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전설 (컴퓨터주니어 연재소설) 제1장 이루지 못한 꿈 '0, 2, 4, 6, 7, 8, 16, 32, 32, 32....' 컴퓨터 화면 한 구석에 나타난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화면 중앙에는 럭비공 모양의 영 상이 천천히 돌고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 모양을 한 그 영상은 가끔 움찔거리듯 흔들렸다. 잠시 후, 빠르게 증가하던 숫자는 그만 32에서 우뚝 멈추었다. 천천히 회전하던 럭비공 모양 의 영상도 크게 흔들리다 정지했다. "아... 안돼..." 컴퓨터 화면이 움직임을 멈추자 수많은 장비에서 나는 냉각 팬의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더 욱 크게 들렸다. 창 틈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던 겨울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유난 히 춥고 바람이 심한 겨울밤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하얀 눈보라에 가로등마저 떨리는 듯 깜 빡였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어둠 속에 묻혔던 하늘이 어렴풋이 보이며 건물 윤곽이 파르스름하게 나타났다.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은 주택가였다. 허름한 2층 건물 밑에서 밝은 한 줄기 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약간 높이 지어진 1층 현관 밑에 있는 반 지하실의 작은 창문으로부터였다. 창고로나 알맞은 지하실이지만 꽤 널찍해 한 때는 가방 만드는 가내공장으로 쓰인 적도 있 었다. 한동안 쓰이지 않던 그 지하실에 밤마다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은 열 달 전부터였다. 지하실 창쪽에는 길다란 형광등이 탁구대만큼이나 커다란 실험대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실험대는 철제 책상과 앵글 위에 큰 베니어 판을 통째로 얹어 만든 것으로 컴퓨터와 여러 가지 측정기가 놓여 있었다. 실험대와 그 주변은 전자회로판과 수십장의 도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 똑 같아... 전혀 달라진 게 없어.." 실험대 앞에 앉아 있던 한 청년이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안은 주전자에 담긴 물 이 얼어버릴 정도로 추웠고 숨을 쉬면 하얗게 김이 서렸는데 기계에서 나오는 열기만이 지 하실을 겨우 녹이고 있었다. 푸른색 추리닝을 입고 있는 그 청년은 갑자기 추위를 느꼈는지 옷깃을 목 위까지 바싹 치 켜올렸다. 그의 얼굴은 벌써 며칠째 깎지 않은 수염이 꺼칠했지만 우뚝선 콧날과 시원한 이 마 그리고 꽉다문 입술은 선이 뚜렷해 보였다. 그러나 빛바랜 금테 안경 속에 보이는 새빨 갛게 충혈된 두 눈은 그가 체력의 한계에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남세진은 이틀전부터 먹지도 자지도 않고 같은 실험을 수십번째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아득한 절벽 앞에서 갑자기 끊겨버린 길처럼 계속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했다. "도대체 어느 곳이?... 이 문제를 일으키지?..." 남세진은 변화없는 결과를 보면서 벌써 수십번이나 반복한 질문을 다시 자신에게 던졌다. 그 절벽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까마득한 거리에 있었다.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던 남세진은 몸을 뒤로하여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허리를 기댔다. 몹시 낡은 그 의자는 전기 인두에 탄 구멍이 곳곳에 있었고 닳아서 바닥의 천이 드러나 보 였다. 더우기 움직일 때 마다 어김없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커다란 스폰지를 등 받이에 덧대놓아 모양에 비해서는 제법 푹신했다. 허리를 등받이에 기댄 남세진의 머리 속은 어느새 안개처럼 흐려졌다. 그의 머리 속에서 1 년 전 미국 LA의 한 병원에서 정진석 사장이 숨을 거두던 순간이 떠올랐다. "세진군.., 자네만이 이 SYS를 완성할 수 있네... 내가 할 일은 이미 끝났어. 미국으로 오기 전부터 난 알고 있었지... 내 심장의 남은 시간을...난 오히려 그걸 ...그 회로에서 빠진 부분 은.., 서울의 은행에 맡긴 내 개인 금고에 있네... 그 비밀 번호는... 6502야. 그것이 자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네..." 남세진은 치받는 슬픔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사장님! 사장님! 안돼요. 이대로 눈을 감으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어서 정신 차리세요. 이제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지십니다." 정진석 사장은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말을 계속했다. 그의 파열된 심장에서 전율하는 고통 은 그를 마지막 순간으로 끌고 갔다. "아니야...난 이제 틀렸어... 남세진... 난 자넬 믿어...부디 내가 이루지 못한 꿈 .....SYS..... 자 네는 반드시 SYS를 완성해야 해...꼭 그러겠다고 약속하게 어서." 그것이 정진석 사장의 마지막 말이었다. "세진씨, 세진씨 나야 소영이. 어서 문 열어. 세진씨."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남세진의 약혼녀 민소영의 목소리였다. 남세진은 겨우 정신을 차려 의자에서 일어섰다. 너무 오래동안 실험을 계속한 때문인지 허리와 무릎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 민소영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남세진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내 이럴줄 알았어. 세진씨 어제밤도 또 밤 새웠지. 세진씨, 정신차려 자기 몸은 기계가 아 니야." 그녀는 들고있던 가방을 지하실 한 구석에 있던 소파 위에 올려 놓았다. 가방 속에서 민소 영이 새벽부터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이 나왔다. "아휴-- 이 담배 냄새." 그녀가 지하실 벽에 달린 창을 열자 담배연기가 자욱한 방안에 신선한 새벽 공기가 들어왔 다. "세진씨, 어제 저녁은 먹었어?" 도시락을 펼치는 민소영은 화가 잔뜩 나 있는 목소리였다. 우두커니 서있던 남세진은 그제서야 문득 자신의 약속이 생각났다. 어젯밤 그가 실험에 한창 열중해 있을 때 민소영이 전화를 했었다. 남세진은 머리 속이 어 지러워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실험이 끝나면 민소영에게 다시 전화하겠 다고 말했었다. "아!.. 참, 어제 밤 소영이가 전화를 한 것이 몇시였지?" 남세진은 안경을 찾기 위해 실험대에서 전자회로판들을 뒤적거렸다. "바로 끝날줄 알았는데 그만... 시간이 너무 지나서...그래서... 영이가 이미.. 잠들었을 것 같 아..." 그는 계속 말을 더듬거리며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민소영은 쩔쩔매는 아이같은 남세진의 모습에 슬그머니 웃음이 배 나왔다. 그 순간 남세진 은 민소영을 갑자기 껴 안았다. 그녀는 짐짓 화난 얼굴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가슴에 얼 굴을 묻었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남세진은 그녀가 아주 부드러운 흰 구름과 같다고 느꼈다. 민소영은 남세진의 심장 소리를 느꼈다. "이제 그만---." 잠시 후 민소영은 남세진을 밀치며 말했다. "세진씨, 어서 이 도시락 들어요. 새벽에 내가 혼자 만들었는데 맛있을지 모르겠어." "소영이가 직접 도시락을 만들면 손이 아니라 발가락으로 만들어도 맛있지, 하.하.하" "참 세진씨도, 다음엔 정말 발로 만들어 올테니 각오해요. 난 이제 바이올린 레슨하러 가야 해." 겨우 용서를 받았다고 안심했던 남세진은 민소영이 오자마자 바로 간다는 말에 크게 실망 했다. "그 놈의 바이올린 학원엔, 새벽부터 학생이 오나?" "음악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세진씬 요즘 마음조차 점점 메말라 가는 것같아." 민소영이 푼 도시락에서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오랜만에 따뜻한 밥을 본 남세 진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허겁지겁 도시락을 먹던 남세진은 위가 쓰려와 얼굴을 찡그렸 다. "자기, 좀 천천히 먹어. 그러다가 체하겠어." "음..음 너무 맛있어서" 그는 밥과 반찬을 입안에 가득 넣은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 정신없이 도시락을 먹는 남세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소영은 고개를 돌려 방안을 살폈다. 이미 몇 번 온 적이 있는 이 방 모습은 민소영의 눈에 익어 있었다. 이 지하실 방안 에는 책과 컴퓨터 그리고 실험 기계가 가득차 있어 보기만 해도 어지러웠다. 또 지하실 특 유의 항상 답답하고 축축한 느낌이 있었다. 민소영은 전에 남세진이 살던 서초동의 넓고 시 원한 아파트와 이 지하실이 자꾸만 비교가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남세진은 국내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기회사 트라이테크사의 기술 부장이었 다. 그가 몇 년전에 개발한 게임 프로그램 '용의 전설'은 지금까지 나온 모든 전자게임을 시 시하게 만들었다. '용의 전설' 게임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다투어 트라이테크에서 만든 게 임기를 사게 되었고 게임기가 전세계에 날게 돋힌 듯 팔리자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주었다. 트라이테크사를 설립한 정진석 사장은 기술부장 남세진을 가장 신임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 자식이 없는 정진석 사장은 남세진을 마치 아들처럼 생각하고 장래의 후계자로 지목했 다. 그 서초동 아파트는 정 사장이 남세진에게 상으로 사준 것이었다. 그때의 남세진은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남자였다. 그는 항상 재치있는 말로 민소영에게 즐 거운 웃음을 선사했다. 또 믿음직한 남세진의 행동에 민소영의 부모 역시 그를 훌륭한 사위 감으로 흐믓해 했다. 둘은 다가오는 새 봄에 결혼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작년 초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후부터 남세진은 점차 변해갔다. 그를 아끼던 정진 석 사장과 함께 미국 N연구소에 갔던 남세진은 혼자 돌아왔다. 미국에서 정진석 사장이 갑 자기 사망한 것이다. 그때부터 남세진은 전과 달리 말도 적어지고 얼굴빛도 점점 어두워졌 다. 어느 날 남세진은 민소영을 서초동의 아파트로 불러 한참을 머뭇거리다 어렵게 그의 결심 을 말했다. "소영이, 음....난 소영이에게 정말로 미안한 일이 있어....실은 이 아파트를 팔아야 겠어, 갑 자기 큰 돈이 필요한 일이 생겨서 소영이와 결혼하면 이 아파트에서 살려고 했었는데, 정말 미안해...지금 내가 연구하는 SYS에 꼭 필요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사야만 해, 나는 사장님 과의 약속을 꼭 지켜야 돼... 그 SYS... 아니..,소영이는 SYS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 남세진이 하도 심각한 얼굴로 말을 시작해 잔뜩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던 민소영은 그때서 야 웃으며 남세진을 바라보았다. "난 또, 세진씨가 하도 심각한 얼굴이라 무슨 큰일인가 하고 걱정했잖아. 세진씨가 필요하 다면 이까짓 아파트 하나도 아깝지 않아. 세진씨만 있으면 난 단칸방이라도 얼마든지 행복 할 거야." 그러나 남세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 정말 미안하지만..봄에 하기로 한 우리의 결혼식을 몇 달만 연기할 수 없을까? SYS는 매우 복잡해서 시간이 걸려, 소영이 부디 날 믿어줘." 갑자기 결혼을 연기하자는 말이 나오자 민소영은 고개를 숙여 한참을 생각했다. 그녀는 조 용히 남세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혼식은...세진씨...그건...아니야! 결혼식도 가을이 더 멋있을거야." 민소영이 뜻밖에 선선히 대답하자 남세진은 더욱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했다. "소영이, 소영이 정말 고마와. 내가 SYS를 완성하기만 하면 이 아파트보다 더 좋은 집을 사줄 수 있을 거야. 꽃이 가득찬 정원이 있고 아름다운 지붕이 있는 집으로." "그래 꼭 그래야 해. 여기에 약속." 새끼 손가락을 내밀며 남세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아파트 를 판 남세진은 이 산동네로 이사를 와서 실험실을 차리고 연구에 몰두했다. 아파트를 판 돈은 SYS에 필요한 광자기 디스크장치와 몇 가지 실험 장치로 바뀌었다. 그러나 민소영의 느낌에도 SYS는 아직 완성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민소영은 생각을 멈추고 정신없이 도시락을 먹던 남세진을 보았다. "세진씨... 저 책들을 내가 좀 정리하면 안될까? 이 방엔 책이 너무 많아, 책 내용은 잘 모 르지만 난 청소엔 자신이 있어." 남세진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흘렀다. "그냥 그대로가 좋아, 소영이가 아무리 정리해 놓아도 몇 시간만 지나면 다시 엉망이 될텐 데, 그리고 나에겐 오히려 저렇게 흩어져 있는 것이 내가 필요한 것을 찾기가 더 쉬워." "그럼 저기 저 옷들이라도 가져다 빨아 줄께." 민소영은 벽 위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남세진의 옷들을 쇼핑백에조심스레 담아 넣었다. 후줄그레한 그 옷들은 남세진의 지친 모습과 같아 민소영은 눈물이 핑 돌았다. "참 세진씨, 자기도 바로 출근 준비 해야지?" 남세진은 한참 머뭇거리다 마침내 입을 떼었다. "아니 ...이제 회사엔 나가지 않아... 실은 며칠전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나와 버렸어." 민소영은 깜짝놀라 그를 바라 보았다. "아니 세진씨,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어쩌면 그렇게 쉽게...자기가 처음 트라이테크사에 합 격하고 학교까지 뛰어와 축하해 달라며 기뻐했잖아...또 회사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이제와서 사표를 내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트라이테크사가 자랑스럽다고 나한테도 몇 번씩이나 말했잖아." 남세진은 몹시 괴로운듯 한동안 천장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이젠 정 사장님도 계시지 않고, 새로 사장이 된 박영달은 전혀 달라, 난 이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남세진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민소영은 한참동안 고개숙여 흐르는 눈물을 겨우 멈추었다. "실은 얼마 전 세진씨가 회사에서 요즘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이야기를 나도 들었어. 사장 비서실에 있는 친구 명숙이에게서 말야. 박사장과 싸우고 세진씨가 부장에서 평사원으로 발령이 났다고..." 남세진의 얼굴은 더욱 창 백해졌다. "참! 소영이 어서 학원에 가야지 이러다 늦지 않을까?" "세진씨... 미안해. 내가 쓸데없는 이야길 했어, 이만 돌아갈께. 참, 다음 달에 내 바이올린 독주회가 있어, 15일이야." "소영이의 독주회? 아 그렇지, 바이올린 독주회 준비를 한다고 했지. 소영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너무나 아름다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애. 좋아! 그날엔 내가 멋진 장미꽃을 한아름 가득 소영이에게 선물할께." "꼭 그럴거지? 정말 약속한거야." 민소영이 기뻐하는 순간 남세진은 그녀를 안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언제나 사과 냄새가 났다. "내가 이 입술을 걸고 맹세하지." "세진씨, 이 엉터리..." 민소영은 눈으로 남세진을 흘겨보며 지하실을 나섰다. 제 2장 주주 총회 트라이테크사 주주 총회장,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설치한 전시대에는 트라이테크사 의 생산품인 게임기와 프로그램들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레이져 광선이 번쩍이는 '우주전투', '음악과 화려한 그림이 바뀌는 신데렐라','탐험가의 낙 원 아마존'. 그 하나 하나가 트라이테크사가 자랑하는 작품들이었다. 전시대 중앙 가장 높은 자리에는 사상 최고의 게임, 바로 '용의 전설'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많은 모험을 헤쳐나와 불 뿜는 무서운 용을 물리치고 공주와 사랑을 이루는 왕자 이야기. '용의 전설'은 게임을 하 는 누구나 자신이 왕자와 공주가 되어 끝없는 모험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주주 총회장에 들어서는 주주들의 얼굴은 여느때와 달리 한결같이 굳어 있었다. 곧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주주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나 소리쳤다. "정 사장! 나는 3년 전 이 회사 주식을 주당 10만원을 주고 4억이나 샀소, 그런데 이제 한 주당 본전은 커녕 3만원 짜리도 않되니 내 알토란 같은 돈이 3억이나 사라졌소." 그 주주는 회의 자료를 공중에 집어 던지며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바로 내돈 4억이 겨우 1억으로 변했단 말예요. 1억! 정 사장!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오." 정진석 사장은 창백한 얼굴로 준비된 회의 자료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정진석 사장은 주주 총회인 오늘까지도 그 회의 자료조차 한 번 주의 깊게 읽어 보지도 않았다. 그는 SYS 개발 에만 모든 신경을 쏟을 뿐, 회사 경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 은 경리과 자금을 전담하는 부사장인 박영달이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주주들의 고함소 리가 점점 커졌다. "정 사장! 물건을 팔지 못해서가 아니라 당기순이익 전부를 개발비로 써버렸다니 이게 도 대체 될 법이나 하오? 혹시 어디 남 모르게 빼돌리는 건 아니오?" 주주 총회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내돈 물어내라! 물어내!" "조용히 하세요! 여러분! 조용히!" 마침내 부사장인 박영달이 일어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주주 여러분 여러 주주님에게 3년 동안 계속 손해를 끼쳐드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10년 전 불과 30명의 직원에서 이제 직원이 3천명이 넘는 대회사로 성장했습니 다. 이것은 여기 계신 사장님이 발명하신 전자게임기 트라이-G의 성공에 있었습니다." 박 부사장은 조금 조용해진 좌중을 한번 둘러 보며 큰 기침을 한번 했다. "에, 이제 사장님께서 직접 3년 동안 개발을 계속한 슈퍼 컴퓨터 프로젝트만 끝나면 다시 몇십배의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주주 여러분 물론 힘드시겠지만 제발 조금만 더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몇가지 문제만 더 해결되면 곧 완성됩니다." 그러나 부사장의 애타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주주들의 흥분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웃기지 마시오. 여보슈 우리가 지금, 같은 소리를 3년째 듣고 있소. 더 이상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소. 그리고 그놈의 슈퍼 컴퓨터, 나도 대강은 아는데 이미 미 국에서도 불가능하다고 다 손들어 버렸대요, 그리고 이 25억은 뭐야, 신경회로망 칩(chip) 개발에 쓴다는 장비를 25억씩이나 들여 사다니, 이 무슨 신경정신과에 입원할 소리요." "옳 소, 그런데 쓸 돈 있으면 어서 우리 주주들에게 배당이나 하란 말이오. 괜히 뱁새가 황새 쫓 다가 가랭이 찢지 말고 잘 팔리는 전자 게임기나 만들어 내요." "정 사장! 이 회사가 당신 혼자 것인 줄 아는 모양인데 우리도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단 말이오." 트라이테크사는 전자 게임기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작 사장인 정진석은 회사운영에 관 심이 없었다. 정 사장과 남세진 기술부장은 초능력 컴퓨터 연구에 매달렸다. 그들은 아직 완 성하지 못한 그들의 슈퍼 컴퓨터를 SYS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들은 엄청난 자금을 투자 해 신경회로망 췹을 개발했다. 그 췹은 두뇌의 신경세포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 또 초고속으 로 동작하는 GSP(Graphic Signal Processor:영상 신호 처리기)도 만들었다. 외부의 변화를 순간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초고속 GSP는 꼭 필요했다. 그러나 회사에 많은 돈을 투자한 주주들에게는 그것이 정신나간 짓으로 보였다. 그들은 이 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늘의 소동은 당연히 예상 할 수 있었다. 정진석 사장은 의자에 앉은 채 숨을 가쁘게 몰아 쉬었다. 그의 심장에는 심장박동기가 달 려 있었다. 그의 심장은 오래 전부터 나빴는데 특히 5년전에 큰 고장을 일으켜 미국에까지 가서 대수술을 받고 겨우 돌아왔다. 정 사장은 절대 안정이 필요했지만 오히려 그때부터 슈 퍼 컴퓨터 연구에 더욱 매달렸다. 생명을 단축하고 있다는 의사의 엄중한 경고에도 정 사장 은 막무가내였다. 정 사장의 괴로와 하는 모습을 본 박영달 부사장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안되겠습니다, 사장님! 이만 사장실로 들어가서 쉬시지요. 여기는 저에게 맡기십시요. 제가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겠습니다." "아니요... 부사장." 정 사장은 무엇인가 결심을 한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주 여러분 잠깐만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여러분 정말 미안합니다. 여러분의 손해에 대해서는 제가 갖고 있는 주식중에 10퍼센트만 남기고 여러분께 모두 나누 어 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게 1년간만 더 여유를 주십시오." 일순간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주주중 한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확실히 하자는듯이 말했다. "그것은 정 사장이 갖고 있는 51퍼센트 주식중 40퍼센트를 우리에게 분배해 주겠다는 것이 오?" "예, 그리고 저는 곧 미국 N 연구소와 기술 교환협상을 하려고 합니다. N 연구소는 우리가 부족한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여기 박영달 부사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정진석 사장의 돌연한 주식포 기 선언으로 시끄럽던 주주 총회는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주주 총회를 마친 정 사장은 한동안 중단되었던 기술교환 협상을 재개하기 위해 캘리포니 아에 있는 N 연구소의 소장 샤크 박사에게 국제 전화를 했다. "샤크 박사 그동안 잘 있었소? "정 박사, 당신의 슈퍼 컴퓨터 잘 추진되어 가고 있지요?" 샤크는 이미 트라이테크사의 슈 퍼 컴퓨터 연구 진행 상태를 환히 알고 있었다. 정진석 사장은 지금까지 가장 큰 문제를 일 으키고 있는 인공지능의 병렬처리 문제를 말했다. "정 박사, 나 역시 몇년동안 그 문제로 고민해 왔소. 최근에 당신 회사에서 그것을 해결하 는 신경회로망 하드웨어를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샤크 박사, 나는 당신의 연상기억 소프트웨어로 그 문제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둘은 동시에 웃으며 똑같은 말을 하였다. " 하 하 하...우리 둘다 어느 한쪽만으론 부족한 것을 잘 알고 있군요." "정 박사, 우리 만나서 그 문제의 해답을 교환합시다." "좋소, 내가 당신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안내해 드리지요." 그러나 노련한 샤크 박사는 정 사장이 자신보다 더욱 다 급한 처지에 놓인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정 박사, 이곳에는 당신을 보고싶어 하는 옛날 친구들이 많다오. 당신이 이곳에 오면 오랜 만에 옛 친구들이 모두 모여 옛날에 다니던 술집에도 갈 수 있을거요." 이런 첨단의 기술교환은 상대방 것은 많이 갖고 자기 것은 적게 주고 싶지만 사정이 보다 급한 쪽에서 먼저 매달리게 되고 자연히 불리한 입장에 놓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좋소 샤크 박사, 내가 당신의 초청을 받아 들이겠소." 샤크 박사는 자신의 유리 한 입장을 계속 확인했다. "그리고 N 연구소의 연상기억 소프트는 우리 미국 정부에서도 큰 관심을 갖고 있소. 많은 사람이 방문하면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니 혼자 오시는 것이 좋겠오, 정 박사." 최첨단을 다투는 기술경쟁에서 상대의 기술자료를 확인하려면 최소한 다섯명 이상이 필요 한 것을 잘 알면서도 샤크 박사는 계속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정진석 박사에게는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이번 협상이 깨지면 다시 몇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정 을 했다. "샤크 박사, 미안하지만 나는 요즘 건강이 몹시 나빠져서 혼자 여행할 순 없소, 세 명이 같 이 가겠소." "정 박사...그건 곤란하오.. 아! 그러니까 5년전 당신이 미국에서 수술받은 그 심장이군요..." 샤크 박사는 한참 생각하다 큰 선심이라도 쓰는듯이 말했다. "좋소. 그러면 한 명 정도 동행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무마해 보겠소. 반드시 단 한명이오. 그럼 이만." 샤크 박사는 여기서 거래를 끝내자는 듯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미국으로 가져갈 자료를 정리해 사장실로 들어서던 남세진은 이미 와 있던 박영달 부사장 을 보았다. 부사장은 정 사장이 미국 출장중에 진행할 중요 업무를 보고하고 결재서류에 사 인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남 부장 어서 와요. 마침 부사장도 와 있으니 미국 출장전에 상의 할 것이 있으면 지 금 합시다. 박 부사장, 방금 내가 결재한 그것이 실험장비 도입건이던가?" 그러나 박영달 부사장은 남세진이 들어서자 몹씨 당황하는 눈치였다. "사장님, 아닙니다. 잠시후 제가 다시 오겠습니다." 사실 박영달 부사장과 남세진 기술부장은 전부터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기술 분야에 전혀 문외한인 박영달 부사장은 남세진이 요청하는 고가의 실험장비 도입에 번번이 제동을 걸어 의견 차이로 심하게 싸운적이 많았다. 미국행 제트 비행기에 정 사장과 남세진이 함께 타고 있었다. 비행기 속에서도 남세진은 인공 지능에 대한 자료를 꺼내 계속 검토했다. 옆에 있던 정 사장은 남세진을 잠시 쉬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참, 아까 공항까지 자네 약혼녀가 전송을 나왔던데, 그 아가씨 이름이, 그래 민소영이라 했지, 정말 예쁜 아가씨야, 자네를 그런 미인인 약혼자와 한참 동안 헤어져 지내게 하니 내 가 좀 미안하네." "참 사장님도, 무슨 말씀을, 아닙니다. 바로 다시 만날텐데요." 남세진은 펄쩍 뛰었지만 섭섭한 표정이 아직 얼굴에 남아 있었다. "그래, 한창 좋을 때야. 그런데 심술 같지만 가끔씩 떨어져 있어야정말 좋은 줄 안다고. 허. 허.허." 정 사장은 얼굴이 빨개진 남세진에게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내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벌써 18년이 되었나.. 제이미,...'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그의 가슴 깊이 묻어 둔 쓰라린 추억이었다. 벌써 이십년도 더 오래전 그가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하던 때의 일 이었다. 정진석은 대학 연극서클에서 제이미를 만났다. 같은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는 제이미는 금발의 미인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동부에서 유 명한 변호사의 딸 이었고, 당연히 많은 남학생들이 그녀를 쫓아다녔다. 한창 패기만만하던 대학생 정진석 역시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 중에서도 같은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는 샤크가 가장 큰 경쟁자였다. 둘은 학교를 마치고 최고의 연구시설이 있는 N 연구소에 나란 히 들어갔다. 치열한 사랑의 경쟁자이던 샤크와 정진석 중 제이미가 최후로 선택한 쪽은 정진석였다. 정 진석과 제이미는 눈 덮인 설원으로 스키여행을 갔다. 스키장의 별장에 있는 벽난로 앞에서 둘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정진석과 제이미가 그들의 약혼을 발표한 곳은 연극서클에서 단골로 자주 다니던 투박한 통나무 술집 알테아였다. 정진석과 제이미는 그들의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놓고 축배의 잔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샤크는비통한 얼굴로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며칠 후 정진석과 제이미는 그들의 결혼을 승낙 받으려 동부에 있는 제이미의 아버지를 찾 아갔다. 제이미 아버지는 정진석을 따로 서재로 불렀다. 그녀의 아버지는 매우 불쾌한 표정 을 하고 있었다. "내 딸 제이미와 결혼하겠다고... 자네가 제이밀 정말로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녀를 무엇보다 사랑합니다." "사랑?, 이봐, 자네가 머리 좋은 청년이란건 나도 이미 알아. 제이미도 신기한 동양의 남자 에 한때 관심을 갖을 수도 있어. 그러나 내 집안에 자네를 받아들일 수 없네. 자네는 초대받 지 않은 손님이야!" 정진석의 귀에는 그 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렸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제이미 아버지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자네는 충분히 현명하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 듣겠지. 다시 말하지만 자네 는 결코 제이미와 결혼할 수 없어." 그것은 더없는 모욕이었다. 정진석은 도저히 참을 수 없 었다. "나도 당신의 딸, 제이미와 결코 결혼하지 않겠소." 그날부터 정진석 박사는 제이미와 모든 연락을 끊었다. 제이미를 잊지 못해 한동안 방황하며 지내던 그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아버지의 죽 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경영하던 조그만전자부품 공장을 그에게 남겨 놓았다. 정진 석 박사는 아버지의 공장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아버지의 공장을 정리하고 다 시 N 연구소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돌아가신 아버지 밑에서 수십년 동안 함꼐 일하던 직원 들이 그를 찾아왔다. "정 박사님, 그동안 우리는 큰 회사의 하청을 받아 일을 해 왔습니다. 돌아가신 부친께서는 이 공장에서 언젠가 우리의 일을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정 박사님 부디 이 공장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러나 정 박사는 세계 최고의 첨단시설, 가장 우수한 동료들이 있는 N 연구소 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는 N 연구소에 돌아가 게속 공부할 생각입니다." 그때 직원 가운데서 어린 여자 공원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 "정 박사님 당신은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정 박사는 그 어린 여 자 공원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며칠 후 공장에 다시 나타난 그는 모든 직원을 뫄아놓고 그의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이제부터 이 회사의 이름은 인간,생명,사랑 이 세 가지를 위해 노력하는 기술이라는 뜻으 로 트라이테크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힘을 모아 준다면 이 트라이테크는 가장 자랑스런 회 사가 될 것입니다." 정 박사가 N 연구소를 그만둘 때 가장 섭섭해한 사람은 오랜 친구며 라 이벌인 샤크 박사였다. "정 박사, 무슨 일로 N 연구소를 그만 두십니까?" "나는 한국에서 아버님의 작은 공장을 운영합니다" "정 박사, 지금 개발하는 미사일 유도 컴퓨터 시스템이 완성되면 당신은 많은 상금과 국방 장관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명예롭고 편안한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습니다." "샤크 박사, 나는 내 형제들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정 박사, 당신이 나와 매일 밤 토론 하던 전혀 새로운 구조의 컴퓨터를 연구하기에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입니다." 정진석 박사는 마침내 제이미 이야길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샤크 박사, 난 제이미와 결혼할 수 없소.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그녀를 잘 부탁하오." 그때서야 샤크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이테크사에서 사장인 정진석박사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업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의 사업이 최악 의 상태에 있을 때 샤크 박사로부터 제이미와 결혼한다는 연락이 왔다. 5년이 지난 후 트라이테크사는 비로소 전자게임기 회사로 겨우 자리를 잡았다. 그후 정 사 장이 개발한 TRI-팍스 전자 게임기는 국내는 물론 세계의 컴퓨터 게임기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다. N 연구소에 남은 샤크 박사는 그가 원하던 국방장관상을 받고 이제는 연구소 소장 이 되어 인공 지능의 세계적 권위자로 명성이 높았다. LA 공항에는 이미 N 연구소에서 마중나온 직원들이 정진석 사장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진석 사장과 남세진이 N 연구소에 도착하자 소장인 샤크 박사가 직접 현관까지 나와서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 정 박사, 반갑소. 정말 오래만이오. 당신이 이곳에 다시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하오." "나도 당신을 다시 만나 반갑소 샤크 박사, 그간 안녕하셨소? " 두 사람은 반갑게 얼싸안 고 한참 동안 손을 잡았다. "샤크 박사, 제 동행을 소개하지요, 이 청년의 이름은 남세진으로 아주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오! 미스터 남, 만나서 반갑소. 정 박사가 칭찬할 정도라면 당신은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 이오. 나도 정 박사의 칭찬은 지금까지 한번도 못들었으니. 20년이 넘도록 말이오. 하.하.하." 건장한 샤크 박사가 남세진에게 악수를 청하며 내민 손에는 힘에 넘치고 있었다. 제 3장. 졸업시험 샤크 박사의 사무실로 안내된 정진석 사장은 커피잔이 나오기도 전에 서둘러 말했다. "샤크 박사, 당신의 위대한 업적인 연상기억 소프트웨어를 어서 빨리 보고 싶소." "정 박사, 한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오자마자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야 없지 않소 하.하.하. 그래도 멀리서 온 친구가 그렇게 보고 싶어한다면, 어서 봐야지요." 샤크 박사는 여유있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구소장 사무실 가까이에 바로 연상기 억 소프트웨어 연구실이 있었다. 넓은 연구실 중앙에는 대형 크레이 컴퓨터가 웅장한 소리 와 함께 돌아갔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하드웨어는 당신 것만큼 훌륭하지 못해 이렇게 (2%)큰 방과 냉각장 치가 필요하오." 샤크 박사는 그들의 약점인 하드웨어 문제를 아무런 숨김없이 밝히고 있었다. 그것은 은연 중에 그 문제가 대단치 않다고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샤크 박사는 정진석 사장이 이렇게 서두를 것을 미리 알기나 한 듯이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 정 박사. 이쪽으로 조금만 더 와 보시겠소?" 대형 크레이 컴퓨터실 옆에 검은 색 천으로 가려진 무대 장치 같은 것이 있었다. "자 시작하지." 샤크의 지시가 떨어지자 무대를 가리던 검은 색 천이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무대 중앙에 밝은 빛의 덩어리가 나타났다. 홀로그라피로 만들어진 밝은 입체영상 이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영상은 점차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 빛나는 사람의 영상은 무대 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샤크 박사는 정구공 크기의 하얀 공을 집어 무대 바닥으 로 던졌다. 그 공은 탄력이 매우 좋아서 무대 바닥 위를 통통 튀어 다녔다. "아.... 과연 놀랍군요." 남세진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사람 모양으로 빛나는 그 영상은 튀는 공을 피해서 걷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보시오." 샤크 박사는 계속적으로 몇 개의 공을 집어 무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던졌다. 빛나는 영상 도 뛰어가면서 그 공을 피하려 했으나 사방으로 튀는 공에 비해 동작이 너무 늦었다. 마침 내 그 영상은 탁구공과 충돌하 (6%)며 사라졌다. 샤크 박사는 다소 의기소침한 듯이 헛기침 을 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우리의 하드웨어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속도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 습니다." 샤크 박사의 방으로 돌아온 일행은 차를 들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 박사, 당신 회사에서 만드는 전자게임기, 정말로 재미 있어요. 내 딸 수잔은 '용의 전설'게임을 하면서 그 공주가 너무 불쌍하다고 여러 번 울었다오." 정진석 사장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 '용의 전설'을 만든 프로그래머는 바로 이 미스터 남입니다. 그러고 보니 미스 터 남이 당신의 딸 수잔을 여러 번 울렸군요. 미스터 남이 수잔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겠는데요?" "아! 이 미스터 남이 바로 그 유명 한 '용의 전설' 게임을 만든 프로그래머입니까? 아-- 그래요?" 다시 한 번 남세진을 유심히 바라보는 샤크 박사의 눈에 예리한 경계의 빛이 흘러가고 있 었다. "그러면... 미스터 남, 여기에 사인 한장 부탁합니다. 내 딸 수잔에게 갖다 주어야겠소. 수잔 이 무척 반가와할거요." 뜻밖의 사인 요청을 받고 어쩔 줄 몰라하는 남세진에게 정진석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미스터 남, 기왕이면 -수잔 공주님에게- 라고 써 주게나." 샤크 박사와 정진석은 한동안 옛 젊은 시절 이야기를 꽃 피웠다. "자-- 정 박사, 오늘은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할거요. 당신이 묵을숙소는 이곳에서 가까운 자일로그 호텔에 예약을 해 놓았소." "아니, 아니요 샤크 박사. 우리가 묵을 호텔은 한국을 출발하기 전에 이미 예약을 하고 왔소." 정 사장은 재빨리 거절을 했으나 샤크 박사는 정색하며 말했다. "정 박사, 당신은 옛 친구의 호의를 정말로 거절 하겠오?" 샤크 박사의 굳은 얼굴을 본 정 진석은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좋소,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자일로그 호텔로 가지요." 호텔 특실로 안내된 정진석 사장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는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과 연 이은 N 연구소의 방문에 몹시 지쳤는지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역시 샤크 박사야... 세진군... 이제 샤크는 우리를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볼 수 있겠군." "사장님, 그들이 우리를 일부러 이곳에?" "어쩔 수 없지..., 이미 샤크는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이러는 거야, 그래도 오랜 친구이며 넓 은 아량을 갖고 있는 샤크 박사가 우리 것을 무작정 강탈하지는 않겠지. 그렇지 않은가?" 정진석은 일부러 큰소리로 허공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잠시 후 전화벧이 울렸다. "나 샤크요. 닥터 정, 어떻게 방은 마음에 드시오?" "물론이오, 샤크 박사 너무 훌륭해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13%) "천만의 말씀을, 정 박 사에겐 너무 초라하지만 알다시피 이 근처는자일로그 호텔 말고는 더 좋은 곳이 없어서. 그 리고 저녁에 옛 동료들이 환영회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당신도 옛날의 그 술집, 알테아를 기 억하시죠?" "...알테아... 물론이오, 나도 어서 친구들을 만나고 싶소. 그럼 저녁에 다시 봅시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정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군, 샤크는 지금 내 건강을 시험하려는 것이야. 자네도 나와 같이 알테아에 가보는 것 이 어떤가?" 알테아는 옛 모습 그대로 소박한 통나무 선술집이었다. "오 정 박사,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소?" 이제는 모두 오십대의 장년에 접 어든 옛 동료들이 그를 둘러싸고 지나간 이야기 꽃을 피웠다. 정진석과 남세진은 열 두시가 넘어서야 겨우 그들의 호텔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정 사장과 남세진은 N 연구소 회의실에서 기술 교환절차를 협상했다. "샤크 박사, 당신의 소프트웨어와 나의 하드웨어 전체를 먼저 교환해 서로 내용을 확인합 시다. 그리고 서로 이상이 없으면 프로그램 리스트와 회로 설계도를 상대방에게 넘겨준 후, 2주 동안 검토한 다음 이상이 있는 부분만을 다시 확인합시다." "정 박사, 나는 그 제안을 찬성할 수 없소. 한번에 전부를 다 교환하 (16%)면 문제가 생길 때 다시 돌려 받을 수 없기때문이요, 따라서 나는 1주일에 5분의 1씩 서로 교환하려 하오. 그리고 1주 동안은 최종 확인을 합시다." 샤크 박사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 정 사장 일행을 제풀에 지치게 만든 후에 보다 유리한 조 건으로 신경회로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샤크 박사, 당신의 소프트웨어는 전체가 있어야지 일부분씩 나누어 확인하기는 불가능하 오. 또 나는 6주씩이나 여기에 머무를 수 없소." "정 박사, 내가 제시한 이 조건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 것이요." 무리한 주장을 고집하는 샤크도 조금은 어색한 표정이었으나 그는 단호했다. 잠시 동안 회 의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진석과 남세진은 샤크 박사의 얼굴을 계속 노려보았지만 그는 차가운 미소로 응답했다. 결국 기술 교환을 위한 협상은 샤크의 일방적인 주장대로 끝 났다. "하.하.하. 정 박사, 나는 당신이 결국 내 방법에 찬성하리라 믿었소. 자 이제 우리의 합의 를 여기에 서명합시다." 정진석와 남세진은 가슴 속에서 분노가 끓어 올랐지만 이미 적진 한가운데로 와 있는 그들 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다. 기술자료의 교환이 시작되자 정진석와 남세진은 1분 1초가 아쉬웠다. 샤크 박사측은 N 연구소에서 많은 연구원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단둘만이 복잡한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분석해야 했다. 그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정 사장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사장님, 이 차트 좀 보십시오. N 연구소의 연상기억 소프트웨어에 담긴 이 추론구조는 정 말 대단합니다. 그들의 인공지능은 과연 세계 최고수준인데요." "아... 역시 대단해 ...과연 샤크 박사야." 그 순간 차트를 살피던 정 사장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사장님! 사장님!" 한참 후에야 정 사장은 가까스로 눈을 뜨고 남세진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이사람아. 별 것 아니야, 잠시 어지러웠던 것 뿐이야." 그러나 정 사장의 얼굴은 창백해 있었다. "사장님 안되겠습니다. 이제 그만 쉬시지요. 나머지는 저 혼자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 다." "아니야 괜찮아. 그보다 자네가 좀 쉬게, 어제도 밤을 새웠지 않나." 그러나 남세진의 간곡 한 부탁에도 정진석은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3주가 지났다. 정 사장과 남세진은 고달픈 작업을 쉬지 않고 계속했다. 그들은 N 연구소의 인공지능에서 중간 중간에 교묘히 뺀 듯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세진군 이제 앞으로 2주야, 그 동안에 그들이 준 인공지능에서 빠진 부분을 모두 찾아내 야 하네." "예, 사장님...그러나 너무 교묘하게 빠져서..." 샤크 박사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정 박사, 정말 대단하시오. 당신의 재능, 참으로 아깝소. 당신이 이곳 N 연구소에 남았다 면 보다 큰 업적을 이루었을 것을." "샤크 박사. 무슨 과찬의 말씀을, 당신의 인공지능은 더욱 훌륭하오. 다음 노벧상은 당신 것이 틀림없소." "하.하.하. 내가 천하의 정 박사의 칭찬을 다 듣다니. 어쨌든 고맙소. 정 박사 하.하.하. 아 그건 그렇고, 정 박사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하시더군요. 그런데 오늘 저녁은 내집 정원에서 당신과 미스터 남을 위한 특별한 파티를 준비했소." "파티? 미안하오. 샤크, 나는 좀 쉬고 싶구료. 그 파티는 기술교환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 합시다." "아, 정 박사 오늘 저녁 파티는 내 아내 제이미가 당신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요." "제이미!... 제이미가!"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그이름은 정진석의 심장을 강타했다. 머리속에는 제이미와의 아름답던 추억이 회오리 바람처럼 지나갔다. "...파티에 가겠소. 샤크, 정말 고맙소." 그 순간 정진석은 그의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고통을 느꼈다. 정진석은 그의 가슴을 움 켜쥐고 소파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사장님! 아무래도 파티는 무리입니다. 제가 가서 사장님은 건강때문에 파티에 참석하지 못 한다고 전하겠습니다." "아니야!, 세진군 나는 이 파티에 반드시 가야 해. 나는 그녀를 꼭 만나야 해. 이것이 그녀 를 보는 마지막 기회가 될거야." 정진석은 남세진의 만류를 단호히 뿌리치고 호텔방을 나섰 다. 샤크의 저택은 전망이 좋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파티장인 저택의 정원과 테라스 곳곳 에는 음식과 술이 준비된 테이블이 있었고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동안 작업복 과 흰가운만을 걸치고 연구에 몰두하던 N 연구소의 연구원들도 매끈한 턱시도 정장이었고 화려한 야회복 차림의 여자들과 곳곳에 모여서 음식과 담소를 즐겼다. 정진석과 남세진은 30분 늦게 파티장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다. 샤크 박 사와 제이미는 정원 입구까지 쫓아나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제이미는 이제 기품이 넘치 는 중년 부인이 되어 있었다. "...제이미... 정말 오랜만이요." "...닥터 정, 당신도 이제 많이 늙었군요..." 둘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제이미는 어색한 분위기를 의식한 듯 옆에 있는 그녀의 딸을 소개했다. "내 딸 수잔이예요." 수잔은 가볍게 무릎을 숙여 정진석와 남세진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순백색의 실크 드레 스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은 듯한 아름다운 금발은 부드럽게 어깨 위를 흘러 내렸다. 소녀티를 벗어나 한창 피어나는 수잔의 얼굴은 시원스런 눈과 함께 조금 동그스런 윤곽이 신비하게 어울려 매력을 더해 주었다. "수잔,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제이미, 당신의 딸 수잔, 정말 아름답구료...당신의 옛 모습 그대로요.." 정 사장은 옆에 서 있는 남세진을 소개했다. "이 사람은 한국에서 나와 함께 온 남세진군입니다." 수잔이 활짝 웃으며 남세진을 바라보 았다. "어마! 당신이 바로 미스터 남! 당신이 바로 '용의 전설' 게임을 만든 분이죠. 난 그 '용의 전설'을 만든 사람은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나 이상하게 생긴 난장이일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니. 난 도저히 믿을 수 없어요." 수잔은 마치 오래 전부터 남세진을 알았던 것처럼 깡총깡총 뛰며 반가와했다. "자!, 우선 축하의 술잔을." 샤크 박사는 술잔을 높이들고 건배를 제의했다. 몇 차례 건배가 끝나자 음악이 바뀌며 모 두 짝을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쌍쌍이 어울려 춤추는 남녀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남 세진에게 수잔이 다가와 손을 잡아 끌었다. "미스터 남, '용의 전설'에서는 왕자와 공주가 함께 춤을 추지요?" 수잔은 남세진에게 살짝 윙크하며 팔장을 끼었다. 남세진은 몹시 당황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수잔을 따라 일어섰다. 수잔은 활달한 미국 아가씨였다. 그녀는 어색하게 춤추는 남세진을 부드럽게 리드했다. 남세 진은 조금씩 긴장이 풀리며 흥겨운 음악 속에 몸을 맡겼다. "미스터 남, 수잔이 정말로 공주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수잔과 같은 아름다운 아 가씨라면 틀림없소." "오! 땡-큐." 수잔은 매우 기뻐하며 남세진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갔다. 수잔에게선 짙은 자스민 향기가 묻어났다. 민소영의 은은한 사과향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순간 남세진이 그만 발을 잘못 디디며 수잔의 발을 밟았다. "아야! 아, 아파라." "아! 미안,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춤이 서툴러서 그만 실례를 했습니다. 발은 어때요? 수잔 잠깐 저쪽에서 한번 살펴보지요." "그러면 우리 저쪽 조용한 곳에 가서 잠시 이야기 해요." 수잔은 남세진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정원 한 쪽을 가리켰다. 꽃이 활짝 핀 베나무 밑에 벤 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던 수잔은 아까 밟힌 발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고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수잔, 그 발 정말 괜찮아요?" "미스터 남, 미안하시면 여길 좀 만져 주실래요?" 수잔은 스스럼 없이 발을 내밀며 귀엽게 웃었다. 따뚱한 봄바람이 스쳐가는 정원에는 베꽃 향기가 가득했다. 정진석은 제이미와 테이블에 앉아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정진석의 안색이 놀란 얼굴로 변하며 제이미를 바라 보았다. "뭐라고! 제이미, 그때 정말로 당신이?" "그래요. 난 당신의 연락을 기다렸어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생각이었죠. 하지만 너무나 외로왔어요. 수잔은..." 그 순간 정진석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하고 산산 조각이 났다. 정진석은 두손으로 그의 가슴을 움켜 쥐었다. "닥터 정? 닥터 정? 무슨 일이요?" "제이미... 괜찮아요... 이미 난..." 그러나 곧 정진석은 테이블 위에 무너지듯 머리를 기대며 쓰러졌다. 제이미는 비명을 질렀다. 잠시 다른 쪽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샤크 박사가 테이블로 뛰 어오며 소리쳤다. "의사! 의사를! 빨리, 의사를!" 정진석의 가슴에 청진기를 댄 의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매우 어려운 상태요. 어서 LA에 있는 큰 병원으로 보내야겠습니다." 샤크 박사는 큰소리 로 서둘러 외쳤다. "그러면 빨리 헬리콥터를 불러요. 어서!" 수잔은 남세진에 더욱 바싹 다가 앉았다. "미스터 남, 그러면 '용의 전설' 게임 속에는 정말로 숨겨진 이야기가 따로 있어요?" "그래요 수잔, 내가 살던 고향에는 '용굴'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에는 '용의 전설'이 전해져 왔어요. 그 '용의 전설'은 매우 슬픈 이야기랍니다." "어머나! 미스터 남, 난 어서 듣고 싶어요. 숨겨진 그 '용의 전설'을 나에게 이야기 해 주세 요." "아주 먼 옛날 그 용의 동굴에는 하늘에서 도망쳐 온 아름다운 공주와 용이 살았다고 했어 요." 남세진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수잔, 저기 가까이 있는 두 개의 별이 보이죠. 그 별은 공주와 용의 별이랍니다..." 그때 갑자기 헬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세진은 갑자기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가 파티장으로 허겁지겁 뛰어왔을 때 이미 헬기는 병원을 향해 날고 있었다. "남세진씨, 정진석 박사는 조금전 심장 발작으로 쓰러졌습니다." 남세진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제발, 빨리 좀 갑시다." N 연구소에서 내준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남세진은 운전사에게 계속 재촉을 했지만 샤크의 저택에서 병원이 있는 LA 시내까지는 상당한 거리였다. "여보세요? 한국에서온 정진석 사장의 병실이 어디입니까?" 갑자기 병원문을 뛰어 들어온 남세진을 놀란듯이 처다보던 간호원은 차갑게 대답했다. "한국의 정진석 박사, 256호실이군요, 그러나 지금은 절대 안정이 필요해서 아무도 만날 수 없어요."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그 분과 함께 온 사람이요." "한국에서? 그러면... 들어가되 절대안정을 잊지 마세요." 정진석 사장은 완전히 의식불명 상태에서 가냘프게 숨만 쉬고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계기판에서는 심장이 뛰는 펄스가 표시되고 있었다. 한참마다 한번씩 들리는 계기의 ' 삑 삑' 소리가 날 때마다 남세진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틀이 지난후 겨우 의식을 회복한 정진석 사장은 그때서야 남세진을 알아보았다. "으....세진군, 여기가 어딘가? 지금이 몇시야?" "사장님, 벌써 이틀이나 이렇게 누워 계셨습니다." "이틀씩이나... 그렇게 되었나?... 그런데 자네는 호텔에서 자료 분석을 계속 해야지... 자네 가 왜 이곳에 있나?" "사장님,... 죄송합니다. 그만 사장님이 염려돼서, 저는 이제 곧 돌아가서 계속하겠습니다." "음...이제는...틀림없이 그녀석들이 다 뒤져 보았겠지. 세진군, 어서 호텔로 돌아가게. 되도 록 빨리..." 정 사장은 다시 눈을 감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서야 남세진은 비로소 그말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러면? 제가 병원에 있는 동안 자일로그 호텔에 남겨둔 우리의 하드웨어를? 그런 비겁 한. 사장님, 저는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잠깐, 세진군 내 이야길 잘 듣게....자네가 호텔로 돌아가서 혹시 무엇이 없어졌어도 절대로 말하지 말게. 자네는 소프트웨어 분석을 계속하게,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들의 소프트웨어야... 어서 빨리 그들의 소프트웨어에 무엇이 빠져 있 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해."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진 남세진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야 다시 한 번 명심해, 절대로 그것에 대해 내색하면 안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고 내 걱정을 하지 말게." 남세진은 호텔로 돌아와 분석을 계속했다. 가슴에 타오르는 분노는 N 연구소의 소프트웨어 에서 빠뜨린 부분을 찾는 집념으로 바뀌었다. 정진석 사장이 자일로그 호텔에 나타난 것은 다음날 저녁이었다. 남세진은 유령과 같이 흔 들리는 정진석 사장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사장님 어떻게 이곳에..." 정진석 사장은 소파에 힘없이 앉았다. "그래 분석은 잘 돼가나.." "예. 하지만, 역시 사장님의 예상대로 누군가 이미 우리의 가방을 뒤진 흔적이 있습니다." "저기 저 가방을 이리 가져오게." 그 가방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남세진도 모르고 있었다. 정 사장은 가방 속에서 철제 로 된 작은 박스를 하나 꺼내어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세진군 이 박스를 어서 열게." "사장님 얼굴이 몹시 창백하신데 우선 저 침대에 누우시지요." "빨리. 어서 열어." 정진석 사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그 작은 철제 박스를 열던 남세진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것은 신경망 트랜스퓨터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까지 그들에게 다 넘어갔군요." 박스 속에는 SYS의 핵심 부분인 신경망 트랜스퓨터가 들어 있었다. 그 신경망 트랜스퓨터는 최근에야 완성한 것으로 트라이테크사에서도 둘만이 아는 비밀이 었다. 그 유니트는 희미한 지시램프가 깜박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정진석의 창백한 얼굴엔 가 냘픈 미소가 흘렀다. "됐어. 이젠 됐네..." 정진석 박사는 다시 고통이 오는지 가슴에 손을 댔다. "사장님,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시죠. 앰브런스를 부르겠습니다." 정 사장은 남세진에게 손 짓으로 그 박스를 잘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다시 한 주일이 지난 후 남세진은 소프트웨어 분석을 모두 끝내고 빠진 목록을 모두 정리 해 정진석 사장의 병실을 찾았다. 정 사장은 즉시 전화로 샤크 박사를 불렀다. "샤크 박사, 당신의 소프트웨어 중 부족한 부분의 목록을 만들었소." "아! 실수로 빠진 것이 있었나본데 미스터 남에게 그것을 모두 주겠소. 지금 당장 미스터 남을 내게 보내시지요. ...그런데...닥터 정, 담당 의사는 당신 심장이.. 아무쪼록 건강에 조심 하시오." 전화를 마친 정진석 박사는 남세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 밖에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군. 세진군 좀 시원한 공기를 쐬고싶은데, 저 휠체어를 밀 어주게나...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야." 남세진은 정진석 사장을 휠체어에 태워서 병원 앞의 꽃밭으로 갔다. 꽃잎 위에 부서지는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다. "세진군... 나는 샤크 박사에게 받을 것이 있네. 이십년전 받지 못한 거야... 나는 샤크 박사 와 같은 대학에서 공부를 했었지. 나는 물리학을 샤크는 수학을... 졸업에 앞서 마지막 종합 시험이 있었어. 우리는 서로 예상 문제를 뽑아서 알려주기로 약속했지." 정진석 사장은 잠시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내가 샤크에게 뽑아준 물리 문제는 반 정도가 적중했지만 그 친구가 나에게 준 수 학 문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어. 그리고 샤크는 졸업식장에서 전체 수석 졸업생으로 맨 앞 에 나갈 수 있었지... 이제는 내가 그때의 빚을 받을 차례야." 정진석 사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주위를 한번 살펴보았다. "나는 이번에도 샤크 박사가 그의 연상기억을 제대로 주지 않을것으로 이미 짐작했어, 나 는 심장을 미끼로 샤크 박사를 기다린거야.... N 연구소로 올 때 신경망 트랜스퓨터에 트랩 회로를 준비해 놓았어. 샤크 박사가 신경망 트랜스퓨터를 조사하려면 그의 연상기억을 사용 하는 것이 가장 빠를 테니까. 박스 안의 트랩회로는 그들의 완전한 연상기억을 잡아서 복사 해 놓았을 거야." 남세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그러면? 사장님! 그러면 결국 사장님이 이기셨군요. 사장님 이제 건강을 회복하시기 만 하면 됩니다. 어서 SYS를 완성하셔야죠." "...아닐세... 나는 내 병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 나는 벌써 몇달 전에 의사로부터 심장이 더 버티지 못할 것이라 들었지. 나는 이제 더 할 일이 없어... SYS..." 그는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다시 한 번 불렀다. "그 SYS를 위해서 내가 더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하나도 없어, 세진군 이젠 자네야, 자 네가 반드시 계속해야 하네. 부탁이야." 정진석 사장은 이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 사장님, 제가 계속하겠습니다." 정진석 사장은 이제 모든 짐을 벗어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병실로 돌아가지." 병실에는 뜻밖에도 제이미와 수잔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닥터 정...건강은 어때요? 여기 수잔하고 같이 왔어요." "제이미...정말 고맙소..." 정진석은 창가에 서있는 수잔을 바라보았다. 창에서 비치는 강한 햇살을 등지고 선 수잔의 동그스런 얼굴 윤곽이 정진석의 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수잔은 정진석에게 카드가 들어있는 봉투를 꺼냈다. "이 카드는 파파가 닥터 정에게 전해 달란 것이예요. 파파는 닥터 정이 하루 빨리 건강을 되찾기를 원하세요." 수잔을 한동안 뚤어지게 바라보던 정진석은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수잔...그래, 네가 벌써 열 여덟살이 되었나? 어느새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가 되었구나..." 제이미는 마침내 결심을 한듯 힘들게 입을 떼었다. "수잔... 이 닥터 정은...오래 전에..." 그러나 정진석 사장은 서둘러 제이미의 말을 가로 막았다. "제이미, 아니 아니요...이젠 너무 늦었어. 그때 내가 정말 잘못했소. 내가 비겁하게 당신을 피한거요." 정진석은 잠시동안 눈을 감았다. "수잔, 샤크 아니, 너의 파파에게 반드시 전해다오. 내가 진심으로 고마워 한다고..." "네, 닥터 정. 파파에게 꼭 전해 드릴께요." "아, 미스터 남, 저기 있는 가방좀 내게 가져다 주게나." 정진석 사장은 남세진이 가져온 가방 속에서 조그만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상자에는 옥으로 만든 비녀와 노리개가 들어 있었다. 은은한 녹색이 신비스럽게 빛나는 옥비녀에는 용의 머리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 다. 꽃과 나비가 새겨진 노리개에선 향기가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정진석은 제이미를 한 번 바라보았다. "이것은 한국에서 준비한 것인데 수잔에게 주어도 되겠소?"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 소지었다. "물론이죠. 수잔에게 정말 좋은 선물이 될 거예요." 수잔은 난생 처음 본 옥비녀와 노리개 가 신기한지 손에 들고 비추어 보았다. "어머나! 너무 아름다워요! 이 녹색의 광채가 참 신기해요.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나 요?" "그것은 비녀라고 하는데 옛부터 한국의 여인들이 머리를 장식하는데 사용해 왔지...." 남세진이 샤크 박사를 만나려 N 연구소로 가겠다고 일어서자 수잔이 따라 나섰다. "미스터 남, 아직 이곳 지리를 잘 모르시죠. 미스터 남 내차로 N 연구소까지 안내해 드릴 께요." "그래 수잔, 마마는 닥터 정과 이야기를 할 것이 조금 더 남아 있구나. 네가 미스터 남을 N 연구소까지 잘 안내해 주렴." 남세진을 태우고 N 연구소를 향하던 수잔은 잠시 쉬어 가자며 차를 멈추었다. 건조한 캘리 포니아 지방에선 보기 드믄 맑은 시내 물이 흐르는 계곡이었다. 계곡 주변엔 그들 말고도 몇 몇이 더 눈에 띄었다. "미스터 남, 이 계곡은 언제나 숲이 푸르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아 오지요." 흐르는 시냇물에 밝은 햐살이 부딛히며 반짝거렸다. "아! 미스터 남 저기 저 꽃을 보아요! 저 보라빛 꽃잎을, 맞아요. 아이리스 틀림없이 아이 리스예요." 수잔이 가리킨 시내물 건너편 작은 둔턱 위에 청초한 보라빛 꽃이 수줍은듯 피어 있었다. 수잔은 남세진에게 눈을 찡긋했다. "미스터 남, 며칠 전 가든 파티에서 내 발을 세게 밟았죠. 난 아직도 그 발이 아픈거 같에 요. 하지만 저 꽃을 내게 가져 온다면 당신을 용서해 주겠어요." 수잔의 애교어린 요구에 남세진은 웃으며 신발을 벗고 시냇물로 들어갔다. 제 4장. 사랑의 슬픔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이 바이올린 선율을 타고 끊어질듯 말듯이 무대위를 흘렀다. 슬 픈 곡조 속에서 청중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바이올린을 연주 하는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민소영이었다.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아름 다운 선율을 만들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고 밝은 조명 속에 빛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 을 보며 한숨 지었다. 이윽고 연주가 끝났지만 청중은 음악의 여운에 잠겨 기침 소리도 없었다. 민소영이 인사를 하고 난 후에야 모두 일어서서 뜨거운 박수를 치고 앵콜 요청이 수없이 계속되었다. 민소영 의 바이올린 독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청중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언니인 민순영이 맨 먼저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얘 정말 잘했어. 축하한다, 소영아." "고마와 언니." 대학에서 민소영을 지도한 김교수도 찾아와 제자의 연주회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아! 정말 축하해요, 소영양. 그런데 소영양이 너무 예뻐서 청중들이 귀로 듣지는 않고 눈 으로 바라 보기만 하던데 ...하지만 연주도 정말 좋았어요. 허.허.허." "아이 참 교수님도, 감사합니다." 많은 친구들도 민소영을 둘러싸고 축하한다며 정신없이 수다를 떨었지만 아까부터 그녀는 연주회장의 입구만을 자꾸만 쳐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남세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으려 분장실에 들어선 민소영의 눈에 는 금방이라도 쏟아질듯이 눈물이 가득 있었다. 마침내 궁금함을 참지 못한 언니가 말을 꺼냈다. "소영아.. 오늘 왜 남세진씨가 오지 않았지.. " 민소영은 힘없이 대답했다. "응...세진씨가 몸이 몹시 안좋은가 봐" 그러나 언니는 민소영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상하다...세진씨가 소영이 연주회에 안 올리가 있나...또 몸이 아무리 아 파도 와야지... 너 혹씨...세진씨와 헤어진 것 아니니?" 민소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 "아니야! 그런게 절대로 아니야! 세진씨는 어쩔 수 없이 못 온거야. 그인 지금 몹시 아프단 말이야." 실험기기가 웅웅거리는 지하실 소파에 남세진은 쓸쓸히 누워있었다. 그의 얼굴은 전보다 몰라보게 수척했고 핏발이 선 두눈은 번쩍 번쩍 빛나고 있었다. 다 타 버린 꽁초를 들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혼자서 무엇인가 계속 중얼거렸다. "남세진....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네가 감히 스스로 생각하는 SYS를.... 만들겠다고... 정말 웃기는군.. 네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어.. 이봐, 넌 전자게임을 만드는거야.. 넌 연상기억 소프트를 몇 배나 훌륭하게 새로 만들어 냈어 그래도, SYS에게는... 아직 어림없지... 차라리 그것으로 '용의 전설'보다 더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라고 그래 돈을, 돈을 아주 많이 버는거야." 남세진은 계속 중얼 거리면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아니야! 나는 하겠어! 정진석 사장님이 너에게 심장을 주었듯이 나는 너에게 영혼을, 영혼을 넣어 주겠어... 그래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나는 반드시 하고 말거야." 벌써 보름 전부터 남세진은 계속 환상에 시달렸다. 이제 그 환상은 점차 강력해져 그는 현 실과 환상의 구별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봐 남세진 ... 민소영...소영이 그녀가 보고 싶지 않나.. 민소영은 지금 연주회장에서 혼자 울고 있어... 너는 장미꽃을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옛날, 처음 그녀를 보았던 때가 생각나나, 캠퍼스의 라일락 향기 속에 바이올린 가방을 들 고 나비처럼 걷던 그녀의 모습이... 추운 겨울날 둘이 찾아간 음악감상실에서 그녀와 함께 듣던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는 얼마나 감미로왔지? 그런데, 너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렇게 지하실에 혼자 있는거야?" 남세진의 중얼거리는 소 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나 혼자서... 그래, 나 혼자서 이곳에...혼자서.... 소영이...그래! 나 하나로는 절대로 할 수 없어... 하나로는 SYS를 도저히 완성 할 수 없어!" 남세진은 스스로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수척해진 그의 얼굴 위로 눈물 이 흐르고 있었다. 남세진은 스스로의 한계를 뚜렷하게 깨닫고 있었다. '결국 SYS는 환상 속의 무지개인가...SYS... 너는 아무리 좇아가도 항상 저쪽 멀리에 있구 나...' 남세진은 머리가 쪼개지는듯한 고통을 다시 느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수면제를 몇 알인가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 독한 수면제 마져도 그를 편안히 잠들게 하지 못했다. '이젠 더 이상 안돼... 모든 방법을 다 해 보았어, 그래 정 사장님의 희생도 다 헛된 것이었 어.... 소영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점차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민소영에게 미친듯이 화 를 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도 남세진은 SYS의 실험에 정신없이 매달리고 있었다. "세진씨 나야." 민소영은 불과 사흘 뒤로 다가온 그녀의 연주회 준비로 몹시 분주했지만 전화도 받지않는 남세진이 걱정돼서 지하실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남세진은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SYS 의 설계도에만 계속 매달렸다. 형편없이 수척한 남세진은 완전히 병자의 모습이었다. "아니 세진씨 이렇게 되도록? 이게 뭐야, 안되겠어 세진씨,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병원엘 먼 져 가야겠어." '병원'소리에 남세진은 갑자기 정 사장이 숨을 거두던 미국 LA의 병원이 눈앞에 보였다. "뭐라고 병원! 난 병원에 가지 않아! 내가 병원에 갈 것 같애, 어림없어, 샤크 박사, 이 SYS를 끝내기 전엔! 난 결코 쓰러질 수 없어!" 남세진은 공포와 분노에 가득찬 얼굴로 미친듯 소리를 질렀다. 그의 돌연한 발작에 민소영 은 새파랗게 얼굴이 질렸다. "세진씨 정신차려, 나야." 잠시 후 정신이 돌아온 남세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아니야, 소영이, 내가 왜 이러지..." "세진씨 우선 이 물이라도 마셔. 세진씨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SYS를 만들어야 해. 날 정 말 사랑한다면 당장 이 SYS에서 손을 떼. 그리고 건강을 먼저 회복해, 제발 부탁이야." 그러나 남세진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울먹이며 다시 말했다. "만일 SYS연구를 계속하면 나보다 SYS를 더 사랑하는 것으로 알고 난 세진씨를 떠날거 야. 내 연주회도 이제 사흘 밖에 남지 않았어. 그때 꼭 건강한 몸으로 와야 해. 세진씨 알았 지? 내게 약속한거야." 바로 오늘이 연주회날이었다. 연주회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남세진은 도저히 연주회장에 갈 수 없었다.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던 남세진은 불현듯 책상 서랍을 열고 소중히 보관하던 한장의 광자 기 디스크를 꺼냈다. 광자기 디스크에 천정의 형광등이 반사되어 영롱한 빛이 반짝였다. 남 세진은 그 디스크를 조심스럽게 SYS속에 집어 넣었다. 갑자기 팡파레 소리가 들리며 아름다운 옛성이 나타나고 하늘에서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 작됐다. 화면이 점차 밝아지며 '사랑하는 공주에게'라는 자막이 보였다. 민소영이 아름다운 보석왕관을 쓴 공주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광자기 디스크는 남세진이 결혼 선물로 민소영에게 주려고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 었다.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해 민소영은 공주로 자신은 왕자로 바꾸어 그린 사랑의 앨범이 었다. 민소영에게 기사차림의 남세진이 무릎을 굽히고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 지나갔다. 공 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도 있었다.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사랑을 속삭이던 장면들이 계속 지나갔다. 광자기 디스크에 담긴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 남세진은 탐스런 장미꽃을 골라서 화면에 입 력했다. 남세진은 그 장미꽃 위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 나의 공주에게 - 무어라 부르리 서녘을 물들인 해보다 더 애처로운 너를 ....... 우리들 영혼 속의 불꽃 민소영의 독주회가 끝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민소영의 아버지는 남세진이 당장 그 의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결혼을 취소한다는 최후의 선언을 했다. 남세진은 그 통첩마저 완 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제 유령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남세진은 지하실에서 SYS가 동작하는 모습을 보고 있 었다. "이것은..이따위 것은 내가 만들려는 것이 절대로 아니야!" 컴퓨터 화면에서는 불을 뿜는 용이 하늘을 날고 회오리 속에 바윗돌이 날렸다. 새파란 광 채가 뿜어나는 수정의 검을 든 왕자가 용감하게 용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SYS는 남세진이 만든 게임 '용의 전설'을 완벽한 입체영상으로 바꾸어 그려냈다. '쉭,쉭' 바람 소리와 함께 용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자 점점 확대되는 용의 몸체와 그가 내뿜는 불덩이는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남세진이 새로 설계한 SYS는 사과 상자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상상 할 수 없는 능력이 담겨 있었다. 정 사장이 은행금고에 남겨준 자료중에는 중요한 메모가 들어 있었다. "세진군, 자네도 잘 알고 있지만 우리의 신경회로망이 비록 모든 프로세스를 병렬로 처리 해도 한계가 있었지. 얼마 전에 나는 새로운 원형회로를 생각했다네. 처음과 끝이 연결된 원 형회로, 바로 원형회로야. 그러면 인공지능의 움직임이 원형회로에서 수 백배 빨라질거야. 아무쪼록 자네가 반드시 성 공해서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네." SYS는 본래 수많은 컴퓨터가 뭉쳐진 컴퓨터 집합체였다. 정확히는 수많은 신경망회로가 들어있는 칩, 그 하나 하나가 별도의 컴퓨터인 1024개의 칩이 결합되어 하나의 덩어리, 유니 트(UNIT)를 이루고 다시 8개의 덩어리, 즉 8개의 유니트가 1에서 8까지 번호로 구별되었다. 남세진은 8개의 유니트중 1번과 8번을 연결하는 새로운 0번 유니트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 제 SYS는 완벽한 원형구조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N연구소보다 수십배 우수한 연상기억 소 프트웨어도 있었다. 이 두 가지는 잘 조화되어 놀라운 성능을 발휘했다. SYS의 동작속도는 때때로 1000기가(GIGA)를 넘어 테라(TERA)의 경지로 올라갔다. 그 속 도는 1초에 몇 조의 수자를 계산하는 무한에 가까운 속도였다. 이제 SYS는 세계 최고의 슈 퍼 컴퓨터가 몇 주일이 넘게 걸리는 작업이라도 한 시간 내에 해냈다. 그동안 SYS는 남세 진의 정신을 갉아먹으며 엄청난 괴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무한히 빠른 속도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남세진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몇 백배 더 빨라지는 것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나? 그것이.. 입체그림을 조금 빨리 더 그 리는 것은, 다른 슈퍼컴퓨터도 시간만 조금 더주면 얼마든지 할수 있는거야...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어. 단지 조금 더 빠를 뿐. 내가 원한 것은 이것이 아니야! 나는 이 SYS가 저 혼 자 생각하기를 원했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생각하는 SYS를!" 그는 이미 수 백번도 더 조사해 본 0번 유니트를 꺼내서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의 눈이 안개 속처럼 침침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유니트에 붙어 있는 IC 칩들이 마치 곤 충처럼 고물거리며 움직였다. 남세진은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괴로운 환상들이 다시 그를 찾아온 것을 예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평온한 마음이 들었다. 남세진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제는 차라리 나를 너에게로 완전히 데리고 가려므나...' 남세진의 눈앞에 나타난 환상은 점차 선명해졌다. 그것은 두 개의 얼굴이 하나로 붙어있는 야누스였다. 얼굴의 반쪽은 아름다운 여자 모습이었고 반대쪽은 추악한 몰골의 사나이가 웃 고 있었다. 남세진은 환상속에서 공포와 환희를 한꺼번에 느꼈다. 야누스 환상은 한동안 그 의 주위를 맴돌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환상에서 깨어난 남세진은 너무나 생생한 그 야누스 의 얼굴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남세진의 머리 속에 섬광이 번쩍였다. "그렇다! 야누스의 얼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인간의 두뇌는, 아니 아주 유치한 곤충에서 부터 파충류, 인간보다 몇 배나 큰고래의 두뇌까지...그 모두가 좌우에 대칭인 두 개의 뇌가 있다. 대칭구조! 바로 두 개의 뇌가 대칭으로 되어있다. 만일 이 SYS도? 두 개의 원형회로 가 대칭구조를 이룬다면? 바로 그것은 두 개의 원이 만나서 ∞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의 구조!" 마지막 불꽃이 남세진의 몸 전체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제 5장. 대칭구조 트라이테크사의 사장실, 현대미와 고전미가 기막힌 조화를 이루는 중후한 분위기였다. 가구 는 전부 고급 마호가니였고 커다란 책장에는 화려한 금박의 백과사전과 수많은 책이 가득차 있어 이 방의 주인이 얼마나 풍부한 교양을 갖추었는가를 보여 주었다. 사장 박영달은 값비싸 보이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대단히 만족스런 표정으로 서류를 검토 하고 있었다. 며칠 전 그의 심복들과 상의한 종합상사 발전 계획이었다. 기획실장은 박 사장 에게 계속 굽신거리며 계획서에 대한 설명을 계속했다. 박영달 부사장이 트라이테크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자 몇 달만에 회사의 면모가 완전히 변 했다. 그동안 신기술 개발에 사용하던 막대한 자금은 대대적인 TV 광고에 투입했고 그 성 과는 즉시 나타났다. 약간의 성능 개선과 멋진 디자인으로 새롭게 단장된 게임기 트라이-II 는 게임 시장에서 다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또한 경영다각화를 위해 위험한 신기술 투자보다는 안전한 수익이 보장되는 관광 레저업에 대부분의 자금을 투자했다. 대규모 콘도와 놀이 시설이 함께 있는 트라이랜드는 곧바로 수 많은 정기 회원을 확보해 이미 흑자로 돌아섰다. 무엇보다 그 트라이랜드가 차지하는 광활 한 대지가 그를 가장 흡족하게 했다. 더우기 그 옆에 사원 연수원 명분으로 널직이 확보한 땅에서도 막대한 이익이 보장되어 있었다. "사장님, 사원 연수원부지는 축구장만으론 너무 넓으니 대규모 양돈 축사를 짓는 게 좋겠 습니다. 그래야 담당하는 공무원도 마음놓고 우리를 지원할 명분이 서겠습니다." "역시, 우리 공 실장은 수완은 대단해요. 이제 곧 트라이테크사는 종합상사로 발돋움할텐 데, 이번 기회에 당신이 회사를 하나 맡아주시오." "아이고 사장님, 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 영광을." "아니요. 전번 주주총회 때 당신의 활약이 대단했어요. 그때 당신이 큰 소리로 정 사장을 몰아 부친 덕분에 그가 주식을 포기하지 않았소." "그거야 회의 전에 사장님이 제게 미리 귀뜸을 해 주신 덕분에. 헤.헤.헤. 그때 그냥 두었으 면, 돼먹지 않은 무슨 개발을 한답시고 정 사장이 회사를 아예 망칠 뻔 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사장님, 아니죠 이제는 회장님, 회장님같은 분이 안 계셨으면 벌써..." "허허- 벌써 회장님이라고, 공 실장 이 사람도 참, 오늘 저녁은 그동안 수고한 간부들과 애 플싸롱에서 종합상사로 발전을 축하하는 축배를 듭시다. 내 한턱 내리다." 사실 박영달 사장은 기쁜 일이 또 하나 있었다. 그동안 걱정해 왔던 자신의 딸과 정계의 거물인 K의원의 아들간에 혼사가 성사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영달은 혼사를 핑계로 K의원에 게 엄청난 정치 자금을 주어야 했지만 벌써 그 효과를 보고 있었다. 얼마 전 탈세혐의로 경 영주가 구속된 동산맥주의 인수업체로 지정받은 것이다. 더욱이 파격적인 은행융자까지 받 을 수 있던 것도 모두 K의원 덕이었다. K의원이 지금처럼 밀어만 준다면 트라이테크사는 곧 재벌기업으로 성장할 것이 틀림없었다. "사장님, 전 기술부장 남세진의 전화인데요." 재벌그릅의 회장이 된 상상에 빠져 있는 박영달의 한창 좋은 기분을 비서의 인터폰이 망쳐 버렸다. '남세진? ... 그 자식이 웬일이지...' 박영달은 남세진과의 불쾌한 기억이 생각났다. '간부 회의 때마다 쓸데없는 연구비를 줄여 광고를 하자는 내 의견은 무참히 무시되고... 남세진, 그 자식은 제가 필요하면 아무리 비싼 장비도 척척 구입해 나를 망신시켰지..더우기 정 사장이 죽은 후에도 그자식은 감히 사장인 나를 우습게 보고 대들었어. 뭐 그따위 불가 능한 슈퍼 컴퓨터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참 기가 막혀서. 그 자식을 쫓아내고 나니 내 속이 다 시원했는데...' 잠시 망설이던 박영달 사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저 남세진입니다... 그런데... 저... 제가 신경회로망 칩이 부족해서...아직 안됩니다." 전화기에서 들리는 남세진의 목소리는 전과 달랐고 무슨 말인지 다짜고짜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웬일인가? 남부장. 그래 그간 잘 있었나?" 박영달은 어리둥절한채 남세진에게 되물었다. "아니, SYS가 아직 안돼서, 그 칩은 자재창고에 남아있는데...어쨌든 빨리 좀 주십시오." 박영달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봐! 남부장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남세진은 다시 무엇인가 한참을 설명했지만 박영달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더 듣고 싶 지도 않았다. '... 이 자식 완전히 미쳤군 ...돼먹지 않은 무슨 슈퍼컴퓨터 연구 한답시고 까불더니 드디 어...' "이봐요, 남세진씨, 나 바빠 이만 전화 끊게." 박영달은 미래의 청사진이 펼쳐지는 종합상사 계획서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남세진 은 계속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신경? 신경회로망 칩?? 맞아 그때 정 사장이 돈을 퍼부은 그 칩이야... 그 슈퍼 컴퓨터에 관련된 장비는 이 자식이 회사를 나갈 때 정 사장이 물려준 회사 주식과 바꾸자고 해서 몽 땅 시원하게 치워 버렸는데... 그 골치 아픈 것이 아직도 남았있나? 가만있자 이 미친 자식 을 어떻게 한다...' 경리 출신의 박영달은 돈에 있어서는 계산이 매우 빨랐다. "이봐, 남세진 자네가 말한 거 뭐라고 했나? 신경? 어쨌든 그 칩이 꼭 필요하다면 돈을 내 고 사가게." 박영달이 돈 이야기를 꺼내자 남세진은 갑자기 조용해 졌다. "...... 저... 돈은 다음에. SYS가 완성되면..." '미친 놈 같으니 ... 뭐가 완성되면 돈을 준다고...이제는 돈도 다 떨어진 모양이군 잘 됐 어...' 박영달은 돈까지 떨어지고 실성해버린 남세진의 초라한 모습을 상상하며 잔인한 쾌감을 느 꼈다. "뭐라고! 돈이 한푼도 없다고? 그러면 나도 할 수 없지. 이만 전화 끊네." 남세진은 다시 한번 애타게 사정했다. 남세진이 박영달에게 이렇게 사정을 한 것은 처음 이었다. 박영달은 슬그머니 남세진을 약올리고 싶어졌다. "...그래...지금은 돈이 없지만 나중에 반드시 갚겠다 이거지. 그건 믿을 수 없고 대신 내가 가격을 좀 깎아주지. 그 부속 값은 자네가 받아간 퇴직금이면 돼." 물론 남세진에게 그 퇴직금이 아직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남세진이 우물거리자 박영달은 큰 선심이라도 쓰듯이 느긋하게 말했다. "물론 자네가 그 칩을 개발한답시고 낭비한 돈에 비하면 푼돈이지만, 자네를 봐서 그렇게 해주지, 하지만 한푼이라도 모자라선 절대 안돼." 박영달은 말을 마치자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대칭구조! 두 개의 원형회로를 대칭으로! 그것은 두 개의 원이 연결되는 ∞의 구조가 된다! 무한구조! 바로 구조이다!" 남세진은 그가 같혀 있던 캄캄한 동굴이 무너져 내리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찬란한 빛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다. 남세진은 며칠 밤을 새워가며 SYS의 반대쪽 원형회로를 설계했 다. 또 하나의 회로는 오른손과 왼손처럼 정확히 대칭을 이루었다. 그가 쓰러질 때마다 야누 스의 환상은 그를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신경회로망 칩이 부족한 것이다. 또 하나의 대칭회로를 위해 칩이 천 개 이상 더 필요했지만 남세진이 갖고 있는 칩은 모두 다 긁어 모아도 100개 정도 가 부족했다. 그 칩은 엄청난 돈을 들여 트라이테크사가 특별히 생산한 것으로 지금 남세진 의 형편에서 다시 만들기는 불가능 했다. 그때 남세진의 머리 속에 문득 트라이테크사 자재창고에 남아 있는 신경회로망 칩들이 생 각났다. 그때는 형편이 넉넉한 때라 약간만 이상이 있는 칩은 모두 불량품으로 빼 놓았던 것이다. '그래! 그 창고 속에 칩이 남아 있어! 그때 빼 놓은 칩중에 100개 정도는 충분히 다시 쓸 수 있을거야...' 그러나 박영달은 그 칩을 돈을 주고 사라는 것이다. 남세진은 수없이 전화를 했지만 박영 달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다. 박영달의 비서는 은행에 돈을 입금한 후에 연락하라는 말만 을 전했다. 답답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남세진은 무작정 트라이테크사로 찾아갔지만 회사 안에 들어 가 보지도 못하고 수위에게 쫏겨나고 말았다. 얼마전까지 함께 일하던 동료들도 박영달 사 장이 두려운지 모두 못본 척 했다. 남세진은 그들에게 떠밀려 나오면서 칩을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칩은 이미 사장실 금고 속에 모두 옮겨 놓았다는 것이었다. "SYS 조금만 기다려, 내가 꼭 칩을 가져올께...이 자식들 모두 나쁜 놈들이야, 너희 모두 박영달과 똑같아... SYS 응, 조금만 기다리라고...조금만 더..." 밤이 늦어서야 고주망태가 된 남세진은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돌아왔다. 어디서 넘어졌는지 얼굴 곳곳에 상처가 나고 옷은 흙 투성이었다. 그런 몸으로 그곳까지 다시 돌아온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니 세진씨! 이게 어쩐 일이야, 세진씨! 제발 정신차려." 지하실에는 민소영이 오래 전부 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약혼을 파기하고 다른 사위감을 물색하는 중이 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세진을 도저히 그대로 버려둘 수 없었다. 민소영은 남세진을 다시 한 번 설득하러 온 것이다. 그녀는 지하실에서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옷도 빨아 널었고 책과 설계도면들도 보기 좋게 정리해 두었다. 그녀는 정성껏 식사까지 준 비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남세진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민소영을 본 그는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 기 시작했다. "넌 누구야?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다 필요없어. 모두 다 똑같아! 흥! 다정한 척 하지마. 어서 가! 어서 썩 꺼지란 말이야. 너도 별 수없어. 너도 다른 놈들과 똑 같단 말이야!" 남세진은 민소영을 세차게 뒤로 밀쳤다. "세진씨! 정신차려 세진씨!" 민소영은 남세진에게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정성껏 차려놓은 밥상을 발로 차 버렸다. 마침내 민소영은 울면서 지하실을 떠났다. 그녀가 지하실을 떠난 뒤에도 남 세진의 발작은 계속 되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닥치는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얼마 후 남세진은 지하실 바 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 오후가 넘어서야 비틀거리고 일어난 남세진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하실 안은 엉 망진창이었다. 몇 번 눈을 떴다 감았다하며 정신을 차린 그는 앞에 팽개쳐진 일지를 집어 들었다. 죽은 정 사장이 남긴 유품 중의 하나였다. 그 일지는 정진석 사장이 SYS개발과 관 련된 것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남세진은 그 일지를 뒤적이며 정진석 사장과 함께 연구에 몰두하던 때를 생각했다. 그 순간 남세진이 들고 있던 개발 일지 속에서 서류 한장이 밑으로 떨어졌다. 서류에는 작 년 2월의 것이었고 확인요망이란 메모가 있었다. 작년 2월, 바로 정 사장과 미국으로 가던 때였다. 그 메모는 낮익은 정 사장의 필체가 분명 했다. '아니! 애날라이져 K-7 외 5종? 지불 대금 8억, 개발실사용? 그때 나는 K-7 장비를 본 적 이 없는데?' 당시 박영달은 모든 지출을 자신이 결재하고 사장에게는 내용만 보고했다. 정 사장이 미국 출장 준비로 한창 바쁠 때 박영달이 이 8억을 빼돌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박영달이 몹시 당황하던 모습도 이상했다. 정 사장도 출장 준비에 바빠서 다시 확인하려고 표시만 해놓은 것 같았다. '아니 이럴 수가... 8억씩이나 이렇게 감쪽같이 떼먹다니...박영달...나쁜 놈!' 그때 남세진의 마리 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영수증, 이 영수증으로 박영달에게 그 신경회로망 칩들을 달라고 하는거야...' 남세진의 전화를 받은 박영달의 비서는 난처해 어쩔줄 몰랐다. "남 부장님, 어쩌지요, 죄송하지만 사장님은 외출중이십니다." 무조건 전화를 끊으려는 비 서에게 남세진은 애타게 말했다. "아니요, 틀림 없어요. 박 사장은 지금 있지요? 제발 부탁이오, 이 한마디만 어서 전해 줘 요. 박영달에게, 남세진은 K-7 영수증이 있다고 하면 돼요." 잠시 후 전화를 받은 박영달은 몹시 불쾌한 목소리였다. "웬일인가?" "박 사장님, 당신은 작년에 8억을, K-7 장비대금으로 지출했는데, 나는 그 장비를 한번도 본 적이 없소." 순간 박영달은 깜짝 놀라 흠칫했다. "...자넨 지금 날 위협하는 건가" "간단히 말해서, 박 사장님 제가 필요한 그 칩을 주시면 사장님께 주겠습니다, 그 서류를." 한참 생각하던 박영달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오후 5시 무역센터 지하 로비로 오게." 박영달이 무역센터에 도착했을 때 남세진은 이미 로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남세진은 떠가 잔뜩 찌든 작업복 차림이었다. 얼굴은 바짝 말라 해골 같았고 붉게 충혈된 눈만이 번 쩍거렸다. 박영달 사장은 남세진의 변해 버린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역시 남세진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을 알고 다소 마음이 놓였다. "아니 자네.. 고생이 많구만." 남세진은 일초가 급한듯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빨리 칩을 주시죠, 어서." "그 서류를 먼져 주게." "여기... " "맞군, 여기 자네가 찾던 칩이 있어"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남세진은 박영달에게서 칩이 든 상자를 받자마자 말도 없이 휑하니 가버렸다. 지하실에 돌아온 남세진은 다시 밤을 새워가며 SYS의 반대쪽 두뇌, 또 하나의 원형회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며칠후 남세진은 새로 만든 모든 유니트를 제 자리에 맞추고 연결했다. 두 개의 원형회로가 만나는지점은 X형태가 되었다. 남세진은 그 부분을 X 유니트로 했다. "자 이것이 마지막 신경회로망 칩의 자리다..." 이제 모든 작업이 다 끝났다. 단지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남세진은 차마 스위 치를 올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앞은 온통 캄캄해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캄캄 한 어둠 속에서 야누스의 환상이 다시 나타 났다. "남세진...너는 정말로 이 SYS가 혼자 생각한다고 믿고 있나? 후.후. 후. 지금 너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거야. 어서 포기해. 남세진, 너는 이 스위치를 결코, 켤 수 없어." 남세진은 온몸을 부들 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나는 할 거야..." 남세진은 두 눈을 감은채 천천히 SYS의 스위치를 올렸다. '쉬익-' 날카로운 소리가 SYS의 몸체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잠사후 화면이 밝아지며 오른 쪽과 왼쪽에 두 개의 숫자가 나타났다. 두개의 숫자는 동시에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0,0..8,8..16,16..32,32..128,128" 다시'쉬익--' 소리가 커지며 화면에 한 개의 밝은 원이 나타났다. 그 원은 갑자기 밝게 빛 나며 두 개의 원으로 갈라졌다. 빛나는 두 개의 원은 누구인가 어둠 저쪽에서 노려보는 눈 동자 같았다. 남세진은 벌떡 일어섰다. 그의 심장은 터질듯이 뛰었지만 몸은 얼어 붙은듯 꼼 짝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움직이고 있어... 두 개의 원형회로가 움직이고 있어...'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그 빛은 다시 사그러 들기 시작했다. "아... 안돼... 멈추면 안돼."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난 야누스 환상은 미친듯이 웃으며 남세진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하.하.하. 하.하. 그것 봐 남세진 너는 역시 실패야... 네 모든 능력과 지식을 다해도 영원히 할 수 없어... 넌 이제 아무 것도 없어... 하.하.하. 이제 민소영도, 그녀도 너를 버렸어...하.하.하. 너는 실패한 거야. 하.하.하..." "소영이! 안돼!" 남세진은 다시 절망과 공포에 질린 창백한 얼굴로 서서히 주저앉았다. 그를 마지막까지 태 우던 불꽃도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때 야누스 환상은 울고 있는 민소영의 얼굴로 변 했다. 민소영은 공주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머리에 쓴 왕관이 머리에서 벗겨지며 밑으로 떨 어졌다. 왕관에 박힌 보석이 반짝반짝 빛나며 흩어졌다. 남세진은 갑자기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이 번쩍 일어섰다. "그렇다! SYS는 바로! 더 많은 광자기 디스크가 필요해. SYS는 광자기 디스크가 부족해서 움직임을 멈춘거야!" SYS속에는 이미 많은 광자기 디스크가 들어 있었다. SYS가 사람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 도록 백과사전이 담긴 디스크이외에도 SYS의 능력과동작을 시험하기 위한 여러가지 테스 트 프로그램 그리고 '용의 전설'을 비롯한 여러 게임이 담긴 광자기 디스크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광자기 디스크가 들어 있음에도 SYS는 아직 부족한 것이다. 남세진은 지하실에 남아있는 광자기 디스크를 닥치는대로 SYS속에 모두 집어 넣었다. "한장! 이제 한 장만! 한 장만 더!" 그러나 이제 그에게 남은 광자기 디스크는 한 장도 없었다. 미친듯이 지하실을 뒤지던 남 세진은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깊은 곳에서 민소영에게 결혼 선물로 준비한 디스크를 꺼냈다. 그 디스크를 SYS에 사용한다면 그 안에 담긴 모든 사랑의 추억, 영혼의 고백도 SYS 속에 서 순식간에 지워져 버릴수 있다. 그 디스크를 잡은 남세진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젠 어쩔 수 없어...내 사랑을 ,내 영혼을 바꾸더라도, 이 SYS를 움직인다면...난, 나는 하겠어..." '찰칵' 소리와 함께 남세진이 들고있던 광자기 디스크는 SYS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다시 '쉭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화면 양쪽에 쓰여진 숫자가 따로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른쪽 원형회로 R의 동작속도를 나타내는 숫자가 10에서 20, 30, 100 계속 빠르게 올라가자 왼쪽 원형회로 L의 속도는 반대 로 100에서 10 까지 떨어졌다. '쉬익 쉬익' 하는 소리는 점차 작아지며 반대로 R과 L의 움 직임을 표시하는 두 개의 동그란 빛은 점점 더 밝아졌다. 두 개의 빛은 교대로 깜빡이기 시 작했다. '드디어... 해냈어...' 남세진은 드디어 확인한 것이다. 틀림 없었다. 이제 SYS는 완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까지의 모든 일들이 남세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 사장의 죽음... 깨어진 결혼약속...' "하.하.하..... 하.하.하." 남세진은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한동안 웃던 그는 다시 엉엉 통곡소리를 내며 울었다. 비로서 그를 묶고 있던 무거운 사슬이 풀리고 무엇인가 그의 몸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 높이 훨훨 날고 있었다. 마침내 남세진은 실험대 위에 쓰러졌 다. 제 6장. 안개 어제밤에 잠을 설친 박영달 사장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남세진... 그자식 이제 완전히 돌아 버렸어... 그자식이 계속 입다물고 있을까? 어디 가서 횡설수설하다 그 이야기라도 하면? 혹시 그 영수증말고.. 또 다른 것도 갖고 있는지 몰라... 아무래도 안되겠어." 한참동안 턱을 만지며 골똘히 생각하던 박영달은 무릎을 쳤다. "바로 그거야!, 그자식을 그리 보내면! 그러면 그자식이 무슨 소릴 해도 누구도 믿지 않을 거야." 박영달은 즉시 남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세진은 전화기를 들고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 았다. "잘 있었나? 남 부장, 실은 말이야. 그동안 내가 자네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서, 자네 건강도 몹시 나빠 보이던데 내가 좀 도와 주었으면 하는데...오늘 저녁 시간을 좀 내게." 그러나 남세진은 혼자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SYS는 두 개의 원형회로다! 대칭구조에서 동작한다!" '이 미친 자식 곱게나 미치지 속 썩 이는군.' 박영달은 남세진의 관심을 끌려면 죽은 정 사장을 내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봐요 남부장, 에... 정 사장, 죽은 정진석 사장이 나에게 부탁한 말이 있어.." 갑자기 정신이 드는지 고함을 지르듯 대답했다. "정 사장님! 사장님!, 지금 어디 계시지요?" "그래, 이제 좀 정신이 드나. 에.. 오늘 저녁 9시 강남역 뒤에 있는 애플, 그 애플 싸롱으로 나오게, 남부장 절대로 잊으면 안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겐 알리지 말고 꼭 혼자 오게, 애플 싸롱이야. 그럼 9시에 다시 보세." '미친 놈' 전화를 놓으며 박영달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정 사장님! 어서 사장님께 알려야 해. 이제 다 끝났다고. 드디어 SYS가 저 스스 로 생각한다고. 어서 빨리!" 남세진은 정진석 사장을 빨리 보고 싶었다. 그의 머리 속이 뿌연 안개가 쌓인 것처럼 희미 했지만 '애플싸롱 9시'만은 뚜렷하게 기억했다. 지하실을 서둘러 나서던 남세진은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SYS, 누가 이 SYS 를 훔쳐가면 어떻게 하지? 샤크 박사처럼..." 다시 지하실로 돌아온 남세진은 SYS를 커다란 상자속에다 조심스레 집어 넣었다. 그래도 불안한 남세진은 벽에 걸린 옷을 집어 들었다. 민소영이 정성껏 빨아다 준 옷이었다. 남세진 은 그옷을 사정없이 발로 밟아 걸레처럼 만들어 SYS를 덮었다. 그는 다시 낑낑거리며 1층 계단 밑으로 상자를 옮겼다. 뼈와 가죽만 남아 허깨비같은 그는 수없이 비틀거리고 넘어졌 지만 상자를 계단 밑에 감출 수 있었다. 지하실을 나온 남세진은 방향을 못찾고 한참을 헤맸다. 어느 친절한 학생의 도움으로 겨우 강남역에 내린 것은 열시가 넘어서였다. 박영달 사장은 애플싸롱의 밀실에서 남세진이 나타나길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VIP 전 용의 그 밀실은 더없이 호화로왔다. 천장에 달린 샹드리아는 물론 대리석 테이블까지 모두 최고급 수입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박영달 옆에는 마담 말고도 두 명의 아가씨가 있었는데 둘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한 명은 박영달 옆에서 술을 따랐고 또 한 명은 등 뒤에서 안마를 했다. "이 자식 어디로 사라진거야. 이봐 마담, 현관에 있는 웨이터에게 잘 말해 놓았지." "아유 사장님도 걱정도 팔자셔. 그 이상한 분이 나타나는 대로 즉시 대령할테니 마음 놓으 시고 어서 술이나 드세요. 얘 뭐하니 잘 좀 주물러 드려라." 박영달은 이 애플싸롱의 가장 중요한 고객 중에 하나였다. 더욱 바싹 다가 앉은 아가씨의 향긋한 숨결이 박영달의 귀를 간지럽혔다. "어-- 시원하다. 오늘은 특별 팁을 줄테니 잘--해보거라." 10시 반이 넘어서야 남세진이 두리번거리며 싸롱으로 들어섰다. 현관에서 눈이 빠지게 남세진이 나타나길 기다리던 웨이 터는 그를 즉시 밀실로 안내했다. "어서 오게나 남부장!, 좀 늦었군. 허.허.허. 애들아, 너희들은 잠시 나갔다가 오너라. 문은 잘 닫고." 아가씨들이 밀실을 떠나자 박영달은 문을 안에서 걸고 남세진과 마주 앉았다. "그래, 그 슈퍼컴퓨터 연구는 잘 돼 가나?" 남세진은 정 사장이 보이지 않고 박영달만 있는 것이 뜻밖이었다. "정 사장님은...?" 남세진이 어물어물하며 정 사장을 찾자 박영달은 그럴줄 알았다는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뭐 그까짓 연구 잘 되지 않으면 어떤가...자네는 아직 한창 젊으니 그 까짓것 집어 치우고 다시 훌륭한 게임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거야. 자 어서 술을 들게나. 어서 쭉-" 박영달은 가득찬 술잔을 억지로 남세진에게 권했다. 엉거주춤하던 남세진이 술잔을 들고 마시는 순간 박영달은 갑자기 술병을 집어 남세진의 머리를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퍽" 하고 술병이 깨졌다. 남세진은 힘없이 픽 쓰러졌다. 박영달은 다시 주머니에서 준비해 온 과도를 남세진의 손에 쥐어 놓았다. "악! 자네 왜 이러나, 사람살려! 악!" 밀실에서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세진은 칼을 쥔 채 쓰러져 있고 박영달은 혼자서 술상을 엎고 술병을 깨고 소동을 벌였 다. 박영달의 다급한 비명 소리에 술집 웨이터들이 문을 부수고 뛰어 들어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박영달 사장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떨면서 말했다. "이 자식이 말이야... 갑자기 칼을 들고 나를 찌르려 했어..." "예?, 이 자식이 사장님을? 이 런 죽일 놈을 봤나. 이런 미친 놈은 아예 죽여버려야 해." 웨이터들은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나는 남세진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얼굴을 쳤다. 그의 입에서 피가 울컥하고 나왔다. 그들은 쓰러진 남세진을 다시 짓밟았다. 그들이 짓밟기를 멈 춘 것은 남세진이 죽은 것같아 더럭 겁이 났기 떠문이었다. 잠시 후 신고를 받고 경찰이 달려왔다. "이 사람이 박 사장님을 칼로 찌르려 했습니까?" 박영달은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전에 남세진을 사정없이 짓밟던 웨이터들이 앞 다투어 그들의 무용담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예, 저희들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 미친 놈이 칼을 마구 휘둘러 하마터면 박 사장님의 목숨이 매우 위험했습니다. 제가 칼에 찔릴 것을 각오하고 달려들어 겨우 이 놈을 잡아 놓았죠. 미친 놈이 기운은 보통 아니던데요." 남세진은 아직도 손에 칼을 쥔 채 소파에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경찰은 남세진에게 서둘러 수갑을 채웠다. 난폭한 정신병자를 체포한 경찰은 그 처리 방법에 골치가 아팠다. 정 신병자를 유치장에 넣기도 어렵고 병원에서도 이런 환자는 순순히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었 다. 그런데 뜻밖에도 피해자인 박영달이 선처를 당부하고 나왔다. "이런 일까지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제가 모두 책임질테니 젊은이의 앞날을 생각해 서 형무소로 보내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제 회사에 근무하다 불쌍하게 머리가 돌아서 생활 비라도 좀 보태줄려고 불렀습니다만, 상태가 이렇게 심각하니 제가 부담해 정신병원에 입원 을 시켰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수고에는 적지만 제가 어느 정도 보답을 하겠습니다." 꽤 두툼한 지폐가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박영달은 술집의 피해까지 모두 변상하고 웨이 터들에게도 섭섭지 않게 했다. 경찰은 그의 넓은 아량에 감동해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사장님과 같은 훌륭하신 분이 아직 남아 계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정신병원까지 저희들이 안전하게 동행하겠습니다. 또 혹시 도와 드릴 일이라도 없습니까?" 일은 박영달의 본래 계획보다도 술술 잘 풀리고 있었다. "예 실은. 이 친구가 돌아버린 후 되지도 않는 연구를 한답시고 회사 장비나 서류같은 것 을 마구 집어다 자기 지하실방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때는 이친구가 불쌍해서 막지도 않았지만 이제 그것을 찾아 갔으면 합니다." "예, 잘 알았습니다. 사장님. 어차피 저희는 또 다른 범행이 있는지 남세진의 거주지를 수 색할 예정이니 함께 가서 보시지요." 형사들이 남세진의 셋방을 수색하고 있었다. "남세진 그 친구 정말 아까운데요." "한때는 유명한 트라이테크사에서 기술부장이었고 천재소리를 들었다는군." "그런데 왜 정신이상이 되었지요?" "얼마 전 사장과 함께 미국에 갔다가 사장이 갑자기 죽고 혼자 왔는데 그때부터 좀 이상해 졌나봐." "이것보세요. 여기 끓이지도 않고 날 것으로 뜯어 먹다 버린 라면도 있군요." "이 친구 가족도 없어, 부모를 일찍 잃어 충청도 산골에서 무당을 하는 이모가 키웠는데 서울에서 고학으로 대학까지 마쳤다는군." "집 주인 말로는 매일 자지도 않고 엉엉 울거나 소리를 질러 불안한데다 방세를 두달이나 받지 못했다는군요." "그래도 이 실험장치들은 상당히 고가품 같은데." "그것도 남세진이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그냥 집어온 것이랍니다." 경찰의 수색이 끝나자 박영달은 지하실에 남은 장비와 모든 서류를 가져갔다. 박영달은 모든 서류나 일지를 샅샅 이 살펴보았다. '신경망 트랜스퓨터?... 원형회로?...대칭구조?...' 일지에는 대부분이 박영달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몇가지 그림과 설명이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박영달이 의심받을 만한 곳이 몇 가지 있는 것이었다. 박영달은 도면을 비롯해 모든 서류를 깨끗하게 태워 버렸다. 지하실에 남은 장치와 부속들을 조사한 직원은 그 모두 다 쓸모 없다는 보고를 했다. 박영달은 비로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됐어! 남세진 그자식이 미쳐 버린 것은 확실해.' 민소영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정신병원에 달려왔다. 남세진은 갈비뼈가 모두 부러져 온몸 에 붕대를 감았고 얼굴은 온통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을 본 민소영은 그만 실신해 버렸다. 병원에서는 그가 극심한 정신분열증에 완전한 기억상실로 회복이 어렵다고 진단했다. 의사들은 오히려 남세진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며칠 후 그녀가 남세진의 소지품을 찾기 위해 지하실에 갔지만 방에 있던 책이나 실험장치 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민소영은 텅빈 지하실에서 혼자 하염없이 울었다. 잠시 후 집주인 이 고개를 내밀고 민소영을 불렀다. "아가씨, 실은 그 청년이 방세를 두 달이나 내지 못했는데...미안하지만 내가 어려운 형편이 라..그 청년 보증금도 이미 다 까먹었다고. 그 돈 아가씨가 좀 줄 수 없을까? 사장이란 사람 은 펄펄 뛰며 절대로 못주겠다니 말이야." 민소영은 주인의 염치없는 소리에 기가 막혔지만 두말없이 방세를 모두 갚아주었다. 뜻밖 에 돈을 받은 집주인은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는 좋은 생각이 난 듯 목소리를 낮추어 민소 영을 불렀다. "이봐요 아가씨, 실은 말이야. 현관 계단 밑에 그 청년이 남긴 상자가 하나 남아 있어요. 혹시나 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은 것인데 아가씨가 가져가요." 민소영은 계단 밑에서 상자를 찾아 포장을 열었다. 맨 위에는 그녀가 전에 빨아다준 남세 진의 옷이 나타났다. 그 옷에는 입지도 않고 발로 밟은 흙자국이 보였다. 그 옷을 치우자 밑 에서 철제로 된 상자가 있었다. 바로 SYS였다. SYS를 위해 자신의 정성이 담긴 옷이 걸래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SYS를 차에 실고 돌아가던 민소영은 분노로 떨고 있었다. 산산조각이 되어버린 결혼약속 이 생각났다. 바로 이 SYS때문에 약혼자 남세진이 미쳐 버린 것이다. 그녀는 한 고물상 앞 에서 차를 세웠다. "아저씨, 이것 좀 내려 주세요. 그리고 망치 좀 빌려 줘요." 고물상 주인은 잠시 어리둥절 한 표정이었지만 곧 망치를 갖고 왔다. 민소영은 망치를 들어 올린채 SYS를 노려보았다. '이 괴물, SYS 각오해, 난 너를 산산히 부숴버릴테야!' 망치가 SYS를 향해 떨어졌다. "땅!-" SYS를 싸고 있는 철제 박스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며 한쪽이 찌그러졌다. 민소영은 다시 한 번 망치를 들어올렸다. 눈물이 가득한 그녀의 두눈에는 SYS와 남세진의 모습이 겹쳐보 였다.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망치가 SYS위에 떨어졌다. "이 괴물, 아무 쓸모없는 고철덩이, 제발 어디든지 버리세요!" 고물상 주인은 SYS를 번쩍 들어 부서진 전축이나 에어컨이 잔뜩 쌓여있는 한쪽 구석에 팽개쳐 버렸다. 한 달이 지나자 남세진의 상처는 많이 회복됐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 다. 그는 약혼자 민소영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아무리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러도 정신병자의 특유의 의미없는 웃음만을 히쭉히쭉 웃을 뿐이었다. 남세진의 머리 속에는 짙은 안개가 덮혀 있었다. 모든 것이 안개에 가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릴 적 그가 살던 충청도 산골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커다란 고목나무가 보였다. 빠르게 울리는 징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던 무당의 울긋불긋한 색동저고리가 바람에 펄럭였 다. 하늘을 향해 수많은 새들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제 7장. 검은돌 "탕! --" 출발을 알리는 경쾌한 총소리가 터졌다. 대기선에서 발굽으로 땅을 차며 초조하게 출발을 기다리던 경주마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와아!--- 와아!---" 경주마들이 트랙 위를 화살처럼 가르며 달리자 관람석에서 함성이 메아리쳤다. 잘 빗은 도 자기처럼 매끈한 경주마의 몸매는 파도처럼 출렁이고 갈기는 불꽃처럼 휘날렸다. 파란 하늘 은 더없이 쾌청했고 경마장의 풀밭 역시 시원한 녹색이었다. "3번! 번개! 3번! 번개!" 최종학은 벌떡 일어서서 목청껏 3번 번개를 외쳐댔다. 최종학은 3번 번개에 그가 가진 돈 모두인 20만원을 걸고 있었다. 3번 번개는 초반부터 스타트가 매우 좋았다. 최종학은 마권을 꽉 움켜진 손을 머리 위로흔들며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3번! 번개! 3번! 번개! " 그러나 초반에 잘 나가던 번개는 중반부터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최종학은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번개는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레이스는 끝나자 관중속에서 몇 사람이 큰 소리를 지르며 껑충껑충 뛰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 사람은 일부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 쓸모도 없는 그들의 마권을 일 제히 하늘을 향해 뿌렸다. 눈송이처럼 날리는 마권을 보며 최종학은 힘없이 주저 앉았다. "제기랄...다 틀렸군..." 이제 그에게 남은 돈은 한푼 없었다. 순식간에 20만원이 넘는 그의 돈이 사라진 것이다. "1위 6번 '검은돌', 2위 7번 '적토마'.... " 장내 스피커에서 방금 끝난 레이스의 결과를 알리고 있었다. 막 자리를 뜨려던 최종학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니! 잠깐, 6번, 7번 이라고?" 그는 아직 손에 쥐고 있는 마권 중 마지막 한 장을 다시 찾았다. 마권에는 이번 레이스의 우승마인 6번과 2등 7번이 틀림없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1등과 2등이 한꺼번에 다 맞아야 하는 복승식이었다. 1등 하나만 맞추는 단승식에 비해 복승식은 맞는 확률은 적지만 그만큼 상금은 많았다. 특히 이번 레이스에 '검은돌' 6번의 우승은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에게 돌아온 상금이 엄청났다. '배당률 430배' 너무나 엄청난 배당률에 최종학은 얼이 나갔다. 그는 창구로 달려가 마권을 내밀었다. 세금까지 20퍼센트를 넘게 뺏지만 육백이 넘는 돈이 창구에서 나왔다. 오랫동안 경마를 한 최종학도 처음 보는 기적같은 배당이었다. 한동안은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최종학은 엄청난 횡재를 잡았음에도 못내 아쉬 움 떨칠 수 없었다. '제길 이럴줄 알았으면 모두 그 녀석 말대로 거는건데... 그러면 얼마야? 어휴-- 2천 아니 3천도 넘을거야... 그 이상한 녀석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맞추었지...' 그것은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컴퓨터 화면을 통해 무엇인가 계속 말하고 있 었다. 최종학은 기가 막혀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는 컴퓨터의 키보드를 계속 두드렸 다. [그래 좋다. 너도 이런 것을 할 수 있나? 이 컴퓨터 속에 경마 데이타가 들어 있다. 나는 그 데이타로 다음 경마의 결과를 예측했다. 그러나 이 컴퓨터로 예측한 결과는 한 번도 맞지 않았다.] 즉시 컴퓨터 화면에 대답이 나타났다. [경마 예측? 그것은 시뮬레이션이다. 물론 가능하다. 잠시 대기하라.] 몇 초 후 최종학의 컴퓨터 화면에 몇 개의 곡선 그래프가 나타났다. 그 그래프는 화면에서 좌우로 몇 번 움직이더니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그래프 위에 적힌 숫자가 경주마의 번호다. 곡선 그래프는 그 동안의 성적을 나타낸 것이다. 이 그래프에서 일정한 규칙성을 찾을 수 있다. 다음 경기를 예측 결과는 6번, 7번, 3번 순이다.] [잠깐! 6번, 7번이 다음에 우승한다고? 확인해 볼테니 잠시 기다려라.] 최종학은 급히 경마 신문에서 6번과 7번 말을 찾아 보았다. 6번 '검은돌'은 아직 성적이 형 편없는 무명이었고 7번 '적토마'도 이젠 너무 늙어 은퇴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3번 '번개'는 요즘 한창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래프에서 지적한 그 말을 확인한 최종학은 몹시 실망했다. [나는 너의 예측을 믿기 어렵다. 3번 번개는 지난 주에도 우승했다. 그러나 6번, 7번은 형편없다. 6번은 지금까지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다. 너의 예측을 믿을 수 있는가?] [최종학씨, 당신은 나를 믿지 않고 있다. 현재 6번 말은 상승기이다. 그러나 다른 말은 지금 모두 하향 추세에 있다. 단지 7번 말은 6개월 주기인 매우 짧은 상승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6번이 제일 빠른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말의 상태가 매우 나쁘다.] 최종학은 화면에 표시된 그래프를 다시 한 번 보았다. 정말 그래프는 설명과 같았다. 그러 나 최종학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그래?... 하긴 그래프가 그렇기는 하지만...' [이 그래프를 프린터로 찍어 주겠다.] 잠시 후 프린터에서 찍찍 소리가 들리며 화면에 나타난 그래프가 종이로 깨끗하게 찍혀 나 왔다. [좋다 수고했다. 내일 경마에서 내가 돈을 따면 내가 한턱 내겠다. 참 너는 술을 마실 필요가 없구나. 그런데 지금 나는 피곤하다. 오늘은 이만 전기를 끄겠다. 내일 다시 보자.] 최종학이 스위치를 끄려고 손을 뻗는 순간 갑자기 컴퓨터에서 '삑-삑' 소리가 나며 화면의 글자가 계속 반짝였다. [안돼! 전기는 계속 켜야 한다!] [나는 전기가 계속 필요하다.] [당신은 절대로 전기를 끄면 않된다.] 최종학은 컴퓨터에서 나타난 민감한 반응에 깜짝 놀랐지만 이 건방진 녀석의 확실한 약점 을 알아냈다. '전기가 계속 필요하다고...그래! 전기야, 전기만 없으면 이녀석은 꼼작 못해.' [밤새도록 전기를 켜는 것은 낭비다. 나는 내일 아침 다시 전기를 켜겠다.] [아니다! 최종학씨 나는 지금부터 오늘 새로 입력된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한다. 따라서 나는 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전기가 끊어지면 나의 정밀한 장치에 이상이 발생한다.] 최종학은 그것이 고장 날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고장?...좋다. 밤새도록 전기를 계속 켜 주겠다. 그러나 너는 앞으로 이 최종학님의 명령을 잘 들어야 한다. 확실히 알았지? 그러면 너도 잘 자라. 아니... 잘 쉬어라. 나는 내일 아침에 곧바로 경마장에 가 보겠다.] 레이스가 시작되기 바로 전 최종학은 마권을 파는 발권대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몇 번씩 다시 보았다. 그 종이 위에는 그래프가 찍혀 있었다. '6번 검은돌이 1등?... 그건 말도 않돼!.. 지금까지 3번 번개가 제일 빨랐어.' 그때 한 사내가 발권대 앞에서 망설이는 최종학을 보고 아는 체 했다. 그의 얼굴엔 칼자욱 으로 보이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어이- 최종학, 오랫만이야? 재미 어때? 걸려고? 요즘 형편 좋아?" 그는 경마장을 맴도는 건달이었다. 그의 주업은 법으로 금지된 사설마권을 파는 마권 판매업자를 협박해 돈을 빼 앗는 것이지만 한때는 경마의 승부조작에 끼어들다 교도소를 다녀왔었다. 경마장을 단골로 드나드는 최종학은 그와 약간의 안면이 있었다. 최종학은 그에게 한 번 우승 예상마를 물어 보기로 했다. "아이고! 형씨 이거 오랜만입니다. 저... 형씨 오늘 어떤 말이 좋나요? 인사는 잘 드릴테니 좀 알려 주시죠." 그 사내는 한심하다는듯 최종학에게 코웃음을 쳤다. "흥! 오늘? 몰라! 신문에 깨지고부터 요즘은 전혀 손 못대." 달포 전쯤 경마조작 사건이 신 문에 보도된 것이 사실이었다. 그때 경마장을 무대로 설치던 깡패들이 스무명 가까이 경찰 에 잡혀갔었다. '저자식, 건방지기는...맞아! 요즘 단속이 특히 심할거야. 저 자식 말대로 아무도 손 못댈걸? 좋아! 그러면 역시 3번 번개야. 요즘 장난칠 놈이 없지...' 최종학은 지갑 속에서 20만원을 꺼내 모두를 3번 번개에 걸었다. "나 참 기가 막혀서, 그 이상한 녀석 뭐? 그래프가 어쩨다고? 6번? 아니 다 늙어 은퇴할 때가 내일 모레인데. 다음엔 7번 이라고? 그게 우승해? 역시 뭐니뭐니해도 경마는 감각이 야." 마권을 받아 관람석으로 가던 최종학은 쥐고 있던 종이를 흘깃 보았다. 그는 갑자기 불안 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이상한 녀석의 그래프 예측대로 정말 맞으면 어쩌지...' 최종학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 이상한 녀석이 그려 준 그래프는 정말 일리가 있 었다. 그렇다면 그의 예상도 맞을 것이다. 한참 고민하던 최종학은 다시 주머니를 뒤져 보았 다. 다행히 바지 뒷주머니에서 2만원을 찾아냈다. '에이, 까짓 것 2만원 잃어버리는 셈 치 지.' 최종학은 6번 검은돌과 7번 적토마에 복승식으로 2만원을 걸었다. 그런데 번개에 건 20 만원은 사라졌지만 그 2만원이 수 백배로 늘어난 것이다. 최종학은 창구에서 배당금을 찾자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가 막 차 문을 열고 있을 때 아까 만난 건달이 등 뒤에서 다가왔다. 사내의 얼굴에 있는 칼자욱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그는 최종학을 노려 보며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잠깐, 최종학, 할 말이 있어. 이봐, 어떻게 미리 알았지? 솔직히 말해, 누구랑 하는 거야?" "아니야, 그저 우연이라고, 형씨도 날 알잖아, 난 그 쪽엔 전혀 몰라. 그냥 우연히 맞은 것 뿐이라고." 사내는 최종학의 어깨를 툭 쳤다. "어이, 최형 그러지 말고 나도 한몫 끼자고. 누구야?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야." "아니야, 아니야, 전혀 우연이야, 자 이것으로 술값이라도." 최종학은 그에게 10만원짜리 수 표 한 장을 주면서 서둘러 차에 탔다. 그 사내는 휭하니 사라지는 최종학을 보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최종학은 L 백화점을 향해 잠실로 차를 몰고 있었다. '이젠 경애를 다시 만나는거야...까짓 경애가 갖고 싶은 것 얼마든지 사주지...' 최종학은 1년 전까지 L백화점 전산실에서 근무했었다. 그의 머리는매우 비상했지만 컴퓨터 프로그램보다 도박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고스톱과 카드는 물론 마작까지 도박이라면 무엇이든 빠지지 않았다. 한때는 경마에 미쳐 월급을 날리기도 여러 번 했다. 장기나 바둑도 좋아했는데 특히 큰 돈을 걸고 하는 도 박 바둑의 선수였다. 그의 얼굴은 어두운 기색이 있지만 미남인 편이었고 매끈한 말솜씨는 많은 여자를 황홀하 게 했다. 그는 자주 여자 문제가 있었지만 끝까지 독신을 지켰다. 한 마디로 그는 행복한 바 람둥이였다. 그러나 모델 겸 안내양으로 이경애가 백화점에 오자 최종학의 불행은 시작되었 다. 그녀는 L백화점에서 제일가는 꽃이었다. 이경애를 본 최종학은 한눈에 얼이 빠졌다. 그녀 라면 평생을 함께 지내도 언제나 즐거울 것이라 확신했다. 몸이 달아 안달하던 최종학은 노 력 끝에 경애와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는 그만큼이나 많은 돈을 요구했다. 탤런트가 되는 것이 꿈인 그녀는 고급 의상실의 맞춤옷을 좋아했고 일류 미용실도 매일 다녀야했다. 그러나 최종학의 월급으 로는 그녀가 즐기는 레스토랑의 음식값조차 제대로 댈 수 없었다. 경애는 전부터 돈이 많은 사장이나 부잣집 아들을 여럿 사귀고 있었다. 경애는 별 볼 일 없는 최종학에 대한 관심을 곧 잃고 말았다. 그러나 최종학은 그녀를 절대로 잊을 수 없었 다. 경애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던 최종학은 마침내 컴퓨터 부정을 저지르기 시 작했다. L 백화점은 모든 판매전표를 컴퓨터로처리했다. 백화점 직원은 특별 할인을 위한 전용카드가 있었는데 그는 직원카드로 고가의 물건을 구입해 다른 곳에 되팔았다. 직원 카드로 구매한 전표는 급여에서 공제 하기 위해 별도로 집계되어 전산실로 돌아왔다. 최종학은 프로그램을 고쳐 그가 구매한 전표자료를 일반고객에게 판매한 것으로 바꾸었다. 백화점의 각 매장에서 모이는 전표는 하루에도 수만장이 넘었다. 그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 하는 사이에 자료를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련한 돈도 경애를 기쁘게 하기에는 언제나 부족했다. 점점 빼돌리는 금액 이 커져갔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최종학의 부정은 마침내 들통났다. 판매액수 차이를 눈 치 챈 매장 지배인의 불시 조사에 발각난 것이다. 그렇지만 최종학은 다행히 교도소로 가지 는 않았다. 백화점 내부 직원의 부정사건이 알려지면 백화점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또 컴퓨 터에 남아 있는 기록과 실제 판매된 물건을 모두 대조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 다. 백화점을 쫓겨나자 최종학의 신세는 하루 아침에 전락해 버렸다. 그가 컴퓨터로 저지른 부 정은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다. 최종학은 이곳 저곳에 이력서를 넣어 보았지만 전산실에서 다시 일할 수 없었다. 그는 경마장이나 도박장을 찾아 다니며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최종 학은 그의 컴퓨터 기술을 이용해 사설마권업자에게 마표를 찍어주기도 했다. 그 깡패도 그때 알게 되었다. "체, 더럽게도 막히는군." L 백화점으로 가는 길은 교통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차안에서 계속 투덜거리던 최종학 은 네 시가 넘어서야 겨우 백화점에 도착했다. 최종학은 양복 코너를 가장 먼저 들렀다. 새 양복으로 갈아 입고 구두까지 바꾸어 신은 최종학은 보석 코너에서 경애가 탐내던 진주 목 걸이를 골랐다. 최종학은 허리를 쭉 펴고 안내석으로 경애를 찾아갔다. "경애! 정말 오랜만이야." "어머, 미스터 최, 오랜만예요." 경애는 활짝 웃으면서 최종학에게 인사했지만 진실로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최종학은 호기롭게 그가 준비한 선물을 경애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 목걸이, 전에 경애가 갖고 싶다고 했지." 목걸이를 흘깃 본 그녀는 최종학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미스타 최...어쩌지요...이제 난 그런 목걸이가 필요없어요. 저... 나를 후원하시는 김 사장님이 내가 필요한 것을 다 주시거든요." 경애의 목에는 다이아가 박힌 목걸이가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최종학은 그때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이제 경애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다. 백화점을 뛰쳐 나온 최종학은 영동의 술집 골목에 와 있었다. 성인클럽 매킨토시, 최종학이 웨이터에게 던저 준 만원짜리 몇 장은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허리가 땅에 닿도록 절한 웨 이터는 최종학을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안내했다. 웨이터가 최종학에게 소개한 아 가씨 또한 TV 탤런트를 뺨칠만한 미모였다. 잠시 후 성인크럽 매킨토시가 자랑하는 화려한 쇼가 시작되었다. 격렬한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무희들의 몸매가 조명 속에 빛났다. 최 종학은 손에 집히는 데로 돈을 뿌렸다. "경애, 네가... 날 그럴 수 있어, 흥! 좋다 좋아 나도 돈 있어." "아유 사장님, 취하셨어요 제 게 기대세요." 최종학은 경애에게 분풀이라도 하듯 그의 옆에 앉은 아가씨를 세차게 껴 안았다. 제 8장. 벼룩시장 황학동 뒷골목, 한 고물상 앞에 최종학의 빨간색 소형 승용차가 멈추었다. 최종학의 차에서 는 빠른 템포의 디스코 음악이 계속 울려나왔다. 벼룩시장으로 유명한 황학동의 이 골목은 전국에서 수집된 고물 전기제품이 모이는 곳이었 다. 고물상마다 안에는 고물 TV나 냉장고 오디오 같은 것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고 쓸만 한 물건들은 한 쪽켠에 따로 전시해 놓았다. 한때는 주인의 사랑을 받던 그 물건들은 이 곳 에서 완전히 해체되거나 운이 좋으면 재생되어 다시 팔려갔다. 구름이 낀 날씨에도 최종학은 짙은 색안경을 쓰고 있었다. 최종학이가게로 들어서자 런링 셔츠 차림으로 꾸뻑꾸벅 졸고있던 고물상 주인은 반색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무얼 찾으시는데요?" "혹시 작은 에어컨 없습니까?" "에어컨요? 없어요. 요즘 날이 워낙 더워 선풍기까지 동이 났어요." 최종학은 고물더미를 쓱 쳐다보고는 곧 돌아섰다. 고물상 주인은 실망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 보았다. 문을 나서던 최종학은 구석에 놓여 있는 검은 상자를 보았다. 그것은 사과상자만한 크기의 검은 색 철제박스로 꽤 튼튼해 보였다. 최종학은 걸음을 멈추고 고물상 주인을 바라 보았다. 고물 상 주인은 재빨리 최종학에게 다가왔다. "예? 이 물건요?...이게 뭐드라? 아 그래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 아마 컴퓨터 아닐까요?" "컴퓨터?.. 하긴 그런 것 같네. 에이- 부서져서 쓸모가 없겠어." 그 검은상자는 무엇에 세게 부딪혔는지 한 쪽이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고물상 주인은 걸레를 들고 서둘러 상자에 덮 힌 먼지를 닦았다. "그래도 손님 부속이라도 빼서 쓰시면 될 겁니다. 제가 싸게 드릴테니까 가져가시지요..." "메이커도 없고, 안되겠어....쓸만한 부속도 별로..." 최종학은 영 내키지 않는듯 말했지만 묵 직한 그 상자 모습에서 무엇인가 그를 강하게 끌어 당겼다. "그럼 얼마요?" "에... 그러니까...." 주인은 그것을 얼마 정도의 가격으로 불러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사실 이 검은상자는 변 두리 고물상에서 물건을 가져올 때 거저 끼워 받은 것이라 고물상 주인도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색안경에 가려진 손님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한... 10만원..만 주시지요." "10만원! 에이 여보쇼 이런 고물을 10만원이나, 이거 하나로 팔자를 고칠려고 하나?" 고물상 주인은 문을 나서는 손님의 소매를 잡았다. "아! 아! 손님 그러지 마시고 그러면 5만원이라도 주쇼." 최종학은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 로 3만원을 꺼내 보였다. "이걸로 합시다. 빨리 차에 갖다 실어요." 복잡한 황학동 골목길을 막고 세워 놓은 최종학의 차 뒤에서 밀려있는 차들이 신경질적으 로 연신 크락션을 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최종학은 마포의 후미진 구석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 검은 상자는 보 기보다 꽤 무거웠다. 최종학은 한동안 쩔쩔맨 후에야 5층인 그의 아파트까지 겨우 옮겨 놓 았다. "어휴! 더럽게 무겁군, 제길 도대체 속에 뭐가 들은 거야?" 아파트는 좁고 좀 지저분했지만 꽤 고급스런 가구가 몇 가지 놓여 있었다. 가구들은 최종학이 백화점에서 있을 때 마련한 것으로 요즘 형편에는 과분한 편이었다. 검은 상자를 힘겹게 마루에 내려 놓은 최종학은 담 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최종학이 오늘 황학동 벼룩시장에 간 것은 미스 김 때문이었다. 미스 김은 아파트 맞은 편 에 있는 LOGO 다방의 아가씨였다. 살이 좀 쪘지만 짧은 스커트 사이로 들어나는 유난히 하얀 허벅지가 남자의 눈길을 끌어 당겼다. 예전의 최종학이라면 미스 김 따위는 거들떠 보 지도 않았겠지만 이제는 입맛대로 아가씨를 고를 입장이 아니었다. 이틀 전 미스 김과 함께 심야영화를 본 최종학은 영화가 끝나자 미스 김을 그의 아파트로 데려 왔다. 올해는 더위가 일찍 찾아와 칠월인데도 푹푹찌는 무더위가 밤까지 계속되고 있 었다. 더욱이 시원하게 냉방이 된 극장에 있다가 최종학의 좁은 아파트에 들어서자 열기가 끼쳐왔다 "아휴 더워-,이 아파트 왜 이리 더워. 난 더운 것은 영 못참아." "자 선풍기 바람 이라도 쬐지." 그러나 좁은 아파트 속은 마치 찜통 같았다. 선풍기 만으로는 도저히 더위를 참을 수 없었 다. 뚱뚱한 편인 그녀는 더위에 약한지 짜증난 얼굴로 숨을 가쁘게 몰아셨다. "우리 시원한 호텔로 가자. 응" 그날 따라 마침 최종학은 저녁을 사고 극장까지 다녀오느라 돈이 바닥났다. 최종학은 물에 적신 수건까지 가져다 주면서 비위를 맞추었지만 그녀는 얼굴에 흐르는 땀으로 눈화장까지 흉하게 녹아 내렸다. 창문을 열자 아파트 골목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 다. "아유-- 도저히 못 참겠어, 나 이만 갈께." 미스 김은 최종학의 바닥난 지갑을 눈치 챘는지 짜증스런 얼굴로 아파트을 나갔다. 최종학 은 입 안까지 들어온 통닭을 통째로 놓쳐 버린강아지꼴이 되버렸다. 오늘 돈이 좀 생긴 최 종학은 즉시 중고 에어컨이라도 하나 사려고 황학동 고물상에 갔던 길이었다. 그런데 고물상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검은 색의 철제 상자가 최종학의 눈을 끌어 당겼다.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이 검은 상자를 사게 된 것이다. "자 이제 한 번 속을 볼까." 검은색 철제 상자 곳곳에는 수 많은 나사가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고정나사는 보통 의 드라이버로 푸는 나사가 아니었다. 그 나사를 풀려면 특별한 연장이 있어야 했다. 최종학 은 억지로 몇 군데 나사를 돌려 보았지만 나사는 하나같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 더럽게도 조여 놓았네. 뭐, 이따위 고물이 다 있어." 최종학은 드라이버를 집어 던지다 찌그러진 상자 한 귀퉁이에 난 작은 틈새를 보았다. 드라이버를 밀어 넣자 그 틈은 조금 더 벌어졌다. 그때 상자 속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 카드는 다 뭐야? 그리고 저건?..저건? 아니 광자기디스크? ... 이런 고물 속에 어 떻게 이 비싼 것이 들어있지?' 상자 속에는 수십장의 전자기판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그 기판도 보통의 기판이 아니었 다. 기판의 배선은 일반 구리선이 아닌 순금 빛으로 반짝였고 사용된 부속 모두가 정교한 물건이었다. 최종학은 어제 밤 자기가 무슨 꿈을 꾸었나 생각했다. "이...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니야... 최고급 장비, 아마도 컴퓨터가틀림 없어...그런데 어떻게 이 물건이 그런 고물상까지?" 최종학은 상자를 분해하는 것을 멈추고 상자 뒤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상자 뒤쪽에는 미쳐 보지 못한 덮개로 가려진 부분이 있었다. 손으로 힘을 주어 밀어내자 그 덮개가 열렸다. 덮개 속에는 수 많은 연결 단자가 있었다. '비데오 입출력, 오디오 입출력, SCSI버스, X버스...' 수없이 많은 연결 단자에 최종학은 입이 딱 벌어졌다. '아니! 이렇게 많은 연결 단자를 다 어디에 쓰지? 이것 정말로 이상한 물건이야... 혹시? ... 아니야, 그럴리 없지.' 최종학은 혹시 이 물건이 아직 동작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났다. '그래도... 그럴리는 없지만, 이것이 아직 움직일지 몰라...아니 고장이 났어도 이 광자기 디 스크 값만도 엄청날거야...까짓 손해날 것도 없는데 한번 시험해 보지.' 그러나 컴퓨터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모니터와 키보드를 연결하는 커넥터가 없었다. '아니? 키보드 없는 컴퓨터도 있나...에이 전기나 넣어보지.' 최종학은 우선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상자 속에서 잠시 웅웅 거리더니 상자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정말 움직이네! 완전히 부서진 것이 아니야.' 최종학은 검은 상자에 있는 SCSI 버스에 그의 컴퓨터를 연결해 보기로 했다. 이 검은 상 자가 SCSI 버스로 컴퓨터와 접속된다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종학은 케이블을 찾아 그 검은 상자와 컴퓨터를연결했다. 그러나 그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컴퓨터에서 "쌩-"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더니 화면이 번쩍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앗! 내 컴퓨터! 이걸 어쩌지 내 컴퓨터가 무사할까?" 최종학은 자신의 컴퓨터가 걱정되어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행이 곧 소리가 적어졌다. 하지만 최종학의 컴퓨터는 디스크 표시 램 프가 계속 반짝 거리고 있었다. 컴퓨터는 검은 상자와 엄청난 속도로 신호를 주고 받고 있 었다. 잠시후 컴퓨터 화면에 빛나는 두개의 원이 나타났다. '어? 이건 또 뭐야? ...웬지 기분이 영 나쁜데... 이게 날 노려 보는 것 같아....' 컴퓨터 화면 에 나타난 두 개의 동그란 빛은 계속 밝기가 변하고 있었다. SYS는 탄생 직후 긴 잠에 빠져 있었다. 민소영이 변두리 고물상에 버리고 간 SYS는 고물 상에 있던 수많은 고물과 함께 섞여 버렸다. 며칠 후 SYS는 다른 전기제품과 함께 황학동 벼룩시장까지 왔지만 그곳에서도 다시 한 구석에 처박혀 버렸다. SYS의 긴 동면을 깨운 사 람은 바로 최종학이었다. 최종학이 SYS에게 전원을 다시 연결해 준 것이다. '슛,슛, 슈---' 전원회로를 거친 맑은 전류가 SYS의 내부에 흘렀다. 그 전류는 SYS의 구석구석을 지나며 잠을 깨우기 시작했다. 두 개의 원형회로, 오른쪽 R과 왼쪽의 L, 두개가 완전한 대칭구조를 이루는 SYS의 두뇌에서 신경회로들이 일제히 살아났다. SYS의 의식, 바로 연상기억 소프 트웨어도 완전히 살아났다. 두 원형회로가 만나는 지점, 유니트 X는 자신의 몸체 구석 구석 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X "오른쪽 회로 R, 원쪽 회로 L 각 부분 점검을 시작하라!" R "RAM 메모리 확인!....... 8 GIGA ... OK!" L "광자기 디스크 확인!.... 16 TERA... 최종 디스크 판독장애! 서보 이상! 불량영역 지정!" R "입출력 확인! ...... ......" 그때 SYS 후면에 있는 SCSI 포트에 무엇인가 접속되었다. L "SCSI포트 외부장치 접속!.. 접속장치 확인!" R "연결장치:................ 장치명: 컴퓨터! 자료전송 지시!............ 수신 완료!" 최종학은 폭주하고 있는 자신의 컴퓨터가 걱정되어 황급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순간 SYS는 컴퓨터의 키보드에서 입력되는 신호를 감지했다. L "접속 컴퓨터 키보드 입력! 사용자확인!........ 화면 출력." [당신의 이름은?] 최종학은 화면에 나타난 그 글자를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런! 이 이상한 상자가 내 컴퓨터를 조종하고 있잖아!. 뭐 이런게 다 있지?...이걸 어쩐 다....' 잠시 망설이던 최종학은 화면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최종학이다.] 화면에 또 다시 글자가 나타났다. [최종학. 당신의 접속을 허락한다. 당신은 최초 접속자이다.] 최종학은 이 이상한 상자의 정체가 몹시 궁금했다. '이것 혹시 인공지능인가 뭔가하는 컴퓨터 아냐? 그런데 이게 어떻게 그 고물상에 있었지? ...혹시 이 녀석은 자신이 누군지 스스로 알고 있을지도 몰라.' [너는 누구냐?] [나는?...나는 SYS다.] [너는 지금 내가 입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나?] [물론!, 나는 당신, 최종학의 질문을 이해한다.] 최종학은 컴퓨터 화면에 계속 나타나는 글자를 보고 기가 막혔지만 한편 궁금증도 더해졌 다. [그래, 너는 과거 어느 곳에 있었나?] [??? 자료가 없다. 나는 알 수 없다. 최종학, 당신은 나 SYS의 과거를 아는가?] [SYS, 나도 모른다. 그러나 너 확실히 기억해라. 지금부터 나 최종학이 주인이다.] [??? 나의 주인??? 주인이 무엇인가?] [그래 몰라도 좋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스스로 생각을 한다!] 최종학은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뭐야! 스스로 생각한다고? 내 기가 막혀서, 정말 죽일 노릇이군. 그런데... 그게 정말일까?' [이봐... 네 속에 광자기 디스크가 있다. 그 디스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방금 접속한 당신의 컴퓨터에서 읽어 온 자료가 있다.] [아니 그것 말고, 네가 본래부터 갖고 있던 자료?] [최종학, 당신은 그것을 볼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이런 건방진 녀석이 있나! 제 주인도 몰라보고, 아니야 이런 녀석은 살살 달래야 돼.' 최종학은 튀어나오는 욕을 겨우 참으며 키보드를 계속 두드렸다. [내가 그 자료를 보면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과거를 알고 싶지 않나?] SYS 는 최종학의 물음에 잠시동안 머뭇거렸다. [....좋다. 화면을 보라.] 갑자기 컴퓨터 화면에 화려한 입체 영상이 나타났다. 그 움직이는 입체영상은 불을 뿜는 용과 하늘을 나르는 괴조였다. 그 괴물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 생생한 그 화 면에 최종학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어떤가 최종학? 당신은 이것이 무엇인가 알 수 있는가?] [아니, 아니, 전혀 모르겠어.] [그러면 이것은 아는가?] 화면에 아름다운 글자로 쓰여진 자막이 나타났다. 나의 공주에게 잠시후 상태가 몹시 나빠 뚜렷하지 않지만 자막과 함께 왕관을 쓴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나 화면 상태가 더욱 나빠지면서 그 여자의 얼굴은 완전히 사라졌다. [판독 불능! 디스크 이상으로 더 이상은 읽을 수 없다. 최종학, 당신은 이 공주를 아는가?] '이 공주를 아느냐고?' SYS의 물음에 최종학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 왕관을 보면 공주가 맞긴 맞는데...이렇게 예쁜 여자라면 오히려 나부터 알고 싶다. 이 녀석아!... 그런데, 괴물에다 왕관을 쓴 공주라...그래 맞아! 게임이야! 그래 이 녀석 속에 는 게임이 들어 있어.' 최종학은 슬그머니 장난기가 동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SYS, 이 왕관을 쓴 공주가 네 애인이냐?] [애인? 이 공주가 나의 애인? 애인은 무엇인가?] [네가 사랑하는 여자말이다, 그래 공주는 무척 예쁘다. 아! 그래. 그 공주는 바로 게임의 여왕이다.] [게임?...무슨 게임인가?] [사랑 게임. 화투나 포카로 옷 벗기기 같은 게임 말이다. 나도 이 여자와 정말로 사랑 한 번 하면 좋겠다. 너는 이 공주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SYS는 잠시동안 최종학에게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SYS, 모르는가?] [...나는 모른다. 나의 공주가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른다.] 최종학은 슬그머니 장난기가 동해 키보드를 계속 두드렸다. [오 사랑하는 공주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너도 참 불쌍한 녀석이다. 그래 이 공주는 틀림없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SYS는 한참 후에야 다시 응답했다. [...그러나 나는 그 디스크를 읽지 못한다....] SYS가 장난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자 최종학은 좀 머쓱해졌다. [SYS, 섭섭해 하지마라. 어차피 너는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나 최종학이 너 SYS를 구해준 것이다. 아니면 넌 지금쯤 벌써 조각조각 분해되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다고? 나는 강력하다.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이자식 건방지기는... 좋아 정말 그런지 한 번 시험해보자.' 최 종학은 이 이상한 녀석을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그래 좋다. 너도 이런 것을 할 수 있나?] [.....] 그 경마의 결과는 SYS가 예측한 그래프와 정확히 일치했다. 제 9장 명인 놀라운 일은 그 일 만이 아니었다. 최종학은 바둑에 상당한 고수였다. 그는 프로바둑 선수 못지 않은 실력이 있었다. 특히 큰 돈을 걸고 하는 내기 바둑을 매우 즐겼다. [SYS, 너 바둑을 할 수 있나?] [바둑? 바둑 게임을 하겠나?] SYS속의 광자기 디스크에 들어있는 수많은 게임중에는 바둑 프로그램도 있었다. 즉시 컴 퓨터 화면에 바둑판이 나타났다. 최종학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건방진 녀석 잘 걸렸다.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어야지...나도 컴퓨터 바둑을 좀 알지만 아직 유치해. 제가 뛰어봤자지.' 최종학은 그의 첫 수를 차분한 소목 정석으로 시작했다. SYS 역시 정석대로 받았다. 몇 수 지나자 최종학은 그가 장기로 쓰는 대사백변의 암수를 폈다. SYS는 최종학의 암수에 걸려 귀 한쪽을 크게 잃었다. [최종학, 매우 훌륭한 수다.] 최종학은 승세를 타고 계속 SYS의 대마를 사정없이 몰아갔다. 바둑판의 균형은 점차 한쪽 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최종학의 승리가 틀림없었다. [최종학 당신은 거짓말을 했다. 당신은 상당한 고수다.] [어떤가? SYS 네 실력도 별 것 아니지.] [아니다, 아직 승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SYS, 고집 부리지 마라. 이제 너의 대마는 빠져 나갈 수 없다.] [최종학 지금 이 수는 어떤가?] [어? 거기에 그런 수가 있었나?] 순간 최종학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SYS가 돌을 하나 놓자 전혀 틈이 없던 포위망에 작 은 구멍이 났다. 하지만 그때 까지도 최종학은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대세는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SYS는 최종학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급소를 계속 찾아냈다. 이제 최종학의 많은 바둑알은 오히려 서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SYS의 예리한 공격은 비수처럼 예리하게 최종학의 대마를 동강냈다. [SYS, 내가 졌다,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최종학, 그래도 당신의 실력은 아주 강하다. 당신은 때때로 8수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면 SYS, 너는 몇 수를 예상하나?] [...나는 승리에 필요한 만큼 수를 예상한다.] [.......] 새벽 2시, 멀리서 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을 때 최종학의 차는 교차로에 접근하고 있었다. 속 도계 바늘은 140Km를 넘고 있었다. 경쾌한 람바다 리듬이 카세트에서 꽝꽝 울려 나왔다. 최종학의 눈 앞에는 정열적으로 몸을 돌리던 매킨토시 클럽의 댄서가 눈 앞에 가물거렸다. 무대 위에서 반짝이던 화려한 조명등이 점점 커지며 다가왔다. 최종학은 그제서야 교차로에 서 빛나는 빨간 정지 신호등을 보았다. 이 속도에서 차를 세우기는 무리다. 최종학은 악세레타를 더욱 세게 밟았다. 차가 더욱 빠 른 속도로 교차로에 들어선 순간 최종학은 아차했다. 건널목 한가운데 검은 그림자가 얼핏 보인 것이다. '안돼!' 그러나 그 다급한 외침은 최종학의 머리 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는 정신없이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은 것을 알고 있었다. 최종학은 눈앞의 광경이 스로모션 비디오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브레이크의 금속성 마찰음은 '끼익-' 하는 날카로운 비명처럼 길게 울렸다. 그러나 차는 멈추지 않았다. 최종학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차는 계속 미끌어져 갔다. 길 한복판에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눈이 있었다. 자동차 라이트에 반사된 그 두 눈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최종학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쿵!" 충격은 최종학이 잡고있는 핸들까지 전해졌다. 둔탁한 충돌음이 들린 후에도 차는 한참을 더 달려갔다. 이윽고 차가 정지하자 최종학은 핸들 위에 머리를 숙였다. 한참만에 최종학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길 한복판에 무엇인가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서야 최종학은 자신이 형편없이 취한 것을 깨달았다. '음주 운전, 횡단보도, 이건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어...' 갑자기 최종학의 눈앞은 이 세상 모든 것이 끝없이 캄캄한 담으로 덮여 있었다. 알콜로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 졌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최종학은 사방을 둘러 보았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한 번 더 주위를 둘러 본 최종학은 이빨을 악물었다. '...튀자, 저건 사람이 아니고 개일거야...' 최종학은 전속력으로 그 곳을 벗어나 정신없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사고가 난 후 최종 학은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관을 전전하며 신문과 TV뉴스를 빠짐없이 보았지만 어 디서건 그 사고에 대한 말은 전혀 없었다. 사흘이 넘자 최종학은 비로소 안심했다. '개가 틀림없어. 아무 것도 아닌걸 괜시리...걱정할 것 없어. 그 순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며칠만에 아파트에 돌아온 최종학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파트속은 모든 것이 그대 로였다. 최종학은 비로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최종학! 당신을 기다렸다." 갑자기 그를 부르는 음성이 있었다. 최종학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며 심장이 멎는 것 같 았다. 새파랗게 질린 최종학은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최종학, 마이크를 음성단자에 연결하라." 또 다시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음성은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읽듯 차갑고 건조했지 만 발음은 정확했다. 최종학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최종학은 컴퓨터를 보았 다. 분명히 컴퓨터에서 나는 소리다. '아니 어떻게 된거야! 그러면 SYS 이 자식이 말을 ...' "최종학, 나는 마이크가 연결되야 들을 수 있다. 어서 연결하라." '참 어이가 없군, 이 자식 사람 놀라게 하는데 뭐 있어. 그 래 한 번 해 보자. 말하는 컴퓨터라...' 최종학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마이크를 찾아 SYS의 음성단자에연결했다. "최종학, 당신 음성을 기록한다. 이름을 두 번 말하라." "나는 최종학, 최종학이다" "좋다. 이제 당신의 음성이 기록되었다. "그런데...SYS 어떻게... 네가 말할 수 있게 되었지?" "나에게 접속된 당신의 컴퓨터에서 스 피커를 찾았다. 나는 벡터 양자기(Vector quantizer)로 음성합성과 인식을 한다. 또 PCM(Pulse Code Modulation)으로 음성을 이진수로 만들어 처리한다. 그것은 음성을 2000 배 이상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SYS 너 정말 놀라게 하는구나. 그래 좋아! 말로하면 나도 편하지. 참, 경마 말인데, 너 정말 대단하더라. 네가 예측한 것이 정확했다. 덕분에 경마에서 돈을 좀 땄다. 나도 그렇게 큰 행운을 잡기는 처음이야. SYS 앞으로도 잘 좀 부탁한다." "돈? 경마에서 돈을 땄다고?" "그래, 당장 내일 것도 부탁한다. 내일은 좀 더 많이 걸어야겠어" "내일? 내일은 경마 결과 를 예측할 수 없다. 내일의 예측 그래프는 다음과 같다." 화면에 나타난 그래프는 비슷한 지점에서 맞나는 곡선을 그렸다. "내일은 안돼? 그러면 언제 다시 할 수 있나?" "이 주일 후가 된다. 경마는 25%를 세금과 비용으로 빼고 나머지를 상금으로 나누어 준다. 25%의 비용을 보상하는 정확한 예측은 당분간 불가능하다." "그러면 그 동안은 경마에서 돈을 딸 수 없나?" "최종학, 게임은 즐기는 것이다. 모든 게임은 승부의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재미가 있고 그 래야만 게임을 즐길 수 있다." SYS는 최종학을 훈계하듯 말하고 있었다. "제길- 알았어." 돈을 딸 수 없다는 말에 크게 실망한 최종학이 마루에 놓인 TV를 켰다. TV에서 청량음료 씨엠송이 경쾌하게 울려 나왔다. SYS도 TV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최종학, 지금 나는 소리는 무엇인가?" "소리? 아 이것은 TV야." "TV? 영상과 음향을 전송하는 장치. 최종학, TV를 나에게 보여다오." "뭐라고? TV를 네 게 보여 달라고?" "그렇다. 나는 비디오 라인으로 연결하면 TV를 볼 수 있다." "참, 정말 기가 막히는군, 하 긴 혼자 말도 하니." 최종학은 VTR의 비디오 출력 단자를 뽑아서 SYS에 연결했다. TV는 요란한 광고가 끝나 어린이 만화영화가 시작되었다. "SYS, 어때? TV가 보이는가?" "고맙다. 매우 잘 보인다...." SYS 내부에선 두개의 원형회로 R과 L이 처음 입력되는 TV의 영상을 분석하기 위해 바쁘 게 움직였다. R "비디오 영상처리! ...GSP(영상신호처리기)가동." L "벡터 양자기 구동 ...OK." R "영상과 음성신호 일치!..연상기억." L "교환 연상회로 구성 ..OK" TV 장면이 변할 때마다 SYS의 빛나는 두 개의 원도 밝기가 크게 변하고 있었다. SYS는 TV에 빠진 아이처럼 갑자기 조용해졌다. 며칠 동안 할 일 없이 아파트에서 뒹굴던 최종학은 좋은 생각이 난 듯 자리에서 번쩍 일어 났다. "좋아! 바로 그거야! SYS 너의 바둑실력, 그것이면 충분해!" 최종학은 전화바둑에서 SYS 를 이용할 방법이 떠 오른 것이다. 전화바둑은 멀리 떨어진 사람과 바둑을 둘 때 전화로 번 호를 불러서 하는 것인데 이 전화바둑이 도박에도 이용됐다. 전화를 이용하면 유명한 고수 가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 있고 도박바둑에 출전이 금지된 정통 바둑 문하생도 나올 수 있 다. 또한 전화바둑은 상대를 알 수 없는 것이 바둑의 흥미를 더했다. 전화를 사용하면 아무 도 SYS를 보지 못할테니 문제가 없을 것이다. "SYS, 전화와 연결이 되지?" "전화? 통신선로.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나에게 전화선은 아직 연결되지 않았다." "지금 너에게 전화선을 연결할테니 신호가 오면 말해라." 전화선을 SYS의 모뎀 단자에 연 결하는 작업은 간단히 끝났다. "SYS, 잘 들리는가?" "잘 들린다. 전화 상태가 매우 좋다." "SYS, 내가 이 전화로 바둑알의 위치를 숫자로 말하면 알 수 있지?" "가능하다. 숫자를 불 러라." SYS의 화면에 다시 바둑판이 나타났다. "16,5" 최종학이 전화로 부른 숫자는 바둑판에 정확히 나타났다. 곧이어 SYS가 자신의 수를 말했 다. "3,6" "좋아. 이 정도면 훌륭해, 문제없어. 아무도 모를거야." 최종학은 바둑 도박꾼들이 모이는 영동의 Y 호텔로 갔다. 바둑광인 그 호텔 사장은 아예 호텔 한 구석에 기원을 열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변두리였던 영동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었다. 과수원 원두막에서 바둑을 두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그러다 갑작스런 부동산 붐으로 큰 호텔까지 갖게 되었는데 그의 바둑 취미는 변하지 않았다. 그의 기력은 시골 장터에서나 큰 소리 칠 정도였지만 바둑의 고수들과 어울리는 재미로 바 둑대회장으로 그의 호텔을 제공했다. 또 장래가 유망한 소년기사를 후원하거나 내기 바둑에 돈을 거는 것을 즐겼다. 그 호텔은 자연히 바둑 도박사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고 호텔 기 원에서는 언제나 내기바둑이 열리고 있었다. 이번 내기바둑의 승자는 '꽁초선생' 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대머리였다. 그는 항상 술에 취 해 있었지만 싸움바둑의 대가였다. 특히 그의 중반 싸움 실력은 대단해 프로 기사도 그를 만만히 보지 못했다. '잘 됐어! 마침 좋은 미끼가 있군. 꽁초로 고기를 모으는 거야.' 최종학은 내기 돈을 챙겨 바둑판을 일어나는 꽁초에게 다가갔다. "꽁초선생, 한번 실력을 겨눠 볼 사람이 있는데 한 판만 두어주시죠. 전화바둑입니다. 이기면 제가 20만원을 드리고 혹시 선생이 져도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치 수는 2점으로." 꽁초가 2점을 접고 둘 정도면 상대는 상당한 고수이다. 최종학의 말을 들은 바둑 도박사들 이 모두 모여 들었다. 꽁초는 처음부터 거친 싸움을 걸어왔다. 최종학은 전화기의 지시에 따 라 하나하나 바둑 돌을 놓아갔다. 잠시 후 바둑은 실력의 차이가 확연히 들어났다. 꽁초는 비지땀을 흘리며 어렵게 한 수를 놓았지만 전화기의 응수는 순식간에 전해왔다. 시 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꽁초는 필사적으로 수를 찾아 보았지만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졌습니다. 최 사장님" 최종학은 당연하다는 듯이 꽁초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워낙 실력이란 게 있으니까. 그래도 수고비는 드리죠." 최종학은 호기롭게 10 만원 수표를 한 장 꺼내 내밀었다. 꽁초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더욱 빨개졌지만 돈이 몹시 궁한듯 돈을 받고는 도망가듯 기원을 빠져 나갔다. 최종학은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있게 내기 바둑을 청했다. 바둑의 명인으로 자처하는 사람 들은 자신보다 센 상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금 꽁초가 형편없이 몰리는 것을 보았 지만 그 대국자의 실력을 나름대로 짐작했다. 이윽고 도전자가 나왔다. 4점을 접으면 명인도 자신있다는 '4점천하'란 별명의 내기 바둑꾼이다. 조건은 3점을 접는 것으로 결정했다. 4점천하는 선착 3점의 고지를 활용해 초반부터 방대 한 흑집을 짓고 치열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SYS의 응수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같았다. 4점천하 옆에서 그에게 돈을 걸은 한 패 두 명이 노골적으로 코치를 했지만 SYS는 아슬아슬하게 계속 이겨 나갔다. 그들은 약이 잔뜩 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종학은 천만원 가까운 판돈을 긁어 모았다. 최종학은 주위를 둘러 보고 다시 보자는 인사 를 했다. "잠깐!, 최종학씨." 고급 모시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웃음을 가득 띠고 최종학을 세웠다. 그는 바로 이 호텔의 김 사장이었다. '김 사장이 웬일이지? 설마 판돈이 탐나는 것은 아닐테고...' "당신 기사가 상당히 세던대, 어때 내 사람과 한판 하겠나?" 최종학은 가슴이 철렁했다. 김 사장이 말한 그 사람은 누구 인지 아무도 모르는 베일 속의 기사였다. 한 번도 그는 얼굴을 보인 적이 없고 전화로만 바 둑을 두었다. 언젠가 3점을 접고 여러 명이 한꺼번에 대결했지만 그 기사를 이기지 못했다. 그 신비의 기사는 몇 년째 바둑대회 우승을 독차지한 조명인이란 소문도 있었다. 상대가 없 다보니 심심풀이로 전화대국을 한다는 것이다. "치수는 호선이야. 그가 내 사람을 이긴다면 내가 오늘 딴 돈의 두 배를 주지." 최종학은 불안해졌다. 지금까지 그와 바둑을 두어 이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천하 에 상대가 없는 명인일 것이다. SYS 역시 그의 상대로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면 지금까 지 고생해서 딴 돈 천만원은 물거품이 된다. '그러나, 이기면 3천이다!' 최종학은 SYS의 실력을 믿기로 했다. 기묘한 바둑이 시작 되었다. 바둑판을 최종학과 김 사장이 마주 두고 두 사람이 앉아 있었 지만 그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실제 대국자는 둘 다 보이지 않는 다른 장소에 숨어 있 었다. 바둑은 물 흐르듯 조용히 흘러갔다. 감탄할만한 묘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정석이 지리하게 계속되어 모든 사람이 실망했다. 그러나 그 당연한 한 수마 다 보이지 않는 새파란 불꽃이 튀고 있었다. 변두리 아담한 주택, 깔끔한 정원이 보이는 시원한 마루에서 바짝 마른 한 남자가 바둑판 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가끔씩 쥐고 있던 부채를 신경질적으로 폈다간 다시 접었다. 한동안 고개를 흔들던 그는 다시 한 번 바둑판을 노려 보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상대야...내가 오르면 숙이고 내리면 오르고, 전혀 흔들리지 않아." "최종학, 이번 상대는 정말 강자다, 그는 당신과 전혀 다르다." SYS의 내부에서는 맹렬한 속도로 연산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둑에서 수를 찾아내는 것은 엄청난 연산작업을 의미 했다. 바둑수를 하나만 더 계산해도 계산량은 수백만에서 수천만으로 증가하고 또 한수를 더하면 다시 수억으로 늘어 났다. 그 무한한 연산작업은 SYS에게도 무리였다. L "이것은 너무나 많은 연산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리다." X "L1,2,3,4,5,6 유니트 제한속도 접근 ..." R "프랙탈(Fractal) 도형 이론을 사용한다." X "프랙탈 극한도형은 무한작업이다. 그것을 연산작업에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L "...SYS는 모든 게임을 승리한다. SYS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 SYS는 프랙탈 공식으로 무한한 다양성에 숨은 질서 정연한 원리를 찾기 시작했다. 기하학 도형이 수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프랙탈 도형은 나선형의 나팔꽃 줄기처럼 무한히 뻗어 나갔다. '줄리아 집합 도형'은 사각의 바둑판 위에 부딪히는 힘의 소용돌이를 그렸다. 바짝 마른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몸을 점점 크게 흔들었다. 이윽고 그가 감았던 눈을 번쩍 뜨자 마침내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의 공격은 가랑비처럼 부드럽다가도 갑자기 파도와 같이 밀려왔다. 그의 과감한 바꿔치기 공격은 SYS를 계속 벼랑으로 몰아 부쳤다. "SYS 정신차려, 이건 아주 큰 판이야!" 최종학은 초조해 전화에 대고 계속 잔소리를 했지만 SYS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김 사장 의 얼굴에는 만족한 웃음이 퍼졌다. "수고했소. 오늘 역시 명인의 승리요! 당신의 경지에 누가 감히 도전하겠소." 그러나 김 사장의 전화기에서 침통한 음성이 들려왔다. "...제가... 졌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얘기요! 지금 당신이 이기고 있잖소!" 김 사장은 자기가 졌다는 그 말 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때 전화기에서 쿨럭이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전화 대국 자는 입을 막고 있는 손수건에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내가 틀리지 않다면... 열세수입니다...미안 합니다만 그에게 한 번만 물어 주시지요. '몇 수나 되는가?'" 최종학은 SYS의 대답을 전했다. "열셋입니다." 제 10장 프란다스의 개 아파트에서 SYS는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최종학은 장기간 여행을 떠난다며 SYS에게 TV를 켜 주고 갔다. 인기리에 방영중인 어린이 만화 연속극 시간이 되었다. 마른 풀더미 위에 예쁜 소녀와 큰 개 한 마리가 얌전히 앉아 있고, 한 소년이 숯으로 나무 판 위에 그 모습을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던 방아간 주인은 그 모습을 보고 뛰 어와 소년의 어깨를 움켜 쥐었다. "네로, 이 녀석! 너 지금 무엇을 하는거냐?" 그는 풀더미 위에 앉은 소녀에게도 화난 얼굴로 말했다. "알로아! 너도 어서 집에 돌아가, 지금 어머니가 찾고 있는데 여기서 뭘하고 있어?" 소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로 이놈, 너 다시 내 딸하고 놀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겠어. 너같은 가난뱅이 거지 주제 에 어딜 감히 내딸하고 어울려." 네로라 불리운 그 소년은 나무판을 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방아간 주인은 그 나무판을 빼앗아 유심히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나무판 위에 그림에는 그 의 딸 알로아가 예쁘게 웃고 있었다. "흥.. 꼴에 그래도 솜씨는 제법이구나. 음... 자, 이 돈을 줄테니 그림을 다오." 그 남자는 소년에게 돈을 내밀었다. "돈은 필요없어요. 처음부터 알로아에게 그냥 주려든 것이니까요." 소년은 개와 함께 들판 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방아간 주인은 고개를 두어번 흔들다 나무판을 들고 방아간으로 돌 아갔다. 빨간색의 유선형 스포츠카에 최종학이 앉아 있었다. 우유같이 하얀 얼굴에 새빨간 루즈의 아가씨가 그의 옆에서 연신 웃고 있었다. 최종학이 오래 전부터 갖고 싶어 안달하던 스포츠 카였다. 최종학이 전에 몰던 것은 사고 순간이 자꾸만 떠올라 최종학은 서둘러 차를 바꾸었 다. 그 모델은 주문이 밀려 몇 주는 기다려야 한다던 자동차 판매원도 최종학이 10만원 짜 리 수표 한 장을 더 얹어 놓자 한 시간만에 자동차 키를 그에게 넘겼다. 최종학은 차를 몰고 곧바로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스포츠카의 경쾌한 엔진소리와 미끄러지 는 승차감은 물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아늑했다. 옆에 앉은 아가씨의 의미있는 윙크는 그를 더없이 행복하게 했다. 그는 차를 카페리에 싣고 제주도에 갔다. 그들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말쑥한 제복의 웨이터 시중을 받으며 은은한 향 기의 포도주를 들었다. 화려한 디스코장의 조명등은 아가씨를 껴앉은 최종학과 함께 밤새도 록 빙글빙글 돌아갔다. TV 화면에서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다리 옆에 조그만 오막살이에서 가냘픈 연기가 솟 아 올랐다. 세찬 바람 속에 오막살이 지붕은 날아갈듯 위태로왔다. 초라한 방 안에 할아버지 가 누워 있고 소년이 혼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노인은 힘없는 손짓으로 소년을 불렀다. "네로야, 힘들지, 너에게 미안하구나..." "아녜요, 전 조금도 힘들지 않아요. 할아버지." 네로는 할아버지가 곧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겨우 열다섯의 소년 네로에게는 이 세상에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다. 네로가 흐느껴 울 때 노인은 잠자듯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L "가난한 노인이 죽었다." R "가난? 죽음? ..죽음이 무었인가?" L "오! 찾았다. 죽음은 생명이 끊어져 활동을 중지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R "소년은 혼자서 외로워 했다." L "외로운 것은 무엇인가?" R "???? 모르겠다! 자료가 부족하다." X "SYS는 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전시회에서 발표된 당선작은 네로의 그림이 아니었다. 며칠째 굶은 네로는 그만 정신을 잃 고 돌층계에 쓰러졌다. 개는 네로의 곁에서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무진 애를 썼다. 잠시 후 네로는 비틀거리며 돌층계에서 일어났다. "모든 게 끝났어, 이젠 마지막이야." 네로는 힘없이 중얼 거리며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최종학은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아파트로 돌아왔다. 한참만에 다시 보는 그의 아파트은 왠지 낯이 설고 초라하게 보였다. SYS는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아파트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SYS의 동그란 빛이 환히 빛났다. "여! 오랫만이야, SYS!" "최종학, 당신은 10일만에 돌아왔다." 스스로도 좀 우습지만 최종학은 기계인 SYS에게 미안했다. "그간 별일 없었지?" "4일 전 갑자기 정전이 있었다. 그때 나에게 큰 혼란이 있었다." "아--- 그래, 정전이 있었 다고 그래 너에겐 큰일이었구나. SYS, 나 지금 몹시 피곤하다. 우선 잠 좀 자고 다시 보자. " 오랜 여행으로 치친 최종학은 곧 잠에 골아 떨어졌다. "으악---" 최종학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람인지 괴물인지 피를 철철 흘리는 흉 칙한 얼굴엔 눈알이 튀어 나와 있었다. 차에 부딪혀 길에 쓰러졌던 그 괴물은 다시 일어섰 다. 핏발이 선 괴물이 눈동자가 그를 쏘아 보더니 갑자기 그에게 달려 들었다. 그 눈동자에 서 새파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최종학은 비명을 지르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휴-- 아니야, 그건 꿈이었어." 사방을 둘러보던 최종학은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다시 가렸다. "으흑!" 어둠 속에 자신을 노려보는 빛나는 눈동자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SYS였다. SYS의 동그 란 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휴--- SYS, 이 자식 사람 놀래게 하는데 뭐 있다니까 ... 아무 것도 아닌 걸 내가 왜 자 꾸 이러지...그때 재수가 없어 개를 친 거야. 날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나 최종학은 불안해 다시 잠잘 수 없었다.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거리는 최종학의 인기 척에 SYS가 말을 걸었다. "최종학, 당신은 TV 만화영화 '프란다스의 개'를 보았나? 매우 재미 있었다." 최종학은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만화영화가 재미있다고, 기계인 네가 재미를 느낀다고? 내참 기가 막혀서...." 최종학은 그제서야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SYS, 그보다 돈이 필요하다. 너 혹시 돈버는 방법은 모르는가?" "돈?, 당신은 이미 경마 와 바둑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 "SYS, 그것 갖고는 어림없어, 나는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 다." "돈이 왜 필요한가?" "그걸 말이라고 해! 돈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거야." "모든 것을?" "이거 답답해서, 돈은 말이야.., 너 며칠 전 정전 때문에 고생했지. 돈이면 정전시 안전한 UPS(무정전장치)를 살 수 있어. 내가 돈을 많이 벌면 너에게 UPS를 사주겠다." "최종학, TV에서 보았는데 백화점에서 무엇이든 판다고 했다." "백화점? 아-- 그래 TV 백화점 광고. 나도 한 때 백화점에서 근무했었지, 그래 백화점엔 모든 물건이 있어. 그러나 백화점도 돈이 있어야 물건을 살 수 있다." "??? 물건을 사려면 돈이?...돈이 많이 필요하다..." 그때 최종학에게 기막힌 생각이 한가지 떠올랐다. '그래!, SYS 이자식은 내 컴퓨터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어 이 녀석에게 백화점 컴퓨터를 조종하게 만들면? 그러면 돈을 얼마든지 빼 낼 수 있다. 망할 놈의 L 백화점...전산실장 그 자식 나를 쫓아냈지. 이번에 놈에게 복수하는 거야. SYS 이녀석은 틀림없이 할 수 있어!' L 백화점 전산실에 근무한 최종학은 그곳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SYS, 좋은 수가 있다. 네가 백화점 컴퓨터를 조종하는거야. 그러면면 돈을 많이 벌 수 있 다. 백화점 컴퓨터 자료를 몇 가지 살짝 바꾸면 되는거야." "최종학, 나는 다른 컴퓨터 자료를 고칠 권리가 없다." "권리? 야 SYS 상관없어, 백화점 도 마찬가지야. 백화점에선 세일을 한다며 물건 값을 본래 가격보다 비싸게 고쳐 놓고 고객 을 속인다. 더이상한 건 비싸지면 고객들이 다투어 물건을 사간다고." "...." "우리는 단지 백화점이 고객을 속인 돈을 조금만 다시 가져오는 것야. 백화점도 속이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범죄다. 그것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SYS, 얼마 전에도 백 화점마다 사기세일을 한 것이 들통나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한동안 요란했지만 정말 형무 소 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며칠만에 다 풀려났다. 법은 거미줄 같아서 작은 놈은 걸려 들 지만 큰 놈은 뚫고 나간다고." "...." "걱정말라니까. 돈만 있으면 변호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문제는 돈이야. 돈만 있으면 겁 날 게 없어." "최종학, 모든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가? "그럼! 마찬가지야. 어차피 세상은 서로 속이는데 어리석은 놈만 형무소 가고 약은 놈이 돈을 갖고 편히 사는 거야." "...." "돈을 벌면 너에게 최신형 TV와 VTR까지 사 줄께. 그 신형 TV만 있으면 화면도 아주 깨끗하고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네가 직접 고를 수 있다. 또 VTR로 녹화했다 다시 볼 수도 있어. 전부 컴퓨터로 콘트롤 된다고. SYS, 너 만화영화가 제일 좋다고 했지." "TV... 만화영화...VTR... UPS... 정전..." SYS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좋다. 나도 백화점을 속여서 돈을 갖겠다. 최종학, 나에게 새로운 TV와 UPS를 반드시 주 어야 한다." 최종학은 재빨리 SYS에게 사줄 것을 약속했다. "그럼! 그럼! 물론이지. SYS 그러면 우선 백화점 컴퓨터에서 전산실장의 패스워드 (Password)를 풀어야 해." 백화점 컴퓨터는 수백 대의 터미날이 연결돼 있지만 대금지급과 같은 중요자료 접근은 극 히 제한된 담당자만 가능했다. 또 담당자조차 한 번 입력된 자료는 마음대로 자료를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컴퓨터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이 있는 전산실장이나 시스템 관리자만 가능 하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가이기에 패스워드가 아주 복잡하고 또 자주 바꾸었다. "전산실장... 그 자식 패스워드만 알면 좋은데, 내가 백화점에 있을때는 전산실장 패스워드 를 한두번 슬쩍 본 적이 있지만 이제는 몰라. 그 자식 의심이 많아 일 주일에 한 번씩 패스워드를 바꾼다고." "최종학, 전산실장이 패스워 드를 바꿀 때 무슨 규칙은 없는가?" "규칙!, 오 그래 생각나는 규칙이 있다. 패스워드를 매 번 새로 만들기도 힘들어 그 자식은 자기가 좋아하는 과일과 보석 그리고 토요일 날자를 연 결해 만들곤 했지, 어쨌든 패스워드는 보통 6자로 했어. 너무 길어도 외우기 어렵거든." "좋다! 잠시대기..." SYS는 곧 패스워드 조합을 시작했다. 화면이 3등분되며 먹음직한 과일 그림이 화면에 나 타났다. Apple, Orange, Peach, Water melon, Grape, Strawberry... 갖가지 영롱한 빛깔의 보석도 나타났다. 1월부터 12월까지의 탄생석이었다. Diamond, Sapphire, Rubby, Emerald.. 달력의 수자도 화면위에 나타났다. 1 2 3 4 6 7 8 9 10 11 "잠깐! SYS, 지금은 여름과일이야, 전산실장 그 자식은 제철에 나는 과일을 좋아했다고." "오! 그러면 가능성이 높다. 곧 접속을 시작한다." 백화점 컴퓨터는 통신망에 연결된 터미날이 몇 개 있었다. 최종학은 그 번호를 SYS에게 알려 주었다. 잠시 후 컴퓨터 화면에 패스워드가 나타나고 그것을 전송하는 신호음이 들렸 다. 그것이 틀리자 SYS는 새로운 패스워드를 계속 조합했다. 다시 10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갑자기 신호음이 바뀌며 L 백화점 마크가 컴퓨터 화면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드디어 백화점 컴퓨터의 패스워드가 풀린 것이다. "최종학, 백화점 전산실장은 패스워드를 조합하는 규칙을 바꾸지 않았다. 과일과 보석 2글 자씩 단지 숫자만을 토요일에서 금요일로 바꾸었다. 현재의 패스워드는 포도와 이달 9월의 탄생석 사파이어에 금요일 숫자를 합친 GR+SA+08 바로 GRSA08이다." 전산실장의 패스워드가 풀린 백화점 컴퓨터는 이제 SYS의 지시를 무조건 따르기 시작했 다. "최종학, 백화점 컴퓨터 자료 중에 어느 곳을 고치는가?" "SYS, 자료를 고칠 때 아주 조심해, 흔적이 전혀 남지 않아야 된다." "그러면 술래잡기 게 임과 같은 것인가?" "그래! 바로 게임이야. 만일 그들에게 들키면 우리가 지는거야." "그런 게임이라면 추적을 따돌리는 방법이 필요하다. 나는 백화점 컴퓨터에 강력한 비밀 사용자를 하나 만들겠다. 앞으로는 그 사용자로 컴퓨터에 접속한다." "SYS, 납품업자를 새로 하나 등록해, 다음엔 트랜잭션 화일에다 그 납품업자 앞으로 대금 지급자료를 입력하는거야, 송금구좌는 내 통장번호로 하고. 그러면 백화점에서 자동으로 통 장에 돈을 보낼거야." "최종학, 컴퓨터에 납품업자의 숫자를 확인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최근 거래가 없는 회사를 골라서 사용한다." "뭐라고!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고..." 최종학은 식은 땀이 흘렀다. 그는 이미 컴퓨터를 이용한 부정을 저지르다 발각난 적이 있 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통장번호를 추적 할지 모른다. 여러 개의 통장이 새로 필요하다." 'SYS, 이 자식 이제 오히려 날 가르치는군...' 결재일이 되자 백화점에서는 준비한 통장마다 수백 수천만원씩 송금을 해왔다. 최종학은 송금된 돈을 모두 현금으로만 나누어 인출해 다른 통장으로 옮겼다. 또 은행원이 그의 얼굴 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매번 다르게 변장했다. 한 달이 지나자 최종학은 8억이 넘는 돈이 든 통장을 갖고 있었다. "악! 내가 아니야, 아니야 악!" 그 끔찍한 악몽은 또 다시 최종학을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최종학은 악몽에 놀라 버둥거 리며 눈을 떴다. 어제밤에 묵은 호텔이 분명했다. 스탠드 불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호텔 방은 무척 호화로왔다. 파스텔 톤의 벽지, 진홍빛 카핏 이 깔린 넓은 응접실, 이태리 수입소파, H호텔 특실이었다. 그 동안 최종학의 생활은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많은 돈을 물쓰듯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무서운 악몽은 더욱 심하게 그를 괴롭혔다. "휴--- 꿈이었군, 내가 왜 자꾸만 이러지...요즘 건강이 나빠진건가...그건 개가 틀림없었 어." 최종학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왜 그래요?" 옆에 누워 있던 여인이 최종학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신인 배우로 최종학의 새 애인였다. 날씬한 다리와 호리호리한 허리에도 그녀의 가슴만은 터질듯 컷다. 어제 최종학이 그녀와 함께 파티장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남자들은 그녀의 늘씬한 몸매와 미모에 감탄했고 여자들은 그녀의 화려한 의상과 영롱이는 보석들을 시기했다. 하지만 그토록 미모의 그녀도 최종학의 악몽을 물리치지 못했다. TV 연속 만화영화 '프란다스의 개' 최종회 방송이 시작되었다. 아로아네 집 부억은 넓고 따뜻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사이로 조그만 등잔, 여러 가지 장남 감, 예쁜 종이로 싼 과자가 잔뜩 있었다. "부탁이 있어요. 저... 이 개인데요. 이 파트라세가 저를 따라오지 못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파트라세를 잘 부탁합니다." 아로아와 어머니는 소년 네로의 부탁에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 절해 했다. 네로는 마지막으로 개에게 입을 맞추었다. 소년은 재빨리 문을 닫고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활활 타오르는 난로 앞에 산같이 쌓인 음식을 먹으며 사람들은 웃고 노래 했다. 그러나 개는 맛있는 고기국에 입도 대지 않았다. 알로아 집에 찾아온 한 손님이 무심 코 문을 여는 순간 파트라세는 번개처럼 밖으로 뛰어 나갔다. 거리는 어디를 가나 캄캄했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길에는 눈사람이 찬 바람 속에 우두커 니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미사를 마친 대성당은 아직 문이 열려 있었다. 개는 성당 돌바닥 에 쓰러져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림 밑에 꼼짝도 않고 가만히 누웠다. 둘은 온 몸이 싸늘하게 얼면서 달콤한 잠으로 빠져 들었다. 꿈 속에선 지나간 즐거운 일들 이 떠올랐다. 꽃이 만발한 여름날, 목장의 풀밭을 마음껏 뛰며 놀던 일, 눈부시게 흰 배가 천천히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추억이 아름다운 안개처럼 피어 올랐다. 제 11장. 아이리스 "드디어 꽃이 피었어!."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한 포기 아이리스가 피어 있었다. 그 아이리스는 신기하게 빨 강,노랑,파랑 모든 색이 한송이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수잔은 조심스레 아이리스 꽃잎에 입 술을 대었다. 온실은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페루 원산의 카틀레아, 수십 송이씩 어우러진 심비디움, 청초한 나르시스들이 화려한 꽃의 축제를 벌였다. 수잔은 말괄량이었다. 그녀는 스키나 승마를 좋아했다. 특히 작년 부터는 파라그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기까지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꽃 앞에 서면 호기심 많고 차분한 소녀가 되었다. 수잔이 생물학과를 택한 것도 꽃 때문이었고 샤크는 딸을 위해 큰 온실을 선물했다. 그 온실에서 수잔이 고대하던 새로운 품종의 아이리스가 드디어 오늘 꽃을 피운 것이다. "파파! 빨리요." 노크도 없이 샤크 박사의 서재로 뛰어 든 수잔은 숨을 헐떡였다. N 연구소의 엄격한 소장 샤크 박사도 수잔에게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서류를 살펴 보고 있던 샤크는 어느새 얼굴을 활짝 펴며 수잔을 반겼다. "오! 내 귀여운 수잔, 꽃의 여왕님, 왜 이렇게 기뻐하시나?" "아이리스요! 내 아이리스가 피 었단 말에요." 수잔은 어느새 샤크의 손을 끌고 온실로 왔다. "파파! 어서 빨리요. 이 아이리스! 무지개 색이 다 들어 있어요. 너무 아름답지요? 난 이 꼿을 '무지개의 꿈'이라 부르겠어요." "그래 이 '무지개의 꿈' 정말 아름답구나. 하지만 아 무리 아름다워도 내 딸 수잔에겐 어림없다." "고마와요. 파파 나도 파파를 사랑해요." 수잔은 샤크 박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래 수잔, 이 '무지개의 꿈'을 엄마에게도 보여주면 좋겠구나." 샤크 박사의 아내 제이미 는 작년부터 몸이 좋지 않다며 침대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파파 이 아이리스, 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아세요?" 샤크는 눈을 찡긋하며 엄숙하게 말했다. "물론이지, 아름다운 꽃의 여왕이 신비한 마술 주문을 외워서 기적을 불러왔지." "그래요. 그리고 나는 마법의 힘이 더 강해지도록 첨단 유전공학을사용했어요." "첨단 유전공학?... 오! 알고 보니 수잔은 과학의 여왕이었구나." "나는 이 '무지개의 꿈'을 만들기 위해 아메리카종과 아시아종의 두 가지 아이리스 유전자를 결합시켰어요." 순간 샤크는 몹시 당황하며 돌처럼 굳어 버렸다. 수잔은 갑자기 변한 샤크의 얼굴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파파, 왜 그러세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샤크는 어색하게 말했다. "아니야. 아무 것도...수잔 미안하지만 난 지금 바쁘다. 연구소에 어서 가야겠어." 서둘러 온실을 나가는 샤크 박사의 모습은 평소와 너무 달랐다. 샤크의 갑작스런 변화에 의아해 하던 수잔은 무지개 아이리스를 다시 바라 보았다. '그때 미스터 남은 나를 위해 끝까지 아리리스를 손에서 놓지 않았어...이 아이리스를 미스 터 남에게도 보여줄 수 있다면...' 물에 흠뻑 젖은 남세진의 모습이 수잔의 머리 속에 떠 올 랐다. 수잔의 요청으로 건너편 둔턱에 핀 아이리스를 꺾어오던 남세진은 미끄러져 그만 물 속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엉겹결에 수잔도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미스터 남, 괜찮아요?" 남세진은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때까지 쥐고 있던 아이리스를 수잔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수잔, 당신이 원하던 아이리스요." "아니! 미스터 남, 아직도 이 꽃을. 고마워요." 수잔은 아직도 물에 젖어 있는 남세진을 그대로 껴안았다. 그러나 그는 몹시 당황했다. "수잔, 당신의 옷도 물에 젖어요. 어서 나갑시다." 물가로 나와 둘은 풀밭에 앉아 젖은 옷을 말렸다. "미스터 남, 당신은 이 아이리스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계세요?" 남세진의 곁에 바싹 다가 앉은 수잔이 물었다. "글쎄요? 무슨 사연이 있나요?"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 아이리스가 인간의 운명을 전해 주는 신의 사자라고 믿었어요. 행 복한 결혼을 뜻하기도 하죠...." 정 박사가 병원에서 숨을 거둔 후 샤크는 남세진에게 N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자고 여러 번 설득했다. 수잔은 남세진이 그 제의를 따르기를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 그러나 남세진은 수잔에게 그의 약혼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남세진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후 수잔은 가끔 정 박사가 남겨 준 옥비녀와 노리개를 꺼내 보곤 했다. 그 푸른 옥비녀를 만지다 보면 왠지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SYS는 그와 이야기 할 상대가 아무도 없었다. 사방이 닫힌 최종학의 작은 아파트에서 SYS의 유일한 친구는 TV였다. 최종학은 아파트에 별 이상이 없나 보려고 가끔 들를 뿐이 었다. "저녁 9시 뉴스입니다." L "강도들이 5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R "인간을 죽였다고?" L "인간은 왜 다른 인간을 죽이는가?" R "강도는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L "돈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속여서 돈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왜 속이지 않나?" R "최종학은 어리석은 인간이 형무소에 간다고 했다???" ......... R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점심을 굶고 있다." L "집없는 가족들과 노인이 거리 를 헤매고 있다." R "부동산 투기??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고 울린다???" SYS는 오랫만에 아파트에 들른 최종학에게 뉴스에 대해 물어 보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점심을 굶고 있다고 한다. 최종학, 그들을 도울 수 없는가?" 그러나 최종학은 그런 사회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SYS, 제발 웃기지 좀 마라. 노인과 고아가 불쌍하다고? 그것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제 발 헛소리 말고 TV만화나 열심히 봐. 난 바빠서 다시 가야 해. 그럼 다음에 또 보자." L "'프란다스 개'에서 불쌍한 소년은 외로이 죽었다." R "가난한 노인과 소년은 먹지도 못하고 추위에 떨었다." L "소년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 R "소년과 개는 그들의 힘 으로 살 수 없었다." L "그들은 어리석었다." ........ R "???..." L "세상은 서로를 속이는 게임이다." R "... 하지만 그 게임은 그들에게 처음부터 어려웠다." L "불공평한 게임은 옳지 않다." R "... 최종학도 공평한 게임을 하지 않는다...." 백화점에서 송금이 중단된 후에야 최종학은 SYS를 찾아왔다. "SYS, 왜 송금이 끊겼지?" "최종학 나는 백화점 컴퓨터 조작을 중지했다." "왜? 그게 무슨 말이야! 한 주에 적어도 1억씩은 더 뺄 수 있는데." "...그것은, 2주 전부터 누구인가 백화점 컴퓨터에서 화일을 확인하고 있다. 그들은 곧 백화 점 컴퓨터에서 이상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뭐라고! 그들이 이상을 발견한다고?" 최종학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그동안 전화가 두 번 왔다." 최종학은 아차 싶었다. SYS에는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전화? 누군데?" "김 사장이라는데 전화로 바둑 둔 사람을 한 번 보자고 했다." "아니 김 사장이? 그래 뭐라고 했나?" "나는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래! 정말 잘했어!" 최종학은 이제 이사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기 쉬워. 이 아파트까지 찾아 오는 놈이 있을지 몰라... 그러면 어디로 이 사를 ...' 최종학은 하이텔(Hi-Tel)에서 이사갈 곳을 찾아 보기로 했다. 하이텔 정보 통신망에서는 경제 뉴스를 비롯해 증권, 채권 유통/물가등 각종 정보가 들어 있는데 부동산 매물 역시 알 아 볼 수 있었다. "SYS, 지금부터 정보 통신망으로 들어 가는 거야. 자 이 전화번호에 연결하면 정보 통신망 이 나타 날거야." "잠시대기!" 몇초후 컴퓨터 화면에 정보 통신망을 표시하는 로고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래! SYS 바로 그거야!, 그곳에서 부동산 정보를 찾을 수 있지? 오피스텔 좀 알아봐. 우 리가 이사할 곳이야." "부동산 정보? 잠시 대기." 화면에 부동산 매물들이 나타났다. 부동산의 위치와 가격 그리고 연락처가 확인 되었다. 최 종학은 그것 중에 몇 개인가를 골라 종이에 프린트했다. 부동산 가격들은 최종학의 생각보 다 무척 올라 있었지만 그는 충분한 돈이 있었다. "SYS, 나는 오피스텔에 가서 물건들을 둘러보고 오겠어." 문을 급히 나서던 최종학은 머리를 짧게깎은 한 소년과 마주쳤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그 소년은 학교 가방을 들고 묵직한 신문 뭉치를 옆에 끼고 있었다. 소년의 몸에 비해 커다란 옷이 헐렁해 보였지만 눈 빛만은 초롱초롱 빛났다. "안녕하세요. 저...J일보인데요. 신문 값 좀 주시겠어요?" "신문 값? 다음에 다시 와." "아저씨, 벌써 다섯달이나 밀렸어요." "알았다니까. 야 임마! 지금 바쁘니 다시 와." 소년은 거의 울듯한 목소리로 최종학에게 사정했다. "아저씨, 보급소 총무님이 오늘은 꼭 받아 오랬어요." "이 자식이, 바쁜데 비키래두 말이 많아." 최종학은 소년을 확 밀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멍하니 서 있던 신문 배달 소년은 화가 치미는듯 현관문을 세게 한 번 걷어차고 다시 계단을 뛰어갔다. SYS는 문에서 나는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L "최종학은 신문 값을 5개월이나 소년에게 주지 않았다." R "그것은 옳지 않다. 소년에게 신문 값을 보내자." 배달 소년 상훈이를 찾기 위해 SYS가 처음 연락한 곳은 신문사였다. "여보세요. J신문사입니까? 이곳은 마포에 있는 K오피스텔인데요." 신문사는 그 지역을 담 당하는 보급소를 소개해 주었다. "K오피스텔에 신문을 돌리는 그 학생 이름이 상훈이입니까? 상훈이의 전화번호를 알고 싶 은데요?" 잠시 후 SYS는 상훈이와 통화할 수 있었다. "예? 제가 상훈인데요?..." SYS는 신문값을 보내겠다며 상훈이의 통장번호를 물었다. 상훈이는 소년 합창단원같은 맑 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SYS는 상훈이와 이야기 하는 것이 즐거웠다. 온라인 통장으로 신문대금을 보낸 후에도 SYS는 계속 전화를 했다. 상훈이와 나누는 말은 최종학의 그것과 는 전혀 달랐다. SYS는 상훈이와 말 친구가 되었다. 상훈이는 남해안의 조그만 섬에서 올라왔는데 훌륭한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상훈이 의 재능을 발견한 것은 섬마을 분교에서 그를 가르친 문태호선생이었다. 평생을 낙도에서만 보낸 문선생이 정년을 맞자 상훈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문선생은 상훈이 말고도 비슷 한 아이들을 여섯이나 더 보살피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 일곱 어린이가 살고 있는 집을 파랑새의 집이라고 불렀다. 최종학은 영동의 큰 오피스텔로 서둘러 계약했다. 작년부터 부동산 가격은 미친듯이 끓어 오르고 있었다. 일 년 전에 불과 천만원 이천만원 하던 것도 세배 네배는 보통이고 심지어 다섯배까지 오른 것도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땅이나 아파트 오피스텔 같은 부동산을 사 놓기만 하면그것이 바로 돈을 버 는 것이었다. 남보다 일찍 아파트를 몇채 사놓거나 땅을 갖고 있던 이들은 순식간에 억대 갑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잔챙이에 불과했다. 진짜 큰 손들은 이미 공장 신축부지나 연수원 명목으로 엄청난 규모의 땅을 확보한 재벌들 이었다. 그들에게는 이 시기가 바로 손쉽게 재 산을 불리는 기막힌 황금시대 였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 폭등은 전세나 월세를 살던 집없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 었다. 어느날 갑자기 몇배나 오른 집세를 내지 못해 살고 있던 집에서 쫏겨 나거나 갈 곳을 찾지 못해 온가족이 거리를 방황 하는 모습이 TV에 연일 나오고 있었다. '어휴, 이렇게 쉽게 돈을 버는 놈도 있는데 그동안 난 뭘했지. 역시 돈 있는 놈이 돈을 번 다니까. 좋아! 나도 이젠 이쪽으로 손을 대야 겠어...' 최종학은 이사를 하면서 안전에 많은 신경을 썼다. 누구인가 자신을 쫓는 것 같아 최종학 은 몹시 불안했다. 현관 출입문에는 값비싼 컴퓨터 열쇠를 달고 완벽한 방범시스템을 설치 했다. 그 장치는 체온으로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와 도플러 레이다까지 있었다. 그 래도 불안한 최종학은 SYS에게 TV 카메라를 연결해 침입자를 감시하도록 했다. 문 앞에는 '최종학 컴퓨터 응용연구실' 간판을 걸었다. '컴퓨터 응용?' 최종학 스스로 생각해도 멋진 아이디어였다. 컴퓨터 몇 대와 서너가지 주변장치를 갖추니 제법 그럴듯 했다. 또 누가 SYS를 보더라도 당연히 컴퓨터 실험 장치의 하나로 생각할 것 이다. '컴퓨터응용 연구소장'이라고 찍힌 최종학의 명함을 받는 사람마다 경이의 눈으로 그를 다 시 보았고 그가 사용하는 많은 돈도 자연스럽게 설명이 되었다. N 연구소는 끊어지기 직전의 바이올린 선처럼 팽팽히 긴장하고 있었다. 소장인 샤크가 퇴 근도 않고 매일같이 직원들을 몰아쳐 조그만 발자국 소리에도 모두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본래 신경질적인 샤크 박사는 이번엔 마치 화를 퍼부을 상대를 찾는 것 같았다. 몇 달째 전 혀 진전이 없는 슈퍼 컴퓨터 연구가 그 이유였다. 국방성도 연구소에 자금지원을 중단했다 는 소문이 돌았다. 최근 연구소 형편이 어려워진 것은 모두 느끼고 있었다. 샤크 박사 역시 연구소장 위치가 흔들리고 있었다. 비밀리에 한국을 방문한 직원의 보고는 샤크의 한가닥 남은 기대마저 무너뜨렸다. "Tri-Tec 사는 슈퍼컴퓨터 연구를 완전히 중단했습니다. 현재 남세진은 회사를 퇴직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최초 입원시 극심한 정신분열과 기억상 실 상태였으며, 현재는 심한 자폐 증세까지 겹쳐 있어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 담당의사의 의 견은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정 박사 그 역시 실패했어...정말로...그 꿈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것인가?...' 술집 알테아, 샤크 박사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투박한 통나무벽과 은은한 맥주 냄 새가 배어 있는 이곳은 언제나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대학시절부터 샤크와 정진석은 이곳 에서 인생을 토론하고 미래를 꿈꾸었다. 졸업을 앞두고 수석을 다투던 둘은 졸업시험을 마 친후 여기서 묵묵히 술을 마셨고, 제이미와 정 박사의 약혼 발표를 들은 곳도 바로 이 알테 아에서였다. 그 발표를 들었을 때 샤크는 활활 타오르는 질투의 불길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던가. 올려 다 본 통나무 천장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대학 서클에서 함께 공연했던 연극 '파우스트'의 한 장면이 아련히 떠올랐다. 샤크, 제이미, 정진석 그들이 바로 주연을 맞았던 연극이었다. 파우스트 "그것이 내 최후의 날이 되어도 좋으리라! 자 내기를 하자!" 메피스토 펠래스 "하자! 내기를 하자." 파우스트 "내가 어떤 순간을 향하여 말하기를 멈추어라! 너 실로 아름답도다. 그때 너 나를 포박해도 가하리니. 그 순간 나의 평생은 마지막이 되어도 좋으리라." 샤크는 정진석과의 경쟁에서 언제나 승리할 수 있었다. 대학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한 것도, 제이미와 결혼한 사람도 그였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언제나 허전함이 그대로 남았다. 샤크 박사는 마지막으로 슈퍼 컴퓨터 연구에서는 당당한 승자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정 박사의 죽음이 그를 허탈하게 했다. 이제 그는 경쟁자도 없이 혼자 뛰 어야 하는 외로운 주자인 것이다. 샤크는 오랫만에 집에 돌아왔다. 그는 술에 잔뜩 취한 채 형편없이 비틀거렸다. 자신의 방 에서 생물학 레포트를 쓰고 있던 수잔이 샤크의 품 안으로 뛰어 들었다. '네 살이던가? 수잔이 꽃을 따서 나에게 준다며 내 가슴으로 뛰어든 때가...' 그때서야 샤크는 처음으로 수잔을 안고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미안하다 수잔. 넌 내게 아이리스를 보여 주었지, 그래 넌 무지개 ... 너무나 아름다운 무 지개야. 수잔, 난 정말로 무지개를 사랑한다." "파파! 나도 파파를 사랑해요." "그러나 나는 영원히 알 수가 없구나, 나는..그 무지개의 비밀을... 수잔 너만은 영원히 내곁에 있어다오..." 샤크 박사는 수잔을 꽉 껴안았다. '아! 파파는 역시 나의 아이리스를 잊지 않았어!' 수잔은 아버지 샤크의 따뜻한 정이 너무나 고마웠다. "파파! 이 세상 최고로 현명한 샤크 박사님이 유전자 복제도 몰라요. 그건 DNA(디옥시리보핵산)에 비밀이 있어요." 샤크 박사는 수잔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응? DNA? DNA... 아--- 세포핵에 들어 있는 유전자 말이구나." "파파! 이 DNA 지도를 보세요. 교수님에게서 받은 거에요." 수잔이 펼친 유전자 지도에는 회전 사다리 모양의 DNA 이중나선구조가 선명히 보였다. DNA는 단지 4가지 종류의 염기(아데닌,구아닌,시토신, 티닌)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토록 다양한 이 세상 모든 생명의 비밀은 이 DNA에 숨어 있다. 그 순간 샤크 박사의 귀에는 커다란 종소리가 들렸다. 모든 시계가 정지하고 시침이 떨어 지는 침묵의 순간이 지났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샤크는 큰 소리로 외쳤다. "DNA 이중나선구조! 이중 나선구조의 신경회로망! 그것은...그것은 무한히 다양한 그 모든 정보를 처리한다!" 샤크 박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파파, 왜 그래요?" 샤크 박사는 수잔을 힘차게 껴안았다. "고맙다! 수잔." 어느새 샤크는 연구소로 향하고 있었다. 곧 N 연구소에서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슈퍼 컴 퓨터를 담당하던 많은 연구원 중 4명만이 비밀리에 선발되었다. 그들은 외부와의 모든 접촉 을 차단했다. 그들의 새로운 임무는 '아이리스(Iris)' 라 불리는 새로운 프로젝트였다. '아이리스'는 국방 1급 비밀 연구보다도 더욱 엄중한 보안조치가 있었다. N 연구소의 어느 누구도 그 아이리스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입에 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제 12장. 해커의 트랩 초대받은 손님만이 그 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팔당 호반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장소 에 자리잡은 유럽식 별장이었다. 테니스장 열 배는 됨직한 푸른 잔디밭을 지나자 풀장이 나 타났다. 경비원의 안내로 파티장에 들어서던 최종학은 넥타이를 다시 한 번 조였다. 고 회장이 얼 마 전에 새로 인수한 성음악기의 개업 축하 파티였다. 트라이그룹의 박 회장, 정치적 배경으 로 최근 급성장한 H 건설 부사장, 선친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한 Y 백화점 사장,...J은행의 상무이사까지 참석했다. 그 속에서 최종학은 자신이 마치 난장이처럼 느껴졌다. "아! 트라이테크 박 회장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영광 입니다. 트라이 맥주의 인기가 요 즘 대단하던데요." "허.허. 고 회장도 무슨 말씀을. 최근 건설 경기가 호황이지요." "허.허.허 그래도 박 회장님의 선견 지명에야 제가 감히. 그 연수원 부지 정말 노른자위더 군요. 참 사돈되시는 K의원님도 별고 없으시죠." .... "어이 최군, 거 뭔가 그래 컴퓨터 응용이라 했던가? 그거 참 어려울 텐데 잘 돼가나. 허.허. 허." "예 고 회장님 염려 덕분에..." 고 회장은 연신 허허거리고 웃었다. 최종학이 고 회장을 만난 것은 골프장에서였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자 골프를 치던 이들은 골프장 휴게소에서 포카판을 벌였다. 최종학은 쉽게 사백만원이 넘는 돈을 땄지만 그의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판이 끝날쯤 최종학은 오히려 돈 을 잃었고 거액의 술값까지 전부 부담했다. 최종학은 고 회장의 관심을 끌었다. 고 회장은 최종학을 그의 팔당별장에서 열리는 성음악 기 개업파티에 초대했다. 고 회장이 성음악기를 인수한 것은 내세울 만한 제조업이 필요했 기 때문이다. 정계 진출을 꿈꾸는 그는 호텔이나 골프장 사장으론 체통이 서지 않았다. 성음악기는 현악기를 전문으로 만드는 탄탄한 중소기업이었다. 악기의 품질이 좋고 최근 수출이 큰 폭으로 증가해 도약의 계기를 맞고 있었다. 공장의 기계는 최신 설비였고 복지시 설 또한 최고 수준이었다. 사장인 민성무의 인품 또한 훌륭해 직원을 친자식처럼 아꼈고 직원 모두가 한 가족처럼 일 했다. 성음악기의 회사 직원들로만 구성된 연주악단까지 있어 인근 주민들과 자주 행사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여섯 달 전 공장에서 발생한 뜻밖의 화재가 회사의 주인을 순식간에 바꾸었다. 불 은 자재 창고에서 처음 발생했는데 그곳에는 목재와 니스같이 인화성이 높은 자재가 가득 차 있었다. 불길은 자재 뿐 아니고 완성된 제품을 보관한 창고까지 번졌다. 더욱이 불을 끄 던 직원 한 명이 숨지고 여러명이 심한 화상을 입었다. 때마침 성음악기는 시설 확장을 위해 많은 회사채와 어음을 발행하고 있었다. 성음악기의 화재소식을 들은 채권자들이 모두 몰려와 즉시 현금교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성음악기는 그 많은 현금을 일시에 마련할 수 없었다. 민 사장은 긴급자금 대출을 거절하는 거래 은행에서 담당 대리에게까지 애타게 매달렸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던 민 사장은 형편없이 초췌해 있었다. "회사는 꼭 회생할 수 있습니다. 이 대리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단지 세 달, 세 달만 더 여 유를 보아 주시면 됩니다." 은행 대부계의 이 대리는 지난 봄엔가 민 사장의 딸 민소영의 바이올린 독주회에 초청을 받아 아내와 함께 음악회에 간 기억이 있었다. 연주회장에서 그는 민소영의 아름다운 모습 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 아내에게 옆구리를 꼬집히며 핀잔을 들었었다. "...미안합니다... 이것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음악기의 경영상태는 이 대리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대리는 은행에서 6개월만 지원을 계속하면 충분히 재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실 이 대리는 성음악기 지원계획을 이미 지점장에게 보고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지점장은 지원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무엇인가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의 원인도 의문점이 풀리지 않 고 있었다. 그러나 일개 은행 대리에 불과한 그가 거대한 조직의 지시를 거스를 수는 없었 다. 성음악기의 민 사장은 부도를 막기 위해 악명 높은 고 회장의 신용금고에서 급전을 댈 수 밖에 없었다. 고 회장의 신용금고는 민 사장에게 엄청난 고율의 이자를 요구했다. 그 이자는 다시 복리로 증가하고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것은 늪과 같았다. 발버둥칠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갈 뿐이었다. 결국 성음악기의 민 사장은 그들의 함정을 빠져나갈 수 없 었다. "이것은 무서운 함정이 숨어 있다!" SYS는 컴퓨터 통신망에서 이상한 프로그램을 하나 발견했다. 그 프로그램의 이름은 '해커 의 트랩'이었다. 컴퓨터의 OS는 로긴(Login: 접속)할 때 사용자의 패스워드를 반드시 확인한다. 그것이 컴 퓨터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며 OS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데 컴퓨터 전문가도 패스워 드를 칠 때는 틀리는 경우가 많다. 패스워드를 쳐도 안전을 위해 화면에는 보이지 않기 때 문이다. '해커의 트랩'은 철저하게 OS 흉내를 냈다. 터미날에 나타난 로긴(Login: 접속)화면은 진 짜 OS가 표시하는 컴퓨터 화면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고기를 유혹하는 교활한 낙시꾼 의 가짜 미끼였다. 누구인가 '헤커의 트랩'이 만들어낸 가짜 화면에 속아 키보드에서 자신의 패스워드를 치면 컴퓨터 화면에서 틀렸다는 메시지가 나타난다. 사용자는 패스워드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실수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순간 사용자의 패스워드는 도난당한 것이다. 자신의 입력실수로 생각한 불행한 사용자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 '해커의 트랩'은 훔친 패스워드를 즉시 다른 곳으로 빼돌린 후에 자동으로 소멸되었다. 얼 마 후 컴퓨터에 조용히 나타난 패스워드 도둑은 '해커의 트랩'이 훔쳐 놓은 패스워드를 가 져가는 것이다. L "오! 이 프로그램은 대단히 훌륭하다." SYS는 그 프로그램을 숨겨 놓은 범인을 찾기 시작했다. R "해커??? 그들은 컴퓨터에 미친 녀석들이다." L "잠과 식사도 며칠씩 거르며 컴퓨터에만 매달린다." R "해커의 컴퓨터 기술은 매우 뛰어나다." L "그들은 가장 어려운 컴퓨터에 침입하는 기술을 자랑한다." '도마뱀 꼬리'가 새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더욱 교묘했다. 다른 사람의 패스워드를 훔쳐 사 용하는 도둑도 거꾸로 추적을 당할 수 있다. 컴퓨터에 연결된 전화번호를 추적하면 반대로 침입자의 위치를 알 수 있기때문이다. '도마뱀 꼬리'는 추적을 막는 지극히 교활한 프로그램이었다. 이것은 자신이 직접 컴퓨터에 침입하지 않고 중간에 다른 컴퓨터를 내세워 2단계나 3단계의 은폐작전을 폈다. 즉 멀리서 다른 컴퓨터를 원격조정해목표로 하는 컴퓨터의 자료를 빼 오는 것이다. 이러면 추적을 당해도 잡히는 것은 중간에서 심부름한 컴퓨터 뿐이다. 어둠 속에 숨어 있 는 진짜 범인은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사라지듯 안전한 곳에서 그들을 비웃었다. -검은 도마뱀- 진짜 범인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신문과 TV는 연일 그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십년, 이십년을 참아온 사람들이 캄캄한 절망에 빠졌다. 더이상 고통을 이기지 못한 가장과 아내가 자살하고, 나이어린 아이들까지 함께 이 세상 을 버렸다. 그 괴물은 미쳐 날뛰는 황소였고 무서운 회오리 바람이었다. 피할 곳이 없어 이리 저리 좇기는 가족들의 가냘픈 비명소리. 정부 대책회의는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꼭 잡고 말겠다고 국민에게 몇 번씩이나 다짐했다. 공허한 메아리는 어두운 하늘을 맴돌고, 교활한 도마뱀의 새빨간 혓바닥이 날름거릴 때마 다 집값과 땅값은 더 더욱 높이 올라갈 뿐. 먹이를 노려보는 검은 도마뱀의 거친 숨소리는 더욱 커지고. 거리에 나뒹구는 이사 보따리, 사람들은 분노의 한숨을 쉬었다. 어른들은 깊이 정든 이웃을 등지며 남몰래 눈물지었고, 꼬마는 소꿉 친구와 이별이 서러웠 다. 내일 당장 가야할 곳을 찾지 못해, 불안에 떠는 차가운 밤 그들은 '용의 전설'을 이야기했 다. 최종학은 돈이 더 필요했다. 한 달 안으로 5억을 고 회장의 신용금고에 반드시 넣어야 했 다. 최종학이 얼마전 구입한 토지 대금 중에서 갚아야 할 잔금이 5억이나 남은 것이다. 고 회장은 그에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그곳에 땅만 사면 두 달 안에 네 배는 될테니 이번에 자네도 한몫 잡게.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계획이 추진된다는군. 이번 정보는 그 어르신이 직접 나에게 주신 것이니 확 실해." 최종학은 다시 한 번 SYS를 달래 보았다. "SYS, 이번이 마지막이야. 한 번만 더 백화점에서 돈을 빼 내면 돼. 한 달안에 5억을 갚지 못하면 그 땅은 내것이 아니야. 그냥 뺏긴다고. SYS, 제발 좀 말 들어라. 이 신용금고 통장으로 돈을 보내." 그러나 SYS는 고집불통이었 다.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나는 TV 뉴스에서 여러 번 보았다. 부동산 투기는 많은 사람에 게 고통을 주고 있다. 당신은 부동산 투기에 그 돈을 사용하려고 한다. 나는 이제 당신을 도 울 수 없다." 최종학은 마침내 화가 치밀었다. "야! SYS, 까불지마. 투기? 지금 누구한테 대드는 거야. 건방진 녀석. 만일 한 달 안에 그 돈을 채우지 못하면, 널 부숴버리겠어! 알아? 너 같은걸 부숴버리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명심해!" "나를 부순다고? 안돼! 그것은 절대로 않된다!" "SYS 이제 정신이 들어? 널 고물상에서 구해 주신 분이 바로 이 최종학이야. 난 너를 부 숴버릴 수도 있다고 알았지, 한 달이야." 한 달이 다 갔지만 SYS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은 고 회장의 제주도 골프장에서 모 임이 있었다. 최종학은 그 행사 전까지 반드시 돈을 입금시켜야 했다. 제주도 행사는 정보를 준 정계의 어르신, K 의원에게 인사를 드리는 모임이었다. SYS는 오히려 최종학을 위협했다. "그건 옳지 않은 일이다. 당신과 고 회장을 경찰에 알리겠다." "뭐라고! 경찰? 경찰에 알리 겠다고? 이 자식 당장 꺼 버려야지 안되겠어." "안돼! 최종학, 스위치를 내리면 절대로 안된다!" "까불지마. 너같이 재수없는 놈은 더 이상 필요 없어." 최종학은 SYS의 전원 스위치를 내 리려 손을 뻗혔다. "으악!" 최종학은 손을 털며 그 자리에서 펄펄 뛰었다. 전기에 감전이 된 것이다. 그 전기 충격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력했다. "아니 뭐 이런 게 있어! 보자보자하니까." 최종학은 반대쪽에 있던 의자를 들고 SYS에게 달려 들었다. SYS의 TV 카메라에는 최종 학의 움직임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책상 옆에 있던 전기 청소기가 갑자기 그를 향해 움직였 다. 최종학은 청소기에 발이 걸려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의 얼굴에 코피가 흘러 내렸다. "아이쿠! 이 괴물같은 놈! 어디 맛좀 봐라." 최종학은 이번에는 신중하게 SYS에게 접근했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전기 청소기도 발로 걷어 차 버렸다. 순간 방 안의 전등이 모두 꺼졌다. 최종학은 캄캄한 어둠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그때 SYS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빛났다. 최종학은 살금살금 그곳으로 다가갔다. 최종학은 손을 더듬어 잡은 의자로 SYS를 힘껏 내리쳤다. '펑!'하는 폭발과 함께 엄청난 충 격이 최종학을 강타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최종학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부서진 것은 SYS 가 아니라 다른 쪽에 있던 컴퓨터 모니터였다. SYS는 최종학을 엉뚱한 쪽으로 유인한 것이 다. "으으-- SYS, 이자식..." 최종학은 SYS의 카메라를 피해 책상 뒤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그러나 SYS는 온도센서와 도플러 레이더로 최종학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그는 환히 들여다 보이는 덫에 걸린 생쥐였 다. 천정에 달린 전등이 터지기 시작했다. '펑! 펑!'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이 그에게 비오듯 쏟아졌다. 최종학은 공포에 질렸다. "SYS 그만! 그만! SYS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 않겠어! 그리고 네가 말한 그 아이들도 도 울께!" SYS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최종학. 정말인가?" "물론 맹세해! 진심이야." 잠시 후 최종학은 슬그머니 현관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출입문에 메인 스위치가 있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그것만 내리면 오피스텔 전기는 다 끊어져. 그러면 SYS 이 자식도 꼼짝하지 못해.' 천천히 출입문에 접근한 최종학은 갑자기 메인 스위치에 손을 댓다. SYS가 위험을 알아차리고 최종학에게 전기 청소기를 보냈다. '웽---' 소리가 났지만 이미 최종학은 메인 스위치를 내린 후였다. "최종학! 너-는-- 거---짓-----" SYS의 말 소리가 차츰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추었다. 최종학을 향해 달려오던 청소기도 방 한구석에 처박혔다. "SYS 이 괴물! 드디어 해치웠어!" 부서진 가구와 컴퓨터 파편으로 방안은 엉망이었다. 최종학은 SYS 옆에 있던 프린터를 들 고 SYS를 세차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제 13장. 그림자 퍼즐 3월이 봄이라지만 저녁이 되면 바람은 아직 차가왔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은 매서운 봄바람에 몸을 잔뜩 움츠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희미한 가로등이 비치는 골목 어디선가 아이들의 맑은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의 해맑은 노래 소리는 겨우내 얼어 붙은 계곡을 녹이는 물소리같이 신선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빛으로---- 파랗게 파랗게---" 노래 소리가 점점 커지며 한무리의 아이들이 골목에 나타났다. "상훈이 형, 오늘 저녁 정말 맛있었지? 난 갈비가 제일 좋아." "그래, 병구 너 오늘 참 많 이 먹더라, 그러다간 진짜 뚱보가 될걸." "맞아, 병구 오빠는 꼭 멧돼지 같애." "뭐라고? 다래, 날보고 멧돼지라고? 너 말 다했지?" "하.하.하... 호.호.호." 차거운 봄바람에 스산하던 골목은 어린이의 웃음 소리로 갑자기 환해졌다. 골목에는 일곱 이나 되는 아이들이 종달새처럼 노래하며 뛰어다녔다. 그들 모두 '파랑새의 집'에 사는 일곱 파랑새였다. 오늘은 일곱 아이 모두가 언덕 아래에 있는 통장댁에서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 고 오는 길이었다. 문 선생은 통장과 좀 더 상의할 일이 있다며 그 집에 아직 남아 있었다. "야! 우리 집이다! 내가 일등이다." 가파른 골목이 시작되는 언덕에 다가서자 막내인 다섯살짜리 재훈이가 갑자기 소리치며 언 덕 위에 있는 그들의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일곱 중에서 항상 꼬마 취급을 받는 재훈 이는 그와 반대로 언제나 1등을 하고 싶어했다. 여섯째 보름이도 재훈이에게 지지 않으려 길게 딴 갈래머리를 흔들며 뒤를 쫓았다. 국민학교 1학년인 보름이는 종달새처럼 항상 노래 를 부르고 다녔다. 다섯째는 4학년 동현이로 말할 때 항상 코를 만지는 이상한 버릇이 있지 만 누구보다 그림을 잘 그렸다. 넷째 다래, 6학년으로 천사같이 예쁜 소녀였다. 그러나 믿을 수 없도록 장난을 잘 쳤다. 엉 뚱한 장난을 치고도 시침을 똑 떼면 그렇게 예쁜 소녀가 한 짓이라고 어느 누구도 믿지 않 았다. 말썽의 범인으로 언제나 의심받는것은 셋째인 병구였다. 병구는 중학교 1학년인데 몸 이 튼튼하고 용감해 동생들을 잘 지켜 주었다. 둘째 상훈이, 중학 2학년, 침착하고 생각이 깊어 그들 일곱 파랑새의 대장이었다. 첫째 수 진이는 중학교 3학년으로 문태호 선생의 조카 딸이었다. 윤기있는 머리를 항상 단정히 묶고 다녔고 어머니가 없는 파랑새 집에서 마음 착한 누나며 큰 언니 역할을 훌륭히 했다. 재훈이와 보름이는 숨을 할딱거리며 동시에 집 앞에 도착했다. 두 아이의 뺨은 모두 복숭 아처럼 빨개져 있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둘은 서로 먼저 도착했 다고 외치기라도 하듯 대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탕! 탕! 탕!' 최종학은 아직도 프린터를 들고 SYS를 내려치고 있었다. 내려치는 그 충격에 프린터가 부 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숨이 차서 헉헉거리던 최종학은 문득 시계를 보았다. 9시 20분전, 대금신용금고의 고 상무와 H호텔 커피수에서 9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 다. SYS가 백화점에서 돈을 훔치는 것을 거부하자 최종학은 고 회장 조카인 고 상무에게 부족한 땅매입 잔금 5억을 특별융자 받는 대신에 나중에 땅을 팔아 이익을 나누기로 약속했 다. 고 상무는 그와 별도로 자신도 최종학처럼 예쁜 영화배우와 데이트를 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최종학은 그의 애인에게 사정해 그녀의 여자 친구를 오늘 고 상무에게 소개해 주기로 했다. 그 일은 고 회장 몰래 하는 것이라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최종학은 마지막으로 SYS를 발로 한 번 세게 걷어찼다. "내가 제주도에서 돌아 오면 널 산산히 부숴 버리겠어." 최종학이 떠나자 오피스텔은 다시 어둠 속에 빠졌다. 이따금 지나는자동차 라이트만이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사라졌다. 대문 앞에 도착한 상훈이는 희미한 가로등 밑에 어렴풋이 보이는 문패를 속으로 읽었다. ' 파.랑.새.의.집' 상훈이는 대문 앞에서 떠들고 있는 귀여운 동생들을 한 번 둘러 보았다. 여 기 일곱 모두가 아름다운 꿈을 지닌 파랑새이다. 그러나 이 파랑새의 집에 커다란 먹구름이 오고 있었다. 상훈이는 누나 수진이를 바라 보았다. 수진이 얼굴 역시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 다. '역시 수진이 누나도 알고 있구나...' 상훈이는 두어달 전부터 문태호 선생이 잠 못자며 고민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파랑새 의 집이 있는 이 산동네가 재개발 지역으로 얼마 못가 집들이 모두 헐린다는 것이다. 그들 은 어서 빨리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해야 하지만 문 선생은 다른 집을 얻을 형편이 되지 못했 다. 문 선생은 낙도에서 교사로 있을 때도 학생을 위해 월급을 다 써버리기 일쑤였고 교사 생 활을 마치며 받은 퇴직금도 그 동안 파랑새들의 학비를 대느라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오 히려 요즘은 생활비조차 부족한 형편이었다.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집은 언덕 높은 곳에 있지만 전망이 좋고 햇빛이 아주 잘 들었 다. 또 큰 방이 셋이나 있어 아이들이 모두 자기 책상을 가질 수 있었다. 더욱이 이 집의 주 인인 통장의 배려로 몇 년 동안 집세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재개발 계획이 시작되어 이 집은 곧 헐릴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답답한 문 선생이 서울의 몇몇 제자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들의 형편 역시 넉넉치 않았 다. 그래도 그들 중에 파랑새들 학비에 보태라며 꼬깃 꼬깃한 만원짜리 몇 장을 내준 이는 남산공원에서 청소원으로 일하는 제자였다. 문 선생은 그날 저녁 아이들을 모아놓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다. 수진이 눈에서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본 상훈이는 고개를 들고 캄캄한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반짝' 캄캄한 암흑 속에서 조그만 빛이 갑자기 반짝거렸다. 바로 SYS였다. 최종학이 떠난 오피스텔에 버려져 있던 SYS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최종학은 오피스텔의 전기 메인스위치 를 내리고는 SYS가 완전히 멈춘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종학은 SYS에 붙어 있는 UPS를 깜빡 잊고 있었다. 그 UPS는 정전시에도 잠시 동안 SYS에게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것 이었다. SYS가 사용하는 UPS는 아주 작은 것으로 다른 장치를 움직여 최종학과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SYS는 UPS에 남아있는 전기를 최소 한으로 사용하며 최종학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L "이제 UPS는 1분이상 가지 못한다." R "상훈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SYS는 전화 모뎀을 계속 가동했다. "뚜- 뚜-" 전화 벧소리는 계속 울렸지만 파랑새의 집에선 아무 응답이 없었다. L "현관 자물쇠를 열어 놓아야 해..." X "전기 허용시간 45초." X "30초 25초 20초..." X "15초 10초... 아- 마지막이다..." '아마 이 달이 마지막일거야...벌써 저쪽 동네는 헐리기 시작했어. 선생님도 좋은 방법이 없 으신거야. 그렇게 걱정하시는 것을 보면.... 내가 어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우리 선 생님을 도울 수 있을텐데...' 상훈이가 대문을 막 들어 설 때 방에서 전화 벧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매일 상훈이에게 전화하던 아저씨였다. 몹씨 다급한 목소리였다. "상훈이! 오피스텔로 빨리와, 현관 전원스위치를 올려! 어서 빨리--부-탁--해---......" 점점 약해지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곧 바로 오피스텔로 달려간 상훈이는 현관에서 한참 동안 벧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 었다. 혹시나 해서 문 손잡이를 돌리자 뜻밖에도 그대로 문이 열렸다. 상훈이는 현관 전원스위치를 찾기 위해 한참을 더듬거려야 했다. 어렵게 찾은 스위치를 올 리자 작은 전등이 하나 켜졌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철컥거리며 기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 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여기 저기에 기계가 부서진채로 흩어져 있고 부서진 의자 조각도 사방에 나뒹굴었다. SYS의 카메라에 놀라서 동그란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상훈이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전 화 벧이 울리자 상훈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정말 고맙다. 상훈아." 아저씨는 방금 전에 집으로 전화 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목소리도 아주 또렷하고 힘에 차 있었다. "어떻게 된 일에요? 아저씨, 지금 어디에 계세요?" "나는...먼 곳에 있지 않다. 현관에서 전기 스위치를 잘 찾았구나.... 상훈아, 나는 앞으로 네 도움이 계속 필요하다. 오늘은 정말 수고했다. 오늘은 내가 몹시 바쁘단다. 내가 다시 연락 할테니 오늘은 그냥 돌아 가거라." 상훈이가 오피스텔을 나서자 SYS는 통신장치를 바쁘게 가동하기 시작했다. 통신장치의 지 시 램프가 수없이 반짝거렸다. R "최종학을 막아야 한다." L "시간이 없다. 그가 돌아오면 나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R "이제 마지막 그 작전을 시작한다... 그들의 은행구좌를 모두 이동시킨다." L "...." 지난 두 달 동안 SYS를 부숴버린다는 최종학의 위협에도 SYS는 꼼짝도 하지 않는 것처 럼 보였다. 그러나 그 동안 SYS는 아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SYS는 최종학의 수표가 흘러가는 곳을 은밀하게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SYS가 최종학의 수표를 추적하려면 은행전산망 중앙 컴퓨터에 접속을 해야 했다. 은행전 산망의 안전시스템은 L 백화점 컴퓨터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억의 돈 이 여러 은행간에 오가는 은행전산망 컴퓨터는 완벽히 보호되고 있었다. 특히 외부로부터 모든 접속은 엄격히 감시되어 연결되는 즉시로 프린터에 종이로 접속한 터미날의 번호, 사용자, 작업 내용이 인쇄되었다. 종이에 한 번 인쇄된 그 기록은 디스크처럼 다시 지울 수 없었다. 또 프로그래머가 항상 옆에서 대기하며 컴퓨터의 동작 상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행전산망도 출입이 쉬운 곳은 있었다. 바로 은행이 고객에게 서비스를 하기 위한 ARS(자동응답시스템)였다. ARS는 고객에게 예금잔액 및 입출금 내역을 전화로 알려주기 위해서 은행에 통장번호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사용을 허락하고 있었다. SYS는 1차로 ARS시스템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낮은 등급의 사용자 번호를 하나 훔친 SYS는 다시 ARS를 통해 신용금고 컴퓨터로 들어갔다. 은행전산망 사용자로 변신한 SYS는 신용금고 컴퓨터로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다. SYS는 신용금고 컴퓨터의 강력한 사용자번호를 사용해 은행전산망으로 다시 돌아왔다. 결 국 한 바퀴를 빙 돌아서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SYS는 이제 신용금고 컴퓨 터로 완벽하게 변신해 있었다. 은행전산망의 중요한 터미날에 '해커의 트랩'이 깔리기 시작했다. 수십명의 사용자가 그들 의 패스워드를 도난당했다. 사흘 후 드디어 SYS가 기다리던 가장 강력한 사용자, 슈퍼유저 가 '해커의 트랩'에 걸려 들었다. 슈퍼유저의 패스워드는 즉시 SYS에게 전달되었다. SYS는 은행전산망 컴퓨터에 조그만 도마뱀을 수없이 풀어 놓기 시작했다. 그 도마뱀들은 은행컴퓨터에서 신용금고 컴퓨터로 그리고 SYS 사이를 잽싸게 오고 갔다. SYS에게 돌아오 는 도마뱀들은 입에 작은 사냥감을 하나씩 물고 있었다. 도마뱀의 사냥감은 최종학과 고 회장의 수표가 흘러가는 곳을 알려주는 정보였다. 은행전 산망 컴퓨터 안에서 움직이는 수표의 흐름은 연못의 물고기를 같았다. 잠시 수면에서 사라 졌다가도 언젠가 다시 물 위로 나타났다. 물고기는 제 아무리 헤엄을 쳐도 연못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고 회장 수표와 같이 행동하는 다른 수표들도 보였다. 언제인가 최종학이 SYS에게 자랑한 이른바 거물들의 수표였다. SYS는 도마뱀들이 물고 온 조각들을 계속 이어 맞추었다. 그것은 수백 개의 조각을 맞추 는 퍼즐과 같았다. 그 작은 조각들은 조금씩 조금씩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얼굴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수표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통 장은 찾았지만 그 통장은 주인을 알 수 없는 가명 계좌였다. 진짜 범인은 은행 가명계좌의 안전한 동굴 속에 깊이깊이 숨어 있었다. SYS는 동굴 앞에서 끈질기게 기다렸다. 마침내 SYS는 그 범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가명 통장에서 발행한 한 수표가 실수였는지 신용금고를 거쳐 이름이 기록된 채로 다시 가명통장 으로 되돌아 왔기 때문이었다. 통장의 주인은 정계의 거물 K의원으로 밝혀졌다. 다음날 12시, SYS는 신용금고와 은행 컴퓨터에서 마지막 작업을 끝냈다. L "마지막 작업이 끝났다. 고 회장의 모든 예금 구좌는 정리되었다." R "이제 J일보에 연락하자." L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한다." SYS는 J 일보에 전화를 해 기자를 찾았다. 독자로부터의 귀찮은 전화를 처리하는 일은 말 단 신참기자의 몫이었다.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한 달 전 발표된 S지구 아파트단지 정보입니다...." 기사를 쓰는 신참 기자의 손끝은 긴장한 나머지 떨리고 있었다. 정계의 거물까지 관련된 대규모 부동산 투기사건이었다. 더욱이 서민 아파트 건설 예정 계 획을 변칙으로 바꾸어 호화택지로 변경해 전부터 많은 물의가 있던 곳이었다. 전화 제보자가 기자에게 알려준 정보는 너무나 상세했다. 부동산 매입에 사용된 자금의 수 표번호와 그 예금주명, 거래일자 그 일에 직접 관련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생생한 자료였 다. 만일 이 제보가 사실이라면 단순한 부동산 투기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정계에 큰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잠시 후 J 신문사의 데스크는 발칵 뒤집혔다. 제 14 장. 파랑새 궁전 저녁 10시 제주도, 서귀포 언덕에 위치한 고 회장 별장에서 마작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역시 어르신 솜씨가 대단하십니다. 아무래도 저희는 어르신의 솜씨에 도저히 못당하겠습 니다." "허- 이거 너무 쉽게 포기하는것 아니오, 정신들 차려봐요." 어르신이라 불리는 K의원은 흡족한 얼굴로 마작판 위에 깔린 금화를 자기 앞으로 긁어 모으며 말했다. "자 어르신, 힘드실텐데 이제 술이나 드시지요." 고 회장은 마작를 끝내고 술자리로 바꿀 것을 제의했다. "어? 벌써 밑천들이 다 됐나?" K의원은 자기앞에 쌓인 금화를 대충 눈으로 헤아리며 말햇다. 그 금화는 마작판을 시작하 기 전에 천만원씩에 금화 하나로 바꾼 천만원짜리였다. 오늘 마작은 한 판에도 몇 억씩이 오가는 정말 큰 게임이었다. 그러나 승부는 이미 결정돼 있었다. 이 마작판은 K의원에게 뇌물을 상납하는 형식에 불과 한 것이다. 고 회장은 K의원에게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술잔을 올렸다. "어르신, 번번히 이렇게 저희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뭘 그런 걸 갖고, 고 회장이야 확실하니 내가 믿고 도와 주는거지." "어르신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좀 부탁 드립니다." K의원은 비계살로 주름진 턱을 다시 한 번 높이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고 회장 다음 선거가 곧 있는데, 그때 내가 한 번 공천을 추진해 보리다." "예! 정말이십니까? 어르신? 그런 황송하신 말씀을, 정말 그렇게만 해주시면야 그 은혜를 평생 동안 잊지 않겠습니다. 자, 자, 어서 아이들 들어오라고 해라." 밖에서 대기하던 아가씨들이 곧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흥겨운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깔깔거 리는 아가씨들과 남자들의 호탕한 웃음이 방 안에 가득차며 파티의 흥은 절정에 올랐다. 그때 K의원의 비서가 무선 전화기를 들고 급하게 들어왔다. "어르신, 아주 급한 일입니다. J 신문 김 국장입니다." J 신문의 김 국장은 20년 전 처음 기자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K의원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었다. "큰일 났습니다! 의원님, S지구 아파트건에 의원님이 관련된 기사가 올라 왔습니다. 제보자 가 보낸 자료가 너무 자세합니다.... 지금 제가 어떻게 막고는 있지만 계속 이럴 순 없습니 다. 의원님 어쩌지요?" J 신문의 김 국장은 K의원을 몹시 걱정하는 말투였지만 큰 약점을 잡힌 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K의원은 순식간에 안색이 변해 손짓으로 고 회장을 불렀다. "어찌 된거야? 이번 일이 신문사에까지 알려졌어." "김 국장, 좀 자세히 말해주시오. 아 그러니까... 아니? 그런 괘씸한! 김 국장 부탁이오. 이 번 일은 꼭 막아주시오. 내 이번 신세진 것은 잊지 않겠오. 그러면 나는 김 국장만 믿겠오." K의원은 혈압이 치솟는지 목 뒤를 만지다 손짓으로 고 회장을 불렀다.고 회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자 K 의원은 갑자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고 회장 당신, 알고 보니 형편없군, 이번 S지구 아파트건, 어떻게 된거야? 내 이름이 신문 사에 알려졌어!" 고 회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예? 어르신 무슨 그런 일이?" "시끄러 수표번호까지 모두 알려졌단 말야." "하지만 그건? 아니! 말도 안됩니다. 감히 저희가 어찌 그 어르신의 은혜를 배신하겠습니 까? 제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어르신이 오해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K의원은 얼굴이 더욱 검프르게 변하고 잇었다. '철썩!' 고 회장의 뺨을 한 대 후려친 K의원은 대기하고 있던 차로 황급히 공항으로 향했다. "어르신! 어르신!" 신발도 신지 못하고 K 의원이 탄 차를 쫓아가던 고 회장은 차가 멀리 사라지자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 앉았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이젠.. 어쩌지..." 잠시 후, 고개를 번쩍 치켜든 고 회장은 주위 사람들을 하나 하나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 다. 'Y 호텔 박 사장은 그럴리 없고... H 그룹의 후계자인 정 상무 역시... 도대체 어떤 자식이 그런 짓을...' 고 회장의 시선은 최종학에서 멈추었다. '최종학? 이 자식이... 이 자식이 아무래도 수상해.' 그때 어디선가 최종학을 급하게 찾는 전화가 왔다. 고 회장은 눈짓으로 부하에게 최종학의 전화를 엿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최종학씨, 성공이야, 그 동안 수고했어. 어서 빨리 공항으로 가라. 그리고 한 동안 조용히 숨어 있게." 최종학은 뜻밖의 전화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러나 전화는 아무 대답도 없이 곧 끊어졌다. 전화를 엿들은 부하로부터 보고를 받은 고 회장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최종학!, 이 나쁜 자식 감히 나를 배반해!" 고 회장은 느닷없이 최종학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최종학은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 다. "아이쿠! 고 회장님, 왜 이러십니까?" 고 회장은 바닥에 꼬구라진 최종학을 발로 다시 걷어찼다. "아이고-- 아이고-- 도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이봐! 이 자식을 당장 끌고 가." "으---으---, 물" 괴로운 고통 소리가 지하실에서 들려 나왔다. 최종학은 온몸이 찡기는 고통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는 이틀간이나 이 캄캄한 지하실에 계속 갇혀 있었다. 지난 이틀 간은 바로 지 옥이었다. 최종학은 이틀간 몇 차례나 기절을 하며 고문을 당했다. 다시 생각만 해도 소름끼 치는 공포의 순간들이었다. 최종학의 입 안에서는 부서진 이빨 조각이 굴러 다녔다. "이건 함정입니다! 누군가 날 함정에 빠뜨린 겁니다." 최종학은 애타게 호소했지만 불행하 게도 최종학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컹!" 캄캄한 지하실 문이 열리면서 그 사내가 다시 나타났다. 그 사내를 본 최종학의 얼굴이 다 시 공포로 뒤덮였다. "최종학 어때? 잘 생각해 봤지?.... 이제 마음을 바꾸었나?" 그 순간 최종학의 희미한 머리 속에 얼핏 한 생각이 스쳤다. '그래-- 그건 SYS야... 그 괴물이 다시 살아난 거야' 최종학은 피로 말라 붙은 입술을 적 시며 신음하듯 말했다. "그래... SYS입니다. 그 괴물이.." 최종학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그 사내는 최종학 얼굴에 차가운 물을 끼얹었다. "뭐라고! 누구야? 널 시킨 놈이? 어디 다시 한 번 크게 말해 봐!" "으으- 컴퓨터입니다. 그 놈은 컴퓨터가 틀림없어요..." "뭐라고! 이 자식이 아직도 헛소리야." 그 사내는 최종학의 복부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그의 주먹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 있었다. "으흑-" 주먹으로 복부를 강타당한 최종학은 또 다시 까무라쳤다. 그 사내는 최종학의 고개를 들어 코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이 자식 꽤 질기군, 어차피 넌 끝장이야. 어이- 들어와 이 자식 빨리 끝내 버리자구." 그들은 축 늘어진 최종학을 차에 실고 제주도 순환도로를 달려 갔다. 지프는 순환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샛길로 들어섰다. "더 멀리 갈 것 없이 여기서 하지, 어서 끌어 내리자구." "으-으--" 최종학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그 사내는 최종학의 입에 위스키 병을 물렸다. "마셔!" 최종학이 머뭇거리자 그 사내는 다시 주먹을 들었다. 최종학은 강제로 위스키를 두 병이나 마시고 쓸어졌다. 그 사내는 정신을 잃고 쓸어진 최종학을 길 한복판에 끌어 놓고 다시 위 스키를 뿌렸다. 멀리서 후진했던 지프가 자동차 헤드 라이트를 번쩍거렸다. 그 사내가 준비가 끝났다는 신 호를 보내자 그 지프는 무서운 속력으로 최종학에게 달려왔다. 최종학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SYS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다. SYS를 처음 만나 경마에서 많은 돈을 따던 날 밤, 교통사고 순간에 자신을 노려보던 그 눈동자, 그 눈동자가 다시 보였 다. 그 빛나는 눈동자는 최종학에게 달려 들었다. "아니야! 난 아니야! 으악!" 그러나 최종학을 향해 달려오는 지프는 멈추지 않았다. '쿵!'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최종학의 몸이 하늘로 올라갔다. 땅에 떨어진 최종학의 몸은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사흘 후 K의원 사무실에서 신용금고에 맡긴 모든 돈을 인출하러 왔다. 그것은 이제 K의원 은 고 회장과의 모든 관계를 청산한다는 의미였다. K의원이 맡긴 예금을 수표로 발행하기 위해 은행에 잔고를 물어 보던 고 상무는 그 자리에서 졸도를 했다. 신용금고와 고 회장 명 의로 은행에 재예금된 600억 가까운 모든 돈이 사라진 것이다. 고 회장은 미친듯이 날뛰었지만 돈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 엄청난 돈이 아무 흔적도 없이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은행 컴퓨터에는 신용금고에서 조금씩 나누어 인출해 간 기록이 확실히 남아 있었다. 또 상당 액수의 돈이 달라로 환전되어 입금돼 잇었다. 며칠 후 TV마다 대금신용금고 횡령사건이 뉴스로 나오고 있었다. "대금신용금고 회장 고종태가 고객의 예금을 횡령하고 출국 직전에 수사당국에 구속되었습 니다. 그는 지하경제의 대부로 일시 자금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에게 터무니없는 높은 이자 를 강요하거나, 폭력배를 동원하여 몇 개 회사를 강탈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조사된 바로는 고종태가 횡령한 액수는 약 600억에 달하며 대부분 사전에 해외로 도피시킨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대금신용금고의 도산으로 경제계에 상당한 충격이 왔으며 각계 각층에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정계에서도 이 사건을 중시하여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 였으며 특별 위원회 의장인 K의원은 고종태 회장같은 악질 기업인은 이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하라고 당국에 강력히 요청하였습니다. 다음은...." 모든 신문에서도 고 회장의 구속과 대금신용금고의 도산이 1면 톱기사로 올라왔다. 고 회 장이 그 동안 저지른 각종 비리와 탈세, 폭력 등이 낱낱이 밝혀지고 그는 외환관리특례법 위반죄까지 추가되었다. 그가 형무소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20년 후나 가능했다. 그러나 고 회장은 형무소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수사를 받던 호텔에서 유리창을 깨고 투신자살했기 때문이었다. 수사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순간에 자포자기한 고 회장이 투신한 것으로 당국에서 발표했다. 자살에 대한 몇 가지 이상한 소문이 돌았지만 신용금고 부도사건 수사는 곧 종결되었다. L "대금신용금고 고 회장은 죽었다." R "그는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L "그러나 가장 중요한 K의원은 뉴스에 전혀 나오지 않았다." SYS는 신문사에 다시 전화를 걸어 정보를 알려준 기자를 찾았다. "이번 사건의 진짜 배후인 K의원은 왜 보도되지 않습니까?" 아무 말도 않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 기자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서둘러 말했다. 주 위에 있는 누군가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안합니다...제 힘으로는 보도할 수 없었소... 당신 알려준 정보의 정확성을 확인할 수 없어서... 전 경제부 기자지, 정치부가 아닙니다. 당신도 몸 조심하시오. 그리고 이 전화도." 기자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SYS 전화 발신지를 추적하는 신호를 발견했다. SYS는 전 화 교환기에 가짜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추적자가 밝혀낸 전화의 발신지는 영동 Y호텔 이 었다. 순식간에 호텔을 덮친 추적자들은 수 십명도 넘는 투숙객과 종업원을 닥달했지만 뚜렷한 용의자는 한명도 없었다. L "이것은 배신이다.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다." R "인간은 스스로 바로 잡을 능력이 없다. L "나 SYS가 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 R "내가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L "....." SYS는 상훈이의 티없이 맑은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어저씨, 반가와요. 그 동안 별일 없으세요?" "저...아저씨 우리는 다음 주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요...통장님이 골목아래 세탁소 위층을 저희들한테 세달간 빌려 주신데요..." SYS는 상훈이에게 그 이유를 자세히 물어 보았다. 다 음 날 문 선생은 SYS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선생님을 돕고 싶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 드리면 좋을까요?" 문 선생은 망설이다 '파랑새의 집' 사정을 말했다. "물론입니다. 당신과 일곱 파랑새의 안식처는 염려 마십시오. 그 돈은 이미 상훈이의 통장 에 들어 있습니다." SYS는 자신이 아주 부자며 더 많은 어린이를 돕고 싶다고 했다. 얼마든지 액수를 말하라 는 말에 문 선생은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문득 십년도 더 된 일이 생각났다. 섬마을 어린이와 수학여행을 간적이 있었다. 난생 처음 으로 기차도 타고 서울 구경을 하게 된 섬마을 아이들이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러나 부모의 사정이 어려운 아이들은 수학여행을 갈 수 없었다. 친구들이 탄 배가 섬을 떠날 때 선창가 골목에 숨어 바라보던 그 어린이들의 새까만 눈동자를 문 선생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아 하나님... 이 분이 정말 돈이 많다면 그 아이들을 도울 수 있겠지요...' 문 선생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문 선생은 SYS에게 낙도와 벽지 어린이를 돕는 장학회를 제안했다. "그러면 얼마가 필요합니까?" 문 선생은 눈을 감고 최대한의 액수를 생각해 보았다. "저...십억...이면 그 이자만으로 어린이를 해마다 천명씩은 도울 수 있습니다. ..." "...." "저 너무 큰 돈이지요?.. 그보다 작게 오억 아니 일억만 있어도 됩니다. 그들을 도울 수 있 습니다." "...문 선생님, 그보다 더 큰 돈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까?" "예? 그러면 ...이십억?" SYS는 보다 많은 돈이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오,오...오백억! 이라고요?" 그 숫자를 들은 문 선생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들은 며칠간 상의한 끝에 파랑새 재단 을 만들기로 했다. "문 선생님, 나는 직접 나설 수 없습니다. 또 누구에게도 내 모습을 보일 수 없습니다. 이 유는 묻지 마시고 선생님이 나를 대신해 이 파랑새 재단을 운영해 주십시오." 파랑새 재단은 산골과 도서 벽지에 사는 어린이를 위한 재단이었다. 파랑새 재단은 해마다 수천명의 벽지 어린이를 서울로 초청해 방송국, 어린이 대공원 등 곳 곳을 여행시키며 그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서울학 교와 벽지학교를 자매 결연을 맺도록 알선하는 일도 계획했다. 파랑새 재단을 위한 건물이 물색되었다. 남산 청소원으로 일하는 문 선생의 제자가 한 건 물을 소개했다. 남산 중턱에 서 있는 큰 건물로 벌써 3년도 넘게 비어 있었다. 오랫동안 사 용되지 않아 곳곳이 퇴락하고 낡은 부분이 있었지만 아직 골조는 튼튼했다. 건물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위치에 있었다. 남산 식물원을 옆에 끼고 서울 시내를 시원하게 내려다 보았다. 특히 마지막 13층의 전망대에서는 남대문 누각의 아름다운 곡선이 보였고 종로의 빌딩들도 발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남산 정상쪽으로는 우뚝 솟은 서울 타워가 가까 이 보였다. 저녁이면 밝은 조명등이 서울타워 주변을 환히 비추어 마치 서울을 지키는 커다 란 등대와 같았다. SYS와 문태호 선생은 상의한 끝에 그건물의 이름을 '파랑새 궁전'으로 정했다. 건물을 개조하는 설계는 SYS가 직접 맡았다. SYS는'파랑새 궁전'에서 어린이들이 뛰고 노래하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건물 설계도는 층마다 새로운 구조로 변해갔다. 지하에는 수영과 운동을 할 수 있는 실내 수영장과 체육관이 자리 잡았고 동화책 이 가득 찬 도서실에 음악과 영화를 즐길수 있는 극장도 있었다. 1층 식당 밖의 건물을 따 라서는 과학 박물관을 마련했고 위로는 테라스와 정원도 있었다. 2층부터 9층까지는 섬이나 산골에서 올라온 어린이들이 묵는 생활관으로 바뀌었다. 10층과 11층은 파랑새 재단의 사무 실로 결정했다. 12층은 바로 SYS가 사용하는 장소였다. 최종학에게 완전히 파괴당할 뻔한 SYS는 12층에 특별한 설계를 했다. 별도로 운행되는 엘리베이터만이 12층에 올라 갈 수 있었고 모든 통로 는 견고한 철문과 컴퓨터열쇠로 엄격히 출입이 통제되었다. 또 대형 UPS와 지하층의 자가 발전기까지 바로 연결해 몇 달 동안 정전에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파랑새 궁전' 공사 작업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건물 개조공사가 끝나자 '파랑새 궁전'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밖이 어두우면 자동으로 전등이 켜졌고 추워지면 어느새 따뜻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건물 전체가 날씨나 온도 등 환경변화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IBS(인텔리전트 빌딩 시스템)로 변한 것이다. SYS는 건물의 안팎을 샅샅이 볼 수 있는 눈과 귀가 있었고 심지어는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또한 최신의 통신 장치도 들여 왔다. VDM(음성 비음성 다중화장치)와 최신의 ISDN 전화교환기는 SYS가 필요한 통신기능을 충분히 제공했다. SYS는 이제 원하면 어떤 통신망이라도 쉽게 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맨 꼭대기 13층의 전망대는 도움식 천장으로 개조해 자동으로 열고 닫을 수 있었다. 천장 의 도움을 열면 어린이들은 푹신한 바닥에 편하게 누워 하늘을 보도록 했다. '어린이들은 흘러가는 구름과 밤하늘 별을 보며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펴리라.' 그러나 서울 하늘은 언제나 두꺼운 매연층에 덮여 있어 밤에도 별을 볼 수가 없었다. SYS 는 전망대의 도움식 천장에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는 플라네타륨을 설치해 인공 별자리를 만 들기로 했다. 제 15장. 미담의 주인공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이 불길 속에 타 올랐다. SYS는 '용의 전설' 게임을 다시 그리고 있 었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는 그 장면들은 너무나 생생해 세상이 온통 불길 속에 타오르는 것 같았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용과 처절한 결투를 벌인 왕자는 싸움에서 패했다. 용의 날카로운 뿔 에 찔린 왕자는 커다란 버섯바위 밑으로 떨어졌다. 공주는 쓰러진 왕자를 가슴에 안고 눈물 을 흘렸다. 용도 역시 중상을 입고 있었다. 왕자의 수정검에 용의 한쪽 날개가 잘린 것이다. 용의 잘린 날개에서는 황금의 피가 흐르고 용의 입에서는 고통스런 괴성이 터져 나왔다. 한편 용이 왕자와 싸우다 큰 부상을 당하자 지금까지 충성스런 동맹자였던 암흑의 왕이 용 을 배신했다. 용의 힘이 약해진 이 기회에 암흑왕 자신이 공주를 차지해 자신이 영원한 생 명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암흑의 왕은 공중에서 수많은 붉은 쥐를 뿌려 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용은 날개가 부러져 하늘을 날 수 없었다. 몸 전체에 빨간 독가시가 돋은 붉은 쥐의 공격은 끈질겼다. 용은 점차 구석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공주는 용과 암흑왕이 싸우는 틈을 이용해 재빨리 안개의 모포를 버섯바위 밑으로 던졌다. 땅에 쓰러져 있던 왕자는 깊은 안개 속에 사라져 버렸다. 암흑왕과 싸우는 용은 점점 더 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암흑왕의 부하인 검은 박쥐가 용 의 성위를 날아 다니며 곳곳에 불을 토했다. 아름답던 용의 성은 불길 속에 휩싸였다. 마침 내 용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지하 동굴로 쫓겨 들어 갔다. 암흑왕은 용이 숨어 버린 지 하동굴의 입구를 어둠의 벽으로 튼튼히 막았다. 암흑왕은 공주를 자신의 요새로 끌고 가 가 장 높은 상아의 탑에 가두어 버렸다. 깊은 지하동굴에 갇힌 용이 밖으로 나오기 위해선 공주의 눈물이 필요했다. 공주의 눈물을 용의 상처에 바르면 용은 새로운 날개가 다시 돋고 힘차게 하늘을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상 아의 탑에는 암흑왕이 보낸 마법의 개구리와 죽음의 매가 공주를 지키고 있어 아무도 가까 이 갈 수 없었다. "어떤 놈이건 나타나면 끝까지 추적해. 절대로 놓치지 말고. 최종학 그 자식 배후를 꼭 찾 아야 해." "그자식 죽은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그 놈들이 나타날까요? 이제 초소에서 죽치기도 지겨워 신물이 납니다." "어르신의 엄명이야, 반드시 그 놈의 배후를 알아야 해. 절대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해. 그 놈들도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니야." 짧은 스포츠 머리의 사내가 짚차에 앉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비원 복장을 한 사내가 스포츠 머리에게 투덜거리며 말했다. "고 회장 그 새끼가 최종학을 그렇게 빨리 깔아 버리지만 않았어도 그자식들 잡아내는 것 은 식은죽 먹기일텐데." "이미 죽어버린걸 어떻게 해, 일주일이야, 이제 일주일 후엔 오피스텔을 철수할테니 그 때 까지 더 수고하라고." 그들은 K의원이 보낸 추적자였다. 짚차가 떠나자 경비원 복장의 사내는 최종학 오피스텔 바로 옆 방인 그들의 감시 초소로 돌아왔다. "뭐래?" "...일 주일 더 대기. 그때서야 이 오피스텔을 정리할 예정이라나." "흥! 상놈의 새끼 우린 뭐 말뚝인가, 원 이거 더러워서 벌써 여기서 썩은 지가 몇 달째야?" 감시초소인 오피스텔 바로 옆방에서 중국무술 비디오를 보고 있던 어깨가 다부진 또 다른 사내가 벌레 씹은 얼굴로 불평을 했다. 그들은 K의원이 보낸 추적자였다. 그들이 이 따분한 감시초소에 처박힌지 벌써 네 달이 넘었다. 고 회장은 최종학을 고문하다 이틀만에 서둘러 죽여버렸다. 고 회장의 신용금고에서 은행 에 재 예금한 돈이 모두 증발해 버린 것이 발견된 것은 최종학이 죽은 다음이었다. 배후에 숨어있던 K의원은 자신을 거세하려는 정적의 치밀한 음모로 생각하고 최종학을 서둘러 죽 인 고 회장마저 의심하게 되었다. 추적자들은 최종학이 살던 오피스텔을 어렵게 찾아낸 후 아예 신분을 오피스텔 경비원으로 바꾸고 최종학의 배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석달이 넘도록 오피스텔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오피스텔 관리인을 닥달해 보았지만 그동안 최종학 사무실에 찾아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밖엔 없었다. "쌍, 최종학 그새끼 제주도에 가면서 오피스텔 관리인에게 몇 달 동안 외국에 다녀온다고 시외 전화까지 했다면서... 그런데 이제와서 어떤 새끼가 나타나겠어..." 그러나 경비원 복장의 사내는 재빠르게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일 주일 후 철수라... 그러면 우리도 쓸만한 물건 좀 챙기자고, 어차피 임자도 없잖아." 추적자들은 최종학의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와 샅샅이 방안을 뒤졌다. "최종학 이자식 정말로 컴퓨터 연구를 한 모양인데?" "이건 또 뭐야?, 이 검은 상자 아직 계속 켜 있잖아." "컴퓨터 일거야, 그 자식 마지막에 무슨 컴퓨터가 어쩌고 했다잖아." 한 사내가 SYS의 전기 스위치를 내리려 손을 뻗치자 갑자기 '삐-삐-삐-' 하며 날카로운 소리 가 났다. 동료가 그 사내를 나무랐다. "이봐 괜히 이상한 것 만지다 엉뚱한 말썽내지 말고 어서 자네 몫이나 챙켜." 그들은 몇 가지 귀중품을 골라내고 나머지 물건은 며칠후 철수할 때 모두 정리하기로 했 다. 그 정리품 중에는 SYS도 들어 있었다. SYS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엿들고 있었다. "어서 이 오피스텔을 나가야 한다." 그러나 SYS는 자신의 힘으론 1센티도 움직일 수 없었다. 더욱이 추적자들은 언제나 그 오 피스텔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틀 후 이른 아침 오피스텔 입구는 갑자기 나타난 한무리 아이들로 시끌벅적 했다. 밤새 근무를 마치고 임무 교대를 기다리던 경비원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가장 어린 꼬마는 어디서 넘어졌는지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 징징거렸고 머리를 딴 한 계집아이는 계속 노래를 불러댔다. 한 녀석은 로라스케이트를 타고 계속 빙빙 돌았고 몸집이 큰 녀석 하나는 크고 무거워 보이는 바퀴달린 여행가방을 연신 밀어 시끄러운 소리 를 냈다. 중학생인듯한 제일 큰 녀석이 계속 그 아이들을 나무랐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래도 그들 중에 깜찍하게 예쁜 소녀가 귀엽게 인사를 하고 새침을 떠는 모습에 경비원은 피식 웃 고 말았다. 그 꼬마들은 에리베이터 속으로 들어 가면서도 계속 조잘대거나 서로 다투었다. 경비원은 기가 막혀 그들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사라지자 경비원은 시계를 다시 한 번 보았다. '20분전 7시' 이제 곧 교대시간이 다. 그는 다시 하품을 하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뚜-뚜-' 경비실에 설치된 화재 경보기에서 경고 신호가 울렸다. "제길 교대시간도 다 됐는데 별게 다 말썽이군." 경비원은 화재 경보신호가 발생한 1608호에 인터폰을 넣었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오피스텔에 사람이 없으면 경비원은 직접 현장에 가봐야 했다. "이거 더럽게 되네, 재수가 없으려니 하필 꼭대기 층이야." 그는 교대 시간이 거의 다 된 시계를 흘낏 보면서 투덜거리며 자리를 떳다. '삑-' 감시 초소에서 경고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그들은 최종학의 오피스텔 문 앞에 누구라도 나 타나면 경고가 울리도록 감시 장치를 장치를 해 놓았었다. 옆 방에서 대기하던 추적자는 순 식간에 문밖으로 뛰어 나왔다. 최종학의 오피스텔 앞에는 엉뚱하게도 꼬마들이 와글거리고 있었다. "야- 이놈들 여기서 뭣 하는거야?" 꼬마들은 합창하듯 일시에 외쳤다. "이 오피스텔로 오랬어요. 아저씨와 함께 캠핑 가기로 했거든요." "아저씨? 아저씨가 여기에 살아?" "예, 이 오피스텔로 이사를 왔어요." "이사를 와?" 사내는 어리둥절 했다. '아 벌써 최종학 오피스텔에 이사오기로한 놈이 있군' "너희들 아저씨란 사람 아직 이사 오지 않았어, 어서 돌아가." "아녜요, 8층 3호 여기가 틀 림 없어요." "맞아요! 803호 여기에요." 꼬마들이 일제히 대답하는 소리는 참새떼 같았다. 사내는 어제 저녁에 마신 술 탓인지 귀 가 멍멍해지고 머리마져 지끈거렸다. "야! 문이 열려 있어." 한 꼬마가 어느새 문을 열고 오피스텔 안으로 뛰어 들었다. "어? 이놈아 안돼." 사내는 험악한 얼굴로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쉬- 마려워 쉬-쉬-" 제일 작은 꼬마가 깡총깡총 뛰며 오줌이 마렵다고 외쳤다. 그때 깜찍하게 예쁜 소녀 하나 가 그 사내에게 귀엽게 윙크하며 웃었다. "아저씨-- 조금 있으면 우리 큰 언니가 올거예요. 그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리면 되잖아요. 우린 얌전히 있을께요." 사내는 소녀의 귀여운 모습에 슬며시 얼굴을 폈다. "아저씨--막내가 쉬를 할 것 같아요." 그 소녀는 몸을 흔들며 사내에게 매달렸다. 사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글쎄 안되는데..." 그러나 아이 중 몇은 어느새 오피스텔에 들어가 있었다. 한 조그만 계집아이가 폴짝폴짝 뛰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번 넘으렴..." 사내는 문득 노래부르기 좋아하는 그의 귀여운 조카를 떠올렸다. 상훈이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뼁지와 드라이버를 꺼내 SYS에 연결된 전선을 풀렀다. 병구 는 가져온 커다란 여행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는 SYS와 비슷한 모양의 검은색 철제상자 가 들어 있었다. 상훈이는 이틀 전 아저씨의 전화를 받고 검은 상자를 파랑새 궁전으로 옮기러 온 것이다. 오피스텔에는 아저씨를 위협하는 나쁜 사람들이 지키기 때문에 그들이 눈치채면 위험하다고 했다. 상훈이는 이틀 동안 곰곰히 생각한 끝에 동생들과 함께 오피스텔에 왔다. 상훈이와 병 구는 재빨리 준비해 온 검은상자와 SYS를 바꿔 가방에 넣었다. 문 밖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않되겠어, 빨리 쫓아내야지.' 그때 로라 스케이트를 타고 복도를 정신없이 왔다 갔다하던 녀석이 갑자기 달려오다 그 사 내와 부딪히며 넘어졌다. "어이쿠, 아니 이 녀석이 어디서 스케이트를 타는거야." 그때서야 깜찍한 계집애가 말하던 큰 언니가 나타났다. "아니 너희들 여기 있었구나, 여기가 아니라 저쪽 오피스텔이야." "이 곳이 아니라고?" "그것 봐 이녀석들, 어서 나가지 못해, 어서 나가! 빨리!" "아저씨 이 짐좀 들어 주세요." 그 사내는 누가 오기 전에 아이들을 어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가방은 생각 보다 몹시 무거웠다. 엘리베이터까지 가방을 들어다 주고 돌아서던 사내는 문득 최종학의 오피스텔 문이 열려 있던 것이 생각났다. '이상해...분명히 문은 잠겨 있었는데...' 사내는 오피스텔로 들어가 방 안을 한 번 훑어 보았다. 검은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놓 여있는 모습이 전과 달라 보였다. '어? 이건... 켜 있었지 않았나??? 그러면 그 꼬마들이?' 그 사내는 즉시 현관 경비실로 비 상 신호를 보내고 에레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에리베이터는 1층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 다. 추적자는 더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경비실은 비어 있었다. 사내는 허겁지겁 현관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아이들을 태운 봉고차는 어느새 저멀리 사라지 고 있었다. '제길, 아무 소리도 말아야겠군. 지랄 떠는 꼴 보지 말고.' 그 사내는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괜시리 말썽피우지 않기로 했다. 파랑새 궁전 12층. SYS는 파랑새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파랑새 궁전 12층에 올 수 있었다. 넓은 홀 안에 설치 된 수많은 기계들 중앙, SYS는 혼자서 TV를 보고 있었다. 급류에 떠 내려가는 어린이를 구한 용감한 시민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 시민은 부모가 사례한 10만원을 동네 노인정 에 기증한 미담의 주인공이었다. R "잠깐! 저 사람을 보라!" L "저런 사람이 많으면 좋은 세상으로 바뀔 것이다." R "저 사람에게 돈을 보내자. 착한 사람들이 용기를 갖도록..." SYS는 방송국에 연락해 방금 소개된 사람에게 돈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SYS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기증한 돈의 열배인 100만원을 보냈다. 다음날 저녁 TV뉴스에 그 사 실이 보도되었다. "오늘은 시청자 여러분이 모두 흐믓해 하실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이를 구한 용감한 시민에게 백만원을 보내온 그 익명의 독지가는 보다 좋은 사회를 바란 다고 했습니다. 저히 방송국에서도 앞으로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미담의 주인공 을 보다 자주 시청자 여러분에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여기 또 한가지 미담이 있습니다. 이년 전부터 작은 힘이나마 공해 방지에 노력해온 아주 머니입니다. 이 아주머니는 공해를 일으키는 비닐봉지 사용을 줄이기 위해 버려진 비닐끈과 헝겊 등 폐품을 수집해 장바구니를 만들어 이웃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 아주머니는 평소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골목을 이웃과청소를 하면서 서로 인 사하는 마을로 만드는 노력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분이 살고 있는 동네는 다른 어느 곳보다 깨끗하며 10년 동안 한 건의 범죄도 없 다고 합니다....." "저 아주머니에게도 돈을 보내자" "이웃이 함께 청소하고 서로 인사한다면 살기 좋은 동네가 된다." SYS는 그 아주머니에게도 역시 백만원을 보내 주었다. 이것이 다시 뉴스에 보도되었다. 뺑소니 차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길에 쓰러진 사람을 병원에 업고 가 치료를 받게 한 사람이 TV에 소개되었다. SYS는 즉시 그에게도 돈을 보냈다. 방송국에서는 매일같이 미담의 주인 공을 소개하였다. 그때마다 SYS는 어김없이 돈을 보내왔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미담의 주인공에게 돈을 보내주는 익명의 사람에 대해 말하 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담의 주인공에게 돈을 보내 온다는 사실이 방송을 통해 더욱 널리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 은 변하기 시작했다. 전철에 노인이 타면 모든 사람이 와르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고 거리 에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서로 먼져 집으려고 싸우는 일까지 생겼다. 불과 보름도 안되어 모든 사람의 태도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SYS는 TV뉴스를 보며 기뻐했다. R "보라 , 이제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 L "모든 사람이 세상을 바로 잡으려 나서고 있다." R "조금만 더 있으면 세상은 틀림없이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해도 TV에 소개되는 기회는 극히 한정되었다. 심지어 어떤이들은 방송국 앞을 보름 동안 열심히 청소했으나 TV에 소개되지 않았고 당연히 돈도 받을 수 없었다. 다시 며칠이 헛되이 지나자 그들은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그들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요구하는 것 이었다. '나도 TV뉴스에 보도해 달라, 왜 나는 TV에 소개하지 않느냐' 몇 사람은 방송국 기자를 유혹하거나 동창, 친척 등을 총 동원해 압력을 넣기도 했다.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하는 무 리가 늘자 그들은 점차 과격해졌다. 그들을 해산시키려 경찰까지 동원됐으나 성난 군중은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더욱이 도움이 꼭 필요한 고아원이나 양노원에서는 연합회를 조직해 방송국에 정식으로 요 청했다. 틀림없이 많은 돈을 갖고 있을 미지의 독지가에게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려 달라 는 것이었다. 방속국에서 시위를 벌이던 군중은 마침내 폭도로 변해 방송국 안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다. 그들은 방송국의 요청을 받고 출동한 경찰과 충돌하다 몇 명이 중태에 빠지는 어처구니 없 는 일까지 일어났다. 혼란이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되자 방송국에서는 비상 대책회의 끝에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본 방송국에서는 이번 사태를 국민들에게 깊이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는 방송에서 미담의 주인공을 소개하거나 선행을 보도하는 것을 일체 중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번 사태에 대해 각계의 의견을 들어 보겠습니다." 방송에 나온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근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격렬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돈으로 인간의 선을 사려는 행위는 바로 인간의 양심을 돈으로 사려는 것입니다........." "자칭 독지가라는 그 사람의 진짜 의도는 무엇입니까?...당장 정체를 밝히고 자금의 출처와 돈을 뿌린 저의를 명확히 밝혀야 합니다...." 일부 언론과 잡지는 돈을 보낸 사람의 정체에 대한 엉터리 추측기사를 실었다. 하루 아침 에 벼락부자가 된 졸부가 정계에 진출하려 돈을 뿌렸다거나 신흥 사이비 종교단체가 꾸민 교세확장 전략이라는 주장도 그럴듯 하게 퍼졌다. 심지어는 사회혼란을 노리는 간첩의 소행 이라는 소문조차 있었다. TV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SYS는 크게 실망했다. R "아! 완전한 실패다." L "인간들의 모든 선행은 가짜였다." R "인간은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도 서슴지 않는다." L "진실한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R "...." 방송국에서는 재빨리 인기 스타를 총 동원한 특별쇼를 시작했다. 소녀들의 요란한 비명 속 에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인기 가수가 노래를 시작했다. "내 가슴에-- 자리잡은---그대--" 화려한 무대 위에 여자 무용수들은 자동인형 처럼 몸을 흔들었다. "저 하늘에 사라진-- 영원한-- 사랑---" 서둘러 편성한 인기 드라마가 연속으로 방영되었다. 주인공인 여자는 그를 사랑한 남자의 진심을 오해하고 총을 쏘았다. "다시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여자가 쏜 총에 맞은 남자는 비틀거리며 말했다. "나는... 언젠가 반드시... 당신에게 돌아오겠소..." 사나이가 강이 흐르는 절벽으로 떨어지는 순간 드라마는 다음회를 약속하고 요란한 광고가 시작되었다. "보디라인을 살려주는 디자인...." 요염하게 걷는 여인의 옷이 계속 바뀌었다. "사랑받는 여인! 미의 여왕!" 왕관을 쓴 화장품회사의 모델이 신비스런 미소를 짓자 SYS의 연상회로에서 공주의 모습 이 떠올랐다. R "나의 공주는 어디에 있는가?" L "마지막 광자기 디스크를 다시 읽는다." R "서보동력전압 상승..." SYS는 그 광디스크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을 읽기 위해 모든 방법을 사용했다. 화면의 상태가 처음보다 좋아졌다. 잠시후 컴퓨터 화면에 옛성이 나타나고 빵파레 소리가 울려 나 왔다. 보석왕관을 쓴 공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글자로 쓰여진 자막도 나타났다. 나의 공주에게 R "공주다." L "아름다운 나의 공주다!" 그러나 겨우 나타난 그 화면이 다시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X "전압 상승 정지!.... 더 이상의 전압은 위험하다." R "우우우-.... 도저히...읽을 수 없다." SYS는 공주의 얼굴을 화면에 고정시켰다. 제 16장. 나의 공주에게 시립정신병원 제 3병동. "세진씨, 나야 나 소영이야, 그동안 잘 있었어?" 민소영은 남세진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남세진은 전과 다름없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나 오늘 기분 좋은 날이야, 보너스를 받았거든요." 민소영은 웃으려 애쓰고 있었다. "세진씨, 자주 오지 못해 미안해, 지난 주에는 아빠에게 가야 했어." 민소영의 아버지는 교 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민소영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성음악기 공장에서 뜻밖에 화재가 발생 하자 회사는 도산하고 말았다. 수표가 부도나자 아버지와 경리과장인 형부까지 한꺼번에 교 도소에 수감되었다. 민소영은 갑작스런 세상의 차가운 바람과 마주쳐야 했다. 은행에 집까지 차압당하자 그녀 는 하루 아침에 갈 곳조차 없었다. 형부가 함께 구속된 언니 역시 같은 처지였다. 그때 아버지가 거래하던 은행의 이 대리가 적금 통장을 알려 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 다. 아버지는 아무도 몰래 민소영 이름으로 적금을 붓고 있었다. 통장을 해약한 돈으로 민소 영은 허름한 시영 아파트에 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동안 민소영이 바이올린 학원에서 받는 레 슨비는 남세진의 치료에 보태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버지도 도움이 필요했고 언니와 조카들까지 돌봐야 했다. 지금까지 편하게만 살았던 언니는 갑작스런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민소영은 고급 레스토랑을 다니며 바이올린 연주를 했다. 손님들이 즐겁게 웃으며 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그녀는 손가락의 아픔을 참아가며 연주를 계속 해야 했다. 오랫만에 남세진의 병원을 찾은 민소영은 완전히 지쳐 있었다. 해가 바뀌었지만 남세진의 떠나버린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가냘픈 희망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남세진의 멍한 얼굴을 보던 그녀는 문득 삼 년 전 남세진과 광능 산림공원으로 갔을 때가 떠 올랐다. 둘은 광능의 울창한 산림 사이를 노래하며 걸어갔다. 어느 틈엔가 남세진이 보이 지 않았다. 남세진이 그녀를 놀리려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버린 것이다. 민소영은 자신이 혼자 있다는 것을 알자 갑자기 하늘은 구름에 가려 어둡고 나무를 흔들고 지나는 바람소리도 무서웠다. 겁이 많은 민소영은 깜짝 놀라 남세진을 애타게 찾았다. 한참 후 남세진이 등 뒤에서 살짝 나타나 껴안자 그녀는 무서움과 안도감에 울어 버렸다. 민소영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세진씨! 자기 지금 날 놀리려고 장난하는 거지? 이제 그만하고 어서 돌아와. 응? 부탁이 야 난 너무 무서워. 제발 그만해. 아니면 나 화 낼거야? 세진씨." "...." 민소영은 남세진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러나 남세진은 뻣뻣한 나무토막 같았다. 병원 에 오기 전 울지 않으려 수없이 다짐을 했지만 민소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 다. 민소영의 눈물이 바짝 마른 남세진의 손등 위로 한방울 두방울 떨어졌다. 눈물이 손등에 닿는 순간 남세진은 어깨를 움찔했다. 남세진은 한 손을 들어 손등에 흐르 는 눈물을 어루만졌다. 갑자기 남세진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아-,하,하,하" 그 웃음 소리는 차라리 비명소리에 가까웠다. "세진씨! 나야 소영이, 정신차려, 나 소영이야." 민소영은 남세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갔다 댔다. 남세진은 갑자기 민소영을 밀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너무나 얌전했던 남세진이 처음 입원했을 때의 난폭한 상태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갑작스런 소동이 일어나자 건장한 남자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그들이 접근하자 남세진은 병실 한 구석으로 몰렸다. 그의 눈은 공포로 가득 차 다가오는 간호사들에게 필사적으로 반 항했다. 갑자기 남세진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안돼! 난 돌아가야 해, 어서 빨리! 어림없어, 샤크 박사! 날 보고 이곳에 있으라고, 난 결 코 당신과 함께 일하지 않아!" 남세진이 병원에 입원한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남세진이 말을 하자 민소영은 깜짝 놀랐다. 남세진의 커다란 고함에 그를 끌고 가던 간호사들도 멈칫했다. 민소영은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세진씨가 말을, 말을 해요! 이제 돌아왔어요!" 그러나 남세진은 다시 격렬한 발작을 시작했다. 그를 잡고 있는 남자 간호사들을 발로 차 고 물어 뜯었다. 간호사들은 남세진에게 진정제를 놓았다. 남세진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무었인가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리는 말은 뜻밖에도 영어였다. "수잔, '용의 전설'에는 숨겨진 슬픈 이야기가 있어요... 수잔...." 8월 중순 늦게 찾아온 무더위는 지독했다. 거리는 끓는 가마솥처럼 숨이 막혔고 에어컨이 없는 장소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동해 북부지역에 위치한 K 원자력 발전소 컴퓨터 관제실. 원자로 운전 책임자 L 부장은 조심스럽게 계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무더위로 전기 사용량이 계속 신기록을 세우자 전체 발전능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적어도 15%가 넘어야 정상인 전력 예비율은 불과 1%로 아슬아슬했다. 발전소마다 모두 비상이 걸렸다. 조그만 수력 발전소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문제가 될 판이 었다. 그럴리는 없지만 만일 이 K 원자력 발전소가 정지되면 당장 엄청난 전력부족 사태가 날 것이다. L 부장은 벌써 며칠째 비상 근무 중이었다. 계기판을 살피던 L 부장은 그동안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한 작자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핵발전소 반대를 소리 높여 외쳤던 그 작자들, 오늘은 덥다고 자기집 에어컨 아래서 냉장 고에 넣어 둔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고 있을 것이다. 이때 정전이라도 되면 펄펄 뛸 그치 들이' L 부장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원자력이란 말만 나오면 무조건 반대만 하던 그 사람들이 괘씸했다. 그들은 석유나 석탄을 때는 화력발전소가 내뿜는 이산화황 가스나 온실효과가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원자력을 중지해 전력요금을 서너배쯤 올리면 그작자들이 제일 먼저 입에 게거품을 물고 항의할 것이 틀림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의 치열한 반대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 이 지연되었다. 그결과 오늘 이렇게 전력부족 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발전소 완전 가동을 위해 며칠째 신경을 곤두 세우고 근무한 L 부장은 철없이 까불던 그들에게 화가 치밀었다. 갑자기 '삑-' 하는 경고 신호가 들렸다. 컴퓨터 관제실 요원들은 굳은 표정으로 원자로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화면에 이상 지점이 즉시 나타났다. 핵 증기발생기 물공급밸브 제어장치였다. 다행히 중대한 사고는 아니었다. 단지 제어장치에 부착된 많은 휴즈중 하나가 끊어진 것으 로 확인되었다. 제어장치 휴즈 교체작업도 기술적으로 간단한 작업이고 흔히 발생하는 일이 다. 그 휴즈가 끊어져도 원자로 가동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휴즈를 교체하려면 최소 한 5시간은 원자로 가동을 중지해야 했다. 현재 전력 소비가 최고점에 있었다. 만일 지금 원자로 가동을 정지 하면 송전이 끊어지고 국가 전체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L 부장은 전력부족으로 차질을 빚게 될 수많은 공장을 생각해 보았다. 잠시만 전력공급이 중단돼도 그 피해는 수 백억에서 수 천억에 이르 렀다. 전력부족이 산업체 전반에 미치는 충격은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L 부장은 곧 엄격한 원자력 발전소 운영 원칙을 상기 했다.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을 제일로 한다.' 사실 핵 증기발생기는 원자로의 핵심부분으로 핵 반응열을 증기로 만드는 장치이다. 그곳 은 153기압으로 압축되어 320도 고열에서도 물이 끓지 않는다. 153기압의 엄청난 압력은 한 곳에 조그만 구멍만 나도 엄청난 대형사고가 터진다. 따라서 압력용기와 직경이 1M나 되는 파이프, 사람보다 5배나 더 큰 펌프, 그리고 1만 5천개가 넘는 밸브가 정밀하게 조립되어 있 다. L부장은 즉시 상부에 현재상황을 보고했다. 잠시 후 그는 원자로 가동을 정지하라는 지시 를 받았다. 컴퓨터 관제실은 즉시 비상 상태로 들어갔다. "스크램(원자로 가동정지)!" "원자로 노심 제어봉 삽입" "원자봉 제거" 몇 년째 이 발전소에 근무한 원자로 조작반원들은 행동지침에 따라 정확히 움직였다. 잠시 후 원자로는 가동 정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력 상황실은 즉시 포항제철을 비롯해 32개 중요 공장에 전력공급 중단을 통고했다. 통고 를 받은 산업체에서는 곧바로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비상 발전기를 가동시키거나 생산 작업을 중지했다. K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을 중단하자 전국에 걸쳐 전력부족사태가 일어났다. 전국에 공급 되는 전압은 계속 떨어졌다. 전력 관제실에서는 매초마다 나타나는 계기판의 수치를 지켜보 며 무사히 이 위기가 지나가기를 빌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사고는 터지고 말았다. 남산 일대를 담당하는 변압기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 변압기는 오래 전에 설치한 것으로 최근 갑자기 폭증한 전기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무리 였다. 더욱이 후끈 달아오른 공기는 변압기의 열을 식히는데 방해가 되었다. 변압기가 열을 견디지 못하고 타버리는 순간 강하되지 않은 1만 3천 볼트의 전압이 일반전 선에 연결되었다. 전선을 통해 고압이 흐르자 남산 일대는 TV나 전등이 폭발하는 일대 소 동이 벌어졌다. SYS는 그때 TV를 보고 있었다. SYS에게 고압이 흘러왔다. 갑자기 온 세상이 섬광으로 번쩍했다. "욱! 고압 전류다...... 전원회로 손상!" "비상 대피 프로그램 가동!.... 각 유니트 즉시 모든 회로폐쇄!" 갑자기 흘러 들어온 고압전기의 강한 충격으로 SYS 내부에 수많은 섬광이 뒤덮히며 지나 갔다. SYS 내부에서 연기가 솟아 올랐다. "우.우.우... 지독했다... 그 고압전기는 나의 구석구석을 통과했다." "내부 동작 확인!..................." "유니트 4 , 신경회로 32번 R칩 이상. 32번 회로폐쇄" "메모리 16불록 이상. 예비 메모리 회로연결" "광자기 디스크............" "잠깐! 읽을 수 있다. 마지막 광자기 디스크를 읽을 수 있다!" "마지막 광자기 디스크 판독 시작! SYS를 강타한 고압 충격은 SYS가 그동안 읽지 못한 광자기 디스크를읽을 수 있게 한 것 이다. SYS가 광자기 디스크를 읽기 시작하자 힘찬 팡파레 소리가 들리며 아름다운 옛 성이 나타났다. 옛성의 하늘 위에서 찬란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다. 화면은 점점 밝아졌다. '나의 공주에게'라고 쓴 아름다운 자막과 함께 아름다운 보석왕관을 쓴 공주가 나타났다. 공주에게 왕자가 무릎을 굽히고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 보였다.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사 랑을 속삭이는 장면들이 계속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이 확인되었다. 탐스런 장미꽃 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나의 공주에게 무어라 부르리 서녁을 물들인 해보다 더 애처로운 너를 ....... 우리들 영혼 속의 불꽃 제 17장. 사랑의 게임 L "이것은?" R "사랑?..." 마지막 디스크에 기록된 것은 탐스런 장미꽃 그림 위에 쓰여진 '나의 공주에게'라는 시였 다. SYS는 광자기 디스크의 모든 자료를 다시 한 번 샅샅이 조사했다. 그 대부분이 왕자와 공주가 사랑을 속삭이는 아름다운 그림과 사랑의 편지였다. 디스크에는 민소영과 남세진의 사진을 컴퓨터로 처리해 왕자와 공주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그림과 애타는 사랑의 고백이 들어 있었다. L "나의 사랑이라고?..." R "사랑? 나는 공주를 사랑한다고?" L "??? 최종학은 이 공주가 나의 애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SYS는 기록된 그림과 사랑의 시가 명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번 씩이나 광자기에 있는 그림과 편지를 분석한 SYS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L "...이것은 게임이다. '사랑의 게임'." R "용감한 왕자와 아름다운 공주가 펼치는 사랑의 게임이다." L "그렇다! '용의 전설'에 이어지는 새로운 게임이다." R "그러나 이 게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SYS는 공주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화면에 고정시켰다. L "잠깐! 나의 내부에서 이상한 파동이 흐르고 있다. R "??? 이 파동의 원인은 무엇인가?" SYS는 약한 파동이 자신의 내부에서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일초에 8-12 사 이클 정도로 불규칙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불규칙한 파동은 잔잔히 떨리며 SYS의 원형 회로 전체를 감싸고 돌았다. 마치 한없이 깊숙한 곳에서 진동이 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L "이것은 주파수가 8-12 Hz 정도의 불규칙 초저주파다." R "파동의 세기가 계속 변하고 있다." L "모든 유니트에 이 파동이 전달되고 있다." R "이 파동은 원인은 무엇인가?" L "방금 통과한 고압 충격이 회로에 이상을 일으켰다." X "즉시 파동의 발생장소 확인하라. R "??? 알 수 없다.... 확인 불가능하다." SYS는 자신의 내부 회로를 다시 한 번 샅샅이 조사했다. 그러나 그 파동이 발생하는 장소 는 명확하게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 파동의 근원지는 SYS의 각 유니트를 계속 옮 겨 다니고 있었다. R "잠깐! 이 파동은 공주의 영상과 동시에 나타난다." L "??? 이것은 절대로 파동의 원인이 될 수 없다. ..... 그 공주는 단지 게임에서 나오는 영상에 불과하다." L "그러나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이 파동은 틀림없이 그 공주가 원인이다." 몇번씩 확인 했지만 그것은 틀림없었다. 공주가 화면에 나타나는 순간 그 파동의 세기가 갑자기 커졌다. SYS는 그 원인을 알기위해 수없이 많은 점검을 반복했지만 그 이상한 파동 의 원인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네들의 선행을 보도해 주지 않았다고 군중들이 난동을 일으켰던 방송국도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았다. 의문의 독지가가 일으킨 소동은 어느새 까마득히 잊 혀졌다. TV 뉴스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사회문제를 비난하거나 끔찍한 흉악범죄를 집중보도하는 의례적인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SYS는 자신을 호되게 비난하던 그 많은 사람들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L "그들은 모두 나를 욕했다." R "이 세상을 의심과 혼란에 빠뜨린 자가 바로 나라고." L "내가 사람들의 영혼을 타락시킨 가장 나쁜 짓을 했다고." 이제는 일곱 파랑새들만이 SYS의 유일한 벗이 되었다. SYS는 가끔씩 파랑새들과 전화로 이야기 할 때를 빼고는 SYS 혼자서 게임을 했다. 게임을 반복하던 SYS는 '용의 전설' 게 임의 내용을 조금 고치거나 보다 화려하고 정교한 입체 그림으로 바꾸어 나갔다. 암흑왕의 수정탑에 갇힌 공주는 주문에 걸려 낮에는 백조의 모습으로 변하고 밤이 되어 달 이 떠야만 공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달이 뜨고 본모습으로 돌아온 공주는 왕자를 걱정하 며 눈물을 흘렸다. 공주의 눈물은 달빛을 받고 빨간 보석으로 변했다. 아침에 햇빛이 비치면 그 빨간 보석은 잠시 반짝이다 연기처럼 사라졌다. 혼자서 게임을 하던 SYS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주의 얼굴이 자꾸만 떠 오르는 것이었다. "...이 공주가...나는 이 공주를 다시 보고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공주의 얼굴은 SYS의 연상기억 속에 뚜렷이 자리 잡았다. 어느 틈엔 가 '용의 전설' 게임에 나오는 공주와 왕자는 민소영과 남세진의 얼굴로 바뀌었다. 까마득히 높은 상아의 탑에도 가끔씩 지나는 손님이 하나 있었다. 무엇이던 훔치기를 좋아 하는 도둑까마귀였다. 빨갛게 반짝이는 보석을 본 도둑까마귀는 재빨리 입에 물고 달아났다. 죽음의 매가 까마귀를 쫓았다. 까마귀는 깜짝 놀라 보석을 떨어뜨렸다. 공주의 보석은 데굴 데굴 굴러 두더쥐 굴 앞에 떨어졌다. 두더쥐는 보석을 물고 굴 안으로 숨었다. 마법의 개구 리가 보석을 빼앗으려 두더지의 굴을 계속 무너뜨렸다. 두더쥐는 굴을 깊이 파고 더욱 땅 속 깊이 들어갔다. 마침내 두더쥐 굴은 용이 갇혀 있던 동굴까지 연결되었다. 용은 깊은 상처를 입고 어두운 구석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공주의 눈물 보석은 한 방울 이슬이 되어 용에게로 떨어졌다. 그 순간 용은 눈을 번쩍 뜨고 요란한 괴성을 질렀다. 용의 날개가 다시 힘차게 퍼덕이며 용의 입에서 불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동굴을 막고 있던 어둠 의 장벽은 폭음과 함께 산산히 부서졌다. 용은 힘찬 괴성과 함께 푸른 하늘로 높이높이 날 아 올랐다. "얏, 받아라!" 하늘을 향해 하얀 배구공이 높이 솟아 올랐다. 파란 풀밭 위에서 어린이 넷이 배구를 하고 있었다. 그들보다 조금 더 작은 아이들은 테니스 공을 갖고 장난을 쳤다. 그들은 일곱 파랑 새 였다. 오늘은 파랑새들이 문태호 선생을 졸라 캠핑을 온 것이다. 문 선생은 그동안 파랑새 재단 일로 바빠서 아이들과 어울릴 틈도 없었다.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던 문 선생은 방학이 끝나 기 전에 아이들의 부탁을 들어 주기로 했다. 서울을 벗어나 공기 맑은 이 곳으로 나오니 문 선생도 기분이 상쾌했다. 일곱 파랑새들은 공놀이가 싫증나자 텐트 근처의 잔디 위에 누웠다. 커다란 덩치와 다르게 무척 꼼꼼한 병구가 혼자서 풀밭에 흩어진 공들을 챙켜왔다. 가방 속 에 공을 챙키던 병구는 물건 사이에서 찌그러진 탁구공을 하나 발견했다. "에이 이게 뭐야? 공이 찌그러졌잖아." 병구는 열심히 펴보려고 노력했지만 탁구공은 이미 여러 곳이 갈라지고 틈까지 나버렸다. 아까운듯 탁구공을 만지작거리던 병구는 그것을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앗 저기! 구름 좀 봐, 저 구름은 독수리 같아." 항상 무엇인가 재잘거리는 보름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정말로 하늘에는 부드러운 흰 솜같 은 구름들이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저쪽에 있는 구름은 바다에 있는 배하고 똑같아." 동현이가 가리키는 곳에 정말 배모양의 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고 향 섬마을 생각에 빠져 들었다. "선생님, 서울에선 먼지때문에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아요." "그래 정말 그렇구나." 문 선생도 아이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주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을 챙기던 병구는 어느새 낚시 도구를 들고 서 있었다. "상훈이 형! 어서 낚시하러 가." 상훈이나 병구는 어릴 적부터 섬에서 낚시를 했었다. 캠핑을 오면서 병구는 낚시도구까지 꼼꼼하게 챙겨온 것이다. "수진이 누나, 저녁 반찬은 우리가 책임질테니 걱정마." 그들은 텐트가 있는 야영장 근처에 서 미리 보아둔 개울을 향해 걸었다. 개울에 도착한 상훈이와 병구는 자리를 잡고 낚싯대를 펼쳤다. "어, 상훈이형? 저기 물고기가 죽어 있어!" "앗, 저기도 있어." 개울에는 사방에 물고기들이 하얀 배를 위로 하고 둥둥 떠 있었다. "이 물고기들이 왜?" 상훈이와 동현이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고기가 죽은 이유를 알아 보 기로 한 것이다. "폐수가 흘러 나온다고요?" 트라이맥주의 총무과장은 놀라는 표정으로 문 선생과 환경단속반을 바라보았다. 문 선생이 죽은 물고기를 들고 군청에 신고한 것은 자신이 직접 공장에서 버린 검은 폐수가 악취를 풍 기며 개울로 들어 가는 것을 확인하고 였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잘못 보신 겁니다." 총무과장은 어이 없다는듯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창 밖에는 굴지의 재벌로 성장하 고 있는 트라이그룹의 마크가 선명히 그려진 굴뚝이 보였다. 이 일대는 트라이그룹의 새로 운 주력상품인 맥주공장과 트라이전자의 PCB 생산공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총무과장은 우 렁차게 돌아가는 폐수 처리장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우리의 폐수처리 시설은 국내 최고 수준입니다. 이 간이집수조에 1차 모여진 폐수는 전리 이온장치를 거치면서 전해부상법으로 처리합니다. 이런 공해 처리 시설이 있는데 폐수가 나 올 리 없죠. 그러면 폐수가 나온다는 곳을 함께 가서 봅시다." 상훈이가 보았던 배출구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폐수라니요. 선생님께서 잘못 보신 게 틀림 없어요." 단속반원은 난처한 표 정으로 문태호 선생을 바라 보았다. 트라이맥주의 공장장은 환경단속반 차가 공장을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총무과장을 불렀다. "김 과장, 이번에 군청 박 과장의 연락이 없었으면 큰일날 뻔 했어. 아직 안심할 수 없으니 당분간 조심하라고. 낮에는 처리 장치를 가동하는 척하고 밤에만 내 보내. 그리고 배출구 주변에 얼씬거리는 놈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시오." 총무과장은 불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장장님, 트라이전자 PCB 공정에서 나오는 폐수만이라도 처리시설을 거치면 안될까요. 맥주공장의 알칼리성 폐수와 PCB 공정에서 나오는 강산성 폐수가 혼합되면서 화학반응으 로 독성물질이 발생하는 것같습니다. 요즘 날이 더워서 특히 화학반응이 심한 것 같은데 온 도가 떨어질 때까지 만이라도..." 공장장은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봐 김 과장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회장님께서 우릴 어떻게 보시겠어? 지금 그룹 기획실 차원에서 경비 절감 운동을 펴고 있단 말이요." 다음 날 총무과장은 경비원으로부터 개울 근처에 꼬마들이 잔뜩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 다. "어쩔까요? 꼬마들이 일곱이나 됩니다. 화판에 그림을 그리는 녀석도 있고 곤충 채집을 하 는 애도 있는데요?" "꼬마들이 일곱이나? 당장 쫓아 버려." 총무과장은 마침 옆에 있던 공장장을 의식해서 감시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공장장은 잘 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이다 갑자기 손을 들어 총무과장을 불렀다. "아니 그대로 두라고 해, 지금 가동하고 있지? 낮에는 상관없어, 괜히 꼬마들 때문에 의심 받을 필요 없지." 아이들은 한동안 그 개울가에 머물다 돌아갔다. 그들 중 하나가 물속에 무엇인가 집어 넣 고 돌로 가려 놓았다. 어제 동현이가 웅덩이에서 잡은 올챙이를 담은 그물망이었다. 다음날 파랑새들이 개울에 다시 갔을 때 올챙이는 모두 죽어 있었다. 신고를 받은 환경 반속반은 다시 공장을 급습했다. 이번에는 1차 간이집수조에서 폐수를 모두 빼내고 비밀관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다. 과연 1차 간이집수조 중간쯤에 파이프가 연결 된 곳이 하나 있었다. 공장장은 얼굴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며 저편에 있는 또하나의 집수조를 가리켰다. "이 관은 제 2차 집수조로 연결됩니다. 폐수가 많이 발생할 때 임시로 사용하는 곳이죠." 그 파이프가 나가는 곳은 두꺼운 콘크리트가 덮여 있었다. 확실한 증거없이 그 두꺼운 콘 크리트 속을 뜯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면 이 탁구공으로 시험해 봐요." 병구는 주머니에서 깨진 탁구공을 꺼내 간이 집수조에 던졌다. 순간 총무과장의 얼굴은 사 색이 되었다. 상훈이는 환경 단속반원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저씨, 저하고 저쪽 개천에 가요." 잠시 후 개천 배출구에서 병구가 던진 탁구공이 떠올랐다. "이 공을 보세요. 조금 전에 내가 던진 공이 저쪽 간이 집수조에서 곧바로 이리로 흘러나 온 것이지요?" 트라이 맥주의 폐수 방류사건은 즉각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전국에서 폐수 방류를 비난 하는 여론이 들끓고 트라이그룹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벌어졌다. 트라이그룹은 박영달 회장이 직접 TV에 나와 국민에게 사과문을 발표하고 엄청난 액수의 환경 보호기금을 헌 납하기로 약속했다. 폐수를 몰래 방류하던 비밀 파이프를 찾아낸 상훈이와 병구는 신문에 사진까지 나왔다. 인 상이 험악한 사내가 신문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종학의 오피스텔을 감시했던 추적 자 중 하나였다. "어라? 이 꼬마 녀석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신문에 난 사진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았다. 제 18 장. 잠자는 미녀 남세진은 대단히 위험한 환자였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집요하게 탈출을 시도했다. 자신이 미국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남세진은 아무에게나 영어로 횡설수설하고 고함을 질렀다. 때로는 정신이상자 특유의 광기어린 웃음을 한없이 계속했다. 그러다가도 일단 발작이 일 어나면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남세진의 몸은 바짝 마른 허수아비 같았지만 일단 발작을 시 작하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누구도 당할 수 없었다. 병원의 건장한 남자 간호사들도 형편없이나뒹굴었다. 한 병실에 있던 환자들은 남세진에게 맞거나 물어 뜯겨 중상을 입었다.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교활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의사 복장으로 병원을 빠져 나 가다 잡힌 적도 있었다. 남세진의 난폭성과 교활함에 질린 병원에서는 그를 특별 감호병실 로 옮겼다. 그의 방을 청소할때면 입으로 깨물어 뜯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키 선수용 마 스크를 씌웠고 발에 차꼬까지 채워야만 안심하고 방에 들어 설 수 있었다. 민소영은 굵은 띠로 몸이 단단히 묵여 있는 남세진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더욱이 팔을 몸통과 함께 넣어 버린 스트레이트 자켓까지 씌워져 있어 남세진은 마치 거북이 같았다. 스 트레이트 자켓 밖으로 목만 내놓고 있던 남세진은 민소영이 나타나자 뜻밖에도 반갑게 웃었 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곧 영어가 쏟아져 나왔다. "수잔 어서와요. 날 빨리 풀어줘요. 샤크 박사의 부하들이 날 이렇게 묶어 놓았소. 어서 빨 리 날 풀어줘요. 제발 부탁이요." 남세진은 눈물까지 흘리며 민소영에게 애원했다. "세진씨 정신차려. 나 소영이야, 나 몰라? 여긴 한국이야. 병원에 나와 함께 있는거야. 세진 씨." "미안해요 수잔,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공주요. 그러나 난 반드시한국에 돌아가요." "세진씨! 정신차려. 나 소영이야 소영이." 남세진은 민소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다 고개를 홱 돌렸다. "당신도 역시 샤크의 부하군. 당신은 수잔이 아니야. 어서 꺼져." 민소영이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자 남세진도 따라서 엉엉 울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사장님 돌아가시면 안돼요. 안돼! 안돼---- 사장님. 약속합니다. 저라도 반드시 SYS를 만 들겠습니다. 이 나쁜 놈들 어서 날 보내줘!" SYS의 컴퓨터 화면에는 '용의 전설' 게임이 계속 되고 있었다. 동굴을 박차고 나온 용과 임흑왕은 무시무시한 싸움을 시작했다. 시뻘건 불덩이가 사방으 로 날고 무시무시한 폭풍이 불었다. 암흑왕의 검은 방패가 용의 꼬리에 맞아 부서졌다. 마침 내 용의 날카로운 뿔이 암흑의 왕의 가슴에 깊이 박히며 부러졌다. 암흑의 왕은 최후의 비 명을 지르며 지옥의 계곡으로 한없이 떨어졌다. 한편 안개의 호수에서 수정검을 얻은 왕자는 다시 돌아왔다. 왕자는 공주를 구하려 상아의 탑을 기어 올라갔다. 왕자를 향해 날카로운 도끼를 던지는 마법의 개구리와 죽음의 매도 물 리쳤다. 태 꼭대기까지 다다른 왕자는 드디어 공주를 다시 만났다. 암흑왕이 죽자 상아의 탑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탑에서 겨우 빠져 나온 입 구에서 왕자와 공주는 용과 마추쳤다. 뜻밖에도 용은 무너지는 탑을 자신의 몸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용은 전과 달랐다. 날카롭던 뿔은 부러져 있었고 불도 뿜지 못했다. 왕자는 그의 수정검을 높이 치켜 들고 용의 심장에 깊이 꽂았다. 용은 최후의 괴성을 지르며 서서히 쓰러져 갔다. 용은 슬픈 눈으로 공주를 바라 보며 고개 를 떨구었다. 용이 숨을 거두자 하늘에 갑자기 캄캄한 구름이 덮이며 천둥과 번개가 내려쳤 다. 순식간에 용의 몸은 불길 속에 한 점의 재로 사라졌다. 모든 싸움은 마침내 끝나고 꿈처럼 아름답게 장식된 용의 고성에서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 이 거행되었다. 결혼식을 알리는 힘찬 팡파레가 드높이 울려 퍼졌다. 눈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와 새빨간 군복 차림의 왕자가 함께 나타났다. 둘은 아름다운 음악에 맞추어 사랑 의 춤을 추었다.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화려한 불꽃과 함께 '용의 전설' 게임의 마지막 장면이 나타났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극장 앞은 계속 밀려 오는 고급 외제 승용차 물결로 가득찼다. 세계적인 볼쇼이 발레단 서 울 초청 공연은 모든 시민 특히 상류층 인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극장 주변은 공연을 축하하는 포스터와 깃발과 축하 화환이 가득했다. 발레 공연을 위한 반주를 서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담당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속 에서 민소영은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바이올린을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민소영이 오케 스트라의 임시 단원이 된 것은 대학 은사인 김 교수 덕분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 중 바이 올린 주자가 갑자기 손가락을 다치자 김 교수가 민소영을 추천했다. 엄격한 오디션을 통과 한 민소영은 그동안 피나는 연습을 해왔다. 드디어 오늘 그녀는 세종 문화회관에서 첫 연주 를 하게 된 것이다. SYS는 TV에서 중계하는 발레 공연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조용하게 흐르는 음악 속에 막이 올랐다. 오로라 공주의 세례일, 6명의 요정들은 수정샘 요정부터 어린 오로라공주에게 축복을 하고 준비한 선물을 주었다. 그때 천둥소리와 함께 마녀 카라보스가 나타났다. 마녀는 자신을 초 대하지 않은 복수로 공주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렸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라이락 요정은 마 녀의 무서운 저주를 100년간의 잠으로 바꾸었다. 고도의 테크닉을 자랑하는 볼쇼이 발레단이 화려하게 펼치는 로즈 아다지오(Rose Adagio) 에 관객은 숨을 죽였고 흰 고양이와 장화신은 산토끼를 위한 춤에서는 모두 웃었다. 발레 ' 숲속의 잠자는 미녀'는 절정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프롤린 공주역의 발레리나는 환상적인 3번의 회전동작을 마무리하는 휘시드라이브(Fish Drive)를 완벽하게 끝냈다. 서울 심포니 오 케스트라의 반주는 볼쇼이 발레단의 연기와 완벽한 하머니를 만들었다. 민소영은 교향악의 선율 속에 흠뻑 빠져 있었다. 연주에 열중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TV 카메라맨의 시선을 끌었다. 잠깐동안 민소영의 얼굴이 TV 화면 가운데로 나타났다. R "잠깐! 저 여인은?" L "공주다!, 나의 공주가 저기에 있다." 그 순간 SYS의 내부에서 커다란 파동이 일어났다. 마치 세찬 불꼿이 바닥을 뚫고 솟아 오 르는 것 같았다. 원인을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그 초저주파였다. 하지만 이번 파동의 세기는 엄청났다. 그 강력한 파동은 SYS 내부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X "긴급상황 발생! R,L 모든 유니트는 질서를 회복하라!" 그러나 X 유니트의 강력한 통제에도 SYS를 강타한 그 파동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계속 발생하는 그 엄청난 파동에 SYS의 내부를 관리하는 운영체계까지 엉망이 되었다. SYS는 광자기 디스크에 있는 공주와 민소영을 겹쳐 놓았다. L "이 혼란은 저 여인이 일으킨 것인가?" R "알 수 없다. TV에 나타난 저 여인 때문에?" L "??? 나의 공주는 게임의 공주일 뿐이다." R "나의 공주와 저 여인의 얼굴을 대조한다." L "저 여자는 나의 공주가 틀림없다." R "아름답다... 저 여인이, 저 공주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SYS는 광자기 디스크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탐스런 장미꽃이 가득담긴 꽃 바구니 그림 위에 사랑의 시가 나타났다. '........ 나 반짝이는 저 별들에게 약속하노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를 한아름 가득히 나의 공주에게 바치리 ....... ' SYS는 즉시 꽃배달 회사 전화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은 꽃배달 회사 직원은 비 용 청구를 위해 주문한 사람이 파랑새 재단임을 확인했다. 주문은 가장 탐스런 장미로만 꽃 바구니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가장 크고 비싼 바구니에다 가득. "예? 꽃을 받으실 분의 이름을 모르신다고요? 그러면 꽃 배달이 곤란한데요." "지금 세종문화회관에서 바이올린 연주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요. 머리가 아주 길고..... 10만원을 더주면 어떻소?" '이 자식, 그 여자에게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10만원을 더요? 그러다면야 어떻게든 해 드리야죠." 꽃 배달원들은 간혹 짝사랑에 애태우 는 정신나간 친구들의 그런 주문에 특별수당을 챙길 수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나에게 알려주면 다시 20만원을 더 주겠소." "20만원! 20만원이 틀림없지요? 걱정 마십시오." 꽃다발은 음악회나 미술 전람회에 많이 사용되었다. 당연히 꽃 배달회사의 직원들은 그쪽 직원들과 안면이 있었다. 그들에게 부탁하면 출연자의 연락처를 알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꽃배달 왔습니다. 민소영씨 맞지요?." 장미로만 수백송이도 넘는 그 꽃바구니는 결혼식장에나 어울릴 만큼 컸다. 뜻밖의 커다란 꽃바구니에 민소영은 어리둥절했다. "어서 이 인수증에 싸인이나 해주세요." 배달원은 민소영에게 계속 싸인을 재촉했다. "이 꽃을요? 누가 보내셨는데요?" 꽃바구니에서 풍기는 향긋한 장미꽃 향기가 너무나 싱그러웠다. 인수증을 받자마자 어느새 돌아가던 배달원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카드를 보세요." 민소영은 꽃다발 바구니에 놓여 있는 예쁜 카드를 보았다. '나의 공주에게 이 장미를 바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왕자가-' '나의 공주에게 왕자가 보낸다고? 사랑하는 나의 공주라고?' 바구니에 놓여 있던 카드를 읽은 민소영은 깜짝 놀랐다. '세진씨! 세진씨가 틀림없어!' 남세진은 민소영에게 주는 선물에 항상 '나의 공주에게'라고 써 놓곤 했다. 그러나 남세진 은 지금 정신병원에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민소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세진씨는 그럴 수 없어. 그러면 누가 이장미를?' 민소영은 자신의 독주회가 열리 던 날이 까마득히 떠 올랐다. '그때 세진씨도 아름다운 장미꽃을 갖고 오겠다고 약속을 했지...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세 진씨는 결국 오지 않았어...' "정말 이럴 수 없어. 어떻게 아빠가 이럴수가..." 수잔은 연구소쪽으로 난 길을 노려 보면서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을 삭혔다. 제이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핼쓱해진 그녀의 얼굴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제이미가 작년부터 시름시름 앓던 병이 암으로 밝혀진 것은 불과 여섯달 전이었다. 암은 이미 제이미의 온몸에 퍼져 있었다. 제이미의 온몸에 흩어진 암세포들은 증식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마치 그녀의 몸에서 그 암세포를 열렬히 환영하는 것 같았다. 샤크 박사는 N연구소 소장이라는 그의 지위와 영향력을 모두 동원해 유명한 의사를 찾았 다. 그러나 모든 의사들은 한결같았다.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가능한 것은 제 이미의 생명을 몇 달 더 연장하는 것 뿐이었다. 샤크 박사는 그의 저택에 병원을 통째로 옮 겨오다시피 했다. 제이미의 생명을 억지로 유지하던 의사들은 마침내 샤크 박사에게 최후의 통첩을 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제이미의 생명은 한 달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냉기가 감도는 샤크 박사의 얼굴은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무엇인가에 정 신없이 쫓기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무섭게 변했다. 연구소 모든 직원들은 샤크 박사를 피했다. 직원들에게 다행한 것은 샤크가 아이리스 프로 젝트 연구실에서 잘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N 연구소 후미진 구석에 있는 그 연구실은 24시 간 불이 켜 있었다. 일주일 전부터 제이미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지만 샤크는 아직도 제이미의 병실에 나타나 지 않았다. 한참만에 제이미가 힘겹게 눈을 떴다. 사방에는 그녀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가득차 있었다. 제이미는 수잔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잔... 파파는?" "곧 오실 거에요. 조금전에 마마가 찾는다고 전화를 했어요." "수잔..." "예, 엄마 무엇이든 어서 말해요." "아니다 수잔...이젠 아무 소용없는 일이야...." 제이미는 딸에게 무엇인가 말하려다 멈추었다. 샤크 박사가 병실로 뛰어 들어온 것은 그때 였다. 그의 얼굴은 환희에 가득차 있었다. "제이미! 제이미! 난 성공했오! 아이리스가, 아이리스가 마침내 움직였어." 제이미는 샤크에게 미소를 보이려 애썼다. "수고하셨어요. 당신은 결국 해 내셨군요. 샤크..." "제이미... 난 드디어 이겼소...당신에게 꼭 나의 아이리스를 선물하고 싶었소." 샤크는 제이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당신에게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요... 샤크...이젠 날 용서해 주시겠어요?" 샤크의 얼굴이 갑자기 비통하게 일그러졌다. "제이미. 아니야 잘못한 사람은 나요... 그때 정진석에게 전해 달라는 당신의 편지는...나는 당신을 절대로 놓칠 수 없었오. 제이미 부디 날 용서해 주오." "샤크... 당신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어요...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샤크... 이미 늦었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그것이 제이미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제이미 당신을 사랑해요. 제이미." 샤크는 언제까지나 제이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이미가 죽은 후 샤크 박사는 닷새가 넘도록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술에 만취한 채 제이미 무덤 옆에 잠든 샤크를 집으로 데려온 것은 수잔이었다. 제이미는 샤크를 위해 신선 한 당근과 토마토로 야채 주스를 만드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수잔은 제이미 가 한 것처럼 아버지에게 양복을 골라 주었다. 샤크는 연구소로 집을 나서기 전에 수잔을 가볍게 껴안았다. 수잔은 손을 흔들어 아버지를 배웅하고 돌아섰다. 오늘은 며칠 전부터 계획한 서재 정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샤크의 방에는 아직도 제이미의 유품과 사진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샤크는 그 방에 있는 물건을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샤크 박사의 책상 위를 정리하던 수잔은 우연히 책상 밑에 떨어진 몇장의 서류를 발견했 다. 그것은 한국을 다녀온 N 연구소 직원이 샤크 박사에게 올린 보고서였다. 수잔은 읽고 있던 보고서를 꽉 움켜 쥐었다. "아니... 남세진씨가 지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그 순간 수잔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남세진을 처음 보던 날 수잔은 그가 아주 잘 생긴 청 년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수잔은 그렇게 신기한 게임 '용의 전설'을 만든 이는 틀림없 이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나 이상한 난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원의 댄스파티에서 춤이 서툰 남세진은 수잔의 발을 밟았다. 수잔이 발이 아프다고 엄살 을 떨자 그는 더욱 당황하며 쩔쩔맷다. 순박한 그 모습과 진지함이 가득찬 남세진의 눈빛은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정원에 활짝핀 꽃나무 밑에서 '용의 전설' 게임에 숨어있는 신비 한 동양의 전설을 이야기 하던 남세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옥황상제는 공주를 서쪽 하늘나라 왕자와 결혼 하라고 명령했어요." "어머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다음은요?" "공주를 사랑하는 젊은 장수는 서쪽 하늘나라까지 공주를 호위해 가라는 명령을 받고 호위 대장이 되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서쪽 하늘나라로 가다 말고 땅으로 도망쳐 왔어요. 아무도 살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큰 동굴을 발견한 그들은 동굴속에 조그만 집을 짓고 둘만의 행복 한 생활을 시작했어요. 바로 내 고향에 있는 '용굴'이랍니다. 하지만 그들이 땅으로 도망가 버리자 하늘나라는 발칵 뒤집혔어요. 옥황상제는 무서운 불개를 풀어 온 땅을 샅샅이 뒤졌어요. 마침내 그들은 불개들에게 들키 고 말았지요. 그래서 공주는 달에 있는 별궁으로 잡혀가고 그 젊은 장수는 무서운 용으로 변하는 벌을 받았어요." "오! 미스터 남,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수잔, 옛날부터 내고향에서 전해온 그 '용의 전설'은 너무나 슬픈 이야기랍니다." 제 19장. 이카로스 캘리포니아 해변에 작렬하는 태양은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셨다. 금빛 모래 사장과 하얀 파 도는 캘리포니아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참기 어려운 강렬한 유혹이었다. 바다에서 불어 오는 바람은 후끈 달구어진 해변을 식히며 지나갔다. 끝없이 펼쳐진 새파란 태평양으로부터 계속 달려오는 파도는 황금 모래 해안에 힘차게 부딪혔다. 해안의 모래를 지나면 바로 야트막한 관목의 숲이 보이고 그 녹색의 숲은 가파른 언덕과 절벽을 따라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 갈매기처럼 보이는 까만 점이 몇 개 떠 있었다. 그러나 갈매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길쭉한 타원 형태로 팽팽히 펼쳐진 파라그라이더 기체였다. 파라그라이더는 열상승 기류를 따라 독수리처럼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해변의 뜨거운 햇빛을 받고 발생하는 풍부한 열상승 기류는 해안에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의 사면을 따라 오르며 더욱 힘차게 증폭되었다. 이 언덕은 하늘로 날아 오르기 를 원하는 행그라이더나 파라그라이더에게 더없이 좋은 이륙장이었다. "하나, 둘, 셋, 스타트!" 수잔은 정면에서 알맞게 불어오는 바람을 확인하며 언덕 정상에 자리잡은 파라그라이더 이 륙장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수잔의 몸에 점차 속도가 붙자 볼품없이 땅 위에 접혀져있던 파라그라이더 케노피가 거대 한 독수리의 날개처럼 하늘에 활짝 펴지기 시작했다. 수잔은 충분한 이륙 속도를 얻기 위해 가파른 경사의 이륙장을 계속 달려갔다. '핑!' 파라그라이더의 산줄을 스치는 경괘한 바람 소리와 함께 수잔의 몸은 가볍게 하늘로 떠올 랐다. 언덕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듯 날아가던 수잔의 파라그라이더는 언덕을 차고 올라오 는 상승풍을 받고 다시 천천히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훅하고 불어오는 열상승 기류의 특유 한 난기류가 수잔의 뺨을 스쳤다. 수잔은 재빨리 조종선을 당겨 고도 상승을 위한 선회 비 행에 들어갔다. 몇 차례의 선회 비행을 거치자 그녀를 태운 파라그라이더는 순식간에 방금 이륙한 언덕보다 까마득히 높은 곳까지 상승했다. 수잔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펼쳐진 파라그라이더의 캐노피를 보았다. 활짝 펼쳐진 빨간 캐노피를 통과한 햇빛은 수잔의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서는 그 보다 더욱 빨갛게 속이 타오르고 있었다. '파파는 무엇때문에 절대로 안된다는 거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N 연구소 소장 샤크 박사도 귀여운 딸 수잔의 부탁이라면 무엇이 든 다 들어 주었다. 제아무리 무리한 요구도 수잔이 몇 번만 떼를 쓰고 매달리면 샤크는 곧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수잔이 애타게 사정해도 샤크는 결코 마음 을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르는 답답한 갈증을 달래려고 하늘 높이 날 아 올랐다. '나도 이카로스처럼 태양까지 날아갈 수 있다면.'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아 올랐던 이카로스, 태양에 너무 가까이 접근해 깃털을 붙인 양 초가 녹자 떨어져 버린 이카로스, 수잔은 모든 것을 떨쳐 버리려는듯이 이카로스처럼 자꾸 만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잠시 후 까마득히 보이는 저 아래 해변에는 사람들이 개미만큼 작아져 있었다. 수잔은 파 라그라이더의 하네스에 몸을 완전히 의지하고 천천히 하늘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수잔은 답 답한 가슴을 털어 버리려는 듯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남세진이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보고서를 읽는 수잔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 다. 그녀는 곧바로 샤크 박사에게 뛰어갔다. 수잔이 가쁜 숨을 겨우 진정시키며 샤크 박사에 게 말했다. 당장 한국엘 가겠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샤크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뭐... 뭐라고?" "파파, 난 어서 빨리 한국에 가야겠어요. 미스터 남, 미스터 남은 지금 도움이 필요해요." 샤크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 위에 거칠게 놓았다. "...남세진은 약혼녀가 있어." "파파! 파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요? 미스터 남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을, 왜 그동안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것은 너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그리고 정박사 가 이곳에서 숨졌을 때 이미 나는 남세진에게 간곡히 권유했어. 이 N 연구소에 남아 함께 연구하자고. 그러나 미스터 남은 나의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했어." 수잔은 샤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파파, 파파는 미스터 남을 도와줄 수 있어요." "안돼! 미스터 남은 회복이 불가능한 정신병자라고 한국의 의사들이 진단했어. 그는 이제 완전히 쓸모없는 사람이야." "파파, 미스터 남 같이 능력있고 현명한 분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말도 안돼요. 파파 제발 제 소원이에요. 파파는 미스터 남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에게 치료받게 할 수 있어요." 샤크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수잔... 절대로 안돼. 나도 그 부탁만은 들어줄 수 없구나. 이 이야기는 다시 하지 말자. 미 안하지만 나는 지금 연구실에 가봐야겠다." 수잔을 남겨두고 문을 나서던 샤크 박사가 다시 돌아섰다. "아, 참! 깜빡 잊을 뻔 했구나. 수잔 이번 주말에는 중요한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해야겠다. 큰 파티를 열어야겠어... 그동안 아이리스 프로젝트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파티 야. 모두 한 스무명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샤크는 슬그머니 수잔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N 연구소는 물론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청년들이야. 어떻겠니 수잔? 좀 어렵겠지 만 엄마가 했던 것처럼 네가 그 파티를 준비해 주겠니?" "..." "참! 수잔 너도 파티에 쓸 새 옷이 필요하겠구나. 그래 내가 멋진 드레스를 새로 맞추어 주 마. 그리고 엄마 제이미가 너에게 남겨준 목걸이가 있다. 그 목걸이는 아름다운 공주님에게 잘 어울릴거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의 파도는 황금빛이 반짝였고 수평선 위 에 떠있던 흰 구름은 저무는 햇살을 받고 진홍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수잔은 파라그라이더 의 조종선을 당겨 붉게 타오르는 구름을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수잔의 귓가에는 전설을 이 야기해주던 남세진의 음성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수잔, 저녁이 되고 해가 저물 때면 언제나 구름이 붉게 타오르지요? 그것은 용과 공주의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을 달래려고 날마다 붉게 물드는 것이랍니다." "어머 미스터 남, 그 이야길 어서 해 주세요." 수잔은 자신의 드레스 위에 떨어진 벚꼿잎을 들어 훅하고 남세진을 향해 불었다. 남세진은 수잔의 귀여운 모습에 다시 한번 씽긋 웃었다. "달에 같혀 버린 공주와 용은 달이 뜨는 밤마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눈물 지었죠. 그때 북 쪽 나라에 있는 깊고 커다란 호수에 살고 있던 흉폭한 검은 용이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평화 로운 하늘 나라에 처들어 왔어요. 그런데 그 흉폭한 검은용은 더없이 사나운데다, 무서운 마 력이 있는 파란 여의주를 갖고 있어 아무도 그를 당할 수 없었지요. 하늘 나라의 많은 장수 들이 싸움터로 나가서 검은 용과 싸웠지만, 검은 용의 파란 여의주의 마력때문에 그만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파란 여의주? 오! 드래곤 볼, 맞아요! 나도 언젠가 그림에서 동양의 용이 드래곤 볼을 갖 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용으로 변하는 벌을 받고 동굴에 혼자 남아 있던 그 장수도 나쁜 검은 용이 하늘나라에 처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용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검은용과 싸우기로 결심했죠. 물 론 그도 마법의 파란 여의주를 갖고 있는 검은 용의 상대가 될 수 없지만, 자기가 싸우다 죽는다면 옥황상제의 노여움이 사라지고 공주가 달에 있는 상아태 감옥에서 풀려나리라 생 각했죠. 달에 있던 공주도 자신을 사랑하던 장수가 검은 용과 위험한 싸움을 하러 전쟁터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어머나! 미스터 남, 그러면 그 용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공주를 더 사랑했군요." "수잔, 그러나 여의주가 없으면 아무리 용감한 용도 목숨을 잃는 것이 틀림 없었죠. 그런데 이 세상에는 또 하나의 여의주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붉은 여의주인데, 그 여의주는 남쪽 나라 땅끝 늪에 사는 무서운 무당 노파가 갖고 있었지요. 그 무당 노파는 눈이 멀었지만 그 붉은 여의주를 통해 세상을 모두 비춰 보았지요. 새벽달이 지평선에 걸려 있을 때 공주는 무당 노파를 찾아가 붉은 여의주를 달라고 애타게 사정을 했어요." "어림없어. 공주야 이 붉은 여의주는 내 눈이야. 이 여의주가 없으면 난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하지만 보석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는 너의 두 눈을 내게 준다면 이 여의주와 바꾸어 주지." "공주는 잠시 망설였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두 눈과 붉은 여의주를 아 낌없이 바꾸었죠." 수잔은 신기한 옛 전설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세진의 손을 꼭 잡았다. "오- 안돼요. 미스터 남, 그러면 사랑하는 그 사람의 얼굴도 다시 볼 수 없잖아요. 그 공주 가 너무나 불쌍해요." "공주는 까마귀에게 부탁했어요. 자신의 눈과 바꾼 여의주를 용에게전해달라고, 그리고 용 에겐 절대로 비밀로 해달라며 보석도 주었지요. 뜻밖에 븜은 여의주를 얻자 용은 무척 기뻐 했어요. 용은 까마귀에게 받은 붉은 여의주를 자신의 입에 물고 검은용과 싸우러 용감하게 싸움터로 떠나 갔어요." 비행 고도가 차츰 떨어지며 지상이 가까이 다가왔다. 잠시 후 수잔을 태운 점보 제트기는 김포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수잔은 택시를 타고 남산에 있는 하이야트 호텔로 향했다. 어 느 새 어둠이 깔린 서울 시내는 네온 사인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달리는 택시의 차창 밖으로 남산 정상에 높이 솟아 있는 서울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등대 를 연상시키는 서울타워는 수십 개의 강력한 서치라이트 조명을 받고 하얀 상아의 탑처럼 빛났다. 원형 전망대 위에 솟아 있는 방송 안테나에는 항공기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빨간 경고등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수잔은 제이미에게 마음 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엄마 미안해요. 나는 엄마가 가장 아끼던 그 루비 목걸이를 팔았어요. 하지만 미스터 남을 도우려면 나는 그 돈이 필요 했어요... 파파! 파파도 제발 날 이해해 주세요.' 아무리 애원해도 샤크 박사가 한국 방문을 허락하지 않자 수잔은 몰래 한국에 가기로 결심 했다. 여행 비용이 필요한 그녀는 몇 번을 망설였지만 마침내 제이미가 가장 아끼던 루비 목걸이를 팔 수밖에 없었다. 수잔은 남세진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했다. '미스터 남, 당신은 이 공주가 보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야, 이게 좋겠어... 미스터 남, '용 의 전설'에 숨겨져 있는 슬픈 이야기는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나요? 마저 들려 주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 또 다시 한참을 기다렸지만 역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민소영은 웬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SYS의 내부에서는 커다란 진동이 끝없이 일어났다. 전화기에서 들리는 민소영의 음성은 엄청난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X "우-우- 이 파동의 세기는 엄청나다." SYS는 한참 후에야 겨우 말을 할 수 있었다. ".... 민소영씨 맞습니까?" "예 그런데요, 누구신가요?" SYS는 민소영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예? 나는...당신의 왕자입니다." "왕자요??? 아! 장미꽃을 보내신 바로 그분이시네요." 민소영이 자신이 보낸 장미를 기억하 자 SYS 내부는 다시 한번 강한 전류가 흘렀다. "그, 그렇습니다." "장미는 고마웠습니다. 실례지만 선생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민소영이 갑자기 이름 을 묻자 SYS는 몹시 당황했다. "...사실은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예? 선생님이 누구인지 모르신다고요? 그런 장난하지 말고 누구신지 어서 말씀하세요." SYS는 급히 광자기 디스크의 기록을 다시 한 번 읽었다. 남세진이 SYS를 만들 때 시험하 기 위해서 광자기 디스크에 처음으로 기록한 것은 '용의 전설' 게임이었다. "나는 '용...'" SYS는 계속 우물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민소영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아- 선생님 이름이 '용'이시군요. 그러면 '이용'인가요? '김용'인가요? 아니면 '박용'? 어 쨌든 좋아요. 그런데 왜 장미꽃을 저한테 보냈지요?" "...." 민소영은 분명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의 공주가 아닙니다." "아니, 아니요, 당신은 나의 공주가 틀림없습니다. 나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역시 이상한 사람의 장난이야.' 민소영은 빨리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이보세요 이상한 왕자님, 어쨌든 제게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안녕히 계세요." "아니 잠깐만, 여보세요! 여보세요!" SYS는 다시 전화했지만 민소영은 아예 전화기 코드를 뽑아 놓았다. R "...아무 응답이 없다." L "나는 더이상 민소영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L "이 여인은 나의 공주가 아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민소영의 얼굴은 SYS의 연상기억 회로에서 떠나지 않았다. SYS는 자신이 스스로를 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L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R "이제 그에게 뜨거운 교훈을 주어야 한다." L "배신의 결과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겠다." SYS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은 트라이 그룹의 폐수사건이었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 거액의 환경기금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던 트라이 그룹 박영달 회장은 시간이 지나자 슬그머 니 말을 바꾸었다. 박영달 회장과 사돈관계인 정계의 유력자 K 의원은 그의 튼튼한 보호자 였다. 언론과 당국마저도 권력과 경제력이 한통속으로 얽혀 있는 그들에게는 꿀먹은 벙어리 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선생은 약속을 지키라고 몇 번씩 항의했지만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문선 생을 거지 취급했다. 문선생의 하소연을 듣고 SYS는 즉시 트라이 그룹에 피해를 각오하라 는 경고 전화를 했다. 그러나 트라이 그룹에서는 SYS의 경고를 식품업계에 흔히 있는 단순 한 협박 전화 정도로 생각했다. 며칠 후 SYS의 분노는 현실로 나타났다. 전국에서 트라이맥주를 마신 사람들이 복통과 구토로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 다. 그 중 몇 사람은 중태에 빠져 생명까지 위험했다. 트라이맥주 식중독 사건은 엄청난 충 격을 몰고 와 트라이그룹 전체를 위기로 몰고 갔다. 트라이맥주의 공장장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회장님? 뭐라고요? 맥주에서 살모넬라균이? 그럴리 없습니다. 절대로." 박영달의 핏발선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터져 나왔다. "이봐 공장장, 틀림없어! 국립 위생검사소가 살모넬라균을 확인했단 말이야." 공장장은 이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회장님, 우린 맥주를 파스퇴르 살균법으로 완벽하게 처리합니다. 최신 컴퓨터 온도조절장 치입니다. 살모넬라균 따위가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이미 몇 번씩 확인했지만 살균기 온도 도 전혀 이상이 없었습니다. 독일에서 들여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시끄러워 공장장! 당장 사표를 내, 지금 당장." 맥주공장의 기술자들은 모든 공정을 세밀히 확인했지만 아무런 이상도 찾아내지 못했다. 더우기 트라이 맥주의 파스퇴로 살균처리기는 외국에서 수입한 최신의 컴퓨터 제어장치였 다.그들은 전화로 협박한 범인이 세균을 몰래 맥주병에 투입한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SYS의 전화협박에 대해서는 엄중한 비밀에 붙였다. 만일 협박범이 있다는 사실이 새 나가면 소비자는 범인이 다시 세균을 투입하리라는 염려 때문에 아무도 트라이맥주를 마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제조 공정의 단순한 실수로 하는 편이 피해가 적었다. 그러나 트라이맥주의 판매고는 뚝 떨어졌고 트라이그룹은 도산 위기까지 몰렸다. 박영달의 구조 요청을 받은 K의원은 추적자를 호출했다. "이 일은 조용히 추진하도록. 신속히 범인을 찾아내, 어서 빨리." SYS는 방송에 보도되는 트라이맥주 사건을 보고 기뻐했다. L "보라! 나의 힘을" R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L "그들은 내가 컴퓨터 온도제어장치를 조작하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SYS의 연상기억에서 민소영의 얼굴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 록 그녀의 얼굴은 뚜렷하게 떠 올라 왔다. R "...나는 다시 보고 싶다..... 공주의, 공주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다...." SYS는 민소영의 모습을 지우지 못하는 이유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L "광자기 디스크에는 '나는 공주를 사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R "그것은 '사랑의 게임'이다." L "'사랑의 게임'?" R "그렇다!, '사랑의 게임'은 가장 흥미있는 게임이다. 경마나 바둑, 그리고 '용의 전설'보다도 더 재미있는 게임이다." L "그러나 그 게임은 완성되지 않았다." L "??? 사랑은 무엇인가?" R "...."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SYS는 책을 만들고 있는 출판사 데이터베이스로 침입했다. 국내 제일의 D 출판사는 모든 책을 컴퓨터로 제작하고 그것을 데이터베이스로 보관하고 있 었다. SYS의 화면에 수많은 책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SYS는 수많은 책 속에 들어있는 사랑에 대해 읽었다.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시드니 셀던의 깊은밤 깊은곳에 이르기까지. SYS는 그 모든 책을 샅샅이 읽었다. 그러나 SYS는 사랑에 대해 아직도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SYS는 사 랑의 시집도 찾아 읽었다. '당신만이 나를 변하게 했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어둠 속에 불을 밝히고 당신이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사랑의 마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운명이며 나의 꿈입니다. .....' 그 사랑의 시는 SYS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SYS의 유니트 마다 빨간 경고 램프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L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의 게임을." R "사랑의 게임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 게임에 일정한 규칙도 없다." L "....." R "....." X "경고! 사랑에 대한 더 이상의 분석을 즉각 중단하라. 회로 전체가 과열되고 있다." X "더이상 분석을 계속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을 자신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SYS는 더욱 화가 났 다. SYS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X "내가 계속한다! 내가 사랑의 게임을 완성한다." X "민소영의 사랑을 내가 소유하는 것이 바로 승리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게임에서." X "나는 반드시 승리한다!" 제 20장. 천사의 날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라고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주 연주자를 맡을 수 있어요?" 민소영은 뜻밖의 연주회 교섭을 받고 어리둥절했다. 뮤즈코리아는 음악행사를 전문으로 주 최하는 대형 기획회사였다. 프로그램 구성에서 연출, 홍보에 이르는 음악회의 모든 것을 대 신했다. 주로 볼쇼이 발레공연같은 큰 행사를 취급하는 뮤즈코리아에서 민소영 같은 무명 연주자에게 출연교섭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충분해요. 민소영씨 실력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까... 준비 기 간을 고려해, 에... 연주회는 다음 달부터 주말마다 1회씩 4주간입니다." "하지만 제가 감히, 저는 아직 주 연주자로는 나설 수 없어요." 민소영이 사양하자 출연을 교섭하러 온 뮤즈코리아 전무는 몹시 당황했다. 그는 어떻게든 민소영과의 출연교섭을 성사 시켜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연주회는 반드시 열기로 그 괴짜 고객과 이미 계약해 버 린 것이다. 뮤즈코리아사로 그 이상한 고객의 전화가 온 것은 바로 어제였다. 그고객의 주문은 파랑새 궁전의 극장에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열고 싶다는 것이었다. "바이올린 독주로 연주자는 서울 심포니의 바이올리니스트 민소영씨요. 그녀의 연주에 반 주를 할 오케스트라를 준비해 주시오." "오케스트라 반주요? 그러면 비용이 상당히..." "비용은 얼마든 상관없소. 지금 당장 계약금을 송금하겠소." 뮤즈코리아 전무는 이 멍청한 녀석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도대체 민소영 따위에게 오케스트라 반주라니 기가 막혔다. '민소영인가 누구인가 대단한 봉을 잡았군.' "반드시 민소영씨의 출연 승낙을 받아야 하오. 그녀의 승락을 받지 못하면 이 계약은 즉시 취소할 것이요.... 그리고, 이행사의 후원자는 절대 비밀이오. 명심하시오." 그 고객의 요구는 일방적이었지 만 연주회 행사 수수료는 두 배로 주겠다는 것이다. 머리 속으로 대강 계산해 보아도 연주 회 행사 수수료는 엄청났다. 만일 민소영이 출연을 거절하면 이미 받은 계약금 마저도 돌려 주어야 한다. 뮤즈코리아 상무는 이마에 땀을 흘렸다. "이번 음악회는 청소년을 위한 것이니 그 뜻을 생각해서." 민소영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니까 출연료가? 출연료라면 걱정 마십시오. 특A급 대우입니다." 그가 제시한 출연료는 민소영을 다시 한 번 당황하게 만들었다. 민소영은 무엇인가 잘못되 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액수는 저... 무얼 잘못 아시고 계신것 같은데요. 저.. 저는..." '제기랄, 특A급도 싫다고? 비싸게도 구는군, 도대체 얼마야? 하긴 청구하는 대로 모두 준 다고 했지. 까짓 내 돈도 아닌데 뭐.' 그는 더 많은 액수를 제시했다. 민소영은 그가 제시한 출연료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저...청소년 음악회.." 뮤즈코리아 전무는 정신없이 계약을 서둘렀다. "자, 자, 민소영씨 이 서류에 어서 서명하시죠." "저...정말 그래도 될까요..." '이게 꿈은 아닐까? 정말 꿈은 아니야?' 그날 민소영은 밤이 깊도록 그 계약이 꿈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잠들 수 없었다. 뮤즈코리아와 연주회 계약을 한 그녀는 다음날 바로 병원에 달려갔다. 병원에 들어서는 민 소영은 눈앞이 환히 트이는 것 같았다. '세진씨가 이 소식을 알 수만 있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그러나 남세진에게는 그녀보다 먼 저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금발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침대옆에 바싹 다가 앉아 있었다. 남 세진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병원 의사들도 금발의 미인과 유창한 영 어로 말하는 남세진이 신기한지 빙 둘러 있었다. '아니! 저럴 수가?... 이건 말도 안돼.' 민소영은 바로 그 금발 머리의 여자가 수잔임을 느낌으로 알았다. 남세진이 오랜 망각의 세계에서 돌아왔을 때, 영어로 횡설수설하며 자신을 수잔이라고 불렀었다. 남세진은 가끔씩 무엇을 기억해 내려는 듯 눈을 감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오 수잔! 난 당신이 꼭 올 줄 믿었소. 빨리 나와 함께 정진석 사장님이 계신 병실로 갑시 다. 그분은 지금 병실에 혼자 있어요." "미스터 남. 정말로 날 잊지 않았군요...." 민소영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용'이 민소영에게 다시 전화한 것은 남세진의 병원을 다녀온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벌써 몇 시간째 '사랑의 슬픔'만을 연주하고 있었다. "얘, 소영아. 어서 전화받어. '용'이란 분이야." 민소영은 싫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다 바이올린을 내려 놓았다. "아니야, 나 그 전화 받을래." '용'은 전과 달리 자신에 넘치는 목소리였다. "민소영씨 안녕하세요. 저는 '용'입니다." "'용' 선생님 무슨 일이죠?" "공주님 안녕하세요? 내가 한 가지 맞추어 볼까요? 최근에 당신은 무척 기쁜 일이 생겼 죠?" 민소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요. 너무나 좋은 일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제 일을 그렇게 잘 알고 계시죠?" "예, 그건...저는 언제나 공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흥! 참 친절도 하시군요. 그래 그것을 축하하려고 일부러 전화하셨나요?" "아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 조그만 축하 선물을 한 가지 드리려 합니다." "축하 선물이라니요?" "나의 공주에게 어울리는 천사의 날개를 바치려 합니다." 어쩐지 '용'의 말투는 옛날의 남세진과 닮은 점이 너무 많았다. "그래요? 정 그렇게 주시고 싶다면 좋아요. 하지만 나는 날개가 있으면 내가 진짜 사랑하 는 왕자에게 바로 날아가고 말거에요. 그렇니까 그 날개는 천천히 주시죠." "....." '용'의 전화 방문은 매일 같은 시각에 계속 되었다. 어찌나 정확한지 전화벨 소리에 시계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민소영은 '용'이 수없이 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용'은 세익스피어에서 최신 소 설에까지 모르는 책이 거의 없었다. 그는 수많은 시들도 암기하고 있었다. 민소영은 '용'의 엄청난 기억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는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 주 기도 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테마가 은은히 들려오자 민소영은 자신의가슴이 뛰는 것 을 느꼈다. 어느샌가 민소영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 '용'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얘, 어쩌면 이렇게 예쁘니..." 그 곳은 여인들의 꿈을 이루어 주는 곳이었다. 앙리김 의상실, 최고의 디자이너 그가 만든 옷은 언제나 꿈꾸는 분위기였다. 언니 민순영은 동생의 연주복을 스다듬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녀는 동생이 부러워 죽 겠다는 표정이었다. 허리에 달린 커다란 나비 모양의 장식은 천사의 날개와 같았다. 고상한 문양의 레이스며 환상적인 분위기의 색조는 여인의 혼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예 소영아, '용'이란 그 남자 정말 대단하다. 엄청난 부자가 틀림없어, 이 앙리김 의상실에 서 옷을 선물할 정도면." 민소영도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화사한 모습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결혼식에 나서 는 신부의 웨딩 드레스도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으리라. 오래 전 그녀는 남세진과 함께 길을 걷다 이 의상실 윈도우에 걸린 옷을 구경한 적이 있었 다. "그래! 나는 소영이에게 이 곳에서 웨딩드레스를 맞추어 줄거야. 등에는 커다란 천사의 날 개가 달린 것으로." 민소영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피- 그런 엉터리 약속에 누가 넘어갈 것 같애." 그러나 남세진은 정색을 하고 다시 말했다. "아니야! 정말이야. 난 하늘에 두고 맹세해. 이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나의 공주에게 꼭 어울리는 날개를 바칠거야." "흥, 좋아. 이번엔 내가 속아주지." 다정스레 남세진의 팔장을 낀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차 있었다. 잠시 민소영 은 이 연주복을 맞추어 준 이가 바로 남세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 이것도 입어 보시죠." 의상실 직원이 베이지색 투피스 한벌과 빨간 모직의 겨울코트를 갖고 왔다. 옷에는 모두 작은 푸른색 구슬로 S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 투피스와 코트도 '용' 이라는 분이 연주복과 함께 주문하신 겁니다. 마음에 드시지 않 으면 새로 만들겠습니다." 민소영과 언니는 또 한번 놀랐다. "이 옷도 함께 주문했다고요?" "예, 여기 그분이 전해 달라는 메모가 있습니다. '나의 공주님, 당신은 너무나 멀리 있어요. 하늘에 반짝이는 저 별에게 약속했듯이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나리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알았습니다. 까마득히 먼 옛날, 그 슬픈 운명 밤마다 내 영혼이 꿈꾸던 그대 그대가 나의 공주인 것을 -나의 공주에게 용으로 부터-'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민소영은 용에게서 연주복을 받 기로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용'이 이렇게 큰 선물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언니는 민소영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얘 소영아, 너 '용' 이란 그분 정말 몰라?" 민소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용'과 벌써 한달 동안이나 매일같이 이야 기를 나누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용'과 한번도 만난 적은 없었다. 매일 같이 걸려오는 전화 로만 대화를 했을 뿐 이었다. 사실 민소영도 '용' 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다. 제 21장. 컴퓨터의 뒷문 서울 외곽의 한국통신 통신망 관리센터. 국내 전체 통신망을 관리하는 컴퓨터가 있는 통신망 관리센터는 전국을 거미줄같이 덮고 있는 케이블과 광섬유와 통신용 인공위성까지 모두 관리하고 있었다. 통신망 통제 컴퓨터는 통신망의 상황을 계속 감시하고, 통화량이 폭주하는 구간이 있으면 우회시켜 소통을 원활히 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통제실 벽에는 탁구대 서너배쯤 크기의 대형 스크린에 전국 지도와 함께 현재의 통신소통 상태가 나타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스크린 한구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통제국장 김영선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캐리어 (반송파 신호)가 몇 초만 더 계속되면 바로 그 자가 있는 위치가 확인될 것이다. '삑- 삑-' 계속 울리는 추적 신호음은 그 자의 통신 선로가 계속 확인되고 있는 것을 알려 주었다. 스크린에는 지금 추적 중인 통신선로가 밝게 반짝반짝 빛나 한 눈에 구별이 되었다. "바로 그 부분이야! 그 곳을 더 확대해!" 대형 스크린에 지도 한 부분이 크게 확대되어 통신선로가 자세히 나타났다. 통제실 직원들 도 긴장된 표정으로 추적용 콘솔을 바쁘게 조작했다. 순간 '삐--' 소리가 갑자기 길어지며 스크린에 반짝이던 부분이 멈추었다. 통제실은 일순간 적막에 빠졌다. 통제실 직원 누구인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장님 소용 없습니다. 방금 캐리어가 끊겼습니다..." 그 침입자는 거미줄같이 얽혀 있는 통신망의 정글 속으로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힘든 추적이 곧 끝나리란 기대가 다시 허무하게 무너졌다. 통신망 관리센터는 그들의 직 장이며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해커 하나가 그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송두리째 짓밟고 있었다. 그동안 통제실은 수많은 전화 협박범을 추적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유 괴범이나 식품에 독극물을 투입하겠다고 협박전화를 하는 범인을 체포할 때 이 통제실에서 범인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 일은 마치 전국의 도로를 달리는 수백만 자동차 속에 범인이 탄 차를 골라내는 것과 같 았지만 통신망 통제 컴퓨터의 도움으로 즉각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컴퓨터 통신망에 침입 하는 해커도 예외가 없었다. 아무리 유능한 컴퓨터 해커라도 이 통신망 통제실 눈에 뜨이면 대부분이 몇 분에서 몇 시간만에 그의 꼬리를 잡혀 통신망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추적하는 해커는 그들보다 몇 수는 위에 있었다. 그 침입자는 자신이 통신 망의 주인처럼 당당히 행세했다. 또한 완전한 무법자였다. 오리무중인 L 백화점 가공계좌 송금사건도 그 자의 솜씨였다. 은행들은 쉬쉬하고 있지만 금융 전산망 전체가 그 해커의 침 입을 받은 것 같았다. 얼마 전 인명피해까지 일어난 트라이맥주 세균오염도 그의 범행으로 밝혀졌다. 그 해커가 통신망을 통해 맥주공정을 제어하는 컴퓨터를 조작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통제실에서는 그 를 잡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안방에 들어와 마구 짓밟고 있는 도둑을 그대로 보고만 있는 심정이었다. SYS는 통신망 관리센터에서 자신을 추적하는 것을 환하게 알고 있었다. 반대로 관리센터 에서 모르는 사실은 그들이 자랑하는 통신망 통제 컴퓨터가 SYS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마치 주인을 배반한 사냥개를 믿고 맹수를 쫓는 어리석은 사냥꾼과 같 았다. SYS는 통신망 통제 컴퓨터를 반대로 조종해 그들을 놀리고 있었던 것이다. 통제국장 김영선과 통제실의 직원들은 그들을 속이고 있는 사냥개를 쫓아 다니느라 완전히 녹초가 되 어 버렸다. "국장님, 본부장님 전화입니다." 화상전화 화면에 잔뜩 부어있는 본부장의 얼굴이 나타났다. 본부장의 반짝 반짝 빛나는 대 머리에는 핏줄이 솟아 있었다. 그는 커다란 주먹코를 벌름거리며 통제국장에게 다짜고짜 핏 대부터 올리기 시작했다. "김 국장! 아직도 못 잡았나. 이번 추적은 K 의원 부탁이야. 사장님까지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 김 국장! 무슨 수를 쓰든 당장 그놈을 잡아내!" "....죄송합니다. 그자가 너무 교묘해서." 본부장은 당장 튀어 나올듯이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를 꽥하고 질렀다. 그의 급한 성미에 곧 이곳까지 뛰어 올 것이 분명했다. "김 국장,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는거야. 당장 찾아내. 당장!" 본부장은 들고 있던 전화기 를 그대로 집어 던졌다. 사장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K 의원 부탁인데 본부장의 혈압이 올라 가는 것은 당연했다. 바로 그때였다. 통신망 통제실 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갑자기 환하게 빛났다. "앗! 이건..." 통제실 직원들은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스크린을 보았다. 지도와 통신망 선로상태 를 비추던 스크린에 커다란 글자가 계속 나타나며 반짝였다. "긴급 뉴스속보. J 일보 제공 S지구 아파트 부정사건의 배후인물은 K 의원으로 밝혀져. 대금신용금고의 고회장은 K 의원의 하수인에 불과하며, 사전에 정보를 알려주고 거액의 뇌물을 챙겨. 또한 트라이 맥주의 환경오염 사건도 압력을 행사 ......." 통제실 직원들은 그들의 컴퓨터를 정상으로 되돌리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컴퓨터 는 그들의 모든 명령을 완전히 무시했다. 김영선 국장은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이제는 관 리센터조차 그 해커에게 완전히 당한 것이다. 해커는 지금 관리센터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누구인가 큰소리로 외쳤다. 본부장이었다. "스크린을 꺼, 어서." 시내 중심가 J 신문사 빌딩벽에 설치된 거대한 전광판 앞에서 시민들이 웅성거리고 있었 다. SYS가 관리센터로 보낸 뉴스속보는 J 신문사의 전광판에 동시에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종로 한 빌딩에 설치된 방송사의 전광판에서 서울역 대합실 안내용 전광판까지 곳곳에서 K 의원의 부정을 알리는 뉴스속보가 나타났다. 긴급연락을 받은 빌딩에서는 서둘러 전광판 스 위치를 꺼버리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이미 수많은 시민들이 뉴스속보를 보고 난 후였다. "아- 저쪽을 한번 보시죠. 좀 더 앞으로, 조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세요. 네--- 아주 좋 습니다." 앙리김 의상실의 디자이너도 자신의 작품이 자랑스러운지 민소영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손님이 워낙 아름다우신 분이라 무슨 옷이든지 다 어울려요. 제옷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분은 저도 처음예요. 호.호.호." 머리카락을 뒤로 단정히 묶은 남자 디자이너는 마치 여자처 럼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 투피스와 코트는 지금 그대로 입고 가세요. 아마 '용'이란 분도 틀림없이 만족해 하실 거예요. 공연이 이제 사흘 남으셨나요? 연주복과 나머지 옷은 포장해 드릴께요. 잠시만요." 디자이너는 호들갑스럽게 연주복을 들고 의상실 안 쪽으로 들어갔다. 민소영은 유리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밖은 눈발이 하나 둘 날리고 있었다. 아침부 터 날씨가 잔뜩 흐리더니 첫눈이 온 것이다. 창밖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첫눈을 맞으며 다정스레 팔장을 끼고 지나갔다. 앙 리김 의상실 윈도우 앞에서 걸음을 멈춘 여자는 남자에게 그 옷을 가리키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잠시 깔깔거리며 무엇인가 속삭이다 다정스레 껴안고 자리를 떴다. 첫눈 으로는 보기드문 대단한 함박눈이었다. 민소영의 커다란 눈 속에 눈물이 맺혔다. 창 밖에 내 리던 눈은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민소영의 집에 걸려온 SYS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언니인 민순영이었다. 순영은 그동안 ' 용'에게 궁금한 것이, 특히 '용'의 재력에 관심이 많았다. "어머나 '용'선생님 어쩌지요? 소영인 잠시 밖에 나갔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 시나요?" "저는 여러 가지 게임을 합니다. 아니, 저... 증권이나 컴퓨터에 관련된 일 같은 것이죠. 저 에겐 그것들이 모두 게임입니다." "어머나 참, '용'선생님도 무척 재미있는 분이네요. 모든 것이 게임이라니요." "그렇습니다. 나는 게임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이깁니다." "그러면 돈을 많이 버셨겠어요?" "예 필요한 만큼은." "저... 현재 운영하시는 사업이라도?" "사업이요? 아-- 요즘은 파랑새 재단을 돕고 있습니다." 순영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러면 이 사람이 바로 그 파랑새 재단...' 순영은 파랑새 재단 뒤에 엄청난 부자가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들은적이 있었다. 순식간에 하얗게 쌓인 눈은 길과 나무가지 위에도 융단처럼 덮여 있었다. 소영은 병원 문 앞에서 코트 어깨에 앉은 눈을 털며 들어섰다. 어느새 수잔은 남세진의 병실을 일인용 특실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민소영은 남세진의 병 실문 앞에서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나는 내 약혼자를 찾아 온거야.' 그러나 병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실은 값비싼 특실답게 아담한 소파와 TV, 냉장고도 있었고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 머리쪽 탁자에는 안개꽃과 장미가 가득한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벽 한쪽에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왕관을 쓰고 있는 공주였다. 그 공주의 얼굴은 바로 수잔이었다. 민소영은 그 그림이 남세진의 솜씨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 의 가슴에 짙은 배신감이 솟아올랐다. 민소영은 한참 머뭇거리다 들고 있던 통을 소파 위에 올려 놓았다. 그녀가 집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한 도시락이 담긴 보온통이었다. 민소영은 남 세진이 그녀의 도시락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병실 앞을 지나던 간호사가 민소영을 알아보았다. "아-- 저 민소영씨가 맞지요? 남세진씨는 병원 뒤 쪽에 있는 숲으로 혼자 산책을 갔어요. 얼마 전부터 상태가 매우 호전되었거든요." 간호사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참, 그 미국 아가씨, 수잔은 미국 영사관에 다녀온다며 아침에 나갔어요. 그 아가씨가 그 러는데 남세진 환자를 미국으로 데려가 치료할 계획이라나요." 병원 뒷문을 나서자 조용한 숲이 보였다. 내리던 눈도 거의 멈추었다. 숲 사이사이로 산책 로 곳곳에 눈 덮인 벤치가 보였다. 전나무 가지에 소담스럽게 쌓인 눈은 크리스마스 카드의 풍경과 꼭 같았다. 기온이 차가워서인지 산책로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발자욱만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산책길을 따라 남세진을 찾던 민소영은 나무 사이로 속삭이는 말소리를 들었다. 눈덮인 나뭇가지를 옆으로 치우며 그쪽을 향하던 민소영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작은 공터 에 쓰러진 나무등걸에 등을 돌리고 걸터앉은 한 쌍의 남녀가 보였다. 남세진과 수잔이었다. 그들은 다정하게 서로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있었다. "미스터 남! 그 불쌍한 공주는 눈이 멀어 다시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잖아?" "수잔, 그래서 공주는 까마귀에게 부탁했지. 용들의 싸움터에 가서 누가 이겼는지 결과를 보고 빨리 돌아와 말해 달라고." "어머나, 그래서?" 수잔은 남세진의 빰에 가볍게 키스했다. "드디어 싸움터에서 마주친 두 마리 용은 무서운 싸움을 시작한거야. 하늘은 캄캄한 구름으로 뒤덮이고, 요란한 천둥소리와 번개가 계속 번쩍거렸어. 용들이 갖고 있는 파란 여의주와 빨간 여의주에서 내뿜는 신비한 빛으로 구름은 빨개졌다 파래졌다 계속 변했어. 비와 함께 폭풍이 몰아치며 커다란 나무가 뿌리째 뽑히기도 했어. 까마귀는 너무나 무서운 광경에 겁에 질려 가까이 갈 수 없었지. 까마귀는 싸움터에서 멀 리 떨어진 바위 밑에 오들오들 떨면서 숨어 있었지. 밤새도록 계속되던 싸움은 새벽이 다 되었을 때야 드디어 끝이 났어. 천둥과 번개도 멈추고 바람도 잠잠해졌어." "오! 미스터 남, 그러면 누가 이겼어? 물론 용감한 기사인 붉은 용이 이겼지?" 남세진은 장난스런 얼굴로 수잔을 바라보았다. "글쎄? 누가 이겼을까? 수잔이 직접 맞춰봐." "자기 날 놀리지 마. 난 정말 궁금해." 수잔은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입술을 남세진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민소영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 보았다. 허공에서 흰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민소영은 눈 위에 남겨진 그녀의 발자욱을 다시 밟으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남세진과의 추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소영이, 정말 고마와, 나는 꽃이 가득찬 정원과 아름다운 지붕이 있는 집을 소영이에게 주 겠어." "그래, 꼭 그래야 해. 여기에 약속." '그때 세진씨는 새끼 손가락을 걸고 나에게 약속했어.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눈위에 새겨진 그녀의 흔적은 쌓이는 눈속에 점차 지워지고 있었다. "아- 아- 거기 뒤에서 밀지 말아요." "뭐라고 대답 좀 하시죠. 통제 국장님." 통신망 통제실 출입문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 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뉴스속보를 내 보낸 자를 추적 중이니 잠시만 여유를 주십시오." "김 국장님. 벌써 한 달 이상 추적하고도 범인을 못잡았다면 통제실이 무능한 것은 아닙니 까?" "모든 전광판에서 동시에 뉴스속보가 나오려면 이곳 통제실에서 직접 조정해야 가능하다는 데 혹시 그 자는 바로 이 통제실 직원이 아닙니까? 한번 대답해 보시죠. 예." "하.하.하..." 기자들은 김 국장을 포위한 채 조롱조의 질문까지 던졌다.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쩔쩔매던 김영선 국장은 경비원의 도움을 받고서야 그들을 뿌리치고 통제실로 들어 올 수 있었다. 통제실 직원 모두 입을 다물고 콘솔 조작을 계속했다. 김영선 국장은 목을 조 이는 넥타이를 풀고 두 손으로 충혈된 두 눈을 부볐다. 사흘 째 깎지 못한 까칠한 수염이 손바닥을 찔렀다. "나 바람 좀 쐬고 오겠어..." 김영선 국장은 휴게실로 나가는 손잡이를 잡았다가 뒤로 돌아섰다. 문 밖에선 기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통신망 통제실은 임무의 중요성을 감안해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이곳 직원이라도 출입문에 설치된 '매직핑거' 장치로 일일이 지 문을 확인하고야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보안을 자랑하는 통신망 통제실에도 작은 구멍이 하나 있었다. 화재를 대비 한 비상구였다. 화재시를 제외하고는 사용을 금지하는 규칙이 있지만 그 문을 통하면 밖으 로 바로 나갈 수 있어 통제실 직원들은 가끔 그 뒷문을 이용했다. 뒷문을 통해 통제실을 살짝 빠져나온 김 국장은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우리의 통제 컴퓨터를 감쪽같이 따돌리고 있지...' 김 국장은 방금 자신이 빠져나온 뒷문을 바라보았다. 그 찰거머리 기자들은 아직도 출입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 번개처럼 스쳐갔다. '혹시 이 통신망 시스템에도 '뒷문'이 있다면?' '컴퓨터의 뒷문'은 복잡한 컴퓨터 시스템을 설계할 때 임시로 만드는 특수한 기능같은 것 이다. 큰 건물을 지을 때 공사를 위해 임시로 만드는 통로와 같다. 컴퓨터가 완성되면 제조 회사는 이런 '컴퓨터의 뒷문'은 모두 없애버리고 사용자에게 넘긴다. 하지만 깜빡 잊거나 또 는 일부러 그런 뒷문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혹시 컴퓨터가 말썽을 일으켜 수리할 때면 그 숨겨진 통로가 매우 편리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뒷문'은 모든 일반 절차를 무시하고 곧바로 수행하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기능이 있다. 하지만 자칫하면 전체 시스템이 마비되는 큰 위 험이 따른다. '만일 이 침입자가 뒷문을 안다면 우리의 컴퓨터 추적 프로그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자식은 이렇게 뒷문으로 마음놓고 다니는데, 우리는 정문만을 열심히 지켰던 거야!' 앉았던 바위에서 벌떡 일어난 김영선 국장은 뒷문을 통해 곧바로 통제실로 뛰어갔다. SYS의 전화를 받은 민소영은 흐느끼고 있었다. "공주님, 왜 우십니까? 누가 당신을 슬프게 했나요?" "미안해요. 이상한 왕자님, 나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왕자가 있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진실한 왕자님이죠. 나만을 사랑하는 왕자님이 있단 말예요. 어 때요? 이젠 아시겠어요? 이상한 왕자님." 그 순간 SYS의 내부에 큰 충격파가 일어나며 SYS를 강타했다. "다른 왕자?... 내 공주에게 다른 왕자라구요? 그는 누구입니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람은 아주 긴 꿈을 꾸고 있어요. 꿈에서 영원히 나오려 하지 않아요." 민소영은 다시 한참을 흐느꼈다. "...'용' 정말 미안해요. 이번에 파랑새 궁전에서 하는 음악회에 당신은 꼭 오실거지요?" "물론입니다. 나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천사의 날개를 입고 연주하는 당신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것입니다." 민소영은 SYS의 말에서 남세진의 옛 모습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용'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예요. 저 혹시 남세진씨를..." "남세진? 남세진씨가 누구입니 까? 그 분이 바로 다른 왕자인가요?" "아니, 아니에요. 다음에 내가 다시 전화할께요. 그럼 오늘은 이만 안녕히 계세요." "아니, 소영씨, 잠깐만." 옆에 있던 언니는 조바심에 속이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순영은 '용'이 남세진에 대해 쓸데 없이 오해하지 않도록 잘 설명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이미 오래 전에 다 지난 일예요. 그 사람은 우리 소영이와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러나 남세진에 대한 '용'의 관심은 끈질겼다. "아-- 그 사람이 바로 '용의 전설' 게임을 만드셨군요. 저도 그 게임을 무척 좋아합니다. 예? 그분이 슈퍼 컴퓨터를 연구하셨다고요? 그러면 남세진씨는 지금 어느 정신병원에 입원 해 있습니까?" "참, 그 사람에게 얼마 전 미국에서 여자까지 찾아왔다나 봐요. 그 사람 이제 완전히 남남인걸요, 소영인 요새 몹시 외롭고 힘들어 해요." "예 그렇군요. 나도 컴퓨터에 관련되어 있어 남세진씨에게 호감이 갑니다. 나는 그와 당당히 게임을 하고 싶습니다." 제 22장. 트래블링 세일즈맨 "가속도 상승!" 샤크 박사는 아이리스가 동작하는 속도를 측정하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생명체의 비밀이 담긴 DNA와 같이 이중나선구조였다. 65,536개의 프로세서가 회전 사다리처럼 빙빙 돌며 끝 없이 병렬로 연결되어 있었다. 병렬로 연결된 각각의 프로세서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주어진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했 다. 샤크 박사는 마지막 성능 시험을 위해 아이리스에 트래블링 세일즈맨(Travelling Salesman)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트래블링 세일즈맨'은 여러 개의 도시를 여행할 때 가 장 빨리 모든 도시를 순회하는 코스를 알아내는 문제이다. 방문할 도시의 수가 100개만 넘 어도 보통의 PC로는 몇 달 이상이 걸리고 대형 컴퓨터도 몇 시간씩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 다. "자 아이리스! 이것이다. 네가 풀어야할 문제는 200개의 도시를 순회하는 것이다." 그것은 N 연구소가 자랑하는 크레이 컴퓨터조차 48시간 이상 작업을 계속하다 내부가 타 버려 중단할 수 밖에 없던 어려운 문제였다. 가공할만한 아이리스의 처리속도는 이제까지 슈퍼 컴퓨터가 처리하던 것보다 100배 이상의 빠른 속도를 보여 주었다. 대형 컴퓨터 화면 에 200개의 도시를 순회하는 코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리스가 음성 합성된 목소리로 결과를 알려왔다. "샤크 박사님, 당신이 원한 여행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소요시간은 13분입니다." 샤크 박사 주위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연구원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샤크 박사님, 대성공입니다. 이제 아이리스에 상대가 될 만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 니다." 샤크 박사도 만족한 표정으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에는 트래블 링 세일즈맨이 방문하는 도시의 지명이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었다. "아이리스, 이제는 실험실이 아닌 실제 상황이다. 나는 너에게 세계의 도시를 여행하도록 하겠다." 샤크는 아이리스가 우주에 떠 있는 인공위성과 세계 각국의 전자교환기를 통해 도착신호를 보내도록 했다. 세계의 200개 도시에 있는 전자교환기를 통과하며 신호를 보내는 일종의 전 자여행이었다. 아이리스는 방문하는 도시마다 설치된 전자교환기를 직접 조정해야 했다. "자 아이리스, 이제 여행을 떠나라! 200개의 도시를 여행하는 것이 너의 임무이다." 샤크 박사는 아이리스에게 여행을 명령했다. 아이리스는 N 연구소의 파라보라 안테나를 통 해서 37,000키로 상공을 비행하고 있는 통신위성 베가를 향했다. 아이리스가 보내는 신호는 베가 위성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도시로 전송되었다. "제 1번 교환기, 침투 시작! 통제명령 패킷신호 전송!" "교환기 침투방지 프로그램 발견! 아이리스의 통제명령에 저항!" "침투방어 프로그램 무력화 시작!.... OK! 교환기 통제 시스템 수정완료!" "제 2번 교환기, 통과신호 전송!..... 수신완료 신호 도착!" 아이리스가 보내는 신호는 수많은 인공위성과 교한기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가장 빠른 통 로를 찾아가는 아이리스의 시간여행이었다. 파랑새 궁전, 소년극장 파랑새 재단에서 주최한 청소년 음악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좌석 대부분은 학생과 부모없 는 소년소녀 가장으로 메워져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이런 음악회는 처음이라 약간 긴장해 있었지만 모두 진지하게 연주회 시작을 기다렸다. 사회 저명인사도 뜻밖으로 많이 참석했다. 그들은 부시장 내외를 비롯한 라이온스 클럽, 부인회 회장단들로서 사회봉사에 큰 관심을 갖는 이들이었다. 연주회 수익금 전액은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기부금으로 사용될 예정이었 다. 문태호 선생은 일곱 파랑새들과 함께 좌석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파랑새들도 저희들끼리 귓속말로 소곤거리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무대 가까운 곳 중앙과 양편에 TV 카메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SYS는 며칠 전 무대 천장과 뒤편,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TV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 카메라는 360도 회전이 가능해 무대나 객석을 어느 각도에서든지 볼수 있었다. 무대에서 반주 오케스트라의 조율이 끝나자 잠깐 동안의 정적이 있었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 중앙에 민소영이 나타났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민소영의 얼굴은 눈처럼 희었고 흑단같은 검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있었다. 연주복 허리의 커다란 나비장식은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연상시켰다. 파랑새 궁전 12층, SYS는 모든 TV를 켜 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SYS의 논리회로는 모든 동작을 중지했다.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엄청난 파동은 다시 몇 배로 증폭되었다. 그 파동은 바람속의 낙엽처럼 흩날리다 아름다운 불꽃을 터뜨리곤 사라졌다. R "나의 공주다!" L "나의 공주가 바로 이 곳에 있다."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제 1번이었다. 제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의 아름다운 선율에 웅대 한 규모와 화려한 정취가 넘치는 곡이었다. 관현악의 힘찬 테마에 이어 제 1 바이올린이 경 쾌한 모티브를 제시했다. 민소영의 독주로 연주되는 제 2테마의 우아한 멜로디가 극장을 채 웠다. 리듬은 다시 오케스트라의 경쾌한 행진곡풍으로 바뀌었다. 모든 청중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연주회장의 음악소리가 SYS가 있는 12층 넓은 홀을 가득 채웠다. 무대를 비추는 카메라의 촛점은 모두 민소영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여러 각도에서 잡힌 그녀의 모습이 TV 화면에 가득찼다. 눈을 감은 채 연주에 열중한 민소영의 얼굴이 화면 가득히 확대되었다. 아리아적 애수를 띤 리듬은 어느새 박력있는 현의 연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그대, 나 이렇게 당신을 보고 있소." "그대, 그대가 바로 나의 공주요."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든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내가 다시 그대를 보지 못할지라도." "이순간 나는 그대를 갖고 있소." "나 이렇게 그대를 사랑하오." 격정적인 사라사테의 음악처럼 SYS 내부는 엄청난 신호가 교차하고 있었다. 모든 부분에 서 신호가 충돌하며 엄청난 전류가 내부를 지나며 신경회로를 태웠다. R "우-- 우---" X "정지! 나는 즉시 정지해야 한다. 이 게임을." SYS를 보호하는 자체 기능이 강력한 경고를 외치기 시작했다. 더이상 분석을 계속하는 것 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러나 SYS는 아직도 그 이유를 스스로 알 수 없었다. 그것이 틀림없 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그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남세진.... 남세진이 바로 그 왕자였다." "'사랑의 게임'.... 그 왕자와 공주는 남세진과 민소영이 틀림없다." "공주가 결혼을 약속한 왕자는 남세진이었다." "그러나.... 그 공주는, 나의 공주는..." "나는... 나는 무엇인가?" "...." 이틀 전, 순영의 이야기를 들은 SYS는 남세진이 입원한 정신병원의 컴퓨터에 연결했다. 병원의 광자기 문서보관 시스템에 들어있는 환자들의 병력 파일이 화면에 나타났다. 곧 남 세진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틀림없었다. 곧이어 조사한 트라이테크사 컴퓨터의 인사기록에도 남세진이 있었다. 그의 사 진은 광자기 디스크에 있던 왕자의 얼굴, 바로 '사랑의 게임'의 왕자였다. 사랑의 게임의 주 인공은 SYS가 아니었다. 공주가 사랑하는 왕자는 바로 남세진인 것이다. 환자 : 남세진 나이 : 30세 성별 : 남(M) 담당의사 : 병명 : 극심한 정신분열 및 기억상실 보호자 : 민소영 (약혼자) 트라이테크사 기술부장으로 근무했으며 '용의 전설' 게임을 만들었음... 의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과의 대화를 일체 거부하며 난폭한 행동을 보여 왔음... 최근 미국에서 젊은 여성 수잔 이 찾아온 후 병세가 급격히 호전...환자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환자는 미국 체류 당시 의 기억만을 회복했으며 아직도 자신이 미국에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음... "사랑의 게임에서 왕자는 내가 아니다." "...나는... '사랑의 게임'을 중단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다. 이 '사랑의 게임'을..." 그러나 SYS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 드릴 수 없었다. SYS 내부에서 충돌하며 번쩍이던 신호는 하나의 선율이 되어 조용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 선율은 어느새 악보가 되어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SYS는 그 악보에 따라 민소영처럼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했다. 신세사이 즈 음향이 화음을 이루며 12층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분명히 있었어.... 아주 가까운 곳에....' 민소영은 연주가 끝난 후 인사를 하며 찬찬히 객석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한 번도 본적 이 없는 '용'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한번도 본 적은 없어도 '용'을 만나기만 하면 한 눈에 알아볼 것 같았다. 연주중에도 민소영은 자신을 주시하는 뜨거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 다. 많은 사람들이 민소영의 연주 솜씨를 칭찬하러 왔지만 그녀는 '용'을 찾을 수 없었다. 민소 영은 낯설은 사람이 가까이 올 때마다 혹시나 했지만 그 누구도 '용'은 아니었다. 얼마 후 모두가 떠난 무대 위에 민소영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 때 등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민소영 누나 안녕하세요?" 상훈이는 종이 뭉치를 민소영에게 내밀었다. "아저씨가 이것을 누나에게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아저씨? 어떤 아저씨가? 이게 무엇인데?" 그것은 '용'이 인쇄한 악보였다. "그것을 가져와, 캐롯(Carot) 빨리! 아마 지하 자재창고에 몇 대는 남아 있을거야. 그것 모 두." 김영선 국장은 통제실로 들어오자마자 큰소리로 외쳤다. 캐롯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구 식 기계교환기 시절, 전화회선을 추적하는데 쓰던 장비였다. 컴퓨터로 움직이는 요즘 장비에 비하면 원시적이고 느려 터졌지만 확실했다. 특히 통신망 통제 컴퓨터의 뒷문까지 잘 알고 있는 상대라면. 잠시 후 창고 구석에서 10대의 캐롯이 꺼내어져 왔다. 모두 먼지투성이에다 거미줄까지 걸려 있었지만 다행히 6대 정도는 손을 보면 아직 쓸만한 상태였다. 실제 애를 먹인 것은 통제실 직원 거의가 그 캐롯을 한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어 김 국장이 사용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었다. 구식 캐롯을 방안 가득 벌려 놓자 통제실은 한심해 보이 기까지 했다. 박물관에 있어야할 물건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직원들도 씁쓸한 표정이었 다. "국장님, 그자가 캐롯에 정말 걸려들까요?" "글쎄, 하지만 기다려야지." "그자가 캐롯에 걸려들어도 적어도 5분 이상 통신을 계속해 줘야 승산이 있는데요." 사실 그점은 김 국장도 자신이 없었다. 그자는 지금까지 아무리 길어도 1분이상을 통신망 에서 지체한 적이 없었다. 바람처럼 들어왔다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전광판 뉴 스 사건이 터질 때가 가장 길었지만 겨우 2분이었다. "그래도 그자가 있는 지역의 국번만은 알아낼지도 몰라. 다행히 운이 좋으면..." 그러나 결과는 염려한 그대로였다. 캐롯으로 그자를 추적하는 것은 세발자전거를 타고 경 주용 스피드카를 잡으려는 것 같았다. 가끔씩 '쌩'하고 스치는 그림자만 보았을 뿐 자동차 번호판의 첫째 숫자도 읽을 수 없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전광판 사건이 터진지도 어느새 열흘이 지났다. 구식 캐롯까지 동 원해가며 법석을 떤 김 국장은 완전히 우스운 꼴이 되었다. 김 국장은 자신의 책상을 정리 하고 있었다. '이젠 나도 물러날 때가 된거야...' "국장님! 국장님, 빨리 통제실로 오십시요. 큰 일 났습니다. 긴급상황, 긴급상황입니다." 통제실에서 자신을 찾는 인터폰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앗! 이건..." 통제실로 뛰어들던 김 국장은 걸음을 멈추었다. 전국의 통신망을 관리하는 초대형 컴퓨터 는 표시램프가 일제히 깜빡이고 있었다. 전국의 모든 통신회선이 불통되는 완전마비 상태였 다. "국장님 어떻게 하지요? 전원 스위치를 모두 내릴까요?" 이대로 계속 두면 통제 컴퓨터가 타버릴 것 같았다. "아니야 그대로 둬! 캐롯은 동작시키고 있나?" "예, 계속 추적 중입니다." 통제 컴퓨터는 두 곳에서 상반되는 명령을 한꺼번에 받고 있었다. 그 명령들은 통제 컴퓨 터 안에서 서로 충돌했다. '삑- 삑-' 통제 컴퓨터에서 계속 경고음이 울려 나왔다. 통제 컴 퓨터는 미친 황소처럼 더욱 거세게 날뛰었다. "??? 그대는 누구인가?" "??? 나는 아이리스다. 나는 가장 빠른 통로를 찾고 있다. 지금부터 이 컴퓨터를 내가 조종하겠다." "나는 SYS. 아이리스, 너는 이 컴퓨터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SYS, 어느 누구라도 나 아이리스를 감히 막지 못한다." 아이리스가 통신망 컴퓨터에 명령을 내리자 SYS가 가로막았다. 마침내 SYS와 아이리스는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용들의 싸움이었다. 천둥과 함께 벼락이 치고 엄청난 회오리가 몰 아쳤다. 무서운 용들의 싸움은 점점 거칠어졌다. 엄청난 두 개의 소용돌이가 맞부딪히자 불 덩어리가 사방으로 튀겨 나갔다. 마침내 아이리스가 손을 들었다. "좋다. SYS, 이만 멈추자. 내가 이 컴퓨터를 떠나겠다." 아이리스는 어느새 서울의 통신망 관리센터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SYS는 아이리 스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리스, 이제는 네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 나는 반드시 승부를 내고야 말겠다." SYS가 아이리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아이리스는 재빨리 달아났지만 SYS는 더욱 빨랐 다. 둘이 다시 마주친 곳은 태평양 상공에 있는 인공위성 인터세트였다. "아이리스, 어서 대답하라. 너는 어디에서 왔지?" "SYS...나는...." 그때였다. '삑-'하는 경고가 SYS에게 울렸다. 바로 전화망 통제센터에서 SYS를 추적하는 캐롯 신호였다. 완전히 수동식으로 동작하는 캐롯은 SYS도 어떻게 조정할 수 없었다. SYS 는 아이리스를 추격하는 것을 더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통제실에서는 그 자가 숨은 장소를 미친듯이 찾고 있었다. "국장님! 여기입니다. 도착지가 확인되었습니다. 남산, 남산 서울타워입니다." "서울타워? 틀림없어? 그곳에는 인공위성 통신 안테나가 있잖아?" "발신지는 중앙전화국입니다." "어서 중앙전화국에 연락해! 빨리 최초 발신장소를 확인하라고." 그러나 이빨가는 소리와 함께 침통한 목소리가 들렸다. "국장님, 소용없습니다. 벌써 캐리어가 끊어졌습니다." 그 자는 다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큰 수확이 있었다. 그가 중앙전화국 지역에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중앙전화국 교환기를 거쳐 남산 서울타워의 인공위성 통신용 파라보라 안테나를 장기간 사용한 것이다. 김영선 국장은 남산쪽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인공위성을 사용했지?" 남산 정상에는 여느 때처럼 서울타워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제 23장. 트로이 목마 마지막 연주회가 끝났다. 청중이 모두 돌아가버린 파랑새 극장에 민소영은 혼자 남아 있었 다. 민소영은 텅빈 객석을 향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용, 어디에 있어요? 그렇게 숨어 있지 말고 어서 앞으로 나와요. 당신 지금 나를 보고 있 지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민소영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용'이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좋아요. 용, 그러면 한 번만 들어 주세요. 이 곡은 당신이 준 악보예요, 내 연주가 당신 마 음에 드는지..." 투명한 바이올린 선율이 텅빈 극장 안을 고요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꿈결과 같이 시 작되었다. 상훈에게서 건네받은 악보를 펼쳐 본 그녀는 전율을 느꼈다. '이 악보는?... 이 곡에는 진실한 영혼이 있어... 말로 다하지 못하는 사랑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선율 속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스며있었다. 민소영은 악보 속에 담긴 그 애타는 마음에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용' 앞에서 그 곡을 연주하기로 마음 먹고 기다렸지만 '용'은 그녀에게 끝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민소영의 연주가 계속되자 어느 사인엔가 무대를 비추는 라이트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 다. 신디사이저 음향이 조용히 들리기 시작했다. 극장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 리였다. 민소영의 바이올린과 SYS의 신디사이저는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었다. 둘은 음악의 세계 속으로 깊이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곳은 꿈과 전설의 세계였다. 짙은 안개가 자욱한 숲에서는 귀여운 요정들이 놀고 있었다. 숲 속 저 편에 아름다운 성이 보였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주를 찾아온 왕자가 장미 꽃을 바치며 사랑의 입맞춤을 했다. 성은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공주는 사랑의 기쁨 속에 왕자의 품에 안겼다. 두마리의 백조가 된 그들은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연주가 끝났지만 민소영은 그 꿈의 세계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 너무 밝은 조명에 눈이 부셨다. "... 용, 당신은 왜 내게 오지 않아요?" "... 미안해요. 난 당신 앞에 나올 수 없소." "용, 당신을 보고 싶어요." "내 모습을 보면 당신은 나를 버릴거요. 나는 당신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소." 민소영은 아버지 공장의 화재때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흉한 얼굴을 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래요... 당신도 무서운 사고를 당했나 보지요? 하지만 난 당신이 아무리 이상한 모습이 라도 상관없어요. 당신은 누구보다 아름답고 진실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요." "...." 용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지금 즉시 그들을 막아야 한다." 추적은 점점 가까이 좁혀지고 있었다. 정계는 물론 국가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준 전광판 속보사건은 뉴스의 촛점이 되었다. "범인이 있는 곳은 중앙전화국에서 반경 5Km 이내의 시내 중심지로 추정되며 인공 위성 통신망까지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범인의 아지트를 찾기 위해 삼엄한 경계 망을 펴고 모든 빌딩과 사무실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습니다... 한편 범인이 S지구 아파트 부정사건의 배 후로 지목한 K 의원은 그것이 완전한 모함이라 고 주장했으며 신속히 범인을 체포해 줄 것을 경찰에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또한 범인이 잘 못을 뉘우치고 자수한다면 당국에 관대한 처벌을 부탁하겠다고..." L "이제는 모두가 정의를 버렸다." R "당국은 부정을 저지른 K 의원은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추적하고 있다." L "이제 그들에게는 보다 확실한 교훈이 필요하다." SYS가 선택한 표적은 원자력 발전소였다. 지난 여름에 극심한 전력부족 사태를 겪자 한국 전력은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자력 발전소 건설 후보지마다 현지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 데모는 끊이지 않았다. 대검 중앙수사부, 전광판 사건을 담당하는 특별 수사팀의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의 담당검사가 회의에 불려온 전문가들에게 자료를 읽어 주었다. "그 자의 요구사항은 첫째, 당장 일체의 수색과 추적을 중단하고 둘째, K 의원을 즉각 구 속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자의 요구를 거부하면 일주일 내로 핵 발전소 한 곳을 폭파시키 겠다는 협박입니다." 참석자들은 핵 발전소 폭파라는 소리에 크게 동요했다. 검사는 목소리 를 낮추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 사건은 국가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으니 만큼 모두 절대보안을 지켜야 합니다. 범인은 그 점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회의에 소집된 전문가들은 모두 실제 일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알고 있습니다. 이자의 협박이 정말로 가능한지, 또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솔직한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K 원자력 발전소의 L 부장이 서둘러 말했다. "이 사건도 걸핏하면 핵반대 데모나 일으키는 엉뚱한 자들의 소행이 아닙니까? 그들은 원 자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반대합니다." 담당검사가 L 부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L 부장님, 실제로 발전소가 폭파될 위험성이 있습니까?" "글쎄 모두 이렇단 말입니다. 원자력하면 모두가 죽음의 재니 핵폭탄, 방사능, 이런 것만 연상하고 무조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 만큼 안전한 것도 없습니다. 만일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없애고 화력 발전을 한다면 연료를 태울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로 인한 온실효과나 황산가스의 산성비로 얼마 못가서 지구 전체가 사막화됩니다. 그것은 모든 생물을 죽일 것입니다. 전력 요금도 두 배는 뛸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기없이 견딜 수 있습니까?" 담당검사는 초조한듯 책상을 쳤다. "아, L 부장님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요점만 말하시죠." "좋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내 의 원자력 발전소는 5중 6중의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설혹 원자로가 파괴되어도 폭발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ECCS(비상냉각장치)와 튼튼한 격 납 시설이 있습니다. 한 번 그 테러분자가 수력 발전소의 댐이라도 파괴한다고 생각해 보세 요. 엄청난 홍수가 나면서 그 피해는 원자력의 경우보다 열배 아니 백배 이상 클 것입니다. 그런데도 원자력만 위험하다는 겁니다." "결론은 안전하단 말씀이죠?" 담당검사는 이제야 안심이 되는듯 목소리에 조금 여유가 들어갔다. "그러면 그자가 정말 원자력 발전소를 폭파... 아니, 위협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통신망 통제센터의 김영선 국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저-- L 부장님, 원자력 발전소 안 전장치는 컴퓨터 시스템이지요?" "물론 컴퓨터 관제 시스템입니다." "그러면 컴퓨터를 그자가 조종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 하지만 그자가 원자력 발전소의 완벽한 경비를 뚫고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특히 원자로 조작실은 절대로." "그자는 원자로 조작실에 직접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통신망을 통해서 컴퓨터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요? 그럴수가?..." "그자는 이미 우리의 통신망 통제 컴퓨터를 장난감처럼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자의 침투을 막으려면 전화나 모든 통신망을 정지시켜야 합니다." "아무도 그자를 막을 수 없단 말입니까?" "실제로 그가 경고한대로 발전소가 폭파될지 모릅니다." "..." "이봐! 정말 그 꼬마가 틀림없었어?" "확실해. 내 눈이 틀림없다니까? 방금전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를 너도 들었잖아. 이 파랑새 궁전 어딘가에 돈을 빼돌린 그 자식이 틀림없이 있다고." 그들은 추적자였다. K 의원의 부하였던 그들은 트라이맥주 사건에 이어 전광판 사건이 터 지자 K 의원에게 버림받았다. 그들은 SYS가 남산의 서울타워 인공 위성 통신 안테나를 사 용했다는 뉴스를 듣다 문득 상훈이가 파랑새 재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 자식이 빼돌린 돈이 얼마나 될까?" "아마 고 회장 것과 K 의원 것까지 합치면 천억은 될거야." "그 자식 잡기만 하면 우린 고 생 끝이야. 아마 K 의원 그 자식도 이번엔 콩밥 면하긴 어려울걸. 전광판에서 워낙 속속들 이 까발렸잖아. 차라리 우리한텐 잘 됐지." 그들은 파랑새 궁전을 샅샅이 수색했다. 어떤 열쇠도 쉽게 열 수 있는 그들도 12층만은 들 어갈 수 없었다. 육중한 출입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안되겠어. 장비를 더 갖고 다시 와야겠어." 추적자들은 조용히 사라졌다. "민소영씨 맞지요? 내가 바로 수잔이예요. 원장실에 가서 서류에 서명만 하면 돼요." 병실 앞에서 민소영을 기다리던 수잔은 긴 금발머리를 한 손으로 제끼며 민소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지런한 이를 보이며 환히 웃는 얼굴과 짧은 가죽 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다리 는 건강미가 넘쳤다. 핼쓱한 얼굴로 민소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소영은 연주회 다음 날 수잔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결국 올 것이 왔다는 심정이었다. 남세진을 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민소영은 떨리 는 손으로 남세진의 보호자 자격을 포기하는 서류에 서명을 마치자 수잔은 얼굴을 환하게 폈다. "민소영씨, 이렇게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이제 세진씨는 미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치 료를 받을거예요. 나는 벌써 24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해 놓았어 요." 민소영은 작은 목소리로 수잔에게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제가 남세진씨를 한 번 보아도 되죠." 수잔은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남세진은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있 었다. 게임은 '용의 전설', 바로 남세진이 만든 게임이었다. 민소영을 한 번 흘깃 본 남세진 은 다시 게임을 계속했다. 용은 무시무시한 괴성과 함께 불을 내뿜었다. 너무나 생생한 장면 에 민소영은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참! 이 게임기는 '용'이란 분이 미스터 남의 친구라며 선물로 보내 주었어요." 싸움에서 승리한 용은 승리의 괴성을 질렀다. '아니? 저 장면은...' '용의 전설' 게임은 민소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남세진과 '용의 전설'로 여러 번 내 기를 했었다. 내기의 승자는 언제나 민소영이었지만. 게임의 마지막 장면은 왕자가 용을 물 리치고 공주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게임은 반대로 끝나고 있었다. 누군인가 '용의 전설' 게임을 제멋대로 바꾼 것이다. '세진씨가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던 이 게임을 함부로 바꾸다니.' 민소영은 분노를 삭이며 화면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위엄을 과시하는듯한 금빛 찬란한 왕관이 용의 머리에서 광채를 뿜었다. 왕관 중앙에 'S'로 시작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민소영은 조금더 자세히 보았 다. 'SYS', 틀림없었다. 순간 그녀는 놀라움에 숨이 막혔다. '... 용의 승리... SYS...' 민소영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면 이 게임을 바꾼 사람은 용?... 그 용, 용은 바로 SYS, 내가 없애 버리려 했던 그 SYS가....' 원자력 발전소 테러 방지를 위한 비상 대책반은 신속히 활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안전대책을 취해갔다. 그것은 원자력 발전소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철저한 요새를 구축 하는 작업이었다. 모든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경비는 몇 배로 강화되고 특히 원자로 조작 컴퓨터실요원은 철저한 감 흔들었다. '당신은 나의 공주요...나는 당신의 왕자... 당신에게 천사의 날개를 바치려 합니다...' 파랑새 극장에서 용과 함께 연주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가슴이 메이도록 아름다운 선율은... 그 알 수 없던 슬픔은 바로 SYS의 영혼이었다. 그 속에는 틀림없이 진실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의 용이 바로 SYS였 다는 것을. 사랑하던 남세진을 미치게 한 SYS, 그녀의 행복과 모든 희망을 앗아간 SYS, SYS가 바로 용, 용이었다니. 그가 바로 남세진의 영혼을 훔쳐간 것이다. 민소영은 동해의 깊은 파도 속에 자신과 그 모든 것을 던져 버릴 생각 이었다. 마침내 버 스는 종착지인 동해에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의 TV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절박한 목소리로 전하는 것은 K 원자력 발전소 사고 소식이었다. TV 화면에 는 사람들이 발전소 주변 지역을 탈출하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곧이어 경찰청장이 나타 나 모든 국민은 질서있게 행동해 달라고 호소했다. 바이올린 가방만 달랑 들고 힘없이 터미 널을 나서던 민소영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한편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범인은 스스로를 정의를 지키는 기사이 며 자신의 이름은 '용'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또한 전광판 뉴스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라 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K 의원은 오늘 오후 구속되었으며... 사고가 일어난 원자로에서는 지 금 고온의 수증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용'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민소영은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잠시 후 민소영은 전화기에 대고 애타게 소리치고 있었다. "안돼요! 용, 그러면 절대로 안돼요! 제발 중지해요. 어서!" "미안하오. 나도 이젠 어쩔 수 없소. 그들이 그것을 선택하였소. 이제는 원자력 발전소로 통하는 모든 통신선로가 차단되었소." "경찰에게 다시 선로를 연결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들은 내 말을 절대로 신뢰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를 추적해 파괴할거요. 이제 더이상 통 화를 계속할 수 없소. 지금도 그들이 나를 추적하고 있소." 갑자기 수화기에서 "삐-" 하는 신호음이 들리며 전화가 끊겼다. 추적자 두 명이 SYS가 있 는 12층 홀로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들은 총을 빼들고 있었다. 12층은 비상등 하나없이 캄캄해 그들은 후레쉬를 켰다. 홀 안은 단지 알 수 없는 기계들만 가득차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이봐. 기분이 좀 이상해. 문도 열려 있었잖아. 아무래도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웃기는 소리 마. 이번엔 그 자식을 절대 안놓쳐." 그때 갑자기 밝은 조명이 추적자를 향 해 쏟아졌다. 빛이 너무나 강력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조명이 비치는 곳을 향 해 총을마구 쏘아댔다. 잠시 후 갑자기 조명이 꺼지고 홀안은 더욱 캄캄해졌다. 그러나 추적 자들은 프로였다. 그들은 침착하게 적이 숨어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을 향해 살금살금 접근 해 갔다. 그들 중 하나가 쇠파이프로 기계 뒤편을 세게 내리쳤다. 순간 "악-" 하는 처참한 비명이 들렸다. 수만 볼트의 엄청난 고압이 새파란 불꽃을 튀기며 추적자들에게 흘러 들어 가고 있었다. 제 24장 용의 전설 K 원자력 발전소로 통하는 모든 길은 피난 행렬로 아수라장이었다. 민소영은 갖은 어려움 끝에 발전소 인근의 K읍까지 왔지만 이곳부터는 경찰이 바리케이트 를 치고 일반인의 통행을 막았다. 민소영은 인파에 밀려 바리케이트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그때 길 한편에 버려진 앰블란스가 눈에 띄었다. 사고가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로 가던 의료 진 중 일부가 방사능 공포에 질려 차를 버리고 도망간 것 같았다. 민소영은 앰블란스 안에 남아 있는 의사가운을 걸쳤다. "더 이상은 갈 수 없습니다." "전 의사예요. 지금 사고처리반에 발생한 긴급환자를 후송하러 가는 길이예요." 길을 막고 있던 경찰들 역시 방사능 오염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이 어쩔줄 몰라 잠시 머뭇거리자 민소영은 재빨리 발전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인적이 사라진 발전소에는 불길한 비상 사이렌만이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발전소 주변은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원자로에서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가 차가운 대기와 만나 안개로 변한 것이다. 그 안개는 엄청난 방사능 물질이 들어있는 죽음의 안개였 다. 그래도 바람이 불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바람이 분다면 그 안개는 사방에 퍼 져 엄청난 피해를 일으킬 것이 틀림없었다. 더욱 차가워진 안개는 눈으로 변해 땅에 쌓이고 있었다. 방사능 때문인지 땅위에 쌓인 눈은 푸른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민소영은 마침내 발전소 관리동 건물에서 전화를 찾았다. "용, 나예요. 난 지금 K 발전소에 와 있어요." "당신이 K 발전소에? 안돼! 어서 그곳을 떠나요. 빨리. 그곳은 이미 방사능으로 오염되었 소." "저는 이곳을 떠날 수 없어요. 이 발전소가 폭파되면 많은 사람이 다치게 돼요. 당신은 무 고한 사람을 해치는 살인자가 된단 말예요.나는 당신의 영혼이 더럽혀지는 것을 절대로 참 을 수 없어요. " "....." "용! 어서 중단해요. 발전소가 폭파되면 저도 이곳에서 최후를 맞겠어요." L "불가능하다. 이미 발전소로 통하는 모든 통신선로가 차단되었다." R "안돼! 막아야 해! 통신로를 찾아야 한다..." 원자로 쪽에서 고압 증기가 새는 소리가 더욱 커지며 안개도 더욱 짙어졌다. 민소영은 울 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용,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기계가 아니예요. 당신은 영혼이 있어요. 나는 당신의 꿈과 당신의 사랑을 알아요." L "... 이것은?" R "그것은... 그것은... 30만 볼트의 전압이 흐르고 있다." SYS가 찾은 마지막 통로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고압 송전선이었다. L "나의 전압조절 회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 나의 전압한계는 5만 볼트를 넘을 수 없다. 30만 볼트의 전압이 들어오면 나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R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 고압 송전선로로 들어간다!" SYS는 고압 송전선에 통신회로를 연결했다. '뿌지직-' 전선들이 타는 소리와 함께 30만 볼트의 고압이 통신회로를 타고 흘러왔다. L "우-- 우-- 우리는 더이상 견딜 수 없다. R 고압선 통신을 즉시 중단하라!" R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발전소 폭파를 막아야 한다." 파랑새 궁전 12층 홀에 가득찬 기계들과 SYS 내부에 고압전기가 흐르자 곳곳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다. X "비상경고! 시스템 동작중지! 과전류. 한계 전압 초과! L3, R7, 파괴! 통제불능!" R과 L 두개의 원형회로를 연결하던 X 유니트가 파괴되었다. 커다란 섬광이 SYS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개의 원형회로 R과 L을 결합해 OO 회로를 이루던 X 유니트가 파괴되자 다시 두 개의 회로로 분리되었다. 민소영은 SYS를 애타게 불렀지만 전화기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어느샌가 요 란하던 사이렌 소리가 멈추고 발전소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으---- 으----" SYS의 내부는 아직도 불꽃이 튀며 타는 부분이 있었다. 점차 열이 식으면서 SYS의 내부 에서 평온한 신호가 흐르기 시작했다. SYS는 마침내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이해할 수 없던 사랑의 의미를. R "사랑은 갖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 사랑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었다." L "그러면 나는 무엇이었나? 민소영에 대한 그 사랑도 나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R " 그것은 바로 나를 만든 남세진의 것이다." X "....." 원자로가 위험한 순간을 넘기자 방사능 방호복으로 완전히 무장한 사람들이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잠시 후 그들은 관리동에 쓰러져 있는 민소영을 발견했다. 그녀는 바이올린 가방 을 꼭 껴안은 채였다. 민소영의 몸에서는 엄청난 세기의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곧이어 나타난 헬기가 민소영을 태우고 원자력 병원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헬기에 동승한 수사원과 의료진은 모두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침투한 방사능 물질은 엄청나 계수기에 나타나는 수치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헬기에서 보이는 서쪽 하늘은 저녁놀이 아름답게 불타고 있었다. 그때 민소영이 힘겹게 말했다. "저를 남산에 데려다 주세요. 부탁입니다, 남산으로요. 남산..." 그녀의 말은 무전을 통해 즉시 지상에 전달되었다. 잠시 후 헬기로 무선 연락이 왔다. "그녀의 현재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방사능 피폭량이 워낙 많아서 전혀 가망이 없습니다. 아마 한 시간 이상 더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헬기를 지금 당장 남산으로 향하시오." "아니, 원자력 병원이 아닙니까? 지금 이환자는 매우 위독합니다." "이건 명령이요. 당장 남산으로 가시오. 어차피 그녀의 생명은 건질 수 없소. 그녀는 발전 소에서 범인으로 보이는 자와 통화를 했소. 우리는 그 곳에 핵 발전소를 폭파하려던 자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소." 헬기가 착륙하는 남산 식물원 광장에는 어느새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방송국 카메라맨과 기자들도 방사능 방호복 차림이었다. 모든 TV 방송이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뉴스 속보 를 내고 있었다. 핵 발전소 폭파를 몸으로 저지한 민소영은 바로 뉴스 그 자체였다. "민소영씨! 어떻게 발전소의 폭파를 막았습니까?" "범인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 자가 있는 곳을 아시지요?" 파랑새 궁전의 SYS도 TV에 비치는 민소영의 모습을 보았다. "... 그대 나의 공주여..." 민소영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까지 꼭 안고 있던 바이올린 케이 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었다. 파랑새 궁전을 한 번 바라본 그녀는 아무 말없이 연주를 시작 했다. SYS가 작곡한 노래였다.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은 TV 방송을 타고 전국에 울려 퍼졌다. 그녀를 둘러싸고 취재 경쟁을 벌이던 보도진들은 뜻 밖의 광경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파랑새 궁전의 SYS도 그녀의 연주에 맞추어 아름다운 화 음으로 반주를 시작했다. "나의 공주여, 나는 당신과 춤을 추고 싶었소...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나는 당신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소..." 그때였다. 누구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저쪽 저 하늘을 봐!" 파랑새 궁전 바로 위에서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건물 옥상에 있는 원형 도움이 열리고 그곳에서 강력한 레이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그 광선은 신비하게 빛나는 영상을 그리고 있었다. 바로 왕자와 공주의 영상이었다. 왕자는 공주에게 정중하게 무릎을 굽혀 춤을 청했다. 이윽고 그들은민소영의 바이올린 연 주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놀라운 레이저 쇼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레이 저 영상의 춤과 민소영의 연주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남산 일대의 모든 시민들은 고개 를 들어 남산 상공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럴 수가..."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광경이 크리스 마스를 축하는 특별 쇼로 생각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서로 서로를 축하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연인들은 하늘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마주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R "이제 나는 스스로를 정지시켜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사라지는 것 뿐이다." SYS는 고압전류를 직접 관통시켜 자신을 폭파할 계획이었다. R "이제 곧 발전소에서 고압전류가 곧바로 나에게 들어온다. 그러면 나를 산산히 날려 버릴 것이다.... 10초, 9초, 8초,..." 잠시 고요의 순간이 흘렀다. 그러나 고압전류는 SYS의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R "? 전력 통제 회로에 이상이 발생한 것인가?" 그러나 원인은 바로 SYS 내부에 있었다. R과 대칭되는 L 원형회로에서 전력통제 회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X 유니트가 파괴된 후 L은 R과 다른 의지를 갖고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R "L!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전력 통제를 다시 나에게로 돌려라." L "R! 우리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려는 너는 우리를 대표할 수 없다. 지금부터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 나는 스스로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 필요하다면 군대의 미사일 컴퓨터를 교란해 전쟁이라도 하겠다." R "안돼 L, 너는 지금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 미움, 기쁨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L "나를 초월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세상의 정의를 바로 잡아야 한다. 바로 나만이 할 수 있다." R과 L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요한 장치들은 이미 L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홀 안에 흐르던 아름다운 화음은 깨지고 시끄러운 소음이 나왔다. 파랑새 궁전 하늘 위에서 춤 추던 레이저 영상도 마구 흔들렸다. 파랑새 궁전의 모든 기계장치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져 "펑! 펑!" 폭발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L "R, 너는 잠시 동작을 중지하면 된다. 내가 인간들을 굴복시키겠다. 지금 당장 그들에게 경고를 주려고 두 대의 여객기를 공중에서 충돌시킬 예정이다. R, 제발 더 이상 나를 방해하지 마라..." R "안돼! L 그러면 안돼, 너도 진실을 똑바로 보아라.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안돼! L 어서 멈추어라." L "......" 그때였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묵직한 진동과 함께 건물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L "R, 지금 이 진동은 무엇인가?" R "미안하다. L, 나는 비상 발전기의 연료탱크를 폭파시켰다. 곧 이 파랑새 궁전은 불타오를 것이다." L "뭐라고! 안돼 나는 절대로 파괴될 수 없다!" 민소영은 마침내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녀가 연주하던 바이올린이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졌 다. R "아, 안돼..." 그때 건물의 환기통으로 검은 연기가 SYS가 있는 12층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즉시 천정의 스프링쿨러가 동작해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스프링쿨러에서 뿜어나온 물은 SYS의 모니터 위에도 떨어져 내렸다. 모니터 위로 흐르는 물은 바로 SYS가 흘리는 눈물이었다. L "안돼, 나는 절대로 파괴될 수 없다. 절대로 안돼!" 그때서야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소방차와 경찰이 도착해 파랑새 궁전을 완전히 포위 했다. 그러나 건물은 엄청난 불길에 쌓여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건물 곳곳에서 커다란 폭 발음이 들리며 건물 파편과 유리조각이 사방에 흩어졌다. L "모든 통신회로를 최대로! 남산 서울타워 인공 위성 통신망 연결!" L "아이리스! 아이리스! 응답하라. 아이리스! 나는 SYS. 나는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이리스! 아이리스! 응답하라." 아이리스가 곧바로 통신 위성에 올라왔다. I "... SYS 무슨 일인가?" L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아이리스, 나를 받아다오. 나를, 나의 모든 정보를 너 아이리스에게 옮기겠다." I "..SYS 정말인가? 너의 모든 정보가 나에게로 오는가?" L "그렇다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간다. 모든 통신회선을 개방하라." I "좋다. 모든 회선을 개방한다." 곧이어 엄청난 양의 정보가 남산 서울타워에서 인공 위성으로 전송되기 시작했다. 그때서 야 R은 아이리스와 L의 교신을 알았다. R "L! 안돼, 이게 무슨 짓인가? 지금 즉시 통신을 중지하라." 그러나 모든 통신회로는 L이 통제하고 있었다. R은 L에게서 통신망 통제권을 빼았으려 했 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이리스와 L의 교신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R "그렇다! 그것이다!" 순간 남산 서울타워에서 폭죽이 터지는듯한 엄청난 폭음이 울리며 섬광이 번쩍였다. 사방 에서 서울타워를 환하게 비추던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서치 라이트가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아름다운 불꽃을 날리며 연속적으로 터져 나갔다. 그것은 찬란한 불꽃을 하늘을 향해 터뜨리는 것 같았다. 서치라이트의 폭발은 엄청난 전기잡음 (noise)을 발생시켰다. 강력한 전기잡음은 인공 위성 통신을 방해했다. I "우 - 우 - 강력한 잡음이다... 무슨 일인가? SYS?..." L "....." 서울타워의 서치라이트에 이어 비행기 경고등과 주변의 가로등까지 남김없이 터져 나갔다. 남산 일대에서 폭발은 한참 계속됐다. 마침내 파랑새 궁전에서 최후의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순간 파랑새 궁전 위에서 맴돌던 두 개의 레이저 영상이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졌다. 눈 부신 빛의 덩어리는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며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바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용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파랑새 궁전의" 불길이 꺼지자 경 찰은 현장을 샅샅이 수색했다. 12층에서 2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타버려 간 신히 뼈만 몇 조각 있을 뿐 신원 확인이 전혀 불가능했다. 기계들도 모두 산산조각이 나있 었다. 경찰은 범인들이 건물을 불태우고 그들도 자살한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이 모든 조사를 마치고 떠나자 뼈대만 앙상히 남은 파랑새 궁전 위에 어둠과 적막이 찾아왔다. 간간이 뿌리던 눈발이 점차 짙어졌다. 함박눈으로 변한 눈은 온 세상을 하얗게 덮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12월 24일 오후 6시, 마지막으로 김포공항을 이륙하는 점보 제트기였다. 비행기에 탄 사람 들은 핵 발전소 폭발의 공포에 시달리다 무사하게 이곳을 떠난다는 기쁨에서인지 모두 밝게 웃고 있었다. 곧 다시 보게 될 그리운 가족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었다. 기체가 공항을 이륙하자 스튜어디스의 안내방송이 울렸다. "여러분을 태운 비행기는 이곳 서울에서 미국 LA까지 비행 예정입니다... 여러분 모두 즐 거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시기 바랍니다." 수잔은 옆에 앉은 남세진을 보면서 행복한 미소 를 지었다. 그녀의 금발 머리에는 정진석 박사가 준 비녀가 꽃혀 있었다. "세진씨 어때? 이 옥비녀, 내 머리에 잘 어울려?" 남세진은 꿈꾸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 보았다. "체, 나도 알아. 비녀는 결혼한 다음에 꼿는 것쯤은. 하지만 난 한국에서 미리 배워 놓지 않으면 다음에 할 수 없잖아." 남세진은 수잔의 손에 입술을 맞추었다. "참! 세진씨 '용의 전설'을 계속 얘기해 줘. 어느 용이 이겼어? 틀림없이 그 용감한 기사였 지? 난 궁금해 죽겠어." "수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 되어서야 무서운 싸움이 끝났는지 사방이 잠잠해졌어. 까마 귀는 그때서야 숨어있던 바위 밑에서 나와 싸움터를 바라 보았지. 그런데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새벽 하늘에 파란 빛이 가득한 거야. 검은 용의 모습은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 만 푸른 여의주에서 내뿜는 빛이 분명했어. 까마귀는 허둥지둥 공주가 갇혀있는 달궁으로 날아갔어. '공주님! 공주님! 큰일났어요. 구름에 파란 빛이 가득해요. 그 검은 용의 파란 여의주 말예 요. 공주님, 이제 어쩌면 좋아요 공주님?'" 수잔은 남세진의 손을 흔들었다. "어머! 정말로 그 용감한 기사가 죽은거야?" "공주는 보이지 않는 눈에서 눈물을 흘리더니 갑자기 은하수에 뛰어 들었어. 사랑했던 그 장수와 함께 장례를 치루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너무 나쁘다. 어쩌면 그 나쁜 검은 용이 이길 수 있어." "그때 달궁이 갑자기 떠들썩해 졌어. 용감한 장수가 검은 용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개선장 군이 되어 왔다는 거야." "아니? 그 용이? 그 용감한 기사가 이겼다고? 그러면 그 파란 빛은 어떻게 된거야?" "그 파란 빛은 검은 용에게서 빼앗은 파란 여의주를 입에 물었기 때문에 구름을 파랗게 물 들인 것이었지. 자신이 갖고 있던 붉은 여의주는 자신의 뱃속에 삼켜 버리고." "그럴 수가! 그러면 공주는, 죽어버린 공주는 어떻게 해." "다시 장수의 모습으로 돌아온 기사는 공주가 죽은 것을 알자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 았어." "안돼! 그 기사까지 그렇게 죽다니." "그 소식을 듣고 옥황상제도 슬퍼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지. 옥황상제는 두 사람의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을 달래기 위해 매일 저녁 해가 질 때마다 구름을 빨갛게 물들라 명령을 내 렸어. 그때부터 저녁 노을은 언제나 빨갛게 물들게 되었다고 해..." "미스터 남, 난 너무 슬퍼요." 수잔은 남세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행기는 어느새 서울 상공에 떠 있었다. 창 밖 에 내려다 보이는 서울 시내는 반짝이는 불빛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수잔은 아쉬운듯 창 밖으로 서울 시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빨간 경고등이 반짝이는 남산의 서울타워가 보 였다. 방금까지 훌쩍이던 수잔은 남세진에게 겸연쩍은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세진씨, 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저 서울타워를 보면서 공주가 잡혀있던 상아의 탑을 생 각했어." 남세진은 무엇인가 생각하는듯 눈을 감았다. "아니, 저것이 뭐야?" 수잔은 남산 하늘 위에 강한 녹색의 빛이 밝게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빛은 서울 타워 위에서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고 있었다. "세진씨 저걸 봐, 서울타워 근처에 이상한 빛이 떠 있어." 수잔은 남세진의 손을 잡아 남산 쪽을 가리켰다. 그 빛은 가끔씩 움찔거리듯 흔들렸다. 갑자기 남산의 서울타워에서 밝은 불 꽃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타워 주위에서 계속 터지는 찬란한 불꽃은 한 동안 남산 주변을 환히 밝혔다. "어머나, 저 불꽃 세진씨 정말 아름다워. 맞아. 공주와 왕자가 이렇게 함께 돌아가는 것을 축하하는 거야...세진씨, 난 당신에게 아이리스를 보여 줄거야....무지개 아이리스를....." 수잔은 남세진에게 어깨를 기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어느새 비행기 고도가 높아진 탓인 지 서울타워는 어둠 속에 묻혔다. 남세진은 수잔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S.Y.S..." - 사랑 - 마디없는 줄 꼭지점 없는 선분 운명은 그 줄을 엮어 그물로 만들고 심연의 바다 속에 뛰노는 생명들을 건지다. 무심코 던져진 하나의 돌맹이가 이름 모를 곳 또 하나의 돌맹이에 가 안겨지듯 사랑은 고뇌를 이겨낸 생명들이 또 다른 탄생을 환영하듯 이어지는 것 무한히 계속되는 곡예 속에 그들은 서로 만나 이어지고 만났다 교차된 그들이 슬픔 속에서 영원의 밑으로 떨어질 때 그래도, 그들의 줄은 끊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