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암 정채봉 창작과 비평사 한양대학교 김대환 부끄러움 속에서 나는 동화를 쓴다는 사실에 행복하면서도 간혹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동화가 동심에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찾는 중에 젖게 되는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맑음과는 거리가 먼 이 세상살이가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나는 항시 글을 쓰기에 앞서 '창세기' 1장에서 거듭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기 참 좋았다."는 말을 상기하곤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내 작품이 좀더 강렬하지 못한 데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입니다만 신이 보기에 싫은 것보다는 좋은 것을 써보고자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피천득 선생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만 "문학의 가장 위대한 기능은 우리네 삶을 위로해 주고 승화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나의 신조로 삼고 있지요. 여기에 모은 동화는 1983년 여름부터 1986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첫번째 창작집 "물에서 나온 새"의 아우가 되는 셈입니다. 이 시절을 저 수원에서 살았었습니다. 앞에는 들이, 뒤에는 숲이 울창한 산이 있어서 아침마다 새들 우짖는 소리에 잠이 깨곤 하였었습니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뻐꾸기가 울며, 가을에는 들국화가, 겨울에는 눈이 잘 녹지 않는 마을이었지요. 그곳의 베어 내고 남은 벼포기마다에 하얗게 내린 서리, 그 시린 정기를 이 책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고 싶습니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게으른 저를 심히 독촉해 주신 창비의 이혜경님, 그리고 좋은 그림을 따뜻한 우정으로 그려 주신 김근중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986.8.18 정채봉 제1부 강나루아이들 흰구름의 말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보렴. 비가 오고 있는 곳에서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을 거야. 그러나 남색의 하늘이 트여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야. 파나 하늘 한쪽에 하얀 솜처럼 두둥실 떠 있는 흰구름. 그 휜구름이 내 모습이거든. 요즈음 같은 삼월에는, 얼음 녹아 흐르는 산여울 위나 살구꽃이 피는 외딴집 울타리 가에 잘 머물곤 하지. 내가 왜 이렇게 하얀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걸 나도 알아. 어떤 아이는 깊은 산속 옹달샘 물을 먹고 살아서 그렇다 하더군. 또 다른 아이는 수평선 너머 파아란 바닷물로 멱을 감고 다녀서 하얗다 하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구정물도 곧잘 먹는 걸. 흙탕물로 목욕을 하기도 하고. 거짓말 같다고? 아니야, 정말이야. 지금 당장 부엌문 곁에 있는 구정물통을 들여다봐. 처마 끝을 비집고 나와서 구정물통 속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을 테니. 구정물통이 따로 없는 사람은 비 온 다음에 길가의 물웅덩이를 가만히 지켜 보면 알게 돼. 빗물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세수를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서 하얀지, 그 비밀을 알려 달라고? 그건 간단해. 아주 쉬운 일이야. 나는 푸른 하늘을 오고 가면서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서 맑은 것만 가려서 보고 있어. 꽃잎에 티 묻은 발자국이 생길까 봐 발을 열심히 닦고 있는 아기 나비하며, 풀잎 사이로 쳐놓은 그물에 이슬방울이 걸리자 너무 좋아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아기거미하며. 그래,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내 가슴은 하얗게 부풀어.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일들만 보는 검은 구름하고는 정반대이지. 어떤 사람들은 그런 작은 기쁨이 무슨 이야기가 되느냐며 못마땅해하기도 하겠지. 그러나 이 지구가 우주의 어느 별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곳곳에 숨어 있는 이런 소중한 풍경 때문이 아닐까. 모래능선의 사막에 있는 한점 오아시스처럼.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게. 강나루 아이들 강나루에 머물던 때의 일이야. 강가에서 아이 둘이가 만나서 노는 것을 보곤 했었어. 사내아이는 과수원 집의 손자였고, 여자아이는 나룻배 사공의 손녀였지. 두 아이는 때로 강가에서 종이배를 접어 띄우기도 했고, 모래성을 쌓으며 놀기도 했어. 어떤 날은 강둑에서 풀꽃으로 꽃반지를 만들어 여자아이의 손가락에 끼우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풀꽃으로 꽃시계를 만들어 사내아이가 차기도 했지. 그런데 두 아이가 가장 즐겨 한 놀이는 소꿉장난이었어. 그 중에서도 병원놀이는 여자아이가 고집을 피워서 번번이 거듭되곤 했었지. 여자아이의 장래 소원이 간호원이었거든. 사내아이의 장래 소원은 무엇이었냐고? 그거야 장군이었지. 대개의 사내들이란 그런 거야.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큰 공을 세워서 빛나고 싶은 거지. 그러나 강나루의 사내아이는 신나게 싸워 보지도 못하고 부상을 당해 돌아와야 했어. 여자아이가 치료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사내아이는 눈을 감은 채 어떤 때는 팔을 그리고 또 어떤 때는 다리를 여자아이한테 맡기곤 했지. 그러면 여자아이는 탱자나무 가시를 들고 말하는 거야. "어머나, 나쁜 총알이 여기로 지나갔군요. 아프겠지만 참아요. 안 아프게 하는 주사를 주겠어요. 어때요? 이젠 아프지 않지요?" 사내아이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어. 하지만 심술이 날 때는 더 아픈 양 엄살을 피우곤 했지. "아파! 아파 죽겠단 말이야. 아야! 아야!" "정말 아파?" "아프다니까." "얼만큼 아파?" "하늘만큼, 땅만큼." "그럼 수술을 해야겠네. 잠깐 기다려요." 여자아이가 수술도구로 헝겊이며 조개 껍데기 등을 가져올 때면 사내아이는 벌떡 일어나는 것이야. 아무데도, 아무데도 아프지 않다고 헤헤헤 웃으면서 말이야. 그러면 여자아이는 눈을 흘기는 것이었는데 이럴 때 나는 조용한 평화로 뭉게뭉게 커지곤 하지. 그런데 어느 날이었어. 이날 나는 강 건너에서 깜박 낮잠이 들었다가 이쪽 강가에 나오는 것이 좀 늦었었지. 한데 이날도 두 아이는 병원놀이를 하고 있더군. 사내아이는 또다시 다쳐 와서 누워 있었고, 여자아이는 그 앞에서 소리소리를 지르는 것이야. "어디가 아프세요? 어디를 다쳤냐니까?"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어디를 다쳤는데 그래?" 사내아이가 귀를 가리켰어. 그러자 금방 여자아이의 눈에 눈물이 괴는 것을 나는 보았지. "그러지마. 다른 데는 다 다쳐도 좋아. 그러나 귀는 다치지 마라.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니까 슬퍼져." 그러자 사내아이는 여자아이가 우는 것이 재미있었던가 봐. 이번에는 눈을 꼭 감고 앓는 소리를 내었어. "어디가 아프세요?" "눈이 아파." "어머, 눈을 다쳤어?" "그래, 눈을 다쳤어." "두 눈을 다?" "응. 두 눈 다 다쳤어." "아무것도 안 보여?" "안 보여." "그럼 내가......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모르겠어." 이때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뜨렸어. 소꿉장난중인데 정말로 우는 것이야. 사내아이가 눈을 뜨자 여자아이가 말했어. "그러지 마. 다른 데는 모르지만 눈만은 다치지 마라. 내 얼굴이 안 보이면 난 어떡해?" 사내아이가 가만히 다가가서 여자아이의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 주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지. 넓은 하늘을 오통 내 흰구름으로 가득 덮고 싶은 날이었어. <1985. 3> 꽃 그늘 환한 물 흰구름이 이야기하였습니다. 골 깊은 산속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지. 푸른 바다 가운데 떠 있는 한 점 바위섬처럼 숲과 산바람에 둘러싸여 있는 이 암자에는 눈이 큰 스님이 한분 살고 계셨는데, 나는 때때로 이 조용한 암자가 좋아서 지붕 위를 맴돌며 한참씩 쉬어가곤 하였어. 스님은 일찍 일어나셔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린 다음, 혼자서 나무하고 밭매고 밥짓는 틈틈이 공부를 하시지. 어떤 날은 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염불 소리만 바깥으로 흘러 나오기도 해. 스님의 낭랑한 염불은 새소리, 솔바람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데 간혹 다람쥐들이 귀를 세우고 듣는 걸 볼 적도 있지. 때로 스님은 빨랫감을 가지고 개울가로 나와서 빨래를 하다 말고 물끄러미 흘르가는 개울물에 눈을 준 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냥 앉아 있기도 해. 그러다 일어나실 때 보면 스님의 눈빛은 물빛보다도 더욱 맑아 있곤 하는데, 아마도 스님께선 쉬지 않고 흘러가는 물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깨닫지 않았나, 나는 그렇게 짐작하지. 하루는 장난기가 심한 새들이 날아와서 스님이 잘 닦아 놓은 마루 위에 발자국들을 옹기종기 어질러 놓고 날아가더군. 나는 스님이 어떤 얼굴을 하실까, 궁금했지. 한참 있으니 밭에 나간 스님이 괭이와 삽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셨어. 스님은 괭이와 삽을 광 속에 집어 넣고 옷을 훌훌 털면서 토방 위로 오라오셨지. 그러고는 이내 마루에 어질러져 있는 새들의 발자국을 보시고는 빙그레 미소 지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어. "내 없는 사이에 화엄이네가 다녀간 게로군." 어는 겨울인가 눈이 아주 드물게 많이 왔을 때의 일이야. 스님은 저녁 예불을 마치기가 바쁘게 마당 귀퉁이를 파는 것이었어. 거기에서는 갈무리해 둔 무가 나왔었는데 스님은 그 무들을 한 삼태기 담아 가지고는 숲이 짙은 뒤란 쪽에다 듬성듬성 놓아 두는 것이었어. 나는 처음에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왜 저러는가 했지. 그런데 이날 밤에 밤마을 나와서야 나는 비로소 스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차렸지. 마침 달이 떠올랐기 때문에 눈덮인 산천은 대낮보다도 환하고 아름다웠어. 그때 나는 배가 고픈 토끼가 암자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내려오다가 눈을 화들짝 왕밤만하게 뜨는 것을 보았지. 무가 여기저기에 놓여 있으니까 글쎄 이 녀석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것이었어. 얼마 후 토끼의 기별을 받고 몰려든 오소리며 노루며 너구리며 고라니 들이 순이 노오란 무를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이를 보면서 나는 산식구들과 나누는 스님의 잔잔한 인정이 가슴에 속속들이 저며움을 느끼었지. 그런데 정작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지금부터야. 그러니까 지난 늦가을이었지. 낙엽이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산속의 길도 묻혀 버린 어느 날이었어. 장에 갔다 오시던 스님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문득 발을 멈추셨지. 무슨 일일까, 발이라도 씻으시려나 했더니 그게 아니더군. 스님은 개울의 한쪽 귀퉁이에서 파란 융단 같은 이끼를 쓰고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작은 돌 하나를 집어 드시는 것이었어. 그러곤 이웃한테, 마치 사람들에게 이르시듯 조용조용히 말씀하셨지. "올해는 무껍질이 두터운 걸로 봐서 동장군이 제법 기승을 부릴 것 같으이. 그렇게 되면 이 이끼도 얼어 죽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가 묵고 있는 거처로 데려가려고 하네. 이해들 해주겠지. 그렇다면 서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게나." 개울가의 마른 풀잎들이 서걱거렸지. 바위를 도는 물줄기는 돌돌거렸고, 작은 물고기가 한 마리 물 위로 반짝 하고 뛰었어. 마치 돌아서 가시는 스님을 배웅하기나 하는 것처럼. 이날 석양 무렵이었지. 암자에 올라오신 스님은 소반 위에 이끼 덮인 돌을 올려 들고 방으로 들어가시더군. 나는 방에서 흘러 나오는 스님의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 "처음은 좀 낯이 설어서 서먹서먹할지 모르지만 이내 서로 정이 들걸세. 저건 차를 끓이는 주전자이고 저건 찻잔일세," 나는 그만 바람을 타고산을 넘어갔어. 이끼가 들어섬으로 해서 푸른 섬이 생기었을 스님의 단출한 방안을 생각하면 여간 즐겁지가 않았지. 이끼 또한 스님 덕분에 무사히 겨울을 날 테니 이 또한 내 마음을 아늑하게 하였었고. 삭풍이 부는 겨울이 오는가 했더니 눈을 못 이긴 소나무 가지가 더러 부러지면서 겨울은 차츰 깊어갔어. 나는 이즈음 어쩌다 암자를 지날 때면 스님이 묵고 계시는 방 미닫이를 찬찬히 살펴보곤 했지. 그럴 때면 미닫이에 스님의 오롯한 그림자가 비치고 그 곁에는 이끼가 얹혀 살아가는 소반의 그림자가 따라 있곤 했어. 이 얼마나 든든한 안부인지. 어느덧 겨울이 물러가고 움이 터오르는 봄이 되었어. 얼음 풀려 흐르는 물소리가 개울에서 제법 커지고, 진달래꽃 빛이 산을 덮어가는 봄날의 오후였지. 나는 이날 무심히 이 골 깊은 산골짜기의 개울물에 내 몸을 비취 보며 놀고 있는데 ㅂ리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어. 아, 바로 그 눈이 크고 키가 큰 스님이었어 스님이 두 손으로 싸안고 온 것은, 그래 맞아, 바로 그 이끼가 덮인 돌덩어리였지. 이끼는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야. 아주 새파래. 스님은 징검다리를 건너서 개울 귀퉁이로 내려왔지. 바로 그 자리는 이끼의 돌덩어리가 박혀 있던 곳이었어. 거기에 예전 모습 그대로 돌을 놓으면서 스님은 말씀하셨어. "자, 약속대로 자네들의 친구를 다시 데려왔네. 반갑겠지? 암, 그렇고말고. 이제부터는 또 사이 좋게들 지내게나. 그리고 능엄이, 자넨 다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네. 자기의 삶을 남에게 평생 의지해 살면 뿌리가 썩어 버리는 법이야. 아마 가뭄이 들거나 큰물이 질 때도 있을 테니 힘은 들겠지. 그러나 그런 어려움쯤은 견뎌내야 하네. 그래야 살아간다는 보람이 생기는 걸세. 자, 그럼 잘 있게. 궁금하고 보고 싶으면 간혹 올게." 스님은 왔던 길을 되짚어갔지. 어깨가 보이다가, 등이 보이다가 나중에는 가사 자락마저도 산수유 꽃가지 속으로 묻혀 버렸지. 나는 이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높은 산 위로 올라갔어. <1986.3> 풀꽃 꽃다발 휜구름이 말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산밑에 고아원이 있었지. 아카시아나무와 상수리나무와 오리목나무들이 빙 둘러 서 있고 슬레이트 지붕에 빨간 칠을 해서 먼데서 보면 아늑한 과수원집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낙엽처럼 쓸쓸한 아이들이 모여 사는 서글픈 곳이야. 어떤 날 보면 배가 고픈 아이가 우물가로 나와서 찬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는 하늘을 물끄러미 우러러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빵으로 부풀지 못하는 아쉬움에 한숨을 쉬곤 하지. 그르나 이때보다도 더 가슴이 미어지는 적이 있어. 해질 무렵 산그리메(그림자)가 들녘으로 소리 없이 내려오면 아이들의 놀이판은 꽃잎이 시드는 것처럼 후줄근해지지. 소꿉장난을 하던 아이들도, 숨바꼭질을 하던 아이들도 등불이 하나 둘 물리는 마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거야. 아아, 그리하여 저 먼 정거장에 와닿는 기차의 기적이 울린 뒤, 저녁 안개가 묻어 오는 신작로에 어느 여인의 치맛자락이라도 비칠라치면 우우 울타리 너머를 내다보는 아이들...... 그들의 가슴마다에 번져 가는 빠알간 노을을 나는 알고 있지. 노을이 스러지면 어둠이 찾아들고, 어둠이 깊어지면 별이 떠오르듯 이 외로운 고아들에게도 별처럼 아름다운 보모가 계셨어.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서 굴뚝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우는 아이의 등을 쓸어 주며 하는 이 보모의 얘기를 나는 들었지. "나도 너처럼 엄마 아빠가 없이 홀로 자랐단다. 내가 밥을 끓이고, 설거지도 하고, 동생의 옷을 갈아입히기도 했지. 내가 선애 너만 했을 때의 가을 운동회날이 생각나는구나. 남들은 다들 부모 형제가 왔는데 나는 혼자뿐이었지. 달리기에서 일등을 하였는데도 누구 하나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어. 나는 점심 시간에 혼자서 뒷동산으로 올라갔지. 풀숲에 들어가서 한참 울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글쎄 잡초 틈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오지 뭐야. 누구 하나 돌봐 주지 않았을 텐데도 저 혼자 꿋꿋하게 자라서 꽃을 피운 잡초 속의 코스모스가 어찌나 좋아 뵈던지...... 나중에 나는 그 코스모스와 약속을 했어. 꿋꿋하게 나도 잘 자라서 이쁜 꽃을 피우겠다고 말이야. 선애야, 너도 나와 약속할 수 있겠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나는 보았지. 기쁨으로 가득 찬 내 가슴이 뭉게뭉게 부풀어오르는 한낮이었어. 그른데 며칠 전부터였어. 이 고아원의 아이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것이 자주 내 눈에 띄었지. 무슨 일일까, 궁금한 나는 귀를 바짝 세웠지. 그러나 아이들은 어찌나 작은 소리로 말을 옮기는지 좀처럼 그 비밀이 새어 나오지를 않는 것이야. 나는 아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인영이의 머리 위에서 머물렀지. 인영이한테 그 비밀이 옮겨져 오면 틀림없이 인영인 그것을 터뜨리지 않곤 배겨내지 못할 테니까. 아니나다를까. 인영이가 물가에서 올챙이르 잡고 있는데 선애가 쪼르르르 달려왔어. 그리고 인영이의 귀를 잡고 뭐라고 말하자, 금방 인영이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것이었어. "뭐야? 엄마가 시집을 간다고?" "쉬이, 조용히 해." "내가 조용히 하면 엄마가 시집 안가?" "바보." "그런 것도 모르는 언니가 바보지, 내가 왜 바보야." 인영이는 두 주먹을 쥐고 달려갔어. 고아원의 큰언니들이 복숭아나무 아래 모여 서 있더군. "큰언니, 엄마가 정말 시집가?" "넌 누구한테서 들었니?" "선애 언니한테서." "빠르기도 하네." "큰언니, 정말이야?" "그래, 정말이야. 결혼하신대." "그럼 큰일 아냐?" "왜?" "우리 진짜 엄마처럼 우리를 버리고 갈 거 아냐?" "그렇지 않아. 지금의 우리 마리아 엄마는 우리와 헤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어. 시집가서도 우리와 함께 계속 이곳에서 사신댔어." "정말이야, 큰언니?" "그럼! 엄마가 우리한테 약속해 주셨는걸." "야아, 신난다! 그런데 언니들은 지금 무얼 걱정하고 있어?" "엄마한테 결혼 선물을 해야겠는데 마땅한 게 없으니까 그렇지." "참 그렇구나......" 아이들은 다시 시름에 젖는 것이었어. 인영이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쳤어. "큰언니, 꽃다발을 선물하면 어때?" 그러자 키가 큰 사내아이가 한심스럽다는 듯 인영이를 내려다보면서 말했지. "꽃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알어? 우리한테는 지금 다 모은 돈이 삼백팔십 원밖에 안 된단 말이야." "나한테도 조금 있어." 인영이가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어. "얼만데?" "전번 은행 앞에서 주운 일원짜리 셋하고...... 또 우체국 앞에서 주운 오원짜리 하나하구." 그러자 큰 아이들이 조용히 웃었지. "그래 봐야 삼백팔십팔 원밖에 더 되니?" 이때 산너머로부터 남풍이 불어와 나의 어깨를 가만가만히 떠다밀었어. 그 자리에 내가 더 있다가는 눈물을 머금게 될까 봐 바람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야. 마침내 그작은 고아원의 보모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어. 나는 그날따라 먹구름이 어른 비켜 주지 않는 통에 산너머에서 늦게 나섰지. 강을 건너 들녘을 지나가는데 나를 실어 가는 바람은 또 어찌 그렇게 자주 쉬는지...... 읍내의 예식장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어. 유리창 너머로 살며시 들여다본 식장의 맨 앞에는 주례를 맡은 선생님이 계시더군. 그 맞은편에는 목화 같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 그리고 갚은 바다 빛깔의 파란 양복을 입은 신랑이 서 있고, 그 뒤로는 단출한 축하객들이 가지런히 앉아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아이들이 언덕 밑의 풀꽃처럼 박혀 있고. 식장을 한 바퀴 둘러본 나는 신부한테로 다시 눈을 돌렸지. 순간 나는 숨이 컥 막히는 감격적인 것을 보았어. 신부가 가슴 앞에 두 손으로 모두어 들고 있는 꽃다발. 그것은 내가 처음 보는 아름답고도 고귀한 꽃다발이었었지. 주례를 맡아 주신 선생님을 이렇게 말씀을 끝맺으셨어. "......저는 오늘 이 조촐한 자리에서 이 세상은 정말 살아갈 만하구나 하고 찡하게 우러나오는 감동을 맛보고 있습니다. 오늘 결혼을 하는 이마리아님은 고아로 자라나서 고아원 보모가 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마리아님이 보살피고 있는 어린이들이 놀라운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 신부가 안고 있는 꽃다발이 그것입니다. 들녘과 산비탈에 피어난 제비꽃과 진달래와 그리고 냉이꽃과 민들레를 엮어서 만든 이 꽃다발. 이것보다 아름다운 꽃다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이 빛나는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풀꽃 꽃다발의 정이 두루 나누어지기를 소원합니다." <1986.4> 하늘 나라 우체부 흰구름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집배원 아저씨를 한 사람 알고 있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커다란 편지 가방을 어깨에 메고 골목 안 오두막까지도 찾아 다니는 집배원들. 그 중에 이 분이 내 눈에 띈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다른 집배원들은 오후가 되어 배달이 끝나면 빈 가방을 메고 휘파람을 불면서 우체국을 향해 곧장 돌아가 버리지. 그러나 이 집배원을 달라. 우체국을 나설 때 편지로 가득했던 그 편지 가방이 비면 서편에 있는 강가로 나가곤 하는 것이었어. 그러고는 가죽 가방에 강변 금모래를 가득 담아 메고는 아이들 놀이터를 순례하는 것이야. 그리하여 그 집배원 아저씨가 지나가는 동네의 놀이터마다는 고운 금로래로 반짝이었는데 그 모래 위헤 풀석풀석 드러눕는 아이들을 볼 때면 내 가슴은 평화로 가득 출렁거리곤 하지. 그날도 집배원 아저씨는 편지 가방에 금모래를 가득 담아 메고서 밤실 마을의 새로 생긴 어린이 놀이터에 나타나셨어. 마침 저녁때인지라 아이들은 거의 집으로 돌아가고 놀이터는 한가히 비어 있었지. 집배원 아저씨가 미끄럼틀 아래에 가방 속의 모래를 쏟아 놓고 일어났을 때였어. 그때까지 집에 가지 않고 있던 아이 하나가 다가왔지. 그래. 그 아이 이름을 나는 기억하고 있어. 이미경. 이 마을의 안산 밑 외딴 두메에서 농사를 짓는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여자아이로 올해 국민학교에 갓 입학했지. 미경이는 집배원 아저씨 앞으로 달려와서 다짜고짜 물었어. "아저씨, 하늘 나라에도 편지가 가?" "뭐라구? 하늘 나라에도 편지가 가느냐고?" "예, 아저씨. 우리 아빠가 하늘 나라에 가 계시거든요." "그으래?" 집배원 아저씨의 눈이 커졌지. 부어 놓은 모래를 손바닥으로 고르더니 그 위에다 '하늘 나라 우편 번호"라고 손가락 글씨를 써보더군. 이내 아저씨가 손을 털고 일어나서 미경이의 작은 손목을 거머잡으며 말씀하셨어. "내가 네 편지를 하늘 나라에 계시는 너희 아빠한테 보내 주겠다. 그러니 그 편지를 내게 다오." "정말이야, 아저씨? 하늘 나라에도 정말 편지가 가?" "그럼 가고말고. 편지는 어느 나라이고 찾아가지 않는 데가 없는걸." 미경이는 등뒤에 감추고 있던 편지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런데 아저씨, 아빠의 답장을 받으려면 며칠이나 걸려?" "아빠의 답장? 글쎄 그건......" 아저씨는 뒷머리를 만지며 한참 생각하더니 불쑥 말했지. "일주일쯤 지나면 아빠의 답방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정말이야, 아저시?" "정말이고말고. 다음 토요일 오후에 여기서 만나자. 내가 너희 아빠의 답장을 가지고 올게." "야, 신난다!" 미경이는 깡충깡충 뛰어갔지. 집배원 아저씨는 툭툭 돌을 차며 돌아갔고.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어. 나는 토요일 낮부터 밤실 마을의 어린이 놀이터 위에 나와 있었지. 미루나무의 그림자가 제볍 커지자 미경이가 나타났어. 미경이는 전처럼 그네 위에 앉아서 내내 동구 밖을 내다보고 있었지. 마침내 빨간 편지 가방을 어깨에 멘 아저씨가 놀이터에 들어섰어. 미경이가 벌떡 일어나서 쫓아갔지. 순간 나도 미경이도 놀랐어. 놀이터로 들어온 사람은 전혀 못 보던 얼굴의 집배원이었으니까. 아저씨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미경이를 보고 물었어. "네가 이미경이니?" "예, 아저씨." "자, 하늘 나라에서 너희 아빠가 보낸 편지가 왔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편지를 받아 든 미경이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지. 그러다 곧 궁금한 얼굴로 미경이가 물었어. "그런데 아저씨, 저번 내 편지를 부쳐 준 아저씨는 왜 안 왔지?" "아, 그 사람은 발령이 나서 다른 데로 옮겨 갔단다. 그래서 내가 너희 아버지의 답장을 대신 가지고 온 거야." 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어. 하늘이 무척 푸른 오월에 일어난 일이었어. <1986. 6> 위문 온 매미 흰구름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칠월은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달이지. 나무들은 모두 감춰 둔 속잎까지도 마저 퍼내고, 들녘에서는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개똥참외가 열리기도 하지. 그리고 고구마밭 이랑을 지나는 사람들은 간혹 고구마 둔덕에 금 가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달이야. 이처럼 싱싱한 이 달과 참 잘 어울리는 곳이 있지. 막사 지붕이 보이는 병영. 이곳을 지날 때면 나는 젊은이들의 구릿빛 얼굴에서 파도결 같은 힘을 느끼곤 하지. 그날은 뙤약볕이 어찌나 쟁쟁한지 막사 지붕 위의 콜타르가 진득하게 녹을 정도였었어. 그런데 한낮의 휴식 시간에 병사들 앞으로 위문 편지가 한 통씩 전달되었지. 환호하는 병사들의 얼굴을 그려보아. 그 중에서도 시골 자전거포에서 일하다 온 김 일병은 평소 펀지 한 통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기쁨이 큰 것 같았어. 미루나무 밑동에 기대어 김 일병은 편지를 읽더니만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겠지. 크지는 않지만 깊은 산속에서 피는 풀꽃 같은 눈빛이랄까, 아무튼 병영에서는 보기 드문 고요한 눈이었어. 그로부터 며칠 후, 일요일이었지. 남들은 낮잠을 자거나 장기를 두거나 외출을 나가는데 그 김 일병은 이상한 것을 만들었어. 기다란 작대기 끝에다 철사로 원을 엮은 다음, 처마 구석을 찾아 다니면서 걷는 거미줄. 그래, 시골 아이들이 흔히 만드는 잠자리채였어. 김 일병은 이내 이 나무 저나무를 오르내리면서 그긋으로 매미를 잡더군. 아마 한 서른 마리쯤이 잡혔을 거야. 김 일병은 매미가 든 봉지를 들고는 선임하사한테 외출 신고를 하러 갔지. "제 일 중대 이 소대 김영오 일병 서울 외출을 다녀오겠습니닷!" 그러자 이때 봉지 속에 든 매미가 한 마리 "매아암."하고 저도 신고를 하는 양 울었어. 마침 바둑에서 상대를 이기고 있던 참이라 선임하사는 가볍게 고갯짓 한 번으로 외출을 승낙해 주었지. 부대를 나선 김 일병은 정류장에 이르러 서울 가는 버스를 타더군. 그러고는 창가에 앉더니 윗주머니 속에서 봉투를 하나를 꺼내는 거야.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김 일병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어슴푸레 짐작할 수가 있었어. 김 일병이 꺼내 들고 옆 사람한테 주소를 묻는 그 편지 봉투는 바로 며칠 전에 본 위문 편지의 겉봉이었으니까. 김 일병이 물엇 물어서 마침내 이른 국민학교는 비탈이 가파른 언덕 위에 있었지. 일요일인지라 교실도, 운동장도 텅 비어 있고 수위 아저씨만이 수위실에서 앉은 채로 잠이 들어 있더군. 김 일병은 학교 주변의 나무 밑을 걸어다니면서 봉지 속의 매미를 한 마리씩 꺼내어 날리는 것이었어. 날아오르는 매미, 팔랑거리는 나뭇잎 그리고 휘파람을 부는 김 일병. 이들보다 행복한 이들이 어디 있을까. 이튿날 그 학교는 온통 매미들의 노랫소리에 젖어 있었지. "선생님, 제 소원대로 우리 학교에 매미들이 많이 와 주었어요." 키가 큰 여자아이가 이렇게 말했는데 나는 이 아이가 김 일병이 본 위문 편지의 주인이 아닐까 짐작할 뿐 직접 물어 볼 수는 없는 일이었어. <1986. 7> 신호등 속의 제비집 흰구름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시의 네거리 중앙에 신호등이 있었지. 파란불이 켜지면 가고 빨간불이 켜지면 서야 하는 이 신호등에 어느 봄날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어. 강남 갔다 온 제비네 부부인데 집터가 마땅찮았던지 글쎄 이 신호등을 살펴보더니만 집을 지으려 드는 거야. "아니야. 거긴 시끄러워서 못써. 다른 데로 가. 가란 말이야." 내가 타일렀지만 그 제비 부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 "어디가 좀 부족한 녀석들이로군." 나는 그냥 바람 따라서 강을 건너가 쉬어 버렸지. 이튿날이었어. 나는 이들이 틀림없이 집 짓는 일을 포기하고 다른 데로 갔겠지 하는 마음올 와보았더니 아니, 이게 웬일이야. 제비네가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했군 그래. 두 마리의 제비가 열심히 지푸라기에 물을 묻히고 진흙을 발라서 차곡차곡 벽을 쌓고 있었지. 이 광경을 맨 먼저 발견한 사람은 특럭 운전사였어. 마침 이 신호등 밑을 지나다가 신호를 위반햇다, 안했다 해서 교통 순경과 시비가 벌어졌느데 교통 순경이 손짓으로 가리키는 신호등을 쳐다보던 트럭 운전사가 "히야." 하고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떴어. "교통 아저씨, 일 생겼습니다." "뭐요? 이 양반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저기 좀 보십시오." 트럭 운전사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 교통 순겨의 굳은 눈가도 스르르르 풀렸지. "거참, 집터 한번 희한하게 골랐군. 저걸 그냥 두면 안 되지." 교통 순경이 기다란 작대기를 찾아 들고 어슬렁어슬렁 신호등 밑으로 닥가자 트륵 운전사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얼씨구나 하고 차를 몰아 내뺐지. 교통 순경이 작대기로 제비네 집을 걷어내 버리려고 하는 순간이었어. 마침 신호등 앞에 서 있던 택시 속에서 좀 선하게 생긴 사람이고개를 비죽 내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 "아저씨는 구청 철거반 출신인가요? 아, 도시 사람들 인심이 얼마나 사나웠으면 제비들이 거기에다 집을 지으려고 하겠어요? 한번 봐주세요 거." 교통 순경은 순간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나 보았어. 뒷머리를 만지며 순순히 물러나오더군. 이때 바람이 불어와서 나를 밀었어. 나는 더 지켜 보고 싶었는데 바람이 미니 자리를 조용히 뜰 수 밖에 없었어. 다음날도 나는 이 거리로 일찍 나왔지. 이번에는 이 신호등 아래에 백차가 와 있더군. 교통 순경이 백차에 앉은 사람에게 하는 보고를 나는 들었지. "이젠 집 짓기가 다 끝났습니다. 오늘 아침부터는 벌어먹으러들 다닙니다." "그렇다면 문제지. 밖에 벌이 나갔는데 함부로 집을 부술 수는 없잖아." "글쎄 말입니다. 별일을 다 보니다." "운전하시는 분들은 어때? 교통 장애는 일으키지 않는가?" "웬걸요. 전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습니다. 일부러 이 길로 지나가면서 저들 안부를 묻는 분들도 생겼는걸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하게. 혹시 제비 부부가 감전 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니 저 신호등의 사용을 당분간 중단시키게." "그럼 교통 신호는 대신 저희가 맡아 해야겠군요." "그래야지. 고단하겠지만 함께 살아간다고 생각해서 수고 좀 해주게. 혹시 알아. 저들이 흥부네 제비처럼 강남 갔다 오면서 자네한테 박씨라도 물어 올지 말이야." 교통 순경도 그리고 그이 윗사람도 함께 너털웃음을 웃었지. 나도 기분이 좋아 뭉클뭉클 웃었고. 이날부터 이 신호등에는 전기가 끊겼지. 대신 신호등 위에 애드벌룬이 둥실 떠 있고 그 애드벌룬에는 이런 글이 쓰인 리본이 매달려 있더군. '이 신호등에는 제비집이 있습니다. 신혼이니 놀라지 않게 해주십시요.'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지. 차들이 일체 클랙슨을 울리지 않고, 윙윙거리지도 않고 떼쟁이 아기가 자고 있는 데를 지나는 것처럼 조심조심 다니는 거야. 제비는 아주 신나서 폴폴 나다니고. 한동안 장마가 들어서 나는 자주 그 거리에 나가 볼 수가 없었지. 제비네가 어디로 이사를 가지나 않았을까 궁금하였지만 참고 기다릴 수밖에. 드디어 장마가 개고 하늘이 다시 맑아졌어. 나는 서둘러서 그 네거리로 나가 보았지. 그동안에 리본의 글이 바뀌어져 있더군. '축. 제비 순산하다.' 운전사들은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제비네 소식을 나르기에 바빴지. "당신, 들었어요?" "무얼 말이요?" "그 네거리 신호등에 집 짓고 사는 제비네가 새끼를 깠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미역 사가야겠네요." "미역이 아니라 고추잠자리나 서너 마리 잡아가시지요." "아. 그 제비네는 새끼가 다섯 마리나 된다는 군요." "다복하기도 해라. 그들한텐 산아제한 하라는 캠페인이 없는 모양이지요." "오늘 아침 리본 뉴스 보았어요?" "뭐라고 나왔습니까?" "제비 새끼들 날기 시작하다, 이렇게 돼 있더군요." "거참, 축하할 일입니다." 마침내 가을이 왔어. 그날은 날씨가 하도 좋아서 아침 일찍 나가 보았더니 네거리가 온통 북적대고 있더군. 길 양편으로 차들이 줄줄이 서 있고, 사람들도 발 하나 들여놓을 틈 없이 차 있고. 애드벌룬은 하나에서 세 개로 늘어나 있었는데 거기에 달려 있는 리본 글을 보고서야 나는 알았지. '축. 제비 강남길 환송연.' 밴드가 울렸어. 신통하게 제비네 일곱 식구도 가지런히 전깃줄에 나와 앉아 있더군. 시장이 나와서 그동안에 이 거리에서는 교통 사고는 물론 경범 사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인사말을 하자 박수가 쏟아졌어. 제비들은 신호등 주위를 빙빙 돌며 날았고. 여학생들이 조용히 합창을 하자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따라 불렀지. 남쪽 따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 1986. 8 > 저 들 밖에서 흰구름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역 광장의 한쪽 모퉁이에 장님 부부가 나타났어. 이 부부는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들고 있는 악기와 노래가 남다르더군. 그러니까 대개의 장님들은 기타를 치면서 유행가를 부르는데 이 부부는 바이올린을 켜면서 성가를 부르는 것이었어. 남자는 바이올린을 켜고 여자는 노래를 하고. 그래서인지 다른 데보다는 모이는 사람도 얻는 것도 적었는데, 얼음이 금방금방 어는 날 이들 부부를 보고 있을 때는 한숨이 절로 나오곤 하지. 날이 갈수록 추위는 더욱 기승을 부렸어. 크리스마스가 코앞에 바짝 다가왔던 거야.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점 서둘러지고 가로등 아래의 눈발처럼 정거장마다 사람들이 붐비었지. 그날 오후에도 장님 부부는 성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어. 그런데 여느 날보다도 더 사람들은 모여들지 않았어. 칼바람만 씽씽 달려들 뿐. 그런데 해질 무렵이었어. 지하도에서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나오던 중년 부부가 문득 이들 앞에서 발을 멈추었어. 장님 부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년 신사가 곁의 부인한테 눈으로 묻더군. 당신 어때요 하고. 그러자 부인 역시 눈으로 대답했어. 좋아요, 당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하고. 신사가 나서서 공손히 장님 남자에게 말했어. "저희기 좀 거들어 드릴까요?" 이내 신사가 바이올린을 받아 들고 켜기 시작하는 것이었어. 부인은 노래를 부르고.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천사가 내려와 부인이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부르는 아름다운 성가는 신사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멜로디와 어울려 역 광장을 울리었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이내 이들을 파도결처럼 둘러섰지. 사람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면서 앙코르를 연발했어.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잠자던 목동들 장님 부부의 바구니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이내 바구니는 지폐로 가득 찼지. 신사와 부인이 환한 얼굴로 장님 부부에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었어.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으세요." 장님 부부는 어쩔 줄을 몰라했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사와 부인은 차 시간이 되었는지 바쁜 걸음으로 역 플랫폼을 빠져 나갔지. 아직 흩어지기 아쉬운 듯 머뭇거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지. "저 분들은 그 유명한 부부 음악가 교수인 것 같은데." "맞아. 나도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한 번 본 것 같애." 눈이 펑펑 내려 주었으면 하고 기다려지는 12월 24일 저녁때의 일이었어. <1986. 5> 제 2 부 문 리태네 식구들은 이름에 '태'자를 돌림으로 씁니다. 돌림자란 한집안 사람들끼리 이름을 맞추어 쓰는 항렬자인데 맨 먼저 리태의 오빠한테 붙었습니다. "사람이란 혼자서는 살 수 없느니라. 이리저리 어우러져서 살아야 하지. 그러니 이름을 '이을 승'에 돌림자인 '클 태'를 써서 '승태'라고 하자." 순천에서 갓을 쓰고 올라오신 할아버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이 집에 딸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자 리태 아빠는 유리처럼 맑고 밝으라고 유리라 불렀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면 족보에도 올려 주지 않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태' 자를 써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집의 딸아이는 유리에서 '유' 자를 빼고 '리태'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입니다. 리태네는 솔밭 밑에 있는 작은 기와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전에 살던 아저씨네가 리태네한테 강아지를 한 마리 주고 갔습니다. "깨앵 깽." 우는 강아지를 보고 리태 아빠가 말했습니다. "야, 저 녀석은 개니까 개태다." 그래서 그날로 강아지는 개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리태 아빠가 술에 아주 푹 젖어 돌아와서 대문을 주먹으로 꽝꽝 두드리며 불렀습니다. "마태씨! 마태씨이!" 엄마가 문을 따주면서 물었습니다. "마태라니, 마태가 누군가요?" "누구긴 누구야! 엄마에서 엄자를 빼고 태 자를 붙이니까 당신이 마태지. 안 그러우, 마태씨." 그러자 엄마도 지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도 아빠에서 아 자를 빼고 태 자를 붙여야 겠네요. 어머, 멋져라. 빠태씨! 빠태씨이!" 그리 놓고 보니 이 집 식구들 이름은 이렇게 되었습니다. 빠태, 마태, 승태, 리태, 개태. 그런데 며칠 전부터입니다. 리태네 집에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개태가 통 밥을 먹으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리태가 유치원에서 간신히 배운 비죽배죽 글씨로 '수원시 화서동 322-10 정리태 집안 정개태'라고 쓴 문패가 달린 제 집 속에서 식구들이 아무리 불러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오늘 아침에는 급기야 먹은 것을 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가축 병원에 한번 다녀오시오." 아빠가 회사에 나가면서 말하였습니다. "엄마, 개태도 주사 맞을 때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하라고 해요." 오빠가 학교에 가면서 말하였습니다. "리태야, 개태 데리고 가축 병원에 갔다 올 테니 집 좀 보고 있거라." 엄마가 외투를 입으면서 말하였습니다. "싫어. 싫어! 나도 엄마 따라갈테야!" 리태가 어깨를 흔들며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안 돼. 이천에서 외할머니가 오실지도 모르니까 너라도 집에 있어야 해. 엄마가 오면서 우리 리태가 좋아하는 초컬릿 사올게." 초콜릿을 사온다는 말에 리태는 솔깃해졌습니다. "근데 엄마, 도둑이 오면 어떡하지?" "그러니까 대문을 꼭 잠그고 있어." 엄마는 개태를 데리고 서둘러서 바삐 밖으로 나갔습니다. 리태 혼자만 집에 덩그렇게 남았습니다. 참새들만 기웃거릴 뿐 한낮의 리태네 집은 조용하기만 하였습니다. 리태는 심심하였습니다. 무섭기도 하였습니다. 리태는 엄마 흉내를 배보았습니다. 엄마의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행주치마를 허리에 둘렀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샌들을 신고 아빠의 흔들의자를 향해서 소리쳤습니다. "여보! 빠태씨! 당신 너무해욧! 맨날맨날 술만 먹고! 맨날맨날 머리 아프고! 맨날맨날 돈 하나 없고! 뭐예욧! 뭐예욧!" 그러나 아빠가 대꾸를 안 하니 시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 속상해! 아이 답답해!" 엄마처럼 혼자서 중얼거리며 흔들의자에 풀썩 앉았습니다. 리태는 생각해 봅니다. 다른 무슨 좋은 놀이가 없을까 하고. '참 그래 전화를 걸어 보자.' 리태는 탁자 위에 있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습니다. 아무 번호나 막 돌렸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나는 정리태예요. 거기는 누구예요?" "나는 눈사람이야." "정말?" "그래. 나는 너희 집 장독 가에 있는 눈사람이야." "어머, 반갑다 얘." "그래, 나도 반가워. 그런데 너 참, 전화 잘 해주었다." "왜?" "너한테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이 뭔데?" "너희 집 대문 좀 열어 줘." "그건 안 돼. 우리 엄마가 말이야, 문 열어 놓으면 말이야, 도둑이 들어온댔는 걸." "꼭 그런 것도 아니야. 도둑이 들려면 잠겨 있는 문도 따고 들어오는 거야." "그럼 어떡하지?" "그러니까 열어 놓고 살아야 해. 하늘을 보렴. 활짝 열어 놓고 살아도 잃어버린 것 하나 없지 않아?" "정말 그렇네. 하늘에는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고, 구름도 있고, 맞아 무지개도 있어. 그런데 도둑들이 아무 것도 훔쳐 가지 못하네." "그렇지, 리태야?" "응, 왜 그럴까? 왜 하늘은 열려 있는데도 도둑이 들어가지 못할까?" "담도 없고 문도 없으니까. 들어갈 문도 안 보이니까 나올 문도 안 보일 거 아냐?" "맞아, 그래. 그러면 우린 어떡하지?' "열어 놓고 살아야 한다니까. 새도 봐. 날아다녀야 멀리 보는 거야." "어렵다, 얘. 좀 쉽게 말해 줘." "한마디로 가둬 놓으면 병이 생긴달 말이야." "어머, 그럼 우리 개태도 맨날맨날 묶어 두어서 아픈 게로구나." "맞아. 이제야 알아차리는 구나.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갑갑한 걸." "아아, 그랬었구나. 네가 한 말을 우리 엄마 아빠한테도 들려줘야지." 리태 엄마가 가축 병원에서 돌아와 보니 대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도둑이 들었나 하고 리태 엄마가 집안으로 달려들어가 보니 리태는 흔들의자에서 잠들어 있고 없어진 것이라고 장독 가에 있던 눈사람 하나뿐이었습니다. <1985. 1> 쌀 한 톨 우는 소리가 어디선가에서 들려 왔습니다. "누굴까? 누가 저렇게 굴뚝새처럼 울지?" 만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불장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만희의 오줌 자국이 남아 있는 요가 만희를 보자 비죽 배죽 웃었습니다. "아유, 창피해." 만희는 얼른 이불장 문을 닫았습니다. 마루로 나와서 신발장 문을 열었습니다. 나란히 나란히 짝을 맞춘 신발 가운데 오빠의 비신 한 짝이 쓰러져서 끄응끙 앓고 있었습니다. "미안해." 만희는 쓰러져 있는 비신을 일으켜 세워 주었습니다. 신발장 문을 다고 부엌으로 갔습니다. 양념장 문을 열었습니다. 간장과 참기름은 유리병 속에서 그리고 고춧가루와 깨소금은 하얀 사기 그릇 속에서 콜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만희는 양념들이 잠에서 깰까 봐 소리나지 않게 조심해서 문을 닫았습니다. 만희의 귀가 쫑긋 섰습니다. 울음이 흘러 나오는 곳을 마침내 찾았습니다. 빈 그릇들이 들어가 있는 설거지통 속이었습니다. 만희는 꼰지발을 하고 설거지통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설거지통 속의 다른 그릇은 다 깨끗하였습니다. 그러나 만희의 밥그릇만은 지저분하였습니다. 밥알도 많이 남아 있었고 먹다 만 김치쪽도 남겨진 채였습니다.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김치쪽과 밥알들이었습니다. "울음 뚝 그치지 못하겠니!" 만희는 소리를 바락 질렀습니다. 우는 소리가 여치 소리만큼 낮아졌습니다. "왜 우니. 왜 그렇게 동네방네 떠나가라고 울어?" 그러자 밥알이 사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내 말 좀 들어 봐. 내가 이렇듯 한 알의 밥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공이 들여졌는지 몰라. 볍씨로 갈무리 되었다가 모판에 뿌려지고, 다음에는 모로 자라나서 논에 옮겨지고. 그러고 나서부터는 숱한 김매기와 거름 주기, 가뭄 때는 끌어대랴, 병충해에 농약 치랴, 정말 농부의 땀방울로 푹 적셔져서 우리가 쌀이 된 거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은 더욱 간절하지. 우리가 사람의 밥이 되었을 때 우리로 하여 그 사람이 힘을 얻어서 그 힘을 농붕의 땀방울처럼 거짓 없이 보람 있는 일에 쓰기를 바란 거야. 그런데 오늘 내가 드디어 밥이 되어 만희 네 밥그릇에 담아졌는데 넌 군것질을 해서 밥맛이 없다고 엄마한테 짜증을 내다가 엄마가 한눈 판 사이에 나를 슬쩍 흘려 버렸었지. 이렇게 해서 내가 지금 설거지통으로 옮겨 온 것이야. 그러니 내가 억울해서 어찌 울지 않고 배길 수 있겠니?' 김치쪽도 말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저 밥이 된 쌀만큼 많은 농부의 정성을 받고 자라나서 마침내 이 손 저 손을 거쳐 김치가 된 것이야. 사실 오늘 낮에 만희 네가 나를 집어들 때까지만 해도 나는 행복했어. 아, 나도 누군가를 위하는 반찬이 되는구나 하고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조금만 베어 먹고 버리다니 정말 너무해......" 만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습니다. "내가 몰랐어. 다음부턴 밥알 하나 김치 한 쪽 버리지 않고 잘 먹을게. 용서해 줘." 만희 엄마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만희의 잠꼬대를 들었습니다.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닦으면서 방에 들어와 보니 만희는 미닫이에 코를 박고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뜰에 목련이 눈부시게 벙그는 봄날 오후였습니다. <1986. 2> 성모님의 유치원 은아는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은근히 마음 쓰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은아가 집에서 어떻게 하고 있나' 하고 유치원 선생님이 요술 망원경으로 지켜 보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밥알이 흘려지나 조심이 됐고 시장가는 엄마한테 저도 데리고 가달라고 떼를 쓰다가도 흠칫 놀라서 그만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화장실에 가서 휴지를 한 움큼 끊으려 하다가도 "안 돼요. 아껴 써야 해요" 한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절반만 끊어 쓰기도 합니다.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아홉 시를 알려 드립니다" 하고서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하고 아나운서가 말할 땐 두말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며칠 전 일입니다. 온 식구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웃음거리를 보고 있는데 또 아홉 시 시보가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심술이 난 은아는 벌떡 일어나서 아나운서가 하려는 말을 자기가 가로챘습니다. "알겠다. 알겠어. 착한 어린이는 어서 잠자리에 들어라, 이 말 하려고 그러지?" 은아는 꽝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나갔습니다. 문 이 쪽에서 식구들의 웃음이 터졌습니다. 할머니느 틀니까지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역시 일찍 잠자리에 들면 빨리 잠이 깨었습니다. 새 나라의 어린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은아처럼 빨리 자고 일찍 일어나면 새 나라의 어린이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은아는 더 일찍 잠이 깨었습니다. 아침 일찍 꽃밭에 나가서 꽃들하고 얘기를 나누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날의 꽃밭은 마치 은아네 유치원 교실 같습니다. 저마다 이쁜 얼굴을 하고 모여 있는 꽃밭 교실.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은 꽃들의 모습은 영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쩌다 밤 사이에 소나기로 샤워라도 한 날이면 옷자락이 스치기만 해도 꽃물이 옮아 올 만큼 싱싱한 꽃나무들. 유치원에서는 원생인 은아이지만 꽃밭에서는 은아가 선생님입니다. 꽃밭 가운데 서 있는 성모님은 원장 선생님이고. 현관을 나온 은아는 먼저 성모님께 절을 합니다. "성모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러고는 돌아서서 꽃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여러분, 잘 자고 밥 맛있게 먹었어요?" "네에." 일제히 대답하는 꽃들의 소리는 기운찹니다. 빨간 꽃은 빨간 입을 벌리고, 노란 꽃은 노란 입을 벌리고, 파란 꽃은 파란 입을 벌리고. 은아는 출석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나팔꽃." "네." "금잔화." "네." "맨드라미." "네." "과꽃." "네." "채송화." "네." "봉숭아." "네." "분꽃." "네." "해바라기." "네." 은아는 커다란 돌이 교탁인 양 거기에 두 손을 얹고 꽃들을 향해 말을 합니다. "오늘도 우리 이쁜 원생들이 다 나와 주었군요. 정말 기뻐요. 봉숭아, 어제 감기 기운이 있다고 했지요? 좀 어때요? 아, 이젠 괜찮다구요? 정말 다행이어요. 정말 기뻐요. 어제도 선생님은 요술 망원경을 보았어요. 집에서 누가누가 잘하나, 누가누가 잘못하나 하구요. 그런데 우리 원생들은 모두모두 잘했어요. 밥알을 흘리는 사람도 없었어요. 떼를 쓰는 사람도 없었어요. 휴지도 아껴쓰고 물도 아껴쓰고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정말 착한 어린이들이었어요." 은아는 천천히 걸으면서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입니다. 맨드라미꽃 앞에서 발을 멈춥니다. 허리를 구부려 맨드라미 아랫잎에 묻은 흙을 씻어 줍니다. 나팔꽃이 헛디딘 발을 울타리에 기대어 놓습니다. 과꽃의 고개를 바로 잡아 주면서 "버릇 돼요" 하고 주의 시킵니다. 키다리 해바라기를 쳐다보면서 "혼자 햇빛 다 먹으면 안 돼요"하고 타이르기도 합니다. 꽃밭을 한 바퀴 다 돈 은아의 눈길은 문득 한곳에 가 머뭅니다. 꽃밭의 담은 작은 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 담 바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름 모르는 꽃나무 한 그루. 자갈 틈을 비집고 나와서 그런지 키도 작습니다. 돌보는 이가 없기 때문에 이파리에는 벌레 먹은 흠집이 많습니다. 간혹 은아네 유치원 창 밖에 서 있다가 떠나곤 하는 그 아이처럼. 언젠가 은아는 할머니께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할머니, 하느님은 어디에 계셔요?" "은아야!" 할머니는 은아의 손목을 가만히 거머쥐며 말했습니다. "하늘에도 바닷가에도 그리고 들녘으 풀숲에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단다." "할머니, 하느님은 꽃처럼 이쁘시기도 해요?" "그럼, 이쁘시고말고." "무슨 꽃처럼 생기셨어요? 채송화처럼? 봉숭아처럼?" 할머니는 파란 하늘을 보시다가 한참 만에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채송화처럼도 생기셨고, 봉숭아처럼도 생기셨지. 그리고 우리 꽃밭에는 없는 백합처럼도 생기셨고 풀꽃처럼도 생기셨단다." 은아는 화들짝 깨어났습니다. -그래, 하느님은 저 이름 없는 꽃일지도 모른다. 은아는 성모님을 돌아보며 말하였습니다. "성모님, 저기 저 바깥에 있는 가난한 꽃나무도 우리 꽃밭 안에 들어오게 해요. 괜찮지요?" 은아는 돌담을 허물었습니다. 못난 꽃나무가 꽃밭 안에 들어오게 담을 고쳤습니다. 호미로 땅을 파고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습니다. 손을 씻고 꽃들 앞에 다시 섰습니다. "여러분, 오늘 새 동무를 소개하겠어요. 여러분도 진즉부터 보았지요? 우리 유치원 바깥에 서 있던 가난한 동무여요. 앞으로 사이 좋게 지내도록 해요. 알았지요?" "네에!" 어느 때보다도 꽃들의 대답은 우렁찼습니다. 이때입니다. 은아의 뒤편에 서 있던 성모님이 은아의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은 것은. <1984. 4> 거울 나라 원이와 함께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세모가 울상이 되어 아빠를 찾아왔습니다. "아빠, 형이 안 보여요." "온몸을 찾으려니까 그렇지. 그런 놀이를 하면서는 작은 것을 잘 봐야 하는 거야. 머리 끝 부분이나 발부리 부분을 말이야." "나도 알아요. 머리카락도 찾고 실밥도 찾아내요. 그런데 아빠, 이건 정말이어요. 원이 형이 우주의 소매치기처럼 사라져 버렸어요." "원 녀석들도......" 아빠는 볼멘소리를 하면서 일어났습니다. 보고 있던 책을 덮는 것이 못내 아쉬운지 혀를 두어 번 차기도 했습니다. 아빠는 옷장이며 이불장, 목욕탕, 다락, 책상 밑 할 것없이 원이가 숨어 있을 만한 곳들을 찾아 이 방 저 방을 뒤졌습니다. 세모도 아빠의 뒤를 따라다니며 책상 서랍을 열어 보기도 하고, 옷장 서랍을 빼보기도 했습니다. "이 녀석아, 어떻게 그런 작은 서랍 속에 네 형이 들어간단 말이냐?" 아빠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형아! 형이 이겼어! 그만 숨고 어서 나와!" 세모가 커튼을 젖혀 보면서 소리쳤습니다. 원이는 엄마 방의 큰 거울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빠와 세모가 가슴 죄며 찾아 다니는 줄도 모르고 거울 안으로 계속 발을 옮겨 놓고 있었습니다. 원이의 눈을 점점 커졌습니다. 거울 속에도 거울 밖과 똑같은 세계가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앞산과 마을 그리고 사람들, 하늘과 집 마당 구석의 오동나무까지도 그대로 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원이가 꾸벅 절을 해도 누구 하나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동나무 큰 잎이 바람에 흔들려도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있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저만큼 떨어져 있는 돌담 가에 이사 간 영이가 나타났습니다. 영이는 이삿짐 차를 타고 갈 때처럼 파란 스커트에 노란 스웨터를 입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는데 퇴원해 나왔구나.' 원이는 반가움에 영이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영이는 하나도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물끄러미 원이를 바라다보기만 할 뿐이엇습니다. 원이는 영이한테 무슨 말인가를 건네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원이는 영이의 고무줄을 끊어 가지고 도망갓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 일 때문에 영이가 토라졌었습니다. 원이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던 고무줄 토막을 꺼내어서 영이한테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영이는 초롱한 눈으로 원이를 빤히 쳐다볼 뿐,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원이는 할 수 없이 고무줄 토막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언젠가 미안한 일이 있었을 때처럼 영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잡은 손을 통해 영이의 생각이 그대로 전해져 왔던 것입니다. "괜찮아. 이곳은 잘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 이전의 우리들 본래의 맑은 마음 세상이야." "뭐라고? 우리들 마음 세상이라는 것도 있다고?" 원이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우리는 바깥세상에 있는 우리와 다르다는 말이니?" "맞아. 거울 이쪽의 우리가 진짜야. 바깥세상의 우리는 어른이 만들어 준 껍데기에 불과해." 원이는 점점 어리둥절해 갔습니다. "그렇다면 영이야, 너는 언제 이곳에 들어왔니?' "난 아주 오래 전부터 여기에 있었어." "그럼 나와 예전에 놀던 영이는 누구였니?" "그건 거울 저쪽의 나야." "그러면 나도 여기 거울 속에 바깥세상과는 다른 또 하나의 내가 있겠구나?" 영이는 원이의 두 눈을 들여다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람만이 아니야. 해와 달도, 별과 산도 그리고 작은 풀나무 한 그루도 또 하나의 자기가 있어." 원이는 가슴의 방망이질하듯 뛰는 걸 느꼈습니다. "영이야, 그렇다면 또 하나의 나를 만나게 해줘, 응?" 영이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습니다. "지금은 안 돼. 그러나 먼 훗날엔 자연히 만날 수 있게 될 거야. 그때까지 이 풀꽃처럼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지내도록 해. 그렇게 되면 네 본모습을 만나는 날, 기쁨으로 한몸이 될 테니까." 영이는 풀꽃 하나를 가만히 원이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원이는 물처럼 맑게 흘러 들어오는 유리빛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가없는 둘레였습니다. 영이는 원이의 손을 잡고 원이네 집을 향해 걸었습니다. 원이네 뜰에 있는 오동나무에서 잎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빠와 동생 세모가 장독대를 돌아서 포도 덩굴 밑을 뒤지고 나오는 것이 원이 눈에 보였습니다. 원이는 그제서야 세모와 함께 숨바꼭질을 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원이는 세모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옆으로 얼른 비켜났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영이의 손을 놓치면서 넘어졌습니다. 쨍그랑! 하고 엄마의 방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아빠가 깜짝 놀라서 달려가 보니 원이가 엄마의 경대와 함께 나동그라져 있었습니다. "거울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을 몰랐구나.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아빠가 원이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습니다. 원이는 꿈을 꾸고 난 것처럼 몽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형아, 이 풀꽃 어디서 났어?" 뒤늦게 들어온 세모가 깨진 거울 조각 틈에서 풀꽃을 집어 들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원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풀꽃을 쳐다보며 씩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습니다. <1984. 1> 천사의 눈 시의 네거리 모퉁이에 커다란 은행나무 가로수가 서 있고, 그 은행나무 뒤편에 작은 빌딩이 하나 있었습니다. 빌딩의 1층에는 여행사 사무실이, 2층에는 소아과 병원이 그리고 3층에는 조각가 아저씨가 세 들어 있습니다. 여행사 사무실에서는 기차표와 비행기표 파는 일을 합니다. 그러니 자연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출렁거리게 마련입니다. "강릉 가는 표 있는가요? 경포대에 가서 우리 집 아이한테 달 뜨는 걸 보여 주려고 그래요. 경포대에서 보는 달은 정말 아름답거든요." "부여 가는 표 있으면 넉 장만 주셔요. 이번 토요일에 온 가족이 한 번 다녀올 생각예요. 부소산 낙화암으로 해서 백마강으로 가서 배도 타보겠어요." 이처럼 밝은 1층의 여행사와는 달리 2층의 소아과 병원은 입구서부터 어둡습니다. 때로는 들어가기 싫어서 층계에 주저앉아 떼를 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기절한 아이를 업은 어른이 급히급히 뛰어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3층은 항시 고요합니다. 방의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돌덩어리와 나무토막과 플라스틱 그리고 석고가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궁금해하고 있어서 더욱 조용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빌딩은 층마다 서로 다른 일거리로 아주 동떨어진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층끼리는 사이가 좋아서 서로 다툰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2층 소아과 병원에서는 주사 맞기 싫어서 우는 아이한테 1층에 있는 여행사 이야기를 하여 달랩니다. "비행기 타고 여행 가고 싶지 않니? 제주도로 말이야. 제주도에 가면 해녀도 볼 수 있고, 망아지도 볼 수 있고 귤이 주렁주렁 열린 귤나무도 볼 수 있대. 그래, 어서 나아야 제주도에도 갈 수 있는 거야." 그러나 이 병원에는 제주도 이야기를 열 번도 넘게, 그리고 알프스의 산동네 이야기를 다섯 번도 넘게 들은 아이가 있습니다. 이름, 이미리. 나이, 7세. 성별, 여자. 병, 선천성 심장 불량. 미리는 때때로 피를 바꾸어야 하고, 안정제 주사를 맞아야 하고, 아랫배에 또 커다란 바늘도 꽂아야 하기 때문에 간호원 언니의 달램 여행 밑천도 다 떨어지고 없습니다. 도리어 병원에 처음 온 아이가 의사 선생님 앞에서 울면 미리가 가서 손을 잡아 주며 달래었습니다. "무서워마. 나는 늘 피를 빼는 걸. 너 여기 들어오다가 봤지. 비행기가 그려진 유리문 말이야. 거기선 세계 여러 나라로 가는 비행기표를 팔고 있어. 너는 어디 가고 싶니? 알프스? 그래 거기도 좋아. 흰 눈을 이고 있는 산, 지붕이 빨간 집, 파란 풀밭, 그래그래 젖소도 있지. 너도 사진에서 보았구나. 그런데 그런 나라에 가려면 말이야, 이 주사 맞고 어서 병이 나아야 한 대." 또 어떤 날은 이런 얘기도 하였습니다. "너 흰구름 타고 싶지 않니? 나는 아픈 것을 잘 참아 낸다고 얘, 우리 작대기 아저씨가 흰구름을 탈 수 있는 표 얻어 준댔다. 흰구름 타고 여기저기 구경하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흰구름은 너무 푹신해서 잘 걸을 수가 없다지 뭐니?" 작대기 아저씨란 3층에 사는 조각가 아저씨의 별명입니다. 작대기처럼 빼빼 말랐다고 해서 미리가 그렇게 부르는 이 아저씨는 미리와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간호원 언니가 찾을 때 미리가 방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간호원 언니는 미리를 두 번 다시 부르지 않고 3층으로 올라갑니다. 그만큼 미리는 조각가 아저씨한테 자주 다닙니다. '아저씨가 무얼 만들고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가고, 옛날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찾아갑니다. 가로수의 은행잎이 참 이쁘다고 일러주고 가고, 참새네 가족이 전깃줄에 앉아 있는 걸 보려고도 올라갑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각가 아저씨가 미리를 찾아왔습니다. 미리가 큰 수술을 하게 되니 한 번 보는 게 좋겠다는 의사 선생님의 전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리는 침대에 누워서 피주사를 맞고 있었습니다. "피야, 우리 작대기 아저씨 오셨다. 함께 인사하자. 안녕, 아저씨." 미리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맑았습니다. "그래, 미리도 잘 있었니?' "네, 아저씨. 그런데 아저씨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예요?" ", 이건 어젯밤에 만들어 본 작품이야. 이름은 죄인상이라고 했지. 그러니까 이쪽 눈이 없는 사람이 있지? 이 사람은 눈을 가지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눈을 없앴고 이쪽 입이 없는 사람은 입을 가지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입을 없애고 만든 것이야." "아저씨 너무했다." "내가 뭘 너무해?" 그러나 미리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피야, 어서 들어와. 와줘서 고맙다, 안녕." 미리는 이내 잠이 드는 것 같았습니다. 주사 바늘을 거둔 한참 뒤에까지도 눈을 감은 채 색색 숨을 고르게 쉬었습니다. 간호원 언니가 미리의 밀차를 가만가만히 밀었습니다. 이어서 청진기를 목에 건 의사 선생님이 뒤를 따랐습니다. 조각가 아저씨도 밀차를 붙들고 걸었습니다. 밀차가 수술실 앞에 멈추자 미리가 눈을 떴습니다. 조각가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자 손짓으로 조각가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작대기 아저씨, 나 지금 막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인데?" "아저씨가 만든 죄인상들이 살아나서 나한테 막 달래지 뭐야?" "무얼 달라고 하던?" "입이 없는 사람은 입을 달라고 하고, 눈이 없는 사람은 눈을 달라고 사정하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했니?" "내 눈과 내 입을 떼어 주었어. 그랬더니 아주 고마워 해. 이젠 다시 죄 짓지 않겠대." 미리의 말꼬리가 수술실의 열린 문 사이로 사라져 갔습니다. 문이 닫혔습니다. 그러나 조각가 아저씨는 고개를 숙인 채 좀체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에 조각가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천사의 눈, 천사의 입이야." 오후, 바람이 자는 한낮이었습니다. 네거리 모퉁이의 빌딩 옆에 선 은행나무 위로 흰구름 한 점이 가만가만히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흰구름에 누가 오르는지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983. 11> 바다 종소리 그 작은 바위섬은 바다 가운데 있었다. 밀물이 들 때는 보이지 않다가도 썰물 때부터는 아스라이 상어의 등처럼 검은 부분이 드러나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바다를 나는 물새들이 한참씩 쉬어 가는 곳, 장난꾸러기 어린 새들이 어질러 놓은 자리를 밀물이 들어와서 철썩철썩 닦아 내고 또 닦아 내는 바위섬. 이 섬을 가리켜 바닷가 마을 사람들은 뎅바위라고 불렀다. 천 년도 훨씬 넘은 저 오래 전부터 어쩌다가 한 번씩, 물 물풀잎에 와닿는 바람같은 인연처럼 울려 오는 종소리. 그 소리가 "뎅."하고 바위섬 근처의 바닷속에서 울려 나오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팔베개 위에서 푸른 바다 푸른 솔을 적적히 건너오는 파도소리와 함께 종 이야기를 들었다. 바다 종소리 그 작은 바위섬은 바다 가운데 있었다. 밀물이 들 때는 보이지 않다가도 썰물 때부터는 아스라이 상어의 등처럼 검은 부분이 드러나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바다를 나는 물새들이 한참씩 쉬어 가는 곳, 장난꾸러기 어린 새들이 어질러 놓은 자리를 밀물이 들어와서 철썩철썩 닦아 내고 또 닦아 내는 바위섬. 이 섬을 가리켜 바닷가 마을 사람들은 뎅바위라고 불렀다. 천 년도 훨씬 넘은 저 오래 전부터 어쩌다가 한 번씩. 물풀잎에 와닿는 바람 같은 인연처럼 울려 오는 종소리. 그 소리가 "뎅." 하고 바위섬 근처의 바닷속에서 울려 나오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팔베개 위에서 푸른 바다 푸른 솔을 적적히 건너오는 파도 소리와 함께 종 이야기를 들었다. 종한테는 많은 기도가 배어 있었다. 그 기도는 종을 짓는 곳에서 잔일을 하는 동자가 심어 준 것이었다. -할아버지, 저 하늘 좀 봐요. 눈이 시리게 파랗잖아요. 저기에 작은 구슬을 떨어뜨려 놓으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날 것 같지요? 좋은 소리란 저렇게 바탕이 맑아야 나는 거 아닌가요? -할아버지, 저기 저 풀잎을 보아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아주 가는 바람도 타고 있지 않은가요. 저렇게 약한 것에도 떨린다면 얼마나 좋은 종일까요? -할아버지, 오늘 개울을 지나오면서 얼음 밑에서 노는 작은 고기들을 보았어요. 흘러가는 안쪽 물은 얼지가 않아서 고기가 사는가 봐요. 할아버지도 안쪽에 따뜻한 소리들이 모여 사는 종을 지어 봐요. -할아버지, 종한테 숨을 붙여 주어요. 정도 넣고 핏줄도 통하게 해요. 무지개를 먹고 꽃소리를 터뜨리게 해요. 마침내 종은 산기슭으로 올라왔다. 동해가 바라보이는 종루에서 큰북과 운판과 나무고기와 함께 살았다. 그 중에서도 나무고기와는 아주 친했다. 바람이 잠든 산등에서 달이 둥그렇게 올라온 밤이었다. 나무고기가 종을 보고 말했다. -너와 한지붕 밑에서 살게 해준 부처님께 나는 진정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네 소리를 듣고 있자면 흰구름 속에 묻흰 듯한 평화를 느끼거든. -아니야. 내 쇳소리보다는 네 나무소리가 더 아름다워. 너한테는 골 깊은 산속의 바람이랑 새노래랑 심지어 풀잎 소리까지도 어우러져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 너는 서라벌의 임금께서도 빼어나다고 말한 종이야. 쇠붙이 하나에 괴어 있는 소리로 말하더라도 수억의 모래 속에서 일군 것이지. 하늘 먼데 있는 별한테서 전해 오는 기별처럼 너의 소리는 그렇게 어질 수가 없어. 이때 산 아래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소나기가 몰려올 때처럼 박쥐들이 날았다. 풀벌레들이 노래를 뚝 그쳤고, 가물치가 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 무수한 발소리와 함께 횃불이 절을 향해 줄을 지어 달려왔다. 스님들이 소리를 질렀다. -도적이다! -바다를 건너온 왜놈들이다.! -동굴 속으로 피해라, 어서! 이내 일주문 안으로 도적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훔쳐 갈 것을 찾았다. 함부로 문을 열고, 앞을 막는 스님이 나타나면 베었다. 종루에 올라온 도적 하나가 외쳤다. -여기를 보아라. 이 종을 가져가자! 순간, 종은 정신을 잃었다. 오직 나무고기만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종을 떼어 가는 도적들을 보고도 어쩌지를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서 배에 종을 싣고 있는 도적들을 물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무고기에는 생명이 주어져 있지 않았다. 나무고기는 기도했다. -부처님, 저에게 겨자씨만한 공덕이 있다면 이를 어여쁘게 여기시어 진짜 고기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일 진짜 고기가 되어 저 도적의 무리로부터 내 형제 종을 구한다면 그땐 먼지처럼 이 몸이 없어져도 한이 없겠나이다. 도적들의 배가 돛을 올렸다. 바다 가운데로 서서히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을 바라보는 나무고기의 눈에 핏줄이 불거졌다. -부처님, 저희를 이렇게 버리시렵니까. 바로 이 순간이었다. 토함산 너머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 온 것은. 이 피리는 만파식적이라고 불리는 나라의 보물이었다. 곧 이 피리가 울리면 무엇이고 바라는 바가 다 이루어지곤 했었다. 전쟁 때는 적이 물러갔다. 병든 사람은 병이 나았다. 그리고 가뭄에는 비가 왔고, 폭풍이 불 때는 폭풍을 재웠다. 이 피리가 울려서 되지 않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날 만파식적이 울린 것이다. 나무고기는 갑자기 온몸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리에 바람 기운이 와닿았다. 그러자 꼬리가 꿈틀 하고 움직여졌다. 아가미가 뜨거워졌다. 후, 하고 숨을 내쉬자 속이 시원해졌다. -아, 아. 그때서야 나무고기가 진짜가 된 자기를 깨달았다. 온 몸에 돋아난 비늘 그리고 힘찬 지느러미. 생고기가 된 나무고기는 바다로 내달으면서 있는 힘을 다해 크게, 크으게 입을 벌렸다. 그러자 바다에 때아닌 물기둥이 일어났다. 눈깜짝할 사이에 도적들의 배가 엎어져 버렸다. "그때에 종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것이야. 부처님께서 나무고기와 함께 바다에서 영원히 살도록 해주신 것이지. 저 뎅바위 근처의 바다가 바로 그 자리란다.." 아이는 귓가에 손을 모았다. 그러나 바다로부터는 물새들 울음 소리만 날아왔다. 어머니는 한참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너희 할아버지 때만 해도 바닷속으로부터 종소리가 들려 오는 걸 듣곤 했었단다. 그리고 그 종소리를 들은 사람한테는 지니고 있던 소원이 이뤄졌고...... 그런데 한가지 신기한 것은, 종이 울리기 전에는 꼭꼭 이명 소리 같은 피리소리가 난다는 구나." "그렇다면 어머니, 만파식적이라는 피리가 지금도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지요?" "글쎄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속에서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나는 우리 마음속에서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만......" "어머니, 나는 잃지 않겠어요. 소원이 있으니까요." "너의 소원은 무언데?" "어머니의 병이 나아서 어머니랑 함께 사는 거예요." 어머니는 파리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아이가 깨어나 보니 어머니는 또다시 떠나고 없었다. 절 처마 끝의 풍경만이 땡그랑땡그랑 쉬어 가면서 울고 있었다. 아이는 선방의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언젠가 마루 틈으로 빠진 염주알을 찾으러 들어갔다가 본 묵은 피리가 생각났던 것이다. 다행히도 피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아이는 옷소매로 피리를 닦았다. 살며시 입술을 대고 불어 보았다. 소리가 났다. 영롱한 소리였다. 아이는 틈이 날 때마다 바다를 향해서 피리를 불었다. 그러나 바닷속의 종은 좀처럼 울릴 줄을 몰랐다.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아이는 오랜만에 대웅전에 들어갔다. 일렁이는 촛불 사이로 부처님을 우러러보다 말고 아이는 깜짝 놀랐다. 부처님이 그렇게 피곤해 보일 수가 없었다. 부처님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너도나도 달라고 조르는 사람들뿐이니 참 힘들구나. 사람들은 흡사 내가 저들의 복과 명과 높은 자리를 떼어 먹은 빚쟁이인 양 그저 달라고만 하는구나." "아, 가엾으신 우리 부처님." 아이는 살며시 허러에서 피리를 꺼내었다. 부처님을 위로해 드릴 생각으로 가만히 무릎을 꿇고 피리를 불었다. 대웅전의 피리 소리가 별이 많은 그믐밤 하늘을 적셔 갔다. 그러자 바위섬이 있는 바다로부터 아름답게 솟구치는 소리가 있었다. 뎅그렁 뎅 데엥...... 부처님이 가만히 미소를 지으셨다. <1984. 12> 아버지의 방아 우리 아버지를 가리켜 동리 사람들은 백결 선생이라 부릅니다. 해어진 옷을 수없이 기워서 마치 메추라기 달아맨 것 같으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은 옷을 험하게 입은 여자아이를 나무랄 때는 "백결 선생 댁으로 시집가려느냐." 고 할 정도랍니다.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우리 아버지가 멀리 지나가면 "누더기 누더기 백결 선생, 누더기 누더기 왕누더기."라고 놀려댑니다. 나는 남들이 우리 아버지를 그렇게 놀리는 것이 창피하고 또한 분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울면서 아버지한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그 헌 옷 좀 벗어요. 그리고 새 옷 좀 입어봐요. 동무들까지 놀리니까 싫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나를 안아서 먼산을 보게 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저 산과 저 들과 저 강을 보아라. 어느 것 하나 이어 붙이지 않은 것이 있느냐. 저 무리 없는 이어 붙임이 하나로 된 바다보다 아름답지 ㅇ느냐." 나는 그때 놀랐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산과 산이 이어지고 강과 강이 이어지고 들과 들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었으니까요. 나는 아버지의 누더기옷을 다시 보았습니다. 이 천조각, 저 천조각으로 온통 기운 옷, 거기에서 갑자기 산과 강과 들의 사계절이 함께 살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아버지, 그래도 나는 싫어요. 나는 이어 붙이지 않은 파란 베 하나로 된 하늘이 좋은걸요." 아버지는 고개를 먼 하늘 쪽으로 돌렸습니다. 아버지의 하얀 수염 속으로 바람이 한 움큼 스며들었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목단꽃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내 귀로 굴러들어왔습니다. "아이야, 하늘은 선녀님의 바늘로 기워졌기 때문이란다. 선녀님의 바늘은 기운 자국이 나타나지 않거든. 나의 바느질 솜씨는 이렇듯 선녀님의 바늘처럼 기운 자국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내게는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거문고가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지 거문고 타는 솜씨는 나도 압니다. 내가 토방에 굴러떨어져서 울 때, 내가 잠투정을 할 때, 그리고 내가 좋아서 웃을 때, 아버지는 거문고 소리로 아픔을 달래 주고, 잠을 불러오고, 기쁨을 더 크게 하여 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거문고 가락을 돈으로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집은 끼니 때우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머니가 남의 집에 품을 팔아서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었습니다. 하루는 내가 아버지한테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왜 거문고 가락을 팔지 않는가요? 부자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거문고를 뜯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텐데요."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네가 모르는 소리다. 돈을 얻으려고 거문고를 뜬는다면 그건 돈 소리밖에 더 어떤 소리가 나오겠느냐. 거문고 소리는 거문고 소리로 있어야 하는 것이야." 그러나 어디 세상이 우리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아주는가요? 우리는 끊임없이 배가 고팠습니다. 섣달이 와서 세밑이 되어도 우리 집은 그저 조용하기만 하였습니다. 남들은 다듬이질을 한다. 떡쌀을 찧는다고 소리소리 내는데 우리 집은 설거지 소리 하나도 낼일이 없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이었습니다. 이 집 저 집으로부터 방아 찧는 소리가 쿵더쿵 쿵더쿵 들려 왔습니다. 나는 마침내 어머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나의 등을 쓸어 주면서 한탄하였습니다. "남들은 모두 곡식이 있어 방아를 찧는데 우리만이 없으니 어떻게 이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까?" 이때 아버지 방에서 거문고 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 소리는 체로 떡가루를 치는 듯한 가락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봐요. 하늘로부터 끝도 없이 내려오는 하얀 떡가루를. "엄마, 진자 떡가루야." 나는 마당으로 뛰어나갔습니다. 함지에다 부지런히 떡가루를 쓸어 담아서 절구통으로 날랐습니다. 어머니가 절굿공이를 들고 쫓아왔습니다. 그런데 방아소리가 아버지의 방에서 먼저 흘러 나왔습니다. 흥이 절로 솟는 아름다운 방아 소리가. 참새들이 수없이 우리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집쥐 들쥐까지도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집을 향해 달려오는 동리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아아, 나는 춤을 추었습니다. <1985. 12> 모 래 성 우리 고향의 성모 병원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벚나무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겨울이면 빨간 동백꽃 잎이 바다를 향해서 날아갔고, 봄이면 하얀 벚꽃 잎이 파도가 칠 때마다 우수수 우수수 떨어지는 언덕이었습니다. 지금도 내가 입원하던 날이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갈매기가 어느 때보다도 많이 나는 여름이었어요. 나는 병원 문을 들어가기가 싫어서 성모상 아래에서 떼를 썼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내 손목을 잡고 장미 덩굴이 올라가 있는 차양 아래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하얀 벤치가 있었습니다. 벤치에 앉자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습니다. 바다에는 푸른 물이 가득 출렁거리고 있었고, 갈매기들이 내려 앉다가는 올라오고 올라오다가는 내려가곤 하였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아버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영민아, 병원은 무서운 곳이 아니야. 병원은 우리 몸에 들어 있는 병을 쫓아내 주는 고마운 곳이야. 주사만 해도 그렇지. 주사를 맞으면 병균이 죽고 그렇게 해서 영민이가 건강해지면 저기서 날고 있는 물새들처럼 활발해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나도 일어났습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병원 현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나는 문 사이로 들어오는 파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파도 소리는 안으로 걸어갈수록 멀어졌습니다. 대기실 의자에 가서 앉자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그 순간에 갑자기 눈물이 쿡 솟아올랐습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습니다. 그날 나는 병원에서 진찰만 맏으면 다른 때처럼 간호원 누나로부터 주사를 맞고 약을 타가지고 집으로 곧 돌아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차례가 되어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면서 일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금테 안경을 쓰고 숨을 크게 쉴 때마다 콧구멍이 뻐끔뻐끔 움직이는 의사 선생님은 청진기를 이리저리 대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나중에는 나를 침대 위에 눕히고 주사기로 내 팔의 피를 뽑아 갔습니다. 한참 후에 다른 방에 갔다 온 의사 선생님은 입원수속을 밟으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도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더욱더 놀랐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꾹 참고서 간호원 누나가 주는 푸르스름한 환자옷을 입었습니다. 내가 얻어 들어간 방은 7층의, 바다를 향한 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맨 끝방이었습니다. 그 방의 침대는 두 개였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영영 집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어이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한참 울고 있는데 옆 침대에서 말소리가 건너왔습니다. "바보같이, 무슨 사내가 저렇게 오래 울어." 여자아이의 목소리였습니다. 창피해서 얼른 돌아보니 옆 침대에서 홑이불 바깥으로만 눈만 빠꼼 내놓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습니다. "뭐야, 계집애가!" 나는 때릴 듯이 주먹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힘이 풀려 버렸습니다. 여자아이가 누운 침대 가에 커다랑 링거 병이 달려 있는 주사대가 보였던 것입니다. "저 주사약을 다 맞으려면 얼마나 걸려야 하나요?" 내가 아버지한테 물었었는데 대답은 엉뚱하게도 여자아이한테서 왔습니다. "이렇게 방울방울 떨어지면 네 시간 정도 걸려." "그럼 네 시간 내내 꼼작하지 못하겠네." "그렇지. 이렇게 계속 있어야 해." "처음 맞니?" "아니야. 여러 번 맞았어. 그제부터는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맞는 걸." "아침 저녁으로 한 번 씩?" 나는 눈을 크게 떴습니다. 여자아이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잔기침 같은 웃음을 웃었습니다. "너 눈 너무 크다, 얘."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이 은하라는 것을 안 것은 침대맡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보고서였습니다. 병 이름은 영어로 씌어져 있어서 몰랐지만 나이도 나와 같은 열 살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병실에 우리 둘만이 남아 있을 때면 서로 마주보고 말을 나누었습니다. "너 몇 학년이니?" "사학년." "나도 사학년이다." "그럼 넌 어느 학교니?" "동 국민학교." "피이 동냥치구나." "뭐라구.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넌 서 국민학교 쥐새끼 학교로구나." "뭐야. 지난봄에 너희 학교 농구가 우리 학교한테 묵사발 된 것 몰라." "얼씨구, 우리 학교한테 코가 납작해진 너희 학교 야구는 어디다 두고 그래." 이렇게 다툰 날은 으레 서로 등을 지고 한나절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심심하고 심심하였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말문을 터야 했습니다. 그럴 때면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에서 구실을 찾았습니다. "어머, 저기 봐. 수평선에 뜬 흰구름이 곡 양 떼 같네." 내 눈에는 다르게 보였지만 그러나 나는 곧잘 양보하곤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구나. 수평선과 저 구름들은 참 행복해 보이지? 그지?" "그래. 우리 병원에서 나가면 배 타고 저기 저 수평선에 꼭 한 번 가자." "좋아. 작은 섬을 찾아가서 텀험도 해야지. 그땐 넌 식사 준비를 해. 내가 고기를 잡아올 테니까." "응." "정말." "정말."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약속을 하였습니다. 바닷가에 있는 비치 파라솔 아래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것도, 모래밭에서 단거리 경주를 벌일 것도, 그리고 함께 수영을 할 것도. 그러나 우리 앞에는 병원의 출구보다도 수술실의 문이 더 먼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담배를 거푸 피웠고, 은하는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었습니다. "나도 작년에 수술을 했었어." "그으래?" "수술실은 무서워. 그리고 한참 동안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게 돼." "......" "어떤 사람은 영영 깨어나지 않기도 한대." "그럼 죽는 거야?' 은하는 홑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습니다. 홑이불자락이 옅은 바람을 타는 풀잎처럼 가만가만히 흔들리었습니다. 나는 침대 가로 비어져 나와 있는 은하의 손목을 꽉 쥐어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걱정 마. 난 안 잊을 거야. 너를 꼭 생각하면서 수술을 받겠어. 그리고 반드시 깨어나서 널 마나러 올 거야."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다른 방이었습니다. 옆 침대에도 은하가 아닌 다른 환자 아이가 누워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수술실의 여러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우주인들처럼 머리 위에서부터 무릎까지 통째로 된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과 간호원 누나들. 새하얗게 빛을 퍼뜨리는 백열등. 그리고 하나, 둘, 셋을 헤는 동안 수평선처럼 아득하게 멀어져 가던 은하의 얼굴...... 내가 수술실로 들어갈 때는 하늘에도 바다에도 놀이 번지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려서 바라본 창에는 파란 빛의 새벽이 와 머물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되살아난 아픔과 함께 잠이 들었습니다. 깨어보니 한낮이었습니다. 창 너머로 바라본 바다에는 빨갛고 파랗게 색이 칠해진 기선이 한 척 조용히 머물고 있었습니다. "은하야, 저 배를 탈까." 하고 말하려다 말고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습니다. 은하와 함께 있지 않은 병실. 나는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은하가 곧 찾아와 주겠지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도 은하는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알 텐데 왜 오지 않을까, 나는 화가 났습니다. 찾아와서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은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검진을 나온 간호원 누나한테 은하가 어떻게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간호원 누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 718호실에 있는 이쁜 아이 말이지. 맞아, 그리고 보니 너희들은 같은 병실에 있었구나. 그런데 말이야. 그 아이는 며칠 전에 중환자실로 옮겨졌단다." "네? 중환자실요? 거기는 어떤 곳인데요?" "위급한 환자들이 가는 곳이지. 글쎄 제 몸도 좋지 않은 아이가 성모상 앞에서 밤새워 기도를 했다지 뭐니. 그 일로 병이 덧나서 중환자실로 올라가게 됐다는구나." 나는 가슴속 저 깊은 곳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돌 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수술실로 갈 때 밀차를 따라나와서 한 은하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성모님께 가서 내가 기도할게. 걱정하지 마. 성모님은 내 말을 참 잘 들어주시거든." 나는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울었습니다. 수평선 쪽의 흰구름 속에서 은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은하는 조용히 노래하였습니다. 모래성이 차례로 허물어지면 아이들도 하나 둘 집으로 가고...... <1985. 7> 제 3 부 은하수의 노래 나는 인형입니다. 이름은 로미라 하지요. 나이는 올래로 서른 살이 되었어요. 무슨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었느냐고요? 그래요. 사람들은 나이를 나무의 나이테처럼 자람점으로만 생각하지요. 한 살 더 먹으면 이만큼 자라고 한 살 더 먹으면 또 이만큼 자라고...... 그러나 우리 인형들은 나이가 곧 주인의 사랑을 말하여 주지요. 한 살을 먹으면 한 해의 사랑을 받았음이고, 두 살을 먹으면 두 해의 사랑을 받았음이고. 우리 인형들은 한 살만 먹어도 늙은 축에 끼여요. 그만큼 아이들은 우리를 곧잘 버리지요. 처음에는 끔찍히도 이뻐하며 업고 다니고 껴안고 자고 하다가도 며칠 지나면 금방 싫증을 내거든요. 더러는 옷을 벗기고, 팔을 빼보고, 나중에는 다리 하나가 없는 병신이 되기도 해서 광 속으로 밀려나는 것이 보통이어요. 그런데 나는 30년 동안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이 선생님 댁에서 살고 있지요. 그러니까 내가 받은 사랑은 내 나이만큼이나 보이지 않게 쌓여서 아름다운 그림자탑을 이루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았어요. 내가 태어난 산날망의 판잣집. 그 집에서 우리 인형들을 다듬어 내는 청년은 좀체 나를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하지 않았어요. 군용 담요로 사과 상자를 덮어 만든 책상 위에 나를 올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어요. 그 젊은이의 하얀 접시꽃 같은 얼굴이며 깊은 소의 물빛 같던 눈이 지금도 어쩌다가 생각나요. 간혹 콜록이던 잔기침하며.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어요. 그날은 쪽창에 성에꽃이 하얗게 핀 날이었지요. 갑자기 그 청년이 기침을 하다 말고 왈칵 피를 토했어요. 그러자 윗목에 잠들어 있던 소녀가 일어나면서 부르짖었어요. "오빠 오빠." 하면서. 그 길로 나는 소녀의 작은 바구니 속에 담겨져서 거리로 나왔어요. 바람이 낙엽을 몰아오는 전봇대 아래에서 한나절을 떨고 있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지금의 주인인 로사 언니의 아빠를 만났어요. 그때 소녀가 로사 언니의 아빠를 붙들고 사정하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환청처럼 살아 있어요. "아저씨. 이 인형을 팔아 주세요. 불쌍한 우리 오빠 약값이 있어야 해요." 그리하여 나는 이 집으로 오게 되어 로사 언니를 만났어요. 이 집의 외딸인 로사 언니와 함께 살던 그 시절은 정말 즐거웠었지요. 어찌나 언니가 나를 떼어놓지 않는지 나한테 로미라는 이름이 붙여지기가지 하였으니까요. 피아노를 특히 잘 치는 로사 언니는 나를 피아노 위에 앉혀 놓고 여러 성가곡들을 들려주기도 하였었지요. 그러던 로사 언니가 미국으로 피아노 공부를 하러 가게 되어서 우리는 헤어져야 했어요. 그 슬픔을 누가 알까요? 다행히 언니의 엄마와 아빠가 나를 돌봐 주어서 내 마음속의 슬픈 파도는 가라앉았지요. 로사 언니가 했던 것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꼭꼭 목욕시켜 주고 철따라 옷 갈아입혀 주는 두 분.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 모습 그대로이지만 이 두 분은 차츰차츰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변해 갔어요. 그러나 우리가 애탸게 기다리는 로사 언니는 외국에서 돌아올 줄을 몰랐어요. 간혹 로사 언니가 연주했다는 레코드만 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 레코드를 전축에 걸어 놓고 세 식구가 듣는 기쁨도 적은 것은 아니었어요.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숨을 거두실 때도 로사 언니의 레코드를 들으면서였어요. 은하수가 흘러들듯이 조용히 젖어가다가 소리 없이 멈추던 그날의 음률을 나는 잊을 수가 없어요. 나를 이 세상에 내놓은 청년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그런데 오늘 아침 일입니다. 할머니가 나를 깨우며 이렇게 귀뜀해 주셨습니다. "로미야, 드디어 로사 언니가 온단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게 열리는 연주회에 초청을 받았다지 뭐니? 너도 기쁜 게로구나. 나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할머니는 나를 목욕시킨 다음에 새 옷을 갈아입혀 주셨어요. 머리를 빗어 주시면서 할머니는 말씀하셨어요. "언니가 집에 들르지 못하고 연주회장으로 바로 간다는구나. 그러니 너랑 나랑 함께 극장에 가서 만나 보자꾸나." 극장은 사람들로 가득가득 넘쳐나고 있었어요. 나는 할머니 품에 안겨서 무대 뒤로 갔었지요. 저만치에 수많은 꽃다발 속에 묻혀 있는 로사 언니가 보였어요. "아, 로사 언니." 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어요. 할머니한테서 나를 건네 받은 로사 언니의 눈에도 눈물이 넘쳤어요. 로사 언니는 나를 안고 무대 앞으로 나갔어요. 그러고는 나를 예전처럼 피아노 위에 앉혀 놓고 아버지가 좋아 하시던 모자르트의 곡을 연주하였어요. 은하수 멀리멀리 흘러가는 선율...... 로사 언니가 손을 멈추자, 청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내 주었어요. 로사 언니는 나를 안고 무대 가운데로 나와 답례의 말을 하였어요. "삼십 년 전 전쟁중에 한쪽 다리를 잃으신 아버님께서 집으로 돌아오시면서 저한테 사다 주신 인형입니다...... 나의 귀국을 애타게 기다리시며 이 작은 인형한테 정을 주고 살다가 하늘 나라의 별로 돌아가신 아버님. 그 아버님의 은혜를 이제사 깨닫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1986. 7> 돌아오는 길 하늘 나라의 천사님 집 우물 속에 생수가 살고 있었습니다. 올리브나무 잎사귀 그늘이 초록빛 그대로 가만히 내려와 앉은 우물 속에서 수정 같은 영롱한 몸매로 찰랑찰랑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천사님이 와서 생수를 보고 말하였습니다. "저 아래 세상에 가엾은 문둥병자 소녀가 있다. 가서 그 소녀의 목을 축여 주고 오너라." 생수는 간이 없어진 듯이 팔짝 뛰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싫습니다. 대통령의 궁이라면 모르지만 문둥병자에게는 가지 못합니다." "뭐라고? 문둥병자에게는 가기 싫다고? 이런 몹쓸 것이 있나! 교만한 너의 마음을 고쳐야겠다." 화가 난 천사님은 천둥 치고 번개 치는 날, 생수를 하늘 나라에서 쫓아냈습니다. 생수는 그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 생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높은 산의 산대나무밭이었습니다. 사방은 깜깜한 밤이었고, 바람에 대나무 잎들이며 댓가지 서걱거리는 소리가 무서웠습니다. 생수는 울퉁불퉁한 대나무 뿌리를 타고 바위 위로 굴러서 돌벼랑에 이르렀습니다. 돌벼랑에는 이미 여러 물이 모여들어서 돌돌돌 떨고 있었습니다. 가재가 한 마리 지나다가는 뒷걸음질을 하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무슨 돌이 이렇게 차담!" 비가 개면서 먼동이 밝아져 왔습니다. 먼 산봉우리가 한결 가깝게 보였고 나뭇잎과 흙은 촉촉히 젖어서 싱그러웠습니다. 이 나무 저 나무를 건너뛰면서 새들이 노래하였습니다. "여기도 한 번 머물다 갈 만한 세상이군 그래." 생수는 기지개를 켜면서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생수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습니다. 어느 틈엔지 윗골 물이 와서 생수의 등을 떼밀었습니다. 그러자 생수는 그만 발을 헛디뎌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생수의 기약 없는 방랑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산이 높고 깊기 때문에 생수가 가는 길은 매우 가팔랐습니다. 숨이 차고 발이 아팠지만 쉬어갈 데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용바위골을 지날 때였습니다. 생수는 옆 계곡에서 내려온 약수와 만났습니다. 약수는 산삼밭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아는 것도 많았고 지혜도 깊었습니다. 약수가 말하였습니다. "생수, 너는 좀 부드러어져야 하겠다." "왜?" "너무 뻣뻣해. 이제 곧 폭포가 나타나는데 이대로 가다가 허리가 분질러지고 말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지?" "겸손해야 돼. 구름을 봐. 비가 든 구름은 검고 무거우나 평화가 든 구름은 희고 가볍잖아." 생수는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소나무 사이로 오래 된 무덤이 하나 다가오다가는 이내 사라졌습니다. 바람 소리만이 개울가에 남았습니다. 앞장선 물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습니다. "폭포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이 일어났습니다. 앞이 확 트이는가 하자 그만 생수도 약수도 공중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생수는 낱낱이 나눠지는 몸 사이로 햇살이 일곱 빛깔로 와서 박히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맛볼 수 없었던 황홀감이었습니다. 폭포 아래는 소였습니다. 소는 깊고 넓었기 때문에 한번 떨어진 물들은 한참씩 쉬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물끼리 절대적으로 지켜지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을 다투지 않고 순서를 지켜서 같다는 것이며 앞을 가로막는 방해가 나타나면 실력을 모은 다음에 밀어내지, 다른 방법은 일체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수가 약수와 함께 소를 떠나게 된 때는 달이 뜨고 별이 많이 나온 밤이었습니다. 소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전보다 훨씬 느슨하였습니다. 그리고 솔밭 사이로 길이 나 있어서 따라오는 달빛도, 별빛도 마냥 정다워 보였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물들은 나직하게 합창하였습니다. 엄마가 말했어요. 가득하면 홍수 되니 부족한 게 좋다고 지금이 그래요. 부자가 안 부러워요. 밤새 달리자 산이 끝났습니다. 그러자 떠오르는 아침해 사이로 두 갈래 길이 나타났습니다. 오른편은 바위 사이로 굽이쳐 가는 가팔라 보이는 길이었고, 왼편은 물억새가 무성한 언덕 밑으로 빠지는 평평한 길이었습니다. 생수는 약수의 팔을 끌었습니다. "왼편의 언덕 밑길로 가자." "아니야, 보기에 좋은 길이 사실은 좋지 않을 수도 있어." "그렇지 않아. 저기 저 물억새가 한들거리며 우리를 부르고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날 따라와. 바윗길은 이제 지겹지도 않니?" "그러나 바윗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몰라. 지금 우리가 고생을 해두면 훗날은 반드시 좋은 일로 이어질지 누가 아니?" "바보 같은 소리 마라. 바위 많은 비탈길보다는 저렇게 풀이 많은 들길이 보기에도 얼마난 좋아." 다투는 사이에 어느덧 둘은 갈림길에 이르렀습니다. 생수는 멈칫거리는 약수를 언덕 밑길로 떼밀고 들어섰습니다. 들길 입구는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붕어마름과 나사말위로 물옥잠의 보랏빛 꽃이 피어 반겨 주었습니다. 물총새가 깃을 적시며 날았고 물방개가 맴을 돌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갈수록 물빛이 다른 것이 이상하였습니다. 흙빛이 올라오고 이끼가 자주 비치었습니다. 길은 경사지지 않아서 편했지만 앞물들이 너무 느리게 걷기 때문에 답답증이 일었습니다. 약수가 한 말이 옳았다고 깨달았지만 이미 발을 돌리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에 생수와 약수는 들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못에 도착하였습니다. 못은 물의 흐름이 그치었기 때문에 앞서 온 밑물은 이미 썩어가고 있는지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큰일났어! 우리도 잘못하면 여기서 살아 나가지 못하게 돼." "그럼 어떡하지?" 생수는 약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약수는 건너편 못가로 흔들려 가면서 생수를 불렀습니다. "어서 이리 와!" "왜?" "글쎄 어서 오라니까!" 생수는 약수한테로 가보았습니다. 그러자 약수는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는 양 이번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생수를 불렀습니다. "너 지금 어디 있어." "여기 있잖아." "안 돼. 거기 있으면 안 돼. 어서 이리 와." "왜 그래? 왜 한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는 거야?" "움직여야 살아나게 돼. 움직이지 않으면 곧 가라앉고 말아." 생수는 비로소 가슴에 불화살이 와 꽂힌 것 같았습니다. 가슴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이때 못가에 농부가 나타났습니다. 농부는 논에 물을 끌어들일 양으로 못의 귀퉁이를 삽으로 살며시 열었습니다. 약수가 나서기를 기다렸다가 생수도 못을 나섰습니다. 사랑이 불타는 가슴으로 윗논의 벼를 적시소 아랫논의 벼를 적셨습니다. 물간의 굽이를 돌아서 작은 수로로 천천히 흘렀습니다. 송사리들끼리 서로 장난을 치며 지나는 것에도 기쁨을 느꼈습니다. 생수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넓은 길로 나가서 강에 이르고 바다에 닿게 될까? 아니면 좁은 길로 이렇게 잦아지다가 끝내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약수가 말을 받았습니다. "넓은 길로 가고 싶어?" "하늘의 뜻을 따르겠어. 좁은 길로 가라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어." "너도 이제 다 익었구나." 길은 점점 좁아 들었습니다. 마침내 돌멩이 몇 개만으로 이어지다가 그것도 외딴 두메에서 끝이 났습니다. 생수는 하얀 돌 틈으로 빠졌습니다. 자갈 사이를 헤집고 나와 보니 아, 그곳은 작은 옹달샘이었습니다. 옹달샘 가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그 느티나무의 밑동에는 '성 나자로 마을'이라는 이름표가 단정히 붙어 있었습니다. <1985. 4> 왕릉과 풀씨 밤 사이에 지나간 겨울 바람 소리를 귀담아들어 보셨는지요? 전나무 가지를 하모니카의 낮은 음처럼 우우 울게 하고, 빈 양동이를 떼굴떼굴 굴리던 그 바람 소리를. 지금쯤 산 아랫집 댓돌가에는 낙엽들이 수북히 등을 기대고 있겠지요. 바닷가 모래 사장에는 먼 수평선으로부터 떼밀려 온 성에가 은빛 띠를 이루고 앉아 있을 것이며. 우리는 요즈음 큰 것에 자주 놀라다 보니 작은 것들, 외로이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서 많이들 둔해졌지요. 한낮 햇살이 조찰하게 비쳐 드는 문살에 창호지 위를 사각사각 기어가는 파리의 발소리를 들은 이는 얼마나 되는지요? 어젯밤에 바람이 옮겨 놓은 것들 가운데는 작은 풀씨도 한 톨 있지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그 풀씨의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로 바람을 타다 아래로 굴러떨어질 때는 곤두박질을 하게 마련입니다. "어이쿠." 이렇게 비명을 지르고 풀씨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풀씨가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땐 아주 청명한 겨울 아침이었습니다. 사금파리 속의 얼음이 다이아몬드처럼 빛살을 튀기고 있었고 언제 그런 바람이 불었느냐는 듯 미루나무 맨 윗가지 하나도 연필심처럼 까딱도 하지 않았습니다. 풀씨는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습니다. 풀씨의 눈에 먼저 띈 건 바로 앞의 돌로 만든 사람과 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을 깎고 닦아 만든 반지르르한 판석과 석등도 있었습니다. 멀리 오래 된 정자각의 지붕도 보였고 쇠로 만든 기다란 울타리도 보였습니다. 풀씨가 떨어진 곳은 둥그런 능선바지였습니다. 산보다는 작은데 풀씨네 고향인 고아원 뒷산의 무덤보다는 엄청나게 큰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였습니다. 풀씨는 이 궁금한 것을 물어 볼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해가 한뼘한뼘 떠오르면서 마른 잔디잎에 관처럼 씌워졌던 서리가 녹자 어디서인지 개미 한 마리가 풀씨 앞에 나타났습니다. "넌 뭐냐? 까맣게 못생긴 것이 왜 우리가 다니는 길 한가운데 버티고 있어." 개미는 풀씨가 맛없게 보이는 것이 우선 불만인 것 같았습니다. "버티고 있는게 아니야. 간밤에 바람이 나를 이리로 데려다 놓았어." 풀씨도 지지 않고 대꾸하였습니다. "넌 도대체 어디서 살다가 온 누구인데 그렇게 목소리가 크니?" "난 저 산넘 고아원 뒷산에 살던 풀씨야. 그런데 여기는 어디냐?" "고아원 뒷산에서 살다 온 풀씨라구? 어딘지 촌티가 난다 했더니...... 여기는 왕릉이야. 옛날 임금님이 묻혀 있는 무덤이란 말이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러 오는 곳이기도 하지." "어쩐지......" "이 무덤 속에는 왕관도 있어. 금으로 만든 허리끈도 있고 큰 칼도 있어. 나는 이 무덤 속을 드나들어 봐서 잘 알지." "왕관이나 금띠가 살아 있니?" "살아 있는 것이 아니야. 그것들도 임금님이 죽었을 때 함께 묻혔어. 다만 임금님의 몸은 뼈까지 모두 흙이 되어 버렸지만 왕관이나 금띠는 아직도 썩지 않고 있지." "그럼 칼은 저 벼랑에서 우는 부엉이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니?" "바보 같으니. 칼도 모양만 남아 있을 뿐이야. 날은 이미 무뎌지고 녹이 빨갛게 슬어 있어." "그러면 그게 뭐가 자랑거리가 되니? 나는 작고 힘이 없는 풀씨지만 아무데나 떨어져도 뿌리를 내리고 살지. 봄이면 솔숲 사이에서 우는 뻐꾸기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고, 여름이면 이름을 갖지는 못했지만 작은 꽃을 피우기도 해. 살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내 이파리하고 임금님의 녹슨 칼하고 어떤게 더 소중해?" "난 잘 모르겠어. 사람들은 썩었을망정 칼이 더 소중하다고 할 텐데......" "그건 진짜로 소중한 것이 아니야. 죽은 고래보다는 산 피라미가 더 중요해. 죽은 고래는 아무리 몸집이 커도 물살에 떼밀려 내려가지만 산 피라미는 아무리 몸집이 작아도 물살을 거슬러올라갈 수 있거든." "그러나 같이 죽었을 땐 고래가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는 걸 나는 여기에 와보고 알았어. 작아도 마음에 품은 뜻이 몸집보다는 더 중요한 것 같애. 내가 자란 고아원 뒷산에 있는 작은 무덤가에는 겨울이고 여름이고 아이들이 몰려와서 놀았어. 철다라 할미꽃도 피고 패랭이도 피고 나보다 작은 풀꽃도 피었어." "여기에는 그보다 더 큰 꽃나무들이 있어." "내가 말하려 하는 건 그것이 아니야. 그 무덤 앞에서 있는 모비글을 말하려는 거야. 묘비글은 이래. '나를 아이들의 학교가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 주시오. 내 무덤은 내 한 몸 길이만 묻히면 되니 내 몸보다 더 크게 하지 마시오.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지도 모르니 돌로 된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 놓지 마시오. 그리고 봉우리도 너무 높게 하지 마시오. 그저 아이들이 즐겨 구를 수 있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적당히 하시오. 다만 잔디가 벗겨지면 아이들이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 봄마다 잔디나 한 번씩 손질해 주시오.' 이렇게 적혀 있어. 그런데 여기는 뭐야. 봉우리만 컸지 어떤 소중함이 있느냔 말이야." "네가 안 보아서 그렇지. 안에 들어가면 임금님의 왕관은 정말 아름다워. 그리고 칼ㅈ루도 정말 위엄이 있어." "그건 진짜를 정복하는 무기가 아니야. 진짜는 그런 왕관이나 칼에 의해 정복되지 않고 위대한 영혼에 의해서 정복되는 것이야." 풀씨의 이 조용한 한마디에 개미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하늘의 흰구름이나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 개미는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하느님께서 너를 왜 이곳으로 보냈는지 이제야 알겠다. 나도 이곳에서 구경꾼들이 흘려 버리는 과자 부스러기나 주워먹고 살 것이 아니라 내가 땀 흘려서 먹이를 찾고 내가 사는 뜻을 가꾸어 볼 수 있는 들녘으로 나가야겠다." 풀씨도 가만가만히 말하였습니다. "나도 그래. 이 왕릉이 수평이 기울어지지 않게 네가 이곳을 떠나면 내가 대신 이곳에 뿌리를 내리겠어. 그래서 뜻을 가진 이면 알아볼수 있게 내 잎을 세우고, 내 꽃을 피워야지. 그래서 이 왕릉의 위엄에 조금도 기죽지 않는 내 혼을 보여주겠어." 며칠 뒤 이 왕릉에 눈이 내렸습니다. 눈이 그치고 햇빛이 나자 눈 위에는 철책 밖으로 멀리 사라진 개미의 맨발자국이 오롯이 나 있었습니다. <1984.11> 진 주 백합이 사는 조개 마을은 은모래가 반짝이는 바닷가에 있습니다. 뒤에는 물새들이 간혹 쉬어 가는 바위 동산이 있고, 동구 밖에는 해당화 한 그루가 정자나무 되어 서 있는 작은 동네입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조개는 바지락과 다슬기와 고둥이 거의 전부였으며 백합은 단 한 집밖에 없었브니다. 그래서 백합은 다른 조개들한테 자기가 예쁜 것을 은근히 뽐내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반들거리는 조가비에 비단 무늬가 놓인 조개는 백합 혼자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지난해 여름에 백합의 기가 꺾여 버린 일이 생겼습니다. 태풍이 불어서 해일이 아주 심하게 일어난 뒤였지요. 깊은 바다 산호초 마을에서 진주조개가 하나 떠밀려 왔다가 이곳에서 며칠 묵고 간적이 있습니다. 그때 온 동네 조개들은 모두 진주조개를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백합도 진주라는 귀한 보석을 지닌 조개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진주조개는 그저 평범함 조개일 뿐이었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표지도 없고, 반작이는 빛을 내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겉모양을 말한다면 백합한테도 훨씬 못 미쳤습니다. 바지락이 맨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진주 씨앗을 좀 얻을 수 없어?" 진주조개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고 대답하였습니다. "진주는 씨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야 그 값진 보석을 가질 수 있지?" "진짜로 사랑을 하고 의롭게 살면!" 그러자 조개들은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누군 사랑을 가짜로 하나 뭐." 하고 빈정대는 축도 있었습니다. 진주조개는 멀리 조개들의 공동묘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다슬기가 나서서 진주조개한테 물었습니다. "진주를 가지면 어때? 몸도 마음도 편안하고 좋아?"; "아니야 몸은 아주 아파. 견디기 어려울 만큼." "처음만 그래?" "계속이야. 진주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 아픈걸." "그런데 뭣 하러 가져? 그것을 가져서 편안해지고 즐거워진다면 모르지만 가져서 도리어 아프고 괴로운 것인데." 그러자 모여 섰던 조개들은 정말 그렇다고들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 둘 흩어졌습니다. 다른 조개들이 모두 돌아가고 백합만 남아 있자 진주 조개가 물었습니다. "넌 왜 돌아가지 않니?" "더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래." "그게 뭔데?" "진주를 가지고 사는 것과 진주를 가지지 않고 사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점을 말해 줘." "그것은 사는 의미에 관계된 것이야. 진주를 가지지 않으면 지금 당장 살기는 편하겠지. 주어진 시간에 먹고 즐기며 살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없어. 죽는 날로 모든 것이 물안개처럼 사라지고 말거든." "진주를 가졌을 때는?" "희망을 가졌다는 뜻도 돼. 오직 그것을 위하여 힘을 쓰고 키우는 보람이 육신의 아픔을 지워 주고도 남아. 그리고 진주를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죽음이 불쑥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두렵지 않아. 죽음이란 그저 껍데기와 살이 죽는 것일 뿐, 진주란 보석은 영원히 빛나면서 사는 것이니까." 집으로 돌아온 백합은 처음으로 적막함을 느꼈습니다. 죽게 되는 날, 이 비단 무늬의 껍데기와 싱싱한 살이 한꺼번에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자 무서워지기도 하였습니다. 백합은 다시 집을 나섰습니다. 어느덧 하늘에는 해가 지고, 별이 하나 둘 나와서 바닷물 속에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백합은 여인숙 집인 소라 껍데기의 문을 두들겼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가리비가 나왔습니다. "누구를 찾니?" "진주조개를 만나러 왔어." "진주조개는 저희 고향으로 돌아갔어. 아가 저녁놀이 질 때쯤 썰물을 타고 갔는 걸."; "정말?" "정말이야. 참, 그런데 네가 오면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했어." "무슨 말인데." "열심히 구하라고 했어. 그러면 반두시 얻을 것이라고." 백합은 쓸쓸히 돌아섰습니다. 그날부터였습니다. 백합한테 말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나들이하는 시간도 줄었습니다. 대신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져 갔습니다. 백합은 흰구름이 지고 피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였습니다. 어린 물새들 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갈대밭에 내리는 실비 소리에 넋을 놓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백합은 그날 설물에 다문다문 실려 가는 해당화 꽃잎을 바라보면서 동구 밖의 모래톱 위를 조용히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만치 떨어져 있는 바위틈의 말미잘 숲에서 아기 전복이 허둥지둥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구나.' 하고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아기 전복한테로 날쌔게 덮쳐 드는 불가사리를 백합은 보았습니다. 전에도 불가사리가 조개들을 잡아먹는 일을 종종 보아 오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당하는 일이 아닐 땐 외면을 하고 숨는 것이 조개들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의 백합은 달랐습니다. 뜨거움이 가슴 저 아래쪽에서 치밀어오르자 냅다 불가사리의 머리통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백합과 불가사리의 싸움은 한참이나 계속되었습니다. 힘으로 말하면 불가사리한테 백합은 어림도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불가사리하고 싸워서 이긴 조개는 하나도 없었을 만큼 불가사리의 힘은 무지무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어찌나 백합이 급소를 꽉 물고 놓지를 않는지 불가사리가 견뎌내지를 못하였습니다. 모래가 뿌옇게 날리고 물보라가 일던 싸움판은 서서히 가라앉았습니다. 그제야 여기저기에서 숨어 있던 조개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야아, 백합이 이겼다." "아기 전복은 어때? 죽지 않았니?" "백합이 구해 줘서 살아났어.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 걸." 백합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눈을 떠보니 늙은 뼈고둥이 상처를 꿰매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좀 드니?" "네, 아저씨." "넌 아주 훌륭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까. 그런데 너한테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데요?' "이번 일로 모래 한 알이 네 심장 깊숙히 박혀 있다는 걸 알아 두어라. 원체 깊이 박혀 버렸기 때문에 꺼내질 못했다. 미안하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요? 죽는가요?" "죽을 수도 있지만 죽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러나 십중팔구는 죽게 돼." "만일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요?' "진주조개가 되지. 그러나 나는 여태껏 우리 마을에서 진주를 가진 조개가 나타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백합은 엇살아 버린 지난날들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평소의 교만을 부끄러워하였으며 남을 더 많이 돕지 못했음을 슬퍼하였습니다. 백합은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죄 많은 조개입니다. 내 기쁨을 나누어 가질 줄 몰랐으며 남의 아픔을 덜어 줄 줄 몰랐습니다. 내 안의 사치와 질투와 욕심이 악마임을 미처 알지 못하였으며 물 한 모금, 바람 한 모금의 작은 것에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제 저는 남은 날을 오직 참회하며 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이세상을 더나갈 때에 눈물 한 덩어리밖에 남길 게 없게 되겠사오니 가난한 이 외에는 아무도 저를 만지지 말게 하소서." 수평선 너머에서 흰구름이 뭉게뭉게 떠올라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1985. 7> 행복한 눈물 비행기가 구름 위로 솟았다. 오월의 나뭇잎새에 바람이 찾아들 때처럼 구름이 부드럽게 비행기의 창을 스쳤다. "야, 구름이 내 꼬리보다 아름답다." 옆 우리의 공작새가 탄성을 올렸다.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었던 너희들은 반성해야 돼. 여기까지 한 번 올라올 생각은 안 하고 기껏 나무 위나 날며 살았지 않았느냐 말이야." 타조가 껑충한 다리로 일어나며 비꼬았다. "맞아. 우리는 너무 시시하게 살았어. 옛적 우리 조상 가운데 한 분은 끝없이 날아서 마침내 하늘 안쪽의 별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구석에 있는 우리에서 독수리가 그 큰 눈을 껌벅거리며 대꾸했다. "지나간 일을 탓하면 뭣 해......" 내내 창 밖만 내다보고 있던 앵무새가 중얼거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다른 새가 아닌 바로 자기에게 들려줘야 할 말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높이 날아서 멀리 내다보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내 탓이 아닌가. 나무에서 풀밭으로, 땅에서 바위로 날면서 그저 과실이나 쪼아먹고 곡식 몇 알에 만족해서 살았던 나날. 그리하여 마침내 그 하잘것없는 사탕수수 덫을 놓은 사람들한테 잡히고 말았으니......" 앵무새는 결심했다. "이젠 달라져야 한다. 지난날을 후회하고 한숨만 쉬고 있을 지금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지난날처럼 헛보고, 헛살지 말고 바로 보고 바로 살아야겠다. 삶은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것을 잊어버지지 말자." 비행기가 서서히 구름 밑으로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땅의 푸른 산과 강이 가까워지면서 여기저기서 "어이쿠" "어이쿠우" 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들 가운데 서 있는 깃대가 달려오다가는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렀다. 앵무새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창을 넘어온 햇살이 발목에서 비껴 가고 있었다. 노을 질 무렵에 비행기의 창고문이 열렸다. 상자가 화물 트럭으로 옮겨지는 데 참새 떼가 지나갔다. 어미 참새와 아기 참새가 나누는 소리를 앵무새는 들었다. "엄마, 저들은 누구야?" "동물원으로 들어가는 외국 새란다." "엄마, 우리도 저 새들처럼 이상하게 생겼으면 동물원에 가서 편안히 먹고 살 텐데. 그지, 엄마?" "철없는 녀석아! 쪽박을 차고 얻어먹고 살아도 자유천지 생활이 최고란다." 이튿날부터 앵무새는 동물원의 새장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사육사가 넣어 주는 모이를 먹으면서. 수많은 구경꾼들을 구경하면서. 고향에 비하면 서늘한 날시가 불만이었지만 추운 지방에서 잡혀온 새들이 조금만 더워도 숨을 가쁘게 쉬는 것을 보고 앵무새는 참았다. 그러나 앵무새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고민거리가 이내 나타났다. 그것은 구경꾼한테 붙어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구경꾼들을 무시하고 살아갈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어느 날 이곳에 먼저 와서 살고 있던 선배가 새로 들어온 앵무새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너희들을 진정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한 가지 먼저 마음에 새겨 둘 것이 있다. 그것은 이제부터 너희들 중에 누구도 이 동물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자랐단 고향은 지구 저편에 까마득히 멀다. 일찍이 누구도이곳을 탈출해 아프리카로 돌아간 새는 없다." 이때 앵무새가 선배의 말 사이에 끼여들었다. "우리들의 고향 아프리카보다도 더 먼 별나라로 날아간 조상도 있다던데요?" "누가 그러던?" "부엉이 아저씨가 같이 타고 온 비행기 속에서 그렇게 말했어요." "그것은 다만 전설일 뿐이야. 그러니가 현대식을 말하면 유언비어라는 것이지. 그런 붕 뜨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위험해져. 문제의 새가 될 수 있으니가.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편히 살아가야 돼. 사육사의 말을 잘 듣는다면 맞아서 죽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사육사가 우리한테 가져다 주는 양식은 아주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이야. 그런데 어떻게 나는 이렇게 살이 쪘느냐, 그 삶의 비결은 간단해. 하느님께서 우리한테 특별히 주신 기가 막히 재주가 있지 않느냔 말이야. 사람들이 말을 금방 옮길 수 있는 재주. 이것으로 구경꾼들의 귀여움을 받아서 과자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배불리 살 수 있다는 말씀이지." "틀렸어요." 앵무새가 버럭 소리를 질러서 선배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 사람들의 소리를 옮기는 것은 흉내일 뿐이에요. 의미가 담긴 말을 하면서 얻는다면 모르지만 그렇게 흉내낸 소리로 빌어먹는다는 것은 비굴한 것이에요." 이번에는 친구들을 둘러보며 앵무새가 말했다. "갇혀서 살수록 당당해져야 돼. 땀 흘려서 노력하지 않고 거저 먹으려는 못된 유혹에 넘어가서 이렇게 잡혀온 신세가 되었잖아. 이제부턴 배가 고프고 고단하더라도 먹을 값어치 한 대로만 먹고 사는 거야. 비굴하게 아부해서 살찌고 사느니보다는 적게 먹더라도 진실되게 떳떳이 사는 삶이 더 소중한 것 아니겠어?" "그래, 우리는 비겁하게 살지 말자!" "아프리카의 앵무새답게 우리의 순수를 지키며 살자!" 뜨거운 열기가 새장을 가득 채웠다. 선배가 씩 웃으며 자리를 떴다. "좋다. 너희들이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나도 처음엔 지금의 너희들 결심 못지않았거든." 날이 밝았다. 날이 저물었다. 다시 해가 떴다. 느티나무의 그림자가 해를 따라 옮겨 다니다가 달을 따라 옮겨 다녔다. 가을이 그 속으로 왔다가 돌아갔고, 겨울이 또 그렇게 왔다가 물러갔다. 앵무새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변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흙벽에 금이 가듯 그렇게 사이가 벌어져 갔다. 처음에는 "안녕하세요"를 구경꾼들이 세 번 네 번 해야 간신히 그것도 마지못해서 하는 둥 하더니 이제는 서로 다투어서 저쪽이 시키지 않는데도 사람 소리를 내곤 했다. 어떤 친구는 한술 더 떠서 "야, 바보야." 하고 웃기는 말을 옮겨서 얻어먹는가 하면 또 다른 친구는 "좀 줘." 하고 비굴한 소리까지 배워서 써먹었다. 오직 그만이 버티었다. 그만이 말과 먹이를 혼동하지 않았고 노래를 유희용으로 쓰지 않았다. 새벽이면 꼭꼭 고향 본래의 앵무새 말을 잊지 않기 위해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마음 씨앗을 뿌려서 키워 낸 말나무에는 하늘이 열리고 거짓 씨앗을 뿌려서 키워 낸 소리나무에는 지옥이 열리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뀜에 따라 그의 몸은 점점 야위어갔다. 사육사의 눈밖에도 났다.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그는 늘 혼자였다. 마침내 살이 비어 버린 몸에 먼 하늘의 별빛이 소롯소롯이 재이는 밤이었다. 앵무새는 횃대 위에 앉아서 가물가물 물결처럼 밀려가고 밀려오는 달빛을 느끼고 있었다. 골 얕은 곳으로 휴지를 몰아가는 바람 소리가 들리다가 그치었다. 앵무새는 낮에 우리 앞을 지나던 늙은 교수와 젊은 학생의 대화를 떠올렸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꽁보리밥을 먹고 있는데 마침 그이 친구 아리스티포스가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았다는 군." "아리스티포스는 왕한테 아첨을 해서 벼슬을 한 철인 아닙니까?" "맞아. 그 아리스티포스가 디오게네스에게 이렇게 말했다네. '왕에게 고분고분할 줄 알면 그따위 형편없는 꽁보리밥은 먹지 않게 될 텐데.'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이렇게 대꾸했다더군. '이런 꽁보리밥을 먹고 살 줄 알면 왕에게 아첨 떨지 않아도 되련만.' 하고 말이야." 앵무새의 두 눈에 달빛보다도 맑은 눈물이 솟았다. 그때였다. 앵무새의 눈물 방울이 아래의 바위를 스치자 뜻밖에도 바위 속으로부터 말이 흘러 나왔다. "앵무새야 울지 마라. 언젠가 우리는 다시 부활할 것이다." 앵무새는 소리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바위는 산의 맥을 이루고 있다가 동물원의 공사중에 흙 위로 비어져 나온 지층의 자락이었다. "그 바위 속에 누가 있어요?" 앵무새가 물었다. "내가 있다." "내라니 누구신데요?' "시조새지. 나는 이 돌 속에서 네가 온 날로부터 계속 너의 하루하루를 지켜 보고 있었다." "정말이어요?" "그럼. 나도 너처럼 마음을 지키고 살았었으니까. 바르지 않은 곳을 날개가 날아가면 깃을 뽑아 버렸고 헛소리를 내면 혀를 끊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실에 의하여 내 몸이 타올랐을 때 하느님은 나에게 여기 이 돌 속에다가 억만 년의 터를 잡아 주셨단다. 앵무새야, 양심을 지키며 본래의 노래를 잊지 않으며 산 너의 양심을 후일에 내가 증언하겠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진실의 횃불이 밝히는 날, 우리 함께 부활하여 저 푸른 하늘을 훨훨 날자꾸나." "감사합니다. 시조새님." 앵무새는 빨갛게 달아오르는 가슴 위에 고개를 묻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산너머 절에서 저녁 종소리가 저렁저렁 울려 오고 있었다. <1985. 6> 별이 된 가시나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지어 놓으시고 이 세상에 필요한 나무와 풀포기들을 빚으시던 날의 일입니다. 더 아름다운 생명으로 나서기 위해 나무와 풀들의 바람은 컸습니다. 그 중에서도 못생긴 가시나무의 소원은 몸에 지닌 가시끝만큼이나 간절하였습니다. '장미처럼 이쁜 꽃을 얹어 주소서.' 하고.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해가 지자 손을 털고 일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가시나무는 황급히 하느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아버지, 저에게도 뽐낼 수 있는 무엇을 주셔요. 이렇게 가시만 가득 달고 세상에 나가서느 미움만 받고 살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조용히 가시나무를 타일렀습니다. "나에게는 지금 너한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후일 네가 마음을 갖기에 따라서 장미꽃보다도 더 거룩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이 말씀을 믿고 가시나무는 세상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눈총만 받고 사는 나날이었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서서히 나무들과 풀들을 가려서 옮겼습니다. 과실나무와 꽃나무들은 뜰 안으로, 곡식과 채소들은 논밭으로 가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산에서는 밀려 내려오고, 들에서는 쫓겨나서 비탈진 언덕 같은 곳에서나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많은 날이 흘렀습니다. 할아버지 가시나무가 죽고, 아들 가시나무가 아버지가 되고, 또 아들 가시나무가 태어나고...... 그동안에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고, 도시를 이루엇습니다. 율법과 장식품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고 죄를 돌무더기처럼 쌓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땅 위의 동쪽에 있는 한 작은 도시에서 이 세상에 길이 젼하여질 일이 벌어졌습니다. 땅의 권세에 눈이 어두운 철부지 사람들이 눈에 하늘빛이 가득한 분을 붙잡아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날 가시나무는 그 도시의 감옥이 있는 언덕의 비탈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술을 마셔서 얼굴이 붉어진 병사 하나가 칼을 들고 나타나서 가시나무를 싹둑 잘랐습니다. 병사가 가시나무로 테를 둥글게 엮어서 그 분의 머리 위에 얹기까지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아, 미안해요. 이건 제가 마음먹고 있었던 일이 아니니 용서하셔요. 저는 당신의 피를 흘리게 하려는 가시가 아니라 위로의 가시이고 싶었어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부터 언젠가는 거룩히 쓰일 것이라는 하느님의 언약을 믿고 살아온 우리들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저주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가시나무는 눈물로 빌었습니다. 그러자 조용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울지마라, 가시나무야. 너는 이제 진실한 너의 그 마음 하나로 거룩히 되었다. 땅 임자의 황금으로 된 왕관보다도 몇 천 배나 높은 하늘 임자의 면류관이 된 것이다." 하늘의 별들이 온통 가시마다에 내려와서 총총총 총총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1985. 11> 제 4부 오 세 암 바다보다 넓게 내리는 눈 스님은 그 거지 남매와 포구에서 만났다. 수만 마리의 하얀 나비들이 나는 듯 눈발로 가득한 바다를 보고 있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누나, 눈이 바다보다 넓게 내린다." 스님이 돌아보니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가 장님 소녀의 손목을 잡고 소나무와 나란히 서 있었다. 작은 나무 그릇을 하나씩 든 것으로 보아 얻어먹고 다니는 아이들이 틀림없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스님은 아이 옆으로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서 빤히 스님을 쳐다보았다. 가을 아침 물빛처럼 시린 눈총이었다. "스님 눈썹에도 눈송이가 떨어졌는 걸." 스님의 손이 눈 위로 올라가자 아이가 다시 말했다. "콧등에도야." 장님 소녀가 아이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누구니?" "스님이야. 머리에 머리카락 씨만 뿌려져 있는 사람이야." "머리카락 씨만 뿌려져 있다고? 고 녀석 참......" 스님의 입가에 초승달 같은 웃음이 물리었다. "누나, 오늘 하늘이 저 스님이 입은 옷색깔 하고 같아. 저런 색을 뭐라 하더라?" "재색이라고 하지." 스님이 대답하였다. "우리 누나는 그런 말 못 알아들어. 맞아, 생각났다. 맛없는 국 색깔이야." 장님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알겠다. 그러니가 때지난 나물국 빛이다. 이거지?" 스님은 웃음을 거두고, 사내아이의 나무 그릇에 돈을 놓았다. 스님이 한참 가다가 돌아보니 그들 남매는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바다로부터 물새 우는 소리가 쫓아와서 스님을 한참 동안 꺼억꺼억 하고 따라다녔다. 첫눈이어서 그런지 눈발은 쌓이지 않고 금방금방 녹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체 밖을 내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스님은 탁발 그릇 속의 눈을 비우고 산 쪽으로 돌아섰다. 주막이 있는 삼거리를 지나 설악 자락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길가의 짚가리 속에서 아이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나, 식은 나물국 스님이 가고 있다." 스님은 짚이는 데가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서 짚더미를 헤쳐 보았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장님 소녀와 그 아이가 노랑 지빠귀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너희들 왜 집에 가지 않고 여기에 있니?" "우리는 집이 없어." "그럼 여기서 자겠단 말이냐?" "응." "눈이 그치면 눈보라가 칠 텐데......" "괜찮아. 우리가 싸우지만 않으면 돼. 우리가 사이 좋게 있으면 매운 바람도 우릴 비켜 가는걸." "허허, 녀석들 참......" 스님은 돌아서서 걸었다. 그런데 어린 것들이 눈바람 속에서 얼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새 울음 소리로 나타나서 걸음을 더디게 했다. 스님은 얼음이 서리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발길을 돌렸다. 짚더미를 헤치고 아이들을 불렀다. "너희들 날 따라가지 않을래?" "어디로 가는데요?" 이번에는 장님 소녀가 말대답을 하였다. "절로 가지. 내가 묵고 있는 절에 가면 따뜻한 방도 있고 밥도 있단다." "정말이야? 스님!" 사내아이가 벌떡 일어나면서 손뼉을 쳤다. 스님은 아이들의 머리에 붙은 지푸라기를 떼내면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길손이야. 누나 이름은 감이구." "길손이와 감이라아......거참 흔치 않은 이름이구나." "내 이름은 향교 문지기 아저씨가 지어 주었어. 떠돌이라는 뜻이래. 감이 누나 이름은 내가 지었구." "감이라는 뜻은 무엇인데?" "아이, 스님도 답답하다. 감이는 그냥 감이라는 뜻이야. 눈을 감았으니까. 그래서 감이야." "허허, 고 녀석 참......" "스님, 우리를 데려가도 높은 사람이 눈치 안 해? 향교에서도 쫓겨났는데......" "그러면 조카들이라고 해야지. 이제부터 너희들은 부모 잃은 내 조카가 되는 거다." 도란도란 얘기하며 걸어가는 세 사람의 등에서 눈발은 서서히 성글어졌다. 바람의 손자국, 발자국 "누나, 이 산의 나무들은 말이야. 갈대로 만든 자리를 세운 것 같아. 죽죽 하늘에 닿을 듯이 치솟았거든. 저기 저 언덕바지에 있는 전나무는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다." "누나, 아줌마 셋이가 대웅전에서 절을 하고 있어 복 달라고, 명 달라고 비는 거야. 할머니 둘은 또 탑을 돌고 있어. 저 할머닌 뭘 달라고 저럴까? 극락 가게 해 달라고 그러겠지? 부처님도 성가시겠다, 그지? 누나, 사람들이 자꾸자꾸 조르기만 하니가. 나 같으면 부처님을 좀 즐겁게 해드리겠는데...... 에이......" "내가 누나의 댕기를 잡아당긴 게 아니야. 바람이었어. 바람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아유 답답하다, 답답해. 바람은 우리 눈에 안 보여. 비, 눈, 서리는 보이지. 그러나 바람은 안 보인단 말이야. 바람의 손자국, 발자국만 보여. 굴러가는 낙엽, 흔들리는 마뭇가지, 바람이 짚고 다니는 손자국 발자국만 보인단 말이야. 부처님도 못 보냐구? 그건 모르겠는데. 그래, 맞아. 부처님은 바람을 볼지도 몰다. 누나, 우리 스님한테 가서 그걸 물어보자." 스님은 우물가에서 발을 닦고 있었다. "스님, 하나 물어 봐도 돼?": "무언데?" "부처님 눈에는 바람이 보여?" "바람이라니?" "저기 저 전 나무 가지를 흔드는 손님 말이야." "부처님 눈에는...... 그래. 바람이 보이지." "어떻게 바람이 보이지?" "마음의 눈을 뜨고 계시니까." "마음의 눈이란 것도 있어?" "그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한테는 수많는 눈의 창문이 있단다. 지금 감이는 육신의 창문이 닫힌 거구, 길손이와 나는 마음의 창문이 닫혀 있는 거지.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하나하나 창문이 열리거든. 그 맨 안쪽 마지막 창까지를 연 분이 부처님이란다. 그땐 바람도 보이고 하늘 뒤란도 보이는 거지." "스님, 나도 마음의 눈을 뜨고 싶어. 바람도 보고 하늘 뒤란도 보고 싶어. 그래서 우리 감이 누나한테 이 바깥세상을 더 잘 말해 주고 싶어."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해. 나는 내일부터 공부하러 다른 데로 가려고 하는데 길손이 너도 날 따라갈래?" "야, 신난다!" 길손이는 좋아라 깡충깡충 뛰었다. "그러려면 감이 누나와 헤어져 있어야 하는데......" "왜? 감이 누나와 왜 함께 못 가는 거야?" 길손이의 얼굴에 금방 어둠이 널렸다. "산이 험하기 때문에 감이가 거기에 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아." "거기가 어딘데?" "마등령 중턱에 있는 관음암이다." 이때까지 말없이 옷섶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감이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거기에 머무를 건가요?" "봄이 오면 내려와야지." "그렇다면 전 여기 남아 있을게요. 우리 길손이를 데리고 가서 공부만 많이 시켜 주셔요." "혼자 있으면 심심할 텐데?" "괜찮아요. 전 참을 수 있어요." 감이가 의외로 물러서는 바람에 스님의 걱정은 쉽게 풀렸다. 감이와 길손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스님은 내내 염려하고 있던 참이었다. 스님은 길손이를 데리고 암자로 가기로 마음먹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길손이가 장난이 심하여 절의 젊은 스님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감이는 눈이 멀어도 제법 부엌일도 거들고 해서 제 밥 값은 하는 편이었으나 길손이는 날마다 말썽만 피울 뿐이었다. 밤에 이불에 오줌 싸는 일은 사흘에 한 번꼴, 조용해야 할 선방으로 날짐승을 몰아와서 우당탕거리는 일은 이틀에 한 번꼴, 법회 때 한가운데 앉아 있다가 방귀를 뽕 소리가 나게 뀌지를 않나, 불개미를 잡아와서 스님들의 바짓가랑이 속으로 들여보내지를 않나. 물초롱 속에 구름을 넣어서 길손이는 한사코 작은 물초롱을 들고 나섰다. "거기에도 좋은 샘이 있다니까 그러는구나." "스님 바보야. 내가 물 가져가는 것 같아?" "그럼 물이 아니고 무엇이냐?" "흰구름을 넣어 가지고 가는 거야. 요 앞날 개울에서 건져 왔거든." "고 녀석 참......" "스님, 저기 저 안개구름 속에서 우뚝 솟은 산봉우리 이름은 무어야?" "귀떼기청봉이다." "귀떼기청봉? 그럼 코떼기청봉도 있겠네." 길손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길손이의 웃음소리가 메아리를 일구자 큰 노루, 작은 토끼가 귀를 세우고 달렸다. 굴러간ㄴ 메아리를 물어 오기나 할 것처럼. 길손이와 스님이 관음암에 당도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터라, 암자는 한동안 도망가는 산짐승들의 발소리로 수선스러웠다. "아냐, 아냐. 너희들이랑 함께 살려고 왔어. 달아나지 마. 도망가지 마라니까!" 산양이며 장끼를 쫓아다니는 길손이의 뒤에서 스님은 조용히 염주를 굴렸다. "고 녀석 참......" 입김으로 피운 꽃 겨울잠에 빠져 있던 암자는 길손이의 소리로 깨어냐기 시작하였다. 벌집을 찾아 다니는가 하면 다람쥐굴을 파해쳤다. 어떤 날은 벌한테 쏘여서 머리에 혹이 났고, 어떤 날은 뱀굴을 다람쥐굴로 잘못 알고 건드렸다가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솜다리를 보고 놀라기도 하였다. "누나, 꽃이 피었다. 겨울인데 말이야. 바위틈 얼음 속에 발을 묻고 피었어. 누나, 병아리의 가슴털을 만져 본 적이 있지? 그래. 그처럼 ㄱ이 아주아주 보송보송 해. 저기 저 돌부처님이 입김으로 키우셨나 봐." 스님의 발소리가 났다. 스님은 빨래를 널고 오는 길이었다. 스님이 물었다. "너 조금 전에 누구한테 말을 했느냐?" "감이 누나한테 했어." "감이는 아래 큰 절에 있지 않느냐?" "아유 답답해. 누난 내 곁에도 지금 있는 거야. 감이 누나가 그랬어. 내가 있는 곳엔 어디고 감이 누나 마음도 따라와 있겠다고." "고 녀석 참......" 스님은 뒷머리를 만지며 돌아섰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선방 안으로 사라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길손이가 갑자기 두 주먹을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선방 문을 열고 스님을 불렀다. "스님!" 그러자 스님은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 갑자기 귀머거리가 되었는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님, 나하고 좀 놀아." 그래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앉아 잇기만 하면 뭣 해! 벽에 뭐가 있어? 솜다리 꽃 하나도 피우지 못하구서!" 길손이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문을 닫았다. 볕이 잘 드는 툇마루로 와서 벌렁 누웠다. 참나무의 떨어지고 남은 이파리 하나가 대롱거리는 그림자를 툇마루 위에까지 보내 왔다. 사각사각 문종이 위를 기어가는 파리의 발소리도 들려왔다. 길손이는 벌떡 일어났다. 우물가로 가서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흰구름은 산너머로 놀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오기만 해봐라, 혼내 놓을 테니." 어깨가 처져서 돌아오던 길손이는 새앙쥐 한 마리가 마루 밑으로 숨는 것을 보았다. "옳지. 저 마루 밑 어둠 속을 뒤져 보자. 밤이고 낮이고 캄캄하기만 한 저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길손이는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얼마 후 마루 밑에서 나온 길손이의 손에는 깨어진 바릿대와 풀어진 염주알이 세 개 들려 있었다. 길손이가 암자의 구석진 곳을 뒤지는 것으로 재미를 삼은 것은 이날부터였다. 살며시 웃는 얼굴 진눈깨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이었다. 길손이가 아까부터 뒤란 맨 끝에 있는 골방문 앞에서 망설잉고 있었다. 그동안 장독대며 다락, 헛간까지를 다 뒤지고 오직 길손이의 손이 못 미친 곳은 이 골방 하나뿐이었다. "그 방은 문둥병에 걸리 스님이 묵고 있다가 죽은 곳이란다." 언젠가 밥을 먹다 말고 길손이가 물었을 때 스님이 알려준 말이었다. 문둥병, 듣기만 해도 길손이는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감이 누나와 함께 얻어먹으면서 여기저기를 흘러 다녔을 때 가장 싫었던 이들이 문둥병자였었다. "누나, 방도 무섭게 생겼지? 문에 먼지가 가득해. 그래도 한번 들어가 볼까? 누나가 여기서 지키고 있으래? 나 금방 들어갔다 나올게." 길손이는 감이 누나가 마치 곁에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까지 까딱해 보였다. 가만가만히 발꿈치를 들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마룻장이 삐걱거렸다. 길손이는 살며시 문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발로 문턱을 받치고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문이 와당탕탕,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길손이가 문고리를 움켜쥔 채 마룻바닥에 넘어졌다. 도깨비가 떠다밀었는가 하고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조용하기만 했다. 떨어진 문 사이로 골방 안이 내다보였다. 묵은 목침과 질화로가 나뒹굴어져 있었다. 길손이는 살금살금 골방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방은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넓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벽에 걸려 있는 도롱이를 들어냈다. 그러자 갑자기 방안이 밝아졌다. 도롱이가 걸려 있던 자리가 들창이었다. "누나, 저 창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가 관음봉이야. 스님이 말해 주었어. 여기서 보니가 아주 바로 보이지?" 방을 나오려던 길손이는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한 폭을 보았다. "누나, 가만. 벽에 그림이 있다. 머리에 관을 쓴 보살님이야. 연꽃에 떠받쳐서 서 있는걸. 살며시 웃고 있어." 길손이는 그림을 향해 절을 하였다. "안녕하셔요. 전 길손이예요. 오늘 너무 떠들어서 미안해요." 길손이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문짝을 전처럼 기대 놓다 말고 다시 골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내일부터 놀러 와도 돼요?" 한참 있다가 길손이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 나왔다. "그럼 내일 또 올게요. 안녕!"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이튿날 길손이는 아침밥 숟가락을 놓자마자 골방으로 달려갔다. 목침을 치우고 질화로를 들어냈다. 도롱이는 아예 마루 밑에다 쑤셔박아 버렸다. 비로 쓸고 걸레질도 하였다. 길손이는 그림 앞에 앉아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였다. "게곡의 고드름이 하늘에서 늘어뜨린 동아줄 같아요. 스님은 김치를 꺼내가가 얼음 조각에 손가락을 베었어요. 보살님도 춥지요? 가만 있어요. 내가 솔가리 긁어 와서 군불 넣어 드릴게요." 길손이는 그림 속에 계시는 분을 소리내어 웃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흉내를 내었다. 토끼가 귀를 세우고 뛰어가는 깡충거리는 걸음을, 목탁을 치면서 염불하는 스님의 흉내를, 그리고 슬며시 소리 안 나게 방귀를 뀌어 놓고서 살피기도 하였다. "아유 냄새! 보살님이 뀌었지?" 그러나 그 분은 소리 없이 웃기만 하였다. 이래도 가물가물 웃고, 거래도 가물가물 웃는 그림 속의 보살님이 길손이는 마냥 좋았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나는 엄마가 없어요. 엄마 얼굴도 모르는 걸요. 정말이어요. 내 소원을 말할게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약속하지요? 내 소원은...... 내 소원은...... 저...... 엄마를......엄마를 가지는 거예요. 저...... 엄......마......엄마......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마음을 다해 부르면 흰구름이 우물 속에서 꼼짝하지 않고 낮잠을 자는 오후였다. 그 시간에도 길손이는 골방에 와서 놀고 있었다. "엄마, 삶은 밤이어요. 스님이 다섯 개를 주셨어요. 내가 네 개를 먹었지만 가장 큰 것은 남겨 왔어요. 어서 잡수셔요. 참, 맛있어요." "내 동무 흰구름이 어떻게 있는지 알아요? 이렇게 웅크리고 잠들었어요. 두레박을 풍덩 집어 넣었는데도 일어나지 않아요. 잠꾸러기지요?" "엄마, 스님이 찾고 있어요. 얼른 갔다 올게 밤 잡숫고 계셔요. 안녕." 스님은 쌀을 씻고 있었다. "그 방에 드나들지 말랬지 않느냐." "엄마가 있는데?" "엄마라니?" "우리 엄마......" "탱화를 보고 하는 말이로군. 고 녀석 참...... 그건 그렇고 너 내일은 혼자 있어야 겠다." "왜?" "내가 저잣거리에 좀 다녀와야 할까부다." "무엇 하러 가는데?" "이것저것 구해 올 것이 많다." "싫어, 나 혼자 있지 않을 테야." "그러나 양식이 떨어졌는데 어떡하니?" "나 혼자는 무섭단 말이야." "무섭긴, 부처님도 계시고 관세음 보살님도 계시고 사천대왕도 있는데." "금방 갔다 오는 거야?" "그럼, 금방 오고말고. 길손아, 내일 내가 없는 동안 무섭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하고 관세음 보살님을 찾거라. 알았지?" "그러면 관세음 보살님이 오셔?" "오고말고. 네가 마음을 다하여 부르면 꼭 오시지." "마음을 다해 부르면? 그러면 엄마가 온단 말이지?" "인석아, 엄마가 아니고 관세음 보살님이라니까." 길손이는 가만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쌓인 눈이 마루에 닿다 스님은 부랴부랴 장태를 벗어 나오면서 또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낮인데도 바람이 자고 하늘이 가라앉은 것이 아무래도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장싸꾼들도 서둘러서 짐 보퉁이를 꾸리고 있었다. "큰눈이 오겠는걸. 설악 쪽은 벌써 어두워졌어." 대장간 노인이 풀무에서 손을 놓으며 하는 말이 스님의 가슴을 더욱 죄었다. 스님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소달구지 위에 올랐다가 다시 내렸다. 짐의 멜빵을 당기고 남이 한 걸음 걸을 때 두 걸음 세 걸음을 서둘러 떼어 놓았다. 그러나 눈은 스님이 버덩말에도 이르기 전에 쏟아졌다. 눈송이는 목화송이만씩 해서 금방 산과 들을 하얗게 덮었다. 처음 보는 폭설이었다. 이내 눈 속에 스님의 발목이 빠지고 정강이가 빠졌다. "안 돼! 길손이가 혼자 있어! 먹을 것도 없는 암자에 어린아이만 혼자 있다고!" 스님은 정신이 반 나간 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길조차도 눈 속으로 숨어 버렸다. 스님은 부처님을 부르며, 길손이를 부르며 눈 위에 스러지고 말았다. 스님이 눈을 떠보니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 안방이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가 왜 여기에 누워 있습니까?" 스님은 옆에서 짚신을 삼고 있는 노인한테 물었다. "나무를 해오던 우리 아들이 눈 위에 쓰러져 있는 스님을 발견해서 업고 왔지요. 하마터면 큰일날 ㅃ했습니다. 어찌나 눈이 많이 왔는지 쌓인 눈이 마루 끝에닿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먹을 것이 하나도 있지 않은 암자에 혼자 있습니다." "그 암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마등령 고개턱에 있습니다." "네에? 기기는 절대 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쌓였는데 거기가 어디라고 올라갑니까?"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스님은 그날부터 앓았다. 길손이를 부르며,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 보살을 부르며. 스님이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큰 절에 올라간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 후였다. 그리고 큰 절에 있는 감이를 데리고 관음암을 향해 다시 오른 것은 스님이 길손이를 관음암에 혼자 남겨 두고 떠나온 날로부터 한 달하고 스무 날째가 되던 날이었다.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 눈이 녹았다지만 길은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었다. 눈녹은 물이 그대로 얼어붙어서 빙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용케도 발이 나아가는 것은 길바닥에 드러나 있는 무수한 나무뿌리들 덕이었다. 줄줄 미끄러지다가도 신발이 나무등걸에 걸리는 통에 몸을 가누게 되었다. "감이야, 이젠 비탈이 가파르니 내 등에 업혀야겠다." "괜찮아요, 스님. 조금 더 걷겠어요." 감이는 지팡이를 짚고 다시 일어났다. 오랜만에 나타나는 사람이 신기했던지 노루가 빠끔히 나무 사이로 내다보다가는 사라졌다. 장끼는 깃을 하나 떨어뜨려 놓고 등 너머로 날아갔다. "봄이 어우러지는지 흙내음이 나요." 감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하였다. "저 곰골 허리도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구나. 저것도 봄기운이지." 스님이 감이으 팔을 잡아 주며 말하였다. 봄물이 연하게 오르는 물푸레나무 가지에는 밀화부리새가 앉아서 울고 있었다. 마등령 고개가 시작되는 데서부터였다. 감이의 귀가 자주 쫑긋거리었다. 눈가의 눈썹도 움찔움찔 움지이었다. "스님, 냄새가 나요." "사향노루 내음 말이냐?" "아냐요. 우리 길손이 내음이어요." "허허, 고 녀석 참......" 스님은 감이를 업었다. 한참을 걸었다. 갑자기 감이가 스님을 불렀다. "스님,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으셔요?" "무슨 소리? 지금 윙윙거리는 저 소리는 전나무를 울리는 바람 소리인데." "아냐요. 바람 소리말고." "바람 소리말고? 아, 그거야 새 우는 소리 아니냐." "새 우는 소리말고,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셔요, 스님?" 스님은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늙은 마가목나무를 쳐다본 스님은 하, 하고 얼굴을 풀었다. "감이야, 그건 딱다구리라는 새가 고목을 쪼는 소리란다." "딱다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라구요? 아, 들은 적이 있어요. 언젠가 길손이가 말해 주었어요. 날개는 까맣고 입부리가 긴 새라고 했어요. 그 새가 묵은 나무 틈새에 사는 벌레를 잡아먹느라고 따따따 입부리로 쫀다구요." "그래. 조금 전에 네가 들은 소리가 바로 그 딱다구리 소리란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었다. "스님, 우리 길손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스님은 헛기침으로 크음, 눈물을 삼키고 나서 감이를 일으켰다. 능선길을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암자가 있는 산허리로부터 솔바람이 한 줄기 흘러내려왔다. "스님, 딱다구리 소리가 아니어요!" 감이가 펄쩍 주저앉으며 소리르 질렀다. 스님도 들었다. 바람을 타고 멀어졌다, 가까워졌다하며 들려 오는 소리. 그 소리는 목탁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암자에 떠돌이 스님이라도 와서 묵고 있단 말인가." 스님은 살갗이 활시위처럼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서 가보자." 스님은 서둘러서 감이를 업었다. 잡목숲 속으로 난 작은 길을 숨가쁘게 걸었다. 관음암의 지붕이 보이는 잔솔밭 언덕에서 감이가 잠깐 내리고 싶다고 하였다. 스님이 땅에 내려주자 감이는 서너 걸음을 더듬거리고 앞으로 나갔다. 찰피나무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었다. "왜? 이번에는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 감이는 손짓으로 말하였다. 어서 와보셔요, 어서요, 하고. "무슨 일이 있느냐?" "들어 보셔요. 들리지 않으셔요?" "고 녀석 참. 나한테는 목탁 소리밖에 안 들리는구나." "가만히 들어 봐요. 저봐요. 괸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 하잖아요." "저...... 저...... 저...... 소리는......" 스님은 감이의 팔을 잡아 끌고 달렸다. 꽃비가 내리다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스님은 암자로 들어서기가 바쁘게 무릎을 꿇었다. 막 길손이를 부르려는데 소리 없이 법당문이 열리었다. 살며시 걸어나오는 발, 그것은 길손이의 빨간 맨발이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냐? 길손이 네가 살아 있다니?" 스님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마가 오셨어요. 배가 고프다 하면 젖을 주고 나랑 함께 놀아 주었어요." 길손이의 말이 떨어졌을 때였다. 뒷산 관음봉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소리도 없이 내려오는 것을 스님은 보았다. 여인은 길손이를 가만히 품에 안으며 말하였다. "이 어린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 까지도 얘기해 주었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꽃이 피면 꽃아이가 되어 꽃과 대화를 나누고, 바람이 불면 바람아이가 되어 바람과 숨을 나누었다. 과연 이 어린아이보다 진실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야. 이 아이는 이제 부처님이 되었다." 이 순간 우물 속의 흰구름이 빨갛게 변하였다. 그때였다. 감이의 환희에 찬 목소리가 터진 것은. "스님, 파랑새가 날아가고 있어요!" 댓돌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스님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관세음 보살님이 파랑새로 몸을 바꾸어 날아가고 있구나. 그런데 눈이 먼 감이 네가 어떻게 보느냐? 아니, 이게 웬일이냐? 감이 너 눈을 떴지 않느냐?" "네, 스님. 모든 게 보여요. 햇빛도 보이고, 스님도 보여요. 마루 위에 잠이 들어 누워 있는 길손이도 보여요." "아아, 부처님." 스님은 길손이한테 계속해서 절을 하였다. 눈을 이제 막 뜬 감이도 스님을 따라서 절을 하였다. 감이는 길손이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누나!" 하고 일어나서 장난을 걸 것 같아서 길손이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 보았다. 길손이는 엄마의 그윽한 품안에 아주 편안히 누운 것 같았다. 뺨에 손바닥을 괴고 모로 누운 모습이 재미있는 놀이라도 구경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 시간에 설악산에는 꽃비가 내렸다. 솜다리, 금낭화, 금강초롱, 철쭉꽃이 온통 산을 덮었다. 그리고 다람쥐, 오소리, 토끼, 사슴 들이 꽃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관음암을 향하여 달려왔다. 연기 좀 붙들어 줘요 사흘 후에 길손이의 장례식이 있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여러 절과 마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 암자가 생기고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건봉사의 방장 스님도 오시고, 신흥사 백담사의 주지스님도 오시고, 멀리 월정사와 상원사의 큰 스님, 작은스님들도 줄을 지어서 찾아왔다. 강릉에 사는 한 양반 어른은 가마를 타고 왔다가 길이 험해서 올라오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고 말았지만 양양에 사는 한 할머니는 아들의 지게 위에 올라앉아서 무사히 도착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골방으로 가서 길손이가 만나 본 탱화 속의 관세음 보살님을 향하여 자꾸자꾸 절을 하였다. 그나마도 나중에 온 사람들은 암자의 뜰이 비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자 밖에서 멀리 관음봉을 바라보고 절을 하였다. 스님들은 한때 길손이를 구박했던 자기들의 순진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깊이깊이 뉘우쳤다. 그리고 스님들은 이 암자의 이름을 아예 바꾸기로 하였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부처님이 된 곳이라고 해서 이후부터는 오세암이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길손이를 돌보아 온 설정 스님의 괴로움은 조금도 줄지 않았고 감이의 슬픔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정 스님은 부처님 공부에 대해서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고, 감이는 막상 눈을 뜨고 보니 길손이가 설명해 주던 것에 훨씬 못 미치는 이 세상 풍경에 실망하고 더욱더 길손이를 그리워하였다. 오후가 되어 장작불이 타올랐다. 연기는 곧게 하늘로 올라거서 흰구름과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스님들은 모두 염불을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절을 하였다. 감이만이 울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 <198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