라져 가고 있었다. 파파파파팍! 두 사람은 손이 보이지 않을만큼 빠른 솜씨로 장풍을 나누기 시작했다. 도저히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금문군, 곽숭양 등의 사람들과 몇몇 살아남은 건곤교의 무리들은 십장 밖에 서 있다가 도저히 밀려오는 장풍을 이기지 못하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운산화는 얼굴이 창백하게 된 채로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곽숭양이 그 눈치를 채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운낭자,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화아우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거요. 내가 그것을 보장하겠소. 운산화는 그 말에 정신을 쏟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때, 꽈꽝! 갑자기 땅이 흔들거리며 엄청난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 했다. 두 인영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운산화는 자기 입을 손으로 얼른 막았다. 하마터면 그 굉음에 이어 그녀의 비단폭을 찢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한채 허공으로 치솟아 어울린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은 허공에서 스물두초식이나 교환하고 사뿐히 내려섰다. 그때 갑자기 구양외는 품속에서 하나의 도를 꺼내들었다. 그 도는 길이가 두자쯤 되고 하얀 수실이 달린 보도였다. 바로 그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한 천황도(天荒刀)였다. 화일로도 허리춤에서 하나의 연검을 뽑아들었다. 눈부신 검광이 중인들의 눈을 어지럽힐 순간, 차압! 이얏! 두 사람은 이미 정신이 없는 듯 어느새 벼락같이 어울려 버렸다. 이번에는 각기 병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 ?흉험함이란 먼전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파파파파팍! 쐐쐐쐐쐐쐐쐐! 무시무시한 도기와 매서운 검기가 질풍노도처럼 장내를 휩쓸어 그들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일순, 끼이이이...... 도기와 검풍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는 듯한 괴이한 소성이 울려퍼졌다. 윽! 무공이 약한 몇몇 고수들이 고막을 막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귀곡호다! 모두 뒤로 물러나시오! 곽승양이 대경실색하여 급히 부르짖으며 먼저 운산화를 붙잡고 오십여장 밖으로 날아갔다. 중인들도 이것이 구양외가 염왕도를 시전할 때 일어나는 악마의 귀곡호임을 알자 앞을 다투어 오십여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장내에는 백장이 넘는 공지가 생겨났다. 허나 그 공지는 거의 빈틈이 없이 시커먼 도기와 새파란 검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중인들은 그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이십여장을 물러나야만 했다. 헌원당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정말 괴..... 굉장하다..... 이런 검기와 도기속에서는 금강동인(金剛銅人) 이라도 박살이 나고 말텐데..... 그것은 모든 중인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록 강호무림?을 오랫동안 질타해온 절정고수들이었지만 이와같은 무공은 일찍이 본 적도 없었고 들은적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입만 딱 벌린채 백여장을 온통 휩쓸고 있는 도기와 검기의 소용돌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끼이이이...... 소용돌이 속에서 들려오는 귀곡호가 갑자기 더욱 커졌다. 그와 함께 검은 도기가 뭉치듯 꾸역꾸역 일어났다. 그것은 천하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마구 거세게 일어났다. 그 도기의 폭풍에 가려 시퍼런 검기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 운산화는 절망어린 탄식을 토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쐐애액! 무언가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터져나오며 백여장 안을 온통 뒤집고 있던 검은 도기의 가운데가 길게 찢어지며 시퍼런 검기가 하늘까지 치솟아 올랐다. 아아.....! 피아를 가릴 것 없이 모든 군웅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울렸다. 그순간 그토록 사방을 휩쓸던 도기와 검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은 모두 정신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폐허로 변한 공지의 중앙에 두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모두 두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화일로는 오른손에 신검을 든 채 엄숙?한 표정으로 구양외를 쏘아보고 있었다. 온 얼굴이 땀에 젖어 있고 군데군데 옷이 도기에 갈라져 가는 핏줄기가 보이고 있지만 커다란 상처는 입은 것 같지 않았다. 구양외는 하늘색 유삼이 땀으로 흠뻑 젖어 몸에 찰싹 달라 붙어 있었다.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히 변해 있었고, 왼쪽 가슴에서 오른쪽 아랫배까지가 길게 베어 있어 핏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허나 치명적인 상처는 아닌 듯 했다. 구양외는 몸을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 했으나 수중에 들고 있던 천황도를 땅을 짚으며 간신히 버티었다. 화일로.... 너는 연환의 제자구나? 구양외의 창백한 입술에서 날카롭게 나온 소리였다. 그렇소. 구양외는 이를 바드득 갈며 주먹을 움켜쥐고 자기 가슴을 마구 후려쳤다. 여.... 연환? 너는 그가 무극문에서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는데..... 연환노인은 확실히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소. 하지만 그는 일신의 공력을 너의 몸에 주입시켜 너를 무림에서 활보하게 만들었는데 어찌 그것만 자랑으로 여길 수 있겠느냐? 노선배, 연환노인은 비록 무극문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절정에 달한 무?예를 실전시킬 수는 없었소. 瀏??그 분의 제자까지 무림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할 수 있겠소? 그 분은 노선배가 언젠가는 이와같은 일을 벌일 것을 미리 예측하시고 일신의 무공을 내게 주입시켰던 것이오. 구양외는 몸을 와들와들 떨며 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연환은 지금 어디 있느냐? 지금도 무극문에 있느냐? 그렇소. 그 분은 영원히 그 안에만 계실 것이오. 구양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영원히라니..... 그럼 그가 죽었단 말이냐? 노선배, 연환노인께서는 이미 십년전에 극락왕생하셨소. 구양외는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화일로를 노려보았다. 마치 그의 눈에 화일로가 연환노인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조..... 좋다..... 연환, 이 놈은 죽으면서까지 나를 누르려고 하다니.... 나는 천하를 쑥밭으로 만들어 내 분을 풀고야 말겠다. 화일로는 구양외의 정신없는 말에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노선배! 구양외는 여전히 부릅뜬 눈으로 화일로가 아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입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하.... 오십년간이나 연환에게 설욕할 마음 하나로 무공을 수련했는데 이미 죽고 말억]年募?... 이렇게 물거품으로 끝나다니.... 화일로, 나 구양외는 맹세하겠다..... 그의 눈빛이 격하게 떨렸다. 나.....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무림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떨리는 음성을 남긴 그는 즉시 몸을 돌렸다. 화일로는 태도를 일변시켜 즉시 허리를 굽혀 공손히 말했다. 사숙(師叔), 안녕히 가십시오. 이 말에 도성 구양외는 홱 돌아서서 노기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지금 뭐라고 했느냐? 나는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한다. 사숙, 그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모든 허물을 용서하십시오. 뭐라고, 사숙?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네가 제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 그건 사숙님의 생각하실 따름입니다. 나는 마땅히 당신을 사숙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화일로, 너는 나를 믿느냐? 그 말씀은..... 나는 무극문으로 연환을 보러..... 어찌 사숙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얼마든지 가십시오. 너는 나를 어찌 믿느냐? 사숙의 무예는 무극문의 것이고 또 사숙은 검성 연환노인의 사제이며 나의 사숙입니다. 아.... 내가 큰 일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한번 실수가 수십년에 이르다니.... 구억]玲幷?잔잔해진 시선으로 화일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곧 무극문으로 가서 연환을 본 후에 그 안에서 생을 마칠 것이다. 구양외는 어깨를 약간 흔들더니 회오리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일행이 우르르 달려왔다. 곽숭양이 제일 먼저 화일로에게 달려들었다. 노제, 괜찮은가? 화일로가 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다가 천천히 선혈 한 모금을 뱉어냈다. 운산화가 달려오다가 선혈을 보고 대경실색하여 외쳤다. 당신..... 왜 그래요? 운산화는 중인들의 이목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기며 글썽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화일로는 빙긋 웃음 지었다. 아무렇지도 않소. 아, 피를 좀 토했더니 속이 시워해졌소. 나는 반나절이나 참고 있었소. 운산화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린 채 눈만 깜박거렸다. 당신 정말 괜찮아요? 헌원당이 옆에서 걱정하는 운산화를 보다 못해 한 마디 거들었다. 운낭자도 무림인이면서 모르겠소? 안심해도 되오. 그제서야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정말 놀랐어요. 그녀가 화일로의 팔에 얼굴을 묻으며 고였던 이슬을 닦자 악깍]맡돛?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게 바로 정(情)이라는 걸세. 자기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데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으면 자기 일보다 더 가슴이 아프고 당황하게 되는 법이지. 운산화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아직 이슬이 영롱한채 남아 있어 물기에 젖은 눈이 퍽 수줍어 보였다. 우풍광이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안심한 듯 말했다. 정말 화형의 실력은 대단했소. 그런데 지금까지 당신은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으니 우리가 점장이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알겠소? 그런데 어떻게 연환노인의 제자로 바뀌었소? 화일로는 운산화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게 내버려둔채 조용히 말했다. 이제 더이상 여러분에게 의심하는 점을 남겨둬서는 안될 것 같소. 나는 원래 연환노인의 제자였소. 이 말에 모두 반신반의하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정구살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그러면 자네의 사부는 두 명이란 말인가? 새장자 남궁봉도 있지 않나? 그건 이 다음에 그 분을 만나게 되면 여러분이 각자 물어 보시오. 그러면 시원스럽게 알게 될 거요. 정구살이 그가 확실한 대답쟁]?해주지 않자 성을 내며 외쳤다. 이거 왜 이러나? 누구 궁금해 죽는 꼴을 보려고 그러나? 그 일은 지금 중요한게 아니오. 이제 중요한 것은 금소저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오. 약속이라니? 나는 그녀에게 육청운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소.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금문군을 쳐다보았다. 금문군은 얼굴을 능금처럼 붉힌 채 고개를 떨구었으나 가슴은 설레임으로 새처럼 마냥 뛰고 있었다. 제 63 장 세 얼굴의 사나이 그럼 여러분은 이만 가보시오. 나는 금소저를 육청운에게 안내하겠으니..... 그럴 필요 없네. 우리는 당분간 가지 않겠네. 육청운은 신비로운 인물이라 모두 그를 보고 싶어 하고 있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볼 기회가 있겠나? 정구살의 말에 중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옳소. 나 헌원당이 이번에 육대협을 만나지 못한다면 다시 한번 장안성을 홀딱 벗고 뛸 용의가 있소. 헤헤.... 이 우풍광도 천하제일미남자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견딜수 없네. 나도 옥면청삼 절정신검의 절세적인 풍채와 무공을 구경해야겠소. 모두들 따라간다고 떠들썩하고 ?있을 때 곽숭양만이 빙그레 웃으며 화일로에게 눈짓을 하고는 뒤로 빠졌다. 화형, 육대협은 지금 어디 있소? 먼데 있소? 멀지도 가깝지도 않소. 어쨌든 조만간에 볼 수 있을 거요. 그럼 가까운 곳에 있는 모양이구려. 어서 갑시다. 궁금해서 미칠지경이오. 헌원당은 거의 반 강제로 화일로의 팔을 잡아끌었다. 헌원소선은 오빠의 서두르는 모습에 웃음을 참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왜 그렇게 조급하게 서두르세요? 헌원당은 눈을 부릅뜨며 꽥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그럼 너는 육청운이 빨리 보고 싶지 않단 말이냐? 호호..... 이왕이면 지금 눈앞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말에 중인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웃고난 그들은 화일로의 뒤를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 헌데 기이하게도 화일로가 향하는 곳은 복룡곡의 바깥이 아닌 개방총타가 있는 곳이었다. 육대협이 개방 총타에 있소? 헌원당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자 화일로는 빙그레 웃었다. 그 분은 사부님과 함께 개방의 조사당안에 계시오. 그럼 남궁노선배님께서도 이곳에 와 계시단 말이오? 그렇소. 그 분들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개방?의 조사당을 지키고 계셨던 것요. 중인들은 다시 한번 놀라며 벌떼처럼 개방의 조사당 앞으로 몰려들었다. 조사당 앞에 당도하자 화일로는 사람들을 제지시켰다. 여러분들은 잠시만 이 앞에서 기다리시오. 이어 그는 조사당의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왜 부르지 않고 들어가지? 우풍광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악구천이 또 면박을 주었다. 그게 바로 예의라는 거다. 이 무식쟁이야! 이때 조사당 문이 열리며 남궁봉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남궁봉은 중인들을 돌아보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이번에 여러분들께서 무림의 환난을 제거하기 위해 수고해 주신 점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소. 아? 남궁늙은이로군. 악구천이 반갑게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이곳에 숨어 있었군. 그래. 이곳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온 천하의 거지떼들이 조상의 위패를 돌려달라고 떼를 쓰며 돌아다닐테니 그 꼴을 어떻게 보겠나? 그래서 잠시 기거를 했지. 정구살이 앞으로 나서며 금문군을 가리켰다. 저 금소저가 아까부터 육청운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왜 안나오는 거요? 남궁봉은 금문군을 돌아보다 그녀가 몹시 초조해함을? 알아차렸다. 그는 저 조사당안에 있는데 부끄러운지 도통 나오지를 않으려고 하오. 정구살 등은 입을 딱 벌리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육대협이 부끄러워서 못나온다고? 그게 무슨 말이오. 남궁봉은 정색을 하고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애기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는 노부에게 한가지 청을 했는데 그게 될지 안될지 모르는 일이라서 아마 그래서...... 정구살은 물론이고 금문군 또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궁봉의 말에 의혹이 가득찬 표정을 지었다. 금문군이 조사당의 문 안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악구천이 물었다. 아니 무슨 부탁인데 그러나? 부탁은 내게 했지만 사실은 금소저의 도움이 크게 필요한 부탁일세. 그게 좀 난처한 것이지. 금문군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앞뒤 생각하지 않고 급히 말했다. 제 힘이 필요한 것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발벗고 나서겠으니 노선배님께서는 어서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오. 내가 그 사람 대신 우선 감사의 뜻을 표하겠소이다. 다름이 아니고 육청운, 그 사람은 나한테 중매를..... 금문군은 어리둥절해쇽]?눈을 크게 뜨고 남궁봉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뒤늦게 눈치를 채고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귀밑이 빨개진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하! 우풍광이 손뼉을 탁 쳤다. 그럼 선배님더러 금소저에게 청혼을 부탁한 것이로군요. 이놈아! 너는 어떻게 이런 일에는 그렇게 머리가 빨리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악구천이 너털웃음을 웃자 우풍광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정구살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선배님도 무슨 말씀을.... 저는 원래부터 총명한 머리라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모두 와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금문군은 더욱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결혼축하주를 마시게 되겠군. 그래. 악구천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자 남궁봉은 주위를 돌아보며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고 한 후 점잖게 말했다. 잠깐만 조용히 하시오. 아직 금소저의 입에서 허락하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소이다. 금문군은 더욱 고개를 떨구었다. 금소저의 생각은 어떻소? 그녀는 간신히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노선배님께서 하라시는대로..... 하하..... 그럼 우리는 축하주를 마시게 되었군요.? 결혼 애기만 나와도 팔짝 뛰며 좋아하는 우풍광이 박장대소를 하며 기뻐했다. 남궁봉은 그녀에게 미소지었다. 금소저께서 노부의 체면을 지켜주시니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 모두들 웃고 떠들며, 금문군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여자들은 마치 자기의 일처럼 좋아하며 그녀를 감싸고 재잘거렸다. 정구살이 남궁봉을 향해 손짓을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뭐하고 있소?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당신의 쪼그랑바가지 같은 얼굴이 아니라 그 신랑감을 구경하러 왔소이다. 물론 그러리라 생각하오. 걱정하지 마시오. 남궁봉은 몸을 돌이키더니 조사당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자, 당신 뜻대로 되었으니 어서 나와 얼굴을 보이시오. 그들이 모두 문을 바라보며 육청운이 나타나기만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이제보니 그 사람 여자보다 더 심하군. 아무래도 내가 또 들어가 봐야겠소. 남궁봉은 미소로 중인들을 안심시킨 후 총총히 조사당 안으로 사라졌다. 모두 웅성거리며 조사당 입구를 응시했다. 남궁봉이 사라지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훤칠한 키에 쟁]　?나이.... 실로 절세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영준한 얼굴.... 맑은 정기가 떠돌고 있는 두 눈, 그야말로 당대제일의 미남자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모두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운산화를 그를 보는 순간 안면이 퍽 눈에 익음을 깨달았다. 그 청의를 곱게 떨쳐 입은 육청운은 나오자마자 금문군쪽을 부끄러운 시선으로 주시했다. 금문군도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시선이 맞부딪게 되자 얼른 고개를 떨어뜨렸다. 당신이 육청운, 육대협입니까? 헌원당이 경의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육청운은 미소를 지으며 헌원당을 바라보았다. 그렇소. 헌원소협. 헌원당은 육청운이 정확하게 자신을 알아보자 눈을 크게 뜨고 정색을 하며 반가워 했다. 아니 육대협께선 나를 어찌 알고 계십니까? 육청운은 빙긋 웃었다. 당신만 알고 있는 줄 아시오? 나는 다 알고 있소이다. 당신의 여동생인 헌원소선, 우풍광, 그리고 정선배, 악선배, 운산화 낭자 등 모르는 사람이 없소. 헌원당은 육청운의 청산유수같이 엮어내려가는 말에 감탄을 금치 못해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그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이 못내 이상한지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렸다. 육대협은 정말 나를 알고 있습니까? 아, 참 이상한데.... 나는 대협을 뵌 적이 한번도 없는데..... 하하... 조금도 이상할게 없소. 나는 화일로를 통해 이미 다 들었소. 아! 어쩐지 귀신같이 꿰뚫고 있다 했더니 그랬었군요. 육청운의 시선은 다시 금문군에게 고정되었다. 화일로의 말에 의하면 금소저께서 나를 위해 커다란 도움을 주셨다고 하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료. 금문군은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자기들에게 쏠려 있자 가슴에는 하고 싶은 애기가 산같이 쌓여 있었지만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입을 열어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육대협은 너무 겸손하시군요. 모두 제가 원해서 한 일이니 대협께선 마음에 두지 마세요. 정구살이 그들의 어색한 대화을 듣다 못해 앞으로 나섰다. 아니 육대협이니 금소저니 하는 말은 어디서 나온 거요? 앞으로 대례(大禮)를 올려야 할 사람들이 명분만 내세우고 있으니..... 육대협! 내가 참견하는게 아니라 두 분은 어서 떠나서 오붓한 시간을 갖도록 하시오. 육청운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감돌았다. 그렇게 깨우쳐주시니 감사하오?. 그때 운산화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럼 두 분은 재미있는 애기나 나누세요. 저는 안에 들어가서 남궁선배님과 화가주를 모시고 오겠어요. 운산화가 조사당안으로 막 들어가려 하는 순간 육청운이 불쑥 말했다. 운낭자, 갈 필요가 없소. 그들은 이미 이곳을 떠났소. 이 말에 운산화는 물론이고 밖에서 두 사람의 일을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운산화는 엉거주춤 돌아서더니 경악에 찬 눈으로 육청운을 응시했다. 그.... 그분들이 갔다고요? 대관절 어디로 갔지요? 그건 잘 모르겠소. 하지만 화일로는 가기전에 말을 전하라고 했소. 그는 운낭자가 나를 따라.... 뭐라고요? 나더러 당신을 따라가라고 했단 말인가요? 운산화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의혹에 찬 눈으로 육청운을 바라보았다. 그렇소. 운낭자, 나는 화일로에게 뒤질 것이 없소. 운산화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몸을 돌이키더니 길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번개같이 달려간 육청운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운낭자, 화일로의 부탁대로 해야겠소. 나를 따라 가야겠소. 왜 이러지요? 어서 이 손 놓지 못하겠어요? 그녀의 앙칼진 음성에도 육?청운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빙그레 미소까지 짓고 있지 않은가? 금문군의 놀라움은 충격적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지나친 행동에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정구살이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소리쳤다. 육대협, 대체 왜 이러시오? 무슨 부탁을 그렇게 받았소? 육청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품속에서 무엇인가 꺼내더니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어? 화일로! 헌원당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게 웬일인가? 육청운은 어디로 가고 화일로가 빙그레 미소짓고 있지 않은가? 아니 그게 어쩐 일이예요? 산화, 화일로와 육청운은 모두 나 한사람이었소. 금문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화가주, 진짜 육청운은 어디 있소? 문군, 이 세상에는 화일로 밖에 없소. 육청운은 화일로의 화신(化身)에 불과하오. 그렇다면 도성 구양외와 싸우고 우리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그렇소 화일로이며 육청운이었소. 그런데 왜 미리 밝히지 않았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소. 나는 무림의 평정이 오기까지는 영원히 화일로와 육청운, 두 인물이 되려고 했소. 금문군은 안타까와하며 소리쳤다. 왜 그래야 하지요? 그곤]痼?경우에 따라 행동을 편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소. 헌원당이 입을 딱 벌리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는 모두 속고 말았구료. 어쩐지 육청운이 나를 잘 알고 있더라니. 그런데 남궁선배님은.......? 사부님은 이곳에 계시오. 육청운은 품속에서 정교하게 만든 인피면구를 꺼냈다. 그 인피면구에는 수염까지 달려 있었다. 모두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그럼 남궁봉도 바로 당신이었다는 거요? 헌원당은 그 인피면구를 빼앗아 들여다 보며 외쳤다. 육청운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이다. 악구천이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정말 비범하군. 그 세 사람중에서 우리는 가끔 두 사람을 만나고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 그럴 수가 있는가? 헌원당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자기가 자기 중매를 하는구료. 하하....... 금문군의 얼굴도 다시 붉어졌다. 그녀는 육청운을 곱게 흘겨보았다. 당신은 정말 너무 지나치시군요. 육청운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 인피면구를 보시오. ?낯가죽이 이렇게 두껍지 않소. 하하하..... 육청운은 중인들을 돌아보며 포권의 예를 올렸다. 무림의 평온은 모두 여러분의 도움이었소. 정말 감사하오. 그건 모두 자네의 공일세. 우리는 단지 들러리에 불과했을 뿐이네. 악구천이 고개를 내젓고 말하자 중인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육청운은 담담하게 웃었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오. 이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소. 하하... 이제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이만 헤어지고 내년 이맘때나 다시 만납시다." 정구살이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왜냐고요? 그거야 득남주(得男酒)를 얻어마시기 위해서지. 하하하....." 중인들은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육청운은 금문군과 운산화의 손목을 양손으로 나누어 잡은 채 빙그레 웃었다. 그녀들의 입가에도 행복한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 大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