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한국축구 뒤의 여자, 오은미 ‘월드컵 내조’ 목숨 걸었다 사람들은 그를 “한국축구의 뒤에 서 있는 여자”라고 부른다. ‘차범근의 핸드폰’이란 별명도 있다. 온달과 결혼한 평강공주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는 축구 국가대표 사령탑인 차범근 감독을 집에서 중계방송이나 보며 기다리고 앉아 있는 마누라가 아니다. 경기장에만 안 들어갔지 차 감독 마음속에서 함께 뛰고 있는 코칭 스태프의 한사람이다. 말하자면 차 감독은 매니저이자 카운슬러에 대변인 구실까지 하는 유능한 인재 하나를 곁에 두고 있는 셈이다. 오은미(43)씨는 자신에게 떨어진 이 세가지 구실을 부지런히 챙기며 지난 20여년을 차범근의 분신처럼 살아왔다. 차 감독이 끼고 사는 노트북 컴퓨터와 함께 오씨는 그의 손발이 되어 함께 걸어가고 있는 또 한대의 살아 있는 컴퓨터다. 586컴퓨터로도 그 기능을 헤아릴 길 없는 고성능 고감도의 컴퓨터다. 그 바탕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오씨 가슴엔 아직도 그가 25년 전 첫눈에 반했다며 그를 사로잡은 수줍은 청년, 축구밖에 모르는 사나이로 남아 있다. 완벽한 독일어, 지금도 정보수집 (사진/차범근·오은미 부부의 평생 소원은 한국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일이다.) “부부라면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것 아닌가요. 한가지 목적을 향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열심히 노력하는 것, 하나의 일을 둘이 나눠하며 이고지고 가는 것. 부부관계를 종속적인 것으로 치는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으로 보면 좀 튄다 싶겠지만 전 제가 하는 일이 평등한 부부상으로 볼 땐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축구에 목숨을 건 한 남자와, 그와 한배를 타겠다고 작정한 여자가 그 한 목표를 위해 각자의 능력에 맞는 일을 나눠 하고 있다는 오씨의 역할론은 뚜렷했다. 지난 1월5일, 차 감독이 울산으로 대표팀 합숙훈련을 떠나기까지 오은미씨는 손에서 전화기를 내려놓을 새가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차 감독을 찾는 전화가 계속 울렸기 때문이다. 자동응답기로는 견뎌낼 수가 없다. 눈깜짝할 새 29번이 꽉 차기 때문이다. 월드컵 본선 4회 연속진출의 쾌거를 이룬 97년이 ‘차범근의 해’였기에 더했다. “내가 뭐 전화받는 사람인가”라고 볼멘 목소리를 하면서도 오씨의 전화 응대는 유연하면서 합리적이다. “여보세요, 지금 여기 안 계신데요. 어디세요…”로 시작하는 그의 대꾸는 통화 상대에 따라 순발력있게 펼쳐진다. “오늘 오시겠어요, 오세요. 양복, 넥타이, 네네… 축구공이 있나 모르겠네요, 찾으면 있겠지요. 뭘 얼마나 대단하게 쓰시려구….” 언론사들의 인터뷰 요청엔 사진기자들을 위한 의상도 준비해야 한다. 책을 쓰자, 광고를 찍자, 모임에 나와달라, 간증을 해달라…. 밀려드는 온갖 주문을 수화기 저편에 있는 사람이 불쾌하지 않게 물리치는 일도 당하는 입장에선 쉬운 일이 아니다. “푹 쉬게 하고 싶은데 도대체 짬이 나질 않네요. 꼭 필요한 일정만 잡는데도 너무 빡빡하다고 차 감독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는 제가 더 울고 싶어요. 저 사람은 집중을 못하면 일을 못하는 성격이라 제 스스로 수비벽을 단단히 치는 꼴인데, 그걸 여자가 너무 설친다고 오해하는 분들도 있는 모양이에요.” 차 감독의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단박 알아채는 그의 뒷바라지는 1급 비서 뺨치게 보였다. 시간조절부터 이미지 관리, 대인관계, 각종 연락, 원고 수발까지, “아내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다”는 차 감독의 고백은 과장된 공치사가 아니었다. 대학 1학년 때 친구따라 나간 우연한 자리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씨는 여느 연세대생과 마찬가지로 연고전에나 가서야 그라운드를 누비는 최연소 축구 국가대표선수 차범근을, 상대팀의 골 잘차는 호랑이로 건너다보았을 것이다. 종교음악과를 다녔던 그의 젊은 시절 꿈은 거실 한 쪽에 놓여 있는 피아노에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스크랩북에 차곡차곡 모여 있는 빛바랜 기사들은 온 국민이 주시하는 축구스타 차범근의 약혼녀로 기자들의 초점이 됐던 76년께가 오씨의 인생 전환점이었음을 알려준다. “그의 축구인생이 제 인생으로 굳어진 건 독일 분데스리그에서 뛰던 80년대였어요. 독일 프로선수들이 가장 진실하고 훌륭한 매니저는 바로 부인이란 얘길 하는 걸 귀담아 들었지요. 맨주먹으로 뛰어든 독일 생활은 사실 하루하루가 그가 축구선수로 살아남느냐 죽느냐를 다투던 때여서 다른 선택이란 게 없었어요.” 한동안은 그에게 뭘 먹일까 영양관리 하는 데만도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게 집중을 하니까,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선수가 오늘은 뭘 먹고 싶다고 생각하고 오면 바로 그 음식이 준비돼 있어 서로 놀라는 때도 많았다. 오씨가 독일어를 완벽하게 익혀서 그곳 축구계 인사들과 두루 안면을 넓혀둔 것도 큰 자산이 됐다. 요즘도 세계 축구계의 정보를 독일의 옛 친구들로부터 수집하는 일은 오은미씨의 몫이다. 남편의 글들은 다 그의 작품 “유럽과 한국이 시차가 있으니까 누구한테 부탁하겠어요. 더구나 저는 차 감독이 이것 좀 알아봐 달라 말만 하면 목숨걸고 하니까 부려먹기 얼마나 좋아요. 팩스로 정보수집하고 그걸 번역해서 전해주고, 그러는 사이에 저도 어깨 너머로 축구에 눈을 뜨게 된 거지요.” 차 감독의 이름으로 신문이며 잡지에 나가는 글들은 거의가 오은미씨 작품이다. 차 감독에게 취재를 하고 원고를 보여서 사인은 받지만, 언론계에서 인정하는 오씨의 글솜씨는 전문가의 수준에 이르렀다. 8년째 한 스포츠지에 연재하고 있는 ‘차범근의 그라운드 산책’이며 ‘차범근의 축구세상’ ‘차범근의 PC산책’ 등이 차 감독을 공부하는 축구선수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차 감독 어깨가 더 내려앉은 것 같아서 짠해요. 그 큰일을 치르는데 얼마나 외롭겠어요. 정말 저 사람이 원하는 일이니까 1승이라도 거뒀으면 좋겠고, 이번에 안 되면 2002년 한국 월드컵에서 16강이나 8강 진입이 이뤄진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 차범근·오은미 부부의 평생 소원은 한국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일이다. 두사람이 앞으로 힘을 쏟고 싶어하는 ‘꿈나무 축구교실’이 그 바탕이 되리라고 오씨는 말한다. “차 감독이 꼬마들 가르치는 걸 보면 벌써 눈빛이 달라요. 그만큼 먼 미래를 내다보며 사명감을 느낀다는 얘기지요. 지금은 우리 둘 다 그때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시간으로 삼고 있어요. 숨이 차지만 노력한 만큼 작은 결실이라도 맺으리라 믿습니다.”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버섯 못난이’정덕균씨 (사진/팽이버섯은 갓이 크지 않고, 기둥이 굵고 길어야 상품이다. 출하를 앞둔 팽이버섯을 바라보는 정씨의 눈길이 그윽하다.) 별명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어떤 이 의 겉모습에서 연유한 별명은 흔히 과장이거나 오해이기 십상이다. 그의 됨됨이나 성격, 직업, 말투 따위를 빗댄 별명은 더욱 실체와 멀다. 보는 이의 주관이 섞여 원형을 짐작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어쩌다 별명 에 딱 들어맞는 이를 만나면 저절로 무릎을 치게된다. 정말 별명 그대로 야! 누에농사 실패, 그후… 정덕균(50)씨가 그런 경우다. 주변에선 그를 ‘버섯 박사’라 부른다. 그 렇다고 그가 유수한 대학의 학위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사실 그는 버섯 에 대해 한편의 학위논문도 낸 적이 없다. 하다못해 중·고교에서 교과서 로나마 버섯을 배운 적도 없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 럼에도 그는 버섯의 모든 것을 꿰뚫는다. 종균배양에서 재배, 채취, 그리 고 가공에 이르기까지. 그의 머리에 든 지식을 펼치면 작은 ‘버섯 사전 ’이 될 성싶다. “박사라기보다는 그저 농사꾼이지요. 학문으로야 그분들을 따라갈 수 있 나요. 그저 버섯을 어떻게 기르고, 다듬어야 하는지 체득했을 뿐이지요. 그것은 배추를 기르는 농사꾼의 지혜와 조금도 다를 게 없을 겁니다.” 버섯에 대한 그의 지헤는 세월에서 온다. 그는 20년 넘게 버섯과 한지붕 아래서 살다시피 했다.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팽이버섯 따위를 기르며 젊음을 보냈다. 그동안 다른 작물에는 눈도 주지 않았다. 오로지 버섯이 좋아하는 최적의 조건을 찾아 실험하고 도전했다. 버섯이 잘 되면, 그도 잘 됐고, 버섯이 잘 되지 않으면, 그 역시 잘 되지 않았다. “버섯밖에 몰랐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기도 포천에 종균배양소와 재배지, 가공시설까지 갗춘 어엿한 버섯공장의 주인이지만, 좀체 버섯 곁을 떠나지 않는다. 20 평 남짓한 살림집도 아예 공장에 붙어 있다. 종균배양소를 시작으로 공장 을 도는 게 그의 정해진 일과다. 그러다 배가 출출하면 재배지에 들러, 막 자란 팽이버섯을 한움큼 따서 그대로 씹어먹는다. “가끔 아내가 버섯 귀신이 씌웠냐며 눈을 흘기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 그런 게 아닌가 싶어 쓴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버섯을 한 건 아니었다. 농사꾼으로서 그의 세상살이는 누에와 함께 시작했다. “아버지는 말년을 자리에 누워 보냈습니다. 이름모를 병 에 덜컥 발목을 잡히더니, 치료비며 약값으로 집과 땅을 몽땅 들어먹었죠 . 제가 열아홉살 때였습니다. 올망졸망한 동생 넷을 둔 맏이로서 앞길이 막막하더군요. 그때 누에를 치면, 일본에 실을 수출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거죠.” 1년에 쌀 2가마를 주기로 하고 땅을 빌렸다. 5~6년 동안은 재미가 좋았다 . 먹고 살 걱정이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몰락이 닥쳤다. 이른 바 석유파동이 그와 누에를 삼켜버렸다. 일본이 급하게 수입문을 닫더니, 엎친데 덮친격으로 값싼 중국산까지 밀려들어왔다. 정씨는 일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 모든 양잠농가의 운명이 그랬던 것처럼. 그때 버섯이 찾아들었다. 텅빈 잠실 앞에서 망연자실하던 그에게, 평소 알고 지내던 농촌지도소 직원이 버섯농사를 권했다. 마침 뽕나무 가지를 잘라 느타리버섯을 기르는 수가 있다는 거였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 로 버섯농사에 뛰어들었다. 그가 27세되던 해였다. 그는 당시를 “가난한 농사꾼과 버섯 색시의 만남”으로 기억한다. 아이를 잃어야 했던 뼈아픈 기억 “버섯이 참 잘 됐습니다. 포천은 추운 곳이라, 당시만 해도 겨울엔 돈벌 이가 될 농사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일손을 놓았죠. 그러나 저는 날마다 버섯을 들고 서울 경동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이웃들이 모두 부러 워했죠. 저도 흥이 났습니다. 버섯 색시가 저에게 마술을 걸었던 것 같아 요.” 그의 작은 성공은 곧 근방의 신화가 됐다. 그를 따라 버섯을 기르는 농가 가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2년 만에 1백곳 가까이 생겼다. 정씨는 이들에 게 아낌없이 버섯농사법을 전파했다. 이 가운데 26곳은 제법 규모를 갖춘 버섯농가로 성장했다. 정씨와 이들을 중심으로 버섯작목반이 꾸려졌다. 포천의 특산물 목록에 버섯이 끼어든 것도 이때부터였다. 버섯농사가 모두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일에 정신이 팔려 아이를 잃은 기억은 지금도 뼈아프다. “어느해 겨울, 선산에서 몰래 나무를 베어다 재배지를 증축했습니다. 바쁜 마음에 날림으로 지었죠. 버섯이 자랄 볏짚 을 살균하기 위해 연탄불을 피우던 시절이었습니다. 볏짚에 물을 잔뜩 먹 이고, 주변에 연탄 50여개를 피웠습니다. 사흘 동안 재배사 온도를 섭씨 60도 이상 유지해야 했으니까요. 온도가 올라가자 나무가 건조되면서 비 틀렸던 모양입니다. 날림으로 지은 재배사가 폭싹 무너앉고 말았죠. 마침 세살배기 둘째아들이 옆에서 놀다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는 버섯에서 우리 농업의 살길을 본다. 우리나라처럼 땅이 좁은 곳에서 버섯만큼 경제적인 농사가 없다는 것이다. “배추나 고추는 씨를 뿌릴 넒 은 땅이 필요하지만, 버섯은 땅을 아파트처럼 활용할 수 있습니다. 더욱 이 번식이 빨라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죠. 특별한 재료가 필요한 것도 아 닙니다. 버섯 재배에 쓰이는 톱밥이나 볏짚, 쌀겨 등은 모두 주변에 흔한 부산물 아닙니까. 버섯농사는 100% 재활용산업입니다.” 버섯은 그야말로 솜털처럼 환경에 예민하다. 온도를 비롯해 습도, 공기, 빛이 제대로 어우러져야만 버섯 고유의 맛과 향을 낸다. 온도가 맞지 않 으면 수확량이 떨어지고, 습도가 맞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 식이다. 공기가 깨끗하지 않으면 아예 죽어버리기도 하고, 빛이 적당하지 않으면 빛깔이 제대로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버섯에서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느낀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다. “버섯마다 개성이 있습니 다. 그 개성을 잘 살려주면, 사람에게 많은 이익을 줍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욕심대로 자라라고만 하면, 등을 돌립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다는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원리가 숨어었는 거죠.” 그는 최근 버섯과자를 개발해 판로를 열고 있다. 그로선 버섯농사의 운명 을 건 사업이다. 80년대 말 우루과이라운드 때문에 전국의 농촌이 난리를 쳤지만, 버섯농가는 벌써 위기를 맞고 있었다. 버섯은 가장 먼저 수입이 자유화된 품목이었다. 국산 버섯이 급속히 가격경쟁력을 잃어가는 상황에 서, 정씨는 버섯가공으로 눈을 돌렸다. 그 첫 열매가 느타리버섯을 진공 저온상태에서 튀긴 과자였다. 느타리버섯의 맛과 향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이 과자는 일본으로 수출돼 호평을 받고 있다. 그는 버섯 공동체를 꿈꾼다. 버섯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소박하고 오붓한 마을을 그리는 것이다. 버섯 학교, 버섯 자연학습장 등이 그 마을 의 핵심을 이룬다. “버섯을 기르고 싶어도 길을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 이들에겐 학교가 필요해요. 책이나 칠판에 쓰인 글이 아니라, 직접 체 험을 통해 농사법을 익힐 수 있는 곳이죠. 또 도시인들이 여가에 버섯 자 연학습장에 들러 아이들과 함께 버섯을 기르거나 따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식이 아닌 정성으로 키운다” 그의 꿈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지도를 받은 버섯기술자 9명이 올해 초 캐나다 오타와에 버섯농장을 꾸렸다. 그가 오타와 주정부와 함께 주선한 버섯이민이 시작된 것이다. 나머지 11명도 조만간 한국을 떠난다. “우리 농업도 세계로 뻗어야 합니다. 밖에 나가보면 무궁무진한 자원이 널려 있습니다. 캐나다만 해도 버섯농사에 좋은 조건입니다. 그 넓은 땅 에 밀이나 옥수수, 면화 찌꺼기가 그냥 버려진 채 썩어갑니다. 모두 버섯 농사의 원자재들이죠.” 그에겐 또다른 별명이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 별명 역시, 그에게 딱 들어맞는다고 한다. 그 별명은 바로 ‘못난이’다. 별다른 취미도 없 고, 술·담배도 모른 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버섯 주변을 맴도는 그의 우직함을 빗댄 표현이다. 한데 그는 ‘박사’라는 별명보다, 이 ‘못난이 ’라는 별명을 더 좋아한다. “버섯은 지식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정성으 로 키우기 때문”이란다. 포천=글 유강문 기자 사진 정진환 기자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검객 이영식 “나에게 칼을 겨눈다” (사진/칼은 이제 무기가 아니다. 그는 칼을 통해 앞선 검객의 정신을 되살린다.) 짚단 앞에 서면 칼이 된다. 발끝에서 올라온 살기가 팽팽하게 조여진 신 경줄을 타고 손끝으로 모인다. 저걸 베어야 내가 산다. 생명없는 짚단이 지만 칼 앞에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는 그걸 느낀다. 깊은 호흡, 힘줄이 돋아나는 팔뚝, 그리고 외마디 기합. 마침내 서슬퍼런 칼이 하늘을 가르고 짚단을 베어들어간다. 그 찰나의 순간에 그는 그대로 칼이 다. 칼보다 먼저 주먹을 배우다 이영식(48). 그는 검객이다. 그것도 1천여년 전 신라의 검객이다. 전쟁터 에서 나라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칼을 휘두르던 그 옹골찼던 병사 다. 칼을 잡은 마음가짐이 그렇고, 칼을 쓰는 법이 그렇다. 그는 신라검 법에 홀려 절벽 같은 세월을 뛰어넘었다. 검법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됐다는, 그러나 지금은 역사책으로만 전해오는 그 검법을 되살리기 위한 도전이었다. 그 시간여행에서 그는 끝내 비술을 훔쳤다. 짚단이 세 조각으로 베어졌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그리 고 수평으로. 허공을 가르는 칼바람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일도삼단. 바닥을 뒹구는 짚단의 주검 위로 지푸라기 몇개가 표표히 떨어진다. 신경 줄은 아직도 팽팽하다. 칼을 거둬들일 때의 동작이 불을 다루듯 신중하다 . 짧은 원을 그리며 정확히 허리께의 칼집을 찾아든다. 그렇게 칼날을 갈 무리하고서야 그는 살심에서 벗어난다. 이영식은 우리의 전통검법을 가장 완벽히 되살린 무도인으로 꼽힌다. 무 도인으로서 30년을 사는 동안 꼭 절반을 칼과 함께 한 열매다. 강하고 빠 른 움직임,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의 생명을 노리는 현란한 손바꿈을 특징 으로 하는 우리의 검법은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그는 그럼으로써 총과 대포가 판치는 세상에서 무사로 살아남았다. 칼 한자루에 생명을 걸고 적 진 속으로 뛰어들던 선인의 용맹함은 지금 그의 칼날 위에서 숨쉰다. 그는 칼보다 먼저 주먹을 배웠다. 어린 시절 그는 몸집이 작고 얼굴이 곱 상해 괜한 시달림을 받았다고 한다. 집적거리는 아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무술을 가르친다는 동네 체육관엔 모조리 들어갔다. 유도에서 합기도로, 당수로. 부모가 제과점을 운영해 살림은 넉넉했고, 소년은 마음껏 무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운동신경이 유난히 발달한 소년에게 체육관은 놀이터 비슷했다고 한다. 남들은 한달 걸려 배우는 동작을 사흘 만에 깨우칠 정 도였다. 소년은 동네 주먹대장이 됐다. 덩치만 믿고 거들먹거리는 아이들은 모두 그에게 혼쭐이 났다. 상대의 주먹이며 발길이 슬로우비디오처럼 보였다는 데, 그 경지를 짐작하기 힘들다. 중고교에 다니는 동안 2~3년 선배는 그 냥 친구처럼 대했다. 그는 주먹만 세면 다 그랬던 시절이었다며 씨익 웃 는다. 소년은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그것은 소년에게 빛나는 훈장 같은 것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그는 연애에 실패하자 홧김에 해병대에 자원했다. 마침 월 남전이 한창이었다. 그는 아무런 동요없이 남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리 고 거기서 진짜 무서운 상대를 만났다. 베트콩은 아니었다. 사실 적군은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현대의 전쟁이란 애초 적을 보며 싸우는 게 아니 니까. 그것은 자신이었다. 포격소리와 비명만이 들리는 전쟁터에서 유일 한 원칙은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었고, 자신은 너무 나약했던 것이다. 제 대한 뒤, 그는 미련없이 싸움의 세계를 떠났다. 칼의 역사를 얘기하는 그는 자못 비장하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숨어 있기 때문이란다. “처음 신라의 화랑들이 연마했던 신라검 법(본국검법)이 있었으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화약이 발 명되고, 조선시대에서는 무인을 천하게 여기는 풍토 때문에 우리 검술의 맥이 끊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검술의 필요성을 절감했 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 통에 우리에게서 칼만드는 법과 칼쓰는 법을 배워간 일본이 칼의 종주국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칼 아래 얼마나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는가.” 무예도보통지 가 던진 수수께끼 그에게 칼은 더이상 무기가 아니다. 먹을 게 없으면 빼앗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야 칼이 곧 정의였겠지만, 지금은 아무런 사회적 보호도 받 지 못한다는 걸 안다. 사실 무사가 사라진 시대에 칼이란 장신구 이상의 효용이 있을 턱이 없다. 그는 칼에서 무사의 정신을 느낄 뿐이다. 칼쓰는 법을 되살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칼쓰는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에게 칼은 조상의 얼이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칼은 검도에 입문하면서 만났다. 죽도를 들고 상대를 후려치면서 갈증 같 은 걸 느꼈다고 한다. 우리의 검법은 없는 것일까. 5천년 역사를 지탱해 온 민족의 검법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갈증을 풀어줄 스승도 교재 도 없었다. 그렇다고 산 속의 도인을 찾아 헤맬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는 도장에 홀로 남아 칼쓰는 법을 다듬으며 칼의 이치를 캐들어갈 수밖 에 없었다. 어느 날 소문이 들려왔다. 칼로 명함을 자르는 신검이 있다는 거였다. 그 는 그 소문의 주인공을 수소문해 집으로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스승은 늙고 병들었고 가난했다. 라면으로 근근히 하루 세끼를 때우는 형 편이었다. 검객은 요즘 같은 세상에선 실패자라고 믿는 건 그때부터다. 스승은 짚단도 벨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없었다. 스승은 그저 무예도보통 지 라는 신라의 검보가 있으니 찾아 배우라는 말만 툭 던질 뿐이었다. 그 러면서 “네 인상이 무사 인상이다. 눈매나 웃을 때 입모습이 그렇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남겼다. 지금의 워커힐 근처 강가에 수련장을 마련했다. 폐농가를 개조한 그곳에 서 그는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칼 쥐는 자세에서 칼 내리치 는 각도, 발 옮기는 법 따위를 무예도보통지 를 보며 익혔다. 규장각에 서 복사해온 그 검보는 선인의 비술을 수수께끼로 내놓았다. 무엇보다 칼 쥐는 자세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검보의 가르침은 변화무쌍한 손바꿈이었 고, 그것은 지금까지 배운 검도의 가르침과 달랐다. 그게 어떤 상태에서 도 칼을 쓸 수 있도록 한 실전무공임을 깨달은 것은 시간이 훨씬 지나서 였다. 칼의 이치를 캐들어가면서 한때 외도를 하기도 했다. 칼을 칼집에 꽂은 상태로 콩을 반토막낼 수 있는 경지에 올랐을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허영심을 주체할 수 없 었다.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에 나가 보란 듯이 명함도 자르고 콩도 잘랐다 . 그러나 녹화가 끝난 뒤, 그는 처참했다고 한다. 서커스단의 원숭이가 됐다는 후회가 밀려왔고, 검객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다. 짚단이 철벽으로 변할 때 짚단도 때로는 철벽이 된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베어들어가는 각 이 맞지 않으면 짚단을 벨 수 없다. 그저 힘과 빠르기만 앞세운 베기는 그래서 칼질에 불과하다. 그는 짚단이 생명체로 보여야만 칼쓰는 법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짚단을 베는 게 아니라 칼에 저항하는 물체를 베는 게 법이기 때문이다. 저항하지 않는 물체를 베는 건 무사의 도리가 아니다. 그는 아직도 칼쓰는 법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걸 아쉬워한다. 수련이 짧아서라고 자위하지만 그게 언제 끝날지 자신이 없다. 시범을 보일 때 실수도 하고 발이 엇갈리기도 하고, 자세가 흔들리기도 한다. 그럴수록 칼이 무섭다. 칼의 길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두렵다. 언제 가는 자신이 짚단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에 떤다. 그래도 그때가 되면, 그 는 자신을 베어버릴 작정이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칼을 겨눈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4월17일 제 153호 춤꾼 한금련 “나의 고통, 당신의 카타르시스" (사진/나이 서른줄에 자기춤을 찾아 나선 그에게선 이제 재능보다 차분함이 느껴진다. 무대를 응시하는 눈 속엔 욕심을 부리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겠다는 각오가 스친다.) 몸을 꺾는다. 허리째 한껏 뒤로 젖혀간다. 목줄기에 팽팽한 힘줄이 돋는 다. 배꼽 높이에서 갑자기 허리가 사라졌다. 몸은 꼭 기역자다. 허리째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 이번엔 좀더 가파르다. 정수리가 발뒤꿈치 어름에 닿는 순간, 삼단같은 머리칼이 바닥에 털썩 깔린다. 몸은 이제 시옷자를 닮았다. 발레리나 한금련(32)의 춤은 대개 이렇다. 체조에 정나미가 떨어진 뒤… 춤이 꼭 예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살기 번뜩이는 검무도 있고, 우스꽝스 러운 병신춤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렇게 몸을 꺾는다는 건 생경하다 . 그것도 발레란 이름으로. 더욱이 그는 몸을 심하게 비튼다. 발끝에서 손끝까지 조금씩 꼬여가는 그를 보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귀를 대 면 뼈마디가 우드득 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몸이 내는 비명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몸의 가장 치명적인 고통을 전하 는 거죠.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보고나면, 자신의 작은 고통은 잊고 맙니 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거죠. 그건 내가 무대에 서는 목적이 기도 하고요.” 그렇게 춤을 추고 나면 몸세포 하나하나가 아프다고 한다. 처음엔 수시로 침방 신세를 졌다. 꺾는 정도를 덜하나 더하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자연이 부여한 몸의 구조를 인위적으로 깬 데 대한 업보 같은 것 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걸 마다하지 않는다. 춤이니까. 그 뒤에 남는 아 픔은 일종의 직업병으로 친다. 그는 대학교수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주부다. 발레리나가 서른 고개를 넘 으면 둘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퇴장이 가까왔거나, 이제 막 자기춤을 추 게 됐거나. 그는 행복하게도 나중에 속한다. 결혼과 출산을 겪은 발레리 나로선 드문 경우다. 더욱이 그 춤이란 게 도무지 상식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무용계에서 그를 개성파로 내놓는 까닭을 짐작할 법도 하다 . 중학교 때까진 체조를 했다. 지금도 그때의 흔적이 몸에 남아 있다. 철사 로 엮어놓은 듯한 골격과 절도가 밴 팔다리, 그리고 가늘지만 선이 분명 한 몸매. 여성의 굴곡은 숫제 근육 속으로 가라앉았다. “어릴 때부터 몸 을 잘 부렸어요. 텔레비전에서 서커스를 보면 금세 그 동작을 따라하곤 했죠. 올가 코르부튼가 하는 체조선수를 참 좋아했습니다. 백핸드로 공중 제비를 도는 모습에 감탄하곤 했죠.” 초등학교 4학년 때 체조부에 들었다. 천방지축으로 매트를 누볐다. 몸을 돌리고, 접고, 굴리는 데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한번은 집에서 이불을 펴고 공중제비를 돌다 크게 다치기도 했다. 서커스 곡예를 흉내낸다며 사 지를 기기묘묘하게 꼬는 놀이도 즐겼다. 요즘 그만한 제자들을 키우다보 니 참 희한한 아이였다고 느낀단다. 체육중학교에 진학해선 호된 훈련을 받았다. 선생님이 재목이다 여겼는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다그쳤다. ‘백핸드 연속 다섯번씩 몇번’ 식으로 끊임없이 숙제를 냈다. 게으름을 피우다 벌도 많이 섰다고 한다. 그러다 체조에 정을 잃었다. 2학년 때 무용으로 방향을 틀었다. “훈련을 피하다 보니 좋아하는 걸 잊고 말았어요. 정나미가 떨어진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게 피가 되고 살이 됐지만요.” “아이 기르는 게 춤보다 어려워요” 이후 펼쳐진 그의 발레수업은 재능있는 이의 성공을 떠올리면 된다. 발레 시간 첫날, 발레의 모든 기본동작을 해낼 정도였다. 마치 장난 같았다고 한다. 몸을 다스리는 데 이골이 난 그에게 춤동작은 숨쉬기 같은 거였다. 서울의 예술고로 진학해서도 능력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최고는 아닐지 라도,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국립발레단까지 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도 없었다. 그의 재능을 한 평론가는 이런 얘기로 전한다. “경쟁의식 때문에 곧잘 신경전을 벌이던 두 작가가 어느날 공교롭게도 회전문 앞에서 만났다. 썩 미인이라 할 수 없는 선배가 순서를 양보하며 말했다. 재능보다 미모. 그 러자 후배가 냉큼 문 안으로 들어가며 맞받아쳤다. 나이보다 재능. 아마 한금련이 그 후배였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재능을 아쉬움으로 삭인다. 재능의 마력에 넘어가 춤의 어려움을 방기했던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어릴 때 엉덩이를 집어넣 어라, 아랫배를 당기라는 말만 듣고 쉽게 배운 춤이 본무대에선 통하지 않았다. 자동차처럼 정교해야 할 몸이 달구지처럼 덜그덕거리는 것같았다 고 한다. 국립발레단은 그래서 반성의 무대였다. “그릇도 찰흙이 말랑말 랑할 때 빚어야 합니다. 나중에 고치려고 하면 자칫 부서지고 말죠. 제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이미 굳어버린 것을 허물고, 다시 다듬자니 힘이 곱 절로 들었죠.” 발레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되면서, 발레가 진짜로 좋아지게 됐다. 국립발 레단에 있던 9년 동안 열심히 춤을 배웠다. 외국인에게 배우고 싶어 선생 님 몰래 대학생들 틈에 끼어 다른 발레단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선생님 의 눈총을 받았지만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게 먼저였다. 적당히 만족하고, 빈자리를 예술성으로 채우겠다며 자신을 속이기 싫었다. 그렇 게 매년 한계단씩 올라가 6년 만에 국립발레단의 주역이 됐다. 그래도 턱없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공을 들이고 들여도 자꾸만 춤 이 기우뚱거렸다. 항아리에 물을 붓고 부어도 밑바닥을 채우지 못하는 것 같은 허무를 느꼈다. 그래서 춤을 떠났다.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며 5년 가까이 무대에서 떨어져 살았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거 춤보다 어려 워요. 춤은 안 되면 안 하면 되지만, 아이는 그럴 수 없죠. 포기하지 않 는 데서 맛보는 보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저를 옥죄 던 춤의 굴레를 벗어났어요.” 발레리나에게 출산과 육아는 위기의 성격이 짙다. 특히 육아가 그렇다. 아이냐 춤이냐, 양자택일의 순간을 맞게 마련이다. 만유인력의 법칙과도 같다. 둘 중에 누가 인력이 강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 그는 춤으로 끌렸다. 그건 ‘몸의 기미’였다. 내면의 깊은 광기가 머리를 든 것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제대로 태워보지 못한 마음의 심지가 그를 무대로 떼밀 었다. 그는 지난해 예술의 전당이 마련한 ‘우리 시대의 춤꾼’ 무대를 통해 춤 속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의 시선은 무용계에서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던 이 여자 무용수에게로 쏠렸다. 빠르고, 힘차게 끊어지며, 심하게 굴절되 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그는 자기만의 춤사위를 보여줬다. 몸을 꺾고 비 틀어 애초의 길로 돌아온 것이다. 그해의 무용연기자상이 그의 그런 복귀 를 반겼다. 이봉주의 마라톤 같은 춤을 그는 무대에서 춤을 추다 엉덩이가 비치면 남몰래 꼭 옷을 매만진다. 시 합 전날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고, 영전에 영광을 바치기 위해 투혼을 발휘했다는 사람들의 신화를 안타까워 한다. 자기라면 시합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달려갈 거라고 한다. 그게 진정한 프로라고 믿는다. “공연 안 해도 돼요. 사람사는 게 그게 아니죠. 춤에 벌벌 떨 필요없어 요. 중요한 것은 순간의 격함이 아니라 긴 이어짐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이봉주의 마라톤 같은 춤을 추고 싶다. 42.195km는 그가 달려야 할 춤의 길이다. 중간중간 숨이 고비에 닿을 것이다. 몸의 진이 모두 달아나 눕고 싶을 때도 닥칠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사람들이 이봉주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감동을 받듯 자신의 고통스런 춤에서 감동받 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몸을 꺾고 비튼다.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17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7월17일 제 166호 ‘촌스러운 청바지’ 만세! 김종석(46)은 장사꾼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잘 나간다는 국산 청바 지 ‘잠뱅이’를 판다. 마고자에 ‘블라우스’라는 상표를 붙인 것 같은 희한한 브랜드다. 업계에서 부러움을 살 만큼 성공사례로 꼽힌다. 장사 4 년만에 전국에 70여개의 대리점을 거느리게 됐고, 얼마 전엔 서울 강남 대로변의 번듯한 건물로 이사갔다. 게스니 캘빈클라인이니 하는 외제 청 바지가 휩쓰는 판에, 그것도 장사가 안 돼 죽겠다고 모두가 아우성치는 불경기에, 그는 거꾸로 부자가 됐다. 전태일이 남긴 것 6·25 전쟁통에 태어났으니 어릴 적 고생은 당연했지 싶다. 부모님은 농 사지어 빚 갚고, 다시 빚 얻어 농사짓는 형편이었다. 끼니마다 오르는 꽁 보리밥에는 고구마가 수북했다. 그나마 떨어지면 콩이 보리알만큼 섞였다 고 한다. 그때 어머니가 군것질거리로 주던 술지게미 맛은 지금도 혓바닥 에 감친다. 그래도 형과 누나들처럼 허구한 날 배를 곯지는 않았으니 천 만다행이다. 그들은 밥굶기를 예사로 했고, 이불이 없어 멧방석을 덮고 잠을 잤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중학교에 가야 할 무렵, 형편이 안 되니 1 년만 기다리라는 부모님 말씀에 그냥 눌러앉았다. 하지만 애시당초 1년 지난다고 나아질 형편이 아니었다. 2년쯤 집안 일을 돕다 누나 손잡고 서 울로 튀었다. 그때 그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이후 펼쳐진 삶은 촌뜨기 소 년의 서울표류기일 뿐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삼스럽게 말하기도 쑥스럽고, 설사 말한다고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뻔한 얘기”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남대문시장과 청계천 평화시장 주변의 봉제공장을 전 전했다. 전봇대에 “밥 먹여주고 기술도 배워준다”고만 써붙이면 사람들 이 떼로 모여들던 시절이었다. 처음엔 쪽가위로 실밥 따고 단추 치는 게 일이었다. 월급은 언감생심. 사장이 생각날 때마다 툭툭 던져주는 용돈이 월급이나 마찬가지였다. 월급을 주면 써버리니 연말에 몰아 주겠다는 사 장의 말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일하다 공장이 망하면 몇년치 월급도 날아갔다. 코딱지만한 공간을 쪼개 다락까지 낸 공장에서 그는 새 벽부터 밤 늦게까지 몸을 팔았다. 청년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전태일이 평화시장 한복판에서 불꽃으로 타오를 때, 그는 근처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있었다. 물건을 어서 내라는 공장장의 독촉에 쫓겨 온신경 이 미싱바늘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파도 처럼 밀려왔다. 청년 하나가 분신했다는 거였다. 창문을 내다보니 사람들 이 어디론가 내달리고 있었다. 청년이 누구이고, 왜 몸에 불을 붙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일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 “그때 어쩌면 전태일을 태운 불씨 하나가 날아와 눈앞에서 반짝했는지 모른다.” 전태일이 죽은 뒤, 그는 재야단체에서 여는 노동교실에 드나들기 시작했 다. 친구들과 ‘이본침’(바늘이 두개인 봉제기계)이라는 모임을 꾸리고 회보를 내기도 했다. 근로기준법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마음에 새겼다. “일밖에 몰랐던 촌뜨기가 노동운동가 흉내를 내게 된 것이다.” 그런 각 성은 급기야는 근로조건 개선을 촉구하는 단식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때 함께 싸우던 전태일의 어머니가 경찰에 머리채를 붙잡혀 짐짝처럼 계단을 굴러가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잠뱅이 성공은 순전히 아버지 덕”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단다. 봉제판에서 굴러먹은 지 10년 만에 그는 공 장장으로 승진했다. 이제 노동자에서 사용자 비슷하게 위치가 바뀐 것이 다. 그러고 나니 공장 애들이 노조니 모임이니 하는 데 나가는 게 영 마 음에 들지 않더란다. 한때는 양 몰듯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던 그였지만, 이제는 재단사가 애들을 데리고 나갈라치면 문을 막아섰다. 스스로도 참 어처구니없는 변신이었다. 그때 속으로 반성하듯 변명했다. “사람은 그 때그때 상황에 맞게 사는 것일 뿐이라고.” 1년 뒤 그는 아예 봉제공장을 차렸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 곧바로 남대문 새벽시장에 진출했다. 통금이 있던 때라 새벽 4시에 일을 시작했 다. 전국에서 올라온 보따리장사들에게 ‘키커’라는 상표의 청바지를 넘 겼다. 생체시계가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는 나날이었다. 부부생활이고 자 녀교육이고 다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신 금고에는 그만큼 돈이 쌓여갔다. 그는 이따금 직원들에게 삶이 심심해지면 새벽시장에 나가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내가 얼마나 잠꾸러기인지 알게 될 테니 까.” 잠뱅이를 시작할 무렵 그는 이미 부자였다. 눈비 맞으며 15년 동안 새벽 시장을 지킨 결과였다. 잠뱅이라는 상표로 청바지 장사를 하겠다니 사람 들이 쫓아다니며 말렸다. 청바지에 그런 한글 상표는 어울리지 않으니 사 서 고생하지 말라는 거였다. 구청공무원인 친구는 특히 단호했다. “6·2 5전쟁 뒤 미국에 주 하나가 늘었다. 바로 우리나라다. 우리는 미국의 3대 무기인 햄버거와 콜라와 청바지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그런데 그런 청바 지에 한글 상표를 달겠다고. 아서라.” 정말 그랬다. 매장을 찾은 손님들은 청바지는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상표 는 싫어했다. 상표가 촌스럽고, 유치하고, 심지어 창피하다고까지 했다. 어떤 젊은이는 아예 상표를 떼고 달라고도 했다. 할 수 없이 면도칼로 상 표를 떼다가 바지를 찢는 바람에 새 바지를 내준 적도 많았다. 그래도 그 는 한국 브랜드 청바지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고집을 부렸다. 상표 때문에 10벌 팔릴 게, 5벌만 팔려도 좋다고 다짐했다. “남들이 독 립운동하냐고 비아냥대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잠뱅이라는 상표에는 어렸을 적 재미난 기억이 숨어 있다. 어느 땡볕날, 아버지가 들어오자마자 등거리와 잠뱅이를 내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우물 로 등물을 해야겠다는 거였다. 한데 그는 고개만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 등거리는 알겠는데, 잠뱅이가 뭐지. 아버지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이 놈 뭘 꾸물대는 거냐.” 그는 그래도 꿈쩍하지 않았다. 황소처럼 눈만 멀 뚱거리다가 끝내 주먹만한 군밤을 맞고 말았다. “잠뱅이의 성공은 순전 히 아버지 덕이라니까.” 외제차·골프회원권도 사봤지만… 그는 불량품이나 재고품을 매달 원주로 보낸다. 88년 한 신부를 알게 된 뒤부터다. 탄광촌의 아이들을 위해 쓰겠다고 해 넘겼는데, 막상 신부한테 돈 달라고 손을 벌릴 수가 없더란다. 그게 한동안 속상하기 짝이 없었다. 덤핑으로 넘기면 한달에 얼마고, 1년이면 얼만데. 새벽같이 돈 벌어 남 좋은 일만 하는 바보. 그날로 이태원에 가서 외제승용차 사고 골프회원권 도 샀다. 한데 그게 영 취향에 맞지 않았단다. 결국 승용차도 아이들에게 공짜로 넘어갔다. 골프회원권은 얼마 뒤 장사밑천이 모자라 반값에 팔았 다. 그는 장사가 이윤을 쫓는 행위란 걸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다. 그렇다고 손해보고 물건 판다고 푸념할 만큼 거짓말쟁이도 아니다. 고생해 돈 벌었 으니 사회에 재산을 환원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갖고 있는 독지가는 더 더욱 아니다. 장삿속 못지 않게 고집도 부릴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장사꾼 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러다 성공하면 좋은 거고, 손해보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7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프라자호텔 주방장 맹상태“요리는 고달픈 숙제 (사진/프랑스요리만 15년째. 동네 레스토랑과 골프장 한식당에서 일한 것까지 치면 요리인생 27년째다. 그는 스스로를 영락없는 `부엌데기 팔자'로 여긴다.) “요리란 게 별건가요. 그저 먹어서 소화 잘 되고, 일할 힘이 나면 되는 거죠. 배고프면 맛은 절로 나는 거고.” 공사판 함바집 아줌마의 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다. 노동에 지친 일꾼들 의 허기를 달래는 데 솔직히 특별한 요리가 필요지는 않을 것이다. 미지 근한 국물에 신김치라도 꾹꾹 눌러담은 고봉밥이면 족하지 싶다. 그러나 무궁화 다섯개짜리 특급호텔의 주방장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건 조금 뜻 밖이다. 그런데 한술 더 뜬다. “라면도 기분좋게 먹으면 보약이에요. 하 지만 송아지 안심이라도 인상쓰고 먹으면 꼭 목에 걸립니다.” 접시닦이로 인생에 눈을 뜨다 맹상태(45)씨. 서울프라자호텔 양식당 ‘토파즈’의 우두머리 주방장이다 . 프랑스요리만 15년째고, 그 이전에 동네 레스토랑과 골프장 한식당에서 일한 것까지 치면 요리인생 27년째다. 영락없는 부엌데기 팔자다. 스스로 도 그렇게 여긴다. 어릴 때 무시로 끼니를 걸러서 그런 것일까. 태어난 곳이 전남 무안에서 도 바닷가 깡촌이라 보릿고개면 굶는 게 일이었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간 다는 건 애초에 꿈도 못꿨다.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와 운 동장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거기선 같은 처지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편했다. 물로 헛배를 채우고 공을 차며 놀았다. 그래서인지 “주방장이 됐다니 친구들이 되게 출세했다고 놀리더라”며 웃는다. 처음엔 접시닦이였다.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상경해, 당시 신민당 사 아래에 있던 레스토랑에 취직했다. 말이 레스토랑이지, 지금처럼 전자 레인지와 가스화로가 깔끔하게 들어찬 주방이 아니었다. 조개탄으로 물을 끓이고, 석쇠를 달구던 때라 주방은 흡사 시장바닥이었다. 겨울이면 찬물 로 접시를 씻느라 손이 부르텄고, 여름엔 발가락에 무좀이 피었다. 그때 침목처럼 큼지막했던 비누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잠도 많아야 4시간 정도 잤을까요. 영업이 끝나면 부엌에서 홀까지 온통 내 몫이었습니다. 설거지 하고, 식기 정리하고, 홀을 치우고 나면 자정이 훌쩍 지났죠. 잠 자리도 따로 없었어요. 테이블이나 의자 위에서 대충 눈을 붙였습니다.” 그때 고생은 본인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영어학원으 로 뛰었다. 대학생이 되고 싶어서였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 대학에 가리 라 결심했다. 부엌에서 인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다. 월급 4천7백원에서 절반은 고향집에 보내고 나머지는 몽땅 저축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업 을 하겠다며 저축한 돈을 몽땅 털어먹었다. 아버지는 1년 만에 풍랑으로 배를 잃고 빚더미에 올랐다. 다시 돈을 모아 빚독에 쓸어부었다. 그 통에 대학을 향한 꿈도 사라졌다. 골프장으로 옮긴 건 행운이었다. 월급을 2만원으로 올려주겠다는데,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요리사로 인생을 종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든 것도 거기서였다. 골프장에선 주로 한식을 만들었다. 살림은 폈지만 역시 힘든 나날이었다. “그때는 요리사 사이에 위아래가 엄격했어요. 내무반 군기 못지 않았죠. 선배는 신이었고, 선배의 말은 그대로 경전이었으니까 요. 선배의 양말이나 속옷을 빨아주기도 했습니다. 안 그러면 선배의 비 방을 배울 수가 없었죠.” 그렇게 요리를 배워 프라자호텔로 옮겼다. 요리사 맹상태란 이름은 그때 부터 빛을 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이래 우리나라 대통령은 한번쯤 그 의 손끝을 거친 요리를 먹었다. 해마다 정초면 대통령의 지방순시가 있었 고, 날씨가 나빠 전용열차를 이용할라치면, 꼭 그가 불려나갔던 것이다. 게다가 호텔이 시내 한복판에 있다보니 각계의 거물들도 수시로 대접했다 . 특히 정치인들이 단골이었다. 호텔의 밀실은 곧 청와대였고, 국회였다. 그때 거기를 찾던 사람들이 지금도 텔레비전과 신문에 단골메뉴로 오르내 린다. 대통령 4명의 입맛과 식성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극성이 강한 걸 좋아했다. 말년에 주치의의 권고로 순한 음식으로 돌았지만 매콤한 음식을 유난히 즐겼다. 돼지볶음 한 접시 면 거뜬히 끼니를 때웠다. 파전에 빈대떡, 국수도 좋아해 서민적인 먹성 으로 기억한다. 술은 막걸리를 최고고 쳤다. 특히 고양 막걸리를 좋아해 사람을 보내 막걸리 수송작전을 펴기 일쑤였다. 한번은 그래서 난리를 쳤 다. “골프장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떴는데, 갑자기 양주를 찾지 뭡니까. 당시엔 대부분의 양주가 불법으로 유통되던 때라, 세금딱지가 붙 은 양주가 없었어요. 또 막걸리를 찾겠지 방심했다 허를 찔린 거죠. 골프 장이 온통 난리였습니다. 대통령에게 불법 양주를 내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아마 창고란 창고는 다 뒤졌을 겁니다. 궁여지책으로 세금딱지 가 붙은 빈 양주병에 양주를 부어 내놓았죠.”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도 먹성이 좋았다. 까탈스럽게 음식을 가리 지 않았고, 먹고 나서도 일체 불평이 없었다. 다만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씨가 입이 짧아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밤수프를 끓여 내놓았더니, 칭찬이 대단했 다. 옆에서 한식을 먹던 이순자씨에게까지 권할 정도였다. 그러더니 국무 위원들을 불러 지시를 내리는 거였다. “입시공부로 허약해진 수험생들이 이런 수프를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맛도 좋고 영양도 그만일 것 같다. 밤수프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봐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 대표위원 시절 몇차례 음식을 대접한 적이 있다. 대단히 식사량이 적었다. 아침은 거의 과일로 때웠고, 점심·저녁도 소식 주의였다. 반찬도 지극히 검소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그런 습관은 여전하다더군요. 청와대에서 일하는 후배가 할 일이 없을 정도래요. 지금 까지 대통령을 세명 겪었는데 제일 검소하다더군요.” 그는 요리에서 건강을 중시한다. 요리의 예술성이나 맛보다, 먹는 이의 건강이 먼저라고 믿는다. 때깔만 좋고,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요리는 딱 질색이다. 그래서 소스에 유난히 신경을 쓴다. 육류나 생선 같은 재료에 선 건강을 고려할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버터나 크림 같은 지방질 소스 는 별로 쓰지 않는다. 대신 야채와 과일에서 뽑아낸 소스를 즐겨 사용한 다. 토마토의 향과 맛이 살아 있는 소스는 그의 자랑거리다. 그에게 요리는 고달픈 숙제다. 그가 갖고 있는 요리노트만 해도 수십권이 다. 어떤 음식은 재료만도 30가지가 넘는다. 게다가 함량도 다 다르다. 천재라도 못 외울 정교한 수식이다. 그런 요리법을 일일이 기록해 수시로 보고 암기하곤 했다. 지금 그때의 노트를 보면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 도 하다. 해묵은 노트에서 새로운 요리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한다. “요 리란 게 민감하기가 봄처녀 마음 같아요. 똑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불의 세기, 물의 양에 따라 맛이 확 달라지지요. 평생 한결같은 맛을 내는 어 머니들의 손끝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명예퇴직 신청했다가 퇴짜 그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매운 음식은 되도록 피하지만, 고집을 부리 지는 않는다. 음식을 만드는 이의 고생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서 는 아내가 내오는 음식을 군말없이 먹는다. 직접 요리를 하는 일도 좀체 드물다. 아이들이 조르면, 돼지고기로 김치찌개를 끓여주는 게 고작이다. “뻔한 말 같지만 음식은 정말 정성이에요. 그만큼 요리사는 심성이 무던 해야 하고, 매사에 성실해야 합니다. 요리를 하고 나면 지칠 때가 많아요 .” 그는 지난해 명예퇴직 신청을 했다 퇴짜를 맞았다. 부엌에서 벗어나고 싶 었는데, 호텔에서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생각을 포기했 다. “아무래도 요리와 함께 인생을 마칠 팔잔가 봅니다. 접시나 냄비처 럼 부엌의 일원으로 남는 거죠. 요리인생, 딱히 보람이랄 것도 없지만, 남에게 봉사하며 덕을 쌓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27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신부 정재순“카메라는 나의 기도, 나의 강론 (사진/그는 망원렌즈를 사절한다. 24mm렌즈만을 고집한다. 사람들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가서 구원의 메시지를 찍고 싶기 때문이다.) 기도가 먼져냐, 셔터가 먼저냐. 신부는 그 순간 셔터를 선택했다. 죽음 앞에 선 노인은 헉헉거리며 마지막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신부는 그런 노인의 코 앞까지 카메라를 대고 미친듯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 5분 동안 신부는 오로지 사진작가일 뿐이었다. 갑자기 노인의 입에서 누릿한 오물 이 왈칵 뿜어져 나왔다. 이승에 던지는 마지막 구토였다. 신부는 그 순간 까지도 셔터를 눌러댔다. 정재순(66) 신부(대구 용성본당)의 사진모음집 ‘나인의 길’은 그렇게 완성됐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난다. 신부가 죽어가는 이 앞에서 기도는 올리지 않고 사진만 찍어댔으니. 카메라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론 연신 묵주를 돌리긴 했지만, 어디 그게 신부의 도리인가. 두고두 고 속으로 참회할 뿐이다. 하느님 용서하소서! “죽어가는 환자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렇게까지 극성을 부린 까닭이 있긴 하다. 그때 그는 ‘나인의 길’을 이끌 큰 제목으로 ‘부활’을 잡았다. 한데, 정작 거기에 맞는 한 컷의 사진을 찍지 못했다.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니, 죽어가 는 이의 모습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죽을 징조가 보이는 환자가 있으 면 꼭 연락을 주세요.” 중증 나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돌며 그런 괴상망측한 부탁을 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그렇게 맞은 임종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는 시신 안치실까지 따라 들어가 죽은 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병원 사람들은 그런 그를 어이없어 했다. 원장은 “어떻게 신부님이…” 라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원성 탓이었을까. 일을 마쳤다는 기쁨 에 잠시 넋을 잃는 순간, 카메라가 스르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퉁, 딸까닥. 카메라는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고, 필름을 보호하는 캡까지 열 렸다. 신부는 그때서야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제발 이 필름을 살려주 십시오.” 다행히 필름은 멀쩡했다고 하나, 역시 신부로서 쑥쓰러운 일이 었다. ‘나인의 길’은 나환자들의 처절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성한 손가락이 하나도 없어 손바닥으로 알약을 받쳐든 모습, 정강이부터 문드러져 신발 이 필요없는 두 다리, 어깻죽지만 남은 팔에 고무줄을 동여매고, 거기에 숟가락을 매달아 밥을 먹는 할머니. 그는 그들의 그런 모습에서 죽음이 곧 구원임을 보았던 것일까. 신부는 그 사진들 옆에 “육체는 질질 끌려 가는 무거운 십자가. 앞으로 얼마를 더 용서받아야 남은 형벌을 면할까” 라고 썼다. 그는 사진을 통해 “음지에서 사는 사람들 속에 숨겨진 구원의 메시지를 양지로 가지고 나온다”고 말한다. 그 메시지를 담아오기 위해 사람들에 게 가장 가깝게 다가선다. 24mm 렌즈만을 고집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망원렌즈는 절대 사절이다. 사람의 코 앞에서 셔터를 눌러야 사진이 되는 렌즈로 구원의 메시지를 찍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카메라는 복음을 전하는 강론이다. 그가 신부가 되기까지 걸었던 길도 유별나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성당 에 발을 들였다고 한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세레를 받았고, 커서 는 사제가 되리라고 작심했다. 그러나 양복재단을 했던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그걸 한사코 반대했다. 아주 완강한 반대였다고 하는데 들어보니 정말 그렇다. 엄동설한에 옷은 커녕 신발도 없이 맨발에 누더기 를 걸친 채 쫓겨나기도 했고, 끼니를 거르기도 많이 했다고 한다. 춥고 배고프면 성당에 발길을 끊고 교회로 오라는 강력한 압력이었다. 일종의 종교적 박해였던 셈이다. ‘종교적 박해’이기고 신부의 길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사제가 되기 위해 가출을 감행한다. “서울 용 산에 가면 가톨릭재단에서 세운 소신학교(중고등 과정 6년제)가 있는데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준다는 거였다. 그곳을 마치고 대신학교(카톨릭 대 신학부 전신)에 들어가 신부가 될 생각이었다.” 사정을 안 수녀가 서 울 가는 기차표 한장을 구해줬고, 소년은 술 지게미 한 움큼을 삼키고 기 차에 몸을 실었다. 날은 추웠고,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때 간밤에 눈물 을 섞어 부모 앞으로 편지를 썼다. 유서 삼아 남긴 그 편지의 내용은 지 금 가물가물하다. “아버님 저한테 한 번만이라도 웃어주세요”라는 구절 이 있었던 것만 기억난단다. 아버지와의 화해는 그가 신부가 되고서야 이뤄졌다. 소신학교를 마치고 학도병으로 입대해 전쟁을 치렀다. 4년간 복무하는 동안에 목도한 인간사 의 비극은 그의 사제행을 더욱 굳게 했다. 제대 뒤 마저 대신학교를 마치 고 1961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사제복을 입은 아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리한 종교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사진에 손을 댄 동기란 게 참 묘하다. 임종 앞에서 한 손에 묵주를, 다른 한 손엔 카메라를 든 것과 비슷하다. 종교적인 책임감과 조금은 이기적인 욕심. 신부가 되어 강론을 하면서 깊은 한계를 느끼곤 했다고 한다. 20여 분 동안의 강론으로는 하고 싶은 얘기를 제대로 전하기 힘들었다는 것이 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이 보여주자는 거였다. 영상시대에 영상 으로 설교하리라. 그날 즉시 작동원리나 조작법도 모르는 채로 카메라를 샀다. 그러면서 속으로 선언했다. ‘일 년 안에 개인전을 열리라.’ 그는 당돌하게도 국전 초대작가를 찾아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내가 타도 1호 로 삼고 있는 표적이 바로 당신이오.”그에겐 애초 성과 속을 나누는 논 리가 통하지 않는 것일까. 정 신부는 그때부터 말씀과 사진을 함께 생활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다. 일 년만에 순교자들의 이미지를 담은 ‘새남터의 목 소리’라는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국전 초대작가에게 걸었던 승부 도 계속했다. 그러기 위해선 남들이 못찍은 걸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병환자들 속으로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소록도를 비롯한 나환자 들 수용소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마침 나환자들 가운데 중환자들은 경 북대 부속병원으로 수술을 받으러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작업은 한 결 쉬웠다. 그러나 그것은 신부가 아니면 흉내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사제라는 신분 이 아니었다면 나환자에게 접근할 기회조차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나환 자들은 세상에서 카메라를 가장 싫어한다고 한다. 그 역시 처음에 멋모르 고 환자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차가운 시선을 느껴야 했다. 단박에 “저놈 자식, 또 우리 사진 찍으러 왔군”이라는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로만칼러가 아니었다면 돌멩이가 날아왔을 것이다. 작전을 바꿨다. 1년여 동안 카메라없이 찾아가서 운동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으며 벽을 낮췄다. 그렇게 붙어살다시피 하다보니 어느덧 친구가 됐다. 그때 카메라를 들이댔다. “자, 신분증 사진들 없지요? 내가 찍어 줄게요.” 환자들은 그제서야 뭉툭한 팔이며 발목이 달아나고 없는 다리 를 스스럼없이 내밀었다. ‘나인의 길’은 그렇게 탄생했다. “다시 태어나면 사진작가가 돼야지” 그의 카메라는 항상 외지고 어두운 곳을 담는다. 나환자들을 떠나 이번엔 정신병동을 찾아들었다. 정신은 멀쩡한데 육신이 썩어 문드러진 사람들을 찍었으니 거꾸로 육신은 멀쩡한데 정신이 성하지 않은 사람들을 찍기 위 해서였다. “아저씨 연애 한 번 하자”고 달려드는 여자 환자에게 “오늘 은 기운이 없어”라며 너스레를 떨며 사진을 찍었다. 뇌성마비 소년소녀 들이나 난지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 그 러다보니 정보기관은 그를 불순 신부로 찍기도 했다. 그는 요즘엔 기력이 달려 사진을 마음대로 찍지 못한다.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를 순간을 기다리는 게 여간한 고역이 아니다. 그렇게 대여섯 번을 하고 나면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흥건하다. 어떨 땐 쓰러지기 도 한다. 암실에서 금세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몰려와 문을 두드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되뇌인다. 이렇게 죽어 다시 태어나면 사진작 가가 돼야지. 그는 사제복 대신 작업복에 카메라를 들고 전장을 누비는 종군작가가 되고 싶단다.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카메라 에 담고 싶다. 사진 박승화/ 프리랜서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5월01일 제 155호 나비소리를 내는 남자, 곤충연구가 김정환 (사진/그는 나비를 잡지 않는다. 나비표본이 잔인한 사냥행위라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 사진으로 표본을 대신한다.) 그는 나비 같은 사람이다. 몸 안에 나비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처럼 인생을 자주 바꿨는지 모른다. 고시생에서 옷장사로, 옷장사에서 건 재상으로, 그리고 볼트공장 사장으로. 고려곤충연구소 소장이라는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너댓번의 변신을 겪었다. 나비로 치면 숙명 같은 탈바꿈 이었다.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그리고 마침내 나비로 훨훨. 떠나버린 나비와 중학교 낙방의 추억 김정환(50)씨. 나이 서른일곱에 나비와 바람이 났다. 남들은 인생의 중간 에서 남은 길을 재고 있을 때건만, 늦바람이 무서웠다. 무작정 나비를 찾 아 샛길로 빠졌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으로 한없이 뻗어 있었다. 거기서 남몰래 나비를 만났다. 오색영롱한 날개와 가녀린 더듬이, 그리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배에 넋을 빼앗겼다. “덫에 걸린 거죠. 나비는 자연의 덫이었고, 저는 그 덫에 걸린 포로였습니다.” 그가 나비를 만난 것은 사실 그보다 훨씬 옛날이었다. 40년 전 청주는 지 금의 시골 같았다. 요즘이야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곤충이라곤 바퀴벌레나 파리, 모기가 고작이지만, 그땐 철따라 온갖 곤충을 만날 수 있었다. 소 년은 잠자리채를 들고 온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나비는 가장 잡고 싶은 곤충이었다. 하늘거리며 이꽃 저꽃을 넘나드는 나비를 쫓다 밥때를 넘기 기도 했다. 나비는 자연이 준 예쁜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 비는 이내 소년의 기억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중학교 입시 때 나비를 다시 만났다. 합격자 발표를 사흘 앞둔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소낙비가 떨어지는 꽃밭에 나비 한마리가 날아들었다. 나뭇 잎 사이에 숨어 비를 피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합격통지를 초조히 기다 리는 자신의 신세처럼 느껴졌다. 그때 다짜고짜 생각해버렸다. 저 나비가 보이지 않으면 시험에 떨어질 것이라고. 그런데 합격자 발표 하루 전날, 나비는 떠났고 그는 정말 떨어졌다. 나비는 기억 더 깊은 곳으로 사라졌 다. “나비 때문에 미역국을 먹었다는 원망이 생기더군요. 나비가 미웠죠 .” 그날 이후로 나비를 잊고 살았다. 고등학생이 되어선 대학입시에 매달려 주변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대학입시에서 연거푸 낙방의 쓴잔을 들고 나 서는 하루하루가 각박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진학을 고집하기도 힘들 었고, 어느새 수험생이 된 동생들을 볼 면목도 없었다. 도망치듯 군대로 숨어들었다. “동생들에게 장애물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아마 그때도 나 비가 날아들었겠지만 눈길을 돌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죠.” 제대 뒤엔 고시에 매달렸다. 역시 낙방의 연속이었다. 지지리도 못난 놈 이라고 자책하며 인고의 세월을 살았다. 그러는 새 혼기를 놓쳤다. 지금 이야 지난 일로 치고 웃어넘기지만, 젊은 날의 상처치곤 누구 못지 않게 아팠다고 한다. “빈털터리 실업자에게 어느 여자가 오겠습니까. 곤충들 도 짝짓기를 할 땐 암컷에게 선물을 주고 구애를 하는데요. 사람 사는 게 곤충이 사는 법과 다를 것 없어요.” 고시공부를 때려치우고 장사꾼으로 나섰다. 처음엔 옷장사로 시장바닥을 돌았다. 밤낮 책상머리만 지키던 샌님이 거친 장터에서 배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물러설 곳이 없었다. 건재상도 해봤으나, 살림은 여전히 궁색했다. 그러다 구로공단 공구상가 구석에 볼트공장을 냈다. 볼트에 대 해 아는 것이라곤 너트의 짝이라는 게 고작이었다. 한심한 출발이었다. 다행히, 마침 운이 따랐다. 호경기를 타고 제법 돈을 모았다. 배낭 메고 산으로, 산으로 살림이 피자 문득 나비가 날아들었다. 어렸을 때 기억 깊숙이 사라졌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며 서서히 떠올랐다. 철부지 동심을 홀렸던 나비의 아 름다운 모습이 점점 뚜렷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미 주변엔 그런 나비가 없었다. 결국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나비를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 “30 년 만에 나비 연구의 길로 들어선 겁니다. 대학에서 10년이면 될 길을 옆 길로 돌고 돌아온 거죠. 하지만 후회는 안 합니다. 학교교육은 틀에 박힌 공부고, 저는 그런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요.” 먼저 전국을 돌며 나비의 분포를 조사했다. 처음부터 고생길이었다. 나비 에게 다가설수록 모르는 게 속속 튀어나왔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업으 로 치고 독학을 시작했다. 지질학에서 고생물학, 동물학에 이르기까지 관 련 논문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외국의 논문을 읽기 위해 영어와 일어에도 손을 댔다. 볼트공장은 정리해버렸다. “가족을 생각하면 볼트고, 내 인 생을 생각하면 나비였죠. 가족도 중요했지만, 나비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 다. 아내한테는 지금도 미안해요.” 그의 나비 연구는 전복적이다. 나비를 채집하고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를 묻는 게 아니다. 그는 정반대로 묻는다. 여기에 이 나비가 있어야 하는데 , 왜 없을까. 그만큼 발품이 많이 든다. 전국의 깊은 산이란 산은 모두 들어가봤다. 나비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성이 차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나비는 모두 먼 옛날 빙하기 영향을 받았습니다. 빙하기는 거대한 나비의 이동을 낳았죠.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나비가 그곳에 갇 혀 특산종이 되기도 했으니까요. 그 이동경로를 추적하면서 나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혼자 산을 타다보면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워낙 깊은 산이다 보니 도중 에 발을 삐거나 길을 잃어버리면 낭패다. 하지만 지금은 형편이 나아졌다 . 곳곳에 친구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산에는 속세를 떠나온 기인들이 많 고, 그들이 어느새 그의 친구가 됐다. 이제는 배고프면 밥을 얻어먹을 데 도 있고, 험한 곳에 갈라치면 동행해줄 벗도 넉넉하다. 곤충과도 친해졌다. 그는 이제 날개 모양이나 색만 봐도 곤충의 성질과 특성을 척 알아본다. 무당벌레의 빨간색에서 독성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읽는 식이다. 곤충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너는 참 오랜만이구나.” 그 러면 곤충이 대답을 해온다고 한다. “저 친구, 또 우리를 못살게 굴려고 찾아왔군.” 그땐 여유있게 받아 넘긴다. “잡지 않고 사진만 찍는다니까 . 도망가지 마!” 그는 정말 곤충을 잡지 않는다. 더이상 표본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 비에서 잠자리로, 메뚜기로 관심영역을 넓혔지만 그것만은 철칙처럼 지킨 다. “어느날 벽에 걸린 나비표본 액자를 보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 내가 가장 잔인한 나비사냥꾼이라는 걸 알았던 거죠. 나비표본은 의심 할 수 없는 증거였죠. 만신창이가 된 심정이었습니다. 그뒤부터 사진으로 표본을 대신합니다.” 동심으로 쓰는 곤충관찰기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낀다. 곤충의 세계가 사람의 몸이라면, 이제 사 손가락 마디 하나를 본 것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곤충들의 오묘한 세 계를 알려면 살아 서는 불가능할 게 명확하다. 나비만 해도 벌써 13년째 더듬었지만, 만지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다. 늦바람의 결과치곤 내세울 게 별로 없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기쁨은 크다. 그래서 나비 가 늦둥이인 양 소중하다. 그는 요즘 동화를 쓴다. 아이들이 주변에 사는 곤충들의 이름이라도 알았 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한 글쓰기다. 그의 동화에는 곤충들 의 살아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동심으로 쓴 곤충관찰기라 할 수 있다. “곤충은 2억만년 전부터 지구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보다 먼저 지구를 지배했던 거죠. 그들이 지금 사람에게 쫓겨 깊은 산으로 숨어들었 습니다. 아이들이 그들을 다시 사람곁으로 데려와주길 바랍니다. 곤충과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가장 좋은 환경이니까요.”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01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마술사 정은선 “얍! 남자로 만들겠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였다. 검은 턱시도에 붉은 망토를 걸친 깡마른 사내 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입꼬리를 쳐들고 씨익 웃는 품이 마치 제물을 발견한 악마의 사제 같았다. 사내 앞에는 하얀 드 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인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잠이 든 것일까. 갑자 기 사내의 손이 머리맡에서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적. 순간 날 카로운 외마디 기합이 귓전을 때렸다. 얍! 금발 여인은 달나라의 우주인 처럼 둥실 떠올랐다. 마술이었다. ‘마술에 마술이 걸려’학교도 때려치워 정은선. 마술사다. 여자로선 우리나라 최초이고 아직까진 유일하다. 대학 생 때 텔레비전에서 본 마술에 마술이 걸려 20년을 묶여 살고 있다. 팔랑 거리다 거미줄에 붙잡힌 나비 신세다. 그 줄이 어찌나 질기고 독한지 도 무지 벗어날 길이 없더란다. 마술을 배우겠다고 다짜고짜 학업을 때려치 웠으니. 집에서 난리가 나자 보따리까지 쌌다. 그러다 끝내 이름마저 잃 었다. “어디 가서 이 애비가 지어준 이름을 쓰지마라. 너는 이제 내 딸 이 아니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숨을 거둘 때까지 화를 풀지 않았다. 원래 하고 싶은 건 참지 못하는 성질이었다. “응석받이 막내로 자라 그 런 것 같다”며 배시시 웃는다. “아빠 돈!” 하면 돈 주고, “엄마 밥! ” 하면 밥 주던 부모였다고 하니 꼭 그의 탓만은 아니다. 그러나 마술의 세계에 뛰어든 순간, 그는 외톨이였다. 아무리 “마술!”을 외쳐도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 마술을 배울 곳도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다 . 영어로 된 마술책을 구해다 낑낑 대며 밤낮으로 읽고 해보는 게 고작이 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비웃었다. “마술이 장난인 줄 아나. 쯧 쯧.” 그런 냉대 역시 참을 수 없었다. “좋아. 그럼 나 혼자 하지 뭐.” 대학에선 심리학을 전공했다. 부모가 법대 가란 걸 부득부득 고집을 부렸 다.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였다. 첫사랑의 시련을 던져준 국어선생님 의 속내가 궁금했단다. 그러나 2년 만에 끝이었다. 마술이란, 더 궁금한 게 생겼으므로. 그게 아쉬움으로 남아 훗날 마술사가 되어 복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옷도 얌전히 입고 빨간 손톱칠도 지웠지만, 프로이트의 설교를 따르기엔 후디니의 유혹이 너무 강했다. 아 무래도 운명같다. 처음엔 밤무대를 뛰었다. 남자 마술사의 보조역이었다. 반짝이는 구슬옷 을 입고 옆에서 도구를 챙겨주는 게 일이었다. 사람이 필요할 땐 실험대 상이 되기도 했다. 이따금 직접 마술을 펼치기도 했지만 시간때우기용에 불과했다. 스카프를 지팡이로 변하게 하거나, 소매에서 비둘기를 날아오 르게 하는 평범한 마술로는 취객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이러자고 마 술에 뛰어든 것은 아닌데. 초조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힘든 시절이었 다. 세계를 돌며 스승을 찾다 음지에서 그를 빼낸 건 ‘돈’이었다. 사람들의 넋을 훔칠 마술을 고민하 던 그에게 문득 떠오른 게 돈을 만들어보이자는 거였다. 한장의 지폐로 수십장의 지폐를 만들 수만 있다면. 내친 김에 방문을 걸어잠그고 연구에 들어갔다. 일주일 만에 성공. 부챗살이 펼쳐지듯 돈이 한장한장 불어나는 마술은 사람들을 들뜨게 했다. 며느리 삼겠다는 사람도 생겼고, 결혼하자 며 달려드는 팬도 나왔단다. ‘돈 만드는 여자’로 그 바닥에선 제법 유 명인사가 됐다. 이곳저곳 불려다니느라 밤엔 택시잡는 게 고역일 정도였 다. 한칸짜리 월세방에서 두칸짜리 전셋집으로 옮긴 것도 그때였다. 마술사 정은선으로 독립한 건 그보다 조금 뒤였다. 80년대 초 서울 영등 포의 한 나이트클럽으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긴장했는지 실수 연발이었다 . 얼굴은 굳고 손은 떨리고, 게다가 도구까지 말썽을 부리고. 그래도 겨 우겨우 공연을 이어가는데 막판에 일이 또 터졌다. 탁자에 사람을 뉘여놓 고 칼을 꽂는 마술이었다. 공연 도중 갑자기 탁자 발 하나가 뚝 부러졌다 . 사람은 이미 칼에 찔려 고슴도치가 된 상태였다. 손짓으로 조명을 끄라 는 신호를 보냈으나 허사였다. 할 수 없이 손님이 앉아 있던 의자를 고여 마술을 마쳤다. 지금도 휘휘 손을 내젓는 걸 보니 그때 어지간히 고생했 던가 싶다. 먹고살 만하니 욕심이 생기더란다. 더 멋진 마술은 없을까. 틈틈이 세계 를 돌며 스승을 찾았다. 카드에서 비둘기, 스카프, 로프에 이르기까지 마 술과 관련된 분야의 일인자들을 찾아 한두달씩 죽치고 기술을 배웠다. 수 업료 달라는 대로 꼬박꼬박 주느라 살림이 꽤 축났단다. 현존하는 최고의 마술사라는 카퍼필드도 그때 한 스승 밑에서 만났다. 훗날 그가 자유의 여신상을 사라지게 하고, 만리장성을 통과하는 신기를 펼쳐 사람들을 놀 라게 했으니 부러울 만도 할 텐데 시큰둥하다. “나도 그만한 돈과 장비 만 갖추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갑자기 마술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싫다고 얼굴을 붉힌다. 마술은 과학 으로 똘똘 뭉친 것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속임수나 최면, 심지어는 주술 로 오해한단다. 그럴 때마다 속이 팍 상한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 비슷 하게 “점 좀 봐달라”고 할 땐 기가 막힐 지경이고. 게다가 마술을 즐기 기보다는 마술에서 꼬투리를 잡으려는 날선 눈초리란. 그건 노래는 듣지 않고 가수의 입모양만 보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란다. 마술사가 실 수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여유가 아쉽다. 장애 인들 앞에서 하는 공연은 그래서 기쁘다. 그들은 모자에서 나오는 토끼 한마리, 꽃 한송이에도 환한 웃음을 터뜨린단다. 실수해도 박수요, 멋지 게 하면 더 큰 박수다. “여제자를 찾습니다” 그는 마술에 항상 감사를 드린다고 한다. 얼굴이 예쁘지도 않고 몸매가 좋지도 않은 여자가 마술 아니었으면 어떻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겠느냐는 거다. 게다가 마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복잡하 고 어려운 마술이라도 정해진 길만 밟으면 틀림없이 성공한다. 그러나 길 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영락없이 실패하게 마련이다. 더욱이 그걸 깨치 는 마술사의 길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느리지만 확고하다. “마술에는 비 약이 없어요. 마술사 가운데 반짝스타가 없는 것처럼요. 도리를 지키고 정직하게 살라는 게 마술의 도라면 도예요.” 그에겐 꼭꼭 숨겨둔 비장의 마술이 하나 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여제 자’를 구하지 못해 아직 속으로만 담아두고 있는 필생의 마술이다. 그는 언젠가 무대에서 남자를 창조할 생각이란다. 하나님이 이브의 갈비뼈에서 아담을 만든 것처럼. 그리고 남자의 손을 잡고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무대 아나운서는 이렇게 말한다. “정은선은 마술나라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꿈꾸는 자신의 은퇴무대다(그에게서 마술 의 비법을 들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평범한 마술이라도 제자가 아니면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게 마술사의 직업윤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 신은 직업정신에 투철한 프로라고 했다).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14일 제 170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5월15일 제 157호 나래 감독 최명룡 “헝그리는 다시 싸우리라" 경기가 끝났다. 4패1승. 완패다. 패장의 아픔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가 슴을 헤집는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왈칵 치솟는다. 정말 최선을 다했는 데. 남이 볼세라 잽싸게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선수들도 비맞은 강아 지처럼 풀이 죽었다. 땀에 젖은 어깨가 한뼘이나 낮아졌다. 코치는 넋이 나갔다. 멍하니 전광판을 바라보는 얼굴에 핏기라곤 없다. 패장의 아픔이 다시 고개를 쳐든다.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영광이 언제 우리 편이었나” 최명룡(45) 나래 블루버드 감독은 그렇게 코트를 떠났다. 프로농구 원년 챔피언결정전에서 기아 엔터프라이즈에게 무릎을 꿇던 날, 패장은 그토록 씁쓸했다. 모든 영광과 명예는 오로지 승자의 것이었다. 관중의 환호와 열광, 응원단의 폭죽과 함성, 선수들의 헹가래와 샴페인. 그 화려한 잔치 에 그가 낄 자리는 없었다. 그는 이등이었고, 애초에 영광이란 이등에게 까지 돌아갈 만큼 넉넉한 게 아니었다. 챔피언결정전이 있기까지 그는 작은 신화였다. 실업 시절 무명선수들로 구성된 신생팀 나래를 이끌고 시즌 내내 명문구단을 압도했고, 결국 왕좌 를 넘보기에까지 이르렀다. 프로농구가 시작할 때 그를 비웃던 이들은 슬 며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남긴 것은 또하나의 씁쓸함 이었다. ‘사람들은 이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서 라커룸에서 선수 들에게 그렇게 외쳤는지 모른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영광이 언제 우 리 편이었나.” 최명룡은 어쩌면 영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농구 선수로서, 감독으로 서 그의 일생은 빛보다는 어둠이 길었다. 선수 시절 그는 스타가 아니었 고, 감독이 돼서도 스타를 거느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농구장을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어디 두고보자. 그의 일 생은 두고보자를 다짐하고, 끝내 그걸 보여주는 오기로 일군 삶이었다. 농구공을 처음 잡은 건 중학생 때였다. 덕수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교문 을 지나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부 코치의 눈에 들었다. 요즘이 야 그리 큰 키가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고 한다. 당장 방과후에 농구부로 끌려갔다. 억지로 시작했지만, 농구란 게 제법 재미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게 코트를 옮겨다니며, 공을 쫓다보면 소년의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그러나 그 재미도 3개월 만에 끝났다. 가 난한 학교살림 탓에 농구부가 해체된 것이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다시 농구공을 잡았다. 농구부가 해체된 뒤로,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된 그에게 성동공고에서 스카우트의 손길을 뻗쳐왔다. 중학생 시절, 그의 재능을 떠올린 농구부에서 그를 지목했던 것이다. 소 년은 마술에 걸린 것처럼 코트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까닭을 대기 힘들다. 오기 같은 게 아니었나 생각할 뿐이다. 부모가 운동 복을 아궁이에 넣어 불태우면서까지 말렸으나, 소년의 고집을 꺾지는 못 했다. 대학에 갈 무렵, 그는 농구부의 기둥이었다. 밤이면 체육관에 홀로 남아 촛불을 켜고 슛연습을 한 덕이었다. 그의 슛이 터지기 시작하면 상대팀은 견딜 수 없었다. 큰 포물선을 그리는 장거리슛은 그의 강력한 무기였다. 지금으로 치면 3점슛을 펑펑 쏴댄 것이다. 한양대로 진학해서도 그의 슛 은 위력을 잃지 않았다. 한양대는 그의 슛을 타고 농구명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그의 농구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 었다. 스타에 의존 않는 ‘역할 농구’ 산업은행 시절은 우울했다. 실업팀이 거의 없다보니, 선택한 길이었지만 농구 할 여건은 지극히 나빴다. 낮 12시까지 은행에서 근무하고, 오후엔 체육관에서 연습을 하는, 어정쩡한 생활이 이어졌다. 다른 은행원들과 똑 같이 치러야 하는 승진시험도 불편했다. 게다가 은행 안에 퍼진 차별도 만만찮았다. 운동선수는 인사에서 고졸사원보다 불이익을 받기 일쑤였다. 선수생활을 포기하는 동료들이 속출했다. 마침 현대와 삼성에서 농구단을 만들면서 실업농구계에 돈바람이 몰아쳤 다. 그 바람에 산업은행도 한순간에 날아갔다. 좀 한다는 선수들은 이들 재벌에서 억대의 연봉으로 싹쓸이해갔다. 금융팀에선 원천적으로 쓸 만한 선수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재벌의 그물에서 벗어난 그렇고 그런 선수들이 고작이었다. 당연히 팀은 만년 하위권을 맴돌았고, 슛쟁이 최명룡은 완전 히 사람들의 관심권에서 사라졌다. 감독이 돼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작전을 짜도 먹혀들지 않았다. 좋은 선수가 없는 한계였다. 시합에 진 날이면 코 치와 밤새 소줏잔을 기울였다. 지방에서 시합이 있는 날이면 신세가 더욱 처량했다. 상대는 전용버스에 응원단까지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출전하 는데, 그의 팀은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비오는 날, 경기를 마치고 나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택시를 잡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래는 그런 서러움에서 태어났다. 선수들은 산업은행에서 한솥밥을 먹은 이들이 주축이다. 여기에 합류한 한국은행 출신들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프로농구 출범 직후 아무도 나래의 비상을 점치지 못했던 건 당연했다. 애초에 그들은 버려진 아이들과 비슷했다. 그들에게 붙여진 ‘공포의 외 인구단’이란 별명은 그래서 그럴듯하다. 그들은 무인도의 지옥훈련 못지 않은 서러움의 아픔 속에서 단련됐기 때문이다. 최명룡은 팀워크를 유난히 강조한다. 방앗간의 피대가 톱니바퀴의 연속적 인 물림으로 돌아가듯, 부분이 전체로 발전하는 농구를 추구한다. 이른바 역할 농구다. 선수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움직이며 조직력을 극대화하 는 것이다. 애초부터 스타에 의존하지 않는 농구다. 사실 그에게 그런 농 구는 낯설다. 선수들에게 큰소리 치는 일도 좀체 없다. 고생할 만큼 했으 니 알아서 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의 작전이라면 작전이다. 파랑새는 다시 날아오른다 최명룡 자신은 예전에 비하면 스타다. 연고지 강원도 원주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그를 알아보는 이가 많다. 이발소에 가면 주인이 “나래 감독 닮았다”고 해 쓴웃음을 짓곤 한다. 양복을 입고 코트를 지휘하다, 관중 들의 환호에 두손을 모아 머리 위에서 흔드는 몸짓도 꽤 그럴싸하다. 하 지만 그는 그런 인기가 함정이란 걸 잘 안다. 더욱이 한번 빛을 본 뒤에 맞은 어둠은 갑절로 가혹하다는 것도. 언제나 시작하는 기분으로 사는 건 그 때문이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6월19일 제 162호 도공 김시영 “득도의 빛, 흑자의 마술” 도공은 검은빛에서 세상의 모든 빛을 봤다. 밤하늘의 푸른 은하수, 해질 녘 산마루에 걸린 붉은 노을, 그리고 막 바다에서 건져낸 진주의 영롱함. 심지어 무지개의 상큼한 일곱 빛깔까지. 게다가 그 속엔 6백년 전 도공의 숨결이 서리서리 맺혀 있었다. 도공에게 검은빛은 세월의 벽을 뛰어넘는 신비였다. 고려흑자의 정체모를 빛 김시영(40)이 빚어내는 도자기는 검다. 어떤 것은 전체가 검은빛이고, 어 떤 것은 군데군데 검은물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저 까맣기만 한 것은 아 니다. 검은 살갗 속엔 녹빛, 비취빛, 구리빛 등 온갖 빛들이 반짝인다. 그게 화려하다 싶으면 그윽하고, 무겁다 싶으면 경쾌하다. 그가 되살려낸 고려 흑자는 그렇게 정체모를 빛을 뿌린다. 그런데 흑자라니. 고려하면 청자 아니었나. 도공이 사람좋아 보이는 웃음 을 터뜨린다. 그 웃음이 어찌 깊은지 눈에서 입까지 고랑 같은 주름이 팬 다. 그리곤 자식을 소개하듯 흑자의 비밀을 들려준다. “흑자는 청자와 함께 고려를 대표하는 자기였습니다. 그러나 왕조의 멸망으로 시간의 감 옥에 갇히고 말았죠. 청자는 이후에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요. 흑자는 지금 박물관에 소장된 몇점의 작품으로만 그 이름을 전할 뿐입니다.” 김시영은 그렇게 끊어진 흑자의 맥을 이었다. 검은빛을 찾아 10년이란 세 월을 안개 속에서 헤맨 결과였다. 제작법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처음엔 늙은 도공의 기억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전국의 도요지를 돌며 비법의 파편들을 넝마줍듯 거둬들였다. 그리고 실험과 시행착오. 그 10년 동안 그가 깨뜨린 도자기가 가마 옆에 검은 언덕을 이뤘다. 그것은 빛이라곤 전혀 없는 깜깜한 무덤 같은 것이다. 검은빛은 처음엔 먹물로 다가왔다. 어릴 적 서예가이신 양아버지 곁에서 먹을 갈다 검은빛과 인연을 맺었다. 은은한 향을 내뿜으며 하얀 종이를 적시는 먹물이 왠지 좋았다. 검은빛을 보노라면 마음까지 깊은 향이 스며 드는 것 같았다. “그냥 편했습니다. 방심할 수 없는 자리라 몸은 잔뜩 굳어 있었지만 마음은 한없이 자유로웠죠. 콧등에 먹물이 튀는 줄도 몰랐 으니까요.” 그러나 그 인연은 금세 잊혀졌다. 학교에 들어간 소년은 권투장갑을 꼈고 , 검은빛보다는 땀냄새 풍기는 승패의 명암에 매혹됐다. 먹물의 여유를 감지했던 소년은 이제 상대의 붉은 피 자극적인 기쁨에 빠졌다. 미술시간 에서나 만져보는 나무며 돌이며 쇳조각에 마음의 한자락이 끌릴 뿐이었다 .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두들기고 난 뒤 후끈 달아오른 가슴으로 소년은 얼핏 조각가의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그의 혈기는 검은빛을 품기엔 너 무 붉었다. 산에서 다시 검은빛을 만났다. 대학 산악반에 든 그는 어느 날 화전민촌 을 지나고 있었다. 문명을 등진 이들의 삶을 쫓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앞 으로 고꾸라졌다. 그때 눈앞에서 섬광처럼 까만빛이 반짝였다. 기와같기 도 하고, 옹기같기도 한 파편이 상어의 삼각지느러미처럼 땅거죽을 뚫고 올라와 있었다. 손으로 땅을 파헤쳐 뽑아올린 까만 조각. 거기엔 흙먼지 에 갇힌 오색찬란한 빛이 숨쉬고 있었다. 그게 인생의 이정표가 될 줄이 야! 유약 찾는 데만 꼬박 5년 (사진/그의 도자기는 검다. 어떤 것은 전체가 검은빛이고, 어떤 것은 군데군데 검은물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저 까맣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검은 살갗 속엔 녹빛, 비취빛, 구리빛 등 온갖 빛들로 반짝인다.) 금속공학을 전공한 그는 국립공업연구소 도자기실험소에서 연구원으로 일 하면서 도예의 길에 뛰어들었다. 틈틈이 요업을 공부하며 검은빛을 정복 하기 위한 등반을 준비했다. 야간 대학원에서 흙과 불과 사람의 혼이 빚 어내는 도자기의 오묘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실험소를 그만두고 경기도 이천의 한조세라믹스 공장장으로 일하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흑자를 빚었 다. 재처럼 그저 뿌옇고 어두운 빛이었다. 흑자를 빚는 유약을 찾는 데만 꼬박 5년이란 세월을 까먹었다. 흑자에 쓰 는 유약은 청자에 비해 산화철 성분이 더 많아야 한다는 게 유일한 실마 리였다. 그 비법을 알려줄 문헌은 어디에도 없었다. 구전과 실험에 의존 하는 고통스런 나날이 이어졌다. 고령토, 장석, 규석, 사토, 그리고 이제 는 자신의 비밀이 된 흙들을 섞어가며 가마 앞에서 밤을 지샜다. “검은 빛을 토해내는 유약에는 10여가지의 성분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배합 비율에 따라 수십가지 빛의 흑자가 탄생합니다. 수수께끼도 이만저만 한 게 아니죠.” 유약에서 일이 끝난 게 아니었다. 불은 또다른 고봉준령이었다. 가마를 데우는 불은 섭씨 1천도에서 1천3백도까지 타오른다. 불의 온도와 온도별 시간, 땔감의 종류에 따라 흑자의 빛깔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 미묘 한 방정식을 푸느라 다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도자기를 굽 고, 구워져나온 빛을 보고, 결과의 미세한 차이를 일일이 기록하는 지리 한 작업이 이어졌다. 가마에서 나온 도자기를 모두 깨뜨리고 암담함에 휩 싸일 때도 있었다. 그러다 도둑처럼 어느 날 검은빛이 다가왔다. 그는 그 날을 머리가 나빠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냥 소리지르고 춤췄던 황홀 의 느낌만 기억한다. 그는 흑자를 빚어내는 게 사람의 힘이 아니라고 믿는다. 도공의 혼은 그 힘을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것이다. 가마 앞에서 깜빡 졸다 깨어보니 전 혀 상상도 못했던 검은빛이 비쳐 넋을 잃곤 한다. 그땐 정말 자신이 빚은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 불가에서 검은빛은 득도의 빛이라고 하는 도리를 문득 깨칠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섭리로 이뤄지는 창조의 마술 앞에 서 그는 경건해진다. 그 순간의 신비가 ‘회상’이란 자작시에 이렇게 담 겨 있다. “모든 목숨 하나되는 밤. 불이 나를 삼키고 귀한 생명 하나 남 겼네.” 어머니는 지금도 “밤 새며 대체 뭐하냐. 불 땐다고 밥이 나오니 돈이 나 오니”라며 그를 꾸짖는다. 아내도 검은빛에 사로잡힌 남편의 우직함을 못내 안타까워 한다. 그는 그들에게 할말이 별로 없다. 하염없이 세월만 까먹는 자신의 미천한 재능을 탓할 뿐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아내에게 내팽개치고 그는 오직 한 걱정만 한다. 내일도 가마에 불을 지필 수 있을 까. 빚이 쌓였다고 하는데. “천상 산 밑에서 불 땔 팔자여” 그는 갓 구워낸 도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깨버린다. 그럴 때마다 못난 자식을 내치는 것같아 참담하다. 한때는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다. 집에서 찻잔이나 물대접으로 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제 그 는 깨뜨림을 통해 스스로를 다그친다. 저건 나를 깨는 거라고. 그는 밥먹듯이 가마를 땐다. 가마 앞에서 깜빡 잠이 들기도 한다. 계절의 바뀜이나 시간의 흐름에 둔감해진 지 이미 오래다. 자기보다 밤과 새벽의 교체를 많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자랑한다. 권투와 등산으로 단련되 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몸져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따금 선배가 전해 준 점쟁이의 말이 딱 맞다는 생각을 한다. “김시영이란 이름을 풀어보니 천상 산 밑에서 불 땔 팔자야. 손에는 흙이 가득 쥐여 있구만.”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9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5월22일 제 158호 ‘세상에서 친구가 가장 많은 사람’출판인 한윤수 (사진/방랑자로 살아온 인생. 그는 세상을 꽤나 넉넉하게 산다. 친구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날은 참 화창했다. 바람은 상쾌했고, 길가의 나무와 풀은 가장 아름다 운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히는 게 약간 덥다 싶 기도 했다. 큰길에서 빠져 들어간 시골길은 꽃가루로 분분했다. 마치 함 박눈이 내리는 것 같아 도무지 피할 데가 없었다. 마침 토요일 오후여서 인지 주변의 집과 들에선 나른한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 기에 한윤수(50)라는 사람이 서 있었다. 맨발에 슬리퍼, 삐죽삐죽한 머리칼 그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빗어넘겼는지 굵 은 올들이 삐죽삐죽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손마디는 굵었고, 발 뒤꿈치 는 허옇게 살갗이 텄다. 막 밭일을 마치고, 우물물로 목물한 농부의 모습 이 그럴까. 게다가 그 사람좋게 보이는 웃음이란. 사람들이 그를 ‘세상 에서 가장 친구가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는데, 첫눈에 알아보겠다. 가족들도 비슷했다. 너그러운 웃음만큼은 영락없는 촌사람들이다. 사실 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꽤 유명인사다. 둘 다 뻔질나게 텔레비전이며, 신 문이며, 잡지에 오르내린 탓에 거리에서도 몸조심을 해야 할 만큼 유명세 가 만만찮다. 본디 그럴 인물들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두 권의 책이 그렇 게 만들었다(아내는 고부일기 를 쓴 김민희고, 어머니는 붕어빵은 왜 사왔니? 를 쓴 천정순이다). 물 같은 며느리와 불 같은 시어머니가 서로 속끓던 사연을 새끼줄 꼬듯 엮은 게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졸지에 스타가 됐다. 한윤수는 그 두 책에서 우스꽝스런 악한으로 등장한다. 아내에겐 고집불 통에 천하의 술꾼으로, 어머니에겐 아내 품에서 헤매는 못난 놈으로 도마 에 오른다. 그래도 그는 허허 웃는다. 오히려 그런 얘기를 까발려 유명세 를 치러야 하는 고부가 고소하기만 하단다. 게다가 그에겐 예전에 없던 강력한 무기까지 생겼으니. 어쩌다 고부가 눈싸움을 할라치면 제깍 그 무 기를 휘두른다. “어허! 고부간에 사이좋다는 건 온세상이 다 아는데 어 디서 함부로 눈살을 찌푸려?” 그러면 두 사람은 고양이 앞의 쥐다. 그는 정작 자신에 대해선 “멋대로 살아 별로 내세울 게 없다”고 손을 내젓는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데, 말해 뭐 하겠느냐는 투 다. 소 닭보듯 뚱한 눈으로 들려준 게 겨우 이 정도다. 대학 졸업하고 인 쇄소 취직. 먹고살기 힘들어 제법 그럴듯한 회사로 옮김. 출판사 차려 내 고 싶은 책 뚝딱뚝딱 찍어냄. 그러다 책 하나가 잘못돼 석달간 도망다님. 출판에 정나미가 떨어져 다짜고짜 시골로 들어옴. 농사짓고 가물치 기르 며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무지 속 썩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출 판사 차림. 그러는 동안에도 친구들과 어울려 고기 구워먹고 술 마시기는 계속함. 그래버리니 더이상 묻기도 뭐 하다. 막걸리 한통 갖다놓고 사발을 주거니 받거니 해야 인생보따리가 풀어질 것 같은데, 참 난감하다. 닭이 소보듯 한참을 뚱하고 쳐다보니, 씩 웃으며 그제사 손님대접을 해준다. “연미복 을 입고 아름다운 여자랑 춤추는 영화를 보고 촌놈이 홀딱 반해 외교관을 꿈꿨다”는 게 첫 보따리였다. 외교관이 되어 국제 사교무대를 주름잡으 리라 다짐했다는 것 같은데, 그 뒤집힌 현실에 쓴웃음이 절로 난다. 어찌어찌 서울대 외교학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 내내 책이나 보고, 놀고 먹었단다. 막상 학교에 가보니 그게 착각인 걸 알았던 것이다 . “외교관이 되려면 집이 부자든지, 아니면 부잣집 딸과 결혼하든지 둘 중의 하나는 돼야 한다”는데 그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화려한 국제 사교무대를 포기했고, 대신 낭만으로 가득 찬 문리대 사교무대에 등 장했다. 김삿갓을 빗댄 한삿갓이란 별명은 그렇게 생겼다. ‘세상에서 가 장 많은 친구’를 얻은 것도 거기서였다. 출판일과 스트라이크를 배우다 그때 어땠는고 하니 부랑아 뺨친다. 집에서 올라온 하숙비 빼돌려 유흥비 로 탕진했다. 그러다 주머니가 비면 물주를 만날 때까지 쫄쫄 굶었다. 잠 자리는 강의실에서 해결했다. 겨울이면 특히 고생이 심했다. 콘크리트 강 의실에 온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개발한 게 ‘강의노트 난방’이 었다. 깡소주로 열을 낸 뒤, 강의노트를 한장씩 찢어 불태워가며 친구들 과 밤을 샜다고 한다. 그래도 젊은 기운이 팔팔했다. 추석 때면 기차 지 붕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고향으로 갔는데, 조치원쯤 가면 몸이 완전히 얼어 동태가 됐다나. 그렇게 대학을 마치고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인쇄소에 들어갔다 . 언제고 출판사를 차리기 위한 준비운동이었다. 거기서 잉크 냄새나는 밥을 먹으며 출판일을 배웠다. 그러다 스트라이크도 배웠다. “토요일도 평일처럼 일해야 하는 게 못마땅해 직원들이랑 들고 일어선 것”이다. 사 장은 지각과 결석을 하지 않으면, 오후에는 쉬게 해준다고 약속해놓고는 입을 씻었다. 주동자로 찍힌 그는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76년 출판사 ‘청년사’를 차렸다. 출판계에서 의식화 출판사 1호 로 통하는 곳이다. 기획도, 출판도, 판매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 정말 재밌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첫 책이 멕시코의 혁명영웅 판초빌라 의 전기였다. 친구가 번역하고, 또다른 친구가 삽화를 그려 낸 책이었다. 애초에 인세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표지 코팅비가 없어 거리를 지나다 친구를 만나면 “너 술 사줄 돈있지 내놔”라고 윽박질러 돈을 뜯던 시절 이었다. 그런 책을 보따리에 넣고 다니며 팔았다. 명륜동 서점가를 돌며 한두권씩 떠넘겼는데, 갈데없는 외판원이었단다. 그러다 수배자가 되고 말았다. 79년 노동자들의 일기와 수기를 모아 펴낸 책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이 불온서적으로 찍힌 것이다. 책은 판금됐고 , 그는 공안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책을 낼 때부터 틀림없이 안 될 걸 알고, 2만부를 찍어 확 풀 작정이었지만, 저쪽에서 제본부수까지 아는 마당에 통할 리가 없었다. 책은 풀지도 못하고, 휴지가 돼버렸다. 출판에 정나미가 떨어졌고, 도시가 싫어졌다. 식구들 반대를 무릅쓰고 경 기도 고양 시골로 들어갔다. 청년사는 후배에게 물려줬는데, 그 사연이 재밌다. 그가 출판사를 팔려고 하자, 지금은 고인이 된 판화가 오윤이 호 통을 쳤다. “그 출판사가 니 건 줄 알아.” 그 말을 듣고보니 정말 대꾸 할 말이 없더란다. 청년사는 그야말로 친구들 모두의 것이었으니까. 많을 땐 70여명까지 들이닥쳐 시골생활은 힘들었지만, 속은 편했다. 채소를 기르고, 낚시터를 운영하고 , 가물치를 길렀다. 농사법은 이웃들에게 막걸리를 대접해가며 배웠다. 친구들은 이제 야유회 삼아 그의 집을 찾았다. 마당엔 항상 가마솥이 걸 렸고, 일요일이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많을 땐 70명까지 그의 집에 들 이닥쳤다고 한다. 죽어나는 건 아내와 어머니였지만, 그는 나몰라라 친구 들과 어울렸다. 지금 그 친구들 가운데 꽤 높은 정치인도 있고, 관리도 있고, 교수도 있다. 그는 얼마 전 출판계로 돌아왔다. 다시는 책을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는 데, 갈수록 그게 아니었단다. 그의 말대로 배운 도둑질을 어찌할 수 없었 다. 책이란 친구 같은 것이어서 항상 그리웠다고 한다. 그의 친구사귀는 법이란 게 별것 아니다. “사람에게 바랄 게 뭐 있나,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지.” 가족을 묶는 것도 마찬가지다. “애초부터 짜고치는 고스톱인데, 싸워 뭐 하냐”는 것이다. 그는 참 세상을 넉넉하게 산다. 사진 박승화/ 자유기고가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2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쑥뜸에 취한 30년, 김진섭씨 에서 쑥내가 났다. 갓 쪄낸 쑥떡에서 나는 것 같은 보드랍고 연한 향이었 다. 방금 쑥뜸을 뜨고 왔다고 했다. 점심 때 먹은 짜장면이 얹혔는지 속 이 더부룩해 배에 한방 놓았다나. 땀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씨익 웃는다. 그런데 쑥내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일상은 온통 쑥, 쑥, 쑥 이었다. 쑥을 빻고, 그걸 심지처럼 말고, 그리고 그걸 쑥뜸기에 올려 태 우고. 머리와 손은 솜털 같은 쑥가루가 앉아 뿌유스름했다. 원자폭탄에도 솟아나는 생명력에 반해 김진섭(58). 30년 넘게 쑥뜸에 취했다. 불기운에 실린 쑥진으로 살갗을 태워 몸을 다스리는 쑥뜸의 신비를 찾아 헤맸다. 처음엔 그걸 과학으로 풀려고 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결론. “쑥이 사람을 만들었다.” 달나 라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힌 지 이미 오래고, 소저너가 뒤뚱거리며 화성을 기어다니는 마당에 웬 허튼소리를 던지는 것일까. “환웅천왕이 태백산 신단수 밑에 신시를 열고 세상을 다스렸다잖아요. 그때 사람이 되고파 찾 아온 곰과 호랑이에게 준 게 뭡니까. 쑥과 마늘이지요. 그 쑥을 먹고 사 람이 된 웅녀가 단군을 낳았으니, 단군의 후손인 우리 몸에 쑥이 흐르고 있는 거죠.” 그의 쑥자랑은 무한대다. 역사책과 민간의 속설을 넘나들며 열을 올린다. 단오날이 되면 궁중에서 쑥으로 호랑이를 만들었는데, 그게 신령스러운 쑥의 힘으로 잡귀를 물리치려는 뜻이었단다. 백성들은 이사를 가면 짐을 들여놓기 전에 반드시 말린 쑥을 집 네 귀퉁이에 놓고 태웠으니, 이는 쑥 냄새로 악취를 쫓는 지혜였다는 것이고. 그뿐만이 아니다. 여름밤 불을 지핀 풀섶에 생쑥을 얹으면 오래도록 연기를 피워 모기를 쫓는 데 그만이 었다고. 쑥이 우리 민족을 살려온 먹거리였다는 대목에선 얼굴까지 빨개 진다. 보릿고개에 오르면 지겹도록 먹은 풀이 쑥이라는 것이다. 쑥으로 보리개떡을 해 먹기도 하고, 멀건 죽을 끓여먹기도 했단다. 그러나 그에게 쑥은 무엇보다 약이다. 그건 쑥의 놀라운 생명력에서 나온 다고 한다. 오죽하면 “쑥대밭이 됐다”는 말까지 나왔겠느냐는 거다. 그 건 폐허에서도 잡초처럼 살아남는 쑥의 질긴 생명력을 찬미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우리땅 어디에고 파란 쑥이 돋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쑥의 생명력은 바탕을 가리지 않는단다. “들에 제초제를 뿌려도 며칠 안 가 고개를 쑥 내미는 게 쑥입니다. 2차대전 당시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을 맞 고 잿더미로 변했다죠. 그때 잿더미를 뚫고 가장 먼저 녹색 이파리를 피 워올린 게 바로 쑥이에요.” 그는 애초 쑥과는 인연이 멀었다. 쑥은 오히려 두려움의 기억 속에 갇혀 있었다. 쑥뜸의 뜨거운 열기가 남긴 상처 때문이었다. 6·25전쟁 중에 파 편을 맞아 다리를 다쳤다. 변변한 치료약이 없던 때라 어른들 말만 듣고 쑥뜸을 놓았다가 된통 당했다. 살갗을 태우는 불기운에 혼비백산한 것이 다. 다리에는 금세 파편 자국 못지 않은 화상이 생겼다. 그후 오랫동안 쑥뜸 하면 불에 달군 쑥꼬챙이라는 생각부터 먼저 났다. 그러던 그가 지 금 쑥뜸에 미쳐 있으니 인생이란 알 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그의 발명품 ‘신기구’(神氣灸)는 그런 어릴 적 기억에서 아이디어를 길 어왔다. 뜨겁지 않고, 흉터도 생기지 않게 쑥뜸을 놓을 수는 없는 것일까 . 그런 의문을 풀기 위해 수만개의 쑥심지를 태웠다. 팔뚝이 시험관이었 고, 뱃거죽이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쑥뜸기 신기구는 그런 ‘자해’ 끝에 탄생했다. 쑥뜸의 불기운이 곧바로 살갗에 닿지 않도록 황토에 콩가루와 생약재를 섞어 뜸판을 만든 것이다. 뜸판에 쑥봉을 올려놓고 불을 붙인 다음 뚜껑을 덮으면, 일회용 뜸 50개에 해당하는 열량인데도 살갗을 해치 지 않았다. 5천년 내려온 부작용 없는 신약 쑥뜸의 효력은 무궁무진하다. 그건 스스로 체험한 신비이기도 하다. 지난 해 한가위 무렵이었다. 뜸판을 만들려고 금형을 짜다 엄지손가락이 뭉텅 잘려나갔다. 의사가 잘려나간 부분을 떼어버리자는 걸 부득부득 억지를 부려 붙이고 쑥뜸을 떴다. 1년이 채 안 돼 살이 붙고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다. 얼마 전엔 공장을 지으려다 대못을 밟아 발등까지 뚫린 적도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파상풍약 바르고 항생제 치료를 받아야 할 몸인데도 뜸 을 떴다. 사흘 만에 거뜬하게 나아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자 기 말이 믿기지 않으면 믿지 말라고 배짱을 부린다. “애가 넷인데 아직 까지 병원에 보내본 적이 없어요. 집에는 소화제나 위장약도 없죠.” 서양의학에는 믿음이 덜하다. 한때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던 페니실린도 이 제는 부작용이 우려돼 동물에게만 쓰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페니실린에 이어 스트렙토마이신 테라마이신 같은 항생제가 엄청나게 쏟아졌지만, 병 균은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맷집 생기듯이 곧바로 내성을 만들 어내는 병균의 생명력에 비하면 사람의 공격은 무력하기 짝이 없단다. 그 는 ‘병균과의 끊임없는 전쟁’에서 서양의학에 판정패를 내린다. “동양 의학은 음양과 오행의 법칙에 따른 상생과 상극관계로 질병을 봅니다. 몸 에서 상생이 생겨날 때는 건강한 상태이고, 상극이 빚어지면 병에 걸린 상태로 보는 거죠. 그래서 동양의학은 몸의 실한 부분은 덜어내고, 허한 부분은 돋워주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병균이 아니라 몸 전체를 상대하는 거죠.” 집까지 팔아가며 쑥뜸기 개발에 몰두 그는 발명가임을 자처한다. 젊었을 때 보건소 공의로 있던 이모부를 도우 며 간단한 의학지식을 익혔지만, 수박 겉핥기였다는 것을 안다. 보건소를 관두고 침구학원도 다녔지만, 역시 그 깊은 세계를 다 알지 못한다. 그래 도 그런 게 쑥뜸기 발명의 길에선 고마운 동반자다. 보건소 일을 관두고 장사나 해볼까 해서 송추유원지 근처에 터를 잡았을 때였다. 의사고 병원 이고 없던 시절이었다. 보건소에서 일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 이 걸핏하면 찾았다. 치료에 자신이 없던 그에게 쑥뜸은 최고의 처방이었 다. “현대약품은 오랜 연구에 동물실험, 임상실험을 거쳤지만 부작용이 남습니다. 하지만 쑥뜸은 단군시절부터 5천년 동안 부작용없는 민간요법 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아스피린 역사가 1백년에 불과하지만 뜸은 5천년 역사를 가진 겁니다.” 발명이란 게 갈수록 힘들단다. 처음엔 아이디어만 좋으면 됐는데, 지금은 신경쓸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송추에서 ‘아이디어맨 클럽’을 창설하고 , 연탄폐열을 이용한 난방장치를 고안했을 때만 해도 몰랐던 현실이었다. 쑥뜸기를 만드는 데만 벌써 집 몇채를 까먹었다. 보통 아이디어에서 생산 까지 2∼4년 걸린다고 한다. 해마다 1억원 가량이 들어간다. 그걸 모르고 무작정 달려들었다가 낭패를 많이 봤단다. 곶감 빼먹듯 재산 빼내다 결국 엔 집까지 팔아 치웠다. 지금은 판자로 지은 공장 하나가 전 재산이다. 가끔 속이 심란할 때 홀로 쑥을 태운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쫓 으며 사람이 되고자 했던 곰의 인내를 생각한단다.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5월29일 제 159호 인도에서 온 반항아, 리아 무대 밖에서 본 리아는 정말 작았다. 약속장소인 서울 강남의 한 카페를 들어서는데, 몸집이 유리문의 절반도 안 된다. 키는 쬐끄마하고, 어깨와 허리는 버들가지처럼 가늘다. 의자에 앉자마자 살짝 몸을 웅크리는 게 얼 핏 고슴도치를 닮았다. 선머슴마냥 빡빡 깎은 머리카락은 거칠기가 가시 뺨친다. 그러나 무대 위에 선 리아는 작지 않았다. 마이크를 쥐고 몸이 젖혀지도 록 노래를 부르는데, 내지르는 목소리가 객석까지 울린다. 꽝꽝거리던 드 럼도, 웅웅대던 전자기타도 풀이 죽어 단박에 수그러든다. 핏대가 설 만 한 고음에서도 목소리는 윤기를 잃지 않고 하늘로 솟구친다. 그는 작지만 , 크기도 했다.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보낸 어린 시절 “누가 조금 다르다면 외면하고 무시하지. 유행이란 이름으로 남들 눈을 의식하지. 눈치보며 살게 됐어. 그래 그랬었어. 같은 생각하며 살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어. 조금 튀게 난 살아갈 거야. 그 누가 뭐 라 한다고 해도.”( 개성 에서) 리아는 로커다. 그것도 시쳇말로 요즘 잘 나가는 로커다. 몇 가지 신화가 그의 주변을 맴돈다. 데뷔하기 전부터 사람들을 놀래킨 가창력. 라디오 공개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일약 스타로 뛰어오른 화려한 변신. 콘서트를 열 때마다 빈자리가 없다는 폭발적인 인기. 무엇보다 스무살 나이에 어울 리지 않는 신비로운 분위기. 사람들은 그에게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연예 인과 세파를 거스르는 반항아의 이미지를 함께 본다고 했다. 리아는 어린시절을 히말라야의 산자락에서 보냈다. 산악인이었던 아버지 가 인도에 들렀다 아예 눌러앉는 바람에 꿰인 인생의 첫단추였다. 아버지 는 ‘로찌’라는 산악인 전용 하숙집을 운영하며 딸을 인도의 아이로 키 웠다. 아이는 열살이 될 때까지 자연스럽게 인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는 그 가르침을 ‘인도의 냄새’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혹 나중에 작곡 을 하게 되면 노래에 꼭 담고 싶은” 향수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 냄새란 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욕심부리지 말고 착하게 사는 게 좋다는 정도다. 소녀에게 인도의 가르침은 그토록 소박했던 것이다. 사실 그게 주변의 모습이기도 했다. 리아는 사람들이 너무 착하고 순박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줄 알았단다. 한국에 돌아와서야 그게 착각이란 걸 알 았다니, 듣는 이가 조금 쑥스럽다. “애들이 말끝마다 욕을 붙이는 통에 처음 몇년 동안은 기를 펴지 못했어요. 무서웠죠.” 그래서 “큰애들의 가방을 들어주는 게 쪼끄마한 계집애의 사는 법”이 됐단다. “교문에 들어설 땐 항상 긴장하곤 했지. 남들과 좀 다른 모습을 난 하고 는 싶은데. 어른이 된 지금~야야야. 다시 생각했어~ 야야야. 달라보이는 모습 옷으로 해결되진 않아.”( 복장불량 에서) “군량미가 걱정된다구요? 나참∼” (사진/대학에 못 갔지만, 리아는 행복하다. "공부는 잘하는 애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맡기고, 나는 음악이 좋으니 음악을 해야지"라고 결심해서다. ) 한국의 가르침은 소녀를 투사(?)로 단련시켰다. 고교생이 된 리아는 데모 를 주동하는 골목대장이 된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외투를 검은색으로 통 일한다며, 외투를 파는 가게까지 지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외투색까지 맞춰 입으라는 강요를 소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녀는 잘릴 각오를 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신문사에 보낼 투서까지 썼다. 그러나 친구들은 학교라는 벽 앞에서 하나둘씩 무너져갔다. 결국 우표만 붙이면 날아갔을 편지도 휴지가 되고 말았다. 리아는 그때의 실패를 “부끄럽지 는 않지만 안타까웠다”고 돌이킨다. 그렇다고 지금 그가 저항의 로커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록은 반저항적이 다. 심지어 그의 노래는 모든 저항을 무력하게 만든다. “모두가 위선을 버리고 순수해져요, 그래서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을 만들어요”라는 그의 선동을 들으면 전혀 투지가 불타지 않는다. 그는 저항보다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노래할 뿐이다. “남 생각도 좀 해야 되지 않아요. 나만 생각하면 죽을 때 외롭대요.” 그는 여전히 인도의 아이인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한국의 로커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 한국은 얼마나 각박한가. 초청가수로 나서려던 북한어린이돕기 공연도 그래서 무 산됐다. 전경들이 공연장소인 성균관대를 봉쇄하는 바람에 학교 앞에서 2 시간 이상 기다리다 돌아가야 했다. “나는 한끼만 굶어도 머리가 핑핑 돌고 나중엔 짜증이 나는데, 왜 굶어 죽는 어린이들을 돕지 못하게 하는 거죠?” 그는 “권력, 아니 무력이 사랑의 손길을 막았다”며 코끝을 찡 그린다. “정부에선 쌀을 보내면 군량미로 쓰일까봐 걱정하는 모양인데요 . 군인은 사람 아닌가요. 군인들이 민간인들 몫을 먹는 게 문제라면, 군 인들이 먹고 남을 만큼 쌀을 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목소리가 점점 높아가는 게 단단히 화가 난 듯하다. “세상엔 사랑이 필요한거야. 나는 그렇게만 생각해. 병들고 지친 세상 사랑이 필요하단 걸 언젠가 모두 다 알게 될거야. 항상 그렇게만 생각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어떤 세상을 찾을 수 있는 걸 남보다 좀더 가지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배신도 서슴지 않겠지. 우리 모습들 위선이라는 걸 아니.”( 욕구불만 에서) 리아는 그래도 요즘 행복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대학 간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고민을 털어놓을 때 면, 그 행복이 더욱 소중하다. 졸업하고 취직 걱정할 필요도 없어 좋고. 하지만 처음부터 대학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대학 영문과를 쳤으나 떨어 졌고, 부모가 재수는 안 된다고 해 전문대 항공경영과를 쳐 붙었지만 스 스로 돌아섰다. “공부는 잘하는 애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맡기고, 나는 음악이 좋으니까 음악을 해야지”라고 결심해서다. 가수가 된 건 우연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음대에 가기 위한 공부를 하다 라디오프로에 출연해 노래를 부른 게 인연이 되어 가수가 되고 말았 다. 친구가 “노래를 기막히게 잘 부르는 아이가 있다”고 몰래 방송국에 엽서를 띄웠고, 졸지에 초청을 받은 그는 정말 노래를 기막히게 불러젖혔 다. 그 얼마 뒤엔 텔레비전에도 얼굴을 내밀게 됐다. 노래 실력 하나로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화려함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그는 그런 성공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성공이 가져온 화려함이 오히려 부 담스럽다고 한다. 가수가 되고 나서 꽤 많은 돈을 벌었지만, 아직 감당하 기 힘들다.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고, 무엇보다 그것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잘사나 못사나 사람은 똑같다고 생각해요. 토굴에서 사는 사 람이나 세계에서 몇째 안 가는 부자나 어차피 먹고 싸고 자는 것 아닌가 요. 비싼 고기를 먹든, 집 앞의 풀을 뜯어먹든 다를 게 없다고 봐요.” 그에게 돈은 “먹고살 만큼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리아는 나이를 먹어 이빨이 다 빠질 때까지 노래를 부르는 게 소원이다. 그렇게 늙어가면서 나이에 맞게 노래도 성숙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 람들이 자신의 음반을 죽 들으면 한 사람의 늙어가는 과정을 더듬을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어느 날 갑자기 돈도 안 벌리고 인기도 없다고 해서 노래를 그만둘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가 꿈꾸는 세상이 지금 당장 펼쳐지면 모를까. “경찰들은 모두 다 할 일들이 없어져 평생휴가를 떠났을거야. 범죄란 건 모두 다 없어진 지 오래야. 내일은 교도소로 소풍을 가지. 전쟁은 너무 어색해. 사전에서나 볼 수 있겠지. 동화 같은 마음 평화로운 세상. 언제 나 내가 바란 그런 세상. 라랄 라랄라 라랄라.”( 유토피아 에서)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9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6월26일 제 163호 권투인 김기수 (사진/챔피언이 되는 순간. 66년 이탈리아의 벤베누티를 판정승으로 누르면서 그는 `한국 최초의 권투 세계챔피언'으로 기록됐다.) 챔피언의 죽음은 예견돼 있었다. 암세포가 이미 그의 몸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었다. 의사는 잘하면 6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챔피언 은 인생의 마지막 라운드에서 병마의 강펀치를 맞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혼신의 힘으로 주먹을 내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이미 승부는 기울어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복부를 파고드는 적의 피니시 블로우. 한국 최초의 프로 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향년 59)는 그렇게 쓰러졌다. 개구쟁이, 악바리가 되다 김기수는 60년대 최고의 스포츠 영웅이었다. 당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경 제발전이라는 무지개를 쫓던 국민들에게 그는 희망의 화신이었다. 주먹 하나로 세계를 정복한 그의 쾌거는 인간승리로까지 포장됐다. 그가 유복 자요 38따라지로 가난의 설움 속에서 자랐기에 그건 장엄하기조차 했다. 숱한 젊은이들이 그의 뒤를 이어 사각의 링에 뛰어들었다. 징그러운 가난 을 때려눕히기 위해서. 그 비장했던 신화가 이제 무덤에 묻혔다. 1966년 6월25일 장충체육관.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타이틀전 15라운드가 막 끝났다. 김기수는 코너에 앉아 가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채점결과를 발표하는 링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하늘의 심판처럼 쩌렁쩌렁했다. 한국 부 심과 이탈리아 부심은 각각 도전자와 챔피언의 우세를 매겼다. 이제 주심 의 채점만이 남았다. 챔피언의 점수는 68. 김기수는 숨을 멈췄다. “칠십 ….” 링아나운서가 입을 떼는 순간 체육관은 온통 함성에 휩싸였다. 그 날 김기수의 주먹신화는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김기수는 어렸을 때 동네에서 알아주는 개구쟁이였다. 북청물장수 라는 시로 유명한 함남 북청의 처녀들은 모두 그의 희생자였다. 말만한 처녀들 이 머리에 이고 다니던 옹기 물동이는 죄다 그의 새총에 깨졌다. 철부지 소년은 누나들이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곤 했다. 친구들이 제기 차기나 말타기를 하다 초가집 흙굴뚝을 무너뜨려도 집주인들은 그의 어머 니만 들볶았다. “기수 가가 우리집 굴뚝 쓰러뜨렸지비.” 전쟁은 그런 개구쟁이를 악바리로 만들었다. 신창초등학교 5학년 때 6·2 5를 맞은 그는 돛단배에 몸을 싣고 38선을 넘었다. 어머니가 치안대원들 에게 밥을 해준 게 빌미가 되어 공산당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포항에 서 미군화물선으로 갈아타고 여수에 닿은 그는 혹독한 생활전선에 뛰어들 어야 했다. 양담배와 신문을 팔면서 살림을 도왔다. 하루 평균 양담배를 10갑 정도 팔았다고 하는데, 그 돈으로 쌀 닷되를 사면 끝이었다. 여항중 2학년 때 처음으로 권투라는 운동이 있다는 걸 알았다. 시민극장 특설링에서 벌어진 군 대항 학생선수권전이었다. 관중들의 함성과 선수들 의 투지에 소년은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소년은 시합이 끝나자마자 여수 에서 하나뿐인 권투도장으로 달려갔다. 학교를 마치면 양담배와 신문을 판 뒤 체육관으로 내달렸다. 그의 주먹은 금세 빛을 발했다. 펀치 한방에 샌드백이 시계추처럼 흔들렸고, 스파링 파트너는 고개를 꺾은 채 주저앉 았다. 그는 이미 도장의 챔피언이었다. 도장에 나간 지 3~4개월 뒤, 그는 여수대표로 링에 섰다. 그리고 승승장 구. 그의 주먹에 상대방은 여지없이 나가떨어졌다. 57년 광주에서 열린 전국학생선수권대회에선 국가대표 선수들도 무너뜨렸다. 그의 KO 행진은 당시 권투명문이던 서울 성북고에 픽업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훗날 서울 역에 내렸을 때의 감회를 이렇게 회고하곤 했다. “서울역은 과연 으리으 리했다. 역전에서 시발택시를 타고 성북동에 가는 동안 내내 떨었다. 장 래에 대한 벅찬 기대와 불안감으로.” 김기수의 훈련은 지독했다. 지금의 북악스카이웨이를 거쳐 북한산 곤돌바 위까지 약 15리를 매일 뛰었다. 다른 선수들은 평지를 달렸지만 그는 끝 까지 산길을 고집했다. 링에서 절대 쓰러지지 않는 하체를 만들기 위해서 였다. 그때 그 산길에서 한 야구선수를 만났다. 백인천이었다. 2~3년 뒤 고교야구를 석권했던 경동고의 4번타자도 하체단련을 위해 매일 산길을 달렸던 것이다. ‘무서운 조센징’으로 떠올랐지만… (사진/그는 간암 말기로 이미 시한부 생명이었다. 사각의 링에서 강펀치를 휘두르던 그도 병마 앞에선 무력했다. ) 그는 링에서 패배를 몰랐다. 58년 국가대표선발전 웰터급에서 우승하면서 도쿄아시안게임 출전권을 얻었다. 그리고 아시아의 왕자가 됐다. 중량급 으로서는 한국권투 사상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이어 대만에서 열 린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마추어 전적 87승 이라는 무패행진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60년 로마올림픽에서 그는 2회전을 넘 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난생 처음 겪은 패배였다. 그때 상대가 훗날 세계타이틀전에서 만난 벤베누티였다. 벤베누티는 이탈리아의 우승후보답 게 빠르고 강했다. 김기수의 주먹은 턱을 노렸지만 번번이 허공을 갈랐다 . 마지막 수단으로 배를 노렸지만 벤베투티는 허리를 뒤로 빼며 잘도 피 했다. 김기수가 생전에 완패를 인정한 유일한 시합이었다. 프로로 뛰어들었다. 아마추어 무대를 떠난 그는 오직 돈을 향해 뛰었다. 62년 데뷔전에서 한국웰터급 챔피언 이안사노를 7회 KO로 눕히고 일본으 로 날랐다. 그는 곧 무서운 조센징으로 떠올랐다. 일본 선수를 상대로 KO 주먹을 날리며 매운맛을 뽐냈다. 재일동포들은 그를 통해 이국의 설움을 풀었다. 그때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만나 역도산 문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합이 열리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조센징의 돌주먹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 설상가상으로 역도산마저 괴한의 칼에 숨졌다. 그는 보따리를 쌀 수밖 에 없었다. 그의 세계타이틀전은 실로 국가적 행사였다. 당시 벤베누티는 대전료로 5 만5천달러를 요구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막 2백달러를 넘은 시절 이었다. 그는 이기면 5백만원, 지면 대전료를 한푼도 받지 않기로 했지만 막상 챔피언을 불러들일 돈이 없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불렀다 . “이길 자신 있어요?”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하겠습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 를 걸었다. 대전료는 결국 정부에서 나왔다. 당시 김기수는 주먹을 다쳐 치료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등뼈는 노 인의 것처럼 허약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거운 짐을 들어 척추가 노화했다 는 게 당시 서울대학병원의 진단이었다. 그래도 그는 링에 섰다. 그의 승 리를 점치는 사람은 드물었다. 7 대 3이라는 불리한 예상이 나돌았다. 그 는 움직임이 빠른 벤베누티를 치고는 껴안고, 다시 치고는 껴안는 히트 앤 클린치 작전으로 공략했다. 그날 그는 피오줌을 쌌다. 그는 프로전적 49전45승(16KO) 2무2패로 14년 권투인생을 마감했다. 3차 방어전에서 이탈리아의 산드로 마징기에게 판정패하면서 그의 시대도 저 물기 시작했다. 프로에 입문한 뒤 최초의 패배였다. 그는 훗날 “당시 대 전료로 5만5천달러를 받아, 나라에 진 빚을 갚았으니 속이 후련하다”고 말하곤 했다. 6개월 뒤에는 일본 선수에게 동양타이틀마저 빼앗겼다. 그 는 그 타이틀을 4개월 만에 되찾고 미련없이 글러브를 벗었다. “자식들 에게 패배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고집이었 다. 인생에 있어서도 챔피언 그의 자식사랑은 유별났다. 그는 가난하게 산 탓인지 절약정신이 몸에 배 어 있었다. 꼭 필요한 돈이 아니면 쓰지 않았고, 평소에도 근검했다. 그 러나 자식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는 챔피언이 된 뒤 아이들이 그릇이나 유 리창을 깨뜨려도 야단을 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집은 셋방이 아니고 우리집이니까 마음껏 소란을 피워도 괜찮아”라고 오히려 아이들을 두둔 할 정도였다. 은퇴 이후 그는 사업가로도 성공했다. 매맞고 피오줌을 흘리며 번 돈을 허투로 쓰지 않은 덕이었다. 성북동에 집을 마련하고, 후배를 양성하기 위해 권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명동에 챔피온이라는 다방을 열었고 4층 짜리 빌딩도 샀다. 그는 언제나 “사각의 링은 냉정하다. 하지만 링 밖은 더욱 비정하다”고 말하곤 했다. 맨주먹으로 가난의 설움을 날려버린 그 는 인생에 있어서도 챔피언이었다.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26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유리미술가 심현지 유리미술가 심현지(56)를 아는 이가 “그를 만나면 손을 유심히 보라”고 신신당부했다. 한번만 봐도 뇌리에 콱 박힐 거라고 자신있어 했다. 지금 까지 자기가 본 손 가운데 제일 매력적인 손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렇 게 했더니 정말 그랬다. 작고 여린 팔목에 비해 크고 넓은 손바닥, 대꼬 챙이처럼 딱딱하고 쭉쭉 뻗은 손가락, 거기 중간에 깊게 옹이지고 뭉툭한 마디들, 그리고 길게 타원을 그리는 건강한 손톱. 유리처럼 날카롭고 단 단한 손이었다. 그의 집에는 유리가 많다. 삼청동 고개에 자리잡은 낡은 한옥은 짓다만 유리성같다. 반도체칩 만한 유리조각들이 융단처럼 깔려 있고, 창문마다 색유리가 끼워져 있다. 발깔개도 액자도 꽃병도 유리다. 그래서 하루종일 집 전체가 성당의 스테 인드글라스처럼 반짝인다. 해가 뜨면 햇빛으로, 해가 지면 전등빛으로 오 묘한 색깔을 뿌려댄다. 1초 단위로 달라지는 그 다채로운 빛의 프리즘을 그도 헤아리기 어렵단다. “비오는 날 창문을 두드리는 회색빛, 여름날 아스팔트를 달구는 황금빛, 가을날 골목길에 떨어지는 단풍빛, 눈내리는 날 외투에 얹히는 하얀빛….” 한참이나 시구절 같은 말을 읊조린다.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손 유리와는 거리가 먼 삶이 꽤 길었다. 학창시절엔 농과대를 다니며 4년 내 내 농땡이를 쳤다. 도서관이나 강의실보다는 음악감상실에서 시간을 주로 보냈다. 졸업시험이 있던 때라 시골 부모들이 “딸년 졸업이나 제때 하겠 느냐고 가슴을 졸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학교에서 10 명도 안 떨어지는데 내가 왜 떨어지느냐”며 큰소리를 쳤단다. 졸업하고 외국항공사에서 일하다 결혼해 애까지 낳고서도 부모 눈에는 항상 철부지 딸이었나 보다. “결혼한 뒤에도 부모님한테서 일일이 애프터서비스를 받 았다”며 웃는다. 우여곡절이 많은 프랑스 유학이었다. 남편이 국비유학생으로 프랑스에 머 물던 터라 유학을 추진했지만 좀체 길이 열리지 않았다. 60년대 중반이었 는데 여권을 신청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부부가 함께 외국에 나가는 걸 수상히 여기던 시절이었다. 백방으로 손을 써 파리를 거치는 미국행 비행 기를 탔다. 파리에서 남편을 만나더라도 함께 살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썼 다. 훗날 한국에 두고온 딸을 데려오려고 하니 그게 말썽을 일으켰다. “ 왜 각서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화가 치밀어 파리주재 한국대사 관에 격문 비슷한 편지를 보냈다. “고아는 몇천명씩 내보내면서 부모있 는 딸은 왜 묶어두느냐”고. 그랬더니 몇달 뒤 파리에서 딸을 만날 수 있 었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생각처럼 만만치 않았다. 남편 뒷바라지하랴 아르바 이트하랴 공부는 손도 댈 수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인들의 한국에 대한 무지는 더욱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한국을 미국의 속국이나 식민지로 여 겼다. 포르투갈이나 터키에서 온 유학생들보다도 대접이 박했다. “너희 나라도 언어가 있느냐. 영어를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수시로 받았다.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보니 불끈 오기가 났다. 한국인의 매운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도 그들이 자랑하는 미술로. 힘든 시절은 스위스로 이어졌다. 남편 장학금은 떨어지고 생활비는 쪼들 리는데 뱃속에서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일자리가 있다는 친구의 연락 을 받고 알프스를 넘었다. 레만호 근처 번화가에서 잡화점 점원으로 일하 면서 건축미술을 공부했다. 공부하랴 아르바이트하랴 애 키우랴 잠 잘 수 있는 시간이 서너시간에 불과했다. 몸이 배겨나질 못하고 말라갔다. 마침 유럽에 다이어트열풍이 불던 때였는데 현지 신문기자들이 다이어트의 비 결을 물어올 정도였다. 학교를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유리 미술을 배웠다. 건축보다는 손으로 하는 공예쪽에 마음이 끌렸다. 유리를 만나기까지 멀고 먼 우회로를 돌았던 셈이다. (사진/손톱만한 크기의 유리조각 안에도 수천개의 반사점이 숨어 있다. 그 유리를 자르고 붙이다보면 손을 베는 일은 다반사다. ) 처음엔 학교나 성당을 보수하는 게 일이었다. 프랑스에서 동양인 유리미 술가가 작가로서 독립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창작욕을 접어두고 보수 작업에 매달렸다. 나무조각하는 사람이 목수일 못하랴는 심정으로 자위했 다. 다행히 파리에는 문화재가 많아 일거리는 충분했다. 오히려 문제는 체력이었다. 보수작업은 청소하는 것부터가 큰일이었다. 수백년 묵은 때 를 며칠 밤을 새워 닦아내고 나면 남은 일이 까마득했다. 남편도 아이들 도 돌볼 틈이 없었다. 지금 돌이키면 아이들을 거저 키운 것같아 죄스러 울 때가 많다. 중노동 유리미술… 이사하는 데만 트럭 서너대 행운도 있었다. 지금의 아틀리에를 장만하기 전, 파리에서 예술가들에게 싸게 임대해준 낡은 설탕공장 자리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쌍둥이 건물 이었는데 한채가 불타자 나머지 한채도 철거위기에 몰렸다. 2년을 버티며 파리시와 실랑이를 벌였다. 우습게도 시청에 찾아가 항의할 때마다 보상 금이 늘었다. 작업장을 불시에 빼앗긴 작가가 겪어야 하는 창작상의 장애 에 대한 보상금이었다. 세차례쯤 찾아가 항의를 했는데 우리 돈으로 1억 원 가까운 돈이 생기더란다. 그걸로 아틀리에를 장만하고 만세를 불렀다. 유리미술은 중노동에 가깝다. 그가 다루는 유리는 입으로 불어서 만든다. 두께가 일정치 않아 빛이 럭비공처럼 난반사를 일으킨다. 손톱만한 크기 의 유리조각 안에도 수천개의 반사점이 숨어 있다. 그 유리를 자르고 붙 이다보면 손을 베는 일은 다반사다. 집중력을 잃으면 꼭 사고를 친다. 하 루는 유리를 물로 닦는데 물감을 푼 듯 붉은색이 번지더란다. 그게 피라 는 걸 안 건 한참 뒤였다. 유리를 다루는 연장도 큼지막하다. 전기드릴에 전기톱에 콤프레서 등 건축공사를 방불케 하는 장비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이사하는 데만 트럭 서너대가 필요하다. 유리가루 알레르기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살갖이 따갑고 아파 배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돌아오니 한국은 많이 변해 있었다. 자고나면 대형건물이 들 어섰다. 그 덕에 일감은 끊이지 않았다. 작업기간만 6개월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도 꽤 성사시켰다. 그러는 10년새 욕이 많이 늘었다. 서울이 사 람을 거칠게 만드는 것같다고 한다. 성공회 성당의 색유리나 예술의 전당 벽화, 한화증권 앞 조형물을 제작하면서 제작부터 완공까지 돈과 사람들 과 사사건건 입씨름을 해야 했다. 자기가 지은 건물이라고 다른 사람의 손길을 마다하는 건축가들의 고집에는 기가 질렸다. 허가니 심사니 세금 이니 하며 딴죽을 거는 관공서들을 상대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유리 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지 못하고 세상과 다퉈야 하는 삶이 조금은 부끄럽 다.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13일 제 182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7월03일 제 164호 벽화가 박찬국 벽은 커다란 캔버스다. 거리를 걷다 반듯한 벽을 보면 손가락이 근질거린 다. 거기에 새와 나무와 개울과 사람들을 그려넣고 싶다. 여기 혹처럼 튀 어나온 곳엔 사슴의 뿔을 그려야지. 그러면 진짜 우람한 뿔처럼 보일거야 . 저기 움푹 팬 곳엔 옹달샘을 그리면 딱 어울리겠군. 옹달샘 옆엔 옛날 어머니가 우물에서 물긷던 모습을 그려넣으면 될 것이고. 그래! 버드나무 도 하나 집어넣자. 마음은 이미 한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얼핏 보면 영락없는 낙서 박찬국(39). 그의 말을 빌리자면 혁명가요, 평론가요, 정치가요, 화가다. 어느 한 가지로는 온전히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단다. 그래도 사람들 틈에 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만든 명함이 공공미술가란 이름이다. 공공이란 두 글자에 그의 복잡한 정체성이 녹아든 셈이다. 하 지만 조금만 더 세속의 잣대를 들이대면 그는 그냥 화가다. 그것도 벽화 만을 그리는, 혹은 벽화만을 만드는 그런 그림쟁이다. 그에게 벽은 복잡한 자의식만큼이나 복잡하다. 단순히 건물의 안과 밖을 가르고, 사람들의 교류를 막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당이고, 시장판 이고, 학교이고, 놀이터다. 그는 벽에서 거꾸로 사람들의 왕성한 만남을 꿈꾼다. 간단한 덧칠로 삭막한 도시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도 벽이다. 매연으로 찌든 거리에서 문득 한폭의 산수화 같은 벽화를 상상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벽화를 만드는 방식은 통상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과 다르다. 화가가 자신의 세계를 표현한다면, 그는 보는 사람들의 세계를 표현한다. 그 자신의 감성이나 상상력은 중요하긴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그는 항 상 벽화가 들어설 곳의 지역성이나 풍토 따위를 먼저 고려한다. 벽 가까 이에서 사는 사람들의 심성에 어울리는 벽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재료도 그곳에서 동원할 수 있는 것을 쓰려고 애쓴다. 그게 나뭇조각이나 돌멩이 가 될 수도 있고, 폐타이어가 될 수도 있다. 수원시 우람아파트 들머리 옹벽에 그려진 벽화 우리 동네 는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벽화는 얼핏 보면 영락없는 낙서다. 벽 여기 저기에 선과 면으로 단순화된 새와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한켠에선 로켓 이 날아오르고, 증기기관차도 달린다. 꽃은 한결같이 별사탕을 닮았다. 유치원에 다니는 동네 꼬마들의 그림을 토대로 구성했기 때문이란다. 유 심히 보면 정교한 그림도 숨어 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 호랑이 같은 통장 할아버지, 작업복을 입은 청소부 아저씨는 실제 아파트에서 사는 사 람들이 모델이다. 벽화는 제목 그대로 동네를 담았다. 그런 벽화를 그리게 된 사연이 재밌다. 아파트는 지은 지 15년이나 지난 낡은 서민아파트였다. 시에서 도시환경을 정비한다며 옹벽에 벽화를 그릴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벽은 운동장만 한데 보수는 쥐꼬리만 했기 때문이다. 소문은 돌고 돌아 그에게 까지 닿았다. 그는 벽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곳 사람들의 애 환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벽화 속의 할머니 옆에 그려진 낙서는 그 런 그의 소망을 대변한다. “우리 할머니는 허리가 안 좋으십니다. 그래 도 항상 웃으시며 오냐 내 손주 어서 오너라 하십니다. 할머니는 젊어서 전쟁나서 고생하시고 먹을 것이 많지 않아서 아주 열심히 일을 하셨답니 다. 할머니 힘내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포기하고… 그의 벽화는 생활 속에서 태어난다. 그건 그가 그림을 배우며 체득한 것 이기도 하다. 광주에서 고교를 마친 그는 삼수까지 했지만 대학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군대에 들어갔고, 제대를 하고서야 대학생이 됐 다. 그 뒤의 운명은 그야말로 공공적(?)이다. 늦깎이 대학생도 80년대라 는 시대적 세례를 피하지 못했다. 학생운동을 기웃거리며 팸플릿에 만화 를 그리거나 학생회관에 걸릴 걸개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때 예술이 현 실이고,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동의 무기로 배운 만화가 졸업한 뒤에 밥줄이 됐다. 노동에 지친 소년 이 다니던 공장에 불을 질렀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만화로 그려본 게 제법 호평을 받았다. 검열이 심해 발표는 못했지만 만화학원에서 교재로 쓸 정 도였다고 한다. 만화잡지사에 발탁돼 남들이 가져온 콘티를 손봐주며 겨 우겨우 먹고 살았다. 그러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배울까 해서 일본으로 날랐다. 앞으로는 컴퓨터가 중요한 매체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학비가 너무 비쌌다. 벽화를 택한 건 그런 생활상의 이유였다. 그는 단지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화사한 벽화를 거부한다. 그보다는 재밌 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벽화를 그리고 싶다. 그게 만화라도 좋다 . 그런 벽화는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해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하기 때문이 다. 벽화를 그리기에 앞서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엿보는 것도 그 때 문이다. 벽의 상태나 위치를 고려해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아이디어를 붙잡으면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그는 그런 재미가 사람들에게 추억거리 가 되기를 바란다. 처음엔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벽화는 골방에서 그리는 회화와 다르다. 거리에서 벌이는 작업이기에 거치적거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계절 과 날씨의 간섭은 특히 심하다. 습기와 일사량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곰팡이나 자외선이 안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업실에서 갑자기 거리로 나오면 색채 감각이 균형을 잃는다. 지나치게 강한 색을 써 두고 두고 마음에 걸릴 때가 많다. 벽화는 한번 그려놓으면 적어도 일년을 가 는 것이니 속이 상할 대로 상한다. 그의 벽화 사이를 걷는 우리들 그에게 요즘 도시는 참 엉터리다. 폼도 안 나고, 살맛도 나지 않는다. 아 파트나 빌딩을 보면 주인의 욕심을 네모나게 똑 잘라낸 것 같다. 평수와 돈만 생각할 뿐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예전엔 하다못해 대문 문고리에도 뭔가를 장식했는데, 요즘은 그런 문을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 사람들에겐 그런 게 죄다 귀찮은 일일 뿐이다. 그 는 생활 속에서 기능하는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게 못내 안타깝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의 벽화 사이를 걷는다. 푸르른 창공을 헤치고 갈 매기가 날아오르는 빌딩 외벽, 은행나무가 우거진 구치소 담벽, 폐수에 찌든 강물이 흐르는 초등학교 담장. 그리고 거울조각과 동물그림이 모자 이크된 놀이터 벽. 그는 그 벽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이 벽을 넘어 서로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라고….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03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7월31일 제 168호 소리장이 임동창 임동창. 피아노도 치고 장구도 치고 퍼포먼스도 하고, 그리고 도도 닦는 장이다. 벌써 삼년째 그럴듯한 무대에서 정기공연을 하고 있으니 이름값 이 만만찮다. 그런데 참 나이값을 못한다. 말끝마다 욕지거리요 상소리다 . 마흔한살 먹은 어른이 그러니, 듣는 이로선 사람이 본디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무시로 웃음을 터뜨리는 똥그란 얼굴만큼은 맑기 그 지없다. 그의 말마따나 열일곱살 철부지의 모습이다. 몸은 마흔살, 마음은 열일곱살 몸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울화가 치민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응 큼을 떨기 때문이다. 치약 쥐어짜듯 속마음을 조금씩 뱉어내는 게 도무지 못마땅하다. 그런 악연을 맺은 날이면 내내 머리가 지끈지끈 쑤신다. 아 프리카 토인을 만난 것처럼 도대체 뜻이 통하지 않아 답답증이 도진다. 그러다 끝내 분통을 터뜨린다. “그럴려면 방구석에 자빠져 뒹굴지 사람 사는 세상에 뭐하러 나왔누. 망할 놈들.” 소리. 그걸로 치면 세상살이가 더욱 팍팍하다. 무슨 놈의 소리가 그리 복 잡하고 어지러운지. 흔히 클래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아예 미칠 지경이 다. 돈 들여 음악 공부했다고 내놓고 자랑하는 거라면 그나마 봐주겠는데 , 이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순수한 폼을 잡는다. 기껏해야 손장난이 면서. 그때마다 옛적 용각산 광고가 떠오른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그건 망할 소리입니다. 하하하.” 그의 소리는 쉽다. 이 세상 모든 사물의 본디 소리를 끄집어내는 게 처음 이자 끝이다. 작곡을 할 때부터 연주를 할 때까지 오로지 그것만 생각한 다. 멀쩡한 피아노를 뜯어 나무막대를 감싼 양털에 경화제를 쳐바르는 것 도, 무대에서 벼루를 긁거나 놋그릇을 두드리거나 탁구공을 튀기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요즘 소리는 죄다 성형수술한 소리라. 피아노로 치면 딱딱한 소리가 본성인디, 털옷을 입혀놨으니 맛이 갈 수밖에. 게다가 소 리란 게 그런 악기에만 있는 줄 알고 있으니. 쯧쯧.” 하지만 그가 소리를 내는 방식을 받아들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괴짜로 치부해버리면 일도 아니겠지만,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그 말이 라니 그건 애초 택할 길이 아니다. 그래서 임동창이란 이름 앞에 그렇게 많은 수식어가 붙었는지 모른다. 땡초 피아니스트, 컬트 작곡가, 국악과 양악의 크로스오버 연주가, 퍼포먼스 국악인, 심지어 천재라는 찬사까지. 그런데 그는 그런 딱지가 생뚱맞다. “그냥 ‘임동창이 음악’ 하면 되지 , 왜 그리 이러쿵저러쿵 하고 그러요.” 땡초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는 한때 승려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신의 꼬라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머리를 깎았다. 처음 9개월 동 안 공양주 노릇을 하며 적게는 50명분, 많게는 4백명분까지 밥을 지었다. 그 비법을 침을 튀기며 자랑한다. “먼저 곳간에서 쌀을 가져와 쟁반에 한줌씩 뿌려가며 돌을 골라낸 다음 조리질을 해서 가마솥에 앉히는 거라. 솥뚜껑에는 거적때기를 씌우지. 처음엔 태우고 설익히고 난리를 피웠소. 그러다 도가 텄지. 밥 끓는 소리와 김만으로 뜸들일 때를 척 알았응게.” 탈영과 수행… 그러나 고독에 지다 그의 승려 생활이 땡초의 놀음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행을 한답시고 묵언에 들어갔을 때였다. 오랜만에 서울 작은집에 들렀다. 입을 뻥끗해서 도 안 되는데 작은아버지가 자꾸만 말을 걸더란다. 하도 속이 답답해 화 장실에 가는 척하고 방을 나와 맨발로 담을 넘어 내뺐다. 그때부터 한바 탕 소동이 벌어졌다. 작은아버지를 선두로 식구들이 떼거리로 쫓고, 맨발 에 승복을 입은 조카는 달아나고. 택시를 잡아타고 쪽지로 행선지를 써서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는 했으나 지금 생각해도 배꼽을 쥘 촌극이다. 군대에 가서는 탈영까지 시도했다. 도를 닦아야겠는데 군대에서는 길이 보이지 않았단다. 부대에 배치받은 지 보름 만에 홀어머니를 뵈러가야겠 다고 떼를 써 2박3일 특별휴가를 받았다. 절에 돌아가자마자 군복을 벗어 던지고 승복으로 갈아 입었다. 사망신고를 내고 깊은 산 토굴에 들어가 수행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토굴에 들어가니 적막강산이었다. 그 고 독을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어 다시 절로 돌아갔다. 절은 헌병대가 왔다 가고 온통 쑥대밭이 돼 있었다. 결국 “3년 군대생활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찌 평생 중노릇 하겠나 싶어” 불문을 벗어났다(그는 지금도 까까머리 다. 그건 순전히 헤어스타일일 뿐이란다). 피아노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첫 음악시간에 선생님이 시 범으로 가곡을 쳤다. 지금 생각하면 거지 같은 피아노에 거지 같은 솜씨 였단다. 한데 그 소리가 벼락치듯 몸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고 한다. 마치 신내림 같은 거였다. 그뒤 완전히 피아노에 미쳤다. 친구고 공부고 다 때 려치우고 오직 피아노, 피아노였다. 수업시간에도 손을 책상 밑에 감추고 건반 두드리는 연습을 할 정도였다. 선생님이 몽둥이로 다스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없는 살림에 어머니를 졸라 피아노학원 수강료도 뜯어냈다. 그런데 한달이 지나자 학원 선생님이 다음부터는 수업료를 가져오지 말라 고 했단다.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어쨌든 피아노 공부하는 데 들인 돈이 첫 수업료 3천원이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만나다 고교 1학년 때 작곡을 시작했다. 그가 마음나이로 머무르는 열일곱살 시 절이었다. 하루에 2시간만 자고 작곡에 매달렸다. 먹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몸 안에서 꿈틀대는 것들이 넘쳐나와 그걸 발산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단다. 당시만 해도 화성악책이 따로 없어 일본원서를 구해다 선생님에게 번역을 부탁해가며 공부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앞이 훤해지는 걸 느꼈다. 몸 안에서 성을 부리던 것들이 툭 터져버린 것이다. 그 순간 소리와 연주와 작곡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음악보다 음악을 하는 내가 궁금해졌단다. “암만 생각해도 그걸 찾는 길 은 머리 빡빡 깎고 중 되는 수밖에 없더라구.” 국악은 행자 때 좋은 걸 알았다. 법회 때 틀어놓는 설법 억양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란다. 그래서 라디로 국악프로그램을 다 녹음했다. 그러다 국악만 24시간 줄곧 들려주는 카페에서 사물놀이패를 만나 깊게 빠져들었 다. 정신없이 울려대는 타악 뒤로 흐르는 소리에 매혹당했다. 격한 두드 림을 통해 태어난 소리들이 다시 뭉치고 섞여 형성하는 가락이 멋졌다. 그때 그에게 그런 울림을 들려준 이들이 지금 김덕수 사물놀이패 패거리 들이다. “언젠가는 국악을 파헤칠 것이오. 내가 한국사람인데 국악을 몰 라서야 쓰겄소. 국악하는 것은 소가 언덕을 찾는 것과 같응게.” 그에게는 요즘 ‘장이골 촌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 소리의 세 계를 헤매는 젊은이 몇몇이 모여 만든 동네다. 산구석에 틀어박혀 세상의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감동의 선율을 찾느라 하루해가 짧단다. 반편 이 장이가 아닌 온편이 장이가 되려는 그들과 함께 그는 그만의 오롯한 소리를 찾아나선다. 꽉 들어차서 한방울도 새지 않는 그런 소리를. 그러 다 몸에 진이 빠지면 뽕짝 한곡을 멋들어지게 불러젖힌다. “대∼지는 부 른다. 환∼희에 빛나는 꿈꾸는 대∼지다….” 그의 18번 대지의 항구다 다. “그러다 새참으로 막걸리 한잔 걸치고 피아노 앞에 앉으면 그게 참 선 아니겄소.”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31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7월10일 제 165호 두밀리 자연학교장 채규철씨 아이들은 그를 ‘이티(ET)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를 보면 왜 그런 별 명이 붙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영화의 이티처럼 그의 얼굴은 괴상하 고 흉칙하다(그의 얼굴을 이렇게 표현하는 건 순전히 그가 그렇다고 인정 하기 때문이다). “문둥이들이 내 얼굴을 보면 자꾸 친구하자고 한다”는 너스레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에게 외양을 따지는 세속의 잣대를 들이 대는 것부터가 애시당초 잘못이다. 100원짜리 인생? 속으로 웃는다 경기도 가평군 두밀리 자연학교 교장 채규철(61). 20년 전 자동차 사고로 몸의 절반 가량이 불탔다. 의학상식대로라면 이미 무덤 속에서 뼈만 남아 있어야 할 몸이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다. 그것도 누구보다 활기찬 사람 으로. 그는 아이들에게 자연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선생님이요, 기업의 사 원연수에 단골로 불려가는 명강사다.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장기려 박 사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조합인 청십자조합을 만든 사람으로 기억 되는 이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사전에 좌절이란 없다. 그는 스스로를 ‘100원짜리 인생’이라 부른다. 그가 다방이나 음식점에 들어서면 마담이나 카운터들이 잽싸게 100원짜리 동전 한닢을 쥐어준다. 장사 안해도 좋으니 제발 이것만 받고 나가달라는 신호다. 이유는 뻔하다 . 다른 손님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주는 100원짜리 동전을 마다않고 꼭 받아챙긴다. 그리곤 기어이 자리에 앉아 손님행세를 다한다. 나올 때 찻값이나 밥값을 내더라도 100원을 아끼는 셈이니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면서 속으로 웃는다. ‘당신들은 모른다. 내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 지.’ 사실 그의 흉칙한 몰골은 엄청난 돈과 희생이 빚어낸 걸작품이다. 거기에 들어간 치료비며 관리비, 그리고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의 정성어 린 헌신을 돈으로 따진다면 엄청난 금액이다. “6백만불의 사나이는 못되 어도 6백만원의 사나이는 되고도 남을 것이다.” 남보다 더 융숭한 대접 을 받아 마땅한 모습이건만 외려 남보다 심한 수모를 받는 것이 그저 우 스울 뿐이다. 그는 한때 농촌운동에 뜻을 둔 전도양양한 청년이었다. 냉면으로 이름난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1·4후퇴 때 월남해 거제도에 정착했다. 서울농업 대(현 서울시립대)를 나와 충남 홍성의 풀무학원에서 농촌운동가로 첫발 을 내디뎠다(이 학교는 지금 주목받는 대안학교로 떠오르고 있다). 월급 이라야 여름엔 겉보리, 겨울엔 벼를 받는 고된 시절이었다. 덴마크 정부 의 초청으로 유학길에 오를 때까지도 그의 인생은 예정된 시간표대로 굴 러가고 있었다. 덴마크에서 그룬드비를 배우고 스위스의 페스탈로찌를 거 쳐 인도의 간디를 살피고 한국에 돌아온 것이 1967년 가을이었다. 귀국해 선 지금은 고인이 된 장기려 박사를 만나 청십자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1년 뒤 운명이 바뀌었다. 그날은 청명했다. 푸른 하늘 아래 미풍이 남실대고 있었다. 그는 일행과 함께 폭스바겐을 타고 산기슭을 달리고 있었다. 김해에 있는 양계장을 견 학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차가 제길을 벗어나 비탈길 을 구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차 뒷좌석에는 시너가 가득 든 통이 두 개나 실려 있었다. 새로 지은 영아원의 바닥을 칠하는 데 쓸 물건이었다. 차가 뒤집어지면서 시너 두통이 몽땅 터져버렸다. 그는 시너를 머리 끝부 터 발 끝까지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리고 ‘꽝.’ 한주일 서너번 기업연수 강사로 그는 장기려 박사가 원장으로 있던 복음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때까지도 정신은 말짱했다. 죽기 전에 남길 유언까지 생각해뒀다. 수술대에 눕자마 자 장 박사를 찾았다. 그를 아는 간호원들은 울고불고 난리였다. 의사들 이 다급하게 핀센트와 실을 찾아도 넋을 잃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장 박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는 그제서야 스스로 유언이라 생각한 말을 남기고 정신을 잃었다. “박사님, 청십자조합만큼은 꼭 성공시켜주 세요.” 그의 얼굴은 죄다 병원에서 만든 것이다. 눈썹은 머리칼을 떼어서 옮겨 심었다. 그래서인지 눈썹이 쑥쑥 자란다. 2∼3주에 한번은 꼭 이발을 해 야 한다. 요즘에는 새치까지 난다. 눈도 마찬가지다. 눈 주위에 있는 살 은 다 타서 없어지고 눈동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할 수 없이 어깨 피부를 떼어내 눈꺼풀을 만들고, 겨드랑이 털을 가늘게 떼어내 속눈썹을 만들었 다. 밖으로 향해야 할 눈썹이 안으로 자라는 바람에 재수술을 하기도 했 다. 오른쪽 눈은 의안을 박았다. 다행히 왼쪽 눈은 실명하지 않았다. 하 지만 눈에 염증이 생겨 1m 앞을 보지 못한다. 입은 오그라붙어 찻숟가락 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걸 째고 가슴 피부로 입술을 만들어 붙 였다. 두밀리 자연학교를 말할 때 그의 얼굴은 가장 환하게 일그러진다(?). 그 때 입가에 번지는 미묘한 살의 떨림이란. 자연학교는 그에게 남은 마지막 사명이다. 그걸 제대로 완수하지 않고는 죽을 수가 없단다. 사명감은 화 상이 제법 아문 뒤, 새마을연수원 초청으로 강연에 나선 이래 그가 꼭 강 조하는 낱말이다. 그는 보통 일주일에 서너차례 기업체 연수원에 불려간 다. 그렇게 버는 수입이 대학교수 못지 않다. 그게 다 자연학교에 들어간 다. “강연으로 폼도 잡고 학교 운영비도 버니 신난다”고 한다. 자연학교로 가는 길은 학교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다. 불기산 줄기를 타고 들어가면 포장길과 나란히 달리는 개울이 나타난다. 위태롭게 걸린 나무 다리를 건너면 야트막한 산기슭이 펼쳐지고, 그곳에 그가 10년 전에 일군 자연학교가 들어서 있다. 말이 학교지 야영장이나 다름없다. 네모난 시멘 트 건물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여기저기 가건물과 천막들이 늘어 서 있을 뿐이다. 그 사이사이로 숲이 우거지고, 시내가 흐르고, 아이들이 직접 심은 콩이 자란다. “환갑잔치에 반딧불을 준비합니다” 자연학교의 교육방침은 따로 없다. 그저 맛있게 먹고, 즐겁게 놀고, 달콤 하게 자자는 정도다. 아이들이 학교의 진짜 주인이다. 계절을 달리 해 들 을 수놓는 온갖 꽃들과 개울을 따라 헤엄치는 멋대로 생긴 민물고기들, 그리고 숲속에서 자라는 달콤한 열매들이 아이들과 친구할 뿐이다. 아이 들은 낮엔 밭을 매거나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논다. 수제비를 직접 끓여먹고 감자도 삶아먹는다. 그리고 밤이면 모닥불을 피우고 별자리를 찾다 잠이 든다. 잠이 없는 아이들은 반딧불을 쫓거나 귀신놀이를 하다 새벽이슬을 맞기도 한다. 그는 그런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무서운 귀신이 된다. “생긴 게 딱 귀신 역할하기에 제격이다”는 게 그의 자랑이다. 그는 오는 10월 환갑을 맞는다. 그때 학교 마당에서 걸판진 잔치를 열 계 획이다. 연못에서 기른 향어로 회를 치고, 손수 기른 푸성귀로 푸짐한 밥 상을 차릴 생각이다. 그런데 손님들이 너무 많을까 걱정이다. 해마다 8월 이면 자원봉사한답시고 찾는 소록도의 친구들. “너는 소록도에서 사는 게 어울린다”며 갈쿠리 손을 내밀던 그들이 이번엔 섬을 나올지도 모르 겠다. 그리고 살면서 신세를 진 숱한 지인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벌 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들. 그들을 위해선 꼭 감춰둔 선물이 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반딧불들. 그는 요즘 우리곁에서 사라진 반딧불 살리기에 푹 빠져 있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0일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다시 태어난 목사 김상태씨 “암! 치료할 수 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치자. 과연 믿을 사람 이 몇이나 있을까. 의사라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상인이라 면 잽싸게 계산기를 두드릴지 모르겠다. 엄청난 노다지를 캐게 될 테니까 . 그런데 목사 김상태(59·서울 동교회)는 하늘의 약속인 양 그 말을 믿 는다. 오히려 한술 더 뜬다. “암은 불치병이 아니다. 암으로는 결코 죽 지 않는다. 정 믿기지 않으면 여기 나를 보라!” ‘암을 이기는 이들의 모임’이끌어 그렇다고 그가 손 끝으로 기적을 부리는 성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동네 교회에서 만나는 그저 그런 목사 같다. 다만 대단한 말라깽이다. 껑충 큰 키에 얼굴은 광대뼈가 고스란히 불거졌다. 막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의 모 습이다. 아니나 다를까. 병력이 화려하다. 위암 말기 판정. 세번에 걸친 수술. 식도 일부와 위장, 췌장, 비장 제거. 3개월 시한부생명 선고. 그러 면서 ‘암을 이기는 이들의 모임’이란 거창한(?) 모임을 이끈다. 5년이 넘도록 안 죽고 살아 있으니 그럴 자격이 있단다. 그가 암 환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여느 암 환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암 인줄 몰랐고,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처음 쓰러진 건 91년 10월이었다. 새벽기도를 올리다 그대로 넘어졌다. 검사를 해보니 위산과다에 의한 위 궤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안 그래도 새벽만 되면 속이 쓰린 터라 그러 려니 했다. 한달 뒤 또 쓰러졌다. 이번엔 피 속의 헤모글로빈 지수가 낮 다는 판정이 나왔다. 보름 동안 온갖 검사를 다 했으나 역시 암은 발견하 지 못했다. 그러다 92년 2월 위암이라는 진단이 떨어졌다. 암세포가 이미 온몸에 퍼진 상태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술대에 누웠다. 배를 짼 의사는 안을 보더 니 그냥 덮으려 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부득부득 우겼다. 죽어도 좋으니 일단 잘라내자고. 그때 식도 끝부터 위장, 췌장, 비장이 몽땅 사라졌다. 십이지장을 끌어올려 식도에 이어 붙였다. 배변을 위해 배와 옆구리에는 호스를 박았다. 설상가상으로 수술 1주일 만에 복수가 차올라 수술자리가 터지는 바람에 재수술까지 받았다. 입원 석달째가 되자 의사가 퇴원을 권 했다. 길어야 3개월이라는 사형선고와 함께. 병원에 있을 때만 해도 목사였다. 어서 교회에 돌아가 설교하고 싶은 생 각이 굴뚝같았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늘나라가 가 까워졌음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누워서는 천국의 환상을 보기도 했다. 마침 스피커에서 팝송이 흘러나오는데 그게 꼭 천국 의 소리마냥 아름다웠다. 천장에서는 천사가 활짝 미소짓고. 그래서 퇴원 이틀 뒤 강단에 서 설교까지 했다. “생명을 주시고 거두시는 하느님! 감 사합니다.” 명동에서 알아주던 깡패 그러나 집에 누워 있으니 사정이 달라졌다. 목사도 별 수 없는 사람이었 다. 죽는 게 두려웠다. “죽은 이는 하느님의 품 안에 들었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유족들을 다독거리던 게 까마득했다. 천국에 들지 않고 오두막 에 떨어지더라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암에 좋다면 닥치는 대로 사서 먹었다. 풀뿌리에서 짐승의 살점, 심지어 돌가루까지. 그게 대부분 암 환 자들의 살고픈 열정을 악용한 검은 상술이라는 걸 깨치는 데는 많은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보다 깊은 우울증. 당시 그는 미라처럼 말라붙었다. 1백81cm에 85kg이던 몸이 겨우 41kg 나 갔다. 본디 어디 가면 목사 아니라고 할 정도로 건장한 체격이었다. 어쩌 다 시비가 붙은 곳에 가면 사람들이 지레 겁먹고 물러설 정도였다. 군에 서는 사단 씨름대표로 뽑힐 정도였고, 젊어서는 주먹깨나 쓰던 몸이었으 니 그럴만도 했겠다. 그랬던 그가 피골상접한 몰골이 되니 사람들이 눈물 만 흘리더란다. 주먹 얘기가 나오자 대화가 삼천포로 빠진다. 목사가 되기 전엔 명동의 알아주는 깡패였단다. 그 사연이 투병기 못지않게 극적이다. 6·25전쟁 직후 어느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차장과 시비가 붙었다. 운전사까지 합세해 대드는 걸 내다꽂았다. 마침 버스 안에 김두한이 있었다. “내 밑 에 들어와라.” 그 말 한마디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돈과 향락. 최고급 승용차에 양복에 구두에 넥타이까지 차려 입고 멋쟁이로 행 세했다. 선배들이 “그 놈 머리 좋으니 검사시켜 써먹자”며 대학까지 들 어가도록 해줬다. 부랑아에서 폭력조직의 중간보스로, 대학생으로 그로선 출세가도를 질주한 것이다. 운도 좋았다. 5·16쿠데타가 터져 전국의 깡패들이 군홧발에 밟힐 때도 그는 화를 피했다. 마침 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이 일으킨 짓이 어선지 군인에겐 퍽 관대했다고 한다. 군복만 입고 명동서 살던 ‘나이롱 군인’(돈만 주면 1주일 휴가증을 사던 시절이었다)이었는데도 건들지 않 더란다. 우습게도 깡패 잡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져 트럭타고 명동으로 가 기도 했단다. 우연히 들른 천막교회에서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화려한 시 절이었다.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그토록 건강했던 것처럼. 의사가 삶의 한계로 정해준 3개월을 하루 넘기면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 다.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몸은 약해지고, 식도와 십이지장을 연결 한 곳에 악성종양까지 생겼는데도 살아 있지 않은가. 절망을 뚫고 살 수 있다는 의욕이 솟구쳤다. 그때 우연히 한 잡지에서 게에서 뽑아낸 키토산 이 암을 억제한다는 글을 봤다. 바로 키토산 권위자를 찾았다. 마침 그는 쥐를 대상으로 키토산의 항암효과를 연구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달려가 “나를 쥐로 써달라”고 매달렸다. 그리고 그게 기적을 일으켰다. 암세포 가 사라졌고, 몸무게도 54kg으로 불었다. 키토산 연구자에 “나를 쥐로 써달라” 그가 암을 이겨낸 비결이 딱히 신묘해보이지는 않는다. 키토산을 만난 행 운을 빼면 더욱 그렇다. 나름대로 식이요법을 완성했지만 의학적으로 검 증된 것도 아니다. 그는 물은 꼭 광석을 통과한 정화수를 마신다. 하늘에 서 내려온 물이 땅에 스며들면서 광물질을 품도록 한 섭리를 이용한 것이 다. 여기에 채소는 반드시 끊여먹는다. 땅이 크게 오염돼 있어 아무리 깨 끗이 씻어도 허사라고 믿기 때문이다. 열기에 파괴되는 영양소는 알약으 로 해결한다. 그럼으로써 암 세포로 약해진 몸기운을 추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이 방법이 만사형통의 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 그는 다만 암을 불치병이라 여기고 절망하지 말자고 외친다. “암 환자 는 수술보다 수술 후의 고통이 더 큽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기 때 문이죠. 그때 삶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그는 암 환자의 90%는 우울증 환자라고 믿는다. 암은 불치병이라 지레 믿 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꿎은 가족들에게 성질을 부리고, 0.1초 만에 눈물 을 흘린다. 그러니 병이 나을 턱이 없다. 암을 이기기 위해선 무엇보다 밝고 건강한 정신이 필요하다. 그의 암 이기는 비법은 따지고 보면 절망 하지 말자는 거다. 암을 이기려면 이렇게 외치란다. “네버 세이 노.”(N ever Say No·절대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골동 수집가 구원상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골동품 싹쓸이, 숯같은 정열 전시장은 골동품 천지다.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화로며 대패, 촛대, 안경 집, 떡살, 갓, 장롱 따위가 벽을 따라 차곡차곡 쌓여 있다. 막 들어서면 그 옛날 대장간 같기도 하고, 부엌 같기도 하다. 살짝 눈길을 돌리면 여 염집 안방에 들어선 듯도 하다. 밖에서는 날렵한 자동차가 씽씽 내달리는 데, 이곳만큼은 달구지가 딱 어울릴 것 같다. 시간은 이제 겨우 조선시대 쯤 지나고 있을까. 오래 묵은 물건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그런 상념 을 솔솔 부추긴다. 골동계에서 알아주던 ‘봉’ 구원상(49). 명함을 보니 한국열탄주식회사 대표이사다. 열탄이라니. 연 탄도 아니도 석탄도 아닌 게 있었나. 혹시 번개탄? 아니 숯이란다. 요즘 숯불갈비집에서 흔히 보는, 가운데가 뻥 뚫린 숯을 만든단다. 그러니 더 욱 궁금증이 동한다. 숯 굽는 사람이 뭐하러 골동품을 모으는 게지? 게다 가 박물관을 세우겠다고 땅까지 사뒀다는데. “골동이란 게 숯이랑 비슷 합니다. 겉보기엔 죽은 것 같은데 속으론 살아 있죠. 꺼졌나 싶은데도 어 느새 빨간 불씨를 토해내는 숯처럼요. 탁 탁 파르르르! 다만, 골동은 만 들 수 없으니 모아야죠.” 얼굴이 내내 발그스름하다. 십몇년 고이 키워온 딸자식을 선보이는 기분 이란다. 물건이 화려하면 괜히 경망스럽다는 말을 들을까 두렵고, 은근하 면 엉뚱하게 칙칙하다는 말을 들을까 걱정된다. 그도저도 아닌 것은 사람 들의 눈길이나 끌는지. 곁에 두고 볼 때는 다 곱고 예뻤건만, 세상에 내 놓자니 신경쓰이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괜히 일을 저질렀지 싶다. 하 지만 소장품을 내놓는 것은 수집가라면 어차피 한번은 치러야 할 의식이 다. 사실 물건을 다 품안에 두기에는 이제 그도 힘이 부친다. 공장 창고 도 아파트도 더이상 빈 자리가 없다. 골동 수집이 올해로 10년을 넘어섰다. 처음부터 박물관을 지으리라 작정 하고 뛰어든 일이었다. 사업한답시고 해외를 들락거리다 보니 좋다는 박 물관을 많이 구경했다. 나라가 세운 것에서 개인이 세운 것까지 틈나는 대로 둘러봤다. 2천5백여개에 이르는 일본의 개인박물관은 특히 부러웠다 . 그러다 오기가 생겼다. “우리가 일본보다 못할 게 뭐가 있나. 5천년 역사에서 1백년치만 잘 보존해도 꿀릴 게 없지.” 그래서 다짜고짜 뛰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돈 좀 벌었으니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기특한 생각도 끼어들었던 것 같다. 처음엔 골동계에서 알아주는 ‘봉’이었다. 돈푼깨나 있는 사장이, 게다 가 골동품에 대해선 바보나 다름없는 초보자가 박물관 짓겠다고 물건을 싹쓸이하다시피 하니 골동상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가 한번 인사동 에 뜨면 먼지를 뒤집어쓴 온갖 묵은 것들이 바리바리 쌓였다. 물론 개중 에 태반은 가짜이거나 ‘섭치’라 불리는 쓰레기 골동품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걸 넙죽넙죽 사들였다. 속으로 난 참 운도 좋지 하면서. 훗날 눈 이 트여 내다버린 골동품이 이삿짐 트럭으로 서너대 분량은 족히 된다니 참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다. 철강회사에서 숯공장으로 (사진/골동품은 한개를 모으면 열개를 갖고 싶어진다. 골동품의 멋과 내력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골동 수집의 또다른 재미다.) 그때 이런 일도 당했다. 괜찮은 물건이 나왔나 싶어 장안평을 지날 때였 다. 차를 타고 가는데 골동상가게 앞에 서 있는 석등 하나가 눈에 들어왔 다. 모양도 예쁘고 상태도 괜찮아 보였다. 가게에 들어서니 주인이 초조 한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친구가 사고를 냈는데 변호사를 살 돈을 구하지 못해 큰일났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석등을 변호사 비용만 주 고 사라고 매달렸다. 마침 마음에 있던 터라 두말 않고 돈을 치렀다. 그 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무덤 앞에 세워둔 평범한 석물에 불과했다. 골동상이 첫눈에 초보자인 줄 알아보고 쇼를 한 것이다. 숯을 굽게 된 사연도 역시 막무가내식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철강 회사가 갑자기 부도를 내고 망했다. 나이 서른 중반에 들어섰을 때였다. 마침 친구가 하던 숯공장이 경영난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공장에 가서 보니 진입로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차압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게 꼭 초청장 같더란다. 쇠 만드는 회사에서 숯 굽는 공장으로 닿은 인 연도 예사롭지 않고. 돈은 벌어서 주겠다고 약속하고 공장을 덜컥 인수해 버렸다. 다행히 숯공장이 잘됐다. 참나무 대신 톱밥을 압축해 숯을 굽는 기술을 개발한 게 히트를 쳤다. 골동수집에 들어간 돈은 죄다 숯에서 나 온 셈이다. 흔히 골동수집은 취미 가운데 마지막으로 통한다. 죽은 이의 혼이 배어서 인지 한번 빠지면 넋을 빼앗기기 쉽다. 그래서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 된 다. 세상의 모든 골동품을 모조리 사들이려 욕심을 부리다간 큰일난다. 골동상들이 그런 심리를 비수같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골동상들은 고객이 골동품의 맛을 알기 전에 승부를 건다. 작전으로 치면 치고 빠지기다. 그 래서 온갖 상술을 동원한다. 순박한 시골노인으로 가장하기도 하고, 해박 한 지식을 가진 대학교수 흉내를 내기도 한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 으려면 오로지 공부하고 욕심을 버리는 수밖에 없다. 일상사에서야 몇천 만원 뜯기면 사기죄로 고소라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골동상을 이겨야지 그들과 척을 져선 안 된다. 속고 산 물건을 트럭째 버 리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욕심을 버린다는 게 쉽지 않다. 솔직히 지금도 욕심꾸러기란다.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을 물으니 우물쭈물한다. 결국 하는 말이 “많다”다 .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단다. 1천여점에 이르는 골동품을 공 장 창고도 모자라 아파트까지 따로 구해 보관하는 처지이면서 욕심을 부 린다. 그게 우리 것의 멋이라니 사실 따질 이유도 없다. “우리 것은 중 국이나 일본 것과 달라요. 멋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죠. 그래서 보면 볼수 록 깊은 맛이 납니다. 하나하나가 작품이라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다. 한창 욕심부릴 때는 좋은 골동품을 보면 가슴이 펄떡펄떡 뛰었단다. 그리고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 좋다!” 그런데 이젠 좋은 물건을 보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직 이 “좋군” 하며 완상하는 여유를 갖는다. 수천만원대까지 손대는 지경 에 올랐으니 전문가 못지 않은 안목이다. 요즘엔 수집보다 보관에 더 신 경이 쓰인다. 습도 맞추랴 온도 조절하랴, 그리고 방범하랴. 잘못되면 문 화유산에 죄를 짓는 것이니 한시도 방심할 수 없다. 박물관 한다고 하니 학예관들이 면박을 준단다. “구 선생 한 30년 골동 했습니까?” 그 정도 하지 않았으면 명함도 내밀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 이 일생을 걸고 달라붙어야 박물관 하나 할똥말똥한 셈이다. 그 말을 들 을 때마다 앞으로 남은 길이 멀기만 하다. 땅부터 사놓은 게 허튼 짓인 듯해 쑥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작지만 아름다운 박물관을 꿈꾼다. 거기 가면 ‘모든 걸’ 볼 수는 없지만 ‘그것만’은 볼 수 있는 그런 박물관 을 짓고 싶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07일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인권운동가 서준식 “악법의 감옥을 깨부수리” 그의 오십 평생은 감옥 안의 삶과 감옥 밖의 삶으로 찢겨왔다. 감옥은 그에게 또하나의 집이었고 실천의 장이었으며 마음을 벼르는 훈련원이었다. 그는 감옥의 안과 밖을 가르는 벽을 인간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옥죄는 악법으로 보았다. 그 벽을 깨기 위해 그는 옥으로 가야 했다. 20대에서 40대까지 모국유학생 간첩단사건으로 실형 7년에 보안감호 10년, 모두 17년의 긴 첫번째 옥살이를 끝내고 걸어나오면서도 그는 전향하지 않았다. ‘사회안전법’에 맞서 51일 동안의 살인적 단식을 한, 그 원칙을 향해 불타오르는 그의 지독한 고집 때문이었다. ‘비폭력 불복종’을 무기로 악법이 있는 한 그는 언제든지 감옥에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악법은 스스로 없어지지도 않고, 아무도 없애주지 않는다. 변호사가 없애주겠는가, 국회의원이 없애주겠는가. 우리 모두가 그 악법을 어기고, 그래서 악법을 거부한 사람들로 옥이 넘칠 때, 없어진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한마디를 인용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감옥은 의외로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나는 ‘비폭력 불복종’의 정신을 무기로 악법의 감옥을 온몸으로 깨부수려 합니다.” 인권운동가 서준식(50)씨는 막 옥에서 돌아온 참이다. 88년 첫 출옥 3년 만인 91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으로 ‘보안관찰법’ 폐지를 위한 도구가 되겠다며 다시 옥으로 걸어들어갔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 6년 만이다. 그가 일하는 서울 명륜동 인권운동사랑방(02-741-5363)에는 ‘석방을 축하합니다’라고 쓰인 리본을 단 꽃화분 하나가 아직 싱싱하다. 지난 가을의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제주 4·3항쟁을 다룬 영화 '레드 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3번째 옥살이를 한 그는, 바로 그 까닭으로 2월17일 종합영상주간지 '씨네21'이 주는 올해의 ‘씨네21상’을 받았다. 사전심의를 거부한 그의 원칙주의를 심사위원단은 높이 쳤다. “세상이 바뀐 것은 나도 압니다. 그러나 과거의 운동방식을 다 팽개칠 만큼 바뀌었을까요. 사람이 안 바뀐 것은 어쩝니까. 모두들 최근 상황이 갑갑하다고 말하는데 체제 내 운동이 갖고 있는 한계 때문입니다. 운동은 계급사회구조를 넘어서려는 넓은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굉장히 어렵고 당장은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도덕성을 쥐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대규모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준식씨는 지금 새 정부가 꾸리는 국민인권기구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주도한다면 볼 것도 없다고 했다. 국가기구이면서도 민간 차원의 비정부기구(NGO)가 참여해야 균형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권 하면 군사독재시대에 시민적, 정치적 차원에서 벌였던 양심수니 고문이니 하는 것만 생각해요. 그러나 인권이란 노동받을 권리, 교육받을 권리,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등 훨씬 넓은 의미의 권리입니다. 한마디로 자원의 배분이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생각하는데, 특히 현 정치질서에서의 인권은 진보와 충돌합니다. 세계가 근본적으로 계급갈등을 축으로 돌아가기에 계급지배와 계급피지배라는 모순이 사라지기 전에는 보편적 인권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하면 “그럼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하고 되받아치는 사람들의 저의를 안다. 우리 사회에서 ‘…주의자’라고 뚜렷이 밝히는 일이 또하나의 옥살이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인권운동가로서 인권 침해 사례를 해결해가는 것으로 자신을 평가해달라고 했다. 서준식씨가 옥 밖에서 벌이는 인권운동은 인권운동사랑방이 그 중심에 있다. 성균관대 앞 건물 4층, 인권자료들로 발 디딜 틈없이 빽빽한 사무실에서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인권 전문 팩시밀리 신문인 '인권하루소식'을 냈고, 인권정보자료실을 열었으며, 인권교육을 시작했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에 관한 민간보고서를 만들도록 한 것이나, ‘유엔 어린이·청소년 권리조약’에 관한 민간보고서 사업을 일군 것도 인권운동사랑방이 해낸 큰 일들이다. “1천호를 넘긴 '인권하루소식'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딱 좋은 형식이지만 인권단체서 내는 뉴스레터라는 정도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월간 인권지를 내서 인권 이념을 적극 내놓을 수 있도록 할 겁니다. 글을 쓸 만한 전문가가 없는 게 어려운 점인데 진보적 인권운동을 이해하는 이들을 찾아내 같이 고민하며 글을 써나갈 작정입니다.” 그는 20세기에 퍼진 인권 개념이 아직도 자본주의 국가가 주도한 자유주의 전통 위에 서 있어, 몰락한 소련이며 동유럽 인권상황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게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무너질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무너지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도매금으로 무시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우리가 언젠가 얘기해야 할 북한의 인권문제도 전혀 다른 사회체제를 어떻게, 어떤 시각으로 접근하고 평가할 것인지 정치적 의도 이전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인권운동을 한다는 건 참 어려워요. 억압만 있지 도움은커녕 제대로 된 비판도 없습니다. 인권이 뭔지 알아야 해먹죠. 또 인권운동이란 게 민가협 어머니들이나 하는 일이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식의 시선도 있어요. 우리 정서가 너무 제도 정치적인 쪽으로만 편향돼 있다는 증거지요. 인권을 외쳤지만 그건 정권타도의 구호였을 뿐입니다.” “초·중등생들에게 인권교육” 열망 서씨는 냉전이 종결되고 정치적 대립이 약화된 지금, 지구촌에 인권운동의 소리가 커져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여러 학문 분야를 수평으로 꿰뚫는 철학처럼, 인권운동이 여성·노동 등 점차 파편화되고 자기 운동논리에 갇히기 쉬운 여러 운동을 인권 전문성으로 연대하고 맺어줄 수 있는 접착제와 같은 구실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가 젊은이들을 모아 5년쯤 훈련시켜서 유능한 인권운동가들을 키워내는 걸 꿈꾸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인권운동의 과학화와 계획화를 위해 자료실을 더 튼실히 꾸리고 인권교육에 힘을 기울이려는 그의 내심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특히 고등학생들, 더 내려가 초·중학생들에게 인권교육을 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다. 서준식씨는 “감옥이 제일 느리게 변하는 곳”이라고 했다. 정부 예산도 감옥이 가장 뒷전이라는 것이다. 그는 “만약 저를 받아줄 만한 정권이 있다면 감옥에 관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감옥학’이란 게 있다면 그는 이미 전문가가 아닌가. 자신의 ‘감옥관’이라며 덧붙인 그의 말은 “악법이 나쁘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 우리 모두 감옥으로 가자”는 외침 같았다. “앞으로 한 20년 더 산다고 보면, 서너번쯤 더 감옥에 갈 각오가 돼 있습니다. 내가 감옥에 갈 때마다 나와 내 가족들은 큰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반(反)인권세력에 더 큰 상처를 되돌려주는 겁니다. 나의 불복종이 정치권력에 얼마나 큼직한 상처를 내는지, 그 사건들이 모여서 먼 미래에 어떤 악법 하나가 사라지는지, 그게 내 불복종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전통 인형작가 임수희 조선5백년, 인형이 나가신다 대소쿠리에 갓 쪄낸 고구마를 담아 내놓는다. 살짝 벗겨진 껍질 밑으로 드러난 노란 살점이 구수해 보인다. 낯선 손님을 향한 마음새가 고맙다. 입맛이 심심할까 죽염으로 간까지 맞췄다니 문득 미안함이 스친다. 우연 히 들른 외딴집에서 뜻하지 않은 친절을 받은 기분이다. 보랏빛 치마 사 이로 코를 내민 주인의 깜장 고무신은 정겹기만 하고. 그 첫인상이 깨질 까 괜히 한동안 눈치를 봤다. 어렸을 땐 인형이 미웠다 임수희. 마흔쯤 됐지 싶다. 15년째 우리를 닮은 인형을 빚고 있단다. 흙 으로 꼴을 빚어 옷을 지어 입히고 붓으로 표정을 그린단다. 그렇게 태어 난 인형들이 은은한 전등불 아래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다. 갓난애를 포대 기로 감싸고 바람 찬 고개를 넘는 여인, 외할머니 옆에 앉아 앵두 달라고 보채는 소녀, 허리춤에 화살집을 늘어뜨리고 산길을 타는 기녀. 언젠가, 어딘가에서 봤음직한데 흐릿하다. 아마도 어릴 적 낡은 동화책에서 언뜻 스쳤던 것 같다. 옥수수 달인 물을 사이에 두고 주인과 마주했다. 찻잔을 든 가느다란 손 마디에서 굵은 옥가락지가 뽀얗다. 인형보다 주인의 살아온 내력이 궁금 하니 탈이다. 수녀원에 든 수녀의 과거를 들추는 것 같아 겸연쩍다. 다행 히 웃음으로 받아 넘긴다. 세상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아주 잊고 살지 는 않는단다. 동네에선 인형 만드는 사람으로 유명세도 만만찮고. 하지만 아무래도 수상쩍다. 경복궁 돌담길이 꺾어지는 한적한 동네에서 철든 인 생의 태반을 인형과 함께 한 사연이란. 우리네 인형이 아름답단다. 그것이 본뜬 옛 사람들 아름다움만큼의 아름 다움이다. 그 예쁜 모습들을 주섬주섬 입에 담는다. 속곳 차림으로 경대 앞에 앞아 쪽진 머리를 매만지는 여인의 섬섬옥수, 호롱불로 눈을 밝혀 책갈피를 넘기는 양반의 지긋한 입매, 화톳불 옆에서 손주에게 군밤을 까 주는 할머니의 주름진 미소. 그 묘사가 환등기를 틀어주는 듯 생생하다. 몸소 겪고, 책에서 찾고, 박물관에서 떠올린 모습들이어서다. 어렸을 땐 인형이 싫었단다. 엄마가 인형을 사주면 다락방에 툭 던져놓고 문을 잠가버렸다. 손수건으로 문고리를 꽁꽁 처매기까지 했다. 엄마가 온 방을 뒤지며 인형을 찾아도 시치미를 뚝 뗐다. 그땐 몰랐는데 이제사 그 지독한 미움을 헤아리겠다. 노란 머리, 파란 눈에 하얀 레이스. 그 낯선 사람꼴에 마음이 질겁했던 것 같다. 어린아이의 감수성치곤 유별나다. 하 긴 커서도 낯선 것에는 냉큼 두어발짝 물러서는 게 일이었다. 마음이 닿 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고질병이란다. 우리의 인형을 찾기까지 숱한 샛길을 헤맸다. 꼭 길잃은 염소꼴이었다. 이리도 가보고 저리도 가보고. 그러다 끝내 바위 밑에서 음매음매 울어대 는. 대학을 나와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좀체 마음이 머물지 않고 떠돌기만 했다.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 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번민하며 뒤척이는 밤이 차곡 차곡 쌓였다. 그러다 가출도 했다. 그때까지 푼푼이 번 돈 1백만원과 성 모 마리아상 하나 달랑 들고 내뺐다. 구슬을 꿰어 봉지쌀로 연명하면서 가족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멀어져갔다. 딸의 방황을 못내 안타까워하시 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선하다. 인형은 도둑처럼 찾아들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어릴 적 선생님을 만났다 . 골목길서 나오는데 다른 골목길서 나오더란다. “네 마음밭을 잘 살피 고 일궈보렴. 내내 정성을 들이면 언젠가는 아주 큰 나무가 자라날 게야. ” 처음엔 알 듯 모를 듯했다. 그러다 어렴풋이 빛이 보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 샘물로 흐르는 작은 기억들이었다. 무명적삼 치마저고리를 입고 댓돌 위에 내려서며 하얀 고무신을 신던 어머니, 행주치마를 두르고 부뚜 막에서 밥을 푸던 할머니, 장날 할머니가 사다주신 꽃고무신을 신고 마당 을 뛰놀던 자신의 모습이 새겨진 내면이 떠오른 것이다. 그걸 그림도 글 도 아닌 인형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게 가장 생생할 것 같았다. 그의 어릴 적 기억은 도대체 흐릿한 법이 없다. 시간을 뚝 잘라 감춰뒀다 다시 펼치는 듯하다. 사냥을 즐기던 아버지를 따라 눈덮인 산길을 걸을 때 발이 푹푹 빠지던 일이며,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길 가운데 생긴 웅 덩이를 어머니가 놓아준 돌멩이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던 일들이 어제 일 인 듯 또렷하단다. 훗날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새기려 했던 것 같지는 않 다. 그저 마음이 통했다고 밖에 딱히 갖다댈 변명거리가 없다. 그런 기억 의 조각들이 인형에 고스란히 담긴다. ‘행상’이라 이름붙인 사연들 애초 인형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소꿉장난하듯 꼼지락꼼지락 헝겊을 만지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은 흙으로 인형을 빚지만 처음엔 헝겊으로 인 형을 만들었다. 거기에 옷을 지어 입히며 손끝을 다듬었다. 그렇게 만들 어진 인형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어엿한 화 랑에서 전시회도 열었고, 인형도 하나둘씩 타인들에게 시집보냈다. 그리 고 소중한 인연들이 찾아들었다. 조선시대 전통머리의 모양새며 옷소매에 끝동다는 법이며 신분에 따른 신발의 색깔 등을 일러주는 스승을 만나 인 형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전통옷을 짓는 바느질도 배우고 조선시대 복식 에 대한 이론도 접했다. 인형이 만들어지기까지 보통 2개월에서 3개월이 걸린다. 생명없는 것들이 지만 아이를 낳는 여인네와 같이 배앓이를 한다. 인형이 하나 나오면 몸 의 진이 다 빠져나간다. 아이가 옹알이하듯 인형이 들려주는 얘기들이 그 때 위안이 된다. “말 못하는 사람이 어느 날 말문이 트인다면 아마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쏟아낼 거예요. 인형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형의 그런 사연들이 ‘행상’이라 이름붙인 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살짝 곰보인 아낙이 행상하다 벙어리 남자를 만나 화촉을 밝혔다. 아낙 은 늦게 얻은 두살배기 딸아이를 들쳐 업은 채 머리엔 생선 양푼을 이고, 벙어리 남편은 지게에 새우젓을 지고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골목길을 나 선다. 아낙이 벙어리 남편을 대신해 외친다. 생선 사려! 새우젓 사려!” 며칠 전부터 조선 5백년 역사를 인형으로 재현하는 꿈을 꾼다. 옛 사람들 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즐거움이 살아 있는 인형들이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우리의 순백한 멋과 향기를 느꼈으면 좋겠다. 잃어버린 고향과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를 나눴으면 좋겠다. 그 욕심을 오로지 인형의 어깨에 올리자니 미안할 뿐이다.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향도(香徒) 박희준 울향(鬱香)이란 게 있다. 울릉도 남서쪽 바닷가 바위틈에 숨어 자란다는 자단향나무에서 나는 향이다. 그 향이 진하면서도 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향불을 피워도 나무가 탈 때 나는 매운 기운이 전혀 없어 향 가운 데 극품으로 친다. 옛사람들은 그 향을 맡으며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거 나, 거문고 타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다고 한다. 지금은 전설처럼 까마득해진 우리의 향이다. 박희준(41)은 그 향을 찾는, 이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향도(香徒)다. 그는 좀 오지랖이 넓은 편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아무 데서나 일을 벌인다. 시인이고, 차인(茶人)이며, 한지(韓紙) 연구가다. 게다가 이따금 붓글씨도 쓰고 전각(篆刻)도 한다. 모두 그저 제 좋아 하는 일들이다. 남 들은 재주가 많다고 칭찬하기도 하는데, 그는 채신머리없는 짓 같아 부끄 럽기만 하다. 우리 향을 찾는 일도 그래서 내세우고 자랑하지 않는다. 제 몸이 타는 한 가늘게 이어지는 향연처럼 제풀에 꺾이지 않으면 다행이지 싶다. “니 코가 개코다” 애초 향과는 인연이 깊었다. 서당 훈장을 지낸 아버지는 차를 마실 때면 항상 찻상 옆에서 향나무 조각을 태웠다. 책을 읽을 때도, 손님을 맞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집에선 사시사철 은은한 향내음이 끊이질 않 았다. 아버지는 그게 선비의 법도라 했다. 아이는 이따금 찻잔에 어리는 향에 취하기도 하고, 책장 넘어가는 바람에 휘청이는 향연을 좇으며 기분 좋은 잠에 빠지기도 했다. 차와 책과 향은 그에게 자연스러운 하나였다. 10년 전 큰 창피를 당했다. 몇몇 일본인들과 함께 한 차모임에서였다. 그 는 평소 하던 대로 찻상 옆에 향불을 피우고 차를 따랐다. 대흥사 차밭을 들먹이며 차의 맛과 향을 자랑했다. 일본인들은 두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 히 모으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한데 모임이 파 하자 일본인들이 슬금슬금 봉투를 건네는 게 아닌가. “슬픔을 같이 한다 ”는 거였다. 그가 피운 향은 일본인들이 장례나 제사에서 쓰는 일본 향 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시체가 썩어 문드러지는 분향소에서 피우는. 등골 이 서늘했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니 더욱 한심했다. 가게에 나와 있는 향은 대부분 일본 향이었다. 우리 향이라곤 슈퍼마켓에서 파는 싸구려 화학향이 고작 이었다. 행여나 해서 조계사 앞 가게를 뒤졌지만 마찬가지였다. 주인이 좋은 향이라고 꺼내오는 것은 대부분 ‘메이드 인 재팬’이었다. 다행히 우리 향나무로 만든 청학동의 삼선향을 만나 위안으로 삼았는데,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때 돈으로 1백여만원을 주고 한 상자를 사 일본인 친구들 에게 죄다 나눠주고 다시 찾으니 공장이 문을 닫았단다. 우리 향이 사라 진 것이다. (사진/소나무껍질. 솔잎. 향나무 따위를 곱게 빻아 향에 따라 적당히 섞는다. 섞는 차례에 따라 향이 달라진다고 하니 그 오묘함을 짐작하기 힘들다. ) 그는 직접 우리 향을 찾아나섰다. 먼저 선인들의 향방(香方)을 수소문했 다. 규합총서 산림경제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매화향법, 구자 향법 등의 향방을 거기서 찾아냈다.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의 향문화가 번 창했음을 알고 뿌듯할 수 있었다. 선인들은 의례 때는 물론이고, 생활 속 에서 향을 애용했다. 아이들 피부가 짓무를 때 발라주는 땀띠분도 향분이 었고, 여름밤에 피우던 모깃불도 모기쫓는 향이었던 것이다. 목욕통에 쑥 을 넣는 것이며, 창포물에 머리 감는 일, 선비들이 화로에 향나무 조각이 나 솔방울을 묻어두는 일, 송편을 빚어 먹는 일 따위가 모두 생활 속에 숨쉬는 향문화의 흔적이었다. 우리 향은 다시 도둑처럼 왔다 달아났다. 인사동 거리를 지나는데 수상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사흘 굶은 개가 쓰레기통 뒤지듯이” 코를 벌 름거리며 향의 진원지를 쫓아갔다. 허름한 가게였다. 실망하지 않으려고 “일본 향이죠” 하고 물으니 “국산 향”이라는 것이다. 일단 한 상자를 사고 공장에 전화를 걸었다. 저번 공장처럼 문을 닫을까 두려웠다. 아니 나 다를까 전화통 속에선 “이 전화번호는 없는 국번입니다”라는 기계음 만 나왔다. 우리 향이 다시 사라진 것이다. 향을 음미하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스님이 사무실을 찾았다. “너 코가 개코다. 이 향 어디서 구했냐? 일지암 내 사제가 만드는 건데.” 스님의 말은 그 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마침내 사라진 향의 실마리가 잡힌 것이다. 그는 그날로 일지암으로 달려갔다. 스님도 그와 같은 고민을 하다 큰스님에게 비방을 물어 우리의 향을 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께 드릴 좋은 우리 향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 향에 미친 사람과 향을 만드는 땡추 가 만난 셈이다. 그리고 1년 뒤엔 “신통방통하게도” 백제의 향로를 재 현한 장인을 만났다. 향로 만드는 장인까지 합쳐 셋이서 ‘향기를 찾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우리 향은 마음을 다스려준다 우리 향은 형태가 다양하다. 막대 모양의 선향에서 분말 형태의 가루향, 뿔 모양의 뿔향, 몽당연필 같은 편향, 둥근 환향, 모기향 모양의 권향 등 이 있었다. 우리 향은 순식물성에 죽은 것, 마른 것으로 만든다. 장미향 수 1g을 만들기 위해 장미꽃 3천송이를 희생하는 서양의 향문화와는 바탕 이 완연히 다르다. 그리고 우리 향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유혹하는 서양 의 향과 달리 사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차를 마실 때, 경전이나 시를 읽을 때, 서예를 할 때, 대화를 나누거나 거문고를 탈 때, 편안한 잠자리 에 들고 싶을 때 향을 피운 것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우리 향은 약이기도 하다. 울릉도 향나무, 솔잎, 솔방울, 쑥 등이 재료다 . 배고프면 먹어도 괜찮고 얼굴에 바르면 화장품이 되기도 한다. 그런 만 큼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정성이 깃든다. 우선 소나무껍질, 솔잎 , 향나무 따위의 재료를 깨끗이 손질해 말린다. 그것들을 곱게 빻아 향에 따라 적당히 섞는다. 섞는 차례에 따라 향이 달라진다고 하니 그 오묘함 을 짐작하기 힘들다. 다시 향에 따라 녹말전분, 느릅나무풀에 정갈한 물 로 찰질 때까지 반죽해 모양을 뽑아내면 마침내 향이 된다. ‘향기를 찾는 사람들’은 그동안 제법 몸집이 커졌다. 춤꾼에 소리꾼, 그림꾼들이 하나둘씩 우리 향에 취해 모여들었다. 모이면 둥그렇게 둘러 앉아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신다. 흥이 돌면 즉석에서 시도 짓고, 창도 하 고, 춤도 춘다. 노래방에서 노는 것보다 즐겁다. 얼마 전 누군가 “이런 즐거움을 세상에 퍼뜨리자”고 제안했다. 향은 본디 어울리고 나누기 위 해 피우는 것이니 우리만 좋아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게 요 즘 그의 일이 됐다. “우리 향을 피웁시다.” 일요일 인사동에 가면 한복 을 입고 그렇게 외치는 그를 볼 수 있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0일 제 183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채칼장수 고세림 (사진/고세림씨는 채칼과 입담으로 `아메리카드림'을 이루었다. 좌판에 모인 미국인들이 그의 채칼솜씨를 신기한듯 바라보고 있다. ) 고세림(61). 미국에선 ‘미스터 찹찹’(Mr. Chop Chop)으로 통한다. 아메 리카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시장 귀퉁이에 좌판을 벌이고 채칼을 팔았다. 어찌나 입심이 세고 재간이 좋은지 미국사람들이 배꼽을 쥐었다. 우리로 치면 장터에서 “애들은 가라!”며 뱀쇼를 보이던 약장수쯤 될까. 그의 세치 혀가 한번 발동을 걸면 까맣고 하얗고 노란 피부의 사람들이 홀린 듯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팔아치운 채칼이 30만개에 이른다 . 그래놓고는 공치사가 대단하다. “나는 미국사람들을 구했어.” 약장사에게서 산 약을 먹고 효험을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라. 이 약 한 병이면 신경통에 즉효라거나 위장병에서 발기불능까지 만병통치라는 말을 믿은 것부터가 어리석다. 그러니 한낱 채칼장수가 미국사람들을 구했다고 떠벌리는 건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그러나 그는 정색을 한다. 정말이라는 거다. “미국사람들은 고기는 많이 먹고, 야채는 조금 먹는다니까. 양배 추를 손으로 북북 뜯어 마요네즈에 버무려 먹는 게 고작이라고. 그래서 해마다 수백만명이 고혈압으로 죽어가는 거지. 채칼로 야채를 곱게 썰어 많이 먹게 만든 것이 왜 구원이 아니겠어.” 고소 휘말려 미국행… 고혈압 예방법 공개 그의 입담이 쇼로 이어지면 정말 굉장했다. 그가 “다른 사람은 열번 죽 었다 깨어나도 못한다”고 자랑하는 찹찹쇼다. 우선 장바닥에 임시천막이 쳐진다. 벙거지 모자에 하얀 셔츠를 입은 그의 앞에는 회의실 탁자만한 좌판이 놓인다. 좌판 위에는 오이며 호박이며 당근이며 양파 따위의 온갖 야채가 수북하다. 그리고 현란한 채칼 묘기. 일곱가지 칼날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야채를 앞뒤로 쓱쓱 밀어댄다. 가늘게 굵게 얇게 두껍게. 순식 간에 오이는 꽃으로, 당근은 왕관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그러면서 이렇 게 외친다. “백 앤 포스. 백 앤 포스. 킵 언 고잉. 백 앤 포스.” 우리 말로 하면 이런 뜻이다. “왔다리 갔다리. 쉬지 말고 왔다리 갔다리.” 그의 영어는 예나 지금이나 제멋대로다. 대개 이런 식이다. “와이프 프 리티 굿 쿠킹 메이크 해피 패밀리, 허즈번드 프리티 굿 쿠킹 메이크 뱃 패밀리”(아내가 음식을 잘하면 가족이 행복하고, 남편이 음식을 잘하면 가족이 불행하다). 관사나 전치사 따위는 과감하게 잘라내고 알짜배기 단 어들로만 토막토막 이어진다. 채칼 파는 데 충분할 정도만 영어를 배우고 그만둔 탓이다. 그러나 몸짓만큼은 연극배우 뺨친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기를 잡고, 인천 앞바다에 배 한척이 뜨고….” 약장수 처럼 청산유수로 풀어야겠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몸이 고생하는 격이다 . 채칼을 내던지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고, 눈으로 구경꾼들을 쏘아 보고, 그러다 갑자기 말꼬리를 늘였다 자르고. 한판의 걸쭉한 마당극을 방불케 한다. 이쯤되면 그의 말대로 “구경꾼들이 거의 뿅가게 마련이다. ” 애초 채칼은 악연이었다. 사실 미국에 간 것부터가 채칼의 함정에 걸린 것이다. 그 딱한 기억은 연탄을 때던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그는 연탄덮개와 삼발이 석쇠 두꺼비를 하나로 묶은 아이디어 상품을 팔고 있 었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옆에 판을 벌이고 예의 그 입담으로 부엌의 필수품을 선전했다. 그때 백화점쪽에서 채칼도 한번 팔아보라고 권했다. 마침 일본에 수출한 게 반품되어 돌아온 게 있다는 거였다. 채칼 하나를 6백원에 팔면 1백원을 받기로 하고 뛰어들었다. 그게 히트를 쳤다. 공장 에서 금형을 다시 꺼내 채칼을 찍어내야 할 정도였으니. 그때 채칼 회사 에서 “당신은 정직원도 아니니 50원만 먹으라”고 협박을 해왔다. 고집 부려봤자 법으로도 지고 돈으로도 지고 주먹으로도 진다는 거였다. 울화 통이 터져 채칼을 직접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러다 특허침해로 고소에 휘말려 1년 동안 고생을 했다. 미국은 그래서 도피처였다. 50달러와 채칼 다섯개만 달랑 들고 요리사로 유람선에 탔다. 월남전 당시 건설회사 식당에서 콩나물국을 끓여본 게 요리경력의 전부인 그였지만 미 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루에 1천5백명분의 스프를 끓이고 퍼주고 하다보니 저녁이면 녹초가 되곤 했다. 결국 한달 만에 미국땅에 내렸다. 그리고 불법체류. 채칼로 망했으니 채칼로 흥하리라 다짐하면서 온갖 설움과 수모를 견뎠다. 경찰서 앞에서의 위기일발은 지금도 아찔하 다. 채칼 팔 욕심으로 앞뒤 재지 않고 차이나타운에 자리를 편 게 화근이 었다. 20층짜리 건물 앞에 자리를 잡고 “백 앤 고우”(그때만 해도 백 앤 포스가 맞다는 것을 몰랐다)를 외치는데 육군 대위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오는 거였다. “당신 와이프 이거 할 줄 모르지.” 농을 던졌다. 그 랬더니 사내가 씨익 웃으며 사라지는 게 아닌가. 순간 아차했다. 줄행랑. 건물은 경찰서였고 사내는 경찰서장이었던 것이다. 그의 찹찹쇼는 미국에서도 명물로 떠올랐다. 신문과 방송에서 인터뷰가 쇄도했다. 중학교에 초청돼 쇼를 한 기억은 지금도 흐뭇하다. 점심을 먹 고 쉬고 있는데 한 신사가 다가와 꾸벅 인사를 하더란다. 중학교 교장인 데 학교에 와서 찹찹쇼를 해달라는 거였다. 우리로 치면 가정시간 일일강 사로 초청된 것이다. 학생들 앞에서도 걸쭉한 입담을 뽐냈다. 구멍만 숭 숭 뚫린 미국식 채칼을 쇠의자에 내동댕이치며 호통을 쳤다. “이거 봐. 칼날에 녹이 슬었지. 너희들 손도 이렇게 녹슬게 하지 마라. 손이 녹슬면 머리도 녹슬어. 그러나 찹찹하면 손에 녹 안 슨다.” 그랬더니 교실이 찬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지더란다. 김선달식 ‘찹찹쇼’에 매스컴도 관심 그는 미국의 주부들에겐 ‘허즈번드 킬러’라고 호통친다. “당신들은 다 남편잡는 여자들이야. 음식에 고기 많지 달걀 많지 버터 많지. 남편이 그 렇게 콜레스테롤 덩어리를 먹는데 배겨나겠어.” 그러면서 스스로를 ‘콜 레스테롤 킬러’라고 불렀다. “내가 콜레스테롤을 잡는 3가지 비결을 알 려주겠으니 잘 들어. 첫째 화내지 마. 둘째 사람 미워하지 마. 셋째 야채 많이 먹어.” 한마디로 채칼 많이 사라는 말이다. 장사수완도 이 정도면 가히 봉이 김선달 수준이다. 그는 평생 외판원의 길을 걸었다. 부모가 4·3사건의 희생양이 된 뒤로 전국을 떠돌며 물건을 팔았다. 제주에서 다방 차 끓이는 심부름꾼, 식당 보조로 일한 게 월급쟁이 경력의 전부다. 진해로 나가서는 담배를 팔았고 , 서울로 올라와서는 감독 시나리오작가 영화배우 등을 상대로 책을 팔기 도 했다. 학교라곤 중학교 문턱을 밟아본 게 고작이다. 그러나 사는 공부 는 제대로 했다고 자부한다. 그 긴 외판원 인생에서 가장 값진 걸 깨쳤다 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 대접받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다. “풀빵을 굽는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남보다 다르게 풀빵을 굽지 못하는 게 부끄러운 것이여.” 3년 전 미국에선 팔 만큼 팔 았다고 판단해 한국에 돌아온 채칼장수 고세림의 호통이다. 사진 이종찬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04일 제 173호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화가 신학철 민중미술은 초연하다 (사진/동학의병으로부터 6·10 항쟁의 넥타이부대까지 역사의 강을 타고 흐르는 사람들을 그는 그림에 담는다.) 그는 막 밭에서 일하다 흙을 툭툭 털고 둘둘 걷었던 바짓단을 내리고 성큼성큼 걸어온 농부같다. 아니면, 뜨거운 햇볕 아래 시커매진 얼굴 위로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쓱 소매로 닦은 뒤 안전모와 목장갑을 벗어놓고 달려온 노동자같다. 그가 하루내 일하는 곳은 금천구 시흥4동 ‘그림일터’라 이름붙인 작업실. 미술노동자 신학철(55)씨는 해뜨면 화실에 나가 앉아 우리들의 90년대가 이렇게 흘러가도 되느냐고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을 화폭 위에 담는다. “광주의 주검들이 절 안 놔 주네요. 자료 사진 속에서 억울해 눈 못 감고 널부러져 있는 그 시신들이 날 꽉 붙들어요. 광주의 죽음, 엄청난 힘, 난 그들을 제대로 그리기 전엔 풀려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의 신화는 사그라들었지만…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초혼곡' 등 그가 그린 광주 연작들에서, 시체는 누워있지 않고 위로 솟구치듯 서있다. 그의 그림들이 흔히 그러하듯, 불기둥처럼 치솟는 죽은 자들의 몸은 산 자들을 압도해온다. “누워있는 걸 세우니까 힘있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요. 처참하게 죽었지만 아름답게 그리고 싶어요. 전라도 사람들은 징그럽다고 싫어하지만, 난 이 그림들이 딱 내가 해야할 몫인 것처럼 느껴져요. 그 사람들 입으로 말 못하는 거 내가 해줘야지요.” 신학철은, ‘민중미술’이 그러하듯, 이 시대가 잊어가고 있는 이름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이제 와서 당사자들이나 동시대인들이 그 이름 부르기를 어색해하거나, 쑥스러워하거나, 착잡해하는 이름이다. 82년 핵폭탄같은 '한국 근대사' 연작을 들고 미술계를 뒤흔들며 등장했던 그의 신화는 사그라들었다. 82년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으로 ‘오늘의 작가’ ‘제1회 미술기자상’을 휩쓸었고, 91년 제1회 민족미술상을 받았던 그에게 쏠리던 뜨거운 시선은 식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 그는 초연한 듯 하다. 거대한 불기둥 또는 회오리 바람 속에 녹아들어간 한국사의 수많은 인물과 도상들은 빛이 바라지 않았다. 과거는 죽은 것이 아니고, 지나간 것도 아니다. 적어도 그의 그림들 속에서 그들은 아직 불꽃을 튕기며 타오르고 있다. “95년작 '금강'에선 동학부터 6월 대항쟁까지, 신동엽 시인이 겪지 못한 현대사까지 두루 아우르며 역사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행하는 검열에 주눅들린 걸까요. 80년대란 공간, 치열한 운동권의 울타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그림들이지만, 정말 ‘우리들의 80년대’는 그렇게 스르르르 눈사람 녹듯 사라져버린 걸까요.” 그를 시흥동 산동네에서 저자 거리로 다시 불러낸 건 우습게도 '모내기'란 그림이다. 지난 3월13일 대법원은 이미 1,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모내기'를 검찰의 상고이유를 받아들여 유죄를 인정,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지법 합의부로 돌려보냈다. 무죄 판결을 받고 압수된 작품을 되찾으리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법정을 찾은 신씨는 이 어처구니 없는 판결 앞에서 잠시 황당했다. 89년 ‘불온한’ 내용을 담은 이적표현물 혐의를 썼으나 무죄를 받았던 작품이 이제 98년에 와서 다시 유죄 판결을 받는 역상황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그림은 내 고향 경북 금릉을 그린 겁니다. 봄이면 파란 보리밭이 펼쳐지고, 집집마다 살구나무가 곱던, 그림같은 마을이었지요. 신씨와 김씨가 반반쯤 섞어 살았는데 모두들 의가 좋아 법없어도 큰 소리 한번 안나고 살던 곳이었어요. 고향에 갔다가 집안 형님이 써레질 하시는 걸 보고 우리 사회도 저렇게 시원하게 온갖 통일 방해하는 것들 싹 쓸어내고 함께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린 겁니다.” 그런데 공안검찰 눈에는 살구나무 고운 초가집은 김일성 생가, 추수 끝낸 평온한 들녘은 북한으로 보이고, 온갖 매판자본과 미국·일본의 쓰레기 문화가 판치는 그림 아래 부분은 남한으로 보였다. 어린 시절, 신씨에게 무릉도원으로 보였던 고향 그림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불온한’ 것들을 투시해내는 검찰의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라운 비약을 거쳐 남북 분단도로 둔갑해 버렸다. “80년대를 같이 뛰었던 동료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풍자전(4월29일∼5월5일 복합문화공간 이십일세기)을 열어주어서 참 오랜만에들 함께 모였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게 사실은 거북스러워요. 후배들은 이런 싸움이라도 없으면 뿔뿔이 흩어져 자기들 편안한 그림들이나 하고 있을텐데 모처럼 정신을 가다듬는 뜻이 있다고 의미를 두지만, 전 어째….”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역사물이 끝났다”고 짐짓 말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지금 하고 있는 역사화로 이어졌다. “'옆으로 가는 한국 현대사'를 그리고 있어요. 이상하지요. 역사적인 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했던 소재들을 다룰때는 그림이 저절로 위로 솟구쳤는데 서민들을 등장시키니까 화면이 자연스레 옆으로 눕네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졸부, 복부인, 지존파, 소매치기 등 온갖 잡초같은 인생들이 다 나오다보니까 오히려 우리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한 자리에 수평으로 나란히 서니까 지난 40여년 한국 사회를 밀어온 힘이 화면에서 들끓는 거에요. 군부독재의 폭압과 재벌들의 횡포 밑에서 생존을 위해서 아귀다툼하던 것, 그 엄청난 소화불량이 괴기한 에너지가 된 거지요.” 사진처럼 박아낸 그림들 그의 그림들에서 꿈틀거리는 사람들은 모두들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의 회화는 이야기책이요, 역사책이다. 거창한 논리나, 사기치는 은유나, 숨은 그림 찾기같은 상징도 없다. 기록 사진들, 잡지 화보들, 광고지, 신문 사이에 끼어오는 전단들이 다 그의 그림들 속에 모여앉는다. 시대가 그대로 들어앉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살아가며 자기 눈이 확인한 것을, 그대로 박아낸 사진으로 한 겹 더 확인해서 그렸다. 아마도 80년대의 민중미술이 나중에 평가받는다면, 그의 이 정직함은 다른 어떤 생경한 구호보다 앞서 놓일 덕목이 될 것이다. “80년대를 보내고 나니 동지라 부르던 사람들도 여러 가닥으로 흩어지네요. 그 시절을 등에 업고 큰 명망가 미술가도 있지만, 밤을 새며 등사판을 밀고 시위현장에 쓸 그림들을 그리던 젊은 친구들은 어디로들 사라졌는지…그들에게 참 미안해요. 그런데 세상이 바뀌긴 바뀐걸까요.” 그는 잊혀졌다 엉뚱한 망령을 불러내며 살아난 그림 '모내기'의 사진 앞에서 잠시 말을 잊었다.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한국의 인디애나 존스 윤철중 인디애나 존스. 챙달린 모자에 사파리를 입고 허리춤엔 채찍을 차고 성서 의 비밀을 쫓는 할리우드의 모험왕이다. 윤철중(62·상명대)교수를 그렇 게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몇천년 전 하늘과 땅과 사람의 비밀이 깃든 신 화의 흔적을 찾아 무시로 여행을 떠나니. 그 길에서 아찔한 모험을 만나 고 예기치 못한 고초를 겪기도 한다. 그때 행장이란 게 초라하기 짝이 없 다. 낡은 삼국유사 사본 한권과 꼬깃꼬깃한 지도 한장과 카메라 두어개 . 하긴 단군을 찾아 혁거세를 찾아 탈해를 찾아 떠나는 길에 더이상 무엇 이 필요하랴. 학문의 길 뒷골목에 숨어있던 ‘신화’ 신화는 덫이었다. 학문의 길 후미진 곳에 숨어 있다 30년 인생을 나꿔챘 다. 국문학을 전공한답시고 향가에 마음을 쏟은 게 낼름 미끼를 삼킨 꼴 이 됐다. 향가를 풀다보니 자욱한 안개가 발목을 잡았다. 이제껏 향가의 미로를 안내해온 불교라는 지팡이로는 한걸음도 더 나갈 수 없었다. 향가 에는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 선인들의 정체모를 기억이 녹아 있었다. 불교의 껍질을 벗기면 그 기억의 조각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삼국 유사 기이편에 실린 신화들이 그 열쇠였다. 먼저 탈해를 찾아나섰다. 용성국(龍城國)의 왕자로 가락국(駕洛國)을 거 쳐 계림(鷄林)의 동쪽 바닷가 아진포(阿珍浦)에 닿았다는 신라 4대 임금. 대체 그는 누구일까. 그리고 아진포는 어디일까. 역사학자도 아니고 고고 학자도 아닌 그로선 일단 자료를 섭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른바 대가라는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혼란스럽 기만 했다. 아진포만 해도 누구는 지금의 영일(迎日)이라 하고, 누구는 감포(甘浦)라 했다. 한 일본학자는 하서리(下西里)라는 마을이라고 했다. 조선조에 나온 읍지(邑誌)를 훑고 지도를 뒤져도 아진포는 몽롱했다. 김 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아예 이름조차 없었다. 마지막 남은 길이 직접 찾아가보는 거였다. 학자들이 거명한 영일과 감포 , 하서리 일대를 무턱대고 헤맸다.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기약없는 유 랑이었다. 버스도 닿지 않는 길을 걸어 전설의 고향을 더듬어나갔다. 그 러다 행운을 만났다. 하서리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나아리(羅 兒里)란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삼국유사 혁거세 신화에 내 아(乃兒)라는 지명이 나온 터라 귀가 솔깃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아리 주민들은 마을의 옛이름이 아진포였다고 기억을 토해냈다. 그러면서 삼 국유사 에는 언급도 안 된 새로운 이야기까지 들려주는 거였다. 마을 앞 갯가에 ‘홈바위‘라는 돌섬이 있고, 탈해가 그 바위로 올랐다는. 그는 만세를 부르고 말았다. (사진/신화의 흔적을 좇아 30년 외길을 걸었다. 향가의 정체모를 표현. 역사적의 몇글자가 유일한 나침반이었다. ) 그때부터 그의 험난한 신화찾기 여행이 시작됐다. 나아리에서 돌아오자마 자 포니 자동차를 샀다. 신화가 깃든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눈으로 확 인할 생각이었다. 향가의 정체모를 표현, 역사책에 실린 글자 몇개가 유 일한 나침반이었다. 그 나침반이란 게 그를 고생길로만 이끌었다. 바닷가 를 돌며 사진을 찍다 간첩으로 몰려 봉변을 당하기도 했고, 투기꾼으로 몰려 눈총을 받기도 했다. 자갈길을 달리다 기름통이 깨져 차 밑에 기어 들어가 껌으로 땜빵하는 곤욕도 치렀다. 신화의 현장들은 지도에서도 사 라지고 노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 들을 카메라에 담고 일일이 기록을 남겼다. 온 산을 이잡듯이 뒤지고도 허탕을 쳤을 땐 돌아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몇천년 전 신화의 흔적들이 온전할 리 없다. 국토를 휩쓴 개발 바람에 신화를 간직한 유적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 었다. ‘홈바위’만 해도 이제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근처에 원자력발전소 가 들어서면서 방파제를 쌓는 바람에 토사가 밀려와 바위섬을 삼켜버렸다 . 태풍 사라가 몰아쳤을 때 잠시 본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처용의 신화 가 깃든 ‘처용암’은 근처에 온산공단이 생기면서 날로 황폐해지고 있다 . 나루터가 있고 마을이 있던 한적한 풍경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혁거 세의 신화가 숨쉬는 샘 ‘동천’은 아예 콘크리트로 메워졌다. 알에서 나 온 혁거세를 목욕시켰다는 이 샘은 흔적조차 없고, 고목 한그루만이 위치 를 기억케 한다. 이런 신화의 자리들은 이제 그의 사진첩에 남아 있을 뿐 이다. 필름 아낀답시고 많이 찍어두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술독에 흘려 보낸 청춘 학자로서 그는 이만저만한 늦깎이가 아니다. 처음엔 의대를 진학했다. 해 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힘든 시절을 보내다 보니 먹고 살 방편이 급했다. 그러나 그게 실수였다. 끼니도 거르는 판에 제때 등록금을 댈 수가 없었 다. 실험실서 교수를 도와주며 근근히 생활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결국 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그게 너무 분해 등록금을 구해 4년 동안 봄 마다 학교를 찾아가 떼를 썼다. “돈 없어 잘렸는데 돈 가져왔으니 받아 줘야 하지 않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새 20대 청춘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할 수없이 문과대에 편입한 게 또 실수였다. 고등학교 때 막연히 품었던 시인의 꿈을 쫓았지만 허사였다. 이제는 의사가 된 친구들과 어울려 하루 가 멀다하고 술로 밤을 지샜다. 대학원에 들어가 고등학교에 전임 자리를 얻은 뒤론 학업을 완전히 때려치웠다. 월급을 타면 무교동을 휩쓸며 돈 한푼 남지 않을 때까지 술독에 빠져 살았다. 한달 내내 맥주를 먹어도 돈 이 안 떨어지니 신날 수밖에. 결국 대학원에서도 제적. 뒤늦게 등록금 내 고 입학금 내고 해서 석사를 마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30대 늙은 청춘 도 그렇게 지나갔다. 그의 신화찾기 여행은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그는 신화에 민족의 이동경로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탈해와 혁거세, 그리고 단군신화에서 까 마득한 옛날에 있었던 민족의 형성과정을 보는 것이다. 만주벌판을 가로 질러 백두산을 넘어 한반도에 정착한 선인들의 궤적을 신화에서 더듬다보 면 시간의 흐름을 잊기 일쑤다. 그 역동적인 선인들의 삶을 짐작하기도 벅차다. 앞선 문물을 갖고 나타난 이방인들과 그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 물을 창조하는 토착민들의 생동하는 어울림. 그걸 풀어내는 여행길에서 그는 문득 발길을 멈추고 옷깃을 여민다. 그는 얼마 전 30년 신화찾기 여행의 열매를 담은 논문집을 냈다. 친구들 한테 책 나왔다고 하니 “남들 안 하는 것 하느라 고생했다”며 웃더란다 . 사실 신화라는 게 학계에선 인기없는 품목이다. 돈도 안 되고 관심도 끌지 못한다. 그때 이렇게 자위했다. “남들 안 하는 것 하니 속은 편하 다. 남들 다 하는 것 하면 얼마나 말이 많겠느냐. 돈 벌려면 경제학하지 왜 국문학 했겠어. 대학교수해서 밥 굶지는 않으니 내길을 가련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무교회주의자 노평구 (무교회 신앙은 성서의 가르침만을 따른다. 성서를 가르치고 배우는 게 곧 예배다. 사진 오른쪽이 노평구씨). 그들은 교회를 찾지 않는다. 그들이 일요일마다 모이는 곳에는 십자가가 없다. 성가대도 없고, 헌금주머니도 없고, 주보도 없다. 목사니 신부니 하는 설교자도 따로 있지 않다. 회의실에나 어울림직한 길고 네모난 탁자 와 딱딱한 의자, 그리고 성경이 그들 모임의 전부다. 그들은 물론 찬송을 하고, 기도를 올리지만, 그것을 예배라 부르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교회를 갖지 않고, 날을 정해 예배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다. 세상은 그들을 ‘무교회(無敎會)주의자’라 부른다. 교신, 함석헌… 그리고 노평구 노평구(85). 세상에 무교회 신앙인들의 존재를 아는 이가 드무니,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이름을 아는 이 역시 많지 않다. 신앙잡지 성서 연구 발행인이란 명함을 갖고 있지만, 그 또한 세상의 이목에서 멀기는 마찬가지다. 책은 많이 찍을 때도 1천부를 넘지 않았고, 지금은 4백여부 를 헤아리는 정도다. 무교회 신앙에 대한 명상과 일기로 다달이 30쪽 안 팎을 채우며 반세기를 이어온 게 대견할 따름이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이 땅에서 면면이 맥을 이어온 무교회 신앙처럼, 생색을 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무교회 신앙은 본디 일본에서 싹텄다. 성경이 신앙의 알맹이고, 의식은 성경에 붙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사상이 핵심을 이 룬다. 그에게 교회는 서양에서 기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 에 불과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부수었듯이” 그도 세속의 교회를 거부했다. 그의 사상은 김교신, 함석헌 등을 통해 이 땅에 무교회 신앙운동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런 스승들에 대한 늙은 제자의 기억 은 흠모에 가깝다. “김교신 선생이 흥남질소비료공장 노동자숙소에서 일 하시다 전염병으로 돌아가신 뒤 서재를 정리하다 보니 책꽂이마다 영자신 문이 가득합디다. 태평양전쟁의 와중에서도 세계의 흐름을 읽고 계셨던 거죠.” 그는 1912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국경에서 멀지 않던 곳이라 문 물교류가 왕성했다. 서양인들이 세운 교회가 있었고, 그것을 비웃는 사회 주의 혁명가들의 학교도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교회로 기울었 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못마땅해 했지만, 억지로 떼놓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한방서적을 소리내어 읽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의술을 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주변 사람들이 이제 병에 걸리면 고쳐줄 의사가 없구나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요즘 그런 아버지에게서 신앙인의 심성을 발견한다. 서울 유학생활은 사회주의와의 싸움으로 치열했다. 배재중학을 다니던 그 는 기독교 정신으로 사회주의 이론과 맞섰다. 웬만한 소학교 아이들도 사 회주의 서적 한두권은 보자기에 넣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는 주변의 권 유와 유혹에도 끝내 그걸 거부했다. 3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해 1년 정도 옥고를 치렀지만, 그것 역시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그 는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놓고 세계의 지성들이 벌이는 논쟁을 읽으며 이 성과 신앙을 단련하곤 했다. 옥살이를 마친 그의 삶은 사회운동으로 발전한다. 이미 학업의 길은 막힌 터였다. 친구 두어명과 함께 지금의 마포구 도화동 세칭 토막촌(土幕村) 에 들어갔다. 한강변에 땅굴을 파고 살던 빈민들의 마을에서 그는 아이들 을 상대로 학교를 열었다. 오전반, 오후반에 야학반까지 3백여명의 아이 들을 가르치는,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중변소 를 치우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 다.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피로가 몰려오곤 했지만, 희생적인 노동이 주는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운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희생으로 사람들이 바뀌길 원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바람을 비웃었다. 폭력이 난무하는 싸움 과 노름, 그리고 잔인한 범죄에 길든 그들의 삶 앞에서 그의 운동은 초라 했다. 그는 좀더 근본적인 사회개조를 갈구했다. 그때 김교신이 간행하던 무교회 신앙연구지 성서조선 을 만났다. 그건 어둠에 갇힌 그에게 햇살 같은 탈출구였다. 그건 믿음에 기반한 도덕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김교신 의 안내로 일본에 가서 우치무라의 제자인 쓰카모토(塚本虎二)와 야나이 하라(矢內原忠雄)로부터 무교회 신앙을 공부한다. "미움이 살인, 탐욕이 도둑질” 그는 평생을 도덕에 매달렸다. 성서조선 의 뒤를 이어, 1946년 성서연 구 를 내기 시작한 이래, 그는 줄곧 도덕 위에 선 국가를 꿈꿨다. 해방 후 50여년 동안 그의 얄팍한 잡지는 양심, 도덕, 자각 등의 낱말로 점철 돼 있다. “그게 세상물정에 어두운 허튼 짓”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가 말하는 도덕이란 게 여간 엄혹한 게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그의 훈계는 그저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따위가 아니 다. 그에게는 미움이 살인이고, 탐욕이 도둑질이고, 음욕이 곧 간음이다. 그렇다고 그가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외계인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현실 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신앙인으로서 발언이 필요할 때, 그는 성서연구 를 통해 격렬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정치 권력이 무서워 교묘하게 돌려쓰지도 않고, 그저 읽기 좋으라고 문장을 꾸 미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을 연대순으로 읽으면 마치 종교적 입장에 서 서술한 역사비평을 보는 것 같다. 예컨대 군사정치에 대한 그의 비판 은 이렇다. “나는 요새 3군참모가 연일 정사로 분주한 것을 볼 때 무서 워 밤에 잠이 잘 안 온다. 거짓말과 불화와 권모술수와 욕심을 미워하시 는 하나님이 무서워서다. 국사에 임하는 자 오로지 사심없이 거짓말을 말 고 정직하게 하라.”(1963년 3월호) 베트남 파병에 대한 비판은 장렬하기 조차 하다. “도대체 정치가는 물론 전체 지도자가 국민에 대한 사랑, 동 정이 없다. 아! 저들에게 따뜻이 의식주는 못 줄망정, 그래 자국지란에서 겨우 숨을 돌리고 피어나려는 백성을 또다시 수만리 외국에 몰아내는 것 이냐.”(1965년 7월호) 그들은 지난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집회를 가졌다. 참석자는 10여명에 불 과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 땅 무교회 신앙의 오랜 전통답게 시종 묵직 하고 엄숙했다. 참석자들은 대개 머리가 희끗희끗했고, 몇몇은 두꺼운 돋 보기 안경을 썼다. 전직 교수, 중소기업인, 중견 관리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도 그 자리에 있었다. 50년 넘게 지켜온 자리다. 그는 그날 나이 를 무색케 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제자들을 다그쳤다. “믿음에서 우 러나오는 선한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속담 사냥꾼 송재선 俗談諧諷有天理. 속담에 해학과 풍자가 깃든 하늘의 이치가 있다. 송재선 (84)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이지 싶다. 어느 교수가 써준 글나부랭이일 뿐 그런 경지를 깨친 것은 아니라고 쑥스러워 하지만 그의 삶이 완연하게 비 친다. 8·15 해방 무렵부터 모으기 시작한 속담이 5만5천여개에 이르니 그걸 층계삼아 한걸음씩 딛고 올라서면 혹 하늘의 이치에 닿지 않겠는가. 그랬더니 어린 아이처럼 얼굴이 빨개진다. “속담이야 그럴지 모르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해서….” 분단에 휘말린 불행했던 18년 본디 재밌는 말을 즐기는 싱거운 위인이었다. 속담에 마음을 빼앗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처음 속담을 들려준 사람의 입담이 너무 구수했단다. 보 통학교 2학년 때 조선어 시간이었다. 책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따위의 속담 몇개가 실렸다. 한학자 출신의 선생님은 신이 났는지 고사성 어를 곁들여가며 속담 보따리를 풀었다. 댕기머리 학동이 천자문 읊듯 속 담을 줄줄 꿰는데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저렇게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조선말도 있었나. 그때부터 일부러 말 끝마다 속담을 붙였 다. “친구들이 덤빌라치면 이렇게 엄포를 놨지. 나한테 까불지마.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8·15 해방은 그의 속담 취미에 불을 지폈다. 일제의 압박에서 막 벗어난 터라 민족의식이 폭발적으로 고양되던 시기였다. 그때 뜬금없이 속담을 발굴하는 것은 민족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벽돌 공장을 운영하던 그는 그날로 속담을 모으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물론이 고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속담 하나 달라고 추근댔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가 그대로 속담이었다. 많을 때는 하루에 수십 개씩 속담을 모았다. 책방을 돌며 속담을 넝마줍기도 했다. 일제 말기에 폐간된 한글학회 기관지 한글 은 가장 탐나는 물건이었다. 책 끄트머리 에 심심풀이식으로 속담이 서너개씩 소개됐기 때문이다. 일제가 종이를 배급하던 시기에 나온 책이라 지면은 20여쪽에 불과했고, 지면 사정에 따 라 속담이 안 나오기도 했지만 그게 어딘가. 그러나 그 뿌듯했던 취미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6·25 전쟁이 그의 삶 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해방 직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그에게 전쟁은 위기일발의 연속이었다. 사업은 둘째치고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었다. 맨몸으로 황급히 삼팔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59 년 북한의 지령을 받고 다시 삼팔선을 넘었지만 이번엔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전교도소에서 18년을 복역하고 나왔을 땐 예순세살의 늙은이가 돼 있었다. 그 사이 세상도 변했다. 말이 곧 속담이던 세대는 거의 사라 지고 대신 영어라는 낯선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세대가 사회를 점령하고 있었다. 다행히 젊어서 배운 벽돌굽는 기술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공장을 운 영하며 터득한 기술이라 오라는 곳이 많았다. 벽돌공장을 설계해주거나 기술을 전수하면서 궁색한 생활을 벗어났다. 그러자 다시 속담 취미가 되 살아났다. 속담은 이제 그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의 입 속에서만 맴돌고 있었으므로 조바심이 났다. 일이 없는 날이면 노인정으로, 양로원으로, 탑골공원으로 달려갔다. 대학 도서관도 이 잡듯이 뒤졌다. 속담 글자가 든 도서 목록을 들고 전국을 돌았다. 나중엔 그게 힘에 부쳐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하기도 했다. ‘속담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얻은 게 그 무렵 이다. (사진/만나는 사람마다 "속담 하나만 달라"고 추근댄다는 그는 전국을 돌며 속담을 모았고 나중엔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하기도 했다. ) 그가 속담을 사냥하는 수법이 재밌다. 일단 탑골공원 가운데 등나무 아래 벤치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곳을 차지한 노인들은 젊어서 힘깨나 썼는지 호기가 여전해 말 붙이기가 쉽지 않아서다. 그러나 공원 주변 벤 치에 앉은 이들은 사정이 다른다. 철지난 꾀죄죄한 양복을 입고 얼굴엔 궁기가 다닥다닥 붙은 그들은 말상대를 고마워한다. 그들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말문을 트고 점심을 대접한다. 점심이라야 우유에 빵이 전부지만 그쯤되면 서로 허물이 없어진다. 그때 넌지시 용건을 털어놓으면 주변에 물어서라도 속담 몇개씩을 건져온다. 전남 장성에서 올라왔다는 한 노인 은 그에게 자그마치 5백여개의 속담을 적은 종이를 건네주기도 했다. 지난 83년 그동안 모은 2만5천7백개의 속담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우리 말 속담 큰사전 . 속담을 모으기 시작한 지 자그마치 40년만의 열매였다. 이제껏 수록 속담이 1만5천개를 넘지 못했던 다른 속담사전에 비하면 정 말 큰 책이었다. 더욱이 거기에는 육두문자로 이뤄진 상말 속담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읽고 배울까봐 일부러 뺐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 꾸 허리를 찌르더란다. 상말 속담도 한번 책으로 내보지. 당신 죽으면 사 라지지 않겠어. 할 수 없이 93년 그래도 너무 노골적인 것만 빼고 상말 속담 사전 을 내놨다. 그게 제법 인기를 끌어 5천부가 나갔다. 그때 용기 를 얻어 속담시리즈를 계속 내놓고 있다. 농어속담 사전 (94년) 여성속 담 사전 (95년) 동물속담 사전 (97년) 그리고 최근 펴낸 주색잡기속담 사전 까지. 속담이 가장 많은 우리나라 그가 지금까지 모은 속담은 5만5천개가 넘는다. 남한 속담이 3만여개, 북 한 속담이 2만5천개쯤 된다. 남한 것이야 평생을 바친 것이지만 북한 것 은 더 모으기 힘들었다. 처음엔 북한의 군지(郡誌)를 들춰가며 찾아냈다. 그게 벽에 부딪히자 이번엔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조총련계에서 나온 책 을 사람을 시켜 사거나 복사했다. 중국의 연변을 통해 중국말로 된 북한 속담책도 사들였다. 훗날 우리 국어연구원에서 펴낸 북한 속담 1만5천개 를 합하니 2만5천개에 이르렀다. 그때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속담이 가장 많은 나라가 아닌가 하고 스스로도 놀랐단다. 그는 속담에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고 믿는다. 옛날엔 농사 교과서였다 고 자랑도 한다. 달력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속담으로 농사법을 전했다는 것이다. ‘찔레꽃 피면 모 심는다’고 했고 ‘늦모는 겨드랑이에 밤송이 를 넣고 심는다’고 했는데 그게 다 농사꾼을 가르치는 법이었단다. 찔레 꽃이 피면 모를 심고, 밤송이 가시가 딱딱해지기 전까지 모심기를 마치라 는 뜻이라는 것이다. 모 심는 시기를 자연에 빗대 가르친 셈이다. 아무래도 죽음을 떨쳐버릴 수 없는 나이라 요즘 마음이 바쁘다. 여든살 전까지는 5개년 계획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2년씩으로 기간을 줄였다. ‘ 늙은이 근력 좋은 것과 겨울 날씨 좋은 것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미래를 점치기 힘들어서다. 죽기 전에 지금까지 모은 속담을 집대성한 아주 큰 사전을 펴낼 생각이다. ‘내일 얘기하면 귀신이 웃는다’는데 그 꿈이 터 무니없이 끝날까 두렵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한복 할머니 오경애 한땀 한땀 새봄을 짓는다 (사진/큰 욕심없이 바늘 따라 실 따라 걸어온 세월. 그는 바느질로 5남매를 다 독립시켜 내보내고 평생을 살아왔다.) ‘타르르르…’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좁은 방을 울린다. 가위, 송곳, 자, 바늘 등이 색색의 천들을 끼고 흩어져 있다. 날아갈 듯 날렵하게 학 무늬가 놓인 연분홍 공단에서 ‘사르륵’ 봄소리가 묻어난다. 이 방의 주인은 봄이 오는 걸 손끝으로 느낀다. 그가 매만진 고운 옷을 떨쳐입고 봄나들이 할 사람들을 위해 그는 긴 겨울을 곱은 손을 불며 바느질을 했다.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 때 영부인이 입을 한복 일습도 그의 솜씨다. 친정·시어머니도 ‘알아주는 바느질꾼’ “옛날루 치문 왕비 아녀.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음을 정갈하게 하구 공을 들였지. 시간이 원제 가는지도 모르게 일을 했어. 해지면 딱 손을 놓구. 늦게 일하면 그 옷 입을 이의 몸에 안 좋다는 옛말이 있어요. 지성으로 했으니깨 맘에 드시겄지 뭐.” 오경애(71) 할머니는 50년 한복 짓던 경험을 온몸에 모아 이희호 여사의 새 옷을 지었다. 그게 지난 가을께부터 일이다. 그가 지은 치마 저고리에 깨끼며 두루마기가 “몸에 딱 붙는다”고 계속 부탁을 해오는 바람에 열일 제치고 꼬박 스무날씩 매달려 바느질을 했다. 올 설날에 이 여사가 입었던 은은한 회색 명주 치마 저고리도 오 할머니 작품이다. 외국에선 새로 대통령이 당선되면 퍼스트 레이디가 입는 드레스를 지은 패션 디자이너가 큰 화제가 된다고 했더니 “난 그런 건 몰라” 하신다. “그저 흐뭇해. 맘에 드신다니 만든 나로선 고맙지. 내 그 양반은 잘 모르지만 굉장히 침착하다고 들었어유. 그려 그런지 사람이 무게있어 뵈더라구. 몸이 깐깐하니 나랑 비슷한 체격이라 칫수 내는 데도 머리를 짜내서 편안히 입으시게 신경을 썼지.” 오 할머니 고향은 충청남도 논산군 화정리. 동네마다 재봉틀이 한대 있을까 말까 한 시절에 밥술깨나 먹는다는 그의 집엔 재봉틀이 있었다. 바느질 잘 하기로 소문난 어머니 덕에 그도 16살 때부터 재봉틀을 탔고, 온 마을 사람들 한복을 어머니랑 둘이 지었다. “그때는 모두들 한복만 입을 때니까 우리 집에 와서 품을 팔거나 곡식을 주고 옷들을 해갔지. 우리 어머니 손이 매워서 내가 일 하나는 제대로 배웠어.” 18살 나던 1945년, 해방되기 얼마 전에 그는 벼락같이 결혼을 했다. 일본군이 젊은 처녀들을 전부 정신대로 끌어간다는 소문을 들은 친정 아버지가 서둘러 혼인을 시켰기 때문이다. 신랑은 초등학교 동창, 시댁은 바로 이웃마을 원복리였다. 바느질만 하고 살라는 운명이었는지 시어머니도 그 동네에서 알아주는 바느질꾼이었다. 새색시가 조용히 침선에만 몰두하니까 아낙네들이 “얼굴하고 몸하고 일하는 게 똑같네”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아 시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았다. “5남매 낳아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았는데 내 나이 37살 나던 해 할아버지가 하던 일에 실패를 보고 살림을 몽땅 날린 거야. 그때 맨손으로 서울로 올라왔는데 뭐 딴 재주가 있어야지. 바느질로 먹고 사는 수밖에.” 60년대만 해도 한복입는 사람이 많았다. 종로통에 있던 ‘종로 주단’에 들어갔다. 주문을 받고 치수를 재는 할머니 밑에 스무명쯤 되는 바느질꾼들이 있었다. 답십리 끄트머리에 셋방을 하나 얻어 가족들 터를 잡은 뒤 먼길을 출퇴근하며 바느질 품을 팔았다. 옷 잘 짓는다는 소문이 나니까 그에게 오는 주문이 늘었다. 직장을 오가는 일이 힘들던 터라 가게를 내기로 했다. 용두동, 금호동을 거치며 한 10년 한복집을 해서 아이들을 키웠다. “많을 때는 댓명씩 사람을 두고 일을 했는데 그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어. 자꾸 몸이 아프드라구유. 결혼 예복이나 잔치옷, 환갑옷이 주가 되니깨 딱딱 시간 맞춰야 되고, 아랫사람 시키면 내 일 품이 안 나온다고 물리구. 병원에 가니까 의사가 과로다, 무조건 쉬어라 해서 한 한달 놀아봤나. 쉬니까 몸이 더 못견디겠드라구유. 일하던 사람은 일을 해야지 당최 놀면 찌뿌드드해서.” 아이 하나를 잃고 4남매를 다 교육시키고 난 참이라 들어앉아서 쉬엄쉬엄 다시 일을 하기로 했다. 골동품이 다 된 ‘싱거’ 미싱 2대가 그의 곁을 지켜주는 벗이다. 명절 때면 놀러오는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는 왜 매일 일만 하세요” 하지만, 그 바느질로 집안을 일구고 평생을 산 그에겐 놓을 수 없는 삶의 끈 같은 것이다. 건강하게 일할 때 제일 행복하다는 오 할머니의 말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바느질의 철학’처럼 들렸다. 한땀, 한땀, 바늘 따라 실 따라 걸어온 순리의 세월 속에 그의 인생이 익어왔다. 그것은 이 땅에서 살아온 ‘어머니의 마음’이다. 자식들 다 독립시켜 내보내고 이제 홀로 바느질하는 그의 마음은 한결같다. “할아버지 돌아가셔서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을 때두, 큰아들이 데모해서 도망다니며 지 아버지 임종두 못보구 고생할 때두, 다 바느질로 이겨냈어유. 바늘 딱 잡고 무념무상 일하고 있으면 그것이 그런다니깨. 욕심부리지 말고 분수껏만 살어라.” “재봉틀 박다 폭 쓰러져 갈껴” 그런 오 할머니에게도 소원이 하나 있다. 그가 평생 닦아온 바느질 공력을 내보이는 일이다. 지난해에는 전승공예대전에 내려고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8폭 모시 치마 저고리를 손으로 지었는데 그만 접수 날짜를 놓치고 말았다. 이웃들이 보고 “할머니, 이게 귀신이 했지 사람이 했소”하고 감탄들을 했다는 옷이다. “우리 한복이 잘 입으면 참 품위가 있어. 제대로 지은 옷엔 옛날 향이 그윽하지. 요즘 한복은 그게 중국옷도 아니고 미국옷도 아니고, 편리할지는 모르지만 우리 고유의 맛이 없어.” 오 할머니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지금도 엄격하게 규칙적인 하루를 보낸다. 바느질이라는 것이 종일 쪼그려 앉아서 구부리고 하는 일이라 밥도 조금씩 소화 잘되게 먹고, 정신이 어지러우면 선이 곱게 안 나오는지라 심신을 편히 가지려 노력한다. “죽을 때까지 눈만 안 어두우면 바느질이 내 인생길이지. 재봉틀 박다가 폭 쓰러져 갈끼어. 그게 대복이여.”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컴뱃 키드’ 이대영 플래툰 이란 잡지가 있다. 전쟁과 무기에 관한 잡다한 정보를 싣는 월간 지다. 거대한 항공모함을 요모조모 분석하기도 하고, 군복의 기원, 군용 기의 종류, 각국의 특수부대, 2차 세계대전의 야사 따위를 소개하기도 한 다. 책 끄트머리 독자란에는 이런 문답이 실리곤 한다. Q: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권총은 무엇입니까. A: 당시 안중근 의사는 벨기 에제 M1900 자동권총과 미국제 S W44 러시안 리볼버를 갖고 있었습니다. 거사에 쓴 총은 M1900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탱크와 철모 속에서 놀던 기억 이대영(42)은 이처럼 시시콜콜한 군사지식을 담는 플래툰 의 편집장이다 . 서바이벌 게임 동호인들에게는 우리나라에 서바이벌 게임을 처음 소개 한 원조로도 통한다. 그렇다고 그가 군대밥을 먹는 전문가도 아니다. 그 의 군 경력이라곤 공군사관학교 중퇴에 특전사 복무가 전부다. 그는 프로 야구에 미쳐 타자와 투수의 각종 기록을 줄줄이 꿰는 열성 팬 비슷하다. 사실 그게 책의 편집방향이기도 하다. “전쟁은 한판의 야구시합이고, 선 수들은 병정일 뿐이다. 야구를 관람하듯 전쟁을 들여다보자!” 이대영은 어떤 영화제목에 빗대면 ‘컴뱃 키드’다. 어려서부터 전쟁놀이 를 즐겼고 비록 모형이지만 무기를 만들고 제원과 성능을 달달 외우는 게 낙이었다. 그건 6·25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은 유년의 추억이기도 했 다. “대구 변두리 깡촌에서 자랐어요. 6·25 때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라 여기저기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죠. 밭에는 탱크가 주저앉아 있 었고 산에는 지뢰 구덩이가 군데군데 패어 있었으니까요. 집에서 철모를 물바가지로 쓰고 박격포 포신이며 탄피 따위가 길바닥에 널려 있던 기억 이 납니다.” 어릴 적 꿈은 장군이 되는 거였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으면 열에 예닐곱은 장군을 꼽던 시절이었으니 탓할 일은 아니다. 요즘이야 컴퓨터 프로그래머, 가수, 모델,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난리지만 그땐 정말 꿈 같 은 얘기였다고 한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나무나 흙으로 무기를 만들기에 바빴다. 소년의 재산목록에는 그렇게 만든 장난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구슬치기나 딱지치기에는 왠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플라스틱 무기 모형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손가락을 꼽으 며 새 모형이 나오길 기다렸고, 용돈이 떨어지면 참고서 산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해댔다. 그런 군사취미는 공군사관학교 입학으로 이어졌다. 야구를 좋아하다 야구 선수가 되기로 작정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나마 육사 해사가 아니었던 것은 전투기를 몰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사관학교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 다. 태권도 연습 도중 코뼈를 다친 게 화근이었다. 전투기 조종사는 신체 적으로 완벽해야 했기에 그만한 흠도 치명적이었다. 전투기를 몰고 창공 을 누비려던 소년의 꿈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대에 진학한 것도 따지고 보면 무기가 맺어준 인연이었다. 장난감 무기 만든답시고 나무나 흙을 주물럭거린 게 제법 손 끝을 다듬었다. 게다가 그림 솜씨는 근방에서 신동 대접을 받았다. 다섯살 때인가, 한 화가가 그 림을 보더니 이 아이를 나에게 달라고 할 정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는 꽤 유명한 화가였다고 한다. 사관학교 가기로 작심한 뒤로 미술공부는 뒷전이었지만 기댈 데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마침 디자이너가 되면 돈을 잘 번다기에 응용미술을 택했다. 늦깎이로 한 학기를 마치고 사병으로 입 대해 3년을 꽉 채웠다. 사관학교 동기들은 임관해 전투기를 몰았지만 그 는 특전사 대원으로 산골짜기를 훑어야 했다. 제약회사 광고장이로 시작한 직장생활은 따분하고 답답했다. 외국의 군사 전문지를 탐독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봉급 타는 대로 일본은 물론이 고 멀리 유럽과 미국에서 나온 군사전문지를 통신판매로 사들였다. 사람 이 뭔가에 빠진다는 게 아마 그럴 것이다. 군사전문지를 보며 무기와 전 쟁을 파고들어가는 것이 일보다 연애보다 백배나 재미있었다. 결혼하고 처가살이 3년 만에 1천1백만원짜리 집을 샀는데 짐이란 게 모두 책일 정 도였다. 그때 속으로 한번 셈을 해봤다. 한권에 평균 만원씩 잡으면 이게 모두 얼마나 갈까. 어림잡아 1천5백만원은 족히 나갈 것 같았다. 집값보 다 비싼 책값에 아내 몰래 웃고 말았다. 직장에 사표를 내고 충무로에 광고대행사를 차렸다. 돈은 안 됐지만 시간 이 엄청나게 남아 돌았다. 그러다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노느니 책 밑천으로 장사나 해볼까. 자기처럼 무기와 전쟁에 빠진 사람들이 분명 히 있을 것 같았다. 3천부면 원가는 뽑으리라 계산하고 도전했다. 그런데 그게 장난이 아니었다. 부업삼아 시작한 게 손익분기점은 멀기만 하고 격 월간인데도 숨이 가빴다. 90년 9월 사무실 문을 닫고 책을 만드는 데 전 념키로 했다. 직원 월급은커녕 필자들의 원고료도 제때 줄 수 없는 형편 이라 어떨 땐 혼자 책을 만들기도 했다. 책은 변변찮았지만 당시 일본에 서 유행하던 서바이벌 게임을 소개한 것만은 지금도 흐뭇하다. 옷장 가득한 군복, 보기만 해도 뿌듯 군복을 수집하는 취미도 그때 생겼다. 해외를 들락거리면서 하나둘씩 모 은 게 옷장에 가득하다. 팔 생각은 전혀 없고 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군 복마다 깃들어 있는 그 나라 군대의 전술적 특성을 읽는 맛이 유별나서다 . “독일군복의 얼룩무늬는 독일의 숲 색깔과 똑같습니다. 독일의 숲은 아카시아처럼 동글동글한 잎사귀가 무성한 잡목이 우거져 거무스름하죠. 헌법에 따라 해외원정이 금지된 군대라 군복도 국내 지형에만 맞게 설계 된 탓입니다. 반면 세계를 작전무대로 삼는 미군복은 만국 공통의 위장색 을 띱니다. 사막, 평원, 숲 따위의 다양한 환경변화에 맞게 표준색을 추 출해 군복에 적용한 것이죠.” 그렇다고 그가 전쟁광은 아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전쟁은 엄연한 역사이기에 피할 수 없는 연구대상이라고 여긴다. “애초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성전이 따로 있 고 더러운 침략전쟁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당시로선 피할 수 없는 선 택의 결과가 전쟁이기 때문이죠.” 전쟁은 그래서 배울 게 가득한 학교이 기도 한다. 하다못해 성공을 꿈꾸는 이들의 처세술로도 읽을 만하다. 목 숨걸고 벌이는 사업이 전쟁이니 인간이 할 수 있는 지혜는 모두 나오게 마련이다. 오히려 그가 보기엔 사람들의 전쟁에 대한 무지가 문제다. “ 전쟁에 대해 사람들이 아는 게 많을수록 전쟁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전쟁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이죠.”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2일 제 176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시인 `제미' 이영철 (사진/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어 그를 부둥켜안고 살았다는 어머니와 함께.) “아아안… 녀어엉… 하세… 요오.” 그는 인삿말을 건네는 것도 힘겨워했다. 몇마디 안 되는 말을 토해내기 위해 온몸을 쥐어짰다. 새까만 눈썹은 애벌레처럼 꿈틀거렸고, 오뚝한 콧 마루로 이어지는 양미간은 아코디언처럼 연신 주름이 잡혔다 펴졌다. 선 이 또렷한 입은 함지박마냥 벌어졌다, 간장종지처럼 오무라지기도 했다. 말이란 놈이 그의 몸 속을 헤집고 세상으로 기어나오는 듯했다. 이영철(3 6)은 그 말로 시를 쓴다. 그는 1급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백일 무렵 느닷없이 경기를 일으켰다. 멀 쩡하던 애가 갑자기 사지를 배배 비틀며 고래고래 악을 쓰더란다. 어머니 는 그런 아들을 안고 약국으로,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허사였다. 사흘 만 에 이마에 팔뚝만한 길이의 대침을 맞고서야 겨우 경기에서 풀려났다. 그 대가로 그는 팔다리의 자유를 잃었다. 걷는 것은 물론이고, 밥 먹는 것도 , 화장실 가는 것도 그에겐 하늘을 옮기는 일이다.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지만… 게다가 그는 혼혈아다. 지금은 빛바랜 흑백사진으로만 남은 아버지는 주 한미군이었다. 연한 초콜릿색 피부에 갈색 눈동자, 잔디처럼 달라붙은 곱 슬곱슬한 머리칼이 아버지를 빼닮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미군부 대에서 일하다 아버지를 만났다”고만 할 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좀처 럼 들려주지 않는다. 태어나 3년 남짓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하는데, 그것도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군복을 입은 사진 속의 아버지는 항상 멋지 다. “아버진/ 나와 어머니를 두고 떠나갔습니다// 때로는 미워도 하고/ 때로 는 증오도 하면서/ 삼십육년을 살았습니다// 허나 이제는 미워하지도 않 으며/ 증오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 사랑한다고/ 이 아들 말하겠습 니다” (그리운 아버지) 이쯤 되면 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장애인, 그것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뇌성마비 장애인에 흑인 혼혈아. 아버지조차 그런 아들을 부끄러워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편지 한통 없고, 간간이 보내 주던 생활비도 끊어버렸다. 사람들은 눈총과 비아냥, 그리고 학대로 그의 동심을 할퀴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손으로 죽일 수도 없어, 부둥켜안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 게 사랑인 걸 안다. “병신이라고 남들이 말하지만/ 어머니는 병신 자식을/ 가슴으로 안으며/ 때로는 모진 채찍으로 훈계하셨고/ 때로는 속상해 하시면서// 이제는 어 머니/ 아픔을 푸세요/ 한도 푸세요/ 제가 어머니를 제일 사랑하니까요” (어머니) (사진/그는 '쓸 수 없어' 시를 '말한다'. 그 지난한 몸부림을 거쳐 삐쳐나오는 시어들을 자원봉사자들이 대신 글로 옮겨준다. ) 그는 집에선 ‘제미’라고 불린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이영철 ’이란 이름은 호적상 이름이다. 이 땅에서 살려면 주민등록증은 있어야 한다고 여겼는지 어느 날 어머니가 불쑥 지어왔다. 이씨란 성과, 영철이 란 이름을 어디서 어떻게 따왔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그냥 듣기 좋고, 부르기 좋으라고 지었다”고 할 뿐이다. 요즘 첫 시집을 내고나니. 그게 제법 유명해졌다. 그렇게 불릴 때마다 한국인이란 도장을 받는 것 같아 흡족하다. 그는 학교 문턱을 밟아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세 상에 내놓는 걸 꺼렸다. “학교에 보내면 아이들이 걔 구경하느라 공부도 못할 텐데 뭐하러 폐를 끼치누.” 어머니는 그 대신 이웃에 사는 정년퇴 직한 교사를 독선생으로 붙여줬다. 그러나 선생님은 한달을 채 견디지 못 했다. “말 한마디 하는데 몇분이 걸리는 아이를 가르치다보니 혈압이 오 른다”는 거였다. 할 수 없이 옆방에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어 깨 너머로 글을 깨쳤다. 일곱살쯤 됐을 때였다. 스물일곱에 처음으로 시를 썼다. 아니 시를 말했다. 연필을 쥘 수 없는 그는 시를 말한다. 예의 그 지난한 몸부림을 거쳐 삐쳐나오는 시어들이다 . 그 시를 어머니가, 교회친구들이, 자원봉사자들이 대신 글로 옮겨준다. 처음에는 그게 시인 줄도 몰랐다. 어린 아들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 과, 세상에 대한 서글픔을 토로했을 뿐이다. 그게 어느덧 대학노트 열권 을 가득 채웠고, 얼마 전 한권의 시집으로 묶였다. “나는 아무한테나 대필을 부탁하지 않아/ 내 마음을 알아야 시키지/ 내 마음도 몰라주는데 어떻게 부탁하니/ 난 아주 자연스러운 게 좋아/ 시라 는 게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워야지/ 시는 내 마음을 나타내는 거거든/ 마 음을 알고, 마음이 나타날 때/ 그게 시라구” (시에 대한 단상) 그는 책과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일요일 교회 가는 게 유일한 나들이인 그에게 그것들은 세상을 보는 창이기도 하다. 삼국지 를 유난 히 좋아한다. 4번이나 읽었다. “책 속에 지혜와 모략이 넘쳐 흥미진진” 하단다. 한국의 명시 니 세계의 명시 니 하는 시집도 즐겨 읽는다. 텔 레비전에서는 9시 뉴스를 빼먹지 않는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삼풍 백화점이 주저앉은 것도, 그리고 윤금이가 참혹하게 숨진 것도 거기서 알 았다. 요즘 경제가 안 좋다는데 걱정이다. 나이 서른여섯에 사람 노릇한 기분 얼마 전부터는 비디오에 빠졌다. 12평 임대아파트 그의 작은 방에 비디오 테이프가 수북하다. 교회친구들이 하나둘씩 선사한 것들이다. 개중에는 액션물도 있고, 코믹물도 있다. 그는 요즘 에로물에 부쩍 열을 올린다. ‘젖소부인 뭐 했네’ 하는 건 없지만, 제법 야한 테이프가 꽤 된다. 이 따금 어머니랑 히히덕거리며 본다. 어머니는 그런 자식이 조금 안쓰러운 듯했다. 그는 탤런트 채시라를 제일 좋아한다. 그런 여자가 나타나면 당장 결혼하 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면 비웃음을 산다. 너무 눈이 높 다고 한마디씩 해댄다. 그럴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나아… 자아아… 시이인… 으을… 아아알… 아아….” 사람들은 그제서야 웃음을 터뜨린다 . 그러면서 농담도 잘하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아직도 사람들이 버 리지 못한 자신에 대한 편견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시집이 나오던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동안 주변에서 시집 한번 내보 라고 했던 게, 마음에서 욕심으로 자랐나보다. 몇몇 출판사에 원고를 보 냈지만, 연달아 퇴짜를 맞아 더욱 원했는지도 모른다. 나이 서른여섯에 겨우 사람 노릇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어머니에게 자랑거리가 생겨 뿌 듯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게 무슨 시냐”며 심드렁해 하신다. 하지 만 그는 그런 어머니에게서 번개처럼 스치는 웃음을 본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04일 제 185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빗자루 인생’ 백양기씨 청소부가 되던 날의 감격 백양기(62)씨의 하루는 얼마 전까지 이렇게 시작했다. 42년 동안 단 한번 도 어겨본 적이 없던 출근시간. 그 사이 세 아들과 두 딸이 어른이 됐고, 아내는 환갑을 눈앞에 둔 할머니가 됐다. 그렇게 출근해 남들이 우러러볼 만한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쓰레기통을 비우고 골목을 쓸었 을 뿐이다. 구멍 뚫린 냄비, 깨진 거울, 고장난 텔레비전, 그리고 악취를 풍기는 음식쓰레기. 그런 것들과 평생을 부대끼며 살았다. 지난 6월30일 정년퇴직하기까지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청소를 해온 환경미 화원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학교가 집에서 멀기도 했지만 끼 니도 거르는 판에 공부는 호사였다. 6·25 전쟁통에 피난지 부산으로 돈 벌겠다고 떠날 때 어머니는 말없이 주먹밥 세개를 싸주셨다. 영국인 신부 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기대며 일자리를 찾다 구한 게 이른바 미군부대 하 숙보이. 미군들 막사를 돌며 이불을 개주고 깔아주고 청소하는 일이었다. 몸은 고됐지만 먹고 사는 걱정은 없어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미군 부대가 철수하면서 그는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됐고, 혈혈단신 서울로 뛰어 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 빗자루를 잡은 게 55년 8월16일이었다. 그때 나이 스무살. 전쟁 직 후라 가뭄에 콩나듯 일자리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환경미화 원은 청소부라 불렸고, 청소업무는 경찰국 위생과 소관이었다. 청소부가 되던 날의 감격을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한 사흘쯤 굶었을 거예요. 눈 에 뵈는 게 없었으니까요. 식당으로 달려가 국밥을 두그릇이나 먹어치우 고 청소부 월급타서 갚겠다고 자랑스럽게 떠벌였죠. 그때서야 겨우 살았 다는 생각이 듭디다.” 용산구 남영동이 첫 일터였다. 지금이야 거리청소가 용역업체로 넘어갔지 만 그땐 언감생심이었다. 30여명의 청소부가 용산구 전체의 거리청소와 동네청소를 도맡았다. 84년께 용산구의 환경미화원이 4백80여명에 이르렀 으니 참 고된 시절을 보낸 셈이다. 처음엔 품삯도 일당으로 받았다. 그때 돈으로 4백원. 한달 내내 일해야 쌀 한가마도 못 팔았다. 새벽같이 일어 나 저녁까지 골목과 거리를 누비는 고역인데도 그랬다. 오죽하면 별보고 나갔다 달보고 들어오는 신세라고 한탄도 했겠는가. 그 덕에 청소를 맡았 던 구역은 부처님 손바닥 보듯 훤하다. 청소라는 게 일년 열두달 편한 날이 별로 없다. 우선 겨울엔 춥고 일이 많다. 집집마다 연탄을 때던 시절엔 골목이고 거리고 할 것 없이 연탄재 로 넘쳤다. 게다가 눈까지 내리면 거의 속수무책이다. 오르막길이 미끄러 워 리어카 끌기가 몇곱절 힘들다. 여름엔 또 비가 골칫거리다. 비가 오면 일단 그날은 쉬지만 그만큼 다음날 일이 쌓이게 마련이다. 김장철엔 배추 며 무 조각이 쌓이고, 이사철엔 잡동사니 살림살이로 골목이 비좁았다. 세월이 흘러 연탄이 사라지고 김장도 조금 하는 세태로 바뀐 게 청소부 입장에선 고맙기만 하다. (사진/그는 환경미화원의 쥐꼬리 월급으로 42년간 아내와 다섯 자식을 부양했다. 정년퇴직 뒤 집에서 손자의 재롱을 보는 일은 큰 기쁨이다. ) 청소부는 위험을 옆에 끼고 산다. 언제 어디서 불쑥 차가 나타나 들이받 을지 모른다. 새벽녘 길에 거칠 게 없다보니 차들이 총알택시처럼 내달리 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광 작업복이 없던 시절엔 차에 치어 죽은 사람도 많았다. 게다가 대부분 뺑소니다. 목격자가 없으면 사고를 당해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그도 그런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다. “어느날 새벽이었 어요. 거리를 쓸고 있는데 차가 옆을 지나치며 빗자루를 건드리는 거예요 . 빗자루가 마치 탁구공처럼 튀어오르더니 입을 때립디다. 앞니가 몽땅 부러지고 말았죠. 그때 이후로 틀니를 끼는 신세가 되고 말았죠.” 사람이 좀 둔한 편이다. 몸뚱이가 유일한 재산인데도 그걸 관리할 줄은 모른다. 위에 큰 탈이 났는데도 우직하게 일을 마치고서야 병원을 찾은 일은 지금도 동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84년 어느날, 밤새 배가 아팠다. 아침에도 고통이 가시지 않았지만 꾹 참고 일을 마쳤다. 그리고 끝내 실 신. 위궤양이 도져 위에 구멍을 낸 거였다. 동료들에게 업혀 병원에 가니 의사가 참 미련한 사람이라며 혀를 끌끌 차더란다. 직업에 귀천이 정말 없다구요? 직업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청소부라는 게 예나 지금이나 대접받는 직 업은 아니다. 사람들 중에는 드러내놓고 업신여기는 축도 있고, 돌아서서 비웃는 부류도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재건대라 불리던 넝마주이 들이 특히 냉대가 심했다. 서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이었건만 행패가 대단했다. 쓰레기장을 꿰차고 앉아 청소부들을 하인 다루듯 했다. 그들이 고물을 골라내기 전에 쓰레기를 차에 실을라치면 주먹이 날아왔다. 그래 서 그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별로 믿지 않는다. 청소에도 요령이 있다. 구역마다 리어카가 들어가기도 비좁은 골목이 몇 개씩은 꼭 있게 마련이다. 그때 무작정 힘으로 대들면 고생만 하기 일쑤 다. 그래서 청소부 신참은 금방 티가 난다. 청소부 일을 몇년 한 고참들 은 거리를 청소할 때 빗자루를 길게 잡고 넓은 반원을 그린다. 그러나 신 참들은 빗자루를 짧게 잡고 좁게 쓴다. 그러면 일도 잘 안 되고 힘만 들 뿐이다. 쓰레기통을 들 때는 역기를 올리듯 순간적으로 힘을 짜내야 한다 . 천천히 들면 무게를 견디기 힘들다. 역시 오랜 세월 몸으로 터득한 지 혜다. 42년 청소부 인생의 결과는 퇴직금 9천여만원과 21평짜리 아파트가 전부 다. 그나마 아파트도 시에서 환경미화원들에게 분양하지 않았더라면 그림 의 떡이었을 것이다. 그의 월급으로 아내와 자식 다섯을 부양하기란 애초 부터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백혈병 진 단을 받은 아내에게 들어가는 약값도 만만찮았다. 20년 넘게 월급에서 아 내 약값을 떼놓고 살림을 꾸렸다. 그래도 자식들이 반듯하게 자라 고마울 뿐이다. 새벽 3시30분. 그는 지금도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난다. 이 시간이 되면 귀신에 홀린듯 눈이 떠진다. 자리에 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아침을 맞는다 . 아무래도 청소부가 천직이었던 것 같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늘푸른 사제 함세웅 “우리도 명동을 떠나자”…더 낮은 곳에서 민중과 함께 “오, 안녕.” 짧지만 곰살궂은 이 인사 한마디가 검은 사제복의 그를 친구처럼 느끼게 한다. 작달막하나 다부진 몸매, 웃는 눈이지만 강직한 얼굴. 늘봄 문익환 목사가 “저 작은 몸 어디에 저런 힘이 있나” 놀라곤 했다는 그이다. 푸근하면서도 꼿꼿한 그의 인상은 세월의 비바람을 이겨낸 늘푸른 소나무처럼 보인다. ‘부끄러운 성전’을 돌아보다 함세웅(56·서울 상도동성당 주임신부)이란 이름 석자는 70, 80년대 길 잃은 양들이 찾아가는 목자이자, 어둠을 밝히는 등대 같은 것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곳 없는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가면, 함 신부는 자신의 온몸을 열어 고아된 이들을 품어주었다. 거짓이 진실을 덮어버리면, 그는 당장 떨쳐일어나 참언론이 되었다.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천주교 원주교구에 몸을 피했던 문부식씨 일행이 자수하는 데 다리를 놔준 이가 그였다. 87년 6월, 명동성당에서 6일 동안 머물며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농성 학생들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낸 이가 그였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 등 공권력의 만행을 고발한 것도 그였다. 불의가 정의를 깔아뭉개고, 인간이 인간을 내리치던 겨울공화국, 그 시절에 그는 시대의 어둠을 벗겨내는 종소리였다. “예수가 누구입니까. 가장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들의 곁에 있던 분 아닙니까. 갈 곳 몰라 헤매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그들을 어디로 내몰겠습니까. 힘들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껴안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일이 은총처럼 기뻤습니다. 저 개인이 한 일이라기보다 교회공동체를 대표했다고 봐야지요.” 1974년 9월에 창립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함 신부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젊은 사제들의 모임이었다. ‘정치현실에 대한 의사표시를 사회구원의 원리에 입각해 사목행위의 하나로 펼칠 것’을 활동 목표로 삼았던 사제단의 중심인물로서, 그는 성당의 높은 담을 허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60년대 후반에 이탈리아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군부독재가 날뛰는 고국의 현실을 20대의 젊은이로서 고민했습니다. 73년 6월, 8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보좌신부로 간 곳이 연희동성당이었고 그곳에서 일본에 납치됐다 살아돌아온 김대중씨를 신자로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분의 고난을 사제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거죠. 이듬해 민주화를 위해 애쓰시던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 터지고, 이어 민청학련 사건이며 인혁당 사건을 지켜보면서 사제복 안에 웅크리고 있을 수만은 없구나 하는 깨침과 함께 현실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3·1민주구국선언’ ‘명동사건’ 등으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를 쓰고 옥을 드나들기 시작한 그는 80년 2월 잠시 복권됐다가 5·17사태로 다시 계엄당국에 연행되는 등 고난의 형장을 맴돌았다.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가 그를 단골손님 명단에 올렸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는 감옥동창이 됐다. “그때, ‘우리도 언론을 가져야겠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사제단이 기자회견을 할 때면 기자들과 동지 같은 연대감을 느끼곤 했죠. 의식있는 젊은 기자들과 정보 교환도 하고, 그들의 입에서 우리나라 언론과 법조의 역사란 권력기생의 반복이었다는 얘길 듣고 진실에 목말라하는 국민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다는 사명감을 새삼 다지곤 했습니다.” 함 신부는 85년부터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으로 일하면서 천주교 주보를 ‘언론 중의 언론’으로 만들었다. 신문에도 나지 않는 중요한 사안들이 이 지면의 ‘말씀’ ‘누룩’ ‘삶의 자리’ 같은 무기명 칼럼을 통해 세상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가 앞장서서 만들었던 '평화신문' '평화방송'은 언론에 대한 그의 이런 꿈이 바탕이 됐다.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서의 꿈이다. 함 신부는 특히 우리 언론이 그동안 과연 정직했었는가 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고 했다. 국민들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고 이끌어주어야 하는 신문과 방송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권력에 빌붙는 행태를 보여왔다는 것이다. (사진/평신도들과 성당 일을 함께 하는 함 신부. 그는 이제 교회가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이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내지 않았습니까. 나는 이 역사적 사건을 하늘이 준 섭리의 기회라고 봅니다. '구약성서' ‘이사야’서에 보면 양과 늑대가 어울리고, 어린애가 독사의 입에 손을 넣는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김대중 당선자가 정적 김종필씨와 1년여를 줄다리기하며 미움과 증오의 선을 넘어 화해를 이룬 사건과도 비유됩니다. 이 성숙한 정치가 앞으로 남북대화를 이끄는 전 단계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정권교체가 안 됐으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함께 한국은 썩은 민족에 송장 취급을 당했을 거예요. 이번 선거는 가난한 이들, 밑으로부터의 개혁의지가 표출된 준엄한 결단 아닙니까.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자유, 해방, 구원의 체험을 했습니다.” 함 신부는 이제 교회도 거듭날 때라고 말한다. 한때 인권과 자유를 지키는 보금자리이자 한국현대사의 영욕의 현장이었던 명동성당이 올해 1백돌을 맞지만, 지금 그 ‘명성’은 권력과 손잡은 부끄러운 성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치의 체험 “사제단도 94년 20돌을 넘기며 새로운 틀을 찾고 있습니다. 기념 심포지엄에 왔던 유대인 신학자 마크 앨리스가 했던 말이 지금도 아프게 남아 있습니다. ‘당신들 20년 노력의 덕을 누가 보았다고 생각하느냐, 결국 적과 교회만 살찌게 한 것이 아니냐, 오늘의 교회는 온통 브로커투성이다’는 그의 매서운 음성이 따갑게 제 귀를 울렸습니다.” 함 신부는 지금 사제단 부설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02-3672-0254)의 원장으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새 길을 찾고 있다. 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증언집인 10권짜리 '암흑속의 횃불'을 4권까지 정리해 내놓았고, 오는 10월에는 ‘구원과 민족의 해방체험’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도 열 예정이다. 누구나 찾아와 한국교회의 진정한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실천신학의 집, 이것이 그가 그리는 연구원의 미래상이다. 지난해 사제서품 30돌을 맞아 가톨릭대학 동창 19명과 함께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함 신부는 요즈음 그 깜짝깜짝 놀란 체험을 깊은 묵상으로 풀어내고 있다. 비 내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2시간여 침묵 속에 둘러보며 그는 “사제로서의 삶 30년을 압축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아우슈비치가 독일어이고 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칭이라고 부른다는 걸 처음 알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1백50여만명 유대인이 결국 20세기의 속죄양으로 죽어갔구나’ 생각하니 사제로서의 반성과 성찰이 절로 일더군요. 45년 이후 유럽교회가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의 흐름을 일구며 새롭게 일어서게 된 원동력이 그 고난 속에 있었던 겁니다.” 함 신부는 “우리도 이제 명동을 떠나자”고 말했다. 2백년 짧은 한국 천주교 역사가 머물렀던 교조적이고 규율적인 성당을 떠나 우리 교회가 더 낮은 곳으로, 민중 속에 하나가 될 각오를 다질 때라는 것이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장승깎이 이두재 “십년 두들겨 맞은 징짝같이 마빡이 번들거리는 대장군이 있는가 하면 썩은 호박대가리의 상투잡이가 있고, 퉁방울 고리눈이 있는가 하면 하회 탈처럼 파안대소로 가늘어진 실눈이 있고, 화등장만한 눈이 있는가 하면 할퀸 손톱자국같이 작은 눈도 있다. 주먹코, 말똥코, 들창코, 빈대코, 메 줏덩이코, 양물처럼 길게 늘어진 코가 있는가 하면, 아들 못낳은 아낙이 몰래 깎아먹어서 우묵하게 터만 남은 코도 있다. 또 입 생긴 모양을 볼락 시면 함지박만한 것, 심술궂게 옆으로 삐딱하게 찢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 짚신짝 같은 혓바닥을 빼물고 있는 것도 있다. 게다가 이빨 생긴 모양 을 볼락시면 옥수수알 박힌 듯 가지런한 것도 있고, 톱날이 맞물린 듯 험 한 것도 있다.” “장승은 달마와도 같은 것” 한 소설가는 이두재(45)의 장승을 이렇게 묘사했다. 귀신에 홀렸는지 30 년 가까이 장승만 깎고 있는 이두재. 그동안 깎은 장승이 4백여개에 이르 니 소설가의 눈에도 만물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작 이두재의 얼굴 은 둥글넙적한 게 넉넉하기만 하다. 그토록 다양한 표정을 깎노라면 마음 고생도 꽤 했음직한데 굳거나 딱딱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씨름꾼처 럼 옆으로 살이 붙은 몸집을 더하면 영락없이 착해빠진 촌사내다. 그에게 끌과 나무와 장승이 없었다면 아마도 농사를 지었으리라. 그의 작업실은 나무토막과 끌, 망치, 톱밥으로 가득하다. 작업실 한켠 책 상 위에 올망졸망하게 서 있는 장승들을 놓치면 목공소로 착각할 법하다. 그런데 곧고 잘빠진 나무토막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개 벌레먹어 야릇하 게 구멍이 뚫렸거나 비틀리고 옹이가 툭툭 불거졌다. 끌과 망치도 둔탁하 고 투박하기만 하다.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나무의 고유한 모양새 를 그대로 살려 찍고 파고 다듬는다. 벌레먹은 옹이나 뒤틀림은 그대로 장승의 입이 되고 수염이 되고 젖퉁이가 된다. 나무 스스로 만든 장승 몰 골에 조금 사람의 힘을 보태는 것뿐이다. 장승은 본디 이정표로 큰길가에 세우거나, 액을 막고 풍요를 기원하는 신 목으로 마을 밖에 모셨다. 대개 구척 장신에 퉁방울눈, 주먹코, 써렛발을 한 자못 무서운 형상이었다. 그래야만 밖에서 들어오는 이방인이나 귀신 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두재의 장승은 무서움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험상궂은 표정을 해도 도무지 남을 해치거나 겁을 줄 수 있을 것같지 않다. 오히려 조금은 장난스럽고 허풍스럽다. 그의 장 승은 판소리 사설에서 “입은 있으나 말을 할까. 발이 있어 도망할까. 분 한 마음 못이겨 눈을 항상 부릅떴네” 하고 놀림을 받던 그런 장승이다. 고등학교 1학년 미술시간에 처음 장승을 깎았다. 본디 깎아내고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쓱싹 장승 하나를 깎았다. 그게 교내 바자회에서 70원에 팔렸다. 내가 만든 걸 누군가가 보고 좋아한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했지 만 기분이 썩 좋았다. 그때부터 심심풀이로 장승을 깎기 시작한 게 지금 까지 이어졌다. 장승이 좋은 이유라면 딱히 댈 게 없다. “장승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고작이다. “장승은 탱화로 치면 달마도 같은 겁 니다. 붓으로 선 그리고 점 하나만 찍어도 달마가 되듯이 썩은 나무토막 에 몇줄 글만 써넣어도 장승이 되니까요.” 요즘 들어선 장승에 홀린 것같기도 하다. 지난 겨울 장승 찾아 떠난 여행 중 고향을 찾았을 때 그걸 느꼈다. 충북 음성 고향마을 어귀에는 돌장승 세개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어릴 땐 보도 듣도 못했던 발견이었다. ‘돌 장승은 남도엔 많지만 충청도에는 극히 드문데, 여기에 세개나 있다니.’ 그러면서 상념이 꼬리를 물더란다. ‘경찰인 아버지를 따라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바로 태기를 느껴 나를 낳았다고 했지. 그때까지 어머니는 아이 를 낳지 못해 근심이 크셨다던데. 어릴 적 이웃사람들은 우리 집을 도깨 비터라고 무서워했고.’ 아무래도 장승과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아 섬뜩 하다. 게다가 얼마 전 장승 전시회를 앞두고 수상한 꿈을 꿨다. 덥석부리 수염 에 백두건을 두른 칠척 장신의 사내가 서까래에 거꾸로 매달렸다가 내려 서며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더란다. “이 놈아! 내 언제 이런 모습을 맹글 어 달랬냐. 네 놈이 육허기가 졌으면 졌지, 내가 색에 아귀가 씌었드냐. 못된 소행머리에 잔재주를 부려 여장승 가슴팍엔 짝젖통 붙여놓고 남장승 마다 불두덩엔 팔뚝만한 남근을 붙여놓았으니 사모관대에 배에 잔뜩 글 썼어도 웃음거리 될 수밖에 더 있드냐.” 그러고는 마루없는 봉당으로 풀 쩍 내려서며 통짜로 된 끌을 냅다 던지는 거였다. “이 끌로 장난부리지 말고 서른 장승만 깎아라!” 역시 장승에 홀린 기분이었다. 장승 찾아 톱들고 떠나는 산행 장승은 본디 표정이 다양하다. 전문가의 재바른 솜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무식한 백성들이 되는 대로 눈이며 코며 입을 깎아놓았으니 당 연하다. 뭐든지 큼지막하면 좋은 줄 알고 팍팍 끌질을 해댔을 뿐 잔재주 를 부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게 어느 한 사람의 손으로 된 것도 아니다. 장승 만들기는 으레 그 마을의 공동행사였고, 장승에는 공동체의 생각이 녹아들게 마련이었다. “누군가 코를 깎으면 다른 누군가가 참견을 하는 겁니다. ‘거기 콧구멍이 너무 좁아. 눈은 왜 뱁새눈이야.’ 그러다보면 어느새 콧구멍이 눈망울이 넓어지는 거죠.” 휴일에는 대개 톱이 든 배낭을 메고 산행을 떠난다. 돌아오는 길 배낭 안 에는 이따금 팔뚝만한 잡목들이 가득 차 있곤 한다. 그만한 나무로 장승 을 깎아야 운반과 보관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애초 장승 만들어 길에 세 울 요량이 아닌 바에 욕심부릴 필요가 없다. 사실 요즘 세상에 구척 장신 의 장승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을 지키는 일은 경찰서에서 해주고, 아프면 병원가고, 댐 막아 논에 물대고, 컴퓨터로 고기잡는 세상에 장승 의 가치는 볼품없다. 게다가 시험관이다 양수검사다 해서 아들까지 골라 낳는 마당에 장승이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곧고 쓸모 있는 생나무를 자른 적은 없다. 대개 개미집이 들어서 죽어가고 있거나 벌레먹어 썩어가는 나무들이다. 거기에 장승의 얼굴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 미켈란젤로의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미 켈란젤로가 예수상을 깎았는데 한 사람이 그 비결을 묻더란다. 미켈란젤 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채석장을 지나는데 돌에서 예수가 ‘나좀 꺼내달라고 합디다’. 나는 예수를 가두고 있는 돌조각들을 떼어낸 것뿐 입니다.” 그는 이 얘기가 사실은 아닐지 모르지만 진실이라고 믿는다. 장승을 둘러싼 나무조각을 떼어내는 것. 그래서 나무에서 장승을 꺼내는 것. 이두재의 장승깎는 법이다.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글벗책방 김영복 (사진/공부하다가 길이 막힌 한학 연구자들은 그를 찾아온다. 한적을 보는 눈이 탄탄한 데다, 온갖 자료들을 가늠하고 엮어내는 눈썰미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곰팡내인 것도 같고, 싸구려 잉크 냄새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된 콩기름 향내인 듯도 하고…. 김영복(43)씨에게선 그런 냄새가 난다. 이제 골동품 이 돼버린 고서점, 그게 바로 그의 일터라는 생각에 미치면 그 향내는 얄 밉게도 옛사람이 말하는 서권기(書卷氣)라는 근사한 표현을 찾는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2층에 있는 ‘문우(文友)서림(02-7 30-5408)’에 가면 누런 똥색으로 바랜 한적(漢籍)과 수십년 묵은 옛날 책 1만여권에 둘러싸여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 ‘글벗책방’이란 우리 말 간판이 책과 동무를 좋아하는 그와 함께 손님들을 반긴다. ‘고서 보는 눈’을 키운 통문관 시절 “고서점의 부흥과 경제성장은 같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앉아 있 으면 신문 안 봐도 나라살림이 얼마나 어려운가 뼈저리게 느껴져요. 지금 고서 경기가 바닥입니다. 언제 올라갈지 알 수 없을 만큼 수렁에 빠졌어 요.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건 자기 일에 활력이 있다는 증거죠. 바쁜 사람 들이 더 책을 많이 보거든요. 일본 간다의 고서점 거리가 북적대는 건 그 들이 자료 챙기기에 극성이란 말도 되지만, 그만큼 선진국으로 고도성장 할 때 고서점이 함께 발달했다는 얘기지요.” 강원도 원주 산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74년께 인사동에 들어와 고서점에서만 20여년을 넘게 일했다. 고서점 업계의 터줏대감인 통문관에 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공부하는 맛도 좋았지만 그럴듯한 물 건들도 많이 나오고 거래도 활발해서 재미가 쏠쏠했다고 한다. “통문관 영감님이 우리나라에서 고서 보는 눈은 최고지요. 그렇다고 뭐 특별한 걸 가르쳐주시진 않았어요. 그저 어깨 너머로 배운 거지요.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무던했지요. 그런 훈련으로 고서점에서 일한 건 아마 이 세대로서는 마지막이 아닌가 싶어요. 어려서 한 한문 공부를 밑천 삼 아 하루에 한권꼴로 책을 독파했는데, 가끔 책에 코를 파묻고 있다가 손 님 들어오는 걸 놓쳐 영감님께 혼이 나곤 했지요.” 그가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이는 한국 고서업계의 산증인인 통문관 대표 이겸노(88)씨다. 김영복씨는 그 밑에서 한적 보는 법과 물건 다루는 법 등을 배웠다. 70년대 후반, 통문관은 한국학 학자들의 연락사무소 구실을 했다. 한국어문교육연구회는 통문관 3층에 사무실이 있었고 국어국문학회 , 진단학회, 역사학회, 복식학회, 민속학회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한국학 의 부흥을 꾀했다. “그때, 그곳에서 좋은 어른들을 많이 뵈었죠. 일석 이희승, 남광우, 이 가원 선생 등 한국학의 대가들을 모셨으니 그분들이 다 제 스승이었던 셈 입니다. 영감님은 자꾸 학교에 보내줄 테니 한국학쪽으로 공부를 해보라 고 부추기셨지만 그건 제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문자 속은 좀 깨 우쳤지만 굳이 학교에 들어가서 남의 밥그릇 빼앗는 게 싫더라구요.” 한국학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 시절 뿌리를 내렸다. 김영복씨를 잘 아는 이들은 그가 수많은 한국학 전공자들에게 나침반 구실을 했다고 말한다. 한적을 보는 눈이 탄탄한 데다, 온갖 자료들을 가늠하고 엮어내는 눈썰미 가 뛰어나 공부하다가 길이 막힌 연구자들이 등대를 찾는 심정으로 그에 게 달려오곤 했던 것이다. “지금 한국학이 내리막길로 들어선 건 정부 정책에도 문제가 있고, 이걸 해가지고는 먹고 살기가 어려운 세태에도 원인이 있지만, 사실 제일 큰 걸림돌은 한국학을 공부하는 전공자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실학이 좀 된 다 싶으면 실학으로 우르르 몰리고, 고려사가 된다면 또 너도나도 고려사 하고, 도대체 잘 팔리는 것만 하면 나머지는 어쩝니까. 전체가 골고루 연 구돼야 한국학의 대중화도 이뤄지는 건데, 매일 시작하다가 끝나버리죠. 한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것만 하고 종치니까, 뒤에 오는 후배들은 또다시 시작인 겁니다. 기초 번역이 안 돼 있으니까 논문이 아무리 쏟아 져 나와도 모래밭에 물붓기처럼 자국만 나고 마는 거지요.” 김영복씨의 한국학에 대한 비판은 애정이 큰 만큼 더 신랄하다. 왜 체육 진흥회는 있는데 한국학 진흥회는 없느냐는 통탄은 가슴이 찡할 만큼 절 절하다. 한문을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 살아있을 때, 고문서 정리도 하고 원전 번역도 쌓여야 한다는 말도 귀기울일 구석이 많다. 한문은 하면 할 수록 어려워서 뒷심이 부친다는 그는 ‘우리 고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아이와 함께 읽는 한자 1800자’ 같은 대중적인 책을 쓰는 꿈을 키 우고 있다. 그는 90년 3월, 통문관에서 인사동 네거리쪽으로 내려가는 길 건너편에 가게를 내고 통문관 영감님으로부터 독립했다. 관훈동 71번지 3평쯤 되는 그 작은 책방에서 그는 인사동에 나오는 벗들과 글을 논하고, 술을 마셨 다. 4∼5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그 찜통 같은 책방이 인사동의 명소였다 는 건, 이곳을 들르던 손들의 면면이 말해준다. 역마살 탓에 책방 오래 갈까 “민병산 선생님껜 인간이 살아가는 올바른 길을 배웠습니다. 영문학자셨 던 조용만 선생께는 일제에서 구한말에 걸친 중인 계통의 이야기를 들었 지요. 전 박물관장 김재원 박사, 한학자인 김관호씨로부터도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최남선 선생에게 책을 대던 김용수씨는 ‘책장사 잘하 려면 공부 많이 해야돼’라고 선배로서의 조언을 주셨지요. 노인네들을 참 많이 모셨는데, 그게 다 제 인생 밑천이 됐습니다.” 지난 9월, 지금 자리에 재개업을 한 셈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 을지 그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며칠 책방을 지키고 난 다음이면 훌훌 떠나야 숨통이 트이는 그는 민학회 총무로서 지방 답사 를 잘 나간다. 술은 말술, 더러운 꼴은 눈뜨고 못보는 성미라 한번 마음 을 준 친구는 오래가지만 적도 많다. 70년대 후반부터 사귀기 시작한 고 미술 전문점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 학고재(學古齋)는 원래 김영복씨가 살림을 나면 가게 이름으로 하려고 작정해 두었던 것인데, 화랑을 내면서 상호를 못 정해 고민하는 우 사장 에게 김씨가 “그럼 이걸 쓰시게”하고 선뜻 밀어준 내력이 있다. “뭐 좋은 게 나온 것 있나?” 승가대 도서관장인 종범 스님이 들어선다. 종이 지질을 묻고 있던 유부현 교수(대진대 서지학과)는 김씨가 컴퓨터 같은 답변을 접으며 “잘 모르겠는데…”라고 말끝을 흐리자 “형님이 모 르면 누가 알아요” 하고 눈을 찡긋했다. 너무 많은 이들이 그를 필요로 하기에 당분간 김영복씨는 제 맘대로 가게 문도 못 닫을 것같다. 사진 정진환 기자 이번호부터 ‘인물탐험’의 필자가 바뀝니다. 그동안 수고한 유강문 기자 는 한겨레 경제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꽃집아저씨 임성택씨 임성택(42)은 꽃을 파는 장사꾼이다. 꽃장사 경력이 18년이다. 노점상으 로 6년, 대학 근처 가건물에서 5년, 그리고 그 옆에 가게를 내어 5년. 화 류계(?) 인생이라 부를 만도 하다. 그 덕에 단골손님만으로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만큼 터를 닦았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 지 얼마 전 출판사를 차리고 한권에 2만8천원하는 큼지막한 책을 냈다. 그것도 세권을 한 묶음으로. 주변에서 기를 쓰고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리곤 책을 보고 찾아온 사람들과 함께 연구실까지 차렸다. 그랬더니 ‘ 꽃을 포장하는 남자’로 제법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다. 꽃을 깔고 앉아야 했던 노점상 시절 이전까지 그는 ‘예술 아저씨’로 통했다. 사실 늘 색바랜 군복 재킷을 걸치고 머리칼이 삐죽거리는 꽁지머리를 한 꼴이 예술가처럼 보이긴 한다 . 그러나 그보다는 그가 파는 꽃이 좀 특이했다. 꽃이야 여느 가게에서 파는 꽃과 다를 게 없지만 일단 그의 손을 거치면 한층 더 때깔이 났다. 형형색색의 테이프나 셀로판지, 닥종이, 마, 리본 따위로 꽃을 곱게 꾸며 주기 때문이다. 기름종이나 철조망, 심지어는 신문지처럼 꽃과 전혀 어울 릴 것같지 않은 소재들로 꽃을 감싸주기도 한다. 이른바 ‘플라워 래핑’ 이라는 기법이다. 그는 상술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왜 그처럼 꽃을 정성스레 포장하느냐고? 그가 보기에 “그건 꽃을 파는 이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의 꽃집에선 이따금 호통소리가 들린다. 주 인이 손님을 나무라는 소리다. 손님이 슈퍼마켓에서 물건 고르듯 꽃을 함 부로 만지는 걸 못참는 그의 성미 탓이다. 그가 정성스레 포장한 꽃다발 을 거칠게 다루거나 손장난질을 치는 것도 금물이다. 게다가 “내 돈내고 산 꽃인데 웬 참견이냐”고 따지고들면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일쑤다. 그 럴 때마다 고생하는 건 아내다. 남편과 손님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쩔 쩔맨다. 그는 그런 아내 역시 못마땅하다. 꽃장사가 꽃 편을 들지 않다니 . 그의 꽃 편들기는 아무래도 천성이지 싶다. 도자기를 굽던 아버지에게 떠 밀려 도예과에 들어갔지만 도자기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실습시간에 손수 꽃병을 빚고도 그보다는 거기에 꽂힌 꽃이 좋았다고 하니 어쩌랴. 군대 시절 행군을 하거나 진지를 파면서도 한송이 들풀에 마음을 빼앗겼 다. 집안이 망한 뒤 리어카를 끌고 노점상으로 나섰을 때도 홀린듯 택한 게 꽃이었다. 지금도 주말이면 산행을 떠나 이름모를 야생화를 보고 오는 게 낙이다. 그러나 장사는 꽃처럼 곱지는 않았다. 새벽에 꽃을 떼오면 리어카 주변에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곤 했다. 아내는 길바닥에 마구 흐트러진 꽃을 깔 고앉아 눈물을 찔끔거리고. 철거반이 다녀간 뒤의 노점은 그렇게 을씨년 스러웠다. 가건물을 짓고 판을 벌였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마침 올림 픽한다고 철거바람이 불어 하루가 멀다하고 철거반원들과 실랑이를 벌여 야 했다. 하루는 그 등쌀에 견디다 못해 한밤중에 소주병을 들고 철거반 장집에 쳐들어갔다. 팬티 차림으로 깨어나 앉은 반장과 술잔을 돌리면서 밤을 샜다. 다음날 철거반이 거리에 나타났지만 그의 가게는 살아남았다. 그는 “손님이 꽃을 사는 것은 꽃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사고싶어서”라 고 믿는다. 애인이나 가족, 또는 친구가 기뻐하는 걸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꽃의 쓰임에 따라 포장법이 달라진다. 시상대에 선 친구에게 선사 하는 꽃은 아이를 안듯이 가슴에 푹 담기도록 푸짐하고 화사하게 포장한 다. 신부용 부케는 사방에서 꽃송이를 볼 수 있도록 아담하게 꾸민다. 멀 리 떨어져 있는 애인에게 보내는 꽃은 꼭 상자에 담아준다. 상자를 여는 순간 꽃이 보이도록 해 놀라움과 기쁨을 함께 선물하는 것이다. 꽃이여, 나의 사랑이여 (사진/그는 사람을 대하듯 꽃을 정성스레 다룬다. 그래서 더더욱 손님들이 꽃을 함부로 만지는 걸 못참는다. ) 처음 포장법을 개발할 때는 책도 학교도 없었다. 꽃을 선물한다는 것 자 체가 낯선 시절이었으니 포장까지 신경쓰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시내 대형서점에 일부러 주문을 해도 서너주 만에 책을 구할 수 있었다. 대부 분 유럽이나 일본에서 나온 책들이었다. 쓸만한 포장재도 별로 없었다. 요즘이야 온갖 포장재가 넘치지만 80년대만 해도 셀로판지 따위가 고작이 었다. 색깔이 다양하고 투명해 꽃 포장재로는 쓸만했지만 딱히 기술이 없 었다. 밤새 꽃과 셀로판지를 조물락거리며 아이디어를 짰다. 그렇게 짜낸 생각들이 노트에 빽빽하다. 남자가 꽃에 미쳐 사니 주변에서 이상하게 본다. 몇해 전 겨울 꽃집 창밖 으로 엿들은 노부부의 말다툼은 지금 생각해도 절로 웃음이 난다. 아들 졸업식에 올라온 듯한 노부부는 꽃집에 들어서려다 말고 길에서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더욱 컸다. 들어본즉 남자가 꽃집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할머니는 주인이 남자라 아무래도 꽃을 잘 다루지 못할 테니 다른 데로 가자고 할아버지를 윽박질렀다. “우리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허튼 꽃을 주겠느냐”는 완강한 거부였다. 꽃을 다 듬다말고 피식 웃고 말았다. 꽃집에서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본다. 어느 봄날 여자 손님에게 꽃을 포장해주고 있을 때였다. 가게에 들어선 남학생이 “여자친구 작품발표회 에 갈 건데 어떤 꽃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별 생각없이 여자 손님 에게 꽃을 좀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여자는 웃으며 남자에게 장미를 찍어 줬다. 여자가 나가자 역시 별 생각없이 “꽃 골라준 것도 인연인데 여학 생에게 차나 한잔 사라”고 남자에게 농담을 던졌다. 남자는 그말에 홀린 듯 뛰어나갔고 창문 너머로 여자를 불러세우는 게 보였다. 그리고 4년이 란 세월이 흘렀다. 가게 앞에 스포츠카가 서더니 두 사람이 환하게 웃으 며 가게에 들어서는 게 아닌가. 둘 사이에는 갓난아기가 있었다. 아기 이 름이 ‘백장미’라고 했다. 그날 인연으로 두 사람은 부부가 됐던 것이다 . 사실 그의 아내도 꽃이 맺어줬다. 어느 여름날 서울역 대합실에서였다.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짧은 치마에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고 다리를 꼬 고 앉아 머리결을 매만지는 여인 때문은 아니었다. 여인의 가슴에 안긴 특이하게 포장된 빨간 장미 꽃다발. 그는 무릎을 꿇다시피하고 꽃다발에 코를 들이밀었다. 여자는 온몸을 뒤로 젖히며 질겁했다. 순간 그의 한쪽 뺨이 화끈했다. 그때 그 여자가 지금의 아내가 되었다. 꽃은 사람 마음에 평정을 준다. 미운 감정이 든 이에겐 사랑을, 성미가 급한 이에겐 침착함을, 생활에 지친 이에겐 작은 여유를 준다. 꽃보다 아 름답게 꽃을 포장하는 것은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포장하는 것이다. 꽃장 사 임성택은 꽃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꽃을 포장하고 싶다. 사진 박승화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조국의 치부에 현미경을 댄다” 그 우수한 서울대생,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나 (사진/1.5세대 재미교포 박상이씨) “저 바다를 건너면 천국이 있다고 들었다. 꿈과 부와 자유가 있는 나라.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먼 여행을 떠났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낯선 백인들의 천국. 나는 낯선 천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 오랜 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천국의 시민이 되지 못했다. 미국은 열살배기 노란 얼굴의 소년을 싸움꾼으로 만들었다. 서울 옥수동 산동네에서 살던 때엔 못먹던 고기와 우유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대신, 가장 민감할 나이에 그는 또래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칭크’(되놈)하고 놀리며 덤벼드는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 그는 유색인종이 원죄인가를 생각했다. “죽어라 싸웠기 때문에 안 미쳤다”고 할 만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공부를 하고 운동에 매달려도 허전했다. 영어를 토박이들처럼 완벽하게 해도 ‘인생은 이런 게 아닐거야’하는 중얼거림이 저절로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래서 그는 그가 떠났던 곳으로 돌아왔다. 5년째 한국유학… 논문 주제는 ‘발해’ (사진/그의 뿌리찾기는 집요하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쭉 살아온 사람들보다 더 지독하다.) 한국으로 유학온 한국인, 1.5세대 재미교포 박상이(31)씨는 2월26일 서울대 졸업식장에 동료들과 섰다. 아직 논문이 남아 있지만 국사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친 그는 이제 ‘내가 누구인가’를, ‘내가 설 곳이 어디인가’를 안다. 외톨이로 떠돌던 20여년의 방황은 끝났다. “논문 주제를 발해로 잡았습니다. 여름방학 때 3개월쯤 중국에 가서 자료를 모을 생각입니다. 대조영의 기상을 기리며 발해탐사뗏목을 띄웠다가 침몰한 대원들의 도전의식을 저도 느낍니다. 그이들만큼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교류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어디로부터 흘러왔는지 두눈으로 찾아 볼 겁니다.” 그의 뿌리찾기는 집요하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쭉 살아온 사람들보다 더 지독하다. 먼 타향에서 뒹굴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오래 고민했기에 그럴 것이다. “그만큼 한국이 더 잘 보인다”고 그는 말했다. 이런저런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현장을 뛰고, 학교 친구들과 출판사를 내고, 한국사회 치부를 조목조목 들춰내는 걸 보면 잠시 스쳐가는 나그네가 아니다. 94년 가을, 그가 서울 신림9동 녹두거리에 있는 하숙집에 방을 구했을 때, 그가 들은 첫마디는 이런 것이었다. “이봐요. 당신이 한국 사람인지 미국 놈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영어로 씨부렁대지 말아요.” 그는 그때까지 한국 대학생들의 반미감정을 몰랐기에 놀랐다. 그리고 또한번 놀랐다. ‘양키 고 홈!’을 외치던 바로 그 대학생들이 영어를 잘하려고 자신에게 회화를 배우고 미국에 유학을 가려고 안달이었기 때문이다. “영어가 국제공용어로 중요하긴 하지만, 한국을 휩쓸고 있는 영어바람은 그 도가 좀 지나친 것 같아요. 모든 한국인이 영어를 그렇게 잘할 필요가 있을까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건 또하나의 종속 아닌가요. 몇몇 언어에 재능있는 사람들, 국제무대에서 뛰며 영어가 필수인 전문가들만 잘하면 된다고 봅니다.” 그가 가장 가까이에서 본 서울대생들에 대한 비판도 날카롭다. 입학할 때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안 빠지는 우수한 학생들이 4년 동안 “죽는다”고 그는 표현했다. 교수고 학생이고 연구하는 풍토가 안 돼 있다는 것이다. 학생운동은 학창시절에 거치는 유행일 뿐이고, 졸업하면 자동적으로 손쉽게 사회 모든 분야를 휘어잡기에 그는 한국이 ‘서울대의 나라’라는 데 동의한다. “그렇게 우수한 학생들이 학교만 떠나면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시위할 때 드높이던 그 목소리는 다 어디로 가는지. 그들이 타도를 외치던 재벌 회사에 얌전하게 틀어박히려고 그 고생들을 하는 건지요. 대학시절에 가졌던 그 비판 정신을 평생 밀고 나가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더 좋아질까요.” 박상이씨가 우리 사회에서 제일 딱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여성차별이다. 그가 의기투합한 여자친구와 출판사를 차리고 가장 먼저 낸 책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가지않은 길 펴냄)는 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현장 보고서다. “영어회화 아르바이트를 할 때 팀마다 취직시험 준비를 하는 여학생들이 있었어요. 남학생들은 하나, 둘 합격을 해서 팀을 떠나는데 여학생들은 계속 남는 거예요. 실력은 더 우수한데 왜 여학생들은 불이익을 당할까. 똑똑하다고 소문난 서울대 여학생들이 ‘죽고 싶다’고 저에게 상담을 청해올 때 참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3백여명의 여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는가. 누구도 여성들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는다. 스스로 싸워서 쟁취하라.” “낮은 곳에서 힘없는 사람들 곁에 있겠다” 1년쯤의 짧은 여행이리라 생각한 아들의 한국생활이 해를 거듭하자 미국의 부모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로스쿨을 다녔으니까 미국 변호사 자격증도 보장된 서른 넘은 자식이 뒤늦게 한국 공부를 한다고 ‘세월아네월아’ 하고 있으니 걱정이 태산일밖에. 그러나 스스로를 ‘독불장군’이라고 부르는 박씨의 고집엔 이유가 있다. “한국인 피를 가진 사람으로 한국 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건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어요. 인생은 짧으니까 지금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겠습니다. 한국 친구들이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건 저건데 할 수 없이 이걸 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듣게 됩니다. 자기 인생을 그렇게 남일처럼 흘려보낼 순 없지요. 난 한국인 친구들에게 ‘자기 인생을 살아라’고 충고합니다.” 99년 여름, 논문을 제출하고 나면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UN변호사로 일할 계획이다. 한국에 유학와서 얻은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소수’를 위한 인권변호사가 그의 몫이다. 아동매춘과 아동노동, 여성문제를 꽉 잡을 작정이다. 제3세계에 자원해 나가 현장에서 뛸 생각을 하고 있다. 그가 한국에 와서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감동받았던 '전태일 평전'의 그 전태일처럼, 그 책을 쓴 조영래 변호사처럼, 그는 낮은 곳에서 힘없는 사람들 곁에 있겠다고 했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대통령 후보의 아내, 강지영 문을 들어서는 순간 얼굴이 후끈했다. 지난 여름 정오의 아스팔트에서 뿜 어져나오던 열기 같은 뜨거움이었다. 요 며칠새 기온이 뚝 떨어져 으슬으 슬하긴 했지만 유독 추위를 타는 집안인가 싶었다. 거실은 조금 어지러웠 다. 소파 위엔 신문이 접혀 있고, 한구석엔 책이며 잡지 따위가 대충 쌓 여 있다. “딸애가 며칠 전 아이를 낳아서 집에 와 있다”고 했다. 몸조 리하는 산모와 갓 태어난 외손자를 위해 보일러를 세게 틀었단다. 그러고 보니 강지영(54)씨에게서 언뜻 할머니티가 났다. 어머니가 반대한 결혼 강씨는 평범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주부다. 우리 사회에서 주부에게 붙 는 익숙한 낱말들은 그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식들에겐 어머니요, 남편에 겐 아내요, 시댁에선 며느리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에게 낯선 이름이 생겼다. 대통령 후보의 아내라는. 하지만 그런 이름은 민망하기만 하다. 하긴 남편부터 대통령 후보라는 자리를 으스대지 않는 판이다. “별로 달 라진 게 없네요. 동네 사람들도 여전히 아줌마로 대하구요. 솔직히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러나 남편은 많이 달라졌다. 이전보다 훨씬 바빠졌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 절반으로 줄었다. 어제는 밤늦게 들어와 신문을 뒤적이다가 잠에 곯 아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니 언제 나갔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간밤에 갓난아기가 징징대는 바람에 토막잠을 자느라 남편 나가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못하고 배웅도 못한 게 못내 씁쓸하다. 아기울음 소리가 들린다. 산모는 태아가 거꾸로 서는 바람에 제왕절개를 해야 했다. 고생 끝에 낳았지만 지금은 둘 다 건강하다. 딸이 병원에 있 을 때도, 외손자가 태어났을 때도 남편이란 사람은 딱 한번 얼굴을 비쳤 다. 그것도 한 5분. 외손자를 얼른 안아보고는 자리를 떴다. 지난해 딸 결혼식 때도 아버지로서 염치없는 짓을 했던 남편이었다. 그때 남편은 여 의도에서 노동자총파업 집회를 갖고 있었고, 딸은 아버지 대신 신랑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특이해서 좋던데요. 사위도 장인이 나오지 못한 걸 섭섭하게 여기지 않고요.” 그래도 마음이 개운치는 않다. 부모로서 시집가는 딸에게 해준 거라곤 컴 퓨터 한대와 이불 한짝이 전부였다. 대신 축의금은 살림에 보태라고 모두 건네줬다. 그렇다고 그가 딸 혼수를 걱정해야 할 만큼 궁색한 형편은 아 니다. 딸이고 사위고 허례를 사양하기도 했지만 본디 마음가짐이 소박하 다. 액세서리는 묵주 반지가 고작이고 옷도 시장에서 골라 입는 것으로 만족한다. 요즘엔 남편하는 일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맵시에 신경을 쓰 는 편이지만, 달라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사 진을 찍어야겠다고 하니 그때서야 화장대를 힐끗거린다. 예전엔 부잣집 외동딸로 화려하게 살았다. 지금은 삼성그룹에 넘어간 동 방생명 창업주가 아버지였으니 그 호사스러움을 짐작해보라. 학교를 오갈 땐 가방 들어주는 아저씨가 따라나섰고, 집에선 공주님처럼 아줌마들의 대접을 받았다. 이화여대 교육학과에 들어갔을 때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1년 뒤,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 안이 기울면서 그의 양가집 규수 인생도 막을 내렸다. 회사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갔다. 사업의 '사'자도 모르는 모 녀에겐 재산을 지킬 힘이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집은 물론 자동차까지 회사 재산으로 만들어놓을 만큼 고지식했다. 결국 어머니가 갖고 있던 주 식에서 집값, 차값까지 빼고 빚잔치를 치렀다. 처음엔 그게 현실로 느껴 지지 않았다. 재산이 날아가는 것보다 아버지가 사라진 자리에 상심했을 뿐이다. 풍요 속에서 자랐기에 그게 사라진다는 데 대한 두려움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 같다. (사진/처음으로 본 외손자. 딸이 병원에 있을때도, 외손자가 태어났을 때도 남편이란 사람은 딱 한번 얼굴을 비쳤다.) 남편은 당시 서울대 농대를 다니고 있었다. 외사촌 오빠의 절친한 친구여 서 자연스럽게 만났다. 말수가 적은 대신 귀가 넓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도우려고 하는 모습이 좋았다. 고등학생 때 전쟁고아들과 집이 가난해 학교에 못가는 아이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쳤다는 말에 감동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농대가 있는 수원과 서울을 기차로 오가며 사뭇 애틋한 데이트를 이어갔다. 하지만 결혼은 쉽지 않았다.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홀로 된 이후 딸과 사위를 데리고 한집에서 살고 싶어했던 어머니로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외아들이 달가울 리 없었다. 사돈댁이 농사꾼 집안이란 점도 마땅치 않아 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몰래 그를 만나 호통을 치셨대요. 데이트 를 마치고 수원행 기차를 타러간 사람을 서울역에서 기다리고 있다 불러 세운 거죠. ‘나에게는 딸 하나뿐이니 학생이 포기하라’고 윽박질렀답니 다. 결국 자식 고집에 어머니가 지셨지만 그 사람과 손잡고 울기도 많이 했어요.” 매주 화요일엔 호스피스가 된다 남편은 그 뒤로도 친정집에 미운 짓만 골라했다. 서울신문 기자가 되더 니 하루가 멀다하고 선후배들과 술판을 벌였다. 밤늦게 사람들을 데리고 집으로 쳐들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꼭 그를 옆에 앉혀놓고 술잔을 돌렸다. 여주인이 안줏감 마련한다고 부엌을 들락거리는 것은 오 히려 손님들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라는 거였다. 게다가 남편은 차근차근 노동운동가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파리특파원을 마치고 와서 신문사 노조부위원장을 맡더니 아예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 설립에 뛰어 들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거였다. 수배와 수 감생활이 이어졌고, 민주노총 위원장이 돼서는 아예 명동성당에서 살았다 . 그도 이따금 노동자집회가 열리는 곳을 찾는다. 그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 고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다보면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고 활력이 솟는 다. 군중 속에서 단상의 남편을 바라보면 자랑스럽기도 하다. 남편과 눈 짓만 나누고 돌아설 때도 있지만 외롭지 않다. 사장님댁의 외동딸에서 노 동운동가의 아내로 바뀐 삶에 익숙해진 모습에 스스로도 놀란다. “왜 부 부는 닮는다고 하잖아요. 세상보는 눈이나 사는 방법이 비슷해진 거죠. 남편 잡겠다고 형사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데 무서우면서도 담담하 더라구요.” 그는 5년 전부터 호스피스로 말기 암환자들을 돌본다. 매주 화요일 미아 리에 있는 성가병원을 찾아 봉사를 실천한다. 살갗이 거의 벗겨져 일어난 노인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이들의 말벗도 돼준다.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임종의 순간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의 선한 모습에 놀란다. 그래서 꿈에서도 기대하진 않지만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면 무의탁자들을 위한 무료병원을 세우고 싶다. 그런데 그러려면 남 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할 텐데 큰일이다. 참! 그의 남편 이름은 권영길이 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30일 제 180호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신라통, 신라인 윤경렬 (사진/오랜만에 서울에 온 윤결렬씨. 그는 12월5일 인사동 학고재에서 그가 쓴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윤경렬 평생이야기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흰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은 그가 떡 하니 인사동 바닥에 나서자 바 삐 가던 사람들도 길을 멈추고 뒤돌아 본다. 여럿 모인 자리에서도 쉬이 눈에 띄는 명주실 같은 흰 머리카락이 반듯한 이마를 굽슬굽슬 덮었다. 선한 눈매에 부드럽게 다문 입맵시가 예사 노인 같지 않다. 한국인의 얼 굴, 그가 평생을 두고 찾아온 얼굴이 거기 깃들어 있다. 고분 발굴 현장 하나하나 스케치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81)씨는 인형을 만들던 사람이었다. 함경북도 경성군, 온천마을로 이름났던 주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흙으로 만든 토우 인형에 마음을 빼앗겼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조선 풍속을 따 라 인형을 빚어 구운 다음 색칠한 것을 보고 그 기술을 배우러 일본까지 갔다오는 집념의 인형장이였다. 그가 경주 사람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인형 때문. “일본에서 돌아온 뒤 풍속 토우를 만들었지만 팔 길이 막막했어요. 1943 년 아는 이 소개로 개성으로 나가게 됐고, 이듬해에 당시 개성박물관 관 장이시던 고유섭 선생을 뵙게 됐지요. 고고미술학의 선구자이신 선생께서 는 내가 일본에서 3년 동안 공부했다니까 일본놈의 독소를 빼기 전에는 조선 것은 해볼 생각도 말라고 혼을 내셨지요.” 윤씨는 독소를 빼기 위해서 역사가 깊은 곳으로 터전을 옮겨야겠다고 작 정했다. 부여, 공주, 하다가 선뜻 경주를 골랐다. 운명이지 싶다. 경주에 턱 들어서는 순간, 그는 ‘경주에 내 뼈를 묻으리라’ 결심했다. 계림숲 과 무령왕릉에서 그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힘차고 명랑한 예술이 있는가, 새삼 목이 메었다. “경주에 있으면 고분 발굴 현장을 많이 보게 돼요. 몸은 다 썩었어도 그 사람들이 입었던 옷, 쓰던 그릇, 갖고 있던 무기, 온갖 장신구류가 베갯 머리에 모여 있지요. 그걸 현장에서 하나하나 스케치를 했습니다. 사진기 로 툭툭 찍는 것하곤 달라요. 정확하게 관찰해서 그리게 되니까 옷주름 하나도 놓칠 수가 없어요. 지금 텔레비전 사극에 나오는 옷들은 대개 중 국풍이 많아요. 고증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거지요.” 풍속 토우를 만들려면 옛 사람의 얼굴과 의복 일습을 알아야 했다. 그는 얼굴을 찾아 경주 일대를 헤매기 시작했다. 경주 남산에 들어가게 된 데 는 이런 내력이 있다. 남산을 한달에 두번꼴로 한 6백번쯤 오르내렸다. 수없이 눈과 마음에 새긴 이 현장답사 덕에 그가 쓰고 그린 신라이야기 (창작과비평사 펴냄)는 동화책임에도 그 안에 담긴 삽화들이 신라시대의 풍속을 가장 적확하게 복원한 것으로 이름높다. “경주 남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지요. 신라 사람들은 그 바위 속에 부처 님이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전통적인 바위신앙과 불교신앙이 합쳐진 거지 요. 부처님 얼굴에 바로 신라 사람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고구려의 억세고 엄격함, 백제의 부드럽고 섬세함이 만나 빚어낸 한국인의 얼굴이 지요.” 그는 한국 사람 얼굴의 특징을 ‘꾸밈새가 없는 표정’이라고 했다. 시골 파파 할머니의 익살스런 얼굴, 고향 누님처럼 인정 듬뿍한 얼굴, 한마디 로 생겨먹은 대로 구수하고 정겨운 얼굴이라는 것이다. 부지런히 마을들 을 돌아다니며 그 얼굴에 얽힌 이야기들을 모아 펴낸 경주 남산 고적 순 례 겨레의 땅 부처님 땅 등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시절 그가 발로 읽어낸 남산의 육성이다. ‘경주 어린이 박물관학교’도 열어 “처음 남산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땐 나무꾼하고 나물 캐는 아낙밖에 없 었어요. 저를 아는 이들이 한다리 건너 얘기들을 전해듣고 서울에서 내려 올 때마다 앞장서라고 해서 남산 답사가 시작된 거지요.” 요즘이야 문화 답사나 박물관학교 같은 행사가 유행처럼 전국으로 번졌지만 30여년 전만 해도 드문 일이었다. 윤경렬씨가 “내 평생 보람된 일은 우리의 풍속 인 형을 만든 일과 경주 남산을 조사하고 소개한 일, 그리고 경주의 어린이 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가르친 일”이라고 말하는 까닭 이다. 1954년 10월, 당시 경주 박물관장이던 고유섭씨와 힘을 더해 열었 던 ‘경주 어린이 박물관학교’는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에도 있듯, 아이 들에게 ‘겨레의 고운 얼을 길러준 뿌리’였다. 윤경렬씨가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한 건 그가 쓴 마지막 신라인 윤경 렬―윤경렬 평생이야기 (학고재 펴냄) 때문이다. 윤씨가 마다했음에도 후 학들이 마련한 출판기념회가 12월5일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렸다. 모처럼 먼 걸음을 한 그를 보러 찾아온 벗들에 둘러싸여 그는 술과 정에 곱게 취 했다. 지금도 그는 경주시 양지마을의 인형공방 ‘고청사’(古靑舍·0561-772-9 114) 문턱 낮은 집에서 한국인의 멋을 생각하고, 남산을 가고자 하는 손 들을 맞으며 산다. 고청은 그의 자호. 원래 나만 홀로 익지 못해 아직 푸 르다는 뜻으로 고청(孤靑)이라 했으나, 이제는 옛날 속에서 푸르게 산다 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동무처럼 손잡고 남산을 오르내리던 부인 ‘순이’를 3년 전 먼저 보낸 요즘 그의 나날은 고즈넉하다. 적적할라치면, “꼴꼴꼴” 술 떨어지는 소 리가 좋은 상감청자 술병에 고량주를 받아놓고 남산을 친구 삼아 홀로 권 커니 받거니 대작하는 멋을 안사람 삼았다. 가끔 지구상에서 가장 먼 곳, 고향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지만 자신이 경주 사람이 된 것은 필경 부처님 의 뜻이었다고 믿는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8일 제 187호 한겨레 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영원한 가수 한대수 음악감상실. 희뿌연한 담배 연기와 디제이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뒤엉키던 곳. 아침에 한번 들어가면 푹신한 의자에 눌러앉아 하루를 죽칠 수 있던 곳. 간혹 통기타를 치는 무명가수의 열창을 들을 수 있던 곳. 그래서 시 간은 많고 돈은 없던 청춘들이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던 곳. 70년대 한 국의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세상에 없는 것들을 꿈꾸곤 했다. 자유, 낭만, 혹은 사랑. 가수 한대수(49)도 그때 거기에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에 머 리칼 부수수한 장발을 하고서. 조국은 마음의 고향일 뿐…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더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 오.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나 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행복의 나라로 )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음악감상실은 연탄가게가 사라지듯 하나둘씩 자취 를 감췄고, 그곳을 찾던 사람들은 어느새 중년이 됐다. 통기타는 전자기 타와 드럼에 자리를 내주고, 소박했던 노래는 빠른 랩과 거친 록에 밀려 났다. 굵은 경상도 억양으로 기타를 타던 한대수도 세월의 흐름에 덧없다 . 허리엔 제법 살이 붙고 이마엔 가느다란 골이 깊다. 초등학교 졸업앨범 에 남은 몇장의 흑백사진들처럼 이제 그를 기억케 하는 건 몇곡의 노래다 .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오.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오. 나의 목을 간질며 놀리면서. 밖에 보네네.”( 물 좀 주소 ) 그동안 세계의 이곳저곳을 흘러다녔다. 뉴욕에서 모스크바로, 도쿄로, 그 러다 서울로. 한가로운 여행이기도 했고 노래부를 무대를 찾는 목마름이 기도 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은 미국이듯이 조국은 마음의 고향 일 뿐 그를 구속하지 않는다. 공연차 들른 한국은 오히려 낯설다. 그렇게 살면서 세계를 친구로 사귀었다. 뉴욕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이탈리아 프 랑스 콜롬비아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었고, 몽골인의 피를 받은 러시아 여 인과 결혼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 그의 방랑은 어려서부터 시작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은 거리에서 아이들이 똥을 눌 정도로 가난했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시절이었다. 소년은 그 때부터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풍요 속에서 자란 미국 아이들에게 그는 촌놈이었고, 별볼일없는 황인종에 불과했다. 한국에 돌아와도 마찬 가지였다. 가난한 한국 아이들에게 그는 버터냄새 나는 이물질이었다. 소 년은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사진/도쿄에서의 공연.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유를 노래한다. ) 음악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베토벤과 바흐가 소년의 깊은 소외감을 달 래줬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음악광이었다. 전축 스피커에서 불이 나도록 교향악이 집안을 울리곤 했다. 그럴수록 소년의 외로움은 더욱 깊 어갔다. 마침 엘비스 프레슬리가 미국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기타를 두드리며 엘비스의 노래와 몸짓을 흉내냈다. 그러다 비틀스를 만났다. 비 틀스는 그를 작곡으로 이끈 스승이기도 했다. 마음 속에서 떠도는 말들, 그것이 곧 음악이 될 수 있다니. 대학에선 수의학을 전공했다. 한국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할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한국에선 지금 우유를 많이 먹지 않지만 조만간 우유를 많이 먹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거였다. 어릴 적 소똥을 삽으로 치우며 기진맥 진했던 기억이 새로웠지만 그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음악 외의 세상일 에 그다지 열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동물을 수술하다 피를 보고는 질겁하고 말았다. 그래서 새로 택한 게 사진이었다. 요즘 그것으로 먹고 산다.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맥주도 찍고 자동차도 찍는다. 가수가 아닌 한대수는 상업사진 작가다. 그가 귀국했을 때 한국은 청바지와 생맥주, 통기타가 지배하고 있었다. 송창식과 윤형주, 김민기, 양희은이 선봉에 서 있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서린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 둥지를 틀었다. 사람들은 소외감과 문화적 혼돈 속에서 달궈진 그의 노래에 박수를 보냈다. 시대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도 마찬가지였 다. 그의 앨범은 얼마 안 가 판매가 금지됐고, 그는 방송출연도 금지당했 다. 두번째 앨범 고무신 은 음반이 나오기도 전에 녹음테이프가 압수당 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 탄압을 자신의 노래에 대한 오해이거나 이해일 거라고 말한다. ‘행복의 나라'는 멀었는가 “바람아 불어라. 불고 또 불어라. 우리 아버지 명태잡아 내일이면 돌아 온다.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명태를 잡아오면 명태국도 많이 먹고. 명 태국이 나는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명태국을 먹고 나서 명태가 몇마리 남는다면. 나머지 명태를 팔아서 고무신을 사서 신고 ”( 고무신 ) 그 권력의 폭력을 군대에서 절감했다. 해군이었는데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순시를 오는 바람에 군기가 칼날이었다. 훈련을 나가면 바다에 둘러 싸여 석달 가량 썩은 김치를 먹고 살아야 했다. 고통에 겨워 자살하는 동 료도 있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삭막한 생활에 질식하기 직전 한 권의 책이 날아들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였다. 미국 의 가족들이 책표지를 뜯어내고 영문판을 보내온 것이다. 검열관한테 연 애소설이라고 속이고 읽었다. 자유가, 노래가 그리웠다. 그러나 그는 권 력에 저항하지 않는다. 다만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을 노래할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일상화된 관념을 깨고 싶었다. 권력보다는 인간을 상대 로 한 노래였다. 그걸 듣는 이가 달리 해석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사실 노래가 권력과 갈등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래처럼 많은 사 람들이 즐기고 오래가는 게 없기 때문이다. “영화 대부 가 아무리 좋다 고 해도 몇번이나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비틀스의 노래는 세계에서 끊 기는 날이 없지 않는가.” 지금도 자유의 노래를 부른다. 문명이 발달했지만 사람은 여전히 억압돼 있다. 삐삐, 주식시세, 예금통장 등 모두가 숫자로 통하는 요즘같은 시대 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지구를 한방에 날려버릴 핵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자본의 공세에 사람들은 무력하다. 인간을 해방시키겠다던 사 회주의는 무너졌지만, 인간을 부유하게 하겠다던 자본주의는 수많은 가난 한 자들을 낳고도 기승을 부린다. 그리고 허리가 동강난 조국 한국. 그래 서 아직도 그의 노래는 행복의 나라를 쫓는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06일 제 181호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소설가 조정래 4년간 틀어박힐 대하소설 한강 작업… 온몸으로 읽게 쓰고파 (사진/조정래씨는 태백산맥 과 아리랑 에서 놓쳐 아쉬웠던 모든 것을 한강 에 쏟아붓겠다고 말한다.) ‘앉은 자리에 풀 한포기 안 날 사람.’ 문단에서 그는 독종으로 통한다. 십몇년째 집에 들어앉아 날이면 날마다를 꼬박 글쓰는 데 바친다. 하루 원고지 30장, 달력엔 이 노역의 결과가 빠짐없이 가새표를 그려나간다. 날짜를 지워가며 스스로 이름지은 ‘글감옥’에서 출옥할 날을 기다리는 그의 나날은 수인의 그것을 닮았다. 7시 기상,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 아침밥, 오전 작업, 1시간쯤 낮잠, 점심, 체조, 오후 작업, 저녁, 뒤로 달리기, 잠깐 눈붙이기, 그리곤 하늘이 두쪽 나도 30장을 채워야 자리에 든다. 그 시각은 늘 다음날 새벽 1∼2시. 이런 나날을 그는 80년대 초부터 계속해왔다. 소설을 시작하면 외출은 물론이고, 전화도 안 받는다. 오죽하면 이종찬 국가정보원장이 통화를 원하는데도 심부름하는 아주머니가 한마디로 “글쎄, 안 계세요”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북에 갈 겁니다” 지금 소설가 조정래(55)씨 집에 전화해 그를 전화기 앞으로 불러내는 암호는 ‘한겨레’다. 5월15일부터 한겨레신문에 연재를 시작하는 대하소설 한강 때문이다. 6년 걸린 10권짜리 태백산맥 , 이어 4년6개월 걸린 12권짜리 아리랑 을 끝내고 잠시 가출옥했던 그는 다시 옥으로 걸어 들어가 앞으로 4년을 틀어박혀 있을 서재의 빗장을 질렀다. “이거 끝내면 내 나이가 60이에요. 소설을 끝낼 때마다 거울을 보며 흠칫 놀라곤 합니다. 삐쩍 마른 어깨, 핏기없는 낯빛, 홀쭉해진 뺨, 쪼글쪼글한 이마, 몇십년 늙은 얼굴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래도 어쩝니까. 그게 내 작가로서의 자존심 같은 징표인걸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길을 한강 을 쓰며 맞게 되네요. 성공회신학대 신영복 교수가 제목 글씨를 써 주셨는데 아주 잘났어요. 돛을 팽팽히 올리고 썩 내닫는 배 같다니까. 글도 쓱쓱 잘 나가니 들머리부터 감이 좋아요.” 조정래씨는 험준한 산맥( 태백산맥 )을 넘어, 출렁거리는 들( 아리랑 )을 지나, 장대한 강( 한강 )에 다다랐다. ‘역사 교과서로 씀직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일제 36년과 해방공간의 민족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치밀하게, 문학적 감흥을 가지고 그려낸 태백산맥 과 아리랑 에 이어 그는 1959년부터 92년까지 분단 한반도를 다룰 예정이다. 이렇게 해서 ‘조정래의 한국 근현대사 3부작’은 마무리된다. 산에서 시작해서 물로 끝나는 것이다. “ 한강 은 우리 민족의 현대사입니다. 남북을 동시에 무대로 삼고, 어느 쪽에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바라볼 참이죠. 남이건 북이건, 잘한 건 잘했다 하고 못한 건 못했다 쓸 겁니다. 그 총체적 관찰 속에서 실오라기 같은 통일의 실개울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요. 어떤 분은 가보지도 않은 북한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묘사하겠느냐, 북에 대해 뭘 얼마나 아느냐 하시겠지만 그동안 중국, 러시아를 비롯해 해외 취재여행을 통해 축적된 자료가 상당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북에 갈 겁니다.” 그는 한강 을 위해 북한을 방문할 뜻을 분명히 했다. 정주영 현대건설 명예회장처럼 소 1천마리를 끌고 휴전선을 넘겠다는 식의 거창한 방북은 아니지만, 그가 ‘분단정권’이라 부르는 남과 북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만큼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 한강 은 50년대 후반, 벌교 촌놈 조정래의 서울 상경기를 따라 시작됩니다. 성북동 산비탈 판잣집에서 사시사철 물지게를 지고 헉헉대야 했던 밑바닥 인생살이의 체험이 한국 현대화의 출발지인 셈이지요.” 조정래씨는 자신의 문학을 일군 지렛대가 ‘가난’이라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계급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걸 인식하게 한 것이 가난 때문에 빚어지는 차별이었다는 것이다. 눈비오면 머슴이 업고 오던 도련님들과 한반에서 공부를 할 때 그는 저절로 “저래선 안 된다”고 깨달았다. 쌀밥에 계란을 얹어오던 부잣집 아이들 도시락에 침을 뱉어 못먹게 한 뒤, 물로 배를 채운 아이들을 불러 나눠먹던 총대장이 조정래 소년이었다. 그는 그 가난에서 사회를 보았고, 그 사회에서 모순을 가려냈으며, 그 모순에서 작가로서 써야 할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반골기질은 가난에서 싹텄습니다. 문학이 왜 필요한가의 출발점도 거기지요. 때로 피로가 쌓여 도망가버리고 싶을 때, 소리지르고 머리칼을 쥐어뜯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고 글이 안 될 때, 내가 술이나 농땡이로 도망치지 않고 책상 앞으로 더 다가앉는 건 어린 시절 나 자신에게 다짐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한번 살다간다. 한번 살기 때문에 적당히 살 수는 없다. 너는 글쓰는 놈이다. 낭비할 시간이 없다. 부지런히 글쓰는 것, 글로써 가난한 자와 가난한 자들의 위에 서 있는 자들을 가려내 그 모순을 고발하는 것, 그게 너의 본분이다.” 그는 태백산맥 과 아리랑 에서 놓쳐 아쉬웠던 모든 것을 한강 에 쏟아붓겠다고 했다. 그의 가슴에 아직 응어리처럼 박혀 있는 5·18 광주민중항쟁이나 베트남전에 대한 제대로 된 서술을 그는 벼르고 있다. 두편의 대하소설에서 이미 1천여명의 인물을 그려낸 작가는 한강 에서도 전태일, 박정희 등 작고인물과 임수경, 박태준씨 등 실존인물을 가감없이 다루겠다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망상처럼 특정 계층에 의해 영웅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그 허울좋은 가면을 확 벗겨버릴 생각입니다. 판문점을 넘어오던 때 일을 취재하며 만난 임수경씨는 ‘선생님 소설에 등장하면 영광’이라고 말하더군요. 70년대나 80년대의 시대정신을 드러낸 인물들, 이를테면 현 사법부가 얼마나 추악한가를 증명한 방희선 판사 같은 이들을 증인처럼 불러낼 겁니다.” 집채만한 파도를 느끼며… 그는 한국 현대사의 실체를 발라내는 6가지 뼈대로 재벌, 정치권, 언론, 군부 및 공무원, 사법부, 미 CIA를 꼽았다. 또 70년대까지 한민족을 이끌었던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잇는 80년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독재타도와 노동자들의 대동단결, 한겨레신문과 전교조 탄생’ 4가지를 들었다. 87년 6월항쟁으로 불기둥 솟듯 터져나온 이 새 정신이 아마도 앞으로 1백년 너머 통일까지를 버텨나갈 미래 정신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한강 은 이 정신을 그려나가게 된다. “한 독자가 편지를 보내셨는데 태백산맥 은 흥분해서 읽었고, 아리랑 은 울면서 읽었다고 쓰셨더군요. 한강 은 흥분하고 울면서 읽는 소설이 될 겁니다. 긴 글을 쓸 때마다 큰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느낌에 빠집니다. 집채만한 파도가 내 몸을 파고드는 걸 느끼며 한강 을 출발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우리의 자손이 살 더 좋은 나라, 통일된 나라를 내다보는 이야기입니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소리꾼 장사익 푸른 하늘을 보러 산으로 올라간 사람. 노래부르는 자신을 서슴없이 '뒤 풀이 가수'라고 말하는 사람. "참 좋아" 아유, 쪽팔려" "똥 같은 소리 말어유"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 소리꾼 장사익(48)씨는 바람 찬 서울 세검정 골짜 기 높지거니 둥지를 틀고 독공중이었다. "요새 다덜 되게 어렵잖아유. 제 노랫말처럼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갔다가, '기진한 몸 텅 빈 가슴으로' 집에 돌아오 는 사내들 뒤꼭지가 눈에 밟히대유. 이번에 낸 두 번째 음반 기침 은 쓰라리고 고된 세상살이를 다룬 거예유. 신배승 시인이 그걸 기침으로 비유한 게 너무 좋더라구." '돌아누워도 돌아누워도/찾아오는 환장할 기침은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밥그긋의 천길 낭떠러지 속을/비굴한 내 한몸 던져 버　 오늘/삶은 언제 나 가 시박힌 손톱의 아픔이라고...'( 기침 중에서) "아버지, 바깥에 낙엽 좀 봐유" 삶의 쓴맛, 신맛이 장아찌처럼 절여진 그의 목소리가 가슴으로 우르르 날 아온다. 아픈 걸 후벼내서 눈물 쏙 빠지게 하는 노래. 뚜르르 맺힌 것 풀어주 는 게 그의 노래다. 꺼끌꺼끌. 후둘후둘, 음을 벼려가는 그의 솜씨는 세 상의 슬픔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사내의 마음처럼 출렁, 칼칼한 목울음이 한 대 목 두 대목을 넘으며 응어리를 만들다가 퍽 쏟아내는 파열음은 쨍하고 갈라지는 얼음장 같다. "기침이란 게 아픔이지유 뭐. 이 시 읽으니까 내 얘긴 것 같드라구. 난 아무리 이름난 시인이 쓴 시라두 내 마음에 안 땡기문 안 되드라구." '기침'에 얽인 얘기는 또 있다. 그가 밀려드는 공연 요청을 다 접고 안절 부절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팔순의 부친이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안방에 누운 지 몇 달이 지났다. 아버지의 기침은 그의 얼굴을 꺼칠하게 만든다. "제가 그랬지유. 아버지, 바깥에 낙엽 좀 봐유. 여름엔 시퍼렇지유. 가 을 오면 단풍 들고 안 떨어질라구 안간힘을 쓰잖아유. 사람이 다 그런 것 같아 유." 부친은 고향 이웃에서 이름났던 장구잡이였다. 그 '끼'는 장사익씨가 이 런저런 직업을 멀리 돌아 마흔다섯에 가수로 살아나는 바탕이 되었다. 충 남 홍 성군 광천 촌놈이 열일곱에 무작정 서울에 와 안 해본 일 없이 떠돌다가 뒤늦게 붙든 소리의 길은, "헐 때까지 신나게 하다 갈" 숙명의 길이다. '노래를 부른다/허리가 굽은 그가/탁자를 탁탁 치며/이 풍진 세상을 만났 으니/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다 벽에 쓴 낙서를 노랫말로 한 국밥집에서 는 그 가 생각하는 좋은 노래의 뜻을 엿보게 한다. (사진/'어디 가든지 내 하고자플 때 내 하고싶은 대로 노래하는' 사람. 그는 그런 자신을 '뒤풀이 가수'라고 말한다. ) "내가 사실 옛날에 뒤풀이 가수여. 어디 가든지 내 하고자플 때 내 하구 싶은 대로 노래했어. 클래식 하는 사람들처럼 딱하구 절 꾸벅하구. 그런 거 난 몰라유. 음악도 모르구. 그냥 밥 먹고 그런 데서, 무대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르는 거지. 사람들이 객석에서 숨죽이 고 뻣 뻣하게 앉아있는 거 보면 나도 숨을 못 쉬겠어. 그래 내가 못 참고 한마 디 하지. '왜들 그려유. 그 숨들 좀 쉬세유'." 서울방송의 대하드라마 임꺽정 주제가를 녹음할 때 일이었다. 반주를 맡은 국악지휘자 박범훈씨가 장씨에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딴따 라냐, 성악가냐, 국악인이냐, 이쯤 구분해 말하는 얘기였을 텐데 그는 뜬금없이 "풍류인이요"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잘 노느냐, 그게 내 일과여" "풍류인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풍류인. 백수인지도 모르고 그 양반이 물 으니 뭐라고 하겠어요. 내가 참 이상한 자리에 서 있는 거지. 라디오 국 악 프 로에 내 노래 찔레꽃 이 나오드라고. 얼마전 예술의 전당에서 한 '공감' 공연 때는 이미자씨의 동백 아가씨 를 불렀는데 그게 개관 10년 만에 처 음 있는 일이랍디다." 1집 하늘 가는 길 에 신중현씨의 님은 멋 곳에 봄비 등을 장씨 틀로 부른 것처럼, 이번 2집 기침 에서도 비 내리는 고모령 대전블루스 등의 대중가요를 그 식대로 노래했다. " 비내리는 고모령 은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거라 넣었어요. 이봉조씨 곡 뜨거운 침묵 은 색소폰 하는 이정식이랑 재즈식으로 흘러가 봤구먼유." 장씨는 공연을 꼭 1부와 2부로 나눈다. 박자도 그저 설렁, 연주자더러 " 먼저 하셔유. 내 쫓아갈팅게" 하는 그답지 않게 이 원칙만은 꼭 지킨다. "1부에선 창작곡을 불러유. 사람들이 저게 뭔 뜻일까. 무슨 곡절이 있을 까. 긴장하고 듣지유. 2부는 쇼같이 해유. 마음을 탁 열어놓고 줄 거 다 주구 막 까불지유. 이게 바로 우리 음악의 묘미에유. 맺고 푸는 것, 꽉 묶었다 가 시원하고 개운하게 풀어주는 것이 우리 소리의 맛이지유." 그 해원의 소리를 뽑아내고 나면 그는 기진해버린다. 라이브 공연은 그의 목숨과 같다. "한번 공연에 일년 목숨을 까먹는 것 같은 만큼 탈진한다. 그 래서 공연이 끝나면 잘 먹고 푹 쉰다. 그래야 몸을 움직일 수 있다. 그가 장기공연을 못하는 까닭이다. 새납(태평소)을 잘 불고, 춤도 잘 추는 그는 "아떻게 잘 노느냐, 그게 요 즘 내 일과여" 라고 말했다. 잘 놀고 싶다는 그의 꿈은, 이 바닥에 나오 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음악 선배인 김대환씨가 던진 "스타가 되지 말라"는 말과 도 통한다. 잘 노는 그의 소리를 듣고 슬픔을 이겨낼 힘을 얻는 사람. 단 한명 이라도 있다면 그를 위해 목이 터져라 노래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25일 제 188호 한겨레 21 사람이야기 .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편집인 정해렴 '정본'(定本)편집에 일가… 몇백년 시공 넘나드는 정신의 다리놓기 한길 (사진/좋은 글을 골라 사람들이 읽기 편하게, 정확하고 정갈한 책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일은 그에겐 신앙과 같은 것이다.) 그는 하룻밤에도 수천리 되는 길을 닦는다. 몇백년 시공을 넘나들며 다리를 놓기도 한다. 손에 든 건 두툼한 돋보기 하나와 빨간 볼펜 한자루뿐. 출렁거리는 정신의 강물을 거슬러 옛 사람들이 한 자, 한 줄 마음에 새긴 글을 읽어나가노라면 시끄러운 문 밖은 멀리 사라지고 깊은 산 속에 들어앉은 듯 맑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고전이 뿜어내는 향기에 취해 산 40년이었다. “책은 상품이 아니다” 편집인 정해렴(59·현대실학사 대표)씨는 스스로를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옛 성현들이 남긴 글들을 오늘에 되살려내는 그의 작업이 사람들 정신 사이를 잇는 일이라 보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골라 사람들이 읽기 편하게 정확하고 정갈한 책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일은 그에겐 신앙과 같은 것이다. 그 역사적인 다리를 놓는 일이 요즘 땅에 떨어진 게 가슴 아프다. 한강에 놓인 다리가 끊어져 사람 다치는 것 못지않게 정신의 다리가 허물어지면서 무너질 이 나라 백성들의 넋이 더 걱정되는 요즈음이다. “책을 자꾸 상품이라고들 하는데 난 그런 시각에 동의할 수 없어요. 물론 정신이라고 부를 수도 없이 남발하는 미사여구며 값싼 감정으로 덕지덕지 칠을 한 책이야 그저 팔아치울 수도 있는 물건이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공해요, 현대사회의 낭비구조를 이루는 한 단면이죠. 그런 책을 내서 사람들의 정신을 흐리고 시간소비를 하게 하는 건 죄입니다. 책 만드는 일을 너무 손쉽게 생각해요. 출판을 무서워하고 어려워하는 맘들이 지금처럼 절실한 때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책을 우습게 알고 멀리하는 데는 출판인들의 책임도 있습니다.” 정씨는 1964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출판계에 들어와 한눈 한번 안 팔고 편집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태어난 책이 줄잡아 1천여권. 아침에 출근해 책상에 앉으면 점심 먹으러 갈 때까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신구문화사에서 10년, 창작과비평사로 자리를 옮겨 다시 20년을 보내는 동안 그는 “출판으로 민족운동을 하는” 심정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던 80∼83년에는 창작과비평사의 사장을 지내며 어려운 시절을 겪기도 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김주영씨의 대하소설 '객주'를 혼자하다시피 펴냈고,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 때문에 안기부에서 3박4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 그는 국학의 중요함에 눈떴다. 고전 국역에 관한 편집의 전범을 세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황금 같은 시절이었다. 그렇게 몇십년을 갈고 닦으니 원고지를 뚫고 보는 천리안의 안목을 갖게 됐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문장에 인격이 담겨 있지요. 난 글과 몸이 함께 가는 걸 최고로 쳐요. 자기는 실천 안 하면서 말로만 떠드는 학자들이 좀 많아요? 몸에 배지 않은 글 쓰는 자들이 너무 많은 거라. 글하고 사람하고 맞질 않으니 그 책이 제대로 읽히겠어요? 쓰레기지. 이 사회의 혼탁함이 오히려 글 쓰는 이들에게 엄정함을 요구했던 시절을 살아왔지만, 거기에 부응했던 이는 얼마 없었어요. 그렇게 굴러온 출판풍토가 엉성한 책, 황폐한 사람들을 만들어온 겁니다.” 그는 편집인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 우리나라 출판계가 섭섭하다고 했다. 그는 출판계에서 편집자가 “거세된 지경”이라고 표현했다. 출판으로 한탕하려는 물주와 영업인만 있다는 것이다. 편집 일을 제대로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는 것도 아쉽다. ‘정본‘(定本)편집에 일가를 이룬 그의 장인정신을 대물림할 후배 세대가 드물다는 건 그만큼 이 분야가 ‘한데’였다는 걸 뜻한다. 원본과 일일이 대조해서 초간본과 중간본에서 실수로 빠뜨린 부분을 찾아 넣고 잘못된 글자를 바로잡는 일은 그에게 왜곡된 정신과 역사를 바로잡는 일과 같았다. 70년 '한용운 전집'의 편집교정 책임자를 맡은 뒤 그의 손을 거쳐 제모습을 찾은 정본이 수십권이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소설가 채만식 전집,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 횡보 염상섭의 '삼대' 등은 그가 아니었으면 잘못 만든 책이 지금도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었을 것이다. “'삼대' 같은 경우, 문장이 빠진 곳이 66군데 968자, 어휘가 빠진 곳이 85군데 147자였어요. 기타 오자나 띄어쓰기가 잘못된 곳은 너무 많아 더 말할 필요도 없고요. 횡보가 저승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아마 소설을 괜히 썼다고 후회했을 겁니다. 요새는 작가들이 아예 디스켓 형태로 원고를 만들어오거나 컴퓨터로 원고입력을 하니까 좀 낫지 않을까 하겠지만 오히려 문장 한줄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졌어요. 덧붙여 말하고 싶은 건 컴퓨터로 원고를 쓸 때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쉽게 쓰니까 문장이 늘어져요. 중언부언에 밀도는 떨어지고 반짝반짝하는 수식어만 늘어나고. 깊이있는 생각이 점점 보기 힘들어집니다. 원고지로 수작업 할 때는 고통스럽잖아요. 한장 한장 쓸 때마다 저절로 퇴고가 됐는데 컴퓨터 원고는 그런 반성이 없어요.” 정씨는 글을 원고지에 쓴다. 그는 몸을 믿는다. 자신의 손이나 눈만큼 믿음직한 건 없다. 그가 만든 1인 출판사의 이름도 그런 그의 뜻을 담고 있다. ‘현대실학사’. 그는 지금도 “실학 정신이 유효하다”고 말했다. 현대적 의미에서 실학의 정신을 잇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민족성을 자각한 것이 실학자였고, 그 정신이 아직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연결되기 않았기에 실학정신은 앞으로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현실총서’란 이름을 달아 그가 낸 책들은 바로 이 실학정신을 오늘에 전파하려는 전령들이다. '한용운 산문선집' '신채호 역사논설집' '다산 문학선집' '안자산 국학논설집' '호암사론사화선집' '홍기문 조선문화론선집'들은 아침부터 밥늦게까지 침침해진 눈을 비비며 그 홀로 오래 묵혀 천천히 손봐 내놓은 책들이다. '성호사설'은 언제쯤 독자 손에… “부도가 났네, 책을 못만들겠네, 다들 난리굿을 피우는데 나는 이익의 '성호사설'을 정리하면서 행복한 가을, 겨울을 보냈습니다. 원고지 1천매쯤 되는 주를 달면서 내가 그분 글에서 읽은 게 뭔지 압니까.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한마디였습니다. ‘모든 문제는 탐욕 때문에 일어나니 제몸을 더욱 갈고 닦아 정갈하게 살 일이다.’ 고전 속에 길이 있다는 건 허투루 흘릴 말이 아닙니다.” 이 '성호사설'이 언제쯤 독자들의 손에 닿을지 모른다. 당장 책 찍을 종이 마련이 난감하다. 다산의 '흠흠신서'도 정리는 다 돼 있지만 책상 속에 잠자고 있다. ‘고전의 현대적 편집은 이렇게 하는 거다’를 보여주려고 맘먹고 편집한 작품이지만 이제 “몸으로 때우는 데도 한계가 온” 형편이어서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사업으로는 실패할지라도 출판으로 역사에 남고자 하는 그의 옹고집은 절굿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왜 안 팔릴 책을 만드느냐”고 아는 이들이 안타까운 김에 한마디 하면, 그는 제꺽 응수한다. “말을 제대로 하게. 내가 안 사갈 책을 만드는가? 독자가 안 찾는 거지.”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노촌(老村) 이구영 그의 몸은 자그맣다. 그러나 그 몸이 껴안아온 세월과 세상은 엄청나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이 이 남자의 몸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조선 봉 건사회, 일제 식민사회, 6·25전쟁, 사회주의사회, 20여년의 감옥사회, 그리고 80·90년대의 자본주의사회를 그는 꿰뚫어왔다. 노촌(老村) 이구영(78). 그가 써내려가는 이력서의 한칸, 한마디마다 살 을 에는 시대의 삭풍이 휘몰아친다. 험악하고 사나운 역사의 수레바퀴가 웬만큼 지나간 지금, 그는 “잘못 살았다는 느낌은 없다”고 했다. “나보다 더 모르고도 잘 살다 가는 사람이 많은데, 옥에서 지낸 지난 20 여년은 오히려 내가 죄짓는 걸 면하게 해줬다고 봐야죠. 밖에 있었으면 으레 남 부리고, 남 덕에 먹고 살았을 텐데 그 죄 짓는 대신 그걸 깨고 살 수 있게 해줬으니 복이라고 할밖에요.” 김일성대학서 한문을 가르치다 노촌은 1920년 충북 제천군 한수면 북노리에서 연안 이씨 집안의 13대 종 손으로 태어났다. 천석꾼 지주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고, 유서깊은 계통의 학문을 대물림한 그는 부족한 게 없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뒤로 하고 어느날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몸을 던지게 된다. 신학문을 하러 들 어간 영창학교(대한기독교청년회학교의 후신)에서 사회주의자인 정준섭씨 를 만나 그쪽에 눈을 떴고, 남로당 선전부장을 지낸 김태준씨에게 배우면 서 이른바 ‘주의자’가 된 것이다. “안다는 게 그렇게 쉬운 얘기가 아니죠. 젊을 때,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 를 좋아했죠. 그는 부잣집 출신으로 진보적 삶을 살았지만 끝내 거기서 벗어나진 못했어요. 그에 비하면 같은 시대를 산 고르키는 깬 사람이었죠 . 외투 나 어머니 를 보면 그가 지상에서 사람이 살다가면서 꼭 깨달아 야 할 옳음이 뭔지 나오죠. 난 뭔 ‘주의’보다는 사람답게 사는데 조금 이라고 이바지할 수 있으면 헛 산 목숨은 아니라고 봅니다.” 1950년 9월,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올라간 노촌은 전시에 그를 쓰러뜨린 폐결핵 때문에 거의 5년 동안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연암 박 지원의 학문에 훤했던 노촌은 병원 안에 있던 회복학교와 평양의 노동학 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때 그가 김일성 앞에서 실학 사상을 강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김일성대학에 가보니 남에서 올라간 애들이 성적이 훨씬 뛰어나. 김대(金大) 교수들이 이게 왜 이러냐 분석해보니 한문을 아느냐 모르느냐 가 관건이야. 그래서 북한에서도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했지. 벽초 홍명희 의 큰아드님 홍기문 등 북의 학자들과도 교류를 해봤지만 남이건 북이건 한문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달라. 동양적 정신이 품고 있는 웅숭깊은 세 계를 서양 학문은 못 따라오지.” (사진/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 몸에 새겨온 사람. 그는 "잘못 살아온 느낌은 없다"고 했다. ) 1958년 그는 중앙당 연락부의 소환을 받고 남파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미 여러 차례 넘나든 그에게 당이 내린 지령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 다. 남으로 온 그는 제대로 활동도 못해보고 부산에서 경찰에 붙들리고 만다.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다, 들어갔다, 나갔다, 그짓 하다가 평생이 다 가 버렸지. 원래 난 양쪽 다 안 믿으니까 뭐라 비교할 수 없지. 자본주의의 소유력은 무시 못하지. 사회주의의 창조력은 대단한 거요. 소련 붕괴는 창조력이 소유력을 못 당해 일어난 일 같아. 어쨌든 난 사회주의니 자본 주의니 그거보다는 고루 함께 잘 사는 사회가 좋아요.” 20여년의 옥살이를 그는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로 보냈다. 75년 대전교도 소에서 만난 신영복(성공회대), 심지연(경남대) 교수들과 한문을 읽었고, 그때 집안 사당에 보관해온 의병기록 1백40여편을 우리 말로 옮겼다. 지 난 93년에 나온 호서의병사적 은 그때 주춧돌을 놓은 노작이다. 옥에 있 는 형 뒷바라지며, 의병자료들을 어렵게 나르던 아우 이칠영은 그보다 먼 저 죽었다. “ 호서… 출간은 젊은 세대들에게 사라져가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의병사를 쉬운 말로 널리 읽을 수 있게 해 우리의 민족자주정신과 애국애 족에 기초한 불굴의 민족정신을 고양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지요. 요즘 한문 번역은 지금 우리말로 두루뭉술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말 짱 헛거예요. 본 뜻을 충실히 살리는 직역을 해야지. 규장각에 쌓여 있는 자료들을 급한 대로 빨리 번역들을 해야 할 거예요. 좀더 시간이 지나면 그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게 될 텐테….” 한주일 8번쯤 강의… 신영복씨도 제자 허약한 몸이 70년대 초의 무지막지한 강제전향공작을 못견뎌 전향서를 쓴 노촌은 80년 5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안에 있을 때 예측한 것과 전혀 딴 세상이라.” 당혹했던 그는 새로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을 알기 위해 젊 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걸 즐긴다. 피해가는 학생을 불러 앉혀놓고 대화할 때도 많다. 그가 이끌어가고 있는 이문학회(以文學會·02-739-8262)는 남 녀노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대화의 광장이자 현대판 서당이다. 논어 에 나오는 “以文會友(글로써 벗을 모으고)하고, 以友補仁(벗으로써 인을 돕는다)이라”에서 따온 학회 이름은 수백명의 제자들을 배출한 노촌의 깊은 뜻을 읽게 한다. 요즘은 일주일에 8번쯤 한문 강의를 한다. 알음알음으로 노선생님을 찾는 학생들은 가지가지다. 신경림 시인이 창립 멤버였던 목요회를 비롯해 감 옥동지인 신영복씨의 친구모임, 화론을 읽는 화가들, 초서를 읽는 주부들 , 각 대학의 한국학 석·박사생들, 문인들, 수녀까지 그는 단 한 사람도 내치지 않고 다 품어안았다. 한글학자인 박용수씨가 그의 양아들 같은 신 동학(성균관대 한문학과 4학년)씨를 “가서 돌아가시면 제사 모실 생각하 고 배워라”고 보낼 정도였다. “학교에서 4년 한 것보다 지난 두달 동안 선생님께 배운 것이 더 많아요. 단순 번역이 아니라 원리를 깨우쳐 주시 는 데다 역사적인 고증, 구절구절에 서린 정신사적 배경을 함께 얘기해주 시니까 감화랄까, 마음으로부터 배우게 되지요.” 신씨의 얘기다. 이문학회와 함께 노촌의 연구실에 붙어 있는 또하나의 간판은 의병정신선 양회. 그는 제대로 된 의병사 집필을 삶의 마지막 임무이자 희망으로 가 슴에 담고 있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봤지만 또 한번 그저 지나가는가부다 해야지. 의병들이 보여준 구국애족의 혈사는 한민족이 길이 기리고 되새겨야 할 한민족의 고귀한 정화입니다.”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1일 제 189호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씩씩한 여성이 세상을 바꾼다 국회의원 추미애 그는 짧다면 짧은 사십 평생을 남의 발자국이 안 난 길을 골라 걸어왔다. ‘현직 여판사로 첫 정계 입문’‘대구 출신 인재가 제1야당에 첫 입당’‘야당 사상 첫 여성 부대변인’‘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첫 여성 위원’. 그의 이력서에 유난스레 ‘첫’ 자가 많이 붙는 것은, 이 땅과 이 시대가 그에게 지워준 짐일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서슴없이 내딛는 그의 발걸음이 너무 당당했기에, 사람들은 때로 그의 어깨가 휘청할 만큼 기대어린 눈길을 보내거나 질시의 눈초리를 퍼붓곤 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가 걷는 길은 그의 후배들과 그의 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기에 그랬다. 민가협 어머니들의 부푼 꿈을 위하여 “1주일 만에 제 방에 돌아오네요.”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130호를 찾아드는 추미애(40·서울 광진을)의원의 목소리엔 피로의 기색이 없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돌아가는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숨가쁨만이 전해진다. 보좌관들이 줄줄이 들여오는 큼직한 보따리들엔 그가 요청한 자료들로 그득하다. 그는 예닐곱개 보자기들을 꼼꼼하게 뒤지며 밤을 샐 모양이다. 인수위에 쏠리는 국민들의 관심이 그를 쉬지 못하게 한다. “하루 내에 보고받고, 회의하고, 자료 뒤지고… 강행군입니다. 새 정부 취임은 2월25일로 못박혀 있는데 정권교체 인수의 경험은 없으니…. 뭐든지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 입장에서 시간 부족이나 인력의 한계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첫 단추를 끼우는 심정으로, 새 역사를 일구어가는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인수위가 하는 일이 과거 정권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몇몇 특정인물에 대한 단죄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지난 50년 일방 통행식으로 이루어져온 국정을 반성의 거울로 삼아 그 잘못들을 낱낱이 점검해보고, 국민의 동의를 얻어가며 공동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공개적이고 투명한 절차 마련의 기초를 놓는 것이 인수위가 할 일이라고 했다. 정무분과 위원으로서 그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양심수 사면과 복권에 관한 문제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인수위에 양심수 사면을 위한 구체적인 검토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를 믿는 민주화실천운동가족협의회 사람들과 만난 추 위원은 “민주정부 시대의 과제로서 솔직하게 과거를 반성하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양심수가 있느냐 없느냐는 얘기는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이 체제에 저항하고 반민주 세력에 대항했던 것은 우리가 일군 정권교체, 그 ‘민주주의의 완성’과 흐름을 같이 합니다. 실정법 위반으로 이미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들이니 만큼 법무부나 검찰쪽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겠지요. 고문 등의 가혹행위에 대한 진실을 밝힌다든가, 다른 사면·복권의 관례를 찾고 국제엠네스티와 연계하는 등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쪽으로 가야 할 겁니다.” (사진/96년 12월 DJ의 대구방문 수행길에서.) 85년부터 95년까지 10년 동안 춘천·전주 지방법원과 광주 고등법원 판사를 지낸 그의 경력은 한마디로 ‘원칙에 철저한 강한 판사’로 모아진다. 86년 10월, 1천5백여명의 대학생들이 건국대에 들어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점거·농성을 벌이다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한 진압을 당했을 때, 추 판사는 한 검사가 내놓은 이른바 이념서적에 대한 압수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며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이름이 목록에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시위학생의 즉심재판을 방청하는 정보과 형사를 보고 “즉심은 방청이 허용되지 않으니 당장 나가라”고 내쫓았다는 일화 또한 공안정국에 굽히지 않았던 그의 신념을 읽게 한다. 그가 96년 10월 국회 내무위의 서울경찰청 국정감사에서, 한총련사태 때 경찰에 연행된 여학생들이 당한 성추행을 폭로하며 정치판의 선배들에게 “듣기 싫은 분들은 나가세요”라고 당차게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법의 정신을 믿기 때문이다. “유신 말기와 격변의 80년대 초를 대학에서 보내면서 그 또래라면 누구나 했음직한 이 사회에서 지식인의 구실을 고민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일이 있을 때 나서서 동참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지요.” 그가 판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도 그 책임감 때문이었다. 한양대 법대 동창이자 같은 법조인의 길을 걸었던 남편 서성환(43)변호사의 조언도 큰 힘이 됐다. “정치판이 썩었다고 가까이 할 곳이 못 된다며 외면만 하면 되겠느냐, 뒤에서 욕만 하지 말고 뛰어들어 고칠 생각을 해봐라, 가장 비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당신 같은 사람이 어찌 보면 적임자일 수도 있다”는 남편의 한마디는 “나를 한번 한국 정치의 실험도구로 써보자”는 추 판사의 결심을 굳게 했다. “교육의 기회는 평등하게 받으면서도 사회활동의 참여나 봉사는 뒤떨어지는 게 지금 우리 여성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입니다. 어렵게 대학을 나오고도 가정과 결혼에 쉽게 안주하는 듯 보입니다. 능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여성이니까 자리를 달라는 건 요즘 같은 무차별 경쟁시대에 무리한 요구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전반적으로 의식화가 안 돼 있는 것, 엄밀한 의미에서 준비된 인력·인재가 부족한 것이 우리 여성계에 아쉬운 점입니다.” “10년쯤 묵묵히 일만 하겠다” “내 이름이나 직함 앞에 붙는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싫다”며 ‘그냥’ 인간 추미애를 강조하는 그의 속내엔 깊은 뜻이 숨어있다. “여자니까 한자리 끼워준다”든가, “얼굴마담으로 내세운다”는 뒷말을 그는 치를 떨면서 털어내왔다. 오로지 능력으로 인정받겠다는 그의 고집과 뚝심은, “일 잘하는 여성들이 각계에서 늘어나면 성차별 하지 않는 사회를 앞당길 수 있다”는 그의 체험론이 배어 있다. “당장 제 딸들이 엄마가 하는 일을 보고 ‘여자도 할 수 있구나’라며 자신감을 갖는 걸 피부로 느낄 때 기뻤습니다. 한 10년쯤 묵묵히 일만 할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규칙대로, 법대로 공정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만드는데 한몫을 할 겁니다. 저에 대한 판단은 나중에 국민들이 내려주시겠지요.” 그는 “야당에서 여당이 됐다고 하나도 달라진 건 없다”고 했다. 색깔론, 흑백론, 양비론 등 우리나라 발전에 치명적 걸림돌이 됐던 시비들을 단숨에 끊어버리고 ‘민주주의의 완성’과 개혁이란 큰 길로 나서는 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함께 했다는 보람을 느낄 뿐이다. 초선 의원 동지들과 어깨를 걸고 걸어가는 ‘21세기 푸른정치모임’에서 그는 가장 씩씩하고 패기넘치는 젊은이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만화가 박재동 한때, 그는 손바닥만한 만평 하나로 국민의 하루를 열었다.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아침 신문을 든 사람들이 화투 패를 까듯 슬쩍 첫 장을 젖히면 나타나는 ‘한겨레 그림판’은 그날의 한국 상황을 웃음 한방으로 날려버렸다. 9㎝×9㎝ 네모칸에 실려 배달된 그의 만평은 화장실에선 쾌 변을 밀어주고, 출근길엔 동료와의 말길을 터줬다. 어느날인가 졸지에 그 그림판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 사람들은 새삼 그의 이름을 아쉬워했다. 박재동(45). 88년 5월15일부터 96년 5월30일까지, 꼬 박 8년 보름을 독자들의 가슴으로 날아오던 그의 분신같던 만평은 이제 한칸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긴 호흡으로 움직이는 장편만화영화의 세계로 변신하는 참이다. “정권교체, 제2의 광복같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주)오돌또기 사무실(02-592-6443)이 시사만화가 박 재동이 애니메이션 제작자 박재동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둥지다. 대통령 선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연말, 그의 일성은 역시 만평자답게 딱 한 마디 “제2의 광복같아”였다. “곧 정권교체가 되리란 믿음엔 흔들림이 없었지만,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어 조마조마했지. 한달음에 다 바뀌진 않겠지만 문화에 대한 억압이나 탄압이 슬슬 풀려나가지 않을까. 문화쪽 사람들이 숨통 터놓고 신바람나 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박씨는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인권영화제를 열었던 서준식씨가 제주 4·3을 소재로 한 기록영화 레드 헌트 를 상영했다는 까닭으로 구속됐던 것이다. 그가 “이제까지 살아온 내 삶 모두를 털어넣 고” 있는 장편 애니메이션 오돌또기 가 바로 제주 4·3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니 그 공안 한파가 자신들의 작업에까지 밀려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말리는 분위기였어. 장사가 되겠느냐, 어디 협찬 사가 붙겠느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던 곳까지 등을 돌리니까 와, 정말 우리 사회가 아직도 이데올로기에 이렇게까지 경직돼 있나 하고 슬퍼지더 군.” 그가 힘을 얻은 건 김대중 당선자가 지역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와 한 약 속이다. “4·3사건에 대한 해법은 진상규명을 대전제로 억울하게 희생된 넋을 위로하는 쪽으로 하겠다”는 그의 공약은 오돌또기 팀이 하고 있 는 일과 맥이 통한다. 박재동과 4·3의 만남은 70년대 초, 그의 대학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52 년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 만화가겟집 아들로 서울에 유학을 온 박재동씨 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 동기이자 자취방을 나눠쓰던 화가 강요배씨에게서 처음 4·3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제주가 고향인 요배에게서 한 날 제사지내는 집안이 여럿일 만큼 그 땅 에 한의 역사가 배어있다는 걸 들은거라. 벌써 20여년 전 얘기인데도 아 직 그 목소리가 생생할 만큼 내겐 충격이었어요. 신문사에 들어오고 난 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면에 가끔 그걸 그리는 것 외엔 없었지. ” 박씨 인생에 전환점이 온 건 강요배씨가 제주민중항쟁사를 주제로 내건 전시회를 연 92년, 그의 나의 마흔이었을 때였다. 옛 친구의 전시회장에 서 그는 4·3을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욕망을 느꼈다. 마 침 제주 사람이 하던 영화사에서 차라리 전 국민이 볼 수 있는 극장용 장 편 애니메이션으로 하자는 제의까지 들어왔다. (사진/'오돌또기' 시놉시스를 펼쳐든 박재동씨. 2천5백여명 뜻있는 이들의 후원이 자칫 조급해지려는 그의 마음을 다잡아 준다. ) “갑자기 내 몸이 붕 뜨더라구. 언젠가 해야지 하고 벼르기만 하던 만화 영화에 대한 꿈이 현실로 다가온거야. 바람이 들었지. 낮에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으면 미치겠고, 밤에 집에 오면 잠이 안 오고. 그래서 위원장( 편집국장)한테 나 그만둬야겠다고 말해버렸지.” 박재동의 그림판이 없는 한겨레 를 어찌 상상할 수 있느냐고 막무가내로 말리는 편집국 분위기에 밀려 3년을 더 버텼다.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을 하다가 처음 시사만화가로 뛰어들 때의 각오가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화가로서 전시장에서 이뤄지는 미술행위에 한계를 느끼던 참이었어요. 80년대 민중미술을 기치로 내걸었던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도 뛰어봤 지만 그 자괴심은 풀 길이 없었지. 한정된 공간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림말고 매일 전 국민에게 그림 한점씩을 보여주자, 역사의 수 레바퀴 한가운데 들어가 민중들과 그림으로 소통하자, 그런 포부였지. 동 양화니 서양화니 구분짓는 건 워낙 싫어했고, 만화야 어릴 때부터 다락방 에서 매일 그리던 거니까 한겨레 그림판이야말로 내겐 안성맞춤인 캔버 스였던 셈입니다.” “나같이 행복한 시사만화가는 온 세계를 뒤져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할 만큼 그는 ‘그릴 수 있는’ 한껏의 자유를 누렸다. ‘상식과 양심’에만 어긋나지 않으면 누구도 그의 그림판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시사 만화가 누구에게나 공평한 고통이 그를 비켜간 것은 아니었다. 분초를 다 투는 마감시간과의 전쟁, 반응이 총알처럼 튀어오는 독자와의 전쟁, 다른 신문 만평과의 전쟁, 재미없으면 어쩌나 하는 ‘썰렁함’과의 전쟁… 너 무 힘들어 한번 손을 떼면 신문사쪽으론 오줌도 누기 싫다는 그 시사만화 가의 고통을 버리고 그는 애니메이션의 황홀한 나라로 날아갔다. 만평 생각에 가끔 몸이 근질근질 “막상 그만두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구. 전쟁터에서 농사짓는 집으로 돌 아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지금도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가끔 만평을 그리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할 때가 있어요. 가을 날, 좋은 풍경 보면 그 림 그리고 싶은 것과 같은 이치지. 장르가 뭐냐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거기다 뭘 담는냐, 누구와 그걸 나누느냐가 문제겠지.” 애니메이션은 회화에 대한 갈증과 만화에 대한 꿈, 거기다 음악과 움직임 에 대한 표현 욕구까지, 모든 걸 충족시켜주기에 지금으로선 세상에 대해 발언하고 싶은 그에게 최상의 무기다. “ 오돌또기 를 만드는 데는 한 12억쯤 들어요. 영화제작사는 일찌감치 손을 들었지. 서울무비에서 일하던 오성윤 PD하고 나하고 꼭 비바람 몰아 치는 광야에 선 꼴이라 같이 일하는 후배들에겐 미안한 마음이 많아요. 그래도 텔레비전 연작물 아구찜과 빠가사리 등 이런저런 비디오작업을 같이 해나가면서 (주)오돌또기의 꿈을 키워가고 있고, 돌산을 고르는 이 런 심정이 결국 미래의 우리 애니메이션 작품에 주춧돌이 되리라고 믿습 니다.” 10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오돌또기 를 만들겠다는 그의 결심은 다부 졌다. 1년여 넘게 고치고 다듬고 있는 시나리오 작업이 그 한 증거다. 만 화검열철폐를 위한 시위며, ‘우리만화발전연구회’의 회장 일 등 대 사 회활동이 그를 또한 바쁘게 하지만, 틈 날 때마다 제주 조천면 선흘에 있 는 제2작업실에 내려가 구상을 가다듬는다. 96년 11월에 열었던 ‘ 오돌 또기 작품 설명회 및 제작비 기금 마련을 위한 특별전시회’에 쏟아졌던 2천5백여명 뜻있는 이들의 후원의 손길이 자칫 조급해지려는 그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든든한 뒷심이다. “98년이 제주민중항쟁 50돌이 되는 해입니다. 억새무덤이 들려주는 그 피울음의 세월을 넘어 한라산에도 봄은 오고야 말겁니다.” 사진 이종찬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8일 제 190호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왕년의 주먹 홍수환 권투야 일어나라!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이 한마디로 한반도를 뒤흔들었던 사나이가 있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사람들의 숨통을 ‘헉’ 소리나게 죄고 있던 77년 11월27일이었다. WBA주니어페더급 타이틀전이 열렸던 파나마시의 하늘엔 태극기가 물결쳤다. 11전11KO승을 기록하며 ‘지옥에서 온 악마’라 불리던 18살의 헥토르 카라스키야는 링 위에 벌렁 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 남미의 권투천재를 쓰러뜨린 사람은 27살의 동양선수. 2라운드에서 얼굴에 피가 낭자하도록 고꾸라지고 나뒹굴며 4번이나 다운당하고도 3라운드가 시작하자마자 총알처럼 치고 나가 48초 만에 카라스키야를 사각의 정글에 눕혔다. 이 ‘4전5기’의 신화는 잔뜩 조여들었던 국민들의 숨통을 한방에 뚫어버렸다. 그는 이날 링에 오르며 트레이너에게 말했다. “내 오늘 죽더라도 타올은 던지지 마시오.” 야구나 농구는 싱거워서 못 본다 홍수환(48)씨는 요새 텔레비전 광고를 타고 있는 19년 전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매번 가슴이 찌릿찌릿 저려온다. 아들의 승전보를 듣고 “대한민국 만세다”를 외쳤던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도 새록새록 하다. 미군 부대 식당일을 하며 억척으로 그를 키운 어머니가 밥쟁반 나르는 걸 볼 때마다 그는 샌드백을 두둘겼다. 그는 그때의 그 파이팅 정신을 어려운 시절을 맞은 국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했다. (사진/파나마의 카라야스키를 때려눕힌 뒤 귀국해 환영퍼레이드를 펼치던 77년의 홍수환.) “IMF 한방 맞았다고 다 끝났구나 할 순 없지요. 쥐어터져도 링 줄 잡고 벌떡벌떡 일어나 다시 덤벼드는 권투선수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매 맞아본 놈이 더 잘삽니다. 우린 이제 더 잘살 겁니다.” 그는 흔히 배고픈 처지에 있는 사람이 악에 받쳐 열심히 하는 걸 ‘헝그리 정신’이라고 부르는 게 유감이다. 권투선수들이 서로 치고받으며 보여주는 헝그리 정신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챔피언, 동양 챔피언 그리고 세계 챔피언, 한계단 한계단 자기가 올라가고자 하는 최종목표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치열한 욕구가 복서들의 헝그리 정신이다. “다른 스포츠가 대부분 무생물을 갖고 노는 반면, 권투는 살아있는 생물과 생물, 인간과 인간이 맞붙는 겨룸의 장입니다. 단 둘이 링 위에 올라서서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면, 인간이 얼마나 고독한 동물인가 뼈가 저려옵니다. 권투의 진실은 그 홀로 싸움에 있습니다. 인간 누구나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걸 링 위에 올라 응축해 보여주는 거지요. 사람들이 권투경기를 보며 열광하는 건 그게 자기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야구나 농구경기는 싱거워서 못 본다. 게다가 이 좁은 나라를 이리저리 지역으로 갈라서 감정만 부추기는 그런 프로 리그는 스포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게임일 뿐이다. 그는 권투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운동”이라고 했다. “내 인생은 권투다. 권투 때문에 홍수환이가 생긴 거다”라고도 말했다. “아버지가 권투를 좋아하셔서 자주 따라다니며 저절로 권투경기에 눈이 익었습니다. 한국 챔피언들을 여럿 길러내신 김준호 선생님이 친구의 아버님이셔서 중앙고 때 그분의 체육관에 들어가며 처음 장갑을 끼었지요. 초등학교 때부터 싸움꾼으로 이름을 날리긴 했지만 선수가 된 뒤엔 정말 피나는 훈련을 했습니다. 다리 힘 기르느라 버스 타고 다닐 땐 손잡이를 안 잡았고, 부평 살 때는 균형잡는 연습으로 철로 위로만 걸어다녔습니다. 내가 본 나의 장점은 기회포착이 능하고, 한번 물고늘어지면 절대 놓치는 법이 없는 거지요. 난 날 잘 압니다. 그래서 밴텀급, 주니어페더급 두 체급에서 세계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겁니다.” (사진/그는 옥희씨와 재결합해 서울 방배동에 갈빗집도 차렸다.) “IMF 한방 맞았다고 다 끝났구나 할 순 없지요. 쥐어터져도 링 줄 잡고 벌떡벌떡 일어나 다시 덤벼드는 권투선수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매 맞아본 놈이 더 잘삽니다. 우린 이제 더 잘살 겁니다.” 그는 흔히 배고픈 처지에 있는 사람이 악에 받쳐 열심히 하는 걸 ‘헝그리 정신’이라고 부르는 게 유감이다. 권투선수들이 서로 치고받으며 보여주는 헝그리 정신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챔피언, 동양 챔피언 그리고 세계 챔피언, 한계단 한계단 자기가 올라가고자 하는 최종목표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치열한 욕구가 복서들의 헝그리 정신이다. “다른 스포츠가 대부분 무생물을 갖고 노는 반면, 권투는 살아있는 생물과 생물, 인간과 인간이 맞붙는 겨룸의 장입니다. 단 둘이 링 위에 올라서서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면, 인간이 얼마나 고독한 동물인가 뼈가 저려옵니다. 권투의 진실은 그 홀로 싸움에 있습니다. 인간 누구나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걸 링 위에 올라 응축해 보여주는 거지요. 사람들이 권투경기를 보며 열광하는 건 그게 자기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야구나 농구경기는 싱거워서 못 본다. 게다가 이 좁은 나라를 이리저리 지역으로 갈라서 감정만 부추기는 그런 프로 리그는 스포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게임일 뿐이다. 그는 권투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운동”이라고 했다. “내 인생은 권투다. 권투 때문에 홍수환이가 생긴 거다”라고도 말했다. “아버지가 권투를 좋아하셔서 자주 따라다니며 저절로 권투경기에 눈이 익었습니다. 한국 챔피언들을 여럿 길러내신 김준호 선생님이 친구의 아버님이셔서 중앙고 때 그분의 체육관에 들어가며 처음 장갑을 끼었지요. 초등학교 때부터 싸움꾼으로 이름을 날리긴 했지만 선수가 된 뒤엔 정말 피나는 훈련을 했습니다. 다리 힘 기르느라 버스 타고 다닐 땐 손잡이를 안 잡았고, 부평 살 때는 균형잡는 연습으로 철로 위로만 걸어다녔습니다. 내가 본 나의 장점은 기회포착이 능하고, 한번 물고늘어지면 절대 놓치는 법이 없는 거지요. 난 날 잘 압니다. 그래서 밴텀급, 주니어페더급 두 체급에서 세계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겁니다.” 맞는 게 직업인 권투선수들이 늘그막에 병들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통념을 깨기 위해 그는 더 열심히 살고 있다. KBS 권투 해설위원으로 뛴 지난 4년 동안 그는 부지런히 연구하며 한국 권투의 중흥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선수 출신도 해설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권투는 옛 영광을 그리워하는 몰락한 집안 같았다. 방송사들이 중계권의 주도권을 쥐고 소속 선수들을 안전하게 관리하며 벌이는 재미없는 시합은 사람들을 점점 권투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권투는 사람들이 죽였다” “권투는 죽은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인 거예요. 세계 챔피언감은 많습니다. 키우지 않기 때문에 좋은 선수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가물에 콩나듯 하는 시합 한번 나가야 4회전 뛰고 40만원 받습니다. 매니저가 33% 가져가면 라면 먹기도 힘들어요. 그건 좋다 칩시다. 명승부를 낼 제대로 된 시합이 없어요. 제가 왜 해설위원 자리에서 쫓겨난지 아십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외국선수 우리 안방에 불러다가 진 경기 하고는 우리 선수 손 들어줘서, ‘그건 진 경기다’ 했더니 방송사에서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권투만큼 진실한 경기가 없는데 그걸 속이려 드니 사람들이 자꾸 권투를 깔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10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할 때 택시 몰면서도 공부하는 마음으로 중요 경기는 다 가 봤습니다. 걔네는 명승부에 명판정을 내립니다. 진짜 이긴 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 권투의 진실을 보여줘야 권투가 다시 삽니다.” 그는 요즈음 침체된 권투 살리기에 나섰다. 권투를 사랑하는 인천의 한 아는 이가 주안역 앞에 있는 땅 1백50평을 선뜻 내줘서 그곳에 ‘홍수환 권투학교’(02-523-8834)를 열 준비에 바쁘다. 자질있는 후배들을 불러모아 선수로 키우고, 트레이너도 교육시킬 계획이다. 프로모터 일도 제대로 해 볼 생각이다. 천덕꾸러기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권투를 다시 대한민국의 얼을 세계에 알리는 ‘효자 스포츠’로 복권시키는 것, 그것이 이 ‘늙은 복서’의 꿈이다.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판화가 이철수 겨울 들녘, 칼 쓰는 소리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은 그에게로 가는 길이다.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 2구, 천등산 박달재 밑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작은 들과 강과 마을에 판화가 이철수(44)씨의 마음이 머물고 있다. 차를 버리고 “그림 그리는 사람 집이 어디입니까”하고 물으면 누구나 가르쳐주는 곳. 겨울 논길을 따라 녹지 않은 눈발을 자박자박 밟으면 그가 한 말이 떠오른다. “서울 토박이였지만 시골생활이 좋아서 서울 떠날 궁리만 했지요. 되도록 안 움직이고 더 조용히 살고 싶어요.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 태도가 저를 정화시키지요. 예전에 싸우던 때보다도 뉘우치게 만드는 지금이 더 좋아요. 나를 남 구경하듯 사는 것. 정직해지는 게 덜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식량·의료 자급자족이 꿈” 들에 서니 그가 만든 판화들 속에 들어앉은 단순한 그림과 글들이 썩 다가선다. 땅을 향해 몸 뉘인 겨울 풀들 위로 “차다! 겨울!”을 새기고, 하늘 향해 망울을 올린 가녀린 가지 곁에 “겨울 추위 아랑곳 없구나 풀열매 곱고”를 써넣은 그의 심정이 보인다. (사진/목수 뺨치게 손재주가 좋은 그가 10여년을 이리저리 고쳐 집 마당에 잇대어 지은 널찍한 작업실엔 나무와 한약재 냄새가 뒤섞여 있다.) 한 촌부가 요강을 내다 휘 밭에 뿌리고 돌아서는 길 끄트머리쯤, 대문이 활짝 열린 그의 집이 있다. 이철수씨 가족이 갈아먹고 사는 논과 밭에 잇대어 있는 그 집은 87년께 이현주 목사가 다리를 놓아주었을 때는 빈집이었다. 목수 뺨치게 손재주가 좋은 그가 10여년을 이리저리 고쳐 반들하니 윤이 나는 집 마당에 잇대어 지은 널찍한 작업실은 나무와 한약재 냄새가 뒤섞여 정신을 향긋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책을 보고 식구들 감기약이나 지어먹이는 정도지요. 한방을 공부하는 건 사람에 관한 이해를 조금 더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구요. 집사람과 아이들이 임상실험의 도구가 돼버렸지만 식량과 의료의 자급자족을 이루는 건 제 꿈입니다.” 2천평쯤 되는 논밭에서 스무가마쯤 나는 쌀과 온갖 잡곡이며 푸성귀들을 거둬 몇가지 공산품을 빼고는 돈으로 사먹는 것이 없다. 농약을 안 치고 유기농을 하려고 애쓰는 데다가, 그림 그리는 외에 이곳저곳 그를 부르는 곳이 많아 태깔은 안 좋지만 남는 곡식을 가까운 이들과 나눠먹는 복도 누린다.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그림을 위해 농경문화를 체험해보자는 뜻으로 내려왔지만 이젠 노동이 주는 기쁨, 농업이 주는 안정감 때문에 땅을 떠날 수가 없다. 더욱이 이곳 주민들과 벌이고 있는 몇가지 활동은 그를 제천 사람 이철수로 살라 한다. “지역민들이 5월에 환경축제, 10월에 의병제를 여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제천이 원래 의병의 고장이었던만큼 여기저기 그 사료며 흔적이 널려 있어 자부심이 크지요. 곧 환경운동연합 제천지부도 출범할 겁니다. 처음에 이곳을 골랐을 때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나이 먹어 쓸쓸하지 않도록 제천을 더 아름답고 푸근한 고장으로 만들자는 맘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농촌이 얼마나 메말라가고 있는지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젊은이들은 의기소침하고, 나이 든 이들은 포기해버린 지역문화를 일구기 위해 그는 쩔쩔매면서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한달에 한번 환경운동연합이 펴내는 '함께 사는 길' 편집회의에 지성으로 참석하는 것도 그 일 가운데 하나다. 지역주민들의 뜻을 전하고 판이 돌아가는 흐름을 읽기 위해서 서울나들이를 마다하지 않는다. “지역민들이 뭘 원하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서울에 앉아서 짐작하는 것 하고는 달라요. 그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풍토를 만드는 걸 도와줘야 합니다. 한마디로 서비스지요. 문화회관만 덩그러니 지어주면 뭣합니까. 그걸 채우고 굴러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밀어줘야지요. 서툴더라도 그들 손으로 만들고 꾸미고 즐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작업대에 앉은 그는 말을 하는 중에도 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 농사일이며 행사가 많은 봄, 가을엔 그림을 할 짬이 나지 않기에 겨울철에 일을 많이 해둬야 한다. 결이 고와 즐겨 쓰는 은행나무와 피나무 판엔 이렇듯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생각들이 툭툭 새겨진다. “80년대에 미술운동을 할 때도 그랬지만 제 그림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편이거나 통로입니다. 민중미술의 편에 섰던 건 그때엔 그것이 건강한 대중성과 바로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지요. 90년대 들면서 우리 사회가 큰 변화를 겪는 와중에 제 그림도 변한 건 세상의 요구와 떼어놓고 볼 수 없는 거였습니다. 그때 제 전시회를 보러 오신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철수 맘 속에 저렇게 고운 게 들어있었는데 그동안 거칠게 사느라 힘들었겠다’ 하시더군요. 그 말씀이 고마웠고, 철없고 어리석었던 나를 그림으로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스스로 인쇄물이라고 말하는 ‘이철수의 새로운 판화’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80년대 수많은 팸플릿에 찍혀 누구에게나 낯익게 날아갔던 그의 단순명쾌한 그림은 이제 “오리지널이나 복사나 큰 차이 없는” 각종 출판물의 형태로 우리 생활 가장 가까이에 있다. 그는 그 출판물이 한국 미술시장 유통구조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소박하며 사람들을 덜 차별하는’ 그림 형식이라고 했다. 흔해졌다고 시시해지는 건 아니다. 많이 쓰인다고 격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더 쉽고 더 깊게, 더 따뜻하게 “비싼 값으로 팔려나가는 그림들이 제아무리 높은 경지의 예술성을 이뤘다 해도 예술품을 자처하며 지나치게 갇혀있는 쪽으로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 삶을 중심에 두고 접근해가면 좋겠어요. 삶이 텍스트가 돼야지요.” 그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길 더 좋아하는 달력이며, 몇몇 잡지들에 고정적으로 실리는 판화 에세이와 판화 칼럼들은 그가 “자, 이게 제가 겪어온 세상살이인데요, 이 경험들과 한번 만나 이야기해보시지 않겠어요”라고 내미는 그의 눈이다. 그의 판화가 ‘글을 거쳐 그림으로 들어가는’ 까닭이다. 더 단순하고 더 쉽고 더 깊게, 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선 더 따뜻하게 그리고 싶다. 그는 “내 판화와 눈을 맞춘 사람들이 그저 보고 지나치지 말고 반성과 환기를 요구하는 그림의 속내를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해가 지면 칼을 놓는다. 그림 그리는 일, 농사 짓는 일, 지역운동이며 환경운동하는 일, 모든 것이 자연과 함께 돌아간다. 그가 판화산문집 '소리하나'에서 쓴 글처럼 “가득할수록 텅 빈 것에 가깝다”를 그는 나날의 삶에서 실천하려고 한다. “그림을 좀 덜 그리는 쪽으로 가고 싶다”든가, “쓸데없는 게 왜 그렇게 많아요. 다 치웠으면 좋겠어요” 같은 말들에서 그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이 보인다. “삶으로 내 그림을 책임지고 싶다”는 판화가 이철수씨의 육성이 오래오래 겨울 들녘을 울렸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가수 황보령 음악은 냉수처럼…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 그의 입술을 바라본다. 두툼하고 매혹적인 입술 때문은 아니다. 아랫입술 한가운데 매달려 있는 은빛 고리가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예쁘라고 귀를 뚫는 거야 이제 별일도 아니지만 입술을 뚫은 건 썩 드문 일이다. 그에게 이 입술고리는 각별한 뜻이 있을 것 같다. 나쁜 영화 에서 뛰쳐나온 아이? “세게 보이라고 하는 자기변장 같은 거예요. 저를 너무 어리게 보는 이들이 많아서 귀찮을 때가 많거든요. 길가다가 신분증 검사는 물론이고 운전할 때 빵빵거리거나 창을 열고 욕까지 하는 기사분도 있어요. ‘나는 이래’ 하고 겁주는 거예요. 잠잘 때도 안 빼는데, 냉면이나 국수 먹을 때는 자꾸 끼여 빼놓을 수밖에 없네요.” (사진/미술학도답게 그는 음반 자켓도 직접 만들었다. 표지엔 그가 좋아하는 귀가 세개 달린 곤양이가 서 있다.) 황보령(28)씨에겐 길가다가 뒤돌아보게 만드는 별난 구석이 있다. 입술고리를 제쳐놓더라도 초록으로 물들인 머리며 한쪽에만 서너개가 매달린 귀고리, 아무렇게나 걸치고 맨 옷차림이 그렇다. 어떤 이들은 그런 그를 “ 나쁜 영화 에서 뛰쳐나온 아이” 같다고 한다. 그 나이 또래 여성들이 하고 다님직한 모양새는 아니다. 다르다. 이 ‘다름’은 가수 황보령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문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제 개성이 있잖아요. 자기 나름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있고, 지키고 싶어하는 영역도 있고. 근데 우리나라 학교들은 그걸 모조리 무너뜨리고 한 길로만 가라고 강요해요. 뭔가 중요하고 지켜져야 할 것까지 무너졌을 때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서 불끈불끈 했어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불만이 많았지만 그런 대로 참았는데 중학교 가니까 더이상 못 견디겠더라구요. 그래서 사고 치고, 미국으로 가야겠다 싶어 훌쩍 떠났어요.” 그의 혈통엔 떠도는 자의 피가 두어방울 섞여 있다. 함북 청진이 고향인 칠순의 아버지와 일본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남한땅에서 만났고, 지금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산다. 보령도 중3 때 미국 사는 이모만 믿고 홀로 떠났을 때, 첫해에만 미국 이곳저곳 네개 학교를 옮겨다녔다. 북부 뉴욕주의 로체스터학교에 가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한국학생은 하나도 없었다. “공부를 하는 애들에겐 충분하게 공부하는 분위기가 되고, 노는 애들은 나름대로 즐겁게 놀 수 있는 풍토여서 상당히 말이 된다고 느꼈어요. 제 하고 싶은 것, 그걸 할 때 살고 있다고 느끼는 걸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 자유의 맛이 참 좋았어요.” 그는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 10살 터울지는 언니가 중학시절에 선물해준 기타가 친구였다. 독학으로 주법을 익히고, 언니들이 보던 노래집을 연주하며, 그는 남과 다른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갔다. 그의 얼굴색이 다른 것처럼, 그의 음악도 달라야 했다. 대학은 그림 전문학교인 프랫 인스티튜트를 갔지만, 그렇다고 음악에서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미술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음악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프랫에선 조소를 전공해요. 조각은 손으로 만질 수 있어 좋아요. 석회든 돌이든 나무든, 그것들을 만지고 있으면 마음이 기뻐요. 음악을 하고 있으면 목탈 때 물 마시는 느낌이에요. 시원해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흔히 ‘먹고 살기 위해’ 전공이나 직업을 선택했다는 말을 할 때 제일 화가 나요. 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뭔가 하고 싶어서, 미치게 좋아해서 일을 하고 하루 24시간을 바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나요.” 96년 잠시 학교를 쉬고 한국에 나온 뒤 그는 ‘또하나의 문화’ 등 알음알음 모임들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음반 하나를 만들었다. 기가 음악에 쏠리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음악이 그를 불렀다. 살다보면 다 때가 있는데 지금은 음악에 집중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로와 신촌에서 열리는 라이브 콘서트나 클럽 미니음악회에서 달랑 기타 하나 들고 제 식대로 미치게 불러젖히고 사라지는 그의 음색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가좌동에 방을 하나 얻고 음악에 온몸을 열었다. 음반 귀가 세개 달린 곤양이 는 그렇게 꼬박 2년 걸려 만든 그의 첫 음반이다. “아버님이 고향 사투리로 고양이를 ‘곤낭이’라 부르시기에 그걸 붙여봤어요. 팔이나 다리가 세개라면 무서운 생각이 들지만 귀가 세개라면 이상하면서도 안 이상하잖아요. 저와 제 음악이 바로 귀가 셋인 고양이인 셈이에요.” 황보령씨의 노래들은 쉽고 편안한 음악은 아니다. 음울하고 거칠며, 피흘리듯 진한 자기고백투다. 우리 시대의 그렇고 그런 대중음악 어법과는 동떨어져 있어 낯설다. 펑크와 테크노가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 또는 펑크가 아니라는 뜻에서 ‘펑크노’라 부르는 상투적 평가에 묶이는 것조차 그는 거부하는 듯 보인다. 그가 일기 쓰듯, 고백하듯, 읊조리는 가사들은 “더 할말이 없”을 만큼 그의 마음속 풍경을 그대로 드러낸다. 솔직해서 무섭다. “사람이 되구 싶은데/ 아름다운 사람이/ 무지개를 따라서 걸어가고 싶은데// 사람이 되구 싶은데/ 아름다운 사람이/ 저멀리 하늘 끝에서 날아가고 싶은데.”( 아름다운 사람 ) 그림 그리며 놀다가, 기타 치면서 놀다가… 꿈꾸듯 웅얼웅얼, 제 속내를 아프게, 거칠게 뽑아내고 뱉어내는 황보령씨의 노래는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홀로 걸어온 한 소녀의 고독한 길을 보여준다. “어느 날에 작은 곤양이 한마리/ 귀가 세개 달린 곤양이/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창문가에 누군가가 돌을 던져/ 곤양이야 이리와서 안겨보렴/ 사실 나는 숨쉬기가 힘들어… 세상의 모습은 반복.”( 예쁜이 ) 미술학도답게 그는 음반 자켓도 직접 만들었다. 표지는 그가 좋아하는 귀가 세개 달린 곤양이인 ‘예쁜이’가 서있고 고양이 속살처럼 분홍빛인 속지엔 그가 좋아하는 장난감과 만화 캐릭터들이 빼곡 들어차 있다. 자기 음악을 로봇들의 전자회로로 설명한 설계도도 재미있다. “늘 한가해요. 물과 나무가 있는 곳이면 아무데나 가서 그냥 앉아 있어요. 잠을 거의 안 자기 때문에 하루가 남보다 많은 편이에요. 그림 그리고 놀다가, 기타 치면서 놀다가, 비디오도 보고… 또 놀고, 계속 놀아요. 노는 게 시원한 물 마시는 것처럼 좋아요.”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버스기사 안건모 “운전대 위에서 글이 익어요” (사진/그는 앞으로도 버스 얘기만 쓰겠다고 했다. 그동안 쓴 ‘생활글’과 ‘주장글’을 모아 조촐한 책 한권을 묶는 것이 꿈이기도 하다.) ‘책읽는 남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저씨’. 경기도 고양시 화정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아침, 저녁 그가 운전하는 147번 동해운수를 타고 서울로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주민들은 ‘안건모’라는 이름은 몰라도 그 별명은 다 안다. 길이 막히면 운전대 옆에 책을 펴고 독서삼매에 빠져드는 그의 모습은 낯익다.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로 통학하는 아이들이 운전대 뒷좌석에 모여 재잘재잘 그와 얘기하는 풍경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낭만은 없다, 생활만이 있을 뿐” 안건모(40)씨는 시내버스를 모는 운전기사다. 막노동판과 이런저런 공장을 거쳐 버스기사로 자리잡은 지 14년째. 그 자신의 말마따나 “뚜렷하게 내세울 것도, 자랑할 만한 것도 없는 인생, 생활이 어려웠지만 지금 내 나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만큼 어렵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싶은 삶이었다. 그런 그를 바꿔놓은 것이 글쓰기다. 안씨는 지금 월간 '작은책'에 ‘버스기사 안건모의 일터이야기’라는 고정란을 맡은 인기 칼럼니스트다. 그의 글이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나서 찾아왔다고 하자 “제 팬이 많아요”하며 웃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글모음’이라고 쓴 월간 '작은책' 광고에 1년 정기구독료 만원이라 돼 있기에 뭐 이렇게 싼 책이 있어 하고 보기 시작했지요. 정말 노동하는 사람들이 쓴 책인가 긴가민가했는데 진짜로 우리들 노동자가 쓴 글이 실려 있더라고요. 그걸 읽다보니까 나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치더군요. ‘글은 높은 학교 다닌 사람이 쓰는 건데’라고 배웠기에 원고지 소리만 나오면 주눅이 들었고, 혹시 신세타령이나 되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은 그의 글이 내뿜는 힘을 뒷받침한다. 머리 속에서 만든 글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익어 차오르는 글이 버스기사 안건모의 일터이야기다. 그는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 그가 차를 몰고 돌아다니면서 보고 체험한 일을 그대로 쓴다. 평범한 독자로 투고한 ‘요즘 시내버스 어떻습니까?’가 '작은책' 96년 4월호에 실렸고, 편집자가 계속 청탁을 하는 바람에 매달 꼬박꼬박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글 뒤에 붙는 원고모음 안내는 안건모씨의 글쓰기를 높이 치는 까닭을 읽게 한다. ‘버스기사 안건모의 일터이야기를 읽으면 버스기사의 하루가 한눈에 들어오지요? 이렇게 글을 쓰고 싶지 않으세요? 근사한 글이 아니어도 좋아요. 그저 동료들에게, 식구들에게 얘기하듯이 쓰시면 그게 바로 좋은 글이 되니까요.’ “결국 오늘도 집에 일찍 들어가지 못하고 술집으로 갔다. 술집이래야 허름한 포장마차 같은 곳이고 술이래야 돼지 머리고기 몇점 시켜놓고 소주 서너병이지만 있는 놈들 몇십만원 하는 양주에 견주랴. 오늘 같은 날 한잔 안 하면 언제 하랴. 이래저래 술 먹는 핑계만 생긴다.” 버스 안에 지갑을 놓고 내린 한 아주머니를 찾아 지갑을 돌려주고 안 받겠다는데도 떠맡기듯 주고 간 성의의 표시를 같이 일하는 기사들과 술 한잔 하는 데 쓴 어느 날의 일기다. 술취한 승객과 담배 때문에 티격태격한 뒤에 쓴 글에는 이런 말 한마디가 붙는다. “운전사들도 문제가 있지만 엉망진창인 시내버스 운행 실태를 먼저 고쳐야 한다. 한탕 갔다와서 느긋하게 쉴 시간을 주어 기사들 불만을 풀어 줄 생각은 않고 무조건 휘어 잡는다 해서 고쳐질 문제는 아니다. 천2백원짜리, 개밥보다 못한 밥을 주고 난폭운전을 시키면서 운전사들에게 친절을 강요한다고 될 수가 없는 것처럼.” 운전대를 잡고도 ‘이걸 써야겠다’ 하는 글감이 떠오르면 바로 메모를 한다. 그 순간이 지나면 느낌이 새버리기 때문이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그 몇마디를 붙들고 글을 쓴다. 며칠 뒤 또 본다. 고친다. 덮었다가 읽으면 또 고칠 게 보인다. 그는 “글은 짧을수록 좋다. 늘어지면 재미없다”고 했다. “한번은 라디오에서 나오라고 해서 방송사에 갔는데 자꾸 뭐 낭만적인 얘기를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지요. 시내버스엔 그런 아름다운 건 없다, 똥줄 타면서 차 끌고 5백원 내고 제 갈길 가는 사람들인데 무슨 낭만이 있느냐, 생활이 있을 뿐이다. 저는 이래서 일하는 사람들이 글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이 자꾸 글 쓰고 떠들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그게 진짜 글이에요. 여태 배운 사람들이 글 써서 바뀐 게 뭐 있습니까. 그 사람들 글 열심히 읽다가 세뇌만 당했어요. 거기서 벗어나야 우리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겁니다.” 가난 때문에 검정고시로 학교를 전전하며 1∼2년 다니다가 때려치운 안건모씨는 운전기사를 하면서 드나들게 된 서울 홍제동 주민독서실에서 비로소 세상에 눈떴다. 전두환이 사령관이던 보안대에서 병역을 치렀고, 삼청교육대 보낼 불량배 소탕작전에도 뽑혀나갔지만 80년 광주항쟁도 이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알았다. 한권에 삼백원씩 빌려읽은 책 가운데는 번역서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와 조정래씨의 소설 '태백산맥', 박노해씨의 시집 '노동의 새벽'이 있었다. 밤을 새우거나 버스 운전을 하며 책을 읽으면서 그는 “세상에, 이렇게 감쪽같이 속고 살았다니”하고 가슴을 쳤다. 주민독서실에서 세상에 눈뜨다 “현실을 외면하고 죽어라 일만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 내가 받는 임금을 한번 계산기로 두드려 봤죠. 계산이 안 돼요. 그래 서울운수노동자협의회가 있다는 보문동을 찾아가봤습니다. 근로기준법, 단체협약을 알아가지고 노조에 얘길 했습니다. 시내버스가 적자라는 말을 믿는 기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월급을 받는 버스기사들은 맞벌이 안 하면 못살아요. 이런 걸 누가 알아줍니까. 우리가 자꾸 떠들고 글로 써서 발표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앞으로도 버스 얘기만 쓰겠다고 했다. 딴 건 잘 모르는 데다가, 시내버스 기사가 버스 얘기 안 쓰면 뭐 쓸게 있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쓴 ‘생활글’과 ‘주장글’을 모아 조촐한 책 한권을 묶는 것이 지금 그의 꿈이다. “글 쓰면서 급하고 삐뚤어졌던 성격이 많이 좋아진 건 제 자신으로 보면 참 좋은 일입니다. 억울하고 화났던 일도 글을 쓰면서 풀어버리게 되고, 나를 자꾸 돌아보니까 반성하는 마음에서 내 단점들을 고치게 됩니다. 노동자 여러분께 정말 같이 글 쓰시자고 권하고 싶어요. 누구든지 쓸 수 있습니다. 가슴에 답답했던 일들 글로 쓰세요. 우리 얘기는 우리가 써야 진짜배기가 나옵니다. 세상 바꾸려면 우리가 써야 해요.”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21 1998년 02월 19일 제195호 .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장기수 할머니 정순덕 “힘없는 할애비들 내놓기요” 그는 말하는 사이, 자주 “아……아…아으” 했다. “아이고, 속썩어라”라고도 했다. 오장육보 깊은 곳에서 오래오래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해 온 그 무엇이 썩어 문드러져 터져나오는 소리 같았다. 듣는 사람도 감전되듯 몸을 움찔하게 만드는 그 찐득찐득한 탄식은, 힘겹게 세월의 굽이굽이를 넘어온 한 인간이 터뜨리는 삶의 느낌표였다. “그럭저럭 사요. 도와준다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그래도 이런 거라도 할 수 있는 게 고맙지.”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의 손은 재게 움직인다. 파를 숭숭 썰어 무 국에 집어넣고 압력밥솥이 딸랑이는지 귀를 기울인다. 냉장고 문을 열어 김치통을 꺼내고 수저며 보리차 주전자를 챙긴다. 평범한 처녀에서 전사로 10명 식구의 점심을 준비하는 정순덕(65) 할머니의 손길은 규모 있고 정확했다. 일주일 전에 식구 세사람이 늘어 부엌 한쪽에 놓는 밥상이 비좁아졌지만, 얼마나 좋은가. 함께 나란히 앉아 밥을 나눌 수 있으니. “어디 제대로 하겠어요? 아쉬워서 얻어드시는 거겠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상을 보는 그의 손길은 정성스럽다. 오랜 옥살이로 쇠약해진 몸들, 대부분 칠순을 넘긴 할아버지 한분 한분의 식성을 기억해 밥의 양을 조절하고 반찬을 놓아드리고 식사 뒤에 먹어야 할 약까지 챙긴다. “선생님, 식사들 하세요.” 아래 위층 4개 방을 돌며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힘차다. 옛 시절 산을 타며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전사의 흔적이 거기서 묻어난다. ‘마지막 빨치산’, 그를 23년 동안 차가운 철창 안에 가두어두었던 죄목 아닌 죄목이다. (사진/그는 빨치산 시절 한쪽 다리를 잘라낸 성치 않은 몸으로 하루 세끼 10명 식구의 먹거리를 장만한다.) 세사람의 새 식구와 함께 낙성대 ‘만남의 집’(02-887-5249)에도 봄이 왔다. 3월13일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된 비전향 장기수 최하종(72·36년 구금), 김인수(76·36년 구금), 홍경선(74·31년 구금)씨가 ‘만남의 집’에 봄소식을 갖고 왔다. 출소 장기수들이 모여사는 관악구 봉천6동 골목 안 2층 양옥집에 봄볕이 가득하다. 남한에 가족이 없어 옥에서 나온 뒤에도 갈 곳 모르던 장기수들이 의지하며 늙고 병든 몸을 서로 보듬어주는 곳. 정순덕 할머니는 이 ‘만남의 집’에 단 한사람 여성 동지다.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는 이들에게 그는 식사 문제를 책임지는 선생님인 셈이다. 식구가 늘어 일이 더 많아졌지만 정 선생님은 힘든 줄 모른다. “옥 밖에서 이리 살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이냐”며 그는 신나게 도마질을 한다. 집안일을 해 본 사람은 안다. 하루 세끼 10명 식구 먹거리 장만하는 일이 얼마나 허리 휘어지는 고된 노동인지. 오전 6시30분 아침, 낮 12시30분 점심, 오후 6시30분 저녁 준비에, 먹고 치우는 사이사이 장을 보고, 마당 한켠에 있는 텃밭을 가꾸고, 청소와 빨래를 한다. 게다가 정순덕씨는 몸이 성치 않다. 오른쪽 다리가 의족이다. 너무 오래 힘을 쓴 왼쪽 다리도 퇴행성 관절염으로 그를 괴롭힌다. 35년 전, 체포될 때 군경찰이 쏜 총에 맞은 다리를 수술로 잘라내고 그는 절룩이며, 그보다 더 절룩이는 한반도의 현대사를 지켜보았다. “63년 서른살 때 일이네. 경남 산청이 내 고향이오. 조직망을 세운 우리가 댕기는 걸 알고 경찰이 함정을 판 기라. 그때가 무서운 시절 아닙니까. 촌사람들이 또 좀 순박합니까. 불러다가 정순덕이 잡아줄래 안 잡아줄래, 협박을 하니까 어려서부터 같이 크던 친구 하나가 결국 언제 온다 불어버린기라. 동지 3명과 방 안에 있다가 집 안팎을 겹겹이 둘러싼 군경찰이, 그때 M2라고 있었어요, 그걸 갈기며 들이닥쳤지. 친구 마누라가 총을 붙잡아 자살도 못하고 젭혔어. 젭히가지고 그 산골짜기서 지서, 그때는 파출소를 지서라고 했어요, 거기를 가는데 돌투성이 자갈밭을 흔들리며 몇시간을 가도 지혈을 안 해 주니 피를 철철 흘렸지. 사람 죽는다고 외쳤지만 소용이 있나. 그래 가지고 다리를 잘라버렸수다.” 경상도 사투리와 이북 말씨가 뒤섞인 그의 증언은 담담했지만, 얼굴에 새겨진 굵은 주름살이 꿈틀거리는 걸 이 여전사도 막지는 못했다. 1950년,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그도 평범한 시골 처녀였다. 17살에 맞은 6·25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다. 일곱식구가 서너마지기 땅을 부쳐 입에 풀칠을 하는 가난한 소작농에 시집간 그는 전쟁에 의용군으로 나간 남편이 산사람이 되어 돌아오자 그의 뒤를 따랐다. 여필종부가 아니라, 남편을 찾아오라고 고문하는 경찰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느니 산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무지렁이였지만 나라를 구한다는 신념이 있었소. 산에선 참 재미있었어요. 다 동지였거든. 교육도 하고, 오락도 하고, 사업도 했지. 나는 학교 문턱도 못 가봤는데 거기서 한글도 깨우쳤어요. 미국 놈들이 민족을 분열시키느라 빨갱이라고 붙였지, 우리가 어데 빨갱이요. 나라가 부서지게 생겼는데 안 나설 수 있소? 그때 피흘린 대가가 이기요?” 대구, 공주, 대전, 다시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다 살도록 두어번 면회를 온 어머니와 여동생 외엔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의 발길마저 끊긴 뒤, 그는 사고무친의 고아가 되었다. 2무덤 속까지 묻고 갈 이야기들 “섭섭하다니 그기 무신 소리요, 내 땜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가족들을 다 데려다 두들겨 패가지고 아버지는 골병 들어 돌아가시고, 형제간은 학교에서 손가락질 받아 교육도 마치지를 못했소. 그 시절이 그리 험한 시절이었소. 들판에 사람이 죽어넘어져 있어도 시체 수습도 몬했지. 시체 치우면 죽이니까. 자기 땜에 가족들 죽는다고 자살한 사람들도 많았어요. 산에 올라가 죽은 백성도 많았고. 부역죄가 얼마나 무서운 죈지 지금 사람들은 몰라요.” 85년 8월14일에 가석방이 되어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 얘기 할라문….” 그는 말문을 닫아 걸었다. 무덤 속까지 가슴에 묻고 가겠다는 것이다. 92년에 재봉공장에 취직을 해 혼자 벌어먹고 살다가 95년 ‘만남의 집’에 자리잡을 때까지 정순덕 할머니가 걸어왔을 가시밭길은, 그가 표현한 ‘괄시’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짐승 이하의 것 같았다. “우리한테 이제 고향이구 뭐이구가 있소? 왜 30, 40년 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그 힘없는 할애비들을 안 내놓는 기요. 나라 위해 싸운 사람들을 입으로는 이 나라 통일 위해 정치한다는 놈들이 가둬두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는 장기수 선생님들이 한사람도 옥에 안 남고 다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북에 남아있는 가족들 얼굴이나마 보고 죽게 오가게는 했으면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숨쉬듯 말했다. “제일 좋은 건 통일이지.”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신부 임 세바스틴 “목마른 자, 비디오를 보라” 그의 손엔 성경 대신 비디오가 들려 있다. 신이 남긴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영화가 그에겐 복음이다. 그가 가방 가득 비디오를 넣고 시골 구석구석까지 찾아가는 건, 이 시대가 목말라하는 구원의 이야기가 그 비디오들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 잉그마르 베리만의 '산딸기', 장 지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 켄 로치의 '레이드버드, 레이드버드'…. 그 영상들 속에서 그는 사람과 하느님이 만나는 걸 지켜본다. “딱딱한 설교로만 붙잡을 수 없었다” “신학대학에서 공부할 때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에게 부드럽고 친근하게 종교를 소개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이 혼란한 세상에서 가치관이 흔들리는 청년들을 딱딱한 설교로만 붙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종교심리학을 강의하던 한 교수가 음악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그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예술 형식이면 뭐든 활용해 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시청각을 통한 나의 전도는 거기서 싹튼 겁니다.” (사진/안 팔리더라도 '가치관을 만드는 비디오'를 내놓겠다는게 그의 고집이다.) 성베네딕도 수도원 시청각 종교교육 연구회(02-279-7429)를 이끌고 있는 임 세바스틴(62) 신부는 33년째로 접어든 한국 생활을 온통 좋은 비디오 보급에 바치고 있다. ‘고집불통’이란 별명에 걸맞게 그는 장사 잘되는 비디오는 못 만들겠다고 버틴다. 안 팔리더라도 ‘가치관을 만드는 비디오’를 내놓겠다는 것이다. 가방에 싸가지고 다니며 직접 언론사에 홍보를 부탁하고 비디오가게 주인들을 만나는 것은, “판매보다는 여럿이 함께 볼 수 있게, 이 좋은 걸 한사람이라도 더 보게” 하려는 그의 지극정성 때문이다. “어떤 이는 우리가 내는 비디오가 어렵다고 합니다. 왜 어려운 책은 여러번 읽어 깨우치려고 하면서 영화는 그렇게 안 합니까. 비디오는 곁에 두고 되풀이해 볼 수 있는 매체입니다. 두세번 보다 문득 깨우치는 순간, 독서와 또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1966년 독일을 떠나올 때, 그에게 한국은 제3세계 나라의 하나였을 뿐이다. 고향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한 낯선 이방인을 만났고, 그가 부르는 ‘아리랑’을 들었을 때, 임 신부는 자신의 삶을 묻을 제2의 고향으로 한국을 선택했다. “50년대의 독일에서 한국인을 만난다는 건 참 드문 일이었습니다. 뷔르츠부르크대와 뮌헨대에서 신학과 영화를 공부하면서 제3세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로 갈까 막연하던 참이었지요. 부산에서 왔다는 그 유학생은 경제학 전공이었지만 제게 한국의 문화며 독특한 생활양식들을 많이 들려줬습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한 나라로 가겠다던 나의 발길이 한국으로 향한 건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신의 뜻이라면 뜻이겠지요.” 그는 32년 전 인천항에 내렸을 때의 첫 인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날 저녁 허름한 식당에서 1백30원 주고 사먹은 불고기가 아주 맛이 있었던 거며, 한국말을 배우러 다니던 서울 정동의 프란치스코회에서 만난 젊은 여자 선생님들과의 추억, 영화광인 그가 즐겁게 본 유현목 감독의 '공처가 3대'니 '남자식모' 같은 영화 제목도 어제일처럼 떠오른다. 서른살 청년으로 와 60대 할아버지가 됐지만 교구 신부로 편안히 눌러앉지 않고 멀리 낯선 곳으로 떠나온 것을 한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이 땅에서 임 신부는 그의 손을 기다리는 많은 일들을 해왔고, 그의 눈이 증언해야 할 많은 일들을 보았다. “71년 분도출판사를 맡아 93년까지 22년간 책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지요. 번역, 편집, 교열, 제작, 표지디자인, 유통까지 1인 출판사 체제였습니다. 해방신학을 소개하고 사회정의에 관한 책을 내려니까 교회 안에서 막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 책은 한국에선 잘 안 팔린다나요. 그래 내가 그랬지요. 출판이 그렇게 시류에 따라 흔들리면 방향을 잃는다. 이건 한국에 필요한 책이다. 우리는 우리 길로 간다. 그때 처음 낸 책이 브라질의 마틴 루터 킹이라 불리는 돔 헬더 카마라 주교의 '정의에 목마른 소리'였습니다. 유신시대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얼어붙기 시작했지요. 지학순 주교는 감옥으로 가고 한국사회는 정의에 목말라 있던 때였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유명한 ‘가방작전’이 시작됐다. 그가 낸 책을 못마땅하게 여긴 가톨릭출판물 배급처에서 나 몰라라 하니 임 신부가 직접 가방으로 10권, 20권씩 서점으로 날라야 했다. 지금 비디오를 나르는 솜씨가 능숙한 데는 다 이런 이력이 있다. 77년에 '해방신학'을 펴냈을 때는 책을 절대로 팔아선 안 된다는 관계당국의 경고가 들어왔다. 몇몇 젊은 신부들과 함께 밤에 몰래 수도원 숙소 깊은 곳에 책을 숨겼다. '해방신학'은 3천부가 팔려나갔다. “책을 한권도 팔 수 없다고 금지하는 게 공산주의요 파시즘 아닙니까. 난 독일에서도 나치즘을 증오했는데 멀리 타향에까지 와 독재를 겪어야 한다는 게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아흔이 넘어 독일에 살아계신 임 신부의 부친은 드러난 활동가는 아니었지만 히틀러의 나치즘에 저항했던 전기기술자였다. 공산주의자라고 암살당한 사람의 장례식에 아무도 가면 안 된다고 나치가 금지하고 나서자 그건 비인간적이라며 참석한 이다. 그래서 임 신부의 가족은 작은 읍으로 쫓겨났고 소년 하인리히 로틀러(임 신부의 어릴 때 이름)는 2차대전을 그곳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히틀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지요. 아무도 대답을 안 하는데 제가 일어나 전쟁을 일으킨 나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선생이 너무 놀라 그날 밤 아버지를 찾아와서는 위험한 아이라고 주의를 주고 가더군요.” 남동생은 아프리카에서 활동 전쟁과 독재에 대한 증오는 그의 가족 모두의 피 속에 흐른다. 임 신부의 남동생도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신부다. 그가 한국에서 벌이는 활동의 바탕엔 나치를 미워하던 어린 시절의 정의감이 고여 있는 셈이다. 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때 그가 보여준 용기있는 행동도 아마 여기에 뿌리를 대고 있을 것이다. “분도 수도원은 경북 왜관이 중심이지요. 그곳에 인쇄시설도 있고요. 광주 신학교에서 내는 잡지 '전망'도 왜관에서 찍었고, 교열을 보는 담당자 한명이 오곤 했습니다. 그 5월에 사람이 왔는데 광주에 큰 일이 난 거예요. 그는 보고 들은 데로 낱낱이 구술했고 우린 그걸 녹음해 복사한 뒤 전국의 성당과 교구로 보냈습니다. 학살이라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외국 잡지며 신문을 구해 진실을 기록한 인쇄물과 전단을 밀어 배포했습니다. 그때 신문에 나온 건 다 거짓말이었으니까요.” 경찰과 군인이 왜관까지 찾아와 임 신부를 심문했다. 그는 “이제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구나” 하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다행히 추방령은 없었고, 그는 한국땅에 더 밀착되는 자신을 느꼈다고 한다. “지난해 4월엔 북한도 다녀왔습니다. 참 아름다운 나라,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안내원들이 철저하게 막아 기아에 시달리는 일반인들은 못 만났지만 상황이 심각하다는 건 느꼈지요. 결국 정치 책임자들이 이 나라를 망치고 사람들을 무시하기에 인간답게 살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임 신부는 두나라를 다 보고 “이젠 어느 누가 등을 떠밀어도 이 땅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 이름 임인덕(林仁德), 임 세바스틴 신부는 피는 다르지만 한국 사람이다.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동화작가 권정생 슬퍼서 아름다운 ‘나사로’ (사진/1평 남짓한 방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그는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그는 한달에 5만원쯤으로 산다. 10만원이면 참 잘 쓴다. 지난해까지 1년에 채 1백만원을 못 써봤다. 14살 먹은 개 뺑덕이하고, 복슬복슬 털이 엉긴 게 걸레 같다 해서 이름붙인 강아지 두데기하고, 세식구가 오순도순 산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빌뱅이 언덕, 동네 청년들이 지어줬다는 흙집은 어른 넷이 겨우 끼어앉을 수 있는 1평 남짓한 방이 둘 붙었다. 하나는 한사람이 누우면 꽉 차고, 또 하나는 부엌 겸 창고인데, 두 방 다 벽으로 둘러 책이 빼곡하다. 해묵은 살림살이들이 청빈의 때를 입고 골동 같은 주인을 에워싸고 있다. 방문을 열면 노란 산수유가 고운 외딴 집, 뒤론 산이 둘러싸고 앞으론 들이 탁 트인 그 오두막 집에 동화작가 권정생(61)씨가 정물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앉았다. 가장 보람있었던 거지체험 “서울 사람들이 더 불쌍하죠. 제가 더 미안하죠.” 우체부가 던져주고 가는 신문을 펴며 그는 근심섞인 눈을 들었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되려는지 아직도 만날 슬프고 아름다운 게 좋구나” 했던 그 슬픈 눈이다. “기업들이 무너진 건 아무것도 아녜요. 우리 혼이 다 무너진 게 더 큰 일이죠. 왜 애들이 아파트에서 떨어지고 아비, 어미가 자식들을 데리고 죽습니까. 그래선 안 되거든요. 옛날 어머니들은 머리채를 자르든, 허벅지 살을 베든, 어떻게든 살았지요. 애들은 못먹어서 삐쩍 말랐어도 좌절하지 않았어요. 이 정도 갖고 죽으면 지금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겠어요.” 육십 평생을 지지리 고생구덩이 속을 헤매며 살아온 그에게 지금 세상살이는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삶을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라고 표현했을까. 지금도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는 결핵균과 함께 일생을 기다시피 걸어온 그는 때로 성서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 같았고, 때로 그가 쓴 동화 ‘강아지똥’ 같았다. 자디잘게 부서져 땅 속 민들레의 뿌리로 모여들어 한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운 강아지똥처럼, 그는 모두들 피해가는 허물어진 육신을 부숴뜨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동화를 썼다. “'강아지똥'을 쓰던 69년은 일직교회 문간방 한칸에 겨우 몸을 부리고 종지기를 하며 겨울을 나던 때였습니다. 불을 못 때 귀에 동상이 걸렸고, 아침에 보리쌀 두홉을 남비에 끓여 숟가락으로 세등분 금그어 놓고 저녁까지 나눠 먹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내 동화는 슬픈지 모릅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건 아닙니다. 서러운 얘기를 함께 나누면서 그 설움을 푸는 거지요. 요즘은 동화를 머리로들 쓰는데 글이란 머리로 쓰는 게 아닙니다. 우리 옛날 얘기를 보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사랑방에 모인 민중들이 서로의 마음을 보태 한풀이를 했거든요.” 그는 동화에 웬 똥이 나오고, 왜 그렇게 어둡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게 진실이기에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잖냐고 했다. '무명저고리와 엄마'는 일제시대로부터 6·25, 가난의 60년대까지 한국 현대사를 칠남매를 기른 한 어머니를 통해 보여준 일종의 역사동화다. “우리 주변의 작은 사건들 모두가 분단과 관련이 있기에” 그는 외롭고 팔리지 않더라도 분단 얘기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분단이 되면서 반공교육 일색으로 돈 동화들이 아이들 마음을 망쳤다고 했다. 한국전쟁과 분단 문제를 다룬 작품이 거의 없던 그런 어린이 문학 실정에서 권씨가 발표한 '몽실 언니'는 어른들도 울릴 만큼 절절하게 민족상잔의 비극을 되살려냈다. “여기 조탑골에 80여가구가 사는데 혼자 되신 할머니들이 많아요. 편지도 써드리고 친구처럼 지내는데 그중에 43년에 징용간 남편을 아직도 기다리는 분이 있어요. 요즘 자식들은 이해를 못하겠지요. 전쟁 때 하나 남은 아들 키워 월남전에서 잃은 할머니도 계세요. 역사가 이렇고, 사람들 사는 게 다 그런데 슬프게 살아야죠. 눈물흘리며 살아야지….” 일본 도쿄 변두리 시부야에서 태어난 그는 거리 청소부였던 아버지가 쓰레기더미에서 건져온 동화책을 읽으며 혼자 글을 깨우쳤다. 해방 이듬해 한국에 돌아온 권씨 가족은 어려운 살림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전쟁통에 부산으로 흘러든 권씨는 고아 아닌 고아로 피똥싸게 고생했지만,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때 그는 늑막염과 함께 폐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죄인처럼 집으로 끌려돌아왔다. 한끼 때우고 돌아서면 다음 끼니가 걱정인 가족이라 반가울 리도 없었다. “내 병구완 하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가 동생이 집안 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한 1년 나갔다 돌아오라는 거예요. 거지 생활이 시작됐지요. 그 3개월이 내 일생에서 가장 보람있었던 인생 체험이라 믿습니다. 석달 동안 깡통 들고 다리 밑에서 잠을 잘 때, 길에서 거지들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요. 병만 악화되지 않았으면 난 지금도 거지 노릇을 할지 몰라요. 거지 생활, 몸만 튼튼하면 할 만해요….” 연애는 수없이 했다? 교회 문간방에 살 때, 술 취한 거지들이 아무때고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불쑥 들어와 자다가 바지 내리면 얼른 요강 대주고 술 깨면 말 한마디 없이 떠나던 그들이, 그는 참 좋았다. 그가 1년 가야 몇번 나가지 않는 안동에 가느라 버스를 타면 동네 아줌마가 차비를 내준다. “암 일도 안 하시는데 돈이 어디 있다고.” 그런 아낙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그는 또 좋다. “사람이 절대 훌륭해선 안 돼요. 훌륭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하층민이 생기잖아요. 살아보니 다 허무한데. 잘난 놈들이 위에서, 앞에서 까분다고 이 세상이 좋아진 게 있습니까. 점점 나빠졌지. 훌륭한 사람이 있어선 안 돼요. 보통 사람들이 살다 가고, 살다 가고 해야지.” 그는 응달에 숨어 사는 목숨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이냐고 했다. 다들 돈에 물들고, 미국에 물들어 안타까운 참에 그렇게 큰 길에서 비껴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게 참 좋드라고요” 했다. 그는 장가 안 간 노총각이지만 연애는 수없이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하고도, 아이들하고도, 강아지하고도, 생쥐하고도, 개구리하고도, 개똥하고도 매일 연애하는데요. 개똥 사랑하면 가슴이 덜 떨리고 힘도 덜 소모돼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봉당에 내려선 그의 모습은, 마치 스스로를 그늘에 유폐시킨 성자 같았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허재 . 다시 날아라 허똥! (사진/97∼98 프로농구 챔피언전은 그에게 최우수선수상을 안겨줬다. 이기고 지는 것을 뛰어넘은 그의 투혼이 빛났기 때문이다.) 졌다. 게임은 끝났다. 그는 고개를 떨궜다. 사람들이 현대 다이냇팀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지금의 환호는 저들의 것이다. 샴페인이 터지고, 돌아가며 헹가래를 치는 현대 선수들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경기장을 흔든다. 땀에 푹 절은 셔츠의 등에 달린 기아 9번, 잠시 숙였던 머리를 당당히 들고 스탠드를 바라본다. 게임은 졌다. 하나 아쉽지 않다. 최선을 다해 뛰었다. 부러지고 찢어진 몸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코트의 한마리 표범이었다. 그는 슬며시 입술을 깨물며 빙긋 웃었다.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다. 사람들은 이긴 자만을 기억하지만, 진 자들의 세계도 있다. 잊혀진 자들의 고독도 좋다는 걸 그는 지난 몇년 새 알았다. ‘농구천재’에서 ‘농구신선’으로 4월11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 허재(33·기아엔터프라이즈) 선수는 우승은 놓쳤지만 97∼98 프로농구 MVP에 올랐다. 우승팀의 이상민이 떠오르는 별이었다면, 그는 지는 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최우수선수상을 안겨줬다. 이기고 지는 것을 뛰어넘은 그의 투혼이 빛났기 때문이다. 챔피언 결정 7차전까지 오도록 그는 농구선수로선 환갑 나이인 33살이 무색하게 신이 들린 듯 뛰었다. 부러진 오른손 손등뼈에 깁스를 한데다 오른쪽 눈두덩이 찢어져 반창고를 댄 그가 5차전에서 경기종료 5.9초를 남기고 던져넣은 결승골은 그림 같은 명승부에 그가 찍은 화룡점정이었다. 농구선수 생활 24년째. 그는 ‘농구 천재’에서 이제 ‘농구 신선’으로 건너뛰는 참이다. “제가 재기에 성공했다고들 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차가 굴에 들어간다고 가지 않는 건 아니죠. 슛쟁이로서는 대한민국 누구보다 노력했다고 자부합니다. 밥먹고 자는 시간 빼곤 농구 생각만 했어요. 새벽, 오전, 오후, 야간, 하루 네차례 죽어라고 연습에 매달린 결과입니다. 천재는 없어요.” 동북초등학교 3학년 특활시간에 처음 만져본 농구공이 그는 좋았다. 코치가 이 특별한 학생을 눈여겨본 건 그 열정 때문이었다. 아마권투선수였던 부친은 집 뒤뜰에 농구대를 세워주었고, 몽둥이를 들었다. 죽어라고 공을 던졌다. 타고난 힘은 대물림한 것이다. 그의 집안은 2∼3대 걸러 장사가 나온 집안. 어려서부터 줄넘기와 복근운동을 시킨 아버지 덕에 그는 빠른 몸놀림과 균형잡힌 하체를 지니게 됐다. 교실에 앉으면 칠판이 농구코트로 보였다. 동북 농구팀이 해체되자 상명초등학교에서 그를 데려갔다. 스카우트 전쟁의 시작이었다. 용산중학교를 거쳐 용산고에서 뛰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예비스타’라고 불렀다. 청소년대표팀 주전 가드로 뛰던 그에게 농구관계자들은 “김영기의 묘기와 신동파의 득점기계를 모두 갖춘 타고난 농구 귀재”라고 입을 모았다. “전 늘 베스트5였고, 당당한 주전이었어요. 용산중 1학년 때 전승, 2학년 때 3관왕, 3학년 때 전승, 용산고 2·3학년 전대회 우승, 중앙대 때는 4년 내리 전대회를 휩쓸었고, 기아에 들어와서도 8회 우승을 일궜으니 저도 좀 뽐낼 만하지 않습니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보고 잘난 척한다, 안하무인이다, 개차반이다 하지만 농구선수 허재도 혈기방장한 사내 아닙니까. 욱하는 성질이 있는 건 인정하지만, 손톱으로 톡 건드리면 주먹으로 쳤다고 뻥 튀겨 보도가 되니 사실 죽을 맛이었습니다. 저를 모르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들에 한때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사귀어보면 저도 나쁜 놈은 아닙니다.” 허재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인간이 싫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건 이런 까닭에서다. 농구밖에 모르는 남자 허재에게 중앙대 시절 정봉섭 감독이 오죽하면 ‘허똥’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을까. 허재를 잘 아는 정 감독이 “다른 사람의 밑거름이 되라”고 내린 그 깊은 뜻을 그는 지난해 벤치에 앉아 소중하게 돌아보았다. 올 들어 그가 독불장군처럼 뛰던 과거와 달리 득점보다 어시스트에 더 주력하며 동료들을 두루 챙긴 건 이런 뼈아픈 반성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술 좋아합니다. 운동선수니까 주량도 좀 되지요. 그러나 한잔 마시면 한말 마셨다고 떠들고, 시즌 끝나고 한두번 친구들과 어울린 걸 보고 알코올 중독자라고 하는 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친구 좋아하고, 선후배 아끼고, 정 많은 저로선 때로 성깔 때문에 손해보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타고난 다혈질이니….” 그는 한때 그를 싫어했던 감독들이 같이 뒹굴어보고 나면 “꽤 괜찮은 구석이 있는 녀석”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솔직담백한 성격이다. 경기장 폭력사고, 음주운전사고…. 90년대 들어 꼬리를 문 허재의 악운은, 그를 잘 아는 사람들도 “농구는 잘하지만 감정을 자제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게 만들 만큼 세상의 인심을 잃게 했다. 농구가 낳은 터미네이터, 코트의 말썽꾼, 악동 애물단지…. 허재에 대한 소문이 잠잘 날 없었지만 그는 악몽 같은 지난 몇년 세월을 이겨내고 돌아왔다. 올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은 허재를 위한 한바탕 한풀이의 무대였고, 그는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맷집 좋은 흑인 용병들이 판을 좌지우지하는 요즘 프로코트에서 그 장대숲을 휘저으며 온몸을 던진 그의 토종 농구술은 단연 돋보였다. “기아그룹 다시 불끈 일어서길” “농구란 게 직사각형 금 그어진 작은 마당에서 10명이 뛰면서 상대방을 속여야 내가 사는 운동입니다. 조그만 구멍에 큰 공이 들어가야 점수가 나는 것도 재미있죠.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끼리 부딪치며 몸싸움을 해야 하니 투기 성격도 강합니다. 한마디로 인생 축소판이죠. 이젠 경기장에 들어서면 편안합니다. 집착을 버리고 힘껏, 마음을 모아 골대에 던집니다. 이번 시합에서는 특히 어려운 사정에 처한 기아 근로자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바치고 싶었는데…. 최선을 다해 싸웠던 모습만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아가 다시 불끈 일어서길 누구보다 간절히 빕니다.” 기아체육관이 있는 용인 합숙소에 돌아오면 자리에 누워 그날 40분 경기를 비디오 돌리듯 천천히 곱씹어보는 게 그의 공부다. 농구선수도 직업이다. 철저한 프로 직업인으로서 그는 반성하는 농구인으로 남고 싶다. ‘그때는 내가 한 타임 죽였어야 하는데. 그때 플레이는 참 좋았다’ 이리저리 머릿속으로 굴려보다 잠이 든다. 게임은 끝났다. 상처뿐인 영광이다. 가끔 농구 골대 위로 찌가 솟을 만큼 낚시가 그리운 그는 서둘러 낚시대를 챙길 것이다. 4월, 좋은 물가에 낚시대를 드리워놓고 아무 생각없이 찌가 움직이는 걸 지켜보리라. 다른 팀으로 가든, 기아에 남든, 은퇴하는 날까지 허재는 혼신을 다하는 농구선수다.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사진가 여동완씨 기다려라 몽골! (사진/그는 이제 몽골리안의 뿌리를 찾아 몽골과 중앙아시아로 간다.) 그는 늘 어디론가 떠나려는 몸짓으로 서성인다. 아무 때고 떠날 채비가 돼 있다. 애들 방처럼 노란색을 칠한 사무실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가뿐하고 날렵해 뵈는 몸피는 쏜살같이 산이나 들로 내달을 기세다. 작업실엔 지난 여행에서 돌아온 배낭이 아직 풀지 않은 채 놓여 있다. “역마살이 끼었다”고 말하는 품이 방랑벽을 어지간히 즐기는 눈치다. 제집처럼 드나든 티베트 8년 “한마디로 좋아섭니다. 펄펄거리고 돌아다닐 때 좋아요. 사진도 산에서 시작했습니다. 사진보다 산이 먼저였지요. 히말라야가 보고 싶어 네팔에 갔고, 그래서 네팔과 티베트를 찍었습니다. 그렇게 싸돌아다닐 때, 살아있는 걸 느낍니다.” 사진가 여동완(38)씨는 티베트를 찍는 사진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오지를 찍는 사람’ 또는 ‘여행사진가’라고 부른다. 정작 여씨는 그 이름을 둘다 거부한다. “이 세상에 오지는 없기” 때문이다. 티베트는 오지가 아니라 다만 교통이 나쁜 곳일 뿐이다. 여행사진가란 말도 그의 사전엔 없다. 사람들이 늘 뭔가 굴레를 씌우고 규정하려는 게 싫다. 그는 자석처럼 자신을 잡아당기는 곳에 홀린 듯 찾아갔고, 그곳에서 자신과 꼭 닮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이 좋아 자꾸 찾아가서 사진을 찍었다. “89년, 서른살을 두달 남겨놓고 군에서 제대를 했습니다. 갑자기 큰 산, 하얀 산이 보고 싶더군요. 히말라야에 갔죠. 어, 근데 거기에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살고 있더라고요. 그때 찍은 사진과 쓴 글을 산 전문잡지에 넘겼는데, 당시 편집장이자 산사나이인 박인식 형이 제목을 ‘동쪽에서 온 동이족’이라고 붙였어요. 박 선배가 제게 화두를 던진 셈이었죠. 자료를 뽑고 조사를 한 뒤에 다시 도전했죠. 네팔과 인도를 들락날락하고, 미수교국 여행허가를 내 티베트까지 갔습니다. 외국인에게 개방이 안 된 ‘캄’ 지역까지 들어가 45일 동안 원없이 돌아다녔습니다.” 여씨가 찍은 티베트는 있는 그대로의 티베트다. 그는 사진을 만들지 않는다. 밤이건 낮이건 자연광을 쓴다. 아무리 어두워도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다. 흔들린 사진도 그대로 쓴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고전적인, 스트레이트 사진”이라고 불렀다. 그는 인류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니라 사진가이기 때문에 아무런 해석이 묻어 있지 않은 그냥 사진을 찍는다. 누구에게 보이고 싶은 욕심도 없고, 팔고 싶은 생각도 없다. “좋아서, 느낌이 올 때” 본능처럼 그의 손가락은 셔터를 누른다. “안 좋아하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먼저 자기가 좋아야 사진도 좋고 작업도 좋아요. 꼭 찍어야지 욕심을 부리거나 단순한 호기심으로 덤벼들면 실패합니다. 한곳에 오래 머물며 그 장소가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호기심은 사라지고 편하고 즐거운 느낌이 와요. 전 발동이 늦게 걸리는 편인 데다 게을러서 카메라도 안 들고 어슬렁거리기 일쑤지요. 사진을 안 찍으면 또 어때요. 좋으면 좋은 거죠.” 그의 티베트 사진엔 꼭 사람이 들어가 있다. 일부러 집어넣으려 한 적도 없는데 먼 거리 사진이라도 점만한 사람이나 동물이 잡힌다. 아마도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일 거라고 그는 설명했다. 어느 땅에나 사람은 살고 있고, 그는 그 현장을 담는 한 사진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도 “이제 티베트는 끝났다”고 말했다. 8년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곳이다. 티베트 친구들이 “넌 전생에 티베트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혀를 내두를 만큼 온몸이 끌렸던 곳이다. 한두달 있다보면 새까맣게 타는데 그땐 정말 외지인들이 구별 못할 만큼 티베트 사람이 되곤 했다. 남들은 라싸 공항에만 내려도 헉헉 숨을 몰아쉬며 머리가 아프다고 야단인데 그는 5천m 고산지대에서도 담배를 2갑씩 태울 만큼 타고난 특이체질이었다. 사천성 칭두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면 티베트 지역에 들어섰음을 느낌으로 먼저 알던 그였다. “완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됐다 싶을 때, 여기서 접고 싶어요. 티베트말고도 가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이제 몽골리안의 뿌리를 찾아 몽골과 중앙아시아로 갑니다. 얼마 전에도 우랄 알타이산맥을 훑고 다녔는데 사고가 나서 깁스를 하는 바람에 거의 못 찍고 그냥 왔어요.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난 시간을 넉넉히 잡아 일하고 싶어요. 일정 빡빡하게 잡아 단번에 쓱 찍어버리는 건 싫어요. 그건 베끼는 거죠.” 그는 사진찍을 곳을 적어도 두번은 간다. 처음 갔을 땐, 스케치하듯 뚝뚝 그냥 찍으며 논다. 낯선 풍광과 인사하고 그곳이 그에게 걸어오는 말을 들어준다. 첫 필름들을 현상하면서 개념을 잡는다. 두번째 갔을 땐 느낌이 온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서양 사진가들을 만나는데 걔네들은 정말 치열하게 작업해요. 우리 작가들이 그걸 배워야 한국 사진이 발전할 겁니다.” 전 세계를 이웃 마실가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누비던 그도 이젠 좀 지쳤다. 나이 탓일까. “카메라가 조금씩 더 무거워”진다. 돈 마련하는 일도 버겁다. 손에 잡히는 대로 내다 맡기던 컴퓨터며 카메라, 오디오도 이젠 더 팔게 없다. 사진가의 작업과 그 작품을 제값 쳐주는 풍토가 안 돼있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한번 나가면 길게는 1백20일까지 “한번 나가면 짧아야 한달, 길게는 1백20일까지 돌아다니다 옵니다. 옛날엔 그 품 드는 걸 외국처럼 다 받으려고 많이 싸웠어요. 이젠 포기했습니다. 다 공염불이에요. 서양에서도 다큐멘터리 사진은 싣는 매체가 줄면서 점점 어려운 분야가 되고 있어요.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 남겠지요.” 그는 그 탈출구로 2년여 전부터 직접 외국 다큐 사진대행사를 뚫었다. 영국 런던의 ‘로버트 하딩 픽처스’와 이탈리아의 ‘그라자베리’ 등 서너군데와 계약을 트고 국제적인 프로 다큐멘터리 작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의 사진을 지오 (GEO) 같은 다큐멘터리 전문잡지나 ‘시그마’ 제공으로 보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173cm에 53kg, 군살없이 벼려진 그의 몸이 또다시 떠날 마음으로 긴장한다. 그로선 너무 오래 붙어 있었다. 한두달 뒤, 필름과 돈 둘중 하나가 떨어진 그가 새까맣게 탄 얼굴로 몽골의 바람을 안고 다시 돌아오리라.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목수 김씨, 김진송 자연의 투박함 그대로 살린 전직 미술평론가의 익명 전시회 그는 목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목수 김씨가 되었다. 목수 김씨는 앞산 뒷산에서 부지런히 나무를 주워다 깎고 다듬었다. 마음이 한군데 모아지니 정신이 맑고 잡념이 없어졌다. 팔뚝만한 소나무와 한아름드리 전나무가 얽어져 의자가 되었다. 마루에 놓고 가족들이 두루 잘 썼다. 동네 면사무소 앞을 지나다가 전나무 몇토막이 나뒹구는 걸 보았다. 몇십년 전 개소식 기념식수가 죽어 베어진 것이다. 그걸 가져다 휘어진 자작나무를 걸쳐 팔걸이를 만들었다. 아버님 텔레비전 보실 때 참 좋았다. 홍수에 떠내려가던 나무를 건져 말려서 마누라 가계부 쓰라고 탁자를 해주었다. 어머님 목침을 뚝딱 깎아드렸더니 그 친구분이 보시고 “나도 해줘” 하셨다. 하나둘씩 그렇게 가구가 모아지니 집안은 비좁아지고, 그걸 머리에 이고 살 수도 없어서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목수 김씨전’(4월14∼21일 가나아트스페이스, 22∼30일 부천 LG갤러리)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전시장의 푸근한 안내문 “만져보세요” 그는 처음에 겁이 났다. 그는 원래 목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목수로 안 봐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어떤 이들은 그를 미술평론가로, 또 어떤 이들은 그를 출판운동가로,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익명으로 뭘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가 일찍이 몸담았던 미술동네엔 전시회 연다는 기별을 일절 하지 않았다. 전시도록에도 59년 서울에서 나서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외방리에 사는 목수 김씨라고만 적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 신명나서 제 손끝을 놀려 노동한 품을 온전하게 그 물건만으로 저울질당하고 싶었다. (사진/전시장에서 만난 김씨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무엇보다 동업자인 목수들이 그의 손을 알아봐줬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목수 김씨는 입이 헤 벌어졌다. 목수의 아내도 기분이 좋았다. 전시회장에 들러 그의 손을 잡는 사람들도 다들 “참 좋습니다” 했다. ‘만지거나 앉아보거나 기대보실 수 있다’는 안내문도 푸근했다. ‘절대 만지시면 안 됩니다’라고 위협하는 다른 전시장과는 달랐다. 집에서 쓰던 물건들이라 반들반들 손때도 묻고 해서 더 정겨웠다. 목수 김씨와 사진을 박자는 젊은이들, 나무에 일가견이 있다며 목수 김씨와 즉석 토론을 벌이는 중년의 사내, 팔지 않는 나무 그림을 굳이 맘에 든다며 팔라고 떼를 쓰는 아주머니, 전시장은 장터마냥 시끌했다. 무엇보다 동업자인 목수들이 그의 손을 알아봐줬다는 게 목수 김씨는 흥이 났다. 한참 고참인 선배뻘 목수들이 찾아와선 “한 십년 공들이셨겠수”하고 슬쩍 운을 뗄 때, 그는 어쩔 줄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평생을 나무를 품에 안고 살아온 그들에게 어떻게 예를 갖춰야 할지 두렵고 거북했다. 얼치기 목수가 만든 걸 찬찬히 뜯어보고 “나도 이렇게 자연스런 걸 만들려고 고민했는데 젊은 분이 어찌 이 경지에 다다르셨나. 난 나이 많은 분인 줄 알았네” 할 땐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이제 목수 김씨는 그 익명성을 벗어던지기로 했다. 김진송(39)씨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가 얻고자 했던 대부분의 것을 이루었다. 전시된 목물을 주고 다섯식구 몇달 지낼 만한 돈을 ‘샀고’, 주문도 받아 목수 김씨로 계속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한국 공예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 근본은 어디에 있는지 꿰뚫게 된 것이 큰 소득으로 남았다. “집 앞뒷산을 어기적거리다 보면 못쓰게 된 나무들이 버려져 있었어요. 옛날 같으면 땔감으로 썼겠지만 지금이야 미끈한 고급재가 아니면 누가 돌아다나 봅니까. 목질이 갈라지고 무너져서 쓸모가 없지요. 그걸 주워다 도끼를 대고 깍귀로 다듬다보니 우리 옛날 집안에서 쓰던 목물들이 단순하고 소박한 모양새를 가지게 된 까닭을 알겠더라고요. 흔히 서민들이 소탈하고 질박한 성품을 지녀 물건도 그렇다고들 해석을 하는데 그건 듣기 좋은 소리구요, 사실은 그들이 구할 수 있는 나무들이 그런 것밖에 없으니 거기에 맞출 수밖에요. 제가 만든 목물들도 그런 겁니다.” 그가 목수가 된 건 사실 미술판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80년대를 미술운동판 언저리에서 보낸 그는 97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일상 기억 그리고 역사전’을 맡아 전시를 진행하면서 속병을 얻었다. “너는 예술주의자냐, 사회학주의자냐”는 기획자들간의 논쟁에서부터 실무를 담당한 관료들과의 신경전까지, 한꺼풀만 걷어내면 속이 다 보이는 얄팍한 우리 문화 전반에 대해 신물이 났다. 그는 전시를 개막해 놓곤 집으로 돌아갔다. 그 울분을 삭히려고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해가 뜨면 연장을 들고 해가 지면 나무를 내려놓았다. 나무를 붙들고 있으니 심신이 편안했다. 원래 손재주는 있는 편이었지만, 목수일은 8할 이상을 그저 나무와 씨름하며 배웠다. “목수라고 생각하니 그동안 우리 주변을 싸고 있던 가구들이 다시 보이더군요. 으리으리한 전통 목가구, 값비싼 수입 목가구, 모던해 보이지만 우리 디자인은 아닌 외국산 닮은꼴 공산품. 지금 우리 집들을 점령한 가구들은 얼추 이 세가지가 아닌가 싶어요. 정말 우리 일상의 삶이 배어있는 친근한 가구가 없지요. 제 전시회에 와보고 사람들이 좋아했던 건 어디선가 옛날에 보았던 그 투박하고 자연스런 나무의 모습이 그냥 살아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 우리 미술이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이름을 사고 파는 허명의 상거래로 전락했기에, 그 대안으로 익명성을 택했다고 했다. 그가 작가 김진송이 아니라 목수 김씨를 고집한 까닭이다. 또하나, 탄력성을 잃어버리고 단단하게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사회의 경화증을 뚫어보고 싶었다. ‘먹물’이 갑자기 목수가 돼 나타났다고 떠벌이는 게 싫었다. 그는 우리 지식인들이 너무 일찍 내다버리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손의 문화’를 되살리고 싶다고 했다. “목수 공동체 열고 싶다” “목수와 평론가는 다를 게 없어요. 전 평단에서 일찌감치 명예퇴직 당한 사람입니다. 제 평론을 다들 싫어하면 전 다른 길을 찾아야죠. 그래 이번에도 제 물건을 싫어하면 목수 김씨를 포기하고 배추장사 김씨를 할까, 엿장사 김씨를 할까 다른 길을 찾아볼 셈이었지요. 다행히 목수 김씨를 좋아해 주시니 용기백배해 더 열심히 해 보렵니다.” 그가 사는 동네엔 이제 목수 김씨 소문이 나서 ‘어디 가면 이런 나무가 있다더라’, 밤중이고 새벽이고 알려주는 이웃이 많이 생겼다. 빼도 박고 못하게 생긴 목수일을 그는 “시원하다”고 표현했다. 때로 ‘이렇게 되니까 하나둘 하는 이들이 사라졌구나’ 싶게 힘이 들다가도, 지금 그가 하는 게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진정한 미술운동이 아닌가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한다. “나 같은 마음을 가진 분들을 위해 ‘열린 공방’을 열고 싶어요. 재료와 공구를 제공해서 맘껏 만들어 하나씩 가져가시도록 하는 일종의 목수 공동체 같은 겁니다. 옛 어른들이 생활 속에서 목수도 됐다가 농사꾼도 됐듯이 우리도 일상 속에서 손을 쓰며 제 삶을 즐기는 기쁨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희극배우 구봉서 “웃음엔 은퇴가 없다” (사진/웃고 살아 그런지 구김없는 그의 얼굴은 칠십 노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에겐 더이상 웃을 수 없는, 죽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다.) 그의 평생 소원은 “아이구, 너무 우스워서 눈물나네요” 소리를 매일 듣는 거였다. 이 바닥에 들어온 지 50여년. 사람들을 웃기느라 세월가는 줄도 몰랐다. 남 울리기는 쉬워도 남을 웃기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어린 아들을 뇌막염으로 잃은 날에도 남들을 웃기느라 피멍 든 가슴을 부여잡던 동료 코미디언 양석천씨와 울며 방송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안 죽으면 또 보자”고 악수하며 돌아서는 그의 멀뚱멀뚱한 얼굴 때문에 웃음이 삐져나왔지만, 늙은 희극배우의 얼굴엔 얼핏 쓸쓸함이 스쳤다. 우연한 악극인생, 가는 자리마다 볕 “옛날 관객들은 준비된 관객이었어요. 잘 웃기는 배우가 나온다 싶으면 벌써 웃을 채비를 딱 하고 있다가 얼굴만 비쳐도 ‘와’ 웃었으니까. 무대에 선 사람들도 신이 났지. 대사를 잊어버리고 실수를 해도 격려의 휘파람을 불어가며 ‘잘한다’ 소리들을 질러대던 그 인심좋은 관객들이 그리워요. 지금 사람들은 얼마나 웃음에 인색한지. 아, 좀 웃으면 어디가 덧나나. 화난 것처럼 뚱하고 앉았으니 그 심술통 마음들을 웃기려면 늙은이 등에 땀이 흘러요. 난 요즘 사람들 못 웃기겠어. 그러니 젊은 코미디언들이 자꾸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꾸며내 억지 웃음을 쥐어짜지. 그건 코미디가 아니에요. 말장난이지. 코미디는 페이소스가 있어야 해. 웃다보면 눈꼬리에 눈물 핑 맺히는 거 말이야.” 영원한 ‘막둥이’ 구봉서(72)씨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올해 몇이냐”고 물으면 그날 기분따라 나이가 널을 뛴다. “마흔아홉이요” 했다가, “언제적 구봉선데요” 하면, “사실은 쉰아홉이에요” 하고 젊잖게 눙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믿는다. 웃고 살아 그런지 구김없는 그의 얼굴은 칠십 노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웃음에는 은퇴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겐 더이상 웃을 수 없는, 죽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다. “난 참 운이 좋았어요. 해방되던 해 우연히 악극 악사로 무대 인생을 시작했는데 흘러가는 길목마다 내가 서는 자리에 볕이 들었어요. 악단에서 아코디언을 켜다가 도망간 배우 대신 잠깐 선 악극 무대가 날 스타로 만들어주었고, 악극이 기우니까 영화판이 날 불렀고, 영화배우가 시들해지자 텔레비전 붐이 일어 오늘날까지 현역으로 뛰니 기막히게 운좋은 사내 아닙니까.” 악극배우 구봉서는 전국에서 날리던 유명한 ‘오빠’였다. 그때 여성 팬들은 지금처럼 떼로 몰려다니며 ‘악악’ 대지 않았다. 조용하면서도 정열적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배우를 대접했다. 극이 끝나면 무대 뒤로 쪽지가 오거나 숙소로 인력거가 대령했다. 어디어디서 누가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가보면 요릿집에 한상 잘 차려놓고 그를 흠모하는 여성팬이 기다리고 있었다. 술이야 두주불사고, 총각의 끓는 피도 뜨거웠지만, 로맨스는 있되 스캔들은 없었다. 극에 흠뻑 빠져 울고 웃는 배우와 관객으로 만났기 때문이었다. 인생이 연극인 것처럼, 그들의 만남은 그순간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하룻밤 막간극이었다.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지요. 그때는 악극 열풍이 대단했어요. 요즘 밤무대 쇼나 텔레비전 드라마하곤 질이 틀렸지요. 모두들 순수했고, 온 가슴을 열어 그 얘길 자기 것인 양 진심으로 즐겼어요. 전쟁이 끝난 54년부터 57년까지는 악극단의 마지막 전성기였지요. 민족끼리 엄청나게 피를 흘리며 싸우고 난 뒤 기진맥진한 몸들, 그 깊은 상처를 다독여줄 게 절실히 필요했어요. 악극과 배우들이 그들의 울고 웃고 싶은 마음을 달래준 거지요.” '아리랑' '눈내리는 밤' 등 구름같이 사람들을 모으던 그 시절의 악극을 떠올리던 그는 “지금 악극은 악극도 아니다”고 한마디했다. 그때는 사람들 마음을 울리는 노래들을 많이 만들어 극 속에서 줄줄이 불렀고, 무대장치도 수십명이 매달려 그럴듯하게 꾸몄다. 돈보다는 좋은 악극을 만들겠다는 제작자와 배우들의 혈기가 뜨거웠던 때였다. “요사이 악극 붐이다, 복고 열풍이다 해서 옛날 악극들을 다시 만드는데 그건 흉내일 뿐예요. 노래만 몇곡 딴따라처럼 따라 부른다고 가짜가 진짜가 되나. 뮤지컬도 그래요. 그게 미국 거지 우리 거라는 느낌이 없잖아. 악극은 그 시대가 만든 우리 음악극이었어요. 그래 모두들 그렇게 열광했지.” 악극이 밀려난 건 활동사진 때문이었다. 50년대 중반부터 영화바람이 거세게 불자 악극단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신상옥 감독의 '춘향전'이 장안의 남녀들을 극장 앞으로 몰아올 때, 그는 영화배우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가 ‘막둥이’로 불리게 된 58년작 '오부자'는 그의 출세작이자 화제작이었다. 4형제의 막내로 출연해 막둥이가 된 그는 이 작품이 뜨자 영화 10편을 동시에 찍는 전성시대를 맞게 된다. 이때 함께 일을 하던 ‘합죽이’ 김희갑씨, ‘홀쭉이와 뚱뚱이’의 양석천·양훈씨, ‘후라이보이’ 곽규석씨와 평생 우정을 쌓으면서 ‘코미디 코리아’란 쇼단체를 만들어 돈벼락을 맞으며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다. 그무렵 찍은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죽어가며 하던 마지막 대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죽으면 너희들을 누가 웃기니?” “69년 8월에 MBC에서 '웃으면 복이 와요'를 시작할 즈음은 영화에 좀 질렸던 때였어요. 이미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방송의 맛도 보고 그 가능성도 봤던 참이라 쉽게 마음을 결정했지요. 15년8개월 동안 장수했던 '웃으면 복이 와요'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프로그램입니다. 시청률이 떨어진다고 그 효자 프로를 없애는 방송사에 솔직히 서운했습니다. 10대들을 대상으로 한 개그 프로가 있다면 성인들을 위한 '웃으면…' 같은 프로도 상징적으로 하나쯤 둬야 한다고 난 생각합니다.” “그 사기꾼들하곤 잘 지내냐?” 웃는 걸 경박하고 가볍다고 천시하는 우리나라 풍조에서 코미디언으로 살아가는 건 참 고단한 일이다. 입 있는 사람들마다 “우리나라 코미디는…” 어쩌구저쩌구 비판들을 할 때면 속상하다. 웃음의 미학이 없는 땅에서, 자기 조직이나 직업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을 손톱만큼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웃음을 일궈내는 어려움을 그들은 모른다. 코미디언을 ‘바보’ 취급하는 풍토도 그를 진저리치게 한다. 아무 소리 못하고 늘 당하기만 하는 후배들을 위해 그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항의하고 화를 내는 건, 우선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지금은 코미디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후배들 가운데 많이 배우고 잘난 젊은이들이 많은 게 마음 든든합니다. MBC 코미디언실에 나가 앉아있을 때면 잔소리를 좀 하지요. 책 읽어라, 연구해라, 고민해라, 까르르 까르르 노상 손님들 웃기려고 오줌 마려운 놈 모양 안절부절 말고 니 코미디철학을 좀 가져라….” 그는 5월8일부터 인천을 출발해 전국을 순회하는 악극 '이것이 유랑극단'에 후배 코미디언들과 함께 선다. 악극의 옛 영화는 못살리겠지만 그 맛이라도 살짝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희망이다. 회장일을 보고 있는 한국기독연예인선교단 일도 그를 바쁘게 한다. 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해 아프리카 우간다 오지에 중·고등학교를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한 터라 그 뒷마무리에도 손이 자주 가는 편이다. 한눈 안 팔고 코미디언으로 살아온 그에게 정치판에서 유혹의 손길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국회의원으로 간 후배에게 내 한마디 했지요. ‘그 사기꾼들하곤 요새 잘 지내냐.’ 그가 그저 웃대요. 맨날 이리갔다 저리갔다 쌈질이나 하는 거길 내가 왜 갑니까. 한번 써먹고 차버릴걸. 그런 진흙탕에 비하면 코미디판이야 깨끗하죠. 정말 코미디하는 곳이 어딘지 가끔 헷갈린다니까요.”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피아니스트 백건우 방랑의 세월 이기고 돌아온 신동, 허름한 건반 위에서 봉사의 기쁨 만끽 그가 무대로 걸어나오는 모습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깡똥한 검은색 연미복 속에 흰 터틀넥 스웨터를 받쳐입은 그는 껑충해 보인다. 가난하지만 재능 넘치는 예술가의 초상 같은 게 그의 차림새에서 풍겨난다. 성큼성큼 피아노쪽으로 걸어가며 쑥스러운 듯 머리를 슬쩍 쓸어올리는 그의 손이 큼직하다. 타고난 피아니스트의 손이다. 긴 다리를 피아노와 의자 사이에 접어넣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비어있다. 영락없이 음악을 따라 흘러온 나그네의 그것이다. “내가 백 삿갓이 아닌가 싶어요. 음악을 따라 오래 떠돌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요. 저녁노을 좀 보세요….” 음악인으로서 인간을 돕는 일 (사진/백건우씨가 1년 전쯤 요셉 마리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자가 된 데엔 부인인 영화배우 윤정희씨 집안의 영향이 컸다.) 피아니스트 백건우(52)씨는 축성 1백돌을 맞은 명동성당에 와서 벽돌집 뒤로 지는 붉은 해를 더 고와했다. 96년, 성당 제단 바로 앞에 대담하게 그랜드피아노를 들여놓고 메시앙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 을 연주했던 그는 그때 그 자신이 바로 저녁노을이었다. 온몸을 건반에 쏟아부어 피아노와 한몸이 된 그는 때로 격정을 삭이듯 이를 꽉 문 얼굴 표정으로 음 하나하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기엔 메시앙은 사라지고 백건우만이 남았다. 그 시간, 그 공간에서만은 백건우의 음악이 성당을 메운 사람들 마음을 적시고 뒤흔들었다. “음악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더 절실하게 느낍니다. 음악은 참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에요. 음악가로서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지요. 아울러 나의 한계도, 해야 할 일도 알겠어요. 날이 갈수록 시간이 짧다는 게 아쉽습니다.” 지지난해 메시앙 연주가 끝난 뒤 바로 명동성당 축성 1백돌 기념음악회에 초대받았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1년 전쯤 요셉 마리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자가 된 그는 6월1일 저녁 다시 명동성당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았다. 바흐의 사랑하는 형 야곱의 출발에 부치는 카프리치오 와 브람스의 변주곡, 베토벤의 소나타 월광 이 여름 밤 성당 하늘 위로 퍼져갔다. 이 땅에서 고난받던 수많은 어린 양들이 핍박을 피해, 민주주의와 정의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들던 양심의 성소에 그의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힘든 고비를 넘고 있는 조국을 돕고 싶었습니다. 공연수익금으로 명동성당이 운영하는 실직자 쉼터 ‘명동평화의 집’을 돕게 될 것 같습니다. 음악인이 정치적으로 나서는 건 원치 않아요. 음악인으로서 인간을 돕는 일, 그건 거절할 수 없지요.” 몇년 전부터 그는 큰 소리 내지 않고 자신의 음악으로 봉사의 손길을 돕는 데 보태왔다. 그의 음악을 듣고자 하는 이들에겐 연주 조건을 따지지 않고 찾아갔다. 지역 순회음악회를 열고, 충북 음성 꽃동네 초청도 선뜻 응했다. “완벽하게 준비된 음악회는 없어요. 물론 지역에 가보면 조율도 제대로 안 된 피아노에 음향이라는 말도 못 꺼낼 지경의 강당에서 연주를 하는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모여 내 음악을 듣는 이들이 내게 주는 감동은 말로 못할 만큼 값집니다. 내가 음악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진실하면 그들도 깊은 침묵으로 함께 숨쉬며 그걸 받아들입니다. 그 말없는 대화 속에서 배우는 게 얼마나 많은지요.” 그는 “음악이 학문이면서 인간적 예술이기” 때문에 인간을 이해하고 삶을 이해하는 것을 첫째로 꼽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남의 연주를 들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한 인간으로서 감동을 주느냐를 따진다. 기교는 한번 듣고 나면 끝이지만, 인간적 감동은 20∼30년이 흐른 뒤에도 울림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게 아마도 우리가 찾는 진리겠지요”라고 결론처럼 덧붙였다. 백건우씨는 8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10살 때 첫 독주회를 가졌으며, 12살 때 국립교향악단과 협연을 한 신동이었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그렇게 계속 나갔으면 지금은 피아노를 그만뒀거나 있으나마나한 연주자로 떨어졌을 것이다. 15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동안 피아노를 멀리했다. 철학책을 읽고 사진찍기에 몰두하며 스승들이 걱정할만큼 방랑의 세월을 보냈다. “무리한 천재교육에 대한 반항이랄까요. 나의 뜻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진 피아노 수업에 염증을 느낀 거지요. 내 인생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피아노를 멀리 떼어놓고, 일부러 멀리 돌았지요. 그 과정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 내 음악은 없었을 겁니다.” 그는 자신이 “항상 빙 도는 성격이어서” 손해를 많이 보는 듯하지만, 결국 그렇게 돌아서라도 더 정확하고 여유있게 갈 곳에 가기 때문에, 오히려 음악이 더 두터운 결을 이루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 고통이나 고뇌없는 밋밋한 음악은 맛이 없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언덕을 넘어야 큰 경치를 보고,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겨야 삶이 아름다운 것”처럼 그는 음악도 센 풍랑을 거친 만큼 보석처럼 더 단단하게 벼려진다는 걸 믿는다. “피아노 좀 잘 쳤으면 싶다” “무대 예술이 참 힘든 거라는 걸 나이 먹을수록 느껴요. 첫째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이 없어야 해요. 그렇다고 아주 가라앉아 버리면 또 안 되지요. 남을 설득해낼 정도의 힘,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둘이 적당하게 조화를 이룬 연주자가 무대에 섰을 때, 관객들이 객석을 메우고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건 그에 대한 신뢰 같은 겁니다. 서로가 사랑하는 음악의 진실, 그걸 함께 즐길 수 있는 대화의 통로가 열렸다는 걸 말없이 공감하는 순간이지요.” 백건우씨의 무대가 고정 애호가들로 늘 뜨거워지는 건 이 믿음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서둘러 온 사람이 아니고 멀리 돌아서 천천히 찾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제 소리를 찾아서 제 식대로, 묵묵히 걸어온 이 음악 나그네의 피아노에 대한 사랑을 그들은 함께 알고 느끼고 즐긴다. “지금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궁금증이 없다면 음악이 살아 남을 수 없죠. 어릴 땐 철학이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어요. 바보가 되는 것 같아요. 점점 작아지는 세상에서 한가지 잘하고 죽기도 참 힘들구나 한탄하지요. 음악으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던 제가 지금은 그저 피아노 좀 잘 쳤으면 싶네요. 그것만 잘해도 어디에요.”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입양아 리아 시크 모국의 고통받는 얼굴에서 확인한 출생의 비밀…미국으로 돌아가며 마지막 춤판 그는 막 집에 돌아온 참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25년 뿌리없이 떠돌던 그의 몸이 탯줄 같은 무명 천을 부여잡고 그 속에 머리를 묻었다. ‘덩 더덩’ 심장 고동소리처럼 울리던 장고 소리도 잦아들고,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6월의 말간 해가 빛났다. 핏덩어리처럼 뻘겋게 열이 오른 그의 몸 위로 흰나비 한마리가 날아들었다. ‘어머니!, 왜 나를 두고 떠나셨습니까?’ 눈물 번진 얼굴들이 그와 나비를 좇았다. 갓난아이처럼 첫번째 긴 숨을 비로소 내쉰 그가 일어선다. 그는 고향에 와서 다시 목숨을 얻었다. ‘어머니, 닷새 밖에 안 남았어요’ 리아 시크(25). 입양아. 이름 모름. 생년월일 모름. 1973년 1월8일 서울 동대문구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일하던 사람이 강보에 싸여 울고 있는 그를 발견해 종로 파출소로 옮김. 파출소에서 시립아동병원으로, 다시 홀트양자회로 넘겨진 그를, 그해 3월 미국 인디애나주에 사는 로버트와 홀리 시크 부부가 입양해 감. 25년 전 기록은 이것뿐이다. ‘오른쪽 어깨에 팥 크기의 녹색점이 있음’이라는 단 한 줄이 홀트양자회가 남긴 신원정보의 전부였다. (사진/놀이마당을 마련한 시선 대표 엄정애씨는 고향 땅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흘린 땀과 눈물에 젖은 리아를 꼭 안아주었다.) 지난 6월7일 경기도 용인시 시미리 전통찻집 ‘시선’에 모인 사람들이 본 것은, “우리 집을 못 찾겠어요”라고 안타까워하는 리아 시크의 마음이었다. 먼 길을 돌아 집을 찾아온 그를 위해 한국 친구들이 열어 준 한판 놀이마당 ‘어머니, 닷새밖에 안 남았어요’라는 제목이 그의 초조한 심정을 대신 말하고 있었다. 6월13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날을 잡아 놓고, 그는 저를 낳아준 어미를 찾는 마지막 춤을 추었다. “내 얼굴, 내 손, 내 가슴, 당신의 질을 통해 나왔을 내 몸. 당신이 3개월 핏덩이 날 버렸을 때, 난 첫번째 상실을 겪었어요…. 어머니, 그래도 난 당신을 그려볼 수 있어요. 당신 숨결과 하나가 되어 나는 당신의 자궁 속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이 쓴 시가 낭송되는 가운데, 배냇저고리 같은 흰 옷을 입은 리아는 25년 제 삶을 몽땅 던져넣은, 목숨 같은 몸짓으로 흐느꼈다. 한국에 와서 배운 살풀이춤에 실어 그동안 쌓인 한을 훌훌 떨쳐버렸다. “리아가 지금 울고 있어요…. 우리가 그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요. 이런 자리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입양아는 우리와 다르지 않아요. 친구처럼, 이웃처럼, 똑같이 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고향 땅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흘린 땀과 눈물에 젖은 리아를 꼭 안아주며, 이 모임을 마련한 엄정애(시선 대표·전통인형연구가)씨는 같이 울었다. 리아는 수많은 입양아들처럼,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 중 하나였다. 운좋게 좋은 양부모를 만났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겨우 숨쉬기 시작한 그를 거둬준 양어머니는 “리아가 크면 한국에 가서 친부모님을 찾아야 해”하고 늘 말해주었다. 그의 가족은 입양가족이자 다국적 가족이다. 남동생 프레도는 베트남에서 왔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미국에 입양됐다고 하면 인종차별로 고통받지 않았느냐고 물어요. 그들은 다문화사회인 미국의 긍정적인 면을 보려 하지 않아요. 물론 인종차별은 있어요. 하지만 인종차별은 한국사회에도 있지 않나요. 한국 친구들이 나에게 ‘왜 한국말을 못하느냐’고 따지듯 말할 때, 난 거기서 무서운 인종차별을 봅니다. 그들에게 묻고 싶어요. ‘왜 나는 해외로 입양돼야만 했나요?’” 리아는 어려서는 조국이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아름다운 처녀로 크면서, 여자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면서, 돌아가야 할 집과 고향과 어머니를 떠올렸다. 코네티컷주 웨즐리언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1학년 때 ‘아시안계 미국 여성들’이란 강의를 들었다. 그때, 동양인들에 대한 느낌이 왔다. 노란 얼굴의 사람들, 중국인과 일본인과 함께 묶이는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학 4학년 때 ‘입양아들의 자아 정체성’이란 논문을 쓰게 된 건 이런 경험이 스물한살 그의 감성과 엮이게 된 결과였다. “오래 전 집을 떠났기에 난 내 얼굴이 부모와 다르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어요. 내가 한국 사람이란 걸 가슴으로 깨닫는 순간, 갑자기 깊은 슬픔을 느꼈어요. 많은 아시아 사람들의 얼굴이 내게 다가왔고, 그 첫 경험은 큰 물결을 내게 몰아왔어요.” 리아가 이 무렵에 쓴 시 ‘미국에서’에는 갑자기 이방인이 된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나의 한국인 얼굴이/ 거울 속을 떠다닌다// 반달 같은 눈초리/ 도도해 보이는 광대뼈/ 멜론빛 입술/ 어둠에 잠긴 까만 머릿결// 나를 떠나질 않는다// 내가 그 암호를 풀어낼 수 있다면/ 내 출생의 비밀이,/ 나를 그 첫번째 숨결로/ 데려다 주련만// 내가 내 원래 어머니의 딸이었던/ 그 칠일간이/ 내게 말해 줄 수 있을 텐테// 이것이 그녀의 얼굴인지/ 나는 보고 있다.” 리아가 진보적인 인권단체 등에서 일을 하고, 식민지에서 인권운동을 벌였던 프란츠 파농에 감동받은 건, 뒤늦게 그의 삶을 뒤흔든 핏줄과 뿌리에 대한 절실함 때문이었다. 96년 프린스턴대학교의 한 문화교류 프로그램에 갔다가 아시아 지역에서 직업을 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그는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서울대 어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양심수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서울에 온 12월에 경동교회에서 ‘그늘진 공간’이란 이벤트가 열렸어요. 저보다 먼저 한국에 온 입양아들이 만든 모임이었지요. 그곳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고 정보도 얻었어요. 엄마가 미혼모였을 것 같아요. 엄마는 너무 힘들어서 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2년쯤 있으면서 이 사회가 여자들을 대하는 수없는 차별과 불평등을 보았어요. 이 땅에 태어난 아이들을 외국에 팔 수밖에 없었던 이 나라의 역사도 알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더 보고 싶어요.” 리아에게 이제 ‘엄마’란 말은 여러가지 뜻을 지니게 됐다. ‘한국 여자’ ‘한국 역사’, 그리고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자기가 태어난 땅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아직도 길 위에서 떠돌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바로 ‘디아스포라’다. 그는 한국에 와서 만난 양심수와 장기수들, 외국인노동자들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언젠가 엄마를 만날 걸 믿습니다.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죠. 이제 그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어요. 집에 돌아왔거든요. 몸은 미국으로 떠나지만, 마음은 이 땅, 엄마가 사는 곳에 두고 갑니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변호사 이돈명씨 “좋은 나라에서 죽고 싶소” 그의 머리가 서리를 인 듯 하얗다. 몇년 전만 해도 까맣던 머리카락이다. 두어달 전 5분차로 이승과 저승을 왔다갔다 한 뒤 그렇게 좋던 기억력도 이젠 자신이 없다. 중환자실을 드나들며 먼저 간 후배들을 생각했다. 90년 조영래, 93년 황인철을 보내고 나서 맘이 많이 약해졌다. 둘 다 암으로 갔다. 암은 시대의 병이다. 너무 오래 불의가 지배한 이 사회가 그들을 죽였다. 인권변론의 사령탑으로 그들을 혹사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지금 제 가슴을 친다. 그 시절, 지기만 했던 변호사 “80년대 인권변호사들에게 인권 관련 사건을 적절하게 나누는 것이 내 일이었어요. 내가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이었으니까 인권쪽 사건이 주로 접수되던 종교계와 친하다는 이유로 아마 나를 배당 담당으로 밀었나봐. 그러니 내가 조영래, 황인철 일 많이 시켜 그 좋은 후배들 명을 재촉했단 자책감이 안 들겠오?” (사진/70년대부터 가장 왕성하게 인권변론을 벌여온 그를 동료 인권변호사들은 ‘우리 대장’이라고 부른다.) 범하(凡下) 이돈명(76) 변호사를 동료 인권변호사들은 “우리 대장”이라 부른다. 70년대부터 가장 왕성하게 인권변론을 벌여온 그는 정의실천법조인회(이하 정법회)와 이를 바탕으로 해 만들어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의 중심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민변이 10돌을 맞은 지난 5월, 그는 법조계에서 일한 46년 세월을 돌아봤다. 암흑 같던 시절을 뚫고 나온 그의 몸은 망가졌지만,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맑은 눈은 험한 세월도 어쩌지 못했다. “52년 사법고시에 합격해 한 10여년 판사생활을 했지요. 5·16이 나니까 사법부가 흔들리더라고.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위로부터 눈에 안 보이는 압력이 거세지기 시작한 거야. 63년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끝으로 미련없이 관직의 연을 끊었어요. 그때 좋은 판사들이 일찌감치 자리들을 많이 떴지.” 자유당 시절만 해도 하급법원엔 일체 권력의 입김이 와닿질 못했다. 대법원장이던 가인 김병로가 철통같이 막아줬기 때문이다. 가인이 물러나자 조봉암 사건, 경향신문 사건 등이 터졌고, 사법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져버렸다. 이런 와중에 박봉에 시달리는 아들을 위해 농사를 지어 부족한 쌀을 대주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더 머뭇거릴 마음이 없었다. “변호사로 나서니까 할 일이 널렸더라고. 유신체제와 5공화국의 무지막지한 법 앞에 내몰린 무수한 양심수들이 좀 많았어요. 재미있는 건 사람이 뭘 말하는 걸 범죄로 몰아 재판에 부치는 거야. 북한에 식량이 안 모자란다더라, 해도 잡아가고 이걸 재판에 부쳐. 말뿐인데. 피고들은 또 중형받을 걸 알면서도 그렇게 당당하고 의연한 거야. 말 한마디에 몇년이 왔다갔다 하는 판국인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니….” 이 변호사 자신이 바로 법정에서 그리도 당당했던 것을 많은 후배들이 기억한다. 86년 10월, 5·3 인천사태로 수배중이던 이부영(한나라당 국회의원)씨를 숨겨주었다는 죄 아닌 죄로 법정에 선 그는 최후진술에서 말했다. “정치보복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처단하는 마지막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원로 법조인이자 현직 변호사를 구속해 6개월 옥살이를 시킨 5공 정권은 이 상징적 사건만으로도 말기가 가까웠음을 보여주었다. “내가 그 시절에 만날 지기만 하는 변호사였소. 사실 징역 보내는 변호사였지. 남영동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던 김근태(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씨, 성고문을 당한 권인숙양, 일본 간첩단사건의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대표)씨가 모두 징역살고 고생했어요. ‘법이란 이름의 불의에 쫓긴 양’들이었지.” 그가 양을 말함은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인 듯싶다. 그는 나이 쉰이 넘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귀의했는데 그 계기 또한 참으로 그답다. “74년께부터 천주교가 벌이는 대사회활동을 지켜봤지요.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벌이는 일들이 아주 옹골차더라구. 난 그때까지 교회가 제 몸 하나 잘되라고 기도만 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독재정권에 맞서 인권을 위해 싸우는 용감하고 정의로운 종교라면 믿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75년 천주교 영세를 받을 때 그의 성품을 잘 아는 친구가 그에게 붙여준 세례명이 ‘토마스 모어’였다. 16세기, 한국의 유신시대처럼 어려운 정치상황이 벌어졌던 영국에서 정의를 위해 서슴없이 단두대에 올랐던 토마스 모어의 삶을 그의 삶에 겹쳐놓았던 것이다. 그 인연 때문인가. 이 변호사가 늘 곁에 두고 즐겨 읽는 책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다. 유토피아 가 그린 사회, 모든 사람이 같이 일하고 같이 쉬는 합리적 인간사회를 그도 꿈꾼다. “88년 9월 조선대 총장에 취임한 것도 학원민주화를 향해 일어섰던 한 사립대학의 뜻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그걸 문교부를 시켜 감사를 하고 언론재판을 벌였을 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허탈했지요. 난마 같던 사건을 해결한다는 심정으로 3년을 싸웠고 그때 마음고생을 너무해 팍 늙은 것 같아.” “조선대 총장 때 너무 마음고생” 그는 파안대소했다. 자신이 한 인권변론은 하느님 이름 빌려 운동한 것이니 “내가 뭐 한 게 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정권이 바뀌건 사람이 바뀌건 가장 중요한 건 인권 옹호입니다. 인권 침해 없는 나라가 최고예요. 인권을 위해 싸우는 것, 그건 인간으로서 첫째 임무로 둬야 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성취되면 할 일이 없지 않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난 그렇지 않다고 봐요. 민주주의도 그 이면엔 그늘이 있게 마련이에요. 그 그늘 편에 서는 것이 인권변호사가 마지막으로 할 일입니다.” 그는 우리 법조계가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법관들은 아직 똥인지 된장인 뭐가뭔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여기저기 눈치보는 잘못된 버릇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온 국민이 오랫동안 원했던 나라로 가는 길에 들어섰으니 민주 국가에 사는 시민답게, 법관답게 살아야지요. 모두들 딱 자기 위치에 굳건하게 서서 소신있게 자기 일을 해나가는 걸 보고 죽어야 할 텐데.” 노변호사의 단 하나 소원은 “좋은 나라, 인권 침해 없는 나라”를 보고 죽는 것이었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소설가 조세희/“너무 아파, 나는 피를 토한다” 수많은 난쟁이들 분노 기록할 하얀 저고리 , 제2의 난쏘공 으로 그는 여전히 난쟁이다. 1978년 6월에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하 난쏘공 )을 내놓을 때도 난쟁이였고,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난쟁이다. 이 사회에서 사는 한, 그는 난쟁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낙원구 행복동에 살던 난쟁이 일가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던 다섯식구의 삶이 지금 도처에 널려 있다. 망하기 딱 좋은 매체, 당대비평 “아는 이들이 절더러 그래요. 조형, 왜 그렇게 힘들게 삽니까. 세상이 바뀌었는데 얼굴 좀 피고 즐기면서 사세요. 그 사람들 머리에선 70, 80년대가 벌써 화석이 돼 있어요. 그게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현실인데, 벌써 역사를 만들어버리면 어쩝니까. 군부독재가 이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이미 IMF체제는 시작된 거였어요. 박정희가 한 일이 뭡니까. 외국 자본에 땅 주고 삐쩍 마른 노동자 대준 것뿐이잖아요. 그 노동자들마저 지금은 거리로 쫓겨났고요. 우린 여전히 제3세계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겁니다. 옛 것은 여전한데 새 것은 자라지 않았어요.” (사진/문학은 ‘사람을 사랑한 자취’라고 정의하는 그는 “바로 우리 곁에서 분노하는 난쟁이들을 서로 사랑하자”고 말한다.) 조세희(56)씨는 “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자로서, 낙오자로서 말한다”고 앞말을 달았다. 70년대, 유신시대의 암울하고 참담한 상황을 적확하게 짚어냈던 연작소설집 난쏘공 을 내놓은 뒤 그는 정말 하나도 자라지 않았고 변하지 않았다. 똑같이 굴뚝 청소를 한 아이 둘의 얼굴이 하나는 까맣고 하나는 하얄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던졌던 그는 바로 지금 우리가 그 ‘뫼비우스의 띠’를 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니까 우리의 정신을 꽉 묶어 발육을 막았던 적들보다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우리 자신이 더 단결력이 없었던 셈이에요. 현장을 지키던 사람들이 일찌감치 부대를 해산하고 분열 양상을 보이니 나같은 늙은이라도 젊은이들 편에 남아서 실패자의 경험을 얘기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우리의 미래는 다시금 아스팔트 위에서 피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70, 80년대가 뭘 깨야 할지 적이 단순·명쾌했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그 표적이 움직이는 데다 변색까지 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라고 말했다. 이렇게 변질된 세상을 변화시키긴 위해선 사람도 변하고 언어도 변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계간 당대비평 편집인 일을 맡았다. “진실한 목소리에 목말라 하는 젊은 친구들을 위해 이 난쟁이가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 화가 나서 분노가 치밀 때마다 새로운 매체가 있어야겠구나 생각은 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없으면 만들자, 하고 의기투합한 이들이 있어 당대비평 이 태어난 거예요. 또 70, 80년대 내가 내 일을 제대로 못했기에 그때 희생자들에게 진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나왔어요. 근데 그 사이 싸움꾼, 일꾼 숫자가 굉장히 줄어들어 섭섭해요.” 꼭 1년이 된 당대… 를 그는 “망하기 딱 좋은 매체”라고 불렀다. 이 사회가 그동안 제대로 말하기를 피해온 얘기들을 정색하고 파헤치려는 힘 때문이다. 그가 “실패할 것 같애”라고 말할 때, “선생님이 못하시면 우리가 하겠습니다”라고 덤벼드는 젊은 친구들의 예쁜 얼굴 때문에 그는 허덕이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고백했다. “지식인 문제만 해도 그래요. 시대가 바뀌어도 만날 그 사람이 그 사람이야. ‘운동’ 팔지, 변절하지. 우리 역사에서 언제 한번 지식인들을 제대로 단죄한 적이 있습니까. 난 최소한 청와대 들어가 ‘국민교육헌장’ 기초한 박종홍부터 싹 한번 그 공과를 정확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노 시대에 종살이한 지식인들이 또 텔레비전 나가서 위대한 우리 민족이 곧 IMF를 극복할 거다 어쩐다 떠드는 걸 보면 기가 막혀요. IMF가 뭐예요. 반성하자는 거 아닙니까. 외국 거대자본이 음흉하게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덤벼드는데 더 크고 근본적인 반성이 없으면 이 나라는 또 멀찌감치 뒤로 가게 되고, 난쟁이들만 더 큰 고통받게 됩니다.” 그는 지금 마무리를 짓고 있는 소설 하얀 저고리 에 수많은 난쟁이들의 분노에 찬 함성을 기록하고 있다. 난쏘공 도 하얀 저고리 도 하찮은 작품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절규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한번 피마르게 아파서 소리지르는 때가 있어요. 그 진실한 절규를 모은 게 역사라고 나는 봅니다. 난쏘공 은 내가 너무 아파서 지른 간절하고 피맺힌 절규였어요. 그래서 아마 20년이 흘러도 그 난쟁이들의 소리에 젊은이들이 귀를 기울이는 걸 겁니다. 시대 문제의 핵심, 인간의 마음에 가까이 갔었기 때문에.” 홧김에 사들인 카메라 그는 어떤 형식이든 현실에 개입하는 걸 즐긴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도 현실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79년 사북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는 사진찍는 젊은 친구들에게 제발 그 기록을 남기라고 쫓아다니며 부탁했다. 아무도 그의 말을 안 듣자 홧김에 카메라를 한대 사고 필름을 끼운 뒤 현장으로 들어갔다. 사진의 첫걸음 이란 얄팍한 책 한권으로 사진찍기와 만들기를 사흘 만에 깨우친 뒤였다. “프랑스 총파업 때 가보니까 거긴 각 대학 사진과 학생들이 죄 나와서 교수와 함께 사진을 찍어요. 그들이 사는 시대를 그들 눈으로 보고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친 역사 공부의 현장이더군요. 요새 우리 파업 현장에 가보세요. 직업 때문에 온 언론사 기자들밖에 없어요. 뭔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늘 지지만, 끊임없이 그 패배의 쓴 경험을 들려줄 나같은 사람이 필요한 가봐요.” 그는 난쟁이로서의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치사하고 창피한 일이 많아 한없이 부끄럽다고 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조차 자신이 벌인 싸움의 원동력이기에 소중하다고 했다. “문학은 사람을 사랑한 자취입니다. 난쟁이의 경험, 난쏘공 은 바로 사람을 사랑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우리 곁에서 분노하고 있는 난쟁이들을 서로 사랑합시다.”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고구마 권병준 “나를 삶아 드세요” 그의 이름은 고구마다. 이젠 권병준이란 본명이 오히려 낯설다. 남들도 그를 고구마라고 부른다. 편하다. 그는 편한 게 좋다. 이 뻑뻑한 세상을 좀 편하게 살고 싶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름을 바꿨어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되고 싶었지요. 새 이름이 필요했어요. 아무 뜻도 없는 무엇을 찾았지요. 그게 고구마예요. 남들이 나를 부를 때 무상무념 아무 느낌이 없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감자도 아니고 고구마다. 느릿느릿 말하는 그의 길쭉하고 느른한 몸이 똑 고구마다. 가수이자 작곡가이고 영화배우인 권병준(26). 이 남자의 삶은 ‘그렇게 그냥’ 고구마처럼 굴러간다. 영화가 오면 영화를 찍고, 작곡 해달라면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불러야 할 때면 노래를 부른다. 다 좋다. ‘편하게, 자연스럽게.’ 이 ‘무서운’ 얘기를 그는 쉽게 한다. 남들이 늘그막에 퍼뜩 깨닫는 걸 너무 빨리 알아버린 것 같다. 껌벅껌벅 눈을 비비는 고구마의 모습은 무방비 상태의 어린이인데 속에 들어앉은 건 산전수전 다 겪은 영감이다. “‘쇼’ 같아서 싫어요” (사진/“대개들 음악에다 자기 속의 걸 그냥 담잖아요. 그렇게 확 뱉어버리는 식의 음악이 제일 싫어요. 그건 똥싸는 거나 같아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많아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그 만남이 모여서 관계가 되고, 그런 관계들이 얽혀서 더 큰 관계가 되는 것, 그걸 지켜보는 걸 좋아하지요. 제가 보기엔 지금 사람들 사이가 참 각박해요. 서로들 피해의식만 느끼는 것 같고. 다들 불쌍해요.” 고구마가 하고픈 건 그런 사람들 사이를 부드럽게 맺어주는 구실을 하는 음악과 영화다. 대중음악을 하고, 영화배우를 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고 널리 부딪치기 위한 통로다. 그가 보기엔 음악과 영화 둘이 지금 보통 사람들에게 살갑게 침투할 수 있는 가장 힘센 매체이기 때문이다. “공연할 때마다 고민이 많아요. 사실 별로 잘하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를 대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대에서 뭔가를 보여주는 건 ‘쇼’ 같아서 싫어요. 음악을 매개로 남들과 소통하는 데 더 관심이 많지요. 누구나 제 삶이 작품으로 드러나게 마련인데 거기서 되도록 멀리 벗어나려고 노력해요. 그래봤자 제 안에 갇혀 있지만.” 음악은 그의 삶이다. 하루 12시간씩 음악에 매달려도 허기가 진다. 기타를 뜯고 노래를 부를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너무 좋아해왔기에 지금도 음악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끔 겁이 난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에게서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질려서 도망쳤고, 다시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그것도 싫었던 그는 혼자 딩딩거리며 배운 기타엔 금세 빠져버렸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밴드 ‘강아지’를 결성했던 그는 서울대 불문과에 들어간 뒤엔 아예 공부를 밀어놓고 음악과 열애에 빠졌다. “과 분위기가 학생이고 교수고 웬만한 평론가 못지 않은 귀를 지닌 음악광들이었어요. 거기서 좋은 선배들을 만났지요. 시도 쓰고 음악평도 하는 성기완 형과 93년에 그룹 토마토를 이뤄 음반을 만들었어요. 96년엔 삐삐롱스타킹 멤버로 들어갔고요. 보들레르를 좋아했지만 음악과는 다른 얘기죠.” 음악을 왜 하냐는 질문에 그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음악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는 음악을 한다. “대개들 음악에다 자기 속의 걸 그냥 담잖아요. 그렇게 확 뱉어버리는 식의 음악이 제일 싫어요. 그건 똥싸는 거나 같아요.” 그가 지금 노래하고 있는 밴드는 그룹 원더 버드다. 선배들인 박현준, 신윤철, 신경호 형들과는 마음이 참 편해서 일하기가 좋다. 소리도 몇개 없는 단순한 음악들을 만들었는데 그 노래가 또 그리 좋다. 절반쯤 작업이 끝난 새 음반 제목을 그는 쉘 위 크로스? (건너볼까요)로 지을까 생각중이다. 지금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바로 “건너가겠느냐”다. 어디론가 건너가야 할 시간을 우리가 맞고 있다는 게 그의 느낌이다. ‘필’이 온 것이다. 여균동 감독의 영화 죽이는 이야기 에서 그는 “이제 뭘 할지 필이 와요”라고 말했었다. 투숙객들의 정사장면을 몰래 비디오로 찍는 여관종업원 역할을 한 그는 타고난 연기감각으로 단역에서 바로 주연급 조역으로 뛰는 급성장을 했다. 지금 찍고 있는 유상욱 감독의 건축무한 육각면체의 비밀 도 촬영이 거의 끝나간다. 11월쯤이면 극장에서 배우 고구마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영화에 출연하면서 새롭게 나 자신을 발견했어요. 내 속에 그런 연기력이 숨어 있었는지 몰랐거든요. 음악은 자연스럽게 하지만 영화는 거꾸로 가장 부자연스럽게, 가장 내 나이와 동떨어진 배역을 맡고 싶어요. 연기력을 만들어가는 게 재미있어요.” 발 담그는 데 10년, 발 빼는 데 10년 고구마는 자신들이 듣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음반을 만들고 유통시키는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지난해 ‘강아지문화예술’을 만들어 음반제작에 나섰던 건 대형 유통업체에 휘둘리는 한국 대중음악을 한 구석에서나마 치고 나가려는 뜻이었다. 요즘은 더 넓게 활동하고픈 개인적 욕심 때문에 ‘강아지’에서 나와 곁에서 훈수나 두는 처지가 됐지만 독립음반사에 때한 꿈까지 포기한 건 아니다. “판 몇 장 더 파는 문제가 아니에요. 노래를 좋아하는 잠재 세력들과 음악으로 만난다는 게 중요하죠. 우리가 좋은 음악을 하면, 사람들도 그걸 즐기죠. 독립음반을 만든다고 자기들만 알아듣는 음악을 만들어 내놓고 강요하는 건 나빠요. 다 쉽게, 더 단순하게 대중들에게 날아가는 음악을 만들래요.” 그는 남들이 일어나 일터로 갈 때쯤 잠자리에 든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쯤 잠자리에 든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쯤 작업실로 나선다. 밤이 그가 일하는 시간이다. 사람들이 없는 밤이 좋다. "북 치시는 김대환 선생이 나이에 맞게 음악을 하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지금도 그 말이 제일 절실하게 다가와요. 그게 자연스러운 거죠. 나이따라 해야할 음악이 있어요. 너무 어린 친구들이 맨 마직막에나 할 펑크나 명상음악을 하는 걸 보면 걱정돼요. 반대로 나이 들어서 젊은이들이나 할 음악을 하면 우습구요." 그는 음악이건 영화건 발 담그는 데 10년, 발빼는 데 10년쯤 걸리고, 그러고 나서 비로소 제 걸 시작할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전 이제 발을 담그는 중이에요."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사학자 이이화 “오늘도 나는 역사를 오른다” 그는 평생을 삐딱하게 살아왔다. 남이 다 가는 넓은 길에서 튕겨나와 좁고 가파른 길로 멀리 돌아왔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재야사학자란 명칭의 ‘재야’가 그걸 뭉뚱그려 드러낸다. 한마디로 대학졸업장이 없고 학위가 없는 그가 명문대 정통코스를 거쳐 줄을 잘 선 보수적 사학자들 사이에서 빛나는 건 이런 남다른 ‘삐딱이 정신’ 때문이다. 그 정신은 때론 높은 사회 벽에 부딪혀 콤플렉스로 불거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기존 학계에 도전하는 반골기질로 그의 몸을 단련시켰다. 주역 사상의 대가였던 선친 “내가 정상으로 밟아온 게 하나도 없어. 어릴 땐 집에 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녔지만 나중엔 갈 수 있어도 안 갔어. 꼭 그놈의 학위를 따야 하나 싶더라구. 학위증 내놓고 글 쓰는 건 아니잖아.” 재야사학자 이이화(61)씨는 후배들 사이에서 작은 거인으로 통한다. 158㎝에 48㎏, 작은 몸 어디에 그런 깡다구가 있나 싶게 그는 말힘, 글힘이 세다. 2000년 초에나 완간될 예정인 24권짜리 한국사 이야기 (한길사 펴냄)를 내놓기 시작한 요즘, 그는 다시한번 그 삐딱이 정신을 가다듬고 있다. “처음에 책을 24권이나 쓴다 하니까 정신이 바짝 들더라구. 내 잘 모르는 고대까지 두루 훑어야 하니 마음을 독하게 먹었지.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내가 사회활동을 딱 끊기로 결심한 거야. 기왕에 나와있는 책보다 뛰어나지 못할 바엔 쓰지 말자, 하는 각오로 홀로 의병처럼 전북 장수 산골로 숨었지. 장수가 겨울에 굉장히 추운 곳입디다. 바닥에 누우면 벽에서 바람소리가 ‘솨아’ 나면서 귓볼이 떨어지고 손이 곱아 책장이 잘 안 넘어가. 그런 땐 조선 실학자들을 생각했어요. 글 하나 잘못 쓰면 옥에 가고 밥 굶고. 그렇다고 자기 글이 언제 세상 빛을 볼지 기약없어도 죽어라 공부하고 글쓰던 그 사람들에 비하면 난 얼마나 행복한가. 참자, 견디자, 했지.” 한 2년쯤 지나선 김제 월명암으로 옮겨 고시생들이 쓰던 1평 반짜리 골방에서 원고를 썼다. 누워서 자료를 뒤지다 지루해지면 선친을 떠올렸다. 주역 사상의 대가였던 야산 이달이 그이다. 물질문명을 거부해 일절 자기 이름의 재산을 지니지 않았던 사람,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고 일제에 협력하기 싫어 그를 따르던 이들과 산 생활을 했던 의인. 선친이 그에게 준 건 이름 석자뿐이었으나, 그가 이제껏 만난 사람 가운데 제일 존경하는 분이자 진실로 세속을 초탈했던 도인이었다. “내게 야인 기질이 있다면 그건 선친의 피 때문일 거요. 그분이 일제 식민주의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결연히 물리쳤으니까. 16살에 가출할 때까지 아버님께 한학을 배웠는데 그게 내 공부의 가장 큰 바탕이 됐어요. 한문 강독을 한국적으로 하셨지. 내가 허균의 개혁사상이나 북벌론을 사상사적으로 검토하게 된 원동력이 바로 아버님의 위정척사론과 후천개벽사상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산 속에서 배고픈 생활을 하며 한학만 익히던 이이화 소년은 한두번 내려가본 도시의 신식문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작정 산을 내려와 학교에 들어갈 길을 찾았다. “별별 일을 다 하며 입에 풀칠을 했지. 여관 보이 노릇 할 때였는데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었으니까, 남녀가 통금 가까워 들어오는 거야. 둘이 티격태격 좀 소음이 심하겠어. 방음이 전혀 안 되는 여관방에서 공부가 될 리가 없지. 그래 소설만 들입다 읽은 거야. 그래도 그 소설 나부랭이 읽은 덕이 있어요. 쓰는 글이 당대인들이 많이 쓰는 입말로 구수하게 가는 거야. 논문쓸 때 상투적으로 ‘상계서’니 ‘전계서’니 하던 한문투 용어를 ‘위의 책’ ‘앞의 책’으로 내가 처음 고쳐 쓴 것도 이 시절 경험이 커요. ‘생활사’에 애정을 가진 것도 이 시절 남독과 잡독으로 얻은 ‘뽀시락 상식’에서 힘입은 거야. 뽀시락이 뭐냐고? 아 거, 쥐들이 움직일 때 ‘뽀시락’ 소리 나잖소.” 그는 일제식민사학이 우리 역사를 “태정태세문단세”나 외우는 죽어있는 학문으로 오도했다고 했다. 이들을 따르지 않은 나머지 진보사학자들은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산으로 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역사를 가슴에 품고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젊은 진보적 사학자들이 모여 만들었던 역사문제연구소(이하 역문연)가 제기하려 했던 것도 이런 시대정신이었다. 아들뻘의 후학들과 역문연을 이끌며 수많은 글을 발표한 그는 특히 동학 100주년 사업과 대중적 역사서 출간으로 청년 역사학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제 조상 캐는 게 역사가 아니에요. 역사는 근엄해야 해. 역사는 점잖아야지. 컴컴한 연구실 안에서 지들끼리 속닥속닥 즐기는 게 어찌 역산가.” 그는 시인 고은과 소설가 김주영씨가 북한에 갔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을 쳤다. “정작 갈 사람은 여기 있는데.” 그는 한국사 이야기 를 제대로 마무리하기 위해 북한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한국사 이야기 24권은 죽을 때까지 그가 등에 업고 갈 짐이 될 모양이다. 쓴 걸 읽어보니 벌써 다시 써야겠다 싶은 부분이 많다고 한다. 그는 “써놓고 고치는 일도 좋은 것이여. 내 죽는 날까지 이 책의 3분의 1 이상은 고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잠결에 고대인과 대화 “먼 과거로 돌아가 그때를 산 인간들이 어땠을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부대끼다 보면 생각이 많아. 꿈도 많이 꾸지. 잠결에 고대인으로부터 귀중한 얘기를 들어 ‘이거다’ 무릎을 쳤다가 깨고 나서 다 잊어버린 일도 있어. 장강같이 흐르는 역사의 큰 줄기를 더듬다보면 세상이 하찮게 보여. 아옹다옹 뭘 얼마나 더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저것들이 지랄인가, 욕할 때도 있고. 인간의 지배욕과 권력욕이 참 대단하구나 새삼 놀랄 때도 많지.” 그는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이것저것 참 잡문을 많이 썼어. 그게 대부분 역사 속 인물들 얘긴데 여기저기 잡지에서 청탁해 오는 대로 응하다 보니 나중에 한권 책으로 묶기 위해 그렇게 됐어”라며, “난 숨기는 게 하나도 없어”라고 웃었다. 자유직업자로서 먹고 살기 위해 썼고, 그게 역사 대중화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내 이름을 한글로 써놓으면 예쁜 여자 이름 아니오. 어떤 군인이 글만 보고 내게 편지를 썼어. 젊은 여자분이 어쩜 그렇게 역사에 대해 아는 게 많으세요, 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사람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것이여. 환상을 버리시오. 역사에 대해서도 환상을 버려야 해. 개혁의 단초가 거기 있소.”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소설가 이제하 나그네는 육십에 ‘카수’가 됐다 그는 겉모습만으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강파른 몸, 신경질만 살아있는 듯한 피부, 벙거지를 젖히면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 청바지를 즐겨 입고 입에서 담배를 뗄 줄 모르는 만년 청년. 그런 그가 나이 육십에 가수가 됐다. 손자 볼 나이에 음반 하나를 뚝딱 만든 것이다. “원고 쓰기 싫으니까 기타 뚱땅거리다 놀러온 놈 하나 붙들고 ‘너, 노래 하나 해봐라’, 시켜 놓고 나도 하나 하고… 그러다가 애들이 ‘음반 하나 내죠’ 해서 ‘그러자’ 한 게 진짜가 되버렸네요.” ‘이제하식’ 육자배기 포크 소설가이자 시인 이제하(61)씨는 또래 벗보다 젊은 친구들이 많다. 80년대 말 서울 삼청동에 살 때는 언저리에 있는 카페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이 다 친구였다. 그의 노래는 거기서 싹텄다. 경복궁 십자각 옆 눈썹을 그리는 광대 , 창덕궁 건너 나무요일 이 그가 거침없이 기타를 잡을 수 있는 아지트였다. 요절한 가수 김광석과 노래로 어우러졌던 것도 그곳이다. “딱 개집만한 카페였는데 그 구멍으로 죽어라고들 기어들더라고요. 사람들이 조그만 구멍 찾는 성질이 있나 봐. 4평쯤 됐나. 20명쯤 무릎을 맞대다시피 바글거리고 앉아 좋아하는 노래도 부르고 술도 먹고, 하여튼 즐겁게 지냈는데 걔들이 내 노래를 지들만 듣기 아깝다고 없는 주머니들을 털어 음반을 만들어주네요.” 빈 들판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 등 자작곡 9곡에 양희은의 노래 세노야 를 붙인 음반은 기획·제작부터 편곡·반주·합창까지 다 나무요일 사람들이 도와줬다. 거칠거칠하고 탁하면서도 성깔있게 까부라져 구수한 그의 목청은 ‘띵-띵-’ 주인을 따라 우는 기타소리를 타고 사람들 가슴을 파고든다. 포크풍 노래지만 완전히 ‘이제하 식’으로 육화된 육자배기 포크다. “빈 들판으로 바람이 가네 아아/ 빈 하늘로 별이 지네 아아/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소리없이 나를 부르네.”( 빈 들판 에서) “소설쟁이가 노래한다고 나서 봤자 얼마나 하겠습니까. 애들이 늙은이 기 세워주느라 인사치레 한 걸 곧이 듣고 우쭐해서…. 다 늙어서 노망난 거죠. 그래도 부산 무대에서 날 가수로 불러줘 돈 받고 밥 얻어먹고 좋은 데서 자고 구경까지 잘 하고 나니 욕심이 생깁디다.” (사진/소년시절부터 그는 고생을 사서 했다. 저 길로 가면 편하고 잘 풀릴 줄 뻔히 알면서도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는 게 그였다.) 지방 밤무대 한 사흘 뛰고,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먹으며 열흘쯤 놀고, 또 사흘 뛰고, 그 짬짬이 노트북 들고다니며 글 쓰고 하는 게 지금 그의 꿈이다. 그렇게만 되면 평생 그를 따라다닌 원고 스트레스도 안 받고 좋은 글 쓸 수 있을 거 같다. 또 몇몇 문인들이 선수를 빼앗겼다며 쓴 입맛 다시는 걸 보는 것도 통쾌하다. 소설가 황석영씨가 “나도 노래라면 안 빠지는데” 했다는 소릴 듣고 “아, 개그맨으로 나서면 되잖아”하고 한마디 해줬다. “늙었다고 쥐어짠 얼굴 하고 앉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네요. 지금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하면 억장이 무너져요. 난 주례도 절대 안 섭니다. 그거 서고 나면 관에 들어가얄 것 같아서.” 월급 나오는 직장생활은 딱 1년하고 3개월 해봤다. 그 외엔 ‘도배하라면 도배하고 구들장 놓으라면 구들장 놓으며’ 담배값 몇푼 얻어쓰려고 좌충우돌 날품을 팔아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는 시인선 표지에 시인들 초상화 그리기, 각종 잡지에 영화평과 노래평 쓰기, 시나리오 만들기, 책 표지 디자이너, 대학 시간강사는 뜨문뜨문 했고 급할 때는 그림도 그렸다. 80년 석유파동이 났을 즈음 갑자기 아내가 하던 양장점이 빚더미에 올라 식구들 이슬 피할 셋방이라도 얻으려고 전시회를 열었을 때 일이다. 그는 홍익대 조소과와 회화과를 5년에 걸쳐 다닌 미술학도였다. “그때 졸업장만 타놨어도 오늘날 이 고생은 안 했을 테지만….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 지금은 다 유명한 화가에 각 미대 학장이니 교수들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30대쯤엔 같이 어울렸는데 그 뒤엔 빈부격차가 심해져서 같이 못 놀겠습디다.” 소년시절부터 그는 고생을 사서 하는 형이었다. 저 길로 가면 편하고 잘 풀릴 줄 뻔히 알면서도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는 게 그였다. 세상을 거부하며 어거지 몸부림을 쳤다. 잘 나가다가도 막판에 틀어버리거나 세상과 어긋나는 짓을 즐겼다. 그게 다 문학의 재료요, 소설과 시 속에 피와 살로 들어앉기를 바랐다. “언제 어디서고 기념사진 속에서라면/ 시인은 단연 군계일학이다… 엿장수 마음대로? 절대로/ 시인은 시인이기를 그만 둘… 수가/ 없다… 그것은 실은/ 다시 밟혀 죽은 그 꿈이고, 꿈이 깔기는/ 똥이고, 똥 속에 숨은/ 그 뭣의/ 똥… 이다/ 그 뭣의 똥! 그 뭣의 똥!”( 시인들 에서) “‘탤런트’가 되고픈 생각은 없다” 며칠 전 서점에서 팬사인회를 한다기에 나갔다가 줄담배만 태우다 들어왔다. 옆에 앉은 젊은이들 책은 수십권이 나가는데 그의 책은 두손으로 꼽을 만치도 안 나갔다. “늙다리들 건 안 팔려요. 지금 내 나이 안팎 사람들이 참 어렵게들 문학한 사람들입니다. 70, 80년대 순수니 참여니 갈려서 제 소리 내면서 작품 쓰겠다는 작가들은 그 사이에서 치었어요. 나도 초식 같은 작품은 저항소설로 칠 수 있지만 그래도 난 운동권으로 안 갔어요. 그 바닥에서 앞장서 뛰는 이들이랑 다 60년대 이상한 짓 하며 한통속으로 놀던 사인데 그이들 하는 게 미덥지가 않더라고요. 너무 나대는 건 원래 싫어하는 성미고. 내가 그이들 속을 다 꿰고 있는데 정말 눈꼴 시어서 못 봐 주겠더라고.” 그는 요즈음 소통문제를 많이 생각한다. 40년 소설을 써왔어도 그걸로 밥을 못 먹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다고 일부 잘 나가는 작가들처럼 탤런트가 되고픈 마음은 없다. 미술을 해서 그런지 우리 풍토에서 드물게 초현실주의, 표현주의풍 글을 써왔고, 그 식대로 쓱쓱 밀고 나가고 싶다. “IMF 빈궁기가 되니 모두들 참 힘들어하네요. 돌아보면 가난한 시골뜨기가 소설가도 되고 가수도 된 게 그저 인생 가는 데로 끄덕끄덕 걸어온 덕 아닌가 싶네요. 요 걸음대로 가다 보면 뭐가 보이긴 보이겠지요.” 그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나그네인 것이다. 사진 이종찬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항문을 조이고 우주를 마시자" 명상음악가 김도향 (사진/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제대로 정신 차리고 사는 것이 수련이라고 정의했다.) 도인처럼 살아가는 왕년의 광고음악 제작자… 수험생 명상음악 세계수출 야심 그는 하루에 500번씩 항문을 조인다. 항문은 괄약근(오므리고 벌리는 것으로 여닫음을 조절하는 고리 모양의 근육)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조여지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항문을 조일 때마다 쓸데없는 잡생각들이 똥 잘려나가듯 툭툭 떨려난다. 항문을 조이는 건 영혼의 숙변을 없애는 것이다. “항문을 조이는 게 생각보다 참 중요한 일입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들은 각종 화병으로 시달리는데 그렇게 화가 나는 순간 항문을 조이는 걸 습관으로 만들면 스트레스가 다 물러섭니다. 사람이 죽으면 항문이 열리는데 이게 항문을 통해 혼이 날아가기 때문이죠. 항문 조이기를 하면 혼백, 혼줄이 튼튼해져서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해집니다. 인도 요가에 항문 조이기에 대해서만 쓴 백과사전만한 책이 있을 정도니까요.” (사진/70년대 그는 잘 나가는 광고음악 제작자였다. 사진은 브라보콘 CF제작현장의 모습.) “난 참 뻔뻔하게 살았군요” 명상음악가 김도향(53)씨는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항문 조이기를 범국민운동이라도 벌여 권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쓴 항문을 조입시다 (혜윰 펴냄)는 생활 속에서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며 기분좋게 사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이 글들은 또한 가수로 출발해 70년대 잘 나가는 광고음악(시엠송) 제작자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허연 수염을 날리는 수련자로 변신해 살아온 뒷얘기들을 담고 있다. “김도향하면 사람들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를 넉살좋게 불러젖히던 맷집좋은 사내를 떠올리죠. 또 어떤 이들은 ‘맛동산 먹고 즐거운 파티’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같은 광고음악 제작자 김도향만 알죠. 그땐 참 뻔뻔하게 잘 살았어요. 지금 그무렵 사진을 보면 욕심이 가득 찬 얼굴 때문에 부끄러워요. 모든 건 마음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제가 81년에 수련에 들어 마음공부를 하게 된 것, 그건 필연이었죠. 저는 한번도 변하지 않고 제 모습 그대로 흘러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연예인으로 특히 많이 노출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들쭉날쭉 변신의 폭이 큰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그건 다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했다. 오랜 세월, 광고음악을 만드느라 날밤을 밥먹듯 새우며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된 것, 살아 있음의 기쁨을 느끼게 된 것 등 마음공부를 시작한 뒤 누린 복을 그는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제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저보다 더 나이드신 분들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합니다. 허연 수염 때문이지요. 도대체 수염을 길렀을 때 저와 안 길렀을 때 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거 다 껍데기만 보기 때문입니다. 옛 어른들이 흔히 ‘정신차려!’ 한마디를 잘하셨는데 그게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착각이나 환상에서 벗어나 제대로 보고 생각하는 것, 이게 누구나 할 수 있는 마음공부의 첫 걸음이죠. 정신들 차리십시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제대로 정신 차리고 사는 것이 수련이라고 정의했다. 따로 도장이니 수련원이니 만들어놓고 시간내서 공부하는 건 헛거라는 얘기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도장이고, 현실이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선 일어나는 일들이 다 선생이라고 했다. 부딪치는 일마다 다 배울 거리가 있다. 세상이란 도장이 가장 힘들고 거친 수련장이니 세파에서 떨어져나가 지내는 스님들은 쉽게 과외공부 하는 셈이 아니냐며 그는 ‘허허’ 웃었다. “요즘 사람들은 기(氣)를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것 같아요. 단전호흡이니 기공이니 해서 상당히 관심이 높고 갈래도 많습니다. 기의 세계는 워낙 크고 넓어서 이렇게 유행처럼 공부하고 스승의 제대로 된 가르침 없이 수련자들만 늘어나는 건 참 위험한 일입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너무 방만해져버릴 가능성이 많아요. 어떻게든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찾고 있는 건 인간의 뇌파를 고요하게 가라앉혀 줄 음악이다. 8년 전 만들었던 태교 명상음악 이 그중 하나다. 새 생명을 만드는 부모가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기쁨에 젖어 있으면 잉태 당시 끌려오는 영혼도 그런 상태로 흘러온다는 것이 김씨의 생각이다. 그는 지난 8월 태교 명상음악 을 디딤돌로 삼아 공부 잘하게 만들어주는 음악을 완성했다. 어차피 헤드폰 끼고 댄스음악 들으며 공부하는 신세대들을 위해 아예 과목별로 점수 올리는 수험생 명상음악 을 작곡한 것이다. “과목별로 공부 잘하게 만들어주는 음악이라고 제목을 단 건 청소년들로 하여금 제 음악을 듣도록 만들기 위한 발림이지만 사실 일리가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경락별로 그 기능과 과목을 맞춘 거지요. 우선 간은 짜증과 스트레스의 주범인데 이걸 다스리면 마음이 담담해져 국어를 잘합니다. 신장이 좋으면 끈기와 의지가 든든해져 수학을 잘하고, 위는 머리를 맑게 해 과학공부에 도움을 줍니다. 흔히 쓸개라 부르는 담은 담력과 기운을 조절해 영어 등 외국어를 공부할 때 나타나는 두려운 마음을 없애줍니다. 또 비장은 사고를 조절하고 생각을 깊이 하도록 만들어 논술이나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줍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어떻게 공부를 하느냐고 걱정들 하시지만 사실 음악이 다른 잡생각들을 막아주는 병풍 구실을 한다는 걸 모르고 하는 얘기죠. 아이들에게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좋은 공기 불어넣어 주는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명상음악이 과목별 점수를 올려준다? 그는 5장 한묶음으로 된 이 명상음악을 음악치료가 크게 발달하고 세분화돼 있는 일본, 미국, 유럽에 수출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임상실험을 정밀하게 해서 그 결과와 함께 명상음악의 이론을 쓴 해설서를 붙이고 디자인을 잘하면 좋은 문화상품이 될 것이라고 그는 자신했다. “일종의 벤처산업인데 성공할 것 같은 느낌이 와요. 이걸로 돈 벌면 제가 꼭 할 일이 있습니다. 나랏님은 절대 못하고 민간인이 나서야 할 일입니다. 연변으로 목숨걸고 건너오는 북한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사업입니다. 중국 정부로부터 농지 천만평을 50년 임대해서 땅 부쳐먹고 살 수 있도록 자립마을을 세워주는 겁니다. 그리고 남는 돈으로는 학생들이 제 뒤를 이어 인류를 위해 좋은 명상음악을 만들 수 있는 음악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선친이 “팔도강산을 너의 집처럼 편안하고 자유롭게 지내거라”는 뜻에서 지어주셨다는 이름 도향(道鄕)처럼, 그는 도(道)의 고향을 찾아 떠도는 타고난 수련자로 오늘도 세상을 도장 삼아 명상에 든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한학자 김충호 40년을 한결같이 한학과 예학의 가르침대로… 유학 학맥계승 불타는 사명감 그를 보면 ‘조선 선비가 딱 저랬으려니’ 싶다. 격을 갖춰 입은 한복 일습 속에 꼿꼿하게 선 몸이 한치 허술함이 없다. 길을 걸을 때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땅을 고르며 걷는다. 눈은 앞을 내다보고 팔다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르다. 느리다. 정(淨)하다. 지천명 나이를 지난 그가 한치 흔들림 없이 걸어가고 있다. 한한대사전 에 묻힌 18년 세월 “난 선비정신을 곧을 직(直)자라고 풉니다. 공자가 중시했고, 주자도 말했지요. 우암 송시열 선생도 사약을 받으시며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곧게 살아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직’이 뭡니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입니다. 선비들이 올곧게 살다가 국난을 당하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건 이 ‘직’의 정신에서 비롯한 겁니다. 그 정신을 오늘에 이어 처세한다고 칩시다. 말하자면 5·18을 일으켜 총칼로 정권을 빼앗은 5공화국이 들어섰을 때 그 불의를 보고 비판하지 못했다면 미련없이 낙향해 땅 갈고 책 읽으며 자기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물며 그 밑에 들어가 벼슬을 하고 녹을 먹었다면 선비라 할 수 없지요.” (사진/"거친 밥 먹더라도 나 좋아하는 학문 실컷하고 인재양성하면서 사는 게 훨씬 행복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학자 김충호(52)씨는 이제 이 땅에서 사라져가는 몇 안 남은 선비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힌다. 40여년을 하루같이 한학과 예학 공부를 했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왔다. 한학계에선 그의 실력을 으뜸으로 친다. 그는 지금도 그때 일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14살 난 그에게 막걸리 1병, 봉초(담배잎) 2봉을 사주시며 “자, 이제 가서 한문을 읽어라”고 서당에 보내주신 것, 이곳저곳 경치 좋은 정자를 옮겨다니며 사서삼경 을 큰소리로 읽던 추억이 엊그제 같다. 스무살이 넘어서는 그 스스로 전북 고부에 살던 양재 권순명 선생에게 가 배웠다. 거기서 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양재 선생이 제게 학문의 큰 길을 열어주셨지요. 그 어른이 교제 폭이 넓어 팔도 선비들이 다 출입했는데 그때 전국 유림들을 다 거기서 뵈었습니다. 선비가 갖추어야 할 몸가짐이며 비문, 제문, 서문, 발문 등 각종 글을 하나하나 익혔습니다. 지금 제가 뭘 좀 한다면 다 그분 덕입니다.” 공부하는 때만은 세상만사를 잊었지만 현실은 어려웠다. 25살 되던 해엔 아예 고부로 집과 가족을 옮겨 농사지으며 글을 읽었다. “유학의 학맥을 계승해야겠다는 마음이 참 절실했습니다. 박정희 시대에 한문이 폐가되고 나니 더욱더 누군가 이 학문을 해서 맥을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명감이 듭디다. 근데 당시에 한문 한다 하면 생활보장이 되나, 장가를 갈 수가 있나, 참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고생시킨다고 누가 딸을 줘야 말이죠.” 그가 고생하는 걸 본 주위 사람들이 광주 살던 의재 허백련에게 가 차라리 서화를 배우라고 권할 정도였다. 그림을 그리면 먹고 사는 게 좀 나을 거라는 까닭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쪽엔 뜻이 없었다. “거친 밥 먹더라도 나 좋아하는 학문 실컷 하고 인재양성하면서 사는 게 훨씬 행복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그리 안 놔둡디다. 서른두살 되던 78년께 할머니와 아버지가 병환이 나셨는데 속수무책이라. 한약방에 보였더니 고급 약을 쓰라는데 형편이 그리 됩니까. 나 좋자고 불효해서야 되겠는가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궁하면 통한다고, 그때 마침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역사자료를 번역하고 정리할 사람을 뽑았다. 초등학교 이후로 시험이라곤 본 일이 없는 그는 떨어질 게 분명하다 싶어 답안지를 내놓고는 도망치듯 시골로 내려갔는데 열흘쯤 지나 합격통지가 왔다. 그래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거기서 한 2년 일하고 난 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 3개월, 그리고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에서 마침 한한대사전 을 만든다 해 옮겨 지금까지 18년여 묻혀 지내고 있습니다. 평생 소원은 그저 유학의 맥락이 끊이지 않도록 종자를 가꾸는 것뿐입니다.” 90년부터 성균관 부설로 시작한 한림원은 그 종자를 씨뿌리는 밭이다. 기초과정인 ‘학정계재’가 2년, 고급과정인 ‘한림계재’가 3년, 해서 5년 동안 단단하게 한문 공부를 시킨다. 여름방학에는 영남 덕천서원, 경주 옥산서원, 충청 돈암서원 등 각 지역에 이름난 서원을 찾아 5학년 학생 전원이 1주일 숙식을 하며 성현의 체취를 느끼며 공부에 정진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사서삼경 도 교과에 반영을 “고전을 현대화하는 작업이 시급합니다. 어차피 지금 사람들이 원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먼저 원전들을 정확하게 직역해 펴내고, 그 다음에 각 분야별로 뽑아서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현대어로 옮겨 다양하게 보급하는 게 좋습니다.” 그는 이런 일이 정책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힘들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사서삼경 에서 중요한 대목을 뽑아서 학교에서 교육시키며 교과에 반영해주고, 어떻게든 한림원을 잘 발전시키면 죽어가던 한학, 국학이 살아날 것이란 믿음에 변함이 없다. “지금 유학이 완전히 쇠퇴해 그 명맥이 끊어져가는 찰나입니다. 초야에 몇 안 남았어요. 그 지식의 높낮이를 떠나서 그분들이 그걸 남기고 가야 합니다. 소학 한자, 천자문 한줄이라도 더 가르쳐서 전수해주고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으로 훨씬 도움이 되는 번역을 하지 않는다. 그 시간을 아껴 그를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한자라도 더 가르치려 애쓴다. 번역은 글로 끝나지만, 가르침은 인간적 맥을 낳고 학문의 맥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3남매 자식들 교육이 끝나면 배산임수(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는 땅)에 초가집이라도 짓고 조용하니 들어앉아 죽이면 죽, 밥이면 밥을 끓여 함께 나누며 후학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유학의 맥을 잇는 일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멸종하는 조선 선비의 마지막 소원은 그처럼 소박하고도 한결같이 곧았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인물탐험 . 뇌호흡 창시자 이승헌 "마음을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 (사진/ 뇌호흡 창시자 이승헌. 그는 21세기를 이끌어갈 인류의 이념으로 '홍익인간'을 꼽았다.) 그를 일러 사람들은 ‘깨달은 자’라 한다. “젊은 날 수년간의 방황과 구도 끝에 인생과 우주의 이치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말한다. 세상에 깨달았다는 이들은 많으나 실로 그들을 알아보기는 어렵다. 그에 관한 여러 말들이 시중에 떠돌수록 그 본 모습은 더 어두워진다. 시인 김지하 같은 명사들이 거듭나는 곳,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이들이 신도처럼 불어나는 곳, 뇌호흡을 하는 아이들이 투시능력을 자랑하는 떠들썩한 단학선원 그 뒤편에 일지(一指) 이승헌(49) 선사가 앉아 있다. 단학과 중국 기공이 다른 점 “내가 특수한 사람이 아니라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단학은 크게 가르치는 것도 없고, 크게 주어진 철학도 없고, 교리도 없어요. 한마디로 뇌를 잘 쓰게 만들어주는 것이지. 제 스스로 묻고 참회하고 정화하는 것, 자기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제 몸을 돌아보고 살아가야 할 앞날을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단학이 가진 큰 정신이 있다면 나누는 겁니다. 쉬고 있던 뇌를 일하게 만들어주면 뇌가 기를 느끼는 순간 기분이 좋아지고, 그러다보면 사람들이 좋은 일 할 때 즐겁다는 깨달음이 와요. 이게 신인이요 깨달은 사람입니다. 신선이 되는 일은 이렇게 단순하고 쉬워요.” 그는 자신의 말마따나 평범했다. 반듯한 얼굴에 넉넉한 풍채가 보기 좋은, 곱게 늙어가는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요즘은 주로 영산(靈山)이라 일컬어지는 미국 애리조나주 세도나에 있는 벨록 근처에 머물며 뇌호흡을 바탕으로 한 한국의 단학 정신을 세계에 퍼뜨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인체과학연구원에서 만난 그는 “내가 틀에 매이는 걸 싫어해서 아주 큰 얼개만 세워주고 나머지는 제자들이 나름으로 해나가는 것”이라고 단학선원에 대한 세상의 말 많음을 일축했다. “처음엔 나도 직장 갖고 수련하던 사람이오. 아침 일찍 일터 나가기 전에 혼자 산에 올라 꾸준히 내 뇌하고 대화를 했지. 뇌에 물어보니 ‘왜 이제 물어보니’ 하는 거야. 어릴 때부터 나 자신에 대한 의문이 많았거든. 근데 그게 다 내 안에 있었던 거야. 자꾸 그렇게 묻고 답하다 보니 모든 게 잘 풀려. 1982년에 안양 충현탑 공원에서 홀로 수련을 하는데 아침 운동을 하러 나오는 이들이 묻기에 단전호흡을 가르쳐줬어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지. 마침 추운 겨울이 닥쳐 ‘이제 따뜻한 봄에 만납시다’ 했더니 지도를 받던 이 하나가 손을 덥석 잡고 해장국 먹으러 가자는 거야. 신경성 위장병 환자였는데 당신 만나면서 병이 다 나았다,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다, 자기한테 건물이 하나 있는데 공간을 마련할 테니 계속 나와 가르쳐달라, 이러는 거야. 그렇게 한겨울을 나고 나니 소문이 퍼져 내가 어쩌고 말고 할 수가 없게 됐어요.” 85년 서울 신사동에 첫 단학선원 수련장을 내고 수련지도를 하는 한편 단학책을 냈다. 초창기엔 그가 기를 주면 3년 발가락도 꼼짝 못하던 결핵성 뇌막염 환자가 일어나 걸었다해서 ‘기적의 손’이란 소문까지 났다. 일반인들이 따라오기에 다소 어려운 국선도와 달리 단학은 “누구에게나 순간에 오는 것이고 안 배우고도 되는 것”이기에 우리 국민에게 좋은 것 아니냐고 그는 물었다. “내가 지금 얘기하는 게 이미 다 우리 옛 어른들이 말씀하신 거예요. 궁극적으로 단학이 지향하는 것이 홍익인간이고 이화세계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 정신이 21세기 우리 인류를 이끌어갈 유일한 거예요. 바로 단학이 추구하는 게 이것이거든. 남을 이롭게 할 때 기쁜 사람, 이웃을 도와줄 때 즐거운 사람이 되자는 거지요. 말하자면 난 홍익인간이 뭔가를 조금 더 생각했을 뿐이에요.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터득한 거지.” 그는 같은 기를 다루는 훈련이면서도 우리 단학이 중국 기공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고 했다. 기공은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지만, 단학은 남과 더불어 기쁘려는 것이기에 도가 더 윗자리에 든다는 얘기다. “마음이 바뀐다”는 건 세상이 바뀌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라는 걸 그는 강조했다. “통일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말만 무성한 건 상상임신하고 똑같아요. 애를 낳으려면 준비를 해야지. 통일국가로 가기 위해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어떠해야 하는가. 흔히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말합니다. 난 ‘지구는 우리땅’이라고 말하자고 제안합니다. 그 정도 차원은 돼야 통일할 수 있습니다. 갈수록 국경은 의미가 없어져요. 그런 개념 자체가 우스워지겠지요. 앞으로 세계를 거머쥘 나라는 밝고 건강하게 제 나름의 삶을 키워가는 문화국민이 사는 땅입니다. 우리나라는 머리밖에 없어요. 땅에서 농사짓다가 공장 지어 물건 팔아먹었지, 그러다가 혼났잖아요. 이제는 뇌에서 나오는 힘으로 살아야 할 땝니다. 세계를 향해 나갈 정신무장을 해야지.” 그는 “정신으로 세계를 장악하겠다”는 꿈을 내비쳤다. 그가 주로 미국에 머물며 뇌호흡을 무기로 단학선원 지원을 늘려나가는 까닭이 여기 있다. 통일은 “아직 때가, 준비가 안 됐다”고 했다. 서양교육으로 병든 우리 국민 모두를 단학이든 기훈련이든 뭐든, 교육의병으로 일으켜 세우는 시민운동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욕망을 지배하는 게 '제3의 길' “21세기가 뇌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미국 가서 조사해보니 뇌연구는 앞서가지만 뇌훈련은 없어요. 지금 온 세계가 바라는 게 정신 개발을 통한 인성 도모에요. 단학과 뇌호흡이 바로 그걸 할 수 있어요. 세계 정신을 이끌고 지도한다는 호흡으로 미래에 희망과 평화를 줄 겁니다.” 이승헌 선사는 최근 인터넷에 ‘뉴 휴먼국가’를 개설했다. 인류 전체가 모여 그 정신의 힘으로 답답한 이 지구 상황을 개선해 가자는 모임이다. 그는 이 모임을 ‘21세기형 유엔(UN)’이라 불렀다. 이들 신인이 천지의 감각을 회복해 자유롭게 다니며 기쁨을 느끼고 사는 것이 신명시대라고 했다. 문화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율려’운동은 아주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지만 이게 잘되면 신명시대는 저절로 올 것이라고 말했다. 범인의 눈으로는 안 보이는 모든 생명현상의 법칙, 그 우주의 큰 법칙이 문화로 나타나는 것이 율려라는 것이다. “욕망을 벗어나서 그 욕망을 지배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다름아닌 제3의 길이요, 한문화운동이라고도 했다. 그는 이렇게 전세계를 정신으로 지도할 “준비된 나라”가 되자고 강조했다.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자기 뇌에 물어보세요. 바로 거기 뇌에 하느님이 계신 거야.” 글 정재숙 기자,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재일동포 소설가 양석일 아버지 모델로 한 재일동포 소설 피와 뼈 , 국경과 고향 뛰어넘는 사랑으로 그가 기골이 장대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리라 지레 넘겨짚었던 이들은 보자마자 실망한다. 적당한 중키에 소 같은 눈을 지닌 그와 악수를 나누다보면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어느 한구석 선친과 닮은 품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을 실제 인간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그의 상상력을 탓해야 할지, 독자들은 잠시 당황하게 된다. 뿌리뽑힌 자들의 영원한 주제 “저는 작지만 아들 놈은 커요. 내 안에 이어져온 피가 손자까지 이어지는 거지요. 피란 게 그렇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아닌지, 소설로 그 얘길 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피와 뼈’란 두마디가 다시금 튕겨오른다. 장편소설 피와 뼈 가 한국어로 번역(자유포럼 펴냄)돼 나오는 바람에 5번째로 고국 땅을 밟은 재일동포 소설가 양석일(62)씨는 “한국과 나를 이어주는 피와 뼈의 문제는 뿌리뽑힌 자들에게 그렇듯 내겐 영원한 주제”라고 말했다. 피와 뼈 는 양씨가 아버지를 모델로 해 쓴 자전적인 소설이다. 육척이 넘는 거구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의 근육질로 덮여 있고, 식욕과 성욕만 남은 듯 본능에 몸을 맡겨 살아가면서도 야쿠자들을 벌벌 기게 만들고 수전노 저리가랄 만큼 돈에 탐닉하는 김준평이란 인물은 한마디로 요즘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야생적 인간이다. 이런 부친을 둔 양석일씨가 거칠게 생겼을 것이라 짐작하는 건 당연하다. 소설 속 공간이 현실로까지 이어지는 걸 보면 피와 뼈 가 독자들을 몰아쳐가는 힘이 강력함을 느끼게 된다. 올 초 일본에서 출간된 뒤 벌써 20만부가 팔려나갔고, 이름난 대중문학상인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받았다. 그의 소설 택시 광조곡 을 대본 삼아 영화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 를 만들었던 재일동포 감독 최양일씨가 이미 피와 뼈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니 2000년쯤이면 영화 피와 뼈 도 볼 수 있겠다. “아마 일본에서 소설만 써서 밥먹고 사는 재일동포 작가는 유미리씨와 저뿐일 겁니다. 얼마 전 유미리씨가 독자사인회에 나오면 테러를 하겠다고 협박받은 일이 있는데, 그 협박범이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사실 한방 먹이고 싶었던 놈은 양석일이라고 말했다는 얘길 듣고 놀랬어요.” 그는 재일동포이기 때문에 크게 차별받은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대부가 안 된다든지, 할부를 할 수 없다든지 하는 생활의 불편 때문에 소외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지겨워도 떼버릴 수 없는 것, 그래도 계속 안고 가야 하는 것이 그에겐 핏줄이었다. “재일동포는 한·일 근현대사에서 생겨난 일종의 난민입니다. 역사에서 버림받은 자식들이지요. 끊임없이 자기 존재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질문받을 때마다 거꾸로 한국인, 당신들은 재일동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고 싶어요.” 그는 1930년대 제주도 서귀포에서 값싼 노동력을 일본으로 실어나르던 기미가요마루호를 타고 오사카로 간 양친을 부모로 태어났다. 일본인 학교를 다녀서 한국말은 못하지만 웬만큼 알아듣기는 한다. 피와 뼈 에 묘사된 어묵공장 밑바닥 삶과 한국전쟁을 반대하며 미군은 물러가라고 데모하는 재일동포들 모습은 바로 그가 목격했던 역사이다. (사진/제주 출신 문인들이 마련한 술자리에서 건배하는 양석일씨.) “남과 북의 문제만 해도 그래요. 처음에 조총련계가 많았던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일본이 전쟁에 지기 전까지 열등민족 취급을 받았던 우리를 동지처럼 감싸안아준 사람들이 일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었거든요. 이들도 일본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우리들은 그들을 동지처럼 느꼈지요.” 소설 속에서 병든 김준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떠난다. 여기서 북은 이념적 공간이 아니다. 그는 “소설가란, 국경을 뛰어넘지 못하면 존립하지 못하는 인간들”이라고 말했다.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화산도 를 썼고, 일본 동포사회에서 존경받는 김석범 선생이 회고하는 양석일씨의 모습은 고민하는 문학청년 그 자체였다. 50년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양석일이 포장마차에 술먹으러 와서는 “선생님, 문학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18살부터 21살까지 시를 썼습니다. 그리곤 결혼을 했는데 당장 끼니가 걱정이었어요. 시인의 꿈을 접었지요. 미술인쇄업을 했는데 5년 만에 억대의 빚을 지고 도망자가 됐어요. 그 방랑 시절에 한 시골 책방에서 헨리 밀러의 소설 남회귀선 을 만났어요. 벼락이 치는 것 같더군요. 지저분한 성애소설인 줄 알았더니 그 안에 내가 갈구하던 삶이 있었어요.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바로 헨리 밀러의 소설 덕이었습니다.” 그가 9월에 NHK 에서 만들 1시간짜리 프로그램 내 마음의 고향 으로 정한 곳이 제주도 서귀포나 오사카가 아닌 파리인 건 이 때문이다. 그는 헨리 밀러가 자유분방하게 보낸 파리에 가서 자신을 소설가로 변신시킨 도시의 공기를 호흡하고 헨리 밀러의 자취를 더듬어 볼 생각이다. “미래사회는 여성에 달렸다” “인간이 문명을 가진 순간, 그는 반자연적이 돼버렸지요. 인간 외 생물들과는 다른 존재가 된 겁니다. 이제 인간들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돼버렸어요. 그럴 때 유일하게 안길 수 있는 곳이 모태입니다. 그걸 파괴한다면 인간이 살아남기는 어려워질 겁니다. 인간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남성중심의 사회를 구하고 바꾸어놓을 수 있는 건 여자들 힘입니다. 남자들에겐 이렇게 타락한 사회를 회복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아요. 남성중심 사회에서 억압받은 여성에게 더 많은 에너지가 남아 있지요. 여성의 시대가 오는 건 당연합니다.” 그는 미래사회가 여성들 손에 달렸다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건 아마도 아버지가 뼈를 준다면, 어머니는 피를 준다는 것, 그 절대적인 힘을 뼈저리게 느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았다. 양석일씨는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에 “늘 사랑하니까 젊다”고 했다. 그에게 피는 사랑이었다. 국경을 뛰어넘고, 고향을 뛰어넘는 사랑, 그것이 뼈를 녹이는 피였다.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인터넷으로부터의 사색 우리사상 연구자 신영복씨 ‘더불어 숲’ 새 세상 위해 대화방 개설…“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가야 합니다” 그의 이름 석자는 한때 ‘갇혀 있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고픈 편지의 대표 발신자였다. 88년에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93년에 나온 영인본 엽서 는 20년 긴 세월을 ‘짐승의 시간’에 묶여 지내야 했던 우리 시대 한 양심수의 고백이자 연서로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아직도 놓지 않은 경제학자의 시각 “열한가족이 받은 징역이 도합 242년. 지금까지 산 햇수가 140년. 한마디로 징역을 오래 산 무기수와 장기수의 방입니다. 응달쪽과는 내복 한벌 차라는 양지 바른 방이라든가, 창 밖에 벽오동 푸른 잎사귀 사이로 산경이 아름답다는 점도 물론 좋은 점이지만, 나에게는 역경에서 삶을 개간해온 열사람의 역사를 만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가슴 뿌듯한 행운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 신영복(57·성공회대 교수)씨가 20년 동안 검열의 선을 넘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휴지며 엽서에 철필로 또박또박 써 보낸 편지들은 짧은 글이었지만, 큰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이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진솔함으로 긴 감동을 남겼다. 그 감동은,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하는 옥방에서 그 “형벌 중의 형벌”을 이겨내며 자기개조의 나날을 보낸 한 지식인의 진실한 고백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징역 살러 들어가서 맨 먼저 발견한 것이 제 창백한 손이었습니다. 저의 20대를 지배했던 논리적 사고,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사상들을 상징했던 그 인텔리의 손과 결별하고 두껍고 투박한 손으로 가기 위한 성분개조의 시간, 옥살이를 거기에 바치자고 결심했조.” (사진/서울이면서도 서울 밖 어느 먼 시골처럼 느껴지는 성공회대학 교정에서 젊은 교수들과 어울린 신영복씨.) 서울대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일하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받은 그는 옥에서 새로 태어났다. 우리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온 밑바닥 인생들과 부대끼며 그는 자본에 의해 구분되는 계급보다 지식에 의해 구분되는 계급의 골이 더 깊음을 깨우쳤다. “비단 갇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튼튼한 연대감이야말로 닫힌 공간을 열고, 저 푸른 하늘을 숨쉬게 하며, 그리하여 긴장과 갈등마저 넉넉히 포용하는 거대한 대륙에 발 딛게 하는 우람한 힘이라 믿고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봅니다.” 그는 사상범들이 한데 모여 있어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리던 대전교도소에서 자기개조를 이끌어줄 스승들을 만났다. 한학자이자 의병사 연구자인 노촌 이구영 선생이 그들 중 한분이다. 어린시절 할아버지께 배웠던 한학의 기초를 그의 가르침으로 튼튼하게 다졌다. 한글세대로서 서구사회에 대한 패배감에 젖어 있던 어린 생각을 바로잡고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서화반에 들어 글씨도 다시 썼다. ‘동상 예방 주의사항’ 같은 생활글씨를 옥 안 공장에 붙이며 그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민체(民體)를 깨우쳤다. 옛 선비들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듯이 그저 자연스레 함께 하는 것이라 자신을 서예가라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그는 그런 정신으로 글씨를 부탁하는 사람들에겐 두말없이 써준다. 성공회대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그의 글씨는 눈에 쏙 들어올 만큼 서민적이고 건강하다. “88년에 가출옥하니까 사람들이 한결같이 묻는 말이 ‘참 많이 변했지요’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며 아득바득 살고 있더군요. 우리 시대를 지배하던 속도와 목표와 성장에 대한 신화가 여전히 이 나라를 채찍질하고 있는 겁니다. 비용이 좀 많이 들더라도 인간적인 생산으로 갈 수는 없을까요. 차라리 좀 덜 만들고 덜 쓰더라도 다같이 나누어 사는 길은 없을까요.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쓰라린 경제적 난국은 결국 서구자본주의가 주인처럼 끌고가는 경제구조 밑에서 하인경제를 간신히 꾸려가던 우리의 환상이 깨진 건 아닐까요.” 그는 이제 자신을 경제학자라 부를 수는 없지만, 역사를 사회경제적 기반을 놓고 분석하는 시각은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신영복 교수가 학부 1, 2학년들을 대상으로 1학기에 개설했던 한국사상사 강의에 다른 대학 청강생은 물론 교수들과 일반 시민까지 찾아와 강의실을 가득 메웠던 건 아마도 이런 그의 반성적이면서도 넓은 시각이 소중했던 때문일 것이다. “한 언론사의 제의로 머리털 나고 처음 해외여행을 하게 됐을 때, 제가 첫 발을 디딜 곳으로 고른 지점이 스페인의 우엘바 항구였습니다. 500여년 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해 떠났던 바로 그 점에서 저는 그동안 역사를 지배해온 서구의 존재론, 그 살육과 파괴의 정복욕을 곰곰이 돌아보았습니다. 둥근 달걀을 깨 세운 콜럼버스는 생명을 무자비하게 짓이기는 폭력성의 상징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폭력의 신화를 맹신하던 꿈에서 깨어나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사상, 관계를 맺고 사는 아름다운 정신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서구적 패러다임을 깨는 길 신영복씨는 인터넷 홈페이지(www.culturekorea.com/ybshin)에 대화방을 열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모든 이들과 만난다. 뿔뿔이 흩어져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한데 엮어주기 위해서다. 그는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 서구적 패러다임을 깨고 우리 나름의 생존원리를 찾는 길이라고 말했다. “교도소에서도, 세상에서도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소수 악한 조직에 눌려 있어요. 나무가 숲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21세기엔 한그루 한그루 나무인 우리가 더불어 숲이 되는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오랜 세월 강철의 역사, 제국주의의 역사에 짓눌려온 우리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빛이 될 겁니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생태사진가 석동일 “나의 아름다운 피사체!” (사진/제주도 당처물동굴을 탐사하는 석동일씨) 환경운동으로 이어진 목숨 건 동굴촬영…밥 굶어도 행복을 미룰 순 없다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영월댐 건설로 수몰될 운명인 동강 얘기가 나오자 가방에서 자료를 한무더기 내놓더니, “동강이란 말만 나오면 흥분된다”고 숨을 몰아쉬었다. 무엇에 한번 마음을 붙들리면 딴 일은 못하는 사람, 어딘가 빠져들면 끝을 보기 전까진 못 빠져나오는 사람이 그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두가지 일을 못해요. 그래서 직장생활을 못합니다. 죽어도 매이는 건 싫거든요. 우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남 밑에 들어가 월급받는다고 눈치보며 싫은 일은 못하죠.” (사진/동굴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서 죽고 싶다"는 맘이 들었을 만큼 사람 손 닿지 않은 태고의 신비가 아름다웠다.) 동굴 다 찍고나니 버섯이 보이네 사진가 석동일(47)씨 명함엔 ‘가’자 붙은 이름 세개가 나란히 박혀있다. 동굴사진가, 생태사진가, 환경사진가. 47년 인생이 그 삼각대 위에 놓여 있다. 그이 말대로, 한번에 두가지 일은 못하기에 그의 삶은 이 세길을 따라 차례로 흘러왔다. 20·30대엔 동굴 사진을 찍었다. 산사나이가 되고파 산만 타다가 우연히 동굴 학술조사단을 따라 간 게 인생을 바꿔놓았다. 동굴에 발을 내딛는 순간, 미쳐버렸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처음 내렸을 때 기분이 그랬을까. 태고의 신비가 그의 발 아래 고스란히 알몸을 드러내자 넋이 나갔다. “며칠 전에 그동안 봉쇄됐던 제주도 당처물 동굴에 들어갔어요. 한마디로 죽고 싶더군요. 종유석이 수만개 매달린 천장에선 표현할 길 없는 빛이 쏟아져내리고, 바닥도 보석이 깔린 듯 휘황해 발디딜 곳이 없어요. 사실 동굴 사진 찍는 일이 힘들기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작업인데, 그런 순간엔 삶이고 죽음이고 다 잊죠. 제가 늘 죽을 때 잘 죽어야겠다, 열심히 일하다 현장에서 쓰러져 죽고 싶다고 말하는데 바로 당처물 동굴에서 그런 때를 만난 거죠.” 그는 지난 20여년 전국에 흩어져 있는 350여개 동굴을 샅샅이 찍었다. ‘동굴 지킴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뿐이 아니다. 동굴은 그의 집안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동일씨가 장남인 석씨네 1녀4남 가운데 삼형제가 사진가다. 동굴 탐사를 따라다니던 두 동생이 사진과 평생 연을 맺은 것이다. 삼형제 사진전 여는 게 꿈이지만 아직 각자 앞가림 하느라 몇년 뒤로 미뤄놓고 있다. “동굴을 다 찍고 나니까 버섯이 눈에 띕디다. 거기 또 매달렸지요. 한국의 버섯 890종을 촬영했습니다. 그래서 생태사진가가 됐습니다. 동굴 찍을 때도 그랬지만, 난 뭣에 몰두하면 꼭 자료를 남겨요. 전시회 한번 열고 치워버리는 게 아니라 동굴도감, 버섯도감을 만듭니다. 제가 강의 나가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써 먹을 사진을 찍어라. 왜 비싼 필름에 시간 들여 못 써 먹는 사진을 찍느냐. 기왕이면 앞으로 300∼400년 후손에게 교육도 되고 기록도 되는 자연생태사진을 찍어라.” 그는 생태사진 분야엔 취미삼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열일 제치고 달려가는 까닭이다. 아직 얄팍한 이 분야의 저변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다. “생태사진을 찍다 보면 자연스레 환경사진과 연결되고, 환경운동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장에 가서 두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동강이 수몰된다는 소식을 듣고 20여년 드나들던 백령굴을 찾아 나섰다가 저도 모르게 ‘동강 지킴이’가 돼버렸어요. 지난 5월16일 처음으로 동강 30km를 래프팅으로 돌아봤는데, 마약 맞은 듯 제 혼이 뒤흔들렸습니다. 구석구석 풍경을 다 욀 지경이 됐지요. 제가 석달도 안 되는 사이에 수십명 사람들을 끌고 동강을 이웃집 드나들듯 한 까닭이 뭐겠습니까. 천하에 다시 없는 그 비경을 파묻는 건 범죄입니다. 오늘 우리가 침묵한다면 우린 모두 미래에 범죄자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겁니다.” 그는 동강을 살리겠다고 나선 환경단체들이 현장 한번 안 가보고 책상 위에서 자료나 뒤지며 밤샘 회의하는 걸 보곤 속상했다. 실천하지 않는 환경운동은 이제 신물이 나기 때문이다. 그는 “입으로 하는 환경운동은 필요없다”고 한마디로 잘랐다. “환경운동은 지식이나 투쟁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나는 내 사진으로 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사람 숨이 닿는 순간 망가지기 시작했던 동굴의 죽음을 목격한 뒤 그렇게 죽어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아름다움을 남기고 전하는 것, 나아가 지키는 일이 목숨을 걸 만한 소명이라고 보는 거지요.” 자료를 보느라 돋보기를 꺼낸 그는 “이걸 쓰는 맘이 얼마나 허망한지 모를 것”이라고 했다. 껍데기는 멀쩡해도 속은 썩어간다고 느낄 때, 그는 다시 한번 “절대 행복을 미루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에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순간순간이 다 행복이다. “집을 나설 때 행복합니다. 일하러 가니까요. 밤에 누우면 일하고 싶어서 잠이 안 와요. 한번 살다 가는데 밥값은 해야잖아요. 그래서 밥 많이 먹고 잠 많이 자는 사람을 미워해요.” 손자들과 동강에서 래프팅하는 게 꿈 평생을 빠듯하게 살아온 그는 “배는 좀 고픈 게 좋다”고 했다. 80년 고향 광주에서 5·18을 겪으며 “정신이 삥 돌아 못살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내가 해야할 일이 있으니 그때까지는 살자”고 독하게 마음먹었던 그였다. 그 어려운 시절들을 헤쳐나오며 그에게 남은 유일한 취미가 카레이싱. 서울에서 광주를 2시간10분대에 주파하는 스피드광인 그는 어쩌면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그 엄청난 속도 속에서 죽음을 뛰어넘는 힘을 얻는지 모른다. 그는 내년까지 바짝 서둘러서 한국의 천연기념물 300여종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을 끝낼 계획이다. 그리곤 또다른 소재를 찾아 달려갈 것이다. 그가 ‘나의 유일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숲 속에 들어가 예쁜 피사체를 발견하는 기쁨을 죽는 순간까지 누리리라. “꿈이 있다면 손주들과 동강에서 래프팅하는 겁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동강으로 달려갑니다. 난 나 자신을 믿습니다. 동강은 우리를 낳은 태고의 어머니 같은 땅입니다. 그를 우리 곁에서 떠나보낼 수는 없습니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인권운동, 편식하지 맙시다” 남의 이야기 들어주는 남자, 더 가난하고 더 힘없는 사람들을 찾아 인권운동가 오창익씨 그는 하루종일 남 얘기를 듣는다. 찾아오는 사람들, 전화를 걸어오는 이들, 편지와 팩스로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연들이 24시간 그를 붙들고 있다. 한꺼번에 두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오가는 길에서 핸드폰으로 사연을 접수하기도 한다. 세상 오만가지 얘기가 그에게 흘러들어왔다가 적절한 처방을 받고 돌아나간다. 그 가운데는 국방부 특조단이 재조사를 벌이고 있는 ‘김훈 중위 사망 사건’같이 큰 뉴스도 있고, ‘내 귀에 도청장치’처럼 시시콜콜한 일들도 제법 많다. 도와달라고, 들어만 달라고 하소연하는 이들이 세상에 이렇게 많을까 진저리칠 때도 있다. 그래서 ‘고민은 5분 이상 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워놓고 일을 한다. 5분 이상은 안 듣는 이유 (사진/천주교인권위원회 간사들과 인권상황을 의논하는 오창익씨. “우리는 고용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월급이 아니라 활동비를 받는다.”) “처음 상담 시작했을 때는 멋도 모르고 5시간이고 10시간이고 미주알고주알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제 업무가 죽도밥도 안 되겠더라고요. 차츰 요령이랄까, 솜씨랄까, 그런 게 생겼습니다. 현장에서 일을 통해 배운 셈이죠. 지금은 5분 이상 안 듣습니다. 한두마디 들으면 척 감이 오고 바로 조치를 취하거나 조언을 합니다. 사실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식으로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사례는 수백명이 넘는데 그들에겐 정신과 의사 도움을 받으라고 권합니다. 충격 덜 받고 모멸감 덜 느끼게 바른 말을 해주는 것, 그런 기술이 제가 일을 하는 요령입니다.” 인권운동가 오창익(33)씨는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세상 어디가서도 털어놓을 길 없는 한 맺힌 이야기들을 그는 참을성 있게 잘 들어준다. 그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백가지 얘기를 들어도 한가지 처리하기가 힘들다. 그럴 때 그를 움직이게 하는 기준이 있다. 더 가난한 사람들, 더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달려간다. 이를테면 일반 인권운동이 빠져 있는 ‘패거리주의’나 ‘집단편식’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그가 세운 잣대다. “쉽게 말해서 데모하다 잡혀가면 다들 두눈에 불을 켜지만 배고파서 빵 하나 훔치다 잡혀가면 눈길도 안 줍니다. 대학 다니다 군에 가서 죽으면 의문사라고 떠들지만, 가방 끈짧은 애들은 군대에서 죽어나와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러면 안 되죠. 네편 내편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인권운동이 누굴 위해 하는 것인지 다들 다시 한번 마음 다잡아야 할 때라고 봅니다. ‘피해자 운동’에 그친다면 그건 인권에 대한 모독이죠.” 그는 며칠 전까지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그 전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3년쯤 일을 봤다. 유년 주일학교부터 내처 교회 안에서 커온 그가 한눈 안 팔고 선택해온 길이다. ‘착하게 살아라, 나눠먹고 살아라’고 배운 한마디가 지금 그를 밀고 나가는 힘이다. ‘어디까지가 참일지는 모르지만 나도 좀 거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다짐을 하루에도 수십번 한다. 학교 다닐 때 데모는 안 빠졌지만 조직에는 몸담지 않았던 것, 감옥은 한번도 안 가봤지만 경찰서 두어번 다녀온 것뿐인 경력이 그가 ‘편견’에 빠지지 않는 까닭이라면 까닭이다. “남들처럼 감옥에서 심지를 굳힌 것도 아니고, 동생이나 피붙이가 죽어 맺힌 한도 없습니다. 특별한 자극이 없는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누구나 인권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한 사례랄까요. 슬럼프에 빠지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꾸준히 이 일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평범함, 이념에 함몰되지 않고 이것저것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는 것이 제 강점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평범한 사람을 인권운동에 몰두하게 만드는 힘일까. “방금 김훈 중위 부모님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이분들 여때까지 한 백번쯤 만났을 겁니다. 그 어머니가 아들 부검한 사진을 저에게 보여줍니다. 그거 고문입니다. 이게 심장이고, 이게 허파고, 하나하나 보여주는 어머니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히지요. 아마도 그런 이들 진정성이 제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정의랄까 그런 걸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그는 “우리는 아직 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10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사실을 밝혀 꼭 이길 거라고 했다. 며칠 전 인혁당 사건 24주기를 맞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사회를 본 그는 이돈명 변호사가 한 말을 잊을 수 없다며 몇번씩 되뇌었다. “인혁당 사건은 24년이 됐는데 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안 됐다. 그러나 우리는 240년이 지나도 그 진실을 밝힐 것이다. 사람은 죽지만 정의는 역사를 지나 누군가에 의해 꼭 지켜진다.” “여기 이곳에 인권운동가라고 이름붙일 만한 사람이 사실 몇명 없습니다. 인권운동을 합네 하는 사람들이 ‘중앙 안테나’만 바라봐요. 한마디로 이걸 다리삼아 정치를 하겠다는 건데 참 우습죠. 바른 말로 하면 ‘정치건달’ 아닙니까. 그동안 우리 운동이 참 열심히 해왔는데 결국 남은 게 뭡니까. 다 ‘두길 보기’를 하기 때문이지요, 비즈니스 하느라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지요. 정치활동 따로, 운동 따로, 그러니까 혼란스럽고 불만이고 추한 꼴만 보이는 겁니다. 제가 참 건방진데 이 말 한마디는 꼭 하고 싶습니다. 우리 운동에서 ‘패거리주의’를 추방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데모할 기회조차 없었던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오래 계속돼왔던 ‘편식’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인식과 구조변화가 없다면, 백날 해봐야 우리 인권운동은 그 자리에서 맴돌기입니다.” "계산하기 시작하면 복잡해진다" 그는 “거꾸로 가보자”고 했다. “진짜 봐야 할 사람들을 보자”고 했다. 동향, 동창, 동기, 하다못해 동지까지 아는 사람들 감싸주기는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런저런 운동 조직들의 장을 변호사나 운동가 출신이 아니라 여성이나 장애인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 일을 배고파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세상에 밥 굶는 사람 있습니까. 저는 이제껏 월급이란 걸 받아본 일이 없는데 빚없이 삽니다. 처도 전업주부고 아이도 둘 있습니다. 고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든 크든 수고비로 받는 돈을 우리는 활동비라고 부릅니다. 그 돈 한도 내에서 삽니다. 계산하기 시작하면 복잡해져서 못 살죠. 그래도 저는 평생 갈 길로 인권운동에 뛰어든 걸 잘했다고 늘 생각합니다. 계급을 없애자는 일이니까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늘 책임을 느끼고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이들이 저에게 와서 말하는 중에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던다면,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을 부족하나마 채우고 간다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와서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갈옷 디자이너 김은희 감나무에 바치는 연가 왕년의 통기타 가수, 뉴욕시장에서 블루진에 도전장 내밀고 싶어라 그는 섬처녀였다. 18살에 부른 번안 노래 연가 는 검푸른 제주 바다 건너 뭍을 바라보며 그가 물결에 실어보내던 그리움이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고,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70년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꽃반지 끼고 사랑해 는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국민가요다.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통기타를 튕기며 곱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던 긴 머리에 눈이 큰 소녀. 그가 예명 은희로 알려져 있는 김은희(47)씨다. 가수 은희가 갈옷 디자이너 김은희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기타 튕기던 손이 감나무를 심게 된 내력엔 그의 고향 제주가 버티고 앉았다. (사진/"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통기타를 치며 연가 를 부르던 젊은날의 김은희씨.) 폭탄 갖고 놀던 제주 소녀 “뉴욕에서 15년을 살고 귀국하니까 갑자기 ‘우리 것’이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태어난 땅이 모슬포에요. 4·3 제주항쟁의 잔해가 널려 있던 곳이죠. 아기였을 때부터 폭탄을 갖고 놀았어요. ‘이재수 난’이니 해녀항쟁이 다 이 언저리에서 일어나, 대가 센 터라고 옛날부터 이름났지요. 그 땅 사람들이 만들어 입던 갈옷이 제 눈을 치고 들어오더군요. 저거다 싶었어요. 일옷이면서도 한국의 미를 듬뿍 담고 있는 옷, 그걸 되살리는 게 내 일이구나, 짜르르한 느낌이 등허리를 치고 지나갔어요.” 얼결에 가수가 된 것처럼, 그는 또 단숨에 갈옷 디자이너가 됐다. 가수시절에도 미디와 맥시스커트를 유행시킬 만큼 패션에 눈썰미가 있던 그였다. 70년대 초, 잘 나가던 가수생활을 미련없이 때려치우고 미국으로 날아간 그는 뉴욕 FIT(패션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를 졸업하고 패션디자이너로 뉴욕을 누볐다. 액세서리, 화장, 신발 등 패션과 관계되는 건 뭐든지 배웠다. “뭐든 발견하는 자의 것이라는 걸 거기서 배웠어요. 제가 한국에 돌아와 고향 제주에서 갈옷을 발견한 것도 그때 익힌 안목 때문일 거예요. 남하고 다른 걸 하기 위해 몇시간이고 먼지 투성이 천더미에서 자투리 하나라도 건지려고 깡다구를 부리던 시절이었죠.” 88년 귀국한 뒤 서울 압구정동에 코디네이션 센터 ‘돌섬’(스톤 아일랜드)을 열고 한국에 ‘코디’를 유행시킨 것이 그였다. 지금은 너도나도 ‘코디네이션’이란 말을 쓰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그 개념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장사가 너무 잘 돼 겁이 날 정도였다는 그는 서슴없이 “제가 악질 부르주아였어요”라고 말했다. “돈을 많이 벌다 보니 국세청에서 조사를 나오더라고요. 한방 맞았죠. 너무 억울해서 1년 반을 싸웠습니다. 그때 참 많은 걸 느꼈는데 제일 소중했던 건, 나이 들어 후배들이 그래도 김 선배가 한 일이 있어, 라고 날 기억해 줄 일을 해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죠.” 제주로 내려간 그는 먼저 감나무를 심었다. 7, 8월에 그 감나무에 열린 풋감을 따서 정성껏 빻은 뒤 즙을 내서 무명천에 염색해 열흘을 말렸다. 제주 땅의 정기를 받으며 마르는 옷감엔 사람 몸에 좋은 온갖 자연이 스며들었다. 이른 아침 찬이슬, 한낮의 뜨거운 태양, 맑은 달빛, 청정한 바람… 뜨거운 것과 찬 것, 음양의 조화가 두루 빚어내는 색깔과 감촉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옹기색과도 다르고, 황토색과도 차이가 있다. “하나하나 사람 손으로 만져 나오는 천연옷감이라 우리 몸을 받쳐주는 힘이 대단해요. 피부 호흡을 도와줘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죠, 벌레 안 생기죠, 골동품 같은 향기나죠…. 이 옷을 한번 입고 나면 화학섬유옷은 못 입어요, 가려워서. 제 옷을 입은 분들이 또 찾는 까닭이기도 한데, 외국인 단골도 많아요. 어떤 분은 갈옷 색깔을 보고 ‘눈물이 나요’하셔서 저도 ‘그렇죠’하며 손을 맞잡은 적이 있어요.” 이런 좋은 옷을 정작 제주 사람들은 싫어한다. 지금도 그가 자료조사며 고증을 하려고 갈옷 짓는 할머니들을 만나러 가면 “이 옷을 뭐하러 그렇게 만들려고 하냐”며 고개를 젓는다. 해녀건 노동자건 죄다 갈옷들을 입었던지라 그 옷만 보면 가난하게 살며 죽도록 일만 하던 옛날이 생각나기 때문인 것 같다고 김씨는 나름의 해설을 달았다. 그가 지난 6월 인사동에 낸 갈옷집 이름이 ‘봅데강’(02-722-2426). 제주말로 “보셨어요?”란 뜻이다. 외국 아이들에게 “니들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 갈옷을 봤냐”고 묻고 싶어 붙였다는데, 외국인들이 진열장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가게 문을 밀고 들어와 한 번씩 둘러보고 간다니 제목이 제구실을 똑 떨어지게 하는 셈이다.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블루진이 원래 노동자들이 입던 일옷이잖아요. 우리 갈옷이 그 블루진을 못 이기라는 법도 없지요. 더구나 갈옷의 구조가 사람 몸에 좀 좋아요. 블루진은 몸을 꽉 조으잖아요. 근데 우리 몸은 그렇게 조이면 혈액순환이 안 되서 병이 생기죠. 저는 밑을 방방하게 하고 몸을 풀어주는 차림새를 만들죠. 특히 아랫도리는 편하게 해줘야 좋아요. 우리 체질과 체형에 좋은 옷을 만들려고 노력하죠.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옷을 입어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그 땅의 기후나 체질, 음식 등에 맞춰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거죠.” 서울 인사동에 진출하기까지 10년을 제주 ‘봅데강’ 식구들과 한솥밥 먹고 온갖 연구와 실험을 하며 살아온 김씨는 “공동체처럼 모여사는 그 젊은 친구들 때문에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지금도 제주 ‘봅데강’엔 갈옷이 좋아 모인 수십명이 바글거리며 감나무를 심고 옷감을 말린다. 전시회 수익금, 4·3 연구소 기금으로 그가 고향 동무들과 손잡고 8월26일부터 9월5일까지 인사동 예나르에서 여는 ‘갈옷전-왕방 고릅서’는 여러가지 뜻이 담긴 전시회다. ‘왕방 고릅서’란 “오셔서 보시고 평해주세요”란 제주말. 지난 10년 갈옷에 바친 그의 열정을 내보이는 자리이자, ‘봅데강’이 한해 한번씩 좋은 일 하려고 마음 먹은 뒤 처음 마련한 자선행사다. 김씨는 이 전시에서 얻는 수익금 전부를 ‘제주 4·3항쟁 연구소’ 기금으로 내놓는다. 4·3은 지금도 그의 피 속을 흐르는 생각의 뿌리이자 삶의 지향점이다. 갈옷의 정신이 4·3의 정신인지 모른다. “제발 우리 걸 좀 아껴주세요. 우리가 먼저 아껴야 제가 내년에 뉴욕으로 갈옷 들고 전쟁하러 가지요. 블루진에 도전장을 내고 많이 팔 수 있는 길을 뚫을 거예요. 그리고 나서요? 가수 해야죠. 갈옷 좋은 걸 널리 알리고 난 뒤엔 쪼글쪼글 할머니가 되더라도 다시 기타 들고 노래할 거예요.”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한 ‘비관주의자’의 22년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가수 김창완 그는 참 끈질기다. 술도 끈질기게 마시지만, 뭐든 하고픈 건 오래 한다. 마음이 움직이면 그가 갈 수 있는 자리, 할 수 있는 일을 가리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켜도 라디오를 틀어도 그가 늘 거기 있다는 건 참 대단하다. 김창완이란 이름은 몰라도 그 얼굴과 목소리는 사람들 가슴에 남는다. “딴딴 딴…”하며 피자집 유리창에 나타나건, 테마 게임 에서 만년 조역으로 구석자리를 꿰고 앉았건, 자정 넘어 내일로 가는 밤 에 나와 음악을 틀고 있건, 그는 쉬지 않고 뭔가 하고 있다. 아니 변하고 있다. 없는 듯 있는 것, 빈 듯 채우는 것, 그가 물처럼 자신이 흘러가는 곳에 따라 달라지는 걸 보는 건 늘 놀랍고도 신기하다. 피카소말고 고흐처럼… “항상 내가 나인 것이 불만인 사람이었죠. 나 자신을 미워했다랄까. 그러니 틀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미웠겠어요. 계속 다른 모습으로 도망다녀야지.” 김창완(46)씨는 자신을 “뼛속 깊이 비관주의자”라고 불렀다. 자폐증과 정신분열이 어린 시절 그가 ‘집에 가는 길’을 어둡게 만들었다. 불화가 심했던 부모가 어린 아들에게 보여준 불행은 그를 혼자의 세계에 살도록 가두었다. 그 방을 벗어나게 만든 것이 음악이었다. 열여섯에 담배를 배우고 열일곱에 술을 마시며 그는 곡을 쓰고 노래를 불렀다. 동생들과 만든 록밴드 ‘산울림’에서 77년 아니 벌써 를 외쳤을 때, 유신말기 암울했던 한반도는 잠깐 펄쩍 뛰어올랐다. “‘산울림’ 정신이란 게 뭐 있나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뭐 그 정도랄까. 음악을 발표하는 것이 사고의 결정체가 아니라 바로 사고의 시작이었어요. 한마디로 산울림 음악은 경향이 없다는 것,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른다는 것, 고착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일종의 방기죠. 다 버리고 살고 싶어요.” 그는 심심한 걸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좀이 쑤시는 걸 즐기는데 요즘 그렇게 못해서 또 좀이 쑤신다. 드라마 하자면 드라마 하고, CF 찍자면 CF 찍고, 또 한잔 마시자면 또 한잔 마신다. “맘가는 대로 많이 하는데, 그게 머리가 시키는 것 따르는 것보다 탈이 없다”고 했다. 피카소 같은 삶말고 고흐처럼 사랑하고 다 후딱 뒤집어놓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택해서 똑바로 걸어가는 것보다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며 가다보니 뭔가 나타나고 보이는 길이 더 좋다고도 했다. “요새 그런 생각이 들어요. 프로와 아마추어 차이가 뭐냐. 프로는 못해도 계속하는 거고, 아마추어는 못하면 그만 하는 것 아니냐. 사실 닥치는 대로 장르를 넘나들다 보니까 거기 어쨌든 프로들이 있어요. 거기 가서 좌충우돌하지만 죽으나 사나 할 사람이니까 부딪히는 거죠. 거기다 어느 바닥에 가도 내 역은 비슷비슷해요. 잘 나가는 윗자리보다는 뭔가 있긴 있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아랫도리 있잖아요. 이 힘든 세상을 허우적거리다가 슬쩍 건너다보며 ‘저런 인생도 있는데…’ 뭐 이쯤 되는 거요.” 그는 요즘 살짝 신이 났다. 후배들이 ‘산울림’ 22년을 기려 헌정음반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복도 많아라.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죽게 생겼어요.” 우스갯소리를 한 그는 “과거의 가요와 현재의 가요, 어른들 노래와 청소년들 노래가 만나는 새로운 연결고리로서 한몫을 한다는 기쁨이 크다”고 반가워했다. “사실 이번에 외로움을 좀 덥니다. 앨범 13집을 내는 동안 가끔 쓸쓸한 때도 있었거든요. 제 곡이 재해석된다는 것보다 오랫동안 활동해온 제 삶을 조명하는 뜻이라 여기니 후배들이 참 고맙고요. 사실 난 한 게 없어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그저 모티브를 제공하고 싶었지요.” 시금털털한 ‘김창완 아저씨’로 이미지가 굳어진 그가, 몇십년 후배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우리 음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몇꺼풀 자기변신으로 하루를 보내고 난 새벽녘, 그는 제 방에 들어가 기타줄을 튕기며 또다른 제 속내를 불러낸다. “우리 것 찾아가는 음악가들이 많습니다. 전 우리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이 부르면 다 우리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서양음악을 어떻게 골라냅니까. 음악은 모래에 쇳가루가 섞여 자석으로 뽑아내듯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화학결합이 끝나서 이미 서로 침해를 받는 거예요. 그걸 억지로 뜯어내다 보면 덜 마른 벽지모양 이것저것 다 뜯겨버립니다.” 그는 젊은 세대들이 힙합이나 댄스음악 등 칼로리만 많고 영양가 없는 음악만 들어 어쩌냐는 걱정에 “그것도 과정”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가 보기엔 꼭 거쳤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정작 그가 고민하는 건 아이들이 진정한 외로움을 모르게 될까 하는 점이다. “제가 참 외로움을 잘 탑니다. 외로움을 즐기죠. 외로움이란 것이 옛날에는 ‘군중 속의 외로움’처럼 뭔가 본질적인 것이었어요. 전 이 외로움이 참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자기만의 깡통화된 외로움을 들여마시고 있어요. 외로움의 질이 떨어진 겁니다. 일용화된 외로움, 상품화된 외로움은 위험해요. 그 아이들이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의 외로움에 대해 뭘 알겠어요. 전 제 노래로 외로움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 싶어요.” 잠 못 이루는 ‘백수’들을 위하여 그는 “그리움으로 산다.” 취미인지 속성인지 어린 시절 부지깽이에 묻어 있던 검댕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이 가슴 속을 후비고 지나갈 때, 그 시절의 퀴퀴한 냄새 같은 것이 코를 훑고 갈 때, 아릿해지며 행복해진다. 그런 완벽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 그는 잠시 “내 마음의 유리가 깨져서 에고가 해체되는 순간,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만난다고 했다. “요새 제가 하는 라디오 심야 프로 듣는 분들 중엔 백수가 많아요. 방송시간이 새벽이다 보니까 원래 운전기사 분들이 사연을 많이 보냈는데 요즈음은 ‘뒷머리 재우고 있어요, 놀아요, 명퇴 당했어요’ 이런 분들이 늘었어요. 민중을 위한 소리가 따로 없다니까요. 어려운 때, 잠 못 이루는 분들 위해 내 맘, 내 음악 열어야죠.”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언론과의 싸움엔 '안변'이 있다 변호사 안상운씨 (사진/재판으로 얻어낸 방송의 정정보도. 관련기록물을 담은 비디오가 수북하다.) 재판에서 진 적 없다 하여 ‘무패안변’… ‘최장집 죽이기’ 조선일보 저격에도 성공 그가 나타나면 언론계 사람들이 움찔한다. ‘언론 잡는 변호사’가 또 무슨 냄새를 맡았나 싶어서다. 천하를 들었다놨다 하는 신문사나 방송사라도 그가 변론의 칼자루를 쥐면 고양이 앞에 쥐가 된다. 언론사와 맞선 재판에서 진 적이 없다 하여 붙은 ‘무패안변’(無敗安辯)이란 별명이 장난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최장집 교수 사건에 대한 반론보도와 정정보도 신청을 냈습니다. 월간조선 과 주간조선 은 물론, 조선일보 도 원래 보도했던 지면과 똑같이 1면에 반론보도를 실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소송을 내서 끝까지 싸울 겁니다.” 법을 통한 시민운동 이른바 ‘공인의 사상검증’ 문제를 들고 나오며 최장집 정책기획위원장을 물고늘어졌던 월간조선 11월호에 법원이 판매·배포금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을 때, 안상운(36) 변호사는 “싸움은 지금부터”라고 다짐했다. 가처분 결정이 나옴으로써 이제야 최장집 교수와 조선일보사가 대등한 관계에서 법정공방을 벌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사와 맞서 재판을 벌일 때 가처분 결정이 참 중요합니다. 언론사가 일방적 주장이나 의도적 여론 형성을 못하도록 일단 입을 막는 효과가 있어서입니다. 이게 안 되면 언론사가 융단폭격 보도로 피해자를 사정없이 몰아붙이기 때문에 싸움은 시작부터 끝난 셈이 됩니다.” 그는 일방적인 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는 걸 꺼리는 게 언론사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라고 했다. 보복당하지 않을까, 더 많은 걸 잃지 않을까,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하면서 망설인다는 것이다. 그는 언론관련 재판에서 당사자가 안 나서려 하거나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건 바로 이런 우리 풍토 때문이라고 했다.“10여년 언론관련 사건을 맡아 보니 우리나라 언론사들이 참 비열해요. 국민이면 누구나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 헌법을 준수하라고 떠들면서 자기들이 걸리면 법대로 대응 안 하고 온갖 비방을 늘어놓습니다. 정론을 편다는 언론이 유언비어를 조작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또 한국의 지식인들이 말이나 글을 통해선 언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 그게 자기 문제가 되면 영 딴판으로 나가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그가 언론사건 의뢰가 오면 끝까지 재판을 할 것인지 다짐을 받는 까닭이다. 중간에서 흐지부지 타협을 볼 거면 아예 시작을 말자고 거절한다. “전 이걸 법을 통한 시민운동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여럿이 함께 의논하고, 나아가 법원으로부터 그에 대한 좋은 판결을 받아내면 그게 우리 사회를 한단계 성숙시키는 지름길이라는 거지요.” 안 변호사가 언론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사법시험 공부를 하던 대학 3학년 때였다. 데모하는 학생들이 집시법이니 언론기본법을 폐지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는 그 언론기본법이 뭔지 궁금했다. 두달에 걸쳐 관련 자료들을 이잡듯 뒤졌고, 200장에 이르는 긴 논문을 써 법대 학회지에 발표했다. “언론기본법을 찬양하는 글은 수두룩한데 비판하는 학자의 목소리는 없는 거예요. 그 글이란 것도 법조문의 나열일 뿐이지 실제 국민이 궁금해 할 관련법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었어요. 한심합디다. 입술이 닳도록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뒤에서 그걸 제약하는 법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바로 제 선생이고 선배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88년 변호사 사무실을 열자마자 그가 맡게 된 첫 사건이 문익환 목사 방북 보도건이었다. 북에 갔던 문 목사가 베이징에 나와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그걸 보도한 조선일보 가 ‘문 목사 돌아가고 싶지 않다’란 제목을 달아 망명설 비슷하게 본디 뜻을 흐려버린 것이다. 그는 이 재판을 승소로 이끌어가면서 우리 언론이 특히 공안, 북한관련 보도에서 허점을 많이 보인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시국사범, 노동자, 학생에 대한 기사는 언론사 입장에 따라 아예 확인도 안 하고 넘겨짚는 식의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논지를 펴는 경우가 많았어요. 언론사 내부에 기사의 정확성을 점검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걸 체험으로 알게 됐습니다. 일이 터지면 자기 회사 기자들 보호하는 데만 급급하지 기사가 정확했는지를 검토하는 건 뒷전이에요. 그 성역 아닌 성역을 깨고 싶었습니다.” 한국방송공사 주간인 남성우씨를 주사파로 몬 한국논단 , 한국통신노조 노동운동을 북한사주로 덮어씌운 박홍 전 서강대 총장 등이 다 그의 집요한 변론으로 법정에서 법의 철퇴를 맞았다. 물론 이들이 다 안상운 변호사를 먼저 찾아왔던 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나서는 용기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안 변호사는 언론에 억울하게 당한 이들을 찾아가서 무료변론을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걸 ‘기획변론’이라고 불렀다. 검찰도 기획수사를 하는데 변호사라고 기획소송을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94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언론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을 맡아 뛰기 시작했다. 바로 그해에 북한 장학금을 받았다고 보도됐던 성균관대 정현백 교수 사건을 맡아 한국방송공사 9시 뉴스 , 서울방송 8시 뉴스 첫머리에 정정문을 내보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글이었지만, 감히 누구도 건드려볼 엄두를 못냈던 제4의 권력이 스스로의 실책을 뼈아프게 인정한 고백문으로 한국 언론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자들이 나를 참 미워합니다” “우리나라는 국가권력과 언론과 시민사회가 완전히 수직적 관계예요. 청와대나 안기부 정도를 빼놓고 나면 언론보다 더 힘이 센 곳이 없어요. 스스로 권력기관으로 변해버린 지금으로선 언론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언론도 잘못된 보도를 하면 문 닫을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사건은 힘들다. 한마디로 피말리는 일이다. 일반재판이 흔히 돈에 관한 것이라면 언론관련 재판은 인격과 명예에 관한 것이다. 의뢰인에 대한 인물탐험에, 말과 글을 권력처럼 부리는 언론사를 상대하려면 수십, 수백개 컴퓨터 파일을 채우는 자료수집이 기본이다. 그는 “서초동에 수백명 변호사가 우글거리지만 언론사건이라면 다들 고개를 저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가 언론관련 재판 전문변호사로 남으려 하는 까닭 중 하나다. 언론사들에서 의뢰를 해오기도 하지만 그는 “내가 저쪽으로 넘어가면 누가 이쪽에 남을까” 싶어 마음을 다져먹는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전통술 연구가 배상면 ‘술 독립’ 만세! 좋은 우리술 찾아 50년 외길… 전세계 주요도시에 양조장 내는 꿈 그의 얼굴은 잘 익은 술처럼 말갛다. 누룩내가 풍기는 듯도 하다. 화색이 돈다. 좋은 술 찾아 걸어온 50년 외길이 그의 몸에 그대로 배어 있다. “우리 전통술을 이대로 둬선 안 됩니다. 참말로 엉망이에요. 우리것 좋은 걸 잊어버리고 외국술들만 마셔대니 참 큰일입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위스키 많이 소비하기로 유명해져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전통주 시장점유율이 고작 0.2%입니다. 해방 뒤 우리건 거들떠보지 않는 이상한 풍조가 돌아 이 지경이 됐어요. 일본과 중국이 자기들 민족술 연구에 얼마나 열심인지 아십니까. 우린 정부 지원은커녕 규제만 많죠, 전문가 양성 안 되죠, 소비자 외면하죠, 이러다간 술 식민지 되기 딱 좋게 생겼어요.” 사람들이 반한 무증자 약주 배상면(74)씨는 한이 맺히고 원통하다고 했다. 고구려 땐 오히려 우리의 술 제조법을 중국에서 배워갈 정도로 뛰어난 술 종주국이었는데 그 맥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1935년까지만 해도 약주류가 16종, 막걸리류 31종 등 각 지방 토산술이 많았는데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주류제조에 곡류사용을 막아 다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전통술 연구에 뛰어든 건 우연이었다. 해방 뒤 경북대 농화학과에서 공부하던 그에게 양조장을 하던 삼촌이 자꾸 술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책을 찾아보며 아쉬우나마 답을 했는데 공부해 보니 꽤 재미가 있었다. 당시 학교는 좌우익이 갈려 이념투쟁을 벌인다고 밤낮 휴강이라 시간도 많았다.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배워보자고 맘을 굳혔다. “그때 대구에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이 운영하던 청주 양조장이 있었어요. 거기로 실습을 나갔습니다. 낯선 젊은이가 와서 술 만드는 법을 배우겠다고 하니 가르쳐 줍니까? 그저 어깨 너머로 배우는 거죠. 일본 청주 제조법은 용어가 많고 복잡해요. 하루는 공장장이 안 나왔기에 야근을 자청했죠. 모두들 퇴근하고 난 뒤 책장을 살폈습니다. 거기 술 제조기록을 담은 두툼한 공책이 한권 있더군요. 밤새 읽고 외웠죠.” 그는 독학으로 술 제조법을 깨쳐나갔다. 자료도 부지런히 찾았으나 도대체 기록이 없었다. 정작 필요한 세밀한 과정은 쏙 빠져 있고 뜬구름잡는 얘기뿐이었다. 홀로 익혀갈 수밖에 없었다. 하루 내내 현미경을 들여다 보니 목이 늘 뻣뻣했다. 그 고생한 걸 혼자 보기가 아까워 태양통신 이란 회보를 3천부씩 찍어 전국 양조업자들에게 보냈다. 35호까지 낸 이 술 연구보고서는 지금 경기도 포천에 있는 전통술 박물관에 술제조 유물 300여점과 함께 전시돼 있다. “미친 사람처럼 술 연구에 매달렸지요. 고구려부터 내려오는 술 연구서에 보면 첫장에 백하주(白霞酒)가 나옵니다. 생쌀을 물에 담갔다가 빻아서 지글지글 끓는 물을 부으라고 했어요. 이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방법이라. 그때까지 생쌀가루는 변한다는 설이 유력했어요. 어찌됐든 한번 해보자. 항아리 하나에 억지로 담아 보니 영 술이 될 것 같질 않아요. 세균이 우글우글해서 내버릴까 하다가 계속 현미경으로 보고 냄새 맡고 맛을 보며 날이 갔습니다. 아, 근데 이놈이 차차 세균이 죽고 효모만 살아 남으면서 좋은 향기가 진동하는거라. 그 맛 또한 독특했어요. 옳지, 생쌀 갖고도 술이 되는구나, 싶어 본격 연구에 매달렸지요.” 외동딸 결혼식에 이 술을 내놨더니 손님들이 다른 술은 손도 안 대서 이 술 항아리만 동이 났다. 그는 새삼 우리 민족이 참 창조적인 민족이구나 무릎을 쳤다. 이 생쌀 술이 바로 우리 민족 뿌리에 닿는 술이구나 싶었고, 생을 여기에 한번 걸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 무렵이 1차 기름파동이 났던 70년대 말이었다. 에너지를 절약해야 하니 쌀을 안 찌고 만드는 그 무증자 방법이 맞춤했다. 하늘이 돕는가 싶었다.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88년 서울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에게 내놓을 우리 술이 없다는거라. 기가 막힙디다. 내가 평생 우리 술 연구를 했는데 민족의 술 하나 못 만들고 죽어야 되겠나 싶더군요. 강릉에 약주제조장 면허를 하나 사서 무증자 방법으로 만든 약주를 내놓기 시작했지요.” 늘그막에 첫 애를 보는 심정이었다. 강원도 안에서만 팔 수 있기에 판로까지 개척하며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 처음엔 주로 군인들이 사갔다. 그들이 입선전을 해줬다. 이제까지 먹어본 술 중 최고라고 했다. 만드는 족족 팔려나갔다. “우리 조상들이 왜 술 앞에 ‘약’자를 붙였겠습니까. 술도 명실공히 건강에 좋아야 하는 겁니다. 과음해서 몸 상하고 집안 망치면 그게 ‘약주’가 아니라 ‘악주’지요. 술도 음식이니까 자기 체질에 맞게 적당히 맛있게 먹으면 보약이 따로 없는 겁니다. 술만 먹고 취할 게 아니라 그 속에 든 문화에도 젖어들 줄 알아야 합니다.” 평생 술과 함께 살아온 그에게 술철학을 물었다. “술 만드는 사람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가, 내 딱 다섯가지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원료를 아끼지 말아라. 절대 잔재주 부리지 마라. 뭐니뭐니 해도 맛이 좋아야 한다. 시대따라 왔다갔다 하지말고 오직 한길로 가라. 그 물건 가치 이상의 값을 받지 마라.” 내일모레 팔순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지만,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을 반짝이는 그에겐 아직 꿈이 많다. 술 기술자 양성학교를 세우는 일, 전세계 주요도시에 우리 술 양조장을 내는 일이다. 일본이나 중국 음식점이 지구촌 사람들 입맛을 쥐고 흔들듯이 우리 술로 세계인의 혀를 녹여보고 싶은 것이다. “바보 같다는 얘기를 듣더라도 사람이 재주 안 피우고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상대가 다 알아줍니다. 우직하게, 믿음직하게, 고집스럽게. 말하는 것보다 실제 물건이 더 좋으면 우리 물건 좋다고 선전 안 해도 다들 사갑니다.” 삼부자가 함께 걷는 길 피가 무서운가, 아들 둘이 다 고집쟁이다. 삼부자가 한길을 가는 건 그런 까닭이다. 큰아들 중호씨가 (주)국순당을 맡아 술을 만들고, 둘째아들 영호씨가 아버지 이름을 딴 배상면 주가(酒家)를 내서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길을 뚫었다. 지난 8월1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문을 연 배상면 주가(02-416-9727)는 ‘문화가 있는 술’을 내세운 이들 배씨 삼부자의 전통술 박물관이다. 낮에는 500여년 단절됐던 우리 전통 음료 10여가지를 맛보이고 밤에는 백하주, 활인18품, 흑미주, 천대홍주, 산사춘 등 전통술에 철따라 빚은 계절술(세시주)을 술지게미로 만든 안주를 곁들여 내며 조상들이 즐겼던 풍류를 되살린다. 연구, 교육, 양조, 관광의 네가지 기능이 복합된 문화공간인 셈이다. “술에 미친 괴짜가 하나 있어 세상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흔히 사람들 말이 제 하던 일은 절대 자식에게 안 시키겠다 하는데 그거 참 이상한 폭언 아닙니까. 한번뿐인 일생을 바쳐 하는 일을 왜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합니까. 그건 자기를 스스로 무시하는 겁니다. 당장 때려치우고 딴 일 해야죠. 죽는 날까지 고구려의 술빚기, 위대한 우리 조상의 술문화를 살려 세계의 술로 간다는 각오로 살 겁니다. 무위도식하며 오래 살면 뭐하겠습니까.”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c.k@mail.hani.co.kr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예수님 부처님 다 똑같다" 사월 초파일 법문 강사로 나섰던 목사님, 쑥 솟아나는 동화를 기다린다 목사 이현주 그는 누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글을 써달라면 써주고 얘기를 해달라면 얘기를 한다. 천지 사방 모든 것에 자신을 활짝 열어둔다. 아무도 부르는 이 없으면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낮잠을 자기도 한다. 늘 읽고 쓴다. 그냥 어제처럼 오늘도 산다. 크게 바라는 것이 없었을뿐더러 작은 것도 바라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뭇잎 하나 무심으로 나부끼듯이, 미련없이 욕심없이 나부껴본다. 자연 그대로 있는 것, 허공! “만나자기에 나왔지만 허, 그거. 나에 대해서야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알고 있겠지만 막상 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한다면 글쎄…. 이게 내 일이다 할 만한 게 딱히 없어요. 닥치는대로 날 쓸 수 있는 일에 쓰고는 있는데… 나도 잘 모르겠네.” 이현주(55), 그는 감리교 목사였지만 그래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다. 4년 전 철원 반석교회 담임을 끝으로 말하자면 ‘공식적인’ 목사 일을 접었다. “꽉 죄는 옷을 입은 듯 갑갑하고 답답”해서였다. 그가 본 오늘의 한국감리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을 옥죄는 낡은 체제였다. 그는 스스로 제명을 청원했고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이 됐다. 70년대 중반에 동해안 작은 어촌 죽변에서 목회일을 시작해 전국을 떠돌며 이삿짐을 수십번 싼 뒤 내린 결정이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 살아가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죠. 그저 그분의 작은 피리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피리는 제 몸을 통해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잖아요. 피리가 제 소리를 제가 내겠다고 나선다면 아무도 그 피리를 불 수는 없죠. 그게 바로 무위(無爲)와 작위(作爲)의 차이입니다.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자연 그대로 있는 것, 텅 비어서 지상 만물을 살아 있게 하는 허공.” 그래서 그는 누가 종교가 뭐냐, 교파가 어디냐 물으면 한마디 한다. “울타리 없는 집에 산 지 이미 오래된 사람한테 언제 담을 넘었느냐고 묻는 거요?” 올 부처님 오신 날, 그는 100일 법문을 듣고 있는 스님들 모임에 초대받았다. “초파일이라 부처님 얘기는 귀닳도록 들었을 테니 예수님 얘기를 좀 들어봐라. 근데 부처님 얘기랑 똑같다”고 시작한 법회는 웃음 반 말씀 반이었다. 가톨릭 사제, 수녀들과도 폭넓은 만남을 나누며 강론도 마다않는 그를 어떤 이들은 신부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아예 천주교로 개종하는 게 어떠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한 종교를 떠나 다른 종교로 가는 게 개종이지요. 그런데 저에게는 천주교가 다른 종교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왔다갔다 하는 걸 이사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 다 하나로 만나게 되죠. 정신도 깊숙이 들어가보면 경계가 없어요. 종교에 장벽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어느 종교나 다 좋은 거예요. 제대로 올바르게 믿느냐가 문제죠. 깊이의 차원일 뿐이에요. 나누고 갈라서 벽을 만들고 틀에 가둔 건 결국 못난 인간들이 한 작위죠.” 희끗희끗한 수염 때문에 나이보다 더 대접받을 때도 있다. 흰 고무신에 편한 한복 차림, 달랑 맨 바랑, 손에 닿는 대나무 느낌이 좋아 늘 들고다니는 단소 한 자루까지 그는 나이든 도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젊어서부터 빨리 늙었으면 했어요. 늙은이들은 누가 귀찮게 안 하잖아요.” 그는 몇년 전 암으로 죽은 원주의 늙은 벗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과 ‘노자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눈을 깨쳤다. 얼마 전 꿈에 나타난 장일순 선생은 “공부하는 현주냐, 문자 공부로는 안 돼, 문자 공부에 빠지지 말어, 마음을 잡어. 마음을 항복시키라구” 말씀하셨다. “장 선생님이 참 넓으신 분이에요. 그 품 안에 웬만한 건 다 들어갔어요. 암으로 투병하실 때 ‘암세포도 내 몸이니 잘 모시고 가야지’ 하신 분입니다. 하루는 병실에 들어섰더니 내 손을 잡고 우시는 거예요. 그래서 속으로 ‘이 양반이 약해지셨구나’ 하고 ‘왜 우십니까’ 여쭸더니 ‘나 하나 암이라고 이렇게 여럿이 난리고 고생인데 우리 어머닌 가슴에 암 덩어리가 박혔는데도 암말이 없으셔’ 하시는 거예요. 그 어머니가 우리 지구고 우주란 말씀이죠.” 또 한 사람 늙은 벗 권정생씨는 그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형님이다. 같은 동화작가로 만나 존경과 사랑으로 남다른 만남을 일궈온 두 사람은 홀로 사는 권씨가 “나 죽으면 내 살던 토담집은 현주 거다” 할 만큼 깊은 속을 나눠왔다. “동화를 못쓴 지가 오래됐어요. 적당히 만들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명작을 쓰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차고 넘쳐서 쑥 솟아나는 동화를 기다리고 있어요. 동화는 가장 성숙한 문학입니다. 시와 소설이 나 나온 뒤 그 다음에 오죠. 우리 문학사에서 걸작 동화를 보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는 요즈음 홀가분하다. 충남 예산군 신양면 무봉리 안골에서 장일순 선생이 하신 말씀처럼 “만고에 무능군자”로 산다. 집에 없는 듯 있다. ‘이아무개’란 이름으로 불교책도 번역하고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사상가 루미의 시집 ‘내가 당신이라고 말하라’를 우리말로 옮겨 내놓는다. 컴퓨터를 안 쓰는 그가 직접 쓴 글씨 그대로 재생지에 인쇄된 책도 있다. 혼자 보기엔 아까울 만큼 마음이 툭 통하는 책을 아는 이들과 나눠보려고 시작한 번역작업이 이젠 책을 착실하게 보는 그이 나름의 방편이 되었다. 가까운 친구 최완택 목사가 섬기는 민들레교회 주보에 글도 쓰고 전문가가 그 가치를 인정한 장자 산책 같은 연구서도 펴낸다. 그가 낙서하듯 쓴 글 한편을 부인은 냉장고에 붙여두었다. “여기 있으면서 여기 아닌 데 있는 사람. 그래서 여기 아니 있지만 언제나 여기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성공회 대교구에서 작은 ‘성경이야기’ 그는 한달에 한번 성공회 서울대교구 지하 예배실에서 조그만 성경이야기를 끌어간다. ‘예수 살기 모임’ 7월 첫주 모임이 열린 지난 1일, 풍금도 없이 맨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묵상을 한 30여명 벗들에게 그는 소곤대듯 말문을 열었다. “캠프에 갔던 유치원 아이들 20여명이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어른들 잘못에 무고한 어린이들이 죽었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안전을 강구해야 한다’ 입 있는 자들마다 한마디씩 떠듭니다. 다리가 무너졌을 때도, 백화점이 넘어졌을 때도 똑같았습니다. 틀에 박혀 살면 답도 뻔합니다. 자기만 바라보게 우리를 조여온 좁은 틀을 깨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자기 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땅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여기서 내가 바로 너’라고 말하라 하십니다. 남이 아닙니다. 너와 나, 여러분과 저는 자연까지를 포함해서 하나인 몸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전통 옥새장 민홍규씨 “국새를 바꿔야 합니다” 손에 눈이 달린 사람, ‘온몸에 기를 모으며’ 오지의 도장생활 27년 그의 손엔 눈이 달려 있는 것 같다. 처음 본 사람 손을 슬쩍 스쳐가며 잡아도 낯선 이의 인생을 훤히 꿰찬다. 단순히 손금을 본다고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섬세하면서도 극도로 힘이 몰려 있는 듯한 분위기가 그의 손을 감싸안았다. 지금 그의 엄지와 검지손가락엔 송곳 같은 날카로운 물건으로 뚫린 듯한 자국이 있다. 기(氣)훈련을 해서 손으로 불을 만들어내는 그가 지난 11월 경기도립박물관에 손수 설치한 대왕가마에 불을 붙일 때 그 손을 쓰며 남긴 자국이다. 석불 정기호 선생과의 만남 “15살 때 스님에게 봉술을 배우다가 척추를 다쳤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수술을 해야 한다는데 모친이 몸에 칼을 댈 수는 없다고 막무가내셨어요. 그때 기치료로 병을 이겨냈죠. 지금도 제 척추가 정상이 아녜요. 그래도 건강합니다.” 민홍규(43)씨가 서울에 사는 가족과 떨어져 경기도 이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사는 건 이 기훈련 때문이다. 새벽 일찌감치 일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온몸의 기를 모으는 건 삶의 기본이다. 그가 오지라면 오지인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또 한가지 까닭은 대왕가마 때문이다. 유일하게 전통 옥새 동장(銅章) 제작기법을 이어가고 있는 옥새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그를 가마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 “어릴 때부터 한문과 서예 공부를 했는데 어느 날 집안 할아버지 한분이 도장 만드는 걸로 유명한 분이 있다면서 한번 만나보라는 거예요. 지금도 크게 나아지진 않았지만 그때는 도장 파는 사람들을 도장장이라 해서 업신여기는 풍조가 있었어요. 썩 내키진 않았으나 동양 삼국에서 유일하게 옥새 제작기법 맥을 잇고 계시다 해서 부산 금정사로 찾아갔지요. 그분이 바로 석불 정기호(1899∼1989) 선생이셨어요. 구한말 일본이 빼앗아간 8개의 옥새를 만드셨던 황소산 문하에서 그 기법을 계승하신 분이셨지요. 제 나이 16살 때였으니 흙 만진 지 27년이 넘어가는군요.” 민홍규씨는 석불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근역서화징 을 쓴 위창 오세창이 극찬했던 석불이었다. 옥새 동장 기법 중 어렵기로 이름난 봉장법, 연금법, 용주법, 각작법을 다 계승하며 한국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더 이름을 떨친 기인이었다. 석불 자신이 워낙 호방한 인물인 데다 부인이 일본인이어서 일본 경찰에 호령을 해가며 독립군 자금을 운반한 숱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처음엔 너무 어리다고 쳐다보시지도 않더군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몇년 지나니 먼저 글씨를 보자시더군요. 보기에 좋은 글보다 살아있는 글을 원하신다 하셨어요. 그리곤 글씨를 더 쓰라 하시고 칼가는 일만 시키셨죠. 각은 손도 못대게 하셨는데 하루는 어린 마음에 각이 하고파 칼을 들었다가 목침으로 얹어맞아 입술 한쪽에 흉터가 남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남아나질 않았어요. 미친 영감이라고 슬슬 피했죠.” 그는 옛날 스승들은 그렇게 무서웠지만 제대로 사람을 가르쳤다며 석불을 그리워했다. 그 무서운 스승은 때가 되자 그에게 자신이 쓰던 칼, 중봉철필을 내리고 세불이란 아호도 지어줬다. 옥새를 만드는 이는 갖춰야 할 게 참 많다. 흔히 필수덕목 9항이라 해서 옥새 제작의 기본철학, 서법과 문자 구성론, 천역과 명리운기학, 고새인장법리, 회화조형의식, 각작법, 합금법, 연금비전, 주물법 등을 두루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옥새장 하겠다는 사람이 드물다. 지금도 그의 뒤를 이을 후학이 없어 걱정이다. 요즘 세대 중엔 이런 옛 학문과 기법 등을 어렵게 공부하면서 세상에서 별로 알아주지도 않을뿐더러 사라져가는 기예를 익히려는 젊은이가 없다. “옥새란 한 나라를 세우는 기초입니다. 그 조그마한 네모 속에 한 나라의 운명이 들어앉아 있는 겁니다. 일제가 민족문화를 말살하려고 처음 한 짓이 뭔지 아십니까. 조선조 73개의 옥새를 찬탈해 왕권을 짓밟은 거였습니다. 그만큼 옥새가 지니고 있는 정신이 준엄했어요. 새 임금이 왕위를 잇고, 새 정부가 서면 옥새를 새로 만들어 새 정신의 틀을 놓았던 거죠.” 박정희가 만든 옥새를 바꿔야 하는 이유 그는 김대중 정부가 쓰고 있는 국새가 지난 63년 박정희 정권 때 만든 것이라며 다시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몇가지 댔다. “원래 고종이 쓰던 옥새는 도장 윗부분, 손잡이가 용이었어요. 그런데 박정희가 그걸 바꾸면서 거북을 새겼지요. 원래 거북은 황제 밑에서 충성을 서약하는 제후를 상징하는 겁니다. 또 대한민국지새란 한자를 대한민국이란 한글로 바꿨는데 그 획수가 20획이에요. 운기학, 문자학, 성명학으로 보면 20은 허망함을 나타냅니다. 23획이 좋아요. 성공과 부귀공명을 뜻하지요. 지금 국새자문위원회가 있어 그 위원들에게도 자문을 해줬는데 제 생각엔 제2의 건국을 위한 상징으로 옥새, 곧 국새를 다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지난 8월18일 경기도박물관에 고종황제가 사용했던 옥새를 그대로 복원한 전통 옥새 5과를 기증했다. 전해 내려오는 오합금에 진흙 거푸집을 쓴 전통 주조법으로 만든 귀한 옥새였다. 경기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주고 또 그의 뜻을 귀하게 여긴 몇몇이 도와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앞으로 규장각에 있는 조선의 ‘어보의궤’인 보인부신총수 를 자료로 해 모두 73과의 옥새를 차례로 만들 꿈에 부풀어 있었다. “동장을 만들 때는 손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이 더 소중합니다.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칼을 들지요. 석불이 제게 남기신 말씀도 정신이 먼저 선 뒤에 기교가 자연스레 흐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손가락 한마디도 안 되는 작고 작은 네모 속에 세상의 이치와 역사와 삶을 아울러 담아내는 그의 손에 눈이 달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북한전문가 권오홍 남과 북 맺어주는 ‘복덕방’주인, 사람도 찾아주고 물건도 구해주고… (사진/그는 북한문제에 인생을 걸었다. ‘북’자만 봐도 눈이 번쩍 뜨인단다.) 그는 9개 명함을 지니고 다닌다. 때와 곳에 따라 내미는 명함이 다르다. ‘얼굴’이 많은 편이지만 노출되는 걸 몹시 꺼린다. 백두산을 7번 다녀왔는데도 그 흔한 기념사진 한장을 안 찍었다. 투철한 직업정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는 이들은 아직 그의 얼굴을 전부 본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반쯤 알면 많이 아는 셈이라고 했다. 그는 “돌아보니 올해는 스무번쯤 외국 출장을 나갔고, 한국에 머문 건 고작 석달이었는데도 들어온 지 좀 되니까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말했다. 전문서에 문화비평서, 소설까지 써제껴 “올해는 IMF 사태가 터지고 여러 루트로 남북 교류가 이뤄진 데다 마지막에 금강산 관광선까지 떠서 참 바빴습니다. 수도 없이 사람을 만나 부대끼고 순간순간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라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지요. 그걸 책 쓰는 일로 풀고 있습니다.” 권오홍(35)씨는 1년에 책을 적어도 1권씩 써내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다. 북한 비즈니스 35계 중국 비즈니스 37계 같은 전문서도 있고 바람의 사부 같은 소설,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듣는다 같은 문화비평서도 있다. 지금은 실전 중국 진출 하이스트 테크닉 을 쓰고 있고, 중국 소설도 번역중이다. 그렇다고 직업이 저술가는 아니다. 파김치가 돼 돌아간 집에서 새벽까지 짬을 내 컴퓨터를 두드린다. 그는 “취미일 뿐”이라고 했다. 한꺼번에 여러가지 일을 하는 건 머리가 뜨겁기로 유별난 그가 그 에너지를 분산해 스스로를 조절하는 비법인 듯 싶었다. 권씨가 주로 내미는 명함은 장한신식(長漢信息)주식회사 대표이사라고 박은 평범한 것이다. ‘장한신식’이 업계에선 중국투자전문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복덕방’이라고 불렀다. 그가 하는 일이 넓게 보면 남과 북 중간에 서서 관계를 맺어주고 온갖 일을 주선하는 것이니 복덕방이라 부를 만했다. “이를테면 북에 동생들을 두고 단신 월남한 7남매 중 장남이란 분이 저를 찾아옵니다. 6남매를 다 수소문해서 편지와 사진을 교환하게 해줍니다. 임가공할 물건을 찾는 상인에게 북한산 웅담을 구해줍니다. 중국에서 사업을 벌이려는 미국, 대만, 일본, 홍콩 사람들을 상담합니다. 이런 정보를 얻기 위해선 계속 움직여야지요. 제가 어디 가 있는지, 뭘 하는지 집사람도 잘 모릅니다. 일단 해외에 나가면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저 자신을 보안합니다. 그게 아마도 저쪽 사람들이 ‘권 선생과 일하면 손해는 안 본다’고 말하는 비결인 모양입니다.” 그가 북한과 중국전문가가 된 건 10년 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을 담당하게 된 그는 당시 중공은 물론 북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버마, 몽골을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모든 나라를 “경제란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봤다. 코트라에 처음 문을 연 북한실 주역으로 뛰게 된 건 운명 같은 것이었다. 92년 홍콩 무역관으로 발령나자 그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프로’의 경지를 뛰어넘는 ‘프로 마니아’로 서고픈 욕망이 들끓었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안다는 쾌감이 대단했습니다. 쟤들이 어떻게 움직일까 나름대로 틀을 짜서 그걸 예측하고 그 진행 양식을 살피는 것, 말하자면 점쟁이 기질이 발동하기 시작한 거죠. 친한 친구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국가기관이란 한계가 저를 막아서더군요.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데 못하게 막더라구요. 94년에 사표를 내고 ‘장한신식’을 차려 독립했습니다.” 그는 북한전문가란 저마다 나름대로 ‘무형식의 틀’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반도란 땅이 너무 ‘정치적’이어서 그 벽을 뛰어넘는 방법은 ‘무형식’이란 단어 외에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치료한다는 의미에서는 의사요,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는 것으로 보면 중매쟁이요, 새로운 경우가 나오면 연구해야 한다는 뜻에선 연구가라고 했다. 그는 이 분야가 초보자가 발을 들여놓기엔 너무 어렵고 위험한 곳이라 사람이 없다고 걱정했다. 가르쳐줄 곳이 없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국가정보원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안기부가 앞으로 이런 교육기관 구실도 해줬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오프 더 레코드’가 많은 이야기들 “북한에 대해 일단 시각 자체를 넓게 여는 게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굶어 죽어간다고 구호물자 보내다가 잠수함 온다면 이를 갈고, 금강산 관광가서 목놓아 친족이름 외치다가 돌아오면 고개를 저으며 말짱 잊어버리는 식이 돼선 곤란하지요. 일반인들에게 그렇게 극과 극을 달리는 이중적 북한관을 뛰어넘게 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북한을 별나라 얘기하듯 해선 안 됩니다. 기초과학처럼 북한에 대한 기초접근법 강의를 안기부가 우리 국민에게 해주는 것, 그것이 새 정부가 대북 관계에서 한걸음 나아가는 길일 겁니다.” 그는 수없이 “괄호 열고 괄호 닫고”란 단서를 달았다. 이 괄호 안에 묶인 이야기는 ‘오프 더 레코드’였다. 그가 걸러서 하는 말들 속에도 기록할 수 없는 많은 속내가 뜨겁게 묻어났다. “북한문제에 제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 일 자체를 사랑해요. ‘북’자만 봐도 눈이 번쩍 뜨입니다. 힘없는 복덕방 주인이지만 이런 말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지금 대북문제는 더 신중할 필요가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꼭 100년 전 상황과 똑같습니다. 역사가 순환한다는 걸 실감하고 있어요. 금강산에 갔다고 들뜰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위험한 시기죠. 큰 덩치를 맛본 사람들이 자잘한 걸 돌아보겠느냐는 걱정뿐입니다. 우리로선 덤덤하게 지켜볼밖에요. 다만 전 저를 찾아오는 분들께 이렇게 충고합니다. 돈 벌려고 뛰어드신다면 그냥 돌아가시라. 북한을 이용해 돈을 벌 수는 없다.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다. 그럴 양이면 아예 시작을 말라.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동족 이용해 돈 벌어 호의호식하면 그게 살로 가겠는가.”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씨 준통일 국적, 그걸 주시오 귀국할 때마다 존재가 흔들리는 몸살… 그는 왜 50년간 ‘조선’ 국적을 고집했는가 그는 세번째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해방 전 어린 시절에 드나들던 고향 제주도로 가는 길이 이리 멀었던가 싶다. 한번 올 때마다 그의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몸살을 앓았다. 두 동강으로 찢어진 조국처럼 그의 몸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겪었다. 희끗한 머리카락을 날리며 공항 출국장을 나서는 그의 얼굴 위로 공익광고 한마디가 흘러갔다. ‘남북이 함께 발전해야 통일이 빨라집니다.’ 드라마처럼 성공한 입국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73)씨는 국적이 없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제주도가 고향인 부친의 피를 따라 조선인임을 자랑스레 여기지만 ‘남’이나 ‘북’ 어느 한쪽을 선택하길 거부했다. 그에겐 48년 이전, 남과 북이 하나였던 조선만이 있다. 조총련(이하 총련)계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흔히 ‘북’을 국적으로 한 사람들로 오해받는 ‘조선적’은 그에게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그래서 조선은 ‘국적’이 아니라 그냥 ‘적’이다. “48년에 처음 외국인등록법이 생겼을 때는 남북한을 통틀어 ‘조선’이라 했어요. 그때가 차라리 나았던 것 같아요. 통일되기 전까지는 그 어느 쪽도 내 조국은 아니니까.” 남들이 생활의 불편 때문에 쉽게 포기하는 걸 그는 끝까지 고집했다. 88년 11월, 4·3을 소재로 한 그의 장편소설집 화산도 와 단편집 까마귀의 죽음 한국어판이 나온 몇달 뒤 40년 만에 처음 한국에 들어올 때도 그랬고, 96년 한민족작가대회에 참석할 때도 힘들었지만 이번 세번째 한국 입국은 말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지난 8월21∼24일 제주시 제주그랜드호텔에서 열린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한 제주 4·3 50돌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려던 그는 도쿄 주재 한국총영사관으로부터 ‘국적문제’로 여권 발급을 거부당했다. 이 소식은 곧바로 회의장에 전해졌고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대만 참석자들은 권력의 횡포라며 분노했다. 개막회의에서 이에 항의하는 긴급문건을 쓴 이가 서승씨였다. 모국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긴 옥살이를 하고 지금은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교수로 있는 그는 ‘4·3을 논하는 학술회의에 김석범 선생이 빠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정부당국에 엄중하게 따져물었다. 그렇게 해서 대회 마지막날에야 칠십여 평생을 그 국적문제로 싸워온 노 투사가 참석자들의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으며 회의장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재일동포 수가 한 67만 됩니다. 그 가운데 15만쯤이 ‘조선’적을 가지고 있어요. 1년에 5천쯤이 한국 국적으로 돌아서고, 일본에 귀화하는 사람이 또 1만명씩 되니 자꾸 감소하는 추세죠. 그러나 가령 3∼4년 뒤 일본이 북한과 국교를 트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나같이 남한이나 북한 어느 쪽 국적도 갖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무국적자가 될 운명에 놓입니다. 통일된 나라의 국적이 아니면 싫다고 온갖 불편을 견디며 50년을 버텨온 우리는 어찌합니까. 나라없는 신세로 일본에 들어와 큰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는데 또다시 나라없는 구렁텅이로 우리를 밀어넣지 마십시오.” 그는 통일을 전제로 한 ‘준통일 국적’을 제안했다. 어느 쪽 국적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이들에게 ‘준국가적 국적’을 주는 것이다. 이들이 남과 북을 자유로 왕래하게 되면 두 정부를 잇는 완충지대이자 통일로 가는 다리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구상을 한국 특집을 마련한 잡지 세계 (이와나미 서점) 다음호에 정식으로 제안하겠다고 했다. “이제껏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들에 대해 펴온 건 안기부에 의한 정보정치뿐이었어요. ‘고향방문단’ 활동 등을 통해 총련을 와해시키는 데만 주력했지요. 그건 냉전시대의 추악한 유물일 뿐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오늘까지 구태의연하게 박정희 독재정권식 대책을 펴서야 되겠습니까. 바뀌어야 합니다. 무국적자로서 세번씩이나 한국에 들어온 걸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소설 좀 쓴다고 특권 누리는 건 싫어요. 제 선배나 또래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이 고향을 그리며 눈물 짓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 정부가 진정한 민주정부라면 그들을 오게 해야 합니다.” 또 한가지, 그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건 제주공항 활주로 밑에 묻혀 있는 4·3사건 희생자들의 유골이다. ‘정뜨르’라 불리는 이곳엔 48년 4·3 반미 민주항쟁 때 학살당한 수천구 주검이 누워 있다. 제주공항 시멘트를 깨부숴라 “하루종일 코끼리 같은 비행기들이 그 육중한 동체를 비벼대며 오르내리고 굉음을 내지르니 원혼들이 깜짝 놀라 혼비백산하지 않겠습니까. 죽어서도 그 고통을 당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그들을 거기 묻어두곤 민주주의 국가 실현 못합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뒷날 공항이 이전하게 되면 시멘트를 깨부숴 싹 걷어내고 그 백골들을 거둬 편히 잠들도록 모셔야 합니다.” 그는 이럴 땐 미국이나 일본 정부가 부럽다고 했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군인들 유골을 아직도 거둬가는 미군이나, 2차대전 때 죽은 일본군을 찾아 지금까지도 남양군도 바닷속 깊은 곳을 뒤지고 있는 일본 사람들의 집요함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싶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그는 평생을 쏟아부은 화산도 1, 2부 전 7권을 일본 문예춘추사에서 펴냈다. 76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해 거의 20여년 만에 마침표를 찍었으니 그의 일생이 이 소설에 다 녹아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 문단에서 그를 노벨문학상 후보로 미는 건 이 작품이 4·3이란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한시대를 뛰어넘는 인류사의 보편적 문제를 응축해냈기 때문이다. “지난 5월에 담낭 제거 수술을 받고 나서 술도 못마시고 음식도 조심해왔는데 고향에 오니 ‘한라’ 소주 맛이 기막혀 한잔 안 할 수가 없네요. 냄새날까 일본에선 자제하던 생마늘도 원없이 먹었어요. 결국 탈이 나서 고생은 좀 했지만 참 유쾌합디다. 4·3을 주제로 한 국제적 학술대회를 바로 그 땅에서 멋있게 치른 걸 보니 오래 산 보람도 있고요.” 그는 ‘조선’ 사람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조선’ 사람으로 돌아갔다. 영원히 ‘조선’ 사람이기를 고집하는 그가 그 뜻을 귀히 여긴 고향 땅에 네번째 귀국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노랑부리저어새는 어디로 갔나 습지보전운동가 닐 무어스 (사진/"습지가 애인"이라고 말하는 닐 무어스. 노랑부리저어새를 찍은 슬라이드 필름은 늘 그의 품속에 있다.) 그가 준 명함엔 ‘습지설계사’라고 써 있었다. 말 그대로 풀자면 축축한 땅을 가지고 뭔가 만들어내는 사람이란 뜻인데…. 장난기를 듬뿍 머금은 파란 눈이 반짝였다. 불룩한 윗도리 주머니에서 슬라이드가 나오고 조류도감이 펼쳐진다. 거기 푸른 물가에 노란빛 부리가 뚜렷한 새 세마리가 정답게 앉아 있다. 도감에서 그는 ‘spoonbill’이라는 이름을 짚었다. 토박이보다 더 밝은 길눈 “노랑부리 저어새(spoonbill)는 지금 전세계에 600마리쯤 남아 있습니다. 우리 할머니 세대엔 저 창 밖에서 우는 까치처럼 흔하게 볼 수 있던 새였습니다. 몇십년 사이에 그 많던 노랑부리 저어새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사라지게 했을까요. 지금 이 새들이 날아와 먹고 쉴 수 있는 습지를 보전하지 않는다면, 아마 사람들도 그들처럼 사라질 겁니다.” 닐 무어스(36)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수백 수천마리 새가 살아 있다. 이메일 주소(spoonbill@hotmail.com)로 쓰고 있는 노랑머리 저어새는 그들을 상징하는 한마리 새일 뿐이다. 잠수함 속 토끼처럼, 이 새들은 지구가 인간이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인가를 드러내는 잣대 같은 것이다. 이들이 자취를 감춘다는 건, 그만큼 지구가 사람 살기 어려운 땅이 돼간다는 뜻이라고 그는 한숨짓듯 말했다. “그래서 습지가 참 중요합니다. 습지는 온갖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들과 물고기들, 그중에서도 철따라 물새가 찾아온다는 건 그 습지가 살아 있다는 걸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나라는 복받았습니다. 삼면 바다에 아직 싱싱하게 살아숨쉬는 갯벌과 만(灣)이 그득하니까요.” 무어스가 우리나라에 온 건 갯벌 때문이었다. 그가 태어나 소년기를 보낸 영국 리버플과 닮은 바닷가 풍광이 그를 잡아끌었는지도 모른다. 일곱살 때 할머니로부터 새에 관한 책을 선물받고 하루종일 갯벌에 나가 새들을 관찰하던 그 체험이 먼 이국땅을 낯설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새들이 퍼득거리는 건강한 습지를 사랑하는 그에게 한국은 고향 같은 곳이다. “일본에서 7년쯤 습지보전운동을 펼칠 때 몇번 한국에 왔습니다. 일본은 습지를 둘러싼 환경단체들 싸움이 이미 패배로 끝난 뒤였지요. 정부는 완고했고, 시민들은 성공사례를 하나도 만들지 못한 채 무기력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달랐어요. 습지도 날것 그대로 살아 있었고, 사람들도 그걸 지켜야 한다는 의지로 팽팽하게 날이 서 있었습니다. 여기야말로 내가 있을 곳이라는 걸 느꼈지요.” 90년대 초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한국에서 그는 국제 습지연구가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천혜의 갯벌들을 보았다. 과학적 자료나 통계도 없었다. 그는 놀랐고, 흥분했고, 할 일 많음에 몸이 달았다. 습지마다 사랑하는 애인이 기다리는 듯 그는 촌음을 아껴 전국을 떠돌았다. 한국에서 일한 지 1년여. 영어교사로 일하며 조사를 다니던 일본에서와 달리 밥벌이를 전폐하고 오로지 습지로, 습지로만 내닫는 그는 이제 한국 환경운동가들에게 낯익은 얼굴이 되었다. ‘전국습지보전연대회의’ 소속으로 여러 환경단체·지역단체들과 함께 움직이는 그는 토박이들보다 더 길눈이 밝아 초행길 낯선 곳에서 길잡이를 자청해 사람들을 놀래킨다. 무어스는 올 들어서만도 1월엔 목포 해남 순천만 광양만 낙동강 남해 우포 주남 보성만 제주를 이틀거리로 돌았고, 2월 들어선 부안곰소 새만금 금강 천수만 아산만 제부도 대부도 시화송도 영종도 강화도 한강 하구를 찾아나서고 있다. 숨돌릴 틈도 없어 보이는 빡빡한 일정인데도 짬을 내 지난 1월30일엔 제주환경운동연합과 습지보전연대회의가 함께 연 ‘제주도의 습지 보전을 위한 세미나’에 참석해 제주도의 겨울철새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고, 2월2일 ‘세계 습지의 날’엔 새만금에서 습지 살리기 캠페인을 벌였다. 현장에 가면 밥먹는 시간도 아까워해서 차로 이동할 때 때우자고 말할 만큼 지독하고 철저하다. 같이 일하는 김경원(습지보전연대회의)씨는 “한국 운동가들은 목소리가 큰데, 그는 발이 빠르다. 데이터 하나가 더 있으면 우리가 힘을 하나 더 얻는다고 말하는 이 완벽주의자 앞에서 대충대충에 익숙하던 내 타성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현장에서 닐이 빛나는 게 바로 이 자료다. 한국 환경문제나 습지에 관한 자료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데는 그의 힘이 컸다. 도요새 이동경로를 알 수 있는 새만금 등 전 지구적으로 중요한 습지들이 충분한 과학적 통계, 영문으로 옮겨진 자료 등이 없어 그동안 국제사회에 알려지지 못한 걸 그는 지금도 안타까워한다. “이곳에 와서 수많은 환경단체들, 여러 비정부기구(NGO)들을 만났습니다. 한국은 70, 80년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의 열기가 여전히 뜨끈뜨근하게 이어져 참 좋습니다. 그들이 인권을 향해 뻗치는 정열이나 자기희생, 유대감 같은 건 다른 나라 NGO와 많이 접촉해 본 제 눈으로 볼 때 한국 사회의 미래가 얼마나 밝은가를 점치게 하는 핵입니다. 그러나 환경운동은 당위나 주장만으론 부족합니다. 습지를 보전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기 전에 그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가 있어야 합니다. 자료는 진실합니다. 새가 몇마리 날아오고, 어떤 먹이를 먹고, 어떻게 새끼를 치고 살아가는가를 정확히 보여줘야 합니다. 느낌을 구체적인 과학적 진실로 이어주는 것이 자료입니다. 아마도 그간 한국에서 이뤄져온 환경운동이 한단계 올라서려면 이런 전문가적 활동과 운동가적 시각, 거기에 정부의 협력, 이 삼박자가 맞물려 돌아가야 할 겁니다. 새와 습지와 인간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각 지역에 맞게 현지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 그 제안을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댄 모임에 제시하는 것, 그것이 습지설계사가 하는 일입니다.” “왜 남일 보듯 합니까” 그는 오는 5월 세계 113국이 참가해 여는 습지에 관한 국제적인 학술모임 ‘람사’(Ramsar) 회의에 가서 새만금 등 한국 습지에 관한 발표를 할 예정이다. 그동안 인터넷 등을 통해 한국 자료를 많이 발표해온 그로서는 앞으로 5년쯤 이 생명력 넘치는 땅에서 더 일하고픈 마음이다. “습지나 물새 얘기가 도심 고층빌딩에서 일하고 쾌적한 신도시 아파트에 사는 당신과는 상관없는 먼 바닷가나 오지 얘기 같습니까. 아닙니다. ‘환경은 곧 나’입니다. 지구를 떠받치는 생명체로서 당신은 환경문제에 함께 엮여 있습니다. 왜 남일 보듯 합니까. 외국인인 제가 한국 땅에 와서 습지를 찾아다니는 건 우리 모두가 바로 환경이요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과 지구의 후손들이 노랑머리 저어새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마술사 이흥선 제자들은 떠났지만 외손자들과 함께 용기백배…만화적 상상력에 도전한다 그가 손을 허공에 저을 때 세상은 그 손을 따라 움직인다. 비둘기가 사라졌다 나타나고 손수건이 펄럭이다 자취를 감춘다. 만물이 그 손 안에서 들고 나는 것이 눈 깜짝 할 사이다. “재빠른 손 놀림이 생명이지요. 동작이 빨라야 해요. 어른들 눈을 따돌리기는 쉬워요. 나이 든 이들은 감각이 느려. 그 눈이 세파에 시달려 그런가 뭘 잘 못봐요. 아이들 눈이 무섭지. 초등학생들이 제일 무서워요. 걔네들 눈은 내 손놀림을 다 따라온다니까. 그래서 아이들 앞에서 할 때는 각별히 숨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하게 돼요.” 이흥선(74)씨는 마술사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마술 묘기를 씌우느라 세월 가는 줄도 몰랐다. 돈 많이 벌 생각도 안 들고 출세할 맘도 없다. 마술을 할 때는 시간도 공간도 멈춘다. 세상이 그 몸에 쏠린다. 그 순간은 천국이다. 무사태평, 늘 웃는 낯, 자나깨나 마술 생각에 빠져 사는 그에게 세상은 즐거운 곳이다. “마포 고물상을 꿰차고 있지” (사진/60년대 초의 링 묘기.) “사람이 머리를 쓰며 살아야지. 마술이 별건가. 머리쓰며 사는 게 마술이지. 난 내 머리 써서 사람들 즐겁게 하는 게 좋소. 그게 또 마술이야. 남들 기쁘게 해주며 살다보니 나도 즐겁고 늙는 줄도 모르겠어요.” 짧다면 짧은 한국 마술사에서 그는 1세대 마술인으로 꼽힌다. 서울 용산에서 태어나 해방 전엔 전국을 떠돌며 기계체조로 몸을 단련했고 운동을 가르쳤다. 한국전쟁을 치르며 ‘신광서커스단’에 들어간 그는 곡예사로 이름을 날리다가 서른살 되던 해 어깨너머로 배운 마술의 길로 들어섰다. 몸놀림이 빠르고 눈썰미가 좋던 그에게 마술은 천직이었다. 외국 마술사들이 공연오면 구경가서 그 비법을 단숨에 익혔다. 그가 장기로 치는 비둘기 마술도 홍콩 마술사 ‘미스터 엑스’에게서 홀로 전수받은 비장의 무기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마술은 가지수로 치면 2천가지가 넘는다.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그의 집은 동네 아이들이 즐겨 놀러오는 놀이터다. 늘 문이 열려 있는 그 집엔 요즘 보기 드물게 빨간 눈의 토끼가 살고 비둘기가 구구거리고 이상한 물건들이 널려 있다. 얼핏 봐선 고물상같이 구닥다리 물건들이 빼곡 들어차 있지만 그 낡은 철물이며 상자 하나하나가 다 마술 도구다. “마술 기구 만들 때는 세상 만물을 다 써요. 뭐 하나 버리는 게 없지. 마포에 있는 고물상들에 뭐가 있는지 내가 뚜르르 꿰차고 있는 건 내 도구들이 다 그 버리는 물건들 속에서 태어난다는 얘기에요. 창의력이 문제지.” “사람이 머리를 쓰며 살아야지. 마술이 별건가. 머리쓰며 사는 게 마술이지. 난 내 머리 써서 사람들 즐겁게 하는 게 좋소. 그게 또 마술이야. 남들 기쁘게 해주며 살다보니 나도 즐겁고 늙는 줄도 모르겠어요.” 짧다면 짧은 한국 마술사에서 그는 1세대 마술인으로 꼽힌다. 서울 용산에서 태어나 해방 전엔 전국을 떠돌며 기계체조로 몸을 단련했고 운동을 가르쳤다. 한국전쟁을 치르며 ‘신광서커스단’에 들어간 그는 곡예사로 이름을 날리다가 서른살 되던 해 어깨너머로 배운 마술의 길로 들어섰다. 몸놀림이 빠르고 눈썰미가 좋던 그에게 마술은 천직이었다. 외국 마술사들이 공연오면 구경가서 그 비법을 단숨에 익혔다. 그가 장기로 치는 비둘기 마술도 홍콩 마술사 ‘미스터 엑스’에게서 홀로 전수받은 비장의 무기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마술은 가지수로 치면 2천가지가 넘는다.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그의 집은 동네 아이들이 즐겨 놀러오는 놀이터다. 늘 문이 열려 있는 그 집엔 요즘 보기 드물게 빨간 눈의 토끼가 살고 비둘기가 구구거리고 이상한 물건들이 널려 있다. 얼핏 봐선 고물상같이 구닥다리 물건들이 빼곡 들어차 있지만 그 낡은 철물이며 상자 하나하나가 다 마술 도구다. “마술 기구 만들 때는 세상 만물을 다 써요. 뭐 하나 버리는 게 없지. 마포에 있는 고물상들에 뭐가 있는지 내가 뚜르르 꿰차고 있는 건 내 도구들이 다 그 버리는 물건들 속에서 태어난다는 얘기에요. 창의력이 문제지.” 이흥선 할아버지네는 새 것 사는 법이 없다. 그가 손을 대면 못 고치는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내일 굶더라도 나는 오늘 마술을 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건 적게 벌든 많이 벌든 이렇게 자급자족하는 습관이 몸에 배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마술사들이 체계가 없어요. 외국엔 나름대로 마술사들 족보 비슷한 것도 있고 마술협회 같은 것도 활발히 움직이는 모양인데 우린 다들 어디 숨었는지 명맥이 희미해요. 공연장이 있길 하나 우리를 다루는 매체가 하나 있나. 전국에 마술 하는 사람들은 한 1천명쯤 헤아리지만 진짜 프로 마술사는 10명이 채 안 돼요. 마술가들이 살아갈 터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기껏해야 야간업소밖에 없고 그나마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어요. 그렇다고 텔레비전에서 우리를 불러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그러니 한국 마술이 점점 죽어가고 있지.” (사진/70년대 말의 비둘기 묘기.) 그는 한 TV프로에서 마술의 비법을 파헤치는 외국 필름을 방영하는 걸 볼 때 슬프다고 했다. 물론, 마술이 눈속임이라 그 속내를 소개하는 건 시청자들 흥미를 끌고 나름대로 재미가 있겠지만 마술인들이 설 땅을 만들어주지는 않고 빼앗아가기만 하는 그들 각박한 인심이 섭섭하다는 것이다. “요즘도 마술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꽤 있어요. 근데 비법을 전수하는 게 꺼려져. 기술 하나 배우는데 1∼2년씩 걸릴 만큼 힘든 길인데 배워봤자 먹고 살 구멍이 보여야지. 몇달 견디다 훌쩍 떠나버린 제자들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그는 할아버지 솜씨를 잇겠다는 외손자 김준오(31), 정우(28)씨와 함께 ‘알렉산더 매직 패밀리’를 만들어 한국 마술 부흥을 꾀하고 있다. ‘알렉산더’는 대중가요 두만강 으로 유명한 김정구씨가 그에게 붙여준 예명이다. 대여섯살 때부터 외할아버지 ‘알렉산더 리’를 따라 텔레비전에 출연한 게 인연이 된 정우씨는 마술을 전수받고 있고, 준오씨는 무대를 꾸리는 감독일을 보고 있다. 이들이 지난 4월19일 홍대 앞에 낸 ‘알렉산더 매직 바’(02-3333∼505)는 눈앞에서 마술을 즐길 수 있는 즐거운 공간이다. 바에 앉아 간단한 음료수를 마시며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수백가지 카드 마술이나 공 마술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마술을 무대 마술, 코미디 마술, 토크 마술, 테이블 마술로 가르자면 테이블 마술을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일본과 미국처럼 마술이 대중화돼 있는 나라에선 이런 매직 바가 인기있는 관광명소의 하나다. 마술로 대를 잇는 이들의 꿈은 ‘알렉산더 매직 바’를 한국 마술을 세계에 알리는 명소로 만드는 것이다. “서양마술하고 동양마술은 달라요. 뭐랄까, 그 정서와 분위기가 차이가 있지. 서양마술이 기계적이고 차갑다면 동양마술은 좀더 인간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따뜻함이 특징이에요. 마술은 아주 대중적인 묘기이면서도 그 안에 그 민족이 지닌 환상, 기쁨, 사랑, 인생에 대한 페이소스 같은 걸 지니고 있어요. 마술은 꿈이지요. 더이상 꿈꾸지 않는 어른은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에요. 마술은 그 꿈을 되살려주는 방편이라오. 어린시절의 꿈 말이에요.” 지방 밤무대 초대를 마다하고… 이흥선씨는 요즘 여기저기 지방 밤무대 초대를 마다하고 새로운 마술 도구 만드느라 하루 해가 짧다. 극단 민들레가 9월25일부터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하는 어린이극 둘리 매직쇼-아기공룡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 에 쓸 무대장치들이다. 김수정씨의 만화영화 둘리를 무대에서 공연하려니 그 만화적 상상력을 따라잡을 수 있는 건 마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0t 트럭 1대분 장치들을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놓은 그는 벌써 아이들이 즐거워할 걸 그려보며 얼굴이 환해졌다. “한번은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내 마술쇼를 봤다며 날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는데 내 손을 잡고 이리 휘적 저리 휘적 하더니 ‘보통 사람이시네요’ 하는 거예요. 그래 내가 ‘뭐 별난 사람인 줄 아셨소’ 했더니 하늘에서 내려온 기인인 줄 알았다는 거예요. 나야말로 대한민국 보통 할아버지지. 늘 꿈꾸는 할아버지로 남아 있다는 게 좀 별나지만.”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음식 칼럼니스트 김순경 사골국물처럼 살아온 해직 사진기자… 팔도 55만개 식당은 그의 실험실 그는 하루에 5끼쯤 먹는다. 일 때문에 남보다 더 먹게 된다. 때로 안 좋은 걸 먹거나 과식하면 바로 뒷간으로 달려가기도 한다. 위에 난 다람쥐 등 같은 상처는 그렇게 해서 생긴 직업병이다. 몸집을 보면 먹는 게 다 살로 가진 않는 것 같다. 차에서 시작해 차에서 끝나는 고된 나날이 넘치는 열량을 다 빼앗아가는 모양이다. 음식점과 음식점을 잇는 여행길을 내처 홀로 달려가다 보면 때로 육십평생 멀리 돌아온 길이 창 밖을 스쳐지나간다. 하루 5끼 식사가 부른 직업병 “푹 고아 뽀얀 기름이 뜬 사골국물 같은 삶이랄까. 굽이굽이 헤매왔지만 때마다 닥치는 일을 차근차근 하다 보니 저절로 내 인생이 우러났나 봅니다.” 김순경(58)씨가 사무실(02-266-5765)에 붙인 ‘길과 맛’이란 제목은 바로 그가 살아온 행로다. 길 따라 차를 달리며 맛 찾아 방방곡곡을 누볐다. 맛있는 음식, 좋은 음식점을 소개하는 글을 써온 그에게 팔도에 흩어져 있는 55만개 식당은 언젠가 한번 찾아가 맛을 봐야 할 실험실 같은 곳이다. 두산그룹 협찬을 받아 만든 인터넷 OB가이드 ‘한국의 음식명가’(www.obguide.com)엔 벌써 1030곳 음식점이 들어앉았다. 음식점마다 내력, 차림표, 특징, 약도, 사진, 기타사항 등이 올라 있어 누구나 지역, 음식 종류에 따라 클릭하면 식당 선택부터 예약까지 한걸음에 마칠 수 있다. “지난 2월에 개설한 뒤 한달에 80꼭지쯤 올립니다. 2000년까지 3천곳을 하기로 했으니, 적어도 하루 3∼4곳은 가야 하고 허탕치는 것까지 치면 5∼6곳, 그래서 5끼 먹는 날이 많습니다. 하지만 맘먹은 김에 20세기에 맛볼 수 있는 모든 음식을 이 사이트에 올릴 생각입니다.” 잘못 실은 집, 주인이 바뀌거나 음식내용이 달라진 집을 솎아내며 사이트를 꾸려가는 게 중노동이다. 1년이면 식당 정보가 꼼꼼하게 정리된 두툼한 수첩 20개가 쌓인다. 장거리 여행에서 돌아와도 그날 돌아본 음식점을 원고 상태로 얽어놓고 사진을 정리하다 보면 동이 터오기 일쑤다. 우리 음식을 지키겠다는 희생정신이 없으면 못할 일이지만 먼저 깨우친 사람이 앞서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또 새벽길로 나선다. “이젠 식당에 들어서면 첫눈에 감이 옵니다. 음식점 사람들은 가족 같아요. 오래 일한 식구라도 있으면 미주알고주알 주방일 듣느라 바쁜 하루 해가 더 빨리 저물죠. 만든 이 불러앉히고 얘기 나누며 먹으면 정말 제맛 납니다. 그럴 땐 대통령보다 더 행복해요.” 가팔랐던 현대사 때문에 100∼200년 긴 역사를 지닌 음식점이 없는 게 아쉽지만 몇십년씩 한집을 지키는 주방 숙수를 만났을 땐 친척을 만난 듯 기쁘다. 그는 수십년 한집에서 주방일을 본 ‘조선옥’ 김계화 할머니나 ‘마방집’ 한호순 할머니를 살아 있는 역사라고 불렀다. “두분 다 칠순이 넘었지만 꼭 어린아이 같이 맑은 눈에, 수줍음은 또 얼마나 타는지…. 그런 할머니 손에 묻혀 있는 한국 토종 솜씨를 발굴해 대중음식으로 살려가는 게 제 꿈입니다. 그 분들이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사람 입에 들어가는 걸 소홀히 하면 벌받는다는 거죠. 또 음식을 저울질이나 됫박질하며 만들면 안 된다는 건데 바로 손맛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음식 만드는 일을 신앙처럼 받들며 사는 그런 이들 만나면 먹을거리가 사람 살리는 거라는 말이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그가 음식점에 들어가 가장 중요하게 따지는 건 주인이 자리를 지키느냐 하는 점이다. 주인이 없는 집 음식은 열에 아홉은 엉터리다. 그 다음엔 주방장 손을 본다. 굵고 길고 두툼하고 부드러운 손을 가진 이면 음식 솜씨는 볼 것도 없다. 훌륭한 요리사는 손을 정성껏 가꾼다. “우리 음식문화가 참 빼어납니다. 사람들이 그걸 발굴할 생각은 잊고 외국 음식에만 매달리는 게 안타까워요. 예를 들어 전통 한정식이 음식 가짓수가 많다고 하는데 그게 다 뜻이 있습니다. 여럿이 둘러앉아 입맛따라, 그날 몸 상황따라 골라 먹으라는 배려죠. 젓갈만 해도 그래요. 칸막이 구실이랄까. 이것저것 먹고 나서 젓갈 한점 집어먹으면 입 안이 개운해지면서 싹 정리가 돼죠. 음식은 간을 맞춰 먹어야 한다는 옛 어른들 말씀, 허투루 흘리면 안 됩니다. 바로 거기에 생활철학이 듬뿍 배어 있습니다.” 김순경씨는 음식 칼럼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길을 걸어왔다. 그가 “사골국물처럼 우러난 삶”이라고 표현한 건 맛 찾아 흘러온 사람이기에 쓴 수사법만은 아니다. 그는 66년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로 들어갔다가 75년 동아사태 때 해직됐다. 아침에 일어나니 갈 곳이 없었다. 그가 처음 손댄 건 수퍼마켓이었다. 3·1빌딩 옆 골목이었는데, 서울에선 처음으로 도심에 선 대형 구멍가게였다. 종일 자리에 앉을 새 없이 손님이 들락거려 저녁이면 다리가 퉁퉁 부었다. 그래서 때려치우고 옛 화신백화점 뒤에서 막국수집을 했다. 정직하게 음식을 만드니까 늘 사람들로 북적댔다. 동네 음식점 주인들 친목모임 단골장소로도 유명했다. “왜 꼭 우리집이냐” 물었더니 “당신네 집 음식이면 믿고 먹을 수 있어서”라 했다. 목장도 해봤다. 이것저것 뒤집을 때마다 재산이 불어나는 게 아니라 뭉턱뭉턱 날아갔다. “다 처분하고 나니 딱 하나, 차가 남습디다. 그 무렵만 해도 서울에서 차 끌고다니는 사람이 드물었어요. 일 때문에 차를 일찍 장만한 편인데 그게 내 인생 밑천이 됐지요.” “ 음식총람 해마다 낼 겁니다” 사진은 기본이고, 차를 갖고 있으니 다음 일이 저절로 우러났다. 80년대 초, 한국에 자동차문화가 도래한 때였다. 자동차생활 월간 오토 등 막 창간하기 시작한 자동차잡지 여섯군데를 편집인으로 돌아다녔다. 그는 아무 준비없이 ‘마이 카’ 시대를 맞은 ‘오너 드라이버’들에게 자동차 여행지를 안내하고 먹을 만한 곳을 소개하는 글과 사진을 구성한 개척자였다. 그때부터 전국을 내 집처럼 떠돌았으니, 20여년 여행길에서 몸에 익은 살아 있는 지도가 그의 머릿속에 컴퓨터처럼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동차잡지 일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또 길 떠나보니 음식 칼럼니스트란 더 좋은 직업 겸 취미가 썩 나서더라며 그는 자신을 “운 좋은 사내”라고 했다.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음식문화, 이게 참 무서운 얘깁니다. 우리 고유의 음식기법을 간직하고 있는 숨겨진 분들 찾아내 하루빨리 그걸 전수받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제가 내년부터 음식총람 을 해마다 내려는 게, 그거나마 기록이 남으면 기초자료가 될까 해서지요.” 그는 앞으로 꼭 쓰고픈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제목도 벌써 정해놨다고 했다. 음식을 잘 먹으면 건강해지고 성공은 덤으로 얻어진다 . 그가 평생 우리 맛 찾아 길 떠돌며 얻은 음식철학이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조류연구가 홍순복 새 백정, 새와 사랑하다 그가 새까맣게 탄 얼굴에 흰 이를 드러내고 ‘싱긋’ 웃는 걸 보면 ‘아, 이이는 세상에서 좀 벗어나 있는 사람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홀로 있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온 몸에 고독이 배어 있는 것 같다. 큼직한 배낭을 멘 몸피는 강단있어 보이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은 거침없다. 하늘을 바라보는 눈이 빛나는 사나이, 조류학자 홍순복(41)씨는 발을 땅에 붙이고 있어도 그 정신만은 새와 함께 훨훨 날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 4월 말, 낙동강 하구 섬에 들어가 6월12일에 뭍으로 나왔습니다. 제가 마음을 두고 연구하고 있는 쇠제비갈매기들의 생태조사를 위한 거지요. 5월 중순 알을 낳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 산란기에 집중적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무인도 생활이란 게 뭐 있겠습니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관찰과 기록뿐, 남들이 들으면 재미있을 게 하나 없는 무덤덤하고 지루한 얘기뿐이지요.” 벌거숭이 섬 생활 달래주는 소주 그는 1년이면 몇달을 무인도에 들어가 산다. 낙동강 하구 삼각주에 형성된 크고 작은 모래톱이 그의 일터다. 일단 섬에 들어가면 그는 벌거숭이가 된다. 팬티만 입고 돌아다닐 때도 많다. 깜둥이처럼 타서 눈과 이만 하얗게 반짝이는 그가 새들과 종일 씨름한다. 쇠제비갈매기들이 허공에서 내지른 똥을 맞아 엉망이 된 허름한 잠바 하나를 걸치고 그는 종일 둥지를 돈다. “아침 7시부터 해질녘까지 하루 80여개 둥지를 조사합니다. 몸무게 달고 다리와 부리 길이를 잰 뒤 성장과정을 관찰하지요. 알 놓는 순서와 부화 순서에 따라 어떤 차이가 나는지, 또 지난해에 비해 어떤 변화가 있는지, 조사결과를 가지고 꼼꼼하게 데이터를 작성해 나갑니다. 그게 제 연구의 기초가 되는 거지요.” 쇠제비갈매기는 그 이름처럼 수직으로 내리꽂는 날렵한 몸동작이 일품인 낙동강변의 여름철새다. 수심이 얕고 먹이가 많은 낙동강을 찾아 날아와 한동안 쉬며 새끼를 낳은 뒤 가을엔 오스트레일리아 등 따뜻한 나라로 돌아간다. 80년대 말부터 낙동강 조류의 번식과 생태를 조사해온 그는 이제 쇠제비갈매기와 정이 폭 들어 떠나는 그들을 보면서 내년에 꼭 돌아오라고 인사한다. “옛날보다 종수가 훨씬 줄었어요. 인간들의 탐욕이 자연환경을 더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나쁜 조건을 견딜 수 있는 종은 개체수가 더 늘고, 그 악조건을 배겨내지 못한 종은 사라지는 거지요. 자연은 예외가 없습니다. 인간도 그 속에 살고 있는 겁니다. 새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우리 인간이란 종족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 세대가 걱정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가 한달여 살았던 곳은 버려진 김 채취선 위에 친 텐트다. 물이 들고 나기 때문에 배 위에 있어야 안전하다. 나무 한그루 없는 모래톱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들은 상상처럼 낭만적인 건 아니다. 1주일에 한 번 뭍에서 물과 식량을 공급받는 외엔 아무도 오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보슬비 오고 안개 낄 때가 제일 힙듭니다.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마음이 널을 뛰지요. 그럴 때 저를 위로해 주는 게 소줍니다. 사방에 사람 새끼 하나 안 보이는 무인도에서 홀로 앉아 소주 한잔 기울이는 멋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가 새와 친해진 건 고향 산청에서 보낸 어린시절부터다. 12살 나던 해, 큰형님 따라 새 잡으러 갔다가 박제 하는 걸 보고 거기에 푹 빠져버렸다. 가죽도 쓰고 속도 먹고, 버릴 게 하는 없는 새 박제는 꾸러기소년 홍순복에게 재미있고 생산적인 장난감이었다. 그는 곧 타고난 솜씨를 인정받아 ‘새 백정’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새만 붙들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지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어떤 종이든 박제하는 데는 도가 텄지요. 새를 한번 박제해 보면 그 새의 모든 것이 한눈에 잡힙니다. 지금 제가 그 몸 속까지 다 알 수 있는 게 한 200종 됩니다. 역시 표본을 떠봐야 그 새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자연사박물관을 만든다는 데 제대로 하려면 박제 전문가들 의견을 많이 들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대학 갈 때가 되자 그는 새와 전혀 관계없는 회계학을 전공으로 골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1년쯤 쉰 뒤였다. 형제는 많고 가난한 살림살이에, 졸업한 뒤 밥벌이를 확실히 할 수 있는 과를 선택해야 했다. 새 생각을 접어둔 그의 피를 다시 끓게 한 건 그의 박제 솜씨를 잘 아는 친구였다. 그 친구 손에 끌려 경성대 대학원에 들어간 그는 조류연구소 조교를 하며 어린시절의 꿈을 되살렸다. 94년 일본 홋카이도대학 지구환경과학대학원에 유학가 3년여 공부를 더 한 건 그의 일생을 조류연구가로 결정짓게 한 전환점이었다. 그가 쓴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낙동강 하구에서 쇠제비갈매기의 산란순서에 의한 번식상태’였다. “새들 생태를 조사하는 게 꼭 농사짓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1년에 딱 2달 산란기에 잘해야지 비가 오거나 여차해서 때를 놓치면 1년 농사 완전히 망치고 다음 해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약 아프기라도 해서 병원가면 그 해는 끝이지요. 그러니까 섬에 들어가면 잔뜩 긴장하게 돼요. 이 학문이야말로 시간 싸움, 체력 싸움, 인내력 싸움입니다.” 시간싸움, 체력싸움, 인내력싸움 올해도 45일 무인도 생활을 끝내고 뭍으로 나오니 몸무게가 3kg 줄고 온 몸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다시 육지 생활에 적응하는 데 한달 이상이 걸렸다. 가스등 하나 켜고 잠 못 들어 보낸 무수한 밤들, 먹을 물도 아까운 상황에서 머리도 못 감고 소금기 많은 바람을 맞으며 끈적끈적한 몸을 뒤척이던 외로운 나날들. 그래서 그는 한살이라도 더 적을 때 현장에 많이 들어가려고 기를 쓰고 있다. 나이 들면 가고 싶어도 몸이 못 따라 줄 일임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거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사서 하는 고생인데 자기가 좋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묵묵히 조사하다 보면 한것만큼 결과가 나오겠지요. 자연과학이란 참 정직한 학문이기에 좋아합니다.” 그는 지금 경북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자락 한 모퉁이에서 지난 여름 몸으로 버텨 거둬온 자료들을 분석하며 논문을 쓰느라 바쁘다. 그는 “현장에 가지 않고 연구실에 앉아 열정없이 말로만 떠드는 생태학자들을 경멸한다”고 말했다. 몸을 던져 새들과 함께 사는 무인도의 외로운 밤들, 그 침묵 속에서 영근 자연의 소리를 논문으로 얽어내며 평생 새들과 함께 사는 게 그의 꿈이다.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c.k.@mail.hani.cd.kr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내 멋대로, 죽을 때까지! 이미 유명해진 ‘자퇴 청소년 대표’…“영화의 바다에서 나만의 인생 시나리오 쓰겠다” (사진/“신경질이 하늘을 찌르고, 건방이 땅을 울려도 결코 내 기를 죽인 적이 없는” 남자친구와.) 그는 세상 잣대로 보면 ‘이상한 아이’였다. 또래들과 너무 달라서 문제아가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그 ‘다름’이 개성으로 추켜지는 게 아니라 말썽과 반항으로 불거졌다. 그래서 한발 한발 홀로 걸어가는 길이 늘 아프고 외로웠다. 사회가 꼼짝 못하게 박아놓은 ‘사다리타기’를 거부했기에, 떨어지고 날아오르려는 어지럼 속에서 중심을 잡느라 힘겨웠다. 색안경을 쓴 어른들이 유별나다고 찍은 그에게 내리꽂는 눈초리가 너무 따가워서 마음앓이가 심한 그에게 아버지까지 “네 멋대로 해라”고 화를 내셨다. 그 말씀은 그대로 책 제목이 되었다. 짧다면 짧은 열여덟 생을 돌아본 네 멋대로 해라 (한겨레신문사 출판부 펴냄)를 내놓고 김현진(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은 “창피해요, 비린내나죠?”라고 웃었다. 자유, 그러나 외로움 “책 첫머리를 쓰는 게 참 힘들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매일 매맞고 다니던 그때를 돌이키려니까 고통스러웠고 열도 받치고요. 제가 선생님들한테 일찌감치 ‘나쁜 아이’라고 따돌림을 당한 건 아마도 굴복하지 않는 독립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 전 교사나 학교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가는 학생이 아니었거든요. 차라리 ‘학교는 죽었다’고, 그 감옥 같은 곳을 박차고 나왔죠. 그뒤 한번도 교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오던 그때의 내 결정을 후회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자유를 얻은 대신 그는 큰 외로움에 시달렸다. 고등학교 1학년 초 자퇴한 뒤 그는 학생이란 이름에 포함돼 있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또한 “공부하는 화석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흔히 범생이라 불리는 친구에게 제가 물었어요. 넌 꿈이 뭐니. 하루 15시간 학교에 감금돼 있는 그 애가 하는 말이 ‘고등학교 졸업하는 거’였어요. 제가 학교를 그만둔 건 고등학교에서 보내는 3년간의 인생이 오로지 대학만을 위한 것이라는 이 당위를 누구나 긍정하는 데 대한 반발 때문이었어요. 나는 내 발로 걸어나왔지만 누렇게 뜬 얼굴로 왔다갔다하는 잠재적 학업 중퇴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는 ‘자퇴 청소년 대표’로 꽤 유명해졌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그만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는 뉴스거리가 되었고,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한 기업이 자본을 댄 웹진 ‘네가진’ 편집장을 했고 영상원에 합격했으며, 청소년위원회 부위윈장이다. 이 모든 이름 앞에 무슨 훈장처럼 붙는 ‘최연소’와 ‘자퇴 경력’이 그는 우스울 뿐이다. “우리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이 늦되는 걸 못봐주는 나쁜 버릇이 있어요. 뭐든지 빨리빨리, 각 개인이 지닌 소질은 다 뭉개버리고 정해진 학습단계를 착착 남보다 빨리 밟아올라가는 것만 챙기죠. 그러니까 좋은 학교는 우리 애가 얼마나 행복하게 청소년기를 보내고 제 꿈을 키울 수 있는 곳이냐가 아니라 무조건 공부 세게 시켜서 좋은 대학 넣어주는 곳이죠. 그럼 차라리 모든 학교를 입시학원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그는 개척교회 목사였던 아버지 덕에 3살 때부터 문자중독증에 걸렸다. 그게 현진이의 병이라면 병이었다. 유년주일학교를 맡았던 아버지는 매일 외동딸 앞에서 큰 소리로 동화를 읽어주고 온갖 사물들 이름을 불러주었다. 5살 꼬마에게 시를 써보라고 부추겼고, 7살 어린아이를 영화관에 데려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읽는 성경에 눈이 익은 현진이는 한글 자막을 줄줄 읽었고 그만 영화에 빠져버렸다. ‘씨네 키드’ 현진이의 탄생이었다. “불이 탁 꺼지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네모난 화면이 팍 뜨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건 마술이었고, 제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었죠. 11살 때 벌써 고전영화들을 줄줄이 봤는데 그래도 그땐 책이 더 좋았어요. 지금도 화장실에서 보는 책, 식탁에서 보는 책, 버스 속에서 보는 책이 다 따로에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남대문 시장 맞은편 남창동은 다닥다닥 하청집과 빨간 알전구가 비치던 여인숙과 지저분한 점술집들이 늘어서 있는 동네였다. “칼처럼 예민했던” 열세살 소녀는 화려한 명동을 가로질러 지하도 구석에 있는 서점에 콕 처박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는 조숙한 아이였다. 그때 벌써 우울했다. “다른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고 엄지공주를 꿈꾸며 살 때”, 그는 “여관 골목의 입술이 새빨간 여자들과 나날이 누렇게 말라가는 방글라데시 시다들을 보며 ‘인생이 아름답다는 놈이 있으면 내 손으로 없애주지’”라고 결심했다. “화장실이 따로 있는 집에서 살기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됐어요. 학교를 그만두고도 남들처럼 학원에 다닌 게 아니라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했죠. ‘홀로’ 모든 걸 생각하고 모든 걸 해나가야 하는 것, 아마도 그게 김현진이란 인간을 만든 힘일 거예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들어갈 때도 그는 스스로 결정한 길이었기에 무모했다. 신경성 천식으로 시원찮은 몸이며 전형료 8만5천원을 다시 아버지에게서 타낼 자신이 없어서 그는 면접장에 들어가서 면접위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떨어지면 이 학교와 당신들 손해다.” “나 떨어지면 당신들 손해다” “사람들은 참 겁이 많아요. 아주 작은 일들에서 겁이 많지요. 똑같은 학교생활 거쳐, 판에 박은 직장 잡고, 때 되면 결혼한 뒤, 남들처럼 행복하게 그럭저럭 살았다, 뭐 이런 시나리오를 쓰려고 그렇게 안달복달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나요. 난 아니에요. 그건 너무 심심해요. 나 내 멋대로, 나만이 사는 방법으로 살 거예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큰다잖아요. 늘 부끄러워하면서 끊임없이 성장할 거예요.” “그 다음엔?” 그는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그는 “모르겠어요”란 말을 잘 썼는데 정말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알아보고 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진심으로 이 말을 쓴다고 했다. 지금 그에겐 영화가 전부다. 7∼8살 많은 오빠, 언니들과 견줘도 그 열정만큼은 자신있다. ‘나쁜 학교’를 겁없이 뛰쳐나온 그 용기로 그는 21세기 한국영화 한귀퉁이를 번쩍 쳐들겠단다.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화가 김원숙씨 “북녁도 우리처럼…” 유진 벨 가문의 며느리로 북한 돕기에 한몫… 자기를 비우는 행복을 화폭에 담는다 그가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사는 게 얼마나 재미있어요” 할라치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행복이 전염되는 것 같다. “난 그림 그릴 게 없다고 고민하는 작가들 보면 미안해요. 할 일이 너무 많고, 매일같이 일이 일어나고, 이렇게 재미있고, 그래서 그려야 할 것들이 넘쳐나는 생활…. 이거 인생의 축복이에요.” 화가 김원숙(45)씨는 스스로를 “눈으로 밥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에겐 살아가면서 보고 겪는 모든 일들이 그림이 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엔 사람이 있고 얘기가 흐르고 마음이 넘친다. “그림은 하여튼 쉬워야 해요”라고 그는 몇번씩 강조했다. 사는 것이 고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그렇지만 재밌잖아. 절대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때로 미치고 환장하겠지만 그래도.” 그는 그냥 그 삶의 느낌들을 기록한다. (사진/맨발에 망치를 들고 쾅쾅 못질을 해서 건 자기 그림 앞에 선 김원숙씨.) 북한 방문 위해 국적을 바꾸다 즐거운 것만 기억해서 그리고, 뭐든 돌아서면 잘 잊어버리는 성격인 그가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 북한 풍경이다. 미국 유학시절에 만난 남편 스티브 린튼(48)을 따라 90년 처음 북한에 갔을 때, 그는 “어머, 우리가 살고 있었네”라고 놀랐다. 한 소설가가 썼던 책 제목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우리’다. “우리랑 똑같은 거예요. 남자들 화딱지 내는 것도 똑같고, 여자들 고생하는 것도 똑같고. 그래서 갈수록 친숙해졌어요. 지내 보니까 우리보다 훨씬 전통사회, 조선 말기 모습에 더 가깝다는 건 느꼈지만 어쩜 그렇게 우리하고 같아요?” 남편은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중 한명인 유진 벨 목사를 증조부로 해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순천결핵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인애자(79)씨, 동생이 한국에서 유진 벨 재단을 이끄는 의사 인요한씨다. 이들은 유진 벨 목사의 한국 선교 100돌을 기념해 지난 95년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보냈다. 이 일을 위해 남편은 34차례나 북한을 다녀왔고 앞으로도 그들이 거부하지 않는 한 계속 갈 것이다. 북한돕기에 생을 건듯 보이는 이들 형제, 자기가 백인 남성이라는 걸 아예 모르고 사는 남편과 시동생을 보면서 그는 “이 남자들이 하는 일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신나는 일이며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한 뒤에도 바꾸지 않았던 국적을 바꿨다. 북한에 가기 위해서였다. “북한에 다녀오면 오랫동안 우울해져요. 아주 힘들죠. 어떨 때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아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 북한에 갔다가 남한에 오면 더 힘들어요. 북한 소식을 전하면 마치 방 안에서 유령을 본 것 같이 나를 보는 것 같아요. 더구나 잠수함이니 미사일 얘기가 나오면 이성이 마비되나봐요. 난 북한돕기가 오로지 민간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도움은 필요없어요. ‘이 굶어 죽어가는 소녀를 보십시오’ 사진 한번 보고 돈 몇푼 보내는 값싼 동정은 북한 주민들을 오히려 망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꾸준한 접촉이 쌓여 이뤄지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9월23일부터 10월18일까지 서울 학고재와 아트스페이스 서울, 그리고 조선일보미술관에서 ‘비우는 행복-김원숙의 흑백그림들’전을 여는 그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비우는 행복’을 느끼고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를 기르고 밥을 하고 걸레를 빨듯, 똑같은 농도의 마음으로 북한을 다녀온 그의 체험이 ‘비우는’, 그 ‘행복’을 그린 그림들 속에 담겨 있다. “북한을 다녀보면 막 자라고 있는 옥수수풀 하나를 놓고도 그 옆에서 침을 흘리고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걸 보며 나는 왜 여기에 서 있는가 생각해요. 미술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난 왜 그리는가 스스로에게 물으며 학교가 참 시시하다고 생각했는데 난 북한에 가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그 중요한 질문의 답을 보고 왔어요.” 이번 서울 전시를 위해 한국에 오면서 그들 부부는 김포공항에서 잠시 헤어졌다. 남편은 북한으로 들어가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탔다. 며칠 뒤 다시 만날 때까지 그들은 직접 통화할 수 없는 남북의 벽을 미국에 있는 아들 인반석(25)을 중간기지로 해 뛰어넘을 것이다. 낯선 체험의 고통 그리고 깨달음 유진 벨 재단(02-336-8461) 사람들이 벌이는 북한돕기는 아주 실질적인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영양실조로 가장 많이 앓고 있는 결핵을 퇴치하는 일종의 의료사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북한에 널리 퍼져 있는 결핵에 대해 북한 정부가 아무 대책을 못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3병원’이라 부르는 13개 도립병원에는 결핵으로 수용돼 있는 환자들이 많은데 이들을 제대로 검사할 엑스레이 한대 없는 것이 지금 북한 실정이다. 이들이 북한에 보내는 건 결핵약과 그 독한 약을 견딜 수 있게 위와 몸을 보호해주는 영양식인 콩, 객담 검사를 할 수 있는 현미경과 슬라이드, 그리고 요양소마다 세울 비닐 온실 한채다. 현재까지 엑스레이를 4대 보냈다. 비닐하우스에서 신선한 야채를 길러먹도록 씨도 함께 넣는다. 절대 돈을 보내지는 않는다. 그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할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남편이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남의 나라가 와서 분단은 했지만 남의 나라 손으로 짜깁기는 못한다.” 그는 한국의 젊은 지성인들이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 사람들을 도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기를 ‘비우는 것’, 거기에 길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좋은 생각, 그거 하나뿐!" 잡지인 정용철…'밑바닥 좋은님'들의 감동 물결 그는 아무리 뜯어봐도 20만부 넘게 나가는 잡지 발행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누추한’ 사무실 때문도 아니고 ‘보잘것없는’ 경력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그것도 모자라 “잘한다고만 하지 말고 못하는 것, 부족한 점이 많다 써달라”고 사정까지 했다. 못나 보여도 잘 써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은 봤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 얼굴로 봐서 빈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수줍어하고 불안해했다. 그는 자꾸 이름이 나고, 그렇게 알려지면서 스스로 지게 될 짐이 혹시라도 자신이 지켜온 잡지 정신에 흠을 낼까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평범한 들녘, 맑은 자연처럼… “대단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이 책을 가지고 사람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야심도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밝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이 잡지를 읽고 좋은 생각을 했다면 만족한다고 썼지요. 잡지 표지나 속 사진이 주로 이름없는 들꽃이나 평범한 들녘이 나간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 잡지가 말없는 자연처럼 사람들 사이에 그저 그렇게 있기를 바란 거지요.” 월간 좋은생각 을 내는 정용철(46)씨는 몇달 전, 독자에게서 온 편지 한통을 읽고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뜻을 이뤘다. 좋은생각 을 읽고 내가 좋은 생각을 했다. 나 한사람을 변화시켰으니 된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그는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수인이었다. 한달이면 전국 곳곳에서 날아오는 편지며 엽서가 500여통. 수시로 그를 찾는 전화나 직접 찾아오는 독자들 때문에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 그가 ‘좋은님’이라고 부르는 이 독자들이 살아 있는 필자들이다. 그들이 형제나 이웃에게 들려주는 듯한 그 사연들은 다음달 좋은생각 이곳저곳을 빼곡 채운다. 번지르르한 수식어 하나 없고, 기교나 겉치레라곤 눈씻고 찾아도 없는 그 슴슴한 시래깃국 같은 글들을 귀하게 받들어 그는 한쪽 한쪽 좋은생각 을 만든다. “물론 잡지 전체 틀을 잡고 사진을 찍는 건 접니다. 글을 쓰기 위해 어떤 때는 하늘을 오래오래 바라보았고, 어느 날은 동네 시장을 돌아다녔고, 때로는 하루종일 음악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좋은생각 앞머리에 실리는 ‘잔잔한 물가’는 수십번 고쳐씁니다. 내 속에서 정말로 울려나오는 소리 외에는 다 버립니다. 내 몸에서 느껴 뽑아내지 않은 말은 죽은 말입니다. 딴건 몰라도 진짜 열심히 했다는 생각은 들어요. 죽는 순간까지 이 잡지 붙들고 있다 갈 텐테, 마지막에 이 책을 두고 떠날 때 무슨 생각 떠오를까, 하면 역시 ‘나는 열심히 했다’ 이 세마디가 아닐까 싶어요.” 그가 쓰는 글은 쉽다. 심심하다 싶을 만큼 밋밋하다. 좋은생각 99년 1월호 ‘잔잔한 물가’ 난에 쓴 ‘나는 잘될 거야’는 많은 독자들이 읽고 좋았다는 편지와 전화를 준 글인데 요즘같이 웬만한 자극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별것 아닌 소재를 무덤덤하게 다룬 글을 그렇게 좋아한다는 건 신기하다. “아마도 제가 살아온 그대로 정직하게 잡지를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처럼 바보같이 살아온 사람들이 이 땅에 그만큼 많다는 뜻이겠지요. 남해 작은 어촌,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10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얘가 학교를 가나, 군대를 가나, 장가를 가나, 무심한 집안에서 이리저리 구르며 살아온 사람 말입니다.” 사실 이 잡지를 만들면서 제일 많이 변한 사람은 정용철씨 자신이다. 대기업 홍보실에서 사보를 만들다가 생산직 여사원들이 통 책 읽을 새가 없는 걸 보고는 화장실 갈 짬에라도 잠깐 읽으라고 짧고 좋은 글을 실은 잡지 한권을 만들자고 나섰던 게 이 고생길이었다. 형님으로 모시던 선배 한분이 늘 “좋은 생각만 하고 삽시다”라고 입에 달고 다니던 데서 옳다구나, 제목을 정했지만 그뒤는 막막했다. “91년 1월호를 무가지로 400부 찍었습니다. 그리곤 사정이 생겨 쉬었지요. 그무렵 그만그만한 교양지들이 하나둘 무너지며 문을 닫던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망한다고 다들 말렸지요. 폭로성 기사나 야한 얘기를 싣는 연예지들만 살아남았습니다. 갑자기 불끈 이런 생각이 솟더군요. 그래, ‘좋은 생각’은 안 되고 ‘나쁜 생각’은 되는 세상에서 내가 한번 ‘좋은 생각’이 된다는 걸 보여주자.” 92년 8월에 재창간을 했을 때 정말 죽을 똥을 쌌다. 통장에서 100원짜리까지 닥닥 긁어 쓰던 때, 점심시간이면 같이 사무실 쓰던 사람들 보기 민망해서 건물 주변을 빙빙 돌다 들어왔던 때도 많았다. 그는 더이상 내려갈 곳 없는 그 밑바닥에서, 한꺼풀 자기자신을 벗어던지고 좋은생각 이 뭘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느꼈다. 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았고, 소박하고 평범했던 부모님과 이웃들을 떠올렸다.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걸 고생이라 생각 안 했던 사람들, 세상과 삶을 그저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사람들… 도시로 몰려나온 많은 이들이 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어렵다는 시절에 잡지가 더 잘 나가는 걸 보며 “요즈음에 와서야 ‘좋은 생각’이 뭔지,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고 말했다. “고향에선 좋은생각 을 덮으세요” “그저 막연히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잡지 성격을 잡았는데 이제 와서야 뒤늦게 그 뜻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이런 잡지류가 많이 나오고 잘 팔리는 사회적 의미도 깨닫고 있어요. 어떤 분들은 잡지가 너무 이상적이다, 좋은 쪽만 드러내는 건 일종의 편식 아니냐 하지만, 다른 쪽 말하는 책들은 또 많으니까 일종의 역할분담이라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다만 비슷비슷한 잡지들이 쏟아져나오는 건 좀 걱정이 되네요. 다 좋지만 독창성있게 삶 전체를 바라보는 지평을 넓혀가야지….” 그는 독자들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좋은생각 을 읽으며 고향에 갈 좋은님들에게 그는 오히려 잡지를 덮으라고 부탁했다. “고향에 가서는 그저 즐겁게 놀다 오세요. 좋은생각 도 멀리 던지고, 복잡해지지 말고, 단순하게, 좋은님들 바로 곁에 지금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세요. 그게 좋은 생각입니다.”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아나운서 강재형 ‘걸어다니는 표준말’이 된 일벌레의 운명… 우리말 나들이 PD로도 맹활약 (사진/아나운서로서 PD를 한 건 그가 처음이다. 우리말 나들이 는 주말을 제외한 매일 오후 6시25분 방송된다.) 그는 문화방송 아나운서실에서 ‘강철인간’이라 불린다. 밤을 꼬박 새고 난 다음날도 아침부터 멀쩡하게 마이크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보고 동료들은 혀를 내둘렀다. “걸어다니는 표준말이 되겠다”고 자신의 입으로 다짐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피곤을 못 느끼는” 일벌레가 되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제가 입사 면접 볼 때 왜 영문학도가 아나운서 직을 지망했느냐는 물음에 ‘운명입니다’ 한마디를 덜컥 했습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걸어다니는 표준말이 되겠다고 한 건데 그게 정말 운명이 돼버렸어요.” 아나운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아나운서 강재형(36)씨는 직업을 떠나서도 참 말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다. 그의 말마따나 “말을 잘하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고”, 때로 도가 지나쳐서 방송중 말을 더듬을 때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욕 한마디를 안 해 봤고, 학교에서는 말 하기 전에 미리 마음속에서 논지를 세워 한번 가다듬고 난 뒤 입을 열 정도였다. 그가 매일 밤 10시55분 스포츠 하이라이트 시간에 산뜻한 티셔츠 차림으로 경쾌하게 프로를 진행하는 걸 보는 시청자들은 그가 속으로 얼마나 말을 연습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말에 대한 고민으로 날이 지고 샙니다. 우리말을 제대로 잘하고 잘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걸 하루하루 더 절감하며 사는 셈입니다. 요즈음 한 소설가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란 얘기를 꺼냈는데 전 그게 몸톰과 꼬리가 바뀐 논지라고 생각합니다. 내 새끼가 얼마나 우리말 바르게 하는지 신경쓰기보다 조기 영어교육 시켜서 영어 유창하게 하는 데만 정신을 쏟는다면 그건 나라 망하는 일이죠. 말엔 얼이 담겨 있잖아요.” 그는 주말을 뺀 매일 오후 6시25분 방송되는 우리말 나들이 를 만드는 PD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로서 PD를 한 건 그가 처음이다. 젊은 후배들은 조금만 초과근무하면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그는 날밤을 세워야 하는 이 일을 자청해서 즐겁게 맡았다. 누가 뭐래도 아나운서가 할 수 있는 일은 첫째도, 둘째도 우리말을 바로잡는 것, 그 준엄한 사명을 지켜가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아나운서도 사람이니까 어떻게 하면 방송은 덜 하고 유명해지나에 관심들이 많죠. 전 후배들이 들어오면 바로 그 욕망의 지점에서부터 문제제기를 합니다. 아나운서란 뭐하는 집단인가, 아나운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아나운서는 방송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되는가.” 그는 지난 11년을 스스로 ‘아나운서 철학’이라 부르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애써왔다. 아나운서는 말을 하는 사람, 그 시대에 가장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그가 펴낸 애무하는 아나운서 는 우리말에 목숨을 건 강재형 아나운서의 속내를 읽게 하는 책이었다. 87년 문화방송에 입사했을 때, 그는 합격자 7명 가운데 청일점이었다. 백지연 정혜정 김은주 앵커들이 동기였다. 여자 동료들이 초고속으로 ‘잘 나갈 때’, 그는 뒤에 남아 자료실 붙박이가 되어 공부를 했다. 방송이론서, 방송언어, 방송진행 같은 책을 하루 내내 읽었다. 선배들에겐 미안한 얘기였지만 고민 안 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아나운서 일을 하는 풍토가 싫었다. “방송언어를 깊이 파고들어가니까 저절로 ‘민족주의자’가 되더라고요. 누가 뭐래도 우리말에 대해 나름의 ‘눈이’ 트이는 걸 느꼈어요. 우리말 공부를 하지 않고 표준말도 모르면서 번지르르한 거죽만으로 승부하려드는 게 속상했어요. 연예인이나 탤런트로 변해가고 있는 아나운서의 숙명을 개탄하면서도 말 제대로 하는 데는 관심들이 없었죠. 그래서 그동안 공부한 것을 혼자만 알고 있는 건 아깝다, 일을 저지르자, 결심했죠.” 그가 저지른 일이란 93년 7월, 갓 배운 컴퓨터 작업으로 16절 갱지에 찍어낸 우리말 나들이 란 인쇄물을 아나운서실에 붙인 것이었다. 방송에서 흔히 틀리게 쓰고 있는 우리말 등을 바로 고치고 함께 생각하자고 부추기는 내용이었다. 그 초판은 무반응으로 끝났지만 그는 뚝심으로 2호를 만들었고, 그때부터 반응이 왔다. 내친 김에 95년에는 각 지역방송 아나운서들을 모아 우리말 세미나를 열었고, 97년에는 해외 우리말 방송 교류를 중국 연변 TV방송과 텄다. 그런 일련의 작업들이 뿌리가 돼 태어난 것이 1분짜리 우리말 나들이 프로였다. 97년 12월8일 첫 방송이 나가던 날을 그는 잊지 못한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 눈가를 적시던 그 짭조름한 눈물을 그는 누가 보든 말든 그냥 흐르게 놔두었다. “방송이 ‘아’하면 애들도 ‘아’합니다” “전부 다 맨주먹으로 하나씩 배워가며 만들었어요. 그림 만들기도 힘들고, 또 우선 우리부터 반성하자는 뜻에서 자체 프로그램 필름을 가지고 잘못 쓰인 말들을 먼저 잡아냈죠. 우리말은 MBC가 확실히 지킨다는 믿음을 드리고 싶어요. 인터체인지를 나들목으로, 고수부지를 둔치로 바꾼 건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가끔 다른 방송 아나운서들도 우리가 고친 말을 쓰는 걸 들을 때, 혼자 흐뭇해하면서 ‘역시 넌 우리말 환자야’하며 웃죠. 끝이 안 보이는 길이지만 제 스스로 자승자박한 것이고, 또 나라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지 하는 믿음으로 버텨가는 겁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80년대 노래는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다. 이 대목을 부를 때면 지금도 목이 콱 막히면서 눈물이 핑 돈다. 아나운서는 그가 택한 길이었고, 운명이었다. 목숨바쳐 일할만한 값어치를 발견했기에 그는 죽을 때까지 아나운서 강재형으로 가려 한다. “방송에서 ‘아’하면 애들이 다 ‘아’하고 ‘어’하면 ‘어’합니다. 그만큼 당대의 언어생활에 방송이 끼치는 영향이 크지요. 내 아들, 딸이 커서 ‘아버지가 방송에서 가르치신 대로 우리말을 배웠다’고 한마디 해주면 그걸로 이 세상 왔다간 흔적을 남겼다고 행복할 겁니다.”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일본 대중음악가 가스가 강산에와 손잡은 동양의 ‘에릭 클랩턴’… 동서양 음악을 뒤섞고 싶어라 그가 입을 열자 ‘재미’란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재미있어야죠” “재미없는 건 못해요” “오호, 그거 재미있겠네요” “재미나게 살아야죠”…… 삶이 재미없으면 못살 것처럼 보이는 그는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재미’를 향해 타오르는 그 마음을 전염시키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가스가 하찌 히로후미(春日博文). ‘히로부미’라고 발음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히로부미 아니에요. 히로후미에요”라고 펄쩍 뛰었다. 이등박문이 식민지 한국에 남긴 아픔을 그가 알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박힌 긴 머리를 질끈 하나로 묶은 그는 “나는 때로 ‘내가 한국인이었다면’하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일본보다 한국이 편해요”라고도 했다. 하루 6∼7시간씩 익혔던 농악 (사진/‘강산에와 예비군’과 함께 한 가스가. 그는 요즘은 이들과의 작업 때문에 1년이면 몇달씩 한국에서 지낸다.) 우리 대중음악 바닥에서 흔히 ‘하찌 아저씨’라고 불리는 그는 올해 마흔넷된 기타리스트다. 길쭉하고 재주많게 생긴 날렵한 손가락이 인상적인 그는 ‘동양의 에릭 클랩턴’이라 불릴 만큼 타고난 음악솜씨를 자랑하는 연주가 겸 작곡가다. 도쿄에 있는 도라타누 레코드 대표이고, 세계를 떠돌며 마음맞는 음악인들과 한 무대에 서거나 음반작업을 하는 자유인으로서 그는 타고난 코스모폴리턴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한국을 제집처럼 드나들게 된 건 ‘사물놀이’에 홀렸기 때문이다. 그는 13년 전 일본에서 김덕수 사물놀이패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85년에 도쿄 공연을 온 사물놀이를 만났어요. 그 전까지는 불고기랑 김치밖에 몰랐어요.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 식민지 역사가 뭔지 전혀 아는 게 없었지요. 그런데 하룻밤 꽹과리와 장구소리에 취하고 나니 당장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광수 선생 소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작은 재떨이 같은 놋쇠를 한손으로 뚜드리는데 거기서 어떻게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나는지 알아봐야겠다는 맘뿐이었죠.” 도쿄에 장구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배웠다. 1년쯤 장구채를 잡고 나니 한국에 나가고 싶은 열망이 더 강렬해졌다. 알음알음으로 평택에 사는 최은창 선생을 소개받았다. “너라면 한달 안에 장구를 뒤집을 거라는” 소리에 앞뒤 돌아보지 않고 87년 한국에 나왔다. 최 선생 집에 들어가 하루 6∼7시간씩 농악을 익혔다. 농촌 생활 속에 살아있는 농악을 배우다 보니, 극장 무대에 갇혀 있는 사물놀이가 조미료 친 식당음식마냥 맛이 없었다. “내가 미쳤던 건 사물이 불러내는 그 ‘비트’였어요. 사람 몸을 뒤흔드는 고동이랄까. 말하자면 피를 끓게 하는 맥,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뒤흔드는 진동이었지요. 평택에 가서 한 마을, 한 노동공동체가 삶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 피돌기를 본 겁니다. 그에 비하면 돈 받고 무대 위에서 뚜드리는 건 좀 재미가 떨어집디다.”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가 일본사람이란 걸 잊게 된다. 일본말을 번역한 듯한 일본어투 한국말을 모나게 발음하는 일본사람들과 그는 다르다. 제대로 배운 한국말에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국술을 좋아라 마시고, 한국담배를 즐겨 피우고, 남들이 “한국사람 같아요”라고 말하면 “으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그는 “전생에 한국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국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비자 문제가 해결이 안 됐어요. 평택을 떠나면서 그 문제를 푸는 방법을 연구했지요. 이왕 내 마음을 뒤흔든 한국소리를 더 알기 위해 한국말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들어가 1년쯤 공부했다.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사귀게 됐고, 그러저러한 인연으로 알게 된 이가 가수 강산에씨다. 그가 요즈음 1년이면 몇달씩 한국에 나오는 까닭이 그와 나누는 작업 때문이다. 강산에 3집 앨범 삐따기 와 4집 연어 제작에 음악감독으로 참가했고, 지금은 ‘강산에와 예비군’에 ‘소집’돼 라이브 무대에 서고 있는 그는 우리 대중음악계가 들으면 가슴아플 소리를 애정섞인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나라는 도대체 계획이란 게 없더군요. 공연이고 앨범 제작이고 며칠새 뚝딱 해치우는 거예요. 적어도 1년쯤 시간을 두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의견을 나누고 뜸을 들이는 일본과는 너무 풍토가 달라 처음엔 좀 당황했지요. 다음 공연장소로 떠나면서 핸드폰으로 공연이 열리는지 확인하는 걸 보고 참 놀랐습니다. 라이브 무대에선 악기가 조율이 제대로 됐는지 튕겨볼 시간조차 안 주고, 분장실이 있나, 비가 오면 머리를 가릴 천장이 있나, 참 기가 막혔죠. 물론 지금은 그 ‘한국적인’ 관행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또 그 인간미에 길들여졌긴 했지만 말이죠.” 그는 원래 북을 두드리던 드러머였다. 그가 기타를 치면서도 타악기에 더 정신을 파는 건 10대 시절 음악을 시작하며 피가 끓었던 타악에 대한 본능 때문이다. 록음악을 듣고 자란 그는 한국 사물놀이와 아프리카 북소리를 사랑한다. 강산에 앨범에 타악이 매력을 발산하는 건 하찌의 공력이다. “60년대 후반 일본을 휩쓸던 ‘스쿨 밴드’를 결성하며 드러머로 출발했어요. 그 무렵부터 일한 기억이 없어요. 재밌게 놀았다는 기억뿐입니다. 수입이 바닥을 기어도 워낙 결핍이 몸에 밴지라,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었죠. 그게 편했어요. 대신 어디든 내 맘과 맞고 재미있는 팀이 있으면 달려가 함께 연주하고 놀았습니다. 그거면 대만족이죠.” 92년 일본에서 열린 한·일연출가회의 때 재일동포 음악가들과 만든 ‘도쿄비빔밥 클럽’도 ‘재미있어서’ 몇년을 즐겁게 몰려다녔다. 그가 연주하는 현장에 간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음악을 즐기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무대를 휘어잡는 아름다운 40대, 민족과 국경을 넘어 저 좋은 음악을 부여안고 춤추는 이 아저씨 기타리스트는 일본대중음악 개방이나 한·일관계 같은 정치색있는 단어는 집어치우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순수한 ‘음악’ 얘기를 하자고 했다. “왜 서양음악을 베끼나요” “내가 보기에 한국사람들이 일본사람들보다 훨씬 음악성도 뛰어나고 음악을 즐길 줄 알아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 서양음악 베끼고 그거 따라가느라 바쁜데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신나고 재미있는 한국 전통음악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서양음악과 섞으면 참 재미있을 텐데…. 서양음악 하는 사람은 장구 모르고 또 꽹과리 잘 치는 사람은 서양음악을 모르니.” 그는 좋아하는 모든 음악을 뒤섞어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인간이 기계에 맞춰가는 음악은 앞으로 몇년 못갈 거라며 컴퓨터음악이 싫증나면 다시 사람 호흡이 살아있는 음악으로 돌아올 텐데 그때 한국 전통음악은 가능성이 많은 음악이라고 평했다. “사람들 몸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말하듯, 걷듯 하는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요. 내가 내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좋은 것 아닐까요. 내 음악은 ‘재밌게 살자’고 외치는 내 내면의 전달수단입니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세상을 향해 선 골키퍼! 한국정치의 허상을 온몸으로 겪은 민완 진행자 “사랑과 행복의 씨앗 뿌리고 싶다” (사진/시사평론가 정관용씨) 그는 깔끔하고 말쑥하다. 면도질 잘된 미끈한 얼굴엔 팽팽한 선이 각져 있다. 깡마른 몸피도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허술함이 없어서 보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팍 차고 튀어나갈 듯 온몸을 빳빳하게 세운 그는 요즘 ‘한국에서 가장 칼 같은 사람’으로 분초를 다투며 산다. “새벽부터 생방송에 나가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늘 곤두서 있을 수밖에 없죠. 사회 전반을 향해 서 있는 골키퍼랄까요. 뭐 하나 놓치는 것 없이 다 받아내고 그걸 완벽하게 소화해 한마디로 응축해내야 하기에 눈, 귀, 코, 입, 뭐 하나 느슨할 수가 없습니다. 기본에 충실하자는 생각이지만 또 한편으론 가랑비에 옷 젖듯 하자는 마음입니다.” 프로듀서들이 함께 일하고픈 진행자 시사평론가 정관용(37)씨는 ‘긴장한 인생’을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살고 있나” 한숨도 토해봤지만, “아 이걸 평생 할 수도 있겠다” 확신한 건 최근 들어서다. 그는 빠른 시간에 널리 낮이 익은 MC로 꼽힌다. 89년 CBS ‘시사자키’ 정치시평으로 일을 시작해 각 방송사를 두루 거친 뒤 지금은 EBS 라디오 ‘정보광장’과 KBS 위성 2TV ‘세계의 헤드라인’을 맡고 있고, KBS 2TV ‘좋은 아침입니다’에서 시사초점을 매일 진행한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오가며 오디오형과 비디오형 진행자로 두루 경력을 쌓은 그는 개편철이면 프로듀서들이 같이 일하고 싶어하는 진행자로 첫손 꼽는 시사평론가가 됐다. “경력이 복잡한 게 무기라면 무기죠. 늘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뭘까, 부닥치며 살아온 터라 순발력은 저절로 몸에 익었고 물불 가리는 법도 나이에 비해선 일찍 터득한 편입니다. 전 시사평론가를 기자와 교수 중간쯤에 놓습니다. 사람들이 뭘 궁금해 하는지 한발 앞서 배우고 그걸 전해주는 것, 거기다 해석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통신과 신문들을 샅샅이 뒤져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나름대로 기준을 세우고 정리할 때면 항상 머리가 타닥타닥 튀면서 복잡해진다. 신문 제대로 잘 읽기로 소문난 그가 주말이면 신문, 뉴스 근처에도 안 가는 건 평일에 이잡듯 뒤지는 이 사회 만화경에 어지간히 물리기 때문인 듯하다. “가끔 아주 답답함을 느낍니다. 방송인이야 남이 쓴 걸 읽는 사람이지만 시사평론가는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내 말을 하고 싶은데 여전히 닫힌 언로를 보면 신경이 곤두서죠. 정치 현실과 매일 줄타기를 한다고 가정해보세요. 피곤하죠. 맘대로 말좀 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꽤 꼬불탕거리는 길을 돌아왔다. 81학번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86년부터 96년까지 10년 동안 다섯 군데 직장을 왔다갔다했다. 평균 2년에 한번 꼴로 사표를 던졌다는 얘기다. 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한국사회과학연구소 편집실장, 나라정책연구원 기획실장을 돈 뒤 93년 3월부터 95년 2월까지 김영삼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으로 일했고, 여의도연구소 기획위원을 거쳐 96년부터 프리랜서 시사평론가로 뛰었다. 숨가쁜 20대와 30대를 보낸 그는 “아직 40이 안 됐다는 게 대중에겐 좀 놀랄 일인 모양”이라고 웃었다. “정치 현장에 가까이 가봤기에 일찍 늙었다랄까, 그런 점이 있죠. 교문사회와 정무 행정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는 미리 터잡고 있던 이들이 어디서 굴러온 돌인가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전 오히려 편한 마음으로 훼방만 놓다 나왔어요. 철저하게 용병 입장에서 일만 하고 나가겠다는 선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때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이 ‘재야 출신 행정관의 반성’이란 제목으로 저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게 다 당시 김정남 수석을 잡으려는 곁다리 표적 겨냥이었죠. 물론 80년대 수많은 논쟁이 유행에 편승해 흥분한 점이 있고, 제가 우리 사회에 대해 발표한 글들도 과도한 개념 규정이 너무 많았다는 걸 인정합니다. 대중이 보기엔 너무 어렵고 학계가 수용하기엔 얄팍하고 안 맞았죠. 어쨌든 한국 정치의 허상과 실상, 한국 보수우익의 진면목을 명확히 본 셈인데 그걸 값진 재산이라고 칩니다. 시사평론가로 현실에 굵은 선을 나름대로 그을 수 있는 데는 그때 경험도 큰 몫을 합니다.” 그는 자신들 또래 세대가 ‘386’으로 불리는 걸 몹시 싫어했다. 왜 다 다른 사람, 다른 인생인데 하나로 뭉뚱그려 똑같은 색깔로 분류하느냐는 불만이다. 일부 정치지망생들을 위해 들러리 서는 기분이라며 이런 부분은 여론에 휩쓸리지 말고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뼈있는 말을 던졌다. 386, 허망한 껍데기를 경계한다 “사실 386이라는 게 언론에서 만들어 부풀린 구석이 있어요. 저는 30대 우리 나이가 자기 영역에서 탄탄하게 실력을 쌓으면서 할 일을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종적 연계보다는 오히려 동료들과 횡적 연계를 튼튼히 해야 할 때죠. 정치 현장으로 뛰어들기엔 아직 좀 이르지 않은가 하는 감입니다. 그런데 섣불리 ‘젊은 피’니 신세대 정치권이니 하는 바람에 휩쓸려 자기 설 자리가 흔들리고 나면 몇년 안 가 결국 허망한 껍데기만 남지 않겠느냐는 거죠. 과거에 운동권이냐 도서관파였느냐, 이런 건 지금 와서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느냐를 더 눈여겨봐야죠.” 그는 시사평론이 앞으로 더 널리 필요한 분야이고, 그런 점에서 자신이 영 안 들어맞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믿음을 요즘 들어 두텁게 하고 있다. 몇사람 선배가 개척하고 있는 이 분야는 바닥이 너무 빤해서 일찍 지칠 수 있다는 점을 조심한다는 그는, “하는 사람이 편하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방송철학을, 그 함정을 피하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 “사랑하고 행복해지는 사회를 가꾸는 시사평론가가 되고 싶어요. 지난 몇 십년 우리 사회와 사람들을 지배해온 성공 신화를 무너뜨리고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법, 행복해지는 법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린 서로 사랑하고 행복해지는 데 투자가 너무 없었어요. 날마다 떠드는 말 속에 사랑과 행복 씨앗을 널리 퍼트릴래요.”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삶 . 박재규 경남대 총장 “북한연구 우리에게 맡겨라” 그는 대한민국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독일쯤에 태어났을 것이다. 북한을 향해 뿜어내는 그 열정을 보면 분단국 연구에 쏠리는 타고난 피를 느낄 수 있다. 그는 거침없이 “북한 연구 투자에 일생 승부수를 던졌다”고 말했다. 72년 극동문제연구소를 세웠고, 올해엔 북한대학원 문을 열었다. 자나깨나 북한을 생각한다. 금강산 유람선이 떠가고 잠수정이 떠오르던 1998년 한반도 앞바다를 그만큼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본 이도 없을 게다. 그는 늘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북한을 올해 처음 다녀왔다. 북한 연구에 바친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감사한 한해였다. “9월26일부터 10월3일까지 8일 동안 시험 치르는 심정으로 북한을 돌아봤습니다. 30년 연구한 걸 확인하러 간 셈이죠. 온 몸과 마음을 열어놓고 머릿속 예상 답안에 동그라미와 가위표를 쳤습니다. 틀린 것도 많았고, 잘못 이해한 부분도 꽤 됐습니다. 남한에 앉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예상보다 수정해야 할 게 많았어요. 그걸 50년을 헤어져 달리 살아온 ‘틈’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 지나면서 우울해지고 비관도 됐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한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많이 기다려야 한다.” “통일, 참아야 하느니라” 박재규(54) 경남대 총장은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해온 북한을 현지에 가서 두눈 뜨고 보고 나서 오히려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30년은 기초 닦은 셈 치기로 했다. 21세기 우리나라를 위해 다시 출발선에 선 심정이다. 그 한결같음은 꼭 30년 전 미국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북한연구자로 첫 걸음을 내딛던 때 같다. (사진/지난 9월 북한에 갔을 때, 소년궁전에서 만난 북한 어린이가 그에게 붓글씨 한점을 써주었다. ‘내나라 좋다’ 글 한폭에 큰 뜻이 담겨 있다.)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러 갔는데 영국 사회주의 경제학자로 유명한 피터 와일스 교수가 신나게 소련 사회사를 강의하고 나더니 ‘넌 한국에서 왔으니까 네가 당면하고 있는 북한 연구를 해봐라’하고는 과제를 내주는 거예요. 굉장히 당황했죠. 그때가 언젭니까. 60년대 말, 우리는 북한을 북괴라 불렀습니다. 북한은 빨갱이 나라고, 김일성은 수괴였습니다. 도대체 북한에 대한 자료 하나도 본 일이 없던 때였죠. 유엔 도서관에 가서 북한에 관한 건 모조리 긁어모아 읽고 당시 뉴욕에 있던 중공, 소련 전문서점을 뒤져 겨우 리포트를 냈습니다.” 이때 그는 자기 인생을 결정했다. 아무도 안 한다고 망설일 필요는 없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 낸 책이 북한사회의 구조적 분석 이었다. 그리곤 1972년에 경남대학교에 극동문제연구소 간판을 걸었다. 아는 이들이 다 말렸다. 왜 하필이면 그 힘든 길을 가느냐고 했다. “지금 극동문제연구소 출신 360여명이 전국 각 대학 교수나 연구위원으로 일합니다. 만일 연구소를 세우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부족한 북한 연구자들을 어디서 키웠겠습니까. 일반 회원이 1천여명 되는 건 우리 연구소만의 자랑거립니다. 북한대학원을 만든 것도 이런 오랜 경험이 쌓여 저절로 우러난 겁니다. 왜 우리나라 문제를 외국 연구자들 손을 빌리고 그들 시각에 의존합니까. 이제 우리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도해가야죠. 전문가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는 북한과 관련한 문제가 생기면 국내외 어디서든 극동문제연구소로 달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더 책임감을 느끼는 요즘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수위건 운전기사건 누구라도 북한 전문가여야 한다고 늘 직원들 귀가 닳도록 이른다. 박 총장에겐 북한대학원에 쏠리는 외국인들 관심도 큰힘이 된다. 일본 요미우리 특파원이 대학원 입학을 신청했고, 한국을 연구하는 해외 학자나 학생들의 문의도 많다. 이달엔 워싱턴 전략문제연구소팀들이 찾아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원들과 비공개 워크숍을 열었다. 그가 이들에게 언제든지 연구실과 숙소를 내주고 맘껏 공부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건 미래를 위해서다. 강인덕 통일부 장관, 임동원 외교안보수석 등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를 강사로 모셔 학생들에게 현실감각을 익히게 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지원자들이 지금 어디서 북한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연구한 걸 무기로 미래에 어디서 북한관련 일을 할 것인가, 이 두가지가 대학원 지원생들을 뽑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세상 참 많이 변했습니다. 요즈음 북한 연구자들은 행복한 겁니다. 나같은 ‘냉전 세대’가 어디 꿈이나 꿨던 일입니까. 현대북한연구 란 반년간 연구지를 창간한 것도 이런 과거의 한이 맺혀 벌인 일입니다. 이제껏 나왔던 북한관련 연구지는 대북정책을 근간으로 한 반공지나 정보지 수준이었습니다. 제대로 북한사회를 보여줄 수 있는 정확한 연구지, 편견에 사로잡힌 한 부분만 다룬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북한을 분석한 연구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가정법의 북한관’을 연습하자 그는 북에서 잠수정이 와도 지금 금강호를 멈춰선 안 된다고 했다. 너무 오래 기다린 이 배는 남북경협의 결실이자 남북관계 정상화의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금강호를 단순한 유람선으로 보면 안 된다. 금강호는 남북관계가 21세기 한민족이 새로운 미래를 여느냐, 아니면 주저앉느냐를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그는 강조했다. “이제 한세기를 접고 다시 새 세기가 옵니다. 변화의 바람이 느껴집니다. 북한 연구자로서 새해 희망이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이렇게 남북 사이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던 두터운 장벽이 무너지고 그 오솔길로 난 디딤돌이 쌓여가니, 그 길이 계속 이어져 남북 정상회담이든 뭐든 실제로 개방을 기대할 수 있는 큰 길로 행진하는 겁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저쪽 입장에 서서 그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때라고 했다. 사회 각 분야별로 “내가 북한 사람이라면…”하는 ‘가정법의 북한관’을 절실한 마음으로 연습하자고 그는 말했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쓰레기 캐는 게 통일이야!” 스님 원공 20년간 내처 걸어온 염력, 백두대간 정화 위해 바친다 그는 절을 받지 않는다. “나를 만나려면 천배하라” 했던 여느 스님과 달리 일어나 손잡고 맞는다. 절은 죽은 사람에게나 하는 것, 젊은 것이 늙은 어른께 절 받는 건 중밖에 없단다. “절에 가면 주지라고 있지. 근데 내가 보기엔 ‘받지’만 있는 게야. 중들이 신도들한테 받기만 하면서 왜 ‘주지’라 하나. 우리 절집이 참 인색해. 요새 중들 생일잔치가 열리는데 중놈이 생일이 어딨어. 집 나오면 끝이지. 아또, 살아 있으면 365일 생일이고 죽으면 기일 아닌가. 절에서 중노릇하는 것이 똑 산적짓이야. 절집이 한창 시끌시끌했던 거 다 투명하지 못해서 그래. 회계를 왜 승려가 하나. 중은 회계 안 배우잖아. 돈 만지면 세속생활 연장되는 거지. 중이 돈 안 만지면 절집 다 잘돼. 요새는 어떻게 된 게 머리 깎고 절집 가면 과정생략하고 바로 중이야. 스님 냄새가 없어.” ‘산에 도라지 심는 사람들’ 원공 스님(55)에게 가는 길은 문이 없다. 그가 머물고 있는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또한 아무나 들어설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사람을 가리진 않지만, 오가는 이 마음을 읽는다. “어서 오게.” 시원스레 손을 맞는 스님은 걸쩍지근한 육두문자로 좌중 배꼽을 쏙 뽑아놓고 난 뒤, “너 오늘 잘 만났다. 쓰레기나 캐러 가자”며 당장 자루를 지워 길로 나선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농업 빼곤 다 남 속여먹는 거야. 인간들이 다 게을러터졌어. 1회용 많이 쓰는 여자하곤 이혼해. 제 새끼 똥도 안 보려는 동물은 사람뿐이야. 짐승들이 모성이 더 진해. 우리가 흔히 ‘개새끼’라고 욕하는데 개들은 가만히 앉아 있다고 욕먹는 거야. 많이 먹으면 돼지 같다 하지. 사실 걔들은 과식 안 해. 제일 못난 동물이 다른 동물에게 오물 튀기는 격이라니까.”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스님 계율은 살아 움직이는 수도법이다. 수녀도, 신부도 이 방에 오면 쓰레기 캐는 중생이다. 한방 가득 말씀 들으러 온 보살들을 가리키며 스님은 “쓰레기 부대야” 했다. “쓰레기 줍고 캐는 게 다 하심(下心) 키우는 거야. ‘나는 별것 아니다’하면 나를 내세울 필요가 없는 거지. 어제도 마을 사람들하고 종일 한 50자루 캤는데 산꼭대기서 쓰레기 줍다 보면 어디나 쓰레기라 밤에 잠이 안 와. 백두대간도 사람들 드나든 지 10년쯤 됐으니 쓰레기가 많을 거야. 이번에 백두대간 종주하며 묵은 쓰레기들 걷어내야지. 민족정기가 쓰레기에 묻히면 되겠나.” 원공 스님은 지난 20년 ‘걷는 스님’으로 이름이 났다. 탈 것을 일체 물리치고 걸어서만 다니는 스님 뜻은 그 염력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한민족 동질성 회복 기원’ ‘조국통일 1천만 이산가족 만남기원’ ‘천만 이산가족 고향 자유왕래 발원’ 등 그가 하루 일백리를 걸으며 몸과 마음을 순례도보기도에 바친 건 모두 조국통일 한지점으로 모인다. 지난 79년, 6년 면벽 수행을 끝낸 뒤 내처 걷기 시작해 전국은 물론 중국까지 걸어다녔는데, 이번에도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백두대간을 쓰레기 줍고 도라지 심으며 걸어서 123일 동안 종주하겠다는 것이다. 이 종주가 중요한 건 북한 어린이를 돕자는 스님 뜻이 앞에 붙었기 때문이다. “아는 이로부터 북한 애들이 쓰레기를 주워먹고 산다는 소릴 들었어. 나야 라디오도 안 듣고 텔레비전도 안 보니까 그동안 몰랐지. 기왕에 통일되라고 걸어다녔으니까 굶어죽는 아이들 돕는 것도 중요한 도보 목적이 되겠지. 백두산에서 마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가는 데까지 가다가 못가게 하면 돌아오는 거지. 내 접근방법은 그런 거야. 못가게 하니 더 가고 싶어.” 3월25일 지리산 천왕봉에서 걷기 시작해 7월25일께 마칠 이 백두대간 종주는 ‘산에 도라지 심는 사람들’(02-823-0014)과 함께 한다. 피를 맑게 하는 우리 약초 도라지 심는 일을 5년여 해온 스님이 옛날엔 지천으로 피어 있던 도라지꽃을 백두대간 가는 길마다 뿌리는 것이다. 쓰레기는 줍는 데로 내려보낼 계획인데 지역인들이 나와 같이 하면 좋겠다는 게 스님 뜻이다. 그래야 앞으로 생명력있는 지역 행사로 살아남을 것이라는 얘기다. 몸이 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시일반’이란 예금주(우체국 013045-0102143)로 북한 아이들에게 보낼 마음을 전하면 된다. “처음엔 한 10년만 걸으며 기도하면 남북 상황이 좋아지지 않을까 했지. 근데 이젠 내 몸뚱이 하나 끌고가는 것도 힘들어. 사람 걸어다닐 길도 없고. ‘피는 사상보다 진하다’ 이런 생각으로 해왔는데. 내가 시켜서 가는 길하고 남이 시켜서 가는 길하곤 다르지.” 스님은 도보여행을 끝내는 곳으로 산을 즐겨 잡는다. 제주도 한라산 정상이나 지리산 속에 들면 마음으로 제사를 지낸다. 4·3 제주민중항쟁으로, 빨치산으로 이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을 돌이켜보며 그가 걷는 길에서 만난 촌부 촌로가 곧 하늘이요 부처 아닌가 생각한다. “여행이 살아 있는 선생이야. 사람이 칠십 먹으면 다 이야기보따릴세. 그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풀어내는 구수한 입말을 듣다보면 생활 속에서 저절로 익어 영근 우리말이 얼마나 간결하고 쓰임새있고 자연스러운가 새삼 놀라게 되지.” “전구 키면 달이 빛을 잃어” 요즘 보수주의자들이 용을 쓰는데 스님 의견은 어떠시냐고 여쭸더니 “이보게, 그 부산가면 보수동이라고 있어. 거기가 꼴보수지”라고 슬쩍 딴청으로 돌아간다. 말뜻과 별개로 전국 고을 지명이나 지리, 풍속에 대한 스님 지식은 그야말로 ‘다시 태어난 김정호’ 뺨치는 것이어서 처음 무문관에 든 이들은 이름과 성씨, 고향을 밝히는 순간 긴 지리학 강의와 풍속지 여행에 말려들게 마련이다. 무문관에 들었던 이들이 우렁우렁한 스님 목소리와 함께 또하나 잊을 수 없는 건 그 정갈한 방 풍경이다. 스님이 머무는 네평반쯤 되는 방은 투박한 소나무로 대충 얽은 평상뿐 아무것도 없다. “전구 키면 달이 빛을 잃어” 전기도 안 쓴다. 우리나라에서 한방울도 안 나는 기름은 안 쓰겠다는 뜻으로 연탄짐을 져날라 겨울을 난다. 밥도 직접 짓고, 입고 벗을 두벌 옷 빨래도 스님 손으로 한다. ‘무소유’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텅 빈 원공 스님 방에 잠시 머물면 된다. “천국이니 내세니들 찾는데 언제 딴 세상 가서 또 무얼 하겠나.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에서도 새는 법. 여기서 문제를 해결해야지.”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젊은이여 내 책을 덮어라” 역사학자 강만길 (사진/북한과 중국이 맞닿은 도문에 선 역사학자.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이 빚어내는 조화가 21세기 세계를 움직이는 큰힘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를 생각하면 저절로 ‘분단시대’란 말이 떠오른다. 20년 전 그가 낸 책 이름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은 그의 이마에 ‘분단시대의 역사학자’란 머리띠를 둘러주었다.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 와 함께 분단시대… 는 80년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이 ‘그 시대’를 바르게 살아내기 위해 읽어야 했던 필독서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민족사적 과제가 분단극복이라는 생각에서 썼지만 너무 반향이 커서 부담감을 느꼈다”는 그는 그 간판을 달고서 살아온 평생이 ‘분단 극복 사학’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구라파와 중국에 주목 “해방 후를 분단시대라 이름붙였으면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이론을 세워야 했을 텐데 그게 나 혼자 힘으로 어렵단 말예요. 어쨌든 금강호가 떠가고, 예전 같으면 당장 냉각됐을 법한 일이 일어나도 교류가 지속되니 바람직한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햇볕정책이니, 포용정책이니 하는 말은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한쪽이 좀 밑지는 것 같아. 이름 정리를 해야지요. 남북이 다같이 흡수통일 안 하겠다 했으니 그럼 뭐냐. 난 그걸 ‘대등통일’이라고 불러요. 한반도 문제가 늘 ‘주변’이 문제였는데 이제 남북이 동등한 주체로 나서 주변 조건을 우리쪽에 유리하게끔 끌고 가야지. 우리 역량이 이제 웬만하니까 21세기엔 우리가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강만길(66) 교수는 강단을 떠나는 중이다. 32년을 봉직했던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2월에 정년퇴임한다. 제자들이 학교 근처 돈암동 주택가에 모여 꾸려가던 공부방에 ‘여사서실’(黎史書室)이란 문패를 달고 들어가 같이 있기로 했다. 여사는 그의 호다. 역사의 ‘여명’과 역사의 ‘평민성’을 아우른 뜻을 담았다. “남들은 정년쇼크다 뭐다 해서 안 좋다는데 난 오히려 홀가분해요. 80년에 해직교수가 됐을 때 이미 한번 연습을 했거든. 책읽고 여행가고 놀고, 해방감을 맘껏 즐길 참이오.” 그는 후련해보였다. 몇년 새 중국나들이가 잦았다. 왜 중국에 자주 가느냐 물었더니 “볼 게 많아서”란 짧은 답이 돌아왔다. 역사학자로서, 동양학하는 사람으로서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은 중국이다. ‘유니텔 가상대학’에서 강의한 걸 묶은 20세기 한국사 강의 , 60년대 러시아 한인들의 시베리아 강제이주사 길을 따라가본 회상의 열차를 타고 가 곧 책으로 나올 예정이지만 그외에 책 쓸 계획은 아직 없다. 우선 열심히 놀겠다고 말할 때 이 근엄한 역사학자 얼굴에는 잠시 개구쟁이 소년의 얼굴이 겹쳤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 그가 ‘좌와 우를 넘어’ 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나 궁금하다고 했다. “역사를 공부한 입장에선 그래도 전 지구에서 구라파가 제일 앞서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럽공동체가 뜨는 것도 대단하고. 구라파 주요 나라들이 다 지금 사회민주주의가 세력을 쥐고 있는 것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또하나 내가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곳이 중국입니다. 사회주의에 시장경제를 접목한 이 나라 중국이 21세기에 어떻게 나갈 것인가, 그런 문제들을 차분히 읽어봐야겠어요.” 그는 진지하고 깐깐한 스승으로 유명했다. 새벽이면 하루 2시간씩 수유리 집에서 대동문까지 오르내리는 등산으로 다져진 건강이 휴강없는 열강의 밑바탕이었다. “역사 강의는 진검승부랄까. 한마디로 허튼 소리 하면 안 되는 엄숙한 시간입니다. 역사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이에요. 대상이 인간 아닙니까. 사람들 생활을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해야지. 그런 목적의식이 없다면 야담사화와 뭐 다를 게 있겠소.” 그는 바로 역사학자의 그 목적의식을 가지고 한세기가 저물고 새 세기가 밝는 걸 기다리고 있다. “21세기를 얼마나 지켜볼 수 있을까”했지만 새로운 밀레니엄 얘기가 나오자 그는 눈을 반짝였다. “한해가 바뀌는 1월1일 하루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그 새 날을 중시하며 뭔가 새 각오를 다집니까. 그게 중요해요. 역사를 발전시키려는 새 다짐, 그게 시간을 나누는 제일 큰 마디라 할 세기를 맞으니 얼마나 큼직하겠습니까. 20세기는 인류사 전체로 봐서 너무 불행한 세기였잖아요. 21세기는 상당히 다른 세기가 될 거라고 나는 봅니다. 민족국가의 벽을 넘어서 지역공동체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차원의 평화공동체가 꿈틀대는 걸 느낍니다. 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낙관적 역사학잡니다. 그런 내 눈에 21세기는 인류애와 욕망이 얽혀 다같이 잘 살려는 세기, 훨씬 전진하는 세기가 될 것으로 내다보입니다.” 구세대가 깔고앉았던 멍석을 치우자 그래서 그는 신세대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했다. 금세기 냉전의 마지막 지역 한반도가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지역공동체 결성을 쥐고 있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7천만 한민족 손에 세계사적 문제가 걸려 있다며 크게 웃었다. “한국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민족문제 해결에 주역이 되면 통일 가능성은 커요. 기성세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피흘리고 싸웠던 과거 때문에 북한이 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신세대는 북한이 동족으로 보인다 말이야. 이게 얼마나 큰 차입니까”하고 그는 되물었다. “어른이 뭡니까. 뒷세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젊은이들이 내 책을 읽고 나랑 같은 생각을 하면 이 나라는 망하지요. 우리 세대가 깔고 앉아 있던 분단시대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야지요.” 그는 “나를 밟고 넘어서라”고 했다. “그래야 역사는 분단을 넘어 다시 하나가 되면서 전진할 것”이라고 노학자는 붉어진 얼굴을 들었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말, 말, 말 좀 사세요” 세계 최고의 영업사원 꿈꾸는 ‘간첩단 두목’ 출신, 뚝심 하나로 승부한다 (사진/‘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 7층에 있는 편집국에서 창간 14돌을 맞는 말 식구들과 함께 한 박충렬씨.) 그는 자신을 사장이 아니라 ‘책장사’라고 불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가 살아남는 생존력은 결국 판매와 영업에 달렸기에 장사를 잘해야겠다는 맘 하나로 사장 취임 1년을 넘겼다고 했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시사잡지사가 살아남기 위해선 ‘열심히 팔아야 한다, 못 팔면 죽는다’는 절박함으로 밀고 나왔다. 기자를 해본 적도 없고 필명을 날린 건 더더욱 아니었던 그가 사장만큼은 할 수 있다고 덤벼들었던 건 이 오기 하나였다. 산전수전 모진 풍파 다 겪고난 그는 지금도 우는 소리 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 사형선고 받아봤어?” “너 사형선고 받아봤어?” “95년 전국연합 사무차장을 하고 있을 때 뜬금없이 부여간첩 김동식 사건에 말려들어 하루아침에 ‘간첩단 두목’이 됐어요. 안기부에 연행된 뒤 50여일이 지나서야 전국연합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는데 그 편지가 말 96년 2월호에 실렸고 ‘사람이 무섭고 세상이 무섭다’는 사연이 말 사람들에게 인상이 깊었나봐요. 무죄로 풀려난 뒤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던 저에게 ‘편안하게 같이 일합시다’고 손을 내밀었어요. 그래서 뭐든지 하겠다는 맘으로 들어왔죠.” (사진/ 말 사장 박충렬) 박충렬(39·월간 말 사장)씨는 요즈음 구두 밑창이 닳도록 사람들을 만난다. 아침에 한웅큼 들고나간 명함이 해질녘이면 모자랄 지경이다. “사장이 왜 이러고 돌아다녀…”하는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창간 14돌을 맞는 말 에 처음으로 ‘의견축하광고’를 받아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도 그였다. 그렇다고 오라는 곳이 있는 것도, 딱히 찾아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딘가 사람이 몰려있을 법한 건물을 찾아가 맨 윗층부터 죽 훑고 내려오는 게 그 나름의 방법이다. 하루 10시간 넘게 사람들을 만나길 며칠째, 그는 기운이 솟는다고 했다. 어려운 시절을 헤쳐나온 말 에 대한 사람들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뭔가 노력하는 게 보인다, 끈질기게 파헤치는 모습이 보기좋다, 이런 소리 들으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죠. 지난해 신문이며 잡지 시장이 얼마나 안 좋았습니까. 그런데 우리 잡지는 연말부터 하락 추세가 멈추고 분위기가 반전되더란 말입니다. 정기독자 신청도 늘고, 가판 상황도 좋아지고. 물론 아직도 비판하는 소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하면 뭔가 되겠다는 확신이 선 건 큰 소득입니다.” 처음에 기획실장으로 입사했던 그는 차라리 독자사업팀장을 시켜달라고 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광고, 판매, 정기독자 가운데 빠른 시간 안에 결실을 볼 수 있는 분야는 정기독자뿐이었다. 별동부대를 조직해 1년 만에 6천명 정기구독자를 늘렸다. 사무실과 편집국을 번듯한 불교방송국 빌딩으로 옮긴 것도 그였다. 말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에서 일하긴 처음”이라며 웃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 멀었다고 구두끈을 조인다. 흑자경영을 내걸었던 1년 전 약속을 아직 못 지켰기 때문이다. “망하지는 않겠다는 확신을 얻은 건 큰 소득이지만 거기엔 월급을 반밖에 못 가져가고도 열심히 뛴 우리 기자들과 사원들 피땀이 서려 있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오히려 기자수를 늘리고 종이질을 높이고 컬러 쪽수도 늘렸어요. 판단은 독자가 내려주시겠지요.” 그는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언론매체가 시대소명과 독자 뜻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그날로 망해버리든지 없어져버리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말 이 월간지 하나로 14년을 버텨왔다는 건 이 둘에 다 충실했던 증거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우리 회사는 뭐 거창한 이론이나 노선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집단은 아래위 할 것없이 정신과 기상이 살아 있어요. 누구한테든 눌리지 않고 옳으면 무차별 그 길로 밀고 나가는 뚝심 같은 것, 기(氣)라고나 할까요. 남들이 보면 뻐세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린 이 지조 하나로 색깔을 분명하게 하고 밀고 나갑니다.” 그는 평범한 시골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면사무소 공무원이어서 70년대엔 새마을운동도 열심히 하고 박정희 대통령도 존경했다. 그러다가 80년에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하면서 세상 보는 눈이 바뀌었다. 대학 선배에게서 받은 한권의 책,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 가 그를 뒤집어놓았다. 신입생 시절, 미팅을 수십번 한 이유 “ 전환시대의 논리 가 맞다면 난 여태껏 박정희에게 속아 살아온 거더란 말입니다. 내가 뭘 해야 할지 알고 나니까 더이상 지식은 필요없다는 생각이 듭디다. 이제 행동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습게도 신입생 시절 두어달 만에 미팅만 마흔번이 넘게 했다니까요. 하루에도 서너탕을 뛰었는데 빨리 전환시대… 얘기를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는 전·논 전도사를 자임하며 5·18을 맞았고 자연스레 서클에 들어갔으며 데모를 했고 2학년 말 무기정학, 3학년 1학기 지도휴학으로 학교를 떠났다. 공장활동과 야학을 거쳐 노동운동판에서 뛰었는데 그무렵 삶을 뒤바꾸어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83년 어느 날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5일 동안 고문을 받았어요. 죽은 박종철과 비슷한 경우였는데 녹화사업으로 99% 물증을 확보해놓고 마지막 말 한마디를 듣자는 거였어요. 물고문, 전기고문 등 별 고문을 다 받았는데 풀려나고 보니 내가 정신이상자가 돼가는구나 하는 자각이 오더군요. 마음을 비우고 거기에 저항했습니다. 그뒤에도 ‘깃발 사건’이며 반제동맹사건으로 몇 차례 곤욕을 치렀지만 겁이 사라지니까 오히려 담대해질 수 있었어요.” 그는 “80년대라는 시대가 힘을 길러줬다”고 믿는다. 다른 세대보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파고들며 살았던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말 5월호 별책부록 21세기 한국의 희망 386리더 는 그런 박 사장 마음이 편집국 기자들과 맞아떨어져 나온 작품이다. “시대를 맘대로 만들 수는 없다, 태어나서 머리 굵도록 살아야지. 80년대 경험을 오로지 정치적으로만 채색하는 것, 패배주의적 시각으로만 접근하는 것을 다 거부한다”는 것이 그이 생각이다. 그는 ‘과정에 충실하자’ 주의자다. 지금, 오늘,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친다. “왕년에 내가…” 같은 과거업적주의자를 굉장히 싫어하고 “내 40대엔…”처럼 미래허풍주의자도 믿지 않는다. 그날 그날을 똑바로 산다. 사농공상, 연공서열, 관존민비, 남존여비를 이 사회에서 없애고 싶은 네 가지 악습으로 든 그는 미래에 능력있는 ‘영업맨’이 되고 싶다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영업사원이 되는 것, 살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물건을 팔 수 있는 외판원이 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리곤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지역 시민단체를 꾸리는 게 또하나 소원이죠. 물건 많이 팔고 돌아와 저녁에 지역 사람들과 모임 열고 이런저런 얘기하며 오손도손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화가 주재환 ‘다리 밑’에서 꼬나보다 그는 평생 화가였지만, 육십 되도록 개인전 한번 열지 못했다. 73년에 광화문에 있는 한 술집에 아는 이들 모아놓고 사진 붙이기(포토콜라주) 50여점 보여준 것이 개인전이란 이름을 달았던 유일한 것이었다. “화가들 이력에 개인전 수십회에 단체전 수백회 출품이라고 써넣은 거 보면 있지, 꼭 총비행 출격시간 기록 같아”하고 그는 깔깔 웃었다. 당뇨 합병증으로 엉망이 된 이가 갈그락거리는 그 웃음소리가 유쾌하게 들렸다. 1960년에 홍익대 서양화과에 들어갔다가 중퇴한 뒤 야경꾼, 행상, 외판원, 출판 편집인 등으로 흘러다니느라 미술계 인사들보다는 ‘사회 사람들’을 더 많이 사귄 그였다. 그는 그 다양한 만남을 “다리 밑에서 놀았다”라고 표현했는데, 그 와중에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체질이 미술판과는 크게 달라져버렸어”라고도 했다. 아마도 그가 이제껏 대한민국에 출현했던 화가들과 크게 다른 까닭이 이 “다리 밑에서 뒹군” 한 시절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할 뿐이다. “내가 장로야 장로…” 그 짐작은 그와 만나 5분쯤 이야기하고 나면 어렴풋이 손이나 눈으로 만져진다. 크지 않은 몸피 뒤로 큼지막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걸 보게 되는데, 그 풍경은 이를테면 코딱지만한 집들이 다닥다닥 늘어선 산동네거나 중생들이 비칠비칠 걸어가는 희뿌연 도시 변두리다. 그가 80년대 민중미술판에서 가장 중심에 있으면서 또한 변방에 서 있던 자유인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다리 밑 풍경’ 때문이었을 듯싶다. 화가 주재환(59)씨를 만나기 위해 전화를 넣고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는 흔해빠진 인사말을 건넸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장로 아냐 장로. 장시간 노는 사람. 시간이 많으니까 그림 생각도 많아지고. 종일 그림 그리고 살아.” 80년대까지 이런저런 일들, 입에 풀칠하는 일로 바빴던 그가 차분하게 작업실이라고 차려놓고 들어앉은 것이 90년께였다. 제기동에 있는 옥탑에서 3년, 신사동 다락방에서 3년, 일산 밤가시 마을로 이사온 뒤 이제 4년여가 돼간다. 그는 “이왕 그림 그리겠다 했으니까 한번은 해야겠지. 회갑 전엔 개인전 열겠다 마음은 먹었는데…. 안 하면 배신자지”라면서도 “주책이지, 쑥스럽지 뭐”라고 뒷말을 달았다. 병을 다스리느라 애를 쓰지만 “끊으면 불안해서 한대 피고, 안 마시다가도 얼굴 보면 한잔 안 마실 수 없다”는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얘기로 사람 속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 오후 5시 아냐. 해가 설핏 졌어. 과연 내가 젊었을 때 바라던 미술에 대한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꿈틀은 해보고 가야겠지. 시간이 휙휙 가고 달력 넘어가는 게 느껴져. 남들은 새벽에 다들 한바탕씩 하고 났는데 난…. 그래도 7시까지 아직 2시간은 남았으니까…. 사람이 사실은 후회가 많은 거 같아. 말 못할 게 쌓이잖아. 그걸 유화로 푸는 거야. 옛날에 이런 일 있었지, 하면서 붓질 한번으로 탁 찍어내고, 또 한번 찍어가며 하나씩 반추하고, 그러다 보면 썩은 물 채로 받쳐 맑은 물 걸러내는 것 같아. 이렇게 석양을 보내는 것도 복받은 거지 뭐. 7시 이후 세계는 나도 몰라.” 우리 미술판에서 화가 주재환이란 이름은 낯설고도 특이하다. 아는 이는 알고 모르는 이는 모른다. 80년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 창립전에 내놓은 몬드리안 호텔 이나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가 보여준 그 도저한 ‘현실 뒤집기’는 전설로 전해지는 걸작이 됐다. 그뒤 현발 동인전이나 민족미술협의회 기념전에 삐죽 내미는 ‘주재환 선생’ 작품은 그가 즐겨 ‘후라이’라고 말하는 발랄한 익살로 나이값을 뛰어넘는 울림을 던지고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시대 추이 같기도 한데 지금은 다들 밀실에 숨어 있는 거 같아. 자기 스스로를 가둬두고 소외와 고독 어쩌구 하면서 자기 중얼거림에 빠져있는 것 말야. 소통을 거부해서 되갔어. 전부다 자기 방언이나 자기 연민에 빠져 있으니 참 문제야. 일상과 밀착된 게 없어요. 몽상과 공상뿐이야. 나의… 로 시작되는 책들이 난무하는 거 있잖아. 이거 참 위험해. 대문자 ‘나’를 그렇게 드러내고 과시해서야 되갔어. 예술하는 사람들이 ‘나’보다는 ‘왜’를 좀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것’에 더 투자하는 세월이 왔으면 좋겠고.”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인생을 즐겁게만 산 사람들이 읽기엔 좀 그런 그림”이라고 했다. “다리 밑 5시 그림을 이해하려면 눈물 콧물도 좀 흘리고, 삶에 덕지덕지 낀 때도 좀 긁어보고, 어깨도 축 늘어뜨려보고, 맨발로 끈적끈적한 진흙탕도 기어봐야지”라고 그는 말했다. 수요일마다 분리수거장을 어슬렁거리는 이유 “유토피아란 게 돈 없는 사회 아닐까. 난 모르갔어, 내가 뭘 알갔어, 개코나 뭐나 진짜 몰라. 그저 그림만 붙들고 있는 거지. 어떤 그림은 1년을 붙잡고 있어도 불만스러워. 아, 그림에도 운명이 있구나 느끼지. 그럴 때 주문을 외워. 어불경인 사불휴(語不驚人 死不休). 두보(杜甫) 시구인데 ‘내 시가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않는다’는 뜻이야. 귀찮지만 외우지. 그래도 안 되면 놔두지. 그림에 좀 엄격하게 하려구 그래.” 지난해부터 그는 유화를 좀 제쳐두고 혼합매체 작업을 빠른 속도로 쏟아내고 있다. 평생 130여점쯤 내놓은 그가 98년에만 60여점 넘는 작품을 만들었다. 신문 속에 두툼하게 끼어 들어오는 각종 선전지, 수요일마다 분리수거장을 어슬렁거리며 주워오는 이상한 물건들이 작품거리다. 풀과 스카치테이프만 있으면 되는 그 ‘값싼’ 재료들로 그는 ‘쇼핑맨’ ‘폰팅맨’ 같은 우리 인생의 풍경과 인간의 전설을 엮어낸다. 그는 그 우거지 같은 언저리 삶에서 진실 한자락을 찾고 있는 듯하다.“돌아보니까 80%는 후회고 5%쯤 즐겁고 그랬던 것 같아. 그러다 가는 거지 뭐. 신비해… 인간들이….” 그는 “똥폼 잡는 작가들 말야, 지들이 뭐 패션 모델이야”라고 또 깔깔 웃었다. ‘다리 밑’ 철학으로 세상을 꼬나보는 그는 “지지고 볶는 삶, 그 복판에서 살고, 그리고, 그러다 가고 싶다”고 했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상투적인 건 땡땡땡! “내가 하는 한마디 개그가 지구상에서 처음 듣는 개그가 될 수 있도록…” 개그맨 전유성 그는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나타났다. 뒤뚱거렸지만 신나보였다. 밋밋한 뒤통수를 긁적이며 “재밌어요. 한번 해보세요” 진지하게 권했다. “넘어지면? 일어나는 거지 뭐. 안 해본 사람이 더 걱정이라니까.” 오십줄에 들어선 아저씨가 똥배 한켜 없이 날씬하다. 몇달 새 허리띠 구멍을 두개쯤 안으로 들였을 만큼 살을 뺐다는데 펑퍼짐하게 퍼지는 게 싫어서다. 무딘 날로는 세상을 벨 수 없다. 팽팽하게 가슴속 말을 세우는 것, 그가 밀려오는 새 얼굴들 속에서 아직 개그 하나로 고참 자리를 점잖게 지키고 있는 비결이다. 튀는 말, 색다른 말, 기발한 말… “개그맨 생활이 올해 30년쨉니다. 날 지켜야죠. 습관적으로 사는 거 싫어합니다. 뻔한 말, 되풀이되는 우스갯소리 안 하고 살려고 노력합니다. 개그맨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난 내가 하는 말이 지구상에서 처음 듣는 얘기가 되게 쉬지 않고 궁리합니다.” (사진/자신의 카페 ‘학교종이 땡땡땡’에서 팬들과 대화하는 전유성씨. 그는 항상 다른 말, 다른 생각으로 사람들 허를 콕 찌른다.) 개그맨 전유성(51)씨는 다르다. 거꾸로 간다. 다른 말, 다른 생각으로 사람들 허를 콕 찌른다. 똑같은 건 재미가 없어서 못한다. 하지 말란 거 하고 가지 말란 데 간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를 아는 이들은 ‘럭비공 같은 사내’라고 부른다. 그는 왜 살까. “안 심심하려고.” 그가 남긴 명언은 너무 많아서 다 챙길 도리가 없다. “전유성 선배는 개그맨도 하고 아이디어맨이기도 하고 영화배우에 감독도 하고 그러시는데 원래 뭘로 시작했습니까?” “정자로부터 시작했지.” 개그맨이다 보니 그는 말에 관심이 많다. 튀는 말, 색다른 말, 기발한 말들을 수집하고 연구한다. 남이 잘 지은 제목이나 이름을 보면 열 받는데 그걸 보고 더 분발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똑같은 건 재미가 없잖아요. 특히 방송 진행자들 판에 박은 말들 늘어놓을 때 신경질 나요. 전문가 데려다가 실컷 얘기 듣고 나서 ‘박사님 모시고 말씀 들었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셨나 모르겠네요’ 따위 말을 한다든가, 새해만 되면 ‘원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십시오’ 덕담 시늉을 하는데 얼마나 무책임한 말입니까. 만일 큰 도둑들이 한탕 하려고 모의하고 있다가 이 말 들으면 얼마나 기운이 나겠어요. 대한민국을 망치는 건 너무 평범해서 지겨운 오프닝 멘트나 클로징 멘트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좀 다르게 살아봅시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부터 지워버리자구요. 자기만 할 수 있는 걸 인생노트에 적어보세요. 우리 인생 한줄만 고치면 신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그가 내놓는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돈 한푼 안 받고 지어준 가게 이름, 상품 이름, 기획들이 성공해서 남을 돈방석에 올려놓고 즐거워한다. 후배 개그우먼 이영자씨 삼겹살집 이름 ‘영자나라 돼지만세’, 귀순용사 전철우씨 냉면집 이름 ‘냉면도 같이 내려왔시요!’, 후배 표인봉씨 등심집 이름 ‘소 잃고 열받아 차린 고깃집 이랴이랴’… 너무 많아 다 셀 수도 없다. 80년대 초에 심야극장을 만들었고 월미도에 카페촌 붐을 일으켰으며 수많은 명카피를 쓴 소문 안 난 카피라이터가 그였다. 그가 속 영자의 전성시대 에 쓴 영화광고 한줄은 이랬다. ‘내가 미성년자였을 때 보고 싶었던 영화.’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느냐고 사람들이 묻습니다. 저도 어디 가서 사거나 구할 수 있다면야 그러고 싶지요. 아이디어는 짜내는 겁니다. 물론 마냥 생각만 한다고 짜내지는 건 아니지요. 마른 행주 짠다고 물 나옵니까. 물을 좀 적셔야지. 훈련하기 나름이지요. 앉으나 서나, 웃을 때나 얘기할 때나 항상 머리를 굴리는 습관을 들이는 겁니다.” 그는 책 많이 읽는 개그맨으로 유명하다. 큰 서점들이 뽑는 단골손님 명단에 이름 석자가 자주 올라간다. 아침 6시면 꼭 일어나 2시간쯤 읽고 쓴다. 세상에는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고 그들에게 오히려 장학금을 줘야 한다고 말하는 그다. 그가 쓴 책 몇권이 베스트셀러가 된 건 그러니까 우연이 아니다. 부인 진미령씨와 떠났던 외국여행기 남의 문화유산답사기 는 청운초등학교 동창인 미술평론가 유홍준씨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를 비틀어놓은 제목으로 웃음을 자아냈는데 오랜만에 만난 동창은 “제목 한번 절묘하게 지었다”고 칭찬해서 그를 기쁘게 했다. 며칠 전엔 인터넷만으로 살 수 있는지를 체험하는 ‘인터넷 서바이벌 99’에 자원해 이벤트팀으로 참가했다. 3시간 동안 그는 곽재구의 시집을 주문하고 음식을 시켜 먹으며 컴퓨터 잘하는 개그맨으로서의 명성을 확인하게 했다. “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란 책을 내놨을 때 사람들이 ‘정말 직접 썼어요?’ 묻더라구요. 그래 내가 그랬죠. ‘니가 형사냐’.” 그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보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다. 한켠 맨 끄트머리에 모른 척하고 앉아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강타를 날린다. 학교 이야기가 나오자 누군가 “우린 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안 밟았어요” 무게를 잡았다. 그러자 전유성씨 마지못해 한다는 얼굴로 개그 한 자락을 던진다. “우리 땐 스승이 하도 어려워서 학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어요.” 쾌하다. 주어진 틀, 교훈적 이데올로기, 관습적인 질서를 그는 툭 던진 말 한마디로 웃음 속에 와장창 무너뜨린다. 텔레비전에서 퇴출당한다면? “볼 때는 실컷 웃고 나서 나중에서야 교훈이 없다, 저질이다, 한국 코미디를 싸잡아 욕합니다. 우리나라 코미디가 질이 낮다고 칩시다. 그게 왜 그런지 아세요? 바로 우리 국민 질이 그만큼밖에 안 돼서 그래요. 요즘은 옛날처럼 엎어지고 넘어지고 해서 웃기는 억지는 없어졌잖아요. 왜 니넨 외국 코미디처럼 못하느냐 그러는데 언제 우리 코미디언이나 개그맨들 제대로 대접이나 해줬습니까. 어려웠던 시절, 웃음으로 고단한 삶을 다독이던 구봉서 배삼룡 같은 선배들 동상 세워줘야 한다고 난 봅니다. 그이들 얼굴을 돈이나 우표에 넣으면 볼 때마다 얼마나 즐겁겠어요.” 한국방송공사에서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 에 얼굴을 내미는 그는 ‘연극 같은 코미디’란 아이디어를 내고 2달 동안 후배들과 땀을 흘렸다. 이 반짝이는 아이디어 뱅크 앞에서 나이도, 세월도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다. 7월 중순엔 해안선을 따라 발길 닫는 대로 여행을 떠난다. “텔레비전에서 퇴출당한다면?” “책을 쓰고, 여행을 하고, 사람들과 놀고, 산에 들어가고… 할 일이 더 많아요. 한 3개월 지리산에 들어가 있을 때 느낀건데 산에선 심심하지 않았어요. 도시가 정말 심심한 데거든요.” 그가 쓴 책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에 사인을 부탁하자 그는 거침없이 펜을 내달려 썼다. “읽다가 잃어버리고 다시 삽시다.”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인물탐험 . 무녀 정순덕…분단원혼을 위한 엑스터시 사회현실에 눈뜬 뒤 진혼굿 행진… “억울한 혼들이 너무 아파 울어요” (사진/신당에 선 정순덕씨. "제 눈으로 돌아보면 한반도 전체가 진혼굿을 기다리는 영혼으로 꽉 찬 듯 보인다"고 말했다.) 그를 만나면 먼저 너무 평범해서 놀라게 된다. 무녀란 이러저러하게 생겼거니 어림짐작하고 간 모습과 한참 다르다. 복스런 얼굴, 시원스런 말씨, 곰살궂은 몸짓 등이 동네 아낙 같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신당만 해도 그렇다. 오피스텔 한칸을 빌려 차린 신당이란 것이, 책이 빼곡 들어찬 책장이 반 넘게 차지하는 자취생 공부방 분위기다. 정화수 항아리가 늘어선 굿당 옆 창 너머로 낙원동 번잡한 거리 풍경이 지나간다.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이 한가닥 희망을 찾아 문을 밀고 들어오면 그는 정성껏 그들의 마음을 다독이며 알 길 없는 인생의 과거와 미래를 들여다본다. 어른들 인생상담을 해준 ‘꼬마무당’ “요즘엔 절이 저잣거리로 내려오고 신당이 변두리며 산 속으로 밀려났지만 옛날엔 정반대였어요. 절은 깊은 산 속에 숨듯 들어앉았고 신당이 사람들 가까이 마을에 자리했지요. 근심많은 이들 혼을 다스려주는 굿당이 왜 동네 언저리에 있으면 안 되는지 까닭을 모르겠어요.” 정순덕(32)씨는 무녀생활 24년을 보냈지만 아직도 ‘아기무당’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8살에 신이 내려 아이 때부터 점을 치고 굿판에 서왔기 때문이다. 5살 되던 해 아버지를 잃고 홍역을 앓기 시작했는데 같이 누웠던 언니와 오빠가 1주일 만에 털고 일어난 뒤에도 그는 기운을 추스를 줄 모르고 방 안 이부자리 신세를 졌다. 내리 3년을 시름시름 앓았는데 학교갈 나이가 돼 입학통지서가 나왔을 때도 그는 문 밖으로 한걸음 떼기가 힘겨울 만큼 병색이 깊었다. “어느 날 꿈을 꿨어요. 눈뜨고 꾸는 꿈이었지요. 까만 갓에 도포를 입은 수염 난 할아버지가 칼, 부채, 방울을 주시며 ‘순덕아, 이거 갖고 너랑나랑 밥 빌어먹고 살자’ 하시는 거예요. 그 순간부터 온몸이 떨리고 진동이 와서 ‘내가 왜 이렇게 떠나요’하고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어요.” 뒷집 할머니가 마침 빈 집에 혼자 누워 있는 순덕을 보러 왔다가 혼 나간 듯 팔을 떨고 있는 아이를 보았고, 장사 나갔던 어머니에게 “순덕이한테 신이 왔구먼”하고 일러주었다. 당시 충남 서산에는 이름난 박수무당이 있었는데 그가 와서 보곤 “이 아이는 천지신명이 안고 있는 아이다. 내림굿을 해야 산다”고 했다. 그는 8살 나던 해 단오날 내림굿을 하고 아기무당이 되었다. 병이 나가고 신이 내렸다. 내림굿을 하기 전부터 이미 점은 봤으나 굿을 하고 난 뒤에는 샘자리, 집자리, 산소자리를 봐달라고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신통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마귀할멈’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어린 소녀지만 몸 속에 든 신이 할아버지 신이라서 하는 짓이며 말투가 꼭 어른 같아 붙은 이름이었다. “그때 설이면 고향에 내려와 점을 보던 마을 부잣집 어른이 계셨어요. 하루는 ‘이런 아이를 시골에서 썩히기는 아깝다’며 같이 올라 가자고 하셔서 14살 때 서울로 오게 됐지요. 청량리경찰서 뒤쪽에 방을 하나 얻어 일을 시작했는데 꼬마가 점을 잘 본다는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어요. 한창 뛰어놀 나이에 종일 어른들 인생상담을 하고 앉았으니 어땠겠어요. 다른 애들처럼 학교도 가고 싶고, 친구도 사귀고 싶고….” 그는 신설동에 있는 고려학원을 자신의 모교라고 부른다. 너무 공부가 하고 싶어서 뒤늦게 찾은 이곳에서 그는 “무녀도 꼭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이끌어준 제주 출신 선생님을 만났다. “점을 본다”고 했더니 “귀한 일을 한다”고 손을 잡아준 그 은사를 정순덕씨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우옥주, 김금화 두 만신에게서 이북굿을 제대로 배웠어요. 나이든 이들처럼 구성진 맛은 없지만 기본을 탄탄하게 갖춘 데다 어린 것이 겁없이 굿판에 달려드니 모두들 잘한다고 치켜주셨지요. 19살짜리가 한을 알겠어요? 너무 이른 나이에 스타처럼 교수님들 사랑을 독차지하고 대접받고….” 그는 몇년을 스승인 김금화 만신의 손발이 되어 살았다. 그가 잘 되는 걸 시기하는 주위 사람들이 “저것이 오만하게 겉멋만 들었다“고 말들 했지만 그는 오히려 “선생님도 좀 깨셔야 해요”라고 바른소리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눈 뜬 무당’으로 제 갈 길을 알아 나선 뒤였다. “그 무렵이 한창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때였어요. 풍물과 굿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현장을 따라다니며 조사연구를 많이 하던 시절이지요. 그때 만난 문화패들과 어우러지며 현실에 눈을 떴어요. 한번은 명동성당에서 진혼굿을 했는데 구경하시던 한 신부님이 ‘자네도 보통은 아니네’ 하신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84년 인사동 그림마당민에서 무녀 정순덕은 공개 굿판을 벌였다. 그리곤 갑자기 바빠졌다. 여기저기서 학생들 죽었다는 소리가 들렸고, 한걸음에 달려가 그 고통받은 넋들을 위로하느라 제 몸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 열사들 진혼굿판에 소복하고 붉은띠 매고 그들 영혼이 되어 펄펄 뛰다보면 제 몸에 실린 그들 억울한 혼이 너무 아파서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때도 있었다. “제 눈으로 돌아보면 한반도 전체가 진혼굿을 기다리는 영혼들로 꽉 찬 듯 보입니다. 지난해 4월엔 제주 4·3 진혼굿을 종로5가 연강홀에서 했는데 처음엔 겁이 났어요. 한두명 혼이야 수없이 만나봤지만 그렇게 많은 영혼을 한꺼번에 만난다 싶으니까 제 몸이 견뎌낼까 자신이 없더라고요.” 빨치산들의 영령도 거두고 싶고… 그는 “한 많은 영혼들이 너무 많이 묻혀 있는 이 땅”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했다. 지리산에 누워 있는 빨치산들의 영령도 거두고 싶고, 통일이 되면 북한 땅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원혼들의 혼도 달래고 싶다. 그에게 굿이란 “예술이라기보다는 무녀의 춤 속에서 삶의 상징적 불을 피우는 것, 그 엑스터시와 신명 속에서 신에 감응해 타오르는 불새요 불나비”다. “굿은 혼처럼 허공에 금방 사그라지는 뿌리없는 꽃을 피우는 것”이지만 “그 몸짓 속에 불쌍한 영혼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원혼들 제 길 찾아가게 이끌어주는 것”이기에 숭고한 의식이라고 했다. “지난해는 IMF 신탁통치 등 어려운 시절이라 그런지 유난히 저를 찾아오는 분들이 많았어요. 전에는 하는 일이 적성에 맞는가 물었는데 요즘엔 이 자리에서 얼마나 버티겠느냐 절실하게 묻는 이들이 늘었어요. 점을 보면서 사람들 사는 게 너무 힘들구나, 내가 이들 맘 편하게 하면서 기운내도록 도와주는 길 안내자구나, 최선을 다하자, 다짐하곤 합니다.” 며칠 전 그는 또 눈뜨고 꿈을 꾸었다. 새벽녘 어스름 하늘에 옥황상제가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아가, 너는 이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잠시 꿈을 꾼다고 생각해라. 다른 이들 영혼을 달래주는 일이 네 복이자 업이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나는 거부했다, 고로 존재했다” 재일동포 학자 서승씨 28년 전 악몽 담담히 돌이킨 ‘옥중 19년’ 수기… 일본을 감동시키고 한국으로 그가 내민 들쭉날쭉한 상처 투성이 손에 한국 인권사 한자락이 오그라들어 있다. 말 그대로 “손바닥의 벌건 맨살을 쇠솔로 문질러 벗겨내는” 아픔을 견딘 그 손이다. 슬픈 눈이 사람 마음을 짠하게 붙드는 얼굴이야 더 말해 무엇하리. “입은 빨대 한개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오므라들었고 눈썹도 귀도 녹아버렸던” 1971년 4월의 어느 아침해 밝았던 날, 스물여섯살 청년의 얼굴은 “원자폭탄으로 타들어간 들판처럼 타 문드러”졌다. 박정희독재정권이 종신대통령 야망을 위하여 날조한 ‘재일교포 학생학원침투 간첩단사건’에 몰려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던 중 기름을 끼얹고 자기 몸에 불을 붙였던 그는 그 순간 “어머니 죄송해요, 어머니 용서하세요”를 중얼거리며 오히려 “조용한 안도감과 편안함”으로 빨려들어갔다. 학위 없이 강단에 설 수 있었던 힘 “내 책이 말을 해주겠지요.” 서승(54·일본 리쓰메이칸대 법학부 교수)씨는 서승의 옥중 19년 (김경자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을 들고 28년 전 그 악몽을 담담하게 돌이켰다. 94년 일본 이와나미서점에서 먼저 나와 5쇄를 거듭하며 4만5천부쯤 팔린 이 책이 뒤늦게 우리말로 옮겨져 빛을 본 그날, 기다렸다는 듯 옥 문이 열리고 장기수 17명이 출소했다. “이제 ‘비전향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말한 그는 “이 작은 책을 장기수 선생들께 바친다”고 했다. “1990년 2월 석방된 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사회학과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불타 못쓰게 된 손 기능 수술을 받았어요. 한번 수술하면 또 네다섯달 기다려야 다음 수술을 하는 한없이 지루한 나날이었지요. 그때 일본에서 학생운동을 같이 하던 선배 하나가 노트북을 가져다주면서 뭘 좀 써보라는 거예요. 붕대를 칭칭 감은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한자 한자 장난하듯 쳐가면서 잊고 싶었던 그날들을 복원했습니다. 이걸 쓰면서 내가 다짐한 게 있습니다. 감정은 절대 금물이다.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쓰자. 우리 시대에서 감옥이란 무엇인지 ‘감옥사회학’을 일구자. 옥바라지를 했던 막내 동생 경식에게 초고를 보였다가 혹평을 듣고 열번쯤 고쳐썼으니 제 문장수업기라 할 만했지요.” 옥 안에서 아무 기록도 할 수 없게 돼 있는 한국 감옥 현실에서 서씨가 기댈 데라곤 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냈던 편지와 면회왔던 가족들이 적어둔 글뿐이었다. 원고를 써가면서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은 출소한 사람들을 찾아 일일이 묻고 확인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가 놀란 건 대부분 사람들이 감옥 안 일을 다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같이 이걸 언젠가 밝혀야겠다고 기억하려 노력했던 이들이 드물다는 걸 알고 느낀 점이 많았어요. 옥에 있으면 누구나 탈옥을 꿈꾸긴 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독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소리나 감각으로 감옥 구조를 그렸거든요. 한국판엔 빠졌지만 일본판엔 감옥 내부 지도가 들어갔습니다. 이 책을 내면서 여러분들을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망명자 길을 선택해 파리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 홍세화씨, ‘통일조선’에 가고 싶다며 일본에서 조선국적을 고집하고 있는 김석범 선생… 다 함께 이 땅에서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옥중 19년 이 일본에서 일으킨 반향은 대단해서 “한국 정치범들 한사람 한사람 영혼의 숭고함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는 독자들 편지가 출판사로 날아들었다. 또 한편으로 서승씨 개인에겐 강단에 서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사회학과 출신 서씨가 학위도 없이 법학부 강의를 맡게 된 데는 이 책 힘이 컸다. 리쓰메이칸대 교수선발위원회에서 서씨 임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한 위원 말을 법학부 동료가 한마디로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그는 나중에 들었다. “ 옥중 19년 은 그 어떤 법학서적보다 인권과 한국정치에 대한 정확한 자료와 풍부한 해석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박사논문보다 더 뛰어나다.” 그는 지금 “운동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자도 아닌”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다. 같이 옥살이를 한 동생 준식씨가 ‘인권운동사랑방’을 열어 운동가로 우뚝 나선 것과는 다르다. 옥에서 나오며 만났던 대만 최장기(36년) 정치범 린쑤양과 뜻을 모아 동아시아 연대를 이룩한 걸 그는 가장 뜻깊게 치고 있다. 가장 좁은 세계서 나오는 순간 가장 넓은 세계로 생각의 틀을 넓힌 그는 “남북 문제가 동아시아 지배구조를 전환하지 않고는 온전하게 풀기 어렵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간적으로 약점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이것저것 잡다하게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주로 감옥사회학을 중심으로 한국법정치사를 강의하고 ‘평화학’ ‘현대와 인권’ ‘반일론’(反日論) 강좌를 맡습니다. 아마도 ‘반일론’은 일본 안 대학에서 제가 처음 개설한 과목일겁니다. 올 1월엔 ‘주한미군범죄 근절을 위한 운동본부’가 아오키서점에서 펴낸 주한미군 범죄백서 를 일본말로 옮겨 냈습니다. 그게 벌써 초판 3천부가 나갔습니다. 또 오는 11월에는 오키나와에서 ‘미·일 냉전정책과 동아시아 평화인권’을 주제로 한 한·중·일 3차 심포지엄을 엽니다. 동아시아 공동으로 잡지를 낼 계획도 있습니다. ‘나눔의 집’이 연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돕는 후원회 일도 소중한 제 몫입니다. 이번에 서울에 온 건 일본 문부성 국제학술교류기금을 받아 서울대 법대와 공동으로 한·일 법체계에 관한 공동연구를 위한 의논 때문이고요. 그 사이사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굳이 학자와 운동가가 설자리를 가를 생각은 없습니다. 한번 죽고자 했던 목숨이 다시 살아났으니 이 몸 못쓰게 될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조국이 불러준다면 언제든 돌아오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쁜 일정을 쪼개 2월26일 용산 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열린 ‘한·미 행정협정 전면 개정을 위한 집회’에 참석해 시위에 나선 젊은이들을 격려했다. “민중연대가 동아시아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는 이 ‘살아 있는 전설’ 앞에서 선배들로부터 말로만 전해듣던 서승씨를 만나는 청년들 입에서 짧은 환호성이 터졌다. “동북아 지배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어떤 시대가 되더라도 거부하는 정신은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아닐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교편 잡으며 일본 젊은이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많은데 그들은 지금 심각한 ‘미즘’(Meism)에 빠져 있습니다. 외부 세계와 단절한 채 자기 안으로만 향하는 꿈없는 세대입니다. 냄새없고 현실감없는 이들을 일러 ‘한없이 투명한 인간’이라 하는데, 이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현대 일본사회는 미래가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오는 7월이면 그도 아버지가 된다. 뒤늦게 한 결혼, 늦둥이를 보는 기쁨에 앞서 그는 새삼 다짐한다. “우리 겨레 스스로 우리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기에 한반도는 늘 불안정했습니다. 이제 우리 아이들 세대에 평화의 새 세기를 열어주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지배구조를 어떻게 바꿔갈 것인가 하는 장기전망이 좀더 중요한 때입니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노동운동 즐겁게 합시다 두번의 해고와 두번의 복직… “진실되고 평범하게 살았는데 빨갱이래요” 한국통신노동조합원 심철식 그는 평범하다면 참으로 평범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평균치 남성으로 뽑아도 크게 빠지는 게 없다.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수원으로 이사한 뒤 이곳에서 보통의무교육을 마쳤다. 고학으로 전문대를 다니던 중 친구들과 내기삼아 본 체신부 기술직 시험에 덜컥 붙어 전화수리보로 한국통신에 들어왔고 20년 넘게 한 일터에 뼈를 묻어왔다. 군대는 일찌감치 병장 제대했고 직장을 다니며 서울산업대에 편입해 학사모도 썼다. 아버지나 집안 도움 없이 어릴 때부터 제 앞가림을 해온 걸 그는 “그게 뭔 자랑거리냐, 다 그러구 살지 않느냐”고 손을 내저었다. 일이 파한 뒤 직장 동료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 한잔 하는 게 낙이고 주말이면 사무실 근처 관악산에 오르는 게 취미다. 기회가 되면 한자라도 더 배우고 싶어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를 다녔고 마흔 넘어서부터는 힘 자라는 데까지 사회활동을 하고 싶어 이런저런 모임에 부지런히 다리품을 판다. 직장 동료였던 부인은 아이가 생기자 전업주부로 들어앉아 살림 착실히 하고, 딸 둘은 공부를 썩 잘해 열 아들 안 부럽다. 동료들 좋아하다 보니 어느새 노동운동가로 평범한 남자 심철식(42·과천전화국 선로과)씨는 그러나 이 평범 속에 비범함을 삭이고 산다. 한국통신에서 그는 ‘두번 해고됐던 남자’로 유명하다. 아마도 전무후무할 이 기록을 세우게 된 건 그가 참으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21년 전 평택전화국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부터 그는 집과 일터밖에 몰랐고, 한솥밥을 먹는 동료들을 피붙이처럼 아꼈다. 동료들과 함께 가는 길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그것이 최우선이었다. (사진/1995년 5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농성중 기자회견하는 한국통신노조 동지들과 함께. 뒷줄에 선 이가 심철식씨.) “80년대 후반 한국통신노조는 어용화, 족벌화돼 있었어요. 이런저런 모임에서 동지들 어려움을 듣다 보니까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때까지만 해도 조직이 워낙 나이든 사람 위주여서 젊은층이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었어요. 91년 혜화전화국 노조 지부장 선거에 나가 제가 당선됐을 때 회유하려는 은근한 손짓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함께 가는 동지들이 있었지요. 당시 유덕상 위원장 등 우리 회원들은 모이면 밥값도 1만원씩 회비 걷어서 쓰고 참 진실되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국제전화요금 차등철폐건으로 광화문 본사를 점거하고 항의농성을 할 때도 그는 그것이 동료들이 제대로 ‘민족 통신’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바탕임을 알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징계위원회에 나가 해고통보를 받았을 때 그는 목이 메어 소명자료를 읽었다. 15년 넘게 가정보다 더 사랑해 온 일터를 위해 한 일로 해고를 당하니 슬프다는 내용이었다. “참 청천벽력이었지요. 그때 처음 해고를 당했다가 4개월 만에 복직이 됐는데 철원으로 발령이 났어요. 노조 핵심 간부들이 전국 각처로 뿔뿔이 찢어졌는데 우린 그걸 ‘유배’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그 유배가 결과적으로 우리 노조 조직을 더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씨앗이 됐어요. 제주부터 태백까지 전국으로 민주노조가 퍼지는 원동력이 됐거든요.” 그가 처음 철원에 갔을 때는 “빨갱이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동료들이 그를 슬슬 피하기까지 했다. 휴전선을 코앞에 둔 지역 특성 때문에 노조 활동 전력이 붉은줄 표시와 같았다. 한달쯤 지나 함께 소주라도 한잔씩 걸치게 되자 “아 저렇게 순한 사람이 왜 저리 강성이 됐지”하고 의심을 풀게 됐다. 그는 한탄강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건져 판 돈으로 어려운 이웃돕기를 벌이는 등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이 꼭 파업이나 농성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 사회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삽니까. 제나름으로 처지나 생각이 다른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가려면 그들의 의견을 듣고 함께 할 수 있는 대중성이 필요합니다. 제가 10여년 노조활동에서 몸으로 체득한 게 있다면 이 ‘함께 간다’는 정신, 대중성을 잃으면 노조도 없다는 교훈일 겁니다.” 94년 5월 서울 도봉전화국으로 발령이 나 올라오자 노조가 그를 불렀다. 한국통신노조가 30년 어용의 사슬을 끊고 민주노조로 거듭나는 길에서 그는 그 1기 민주노조 제도개선국장으로 집행부에 참여하게 됐다. “내가 간부하려고 서울 올라가는 게 아니다”고 사양했지만 일할 사람이 없다는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95년 5월에 사측이 노조 간부 64명을 징계조치하자 우리는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습니다. 매일 기자회견하고 전국 노조원들 추스르고 기자들 만나 우리 뜻 전하고…. 지금도 4년 전 5월을 잊을 수가 없어요. 결국 김영삼 정권이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해 우리를 끌어갔지만 그거야말로 문민정부의 허구성을 드러낸 폭거였지요.” 그는 자신을 “여간해서 화 안 내는 사람” “천하에 낙천주의자”라고 불렀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할 때도 잘 먹고 잘 잤다. “매일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오니까 끼니 잘 챙겨먹고 얼굴이 뽀얘야 TV보는 노조원들이 기운 난다”고 동지들 뒤치다꺼리도 열심히 했다. 형님, 동생하며 함께 뒹굴었던 기자들과는 그뒤로도 이런저런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 심철식씨를 가장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노조원으로 만든 것 같다. 72일을 옥에 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지난해 9월1일 두 번째 복직해 온 곳이 지금 일하는 과천전화국. 그는 운 좋은 사내인지도 모른다. 한 직장에서 두번 해고에 두번 복직은 참 드문 일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한다. ‘노동운동 했던 사람’이란 꼬리표가 무슨 훈장처럼 붙어 있는 한 그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지하철노조가 스스로 파업을 푼 것이나 한통노조가 파업을 유보한 걸 정부가 그들을 꺾었다거나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판이라고 봅니다. 신중해야지요. 이번 싸움 자체가 그나마 조직이 남아 있는 지하철노조가 힘없는 노동자들 대변해 나섰던 건데 그 큰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걸 국민의 정부라 할 수 있습니까. 95, 96년 국감 때 국회가서 살면서 친했던 국회의원들이 지금 다 여당인데 그들이 지금은 우리편이 아니더라구요. 우리랑 그렇게 의기투합했던 통신정책마저 기조가 싹 바뀌었어요.” 바른 얘기 하는 언론을 보고 싶다 막내동서가 지하철 노조원으로 서울대에 들어가 있었기에 그는 언론보도 상황을 신경써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한쪽에 치우친 시각으로 보도하는 게 안타까웠다”고 말한 그는 “눈치 안 보고 바른 얘기 하는 언론, 맺고 끊고 확실히 하는 언론”을 보고 싶다고 했다. “노조활동을 즐겁게 하자는 게 제 소신입니다. 제 생각은 평범합니다. 다 사람 살리자고 하는 일인데 그것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짜장면'에서 향기가 난다 중화요리사 양명안씨 중국집 주방서 50년 보낸 한국 최고의 달인, 영화 북경반점 요리감독으로 그가 아현시장에 나타나자 아낙네들이 “주방장님 오랜만에 나오셨네”하며 반가워했다. 그 손에서 요술처럼 뽑아져나오던 자장면, 탕수육 맛을 못 잊는다는 그네들 인사에 그가 손사래를 치며 “허허” 웃었다. 지난해 가을, 동네에 냈던 중국집을 힘이 부쳐서 그만둘 때까지 그가 만든 자장면을 먹으며 즐거워했던 이 나라 사람들은 대통령부터 거지까지, 남녀노소에 신분과 빈부 벽을 뛰어넘는다. 군대가 싫어 산둥성에서 도망치다 (사진/영화 북경반점 촬영현장에서 중화요리의 진수를 선보이는 양 사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소장 시절부터 제 음식을 드셨는데 청와대 들어간 뒤로는 운전사에게 그릇 담긴 배달통을 들려 요리를 시켜갔어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도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이른바 출장요리를 나가는 건데 이병철 삼성회장 집, 정일권 국회의장 집, 이름난 배우들 집, 유명인사 집… 그런 집에 불려가서 한상 잘 차려 들여보내고 나면 애썼다고 따로 두둑한 봉투도 받았어요. 그럼 같이 애쓴 주방 식구들하고 돈도 나누고 술도 한잔 하고 참 신나던 시절이 있었지요.” ‘자장면 하나로 대한민국을 평정한 사람’ 양명안(66)씨는 평생을 중국집 주방에서 보냈다. 햇수로 50년. 열여섯살에 닷돈짜리 금반지 2개 달랑 들고 고향 산둥성을 떠나 돛단배를 탄 그는 “군대에 끌려가기 싫어 한국으로 도망왔지만 짜장면 집에 취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1949년 국공합작을 하고 난 뒤 전부 군인이 돼야 한다기에 군대가기 싫어서 도망을 친 거예요. 군산항에 닿아 배에서 내릴 때 금반지 한개, 이모부 만나러 서울가는 기차에서 또 한개, 다 빼주고 나니 참 막막합디다. 여기 사람들도 일자리 잡기가 어렵던 시절에 중국인인 내가 입에 풀칠할 일을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지요.” 어찌어찌 부산으로 흘러간 그는 청요릿집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겨우 비를 피하고 세끼 밥을 굶지 않게 됐다. “요리 기술자”들을 빼고 허드레꾼이 8명이나 돼서 그야말로 눈칫밥이 빠꼼해야 얻어맞지 않고 끼니를 찾아먹을 수 있었는데, 그로부터 그가 돌아다닌 이 나라 유명한 중국집 이름을 다 들자면 한나절이요, 그 사연이 또한 만리장성이었다. “새벽 같이 일어나 청소하고 불지피고 재료 다듬고 그릇씻고 음식 나르고 배달하고, 눈썹 날리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떻게 세때가 가는지 모르게 밤 11시가 돼요. 식당 문 닫고 윗사람들 퇴근하고 나면 청소하고 앞치마 죄 빨고… 그것뿐인가요. 서로 잘 보이려고 닭 잡고 새우 까놓고 부산을 떨다가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날이 가고 달이 갔어요.” 한국전쟁이 나고 피난민들이 바글거리던 부산에서 중국집은 돈을 가마니로 긁어모을 만큼 장사가 잘됐다. 하루에 닭만 100마리쯤 잡았고, 잠시 엉덩이 붙일 새가 없었다. “동생뻘되는 라면이 나오기 전 짜장면은 그야말로 이 나라 사람들 살리는 전 국민의 한끼 식사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곳에서 일을 배우는 동안 중국에서 가져온 이불은 3년 동안 물 구경을 못해 때에 절어 반질반질 윤이 났고, 한장뿐인 팬티는 저녁에 빨아 밤새 이불 밑에 깔아뒀다가 다음날 입는 지경이었다. 그래도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다 온 양 소년은 문자 속이 있어서 까막눈이던 요리사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그릇을 씻으며, 양파를 까며 어깨 너머로 요리하는 걸 곁눈질하던 그 눈물겹던 시절을 양씨는 “요리가 뭔지 몸으로 익힌 소중한 세월”이라고 했다. “요새 짜장면이 왜 맛이 없는 줄 아세요? 배운 대로 안 하고 다들 제멋대로 생각나는 대로 해서 그래요. 우리는 그때 요리 한가지 배우려면 몇년을 잔심부름하며 기술자 아저씨들이 한번 불러주길 고개 빼고 기다렸습니다. 지금은 어디 그런 기다림이 있습니까. 아무 데나 중국집에서 한두달 구르다 나와 제집 차리면 마구잡이로 음식을 만듭니다. 거기에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오랜 인내로 익은 춘장은 지금 없습니다. 그대신 조미료며 설탕만 많이 넣으니까 들쩍지근해지지. 옛날 짜장면이라고 선전을 요란하게 하는 집 가봤더니 감자를 넣었습디다. 짜장면엔 원래 감자는 안 넣는 겁니다. 양파, 배추, 호박에다가 야채 구하기가 힘든 겨울엔 무나 녹두나물을 넣었죠. 요즘이야 사철 채소가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손맛으로 음식 만들 정성은 안 들이고 조미료로 범벅을 쳐 돈 벌 생각만 하니 옛 맛이 나겠어요.” 양명안씨가 요사이 자장면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된 건 영화 북경반점 때문이다. 김의석 감독과 ‘영화세상’이 만들어 4월 중순쯤 개봉할 예정인 이 영화에서 양씨는 요리감독을 맡아 나름의 ‘짜장면 철학’을 설파했다. 화교인중화요리협회 고문답게, 그는 “짜장면 한그릇에 인생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자장면이라고들 하지만 그렇게 발음해서는 느낌이 안 와요. 역시 자장면은 ‘짜장면’이라고 해야지. 이게 요즘이야 단돈 2천원짜리로 전락했지만 내가 처음 주방일을 볼 때는 곰탕이나 설렁탕과 어깨를 겨루며 값도 비슷비슷하던 영양식입니다. 춘장이 콩으로 만드는 건데 그게 영양덩어리에요. 거기다 고기 볶아 넣지 각종 야채 들어가지, 수백번씩 쳐서 뽑아낸 면 쫄깃하지. 이 나라에 짜장면 한그릇 안 먹어보고 죽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시오.” “그 짜장면 한번 먹고 죽자” 원주 ‘양강춘’, 대구 ‘동화반점’, 서울의 ‘국일관’·‘중화각’, ‘태동루’, ‘안동장’…. 그가 주방을 맡을 때마다 그집 자장면 솜씨가 전국 최고라는 입소문이 드높았고 “그 짜장면 한번 먹어보고 죽자”고 찾아오는 손님들 발걸음으로 문턱이 닳았다. “비법이요? 마음이지요. 난 내 손으로 만든 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볼 때 제일 좋아요. 내가 주방을 맡으면 아랫사람들 안 시키고 제가 장을 봤습니다. 손님들 가고 나면 물린 상을 꼭 살폈어요. 접시가 싹 비어 있는 걸 보면 흐뭇하지만 음식이 남았으면 그때부터 고민입니다. 뭐가 잘못됐나, 국물도 찍어먹어보고 국수도 씹어보고 주방에 돌아가는 순간부터 다시 연구가 시작되는 거지요.” 부산에서 맞선보고 귀밑머리를 푼 배분임(61)씨가 그가 이 땅에서 맺은 새 핏줄이다. 두딸에 아들 하나 대학교육까지 번듯하게 시켰으나 ‘고지식해서’ 돈은 벌지 못했다. 그는 “음식장사로 돈을 벌면 벌받는다”고 했다. 배고픈 이 맛있게 먹인 품으로 세때 밥 먹었으면 됐다는 것이다. “나랑 같이 화교요리협회 ‘사부 3인방’이라 불리던 이들도 이제 다 떠났어요. 하나는 죽고, 하나는 미국 가버리고 나만 남았네요. 이 땅에 중국집이 들어온 게 근 100년이 넘을 텐데 한국인들 입맛에 맞는 요리를 우리가 많이 해서 이 나라 사람들 먹을거리 생활에 도움이 됐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주방장 50년에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모녀의 아픔은 시에 씻기고… “딸아, 두고 온 딸자식 보고 싶으면 그냥 애 이름 50번 불러라. 그게 시다” (사진/늦깎이 시인 이근숙씨) ‘(마한의) 천제의식에는 여자들만 참여한다. 수십명의 여자들이 떼지어 솥뚜껑, 바가지, 시루, 키 따위를 이거나 메거나 들고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하늘에 비를 비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동안 노래를 부르고 나서는 속곳만 입은 채 춤을 추어댄다. 열광적으로 춤을 추고 나서는 옷을 몽땅 벗어버린다. 완전한 나체를 드러내놓고 다시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이화, 한국사이야기1 316쪽) 20년 전 이혼한 어머니와 두달 전 이혼한 딸이 함께 여행을 떠났다. 어머니가 지척에 느껴지는 죽음을 홀로 맞으려 서울을 버리고 경기도 용인 양지 시냇가로 내려간 지 1년 만에 딸이 혼자 되어 어머니의 낡은 집에 찾아들었다. 심부전증으로 급사의 위험이 있다는 양의의 진단과 울화병으로 7정(七情)이 상해 소생하기 어렵다는 한의의 진단을 받은 어머니. 두고 온 딸자식 생각에 사람 아닌 모습이 돼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던 딸. 안면도에서… “두려울 게 없었다. 자, 돈도 실컷 써보자. 술도 밤 새워 먹어보자. 소리내며 울어도 보자. 바닷물 속에 발가벗고 들어가자. 밤바다 파도소리 들으며 방파제에 앉아 밤도 새워보자. 남자들 꼬여 사랑도 해보자. 우리 모녀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말하는 미친 춤을 추었다. 죽기 위한 마지막 춤을.” 그 춤을 추러 찾아든 곳은 낮게, 편안히 잠든 땅, 안면도였다. 모녀는 홍송숲도 보고, 갯벌에 나가 조개도 캐고, 돌아다니며 술도 마시고, 때묻지 않은 사람들도 만났다. 그래도 딸은 곰섬에 가서 울었다. 어머니도 울었다. 안면도에서 우는 것은 이들 모녀뿐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녹용 한짐 머리에 이고 행상길 떠났던 곳이 안면도였다. 그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날마다 계모 눈치보며 얼어터진 손등 아물날 없는데 아침이면 또래 아이들 학교가며 재잘대는 소리를 애써 귀막으며 열세살 소녀의 가슴은 언제나 찬바람이 일었다’. 열세살 소녀 이근숙은 이제 3남매를 둔 나이 쉰둘의 어머니가 됐다. 안면도 바닷가에 서면 그 40년 세월을 쓸고 간 만겹의 파도가 달려들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지 두달이 된 어느 날 하교길, 아무도 돌보지 않는 막내동생이 제 똥을 먹고 노는 모습을 보고는 그 날로 자퇴를 결심했다. 그리고 매일 세숫물 떠다 바치던 새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시집간 게 열아홉살 때였다.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아버지, 남편 오형제, 방앗간 일꾼 밥상을 따로따로 차리고 방앗간 일에 소 먹이고 돼지 키우고 농사짓는, ‘아후’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 시집살이가 10여년 흘렀다. 그리고 “가수 윤시내 머리를 한 여자”가 다방으로 불러내 당당하게 “물러나라”고 했다. 그가 아이 셋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것은 물러난 게 아니라 나아간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뒤 시댁에 이혼한 사실을 숨기고 아이들 교육 때문이라 둘러대는 ‘코미디 같은’ 삶이 10년 동안 이어졌지만, 한편으론 누구보다 진지하게 세상에 맞섰다. 밤늦도록 뛰어다니며 미술재료상으로 자리를 닦았다. 수석 동호모임에서 만난 잡지 발행인과 함께 대중잡지회사를 일궜다. ‘사계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그리고 썰물이 시작됐다. 10여년 전 그는 외설잡지 단속이라는 칼바람에 무너졌고 회사는 부도가 났다. 곧이어 막내딸의 교통사고가 이어졌다. 심한 부상은 아니었는데 부주의한 주사 투여로 쇼크를 받아 7달이나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막내딸. 그 딸이 병원에서 만난 의대생과 결혼을 하기까지 7년 동안 사돈댁에서 받은 수모는 말로 다 풀어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자신 최선을 다해 헤쳐온 지난날을 ‘부끄러운 것’이라고 강변하는 목소리들이 그의 심장에 파고들어 병이 됐다. 썰물진 겨울 바닷가의 진눈깨비처럼 삶의 추위는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며느리가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게 됐을 때 그는 딸을 위해서도 하지 않았던 굿을 벌였다. 그렇게 며느리는 어렵게 소생했지만, 또 하나 남은 딸이 불행의 종지부를 찍듯 찾아온 것이다. 바야흐로 일몰이란 말인가. 바닷가에서 울고 있는 딸에게 어머니는 “어차피 인생은 고해이고 먼저 산 사람들도 너만큼, 너보다 더 아프다는 걸” 말해줬다. 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이 겪은 40년 파도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1999년 8월18일부터 32일 동안 안면도의 달은 모녀의 술잔에 빠지고 담배연기에 가려졌다. 어머니는 말로 안 되고 몸짓으로도 전달되지 않는 가슴속 덩어리를 글로 썼다. 곰섬에서 우는 딸이 애틋해 ‘새끼 잃은 어미곰 한 마리 울고 있어 곰섬인가. 자식 버린 에미가 곰섬에서 울고 있네’라고 썼다. 딸이 그것을 ‘시’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홍역을 앓듯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며칠 밤을 새기도 했고 차 안에서 펜을 움켜쥐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입 안에 침이 마르고 머리카락은 뻣뻣해지고 이빨은 딱딱 부딪치며 오한이 덮쳐왔다. 그런 날은 딸의 품에 안겨 어린애처럼 잠들었다. “답답한 마음을 토하고 토해냈더니 딸의 눈에 조금씩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것이 한권의 시집으로 나온 날 12월17일 난 느꼈다. 우리 모녀는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걸. 출판기념회날 오랜만에, 몇년 만에 딸의 볼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그들 모녀가 세상의 자궁이 된들… 그 자신에게도 생기가 찾아왔다. 평생 먹어야 한다던 한약을 3년만 먹으라고 하더니, 6달로 줄었다가, 이젠 끊어도 된다고 한다. 안면도에서 만난 서산문학회 사람들은 그에게 시귀신이 붙었다고 했다. 시집을 내라고도 했다. 그는 자비로 펴낸 시집 산자들을 위한 굿판 을 만나는 사람마다 건넨다. 자신의 아픈 삶을 드러낸 시가 자신과 딸을 살렸으니, 이제 아파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고침의 시’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리고 독자들의 전화를 받으면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대하축제에 나갔다 목격한 장돌뱅이들. 차가운 날씨가 손님을 몰아내는 바람에 여관비도 못 벌고 땅바닥에 스티로폼 깔고 새우잠 자던 그들을 보고 눈물 흘리며 시를 썼다. 이제는 그렇게 아픈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고통에 몸을 담그려 한다. 한판 굿을 벌이려 한다. 그의 굿판엔 칼춤 대신 말의 춤, 배우지 못한 사람도 쓸 수 있는 시가 있다. 고매한 시인들이 빼앗아간 시를 되찾아 휘두른다. “딸아, 두고 온 딸자식이 보고 싶으면 그냥 애 이름 50번 불러라. 그게 시다.” 그러면 눈물이 흐르고 비가 내리겠지. 그 비에 아픈 것도 씻겨지겠지. 누구보다 온힘을 다했건만 무너져내리기만 한 삶의 잔해도 씻기겠지. 안면도는 마한 땅 아니던가. 2천년 전 여인들처럼 발가벗고 춤추다 보면 사람들 거둬먹일 곡식을 키우는 비가 내리겠지. 안면도 꽃지 바다에 떨어지는 해를 보며 ‘바다는 예쁜 자궁을 가졌나 보다’고 한 노래처럼, 그들 모녀가 꽃지 바닷가로 돌아가 세상의 자궁이 된들 어떠랴.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소설가 박상륭 흉악망측 어려워도 재미있다 ‘잡설의 예언자’ 30년 만의 귀향… 허무에서 해탈로 향하는 그의 세계를 만난다 그는 오래 비워두었던 고향에 돌아온 참이다. ‘어려워서 재미있는’ 소설 죽음의 한 연구 나 칠조어론 으로 열혈독자들 사이에 ‘그 없음’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던 박상륭 선생이 30년 만에 귀향했다. 스물아홉 청년으로 떠났던 그는 쉰아홉 장년이 됐고, 그가 두고 갔던 땅도 사람들도 많이 변했다. “아직도 저 백수건달의 한(恨)이랄 것을 여의지는 못하고 있는” 그로서는 떠나고 돌아옴이 대수겠는가마는, 때론 먼저 세상을 버린 친구 때문에 혼까지 저며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한다. 옛날식 광기는 사라졌습니까? “돌아온 자리에 있었어야 할 옛 친구 김현(문학평론가)이 없어서 죽음으로부터 배신이라도 당한 느낌입니다. 나는 떠날 때 마음 그대로인데, 세상 아는 이들은 저 멀리 간 것 같고요. 60년대엔 한자리에 모여 니가 잘났느니 내가 잘했느니 된통 떠들면서 참 시끌했습니다. 술판에 안주 접시가 날고, 깨지고 박살나며 참 격렬했지요. 근데 이젠 그 ‘60년대식’이란 게 없어요. 동년배들은 꺼진 숯마냥 업적과 권위에 나앉아 있고, 옛날식 광기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제 몸 깨가며 손해보려는 이들이 없어요.” 소설가 박상륭(59)씨는 쓸쓸했던 타향에서보다 더 고즈넉해진 얼굴로 앉아 있다. 폐간 직전에 있던 사상계 를 두고 간호사 부인을 따라 이민갔던 캐나다는 박상륭 문학에 오히려 기름을 들이부어준 신대륙이었다. 모국어를 지껄이고 싶어도 그 말을 들어줄 이가 벽 밖에 없을 때, 그는 천리 먼길 고국으로 편지를 쓰거나 선술집 스탠드 바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죽음의 한 연구 를 구상하고 칠조어론 을 중얼거렸다. “캐나다에서 처음 잡은 직장이 병원 시체실 청소부였습니다. 냉동된 관에 담긴 시체들을 해부하거나 환부를 쪼개 실험한 뒤 화장터나 장례식장에 가기 전까지 보관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썩은 피며 온갖 분비물에 쓰레기가 많아 굉장히 더러운 곳이었지요. 몸과 마음이 다 고된 일이어서 퇴근하고 나면 지친 육신을 추스를 곳이 필요했습니다. 느닷없이 유형당한 느낌, 외로움이 밀려오는 저녁이었지요.” 일터가 있던 곳은 인디언 토인들과 무직자와 실직자가 쥐꼬리만한 사회복지금으로 살아가던 최하류 골목이었다. 그는 그 일대 술집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시체들과 보낸 하루 일과를 마감하곤 했다. 한 집에서 딱 두잔씩, 한 순배를 돌고나면 평온한 새벽이 다가왔다. “뜻이 통하지 않는 언어라는 게 장벽이고, 강추위고, 끝없는 사막으로 여겨지더군요. 그러나 그 사막에서, 그 추위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더 강하게 자신과 싸워야했습니다. 그렇게 나 나름으로는 피를 토해내 그걸 잉크 삼아 쓴 것이 죽음의 한 연구 고 칠조어론 입니다. 난 문학을 하지 않았어요. 소설은 내가 생각한 것을 실어나르는 도구나 수레였습니다. 빌린 것이지요.” 그는 한 작품을 보통 열번쯤 퇴고한다. 부분부분 고쳐쓰는 것이 아니라 첫 문장부터 마침표까지 다시 쓴다. 그건 도(道) 닦기와 같다. 쓰는 동안, 흔히 밤이기 십상인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평온하고 정신은 평화를 얻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다시금 변소가고 밥먹고 일가고, 아프고 가려운 허탈함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땅 위에 이미 너무 많은 지혜와 철학과 종교가 있습니다. 새로운 사상을 구축하기란 불가능하지요. 캐나다에 가기 전까진 기독교에 심취했습니다. 그곳에 가선 밀교와 힌두이즘과 탄트라에 압도당해 들린 적도 있었어요. 동양에서 서양에 건너가 오히려 동양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때 짧은 언어가 오히려 도움이 되더란 말입니다. 이곳에서 성경 과 팔만대장경 밖에 접하지 못하다가 온갖 책들이 흘러넘치는 그곳에서 재료는 충분히 얻었으나 다 해석하지 못하니 나름으로 이해력을 총동원해 넘겨짚을밖에요. 그게 더 훌륭한 요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아십니까.” 스스로를 ‘잡설의 예언자’로 부르는 그는 “지금 불교와 기독교가 너무 오래된 옛날 종교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당대 중생들에게 맞는 새로운 해석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말세를 이기고 새로 올 메시아는 종교간 울타리를 없애는 이일 것이라고 말했다. “종교 색채가 짙은 내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그럼 당신은 누굴 믿느냐고 묻습니다. 난 만종교와 만신을 다 믿는 허무주의자입니다. 여기서 허무는 절대적 긍정으로 가면 해탈이요, 절대적 부정으로 가면 소멸이라. 우리가 세상에 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해탈하기 위해서 온 것 아닙니까. 앞으로는 우리 자신이 회당이나 사원이 될 것인데, 삶의 행위가 곧 종교 행위가 되는 차후 세기는 갈등과 알력이 없어지는 세기가 될 것입니다.”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밑도는 말(잡설)과 논리적이며 사변적인 웃도는 말(예언자적 말)이 정신없이 뒤섞여 돌아가는 박상륭 소설을 읽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유황불을 뿜어올리는 지옥에서의 한철을 경험하게 한다. 그 고통을 어찌 견디는가 물었더니, “누가 그러더군요. 그보다 더 재밌는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라구요. 저로서는 할 만큼은 다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드릴 수 있겠군요. 출판사 잘못으로 오자는 있을 수 있겠으나 오문(誤文)은 없다구요”라고 말문을 닫았다. 다음달쯤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새 단편집과 산문집에서 젊은 독자들은 박상륭이란 “흉악망측한 도척이”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괄호다” 아마도 말을 통해 몸과 마음의 우주를 떠도는 그의 문학세계를 조금 더 알고 싶은 이는 4월23·24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리는 ‘박상륭 문학제’가 그 난해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될 듯싶다. 영화 유리 상영, 춤과 마임 공연, 평론가들 발표와 토론으로 이어질 이 시간에 그는 칠조어론 의 촛불승처럼 “나를 죽이며” 앉아 있을 것이다. “환갑 돼가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얘기쯤으로 들어주십시요. 젊어서는 산다는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괄호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삶이란 것이 돈을 번다는 의미라든가, 어느 날 사랑을 체험한 의미라든가, 이런 식으로 개인들이 괄호를 처넣는 것인데 그게 육, 칠십살 될 때까지 갈지 의문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삶에 목적은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우리가 목숨을 받지 않았습니까. 죽기는 싫어하면서도 그게 고통스러우니까 그 고통스러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되돌아보기’, 해탈이랄까…. 의미는 모르겠으나 목적은 이미 받아져 있는 것이니까.”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여성과 자연이 민중입니다" 이 세상에 교회는 왜 있는가… 어느 민중신학자의 5월의 기도 목사 이상성 그는 5월이 올 때마다 새삼스레 기도한다. 덤으로 살고 있는 이 삶을 감사하고, 그 대신 먼저 간 사람들 복을 빈다. 돌아보면 어언 19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열심히 살았다지만 하늘에 있는 그 영혼들에게 빚진 마음은 여전하다. 세상과 타협하려는 유혹이 들 때마다 그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죽는 날까지 그를 버팅기는 힘이 되어줄 5·18광주를 그는 오늘 다시 되새긴다. 이미 광주에서 죽은 사람 “80년 5월에 저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대학 3학년이었습니다. 남도 광주에서 일이 벌어졌다는데 며칠째 신문이며 방송보도는 믿을 게 못 됐어요. 북한 공산당이 사주해 빨갱이들과 폭도들이 벌인 일이라는데 도저히 납득이 안 가더군요. 그때 마침 고등학교 동창 중에 미군에게 영어회화를 배우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집에 놀러갔다가 그 미군이 들고 온 타임 과 뉴스위크 를 보게 됐습니다. 국내판에선 찢겨나가거나 시커먼 먹물로 지워져 들어왔던 광주 관련 기사가 거기 몇쪽에 걸쳐 실려 있더군요. 신군부 발표와 완전히 거꾸로인 진실, 거기다가 끔찍한 사진들, 아찔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내리치는 사진 속 곤봉에 제가 맞아 머리가 터진 것 같았습니다.” 이상성(45) 목사는 그 80년 5월에 인생이 바뀌었다. 27살 평범한 청년이던 그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 광주 앞에서 그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꼈다. ‘광주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똑같은 우리 젊은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 그들 죽임당하는 젊은이들이 나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는가?’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서울에 있고 그들은 단지 전라도에서 태어나 광주에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신앙의 양심을 따르자면 그 폭력과 불의에 저항해야 하는데, 산 넘고 물 건너 걸어서라도 그곳에 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난 무력했습니다. 함께 하지 못할망정 거리에 나가 광주에서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다고 외치기라도 해야 할 텐데, 말 한마디 못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이렇게 나약하고 비겁하구나’ 자책감으로 몇달을 잠을 못 잤습니다.” 그를 더 괴롭혔던 것은 도움을 청하며 달려온 광주 시민들 앞에서 많은 교회들이 문을 걸어잠갔다는 사실이다. 접대부들까지 두 팔 걷어붙이고 제 피를 뽑아 부상자들을 도왔다는데 민중의 고통을 외면한 교회 얘기는 그를 삥 돌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 교회가 왜 있는가. 교회가 목사 밥먹여 살리는 곳인가. 심각한 회의가 제 가슴을 쳤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사회에서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고 있구나, 절실하게 교회 갱신을 이루지 않고는 나아길 길이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농촌교회 목회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농부들이 겪는 쓰라린 밑바닥 삶을 일찍이 맛봤던 그에게 5월 광주는 그 경험들이 ‘민중’이란 한 단어로 집약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제부터 내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작정했다. 이미 광주에서 죽임당한 사람들과 함께 죽었어야 하는 사람인데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새로 받은 목숨을 교회 갱신을 위해 쓰자고 결심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신학교로 길을 틀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혼자 민중신학을 공부했다. 민중의 ‘민’자만 나와도 알레르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그걸로 논문 써 어찌 먹고 살려느냐 걱정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는 한마디로 물리쳤다. “나는 80년에 죽은 목숨이었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어디냐. 그때 내가 진 빚이 있으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밀고 나가는 게 그 빚 갚는 일이다.” 그는 지난해, 새로 목숨을 받았던 바로 그 5월에 미국 드루대학에서 ‘민중운동으로서의 한국교회: 민중신학의 교회학’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학으로부터 이어져내린 한국 민중신학의 뿌리를 현재 시점까지 끌고 나온 역작이다. 정통교단에서 이단으로 몰려 박해받고 처형당한 이들이 다 민중운동가였다고 쓴 이 논문에서 그는 앞으로 한국에서 민중신학과 그 운동이 갈 길이 여성과 생태라고 결론지었다. “어떤 형태로든 억압받는 모든 피조물이 민중”이라는 관점에서 그는 성차별과 환경파괴로 신음하는 여성과 자연이 지금 가장 신음하는 민중이라고 말했다. “이미 세계 학계에서 우리말 ‘민중’은 고유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영어표기 Minjung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민중신학과 연결해 잘 알고 있지요. 아마도 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밑에서 활발했던 민중교회운동 덕일 겁니다. 그 전통을 어떻게 이어가느냐가 오늘 목회자들이 고민해야 할 절실한 주제입니다.” 학비가 없으면 1년쯤 일을 해 다시 등록을 하고, 함께 공부하는 부인 뒷바라지로 또 쉬엄쉬엄 하고 해서 그는 14년 만에 학위를 땄다. 아내가 공부를 시작한다면 가사노동을 100%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던 그는 ‘평등부부’로도 이름났다. “남자가 여자보다 육체적으로 훨씬 강하기 때문에” 집안일을 적어도 67%는 해야 한다고 믿는 그는 빨래, 설거지는 물론 재봉질과 뜨개질까지 수준급이다. “가사노동을 다른 말로 살림이라고 부르지요. 사람이 살면서 이 살림을 하지 않고는 당장 밥 굶기 딱 좋지요. 생존을 위한 이 일에 남자, 여자 가르면 안 되지요.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운동한다는 남자들이 또한 가장 핍박하는 게 여자입니다. 민중을 해방시킨다면서 바로 자기 부인이나 여동생을 억압해서야 되겠습니까. 가부장제를 떨치지 않고는 진정한 평등사회는 만들 수 없습니다. 특히 가사노동은 사회적 변화없이 지금 마음만 고쳐먹으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평등을 위한 손쉬운 실천항목입니다. 해보세요.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집안에 기쁨과 행복이 넘쳐납니다.” 민중신학 논문 영어로 옮길 계획 그는 아내 학위가 끝나는 가을께 완전 귀국해 대학에서 민중신학을 가르칠 예정이다. 목사를 하면 한 교회 교인들만 살리겠지만, 목회자를 가르치면 그들이 전국으로 뻗어나가 수많은 신앙인들을 해방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5월 광주 학살자들이 버젓이 다시 활개치는 걸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민중신학 공부를 하고 가르칠 작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민중신학 책이 몇권 없는 게 늘 마음에 걸렸는데 논문들이 나오는 대로 영어로 옮겨 학술지에 정기적으로 발표할 계획도 세웠습니다. 나를 거듭나게 한 광주가 지켜보고 있는 한 민중과 함께 가는 길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사진 강재훈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전쟁을 보면 피가 끓는다 예맨…르완다…아프가니스탄…동티모르, 그는 왜 세계의 분쟁현장을 누비는가 (사진/95년 여름 버마의 아웅산 수지와 인터뷰하는 정문태씨. 당시 BBC 와 CNN 에 이어 국내 최초로 이뤄진 이 인터뷰는 한겨레21 70호에 실렸다.) 종군기자 정문태씨 그는 지금 전쟁터로 간다. 세르비아가, 인도네시아가, 이 남자 피를 뛰게 만든다. 전쟁이 터진 곳이 그가 살아있어야 할 삶터다. 전쟁이 없는 곳에서 숨쉬기는 심심하다. 쏟아지는 포탄을 뚫고 내달리는 가슴속에서 팔딱거리는 심장 박동이 그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혈압을 걱정하고, 연봉과 남은 정년을 계산하며, 주식시세와 부동산 경기를 헤아리는 도시인들에게 이 전사가 하는 말은 낯설다. 한 50대 여성기자의 추억 “이 바닥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세이 헬로, 세이 굿바이. 우리식으로 하자면 ‘만나자 이별’이란 말인데 워낙 관계를 지속하기가 어려운 탓에 나온 표현이죠. ‘살아있으면 어디서 또 보자’고들 웃으며 헤어지지만 이 인사만큼 우리 직업을 절실하고 적확하게 전달해주는 게 없죠.” 정문태(38)씨는 종군기자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이후로 그나마 희미하던 종군기자 맥이 끊긴 이 나라에서 그는 이를테면 소속도 없이 백의종군하고 있는 종군기자다. 더구나 전세계를 뒤져도 그처럼 늘 전쟁을 취재하는 이는 드물다. 아니 딱 한사람 있다. 정씨가 94년 예멘 내전 때 만났던 그는, 50대 여성 기자였다. “그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남예멘으로 들어가는 길은 지부티로부터 배를 타고 홍해를 건너가는 방법밖에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투입되는 국제적십자사 약품 보급선을 타고 가는데 밤 7시쯤 무전이 오더군요. 취재기자 하나가 실종됐다는 거예요. 2시간쯤 정박하고 있자니까 모터 보트 하나가 다가오는데 운전사 하나, 아줌마 하나가 탔어요. 연료가 떨어져 10시간을 표류했다는데 그 아줌마 배에 옮겨타자마자 물에 젖은 머리를 탁 털고는 ‘담배’하는 거예요.” 르 몽드 기자 프랑수아즈는 그렇게 만났다.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도로를 내달리다 못견디고 전부 다 내려 차 밑에 납작 엎드렸는데 태연히 서서 ‘기자가 어떻게 엎드려 취재하느냐’고 호령했던 그였다. 그 모습에서 정씨는 종군기자가 뭔지를 느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전쟁보다 재미있는 걸 못봤어요. 재미없는 건 단 한순간도 할 수 없어요. 전쟁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가운데 가장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행위죠. 그 죽음터에서 살아서 돌아나왔다는 자각이랄까, 자의식을 느낄 때 내 존재가치를 확인합니다. 원래 제 피가 그렇게 돼먹은 모양입니다. 집시형이라서 한곳에 붙박혀 있지 못하고 떠돌아야 숨을 쉬죠. 재미없고 피가 끓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 내놓고 하는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는 종군기자를 뱃사람에 비유했다. 한번 나가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종잡을 수 없는 일, 생명걸고 번 돈 한몫에 호탕하게 쓰고 돌아서는 기분,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아낌없이 모든 걸 던져버리는 멋. 어딘가에 묶여 있다는 걸 그는 생각할 수 없다. “80년에 대학을 몇달쯤 다니다가 떨어져나와 굿판도 떠돌고 대구지역에서 민예총 일도 봤습니다. 다 허망했어요. 그 시절을 보낸 이들이 기억하듯, 다들 찢어지고 부서질 때, 자칭 ‘지친 놈들’이 이 나라 저 나라로 유학들을 떠날 때였습니다. 그래도 차마 어찌 미국에 가겠느냐, 싶었지요. 제3세계 연장으로 아시아로 가자 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떠났다. 88년 11월이었다. ‘랑군의 봄’은 가고 버마학생민주전선이 타이 국경에 쫓겨가 있던 무렵이었다. 발길이 저절로 타이로 향했다. 처음엔 어디 가야 그들을 만날 수 있는지도 몰랐다. 정씨는 그들이 만난 첫 외신기자 중 하나였는데 한국에서 취재왔다니까 ‘못들어온다, 외국사람 못믿는다’ 하다가 버티기로 물고늘어지니까 차츰 ‘저녁먹고 가라’로 바뀌었다가, ‘텔레비전 보니까 니네는 화염병 던지던데 그 제조법 좀 알려달라’고 부드러워졌다. 이 친구들을 통해 카렌족 등 다른 민족해방전선과 접촉하면서 그는 종군기자로서 발을 내디뎠다. “첫 기사를 일본 교토 뉴스에 팔았습니다. 남이 취재 못하는 것, 다른 기자들이 못들어가는 곳에 가서 쓰고 찍으면 그게 좋은 글 좋은 사진이었고 잘 사줬습니다. 그 당시엔 아무것도 겁나는 게 없었죠. 포탄이 쏟아져도 두려움이 없었어요. 이제는 포 소리 들으면 몇mm고 어디쯤에서 날아오는 건지, 저런 무기는 어떤 위험이 있는가, 주루룩 꿰지요. 그런데 신출내기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서워요. 알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무서워져요.” 한겨레21 , KBS 등을 타고 국내 언론으로는 최초로 독점 취재한 르완다 내전, 예멘 내전을 비롯해 남사군도, 알바니아, 캄보디아, 랑군, 아프가니스탄… 따끈따끈한 기사가 안방 시청자들과 독자들에게 날아갔다. 그가 가는 곳은 외지인 발자국이 거의 없던 땅이었다. 애당초 어디를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차츰 다니다보니 두가지쯤 잣대가 생겼다. ‘소수약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반군쪽에서.’ 공격하는 놈보다는 공격당하는 쪽에서 취재한다는 나름의 기준이 그를 오늘도 살아숨쉬는 전쟁기사를 만들어내는 드문 종군기자로 만들고 있다. “취재를 하다보면 확실히 반군이 조금이라도 더 도덕적이거든요. 그런 그들과 믿음을 쌓고, 그들과 연결되는 중간 연락책을 폭넓게 사귀는 것 등이 평생 종군기자로 살아갈 제 밑천입니다.” “돌발적인 게 내 생이고 운명” 전쟁터에서 정확한 정보는 목숨이다. 12년째로 접어든 그도 이제는 고급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고참으로 꼽힌다. 현장에 나가보면 일본기자들이 바글대는데 우리 기자는 하나도 안 보일 때 속상하다. 21세기 정보전쟁이 시작된 지 한참인데 한국은 여전히 하루하루 뒤떨어지는 정보싸움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우리 매체들이 지면이건 시간이건 좀 널리 개방해서 나같은 자유기고가들, 종군기자들이 물어오는 질높은 기사들을 많이 실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타이 방콕에 사무실을 내고 일본인 프리랜서들과 손잡고 뛰는 그는 “깡다구와 본능으로 뛸 수 있는 후배들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이 그를 움직이는 제일 큰 동력이란 걸 그가 떠나는 땅을 보면 안다. 그 약소국 뒤에 숨어 있는 ‘미국’이란 천의 얼굴을 잡아내는 것이 그가 평생을 건 취재목적이기 때문이다. “10년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전투든 분쟁이든 국지전이든, 어떤 전쟁이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 전쟁이 없어요. 이 부분을 안 보면 정확한 외신 기사, 전쟁 기사는 쓸 수 없다고 봅니다.” 그는 다시 내분이 벌어진 동티모르로 떠났다. “돌발적인 게 내 생이고 운명”이라는 이 사내는 해방과 독립에 얽힌 이들 전쟁을 취재하며 한국전쟁을 생각하고 가면 쓴 미국 얼굴을 뒤집어낼 것이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이제야말로 물고문을 이겼다 고문기술자들이 혀를 내둘렀던 독종… 가혹했던 역사를 ‘부적’으로 승화시키다 화가 홍성담 그는 옛 안기부 고문실에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몇날 며칠 계속된 고문에도 끝내 불지 않았기에 고문기술자들이 혀를 내두르며 ‘독종’이라고 딱지를 붙였다. 그때 그가 남긴 말 “조국과 이념은 배신해도 친구는 배신할 수 없다”는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올라 찡한 여운을 남기는 한마디가 되었다. “욕조 속에 머리가 박히는 순간, 그 짧은 찰나에 수만가지 그림이 떠오릅니다. 묘한 환상이죠. 별의별 게 다 보입니다. 죽을 때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이미지들, 때로 내 코에 물을 붓고 있는 인간이 반가사유상의 부처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식구통’(食口通)을 통해 본 20세기 화가 홍성담(44)씨는 그 경험을 물 속에서 스무날 이란 연작에 담았다. 의자에 몸이 묶인 한 남자가 물 속으로 처박히며 물고기들과 만난다. 그는 물고기들과 어우러져 놀고 고기 뱃 속에 들어가 잠이 든다. 밥이 보이고 연꽃이 핀다. 커다란 물주전자 속에서 쏟아지는 물은 강을 이루고 끝내 물고기가 된 사내는 꼬리를 물고 도는 원형 속에 들어가 한폭 만다라가 된다. 그 만다라는 북두칠성을 끼고 돌다 세상만사 액을 없애주고 악귀와 잡신을 쫓아준다는 부적으로 변한다. 물고문으로 죽음 문턱까지 갔던 화가는 분노나 증오에 무릎꿇지 않았다. 대신 그를 지옥불 속에 밀어넣었던 그 물을 제 몸 속에 받아들였다. 스스로 절대불변으로 돌고 도는 물이 되고자 했다. 육신을 혼절케 했던 물을 길어올려 시대를 뚫고 터져나오는 부적을 그렸다. 물 속에서 모든 생명있는 것들은 숨통이 열린다. 꼭꼭 막혔던 군부독재시대, 너와 나, 남과 북의 콘크리트 벽을 뚫는 물의 힘, 그건 고발이나 외침보다 더 무서운 그림이다. “운동가란 뭐냐. 난 보살행을 사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지은 죄가 뭐냐. 이 땅에 산 죄, 전두환 노태우 밑에 산 죄, 분단된 금 속에 머무른 죄, 이게 다 유죄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그 죄값으로 흘린 피와 땀이 다 고행이고, 그렇게 이 땅에 스며든 게 정화수요, 내가 그린 물의 뜻입니다.” 8월12일부터 29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홍성담 개인전’은 화가가 대학 졸업 언저리에 광주에서 마련했던 개인전 뒤 20년 만에 갖는 것이다. 그림을 무기로 통일을 이루고자 했던 한 인간, 그림으로 80년 5월 광주를 증언하고자 했던 한 청년은 이제 20년 세월이 흐른 뒤 그가 겪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말없이 저무는 세기말 한반도를 되짚어보고 있다. 그는 6년 전 옥에서 나올 때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옮겨왔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89년 집단창작으로 그린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슬라이드를 평양축전에 보냈다는 이유로 ‘간첩 화가’로 몰려 3년 옥살이를 마친 뒤였다. 그는 그때부터 이 사회를 창살 박힌 네모난 틀을 통해 바라보기 시작한 것 같다. 꼼짝달싹할 수 없게 인간을 옥죄는 사각형이 한반도 전체를 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밥 연작은 화가가 감옥 안 식구통(食口通)을 통해 바라본 20세기 역사다. “식구통(食口通)은 강아지가 드나들 만한 구멍인데 거기로 밥을 받아 먹습니다. 완고한 억압의 틀이지만 또한 그곳으로 내 목숨을 이어줄 밥이 들나들고 외부와 연결되는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구멍에 매달릴 수밖에 없지요. 내 모든 것이 그 구멍 하나로 감시당하고, 내 상상력 또한 그 구멍 하나에서 시작합니다. 그 네모난 틀에 그린 80개 그림을 붙여 큰 벽화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사각형에 관한 명상’이라 할 것인데, 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역사가 가혹할수록 서사의 틀은 강해진다.” 그는 80년대 민중미술이 저항성만 있었지 사람들 사이로 들어와 보편성을 얻지 못했기에 아쉽다고 했다. 하나의 원형질, 본질적 구조를 만들지 못해서 민중적 투쟁으로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흐르는 물’에서 그 원형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 스스로 “한이 서리서리 맺혀 있는 슬픔의 덩어리”라고 불렀던 5월 판화 로부터 밥 연작까지, 그는 지난 20년이 한줄기로 연결돼 있기에 “이 모든 것은 지난 얘기가 아니라”고 했다. “너무나 많은 상처가 여전히 우리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지난 세월을 제대로 밟고 정리하며 지나오지 못했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 사회가 걷고 있는 행로입니다. 이번 전시회를 보며 사람들은 ‘아직도 과거에 하던 그걸 하고 있니’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서 냉소나 던지고 있는 과거의 인간으로 남고 싶지는 않습니다.” 영정 판화 파는 일이 지긋지긋하던 때 그는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던지’ 죽은 열사들 영정 판화 파는 일이 지긋지긋하던 때가 불과 몇전 전이었다고 상기시켰다. 가끔 ‘홍성담’이란 말만 듣고 무조건 “저거 또 5월 그렸구만”이라고 광주민주항쟁에 제 그림을 끌어다 해석해버리는 일도 신물이 난다고 했다. “내 그림은 한번도 과격한 적이 없어요. 이건 역사화도 아니고 민족수난도도 아닙니다. 내가 살고 보고 있는 현재를 내 언어로 얘기하는 겁니다. 나를 죄고 내 영혼을 파괴했던 그 시대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난 그걸 나보다 더 고통스럽게 이 시대를 앞서 걸었던 사람들 얼굴에서 봅니다. 내가 그리는 부적들은 ‘내가 너를 닮으리라’는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부적이 무엇입니까. 4월 혁명과 5월 광주와 6월 항쟁에서 투쟁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바로 우리가 함께 나눌 부적입니다. 우리 속에 살아 있는 그들 얼굴,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그날의 상처, 그걸 내 그림은 원형질로 삼아 흘러갈 겁니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귀신도 모르는 ‘제임스 유’ 평양 활보하는 유일한 장애인 벤처사업가 "굶는 동포들 일으켜세우겠다" 북한투자전문가 유완영씨 그가 내민 여권은 너덜너덜했다. 속지까지 끼워서 썼는데도 벌써 도장 찍을 자리가 없다. 지난해 베이징에만 60번을 다녀왔으니 비행기 타기가 신물이 날 만하다. 베이징뿐인가. 그가 가는 곳은 귀신도 모르는 수가 많다. “원래 평양 거리는 신체장애인들이 나다닐 수 없게 돼 있죠. 그런데 제가 유일한 예외라는 것 아닙니까. 우스운 얘기지만 사람들이 농반진반으로 당신 뒤에 누가 있는 거 아니냐 묻습니다. 한때는 조총련이냐, 공작금은 얼마나 받았느냐, 의심도 많이 받았습니다. 한반도에서 산다는 거 괴롭다 싶었죠. 정말 든든한 ‘빽’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어른 한분 있으면 이 나라가 훨씬 잘될 텐데요.” 컬러모니터 생산합작, 바로 그 사람 유완영(36·케테르 회장)씨는 말하는 중에 ‘어른’이란 단어를 많이 썼다. “‘어른들’이 좀 잘해주면 이 나라가 좋아질텐 데요”라고 했다. 어른들이 못하던 일 젊은이들이 하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의심하고 해코지 하는 일이 더 많다고 슬퍼했다. 선천성 소아마비이기 때문에 못했던 일은 없었지만, 남한 국적이라 못했던 일이 더 많았다. 도저히 여기서 살 수 없어 러시아와 미국으로 떠돌며 맨 몸으로 부닥쳐 깨부순 세월이 지금 그가 서 있는 지점을 만들어줬다. “80년대에 젊은 놈 혈기로 소련 보드카를 들여다 팔다가 어느 날 갑자기 파산했죠. 20대 말, 도저히 여기선 재기할 수 없다 싶었습니다. 부도가 난 상태라 명예회복도 안 되고 다시 일어선다는 게 희망사항이었죠. 소련 때문에 망했으니 소련으로 가자. 파리를 거쳐 모스크바에 내렸을 때 정말 얼굴에 철판깔고 별의별 짓을 다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북한이 제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분단교육을 20여년 받아온 평범한 젊은이가 느꼈을 불안과 의혹을 떨치고 나자 갑자기 북한이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난 유학생들처럼 학문이 아니라 절실한 삶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한마디로 생활 속에서 구르며 남북을 뛰어넘었습니다. 아마도 미국으로 건너가 대북투자 컨설팅 회사를 차리게 된 건 그 몸으로 구르며 체득한 대북 경험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93년 10월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국제경영연구소를 내고 재미교포들을 대상으로 대북투자상담을 시작했다. 제임스 본드 007작전처럼 북한 일을 보던 그는 이름도 쉽게 ‘제임스 유’로 바꾸고 북한에 관심을 나타내던 미국교포들 상담을 시작했다. 95년 8월에 열었던 ‘북한투자진출전략세미나’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북한 모두가 입이 딱 벌어졌던 회의였다. 다리를 저는 한 보잘것없는 청년이 ‘현장’에서 뒹굴던 경험과 뜨거운 마음 하나로 성사시킨 이 국제회의는 국경을 뛰어넘는 민간차원 외교로 큰 주목을 받았다. “대북사업은 벤처사업입니다. 지금 정주영 회장이 오가는 ‘현대’말고 남북경협이 거의 죽었는데 그런 대기업 빼고 중소기업 차원에서 좀 뛸 수 있는 분위기가 있어야 휴전선에 진정한 봄이 옵니다. 사람들이 굶어죽어간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가 이제는 비료라도 좀 모아 보내자 해도 단돈 1만원 내는 걸 아까워하는 분위기로 돌아섰습니다. 이거 비극입니다. ‘어른’들이 잘못해서 그런 겁니다. 왜들 그렇게 꽉 막혀 있습니까. 누군가 벽을 허물 각오를 해야죠. 도대체 북한을 이용해서 돈을 벌겠다는 ‘어른’들이 설쳐서야 남북관계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는 ‘조선상품’이면 뭐든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들여올 맘을 먹고 있는 기업인이다. 며칠 전 수입해온 북한미술품들을 인사동에 풀어놓고 있는 중이다.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와 봉래호에서도 선보이고 있는 이 문화상품들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만수대창작단 수예품들로 액자며 포장이 서툴러보여 그렇지 세공기술 하나는 감탄을 자아낼 만큼 섬세하고 뛰어나다. 닭털로 정교하게 꾸민 호랑이 얼굴, 예술성이 돋보이는 부채며 목각인형들로 가득 찬 사무실에서 그는 “왜 도와주겠다는 발상부터 하느냐, 북쪽이 거지냐”고 했다. “마음이 문젭니다. 어차피 남북한 문제라는 게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늘 한국인이 배제돼왔던 역사도 있고 해서 힘든건데, 언제까지 소 닭보듯 해야 하는 건지 슬플 때가 많습니다. 전부 다 큰 것만 생각할 순 없는 것이고, 더구나 북한사회는 이해하기가 그렇게 수월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 우리뿐 아닙니까. 한반도 문제를 누가 풀겠습니까. 성질 더럽다고, 하늘도 구제못할 가난이라고 형제를 버리겠습니까. 누구든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가다 보니 길이 났다고 훗날 역사가 기록할 때, 그 사람 중 하나가 저이길 바랄 뿐이지요.” 유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전자모니터 생산업체인 ‘케테르’를 ‘평양전자제품개발회사’와 합작시켜 컴퓨터용 컬러모니터 생산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이 말마따나 “굶는 동포들 적선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하도록 일으켜세우는 일”이다. 평양 중심가 6천여평 규모에 80여명 북쪽 노력수(노동자)가 일하는 이 공장은 그가 꿈꾸는 진정한 남북경협의 첫 발자국이다. “남북문제 하면 전부다 엄청 큰 것만 생각합니다. 누구나 정주영 회장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선 백날 도루묵입니다. 남북문제는 마라톤입니다. 달리는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이 절실하게, 목마르게 제 가는 길 그 선에서 쉬지말고 달려야 합니다. 남북문제 다룰 때 언제 한번 국민 합의 물었습니까. 소수 정치인이건, 권력자건, 있는자건, 힘있는자들끼리 했습니다. 뭘 매개체로 남북문제를 풀어갈 건지 어느 정부도 국민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통일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있었지 어떻게라는 시시콜콜은 없었습니다. 비용은 엄청나다는 놀람만 있었지 산업격차를 줄이고 공유 프로그램을 늘리자는 진지한 논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21세기에도 계속 갈 겁니까.” “이 일에서 승자는 없다” 불편한 다리를 추스르던 그이 얼굴이 붉어졌다. “이 시대에 이 일을 하는 젊은 사람 경험으로 솔직하게 하는 말”이라며 그는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또 “이 일에서 승자는 없다”고 했다. 다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이제 우리는 금강산 관광간답시며 북한이 그렇게 못산다더라쯤 되는 편견섞인 생각을 주입시키는 것만은 그만하자”고 말했다. “나 같은 사람도 여기서 이 일을 합니다. 조금씩, 천천히, 저 오래 철옹성처럼 막혀 있던 남북 벽을 허무는 데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씩만 했으면 싶습니다. 난 남들이 생각 안 하는 쪽으로 갔습니다. 조카·자식세대에게 통일 길목에서 이 삼촌·애비가 뭣좀 했다고 역사에 남길 수 있다면 참 목메게 고맙겠습니다.”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100년이 드라마야, 드라마…” 20세기를 꽉 채워 산 아흔일곱 노인의 인생역정 (사진/독립노인 엄자륜씨) 1903년에 태어났으니까 세는 나이로 아흔일곱이우. 오래 산 게 자랑거린 아니지만 그럭저럭 100년을 살았네. 부끄러울 정도지. 큰아들이 지금 일흔둘이라 같이 늙어가는데 함께 나서면 사람들이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요, 물어. 지지난해 둘째마누라가 먼저 가고 난 뒤 시력하구 청력이 좀 떨어졌지만 아직도 신문보고 사람들 만나구 밥 끓여먹는 데는 아무 불편이 없소. 늙으면 다시 애로 돌아가는 거라 보모가 필요한데 마누라가 없으니 누구더러 내 보모 돼달라겠소. 애들 자유를 뺏기도 싫고 짐 되는 것도 안 내켜서 난 나대로 편안히, 애들은 애들대로 자유롭게 살우. 보다시피 그릇은 깨지 않게 다 플라스틱이구 조그만 전기밥통이랑 냉장고에… 혼자 사는 네쨋딸 김치도 담가다주는데. 내 몸 내가 맘대로 부릴 수 있을 때까진 이러고 움직이는 게 좋아. 받아먹으면 그때부턴 송장이지. 난 늙으면 책 친구해야지, 했는데 그건 안 됩디다. 돋보기에 확대경 대도 가물가물 하니까 못 보지. 겪어보니까 독서로 소일한다는 노인네들 말이 다 거짓이야. 이젠 친구들도 다 가고 후배들까지 가는 판이니 외롭지. 철 바뀔 때 내복 챙겨주고 맞춤한 옷 내주는 사람이 없어 감기 잘 걸리는 게 좀 불편해. 여기(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가 공기 좋고 나무 많고 터가 널찍해 그저 소일하며 삽니다. 집 울타리삼아 빙 둘러친 이 나무들 다 내가 가지치기 해준 거요. 저기 텃밭에 심은 배추, 열무, 호박 아무나 따가라고 키우지요. 밤에도 대문 안 잠그고 잡니다. 뭐 가져갈 게 있어야지. 만주와 서울, 그리고 일본 내가 함북 청진 산인데 참,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얘길세. 세살 때 을사보호조약이 이뤄지고 여덟살 때 일본이 우리나랄 먹어치웠단 말야. 국권을 빼앗겼단 얘기지. 그러자 내 아버지가 우리 육형제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을 하셨소. 일본놈 세상에서 어찌 사느냐, 이제 과거 볼 곳도 없지 않느냐 거사하신 거지. 우차(牛車)에 짐을 싣고 가는데 막내인 날 앉히려 하는 걸 걸어가겠다고 우겼소.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당당하게 걸어다닙니다. 당시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사람들, 먹고살 길이 없는 거야. 열두살 때 온 가족이 이번엔 러시아로 망명을 했소. 지금도 내 러시아말 합니다. 1차 세계대전 땐데 우라디보스토크 한인 부락 사람들을 스탈린이 사람 못 살 곳으로 내쫓는 일이 생겼소. 열여섯에 다시 만주로 왔는데 병역에 걸리게 생겨서 도망을 쳤지. 선친 말씀이, “네 형들은 다 늙었으니 너만이라도 새 문명을 섭취해 신개화 공부를 해라” 허락이 떨어져 비로소 그때부터 일본말 공부를 시작했소. 그게 열여덟살 때요. 스물세살에 함북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원을 했는데 인기가 좋았지. 공부가 모자라다 싶어 스물여섯엔 일본 후쿠오카사범학교로 유학을 했어요. 너희들이 교육을 담당하려면 니네 국토를 샅샅이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 큰소리치며 일본애들을 몰고 무전여행도 했소. 젊은 혈기로 조선 남아 기개를 떨쳤지. 정구, 야구, 스케이트 못하는 운동이 없어서 당시엔 날렸어요. 귀국해서 소학교 교장을 했는데 지금도 함북 출신 실향민들은 엄 교장, 엄 선생 하면 다 알지. 감격으로 맞은 광복, 그냥 서울로 뛰쳐올라왔소. 일본 사람들이 다 가니까 일꾼이 없는 거야. 내가 과학교육진흥위원을 지냈기에 뭔가 해방 조선에 할 일이 있다 싶었어요. 누가 독립정부를 세우겠느냐, 뭐 그런 엉뚱한 맘이 듭디다. 당시엔 석유공장이 뭔지 사람들이 몰랐어요. 이승만 박사도 “엄 선생, 석유 없어도 호롱불 켤 수 있는 것 아니요” 했을 정도니까. 그래 내가 그랬지. “각하가 지금 입고 계신 양복 바지에도 석유에서 뽑아낸 실이 들어 있습니다” 했더니 놀라더만. 난 과학에 일찌감치 눈을 떠서 나라가 돌아가려면 제일 먼저 석유가 있어야겠다, 미국 석유만 들여다 써서는 안 되겠다, 깨쳤어요. 지금이야 어린애들도 아는 거지만 50년 전만 해도 석유가 뭐인가 다들 몰랐어요. 그런 시대에 내가 어떻게 석유 생각을 했을까, 지금 돌아봐도 우스워요. 조선석유주식회사를 차려 울산 태화강 건너편 허허벌판에 석유공장 부지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어요. 공장 지을 자재를 운반하려면 철도가 필요해서 그걸 끌어다 만들고 막 1기 공사를 끝내고 준공하던 날, 하, 이 엄자륜 100년이 다 드라마야, 드라마. 준공식을 보러 미국 대사와 허정 교통부 장관 등 당시 정부 관계자들이 다 울산에 내려왔는데 점심 때가 가까워서 미 대사관에서 급히 연락이 온거라. 전쟁이 터졌다는 거야. 모두들 인사 한마디도 없이 달아났어. 이틀 걸려 공장 뒷처리를 하고 서울로 떠나려니까 대전까지 밖에 못 가네. 피난을 갔다가 수복이 돼서 석달 만에 서울에 돌아오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원산에 먼저 들어가 석유공장을 보수하라는 거야. 목숨 내놓으라는 거지. 그래도 내 기술자 한명 데리고 구축함 타고 전쟁터에 들어간 사람이오. 그래서 목숨이 긴가. 우리나라 석유공업 역사가 이렇게 시작됐는데 누가 알갔어. 박정희에게 석유공장을 빼앗기다 난 70년에 은퇴란 걸 남 탓에 했어요. 박정희 정권에 석유공장을 빼앗겼는데 알몸만 남고 보니 오히려 시원하더라구. 내가 이래서 또 오래 사나봐. 오래 살면서 자꾸 생각키우는 건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과연 뭘 했는가 말이야. 정치를 잘 못했기 때문에 우리 백성이 그렇게 고생을 했구나. 우리 민족이 참 영리한 사람들인데…. 위정자 잘못 만나 나라가 부도난 것까지 보고 나니 기가 막힙디다. 돌아보면 일백년이 잠깐이지. 우둔할 만큼 열심히 일했으니까. 필요없는 걱정 안 하고 희망에 넘쳐 살았소. 돈 벌잔 생각 없었고. 자기 하는 일에 열정 있으면 잡념이 없어서 건강은 따라줍디다. 인간이니까 후회가 어찌 없겠소. 내가 딸부자라 딸 다섯에 아들 둘인데 그것들이 잘 자라 손자 손녀 훌륭히 키워냈으니 낙이라면 가끔 서울나들이 가 아이들 보는 거지. 2800원이면 고속버스가 데려다주는데 뭐더러 차를 보내라 마라 번거롭게 하겠소. 110살까진 살 것 같은 기분이라. 다 산 늙은이가 20세기 꽉 채워본 것도 과분한데 21세기에 뭘 보겠소. 딴 건말고 그저 남북통일돼서 고향에 가보고 죽었으면 하는 게 남은 소원이라오. 사진 강창광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바이올린은 깨어있다! 그가 밝은 연두색 점퍼 차림에 검은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호텔 커피숍에 나타나자 주위가 환해졌다. 큼직큼직 시원스런 얼굴에 활짝 피어오르는 웃음이 터질듯 싱싱하다. 그는 지금 음악회에 선 ‘신동’이 아니라 인생이란 무대에서 봄을 맞고 있는 ‘봄처녀’다. “‘천재소녀’라는 수식어야 남들이 붙여준 거고요, 전 저일 뿐이지요. 여느 아이들처럼 학교 다니고 숙제하고 밤샘 파티도 즐기고, 사춘기도 거쳤고. 그렇지만 끝에 가서 저에게 남는 게 뭘까 하면 결국 음악이죠. 음악가라는 거 자랑스러워요. 100여명 오케스트라와 한 무대에 설 때 얼마나 많은 걸 배우는지요. 무대가 제 인생 배움터예요. 음악처럼 아름다운 건 없어요.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하죠.” ‘천재’라는 단어가 징그러웠다 (사진/9살 때 필라델피아 교향악단 갈라 콘서트에 독주자로 초청받아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와 협연한 신동시절 장영주. 깜찍한 빨간 드레스가 눈에 띈다.) 장영주(18)양은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말을 주고받는 사이사이 그를 위해 나와 있는 음반사 직원들에게 농담을 던졌다. 지난 밤 늦게 대구에서 공연을 마치고 아침 일찍 서울에 올라왔다는 그는 빡빡한 일정에도 지친 기색이 없다. 3월23일 인천에서 시작해 25일 서울, 27일 전주, 28일 부산, 30일 대구를 거쳐 전석 매진이 된 서울에 다시 올라와 4월1일 앙코르 공연을 열고 2일 대전에서 마치도록 돼 있는 한국 순회독주회는 길에서 시작해 길에서 끝나는 여행의 계속이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가 필라델피아집에 머무는 시간은 잠깐일 뿐, 이미 2002년까지 스케줄이 꽉 찬 그는 대륙과 대륙을 날아다니는 연주여행으로 날과 달을 보낸다. 비행기와 비행기를 갈아타고, 호텔에서 호텔로 떠돌며, 숨돌릴 틈 없이 줄을 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며 기자들 인터뷰에 응하는 그는 걱정하는 이들 우려를 오히려 “이 모든 걸 즐긴다”는 한마디로 가볍게 넘겼다. “저도 인간인데 피곤하죠. 하지만 그걸 무대에서 관객에게 보이면 안 된다고 배웠어요. 그이들이 어렵게 시간내고 표사서 음악회에 와서 듣고 보고 싶은 건 인류공통 언어인 음악, 그걸 나르는 프로 연주자죠. 전 무대를 좋아해요. 게다가 호텔이 얼마나 편한데요. 청소 안 하죠, 빨래도 다해주죠, 매일 색다른 음식 먹지요. 불편한 점이 있다면 매일 바뀌니까 가끔 제 방 호수를 헤갈린다는 거예요.” 그는 참 잘 웃었다. 그 웃음 속에 스며 있는 낙천적 기질이 아마도 이 일찌감치 웃자라버린 연주가를 버팅기고 있는 힘인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이 한창 부모 품에서 어리광을 부릴 나이인 5살에 동네 교향악단과 협연을 하고 8살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데뷔 무대를 연 뒤 9살에 세계 최연소 레코딩 기록을 세운 장영주는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신동’ ‘천재’란 단어가 징그러웠을 법하다. 그가 직접 쓴 ‘과연 나는 천재인가?’란 글( 객석 98년 3월호)은 그 속내를 짐작게 하는 한 단서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니 신동이니 하는 소리를 무척이나 많이 듣고 자랐다. 코흘리개 시절, 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사람들은 ‘어마, 쟤 천잰가봐. 어쩜 저렇게 잘할 수가 있어!’라고 수군거렸다…그 말 속에는 ‘지금은 아이로서 잘하지만 어디 나중까지 잘할 수 있나 두고 보자’라는 가시돋친 의미가 숨어 있는 듯했고… 그래서 ‘천재’라는 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몇년 전부터 그런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나는 천재다’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자꾸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 자신감이 생기고… ‘묘한 힘’으로 내 속에 자리하며 나를 이끌었다. 새로운 작품세계로의 도전에 힘과 정열로 작용하기도 했고, 다양한 작곡가의 곡들을 섭렵해가는 데 엄청난 에너지와 속도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가 스스로를 가꾸어가는 이 마음가짐은 현실에 그대로 나타난다. 올해 내놓은 8집 음반 달콤한 슬픔 첫머리에 담긴 비탈리의 샤콘느 를 그는 하이페츠 같은 거장들이 남긴 명반과는 다른 해석으로 대담하게 뒤집어놓았다. 지상에서 가장 가슴 저미게 슬프다는 이 곡을 그는 오히려 느리고 담담한 표현으로 넘어섰다. ‘나는 슬퍼’가 아니라 ‘나는 기뻐’ 속에 눈물을 감춘 슬픔을 드러낸 것이다. 그 나이쯤에 어릴 법한 달콤한 낭만이 배어 있는 듯도 하다. “2000년부터 베토벤과 브람스를 시작해도 될 것 같다”고 말하는 품이나 “바흐와 모차르트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조심스레 내비치는 한마디 한마디가 “이제 내 색깔을 찾겠다”는 단호한 결심으로 들렸다. “많은 이들이 저더러 ‘넌 행운아’라고 해요. 음악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장난감 대신 바이올린을 가지고 놀았고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은데다 좋은 가르침에 훌륭한 지휘자들과만 연주했고 단 한번의 슬럼프도 없이 성공으로만 내달렸다고요. 물론 다 맞는 말이지요. 기계적인 연주가가 아니라 진정한 음악가로 키우려고 세심하게 이끌어주신 부모님 덕이야 더 말할 수 없고요. 두분은 ‘네가 하고 싶으면 하라’고 늘 마음을 열어주셨어요. 옛날엔 쉬웠죠. 그러나, 전 이제 빨간 드레스를 입은 꼬맹이가 아니에요. ‘쬐끄만게 귀여워라’하는 사람들도 없고요.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생각합니다. 음악가로 사는 것, 제가 평생 혼자 걸어가야할 그 길을 만들어가야지요.” 음대 마다하고 일반대학 진학 음악에 인생살이가 묻어난다면, 그는 이미 어린 시절에 깊은 삶의 무늬들을 바이올린 속에 엮어냈던 특출한 인간이었다. 평생 노력으로도 모차르트 발뒤꿈치조차 못 쫓아가 절망하고 신을 저주했던 살리에르보다는 아마도 모차르트쪽에 가까울 그는 음악에 있어선 제 나이보다 엄청 무겁고 큰 걸 번쩍번쩍 치켜든 ‘장사’라 할 만하다. 그런 ‘힘셈’이 장영주 음악이 빛나는 까닭이다. 그의 온 몸이 풍기는 내음이 ‘건강미’라는 건 그가 무대로 걸어나와 씩 웃으며 힘차게 활을 내리긋는 그 첫 인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손이 짓무를 지경으로 컴퓨터게임을 즐기고 처음 가본 고속도로 심야 휴게소에서 먹은 과자가 맛있었다고 재잘거리던 그가 청중이 많을수록 더 신들린듯 음악이 자신에게 내려온다고 말할 때, 그 평범한 일상과 비범한 무대가 엇갈리는 지점에서 장영주 음악이 품은 ‘건강함’이 드러난다. 올 가을 대학에 진학하는 그가 음악대학이 아니라 역사나 독문학을 전공하는 일반대학에 가려는 건 그런 ‘장영주다움’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천재 음악가가 아니라 세상에 깨어 있는 ‘좋은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이 의젓한 젊은이가 ‘사라 장’이란 이름으로 세계에 한국인 핏줄을 떨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음악가라는 게 굉장히 오래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더 좋아요. 손이 돌아갈 때까지, 일흔 여든 할머니가 돼서도 바이올린을 들고 있을래요. 그래요, 음악없인 살 수 없어요.”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저를 때려주고 싶습니까?"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 필화 아닌 필화… 그의 글에 ‘적당한 타협’이란 없다 시인 김정란 그를 ‘싸움꾼’으로 알고 있던 이들은 그렇게 당차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 정말 이 여자인가 놀란다. 인파에 묻히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키, 여릿여릿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몸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위태위태해 보이는 걸음걸이가 그를 다시 보게 한다. ‘이건 모순이다.’ 그러나 일단 말을 시작하면 그는 제 이름을 찾고 제 심지를 찾는다. “…습니다” 어금니 맞추는 소리가 딱 딱 울리는 그이 달변을 10분쯤 듣고 나면 결국 ‘이 사람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겠구나’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전화폭력에 부들부들 떨다 “요새 전화받느라 바빴어요. 그리고 많이 아팠습니다.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소나기처럼 터지는 ‘따르릉’ 소리에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거의 성폭행 수준 욕을 들으면서 참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공개된 자리에서 문제제기를 해야지 얼굴을 감춘 수화기 속에서 폭언을 퍼붓는 덴 질렸어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정란(46·상지대 불문과 교수)씨는 지난 한달여 전화폭력에 시달렸다. 조선일보를 아십니까? (개마고원 펴냄)에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 부드럽고 멍청할 것, 그리고 나 자신만을 위할 것’을 썼다가 필화 아닌 필화를 겪었다. “ 조선일보 의 잽싼 몸바꾸기”가 “너무나 위험해 보”이고 “우리 사회에 아주 나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그가 잘 아는 문학판 예를 들어 그걸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욕설뿐이었다. 문학을, 문인을, 언론이 질질 끌고 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외친 그에게 그가 연대정신을 품고 동료라고 여겼던 문인들이 오히려 돌을 던졌다. “90년대 들어서 한국 문학은 부드럽고 멍청한 애첩의 지위로 몰려났다”고 동료들 어깨에 거침없이 죽비를 내리친 그가 때려주고 싶게 미웠을지도 모른다. “저도 이 사회를 몰이하는 조선일보 라는 거대담론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어요.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가 쓴 글을 읽으면서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몰랐으면 고백해야지요. 적어도 조선일보 에 들러리 서지는 않겠다는 맘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는 단호하고 딱 부러졌다. 남들이 뭐라건 그 눈에 옳게 보이는 것을 옳다고 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아줌마 시인들을 열심히 비평했고, 지난 91년 김문기 이사장 시절 상지대 재단이 교수협의회를 붕괴시키려 했을 때 악바리처럼 농성과 단식으로 그 비합리에 맞섰다. 고등학교도 못 나온 아줌마들이 뭘 썼을까, 의심하다가 시가 너무 좋아 읽고 확신을 가지는 과정에서 계급의식을 깼다. 91년 대학에서 해직되고 난 뒤 재단과 싸우면서 오히려 단단해졌다. 정치적으로 사회를 읽는 방식과 동시에 문학을 밀고 나가는 방식을 익혀가기 시작했다. 그가 옳다고 믿는 걸 사회에 대고 발언하자 가슴속에 오래 묻혀 있던 ‘여성의 힘’이 저절로 풀려나왔다. “아버지는 보기 드문 인텔리였어요. 상대적으로 교육을 덜 받은 엄마는 이를테면 전근대적이었지요. 아버지를 닮고픈 마음과 어머니를 싫어하는 마음, 그 두 방향은 내 문학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이었습니다. 80년대를 고통스럽게 보낼 때도 이 두 극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 속에 숨어 있던 ‘어머니’를 발견한 거예요. 겉돌지 않고 내 소리를 낼 수 있는 힘, 내 새끼를 위해 싸우는 어미늑대처럼 이건 내가 할 수 있겠다는 기운이 솟구치는 믿음, 계파나 노선이 아니라 자기 본질이 가르쳐주는 대로 나아가는 길을 찾은 겁니다. 좋은 여성이면 정말 남성보다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가 쓴 칼럼에 ‘적당한 타협’이란 없다. 시를 쓰든, 산문을 쓰든, ‘김정란’이란 이름 석자가 붙는 한 그건 “세상에 대고 반드시 나를 이야기하겠다”는 확신에 찬 시요 글이다. “핏줄들. 알리바이?/ 어림없어. 일어나// 이럭저럭 세월은 갔다. 사실이다. 나는/ 살아 남은 내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허깨비…라고. 내 안의 핏줄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나는 다시 울어. 오월, 살아 있는 일이/ 아아 아직도 추문이야. 현장의 추문./ 나는 여전히 현행범이야. 오월 다시 오월은 오고.”(‘다시 오월’ 중에서) 그는 이제서야 80년 5월을 제대로 노래할 수 있다. 월간 현대시 에서 펴낸 시낭송 음반에서도 그는 ‘비겁한 정원사들’이란 시 속에 광주 민중항쟁을 노래했다. “여긴 내 물이 아니야”라고 도리질쳤던 고통스런 80년대를 거쳐 그는 이제 자신있게 역사와 사회에 대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뽑아낸 육성을 뿜어낼 수 있다. “아버지는 늘 ‘피양’이라 부르셨던 평양에서 내려오셨던 분이셨고 어머니는 4·3사태가 일어났던 제주 분이셨어요. 이 두 극이 만나 빚어낸 나, 영민했던 부친과 격렬하고 직관이 강했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나를 분석해보면 지금 내가 보여요. 아버지를 사랑했던 딸인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 남자가 와서 날 꺼내주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몸을 일으킨 건 내 속의 여성이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니었던 날들, 담대하라던 아버님 말씀을 오늘도 되새깁니다.” “나는 시를 산다(生)” 그는 시인들의 직관이 “가장 기능이 좋은 사회적 안테나”라고 말한다. 시는 “자기가 먼저 간다.” 그래서 그는 시를 “쓴다”고 하지 않고 시를 “산다[生]”고 한다. “감기. 아무렴. 난 감 잡고 있지./ 뭔가 삐걱거리는 것을.// 감기, 내 삶에 대한 내 삶 전체의/ 징후. 내 기질이 내 삶에 대해 가지는 관계./ 안에서 어긋나는.”(‘지옥에서- 감기기운’ 중에서) “독살스럽다는 말까지 들을 때, 때로 이렇게까지 글을 써야 할까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칼럼을 읽고 멀리 미국에서까지 전화주신 분들, 이러다 우리 엄마 테러당하는 거 아니냐면서도 절대적 지지자로 힘을 주는 두 아이들, 말은 안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동지들, 이들 격려로 다시 일어섭니다. 허위의식과 감상과 속임수와 싸구려 상술로 똘똘 뭉친 문학과 언론 행태를 공격하는 데 제 단호한 여성은 늘 용감합니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바둑세계의 본질을 찾아서 “피말리는 승단대회보다 기분좋은 동네바둑을… 상상력 죽으면 바둑도 죽는다” 전문기사 문용직 그에게 바둑은 세상에 대한 하나의 은유다. 그 네모난 반상에서 삶이 풀려가는 길을 더듬는다. 가로 세로 열아홉줄이 그어진 판 위에 검은돌과 흰돌 쥔 두 사람이 공평하게 한점씩 놓아가며 승부를 내는 것. 그 안에 무슨 깊은 뜻이 숨어 있으랴마는 재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것, 그게 산다는 것 아닐까. 그저 인간이 얼마나 불확실한 존재인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추리하며 좇아갈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없는 사고의 흐름을 손으로 짚어가 볼 뿐이다. 잠시 현실에서 비껴서 자기를 비춰주는 거울을 바라보기. 따라서 그에게 바둑은 발견하는 것이다. 12년째 4단, 그게 대수랴 “무엇보다 바둑은 우리가 인생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지저분한 관계와는 달리 승부가 깨끗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껏 바둑만큼 공정한 게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고 받으며 끊임없이 자기 사고를 반추하고 검토하고 또다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살아간다는 건 바둑두기 같은 것 아닐까요. 한점 두점 놓다 보면 시간은 흘러가고, 니나 내나 이 판에서 억지로 살 거나 안 살 수는 없는 거죠. IMF가 터지고 나서 기원이 잘 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실업자들에게 바둑만큼 좋은 게 있을까 싶어요. 현실로부터, 고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해주니까요. 시간이 좀 걸린다는 흠이 있지만 어떤 상대라도 다 즐겁죠. 바둑을 둘 때는 불만 불평을 잊고 의식이 평온해지니까.” 전문기사 문용직(41)씨는 바둑을 두면 세상이 즐겁다. 땡볕이건 장마건, 김씨들이 쇼를 하건 주가가 널을 뛰건, 바둑판만 보고 앉았으면 심신이 유쾌해진다. 83년 입단한 뒤 12년째 4단에 머물러 있지만 그게 대수랴. 승단대회 나가 피말리는 것보다 기분 좋게 동네바둑 두는 걸 더 즐긴다. “제가 아는 한 바둑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임입니다. 안타까운 건 각종 대회에서 우승하는 프로 기사들 얘기나 상금 액수에만 치우쳐 바둑을 돈 버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는 거죠. 싸우는 바둑도 좋지만 바둑을 두면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승부 외적인 점에 더 애정을 가지면 얻을 게 더 많을 텐데 아쉽습니다. 특히 지난 400여년 한국 바둑은 일본 바둑계가 개발해온 이론에 무임승차한 감이 있습니다. 일본 바둑책을 공부해서 나온 걸 ‘우리 것’이라고 할 수는 없죠. 이제 한국 바둑도 세계 기전 우승자니 국수니 하는 타이틀 따기 바둑에서 벗어나 바둑 본질의 발전에 힘을 보태는 성숙한 시대로 접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지난해 내놓은 바둑의 발견 (부키 펴냄)은 이런 생각들을 정리한 바둑책이다. 현대 바둑의 역사를 두번의 ‘패러다임’ 변혁으로 정리한 이 책은 기보 위주 수법 해설이나 한국기원 주변을 훑는 신변잡기 에세이류를 벗어난 과학적 분석으로 바둑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다. 이 책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바둑을 오늘날 영토 획득을 추구하는 제로섬 게임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바둑을 하나의 전쟁으로 보는 것은 중국의 바둑이나 한국의 순장바둑, 일본의 바둑이 채용한 모형일 것이다… 그러므로 바둑 자체의 모형과는 관계없이 바둑은 예(藝)로서 승화할 수도 있으며, 비속한 수준에 머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문제는 바둑이 아니라, 예 그 자체와 인간이 하나의 상품이 되는 데 있다.”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와 위로 형들이 두는 바둑판을 넘겨보며 자기도 모르는 새 바둑을 익혔다. 김천에서 바둑 잘 두는 소년으로 이름난 그가 서울에 올라온 건 김천고 1학년 때로 전국대회에 나갔다가 바둑명문으로 이름난 충암고에, 말하자면 스카우트를 당했다. 바둑에 빠져 산 고등학교 3년을 그는 “물리고 싶은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바둑책 외엔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다른 쪽 가능성을 버렸다는 안타까움으로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정치과정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결국 다시 바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바둑을 선택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운 건지 몰랐어요. 전 너무 늦었죠. 바둑은 일찍 시작할수록 좋습니다. 머리가 깨끗하게 비어있을수록 좋죠. 요즈음 한국기원에는 연구생으로 들어오겠다고 초등학생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물론 다 전문기사가 될 수는 없지만 특히 재주보다는 승부근성이 강한 어린이들이 장래가 밝다고 말할 수 있죠. 독해야 긴장감을 견뎌내고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도 기업들이 홍보수단으로 각종 기전을 창설한 덕이죠. 80년 말께부터 기사도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게 됐으니 사회변화에 따라 한국 바둑사도 흘러온 셈입니다.” 바둑동네와 문학동네가 가까운 이유 그는 지난 7월3일 한국기원에서 ‘사이버 공동체와 바둑’이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국 바둑이 승부사 근성뿐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두터워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마련하고 있는 심포지엄 세 번째 자리였다. 이날 주제는 인터넷으로 국제적 교류가 활발해진 바둑 동네의 변화를 짚으며 앞으로 바둑 세계가 이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미래를 전망했다. 그는 지금 당장 ‘바둑이란 무엇인가’ 질문에 답할 순 없지만 그걸 알아가기 위해 심포지엄을 꾸준히 열겠다고 했다. “자유로운 상상력이 고갈된 바둑판을 우리는 ‘바둑의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상상력이 죽는 순간, 바둑도 죽는 거죠. 바둑은 모양이 좋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건 추상화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겁니다. 예로부터 바둑동네와 문학동네가 가깝게 지내온 건 아마도 이런 상상력이 통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 가지, 두 분야 다 참 곤궁하고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었죠. 이름난 소설가나 시인들 가운데 바둑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 건 바둑이 주는 위안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이 거지같이 돌아가도 바둑을 두는 동안 그 저잣거리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건 큰 위로가 됐을 겁니다. 돌을 쥐고 있는 순간, 의식은 평온을 찾고 완벽하게 쉴 수 있거든요. 바둑이라도 고맙죠.”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30년간 무(無)만 붙들었다 ‘나를 없애며’ 살아온 화가 스님, 6천만 동포에게 둥글둥글한 그림을 선물하고 싶다 그에게 “스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물으면 그는 “나는 맷돌이지” 한다. 그는 맷돌 스님이다. 몸 하나 받은 거 잘게 쪼개고 으깨어 떡을 만들든, 땅을 일구든, 평생 갈고 부수어 “나를 없애고” 돌아가고픈 게 이 스님 마음이다. “안 갈면 송장이지. 난 바랑을 걸머지면서 나를 부수어야겠다고 다짐한 걸. 산에서 이름 없는 풀들 그저 들여다보는 일도, 흙 만지고 돌 주무르며 노는 일도 다 나를 부수는 과정이에요. 그림 그리고 전각 하는 것도 다 무(無)로 돌아가는 맷돌질이고. 자기 이름도 잊을 정도로 갈고 갈아야지.” 1년간 원만 그리다 간 아일랜드 화가 수안(59) 스님은 30년째 이 ‘무’를 붙들고 있다. 어린 시절 진주 남강에서 헤엄치며 놀 때, 어느 날 그는 모래밭에 쪼그리고 앉아 한없이 모래탑을 쌓았다. 학교에 낼 공납금을 타러 가는 길이었는데 집에는 돈이 없었다. 키만큼 쌓았던 모래탑이 물기가 빠져 스르르 무너지면 저쪽에 쌓고, 그게 무너지면 또다른 쪽에 쌓으며 하루를 보냈다. 무념무상 우주가 흘러갔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었던 그 적막 속에서 그는 오랫동안 강물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출가했다. 열일곱살 때였다. “그게 연인가, 화두를 무로 잡게 됐어요. 무가 뭔가. 중이 위에 무(無)자를 한없이 그려요. 모래탑 쌓듯 그림탑을 쌓지. 밤새 무자 탑을 올려다 보면 그게 무사기원 탑도 되고 남북통일 기원탑도 돼요. 흰 종이 위에 점 하나 찍고 무사(無事)라 했어. 무사가 무어요. 마음에 걸림이 없고 아무것에도 구애됨이 없다는 뜻 아니요.” 통도사 축서암에서 그림 그리고 사는 수안 스님은 그렇게 화가 스님이 됐다. 사미승(어린 스님) 시절, 경봉 노사가 “수안 수좌는 감자 수좌라. 손이 참 영특해. 정진을 열심히 해보게나” 했을 정도로 손이 재고 눈썰미가 도드라졌다. 뭐든 시키는 건 똑 소리나게 해냈다. 전각 수업을 받을 때는 원을 천번이고 만번이고 그렸다. 한없이 원을 그리다 보면 “내가 없어졌다”. “도 닦는 게 따로 있나. 나한테 그림 배우겠다고 온 아일랜드 화가가 있었는데 1년쯤 먹 갈고 원만 그리다가 갔어요. 마음이 어수선하면 아무 종이나 놓고 원을 그려보세요. 사람살이란 게 원형이구나 느껴져요. 둥글게 둥글게… 내가 그리는 동자승들 얼굴이고 몸이 다 저절로 둥글둥글한 게 그런 까닭이요.” 그가 그리는 둥글넓적 동자상은 늘 웃고 있다. 수안 스님 자화상이기도 하다. 주름 많은 깡마른 얼굴이 웃으면 똑 개구쟁이 소년 같은 스님 얼굴은 나이 육십 먹도록 동자승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전시회를 열면 아이들이 먼저 좋아하고 매달린다. 그 다음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뻐한다. 때로 그림 앞에서 펑펑 우는 할머니 때문에 수안 스님도 붙잡고 울 때가 있다. “할머니, 울기는 왜 우소?” 물었더니 “스님 그림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한다. “고문치사로 죽은 박종철군 사십구제 때였어요. 박군은 물에 코를 박고 억 하고 죽었다는데, 말 한마디 못하고 20대 청춘이 그냥 갔다는데…. 그런 박군을 위해 시 쓰고 그림을 그리고 나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알았어요. 나머지는 내 삶이 아니라 그들 삶이라고 말이요.” 화가 스님으로 뜻을 세웠을 때 그는 큰 원을 하나 짓고 기도했다.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제 그림이 남북한의 6천만 동포 모두에게 전해져 불국토를 이루게 해주십시오.” 그림 6천만장을 그리겠다는 스님 꿈은 한숨 나오는 일이었지만 절실하면 소원은 이루어지게 마련이란 걸 그는 요즘 실감하고 있다. 잡지 표지며, 엽서, 책 삽화 등으로 인쇄돼 퍼지는 그림 양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요즘은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 기금전에 그림 내느라 바쁘다. 이번주에도 마산 농어촌 청소년 기숙사 장학금 마련 전시회를 열었다. 97년 통도사 아랫마을에 문을 연 양로원 ‘자비원’도 그가 돌봐야 할 70여 노인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내 그림이 애들 밥이 된다니 더 열심히 그리는 수밖에요. 얼마나 좋아요. ‘참 좋다, 정말 좋구나’ 이런 글을 그림 옆에 쓰는 건 할일이 많아서 너무너무 좋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거침없이 산다. 스키를 타고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한다. 스키장에서 몸을 움직일 때 눈밭은 종이가 되고 스키는 붓이 된다. 바닷물 기막힌 색감과 풍광은 스님이 그리는 그림 속에 떠오른다. 그는 미인을 좋아하고 술을 사랑한다. 축서암 살림을 도맡아주는 방림 보살이 메주 담그는 과정을 따라가며 “예술이야, 참 아름다워” 감탄한다. 수안 스님 얼굴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산이 좋아 산에서 산이 된다” “내가 나에게 묻는 때가 있어요. 당신은 누구냐. 스님이란 생각을 잊을 때도 많아요.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조계종이 700∼800년 중생들 이 물음에 답해 주느라 힘이 다했어요. 늙으면 만병이 오는 거라. 오래 묵으면 뿌리를 갈아야지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마음을 돌아보면 가슴이 서늘해져요. 나도 머리 깎을 때 나를 갈아 없애리라 다짐했지만….” “산이 좋아 산에서 산이 됩니다”는 수안 스님이 입산한 지 마흔두해. 늙은 소나무가 빙 둘러친 축서암 암자에서 그는 오늘도 그를 찾는 아이를 맞는다. “스님, 니 몇살이고?” “니는 몇살이냐?” “나? 나는 다섯살이다.” “그래? 나도 다섯살이지.” 그가 가는 맷돌 소리가 들린다. 사진 강재훈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하나뿐인 지구, 하나뿐인 청춘! 다큐 PD 이은정씨 사시사철 햇볕과 비바람에 맞서며 산타고 강건너 자연을 헤매는 이유가 있다 그가 한달에 집에 들어가는 날수는 두손으로 꼽을 정도다. 일주일 다해봐야 잠자는 시간은 18시간쯤. 주말이란 단어를 잊은 지 오래다. 몇날 며칠을 일에 파묻혀 지내다가 잠깐 짬이 나면 밀린 잠을 자면서 체력을 보충한다. 일 외엔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가끔 연애를 좀 했으면 싶지만 그것도 지금은 팔자에 없는 걸로 친다. “후배나 동료들이 너무 강행군을 한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불평 반 걱정 반 할 때가 있어요. 무슨 얘기인지 다 알지요. 하지만 그렇게 안 하면 프로그램을 만들 수가 없어요. 쉬엄쉬엄 다 챙겨가면서 하면 사람 좋다는 소리야 듣겠지요. 그렇게 넘기고 나서 후회하느니 차라리 독종 소릴 듣더라도 할 때는 매섭게 다그치는 게 낫다는 생각입니다.” 꼭 챙겨본다고 전화를 주는 시청자들 이은정(29)씨는 교육방송(EBS)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하나뿐인 지구’를 만드는 연출가다. 91년 10월 그가 교육방송 2기로 입사했을 때, 여자 다큐 피디는 희귀종이었다. 그만큼 지원자도 드물고, 살아남기도 어려운 풍토였다. 한국방송공사나 문화방송에 비하면 예산은 쥐꼬리, 제작 여건은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꼴이라 현장에 서면 기가 막힐 때가 많았다. “1주일 기획하고 답사 3일쯤 다녀온 뒤 8박9일 현장가서 찍고 보충촬영하고 편집하느라 1주일 날밤 새고 나면 방송날짜가 코앞에 닥쳐 있는 식입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이름난 제작사가 한 주제를 가지고 몇년에 걸쳐 수십명 전문가를 투입해 만든다는 걸 생각하면 한숨나오는 일이죠.” 가끔 자연 다큐가 조작됐다느니, 우리는 왜 동물의 왕국 같은 질좋은 기록물을 못 만드느냐는 소리를 들을 땐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눈앞에 벌떡 누운 사자 찍는 것과 한국 산야에서 동물들이 흘리고 간 똥을 뒤져가며 다큐 만드는 건 하늘 땅 차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근 방영된 시베리아 호랑이 는 교육방송의 근성을 빛낸 프로였다고 이씨는 제 일처럼 자랑했다. 몇년씩 목을 맨 일본 NHK 촬영팀이 코빼기도 못 본 시베리아 호랑이를 교육방송 다큐팀이 뚝심 하나로 찍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오는 11월30일 ‘하나뿐인 지구’가 500회를 맞습니다. 교육방송이 다른 방송에 비해 시청자들과 만날 기회가 드물어 잘 모르실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방송으로선 처음으로 환경문제를 제대로 다룬 다큐멘터리로 저희가 자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꼭 챙겨본다고 격려 전화를 주는 시청자들, 당신들은 믿고 말할 수 있다고 전폭 지원해주는 자문위원들을 만날 때 일하는 보람을 느끼지요.” 94년 그가 새내기로 다큐팀에 들어갔을 때는 피디가 3명뿐이었다. 3주에 한번 3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건 똥끝타는 일이었다.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방송일자가 다가올 땐 말 그대로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듯했다. 그때 만든 첫 작품, 흔히 입봉작이라 부르는 건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개발로 망가져 위기에 처한 우리 산들을 돌아보는 환경기행이었는데 26살 젊음을 바쳐 만든 그 프로를 더 많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전주에 사시는 부모님께서 꼬박꼬박 녹화를 뜨신 뒤 꼼꼼하게 모니터를 해주시는 게 큰 도움이 돼요. 근데 어느 땐가 한마디 하시더라구요. 니네는 왜 비 올 때만 골라 촬영을 나가느냐구요. 그게 참 착잡한 얘기거든요. 며칠씩 들로 산으로 헤매다보면 십중팔구 비를 만나게 되는데 시간도, 제작비도 빠듯하다보니 비가 오든 천둥이 치든 찍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가 다큐 피디가 된 건 12살 소녀의 마음을 뒤흔든 한 과학프로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주과학자 칼 세이건이 쓴 600쪽짜리 두툼한 책 코스모스 를 읽고는 흥분해서 5번을 독파했던 그는 텔레비전에서 코스모스 를 13부작 다큐로 만든 프로그램을 방영했을 때, 인생을 결정했다. “난 과학자가 될거야, 라고 흥분해서 외쳤지요. 나란 존재가 우주에서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느끼게 만든 그 프로를 보며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는지 모릅니다. 방송의 힘을 느낀 첫 체험이었던 셈이죠. 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했던 것도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는 87학번이다. 그해에 대학에 들어간 이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그는 운동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부터 6월항쟁까지, 그는 강의실보다 거리에서 더 많이 배웠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교육방송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여러번의 파업에서 그는 학생운동이 방송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저런 생각이 그가 만드는 다큐 프로에 짱짱하게 배어든다. “동강은 흘러야 한다” “너무 어렵지 않게, 어깨에 힘 빼고, 물 흐르듯이 다큐를 만들고 싶어요. 사람들과 함께 가는 길, 그들을 따라가다보면 뭉클한 감동이 차오르는 필름을 남겨야죠. 아마도 그게 여성 다큐 피디가 더 낫다면 낫게 만들 수 있는 이 시대의 기록일 겁니다.” 그의 손은 사철 까맣게 타 있다. 봄여름가을겨울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얼굴이 건강해보인다. 산타고 강건너 자연을 헤매는 그의 몸은 작지만 다부지다. 하루내 빡빡한 일정을 좇아 종종걸음을 치다가 해가 지면 주막에 짐을 풀고 촬영팀과 술 한잔으로 컬컬한 목을 푸는 털털함도 있다. 11월2일 월요일밤 9시45분 방송되는 ‘동강은 흘러야 한다’에서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는 ‘무공해방송’ 교육방송에 채널을 맞춘 시청자들은 다시 그의 절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영월댐 건설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천연자원의 보고 동강에 다녀와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강의 미래는 두가지입니다. 지금 이대로…, 혹은 동강의 모든 풍경과 추억을 물밑에 가두는 것. 과연 어떤 것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열어줄까요.”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산을 기다리는 '산짐승' 찍고 싶은 장면 나올 때까지 몇달 몇년… 다시 ‘아리랑’을 위하여 백두산으로 산악사진가 안승일 그는 산에 살 때 편하다. 잠없고 추위 안 타는 그에겐 산이 집이다. 몇달씩 산에 있어도 산 밑이 그립지 않다. 도시에서 바쁘던 심신이 산에 들어 있으면 느꺼운 느림으로 차오른다. 놀고 책보고 생각에 잠기지만 주로 하는 일은 바라보기다. 한없이 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온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 느낌을, 카메라 셔터 위에 놓여 있는 그의 손가락을 몇 십분의 일초, 찰나에 누르게 만들 그 순간을. 재주보다는 인내심, 눈썰미보다는 참을성 “난 산밖에 몰라요. 산에 오래 살아 산을 찍습니다. 그렇다고 산이 날 봐주는 건 없어요. 오기로 버티는 거죠. 내가 찍고 싶은 장면이 나타나길 몇달, 몇년씩 숨죽여 기다립니다. 지난해엔 겨울 대청봉을 찍으러 50일 가 있었는데 결국 한장도 못 건졌어요. 글쎄, 몇 백일 가 있어야 두어장 나오나.” 사진가 안승일(53)씨는 중학생 때부터 산을 찍었다. 자신이 다리를 전다는 사실을 처음 인식한 무렵이었다. 그걸 극복하려 산에 올랐다. 산에 가면 그는 정상인보다 나았다. 산과 바위를 잘 타는데다 체력 좋고 끈기가 있었다. 여느 인간과 똑같이 그를 대접하는 산에 빠져들었다. 중3 때 정릉으로 소풍간 길에 사진을 찍었는데 사람을 빼고 산만 찍었더니 그게 그렇게 좋았다. 동네 사진관 아저씨가 필름을 맡길 때마다 이것저것 가르쳐줬다. 사진에 대해 배울 건 거기서 대강 뗐다. 그는 산으로 달려갔고 사진을 찍었다. 그 외엔 다 헛것이었다. “제가 6남매 장남인데 지금도 동생 다섯이 어디 사는지 몰라요. 아버지 회갑잔치에도 안 갔어요. 명절이고 친구고 없어요. 어머니가 그러셨죠. ‘쟤가 16살 때부터 고생하러 다녀.’ 고생이 아니라 고행이죠. 홀로 가는 길. 내 팔자에 없는 아들 하나 낳은 게 기적처럼 느껴질 지경이니까요.” 그는 평생 양복을 한번도 입지 않았다. 물론 결혼식 때도 안 입었다. 산에서 입기 편한 남방 셔츠 마음에 드는 걸 열댓벌 똑같은 걸 해놓고 늘 그것만 입는다. 신발은 흰 고무신, 배낭과 등산화가 언제든 떠날 수 있게 구석에 서 있다. 어려운 자리 안 가보고 윗사람은 아예 없었다. 투표용지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른다. 20년을 같은 자리에서 하는 사진실(그린 스튜디오·02-2275-6543)에 없으면 산에 있는 거다. “사람들이 나보고 119구급대라고 해요. 저녁 나절 밥을 먹으러 들어앉아서도 해지는 풍광이 괜찮은가 끊임없이 밖을 내다보고, 궁둥이가 바닥에서 반쯤 떠서 항상 대기중이니까. 사진 찍는 일은 재주보다는 인내심이고 눈썰미보다는 참을성입니다.” 그는 충무로에 나와 상업사진을 찍어주고 번 첫 목돈을 사진집 만드는 데 몽땅 털어넣었다. 82년, 사업에 실패한 부친이 시흥2동 달동네 100만원짜리 집에 살던 때였다. 그때 500만원을 들여 만든 사진집 산 은 시작일 뿐이었다. 밤샘을 밥먹듯 하며 죽기 살기로 번 돈을 그는 차례로 삼각산 한라산 백두산 에 쏟아부었다. 일출을 본다고 몇년씩 좇아다니다가 맘에 쏙 드는 걸 한컷 찍은 뒤엔 혹시 차타고 올라오다가 교통사고 나서 그 사진 못 보고 죽을까봐 역에 내려 기차로 올라온 그였다. 그렇게 애 만들듯 한장 한장을 완성한 뒤 수천만원 들여 만든 사진집을 아무도 사주지 않을 때, 아니 아무도 봐주지 않을 때 그는 고독했고, 더 오기가 뻗쳐올랐다. “사진집을 한손으로 스르륵 넘긴 뒤 치워버리는 이들 보면 솔직히 열이 올라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열심히 다니셨네 하면 더 약이 오릅니다. 그냥 보고, 술 한잔 하고 보고, 마누라랑 보고, 아이들이랑 보고, 보고 또 보고 해줘도 섭섭할 텐데. 97년에 펴낸 굴피집 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0년을 드나든 양양 이용구 어른 집입니다. 부모가 죽었대도 못 올 길을 왔다는 소릴 들으며 함께 늙은 집이지요.” 그 굴피집 주인 이용구씨 회고를 들어보면 안승일이란 사진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나는 그저 사진 한번, 여게 찍고, 앞면 찍고, 뒷면 찍고, 전후면에 다 찍어 가지구는 글루 끝난 줄 알았단 말요. 자… 그런데 이건 꽁지를 물고, 간 뒤에 며칠 있으믄 또 찍으러 오고, 또 찍으러 오고…. 뭔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냐고 그러니, 그거 내 여러번 찍어가지고 골를라구 그런다 이런단 말여.” 필름 사고 책 만드는 데 외엔 돈 써본 일이 없다는 안승일씨 말은 한치 거짓이 없다. 올 2월에 펴낸 아리랑 은 중국을 열댓 차례 드나들고 난 뒤, 몸은 서울로 돌아왔어도 마음은 백두산과 압록·두만강을 떠돌고 있던 그가 정열을 바쳐 만든 사진집이다. ‘북한의 진실’을 보기 위해 중국에 가야 했던 그는 그 평화로운 북녘사진으로 이렇게 소리친다. “동포들의 궁핍을 과장하려 개처럼 강변을 뒤지는 자칭 저널리스트들아, 잘 들어라. 카메라가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진 무기인가를 아는가.” “중국에 가면 항일운동 하는 기분이에요. 숲이나 옥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중국 공안들이 총신으로 옆구리 쿡쿡 찌르면 정말 기분 묘하죠. 너도 시체 찍으러 왔느냐, 멱살 잡힐 때 참 울고 싶었습니다. 압록, 두만강을 나만큼 뒤지고 다닌 사람이 없는데 난 시체 한구 떠내려온 걸 못 봤어요. 뭐가 진실입니까.” 그는 사진으로 다 말할 수 없어 아리랑 뒤에 긴 글을 붙였다. 카메라 렌즈 뒤에서 바라본 북한 관찰기 끝에 그는 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들도, 대한민국 국민들도 우리 함께 힘 모아 ‘사람질’ 좀 하며 살아봅시다.” 인간이 짐승으로 돼 가는 과정 그는 또 중국으로 떠난다. 필름 1500롤을 들고 다섯달 백두산, 두만·압록강을 헤맬 계획이다. 누가 이 길을 가라 하지는 않았지만, 30년 이 길을 누가 또 가라 하면 못 간다. “돌아보면 어휴 이걸 어떻게 했지, 한숨부터 나와요.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고, 이젠 세월을 돌려줘도 이만큼 못 와요. 하나 바라는 건 누가 날 좀 밟고 올라서줬으면 하는 거죠. 산사진을 찍는다는 건 인간이 짐승 돼가는 과정이랄 수 있습니다. 저 구름 들어오겠다, 비오니 배수로 파라, 이쪽 귀퉁이가 써늘하니 바람이 어디로 가겠다, 뭐 그런 거 몸으로 배우는 겁니다. 이만큼 오는 데 혼자 흘린 땀과 눈물을 생각하면 그걸 몽땅 누군가에게 전하고 가야겠다는 맘이란 말이죠. 내가 닦아놓은 지점에서 오르면 저 봉우리 하나쯤은 가뿐하게 뛰어오를 텐데요.”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1인10역 한국미술의 뚝심 미국에서 딱 한 사람 한국 출신 한국미술사 교수, 그가 불상을 찾아헤매는 이유 재미 미술사학자 이정희 그는 그 또래가 타고났을 적당한 키와 몸피, 스타일을 지녀 첫눈엔 참 평범해 보인다. 일 때문에 찾아가는 절에서도 “뭘 빌러 왔나” 퉁명스런 스님 질문에 남편 자리보전이나 아이들 합격기원을 하러온 아줌마로 몰리기 일쑤다. 그나마 그게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카메라를 메고 삼각대 가방을 들고 산 속에 들어가면 영락없이 신고를 당해 한번쯤 “주민등록증 좀 봅시다”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서너 시간 땀을 찔찔 흘리며 오른 산사에서 불상을 보여줄 수 없다며 108배를 하라고 고집을 피우는 스님은 차라리 낫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산을 헤매는 그를 간첩으로 모는 이 땅 사람들 신고의식에 질릴 때가 더 많다. “깎아먹을 건 내 잠밖에 없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 초청장학금을 받아 3개월 예정으로 들어왔어요. 물론 불상 연구 때문이지요. 몇년째 방학이면 달려오지만 이게 언제 끝날 지는 나도 몰라요. 어제는 해남을 다녀왔고 내일은 원주로 떠납니다. 불상이 있다는 소리만 들으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요. 하루라도 불상을 못 보면 우울해지니 참 괴상한 직업병도 다 있지. 불상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막 생에 의욕이 솟아요. 새로운 불상을 만나면 그걸 사진찍고 관찰하고 크기며 특징을 기록하고 내 머리 속에 입력합니다. 가끔 조사를 끝내고 돌아온 다음 불상을 도둑맞았다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을 쓸어내리게 돼요. 비가 죽죽 내리니까 저 살던 포트랜드 생각이 나네요. 거긴 거의 1년 내, 9월부터 4월까지 비가 와요. 빗소리를 친구삼아 밤잠을 잊고 일하던 때가 그립네요.” (사진/97년 5월7일, 그 혼자 힘으로 만들다시피한 오리건 포트랜드 미술관 한국실 개관 기념식장에 선 이정희씨. 중국, 일본과 나란히 한글로 선명하게 쓴 한국이란 휘장 글씨가 유난히 자랑스러워 보인다.) 재미 미술사학자 이정희(51·오리건 포트랜드주립대 미술학과 부교수)씨는 지금 미국에서 딱 한 사람 한국 출신 한국미술사 교수다. 노란 얼굴을 한 동양여자가 교수가 되는 것도 어려운 판에 한국미술을 강의하겠다고 나선 뚝심도 대단했다.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71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석박사 학위를 따고 시간강사 생활을 한 지 이십몇 년 만에 교수가 됐을 때, 그는 자기를 따르던 재미동포 2세, 3세들 얼굴을 떠올렸다. “강의를 나가보면 아이들이 울분에 차서 저한테 막 따져요. 선생님, 왜 중국미술사나 일본미술사는 개설하면서 한국미술사는 안 가르칩니까. 우리도 우리 조국 미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여기서 교수하기는 글렀다고 거의 포기하고 있던 터였지만 걔네들 꿈을 풀어주겠다는 일념으로 한번 더 교수직에 매달렸지요. 공부하고 일할 때 깎아먹을 거라곤 내 잠밖에 없어서 나중엔 몽롱할 지경으로 한계상황에 다다랐는데 그래도 나밖에 이걸 할 사람이 없다고 마음먹으니까 몸이 버텨주데요.” 94년 포트랜드대학에 부임했을 때 강의말고 또 하나 그에게 떨어진 일은 포트랜드 미술관에 한국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간만 확보된 상태여서 소장품을 모으고 전시실을 디자인하고 도록을 만들고 홍보를 하고 개막식 준비까지 그 어깨 위에 떨어진 일이 1인10역쯤 됐다. 보스턴에 두고 온 남편과 두 아이들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때 한국실과 함께 중국실, 일본실이 같이 개관하게 돼서 은근히 경쟁심이 솟았어요. 일본실은 일본기업들 스무개쯤이 기부를 해서 돈이 많았고 중국실은 기증품이 많이 들어와 소장품이 많았어요. 우린 아무것도 없었죠. 억척을 부려서 전시장소로 중앙에 가장 좋은 자리를 얻고 나서 기증품을 구하러 발벗고 나섰습니다. 중고등학교 동창, 고향 동무, 사돈에 팔촌까지 정말 뭐로든 끈만 닿으면 쫓아다녔습니다.” 그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걸 보다못한 동창들이 그야말로 쌈짓돈 5달러, 10달러부터 큼직한 목돈까지 모아주고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캘리포니아 미술관 한국실이 구석에 없는 듯 처박혀 있는 것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단독실도 없이 중국·일본실 옆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우리 미술품을 떠올리면서 미국 내 최고의 한국실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뛰다보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좋은 일도 생겼다. 84살 먹은 미국 할머니가 소중하게 보관해오던 한국미술품 한점을 선뜻 기증한 것이다. “풍토가 달라선가. 미국 사람들은 기증을 잘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아무리 설득해요 소용이 없어요. 그 좋은 인류 문화 유산을 지하실에 처박아 두고 혼자 가끔 보느니 환하고 밝은 미술관에 내놓고 여럿이 두루 보면 좋지 않으냐, 해도 끄덕 안 해요.” 한국실을 만들고 나니 그곳 사람들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전시실 안에 사랑방을 만들고 전통 창을 짜넣고 일일이 해설문을 써붙였다. 김치도 모르던 사람들이 한국 선비문화를 이해하게 됐을 때, 한국미술사를 강의하는 자신을 학생들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줬을 때, 그는 홀로 포트랜드에 떨어져 외로웠던 몇년 전을 떠올렸다. 중국미술사면 됐지 한국미술사를 뭣 하러 따로 가르치냐던 동료 교수들도 그에게 한국미술사를 커리큘럼에 넣으라고 인정해줬다. 내년부터 대학원 과정에 한국미술사 석사과정을 개설하게 된 건 물불 안 가리고 뛴 이 교수 덕이다. 한국에서 필요로 할 땐 언제든… “제가 포트랜드주립대에 가서 배운 게 있습니다. 이 대학은 미국 내에서도 일찌감치 대학이 상아탑이 아님을 실천한 대학입니다. 교수들 평가에서 그가 얼마나 그 지역사회를 위해 협력하고 봉사했는가를 크게 칩니다. 저는 한국실 개관을 위해 뛰면서 포트랜드 사람들에게 멀리 동양에서 온 오래 됐지만 새로운 문화를 깊이 심었습니다. 그걸 인정받아 벌써 종신교수직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언제든 저를 필요로 하면 돌아올 겁니다. 그래서 미국 시민권도 얻지 않았어요.” 그는 한국미술사 강의를 위해서 자문을 구하는 교수들이나 한국미술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터넷 사이트(http://odin.cc.pdx.edu/~dilj/)를 활짝 열어뒀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아마도 한국과 한국미술을 잊을 수 없고, 그래서 자연스레 한국인과 한국상품과 한국을 사랑하게 되리라고 그는 생각한다. “연구자는 외로워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물을 남과 나눌 줄 알 때 비로소 연구를 완성하는 것 아닐까요.”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나는 날마다 통 큰 상상을 한다" 지구촌 하늘과 땅을 도구 삼는 여장부, 설치미술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조형작가 최재은 그는 머물러 있는 걸 견디지 못한다. 순간순간 떠나거나 자라거나 변하길 꾀한다. 그가 언제 무엇이 되어 나타날지 누구도 점칠 수 없는 까닭이다. 몸 속에 차오르는 에너지, 꿈틀거리고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펼치는 일이 그에겐 창조다. 생장해야 할 생명체로서 자신을 늘 자각하고 있기, 그에겐 이것이 바로 목숨이다. 꽃꽂이 체험으로부터 나온 예술혼 “난 고정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거든요. 아침에 눈 뜰 때마다 그날이 제 생애 첫날이거니 여기죠. 요즘은 음악이 배우고 싶어 현대음악을 귀에 달고 살아요. 어제 내가 뭘 했던가는 이미 과거일 뿐. 바로 여기 있는 내가 중요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는 조금이라도 더 새로운 표현을 찾아 눈을 반짝이는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작업이 한군데 머물게 되면 작가에게 그건 죽음이에요.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난 성장해야 합니다.” 조형작가 최재은(46)씨가 이번엔 영화감독이 되어 돌아왔다. 흔히 설치미술가로 불려왔던 그는 그 한계가 싫다며 ‘조형작가’라고 자신을 정의했다. 쉽게 말해 ‘늘 뭔가 만드는 사람’이 그다. 대나무 3천개를 직선 사선으로 엮어 서울 경동교회 옥상 위에 척 올려놓는다든지, 빈병 6만개를 빙 두른 높이 15m 유리돔으로 대전 엑스포 재생조형관을 만든다든지, 경주 토함산에서 아프리카 대륙까지 관통하는 ‘세계 지하 프로젝트’를 끈질기게 해나간다든지, 하는 걸 보면 그에겐 자연 자체가 도화지요 세상 만물이 물감인 격이다. 화랑이나 미술관에 얌전히 들어앉은 그림이나 조각은 도대체 이 ‘통 큰’ 작가 성에 차지 않는 것 같다. 머리로, 가슴으로, 자아내는 아이디어를 휘둘러 지구촌 하늘과 땅을 부리는 이 여성작가에게선 ‘대지의 어머니’다운 아름다움과 넉넉함이 배어나온다. “20세기가 저물어간다는 데, 그 마지막 순간에 한 매듭을 제 눈으로 짓고 싶었어요. 마침 독일통일 10돌도 되고, 내 조국 한반도는 아직 분단 그대로고, 그 모든 걸 영상으로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스승 데시가와라 히로시가 64년 칸영화제 특별상을 받은 감독이고, 그 밑에서 조감독을 했던 만큼 그에게서 배운 영화 감각을 더 잊기 전에 풀어봐야겠다는 조바심도 있었어요. 소재는 전쟁과 그로 인해 가로막힌 ‘경계’이지만, 그 경계를 넘어 전진하는 20세기 인류사 전부를 다룰 겁니다.” 6월7일 그는 촬영팀 10명을 이끌고 판문점으로 갔다. 아무도 감히 찍고자 하지 못했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과 군사분계선, 자유의 다리를 찍었다. 12살배기 소녀가 끊어진 남북의 길을 다시 잇고 싶다는 시를 읽었다. 그 시를 눈시울 뜨거워지면서 진짜 읽고 있었던 사람은 최재은씨 자신이었다. 다큐드라마 길 위에서 는 그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조국에 대한 사랑 표현이다. 학살의 기억창고 아우슈비츠와 툭 터진 베를린 장벽과 핵폭탄이 뭉개고 간 히로시마를 훑을 카메라는 그 중심에 한반도 허리를 반백년 동강내고 있는 휴전선을 놓았다. “76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20여년을 외국으로 떠돌며 오히려 분단된 조국을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됐어요. 항상 가슴 아팠던 건 분단이 풀어지지 않으면 이 민족이 참 어렵다는 거였어요. 길은 사람이 다니라고 만든 거예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판문점으로 달려갔었는데 그동안 제 가슴속에 쌓인 건 바로 ‘길은 있다’는 거죠. 사람이 아름다운 건 길을 만들고 늘 그 길 위에 서 있다가 길 가운데서 죽는다는 겁니다. 우리 민족도 지금 길 위에 있습니다. 그동안 죽 머릿속에 담아온 이 길의 이미지들을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그는 23살에 공부가 하고 싶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70년대 중반, 현실이 숨막히게 답답한 때였다. 패션 디자인도 기웃, 건축도 기웃, 인식욕에 몸이 달았던 20대 초 그에게 일본은 그 숨통을 뚫어줄 곳으로 비쳤다. “소게쓰 미술학교에서 처음 배운 게 일본 문화 전통에서 독특한 것 중 하나로 꼽히는 꽃꽂이였어요. 꽃꽂이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인간이 재구성하는 참 흥미로운 작업입니다. 다루는 상대가 생명체이기 때문에 같은 생명체로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했고, 더구나 꽃이 내 손으로 꺾인 순간부터 죽어가는 것이니까 시간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아마도 제 작품들이 대체로 생명과 시간, 환경과 순환을 다루는 까닭이 이 꽃꽂이 체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나 봅니다.” 85년 그 소게쓰 미술학교 건물 로비에 놓여 있던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 작품 주변에 13t 흙을 깔고 잔디 씨를 뿌려 그 풀이 자라는 과정을 비디오로 지켜본 작업은 최재은이란 이름을 일본미술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규모가 크고 상상력의 꾸밈새는 더 큼지막했던 이 여성작가에게 일본이 95년 베니스비엔날레 대표작가 자리를 내줬던 건 파격이라면 파격이었다. 그보다 더한 사건은 96년에 일어났다. 93년 11월 열반한 성철 큰스님 사리탑 설계가 그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가 해인사 백련암을 8번 찾아가고 성철 스님에 대한 공부를 거듭한 끝에 구(球)와 원으로 단순하게 빚은 이 부도(浮屠)는 지난해 11월 3년여의 작업 끝에 공개되자 새로운 불교문화로 큰 평가를 받았다. 올곧은 삶으로 중생들에게 큰 깨달음을 준 성철 스님의 정신과 자태가 예리하면서도 유연한 선과 면 속에 잘 녹아들었다는 것이다. “에너지와 권리는 쓰는 사람 몫이다” “결국 예술이 사회에 가장 밀접해야 하지 않겠느냐, 앞서 나가며 그 방향과 반향을 가리켜 보여줘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옛날보다 체력이 좀 달리는 것 외에는 정열이 더 타올라서 스스로도 참 씩씩하다 싶을 지경입니다. 이제는 세계 어디다 대고도 내가 이런 프로젝트를 할 텐데 돈 좀 내놔라, 협조좀 해라, 말할 수 있어요. 하는 일마다 재미있으니까 배짱은 저절로 생겨요. 난 이게 권리라고 믿습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이 에너지와 권리는 적극적으로 쓰는 사람 몫이에요.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자기 속을 잘 들여다보고 파보세요. 거기 모든 게 있어요.” 도쿄와 베를린에 있는 작업실을 오가며 전세계를 떠도는 그 여장부는 “어렵다고 불평할 여유조차 없다”고 벌써 다음 일이 기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변태적 세상, 뻥 뚫고 싶다” 봉건적 국가주의에 대드는 유쾌한 게릴라… 연재만화 존나깨군 에 수많은 찬사와 혹평 (사진/만화가 이우일씨) 그는 1년 365일을 두 가지 날로 보낸다. 술 마시는 날과 안 마시는 날. 하루 일과가 음주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데 얼추 반반쯤 된다. 우선 술 안 마시는 날엔 아침 7시쯤 잠자리에 든다. 남들이 출근하려고 일어나는 시간에 잠을 잘 수 있는 행복한 사내처럼 보이지만 날밤을 새우고 일을 한 그로선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를 찬 셈친다. 낮 12시쯤 잠을 깨면 크게 하는 일 없이 논다. 그가 일어난 걸 귀신같이 안 전화통이 울려대고 그때부터 이 집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그리네, 못 그리네’ 원고 씨름을 할 땐 지루하고, 갓난쟁이 딸하고 놀 때 시간이 빨리 간다. 직업 때문에 보기 시작한 텔레비전 뉴스는 앞대가리 정치 난리 같은 것 다 지나간 뒤 잡스럽고 좀스런 사건사고 소식을 즐겨본다. 저녁을 먹고 나면 슬슬 일할 준비를 한다. 밤 11시,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해가 뜰 때까지 그는 그 모습 그대로 붙박이다. 술 마시는 날은 간단하다. ‘오늘은 마셔야지’ 싶거나 약속이 돼 있으면 딴 사람들처럼 낮에 미리 일을 좀 해두고 해거름에 술집으로 향한다. 혼자 마시는 걸 좋아해서 소문난 록카페에서 춤도 안 추고 멀거니 앉아 있는 그를 목격하는 건 쉬운 일이다. 늘 머리 두건을 한 그는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여럿이 마신다 해도 고정 멤버가 정해져 있어 늘 잘 만나는 선배 대여섯과 한잔 든다. 그는 이런 단순한 생활이 좋다고 했다. 술 마시는 날과 안 마시는 날 “갈수록 함께 술 마시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고민입니다. 새 친구 만나긴 더 힘들죠. 그래서 혼자 마시게 돼요. 오도카니 스탠드에 앉아서 바텐더와 실실 잡담하며 홀짝거릴 때 취했더라도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잡념이죠. 바쁘게 돌아치는 도시 삶에서 그렇게 홀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에 잠기는 거 참 좋습니다.” 만화가 이우일(30)씨는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은 소년이었다. “생각이 아니라 공상이라 그러죠.” 그는 단어를 정확하게 교정했다. 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넌 앉아서 딴 생각만 하냐”며 아예 제쳐버렸다. 시험시간에도 그 공상을 멈출 수 없었다. “근데 그걸로 먹고 살게 됐으니…” 그는 수줍게 웃었다. “사람들이 ‘당신 만화가 뜻하는 게 뭐요’ 묻기 시작하면 난감해요. 왜 모든 것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려 들까요. 논리와 메시지 빠진 걸 못 참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죠. 하지만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이 ‘왜’에 답을 준비해야 한다곤 보지 않아요. 다들 너무 답답하게 사는 것 같아요.” 한 일간지에 도날드 닭 을 연재하고 있을 때 특히 이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신문마다 만화 칼럼을 경쟁하듯 만들 때였는데 상대지 만화나 만화가와 대척점에 서 있듯 그를 몰아가는 분위기가 싫었다. 다 다르면 나름대로 좋은 거지 왜 꼭 비교하고 누가 옳고 그른가 따지고 점수를 매기는지 슬펐다. 스스로를 ‘말한 걸 책임지는 스타일’이라고 믿는 그로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이 더 거칠게 나가고 내용도 파격으로 흐른 배경엔 그런 까닭이 있었다. “선배들이 저더러 과격하다고 말들 하죠. 반항의 낌새가 강하다고들 합니다. 오른쪽 길로 가라면 왼쪽으로 갈 놈이라나요. 말 안 하고 있으면 ‘너 또 우리 비웃고 있지’ 슬슬 옆구리를 찌릅니다. 뭔가 강렬한 게 좋아요. 기존 윤리나 논조를 깨부수는 것, 의도적 반동….” 이우일 만화가 겉으로 투박하고 생경하며 못난이 모양을 하고 나타나는 건 이런 의도 때문인 듯하다. 원시적이고 단순하게 처리한 선과 스타일은 그가 말하려는 얘기와 딱 맞아떨어진다. 참 잘 그리는 그림이다. “만화를 그리며 살게 된 건 행운”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 얼굴이 숨김없이 환해졌다. “만화란 장르가 있는 게 너무 좋다”고도 했다. 말을 책임지려는 만화가는 드물다. “머리 쓰면 다 들통나잖아요. 꾸며서 하면 계속 거짓말해야 하니까” 그런 건 못하겠단다. 그가 요즈음 인터넷 패러디사이트 ‘딴지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존나깨군’은 이래저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하루 10여통씩 날아오는 이메일 역시 찬사와 혹평이 뒤섞이고 있다. ‘거시기’를 소재로 했지만 오히려 이 사회가 아직 못 깨고 있는 중세풍 검열과 봉건적 국가주의를 유쾌하게 난도질하고 있는 만화는, 그러나 역시 근엄한 윤리에 투철한 시민들의 불평을 사고 있다. ‘그것도 그림이냐’ ‘넌 인간 쓰레기다’ ‘지구를 떠나라’ 같은 욕설에 가까운 악평을 보면서도 그는 태평하다. “이 세상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독자들이 반응을 보일 때 더 흥미로워요”라는 게 작가의 변이다. 다만 중고생들이 들어왔다가 보곤 “이거 우리가 봐도 되나요” 물어올 땐 좀 난감하다. 가능하면 18살 이하는 보지 않도록 하고 싶지만 그 아이들도 이미 다 문제의식은 갖고 있는 것 같아 오히려 안도한다. “집착하기 시작하면 불행해져요” “우리 사회가 성에 들이대는 이중적 잣대를 보면 꼭 막힌 변기 뚫듯 뻥 뚫고 싶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변태적으로 막고 있기 때문에 게릴라전법으로 대들 수밖에 없는 거죠.” 그는 신혼여행을 무려 1년 동안 다녀왔다. 그 얘기는 만화가 이우일의 303일 동안의 신혼여행 이란 책에 솔직하게 담겨 있다. 부인 선현경씨가 글을 쓰고 이씨가 그림을 그린 이 책은 한 자유주의자가 누린 엉뚱한 신혼기였다. 연애 시절 술 마시다가 ‘한 1년 갔다 올까’ 의기투합해 뒤도 안 돌아보고 계획도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 전세 한칸 없이 그동안 모은 돈 탈탈 털어 배낭 지고 세계를 떠돈 그 완벽했던 시간을 그는 그리워했다. “프리랜서 생활을 하던 때니까 1년 쉬면 거의 명퇴한다고 봐야 할 상황이었지만 대책이 없어도 좋다고 갔죠. 다 버리자, 싶었죠.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해야 할까, 갔다오니까 또 일이 쏟아지고 더 즐거워져 좋습니다. 아이가 걸어다니면 이번엔 가족여행을 떠나야죠. 너무 연연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순순히 살다가 순순히 가는 게 순리인 것 같아요. 집착하기 시작하면 불행해지죠. 허무주의자냐고요? 글쎄… 요….”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알피니즘! 휴머니즘! 산을 만나 운명이 바뀐 사람들, 소설 백두대간 에 형상화되는 20년 산 이야기 전업작가 박인식 그는 산을 만나 운명이 바뀌었다. 고등학교 시절, 히말라야 원정대가 찍은 산사진을 봤을 때 그는 오랫동안 그려온 불멸의 꿈이 거기 있다고 느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끊임없이 표현욕구에 시달려온 그에게 산이 그 너른 품을 여는 순간, 불사조가 날개를 편 듯 그는 산에 눈 멀었다.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에게 사막이, 영국 소설가 조셉 콘래드에게 바다가 있었다면 그에겐 산이 있었다. 인간에게 진실을 보여줄 극한 상황으로 그는 산을 선택했다. 그때부터 그에게 산은 자유였고 용서였고 사랑이었고 그리고 죽음이었다. 그는 늘 산으로 돌아간다. 14년째 인삼씨를 뿌리는 사연 “산은 사람을 참 잘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산에 가면 사람이 그냥 드러나죠. 도시에서 제 얼굴을 잃어버렸던 사람들도 산에 가면 자기가 누구인지 확실해집니다. 존재를 꽉 잡을 수 있어요. 산과 하나가 됐다는 느낌이 올 때, 흘린 땀이 짙을수록 더 확실히 자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산에 안길 때마다 일상에 젖어 흐느적거리던 제 몸이 일어서죠. ‘이게 바로 나다’라고 말하며 살 수 있는 사람, 그건 멋진 인간이죠.” 산악인이자 소설가인 박인식(48)씨가 하는 일은 다 산과 연을 맺고 있다. 산 잡지 기자로 시작해서 산에 관한 전문지 발행인이 됐고 산에 얽힌 이런저런 일을 꾸려가며 산에 관한 소설을 쓴다. 최근 펴낸 대하소설 백두대간 은 산을 만나 비로소 운명이 바뀐 사람들 얘기다. 산악인, 사냥꾼, 스님, 빨치산, 심마니…. 산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이들이 걸어간 길은 한민족의 역사이고 현실이다. 그는 “지난 20여년 떠돌았던 게 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 백두대간 은 ‘산에 왜 가느냐’라는 물음에 나름대로 명쾌한 답을 내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 산에서 죽었죠. 히말라야에 갈 때 일기장을 제게 맡기고 간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한몸에 껴안고 있는 산, 그 ‘사람과 산’ 얘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사람과 산 은 그가 만들었던 잡지 이름이다. 우리 땅 줄기를 일제가 만들어냈던 산맥이 아니라 백두대간 개념으로 제대로 돌려놓았던 것이 이 사람과 산 이다. ‘한국 호랑이를 찾는다’ 같은 기발한 기획을 내놓았던 것도 이 잡지였다. 그러나 그가 정작 자랑하는 대목은 잡지 제목이다. ‘사람과…’란 말을 그는 좋아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소중하기에 ‘사람’을 앞에 뒀다. 박인식씨가 사람에 대해 품고 있는 뜻 그대로다.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죠. ‘박인식의 여자들’이라고 친구들이 놀릴 만큼 여성들도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은 나더러 ‘광야의 외로운 늑대’라지만 서로 마음의 풍경을 보여주고 그걸 교감할 수 있는 이들과 산에 오를 수 있는 걸 큰 기쁨으로 칩니다.” 그가 지금 마음맞는 이들과 하는 모임은 ‘농심마니’다. 150여명쯤 되는 사람들과 1년에 두번 봄 가을로 산에 올라 인삼 씨를 뿌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삼 씨를 1, 2년쯤 키운 걸 심는다. 농약에 오염된 인삼은 효능이 없지만 그 인삼을 산에 심으면 산삼과 같은 약효를 얻을 수 있다는 심마니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86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까지 8천몇백주를 전국 산에 뿌린 셈이다. 운이 좋은 심마니가 있었다면 벌써 이들이 뿌린 15년산 산삼이 사람들 손에 들어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누가 캐가든 그건 그 사람 운이고, 우리 ‘농심마니’ 회원들이 진짜 바라는 건 그 산삼들로 이 땅의 정기가 되살아나는 일이죠. 땅에 대한 믿음을 우리 손으로 되찾자는 겁니다. 70년대 우리 것 찾기, 전통 뿌리찾기가 너무 관념으로만 흐르지 않았나 하는 비판도 겸한 건데요.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것, 바로 산삼을 통해 이 땅을 느껴보자는 바람입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발걸음마다 한국인의 정신을 뿌리는 마음이죠.” 그는 소설 백두대간 에서도 이런 “우리 땅, 우리 사람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늘 꿈꿔온 휴머니즘과 알피니즘의 결합을 이 10권짜리 소설에 풀어놓을 생각이다. 서문을 대신해 쓴 ‘나의 기도’란 시는 그 희망을 부르는 노래다. “산 위에 있는 자들과/ 산 아래 있는 자들이//꿈꾸는 자들과/ 꿈 깨어 아우성 치는 자들이//되돌아가 산에 묻힌 자들과/ 하산을 서두르며 환속하려는 자들이//젊은 몸뚱이 팔아 현실을 산 자들과/ 영혼을 정열과 바꾼 자들이//북녘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자들과/ 절망 대신 굶주림을 택한 북쪽 사람들이…그 모두가/ 서로 어깨 겯고 달려가/ 백두대간의 이름 아래/ 그 넓은 단단한 품에 안겨//우리 민족과 이 나라의/ 미래가/ 백두대간에 있음을 알게 하소서….” 산의 깊이, 인생의 깊이 “서구에선 산을 높이로 칩니다. 높은 산이 장한 산이고, 누가 더 높은 산에 올라갔느냐가 중요하죠. 우리나라에서는 깊이를 칩니다. 깊은 산일수록 좋은 산이고, 사람이 들 만한 산이죠. 산의 깊이란 게 결국 인생의 깊이와 마찬가집니다. 산에 든 사람이 제 목숨의 생명가치를 넓게 느낄수록 좋은 산입니다. 백두대간 엔 그렇게 살다간 사람들이 수십명 나옵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산을 올랐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여성이든 조국이든 그들 삶은 그래서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름있는 산꾼들이 도전하는 높은 산에 별 매력을 못 느낀다. 그 열정의 뒷모습, 허망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서구 알피니즘이 기록경신에 매달리는 것이 그에겐 ‘개떡같은 일’로 보인다. 산을 오르는 행위는 결국 사랑하는 일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산에 들어 진실로 자기를 보고, 타인을 봅니다. 그리고 나서 사랑하는 일만이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알고 가야할 전부임을 느끼는 거죠. 난 산에서 사랑과 용서를 배웠습니다. 앞으로 쓸 소설들에 그 얘기를 풀어낼 겁니다.” 사진 강재훈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내 몸에서 시가 터져나온다" 정순덕 선생을 병문안한 바로 그날 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다 의사 류춘도 그는 나이 칠십이 넘어 한 인생을 접고 또다른 삶을 시작했다. 의사에서 시인으로, 꽤 먼길을 단숨에 타넘었다. 이제껏 의사로 살아온 건 가족을 위해 세상과 타협한 것일 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시가 부르는 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밤마다 꿈 속에서 그를 일으켜세우던 기억들이 시가 되어 터져나오는 걸 애써 잠재우며 먼 훗날을 기다렸다. 그 ‘때’는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왔다. 그가 오래 전 만났을 법한 역사 속 인간들이었다. “지난 5월에 출소한 장기수 선생님들이 모여 사는 ‘만남의 집’ 정순덕 선생님 병문안을 갔다온 밤이었어요. 주체할 길없이 눈물이 솟으면서 시가 막 쏟아지는 거예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 연필을 잡았어요. 이걸 다 써놓고 죽어야 할 텐데, 몸부림치던 세월은 지나갔어요. 다 풀어내고 나니 죽는 게 겁이 안 나요. 난 쓸 거예요. 쓰지 않고는 죽을 수 없어요. 이제야 시 쓰는 이들 맘을 좀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시인이라 하는구나….” ‘부역자’를 자처하다 의사 류춘도(72·청화산부인과)씨는 곧 펴낼 시집 제목을 잊히지 않는 사람들 이라고 붙였다. ‘잊을 수 없는’이 아니라 ‘잊히지 않는’이라며, 그건 하늘 땅만큼 차이가 나는 얘기라고 했다. 몸 속에 박혀 절대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 그이들에 대한 기억을 그는 시로 끌어내고 있었다. “남은 건 팔 하나 눈 하나 목구멍 하나/ 그래도 그녀는 당당하였네. 하나뿐인 팔 내저으며/ 살았노라 살았노라 또다시 살았노라/ 동지들의 사랑으로 살았노라.”(‘어느 여 빨치산의 노래’ 중에서) 그가 묘사한 장기수 정순덕 할머니 모습은 여전사다. 그는 20대에 소녀 군의관으로 전장터에서 그들을 만났다. 한국전쟁에서 남과 북으로 엇갈렸던 이땅 젊은이들이 내뱉는 고통의 숨소리를 그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칠십 넘어 죽음을 좀더 가까이 느낄 때면/ 삶의 헛쭉정이들은 모두 기억상실로 사라져 버리고/ 깊숙이 묻어두었던 삶의 진실이/ 어둠 속에 반짝이는 반딧불처럼/ 불쑥불쑥 되살아난다.”(‘동무를 사랑하오2’ 중에서) 그는 5살 때 아버지를 따라 건너간 일본땅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해방되던 해 다시 조국땅을 밟았다. 작가를 꿈꾸던 그는 경도여전 문과에 시험을 쳐 합격한 상태였으나 한국으로 나오는 바람에 그 꿈을 접고 서울여의전에 입학하고 말았다.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맞은 한국전쟁, 어젯밤까지 국군 병사들을 치료하던 병원에 들이닥친 북한군, 그는 목숨을 구한다는 똑같은 마음으로 북한 병사들을 치료했다. “어제의 국군 부상병은 간데없고/ 텅빈 방에는 의사와 간호사만 서성거린다…/ 들것의 병사, 부축받은 병사/ 혼자서 깽깽이 치고 들어오는 병사/ 창너머로 보는 광경은 어제의 국군과 똑같아/ 다만 모자에 빨간 별이 번쩍이고 땀냄새가 조금 다를까?…/ 우리의 운명은 이날부터 시작됐다/ 헤어짐, 죽음, 감옥/ 긴긴 세월의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운명’ 중에서) “당시엔 사상이고 이념이고 몰랐어요. 다만 독립운동을 했던 여선배 방에서 독서회를 하며 정의가 뭐고 양심이 뭔가 치열하게 고민하던 때였지요. 그런데 병원을 접수한 북한군이 교장부터 식모, 심부름꾼까지 강당에 다 모이라 하더니 함께 의논하고 함께 즐기고 공평하게 서로의 뜻을 묻고 나누는 거예요. ‘아! 이거다.’ 난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은 체험을 했어요.” 그는 부대를 따라 후방이었던 광주 중앙외과병원까지 남하했다. 100명쯤 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함께 훈련을 받았는데 아직 의과대학생이던 그는 그 중간쯤되는 자격으로 머물렀다. “하루는 병원 앞에 러시아 지프가 와 서더니 저를 따르던 소녀 간호병을 데려가려는 거예요. 갑자기 내가 가야겠다는 맘이 불쑥 들었죠. 그게 내 인생이 고생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어요.” 낮에 자고 밤에 걸으며 군의관으로 부대를 따르던 그 시절, 그는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겼다. 소달구지에 실은 중환자들을 후방병원으로 후송하다 비행기 공습을 받고 홀로 살아남았던 일, 임시 야전병원에서 마취도 없이 수술하는 부상병 다리에서 기어나오던 구더기떼, 인민군 최후의 보루였던 남강 전투에서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죽어가던 병사들을 뒤로 하고 돌아서던 일. 그래서 그는 노래했다. “아, 아, 남강 기슭의 풀들이여/ 피를 먹고 자랄 풀들이여/ 대대손손 잊지 말아라.” “그때 그 사람들이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그 어린 소년들조차 조국이 뭔가 깊이 생각하고 있었어요. 자기 생명을 바쳐 애국한다는 자세가 그렇게 아름답고 순수했어요. 난 그걸 보며 그들이 원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한 나라 앞에서 이쪽 저쪽이 어디 있나.” 그는 낙오해서 홀로 퇴각하다 금강에서 붙잡혔다. 그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코뮤니스트’라고 외치는 국군을 저지한 미군 병사 덕에 그는 금강 귀신을 면할 수 있었다. 그뒤 감옥살이도 하고 부역자라는 죄명으로 고초도 겪었으나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오랫동안 과거를 잠그고 그 기억을 억지로 잊어야 했던 그는 이제 그 ‘잊히지 않는 사람들’ 이야기를 시로 쓴다. “산발한 머리카락은 하늘로 치켜들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얼굴은 배추색…/ 배추색 얼굴은 오십년이 된 지금까지도/ 내 머리에 떠오르며 몸서리쳐진다.”(‘배추색 얼굴’) “청주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여간첩사건으로 들어온 박정자, 윤칠성 등을 만났어요.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들을 나는 간첩이 아니라고 봅니다. 고아로 자란 것이 죄일까요. 가난한 자도 먹고 배울 수 있다기에 북녘땅을 찾아간 그이 결단이 그토록 가혹한 벌을 받을 만한 죄인가요.” 옛날 소년병들과 재회한 느낌 그는 최근 들어서야 만날 수 있게 된 장기수들을 보면서 오래 전 헤어진 소년병들과 재회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청년기에서 멈춘 그이들 맑은 영혼을 대할 때면 옥에 들어간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들이 아니었을까 자책할 때도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 이 나라가 이만큼 일어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 희생이 그 밑에 깔려 있는가 제 시집으로 알려주고 싶어요. 그들이 제 시를 읽으면서 전쟁은 사상가나 군인만 하는 게 아니라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여자들과 아이들도 피할 수 없이 누구나 휩쓸려들어 함께 겪는 고통이란 걸 느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가 본 저 북쪽 사람들이 이쪽에서 생각하듯이 그렇게 나쁜 원수들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 피도 있고 눈물도 넘쳐흐르는 같은 겨레라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시를 쓰며 죽음 같은 그 세월에서 풀려났으나 지금 이땅에 과거의 자기처럼 ‘역사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이가 얼마나 많겠느냐고 되물었다.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호주제, 끝장내고 말 테야" 조선시대 정서가 지배하는 사회, 더이상 사기당하지 않고 살겠다는 ‘파격’ 한의사 고은광순 그는 이름이 넉자다. 앞에 둘은 성씨인데 ‘황보’나 ‘남궁’ 같은 두 글자 성이 아니라 두개 성씨를 붙였다. ‘고’는 아버지 성, ‘은’은 어머니 성이다. 그는 왜 부모 성을 함께 쓸까. “보지도 못한 시할압지 제사준비 하라는 것이 ‘과격’이지,/그날, 생신 맞으신 울 압지 뵈러간다는 것이 ‘과격’입니까.//부계혈통에만 매달려 3대 독자 어쩌구, 족보 자랑이 ‘과격’이고,/아이에게 반쪽의 씨앗주인, 압지 성만 붙이는 게 ‘과격’이지,/반쪽의 씨앗주인, 열달을 품어 낳은 엄니 성도 붙이는 게 ‘과격’이랍니까.”(‘호호, 이런게 과격 아니어요?’) 직업현장에서 우러나온 반부계혈통주의 한의사 고은광순(44·홍명한의원 원장)씨가 낸 시집 어느 안티미스코리아의 반란-저기 저 족보 끼고 있는 아자씨, 날 좀 봐유! (인물과 사상사 펴냄)에는 이렇게 남성중심사회에 아픈 칼침을 날리는 시들이 그득하다. 시라기보다 현실비판을 겸한 보고서요,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걸쩍지근한 입심이 하도 씩씩하여 읽는 이들 입가에 웃음이 절로 떠오른다. “삼척시청/‘관광개발사업’으로/‘대형 남근깎기대회’를 열고/…해마다 자지깎기대회를 개최할 예정.(아, 담당자는 ‘남근’은 예술과 문화며 ‘자지’는 외설이란다. 그렇담 ‘페니스’는 로맨티끄?)/…이제는 ‘남근 드러내어 우뚝 세우기’가 즐거움이 되었다./‘커다란 그것’ 자체가 예술이며 문화이며 신앙인 것을!”(‘삼척 해신당 옆 자지공원’) “일단 글을 쓰기로 맘 먹으니 내 몸 속 어디에 그 엄청난 분노가 다 저장돼 있었나 싶게 마구 터져나오는 거예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쓰고, 침을 놓다가도 몇줄 메모하고, 전철을 타고 가다가도 손바닥에 끼적이고, 세상에 대고 외치고 싶은 소리가 파도처럼 쏟아져나왔어요. 이 시대 변질된 남녀 성관계를 발가벗기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사기에 속아 살아왔나 원통할 지경입니다.” 부계혈통주의에 대해 그가 느끼는 악감정은 철저하게 의사라는 직업현장에서 우러난 것이다. 아들낳게 하는 비법을 알려 달라고, 약을 지어 달라고 온 여성들이 털어놓는 체험은 1년에 3만명의 여태아가 고추를 달지 않았다는 까닭만으로 태어나기도 전에 살해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해줬다. “한국전쟁 4년 동안 군인 13만명이 죽었다지만 지난 10년 성감별로 죽은 여태아는 26만명이에요. 이건 전시상황이라고밖에 볼 수 없어요. 김영삼 정권 때 성감별 해준 의사를 구속하고 난리였지만 그건 구두 위로 발등 긁는 격일 뿐. 그 결과가 지금 초등학교 아이들이 외치는 말마따나 ‘아들 바란 부모세대, 짝궁없는 우리 세대’가 된 것 아닙니까. 다이옥신이 든 고기는 폐기처분하고 몸에 나쁜 담뱃갑에는 지나친 흡연을 우려하는 경고문을 박으면서 왜 한국사회를 기형으로 만드는 호주제는 폐지하지 않습니까.” 그는 지난해 뜻맞는 이들 몇과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을 만들었다. 호주제 폐지를 위해서는 넘을 산이 워낙 많으니 우선 당장 할 수 있는 일로 ‘부모성 함께 쓰기’를 앞에 내세웠다. 불과 몇달 만에 참여연대,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과 함께 서명을 받고 그 뜻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내세운 논리가 워낙 뚜렷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아들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난리를 쳐온 우리 현실은 죽 내려오던 종법제와 일제시대에 일본이 지배를 위해 만든 호주제가 결합된 악법이기에 전통도 아니고 미풍양속도 아니라는 것이다. “난 호주제가 사기라고 봅니다. 얼마나 많은 결혼한 여성들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고통받았습니까. 국민들 괴롭히는 법에 그렇게 강박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처럼 사소한 일에 목숨걸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 낡은 사고, 조선시대 정서로는 21세기를 우리 것으로 만들 수가 없어요. 제발 모른 척하지 말고 다들 나서 함께 싸웠으면 좋겠어요. 호주제가 폐지되면 한국사회가 크게 발전하리라고 난 믿습니다.” 그는 70년대 초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다닐 때 데모 배후 주동자로 몰려 제적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80년 봄에 복학했다 신군부 등장으로 다시 제적당하자 그는 아예 인생행로를 바꿔버렸다. ‘이건 틀린 길이다’ 싶으면 바로 뒤집어버리고 마는 그 유연한 성격이 만든 생의 전환점이었다. “두번 제적을 맞고 보니 이렇게 신물나는 사회를 내가 학문으로 공부하겠다고 나섰던 게 다 부질없어 보였어요. 그 무렵 허리가 아파 침을 맞으러 다녔는데 신통하게 사흘 만에 나았어요. ‘이거다’ 싶었죠. 실용학문을 하자, 면허증을 따자고 마음먹은 김에 한의학을 배우게 된 겁니다.” 늙은 학생이었지만 뭘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까 너무 재미있어서 혐오하던 수학 푸는 시간까지도 즐거웠다. 한의원을 열고 난 뒤엔 병원이 곧 그가 세상을 보는 창이었다. 그 현장에서 대학 시절 못다한 ‘운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삭발까지 하고 3년여를 물고늘어진 한·약사법 분쟁은 그가 의사이자 운동가로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한·약사법분쟁 현장을 뛰며 크게 깨달은 게 있어요. 관료주의는 말로 안 된다는 것, 절실한 사람이 발로 뛰어야 한다는 거죠. 끝장 볼 때까지 지독하게 밀어붙일 것, 호주제폐지운동도 그렇게 할 겁니다. 더이상 사기당하지 않고 살겠다는 제 선언은 파격이지만 과격은 아니에요.” 가부장제는 똥… 알을 까는 쉬파리 그는 ‘운동’을 재미있게 한다. 지난 20여년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길가며 손톱을 깎을 지경인 그로서는 즐겁지 않은 운동은 할 맘이 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웃자, 뒤집자, 놀자’ 세 마디를 내세운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와 그 동지들 정신이 맘에 든다. 그가 이프 에 연재하고 있는 ‘고은부인 도끼들었네!’ 이번 여름호 제목은 ‘J.O.T에 대한 몇가지 깨달음’. 호주제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홈페이지(http://myhome.netsgo.com/tcolor)에 뜨는 남성들 ‘과격한’ 의견을 점잖게 나무란 글이다. “여성차별주의로 똘똘 뭉친 입을 열어 함부로 발언하는 남성들을 나는 쉬파리라고 부릅니다. 가부장제는 똥이고, 그 똥에선 쉬파리가 알을 까죠. 통신상에서 얼굴을 감추고 익명으로 떠드는 사람들은 다 강자지배논리가 날뛰어온 이 사회가 싼 쉬파리들이에요. 악랄하면 악랄한 대로 날을 더 뾰족하게 갈아서 돌려줄 겁니다.” “좀 느슨하게 살고 싶다”던 그의 눈이 다시 팽팽하게 긴장으로 일어섰다. 사진 강재훈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나비의 정체성은 열려있다 ‘기혼 동성애자’ 정면으로 다룬 두번째 영화… 게이 커뮤니티 역사 정리하고파 (사진/동성애자 영화감독 이송희일씨) 나비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가 ‘알’이었을 때까지 거슬러올라갈 필요는 없겠다. 기억 저편, 어머니의 뱃속을 헤엄치던 그의 몸과 머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그러니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하자. 미륵사지터가 가까운 전북 익산의 농촌마을에서 가문의 13대 장손이자 외아들로 태어난, 수줍음 많은 소년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읜 소년은 혼자 처박혀 책읽고 글쓰는 것을 좋아했다. 가난을 이유로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권유하던 집안 어른들을 단식으로 물리치고 전주로 유학했다. 소년은 친구들에 둘러싸여도 말없이 앉아있다가도 종교에 관한 논쟁만 일면 거침없이 자기 주장을 쏟아놓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신부가 되고 싶었다. 세상을 좀더 안 뒤 신학대학에 들어가도 늦지 않다는 담임 선생님의 충고로 사회학과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한 친구를 좀 지나치다 싶은 우정으로 좋아했던 기억을 가진 고등학교 시절까지가 그의 ‘애벌레’기에 해당한다. ‘상처 입히는 동성애자들’ 이야기 90학번. 80년대를 관통했던 학생운동의 물줄기가 큰 여울을 굽이쳐 돌던 시기에 그는 물가에 섰다. 물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1년 동안 그는 다시 골방으로, 산 속으로 처박혔다. 유물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방어하기 위해 칸트며 헤겔이며 마르크스를 탐독하면서 가닿은 곳은 역설적이게도 유물론적 세계관이었다. 개인적인 사색의 시간이 보장된다는 점 이외에는 더이상 신부가 될 이유는 없어졌다. 3학년 때부터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사고를 좇았다. 미셸 푸코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문화운동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학졸업 뒤 “영화는 영혼을 경작하는 트랙터”라는 에이젠슈테인의 말에 이끌려 영화를 찍겠다고 ‘무작정 상경’했다. 독립영화 워크숍에서 만난 5명이 의기투합해 독립영화집단 ‘젊은 영화’를 결성했다. 독립영화란 개념조차 제대로 서 있지 않았던 시절, 서점에 들러 책 한권 사는 걸 사치로 여길 정도의 궁핍 속에서 영화를 향한 꿈으로 배를 불리는 나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96년 낙향할 때까지 그런 생활이 2년 가까이 이어졌다. 고향에서 1년 동안 농사짓던 그를 다시 서울로 불러올린 것은 한 남자였다. 영화 작업에서 알게 된 그를 통해 그는 자신의 또다른 정체성을 확인했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를 3년 동안 좋아하면서도 몰랐고, 대학교 때 동성애면 어떻고 양성애면 어떻냐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정체성. 그는 97년 남성 동성애자 단체인 ‘친구사이’에 가입했다. 한때 이희일이라는 이름은 ‘친구사이’의 대표로서 가장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영화찍기도 본격화했다. 자기 이야기를 그린 첫 번째 단편 언제나 일요일처럼 (25분·1998)에는 자기정체성이 확고한 4명의 즐거운 게이들이 나온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영화의 화면처럼, 그도 퍽 수다스럽고 유쾌하다. 퀴어영화제나 게이바 등에서 제한적으로 상영됐던 첫 단편의 한계를 넘어,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 두 번째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는 호기심이 덧칠된, 이성애자가 만든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 동성애자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번 영화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고 선재아트센터라는 대중공간에 걸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막상 동성애자 자신들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억압에 상처받은 동성애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제3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는 두 남자. 집안 사정상 이성과 결혼을 해야만 하는 한쪽 남자. 그와 떨어지기 싫어 자신의 누이를 소개시켜주는 다른쪽 남자. 연인으로서, 또한 처남과 매부로서 살아가는 그들의 이중생활. 영화는 우리나라 남성 동성애자의 상당수가 현실로 겪고 있는 ‘기혼 동성애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서구에서는 동성끼리의 결혼을 합법화하는 국가가 나날이 늘어나고, 국내에서도 교과서의 동성애 차별이 수정되는 등 가시적인 공간에서 동성애에 대한 억압과 편견이 깨져나가고 있다지만, 좀더 큰 문제는 동성애자들이 ‘익명으로 성적인 상대방을 만날 수 있는데 왜 굳이 커밍 아웃을 하느냐’고 생각하며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에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동성애자를 사형에 처하는 식의 극단적인 제도적 억압이 없는 대신, 결혼과 2세 생산이라는 정서적 억압이 자기정체성의 표현을 억누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도 그랬다. 지난해 텔레비전에 나온 그의 모습이 친척들의 입을 통해 어머니에게 전달됐다. 여동생들의 이해를 받으면서도 어머니에게만은 진실을 털어놓지 못한 상태였다. 고향집에 찾아간 그를 앞에 앉혀두고 어머니는 마늘을 까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문중에서는 멍석말이를 하겠다고 난리였다. 그 눈물과 야단법석의 맨 밑바닥에는 그가 자식을 볼 수 없다는 사정이 깔려 있었다. 며칠 뒤 떠나는 그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너를 믿는다.” 그의 평생 소원 3가지 그런 어머니의 믿음이 그 자신을 규정할 수 없음을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다만, 그의 정체성은 한없이 열려 있다는 사실만 말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이 ‘너는 이래야 한다’고 정해주는 획일적인 정체성을 거부했다. 또한 ‘한 시기의 자신’에게 고착되는 것도 거부했다. 삶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구성해가는 것이므로, 개인의 선택작용이 계속 개입해야 하므로, 자기정체성 또한 다양화한 가운데 선택하는 것이므로, 그는 “내가 왜 고착돼야 하나” 되묻는다. 결국 “섹슈얼리티엔 답이 없다”고 말하는 그는 “요즘엔 여자쪽으로 많이 기운다”며 하하 웃었다. 알을 깨고 나온 애벌레가 번데기 속으로 움츠렸다 화사한 날개를 펼치는 나비가 된다. 그 나비는 꿈꾸고 있는 장자일 수도 있고 장자의 꿈을 꾸는 나비일 수도 있다. 나비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묻는 게 소용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 영화를 오는 4월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와 미국 샌프란시스코 퀴어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하고 올해 안에 한국 게이 커뮤니티의 역사를 정리하는 책과 디지털 장편 영화 한편을 완성하겠다는 그에게 평생 소원 3가지를 물었다. “소설 2편을 쓰고, 좋은 사람(아마도 남자)을 만나고, 어머니께 잘해드리고 싶어요.” 사진 강창광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백재희'를 잊어달라 가슴아린 패배의 뒤안길에서 다시 도전하는 청춘, 늦깎이 대학생 이재수! 배우 이정재 그는 걷지 않고 달린다. 스물여섯 젊은 피 때문일까, 아니면 그를 걷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세상 때문일까. 갈 곳 없는 도시의 건달일 때도 뛰었고 외세에 대항한 제주도민들 우두머리일 때도 뛰었다. 목숨 걸고 달음박질을 해보지만 하릴없이 죽기도 여러번 죽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몸을 던진 보디가드 백재희로 숨이 끊겼다가 제주민란 장두 이재수로 참수당한다. 모래시계 로부터 태양은 없다 까지, 백야 3.98 에서 이재수의 난 까지, 이 멀끔하게 번듯한 청년이 달려온 길은 쓰러지는 젊음과 그 가슴아린 패배의 뒤안길이었다. “네 연기관은 뭐니, 철학은…” 배우 이정재(26)씨는 그러나 이번엔 그렇게 쓰러질 수 없다며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길거리에 나붙은 영화 포스터 속의 이글거리는 눈빛, 신문과 잡지 문화면을 뒤덮은 인터뷰 속에서 그는 100년을 뛰어넘는 두 얼굴의 사나이지만 한목소리로 말했다. “외세에 맞서 일어섰던 개항기 제주나 미국투자협상단 압력에 밀려 우리 영화가 죽게 생긴 지금 이곳이나 같은 땅 같은 처지 아닙니까. 흔들리는 양반이나 공무원들 밑에서 죽어나는 건 백성이요 시민들입니다.” 이정재, 아니 이재수는 미국과 붙은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 전쟁에서 우리쪽 장수가 됐다. 6월26일 개봉한 이재수의 난 이 같은 날 나란히 간판을 올린 할리우드 대형 화제작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 에 맞서는 형국이 됐기 때문이다. 원로감독 임권택씨부터 여성감독 임순례씨까지 광화문 거리에 나앉은 영화인 114명이 머리를 깎던 날, 그는 “ 이재수의 난 이 바로 지금 우리 얘기”라고 했다. “이재수란 인물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제주도에서 넉달을 뒹굴었습니다. 사료나 정보가 너무 없어서 뭐든 제주 개항기 역사라면 이잡듯 뒤졌어요. 박광수 감독과 얘기도 많이 했습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 사람, 하층민으로 민란에 뛰어들어 스무살 젊음을 미련없이 던진 이 인간, 아마도 점점 미쳐갔을 한 젊은 남자… 고민고민해 찾아낸 걸 다 표현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배우 인생에서 과연 이런 역할을 또 맡을 수 있을까 싶어 더 기름진 화면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는 이재수에 푹 빠져 지난 몇달을 보내고 이제 막 거기서 벗어나는 참이다. 겉모습은 미끈한 도시 청년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아직 제주 그 검푸른 바닷물과 싸한 바람에 붙잡혀 있다. 과감한 생략으로 관객을 느닷없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 효수대에 걸린 이재수의 목과 까마귀 대목은 지금도 아쉽다. 여러번 죽어본 남자인 그로서는 뎅겅 목이 잘려 내걸린 그 데드마스크가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강인하고 치열한 정신을 지녔던 인간이라도 죽어서까지 그렇게 근엄할까… 죽음은 굉장한 공포인데… 눈도 뜨고 죽고 입도 헤벌리지 않았을까 의견을 냈지요. 그래서 원래 죽은 얼굴을 두벌 떴는데 사람 눈을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다는군요. 제 뜻대로 만든 데드마스크는 결국 못 쓰고 말았어요.” 말없이 그림자처럼 연인을 따르던 모래시계 의 백재희는 달라졌다. “내가 왜 여기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배우”가 돼야겠어서 그는 올 봄 동국대 연극영상학부 1학년 학생으로 입학했다. 92년 현대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7년 만이었다. 며칠 전 끝난 학기말 시험 때는 과제물 내랴 시험 준비하랴 밤을 새면서 고생을 했는데 B학점쯤은 나올 것 같다고 좋아했다. “어떤 선배들은 현장 경험이 더 중요한데 뭐하러 학교를 가느냐 했지만 일을 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게 있었어요. 준비없이 얼결에 뛰어든 분야라 쉽게 정리를 못하겠더라구요. 나이는 먹어가고 작품수도 늘어가는데 내 손에 쥔 게 없는 거예요. 네 연기관은 뭐니, 인생관은, 철학은… 누가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하지.” 신입생 이정재가 신청한 19학점에 그 답이 좀 들어 있을 듯싶다. 전공과목 외에 그는 ‘동서양철학사’ ‘서양음악의 이해’ ‘불교와 인간’을 들었다. 넓어지기 위해서다. 그는 ‘ 모래시계 백재희’란 과거 인물로 굳어진 자신이 수많은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그걸 찾아야 했다. 그는 달음박질을 멈출 수 없었고, 매일 죽는 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친구이자 경쟁 상대인 정우성과 영화 얘기를 많이 합니다. 포장마차에서 한잔 하며 ‘아, 그 영화 그거 안 돼’ 하며 감독들 비판도 하고 영화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치고 받으며 툭툭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공부를 해가면서 가능성이 보인다면 연출도 하고 싶지만…” 아직 버리지 않은 건축가의 꿈 그는 자신을 냉정한 현실주의자라고 불렀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지 못했을 때 자신을 가혹하게 두들기는 것이 장점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젊어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자만하는 것이 단점이라고 짚어냈다. “낮에 촬영할 때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잠을 못 자요. 사람이 보이는 영화, 한국 냄새가 제대로 나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특수효과니 기술이니 하는 것들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우리가 그것만으로 한국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전 그것 못할 것 같아요.” 건축가가 되고 싶었지만 대학입학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하다가 엉뚱한 길로 들어선 그는 아직 그 꿈을 버리지 않았다. 손이 굳지 않도록 가끔 그림도 그리고 건축 박람회나 실내 디자인 전시회가 열리면 빠지지 않고 둘러본다. 배수진을 치는 건 아니지만 배우로 뛰어가다 숨이 차서 더 달릴 수 없게 되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호흡을 고를까 궁리한다. “저, 생긴 건 별로 맘에 안 들어요. 분위기는 약간 정리되지 않은 듯하면서 빈틈 보이지만 섣불리 공격하고 들어갈 틈은 없는, 날카로운 방어막이 있는… 달콤한 부드러움 속에 혀를 벨 수 있는 막대를 숨기고 있는 솜사탕.”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몸을 던지는 '예술의 학문' 한 작품 위해 3년 이상 치밀하고 단단한 작업… 요즘엔 언어에 부쩍 집착 작가 이불 그는 이름 때문에 말을 많이 들었다. 덮고 자는 이불이냐는 농담 같은 질문부터 혹시 진흙으로 구워만든 불상이란 뜻으로 자작한 것이냐는 고차원 짐작까지, 그야말로 만나는 이들마다 이름 내력을 묻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외자 이름 ‘불’이 주는 강력하고도 잊을 수 없는 인상 때문에 수천 수만번 되풀이했을 대답을 또 한번 풀어놓은 그는 “괜찮아요, 팔잔걸요” 웃었다. 젊은 날의 인생모델, 레오나르드 다빈치 “먼동이 터오는 새벽을 뜻하는 ‘해돋을 불’(날 일(日)변에 出)자를 써요. 물론 본명이죠. 외국 전시에 나가며 영어로 이름 풀이를 했더니 저더러 인디언 같다고 하더군요. 인디언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죠. 그들은 삶을 꿰뚫어보던 현자들이었어요. 난 내 작품으로 인류가 죽 살아온 근본구조, 인간사회의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싶어요. 답을 내기보단 권력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작품으로 질문을 계속 던지는 거예요.” 작가 이불(35)씨는 어릴 때부터 튀는 아이였다. 이름이 특이한 이 왼손잡이 여학생은 곧잘 짓궂은 남학생들 놀림감이 됐고, 그 괴로움 속에서 싹튼 열등감은 외부 적들을 견디는 힘이 두터워지면서 강한 자의식으로 발전해나갔다. “난 남과 다르다”고, “독특하게 살 운명”이라고 자아를 일찌감치 세운 소녀 이불은 세계위인전집에서 그가 본받을 만한 인생 모델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발견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였는데 그 많은 위인들 가운데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딱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의사이면서 과학자이고 조각가이면서 화가이고, 한마디로 이 만능 인문주의자는 내가 꿈꿨던 예술가의 초상 꼭 그대로였죠. 그뒤론 존경하는 사람, 되고픈 인간은 으레 레오나르도 다빈치였고 예술가였어요. 예술가 이외에 내가 이 세상에서 되고픈 건 없었어요.” (사진/지난 8월5일 16개 인권·시민단체가 명동성당에서 벌인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캠페인'에서 '하루감옥체험'을 하고 있는 이불씨. 처음엔 "왜 나인가"고민했으나 대학 동창인 민가협 남규선 총무가 또박또박 내세운 이유있는 설득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은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깨졌다.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하고 보니 그가 그리던 예술가는 현실에 없었다.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운전면허시험 합격을 위한 주행코스 훈련과 비슷했으며, 일단 대학에 붙고 나면 말짱 꽝이어서 예술을 하겠다고 가슴 부풀어온 청춘들을 골탕먹였다. “미술대학이 아니라 미술학원이었어요. 너무 자존심이 상했죠. 이게 아니다 싶어 휴학계를 내고 맘 맞는 친구와 함께 마련한 작업실에 파묻혔어요. 어느 날 친구가 제가 주무른 작품들을 몽땅 버리겠다고 나섰을 때 문득 깨달았죠. 그거 다 장난이야, 짐짓 큰소리쳤지만 얼마나 화가 나던지, 그게 제 목숨 같은 거라는 걸 알게 된 겁니다.” 그가 올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 대표작가로 나가고, 특별상을 받은 바탕엔 이런 긴 속내가 깔려 있다.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학자처럼 치밀하고 단단한 작업 과정을 오래 거치는 그는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늘 “미술을 한다는 건 학문하는 행위와 흡사하다”고 강조한다. “한국에서 미술시간에 가르치는 건 너무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에요. 작품은 번개나 폭풍우처럼 순간에 떠오르고 광기나 열정으로 지속되는 게 아니죠. 행위예술 하나를 벌여도 관객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하나하나 예상하며 계획을 세우고 그 표에 따라 진행해요. 저같은 경우, 한 작품에 보통 3년 이상이 걸리는데 계속 붙잡고 있다 보면 감정으로 그 긴 시간을 끌고 간다는 건 불가능하죠. 나중엔 너무 냉정해져서 온통 허점만 보이게 되는데 그 고비를 지나고 일종의 진공상태를 거쳐 저를 돕던 조수들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쯤, 벼리고 벼린 작품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몸이 너무 힘들어서 ‘난 정말 이런 짓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절로 한숨이 나올 때까지 일하고 읽고 생각하고 또 만들어보는 거죠.” 올 베니스비엔날레에 선보였던 사이보그 는 비행기 안에서 떠오른 생각 하나가 진화해 탄생한 작품이다. 유전자에 관한 방송프로를 보다가 ‘사이보그’를 만들자는 맘이 들었고 관련 책을 사모으며 ‘사이보그’에 대한 개념을 확장한 뒤 대중문화, 이를테면 애니메이션이나 공상과학 영화 속에서 그 여러 형상을 찾아가는 식으로 작업해나갔다. 아시아에 사는 전형적인 여성상을 그려가다가 나중엔 창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바람에 힘이 부쳐 마무리를 해야 했을 만큼 일이 커지기도 한다. “뉴욕 근대미술관 초대전을 할 때는 죽은 물고기에 여러 가지 구슬과 장식을 바늘로 달아 여성이 지닌 자연성, 그 부패가 뜻하는 여성의 희생 등을 표현했어요. 구슬이란 소재가 지닌 상징을 잘 읽어보세요. 제 개인으로는 70년대에 어머니가 집에서 구슬백 만드는 일을 한 기억에서 출발했어요. 구슬백은 가난한 여성들에겐 생계수단이요, 유한 마담들에겐 부의 표식이었죠. 더구나 알록달록한 색에 대한 욕구, 내가 잘 다룰 수 있는 재료라는 장점이 매력이었습니다. 표현하고 싶은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내줄 재료를 찾는 것부터 그것들을 잘 꿰맞출 공학을 완전히 익히는 것까지, 모든 과정이 이가 딱 맞아떨어져야 그 작품의 운명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현대미술판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이들은 재료학부터 기계공학까지 다 아는 게 중요하죠.” 그는 뜨거운 여름에 일을 많이 한다. 해외 초대전이 줄을 이었던 지난 몇년 동안 7, 8월을 작업으로 밀어붙였다. 처음엔 아이디어가 온다. 문득 떠오른 발상을 벽 한쪽에 붙여놓은 큼직한 종이에 그리거나 써놓는다. 일을 하며 오다가다 그 기초도를 고치고 메모를 덧붙이고 짜깁고 추스른다. 계속 변하는데다 굉장히 더디기 때문에 그 판을 짜는 게 한편으로 지겹고 괴롭지만 또 한편으론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올 여름 잊을 수 없는 기억 “이상한 편집증이 있어요. 뭘 한번 붙잡으면 완전히 밝히고 분해해버리죠. 그렇게 재료를 다 알아봤다 싶으면 그때는 안녕이죠. 그 재료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힘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즈음 언어에 부쩍 집착을 보이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나 노엄 촘스키의 책을 즐겨 읽는다. “언어가 너무 지쳐서” 우리가 어떤 개념이나 사물을 인식할 때 그 낡고 지친 언어에 갇히곤 하는데 그것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권력관계의 출발이라고 그는 말했다. 올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아마추어 는 노래방 기기를 활용한 것인데 ‘사랑’을 주제로 한 대중가요 90여곡을 넣어 관람객이 고르고 부를 수 있게 꾸몄다. “난 널 미치게 사랑해”라고 말할 때 ‘사랑해’란 형편없이 지쳐버린 말이지만, 그나마 최소한의 그 의미를 누구나 알고 받아들이는 언어라는 것이다. 올 여름 그는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를 보탰다. 민가협 등이 마련한 ‘하루감옥체험’을 하는 현장에서 만난 수염 허연 할아버지들이 남긴 말이다. 0.75평 감옥에 들어앉은 그에게 그들 비전향장기수는 “난 지난 5월에 거기서 나왔다우. 자네 같은 양반들 땜에 우리가 출옥했으니 그저 고마울밖에”라고 고개를 숙였다. “반체제활동을 하신 분들”이라고만 소개한 부모님 덕에 일찌감치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눈떴던 그였지만 “고생 많으십니다”라고 진심어린 인사를 보내는 그들 앞에서 잠시 할말을 잊었다. “이 할아버지들 얼굴이 언젠가는 불쑥 아이디어로 떠오르고 오랜 시간을 거쳐 작업으로 드러나겠죠. 인간사회에서 권력이란 무엇인가. 한 개인이 저항하기 힘든 그 오래된 얘기를 오늘, 내일, 내가 알고 있는 부분들을 축적해가며 오래오래 풀어갈 겁니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꽃을 드러내는 사나이 우리 자연과 문화를 꽃으로 장식하는 ‘꽃의 거장’… 내년엔 작품집도 낸다 (사진/마이스터 플로리스트 방식씨) 독일에 가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었다. 광부가 되는 것. 광부와 간호사를 실어나르기 위해 독일에서 보내오는 전세기가 유일한 항공편이었던 때였다. 71년 5월 그는 광부일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서둘러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독일행은 오로지 24살 청춘의 뜨거운 피가 시켜서 한 일이었다. 그 여자를 만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서라벌고등학교에 입학한 해에 겪은 4·19혁명에서 친구를 잃고 집안의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고향인 목포에 내려가 있던 시절이었다. 고종사촌 누이가 소개한 간호학교 여학생에게서 그는 처음으로 이성을 대하며 떨리는 자신을 느꼈다. 생계를 잇기 위해 산양을 키우던 가난한 목동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독일로… 간호학교 이사장이었던 여학생의 어머니는 둘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조선대 간호학과에 진학한 여학생은 갑자기 파독 간호사로 떠나버렸다. 그뒤로도 편지 왕래가 이어졌지만, 4년의 세월은 편지에 실려오는 감정의 빛을 바래게 했다. 그러던 중 그 여자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에서 만난 독일인 의사와 약혼할 것이라는 ‘통보’와 함께였다. 그 여자를 만나야 했다. 도르트문트의 광산일은 예상못한 고통이었다. 지하 수백m로 내려가 갱목을 세우는 일은 어둠과 습기와 실연의 절망에 맞서야 하는 싸움이었다. 독일에서 본 그 여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그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추스려 돌아서야 했다. 이제 왕복 항공료를 갚지 않으면 그만둘 수 없는 반강제의 노동 속에 젊음이 통째로 묻혀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꽃이 그에게 희망을 줬다. 출퇴근길, 지천으로 피어 있는 이국의 들꽃이 그를 위로했다. 어린 시절 이모댁 마당에 핀 옥잠화 한 송이에 매료돼 기어이 자기 집으로 옮겨심었을 만큼 남달리 꽃에 마음을 주던 그였다. 15달 뒤 항공료를 다 갚게 됐을 무렵, 그는 ‘바움슐렌 라이 꽃장식학교’에 실습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6년 만에 동양인 최초의 ‘마이스터 플로리스트’라는 명예로운 훈장을 달고 고국땅에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이스터 플로리스트를 우리말로 풀면 ‘꽃의 거장’쯤이 된다. 플로리스트는 원예미학 전문가를 말하고, 마이스터는 독일 직업교육에서 최고경지를 이룬 이에게 부여되는 칭호다. 각각 3년인 플로리스트 과정과 마이스터 과정을 밟은 뒤 국가고시에 합격해야만 한다. “실습생은 힘들어도 의자에 앉지 말고 손이 곪아터져도 장갑을 끼지 마라. 비가 오면 맞아라. 그것이 마이스터의 길이다.” 철저한 실습 위주로 혹독하게 진행되는 훈련을 거쳐 마이스터가 되는 것은 한마디로 ‘시다’에서 출발해 박사학위를 따는 것과 같다.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단 1초의 빈틈도 없이 실습생을 몰아붙이는 교육,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 한명 없는 처지, 처음 대하는 라틴어 학명이 던져주는 난감함…. 엄격한 학교 규칙을 어기면 출국된다는 조건으로 입학한 그는 드넓은 실습장에서 시린 손으로 가위질을 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한 가지에 빠지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 그를 붙들어줬다. 때로 그 성격은 오기로 발동해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학교 기숙사에서 청소부 아주머니가 김치냄새에 짜증을 부리자 거처를 마굿간으로 옮겨 겨울 한철을 지냈다. 추위를 잊으려 밤새 뜀박질을 하다 지쳐 잠이 드는 날들이었다. 그의 유난한 집착과 오기는 경쟁심과는 다르다. 무엇이든 동기생들보다 잘해내 스승인 마이스터 칼 라이로부터 ‘천재 친구’로 인정받은 그였지만, 남을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밤을 새워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달리기 대회에서 늘 맨 뒤에 처지는 아이가 그였다. 앞사람을 이겨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아이는 굳이 속도를 내지 않았다. 탁구를 곧잘 치던 청소년 때도 시합만 붙으면 맥을 못췄다. 오직 마이스터가 되겠다는 꿈 하나가 그에게는 중요했다. 그 누구와도 다른 꽃 예술의 경지를 이루겠다는 일념은 동료들과 전혀 다른 발상을 가능케 했다. 고국의 어머니에게 부탁해 공수한 조롱박, 수세미, 옥수수 등을 이용한 꽃꽂이는 바람 같은 인기를 몰아왔다. 그게 플로리스트 과정 때였다. 그런데, 막상 마이스터가 되자 묵직한 허무감이 공격해왔다. “마이스터가 되면 총리 관저의 꽃 장식 기회가 주어집니다. 어쩌면 그 일을 위해 모든 고생을 참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일을 마치고 나니 갑자기 자살하고 싶어졌어요. 아무리 총리라지만 내가 고작 한 인간을 쳐다보고 살아왔다니, 하는 생각에 허탈해지는 거예요.” 그는 사람을 바라보고 작품을 만들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천년을 가는 꽃의 아름다움, 그것을 드러내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그리워 못 죽진 않지만 자연이 그리워 못 죽겠다”는 그는 지천명의 나이에도 독신이다. 최근 고국에 다니러 온 옛사랑과 밤새 막걸리잔을 기울인 일을 전하면서도, 그다지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평생 꽃만 만지니 천국에 갈 것이라고, 하늘의 뜻을 아는 양 이야기하지만, 죽어 천국에 가더라도 우리나라와 같은 산천을 볼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그리고 자살하지 않으려면 계속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귀국한 이래 꽃예술원을 열어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서울 명동의 주요 매장과 방송사, 패션쇼 무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인기 여배우도 그의 고객이었다. 88년 서울올림픽 때는 공식 꽃 디자이너로서 개회·폐회식과 경마장의 꽃장식을 맡아 외국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창조할 수 있는 실력만 갖추면 창조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자는 생각에 강의에서도 한번 가르친 내용은 두번 반복하지 않는다. 그의 한 제자는 “10년을 배워도 새롭다”고 말한다. 3년 전에는 다시 독일에 건너가 2년 동안 새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교재도 새로 만들었다. 영어, 독일어, 라틴어 공부도 계속되고 있다. 8년 전부터 무당춤을 배우는 것도 춤추며 꽃을 꽂는 새로운 양식의 꽃꽂이 예술을 선보이려는 포부에서 비롯했다. 내년엔 우리 자연과 문화를 배경으로 한 꽃장식 작품집을 낼 계획이다. 식물의 아름다움을 '조합'한다 그러면서도 아직 자동차 운전을 못한다. 비디오 리모컨도 다룰 줄 모른다. 작품집을 만들면서도 사진기를 쓸 줄 모른다. 이상한 사람이다. 직업상 식물을 볼 때 꽃, 잎, 줄기, 뿌리를 떼놓고 바라보는 그는 언제나 꽃이 가장 아름다운 건 아니라고 한다. 식물마다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따로따로다. 그것을 잘라내 조합하는 게 그의 직업인 셈이다. 그러나 한데 어우러지는 것도 아름다움이다. 그는 집에 있는 온실이나 고향에 있는 농장의 나무와 풀이 스스로 자라 어울리도록 그냥 놓아둔다. 독일의 숲은 모두 인공림이라 매력이 없다고 한다. 사람도 그렇다고 한다. 떼어놓으면 기쁨도, 슬픔도, 영광도, 좌절도 되는 꽃, 잎, 줄기, 뿌리가 한 포기 식물을 이뤄 자라는 것, 그것이 마이스터 플로리스트 방식(54)씨가 바라보는 삶이다. 사진 강창광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목숨이 아까워도, 원칙은 현장! 지역 방송사 10년 체험에서 얻은 다큐멘터리 정신… 위험한 지역만 골라다니는 깡다구 프로듀서 구수환 그가 발을 디뎠던 곳은 대체로 늘 위험한 지역이었다. 동티모르, 체첸, 키프로스, 버마, 골든트라이앵글, 파푸아뉴기니…. 세계 지도를 펴놓고 그 땅들을 색칠해보면 적색경보로 불긋불긋하다. 전쟁이건 분쟁이건 폭력조직이건 자연재해건,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한마디는 ‘목숨을 버릴 각오가 돼 있는가’란 질문이었다. 누가 등을 떼민 것도 아닌데 그는 왜 생사를 건 모험 속에 자기를 밀어넣었을까. 모두 말하지 못한 이제는 말한다 “개도국, 분단국, 인권 후진국… 우리나라와 연결지어 취재 대상국을 고르다보면 으레 시끌시끌한 곳이 떠올랐어요. 안방에 앉아서 세계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적어도 풍물기행이 아닌 우리 사는 얘기와 관련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독립을 외치는 동티모르 사람들 심정을 미국 언론이 더 잘 알겠습니까 식민경험이 있는 우리가 더 잘 알겠습니까. 외국 통신은 그들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라 한계가 많죠. 직접 우리 눈으로 찍은 그림으로 해설할 때 그 화면이 시청자들 마음을 두드릴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진/97년 9월 인도네시아로 날아가 산불 현장을 취재하던 구수환 프로듀서 오른쪽서 두번째 .) 구수환 프로듀서(41·한국방송공사 TV1국)는 입을 열 때마다 ‘그림’을 강조했다. 좋은 그림 한컷을 얻기 위해서라면 몸이라도 던지겠다는 기세였다. ‘저 그림은 들어가야겠다’ 마음 먹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게 구수환식 취재법이다. 다큐멘터리 전문 PD로 이름을 굳힌 지금, 그는 “다큐멘터리 원칙은 현장이다”라는 한마디에 지난 6년 세월을 실었다. 총질로 날이 지새는 마약지대 골든트라이앵글(황금의 삼각지대)을 두번이나 다녀오고, 버마에 대항해 독립투쟁을 벌이는 카렌족을 만나기 위해 14시간에 걸친 산악행군도 마다하지 않았던 깡다구는 이제 30여편 한국방송공사가 손꼽는 다큐멘터리 목록 속에 남았다. “욕심이죠. 저걸 두고 난 못 떠난다, 뭐 그런 오깁니다. 버마에 항복한 쿤사 이후 마약거래의 새 요지로 떠오른 와족의 수도 팡상에 갔을 때는 정말 죽을 뻔했어요. 해발 2500m 산 속 도시였는데 거길 가려면 메콩강 지류인 마캉강을 건너야 했어요. 밤에 잠입하다가 대여섯 시간 떠내려가는 바람에 십년 감수했죠. 팡상의 화려한 밤거리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게 된 걸로 그 보상이 됐지만요.” 등골 서늘한 그런 취재가 위험했구나 하는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건 귀국 비행기를 타고 난 다음이다. 현장에 들어갈 때는 좋은 그림 찍을 생각에 아예 며칠이고 잠을 안 자는 성미라 앞뒤 잴 틈도 없다.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그 땅을 뜨는 순간, “아이구, 징그러. 내가 왜 거길 갔었지” 손을 탁탁 털게 된다. 그러나 한달쯤 지나면 “이번엔 어딜 가볼까” 외신을 뒤지는 사람이 구수환 PD다. 일요스페셜 세계는 지금 추적 60분 시간에 안방 시청자들 시선을 붙들었던 그 다큐멘터리 정신은 지역 방송사에서 일하던 10여년 전 산 체험으로 얻은 것이다. “80년대 말 강릉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당시 지방 방송사로서는 시도하기 어려웠던 고발 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지역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저를 구세주처럼 여기며 기뻐하는 걸 봤죠. 내가 뭘 해야할까 거기서 배운 게 많습니다. 언론이 으뜸으로 꼽아야 할 건 감시 기능이죠.” 그 경력 덕에 94년 추적 60분 팀이 꾸려질 때 그는 8명 PD 가운데 한명으로 뽑혔다. 현장에 나가 몸 부딪치며 싸움도 해보고 위아래에서 압력도 받고 언론중재위에 고발도 당하고, 구 PD의 수난시대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중 ‘못 가진 자’쪽에 서야 한다는 신념을 굳게 해주었다. “마피아 소탕에 나선 이탈리아 여검사의 고독한 전쟁을 다룬 건 우리 검찰이 왜 이 모양인가 하는 문제제기였죠. 마약 취재는 현지에서 헤로인을 제치고 더 많이 생산하고 있는 각성제 야마(암페타민)가 폭력조직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도 그 감시 장치가 없다는 경고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취재하고 있는 삼성차 문제도 재벌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 정부가 그 개혁의지를 꺾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한 겁니다. 이건 경제 기사가 아닙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라는 고발기사입니다.” 그는 고발 다큐멘터리가 소재 제한으로 제대로 제작되지 못하는 여건을 “우리 사회 현실을 고스란히 비춰주는 제약”이라고 표현했다. 큰 덩어리는 건드리지 못하고 마약이나 매춘, 성문제 같은 흥미 위주 아이템으로 흐르는 현실 때문에 다큐 PD들은 때로 절망한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KBS개혁실천팀으로 들어가 이제는 말한다 를 만들었을 때, 특히 ‘조선일보를 해부한다’가 방송되지 못했을 때 좌절을 느꼈죠. 그걸 제작한 9명 PD들끼리 붙들고 엉엉 울었습니다. KBS의 한계냐 김대중 정권의 한계냐, 우리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입술을 깨물며 다시금 깨달았죠. 재벌이 깨지지 않는 한 언론이 깨질 수 없다. 재벌개혁 다음은 언론개혁이다.” “고발프로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그는 ‘조선일보를 해부한다’를 회사에 반납하고 다시 세계는 지금 , 이어 추적 60분 팀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그가 시청자들과 만나지 못하고 창고로 가버린 그 필름을 잊은 건 아니다. 언젠가 잠자고 있는 그 필름을 깨워 전국 시청자들에게 공개하는 것이 첫째로 꼽는 소원이다. “드라마 PD들만 시청률 경쟁을 하는 건 아닙니다. 다큐 PD들도 시청률에 신경이 곤두서는 건 마찬가지죠. 시민들 제보에서 출발하는 프로인만큼 시청자가 우리 뒤에 서 있다는 자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죠.” 그가 꿈꾸는 건, 역설이지만 빨리 이런 고발프로가 없어지는 사회다. 고발프로가 많은 사회는 살기 좋은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발프로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외치던 그는 다시 발걸음을 빨리 했다. 한달이면 대엿새 꼬박 밤을 새는 편집실 앞에서 그가 말했다. “언론개혁 하려면 1분이 아쉬워요.”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짐승처럼’ 짐승을 쫓아… 흔적들 냄새 맡으며 산으로 산으로… 동물을 통해 인간을 추적한다 (사진/야생동물 연구가 한상훈씨) 한해의 3분의 2는 짐승으로 산다. 동물에 인생을 걸었으니 그런 삶도 달갑다. 한상훈(39) 박사는 수시로 짐을 꾸려 산으로 들어간다. 한번 나가면 4∼5일은 집을 비운다. 1년이면 적게는 200일, 많게는 250일을 산에서 산다. 동물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게 그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연구의 70%는 현장조사가 차지한다. 강의를 몇주씩 비우고 달려가기도 하는 산에서 그는 똥을 줍는다. 동물이 남긴 흔적을 좇는 그의 눈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똥을 기막히게 찾아낸다. 그곳에 어떤 동물이 사는지, 그 동물은 어떤 지형물을 이용하는지,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져야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 해발 800∼1000m의 바위산에 가서 바위틈에 쌓인 낙엽을 헤치면 산양의 똥이 나온다. 양지바른 곳에 팬 웅덩이에 가면 그 물을 마시고 목욕도 한 멧돼지나 노루의 발자국이 보인다. 산은 사람이 손님 그러다 표범 발자국을 봤다. 88년 9월, 경북 영양의 깊은 숲 속에서였다. 호랑이나 표범 같은 대형 육식동물은 모두 사라졌다고 여기던 때였다. 설혹 있더라도, 호랑이라면 몰라도 표범이나 늑대 따위야 한번 붙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자국만 봤는데도 오싹한 느낌이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환희이면서 공포였다. 이듬해엔 여우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93∼95년 세 차례에 걸쳐 지리산과 경남 해안의 야산에서 그는 여우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했다. 수달 멧돼지 살쾡이 하늘다람쥐 너구리 오소리…. 모두 그가 숲 속에서 마주친 동물들이다. “산에서 동물과 마주치면 무척 흥분되지요. 그 감정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밤에 만나면 불빛을 비추면서 관찰하는데, 동물도 움직이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곤 한다. 동물쪽에서 보면, 자기가 사는 곳에 이상한 ‘동물’이 나타나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니 궁금할 수밖에 없다. 한동안 서로를 주시하고 있다보면 누가 누구를 관찰하는 건지 모를 순간이 온다. 한 동물학자가 현장조사를 하면서 유난히 다람쥐가 많이 관찰돼 의아하게 여겼다가 나중에 사진을 분석해보니 모두 같은 다람쥐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람쥐가 그 학자를 줄곧 따라다니며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박사도 수달한테 한번 당한 적이 있다. 물 속에만 들어가 있으면 대담해지는 수달이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방향으로 바싹 다가와 요리조리 살펴보다 들킨 것이다. 어쩌면 그게 정상인지도 모른다. 한 박사는 “산은 사람이 손님으로서 찾아가는 곳”이라고 말한다. 산에서는 동물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생활해야 하고, 왔다간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주인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더구나 학자는 동물의 일상 가장 깊숙한 곳까지 접근하는 침입자인 만큼 동물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잊으면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억새밭을 헤치고 들어가 새둥지를 찾아 관찰한 뒤 그냥 돌아나오면 쥐나 족제비가 그 길을 따라 들어가 알을 훔쳐먹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되도록 동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산에서는 식사를 줄인다. 산과 가까운 집에서 민박을 하면서 한끼 식사와 간식만 싸들고 올라가 하루를 지낸다. 산에서 밤을 지내야 할 때도 텐트를 치지 않고 슬리핑 백 속에서 노숙을 한다. 지나가는 동물이 그를 뭐로 여길까. 이런 생활이 몸에 밴 그이지만, 사람들과 사는 시간을 더 늘리지 못해 안타까운 이유가 하나 있다. 아들 성민(5)이다. 아버지와 떨어져 있기가 싫은지 집을 나서는 한 박사의 다리에 매달리곤 한다. 그래도 부전자전이다. 생물도감에 나오는 동물 이름을 귀신같이 꿰고 있다. 유치원에서는 아버지처럼 동물박사다. 한 박사는 성민이에게서 유년기의 자신을 본다. 5살 때, 낚시를 좋아하던 아버지를 처음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늘 버스를 타고 가서도 1∼2시간 산길이나 바닷가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에 낚싯대를 드리웠다. 때론 벼랑도 타고 내려갔다. 이 무렵부터 그의 내면에 자연이 커다란 터를 닦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반복되는 강행군이 초등학교 3∼4학년까지 이어지면서 저절로 체력이 단련됐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릴 때 그에게 산삼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쨌든 야생동물 연구자에게 필수적인 체력이 갖춰진 것이다. 부산에서 자란 그는 낙동강가에 가 동물을 관찰하는 취미가 생겼다. 고등학교 시절 생물반과 사진반 활동을 하며 한걸음 더 동물에게 다가간 그는 조류학자인 원병오 교수를 찾아 경희대 생물학과에 진학했다. 이미 그의 주된 관심사는 네발 달린 동물이었지만, 당시 포유류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교수는 없었다. 일본유학을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600여명의 회원을 거느린 포유동물학회와 10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연구소들이 있는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통해 우리나라 동물에 대한 자료도 풍부히 모아놓고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 떠난 지 13년 만인 지난 97년 홋카이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얻어 돌아왔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두는 분야는 ‘계통진화학’이라는 낯선 이름의 학문이다. 최초의 동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한반도에 흘러 들어왔는지, 어떻게 한반도 전역으로 퍼졌고 오늘날까지 살아오고 있는지, 그동안 생물의 종이 분화하고 진화하고 사멸한 과정은 어땠는지, 앞으로 이 땅의 생태계는 어떻게 변화할지 등이 그가 답해야 할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사람도 지구상에 명멸했던 숱한 생물 종 가운데 하나라는 전제 아래 더욱 근본적인 곳으로 향한다. “가장 큰 관심은 나란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게 됐느냐는 거죠. 나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전에 생물이 다양하게 분화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그걸 추적해서 답을 얻으려는 거죠. 나는 누구인가.” 동물을 통해 ‘나’를 보려는 한 박사의 연구는 당연히 한반도에 집중된다. 유학생활중에도 한해에 4∼5차례씩 국내에 돌아와 현장조사를 했다. 자기 나라 동물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아니면 할 사람도 없었다. 지금도 외국에 나가 연구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호랑이가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던 우리나라 환경이 걷잡을 수 없이 병들고 있는 점도 그의 마음을 바쁘게 한다. 귀국한 뒤 환경부 생태조사단에서 일하다 지난 4월 그만두고 환경운동에 무게를 싣기 시작했다. 서울대와 경희대에 출강하고 현장조사도 계속해야 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환경단체들의 동강 지키기에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도 무지에서 비롯되는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우리도 세계적으로 가치있는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 어떤 싸움도 마다 않을 생각이다. “나는 늑대 같은 인간” “동물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동물들이 살아가는 순수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동물의 순수한 모습, 그들 사이의 투쟁, 쟁탈전, 암수간의 행위, 가족간의 유대, 무리 속의 행동 등을 보면 인간사를 보는 듯하다고 한다. 인간이란 생물이 먼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시간의 거울 같기도 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의 고향 같기도 한 게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짓궂은 버릇이 생긴 것도 그래서일까. 남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은 너구리 같고, 동작이 민첩한 사람은 족제비처럼 보인다. 70살이 가까운 일본의 스승은 걸음걸이가 자신의 주된 연구대상인 쥐를 닮았다. 그렇다면 그 자신은? “늑대 같은 인간”이라고 한다. 유난히 빛나는 그의 눈빛을 깊은 산중에서 만난다면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마녀의 손, 마술의 손 크고 작은 여성문화행사들이 그의 손에서 ‘수리수리 마수리’ (사진/99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9월4∼27일 예술의전당 미술관) 개막행사 열림굿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이혜경씨. “이름없이 사라진 이씨, 김씨, 설씨 선배 여성화가들이여. 부디 5년 안에 여성문화예술기획이 맘놓고 일할 수 있는 집 한채 얻게 해주소.”) 여성문화운동가 이혜경 그가 손을 대면 요술처럼 문화행사 하나가 뚝딱 태어난다. 영화건 연극이건 미술이건 음악이건, 그가 맘먹으면 돈이 없어도 사람이 모자라도 걸쭉한 판이 벌어지고 시끌한 축제가 늴리리를 분다. 그가 모시는 주인공들 또한 남다르다. 상차리고 설거지하느라 정작 잔칫날엔 뒷전이던 여성이 무대며 객석 앞줄을 떡 하니 차지한다. 97년과 99년에 열렸던 여성영화제, 여성연극 자기만의 방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요네즈 , 이 땅에 사는 여성미술인들이 우르르 모인 ‘99여성미술제-팥쥐들의 행진’,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문화제들, 그리고 크고작은 여성문화 행사들을 그는 ‘수리수리 마수리’ 마녀처럼 만들어왔다. 그가 97년에 열었던 여성문화운동 전용 공간 이름이 ‘마녀’였던 것은 뜻이 깊었다. ‘노는 애’로 한가락했던 추억 “그때 마녀 집단이라고 스스로 나섰던 건 즉흥에서 발동한 끼가 아니었어요. 미치지 않으면 제대로 놀 수도 볼 수도 없는 이 시대 여성들을 대표해 도발했던 거죠. 마녀처럼 짓궂게 놀아보겠다는 비장한 선언이랄까요.” 여성문화운동가 이혜경(46·여성문화예술기획 대표)씨는 “잘 놀자”를 사는 법으로 삼아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했다. 밥먹고 똥싸는 것도 놀이하듯 즐겼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감감 무소식이어서 가끔 형제들을 골탕먹였는데 벽하고 얘기하느라고 시간가는 줄 몰랐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두런두런 혼잣말로 떠들어야 직성이 풀릴 정도였고 애들 모아놓고 연극놀이 벌이는 대장으로 유명했다. 초등학교 때 오락반장과 독서반장을 휩쓸며 ‘노는 애’로 한가락했던 추억은 지금도 가끔 그가 너무 지쳐서 주저앉았을 때, 그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 “육남매 중 넷째, 가운데 도막이어서 부모 간섭없이 홀로 노는 법을 일찌감치 깨쳤어요. 일곱살 무렵엔 소아마비 치료와 요양을 위해 동래온천에 자주 갔는데 그 무렵 체험이 자연과 여행을 좋아하는 제 성품을 만들어줬습니다. 예술을 즐길 줄 알았던 아버지, 교회 반사였던 어머니 덕에 집엔 늘 음악이 흐르고 화집이 널려 있었죠. 할아버지가 목사였던 기독교 집안이어서 사람들이 들끓었는데 가난과 고통을 지고 왔던 신도들이 가고 나면 우리는 다시 토론을 벌이고 춤추는 즐거운 가족으로 돌아가곤 했어요. 밥 한끼를 먹어도 예술처럼 했으니까요. 이렇게 낮과 밤이 다른 갈등, 없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예술 전반을 생활처럼 익힌 내 몸이 느낀 부조화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나를 형성한 원동력이 됐죠.” 일찌감치 ‘노는 세계’에 매혹됐던 그는 어른들이 사는 그 부조리한 세계에 가고 싶지 않아서 계속 그 ‘환상과 유희의 세계’에 남고자 하는 일념으로 열심히 놀았다. 나이가 들면서 또 한가지 부조리함이 그를 억눌렀다. 중학교에 올라가 교복을 입자 여자애들은 얌전해져야했고 남자애들은 씩씩하고 용감해져야했다. 놀기를 좋아하던 소녀는 남녀 사이에 그어진 그 뛰어넘기 힘든 벽을 책읽기와 짧은 여행으로 돌아갔다. 실존주의 소설을 파고들었고 근교로 나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정작 현실이 시작된 건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였어요. 너랑 잘 맞을 거라며 주변에서 권한 대로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했는데 갓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교수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들만 해대서 70년대 초 가뜩이나 우울했던 우리를 더 슬프게 했죠.” 산과 바위를 타며 학교 바깥으로 떠돌던 그가 다시 놀이를 찾은 것은 문리대 연극반에서였다. 김민기가 연출한 금관의 예수 를 보고 탈춤을 배우면서 그는 제 몸 속에서 저항정신과 감성이 만나 터져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외부 연출자를 데려오던 전통을 깨고 ‘우리 손으로, 우리 창작극을’이란 선언을 한 것이 그가 연극반장을 지냈던 73년이었다. 연극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현실은 그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갔다. “크리스찬아카데미 대화모임 간사로 일하다가 우연히 독일 유학을 가게 됐어요. 베를린자유대학 사회학과에서 ‘한국 가면극에 나타난 갈등구조’로 예술사회학 석사를 했지만 학위를 딴 것보다 더 소중한 걸 배웠죠. 밤마다 보러다니던 연극·영화들, 내 피를 끓게 했던 그 속에서 전 ‘아 난 평생 이걸 하고 살아야겠구나’ 느꼈습니다. 또 하나, 더 귀했던 건 간호사로 독일에 갔던 교포 여성들과 만든 연극 공장의 불빛 이었어요. 이른바 운동을 한다는 진보적 남자들이 도저히 깨지 못하는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제에 너무 화가 난 저는 우리 미래에 대한 힘과 희망을 여성들에게서 찾아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죠.” 85년 귀국한 그 앞에 우선 떨어진 임무는 민우회를 만든 이미경 선배(현 국회의원)가 맡긴 문화분과였다. 예산 한푼 없이 며칠 내로 뚝딱 목적성 행사 하나를 만들어내야하는 현실 속에서 그는 “이건 자위밖에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전문성과 프로 근성을 갖춘 문화 일꾼과 문화프로그램이었어요. 뻔한 활동가들을 위한 뻔한 행사를 벌이는 게 밑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고단하고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91년께부터 준비를 하고 여성문화예술기획을 만들었죠. 일을 피해가지 못하는 것, 잘 놀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건 제 숙명인가봐요.” 지난 7년여 여성문화운동 전문집단을 꾸리며 마녀로 살아온 그에게 남은 건 이 운동이 정말 중요하다는 철석 같은 믿음이다. 여성주의적 자각이 문화와 만나 일구는 생산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는 80년대식 동지애로 뭉친 수많은 여성문화 전문가들과 인연을 맺었다. 여성 정체성 뚜렷한 문화운동가들 기대 “자기 정체성을 뚜렷하게 내세우고 전문성을 갖춘 여성문화운동가들이 더 많이 나와야할 시점입니다. 영화면 영화, 미술이면 미술, 분야별로 뛰는 이는 많은데 이걸 여성학적 시각으로 묶어줄 사람은 드물어요. 그래서 교통이 편리한 대학로나 인사동쯤에 하루빨리 복합문화공간을 하나 마련해야겠다고 마음먹곤 합니다. 거기서 좋은 예술을 생산하고 새로운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여성이 문화주체로 가는 행사를 기획하고 싶습니다. 거기 모두들 모여 함께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는 “함께 가며 함께 놀자”고 부추겼다. “깊이 빠져서 진지하게 놀다보면 사는 게 뭔지 좀 보이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근데 정말 제가 잘 놀고 있는 거예요?”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불꺼진 망막에 건반이 타오른다 장애의 핸디캡을 극복한 두배의 연습시간… 음악을 가르치며 점자 악보 보급하고파 (사진/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황선경씨)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피아노의 높은 음계 건반을 가볍게 두드리는 듯한, 탕탕 튀어오르는 목소리가 트레몰로 주법으로 울려왔다. 아직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편견 탓일까. 미안하게도, 그 활달한 목소리가 그의 언니나 동생의 것쯤으로 여겨졌다. 대전에 있는 집으로 찾아갔을 때, 황선경(28)씨는 드뷔시의 기쁨의 섬 을 연주해줬다. 건반 위를 쉴 새 없이 내달리는 그의 손가락도 가벼웠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쉬운 곡은 아니었다. 그동안 건반 위에 떨어졌을 숱한 땀방울이 느껴졌다. 피아노 위에 놓인 악보는 암호 같은 점들만 도드라져 있는 하얀 종이였다. 그는 새로운 곡을 익힐 때 악보를 보면서 연습할 수 없다. 그의 손가락은 건반 위로 가기 전에 점자 악보를 더듬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악보를 미리 읽어 외운 뒤 실제 연주를 하기 때문에 악보를 눈으로 파악하는 이들보다 두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핸디캡을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연습시간을 두배로 늘리는 것이다. “너 진짜 안 보이니?” 하루에 보통 8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 있어도 싫증을 느낀 적이 없다. 행복할 뿐이다. 피아노를 쳐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노력에 극심한 체력 소모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음악은 일찍이 어두워진 그의 망막 위에 세상의 빛을 다시 수놓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유치원 때 옆집에 살던 언니한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황씨는 이미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받은 백내장 수술이 실패했던 것이다. 사람은 눈이 두개지만 원래 한쪽 눈만 사용하게 돼 있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자신의 고통을 알았다. 나머지 한쪽 눈도 시력이 나빠져 두터운 안경을 쓰고 다니면서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대전 맹학교로 전학해 새로운 친구들과 아픔을 나누며 차츰 자신감을 찾아갔지만, 어느덧 오른쪽 눈의 망막에도 이상이 왔다. 8번의 수술도 허사였다. 17살의 늦가을, 세상은 암전됐다. 그러나 그는 웃었다. 더이상 볼 수 없다는 말을 전하는 부모님께 괜찮다고 미소를 보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울었다. 낮에는 잠자고 밤에 일어났다. ‘지금은 밤이라 보이지 않는 거야’ 생각했다. 지금도 그는 항상 웃는다. 피아노의 높은 음계 건반을 두드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는다. 길가다 함께 가는 친구가 “사람들이 쳐다본다”고 귀띔해도 “보는 사람들이 죄지 내가 실명한 게 죄냐? 이러니까 우리나라가 잘 안 되는 거야”라며 웃는다. 그 낙천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황씨는 자신이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예 잊고 살아간다. 누구나 똑같은 사회의 일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친구나 가족이 눈앞의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면 저도 모르게 그것을 자기 눈앞으로 끌어다댈 때도 있다. 100m를 18초에 달릴 수도 있다. 아버지는 가끔 묻는다. “너 진짜 안 보이니?” 세상이 어두워졌을 때 그는 “보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불편은 있다. 이를테면,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많이 기억해야 한다. 불 켜진 방을 나설 때 자연스레 스위치에 손이 가는 비장애인들과 달리 방에 불을 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방 안의 구조도, 동네 길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불편만 견디면 살아갈 수 있다. 그는 이른바 ‘일반학교’인 한성신학대 종교음악과를 다녔다. 시외에 있는 학교까지 스쿨버스를 타고 무사히 통학했고, 학교에서도 친구들의 작은 배려만 있으면 어디든 다닐 수 있었다. 평균 학점은 A. 2월17일 졸업식에서는 학생 대표로 상을 받는다. 그동안 장애인예술제든, 학생음악경연대회든 가리지 않고 출전해 여러 차례 1등을 차지했다. 지도교수인 김순배 교수는 “다른 학생들보다 정신력에서 몇십배 강하고 소리에 대한 집중력과 감각도 뛰어나다”며 “일주일에 한번씩 있는 개인 연주시간에는 동료들에게 감동을 주고 각자를 돌아보게 만든다”고 전한다. 그의 얼굴을 그늘지게 만드는 건 자신도 떨어내버린 절망을 여전히 움켜쥐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염세주의다. 맹학교를 졸업하고 몇 군데 대학에 입학원서를 냈을 때 그걸 절실히 느꼈다. “점자 시험을 따로 준비할 수 없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준비돼 있지 않다”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있겠느냐” “다른 학생들은 그냥 돌아갔다”…. 온갖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원서가 반려됐다. 이미 한성신학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받은 뒤에도 편견은 계속됐다. 청주대 음악교육과에 편입학하려던 그는 원서접수가 거부되자 학교당국을 검찰에 고발하는 강경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혼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들이 입학원서를 들고 ‘받아줄까’라는 걱정부터 해야 하는 현실을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교육과에 들어가고 싶었다. 시각장애인 후배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아직까지 외국에서 구해야 하는 점자 악보를 국내에도 널리 보급하고픈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장애마저 감사하게 받아들일 자세다. 자기 삶의 몫을 기뻐할 것이다. ‘3일간의 풍경보기’보다 외국 유학을 우여곡절 끝에 2월14일 청주대로부터 편입학을 허가한다는 소식이 왔다. 그는 꿈에 다가갈 수 있게 됐다. 기쁨의 섬 은 졸업작품으로 연주한 곡이다. 이상향을 향해 출발하려는 사람들의 심정, 그 설렘을 담아낸 곡이다. 한곳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그의 눈은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 그것을 뛰어넘은 꿈의 세계를 한꺼번에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에 비하면 무언가 보고 싶다는 것은 부차적인 꿈이다. 부모님 얼굴, 형제와 친구의 얼굴, 집안 모습 등 보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고,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자연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한 사흘쯤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안 보이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든다. 보였다 다시 안 보이게 되는 건 더 힘든 일이니까. 그가 자기 삶에 찾아오기를 바라는 행운은 3일간의 풍경보기보다 외국 유학이다. 사랑하는 음악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 싶어한다. 그는 “장애인을 대표해서 음악공부를 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가족과 떨어져 외국 생활을 하는 것도 두렵지 않다. “경제적으로 도와줄 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사에 꼭 써주세요”라며 다시 웃는다.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못생겼는데 어떡하지?” 잠시 빼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나요?”하며 포즈를 취한다. 또 웃음이 난다.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맛깔스런 요리, 칼같은 말씀 딸과 함께 쓴 사위에게 주는 요리책 엔 폭탄선언이… 그는 한때 딸이었고 아내이자 며느리였으며 엄마를 거쳐 장모가 되었다. 이제는 할머니와 시어머니가 될 참이다. 육십여 평생 그가 지녔던 이 이름들은 평범한 여자의 일생이 마련해놓은 정규 시간표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온전하게 그 자신 이름으로 걸어온 길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너무 갈급해서’ 시작한 늦깎이 공부 “60년대 초 대학 졸업하고 공부를 더할까, 직업을 가질까 고민할 새도 없이 아버지 명으로 결혼을 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내가 참 안이했다 싶은데 결혼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당시엔 부친 뜻을 거스를 만큼 용기도 없었고. 신랑이 독일로 유학간다고 해서 나도 같이 공부할 수 있겠구나, 속으로 신이 났지만 큰애를 낳아서 기르는 동안 남편 혼자 다녀와서 그 꿈도 깨지고 말았죠. 신혼 초엔 참 많이 싸웠어요. 당신하고 나하고 동등한데 왜 나만 집에 처박혀 만날 똑같은 가사노동에 손 마를 날이 없느냐, 따졌죠. 근데 하루이틀 달이 가고 해가 넘어가면서 뒤죽박죽 생활에 시달리느라 내가 사라지는 거예요. 이러단 내가 죽겠구나 싶었죠.” 박형옥(62)씨는 자신을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자기처럼 얼결에 주부나 아줌마로 나앉아 불만 속에 살아가는 여성들을 위해 언제든 팔 걷어붙이고 나서겠다는 각오가 서 있었다. 82년부터 여성의 전화에서 상담원으로 일했고, 나이 쉰에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한 그가 전하는 말들은 인생 선배로서 뼈아프게 겪은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남편은 사회에서 날로 번듯해지는데 집 지키고 뒤치다꺼리하는 난 뭐냐, 잠이 안 왔어요. 그때 교회에서 자원봉사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고, 그걸 살려 여성의 전화 초기에 매맞는 여자들과 집나온 아내들을 상담하는 일을 했어요. 난 그때까지 여성들이 그렇게 고통받고 아픔당하는지 몰랐어요. 세상에 제 아내와 자식들을 개 패듯 패는 놈들이 있다니…. 상당하러 온 사람들과 한마음이 돼 울고 분노하면서 마음만으론 안 되겠다 싶어서 여성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도대체 왜 그럴까, 너무 갈급해서” 달려간 학교에서 그는 한밤중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행복을 맛보며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여성학이 이론에만 매달려 있는 걸 보고 자신이 일하던 여성의 전화 현장과 연구자들을 연결시켜주는 다리 구실도 했다. “공부는 늙어서 해도 좋더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먹은 여자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은 때, 바로 그때를 놓치지 말고 시작하라”고 후배들에게 충고했다. “여성학 공부할 때, 성폭력상담소 만들 때, 내 며느리나 딸뻘 되는 동료들을 집에 불러 밥을 해먹이면 그렇게 좋았어요. 내가 원래 사람들 좋아하고 손님치기를 즐겼지만 동지 입장에 있는 여자들과 맛있는 거 나눠먹으면 그렇게 용기 백배하고 죽이 잘 맞았지요. 마치 기름바른 듯 일도 일사천리로 돌아가고 다들 행복해하고.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이 바로 여성운동 하는 에너지가 돼 흘러나오는 것 같았으니까.” 여성학 하는 사람치고 박형옥씨네 밥 한번 안 먹어본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나고 그 못지 않게 똑 떨어진 말솜씨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그 맛깔스런 요리와 칼같은 얘기를 엮어 책으로 묶어내자고들 성화였다. 딸 박이은경과 함께 쓴 사위에게 주는 요리책 (이프 펴냄)은 그런 여성 사랑이 듬뿍 우러나는 요리책 아닌 요리책이다. 딸과 친정엄마가 주거니받거니 나눈 글 사이사이에 코다리명태구이니 강된장이니 배숙 같은 음식 만들기 요령이 끼어 있긴 하지만, 그건 본문을 위해 덧놓은 고명이랄 수 있다. 가령 박씨가 “명절을 비롯한 시댁행사가 공포스럽기만한 여성들을 위해” 소개한 탕평채, 오향장육 소개 앞에는 명절 치레를 하느라 병이 날 지경인 딸에게 보내는 폭탄선언이 적혀 있다. “이제는 병원에 입원한다는 소극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명절이나 생신 때도 다시는 시집에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말하라. 오히려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나 둘의 가정과 서로에 대해 나누어야 할 생각들을 함께 하는 기회를 가져라.” 친정엄마가 딸에게 명절에 시집에서 일하는 대신 여행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 이건 적어도 이 땅에선 아직 혁명에 버금가는 발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박에 정말 과격한 친정엄마야, 별난 장모야, 욕하실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전 거짓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썼어요. 내 딸에게뿐만 아니라 이 나라 모든 친정엄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위와 아들들이 다 들었으면 하고 쓴 거예요. 왜 감추고, 응어리져 살까요. 참고 미룬다고 언제 그 속타는 마음을 알아줄까요. 문제가 있으면 바로 터뜨리고 싸우세요. 사람이 안 싸우고 어떻게 천사처럼 살아요. 여성이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그것도 가족구조 안에서 여성 인권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난 이 나라가 백년 가야 발전이 없을 거라고 봅니다.” 모녀 3대가 대물림으로 벌이는 '싸움' 그는 결혼 전 예비사위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난 자네가 내 딸을 여성이나 아내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대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네. 내가 내 딸을 이제까지 그렇게 키워왔으니까.” “돌이켜보면 내가 오늘 이렇게 당찬 말을 쏟아놓을 수 있는 뿌리가 내 친정어머니로부터 흘러내린 듯해요. 모친은 일제시대에 일본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이었는데 날 대학 안 보내겠다는 부친 앞에서 그럼 가출해버리겠다고 농성을 하셨어요. 친정엄마, 나, 내 딸로 이어내리는 모녀 3대가 대물림으로 벌인 싸움이 오늘에 와서 이만큼이나마 결실을 맺는거구나 짐작하지요. 여성의 적은 어쩌면 남성이 아니라 여성들 자신일지 몰라요. 명절 문제만 해도 그래요. 명절만 돌아오면 이구동성으로 명절엔 어디로 도망가고 싶다, 명절이 다 없어져야 여성해방이 온다는 과격한 말까지 하면서 정작 명절 일로 서로를 얽매는 게 또한 여성들 자신들이 아닌가 돌아볼 일이에요. 왜 힘을 합쳐 부조리한 명절 풍습을 고치기 위해 싸우지 않나요.” 그는 요즈음 생을 잘 마무리짓기 위한 정리를 하고 있다.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같은 모임에 나가거나 여성학 전공자들 만남에 가끔 얼굴을 내미는 외에는 차분하게 제 속을 곰곰 들여다보며 그를 설레게 만드는 여행 떠날 준비를 한다. 남매를 다 키운 뒤 아이들 배웅을 받으며 홀로 떠났던 유럽과 미국 배낭여행에서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이 60을 넘기니 이젠 주변 사람들에게 오히려 거치적거리는 것 같애. 이젠 내가 늘 꿈꾸는 여행을 하다가 어디든 풍광 좋은 자연 속에 묻혀도 좋지 않을까.” 사진 강창광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삶과 죽음의 경계선으로 출동한다 공포를 느끼는 본능까지 반납한 소방사, 그가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이유 (사진/119구조대 반장 허찬만씨) 인천 호프집 화재 현장에 출동했던 구조대원들은 또 하나의 끔찍한 그림을 기억의 창고에 들여놓았을 것이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주검들, 몇십명씩 뒤엉켜 있던 아이들의 팔과 다리, 숨을 조여오는 유독가스를 막으려 얼굴을 가린 티셔츠들…. 구조대원들은 자비심 없이 흘러가버린 그 몇분의 시간을 원망하며, 자신의 손길이 건져내지 못한 생명들의 마지막 표정을 오래 잊지 못한다. 금기 “삼풍백화점 구조 순간의 회상” 서울 종로소방서 119구조대 허찬만(38) 반장도 그렇다. 아무리 잊으려 애를 써도 어제일처럼 또렷하기만 한 기억이 있다. 조각난 몸뚱아리들과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 주검들이 널린 암흑 속에서 귀를 째고 들어오던 갸날픈 음성, “제발 버리고 가지 마세요.” 그 소리에 끌려 철수명령도 어기고 구조작업을 강행했던 95년 여름의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 하루 만에 체력이 소진해 다음날 링거주사를 맞고 또 현장으로 향하던 그때. 한달 만에 집에 들어가면서 몸에 밴 냄새를 씻기 위해 몇 군데의 목욕탕을 들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좀 말할 수 있겠네요. 사실 그뒤로 한번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구조대원들 사이에서도 금기사항처럼 돼 있어요. 기억하기가 싫으니까…. ‘우리한테 95년 7월은 없다’고들 하지요.” 지금도 먼 곳에서 일어난 사고 소식을 들을 때나 출동지령이 떨어질 때나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현장에 있을 사람들의 고통이다. 이 정도 사고면 몇 사람이 다치고 몇 사람이 죽고 몇 사람이 아직 신음하고 있겠다는 게 눈에 보인다. 시범을 보고 군 장성들도 혀를 내둘렀다는 ‘15초 만의 출동’도 그에게는 자랑거리가 아니다. 불길에 휩싸인 건물을 구경하는 심정이야 호기심과 측은지심을 적당히 뒤섞어놓은 것이겠지만, 그곳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허 반장은 “공포심 같은 건 느낄 겨를이 없다”고 한다. 본능처럼 뛰어들 뿐이다. 일을 끝낸 뒤에야 ‘내가 어떻게 저런 일을 했나’ 싶다. 그땐 무섭다. 90년대 초 한 아파트 화재현장. 옥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에어컨 구멍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씌워주고 줄에 매달아 끌어올렸다. 그 사이 허 반장은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구조가 끝나고 그를 올려줄 줄이 내려오길 기다리는 동안 그는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위험은 곧 생활이다. 보통 사람이 위험하다고 여기는 게 그에겐 기본이다. 특전사에서 5년, 구조대에서 11년을 지낸 그가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이미 보통 사람의 판단으로는 가망없는 상황이다. (사진/허찬만 반장과 동료들. 위험한 상황에 함께 뛰어드는 소방관들의 관계는 형제이 상으로 끈끈하다) 마지막 구조기구는 본능 600평의 지하 3층 공간에서 공사도중 불이 났다. 곳곳에 건축 자재만 어지럽게 쌓여 있을 뿐 방향을 읽을 만한 구조물은 전혀 없다. 더구나 짙은 연기가 모든 빛을 삼켜버렸다. 불을 끄던 소방관 2명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구조하러 들어간 허 반장도 방향감각을 잃었다. 남은 산소는 10분치. ‘위험’했다. 허 반장은 가만히 바닥에 엎드렸다. 이제 그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감각기관은 귀. 목숨을 걸고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실오라기 같은 발자국 소리가 잡혔고, 바깥에 있는 대원들의 말 소리로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듯 출동 현장은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그 선상에 서는 사람은 ‘요구조자’(要救助者)일 수도, 구조자인 대원들일 수도, 허 반장 자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매우 모호하다. 자욱한 연기에 가려, 과연 어느 쪽에 더 들어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게 명확해지는 건 순간이다. 허 반장은 삶과 죽음의 정의마저 “순간이죠”라고 말한다. 대원들이 부상을 무릅쓰고 숨이 멎은 사람을 구조해 인공호흡으로 살려냈는데 병원으로 실려가는 길에 숨지기도 한다. 바로 옆에서 구조작업을 하던 동료가 돌아보면 없는 때도 있다. 다치고 깔리고 묻히고…. 그래서 미리 죽음을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에너지를 차라리 지금의 순간, 삶과 죽음이 판가름나는 ‘순간’에 쏟아붓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그런 뚝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허 반장이 4년 만에 풀어놓은 삼풍 사고의 기억 속에는 최명석이란 이름이 있다. 매몰된 지 230여시간 만에 구조된 기적의 생명. 그를 지하에서 끌어올린 게 허 반장이었다. 목만 겨우 들이밀 정도의 구멍을 뚫고 최씨와 처음 대면했을 때, 목줄기를 묵지근하게 만들던 감정의 덩어리를 뭐라 설명하기 힘들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대원들이 희망을 가지게 해줬으니까. 그는 최씨를 구해내면서 주위의 썩은 주검이 얼굴에 와닿건 말건 신명이 났다. 지난 88년 119구조대 창설과 동시에 구조대원이 된 날이 특전사 제대하던 날이었다는 허 반장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익힌 온갖 기술이 사람을 살리는 데 그대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특전사에서 익힌 고공강하나 스쿠버는 기본이고 암벽타기, 지진·방사능 대비, 가스·전기·화학·기계에 관한 지식 습득 등 오히려 훈련은 더 세졌다. 외국인이나 장애인을 구조할 때를 대비해 외국어·수화도 배우고 심지어 애완동물 구조요청이 부쩍 많아지면서 각 동물의 특이한 성질까지 외우고 있다. “전생에 죄가 많아 그걸 갚느라 구조대에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생명을 구한다는 게 평생 한번 하기도 힘든 일인데, 그게 직업이잖아요. 얼마나 복받은 겁니까?” 이젠 구조대 일이 천직이라기보다 생활이라고 말한다. 월급을 받는다는 게 생소할 때도 있다. 위험수당 2만원짜리 삶이 책임감이라든가 보람이라는 말로 버텨지는 건 아니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것 없이는 힘들다. 목숨을 구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사망진단은 의사가 하는 것”이라며 위험을 자처하고 구조에 나서기는 힘들다. “삼풍 사고 때 대원들이 뼛조각 하나하나, 흩어진 시신 하나하나 주워담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산 속에서 20년 수도한 스님이, 목사가, 신부가 한달 동안 썩어 냄새나는 뼛조각을 저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주워담을 수 있겠나…. 우리는 정말 불쌍한 마음에서, 가족을 생각해서, 희생자들 생각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 순간을 산다 ‘헤헤’도 아니고 ‘히히’도 아닌 퍽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는 그는 인생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열심히 사는 거죠”라고 말한다. 군대생활 힘들게 했고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 특유의 그 대답. 하지만 비번날이면 전통무예 수련에 몰두하고 성경에서 불경, 코란, 우파니샤드까지 공부한다는 허 반장은 도를 닦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적어도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는 제복차림의 그가 도인으로 보이나 보다. 아들은 학교에 내는 설문지에 이렇게 적는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 우리 아빠 종교: 우리 아빠.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미술관의 벽을 부숴라 거리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예술과 인생의 의미… 제도권 대신 가난한 자유가 좋다 (사진/아트 피디 임옥상) 그는 사연 많은 과부마냥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둡시다” 했다. “날 자꾸 옛날 전력을 걸어서 얘기하지 말고 지금 내가 뭘 생각하는지, 어떤 비전을 가지고 걸어가고 있는지, 그걸 좀 봐주세요” 부탁했다. 얼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나이건만 정색하곤 “지금 내가 움직여가는 것, 그게 바로 나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흔히 그 이름 석자 앞에 붙었던 화가 대신에 아트 피디라 불러달라는 속내를 털어놓으며 “난 지금 삶과 예술의 중심을 옮기고 있어요. 거기서 미술이 뭐냐, 인생이 뭐냐는 답을 구할 작정이요”라고 했다. 이제는 아트 피디가 된 화가 임옥상(49)씨는 80년대 화단에서 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민중미술 1세대였다. 또래 그룹이었던 ‘현실과 발언’ 동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잘 나갔던 그는 전시를 열었다 하면 늘 화제였고, 상업화랑과도 호흡을 맞출 줄 아는 현실파였으며, 일찌감치 대학에 교수로 자리도 잡았던, 행운을 몰고 다니던 사나이였다. 50m에 달하는 ‘아프리카 현대사’를 발표해 전시장이 장사진을 이루거나, 호암갤러리가 사십 갓 넘은 그를 초대해 전시회를 열어주는 사건의 연속 속에서 그는 늘 숨가빠 보였고 앞으로 내달릴 채비만 차리는 속도경주 선수 같았다. 그러던 그가 그건 다 옛일로 하자고,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봐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갯벌과 지뢰, 그리고 예술가의 숙명 “‘현실과 발언’ 활동을 하며 우리 미술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찾아냈는데 그때는 독재 권력에 맞붙어 싸우느라 이것저것 돌아볼 여유가 없었어요. 말로만 떠들고 관념으로만 짚은 척, 실천을 못한 거지. 90년대 들어서면서는 엉거주춤 감을 못 잡겠드라고. 도저히 그렇게는 살 수 없어 전주대학 교수 자리를 내놓고 밀도있는 전업작가가 되려고 뉴욕 갈 준비를 했어요. 세계 화단으로 뛰자는 생각이었죠. 우리가 언제까지 서구 미술 수입국만 할 건가, 한번 수출국으로 만들어보자.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는지.” 세계 화단이란델 나가보니 작품 질과 별개로 유통 시스템이 움직이고 있었고 유색인종은 원천적으로 그 시장에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돼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란 그물망 속에 철저하게 편입돼 있는 세계 미술시장 실상을 보고 진저리를 쳤고, 그 먹이사슬엔 제 몫이 없음을 알아챘다. 사방이 어두웠고 그는 흔들렸다.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근데 이제는 두루 다 잘 보이는 거예요. 오십줄로 접어드는데, 제일 농익은 시절이라는데, 난 지금 뭘 하구 있나. 화실에 들어앉아 있는 건 대중으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되는 것 아닐까, 미술 역시도 소외시키는 거고. 결국 전시장이란 게 감옥이고 액자는 족쇄 아닌가. 그걸 팔아 밥을 먹는다는 것, 제도권이 죄다 여기에 매달려 있는데 나도 이 지점에서 이렇게 한통속으로 뭉개져야 하는가. 캔버스에 붓으로 그리는 것만 그림일까… 꼬리를 무는 질문을 좇아 집도 절도 없이 떠돌고 있어요.” 평창동 언덕배기 임옥상미술연구소에서 만난 그는 “좀더 가난한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돈 되는 일을 버리고 속 편하게 제자들과 찬없는 밥을 해먹으며 살고 있었다. “건강에 자신없으면 이런 일 못하지”란 자신만만한 몸 하나로 버티는 요즈음 그에겐 세상 모든 거리가 다 캔버스요, 천하 만물이 다 그림 도구다. 하다못해 질척질척 갯벌도 그가 걸어들어가 보듬어야 할 작품이다. 화가 시절부터 땅을 많이 그렸던 그가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고향을 찾아가는 일과도 같다. “갯벌살리기 문화예술인 모임을 만들고 새만금 갯벌 살리기 답사를 가거나 간척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게 내겐 그림을 그리는 일과 똑같아요. 내가 흙을 그리듯이 갯벌을 찾아가 땅이 건강하라고 몸짓으로 힘을 보태주는 거지요. 난 지뢰문제에도 관심이 많은데 지뢰만 생각하면 꼭 내 몸에 폭탄이 박혀 있는 것처럼 온몸이 아파요. 내년쯤 가질 전시회 주제는 자연스레 갯벌과 지뢰로 벌써 결정났어요.”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나 환경운동연합 같은 데 열심인 까닭을 그는 예술가 숙명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가 변했다면 누구보다 먼저 그 변화를 감지하고 변화 양상을 형상화해야 하는 게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난 6월20일부터 두어번 쉰 외엔 일요일마다 인사동 거리에서 꼬박꼬박 이어온 ‘임옥상의 당신도 예술가’는 이렇게 변해가는 한국사회에 “벽없는 미술관”을 일구려는 그 나름의 실천이다. 일요일이면 차없는 거리가 되는 인사동 길바닥에 큼지막한 판을 벌이고 오가는 이 모두에게 스스로 화가가 되어보는 기회를 주는 이 그림잔치는 열번을 넘기면서 단골 손님이 생길 만큼 지역 명물이 되었다. “처음엔 시건방지게 내가 그들에게 뭔가 주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너무 큰 걸 받아 은혜받은 느낌입니다. 숨쉬는 거리라는 매체가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캔버스인지…. 상상도 못했던 재료를 수도 없이 발견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은 만나며 삶이 지닌 다양한 결과 폭을 만지는 기쁨은 내게 미술이란 뭔가를 다시 돌아보게 해줬습니다.” "너 뭐하냐? 완전히 미쳤군!" 첫날 거리에 나섰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아는 선배가 지나다가 “너 뭐하냐. 얘가 완전히 미쳤군” 한마디 해준 게 유일한 참견이라면 참견이었다. ‘그래도 내가 임옥상인데…’ 했지만 아무도 알아봐주는 이가 없었고, 화랑에 가져다놓으면 ‘작품’이 되고 ‘거금’이 되는 사인된 스케치를 앞에 놓고 5천원이 팔고 있자니 귀걸이, 코걸이를 파는 여느 좌판쟁이 신세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스타 좋아하네, 까불지마라’ 말없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쓰린 속을 가다듬으며 “미술이 바로 요 위치에 있구나” 깨달았다. “판만 만들어주고 여러분도 그리세요, 했더니 쭈뼛쭈뼛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한번 달려들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거예요.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만지는 것 같은 문화 행위에 사람들이 얼마나 굶주려 있는가를 확실하게 알았어요. 차없는 거리가 늘어나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내가 휘두를 캔버스가 사방팔방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셈이죠. 꿈이 있다면 그런 거리미술이 서로 이동해 섞이고, 거리미술가들이 앞다퉈 거리를 작품으로 메워주는 거예요. 사람들 누구나가 모두 시간 날 때 거리로 나서 그림을 그린다면, 난 화가보다 아트 피디로 더 행복할 것 같아요. 개똥철학 같아요?”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친북교수' 대통령상 받다 30년 전 북한서도 공로메달 받은 동독출신 한글 유공자… 박경리 토지 번역중 한국학자 헬가 피히트 그는 늦은 점심상을 받고도 수저를 놓은 채 물잔으로만 손이 갔다.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는데 시장기를 못 느낀다고 했다. 너무 맵지만 않다면 뭐든 다 잘 먹고 좋아한다는 한국 음식도 그 순간엔 소용없었다. 도수 높은 안경 속에서 또랑또랑 빛나던 눈이 잠깐 붉어지면서 “이 혼란과 감동, 두 감정이 나를 복받치게 합네다” 입을 뗐다. 이날(10월9일) 오전, 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훈민정음 반포 오백쉰세돌 한글날 기념식에서 한글발전 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고온 길이었다. “혼란과 감동으로 복받칩네다” “베를린에서 수상 소식을 들은 건 10월7일 저녁 늦게였어요. 그날은 꼭 50년 전 지금은 사라진 동독이 창건된 날이었습니다. 기쁘면서도 슬픈 밤이었지요. 내 생애 80%쯤을 난 진짜 동독사람으로 살았어요. 우리 세대가 독일민주주의공화국을 세웠을 때는 자본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독일을 건설하겠다는 결심이 참 굳었드랬습니다. 우리들은 80년대 말까지 동독이 좋은가, 좋지 않은가 같은 질문을 제기 안 하고 열심히 일했고 또 붕괴될 때까지 한번도 우리나라가 없어진다는 생각을 안 했드랬어요. 없어진 조국 생각에 뭉클한 밤, 서울에서 상 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온 거예요. 나는 지난 6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20돌에 공로메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꼭 30년이 지나서 이번엔 한국에서도 상을 받게 됐습니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을 쓸 수밖에 없네요. 이 순간에 젊은 한국인들과 축배를 들게 돼 기쁨네다.” 술잔을 부딪치는 헬가 피히트(65)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1950년대 초부터 동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해 호네커 총비서 등 동독 고위대표단이 북한에 갈 때마다 통역관 일을 했던 조선통, 80년 일본에서 처음 남한 사람들을 만난 뒤 한국 문학에 눈돌려 현대소설과 철학사 등을 독일어로 옮긴 번역가. 한몸에 동서독과 남북한, 두 분단국가 역사를 아로새기고 있는 이 한국학자는 두 체제를 넘나들며 겪은 경험을 들려주고 싶어했다. 하나는 통일되고 하나는 아직 찢어진 채 남았기에 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것 같았다. 북한식 말투가 진한 그의 조선말은 또한 독일사람답게, 교수답게 딱딱할 만큼 정확하고 논리정연했다. “90년 8월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저에게 기자들이 밀려왔습니다. 통독되고 온 첫 동독 사람이면서 남북한을 다 알기에 관심들이 많았죠. 그때 기자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통일되니 좋은가. 서두르지 않았더라면, 점진적으로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했죠. 한국은 언제 통일될 것 같은가. 그건 신이라도 대답할 수 없다, 그 바로 1년여 전 89년 8월에 누가 내게 독일이 언제 통일될 것 같으냐고 물었어도 똑같은 답을 했을 테니까요. 먼저 통일을 이룬 나라 사람으로서 남북한에 뭘 권하겠는가. 독일식으로, 이런 모양으로 하지 말라, 했습니다. 솔직한 심정이었죠.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됐을 때, 서독 사람들은 모든 것이 동독보다 좋다고 선전했습니다. 동독엔 보관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고, 지식인들은 한마디로 빨갱이로 몰아쳤습니다. 동독 인텔리로서 겪은 가장 큰 아픔은 지금까지도 인간적 존엄을 계속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북한도 통일되면 남한이 우세하겠지요. 우리 경험으로 봐서 경제가 결정적이기에. 정말 이곳 분들께 간곡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북한 사람들을 존중해달라는 것입니다. 특히 북한 지식인들을 만났을 때 각별히 신경써서 그들을 높이 존중해주십시오.” 헬가는 60년부터 62년까지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조선어문학을 전공했다. 북한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며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연구했으나 통역원 일이 더 많았다. 거의 한해 한번꼴로 동독 고위층을 수행했고 그런 만큼 김일성 주석을 가장 많이 만난 외국인 가운데 한명이 되었다. 그가 만난 김일성은 이 외국 여성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는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소련이나 동독 지도자들보다 능력과 카리스마가 뛰어났어요. 60년대 말까지, 아니 70년대 중반까지 북한 민중에게 유익한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직감으로 이 사람 나쁘지 않다, 고 느꼈는데 통역을 하면서 점점 논리적 사고력이 아주 발달했구나 깨달았습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말할 줄 아는 드문 사람이었는데 북한 인민들을 위해서 그렇게 스스로 훈련을 많이 한 것 같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딱 한번 점심 자리에서 절 따로 불러 고맙다고 건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조선 남자한테 시집오셨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농을 해서 웃은 기억이 납니다.” 통역원으로서 그는 북한과 동독 지도자들 사이에 서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같은 공산주의자면서도 그때는 이른바 ‘소련식 국제주의’가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에서 성했기 때문에 조선 주체사상이 그들과 갈등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대부분 동독 학자들은 주체사상을 히틀러의 파쇼정권과 연결지어 부르주아 민족주의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입장이 달랐다. “내가 당시 만난 북한 학자들은 김 주석이 60년대에 주체사상을 내놓지 않았다면 북한이 벌써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나도 그 의견에 공감합니다. 내가 쓴 학위논문도 주체사상을 다룬 것이었는데 난 주체사상이 식민지 경험에서 나온 조선 특유의 민족주의라 해석했고 그 뿌리에 한국철학사가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 한국철학을 꼭 연구사업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만큼 동독이 서독보다 한국학이 훨씬 더 발달해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통일된 뒤 그 한국학 연구가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참 허망, 허탈할 뿐입니다.” “독일식으로 통일하지 마세요” 92년 훔볼트대학 교수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 그는 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소설을 번역했고 지금은 박경리의 토지 를 독일말로 옮기고 있다. IMF 사태로 한국쪽 지원이 줄어들어 고달프지만 죽을 때까지 한국학을 연구하고 소설들을 번역하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91년 이후 갈 수 없게 된 북한에도 언제든 다시 가게 되길 기다릴 뿐이다. 자주 드나들게 된 남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에둘러 풍자 한 자락으로 답했다. “‘부익부 빈익빈’이야 익히 알고 온 것이고, 개방은 됐으나 민주화는 의심있습네다. 어쨌든, 과거 조선과 관련해 친북 교수로서 오늘 여기서 한국 대통령 상 받은 게 말할 수 없이 기쁨네다. 전두환 대통령 때라면 불가능했겠지요? 김영삼 대통령이라면 서명했을까요?”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좋은 것만 탐하지 말라” 의관 정제하고 살며 서당수업 46년… “제도교육에서 사서삼경 가르쳤으면” 아무리 한갓진 시골 마을이라도 교회가 들어서지 않은 곳은 드물다.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용두마을도 그렇다. 보리가 자라는 들판 한가운데 십자가 첨탑이 솟아 있다. 그 바로 옆에 울타리도 없는 단층 농가가 한채 누워 있는데, 이 집이 바로 전통서당인 학성당이다. 서구문물에 밀려 이제는 희귀하다 못해 명맥잇기를 걱정해야 하는 전통서당의 처지가 단박에 눈에 들어오는 이 풍경 속으로 한 노인이 걸어 들어오고 있다. 밭둑길 위에 짧은 그림자를 드리운 노인은 흰 옷과 하얀 수염이 바람에 날려도 걸음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 단아한 모습이 더해짐으로 서당의 위풍은 금세 되살아난다. 너는 무엇을 배웠느냐… 그가 김수연(75) 훈장이다. 유학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모른 채 돌아가는 세상을 탄식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람다운 길을 걷도록 깨우쳐주기 위해 서당을 연 지 46년이 지났다. 가까운 마을에서 농사일 하면서 한 글자라도 배우고자 하는 사람부터 대학과 대학원 공부를 마친 사람까지 질과 양을 정해두지 않고 찾아오는 대로 제자를 삼았다. 가르치는 일이 재산을 얻고 이름을 내기 위한 게 아니었으므로 수업료를 내라 한 적이 없다. 머물며 배우고자 하는 제자에게는 방을 내주었다. 제도교육을 통해 배울 만큼 배웠다는 제자에게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으면 대답들을 못했다. “네가 배운 건 과학적 물질문명이 아니냐”고 재차 물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과학적 물질문명이란 게 결국 돈으로만 귀결되니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 장안에 천만명이 사는데 다 돈 버는 것밖에 몰라. 인간사회에서 돈보다 앞서는 게 윤리적 도학문명이야.” 유학은 수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천리, 타고난 본성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며, 이런 공부를 통해 “자기 양심 둘려먹기를 식은 죽 먹듯 하는”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출발점은 물론 그 자신이다. 어려서부터 이곳저곳의 몽학훈장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27살 때 율곡 이이의 학문을 이어받은 서암 김희진을 찾아가 2년 동안 문하에 머물며 공부를 더 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가르치기 시작한 게 29살 때다. 그는 “유학의 병폐가 반상과 사농공상의 차별에 있다”며 낮에는 들에 나가 일했다. 전라도 지방에는 초가지붕 잇기, 구들 놓기, 짚단 쌓기만 할 줄 알면 농촌 일은 다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가 그랬다. 그러면서 아침저녁으로, 비오는 날이면 하루종일 책을 읽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제는 공부만 해도 후세 사람이 욕을 안 할 것”이라며 일손을 놓은 게 환갑 때였다. 글 읽는 사람은 가난하게 마련이라는 그는 재물과 세간의 명성에 전혀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탄허 스님의 집안 아저씨뻘이 되는데, 글씨를 선물받으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에게 줘버리곤 했다. 그 자신의 글씨 또한 내놓을 만한 것이지만 학문의 뒷전으로 밀어냈다. 5공화국 정권이 전씨 족보 편찬을 감수하는 대가로 엄청난 이권을 제시한 일도 있었다. 물론 끝내 물리쳤다. (사진/학성당 훈장 김수연) 자녀들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배고픔과 회초리가 가장 도드라져 있다고 한다. 흐르는 물도 반드시 바가지로 떠다 얼굴과 손발을 모두 씻고 버려야 하는 등 엄격한 생활규율이 있었다. 친구들이 뛰어놀 때 무릎꿇고 한문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꾸짖을 때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항상 회초리를 끊어다 종아리를 치던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린 마음에 품었던 원망이 가신다. 5남2녀를 기르며 자식들보다 더한 고생을 감내했던 부인은 지난해 가을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상복을 입고 있지만 평상시에는 치포관을 쓰고 행의를 차려입는다. 상투 튼 머리부터 버선까지 옛 의관 그대로다. 의고 취미는 아니다. 마음은 허공과 같이 자유자재여서 붙잡아지지 않기에 그것을 붙잡는 방편의 하나로 외표를 엄숙히 하려는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갓을 쓰고 치렁치렁한 도포를 입었던 옛 선비들의 뜻이 그렇다. 옷을 벗고 있을 때와 입고 있을 때, 예비군복을 입고 있을 때와 양복을 입고 있을 때,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보라 했다. 그는 늘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의관을 갖춘 뒤 5시부터 수업에 들어간다.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 1대1로 엄격한 지도를 한다. 배우는 이의 능력에 따라 가르치는 내용과 방식이 다르다. 배우러 드나드는 제자가 많을 때는 50여명에 이르기 때문에 쉴 틈이 없을 정도지만 오는 사람을 막은 적이 없다. 어쩌다 한번씩 와도 좋고 눌러살며 배워도 좋다. 그래도 아직껏 이렇다할 큰 제자 한명 나오지 않은 게 못내 아쉽다. 공부 좀 한다 싶으면 부모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다. 유학은 효가 근본인데 부모 뜻을 거슬러가며 공부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 그래서 가는 사람은 잡지 않는다. 그는 전통서당이 많이 생기고 번창하는 것보다는 제도교육에서 하루 한 시간이라도 사서삼경을 가르치게 되는 것을 더 원한다. 자기의 본래 양심을 알게 하는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울 것이므로 교도소를 더 짓기 전에 교육의 방침부터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다. 세태는 유학을 봉건시대의 낡은 유물이라고 치부하고 있지만, 그의 말대로, 유학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고 하는 소리인지 모른다. 유학은 신분제도의 옹호도 차별의 합리화도 아니며 타고난 본성을 알고 행하는 것임을 누차 강조했다. 그는 조선시대 500년에도 진정한 유학정치는 없었다고 평가한다. 글 짓는 능력만 보고 사람을 등용했던 과거제도가 유학정치를 망쳤다고 한다. 한문 어휘를 늘리고 한시를 외우느라 ‘수신제가치국’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형국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어지러운 정치도 “자기 몸을 높이고 자기 앞에 큰 감을 놓으려는”, 본성을 그르친 정치임을 굳이 두번 말하지 않았다. 그는 주희의 중용 서문에 나오는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厥中)는 말로 사서삼경의 핵심을 삼는다. 딱 맞게 하라는 것. 좋은 것만 탐하는 마음보를 버리라는 것. 그는 한 시골 마을에서 이 말을 거창하지 않은 실천으로 옮기며 살고 있다. 거기에 이르는 길이 요원해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가 세운 뜻과 도달한 경지를 가늠할 능력조차 없는, 유학을 버리는 것만 능사로 아는 세상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래서 제자를 받아 가르치는 것은 “죽어야 끝나는” 일이다. 글 박용현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고수에겐 ‘끼’가 있다 격투기 세계챔피언 된 가녀린 소녀, 영화배우의 꿈을 꽃피우다 (사진/무술인 양민경씨) “국제 무술대회에서 챔피언 딴 거 맞아요?” 그를 처음 소개받을 때 참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질문은 으레 이런 식이다. 까만색 합기도 도복 때문에 더 두드러지는 하얀 피부, 도복을 어색할 정도로 헐겁게 보이게 하는 몸피, 물끄러미 쳐다보는 둥그렇고 서늘한 눈매…. 어디에서도 합기도 3단, 킥복싱 3단의 무술인임을 짐작게 하는 힌트를 얻을 수 없다. 그저, 가벼워보이는 몸이구나, 생각할 뿐이다. 캄보디아에서 실전 실력을 발휘하다 적어도 쇠로 된 쌍절곤 두개를 집어들기 전까지는 그렇다. 그의 손에서 쌍절곤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금세 차르르르 하는 소리로 바꿔 내며 그를 바람의 막으로 에워싼다. 잠시도 정지하는 순간 없이 36가지 동작으로 이어지는 쌍절곤의 움직임은 눈으로 좇아가기 힘들다. 그의 팔길이와 쌍절곤 길이의 합을 반경으로 하는 공간 안에 그가 적의를 품은 상대방이 있다면 온전하지 않을 것 같다. 양민경(22)씨는 얼마 전 세계 정상급 무술인임을 공인받았다. 지난달 열린 제8회 전일본통합무도연맹연무제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비록 겨루기 경기는 아니었지만, 남녀 구별없이 시범을 통해 동작의 빠르기와 정확성으로 승부를 가리는 대회였다. 그의 스승인 세계합기도연맹 이각수 사무총장조차 5위 정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양씨는 ‘한국 대표로 참가했는데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 캐나다 러시아 멕시코 아르헨티나 우크라이나 등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68개 팀의 내로라 하는 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흉기를 들고 달려드는 2명의 남자를 거뜬히 눕혀버리는 그의 호신술은 단지 시범을 통해서만 발휘되는 게 아니다. 지난 7월 캄보디아 대통령 경호실 초청으로 시범을 보이러 갔을 때 본의 아니게 실전 실력까지 발휘한 일이 있다. 시범을 끝내고 편의점에 들른 그에게 캄보디아인 가라테 선수가 접근했다. 양씨의 시범을 지켜본 가라테 선수는 실제 실력이라고 믿기지 않았던지 한번 겨뤄보자는 태도로 집적댔다. 결국 그는 양씨의 발차기에 코피가 터져 냉큼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이런 말을 듣고도,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양씨는 평범한 여성으로 보인다. 사실 그가 타고난 무술인인 것은 아니다. 처음 도장에 찾아왔을 때는 빈혈과 잦은 감기에 시달리는 여고 1년생이었다. 이각수 사무총장은 워낙 기본체력이 달려보여 돌려보낼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곧 남다른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양씨는 당시 문득 도장에 가고 싶어졌던 이유를 아직도 “그냥 그랬어요”라고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어머니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강원도 핸드볼 대표로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어머니 박기정(44)씨는 스포츠 마니아다. 그런 어머니에게 등을 떠밀려 초등학교 때 태권도 도장에 잠깐 드나든 적이 있다. 그때 몸에 새겨진 발차기와 지르기의 기억이 잠재의식을 찔러온 것일까. ‘이각수란 사람이 한국 최초로 격투기 세계챔피언이 됐다’는 신문기사를 보는 순간 시와 피아노에 빠져 있던 여고생 양민경은 ‘그냥’ 그 밑에서 배우고 싶어졌다. 당시 이각수 사무총장이 일본 도쿄 고라쿠엔 체육관에서 열린 세계2종 격투기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권투와 가라테, 합기도와 유도 식으로 서로 다른 종목의 선수가 맞붙는 2종격투기는 혈기방장한 남학생들에게야 매력이 있겠지만, 몸도 약한 여고생의 마음을 잡아끌 만한 운동은 아니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 많은 여학생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집이 있는 장안동에서 도장이 있는 신림동까지, 지하철만 26구간을 타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가는 모습에서 ‘사부’의 눈에 남다른 무엇이 처음 보였다. 양씨는 초보자에겐 한 시간이 벅찬 운동을 하루 3시간씩 꼬박꼬박 했다. 남들보다 체력이 약해 힘들었다. 쌍절곤을 배울 때는 온통 멍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벌을 받을 때는 남자들과 똑같이 기합과 ‘빠따’를 견뎌냈다. 하나 있는 여동생에게는 “힘드니까 하지 마”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포기할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캄보디아 시범경기를 앞두고 발목 부상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치 4주 진단이 나오고 깁스를 해야 했지만, 이를 물고 끝까지 해냈다. 불편한 상태로도 몸놀림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는 힘겹기만 한 운동에도 하늘색 꿈을 입히기 시작했다. 늘 땀에 젖어도 눅눅해지지 않는 ‘끼’가 그의 안에 있었다. 서울예대에 다니면서 방송반에서 MC와 아나운서로 활약하고, 아르바이트 삼아 해보라는 선배 말을 듣고 몇편의 광고도 찍었다. 뮤지컬 배우 남경읍씨한테서 본격적으로 연기수업도 받았다. 배우가 되고 싶었다. 운동은 그 꿈에 한발 더 다가서게 해주는 유리구두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양씨는 내년 2월 촬영이 시작될 예정인 박철수 감독의 에어 2003 에 캐스팅됐다. 세계대회 우승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애초 시나리오에는 등장인물인 북한 테러리스트 5명이 모두 남자로 그려졌다가 양씨가 합류하면서 수정을 거쳤다. ‘한국의 양자경’을 꿈꾸는 그로선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긴장된 시간이다. 날마다 새벽 5시에 도장에 나와 한 시간은 주먹 단련, 한 시간은 발차기 훈련, 한 시간은 꺾기와 던지기 연습을 한다. 운동을 안 하면 몸이 아파오기도 하거니와, 좋은 액션배우가 되려면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 “마흔이 넘으면 글을 쓰고 싶다” 또 내년 2월에는 세계무술연맹이 주최하는 국제무술시범경기대회도 예정돼있다. 이 사무총장은 “2∼3년만 더 수련하면 그야말로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겨룰 실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쯤이면 4단이 될지도 모른다. 국제대회 우승 덕에 좀 혜택을 받게 되겠지만, 단수를 높이려면 실력과 함께 연한을 쌓아야 한다. 5단이 되고 6단이 될 미래에,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넘긴 그는 어떤 모습일까. 중고등학교 시절 백일장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께 불려갔고 시가 좋아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던 양씨는 마흔이 넘으면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어머니 말씀이 아직은 깊이가 안 나오는 것 같다고 하니 그때쯤에야 쓸 수 있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운동을 할 생각이다. 결혼이 그걸 막는다면 “운동하는 사람 만나서 같이 하겠다”고 한다. 합기도말고 좋아하는 종목을 묻자 “킥복싱이요”라고 대답해, 수영이나 에어로빅 따위를 기대한 질문자에게 한방 먹이는 양씨에게는 ‘진정한 고수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중에 놓인 목표일 것이다. 한번의 눈길로 사람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잡아내는 고수. 나이 오십쯤에 검정 도복을 입은 그를 신림동 도장에서 만나고 싶다.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이 뽑으며 역사를 뽑았다” 치과의사 기창덕씨 (사진/그는 내년쯤 아예 병원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을 참이다. 한국의학사 를 쓰기 위해 중국·일본 자료를 절실하게 구하고 있다.) 그는 사람 입 속을 들여다보고 세상을 읽어왔다. 이를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보인다. 먹고, 마시고, 말하고, 머리 쓰고, 행동한 모든 이력이 이에 뚜렷하게 흔적을 남긴다. 고고인류학자들이 사람 뼈를 발굴해도 이가 안 나오면 알맹이가 빠졌다고 생각하는 건 이런 까닭이다. 그는 치과의사로서 그 시대의 생활상과 연대기를 가늠케 하는 이가 지닌 뜻을 헤아린다. 고독한 공부… 한때 나환자의 친구 “이규보가 남긴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을 보면 고려시대 사람이 겪은 치통의 아픔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으며/먹을 때에는 반드시 이로 씹는데/이가 몹시 아파 먹지를 못하니/하늘이 나를 죽이려는가 보네.’ 제가 한국치과의학사 를 쓴 건 의학이 치료 기능으로 끝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의학이 인문학과 만나야 제대로 서고, 의문화(醫文化)가 발달해야 의료윤리가 꽃피고, 그래야 의술이 단순히 기술로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치과의사 기창덕(74)씨는 본업보다는 의학사(醫學史) 연구로 더 이름난 이다. “너무 고독하게 공부했다”고 돌아볼 만큼 홀로 자료를 모으고 틀을 세우고 책을 썼다. 한국치과의학사 를 쓰는 데 14년이 걸렸다. 물어볼 선배도 없고, 도와줄 이도 없었다. 일일이 발굴현장을 찾아가 사진을 찍고 컴퓨터로 작업했다. 태평양 바다에 떨어뜨린 바늘 찾는 격으로 고서를 뒤지고 도서관을 헤집었다. 우리나라 치과의사들이 쓴 모든 논문을 요약해 모아놓은 한국치과의사 논문총취 는 지금까지 2집이 나왔는데 일본에서 오히려 더 많이 사갈 정도다. “치과의사가 이나 고치고 돈이나 벌지 무슨 짓이냐고 입바른 소리들을 했지만 전 그게 우리 치과계에 꼭 필요한 기초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초의학의 중요함을 알아 대학 때는 면역학을 하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밥먹고 살기 힘들어서 치과의로 개업했던 접니다. 그래서 웬만큼 먹고 살게 되고 책 살 돈도 좀 있고 난 뒤엔 내가 가고자 했던 쪽으로 발을 내딛은 거죠.” 한국근대의학 교육사 를 쓸 때는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는 심정이었다. 원래 쓰고 싶었던 건 의학 사회사인데, 교육쪽이 더 급하다 싶어 교육사를 먼저 썼다. 사회사 원고도 꽤 돼 있는 편이지만 지금은 손 댈 시간이 없다. 그를 부르는 곳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년쯤 아예 병원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을 참이다. 한국의학사 를 쓰려고 중국, 일본 자료를 구하는 그의 마음은 그만큼 절실하다. “그래도 지금은 의학사를 연구하는 친구, 동료들이 생겨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요즈음은 각 대학 의대나 병원들이 50년사를 써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저에게 물어와서 그거 얘기해 주러 다니느라 괜히 분주합니다. 제가 제일 강조하는 게 자료수집이지요. 자료집을 먼저 만들어라. 역사는 그걸 기초해 써라. 근거 없는 의학사는 소설이다.” 그가 일하는 서울 종로구 필운동 치과(02-738-4776) 간판엔 ‘소암 의문화사 연구소’란 이름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치과 안에 연구실과 서고와 간이침대가 알뜰하게 들어앉았다. 모교인 서울대와 직장이었던 가톨릭의대에 트럭으로 책과 자료를 실어보냈는 데도 또다시 사모은 의학사 자료들이 그들먹하다. 벽에 붙은 달력엔 일주일 단위로 그가 해야할 일들이 빼곡하게 정리돼 있다. “바빠서 안 늙은 것 같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하루하루를 봉사, 진료, 연구 셋으로 쪼개쓰는 그는 소암(素岩)이란 호가 바로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소암이란 한마디로 돌대가리란 뜻이요. 질박한 바위니 그게 그 말이지 뭐. 난 뭐든지 곧이 곧대로 사는 게 좋아요. 거품 일으키는 것도 싫고, 날개 다는 것도 귀찮고.” 그는 한때 ‘나환자들의 치과의사’로 불렸다. 58년부터 64년까지 스웨니 신부가 이끌던 나자로마을에 가서 봉사활동을 했다. 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그들의 이를 뽑았다. 그는 “내 뒤를 이어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는 강대건 의사 이름을 꼭 좀 써달라”고 부탁했다. 91년엔 복지성가병원에 무의탁 노인과 극빈환자들을 위한 치과진료실을 만들었다. 이듬해엔 시각장애자들을 위한 치과, 96년엔 서초구 보건소에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치과를 설치했다. 그의 뜻을 아는 이들이 보내준 기부금,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의 봉사정신이 큰힘이 됐다. 돈도 없고,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 병원 문턱 때문에 끙끙 앓기만 하던 이들이 얼굴을 펴고 진료실을 나설 때, 그는 치과의사가 때로 지옥과 천국을 건네주는 천사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온몸에 화상투성이인 눈 먼 아줌마들이 이를 해넣고 새 삶을 얻었다고 울며 그에게 인사할 때는 똑 그가 젊어진 느낌이었다. “다른 구청에서도 만들고 싶어하지만 자원하는 의사 모으기가 힘든 모양이에요. ‘장애인 치과봉사회’ 같은 조직을 일궈서 전국적으로 움직이면 좋을 텐데….” ‘장례문화 개선’에도 뛰어들다 뭐든 고쳐야 할 게 보이면 바로 덤벼드는 성격인 그가 지금 관심을 쏟고 있는 또하나의 문제는 우리 장례문화다. 전국 땅을 야금야금 먹어들어오는 묘지를 보며 그는 이미 70년대부터 땅을 좀 아껴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묘지 대안으로 납골당을 만들자는 의견을 내 아는 이들끼리 실천하고 있다. 남서울공원묘원에 시범 모델을 만들어 개선하는 일에 힘을 보탠다. “의학이란 병원에서 환자 보는 게 다가 아닙니다. 병원 밖에서 벌어지는 일도 소중하지요. 이를테면 한의학(韓醫學), 서양의학, 민속의학부터 전염병이나 민간의료 등 사회의학 문제까지 그 시대 인간이 앓았던 병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끌어안아야 합니다. 의학사는 바로 인간이 걸어가는 길, 그 길 하나를 정리하는 거지요. 후손들이 역사에서 뭔가 찾는다면, 의학사는 꽤 배울 게 많은 자료 창고입니다.” 그의 세례명은 돈 보스코다. 성경에서 돈 보스코는 사회사업을 하던 이였다. “내 성격이 그러니 누가 말리겠느냐. 내가 원하는 건 다했다”고 그는 웃었다. 칠십넷 먹은 노인 얼굴이 소년 같다. 사진 장철규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지금은 1420년 9월! 이슬람 지도자 40년 생활… 라마단 고통속에서 사회정의 실천을 꿈꾼다 (사진/무슬림 이행래씨) 1420년 9월,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 고급옷 로비의혹 사건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에 대한 특별검사의 수사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노동계는 노동시간 단축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을 요구하며 겨울싸움에 나섰다. 거리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이슬람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고장난 타임머신을 탄 것일까. 아니다. 지금이 바로 1420년 9월이다. 예언자 무하마드(마호메트)의 ‘히즈라’를 기원으로 삼는 이슬람력(曆)에 따르면. 그래서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에게는 세기말이나 새즈믄해를 도마에 올리는 숱한 입방아가 다 부질없다. 그들은 서기 1999년 12월9일∼2000년 1월8일을 보통의 9월, 아랍말로는 라마단으로 산다. 이슬람력은 1년이 354일이고 윤달도 없는 순 태음력이어서 이렇듯 계절과 무관하게 달이 바뀐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한달은 아니다. 라마단은 무하마드가 이슬람 경전인 쿠란(코란)을 계시받은 성스런 달이다. 이 기간에는 동틀 때부터 해질 때까지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을 끊고 성행위도 금한다. 라마단에 들어선 다음날 서울 한남동 이슬람성원에서 만난 이행래(64) 이맘(성직자 제도가 없는 이슬람교에서 평신도로서 예배를 이끄는 사람)은 차분한 목소리로 예배를 이끌 듯 말했다. 성원 안에는 갑자기 불어닥친 강풍이 낙엽을 이리저리 휩쓰는 소리만 가득할 뿐, 사람 목소리는 불과 몇m도 넘어서지 않았다. 라마단 때는 항상 심사숙고를 거쳐 행동하고 거친 말도 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다섯번 예배하고 일주일에 한번 합동예배를 하고 한해에 한달 동안 단식을 하는 행위는 일상 속에서 꾸준히 신앙을 실천한다는, 항상 자기를 돌아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신앙이라기보다는 생활입니다.” 무슬림들은 평소 동트기 전, 낮 12시를 조금 지난 시각, 오후, 일몰, 일몰 뒤 1시간30분가량 지난 시각 등 하루에 5차례 예배하는데, 예배와 예배 사이에 화장실에 갔다오거나 더러운 물건을 만지거나 심지어 방귀를 뀌어도 새로 몸을 청결히 하는 우두를 행한다. 오른손, 왼손, 입, 코, 얼굴, 오른팔, 왼팔, 머리, 귀, 오른발, 왼발 순으로 세번씩 씻는다. 그러고나서 쿠란을 낭송 또는 암송하고 반절과 이마, 코, 손, 무릎이 완전히 땅에 닿는 절을 한다. 이 이맘도 40년 가까이 무슬림으로 살면서 꼬박꼬박 정해진 예배와 단식을 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앙생활 초기에는 라마단 도중 담배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어 ‘하나님, 죄송합니다’라고 기도하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달려간 적도 있다. 그러나 하루 2갑씩 피우던 담배도 어느 순간엔가 더이상 그를 구속하지 않게 됐다. 무슬림에게 주어지는 각종 금기도 이제는 공기를 마시듯 자연스런 일이다. 술은 물론, 돼지고기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진 짐승의 고기, 뱀처럼 혐오감 주는 동물의 고기는 입에 대지 않는다. 허용된 고기도 사람이 식용으로 쓰기 위해 고통없이 도살한 것만 먹어야 한다. 도박도 엄격한 금기사항. 신 이외의 대상에 절을 할 수 없어 세배도 않는다. 처음엔 어르신들한테 야단도 맞았지만 점차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됐다. 친구들도 그가 무슬림인 사실을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될 만큼 익숙해졌다. 무슬림이 된 뒤 서른이 넘어 중매로 만난 부인도 지금은 독실한 무슬림으로 살고 있다. 전남 장흥에서 올라온 서울 유학생이던 그가 당시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뜻밖에 단순하다. 동국대 국문과에 다니고 있던 59년, 신당동 하숙집에서 알게 된 친구로부터 “이슬람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사뭇 다르다더라”는 말을 듣고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적어도 학교에서 왜곡된 지식을 전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어느 쪽이 맞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이슬람 교회를 찾았다. 방한칸을 빌려 꾸민 허름한 교회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들이 종전 이후인 55년부터 포교활동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 이슬람의 싹이 겨우 움트는 시기였다. 그곳에서 이슬람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이 풀렸다.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이란 표현대로 정복을 통해 교세를 확장한 종교라고 알고 있던 이슬람이 “종교에 강요가 없게 하라”는 쿠란의 명령에 따라 자발적인 개종자만 받아들였다는 사실, 결혼제도도 일부일처제가 기본이며 일부다처제는 애초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을 돌보기 위한 장치라는 것, 신체절단 등 가혹한 법을 시행하지만 배고픈 자의 도둑질은 처벌하지 않는 등 합리적인 정상참작이 있고 본인이 벌을 달게 받겠다는 시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클랑이슬람대학에 6달 동안 연수를 다녀오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외국에 한번 나가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던 때여서 은근히 마음이 동했다. 결국 그는 신앙고백을 하고 이슬람에 입교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은 무슬림이 아니었다. 그는 종교를 갖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는 못된 행동을 보이는 친구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은 내가 다스릴 수 있다’고 여겼다. 마음이 흔들린 건 말레이시아에서였다. 길에서 처음 만난 무슬림이 아랍어로 인사를 해왔다. “앗살라무 알레이쿰”(당신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그리고는 대뜸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낯선 여행자도 도와야 한다는 이슬람 전통에 따라 그를 초대한 것이다. 서울에서는 친구 집에조차 몇번 가보지 못했던 그로선 이 격의없는 호의에 특별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78년과 89년 두 차례 메카 순례를 다녀왔는데, 거기에서는 모두 천 두장으로 몸을 가리는 복장을 합니다. 인종이나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지요. 몸이 떠다닐 정도로 빽빽한 인파 속에서 부대끼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회기여 못해 죄송하다” 국적도 가리지 않는 형제애와 평등사상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게 한국 무슬림의 임무라고 그는 믿는다. 수익금이나 순수한 자기 재산의 40분의 1을 1년에 한번씩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하는 자카트(구빈세)의 정신을 강조한다. 무슬림의 5행(行) 가운데 하나인 자카트는 이슬람식 부의 재분배인 셈이다. 라마단 단식도 신앙심의 단련인 동시에 배고픈 이들의 고통을 체험하는 일이다. 전세계 12억7천만 무슬림들은 라마단 단식을 통해 서력을 쓰는 사람들과 새 밀레니엄의 메시지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에서는 정부가 나서 시행하는 자카트가 우리나라 이슬람에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들과 전혀 다른 풍토 속에서 금기와 예배를 모두 지킬 정도로 신심깊은 이들이 많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이행래 이맘 자신도 교회 일에 매달리다보니 수입 자체가 없는 형편이다. 그는 우리나라 이슬람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죄송하다”며 “자발적인 부의 재분배로 진정한 평화를 찾고 이슬람식의 강력한 법이 도입돼 폭력과 부정부패를 없애는 게 앞으로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일몰 예배를 알리는 아단이 울려퍼지자 이행래 이맘은 다시 예배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추야자 열매와 우유 한잔으로 하루종일 억눌렀던 식욕을 달랬다. 평생 욕 한번 하지 않고 하루에 70번씩 타인을 용서했다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본받기 위해 외모마저 그를 따라 턱수염만 기른 이행래 이맘. 이슬람이 뿌리내리기 힘든 환경에서 개인적인 신앙의 실천을 철저히 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슬림의 사회적 몫을 찾겠다는 그의 바람이 앞으로 어떤 결실을 맺게 될 지 궁금하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민중의 희망을 판소리로” 판·검사 기대를 받던 법대생이 운명처럼 빠져든 국악의 세계 (사진/국립창극단원 한승석씨) 지난 80년대 말 서울대를 다닌 이들은 어렴풋이나마 그를 기억할지 모른다. 흰 농민복을 입고 꽹과리를 든 그의 모습은 봄·가을로 열리는 대동제에서, 도서관 앞 광장의 대규모 집회에서, 전투경찰과 대치한 교문 앞에서 언제나 볼 수 있었다. 북·장구 소리 뒤로 살짝 숨었다 귀청을 쨀 기세로 한껏 솟아오르며 수많은 ‘젊은 피’를 요동치게 했던 꽹과리 소리의 마법성. 김덕수 사물놀이패에 ‘뒤집어지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와 정의에 목말랐던 시대에 순수한 피를 지닌 젊은이들이 만난 현장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2학년 때부터 줄곧 상쇠를 맡았던 한승석(32)씨는 기교만 내세우는 부르주아 예술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공연을 그야말로 ‘우연히’ 보고는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내가 하던 건 어린애 장난하는 수준이었구나’ 하는 부끄러운 자기 평가를 내렸다. 그는 꽹과리 소리에 어떤 정신을 담아내든 소리 자체의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에 군대를 제대하자 복학을 미룬 채 김덕수 사물놀이패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한 사람의 앞길을 결정짓는 데 우연과 의지는 각각 어떤 몫을 갖고 개입하는 걸까. 한씨가 법대에 입학한 것은 의지의 소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남 진도에서 광주로 유학가 공부만 할 줄 아는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법을 전공하는 것도 언론인이 될 수 있는 길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신문방송학과 대신 법대를 선택했다. 그런데 법대생이 법전 대신 꽹과리를 들게 된 것은 순전히 외로움 탓이었다. “사촌동생이 거기에 있는데 재미있다더라”는 동문 선배의 말을 듣고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전통춤 동아리 ‘한사위’를 찾아갔다. 당연한 통과의례로 악기를 만지면서 그는 꽹과리에 미치기 시작했다. 어릴 적 기억 속에서 둥둥거리던 가락이 되살아났다. 그의 고향에서는 명절만 되면 동네 어른들이 사나흘씩 장구를 치며 놀았다. 그의 집에도 장구가 걸려 있었고 아버지와 함께 장구채도 깎아본 적이 있었다. 풍물패를 이끌고 교정을 돌다보면 고향에 온 듯한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가 판소리에 빠져든 것도 겹겹이 인연이었다. 사물놀이를 배우던 중 명창 임방울의 판소리 한 대목을 녹음테이프로 듣게 됐다.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대학 때 숱하게 들었지만 들리지 않던 소리였다. 판소리는 신명이 나는 대신 한을 표현하지는 못하는 사물놀이의 한계를 깨뜨리고 있었다. 청중을 웃겼다 울렸다 다시 환희의 대단원으로 맺힌 것을 풀어버리게 하는 판소리는 여운이 긴 예술이었다. 테이프를 들으며 혼자 흉내를 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95년 1월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안숙선 명창과 첫 인연을 맺었다. 명창 앞에서 평소 연습한 판소리를 한번 해보라는 짓궂은 동료들의 손에 떠밀려 일어섰다. 그의 소리를 들은 안 명창은 한번 찾아오라고 했다. 처음엔 사물놀이 단원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가 판소리를 배웠다. 그만큼 판소리에 매료되지 않았던 단원들이 그의 공부 욕심을 좇아가지 못하자, 그해 5월 꽹과리를 아예 놓아버렸다. 서울 신림동 자취방에서 여동생에게 ‘얹혀살던’ 시절이었다. 새벽 관악산에 올라 목청을 깨우고 돌아와 점심을 먹고는 안 명창 집으로 갔다. 혼자 북채를 잡고 스승이 돌아올 때까지 빈 방을 소리로 채워나갔다. 자정이 다 되어 돌아오기도 하는 스승으로부터 10분이든 1시간이든 가르침을 받으면 하루 일과가 끝났다. 수업료를 남들의 절반밖에 내지 못하던 때라 꾸중이라도 들으면 자격지심에 눈물을 씹었다. 10년. 그가 판소리에 담보잡히기로 한 시간이다. 적벽가 를 1년 만에 익히고 수궁가 는 10달 만에 배웠다. 적벽가 는 수업을 녹음한 테이프가 90분짜리 64개였는데 수궁가 에서는 21개로 줄었다. 성우향 명창으로부터 1년 동안 춘향가 를 배울 때는 14개였다. 소리하다 창밖을 보면 꽃이 피고 소리하다 창밖을 보면 비가 오고 소리하다 창밖을 보면 낙엽이 졌다던 스승을 본받아 10번의 성상을 보내고 나면 소리를 계속할 만한지 아닌지 양단간에 판가름이 날 것이다. 안 명창은 그에게 “늦게 시작했으니 1년에 한 바탕(판소리 한곡)씩 할 각오로 배우라”고 했다. 한 바탕 배우는 시간을 평균보다 3분의 1로 단축하라는 지시였다. 지금은 네 번째인 흥보가 의 절반을 익혔다. 남들보다 빨리 배우는 게 머리가 좋아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늦게 시작한 만큼 어릴 때 시작한 이들보다 공력에서는 뒤쳐지지만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기에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한 가지를 더 들자면,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보법을 창안해냈다는 점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수되는 판소리에 완벽한 악보가 있을 수 없지만, 그래서 아예 악보없이 배우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최대한 정확하고 느낌까지 살릴 수 있는 악보를 체계화할 생각이다. 올해 진학한 대학원에서 그가 연구할 주제도 이것이다. 타고난 재주는 어떤가. 재주가 좀 모자라는 사람은 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어 한이 맺히게 마련이다. 벽을 넘기 위해 연습을 되풀이하다보면 서글픈 감정이 저도 모르게 스며들어 소리에 생기가 깃든다. 타고났든 아니든 100번 연습한 사람보다 101번 연습한 사람이 더 낫다는 게 그의 ‘천재론’이다. 아버지의 반가움에 4년이 걸리다 그를 ‘별난 존재’로 보는 시선을 느낄 때면, 명문대 출신이라는 간판을 내거는 일은 그만큼 판소리에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다그친다. 그 간판이라는 건 또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워줬던가. 아버지는 판·검사가 되는 길을 버리고 판소리에 미친 아들에게 “동네 사람들 보기 창피해 나다니지도 못하겠다”며 역정을 냈다. 텔레비전에 국악 연주장면이라도 나오면 못 볼 것을 본 양 채널을 돌렸다. 아버지를 만날 때 반가움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게 되기까지 4년이 걸렸다. 이제는 국악 프로그램을 보며 “너는 왜 안 나오냐”고 물을 정도로 변했다. 명절 때 귀향할 엄두도 못내던 그가 지난 설날에는 고향 진도에서 이웃들을 불러모아 ‘안방공연’을 열었다. 판소리 5바탕에 통달한 뒤 “쟤는 그래도 돼”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때 그는 젊은 시절 어설픈 기교에 담아냈던 정신을 새로운 경지에서 펼쳐보이겠다는 꿈이 있다. 5·18 광주항쟁,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 , 소년소녀가장의 이야기 등 민중의 고난과 힘과 희망을 정련된 사설로 다듬고 그것을 판소리 가락에 실어올릴 것이다. 거기에 사물놀이도 결합할 생각이다. 운명처럼 빠져든 국악의 세계에서 투쟁과 수련, 사물과 판소리, 정신과 기교의 변증법을 거쳐 그가 건져낼 마지막 판소리 한 바탕은 얼마나 자지러지는 것일까. 글 박용현 기자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온 국민에게 로봇을! 한때의 축구클럽 소년, 로봇축구를 넘어 ‘마이봇’으로 (사진/로봇과학자 김종환씨) 교복이 싫었다. 목을 조르듯 ‘호크’까지 꽉 채워 입어야 했던 교복. 그 검은 옷은 창의성을 억누르는 철창이었고 전인교육을 가로막는 바리케이드였고 꿈의 발목을 묶는 밧줄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너희들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라던 교감 선생님의 일성. 조회시간에 무수히 반복되던 ‘전인교육’이란 말은 도대체 뭐였단 말인가. 탄탄하게 닦인 길은 버렸다 그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은 면에선 ‘범생이’였지만, 늘 ‘이게 아닌데…’ 하며 딴 길을 찾는 ‘삐딱이’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축구 클럽을 만들 정도로 공차기를 좋아했고, 교복보다 유도복이 더 좋았고, 학교수업보다 소설을 읽고 쓰는 게 더 공부같았다. “건전한 사회인으로 키우는 게 교육의 목표 아닙니까. 그런데 딸아이 공부하는 걸 보면 불쌍해요. 학교 끝나면 밤 11시까지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중학교 1학년이 그러니 더 크면 어떻겠습니까. 자유롭게 놀고 운동하고 책도 읽고 해서 정말 일할 사회인이 됐을 때는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여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진을 다 빼놓으니 아이들이 조로하고 사회에 대한 반항심만 쌓는 거죠.” 교복의 울타리를 툭툭 차기도 하고 메다꽂기도 하고 왕창 허물어버리는 상상도 한 덕일까. 그는 한 분야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듣는 과학자가 됐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과 김종환(42) 교수가 지난 96년 첫 대회를 마련한 로봇축구는 국제전자전기공학회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았고, 97년에는 세계로봇축구연맹(FIRA)을 창설하기까지 했다. 그는 ‘로봇축구의 아버지’( 더 타임스 )로, ‘엔터테인먼트 로봇 분야의 개척자’( 앵커리지 데일리 뉴스 )로 불린다. 어디 가서 산업용 로봇을 연구중이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여도 엔터테인먼트 로봇을 연구중이라고 하면 그깟 광대로봇을 만들어 서커스단이라도 차리려느냐는 반응을 보이는 풍토에서 로봇축구라는 발상을 한 건 “과감히 옆길로 샐 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철학에 공을 돌릴 일이다. 그는 공부하는 과정에서도 선배들이 탄탄하게 닦아놓은 길을 버렸다.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과학도에게 으레 다음 단계로 설정돼 있던 미국 유학을 단념했다. 솔직히 준비를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한창 기가 살아야 할 20대에 외국에 나가 그곳의 주류인 백인사회에 끼지도 못하고 살다 보면 정신적으로 위축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해외 배낭여행 가는 학생들이 많은데, 외국에서 거지처럼 하고 다니면 그게 무슨 세계화입니까. 그런 식으로 나가면 열등의식만 심어오지 않겠어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나가야 제대로 보고 느끼고 오는 거지요.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지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80년대 중반, 교수들도 국제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싣기 힘들던 그때 그는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국제전기전자공학회 학회지에 5번이나 자기 이름을 올렸다. 서른살에 박사학위를 따고 이듬해인 88년 카이스트 교수가 됐다. 카이스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쉴새없이 논문을 써내야 한다. 열심히 연구하는 교수만 남겨놓는 엄격한 룰이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국제 학술지에 37편의 논문을 싣고 국제 학술대회에서 10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실적을 올리자면 국내 학술지를 택할 수도 있었지만, 요령 피우지 말자는 생각에 외국 학술지를 고집했다. 승진을 위해 필요한 논문 편수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정교수로 승진한 해를 기억해내는 데도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서울방송 드라마 카이스트 에서 탤런트 이휘향이 연기하고 있는 전자전기공학과 교수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그는 이력과 넘치는 열정을 보면 탤런트 안정훈 분의 천방지축 젊은 교수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그 자신은 “그렇게 나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건 또 하나의 굴레 때문이다. 학계에서도 장유유서나 연공서열이란 말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나이 문화’가 더 견고하면 견고했지 결코 무르지 않았다. “30대 초반에는 나설 일이 아니더군요. 공연히 욕만 먹고 인정도 안 해주고…. 그래서 아예 30대 말이나 40대 초가 됐을 때 마음껏 뜻을 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준비하자, 그렇게 생각했죠. 우리도 에너지 넘치는 30대가 활개칠 수 있는 분위기가 돼야 합니다.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이 마음껏 일하도록 말이죠.” 로봇축구와 함께 그는 뜻을 펼치기 시작한 셈이다. 축구하는 로봇에 그가 맡긴 임무는 당장 돈이 되는 산업로봇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과학기술에 대한 막힌 생각에 도전하고, 색깔만 바뀐 교복에 어김없이 갇혀 있는 청소년들의 꿈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로봇 세상’을 현재에 알리는 것이다. 온 가정이 마이봇을 활용할 날이 온다 김 교수는 최근 ‘마이봇’이라는 이름의 로봇에 푹 빠져 있다. 컴퓨터에 바퀴를 달고 인터넷을 통해 원격조종하도록 만든 마이봇은 화면에 주인의 얼굴이 떠오르고 주인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또 로봇의 감각기관이 수집한 정보가 주인에게 전달된다. 먼 거리에서 또 하나의 ‘나’로서 움직이며 다른 사람과 대화도 하고 물건도 사는 개인용 로봇이다. 지금은 개발을 마치고 특허를 출원했다. 곧 산업화가 가능하다. “휴대폰이나 텔레비전처럼 온 가정에서 마이봇을 활용할 수 있는 날이 곧 옵니다. 인간 삶의 질에 질적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퍼스널 컴퓨터 다음은 퍼스널 로봇이고, 정보화 시대 다음은 로봇 세상입니다.” 밭고랑을 헤치며 공을 차던 소년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폴로호가 달에 착륙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꿈꾸는 과학자가 되어 로봇축구대회를 열었다. 거기에 이르는 길은 밭고랑 같은 길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격언대로, 남이 다져놓은 길을 떠나(leave the beaten track) 달려왔다. 그런 주법을 지닌 선수에게, 아이디어만 있으면 앞서갈 수 있는 로봇 분야는 최적의 트랙이었다. 그리고 20세기의 끝에 이르렀다. 미국의 바론출판사는 김 교수를 새로운 세기의 리더 50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끊임없이 샛길을 두리번거리는 그는 이제 어떤 길을 찾아낼까. 로봇 세상으로 가는 지름길?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입산’에 은퇴는 없다 히말라야 등반 35년의 증언자, 등정주의를 경멸하는 신앙파 산꾼 (사진/까까머리 고교 신입생 시절부터 산을 탄 그는 지금은 등산전문 월간지 사람과 산 의 편집인이다.) 그는 산에 가고, 산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산을 주제로 한 책을 쓴다. 산이 없었으면 그는 심심할 뻔했다. 그렇지만 그가 산에 가는 까닭은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산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산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을 찾는다. 깊은 산에 들수록 제 몸을 겨누는 눈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그는 등산(登山)이라 하지 않고 입산(入山)이라고 말한다. 바위 산, 흰 산 그리고 푸른 산 남선우(43·월간 사람과 산 편집인)씨는 이를테면 뼛속까지 산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30년 산을 탔고, 죽는 날까지 산에 가리라는 이 산사나이는 “산에선 은퇴란 없다”고 했다. “왜 산에 가느냐는 물음엔 산에 가는 사람 수만큼의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건강에 좋다니까 가는 취미파, 한계를 극복하고 기록을 뛰어넘으며 자기존재를 확인하는 스포츠파, 이런 부류들을 경멸하며 산은 곧 인생이라고 관조하는 철학파, 미쳤다는 표현 외엔 설명이 안 되는 신앙파 등, 이 네가지 요소가 경우에 따라 밀도를 달리하며 이리저리 섞일 텐데 제 경우는 마지막 신앙파쯤에 자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산을 타게 된 건 우연이었다. 양정고에 입학한 까까머리 신입생은 어느 날 산악부 옆을 지나다가 “야, 너 이리와봐” 한마디에 납치되다시피 산악부원이 되었다. 첫 산행지였던 인수봉을 그는 잊을 수 없다. 그 산행이 한 남자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첫눈에 불 같은 사랑에 빠져버린 것처럼, 첫발을 내딛는 순간 산에 미쳐버렸습니다. 고등학교 3년을 한주도 빠지지 않고 산에 갔으니까요. 그땐 산타는 분위기가 그랬어요. 산도 좋았지만 사람들이 더 기가 막혔죠.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사람 향기에 취했던 시절입니다.” 그에게 다가온 첫산은 ‘바위 산’이었다. 밥도 안 먹고 바위에 붙어 살았다. 바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 아슬아슬 불확실한 삶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10년쯤 지나니 ‘흰 산’이 보였다. 중앙대 산악부장을 지낸 뒤 그는 알프스며 히말라야의 하얀 봉우리가 부르는 소리에 시달렸다. 해외원정 시대가 열린 것이다. 82년 한해에만 마칼루와 아이거 북벽, 마터호른, 푸모리로 달려갔다. 88년에는 에베레스트를 혼자 올랐고, 92년에는 초오유와 시샤팡마를 잇달아 등정했다. 평지도 발끝으로만 걸어다녔던 집념의 훈련으로 이룬 결과였다. 마흔줄에 접어든 그는 지금 ‘푸른 산’에 빠져 있다. 돌고 돌아 우리 산, 백두대간의 아름다움에 홀린 것이다. “등산이란 계산된 모험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죽음과 맞서서 얻는 깨달음이 크지요. 산은 불투명한 이 세상과 같습니다.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 외엔 확실한 게 없죠. 기후 변화, 등산로 변경 등 변화무쌍한 자연의 조화가 앞을 가로막을 때가 많기 때문에 죽음까지도 자기가 선택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순응할 것인지,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순간순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삶과 닮은꼴이라 볼 수 있죠. 어디를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보다는 어느 길을 따라 어떤 과정을 거쳐 올라가느냐가 더 중요한 겁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등정주의(登頂主義)에 빠져 있는 우리 등산계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올림픽 기록경기처럼 누가 더 빨리, 누가 더 높이 올랐느냐를 따지는 태도는 올바른 등산문화 정착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지난 9월 말께 몇몇 신문이 사회면 구석에 1단 기사로 처리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히말라야 탈레이사가르 북벽에 도전했다가 정상을 눈앞에 두고 떨어져 숨진 신상만, 최승철, 김형진 세 산악인 얘기입니다.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산악인들은 그들이 조용히 추구한 진정한 알피니즘, 모험과 도전 정신을 기렸습니다. 1년이면 수십개 원정대가 해외의 유명 봉들을 오릅니다. 그러나 진실이 가려질 때가 많습니다. 등정주의 때문입니다. 어렵고 새로운 코스에 도전하기보다는 풍부한 물자와 완벽한 안전망, 안이한 등산로 선택으로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선전이나 하는 등산은 진정한 알피니스트가 갈 길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우리 산악인들도 등정주의보다는 등로주의(登路主義)를 따라야 할 때라고 말한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등산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건 이 사회가 오랫동안 앓아온 속도주의와 물량주의 질환의 반영이기도 하고, 개인보다 조직이나 단체에 치중하는 경직된 집단주의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가 올 5월에 지난 35년에 걸친 한국 히말라야 원정등반사인 역동의 히말라야 를 펴낸 것도 이런 등정주의에 물든 산악인들의 구태의연함을 깨고픈 절실함 때문이었다. 그는 700쪽짜리 두툼한 이 자료집에 히말라야 111개봉에 2170명 한국 산악인들이 도전한 모든 기록을 시시콜콜 담았다. 산에 오르는 건 처음 가보는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가장 순수해야 할 탐험과 모험의 길이 성과주의의 썩은 물에 잠기는 걸 남씨는 참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등반성(登攀性)을 칠 때 드는 몇가지 잣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선구성입니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걸 높이 삽니다. 둘째는 불확실성입니다. 한치 앞에 뭐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불안감, 공포를 이겨내고 미지의 세계를 헤쳐나가는 정신입니다. 셋째가 곤란성인데 산의 경사도라든가, 날씨 변화가 큰 걸 극복하는 걸 말합니다. 이런 과정을 과학발달로 제조된 각종 기계나 숙련된 짐꾼인 셀파의 힘에 의존해 생략한 걸 등산이라 부를 순 없죠.” 올라가는 용기, 내려오는 용기 그는 등산의 가치가 “보다 어렵고, 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아가는 데 있다고 했다. 그는 언제든 집과 일터를 버리고 산으로 떠날 수 있는 걸 용기라고 불렀다. 그럴 용기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용기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올 수 있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등산학교에 강의를 나가면 이 용기를 강조합니다. 정상에 오르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붙박이처럼 고여 있던 당신의 집과 일터를 박차고 떠나는 것, 알 수 없는 땅으로 당신의 몸을 한발 한발 들이미는 것, 꼭대기로 전진하다가 다시 하산하는 것, 말할 수 없는 모험심에 달려들었다가 다시 고착된 땅으로 돌아가는 것, 이 모든 과정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이걸 못하면 목사도 안 한다” 모든 차별과 경계를 허무는 예수의 복음, 잘린 손가락들을 향한 기도91-1 (사진/목사 박천응씨) 그의 기도는 인도네시아말로 동시통역된다. 자리를 함께 한 외국인노동자 대여섯명이 함께 머리를 조아린다. 신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이슬람교도이든 무신론자이든, 두 동료의 잘려나간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위한 기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에 이어 박천응(40) 목사는 신신당부한다. “꼭 장갑을 껴. 장갑, 글러브, 알지? 그래야 안 아퍼. 춥게 놔두면 많이 아퍼.” 동시통역되는 그의 기도문 그는 어린 시절부터 광적인 목사 지망생이었다. 장남인 그를 목사로 만드는 게 소원인 부모님의 뜻을 알고 난 뒤 장래희망란에는 꼭 목사라고 적었다. 수업시간에 몰래 다른 책을 보다 혼이 나곤 했는데, 선생님이 그의 무릎에서 뺏은 책은 만화나 소설이 아닌 성경이었다. 교회 문이 닫히면 ‘담치기’를 해서라도 들어가 홀로 기도했다. 중학생 때부터 대학생 기독교 서클에 참여해 성경을 연구했다. 이름난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는 건 기본이었다. (사진/안산시 원곡동에 있는 외국인노동자센터에는 박 목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하나님, 이 사람들이 돈을 벌러 왔는데, 돈은 벌지 못하고 손을 다쳤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슬픔이 없게 위로하시고 보상도 잘 받을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지켜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랬던 그가 ‘목사’보다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이란 직함을 앞세우고 있는 건, 교인들보다 외국인노동자들을 더 챙겨주느라 담임목사 자리까지 내놓은 건 무슨 까닭일까.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이주한 노동자였기 때문일까. 그의 말대로, 외국인들을 만나 말레이시아사람이라고 소개하면 의심없이 받아들여지는, 동남아시아적인 외모가 일체감을 주는 탓일까. 81년 신학생이 되고 나서 교회와 교회 지도자의 바른 상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야에 ‘세상’이 들어왔다. 그가 목격한, 잊지 못할 세상의 한 단면. 대학입학 이듬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오징어와 땅콩을 파는 노점상이었다. 그가 어머니를 만나러 갔을 때 구청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애원하는 어머니, 손수레를 끌고가는 단속반, 물건만이라도 놔두고 가라고 애원하는 어머니, 뿌리치는 단속반. 가슴 한켠에 피눈물이 스미면서,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저들도 사람인데, 왜 저런 식으로 먹고 살아야 할까.’ 그는 노동운동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목사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꿈을 거스르기 힘들었다. 공단지역에 들어가 노동자, 빈민과 함께 하는 목회를 하기로 했다. 그게 성경의 핵심부로 파고드는 일이라고 여겼다. “예수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인 이야기 아시죠. 그런데 그 5천명에 고아나 과부는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당시에 사람 수를 셀 때도 제외될 만큼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의지할 곳 없는 나그네의 편에 서라고 예수는 말씀했습니다.” 89년 반월공단이 있는 경기 안산으로 내려와 교회를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부색이 다른 허름한 노동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맞고 다치고 월급 떼이고 사기 당하고…. 그들이 바로 ‘나그네’였다. “한 외국인노동자가 손목이 잘려 입원했는데, 낯선 한국사람이 찾아와 따뜻하게 돌봐주더랍니다. 보상금 받는 것도 도와주고. 그래서 통장이고 뭐고 다 맡겼더니 보상금 가지고 달아났어요. 나중에 붙잡히기는 했는데, 이 외국인노동자 하는 말이 ‘그래도 저 사람 믿고 싶다’는 거예요. 의도가 뭐였든 병원에서 그처럼 친절하게 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누군가 그들을 돌봤으면 하는 생각에 이 단체, 저 단체 뛰어다니며 상의했다. 그래도 선뜻 나서는 곳이 없자, 말 꺼낸 사람이 짐을 질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를 만들고 지원단체를 조직하고 그들 스스로 뭉칠 수 있도록 도왔다. 이제 상담소에는 늘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물론 회의가 찾아든 적도 있었다. 국제연대를 위해 동남아 국가를 돌아보던 중 우리나라에서 돈을 벌어 귀국한 노동자 일부가 현지에서 악덕기업주나 매춘업자로 변신해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노여움도 일었고, 이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던져보았다. 그의 결론은 그래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돈을 좇아 우리나라를 찾아온 사람들임을 인정하고, 돈을 어떻게 벌고 써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든 다른나라에서든, 우리나라 사람이든 다른 나라 사람이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게 변함없는 그의 목표였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이 박 목사를 초대했다. 영문도 모른 채 푸짐한 식사를 마친 뒤에야 그는 보았다. 평소 산재보상금을 받으면 동료들에게 한턱 내겠다고 말하던 한 외국인노동자의 손가락에 감긴 붕대. 그 순간 울컥 올라오던 무엇인가를 쓸어내려 가슴에 담았다. “예전엔 민중을 계급 개념으로 이해했지만 이제 또다른 차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고난받는 자들, 힘이 없는 자들, 소수자들, 그들이 민중입니다. 그리고 진보는 바닥을 지향점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지금 가장 밑바닥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까마는, 외국인노동자들이 강력한 조직을 이뤄 일정한 힘을 갖게 된다면 박 목사는 한 계단 아래로 다시 내려갈 것이다. 틀림없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탐탁지 않다. 교회에서 집도 나오고 자가용도 나오는 목사가 수두룩한데…. 아직도 빌딩 청소부로 일하는 어머니에게 그는 “이걸 못하면 목사도 안 하겠습니다” 하고 ‘협박’한다. 그러면 돌아오는 어머니 말씀. “목사도 하고 그것도 해라.” ‘국경없는 마을’ 야심찬 꿈 부인이 닥치는 대로 부업을 해 교회를 세웠고, 집에 쌀이 떨어지는 날도 있었다. 1년 전까지는 월급을 챙길 수 없었다. 얼굴없는 이로부터 쌀 포대와 10만원이 든 봉투를 전해받고 ‘까마귀밥’을 받았다고 기뻐한 일도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엘리야가 광야로 피신하자 하나님이 까마귀를 시켜 먹을 것을 물어다줬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세속의 타락한 제왕들을 신의 음성으로 꾸짖고 정의와 평화를 설파하던 선지자의 구실이 자신이 담당해야 할 목사의 몫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래서 그가 있을 곳은 궁전이 아니라 공단이다. 2000년에는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가 있는 원곡동 785∼798번지 일대에 ‘국경없는 마을’을 일군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금도 동남아 각국의 식당들이 자리잡은 이곳에 외국인노동자들이 의료 교육 탁아 등을 함께 해결하는 공동체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모든 차별과 경계를 허무는 예수의 복음”을 실천하는 그에게 화석화한 신앙의 금기쯤이야 껍데기 같은 것일 터. 그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손을 내밀었다. “다음번엔 소주 한잔 합시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나는 엉터리 사진사입니다” 촌놈 근성으로 달려온 ‘잡초’… “바닥인생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사진/다큐감독 조재형씨) 생면부지에 돈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찾아와 대뜸 1천만원을 빌려 달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반대로, 당신이 빌리는 쪽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조재형(40)씨의 방식은 이랬다. 무조건 “1천만원만 빌려 달라”고 했다. 당연히 예상되는 “미친 놈”이라는 반응은 무시했다. 다시 1천만원을 요구하고 상대편이 거부의 의사표시를 하려는 순간 말머리를 잡아챘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정치 이야기도 하고 자기가 몸담았던 노동운동 이야기도 했다. 상대방은 야당인사였던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다시 돈을 요구했다. 아직 상대편 표정이 단호했다. 벌어지려는 그의 입을 다시 틀어막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놈이지만 1년 안에 성공하는 걸 보여주겠다”고 설득했다. “당신은 호래자식”이라고 욕도 했다. “나는 당신 아버지처럼 민주화 투쟁을 한 사람이다. 나를 욕보이는 건 당신 아버지를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2시간을 ‘공략’했다. 그리고 질려버린 상대편으로부터 100만원짜리 수표 10장을 무이자로 받아냈다. 히트작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회사에서 해고된 92년의 일이었다. 새 일을 찾다 영상 분야에 끌렸다. 비디오도 찍고 홍보물도 만드는 사업을 구상했다. 사업자금을 꾸러 간 친구에게서 돈많은 지인을 소개받고 무작정 그의 가게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렇게 ‘새세대영상기획실’이 만들어졌고, 그는 촬영기술을 배워가며 찍기 시작했다. 이 일이 그의 몇번째 직업인지는 세어봐야 안다. 그는 중학교 때 학업을 접고 고향인 전북 고창을 떴다.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사내자식은 넓은 데로 가야한다. 여기 있으면 평생 지게 밑에서 썩는다”며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군데군데 기운 운동복을 입고 서울로 올라온 소년 조재형은 구로공단의 한 공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잘려나가는 동료들의 손가락을 봤고 그 자신도 글라인더 날에 무릎살이 찢겼다. 몸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공장을 나온 뒤 직업사전을 쓸 작정이라도 한듯 온갖 일을 전전했다. 때밀이, 술집 웨이터, 생선장수, 무술사범, 자동차 탁송, 택시 운전…. 나중에 세어보니 37가지였다. 그 가운데 택시 기사 시절은 그의 정신에 하나의 결절점을 이룬다. 그때까지 그의 우상은 ‘전두환 장군’이었다. 선데이 서울 에 난 전씨 기사를 오려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 삶의 고단함을 견디느라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그는 몸으로 그 의미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바야흐로 칼바람에 풀들이 일어나던 87년이었다. 인천 연안부두 뒷골목에서 폭력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여기며 살기도 했던 그였지만, 택시회사의 횡포와 같이 제도화한 폭력에서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합승하라고 교육해놓고 합승이 적발되면 운전사를 해고했다. 그것도 평소 받아둔 ‘백지사표’를 이용해 자진 퇴사하는 형식이었다. 또 1년 이상 근속자에게 주는 상여금이 아까워 1년마다 백지사표를 수리하고 재고용했다. 나이 많은 운전사들은 한 회사에 7년 이상 다녀야 얻을 수 있는 개인택시 면허를 바라보며 회사쪽의 횡포를 묵묵히 참고 있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또다른 직업을 선택했다. 노동운동가였다. (사진/오랜만에 찾은 방송대 교정에는 그를 알아보는 후배들이 많았다) 운동판 시절 그가 노래말을 지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는 이제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졌다.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워 술잔에 눈물을 떨구던 선배 운전사가 택시를 잡으며 “평양!”이라고 외치던, 가슴 뭉클한 기억으로 빚어낸 노래다. 지금까지 노래말 쓰기를 계속하게 만드는 촉촉한 감성의 연원을 그는 “촌놈이었다는 것”에서 찾는다. 60∼70년대의 살기 팍팍한 농촌, 나무해 오는 아버지의 지게에 한아름씩 걸쳐 있던 진달래 빛깔로 어린 시절 기억은 벌겋게 물들어 있다. 어머니는 또 얼마나 큰 스승이었던가. 주경야독으로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할 때 어머니가 보내온 소포에는 훈제 돼지고기와 닭고기, 그리고 편지 한통이 들어 있었다. “장헌 내 아드라.” 철자법에 어두운 어머니 편지는 그의 고단한 몸에 채찍이 됐다. 밤 12시가 넘도록 일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반 수업을 들으며 1년 반 만에 고입과 대입 검정시험을 통과했다. 7년여를 헤매던 뒷골목 유흥가를 빠져나와 검정고시생이 된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대의 방장한 혈기는 여한없이 술에 빠져들고 하룻밤에 두번씩 여자를 바꾸기도 하는 음울한 쾌락을 놓으려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 가는 차창으로 보이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손가락을 벽돌로 내리쳤다. 노동운동을 하다 노동법을 배우고 싶어 방송대에 진학한 게 89년 일이다. 91년에는 출석수업 폐지 움직임에 맞서 ‘공동투쟁연합’을 조직해 싸웠고, 92년에는 동아리 ‘청년영화패’를 만들었다. 이듬해에는 총학생장에 당선돼, 어렵게 시작한 ‘새세대영상기획실’의 장비들을 팔아가며 학생회 활동을 했다. 학생회 일을 그만둔 뒤에는 다시 스튜디오를 차렸다. 예의 ‘무대포식’ 창업이었다. 일단 장비들을 주문해 가져오게 한 뒤 대금은 서너달 뒤 갚겠다고 선언했다. 입이 벌어진 주인을 또 ‘공략’했다. “곧 지방의회 선거가 시작되지 않느냐. 전국의 후보들이 몇명이냐. 선거용 사진을 찍으면 돈 갚을 날은 금방이다.” 그의 장담은 실현됐고 이제는 직원까지 둔 번듯한 스튜디오의 주인이 됐다. 요즘 그의 관심은 온통 다큐멘터리 작업에 쏠려 있다. 그의 카메라가 찾아가는 이들은 탄광촌 진폐환자, 탈북자, 장애인들이다. 최근엔 인도의 ‘불가촉(不可觸) 천민’과 그들을 돕는 불교단체인 ‘JTS’(Joint Together Sociality)를 취재했다. 그가 한가위 연휴를 이용해 강원도 태백에 사는 진폐증 환자를 찾아갔을 때 본 장면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라면 하나를 이불 속에 감춰뒀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그걸 뺏으려 망치를 들고 덤비던 모습.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기회면에서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불평등이 생기는 건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못견딜 정도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폐증 환자 가족의 충격적 기억 척박한 땅을 골라 뿌리내리고 자란 뒤 다시 씨앗을 날려 다른 자리를 찾던 그는 “이제 제자리를 찾았다”고 말한다. 정주할 줄 모르던 욕심과 끼를 담아낼, 사회에 던지고 싶은 발언을 담아낼, 최적의 도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참신한 비유가 아니어서 그에게 미안하지만, 그는 잡초가 아닐까. 고상한 자태로 자랄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화초들은 그에게 사치일 것이다. 모양 사납더라도 어떻게든 뿌리와 잎을 뻗어 생명의 가치를 웅변하는, 화사한 꽃을 피우지 못하는 세상의 뭇나무와 풀과 나란히 어깨를 겯는, 그 뿌리가 늘 인간에 대한 사랑 한줌을 움켜쥐고 있는 착한 식물. “서울역 지하도에서 자는 5살, 7살짜리 남매가 있습니다. 심한 열감기 때문에 흘리는 그 어린 눈물을 찍기 위해 헝겊에 몰래 싼 카메라의 셔터를 찾습니다. 낯익은 나를 발견한 어린 눈에 환한 미소가 피어납니다. 눈물을 닦아주느라 차마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나는 엉터리 사진사입니다.” 인터뷰 끝에 그가 내민 사진관 홍보용 명함 뒤에서 가장 적실하게 그를 표현하는 문장을 발견했다. 글 박용현 기자 사진 강창광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약골의 도발! “그의 사이트에 들어갔다간 당신의 컴퓨터가 부서질지도 모르나니…” (사진/아나키스트 박노식씨) 인터넷 브라우저에 'http://members.tripod.com/~anarclan'을 입력하고 엔터. 그러면 한 아나키스트의 홈페이지가 열린다. 먼저 정중한 경고문부터 읽어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사이트는 당신에게 심한 구토와 설사 그리고 정신장애를 일으켜 당신도 모르는 발작으로 당신의 컴퓨터를 부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정신연령이 미숙한 사람들은 당장 돌아가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홈페이지 안으로 들어가보자(그러므로 정신연령이 미숙한 사람들은 이 글도 더이상 읽으면 안 되겠다). 국가 권위를 공격, 공격하라! 과연 무슨 내용이 있기에 이런 강력한 경고를 보냈을까. 홈페이지 목차를 보면 대강 이렇다. 아나키즘/코뮤니즘/혁명이론/급진정치. 페미니즘/연애/섹스/성/포르노. 약골이 쓴 글모음. 코리안 아나키스트 웹고리. 당신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극단적인 내용들. 흑인영어….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초보자에게 적합한 아나키즘 입문, 국가의 무력독점과 테러리즘에 대한 치열한 논쟁, 자유연애를 감행하자, 마리화나 사진전 등의 제목이 펼쳐진다. 이 가운데 하나를 읽어보자. “소위 기득권이란 것은 생긴 이래 계속 유지돼왔다. … 마치 이 좆같은 사회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기득권에 의해 종횡으로 짜여진 그물과 같다. 도대체 난 그러한 코리아사회에서 약자와 강자가, 노동자와 자본가가, 남자와 여자가, 순수 한국혈통과 혼혈 및 외국인이, 정상(다수)과 변태(소수)가 평등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소수자들과 다양한 의견, 개인의 자발성을 억누르는 국가라는 이름의 권위가 이 홈페이지의 공격대상이다. 기득권을 가진 쪽에서 보면, 뭔가 ‘불온한’ 기운이 확 끼칠 법한, 이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홈페이지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자신을 ‘약골’이라고 소개한다. 영어로는 Dopehead. 마약과 머리의 합성어다. 그는 스스로 “사람들이 튀기 혹은 깜둥이라고 부르는 흑인혼혈아”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류가 행사해온 폭력, 사회기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획일이라는 폭력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내가 다르다고 사람들은 나를 멸시하고 손가락질해왔죠.” 게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가물가물하다. ‘약골이 쓴 글모음’을 보면 남자가 쓴 것 같은 글이 있는가 하면, 어떤 글에서는 분명 여성인 화자가 능청스럽게 잘도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나 막상 실제 얼굴을 대하니 그렇지 않다. 그는 ‘순수 한국혈통’에 ‘남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일부러 비틀어놓은 이유가 흥미롭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머리 속에 주류적인 사고방식이 각인돼 의식없이 하는 말에도 약자·비주류에 대한 폭력이 들어가게 됩니다. 권위가 아닌 자율, 경쟁이 아닌 상호부조라는 아나키즘의 원리가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생각 자체를 강자·주류쪽에서가 아니라 약자·비주류쪽에서 해야겠다는 뜻에서 여성·흑인혼혈의 입을 빌린 겁니다. 컴퓨터 용어로 말하면, 아나키즘이라는 운영체제(O/S)를 제 머리에 새로 인스톨하는 것이죠.” 특히 그는 우리나라 아나키스트의 제1 적수로 혈통의 순수성에 집착하는 민족주의를 꼽는다. 그는 흑인혼혈인 친구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꼈던 차별과 멸시의 폭력을 익히 알고 있다. 한-일 경기가 있을 때마다 표출되는 스포츠 민족주의는 히틀러 이상의 인종차별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흑인혼혈이라는 우리 사회 소수자에 대한 관심 탓이었는지 그는 구제금융 한파로 중도에 접어버린 미국 유학생활에서 흑인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우리나라에서 바라보는 미국은 백인남성 중심의 미국 주류사회일 뿐이라는 사실이 싫었다. 흑인들과 어울려 그들의 문화를 호흡하면서 저항 정신이 깃들인 역동적인 문화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백인 중심의 영어와 문화, 이데올로기만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적 식민현상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가올 국제사회에서 같이 어울려 살아나가야할 흑인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을 치유하기 위해” 그의 홈페이지에는 흑인영어 강의가 연재되고 있다. 청소년 시절 머리를 기르고 헤비메탈을 듣고 청바지를 찢어입는 정도의 반항밖에 할 줄 몰랐던, 대학 시절에도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 청년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96년 단재 신채호의 아나키즘을 접하고 난 뒤부터다. ‘아나키스트가 말하는 게 참 좋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생각을 키우기 시작했다.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끔찍한 자본주의의 현실, 한 나라에서는 식량이 남아돌고 다른 나라에서는 부지기수로 굶어죽는 국제사회의 비극, 자본주의에서든 사회주의에서든 일부에 귀속된 채 끈질기게 생명력을 발휘하는 권력. 아나키즘은 그 대안이 될 것 같았다. 국가가 없다면, 좀도둑은 있을지언정 전쟁으로 인한 대량학살은 없을 테니까. 얼마 전 그가 다니는 학교에서 겪은 일은 국가가 개인의 자율적인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는 게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끔 했다고 한다. 강의실이 있는 건물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자는 주장이 나와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투표에 부쳤다. 투표 결과에 따라 금연이 실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 건물을 금연지역으로 규정한 정부의 방침이 내려와 이 건물에는 커다란 금연딱지가 붙었다. 그는 이처럼 국가의 의지가 개인의 영역에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그대로 관철되는 것은 ‘웃기는 일’을 넘어 일종의 ‘테러’라고 여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일상 생활에 국가권력의 횡포, 즉 테러리즘이 일상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전통적 실천방식을 따라 국가의 힘을 최대한 저지시키는 자기완결적 공동체를 지향한다. 뜻이 맞는 몇몇 지인들과 공동체 생활을 시도하다 재정적인 문제에 걸려 실패했지만, 곧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그가 ‘대동놀이’라고 부르는 공동체 생활은 자못 파격적인 면이 있다. 상대방을 물건처럼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연애·결혼제도를 벗어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서로를 공동체의 또다른 성원, 나와 같은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형태든 산발적인 공동체 실험을 거쳐 좀더 나은 게 정착되는 과정을 통해 아나키사회의 물꼬가 틔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마리화나는 마약이 아니다? “마리화나는 중독성이 없다. 그런데 정부가 금지하니 의심없이 마약으로 받아들여진다. 법이란 얼마나 자의적인가”라든가, “국가권력의 횡포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테러를 인정한다. 다만 그 수단이 왜 필요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한 사려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들은 한발 더 나아가 있다. 약골이란 이름부터가 얼마나 도발적인가. 그런 만큼 ‘위협’도 느낄 법하다. 요즘엔 뜸하지만 홈페이지를 개설한 98년에는 “당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거나 “정보기관에서 당신의 신상을 알고 있다”는 등의 글들이 게시판에 올라오곤 했다. 자료가 몽땅 삭제되기도 했다. 서비스업체의 자체 검열에 걸린 것이다. 그뒤 미국의 서비스업체로 아예 둥지를 옮겼다. 그는 2년여 동안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나름대로 아나키즘의 원리를 실험한 결과 더욱 큰 믿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자발성을 존중하기 위해 운영자의 임의삭제(현실의 감옥에 해당한다고 비유한다)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방문자들이 처음엔 멋대로 욕설 등을 남기고 사라지곤 하다 점차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현재 홈페이지를 통해 알게 된 여남은명이 뜻을 나누는 친한 사이가 됐다. 그의 홈페이지를 빠져나오기 전에, 혹은 들어가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돌아서기 전에, 그의 부탁 한 가지만 더 들어주자. “떠나시면서 이것 하나만큼은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가치가 중요하다면 남의 가치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현실 공간에서 약골은 “모든 언어는 우열을 따질 수 없다. 미개언어란 없다”고 말하는 언어학 석사과정의 박노식(28)씨다. 한겨레 21 박용현 기자의 인물탐험 때묻지 않은 거울처럼 4컷만화 ‘깽패’ 연재하는 물리학자, 참선과 검도로 마음을 닦고… (사진/연세대 박홍이 교수) 박홍이(56) 연세대 교수(물리학)의 연구실에 쌓여 있는 자료 뭉치 곳곳엔 만화가 그려져 있다. 늘 만화의 아이디어를 궁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남은 흔적이다. 물리학회에서 내는 잡지에 네컷짜리 만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깽패’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돼간다. 그동안 그린 만화를 곧 한권의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깽패는 ‘새 판을 짜는 사람’이란 뜻을 담고 있다. 영어로는 ‘선각자’(prophet)로 옮긴다. 그가 정장을 입지 않는 이유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영 아니다 싶은 것이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 돈이면 다라고 믿는 것, 자기만 소중하게 감싸는 것…. 그래서 그의 만화는 주로 다양성과 중용에 대한 여러 가지 각도의 생각으로 채워진다. 예를 들면 똑같은 물 한동이라도 놓인 곳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거나, 같은 거리를 이동하더라도 방법은 여러 가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한 발상 같지만 그것을 길어올리고 몸에 익히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는 정장을 입지 않는다. 외피로 사람을 규정짓는 이 사회의 못된 관행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허름한 옷을 입고 동사무소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직원들과 대판 싸움을 벌인 적도 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대학교수에게도 그랬을까. 사람들이 다른 건 각자 맡은 직분일 뿐인데, 세상은 그것으로 사람 자체의 높낮이를 견주려 한다. 동창회에서 만난 출세한 친구들이 우쭐해하면 그는 ‘근본이 변했다’며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 자신도 ‘박 교수’라는 호칭 대신 중학교 때 별명인 ‘물코’로 불리고 싶어한다. 학교에서도 교수와 직원이라는 구분을 지우고 행동한다. 만화의 아이디어 가운데 상당부분은 성경이나 법구경, 주역 등 경전에서 나온다.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생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지금도 아침마다 참선에 빠져들다 일요일이면 교회를 찾는다. 그가 매기는 인생의 점수표에서 참된 종교생활은 50점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좋은 반려자 20점, 2세를 잘 키우는 것 10점, 스스로 좋아하는 직업 10점, 앞의 것들을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 5점이다. 그는 말한다. “다 채우면 95점짜리 인생이요, 종교와 반려자만 잘 만나도 C학점은 된다. 종교는 바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그는 참선을 할 때마다 ‘나는 남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되뇌고, 성경에서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오히려 조금 모자란 정도가 최선”임을 배운다.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초대 기독교 교회식의 삶이 좋다는 그를 주위에선 공산주의자라고 희롱한다. 그러나 어릴 때 그의 선친이 몸 속 깊숙이 심어준 씨앗이 자라, 이젠 체질처럼 터잡은 그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 그의 선친은 9살 때부터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는데, 유난히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그에게 한달 용돈을 준 뒤 10분의 1을 도로 떼어내 고아원에 보내도록 했다. 돈이 없어 수학여행에 못 가는 친구들의 명단을 적어오게 해 그 비용을 담임선생님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겨울이면 입고 나간 코트를 걸인에게 벗어주고 돌아오는 일도 종종 목격했다. 그가 ‘연세 나눔동네’라는 모임을 만든 내력도 거슬러올라가면 선친의 가르침에 닿아 있다. 교수 200여명과 직원 50여명이 참여하는 이 모임은 다달이 성금을 거둬 소년소녀가장이나 가난한 노인들을 돕고 있다. 그는 자녀들 친구 중에 수학여행을 못 가는 아이가 있으면 도와주기도 하고, 찾아온 손님이 탐하는 책이 있으면 들려보내고 자신은 새로 사서 본다. 긍정적 사고방식 이란 책은 그렇게 10번을 샀다. 그가 넉넉해서 이러는 건 아니다. 선친의 사업이 잘못되면서 대학 졸업 뒤 자가용 운전기사로 취직해야 했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주인 집에서 미국행 비행기표 한장을 마련해준 덕에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11년 유학생활을 버텼다. 초라한 차림의 동양 청년에게 역시 보잘 것없는 멕시코계 노동자들이 건네주던 닭다리 한쪽의 맛을 잊지 못한다. 그의 삶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건 검도다. 중학교 때부터 익혀온 검도는 그의 예찬대상 1호다. 만나는 사람마다 “검도 하세요” 권하고 “검도 시작하면 죽도를 보내주겠다”고 유혹한다. 환갑을 앞둔 나이로 믿기지 않을 만큼 곧고 단단해뵈는 몸은 검도 덕이다. 볼썽사나운 꼴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도 그렇다. 지하철에서 취객 3명이 한 여성의 치마를 들추며 추한 짓을 하는데도 사람들이 못 본 척하고 있을 때 그가 혼자 나서서 이들을 혼내준 적도 있다. 길가다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자초지종을 들은 뒤 시비를 가려줘야 속이 풀린다. 주먹이 무서워 할말을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40년을 한 검도의 단순 동작도 때론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배우고 배워도 모자라는 바가 있는 게 검도고, 겸손을 모르면 그만둬야 하는 점에서 검도는 물리학과도 닮았다. 물리학을 하려면 어린애 같아야 한다고 한다. 미리 틀을 씌워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야, 순진한 눈으로 봐야 자연은 그 원리를 보여준다. 물리학자의 마음은 때가 안 묻은 거울이어야 한다. 동시에 3권의 책을 읽는다 그렇다면 공부도 수도인 셈. 그는 정년이 되기 전 국제적인 유명학술지에 3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이제 90편가량이 남았다. 그리고 항상 3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다. 집에서 한권, 연구실에서 한권, 주머니 속에 한권. 아침마다 영어공부도 1시간씩 한다. 이왕 영어를 할 바엔 미국사람보다 잘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몸담고 있는 대학이란 곳은 그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풍조를 죄 끌어다 놓은 집합소 같다. 훌륭하게 사는 길은 오직 공부라는 생각, 돈이 되는 분야만 키우려는 생각, 사람과 사람을 층지우는 생각…. 그가 이 짧은 생각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기합소리 한마디. “몇해 전 재가불자협회에서 염을 배웠습니다. 이모님 돌아가셨을 때도 내가 염했고, 대학병원에 온 행려병자 시신도 염을 해봤습니다. 염을 해보면 삶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시신을 닦고 묶고 옷을 입힌 다음 저승가는 노자를 가슴에 묻어주는데, 10원짜리 하나 넣고 천냥이요, 또 하나 넣고 이천냥이요, 또 하나 넣고 삼천냥이요, 합니다. 결국 30원 가지고 가는 게 인생입니다.” 사진 강창광 기자 한겨레 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번개칼, 마음을 쳐라 20년 옥바라지’ 아내가 밀어준 검도관 운영… 칼바람 휘날리듯 붓글씨도 일품 (사진/도복을 정갈하게 입고 죽도를 든 그는 깃털처럼 가볍고 독수리처럼 날렵해 보였다.) 검도 사범 오병철씨 그는 무기수였다. 징역 20년을 살았다. 삼십 초반 청년으로 옥에 갔다가 오십 넘은 장년으로 세상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 사회의 바탕이 별로 변하지 않았음을 알고 슬퍼했다. 다시 옥 밖에서 살아온 지 10년. 지난 6월30일 가출옥 상태를 벗고 온전한 시민으로 돌아온 그는 인생의 가운데 토막을 뭉텅 압류당해 잃어버렸던 시간을 찾아가고 있다. 지적 호기심이 유별난 그는 지금도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그 집착을 털어버리느라 힘들다. ‘즐겁게 보낸’ 무기수 생활 “내가 뭔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던가 정리하고픈 욕구가 커요. 한국철학사도 써보고 싶고, 시도 쓰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욕심 부리면 몸에 장애가 생긴다는 걸 알면서도 이거 아니면 내가 늙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병철(60)씨는 지금 검도관 관장이다. 20년을 한마음으로 기다려준 아내가 그가 하고자 하는 일 가운데 유일하게 밀어준 것이 검도관 운영이었다. “내가 바깥에 있었다면 난 그이처럼 못했을 것”이라고 고마워하는 그 부인은 햇빛출판사를 이끄는 윤일숙씨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마포 공덕동에 있는 도장으로 나가 제자들과의 수련으로 아침을 연다. 붉은 글씨로 강산을 휘달리듯 큼직한 마음 심(心)자 간판이 인상적인 제심관(制心館·02-3273-3355)이 그가 검도를 가르치는 도장이다. 탈의실 한켠엔 가림막으로 나눠진 글씨 쓰는 조그만 방이 있다. 옥에 있을 때 배우기 시작한 서예가 한 경지를 이뤄 그의 글씨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다. 그는 글씨를 청하는 이들을 위해 때로 이 작은 공간에서 먹을 갈고 붓을 고른다. “제심이란 말 그대로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사람 사는 문제가 결국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닌가 싶어요. 기술이든 예술이든 운동이든 어느 경지를 넘어서면 자기 완성의 길로 들어서는 것인데 저는 그걸 ‘자유를 향한 행진’이라고 풉니다. 검도도 오래 반복해 숙련되면 아주 자연스러워지지요. 그게 작대기든 칼이든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놀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가 검도에 입문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경북고 3학년 때, 오씨는 잡다한 생각으로 포화상태에 이른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에서 검도를 하면 정신이 집중된다는 얘기를 읽고난 며칠 뒤, 우연히 대구 거리를 걷다가 검도관 간판을 발견했다. 뒤돌아볼 것도 없이 바로 등록했다. “그 시절엔 검도를 경찰관들이나 했지 일반인이 하는 경우가 드물었어요. 고등학생 신분으로 경찰들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대련을 했지요. 참 열심히 했습니다. 검도를 할 때는 잡념이 사라졌어요.”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게시판에 검도반을 모집한다는 방을 붙였다. 예상과 달리 80여명 학생들이 몰려왔다. 의대, 법대, 문리대 학생들이 당시 중부경찰서 도장을 빌려 훈련했다. 2∼3년 뒤에는 선배들 영향을 받아서인지 당시 경기고, 서울고 등에 검도반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들이 다시 서울대로 들어오면서 60∼70년대 서울대 검도반은 막강 실력을 자랑했다. “검도는 스포츠와 다른 측면이 있지요. 인격을 다스리는 면이랄까, 그래 그런지 검도하는 사람들이 지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 많아요. 그때는 전국 체전에서 서울대가 검도부 우승을 휩쓸었지요. 아마 서울대 총장실에 우승기를 들여놓은 건 우리 검도반이 유일했을 겁니다.” 그는 가난한 데다 병역을 마치느라 9년을 대학에 머물렀다. 그때, 마음맞는 선후배들과 대학생들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통일문제와 이승만 독재정권의 심각함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걱정했다. 당시 명동 한구석에 우리나라 최초의 ‘학사주점’을 열었던 것도 이 친구들과였다. 그때는 농촌운동을 할 생각으로 ‘구농회’(求農會)를 만들어 협업농장을 실험해보기도 했다. “참 복잡하던 시절이었어요. 밤낮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바뀌던 때였지요. 또 왜들 그렇게 가난했는지. 남북 문제, 가난의 비극… 고민이 참 많을 때였습니다. 그건 사회의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존재의식이었죠.” 그가 긴 대학생활에서 인혁당 사건과 통혁당 사건으로 연이어 옥에 간 것은 이념적인 것이었다기보다는 이런 시대적 요청을 함께 나누던 선후배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 자신의 실존적 고민 때문이었다. 그는 옥에 들어가서도 여느 사상범들처럼 독방에서 지내지 않았다. ‘징역 현장’에서 일반 사범들에 뒤섞여 대패를 밀고 옷을 만들고 인쇄기를 돌렸다. 서른둘에 옥에 들어가 그의 등 뒤로 육중한 쇠 문이 닫혔을때, 그는 평생을 보내야 하는 그곳에서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기로 해버렸다. 그가 어우러져 지낸 일반 사범들과의 옥살이를 시시콜콜 털어놓은 그는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실존문학에 심취했던 철학청년은 옥에서, 생활 속에서 마음을 닦는 낙천적인 도인이 되었다. “옥에 다녀와 다시 10년이 흐르고 나니 이젠 세종류의 친구만 남았어요. 죽은 친구, 죽어가는 친구, 죽음을 준비하는 친구. 병원이나 장례식장 나들이가 잦아지면서 아, 나도 이제 준비해야겠구나 싶다가 아니다, 아직 멀었다고 마음을 돌리곤 합니다.” 얘기하는 도중에 그의 손은 자연스레 만났다가 내처 합장으로 이어지곤 했다. 한때 요가를 배우고 기공 훈련을 했던 그는 합장이 참 좋은 것이라고 몇번이나 말했다. “울컥한 마음이 막 복받쳐 올라올 때가 있었어요. 그걸 누르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지금은 편해요. 평생을 피해보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 그늘에서 다 벗어났어요.” ‘철저하게 버리기와 비우기’ 그가 즐겨쓰는 글씨는 ‘바위마음’ ‘강물처럼’ ‘깨어있으라’같이 쉬운 우리글이다. 그는 왜 한글만 쓰느냐는 물음에 “사람들이 한문은 써야 뜻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모르니 그들이 쉽게 읽고 아는 우리글을 쓴다”고 이유를 달았다. 그의 말마따나 ‘제 멋대로’ 쓴 글씨는 칼칼하고 속내가 배인 아주 독특한 글씨라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도복을 정갈하게 입고 죽도를 든 그는 깃털처럼 가볍고 독수리처럼 날렵해 보였다. 도장 벽에 그가 쓴 글씨마냥 그는 약한 자를 돕고 불의를 심판하는 정의의 ‘번개칼’이었다. 그가 살아가는 방법,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철저하게 버리기와 비우기’이다. 며칠 전 아끼던 수제품 호구(護具)를 누군가 들고가버려 제자들이 안타까워하자 허허 웃으면서 그가 했다는 한마디가 이렇다. “인생도 다 잃어버리고 사는데 그것 잃어버렸다고 어찌되겠습니까.” 사진 이진홍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마음 잡고’ 마음을 공부한다 형벌의 한계 느낀 강력사건 전문 검사, 옷 벗고 철학과 종교의 길로 들어서다 박재오(41)씨는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부검을 가장 많이 해본 검사”였다. 강력사건을 주로 맡아온 그는 살인사건만 150여건을 수사했다. “검찰에 몸담았던 것을 평생 명예로 간직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이 일에 애착을 느끼던 그가 지난 1월 사표를 던졌다. 더구나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다니다 뒤늦게 사법시험에 도전해 4년 만에 이룬 검사의 꿈이었다. 노장사상 배우며 중국유학 계획 사임의 변 가운데 하나는 법조비리, 옷로비, 파업유도 등 잇따른 타격으로 명예가 실추된 검사의 뒷모습을 보며 느낀 자괴감이다. 친구들이 “너희 아빠, 검사라면서?” 하고 놀린다는 딸 아이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제대로 들 수 없었던 기억은 지금도 그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 이유만이라면 옷벗을 검사는 한둘이 아닐 것이다. 사실 검사는 좋은 직업이 아니었다. 격무에 시달리면서 못볼 것만 골라보게 되는 직업이었다. 인간의 잔인함, 비열한 거래, 왜곡된 욕망, 도덕적 타락 등이 빚어내는 온갖 범죄를 다루다보면 사람은 본래 선한 바탕을 지니고 있다는 평소의 믿음에 균열이 감을 느꼈다. 이런 환경의 지배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마저 전도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은 그를 보고 “갈수록 얼굴이 악해지고 사람이 이상하게 변한다”고 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오랜 암중모색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언젠가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식이 훌륭한 검사가 되게 해달라고 다리의 근육이 뭉쳐 걷지도 못할 정도로 불공을 드리는” 어머니 때문에 선뜻 마음을 먹지 못하던 일이었다. 그건 마음에 대한 공부였다. 선량한 국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한다는 대의에 이끌려 검찰을 택한 그가 8년의 검사 생활을 통해 느낀 것은 세상을 정화하는 도구로서 형벌이 지닌 한계였다. “사람이 악독해지는 건 의식이 저하됐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체가 나아지려면 사람의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저하된 의식을 끌어올리는 건 학문적으로는 철학의 몫이고 일상에서는 종교의 몫입니다.” 그래서 그는 철학과 종교를 연구하려 한다. 이 분야에 대한 공부는 오래 전부터 계속해왔다. 어릴 때 할아버지한테서 사서삼경을 배우며 자랐고 사법시험을 본 뒤에는 2달 동안 지리산에 들어가 한학 공부에 정진하기도 했다. 청소년기에는 영문 성경을 탐독할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군대생활 때 불교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해 검사 시절엔 여러 고승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얻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여러 종교를 접하면서 이르게 된 결론은 어떤 종교든 그 시작과 끝은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종교들 사이에 반목과 질시가 있는 것은 “성직자들이 물질적인 탐욕에 이끌려 혹세무민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목표는 종교의 독선과 이기주의를 걷어내고 모든 종교를 꿰뚫는 맥을 짚어내 밝히는 일이다. 이를 위해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진학해 불교를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한 뒤 아직 본격적인 공부를 못한 노장사상을 배우러 중국으로 유학할 계획이다. 그에게 사는 건 별 게 아니라 “마음 하나 잡는 것”이다. 돼지고기를 먹으며 쇠고기 먹는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고기 한점 못 먹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 필요한 만큼만 가지는 것, 적재적소에서 자기본분을 다하는 것. 이런 마음 공부는 특히 지도자들에게 절실히 요구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신망과 부를 함께 거머쥔 사람들이 책임과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욕심에 따라서만 살고 있습니다. 만원 지하철을 타보면 옆사람이 이웃이 아니라 적으로 보입니다. 교통부장관이라면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고민을 거듭해야 할 것 아닙니까. 노숙자 문제도 찾다보면 해결책이 있을 겁니다. 대통령부터 그걸 찾고 또 찾아야지요.” "사건수사, 지식 아닌 지혜로" 그는 지방근무를 마치고 서울지검으로 발령이 나 전세값 5천만원을 들고 상경했는데, 후미진 신림동 구석까지 뒤져도 그 값에 집을 구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국민의 의식주 문제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위정자들의 무관심 또한 제 앞가림에 바쁜 마음 탓으로 돌린다. 주식투자하는 부인에게 “당신이 버는 만큼 잃는 사람이 있다는 걸 왜 모르느냐”고 역정을 냈다는 그는 주식투자로 재산을 늘린 고위층 재산공개 내역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는 검찰 내부 통신망을 통해 검찰에도 고언을 남겼다. “선배검사들은 검찰조직이 개인의 출세장이 아니고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최고책임기관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각 검사들이 소신과 양심에 따라 일할 수 있도록 결재제도를 없애고 팀제도로 바꿔야 우리 조직이 앞으로 정당한 기관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찰을 떠난 지금, 그는 검사로 일할 때 쉴 새 없이 쌓이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편안한 마음을 찾았다고 한다. 명예는 행복과 상관없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쉬운 대목도 있다. 그 자신은 가장 잘 한 수사라고 여겼던 사건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유명한 ‘이태원 햄버거가게 살인사건’의 주임검사가 그였다. 그가 사건을 후임자에게 넘기고 지방으로 내려간 뒤의 일이지만, 검찰의 실수로 용의자 두명 모두 미국으로 달아난 사실이 밝혀져 사건은 영원히 미궁에 빠지게 됐다. 수사 당시 20여일 동안 밤잠을 설치며 수사했다는 그는 아직도 “처음 기소한 재미동포 에드워드 리가 범인임을 확신한다”며 “1·2심의 유죄판결을 뒤집은 대법원의 판단은 논리적인 모순 투성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럴 때는 아직도 검사인 것 같은 모습이다. 검찰을 ‘친정’이라고 부르며 언론에 비치는 검찰상을 변호하는 모습도 그렇다. 하지만 곧 다시 마음의 문제로 돌아간다. “지식을 쌓았다고 훌륭한 판·검사가 되는 게 아닙니다. 신문조서의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건 수사도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직폭력배들로부터 “배에 철판 깔았냐”는 협박까지 받으며 일하던 검사와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고 외치고 다니는 구도자.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직분이지만, 만인의 행복이 보장되는 사회라는 지향점 하나는 나눠갖고 있다. 이 점이 그의 남다른 변신이 가능한 이유일 것이다. 글 박용현 기자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칠순, 삶의 환희를 다시 깨운다”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그림… 가난과의 싸움 끝에 세계 최초로 꽃피운 수묵 누드화 (사진/할머니 화가/ 문은희씨) 이유 모를 열정에 이끌려 무턱대고 그림 선생을 찾아간 한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하자. 신문에 난 남관미술연구소 기사를 보고 혼자 길을 나섰다. 전차를 타고 가서도 하루종일 헤맨 끝에 고갯마루에 있는 연구소를 찾았다. 남관 선생이 웃었다. 이 당돌한 여고 2년생은 그곳을 찾은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내외하느라 다른 학생들에게 고개도 못돌리고 데생을 하고나면 목이 뻐근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날 때까지 날마다 그렇게 그림을 그렸다. 그로부터 5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2000년. 고희를 앞두고 회고전을 여는, 흰머리 성성한 할머니 화가가 있다. 꿈을 이룬 소녀의 모습이다. 문은희(69)씨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평생의 작품들 앞에 서기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선에서 이미 일탈의 강한 욕구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김상철) “검도인의 칼끝처럼 그가 붓으로 그어낸 묵선에는 숨을 몰아쉬게 하는 생명의 긴장이 느껴진다.”(김구산) 여성의 그림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강한 아름다움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작품들은 거친 세월의 뼈마디 같은 붓선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음에 뿌듯하다”고 회고한다. 결혼의 조건 그가 고등학교 졸업 뒤 혼인을 재촉하는 집안 어른들에게 “미술대학에 보내줄 사람에게 시집가겠다”고 조건을 단 것은 독신으로 그림만 그리며 살겠다는 생각의 표현이었다. 그런 조건을 받아들인 고 황의철 박사(전 한양대 공대 교수)와 살림을 차릴 때까지도 주위에서는 설마했다. 그러나 만삭의 몸으로 홍익대 미대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미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지 않을 때여서 큰 화젯거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동양화과에 입학한 첫 여학생이었다. 더구나 아이를 키우면서 학교에 다닌다는 건 당시로서 분명 파격이었다. 아침에 기저귀를 빨아 널고 등교하면서 아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둘째아들을 낳고 기르면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단체로 야외스케치를 나가면 동료들이 아이를 업어줬다. 아이들이 자라서는 늦게까지 화실에 남아 있는 어머니를 찾아 고개를 넘어오기도 했다. 지금도 어릴 때 손잡고 놀아주지 못한 게 자식들에게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대학 2학년 때 미국 유학을 떠나는 남편도 혼자 보낸 그다. 가회동 산꼭대기로 한칸짜리 방을 얻어 이사할 때 수레에는 화판만 하나 가득 실려 있었다. 59년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남편 유학 뒷바라지하며 아이들 키우느라 붓을 놓아야 했다. 빚쟁이 생활이 지작됐다. 남편은 8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공부밖에 몰랐다. 대학 강사 월급으로 생활을 꾸리는 건 여전히 빚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때 가난 때문에 겪은 고통이 그에겐 가장 아픈 기억이다. 그래도 그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서른아홉살되던 해, 세 번째 아이인 딸을 낳고 나서 다시 붓을 잡았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내가 그토록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려야 한다. 누구에게 내 재능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생명이요, 삶이기 때문이다.” 그는 10여년 동안 눌러온 꿈과 열정을 그렸다. 1백호짜리 그림 20점을 단숨에 쏟아냈다. 속이 후련했다. 당시 주된 소재로 삼았던 성난 파도는 바로 그의 내면 풍경이었다. 다시 10년. 마흔아홉살되던 해, 더이상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10년 동안 남편과 별거에 들어갔다. 막상 혼자가 되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가난과 벌인 지겨운 싸움 끝에 벌거숭이로 혼자 던져진 듯한 괴로움. 그 심정을 표현하는 길을 누드에서 찾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세계 최초로 시도한 수묵누드화가 꽃을 피우기까지는 피나는 단련이 필요했다. 대학생으로 돌아간 듯 연필과 콘테, 크레용으로 누드 데생부터 연습했다. "새로운 작업을 다시 해야지" 7년의 습작 끝에 붓을 잡았다. 값비싼 중국 화선지를 2분에 한장꼴로 버려가며 그렸다. 그때도 물론 가난했다. 그러나 작품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빚을 얻어 사는 처지에 화선지를 한아름 사들고 오면서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미쳤다고도 하고 무당같다고도 했다. 쉬 번지는 먹물로 단번에 인체의 생명감을 그려내는 건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했다.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회의도 일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면 그림에 절을 할 정도였다. 1분에 한번씩 자세를 바꾸는 남자모델 1명과 여자모델 3명을 관찰하며 2시간 만에 150개의 인체를 그려낸 길이 34m짜리 군상이 완성됐을 때는 어떻게 그렸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스스로 무서움마저 느껴지는 그 작품은 신이 그려줬다고 믿는다. 그의 작품은 80년대 말 일본에 알려져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프랑스 평론지에서도 그의 박진감 넘치는 누드화에 찬사를 보냈다. 89년 일본에 초대돼 5개월 동안 머물면서 개인전과 화집출판, 각종 매체의 인터뷰 등으로 어찌나 고된 일정을 소화했는지 그때 이가 빠져버려 지금은 틀니를 하고 있다. 스승 김기창 화백은 “마티스보다 잘 그린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국내의 반응은 차가왔다. 결국 ‘죽고 나서 평가를 받자’는 마음으로 충북 충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여생을 함께 하기 위해 내려왔던 남편은 지난 95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뒤로 3년 동안 붓을 꺾었다. 하지만 그는 또 일어섰다. 미처 작품이 되지 못했던 옛 화선지 속의 숱한 나신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했다. 버리지 않고 간직했던 그림들을 모아 붙인 콜라주들이 이번 회고전에서 선보이는 새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한번도 작품 전체를 전시해보지 못했던 대형 군상 2점도 모두 펼쳐보였다. 또 한번 느껴보는 후련함이었다. 전시회를 찾은 이들로부터 “이게 칠순 노인의 그림입니까?” “대단하십니다”는 감탄을 받으며 그 칠순 노인은 삶의 환희를 다시 깨우고 있다. 그림 때문에 평생 빚쟁이로 살아야 했던 운명 앞에 흐느끼기도 했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피해 숨기도 했지만, 이제 다시 그림 앞에 서니 그 모든 맺힌 것들이 봄볕에 얼음 녹듯 조금씩 가시고 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이 머리 성성한 노인의 자그마한 몸에 깃든, 수천년 변하지 않는 먹빛의 열정이 말한다. “아직도 그림을 놓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새로운 작업을 또 시작해야지.” 글 박용현 기자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페달을 돌려 하늘을 날자” 주인 잃은 어린이자전거 한대가 바꾼 운명… ‘독학’으로 고난도 기술에 도전하다 (사진/BMX선수 전상철) 일상의 아주 우연한 일, 주변의 사소한 물건 하나가 한 사람의 평생을 결정짓는 일도 있다. 봄날 꽃나무처럼 싱싱한 가능성이 꿈틀대는 청소년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어느 날 내린 한줄기 비는 영혼을 좌우하는 세례가 될지도 모른다. 전상철(27)씨의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그랬다. 집에 놀러왔던 동생 친구가 두고 간 어린이용 자전거 한대. 안장에 ‘BMX’라고 새겨진 자전거. 며칠이 지나도 주인은 찾아갈 생각을 안했고, 마당 한쪽에 세워진 자전거는 키가 작아 친구들처럼 큰 자전거를 타지 못하던 그를 유혹했다. 그는 겨울방학 내내 집 근처 안양천 둑길에서 자전거와 함께 놀았다. 화물트럭이 오가며 파놓은 울퉁불퉁한 바퀴자국을 따라 달렸다. 달리다 보니 뛰어오르고 싶었다. 수출용 BMX 자전거 카달로그에 실린 점프장면을 보고 무작정 따라했다. 널빤지로 얼기설기 만든 도약대를 딛고 그의 어린이용 자전거가 날았다. 달리기도 공놀이도 못하던 아이가… 그는 그 겨울방학 이후 다른 쪽으로는 눈도 돌려보지 않고 자전거에 빠져 살고 있다. 자신과 자전거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다고 운동신경이 뛰어나 자전거 타기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친구들이 야구나 축구 시합에 끼워줬더라면 자전거를 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달리기도 공놀이도 못하는, 작고 약한 그가 자기에게 맞는 종목을 찾아낸 셈이었다. 혼자 연습하니 주눅들 필요가 없었고, 안 되는 건 꾸준히 반복해 터득하면 그만이었다. 3학년이 되자 성적을 올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진짜 BMX 자전거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성적보다 자전거에 더 뜻이 있다는 건 뻔한 일이다.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면 자전거를 탈 수 없을 것같아 아예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비밀낙원’을 찾았다. 서울 목동 아파트 단지를 지나는 경인고속도로 지상 구간이 공사만 마치고 개통되지 않은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비밀낙원’으로 향했고, 수업이 끝난 뒤부터 어두워질 때까지도 ‘비밀낙원’에서 살았다. 그러다 취업철이 왔다. 동틀 무렵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에서 자전거를 달려 공중으로 날아오르던 그의 머리 속에 다른 직업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프로팀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의한 삼천리자전거가 그의 직장이 됐다. 땅 위에서, 반원통형 구조물에서, 공중에서 온갖 묘기를 부리고 거친 코스를 좌충우돌 달리기도 하는 BMX(Bicycle Motor Cross). 그 매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10년이 넘게 자전거를 탄 그에게 너무 뒤늦은 감이 있다. “처음엔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기쁨이었고, 한 가지씩 어려운 기술을 터득하면서는 ‘이 기술은 내가 최초다’는 자부심이었죠.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릴이 느껴졌고요.” 어찌보면 무지막지한 시절이었다.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않은 채 무조건 고난도 기술에 도전했다. 95년에는 당시 가장 어렵다던, 공중에서 재주넘듯 360도 회전하는 ‘백플립’을 연습하다 엉덩이부터 떨어지는 바람에 꼬리뼈가 부러져 6달 동안이나 병원신세를 졌다. 한달가량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정도의 부상은 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다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점차 사라졌고 나중엔 다치는 줄도 모르고 자전거를 탔다. 오직 남보다 잘 타는 게 지상과제였다. 땅에서 자전거를 옆으로 360도 돌리는 기술을 연습할 무렵, 다른 사람이 그 기술을 거의 성공시키는 장면을 보고는 완벽하게 성공할 때까지 일주일을 밤낮없이 그 기술만 연습했다. 잘 타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지방이라도 내려가 겨뤄봐야만 직성이 풀렸다. 모여든 구경꾼들이 돌아가든 말든, 밤을 세워서라도 승부를 가렸다. 스스로 졌다고 판단되면 잠을 못이뤘다. 욕심과 승부욕은 지금의 그를 키워낸 거름이기도 했지만 몸 구석구석을 멍들게 한 원흉이기도 했다. 점프할 때는 무아지경에 이르러야 함을 이제는 안다. 욕심이 앞서거나 겁을 먹거나 다른 생각이 끼어들면 몸이 굳는다. 그러면 부상이다. “도약대를 만들어놓고 장남감 자동차를 굴려보세요. 자연스럽게 날았다 착지하지요. 자전거도 마찬가집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 성공하는데, 인위적으로 어떤 마음을 집어넣으면 실수가 나오지요.” 지금은 마치 도를 닦는 기분으로 자전거를 탄다. 아직 약관의 나이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BMX 선수로서는 노장 축에 들어섰다. 몸을 돌볼 틈없이 고난도 기술만 바라보고 달려온 탓에 벌써 체력의 한계가 닥쳐오고 있다. 별도의 체력단련이 필요할 만큼 힘든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로운 기술에 도전하고 있다. 공중에서 자전거와 몸을 수평으로 눕혀 한 바퀴 회전하는 ‘360 테이블 탑’. 자전거는 수평이되 몸은 비스듬한 각도로 도는 외국 선수들이 있지만 그는 몸까지 완전히 눕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착지하는 순간까지 몸과 자전거를 수직상태로 일으키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다 한번 성공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최소 100번은 성공해야 자기 기술이 된다. “후배들은 제대로 배우게 하고파” 지금 느끼는 자신의 한계가 처음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데 있다고 판단하는 그는 외국 선수들과 겨룰 수 있는 선수들을 키우기 위해 전문훈련시설인 ‘파크’를 짓고 교육 프로그램을 계발하는 게 최우선 목표다. 자신은 기회를 놓쳐버린 세계 챔피언 도전의 길을 자라나는 10대들을 위해 닦아주고 싶어서다. 이를 위해 동료들과 사무실을 내고 ‘수입 없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운동삼아 자전거를 타는 것으로만 알고 결혼한 부인도 실상을 알자 처음엔 아연실색했지만 지금은 그의 꿈을 나눠갖고 있다. 부인 혼자 살림을 꾸리다시피 하면서도 두 아이를 인라인 스케이트나 BMX 선수로 키우자고 먼저 나설 정도다. BMX, 인라인 스케이트(롤러 블레이드), 스케이트 보드 등 이른바 ‘익스트림 스포츠’는 사이클, 스케이트, 서핑 등 기존의 경기를 더 재미있게 만드는 과정에서 파생했다. 발생 자체가 파격을 본질로 하고 있는 셈이다. 정해진 틀을 깨는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청소년들이 ‘X-게임’이라 부르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또한 잘 닦인 길에서 벗어나 울퉁불퉁한 둑길을 달리며 살고 있다. “자전거를 안 탔더라면 네 인생이 더 잘 풀렸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그는 자전거와 함께 있으면 더없이 마음이 편안하다. 중학교 2학년 겨울 안양천 둑길을 달리던 자전거가 그를 오래도록 열다섯살 소년의 모습으로 살게 하는 것 같다. 글 박용현 기자 사진 강창광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하느님의 나라, 행복한 달동네를! 중산층 아파트에 둘러싸인 외로운 섬 ‘영구임대아파트’에 희망공동체를 심는다 (사진/희망교회 목사/전춘우씨) 전춘우(42) 목사는 서울 최대의 달동네인 관악구 봉천동에서 10년을 살았다. 이 시대의 가장 힘겹고 서러운 삶들이 그가 이끄는 희망교회의 10년에 돋을새김돼 있다. 중학교 때 예수가 인간이란 사실을 처음 접하면서 이 위대한 인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는 전 목사가 봉천동 비탈진 골목을 누비며 찾고 손잡았던 것도 다름아닌 사람들이었다. 속병 더욱 깊어진 10년 70년대 서울 도심부의 재개발사업으로 밀려난 철거민들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형성된 봉천·신림동 일대의 저소득층 밀집지역(전 목사는 비하의 어감을 담고 있는 빈민촌이란 단어를 절대 쓰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에 그가 처음 발을 들여놓은 건 90년의 일이다. 어렵게 시작한 신학공부도 제쳐둔 채 세상을 바꿔보려는 운동에 매달렸던 80년대를 거쳐 그가 희망교회를 찾아온 것은 ‘민중’에 대한 어떤 기대와 열정의 작용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는 한 그곳에서는 이웃의 자격을 얻지 못하고 겉돌아야 했다. “당신도 나만큼 낮아져본 뒤에 이야기하라”는 주민들의 말에 그는 막노동과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신도들은 땀흘려 일한 뒤 예배에 참석하는데, 그 혼자 텅 빈 교회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다. 92년 계속되는 기침을 참는다는 게 폐결핵을 방치하는 결과가 돼 부인과 부인 뱃속의 아들에게까지 병을 옮겼다. 그때 잠시 몸을 쉬었지만,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삼성자동차 공장을 지으러 부산까지 간 적도 있다. 그러면서 그는 진정한 봉천동 주민이 돼갔다. 90년대 들어 이 지역에는 다시 재개발의 삽날이 파고 들었다. 92년 신림10동, 93년 봉천2·6동, 94년 봉천5동, 98년 봉천3동…. 대책없는 철거로부터 세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던 그는 사람의 또다른 모습을 보았다. 철거용역원들의 잔혹한 폭력. 가옥주와 세입자, 세입자와 세입자 사이에서 빚어지는 편싸움. 철거촌의 이전투구 속에서 돈이 강요하는 인간사의 적나라한 모습을 눈으로 보고 깨달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품었던 기대는 기대일 뿐이었다. 그들을 대상화한 관념이었다. 담담하게 그들의 이웃으로 사는 것, 그들과 한마음이 되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계속된 철거로 주민 7명에 6명은 지역을 떠나고, 근처에서 포장마차나 노점상을 하는 이들만 남아 지하 셋방으로 자리를 옮긴 뒤 구제금융시대가 찾아왔다. 그나마 불안정한 취업상태에 있던 이곳 주민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다. 술에 찌드는 사람들, 이혼하는 부부들, 굶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그는 빈민촌 못지 않게 결식아동이란 말에 대해서도 분개한다. 아이들도 그 말을 싫어할 뿐더러, 아이들이 처한 본질적인 상황을 외면한 채 밥을 굶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선정적인 접근법이 드러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정서불안, 학습부진, 집단 따돌림, 가정폭력 등 밥 한끼를 뛰어넘는 수많은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이 바로 ‘위기 결손가정의 방치아동’이다. 그런데 예전처럼 굶는 아이 밥 챙겨주고 매맞는 아이 파스라도 붙여줄 이웃마저 없었다. 전 목사는 교회 부설로 ‘신나는 집’을 열어 아이들의 부모노릇까지 자처하고 있다. 구제금융 이후 이곳 사람들의 삶의 질이 10년 전으로 고스란히 거슬러올라갔다고 말하는 전 목사는 지난 10년을 “겉모습은 발전했을지 몰라도 속병은 더욱 깊어간” 시간으로 정의한다. 이제 번듯한 아파트촌으로 변하고 있는 봉천동 언덕을 바라보며 앞날의 걱정거리부터 떠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아파트 단지마다 2∼3개동씩 들어설 영구임대 아파트가 그것이다. 일반분양 아파트로 몰려들 중산층을 위주로 생활 환경이 재편되고 나면, 달동네 시절의 이심전심마저 사라진 외로운 섬에서 영구임대아파트 사람들은 소외된 삶이라는 봉천동의 고질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래서 전 목사는 아파트 단지에 희망교회를 심으려 한다.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구심점, 방치되는 아이들을 돌보는 보금자리를 희망교회의 새로운 소임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 안에 분양받을 권리를 가진 교회터가 있지만, 6억원에 이르는 땅값을 마련하는 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아침이 기다리나니… 그러나 그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려움에 좌절할지라도 영영 주저앉지 않는 게 봉천동 사람들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봉천동 현대시장에 인력시장이 서던 시절, 새벽 3시부터 연장을 챙겨들고 나와 모닥불을 쬐며 일거리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교회 2층에 공부방으로 쓸 공간을 지을 때 불법증축이라며 철거하려는 구청직원들을 똘똘뭉쳐 막아내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아등바등 살다 좀 살 만해지면 재개발이니 구제금융이니 하는, 자기와는 무관한 힘에 의해 꺾이는 삶이 반복됐지만 그들은 지금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선한 존재임을 믿는다. 신나는 집 아이들에게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무료 이용권을 준 에스페로 노래방 주인, 무료 진료를 해주고 있는 서울가정의원 원장, 때때로 아이들이 먹을 반찬을 챙겨주는 주민들. 사적소유의 발달로 본래의 인간성이 훼손됐다지만, 생명을 부여받은 태초의 순간에 쐬인 신의 숨결을 누구나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기에 그는 희망을 믿는다. 가시적인 성과로 따져보면 밑 빠진 독에 물붓기로 보일 수도 있는 지난 10년이지만, 그는 날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듯, 오늘의 아이는 어제의 아이와 다르고 봉천동의 아침은 날마다 새로운 아침이다. 늘 새로운 일거리가 생기고 그것을 해결하며 또다른 문제를 기다린다. 처음 입학한 대학을 끝까지 다녔더라면 그는 지금쯤 다른 곳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을 것이다. 경북 안동의 유교 집안 장손으로서 대학 3학년 때 7시간 동안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빈 끝에 신학대학에 재입학하면서까지 갈망했던 목사의 길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신앙의 첫단추를 꿰고 또 꿰며 살고 있다. 하늘을 떠받친다는 동네 이름처럼 하늘 아래 가장 가까이에서, 초라할지라도 신의 나라가 조금씩 이뤄지는 곳. 그는 여기에 사는 게 행복하다. 글 박용현 기자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디지털의 꿈이 흙을 만진다 유기농과 소비자를 이어주는 인터넷 다리… 도시 곳곳 텃밭만들기 대회도 구상중 (사진/인터넷 이장/ 임경수씨) ‘30대의 벤처기업 대표’라는 소개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는 고정돼 있다. 아이디어 하나로 거부를 거머쥐는, 머리 회전 빠르고 도시적 색채의 정서를 지닌 사이버형 인간. 그러나 예외는 있다. 임경수(35) 박사는 디지털시대의 퇴물 중에 퇴물인 농업을 인터넷 공간에서 경작하려 한다. 지난해 5월 후배들과 창업한 벤처기업 ‘인터넷 이장’(http://www.e-jang.com/)은 전국의 유기농 생산자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다리를 놓는 구실을 하고 있다. 원시와 첨단의 결합인 셈인데, 그 지향점은 분명 전자에 두고 있다. 그가 궁극적으로 가려는 곳은 서울의 테헤란밸리가 아니라 무공해 채소가 자라는 시골의 어느 골짜기다. ‘쓰레기를 줍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서울 토박이인 그가 농촌에 유념하게 된 데는 환경이라는 매개체가 있었다. 청소년 시절 많고 많던 환경정화 활동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하다 대학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의 생각과 딱 맞아떨어지는 학과를 찾지 못해 공업화학과에 진학한 게 84년. 시대상황은 환경문제를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빈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졸업 뒤의 진로를 고민할 무렵 선배를 도와주러 간 공대 연구실에서 날마다 단순작업을 반복하며 연구하는 게 여성용 감미료라는 사실을 안 뒤 그는 회의를 느껴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환경대학원에 들어가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담아뒀던 환경공부를 시작했다. (사진/임경수씨가 충북괴산의 한 유기농 생산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현장 조사를 오랫동안 나가지 않으면 몸이 찌뿌드드한 '금단현상'까지 느낀다) 빈곤층 지역의 대기오염이 상대적으로 심화하고 있다는 내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또다른 회의가 찾아왔다. 환경공학은 문제의 발생을 전제로 해결을 모색하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지는 못한다는, 질병이 있어야 먹고 사는 의사처럼 환경공학자도 오염이 많아야 돈을 버는 직업이라는 점이 다시금 ‘쓰레기를 줍지 않는 방법을 없을까’라는 어린 시절의 의문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기 위해 군대에 갔다. 그리고 근본적 해결책을 교육에서 찾던 그는 시골과 도시의 아이들이 환경에 대한 인식에서 서로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는 점에 착목했다. 존재 자체가 환경친화적인 농촌이 늘어나면 환경은 자연히 좋아질 것이란 생각에 농업서적을 탐독하면서 그는 농촌의 심각한 현실을 비로소 보았다. 그리고 ‘이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박사과정 연구계획서를 냈을 때 주위의 반응은 “일단 하던 공부를 계속하라”는 충고 일색이었다. 그러나 이미 다른 분야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학위를 받은 뒤에 관심있는 분야를 연구할 수도 있으리라는 합리적인 조언마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도교수를 설득한 끝에 그는 농학과 생태학을 결합한 연구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지난해 그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계획연구소와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인터넷을 이용한 유기농 생산 정보시스템 구축사업’으로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의 환경사업 공모에 당선되면서 ‘인터넷 이장’이 출범했다. 이젠 올해 11월로 예정됐던 유학계획도 접었다. 다른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연구로 대학교수의 길을 구하느니 차라리 농민들과 함께 흙을 딛고 공부하는 길을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100여명의 유기농 생산자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했다. 유기농 생산자들의 신상명세부터 농사규모, 종자특성, 생산방법과 시기 등을 인터넷사이트에 올렸다. 그리고 그들의 농사철학을 함께 담았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유기농산물 유통구조가 지나치게 소비자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점이었다. 유기농산물 전자상거래 업체들은 생산자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하청업체로 여겨왔다. 전북 무주에서 만난 한 유기농 생산자는 “내 얼굴을 인터넷에 올리면 나도 소비자의 얼굴을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생산자도 소비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자존심의 발로이자, 생산자를 소외시켜온 유통구조에 대한 반발이었다. 농촌은 늘 그렇게 배려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였다. 내년엔 외국의 농촌공동체 찾을 계획 하지만 희망은 바로 그 농촌에 있다는 게 그가 체험한 역설이다. 조사활동중에 겪은 일화 한 토막이 희망의 실마리일 수 있을 것이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마을회관 앞에 앉아 쉬는데 한 아주머니가 “점심은 먹으면서 돌아다니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주머니는 급히 나가 국수 한 바구니를 사오더니 “얼른 삶아줄 테니 먹고 가라”고 했다. 거듭 거절한 끝에 국수 대신 수박으로라도 아주머니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귀농인보다 토박이 농민에게서 이런 정서는 훨씬 강하게 나타났다.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을 시급히 마련해야 하겠지만, 농촌을 살리는 게 농촌에 사람만 그득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공생적인 농문화를 재건해 정신차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 도시문명, 삭막한 콘크리트 문명, 폐기물밖에 만들 줄 모르는 석유문명을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인 문명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인터넷 이장’이 커다란 문명의 전환에 작은 밑거름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단지 유기농산물 거래에 그치지 않고 농장방문 프로그램 등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장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또 도시 곳곳에 텃밭을 가꿔 그 생산물을 이웃과 나누는 운동을 벌이기 위해 텃밭만들기대회를 구상중이다. 나아가 ‘인터넷 이장’을 각종 농촌공동체와 생활협동조합 등 작은 공동체들이 만나는 공간으로 꾸미려 한다. 내년엔 사업을 후배들에게 넘기고 외국의 농촌공동체를 찾아가 1년 동안 생활하며 배울 생각이다. 그리고 결국 그 자신도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유기농산물이 자라는 논밭이 있고 학교도 있고 요양소도 있고 고아원도 있는 시골마을이 그가 꿈꾸는 곳이다. 그런 마을을 하나씩 만드는 게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게 이 ‘사이버 이장’의 소박한 철학이다. 글 박용현 기자 사진 강창광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순수한 즐거움, 경쾌한 혁명” 지배적 가치를 뒤집으려는 고학력 ‘백수’, 게임에서 꿈같은 현실을 산다 (사진/게임평론가/박상우) 그는 경제학 석사 학위를 가지고도 직업이 없다. 구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구하려 하지 않아서다. 엄밀히 말하면 직업이 없는 건 아니다. 하루 4∼5시간씩 컴퓨터 게임을 하고 1시간씩 컴퓨터 게임에 관한 글을 쓰는 그를 사람들은 ‘게임 평론가’라고 부른다. 박상우(34)씨가 컴퓨터 게임과 첫 인연을 맺은 곳은 그 연배의 누구나 그렇듯 작은 게임기가 부착된 탁자를 들여놓은 빵집이나 ‘뿅뿅’으로 통하던 전자오락실이었다. 그저 재미있어 하던 컴퓨터 게임이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다가온 건 90년대에 들어서다. 그는 85년 한의학과에 입학한 지 2년 만에 다시 입시를 치러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자본론’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대학원 진학도 실천을 위한 이론 규명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를 걸치며 많은 이들이 꿈을 잃어 갔다. 현실은 요지부동이었고 절대적이었다. 많은 이들이 현실에 투항하거나 적어도 정치적인 실천으로부터 멀어졌다. 어떤 이들은 영화쪽으로 허기진 시선을 돌릴 때 그는 컴퓨터 게임 속으로 빠져들었다. 실망하고 포기했던 꿈의 비상구를 거기에서 찾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휴대용 게임기를 켜라” “사람들이 컴퓨터 게임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살아봄으로써 현실이 가진 절대성에서 벗어나는 경험은 그 자체로 진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현실의 지배력을 약화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스타그래프트 처럼 치열한 전투로 승부를 가리는 부류의 게임보다는 ‘롤 플레잉 게임’이 이런 설명에 더 적합하다(그는 승부 자체는 컴퓨터 게임이 주는 즐거움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문명2 같은 게임이다. 게이머는 원하는 사회체제를 선택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세율을 정하고 예산을 배분하고 통치방식을 고안하고 기술개발의 중점방향을 설정한다. 파시즘의 또다른 형태로 전락한 현실 사회주의가 아닌, 공동선을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주의 세계의 건설이 컴퓨터 안에서는 불가능하지 않다. 현실도피가 아니냐고? 물론 그렇다. 가상공간은 가상공간일 뿐이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이 자기만족적인 세계 자체가 아니라 자기만족적인 세계를 중요하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드는 컴퓨터 게임의 힘이다. 그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지하철에서도 증권정보를 찾아 읽거나 영어회화 테이프를 듣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휴대용 게임기를 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만 일하는 게 아니다.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내일의 노동을 위해 휴식한다.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상품생산 시스템에 묶여 거의 모든 삶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을 거두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때까지와 다를 바 없이 소모적인 삶을 계속해야 한다. 휴대용 게임기를 켜는 것은 이렇듯 사회와 제도에 뺏긴 시간을 다시 빼앗아 자기를 위해 쓰는 일이다. 직장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순수한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야말로 진보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를 지배하는 현실의 절대적인 힘이 사라지는 순간, 더이상 현실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즐겁고 가장 많은 만족을 주는 현실을 찾는다. 운이 좋아서 그것을 찾는다면, 흔쾌히 그 세계에 머무르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즐거워도 언제까지 그 세계에 눌러앉아 있지는 않는다. 가장 즐거운 순간 새로운 이주를 꿈꾸며 언제라도 자유롭게 툭툭 털고 일어날 준비를 한다.” “인간의 욕망구조와 자본주의가 결합해 구축한 공고한 현실을 극복하려면 욕망구조가 무너지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컴퓨터 게임을 통해 그런 경험을 누릴 뿐만 아니라 실제생활에서도 그런 경험을 추구한다. “평균 이하로 살겠다”는 신조는 직업없는 생활에서도 불편을 느끼지 않게 한다. 그가 갖고 싶은 것은 게임 CD와 책, 만화 등이 고작이다. 전부 사려면 얼마나 필요할까 계산해보니 200만∼300만원이었다. 그나마 다 사려들지도 않는다. 경제학이나 컴퓨터 게임에 관한 외국자료를 번역하거나 몇몇 잡지에 글을 써 얻는 수입에 소비수준을 맞추면 그만이다. 그는 왜 ‘백수’를 고집하는가 그가 ‘백수’생활을 고집하는 근거는 “사회가 올바르지 않고 바꿔야 할 대상인 상황에서 그 공식적인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현실의 지배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려는 그의 시도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 ‘나이 먹어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의 행동으로 매도될지 모른다. 그는 반박한다. “현실의 삶에서 꿈은 무의미하거나 비생산적인 것, 잘해야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한 마취제 정도의 대접만 받아왔다. 상품생산 시스템은 모든 꿈이 눈앞에서 이뤄진다는 최면효과를 가진다. 그러니 무언가를 꿈꾸는 건 정말 불필요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꿈을 실현시켜 줄 상품을 사기 위해 돈을 버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란 바로 이 시스템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대중매체를 통해 상품생산 시스템이 조장하는 현실 같은 꿈을 좇기보다 컴퓨터 게임 속의 꿈 같은 현실을 산다. 그것은 지배적인 가치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현실적인 실천이기도 하다. 현실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져 현실을 절대적 가치에서 상대적 가치의 하나로 떨어뜨리는 것이야말로 “컴퓨터 게임이 세계를 혁명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동화 속 모험의 세계든, 핵전쟁 이후의 새 문명이든, 꿈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가상의 꿈과 현실의 꿈을 모두 이루려는 그의 삶은 컴퓨터 게임처럼 싫증나지 않는 경쾌한 혁명이다. 글 박용현 기자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 21 박용현기자의 인물탐험 차에서 내리면 전국을 달린다 소년소녀가장을 위로하는 마라토너의 기쁨… 자전거로든 발로든 쉴새없는 강행군 (사진/청소차 운전원/임지열씨) 그를 만난 곳은 서울 중랑구 재활용품집하장. 중랑구의 청소차가 모두 모이는 곳이다. 툭 트인 중랑천가에 있어 바람이 제법 부는데도 냄새는 이 공간에 갇힌 듯 가실 줄을 모른다. 온갖 오물이 뒤섞여 썩은 물이 콘크리트 바닥을 적시면 씻어 내고 씻어 내도 그 모양이다. 이 곳이 임지열(48)씨의 직장이다. 그는 중랑구 청소환경과 소속 기능직 운전사이다. 얼마 전까지는 도로의 먼지를 닦는 가로차를 몰았고 지금은 녹색 청소차를 운전한다. 남들이 꺼리는 직업이라지만 그에겐 즐거운 일이다. 그는 뛰어서 출퇴근한다. 광진구 자양동에서 워커힐호텔과 구리시, 망우리고개를 지나 면목동 집하장까지 뛴다. 화양리에 살 때는 아차산과 용마산을 넘어 1시간30분이 걸리는 산악마라톤으로 출퇴근했다. 밤에는 한강둔치에서 잠실∼성수대교 10㎞ 구간을 왕복했다. 지난해에는 자전거를 한대 샀다. 토요일 퇴근하면 망우리고개를 넘어 양평까지 달리고, 일요일에는 서울-남양주-청평-모곡-양평-양수리-덕소-남양주-서울 구간을 달린다. 최근 보름 동안은 힘든 일과를 마치고도 날마다 150㎞를 달리는 강행군을 했다. 산악마라톤으로 출퇴근… 5년여의 몸만들기 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사연이 애틋하다. 지난 95년 말 직장 동기들이 뜻을 모아 5만원씩을 걷어 관내에서 혼자 사는 노인 세명에게 쌀을 사드렸다. 서울에서 세 번째로 빈곤하다는 중랑구에서 다니지 않은 골목이 없는 이들이다보니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왔다. 쌀을 전달하는 순간 그가 느낀 뿌듯함은 5만원어치 술타령에 비할 수 없었다. 그는 “노인들보다 내가 더 즐거웠다”고 한다. 이듬해 장기와 시신 기증에 서명하면서 그는 하나의 ‘이벤트’를 기획했다. 2000년 소년소녀가장 돕기를 위한 전국일주 마라톤. 그리고 뛰기 시작한 것이다. 소년소녀가장의 처지는 홀로 사는 노인보다 더 그의 마음을 찔러왔다.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려면 부모의 품이 꼭 필요함을 그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한때 가정이 깨질 위기가 닥쳐왔을 때 딸이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는 참기로 했고 딸은 3학년이 되어 그에게 우등상을 선물했다. “우리 이렇게 같이 사니까 행복하지? 아빠.” 문득문득 딸이 던지는 말에 그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소녀가장에게 부모가 없다면 다른 어른들이라도 나서야 한다고 그는 여긴다. 그 아이들의 존재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5년 동안 쌓아온 체력이 이젠 제법 뽐낼 만하다. 지난해 7번의 시험을 거친 결과 ‘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전국마운틴바이크 춘천챌리지대회에서 47㎞를 2시간47분58초에 달렸고 금수산전국산악마라톤대회와 서울산악마라톤대회를 완주했다. 제2회 서울마라톤대회에서는 42.195㎞ 풀코스를 3시간42분30초에 주파했다. 완주자 1029명 가운데 224번째였다. 37∼38㎞께 이르면 누가 이름을 불러도 왕왕거리기만 할 뿐 분절음으로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시각도 질리도록 길게 뻗어 있는 길 이외에는 뚜렷한 형체를 잡아내지 못할 때가 되면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의문이 찾아든다. 그러면 생각을 다잡는다. ‘아이들이 좀더 나아지지 않나… 그러니 즐겁게 뛰자.’ (사진/해안을 따라 자전거로 한반도 남쪽을 일주하려는 임지열씨. 그는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 도움을 준 사람들을 기억하며 소년소녀가장들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올해 전국일주 마라톤 계획은 성사되지 않았다. 기간을 한달은 잡아야 하는데 그만큼 말미를 낼 수 없었다. 구조조정으로 직원 수가 대폭 줄어든 상황이다. 그래서 보름 만에 전국을 돌 수 있는 자전거를 선택했다. 그는 5월2일부터 해안을 따라 한반도를 반바퀴 돈다. 홍천-속초-동해-평해-구룡포-기장-고성-순천-해남-진도-고창-서천-아산-광주를 중간 기착지로 하는 전국일주로의 총연장은 1504㎞에 이른다. 자기 돈을 들이고 휴가까지 이용하면서 이런 일에 나서는 그를 주위에선 별난 사람이란 시각으로 바라본다. 세상에 얼굴 한번 내보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기대는 건 거창할 것 없는 철학 한토막이다. “세상을 뜨는 순간에 가치있게 살았다고 느끼면 한평생이 후회없는 것 아니겠어요?” ‘바른생활 아빠’라며 따르는 자녀들에게 몸으로 뭔가를 가르쳐주고 싶은 생각도 있다. “부모가 자식의 존경을 받는 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일부 동료들은 “우리가 도움을 받을 처지인데 무슨 자선사업이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는 “가진 것 없어도 베풀 수 있는 일은 찾으면 한이 없다”고 말한다. 집 앞 골목길을 꾸준히 청소하다보니 이웃들이 수박을 사들고 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란다.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것도 잘 살피면 쓸모가 있는 법이다. 최근엔 목욕탕에서 버려지는 일회용 면도기를 거두어 소독해 노인정에 나눠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보건소에 문의해 위생 문제가 없다는 답변만 얻으면 곧 실행에 옮길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만 두고 있는 걸 못참는 성격이다. 5년 전 연말 흐뭇했던 경험이 있기 전, 그는 곤궁한 생계를 꾸려 가느라 주위로 눈돌릴 틈없는 평범한 청소차 운전사였다. 91년 중랑구청에 취직하기 전에는 더욱 그랬다. 76년 제대와 함께 면목동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 뒤 낮에는 화장품외판원으로, 밤에는 호떡장수로 쉴새없이 일해야 했다. 채소를 실은 리어카를 끌기도 했다. 결혼도 두 아이를 낳은 뒤 여성단체의 도움으로 겨우 예를 갖췄다. 그래도 한겨울 슬리퍼 차림으로 다니던 그에게 군화 한 켤레를 건네던 이웃집 할머니는 그 시절의 기억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이제 그도 다른 사람의 기억속에서 그런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이웃들이 전국일주 후원자로 나섰다 이번 전국일주가 끝나면 지난해 결연을 맺은 소년가장를 집에 초대해 함께 기쁨을 나눌 생각이다. 그의 뜻을 이해하고 후원금을 건네는 이들이 있으면 더 많은 아이들에게 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10여년 남은 정년까지 자전거로든, 발로든 해마다 전국을 돌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근무를 마친 그가 어느새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려 한다. 그리고 내처 전국의 국도로 달릴 것이다. 달리고 달리다보면 지치지 않고 지구 한 바퀴라도 돌 수 있는 바람이 될까. 중랑천가 재활용품집하장에 봄바람이 분다. 세상의 퀴퀴한 냄새는 쉬 가실 줄 모르지만 바람은 조금씩 냄새를 가져간다. 글 박용현 기자 사진 강창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