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불괴 - 좌백 [서장] 삼선은 진경을 남기고 소삼중은 요결을 얻다. <총요 금강불괴는 완전한 인간의 경지이다. 그것은 금강석(다이아몬드)처럼 굳세어서 어떠한 수단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단단한 육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그것은 그러한 육체와 더불어 견고한 지덕으로 일체의 번뇌를 깨뜨린 후에야 도달하는 정신의 지고한 경지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므로 금강불괴가 된다는 것은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에다름아니다. 금강불괴가 되기 위해서는 연형 연기 연혼의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각 단계는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연속되는 일련의 과정이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다르듯이, 인간과 동물이 다르듯이각각이 하나의 단절된 세계요, 따로이 존재하는 하나의지평이다. 그러므로 한 단계가 완성되었다고 다음 단계가 시작되는 것이아니다.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점진적인발전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비약만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그 비약은 그 전까지의 존재 방식을 바꾸는 결단과, 현재의 지평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는 용기만으로 가능하다. 철우 반선 비불 공배.> <기일. 연형편. 금강불괴의 첫 단계는 '연형'의 단계, 곧 신체를단련하는 것이다. <삼선유서 금강불괴론요 중.> 그는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덮었다. 낡아서 너덜거리는 책장이 자칫그 손길에 부스러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될 정도로 그의 손은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손의 떨림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의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을지도 모를 책을 발견한 것이다. 비록 반 권, 아니, 삼분의 일 권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그 책이지만삼십 평생 굴종과 오욕만이 존재했던 그의 삶에 처음으로비추인 햇살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젠 그 햇살이 가리키는 곳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인내와 끈기는 그의 유일한 장점이었으므로 그것은 어렴지 않았다. 길만 확실하다면 포기하지 않고 걷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길만 확실하다면! 그는 낡은 저고리를 벗어 그것으로 뒷장이 뜯겨 나간 책, <삼선유서>를 조심스럽게 감싸 들었다. 그 낡은 보퉁이를 죽어도 놓지 않을듯이 단단하게 가슴에 품고 그는 동굴 밖으로 나왔다. 황량한 대고산의 산봉은 바람에 울부짖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 흘러 폭풍우를 만난 바다의 격랑처림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그 산봉에 서서 잠시 그 광경을 보았다. 불어오는 삭풍이 그의 벌거벗은 가슴을 헤집고 지나갔다. 오늘의 하늘과 땅은 마치그의 인생과도 같이 어둡고 황량했다. 그러나 그의 벌거벗은 가슴에는 한 줄기 뜨거운 열기가 흘러 넘치고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고, 한 주먹을 쥐어 하늘을 향해 뻗고, 다시휘둘렀다. 그의 입에서 한소리 다짐이 터져 나와 대고산 산봉들을 돌아 퍼져나갔다. "지지 않겠다! 나는 이제 지지 않겠다!" 소삼중, 서른두 해 동안 모아 온 한과 오기의 절규였다. [제일장] 광마는 용단을 만들고 노호는 아이를 낳다. 그 해, 그러니까 소삼중이 <삼선유서>를 발견한 지 십 년이 지난 그해, 광동성불산 진가장의 장주, 광마진삼산이 아들을 낳기 위해 벌인 노력은 후일 다시 생각해 보아도 눈물겹다 아니할 수 없었다. 그날 아침 진삼산은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뱉어 낼 뻔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정말 사태를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것이다. 그는 입 안에 담은 찻물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기고 밭은기침을 했다. 그리고 나서야 말을 입 밖으로 내놓을 수가 있었다. "부인,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소?" 방금 남모르게 벌인 치열한 투쟁의 흔적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담담찬 말투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초인적인 자제력의 결과였다. 그의 부인, 광동 진가장의 안주인이며, 일곱 딸의 어머니이자 이제 곧 여덟 아이의 어머니가 될, 그리고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여협인 노호 고대랑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매순간 이러한 자제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고대랑은 대답하기에 앞서 눈썹부터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 만삭이 되어 태산처럼 부풀어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동번산의 대나란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이 완벽하게조화를 이루어 그녀의 말에 거역할수 없는 위엄을 갖추게 했다. 과연 그 은근한 위엄은 언제나처럼 효과적이라서 진삼산이 애써 꾸민 담담한 자세는 허물어지고, 어떤 일이라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대로 들어주겠다는 복종의 빛이 눈가로 흘렀다. 그렇게 사전 작업을 해놓고 나서야 고대랑은 말했다. "내일 용단을 만들겠다고 했어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거부를 용서치 않는 태도였다. '결국!' 진삼산의 낯빛이 일순 파랗게 변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그의 시선 속으로 고대랑 뒤에 서 있는 일곱 딸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와마찬가지로 파랗게 질린 얼굴들이었다. 진삼산은 그 파랗게 질린 얼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만큼은 딸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내에게 거역하다가두들겨 맞는 경우를 경계할 만큼 영리하기도 했다. 그러니 말이 조심스럽게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 하찮은 일에까지 당신 손이 갈 이유는 없지 않겠소, 부인? 홀몸도 아닌데……" 용단이란 달리 대옥자, 혹은 가대붕란이라고도불리는 요리를 말하는 것이다. 원대의 은사 진원정이 저술한 <사림광기>에 말하는 바, 달걀 수십 개를 깨어 잘 저은 후 돼지방광에 담고 끈으로 입구를 묶어 하룻밤 우물에 매단 후 통째로 찌면 노른자는노른자끼리, 횐자는 횐자끼리 모여 커다란 삶은 달걀이 된다고 한다. 광동은 뱀과 고양이를 함께 넣어 끓인 용봉탕이니, 살아 있는 원숭이의 뇌인 후뇌이니, 심지어는 갯지렁이와 살아 있는 생쥐까지도 먹을 정도로 색다른 음식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것도 이 용단만큼 기괴하지는 않았다. 재료도, 만드는 방법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그렇게만들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날이 밝아 매달아 둔 것을쪄 보면 용단은 없고, 게게 풀려 먹고 싶어지지도 않는 달걀 찜만 남는 것이다. 진삼산은 이미 일곱 차례나, 그러니까 고대랑이 아이를 가질 때마다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었다. 그것을 이번에도 시도해야 할까? 원래 그가 그것을 할 이유란 없었다. 그러나 부인이 하겠다는데 어쩔 것인가. 원래 부인이 그것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속설에 따르면용단이 완벽하게 만들어지면 용 같은 아들을 낳는다는데 어쩔 것인가. 진삼산은 진원정이란 자가 옛날 사람만 아니었으면 그리고 그런 터무니없는 속설을 퍼뜨린 자가 누군지만 확실했으면 세상 끝까지라도쫓아가 주리를 틀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내가 홀몸이면……" 고대랑은 진삼산의 말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입을 벌려 말문을 막아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이없는 소리를 다 들어 본다는 빛이 깔려있었다. "용단을 왜 만들겠어요? 홀몸이 아니니 아들을 낳아 보겠다는 거고,그러니 용단을 만들겠다는 것 아니겠어요? 다 진씨 집안을 살리자고하는 일 아닌가요?" 말을 하면서 점점 더 흥분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흥분하려고 일부러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설혹 아주 없지는 않다 해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불행히도 고대랑이 그 중 하나였다. 진삼산은 점점 얼굴이 붉어지고 말은 빨라지는 고대랑을 두려운 빛을 띠고 바라보았다. 이대로 뒀다가는 좋은 일 없을 거라는 것이 오랜경험을 통해 그가 배운 지혜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진삼산은, 자리에서 벌멱 일어났다. 그리고 외쳤다. "주방의 왕숙수에게 용단 만들 준비를 하라고 하고, 사당에제상을 차려라. 용성관에도 사람을 보내 진인들을 모시고!" 그는 고대랑의 뒤에 서서 그를 빤히 보고만 있는 일곱 딸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아니, 너희들은뭐 하는 거냐? 얼른 목욕 재개하고 사당에 가서 빌준비를 해야지!" 이미 일곱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용단 만드는 준비 과정은순조로웠다. 주방의 왕숙수는 성질이 좀 더럽고, 술버룻은 약간 고약하지만 음식솜씨가 좋았다. 그리고 손이 빨랐다. 그는 한 시진 동안에 오백 마리의 닭을 도살해 마흔여덟 가지의 각각 다른 닭요리를 만든 적도 있을정도였다. 그 빠른 손이 오십 개의 달걀과 돼지방광을 준비해 놓았다. 급한 중에도 살진 놈으로 골라 잡아서 잘 씻어 놓은 방광이었다. 고대랑은 무거운 몸을 옮겨 주방으로 와서 손수 달걀을 깨고, 장창을 들던 손에 주걱을 들고 저었다. 달걀들은 그녀의 손끝에서잘 풀어혜쳐져 황금색의 반죽처럼 되었다. 사실 여기까지야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달걀 젓는 일에 만근 바위를 뽑아 던지는 공력과 눈 한번 끔벅할 사이에 마흔 개의 낙엽을 꿰뚫는 섬셤창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일이 언제나 그러하듯, 그리고 고대랑이 하는일이 언제나 그러하듯 종교적 의식에나 어울릴 경건성과 장엄성이 추가되면 아무리 간단한 일도 간단하지만은 않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오늘의 일도 그러했다. '도교의 제사란 얼마나 번거로운 것인지……!' 진삼산은 '용단'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순간부터 계산해서 열일곱번째의 한숨을 내쉬며 도꾜의 제사, 일명 재초라고 불리는 의식을 보았다. 물론 진써 가문외 사당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성밖 용성관에셔 온 '말코'도사들이--어제는 고대랑의 앞이라 진인이라 불렀지만, 사실 진삼산은 그 도사들의 이름을 말코 외의 다른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혹은 일어서고, 혹은 앉으며,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응얼거러고 있는 것을 보니 진삼산의 가슴은 터질 듯했다. 그 가슴 벅참이 감격에 겨워 그런 것이 아님은 물론이었다. 사당 앞에 삼층의 단을 쌓고 각충마다 울짱과 새끼로 주위를 감은다음 다시 각증에 있는 표식에 문을 설치하는데, 최상층에는 열 개의문을 열어 놓는다. 단 안에 있는 각 문과 통로에는 약간의 등을 설치하고, 단의 중앙에는 아홉 척 길이의 장등을 안치하며, 단의 주위에는 서른여섯 개의 색등을 설치한다. 단 안에는 다시 다섯개의 탁자가 안치되어 있는데 소위 '오방에 천문을 적어' 놓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천문 위에는 각기 금룡으로 눌러 놀고향불을 피운다. 이것이 지금 진가외 사당 앞애 만들어진 재단의모습이었다. 말코들은 무얼 하고 있는가? 중간 단의 아래에 열두 명의 말코들이 손에 번, 선, 학우, 절정을 들고 이 모든 재의를 주지하는 두목말코와 함께 음송하며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막을 세우고, 제신께 아뢰고, 부를 발행하고, 혼을 부르며, 삼관초, 북음초를 마련하고, 등을 나누고, 염을 올리는 의식을 행하고, 록을 행하며 기를 세우고, 경을 읽고, 투간하고, 소지하며 등등……! 말코들이야 저것이 밥 벌어 먹고 사는 수단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한 옆에 꿇어앉아 있는 딸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또 딸들이야 고추를 달고 나오지 못한 죄로 그런다고 치더라도 진삼산, 그 자신은 도대체 무슨 죄로 여기 퍼질러앉아 지루할 뿐 아니라무의미하기까지 한 이 의식을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끝나기만 한다면야……!' 진삼산은 열여덟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재초의 절정은 밤에 이루어졌다. 용성관에서말코들이 모시는 주신이며 아들을 점지하는 영험을 지닌 신, 이른바 '용성수태대장군' 이 등장하는 것이다. 휘장에 가져진 용성수태대장군이 나오면 말코들이 '진사막을 세우고, 다음으로 장리막을 세우며, 풍도를 깨고 업도를 깨신 용성수태대장근에게 배례를 하며', '다시 횐 수레에백마를 타신 용성수태대장군에게 배례를 하고', 다시 길을 개통하신용성수태대장군에게 배례를 올리며', '다시 망혼을 불러모으시는 용성수태대장군에게 배례를 올리고……' 등등 수없이 절을 한다. 그 뒤에야 비로소 휘장이 벗겨지고 소위 용성수태대장군의 정체가드러나는데. 용성수태대장군이라는 것은 바로, 장장 구 척에 달하는 장테한 크기의 남근상이었다. 실물과 너무 닮아서 오히려 더윽 보기 흉측한 청동의 남근상. 이쯤 되면 진삼산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의식이 빨리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밖에는 다른 소원이 없게 되곤 했다. 저 흉측한물건을 눈앞에서 치워 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진삼산은 두번 다시 이런 일을 려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저런 흉측한 물건에 대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비극적 회극을 연출하지않게 되길 바랬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 방법을 사용할 때였다. 일곱 살밖에 안 되었지만 눈치가 빠르고 잽싼 다섯째 딸, 청아가 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진삼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새끼줄을 쳐놓은 재단을 벗어나 걸었다. 말코도사 하나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향해 손짓했다. 재주가 자리를 떠선 안 된다는 의미이리라. 진삼산은 가능한 한 흉악하게 눈을 부릅떴다. 그도 한때는 '미친 말'이라 불렸던, 성질을 건드리면 신이고 대장군이고 엎어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니, 일개 말코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말코도사도 그의 악명은 익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들어올린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더니 그냥 돌아서고 있었다. 진삼산이'회심의 미소를 지므며 그늘 속으로 들어가자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청아가 튀어나왔다. 그리곤 귓속말로 말했다. "엄마는 방금 자러 가셨어요." 진삼산은 청아의 귓속말을 듣기 위해 거의 땅바닥에 닿도록 구부린허리를 바로 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진삼산의 계획은 간단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하늘이 내리는 것이니사람이 어쩔 것인가! 그는 단지 용단이 만들어진다고 아들을 낳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임으로써 이 무의미한 의식들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용단을 만들어야 했다. 진삼산은 장원 북쪽 구석진 우물로 가서 우물 위에 매달린 돼지방광을 내려 열어 보았다. 게게 풀린 노란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무리봐도 용단이 만들어질 기미는 없는 것이다. "역시 안 되겠지요?" 언제 빠져 나왔는지 일곱 딸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맏딸 홍아부터 주아, 황아, 초아, 청아, 소남, 네살바기 막내딸 소보까지, 내용도 모르면서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삼산은 하마터면 눈물이 핑 돌 뻔했다. 그가 마누라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바람에 애들까지 고생하고 있지 않은가! '이번에는!' 진삼산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는 용단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궁리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청아가, 제 어미 닮아 멍청한 것이 힘만 센 황아를 시켜달걀광주리를 들고 왔다. 언뜻 보기에도 백여 개가 넘는 달걀이었다. 저 정도면 두 번은 시도할 수 있으리라. 진삼산은 팔을 걷어붙였다. '우션 노른자와 흰자를 따로 모아서……!' 우선이라고는 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달걀 쩝데기를 살짝 깬 뒤 노른자는 흘러나오지 않게 비스듬히 들고 휜자만 먼저 그룻하나에 흘려 넣은 다음 노른자는 따로 그룻 하나에 담아야 했다. 그나마 일곱 딸파 그가 붙어 앉아서 스무 개가 넘는 달걀을 헛되이 깬 뒤에야 겨우 체득한 요령이었다. 그렇게 횐자와 노른자를 따로 담아 놓은 뒤 진삼산은 다시 고민에빠졌다. 노른자를 등글게 삶아 놓는 일은 어떻게든 갸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휜자는 어떻게 삶아 놓는단 말인가? 그것도 노른자를 둘러싼 모습으로! "달걀처림 아래가 위보다 크게 만들어 놓지 않으떤 엄마는 용단이아니라고 할 거야." 청아의 그 말에 초아가 덧붙였다. "흠집 하나만 있어도 제대로 된 용단이 아니라고 하실걸?" 제 어미 닮아 힘만 센 황아가 말했다. "여태까지는 곤죽만 만들었는테 이번에 대충 흰자 노른자가 따로 모이기만 혜도 괜하다고 하지 않으실까?" 역시 제 어미 닮아 성질이 뭇된 주아가 말했다. "바보야! 엄마는 용단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아들 못 낳은 핑계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는 거야. 나중에 또 딸을 낳으시면 분명히용단이 제대로 만틀어지지 않았다거나, 재초에 성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다고 아빠를 구박할 핑계가 펼요하잖아!" 무심코 하는 말들이 어쩌면 저렇게 사태의 정곡을 쩌르고 있을까 하고 있는데 맏이 홍아가 점잖게 일갈했다. "조용히 해, 이것들아! 누가 그걸 모르고 있다고 미주알 고주알 얘기하고 있는 거야!" 우물가는 다시 고요해졌지만 진삼산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철없는 애들도 파악하고 있는 고대랑의 속셈을 그만 여태 모르고 있었던것이다. '이걸 그냥 한번 뒤엎어 버려?' 생각해 보면 삼십오 년 전 혼인하기 전에 한번 대들었다가 곤죽이되도록 맞은 뒤로 아직 한번도 반항의 기치를 올려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동안 그는, 열심히는 아니지만 장주로서 형식적으로라도수련을 계속했다. 그에 반해 고대랑은 아이들 낳고 살림하느라, 아니,살림은 하인들에게 맡기고 낮잠을 즐기느라 수련다운 수련을 못 한 것이 분명했다. 그령다면 이제는 승부가 되지 않을까? 진삼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어떤 방법으로 용단을 만들까보다는 어떤 초식으로 고대랑을 제압할까만 열심히 생각하고있었다. "방법이 있느냐?" "얘. 근래 완성한 광마십삼곤을 불시에 시전해 기선을제압하면 승산이 있을지도……!" 무심결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털어놓던 진삼산은 깝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척단구의 백발노인 하나가 앞에 나타나 던진 질문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의 늙으신 아버지, 진가장의 전대 가주이자 당금무림십대고수 중 하나인 천기공 천기홍화곤진자룡이었다. "쯧쯧…… 못난 것!" 그의 내심을 꿰뚫어본 듯 혀를 차던 진자룡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진삼산의 건너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시작하자!" "뭐, 뭘 말입니까?" "네가 노른자를 등글게 만들면 내가 횐자로 덮어씌워 보마!" "그럼……?" "격공섭물에 이화취정이면 대충 비슷하게는 될겻 같구나." "격공섭물에 이화취정이라고요?" "왜? 이해가 가지 않느냐, 아니면 못 할 것 같으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힘든 것이긴 하지만 못 할 정도도아니다. 그러나 진삼산은 그런 일로 연로하신 아버지를 수고스럽게 한다는것이 민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면목없습니다. 소자 불민하와 이런 일까지……!" "아니다. 가문의 대를 잇겠다는데 여태 구경만 하고 있은 나도 잘못이 아주 없다 하지는 못하리라. 밤이 짧으니 어서 시작하자꾸나." 진삼산은 늙은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눈물을 삼키며 용단을 만들 자세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격공섭물얘 이화취정으로 어떻게 용단을 만드는가? 방법은 간단했다. 노른자를 공중에 띄운 뒤 공처럼 등글게 모은다. 물론 손을 대지 않고 무형의 기만으로 그렇게 구체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격공섭물, 즉 허공을 격하고 물채를 움직이는 공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구체를 만든다고 해도 그대로 굳혀 놓을 수 없으면소용이 없다. 여기에서 이화취정이라는 고도의 무공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화취정은 본신에 내재되어 있는 화기, 즉 삼매진화를 끌어 내어 독기 같은 것을 모으는 기공이었다. 이경우에는 그 삼매진화를 외부로 분출하여 노른자의 형체를 유지하도록모으고, 익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말은 쉬웠지만 막상 그렇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격공섭물만 해도 강호의 유수한 무림인 중 할 수 있는 사람이 백을 넘지않을 것이다. 거기에 이화철정을 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려면 수는반으로 줄어들고,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면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할 것이었다. 진삼산은 가능한가? 어떤 것은 가능하고. 어떤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격공섭물도, 이화취정도 따로따로 하라면 가능했지만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것은 그로서도 무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두 부자는 나누어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삼산이 먼저격공섭물로 노른자를 구체로 만들었다. 그렇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동안 진자룡이 이화취정으로 익혀 놓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쉬웠다. 진삼산은 마치 필생의 대적을 만난 것처럼 잔뜩 긴장해서 땀을 뻘뻘 흘려 가며 겨우 노른자가 완전히 익을 때까지 공중에 띄워 놓을 수 있었다. 그 다음이 어려웠다. 흰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니 모양에도 신경을 써야 했고, 공중에 떠 있는 노른자를 감싸안으며 익혀야 했다. 그것은 진삼산으로서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세심하게 힘을 운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애는 진자룡이 격공섭물을 운용했다. 노른자가 공중에떠오르고, 완전히 풀린 횐자가 그 노른자를 감쌌다. 진자룡이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횐자는 달걀 모양으로 형체를 이루기 시작혔다. 이재 진삼산이 나설 차례였다. 그는 깊이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진기를 사지백해로 운용했다. 그가 익헌 내공심법은 그의 아버지인 진자룡이 젊은 시절우연히 만난 도인에개서 전수받은 태청존신연기오시칠후결이라는 긴 이름의 토납범이었다. 줄여서오칠비결이라고도 부르는 그 비결에 따르면 화기는심장에서 나오고, 그구결은 '가'였다. '가' 자 구결을 운용하자 진삼산의 심장으로부터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온몸을 휘돌아 감쌌다. 진삼산은 자기 몸이 한 덩이숯쳐럼 활활 타오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껴고 있었다. 그는 입을 가볍게 벌려 그 기운을 토해 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뜨거운 기운이 진자룡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달걀을감쌌다. "너무 뜨겁지 않게 화기를 조절해라!" 진삼산의 귓가로 들려 온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격공섭물을 시전하면서 전음지술까지 같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진삼산은 흠칫 놀라 심장에서 비롯하여 입을 통해 뿜어지는 자신의삼매진화를 조절하려 노력했다. 단번에 강하게 터뜨러는 것은 쉬워도 가늘고 유장하게 오래 유지한다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법이었다. 진삼산은 곧 힘이 딸려 진기가 이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의 이마에서 굵은 땀이 배어나왔다. 자칫 하다간 공든 탑이 무너질 판이었다. '달걀 하나 익히는데 이게 웬 난리란 말이냐!' "잡념을 버려라!" 진자룡의 다급한음성이 귀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진삼산의 진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자칫 무리하다가 아예 태워 버릴 우려도 있으니 만큼 차라리 쉬는것이 나을 것이었다. 문제는 다시 시도할 진력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직 달걀의 형체는 굳어지지 않았으니 이대로 내려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진자룡이 계속 허공에 잡아 둘 수도 없는 위기였다. 진삼산의 얼굴이사색이 되었다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진삼산의 등뒤 영대혈과그 한 치 위의 신도혈에 손을 대고 진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다. 진삼산보다 그리 강하지는 않은 공력이었지만 그 진기는 갈증으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주어진 물 한 그룻과도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진삼산의 진기가다시 고르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화기도 안정을 되찾았다. 달걀이 완전히 익고 진씨 부자가 겨우 숩을 돌리게 되자 갑자기 나타난 구세주가 물었다. "달밤에 이게 무슨 요상한 짓인가?" 진자룡은 쓴웃음을 지었다. 구세주는 바로 궁서생 중자릉이었다. 진자룡의 오랜 친구로 어제 놀러 온 것인데 그에게 부끄러운 꼴을 들킨 것이다. 남에게 말하긴 부끄럽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중자릉은 호기심 강하기로 중원에 이름난 친구가 아니던가! 진자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자릉의 어깨를 잡았다. "가서 얘기해 줌세!" 진삼산은 한참이나 더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완전히탈진해 버린 것이다. 그는 하늘에 뜬 달을 보며 탄식했다. "부끄럽도다!" 열아홉 번째 한숨이었다. 달을 보고 탄식하는 것은 진삼산만이 아니었다. 우물가가 바라다보이는 담장 그늘에 몰래 숨어 탄식하는 고대랑의 마음은 진삼산이나 진자룡보다 백 배는 더 무거웠다. 얼굴에 철판을 겹으로 둘렀다 해도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저런 행동까지 하게 하고는 붉어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얼굴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얇았다. 그녀인들 왜 미안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안해 한다고 뱃속의 딸이 갑자기 아들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제발 이번엔 아들이어야 할 텐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진삼산이 오늘 내쉰 한숨보다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날이 밝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같이 우물 위에 매달아 두었던 돼지방광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담겼다 달걀은 오래 삶지 않는 법, 곧 다시 꺼내어져 차가운 물에 담기고, 이젠 개봉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고대랑도 약간의 기대는 하며 그 개봉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결과를 이미 아는데 기대하고 말고 할 것도없었다. 그녀는 귀찮아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손을 저었다. "홍아, 네가 열어 봐라!" 맏딸 홍아가 눈을 휘등그렇게 뜨고 어머니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구를 묶은 끈을 풀었다. 둘러서서 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완벽한 모습의 거대한 달걀이 그 안에서 나온 것이다. 진삼산이 특히 기뼈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고대랑의 손을 잡았다. "축하하오, 부인!" 중자릉은 무슨 얘길 들었는지 눈까지 뒤집어 가며 과장스럽게 감탄했다. "이거야말로 용의 알 아닌가! 듣도 보도 못한 기문아닌가 말이야!" '가증스럽기 그지없구나! 이러다 아들 못 낳으면 무슨 구박을 주려고!' 고대랑은 쏙으로는 이를 갈았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만!" "감사합니다만?" "맛은 없어 보이는군요. 꼭 두 번 찐 것처럼 누리끼리하게 굳었네요!" 진삼산과 진자룡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것을 고대랑은 예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속으로는 간이 떨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리를 힘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치 못하지만 새심한 면에서는 그녀를 따라오려면멀었다. 그들 부자는 어젯밤 용단을 완전히 익혀 버리는 실수를 한것이다. 그녀였다면 반만 익혀 형체를 유지할 정도로만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오늘 평소보다 물에서 일쩍 꺼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여튼……" 고대랑은 천천히 돌아서서 걸어가며 말했다. "다들 나눠 드세요." 뒤에서 진삼산과 진자룡, 거기에 중자릉과 일곱 딸들까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모르지 않는 고대랑이었다. 진삼산의 예측과는 달리 그녀는 무공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백 장 밖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한감각은 그녀의 자랑거리이기도 한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동안 그녀에게 그렇게 당해 왔으니 이제 그녀를 면목없게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왜 통쾌하지 않을 것이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 나……! 이해는 하지만……! 고대랑은 갑자기 돌아서서 진삼산을 노려보았다. '용서할 수가 없어!' 진삼산의 얼굴이 설익은 무처럼 파랗게 변했다. 그 옆에 선 시아버지 진자룡의 탐스러운 수염 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고대랑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 모든 것들을 관찰하면서도 내색하지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쥐새끼를 몰아넣고 나면 서두를 필요가 없는것이다. 자칫하면 콧등을 물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녀는 천천히, 여유있게 말했다. "식욕도 없는데…… 뭔가 맛있는 걸 먹어 보고 싶네요." 진삼산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뭐든지 말만 하구려. 말만 떨어지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해줄 거요, 왕숙수가!" 왕숙수가 인상을 썼지만 진삼산이 그를 보며 그보다 몇 배는 더 더러운 인상을 썼기 때문에 아무런 불평도 할 수가 없었다. 고대랑은 짐짓 한참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고는 불쑥 말했다. "염대야의 내유어시를 먹고 싶군요." "염대야? 내유어시?" 진삼산은 왕숙수를 돌아보았다. "만들 수 있겠지?" 마치 못 만들겠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기름에 튀겨 버릴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왕숙수는 심통이라도 난 것처럼 입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내유어시라면 상어지느러미를 튀겨서 내유를 얹은 것 말씀입지요? 만들 수 있습지요. 상어지느러미야 파는 것두 있구, 요 앞에 강에만 나가도 바다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이 있으니 잡아도 되지만 내유라는 것이 중요합지요. 국물에 우유랑 청주, 소금을 넣어 빛깔을 희게 만들면 그개 내유지요. 우유는 국물 분량보다 적게 넣어야하는데 우유의 양이 많으면 맛이 진하고 탁해져 좋지 않고, 너무 오래끓여도 엉겨서 좋지 않지요……!" 황숙수의 말이 한정없이 길어질 듯하자 진삼산이 말을 끊었다. "그렇게 잘 아니 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겠지?" "아니요!" 황숙수는 고개를 저었다. "내유어시야 만들 수 있지만 염대야의 내유어시는 만들 수 없지요." "못 만들어? 그렇게 아는 척해 놓고 못 만든다고?" "노려보셔두 소용 없습니다요. 때려 죽여도 그건 못 만듭지요. 염대야가 만든 게 염대야의 내유어시인데 제가 무슨 수로 만듭니까요? 제가 만들면 왕숙수의 내유어시죠." "염대야가 누군데?" 이번에는 고대랑이 대답했다. "석기반점의 염대야 말이에요." "석기반점?" "강 건너 등가산 아래의 석기촌, 석기촌 입구에 석기반점말고 주인이 염씨인 석기반점이 있나요? 진자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석기반점의 염대야라면 나도 알지. 연배가 거의 나 정도는 되었을 텐데 아직도 영업을 하나? 진삼산이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저도 생각이 나는군요. 삼십여 년 전에 몇 번 가서 밥을먹은 적이 있지요." 그는 왕숙수를 향해 말했다. "그럼 자네가가서 가져 오게! 그럼 되겠지?" 이번에도 왕숙수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요." "왜 안 돼?" "거긴 배달을 안 해줍니다요. 오직 거기 온 손님에게만 요리를 팔지요." 진삼산은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자 그 콧등이 선명한 붉은색을 띠면서 거기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은 진삼산의 콧구멍에서 더운 김이 뿜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삼산을 유명하게 만든 문제의 버룻이었다. 한때 강호에는 '광마의콧잔등레 땀이 맺히면 누군가는 반드시 비명에 간다'는 격언까지 돌았던 것이다. "지, 지금……" 진삼산이 말을 더듬었다. 극도의 분노가 혀를 마비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오, 오늘내일 하는 이, 임산부가 요, 요리 하나 먹으려고 사, 산넘고 가, 강 건너 가야 한단 말이냐?" 왕숙수는 하앙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타고 대신 고대랑이 대답했다. "배달이 된다 해도 싫어요. 요리한 직후에 먹지 않으면 제 맛이 나지 않죠, 배달해 먹는 건 맛을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작태예요." "다, 당신 그, 그럼 처음부터 가, 가서 먹으려고……?" 눈을 부라리며 금방이라도 사람을 때려 죽일 것 같은 인상으로 진삼산이 물었다. 그러나 고대랑은 내심 그보다 열 배는 분노하고 있었다. '염대야의 내유어시를 잊었다고? 둘이 처음 만나 연애하던 그 장소,처음 먹은 그 요리를 잊었단 말이지?' 원래는 심통을 부리려 한 것이 아니었다.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서곤란하게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와 처음 만난 그 장소, 그 자리에 가서 그때의 기분을 되살려 다시 시작해 보려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털어놓곤 용서를 빌려고도 했던 것이다. 아니, 그가 그 장소를 기억만이라도 하고, 그래서 그녀에게 좋은 말로 몸을 풀고 난 뒤에 데려다 주겠다고만 했어도 고대랑은 이렇게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늦었다. 고대랑의 가슴속에는 지금 호랑이 한 마리가 울부짖고 있었다 분노의 호랑이였다. 하나 지금 싸웠다간 오늘내일 하고 있는 뱃속의 아이가 놀랄 것이다. 고대랑은 지순한 모정으로 타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래서 그녀의 가슴속에서 울부짖던 호랑이도 뾰족한 대꾸 한마디를 하는것으로 성질을 죽였다. "물론이죠. 그래선 안 될 이유가 어디 있어요?" 찰나의 순간에 그녀의 내면을 지나갔던 격렬한 분노와, 그 분노를잠재우기 위해 끌어올렸던 초인적인 인내심을 진삼산은 전혀 파악하지못하는 듯했다. 겁도 없이 주먹을 치켜 올리고 있는 것이다. 말보다는주먹이 빨랐던 그의 젊었을 때 버릇이 잠시 상대를 몰라보고 발동된모양이었다. 고대랑은 내심 코웃음을 치고, 아무리 태내의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해도 섣부른 짓을 하면 적절한 응징을 해주겠노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진삼산은 주먹을 쓸 수가 없었다. "얘야! 그렇게 해주려무나!" 진자룡이 나서서 중재를 한 것이다. 아무리 성질이 불 같다고는 하나 연로한 아버지의 중재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구했다. '한 목숨 건진 줄 알아!' 고대랑은 잔뜩 끌어올렸던 진기를 풀며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조, 좋아!" 잠깐 사이에 한 목숨 건진 줄도 모르는 진삼산의 얼굴이 이번에는파랗게 식어 갔다. 이른바 붉으락푸르락한다는 말이 지금의 진삼산을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대, 대신 어떤 일이 생겨도 책임을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저, 정중히 말혜 두는 바요!" 진삼산이 홧김에 뭐라고 말했든, 아내와 책임 문제를 놓고 다툴 정도로 속이 좁은 사내는 아니었다. 더구나 아내에게 책임질 일을 만들기 위혜 일부러 훼방을 놓는다거나 하는 사내는 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석기촌으로 가는 도정 내내 그가 이를 갈기는 했고, 꽉 쥔 주먹을 풀지도 않긴 했지만 산길에서 수레 축이 부러진 것이 그가 일부러 한 짓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또 설사 속으로는 '거 잘됐다, 고거 쌤통이다'라고 쾌재를 불렀을지는 모르지만 혼자서 가마를 구하러 가며 뒤에 남은 아내에게 '더 나쁜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거나, '아예 죽어 버리면 이 참에 새장가를 들지' 따위의 생각을 했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그들의 운명이 묘하고, 그보다는 이제 태어날 아이의 팔자가기구하니 그러한 모든 일이 생겼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은 진삼산이 가마를 구하러 산을 넘어 간 지 반 각이 채 안 돼 일어났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몰아도 덜컹거리기 마련인 수레 안에서 흔들리다가, 수레 축이 부러지며 받은 충격으로 뱃속의 아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고대랑은 배를 부여잡고 신음하기 시작했다. 산통이었다. 아이를 일곱이나 나았으니 아이 낳는 일에는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 그녀로서도 이렇게 심한 산통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노산이라서……!' 확실히 오십대가 아이 낳기에 적합한 연령은 아니었으리라. 고대랑은 자기가 고집해 나선 길이기도 해서 누굴 원망하지도 못하고 그 산통을 고스란히 참고 있어야 했다. 더구나 밖에는 먼 친척 아저씨로 진가장의 총관인 진 노육과 마부밖에는 없었다. 도움을 청할 계집종 하나 대동하지 않은 것도, 그 자신의 급한 성미탓에 급히 나오느라 그리 된 것이니 누굴 원망할 것인가! 밖얘서 진 노육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마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들여다보지 마세요!" 고대랑이 산퉁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간신히 힘을 내어 대답했지만 노련한 진 노육은 목소리만 듣고도 어떤 사태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무리 먼 친척털이라 하나 사내가 부인네 해산하는 것을 도울 수는없는 일이었다. 남편이라면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그 문제의 남편은 지금 산 녀머에 있는 것이다. 진 노육은 마부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하고 솔가지와 낙엽을 모아 물을 끓이게 하는 등 부산을 떨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고대랑이 아이를낳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오랜 경험에 따라호흡을 조절하며 아이가 쉬이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에 고대랑은 세 번이나 혼절했다가 격렬한 고통에 다시 깨어나는 것을 반복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었다. '이년, 성질 더럽게 쓰더니 이렇게 죽는구나!' 그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탓한 것은 평생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보다 이제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위기에 몰린 것또한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하의 고대랑, 해서 되지 않는 일이라곤 아들 낳는 것밖엔 없었던 고대랑이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고대랑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네 번째 혼절이었다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린 때는, 본인은 느끼지 못했지만 제법 시간이 흐른 후였다. 진삼산은 아직 오지 않았고, 융통성이라곤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볼수 없을 진 노육은 안에서 사람이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밖에서 발만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 바닥은 피바다로 변했고, 아이는 탯줄을잘라 줄 사람이 없어 태반을 몸에 단 채 그 피바다를 구르고 있었다. ' 고대랑은 얼른 손을 뻗어 아이를 집어 들었다.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탯줄을 잘라 줄 사람이 없었으니 숨통을 틔워 줄 사람도 없다는것도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고대랑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원망스러웠다. 평소엔 흔자 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더니, 막상 필요할 땐 아무도 옆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들어올려 엉덩이를 때렸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본인은 느끼지 뭇혔지만 난산을 혼자 이겨 내느라 체력이 심하게 손상된것이다. 아이를 들고 때리는 것도 초인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을 지경인데 힘꼇 때리기까지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대랑온 그것을 해내었다. 자칫 시간을 놓치면 아이가 죽을지정이니 죽을 힘이라도 끌어 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상태인테도 아이의 엉덩이를 두 번이나 더 때렸다. 아이는 그래도 울지 않았다. '세상에……! 혹시 사산……?' 그제서야 고대랑은 걱정이 되어, 낮빛을 바꾸었다. 한마디로 새파랗개 절려 버렸타. '일곱 번이나 아무 일 없이 낳았는데 왜 하필 지금……' 그녀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누워 버렸다. 들고 있던 아이가 그 바람얘 마차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으아앙--!" 우렁찬 아이의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없는 어머니의손바닥보다는 딱딱한 마차 바닥이 아픈 모양이었다. 마차 밖에서 진 노육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구, 낳으셨네! 마님! 아들입니까?" 원레 그런 것부터 물어야 할 일은 아닌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이현재로서는 초미의 관심사이니 진 노육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난산 끝에 아이를 낳고는 아이의 성별부터 확인한다는 것이 서글픈일이긴 하지만 고대랑 역시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그녀는 어지러운눈을 떠 성별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워낙 고생한 탓인지 땀이 눈에 들어가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땀을 지우려 손으로 눈을 비볐는데 그게 오히려 실수였다. 아이를 만지느라 묻은 피가 눈께 들어가 더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진정해야지! 당황하면 안 돼. 설사 딸이면 어때! 한두 번 당해 보는 일도 아니잖아!' 고대랑은 심호흡을 하고 눈을 깜박였다. 핏기가 흘러내려 앞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아이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손을 멈추고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용단의 일도 있고, 오늘의 일도 있으니 만큼 이번애 그녀가 느끼는부담은 이전의 일곱 번에 비해 몇 배로 더했다. 그 긴장감에 절로 눈이 감겨 버린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든 최상의 상황이든 확인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다시 정신을 놓아 버릴 정도였다. '안 돼! 고대랑, 너 왜 이렇게 약해졌니? 힘을 내자!' 그녀는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아들이다!" 아마 도박장에서 천만 냥을 잃은 도박판이 주사위를 던지며 '만당홍(주사위 놀이인 쌍육에서 가장 높은 패)'이라고 소리치는 심정과 비슷한 심정으로 그렇게 한 것이리라. 그렇게 소리치면 말한 대로 된다고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 간절한 바램이 그렇게 말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다. 아들이 맞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고, 아니면 '에구, 아니네!'라고말하면 그만 아닌가. 그렇게 소리치며 고대랑은 부릅뜬 눈으로 아이의 '그것'을 확인하려했다. 확인하려 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없었다. 당연한 것이그녀의 손에는 아아도 없었던 것이다. 방금 분명히 있었던 아이가, 방금 분명히 그녀의 손에서 버등거리던 아이가 한 순잔, 정말 눈 한번깜짝하는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들이래, 아들! 경사났네!" 밖에서는 마부와 진 노육이 소리치고 있었다. 고대랑의 소망성 발언을 그대로 믿고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랑은 눈을 부릅뜨고 마차 안을 살폈지만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수레의 창문이 열려 휘장이 펄럭이고 있을 뿐이었다. "누……, 누가……?" 그녀는 천천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잠시 후에 진삼산이 가마꾼을 호령해 왔고, 손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 아들을 찾기 위해 등가산이 뒤집어졌다. [제이장] 소삼중은 비구니와 싸우고 광마는 등가산을 뒤지다. "그만 돌아가시오. 여기는 시주가 더럽힐 땅이 아니오!" 늙은 비구니는 완강했다. 마치 그가 밀고 들어가겠다고 끝내 고집을 부린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을 것처럼 결연한 태도로 산문을 막고 선 것이다. 그의 발자국이 닿는 것만으로도 불도의 청정도량에 오물이 튀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러나 비구니의 앞에 서 있는 사십 줄의 사나이, 허름한 옷에 깡마른 채구, 검은 피부를 지녀 금방 논에서 일하다 온 농부처럼 보이는사내는 더욱 완강했다. 아니, 더욱더 절박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내, 매타자 소삼중으로서는 이토록 강렬하게 바라고 원하는 일은 그리 혼치 않았다. 그러므로 어느것 하나도 놓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냥 소원이라기엔 너무나 크고 강렬해서그를 휘어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스님께서 뭐라 하시든 저는 그녀를 만나야겠습니다." 늙은 비구니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그 눈초리로 불자답지 않게 사나운 기운이 스며나왔다. "사창가의 꽃을 부르듯이 부르지 말라! 정인은 불제자! 속인이 함부로 이러니저러니 부를 몸이 아니거늘!" 소삼중이 찾는 사람은 정인이었다. 등가산 보광암의 젊은비구니 정인. 그리고 그녀의 뱃속에 있는, 어쩌면 지금쯤 세상 빛을보았을지도 모르는 그의 아이였다. "스님깨는 그녀가 불제자로 보일지 모르나 제게는 아이의 어미, 제아내일 뿐입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일 년여 전이었다. 세상에는 치마 두른 사람만 보면 욕정을 일으키는 무리도 있는지라,호젓한 산길얘서 만나니 비구니라 해서 그냥 두지 않았다. 다섯 명의 그러한 무리가 그녀를 겁간하려 할 때 흔한 이야기처럼소삼중이 지나갔고, 다행히 그얘게는 다섯 사내를 쫓아 버릴 정도의힘이 있었다. 비구니가 감사를 표하고, 소삼중은 별일 아니라고 손을 젓고, 그렇게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두 사람이 그냥 혜어졌으면 오늘의 일은 없었을 젓이다. 하지만 비구니는 멧돼지 같은 다섯 사내에게 밀쳐져 상처를 입었고, 소삼중에게는 그것을 고칠 능력이 있었다.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 일상적인 일처럼 된 그에게 있어서 상처를 치료한다는 것은 웃을 꿰매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옷을 꿰매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는 법.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도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에 밤이 왔고, 승냥이 울음 소리를 들어가며 산길을 재촉할 만큼 바쁜 일은 두 사람 모두에게 없었다. 처음에는 모닥불 지펴진 동굴 안에서 서로를 외면하고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둘 다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두 사람은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삼중은 그때까지 여자를 사귀꺼 본 적이 없었다. 사실은 마음을터놓은 적도, 그럴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 그 비구니, 법호를 정인이라 한 그 비구니는 이상하게 그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나이 이미 마흔을 지난 소삼중과 이제 겨우 스물을 지났을 듯했던 정인. 얼핏 보면 부녀지간이라 할수도 있었을 나이 차이였지만 그날 동굴 안에서 그녀는 어머니 같았고, 그는 오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지치고 상처 입은 마음을 털어놓는 아들 같았다. 세상 모든 중생들을 구제해야 할 사명을 짊어진 수도승이라 그랬을것이다. 정인은 어머니처럼, 연인처럼 소삼중의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고, 소삼중에게는 그렇게 위로받아야 할 상처가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자비심이 많은 수도승이라 해도, 소삼중이 아무리 온 세상 고통을 홀로 지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의 상처를위로해 주던 손길이 피곤한 육신까지 어루만져 주게 되는 데에는 다른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거칠고, 깡마르고, 거무튀튀한 살갗에 상처로 도배를 한사내였지만소삼중에게는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비구니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지고, 억눌려 있던 모성애를 끌어 낼 정도의 매력이, 그것도 비구니가 모든 것을 잊고 두 달 동안이나 산속 동굴을 신혼방으로 삼아 살 정도의 매력이. 두 달이었다. 그녀가 잊고 있던 불자로서의 의무를 다시 기억해 내기까지 걸린 시간이. 단 두 달이었다. 소삼중이 평생 가장 행복했던, 어쩌면 유일하게 행복했던 순간은. 그녀는 자의에 의해 더럽혀진 육신을 안고 다시 절로 돌아갔다. 어쩌면 그녀는 고통스럽긴 했지만 소삼중을 잊을 수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얘게는 의지할 마음의 기둥이 있었고, 넓은 그늘도 있었다. 바로 부처요, 절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기 이전까지 행복이라는 것은 느쪄 본 적이 없던소삼중은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년이 소녀의 집 주변을 들듯이 그녀가들어간 절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모든 것은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제 소삼중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아이가 있고,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있는 것이다. 그에게도 가족이 생긴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혼자일 메는 동굴도 잠자리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가족이 있으면 집없이는 살 수가 없을 것이다. 혼자일 때는 굶어도 좋았고, 거친 밥도좋았지만 가족이 있으면 그렇게 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혼자일 때는돈이야 있어도 좋았고 없어도 좋았지만 가족이 있으면 일정하게 버는돈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가족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으면 그녀도 그에게로 돌아오고 말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이루어 내는 방법은 많을 수도 있겠지만 소삼중이 알고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매를 파는 것이었다. 거리에서사람들에게 맞아 주고 돈을 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원래 그 일이 직업이었기 때문에 별명도매타자였지 않은가. 물론 전에는 다른 목적으로 그런 일을 했지만 이젠 돈을 벌기 위해 매를 팔아야 했다. 여러 달의 고생 끝에 그는 좀더 효과적으로 매를 파는 방법을 생각해 내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준비는 금세 갖추어졌다. 그래서 지금그가 여기 있는 것이었다. "이젠 그녀를 데려가겠습니다. 제 아이의 어머니를!" 소삼중은 판결을 내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단지 불행한 것은 그의 앞에 서 있는 늙은 비구니, 보광암의 주지인혜심은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불행한 것은 지금 보광암에는 소삼중이 찾는 그녀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제, 그러니까 해산일이 임박한 시점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혜심으로서는 소삼중의 말을 따르고 싶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따를수도 없었다. 혜심은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 더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돌아가시오!" 혜심이 문에 들어서고, 여태 문 뒤에서 구경하던 중년의 비구니 둘이 두터운 나무문을 닫았다. 소삼중의 눈샙이 꿈틀거렸다. 그는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 막 닫히려 하는 문 사이로 팔을 밀어 넣었다. 쾅--! 중년비구니들은 보통 힘을 지닌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문은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양쪽에서 밀려오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소삼중의 팔을 찍어 버렸다. 팔이 잘려 나가지는 않는다 해도 뼈가 으스러지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설마 그렇게 무모하게 팔을 밀어 넣을 줄 몰랐던 중년비구니들이 오히려 놀라 문을 급히 당겨 열었다. 혜심이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소삼중은 문틈 사이로 팔을 내민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팔은 문제가없었고, 그 얼굴에는 조금의 고통스러운 빛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혜심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무공을 익혔군!" 그렇다면 더 봐줄 것도 없었다. 무공을 모르고 있다면 모르지만 무공을 알고 있는 자가 와서 그러는 것은 행패를 부리는 것이라 봐야 했다. 행패는 행패답게 대응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팔을 휘둘러 소매를 걷고, 담장에 기대어 두었던 선장을 잡았다. 전신에서 사나운 기운이 새어나왔다. 이제 그녀는 늙어 꼬부라진 비구니가 아니라 무림고수의 풍모를 보이고 있었다. 보광암은 원래 사천 아미파 산하의 무수한 사찰 중하나, 그래서 그 주지인 혜심도 아미파의 방계제자였다. 일류고수는 아니라 해도 상당한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무공이 소삼중에게 발휘되려 하고 있었다. 혜심은 '쾅' 소리가 나도록 선장으로 땅을 찍으며 말했다. 최후 경고였다. "돌아가시오, 시주. 지금이 마지막 기회요." "아이의 어머니를 내놓으시오." 소삼중은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팔을 앞으로 내민 그대로였다. 이제는 혜심이 아무리 자비로운 성격이라 해도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혜심은 그렇게 자비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감히 어디 와서 행패를……!" 말보다 선장이 빨랐다. 선장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반원을 그리고는소삼중의 왼쪽 어깨를 후려치며 나머지 반원을 그렸다. 어떤 초식을사용했다기보다는 그냥 후려친 것이지만 그 손속에는 인정 사정이 없었다. 보광암에 속한 비구니 열둘 중에도 정인은 그녀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제자였다고 했다. 그런 정인이 그와 정분이 나서 애를가져 버렸으니 혜심으로서는 화가 날 만도 했던 것이다. 승려의 신분만 아니었으면 지금 그를 때려 죽여 버리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승려의 신분이라 피할 수 있도록 위협하는 것이었다. 무공을 아는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소삼중은 묵직하게 휘둘러지는 선장을 피하려는 기색도 없이 그대로 어깨로 받았다. 쾅! 중년의 비구니들은 차마 볼 수 없는지 눈을 감고, 그것도 모자라 고개를 돌려 버렸다. 분명 소삼중은 선장의 무지막지한 힘에 날려가거나, 아니면 적어도 어깨라도 으스러지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소삼중은 그 자리에 그대로 꼿꼿이 서 있었다. 아까 문틈에팔이 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통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혜심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제자를 망친 악한에 대한 분노에이제는 손상된 자존심이 겹쳐졌다. "외공 계열의 무공을 익힌 모양인데……!" 혜심은 다시 선장을 휘둘렀다. 아까와 같이 그냥 휘두른 것이 아니라 아미비전 법륜연환장 중의 도타금종초식으로 후려쳐 간 것이었다. 법륜연환장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장법은 한번공격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도타긍종에 이어 문범창천에 노승고종까지, 종을 두들기듯 세 초식이 연달아 펼쳐져 소삼중을 두들기고서야 겨우 한번의 공격이 끝났다. 그냥 몽등이쩜질과 내공이 뒷받침된 장법은 그 차원이 다르다. 근육과 피부를 조금 단련시진 것으로는 바위도 부숴 버리는 장법을 감당할수가 없는 것이파. 혜심은 소삼중이 철포삼와 같은 외문기공을 익혔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법륜연환의 새 초식은 당해 낼 수 없으리라고생각했다. 그러나 소삼중은 여전히 그 자리였다. 소삼중의 검은 얼굴은 여전히무표정하기만 해서 어떤 타격을 입었는지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말했다. "아이의 어머니를 내놓으시오!" 혜심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선장에 전해진 반탄력이 손을 아프게자극하고 있었다. 내가기공을 익힌 것은 분명 아니었다. 만약 그가 내가기공을 익혔다면, 그래서 그녀의 선장을 튕겨 낸 것이라면 그녀가 느끼는 반탄력은 그와는 다른 종류여야 했다.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반탄력은, 그녀의 손바닥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게 만들고 있는 그 느낌은 맨손으로 철판을 쳤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소삼중이 익힌 것이 분명 외문기공중의 하나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철포삼이니 금종조,금강벽처럼 이름만 그럴듯할 뿐인 강호의 삼류무사 나부랭이들이나 익히는 그런 잡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삼중도 결국그런 부류의 하나일 것이다. 골목에서 어깨나 거들먹거리는 그런 하오문의 잡배 따위가그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제자를 파계시키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것이다. 혜심은 참기 힘든 그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몇 번이고 불호를 외고는 돌아섰다. "더 싸워 봤자 얼굴만 깎일 일……, 말해 주거라!"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혜심은 더 싸울 수도 없었다. 선장을 꼭 움켜, 쥔 그녀의 손바닥에는 붉은 선혈이 한 방울씩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찢겨진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였다. 중년비구니 하나가 소삼중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소삼중을가증스럽게 보는 빛이 완연했다. "정인은 오늘 새벽에 어디론가 떠났소." 다른 비구니가 마저 말해 주었다. "파계를 한 죄, 죽음으로 용서받겠다면서……!" 소삼중은 보광암이 바라다보이는 거리를 벗어나자마자 길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깨애서 시작된 통증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더 이상걷기가 힘들었다. 비구니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적지 않은 통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 한번도 재대로 된 내공수련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럴 기회가없기도 했지만, 여태 그가 배운 무공은 그다지 내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었기 떼문이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 혹은 내공을 쌓았다 해도 조예가 대단치 않은 자들과 싸울 때에는 별 타격을 받지 않지만 내가의 고수를 만나면 폐부를 흔들어 놓는 타격을 입곤 하는 것이었다. 사실 소삼중은 모르고 있었지만 혜심사태라고 하면 구대문파의 하나로 당당히 헹세하는 아미과애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그런 고수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넘기고서도 근육이 조금 쑤실 뿐 다친곳이 없다고 하면 강호에서는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소삼중은 외공수련만으로 오를 수 있는 거의 최고의 경지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소삼중 개인으로서는 불만족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강호 일류고수 정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소삼중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 '책'이 가르쳐 주는 것은 이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무엇' 이었다.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뭔가 내공을 익혀야 그 다음의 단계에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요즈음 느끼고 있었다. 정인을 찾은 뒤에!'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라는 것이 그렇게쉽게 목숨을 내버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녀는 어딘가 남들의 눈인 미치지 않는 곳에서 흘로 아이를 낳고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태어나자마자 죄악의 씨앗 정도로 취급되도록 놔두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는 등가산의 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크지는 않지만 그리 작지도 않은 산이었다. 막상 저 속에 있을 한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소삼중은 그녀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그녀를 찾지 못하면 죽은 시체라도 찾고야 말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등가산이 얼마나 크든, 한 삽씩 퍼서 옆으로 옮기라 해도 할 수 있을 인물이 그였던 것이다. 필요하다면 등가산을 한 삽씩 퍼서 옮길 수도 있는 인물이 여기에도있었다. 진삼산이었다. 어떤 사람이 강하다고 할 때, 꼭 그가 무공이 뛰어나야만 그런 말을들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강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세력이 한 지방의 패주라고 불린다고 해서 꼭 휘하 수하등의 수가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가장이 그런경우였다. 그의 장원에는 가족들을 제외하오는 방계의 친척들과 하인, 하녀들을 합쳐 오십을 넣지 않았다. 그래도 진가장이 광동제일의 가문이며, 패주인 것은 분명힌다. 그가한번 떨치고 일어서면 광동지방 팔십삼 개 가문이 함께 일어나는데 어찌 패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것인가. 지금도 굳이 연락을 보내지 않았지만, 이미 학성 사가장, 삼수의 동가장, 사회의 운양문 등인근의 몇 개 가문이 그 짧은 시간에 모여들어 등가산을 뒤지고 있는것이다. 이제 곧 정식으로 인원 요청이 가면 수백 수천의 무리들이 등가산을이 잡듯이 뒤지게 될 것이었다. 물론 진삼산은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겼지만, 그럴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그럴 수 없어 못 하는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쩠든 그는 지금 백여 명의 인원으로도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 내었다. 우선, 마차 주변과 안에 다른 사람의 흔적이 없으니 범인은 경공의고수일 것이다. 아이를 데려간 범인이 혹시 산짐승이나 날짐승이 아닐까 하는 의혹도 있었지만 우선은 그럴 이유가 없어서, 다음으로는 아무리 혼미한 상태라 해도 고대랑의 이목을 속이고 아이를 빼앗아 갈 만큼 능력이 있을 뿐더러 간도 부은 짐승은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배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범인의 윤곽이 좀더 드러났는데, 그것은 범인은 어떤식으로든 아이를 훔쳐 감으로써 이루려 하는 목적을 가진 자라는 것,그리고 광마 진삼산과 광동 팔십삼 개 가문을 건드릴 만큼 간이 부은자라는 것이었다. '경공의 고수면서 간이 부은 자는 혹시 있어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니 곧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고대랑을 위로했다가 진삼산이 많은 사람 앞에서 맞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광동 지방에 전해 오는 전설이 되었다는 것은 우스개라고 치더라도, 그날 거기 수색에 참가한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열심히 아이를 찾아 다녔다는것은 그날 잡힌 짐승들의 수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구석구석 혜집고 다니다 보면 짐승들이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튀어나오는 짐승들을 안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또 있었다. 단지 그것이 그들이 기대하던 것이 아닐 뿐이었다. 그들은 등가산을 뒤지기 시작한 지 두 시진 만에 처음으로 신원이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던 것이다. 걷지도 못하는 아이가 없어졌으니 당연히 걸을 수 있는 누군가가 데려간 것일 터이다. 아이를 훔쳐 간 자는 이미 등가산을 빠져 나갔을 수도 있지만 시간으로 보아 등가산 안에 있을 확률이 높고, 그자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인근에서 광마 진삼산과 진가장이 차지하는 비중으로보아 모르는 사람, 즉 신원이 확실치 않은 사람의 짓일 가능성이 더욱높았다. 그래서 사내, 소삼중은 그 자신이 사람을 찾는 입장이면서도 진가장의 수색대에게 유괴 용의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진삼산은 잔뜩 인상을 쓰고 소삼중을 노려보았다. "당신 누구요?" 질문이 간단하다고 대답도 간단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대개의 경우질문이 간단하면 대답은 길고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소삼중은 진삼산의 간단한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소삼중이오." 진삼산은 우선 소삼중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이 사내는그가 모르는 사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고, 둘쩨로는 소삼중도 그를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서는 이런 식으로 무뚝뚝하게 대답할 수없을 테니까. 의심이 더 가서라기보다는 소삼중의 무뚝뚝한 태도에 기분이 상해서라는 이유로 진삼산의 질문도 더욱 퉁명스러워졌다. "여기서 뭐 하나?" "사람을 찾소." "누구?" "내 아내." "아내를 왜 산에서 찾아?"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소?" 진삼산은 일순 말문이 막혀 머뭇거렸다. 사실 남이야 산에서 뭘 찾든 진삼산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그 자신 역시 산에서 아이를 찾는 중이지 않는가. 그의 앞에 선 초라한 사내, 소삼중이 '남이야 아내를 찾건 말건' 이라고 들릴 수 있는 말을 했다고 해서 화를 낼 입장이 아닌 것이다. 그가 묻는 태도가 질문이라기보다는 심문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대답이 꼬여서 나오는 것 정도는 참아야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참을 수 있었더라면 진삼산은 광마라고 불리지 않았으리라. 진삼산은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려 불쾌해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역력히 표시해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나? 애를 찾는 중이지." 광마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여기서 더 말을 잇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나을 말은 주먹으로 대신 표현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를 모른다 해도 이 만인공통의 표정이 말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을것이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라도 이쯤에서 꼬리를 내리고 고분고분해져야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 사내는 정말 진삼산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눈치도없는 듯했다. 소삼중은 아무표정 변화 없이 자신이 당한 그대로 진삼산에게 질문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애를 왜 산애서 찾소?" 진삼산의 안면 근육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대답은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 산에서, 내 애를 데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지!" 그 정도로도 대답이, 아니 '나, 애 잃어버린 아버지야. 성질 건드리면 죽어'라는 위협의 뜻이 재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진삼산은다시 한마디를 추가했다. "내 허락 없이! 알겠나? 내 허락 없이 이 진삼산의 아이를 데려갔단말이야!" 소삼중은 정말 눈치가 없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 내뱉고는 돌아서는 것이다. "안됐군! 하나 나도 찾을 사람이 있어 도와 줄 수 없겠소." "어어……!" 진삼산은 어이가 없어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도와 달라고나 했단 말인가. 게다가 용의자 주제에동정까지 하며 가버리려 하다니! 진삼산의 머리 꼭대기까지 열기가 치밀어 을랐다. 공력을 운기하지도 않았는데 주먹얘 힘이 쏠렸다. "거기 서!" 진삼산이 한소리 외치며 달려들려고 할 때, 수색대 중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그리고 그 말이 진삼산과 소삼중의 동작을 동시에 묶어놓았다.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산이 있으면 계곡이 있는 법이니 등가산에도 계곡이 있었다. 수색대가 진삼산을 데려간 곳은 등가산에 있는 그 수많은 계곡 중 하나를 내려다보는 낮은 벼랑 위였다. 벼랑 위에는 늙어 고부라진 소나무가 있고, 소나무를 둘러싸고 작은공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그리 깊지 않은 계곡에는 낙엽 썩은독기인지, 아니면 습기인지 뿌연 안개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안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도 있는 일이지만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수색대가 찾은 이상한 혼적이라는 것은소나무와 그 아래의 공지에 남은 '무엇'이었다. 처음에 수색대가 주목한 것은 소나무 가지에 걸린 밧줄이었다. 벼랑을 향해 뻗은 가지에 걸린 밧줄, 그것은 잿빛 천을 꼬아 만든 것이었고 사람 하나가 걸리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튼튼했다. 그 다음으로 주목받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무덤이었다. 사실 수색대가 찾고자 한 것은 나뭇가지에 밧줄이 걸려 있을 경우,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어떤 것, 사실은 시체였다. 그러나 그 공지에는 인근의 돌을 쌓아 올려 대충 만들어진 돌무덤이 있을 뿐이었다. 진삼산은 난폭하긴 하지만 둔하거나 미련한 사람은 아니다. 이 몇개 안 되는 잔해로도 여기에서 있었던 일을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우선 소나무 가지에 걸린 밧줄과 그 바로 아래편에 쌓였다가 무너진돌더미는 극히 명백한 하나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누군가가 여기에 목을 매단 것이다. 아마도 저 돌무덤의 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하나, 혹은 둘은? 소나무에 목을 매단 사람말고, 여기 있던 다른 사람은 무얼 했을까? 다른 사람이 적어도 하나 이상 여기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죽은사람이 자기 무덤을 파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 돌무덤을 만들어 준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삼산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의 그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누군가가 목을 매달아 죽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발견해서 묻어 주고 갔다. 가장 간단하고 상식적인 그림이지만 길도 아닌 이런 외진 벼랑 위를지나가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색하다. 누군가가 목을 매달아 죽었다. 그, 혹은 그녀는 죽어 가면서도 무덤이 없는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가깝게 지내던 사람을 데려와서 자기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 사람은 이 자살자의 소원을들어주었다. 그럴듯하긴 하지만 역시 상식에는 맞지 않았다. 자살하려는 사람이있다면 묻어 주겠노라고 약속하는 것보다 죽지 말도록 설득하는 것이우선 아닐까? 혹시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무덤을 만들어 준다는 소원을흔쾌혀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진삼산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그림은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끌고 와목을 매달게 했다는 것이었다. '자살의 모습을 빌린 살해'가 이 경우그럴듯하지 않을까 하는 것. 돌무더기애 떨어진 피가 그 추측을 더욱 그럴듯하게 했다. 목을 매달아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그에계 확인의 한칼을 선물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목을 매달아 죽은 사람이 피를 흘릴 이유란 없는 것이다. "승복이군요!" 가지얘 묶여진 천을 조사하던 사가장의 장주 번룡수사 사방득이 재미있다는 빛으로 말했다. 잿빛의 천, 바로 중들이 입는 가사장삼의 한 부분이었다. 목을 매딜아 죽은 사람이 중이란 것일까. 아니면 죽은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중이란 것인가,"이리 내놔!" 언제 따라온 것일까. 아까 떠난 줄 알았던 소삼중이 사방득에게 덤벼들었다. 사방득이 주춤 물러섰다. 사가장은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유서 깊은 무림세가. 그런 무림세가의 장주이니 사방득도 당연히 무림인이다. 오랜 수련을 거친 무림고수가 손애 든 물건을 빼앗긴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사방득은 이런 경우 흔히 하는 방식대로 뒤로 움직여 소삼중의 손을피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펴 소삼중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그가 달리 소삼중에게 유감이 있어서 살수를 펼치는 것은 아니었다. '공격과 방어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른바 공방일체의 원칙에 입각한 무림인으로서의 본능적인 대응이었을 뿐이었다. 다행히 사방득은 물건을 뻬앗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지 않게 놀라야 했다. 소삼중의 동작은 마치 일초반식의 무공도 모르는사람처럼 마구잡이였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었던가?' 사방득은 그제서야 손을 과하게 썼다고 후회했지만 그의 손날은 이미 소삼중의 목덜미를 강타하고 있었다. 팍--! 사방득은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그의 수초에 맞았으면 황소라도목줄기가 끊겨 피를 뿜어 냈어야 했을 텐데 소삼중은 아무렇지도 않게달려들어 그 마구잡이 솜씨로 옷자락을 낚아채 버리는 것이다. 사방득은 이 의외의 일에 놀라고, 다음으로는 손이 철벽이라도 후려친 것처럼 얼얼하게 아파 와 멍하니 섰다가 두 눈 가득 분노의 빛을띠며 소삼중을 노려보았다. "이런 무례한……!" 사가장의 독문무공은 수도가 아니라 번룡기라 불리는 깃발이었다. 깃대의 길이도 조정할 수 있어 평소에는 세 자 크기로 줄여등에 메고 다녔던 것인데, 지금 쓰지 않으면 언제 쓸 것인가. 사방득은 깃발을 뽑으려 손을 등뒤로 돌리다가 멈춰 버렸다. 옷자락을 들고 선 소삼중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을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소삼중의 모습은 뭔가 사정이 있으리라고 짐작하게 했다. '잠시 창피당한 것으로 해두고 말지.' 사방득은 쓰게 웃고는 깃발에서 손을 떼버렸다. 진삼산은 소삼중과 사방득이 벌인 일장의 다툼을 눈살을 찌푸리고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뭔가 내력이 있을 듯한 이상한 사내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빨리 이곳에 남은 흔적을 조사하고, 만약 아이가 사라진 것과 관계가 없으면 관심을 끊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진삼산은 돌무덤을 가리키며 수색대의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파라!" 진삼산은 그런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말과는 상관없이 이미 소삼중이 돌무덤을 파혜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진삼산은 다시 한번 인상을 썼지만 굳이 말릴 이유도 없어 가만두기로 했다. 혹시 말리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역시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돌무덤보다 훨씬 더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이때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지의 남쪽 끝, 등가산 전체에서 보자면 후미진 북쪽 구석에 위치한 벼랑 위지만 그래도 그 벼랑애서 보자면 양지 쪽이라 할 만한 곳에또 다른 작은 돌무덤이 있고, 그 안에서 두 개의 태반이 발견되었다. 태반! 어머니의 자궁 속애서 아끼를 감싸고 있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탯줄에 연결되어 같이 나오는 것. 풍습에 따르면 이 태반은 천지인의 기를 아이에개 전달하는 매개체로 지역에 따라서는 또 하나의생명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광동지방에서도, 그래서 아이가 테어나고 텟줄이 끊겨 태반이 분리되면 사람처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는 법이었다. 진삼산도 아이를일곱이나 둔 아버지로 이런 일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은 아니었다. 얼른 이곳의 일을 매듭 짓고 떠나려 했던 진삼산의 마음이 이 태반두 개의 발견으로 급반전을 이루었다. 고대랑이 아이의 태반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물어 보지 않았던 것이기억났다. 실제로는 물어 볼 정신도 없었을 뿐 아니라 관심을 두지도않던 것이었지만, 그리고 태반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아이--그게 누구의 아이이든-- 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흔적이 나타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진삼산은 소삼중이 파고 있던 돌무덤에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소삼중이 한 젊은 비구니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에 난 검은 자국과 입술을 비집고 나온 혓바닥이 그 비구니가 바로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았던 사람이라는 점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더불어서"태반 하나는 저 비구니의 몸에서 나온 것이겠군요." 진삼산은 사방득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비구니는 이제 막해산한 것처럼 하혈을 해서 잿빛 가사의 치맛자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방득이 계속 말했다. "가지 아래 돌무더기에 묻은 핏자국도 저 비구니의 것이라면 해명이되겠지요. 문제는 왜 태반이 두 개인가. 태반 하나에 아이 하나라고한다면 아이 둘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진삼산은 사방득의 말을 끊고 대신 말했다. "누가 데려갔느냐겠지! 그걸 이제부터 우리가 조사해야 할 일일세!" 무림세가의 주인이라 해도 그리 유명하지도, 그리 특이하지도 않은인물이라 평소 사방득을 대단찮게 여기던 진삼산이었지만 방금 한 일련의 추리는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꽤 이치에 맞아서 수긍할 수밖에없었다. 오늘 사방득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된 느낌을 받는 진삼산이었다. 사방득이 다시 소삼중에게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려면 먼저 저 비구니의 신원을 알아야……!" 더 말할 필요도 얼는 일일 것이었다. 진삼산은 눈빛을 달리하며 소삼중에게 다가갔다. 소삼중은 아직 비구니의 시신을 불들고 오열하고 있을 뿐이었다. 간간이 그와 입에서 '정인, 정인'하는 소리가 나왔는데 아마도 비구니의 이름인 듯했다. 사십대 사내가 방금 해산한 흔적이 있는, 그리고 지금은 단지 목을매달아 죽은 시체로 화한 젊은 비구니를 안고 울고 있다는 것은 흔히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진삼산은 그 모습에서 많은 사연들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다. 그때 마침 진가장에서 달려온 하인이 거기 도착했던 것이다. 아이는 집얘 와 있다는 전갈이었다. 수색은 중지되고, 수색대는 철수했다. 진삼산은 풀리지 않은 의문들을 벼랑 위 공지에 그냥 남겨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의문들은 소삼중이라는 그 사내가 해결할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개운찮은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말을 달리던 진삼산이문득 사방득에개 물었다. "사 장주, 방금 그 골짜기에도 이름이 있나?" 사방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묘한 미소를 흘렸다. "진 장주님도 들어 본 곳일 겁니다. 장보곡이라고……!" 진삼산이 해연히 놀라 되물었다. "거기가……!"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가 장보곡이었군! 거기가……!" [제삼장] 궁서생은 영약을 선물하고 불수화타는 아이를 고치다. 장보곡! 전설에 의하면 삼백여 년 전에 대력패왕 철우라는기인이 있어 장생불사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 젊었을 땐 무술을 배워 그 목표를 달하려 하였고, 늙어지자 영물과 선약을 섭취함으로써 뜻을 이루려 하였다. 인간 중에 그러한 뜻을 가진 자가 적지 않았고, 전설에는 그 뜻을이룬 자 역시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 삼천갑자 동방삭이 그 하나요, 도가팔선 중의 여동빈이 또 다른하나였다. 그러나 철우 역시 그러한 뜻을 이루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그가 영물을 모으고 약을 달이던 곳이 이 장보곡이라는 전설만이현세에 전해질 뿐이었다. "그래서요?" 진삼산은 불만애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전갈을 받고 급히 집에 돌아오니 과연 아이는 집에 있었다. 중자릉, 아버지의 친구인 궁서생 중자릉이 데려온 것이다. 아이를 고대랑의 품에서 데려간 것도 그였던것이다. '경공의 달인에 간이 부은 사람'이라는 장의에 중자룽처럼 맞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진삼산은 그때에 와서야 생각해 내었다. 이해 못 할 행동을 했으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중자릉은 해명을 하고 있었다. 중자릉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중간에 끊은 진삼산이 못마땅한 듯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더니 다시 얼굴을 활짝 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태도에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뉘우침의 빛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 처음 형산파의 원로, 뇌공 원굉도에게서 장보곡과 대력패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중자릉은 웃었다. 그것도 탁자 위의 술잔이 덜컹거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대력패왕 철우라는 자가 한 일이라는 것이 마치 보물을 숨겨 두고 '여기 보물 없다'라고 써놓은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 글을 보고서도보물을 파볼 생각을 않을 자가 있을까? 보물은 누군가가 벌써 가져 갔을 것이다. 뇌공 원굉도는 진자룡처럼 중자릉의 오랜 친구 중 하나로 강호에서는 형산재일고수, 또는 천하제일장으로 불리며, 진자룡과 함께 무림십대고수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자릉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자네 정말로 거기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라고 물었다. 중자룽은 그렇게 묻는 그가 오히려 이상해 '보물을 숨기지 않았다면왜 여기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써놓았겠나'라고 반문했다. 원굉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물이 숨겨진 골짜기'라고쓰여 있는 곳에 정말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에 처음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후일에도 다시없을 것이라고 했다. 중자릉은 그 말을 듣고는 약간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않고 형산파를 나와 문제의 그 '장보곡'으로 향했다. 그것이 달포 전의일이었다. 그리고 어제 진가장에서 하루를 묵고 오늘 처음 장보곡을보았을 때 그는 왜 사람들이 거기 보물이 숨겨져 있지 않을 것이라고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장보곡의 입구에는 가로세로 일장은 넘어 보이는 큰 글씨로 '장보곡'이라고 암벽에 새겨져있는 것이었다. 마치 누가 보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라도 한 듯이. 이러니 누가 여기 정말로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을 것인가! 장난삼아 들어가 보려 해도 독기 흐르는 안개가 가득 차 있으니 누가이렇게 가능성이 희박한 소문에 목숨을 걸었을 것인가! 그러나 그 글씨가 중자릉에게는 보물이 있다고, 적어도 예전에는 분명히 있었다고 확신하게 하는 증거가 되었다. 글씨는 비록 어린아이가쓴 것처럼 거칠고 조악했지만 놀랍게도 끌이나 정으로 새긴 것이 아니라 주먹으로 새긴 것이었다. 게다가 전설대로라면 적어도 삼백여 년전에 새긴 것일 텐데 아직도 윤곽이 또렷한 것으로 보아 처음 새겼을때의 깊이를 짐작하게 했다. 중자릉은 전설 속에 나오는 그 대력패왕이 젊었을 때는 무술을 배워장생불사하려 했다는 구절을 기억했다. 아마도 그는 무공에도 절정의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큰 글씨를 암벽에 새길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곽이 잡혔다. '무공은 강하지만 머리는 둔한 기인' 이라는 대력패왕 철우의 모습이그려졌던 것이다. 중자릉은 이제 확신을 갖고 장보곡에 들어갔다. "그래서 찾으셨습니까?" 진삼산이 다시 물었다. 그것이 궁금해서 그런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중자릉의 이야기가 한없이 길기만 하지 정작 궁금해 하는 문제,즉 '왜 아이를 훔쳐 갔는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아 답답해서 물은 것이었다. 그러나 중자릉은 이번에는 들은 척도 않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제부터는 자기 자랑을 할 시점이었던 것이다. 무림에 궁서생 중자릉은 못 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재 다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재 다능할 뿐 아니라 특히 어떤 면에서는 강호에 따를 사람이 없는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존재이기도 했다. 별호인 '궁서생'에서도 보이듯이 그는 박학 다식하기로중원에 이름난 사람이었다. 가난해도 서생은 서생 아닌가 말이다. 사실 과두문이니 금석문이니 말은 많아도 남들이글자라 하니 글자인가 보다 하는 것이지, 무림인 중에 그걸 보고 뜻을헤아려 짐작할 자가 누가 있을 것인가? 그나마 유생가에서 태어나 한때 먹물깨나 묻혀 보았던 궁서생 중자릉밖에는 없었다. 계다가 그는 무림제일의 쾌수이자 경공의 고수이기도했다. 유가의 자존심 떼문에 도둑질을 안 해서 그렇지 마음만먹었다면 지금 중원제일의 도둑으로 알려진 쾌여풍과 어깨를나란히 할수도 있는, 실력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처럼 다재 다능한 사람이 장보곡에는 분명히 보물이 있다는 것을알고 들어갔으니 빈손으로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빈손으로 나왔다. 보물을 찾지 못했거나, 거기 보물이없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간단히 보물을 찾아 내었다. 단지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은 형산파의 원굉도를 불러 장보곡에 보물이 있었음을 보여 줌으로써 자신의 말이 옳았음을 인정받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그가 직접 들고 가서 보여 주며 '장보곡에서 발견한 것이네, 이제내 말이 을았음을 알았지'라고 말하면 원굉도가 그가 거짓말할 사람은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과연 장보곡에 보물이 있었군 자네가 옳았네'라고 말이야 하겠지만 직접 데리고 와서 '저길 보게. 저게 바로대력패왕이 숨긴 보물일세'라고 말하는 것보다 통쾌하진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옛 성인도 백 번 듣는 것보단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 생각대로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보물을 얻은자에개 시련을 주개 마련인지라 중자릉도 곤란을 겪게 되었다. 하필고대랑이 해산하는 마차를 길에서 만난 것이다. 그냥 고대랑이 아이를 쑥 뽑아 내고, '아들이네, 경사났네'라고 하든지. 혹은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또 딸이네'라든지 하는 식으로만일이 진행되었더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좋았을 것이다. 절손의위기에 처한 친우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줌과 동시에 자신의 탁월한식견과 사리 판단을 보여 줄 기회도 얻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필 난산이며, 또 하필 아이를 뽑아 놓고는 혼절할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중자릉은 아이를 낳아 본 적은 없지만 갓 태어난 아이를 한참이 지나도록 보살펴 주지 않으면 죽기 쉬을 뿐 아니라, 혹시 산다 해도 나중에 반드시 탈이 난다는 것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오랜 친우의 유일한 종손을 그런 꼴로 만들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의리일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이 생기게 되었다. 고대랑이 혼절을 하고, 진삼산이 눈이 뒤집혀 등가산을 뒤집어엎는동안, 그리고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던 진자룡마저 지팡이 잡고 등가산으로 달려오던 그 비상시에 궁서생 중자릉은 아이를 안고 장보곡으로 내달렸던 것이다. 이젠 진삼산은 더 이상 중자릉의 말을 끊지 않았다. 중자릉의 행동에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았으니 더 이상 원망할 수도 없었을 뿐아니라 그 뒤가 심히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중자릉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데려갈 때에 자신이 데려 간다고 한마디만 하고 갔으면 이후의 소란은 없었을 것 아닌가. 중자릉은 한창 이야기의 절정 부분을 말하고 있었다. 서생이라 그런지 말을 잘했다. 찻집의 이야기꾼이 삼국지나 수호전을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연기를 해가며 말하는 그였던 것이다. 그때, 장보곡은 검은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골짜기 속에 우글거리는 독물들이 뿜어 내는 독기가 만들어 낸 안개였다. 이런 안개 속으로 아이를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리 다재 다능한 중자릉이라 해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간단한 해결책을 생각해 내었다. "아이는 여기 두고 나만 갔다 오면 되지!" 이렇게 험하고 외진 곳으로 일부러 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들짐승이라도 은다면……. 소나무 가지에 걸어 두면 큰 위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중자릉은 입고 온 장포에 아이를 싸서 늙은 소나무 가지에 걸었다. 그려고 검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목적한 물건은 단 하나였고, 간단히 찾을수 있었다. 중자릉은어렵지 않게 골짜기얘 내려가서, 역시 어렵지 않게 '그것', 붉은 비늘에 검은 뿔이 있는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 이름붙인다면 독각화린망쯤 되는 괴수를 잡아 들었다. 자세한 효능은 잘 모르지만뱀에 뿔이 달렸으너 보통 뱀은 분명 아닐 것이다. 게다가 저 타오르는별처럼 붉은 비늘을 보라! 이것은 정녕코 용미 되다 만 영물이었다. 대력패왕 철우가 원래 선약을 만들턴 곳이니 보물의 종류가 이런 영물이라는 것은 당연하고, 이 독각화린망보다 더 나은 영물온 골짜기안에 없으니 바로 이놈이 보물이라는 것 또한 당연했다. 논바닥에 기어다니는 뱀도 많이 먹으면 몸에 좋다는데, 이렇게 묘하게 셍긴 뱀은 단연코 몸, 특히 정력에 좋을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손이 귀한 집 자손에게 정력이 좋다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이 아이가 나중에 삼처사첩을 얻어 진가의 자손을 퍼뜨리면 중자룡은 진써 집안의 은인으로서 사당에 봉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가 그런 것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서려던 중자릉은 문득 한 가지에 시선을 두었다. 잎도 없이 가는 줄기만 하나 뻗은, 끝에 작고 푸른 과일 세 개가열려 있는 풀이었다. 그러고 보니 독각화린망이 그에게 잡히기 직전에 바로 그 과일을 먹으려 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놈은 그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발버등을 치면서도 그 초라하게 생긴 과일만은 다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중자릉은 회심의 미소를 떠올렸다. "이런 영물이 먹으려 했으니 이것도 괜찮은 것일 거야!" 그는 줄기를 잡고 당겼다. 언뜻 보기에는 연하게 생긴 줄기가 의외로 질겼다. 땅속에 깊이 묻힌 뿌리마저 끌려 나왔던 것이다. 어울리지않게도 연근처럼 굵은 뿌리였다. 흙투성이에 썩은 나뭇등걸처럼 검게 비틀린 뿌리, 민들레 줄기처럼가는데 의외로 질기기만 한 줄기, 앵두보다도 작은, 그리고 맛없어 보이는 세 개의 과일. 중자릉은 그 형편없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영물은…… 아닌가 보다만, 뭐 어쨌든……!" 아이를 두고 온 지 어느덧 일 각은 넘은 듯했으니 빨리 돌아가야 했다. 일 각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오랜 친구에게 고개를 들지못할 것이다. 분명 그는 빨랐고, 보물을 가져 오는 데 일 각이라면 그리 오래 걸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몇 사람의 운명이 꼬이는 데는 그 시간이면충분했다. 중자릉이 골짜기애서 보물을 찾아 들고 다시 늙은 소나무에게로 돌아왔을 때, 쉽지 않은 일을 처리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일 각여만에 돌아온 그때. 소나무에 걸린 아이는 둘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그 옆 가지에는비구니의 시체가 걸려 있고. "그래서?" 여태 듣고만 있던 진자룡이 물었다. "그……., 또 다른 아이는 어쨌나?" "우선 냉수나 한 그룻 가져다 주게나." 중자릉은 시원한 물 한 그룻을 청해 마시고 난 뒤에야 다시 말을 시작했다. 모든 일은 잘 해결되었는데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전가장의 종손에계 큰일을 한 사람 아닌가! 냉수 한 그룻 정도는당연히 받을 보답일 것이다. "사태는 간단했지. 비구니가 아이를 낳아서는 거기에다 걸어 놓고자기만 저 세상으로 간 게야. 안타까운 일이지. 어쨌든 가져 온 보물부터 자네 손주에게 먹이고, 그 아이도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과일과뿌리 즙을 짜서 먹였지. 좋은 약이면 다행이고, 뭐 평범한 풀이라도나쁠 것은 없으니까." 진삼산은 이계쟈 그 벼랑 위에서 본 일들이 이해가 갔다. 아마도 절벽에서 투신하러 거기까지 갔다가 아이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보고는 자기 아이도 거기 내버려둔 것일 게다. 같이 죽는 것보다는하늘에 운명을 맡기는 쪽이 아이에게 덜 미안할 터이니 말이다. '그리곤 자신은 목을 매단 것이겠지.' 아이의 아버지는 그 사내, 소삼중일 것이었다. "저기…… 말씀 중에 잠간 여쭙겠습니다만, 제 아이는 어떻게 구분하셨나요? 그러니까 제 말씀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고대랑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바로 그것이었던것이다. "아, 그거? 하하하! 나도 처음엔 잠시 헷갈렸지. 비구니가 자네 아들을 싼 내 옷을 반으로 찢어서는 그 아이도 싸놓은 거야. 그것 참,갓난아이라는 것이 그놈이 그놈 같아서 쉽게 구분이 안 간다는 사실은나도 오늘 처음 알았네. 그런데 문득 자네 말이 생각나는 거야. '아들이다!'라고 소리를 치지 않았나! 아, 그래! 아들이었지! 이러고는 확인을 해봤더니……, 천만다행으로 하나는 사내고 다른 하나는 계집애지 뭔가! 그냥 구분이 된 거지. 잘못했으면 자네 아들이 둘이나 한꺼번에 생길 뻔했네." 중자릉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주절주절 얘기했다. 그리고 그 말을들으며 고대랑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여자아이……, 여자아이는 어쨌나요?' 한참이나 여종이 주무른 뒤에야 다시 정신을 차린 고대랑이 뱉은 첫마디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중자릉도, 진자룡도 그녀의 옆에 없었다. 그들은 아이에게 가 있었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처음앤 가벼운 미열와 그에 동반된 엷은 흥조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미열은 뜨거운 열기가 되고, 홍조는 붉은 반점처럼 진해지더니 몸 전체를 덮어 버렸다. 대두창이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에 부스럼이 잡히고, 나중애는 몸 속에 횃불이라도 밝혀 놓은 듯이불그스름한 빛까지 발산하기 시작하자 시녀들은 이젠 포기해야 할 것같다고 몰래 소곤거렸다. 아이, 광동 진가장의 종손은 지금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라 앓고 있었다. "아이에게 뭘 먹이셨습니까? 불수화타 정정진이라면 인근에서는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는 명의였다. 그 정정진이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말에대답을 늦출 사람은 없었다. 특히 환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다. 중자릉은 또 다른 의미로 환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역시 얼른 대답했다. "독각화린망의 피와 내단일세!" 정정진의 표정이 야룻해졌다. "뭐라고요?" 중자룽의 표정도 약간 달라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키시작한 것이다. "독각…… 화린망이라고……그랬네." 정정진의 표정이 더욱 야룻해졌다. "생김새와 특징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정정진의 표정이 야룻해짐에 따라 중자릉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그리고 목소리는 더욱더 기어 들어갔다. 마치 혀가 목구멍 너머로딸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 뭔지 이름은 잘 모르겠네만 검은 뿔이 있고, 비늘이 붉은……!" "피가 뜨겁고요!" 중자릉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맞아! 자네도 알고 있었군!" 정정진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짓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군요. 역시 이화복령사였군요. 그것도 천년이나묵은 거물을! 어쩐지 저런 증세를 보인다 했더니." 독각화린사건, 이화복령사건 간에 천년이나 묵은 거물이라는 말에중자릉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주장대로 거물, 영물이 장보곡 안에있지 않은가. 정정진은 다시 물었다. "그런테 그런 요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과 상극의 성질을 가진 영약이나 선약이 같이 있게 마련인데 혹시 못 보셨습니까? 요물! 이제야 중자릉의 안색도 우는 듯 웃는 듯 묘해졌다. 그가 저지른 일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 그…… 괴상하게 생긴 과일이 그럼……?" "이화복령사라는 것은……" 정정진은 가는 수염 끝을 만지작거픽며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그모습이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아 적잖이 고까워 보일 만도 했지만 중자릉이 묘한 표정을 짓다가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린 후, 방안에서 그렇게 셍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정정진이 설명했다. "한마디로 양강지물이지요. 뱀이라는 것이 원체 그렇습니다만 이화복령사는 그 중께서도 좀 심한 것이란 말이지요. 사람이 양기가 허하면 인삼이나 녹용을 먹지 않습니까? 그것도 양강지물,흔히 보양제라 해서 먹는 것인데 이 이화복령사에 비하면 차가운 것이라 할 정도란 말입니다. 이화복령사가 하늘에 이글거리는 태양이라면 인삼, 녹용은 모닥불 정도라고나 할까요." 육십 평생 처음으로 얻은 아들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던 진삼산이 급히 물었다. "그, 그럼 인삼 녹용보다 몇백 배, 몇천 배나 좋은 것 아닌가!" 정정진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라 해도 상태에 따라 양과 정도를 조절해서쓰는 것이지요. 인삼 녹용만 해도 잘못 복용하면 탈이 생기는데 하물며 그보다 몇천 배가 강한 약이면……!"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 의가에서는 보통 그런 것은 약이라 않고 독이라 부르지요. 화독이라고나 할까요!" "화독!" 방안에 일순 파란빛이 일렁기리는 듯했다. 시종일관 침착해 얄밉기까지 한 정정진과 붉게 달아올라 있는 아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진삼산의 눈앞에는 한 가지 색깔이 더 보였다. 눈앞이 노래지고 있는 것이다. 정정진은 불처럼 달아올라 있는 아이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런 독을 먹이고, 음…… 몸에 빨리 퍼지도록 문질러 주기라도 한모양이군요. 이렇게 골고루 퍼져 있는 경우는 저도 처음 봅니다그려. 어떻게 해보긴 하겠지만 사실 손써 볼 방법이 없어 보이는군요." 온몸을 문질러 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중자릉이 피와 내단을 먹이고추궁과혈을 해서 벌모세수시켜 준 것이었다. "그것만 있었어도 몰랐는데……!" 진삼산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뭐 말인가?" 정정진이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소용없습니다. 이미 그……, 그 어르신네가 다른 아이에게 먹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깝다…… 아까워! 그 아까운 것을 한 사람에게 다 먹이다니. 그 정수가 들어 있는 뿌리는 고사하고 과일 하나만 있었어도 목승온 건지는 것인데……!" "그만 해두게!" 진자룡이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그는 아까 전부터 한마디 말도 않고있다가 이제야 정정진의 말을 자른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야 하늘에 달린 것. 진가의 대를 끊고자 하는 것이진정 하늘의 뜻이라멸 자네나 내가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진삼산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진자룡은 다시 소매를 저어 그의 말도 막아 버렸다. "삼산아, 너도 그만 포기해라! 그리고……, 그리고 자릉 앞에서는아이 말은 꺼내지도 않도륵 해라. 선의를 가지고 한 일, 결과가 좋지앓다고 하나 그것이 어찌 그외 잘못일 것이냐, 생각해 보면 그 덕분에지금까지라도 살아 있었는지도 모르지. 마차 안에 그대로 두었다면 벌써……!" "아버님……!" 진삼산은 고개를 숙이고, 고대랑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두 사람의 잘못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방안이 금세 초상집 분위기로 물들어 가는 그때에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그리고 한사람이 뛰쳐 들어왔다, 중자릉이었다. "이거, 이거면 혹시 어떻게 안 되겠소? 그외 손에는시들어 버린 풀줄기와 쥐어짜서 비비틀려 버린 나무뿌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독각화린망. 아니, 이화복령사가 먹으려 했던, 그러나 여자아이가 먹어 버린 그 제이의 보물이었다. 모려반석근 ! 모려는 원래 숫돌이라는 뜻이지만 사실은 귤껍질을 가리킨다. 반석은 유황이 섞인 광석의 일종, 모려 반석근이라고 하면 반석에서 자란 귤나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반석에서 귤나무가 자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연단의 비술을 익혀 신선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려라고부르는 것은 이름만 같을 뿐 사실은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중자릉이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모려반석근은 도가에서 애타게 구하는 선약, 몇 가지 비방을첨가하면 무한한 공능을 지닌 약으로 돌변하는 그것, 살아 있는 금단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중자릉이 들고 온 모려반석근, 살아 있는 돌이었다. 정정진은 여자아이에게 먹인 나머지 모려반석근, 수액이 빠져버린 뿌리와 과일을 잃어버린 시든 줄기만을 가지고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원래 모려반석근은 뿌리 속에, 사실은 이 뿌리가 본체입니다만, 이 뿌리 속에 고인 수액이 진짜죠. 처음에는 뿌리의 모습으로 땅속에 묻혀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줄기가 뻗고, 다시 오랜 시간이지나면 과일 모양으로 영기가 맺힙니다만 뿌리 속에 고인 그 수액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것이라 할 만하죠. 그래도 영약은 영약이니껍데기나마 남아 있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 여기에 희망을 걸어 보겠습니다. 단지 걱정스러운 것은…… 아니, 아닙니다." 정정진이 말끝을 흐리자 몸이 단 중자릉이 다그쳤다.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하지 왜 하다 마는가? 사람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아니, 정말 약올린 건가?" 정정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아직 확증이 없는 것이라 말씀드리기가 영……" 진자룡이 나섰다. "괜찮으니 말해 보게. 미리 알아야 마음의 준비를 할 것 아닌가. 아무도 자네 탓은 않을 것이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말씀드리지요." 정정진은 달여진 약을 짜 그릇에 담고 일어서며 말했다. "인삼을 잘못 먹어 바보가 된 아이가 있더라는 말씀 들어 보셨습니까? 열이 끓어 넘쳐서 그런 역작용을 일으키는 얘도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어쩌면 손자 분도……!" "바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정정진이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정정진이 달인 약을 마시고 아이의 열은 내렸다. 진가장의 대가 이어진 셈이니 반가운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밤 진가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중자릉은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듯해서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같아 더 이상 진가장에 있을 수가 없었다. 인사도 없이 달밤에 몰래장원을 빠져 나가는데 한 사람이 그를 막았다 고대랑이었다. 중자릉은 본능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했다가 고대랑인 것을 보고 풀었다. 그리곤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방어자세를 취했다. 고대랑이 무림에 유례없을 정도로 광폭한 여인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남편도 패는 여인에게 시아버지 친구가 보일 리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고대랑은 의외로 조용하게 묻고 있었다. "낮에 해주신 말씀……, 그러니까 그 여자아이 말이지요.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중자릉은 그 질문이 너무 의외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데려와서 기르라고 할까 했네만……, 자네 집안에는 이미 일곱이나있지 않나. 그래서 길애서 만난 사람에게 줘버렸네." "누구에게요?" "뭐, 지나가던 여도사인데……, 이름은 잘 모르겠네. 그리고…… 허, 그것 참! 그러고 보니 어디 도관에 있는지도 안 물어 봤군그래!" 고대랑은 중자릉의 대답을 듣고는 자신이 지금 마주 대한 사람이 강호에서도 가장 박학 다식하지만 쓸 데는 없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기억해 내었다. 이렇게 트릿하게 일을 처리하니 박학 다식이든 다재 다능이든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찾을 길이 전혀 얼단 말씀이세요? 용모나 행색이나, 하다못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세요?" 중자릉은 고대랑의 테도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대답했다. "왜? 그애가 안돼서 그러나? 그만 잊게나. 세상에 가련하고 불쌍한애가 어디 그애뿐이겠는가! 내 보기앤 그 도고(여도사)가 행색이그리 초라하지도 않고, 제법 깔끔하게 차린 것이 아마 부유한 도관에있는 모양이던걸? 그런 도관애서 기른다면 밥이야 굶지 않을 것 아닌가!" 고대랑의 안섹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무리 시아버지의 친구라지만 이렇게 트릿하게 일을 처리해 그녀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거리를 안겨 준 중자릉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그녀의 눈에 나무토막 하나가 들어왔다. 적당히 손애 잡힐 만한 굵기에 길지도 짧지도 알은 적당한 길이의 장작, 몽등이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장작이 있는 곳으로 움직여 갔다. "이번 일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텐데, 뭘로 하면 좋을지 알 수가없군요. 며칠 더 묵어 가시면 천천히 갚아 드리련만……!" 그때 중자릉이 고대랑의 뒤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자룡이, 자네도?" 고대랑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시아버지가 나온 줄로 생각한것이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급히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방금 중자룽이 서 있던 자리에는 낙엽 한 잎만이 바람에 말려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천하제일의 경공대가인 것이다. 고대랑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는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달은밝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깊이를 모르는 구덩이를 내려다보는 것처럼어둡기만 했다. 모든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봐도 지금저기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확증이 없었다. 진짜 아이는 어쩌면 그 여도사가 데려갔다는 여자아이일지도 몰랐다. 여태 그녀가 여자아이만 낳은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도……, 아니, 여태 여자아이만 낳았으니 이번엔 아들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깊이 탄식하고는 정원 바위에 주저앉아 머리를 움켜쥐었다. 한 순간의 오기가 이런 결과를 불러 올 줄은 정말 몰랐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것은 또 하나 있었다. 정원 한구석 어두운 그늘 아래에는 낮부터 그녀의 행동을 의아하게생각하고 있던 시아버지, 천기홍화곤 진자룡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얼마 후 아무 일 없는 듯이 나았고, 할아버지가 진자앙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진자앙은 건강하고 이상없이 무럭무럭자랐지만 진가장 식솔들은 아무 생각 없이 기뻐할 수는 없었다. --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 정정진의 그 한마디가 진자앙의 머리 위에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진자랑이 한 살이 되고 두 살이 되면서 점점 걷혀졌다. 진자앙은 보통 아이처럼, 아니, 보통 아이보다 훨씬 똑똑하고영민하게 자라났던 것이다. 모두가 기뻐할 그 즈음에 정정진의 예언은다른 방향에서 들어맞았다. 진자앙은 무공에 통 소질이 없었다. [제사장] 조부는 창천 하늘을 나는데 손자는 걷기도 전에 주저앉다. 천유일사임쌍성인중삼공제사마 하늘에 일사는 쌍성을 내려다보고사람 중엔 삼공이 있어 사마를 누르다. 당금 천하무림의 판도는 이러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듯이 정파가 있고, 사파가 있으며, 영웅호걸과 기인협사가 천하를 주유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사마외도와 흉신악살의 무리들이 횡행하였다. 그 중에도 유난히 뚜렷하여 만인의 위에 받들어지는인물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앞의 대련에 일컬어진 열 사람이었고, 무림인들은 그들을 무림십대고수라고 불렀다. -- 천유일사, 하늘에 한 스승. 천은 하늘이지만 또한 황궁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늘, 황궁에 거하는 스숭. 바로 내시의 몸으로 사례태감, 동창대영반을거쳐 국선공의 작위까지 받은 전 황사 매요신이 무림십대고수의 수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권력의 정점을 누렸고, 황궁제일고수로 기공, 병기, 권장지각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의 무공에서 당세에 적수를 찾기 어려웠으너 천하제일고수라는 이름이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그의 올해 나이 백십오세. 다른 별호는 사양하고 황사로 불리기를 고집하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 내시의 신분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을 최상의 자리를 한때나마 차지했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라고들 했다. 그가 쌍성을 내려다본다는 것이 첫 번쩨 글귀의 뜻이다. -- 쌍성, 두 성인. 황궁이 세속 권력의 정점이라면 무림의 태산북두는 소림과 무당이다: 그래서 소림사 방장대사와 무당파 장문진인은 누가 그 자리에 앉든 당연히무림십대고수의 두 자리에 떠받들려져 온 것이다. 당금 무림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현 소림장문인 대보선사는 학승 출신이고, 현 무당장문인 육수정진인은 말 그대로 도인이라 세속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 소림과무당이 각기 대표하는 천하제일권과 천하제일검의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하나 아무도 확인해 보지 않았고, 감히 소림사나 무당파를 찾아가확인해 볼사람도 없으니 소문은 단지 소문으로 그칠 따름이었다. -- 인중삼공제사마, 사람 중엔 삼공이 있어 사마를 누른다. 앞의 셋에 비해 비교적 자주 얼굴을 보이는 인물들이 나머지 일곱고수였으니 삽공과 무림사마가 그들이었다. 그리고그들은 대련에도 나타난 바, 서로 적대적이었다. 삼공의 첫 번째는 형산파의 원로인 뇌공 원굉도였다. 사람들은 형산파에 원굉도가 있다는 것은 무림 천년사의 기적이라고들 했다. 당금 구대문파의 말석에 간신히 매달려 있고, 성세에 따라서는 가끔 구대문파에서 빠지기도 하는 형산파의 초라함에 비할 때, 기형적으로 강한 고수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원굉도로 인해 형산파는 구대문파의 하나가 된다는 말까지 있으니 본말이전도된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형산파는 별로 이렇다 할 독문절기가 없는 것으로도유명했다. 고작 해야 초대 조사가 남긴 원공권, 원공검 정도가 절기로 일컬어지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강호에서 행세하기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절정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무공들이었다. 그러나 원굉도의 무공은 달랐다. 그는 족히 무림십대고수의 위치를차지할 만큼 강했다. 단지 그 혼자만 강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원굉도는 형산파 초대 조사의 직계후손으로 어려서 기연을 만나 물경 삼 갑자에 이르는 엄청난 내공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전설상얘만 내려올 뿐 실제로는 가능치 않다고 알려졌던 형산파의 장법인 일격휴를 익힐 수 있었고, 형산파 사상최고수의 지위에 올랐다. 문제는 '한방이면 끝난다'는 뜻의엄청난 이름과, 그 이름에 걸맞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이 일격휴가 삼갑자 이상의 내공을 익히지 않으면 시전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에있었다. 혀가 부드러워 삼 갑자의 내공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지, 사실 삼갑자 백팔십 년이란 보통 사람이면 그 나이 먹도록 살아 있지도 못하는 장구한 세월이다. 그런 세월 동안 매일같이 내공을 들이파고 있어야 쌓이는 기운이 삼 갑자의 내공이니, 기연이 없으면 죽을 때까지 꿈도 꾸지 못하는 경지인 것이다. 그런 내공이 없으면 일격휴를 익히지 못하고, 혹 그런 내공이 있는사람이 있다 해도 굳이 일격휴를 익힐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단계를 밟아 내공을 그 수준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라면 이미 다른 무공의 달인이 되어 있을 터인데 굳이 그것을 익힐 이유가 있을 것인가. 물론 없었다. 왜 그의 별호가 뇌공인가? 하늘의 번개가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지만 아무데에도 쓸모는 없다. 사람 중에는 원굉도가 꼭 그랬다. 그는 형산파에서지닌 바 무공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못하고, 또 배우려는 사람도없는 유일한 장로인 것이다. 뇌공이라는 별호는 그의 이런 점을풍자한 별호였다. 본인이 그 별호에 숨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암혹장천에 번뜩이는 번개처럼, 사막에 흘로 우뚝 선 바위산처럼 멋은 있으나 쓸모는 없는 노인이 되어 홀로 늙어 가고 있었다. 삼공의 두 번째 인물은 금문공 맹방평인데, 뇌공원굉도가 지닌 바 무공 때문에 특이한 인물이라면 그는 직업 때문에특이한 시선을 받고 있었다. 금문은 '관부'를 의미하는 것. 금문공 맹방평은 바로관부의 인물, 그것도 범죄자를 잡는 포두인 것이다. 원래 무림인이라 하면 무공이 강한 것이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 따로 직업이 있는 사람이 무공까지 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을 해,먹고 살 것을 버노라면 무공수련을 할 시간이 없기 마련이고, 수련 시간이 짧아지면 그만큼 무공이 강해진다는 것은 어렵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남의 집 하인 노릇을 하면서도 온갖 노력을 다해 고수가 된 사람도 있다곤 하지만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아 가며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고수가 된 수에 비하면 없다고 해야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직업상 무공이 강하고, 또 강해야 되는 사람도 있으니 전쟁을 직업으로 삼는 군부의 인물들이 그렇고, 범죄자를 잡아야 하는--꼭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수 흉악범들은 칼을 뻬 들고 덤비기도 하니 포두도 죽지 않을 정도만큼은 강해야 할 것이다--포두가그렇다. 그리고 그것도 직업이라고 인정한다면 녹림도, 즉 도적들도 그런 부류에 들어갈 것이다. 포두와 마찬가지로 꼭 싸워야 재물을 털 수 밌는 것은 아니지만 소수 재물을 목숨보다 귀중하게 생각하는 자들을 털기 위해서는 싸워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맹방평은 그 중 포두였다. 복건성 창포현의 노포두이자, 약관 열여섯에 포두가 되어 올해 나이 백 세가 넝어가도록 포두 생활을 했으니 역사상 가장 오랜 세월 동안 포두로 생활하는 사람이 그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오랜 세월 포두 일을 했으면 충분히 승진하여 대포두나 총포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생포두였고, 죽는 날까지 포두로 살기를 원했다. 한때, 복건성의 제형안찰사사가 그를 복건성 총포두로 승진시키려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이미 무림십대고수의 일 인이었던 그를 일개 포두의 자리에 둔다는 것은 직무유기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되먼던 것이다. 맹방평이 단지 무공만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사건에 대하여서는 예리하기 그지없었으며, 소위 몇 대 고수 운운하는 이름을 지녔으면 당연히 부릴 수도 있는 교만함 같은 것도 전혀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완벽한 포두였다. 그런 사람이 총포두가 되는 것은 누가 봐도 옳은 인선이었다. 그런데 그는 상부애서 총포두의 임명장이 오자 사직해 버렸다. 그리고 메년 있는 포두 모집에 다시 지원했다. 여러 말 할 필요없이 오직 포두로 남겠다는 뜻을 단호하게 표명한 셈이었다. 그는 결국 오늘날까지 포두로 남아 있었고, 그 후로 다시 그를 승진시귀려는시도는 없었다. 사마와 삼공이 적대적인 이유도 사실은 이 금문공 때문이라는 것이중평이었다. 무림에서 정과 사가 양립하지 못한다지만 보통은 그냥 서로를 인정하며 살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포두와 범죄자는 절대 양립할 수가 없다. 포두의 눈에 인간은 '범죄자'와 '잠재적 범죄자'의 두 종류로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포두가 보기에는 사파의 무리, 특히 사마와 같은자들은 무림고수이기 이전에 범죄자에 불과하며, 맹방평은 포두인 것이다. 그러니 맹방평과 무림사마의 사이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평생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마주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일이었다. 삼공의 마지막 사람은 진자앙의 조부, 천기공 진자룡이었다. 천기라는 말은 '하늘이 만들어 낸 조화'를 의미하는것으로 이 말이 사람에게 주어지면 극찬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것이없었다. 사실 진자룡은 여러모로 완벽한 인물이었다. 명문가문 출신에 문무겸전의 고수, 젊어서는 용감한 협의지사였으며나이 들어서는 원만구족한 성품의 무림명숙이었다. 아들, 며느리도 고수요, 손자, 손녀 다 있으니 가정도 다복하다할 수 있고, 십대고수의 하나이니 무림에서 차지하는 지위도 낮지 않은 데다가 형제들이 관계와 상계에 진출해서 그쪽 방면의영향력 또한 적지 않았다. 이리저리 부족한 데라곤 없는 사람이 그였던 것이다. 그가 가진 무공내력 또한 그러했다. 곤은 만병지모에 곤조도사라고도 했다. 즉, 모든 병기는 몽등이에서 비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곤에는 모든 병기들의 쓰임새의 원형이 원시적인 형태로나마 간직되어 있다. 창검처럼 찌를 수도 있고, 도처럼 베어 갈 수도 있다. 퇴처럼 칠 수도 있고, 봉처럼 때릴 수도 있다. 그래서 병기를 배울 때는 먼저 곤에서부터 시작해 다른 것으로 나아가는 법이었다. 진자룡은 바로 그 곤을 주무기로 삼고 있었다. 단지 평생 곤만을 무기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는 곤에서 출발해 만병을 섭렵한 뒤다시 곤으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러고 이제는 그 곤을 버리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즉, 굳이 손에 익은 무기가 아니라 아무것이라도, 의자 다러 하나만 잡아도 능히 천만인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진자룡이었으니, 이른바 '손에 지푸라기 하나만 들어도 천하무적'이라는말이 그를 위해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러니 적어도 병기에 관해서는 그가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일부 호사가들은 당금 무림십대고수의 수좌인 황사 매요신보다 오히려 그가 더 강할지도 모른다고 숙덕거리기도 했다. 사마는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사실은 그들의 정확한 이름이 알려진 적조차 없었다. 그 사마의 첫 번째가 '불같이 급하다'라는 뜻의 별호를 가진 대력귀왕 급여화몄다. 그는 이름처럼 성질이 급하고 포악하여 말보다는 주먹으로 일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 자였다. 불행히도 그의 무공이 고강하고 주먹이단단하여 죽고 다친 자가 부지기수였으니, 그런 그가 무림사마 중 일인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자신, 달리는 천하제일도라 불릴 만큼 무공이 고강한 자인데, 거기다가 그만큼이나 포악한 여덟 의형제들을 모아 강북제일 방파인 화륜맹을 만들고 맹주로 군림하고있으니, 아무도 그를 건드리려는 자가 없었다. 그들 아홉 의형제를 구대흉신이라 부르는데 그 대형이기도 했다. 사마의 두 번째로 꼽히는 사람은 이발불요 운리무였다. 그는 천하제일의 자객이다. 이름 그대로 위로는 구름이 덮고,아래에는 안개가 감싼 듯하여 신출귀몰하게 사람을 죽이고숨어 버리니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 관해서 단 하나 알려진 것은 자객행의 도구가 활이라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은 자의 이마에 꽂혀 있는화살 한 발이 그를 말해 주는 유일한 단서였다. 어디서 어떻게 쏘았는지도 모르는 그 화살 한 발이 빗나간 적은 단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천하제일 자객 운리무는 천하제일의 명궁이기도 하며, '이발불요', 즉 '두 번 쏠 필요가 없다'는별호를 얻게 되었다. 쾌여풍은 천하제일의 도둑이다. 무림이란 조금은 이상한 세계라 도둑이나 거지, 심지어 살인강도조차도 관대하게 보아 주는 법인데 이 사람, 쾌여풍만큼은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자로 낙인이 찍혀무림사마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는 처음엔 고금제일이라 일컬어지는 경공술과 사천당문을 무색케 하는 절묘한 암기술로 도둑질을 했었다. 그때까진 그도 신투 일진풍이라는 제법 운치있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무림사마로 일컬어지개 된 것은 소위 돈 맛을 알고서부터라고 했다. 원래 도독질이라는 것이 밑천이 들지 않는 장사인 데다가재능이 있고 보니 욕심은 점점 커지고, 돈이 없어서 못 쓰지, 있기만하면 쓸 일은 수두룩한 것이 세상이었다. 그러니 그가 도둑질에서 강도로, 나중에는 혼자보단 여럿이 낫다고 떼강도단을 조직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진행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지금 강남북을 휩쓰는 최강의 강도단, 광풍사의 대두목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무림사마 중 가장 비난을 받는 인물은 영리충이었다. 세상에는 살인보다도, 강도보다도 더 비난받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그 행동이 세인의 도덕적 감정을 예민하게 건드리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강간와 같은 일이 그것이었다. 강호에서 색마가 살인마보다 더욱 비난을 받고, 때로는 온갖 치사한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영리충은 색마였다. 그것이 그가무림사마 중 가장 비난을 받는 이유의 첫 번째였다. 그가 비난을 받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젊은 모습 그대로. 아무리 대단한 화화공자라고 하더라도 그 전성기는 스물에서 마흔까지 청년기를 전후한 이삼십 년이 고작이기 마련인데 영리충은 주안과라도 먹었는지 장장 백여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화화공자의 짓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더 흉악하고, 사실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영리충이 그 긴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원한을 맺고 다녔어도 아직 단 한 사람도 그를 곤란하게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황사 매요신과 겨룰 수 있는 인물로 삼공 중 진자룡이손꼽힌다면, 사마 중에서는 유일하다고 할 정도의 고수가 바로 그 영리충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한 사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흉악한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벌을 받지 않고, 하물며 불로장수라는 최상의 복까지 누리고 있는데도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영리충은 무림사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고 있었다. 이렇게 혹은 검으로 혹은 도로, 또 혹은 권과 장으로 무림십대고수가 일세를 풍미한 지 근 백년. 권불십년이나 화무십일흥과 같은 말은 세속에서는 진리처럼받아들여져도 이들 십대고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백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들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고 중원제일, 혹은 천하제일이라는 엄청난 이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은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는 법이었다. 무림의 세계도 이 법칙에는 예외가 아니니 무림십대고수를 정점으로 하는 백년 간의 균형 잡힌 시대도언젠가는 막을 내릴 것이었다. 십대고수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불사의신공을 익히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들은 세월이라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 앞에 천천히 시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무림의 관심사는 십대고수가 언제, 어떻게 자신들의 자리를 내놓게 될 것인가, 그 뒤는 누구의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애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렇개 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다음대의 무럼십대고수는 당대 무림십대고수의 문하에서 나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 즈음에 진자앙은 여섯 살이 되었다. 진자앙이 무공에 소질이 없다는 것이 처음 드러난 것이 그날, 진자앙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생일이었다. 아마도 이화복령사의 부작용으로짐작되는 그의 이상한 체질이 처음 드러난 날도 그날이었다. 그 두 가지는 같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났다. 진자앙이 여섯 살이 되던 그날은 진가장의 후계자가 처음으로 무공에 입문하게 되는 날이었다. 진자앙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무공입문의 길에 들어섰을 때,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은 진가장 비전의 내공심법인 오칠비결에 따라 십장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원래 '태청존신연기오시칠후결'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 심법은 할아버지인 진자룡이 젊었을 때 우연히 만난 도사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도사는 그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구결을 알려 준 뒤 어디론가 깊은 산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 이런저런 경로로 알아 본 바에 의하면 원나라 때 그 성가를 드높였던 전진교의 고인인 듯했다. 전진교는 명나라로 접어들며 천사도니, 모산파니,혹은 용호궁 등등의 여러 종파로 나뉘면서 무림세력으로서의성가는 사라져 버렸지만, 가끔 강호에 나타나곤 하는 옛 무공은 그 위력과 정통성을 알려 주곤 했는데, 진자룡이 전수받은 내공심법은 전진꾜의 정통 심법이었턴 것이다. 내공심법, 혹은 비결이라고 하는 것이 간단한 도인체조에서부터 단전호흠법, 기공을 연성하거나 강기류의특별한 공능을 얻을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련법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하고 복잡 다기한 것은 둘째치고라도 그 안에 가짜, 엉터리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름만 그럴듯해서 멋모르고 내공수련입네 하고 따라 하다가는 속에서부터 망가져 병신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명망있는 각 명문정파의 공인된 내공심법을 알아주는 법이었다. 도가면 도가, 불가면 불가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내공심법이요, 신공기공이 그것이었다. 또한 적어도몇백 년 동안 검증된 것들이 그것이었으니. 단지 대부분의 것들이 말그대로 '비전'이라 자파의 사람들에게가 아니면 전해지지 않으며, 그것도 무공의 성취 단계와 문파애 대한 충성심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더 알려 주곤 하는 것이다. 진자룡은 그런 정퉁의 내공심법 중에서도 정통의 것이라 할 수 있는전진파의 신공을 얻은 셈이니 운이 좋다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갑작스럼개 내공이 진보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련하는 데에 큰 위험이 없으며, 꾸준히 수련하면 수련할수록 더옥더 큰 효능을 얻게 되는수련법 중의 하나가 그것, 오칠비결이었다. "오칠비결은 '가' '희' '취' '호' '오' '담' '합'의 일곱 구결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내공입문은 백수', 그러니까 아흔아흡의 나이에도 정정한 할아버지 진자룡이 구결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섯 살 아이라기애는 제법 큰 체격을 가진 어린 진자앙은 두 눈을말똥말똥하게 뜨고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원래는 알아듣는것을 기대하지 않고 하는 것이지만, 여섯 살 어린아이라 해도 진자앙은 똑똑하고 영민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대충 그 뜻은 짐작하고 있었다. 거기에 자상한 할아버지는 아이가 알아듣기 쉽도록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가' 자 구결을 운용할 때는 심장에서 입으로 한 마리 주작이 나오고, '희'일 때는 위장에서 정수리로 아흡 마리의 백학이날아 올라가며, '취'일 때는 신장에서 귀로 현무가 나오고, '호' 일 때는 비장으로부터 누런 사자가 나오느니라. '오'일 때는 간에서 코로 하얀 호랑이가 나오고, '담'일 때는 뇌에서 눈으로 기린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합'일 때는 앞서 말한 여섯 영물이 단전으로 모여 한 마리 청룡을 이루나니, 이것이 심법을 완전히 일주천했을 때 생기는 일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조식을할 때 그렇게 상상하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가' '회' '취' '호' '오' '담'의 여섯 구결은 하나같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탁한 기운을 뿜어 내고, 본신의 참된 기운을 끌어을리는 것이며, 마지막 '합' 자 구결로 그렬게 끌어올린 기운들을 거두어들여 내공으로 모으는 것이다." 그것이 일주천이지만 처음게는 그 일곱 가지 과정을 따로따로 해야했다. 각각의 구결을 통해서 진기를 끌어올리는 수련부터 한 뒤, 그것이 능숙해지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내공을 만들게 되는 것이었다. 진삼산이 보충 설명을 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지만 열심히 수련하면 미미한 열기 같은것이 심장을 감돌아 나와 핏줄을 따라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미미한 열기가 뜨겁개 느껴지면 구결은 완성이야. 그때 조심스럽게조식을 마치면 된다." 진삼산은 거기에 덧붙여서 미미하나마 열기가 만들어지는 데에 자신은 사흘이 걸렸고, 그것이 뜨거워지가까지 석 달이 걸렸지만, 그것으로도 고금에 보기 드문 빠른 성취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니첫날부터 잘되지 않는다고 서둘지 말라는 아버지로서의 충고였다. 충고는 필요가 없었다. 진자앙은 눈을 감고 구결을 외기 시작한 지 촌각의 시간도 지나지않아서 심장얘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조금 이상했다. 아버지의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그는 조금 이상하다는 정도로 생각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진자룡과 진삼산은 기겁을 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의 전신이 불애 달군쇠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성취가 빨라도 그렇게 빠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진기를 만들고, 그 진기를 주천시킴으로써 내공을 형성하는 것이 심법의 기본이라 할 때, 지금 진자앙이 보인 모습은 내공이형성된 추에나, 그것도 상당한 내공이 형성된 뒤에나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주화입마라고 생각하기에도 너무 빨랐다. 무슨 주화입마가 내공어 이제 갓 입문한 아이에게 찾아온단 말인가,그렇게 진삼산좌 진자룡이 셍전 처음 보는 괴사에 황당해 하고 있는 동안 진자앙은 위험한 지경에 들어가고 있었다. 진자앙의 몸에서 횐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는 것이다. 옷이 타는 연기였다. 안력이 뛰어난 진자룡은 진자앙의 몸이 잔뜩 달아오른 쇳덩이처럼하얗게 빛나며 그 열기로 옷을 태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혈맥을 짚어 봤을 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내공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손자의 몸을 조사해 보았었다. 혹시라도 이화복령사의 피와 내단이 내공수련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자의 몸 안에는 이화복령사의 영향으로생각될 수 있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몸에 열이 많고, 나이에 비해 체구가 커서 '혹시 이화복령사의 영향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영향이 그것 이상의 어떤 것으로도 나타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그의심정이었다. 소위 영약을 먹고 막강한 내공을 얻어 어린 나이에 무림에 위땅을날린 인물치고 나중에 잘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당금무림의 십대고수만 해도 특별한 영약을 먹어 강해졌다는 사람은 없었다. 정도, 사도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고련에 고련을 거듭해서야 오늘의 성취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천부의 재질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진자룡의 생각이었다. 영약과 같은 것은 그런 면에서 우연히 얻어지는 행운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수련에 장애가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손자인 진자앙도 어떤 영약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강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그였다. 그리고……! '잘될 확률보단 잘못될 확률이 더 높으니……!' 약을 먹고 잘되는 경우보다는 잘못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 먹어서 정상이면 그게 잘된 것이다'라는 속담도 있고, 지금 그의 손자가 당한 처지가 그렇지 않은가! 진자룡은 손자의 내공수련을 더 진행시켜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려나 어떤 식으로 중단시킬지가 고민이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돌이킬 수 얼는 사태를 초래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혹시라도……! '어쩌면 천고에 드문 기연을 내가 방해하는 것인지도……?' 혹시 이화복렬사는 그의 손자의 몸에 큰 이득을 남ㅕ 준 것인지도몰랐다.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큰 기운이 손자의 몸 속에 잠재되어있다가 지금 내공수련을 통해서 격발되었는지도 몰랐다. 잘하면, 잘만 하면 그 엄청난 기운이 모조리 내공으로 전화되어 몸속애 쌓이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도 욕심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연기가 걷혔다. 전자앙이 몸에 걸친 옷가지가 모두 타버려 더 이상연기를 낼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버님!" 진삼산이 소리 죽여 진자룡을 불렀다. 진자앙이 하얗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그재서야 발견한 것이다. 진자룡은 얼굴을 굳히고 진자앙의 앞에 가서 앉았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어느쪽으로 하든 결정을 해야 할 때였다. "입을 절반쯤 벌리고 가볍게 숨을 토해 보거라!" 낮은 목소리였자만 진자앙의 귀애는 또렷이 들렸다. 바로 지금 하고있는 운기를 마치라는 신호. 그러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진자앙이 그냥 내버려두고 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이기는 했지만 안정적으로 흐르고 있던 열기였다. 그러나 이제 의식적으로 통제하려고 하자 열기는 갑자기 둑을 무너뜨린 격류처럼 거세게흘러 진자앙의 온몸을 휘감아 돌기 시작했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이 강한 힘이었다. 진자앙의 몸은 불구덩이에들어간 것처럼 안에서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진자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진자앙을 향해 약간의 거리를 두고내민 손바닥으로 기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운기를 멈추라고 한 것은 스스로 기의 흐름을 멈출 수있는지 시험해 본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진자앙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진자앙의 힘이라고 보아도좋을 것이었다. 그리고 내공으로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기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아니었다. 진자앙의 체내에 있는 원인 미상의 힘은 통제의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체내에 있다는 것은 주화입마와 다를 것이 없었다. 진자룡은 앞으로 내민 두 손을 천천히 진자앙의 가슴팍에 붙였다. 그의 본신 내공으로 진자앙의 체내에 돌아다니는 열기를 제어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치이익--!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에 물이 떨어지면 날 듯한 소리가 진자앙의가슴팍과 진자룡의 손바닥 사이에서 들려 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진자앙의 몸에 닿으면서 자연스럽게 격발되어진 진자룡의 호신강기가내는 소리였다. 물론 오칠비결을 익힘으로써 얻어지는 수많은 공능 중 하나에 의한 것이었다. 손자의 가슴팍 전중혈에 손을 댄 진자룡은 놀란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손자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이다. 열기는 용암처럼 뜨겁고, 그 기세는 말그대로 '미친 말'과 같았다. 아무런 법칙도 방향도 없이 마구 날뛰고 있는 이 열기를 잠제우지 않는다면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말 것이었다. "마음을 가라맡히고, 계속 구결을 외어라!" 그는 나직하게 손자에게 말하고 진기를 손자의 몸에 주입했다. 그자신의 진기로 날뛰는 열기를 제 길로 이끌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과한 욕심이었음이 금세 드러났다. 진자앙의 몸속얘서 날뛰는 열기는 백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쌓아 온 그의 공력으로도 계어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한곳에 물아넣기라도……!' 열기를 손자의 몸 한곳얘 물아넣기라도 해야 이후 제한적이나마 내퐁을 익힐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했다. 진자룡은 손자의 몸 속을 돌아다니는 열기흘 퉁계하는 것조차도 어렴다는 것을 곧 알아 내었다." 두사람이 서로 밀어 내려 한다고 할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약간이라도 힘이 세다면 당연히 밀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단지 약간 힘이 센 것만으로는 안되고, 완전히 상대를 통제할수 있을 정도의 힘이 필요한것이다. 지금 진자앙의 몸 속애 돌아다너는 기를 통제하는 것 역시 아찬가지원리라 진자룡의 내공이 진자앙의 몸 속 열기보다 강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진자룡의 내공이 진자앙의 그것보다 월등히 강해서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있어야 했다. 지금 그것이 안 되고 있었다. 진자룡의 이마에 땀이 솟구쪘다. 기실 내공을 쓴다는 것은 어렵고힘든 일이지만 육체적으로 힘든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땅을 몇십 자 파느라 힘이 들어 홀리는 땀꽈 내공을 소모해서 흘리는 땀은 그성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내공을 수련한 기간이 길수록, 그렇게 해서얻어진 내공의 조예가 깊으면 깊을수록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인데, 지금 진자룡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위험신호였다. 진자앙의 몸 속을 돌아다니는 열기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안절부절못하며 보고 있던 진삼산이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했다. 진자룡의 등에 손을 대고 자신의 진력을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격체전력이라 불리는 행동이었다. 평범한 사람들도 서로의 손을 잡거나 몸에 손을 대거나 하면 기가 서로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한 사람의 기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내공수련을 한 사람들은이것이 보다 강하고, 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진자룡과 진삽산 부자는 내공의 깊이와 크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같은 성질의 내공을 지녔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성질의 내공을 지닌 사람들보다 기를 주고받기가 더 쉬웠고, 도움 되는 면 역시 적지않았다. 같은 성질을 지닌 기끼리는 친화력이 있기 때문이었다진자룡은 부쩍 힘을 얻어 진자앙의 몸 속에 기를 쏟아부었다. 방금까지 전혀 가닥이 잡히지 않던 열기가 그제야 약간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력으로도 열기를 제 길로 이끄는 것도, 또 내공수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곳에 몰아넣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참 만에 진자룡은 손자의 등에서 손을 멨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열기는 끌어올려지지 않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진자앙의 몸 구석구석으로 분산되어 숨어 버렸다. 다시 내공을 끌어올리려 하면 열기도다시 준동할 것이다. 결국 그들 삼대는 오늘 아무것도 이루어 놓지 못한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진자앙은 내공을 익히지 못하고 말 것이다. "가서 쉬게 하거라. 그리고……!" 진자룡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공을 모르는 무가의 후계자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모험을 해서손자를 잃는 것보다는 그쪽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내공은 가르치지 말고, 호신술이나 몇 수 가르쳐 보거라!" 그렇게 해서 진자앙의 내공입문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라면 무공에 소질이 없다고는 못할 일이었다. 진자앙의 경우는장애가 있어 내공을 익히지 못하는 것뿐이지 무공에 소질이 없다고 표현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랬다. 그것은 진자룡과 진삼산의 은근한 바램이기도 했는데, 그 바램이 깨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무얼 배워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세상에 가끔은 있는 법이다. 진자앙이 바로 그랬다. "예전엔 그런 일을 믿지 않았지만……" 사방득은 말을 해놓고도 왜 예전엔 그런 일을 믿지 않았던가 의문스러워졌다. 어떤 일에 보통 사람보다 특별히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일에 보통 사람보다 특별히 소질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런데 왜 유독 이 일에 대해서는 믿지 못했던것일까. 어쨌든 지금은 그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기, 진가장의 후계자가 무공엔 통 소질이 없다는 게 사실인가 보더라." 사방득은 말을 하면서 문득 깨달았다. 무공에 천부적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통 소질이 없어 구제불능인 사람도 있다. 그거야 하늘이 내린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 그 당연한 사실이 영 믿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진가장의 후계자'가 무공에 소질이 없다는 것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광동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문, 역대에 걸쳐서 숱한 영웅호걸을 배출했고, 드디어 당금무림에 있어서 최고의 자리라 할 무림십대고수외 하나를 배출한 그 광동 불산의 명문 진가장이 무공에 소질이 없는 후계자를 낳았다는 것이 영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방득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문제의 그 후계자는 나와도 아주 인연이 없지는 않았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 그는 아직 기억하교 있었다. '문제의 그 후계자'가 태어난 날 등가산을 뒤집었던 그 사건을…… 소문애 의하면 그때 약을 잘못 먹은 후유증으로 내공도 익히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 소문이 맞다면, 아마도 맞을 가능성이 높지만, 진가장의 후계자가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된 것, 그리고 오늘 그와 그의 아들이 여기진가장에 오게 된 것은 모두 그날의 일 덕분이었다. '덕분이라……!' 덕분. 진가장외 후계자에게 안 된 일이었지만 그의 아들애겐 이보다 좋은일이 없게 되었으너 덕분이라 해도 크게 를리지 않았다. "어쨌들 네게는 다시없는 기회인 셈이다." 사방득은 그의 옆에 서 있는 아들, 사문기를 내려다보았다. 사문기 역시 아이답지 않게 깊고 총명한 눈으로 그를 을려다보고 있었다. 또렷한 눈동자와 반듯한 콧날, 널찍한 이마와 하얀 살결은 광동학성의 명문 사가장의 후계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용모였다. 올해 나이 열둘. 진가장의 후계자와 같은 나이였다. 그리고 이제 그무공에 소질없는 진가장의 후계자를 대신해서 진삼산의 제자가 될 다섯 명의 소년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림십대고수 중 하나,그리고 그 십대고수 중 가장 정교한 무공을 지러고 있다고 소문난 천기공 진자룡의 진전을 물려받게 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잘된 일이지.' 사가장이 비록 유서 깊은 가문이라 하나 진가장에 비하면 한참이나아래요. 진자룡의 무공에 비하면 무공도 아니었다. 아들이 진자룡의무공을 잇고, 그래서 결국 진가장의 정통을 물려받는다면 그와는 달리천하를 무대로 활동하는 대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들에게는 평생 두 번 오기 힘든 기연이라 아니할 수 없는것이다. '진가장의 후계자…… 진자앙이라 했나? 그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사방득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심중으로는 잘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진자앙에게 미안한 감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한 달 전의 아야기였다. 유명한 일이지만 진가장에는 딸이 일곱이나 있다. 그리고 지금 그중 아래의 셋을 제외하고는 모두 출가했다. 장녀 진홍아는 삼수 동가장, 둘째 진주아는 사회운양문, 셋째 진황아는 이웃 서초산의 비룡문, 그리고 넷째 진초아는 조금 멀리 시집을 가서 강소성양주의 명문, 악씨세가의 며느리가 되어 있는것이다. 그 사대가문에 진가장에서 보낸 서찰이 도착한 것이 바로 한 달 전이었다. 진삼산의 제자 될 인재를 구하는 바, 이왕이면 약간이라도 연원이 있는 사대가문에서 구하고 싶으니 적합한 인재가 있으면 추천 바란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진삼산의 제자라는 것이 결국엔 천기공 진자룡의 후계라는 것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이들사대가문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을것이다. 기연, 기연 하지만 기연 중에도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보다나은 기연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당금 강호에 진자룡보다 더 훌륭한 스승이 어디 있을 것인가. 급거 집안의 나이 어린 아이들 중에 진자룡의 후계가 될 만한 인재를 선발려고 명문자제로 부끄럽지 않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 그들 사대가문의 큰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사대가문말고도 한 군데에 더 똑같은 서찰이 간 곳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사가장이었다. 사가장은 원래 진가장과 교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돈 관계를 맺은겻도 아니고, 다른 인척 관계도 없으니 사대가문에 비하면 친밀함의정도애 있어서 한층 떨어진다고 해야 했다. 그런데도 인재를 구하는,말하자면 추천장이 온 것이다. 혹시 배달이 잘못되었나 해서 은밀히 알아본 바, 전일 진자앙 실종사건 때 사방득이 보여 준 일처리의 방식에 감명받은 진삼산이 특별히사가장을 지정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원래 무가의 후계는 가문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문파 내의 비결이 누설될까 봐 사위조차 성을 바꿔 데릴사위로 데려오는 사천당문은 그 중얘도 심한 경우라고 빼놓고서라도절강의 남궁세가, 하북의 팽씨세가,진주의 언가문 등등이 다 같은 성씨를 가진 후손 중에서 후계를 구하지 타성받이를 들이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가장이 그 전통을 깨려 하고 있었다. 자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진자앙이라는 정통의 후계자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자룡의 무위를 흠모하는 천하의 무림인들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인 셈이었다. 그래서 사방득도 자기의 막내아들 사문기를 데리고 진가장으로 온 것이다. 사방득은 아들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이제 본심을 얘기할 때였다. "알다시피 이번에 진가장에는 너말고도 네 명의 인재가 더 온다. 그렇게 다섯이 진 대협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 말 안 해도 알겠지만……진정한 후계자는 그 중 하나다."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사방득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 말을 반복했다. 사실 말을 안해도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고, 말하지 않을 것도 아니었지만 스스로에게 확신이라도 시키는 듯이 반복하는 것이다. 분명한 일이었다. 제자는 다섯이라도 후계자는 하나였다. 결국엔 하나만이 남을 것이었다. 그것이 무림의 법도요, 전통이었다. 물론 사방득이 진가장의 재물이나 명망을 노리는 것은 아니었다. 재물은 그들 사가장에도 많았고, 설사 그가 찢어지게 가난하다 해도 그것은 사소한 것이었다. 진가장의, 아니 그 전에 진자룡의 후계자가 됨으로써 얻어질 것들에 비하면 재물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사방득은 아들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지금 그의 입술 사이로 스며나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힘을 불어넣듯이. "네가 바로 그 한 사람이 되리라고 이 아비는 믿는다." 사문기는 어리지만 명민한 아이였다. 그는 아버지가 말을 안 해도알 것이라여 한 말들을 전부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이 그에계는 일생에 두 번 만나기 힘든 귀중한 기회라는 것, 진정할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잘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다섯 중에 최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하에 우뚝 선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는 천하에서 사문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도 학성의 사가장을 모르는 사람이 얼을 것이다. 그때는……! '진가장이 아니라 사가장의 후계자를 부러워해야 할 것이다!' 사문기는 고개를 바로 들고 당당하게 진가장의 연무장에 들어섰다. 그는 그외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훨씬 더 큰뜻을 가진 아이였던 것이다. 연무장에는 사가 부자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네 명의 소년과 네명외 어른이 모여 있었다. 어른은 어른을 보고 안이는 또래의 아이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말 오늘은 달랐다. 사방득과 사문기치 시선은 네 소년에게 모아졌다. 소개를 받지 않아도 짐작했던 것이지만 막상 소개를 받자 더욱 확실해졌다. 소년돌은 사대가문얘서 온 아이들이었다. 팔다리가 길어 훤칠하게 커 보이는 소년이 삼수 동가장얘서 온 동평중 , 현재 열네 살이었다. 사희 운양문의 운한경은 약간 살집이 있는 대다가 눈와 입이 순해서 호감이 가게 생긴 소년이었다. 동평중과 동갑이었다. 서초산 비룡문의 문주 맹비룡의 아들인 맹대균은한 살 어린 열세 살인데 체격이 커서 실제보다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다. 그러나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은 가장 나이가 어린 소년이었다. 양주 악씨세가에서 온 악조린은 올해 열한 살인데도 불구하고깊은 눈빛과 네모진 얼굴, 과묵한 인상으로 통 아이답지 않아 보이는것이다. 사대가문에서 온 소년들과 어른들이 사방득 부자와 인사를 마치는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연무장 저편의 문이 열리고 진자룡과 삼산 부자가 들어왔다. 진자룡은 올해로 나이 백다섯을 자랑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허리도 구부러지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검은빛을되찾고 있었다. 광동 일대에서는 이를 두고 진자룡이 전설에서만 내려오는 줄 알았던 반노환동의 경지를 성취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의 뒤에서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따라나오는 희끗희끗한 잿빛 머리를 하고 있는 노인이 아들 진삼산이었는데 그는 오히려 그의 아버지보다도 늙어 보였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듯이 이마에 주름살이 잡혀 있어서 첫인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사문기로서는 광마라는 그의 별호가 다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모시기 쉬운 사부는 아니라는 평을 사가장에서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다. 진삼산의 뒤로 들어선 사람은 큰 체구에 비대한 몸집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엷은 녹색 무복을 입고 손에는 키의 두 배쯤 되어 보이는 장창을 들고 있었다. 그림책에서 볼 수 있을 듯한 고리눈에 위로몇 갈래로 퍼진 눈썹이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그 특징적인 모습과, 진삼산과 마찬가지로 어쩐지 화가 난듯한 인상이 그녀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었다. 노호 고대랑이 아니고서는 누가 그런 모습을 하고 진가장의 연무장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애 들어선 사람은 소년이었다. 맹대경보다 큰 체구에 반듯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어서 얼핏 열다섯은 넘어 보이는 소년. 그러나 처진 어깨와 구부러진 허리, 눈가에깔린 그늘이 어핀지 모르게 처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의 소년. 그것이 얼마 전까지 진가장의 후계자였다가 오늘부터는 아니게 된 진자앙이었다. 올해 나이 열둘,사람들은 그를 금강두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바보라는 뜻이었다. 돌대가리, 석두라는 말로도 진자앙의 어리석음을 다표현하지못해 금강두라는 새로운 말을 지어 냈다는 것인데, 소문에 의하면 무공수련 중에 화가 난 그의 어머니 고대랑이 그렇게 부른 것에서부터시작된 별명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진자앙이 특히 그의 어머니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는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인지도 몰랐다. 항간에는 고대랑이 딸만 귀여워할 뿐 아들 진자앙은 남의 자식 취급한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양쪽에서 귀여움을 받고 있는 사문기로서는 상상이안 가는 일이었다. 여기로 올 때만 해도 무공수련 기간 중에는 못 만나게 되몄다고 어머니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지 않았던가. 대청의 문이 다시 열리고 진 노육의 안내를 받아 한 노인이 들어왔다. 얼굴은 작은 데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이 주름살이 많고, 그리 크지않은 키에 땅까지 닿을 듯이 긴 괄을 건들거리고 있어서 영락없이 원숭이 꼴인데, 몸에는 화려한 비단장삼을 걸치고 있어서 전혀 어울리지않았다. 사문기는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그와 함께 서 있던 소년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한 모양으로 옆에서 나직한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어른들은 달랐다. 그들은 이 원승이 꼴의 노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방득을 위시해 각 가문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황황히 앞으로 나서서 읍을 했다. 원숭이 노인이 긴 팔을 들어 휘저었다. 소년들은 다시 웃었다. 팔을젓는 모습까지 어쩌면 저리 원숭이 꼴인가. 노인이 웃었다. "내 꼴이 우스우냐? 원숭이 같어?' 그는 들어올린 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짐짓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폭소가 터졌다. 사문기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황급히 입을 가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른들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지만 잔뜩 민망하다는 빛이 역력했다. 노인의 신분이 아이들의 웃음을 살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아무리 똑똑해도 아이는 아이고,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는법이었다. 어른들이 몰래 눈짓을 해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쩌질 못하는 것인데 한 아이만 처음부터 표정을 단정하게 유지한 채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악씨세가의 악조린이었다. 사문기도 얼른 얼굴을 굳혔다. '쟤도 이 노인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군!' 사문기는 이 노인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팔이 길면 대체로 원숭이와 흡사하게 보이는 법이지만 이렇게 흡사한사람은 강호무림애 그리 흔치 않다고 들은 것이다. 가문 대대로 원숭이와 닳은 사람들이 이어 오는 곳, 심지어 원숭이와 닮으면 닮을수록 재질이 좋다고 인정되는 곳. 바로 형산파를연 원씨가문이었다. 대대로 형산파의 문주 내지른 장로의 자리에는 원씨가문의 사람들이 있었다. 구대문파 중에서는 약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지만 어쩌다가고수가 하나 나오면 대개는 원씨 성을 가진 사람이기 마련이었다. 당대에도 그래서 형산파 계일고수이자 무림십대고수의 하나가 원씨 성가진 사람이 아니던가. 바로 그들의 앞애 서 있는 원숭이를 닮은 노인, 뇌공 원굉도였다.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자 원굉도가 다시 말했다. "계속 웃어도 괜찮다. 난 유쾌한 아이를 좋아하거든." 그러면서 그는 비단장삼 앞자락을 뒤적이며 이를 잡는 시능을 했다. 이 모습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악조린은 여전히 운지 않았고, 이번에는 사문기도 웃지 않았다. 노인의 정채를 짐작한 듯, 아니면 어른에개 급히 주의를 들었는지웃음을 터뜨린 나머지 세 소년도 억지로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여전히 대청이 떠나가라 웃고 있는 사람은 진자앙 하나뿐이었다. 그는 원굉도가 원숭이 시능을 그만두고, 다른 어른들을 비롯해서 다섯소년들까지 입가얘 웃음기를 씻어 버린 뒤얘도 계속 웃고 있었다. 진삼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고대랑의 눈샙이 바르르 떨렸다. 진자앙의 웃음이 그제야 잦아들었다. 그는 그제야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애들을 웃기려고 했다고 한들 자신의 신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운으면 기분좋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원굉도는 이미 눈살을 찌푸리며 묵묵히 서 있었고, 장내의 공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농담으로 넘어갈 때는 지난 것이다. 웃느라 붉어진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진자앙은 그 얼굴을 감추려고개를 숙였다. 사방득은 이 작은사건을 보며 어이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이지만 저렇게 눈치가 없을 수 있을까. 그것도 무가의 자손이.' 그러고 보니 진자앙에게서는 기가 죽어 있는 것말고도 또 하나의 특징을 발견할수 있었다. 어딘지 미욱한 티가 나고 있는 것이다. 대개 덩치가 큰 사람이 미련해 보이기 마련이지만 사실과는 상관이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진자앙에게서 보여지는 미욱함은 단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덩치가 크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뜯어보면 영준한 얼굴, 깨끗이 차려입은 무복 안으로 드러나는 건장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답답하고 미련한 티가 물씬 풍기고 있는소년. 그것이 진자앙이었다. '눈이 죽었군!' 사방득은 그 미련함의 실체가 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가의 자소이면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흑백이 분명한, 그래서 초롱초롱한 눈망울', 혹은 '총기가 번뜩이는 눈동자', 아니면 적어도 '오기와 투지가가득 찬 눈빛'과 같은 것이 진자앙의 눈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진자앙의 눈은 그저 크고 순하기만 할 똴 무가의 자손다운, 살아 있는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제야 진자앙이 금강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가 가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다름없는 신세가 된 이유도, 그래서 아들을 비롯한 다섯 소년들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게된 이유도 지금 진자앙의 모습을 보고서야 확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진자앙의 눈은 보통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은 눈이었다. 그러니 평범한 눈이라고 말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무가의 자손은 평범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눈을 무가얘서는 죽은 눈이라고 불렀다. 무림인은 평범한 사람이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 또한 평범한 눈은 절대 아닌 것이다. 죽은 눈을 가진 아이, 진자앙을 보면서 사방득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들얘게는 이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는 아들이 진자룡의후계자가 되는 데에 가장 큰 경쟁자는 동가, 운가, 맹가, 악가의 내 소년이 아니라 바로 진자앙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소문이야 무공에 통 소질이 없다고, 그것도 조금 모자란정도가 아니라 심하개 그러하다고 났지만, 그 내막이야 모르는 일이고, 또앞으로도 모르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소질이 없다는 것은 대성하기 어렵다는것이지, 아주 못배운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진자앙이 조부의 곤법을 진자룡의 곤은 법이 아니라 도라고는 하지만 대충 흉내라도 낼 수 있게 된다면 남의 자식보다는 자기 자식에게 가산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아닌가!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아무리 공정하고 사심 없다고 알려진 천기공 진자룡이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은근히 걱정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진자앙의 눈을 보면서 그는 그런 우려들을 말끔히 떨쳐버릴 수 있었다. 소질이 조금 모자란 것은 노력으로 보충할 수가 있다. 그러나 눈이죽으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가 판단하기로는 진자앙이 그랬다응당 자기의 것이었어야 할 후계자의 자리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이 순간에도 원숭이 같은 노인의 꼴을 보며 웃음이나 터뜨리는진자앙이 사방득은 한 순간 불쌍하게 여겨졌다. 진자룡이 측은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앙은 나가 있거라." 이 자리에 그가 있어야 할 이유란 없는 것이었다. 진자앙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원굉도와 오대가문의 손님들에게까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연무장을 나갔다. 원굉도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노부는 형산파의 원굉도요. 오늘 광동 진가곤의 당대 문주가 다섯 제자를 맞아들인다기에 증인이 되고자 이 자리에 참석했소. 진가곤의 위명에 비추어 볼 때 증인이 되기엔 부족한 몸이 아닌가 우려스럽지만 오랜 교분을 힘입어 감히 거절하지 아니하였소이다. 그는 손을 뒤로 돌려 연무장 중앙을 가리켰다. "제단을!" 거기 가려진 휘장이 옆으로 밀려 나가고 거기 진가장 역대 장주들의위패와 제상이 보였다. 위패 위쪽으로는 '광동 진가곤'이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가문으로 따지자면 광동 진가장이라부르지만 무공내력으로 말하자면 광동 진가곤이라는 사승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문과 사승이 분리된다는 것은 이번처럼 가문의 종손이 무공을 물려받지 못할 경우 가문의 재산은 종손에게, 무공과 명예는 제자에게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한 가문에 두 후계자가 생기는 셈. 그러나 무림인에개는 당연히 무공을 이어받는 사랗이 진정한 후계자이기마련이었다. 원굉도가 이제 한껏 엄숙하게 외쳤다. "청조사의 예를 하겠소. 모두 기립하시오." 이른바 배사지래를 하려는 것이다. 원굉도가 다시 외쳤다. "제자들은 앞으로 나서라!" 다섯 소년들이 앞으로 한걸음썩 나섰다. 나이 순서대로 향을 올리고, 조사깨 삼고두하라!" 동평중, 운한경, 맹비룡, 사문기, 악조린이 순서대로 앞으로 나아가계단 앞애 무릎을 꿇었다. 양손을 모아 긴 향을 들고 머리 위로 올렸다가 내린 뒤 향로얘 꽂았다. 그리곤 위패를 향해 한 번 절하고 세 번머리를 조아렸다. 이떼는 머리가 바닥에 부딪쳐 소리가 나도록 하는것이 예의였다. 원죙도가 다시 외쳤다. "사조께 삼고두하라!" 이들의 스승이 될 사람이 진삼산이었기 때문에 이 경우 사조는 진자룡이었다. 다섯 소년은 조사즐 배례하고 난 뒤 태사의에 앉은 진자룡를 향해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스승께 구배지례를 올리라!" 구배지례라는 것은 스숭에게 아흡 번 절하는 것인데, 매 한 번의 절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합계 스물일곱 번의 절을 해야 배사지례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다섯 제자의 절을 받은 진삼산이 일어나 입을 열었다. "무는 기예나 힘 이전에 바른 마음이다 마음이 바로 서지 않고서는 무예 또한 바로 자라지 못할 것이니……!" 제자들에게 첫 교훈을 내리면서도 방금 있었던 아들의 추태가 못내마음에 걸리는지 진삼산은 침중한 안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집이라는 것은 굳이 방이 아니더라도 휴식을 쥐하며 조용히 앉아 쉬기에 적합한 곳이 있기 마련이다. 입구 옆 계단 복도의 한 귀퉁이창문 가의 의자, 정뭔의 담장 아래 같은 곳이 그런 곳이다 대개는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이 교자하는 지점. 즉 명암이 교차하는 지점인데 사람들은 흔히 자신은 어두둔 곳에 남고 시선은 밝은 곳을 향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진자앙든 그런 곳 중에 하나 나지막한 담장이 한낮의 양광을반쯤 가려 주는 정원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멍하니어떻게 앉는 것이 멍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가 앉아 있는모습을 보면 다들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었다.어머니는 그가 앉아도항상 멍하니, 멍청하게 앉아 있는다고 꾸중하시곤 했다. 사실 그렇게 볼 이유도 있긴 했다. 어디에 앉아 있으면 쉬고 있거나하더라도 뭔가 생각이 있기 마련인데 그는 지금 그저 아무 생각 없이앉아 있을 뿐이니 멍하다고 표헌해도 괜찮을 것이다. 진자앙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러니까 무공을 못할 다른 이유가 있다면진자앙도 이모저모로 생각할 일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도 안되는 것을 어쩔 것인가. 누구보다도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도 했다. 피땀을 흘리며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그인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답답하기만 한 것이었다. 원래 그도 머리가 둔하다거나 해서 바보로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공에 진보가 없다는 것은 머리가 둔해서 글공부를 못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때로는 치명적이기도 한 결점이었다. 진가장과 같은무가에서 내어난 아이에게는 글보다는 무공이 더 중요한 법이었다. 객관적으로 봐서 진자앙에게는 무공 방면으로 재주가 없을 이유가없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무림십대고수 중 하나였다. 그 말은 무림의 하고많은 고수들 중에서도 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만큼은 못해도 아직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자기보다 강해 보이는 사람들과는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져본적이 없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누가 말한다면 진삼산의 성격을 모른다고밖에는 달리 말할 것이 활는 일이었다. 진삼산이 언제 상대를 골라서 싸웠던가. 그의 아버지 진자룡의 진전을 완전히 이어받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강호에서는 그래도 특급고수로 손꼽히는 진삼산인 것이다. 어머니는 어떤가. 무공을 놓고 말하자련 아버지보다도 강하다는 것이 정평이었다. 그녀의 난화삼십육로창봉술은 창에 있어서는 일절에 속한다고 알려진 유명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 천부적인 감각이라니. 어머니의 감각은 야수의 그것과 흡사해서 보기 전에 먼저 알고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머니가 진자앙을 못마땅해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단 한 부분이라도 그의 어머니를 닮았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절대로 둔할 리는 없는 것이다. 진자앙은 한메 아버지 어머니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단 한번도 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닳았으면 무공에 소질이 없을 수가 없고, 앉아서 백 장 밖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수 있다는 어머니를 닮았으면 감각이 예민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라는 것이 그의 질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얘개 물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가계에는 너 같은 경우는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물어 보라'고 혔다. 그리고 물론 어머니의 가계에도 그와 같은 경우는없었다. 요컨대 그는 두 사람 중 누구도 닮지 않은 셈이다. 부모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순수한 호기심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런 의문을토로랬다. 그때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붙은 싸움은 할아버지가 와서야 겨우 진압이 되었다. 그리고 진자앙은 다시는 그런 질문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하나의 의문이 남아 있었다. 무공 소질이야없을 수도 있다고 치자. 씨도둑질은 못 하는 법이라고 했지만 때로는부모를 닮지 않은 아이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생긴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체질은 무엇일까? 무공에 형편없는 소질을 가진 그에게도 한 가지 장점이라 할 만한것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공에 대한 형편없는 소질과 더불어 그에게 한 가지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것은 그의 체질이었다. 자라면서 그는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큰 체격을 지니게되었다. 진자앙은 여덟 살 때 이미 열 살이 넘어 보였고, 열두 살이되자 아무도 그를 열다섯 아래로 보는 사람이 없었다. 옛날 같으면, 아니 요즘도 군문에 투신하면 장군감이라고 불릴 만한 체격을 가진 그였다. 거기에 그는 선천적으로 두꺼운 살가죽을 가지고 태어난 모양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상처도 잘 안 날 뿐만 아니라 혹시 났다 해도 금방 낫곤 했던 것이다. 특히 머리는 어지간한 것에 맞아서는 상처도 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손오공 같은 돌원숭이라도 된 것처럼. 그래서 어머니가,그리고 누나들이 붙여 준 별명이 그것이었다. 금강두! '돌대가리', '석두'라는 이름으로는 그의 노둔함과 단단한 머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금강석 대가리'라는 그리 명예스럽지않은 별명을 붙여 준 것이었다. 정상적인 사내라면 이런 모욕을 당하면 참지 않을 것이다. 진자앙도 그랬다. 그는 비록 어리지만 그 별명이 무슨 뜻인지 알 만큼은 영리했고, 스스로가 사내임을 자각할 정도로 조숙했다. 그러나 별명을 지어 준 사랑이 아귀 같은 누나들임을 감안할 때, 반격은 불가능했다. 잘못 대들었다가는 진짜 금강석으로 얼굴을 덮었다해도 밭고랑이 패이고 말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진자앙보다 무공도 잘하고 힘도 세지 않은가. 그래서 진자앙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 모든 일들이 자기 자신에게, 그 중에도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체질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진자앙은 아직도 그때, 그가 처음으로 내공에 입문하던 때를 기억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혈맥이 터져 죽어 버릴 뻔했던 그때의 사건을,그 사전으로 내공수련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생각해보면 모든 일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생겼던 것일까? 진자앙은 할아번지에게 그것을 물어 보았다. 그리고 그것 역시 다시는 묻지 않게 되었다. 항상 인자하던 할아버지가 그때만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진노육에게서 대충의 이유를 듣고서야 그때까지 이해할 수없던 많은 일들이 해명이 되었다. 그때에서야 자신의 이해하기 어려운체질도, 할아버지가 씁쓸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던 것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기가 막히고 억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곰곰이 따져 보면원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렇게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던 것이다. 금강두라니! 뭔래 그가 그런 별명을 들을 정도로 둔한 아이는 절대로 아니었다. 지금도 그랬다. 무공 분야를 제외하면 어디로 보아도 튼튼하고 영민한아이, 진자앙이 아닌가! 그런 그가 금강두 따위의 별명을 들어 가며참아야 하는가? 진자앙은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참는 바에야 누구보다도 더 잘 참으리라고 결심했다. 그것이 그 먼 옛날, 그가 태어난 날에 관계있는 사람들에게 원망을 돌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심지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할아버지의친구까지 포함된 그들을 원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진자앙이 여덞 살 되던 해의 일이었고, 한 해가 가고 또 몇년이 가서 오늘 이렇게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생겨도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운명이 되었다. 진자앙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웃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웃는 것 외에는……! 빡! 소리가 들리고 한참 후에야 통증이 느껴졌다. 진자앙은 손을 들어 뒤통수를 만졌다. 뭔가 날아와 그의 뒤통수를친 모양이었다. "뭐지?" 손에는 볼록 솟아오른 부분이 만져졌다. 뒤를 돌아보니 여섯째 누나,진소남이 아까 연무장에서 본 소년 하나와 나란히 서 있었다. 진소남은 손에 또 하나의 돌을 들고서는 빙글빙글 웃으며 소년에게말하고 있었다. "보라니깐. 뒤에서 부르기만 해선 소용이 없어. 돌이라도 던져야 누가 온 줄 안다니까." 그 말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은 사가장에서 왔다는 소년, 사문기임을 진자앙은 알 수 있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소년, 사문기,여러모로 신기할 것이다. 동생을 부르는데 돌을 던져 뒤통수를 맞힌다거나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보다 그냥 불러서는 모르고, 돌이라도 던져야 돌아볼 정도로 아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진자앙은 돌애 맞아 부어오른 자리를 긁적거리며 겸연쩍은 웃음을지었다. "날 불렀었어?" "부르지 않았으면?" 진소남은 뾰족한 목소리로 되묻고는 옆애 선 사문기를 의식했는지한결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변명하듯 말했다. "불러서 대답했다면 내가 왜 돌까지 던졌겠니?" 그게 이유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진소남은 돌아서서걸었다. "할아버지가 연무장에서 기다리셔!" 진자앙은 더 말하지 않고 일어섰다. 대답을 않는다거나, 온 줄 모른다고 꼭 돌을 던져야 옳을 것인가를 토론하기애는 진소남은 적당한 상대가 아니었다. -- 제 어미 닮아 우악스럽기만 한 년! 아버지가 전에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지만 사실 진소남은 셋쩨 누나인 진황아만큼이나 우악스러웠다. 아버지는 황아 누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었다. -- 제 어미 닮아 무식한 것이 힘만 쎄서…… '제 어미 닳아서'라는 말은 아버지가 딸들을 평할 때마다 입에 달고하는 말이었다. '제 어미 닮아 거칠고 무뚝뚝한 큰딸 홍아'는 그래도 개중 나은 편이고, '성질이 못된 둘째 주아', '멍청한 것이 힘만 쎈 황아', '이것도아니고 저것도 아닌 듯이 뜻뜨미지근한 초아', '약은 청아', '우악스런 소남', 그리고 '얌체 소보'까지 모두 '제 어미'를 닮아서 그렇다는것이었다. 그렇다고 누나들이 항상 욕만 먹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의 '제어미 닮아'라는 문구는 물론 어머니 앞에서는 절대로 내놓지 않을 뿐아니라 드물게 칭찬도 하곤 했다. 물론 그때는 '날 닮아'라는 말이 꼭 앞에 붙었다. -- 날 닮아 믿음직한 맏이 홍아. 이런 식이었다. 이상한 것이 어머너도 누나들을 칭찬할 때는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한다는 것이었다. 잘된 것은 당신을 닮고, 못된 것은 아버지를 닳는다는 것이 서로 반대이긴 했지만. 그러나 어머니는 단 한번도 진자앙을 칭찬한 적은 없었다. 단 한번도 '날 닮아'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빡! 이번에는 앞이마가 아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는 연무장의 기등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걷다가 부딪힌 모양이었다. 이상하게도 연무장에 들어설 때마다 한번씩 부딪히곤 하는 그 기등. "쟨 저게 인사야." 앞서 연무장얘 들어서던 진소남이 킥킥거리며 사문기에게 말했다.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진자앙을 보고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또부딪히겠거니' 하고는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기등을 한번 어루만져 준 뒤연무장에 들어섰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웃는 것 외에는……!' [제오장] 진가곤에는 따로 주인이 생기고 진자앙에게는 따로 사부가 생기다. "이건……!" 진자룡이 나무로 만든 몽둥이 하나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사손들을 새로 받아들이는 기념으로 한 수 지도해 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까 나갔던 진자앙까지 다시 불러오게 된 것인데……"제미곤이라고 부르지 세우면 눈 높이까지 오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제미곤. 곤 중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모든 곤법의 수련은 이것을 쥐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사문기나 동평중. 운한경 등 다섯 가문에서 온 소년들도 그것을 알았다.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도 처음 무공을 배을 때 바로 제미곤부터 시작했었다. 제미곤으로 곤법의 기초를 배운 뒤에 십팔반병기를 대충 섭렵하고 난 후에야 각 가문의 독문병기를 익히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병기수련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 다섯 소년은 진자룡이 한 수 가르쳐 준다기에 잔뜩 기대했다가 잠시 어리등절해졌다. 혹시 제미곤조차 배우지 못한, 완전히무공에 대해서는 초짜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진자룡은 그들 다섯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한 기색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나. 그렁 어디 한번물어 보지." 그는 동평중을 가리키며 물었다. "곤을 수련한 적이 있느냐?" "예!" "무얼 배웠지?" 동평중은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곤법의 달인 앞에 서너 곤을 배웠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웠던 것이다. 진자룡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고냥 솔직히 말해 보려무나." "재미곤의 벽, 도, 착, 륜, 삽, 슬, 교와 풍마곤의 횡격, 하발, 하소, 삽보, 개파, 격파, 륜벽, 점곤, 탈수를배우고 나서 다른 무기로 넘어갔습니다." 벽, 도, 착, 륜, 삽, 슬은 제미곤의 여러 변형 중에 가장 잘 알려진구결들이었다. 후려치고, 올려치고, 찌르고, 옆으로 쓸고 하는동작을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그야말로 곤을 다루는 방법 중에서는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만한 것. 풍마곤은 제미곤에서 한충 더 발달된 곤법인데 끊이지 않는 연속성과 가증되는 압박감을 강조한 아흡 개의 연속동작으로 되어 있다. 곤법을 주무기로 하지 않는 문파에서는 통상 이렇게 두세 가지의 기본곤법을 익히고는 다른 무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흔히 다른 무기라고해도 장병에서는 곤을 기본으로 하고, 단병에서는 도를 기본으로 대충 배운 뒤에 검법을 주로 익히는 것인데 동평중이 꼭 그런 경우였다. "검을 주로 했겠구나." 동가장은 전통적으로 검법을 성명절기로 내세우고 있음을 잘 아는진자룡이었기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운한경에게로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너도 곤법을 배웠겠지?" "제미곤만 배웠습니다." "무얼 잘 하느냐?" "비도를 조금 배웠습니다." 운한경의 출신인 운양세가는 경신술과 비도로 명성을 얻은 가문이었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맹평중도 경우는 약간 다르지만 운한경과 마찬가지로 제미곤만 배웠다. 그의 아버지인 비룡문주는 권법을 장기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문기의 경우는 달랐다. 사가장은 깃발을 무기로 하고 있었다. 같은 장병이라고 해도 곤과 기는 그 사용방법의 까다로움에 있어서 차원이 다르다 할 정도였다. 깃발의 효용 속에는 곤과 창, 채찍과 도끼 등의 용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무기를 사용하려니 기본적인 병장기애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문기는 꽤 여러 무기를 익혔던 것이다. "장병십팔총과 단병십괄종을 대충 거쳐서최근에는 독문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장병십팔종은 모, 극, 과, 과, 봉, 장, 간, 월, 차, 당, 파두, 삭, 대도, 수,파, 기, 산, 팔의 열여덟 가지 병기를 말하는 것이고 단병십팔종은 대략 도, 검, 괴, 부, 편, 간, 추, 저, 련,륜, 렴. 구, 철척, 초자곤, 권 , 종, 자, 필의 열여덟 가지 병기를 말한다. 병기로야 이외에도 각종의 변형기가 있고 비수 따위,호신용의 좌조기에 암기, 나아가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문병기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사문기가 말한 상십육병은 천하무림의 조종이라 할 소람사에서도 인정된 것이니 대충 이 정도만 알면 병기에 대해서 알 만한 것은 다 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이제 독문, 즉 사가장의 독문병기인 번룡기를 익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자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열둘이라고?" "예." "그 나이에 그렇게나 배웠다니 대단하다." 열둘의 나이에 삼십육병을 다 배웠다는 것은 가히 무공의 천재라 할만한 성취였다. 아무리 점잖다고 한들 아직 어린아이인지라 칭찬을 받으니 기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사문기였다. 사문기와 사방득의 표정에 자랑스러운 빛이 스치는 동안 진자룡은 고개를 돌려 진자앙을 바라보며 웃었다. "동갑인데도 아직 제미곤도 익히지 못하고 있는 자앙과는 여러모로다르구나." 진자앙이 할아버지를 마주보고 웃었다. 그러나 그 뒤에 서 있는 고대랑과 진삼산은 웃을 수가 없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여기 와 있는 손님들이 모를 리도 없지만 굳이다시 그 말을 끄집어 내어 웃음거리가 될 일은 무어란 말인가. 진삼산과 고대랑이 그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가 파래졌다가 하는데 진자룡은 악조린에게 마지막 질문을 하고 있었다. "너도 곤을 익혔느냐?" "익히지 않았습니다." 악조린은 앞의 텟과는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다. 진자룡이 놀랍다는 빛을 띠었다. "호오…… 어째서? "제대로 배우지 못할 바에야 아예 배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네 아버님이나 할아버님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냐?" "그령지는 않겠지만…… 태사부님께 비교하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돌한 대답이었다. 명백히 가문의 어른들을 무시한 대답인데도 그는 태연히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이냐?" "운기토납법을 조금 한 정도입니다." 진자룡은 좋다는 뜻인지 아닌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에쥔 제미곤을 들어 보였다. 반질반질 손때가 묻은 나무몽등이. 그는 그것을 한참아나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게 내가 사용한 몇 번째 것인지 이젠 세지도 못하겠구나. 하나한 가지는 확실하리…… 나는 일백 평생 오로지 이것 하나, 재미곤만익혔다." 다들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천하에 못 다루는 무기가 없으며, 지푸라기 하나만 들어도 천하에적수가 없다는 천기공이 일평생 제미곤 하나만 익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일까? 그런 기색을 눈치채었는지 진자룡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소문은 안 그런가 보더라만……, 실제로 나는 이것말고 다른 무기를 배운_적도 없고, 다른 무기로 싸워 본 적도 없어. 여기 원 형이 증명해 줄 거다." 원굉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그게 진상이었다. 소문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는 아니었다. 진자룡은 단한번도 제미곤 외의 다른 무기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사용한다면? 그가 지푸라기든 뭐든 들고 있다면 누구도 그를 이긴다고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들 입이 막혔는지 말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진자룡은 천천히 재미곤을 움직여 동평중이 말한 벽, 도, 착, 륜, 삽, 슬, 교의 일곱 구결을시전해 보였다. 동작이 유난히 느리고 자연스럽다는 것 외에는 특이한점이라곤 없는 동작이었다. 진자룡은 그렇게 제미곤을 한번 시전하고는 곤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곤 다시 진자앙을 바라보며 웃었다. "자앙은 날 닮아서 느린 모양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배우는 게 느려서 혼이 많이 났지. 집안메 이런 바보가 다시없었다는 말을 들었었어." 그리고는 다시 다섯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보여 줄 게 제미곤뿐이라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것도 열심히 연습해두면 쓸 만할 게야." 그게 시범의 끝이었다. "어떤가?" 입문식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원굉도가 물었다. "뭐가?" 진자룡이 되물었다. "쓸 만한 녀석이 있는가?" "다 괜찮은 애들이군." "자넨……, 다 좋은데 그 두리뭉실한 것이 큰 단점이야. 자네 눈에자네 진전을 물려줄 아이가 보이더냐는 걸세. 솔직하게!" 다그치듯 하는 원굉도의 말에 진자룡이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번 보고 그걸 어찌 아나?" 원굉도는 혹시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난? 그 악씨 녀석과 사가 녀석은 마음얘 안 들더군." 진자룡이 와외라는 듯 되물었다. "악씨 애는 총명이 과인한 듯해 자네 마음에 안 들 줄 알았지만 사써 애는 왜?" "아까 내가 뭔숭이 흉내를 냈을 때……, 그 두 녀석만 안 웃었어." 원굉도는 그게 심각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저으며 혀까지찼다. "정상이 아냐. 얘들은 애다워야지……!" 진자룡은 원굉도가 사람 보는 눈이 괴팍하기도 하다고 생각했지만이치가 아주 안 맞는 것도 아니니 뭐라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웃었다. "그럼 자네 보기앤 내 손자 녀석이 제일 낫겠군 그래."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뭔굉도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한참 동안이나 눈을 껌벅거리다가 불쑥 대답했다. "자네 손자도 정상은 아닐세!" "음? 어째서……" 진자룡이 여전히 웃음기를 띤 채 묻는데 원굉도가 그 말을 끊으며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이 진자룡의 입가에 남은 웃음기를 거둬 가버렸다. "맺힌 구석이 많을 녀석이 지나치게 구김살이 없어 그것도 정상은아닐세!" 입문식이 끝난 지 열흘이 지났다. 원굉도를 비롯해 손님들은 가고,오대가문에서 온 소년들은 진삼산에게서 곤법의 기초부터 배우고 있을때에 진가장의 후원 뒤뜰에서는 고대랑이 딸 셋과 함께 진자앙을 닥달하고 있었다. 애초에 고대랑은 입문식 때 시아버지가 한 말을 믿지 않았다. '이 녀석이 당신을 닮았다고? 흥, 어디가?' 그녀의 앞에서 진자앙은 벌써 일백삼십 번이나 반복해서 제미곤을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제대로 동작을 취하는 법이 없었다. 곤의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내공이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동작을 비슷하게 따라가려고 노력해도 어딘지 전혀배우지 못한 사람이 흉내를 내는 듯, 혹은 한두 살 먹은 어린애가 위태위태한 걸음을 내딛는 듯 어색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건 '배움이느려서'라고 이해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시아버지의 '자앙은 나률 닮았다'는 말은 애당초 빈말인 것이다. 고대랑은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손을 저었다. "관둬 ! 더 볼 필요도 없겠다." 진자앙이 무색한 표정을 하고는 연무를 멈추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아무리 단순한 동작이라고는 해도 일곱 동작을 백삼십 번이나 반복했는데 땀 한 방을 흘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체력이 좋아서'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고대랑은 그것을 '열심히하지 않아서'라고밖에는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킥킥거리며 바라보고 있는 세 딸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네년들은 연무는 하지 않고 뭘 하는 게야?" 청아, 소남, 소보의 세 딸이 쩔끔하며 연무를 시작하는 것을 뒤로하며 고대랑은 진자앙을 잡아 먹을 듯 노려보았다. 골백번을 더 반복시켜도 좋은 자세, 좋은 모양을 보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수없이 확인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다시, 또다시 끌어와 가르치곤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를 가지고있기 때문은 아닐까? 고대랑은 고개를 저었다. '미련은 이미 오래 전에 떨쳐 버리지 않았나!' 그랬다. 이제 와서 다시 기대를 하니 마니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래 전 그날, 도저히 잊지 못할 그날 두 아이가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그날의 일이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자앙을 보면 볼수록, 진자앙이무공에 소질을 보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여도사가 데려갔다는 그 아이의 생각이 강렬해졌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마음속 이야기. 아니, 내비치지도 못할 이야기였기에 그것은 그녀의 가슴속으로 더 깊이 사무쳐 가기만 한 비밀이었다. 진가장의 사람들은 그녀가 진자앙에게서 무가의 자손다운 모습을기대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진자앙에게서 찾는 것은, 그리하여 그녀의 깊은 죄책감을 사라지게 해주도록 기대하는것은 남편과 그녀를 닮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무공이었던 것이다. 고대랑은 사발 굵기만한 오유봉, 기름 먹인 몽등이를 불끈움켜쥐고는 진자앙에게 다가갔다. "시작하자!" 진자앙의 얼굴에 두려운 빛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둔하기로 소문난 그가 이 정도로 강력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보기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고대랑이 하자고 하는 일은 아무리 둔한진자앙으로서도 두려워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고대랑이 진자앙의 무인적 감각을 길러 주기 위해 고안한 연무방식,소위 '구명지로'의 연습시간이 된 것이다. 구명지로. 그것이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진자앙의 누나들이'목숨 구하는 길'이라는 그 '구명지로'를 '저승 가는 길'이라는 뜻의 '구명지로'로 바꾸어 부른다는 사실만 보아도 족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원리는 간단했다. 목숨을 구하려면 적의 공격얘 당하지 않으면 된다. 천하에 다시없는보법이니 뭐니 해도 적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역시 본능적인 감각에의존하는 것. 그러니 그 감각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고대랑의 신념이었다. 감각을 어떻게 기르는가? 실전을 방불케 하는 반복훈련과 약간의 자극으로 타고난 감각을 일께운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이것이었다. 고대랑은 오유봉으로 제미곤의 일곱 투로를 반복해서 시전한다. 그러면 진자앙은 피하면 되었다. 방법은 이렇게 간단하지만 실제는 전혀 쉽지 않았다. "벽!" 고대랑의 오유봉이 위에서 아래로 직선을 그리며 진자앙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지극히 단순명료한 동작. 거기에 사전신호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진자앙은 어디로 피할 즐 모르고 어리어리하다가 사발 굵기만한 검정 몽등이에 정수리를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빠악--! "욱!" 위애서 내리쳤으니 다음은 아래에서 올려치는 것이 원칙. 고대랑은사정 보지 않고 다음 투로를 전개했다. "도!" 부웅--! 몽등이라는 것이 아래위가 없어 보이지만 냉수에도 상하가 있다는데 몽등이라고 없을 것인가. 원래 곤의 머리 부분을 곤초라 하고 아랫부분을 곤파라 부르는데 '벽'에서 '도'로 이어질 때는벽은 곤초로 치고, 도는 뒤에 있던 곤파가 앞으로 돌아가며 상대의 하지를 지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머릿속으로 이렇게 이론을 꿰뚫고 있을 뿐 아니라 수없이 얻어맞고,그 자신 또한 수없이 시전해 본 것이니 몸에 익을 만도 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진자앙은 한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오유봉이 사타구니 사이로 파고드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달리 움직여 볼 엄두가 나지않는 것이다. 따악--! 아들의 사타구니 사이를 때리는 것은 아무리 수련 중이라고 해도 어머니로서는 못할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고대랑은 최후의 순간에 팔을비틀어 진자앙의 허벅지를 후려쳐 버렸다. "으윽!" 진자앙의 몸이 맞은 반대편으로 한바퀴 홱 돌아 후원의 돌바닥에 떨어졌다. "빨리 못 일어나!" 고대랑의 눈이 별호 그대로 성난 호랑이처럼 부릅떠졌다. 그 서슬에 진자앙이 비실비실 일어섰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일이었다. 죽이자고 한 일은 아니겠지만 저 정도 위력의 몽등이에 얻어맞고 제대로 일어선다는 것은 무공을 익힌 사람으로서도 그리 쉽지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진자앙은 짧은 비명 한마디만 남기고 다시 일어서고 있지 않은가. 체력 하나만은 알아줘야 할 일인데, 한번 밉게 보자니 뭐든 옳게보이지가 않는 고대랑의 눈에는 그것조차 미련한 구석으로 보였다. 그녀는 더 기다리지 않고 겨우 자세를 잡은 진자앙을 향해 연속적으로 다섯 투로를 시전해 공격해 갔다. "착, 륜, 삽, 슬, 교!" 비스듬히 아래에서 위로 아랫배를 찌르고, 곤을 반 바퀴 회전시켜옆구리를 후려치고, 다시 반대로 돌려 가슴팍을 때리고, 길게 찌르고찌른 상태에서 한바퀴 회전시킨다. 부웅, 딱--! 윽! 휘 잉 , 퍽--! 크윽! 파악--! 큭! 연신 얻어맞는 소리와 억눌린 신음 소리가 조용하던 후원에 가득 찼다. 진자앙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 단 한번도 피해 내지 못하고 고스란히다 몸으로 막아 냈다. 그 대가로 온몸에 무수한 상처와 멍 자국을 남겨야 했음은 물론이었다. 이래서 이 연무방식을 목숨 살리는 길이 아니라 저승 가는 길이라고했던 것이다. 이렇게 개 잡듯 패는데 저승으로 가지 않고 어떻게 견딜수 있을 것인가. 고대랑의 새로운 지도방식은 딸들이 보기에도 심한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후원 구석에서 꿈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났다. 고대랑은 안면근육을 실룩거리며 그 몰골을 보고 있다가 소리쳤다. "자, 처음부터 다시!" 뒤에서 보고 있던 진자앙의 세 누나가 오히려 측은해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동안 진자앙은 그로부터 일곱 번을 더 반복해서 구명지로를연습해야 했다. 물론 칠칠은 사십구, 총 마흔아홉 번의 공격, 마흔아흡 대의 몽등이질을 그는 고스란히 한 몸뚱어리로 받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맞고서는 곰같이 강한 체력 아니라 실제 곰이 온다 해도 곤죽이 되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진자앙도 마지막 일곱 번째의 연무가 끝났을 때는 곤죽이 되어 퍼더버리고 말았다. 그 머리 옆에 오유봉 끝이 내리찍혀 우렁우렁한 소리를 내었다. 고대랑이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공을 못 익히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네 인생이 불쌍하구나!" 아스라이 멀어지는 영상 속에서 진자앙은 문득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기억은 그날 맞은 어떤 몽등이질보다도 더 아픈 상처를 그의 가슴에 남겨 놓았다. 진자앙이 눈을 떴을 때, 처음 느낀 것은 차갑다는 감각이었다. 정신을 잃은 동안에도 시간 감각은 남아 있어서 지금이 봄이요, 그것도 봄, 여름, 가을만 있을 뿐, 겨울이라는 것은 볼 수가 없는 광동인지라 겨울일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지금이 겨울인가보다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느낌을 가졌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시에 수없이 읊어졌고, 그래서 전해져 만들어진 겨울의 느낌이 그렇게 차갑다는것뿐이었던 모양이었다. 깨어나 한참이 지나서, 그가 깨어나는 순간에느꼈던 차가움이란 사실 뒤뜰 깊은 우물 속에서 퍼 을린. 지하수의 청량함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는 물의 차가움과 세상의 차가움을 같은 것인 양 흔동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눈이었다. 연민의 정을 담뿍 담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 바로 그를 가장귀여워하는 다섯쪄 누나 진청아의 눈이었다. 정신을 잃은 그를 후원우물가에 끌고 와서 물을 끼얹어 준 사람이 그녀였던 것이다. 그럴 생각이 전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진자앙은 누나를 알아보자 웃음부터 흘렸다. 애의 바보 같은 미소였다. 어느새 습관이 되었는지 웃음은 시도 때도 없이 새어나오곤 했다. 진청아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아미를 찌푸리며 진자앙의 코를 때렸다. "뭐가 좋다고 웃니? 바보같이 헤벌레 웃는 모양 하고는……!" 진자앙츤 다시 한번 웃었다. 이번애는 의식적으로 웃는 것이었다. "누나!" "응?" "내가 정말 바보 같아?" 진청아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 속으로 아픈 빛이 흘렀다. 진자앙은 다시 한번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나도 내가 바보라고 생각해." 온몸이 욱신욱신 어어지는 듯 아파 왔다. 물애 젖은 옷자락 안에는피멍이 잔뜩 들어 있다는 것을 진자앙은 확인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후운에는 그와 진청아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진자앙은 들릴 듯 말듯하게 뇌까렸다. "어머니를 그렇게 아프게 하니 난 정말 바보야." 그는 다시 습관적으로 싱긋 미소를 짓고는 우물가를 떠나 걸었다. 그 옆을 진청아가 따라붙었다. "자앙아, 실망하지 마. 너는 분명 바보는 아냐. 누나가 알지. 단지……!" 진청아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진자앙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나가 할말이라곤 뻔했다. '바보는 아니다. 단지 무공에 소질이 없을 뿐이다.' 그 말이 지금의 진자앙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인지는 그도알고 누나도 알았다. 차라리 바보라도 무공이나 잘했으면 좋을 일 아니던가, 지금의 진자앙에겐. 진자앙은 더 말하지 않고 후원을 빠져 나와 중문을 거쳐 대문을 향해 걸었다. 진청아가 거기까지 따라붙어 소매를 잡았다. "어딜 가니? 이 몰골로." "시장 구경." "시장? 거기 구경할 게 뭐가 있다고." "재미 있잖아."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사실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지만--멍든몸에 흠뼉 젖은 옷을 걸치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시장으로 가겠다는이유치고는 너무나 간단한 대답에 질려 버렸는지 진청아는 그 자리에멈춰 서버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휘적휘적 걸어가는 동생을멍하니 보다가 다시 따라가 소매를 잡았다. "이거 가져 가라." 진청아가 내미는 것을 진자앙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뭔데?" 수놓은 주머니에서 꺼내 진자앙에게 내밀어진 것은 작은 은자한 토막이었다. 긴 은 막대기를 한 냥 간어치가 되게 자른 작은 토막. 그러니 진청아가 동생에게 내민 것은 은자 한 냥인 셈이었다. "가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어!" "이런 거……!" 펼요업다는 말은 나을 틈도 없었다. 진청아는 은자를 진자앙의 손에쥐여 주고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불산은 삼수, 즉 동강, 서강, 북강의 세강이 합쳐지는 지점에 자리잡은 도시로, 합쳐진 강은 이때부터 주강이라는 이름을 달고 바다로 홀러가게 되니 하운과 해운이 만나는 요충지였다. 그래서 역사상 강서의 경덕진, 호북의 한구, 하남의 주선진과 더불어 사대명진으로 불리고 있었다. 게다가 명소가 많고, 인근 석만진에서는 천하제일로이름난 도자기도 생산되기 때문에 오가는 상인들과 유람객들로 꽤나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당연히 시장에도 물산이 풍부하고 사람도 많으며 진기한 볼거리도 많았다. 그 시장거리를 진자앙은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원래 시장 구경을 간다고 한 것은 핑계였을 뿐 사실은 매 맞은 것이 역력한 몰골로 집에 있다가 아버지나 혹시 할아버지라도 보게 되면마음 아파할까 봐 나왔다는 것이 진자앙의 본심이었다. 그저 어디 한적한 강변에라도 가서 시간을 때우다 부기가 가라앉으면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장 구경을 간다고 돈까지 받았으니 안 가는 것은 또 누나에계 미안한 일일 것이다. 그레서 이렇게 하는 일 없이 어슬렁거리게된 것인데……, 저만치에 사람들이 등글계 모여 있는 것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뭔가 구경거리가 생긴 모양인데……?' 호기심에 다가갔던 진자앙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빽빽히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가만히 서 있어도 아픈 몸인데 저사람들 틈을 밀치고 들어갈 자신이 업었다. 사실은 별로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때, 눈군가가 진자앙을 아는 체했다. "여, 이거 진가장의 소공자님 아니십니까! 여긴 웬일이십니까?" 진자앙은 순간 귀찮게 됐다고 셍각했지만 습관적으로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 보았다. 삼십대의 장한 하나가 반갑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청색 무복에 붉은 허리띠를 동이고. 양쪽 어깨에서 허리로도엇갈린 열 십 자 모양으로 끈을 매었다. 제법 단정한 얼굴에두 눈이 반짝이고 있어 계대로 무공을 닦은 인물임이 분명했다. 만면에 반갑다는 빛을 가득 띠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모르는 사람이었다. 진가장은 광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작지 않지만 막상 무사의 수는그리 많지가 않다. 예전보다 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호원이니 그 외 잡일을 보는 사람 해서 삼십여 명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못 본 사람이 일을지도 모르고, 혹은 새로 고용한 사람일지도몰랐다. 그도 아니면 이런저런 일로 드나들다가 진자앙을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진자앙은 그의 신분을 확실히 몰라 애매하게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음, 그냥 구경차……" "이리 오세요, 제가 앞으로 안내해 드리죠." 진자앙은 시장 구경을 나왔다는 뜻으로 말한 것인데 장한은 이 사람무리 속에 벌어지는 일을 보러 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는 진자앙이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돌아서더니 빽빽히 들어선 사람들을 밀쳐 가며 길을 뚫기 시작했다. 진자앙은 그 뒤를 따를 수밖에없었다. 힘이 센 것인지 장한은 사람들 틈을 쉽게 비집고 길을 만들었다. 진자앙은 금세 등글게 모인 사람들의 제일 앞줄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사람들의 벽 안으로 등글게 공터가 나 있었고 거기에는 두 사람이있었다. 울퉁불퉁 근육이 불거진 장년의 사내 하나와 소년이었다. 날이 시퍼런 작두 하나가 땅바닥에 놓여 있고 사내는 그 작두를 목에받치고 엎드려 있다. 그리고 사내의 뒷목에는 보통 사람은 들기에도 힘들 것 같은 바위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사내는 웃통을 벗고 있었기 때문에 작두와 목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소년은 커다란 몽치 하나를 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 나오새요. 누구든 나오시라니까요. 누구든 힘 좋은 분이 나오셔서 이 바위를 깨보세요." 요컨대 작두를 목 아래 깔고 그 반대편 목에 얹은 바위를 몽치로 쳐서 깨는 시범을 보이갰다는 의미였다. 작두는 날카롭고 목은 약하다. 게다가 그 약한 목을 무거운 바위가누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위험하기 그지없어 보이는데 다시 몽치로내리치겠다는 의미였다. 바위가 께어질 정도로 강하게. 물론 자신이 있으니 그런 일을 하는 것이겠지만 혹시라도 실패한다면 사람들은 오늘 때아닌 참수형을 목도하게 되는 샘이었다. 잔인하고 참혹한 일일수록 보기 싫으면서도 또 눈을 뗄 수 없도록하는 마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징그러운 벌레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떠 외면하는 기색이면서도 또 그 속으로는 호기심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감추지도 않았다. 그들의 기대를 채워 주려는 듯 사내 하나가 빙글빙글 웃으며 사람들속에서 걸어나왔다. 짧은 윗도리를 걸쳐 우람하게 튀어나온 배와 그가운데 움푹 파인 배꼽을 감추지 못하는 비대한 사내였다. 그는 소년이 들고 있는 몽치를 받아들며 바위를 얹고 엎드려 있는사내를 향해 위협하듯 휘둘러 보였다. "바위를 깨는 건 어렵지 않은데 다른 것까지 깨진다거나 하면 어쩌지? 그러니까……, 깨지거나 잘라지면 몹시 아까울 그런 것 말이다." 체구에 걸맞게 제법 뚝심이 있는지 비대한 사내는 소년이 두 손으로도 힘겹게 들고 있던 몽치를 가볍개 한 손으로 들고 휘두르고 있었다. 입가에 띤 미소가 번들번들한 개기름과 합쳐져 느물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도 그런 것을 느꼈는지 인상을 구기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몽치얘 맞아 께어질 물건이면 아까울 게 무어 있겠소? 나오셨으니 빨리 치쇼!" "그래……?" 사내의 웃음기가 그대로 입가에 굳어 버리고 눈가에 잔인한 광채가흘렀다. 소년의 대답이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철완비불이 오늘 시장통 떠돌이 나부랭이에게 완전히 무시당하는군. 좋아, 시키는 대로 하지 뭐!" 철완비불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사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몽치를 치켜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허공에 두어 번 휘돌리더니 그대로 바위를 내리쳤다. "저런!" 진자앙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깡--! "우와아--!" 쇳덩이가 바위를 때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게 울리고 이내 터져 오른 탄성이 그 소리를 덮었다 진자앙은 가늘게 눈을 떠 보았다. 몽치질이 충분치 않았는지 바위는 귀퉁이만 부서졌을 뿐, 완전히 깨어지지는 않았다. 바위 아래 깔린 사내는 무사했다. 소년이 인상을 쓰며 철완비불을 비웃었다. "강철팔뚝이라고요? 아이 팔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군요!" "방금은 준비운동이야. 진짜는 지금부터지!" 철완비불은 유유히 웃으며 다시 몽치를 들어을렸다. "비열한 자식!" 진자앙의 곁에 서 있던 장한이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진자앙은왜 그러는지 물어 보려 했지만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다행히 장한이 묻지도 않았는데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저 철완비불이란 돼지 녀석은 성질이 비열하기로 인근에 유명한 건달입니다. 지금도 한번에 바위를 부술 수 있는데도 일부러 여러 번 치려는 겁니다. 천하에 비열하고 잔인한 놈!" 말인즉슨 이러했다. 바위를 얹은 사내와 소년은 재주를 보여 주고 약을 막는 사람들이었으며, 직금 그들이 보여 주는 재주는 차력미기라고 부르는것인데 일종의 호흡법이었다. 즉. 호흡을 조절해서 신체의 외피를 순간적으로 강하계 하고 충격을 다른 곳엔 흘림으로써 호신하는 하급무공의 하나였다. 이 차력미기의 약점은 정신통일 상테가 유지되는 동안, 혹은 한번모은 호흡이 이어지는 경우에만 호신 효과가 있다는 것인데 지금 철완비불은 몽치로 때리는 시간을 길게 해서 호흡을 흩뜨리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대항하지 않는 사람에 테한 살인형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자연 철완비볼을 두 번째에도 바위를 께지 못해 다시 두 번이나 더몽치를 내리쳐야 했다. 팍--! 여러 번 맞아 금이 잔 바위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몽치는 바위를 부수고도 힘이 남아 그대로 사내의 목을 후려치고 있었다. "아니, 저런!" 진자앙의 옆에 있던 장한이 주먹을 불끈 쥐고 나가려고 하다가 멈추었다. 철완비불의 몽치 아래에서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대단한 힘이오. 감탄했소, 감탄했어!" 사내가 손가락을 치켜 들어 철완비불을 칭찬했다. 근육질이긴 하지만 그리 크다고 볼 수 없는 키에 얼굴에는 주름살이 깊이 패여 자세히보면 오십 줄이 넘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러나 전신을 둘러싼 근육에는 힘이 넘쳐 보이고, 그 두 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광이 번뜩이고 있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 수있었다. 그렇게 몽치에 맞고도 목에는 붉은선 한줄가지 않은 것이다. 철완비불은 이런저런 시도가 모두 어긋나자 머쓱해진 얼굴로 머리를긁으며 사라졌다. 사람들 틈에서 박수 소리가 우레와 같이 퍼져 나왔다. 사내가 사람들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자 옆에 섰던 소년이마치 자기가 박수를 받은 것처림 손을 들어 조용히 하도록 시키고 입을 열었다. "보셨다시피 이 사람은 맞는 게 직업이요, 장기이고, 유일한 생계수단이올시다. 그래서 이름도 매를 판다고 해서 팔 매 칠 타 놈자, 매타자 즉, 매를 파는 놈이지요." 매를 파는 사람, 매타자 소삼중을 그 제자는 놈 자 자를 그대로사용해서 소개하고 있었다. "사람 사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여기 이 사람, 제 사부님은 물려받은 땅이 없으니 농사도 못 짓고, 널빤지 조각배도 없으니 고기잡이도 못 하고, 사냥을 하려니 걸음이 느려 토끼 뒤도 못 쫓는 답니다그려. 가진 건 몸뚱어리 하나요, 특기라곤 맷집이 남다르다는 것뿐이라 맞는 것을 주특기로 하고, 그것을 생계수단으로 삼기에이르렀습니다. 그럭저럭 나이 오십을 먹고 보니 남들처럼 아들 손자도없고 그렇다고 계속 맞고만 살아서야 사람 새끼의 사는 것이 아니더라이겁니다. 그래서 인심 좋은 광동 땅, 그 중에 풍광도 좋은 불산 인근종화에다가 금강당이라고 작은 초가를 지어 놓고 무술을 가르칩네 하니, 특기라곤 맞는 것뿐인데 제자라고 올 리가 있나요. 어쩌다 제자라고 하나 얻어 걸린 것이 저, 유소림인데 사실은굶어 죽어 가는 거지 새끼를 주워다 기른 거죠. 제가 사흘을 굶고 거리에 뒹굴다가 구함을 받았습네 하고 금강당에 입문을 하고 보니 속았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치더군요. 대낮에도 호랑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심심산골에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하나 지어 놓고 그게 사문이라는겁니다. 거리에서 굶어 죽나, 심심산골애서 굶어 죽나 장소만 다르지굶어 죽는 건 마찬가지 형편인 셈이라 이겁니다." 소년은 출신이 거지라 그런지 정말 입이 걸었다. 어찌 들으면 욕도심한 욕일 수도 있는 말을 거침 없이 내뱉는데 그 옆에 선 사내, 명색이 사부라는 사람은 원래 그렇게 말이 없는지, 아니면 소년의 말에 전혀 불만을 못 느끼는지 아무 소리 없이 듣고만 잇었다. 그의 깊게 주름잡힌 얼굴에서는 아무 감정도 찾아볼 수 없자 사람들은 그얘게서 쏟았던 관심을 소년의 유창한 말솜씨에 돌려 버렸다. "그래서 제가 궁리를 낸 것이 바로 이것, 약 파는 겁니다." 어려운 속사정을 하소연하기가 산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 것보다더 어렵다는 말도 있다. 강호에서 무공을 팔아 살아나가려 해도 장사꾼과 같은 수완과 구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도 격식이 있어서 처음 시장에 자리를 만들면 먼저 사람들 복판애 서서 차례로 돌아가며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이것을 양읍이라고 한다.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치레로 두어 마디 말하고 나서 자기 소개를 해야 하며, 펼요하면 자기를 가르쳐 준 사부님을 치켜세우는 따위의 말 같은 것도 좀 한 후에 무술 실력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유소림이 하는 것이 자랑콰는 좀 거리가 있지만 양읍의 한 형식이긴 했다. "맞는 데도 재주가 있어야지요. 어떤 재주냐 하면 다치지 않개 요령껏 맞는 재주하고 혹시 맞아서 다치면 치료하는 재주입니다. 제 사부님이 달리 자랑할 건 없어도 그 두 가지 재주만은 가히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다고 제가 보증합니다. 다년간 나무몽등이에도 맞고, 쇠몽등이에도 맞고, 돌몽등이에도 맞고, 채찍에도 맞고, 그냥 돌멩이에도 맞고, 몽치에도 맞았으며 심지어는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이나 가시 송송한 철퇴, 이리 이빨 같고 호랑이 이빨같이 날카로운 화살들과 색목인들이 사용하는 철포예도 맞아 보았으면서도 아직껏목숨을 부지하신 것이 다 이 재주 덕분입니다." 유소림의 얘기는 남이 알면 창피할 듯한 말도 다 하고, 들어도 믿기지 않을 만큼 처량한 얘기도 다 하면서 구절구절 이야기를 이어졌다. 묘한 것은 내용만 보면 눈물이 절로 솟구칠 만큼 처량하고 불쌍한 내용들인데 듣는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 소삼중은 그저 옆에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고 소위 제자라는 것이 욕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얘기를 다하고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는 것이다. "개도 서당 옆에 삼 년 있으면 풍월을 읖는다는데 저희 사부라고 얻은 것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평생 맞고 치료한 경험을 모아 이 약, 화타고를 만들었습니다. 맞아 다치고 삐고 멍든 데뿐만 아니라,가렵고 따갑고 쓰리고 아플 뿐 아니라 남에게 말하기도 곤란한 피부병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직효약이 이것이올시다. 모름지기 자신이있는 자는 말이 적고, 말이 많은 자는 자신이 없다고 하지요. 약 선전은 이만 하겠습니다. 무인에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만 하고 재주를보이지 않는 건 말만 공부한 놈이고 재주만 보이고 말이 없는 건 벙어리라고요. 보잘것언는 재주나마 몇 가지 더 보이겠습니다. 물론 제 사부님이요. 약은 그 후에 팔지요. 재주를 보이고 약을 다 팔면 다른 돈은 안 받겠습니다만 구태여 돈을 주시겠다면 제가 도로 내던질 수는없겠지요. 그럼 재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유소림의 그 말을 끌으로 소삼중이 다시 묘기를 보이기 시작혔다. 목올대 바로 위, 천돌혈애 날카로운 창 두 자루를 겨누고,그것을 단지 목외 힘만으로 부러뜨리는 묘기인 은창자후와몇 사람이 나와 각목으로 비 오듯 때리면, 때리는 족족 각목이 부러져나가는 철포삼의 시범이었다. 진자앙으로서는 처음 보는 묘기라 보는 것마다 신기한데 그의 옆에서 있는 장한은 지루한 듯 하품을 했다. "볼 거 없죠? 그냥 강호 하류배들이 흔히 하는 무술일 뿐입니다." "그럼 왜 구정하고 있는……?" 장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소 지었다. "무공은 별볼일얼는태 파는 약은 신통하개도 진짜거든요. 속는 셈치토 몇 번 써봤습니다만 약효가 좋아요. 우리 같은 무인들에게는 꼭 필요한 약이죠."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고……" "흔히 이런 곳에서 싸구려 무공을 보여 주고 파는 약츤 거개가 엉터립입니다만, 이 화타고는 진짭니다. 중화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 봤더니 산속에 오두막 하나 짓고 금강당이라고 이름을 볼여서 무공을 가르치는 것도 사실이더군요. 하지만 제자가 저 아이 하나뿐입니다. 누가그런 하급무공을 배운겠습니까?" "내가 볼 땐 괜찮은데 왜 하급무공이라고……" 장한은 그 말을 듣고는 눈을 휘등그렇게 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진자앙을 바라보았다. "그런 말씀을…… 설마 진심으로 물어 보시는 건 아니실 데죠? 광동진가장의 후계……, 아니 자손이!" 진자앙은 순간적으로 바보가 된 것 같아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니, 이미 난 바보 아닌가. 다들 그렇게 알고 있으니 나만 아니라고 한들 무엇 할 것이냐.' 그는 습관적인 웃음을 지으며 장한을 보았다. "아니 , 난 진심으로 묻는 것인데……?" 장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진자앙의 소매를 뜰고 사람들 틈을빠져 나왔다. 그는 낮은 소리로 소삼중의 무공을 하급무공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려 주었다. "일반적으로 무공이라는 것은 내공과 외공으로 나누어지잖습니까. 설마 그것도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외공에 비해서 내공을 보다 고급무공으로 보는데, 그것은 외공에 비해서 익히기는 어렵지만 도달할 수 있는 성취가 끝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사람의 무공은 외공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급무공이죠." "하지만 무슨 무공이든 자기에게 맞는 것을 열심히 익히기만 하면좋은 것 아닌가……?" "그것도 정도차라는 것이 있지요. 철포삼 같은 걸 익히면 뭘 합니까. 익히는 방법도 무식해서 자칫 잘못하면 골병들기 십상인 데다가,오래 연공해서 겨우 익혀도 몽등이나 칼은 막을 수 있겠지만 내공에는상대가 안 된단 말입니다. 장풍 한 방이던 내장이 토막토막 끊어져 죽어 버릴 텐데요." "그…… 장풍이라는 것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던데……?" 장한의 얼굴이 시뺄게졌다. 사실은 그도 장풍은 못 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익혀서 천하제일이 될 걸 익혀야지, 고수라도 만나면 한 방에 죽을 걸 왜 생고생해서 익힙니까?" "천하제일이 아무나 되는 건가……?" 장한의 얼굴이 다시 시뻘개졌다. 이번에는 진자앙의 대답이 그를 비꼬는 것 같이 들렸기 메문에 화가 난 것이었다. "말이 안 통하는군요! 그령게 좋아 보이면 공자님이나 배우십시오."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 진자앙이 불렀다. "어어…… 약도 안 사고……?" "하!" 장한은 다시 한번 뒤돌아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사라져 버렸다. 진자앙은 사실 그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또 뭔가 잘못한 모양이지?' 그는 다시 한번 습관적인 웃음을 짓고는 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멈춰 섰다. 장한이 했던 말이 갑자기 머리를 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몽등이나 칼은 막는다고……?" 익히면 적어도 몽등이나 칼은 막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소삼중이했던 말도 다시 기억났다. "맞는 것밖에는 재주가 없다고 했지? 맞는 재주로야 나만한 사람도없잖아……?" 그는 잠시 더 고민을 하고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시장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사람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장사가 끝난 소삼중이 짐을 챙기고 유소림과 함께 시장을 떠난 것은저녁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렬이었다. 그때 한 소년이 길바닥에 엎드려절을 했다. "제게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소삼중은 시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소년, 진자앙을 힐끗 보고는 그냥 걸어갔다. 대신 유소림이 대답했다. "무공을 배우고 싶으면 종화 금강당으로 찾아와!" 진자앙은 그것이 승낙인지 반승낙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최소한 거절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쉼게 허락을 받을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기뻐서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곧 가겠습니다." 그 소리에 소삼중이 돌아보았다. 무공을 배우러 오라고 해서 정말 오는 경우는 열에 하나였다. 그중에 사흘을 견디는 사람은 다시 열에 하나에 불과하고, 다시 한 달을견디는 사람은 열에 하나. 금강당 같은 이름없는 문파에 오는 사람이애초애 천 명이 넘을 리 없었으니 결국 하나도 못 건진다는 말파 같았다. 그러니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별반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못 배울 테니까. 지금 옆에 있는 제자만 해도 길거리에서 주운 거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제자라기보다는 오갈 데 없는 거지를 키워 주는 것. 그런데 지금 인사한 저 소년은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간단한 두마디 속얘 무공을 배우고 싶어하고, 또 꼭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소삼중은 돌아서서 소년을 자세히 보았다. 얼굴 이곳저곳에 든 멍자국이 바로 눈얘 들어왔다. '어디서 두들겨 맞고 분한 김에 무공을 배우겠다고 한 모양이군!' 그래 가지고서는 꾸준히 무공을 배울 수가 없다. 얻어맞고 분한 마음이야 멍 자국이 희미해지는 것과 함께 엷어지다가 결국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땐 왜 무공을 배우려고 했는지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체격도 큰 녀석이……!' 소삼중은 두 번째로 실망했다. 남들이 볼 때는 근골이 좋으니 재질이 있어 보이느니 할지도 모르지만 소삼중이 보는 눈은 달랐다. '저 체격으로 어디 가서 맞았다면 오기도 없는 놈일 테지!' 재질은 없어도 좋았다. 그러나 오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가없는 것이다. '게다가 비단옷!' 소삼중은 이 소년을 포기했다. 비단옷을 걸친 소년이라면 부잣집 자제라는 뜻이었다. 부잣집 아들이 할 일이 없어서 소삼중과 같은 떠돌이 약장수에게 무공을 배우겠는가. 또 집에서는 허락을 해줄 것인가! 소삼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이제 이 소년에 대해서는아무런 기대도 않게 되었다. "무공을 배우겠다면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와라. 증거를 가져 오지않으면 혹시 온다고 해도 받아 주지 않겠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돌아서 버렸다. 소년은 아마도 오지않거나, 오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제육장] 남아는 집을 나서고 여아는 굴에서 도망쳐 나오다. "뭐라고?" 진삼산은 귀에 손을 대며 다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애비가 늙은 탓에 가는 귀가 먹어서 잘 못 들었다. 다시 말해 줄래?" 진삼산이 늙었다고는 해도 가는 귀가 먹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방금 한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는 것이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진자앙인데도 순진하게도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하늘 같은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 말을 믿는단 말인가. "종화 금강당에 입문하겠습니다." "종화 금강당? 그게 뭐냐?" "그게……, 종화에 있는 문파인데……, 개파조사가 저기 시장에서약 파는 매타자라는 별호에 소씨 성을 가진 분으로 함자는 삼자 중 자를 쓰시는 분인데……!" "누가 그걸 몰었느냐?" 진자앙이 주절주절 설명을 하려 들자 진삼산은 발끈 화를 내었다. "종화 금강당이라는 게 어디서 굴러먹던 말뼈다뀌가 세웠는지 그걸알고 싶다고 했느냐. 요는……, 요는……!" 흥분하면 말을 더듬을 뿐 아니라 할말을 바로 바로 생각해 내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는 진삼산이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고대랑이말을 도왔다. "이름도 없고, 역사도 없는 하급문파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게다." "그렇지 ! 그…… 그런……!" "하급문파애 가서 뭘 배우겠냐고 말씀하시는 거다." "그래, 그거야! 지…… 집……!" "집안 망신시킬 일 있느냐?" 심드렁한 어조이긴 하지만 자기의 뜻을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는 고대광을 향해 진삼산은 발끈 화를 냈다. "이잰 그냥 내가 말하려고 했어!" 고대랑은 고깝다는 듯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저었다. "말하슈!" "밀하라면 못할 줄 아나?" 진삼산은 한번 더 핀잔을 주고 나서야 진자앙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대랑을 바라볼 때완 달리 최대한 표정을 너그럽게 하고서였다. "어떻게 할 거냐?" 진자앙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곤란할 때 흔히 하는 행동이긴 했는데, 이게 또 멍청해 보인다고 핀잔을 듣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 행동을 자산의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한 진삼산이 내처 물었다. "그래도 거기 가서 무공을 배우겠느냐?" "답답하긴……! 물어 보고 말고 할 일이 어디 있어요! 무조건 안 되는 것이지!" 뒤에 잠시 물러섰던 고대랑이 진삼산의 대응 방식을 보다보다 못 참겠는지 불쑥 나서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러 이젠 집안 망하게 할 일만 하고 다니는구나! 광동 진가장 자손이 어디 무공을 배울 곳이 없어서 이름도 없는떨거지 문파에 입문을 한단 말이야? 그런 기가 막힌 생각만 하고 자빠졌으니 이 에미가 가르치는 건 하나도 못 배우지! 저걸 아주 그냥……!" 진삽산이 눈을 부라렸다. "닥쳐! 이 여편네야! 뭘 잘한 게 있다고 나서는 거야, 나서길! 입닥치고 저리 못 가!" "뭐 , 뭐라고요……?" 삼십 년래에 처음 당해 보는 세찬 반격에 놀란 고대랑이 잠시 말을잊고 머뭇거렸다. 기가 막힌 것이다. 눈만 부라렸다 하면 고양이 앞의쥐처럼 떨던 진삼산이 이젠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기까지 하다니! "여편네가 자꾸 멍청하다. 어쩌다 하면서 애 기를 죽여 놓으니까 잘할 수 있는 것도 못하게 되고 그런 거 아냐! 아들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걸 노상 바보, 멍청이라고 불러대니 뭐 하나 배울 맘이 나겠어! 애가 이렇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알고 보면……?" 고대랑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진삼산의 턱 아래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알고 보면 뭐라는 거죠?" "아, 아무것도 아니오." 진삼산이 주춤했다. 진자앙 탄셍 이후 어지간하면 서로간에 건들지않던 문제를 무심결에 건드린 것이다. 진자앙을 낳던 그날의 일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그날의 일에 대해서 각기 다른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진삼산은 멀쩡한 아들 하나를 약 한번 잘못 먹여서 망쳐 놓았다는통한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그런 일을 저지른 흉수가 부친의 천구이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도 하지 못한, 그래서 울화를 풀 길없는 분통터지는 기억이 주는 아픔이었다. 아들 진자앙이 변변한 녀석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개 아들의 그것은 병이지 결코 선천적인 한계가 아니었다. 그날의 그 일만 없었으면 어떤 식으로 자신을 빛내는지 그것만 기대하고 지켜보는 것이 만년의 낙이 되도록 해줄 수도 있었을 그런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 꼴이 되다니……! 아들을 보면 그도 답답하긴 했지만 답답함보다는 분노가, 분노보다는 애처로움이 앞을 가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물정 모르고 아들을 구박하는 고대랑이 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대랑은 남편에 비해 몇 베는 더 그날의 일에 대해서 민감했는데그것은 그녀의 아픔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점에상당 부분 원인이 있었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잊을 수도 없는 의혹과 회한이 장장 십이 년이나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고, 다시 몇십 년을 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해야 할지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이미 십수년이 지났지만 남편 모르게 사람을 풀어 그날 그 여도사의종적을 찾는 것은 아직도 비밀스럽게 진행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녀와일을 맡은 한 사람을 재외하고는 그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찾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찾지 않고는못 배길 그 답답함을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자앙에 대한 그녀의 마음도 그런 답답함의 연장이었다. 어느 날은닮은 것도 같고, 어떤 날은 전혀 닳지 않은 남의 자식 같기도 했다. 뼈대가 굵고 이목구비가 큼직한 것은 남편이나 자신을 닳은 것 같기도 했지만 시아버지인 진자룡의 왜소한 체격을 보면 역시 집안 내림은아니었다. 코끝이 둥그스름한 것은 남편을 닮은 것도 같지만 눈꼬리가약간 처져 순한 인상인 것은 둘 중 누구도 닳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무공에 관련해 아무런 소질도 보이지 않는 것은 집안의 누구도 닮지 않았다. 일곱 딸 중 누구도 그렇게 무공에 소질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남자로 태어났으면 족히 일개 지역의 패주가 될만한 재질들을 지녔다고 해야 했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진자앙이 그녀와 광마 진삼산의 아들인 증거는 없는 것이다. 차라리 찾지 못했으면……차라리 찾지 못했으면 속은 탔겠지만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고대랑은 문득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차라리 보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두 부부가 싸우다 말고 해묵은 고민과 회한에 빠져 있는 동안 그 모든 일의 실질적인 당사자인 진자앙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례비를 어떻게 만들지?' 사례비라는 것은 스승을 모시는 사례금, 달리 말하면 수업료라고나할 명목의 것이었다. 옛날에는 마른 고기, 즉 육포 한 묶음으로도 그것을 치렀다고 하는데 세월이 가면서 점점 비싸져서 명문이나 명인의 문하가 되기 위해서는 집 팔고 논 팔아서 바쳐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론 명문대파애서는 그런 경우가 없다. 소위 구대문파는 나라에서내려 준 봉토, 식읍이 있어서 따로 수업료를 받지 않아도생활에 곤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명문대파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 어려운 일에는 그만큼 대가가 지불되는 것이 당연했다. 소위 문파가 인정하지 않은 '소개료' 라는 것이 역시 집 팔고 논 팔아야 구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절대 없는 것이지만. 흑도문파에도 '공식적'으로는 그런 경우가 없다. 그들은 문파 자체가 하는 일이 있었다. 예를 들면 통행료를 받는다거나 보호세를 받는다거나 아예 약탈을 한다거나 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그런 일을 하자면 사람이 많이 펼요하고, 이왕이면 재주있는 사람이 많으면 좋다. 그러니 들어오겠다는 사람을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명문대파에도 소개료가 있는데 흑도문파에 그런 것이 없을리가 없었다. 소위 잘나가는 문파, 물 좋은자리에 가려면 역시 상당액수의 소개료를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공자가 말한 바, '마른 고기 몇 속만 바치고 들어오는 제자도 나는 거절한 적이 없다'는 말은 오늘날에는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진자앙은 여태 집에서 어머니에게 무공을 배웠고, 그런 만큼 사례비때문에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해야했다. 아까 소상중이 떠나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그에게 소삼중의 제자가 다가와 사례비를 요구했던 것이다. 일단은 누나가 준 한 냥짜리은막대기를 주었지만 적어도 그 열 배 이상을 입문하는 날 가져 오라는 것이 그 제자의 말이었다. 금강당에 입문하려면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종화는 불산에서 동북쪽으로 백 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온천 지역이었다. 그곳은 산이 많고 장족, 요족, 묘족등의야만족들이 살고 있어 한족이 아직 밟아 보지 않은 원시림이 우거져 있는 곳이었다. 그곳 종화에 있는 수많은 산중에서도 오지산에는 높이가 백장에 달하는 거대한 폭포가 있으며 폭포 위에는 천호가 있어 선경을 이루고 있다. 그 정상에 열두 개의 혈이 있고, 그곳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와 온천을 이루는데, 여러 가지 병에 효과가 있다고 했다. 금강당은 바로 그 온천 지역 옆에 있다고 했다. 그곳이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오백 년 간 잡혀 있던 곳과 이름이 같다거나, 온천으로 통하는 관도만 한족의 지배하에 있을 뿐 다른 곳은야만족의 손 아래 있다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진자앙에게 중요한 것은 그곳이 불산에서 백 리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집에서 왔다갔다하며 무공을 배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세가의 자손같이 금이야 옥이야 호강한 진자앙은 아니었다. 그러나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집을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집안에서 천덕꾸러기로 있을수만은 없었다. 이렇게 다시 십년을 보내고 또다시 십 년을 보낸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기때문이었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반드시……!' "자앙아!" 전삼산이 상기된 얼굴로 아들을 불렀다. 고대랑과 백날을 싸워 봐야 질 것이 뻔한 처지에 계속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큰 싸움이 되기 전에 말을 돌리려고 진자앙에게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 테냐?" 포기하라는 압력의 뜻으로 물은 것일 터였다. 좋게 말할 때 그냥 없었던 얘기로 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위협의 뜻이 진삼산의 표정에, 낮게 깔린 목소리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진자앙은 그런 압력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은자가……!" 진삼산은 인상을 썼다. 이게 무슨 엉뚱한 대답이란 말인가! "응?" "은자가 조금 많이 펼요하긴 하지만……, 또 집에서 떠나서 지내야되긴 하지만…… 돈은 제가 그 동안 용돈을 쓰지 않고 모은 것이 다섯냥 가량 있으니 다섯 냥만 더 여비조로 주시면 제가 아껴서 가져다 바치고……, 집 떠나는 것은……!" 진자앙은 그것만은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말을 몇 번이나 목구멍까지 내밀었다가 다시 삼키고 하더니 그예 말하고 말았다. "열두 살이면 이젠 어린애도 아니고……, 나중에 혼자 살 방도도 마련해야……!" "닥쳐라 이놈!" 진삼산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고는 그래도 남은 분을 못 이겨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고대랑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맞는 말인데 왜 그러시우? 후계자 자리도 남에게 넘어갔으니 혼자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말도 맞고…… 단지 쟤 입에서 그런멀쩡한 소리가 나오는 걸 들으니 귀가 의심스러을 뿐이지!" "당신도 닥치지 못해!" "닥치긴 이 시점에서 뭘 더 닥쳐요! 당신도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하란 말이에요! 분명 얘가 정상이 아닌데 그렇게 끼고 돌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요, 대체!" "그렇다고 애를 그런 허접쓰레기 같은 문파에 보내?" "자기가 하겠다는 걸 어쩔 거요? 자기가!" "난 내 아들은 절대 그렇게 못 보내! 체면이 있지!" "그저 아들, 아들! 그럼 딸은 그렇게 보내도 된단 말이요?" "그 얘기가 아니잖아!" 진삼산은 성질이 급한 만큼 목소리가 큰 것으로도 유명했다. 다른많은 일들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고대랑 또한 절대 남편 못지않았다. 그런 두 사람이 한껏 소리를 질러 가며 싸우고 있으니 천장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해도 밖에서 그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었다. 집이 떠나가라고 소리가 나고, 또 그 소리의 내용이 과히 좋은 것이아니었으니 싸움 났다는 것을 모를 리도 또한 없었다. 진가장주 부부가 싸움을 하면 말릴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결국 늙은 진자룡이 아들내외의 싸움을 말리러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보내 주자꾸나!" 진자룡이 여차저차한 사정 얘기를 듣고 내린 판결이었다. "그러나……!" "얘가 하고 싶어하는 것도 처음으로 보는 것 같구나, 내 기억에는! 그렇지 않으냐?" 진삼산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항변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아버지말대로 진자앙이 뭔가를 하고 싶어서 조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하고 싶어하는 일은 열심히 하개 마련이고, 열심히 하는 일에는 성과가 있기 마련이지. 기대해 보자꾸나!" "하지만 약장수가 가르치는 외공 나부랭이나 배워서야……!" "외공, 외공 하지만 그것이나마 제대로 익힌 자가 누가 있던가? 단순한 것이라 얕보지 말고, 유명한 것이라 자만하지 말지니……!" 진자룡은 손자를 내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집 나가서 살 수 있겠느냐?" 대부분의 경우애 말끝을 흐리는 진자앙이었지만 묘하게도 할아버지와 말할 때는 또박또박 대답하곤 했다. "이젠 저도 어린애가 아니니 견뎌야 할 줄 압니다. " "그래, 이젠 애가 아니라…… 우리 손주가 언제 이렇게 컸나, 허허!" 그는 진자앙이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한껏 웃더니 다시 물었다. "언제 돌아을 참이냐?" "사내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고들었습니다. 저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던 진자룡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가지고 갈 것은? 원하는 게 있으면 다 주마!" "은자 다섯 냥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진자앙은 다음날 자기가 모은 은자 다섯 냥에 할아버지가 준은자 다섯 냥, 합쳐서 은자 열 냥을 들고 집을 나섰다. 할아버지에게는 거처에서 인사를 드렸으나 아버지, 어머니는 방문도 열지 않았다. 대문까지 그를 전송한 것은 진노육을 비롯한 집안의 가솔들뿐이었다. 특히 왕숙수는 특별히 만든 길 음식을 보따리에 싸서 어깨에 걸어주었고, 진노육은 강가애까지 따라나와서 종화까지 가는 데에는 뱃길이 빠르다고 배에 태워 주고, 뱃삯을 치러 주었다. 맑은 봄날, 아침이었다. 불산에서 종화로 가는 길은 뱃길로 백여 리, 물살을 거슬러 가는 여정이었기 때문에 꼬박 이틀이 걸렸다. 거기서 금강당이 있다는 오지산까지는 뱃길로 다시 이십여 리를 더 가야 했는데, 진자앙은 그걸 모르고종화현성에서 내렸기 때문에 나머지 거리는 걸어가야 했다. 강줄기를 따라 이십여 리를 걸으면 오지산이 나온다니 찾는 데 어려움은 없을 터였지만 강가를 따라 쭉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군데군데 산을 통과하기도 하고, 한참 돌아가기도 하며 오지산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 되어 버렸다. 산속의 밤은 무서웠다. 길에는 인적이 끊어지고, 산짐승들의 울음 소리가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들려 와 거리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지산 안은 한인들보다는 야만족들의 생활 터전. 사람을 잡아 먹는다느니 어쩌니 하는소문을 익히 들은 진자앙으로서는 짐승보다 오히려 그들을 더 무서워하고 있었다. 해는 산 너머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 잔광은 남아 아직 아슴푸레하나마 밝은 동안 진자앙은 노숙할 곳을 찾았다. 길에서 약간 벗어난 곳이면서 사방을 관찰할 수 있도록 트인 곳이 아니면 안 되었다. 그런 곳은 이내 발견되었다. 길에서 벗어나 산마루로 약간 올라간 곳에 마치 만들어 놓은 것처럼평평한 곳이 있고, 주변에는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는 장소였다. 진자앙은 품속을 뒤져서 가죽주머니 하나를 꺼내었다. 은자 열 냥을넣어 둔 주머니였지만 지금 찾는 것은 그 밖의 다른 것이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그는 최소한 바보는 아니었다. 길을 가는 데 필요할 만한 것을 챙기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단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화도와 화석, 그리고 화섭자를 꺼내어 모닥불을 피웠다. 추워서가 아니라 불이 없으면 짐승을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진자앙은 왕숙수가 싸준 길 음식, 건량을 꺼내어 씹었다. 만약을 위해 조금씩 아껴 먹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는 반 정도를 더 남겨 두었다. 사흘이면넉넉히 가리라고 했던 사람들의 말이 틀렸던 것처럼 금강당을 찾으려면 앞으로도 며칠이 더 걸릴지 몰랐다. 그러나 음식을 사 먹을 돈은없었으니 이것으로 어떻게든 버터야 하는 것이다. 날이 완전히 저물고 나뭇가지 사이로 달이 떠올랐다. 하늘을 보고 누워 있던 진자앙은 문득 다른 생각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불은 짐승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짐승을불러들이는 표식이기도 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야만인들을 불러들인다는 것이었다. 그는 흙을 긁어 모닥블을 끄려다가 다시 손을 멈추었다. 불을 끄고나면 짐승들은 또 어떻게 막을 것인가! 어차피 발견될지도 모르는 것이니 차라리 모닥불을 무기로 해서 대항하는 것이 어떨까? 그는 이내 그 생각은 걷어 버렸다. 그가 어떻게 짐승을 막는단 말인가!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를 그가 아니던가. 혹시 잠을 안 자고 지키고있다가 짐승들을 미리 발견한다고 해도 싸워 이길 자신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야만인들은 그런 식으로 절대 상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진자앙은 머리를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곧 고개를 끄덕이며주머너를 다시 꺼내었다. 주머니 안에서 불빛을 받아 붉게 번뜩이는 비수 한 자루가 나타났다. 사실 불빛이 없을 메도 그 비수는 붉은 광채를 뿜어 내곤 했는데다섯째 누나인 진청아는 그게 비수가 피에 목말라 하는 증거라고 말하곤 했었다. 단룡비. 가전의 보도 중 하나로 원래 다섯쩨 누나의 것이었지만 집을나설 때 그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진자앙은 조금 떨어진 숲으로 들어가 사발 굵기만한 몇 그루의 나무를 베어 왔다. 무공 소질이야 없을지 몰라도 힘은 좋아서 어렵지는 않았다. 그는 베어 온 나무들을 다시 두자정도의 길이로 맞추어 잘라서 모닥불 위로 얼기설기 쌓았다. 불을 감추거나 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오래 타도록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굵은 나무가한꺼번에 타오르도록 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정도는 그도 알았다. 그는 최대한의 주의력을 기울여서 나무를 쌓아 놓고, 불속에는 일부러 생가지와 젖은 낙엽을 넣어서 연기를 피워올렸다. 그리고 그 연기에 몸을 그을렸다. 사람의 냄새를 지우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불안해 그는 다시 땅바닥에 엎으려 몸을 비벼대었다. 그리고 되도록 돌만 밟으려 노력하면서 공터의 가장자리로 움직여 갔다 공터에서 너무 떨어지지 않은, 그러나 공터의 불빛에 바로 비춰지지는 않는 자리가 필요했다. 그것도 나무 위라야 했다. 그런 조건에 맞는 나뭇가지 사이에 올라가 앉은 뒤 그는 나무에 늘어진 덩굴을 길게 잘라 몸을 가지에 묶었다. 혹시 자다가 떨어지는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비수를 양손으로 잡고 가슴에 댄 뒤에야 진자앙은한숨을 돌렸다. 불과 너무 떨어지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불 때문에 자신이 발각되지도 않는 그런 자리를 겨우 마련한 것이다. 지나친 걱정인지도 몰랐지만 아무런 대비를 않고 있다가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진자앙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붙였다. 하루 종일 걸었고, 또 오밤중에 때아닌 작업도 한 참이라 잠이 쉬올 것 같았는데 눈을감으니 오히려 말똥말똥정신이 또렷해졌다. 풀벌레 소리와 먼 곳에서 부르짖는 승냥이 울음 소리가 귀에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드는 달빛이 횃불이라도 밝힌것처럼 환했다. 그 달빛 속으로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와 누나들. 그리고 진가장 식솔들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밤안개가 낀 것처럼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진자앙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으려다가 손에 잡힌 단룡비의 붉은빛에 놀라 그렇게는 못 하고 그저 고개를 흔들어 눈물을 떨어 내었다. 그 순간, 그는 모닥불 가에 움직이는 검은 그럼자를 보았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림자는 멩수의 자취를 발견한 초식동물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이고있었다. 마치 불빛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늘 속으로만 잠시 움직였다가 주변의 동정을 살퍼고, 다시 한참이 지나면 조금씩 움직이더니어느 순간 불빛 속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불빛 속에 나타난 것은 어린 소녀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바짝 끌어을려 정수리에서 묶고, 거기에 자그맣고하얀 옥관을 썼기 때문에 하얀 얼굴과 검은 눈동자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불빛애 비친 두 눈은 놀란 것처럼 동그마니 커서 겁먹은 토끼의 두눈을 연상시켰지만, 그 눈 속애 빛나는 검은 눈동자는 공포의 그림자를 조금도 보여 주고 있지 않았다. 가끔 감았다 떴다 할 때파다 두 눈얘서 뿜어지는 빛이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온몸을 감싼 옷이 달빛 아래에서도 검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청색이나 남색, 흑은 작색 재통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묘하게도 도사들이 입는 도복이었다. 진자앙이 피워 놓은 모닥불 옆애 십여 세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여도사가 나타난 것이다. 소녀, 어린 여도사는 이미 반 시진 가까이 숲 그늘에 숨어 모닥불을관찰했다. 모닥불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피운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불만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망설이며 섣불리 불가로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어쩌면 이 모닥불은 그녀를 쫓는 무리들이 그녀를 유인하기 위해 피워 놓은 불일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면 이대로 어둠 속에서 짐승들의 밥이 될지언정 불가로 다가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천신만고끝에 간신히 여기까지 도망쳐 오지 않았던가! '굴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어! 거기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나아!' 그녀는 아이답지 않게 결연한 결심을 다지며 천천히 뒤로 물러서다가 문득 멈추어서 모닥불을 다시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고개를갸우뚱거렸다. 장작을 쌓은 방식이 그녀가 알던 방식과는 달랐다. 그녀는 비륵 어리지만 눈썰미가 있었고, 한번 본 것은 좀처럼 잊는법이 없을 정도조 영리하기도 했다. 한두 번 보는 것으로도 책을 외을정도인데 하물며 불 펴우는 요령, 장작 쌓는 요령 정도를 모를 리가없었다. 이전에 몇 번 본 것들은 '굴'의 사저들이나 야만족들이 피웠던 것인데 가히 이 분야얘서는 전문가에 가까웠다. 그것들과 지금 이 불을 비교하자면 공을 들여 쌓긴 했지판 불이 타오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도록 뭉쳐진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불빛이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렇게 쌓았느냐 하면 그런 것도아니였다. 그렇게 보기에는 지나치게 하술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서툰 솜거였다. 그 한 가지로 그녀는 이 불이 그녀를 뒤쫓는 사람들이 피운 것은아니라고 확신헌다. 그들이 불을 퍼워 그녀를 유인한다는 정도까지머리가 돌아간다면,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불까지 일부러 서툰 방식으로 퍼워 놓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 '멍청한 것'들에개 그것은 머리가 돌아갈 수 있는 한계 밖의 사항이라교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들이 아니면 누가 이 불을 펴워 놓은 것일까? 그녀는 조금 자신을 얻어 불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묘하게도 모닥불가에는 흔적을 지운 흔적이 있었다. 일부러 불을 피워 놓고 피운 사람은 없다. 그리고 흔적을 지웠다. 그녀의 머리로도 이것은 해명해 내기어려운 수수례끼었다. 그녀는 궁금한 점이 있으면 그대로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점을 생각하기 위해 쫓기는 처지도 생각지 않고 그대로 무릎을 감싸안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다시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스스로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염정아, 넌 이 버릇을 고쳐야 돼! 지금이 어떤 때인데!" 불을 추적자들이 피우진 않았다고 해도 이 옆에 그대로 퍼질러 앉아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불빛은 추적자들에게 좋은 목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심결에 저지른 이 반시진 동안의 실수를 생각하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누군가 이미 불빛을 보고 다가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최대한 빨리 어딘가로 숨어야 했다. 그녀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고는 자신이 할 일을 결정했다. 주변의 풀들을 뜯어 불속에 던져 넣고, 굵은 장작을 발로 약간 더밀어 연기를 피웠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 잠시 머물다가 흙을 손바닥에 묻혀 얼굴과 손에 발랐다. 냄새를 없애고, 달빛에 반사될지도 모르는 맨얼굴과 손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곤 그녀는 되도록 돌들만밟으려고 노력하며 숲 가장자리로 걸었다. 멀리 도망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모닥불 가까운 곳에 숨으면 등하불명의 계략을 쓰는 효과도 있고, 또 적을 관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당한 나무가 발견되었다. 그 나무에 몸을 붙이고 기어 올라가 몸을 쉬게 할 만한 굵은 가지를 잡다가 그녀는 문득 탄성을 질렀다. "아!" 사랍 없는 빈 모닥불의 정체가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그림처럼확연히 드러났다. 그녀가 방금 했던 과정과 유사한 어떤 과정을 거쳐몸을 숨기기 위한 도구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동시에 증거가 나타났다. 그녀가 잡은 나뭇가지 위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얼어붙은 듯 그 자세로 멈추어서 어느 누구도 먼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사내아이, 진자앙은 나뭇가지 위에 몸을 묶은 채로엎드려서. 계집아이, 염정은 그 나뭇가지를 잡고 매달린 채로. 진자앙은 염정이 모닥불 가에 나타날 때부터 보았기 때문에 위험한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조심스럼기 짝이없는 행동을 볼 때 분명 뭔가 위험한 일에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은추측할 수 있었다. 이 계집아이는 여러 가지로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사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밤길에 출몰하는 짐승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친 그 행동들이 그랬고, 어린애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주도 면밀한 행동들이 또 그랬다. 어린애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영리해 보이는 눈……! 진자앙은 그 자신도 아직 어린애이면서 염정의 눈빛과 행동들이 어린얘답지 않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엉뚱한 상상이 들 수밖에없었다. '호정 아닐까?' 진자앙은 염정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잠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호정. 여우요정, 여우 귀신이란 뜻이었다. '여우가 백년을 살면 온갖 조화를 부린다던데……!' 그를 빤히 쳐다보는 염정의 눈동자에는 추호의 두려운 기색도 없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 드는 달빛에 반사된 탓인지 별처럼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그는 이 여우 요정의 눈이 무척이나 귀엽고아름답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여우 요정일까? 날 호리려는 걸까? 진자앙은 샹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여우 요정이 모두 이렇게 귀여운눈을 하고 있다면 거기 흘리개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미소를 띠었다. '옹! 웃어?' 염정은 나무 위의 눈동자 조금 아래에서 하얀 이가 반짝이는 것을보고 '그것'이 웃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웃는다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개나 새들은 울거나,짖을 뿐이지 웃지는 않으니까. 그t러나 사람이라 해도 아무 때나, 아무 이유 없이 마구 웃지는 않는다. 기쁘거나, 우습거나 비웃고 싶거나, 심지어 슬프다거나 허탈할때 웃을 수는 있어도, 아무 없이 우는 경우는 혹시 있다 해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염정은 지금 나무 위의 '그 무엇'이 웃어야 할 이유 웃을 수 있는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이 상황에서 웃을 이유라고 하는 것은도대체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본가? 염정은 살짝 미간을 찡그려 주름살을 만들었다. 스스로를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영리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그녀도 바보를 싫어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를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영리하지만 그들 자신보다는 못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우선 말이 통하고, 둘째로는 이용해 먹기가 좋은 것이다. 바보는 그 반대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알 수가 없고, 이용해 먹으려 해도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영리한 사람들이 바보를 싫어하는 것은 영리한 사람들은 바보를 체질적으로 싫어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염정은 다음 순간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가 여기 나뭇가지에서 '그것'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그녀가 행했던일련의 사고 과정과 동일한, 혹은 적어도 대단히 유사한 과정을 거쳐서 거기 먼저 있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것'의 머리수준이 그녀의 수준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해가는 어느 순간,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오히려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팔이 아프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나중에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멍청이같이 그저 가지에 매달린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발을 움직여 나뭇등걸에 걸치고 가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다시 얼어붙은 듯 멈추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비로소 공포에 가까운 강정의 그림자가 깔렸다. 누군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모닥불 가에는 두 사람이 새로 나타나 있었다. "이개 뭐지? 불은 피워져 있는데 왜 사람이 없는 거야?" "그 계집애가 펴운 것이 아닐까?" 불가얘 나타난 것은 염정과 같은 복장, 즉 머리에 옥으로 만든 도관을 쓰고, 몸에는 도복을 걸친 두 명의 여도사였다. 그녀들은 손에 날이 흰 칼 한 자루깩 들고 있었는데 염정보다는 나이가 많지만 아직 소녀 티가 가시지는 않아 열일고여덟 정도로 보였다. 또 차이가 있었다. 그 두 여도사는 전혀 조심스러운 기색 없이 거침없이 불가로 다가와 주변을 휘둘러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그 재집얘가 어딜 갔다는 거야?"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듣고 도망쳤나 보지 뭐." 눈꼬리가 을라가 약간 사나운 기색이 있지만 보기 드물 정도로 예쁜여도사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넌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다른 여도사가 반문했다. "왜 가능하지 않아7 그년은 여우처럼 교활하고 눈치가 빠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소리를 죽여 가며 수색을 했다고 해도 금세 알아차리고 도망갈 수 있단 말야!" "말 잘됐다. 그래, 여우처럼 교활한 년이 이리 찾아오세요 하고 불을 펴워 놓고 있었겠어? 말도 안 되는……!" 면박을 당한 여도사가 심통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대의 말이 그럴듯해 반박할 거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칼로모닥불을 휘저었다. "피운 지 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계집년, 고걸 그냥!" "뭐?'" "계집애. 너보고 한 소린 아냐. 그 여우 같은 계집애에게 한 소리지. 그년 때문에 이 오밤중에 자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호홍……!" 모닥불을 휘젓던 여도사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달거리하는 계집애처럼 말마다 신경질이더니 그래서였구나. 이젠 알겠어." "너 말투가 이상하다. 알긴 네가 뭘 알아?" "오늘, 아니 어제 오신 그 손님 때문에 그러지, 너?" "뭐?" 뾰족하게 소리를 내어 반문하긴 하지만 어느새 얼굴을 붉히는 눈꼬리가 올라간 여도사였다. "아닌 척하긴, 엉큼한 계집애! 그 계집애 아니었으면 지금쯤 그 손님 품에 안겨 뒹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신경질이 나는 거지? 하긴 인물로 보나 재주로 보나 당연히 네가 모실 줄 알았는데 손님이 염정이 고년을 찍을 줄 누가 알았겠어7 게다가 염정이 고년이 쟁쟁한 선배들 제쳐 두고 그 손님에게 간택되는 복을 받았으면서도 감히도망을 칠 줄은 또 누가 알았겠어? 덕분에 우리가 이 고생 아니니!" 그녀들은 어느새 모닥불 가에 주저앉아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하고있었다. "말이 나왔으너 말인데 그 손님 조금 이상한 것 아니니? 어떻게 열두 살짜리를 품겠다고 침을 흘려? 아무리 영계, 영계 해도 이건 조금심한 것 아냐?" 그녀는 망측스럽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건 풍류가 아니라 병이라구. 어쩌면 우리가 불려 갔어도 이상한짓만 시켰율지도 모르잖아. 너도 차라리 잘됐지 뭐. 아무리 그 손님이절세미남이라도 변테하고 어떻게 자니? 또 염정이 고년이 간택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널 쩍는다는 보장도 없고…… 포기하고 맘 돌려라,얘!" "모르는 소리 말아. 그 손님 전에 왔을 때 지나가다 날 보고는 고년맛있게 생겼다 그러시면서 지금은 시간이 없어 그냥 가지만 다음에 왔을 땐 꼭 부르갰다고 그랬단 말야." "뭐,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런데도 내겐 말도 안 했단 말야? 아유 요년 내숭하곤……! 알아줘야 돼." 두 여도사들이 모닥불 곁에 퍼더버리고 앉아 지극히 출가인답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을 때, 진자앙과 염정은 다른 이유로 심심하지 않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염정이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나무에 매미처럼 매달려 있는 동안 팔힘이 풀어져 버린 것이다. 염정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만으로도 지금 모닥불 곁에서 주책을 부리고 았는 두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듈켜선 안 되는 것이다. 두 여도사가 다 그녀의 사저뻘이었다. 하나는 여란이라고 하는데 미모틀 무기로 아랫사람들을 개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사람이고,또 다른 하나는 지란이라 불리며, 동년배 중에 무공이 가장 괜찮아 역시 아랫사람들을 개 취급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항상 붙어 다니는 것을 보면 유유상종이라는 옛말이 나름대로근거가 있긴 있나 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염정이었다. 문제는 그 두 사람이 다 그녀, 염정을 못 잡아 먹어 안달을 한다는것이었다. 그것이 아마도 질투 때문이리라고 본 그녀의 안목이 옳았음을 오늘 두 사람의 대화는 보여 주고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천하절색이 괼 싹수가 보이는 그녀 염정, 게다가 재지가 뛰어나 춤이면 춤, 악기연주면 악기연주 식으로 못 하는것이 없는 그녀 아니었던가. 조만간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히게 되면그녀들을 우습게 볼 소지가 충분했던 것이다. 그것이 근거없는 걱정은아니라고 염정은 생각했다. 지금도 우습게 보고 있으니까. 어쨌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들에게 발각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힘이 딸렸다. 염정의 두 팔, 그리고 손은 이미 힘을 잃어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안타깝게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를 보았다. 한 자만 더 올라가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움직이면 소리가 나고, 소리가나면 저 두 사저가 못 들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잡는다 해도 더 버틸힘도 없었다. '이젠 끝이야……!' 염정의 두 손이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을 잡고 스르르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때, 나뭇가지에서 손이 뻗어 내려왔다. 염정은 정신이 번쩍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의 주인이 손을내밀어 그녀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소리내면 안 되는데……!' 고마움보다 혹시 소리를 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는 그녀였다. 다행히 눈동자의 주인도 눈치는 있는지 극도로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천천히 손이 내려와서 그녀의 어깨에닿았다. 닿은 다음 손은 그대로 아래로 더 내려갔다. '뭐 하는 짓이지?' 염정은 깜짝 놀랐다. 손이 가슴쪽으로 뻗어 오고 있지 않은가! '이것도 남자?' 문제의 '그것'이 남자라는 생각이 번쩍 든 것은 손이 크다거나 손마디가 굵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굴'에서 숱하게 본 것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만질 떼는 옷소매를 잡아도 될 것을 손목을 잡고, 그냥 떨어져 앉야도 될 것을 어깨를 감싸안으며 기어코 가슴까지 뻗어앞가슴을 만지고서야 만쪽스럽게 안았다는 표정을 잣지 않던가! 그런 것을 보면 이 손의 임자도 분명 남자인 모양이었다. 진자앙의 손은 그런 염정의 생각과는 아랑곳멉이 그녀와 가슴 앞을스치듯 내려가더터 양쪽 겨드랑이 부위에 와서야 멎었다. 그리고 그부분의 옷을 단단히 감아 쥐었다. '이 사람!' 염정은 똑똑한 아이, 손이 그곳을 움져쥔 뜻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그 뒤애는 감탄이었다. 그녀가 입은 것은 헐렁한 도복. 웃소매를 잡거나, 목 부분의 옷을잡으면 이내 몸얘서 벗겨져 염정의 몸뚱어리는 아래로 떨어지고 옷만흘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겨드랑이 아래를 잡으면 팔을 내리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벗겨질 리가 없었다. 게다가 몸무게 전체를 끌어올려 주는 위치라 매달려 있으면서도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쓰다니……! 대단히 뛰어난 사람임에 틀림없어!' 그녀가 어떻게 진자룡이 진자앙을 안아 올려 줄 때마다 그렇게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들어올리곤 했다는 것을 알 것인가! 염정은 한 순간에 편해졌지만 진자앙은 그리 편한 형편이 아니었다. 아까 혼자 누워 있을 때도 울퉁불퉁한 나뭇등걸이 몸 이곳저곳에 배겨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었다. 그런데 이제 여자아이라곤 하지만 한사람의 무게가 전해지고 있으니 몇 배는 더 불편해졌다. 그보다 더 어려운 점은 감아 쥐었다고는 하지만 염정의 몸무게를 손가락의 힘만으로 버터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나무에 배를 깔고는 쌀 반 가마니를 양손 손가락만으로 잡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냐, 반 가마니보단 좀더 가벼운 것 같애.' 진자앙은 그런 생각을 하곤 다시 웃었다. 그 바람에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입 속으로 들어가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손등에포 땀방울이떨어지조 있었다. '겨우 이걸 갖고……?' 벌써 땀방울이 흐르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진자앙이 둔하긴둔한 것이다. 두 사람은 그런 자세로 이피 반 시진 가까이 매달려 있는 중이었다. '장점이라곤 참는 것밖엔 없으니까!' 진자앙은 다시 한번 웃었다. '참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나오는 그 웃음을. 삐익--! 삐익--! 멀리서 피리 소리가 짧게 두 번 들려 왔다. 모닥불 가에 앉아, 요 전번 날 같이 잤던 그 손님은 어떻더라느니그것보단 이 자세가 재미도 있고 편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음담패설에가까운 얘기를 나누던 두 여도사는 그 소리를 듣는 것과 동시에 자리애서 뤼돗이 일어났다. "소집이야!" 여란이 말했다. "우리가 너무 오래 노닥거리고 있었나 봐!" 지란이 걱정스러운 빛으로 말을 받았다. 여란이 소매에서 피리를 꺼내 입에 물었다. 버드나무 가지를 뚫어 만든 신호용 피리였다. 삐익--! 삐익--! 지란은 짧게 두 번 불고 나서 여란을 보았다. "빨리 가자! 치도곤을 치르기 전에!" "뭘 하고 있었냐고 물으면 어멱하지?" "찾고 있던 중이라고 말하면 되지 걱정은 무슨 걱정이야, 멍청한 계집애!" 그 경황중에도 신경질을 부리며 사라지는 지란이었다. 진자앙과 염정은 두 여도사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염정은 나뭇가지에기대어 쉴 수 있었다. 진자앙이 마비된 손가락을 푸는 동안이었다. [제칠장] 짐승이 쫓는 것은 하늘이 막아 주고 마귀가 쫓는 것은 사람이 막아 주다. "칠선관은 창녀굴이에요." 염정은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아마도 그녀가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그 훨씬이전부터 여도사들만 모여 있는 도관에 살고 있었다 그 도관의 이름이 칠선관이었다. "외부적으로는 칠선고를 모시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칠선녀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그녀들은 칠선고가 누구누구인지도 모를걸요?" 물론 그녀도 몰랐다. 그녀는 십이 년 전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던 칠선관의 일곱 선녀들 중 삽선녀의 손에 들려 오던 그날 이후로 칠선관과 이 오지산을 떠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곳에서보고 듣고 배운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곳은 창녀굴이에요. 공자님은 창녀굴이 뭐 하는곳인지 아세요?" 염정은 진자앙이 동갑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존대를 했다. 사실 그녀는 남자에게는 당연히 그령게 말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진자앙은 반말을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몰라." 염정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힐꿋 보더니 설명했다. "창녀굴이란 남자들이 남의 눈을 피해 몰래 와서 여자를 주무를 수있도록 준비해 놓는 곳이에요. 물론 주효가 있고, 연주가있고, 가무와 묘기도 있지만 그건 사소한 일이지요. 그증거로 아무리 멋들어진 춤을 보여 주어도 목마른 것처럼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이던 손님들이 여자들, 대개는 일곱 선녀 중에 하나와 함께지만 그 따자들콰 할께 방얘 들어갔다 나오면 만족스런 표정을 하거든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낮뜨거운 이야기를 하더니 자랑스러운 표정까지 지었다. "원래 저 같은 윽녀들은, 손님 맞는 기교를 공부하게 되는 소선녀가 되기까지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봐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전 다 봤지요." "무얼?" "벗겨 놓고 만지더군요. 웃 위로 만지는 건 성에 안 차는가 봐요." "왜?" "글쎄요? 공자닙은 남자니까 알 줄 알았는데 모르시나요, 왜 그러는지?" 진자앙이 체구는 열다섯이라 해도 그런 방면으로 깜깜하긴 염정과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보고 들은 것이 많은 염정이 그런 쪽에는 훨씬견식이 풍부하다 해야 했다. 그는 염정이 던져 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한참을 고민한 후에 겨우 한마디했다. "재미 있나 보지." "재미? 그게 재미있을까?" 염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전 예민해서 누가 날 만지는 걸 싫어해요. 아무리 곤히 잠들어도누가 가까이 오기만 하면 벌떡 일어나는걸요. 한번은 지란 사저가 내방문을 열려고 손을 내미는데 제가 먼저 알고 문을 열어서 놀래키기도했어요. 물론 일부러 한 건 아니에요. 만약 일부러 했다면 좀 심하게다치도록 열었겠죠." 그러고는 낮게 하하 웃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전 누가 날 만지는 걸 싫어해요. 송충이가 닿는 것 같아요. 이번에 굴에서 도망쳐 나온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이 시대에 비구니만 사는 절이라든가 여도사만 사는 도관이라든가하는 것은 염정이 말한 대로 창녀굴인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노래를 팔고 기예를 보이는 고급기생이 나이가 들어 미색이떨어지면 본격적으로 매춘에 나서기 위해 절이나 도관을 차린다. 도관을 차리면 거기에 여인들을 모아 도사의 복장을 입히고, 겉으로는 여조를 모신다, 현녀를 제사지낸다 하면서 사실은됫구멍으로 매춘을 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도 청루, 홍루 등 사실상 매춘을 하는 기루들을 인정함으로써 매춘이 양성화된 것 같지만 그것에도 정도라는 것이 있었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듣고, 하룻밤 유하고 간다는 말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 일반적인 기루에서 보거나 체험할 수 없는 노골적인 매춘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도관에서는 가능했던 것이다. 염정이 키워지고, 이제 도망쳐 나온 칠선관도 그 중 하나였다. 관주 이하 소위 칠선녀라 불리는 여도사들이 있고, 그 아래에 많은소선녀들, 그리고 옥녀들이 있어 위에서 아래까지 혹은 매춘을 하고,혹은 옴란한 춤을 보이며, 혹은 술을 팔고 심부름을 한다는 것이 칠선관의 재초요 술헹이고 영업이었다. 염정몬 물른 어린애의 눈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그것을 일상적으로보려 살아 왔다. 그러니 그녀가 그러한 일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해서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곳을 도망쳐 나오고,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순전히 '상관공자' 때문이었다. "상관공자라는 사람은 뭐랄까…… 사저들은 송옥, 반안이 울고 잗 절세기남이라고 말하지만 전 잘 모르겠어요. 그저…… 여자아이처럼 생긴 사람이에요. 하여튼 그 사람이 오기만 하면 굴이 온통 난리가 날 정도였죠. 관주 이하 칠선녀가 모두 나와서 영접을 하고 소선녀, 옥녀들이 모두 꽂을 뿌려야 했어요." 한마디로 대단한 손님이었다는 것이다. "그사람이 몇 번 굴에 드나들더니 절 달라고 했어요. 쓸 데가 있다고……!" 염정은 그래서 도망졌다. 상관공자가 그녀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더 말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나뭇등걸에 등을 기대고, 작은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안을 뿐이었다. 진자앙이 호기심을 못 참고 물었다. "그 사람이 데려다가 키우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잖아. 확인해 보지도 않고 그냥 도망쳤단 말이야?" 염정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한마디를 뱉었다. "쓸 데가……!" "……?" "그 쓸 데가 뭔가를 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녀는 보았다. 상관공자가 말하는 쓸 데가 무엇인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그 광경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도 상관공자는 왔었고, 열두엇밖에 안 된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쓸 데가 있다고달라고 했다. 그 여자아이란 가향이라는 소녀였는데 염정과 친자매처럼 지내던 사이였었다. 염정은 지금도 호기심이 많지만 어렸을 때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는 상관공자가 가향 언니를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보기위해 밀실에 숨어들었었다. 다행히 칠선관에는 말이 밀실이지, 정작밀실다운 밀실은 없었다. 어디든 훔쳐볼 수 있는 구멍이 있는 방뿐이었던 것이다. 상관공자는 다른 손님들과는 달리 이상한 짓을 했다. 가향 언니를발가벗겨서 제단 같은 것에 눕혀 놓고는 방안에 분홍 연기가 나는 향을 피웠다. 방안에 분홍빛이 가득 퍼지자 가향 언니가 이상한 짓을 시작했다. 아주 더운 것처럼 몸을 뒤척이며 팔다리를 비비꼬았던 것이다. 코에서는 이상한 소리를 냈는데, 그것은 손님들이 방안에서 선녀들을 만질며 선녀들이 내는 소리와 비슷한 그런 소리였다. "상관공자는 냉정했어요." 염정이 그 말을 할 메는 그녀도 냉정해 보였다. 그날 본 상관공자의냉정한 표정을 자기도 모르게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그 눈동자…… 그 눈동자는 마치……,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든 것같이 차가웠어요." 상관공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는 가향을 관찰하고 있었다고 했다. 조금 후 가향의 다리 사이를 벌려 보고는 상관공자는 만족스러운 듯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손을 그 사이에 넣었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후……! "가향 언니는 쪼글쪼글 쪼그라들어 버랐어요." 그게 가향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최후였다. 진자앙을 자기도 모르개 탄성을 질렀다. 그런 모습을 만드는 무공이라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흡정대법!" 우우우우웅--! 그 순간 멀리서 야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진자앙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염정을 보았을 때 그는 깜짝놀랐다. 염정의 얼굴이 창백하게바래고 있었다. "그들이……!" 염정은 눈에 보이게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 흘로 돌아다닐 때도,그 어둠 속에서 진자앙을 만났을 때도 떨지 않던 그녀가 지금은 떨고있는 것이다. "개들을 풀었어요!" 훈련받은 개들은 맹수보다도 무섭다. 이것을 진자앙은 이번 기회에알게 되었다. 게들은 불을 두려워 않는다. 개들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을두려워하지 않는다. 개들은 태고로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사냥에의 욕구를 그 깊숙이에간직하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피부 바로 아래에깔아 능고는 한번 정해진 사냥감을 게으름피우지 않고 뒤쫓는다. 맹수들도 두려뭐할 악조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목표를 향해 달리는것이다. 진자앙과 염정은 깊은 산속을 달리고 있었다. 달린다고 해봤자 울창한 풀과 나뭇가지 사이에서 하동거리고 있는 정도였지만…… 그 과정내내 개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뒤편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진자앙을 재촉해 나무애서 내려올 때에도 염정은 계속 허등거리고있었다. 떨고 있었다. 지금도 개들을 피해 도망가려 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진자앙이 보기에는 점점 도망가기 어려운 산속으로만 들어가는것 같았다. 숲으로 들어가거나, 산 위로 도망친다면 추격자들에게는 더욱 쉬운목표가 되지 않을까? 한참을 염정의 뒤만 말없이 쫓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멀쩡히 달리던 방향을 다시 꺾었을 때, 진자앙은 참지 못하고물었다. "왜 길로 내려가지 않지?" 길로 내려갔다면 달리기도 편할 뿐 아니라 거리만 어느 정도 있다면인가까지 도망가 구원을 요청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휘적휘적 앞길을 혜치던 염정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도 그걸 거예요." 개를 풀어 놓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그것으로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그것으로 사냥감을 몰아넣는 것이 두 번째다. 그리고 대개는 두 번째 목적이 보다 더 용이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염정이 공포에 사로잡혀 길로 내려가면 그 순간 모든 상황은 종료될것이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포에 사로잡혀! 진자앙은 그 말에 주목했다. "지금도 그리 겁먹지 않은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염정이 한순간 홱 돌아섰다. 그녀의 눈동자는 확실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진자앙의 한마디에 격발된 분노가 그것을 덮었다. 그녀는 잠시 그테로 진자앙을 노려보더너 한숨을 내걸었다. "그래요, 난 개들이 겁나요. 하지만 그것 때문애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에요." 사실 염정은 그 말을 하면서 비로소 이성을 되찾아 갔다. 진자앙의한마디얘 상처 입은 자존심이 공포의 힘을 어느 정도 눌러 준 것이다. 개들은 도관에서 기르는 것들로, 특별히 훈련된 서장견이었다. 염정은 무언가의 일로 관주를 분노케 한 소선녀 중 하나가 개 우리에 던져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소선녀가 개들의 이빨에 찢어지고 발겨져는 것을 칠선관의 전 인원이 지켜보게 한다는 것이 관주의뜻이었기 메문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얘게 개는 악몽의 원민이었고, 죽음의 동의어였다. 개 짖는 소리만 듣고도 두럭워 떠는 것은 칠선관 출신에게는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염정은 이제 조금온 냉정한 머리로 상황을 분석해 볼 여유를가지게 되였다. 개 짖는 소리는 여전히 온 산과 숲을 덮고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도데체 어디쯤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염정은 개들이 그녀를 포착하고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개들의 더운 입김이 귀 밑에 닿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느낌이 그 증거였다. 추격이 개들의 본능이라면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듣지 않아도 아는 것이 그녀만와 본능이라 할 정도였다. 바늘 끝처럼 예리한 감각을그녀는 천부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공자님은 저와 같이 도망갈 이유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들이 찾는 것은 저지, 공자님이 아니니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염정은 잘 알고 있었다. 피에 굻주린 개들이 그들을 발견하면 여자든 남자든, 찾는 사람이든 아니든 같은 운명에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공자님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세요. 저와 같이 있다가 횡액을 당할필요는 없죠." 그것 역시 진심은 아니었다. 누가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이 산속에서 흘로 개들에게 쫓기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진자앙이 원하지도 않는데 그에게 기대어 도움을 받으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싫다는 것 또한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명백한 상황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멍청이와는 같이 다녀 달라고 부탁을 해도 그러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럼." 돌아설 듯 인사를 하고도 염정은 진자앙이 어떻게 결정하는지 관찰하고 있었다. 진자앙, 그녀와 동갑내기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큰 체구의 이 사내아이는 우둔해 보이는 눈을 껌벅거리더니 별반 생각하는기색도 없이 말하고 있었다. "같이 도망가지 뭐." 그러더니 염정의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서 붉은 광채가 번뜩였다. 단룡비를 꺼내 든 것이다. "어차피 개들에게 쫓기는 거라면 눈에 보이는 흔적은 문제가 아니겠지?" 그는 비수를 휘둘러 거치적거리는 나뭇가지를 잘라 가며 길을 뚫었다. 아까보다 훨씬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염정은 진자앙의 뒤를 따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말하는 건 멍청한 것 같은태 행동은 안 그렇고……!' 꼭 큰 채구 매문이 아니라도 진자앙은 어쩐지 바보스럽고 둔해 보였다. 말하는 것이나 몸짓하는 것이나, 반응이나 등속이 느리고 둔하기짝이 없는 것이다. 지나치게 민감한 편인 염정이 보기에는 답답해 속이 터질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행동하는 것을 보면 사고 과정에 있어서 두세 단계를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때로는 염정이 짐작하지 못하는 일에까지 셍각이 미치기도 하는 것이다. 우둔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따르는데 진자앙이 갑자기 돌아보더니 머리를 벌벅 긁으터 물었다. "근데 어디로 도망가지?" 개는 후각에 의지해서 행동한다. 그러니 개들의 추격을 퍼하려면 냄새를 없애논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업었다. 그래서 젼자앙과 염정은 계류를 거슬러 을라가고 있었다. 날은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데 산은 새벽 안개에 휘감겨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차가운 재곡의 물줄기를 찰박찰박 밟으며걷던 염정이 문득 하늘을 보았다. 짙은 안개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현데 그녀는 모든 것을 본다는 것처럼 말했다. "구름이 짙어요." 하늘엔 구름이 덮이고 산자락은 안개에 뒤덮여 있으면, 하늘과 땅은구분이 가지 않는 법이다. 그런 가운데에 서 있으면서도 염정은 구르이 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그 말의 사실 여부는 자기로서는 어차피 모르는 것이기때문에 관심도 두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개들을 떨쳐 버리지 못할 것 같아." "왜죠? 시냇물을 이렇게나 거슬러 왔는데……!" 진자앙은 그들어 지나온 물줄기를 가리켰다. "시내의 폭이 너무 좁아. 이런 시내를 만나서 개들이 냄새를 잃어버리면 흔히 두 패로 나뉘어서 추적하거든. 냇가를 따라 냄새를 맡으면서 한 패는 하류로 내려가고, 또 한 패는 상류로 올라가는데…… 시내의 폭이 넓다면 결국 흔적을 잃을 수도 있는데 여긴 너무 좁아. 곧 들킬 거야." "그럼 어떻게 해요?" "그래도 그냥 올라갈수 밖에.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날 때까지." 두사람은 한참을 더 찰박거리고 올라갔다. 문득 염정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죠?" "할아버지에게 들었지. 사냥할 때 그렇게 한다고……!" "할아버지…… 란 어떤 거죠? 그러니까…… 느낌이 어떠냐구요." "좋아." 염정은 한참을 더 기다리다가 부연설명이 없자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다예요?" "응."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염정은 그렇게 애메한 대답은 듣지 않음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여자를 만지는 이유도 좋아서일 거라고 하고, 할아버지의느껌도 그저 증다고만 하고…… 그 좋다는 말은 같은 건가요?" "아니, 달라. 아니, 아니…… 다를 거야." "어떵게 달라요?" "몰라. 하여튼 다를 거야."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지난밤을 꼬박 자지 않고 걷고, 뛴 셈이었다. 사실 진자앙은 전날 아침부터 계속해서 걸었고, 염정도 그 비슷한시간부터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명백하게 느껴지는 위협은 받지 않은 상태에서 긴장한 채 한참 물속을 걷다 보니 피곤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잊기 위해서인지 두사람은 아무 의미 없을 듯한질문과 대답을 반복하고 있었다. 염정이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나는 어떼요? 좋아요?" "응." "만난 지 세 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까 내가 좋다고 그렇게 주저없이 대답할 수 있어요?" "그냥…… 그냥 좋아." "날 좋다고 말하는 것하고 할아버지가 좋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하코는 어때요? 같아요, 달라요?" "달라. 아니, 비슷혜," "뭐가 다르고 뭐가 비슷해요?" 염정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원래 질문을 입에 달고 다니는 성격인 데다가 지금은 여태 만나 본 적이 없던 신기한 사람, 또래의 사내아이를 만난 것이다. 물어 볼 것이 끝도 없었다. 게다가 피곤이 몰려와 몽롱한 상태였다. 했던 질문을 하고 또 하곤 하는 그녀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쓰러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진자앙은 점점 더 대답이 궁해졌다. 대충 대답하는 것 같지만 나름대로는 성의껏 대답한 것이 '응' '몰라' 정도였는데 이제 뭐가 다르고뭐가 비슷하냐는 질문을 받으니 그 정도의 대답만으로는 안 되게 되었다. 그렇다고 달리 대답할 말도 없었다. 골머리를 싸고 있는데 그를 구해 주는 것이 보였다. 시내는 이제 가파른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실은 그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겠지만 진자앙과 염정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빠져 나오기 힘들 것이었다. 만약 옆으로 기어 올라갈 길이 없으면 다시 돌아 나오기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나갈까, 아니면 좀더 들어가 볼까?" 염정이 걸음을 멈추고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피로에 지쳐 흐릿해지고 있었다. 열두 살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짜낼 수 있는 힘의 한계를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넘어 버린 것이다. "글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죠?" 진자앙도 잘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짐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머리를 긁으며 잠시 더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고개를 돌려 염정을 보다가 그는 깜짝 놀랐다. 염정이 비스듬히 넘어가고 있었다. 걷는 동안은 그런대로 버텄는데 막상 걸음을 멈추니다리가 떨려 더 서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냥 더 가보는 것이 좋갰군." 진자앙은 중얼거리고는 염정을 잡아 등에 들쳐 업었다. 사실 그가아까부터 걱정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만약의 경우, 골짜기를 기어 올라가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 염정의 채력이 버터 주느냐 하는것. 그러나 이젠 물어 볼 펼요도 없어졌다. 이제 질문은 만약의 경우 염정을 업고도 골짜기를 기어 올라갈 수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되었다. 미련할 정도로 힘이 센 그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골짜기 입구는 시내에서 빠져 나오기에는 너무 표시가 나는곳이었다. 그러너 그냥 들어가서 좋은 수가 생기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아까보다 훨썬 가까웠다. 진자앙쁜 꼴짜겨 중간쯤의 벼랑에 걸린 칡덩굴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사오 장쯤 올라왔다. 위로 그 두 배 정도는 더 올라가야골짜기를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자앙은 습관적으로 웃었다. 곤란했다. 벼랑을 무사히 올라간다고 해도 추적자들의 눈에 띄면 소용이 없었다." 질선판의 여도사들은 무공을 익힌 모양이니 이 정도 벼랑쯤은 금세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골짜기를 라져 나가야개들도 따돌리고 그들와 추격에서도 벗어난다는 애초의 목표를 성취할수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다시 칡덩굴을 힘주어 잡으면서 등에 묶은 염정을 생각하고, 또 그가 애초에 여기 오지산에 온 목적과 얼마나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했다. "하는 수 없지!" 그는 다시 웃었다. 그가 하는 일이 언제는 제대로 된 적이 있었던가! 벼랑 위는 다시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산비탈이었다. 안개는 물방을이 잡힐 정도로 짙어졌는데,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아름드리 나무들이 그 안개 속에 머리를 묻고 아래는 다시 녹색의 이끼로 가리고는 빽빽히 들어서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등치를 휘감고 올라간등나무 덩굴들이 가지 아래로 다시 촉수를 드리웠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풀잎들도 잔뜩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진자앙은 그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개들은 벼랑이 막아 줄 것이다. 잔뜩 낀 안개가 개들의 후각까지 마비시킬지는 잘 모르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개들이 벼랑을 기어 올라오지는 못할 것이므로. 반 각의 반으로 좁혀들었던 추격대와 그들의 거리가 이제 다시 상당한 거리로 벌어진 것이다. 그가 고민하는 문제는 이제 어디로 가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등에업힌 염정, 이 작은 여자아이는 어디로 보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그녀의 얘기로 짐작컨대 도망치는 것이 목적이었지, 어디로 가겠다는 계획은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금강당에 데려갈까?' 하지만 곧 곤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굿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여쟈아이까지 데려간다는 것이 그랬다. 만약 갔다가 돌려보내라고 하면 그땐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문득 진자앙은 지금 그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금강당에서 받아 주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계 거가를 찾느냐가 더 문재였다. 그는 이 산속에서 길을 쓸은 것이다. 숲은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어렴풋한 기억으로도오르락내리락하면서 족히 십여 리는 걸은 것 같은데 그의 눈앞에는 아직도 마냥 숲이었다. "잘못하다간 여기서 굶어 죽겠는걸!" 그 말을 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오늘은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얘도 먹은 게 없을 텐데……!" 진자앙은 등얘 업힌 염정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안개에 젖은 머리카랄이 몇 오라기썩흘러내려 얼굴에 볼어 있는데 물에 젖은 그 얼굴이 방금 씻은 것처럼께끗해 보였다. 감은 눈 사이로 길게 뻗어 나온 속눈샙이 가련하다는생각이 들었다. 진자앙은자기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숲의 향기인지 안개 속에섞인 내음인지 약간은 비릿한 향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신선하고 깨끗한 느낌이었다. 그는 불현듯 이 여자아이를 끝까지 지켜 줘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을느쪘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만난 지 얼마 줬다고, 또 그와 무슨관계가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또 책임을 지면 도대체 어디까지 질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한 몸조차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고있다는 것이 현실 아니던가. 진자앙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웃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염정을 더추켜 업은 다음 묶은 끈을 다시 잡아서 바짝 조였다. 관계가 있든 없든, 책임을 질 수 있든 없든, 그는 이 여자아이를 끝까지 지켜 줄 것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때 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진자앙은 뒤를 돌아보았다. 숲 저편 어딘가에서 들려 온 소리였다. 적들은 다시 그들의 흔적을 잡은 것이다. 진자앙은 비수를 저내 들고 뛰기 시작했다. 이런 장소, 이런 상황에서 방향을 가늠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체력이 허락하고, 길이 거기 있는 동안은 뛰는 수밖에 없었다. 풀이 발에 부딪쳐 꺾어졌다. 나뭇가지가 그의 서슬에 휘었다가 다시펴지며 얼굴을 때렸다. 아름드리 나무등치들이 그의 시선 안에 확대되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져 갔다. 진자앙은 뛰고 또 뛰었다. 코로 입으로 들어오는 안개가 매캐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짙었다. 거칠게 내뿜는 그의 숨소리와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리고 저 저주스러운 개 짖는 소리, 그 소리는 전혀 멀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지금 그를 휘감고 있는 안개처럼 끈적끈적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점점 가깝게……! 한 순간 나무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진자앙의 앞에 낮게 깔린 회색구름, 그 아래 불길처럼 구름처럼 대지를 휘감고 있는 뿌연 안개가 드러났다. 숲이 끝나고, 그는 이름 모를 산, 낮은 봉우리 위에 서 있는자신을 발견했다. 진자앙은 턱끝까지 치밀어 오른 숨을 겨우겨우 내뱉으며 재빨리 주변 지형을 살폈다. 보일 때 봐야 했다. 그것이 이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을 선력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산봉우리는 산봉우리로 이어지고, 안개로 아랫도리를 감싸고 있었다. 멀리 오른쪽으로 뱀처럼 기어간 강줄기가 흐릿하게 보였다. '오른쪽!' 진자앙은 셍각했다. 그가 배에서 내려 오지산을 바라보고 올 때 강은 계속 그의 왼쪽에있었다. 그런데 이제 강이 오른쪽에 있다. 진자앙은 그가 타고 올라온 강말고 오지산의 반대쪽에도 강이 있는가를 셍각했다. 그가 알기로는 없었다. 그렇다면 산속을 헤매는 도중에 강을 건넌 것일까? 그렇지도 않았다. 남은 가능성온 단 하나았다. 그들이 정신언이 산속을 해매는 동안어느세 방항을 틀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칠선판의 여도사들이 기다리는 길목을 이미 지났을 수도 있었다. 진자앙은 불확실하지만 유일하개 회망적인 그 가능성에 그와 염정의 목숨을 걸어 보기로 했다. 강을 향해 일직선으로 뛰는 것이었다. 운좋게 강을 지나가는 배를 만나 탈 수만 있다면 그들은 추격망에서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산 아래를 향해서 뛰기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가 귓전에 울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일 각이 지났다. 다시 일 각이 지났다. 그 동안 진자앙은 쉬지 않고 뛰었다. 발 밑에서 돌이 튀고, 풀이 발목을 휘감아 그를 자빠뜨렸다. 진자앙은 뛰고 구르면서 산 아래를 향해, 저 멀리 강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진자앙은 막다른골목에 봉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은 깎아지른 듯한 암벽, 그 옆은 무너져 내린 흙더미로 골짜기를이루었다. 바닥은 안개에 잠겨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그의 뒤에는 개가 있었다. 긴 혀를 늘어뜨리고 거품 문 입에 새하얀 이빨을 번뜩이는 송아지만큼이나 큰 개 다섯 마리가 맹렬히 짖으며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뒤에는 다시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개, 다시 더 많은사람들……진자앙은 이런 막다른 골목으로 도망쳐 온 그 자신을 탓하기 전에빠져 나갈 구멍이 없는지 찾아보았다. 깎아지른 암벽이라지만 칡덩굴 하나만 있어도 올라갈 수 있을지도몰랐다. 깊은 골짜기라지만 경사만 그런대로 완만하다면 기어 내려갈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외에도 방법이 있을수 있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는다면! 포기하지 않고……! 진자앙의 눈이 번뜩였다. 골짜기 아래로 이어진 암벽 틈으로부터 삐져 나온 나무뿌리가 왜 길게 뻗어 있었다. 한번에 뛰어서 그 뿌리를잡는다면 그 옆족, 골짜기 아래쪽의 조금 돌출된 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뒤에는…… 그 뒤에 생각할 일이었다. 숨에 겨워 달아오른 얼굴이 차가워졌다. 진자앙은 손을 내밀어 보았다. 비가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섯 마리 개가 그를 향해 맹렬히도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돕고 있었다. 진자앙은 염정을 업은 채 골짜기 아래쪽 암벽 틈으로 뼘어 나온 나무뿌리를 향꽤 몸을 날렸다. 물 몇 방울이 옷깃에 떨어지는 것부터 시작된 오지산의 비는 순식간에 천지간을 가득 메우고 퍼붓기 시작했다. 샘이 넘치고, 시내가 끓어을랐다. 무너진 흙과 돌들만 뒹굴던 골짜기들이 거센 물줄기로 가득 차 흘렀다. 이럴 때의 산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도 위험한장소가 되는 것이다. 칠선관주 묘선고 하수수는 이, 삼, 사의세 선녀가 받치는 금라산 아래 서서 산 아래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지는 온통 우막 이미 한식경 전부터 그녀의 눈에는 뿌연안개와 하늘을 덮은 먹구름, 그리고 온통 푸른색으로 뭉개져 버린 숲의 풍경밖에는 들어오는 것이 없었지만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모시고 서 있는 사내, 상관공자가 거기 그대로 서서 그녀의 눈에는 안 보이는 무언가를 보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수색을 계속한다는 것은 소득없는 자살 행위 외의아무것도 아니었다. 옆에 선 손님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이 아무리 무섭다고 하더라도 어린 계잡아이 하나 매문에 영업 밑천들을 몽땅 죽일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색대를 그만 철수시켜야겠지요?" 상관공자는 대답을 않았다. 하수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빗속에 어린아이 둘이 골짜기로 들어갔으니 그냥 둔다 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너다. 염정이 고 계집 대신 쓰실 물건을 소녀가 책임지고 구해 드리지요, 하니 그만……!" "염정이 대신 쓸 것을 네가 구한다고? 상관공자가 비로소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예, 소녀가 언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책임지고……!" 말하던 하수수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를 돌아보는 상관공자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웃음 외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미소였다. "네가 염정이 같은 애를 다시 구할 수 있다면 난 너를 여태 과소평가했다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으리라. 그 잘못은 천만금으로도 만회할 수 없는 것이겠지." 상관공자의 목소라는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혀주는 목소리. 그러나 하수수는 그 말을 들으면서 편안해지기는커녕 점점 파랗게질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 이 상관공자를 상대하면서, 한때는그를 사랑하기도 하면서 이 부드러운 어조와 낮은 목소리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하자. 네가 염정이와 같이 내외음양이 완벽하게 조화된 옥촉금단지체의 여아를 구해 오면 내가천만금을 주지. 그러나 못 구해 오면 네가 내게 천만금을 주는 거다어떠냐?" 하수수는 원래 강호 비밀문파 중 하나인 화예문의 수제자였다. 비록 구대문파에는 끼지 못하지만 그것은 그 문파의 특성상 비밀유지를 종지로 했기 때문, 그 세력과 절예만을 보자면 충분히강호 십대 세력 중 하나가 될 만한 문파의 장문 계승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운수 불길하여 일대 색마인 영리충에게 당해 희대의 음녀가 되고, 드디어 문파에서는 파문당하고 여기 광동땅 오지산 깊숙이에서 비밀 매춘굴을 만들어 사는 사정을 일일이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무림에 나가면 여걸 중에 그녀를 제쳐 두지는 못할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상관공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비에 젖어진흙탕으로 변한 땅 위에 비단치마를 아까워하지 않고 구부러진 무릎을 따라 같이 구부러지는 자존심 또한 초개와 같이 여기며 꿇어 엎드리고 있었다. "차라리 소녀를 죽여 주시옵소서, 공자! 그런 귀중한 재목이었음을진작에 알지 못했나이다." 말투가 극존칭을 넘나들고 수그린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옥촉금단지체가 무엇인가? 그저 상관공자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 사실 그녀도 그건 몰랐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한 상관공자에게 허언은 없었다. 천만금을 내놓겠다고 하면 가능향 액수든 아니든 반드시 내놓고야 말 사람이상관공자인 것이다. 그러니 그 옥촉금단지체는 반드시 천만금의 가치가 있는 것일 터였다. 그런 보물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상잔공자는 냉랭하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관두자, 이미 네 손을 떠난 것을 네게 말해 무엇 하랴? 하나 그 아이는 내겐 더없이 귀중하니 나서지 않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보다그 사내아이도 묘하던데……!" 그치 말은 점점 작아져 하수수는 나중 말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대신 삼선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가셨습니다. 일어나세요, 곡주님," 상관공자는 이미 거기 없었다 하수수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디로……?" 삼선녀가 멀러, 아마도 기억이 정확하다면 진자앙과 염정이 사라진그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저쪽으로……!" 짝--! 삼선녀는 팽그르르 돌다가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하수수가 냉랭하게 힐책했다. "애초에 내년이 그년을 주워 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냐!" "용서를!" 일단 빌기는 했지만 삼선녀는 억울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처음 등가산 산길에서 쭈그렁 노인을 만나 아이를 받아 들었을 뻔출가인이 고아를 거절하면 의심을 살까 두려워서였다. 잠시 안고 다니다 보니 은근히 불쌍해진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지만 그때만 해도 데려왔다가 관주가 필요없다고 하면 어디든 파묻어 죽여 버릴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보고서는 관주가 더 좋아하지 않았던가! '바라고 바라던 후계잣감이 왔느니 어쩌니 호들갑을 떨었을 땐 언젠고 이제 와서……!' 원망이 가슴에 가득 찼지만 감히 드러내지 못하고 마는 삼선녀였다. 상관공자는 빗속을 뚫고 쾌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이 그의 행동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이 비를 뚫고경관을 훤히 볼 뿐만 아니라 가벼운 호신강기를 운용하여 빗물을 튕겨버리고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흡정대법 덕분에 얻은 막강한 내공의 공능이라고생각하면 잃어버린 염정이 더욱 아까워지는 것이다. 애초에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도망을 가면 어디까지 갈 것이냐라고 쉽게 생각한 그의실수가 컸다. 옥촉금단지체. 사실 그런 건 없었다. 하수수에게 말을 하다 즉석에서 지은 이름에불과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천만금의 가치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 뛰어난 지모와 재질, 그리고 이미 절세적인 미색이 될 소지가 충분한 그싹수만 가지고도 그랬다. 그는 여자에게 값을 매기는 데 인색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손에 거의 쥐었다가 놓쳐 버린 여자에게는……! 깎아지른 암벽이 그의 앞으로 급속도로 다가왔다. 상관공자는 그바로 앞에 멈춰 서서 염정을 업고 사라진 그 사내아이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쏟아지는 비가 대부분의 흔적을 가지고 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짐작할 흔적이 아주 얼는 것은 아니었다. 상관공자는 가볕개 몸을 날려 사내아이가 목표로 뛰었을 나무뿌리를 잡고 매달렸다. 과연 거기 누군가가 쟌고 매달린 흔적이 있었다. 나무껍질이 상당 부분 벗겨져 있는 것이다. 상관공자는 눈을 빛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추측할 수가 있었다. 껍질이 이정도로 많이 벗겨졌다는 것은 우선 이 쩝질을 잡고 매달린 사람의 손아귀 힘이 상당하다는 것이요, 그러면서도 무공은 익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나더 있었다. 그 사내아이는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상환공자는 거기 그대로 매달려서 이후 사내아이가 어떻게 움직였을까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몇 개 되지 않았고, 흔적은 많았다. 그래서 추리는 간단랬다. 상관공자는 잡고 있는 나무뿌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늘어진 덩굴을 향해 괄을 뻗었다. 그렇게 몇 개를 원승이 줄타기하듯 넘어가자 바닥이 비교적 덜 경사진 지형이 나왔다. 짐작대로 거기애 움푹 패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관공자는 그 경사면을 따라 걸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큰일을 하고 나면 쉬 피곤해지는 법이고, 이 빗속에서는 멀리 가자 해도그럴 수도 없을 터였다. 상관공자는 유람하듯 천천히 걸었고, 잠시 후 찾던 것을 발견할 수있었다. 험준한 산세를 갓 벗어난 산비탈 바위 사이에 난 작은 바위 틈이었다. 갑자기 비를 만난 사람이면 누구든 찾아들고픈 마음이 생길 그런동굴, 그것이 그가 찾던 곳이고, 아마도 먼저 이곳에 왔을 그 사내아이도 찾았을 옷이었다. 상관공자는 그 동굴을 향해 다가갔다. 왕숙수가 싸준 길 양식을 다 먹지 않고 남겨 둔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진자앙은 정신이 들자마자 그가 내놓은 그 음식들을 아구아구집어삼키는 염정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친천히 먹어." 염정이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꼭꼭 씹어 먹으라고." "공자님은 배 안 고프세요?" "난 공자님이 아니라 그냥 진자앙이야. 그리고 난 먹지 않아도 돼배불러." 그녀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 듯한 기분이라는 말은 삼켜 버렸다. 염정은 먹던 음식을 내밀며 말했다. "진자앙 님, 그래도 좀 드세요." "진자앙 님이 아니라 그냥 자앙이라고 불러. 그리고 염정이나 좀더먹어." "자앙……" 재미있다는 듯 입 속으로 불러 보던 염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염정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 이름은 다시 듣기 싫어요. 대신……!"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못했다 갑자기 이름을 바꾸려니 적당한이름이 선뜻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그때 동굴 입구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앙, 염정, 둘 다 좀더 먹어 두거라, 앞으론 음식을 먹을 기회가없을지도 모르니까." 염정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동굴 입구를 돌아보았다. 거기 상관공자가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진자앙이 눈을 껌벅였다.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절 아시나요?" 상관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동굴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염정 아니 정아라고 부르는 게 낫겠군. 정아는 이미 여러번 보아 안면을 익혔지, 네 이름은……!" 그는 고개를 약간 까닥여 미안하다는 표시를 했다. "엿들어서 미안하지만 방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 알게 되었지. 자,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먹어라, 다시 말하지만 앞으론 못 먹게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말은 부드럽고, 태도는 다정했지만 그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내용 또한 눈빛과 같아서 조금만 꼬아 생각하면 앞으론 다시 밥을 못먹게 해주겠다는 뜻이니 죽음의 위협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러나 전자앙은 여전히 얼띤 표정이었다.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신다고요? 그럼 그러세요. 이왕이면 거기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전 원래 속이 좀 좋지 않아서 뭘 먹는 데 시간을들여 먹어야 좋다는군요. 게다가 이렇게……!" 그는 길 양식을 들어 보였다. 마른 고기, 아니 이제는 빗물애 젖어불은고기와 역시 빗물에 젖어 재법 불은 주먹밥이었다. "거친 음식은 공들여 씹어야 살로 가고 힘이 되지요." 상관공자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식도락에 일가견이 있는 공자시군. 귀한 집 자손 같은데 내 짐작이맞을까?" 진자앙은 고기 한 점을 들어 가늘개 찢었다. 그리고 그걸 씹으며 대답했다. "귀한 집 자손 같으면 이렇게 음식을 입에 넣고는 말하지 않지요. 저희 집은 식구가 맡아서 식사시간마다 이야기 꽃이 피는데 그 재미가적지 않거든요. 하지만 음식을 씹어 삼킨 후에야 말을 하거나 웃거나하지, 만약 그 금기를 어겼다간 어머니에게 치도곤을 맞지요." "어머니가 엄하신가 보지? "엄하시죠. 하지만 재일 무서운 벌은 매를 맞는 것보단 식탁에서 일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서 있게 하는 거예요. 목에는 침이 넘어가는데 아무것도 먹진 못하는 거죠. 그게 제일 힘들어요." 진자앙은 다시 조그만 고기 조각을 반으로 찢어 입에 넣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그걸 보고 있지만은 않죠. 일어선 지 조금만지나면 그러시거든요. '에미야 그만 하면 충분히 교훈을 받지 않았을까? 엣말에도 벌이 심하면 안 준 것만 못하다고 하지 않디? 그러면……!" 염정이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옛말에 그런 게 있었어요? 전 처음 듣는데요?" 진자앙이 씹던 것을 멈추고 대답했다. "물론 나도 처음 듣지. 우리 집 노육 아저씨에게 여쭤 보니까그분도 처음 듣는다는 거야. 그러면서 '노주인님이 말씀하신 겁니까? 그러면 있는 거겠지요'라고 말하곤 웃는데 아마 '없는 말을 만들어서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렸어." 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럴듯하긴 하지만 그런 옛말이 실제 있다고는 믿겨지지않아." 그때 상관공자가 끼여들었다. "자앙 형제, 또 한 점 먹을 때자 되지 않았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진자앙은 상관공자가 먹을 시간을 준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최대한 천천히 먹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염정 또한 거기발 맞춘 것인데, 날카로운 상관공자가 그 애처로운 계략을 꿰뚫어보고제지한 것이다. 진자앙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깃점을 뜯어 우물거렸다. 그리곤 갑자기 웃었다. 상관공자가 물었다. "와 웃지?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 진자앙은 한편 입을 우물거리며, 다른 한편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찰언관색이라는 말이 있다. 말투나 표정을 보고 상대의의중을 살핀다는 뜻인데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사람애게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인 샘이다. 상관공자는 그 분야에서 나름대로일가를 이루었다 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가 평생 가장 장기로 여기는 '여자후리기'가 거의 절반 이상 그것에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장기가 지금 진자앙을 상대로 해서는 거의 먹혀들지 않고있었다. 아무리 봐도 어딘가 빈 구석이 있는, 말하자면 멍청한 녀석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여태 멍청이의 의중을 알려고 노력한 적은 없기때문이었다. 사실 진자앙이 방금 웃은 것은 그저 습관적인 것이었을 뿐이었다. 곤란한 지경에 처할수록 많이 웃는 것이 일종의 버룻이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상관공자 같은 경우 '장식용의 미소'를 지은 적은 많지만'목적 없는 미소'라는 것은 여태 해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마포근다에 광곤심다라고 '삼베는 실오리가 말고 총명한 사내는 의심이 많다'는 말이 있는 바, 지금 상관공자가 그랬다. 염정은 방금의 우연한 한 수로 상관공자의 약점을 발견한 것 같았다. 총명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그은 규정에 매여 사람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맞지 않으면 인정을 않으려고 들고, 때로는큰 약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녀 자신이 총명한 사람이지만 이러한 이치는 알고서도 피하지 못하는 것이라 그저 진자앙이 어떻게든 그 약점을 활용해 주기를 바랄뿐이었다. 문득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총명한 사람은 상관공자도, 그녀 자신도아니고 진자앙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대지약우라고도 하지 않아? 대지약우. 크게 지혜로운 자는 오히려 어리석어 보인다는 것인데 진자앙이 거기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그게 맞기를 절실히 바라는 것이 염정의 심정이었다. 진자앙은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달리 생각할 것도 없었다. 희대의 색마, 무림십대고수의 일 인인 데다가 무림사마 중의 최강자인 색마 영리충을 만나고도 그 손에서 빠져 나가려 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었디 . 그는 상관공자라는 사람의 진정한 정체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것이다. 염정으로부터 흡정대법의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에 이미……! 지금 바라기로는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것도 없고, 기대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살아 있는 이 순간을 조금 더 연장해 보자는 것뿐이었다. 그는 염정을 보고, 그 눈빛 속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애타는 기대를읽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가 누군가의 마음을 읽고, 또 머리를 쓴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잊은 일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사실을 눈치챈 그 순간부터, 그리고 그의 출생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그 사실을 종합해 알게 된 그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마음의 창을 닫고 모든 일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던 것이었다. 그런테 지금은 달랐다. 염정을 만나면서부터. 어쩌면 그녀와 함께셍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눈빛만 봐도 그 생각이읽혀지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본 것임이 바로 증명되곤 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얼마 남지 않은 고깃점을 들어 입애 넣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은 너무 적었고, 시간은너무 빨랐다. '포기할 순 업지!' 건자앙은 아까 여정을 업고 뛸 때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어떻게든 염정을 지키깼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그는 회미하게 웃었다. 어느 날 품에 날아든 한 마리 새를 위해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적과 싸울 결심을 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 가소로워서였다. "뭘 생각하고 웃는 거야?" 상관공자는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진자앙의 행동을 전혀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적지 않계 그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상관씨라면서요? 전자앙이 볼쑥 질문했다. 상관공자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상관씨도 있나요? 그럼 하관써, 중관씨도 있겠네요? 아…… 하관씨는 안 되겠군요. 벼슬길에서 쫓겨난다는 얘기 아닌가요. 그런 성씨를 가젼 사람은 없겠지요." 상관공자는 피식 웃었다. 진자앙의 말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자는 술책이라고 생각하니 가소로워서였다. "너는 백가보도 못 읽어 봤느냐? 조전손이 주오정왕으로 시작하는……, 거기 마지막에 그런 구절이 있지. 상관구양이라고……! 백가보는 오대 때의 전당 조본가가 쓴 책으로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성씨 백 개를 나열한 책이다. 그 마지막이 상관구양으로 끝나니 꽤 유명한 성씨라는 뜻이다. "그럼 우리 진가는 몇 번째에 나와 있는지 모르겠군요." 진자앙이 기지개를 펴며 물었다. 상관공자가 가소롭다는 듯 느물거리며 물었다. "펼 진 자를 쓰는 게 맞느냐?" 진자앙이 고개를 저었다. "고보단 불산 진가라고 하는 게 빠르지요. 천기공 진자룡의 진자! 저도 그 진 자를 씁니다." 그는 일어서면서 상관공자의 앞을 비스듬히 막아 섰다. 그의 손에서붉은빛이 번뜩였다. 단룡비를 꺼내 든 것이다. 상관공자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참이었다. 원래 진자앙이 말을 늘일 때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짐작을 했었다. 그러나 맙소사 백 번 양보해서 그가 아무런 방비 태세를 갖추지 않고 있다가 진자앙의 기습을 받았다고 치자. 무림십대고수의 하나가 어린애의 기습을 받았다고 해서 무슨 영향을 받을 것인가! 그 틈에 여자아이라도 도망간다면…… 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가소롭기 짝이 없는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진자앙의 이 일격은 놀라운 것이었다. 무기가 아니라 말로공격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더구나 천기공 진자룡의 이름이 이 아이의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짐작을 못했기 메문에 더욱 놀라웠다. 그는 그것과 동시에 꺼내 든 단룡비의 광망 뒤편으로 염정이동굴을 빠져 나가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손을 내밀어염정을 잡으려 했을 때는 진자앙이 그 방향을 몸으로 막고 있었다. 그는 정말 화를 냈다. 일백 평생 이렇게 화가 난 것도 드문 일이었다. "가소로운!" 상관공자는 오른손을 내밀어 단룡비를 잡고, 다른 손은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염정을 향해 내밀었다가 물여당겼다. 능공섭물의기공이었다. 저만치 가던 염정이 공중에 뜨더니 당겨 왔다. 오른손에 단룡비의감촉이 느껴졌다. 스윽--! 진자앙이 단룡비를 양손으로 잡고 한껏 뒤로 당겼다. 애초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믿고, 또 이 비수의 위력을 믿고 벌인 일이었다. 과연 단룡비는 상관공자의 손바닥에 길게 상처를 내며 뒤로 뽑혀졌다. "이놈!" 상관공자가 노성을 질렀다 생각지도 않던 상처를 입자 한 순간 심령이 흔들려 능공섭물의 운기가 깨졌다. 염정이 바닥을 구르듯 달려나갔다. 상관공자는 상처 입은 오른손을 당겼다가 다시 내밀어 진자앙의 머리를 내러치려다가 순간적으로 마음을 바꾸어 팔을 잡아 동굴 벽에 던져 버렸다. "큭--!" 진자앙이 온몸으로 동굴 벽에 부딪쳤다가 피를 토하며 되튕겨 나왔다. 그나마 상관공자가 마음을 못 정하고 손에 사정을 봐준 것이 아닌었으면 즉사했을 것이다. 염정은 이미 저만치 도망쳐 가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상관공자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진자앙을 바라보았다. 염정은 언제든지 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진가장의 자손을 처리해야 한다는것이었다. 건드리지 않았으면 모르되 한번 건드렸으면 흔적조차 완전히 없애버려야 후환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기공 진자룡이라는 이름에겁을 먹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 껄끄러운 상대이긴 했다. 무엇보다도우선 그와는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천기공과 어떤 사이냐?" 진자앙은 그제서야 간신히 일어서려 애쓰고 있었다. 입가로 핏물이흘러나왔다. "알 것 없소!" 다급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염정의 목숨이 걸린 문제가 아니었으면그는 죽어도 할아버지의 이름을 팔진 않았을 것이다. 죽으며 한번,죽기 전에 한 번 식으로 두 번이나 집안망신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상관공자는 피식 웃었다. "어떤 식으로든 관계는 있겠지!" 결정했으면 망설이지 않는 것도 그의 장점 중 하나. 상관공자는 동굴 벽에 손을 기대어 간신히 선 진자앙을 향해 손을 들었다가 내리치려 했다. "멈춰!" 손은 완전히 내리쳐지지 못했다. 동굴 안쪽으로부터 그를 향해 덤벼드는 그림자를 막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동굴 안쪽, 어두운 구석애서 사람으로 짐작되는 그림자가 상관공자를 향해 육탄으로 달려든 것과 상관공자의 손이 방향을 바꾸어 그 그림자를 후려갈긴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콰앙--! 동굴이 울릴 정도로 강한 위력의 일장이었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일장을 몸으로 받아 내며 그대로 달려들어 상관공자의 옆구리를 들이박으려 했다. "어어……?" 상관공자는 이 황당한 일격을 맞아 왼손으로 가볍게 밀어 내듯 다시일장을 갈기며 발로는 보법을 밟아 동굴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림자가 그 뒤를 따라 나아가 진자앙과 그의 사이를 막아 섰다. 그 그림자는 키는 작지만 근육질의 체구를 자랑하는 오십 줄의 중늙은이였다. "소 노사님!" 건자앙이 자기도 모르개 소리쳤다. 애초에 그가 찾아온 사람, 소삼중이었다. "가거라!" 소삼중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명령했다. 진자앙은 그 뒷등을 바라보았다. 결코 크지 않은 체구가 지금은 태산처럼 우람해 보였다. 그 등에 가려 상관공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진자앙은 입술을 께물고 염정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것 참!" 상관공자는 실소를 흘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거치적거리는 것들이 많지?" 그는 소삼중을 보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질문을 던졌다. "넌 뭐냐?" 소삼중은 두 주먹을 들어 가슴 앞에 세웠다. 무공이라고도 뭐라고도할 수 없는 자세였다. "소삼중 종화 금강당의 당주 매타자 소삼중이 나다." "넌 거기 왜 있었어? 또 있었어도 구경이나 할 것이지 왜 뛰어들어,주제넘게시리!" 상관공자는 오늘 자신이 방심해도 너무 방심했다고 반성했다. 동굴안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해이해져 있었던 것이 이 모든 귀찮음왈원인이었다. "거긴 원래,약초 캐는 사람들의 집이니까 그리고……!" 소삼중은 진자앙이 간 방향을 흘깃 보곤 입을 다물었다. 그 아이가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온 아이라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은 방금 맞은 일장이 내장을 흔들어 놔서 기혈이 역류하려 한다는것이 더 큰 이유였다. 말 몇 마디 더 했다간 적이 보는 앞에서 쓰러질판이었던 것이다. 동굴은 그의 말대로 약초 캐는사람들. 사냥꾼들, 때로는 인근의 장족들도 가끔 와서 쉬어 가는, 일종의 간이 숙소였다. 소삼중은 전날화타고의 재료를 찾으러 골짜기를 뒤지고 있다가 날이 저물어 금강당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동굴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진자앙과 염정이 창황간에 피신하느라 동굴 깊숙한 곳에 안 와서 몰랐겠지만 사실 그 안쪽에는 사람이 쉴 만한 침상에다가 비상용의 음식, 동물을 막기 위한 나무문까지 만들어져 있어 완벽한 하나의 방을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잠시나마 동굴 안에 같이 있었으면서도 소삼중을 발견 뭇한 이유였다. 소삼중도 원래는 새벽 일쩍 돌아가려 했지만 비가 올 것 같아서 하루 더 쉬겠다고 결정한 것이 위기의 순간에 적절하게 나타나 진자앙과영정의 목숨을 구해 주게 된 셈이첬다. 상관공자는 다시 한번 자신의 실수를 탓했다. 지나가는 누구나가 쉬어 가고 싶은 곳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 동굴 안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라기엔 너무 깨끗했던 것을 그냥 넘겨 버린것이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오늘 죽을 사람이 하나 더 생긴 것뿐이지!" 그는 살기를 풀풀 날리며 한걸음 다가섰다. 염정은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도망가지 않은 것이었다. 그나는 롱쿨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나무 위에 올라가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진자앙이 달려오자 그 앞에 뛰어내렸다. "도망쳐 나왔군요!" 염정이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반가운 기색으로 그를 맞았다. "말할 시간 없어!" 진자앙은 그녀를 발견하자마지 손을 잡아 끌고 뛰었다. 소삼중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막아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엔 색마 영리층의 이름이 너무 컸다. 영리충의 추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최대한 멀리,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그 다음엔……!' 피곤이 풀리지 않은 염정이 헐떡거리고 있었다. 진자앙은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다시피 하며 뛰었다. 강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 그녀를멀리 보낼 수 있다. 얼마를 뛰었을까? 나지막한 구릉이 나타나고, 그 구릉에 올라서자 강물은 그리 멀지않은 앞에 흐르고 있었다. 강도 하늘도, 그리고 그 강변에 갈대들도비에 젖고 있었다. 진자앙은 얼굴을 적신 빗물을 두 손으로 훔쳐 내고는 염정을 돌아보았다. "강까지 그냥 달려가. 갈대밭에 몸을 숨기면서 걷다가 지나가는 배가 있으면 타는 거야. 뱃삯을 요구하면……" 진자앙은 품을 뒤져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염정에게 넘겨주었단. ,"그 안에 약간의 은자가 있으니까 그걸로 계산해. 얼마 안 되니까아껴 써. 주머니를 사람들에게 보여선 안 돼. 네가 돈이 많다고 생각하면 주머니를 뺏기 위해 널 죽일지도 몰라. 남이 안 보는 곳에서 몰래 돈을 꺼내 계산해야 할 거야." 숨을 헐떡이면서도 단숨에 거기까지 말한 진자앙은 그래도 무언가더 말해 줄 것이 없을까 생각했다. "혹시 배를 타고, 그래서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 나가면…… 그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혹, 갈 곳이 없다면 불산에 가서 진가장을 찾아가, 거기 가서 내얘길 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널 안전하게 보살펴 줄 거야." 숨이 털에 차서 여태 말도 못하고 있던 염정이 그제야 물었다. "공자님……, 아니 자앙은 어쪄려고요?" 잔자앙은 막연히 뒤쪽을 가리켰다. 염정이 펄쩍 뛰었다. "가면 안 돼! 죽어요!" "지금 그…… 상관공자를 막은 사람이 바로 내 사부님……, 아니 이제 사부님으로 모시려고 했던 분이야. 안 갈 수가 없어." "바보 같은 짓이잖아요!" 그때에야 진자앙은 굳은 표정을 풀고 웃어 보였다. "원래 바보야!" 그는 염정의 등을 밀었다. "빨리 도망가! 그가 무서운 사람이란 건 나도 잘 알아. 아마 죽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살아남으면 나중애 다시 만나 놀자!" 염정은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먹이더니 뒤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바보!" 진자앙은 그 뭣모습을 멍하니 보더니 갑자기 뒤를 따라 달려갔다. "잠깐만!" 염정이 멈추어 그를 기다렸다. "같이 가는 거예요?"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단룡비를 그녀의 손애 쥐어 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산기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염정은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에 젖은 산기슭수풀 사이로 진자앙의 작은 어깨가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한참 동안이나…… 비가 내렸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비가 대지와 강물 위로퍼부었다. 뿌연 우막이 천지를 메우고 있었다. 그 속으로 염정의 작은모습이 사라져 갔다. < 제1권 끝 > [제팔장] 영리충은 산을 내려가고 진자앙은 산으로 올라가다. 산기슭을 돌아서자 진자앙은 뛰는 것을 멈추었다. 이젠 바쁠 것이없었다. 염정을 보내고 나서 돌아간다는 것은 동굴을 나오면서부터 결심한일이었다.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명가의 자손에겐 당연한 규범인 것은 둘째치고라도, 아직 사제의 예를 행하지는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사부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악적의 손에 팽개쳐 두고 혼자만 빠져 나간다는 것은 사람의 자식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가. 빨리 가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누가영리충에게 맞서서 살아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그와 같은 항렬의 고수들, 예컨대 무림십대고수의 반열에 든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림십대고수 중 하나를 조부로 둔 그로서는 그런 이야기를너무나 자주 들어 알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는 것은 사부될 사람의주검을 빨리 보는 것에 다름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임종을 지켜보는 것이 제자 될 사람의 도리었다. 그보다 이전에 목숨을 그로 인해 구함받은 사람의 도리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하나의 할 일이 있었다. 염정이 확실히 도망갈때까지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강변으로 도망갔다지만 영리충 같은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강을 막고 서서 배를 하나씩 뒤지더라도 반드시찾아 낼 것이다. 그것을 막아야 했다.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시간이라도 더 끌어 주어야 했다. 더 많은 시간의 여유가 더 많은 생존의 가능성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어차펴 무공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시간을끌 수 있는가? 상대가 예상치 못하는 일을 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진자땅은 생각했다. 허등지등 도망가고 있을 줄 알았던 생쥐가 고양이 앞에 다시 나타나면 고양이도 그냥 좋아하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그는 지금 산을 오르고 있었다. 진자앙은 점점 성기어 가는 빗방울을 손으로 훔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좁은 오솔길이 있고, 바위가 있으며, 나무가 있었다. 그는 웃었다. "죽기 전애 할 일이 있지." 그는 물애 젖은 생쥐 꼴이 되긴 했지만 대층 옷을 추스르고, 멀리불산이 있는 쪽이라고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서 절을 두 번 했다. "먼저 가는 불효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진자앙은 코를 찡그리고는 다시 웃었다. "살아 오는 동안 멍청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으냐, 자앙! 이제죽을 때만이라도 진가장의 자손다워져야 한다." 그는 다시 산 위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상관공자는 놀랐다기보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삼중이그를 향해 덤비고 있었던 것이다. 계대로 된 무공이라곤 배워 본 적이없는 사랑처럼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한 주먹은 뻗고. 다른 주먹은 옆구리에 붙이고 있는 걸 보면 나한권 같기도 하고, 내민 주먹과 내민 발이 같은 쪽인 걸 생각하면무당자오홍련권 같기도 혔다. 그러나 그 기세에 전혀경력이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결국은 마구잡이, 뒷구멍으로 조금씩 흘러나온 각파의 비전 권법을 시중얘서 얼렁뚱땅 엮어 흉내만 낸마구잡이 권법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상관공자는 실소를 흘리고는 파리를 쫓듯 가볍개 손바닥을 떨쳤다. 그는 지금 진지하게 대응할 펼요도 못 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짓은 파리를 쫓는 것 같지만 그 손애서 뿜어져 나온 힘은 황소라도 때려잡을 것처럼 강렬했다. 그 힘이 소삼중의 어깨를 쳤다. 꽝--! 폭음이 터졌다. 그 일장에 파리처럼 납작해지리라고 기대하고 때린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래도 최소한 달려들 때와 같은 힘으로 삼 장 밖으로 날아가버리거나, 균형을 잃고 팽이처림 돌다가 꼬꾸라지거나,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부들부들 떨다가 숨을 멈추기라도 할 줄 알았던 상관공자였다. 그러나 소삼중은 이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상관공자의일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그대로 밀고 들어와서 그 마구잡이 권법으로 가슴팍을 찔러 왔다. "이것 봐라?" 좀 전에 내뱉은 소리와 내용은 같은,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른탄성 한마디를 지르며 상관공자는 옆으로 비켜섰다. 아무리 힘없는일권에라도, 맞는다는 것은 그의 체면에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일이었다. 소삼증의 동작이 갑자기 두 배로 빨라졌다. 그는 상관공자가 가볍게피해 버린 주먹을 그대로 둔 채 팔을 반으로 접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찍어 버렸다. 온몸의 체중을 실은 통렬한 탄양타의 일격이었다. "이것 봐라!" 이번에는 분노의 탄성이었다. 상관공자가 어떤 사람인데 그 정도의 일격에 타격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이 일격이 그의 자존심에 새긴 상처는 매우 깊었다. 그는 들었던 손을 그대로 뒤집어 소삼중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쳤다. 분노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있는 거친 손짓이었다. 둥--! 북 치는 소리가 소삼중의 목덜미와 등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소삼중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양손을내밀어 상관공자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상관공자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잠시 대응 방법을 생각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누군가에게 옷깃을 잡힌다거나 하는 일은 그가 무공을 익힌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수가 하수를 자신의 지척에 접근시킨다는 것은 무림의 상식으로보아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지금 그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났다. 당연히 거기얘는 보다 더 비상식적인 원인이 있을 수밖애 없었다. 바로 소삼중의 외공이었다. 상관공자는 손바닥에서 시작해서 어깨까지 찌릿찌릿 울리는 느낌에더욱 놀라고 있었다. 마치 철벽을 친 것 같은 느낌. 소삼중이라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철포삼 계통의 외가무공을 익혔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철포삼 따위로 그의 장력을 막아 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가 실제의 철벽을 친다 해도 이런 충격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일장에 바위를 가루로 만들고, 한 자 두께의 강판도 종잇장처럼 뚫어 버리는 그의 장력으로 쳤는데 이런 충격을 받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살과 거죽으로 된 사람 정도야……! 그러나 피곤죽이 되어 있어야 마땅할 소삼중은 지금 그의 옷깃을 잡아 끌고 있지 않은가. 상잔공자는 소삼중의 손길에 끌려가지 않으려 하체에 기를 모았다. 소위 천근추라고 불리는 무공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본능적인 것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소삼중이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끄는 손이 무거워진것을 재빨리 느끼고 상대가 하체로 기를 옳겼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히 상체는 하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한 상태일 것이다. 그는 끄는 손을 그대로 한 채 몸을 띄웠다. 그의 무릎이 상관공자의턱을 후려쳐 가고 있었다. 동네 싸움꾼들, 혹은 됫골목의 건달들이 싸을 때나 쓸 방법으로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이 상관공자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그는 손상된 자존심에 얼굴을 붉히며 몸을 뒤로 눕혔다. 그의 몸이나무막대기처럼 꼿꼿이 선 채로 뒤로 넘어갔다. 소삼중이 그 동작을따라 넘어오고 있었다. 상관공자는 손을 들어 옷깃을 잡은 손을 비틀었다. 내공이 담긴 그손짓을 누가 이길 수 있으랴. 간단하게 소삼중의 손은 떨어져 나갔다.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속동작으로 소삼중의 몸을 잡아 위로치켜 을렸다. 뒤로 기울어지는 몸, 위로 치켜지는 소삼중. 자연스런결과로 소삼중은 상관공자의 머리를 타넘어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려 하고 있었다. 거기에 상관공자의 장력이 연거푸 작렬했다. 파파파파팡--! 격렬한 격타음이 퍼지며 소삼중은 사오 장 너머로 날려가 뒹굴었다. 쏟아지는 비에 만들어진 웅덩이가 요란스럽게 물방울을 튀겨 내었다. 상관공자는 땅바닥에 머리가 닿기 직전, 몸을 뒤채어 오뚝이처럼 꼿꼿이 일어났다. 소삼중을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철판교에 연환장의 절묘한 배합으로 소삼중을 날려 버린 셈이었다. 소삼중은 온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쓴 모양으로 허우적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공자의 분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차피 방급의 연환장이 큰 타격율 주지 못했다는 것을 손바닥애 돌아오는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좀더 확실한 타격을 주어야 했다. 소삼중이 철포삼. 금종조, 흑은 십삼태보횡련 등 속의 외가기공을 익힌 것이 맞다면 방법은 있었다. 상관공자는 그런 유의 외공. 혹은 연경공(신체를 단련하는 기공)이 갖는 약점을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모든 부분, 심지어는 눈꺼풀도 단련시키지만 신체의 단한 부분, 조문만은 단련시키지 못하며, 돌을 부수는 양강의 장력에는 버티지만 내장을 으스러뜨리는 암경애는 잠시도 견뎌 내지 못한다. 지금 소삼중의 조문이 어디인지는 빨리 알아 낼 방법이 없지만 상관공자는 전문적으로 호신기공을 파괴하는 암경 하나는 알고 있었다. 흑심투골장이 그것이었다. 이름이야 촌티가 나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한 그 사공을 그는과거에 데리고 놀다가 버린 한 여인에게서 얻었다. 이미 오십 년도 더지난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상판공자는 단전의 기를 손바닥에 모았다가 그대로 뻗어 내었다. 일머서던 소삼중이 잠시 움찔했다. 상관공자는 미소를 흘렸다. 이런 암경, 혹은 침투경이라고도 볼리는 종류의 장력은 시전하는 사람의 조얘애 따라서 즉시 효과를볼 수도 있고, 일이 년이 지란 후애 갑자기 쓰러지도록 만들 수도 있다. 지금 당장 효과를 보기 위해 최고의 진력을 투입했으니 소삼중의뼈는 끊어지고, 심장은 썩어 가고 있을 것임이 분명혔다. 그리고는 검은 피를 토해 내고 쓰러져 죽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소삼중은 아무렇지도 않온 표정으로 꼿꼿이 일어나 그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의 흔적이란 단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았다상관공자는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백년 넘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것저것 많이 보고, 많이 겪었지만 오늘 같은 일은 처음 겪는다. 외공 나부랭이나 겨우 익혔을 졸개 녀석이 회심의 일격까지 받아넘기고도 그대로 서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로운 무공이 출현했나?' 그는 신기하다는 듯 한참 동안이나 소삼중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꽤나 버티는데……, 어디 일장 더 받아 보려느냐?" 소삼중은 지금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일장을 맞았을 때는 숨이 잠시 멈추고, 가슴속에서 불꽃이 타오르는듯 괴로웠었다. 제이장을 맞았을 때는 목이 부러지고 장이 토막토막끊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방금 뼛속으로 싸늘한 기운이 스며드는 느낌 이후로는 심장이 제대로 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목구멍으로넘어오는 선혈을 간신히 누르고 있었다. 태연히 서 있는 것이 고작일뿐,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정확한 상황이었다. 이제 다시 일장을 맞으면……? 죽고 싶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육신의 고통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비결'을 발견한 지 어언 이십이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그는사람이면 당연히 원할 대부분의 것들을 희생하며 오직 하나, 이 비결에만 매달렸었다. 피부를 단련해야 한다고 해서 죽으라고 맞았다. 내공이 없이는 아무것도 안되리라고 해서 이리 구걸, 저리 귀동냥을 해서 간신히 내공심법 하나를 얻어 배웠다. 이리 맞고 저리 걷어차이던 그 길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오로지 한마음 한뜻, 금강불괴가 되챘노라며 견뎌 왔었다. 그 결과가 '매타자'라는 별호 같지도 않은 별호 하나, 그리고 산 위에 있는 작은 초막, 그 앞에 매달린 '금강당'이라는 현판 하나였다. 그리고 이재 죽으려 하는 것이다. 이십여 년을 꿈꾸어 오던 일은 아직시작조차 못 하고 있는데……, 마음속에 맺힌 비원 하나는 아예꺼내 보지도 못했는데……, 이재 길거리의 개처럼 맞아 죽게 되는 것이다. 소삼중의 입이 묘하게 비틀어져 열렸다. 말라 갈라진 입술 사이로누런 이빨이 잇몸까지 드러났다. 중간에 두 개는 언제 부러졌는지 비어 있었다. 소삼중의 눈기 가늘게 찌ㅅ겨졌다. 얼굴 가득 패인 주름살이 물결치듯움직였다. 그는 지금 웃고 있었다.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한이 채 풀어지지 않은 체 이렇개 웃음 아닌 웃음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한 순간 그렇계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얼굴에 부딪는 빗항을을 손으로 훔쳐 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런 솜주먹이라면 일장아니라 일백 장이라도 더 맞아 주마. 내가눈썹 하나 까닥하나 보려무나!" 마음의 고퉁이 육신의 고통을 누른 것인가. 그는 창자가 끊어지는고통도, 폐부가 찢어지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일장만 더 맞으면……, 일장만 더 맞으면 매타자 소삼중은 가장 그다운 방법으로죽계 되는 것이다. 길거리의 개처럼 맞아죽고 마는 것이다. 소삼중은 어느게 차라리 그것을 바라는 이상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상관공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그는 오늘 이미 일백 평생에가장 이상한 일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일백 평생에 가장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하늘을 보았다. 비는 조금씩 그쳐 가고 있었다. 지금 그 계집아이는 어디쯤 도망갔을까.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소삼중을 보았다. 그 계집아이가 어디로 도망갔든 결국엔 그의 손에 잡히고 말 것이다. 이자를 처리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는 약간씩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지금 이 순간은분노가 욕심을 이기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었다. 아까 진자앙의 단룡비에 베인 상처가 다시 눈에들어왔다. 그것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이번 일장을 맞고도 죽지 않으면 내가 영리충이 아니다!" 그의 손에 붉은빛이 모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수정처럼 붉은 원구가 손을 감싸고 눈부신 광채를 흩뿌렸다. 분분한 빗방울이 그 광채에 닿자 지글거리며 끓어 수증기로 화해 사라지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화로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초절정의 내공 수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이기생형의 경지,기를 모아 형체를 만드는 초절정의 공부였다. 그러나 그 일장은 뻗어 나가지 못했다. 그들이 대치한 공터에 사람하나와 몽등이 하나가 나타난 때문이었다. 상관공자, 영리충은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인상을 구기고는 침을뱉었다. 그의 손에 반짝이던 붉은빛의 구슬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나 원 참! 이런……!" 백년이 넘는 그의 평생에 이렇게 재수없는 날은 처음이었다. "내가 보기엔 천기공 진자룡, 진 대협 같은데……, 맞소?" "귀하가……!" 진자룡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색마로 이름난 영리 형이 맞다면 노부도 자룡이 맞겠지요." 공대를 하지만 '색마'라는 말을 강조해서 적대감을 드러내는 진자룡이었다. 영리충은 충분히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을 듣고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진자룡의 모습과 그의 손에 들린 몽등이 하나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지푸라기 하나만 들면 천하에 적수가 없다…… 오늘 이 궁벽한 산골엔 웬일이시오?' "노부가 말년에 운이 없어서……!" 진자룡은 손에 든 몽등이로 땅을 짚고 기대어 서서 말했다. "지팡이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저승에 한 발 디딘 몸인데도 불구하고 손자 녀석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저기 계시는저분 노사께……!" 그는 한쪽에 서 있는 소삼중을 가리켰다. "손자 녀석의 훈도를 부탁드리려고 했지요. 체구는 크지만 열두 살밖에 안되는 어린 것이 산길을 가다가 이리라도 만나지 않나 해서 체면 불구하고 이렇게 뒤를 쫓았다오." 진자룡이 천기공이라고 이름을 얻은 것은 그저 무공이 강해서만은아니었다. 그의 인품이라는 것이 천의무봉, 흠잡을 구석이없을 정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을 잘 아는 영리충이니 그가 한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불평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재수없군!' 거짓말이 아니라면 진자룡은 여태 손자를 따라다니며 모든 일을 지켜봤을 것이다. 그러니 시기 적절하게 등장할 수도 있었으리라 염정이 하필이면 진자룡의 손자 녀석과 만나게 된 것부터 지금까지, 그의입장에서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재수없는 일이라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었다. 어쨌든 문제는 간단했다. 진자룡이 나서지 않았으면 모르되 나선 바에야 포기하든가, 아니면 그까지 죽여야 했다. 그는 상황관단이 빠른사람. 체면 때문에 이익과 불이익을 혼동하지 않으며,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아는 사람이기도 혔다. 그것이 그 나름대로의 성공 비결이었다. 영리충은 잠깐 사이에 마음을 정했다. 진자룡은 적으로 삼기엔 버거운 상대였다. 나중앤 몰라도 지금은 적으로 삼을 때가 아니기도 했다. 영리충은 소삼중을 다시 보았다. 천하의 천기공 진자룡이 손자를 맡길 정도의 인물인 줄은 몰랐었다. "정체를 감춘 고인이신 줄은 나도 몰라뵈었군! 제자의 성취를 기대하겠소!" 내용이야 정중하지만 전혀 곱지 않은 말투로 몇 마디 내뱉고는 다시그만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진자룡을 보더니 포권했다. "오늘 실례가 많았소. 후일을 기약하고 소생은 그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그는 천천히 장내에서 빠져 나갔다. 진자룡이 몽등이, 그의 말대로라면 지팡이를 슬쪄 움직였다. 순간,영리충이 세 발짝이나 옆으로 뛰었다. 진자룡은 오른팔로 버티던 것을왼팔로 옳겨 짚었을 뿐이었다. "어디로 가시건 영리 형이 못 가실 곳은 업겠지요만……, 한번 용서한 아이들을 다시 건드리실 분이 아니라는 것만 믿지요." 영리충이 가는 방향이라는 것이 진자앙이 도망쳐 내려간 방향과 같았던 것이다. 가볍게 뭉등야를 움직여 경고를 한 샘인데. "흥!" 영리충은 차갑게 코웃음을 날리고는 산길을 돌아 걸어 내려갔다. 잔뜩 분노했는지 비 고인 웅덩이를 피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처음의그 방향, 즉 진자앙과 염정이 사라진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나름대로는 뛰어난 머러를 쟈랑하는 사람이다. 방금 진자룡이정중한 말로 위협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은 것이었다. 어차피 진자앙은 건드릴 필요도 없었고, 우선은 건드리지 않을 작정이기도 했다. 아직은 천기공 진자룡과 적이 될 때는 아니만다. 하나 그가 못마땅해 하는 것은 진자룡이 '아이'라고 하지 않고 '아이들'이라고 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곧 진자앙만이 아니라 먼저 도망간 염정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자룡은 그 계집아이도, 진가장, 더 나아가 천기공 진자룡의 보호하에 있다는 점을 표명한 것이다. "젠장!" 뱃속에서부터 화가 끓어올랐다. 그는 여태 노리는 여자를 누구 위협때문에 놓친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념해야만 했다. "아니 , 아니지!" 영리충은 고개를 저었다. 단념이 아니었다. 단지 이번만 용서해 주는 것뿐이었다. "다시 만나면 그땐……!" 염정을 그냥 두진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내려온 길을 다시 돌아보았다. 수풀로 막혀 진자룡을 비롯한사람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영리충은 회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진자룡 때문에 염정을 건드리지 못한다면, 진자룡을 먼저 없애면 될일이었다계집아이 하나 때문에 무림 상공과 원수가 될 생각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는 그렇다고 단호하게 대답하리라. 계집아이든 과부든 혹은 천하의 추녀든 여인은 항상 아름답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있는 것이 자기라고 단단히 말해 주고 말리라. 그렇다. 그것이 바로 영리충이었다. 자신에 대한 그 같은 확신으로 마음이 홉족해진 영리충은 하늘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한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진자룡에 대한 깊은 적대감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진자룡은 사라지는 영리충의 됫모습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처단해 무림에 그와 같은 색마가 발붙일 곳이 없다는것을 보여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는 먼저 덤벼들지 않는 자를 핍박해목숨을 앗을 정도로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두고 두고 후환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문득 목숨을 걸고 싸운다 해도 사실 영리충을 꼭 이긴다는 확신도 없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십 년만 젊었다면 시도해 볼 만도 했겠지만 백다섯 살은 모험을 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였다. 진자룡은 어지러운 기분을 수습하며 소삼중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그대로 서 있었다. 진자룡이 먼저 포권했다. "노부, 진자룡이외다. 노사께 손자를 맡길 사람이지요." "소삼중입니다." 소삼중이 마주 포권했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쏟아졌다. 진자룡이 앞으로 나서서 그의 어깨를 부축하려 하자 소삼중이 손을저었다. "괜찮소. 문제없……, 큭!" 다시 선혈이 튀어나와 앞섶을 적셨다. 그의 걸음 앞이 빗물에 섞인선혈로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진자룡이 다시 그의 등뒤로 돌아가 신주, 신도, 영태, 지양으로부터 척중, 명문에 이르기까지 척추를 따라 뻗은 혈도들을 짚었다. 진기를 주입해 기혈을 안정시키려는것이었는데 진자룡은 곧 다시 손을 떼어야 했다. 소삽중의등은 그냥만졌는데도 마치 철판과 같이 단단해 진기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혈도가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진자룡은 소삼중을 다시 보게 되었다. 소삼중은 혈도가 없는 정확히 말해서 '혈도를 감추어 버린 육체'라는 외공의 최고 경지에 다다라있었다. 외공만으로 그런 경지라면 분명 사소한 성취는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살아남느냐는 것.' 입으로 붉은 피를 쏟았으니 내부 장기가 흔들린 상태라는 것은 무림의 상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치유하려면 내공을 불어넣어 기혈을 아정시켜야 한다는 것도 상식. 문제는 철판 같은 피부로 내부를 보호하고 있으니 진기요상법을 쓰기가 애매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진자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맹렬히 두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곤그 손을 소삼중의 등을 향해 뻗은 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움직였다. 소위 격체전력의 방법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행위였다. 그의 주위에서 빗방울이 튕겨져 나갔다. 방금 전까지 그의 몸을 때리고 있던 비가 공력을 운기하자 그에게 범접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잠시 후 소삼중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만, 됐습니다." 진자룡은 손을 내리고 소삼중의 앞으로 돌아왔다. 그는 침중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영리충이 마지막 손을 쓰기 전에 나섰어야 옳았다고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분명 그 마지막 장력이 암경 종류의 것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대충이라도 치료하려 했지만……!" "정말 됐습니다." 소삼중이 다시 손을 치켜 들더 진자룡의 말을 막았다. 그는 이제 제대로 일어설 수는 있는 모양이밌다. "저도 나름대로 의약을 공부한 바 있으니 나머지는 스스로 치료할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손자 분을 진정 제게 맡기려 하십니까?" 그는 진자룡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의 눈에서 진실과 거짓을가려 내려는 듯. '오긴가?' 진자룡은 소삼중의 태도에서 다른 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동정이나, 회롱, 고마움의 표시 같은 것이 진자룡의 결정에 섞여 있지나 않은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진자앙의 입문에 그러한 것들이 개입함으로써 그 자신이 불쌍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진자룡은 고개를 저었다. "자앙이……, 그게 손자 녀석 이름이오만, 그애가 소 노사의 문하에 입문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애의 결정이오. 노부는 단지 반대하지 않율 뿐." "제가 배운 것이 모자라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무식한 방법으로밖에 가르칠 수 없습나다. 그러다가 다치기도 하고 간혹 불행한 일도 일어나는테 그래도 괜찮으시갰습니까?"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다치며 혹은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하다못해 마차 모는 법도 배우지 못할 것이오. 어찌 두려워하겠소?" "제가 알고 자신하는 것이 보잘것없는 것들이라 손자 분이 그 모든어려움을 견딘다 해도 나중얘 배운 것을 보면 가소로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부의 제자가 되면 마차 모는 법을 배우고, 수레바퀴 깎는 사람의제자가 되면 수레바쥐 깎는 법을 배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오." "마지막으로……" 소삼중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손자 분이 제 문하에 오도륵 숭낙하신 진짜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않으시겠습니까?" 진자룡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미 대답한 질문이었다. 분명 자앙이원했기 혜문이라고 말했는데 의혹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그 말을 할수 업었다. 소삼중의 상기된 표정이 말로만듣던 무럼십대고수, 그 중얘도 하늘의 조화로 일컬어지는 천기공 진자룡콰 말하고 있다는 흥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혈이 역류하는 가운데에도 억지로 말을 잇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력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 말을 하다간 자칫 피를 토하고 죽을지도 모를 몸으로도 끝내 확답을 받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그 태도얘서 엿보였기 때문애 진자룡은말하지 않으려던 것도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소 노사의 사문, 그러니까 금강당이……" 소삼중은 열에 들뜬 듯한 눈으로 진자룡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자룡은 그 눈이 보여 주는 기대에 부응하듯 마저 말했다. "대력패왕 철우가 창건한 문파가 맞지요?" [제구장] 유소림은 약초를 캐서 약을 만들고 진자앙은 매를 맞으며 무공을 배우다. 예상외의 일은 언제나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진자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가슴이 터져라 달려온 동굴 앞의 모습이 예상했던 것과는다른 것에 놀라 일변 숨을 고르고. 일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있어야 할 사람들, 보였어야 할 장면이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소삼중의 시신을 발고 선 악적, 영리충의 모습'을 기대한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슬프게, 또 어느 정도는 분노를 품고 예상했던 모습이 그와 비슷한 것이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 동굴 앞에서 그가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영리충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피바다. 적어도 난장판은되어 있어야 할 동굴 앞 비좁은 공터에는, 몇 개의 웅덩이만 남아 한결 가늘어진 빗방울을 받아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소 노사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궁금했다. 도대체 소삼중은 어디에 있는가? '만약 돌아가셨다면……?' 돌아가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소삼중은 금강당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높은 가능성은 다른 의미에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돌아가다'라는 말에 포함된 두 가지 의미를 그렇게 동시에 떠올리며 진자앙은 바닥의 흔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이젠 제법 가늘어졌지만 여전허 그치지 않고 있는 비가 뭔가를 추측할 수 있을 자국들을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지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진흙탕에 새겨진 발자국들의 윤곽도 흐릿해진 지 오래고, 뭔가 떨어지거나 했어도 골을 이루며 흐르는 저 빗물에 같이 실려 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진자앙은 모르는 일이지만 소삼중이 뱉어 내었던 핏물도이미 빗속에 섞여 버렸다. 진자앙은 고개를 들었다. 지워져 버린 흔적들만큼이나 빗속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은 흐릿하기만 했다. "오지산이 어디지?" 어쨌든 오지산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진자앙이었다. 가능성이희박하긴 하지만 혹시 소삼중이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그곳, 금강당을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문제는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자신이 위쳐한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처음 가던 대로강을 왼편애 두고 걸어 올라가면 그곳이 오지산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진자앙은 동굴로 들어갔다. 이잰 서두를 일이 없었다. 옷이라도 말린 후에 가도 늦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난밤부터 쫓겨다니느라 눈도 붙이지 못했다. 피부에 닿는 위험은 일단 비켜 갔다고 생각하자 때늦은 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자앙은 잠을 잘 수도, 옷을 말릴 수도 없었다. 쉬려고 들어간 거기에 소삼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삼중은 눈을 반개하고 다리는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극히 가끔이었지만 아랫배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엷은 김이 온몸에서 발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식이 한참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기를 하면 몸에서 열기가 솟구쳐 젖은 옷을 말리게 되고, 그러면거기에서 김이 솟아오른다는 것은 진자앙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새벽녘에 할아버지가 운기하는 모습은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새벽 이슬이 할아버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가 이내 김이 되어 솟구치면 랄아버지의 몸을 안개처럼 휘감고, 그때 할아버지는 마치 구름속에 잠긴 산처럼 커 보이곤 하지 않던가. 이윽고 운기가 절정에 이르러 무아지경에 들어가면 구름에 잠긴 산에서는 푸른 번개가 치고 자줏빛 붉은 서기가 휘황하게 번뜩였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듯, 혹은 찰나지간에 꿈처럼스치고 지나간 듯 그처럼 천변만화한 과정이 끝나면 산처럼 조용하던할아버지가 입을 벌리고, 그 입에서 환상처럼 붉은 주작 한 마리가 튀어나와 머리를 감돌고는 다시 입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것이 할아버지진자룡의 운기하는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주작은 화기가 뭉쳐 그렇게 보인 것일 따름이라고 말했었다. 오행이 생기고 변함은 불로 하여 이루어진다. 간목은 능히 심화를 왕성케 하고, 심화는 또한 비토를 평케 한다. 비토는 금을 낳고, 금은 수로 화하고, 수는목을 낳아 영을 통하게 한다. 생생화화가 다 화로 인하니, 화는 장공에 퍼져만물을 성하게 하느니라. 화기의 중요성에 대한 할아버지의 해석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진가장 가전 내공심법인 오칠비결에 따르면 그런 과정이 여섯 개나 있었다. 그리고마지막 하나인 합 자 구결로 일주천이 완성되었다. 진자릉츤 손자카 내공을 익허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구결은 반복해서 알려 주었었고, 진자앙은 한 자도 빠짐없이 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설명을 통해 이혼적으로는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단지 몸으로 실행하지 못애 그 참 의미를 체득할 수 없으터 그에개는 그림의 멱과도 같은 것일 딸이었다. 몸으로 따르지 못하니 가르치기도 힘든대, 그렇게 가르쳐도 결국 익히지 옷할 것을 련히 알면서도 할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그 주문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했던 구결을 잔잔히 읊어 주론 했었다. 진자앙은 그때의 할아버지 모습을 떠을리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진자앙은 상념에서 깨어나 눈을 번쩍떴다. 어느새 소삼중이 운기를 마치고 그를 바라보며 무어라 말하고있었다. "예?" 진자앙은 제대로 말을 듣지 못해 다시 물었다. 소삼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한 말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동굴 밖으로 앞장서 나간 것이다. 그리곤 돌아보았다. "가자!" 동굴 밖에는 어느새 비가 그치고,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 사이로 이른 저녁 별이 하나둘 보이고 있었다. 소삼중과 진자앙은 비에 젖은 풀잎을 밟으며 산길을 걸었다. 생각해 보면 꼬박 열두 시진을 눈 한번 불여 보지 못하고 뛰고 굴렀다. 발은 천근 같고, 눈꺼풀은 그보다도 무거운 것이 진자앙의지금 상태였다. 그러나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지금의 상황이다. 다행히 체력은 아직 남아 있으니 가다가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쓰러지는 한이있어도 그냥 가야 했다. 자신있는 거라고는 체력과 끈기밖에 없는 진자앙이 아닌가. 힘들고 지친 것은 소삼중도 마찬가지였다. 영리충에게 맞은 타격 때문이었다. 그는 십여 년 전, 보광암익 혜심에게 당한후 이리저리 노력하여 겨우 운기법 하나를 얻게 되었다. 명문대파의 비전심법은 말 그대로 비전, 즉 그들 내부의 사람들에게만 비밀스럽개 전하는 것이니 감히 탐낼 수도 업고, 사파의 사공. 마공은 정파의 그것과 유는 다르지만 은밀하게전해지는 점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못할 일이 없어서 역시 손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겨우 얻어 낸 것이 오다가다 만난 동업자, 즉 떠돌이 약장수 하나가 자긴 그래도 내가기공을 익혔다고 자랑하는 것을 듣고 몇 날 몇 일을 졸라서 배운 단전호흡법이었다. 이 단전호흡법이라는 것이 약장수가 내가기공이라고 풍을 치긴 했지만 사실은 순수한 호흡법이라, 오래 익히면 건강에 보탬이 되는 정도의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내가기공이라고 하는 것들도 결국엔 호흡법으로부터 출발한 것, 이 호흡법이 기본 중의 기본이기는 하니, 적어도 엉터리는 아니었다. 몇 년을 노력하니 단전에 기도 모이고 제법 기를 움직일 수도 있게되어 이전에는 겉모양만 익혔지만 이제는 그 의미까지 이해할 수 있을것도 같았다. 그러나 소삼중은 운이 없었다. 진작에 그것을 알았다면 지금보다 훨썬 높은 단계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아까워해 보지만 때는 늦었다. 갖은 발악을 해도 지금 나이에서는 더 이상 진보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젠 그에게 주어진 시간도 얼마남지 않게 되어 버렸다. 영리충에게 맞은 매의 타격은 여태 그가 받은 어떤 타격보다도 컸다. 그리고 치명적이었다. 표시는 내지 않았지만 그는 이 일격이 그의수명을 십 년은 줄여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시간은 더욱 줄어들어 버렸다. 소삼중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알았다. '안개인가?' 그는 고개를 혼들어 보았다. 눈앞이 밝아졌다. 안개가 걷혀서가 아니었다. 그것을 그는 갑자기 뜨거워진 눈시울의 감각으로 알았다. 그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유명하지도 않고, 잘난 것도 없는 문파라 제자 들이기도 힘들었던금강당이었다. 염원을 대신 이루어 줄 제자, 지닌 바 모든 것을 전해줄 제자 하나 구할 수 없어 애타던 세월이었다. 하나, 오늘 진자앙을제자로 받아들임으로 하여 염원이 이뤄졌는데 왜 눈물이 흐를까? 소삼중은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진정 평생을 염원하던 두가지 일이 손에 잡힐 듯하다가 다시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눈물의 원인이기도 했다. 제자를 들이지만 충분히 가르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생애에 겨우 가족이 생겼나 했더니 사라져 버렸다. 미혼인 처는 죽고,아이는 잃어버렸다. 문득 그는 번개에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그때 진가장에서도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진자앙은 누군가? 혹시 형이나 동생? 그들은 찾았나? 그게 아니면……? 그는 비탈진 산길 아래쪽에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러고 있는 진자앙뮬 돌아보았다. "네 나이가 몇이냐?" "열둘입니다." 갑작스련 질문인 데다 펴곤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진자앙은 애써 숨을 고르며 대다하고 있었다. 괴곤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했다. '자신을 감추는 데 익숙한 애군!' 그런 인내력은 금강당의 무공을 배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소삼중은 잠시지만 아이 생각도 잊어버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자신을 께닫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금강불괴가 된다는 것, 금강당의 무공을 이어 간다는 것을 떼어 놓고는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언제부터인지 그에게는 그것이 인생 그 자채가 되어 버렸다. 그 앞에서는 가족도, 친구도,세상 사람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일채의 가치들이 제 빛을 잃고 만다. 소삼중은 머리를 흔들었다. 마치 그것으로 자신이 가족보다, 잃어버린 아이보다 금강불괴라는, 일견 허황되어 보이는 목표애 더 집착한다는 것에 쏟아질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라도 한다는 듯디. 그는 물었다. "혹시……, 혹시 너 말이다." 그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뭐라고 물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는 동안 진자앙은 혹시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혹시 어렸을 때 잃어버린 적이 있지 않았느냐? 아니, 잃어버려진 적이 있지 않았느냐? 아니, 아니, 그런 얘기를 부모님께 들은 적이있지 않느냐?" 소삼중은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점점 꼬이자 짜증스러운 표정까지 지어 가며 겨우 질문을 마치고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하늘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을 듣기 전인데도 괜히 물었다는생각이 확 밀려왔다. 그런데 진자앙의 대답이 그의 그런 생각을 깨끗이 씻어 버렸다. "그런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등가산에서……!" 소삼중의 눈이 번쩍였다. 이 아이는 의외로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때…… 너말고 또 하나 그 산에서 잃어버린 아이가 있다는얘기는 혹시 못 들었느냐? 혹시 네 부모님들이 그 아이는 찾지 못했다더냐? 혹시 들은 얘기라도……!" 설마 설마 했는데 진자앙의 대답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이, 이 경우그 자신의 이야기지만, 아이가 처음 없어졌던 내막부터 나뭇가지 위에걸려진 또 하나의 아이 이야기, 그리고 결국 그 아이, 아마도 여승이낳은 아이로 짐작되는 그 아이가 도사의 품에 안겨져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진자앙의 입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중자릉의 입에서 진자룡에게로, 진자룡에게서 다시 진자앙에게로전해진 그 이야기였다. 물론 전달 과정에 빠진 것도 있지만 대체의 내용은 알 수 있는 이야기. 그 이야기로 소삼중은 여도사에게 안겨 간그 여자아이가 분명 자신의 아이라고 의심없이 믿게 되었다. "그게 누구…… 라고?" "이름 모를 여도사라고 들었습니다." "아니, 아니!" 소삼중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듣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여도사를 본 사람은 네 말대로면 그…… 중자릉이라는 사람밖에 없지 알으냐. 그 사람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단 말이다." 중자릉을 찾아야 여도사애 대한 것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혹시, 만에 하나라도 아이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르신내는 그 후 저희 집에 다시 들른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거처가 일정치 않고 구름처럼 강호를 떠돌아다닌다고 해서……!" 더 들을 것은 없었다. 중원이 넓다지만 이름을 알고 명호를 알면 다찾을 수 있을 만큼 좋은 것이 또 강호다. 그를 찾아 다닐 만한 시간만있다면.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소삼중은 다시 한벌 하늘을 보교 한숨을 쉬었다. 그애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없다. 그 얼마 남지않은 시간 동안 제자를 기르든직 아니면 아이를 찾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두 가지 다는 할 수 없으리라. 결정은 뻔했다. 그는 다시 한번 목표를 위해 가족을 버렸다. "가자!" 그는 묵묵히 산길을 올랐다. 그리고 다시 아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길 얼는 길을 헤쳐 가며 다시 한나절을 더 올라 산새들이나 등지를 틀 만한 산봉우리 좁은 틈에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집 같은것에 도착괘서야 그는 돌아서서 진자앙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가……!" 그는 말을 멈추었다. 말해도 진자앙은 더 듣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열두 살 아이에게는 너무 힘이 들었으리라. 진자앙은 그의 앞에서 천천히 쓰러지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이미 그전에 감겨져 있었다. "방에 데려가 눕혀라! 그리고 깨어나거든 내게 데려와라!" 소삼중은 통나무집의 문을 열고 나온 유소림에게 지시하곤 들어가버렸다. 얼마나 걸었는지. 또 어디를 어떻게 왔는지 진자앙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통나두를 얽어 란든. 집 비슷한 것을 보고는정긴을 놓아 버렸다는 것과 이제 정신이 들고 보니 눈앞에 그 소년시장에 소삼중과 같이 나왔넌 그의 얼굴이 보딘다는 것딴 알았다. "정신이 들었냐?" 유소림은 그렇게 묻고는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듯 자기 이마를 쳤다. "정신이 들었으니 눈을 떴겠지. 눈을 떴으면 배도 고프겠군. 일어나서 밥 먹어라!" 그는 때묻은 주발 하나를 들어 진자앙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거기밥이 담겨 있는 모양이었다"설마 내가 밥까지 떠먹여 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명색이 사헝인데 말야 갓 들어온 사제에제 밥까지 떠먹여 줘?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사실 나만 해도 여기 처음 왔을 때는 달이다 밥짓기 삼년 물 떠 오기 삼 년. 나무하기 삼 년을 거쳤어, 그렇게 바쁜 와중에틈틈이 약초도 캐고. 공부도 하는 지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단 말이지. 그럼 이젠 네가 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냐 이거지. 그런데 오자마자 하늘 같은 사헝이 물길어다 밥해서 머리맡에서기다리고 있다가 먹여 주기까지 해따 하냔 말이다. 이게 말이 돼?" 소년에게는 화를 내거나 퉁명스럽다거나 한 빛이라곤 전혀 없었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마치 장난이라도 거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막혔던 둑이 터지듯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진자앙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아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인상을 써야 했다"어라 인상을 써7 내 말이 고깝단 뜻이냐? 잘하면 치겠네?" 역시 빙글빙글 웃으면 이죽거리는 유소림에게 진자앙은 얼른 머리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사형께 제가 감히……!" 먼저 입문했으니 사형일 것이다. 게다가 밥짓기 삼 년, 물 떠 오기삼 년. 나무하기 삼 년을 거쳤으면. 그것만 해도 구 년이나 먼저 사부를 모신 셈 아닌가. 대여섯 살 어린아이가 밥짓고 나무하지는 않았을것이니, 나이가 적어도 열대여섯 이하는 아닐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진자앙은 순진하게도 유소림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유소림은 어렸을 때 소삼중이 주워다 길렀으니 연수가 오래된 것은 맞지만 나이는 진자앙보다 어린 열하나였다. 그런데도 말하는 것이나 행동거지가 진자앙보다 노숙해 보이는 것은그 동안 그를 쓸고 지나간 세파의 영향 때문이었으리라. 강호문파들은 일반적으로 나이가 어려도 입문한 시기가 빠르면 사형이 되는 전통이 있긴 하지만 각 문파의 내규에 따라서는 나이순으로 사형제의 선후를 가르는 곳도 있으니 먼저 입문했다고 꼭 사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유소림은 나이도 조금 많아 보이고. 덩치가 커서 힘도셀 것 같은 진자앙이 사제로 들어오니 기선을 잡으려고 이러는 것이었다. 과연 순진하게도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지 않는가. '그래, 이재 넌 내 졸개다!' 유소림은 내심 만족스런 웃음을 흘리며 진자앙에게 밥그룻을 넘겨주었다. 전통적으로 충국의 북부 지방, 즉 강북에서는 밀이 주식이 되고, 강남 지방에서는 쌀이 주식이다. 아침에는 국수 한 그룻으로 가볍게 먹는 것은 강남이나 강북이나 같지만 충화부터는 강북에서는교자를, 강남애서는 쌀밥을 주로 먹는다. 광동도 강남이니 쌀밥이 주가 되는 식사를 해왔던 진자앙이었지만지금 받은 것은 순수한 쌀밥이 아니었다. 사람 머리만큼이나 큰 주발에 이름 모를 풀 삶은 것이 반이나 들어 있었고, 그 나머지만 밥이었다. 따로 반찬그릇 같은 것은 없는지 그룻 한쪽에는 닭다리 같은 것도하나 놓여 있는태. 사실은 꿩다리였고 그나마 원래는 두 개였던 것을유소림이 가져 오면서 하나는 주워먹은 그 나머지였다. 원래 진자양은 자신이 입이 짧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도 누나들과는 달리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숙수라는 출중한 요리사가 해주는 음식이었고, 또 진가장의 가풍이 검소하여 산해진미를 차려 놓고 먹지는않는다 해도 차릴 건 다 차려 놓고 먹는 부잣집이었기에 일반 평민의가정에서 먹는 것좌는 비교가 안 되기 마련이었다. 당연 진자앙은 지금 그가 받아 든 정체 모를 것을 내려다보며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젓가락도 없어 뭘로 먹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소림이 그런 진자앙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물었다. "왜? 배 안 고프냐? 내가 먹으리?" "아, 아닙니다!" 진자앙은 얼른 손으로 밥을 집어 허겁지겁 입으로 가져 갔다. 배가고프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처음 보는 사형의 앞에서 밥투정을 해선 안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 밥맛이 또 묘했다. 삶은 채소를 한입 먹자 마치 한약을마신 것처럼 쓰고 떫은 것이 혀끝까지 아려 왔다. 진자앙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왜, 떫어?" 유소림이 또 물었다.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혀가 얼얼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진자앙은 눈을 딱 감고는 마구 밥과 채소를 꾸겨 넣었다. 맛이라는 것은 기대하지 않고 일단목구멍에 넘기자는 것이었다"체할라. 천천히 먹어라." 유소림이 크게 생각해 주는 것처럼 한마디하더니 진자앙의 찌푸린얼굴을 보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하하! 떫지? 그지? 안 떫어?" 떫은 것이 당연했다. 진자앙이 먹은 것은 채소가 아니라 약초였다. 몸에는 좋은 것이지만 맛은 없고, 비단 맛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인내력이 아니면 목에 넘기기도 힘든 것이 그 밥이었다. 미리 얘기해줬어야 옳은 것인데 아무 소리 않다가 이제 표정이 구겨진 것을 보고서야 좋아하는 것이다. 진자앙은 혀끝의 깔깔한 맛을 되씹으며 입맛을 다시고는 웃었다. "떫긴 떫군요. 그래도 각별한 맛이 있습니다." "맛있어? 더 주랴?" 진자앙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있으면 더 주십시오." 설마 정말 더 달랠 줄 누가 알았으랴. 놀리는 말로 했던 유소림이무색하게 되었다. "없어. 그만 먹어!" "그러지요." 선선히 대답하고는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진자앙이 신기한 모양, 유소림은 한참을 바라보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가져 왔으면 내놔!" "무얼 말입니까?" "그거 있잖아, 사례비!" 진자앙이 갑자기 안절부절못했다. "저 , 그게……!" "안 가져 왔다는 거야? "저, 그게……!" 진자앙은 할말이 없었다. 원래 가져 왔었는데 중간에 만난 여자에에게 줬다는 얘기를 어떻게한단 말인가. 하지만 안 가져 왔습니다, 하면 그런 성의도 없냐고 욕먹을 것 아닌가. 욕을 먹는 것이야 괜찮지만 괘씸하다고 돌아가라고하면 또 어쩔 것인가. 그는 얼른 일어나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어찌어찌 사정이 꼬여서 준비를 못했습니다. 용서하시고 사부님께잘 말씀드려서 내려가라는 말씀만 나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유소림은 눈에 보이게 인상을 썼다. 그러나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사례비라는 것은 그가 지어 낸 말이었다. 소삼중은 단 한번도,사실 그런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사례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진자앙이 부잣집 아들로 보이니까 유소림이 지어 낸 얘기였다. 가져 왔으면 중간에서 가로채고, 만약 안 가져 왔으면 그것으로 줬다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순진한 진자앙이 심각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그는 조금 더 속여 먹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사례비가 없으면 안 되는데……!" 그는 진자앙의 눈치를 힐끔 보고는 일부러 말을 끌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성의가 문제라…… 돌려보내는 것이 원칙인데……!" 예상했던 대로 진자앙이 급하게 빌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소제는 돌아가라 해도 갈 곳이 없습니다. 사형이 잘 말씀드려 주시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유소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속여먹기 쉬운 놈은 보다보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짐짓 한숨을 쉬었다. "하는 수 없군." 잠시 고민하는 빛을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다행히 내가 푼푼이 모은 돈이 얼마 있네. 그걸로 우선 해결을 하지. 그러나……!" 진자앙은 유소림이 사례비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말에 반색을 했다그러나 뒷말이 길었다. "나도 그만한 돈을 융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야. 알다시피 가난뱅이는 평생을 가도 그만한 돈을 만지기 어렵단 말이야." 진자앙이 얼른 알했다. "나중에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바로 그 말을 기다렸던 유소림이었다. "이자는 칠 삼 부일세!" "삼 부……?" "한 달에 동전 육백 닢이란 말이야." 은자 한 냥은 동전으로 이천 닢이 된다. 은자 열 냥이니까 명목상으로 지금 진자앙은 동전 이만 닢을 빛지는 셈이었다. 그 이자가 한 달에 동전 육백 닢이라는 것이었다. 진자앙이 비륵 물정을 모르기는 하지만 그 이자가 상당하다는 것을모르지는 않았다. 얼른 계산해도 서른세 개월마다 은자 열 냥썩을 더빛지는 샘이 된다. '빨리 갚아야겠구나!' 진자앙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곧 갚겠습니다. " 유소림은 흐뭇한 마음을 감주지 못하고 입을 실룩거렸다. 뭔가 한마디 그럴듯한 말을 해주고 싶은데 마침 그 말이 생각났다. "밥 먹고 나면 사부님이 오라고 하셨다. 가봐!" "금강당을 처음 여신 분은 이백여 년 전의 일대기인이셨던 왕자, 철 자, 우 자 쓰시고 별호는 대력패왕이라고 하셨던 분이다. 세간에는 그냥 철우라고만 알려지신 분이지." 소삼중은 금강당의 내력을 말해 주는 것으로부터 진자앙과의 첫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금강당의 내력은 진자앙은 모르지만 알게 모르게 그의 삶에 지대찬 영향을 끼친 대력패왕 철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세간에는 그가 삼백 년 전의 인물이니 아니니 설이 분분하지만 대력패왕 철우가 양주 땅에 금강당을 연 것은 지금으로부터 백오십육 년 전이었고, 외공에 있어서는 그 당시 최강의 고수로 행세를 할때였다. 소삼중은 사 대째의 당주이니 철우는 그에게 태사조,즉 사부의 사조였고 이제 소삼중의 제자가 된 진자앙에게는 사대조, 즉 사조의 사조가 되는 셈이다. "그때만 해도 금강당은 천하를 떨어 울리는 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한다. 내가 사부님째 전해 들은 말로는 당시 사대거당 중의하나이기도 했다." 사대거당. 진자앙은 삼대거당 , 즉 무슨 무슨 당을 이름으로 하는 강호문파 중 최고의 세 개를 가리키는 말은 들어 봤어도 사대거당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그러나 사실 철우가 금강당주일 때만 해도천하에는 네 개의 거당이 있었다. 소림, 무당, 아미, 화산, 곤륜, 점창, 종남, 공동 ,형산의 구대문파. 하남의 남궁씨, 하북의 팽씨, 진주의언껴, 사천의 당씨, 호주와 혁련씨, 양양의 재갈꺼, 하토의 서문거, 그리고 광동의 진씨로 구성된 팔대새가. 그리고 산서 벽력당, 하북 강시당, 복건의 철검당으로 구성된 천하삼당. 개봉을 총타로 하고 거리를 주름잡는 전통의 강자, 거지집단개방과 만들어진 지 삼십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욱일승천의기세로 떠오르는 대력귀왕 급여화의 화륜맹을 지칭하는 일방일맹. 이상의 세력들이 무림십대고수와 더불어 당금 강호를 움직이는 주요세력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소심중은 금강당이 왕년에는 천하삼당과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대 조사께서 신공을 연마하기 위해 떠나신 후 사문의 성세는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하여 급기야 사 대째인 내게 와서는 이 꼴이 되었다." 초대 조사 철우가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장생불로비법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사실 금강불괴신공을익히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장생불로비법을 익히기 위해 은거했다고 하는 전설에도 나름대로 근거는 있었다. 그가 당년에 최고로 일컬어지던 분야는외공말고도 또 있었다. 바로 약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금강당의 사람들이 약장수를 본업으로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개파시조인 철우도 원래는 떠돌이 약장수로 중원을돌아다니다가 기연을 만나 막강한 외공을 익히게 된 경우로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그 일 인을 제외한 누구도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마치 형산파 뇌공의 경우와도 같이 철우 본인은 외공의최고 경지에 올라 무수한 내가의 고수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었지만그와 잘은 종류의 기연을 얻지 못한 후인들로서는 강호 삼류무사의 멍에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는 그 점을 애석하게 여기고, 내가의 고수들에 비해 천대받는 외가의 현실을 분히 생각하여 외가무공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금강불괴신공을 연성코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애써 만든 금강당을 몰락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이대 당주인 역발산 하구연, 삼 대 당주 병거령 소고정을 거치면서 금강당은 형편없이 몰락하다가급기야 소삼중이 제자로 들어올 즈음에는 그 외에는 제자가 단 하나도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소고정은 별호대로 병을 앓는 몸, 소삼중을 맞아들인 지 얼마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소삼중은 제대로 배운 것도 하나 없이 문파의 유지와 부흥이라는 무거운 짐을 져야 했다. "이 사부가 어쩌해야 옳았겠느냐?" 소삼중이 물었지만 진자앙과 유소림은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철우경지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하고 있었다. 철우경지의 자세가 무엇인가? . 양손으로 땅을 받치고 몸은 어깨에서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만들어비스듬히 땅을 향한다. 물론 발끝은 땅을 받쳐야 한다. 양손과 양발끝만 땅에 대고 몸을 받치는 자새가 기본자세, 거기에 허리를 율동적으로 움직이며 팔을 굽혔다 폈다 해야 했다. 이른바 팔굽혀괴기를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철우정지, '땅을 파는 소'의 모습을 연상케하는 자세였다. 팔과 다리의 힘을 길러 주는 면도 있지만 주목적은 허리 힙의 강화였다. 힘없는 사람은 열 번도 못 하고, 조금 체력이 있으면 백 번은 겨우하며, 무공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천 번은 해야 기본인데, 많이 할 수있다고 해서 힘이 덜 드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열 번을 하면 팔이 떨리고, 다시 일백 번을 하면 땀방울이 비 오듯떨어진다. 나중에는 온몸이 풍 맞은 젓처렁 경련을 일으키는데 소삼중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몇천 번이고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 놓고서야 소삼중은 이야기를 하고, 또 질문을 하고 있으니 이야기에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특히 유소림은 아까 전부터 사부가 평소 안 하던 일을 하니 정신이나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하고 있었다. '다치고 돌아와서는 표정도 영 이상하더니 역시……!' 진자앙은 못 견딜 정도로 힘들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도 무가의 자손으로서 이름을 이어나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또 그것이 가치없는 일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말을할 수가 없었다. 소삼중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금강당을 지키기로 했다. 갈 곳 없는 나를 길러 주신 사부님의 은혜를 못 잊어서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솔직히 말해서 달리 갈곳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소림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옛날의 소삼중과 비슷한 신세라 공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자앙은 다른 방향으로 공감을 했다. 그는 소삼중이 금강당을 지키기로 한 첫 번째 이유, 즉 사부의 은혜라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가 배워 왔고, 여태까지 옳다고 믿어 왔던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처음에 소삼중은 가벼운 마음으로 혼자 남은 금강당의 당주노룻을 했다. 윗사람이 없으니 의무가 없고, 아랫사람이 없으니 책임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밥 먹고 살면 그만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 변한 것은……!" 소삼중의 말이 토막토막 끊어졌다. "그래서 내가 이름뿐인 금강당이 아니라 진정한 금강당을 재건하고자 했던 것은……!" 한동안 말이 끊어졌다. 진자앙은 무슨 일인가 해서 동작을 멈추고소삼중을 쳐다보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소삼중의 얼굴이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실룩이고 있었다. 극도의 분노, 혹은 슬픔의 표징이었다. "날 봐라!"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든 진자앙에게 소삼중은 이는 악물고 입술만벌려 보였다. 누렇고 성긴 이빨들 사이로 부러진 자국이 확연히 드러났다. 자연히빠진 것이 아니라 부러진 자국,"그때의 상처 중애 남은 건 이것뿐이다만……, 이게 날 그렇게 바꾸어 능았다." 원래 금강당의 재산이 적진 않았지만 소삼중의 대에까지 남은 것은거의 없었다. 그나마 사문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던 그가 배고플 때 마다 이것저것 밥과 바꾸었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나서는 조사당 과 그 부속건물로 쓰던 작은 집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않았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탐내는 무러가 있었다. "나는 두들겨 맞고 개처럼 내쫓겼다. 내 눈앞에서 조사님들의 위패와 사문의 현판이 조각나는 것을 보면서…… 그러나 진정 날 분노하게 한 것은 내 앞에 던져진 동전 한 닢이었다." 동전 한 닢, 만두 한 개와도 바꿀 수 없는 동전 한 닢이 금강당의 조사당과 바꾸어진 모든 것이었다. 그것이 온몸외 상처와 부러진 팔,그리고 부러져 나간 두 개의 이빨과 바꾸어진 전부였다. "그들은 그 동전 한 닢으로 날 개만도 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제대로 집 값을 못 받았으니 집 주인도 아니고, 구걸하지 않았는데도줬으니 거지도 아니고, 비무 같은 건 하지도 않았으니 무사도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게 가슴을 찔렀다." 소삼중은 거기에서 진정 분노했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무사라고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자신이 무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발을 디딘 이상 죽어도 무사로 죽는다는 것을, 그래야 한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그는 무사로 행세할 수 없다는 것을 함께 선고받았던 것이다. "현판을 뺏기고 조사의 위패를 더럽힌 치욕을 갚지 않고는 나는 무사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진자앙은 소삼중의 그때 심경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싸움을 잘하는무사가 있으니, 못 하는 무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사인데도 무사 대접을 받지 못하면 그는 인간이 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진자앙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개가 개다운 대우를 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사람이 사람다운 대우를 받으려면 또 어찌해야 할까? 무사가 무사다운 대우를 받으려면……? 소삼중은 거기에 나름의 해답을 찾은 모양이었다. "무사답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내 뜻에도 맞았다. 가장 무사다운 무사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나는것, 그보다 나은 복수는 없었다. 가장 무사다운 무사는 어떤 것일까? 나는 금강당의 당주답게 되는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강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난 조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때부터 소삼중의 기나긴 방랑이 시작되었다. 그는 철우라는 이름이 들리는 곳이면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결국철우의 유진을 발견할 때까지. "그것이 이것이다." 소삼중은 품속애서 붉은 보자기 하나를 내놓았다. 보자기는 무엇을싼 것이었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낡은 책 한 권, 아니 삼분의 일 권이었다. "조사님은 금강불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셨던 것 같다. 그래서 반선과 비불이라는 두사람과 힘을합치셨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 책이다." 반선. 선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니 신선이 다시 되겠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신선이 다시 된다. 그럼 원래는 신선이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나는원래 신선이었다'라는 뜻의 이름을 달고 다녔다는 것이 그 이름으로드러난 샘이었다. 비불 역시 반선에 비해 조금도 덜 광오한 이름이 아니었다. 아니, 비불이란 부처에 비견한다는 뜻이니 반선보다 오히려 더건방지면 건방졌지 조금도 모자자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과 철우가 함께 금강볼괴가 되는 법을 연구했다고 책앞머리에 쓰여 있다고 했다.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였다. 연형, 몸을 단련한다. 연기, 기를 익힌다. 연혼, 혼을 단련한다. 그래서 연형편은 철우가, 나머지 둘은 반선과 비불이 각각 맡아 저술한 것이 이 책, <삼선유서 금강불괴론요> 였다. 쉽게 말해 금강불괴가 되는 법이었다. "아쉽게도 내가 발견했을 때는 책의 됫부분은 뜯겨져 나갔는지 없고앞 부분만 있었다." 그러나 그 앞 부분이 철우가 남긴 부분인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또 하나의 다행은 금강불괴가 되는 첫 번째 단계의 수련법이라는 점이었다. 기초를 거치지 않고 뒤를 수련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이 책을 연구했다. 그리고 몇 가지를 깨달았지. 내가 이제 전수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부님!" 유소림은 일백 번을 넘기는 때부터 눈치를 봐가며 어깨만 들었다 내렸다 시늉만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괴로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별 홍미도 없는 얘기를 듣느라고 짜증을 참다가 뭔가 돈이 될 만한 이야기가나온 김에 허락도 없이 일어나 앉으며 볼멘소리를 토해 내었다. "저한테는 십 년을 같이 사시면서도 단 한 가지도 안 가르쳐 주시고, 이제 사제가 들어오니까 그걸 가르쳐 주시겠다는 건.도대체 뭡니까! 차별하시는 겁니까?" 사실 유소림이 소삼중과 같이 산 것은 삼 년밖에 안 되었지만 그 점은 진자앙이 듣는 곳에서 밝힐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유소림이었다. "네겐 이미 가르쳐 줬다." 소삼중이 딱 잘라 대답했다. 유소림이 입을 딱 벌렸다. "언제 가르쳐 주셨다고……!" 말은 안 했지만 사람 잡는다는 표정이탔다. 그러나 소삼중은 태연했다. "네가 안 배우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가 언제……!" 점입가경이었다. 유소림은 정말 금강불괴가 되는 그런 것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가 소삼중의 제자가 된 이후 가르쳐 준 것이라곤, 아니,하라고 한 것이라곤 이렇게 수련이라기보단 벌에 가까운 행위와 들입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것밖에는 없지 않은가,다행히 그가 요령이 없지 않아 이리저리 빠져 다녔기에 아직 살아있지 소삼중이 시킨 대로 다했으면 몸이 열 개가 있어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유소림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어서 눈을 하얗게 까뒤집었다. "이……. 이 고달픈 짓거리들이 그거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이건 약을 팔기 위한 재주를 익히는 방법이지, 금강불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경복시키기에 충분한 어마어마, 고금무쌍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소삼중은 그렇다고 하고 있었다. "왜 아니겠느냐?" 그는 아적 엎드려 있는 진자앙을 가리켰다. "이 자세는 얼핏 보기에는 팔 힘이나 기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유소림이 껴여들었다. 그는 여전히 불퉁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있었다. "그럼, 아닙니까?" "단련하는 부위라는 것은 부담을 받는 부위와 일치한다. 즉, 힘들고아픈 부위가 단련이 된다는 것이지. 이 자세를 취하면 어디에 힘을 받고, 어디가 아픈가, 그곳이 바로 이 자세로 단련하려고 하는 부위다." 제대로 된 철우경지의 자세를 취하면 팔보다는 허리가 아프다. 그렇게 보면 허리를 단련시키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움직이는 모든 동작은 허리가 주재한다. 쌀가마처림 무거운물건을 들 때 쩔쩔매게 되면 팔 힘이 없어서라고 변명하지만 사실은허리 힘이 없어서 들지 못한라는 것이 정답이다. 손에 매달린 쌀자루의 무게가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하고, 허리를 펴지 못하면 사람은 움직일 수가 없다. 무공을 배을 때 사람들은 재빠른 동작, 강한 주먹, 혹은 날카로운눈과 동물적인 감각을 수련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허리의 힘을강조하고 단련하는 문파는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실정이었다. 철우경지는 그 흔치 않은 허리단련법 중 하나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세를 취하고, 동작을 할 때 다리를 꼿꼿이 유지하고 구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다리를 단련하기 위찬 것이고, 자세의 특성상 팔로반 이상의 무게를 지탱하기 때문에 어깨와 팔의 단련도 동시에 목표하게 된다." 요컨대 전신의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게 하는 단련법이라는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발만, 혹은 주먹만 단련하여 무적이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무공을 익히는 것, 신체를 단련한다는 것은 온전함을 요구한다. 팔, 다리, 허리를 비롯해서 온몸이 균형을 이루어야 내지르는 주먹 하나에도 힘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주먹을훈련한답시고 팔운동, 주먹운동만 한다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어렵다. 주먹이 나가는데 발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주먹에체중이 실리지 않는다면 무슨 위려이 있을까. 흑시 발과 주먹에는 힘이 있다고 해도 허리가 그 힘을 연결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움직이고,또 어떻게 위력을 발취할 것인가. 그래서……" 소삼중은 낱은 책의 첫장을 폈다. 유소림은 어차피 까막눈이라 못알아보지만 진자앙은 거기 적힌 것을 알아보았다. 왼쪽에는 '총요'라는 제목 아래 글이 씌어져 있고 그 아래에 방금 들은 철우, 반선, 비불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기일, 연형편'이란 대제목아래 다시 '금강삼십육로'라는 중간 크기의 제목, 그리고 다시 '금강제일로 철우경지'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래 철우경지를 하는 그럼이 그려져 있다. 소삼중이 설명했다. "조사님온 금강불괴에 이르는 길을 서른여섯 단계로 체계를 잡으시고 금강삼십육로라고 명명하셨다. 그 중 첫 번쩨가 바로 이 철우경지다." 유소림은 입을 딱 벌렸다. 감탄해서가 아니라 기가 막혀서였다. 그는 천성이 편한 것을 좋아하고 게으른 편이라, 무공이라고 하면힘들고 귀찮으면서 크개 돈은 안 되는 것 정도로 셍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금강불괴가 얼마나 대단한 아름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벌렸던 입을 겨우 다물고는 진자앙을 가리켰다. "그……, 그 금강불죄가 되는 첫 번계 방법이 겨우…… 이겁니까? "그게 아니면?" 소삼중은 간단히 되물어 유소림의 입을 막고는 계속 설명했다. "금강불괴라는 지고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크게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연형, 형태를 만든다는 말이니 곧 신체를 단련하는단계다. 둘째 연기, 기를 단련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연혼, 심혼을 단련해야 된다는 뜻인 모양인데……, 솔직히 이 사부도 그게 구체적으로 무얼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쳐 보였다. '금강삼십육로 금강지식'이라는 제목 아래 묘한 자세로서 있는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금강지식'의 장으로금강삼십육로는 끝나고, 동시에 연형의 단계도 끝이 난다. 그 다음에는 연기와 연혼의 단계가 있겠지. 아마도 인연이 닿는다면……, 나머지 부분을 찾아 진정한 금강불피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으리라." 말을 하면서도 소삼중은 그리 기대를 갖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나머지 부분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미 말했듯이 그러한 것은 인연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조사님의진전만 이어받기에도 내 재주는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오랫동안 읽고 연구해 본 바로는 금강삼십육로에는 그가 들었던 조사, 철우의 진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금강불괴가 되기 위해떠난 뒤에 얼만큼의 진전이 더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 부분은이후의 단계들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만큼, 더도 말고 과거 철우가 알고 있던 부분만큼만 익혀도 외가에 있어서는 무림제일고수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얼었다. 소삼중은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이것 다음엔 뭡니까?" 유소림이 갑자기 물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추 한 시진이넘었는데도 여전히 철우경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진자앙을 가리키고있었다.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을 쏟으면서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있는 진자앙이었다. "하루 종일 이것만 하는 건 아니쟀지요?" "물론 아니다." 소삼중의 이 말얘 유소림은 조금 얼굴을 폈다. 만약 이 철우경지만있다면 힘든 젓은 둘째치고 지루해서라도 저렇게 하루 종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역시 다른 것도 있는 모양이였다. "철우정지의 자세를 오래 하고 있으면 분명 힘은 생긴다. 그러나 그힘이 그대로 굳어지면 차라리 험을 기르지 않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 뭉쳐진 근육을 풀어 주지 않으면 막상 힘을 사용해야 할 때 움직여지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일정 시간의 수련이 끝나면 근육을풀어 주는 동작을 해야 한다. 그것을 연운십팔박이라 한다. " 그러면서 소삼중은 소위 연운십팔박이라는 동작들을 시전해 보였다. 허리를 앞으로 구부렸다 뒤로 펴고, 옆으로 휘둘렸다가 다시 뒤튼다. 이것이 연운십뽈박의 첫 초식인 번요, 한마디로 말해서 허리 돌라기였다. 괄을 위로 곧게 펴고 몸을 뒤로 한꼇 젖런 후 그 상태에서 탄력을받아 허리를 상하로 움질이니 이것이 두 번쩨 초식인 탄요 . 탄요를 한 자세 그대로 몸을 앞뒤로 움직이는데, 이때는 채찍질하듯힘있게 한다. 이것이 세 번계 초식인 솔요였다. 이후 조천등, 사괘, 외파 등 팔을 흔들고 뛰고 뒹구는데 이것들이 모두 연운십팔박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초식이었다. 사실 진자앙도 이 초식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연운십팔박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지만 하나같이 무공수련 전후에 몸을 풀기 위해 하는 동작들로 널리 알려진 것들이었다. 유소림은 그건 몰랐지만 아무리 봐도 신통치 않은 것임은 알아볼 수있었다. 시장거리에서 가끔 보는 약장수들이 시범 전후에 하곤 하는동작을 왜 모를 것인가. 그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간신히 조절하며 잇사이로 질문했다. 입을 크게 벌렸다간 사부 앞이지만 욕이 튀어나을것 같았다. "그 다음은요?' "다시 금강삼십육로다. 제이로, 바로 마당보다." "마당보!" 유소림이 조금만 더 크게 입을 벌렸다면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 마당보라는 것은 소위 기마세를 다르게 부른 것이다. 문파에 따라서는 기마보, 흑은 그냥 마보라고도 부르는데결국 같은 자세였다. 양발을 어깨 두 개 너비로 벌리고 서서 엉덩이를 무릎 높이로 내리면 그게 마당보였다. 어떤 무공을 배우든지 가장 처음에 배우는 기본자세라고나 할 자세,철우경지보다 쉬워 보이지만 오래 하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소림은 그것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기가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마당보 따위가 금강불괴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는 물었다. "다음은요?" 소삼중은 짜증도 내지 않고 선선히 가르쳐 주었다. "연운십팔박을 하고 제삼로인 단각굴신으로 넘어간다." 단각굴신, 쉽게 말해 한 발로 서서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유소림은 이잰 포기 상태에서 물었다. "다음은 당연히 연운십팔박이겠고, 그 다음은요?" "제사로 , 겪헐보!" 오리걸음으로 컫는 젓이다. "다음은요?" "연운십팔박 다음에 제오로 , 이어타정 !" "아예 허리를 부러뜨리려고 하시는군요!" 아어타정이라는 것아 땅바닥얘 누웠다가 허리의 힘만으로 튀어서일어난다는 것 아닌가. 한두번이라면 몰라도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한다면 허리가 부러지지 알고 어쪘 것이냐. 소삼중이 덤덤히 대답혔다. "누가 무식하게 허리가 부러질 정도까지 한다더냐? 어쨌든 다시 연운십팔박을 하고, 제육로는……!" "아무튼 전 안 합니다!" 유소림아 세차재 머리를 흔들었다. '죽어도 못 한다. 난 장가도 가보기 전에 허리부터 부러지고 싶지않아!' "……오공도인데……!" 말을 하다 말고 소삼중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그 오공도라는 이름은 유소림의 머리에 회전 속도를 더해 주었다. 그는 허리가 부러지기 전애 먼저 목부터 부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공도'라는, 얼핏 멋있개도 들릴 만큼 애매한 이름이 뜻하는 것은 사실 '지랄발광'이었던 것이다. 철우경지의 자세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뛰어오르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니 그걸 '지랄발광'이라 부르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이렇게 수련이라고 알려 주는 것이 모두 수련이라기보단 고문에 가까운 일이라면 도저히 할 일이 아니었다. 유소림은 문득 일어나 소삼중에게 읍을 했다. "제자 오랫동안 사부님을 모셨사오나 이제 하산하게 되니 눈물이 앞을 가리려……!" "너는 하지 않아도 좋다." 허리든 목이든 부러지기 전에 떠나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유소림이 입을 닫았다. 소삼중이 그런 그를 애처롭다는 듯 바라보며 천천히말했다. "들어서 알게 되었겠지만 우리 금강당의 무공은 전적으로 인내력과노력에 의존한다. 어려운 동작도 없고, 까다로운 비결도 없다. 그저참는 것이 최고의 소질이지. 미안하지만 네겐 그런 것이 없다." 유소림은 사부의 말이 을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중노동에는 소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소질이 있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는 것 자체가 고생인데 왜 저런 생고생을 사서 해야 한단 말인가. 소삼중의 말은 계속되었다. "너는 오래 전부터 이 사부를 따라다니며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그러니 우리 일문의 무공이 네게 맞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내보낸다는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지 그래서……!" 유소림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소삼중의 말이 너무나 옳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소삼중이 그를 빈손으로 내보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사실 소삼중을 따라다녔다기보다 소삼중에게서 길러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다는 것이나 그가 소삼중을 위해 준 것보다는 소삼중이 그를 위해 준 것이 더 맡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네게 몇 가지 약의 비방을 전해 주려 한다." 유소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믿지도 않는성격이었다. 어려서 거지로 돌아다니며 굶주렸던 것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금강불괴라는 것은 구름 잡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금강블괴를 본 적도 없고, 소상중 스스로가 금강불괴도 아니면서 제자룰 그렇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데다가, 그 수련 방법이란것을 본 뒤로는 더욱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약의 비방은 달랐다. 그가 여태 경험한 바로는 금강당에서파는 약들은 꽤 효과가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바르는 즉시효과를 볼 수 있는 즉효약이었다. 타박상, 자상, 화상, 부스럼 등 피부와 관계된 거의 모든 질환에 유토한 화타고 외애도 일종의 피로회복제인 제갈행군산, 급채와 복통애 특효약인 청심포룡단 등……어느것 하나라도 제대로 활용하키만 한다면 부자가 될 수 있을 정도의것들이었다. 여태까지는 약초를 캐고, 약로에 불을 때고, 완성된 약을 가져다가팔기만 했지 가장 중요한 배합공식을 배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그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그는 얼른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부님의 은덕은……!" "조건이 있다." 유소림은 친천히 얼굴을 들었다. 잔뜩 일그러져 있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째째할 수가……!' 소삼중도 그렇게 생각하고 미안해 하는지 어두운 빛이었다. 그러나조건은 내놓고 있었다.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지만……, 나와 네 사제에겐 시간이 얼마없다. 다른 일은 접어 두고 매일 무공수련에만 시간을 쏟아야 할 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유소림은 말을 하기 전에 눈부터 까뒤집었다. "설마 저보고 혼자서 밥을 벌어 오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만약 그렇다면 비방이고 뭐고 당장 도망쳐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소삼중이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네게 우리 두 사람을 먹여 살리라고야 하겠느냐? 약 팔러 갈때는 당연히 나도 가야겠지, 단지……"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전처럼 시범은 보이기 어렵겠다. 하지만 어차피 사람들이 시범보러 오는 것은 아니고, 우리 약도 꽤 소문이 나 있으니 괜찮겠지. 그보다 네게 한 가지 맡기고자 하는 것은 약초 캐는 일이다. 여태 우리둘이 캐 오던 약초를 네가 혼자서 캐 와야 한단 말이다. 다행히 네가약초들을 대충은 다 알고 있고, 몸도 날렵하고 하니……! 넉넉잡고 십년만 해다오." 그는 그 이상 말을 않았다. 아무래도 미안한 일을 시키는 것 같다는표정이었다. 유소림은 한참 동안이나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리고 있었다. 그 계산을 끝내게 한 것은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아직 철우경지를 하고 있는진자앙의 모습이었다. '어지간히 미련한 놈이 아니면 저 짓도 못할 거야. 저걸 하느니 이쪽이 낫긴 하지. 비방을 못 얻어 가면 다시 거지질이나 또 할 수밖에업을 태고…… 에이, 대충 알아 내면 도망가 버리면 되지. 설마 십 년이나 걸리갰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러 주신 은혜도 있고 하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겠지요." 그날 이후 진자앙은 금강블쾨가 되는 법을 수련하고, 유소림은 약초를 캐러 산으로 들로 다니게 되었다. [제십장] 진자앙은 바닥을 기고 소삼중은 바닥에 눕다. "벌써 칠 년이나 지났네!" 진자앙이 입문한 이후의 세월을 유소림이 기억하는 것은, 그날 뭐특별한 일이 있어서라거나, 진자앙이 들어온 것이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주어서라거나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처음 들어온 날 빛진사례비의 이자를 계산하다 보니 자연 시간 경과를 기억하게 된 것뿐이었다. 칠 년, 달수로 쳐서 괄십사 개월. 아니, 사 년마다 한번 윤년이 있으니 일 개월이 추가되어 팔십오 개월이었다. 삼십삼 개월마다 은자열 냥씩의 이자가 쌓여서 이제 진자앙이 그에게 진 빛도 물경 은자 서른다섯 냥에 동전 일천백 문이었다. 다시 일 년 하고 이 개월이 지나면 유소림은 더도 덜도 아닌 은자 사십 냥의 채권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매달 초가 되면 꼬박꼬박 진자앙에게 계산해서 알려 주곤 했다. 잊지 말고 꼭 갚으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사실 진자앙이들어온 것은 월말이었는데 월초에 이자 계산을 한 것은 날짜를 당겨받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도 했다. 지지도 않은 빛을 갚으라고 하는 것이 조금 양심에 찔리기는 하지만그나마 이자를 복리로 계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진자앙은 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랬더라면 삼십삼 개월마다 은자 열 냥이 늘어나는 것이 아너라 원금이 두 배가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지금 그가받을 돈은 은자 서른다섯 냥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었다. 유소림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흐뭇해지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웃음을 짓곤 했다. 나중에 실제로 받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받을 것이 있는 신분이 되었다는 것은 그와 같이 아무것도 가져 본적이 없는사람에게는 대단히 힘이 되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는 저도 모르게 벙긋 웃고는 여태 누워 있던 너른 바위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통나무집, 금강당의 마당에서는 진자앙이 소위 그 금강삼십육로를 연습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칠 년이 지나도록 똑같은 것만 하고 있는데 저 녀석은 지겹지도 않나?" 유소림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기가 오히려 지겨워져서 길게 하품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칠 년 전, 저걸 배우느니 차라리 약초를 캐겠다고결정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는 그래도 마음껏 돌아다니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방금처럼 새 소리를 자장가삼아 낮잠을 청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저 녀석은……!" 그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입장을 바꾼다면, 그래서 진자앙이 약초를 캐고 그가 금강불괴가 되는 법을 배우게 줬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는 단 하루도 못 견디고 도망쳤거나, 그게불가능하다면 자살이라도 했을 것이다. 직접 익히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하는지는 그도 칠 년 동안이나 보아서 잘 알고 있었다. 소위 그 금강삼십육로라는 것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도그 동안 알게 된 것이었다. 우선 십이로까지는 기초 체력을 기르고, 십삼로부터 이십사로까지는 근골을 단련한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서 소위 기공을 익히는데,경기공인지 뭔지로 불리는 그것이 무림에서 말하는 외공이고 연기공. 혹은 내가기공이라 불리는 것이내공인 줄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어쩠든 그 이름도 멋있고 어쩐지 편해 보일 것 같은 내가기공은 익히지도 않으니 말할 것도 없지만 이 금강심십육로라 이름붙인 일체의것이 한마디로 '사람 잡는 법'인 줄은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확신하는일이었다. 연정생기, 양신건신 운운하는 기공 설명은, 죽도록 힘들다는 뜻을 어려운 말로 가려 놓은 것임에 분명할 것이었다. "어쨌거나 저놈의 일이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유소림은 손을 뻗어 한껏 기지개를 켜고는 옆에 둔 약초망태기를 집어 들고 산길을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그가 상관할 일이 아주 아닌 것도 아니었다. 그가 들고가는 이 망태기 속에 담긴 약초는 진자앙을 잡는 일에 큰 역할을 한다고 아니할 수 없으니 말이다. 소삼중은 약속을 지켜 그에게 금강당의 의약 부문의 비방들을 가르쳐 주었다. 때문에 그도 이제는 제법 약초나 의료 등을 짐작했다. 그런 그의 눈으로 볼 때 지금 가져 가는 이 약초와 약재들, 그래서 진자앙이 곧 쓰게 될 것들은, 독성이 강해서 잘못 쓰면 위험한 것은 둘째치고 우선 그 맛이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파두가 있다. 파두는 맛이 맵고 성미가 텀고 독이 없다. 단단한 적을 헤치고 폐부에 가라앉은 한을 제거한다. 막힌 것을 통하게 하고 수곡의통로를 통하계 한다. 쉽게 말해서 맺힌 것을 혜치고 창자를 순통하게하여 부종을 내리는 약인대, 한방애 알려지기로는 참관탈문, 곧 관문을 부수고 성을 려앗는 장수와 같으니 섣불리 써서는 안된다는 주의사항이 따라다니는 약초였다. 이것을 진자앙은 매끼니마다 꼭꼭 마셔야 했다. 이른바 서근활혈, 근육을 풀어 주고 피를 살린다는 효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또 마도령이라는 것이 있다. 맛이 쓰고 성미가 차다. 천식에 유익하고 담을 제거하는 데 효험이있고, 기를 통하게 하고 혈의 독을 제거하는 데 특효가 있다. 허를 보하고 해수를 가라앉히고 속을 편케 한다고 하는데…… 유소림의 생각으로는 이게 독약으로 분류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맛이 더러웠다. 이것 역시 끼니마다 먹는다. 신체의 한계를 넘나드는 고련을 하는동안 쌓인 독혈을 재거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같은 효과를 노리고 먹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죠과는 둘쩨치고 맛이떫오, 속을 끓이기로는 둘쩨 가라면 서러을 놈, 바로 대황이었다. 약서애 보면, 물론 유소림은 책을 직접 본 적은 단 한버도 없다. 그에계는 그계 챌애 나왔어도 좋고 안 나왔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효과를 그가 확인할 수 있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황제내경이 어쩌고, 본초강목이 어쩌고하는 것은 대단한 효력을 발휘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웃기는 일이었다. 사람을 못 믿으면서 어찌 책은 믿는단 말인가. 어쨌든 그런 류의 책에 의하면 대황은 맛이 쓰고 성미가 차고 독이없다. 그 성미는 가라앉아서 뜨지 않고 그 작용은 사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울체를 밀어 내서 막히지 않게 하고 화란을 평정하여 태평을 이룬다. 그래서 이름하여 장군이라 한다. 담을 제거하고 기를 순통시키고 뱃속에 몰린 한열을 제거한다고 하는데 몸이 허약한 자에게 써서는 안 된다는 주의사항이 따라다니는 약재였다. 이런 것 때문에라도 유소림은 적잖게 진자앙을 동정하는 것이다. 일하치 않아도 좋으니 삼시 세끼 이걸 꼬박꼬박 먹으라고만 해도, 유소림은 그날로 도망쳐 버릴 것이었다. 뭔가 무공수련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하수오니 영지니, 아니면 동삼이니 하는 걸 써야 할 것 아닌가. 만년 어쩌고,천년 어쩌고는 아니라 해도 십 년, 이십 년짜리라면 드문 것도 아니었다. 몰래 팔아 먹을까 하다가 큰맘 먹고 가져 오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진자앙이 먹는 약에 들어가는 적이 없었다.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리곤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닌 어중간한 풀뿌리, 돌멩이 같은 것만먹이니 사람 잡는다고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소림은 그 생각을 하곤 혀를 찼다. "불쌍한 녀석!" 불쌍한 녀석, 진자앙은 유소림이 마당얘 들어올 때 연운십팔박을 하고 있었다. 유소림이 그를 보고 뭐라고 생각하든 사실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금강삼십육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매끼니 약사발을 들어야 하는 고역도 아니었다. 금강삼십육로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단지 얼마나오래 버티느냐, 얼마나 많이 하느냐 하는 것만이 다를 뿐, 그 자체로는 더할 나위 얼이 쉬운 동작들로 이루어졌다. 하물며 약 먹는 것이야……! 입에 털어 넣고 눈 한번 감으면 해결되는것 아닌가. 그러나 연운십팔박은 달랐다. 무공초식이라기보다는, 본격적인 수편예 들어가기 전에 몸을 풀기 위해서 하는 가벼운 준비운동 같은 것이지만 그것에는 나름대로 자세가 있고. 격식이 있었다. 뒤로 갈수록그 자세와 격식이 복잡하고 어려워지는데 그런 것에 제일 자신없는 진자앙이었다. 굳이 따라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정확한 자세를 취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번요, 탄요, 솔요의 세 동작으로 허리를 풀고,조천등, 사괘, 외파의 세 동작으로 다리를 풀며, 송견(어깨 돌리기), 활완(팔운동), 충권(정권 지르기)으로 팔을 푼다는 연운십팔박 중 전구식은 문제없이 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나오는 후구식에 가서는 문제가 사뭇 달랐다. 후구식은 주로 발차기 초식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소퇴,후소퇴, 공비각, 파련, 괄면각은 겨우겨우 해내고, 연환각과 선풍각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형편이었다. 그나마 마지막 두 초식, 질박곤번과 절첩선전에 가서는 겨우 홍내만 내고 있으니 칠 년 간 하루에도 백여 번씩, 정말 게으름 한번 피지 않고 연습해 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지금도 그는 땅바닥을 구르며 돌고, 뛰어올라 차는 동작에서 흐름이끊겨 버려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나머지 동작을 어물거리고 있었다. 연속으로 펼치는 동작의 중간에 한 동작을 실패해 버리면 그 다음동작은 펼쳐 낼 수가 없었다. "계속해라!" 소삼중의 질타였다. 진자앙은 찔끔해서는 얼른 대충 질박곤번을 끝내고 절첩선전으로넘어갔다. 앉았다 일어섰다 바닥을 쓸며 전소퇴, 후소퇴, 그리고 다시일어나 뛰며 선풍각까지. 여태 앞애서 했던 동작들을 모아 놓았다는것뿐, 그리 특이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 동작이었다. 그런데 모아놓기만 하면 못 하는 것이다. 진자앙은 간신히 오늘의 쉰여섯 번째 연운십팔박 연공을 끝내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소삼중을 보았다. "죄송…… 합니다, 사부님!" 이제 열아홉 살이 된 진자앙은 철탑처럼 큰 체구를 가진 청년으로자라 있었다. 외공을 익힌 사람 특유의 우람한 근육과 어디 한 군데도 기형적으로자라지 않은 잘 짜여진 체구는, 귀한 집 자손다운 준수한 외모와 더불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단지 유달리 크다는 것이 좀 어색해 보일뿐이었다. 그의 체구는 대충 보아도 팔 척 내지는 구 척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체구를 하고는 어렸을 때의 버릇을 고치지 못해 머리를 긁으며 멍청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위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딘지 바보스러워 보이는 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금의 소삼중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괜찮다는 뜻을 표청하려는 듯 손을 들어을리다갔 터져 나오는 기침을 막기위해 입부터 가렸다. "으…… 쿨럭!" 진자앙이 얼른 사부의 곁으로 뛰어가 천과 물그룻을 받쳐 들었다. 천은 토해 내는 피를 닦기 위해서고, 물은 기침이 끝난 뒤 입을 가시기 위한 것이었다. 소삼중은 영리층에게 맞았던 그날 이후로 나날이 약해지더니 삼 년전부터는 약 팔러도 못 나가고, 작년부터는 그나마 거동도 제대로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매일같이 마당에 긴 평상을 가져다 놓고 거기 누워 진자앙이 연공하는 모숨을 지켜보는 것 이외의 아무 일도 않고 있었다. "저리…… 쿨럭! 저리 가……!" 소삼중은 일변 기침을 하면서도 일변 손을 저어 진자앙더러 물러나라는 뜻을 표했다. 진자앙이 마지못해 뒤로 물러서면서 물었다. "사부님 청화산을 올릴까요?" 이때 문간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청화산이 뭐 그리 좋은 거라고 자꾸 먹이려 들어? 그거 많이 먹어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약이야!" 유소림이 마당 한쪽 작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내뱉은 말이었다. 진자앙이 그때서야 그가 온 것을 알고 고개를 꾸벅했다. "어, 사형 언제 오셨어?' 유소림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난 무공은 모르지만 너처럼 이목이 덜 떨어진 사람이 오래살았다는 얘긴 들어 본 적이 없다. 사람이 온 지 한식경이나 되도록눈치도 못 채고 있으니 뒤에서 도끼로 쳐도 모를 것 아니냐." "헤헤……!" 진자앙은 할말이 없어 다시 머리를 긁고, 유소림은 약초가 든 망태기를 들고 일어섰다. 통나무집, 금강당은 그래도 방이 여섯 개나 있었다. 소삼중이 하나,진자앙과 유소림이 같이 하나를 쓰고, 조사당으로 한 칸을 쓴다. 그리고 나머지 세 칸은 약초방과 연단실, 그리고 부엌이었다. 유소림은 약초방에다 망태기를 던져 버리고는 부엌에 들어가며 물었다. "밥은?" 진자앙이 부엌을 가리켰다. "거기 해놨어." 물을 필요도 말할 펼요도 없을 것이, 밥은 항상 있는 거기에 있었다. 그냥 먹다가 옆애 있는 반찬과 함깨 그냥 먹으면 될 일이었다. 유소림은 밥은 솥째로, 반찬도 광주리쩨로 가져다 놓고는 부엌 턱에쭈그리고 앉아 먹기 시작했다. "이건 뭐냐?" 큼직한 돼지 뒷다리 고기 같은 것을 들고 뜯으며 유소림이 물었다. "이틀 전에 산돼지를 한 마리 잡았지. 불애 좀 데워서 먹지?" "됐어!" 유소림은 고기를 문 채로 머리를 젓곤 우적우적 셉기 시작했다. "네 손에 잡귀는 산돼지도 있더냐? 눈먼 놈인가 보네!" "도망갔으면 힘들었을 것인데 달려들기에 그냥……!" "그러기에 눈먼 놈이라니까. 곰을 보고도 그냥 달려드는 놈이니 눈이 멀지 않알으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던 게지." 유소림은 그렇게 진자앙을 곰에 비유해 가며 놀리다가 문득 소삼중을 보았다. 기침은 잦아들었지만 가슴이 아픈지 등을 새우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진자앙이 소삼중의 등을 두드려 주려 하고 있었다. 유소림이 얼른손을 저었다. "야! 노친네 수발하기 귀찮다고 때려 죽일 심산이냐? 솥뚜껑 같은손을 어디에 디밀어! 손 치워!" 말로는 부족한지 먹던 밥도 팽개치고는 자기가 직접 가서 등을 문지른다. "젠장, 빨리 죽지도 않고서……! 제자 둘 있는 걸 이 고생을 시켜! 얼른얼른 왕사성으로 가시면 사부도 편하고 우리도 편할 것아니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등을 문질러 기혈을 안정시키고, 요혈을 눌러 화기를 가라앉히는 것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미 칠 년이었다. 십 년 수발은 애초에 작정에도 없었던 유소림이지만 어어, 하다 보니 벌써 칠 년 동안이나 병든 사부와미련한 사제를 수발한 셈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소삼중도 약을 팔러 같이 나갔고, 소삼중이 움직일수가 없게 된 작년, 아니, 그 이전부터 진자앙이 경공을 연습한다고 나가서는 이런저런 짐승을 잡아오곤 해서 생활에 도움을 주었지만 결국 대부분의 생계는 그가 해결한 셈이었다. 그 정도 되면 원가 한마디 감사의 말이라도 있을 법도 한데 소삼중은 단 한마디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살 것같이 만들어 주니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진자앙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초식을 연마하는 데는 정확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 그러나 지금 네가 하는 연운십팔박은 어차피 몸을 풀기 위해 하는것이다. 정확한 동작이든 아니든 몸만 풀 수 있으면 그만이니 신경 쓰지 말고 다음 수련이나 해라." "수련은 무슨……, 그게 고문이지 수련이야?" 뒤에 섰던 유소림이 핀잔같이 한마디 내뱉었는데도 소삼중은 대꾸하지 않았고, 진자앙도 아무 말 업이 수련을 시작했다. 유소림이 소삼중에게 그렇게 대한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마을로 내려가 버린다는 말을 입버룻처럼 달고 살면서도 아직까지말대로 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유소럼은 언제나처럼 대꾸가 없으니 재미없다는 표정을 하곤 다시밥을 먹으러 가버렸다. 금강삼십육로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맞았다. 각 부분온 각각 십이로, 열두 가지 수련으로 이루어져 있는태 이를테면 기본, 숙달, 응용의 세 부분인 셈이었다. 진자앙이 입문한 후부터 삼 년 간 한 것이 그 첫 번째 부분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철우경지의 자세로 팔굽혀펴기를 천 번 한다. 아침을 먹은 다음엔 마당보를 한 시진 동안, 다시 한 발로 앉았다일어서기를 하는 단각굴신을 양발 각 삼백 회 하면 대충 점심 때였다. 오리걸음 격헐보로 금강당이 있는 작은봉우리를 한바퀴 돌고, 허리힘으로 튀어 일어나는 이어타정을 삼백 회 한 다음 손끝 발끝 힘으로뛰기를 하는 오공도를 백 회 실시한다. 처음에는 이것만으로도 어느새밤이 되고 말았다. 물론 밤이라도 쉬는 것이 아니었다. 한 손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금강종 두 손가락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이지탄은 체력이 될 때까진 아예 엄두도못 냈던 것이지만, 철봉의 양끝에 무거운 바위를 매달아 놓고 들어을리기를 하는 하마공과 철봉의 중심에 줄을 매달고 역시 무거운 돌을 그 즐 끝에 매달아 괄을 앞으로 내민 상태에서 감아 올리기를하는 상관공, 일명 '두레박 감기'를 해야 비로소 잠을 잘 수있었다. 그렇게 일 년여를 죽을 등 살 등 버티고 나니 겨우 체력이 붙어 나머지 네 가지, 즉 금강종과 이지탄, 그리고 벽호공과 경신공을 연마할 시간이 생겼다. 벽호공, 경신공 하니 이름이야 좋지만 사실 그것도 앞의 것들에 비해 하등 쉬운 것이 아니었다. 벽호공은 맨몸으로 절벽 기어오르기이고경신공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길을 달리는 일이니 말이다. 물론 그 중간중간에는 반드시 연운십팔박을 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나니 겨우 이단계로 입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단계의 열두 가지 수련을 아주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해도 밝지 않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사시 경이 될 때까지 그 일단계의 수련을 일 회 하고, 그 후에야 이단계의 열두 수련을 한다. 그리고저녁을 먹은 후에 다시 일 회, 일단계 수련을 하는 것이었다. 곰을 잡아먹은 힘으로도 버티기 힘들 일단계 수련을 삼 년이나 버티면서 힘에는 제법 자신이 붙었다 했는데, 이단계 수련은 일단계 수련에 댈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일단계의 수련은 위험하진 않은데 이단계 수련은 자칫 잘못하다간 죽거나 병신이 되기 십상인 수련들이었다. 이단계 수련의 시작인 금강십삼로는 두들겨 맞는 것이었다. 소위 유타. 원래는 자기 손으로 피부를 두들겨서 단련시키는일종의 피부단련법이지만 금강당의 그것은 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법 힘이 남아 있던 소삼중이 진자앙을 인정 사정없이 팼다. 개 맞듯 맞았으니 물론 멍이 든다. 사실은 안 죽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럴 때 유소럼이 캐 온 약초가 효력을 발휘한다. 마전자라는 것이 있다. 타박상을 고치는 약초인데 사람이먹으면 괜찮지만 가축이 먹으면 죽을 정도로 독한 약이었다. 사람이먹으면 괜찮다고는 했지만 그건 죽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약이 얼마나독한지 사람이 먹어도 중풍 걸린 것처럼 떨게 된다. 토런 마전자를 진자앙은 입에 붙이고 살아야 했다. 매때는 장사가 없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맞는 방법을 배우고, 소삼중이 특별히 처방한 약을 상시 북용하니 제법 가죽이 두꺼워지면서 견딜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유타라는 수련법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매에좀 견딜 만하게 되자 이번에는 대나무 가지로 두들겨 맞았다. 소위 산죽봉이라 하는 것인태, 대나무 가지를 가늘게 잘라서 수십 개를 묶는다. 그걸로 온몸을 때리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물론 있었다. 산죽봉 다음엔 주머나에 모래를 가득 채운 사대봉, 그 다음엔 철사를 수십 개 묶어서 만든 산철사봉, 그리고 본격적으로 궤도에 접어들면 목봉, 한마디로 몽등이로 두들겨 맞는 것이었다. 지금 진자앙은 목봉을 넘어서 철봉으로 두들겨 맞는 경지에도달해 있었다. 유소림의 말처럼 죽지 않는 것이 신기한 이유가 여기있었다. 앞애 든 여섯 수련은 하루에 다하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맞을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철봉으로 패면 곰가죽을 둘러썼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고 어찌 배길 것인가? 당연히 단계를 밟아서 피부의 단련 정도에 따라 수련하는 것이니 시일을 두고 차례로 수련해야 하는것이 앞의 여섯 수련이었다. 그럼 하루 종일 맞기만 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아니, 맞는것은 같다 해도 하루 종일 피부만 단련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단계의 나머지 여섯 수련은 유타와 더불어 매일 하는 것이었고,이것들은 신체의 특정 부위를 단련하는 것이었다. 우선 유명한 철포삼이 있었다. 외가기공의 거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것도 소림사에서 발원한 수련법으로 일반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신체 전반이 아니라 상반신만 단련하는 수련법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철포삼, 즉 강철로 된 조끼를 입는다는 식으로 붙은 것이다. 수련방법은 간단했다. 마당에 모래밭을 만들어 놓고 높은 곳에서 거기로 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상체의 단련시키고자 하는 부분을 아래로해서 떨어져야 한다. 생선을 구을 때와 마찬가지로 돌려 가면서 골고루 떨어져야 한다. 다음으로 포대공과 철우공이 있는데, 이것은 배를단련하는 수련이었다. 철우공은 반탄력을 길러 복부에 닿는 물체를 튕겨 내는 것이고, 반대로 포대공은 복부에 기를 응집시켜 솜같이 부드럽게 만든 다음에 거기 공격해 오는 것을 배로 잡아 묶는 기공이었다. 팔뚝은 철비박을 익혀 단련한다. 간단히 말해 딱딱한 물체에 팔을 부딪쳐서 단련하는 것으로 수비적인 용도에서만이 아니라 그단단한 팔로 무얼 치면 부러지지 않는 것이 없으니 공격에 있어서도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리는 철소추로 단련한다. 이것 역시수비뿐 아니라 공격에도 탁월한 효용을 기대할 수 있는 수련법이었다. 이단계 수련의 마지막은 염음공이었다. 아무리 단련을 해도 여전히 약점은 남기 마련인데 흔히 그런 곳을조문이라 부른다. 다른 곳은 다 철벽과 같이 단단해 어떠한 공격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지만 이 조문은 어린아이의 힘으로 공격해도죽일 수 있는 필사의 약점이었다. 그런 곳은 대개 치명적인 급소의 한 군데인 경우가 많았다. 머리의백회혈, 발바닥의 용천혈, 등허리의 명문혈,가슴막의 전중혈, 사타구니의 회음혈, 그리고 혈도는아니지만 눈동자 같은 곳이 그런 곳이다. 특히 사타구니는 별달리 단련할 방법도 없어 정파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그곳을 공격하면 파렴치한으로 비난을 하곤 하는데, 그건 달리말해서 그만큼 그곳을 공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뜻도 되는 셈이었다. 염음공은 바로 이 사타구니를 단련하는 수켠법이었다. 소위 좌우 고환을 뱃속으로 끌어들여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은 외공의 수련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대 있었다. 내공을 길러 운기하지 않고는 고환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레서 금강삼십육로의 이단계 수련 중에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것인데, 소삼중이 내공심법을 필요로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어쨌든 진자앙은 아까 하던 수련의 뒤를 이어 철소추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마당 한쪽에 심어진--원래 그 나무는 두고 마당을 조성했던 것이지만--아름드리 거목의 아래쪽에 쪼그리고 앉아 다리 바깥쪽으로쓸어 차는 것이었다. 사 년 전 처음 이 수련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나무기둥을 세워 두고 했는데, 다리가 부러질 뻔한 것이 한두 번이아니었다. 사실 사람의 손발이라는 것이 나무보다도 약한 것이라 같이 부딪쳐오면 필경은 손발이 부러지지, 나무가 부러지지는 않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수련 여하에 따라서는 나무기등 아니라 철봉이라도 부러뜨릴수도 있으니, 인체의 위대함이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지금도 그가 한번씩 걷어찰 때마다 아름드리 거목이 벼락맞은 것처럼 흔들리고 도끼로 찍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둥치 아래에는 몽등이로 후려 패서 만들어 놓은 듯한 파인 자국이 깊이 새겨져, 얼마 가지 않아 쓰러지고 말 것 같았다. 유소림은 밥을 다 먹고 잇새에 끼인 고기 조각을 파내며 혀를 찼다. "멀쩡한 도끼 놔두고 왜 다리로 나무를 팬대?" 그러면서 그의 눈은 연단실로 향하고 있었다. '약을 만들어 둔 게 얼마나 남아 있었지?' 그의 말마따나 도끼 놔두고 다리로 나무를 패는데 그 다리가 온전할리가 없다. 요즘은 어지간히 단련이 되어서 예전처럼 부러지지는 않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뭉친 피가 안에서부터 썩어서, 부러지는 것보다 심각한 상처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약이 필요한 것이다. 유소림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한지 방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에이, 떠나 버려야지!" 도대체 그가 여기서 고생해야 할 이유라는 것이 없었다. 비방도 배울 만큼 배웠고, 거동 못 하는 사부도 이 년 간이나 부양하지 않았던가. 사제란 녀석은 사실 그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두 배나 되고, 힘마저 세니 이젠 그가 사부를 부양할 차례 아닌가 말이다. "대신 바보지!" 유소림은 문득 중얼거리고는 혼자 웃었다. 유소림이 다시 깼을 때 그는 얇은 이불을 하나 덮고 침상에 누워 있는그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방바닥에 그냥 누웠던 그를 침상에 옮겨 준 사람이 누구일지, 이불을 덮어 준 사람이 과연 누구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는 창문을 보았다 밤이 깊었는지 창문 너머로 등근 달이 고개를내밀고 있었다. "바보는 바보라도 마음은 착한 바보지. 아니, 바보는 대개 착하다던가?" 그는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밖에 나가 소피나 보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검푸른 하늘, 하얀 달빛 아래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물론 진자앙이었다. "저 녀석이 이 오밤중에 미쳤나?"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진자앙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치심호흡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랫배를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느리기는 하지만 발도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진자앙은 지금 이른바 '강을 밟아 주문을 외운다'는 도가의 내공법을 시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을 발는다는 것은 북두의 꼴을 따라 걷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관되지 않게꼬불꼬불 걷는 것이 두수와 같다는 데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삼중이 얻어 배웠다는그 운기조식법이었다. 떠돌이 약장수에게 배웠지만 그 연원은 도가쪽에 있었던 것이라 규칙에 따라 걷는 중에 주문도 외어야 하는데, 그 주문은 이런 것이었다. -- 천강을 따라 공을 나르고 북두를 따라 걸음을 옮기라. 제때에 화로에 불을 지펴 납을 뽑고 수은을 더하라. 오헹을 모으면 조화가 생기고 사상을 합하면 시간이 정해 진다. 이기는 황도 사이로 들어가고 삼가는 금단의 길에서 모인다…… 일반적으로 도교라는 것이 태상노군, 즉 노자에게서부터 시작한다고들 하지만 그건 후세에 만든 이야기이고 사실은 전통적인 민간신앙에 유교의 것도 조금, 불교의 것이 또 조금, 하는 식으로 이것저것 섞여서 만들어진 종교였다. 그래서 도가는 노자로부터 시작하지만 도교는 그렇지 않다고 도가와 도교를 구분해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로 체계화된 것은 유비, 조조가 싸을 때의삼국시대인데, 당시 한중을 지배하던 군벌 장로가세운 오두미교가 그 시초였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는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씨 삼형제의 태평도가 더 이전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오두미교도 사실은 그 태평도의 한 갈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도교의 정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진파가 사실 이오두미교로부터 전통을 잇고 있으니 오두미교를 정통이라고 보는 것이합당할지도 모른다. 당대 최대의 도교파벌인 천사교가 바로 전진파요, 그 교주를 장천사라 하는데 장노의 직계 후손이라고 스스로도 그러고, 남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오두미교로부터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증거였다. 어쨌든 당대에 들어서 도교의 분파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고, 그 교리 또한 같은 종교인지 모를 정도로 다양해졌지만 근본 이념에서는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즉, 불사와 등선이었다. 그러기 위해 각각의 종파에서는 나름의 방법으로 수도를 하는데 그 방법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불사의 비약을 제조해 복용하고 신선이 되겠다는 연단파 귀신이나 산천의 신령들을 모시고, 주술, 부적으로 사악한 기운을다스리는 부록파. 음양화합, 방중술을 이용해 장생불사를 꿈꾸는 이른바 장생파. 단전호흡과 도인술을 수련하는 연기파가 그것이었다. 물론 이 중 어느 하나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도교 종파는 드물다. 호북의 무당파가 당세애는 연기와 수행으로 유명하지만 연단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원래 유명해진 것은 귀신을 쫓는 재초,즉 축사의 의식 때문이었다. 팡동의 나부파는 대표적인 부록파라 흔히 나부부록파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연기, 즉 무공수련 또한않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작금얘 들어와서는 도인술로부터 시작해서 고심막측한 경지의내가심법에 이르기까지 그 층위야 친차만별이지만 단전호흡을 않는 곳은 없는 형편이고 보니 이런저런 형태의 운기조식. 단전호흡법 따위가숱하게 행해지고, 또 가끔 유출되어 강호로 흘러나온 것도 적지 않았다. 진자앙의 조부, 진자룡이 젊은 시절 배웠던 것이 그 중 하나요, 또지금 소삼중이 진자앙애개 가르친 것 또한 그 중 하나였다. 물론 수준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비유하자면 같은 곳을 가더라도 탄탄한 길로만 가되 돌아가는 길이있고, 비로 험할지라도 바로 질러가는 길이 있는 것처렁. 또 비유하자면 어느 곳에 보물이 묻혀 있다고 했을 때 의심되는 장소로부터 반경 오 리 되는 지점을 모두 파본다면, 늦긴 하더라도 반드시 보물을 찾고야 말 것이지만 묻혀 있는 장소, 말하자면 핵심을정확히 짚어 그 지점만 파면 쉽고 빠르게 보물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진자룡의 오칠비결은 질러가는 길이고, 핵심을 짚는 내공심법이었다. 그것은 실행하는 사람이 적당한 소질만 가지고 있다면 곧장 내가고수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전진파의 숱한 선배고수들에 의해 정련되어지고 검증되어진 내공비결이었다. 그러나 소삼중이 얻은. 그래서 지금 진자앙이 수련하는 이 이름 없는 내공심법은 멀리 돌아가는 길이고, 있을 만한 지점을 두루 건드려보는 식의 것이었다. 그래서 내공심법이라기보다는 도인술에 가까운것이었다. 묘한 것은 사람에 따라 맞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길을 질러가는 것이 꼭 좋지만은 않은 것이, 험한 것에도 정도가 있어 어떤 사람은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한 지점만을 들이파는 것이 꼭 좋지만도 않은 것은 만에 하나 그곳이 엉뚱한 지점이었을 경우, 그때까지 퍼부었던 일체의 노력이 헛수고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미 증명되었듯이 오칠비결은 진자앙으로서는 익힐 수가없었다. 이화복령사의 화독으로 이미 보통 사람과는 다른 체질을 지니게 된진자앙에게 일반적인 내공심법, 평범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내공심법은 그 자체가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진자앙에게 맞을 수가없었다. 무림십대고수의 하나요, 내가기공에는 나름대로 절정의 경지에 이른 진자룡이 왜 손자의 문제를 꿰뚫어보지 못했을까? 광동의 명문 진가장에서 그럴듯한 명의 하나 못 구해서 손자를 내공도 못 익히는 신세로 방치했을까? 물론 아니었다. 진자룡은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직접, 또 불수화타정정진을 다시 불러서 진자앙의 문제를 진단하고 고쳐 보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진자룡이 아는 것은 정상적인, 때로는 재질이 뛰어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정진이보기엔 진자앙은 애초에 너무 오래 익혀 타버린 밥과 같아서 구제할길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금강두' 진자앙이 탄생한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도인술은 오칠비결과 달랐다. 그것은 굳이 인체의한지점에 기를 모으지도 압고, 또 굳이 기를 움직여 어디로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저 사람이 날 때부터 하늘애서 받은 선천의 기, 밥 먹고 물마시며, 또 일채 자연이 스스로 뿜어 내는 천지의 기를 받아들여 몸안얘 쌓은 후천의 기를 끌어올려, 그것들이 각자 갈 곳으로 가게 하고, 할 바를 하게 하는 것이 도인술이었다. 이름붙일 수 없는 그 기운들을 굳이 일컬어 오행이라 하고, 보이지않는 그것들의 움직임을 지칭하여 사상이라 부르는 것은 범인이 이해하기 쉽개 하는 것뿐이었다. 한번 기를 깨워 움직이게 두면 그것은 자연히 제 갈 곳으로 가고, 자연히 제 할 일을 하며 궁극에는 조화로이하나로 이루어지니 이것이 이른바 '이기는 황도 사이로 들어가고 삼가는 금단의 길얘서 모인다'는 말의 참뜻이었다. 아직 그 효과가 겉에 드러날 만큼은 수련하지 못했지만 진자앙은 어려서 포기혜야 했던 내가수련의 길로 다시 접어들고 있었다. 느리지만착실하게 자신의 몸 안에 두루 퍼져 있던 기운들, 너무 강해 제어할수조차 없던 그 야생마와 같고 용암과도 같던 기들을 통제하기 시작한것이다. 유소림은 그가 이러한 수련을 하는 것도 몰랐다. 감추려고 감춘 것이 아니라 매일 밤 자시, 천지음양의 기운이 지상에 가장 가까운 곳에 내려 깔릴 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하여 그때에만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수련했던 것이니 볼 기회가 없었다. 사실 본다 해도 그 이치를 알 수도 없었을 테지만, 유소림은 요 일이 년 간 언제든지 하산할 기회만 바라며 밖으로 돈 터라 요즘 들어진자앙이 이전과 달리 그다지 수련을 힘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고행에 가까운 수련을 하면서도 별반 다치는 곳이 없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온종일,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고생하고도 또다시 오밤중에일어나 소용도 없어 보이는 수련을 하고 있다고 불쌍해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었다. "저 녀석 정말 바보 아냐?" 유소렁은 진자앙이 입문한 이후 지금까지의 세월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잘 때만이라도 다른 방을 쓴 사부보다야 한방에서 몸을 비비고 산 그가 오히려 더 잘 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처음 금강삼십육로의 일단계 수련을 할 때는 하루의 수련을 마치고들어오면 금방이라도 죽지 않을까 할 정도로 힘들어 했었다. 열두 살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체격과 곰 같은 체력에도 불구하고피곤에 지쳐 잠에 떨어지고, 밤새도록 신음을 흘리며 새벽에는 몸이움직이지 않아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다시 수련에 나가곤 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유소림은 그렇게 가혹한 수련을 강요하는 사부를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말없이 따르고만 있는 진자앙이 바보니 어쩔수도 없다고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바보 같은 녀석……!" 습관처럼 다시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허탈하게 울렸다. 바보 같지만 아주 전적으로 바보는 아닌 것도 같다는 것이 그 허탈함의 이유일지도, 아니, 그보다는 무언가에 열중하는 그 모습이 지금의 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에 빠져 있는 사람은 지켜보는 사람을 외롭게 한다. 어딘지자신과 같은 종류의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결국 저마다 다른 사람이 모며 사는 것이 세상이라는, 그러니 각자 자기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는 문득 자신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생각하개 되었다. 바보일지도 모르지만 진자앙은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허황된 목표인 것 같지만 흑시 금강불괴가 되진 않더라도 나중에 튼튼한몸 하나는 남게 될 것 아닌가. 반면 지금의 그는……?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까 전부터 소피를 보려 했던 것이 갑자기 생각났던 것이다. 마당에는 이미 진자앙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진자앙이 그의방에 와서 자지 않은 지도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럼 어디 가서 자나……?" 답은 금방 나왔다. 몇 칸 되지도 않는 방들 중에서 제일 먼저 열어본 문 안에 진자앙은 있었다. 사부, 소삼중의 방이었다. "안 자고 뭐 하냐?" 건성으로 물으면서 방으로 들어선 유소림은 습관적으로 사부의 안색부터 먼저 살폈다. "여전하군!" 여전하다는 말은 나빠지지 않았다는 말보다, 나을 가망이 별로 없다는 말로 쓰일 경우가 훨씬 많다. 방안의 어두운 불빛, 병자 특유의 냄새가 유소림의 답답한 마음을 더 답답하게 했다. "젠장!" 유소림은 소삼중이 누운 침상 곁 의자에 무너지듯 앉아 진자앙을 보았다. "뭐 하냐?" "그냥……!" 진자앙은 어색찬 미소를 흘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싱거운 녀석!" 유소림은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진자앙이 뭘 하고 있었는지 뻔히보였다. 삼 년 병석에 효자 없다는데 자기가 무슨 효자라고 밤새 침상옆에 앉아 지키고 있는단 말인가. "그래서 나을 병이면 벌써 내가 그렇개 했다, 임마!"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 자기가 침상 곁을 지카고 있었을지에대해서는 별로 확신이 없는 유소림이었다. 사실 그도 사람인 이상, 어렸을 때부터 길러 주고 가르쳐 준 은혜를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부양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도 의술을 대충이나마 공부한 입장에서 소삼중의 병은 나을 병이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 천고의 영약을 구하거나, 신선이라도 와서 고쳐 주지 않는 이상은. 그렇다고 해서 긍방 죽을 병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한두 달내에 죽어 버린다면, 그럴 것만 같으면 그도 빨리 하산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곧 죽을 사람을 두고 야박하게 떠났다는 말은 듣고 싶지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세월을 언제까지나 뭉개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 젊고, 바깥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유소림은 모질게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사부!" 소삼중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유소림은 알고 있었다. 유소림은 소삼중의 검은 얼굴, 등잔 그림자가 깔려 더욱 어둡게 보이는 그 얼굴을 보았다. 눈가에, 이마에, 얼굴 전체에 깊이 파인 주름돌을 보았다. '언제 이렇게 쪼그라들었나……!' 유소림은 처음 소삼중을 만났을 때 보았던 그 작지만 당당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지금 작은 원숭이처럼 쪼그라든 모습과 비교해 보며자칫 하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어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부……, 나 이제……!" 소삼중이 불쑥 말을 뱉었다. "안 돼!" 유소림은 흠칫 놀랐다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뭐가 안 된단 말요? 말도 들어 보지 않고선……!" "안 돼!" 소삼중은 짤게 반복했다. "넌 나와 십 년을 약속했어 지금 가면 안 돼!" "이런 젠장!" 유소림은 얼굴을 붉히고는 벌떡 일어났다. 속내를 들키니 오히려 화가 났다"그놈의 빌어먹을 약속! 그건 사부가 맘대로 정한 거지 내가 언제약속했단 말요? 거지 새끼 하나 데려다 키워 놓곤 너무 오래 빨아먹으려 든단 생각은 안 하쇼? 양심이 있으면 진작내보내 줬을 거요!" "안 돼!" 그제야 소삼중이 눈을 부릅떴다. "나와 네 사제에겐 시간이 없어! 네가 있어야 돼! 삼 년, 삼 년만더 기다리면……!" "이런 젠장!" 유소림은 거세게 욕설을 뱉어 냈다. "그놈의 시간! 그놈의 금강불괴! 빌어먹을놈의 금강불괴! 얼어뒤질놈의 금강불괴! 그게 다 뭐요! 그따위 허무맹랑한 꿈 때문에 이 지랄같은 곳에서 아까운 시간을 죽이고 있어야 한단 말요? 사부 당신도 그놈의 것 때문페 가족 잃고, 몸 버리고, 이제 저숭 문 앞에서 깔짝거리고 있으면서 아직도 그 소리요! 미치려면 사부, 당신이나 미치지 왜우리까지 이 고생을 시키는 거요!" 유소림은 거칠게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소삼중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과 내민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처놈, 저놈이……! 아니, 저놈이……!" "사부님, 고정……, 고정하세요!" 진자앙이 놀라 사부를 부축하는데 밖에서 들쾨는 유소림의 고함 소리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어쨌든 난 갈 거요! 이 개 같은 구석에 처박혀 있느니 길바닥에서뒹구는 게 백 번 낫단 말요! 사부 같은 사람은 랄리 죽는 개 남 돕는일이라는 거나 명심하쇼!" "사형!" 진자앙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투막이지만 그레도 통나무로 든든히 엮은 것인데 진자앙의 고함 소리에 무너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유소림은 그 소리에 놀란 듯 잠시 조용히 있더니 약간은 풀죽은 목소리로 말헌다. "사제, 미안괘. 하지만 난 더 견딜 수 없어. 너도 될 수 있으면 빨리 떠나는 개 좋을 거야!" 그는 사립문 밖으로 뛰어가 버렸다. 소삼중이 소리를 질렀다. "저놈, 저놈 잡아! 빨리……!" 그러나 진자앙은 유소림을 쫓아가지 않았다. "사부님 진정하세요, 제발……!" "진정이 아니라……, 으……, 으윽……!" 소삼중은 그대로 침상에 쓰러져 버렸다. 유소림은 한참을 뛰었다. 십 년 넘어 살아 온 곳이라 어두운 밤중,산속이지만 길은 훤했다. 그렇게 뛰었으니 적지 않게 멀리 왔기도 했고, 낌새로 보아 진자앙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떠나게 될 줄은 그도 몰랐었다. 그보다 이렇게 최악의 모습으로 떠나게 된 것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걸 보상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가슴이 터질 지경이 되도록 하염없이 뛰고만 있었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형……!" 유소림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어두운 숲속, 나무 사이로 발소리 . 가들려 왔다. 진자앙이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저 녀석이……!" 그는 진자앙이 쫓아오고 있다는 데에 놀랐고, 그보다 저 둔한 녀석이 이렇게 빨리 그를 따라잡았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진자앙의 발이 제법 빨라진 모양이었다. "사형!" 잠깐 사이에 진자앙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유소림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뭐냐? 날 잡으러 온 거야?" 진자앙은 달려오던 기세를 멈추지 못해 옆에 선 나무 한 그루를 잡고 간신히 몸을 가누더니 고개를 설래설레 저었다. "그럼 뭐야? 날 따라가려고?" 진자앙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젓더니 들고 온 큼지막한 보따리를 내밀었다. 유소림은 영문을 몰라 물었다. "이게 뭐야?" "가지고 가. 내려가면 장사할 밑천이라도 있어야 하잖아." 보따리에는 그 동안 만들어 둔 약과 모아 둔 약초 상당량이 들어 있었다. 유소림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잰장! 그러고 보니 밑천도 안 들고 갈 뻔했군!" 그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진자앙의 손에서 보따리를 뺏듯이 들고는돌아서 버렸다. 진자앙은 그를 잡지 않았다. 그저 그 됫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유소림이 돌아섰다. "너, 내게 진 빛이 오늘까지 쳐서 서른다섯 냥하고 천이백 문이야. 잊지 말어! 나충애 받으러 갈 테니까!" 그는 다시 돌아섰고, 그 다음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제십일장] 곰은 목욕을 시키고 여도사는 옷을 훔치다. 태고의 어느 날에 산신이 분노하여 뜨거운 불길을 토해내었을 때, 그 가슴속 가득 찼던 뜨거운 눈물을 불길과 함께 내뿜어그 열기로 파인 골이 수백 갈래로 뻗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갈라지며 새 땅이 새 하늘 아래 솟아올라 다섯 개의 봉우리를 이루었을 그때에 오지산은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누천, 누만 년이 지나오면서 그때의 불길은 꺼지고, 붉게 달아을랐던 땅거죽도 이제는 푸른 수림에 덮여 버렸지만 아직도 그때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있었으니, 산을 거의 덮고 있는 구멍 뚫린 검은돌들과 녹아 흐르다가 굳은 듯 엉겨 있는 바위들의 모습, 그리고 봉우리를 둘러싸고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황온천들이 그것이었다. 유황이라는 것이 묘해서 손으로 만지면 피부가 굳어 버리고 냄새만슬쩍 맡아도 숨이 멎어 버릴 것같이 독한 놈이지만 적당한 방법으로적당히 사용하면 양생과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산짐승들은 평소에는 얼씬도 않다가도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찾아와 그 거품 일어나는 누런 물에 몸을 담그고, 유황이 섞인 진흙에 됩굴기도 하곤 했다. 산짐승들이 이런데 하물며 사람이 찾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이 오지산을 중심으로 한 종화지역이 광동에서도 유명한 온천 지역이된 것이다. 그 중 향로봉은 오지산 다섯 손가락 중 중지라고 할 위치에있는 봉우리로, 산세가 유독 험하고 기암절벽이 많아 온천을 찾아온사람들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새벽. 향로봉 산기슭에 곰보처럼 뚫려 있는 간헐천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황 냄새 자욱한 수증기가 섞인 새벽 안개를 뚫고 한사람이 달려가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와 수증기 속에서 스치듯 보이는거대한 체구가 마치 한 마리 회색 곰이 질주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했다. 그는 철탑같이 장대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빠른 속도로 기기묘묘하게 튀어나온 바위 틉을 혜치고 구멍 뚫린 검은 돌들의 무더기를 스쳐지나가며 산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진자앙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경공슬을 연마함으로써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경공술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진자앙이 연마하고 있는 것은 비모각이라고 해서 달리기 연습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비모각. 이름 그대로 '털이 휘날리도록 뛰는' 것이다. 근육은 사용하면 할수록 단련되는 것이니 매일 달리면 점점 빨라지기도 하고, 오래 달릴 수도 있개 된다. 그러니 산길을 매일, 그것도 무거운 동판 같은 것을 다리애 매달고 뛰면 걸음이 빨라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이 무림에서 말하는 경공술은 아니었다. 신체적 훈련으로 키울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아무리 단련을 한다고 하러라도 새처럼 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러나 경공술은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말한다. 밀가루를 깔아 놓은 곳을 걸어도 흔적이 남지 않고, 뛰어가는 말을 달려가잡으며, 오 장, 십 장 너비를 가뿐히 뛰어넘는 것 등은 하나같이 인간의 한계를 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진자앙은 그런 경공술은 배운 적이 없었다. 외가에서는 경공술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배을 기회가 없었기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였다. 이 년 전 사형인 유소림이 금강당을 뛰쳐 나가 버린 이후, 소삼중은이전보다 더욱 병세가 악화되어 버렸다. 하루에 깨어 있는 시간보다는그렇지 않은 시간이 훨씬 많은, 거의 탈진한 사람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진자앙에게는 무공수련보다는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 되어 버렸다. 사부를 간호하면서 쌀과 생필품 몇 가지는 사야하는데 자신에게는 유소림처럼 약을 가져다 팔 재주도 없으니 진자앙으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경공수련을 나올 때마다 한두 마리씩 잡곤 하던 산짐승들을팔아 보자는 데로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이제는 하루의 반 이상을 산을 돌아다너며 사냥을 하는 것으로 보내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 나머지 시간만이 수련에 할애될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삼단계의수련을 시작할 즈음이라 영 곤란하게 되어 버렸다. 금강삼십육로의 삼단계 수련은 여태까지의 신체단련 수준에서 끝난는 것이 아니라 사실 내가수련을 겸해야 하는 일종의 기공수련이었다. 이른바 외문기공의 단계였다. 이십오로인 철사장에서 시작해서 무형지기의 권격무공을 수련하는 정권공 ,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다는 선인장, 손바닥 옆 부분을 칼같이 만들어 강철을 자른다는 관음장, 돌을 비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합반장등이 장과 권을 단련시키는 수련법인데 하나같이 내가의 수련을동시에 해야만 효과를 볼 수 있는 수련들이었다. 더구나 삼십로인 점화공은 엄지, 중지, 식지를 단련하여 지풍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고, 용조공은 손가락으로 사람의 혈도를 움켜쥐어 제압하는 점혈법의 일종. 발산공은 금나수의 일종으로 손아귀 힘을 단젼시켜 거력을 발휘하개 하는 수련법이었다. 마안공은 다시 장켠을 단련시키는 것이고, 삼십사로에서는 다시 경신공을 연마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의 경신공이 진짜였다. 이러한 열 가지 수련들은 하나같이 기공이기 때문애 사실 소삼중도이것들은 익히지 못했었다. 내공이 없으면 전혀 시도조차 할 수 없는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자앙에게는 내공수련을 일찌감치 시키고 대충 효과가보인다고 생각되자, 바야흐로 삼단계의 수련을 시키려던 참인데 유소림이 뛰쳐 나가 버렸으니 소삼중의 실망이 더욱 컸던 것이다. 이러한 기공수련에 있어서는 다른 것애 방해를 받지 않고 그저 며칠이고 전념해서 수련할 여건이 필요한데 그게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기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삼중은 오랜 시간 고민한 끝애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했다. '금강삼십육로의 수련법 중 상당 부분을 포기한다'가 그것이었다. 철사장에서 마안공까지는 사실 방어용이라기보다는 공격용의 기공측면이 강했다. 이것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경신공에 대해서는수련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별 필요는 없다는 이유 때문에 포기하게되었다. '도둑질을 할 목적이 아니면 소리내지 않고 걷는 것이 무슨 필요냐' 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 치고라도 나머지 수련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기 때문에 진자앙도 별 불만은 없었다. 그는 근 이 년 동안 새벽같이 일어나 산으로 뛰어 올라오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향로봉의 기암절벽들을 타고 뛰는 것이 경신술만이 아니라 몸 전체의 단련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해왔던 수련들, 즉 이단계까지의 수련들은 이제 그에게는 너무 쉬운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되풀이할 필요도 없었다. 대신 그는 나름의 수련법을 개발해 내었다. 산을 타면서 체력을 기르고, 그 동안 짐승을 잡는다. 그리고……! "이 야아아압--!" 향로봉 산정 가까운 높은 바위에 올라간 진자앙은 그대로 네 활개를펴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대충 눈대중으로 보아도 십여 장이 넘는 높이의 바위, 게다가 그 아래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거기로 진자앙은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네 활개를 편 몸의 전면으로 바위에 부딪쳐 간셈이었다. 쾅--! 마치 묵직한 바위 하나가 털어진 듯한 소음이 퍼지고, 바위 가루가부서져 뿌연 먼지가 솟아올랐다. 보통의 사람, 아니, 무공을 꽤나 수련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도저히살아남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진자앙은 천천히 그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물론 아프다. 그러나 부상은 전혀 입지 않았다는 것이 진자앙의 상태였다. 게다가 이전얘 했을 때보다, 아니, 어제보다도 훨씬 덜 아프다는 것이 중요혔다. 이것이 그가 나름대로 개발한 수련법이었다. 그는 다시 바위 위로 뛰어 올라가 이번에는 뒤로 떨어져 내렸다. 등판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무식한 수련법이 가능했던 것에는, 그러고도 죽지 않을수 있었던 것얘는 이유가 있었다. 포기한 수련들 대신에 '이것만은'이라며 소삼중이 강조한 두 가지 수련, 바로 금강대력과 금강지식의 두 가지 수련법이 효과를 본 것이다. 이 두 가지야말로 금강당의 독보적인 수련이라고 소삼중은 강조했는데 사실 그런 면이 적지 않았다. 금강대력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다. 그저 두 다리를 벌리고 기마식으로 서서 가상의 상대가 공격해 온다고생각하고 그것을 받아쓰러뜨리는 연슘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연습상대가 없어서가 아니라 혼자 수련하는 것이 정석이며 그래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상의 적을 상대로 밀고 밀리는 수련을 거듭하는 동안에 진자앙의 체내 기운이 동작을 따라 움직이게 되고, 그러한 기운은 그의발에서부터 지면으로 이어져 어떠한 힘으로 밀어도 꿈쩍도 않게 되는,이른바 금강부동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진자앙은 이 수련을 통해 상식적으로 기대되는 것보다 훨씬더 진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묘하게도 어머니 고대랑 덕분이었다. 그는 이전에 싸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상의 상대로 할 수 있는사람은 그저 어머니뿐이었다. 고대랑이 어떤 사람인가? 천하무림을 통틀어도 백대고수의 반열에는 올라가고도 남음이 있는광동제일의 여장부인 것이다. 그런 고수를 상대로 매일 수련을 하니 처음에는 힘들었어도 나중에는 그 진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목표를 높이 잡으면 그 성취도 크다는 셈이었다. 금강삼십육로의 마지막인 금강지식은 그야말로 금강당 무공의 총화요,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는 수련이며 , 의식적으로 숨을 멈추는 기공이었다. 내뱉는 숨과 들이마시는 숨 사이에 멈추는 시간을 갖는데 처음에는그 시간이 길지 않게 한다. 그러다가 수련이 진행되어 가면서 점점 내뱉고 들이마시는 시간을 보다 길게 하고, 나중에는 소위 한 모금의 호흡으로 하루를 견디는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수련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 그 경지에는 다다르지 못하였지만 진자앙은 이 금강지식의 수련법이 자신을 변화시킨 것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얼굴과 눈의 단련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이전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단련을 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금강지식의 상테에서는 바위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눈을 찔려도 끄떡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이 수련법은 소삼중에게서 배운 운기조식법과도 묘하게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금강대력을 수련할 때도 그런 것을 느쪘지만 이 금강지식의 수련을 하는 동안에는 몸 안에서 원인 모를 기운이큰 강과도 같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운기조식을 할때도 미처 느껴 보지 못했을 정도로 큰 기운이요, 큰 흐름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방향은 세 가지가 다 공통되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했다. 그가 익힌 운기조식법, 그리고 지금 금강대력과 금강지식의 두 수련법은 인체의 기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려 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런흐름애 맡긴다는 면에서 공통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림에 일반적으로 돌아다니는 내가기공, 내공심법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라고도할 수 있는테, 그런 것들이 비록 기의 자연스런 흐름에 맞게 진기를온행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무리해서 이끌어 가는 느낌이강한 데 반해서 여기얘는 그런 인위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라는 것이 눈 한번 꿈쩍거려도 발뒤꿈치에까지 상호 연관을갖고 기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 상례이니, 금강대력이나 금강지식과 같이 수련을 하는 데에 기의 움직임이 얼을 수가 없다. 그러한 기를 인위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두면 그것이 어디로 움직이는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불길은 위로 치솟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순간 진자앙의 체내에서 가장 적합한 자리로 움직여 갈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에 합치하는흐름이었다. 그렇게 해서 진자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 그의 온몸에 두루퍼져 있던 이화복령사의 기운을 거의 체내로 흡수하고, 그것을 그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비록 복용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원래의 효용이 다 내공으로 만들어지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진자앙 자신의 기로 흡수되어안팎이 모두 자연스러운 기로 충만케 되었으니, 차라리 좋을 수도 있는 결과였다. 적어도 이전처럼 연운십팔박이라는 간단한 동작조차 못 하지는 않았다. 근골이 부드럽게 풀린 덕분이었다. 단지 이목이 영민하지 못하여 지금도 주변의 낌새를 잘 알아차리지못했는데 그것은 워낙 어렸을 때 극양의 화기를 섭취한 부작용으로 신체가 이미 그렇게 변해 버린 때문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것이 성격 자체에도 작용해서 어딘지 느긋한 인물이 되어 버린 것도하는 수 없는 일이다. 좋게 말하면 당황하는 법이 없는 침착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둔해서 반응이 빠르지 못하니 좀 멍청해 보인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사람, 그것이 이제 스물하나가 되는 진자앙의 상태였다. 그런 진자앙의 눈에 뜨일 뿐 아니라 잡히기까지 하는 산짐승들도 그러고 보면 대단히 한심하다 아니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그런 한심한짐승 중 하나가 나타났다. 거대한 붉은 곰 한 마리가 진자앙이 뛰어가는 그 길목 앞 바위 뒤로사라지고 있었다. 진자앙은 걸음을 멈추고 잠깐 머뭇거렸다. 아직 식량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저 정도로 큰 곰은 자주 발견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마리만 잡으면 고기는 포를 떠서 말리고 쓸개는 사부의 약으로쓸 뿐 아니라 가죽을 벗겨 팔면 산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을 대접해드릴 수도 있게 된다. 진자앙은 오늘 아침의 수련은 저 곰을 잡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곰은 흔히 미련한 동물의 대명사처림 취급되지만 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놈이 그것이다. 집채만한 바위도 굴려 버리는 엄청난 힘에, 체구답지 않게 신속한 동작, 역시 체구에 걸맞지 않게 교활한 두뇌는 일반적으로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던오해를 공포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곰을 가장 두려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놈이 가지고 있는 치열한 공격성이다. '곰을 만났을 때는 죽은 척하면 산다.'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이 속설만큼 곰의 흉포함을 모르고 하는 소리는 엄다. 놈은 산 것이건 죽은 것이건 일단 물어뜯어 찢어 놓고서야따지려고 들 것이니 말이다. 덧붙여 말해서 그것에게 물어뜯기고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기대는않는 것이 좋다. 한입에 서너 근씩은 족히 뜯어 갈 것이요, 운이 좋아그 입애서 괴해 도망친다고 해도 그 발톱과 이빨의 독은, 살아남은 사람을 색은 고깃덩어리로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독하기 때문이다. 그런 곰을 쫓는 일은 어렵지 않다. 놈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고, 그런 만큼 적을 피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놈이 누군가를 피하는 것처럼보인다면, 그것은 귀찮아서이지 결코 두려워서는 아니다. 그런데도 진자앙이 놈을 쫓아 잡은 것은 처음 발견한 곳에서도 한참이나 더 간 봉우리의 남쪽 기슭, 화룡동의 초입에서였다. 화룡동. 화룡동은 사실 동굴이 아니었다. 향로봉의 옆에 혹처림 튀어나온,봉우리라기엔 좀 작고 언덕이라기엔 좀 큰, 그런 곳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이 동굴로 불리는 것은 화룡의 굴이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화룡의 굴, 바로 분화구였다. 이재 불을 내뿜지는 않지만 아직도 짙은 황색의 연기가 그침없이 뿜어져 나오고, 그 주변에는 부글부글 끓는 진흙탕과 유황 연기 자욱한고열의 열탕 구덩이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곳이었다. 진자앙은 잠시 머못거렸다. 이곳은 향로봉 구석구석을 다녀 본 그도아직 들어가 본 적이 엄는 곳이었다 온천이라고는 하지만 봉우리 북쪽의 그것들에 비해서 유황 연기도 너무 짙고, 온도도 높아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래도 한번 가보기로 하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화룡동의 중심, 분화구를 향해 걸었다. 사방애는 반쫌 녹다가 만 것 같은 바위들이 즐비하고, 그 사이사이로 거품이 부글거리는 진흙탕이 흘렀다. 애써 땅을 밟으려너 오히려힘들어 진자앙은 바위로 올라가 징검다리를 건너듯 뛰었다. 서너 개를 그헐게 뛰어넘었는데도 곰은 보이지 않았다. 기괴한 모습의 바위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기는 하지만 그리 크지는 않으니 별달리 숨을 곳이 없을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전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진자앙은 바위 하나를 딛고 서서 중얼거렸다. "그만 포기해야 하나……? 여길 찾아온 걸 보니 다친 놈 같기도 하고…… 그래, 관두자!" 그렇게 돌아서는 순간, 바위 아래 진흙탕이 분수처럼 튀어올랐다. 흠칫 놀라 돌아보는 진자앙에게 거대한 곰이 악마처럼 입을 벌리고 덮쳐 들고 있었다. 놈은 진자앙이 서 있던 바위 바로 아래, 진흙탕에 몸을 묻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올려 곰의 발톱을 막으려다가 마음을 바꿔 다른 바위로 뛰어 피하려고 했다. 좁은 바위 위에 서서, 그것도 예상치 못한 기습을 받아 힘을 모으지도 않은 상태에서 곰의 일격을 받으면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갈피를 못 잡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사이, 곰의발톱은 이미 그의 가슴팍을 후려치고 있었다 진자앙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바위 아래 진흙탕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싸움 경험이 없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에 반해 곰의 공격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망설임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대로 바위를 돌아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진자앙의 머리를 향해 다시 일격을 가했다. 퍽--! 진자앙은 그대로 진흙탕 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뒷골이 울리고 있었다. 처음 맞은 가슴팍도 시큰거리는 것이, 곰의 일격이 가볍지는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사이에 침착을 되찾았다. 곰의 연속타를 맞고도 그저 골이 떵하고 가슴팍이 시큰거린다는 정도에 그친 것은 그의 육체가, 그리고 그의 수련이 곰의 공격 정도는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보다 걱정되는 것은 곰의 공격이 아니라 이 자욱이 피어오르는 유황 연기였다. '겉은 가죽이 두꺼우니 괜찮다고 쳐도 폐가 견딜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곰이 다시 공격을 가해 왔다. 놈은 진흙탕 속에 절반이나 파묻힌 그를 물어 당기며 찢어발기려고흔들고 있었다. 진자앙은 힘없는 사슴처럼 곰의 이빨에 목덜미를 물린채로 덜렁거렸다. 꼴이 우스울 거라는 게 뻔했지만 움직이기 어려운 진흙탕에서 꺼내어진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이것보다는 차라리 벼랑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아팠다. 단지 어떻게 곰의 이빨에서 빠져 나가따 할지 몰라 곤란할 뿐이었다. 진자앙은 그재야 자신이 공격을 하는 방법이라고는 단 하나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곰도 이젠 좀 난감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씹어도 씹히지가 않을 테니까. 아마 놈은 이렇게 질긴 고기는 씹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곰이 이제 방법을 바꾸었다. 진자앙을 물고는 바위로 다가가 거기에 패대기를 친 것이다. 이번에는 아팠다. 진자앙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곰의 머리를 내질렀다. 약간 반응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공격하는 방법은 모를지라도 무기가 전혀 없는 것은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온몸이 흉기가 될 수도있었다. 그는 좀더 자신을 가지고 팔을 휘둘렀다. 팔뚝을 가로로 세워 곰의옆구리를 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은 어마어마하게 컸고, 그는 목이 물려, 들려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의 일격은 곰의 목덜미에 격중했다. 잘된 일이었다. 아무래도 살이 많은 옆구리나 팔보다는 목덜미 쪽이 충격이 더 갈터였다. 그러나 곰은 꿈쩍도 않았다. 발이 땅에서 떨어져 있는 데다가 자세가 좋지 않아 별 충격을 주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곰은 옆구리보다는 목덜미 쪽의 가죽이 더 두껍다. 어쨌거나 공격을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진자앙은 그치지 않고 팔을휘둘렀다. 그것이 곰의 신경을 적지 않게 긁어 놓았던 모양이었다. 곰은 포효를 지르며 물고 있던 진자앙을 저만치에 던져 버렸다. 진자앙은 바위에 부딪혀 땅바닥을 굴렀다. 거기로 곰이 다시 덮쳐 왔다. 팡--! 곰의 앞발 일격이 옆구리에 작렬했다. 진자앙은 공처럼 떠서 저만치에 굴러 떨어졌다. 팡--! 다시 한 방. 진자앙은 다시 굴렀다. 곰은 공놀이를 하는 것처럼 진자앙을 이리저리 쳐내고 있었다. 살기에 가득 찬 공놀이였다. 곰이 다시 덮쳐 들 때, 진자앙이 발로 그 얼굴을 걷어찼다. 자신이철소추를 연습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팍--! 이번에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타격점도 좋았다. 진자앙의 발은 정강이를 앞으로 해서 곰의 콧잔등에 그대로 박혀들었다. 크와아아앙--! 곰은 머리를 흔들며 물러났다. 진자앙도 그 틈을 타서 일어나 뒤로물러났다. 어느새 그와 곰은 진흙탕을 라져 나와 언덕의 정상에 보다 가까워져있었다. 온통 진촐을 뒤집어쓴 곰과 사람의 싸움은 거기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곰이 살기로 충혈된 눈에 시뺄건 입을 벌리고 사람처럼 일어섰다통나무처럼 굵은 두 개의 앞발이 비수처럼 날카로운 열 개의 손톱을번뜩이며 하늘을 향해 들려 있었다. 곰의 앞발이 진자앙을 향해 휘둘러졌다. 발톱이 바람을 끊었다. 진자앙은 이미 몇 대 맞아 보고 그 발톱이 별 타격이 되지 않는다는것은 알았지만 일단은 본능적으로 두렵고, 그 다음엔 아무리 곰과 싸우는 것이지만 변변히 공격 한번 못해 보고 지는 것은 싫어서 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았다. 아무 형식이 없이 주먹을 휘둘러 곰을 후려친것인데, 놀랄게도 체법 날카로운 맛이 있었다. 사실은 이 구 년 동안 수없이 되풀이해 온 연운십팔박 중에서 충전,즉 정권지르기의 요령이 진자앙의 이번 공격에 자연스럽게 배어 들어간 덕이었다. 곰과 사람의 공격은 서로에게 정확하게 격중되었다. 곰이 약간은 충격을 받은 듯 멈칫거렸다. 그러나 그때 진자앙은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힘은 둘례치고 체중에서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진자앙이 얼굴을 붉혔다. 그는 처음으로 분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기껏 무공을 배웠는데 곰애게도 밀리면 어디다 쓸 것이냐.' 곰이 다시 덮쳐 왔다. 그도 곰에게 같이 덤벼들었다. 힘으로 이기고말겠다는 생각이었다. 곰의 양팔이 진자앙에게 잡혔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가 곰의 양팔에매달렸다고 하는 것이 더 옳았지만. '금강대력공은 괜히 익힌 줄 알아?' 진자앙은 그 상태에서 그대로 힘을 썼다. 그러나 월등히 키가 큰 곰이 한번 힘을 쓰자 진자앙은 그대로 발이 떠서 공중으로 날아 나가떨어져야 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바닥을 구르면서도 진자앙은 그 생각을 했다. 분명 이럴 리가 없었다. 무언가 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강대력공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밀리는 것일 뿐이라고 그는 믿고 싶었다. 다시 곰이 덮쳐 왔고, 진자앙은 그 팔에 다시 한번 매달리면서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려 했다. 발가락을 안으로 굽혀 땅을 움켜쥐듯 하고, 혀는 윗니 안쪽, 입천장에 붙여라. 항문에 힘을 주어 당기고, 전신은 힘을 푼 듯이 자연스럽게 서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대력공의 기본자세였다. 그러나……! '서로 힘을 쓰는데 어떻게 자연스럽게 선단 말인가?' 한쪽이 힘을 쓰면 상대는 힘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는 것이 이치 아닌가! 그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선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진자앙은 머릿속으로 만든 적과, 실제로 힘을 써가며 싸워야 하는적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가상의 적을 상대로 싸우면서 수련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힘을 사용하지 말고 뜻을 사용하는 것이다! 상체와 하체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중심으로 조화로이 움직이는 것이다! 근육과 뼈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기가 함께 웅직이는것이다! 기는 멈춤없이 흘러야 하고, 호흡을 흩뜨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요결이었다. 한 순간 진자앙은 이것을 여태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알맹이는 버리고 쩝데기만으로싸워 온 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말 잘못 배운 것이었다. 아니, 여태 잘못 익혀 왔던 것이다. 고 오의는 파악하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만 따랐기 때문에실제 상황에 부닥치자 배운 것 전부를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자앙의 몸이 갑자기 태산같이 무거워졌다. 그의 발은 지면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곰이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는 단지 매달려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는 진정으로 곰의 팔을 잡고 있는 셈이었다. 곰이 발버등을 쳤다. 진자앙은 가볍게 비웃으며 그대로 곰을 잡아던져 버렸다. 그 순간, 그가 의식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힘을 쓰는그 순간에 그의 몸이 유지하고 있던 조화가 깨어져 버렸다. '아차!' 진자앙은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 더 좋지 않은 것은 그와 곰이 어느새 분화구의 가장자리에까지 와서 싸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곰과 진자앙은 한 덩어리가 되어 그룻처럼 움푹 파인 분화구의 안쪽으로 뒹굴어 갔다. 퍽--! 무언가 뜨겁고도 뭉클한 감촉이 진자앙의 등에 느껴졌다. 다음 순간그 감촉은 온몸으로 퍼져 그론 감싸안았다. 무거운 압력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진자앙은 그 무겁고, 뜨거운 수렁 속으로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고있었다. 암흑. 그것뿐이었다. '용암인가?' 용암은 아닌 모양이었다. 제아무리 철골과 같이 단련한 몸이라고 해도 용암에 떨어지고야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럼……?' 진자앙은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놓지 않으며 생각했다. 우선은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대한 후회였다. '제대로 못 배워서 이 모양이지!' 마지막 순간애 오만해지지만 않았으면, 어렵게 배워 놓고는 그렇게쉽게 잊어버리지만 않았으면 여기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걱정이었다. 금강지식법을 배웠으니 두 시진 정도는 숨을 쉬지 않고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여기에서는 훨씬 시간이 단축될것이었다. 온몸을 으스러뜨릴 것 같은 이 엄청난 압력 속에서는 기운이 훨씬더 빨라 소진되고, 그러면 숨을 쉬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이 훨씬짧아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의식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느찔 수 있었다. '기분이 좋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마치 흠씬 두들겨 맞고 난 뒤에 가물가물의식이 사라져 가는 그 순간의 안락함 같은 것이었다. 무거운 육체를벗어 던지고 정신이 한없는 자유로움을 얻기 직전의 그 황흘감과도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자앙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그것, 금강지식법의 구결을 암송하고 있었다. 생각이 단순해지면서 다른 생각을 떠을릴 기회도, 능력도 없어져 버린 때문이었다. 머릿속 어디에선가음악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 천강을 따라 공을 나르고 북두를 따라 걸음을 옳기라,제때에 화로에 불을 지펴 납을 뽑고 수은을 더하라오행을 모으면 조화가 생ㅋ기고 사상을 합하면 시간이 정해진다. 이기는 황도 사이로 들어가고 삼가는 금단의 길에서 모인다…… '이게 왜……?' 진자앙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구 년 간 끊임없이 연마해 온 그운기조식법의 구결 아니던가. 보법을 밟으며 그렇게 구결을 외면 몸안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 같은 것이 움직이던, 그 구결이었다. 노랫소리는 하나 더 있었다. 오행이 생기고 변함은 불로 하여 이루어진다. 간목은 능히 심화를 왕성케 하고, 심화는 또한 비토를 평케 한다. 비토는 금을 낳고, 금은 수로 화하고, 수는목을 낳아 영을 통하게 한다. 생생화화가 다 화로 인하니, 화는 장공에 퍼져만물을 성하게 하느니라. 오칠구결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들려 주시던 그 비결. '그러고 보니 이젠 뜨겁지 않군!' 조금 전까지 랫속까지 태울 것 같던 열기가 이젠 그리 뜨겁게 느져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장 속에서부터 시원스럽게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두 가지의 구결을 헛소리처럼 외며 자신도모르게 기를 움직이고 있었다. 운기가 진행됨과 더불어 그의 몸이 무게를 잃어버린 듯이 가볍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의 몸은 조금씩 떠오르고 있업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메 그는 분화구 안쪽에 파인 몇 개의 진흙구덩이 중 하나에 등등 터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흙 구덩이라지만 용암만 아닐 뿐, 사실은 유황 구덩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같이 떨어진 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미 진흙구덩이 속에 깊이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그런 곳에 빠지고도 살아난 것이었다. 태어나자마자 그가 먹었던 이화복령사의 기운이 여기 유황 구덩이가 뿜어 내는 기운과 성질상 합치하는 것이었고, 게다가 그가 외우던오칠비결이 화기를 부르는 구결이라 엄청난 화독의 덩어리나 다름없는곳에서 살아나게 만든 것이지만 진자앙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그 동안 쌓아 온 수련이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오늘의 이 일이 그가 평소에 쌓아 왔던 수련의 효능과 더불어 그의몸 안에 잠복하고 있던 이화복령사의 기운을 완전히 녹여 그의 것으로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유황이 지니고 있는 불과 같은 기운을 더해주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그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단지 진흙 속에 누워 바라본 하늘의 해가 상당히 올라와 있는것을 보고는 산 아래 초막에 누워 그를 기다리고 있을 사부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아차, 늦었다!" 그는 허겁지겁 진홀탕 속을 빠져 나와 분화구를 나오려 했다. 그때한 가지 물건이 그의 시선을 잡았다. 은통 검고, 혹은 로란 바위들 틈에 뒹굴고 있는 어떤 물건이 유독 불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저게 뭐지?" 그가 집어 든 것은 빨갛게 빛나는 등근 구슬이었다. 마치 보석처럼빛나는 구슬. 그러고 보니 그 구슬이 있던 장소에는 같은 구슬들이 여러 개 흩어져 있었다. 진자앙은 구슬을 덮고 있는 노란 돌들을 치우고 구슬들을 꺼내었다. 전부 해서 다섯 개였다. "왜 여기 이런 것이……? 응? 이거, 그러고 보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구슬이 있던 그 바위가 사실은 상자임을 알고 크게 놀랐다. 워낙 낡고 부식이 되어 있어서 바위와 구별이 안 가긴 했지만 분명그것은 상자였다. 그리고 상자 안에는 주변의 바위와 같은 노란 돌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진자앙은 이 노란 돌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 주변에서 가장 혼히 볼 수 있는 것, 바로 유황이었다. 도가에서는 불사의 천단을 만드는 데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 약으로사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물건. 그러나 그가 놀란 것은 상자가 있으면 누군가 사람이 여기 왔었다는점이었다. 유황 연기가 심해 누구도 오려 하지 않는 곳에 누군가가 왔다 간 것이다. 아니, 그는 오기는 했으되 가지는 못했다. 상자 옆에는 노랗게 변색이 되어 얼른 눈에 띄지도 않던 사람의 유해가 여러 구 뒹굴고 있었다.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은 간단했다. 유황이 담겨 있는 상자 그 옆에 뒹구는 여러 구의 시채. 아마도 이들은 유황을 구하러 이곳에 왔다가 상상보다 훨씬지독한 연기얘 질식되어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소삼중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유황을 캐는 광산에서는 이렇게 죽는 일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연기의 분출 때문에, 혹은 그 열기 때문에, 그리고 대부분은너무 오래 유할에 가까이 있느라고 안에서부터 중독이 되어 죽어 버린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시간은 오래라고는 하지만 사나흘이면 충분하다고도 했다.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유황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목숨까지 잃어 가며 캐낼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는 다시 한번 하늘을 보았다 해는 점점 더 하늘 중심을 향해 가고있었다. "아…… 늦었는데 !" 그래도 사람의 유해를 보고 어찌 그냥 갈 것인가. 그는 혀를 차며옷을 벗어서는 거기에 유해들을 주섬주섬 모아 담기 시작했다. 그때 또 다른 물건이 나왔다. 불꽃을 연상케 하는 무의가 빽빽히 새겨진 작은 창같이 생긴 물건이었다. 한 자가 조금 못 되는 길이에 앞뒤로 창날이 달려 있고--사실은 일반적인 창날처럼 납작하지가 않고 팔각형으로 등그스름해서 창날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웠지만--그 양쪽 창날을 중간에 자리한 손잡이와 구분지어 주는 등글등글한 테가 있었다. 테에는 뿌옇게 흐려져 있기는하지만 구슬 같은 것이 박혀 있어서 장식품 같기도 하고 무기 같기도한데 어떤 종류에 속하는 것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손잡이 한쪽에 작은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져 있었다. 그것을 그는 읽을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문자였다. 하지만 그 글자는 다른 것에도 생각이 미치게 했다. 진자앙은 상자의 옆에 쌓인 돌들을 치우고 살펴보았다 돌들 틈에 묻혀 있던 부분은밖에 드러나 있는 부분보다는 훨씬 부식이 덜해서 혹시 글자라도 새겨져 있으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과연 그런 것이 있었다. "산…… 서……, 벽력…… 당!" 그제서야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유황은 도가의 약으로 쓰이는 것보다는 훨씬 대중적인 용도에 더 많이 쓰인다. 바로 화약을 만드는 재료인 것이다. 산서 벽력당은 화기의 제조로 천하에 이름 높은 곳, 그들이유황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 이것도 벽력당의 것이겠군!" 진자앙은 양쪽으로 날이 달린 그 묘한 물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장난감처럼 보여 어딘지 호감이 가는 물건이었다. "나중애 그 사람들을 만나면 돌려줘야겠다!" 그는 그것과 구슬들을 바지춤의 주머니에 넣고, 옷가지에 계속 유골들을 담았다. 양지 바른 옷에 묻어 줄 생각이었다. 진흙탕 속에서 반나절을 뛰고 뒹굴다가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그면 어떤 기분이 될까? 지금 진자앙의 상태가 그러했다. 태을 듯이 뜨거운 열기와 숨을 막히게 하는 매캐한 냄새는 금세 잊혀져 버렸다.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온몸의 무게감이 사라지고, 지친육신을 부드럽게 만져 주는 물의 찰랑임 속에서 배마디 하나하나가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재구성되는 듯한 느낌. 체내의 온갖 혼탁한 기운들이 녹아내려 땀구멍으로 배출되고, 머릿속에 가득했던 잡다한 생각들이 또 그것을 따라 썬겨져 가는 듯한 청량한 기분 속에서 진자앙은 자신을 잃고 무아지경에 빠져 들어갔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진흙 범벅인 채로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는 길에 온천에 들러 잠깐 껏고 가려고 한 것인데, 일이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오늘 진자앙이 그런 모양이었다. 한참 무아지경애 빠져 있는데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니, 나타난 것같았다. 진자앙이 눈을 떴을 때, 온천 옆에는 대여섯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그를 손짓하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어머, 눈떴어! 눈떴어!" "아유, 난 하도 모른척하기에 도닦는중인 줄 알았다, 얘." "귀머거리거나?" "저 놀라는 것 좀 봐, 어머, 귀여워라!" 진자앙은 처음엔 산짐승들만 출몰하는 이 외진 곳에 여자들이, 그것도 한둘도 아니고 떼거지로 몰려 있어 놀라고, 그 다음엔 그 말하는것들이 워낙 거침이 없어 더욱 놀랐다. 젊은 남자가 목욕하는 것을 알고서도 여자가 어찌 그 옆에서 알짱거린단 말인가 물소리만 들어도멀찌감치 퍼해 가야 정상이 아닐까. 그런데 이 여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미 한참 동안 그를 보며 수군덕거라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젠 눈을 뜨니 회롱까지 하려고 드는 것 같았다. 한 여인이 손을 온천물에 담그며 물었다. "물은 따듯한가요?" 옆에 섰던 여인은 그녀보다 한술 더 떠서 진자앙이 보는 앞에서 시발을 벗더니 하얀 비단버선까지 까 내리면서 요염한--적어도 그녀는그렇게 보일 거라고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 피곤해. 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그냥 확 풀리겠지?" 진자앙은 그 순간 뜨거운 물속에 앉아 있는데도 등골로 소름이 확끼쳤다. 여인의 억지로 꾸민 간지러운 목소리가 마치 맨손으로 척추를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끔찍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짜 소름 끼치는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버선을 벗은 여인이 하얀 다리를 온천에 담갔다. 그러면서도 엉덩이는 여전히 온천 가의 바위에 얹어 놓고 있으니 물에 젖지 않으려면 치마를 걷어 올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엉덩이는 높이 있고,다리는 발끝만 물에 찰랑거릴 정도로 담갔으며 치마는 걷어 올려져 있다. 그런 상태에서 진자앙의 머리는 수면에 턱만 내밀어져 있으니 여인의 허벅지 사이가 보이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것이다. 진자앙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 정말 순진한 총각이네?" "저 얼굴 붉어진 것 좀 봐!" "여란 사저가 너무 거칠게 다뤄서 그런가 봐요. 숫총각은 조금씩 이끌어야지 그렇게 당기면 도망간다구요, 호호호!" "까르르르……!" 여인들의 웃음 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쳤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진자앙은 어떻게 여길 빠져 나가나 고민하며 여인들의 희롱을 귓전으로 받아넘겼다. 그러다가 그는 한 생각이 떠올라 슬그머니 눈을 떴다. 여인들의 운음 소리가 더욱 커졌다. "눈떴네?" "다시 보고 싶은 게지?" "여란 사저, 좋은 구경 계속 시켜 주셔야죠?" "호호호호!" '여란이 라고……?' 진자앙온 여란이라 불린 여인을 보았다. 그의 앞에서 다리를 보여주고 있는 여인이었다.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지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 진자앙은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흐흥!" 여란은 재미있다는 듯, 혹은 만족스럽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용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여인이었으니, 오늘 우연히 길가애서 만난 떠꺼머리총각이라도, 자신에게 넘어왔다고 생각하면 즐거워지는 것이다. 즐거우니 과한 행동도 나오는 것일 게다. 그녀는 갑자기 치마를 활짝 들어올렸다가 내렸다. 물론 진자앙의 정면에, 그러나 너무 찰나지간에 한 행동이라 그대로 다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라 계산하고 한 행동이었다. 진자앙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그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았다. "믿을 수가 없군!" 여인들의 웃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사저, 그러게 총각을 너무 거칠게 다루면 안 된다고 한잖아요." "저 눈 튀어나온 것 좀 봐." "아니!"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 하는 짓이 하도 파렴치해서 하는 말이오! 얼굴을 들고 어떻게 그런 짓들을 할 수가 있지?"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쿡--!" 한 여인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황급히 입을 막고 눈치를 살폈다. 여란이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위아래로 쓸어보고 있었다. 웃음을 터뜨린 여인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사이에 진자앙은 자신의 기억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여란이라 불린 여인이 그가 알던 그 여인임을 떠올린 것이다. 구 년 전 그날, 염정과 함제 쫓길 때 뒤를 쫓아왔던 두 여도사 중의하나. "복장이 달라서 못 알아봤군!" 여란이 그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를 돌아보았다"무슨 소리지? 언제 날 보기라도 했다는 거냐?' 괜히 웃는 바람에 그녀에게 찍혔다고 생각한 여인이 얼른 말을 보태었다. "그러고 보니…… 네놈은 그 늙은이랑 한패냐? 우릴 기다린 것 아냐?' 그러고는 여란을 향해 돌아서서 열심히 자기 주장을 설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 깊은 산중예서 저러고 있겠어요? 괜히 시비를걸고……!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 말에 동조를 하는지 여인들이 심상찮은 기색으로 온천 가에 다가들었다. 여차하면 뛰어들기라도 하겠다는 기세였다. 진자앙은 기가 막혔다. 이 깊은 산중에 그럼 자기들은 왜 왔는가. 시비를 걸긴 누가 걸었단말인가, 남 목욕하는 데 와서 훌렁흘렁 치마 까뒤집어 가며 희롱한 사람들이 누군데 이제 와서 시비를 걸었다고 하는 것인가. 잘잘못은 둘째치고, 일이 적지 않게 귀찮아질 것 같자, 진자앙은 빨리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억지스럽고, 방자한 여인네들콰 시비를 가리려 하면 그 자신이 오히려 바보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는 물속으로 잠수해 버렸다. 온천은 넓지는 않지만 꽤 깊고, 바위가 많아 바닥에는 굴곡도 제법있었다. 몸을 숨길 곳은 많았다. 문제는 여자들이 갈 때까지 물속에서 고개를 내밀지 말아야 한다는것인데, 그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아까 같은 진흙탕 속이 아니니 한두 시진 정도 숨을 멈추고 있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움직여야 한다면 호흡을 하지 않고 버티는 시간이 그보다는 훨씬 짧겠지만 그냥 물속에서 참고만 있는다면 대충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으리라. 저 여자들이 할 일이 없다면 모르지만, 아니, 할 일이 있어도 지나가다 우연히 시비 걸린 사람을 잡겠노라고 하루 종일 온천 가에서는버티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늙은이라고 했던가?' 물속에 들어오니 다시 긴장이 풀리는 것이 창졸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들은 누군가를 피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녀들이 말한 대로라면 '늙은이'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들이 있던 주위에 짐보따리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를 피해 달아나고 있는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들이 갈 때까지펴하고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다 보너 문득 과거의 그때와 상황은 다르지만 공통되는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그때. '염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염정을 생각했다. 그녀와는 그 이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날 헤어지면서 혹시 갈곳이 없으면 진가장으로 가라고 했었는데, 집에는 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금강당에 입문한 이후 집에서 전갈을 가지고 온 진 노육에게들은 이야기였다. 진자앙은 구 년 동안 단 한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여섯째 누나 소남과 막내 누나 소보가 시집간다는 소식이 왔을 때도 가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멀게 느껴졌지만 사실 종화와 불산이 그리 먼 곳은 아니다. 그런데도 못 간 것은 소삼중의 지시 때문이었다. 무공수련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끊으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가끔 집과주고받는 전갈도 줄여야 했었다. 어쩠든 염정은 집에 간 적이 없었고, 그 후로는 전혀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궁금했지만 찾을 방법도, 시간도 없으니 그저 세월만 흘러갈 뿐이었다. 진자앙은 그 생각을 하곤 잠시 우울해졌다. 그런데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여자들이 그가 상상도 못했던 방법으로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을 통해 밖에서 소리치는 것이 어렴풋이 들려 왔다. "나와!" "안 나오면, 이 옷 가지고 가버린다!" 진자앙은 흠칫했다. 여태 옷 생각을 않았다. 온천에 들어을 펀 당연히 옷을 안 입고 들어온다. 사실은 진흙탕에뒹구느라고 더러워진 옷을, 옷이라기보단 짐승가죽이지만, 물에 헹궈서 나뭇가지에 널어 두었었는데 여자들이 찾아 낸 모양이었다. 가져 가면 다시 곰가죽 같은 걸로 만들면 그만이지만 당장 내려갈헐 벌거벗고 가야 했다. '아 참! 물건들은?' 아까 화룡동에서 주온 구슬들과 작은 창은 근처 바위 틈에 두었는데저 여인들이 그걸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밖얘서는 한참 시끄러웠다. "옷 같은 건 없어도 되는 모양이지?' "우린 바쁜 사람들이야. 셋 샐 메까지 안 나오면 가져 가 버리겠어!" "언니, 냄세나는 걸 가져 가긴 뭘 가져 가요. 그냥 태워 버려요." "좋아, 하나!" "둘!" 진자앙은 다급해졌다. 하는 짓으로 보아 못 하는 일이 없이 막 나가는여인네들인 줄련히 아는데 단순한 위협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세…… 엣! 좋아, 태워 버려!" "잠깐!" 진자앙은 너무 다급한 김에 물에서 채 머리를 다 내밀기도 전에 입을 벌려 물까지 마셔야 했다. 그리고 그 물을 토해 내느라고 자신도모르게 벌떡 일어서 버렸다. 물 밖으로 그의 건장한 상채가 다 드러났다. "어머……!" 여인들이 창졸간에도 사내의 나신을 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꼬았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이력이 난 여인들이 그녀들, 곧 그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얼굴은 어린데 믐은 아니네?" "그러게, 꼭 짐승처럼 크다……!" "뭐가? 너 짐승 그건 봤니?" "어머, 누가 그거래? 그냥 근육이 울퉁불퉁찬 것이 짐승 같다는 건데……!" 그냥 놔두면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몰랐다. 진자앙은 얼른 쪼그려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객쩍은 소리 말고 옷이나 두고 빨리 가시오! 난 시비 건 적도 없고, 당신들이 말하는 늙은이도 모르오!" 여란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에 진자앙의 옷이 들려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사람 같은 소릴 하는구나! 근데 사람이면 왜 이 산중에서 그러고 있지?' "소생은, 음…… 나는 여기 와서 목욕을 하는 것이 매일의 습관이요. 나야말로 당신들이 여우 요정이 아니면 왜 이 깊은 산속에 왔는지모르겠소이다. 사내의 옷을 가지고 장난이나 하려 들고……!" "장난? 이게 장난으로 보여?" 여란은 옷을 들었다. 그녀의 옆에 선 여인이 짐짓 화섭자를 가져다가 옷 아래에 대었다. 불도 안 붙은 화섭자를 댄다고 옷이 타기야 하겠느냐마는 진자앙에게는 위협이 되었던지 다시 벌떡 일어나다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얼른 주저앉았다. 여인들이 그게 우스워 깔깔거렸다. "사내가 옷 없다고 뭐가 부끄러워서……!" "이봐요, 원래 사내와 여인네 만날 때는 옷 같은 건 필요가 없다네!" "일단 나와 봐. 왜 필요없는지 알게 해줄게!" 분분히 희롱조로 한마디씩 던지는데 진자앙은 얼굴만 붉힐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대채 이 여자 같지도 않은 괴물들을 어떻게 상대할것인가.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위 틈 사이로 중년의 여도사와 젊은 여인 하나, 그리고 몇 명의 사내가 나타난 것이다. 여도사는 시선 한번으로 사태를 파악하고는 일갈했다. "요 잡년들이 그세 사내를 물어서 노닥거리고 있어! 뒤질년들 같으니! 내가뭐라고 했느냐? 언제 그 늙은이가 나타날지 모르니 경계하고있으랬잖으냐!"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여란이 변명조로 몇 마디 하려 하는 것도 막아 버리고 여도사는 손에 든 불진으로 진자앙을 가리켰다. "웬 놈인데 알몸으로 여인네들을 회롱하고 있는 게야! 썩 꺼져 버렷 !" 다시 한번 치한이 되어 버린 진자앙은 어이가 없었지만 가라고 하는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여란이 들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옷을 줘야 갈 것 아니오!" 기회를 놓칠세라 여란이 나섰다. "그 늙은이의 동료인 것 같아서 잡아 두고 있던 참이었……!" "닥쳐라, 요년아! 옷도 빼앗겨서 벌벌거리고 있는 것이 무슨 동료고, 하수인이야! 어디 무지랭이 나무꾼이나 사냥꾼쯤 되는 거겠지! 얼른 주고 가자!" "하지만……!" 할알이 없게 된 여란이 우물거리며 옷을 내미는 것을 사내 하나가막았다. "잠깐만!" 그는 이십대 정도의 제법 영준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사내로 귀옆에는 구레나룻까지 길러 멋을 부렸는데 사내들 중에서는 지휘자급인것을 옷차림으로 알 수 있었다. 다들 무명옷인데 혼자 비단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의 동료건 아니면 나무꾼이건 간에 이왕 우릴 봤으니 그냥 둘 수는 없지요." "그럼……?" 사내는 여도사를 향해 교활한 눈을 깜빡여 보였다. "벌인 일은 깨끗이 마무리하라는 게 우리 등천비룡문의제일 원칙이지요. 이런 경우 우리는 이렇게 처리합니다." 그러면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여도사, 칠선관의 삼선녀인 미선고 여영영은 지금구레나룻의 사내가 뭔가 꾸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그의 말대로마무리가 깨끗한 것도 좋지만 그런 일로 피까지 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녀가 알기로는 이 사내, 등천비룡문의 팔향주인옥면교 가휘섭도 그렇게 피를 즐기는 사내는 아니었다. 그녀는 얼른 장단을 맞추었다. "향주의 말이 옳아 보이는군요. 하지만 우릴 봤다고 그냥 죽이는 것도 가련한 일 아닙니까?" "가련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가휘섭은 진자앙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소리를 크게 하며 허리춤에찬 검을 잡아 갔다. 그의 눈에서는 금세 차가운 살기가 서리서리 뻗어나왔다. 진자앙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지금 이 사람들이 그를 어르고 뺨치려 하고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를 정말 완벽하게 무지랭이 촌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식으로 위협하려 들진 알았을 것이다. 어쨌든 겁날 것도, 당황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진자앙이 곤란해 하는 것은 단 하나, 어떻게 옷을 돌려받나 하는 것뿐이었다. 그 모습을 위협이 먹혀든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휘섭은 검을반쯤 뽐다 말고 혀를 찼다. "그래, 자테가 무슨 죄가 있겠나? 공연한 목숨을 해치는 것도 하늘의 호생지덕에 크계 벗어나는 일이겠지." 그는 한 발 다가서서 짐짓 다정하게 말했다. "들어서 알겠지만 우린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네. 뭐, 그리 무서우상대도 아니고, 별로 쫓겨다닐 이유도 없지만 사실 약간의 오해 때문에 다투기 싫어 피하고 있는 것이지." 여란이 그때 끼여들었다. "이사하느라 바빠서 다른 선녀 분들이 없지만 않았으면, 그냥 혼을내주는 것인테……!" "그래서 말이지만……" 가휘섭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을 책망하는 듯 눈총을 한번 줘서여란의 입을 막아두고 자기들이 왔던 방향을가리켰다. "아마 한 시진 이내에 저쪽 방향에서 늙은이 하나가 올 걸세. 우리가 중간얘 조금 장난을 쳐놨기 메문애 그 정도 시간은 벌 수 있단 말이지. 그러니 그 늙은이가 오면 자네가 그를 따돌려 주면 좋겠다, 이걸세." 진자앙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그들의 말에 따를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가휘섭은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다. "왜? 어려을 것 같나? 하나도 어렵지 않네. 우리가 이리로 가며……!" 그는 온천의 옆을 통과해서 향로봉 정상을 피해 뒤로 넘어가는 길을가리켰다. "그냥 이리로 갔다고 말하면 되는 걸세. 아주 쉽지?" 진자앙은 잠시 멍청해졌다. 그냥 간 곳을 제대로 알려 주면 된다는 얘기 아닌가. 그럼 굳이 그가 말해 줄필요는뭐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휘섭은 계속 말했다. "자네에게 설명해 줘봤자 잘 모르겠지만 그 늙은이는 강호에서도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정신나간 늙은이란 말일세. 그러니 자네가 이쪽 길을 가리키면서 '그들이 이리로 갔습니다' 그러면 그는 의심을 하고 오히려 다른 쪽 길로 갈 거란 말이지." 가휘섭은 산봉우리로 바로 넘어가는 길을 가리켰다. "물론 우린 중간에 또 다른 길로 가겠지만 그건 자네가 알 필요가없는 것이고……, 하여간 그 늙은이가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내려왔다하면서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우린 멀리 피한다 이거지. 어떤가? 푸하하하!" 그는 자기 계략이 자기 생각에도 마음에 드는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는 진자앙을 보았다. "해주겠지?" 진자앙은 묵묵히 그를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옷이나 주시오!" 기대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가휘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란이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살려 주겠다는데 이개 무슨 뻣뻣한 태도냐! 건방진 것!" "아니. 아니!" 가휘섭이 여란을 막았다. "자넨 잘 이헤를 못하는 모양인데 이게 다 호생지덕을 지키자고 하는 일일세. 호생지덕. 하늘은 살아 있는 생명을 좋아한단 말이지. 사실 우리가 자네 하나 죽이자면 닭 모가지 하나 비트는 것처럼 간단한일이네만 그러기에는 안돼 보여서 이러고 있는 것 아니냔 말일세." "그 바보같은 녀서애겐 그런 말이 필요언어요. 제가 한번 해보지요." 여란이 다시 나섰다. "빨리 끝내자!" 미선고 여영영이 짜증스럽개 소리쳤다. 그녀와 같이 온 여인, 사실그녀는 지란이었지만, 그녀가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냥 죽여 버리면 깨끗할 일을……!" "아니, 폴은 방법이 있단 말야!" 여란은 지란을 타박 주고는 진자앙을 향해 옷을 들고 흔들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무지랭이를 다루어서 말을 듣게 함으로써 가휘섭의눈에 들고 싶어했다. "말을 들어야 옷을 주지. 빨리 옷 받아서 가고 싶지 않아?" 어린애에게나 할 위협이지만 위협을 했던 당사자도 놀랄 정도로 효과가 바로 나왔다. 진자앙은 웃 이야기를 하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주시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 '늙은이'가 이들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도 그의 책임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니 빨리승낙하고는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게다가 이맘때면 사부가 깨어날 즈음이었다. '얼른 내려가서 밥을 차려 드려야 하는데……!' 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요즘 들어 소삼중이 거의 식사를 않고 있다는것이 더 걱정스러운 진자앙이었다. 여기서 아웅다웅하고 있을 시간이어디 있는가. 여란이 눈을 빛내었다. 그것 보라는 표정이었다. "좋아, 남아일언은?" "그런 말은 어럭워서 모르겠지만 하여튼 약속은 지키지요." 진자앙은 바보로 보는 바에야 아주 바보처럼 보여도 상관없다는 심산에서 한 말이었지만 그 말 자체가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을 모르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니 약간 안 맞아 들어가는 대꾸였다. 그러나 여란은 대충 넘어가 버렸다. "어쩠든 좋아, 약속은 지킨다니 줬네. 삼선녀님, 어떻습니까?" 말은 여영영에게 하는 것 같지만 보기는 가휘섭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대답도 가휘섭이 했다. "그런대로 됐군 네가 이런 사람을 다스리는 덴 나보다 낫구나!" 여란은 교태로운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 "그만 가자!" 여영영은 짜증스럽게 소리치곤 앞장서서 길을 떠났다. 나머지 사람들이 분분히 짐을 챙겨 들고 뒤를 따르는데 가휘섭은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진자앙을 몇 번이고 돌아보며 갔다. 한참을 간 뒤애 그는 불쑥 소리질렀다. "그래, 그놈 무공을 익힌 놈이야!" 여영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놈 몸에 붙은 근육이 나무꾼이나 사냥꾼 노롯을 한다고 그렇게될 리가 없다는 걸 이재야 깨달았소." "무공을 익혀도 그렇게 무식하게 근육이 나오진 않잖아요?" "아니, 아니오!" 그는 고개를 설래설레 저었다. 왜 진작 그걸 깨닫지 못했는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무식하계도 근육이 맡이 나와서 미처 몰랐는데, 놈은 적어도 상당기간 동안 외공을 익힌 놈일 거요. 전에 산서의 유철두를 본 적이 있는대 그가 그런 체격을 가졌었지요. 듣기로는 소림외가의 외공을 익혀서 그렇다더군요." "살서의 유철두라면 패권 유철미잖아요. 산서제일권이라는 그가 저렇게 무식한 근육을 가졌단 말이에요? 저런근육은 보기만 좋지, 사실 재대로 권법을 하는 사람에겐 불필요한 것아닌가요?" "물론 그렇소. 유철두의 경우에는 재대로 권법을 배우기 전에 외공부터 익혀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긴 하는데……, 하여간 지금 중요한건 아까 그 녀석도 외공을 익혔다는 거지요." 지란이 돌아섰다. "가서 죽이고 올까요?" "그만두시오!" 가휘섭이 손을 저었다. "외공이야 아무리 익혀 봤자 별것 아니니 죽이기 어려울 건 없지만아쉽게도 시간이 없소. 그리고 외공 따위를 익힌 자들은 대개 머리가단단해지기 마련이니……!"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혼자 웃었다. "유철두도 왜 이름 뒤에 머리 두 자가 붙었겠소? 산서 사람들은그를 산서제일권이라는 이름보다는 산서제일우라고 부르기를 더 즐겨 하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들은 대개 머리가 나쁘거나, 적어도 자기보다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가휘섭도그래서 지금 신분은 겨우 향주에 불과하지만 머리 굴리는 것으로는 문중에서 자기를 따를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엔 체구가 크다는 것도 바보스러운데 외공까지 익혔으니오죽 멍청할 것이냐, 라고 진자앙을 가볍게 보아 넘겨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물론 오늘 그가 실제로 진자앙을 죽이려고 했다 하더라도 과연 성공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처럼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별것 아닌 줄 알고 지나친 이 일이 나중엔 그의 가장 큰 실수였음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에게도, 그리고 그가 속한 방파에도. [제십이장] 중자릉은 창랑보를 주고 떠나고 소삼중은 삼선유서를 주고 보내다. 여영영 일행이 말하던 문제의 그 '늙은이'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빨리 온천에 도착했다. 반 시진이 채 되기도 전이었다. 그래서 진자앙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게 되어 좋았다. 진자앙은 온천 옆 바위에 앉아 있었다. 늙은이는 그 앞에 나타났다. 문자 그대로 갑자기 거기 한 사람이 서 있게 된 것처럼 그렇게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으로 보건대 가휘섭이 말한 대로 스스로를강호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늙은이일지는 몰라도 무지하게 빠른 경공술을 가진 늙은이이기도 하다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머리의 약점을 경공술로 극복했을지도 모른다고 진자앙은생각했다. 늙은이, 늙은이 하지만 이 늙은이는 정말 늙은이였다. 바짝 쪼그라든 체구에 주름 가득한 얼굴은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만든 지가 그의 나이만큼이나 되었을 법한 누더기를 입었는테, 자세히 보니 유삼이었다. 아니, 한때는 유삼이라고 불렸을 법한옷이었다. 머리에도 너무 낡아서 정체가 불명확한 건을 썼는데,옷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유생건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유생건을 혼들면서 늙은이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자넨 누군가?" "목욕하러 왔던 사람입니다." "그래? 목욕은 했나?" "예." "목욕했으면 가지, 왜 안 가고 거기 있나?" 진자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빨리 그들 일행이 어디로 갔느냐고물어야 대답을 해주고 내려갈 것인데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니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 애매했다. "음…… 누가 올 것 같아서 기다렸습니다." "누구? 가령…… 나 말인가?" "어르신네일 수도 있겠지요. 혹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고! 할 일 없는 늙은이가 한 가지 묻겠네만…… 여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가? 평소에도 말일새." 진자앙이 보기엔 이 유생건의 노인은 이미 그의 정채와 목적에 대해의심을 품은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차라리 잘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을 안 해도 될 것이다. "거의 안 다닙니다." "그런데 오늘은 누가 올 것 같아서 여기 앉아 있었다, 이건가? 평소얘도 그렇게 누굴 기다리곤 하나? "처음입니다." "호오…… 그거 이상하군. 다른 날은 누굴 기다리지도 않았고, 누가올 것 같지도 않았는데 오늘만 유독 누가 올 것 같고, 그래서 누굴 기다렸단 말인가? 자네 신통력이라도 있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단 말이지 그것 참, 묘한 일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참이나 말을 빙빙 돌리던 노인이 불쑥 물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나?" 진자앙도 더 이상 이러니저러니 하기 싫어 짧게 대답했다. "저쪽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자앙이 가리킨 곳과는 다른 곳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진자앙이 놀라 그를 불렀다. "어르신네!" "뭔가?" 진자앙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노인은 그런 그를 보며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자앙은 그냥 둘걸, 하는 후회도 했지만 이왕 말을 꺼낸 김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저…… 제가 그들이 이쪽으로 갔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그쪽으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자넨 내가 바본 줄 아나?" "예? 제가 왜 어르신네를 바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왜 나보고 자네에게 속으라고 하는 건가?" "제가 언제……?" "이것 보게. 내 원래 자네가 날 속이려고 한 걸 생각하면 적지 아니화를 내야겠지만 그냥 용서해 주지. 그리고 사실을 알아 낸 연유도 설명혜 즐 테니 들어 보게나." 노인은 진자앙이 가리킨 길과 자기가 가려고 한 길, 즉 사실 가휘섭일행이 가지 않은 길을 번갈아 가리켜 가며 설명했다. "자네가 어째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네만 자넨 아마 이 길로 그들이 갔다고 말하도록 부탁을 받았을 거야. 그들이 생각할 떼는 자네 연기력으로는 분명 내가 자네 말을 의심할 거라고 본 거겠지, 물론 의심하지. 이 깊은 산중에 한 사람이 있어서 '당신이 찾는사람들은 저리로 갔습니다' 그러면 누군들 의심을 않겠나? 그럼 그들은 그 다음앤 이령게 생각했을 거야. '자넬 의심할 테니까 자네가 가리킨 길로는 아니 가고 그 반대편으로 갈 것이다' 하고."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와는 반대로 고개를 설레설래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바보지. 바보나 그렇게 결정하는 거야. 나 정도의인물을 상대로 하면 그들은 오히럭 이렇게 생각했을 거라고. '그는 분명 여기까지 추측하고 오히려 제 길을찾아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반대로 가야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추측할 수 있는 옷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므로!' 이령게 말일세. 노인은 진자앙을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것이 이른바 계략을 써도 상대의 수준에 맞추어 쓴다는 것이지.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한 단계 더 생각했어야 혔던 거야. 이것까지 짐작해 낼 줄은 몰랐을 거란 말일세. 이개 결정적인 실수지! 어떤가. 내추측이?" 진자앙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고개만 젓고 있었다. 추리의 과정이야 어쩌 되었건 결국 노인은 틀렸다. 노인이 눈을 사납게 치켜 떴다. "거짓말은 했지만 심성까지 나쁜 것 같진 않아서 용서해 줬건만 전혀 뉘우치지 않는군!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면 못 쓰네! 상대방이 이렇게 확연히 알아차렸으면 그만 인정할 줄도 알아야지! 고얀!" 진자앙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예,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꾸벅 절을 하고 돌아섰다. "이봐!" 진자앙의 '그럼, 맘대로 하라'는 식의 행동이 그의 추측에 일말의불안감을 주기라도 했는지 노인이 급하게 진자앙을 불렀다. 말만이 아니라 행동도 뒤따라서 그는 그림자처럼 스르르 움직여 어느새 진자앙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진자앙은 그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물었다. "무슨 하교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노인은 입을 혜 벌리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손목에는 맥문이라 해서 온몸의 기가 거쳐 가는 요충지가 있다. 그곳은 보통 사람이 조금 강하게 잡기만 해도 뿌리치기가 힘든데하물며 금나술을 익힌 무림고수가 제압했으니 뿌리치기는커녕꿈쩍하기도 곤란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뿌리치다니! 기고 뭐고 간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단지 철기등 같은 것이그의 손에 잡혔다가 빠져 나간 것 같은 황당한 감각을 노인은 한참이나 되씹고 있다가 진자앙이 갈 것처럼 돌아서자 다시 손목을 잡았다. 방금처럼 제압하겠다는 목적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예쁜 기녀가 손님소맷자락 끌어당기듯이 그렇게 슬그머니 잡는 손짓이었다. 과연 진자앙은 이번에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뭐, 그렇게 급히 갈 건 없잖은가! 잠시 얘기나 더 하다 가지 뭐. 그자들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나만큼이야 빠르지는 않겠지." 말은 그렇게 느긋하게 하면서도 사실 그는 진자앙의 손목을 어루만지듯 하며 맥문을 짚어 허실을 정탐하는 중이펐다. 도대체 어떤 신기한 수법을 익히고 있어서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있었던가. 기의 흐름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거나, 너무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어 그가 찾아 내지 뭇하는 경우그 두 가지뿐일 것이다. 노인은 진자앙의 팔뚝이 유달리 울퉁불퉁할 뿐만 아니라 쩌칠하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팔뚝 전체에 마치 굳은살이라도 박힌 것처럼, 그래서 마치 한 그루의 나뭇등걸이 거기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기괴한 일이 !"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해 내더니 곧 전후 사정을 짐작한 모양인지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리 외공이라지만 이 정도로……!" 진자앙은 무뚝뜩하개 말을 끊었다. "무슨 일이십너까?" "엥?" "무슨 말을 하자는 겁니까?" 노인온 그제야 원래의 용건을 생각하곤 팔을 잡아 끌었다. "가자!" "예?" "자네가 거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해 보잔 말이지." "어떻게요?" "쫓아가 보면 알 것 아닌가!" 진자앙은 다시 한번 노인의 팔을 뿌려칠까 했다. 그가 가회섭 일행을 쫓아갈 이유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 일에 말려든 것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재수가 유달리 없기 때문이었으니 이제 팔자에 없는 추격까지 하게 된다는 것도 그냥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될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는 사부와 사형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누굴 만난 적이 없으니 거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했던 그였다. 그러고 보면 아까 가휘섭 일행에게 그렇게 어이없이 당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 노인의 입장에서도 굳이 진자앙을 데려가 진실을 말했는지 거짓을 말했는지 확인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가 진자앙을 데려가려는데에는 그저 이 무식한 외공을 익힌 청년에게 흥미를 느껴서일 뿐이었다. 가다가 기회가 있으면 온갖 고생을 해가며 외공을 익히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가를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쪘든 그렇게 하여 진자앙은 노인을 따라 가휘섭 일행을 쫓아가게되었다. 물론 노인의 고집 때문에 가휘섭 일행이 간 방향이 아니라 산봉우리로 넘어가는 길을 가야 했다. '가휘섭의 일행 중에는 이 산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분명하다.' 진자앙은 얼마 가지 않아서 바로 그런 생각을 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산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은 가휘섭이 간 길, 즉 산등성이로 돌아가는 길보다 몇 배로 험했다. 이 노인의 신법이 얼마나 빠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길을 허덕거리고 가다 보면 아닌 줄 알아차리고 돌아가더라도 가휘섭 일행을 다시 따라잡기는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런 생각을 알려 주려다가 아무 말 없이 앞서가고 있는 노인의 등을 보고는 생각을 돌려 버렸다. '말해도 믿어 주지 않겠지!' 다시 한참이 지났다. 저만치 앞서가던 노인이 갑자기 돌아서서 짜증을 냈다. "자네, 빨리 좀 못 뛰나?" 진자앙의 느린 신법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자앙의 신법도 그리 느린 편은 아니었다. 경공이랄 것은없지만 매일같이 비모각을, 그것도 바로 이 봉우리에서 연습한 그였다. 산을 타는 것을 연습하지 않은 일반 무림인보다도 오히려 빠를 수도 있는 것이 지금 그의 신법이다. 그런데도 느리다고 타박을 하는 것은 경신술에 뛰어난 노인의 눈으로 볼 때 느리다는 것일 게다. 아니면 마음이 그만큼 조급한 것일 수도 있었다. 진자앙은 눈을 끔벅거렸다. 뭐라고 대답하기 애매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제가 느리다고 생각되신다면…… 먼저 가십시오." 어떻게 만난 사람이건 연장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불손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답답하면 먼저 가라.' 이게 정답 아닌가. 노인은 혀를 차며 그의 옆으로 바짝 붙어 뛰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만한 바위 틈들을 비집고, 건너 뛰어가며달리는 중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이 나란히 뛸 공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조금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하기는 했지만 아무 불편없이 그에게 지껄여댔다. "그렇게 뛰면서도 숨이 거칠지 않은 걸 보니 내공수련을 아주 안 한건 아니군 그렇지?" 했다고 해야 하나, 안 했다고 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 참인데 노인은대답도 기다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럼 왜 경공술을 발휘하지 않는가? 아무리 소질이 없어도 뜀박질은 누구나 하지. 크게 보면 경공술이란 것도 뜀박질과 마찬가지야. 같은걸 배워도 더 빠르고 덜 빠른 차이는 있겠지만 근육의 힘만으로 뛰는 것보단 훨씬 빠르단 말일세. 자, 내가 시키는 대로 진기를 운용해봐." 그쯤 되어서는 말을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진기를 운용하는지 모르는대요." 운기조식을 하면서 그냥 움직이는 대로 뒀을 뿐 의식적으로 진기를운용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내공수련을 했다고도, 안 했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공을 배운 것 같은데 진기 운용법도 모른다고? 허허……! 그래서뭐 하날 배워도 제대로 배워야 한다니까!" "그만두십시오!" 진자앙이 갑자기 멈춰 섰다. 노인은 그가 그렇게 감자기 설 줄은 몰랐기 떼문에 한참 앞까지 달려갔다가 발끝으로 바위를 밟고 다시 그의앞으로 튕기듯 날아왔다. 진자앙이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사부님께 모욕이 되는 말씀은 삼가해 주십시오!" 노인이 입을 삐죽거렸다. "말이야 내 말이 맞는 말인데, 그걸 가지고 화를 내나?" 진자앙은 더 말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뒤돌아서서 산 아래로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이 그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이보게, 내 말 좀 들어 보게!" 진자앙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봐! 이봐, 청년!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 야 이 자식아, 어른이 말하는데 안들어?" 그래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상대해 봐야 귀찮은 일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이 노인은 대단히 주책스런 노인임이 틀림없었다. 온갖 일에 참견을 다 해가며 무슨 추격을 한단 말인가, 이건 여유라고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노인은 진자앙이 상대도 않자 이번에는 어조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여보게, 청년. 내가 말을 실수했네. 자네 사부를 모욕할 뜻은 없었으니 용서하게나 이렇게 사과하지. 그러니 내 말 좀 들어 보게." 이렇게까지 말하니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진자앙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도 사실은 바쁜 사람입니다, 어르신네." 그는 하늘을 보았다. 벌써 해가 중천을 넘어섰다. 어쩌면 사부가 벌써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진자앙은 말을 해놓고 보니 더욱 초조해졌다. "얼른 가서 사부님 진지도 준비해 드려야 하는데……!" "좋아, 좋아! 효성이 지극한 청년이군. 그런 사람을 이렇게 잡고 있으니 보상을 않을 수가 없지. 내가 간단히 가르쳐 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하게. 금방 몇 배로 빨라진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게야." "어르신네, 말씀은 고맙지만 지금 그거 배우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하실 말씀이 그런 거라면 전 이만내려가겠습니다." "아니, 아니, 이 친구야! 정말 쉼다니까? 시간도 얼마 안 걸려. 배우면 바로 응용할 수 있지. 이거 밖에서는 제발 가르쳐 달라고 줄 서서 기다리는 걸세! 자랑은 아니지만 내 창랑보로 말하자면 굴원의 어부사애서 '창랑의 물이 말으면 내 갓끈을 씻고,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는 구절을 보고 문득 떠오른 한생각이 있어 만든 것으로, 이름은 보법이지만 사실 신법, 은신법. 보법, 그 어느것으로든 쓸 수 있는 것일세. 당금 무림에서는 쾌여풍의일진풍신법을 제외하고는 필적할 만한 것이 없을 뿐더러……!" "공이 없으면 녹도 언는 법이라는데 그런 귀한 재주라니 저는 더욱 배을 수가 없군요. 그럼 그만……!" 노인은 진자앙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가려 하자 다시 팔을 잡고 매달렸다. "이봐! 왜 이령개 성질이 급한가? 내가 창랑보를 다 가르쳐 주려는것도 아니고, 다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또 가르쳐 주는 것도 그냥이아니라 당연히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네. 생각혜 보게! 혹시 내가맞고 자네가 틀리면 자네 그 느린 다리로 언제 쫓아기서 확인하겠나? 또 그럴 리는 없지만 자내가 맞고 내가 틀리거나 하면 언제 산 넘어가서 확인하고 다시 쫓아와서 그 길로 쫓아가겠나? 다소라도 배워서 속도가 나아지면 훨씬 그러기가 쉽지 않갰나? 난 엉뚱한 데 시간 뺏기지않고 그틀을 추격할수 있으니 좋고, 자넨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자네사부 밥해 주러 갈 수 있어서 좋고, 그 김에 하나 배워 가니 인생에보탬도 되고…… 이렇게 다 좋은 일을 왜 않겠다는 거야?" 진자앙은, 애초에 엉뚱한 대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노인이 자초한일이고, 그는 원래 이 일얘 말려들 처지도 아닌데 말려들었으니 쫓아갈 이유도 없을 뿐더러, 백 번 양보해서 그런 이유가 있다고 해도 이제 그에게 경신술을 가르쳐서 데려가느니보다는 그냥 혼자 쫓아갔다가혼자 돌아와서 다른 길로 가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걸 깨우쳐 주느니 그냥 두는 편이 훨씬 시간이 절약될 것이다. "그럼 배우기로 하지요." "그래, 진작 그랬어야지!" 노인은 횡재라도 한 것처럼 손뼉을 쳐가며 좋아하더니 어딘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뭔가 속는 기분일세……?" 하나 그는 다시 손뼉을 쳤다. "하여튼 이제 시작하세! 아주 쉬워. 창랑보의 제일 원칙은 힘으로뛰는 것이 아니라 뜻으로 뛴다는 것이지, 제이 원칙은 공간을 뚫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흘러간다는 것이고, 마지막 제삼 원칙은 가고자 하는 그곳에 나는 이미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 어때, 쉽지?' "아……!" 진자앙은 벌렸던 입을 겨우 다물었다. 이렇게 어려운 말은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게 답니까?" "물론 실용구결은 따로 있네. 하지만 일단 이 원칙들을머리에 새겨 뒀다가 그 의미를 항상 생각해야 하네. 그러지 않고는 절대 일정 수준 이상은 올라갈 수가 없네." "그건 가능할 것 같군요."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외워 두는 것이야 못 할 것도 없었다. 이해하게 되리라고는 기대도 않았지만 어차피 경공의 고수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상관없었다. "기를 움직이는 방법도 아직 모른다고 했지? 그것도 아주 쉽네. 일단 단전예 뭔가 있다고 셍각해 보게. 느낄 수 있는 것, 이를테면 뭔가 뜨거운 것이 거기 있다고 생각해 봐. 그 다음엔 그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되는 걸세. 그냥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네가 보내고자 한 그곳으로 움직인다고 말일세. 창랑보의 원칙을 이 경우에 적용시키면 이렇게 되갰지. 기를 보내고자 한 그곳에 이미기는 가 있다. 어때?" 말을 하며 진자앙을 보던 노인은 깜짝 놀랐다. 진자앙의 얼굴이 삽시간에 불그스레하게 변한 것이 마치 한참이나 운기조식을 해서 진기를 끌어 모은 상태 같지 않은가. 진자앙이 말했다. "뜨거운 건 느껴지는군요." "그걸 중단전에 보내 보게! 전중혈에서 옥당혈사이가 거기일세. 일반적인 무공을 펼칠 땐 중심이 안정돼야 한다고 해서 보통 기해혈을 중심으로 한 하단전에 기를모으지. 그러나 경공술에 있어서는 중단전을 중심으로 기를 운용하는것이 옳아." 진자앙은 노인의 말대로 뜨거운 기운, 기를 움직였다. 용암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베를 통과해서 가슴팍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노인온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진자앙의 상체가 눈에 보일 정도로부풀어오르고 있었다. 특별한 기공, 소위 강기로 불리는 기공을연마한 사람들에계서 저런 현상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청년은 기를 어떻개 움직이는지도 모르던 사람 아닌가. '무슨 연유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중애 진자앙의 얼굴은 점점 붉어져서 목과 옷깃사이로 드러난 가슴팍까지 홍조률 띠어 가고 있었다. '에구! 잘못하다간 주화입마가 되겠군!' 노인은 얼른 그 다음에 기가 움직여야 할 곳을 일러주었다. "겨드랑이에 있는 대포혈로 움직여 보게! 거긴 족태음비경이 거쳐 가는 곳이지. 거기서 기가 놀면 사지가 따라 움직이는 요혈이야. 대개 발과 다리에 기를 보내야 경신술을 한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거기를 중심으로 한단 말이지. 그러니까 중단전이 중요한……, 에구!" 말을 하다 말고 노인의 눈이 튀어나을 듯이 커졌다. 그의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진자앙이 순간적으로 덮쳐 왔던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보법을 밟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진자앙의 거대한체구가 그를 쓸듯이 지나쳐서 뒤로 쏘아져 갔다. 그와 같은 경공의 고수이니 퍼하지, 보통의 고수였다면 그대로 정면 충돌을 했을 정도로쾌속한 움직임이었다. "이놈이……! 기껏 가르쳐 줬더니 기습을 해?" 발끈 화가 난 노인이 욕설을 퍼부으려는데 진자앙은 그대로 멈추지않고 쏘아져 나가정면의 거대한 바위에 그대로 부딪쳤다. 콰앙! 집채만한 바위가 부르르 떨더니 돌가루를 흩날렸다. 진자앙은 바위에 찰싹 붙어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핏 우스꽝스런 모습으로보이지만 맨몸으로 그렇게 된 것을 생각하면 결코 웃을 일은 아니었다. 노인도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 일면 황당하고 또 일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진자앙에게 달려갔다. "아이구, 이놈 죽었네!" 진자앙은 죽지 않았다. 그것이 노인에게는 더 황당한 일이 되었다. 진자앙은 천천히 바위에서 떨어지더니 목을 좌우로 몇 번 움직였다. 그러고 나서야 몸에 묻은 돌가루들을 툭툭 털어 내었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조금 강도가 강하군. 이젠 이 방법으로수련을 할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노인에게는 그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다.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왜 괜찮지? 그리고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거지? 자네 지금 발 한번땅에 안 대고 칠 장이나 뛴 것을 아나?" 노인의 상식으로는 그런 사고를 당하고도, 아니 스스로 저지르고도괜찮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느냐는 것이었다. 갑자기 미치기라도 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뛰어나을 수 없었다. 설사 미쳤다고 하더라도 방금 전까지 경공의 '경' 자도 모르던 사람이 한 순간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빨라진다는 것, 그래서 칠 장여나 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걸 모르는데 진자앙이라고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몰라?" "정말 모르겠습니다." "속은 괜찮은가? 그러니까 내 말은…… 방금 뛰어나가기 전에 기의흐름이 이상하지 않았느냐는 거야." "전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요?" 시키는 대로 했다. 단지 그것이 노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진자앙의 하단전에서 중단전으로, 거기에서 다시 대포혈로 옮겨간 힘은 굳이 측량해 말하자면 일 갑자, 정통내공을 배운 무림인이 육십 년 동안 열심히 쌓아 온 내공수위를 넘는 힘이었다. 그걸일시에 움직였던 것이다. 보통 무림인이 일 갑자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걸 한꺼번에어디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 신체의 다른 부분을 통째로 비워 두고 한 부분에만 내공을집중시키면 다른 부분은 한 순간 기의 공백 상태가 만들어진다. 물론완벽한 공백은 아니겠지만. 그러면 이어지는 동작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자앙이 방금 한 행동은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것이었다. 진자앙은 그 내용을 잘 모르기도 했지만 이젠 정말 더 이상 시간을낼 수가 없었다. "근데……" 노인은 진자앙이 당한 일의 내막을 생각하는 듯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뭔가?" "추격은 이제 안 하십니까?" "응? 그러고 보니 그 일을 깜박하고 있었군! 어떻게 하지……?" 거기 생각이 미친 노인은 금세 초조해져서 소피 마려운 강아지처럼제자리에서 동동걸음을 했다. "어떻게 하지? 응. 어떻게 해?" 그는 갑자기 멈추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이 혼자 가야겠군. 끝까지 데려가지 못해 미안하네만 자네 걸음이 워낙 느리니……!" '누가 언제 데려가 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느냐'라는 말은 미처 입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노인이 말을 채 끝내지도 않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그의 모습을 찾았을 때는 그는 이미 가물가물 멀어져가고 있었다. "엄청 빠르군!" 진자앙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진자앙이 한 생각은 들어맞았다. 노인은 한 시진이나 달려가도 가휘섭 일행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은 외길, 이 길로 그들이 갔다면 진자앙을 만나 늦어진 것을 감안해도 그의 경공술로는 이미 따라잡았어야 옳았을 시간이었다. 별수없이 그는 처음 진자앙을 만났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없었다. 힘없이 터덜터덜, 그래도 경공의 고수답게 적지 않게 빠른 속도로달려오던 그가 제자리에 멈춰 버렸다. 그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떠을랐다. "아니, 자네! 아직 거기 있었나?" 노인은 아직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그 덩치 크고 이상한 구석이 많은 청년이 처음 그들이 만났던 온천 가에 앉아 있었다. "그러게 경공술을 배우라니까. 걸음이 그렇게 늦으니 여기밖에못 왔지!"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걸음이 늦어 여기밖에 못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어나 노인을 맞으며 가휘섭 일행이 실제로 간 길을 가리켰다. "제가 이 근방 지리를 좀 아는데…… 이 길로 가면 향로봉을 둘러서 흑벽으로 가게 됩니다 저기 보이는 저 봉우리를 오로봉이라고 하는데, 그 오로봉 중틱 즈음에 있는 검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협곡의 이름이 흑벽이지요. 거기에서는 위로 올라가는 길이 없고, 또 올라가 봐야 바늘 끝 같은 정상 외에는 달리 갈 곳도 없으니그들은 흑벽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을 겁니다. 중간에 끊긴 곳도 있지만 대충 협곡 몇 개를 따라가다 보면 와호강아라는 언덕을 만나는데, 거길 넘어가면 오지산의 밖이지요. 거기 도착하기 전에 잡지못하시면 포기하시는 게 나을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진자앙은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노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자네, 그럼 나한테 그걸 알려 주려고 여태 기다렸단 말인가?" 진자앙은 그냥 미소만 지었다. 노인은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듯 몇 번 입술을 움직이더니 그냥 웃었다. "내가 알백 년 넘게 살았지만 자네 같은 친구는 처음 보는군 내가사람을 찾는 일만 아니었다면 자네와 함께 좀더 있으면서 창랑보를 제대로 가르쳐 주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으니 아쉽군! 후일 다시 만나면 그때 가르쳐 주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혜어지세." 보통 사람 같으면 노인이 일백 년을 넘게 살았다는 말을 듣고 놀라겠지만 진자앙은 별로 놀라지 알았다. 그에게도 올해 백열넷이라는 어마어마한 연세를 자랑하시는 할아버지가 있지 않은가,그보다는 이 노인이 가휘섭 일행을 찾아 다니는 이유가 더 흥미로웠다. "사람을 찾으시는 중이었습니까?" "여자아이 하나를 예전에 그 삼선녀란 여도사에게 맡겼었는데, 어디있냐고 물어도 통 가르쳐 주지 않고 도망만 가는군! 아니, 사실은 도관은 불태우고 어디로 이사를 가는 걸 잡아 물으렸더니 그냥 줄창 도망가는 바람에 물을 시간도 없었지만…… 뭔가 오해가 있는 거겠지? 하여튼 난 이만 가네! 언제 강호로 나오면 날 찾게." 노인은 돌아서서 달려갈 차비였다.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이 넓은 세상에 언제 다시 만날 것이냐. 게다가……! "성함도 모르는데요?' "궁서생 중자릉이라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예? 저기 잠깐……!" 진자앙이 황급히 불렀지만 노인, 중자릉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경공의 고수답게 표흘한 거동이긴 했지만 그것으로 그를 다시찾을 길은 막막해져 버렸다. "할아버지 친구 분이셨잖아……!" 이제 알고 보니 중자릉이었다. 진자앙은 몇 번이나 혀를 찼다. "미리 알았으면 인사를 드리는 것인데……!" 어쨌든 그가 중자릉이 맞다면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을지도 몰랐다. 진자앙은 그때에야 산을 내려갔다. 이상한 날, 이상한 아침에 벌어진 이상한 일이었다. 그날 진자앙의 이상한 일은 중자릉과 헤어진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소삼중의 식사를 걱정하며 부리나케 금강당으로 돌아왔을 때는어느새 오후도 한참이나 늦은 때였는데, 놀랍게도 지난 사 년 간 자리보전하고 누워 꼼짝도 않던 소삼중이 침상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왔느냐?" 소삼중은 헷빛을 보지 못해 파리해지기는 했지만 어제의 그것과는달리 무언가 정비된 듯한 모습이었다. 진자앙은 그 얼굴에서 뭔지 모르는 신기가 흐르는 것처럼 느졌다. "어, 어…… 사부넘 기침하셨군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진지를올리……!" "기기 앉거라!" "예?" "거기 바로 앉아 내 말을 들어라!" 진자앙은 주춤주춤 칩상 곁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았다. 소삼중의 병구완을 하기 위해 그가 대충 잘라 만든 투박한 통나무의자였다. "너도 알다시피 이 사부는 한평생 금강불괴의 꿈을 안고 살아 왔다." 소삼중의 말은 언제나 그렇듯이 금강불괴를 언급하는 것으로부터시작되었다. "젊었을 때는 나 자신이 금강불괴가 되려고, 나중에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내 손으로 만들어 보려고…… 뒤돌아보는일도 없이 그냥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열어 놓은 방문으로 오후의 헛살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방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감돌아 어둡게가라앉고 있었다. 소삼중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의 눈도 뿌옇게 흐려졌다는 것을 진자앙은 곁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어리석은 세월이었다. 금강불괴는…… 불가능한꿈인지도 몰라. 사조님에게도, 내게도……!"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소삼중의 말이 지닌 의미는 적지 않았다. 진자앙은 여태 그가 이렇게 스스로의 세월을 부정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금강불괴가 불가능하다고는 더욱 말한 적이 없었다. "사부님!" "자앙아!" 두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예, 사부님!" 진자앙은 얼른 대답했고, 소삼중은 그냥 말을 이었다. "네게 미안하구나……!" 그의 말은 힘겹게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 유달리 신기가 넘쳤던 모습이 점점 허물어틀고, 작은 체구가 더욱 작아졌다. "속인 것 같아서……!" "그건 아님니다!" 진자앙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는 스스로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다시 작게 말했다. "제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꼭 금강불괴가 가능하다는 것을 중명해 보이겠습니다. 못난 재자를 믿고, 스스로를 믿으셔야 될 줄로 압니다, 사부님!" 소삼중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이제 금강불괴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옛 모습을 보는 것처럼 낮설게 진자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또한 내가 지은 죄의 하나아니……! 넌 옛날의 나를 무척 닮았구나. 너는 내가 널 믿어 줄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어쪄하면 나와 달라질 수 있을지 그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부…… 님!" 진자앙은 말을 짓지 못했다. 오늘은 사부가 어딘지 이상했다. 그의몸츤 여기 있는데 눈은 이미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잘못한 일들이 적지 아니한데……, 그 중에도아래와 딸을 지키지 못한 것미 가장 죄가 크다." '아내와…… 딸?' 진자앙으로서는 또다시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소삼중은 조용히 자신의 과거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비구니와 사랑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전에 네 말을 듣고 알게 된 것이지만 그 아이는 궁서생이 어느 여도사에게 넘겨줬다고 들은 이후로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찾기도 어려을 테지만 사실 찾아 보려고도 않았다. 널 가르치느라고…… 그……금강불괴라는 허황된 꿈에 미쳐서 가족도, 아이도 모두 버렸던 것이다. " 소삼중은 기어코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평생의 고난을 보여 주듯이 파리한 안색에 꺼칠한 피부, 밭고랑처럼깊이 파인 주름살들마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봄 가뭄에 갈라 터진진흙 밭처럼 보이는 그 얼굴에 투명한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진자앙은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그저묵묵히 소삼중의 심중에 사무쳐 나오는 말을 듣고 있는 것밖에는 달리아무것도 할 수가 엄는 것이다. "사년을 누워 있는 동안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떠오르는 것은 회한과 비애뿐이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면 내 지난 세월은 한 순간에물거품이 되어 버린다는 생각에 절대 인정을 않으려고 했지, 정말 부단히도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 그건 지난세월 쌓아 온 어리석음의 덩어리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었어. 그걸 나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더구나. 지난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이라고 바로 보게 되니 그제야 모든 것이 용서가 되더라는 것이다. 이해가 가느냐?'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소삼중이 계속 말했다. "언젠가 너도 이해할 때가 오겠지. 지금은 아니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아니 두 개가 있다. 그래서 네게 말을 하는 것이야. 하나는 내 딸. 내 평생 단 한번 잘한 일의 결과를 끝내 찾지 못하고 간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바로 너다. 너도 나와 같은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참을 수가없구나." 진자앙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소삼중의 '간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가긴 어디로 간다는 것일까? 그가 입 밖으로 이 의문을 끄집어 내려 쟀지만 소삼중의 말을 끊을수가 없었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이 두 가지 한이 전부 네개 넘겨질수밖에 없구나. 두 번째 것은 어차피 네 문제지만 내 딸을 찾는 것은사실 네가 혜야 할 일은 아닌대……!" 문득 진자앙은 궁사생을 만났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가 왜 삼선녀의 일행을 쫓아다녔던가를 기억해 내었다. 일순 모든 일이 하나로연결되었다. "사부님!" 그의 소리는 놀랄 만큼 컸다. 회한과 비통에 젖어 평생 가슴에 묻어왔펀 이야기를 꺼내 놓던 소삼중조차도 놀라 말을 멈출 정도였다. "사부님, 궁서생을 봤습니다. 바로 오늘이요. 그리고 따님도……,아니 따님을 데려간 그 여도사도요!" 소삼중의 눈이 번뜩였다. 한 순간에 그는 다시 힘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진자앙은 자신이 오늘 중자릉과 만났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니 그 삼선녀가 따님을 데려간 그 여도사가 분명할 것입니다. 궁서생을 찾기만 하면 좀더 확실해지겠지요. 지금이라도 제가 쫓아가서……!" 금방이라도 나갈 것 같이 서두르는 진자앙을 소삼중이 잡아 세웠다. "앉아라! 급할 것 얼다. 아니, 그보다 더 급한 이야기가 있다." "금방 찾아올 텐테……!" 금방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진자앙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자리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생각하기도 싫은 이야기가 소상중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야 말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는 것 또한 그는 알고 있었다. 소삼중은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래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다. 이제 내 얘기를 들을날도 없을 테니 그냥 거기 앉아 들어라!" "사부님 , 그런……!" 바로 그것이었다. 진자앙이 가장 듣기 겁내면서, 결국 듣고야 말 거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 소삼중의 최후였다. "사부님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더 열심히간호해 드리면……!" "사람의 수명이라는 게 그렇지. 염왕이 삼경에 부르면 오경까지 가지도 못한다고 하지 않더냐? 슬플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 " "하지 만……!" 소삼중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기색에서 어떤 절박한 빛이 풍겨져진자앙은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니 들어라. 금강불괴가 되려면……!" 그는 갑자기 허탈하게 웃었다. "이 꼴이 되고도 아직도 금강불괴 얘기라니……! 미련인가, 미망인가? 하여튼 내가 몇 마디 해두마. 서른이 되기 전에 반드시금강불괴가 되어야 한다. 그때까지 못 된다면 포기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데예는 이유가 있었다. 인간인 이상 체력얘 한계가 있고, 평생을 젊을 것 같아도 노쇠하는날은 누구에계나 오고야 만다.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라서 대개 열여섯에서 이십대 말까지가 체력적인 면이나 정신적인면에서 정점을 이루고, 서른이 넘으면서부터는 급격히 하강곡선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내공을 익헌 내가고수에게는 이 시간이 약간 연장되는테 그들도 대개 오십여 세 정도가 한계이고 그 후에는 불철주야 수련을 해도 그때까지 닦은 무공을 잃지 않는 정도에 불과하다. "하물며 너나 나처럼 외공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소삼중만 해도 서른이 넘어 간신히 무공에 입문해서 어느 정도가 되는 데에는 피나는 수련을 거쳐야 했다. 그러고도 오십이 넘자 바로 시들기 시작괘서 결국에는 이 꼴이 되고 말았다. "그건 그 영리충이……!" "영리충에게 맞은 게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내 평생 맞은 매가 만 대는 안 된다고 해도 수천은 족히 될 것인데 그자의 한두 대가 무어 그리 대단하겠느냐? 단지 그의 타격은 촉발제가 되었을 뿐이다." 그와 같이 외공을 이룬 사람은 어느 순간 내부의 균형이 깨어지면한 순간얘 무너져 버리게 되어 있다. 젊은 시절 건강했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 어느 날 갑자기 자리보전하여 눕고, 시들시들하다가 죽어 버리는 경우가 그런 부류의 일이었다. 절ㅂ은 시절 무리한 것이 한 순간에터져 나온 것이다. "그러니 서른이 되기 전에 께어지지 않을 균형을 몸 안에 이루어 놓지 않으면 너도 결국엔 나와 같은 꼴이 되고야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금강당의 수련은 다른 파의 그것들보다는 낫다." 뭐니뭐니 해도 그는 결국엔 평생을 안고 살아 온 금강당에 대한 자부심, 금강불괴에 대한 미련을 끊어 버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금종조니 십삼태보횡련이니 하지만 우리 금강당의 그것을따를 수는 없다. 그것들은 아무리 익혀도 금강불괴는 될 수가 없어. 금종조는 소림에서 익히는 거라지만 내기를 몸의 상부에만 모으는 반쪽짜리 기공이고, 십삼태보횡련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지만 조문을없앨 수가 없다. 그에 반해 우리는 제대로 수련만 하면……!" 한참 얘기하던 소삼중의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는 천천히 누웠다. 잠시 열을 올렸던 탓인지 얼굴빛이 검게 흐려지고 있었다. 진자앙은 그런 소삼중을 부축하면서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소삼중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걸로는 안 되겠다." 소삼중은 베개 아래에 손을 넣더니 얇은 나무상자를 꺼내었다. 그속에서 낡아 부스러질 것 같은 책 한 권이 나왔다. <삼선유서>였다. 소삼중은 회한에 가득한 눈으로 그 책을 보더니 진자앙에게 내밀었다. "이젠 네 거다." 진자앙은 머뭇거리다가 무릎을 꿇고 받아 들었다. 사양하는 것은 소삼중을 더 괴롭히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걸로는 안 돼." 소삽중이 말했다. "그걸로는 절대 금강불괴가 될 수 없어! 금강불괴가 되려면 나머지를 찾아 내야 해! 삼십 년 만에 그걸 알았다. 삼십 년을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면서, 일생을 그것 때문에 망쳤으면서 겨우 그게 내가 알아낸 전부라니……! 우습지 않으냐?" 대답은 없었다.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네게 그걸 넘겨주는 것은 이제부터 테가 금강당의 당주라는 의미다. 난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니 마음이 편하구나. 그만 내려가거라, 자앙아!" "예?" 소삼중이 침상에 누운 채 손을 들머 힘없이 저었다. "지금 바로 짐을 싸서 집에 가거라!" "사부님!" 진자앙이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재자에게 잘못이 있으면 차라리 꾸짖어 주십시오. 나가라는 말씀만은……!" "고게 아니고……!" 소삼중이 힘얼이 말했다. "죽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일 뿐이다. 그만 가거라! 이게마지막 명령이라 생각하고……!" 진자앙이 한참을 더 빌었지만 소삼중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진자앙이 일어나 나오려 할 때에야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다. "내 딸을…… 찾아서…… 아니다. 이제 와서 찾아서 어쩌겠다고……!" 진자앙은 무릎 꿇어 절하고는 눈물을 홈쳤다. "제자가 꼭 찾아내어 보살펴 드리겠습너다. 사부님!" 소삼중은 다시 대답하지 않더니 진자앙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밖으로 나올 때에 한마디를 했다. "자앙아……, 부디 잘 살아라!" 그날 진자앙은 산을 내려갔다. 오지산에 올라와 소삼중의 제자가 된 지 구 년이 되는 해, 초가을이었다. [제십삼장] 사문기는 사문을 떠나고 진자앙은 진가장에 돌아오다. 진가장은 오늘, 겉으로 보기엔 다른 날과 다름없이 평온한 하루를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 무거운 기류가 진가장을 감싸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진가장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오늘 진가장 안에서는 아무도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대충 이백여 명이나 되는 안팎의가솔들을 먹이느라 하루 종일 분주한 주방에서도 그릇 달그락거리는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듯 조용한 차원을 넘어서 거의 적막하기까지 했다. 진자룡은 이미 십여 년째 그렇게 지내온 것처럼 자신의 처소에서 나오지 않았고, 평소 같으면 굳은 팔다리를 푼다고 아침마다 연무장에모습을 보이던 진삼산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예순이 넘어서까지 변변한 며느리 하나 두지 못한 죄로 이 짓을 한다고투덜거리면서도 새벽같이 나와 집안 대소사를 진두 지휘하곤 하던 고대랑도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의 옆을 따르며 시집 못 간 늙은 처녀답지 않게 집안일을이것저것 거들던 진청아마저 골방얘 숨어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니 평소 지나치게 시끄럽던 진써 집안의 식구들은 오늘 하나도 바깥에 보이지 않는 셈이었다. 그런 모습이 낮이 되면서 조금 바뀌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걸어다니던 하인, 하녀들의 발걸음이빨라졌다. 달리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뭔가 고조되어 가는 장내의위기감을 느낀 탓이었다. 실제로 바빠진 사람도 있었다. 진가장의 내원, 르러니까 진씨 집안 식구들의 시중을 들어주는 시비들이었다. 그녀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안팎을 드나들어도 되는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안의 동정을 밖으로 전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들과 달리, 내원에는 출입하지 못하는 호원무사들과 여타의 하인 하녀들이 그녀들이 전해 오는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어거 그녀들의 발걸음이 빨라지지 않을 것이냐. 그녀들이 전해 오는 소식들도 처츰엔 별것이 없었지만 낮이 되면서진가장의 전가솔들을 흥분시킬 만큼 흥미진진한 것들이어서 기대에 부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원에서 조성된 위기감을 진가장 전체에 퍼뜨리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 가주님이 나와서 태상 가주님이 계신 망산당으로 가셨다. -- 마님이 창을 들고 나오는 걸 진 노집사가 간신히 말려서 다시 들어가셨 다는걸? -- 가주님이 망산당 앞에서 석고대죄하고 있는데 태상 가주님은 안는 척도 않고 계신대. 한마디씩 흘러나오는 정보에 진가장의 사람들은 혹은 놀라서, 혹은다음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지만 기실 그들이 초미의 관심사로 기대하는 소식은 들려 오지 않았다. 한 사람, 오늘의 일을 일으킨 그 한 사람의 동정은 아직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움직였다. 그 순간, 간간이 꿈틀거렸을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던 진가장의 기류가 크게 요동쳤다. -- 넷째 공자가 방을 나섰다! 넷째 공자. 진삼산의 다섯 제자 중 네 번째인 사문기였다. 진청아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많이 닳았다는 말을 들어 왔었다. 방에 있기보다는 밖으로 나돌기를 좋아해 그런지 검게 그을린 얼굴에 여자답지 않게 큼직름직한 이목구비 하며 거친 말투가 그런 말을듣는 이유였다. 사실 고대랑은 성격은 거칠지만 용모만큼은 과거 광동제일미라고 불렸을 정도로 아리따웠다고 했다. 지금 그녀의 일곱 딸중에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래서 진청아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못났다는 말과도 비슷하게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진청아도 박색은 아니었다. 남자처럼거친 맡투와 강한 성격이 흠이 라면 흠이지만 자세히 보면 반듯한 이목구비였던 것이다. 누굴 닮았건 그녀의 성격은 다를 수가 없긴 했다. 아버지도 그렇고어머니도 그런데 어찌 강하고 거친 성격이 안 나올 수가 있을 것인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성격이 시원스러워 좋다고도 했지만, 또혹자에 따르면 일곱 자매 중에서 유독 혼자만 시집을 못 가고 스물여덟이나 되도록 집에서 곰팡이 냄새를 피우며 물러앉아 있는 이유가 그거친 성격 탓이라고도 하니 본인도 썩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그 성격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나중은 어찌 되건 일단은 저질러 놓고 보는 성격, 오늘 그 성격이 제대로 발휘가 안 되고 눌려만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 진자룡 때문이기도 하고, 기실 그녀가 그 나이가 되도록홀로 시집을 안 가고 버티는 참된 원인 제공자, 바로 사문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문기! 학성 사가장의 후계자. 광마 진삼산의 넷째 제자. 그리고 진청아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나이 어린 연인이었다. 오늘 그녀가 누구보다도 더 분노하고, 그러면서도 또 누구보다도 더슬퍼하는 이유가 그것,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곱 살 연하의 사제에의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이 깊을수록 배신당한 아픔도 크다는 것은 진청아도 피해 갈 수없는 법칙이었던 모양이었다. 배신. 그렇다. 오늘 사문기의 행동은 배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앞서 다른 세 명의 제자들이 오늘 사문기가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행동을 했을 때도 그녀는 분노했지만 오늘처럼 뼛속 깊이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정말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는 그녀였다. 그 배신감은 남들처럼 내놓고 욕을 못 하는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더욱 깊이 안으로 사무치고만 있었다. 그 배신감이 한순간 크게 꿈틀거렸다. 자칫밖으로 뚫고 나올 뻔했을 정도였다. -- 넷째 공자가 방을 나서셨습니다! 그녀의 시비인 홍란이 전해 준 소식을 들은 순간이었다. "기어코!"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결국방문을 걷어차고 나오고야 말았다. 문 앞에, 아니, 후원 이곳저곳에서 서성거리던 시비들이 얼른 딴전을 부리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녀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던것일 터였다. "자발없게시리……!" 진청아는 한마디해 주려다가 간신허 눌러 참고 급한 걸음으로 후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지금 그녀가 뭐라고 하든 전부 화풀이로밖에는보이지 않을 것이 너무나 뻔했다. 어쩌면 실제로 그럴 수도 있었고. 문득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처음얘는 문재의 넷째 공자, 사문기에게 가려고 나섰던 것이었다. 그러나 가서 어쩔 것인가.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 것인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인가. 에초의 흥분이 바깥 바람에 식자 좀더 냉정해진 진청아는 어머니의처소로 걸옴을 돌렸다. 그러나 이내 그 걸음은 다시 돌려졌다. 지금 어머니에게 가봤자 방금 전 그녀가 시비들에게 할 뻔했던 그화풀이를 이번에는 그녀가 어머니에게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차라리 아버지에게나……!' 그것도 좋치 않았다. 지금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방문 앞에서 석고대죄하고 있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그녀였다. 거기 가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속이나 터지지, 좋을 것 하나 없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그러는 것은 오늘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의세 제자, 동평중과 운한경, 그리고 맹대균이 오늘 사문기처럼 사문을떠나도록 만든 그 죄까지 같이 용서받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녀가 알기로 할아버지가 그 일들로 아버지를 책망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늘은 할아버지도 화가 나셨을지도 모른다. 평소에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다섯 제자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제자가 사문기였던 것이다. 동평중은 너무 우유부단해서, 운한경은 경망스러워서, 맹대균은 너무 둔해서, 그리고 마지막 악조린은 음침해서 별로였던 것이 그녀만의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장 아끼던 그 후계자가, 어쩌면 진가곤의 후계자로 가장가능성이 있었던 그가 오늘 진가장을 떠난다. 허락받지 않은 외출, 곧파문이었다. 그런 것이 있다면 '자발적인 파문'이라고나 할 행동이었다. 사승내력을 중시하는 무림에서, 아니, 꼭 무림이 아니더라도 명문대가의 후손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범죄 행위였다. 그래서 사가장의 장주, 사문기의 부친인 사방득이 이 소식을 듣고 죽을 듯이 놀라 말을달려 오고 있다지 않는가. 그가 오면 또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진청아는 자기도 모르개 후원의 문을 통과해 정문을 향해 가면서 왜이런 일이 벌어졌나 셍각에 잠겼다. 처음 시작은 운한경이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등천비룡문이라는 그 이름도 생소하던 문파에입문하겠다고 했을 때, 진삼산은 '안 하던 농담을 다 하네? 하지만 별로 재미는 없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그가 별다른 이유도 말하지 않고 끝끝내 고집하자 사태는 이상한 쪽으로 발전혔다. 원래 무림에는 크게 보아 사승, 즉 사제관계를 중심으로 한 문파와 이익을 중심으로 한 방파라는 두 종류의 집단이 있다. 예를 들어 구대문파는 명백히 사승을 중심으로 한 집단으로, 그들만의 독문적인 무공을 대대로 전하며 명맥을 잇는 집단이다. 그러나 장강수로연맹이나 녹림맹 , 혹은 개방과 같은 곳을 그것이 한 지방의 패권이든, 혹은 한 분야에서의독점이든 간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모인 집단이다. 물론 개방의 경우에는 그 중심에 개방의 조사로부터 내려오는 사승의 관계가 있지만,개방외 모든 구성원이 그 사승내력얘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종류의 무림세력은 서로 공존할 수가 있고, 실제로 그래 왔는데 그것은 각 문파의 제자라고 하더라도 이익이 합치되고, 뜻이 맞기만 하다면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 사실은 크게 환영해 온 방파들의 태도에 의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화산파의 제자가 표국--중요한 무림세력의 하나다--의대표두가될 수도 있는 것이고, 뜻이 있어 개방에 입문할수도 있다. 또 구대문파의 경우에는 굳이 남의 아래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자부심과 옳은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정파의 의식이 있어서 혹도로 치부되는 방파에는 들어가는 일이 없지만 사파에 속하는 문파의 제자들은 대개가 그러한 방파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것이 상례였다. 팔대가문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사실상 그들도 평범찬 가족관계는아니고 사승과도 같이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중심이 되니 일종의문파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사천당문처럼 엄격히 가족구성원에게만 비기를 전수하는 것이 아닌 여타의 가문들은, 집사, 혹은 가신의이름으로 다른 문파의 사람들도 받아들여 한 가문을 이루니 방파로 볼수도 있었다. 진가장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진가장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은 진자룡, 진삼산, 진자앙으로 내려오는 가족관계가 그 하나이고, 진자룡, 진삼산, 그리고 다섯 제자로 내려오는 진가곤의 전통이 다른 하나였다. 그러므로 진가장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문파의 전인인 진삼산은 다른 문파에 입문할 수도 없고, 동맹의 형태가 아니면 다른 방파에 소속될 수도 없지만, 단지 가족이기만 한 진자앙은 다른 문파에 입문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진가곤이라는 한 문파에 입문한 다섯 제자들은 사부의 허락 없이는 다른 문파에 또 입문할 수 없지만 어떤 방파, 예를들어 자기들의 출신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는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운한경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는데, 진삼산으로서는 제자의요청은 매우 당혹스럽고도 불재한 것임에 분명했다. 다 배우지도 않고자기 멋대로 하산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간단하게 거절해 버렸다. "아직 수련이 모자라니 나중에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안된다." 당연히 수긍할 줄 알았던 운한경은 의외로 완강했다. "사부님껴서 허락하지 않으셔도 저는 가야갰습니다." 그러너 당연히 일이 악화꾈 수밖에 없었다. "반항이냐?" "제 신념 의한 결정입니다." "그게 반항이지." "그렇게 생각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꼭 가겠다면 사제의 인연을 끊겠다는데도?" "파문하시겠다면 감수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픔 되니 진삼산의 성질로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찬 수밖에없었다. 이 자리얘서 때려 죽이거나, 아니면 다리 하나쯤 꺾어서 파문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거기얘 진자룡이 개입했다. "네 흔자만의 일이 아니니 부모님의 의견도 들어야겠지?" 운한경의 부친, 사회 운양세가의 당대 가주인 운천장은 천리비도라는 별호로 광동에서는 왕성하게 활동하는 고수인데, 진삼산파는 오랜 친구일 뿐만 아니라 사돈지간이었다. 둘째 진주아가 운천장의 아들이자 운한경의 맏형인 운한수에게 시집을가서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로 잔갈을 보벌 떼 진삼산은 운천장이 단숨에 달려와서 못된 아들의 경망스런 헹동을 빌 줄 알았었다. 옷난자식 없는 걸로 치겠다며자기 손으로 죽여 버리겠노라고 하면 어떻게 말려야 하나 걱정을 하고있던 참인태 사람은 아니 오고 편지 한 장이 달랑 돌아왔다.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진삼산이 그 편지를 들고 게거품을 물며 쓰러지려는 참인데 진자룡은 사람 좋게도 '그럼 그렇게 하라'며 승낙을 해버렸다. 파문도 아니고, 처벌도 없이 그냥 보내 준 것이다. 아무리 효성 지극한 진삼산이지만 그 일 때문에 한동안 부친과는 말도 안 했을 정도로 그의 분노와 그 파문은 컸다. 그런데 파문이 가라앉기도 전에 맹대균이 다시 일을 벌였다. 그도 등천비룡문에 입문하겠다며 내보내 달라고 한 것이다. '이번에는 설마'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일은 비슷하게 돌아가서 내보내 주고야 말았다. 맹대균의 부친이자 역시 사돈인 서초산 비룡문의문준 맹비룡은 '원한다면 이혼시키겠다'는 전갈을 거기 시집간 진황아에게 들려서 보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진황아는 시댁에 돌아가지 못하고 후원 깊은 골방에 처박혀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우고 있었다. 그쯤 되니 등천비룡문이라는 단체에 대해 조사를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강남의 소주에 근거를 두고출발한 등천비룡문은 만들어진 지는 오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강남 전역에 걸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무림의 호사가들 사이에서는'일방일맹'에서 개방을 빼버리고 '남문북맹'으로 불러야 찬다, 아니. 다 집어넣어서 '일방일맹일문'으로 불러야한다는 등 논의가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불투명하다는 것이었다. 문주가 누군지, 자금은 어디에서 가져다가 쓰는지, 뭘 해서 방파를운영하는지 등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전구성원이 서른 이전의청년들, 그것도 젊고 준수한 무림의 신진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이 하나같이 명문의 자제거나 제자들이라는 소문만이 두루 퍼져 있었다. 무럼의 신진들 사이에서는 등천비룡문에 입문을 못하면 강호에 나와도 나은 게 아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입신양명을꿈꾸는 젊은이들이 대거 등천비룡문에 들어가는 유행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 전면에 나와 활동하는 사람들은 향주급의 인물들뿐이었다. 일반적인 무림의 방파구성으로 보았을 때는 실제로 일을 하는 향주들이 각 지방에 있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그 위에는 소위 외당이니 형당이니 하는 당주급의 인물들도 있어야 할 것인데 그들은단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잠재력이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증거가 되었다. 당주나 호법 따위의 진짜 고수들이 나오지도 않았는태 그만한 위새라면 더 볼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거대한 세력이라 해도 무서워할 진삼산이 아니었다. 언제 한번 가서 조사라는 명목으로 뒤집어 버리고 올 심산이었는데 다시 한 방의 타격이 가해졌다. 동평중마저 등천비룡문으로 가버린 것이다. 이제 문제는 심각해졌다. 단순히 제자가 반항을 하너 어쩌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넓게 보아양자강 이남을 통틀어 말하는 강남무림의 세력판도가 엄청나게 변하고있다는 것에 대해 대책을 세워야 했다. 전통적으로 강북은 구대문파, 강남은 팔대세가라는 식으로 구분이되어 왔다. 강남에 구패문파 중의 형산파가 있고, 강북에는 사천당문이 있음얘도 불구하고 일컬어지는 말이었다. 실제로 강북은 구대문파의 주도하에, 강남은 팔대세가의 주도하에 옴직여 온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강북은 화륜맹, 강남은 등천비룡문에 의해서 구대문파와 팔대세가의 입지가 극도로 약화되게 된 것이다. 진삼산은 이제 은밀히 다른 세가들과 명문정파들에 연락을 취하고,등천비룡문에 대한 공동 대응책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각파, 각 세가는 자기들의 문단속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한참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차에 결정타가 터졌다. 바로사문기의 건이었다. '이 녀석만은……'이라며 믿고 있던 사문기마저등천비룡문에 입문하기 위해 내보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오늘, 사문기는 떠난다고 했다. 그것이 오늘 진가장을 뒤덮고있는 검은 구름의 정체였다. '바보 같은……!" 무심코 중얼거리고는 진청아는 도대체 뭐가 바보스러운지 그녀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진가장을 떠나 등천비룡문으로 가는 것이 바보스럽다는 것일까? 아니면……? 어찌 생각하면 진가장의 제자라는 것은 겉보기보다 훨씬 대단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 진삼산은 그리 좋은 스승은 아니었다. 말은 서툴고,그나마 흥분하면 더듬는다. 문제는 아버지가 너무 쉽게 흥분한다는 점이었다. 그럴듯하게 설명도 못하면서 제자들이 빨리 못 알아들으면 머리 꼭대기까지 붉어질 정도로 흥분하곤 했다. 예전에는 흥분하면 일단 몽등이부터 휘두르곤 했는데 사돈뻘의 소년들이라고 그 버릇은 자제하는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신 그럴 때면 아버지는 각자 연습하도록 시키곤 했다. 말이 연습이지 그게 가르치기를 포기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스승으로서는 차라리 어머니가 나았다. 성질은 아버지 못지않게 급하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말은 정확하게 했다. 말도 정확하게 하고, 성질도 급하지 않고, 결국 소년들이 앙모하며배우려고 찾아온 할아버지 진자룡은 어떤가? 가끔 연무장에 나와 수련 모습을 지켜보다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혹시 누가 물으면 성의껏 대답은 해주지만, 그 말이 너무 심원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심원하다. 어쩌면 그 말은 잘못인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너무 쉽고간단헤서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것이었다. 예전에 막내동생자앙이 집에 있을 떼, 그애만이 할아버지와 말이 통하고 싫증도 내지않고 오랫동안 대화를 하였다. 결국 소년들은 여기 와서 기대했던 것을 배워 가지 못하고 만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달랐는데……!' 사문기는 달랐다. 그는 영리하면서도 인내력도 있고, 아버지의 성질과 할아버지의 막연함을 견딜 정도로 성격이 좋았다. 그래서 더욱 분한 것이다. 그런 사문기마저 이제 진가장을 버리려 하는 것이다. 진청아는 어느세 대문이 바라다보이는 전각의 처마 아래에 서 있었다. 마당에는 진삼산이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사가장에서부터 사문기의시중을 들기 의해 따라왔던 무사 하나와 사문기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텅 빈 마당얘 사문기는 서 있었다. 진청아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또렷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지 않았다. 배신자를 위해서는 한 방울의 눈물도 아까웠다. 사문기가 그녀를 본 것 같았다. 입을 벌려 무어라 말하려 하더니 그냥 고개를 숙이고 만다. 진청아는 그 모습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사문기가 떠나는 장면을 보겠다고, 그가 결정적으로 그녀와 진가장을 버리는 모습, 그리하여 영영 넘지 못할 벽을 쌓는 모습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확인하겠다고 거기 서 있는 것일 따름이었다. 그때, 대문이 열리고 말 한 마리가 질주해 들어왔다. 그 말에 탔던그림자는 말보다도 빨리 허공을 가로질러 들어오고 있었다. 진청아의 눈깹이 꿈틀거렸다. "감히!" 아무리 이렇게 어이없이 몰락해 가는 과정이지만 아직은 광동 진가장에 말을 타고 뛰어들어도 좋을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손상된 자존심의 과녁을 그 기수에게 돌리려 했을 때, 기수는 내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뛰어들려다가 멈춰 서더니 사문기에게 덮쳐 갔다. 그의 입에서 연속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이놈! 이 죽일놈!" 사문기가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기수가 누군지 확인한 순간 힘없이그냥 당하고만 있었다. 기수는 그의 아버지, 사방득이었다. 사방득은 극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뺨을 후려갈기펴 계속 같은 뜻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 죽일놈! 이렇게 가문의 망신을 시켜?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이놈!" 사문기의 머리가 그 손길에 따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힘없이 흔들렸다. 금세 뺨이 부어오르고, 입술이 터져 퍼가 흘렀다. 원래 사방득이 저런 사람은 아니었다. 광동의 지낭으로 유명한 인물이 그였다.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 냉정하다는 것은 그런 능력을 타고난 것에 대한 대가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도 원래는 너무 싸늘해 인간미가덜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흥분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진삼산과는 불과 얼음이라 할 정도로 대조적인 사람, 그러면서도최근 사오 년 동안에 가장 친하게 지내던 두 사람이었다. 초런 사방득이 이성을 잃고 흥분하고 있었다. 진청아는 한편으로는 아들 문제에 대해서는 별수없이 아버지가 되고 마는 사방득이 안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아버지에게 정신엄이 얻어맞고 있는 사문기가 안되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사방득이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그만은 진가장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뜻이니 진가장을 위해서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약이 되어 사문기가 마음을 돌렸으면 하는 기대를 하면서. 장내의 소란은 진삼산이 진자룡을 모시고 나타나면서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사문기가 무릎을 꿇었다. 그 옆에 사방득이 같이 무릎을 꿇었다. 진삼산이 얼른 비키고, 진자룡이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게나! 이게 무슨 짓인가?" "진 노사제 감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이게 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불초의 잘못이니 용서를 빕니다." "자네가 무슨 죈가? 교육을 잘못 시킨 걸로 치면 오히려 내 죄가 크네!" 진삼산이 말리고 진자룡이 거들었다. "아이들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하는 일인데 무슨 죽을 죄라도 진 것처럼 그러지들 말게. 당사자가 그렇게 원하고 마침 자네도 왔으니 이번에도 그냥 다른 아이들처럼 처리하면 되겠지." 진삼산이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이번에는 절대 그렇게는 안 됩니다.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사방득도 마찬가지로 펄잭 뛰었다. "이놈이 저와 절연을 하면 모를까, 그것은 저도 절대 허락을 못 합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습니다!" "무슨 그런 말을……!" 진자룡이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사방득은 사문기의 앞에 다가가 물었다. "내가 듣기에 등천비룡문에 입문하겠다던데, 사실이냐?' 사문기는 고개를 떨구었다. "예!" 사방득은 막상 본인의 입에서 그것을 확인하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떨리는 입술을 열어 간신히 다음 질문을 했다. "아직도 그 결심에 변함이 없느냐?' "……!" "말해라!" "예!" "기어이 가겠다고? 도대체 그 이유가 뭐냐?" 사문기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채근에 못 이겨 결심을 한 듯 입술을깨물었다. "그곳이 제 나래를 펴기에 적합한 곳이라 여겨지기 테문입니다." "뭐, 나래라고……?" "예!" 사방득이 묘하게 입술을 비틀첬다. 비옷는 것 같기도 하고 비통해하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기어이 그렇계 하깼다면 이 아비는 널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 그래도냐?" "사 노제!" 진삼산이 말렸지만 사방득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진청아는 몸을 떨었다. 장내를 감도는 비장한 분위기에 절로 소름이끼친 것이다. 사방득이 뭔가 일을 벌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제발……!' 그러나 사문기는 그녀의 애타는 기원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님!" 사방득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손이 등애 맨 철봉 같은 것으로 향해 갔다. 그것이 뽑혀지고,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자 그의 손에는꿈틀거리는 용의 문양이 새겨전 깃발이 들려 있게 되었다. 사가장의독문병기인 번룡기였다. "사 노제……!" 진삼산이 입을 벌리고 다가갔다. 그러나 사방득의 손은 가차없이 움직였다. 깃봉의 날카로운 창날,기창이라 부르는 그 창날이 사문기의 정수리를 향해 직선으로내리쳐졌다. "안 돼--!" 진청아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눈은 그 소리보다 빨리 감겨졌다. 사방득과 사문기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손은 너무 빨랐다. 누가 저살기 넘치는 깃발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붉은 피, 꺼내 보지도 못한 연정의 상대자의 붉은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땅--! 경꽤한 소음이 퍼졌다. 그리곤 조용했다. 진청아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진자룡이 어느새 사방득과 사문기의 사이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방금 전까지 노쇄한 그의 몸을 지탱해 주던 지팡이가 가로로 들려 있었다. "어르신네, 그냥 둬주십시오!" 사방득은 진자룡의 지팡이 끝에 걸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그의 깃발을 치우려 하며 말했다. 그러나 깃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강력한 끈끈이에라도 걸린 것처럼 깃발은 지팡이에서 떨어리지 않았다. 진자룡이 천천히 지팡이를 움직였다. 사방득의 깃발이 같이 움직였다. 그렇게 깃발을 사문기의 얼굴 앞에서 치운 다음에야 진자룡은 말했다. "보게! 자네 아들을!" 그도 늦었던 모양이었다. 사문기의 얼굴은 붉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사방득의 기창은 진자룡의 지팡이에 막히고도 아들의 얼굴을 반이나 긁어 놓고서야 멈추었던 것이다. 진자룡은 안타까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은 힘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네. 자네처럼 했다면 삼산은 목슴이 몇 개였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야." 그 경황중에도 진삼산의 뺨이 붉어졌다. "무기는 그만 거두게! 번룡기는 나도 존경하는 바이지만 아들을 상대로 쓰라는 것은 아닐 걸세!" 진자룡은 사방득의 깃발로부터 지팡이를 거두었다. 그리고 거기 기대 서서 사문기에게 말했다. "아버님은 내가 찬찬이 달랠 터이니 너는 이만 가거라! 아니, 우선치료부터 받아야겠군!" 사문기가 그에게 절하고, 진삼산과 아버지에게도 각각 절한 뒤 일어섰다. 그는 피가 흐르는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말했다. "피륙에 생긴 것에 불과하니 걱정은 거두어 주십시오. 불초한 기아는 이만 가겠습니다. 용서를……!" 그는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돌아섰다. 이잰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대문이 열리고 사문기가 나갔다. 진청아의 마음이 같이 닫혔다. 장시 후, 대문이 다시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진청아는 혹시나하고 바라보았다. 사문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가슴이 다시 천길 아래로 멸어져 내렸다. 그때, 들어온 사람이 소리쳤다. "할아버지!" 진가장의 높은 솟을대문에 머리가 걸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큰 사내, 얼핏 보아 철탑이 하나 움직인다 싶을 정도로 큰 그 사내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철탑같이 큰 사내, 진자앙은 웃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돌아온 집인가. 열두 살 꼬마 시절에 나가서 이제 스물한 살 청년이되었다예전엔 그렇게 넓어 보이던 집도 이젠 고만고만해 보이는 것은 그만큼 그가 컸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도 할아버님, 아버님은 하나도 안 변하셨군요!" 구 년 만에 오는 집이니 어딘지 좀 낮설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아버지, 할아버지가 다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을줄은 몰랐다. 덕분에 한결 덜 어색하니 다행이었다. 그는 싱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가 오늘 돌아온다는 건 어떻게 아셨죠? 아, 누가 절 보고 알려드렸나 보군요! 절 알아보는 하인들이 있던가요? 진 노육이면 몰라도……!" 어째 조금 이상했다. 그만 한참 혼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장내의 분위기가 묘했다. 그는 고개률 갸웃거리다가 잊었던 사실을 께달은 것처럼 이마를 쳤다. "아, 내 정신 좀 봐! 인사률 안 드렸군요!" 그는 그대로 허리를 구부려 할아버지에게 절을 했다. "손자 자앙이 돌아왔습니다. 할아버님, 건강은 어떠신지요?" 그러다가 그는 그 자세로 얼어붙었다. 마당의 돌바닥에 뿌려진 핏자국을 그제야 본 것이다. 굳지도 않은 피, 그것은 쏟은지 얼마지나지알았다는 증거였다. "이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진자룡이 그계야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안았다. 그는 억지로인지는물라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청년이 정말 자앙이가 맞는 건가? 어떻게 그 작던 녀석이 이렇게 틀 수가 있지? 거짓말 같구나…… 허허!" "예전에도 작은 아이는 아니었지요!" 진삼산이 마치 화난 차람처림 툴툴거렸다. 그는 아직도 사문기를 보내 준 진자룡에 대케 화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진자앙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절했다. "아버님, 강녕하셨습니까? "강녕……? 흥, 그러지 못했다!" "예……? "옷 꼴이 그게 뭔냐! 갈아입고 쉬어라! 계집애처럼 마당에 서서 수다 떨지 말고!" 진삼산은 애꿎은 진자앙의 옷 타박을 하고는 돌아서서 사방득의 팔을 끌었다. "자식 놈이라고 저 모양이니 원……!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하세!" ' 사문기의 일 때문에 괜히 미안해진 그였다. 그래서 진자앙에게 공연한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누군 아들을 잃다시피 했는데 그는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이라고 실실거릴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는 문득 돌아서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고 보니 사 아저씨께는 인사도 안 하는구나! 어째 예의가 그모양이냐!" "예?" 진자앙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얼른 이해를 못했다. 왜 욕을 먹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방득이 애써 진삼산을 말렸다. "그만두십시오, 형님! 구 년 전에 한번 보고 처음이니 소제도 못 알아봤는데 현질을 탓할 수는 없지요." 그때 진청아가 다가와 진자앙의 소매를 끌었다. 눈치가 없기는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인 진자앙이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나 구 년 만에 돌아온 아이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그녀 또한 심기가 좋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동생이 영문도모르고 야단을 맞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사가장의 사 아저씨셔. 얼른 인사드려!" 진자앙이 영문도 모르고 허리를 굽혔다. "사 아저씨께 문안 여쭙니다!" 사방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멀리 수련하러 갔다더니 이제 돌아오는 길인가?" "예, 종화 금강당얘서……!" 진삼산이 잔뜩 인상을 쓰며 다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종화 금강당이라는 이름이 정말 그를 툰노하게 한 것이다. "그게 무어 그리 자랑스러운 이름이라고 떠벌거리느냐! 그만 들어가옷잊나 갈아입어!" 그는 사방득외 소매를 끌고 들어가 버렸다. 진자앙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그는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있었다. "내 옷이 그렇게 더럽나……?" 허름하긴 했지만 그래도 깨끗이 빤 옷이었다. 그나마 유소림이 있을때는 그가 시장을 도맡아서 왕래했기 때문에 변변한 옷도 없이 짐승가죽만 입다가 나중에 그가 떠난 후 시장에 드나들 필요가 생기자 마련한 몇 벌 안 되는 옷들 중 가장 새것이었다. 그는 코를 킁퐁거렸다. "냄새가 나나……?" 진청아가 답답해서 그치 어깨를 치려다가 키가 워낙 커서 그냥 허리를 한 대 때렸다. "이, 멍청아! 옷 때문에 그런 게 아냐!" "그럼 왜……?" "그게…… 에휴! 그런 게 있어!" 진청아도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답을 않고 그냥진자앙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더럽긴 하니까 가서 갈아입자!" 그러나 진자앙은 꿈쩍도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손뼉을 쳤다. "아! 아까 들어을 때 머리를 다쳤는지 얼굴에 피를 잔뜩 묻이고 나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뭔가 잘못했나 보지? 그래서 혹시 맞기라도 한 거야? 아버님한테?" 성질이 성질이니 만큼 진삼산에게 맞는 하인도 드물지 않고, 그 중에는 가끔 상처를 입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도 어릴 적부터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진청아의 상처를 건드려 버렸다. "이 멍청한 자식!" 그녀는 진자앙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화를 냈다. 그런데 그 정강이가마치 철벽처럼 단단했다. "아야!" 그녀는 발끝을 잡고 잔뜩 인상을 썼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픈 데다가 화까지 치밀어 오르니 이제까지 간신히 견며 온 자제력이 단숨에무너져 버렸다. "바보는 몇 년이 지나도 역시 바보야!" 그녀는 휙 돌아서서 달려가 버렸다. 도대체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모르는 진자앙을 남겨 두고서"자앙아!" 진자룡이었다. "너 때문에 그러는 것들은 아니고, 그냥 그럴 일이 있단다. 오랜 만에 이 할애비와 얘기나 하자꾸나." "저……, 어머님쩨도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네 어미도 얘기할 기분이 아닐 게다. 나중에 하면 된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진자앙은 도리없이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진자룡의 처소는 망산당이라고 불렀는데, 후원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었고 주위에는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나이가 들면서번거로운 것과 접하기 싫어서 본인이 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산도 보이지 않는 곳얘서 '산를 바라본다'는 뜻의당호를 지은 것이 무슨 까닭인지는 아무도 물랐다. 거기 도착해서 견자룡은 간단하게 오늘의 일이 있었던 까닭을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진자앙은 아버지와 누나의 태도를 이해하게 되었지만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자가 사부를 거역하고 떠난다는 것은 작은 일은 아니었다. 명성과위신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무림에서 이 일은 진가장과 할아버지의 이름을 적잖개 훼손하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진자룡은 그것얘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이 할아버지다워서 좋았다. 진자룡이 물었다. "그레, 무얼 배웠느냐? 아니, 그건 나중에 보면 알겠고…… 그래,재미있는 일은 없었느냐?" 진자앙은 원래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산속에서 구 년이나 지내며 소삼중 외에는 별로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으니 이젠 더욱그랬다. "뭐…… 재미있는 일이라면 그냥……!" 무슨 일이 재미있을까 한참 생각을 하는데 문득 할아버지에게 할말이 여러 가지 있다는것을떠을리게 되었다. "궁서생 중자릉 어른을 뵈었습니다. 며칠 전에요," 그가 중자릉을 만났던 얘기를 하자 진자룡은 정말 재미있게 듣는 것같았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듣고는 원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해결하겠다고 그 나이에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군! 사람도참……!"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어쩐지 우울해 하는 것 같아 진자앙은 얼른말을 돌렸다. "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라 다른 일도 많았는데…… 참, 할아버지,이것 좀 봐주십시오. 이게 뭔지 전 전혀 모르겠더군요. 혹시 할아버지라면……!" 그러면서 그가 꺼내 놓은 것은 화룡동에서 주운 양쪽에 날이 달린장식품 같은 것이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물에 껏고 닦은 그것은 전에 보았을 때와는 많이달라져 있었다. 양쪽에 달린 날은 투박하긴 하지만 은은한 검은빛을띠고 있었다. 거기 새겨진 불꽃 무의는 무엇으로 그렸는지는 모르지만그 검은빛 속에서 뚫고 올라오듯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둘째치고 이 색깔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물건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손잡이가 있었다. 손잡이도 깨끗이 닦아 놓으니 전에 못 보던 것이 보였는데, 우선 손잡이와 날을 구분하는 부분에 구슬처럼 튀어나온 것들이 사실은 악마의 머리 모양을 새겨 놓은 것이라는 점. 그리고 손잡이 자체에 한 줄기 번개가 아로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또글자도 하나 더 있었다. 진자룡은 흥미롭다는 듯 한참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중얼거렸다. "이런 물건을 알고는 있다만 이건 좀 특이하구나. 여기 새겨진 글자는 범어다. 서장에서 쓰는 문자지. 나도 범어는 모른다만 다행히 이 글자는 알지. 예전에 서장에서 온 라마교의승려가 들고 다니는 물건이 이것과 흡사했고, 거기 새겨진 글자도 똑같았거든." 글자는 범어로 '푸르부'라고 읽혀졌다. 해석하자면 뇌전도흔히 번개칼이라 새기는 단어인데 이 물건의 이름이 바로 그것이었다. "라마꾜예서 제사할 때 쓰는 법기 중 하난데 방술을 쓸때 사용하기도 하고, 무공을 아는 사람의 경우, 무기로도 쓰인다. 이반대편어 있는 글자는 나도 잘 모르겠다. 바라…… 혹은 바나라……뭐라고 읽는 것 같긴 한데, '바라'라는 말은 금강이란 뜻이고'바나라'라는 말은 번개라는 뜻일 수도 있고, 금강저라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금강저는 아니겠지 그건 이것과는 생김새가 다르니까." 금강저는 칼처럼 생긴 뭉툭한 몽등이. 몽등이 종류라면 진자룡만큼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믿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진자앙은 거기에 '금강'이라는 뜻일 수도 있는 글자가새켜져 있어서 기뻤다. 금강불괴를 추구하는 그에게는 왠지 기분좋은 물건아닌가. "금강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만, 이것도 좀 봐주십시오!" 그는 <삼선유서>를 껴내었다. 진자룡은 쭉 훑어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가 배운 것이 이거냐?" "예!" 진자앙은 긴장해서 한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나 엉터리라고 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자연 진자룡은 그런 투로 말을 꺼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여러모로 다르다만……, 선인이 남긴 것이너 나름의 타당성이 있겠지. 그러나……!"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눈을 빛내었다. "어쩌면 이건 내게도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어느 이름 모를 도사에게서 오칠비결을 배웠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은 내겐 스숭과 다름없는 분이고, 알고 보면 지금 내가 익힌모든 무공의 기초를 닦아 준 것이나 다름없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 도호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이책을 보니 문득 그 생각이 나는구나. 그분이 자신은 원래 신선이었는데 잠시 인간세상에 다니러 왔다고 하신 말씀이지." 진자앙은 입을 딱 벌렸다. 그 말이 '반선'이라는 이름과 엇비슷하게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진자룡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 반선이라는 이름을 보니 그 생각이 난 것이다. 그때는, 그리고 이 책을 보기 전에는 그것이 단지 이름을 가르쳐 주기 싫어 희롱으로 하신 말씀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진담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 그는 책을 돌려주었다. "아쉽게도 됫부분이 없어 내 추측을 확인할 수가 없구나. 하긴 선연이 없으면 쇠신발이 닳도록 찾아 다녀도 못 찾고, 선연이 있으면 집 안에 앉아서도 만난다고 했지. 하필 네게 이런 책이 들어간 것도 하나의 선연이라면 선연일 수 있으니 한번 기대해 보는 것도 좋겠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 나온 것만으로는 절대 금강불괴가 될 수 없을테니 말이다."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관두자. 선연이 있으면 이루어지겠지." 그는 진자앙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할애비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하겠느냐?" "자신은 없지만……?" 진자앙도 진자룡을 마주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는 가장 편한 상대였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속으로 셍각한 것을 굳이 감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손수 무공을 지도해 주실 생각을 하신 것은 아님니까?" "그렇다." 진자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오칠비결을 전케 준 그 도사 어른이 이 반선이라는 분과 동일인이라면, 이 책의 두 번쩨 부분은 아마 오칠비결과 상당 부분 흡사하지 않을까 추측해 보았다.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이라도 알려 줄까 생각했는데 잔두기로 했다. 만에 하나 애상이 틀릴 경우 네 길에 방해만되기 매문이다. 사실 오칠비결은 이미 내게 전해 주었다. 네가 실행하지 못할 뿐이지." 진자앙은 그때 진흙탕 속에서 오칠비결을 읖조렸던 그 일을 얘기할까 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나서 손을 품안에 가져 갔다. "아참! 이것도 봐주십시오. 뇌전도와 같이 있던 것인데…… 역시 벽력당의 것이겠지요?" 그율 꺼낸 것은 천 뭉치였다. 진자룡은 뭔가 하고 보다가 그 안에서붉온 구슬들이 나오자 대경 실색해서 외쳤다. "잠깐! 움직이지 마라!" 진자앙이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할아버지를 이렇게 놀라게 하는 물건이라는 것은 정말로 흔치 않았다. 진자룡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큰소리가 나는 것이 두렵다는 듯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잇사이로 얘기하는 것이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마라! 우선 이걸 치우고 다시 얘기하자!" 그는 달팽이가 움직이듯 느리게 손을 움직여 붉은 구슬을 하나씩 천에서 꺼내 침상의 이부자리에 옳겼다. 극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것이 끝나자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이마를 닦았다. 어느새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이가 없구나. 저걸 그렇게 천 하나로 감싸서 들고 다니다니! 여태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하구나! 그걸 아느냐?" 진자앙은 그때까지도 손을 내민 채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진자룡이 피식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이젠 움직여도 된다." "저게 뭡니까?" 진자앙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리며 물었다. 진자룡이 혀를 찼다. "그래서 내가 어이없어하는 것이다 강호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을가지고 다녔으면서도 몰랐다니. 네가 저걸 가지고 다니는 동안은 넌저승에 발을 반쯤 담갔던 셈이야." 구슬은 바로 벽력당을 강호의 어느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만든 물건이었다. 벽력탄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만 터져도 주변 오 장 안이초토화된다는 공포의 화기. 그런 것을 진자앙이 천 하나로 싸가지고 다녔으니 기가 막힌 노룻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자앙은 별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한번도 벽력탄이 실제로 터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그걸 품에 지니고 바위에 전속력으로 달려가 부딪친 적도있다는 것을 말하면 할아버지가 얼마나 놀라실까, 하는 한가한 생각을하고 있었다. 진자룡이 손을 저었다. "하여튼 저건 벽력당에 돌려줄 방법을 내가 알아 볼 테니 너는 그만가서 자거라. 밤이 늦었으니 피곤할 테지, 어미에게 인사도 가야겠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벌써 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인사를 하고 망산당을 물러 나와 고대랑의 처소로 갔다. 고대랑은 그를 보고는 손부터 저었다. "오늘은 몸이 불편하니 그만 가거라. 나중에 보자." 진자앙은 웃으며 물러 나왔지만 속은 쓰렸다. 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머니가 그를 보는 눈에는 별 차이가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언잰가는……!" 진자앙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흔자 뇌까렸다. "달라지겠지." 진가장에 돌아온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고대랑은 평소에 낮잠이나 즐기고 무공 연습은 거의 않는 것처럼 생각되어지곤 했다. 진삼산이 특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고대랑은 그런 얘기를 들으면 이 사람이 사십여 년을 같이 살 비비고 살아 온 남편이맞나 하는 의심을 가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도대체 마누라가 매일 새벽에 잠자리를 빠져 나간다는 것도 모르는사람이 무슨 남편이란 말인가. 또 그렇게 나가서 무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면 그건 또 뭐 하는 남편이란 말인가,그런 남편과 산다면, 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지, 바람이라도 피울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전혀 눈치를 못 챌 테니 말이다. 오늘도 고대랑은 방금 밤이 되었다 싶을 정도로 꼭두새벽에 나와서연무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려서 처음 무공을 배울 때 남자 형제들에게 지는 게 싫어 그렇게 남보다 먼저 나가 수련을 한 이후 새벽수련은 그녀의 평생 버룻이 되었다. 오늘만 해도 어제 같은 일이 있었다면 하루 정로는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병으로 누워 있어도 너무나 당연할 처지였으니까.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더욱 수련을 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긴장이 한번 풀어지면 다시 추스리기 힘들기도 할 뿐더러 요즘 진가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에서 아무래도 조직적인 음모의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열병도 아닌데 등천비룡문이라는 말라 비틀어질 문파에 입문혀졌다고 차례로 나간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그녀였다. 아직은 그 음모의 주체를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날에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그녀는 일 장 반이나 되는 대창을 든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연무장얘 가까이 가자 그녀는 잠깐 멈추었다. 그리곤 발소리를 죽여가며 조용하면서도 신속하게 연무장 담벼락에 붙어 안으로 들어갔다. 연무장은 지금 그녀가 붙어 있는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터에불과했다. 그러니 몸을 가릴 것이 없다시피 한데도 그녀는 담벼락이만들어 내는 어두운 구석에 붙어 거의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감각은 언제나 그렬듯이 오늘도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연무장 안애는 이미 한 사람이 수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리를 움직이고, 손발을 휘두르고……! '음, 수련 시작하기 전에 몸을 풀고 있나 보군!' 그녀는 예리한 눈으로 이미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 냈다. 사실 그렇게까지 어렵게 말할 것도 없는 것이 철탑을 연상케 할 정도로 큰 체구는 어젯밤이 되기 전에는 진가장 안에서 본 적이 없었으니 그 사람이그녀의 아들이라는 것은 너무 쉬운 추리였다. '녀석, 그래도 좀 나아졌는걸……!' 고대랑은 잠깐이긴 하지만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수련을 하고 오더니 부지런해지지 않았는가. 몸을 푸는 동작도 제법 유연했다. 마지막에 연환각에서 선풍각으로,그 다음엔 질박곤번과 절첩선전의 몇 가지 연속동작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훌륭한 준비운동이야! 요즘은 저런 운동을 소흘히 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저거야말로 수련 전후에 꼭 해줘야 하는 것이지!' 속으로 해설까지 해가며 구경하던 고대랑은 진자앙이 준비운동을다시 시작하자 조금 의아해 했다. '한번 더 하는 건가? 뭐, 그것도 좋겠지!' 소위 그 '준비운동'과 '준비운동' 사이에 금강지식법을 수련했다는것을 못 알아보는 그녀였다. 그냥 멈춰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자 다시'준비운동'을 했으니 그걸 어떻게 알 것인가. 그녀가 아는 무공수련에는 그렇게 그냥 서 있다는 것은 없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예의 준비운동을 다시 한번 시전한 후, 이번에는 금강대력공을 수련했다. 원래 산에 있을 때는 새벽에 금강십이로까지의 체력훈련을 했지만 여기에서 그걸 하기에는 조금 적합하지가 않았다. 경공을연마하기에도, 다른 것을 연마하기에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고대랑의 눈에는 그가 다시 준비운동을 반복하고 있다고밖에는 달리 볼 수가 없었다. '또 준비운동이야? 뭐 저런 수련이 다 있지……! 아니, 잠깐! 혹시저것밖엔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기껏 구 년 간 수련한 것이고작 저것이라면 사기를 당해도 크게 당한 셈이었다. 또한 그야말로 아들 하나 버린 셈이었다. 그녀는 숨어 있던 어둠 속애서 나와 진자앙애개 다가갔다. 진자앙은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눈귀 다 막혀 있는 것도 예전과 똑같고……!' 고대랑은 어쩐지 자꾸 기대감이 엷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어 물었다. "지금 하는 게 뭐냐?" 진자앙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대랑은 자신의 아들이 월 하고 있을때는 가는귀가 먹은 상태나 다름없다는 것을 기억해 내곤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구 년 간이나 무공을 연마했다면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대처 정도는할 것이다. 그녀는 손에 든 대창을 가로로 크게 휘저어 진자앙의 허리를 후려갔다. 혹시나 모르면 어쩌나 해서 일부러 크게 파공음을 일으키며 가한 일격이었다. 파앙--! 귀청을 찢을 정도로 소리가 났는데 진자앙은 대창이 거의 몸에 닿을때가 되어서야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창을 보고는 그냥그 자리에 멈춰 서고 있었다. "이런 바보 자식!" 창은 여지업이 진자앙의 허리를 후려쳤다. 따악--!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창이 그대로 동강이 나서 날아갔다. 맞아도된통 맞은 셈이었다. 원래 어떤 것을 후려쳐서 그것이든 아니면 이쪽이든 어느쪽이든지한쪽이 깨어지거나 부러지면 별로 아프지 않은 법이었다. 그래서 고대랑도 사실은 철기등처림 단단한 진자앙의 몸에 창까지 부러뜨려 놓고도 별반 충격을 받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설마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그녀의 아들은 구 년 동안이나 허송 세월을 하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에잇!" 그녀늘 손에 남은 반 동강이의 창으로 아들의 어깨를 후렸다. 시험도 아니고 순수한 분노의 일격이었다. 따악--! 이번에도 진자앙은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고대랑에게는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공격이 가해지는데 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대신 이번에는 왜 큰 반탄력이 그녀의 손에 전해졌다. 그러나 그녀는흥분 때문에 고통도 잘 느끼지 못했다. "바보 같은 놈! 멍텅구리! 기껏 구 년이나 배웠다는 것이 고작 이따위……!"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돌아서 버렸다. 진자앙은 이게 웬일인가 해서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놈은 아니야! 절대 아니야! 저럴 수가 없어!'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걸어가는 고대랑이 속으로 그런 말을 되뇌고있다는 것은 더욱 모르는 일이었다. 그날 세벽의 일은 놀랍게도 금방 소문이 났다. 잠없는 하인 하나가 그 광경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세한 상황묘사가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입에서 입을 건너가는 동안 색칠까지 되어놀랍게도 고대랑이 한 오래 그대로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졌다. 즉. 진자앙이 구 년 간 배운 것은 다른 무림문파에서 '준비운동'삼아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니 진자앙은 구 년 간 허송 세월만하다 온 셈이라는 것, 또 덩치만 컸지 실속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등의 소문이었다. 진삼산은 그 소문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만 들었다. 그러나 소문이 막는다고 숨을 죽인 적은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없다. 알게 모르게 인근와 무림세력들에는 진가장의 마지막 자손이 허우대만 멀쩡한 멍청이라는 소문이 사실처럼 그럴듯하게 퍼져 나가 버렸다. 원래 소문이라는 것이 당사자가 가장 나중에 알게 된다고들 한다그래서인지 진자앙은 근런 소문에도 상관없이 매일 새벽의 수련을 빠뜨리는 일 없이 꼬박꼬박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예의 그 준비운동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것은 준비운동이나마 첫날 고대랑이 봤을 때는 꽤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다음날부터는 그나마도 재대로 못한다는 것이었다. 진자앙은 마치 어디 불편한 사람리 하는 것처럼 어색한 동작들을, 그것도 힘겹게 하곤 했다. 그것과 진자앙이 진 노육에개 부탁해 납 사백 근을 사들여 오게한 것이 관계가 있다는 점을 눈치챈 사람은, 조부인 진자룡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안팎으로 바보 취급을 받으면서도 진자앙과 진가장은 대충평온한 나날을 보내었다. 그것이 깨어진 것은 한 달 후 어느 날이었다. 문제는 진자앙이 어디에선가 이상한 소리를 얻어들으면서 시작되었다. [제십사장] 진자앙은 국상을 따라가고 양신임은 횡액을 당하다. 중추절, 장안. 삼황야가 어전시합을 연다. 속으로야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기 짝이 없던 무림이 이 한가지 소문으로 발칵 뒤집어졌다. 삼황야는 전대 황제의 셋째 아들이며, 당금 황제의 동생이다. 폭정이니 학정이니는 하지 않으니 사람은 좋다지만 여색에 빠져 골골대는 것이 당금 황제의 상황, 그리고 이런 경우 언제나 그렇듯이 황태자는 아직 어렸다. 그쯤 되면 뒤는 뻔했다. 야심 만만한 황야들이 용이 새겨진 의자에군침을 흘리기 마련인데 삼황야는 그 중에도 일순위라고들 했다. 젊어서부터 똑똑하고, 야심 많고, 용감하기까지 해서 무예도 좋아했던 삼황야. 그가 맏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라의 불행이라고 참람한 말을 하는 대신들도 있었으니 가히 그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삼황야가 무림대회를 여는 것이다. 원래 무림대회, 혹은 비무대회가 벌어지는 데에는 서너 가지의 경우가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 그래서 가장 자주 벌어지는 경우가시비를 해결하기 위한 비무대회였다. 무림은 말보다는 칼이 대신 말해 주고, 또 그 경우 말이 제대로 먹혀드는 경우가 많은 곳이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일단 중재자를 내세워 말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해결되는 경우는 아예 문제랄것도 없는 경우고 대개는 주먹이 오가고 창칼이 번뜩이고 나서야 수습이 된다. 이때 조금이라도 피를 덜 보고, 관가의 이목을 두려워 않고 합법적으로 싸울 수 있는 방법이 비무대회였다. 대표자를 뽑아서 겨룬 뒤 이긴 쪽이 이득을 차지하는 것이다. 무림인으로서는 지극히 공평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무대회는 양측에 초청을 받아 대표가 되지 않으면 구경은 가능해도 나가 싸울 수는 없으니 가장 자주 열리기는 해도 성대하게 벌어지기에는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또 다른 경우로는 물유각주(보물에는 따로 주인이 있다)의원칙에 의거해서 보물을 걸고 그 주인을 가리기 위해 벌어지는 비무대회와 비무초친이라 해서 또 다른 형태의 보물, 즉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비무대회를 여는 경우가 있다. 이 두 경우가 민간에서는 가장 크게 비무대회를 여는 경우고, 참가자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 어떤 경우보다도 흔히 벌어지고, 또 가장 성대하게 벌어지는 비무대회는 관에서 여는 경우였다. 혹은 재미로, 또 혹은 인재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각 성에서 혹은왕공후작들이 비무대회를 열곤 하는데 그 중 가장 지명도가높은 것은 당연히 지고의 존재인 황제의 앞에서 벌어지는 어전시합이다. 그러나 이번에 삼황야가 여는 비무대회는 황제의 어전시합보다도오히려 높게 치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지금은 삼황야가황제보다 오히려 실력자라는 현실적인 이유, 다음으로는 삼황야의 배후에 있는 또 한 사람 때문이었다. 당금 무림십대고수 중에서도 명실공히 수좌의 위치에 있는 황사 매요신, 올해 나이 백삼십 세. 그가 황사의 위치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가르친 제자가 바로 삼황야였다. 이제 나이 들어 조정의 모든 자리에서 은퇴하고 본인의 요첨에 의해삼황야의 성에 가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가 이번 무림대회의 공동주최자였다. 삼황야와 매요신 외에도 주최자가 둘이 더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이름이 이번 대회를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소림장문인대보선사와 무당장문인 육수정진인이 그들이었다. 이러니 누가 이번대회에 참가하고 싶지 않을 것인가. 누가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겠는가. 무림에 널리 퍼진 소문으로는 거기 걸린 상품이 무엇이든 간에 이번에 정상에 오르는 사람이 향후 백년을 주도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곧 무림십대고수를 대신할 사람이 여기에서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였다. 강호가 크게 요동치지 않는 바에야 아무리 실력이 있는 자라도 그실력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세상이 조용한데 혼자 돌아다니며 비무를 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분란을 일으켜서는 명성을 얻기 힘들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야망이 있는 자라면 이런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을 것이냐. 중추절은 아직 멀었는데도 사람들은 장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중얘 진자앙도 있었다. 아니, 이제 곧 끼려 하고 있었다. "뭐라고? 어딜 간다고?" 진삼산은 이번에는 제발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면서 되물었다. 그러나 그의 귀는 잘못되지 않았다. 대신 아들의 머리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질문 뒤에 노골적으로 담겨진 강한 거부의 의사를 읽지 못하고 태연히 방금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삼황야의 어전시함에 참가하겠슬니다." "지, 지금…… 그게 마,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하는 소리냐?" 진삼산은 개거품을 물었지만 진자앙은 그저 눈만 꿈벅거리고 있을뿐, 아버지가 왜 이렇개 흥분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 네 행동이 어떤 결과즐 가져 올지 아, 알고나 하는 소리냔 말이다!" 진자앙은 수줍게 웃었다. "썩 자신이야 없습니다만 혹시 좋은 성적이라도 거두면 제게도 영광이지만 가문의 명망얘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눈물나게 고맙구나! 하지만 그 반대 경우는?" "정당하게 싸웠지만 실력이 모자라 진다 해도 앞으로 더 잘하라는격려로 생각하면 그것 또한 좋은 교훈을 얻는 셈 아니겠습니까?" 진삼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이야 딱 공자님 말씀이지만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쉽게 굴러간단 말인가. 그럴 리도 없겠지만 혹시 이겨도 거기 따라오는 부담이 있고, 혹시 지기라도 하면, 그것도초반에 지기라도 하면 하루아침에 '명망' 따위의 사치스런 단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처참한 위치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이런 일에 게거품을 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없었다. 진삼산은 어떻게 해서든 이번에는 아들을 말리런고 했다. 물론 잘되는 경우보다는 못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걱정해서 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소문으로 들었겠지만 그는 아들의 실력을 직접시험해 본사람에게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자앙의 고집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나절에 걸친 회유와 협박, 애원에도 진자앙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기울어져 가는 집안을자신이 일으켜 보겠다는 나름대로의 장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꼭 가야겠느냐? "죄송합니다." 이 말 한마디로 더 이상의 의논은 불가능해졌다. 진삼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데는 단 한 군데도 닮은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저렇게 한번 결정하면 물러설 줄 모르는 쇠심줄 같은 고집은 빼다 박은 것이 진자앙이었다. 그것을 그는 진자앙이 열두 살일 때 이미 알았다. 그러나……! "이번 일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진삼산은 더 아상 쇠귀에 경을 잃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의 능력으로 헤결이 안 되니 원군을 데리러 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원군을 부르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고대랑은 원군이라기보다는 적이었라. 그에게서 아들이 황당한 일을 하려 한다는말을 듣자마자 이번에는 부러지지도 않율 빈철대창을 거머쥐고는 일격예 때려 죽여 평생의 고생를 덜갰다며 펄펄 뛰는 것이었다. 물론 진삼산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마음에야 안 들지만 하나밖에없는 아들을 꼬치로 만들 수는 없었다. '두사람이 원래 싸우려고 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서슬이 퍼런 무기를 사이애 두고 옥신각신하니 분위기가 좋아질 리가 없다. 결국 대판싸움이 벌어져 전각의 기왓장까지 덜그럭거리며 비명을 지르니 겁에질린 하인, 하녀들이 집사에게 보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요. 그 집사야 평생 동안 두 사람을 보며 살아 왔으닌 자신의 분수를 알고일찌감치 진자룡애게 쫓아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진자룡이 해결을 보게 되었다. "보내 주자꾸나!" "안 됩니다!" "안 돼요!" 서로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이번에는 공동의 적에 대항해서 단단히 결합되었다. 그래서 부부라고 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진자룡이 한 발 물러섰다. "장안이 아니라 광주로 보내자는 말이다." "광주요?" 광주라면 광동성의 성도지만 진자앙을 거기 왜 보내자는 것일까? "너희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앙이 자기 능력을 모르고 있다는 것 아니냐?" "그렇지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도 자앙의 능력을 모르고 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요." "나는 그렇게 본다. 부모만큼 자식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하지만 사실은 부모만큼 자식을 모르는 사람도 드물지. 부모란 원래자식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그러니 광주로 보내 다른 사람에게 자앙의 능력을 시험해 보도로맡겨 보자는 것이다." "광주에 누가……?' "네 사촌 동생이 있지 않느냐!" "아!" "누님, 광주얘 누가 있다구요? 진황아는 다탁애 놓인 유과 둘을 집어 하나는 입에 넣고 다른 하나는 대기 상태로 든 채 대답했다. "오촌 당숙님이 거기 계시지." 그녀에게 오촌 당숙이니 진삼산에게는 사촌 동생이 되는 인물이 광주애 살고 있다. 이것은 매사에 주의 깊은 악조린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는 대기 상태에 있던 유과를 마저 입에 집어넣으며 다른 손은 다시 다탁에서 유과를 집어 드는 지극히 기능적인 일관 작업을 수행하고있는 진황아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금세 눈빛을 바꾸었다. 진황아가 한편 입 속의 유과를 우물거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시집간 이후 몸이 몰라보게 불어 거의 그녀의 어머니만큼이나 비대한 몸집이 되어 버린 진황아. 그래도 그 어머니의 동물적인 감각을 생각한다면 진황아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성격상 어머니의 포악함을 물려받았다면 그 감각도 같이 물려받았을 수도 있었다. 악조린은 사소한 실수로 대사를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보기 좋은 미소를 보내며 다시 물었다. "왜 소제는 진작에 들어 본 적이 없을까요?" 진황아는 유과를 씹다 말고 악조린을 향해 미소를 보내었다. 시집에서 쫓겨나다시피 이곳에 온 이후, 그와 노는 재미로 매일을 보내고 있는 그녀였다. 그것이 남자를 보는 시선인지, 혹은 십 년이 넘는 터울의 동생을 보는 시선인지는 그녀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동생이 그걸 몰랐다고 해도 신기할 것은 없지, 평소 교제를 자제하고 계시거든." 악조린은 그녀가 자신을 남자로 보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작년에 먹은 월병이 목구멍으로 다시 기어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그녀의 시선이 분명 남자를 보는 눈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호감 어린 미소를 유지했다. "왜요?" "그분은 관부에 계시거든!" "아……!" 관부와 무림이 원수 보듯 할 건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 친하지 않은것만큼은 분명했다. 진가장이 광동에서 차지하는 위치상 혹도의 인물들이 도움을 청할 때도 있는데, 그런 인물들은 관부에서 볼 때는 그저강도, 범죄자에 불과하니 말이다. 알게 되면 입장이 애매해진다. 진황아는 놀라게 해줄 것이 있어 잘되었다는 빛으로 생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분이 말이야……!" "그분이요……?" 악조린은 그녀의 기색을 예리하게 파악하고는 속으로 놀라게 하는게 소원이라면 놀라 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황아의 말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애써 연기를 하지 않아도 충분혀 진황아를 만족시킬 만큼 놀랐다. 진황아는 그분, 그녀의 오촌 당숙이 광동성의 형률을 주관하는 광동 제형안찰사라고 알려 준 것이다. "재형…… 안찰사요?" "음! 정삼품 광동 제형안찰사, 철판관으로 유명하신 진탁, 진 대인 어른이 그분이셔." "정삼품 광동 제형안찰사 철판관 진탁, 진 대인 어른이라……!" 악조린은 스무 자나 되는 그 긴 명호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되뇌다가 문득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고 낮빛이 변했다. "그럼……? "왜? 아는 분이셕? 무림인이 그분 이름을 알기란 쉽지 않은데?" 악조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단지 재미있는 사람이 그분 밑에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재미있는 사람?" "금문공 맹방평!" 금문공 맹방평이 근 백여 년을 포두로 있었던 복건성을 떠나 광주로옮겨 온 것은 삼 년여 전의 일이었다. 그의 일이라는 것이 어차피 상부의 명에 따라서 이리저리 임지를 옮겨 다녀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처럼 유명한 인물이, 그처럼 유능한인물이 그처럼 자주 임지를 옮겨 다리고, 또 옮겨 갈 때마다 시골 구석으로 밀려난 것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와 외고집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었다. 불법을 저질렀으면, 그가 고관이든 왕후장상의 아들이든 상관없이 법에 따라 처벌을 해버리는 그 대쪽 같은 성미가, 그를 아래에 두기도 껄끄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정적으로 그는 무림의 거마, 거흉들을 적으로 돌렸다. 어지간하면 시끄러워질까 봐 관부에서도 거마, 거흉들은 감히 건드리지 않지만 천하의 금문공에게 거마거흉이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 앞에서는 클 거 자를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잡혀가서 족쇄 차고 들어앉아 있기 싫으면 하는 수없이 금문공을 처리해야 했다. 무공으로는 안 되니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힘보다 때로는 강하고, 효과에 있어서는 엇비슷한 수단, 황금을 사용했다. 관부의 고관들애게 돈을 먹여 관할전이 다른 지방으로쫓아 보내는 것이다. 그곳에는 그럼 거마거흉이 없는가? 있었지만 금문공이 부임하는 순간 없어져 버렸다. 그러니 그곳에서도 돈이 관부로 들어가고, 금문공은 다시 새로운 임지를 향해 떠나야 했다. 이제 중원에서 보면 남쪽 끄트머리인 광동성까지 흘러 들어갔는데,다행히 여기에서는 더 이상 옳겨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돈을 가진 거마거흉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받을 상관이 없어서였다. 그의 직속상관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간 맨 꼭대기에 앉아 있는 인물, 황동성 재형안찰사 진탁은 돈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게다가금문공 맹방명은 그외 숙부인 찬기공 진자룡과 동격으로 취급되며, 친분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 돈의 힘에 떠밀려 이리저리 다니는 것을용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의 임기 동안만이라도 한곳에 정착해서 노후를즐기도록 했으면 하는 것인데 이제 그것이 안 되게 되었다. 누구의 힘에 밀려서도 아니고 바로 맹방평 본인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그는 포두 생황 일백 년을 마무리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허락해 주도록 집요하게 청원서를 넣었던 것이다. 진탁이 그 요청이 이루어지도록 하긴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중앙으로 파발을 띄워 가며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맹방평이 관할전에 상관없이범죄자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는 내용이었다. 진탁은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 더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느것하나 급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어느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없지만 이 많은 문건들을 처리하려면 사흘은 꼬박 걸릴 것이고, 그때쯤에는 또 이만큼 쌓일 터였다. 그런데 가외의 일이 또 생긴 것이다. 그것도 대충 처리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그는 사촌인 진삼산에게서 온 서한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아들을 보낸다. 삼황야의 어전시합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데,시험한다는 명목으로 적당히 혼을 내서 돌려보내라. 이것이 서한의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서한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대로시행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집안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하는 말을 그대로 알아들었다가는 큰일이 날수도 있는 것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원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는사촌 형인 진삼산의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만에 하나라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 같이 놀다가 맞아서 생긴 머리의 흉터가 그대로 있는 한그는 절대로 그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문제에 비하면 다른 물건들은 그야말로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그는 진삼산의 서한을 조심스럽게 문건들의 제일 위에 올려 두고,다른 문건등은 그 아래에서 하나씩 차례로 빼서 처러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잊을까 봐 매번 보고 기억하려고 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예서 첫 번쩨로 린 문전이 맹방평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다시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맹방평이 이 허가서를 가지고 중원얘 들어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할 때에는 아무리 맹방평이지만 그것은 위험 천만한 일일 뿐 아니라 죽음을 찾아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그래도 흔자 중원으로 보내기엔 안됐다는 점이었다. 하다못해 시중을 들 사람이라도 데리고 가야 할 것 아닌가,그런데 누가 그를 따라갈 것인가? 죽음의 길을 같이 갈 사함은 새상에 드뚠 법이었다. 그는 우씨성을 가진 서리 하나를 불러 적당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우 서리로서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도 중요 문건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니 맹방평이 대단히 위험한 일을 하려 한다는 정도는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업상 그는 포두, 포교들과 친분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기존에 있는 사람들은 추천할 수가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문득 그는 좋은 생각이 터올랐다. "오늘 부임하는 신임포교가 있습니다." 물론 좋은 생각이었다. 진탁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승낙했다. "오는 대로 맹 포두애게 보내게!" 그러고는 다른 문건을 꺼내 들다가 그는 진삼산이 보낸 서한을 책상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것을 주으러 가다가 그는 생각했다. '이러다 혹시 잊으면 어찌 큰일이 아니랴!' 그는 이번에는 이씨 성을 가진 서리를 불러 당부를 해두었다. "오늘 불산에서 청년 하나가 올 것이다. 철탑처럼 체구가 큰 놈이다. 그가 오면 최우선적으로 내게 보고해라. 만약 그것을 잊어서 착오가 생길 경우 맹세코 자네를 면직시켜서 밭이나 갈면서 살도록 만들어주겠다." 이 서리는 미리 겁부터 먹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대답했다. "저는 물려받은 밭도 없으니 만약 정말 그렇게 하시면 목을 매다는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요." 이렇게 해서 이 서리도 다른 어떤 일보다도 그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는 진자앙은 배를 타고 삼수를 따라 흘러와서 광주에 도착해 포구에 내리고 있었다. 진자앙은 배를 타고 올 때부터 어쩐지 뒤통수가 따끔거린다고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건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처럼 둔감한 사람이 뒤통수가 따끔거릴 정도면 그를 보고 있는사람의 눈빛은 단지 눈빛만으로도 살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것이어야 할 터였다. 그러니 그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눈빛은 비단 강렬했을 뿐만 아니라 비추는 반경이 넓기도 했다. 그 사람은 눈이 퉁방울만큼이나 큰 거한이었던 것이다. 진자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왜 그가 자기를 뚫어지게 보고있느냐는 점이었다. 배를 타기 전에는 전혀 모르던 사람 아닌가. 그렇다고 가서 물어 불 수도 없었다. 그가 혹시 그를 보고 있던 것이 아니면 어쩔 것이냐. 또 그가 실제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그게 뭐잘못되었느냐고 하면 어쩔 것이냐. 진자앙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 그냥 보는 대로 두고 포기해 버렸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편해졌다. 그 마음이 다시 불편해진 것은 포구에 내려서 사람들에게 물어 가며광동성의 아문을 찾아갈 때였다. 배에서부터 그를 쳐다보던 퉁방울눈의 사내가 이상하게도 그의 뒤를 쫓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진자앙이 누군가가 노려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도 드문 일이지마 누군가가 미행을 하고 있다고 느끼기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사내는 키가 유달리커서, 아마 진자앙만큼이나 큰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 틈에 섞여있을 때도 가슴팍부터 그 위가 전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드러나 있었다. 아이들 틈에 어른 하나가 끼여 있는 것 같으니 어찌 못 알아볼 수가있겠는가. 퉁방울는의 사내도 그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진자앙이 돌아볼 때마다 닭무리 속에 선 두 마리 학처럼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리고어찌 자신이 뒤를 쫓는 것을 들켰다는 것을 모를 것인가. 그래서인지 그는 걸음을 빨리 해 진자앙을 추월했다. 아마도 미행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자앙이 볼 때는 미행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단서가 곧 잡혔다. 진자앙이 아문을 찾아 한참을 더 걷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깨닫고 골목을 돌아 나올 때, 앞서가는 것 같던 사내도 괜히 행인에게무엇을 물어 보는 척하더니 뒤돌아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사내의 이마에 땀이 방울방을 흘러내리는 것을 진자앙은 가련하다는 빛으로 바라보았다. 저런 체구로 누굴 미행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그에게 미행을 시킨 상관이,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지만, 그놈이 나쁜 것이다. 진자앙은 미소를 보내, 수고했지만 이미 실패했으니 어지간하면 따라오지 말라는 뜻을 표시하고는 돌아서서 걸었다. 그런데 이 퉁방을눈의 사내는 포기할 줄 몰랐다. 둔탁찬 발걸음이 뒤에 다가오더니 이내 그를 지나쳐 갔다. 사내는다시 그를 추월해 앞서가고 있었다. 그때 진자앙은 그의 소매에서 한 통의 서한과도 같은 것이 떨어지는것을 보았다. 그는 얼른 주워 들었다. 사내는 자신이 중요찬 것을 흘렸다는 것도 모르는지 그냥 성큼성큼 걷고만 있었다. 진자앙은 걸음을 빨리 해서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미행을 했건 어쨌건 주운 물건은 돌려주는 것이 도리였다. 사내가 뒤돌아보더니 낮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진자앙이 그를 바짝쫓아오는 것이 두려워진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서서 아까보다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진자앙도 그에 맞추어서 걸음을 빨리 했다. 두 사람은 거의 뛰듯이하고 있었다. 사람이 가득 찬 대로가 두 사람의 거한에 의해서 물결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안 되겠군!' 물건을 돌려주는 것도 좋지만 타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진자앙이 사내를 불렀다. "여보시오!" 사내가 딱 멈워 섰다. 도망가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때에야 전자앙은 퉁방울눈의 사내가 누굴 미행하기도 어렵지만 진자앙 자신이 누군가의 미행을 피하기에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께닫았다. 이렇게 크니 누군들 그를 놓칠 것이냐. "저……!" 전자앙이 막 입을 열려 하는데 사내가 먼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너 키 크다! 됐냐?" "……?" 진자앙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대꾸도 못했다. 그렇게 갑자기, 그렇게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소리를 지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반면 사내도 세상에 이렇게 치졸한 놈은 처음 본다는 듯이 흥분하고 있었다. "세상에 나보다 큰 놈이 있다니…… 해서 본 거란 말이다. 그걸 가지고 화를 내고 쫓아와? 내가 오늘 바쁘지만 않았고, 처음 부임하는도중만 아니었으면 넌 내 손에 혼 좀 났을 텐데…… 운 좋은 줄이나알고 그만 쫓아와!" "그게 아니라……!" 사래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진자앙이 그 뒤를쫓아가며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걷더니 어떤 대문 안으로 북들어가 버렸다. 진자앙은 그 뒤를 쫓아가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물건 주워 준다고 남의 집에까지 쫓아 들어가도 좋은 걸까?' 그러는 사이에 사내는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전각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게 도대체 누구 집이기에 이렇게 큰가……?' 진자앙은 거대한 대문을 보고는 뒤로 한두 걸음 물러서서 다시 보았다. 그런데 대문 위에는 '광동성 제형안찰사사 아문'이라고 금박글씨로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아, 여기가!" 그가 찾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그러고 보면 사내나 그나 같은 장소를 찾아온 셈이었다. 그러니 앞에서 가나 뒤에서 가나 같은 길로 가고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자앙은 실소를 흘리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두리번거렸다'그런데 그는 무슨 일로 여기 왔을까?' 그는 먼저 편지를 돌려주고 나서 당숙 어른을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 누군가를 잡고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다들 바쁜지 그는 본 척도 않고 지나다니고들 있었다. 진자앙은 간신히 그 중 한 중년의 관복라리를 잡고 사내가 떨어뜨렸던 편지를 보여주었다. 말도 꺼내기 전에 관복짜리는 편지의 겉봉을 힐끔 보더니 손을 까딱하고는 앞서 걸었다. 따라오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그를 따라가며 말을 걸었다. "저는 진자앙이라고 불산에서 왔는데……!" 관복짜리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알아, 알아!" 그는 마침 저쪽에 걸어가는 역시 중년의 유생을 보더니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어이, 우 서리! 자네가 기다리던 사람이야!" 관복짜리는 바쁜 듯이 휑하니 가버리고 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자넬 기다리고 있었네!" 진자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이 날 어떻게 알지?' 봉투를 건네 주며 힐긋 봤지만 관부의 표기인 듯한 몇 가지 문양말고는 별것이 없었다. '불산'이라는 글자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건……!" 유생이 그걸 받아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됐어! 이건 이제 필요없으니 그냥 날 따라오게. 진 대인께서 이미내계 지시하신 것이 있어!" 진자앙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당숙님이 미리 얘길 해놓으셨구나!'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유생의 뒤를 쫓아갔다. 야버지와 할아버지얘게서 이미 얘기는 듣고 오는 길이었다. 여기에서 뭔가 시험이 있을 것이고, 그는 그 시험을 통과해야 어전시합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따로 당숙에게 연락을 할까 했지만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눈은 못 믿지만 당숙의 눈은 믿기때문이었다. -- 네 당숙의 시험도 통과 못 하면 정말 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그렇게 말끝을 흐린 할아버지의 뜻을 진자앙은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문 안의 여러 전각들을 한참이나 꼬불꼬불 돌아간 유생이 멈춘 곳은 마방이라는 현판이 걸린 한 채의 목조건물이었다. 마방, 쉽게 말해 마굿간이었다. 유생은 그 마굿간 한쪽으로 진자앙을 이끌더니 검은 나귀 한 마리를묶어 두고는 나무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데려다 주었다. 유생이 말했다. "어르신, 여기 데려왔습니다. 이 친구와 함께 가시라는 진 대인의분부십니다." 노인은 네모진 얼굴에 주름살은 가득하지만 뭉툭한 코와 꽉 다문 입술, 지금은 하얗게 새어 버렸으나 치켜 올라간 눈썹 등 완고한 인상을가지고 있었는데, 진자앙을 보고는 그 치켜 올라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체격만 크지 멍청한 놈 아닌가? 꼭 이 친구를 데리고 가야 하나?" 유생이 곤란하다는 듯 손을 비볐다. "구부러진 나무라도 손질하면 기등으로 쓸 수도 있다지요. 멍청하면짐이라도 지게 하면 되지요. 데려가시면 어디든 쓸모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대인 어른의 분부십니다." 다른 말은 별로 수긍을 않는 모양이지만 마지막의 대인 어른의 분부라는 말에는 그도 어쩔 수가 엄는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쓰면서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신참, 넌 저 나귀나 끌고 따라와!" 어디로 가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자앙은 이것이 바로 당숙의 시험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예!" 그는 얼른 대답하고 나귀의 목끈을 말뚝에서 풀고는 잡아당겼다. 그런데 나귀는 걸을 생각이 없는지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았다. 진자앙은 이번에는 조금 힘을줘서 다시 잡아당겼다. 나귀는 여전히꼼짝도 않았다. 유생이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한쪽에 서서 흥미 진진하게진자앙을 바라보았다. 나귀를 어떻게 다루는지 봐야겠다는 빛이었다. 전자앙은 이번에는 조금 심하게 당겼다. 나귀가 움칠하더니 네 다리로 버티고는 끌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진자앙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치지 않게 데려가려고 힘을 제대로 쓰지 않았지만 남들 보기에는 나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하지않겠는가. 보다 못한 유생이 크게 웃고, 나귀의 내력을 말해 주었다. 사실 이 나귀는 평범한 나귀가 아니었다. 자새히 보면 온몸의 털이 새까맣고 발굽은 중간에 줄이 하나 있어얼핏 보기에는 통발굽이 아니라 소발굽처럼 두 쪽으로 나뉘어진 듯했다. 개다가 이마에는, 옆으로 줄이 한 줄 간, 혹 같은 것도 하나 달려있어, 나귀가 아니라 용의 씨라고 하여 천리독각추라고부르는 영물이었다. 나귀에도 그런 말이 가능하다면 명나귀라고나 할, 그런 짐승. 영리하기도 해서 주인이 아니면 말을 듣지도 않고, 무리하게 다루려고 하면 골탕율 먹이기도 하는 놈이었다. 노인은 그를 골탕먹이려고 하거나 혹은 시험을 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진자앙은 이것도 하나의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시험을 통과할 것인가? 힘으로 끌면 할 수 없지는 않겠지만 귀한 놈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진자앙은 달래 보기로 했다. "자, 착하지! 너도 생각이 있으면 여기서 지금 이러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알 거다. 네 주인이 내게 널 맡겼다는 거 너도 알지 않니?' 나귀는 조용히 있었다. 진자앙은 나귀에게 다가가 등에 손을 얹었다. 긁어 줄 생각이었다. 그때 나귀가 펄쩍 뛰어오르며 됫발굽으로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팍--! "에구!" 유생의 비명 소리가 격타음과 함께 들렸다. 그는 이 나귀에게 맞아병신이 된 사람을 여럿 보아 왔었다. 지금 이 발길질을 보니 일부러시켰다 싶을 정도로 의도적이고, 여태 보아 온 것들 중에서는 가장세게 걷어찬 것이었다. 분명 저 고약한 늙은이가 이 청년을 데려가기 싫으니 걷어차도록 시킨 것이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청년이 다치는 것이 아니라 대신 또 누굴 데려가도록 해야 하나, 라는 문제였다. 그런데 청년, 진자앙은 끄떡없었다. 그는 가슴팍에 묻은 흙을 털면서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유생은 이 예상외의 일에 절로 감탄했다. "어?" 저만치에서 노인도 돌아보며 이채를 발하고 있었다. 진자앙은 나귀에게 다가갔다. "성질이 고약하구나! 사람을 함부로 차니 혼나야겠다." 푸르르--! 나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순간적으로 펄쩍 뛰며 다시 한번 진자앙의 가습을 찼다. 무림고수의 공격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신속한데다가 정확하기까지 한 공격이었다. 진자앙은 이렇게 쾌속한 공격은 피할 수도 없을 뿐더러 피할 생각도없었다. 그는 그대로 나귀의 발굽에 가슴을 내놓은 채 그 넓적다리를잡아 갔다. 팡--! 젼자앙의 가슴팍페서 다시 한번 격타음이 울렸다. 그순간 진자앙은나귀의 넓적다리를 잡아챌 수 있었다. 진자앙은 나귀를 그대로 몸통째잡아서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 등에 올려진 짐까지 함께였다. 나귀가 발버등을 쳤다. 강철 조각같이 단단한 발굽이 진자앙의 머리와 얼굴, 팔을 마구 때렸다. 그러나 진자앙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만 해둬 ! 그만 하지 않으면 던져 버린다!" 진자앙이 위협하듯 나귀를 몇 번 흔들었다. 나귀의 발버등이 잦아들었다. 진자앙은 나귀를 조금 내려서 얼굴을 마주보며 으르렁거렸다. "나도 알고 보면 무서운 사람이야. 너 같은 건 이대로 찢어 버릴 수도 있단 말이다. 내 말 똑바로 들어! 알겠어?" 나귀가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업었지만 진자앙이 다시 내려놓을 동안 얌전히 있긴 했다. 유생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노인이불렀다. "나귀하고 무슨 장난을 치고 있나! 빨리 와! 아니면 관두고!" "아닙니다! 갑니다!" 진자앙은 얼른 나귀를 끌어당겼다. 나귀는 조금 저항하는 듯하더니진자앙이 그 눈을 노려보자 고개를 숙이고는 걷기 시작했다. 유생이 뒤에서 감탄했다는 듯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동안, 진자앙과노인은 아문의 밖으로 걸어나갔다노인은 아무 말이 없었고, 진자앙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시험이 있으면 받으면 그만이었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들이 그렇게 아문을 나와 아까 진자앙이 걸어왔던 길을 거꾸로 내려가서 포구에 있는 배 한 척에 올라탄 다음이었다 진자앙이 알기로는 바다로 나가는 거대한 범선이었다. 나귀는 선창 아래의 우리에 가두고, 허름한 삼등 객실에 짐을 풀고기대어 앉아서 노인이 처음 물었다. "이름이?" "진자앙입니다." "양만리가 아니고?" "그건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그래, 그만 뤘네."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진자앙도 짐에기대어서 쉬었다. 이렇게 해서 진자앙은 광주에 새로 임명된 포교 양만리 대신 금문공맹방득을 수행해서 중원을 향해 떠났다. 삼수를 따라 바다로 나가고, 바다에서는 해안선을 따라서 복건성을지나 절강성의 항주까지, 보름이나 걸리는 길이었다. 양만리가 '철탑같이 큰 사내'를 찾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이 서리를 따라 안찰사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진탁은 대뜸 호통부터 질렀다. "웨 이렇게 늦었어!" "죄, 죄송합니다!" "네가 불산에서 온 놈이냐?" "예!" 사실 정확히 불산은 아니고, 그 외곽에 있는 작은 현에서 온 것이지만 대충 맞는 대답이었다. "내게 주라고 가져 온 게 있나?" 진삼산이나 진자룡에개서 따로 보내는 서한이라도 가져 왔느냐고물어 본 것이다. "예? 예!" 양만리는 얼른 소매 속을 뒤졌다. 그러다가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하얗게 바래졌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새로 광주성부에 속한 포교가 되라는 임명장을 꺼내 바쳐야 하는데 없는 것이다. "왜 그래?" "아니, 저……!" "설마 잃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게……, 잃어버렸습니다!" 양만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첫날부터 이게 무슨 꼴인가, 임명장을잃어버리다니! 진탁이 벌떡 일어나 불호령을 내렸다. "이런 멍청한 것! 듣던 대로 과연 멍청한 놈이구나! 네 부모들이 얼마나 속을 썩었을지 이제 알 만하다!" 양만리는 자칫 했으면 눈물을 떨굴 뻔했다. 잘못하면 욕을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임명되자마자 바로 면직되게 생기지 않았츤가,그는 털썩 무릎을 꿇고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게 진탁의 마음에 더 들지 않았다. 사내 자식이 그 정도 가지고울상을 짓는대서야 어디다 쓸 것인가. 저 정도 기개로 어전시합에 가겠노라고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따로 시험을 해보지 않아도 이미 안 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그래도 혹시나 하고 미리 준비해 둔 시험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데려가서 시켜 봐!" 진탁의 양 옆에 서 있던 포두 둘이 양만리를 일으켜 세워서 연무장으로 끌고 갔다. 포방 소속 포두, 포교, 보쾌들이 무술을연마하는 장소였다. 양만리가 들어서자 바로 포두 하나가 나와서 그와 맞섰다. 포두라고우습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 웬만한 무림고수 한둘쯤은 찜 쪄 먹을만한 고수들이 즐비한 것이 그들의 실정이었다. 굳이 맹방평의 예를 들지 않아도 도적질하지 않고 순수하게 무공만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의 하나가 이것이고, 제법 의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포꽤의 일을 하는 이도 드물지가 않았다. 또한 그 중에서도 여기 광동성 포방에는 굵직굵직한 고수들이 많기로 강남북에 유명했다. 그래서 진자룡과 진삼산이 진자앙을 여기로 보내 시험을 거치도록 한 것이었다. 이곳 포두들을 꺾을 수 있으면 중원에 나가도 그리 밀리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반면 체격은 그럴듯했지만 무공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양만리였다. 한번도 체계적으로 무공을 연마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데다가팔다리 하나쯤은 부러뜨려도 상관없으니 절대 사정을 봐주지 말라는안찰사 어른의 지시가 이미 내려 있는 터였다. "으아아아악--!" 양만리는 얼마 버티지 못했다. 천기공 진자룡의 손자가 온다기애 잔뜩 긴장했던 포두들로서는 싱거운 일이었다. 진탁이 물었다. "어떻게 됐나?" 팡동성 총포두인 구둔사령 여본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약하더군요!" 진탁이 잔뜩 인상을 그었다. "그래서 걱정이라네! 광동제일무가에서 그런 녀석이 나오다니!" 여본중은 아까 전부터 미심잭다는 표정으로 뭔가 말을 해야 하나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 너무 다치게 했나? 병신만 안 만들었으면 괜찮네. 혼을 낼 땐 눈물이 쭉 빠지도록 흔을 내야 버룻이 고쳐지지. 능력도 안되면서 욕심을 내는……!" "다치기야 겨우 팔, 다리 하나씩 부러뜨렸으니까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뭔가 이상한 것이……!" "도대체 뭔가? 뭐가 이상해?" "글쎄 한참 맞으면서 비명을 지르는데……, 그 비명이……!" 그는 주저하다가 결국 말했다. "양만리 살려…… 라고 하더라구요. 양만리라는 사람 아십니까?" 진삼산이 얼마나 분노했고, 진탁이 어떻게 빌었으며, 양만리는 고향으로 실려 가 어떻게 다시 돌아와서 치료를 받은 뒤 포교로 근무하게되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 제2권 끝 > [제십오장] 진자앙은 배를 타고 대력공을 익히고 맹방평은 밧줄을 던져 진자앙을 구하다. 광주에서 배를 타고 하룻길을 내려가면 주강구로 나오게 되는데, 강변에서는 멀리 마을이 보이지만 이미 바다나 다름없이 넓어망망무제의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섬들이 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다시 하룻길을 더 가면 대호도와 향항을 필두로만산군도의 무수한 섬들이 수평선을 가리고 나서니 배는 섬과 섬 사이를 곡예하듯 혜쳐 나가야 한다. 이곳 바다에는 모래톱이 많아 오랜 경험을 가진 수로 안내인이 배마다 타고 앞길을 지시해주지 않으면 오도가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미로 같은 길은 주강구를 마개처럼 막고 펼쳐져 있는 단간열도를 지나서야 끝이 나고, 그때부터 비로소 문자 그대로 일망무제의 대해양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부터 항주까지는 다시 십육 일이나 걸렸다. 그리고 그 여정동안 노인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하루에 서너 번씩 선실 멘 아래층의 우리로 가서 나귀를 보살피고 오는 것 외에는 어둡고 냄새나는 삼등선실 구석에 기대고 누워만있었다. 밥도 진자앙이 가져다 줘야 먹을 뿐, 무슨 사색이라도 길게하는지 노상 눈을 감고 지내는 것이다. 동행이 그러면 답답해서라도 먼저 말을 걸 만도 하련마는 진자앙은그럴 생각도 않았다. 그만큼이나 말이 없던 소삼중과 지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무공수련을 했다. 그들이 탄 배는 돛이 두 개 달린 중형 화물선, 흔히 이장선이라 불리는 일백 섬짜리 범선이었다. 먼 대양을 항괘하는 배 중에는 오백 섬을 실을 수 있는 초대형치 범선도 있다고 하지만,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다가 중간중간 포구마다 들러 여객을 내리고, 화물을 싣고 다음 포구를 향해 가는 연근해용의 배는 그 정도로 클 필요가 없었다. 자연 갑판도 그리 넓지 않고,선실도 적었다. 개다가 그와 노인이 탄 삼등선실은 최하층의 여객들이 타는 곳이다. 침상도 없고, 방 구별도 없이 그저 배 밑바닥 넓은 방 하나에 사오십 명이나 되는 승객들이 남녀노소의 구별도 없이 한꺼번에 밀어 넣어진 선실이었다. 바닥에 귀를 대면 그 아래로 지나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듯하고, 누가 토하기라도 하면 그 냄새가빠져 나갈 창문도 없는 답답한 밀실이었다. 게다가 천장에 매달아 둔등불 하나를 제외하고는 불빛도 없어서,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옆에 앉은 사람 얼굴도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승객들은 낮애는 거의 갑판에 올라가 숨을 돌리고, 밤에만내려와서 이리저리 비비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런 공간에서 어떻게 무공수련을 하는가. 진자앙은 낮에는 어두운 실내에 앉아 지식법을 수련하고, 밤에는 갑판에 나가 대력공을 익혔다 나머지 금강삼십육로의 수련과 연운십팔박도 연습하려 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파도를 따라 위아래로 오르내리고 좌우로도흔들리는 이중의 움직임을 갖는다. 파도가 잔잔한 날에도 인체의 중심감각이 혼들려 멀미를 하는데, 하물며 거기에서 뛰고 구르는 수련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연운십팔박은 둘째치고 대력공도 하기 어려웠다. 대력공은 중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필수인데, 배 위에선 그것이 힘들었던 것이다. 그냥 서 있으라면 못 서 있을 것은 없었지만 땅을 움켜쥐듯이 하고 대지와 자신을 일치시귀며, 주위의 어떠한 움직임에도 중심을 잃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자앙은 처음 사흘 동안은 눈을 감고 똑바로 서서 중심을유지하는 연습만 했다. 눈을 감고 서 있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아무 움직임이 없는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때도 눈을 감고서 꼿꼿이 서 있기란 어려운 일이니, 쉴새없이 움직이는 배 위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해내었다. 사람의 능력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라 어떤환경이든 참고 노력하면 적응할 수 있는 법이었다. 배의 움직임이 그의 신체에 하나의 운율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진자앙은 더 이상배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대력공을 수련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욕심이 생겼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대력공을 수련할 수 있다면 연운십팔박을 못 할 이유는 또 뭔가. 그가 예전부터 자신없어했던, 그리고 그 때문에 오히려 가장 열심히 했던 연운십팔박이었다. 그가 연운십필박을 굳이 하려고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산에서와는 달리 사람들이 많은 인가에서는 금강삼십육로 중 동적인 수련틀을 하기가 불편했다. 남들 있는 앞에서 철우경지를 하고 이어타정을 했다간 미쳤다고 손가락질받기 십상일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기회가 없어 하지 못했던 것을실천해 응기기로 했다. 연운십팔박 속에 금강삼십육로의 수련들을 섞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진 노육에게 부탁해서 사 온 사백 근의납으로 가능해졌다. 그는 그것으로 네 개의 고리를 만들었다. 출목보호대처럼 넓고, 하나하나의 무게가 백 근이나 나가는 네 개의 고리였다. 그것을 팔다리에 끼우고 연운십팔박을 수련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얘상대로, 그리고 그의 목적에 맞게도, 고리들은 그가 단지 그것들을 달고 걷기만 해도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같이 힘들게 만들었다. 이제 이 상태로 연운십출박을 수련한다면, 그레서 그가 사백 근의 무게를 몸얘 달고도 휘고, 구르고, 달릴 수 있게 된다면? 그와 체력은전보다 한결 상숭된 상테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는 창백한 달빛만이 비추이는 갑판에서 연운십팔박을 처음 시전했을 때에야 비로소, 대력공을 수련할 수 있을 정도로 중심을 잡은 것은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서 중심을 잡는 것과 계속 움직이면서 중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음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허리를 굽혔다 펴면 어느새 그는 쓰러져 있었다. 다리를 들었다가는옆으로 휘두르기도 전에 벌써 갑판을 굴러 저만치 난간에 부닥쳐 뒹굴고 있기가 일쑤였다. 그나마 그러한 난간이 없었다면, 그는 벌써 검푸른 바닷물 속에서 물을 이불삼아 잠들어야 했을 것이다. 온갖 고생을 하며 간신히 연운십팔박을 일 회 시전한 뒤에 그는 머리를 감싸고 앉아 고민에 빠져 들었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그와 부딪친 갑판이나 난간이 아파한다면 모를까, 그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난간이 부서질 위험만 없다면, 이리저리 부닥친다는 것은 그것으로 유타의 수련을 겸할 수 있으니 차라리반가울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중심을 잡을 수없는가가 문제였다. 무림인에게, 특히 그와 같이 맞는 것이 주특기요,유일한 장기인 무인에게는, 중심을 잡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일이었다. 가령 한 대 얻어맞아 쓰러져서 두들겨 맞고 짓밟혀도 가죽이 두꺼워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결코 이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누워 뒹굴면서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으니 너는 졌노라'고말한다면 상대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은 물론, 지고도 패배를 인정하지않는 비루한 녀석으로 낙인이 찍혀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심지어는 훗날 생길지도 모를 아들까지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중심을 유지하는 것은 그의 무공의 성패와도 관련이되는 중차대한 일이었다. 진자앙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어!' 그날 밤 그는 넘어지고 꼬꾸라지련서도 연운십팔박을 마흔여덟 번이나 수련한다. 아마 마지막얘 난간이 부서져서 밖으로 굴러 떨어질뻔하지 않았다면 그보다 훨썬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그는 뱃전에 매달려 있다가 간신히 갑관으로 끌어올려진 후 깊이 허리를 굴혀 감사의 뜻을 표혔다. 동행한 노인이 어느새 나타나 그의 옷자락을 잡지 않았다면 그의 유해는 물고기 뱃속에서 찾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를 뜯어 먹을 수 있을 만큼 이빨이 날카로운물고기가 있을 경우에 말이다. 노인은 한 손으로 진자앙을 들어을려서 가볍게 갑판에 올려놓았는데, 그건 뭅시 놀라운 일이었다. 몸무게만 해도 백이십 근은 너끈히나가는 대다 납 덩어리까지 차고 있어 적어도 오백이십 근은 나갈 진자앙을 한 손으로 들어을리고도 노인은 힘든 표정 하나 보이지 않은것이다. "멍청한 놈!" 노인이 말혔다. 비록 욕설이긴 했지만 배에 오른 후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건 셈이었다. 진자앙은 고개를 숙히고 머리를 벅벅 긁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있어야지!" 노인은 핀잔을 주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렇게 시끄러웠나?' 진자앙은 면목이 없어 노인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걸었다. 하긴 오백근이나 나가는 무게가 간판 위애서 튕굴었으니 쿵쾅거리기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소리가 배 밑바닥까지 전해지기는 어려을것이고, 또 그렇게 시끄러웠다면 다른 사람은 왜 나오지 않았을까? 진자앙은 그제야 그가 수행하는 노인이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생각을 했다. 그를 한 손으로 들어올린 것 하며, 천리독각추라는 영물에 가까운 나귀를 타고 다니는 것까지. 그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노인을 보다가 흠칫 놀랐다. 배의 흔들림에 따라 좌우로 약간 다리를 벌리고 걷는 진자앙과는 달리 노인은 뒷짐을지고 일 자로 걷는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게다가 그 뒷등에서 풍기는 태산과 같은 무게감. 진자앙이 여태 목표로 삼고 노력한 그 기도를 노인의 자세가모범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셈이었다. 진자앙은 멍청히 노인의 발만 보면서 따라 걸었다. '어떻게 해야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이 그 후 사흘 동안 그가 다시 속으로 수천, 수만 번을 더 떠올린 의문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어떻게 그렇게 걸을 수 있는가'라고 그냥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자앙은 물어 보는 대신 관찰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루 종일 노인만 지켜보고 있다가, 노인이 나귀에게 갈 때나 소피를 보러 갈때를 막론하고, 움직이기만 하면 그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다시한번 노인의 걸음걸이를 보고, 할 수만 있으면 그 비밀을 밝혀 보려는행동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그런 진자앙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홀이 지난 어느 저녁, 문득 입을 열었다. "응신양기의 공부는 좀 한 모양이군." 응신양기.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항심과 그 항심의 바탕이 되는 기공을 말한다. 진자앙을 칭찬한 셈인데 진자앙은 그게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직 몰라 되물었다. "예?" "대신 둔하군!" 진자앙은 그제서야 자기에게 말한 것인 줄 알아듣고 머리를 긁적었다. "그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노인이 물었다. "넌 왜 날 따라오게 된 것이냐?" "당숙 어른께서 보내신 것인데……" 진자앙은 어리등절해서 물었다. "모르고 재셨습니까?" "네 당숙 어른이 누군데?" "진 자, 탁 자 쓰시는 어른입니다." 노인의 인상이 묘하계 일그러졌다. "그럼 네가 천기홍화곤의 멍청이 손자라는 말이냐?" 젼자앙은 겸연쩍개 웃으며 대답했다. "예!" 노인은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긴 침묵이 흐르고 난 의에 그는조용히 말했다. "난 맹방평이다. 테 할아버지와는 안면이 있으니 아주 무관한 사이는 아니지." 이번에는 진자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놀라움 때문이었다. 광주로오면 먼발치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혹시 하는 기대는 했지만이렇게 동행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노인, 맹방평이 말했다. "그 인연으로 네게 한 가지 요령은 가르쳐 주겠다만…… 난 멍청이는 싫어하니 듣고 바로 깨닫지 못하면 그뿐, 두 번은 묻지 마라! 날졸졸 따라다니지도 말고." 그는 한마디로 짧게 중심을 유지하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중심은 네 안에 있는 것이지, 외물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자앙이 일어나 인사를 하려 하는데, 맹방평이 돌아 누워 버렸다. 더 이상 말하기도 싫고, 절을 받기도 싫다는 표현이었다. 진자앙은 일어나 선실을 나갔다. 맹방평의 가르침을 수련에 적용해보려는 것이다. 중자룡이 말해 준 창랑보의 구결이 그랬던 것처럼, 맹방평의 구결도지극히 간단괘 보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진자앙은 그것이 원론과 실제사아의 간격 때문이라고생각했다. 문제는, 생각만 했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원론적인 것, 즉 이치는 만뭍을 꿰뚫기 매문에 항상 옳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애 어떻게 적용되느냐는, 원론이 옳고 그르고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면, 원론을 아는 것은아무 소용도 얼다. 진자앙은 주저앉아 그가 알고 있는 것과 새로 들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일어나 미친 듯이 연운십팔박을 시전했다. 그리고 꼬꾸라졌다. 그가 생각한 것이 틀렸거나, 제대로 응용하지못한 것이다. 그러면 그는 다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원래 그가 이해하고 있던 중심의 의미, 요령은. 얼마나 대지와 밀착하느냐, 라는 것이었다. 대력공을 수련할 때, 땅을 움켜쥐듯이 발가락을 모으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닌가?' 실제로 발가락을 모은다고 해서 땅을 움켜쥘 수는 없다. 그런 자세를 취하면 기가 발바닥을 통해서 땅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것이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 그 흐름을 느낀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럼 뭔가……?' 진자앙은 머리를 싸매었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갔다. 배는 광동성을 지나 복건성에 속하는 해안을옆으로 하고 흘러가고 있었다. 하문, 천주, 광화의 포구들을 지나, 어제는 복건성의 성도인 복주부 포구에들렀다 떠나왔다. 이제 곧 절강, 항주까지는 사흘이면 도착할 것이다. 진자앙은 그 동안 낮이면 어두컴컴한 선실 안에서 생각에 잠기고,밤이면 갑판에 나와 뒹굴었다. 그러는 그를 보면서도 맹방평은 아무말도 보태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배가 폭풍을 만났다. 복건성과 절강성의 경계를 막 지날즈음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배에까지 날아와 먹이를 찾던 갈매기들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되었을때, 그때도 하늘은 그저 맑기만 했다. 그러나 선원들은 불안한 얼굴로 수군거렸고, 선장은 돛을 돌리고 노를 저어 조금이라도 더 해안에 가까이 붙으려고 애를 썼다. 날씨가 심상치 않음을 배에 탄 승객들이 느긴 때는 하늘 한구석에조그맣게 일어난 검은 구름이 점차 커져 순식간에 온 하늘을 덮어 버리고 난 후였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우박같이 굵은 빗방울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선원들이 이리 뛰고, 저리 구르며 돛을 끌어 내렸다. 더 이상 해안으로 다가가다간 암초에 걸려 좌초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선장이 무거운 닻을 선수와 선미에서부터 각각 하나씩 바다로 내렸다. 배는 지금 선 자리에서 그대로 버틸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먼 바다로부터 일어난 파도가 뱃전을 부숴 버릴 듯이 달려들어 거세게 부딪고, 그래도 남은 힘으로 배를 타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배는중풍 걸린 노인의 손처럼 걷잠을수 없이 떨려야 했다. 여태 바다에 익숙하다고 자신했던 승객들도 창자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쏟아내었다. 그 위로 사람들이 굴러다녔다. 옆이 위가 되로, 위가 아래로 되는 듯한격심한요동 속에서 제자리에 버티고 있을 사람은 아무도 언얼다. 단 한 명, 맹방평을 제외하고는. 진자앙은 선실 벽을 이루고 있는 널판지 사이의 흠에 손가락을 걸치고 떠밀려 다니지 않으려고 한껏 힘을 썼지만 몇 번이고 반대편 벽에굴러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닥에 못박힌 것처럼 벽을 기대고 앉아서 그저 눈을 감고 있는 맹방평을신기하개 쳐다보았탁. 그는 정말 바닥페, 혹은 선실 벽에 그를 잡아 주는 손이라도 있는것처럼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렇게 힘을 쓰는 것 같지 않은데도 그의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진자앙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쓰러져서 정신없이 반대편 벽까지굴러갔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는 그대로 선실의 벽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었다. 폭풍우를 만나면서 그는 자신의 공부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맹방평은 버티는데 그는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어떠한 상황을 만났든 간에 그 자신이 중심을 잡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수련은, 다른 누구와의 경쟁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만큼, 도달할 목표가 있는 한. 그리고 거기까지 갈 길이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고난과 맞서 싸우는 데에서 찾아져야 했다. 갑판 위는 끔찍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낮이었는데 지금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비바람만이 요란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선원들은 하나같이 몸에 밧줄을 감고 어떻게든 저 비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거기 진자앙이 버티고 섰다. 양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무릎을 약간 구부린 채 대력공의 기본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발이 미끄러졌다. 단박에 그는 비틀거리며, 뛰다시피 밀려가서 돛대에 머리를 박았다. 아프지는 않고, 그저 귀만 조금 멍한데 맹방평이 한 얘기가 그 멍한귀에 이명처럼 울려 왔다. -- 중심은 내 안에 있는 겉이지 외물과의 관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 어디에?' 진자앙은 기등을 잡고 일어서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거대한 삼각형의 첨탑 같은 막도가 밀려와 뱃전을 태리고 갑판 위를 물바다로 만들며 흘렀다. 진자앙은 그 파도에 쉽쓸릴 듯 미끄러져서 갑판 위에 유일한 목조건물의 벽에 부딪혔다. '내 안 어디얘 중심이 있나?' 문득 전에 중심을 안정시킨다는 뜻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사부도 아니고, 할아버지도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진자앙은 건물의 벽을 잡고 일어서면서 필사적으로 그 기억을떠올리려 애쌨다. 다시 파도가 배를 때렸다. 진자앙은 비틀거리며 기대고 있는 건물에부딪혀 갔다. 그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 일반적인 무공을 펼칠 땐 증심인 안정됐야 한다고 해서 보통 기해혈을 중심으로 한 하단전에 기를 모으지. 그러나 경공술에 있어서는 중단전 을 중싱으로 기를 운용하는 것이 옳아. 창랑보를 가르쳐 주면서 중자릉이 한 말이었다. '그게 지금 무슨 소용이지?' 별 쓸데없는 기억이 다 나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도 모르개 하단전에 기를 모았다. 의식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이절로 반응을 한 것이다. 그가 정신통일을 하고, 온몸에서 기를 쥐어짜서 모은 다음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수련을 해왔다면 지금 그렇게 쉽게 기가 모이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동작을 철하면 기가 흐르는 대로 두는 수련을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기를 모을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만 일으키면 기가 따라 일어나는, 오랫동안 내공을 익힌 내가고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그에게서 나타났다. 그리고 기적처럼 중심이 안정되었다. 분명 건물 벽에 가 부딪히려던 찰나였는데 한 치 차이를 두고 그의몸이 오뚝이처럼 바로 섰다. 그리고 두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진자앙이 오히려 어리등절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그리고너무도 쉽게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는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쏟아지는 파도가 갑판 위를 휭쓸고 지나가도, 돛대가 수면에 닿겠다 싶을 정도로 배가 기울어져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바보같이……!" 한참 만에야 그는 입을 벌려 스스로를 꾸짖었다. 하나 그게 실수였다. 입을 벌리면 진기가 흐트러지는 것을 몰랐던 탓이었다. 그의 발은그 순간 바닥에서 떨어졌고, 파도가 뱃전을 때렸다. 그는 그대로 허공에 떠서 바다로 떨어져 갔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진작에 단전에 진기를 모으면 중심이 안정된다는 것을 몰랐던가. 중심은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 의한다는 것을 왜 미처 깨닫지 못했던가.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깨달음의 기쁨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그는 서글픔, 흑은 분노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집에서 체계적으로 문공을 배웠다면 모른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간단한 진리를 그는 어렵게 배워야 했다. 그것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그자신 그러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깊이를 모르는 검푸른 바다로 떨어지오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헤엄을 칠 줄 모른다는 것을께달은 것은 광란하는 파도에 이미 몸을 담그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손발에 메달린 납덩이의 무게는 물속에서 그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진자앙은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해 갔다. 그때 눈앞얘 무엇인가 빛나는 물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금빛의 뱀처럼 보이는 무엇이었다. 진자앙은 총망중에도 그 뱀을 쫓아 버리기 위해 손을 저었다. 물속에서 그의 속도는 정말 보잘것없었고, 금빛 뱀은 몹시 빨랐다. 뱀은 어느새 그의 팔목을 휘강았다.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층격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진자앙은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물밖으로 건져지료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메, 금빛 뱀은 그의 팔목에서 풀려 맹방평와 손에 등글게 감겨지고 있었다. 그때에야 그 금빛 밧줄이 포교들이 범인을 묶을 때 쓰는 포승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맹방평이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나타나서 밧줄을 던져 그를 끌어올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갑판에 떨어져서도 그저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만짓고 있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감사의 표시조차 받지 못한 맹방평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것은 정말 제 할애비를 꼭 빼닮았군!" 배는 바다처럼 넓은 항주만을 거쳐 어디까지가 바다였고 어디서부터가 강이었는지도 모르는 사이얘 전당강으로 진입했다. 바다처럼 무수한 섬들을 얹고 넘실거리고 있는 그 푸른 물결을 따라 항주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해도 뉘엿뉘엿 떨어져 가는 저녁나절이었다. 맹방평이 진자앙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것도 그때였다. "난 널 데리고 다닐 여유가 없다. 부근에서 물어 보면 우리가 왔던길을 거부로 되짚어 가는 배가 있을 테니, 타고 돌아가라!" 무어라 욕을 해도, 또 어떻게 비웃어도 그저 웃기만 하던 진자앙의얼굴이 그 순간 창럭하게 바랬다. 끄는 맡은 사람들이 오가는 부듯가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제가 어리고 멍청해서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제발 돌아가라는 말씀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맹방평은 한껏 인상을 썼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사실 넌 여기 잘못 온 것이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라." 진자앙은 입을 벌렸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는 맹방평의 말을 되새기는 데에 전노력을 경주해야 했다. "잘못 왔다고요? 잘못 왔단 말이죠?" 맹방평이 그에게 잘못 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 그가 잘못한것이다. 아니, 어쩌면 길을 잘못 선택했을지도, 아니, 어쩌면 잘못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는 잘못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무가에 태어나지말았어야 할 체질의 아이, 그것이 그였다. 애시당초 무공을 포기하고다른 길이나 알아 봤어야 옳았을지도 물랐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진자앙은 고개를 힙껏 저었다. 이젠 절대 아니었다. 잘한 선택이건, 잘못한 선택이건 그는 무공을배웠고, 목표를 정했다. 이 길이 잘못된 길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가야 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맹방평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보처럼 히죽거리며 웃었다. "거역하는 것 같아 죄송스럽지만 전 못 돌아갑니다. 때려 죽여도 절돌려보내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맹방평이 답답한 듯, 화난 듯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는 손을 젓고는 말을 멈춰 버렸다. "관두자.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네 맘대로 해라! 죽든 살든 네 복이겠지."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진자앙이 벌멱 일어나 그 뒤를 따라갔다. 이번에는 진짜로 옷고 있었다. 시험을 볼 수 있게 된 것만도 어딘가 말이다.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맹방평은 밤이 되어도, 아니 어두워질수록 더욱 번화한 항주의 거리를 걷다가 안면객잔이라는 이름이 붉은 간판애 쓰여진 곳앞애 섰다. 나란히 서 있는 객잔들 중얘서도 가장 허름해 보이는 곳이었다. 어쨌든 진자앙은 객잔에서 자게 되는 것이 셍전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 이름이 마음애 들어 그저 좋았다. "안면객잔이라……, 여기에서 잠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군요." 맹방평이 그를 돌아보았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수다는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너처럼 멍청한 녀석하고는 더욱 그레.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알으면 절대로 입을열지 말도록! 알았나?" 진자앙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싱글벙글거리는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멩방평이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그리고 이름과 실제가 항상 부합하는 것은 아니야." 그외 말미 무슨 뜻인지는 곧밝혀졌다. 붉은 주렴을 옆으로 밀치며안으로 돌어서자마자 입구 옆에 서 있던 점원이 크게 외쳤다. "손님 드십니다!" 그는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장거(지배인)가 바로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장거는 앉아 있던 의자가 비좁을 정도로 비대한 사람이었는데, 그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신속하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맹방평과 진자앙의앞에 와서 섰다. 그리고는 실낱 같은 눈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함박옷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환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제 기억이 맞다면 여기 노장 어른은 한번 오셨던 분이군요. 그러니까…… 한참 전에 말입니다. 혹시 아니시라면세월이 제 기억력을 앗아 갔다는 점을 감안하셔서 널리 용서해 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일단, 저회 객잔이 일층에는 주점, 이층에는 다루를 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는 것이 만일을 위해 합당한 행동이겠지요. 뿐만 아니라 후원에는 손님들을 안락하게 모실 수 있는 방도 준비가 되어 있는데, 거기에 드시면 다섯 가지 과실, 다섯 가지 요리의 식사에, 따로 다과상이 나윰니다. 물론 각 사람이 각 상을 받지요. 그리고 젊은 계집애가 모시고서 노래도 부르고 술도 권하고……이령게 해서 한 사람의 숙박비까지 넣어 은 반 냥을 냅니다 두 분이면…… 금방 계산이 되지요? 한 냥입니다." 그는 비단 행동이 빠를 뿐 아니라 말도 빨랐다. 진자앙은 그의 등근볼에서부터 드러난 가슴팍에 이르기까지 겹겹이 접혀진 살들이 가공할속도로 흔들리는 것을 구경하느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를지경이었다. 사실은 그가 그런 것에 정신을 괄지 않고 귀기울여 들었어도 무슨말인지 몰랐을 것이다. 장거가 하는 말은 강남 사투리라, 평생 광동어만 사용한 그에게는 외국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원은 넓다. 그런 만큼 종족도 많고, 언어도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세 가지 언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데 진자앙이 어려서부터 해온 광동어가 그 하나요, 지금 장거가 말하고 있는 남방 사투리가 그 들이며 나머지는 하나는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로, 북경관화였다. 광동어야 광동에서만 사용되는 것이니, 흔히 황동 명문가의 자손들은 북경관화까지 같이 배우게 되는태, 그것온 강북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황명에 의혜서 환부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진자앙도 물론 그것을 배웠고, 유창하지는 않지만 듣고 말할 줄은 알았다. 그러나 지금 장거가 얘기하는 이 남방 사투리는 북경관화와 비슷한것 같으면서도 맡이 달라서 진자앙으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맹방평은 용케도 그의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예전얘 내가 여기 왔었턴 것은 맞지. 하지만 당신이 날 본 건 아닐거야. 그땐 아마 엄마 젖을 먹고 있었을 테니까. 어쨌든 우선 내 나귀나 보살펴 주게! 제일 좋은 자리에, 제일 좋은 사료를 주게. 참고로말한다면 저 녀석은 술을 좋아하지. 난 하루에 한번은 맑은 술에 깨끗한 콩을 삶아 주곤 한다네, 여기에서도 그런 대우를 받길 원하네. 알겠지?" 장거에 뒤지지 압을 정도로 장황한 말로 나귀를 부탁한 맹방평은 막상 그 자신이 묵을 밖어 대해서는 대충이었다. 원칙은 단 하나, 싸기만 하면 됐다. 그는 나귀률 마굿간에 보내도륵 지시하고 돌아서는 장거를 향해 말했다. 벙금 말한 그 방은 너무 비싸군 다른 방이 없다면 우린 나가야겠어. 내가 알기론 다른 방도 있을 텐데?" 장거의 두툼한 살은 표정을 숨기는 데에 유리한 점이 적지 않았다. 나귀를 최고급으로 모셨으니 사람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던 기대가 깨진 실망감을 두터운 살가죽으로 가린 채 그는 유창하게 말했다. "제가 젖 먹을 적에 오셨었다고요? 그럼 적어도 사십 년 전에는 오셨었다는 말씀이신데, 정말 오랜만에 오셨군요. 다시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는 거의 굽혀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동그란 허리를 간신히 조금구부려 절을 해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단골 손님께는 단골 손넘께 합당한 가격으로 대접을 해드려야겠군요. 그래야 다시 사십 년 후에 또 찾아 주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저희 객잔의 중급 방을 저렴하게 빌려 드리죠. 방은 아까와 똑같지만 식사는 여기 주점에서 하셔야 하는데, 과실도 있고. 데운 술도 있지요. 당연히 시중하는 계집애는 없고 손님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시고 놀아야합니다. 이령게 하면 한사람이 은 이 전이올시다." 그렇게 한바탕 퍼부어 놓고 나서 장거는 허리춤에서 수건을 꺼내어땀을 닦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진자앙이 숨이 찰 정도였으니 장거로서는 매우 무리한 운동을 한 셈이었다. 그래서 장거는 그런 무리한 운동을 다시 하고 싶지 않은지 '이번에는……?' 하는 기대 섞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맹방평은 그런 노력을 보고도 냉정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저었다. "그보다 싼 방은?" 장거의 혈색 좋던 안색이 이젠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그는 한숨을내걸고는 돌아서서 걸었다. 맹방평과 진자앙이 그 뒤를 따랐다. 주점 안에는 사람이 많았고, 하나같이 한껏 소리를 질러 가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두 명의 점원이 쉴 사이도 없이 음식을 나르고 주문을 받았다. 그 복잡한 자리 사이를 장거는 요령 좋게 어디 부딪히지도 않고 걸어서 주방 옆에 뚫린 쪽문을 라져 나갔다. 불도 켜 있지 않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조금 걷자 거기 몇 개의 문이 보였다. 장거는 그 중 하나의 문을 열었다. "여깁니다." 좁은 방안에는 옆으로 몸을 돌려 걸을 수 있는 공간말고는 전부 흙으로 쌓은 구들이었고, 그 구들 위에는 짚이 깔려 있었다. 그것과 벽한쪽에 걸린 등잔을 제외하면 아우것도 없었는데, 등잔월 기름도 떨어져 가는지 손바닥만하게 뚫린 창문으로 스며 들어오는 달빛이 오히려밝을 지경이었다. 장거가 심술궂게 웃었다. "밥은 주방이 바쁘지 않을 때 직접 와서 터 드시면 되고, 계산은 나중애 나가실 때 돈 되는 대로 주시면 됩니다." '설마 이런 방에서 자랴' 하는 표정인데 멩방편은 방을 둘러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내가 전에 여기 왔을 메도 이곳애서 묵었지." "그럼 편히 쉬시지요." 장거는 뛰어나온 입을 가리지도 않고 돌아가 버렸다. 맹방평은 구들에 올라가 대충 누웠다. 진자앙이 그 한쪽 구석에 가서 앉았다. 그런 상태로 한참이 지났다. 맹방평이 문득 물었다. "내가 왜 이런 허름한 방을 잡았는지 이상한 거냐?"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먼저 물었을 때는 말을 해도 된다는것을 떠올리고는 입을 벌려 대답했다. "예!" 계속 궁금해 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배를 타도 삼등선실, 방을잡아도 돼지우리에 가까운 곳을 잡는다는 것은, 십대고수의 일 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맹방평이 간단히 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돈이 없어서다." "아……, 예!" 물론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귀는 왜 그령게호강을 시킨단 말인가. 멩방평은 그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나귀는 내 가족이야." 자기는 대충 굴러도 가족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진자앙은 다시 물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금문공께서 돈이 엄다는 것은 이해가 가치 않는군요." 맹방평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름애 금이 들어 있다고 호주머니에도 들어 있는 건 아니지. 멍청이 같은 녀석! 넌 내가 어디에서 돈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 봉록은 한 달애 쌀 스무 섬 , 은자로 열 냥밖에 안 된단 말이다. 그나마 오래 근무해서 오른 게 그거야. 처음에는 한 달애 쌀 반 섬 받고서 일을 해야 했었지, 이번처럼 공무로 나오면 경비가 지급되지만 나중에 돌아가면 어디에 썼늘지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데, 술값같은 건 계산에 올릴 수도 없단 말이다." 말끝마다 진자앙에게 멍청이라고 하지만 강호에 떠도는 평으로는그 자신만한 멍청이가 없었다. 무공으로 밥벌이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포두말고 다른 직업이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숱한 사람이 포두를, 아니면 포교라도하려 하고, 또 고수일수록 그런 일을 하는 것인가. 매월 나오는 봉록이 그가 챙길 수 있는 전부라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는 권력이 있고, 권력에는 황금이 따라다닌다. 그게 정답이었다. 봉록 같은 것은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지만 뒤로 몰래 들어오는 그런 재물이 없다면, 뭐가 좋아서 포두 노룻을한단 말인가. 그런데 맹방평은 그런 면에서는 벽창호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던지라, 백년 동안 포두 노룻을 하면서도 떡고물 한번 받아 본 적이 없는것이다. '그러고도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해왔으니 멍청이라 아니할 수 없다' 라는 것이 강호의 세월이었다. '내게 돈이 그나마 좀 있으니 이걸로……?' 진자앙은 품속에 든 돈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아들이라고떠나기 직전에 아버지가 집어 준 여비였다. 그러나 지금 그 돈을 꺼내기에는 꾄지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맹방평이 받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진자앙이 주머니를 놓고 손을 례는데 다른 물건이 손에 닿았다. 사각형의 모서리를 가진 상자였다. '이걸 왜 주셔서……!' 진자앙은 가만히 눈썹을 찌푸렸다 이 상자는 할아버지가 준 것이었다.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가 화룡동에서주운 벽력탄들을 거기 담아서 주신 것이다. 진자룡의 말로는, 직접 나가서 주인을 찾아 줄 시간이 없으니 진자앙더러 나간 김에 돌려주고 오라는 것이었다. 특별히 이중 삼중으로안전장치를 해두었으니 그렇게 위험하진 않을 거라고 했지만 영 불안한 물건이었다. '괜찮겠지.' 걱정한다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자앙은 그냥 구들위에 드러누웠다. 주점이 멀지 않은 탓인지 주객들이 터드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 왔다. 창문 밖에서는 간옥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고, 어쩐지 악취도 나는 것이, 아무래도 변소가 바로 옆인 것 같았다. 진자앙은 피식 웃었다. 안면객잔이란 이름과 어쩌면 이렇게 정반대일 수 있는가. 들어을 때맹방평이 한 얘기가 이계야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맹방평은 미리 알고 온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묵는 이유가 돈이 없어서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려는 건 아닐까?' 진자앙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그 속애서 필요한 정보를 취하려고 일부러 이런 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필요한……? 어디에?' 진자앙은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맹방평이 왜 항주까지 왔는지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점을…… 자신을 시험하는데 왜 굳이 여기까자 와이 했을까? 그를 시험하는 데 맹방평까지 동원되어야 하는 것일까? 진자앙은 할아버지가 맹방평와 안면이 있기는 하지만 친하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했다. 만난 적이 거의 없으니 친분을 쌓을 일도 없었을테고, 마음속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관부의 사람들을 만나려하지 않는 것이 진자룡의 태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저기……, 아까 잘못 왔다고 하신 게 무슨 뜻입니까?" 대답이 없었다. 진자앙은 그 무응답이 대답하기 싫다는 것인지, 아니면 벌써 자고있어서인지를 몰라 잠시 망설였다. 더 물어 봐야 할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때 맹방평이 일어나 앉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싫어서도, 자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기가 막혀서였을 뿐이었다. "멍청한 녀석! 느려도 한참 느리구나! 넌 양만리라는 신참 포교와바뀐 거야!" 맹방평이 짐작한 것을 대충 얘기했다. 그것은 거의 사실에 근접한것이었고, 진자앙은 양만리로 짐작되는 인물을 직접 보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은 명확했다. 진자앙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맹방평이 피식 웃었다. 실소든 무엇이든 진자앙 앞에서 그가 웃는것은 처음이라진자앙도 마음이 풀려 같이 웃었다. "이렇게 됐으니 하는 수 없죠. 그 양만리라는 분이 했어야 할 일을제가 대신 해드리겠습니다." 맹방평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 그러겠다고? 후회하지 않을 테냐?" "물론입니다. 제가 아니었으면 그분이 왔을 텐데, 저 때문에 못 온것과 다름이 없으니 제가 그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맹방평은 고개를 혼들며 누웠다. "글쎄 힘들 텐데……?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고." 진자앙은 그가사양하는 것이 오히려 미안해 열심히 졸랐다. "아닙니다. 일을 마치실 때까지 옆에서 시중을 들게 해주십시오. 배에서도 두 번이나 절 구해 주셨고…… 위험한 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 그러다가 그는 문득 자신이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을 기억했다. "아, 참! 중추절까지는 장안에 가야 하는데……!" "걱정 마라! 나도 대충 그쪽으로 가니까 중추절까지는 거기 있게 될게다. 중도애 죽지만 않으면……" 진자앙은 맹방명의 말에 깔린 묘한 조롱기는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장안까지 시간 맞혀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아했다. "다행이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안심하고 눕던 진자앙은 그제야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저, 이런 걸 여쭤 봐도 될지 모르갰습니다만……, 무슨 일로 나오신 겁니까? 그러니까 이제……!" "무슨 일을 하게 되느냐는 것이지? 포교가 수배자 잡는 일말고 무슨일이 있갰느냐!"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했다고 진자앙도 후회하고 있는 차애 맹방평이 한마더 더 했다. 그것이 폭탄과도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무림사마를 잡으러 가는 거다." "예?" 진자앙은 자리에서 튀어오르듯이 일어났타. 낮은 천장이 머리에 부딪혀 먼지가 쏟아졌다. 그는 아마 품속에 있는 벽력탄이 한꺼번에 터졌어도 이 정조로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뭐라고요?" 맹방평은 갑자기 먼지를 뒤집어쓰게 되어 화난 표정으로 일어나다가, 얼떨떨해 하는 진자앙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다시 누워 버렸다. 그는 무림사마를 잡으러 강호로 나가는 중이었다. 그것이 이번에 그가 자청한 임무였고, 그의 포두 생활 일백 년을 청산하는 마지막 임무였다. 그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가장 잡고 싶었던, 그러나 손이 닿지 않았던 자들을 잡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함으로써 자신의 생을 정리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광주에 있던 삼 년, 그걸 위해 그 모든 시간을 바쳤다." 무림사마가 어디 있는지 정보를 찾고, 그들의 범죄 행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그들을 고발해서 수배장이 나오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그래서 삼 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던것은 바로 관할권을 넘어 수배자를 잡아도 된다는 허가였다. 그것이진탁의 힘으로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제 잡으면 되는 것이지!" 맹방평은 이번에는 전혀 조롱기가 담기지 않은 웃음을지었다. 그러나 진자앙에게는 그것이 아까의 웃음보다 훨씬 보기 흉했다. 맹방평의 그 웃음에는 묘한 짓눌림, 얼마 간의 증오에 분노가 덧붙여진비틀린 무언가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여기에도 그 중 하나가 있습니까?" 맹방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저었다. "넷 중 둘의 거처는 확실하다. 그들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으니까…… 그러나 나머지 둘은 좀 어렵지. 여기는 그 중 하나가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이다." 넷 중 둘이 있는 곳은 찾기 쉬웠다. 둘 다 혼자가 아니라 세력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급여화는 강북 최대의 흑도문파인 화륜맹의 수좌이니 그 속에 있을것이고, 쾌여풍은 비록 돌아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오백이나 되는수하들, 광풍사의 무리들을 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달랐다. 운리무는 구름 속애 숨은 것처럼 종적이 없는 데다가 지난 삼십여년 간 강호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죽었다는 소문도 었었다. 영리충도 마찬가지로 찾기 어려웠다. 색마의 속성상 잘생겼다는 소문만 파다하지, 그 용모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 행적을 말할 사람도 없다. 은밀히 헹동하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역용술 때문이었다. "그놈이 사실은 제일 찾기 어려운 놈이다." 맹방평이 말했다. "내가 나온 걸 안다면, 그리고 내 목적을 안다면 숨어서 십 년이고이십 년이고 나오지 않을 놈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돕지 않으면 거의찾을 가능성이 없지. 하지만 다른 자들을 잡기 전에 한번 들러 보지않을 수도 없었다." "여기 그가 있단 말쉽니까? 영리충이……?" 맹방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곳이 있다. 최근 동태가 심상치 않은 곳이 있는데……나는 그 배후에 그가 있지 않나 의삼하고 있다." "그게 어딥니까?" "등천비릉문."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름을 되뇌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인데……, 등천비룡문…… 아니, 등천비룡문이라고요?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최근 아버지의 골머리를 앓게했던 곳이 바로 그곳 아닌가. "들어 본 이름이냐?" 맹방평의 눈이 번뜩였다. 진자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와도 아주 관련이 없진 않군요." 그 이름이 진자앙으로 하여금 마음을 결정하게 했다. 처음 맹방평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황당한 일에 말려들었다는 느낌뿐이었다. 물론 무림고수라고 해서 국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지, 무림십대고수, 그것도 하나같이 백살이 넘은 사람들이라면 이젠 거의 신선에 가깔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하다못해 세속에서 벗어난 느낌이라도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여태 그가 만나 본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 아니, 사실 할아버지인 진자룡도 탈속한 느낌보다는 그저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올 뿐이니, 그의 시각에는 그리위대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물며 그 외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본 뇌공 원굉도에 이제 금문공 맹방평까지 포합해서 무림삼공은 다 만나 본 셈이고,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영리충도 보았었다. 십대고수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지만 거의 그들과 동렬에 속한다는 궁서생 중자릉도 보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이상한 것일까. 어떤 점에서는, 특히 그들이 잘하는 방면으로는 분명 특별하지만 그외의 방면으로는 보통 사람 이하라고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 사람보다 정정해서 그런지도……!' 진자앙은 구들 위 짚자리에 누워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면 무림십대고수는 둘계치고 한 방면에서 이렇다 할 성취를 이룬다는 것이 쉬운 일이던가. 보통의 능력, 보통의 노력에 보통의 집념으로는 그런 성취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 방면의끝을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조금웍 이상하다고 한들 무슨 흥이 될 것인가. 그의 사부 소삼중만 해도 <삼선유서>를 얻은지 삼십 년, 처음 결심한 테부터 치면 근 사십 년을 한 방면으로 정진하고도 결국엔 비참한최후를 맞이하지 않았턴가. 그의 사부 소삼중이야말로 평범한 사람,운이 안 되는 사람은 노력해도 안 된다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사부님……!' 사부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임종도--분명 돌아가셨을 것인데--지켜보지 못하고 무덤도 마련해드리지 못한 못난 제자의 슬픔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키는 대로 산을 내려오고, 시킨 대로 다시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은, 그것띠 사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셍각되기 때문이었다. 눌물을 흩뿌리고 통곡을 해서 달레기에는 사부의 한이 너무 갚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장안으로 가는 것이다. 집을 떠날 메는 진가장의 위명을 드높이겠노라고 했지만, 사실 그가생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진가장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로 이미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금강당은 그렇지 않다. 그는 금강당 오 대 당주의 신분으로 비무대회에 참가해서금강당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우승 같은 것은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오 대를 내려온 금강당의 오기와 집념을 천하에 확인시켜 주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위해장안에 가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밤은 깊어 가고, 이름과 달리 시끄러운 안면객잔의 소음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제십육장] 맹방평은 영리충을 찾고 진자앙은 혁련가와 싸우다. 다음날 아침, 맹방평이 새벽같이 간 곳은 항주부 포도아문이었다. 물론 진자앙이 나귀를 끌고 그 뒤를 따랐다. 이 시대의 모든 관청은, 해가 뜰 때 문을 열고 해가 진 뒤에 닫는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관은 민의 심부름꾼이라는 위민사상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구호가 실제와 부합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나친 욕심이었다. 여기 항주부 포도아문도 예외는 아니어서,그 주홍색 대문이 열린 것은 해가 닷발이나 걸리고 대로에 사람들이오가기 시작한 지도 한찹이나 지나서였다. 맹방평은 그때까지 아무 불평도 없이 기다렸다. 포도아문을 마주보는 대로 건너편 큰 집의 처마 아래에 앉아서였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비로소 정식으로 신청하고 항주부 포도아문의 대포두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진자앙이 보기에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가맨발로 뛰어나와 반기지는 못할망정, 금문공 맹방평을 기다리게 만든다는 것이 있을 수나 있는 일인가 말이다. 그러나 항주부의 대포두 금안조 구양은은 그런 무례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깍듯한 예의를 차려 맹방평을 맞았다. 그리고마찬가지의 예의로 정중하게 맹방평의 요청을 거절했다. "노선배님의 충정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는 매우 안타깝다는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관내의 범죄기록을 보여 달라는 것은 월권행위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선배님이라도 그건 안 될 일이지요." "물론 알지만……, 특별한 것도 아니고 일개 강호문파에 관해 내사한 자료를 보여 달라는 것인데 어렵단 말이오?" 구양은은 양손을 벌려 보였다. 마음으로는 정말 도와 주고 싶지만규정상 그렇게 못 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람다는 표현인 듯했다. "규정은 규정이니 어쩔 수 업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할 말은아니지만…… 노선배님의 경우처럼 무림얘 명망이 높으신 분은 그러셔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같은 무명소졸은 무림의 일에 되도록 참견을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지요. 물론 그들이 두드러진 악행을않는 경우입너다만……!" 진자앙은 뒤예 시립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구양은의 태도에는 묘한 구석이 적지 않았다.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그가 취하는 정중한 태도의 뒤에는 조롱기가담겨 있는 듯한다. 어쩐지 태도를 꾸며 가며 말하는 것같이 보였다. 특히 그런 별호가 붙게 된 원인일 것으로 보이는 그의 노란 눈은 인상이 좋지 않은 정도를 넘어 혐오감마저 느끼게 했다. 그의 횐자위는야수의 그것처럼 노란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맹방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기한 모양이었다. 구양은이 따라 일어났다. "못 도와 드려서 죄송함니다. 하지만 일이 생기면 꼭 도와 드리도록하지요." 맹방평은 손을 휘둘러 보이고는 나가 버렸다. 진자앙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진자앙은 뭔가 억울한 기분이 적잖게 들었다. 처음부터 느끼던 것이지만 도대체 무림십대고수의 일 인이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이곳 항주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지만별호도 생소한 금안조 구양은 따위가 관부 내의 서열이 높다고 천하의맹방평을 저렇게 대하다니. 처음 접해 보는 바깥세상의 모습은 그가 생각해 오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그와 달리 맹방평은 별로 억울한 기색이 아니었다. 사실 그 표정을 뚫어볼 수 없긴 하지만. 그는 그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객잔에 돌아와 늦은 아침을 먹을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방에서 대충 말아 준 소면 한 그룻에 싸늘하게 식은만두 몇 개, 차 한잔을 마시고 나자 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움직이기 시작한 그는 그러지 않을 때의 그와는 전혀 달랐다. "따라올 테냐?" 진자앙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맹방평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그 다음엔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가볍게 털고 나서자 그는 더 이상 초라한늙은이가 아니었다. 주름 잡힌 얼굴 깊숙이 자리잡은 가는 눈에서 심혼을 꿰뚫을 듯한 빛이 쏘아져 나오며 그의 눈은 한 순간에 날카로운매의 눈이 되었다. 허름한 옷에 어깨를 구부리고 걷지만 거리에 가득한 화려한 옷을 입은 행인들 틈에서도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는 힘이그에계서 느껴졌다. 겉모습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는 이제 권력에 밀리고 세상에 치여오그라든 늙은 포두가 아니었다. 이재야말로 그는 광동성의 늙은 포두맹방평이 아니라 무림십대고수의 일 인인 금문공 맹방평인 것이다. 진자앙은 맹방평의 뒤를 따라가면서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한 순간에저리도 달라 보일 수 있조지 의아괘 랬다. 맹방평에게 무엇이 있기에그렇게 되는 것인가. 맹방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멈추지도 않으며 번화한 항주부 서문대로를 따라 걷다가 풍예문이라고 불리는 항주성서쪽 성문을 나서 방향을 남으로 틀었다. 항주외 서쪽애는 천하에 이름어 난 서호가 있고, 그 서호의주변은 전체가 하나의 명승지라 할 정도의 절경과 유적들이 퍼져 있어, 성밖이라지만 번화가나 다름없이 사람이 많았다. 맹방평은 그 서호 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갔다. 묘한것은, 남들눈에 특이해 보이지 않게 보통의 노인들처럼 천천히 걷는 그를 진자앙의 걸음으로 따라가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뒤에서 진자앙이 보기에는, 멩방평이 보통으로 걷는데 주변의 경관이 획획 지나가는 것 같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뒤를 따라가는 진자앙만이 맹방평이 그렇게 빠른 것을 알고 행인들은 눈치를 못 채고있다는 점이었다. '이러다간 놓치겠군!' 진자앙은 체면불구하고 뛰기 시작했다. 덩치라고 철탑만큼이나 큰 사내가 사람들 북적거리는 곳에서 뛰기시작했으니, 행인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달려오는 말을 피하듯이 분분히 옆으로 비켜서면서 욕을 해대었다. 다행히 진자앙은 그 욕들이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욕이나 그냥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소리나 다 같은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한 시진은 족히 달린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맹방평이 보이지 않았다. 진자앙은 그 자리에멈춰 서서 두리번거렸다. 낮선 곳에 왔으니 어린애나 마찬가지 신세인데 보호자를 잃어버린셈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진자앙이 돌아보자 거기 맹방평이서 있었다. 그는 그들이 서 있는 호숫가의 길을 가로질러 저편 언덕에 서 있는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높다란 붉은 담장 너머로 높은 누각들이 보였다. 대문이나 누각의 형태로 보아 절이나 도관 같진 않았다. 게다가 대문 옆에는 긴 의자를 가져다 놓고 몇 사람의 청년이 앉아서 노닥거리고 있는데, 얼른 보기에는 문을지키는 무사들로 보였다. 그곳이 맹방평의 목적지였던 모양이었다. 진자앙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동안 맹방평은 대문으로 다가가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한가하게 앉아 있던 청년들이 일어나 앞을 가로막았다. 맹방평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청년들은 그것을 보더니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 심지어 어떤 청년은 맹방평에게 손가락질까지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치로 보아서는 이상한 노인네가와서 시비를 걸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맹방멱은 그들과 더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청년들 사이를 가로질러 나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청년들이 험악한 인상으로맹방평에게 손을 뻗쳤다. 그 순간 진자앙은보았다. 아니, 보지 못했다. 청년들이 맹방명에게 손을 련친 순간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는 것은 분명히 보았는데, 그 원인이 되었을 맹방평의 동작은 단 하나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맹방평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진자앙이 얼른 따라 들어갔다. 청년들은 혹은 땅바닥에, 혹은 담장에 처박혀서 신음하느라 그들을 잡을수가 없었다. 대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마당이 나왔는태, 그 중심얘 푸른 돌이 깔려진 것으로 보아 길을 만들어 놓은 듯했다.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늘씬한지용의 선을 자랑하는 누각들은 그 한참 안쪽, 다시 한 줄의 담광이 가리고 있는 그 너머에 있었다. 맹방평과 진자앙이 그 담장을 향해 걸어갈 떼였다. 방금 내던져졌던청년들이 들어와 소라를 질러테었다. 그 금리를 들은 사내들이 달려나왔는테, 그 중몇은 파른 콧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어딘가로 보고를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담장 앞예서 맹방평과 진자앙은 다시 제지되었다. 그때에야 진자앙은 맹방멱이 보여 주는 것이 뭔지 알았다. 금색 바탁에 붉은 글씨가세겨진 금패였다. 글씨는 포, 단 한 자였다. 멩방평이 외쳤다. 그의 말은 강남 사투리가 아니라 북경관화였기 때문에 진자앙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공무 수행 중이다! 본관을 가로막는 자는 법에 따라 처단할것이다!" 그 말을 들은 사내들의 반응은 대문 앞에 서 있던 자들과 거의 대동소이했다. 그리고 다시…… 문에 접근하려던 맹방평을 막던 청년들이당한 것 같은 결과가 나왔다. 진자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바로 옆에서 주의 깊게 봤는데도 여전히 맹방평의 동작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얼핏 본 거라고는 맹방평이 어깨를 잠시 들썩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내들이 날아가더라는 것뿐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추리는 맹방평이 눈에 안 보일 정도로빨리 손을 움직여 사내들을 집어던졌다는 것이었다. 고수의 동작을 보는 것은 무공 수준이 일정 정도 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진자앙은 어차퍼 계통이 다른 무공을 익혔으니 비교가 안 되고, 또 원래 이목이 영민하다든가 하는 것과는 담을 쌓은 몸인지라 보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진자앙은 맹방평의 동작을 보려는 것은 포기하고 그냥 뒤나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나마 그것도 쉽지 않은 것이 그도 두 사람을 뚫고 들어가야 했다. 사람이 많아져 맹방평에게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덤벼 오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 다 장봉을 휘두르며 덤벼 오는데, 진자앙은 어떻게 그들을상대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무공을 배운 이후 싸우는 것은 이번이처음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공격을 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으니 뾰족한 방법도 생각나지 않는 데다가 동작이 느려, 그가 '뭘 할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는 이미 두 자루의 봉이 그를후려치고 있었다. 빡--! 빠악--! 진자앙은 어께를 으쓱혔다. 어떻게 대웅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 두사람이 가르쳐 줄 셈이었다. 맞아도 별 상관이 언으니 그냥 아무 대응을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는 그가 걱정이 되는지 뒤돌아보는 맹방멱을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다가갔다. 그런 그를 향혜 다시 두 자루의 봉이 휘둘러졌다. 빠각--! 팡--! 머리를 향해 후려쳐진 봉은 부러져 나가고, 등판에 휘둘러진 봉은부러질 듯 휘어지더터 그것을 휘두른 사내의 손을 찢고 빠져 나가 버렸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더 싸울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싸움 같지도 않은 첫 싸움을 그렇개 무대응으로 일관해서 끝내었으너 진자앙도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것 참!" 그는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그들을 통과해서 맹방평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번쪄 담장을 통롸하자 이번애는 제대로 된 대응이 이루어질 모양이었다. 정면에 보이는 누각 한 체애서 화려한 옷을 입은 청년들이 몇 명 쏟아져 나왔타. 그 중에는 여인도 있었다. 진자앙이 세어 보니 정확히 남자가 여섯 명, 여인이 두명이었다. 하나같이 비단장삼을 차려입고 머리에는 독수리의 깃털을 꽂아 멋을낸 공자들이었다. 문득 진자앙의 두 눈이 이채를 띤 것은 그 중에 오지산의 온천에서만난 가휘섭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가 중심인물인 듯했다. 또 여인들도 눈에 익었다. 오늘까지 쳐서 세 번째 보는 여인들, 바로 지란과 여란이었다. 그녀들도 그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토끼처럼 놀란 눈을 하고는 가휘섭에게 속닥거리는데, 가휘섭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자앙처럼 큰 체구를 가진 사람은, 있다고 해도 많지는 않을 것이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쩠든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들 여섯 명의 사내 중에서 한 사람, 옆구리에 장검을 찬 청년이 앞으로 한걸음 나와 맹방평에게 말했다. 물론 진자앙은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청년의 말 중에서 한마디, '등천비룡문'이라는 이름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기가 등천비룡문이었던가?' 진자앙은 진작에 그걸 알아차렸어야 옳았다. 앞에 서 있는 사내, 가휘섭이 등천비룡문의 향주라는 것을 이미 오래 전 오지산의 온천에서듣지 않았던가. 그것도 그 자신의 입으로. 맹방평이 대꾸했다. 예의 금패를 쳐들어 보여 주면서. 그는 강남 사투리를 알아듣는데도 북경관화로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공무를 집행하는 관리의 규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본관은 광동성 포두 맹방평이다. 사람을 찾아왔으니 너회들은 백성된 도리로 수색에 협조해야 할 것이다." 진자앙이 듣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여기 등천비룡문의문도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무림인들에게는 이런 식의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황당한 말이 황당하게 들리지 않는 것은 말 중에 언급된이름 때문이었다. "맹방평!" 청년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그들이 광동성 포두 따위야 알 바가 없었지만 금문공 맹방평을 모를수는 없었다. 가휘섭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노인이……, 아니 당신이 금문공 맹방평, 맹 노대협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요?" "그렇다." "터무니없는 소리!" 처음의 그 장검을 찬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맹방평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말했다. "어디 와서 사기를 치려는 것이냐! 그가 광동을 못 떠난다는 것은모르는 사람이 없어!" 잔뜩 흥분해서 침을 튀기며 말하다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청년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돈이 궁해서 온 모양인데, 잘못 왔다. 여기가 아무포교 나부랭이 따위가 와서 돈을 긁미 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아? 어디함부로 손을 내미는 거야! 베어 버리기 전에 썩 꺼져라!" 그는 오른손을 아례로 내려 장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여차하면 검이라도 빼서 휘두를 기세였다. 맹방평이 한걸음을 내디며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이 장 거리가 한걸음얘 좁혀진 것아다. 청년이 이 돌연한 행동에 바짝 긴장해서 검을 뽑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맹방평이 어느새 한 손으로 장검의 손잡이 끝 운두를 눌러 세 치쯤 뽑힌 검을 검집으로 다시 밀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청년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 청년이 뺨을 감싸쥐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신이 뺨을 맞은 것,아니. 그보다는 검을 채 뽑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관원에게 검을 빼 들고 덤비면 벌이 삼등 더해진다는 것을……!" 청년은 맹방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검을 뻬 들려 했다. 분노로 눈이 뒤집힌 그에게 실력의 월등한 차이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쫙--! 검은 다시 검집 속으로 들어가고, 청년의 뺨은 기어코 터져 버렸다. 부러져 나간 치아들은 어지간히 돈을 들이지 않고는 가려지지 않을 것이었다. 청년들이 분분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가휘섭이 그것을 제지했다. "잠시!" 그는 맹방평에게 깊이 포권하며 말했다. "전설 속에서나 뵈을 분을 직접 뵙게 되어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을용서하십시오. 저회 후배들이 아직 어리고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그는 피가 흐르는 뺨을 움켜쥐고 아직도 맹방평을 노려보고 있는 장검의 청년을 가리켰다. "처 친구는 이곳 항주에서 계법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검쾌문의 셋쩨 재자 쾌검 황악산이란 자로, 그래도 이 근방에서는 그 손의 빠름을 당할 자가 없었던 검객이올시다. 그런 그를 검조차 뽑지 못하게 하셨는데, 쾌수난타여의박이라 불리시는 금문공 멩방평 어른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신위를 보이시겠습니까?" 장황하게 말을 하지만 맹방평에개 인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수하들에개 들려 주는 암시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힐끔거리기는 했지만 하나둘씩 자리를떠나 움직이고 있었다. 가휘섭은 다시 한번 포권하고 말했다. "저는 여기 등천비룡문의 항주분타를 책임지고 있는 무림말학 가휘섭이라 합니다. 동도들께서는 과분하계도 옥룡이라는 별호로 불러 주고 있지요." 진자앙이 중자릉에게 들은 것으로는 가휘섭의 원래 별호는 옥면교,즉 잘생긴 이무기 정도의 별호였다. 그런데 그 한두 달 사이에 용으로승진을 한 모양이었다. 엥방평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불쑥 물었다. "본환이 알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등천비룡문의 총단이 어디냐는것. 내가 듣기로는……!" 가휘섭이 비켜서며 손으로 누각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간단한 차가 준비되어있습니다만……!" 과연 가휘섭은 따로 치시를 하지 않오 아까의 장황한 설명만으로 수하들에게 준비를 시킨 모양미었다. 진자앙은 그 새련된 태도에 깊은감명을 받았다. 그는 아마 때려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할 것이다. 맹방평이 손을 저었다. "필요없다. 본관은 알고 싶은 것만 말하면 돼!" 그 무뚝뚝한 태도에, 매끄럽기가 미꾸라지 같던 가휘섭도 얼굴을 굳혀 버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표정을 풀며 사근사근한 태도로 물었다. "그러니까 여쭈시는 것이……?" "본관이 듣기로는 여기 항주에 등천비룡문이라는 사설단체의 수장이 자주 드나든다고 했다.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그가 누군지 이곳의 우두머리인 너도 알 것. 민초 가휘섭은 아는 대로 고해바치라!" 가휘섭의 입이 딱 벌어졌다. '사설단체', '수장', '우두머리', 거기다가 '민초 가휘섭은 고해 바치라'는 명령까지…… 그는 듣던 소문이 사실에서 결코 조금도 보태거나 뺀 것이 아님을 알았다. 맹방평은 무림인이면서 결코 무림인이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그는 완벽한 포두로서, 오직 포두의 눈으로만 사물을 보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군!" 그는 이제까지 무림단체, 혹은 고수들과의 다툼은 겪어 본 적이 있지만 관가의 포두와 싸운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 막무가내의 정신나간 노인네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정신은 나갔지만 무공은 끝없이 고강한 노인네, 맹방평. 가휘섭은 일단 버텨 보기로 했다. "아무리 관원이라 하나 죄를 짖지도 않은 자를 닦달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무슨 수배범도 아니고 말입니다." 맹방평이 보통의 포교였다면 이 말에 움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명대의 법률인 대명률과 문형조례를통달할 정도로 외웠고. 그 시행에 일어서는 가차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휘섭의 옆에 서 있던 청년 하나를 향해 손을 뻗쳤다. 청년이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 피하려 했지만 그는 어느새 땅바닥에 개구리처럼 패대기쳐져서 손을 뒤로 들려 잡힌 상태가 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금문공의 포박술이었다. 맹방명은 청년의 옷자락을 일부분 찢어 내었다. "대명률애 의하면 진황색 옷을 천자만 사용하는 것이고, 만약 백성이 입었을 때 그 벌은 참형이다. 네가 이런 옷을 입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진자앙이 보니 정말 그 청년의 옷은 싯누런 비단읏이었다. 보통의노란색보다 조금 붉은빛이 더 들어간 색. 진황색이었다. 맹방평이 다시 일어나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을 가리켰다. "얼핏 보기에도 서른 명은 넘는군! 이들이 왜 여기 모여 있는 것이냐?" 가휘섭의 옆에 서 있던 여란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것도 문제가 된단 말인가요?" "법률로 인정된 목적 이외의 목괵을 가지고 열 명 이상이 도당을 이루면 대명를얘 저촉된다, 그 벌은 당연히 참형이다." "그럼 소림사는? 거긴 적어포 삼천 명은 있잖아요!" 여란이 침을 튀기며 항변했저만 맹방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승려다. 절이나 도관얘 사람이 맡고 적은 것은 도첩(출가자의 자격증)응 발행하는 이부의 소관이다." 여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팔대가문은? 거기에도 사람들이 적지 않을 텐데요?" "가족이 얼마나 되고, 하인, 하녀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은 예부의 소관이다. 너회들같이 다른 목적 없이, 또 아무 연고도 없이모여 있는 경우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렇게 모여 도대체 무얼 하겠다는 거냐? 도적질? 흑은 소금 장사? 아니면 역모라도 꾀하겠다는 거냐?" 말이 역모에까지 이르자 가휘섭도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가 없게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법에 저촉이 된다는 데에야 할말이 없다. 포두와 법으로 따지느니 다른 방식이 나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 중 어느 항목으로 처벌하시겠다는 겁니까? 만약 방금 말씀하신 그 법률을 적용하자면 천하에 참형을 당해야 할 사람이 한둘은아닐 텐데, 그걸 혼자 다 잡으시겠다는 겁니까? "오늘 본관이 문제로 삼는 것은 단 하나다. 범죄 사실을 알고도, 일부러 숨기고 알리지 않는 자는 참형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 "누가 무슨 범죄를 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맹방평은 가휘섭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눈빛으로 마음속까지 꿰뚫을 듯한 매의 눈이었다. 가휘섭은 태연한 빛으로 서 있었지만 한 순간 위축되는 마음을 가릴 수는 없었다. "본관은 상습 강간범 영리충이 등천비룡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심을 갖고 있다." 말과 동시에 맹방평의 눈이 주위에 둘러선 사람 모두를 스쳐 지나갔다. 가휘섭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여란과 지란 두 여인의 안색도 약간 달라졌다가 겨우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빛이었다. "여 , 영리충……? 우하하하하!" 가휘섭이 하늘을 보며 웃었다. 그러나 진자앙은 그 웃음이 어쩐지어색하다고 느쪘다. 가휘섭은 향참이나 웃고는 간신히 진정했다. 그리고 말했다. "어째서 그런 터무니업는 오해를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정말 터무니없습니다." 그는 뒤에 선 청년들을 하나씩 가리켰다. "여기 이 사람은 이미 소개해 드렸지만 좨검문의 제자입니다. 여기는 안휘성 금도방 방주의 자계분인 금섬홍안 오추인이고, 저기는 형산파의 사대제자 은모후 전옥린입니다. 하나같이 정파의 인물들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친구는……!" 가휘섭은 얼굴체 살집이 를어 조금 비대해 보이는 청년을 가리키며씨익 웃었다. "맹 노대협도 잘 아시는 불산 진가장의 재자란 말입니다." 맹방명이 진자앙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사실 진자앙이 더 놀랐다. 가휘섭은 기대한 반응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흐뭇하개 웃었다. "당대 진가장주이신 진삼산 대헙의 둘째 제자이자 사회 운양문의 후계자이기도 한 팔비당랑 운한경 소협입니다. 우리 등천비룡문 항주분타의 부향주를 맡아 주고 계시죠. 나머지 분들은 봉공들이고요. 이런 분들이 영리충 같은 대마두의 수하에 들어오겠습니까?" 알려진 바에 의하면 등천비룡문의 채제는 이러했다. 강호에 드러난 그들의 분타 수는 총 마흔아홉 개. 그 각각의 분타를한 사람의 향주가 주관한다. 그 아래에 두 명의 부향주가 있고, 분타의 사정에 따라 여러 명의 봉공이 있다. 각 문파의 출신이면서 등천비룡문에 입문한 여러 후기지수들이 대개 그렇게 봉공 취급을 받고 있다. 고 했다. 그 외의 수하들은 단지 무사로만 취급된다. 진자앙은 다시 한번 운한경을 살펴보았다. 살집이 있는 얼굴에 순한눈매가 어렴풋이 예전에 보았던 모습같기도 했다. 십 년 전에 겨우한두 달밖에 같이 생활하지 않았으니 못 알아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등천비룡문에 입문했다더니……!' 여기 있었던 모양이었다. 맹방평이 운한경에게 물었다. "네가 진자룡의 후예라니 바른 대답을 해주리라 믿고 묻겠다. 이곳문주가 영리충이 아닌 게 틀림없느냐? 아니, 이곳과 어떤 방식으로든지 관계가 없는 게 맞느냐? 운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확신하느냐?" "예!" "그림 이곳 문주는 누구냐?" "그건……!" 운한경이 잠시 당황해 하며 가휘섭을 보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지시를 기다리는 빛이었다. 맹방평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왜 그걸 말 못 하는가? 혹시 너도 모르는 것 아니냐?" 운한경이 당황해서 우물거리고 있는데 가휘섭이 끼여들었다. "아무리 노선배라지만 남의 문파 속사정을……!" "네게 묻지 않았다!" 맹방평은 가휘섭을 노려보며 일갈을 터뜨려 말문을 막아 버리고 운한경을 닦달했다. "솔직히 말해라. 천기공 진자룡의 명예를 걸고!" 운한경이 식은땀을 흘렸다. 뭐라고 말하기도 곤란한 빛이 역력했다. 그렬게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벌렸다. "대답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모른다는 뜻이겠지." "대답할 수 없습니다." 가휘섭이 소리쳤다. "맹 노선배!" 맹방평이 손을 저었다. "됐다. 질문은 끝났어. 대신……!" 그는 가휘섭에게 다가갔다. 그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오고있었다. "이번앤 네가 대답해 줘야겠다. 향주니까 너는 알겠지? 문주가 누구냐?" 장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휘섭을 위시해서 등천비룡문의 모든 문도들이 무기를 잡아 갔다. 그러나 맹방평온 전하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치 무표정한 얼굴은 그들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가휘섭이 손을 저었다. "좋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는 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괴로운 표정이었다. "하나, 먼저 상부에 여쭤 보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내부의 상황에대해 비밀을 유지하라는 것이 문파의 규율이니…… 이 정도는 이해해주시겠지요?" 맹방평이 인상을 쓰며 말하려 하는데 가휘섭이 손을 저어 말문을 막았다. "저도 무림인이고, 노선배님도 아무리 부인한다고 해도 결국엔 무림인입니다. 상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저는 설사 노선배님이 저를이 자리에서 죽인다고 해도 입을 열 수가 없습니다. 제 말에 한 오라기의 과장도 없음을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새 빼어 든 송곳 같은 물건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맹방평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의 여유를 주지!" 가휘섭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돌아서는 맹방평의 등을 보며깊이 포권했다.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노선배님!" 그때 진자앙이 나섰다. "한 달 반 전에 날 만났던 것을 기억하시겠지요, 가 향주?" 겨우 펴지던 가휘섭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의 입은매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음……, 그래! 이제 보니 그때 산에서 뵈었던 분이군요. 그때와 달리 옷을 입고 있으니 얼른 못 알아보겠소이다그려!" 주위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광동어로대화률 하고 있으니 얼른 무슨 내용인지 못 알아들어 운한경이 설명을해주고 있었다. 돌아서던 멩방령도 멈춰 섰다. 진자앙은 읏 얘기를 걸고 나오자 잠시 멈칫했지만 계속 물었다. 여란과 지란을 가리키면서였다. "그때 저분들도 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부인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렇군! 그때 저분 여협들과 놀고 계셨죠? 옷을 벗고 말이오!" 주변에 왁자한 운음이 퍼졌다. 진자앙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란이교태로운 웃음을 지으며 그를 가리켰다. "그래요, 소녀도 이제 기억이 나는군요. 어쩜 이렇게 벗고 있었을때와는 다르실까? 그땐 그냥 집승 같았는데……!" 다시 웃음이 퍼졌다. 짐승이라는 말애 포함된 중의성이 묘한 상상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주변의 웃음 소리에 상관없이 이번엔 여란에게 물었다. "상관 공자는 어디 있소?" 여란의 얼굴이 파래졌다. 지란이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그러나 진자앙은 가헐섭의 태도만 유심히 보고 있었다. '반응이 있군!' 가휘섭이 여태 보인 것 중 가장 큰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여란이 억지로 웃으며 되물었다. "상관 공자가 누구죠? 소녀가 아는 상관 공자는 한둘이 아닌데 그중 어느 분을 밀씀하시는 건지……?" "나와 염정을 뒤쫓던 그 상관 공자, 영리충을 묻는 것이오!" 여란이 잠시 휘청거렸다. 지란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네가 그럼 , 그때 그놈……!" 급히 입을 막았지만 말은 이미 나간 후였고, 그 말은 진자앙이 한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맹방평이 앞으로 나섰다. "영리충을 알고 있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여란과 지란이 새파랗게 질려서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가휘섭이 손을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의 말은 채 맺어지지 못했다. 맹방평의 손이 움직이는 듯싶자 여란과 지란이 이미 금빛 밧줄에 포박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뱀처럼 영활하면서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신속한포박술, 무림일절이라 불려지는 맹방평의 절기, 여의박이었다. 보았을 때는 이미 손쓸 여지도 없게 만드는 신속한 행동, 돌이킬 수없는 결과였다. 그대로 두 여인을 끌고 대문을 나가면서 맹방평이 말했다. "이 여인들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주기 바란다." 소태를 씹은 얼굴이 된 가휘섭은 그저 이를 갈고 있어야 했다. 진자앙과 맹방평은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그들온 등천비룡문 항주분타가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봉황산 기슭, 나무가 우거져 산을 오르는 유람객들에게는 잘 안 보이지만 자신들은 산 아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에 와 있었다. "어떻개 저기가 등천비룡문의 항주분타인지 아셨습니까? 여기 오기전부터 알고 계셨나요?" 진자앙은 아카 전부터 그것이 궁금했었다. 그는 자신이 유달리 둔해서 현판에 크게 쓰여 있는 것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나올 때 일부러 확인도 해봤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등천비룡문 항주분타는 그 인근에 있는 몇십 개의 장원들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 그런 곳에 불과했었다. "내가……" 맹방평이 말했다. "괜히 새벽같이 포도아문에 간 줄 아느냐?" "그럼……?"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진자앙이었다. "신흥세력이 있으면 그 배후에는 항상 관부, 특히 '포도아문의 누구'라는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대포두가 등천비룡문과 내통이 있다는것은 이미 정보를 들어 알고 있었지. 나는 그냥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했을 뿐이야."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 타초경사의 계략이었다. 맹방평은 구양은에게 여기 온 목적을 밝힘으로써 놀라 연락하게 하고, 그 뒤를 쫓아 본거지를 알아 냈다는 말이었다. "그…… 대포두같이 보이는 사람은 없었는데요?" 진자앙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들이 도대체 누굴 미행했단말인가? "물론 미행은 다른 사람이 했지!" 맹방평이 귀찮다는 듯 짜증을 내며 설명했다. 포방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맹방평을 괄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극히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포두들이 그를 신처럼 존경했다. 그런 사람 중 몇몇이 이번 일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진자앙은 그런 사람을 따라간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지만 더 이상 캐묻진 않았다. 그에게 그런 눈치가 있었으면 이미 많은 일이 달라졌을 것이다. 맹방평의 말이 옳다는 증거는 바로 나타났다. 벙거지를 눌러쓴 사내하나가 그의 나귀, 천리독각추를 끌고 거기 왔던 것이다. 단 한번도본 적이 없는 사내였다. 당연히 맹방평이 그에게 연락을 하거나 하는것도 보지 못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일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맹방평이 하는 일을 미리 아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어차피 그의 장점은 눈치가 빠르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맹방평이 등천비룡문에서 시선을 때지 않은 채 그에게 말했다. "너는 객잔에 돌아가서 날 기다리고 있거라." "맹 포두님은 그럼……?" "난 따로 할 일이 있지," 물론 있겠지만 그 일이 어턴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다. 진자앙은 속으로 궁금해 하면서도 묻지 않았다. "이 여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들의 뒤에는 여란과 지란이 밧줄로--물론 맹방평의 금빛 포승이아닌 다른 밧줄이었다--손목이 묶인 채 뒹굴고 있었다. 관원에게 잡혀와서 순순히 알고 있는 것을 불 사람은 없다. 그러나결국 불지 않는 사람도 언다. 여란과 지란도 처음쉐는 모른다는 말로 일관했지만 결국 알고 있는것을 털어놓게 되었고,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하자 묻지 않은 것까지도다 말하게 되었다. 특히 여란이 그랬지만, 막상 그녀들로부터 알아 낸것은 별로 없었다. 그녀들은 그때 염정을 놓친 이후로 상관 공자를 다시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 이전과 다름얼이 비밀스런 손닙을 받고, 비밀스런 유회를즐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칠선관의 관주인 묘선고 하수수가 산을 나가자고했다. 밀실에서는 온괏 음란한 놀이를 즐겼고 먹는 것 입는 것은 호화찬란한 것들이었지만, 그곳은 산과 나무, 하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런곳에서 살았으니 그녀들이 산을 내려가자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묘선고가 대부분의 여인들을 데리고 내려가고, 여란과 지란이 미선고의 지휘 아래 나머지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가휘섭이 왔다. 그때에야 그녀들은 칠선관이라는 이름이 없어지고, 등천비룡문의 산하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녀들이 하게 될 일들이 칠선관에서 하던 일과 별다를 것이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단지 지금까지는 칠선관을 몰래 찾아오는유생, 관리, 승려들을 상대하던 것이 이제부터는 등천비룡문의 청년공자들을 상대하게 되었다는 것만이 변했다면 변한 일이었다. 그것도 좋았다. 이왕이면 젊고 잘생긴 공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나으니까. 그렇게 이동해 와서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 그녀들이 말한 전부였다. 맹방평은 여인들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네 마음대로 처리해." "제 마음대로요?" "죽이든 어쩌든 잡아 두기만 하면 된다. 가휘섭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가 뭘 알고 있는지 모르도록 하면 돼." 맹방평은 처음부터 여자들에게 윌 알아 내리라는 기대는 않고 있었다. 아까 진자앙이 한 말로도 등천비룡문과 영리충이 어떤 방식으로든관계가 있다는 증거는 충분한 것이다. 그가 지금 여자들을 잡아 두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이 여자들이 어면 얘기를 했는지 모르도콕 만드는 데에 더 목적이 있었다. 갑자기 쳐들어가 뒤집어엎고서는 사흘의 시간을 준 것이나 여자를잡아온 것들 모두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하개 하고 그 반옹을보려고 한 책략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만므로 배후가 드러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맹방평에게는 또 한가지 목적이 있었고, 그것은 얼핏 불가능해 보였지만 천리독각추로 인해 가능한 어떤 일이었다. 지금이 그떼였다. 맹방평의 낱카로운 눈이 저만치 호숫가의 장원 위로 날아오르는 비둘기들을 본 것이다. 그는 그것이 등천비룡문 항주분타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믿머 의심치 알았다. "출발이다!" 멩방평은 그대로 나귀에 을라탔다. 조금 전까지 한없이 게으른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리던 나귀가 갑자기 변혜 버렸다. 네 발굽으로 땅을 두드리는가 싶더니 화살같이 달려나가 버린 것이다. 그들은 하늘의 비둘기를 쫓아가 적의 근거지를 알아 내겠다는, 얼핏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을 시도하고 있었다. 뒤에 남은 진자앙은 눈만 끔벅거리며 맹방굉롸 나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한참 후메야 그는 맹방평에 못지않게 어려운 일을해야 한다는 것을 께달았다. 그는 여란과 지란을 보고 이 여자들을 어떻게 데려가나 고민하기 시작혔다. 이 훤한 대낮에 손목을 묶은 여인 둘을 어떻게 태려간단 말인가. 두여인을 포박한 채 그냥 끌고 갔다간 제아무리 번화한 항주여도 진자앙이 소문의 중심인물로 떠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물론 진자앙은 조용한 사람이너 일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바라지않았다. 그렇다고 밧줄을 풀어 줄 수는 없었다. 둘이 도망이라도 간다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혈도를 제압한다거나 하면 간단하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것은 배우지를 못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라 여란에게 불쑥 물었다. "나머지 여도사들, 음……여자들은 어디 있소?" "각 분타로 갈라졌기 때문에 잘 몰라요." "그럼 항주에는 당신들 둘만 있소?" "예." "그래요? 음……!" 생각한 것을 어떻게 시도할까 말을 고르는 진자앙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란이 묻지 않은 말까지 했다. "저횐 다년간 방중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스무 명 정도는 우리 둘만으로도 충분해요." 진자앙은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 한참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게 아니라……!" 그러다가 진자앙은 다른 것을 깨닫고 해연히 놀라 버렸다. "그럼 항주에 스무 명이나 있단 말이오? 소위 그 봉공이라는 사람들Ol?" 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는 항주는 큰 곳이라 많은 편이고 다른 곳에는 대개 십여 명안팎의 봉공이 있다고 했어요." 시뭔스러운 대답을 듣고도 진자앙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향주, 부향주 합쳐서 한곳애 평균 잡아 열다섯이 있다고 치면 마흔아흡 곳의 인뭔을 전부 합쳐 칠백여 명이 넘는 인원이 등천비룡문에소속되어 있다는 재산이었다. 그냥 칼이나 휘두르고 어깨에 힘주는 것이나 아는 무사 나부랭이라면 모르지만, 하나같이 무림 각 문파의 제자요, 후계자들이 칠백 명이라는 것은 무시해도 좋을 숫자가 아니었다. 칠벅 명의 젊은 고수들이 있다는 것은 무림애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후기지수들의 거의 반 이상이 등천비룡문의 명령을 받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대단한 규모군!' 진자앙은 만약 이 등천비룡문의 배후에 영리충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영리충은 단지 무공만 강한 색마에 불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생각했다. 무림십대고수는 물론 모두 무공이 입신지경에 있다지만 그중 조직력까지 강한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조직력은 한 분야의 장점만 있다고 해서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능력과 매력, 인격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 있어서 좋다고 평가되는 모든 가치들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 단체가 크면 클수륵 그런 것이 더 펼요한 것은 물론이었다. '어쨌든 이왕 물은 김에……!' 진자앙은 아까 맹방명이 있을 메는 꺼낼 수 없었던 개인적인 관심사를 물었다. "염정에 대해서는 그 후에 다시 들은 적 없소?" "염정은……!" 여란은 대답하기 전에 인상부터 썼다. "고 계집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찾느라고고생하고, 결국 놓친 다음엔 감시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고 욕 얻어먹고, 나중엔 애들을 잘못 다스려서 그렬다고 벌을 받고…… 아유, 고년을 찾기만 했으면 그냥 발목을 분질러 놓는 것인데……!" 성질대로 마구 말하던 여란은 진자앙의 기색을 힐끗 살피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염정을 데리고 도망간 사람이 진자앙이니 말을하면 할수록 결국 그에게 하는 욕이 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진자앙이 물었다. "괜찮으니 계속 말해 보시오. 그래서 그 후에 그녀의 소식은 들은게 없소?" 여란의 눈이 교활하게 움직였다. "글쎄 들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그보다 이 밧줄이나 좀풀어 주시겠어요? 팔목이 너무 아파요." 진자앙은 순진하게도 그 말플 곧이곧대로 믿고 줄을 느슨하게라도해주려고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원래의 목적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줄에서 손을 떼고 그녀들을 보았다. "줄을 풀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도망가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소? 보시다시퍼 난 체구가 커서 동작도 느린 편이오. 당신들이 도망가면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 않소." 여란과 지란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잘만 다루면 이 어수룩한 청년을 뜻대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공자가 저회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면 왜 도망을 가겠어요?' 지란이 어울리지 않게도 추파를 흘리며 동조했다. "그러게요, 이렬게 잘생긴 공자님한테서……!" "밧즐로 묶어서 소나 양처럼 끌고 가면 온 항주 사람들이 다 수군거릴걸요? 당신이 어디로 우릴 데려가든 등천비룡문 사람들의 눈을 피할수도 없을 테구요." "아마 금방 우릴 되찾으려고 쳐들어올 거야." 진자앙으로서는 등천비룡문의 인몰틀이 쳐들어오거나 말거나 그 문제는 별로 두렵지 않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본래 셍각하던 조건을 말하려 하는대 지란이 그가 가장 기다리던소식을 말해 주었다. "염정애 대해 알고 싶으시죠?" "우리도 소문을 들은 게 있어요." "그 후에 관주님께서 손님과 하시는 말씀을 얼핏 들었는데, 강에서종적이 사라졌다지 아마……?" 강으로 도망가라고 한 것은 진자앙이었으니 이미 아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 후의 일은 그도 모르던 것이었다. 염정은 지나가던 배에 구조되어 같이 간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었다"어떤 배인지 혹시 들었소?" "자세히는 모르지만 인근의 온천얘 휴양차 왔다 돌아가던 대관이 탄 베라더군요." "쫓던 사람이…… 그 이상으로는 조사를 못 할 이유가 있다고 하는걸로 봐서는 대관도 보통 대관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아유, 고년은 복도 맡아. 복 많은 년은 앉아도 어디에만 앉고, 넘어져도 어디에만 넘어진다더니, 정말! 운만 좋으면 그냥 대관의 첩 자리라도 꿰찰 수 있을 것 아니니? 진자앙은 망연히 고개를 끄덕떴다. 어디로 어떻게 가서 어떻게 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쩠든 죽지는 않았을것이다. 실오라기 같지만 단서도 하나 찾지 않았는가. 소실이 되건, 뭐가 되건, 살아 있는 이상은 다시 만날 수도 있으리라. 그는 여란과 지란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좋은 소식을 알려 줘서 고맙소. 보답으로 밧줄을 풀어 드리지요. 대신 이걸 좀 드셔야겠소." 그가 꺼낸 것은 검은 환약 둘이었다. 여란과 지란의 안색이 파래졌다. "그게 뭐죠? 설마 독약?"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죽는 건 아니니 걱정 마시오. 사문의 비전독약이라 해독하긴어렵지만 그것도 내게 해독약이 있으니 걱정 마시고. 이미 들었겠지만사흘만 참아 주면 되오. 그땐 털 오라기 하나 건드리지 않고 보내 드린다고 약속을 하지요." "이런 비열한!" "힘없는 여인네를 독으로 위협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사내대장부냐!" 여란과 지란은 그때에야 발악을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진자앙은 말 안 듣는 짐숭에게 그러듯이 손으로 턱을 쥐어 강제로입을 벌린 뒤 환약을 먹여 버렸다. 그 다음은 쉬웠다. 진자앙과 두 여인은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도 안면객잔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등천비룡문의 이목까지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진자앙은 그럴 수 있으리라고 기대도 않았다. 그러니 등천비룡문이 어떤 식으로든 접근을 할 것이라고 예측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다음날 저녁에야 그런 모습을 보안 것은 예측보다 오히려 조금 늦은 편이었다. 그것은 맹방명이 비둘기의 뒤를 따라 떠나고, 진자앙은 두 여인을데리고 돌아온 그 다음날 저녁나절에 생긴 일이었다. 그들은 객잔에 들어오자마자 인상부터 썼다. 그리고 내뱉은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여긴 청소도 안 하나? 왜 이렇게 지저분하고…… 으으, 냄새도 나는군!" 장거는 계산대에 앉아 졸다가도 손님만 오면 번개같이 일어나 삼십년간 외워 둔 대사를 을조리는 것이 체질화되었는데, 오늘은 입구에서서 멈칫거렸다. 평소 객잔에 오지 않던 유형의 손님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객잔이라는 것이 원래 온갖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곳이지만 생각보다는훨씬 더 사람을 가리는 법이었다. 예를 들어 그의 평안객잔에는 두 종류의 사람은 오지 않는다. 지불능력이 아예 없는 거지가 그 하나요, 지불 능력이 넘쳐 홀러서 어떻게하면 최단시간 내에 최대의 돈을 쓰느냐가 고민거리인 사람들이 나머지 하나였다. 지금 장거가 마주 대하코 있는 사람들이 바로 후자와 같은 부류의사람들이었다. 같은 질인데도 옥으로 깎은 장식 하나 더 넣어서 일곱 배로 받는항주 단자포에서 산 비단옷을 몸에 감고, 역시 그 정도로비싸게 산 듯하지만 보기는 별로인 장보관을 머리에 썼다. 그 중 어떤 이는 금으로 테를 두르고 은으로 장식을 한 와룡관, 동파관을 썼는데, 두 가지 종류의 관이 모두 검은색을주조로 해서 은일하는 선비의 검소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거기에 금은을 둘러 쓰고 다닌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한마디로 돈 많은 티를 있는 대로 내면서도 별로 보기에는 좋지 않은 부류들이었다. 그런, 자칭 청년 귀공자들이 여덟 명이나 찾아온 것이다. 그리곤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쓰면서 내벨은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저희 객잔이 좀 어두워서 그렇개 보입니다만, 들어오셔서 앉으시면곧 이렇게 편하고 안락한 곳온 항주부를 통틀어도 찾기 어려우리라는것을 아시개 될 것입니다요, 네!" 여덟 명의 공자 중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장보관을 쓴 이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장보관은 원래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니 그래도다른 일곱에 비하연 보기가 좀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옆에 있던 칼을 찬 사내에개 눈짓을 했다. 칼을 찬 사내가 장거를 밀어젖히고 앞장서서 들어와 창가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나마 여기가 덜 더럽군. 치워라!" 장거가 땀을 삐질삐질 흘려댔다. 원래 그 자리에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공자님들같이 고매하신 분들께는 저희 초라한 객잔의 어디인들 지저분하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마는 이곳이 마음에 드신다니 감사할뿐입니다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자리를 차지한 분들이 있으니 이일을 어쩝니까? 군자는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공자님들께서 잠시만 기다져 주시면 신속하게 다른 자리를……!" 그의 말은 한참이나 더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리에 원래 앉아 있던 사내들은 태도나 차림새로 보아서는 장사치들이었는데, 지금 분분히 일어나 다른 자리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몇몇은 먹던 요리가 담긴 접시까지 들고 갔다. 탁자 위에 올려진 칼 한 자루가 말 한마디 필요없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공자가 빼어 든 칼이었다. 그의 칼은 옷차림만큼이나 화려한 것이었다. 칼집에는 붉고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고, 손잡이의 운두는 옥으로 만들어져 붉은 보석두 개가 박혀 있는 것이 마치 해골을 연상케 했다. 장식이 해골 모양이라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그 화려함으로 보아 유생들이 겉멋으로 차고 다니는 패검 같기도 했다. 하지만 유생들이 패검을 차는 것은 꼭 멋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마음속의 사기를 베어 없앤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 만큼 유생이라면 반드시 검을 차고 다니지, 결코 칼을 차지는않는다. 그러니 이 청년이 찬 칼은 겉모습처럼 보도이거나, 아니면 정말 멋으로만 차고 다니는 것일 터였다. 양쪽의 어느 경우든 칼은 칼이고, 칼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지금그가 빼어 든 그 칼처럼 너무나 희어서 오히려 푸르게 빛이 나는 칼은아마도 더욱 쉽게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장사치들이 겁이 많다고 비난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공자는 칼을 들어 천천히 칼집애 꽃았는데, 마치 그 칼날의 날카로움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면서 그는 장거를 보고웃었다. "자리가 비었군. 이제 다툴 펼요가 없겠지?" 장거가 목이 부러질 정도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죠. 정말 고마우신 분들입니다요. 이게 다 공자님들의 위풍당당하신 모습 덕에……!" 그는 다시 한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칼집얘 들어가단 칼이 어느재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 좀 빼고 싶나?" 장거는 천천히 고개를 혼들었다. 빨리 흔들다간 베일 것 같은 모양이었다. "불편한 점은 있지만 오랫등안 정든 살인데 한 점이라도 없어지면적잖이 서운할 터이라……!" 그러고도 알을 하는 장거가 우스웠던 모양, 공자는 실소를 홀리더니칼을 치웠다. "살들과 헤어지기 싫으면 얼른 자리를 치우고 술과 음식을 날라 오는게 좋을거야. 술은 최고급, 안주도 마찬가지. 알겠나? 장거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리 주방으로 달려가 정신없이 지시를 하고 있었다. 요란한 등장과는 달리 여덟 명의 사내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요리가 나왔지만 술을 따를 때를 빼고는 건드리지도 않고 있었다. 단지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인데 그나마 장보관의 사내는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조용함이 깨어진 것은 한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부터였다. 철탑같이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주방 옆, 작은 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사람은 크고 문은 작아 도대체 어떻게 빠져 나올지 모를 정도인데 용케도 몸을 접고는 나오더니 다시 주방의 작은 창문으로 몸을 반이나 들이밀었다. 그가 몸을 빼내었을 때는 음식이 가득 담긴 그릇이 들려 있었다. 그는 음식을 들고 주방 옆 좁은 문으로 다시 비집고 들어갔다. 철탑 같은 사내가 통로로 사라지자 와룡관을 쓴 사내가 장보관을 쓴사내에게 속삭였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코밑으로 가는 수염을기르고 있고, 얼굴은 젓빛을 보지 않은 것처럼 희멀끔해서 전형적인모사형의 인물로 보였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고 차려입은 모양이었다. "다시 나을 때……!" 와룡관의 사내가 작은 소리로 속닥이는 것이 무슨 계략을 제시하는모양이었지만 장보관의 사내는 그의 말이 탐탁치 않은지 머뭇거리기만했다. 칼을 찬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탁자를 쳤다. "일단 하날 언애 놓으면 나머지 노인네야 함께 상대할 수도 있고,여차하면 도망갈 수도 있고, 여러모로 편하잖습니까! 혁련 공자님은 다 좋은데 그 마음 여리신 게 탈이라니까요. 그냥 해치워버립시다!" 나머지 다섯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 하나, 얼굴이 좁고 눈이 가늘어 쥐새끼처럼 생겼지만 제법 눈초리가 날카로워 더욱 잔인해보이는 사내가 품에 손을 넣어 서슬 퍼런 비수 몇 개를 꺼내 쥐기까지했다. 혁련 공자라 불린 사내는 그런 분위기흘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고개을 끄덕였다. "그래도 천하의 맹방평을 따라다니는 사람이니 한 수가 있을 걸세. 조심들 하게!" 칼을 찬 사내가 반갑다는 듯 말했다. "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일단 하면 확실히 하는 것이 우리 신조죠. " 그는 벌떡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자, 여러분 오늘 장사는 끝났소! 그만 나가들 주시오!" 원래 객잔 안애는 사오십 명의 사람들이 혹은 술을 마시고, 혹은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아까 전부터 이들 여덟 명이 하는 일이 불안해서나가고 싶어하던 참이었다. 그들은 잡을까 두려워하는 듯 얼른 일어나나가려 혔다. 장거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등댈 뿐이었다. "저…… 계, 계산은 하고……!" 그때 생쥐의 얼굴을 한 사내가 손뼉을 쳐서 좌중의 주의를 모았다. "잠깐, 잠깐! 식사를 하다 밀쿄 가셔야 되나! 그냥 앉으시오!" "아니, 저…… 괜찮은태요……!"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이렇계 살벌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넘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생쥐 얼굴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손에는 서슬 퍼런 비수가 쥐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그가 우스황스럽게 생겼어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아니야, 당신들은 괜찮아도 내 칼이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군.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이 나와 보고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소? 그 덕분에 우리 일이 실패하면 우린 누구한테 보상을 받겠소? 자, 그냥 앉아서 떠드시오!" 손님들이 말도 못 하고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동파관을 쓴 사내가 소매에서 도끼를 꺼내더니 상을 쳐서 반으로 쪼개 버리며 소리쳤다. "왜 이렇게 조용해, 이거!" 객잔 안의 사람들이 분분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확실하기로는 이것만한 게 없지!" 동파관은 말총, 혹은 마를 사용해서 사각형으로 높이 올려 짜는 것인데, 전형적인 유생건으로 널리 쓰이는 것이다. 그런 동파관을 쓴 사내가 너비가 한 자나 되는 도끼를 들었으니, 그것만큼 어색한일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그 도끼를 들고는 주방 옆에 가서 섰다. 생쥐 얼굴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는 건들거리며 웃었다. "이것도 무시할 수 없지 " 그의 손에는 각각 세 자루, 도합 여섯 자루의 비수가 손가락 사이사이에 거꾸로 들려 있었다. 단번에 뿌릴 태세였다. "이건 어떻소?" 소매 속에서 철봉 몇 개를 꺼낸 사내가 철봉을 연결해 석 자 가량되는 창 두 자루를 만들었다. 그는 홀잭 뛰어 주방 옆 통로의 바로위, 문턱에 발끝을 걸고 섰다. 그렇게, 혹은 문 위에, 혹은 통로 옆에, 심지어 주방에까지 숨어들고 난 뒤애 혁련 공자가 장거를 보았다. 장거는 계산대에 주저앉아 수건을 전 채 부들부들 털고 있었다. "미안하네 우리 때문에 파손된 집기나 장사 못 한 것은 나갈 때 후하게 보상하지!" 장거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저었다. "저흰 손님들이 하시는 일이 잘되기만 빕니다만 이번 일에는 전혀도움을 드리지 못하겠군요. 그저 하시려는 일이 잘되시길 바랄 뿐, 어찌 감히 보상을 바라겠습니까요? 가는 수염의 사내가 그 말을 듣고 퍼식 웃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할말은 한다…… 자네도 보통 인물이 아니군. 오늘 일이 끝나면 출세할 수도 있겠네." 장거가 얼른 손을 저었다. 그 손애 잡힌 수건이 같이 흔들렸다. "제가 출세를 감히 바라겠습니……!" "온다!" 혁련 공자가 낮게 소리쳤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생쥐 얼굴이 인상을 썼다. "너무 조용해!" 이런 유형의 사람이 잔인할 땐 더욱 잔인하다는 것을 사람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계다가 그가 든 무기는 거리가 어텅게 되든 효과가있을 것이다. 어쪄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으랴. 객잔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떠들고 있었다. 주방옆, 작은문이 열렸다. 곰 발바닥같이 큰손이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곧 철탑 같은 사내의 상반신이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거와 몸을 절반 가량 꺾고 머리를 수평으로 내민 다음에 무릎 굽힌 걸음을 해야 빠져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문이었다. 그런 곳으로 철탑같이 큰 사내, 진자앙이 모숨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혁련 공자 일행은 그렇게 조심스럽게 매복을 할 필요가 없었을것이다. 문 위에, 주방 안에 숨을 필요도, 객잔 안을 소란스럽게 할펄요도 없이 통로 옆애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가 나오는 진자앙을 공격했더라도 공격은 단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매복은 보는 사람을 두렵게 할 만한 효과는 있었지만, 진자앙은 고개를 숙이고 비좁은 통로를 비집고 나오느라 어차피 그 중 대부분을 보지 못했다. 그가 보고, 느껀 것이라고는 머리에 따끔한 느낌 하나, 목덜미에 둔중한 압력 하나, 옆구리가 약간 결리는 듯한 느낌,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한 사내가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보는 것 같더니 손을 들었고, 그때 얼굴얘--그 중 두 개는 눈동자에--뭔가가 와서 부딪쳤다가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진자앙은 허리를 숙여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혁련 공자 일행이 소리쳤다. "됐어! 쓰러졌어!" 그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자앙은 쓰러진 것이 아니라, 그의 얼굴과 눈에 맞고 바닥에 떨어진 표창을 집어 들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거 누가 던진 겁니까?" 객잔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암습이 실패한 청년들은 물론이고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 눈을 가리던 손님들도 이 황당한 광경에 말을 잊고 있었다. 창에 찔리고, 도끼로 목을 맞고, 비수에 눈을 찔리고서도 모기에 물린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한 진자앙의 상태애 경악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누가 자기를 암습했는지도 잘 모르는 듯하지 않은가. "괴, 괴물이다!" 허름한 옷을 입은 장사치 하나가 외마디로 부르짖고는 구르듯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것을 신호로 객잔 안의 손님들과, 심부름꾼들까지한꺼번에 밀려 나가 버렸다. 이제 객잔 안에는 진자앙파 혁련 공자 일행, 그리고 계산대에 앉은장거밖에 남지 않았다. 진자앙은 혁련 공자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무기들과 자신의 찢어진 옷자락, 장거의 표정을 종합하니 그제야 결론이 나왔다. "등천비룡문이오?" 생쥐 얼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다시 여섯 자루의 비수가 들려 있었다. "엄청나게 반응이 느린 놈이군!" 그러면서 눈을 찡긋거렸는데, 진자앙의 왼쪽 뒤에 서 있던 도끼의사내는 진자앙과는 달리 반응이 빠른 사내였던 모양이었다. 재빨리 그눈짓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다시 개산대부를 휘둘러 진자앙의 뒤통수를 찍었다. 무공을 좀 아는 사람이 그 초식을 봤다면 형산파의 뇌공부중 한 초식인 일도단악이라는 정도는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지만 진자앙은 봤다고 해도 잘 몰랐을 것이고, 볼 수도 없었다. 그는생쥐 얼굴이 왜 그를 보고 추파를 던지나, 의아해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한 자나 되는 도끼날이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깡--!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도 진자앙은 멀쩡했다. 도끼로 내리쩍었던 사내가 오히려 팔을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한껏 맞았으니 아주 아프지 않을 리가없었다. 혹시 아프지는 않다고 해도 뒤통수를 맞고 기분이 좋을 리는없었다. 진자앙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창날이 번뜩이더니 그의 목을 겔러 왔다. 쿡! 진자앙은 눈을 아래로 깔아 자신의 목에 틀어박힌 창을 보았다. 눈의 구조상 다 보이지는 않고 은빛 창날과 금속으로 만들어진 창대의은빛 광채만 보였다. 이건 그도 알 수 있었다. '양가창……?' 천하에 그 이름이 자자한 양가창이 그의 목을 찔러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양가창을 쓰는 사내는 양가창법의 후계자일 것이다. 진자앙은 손을 올려 창날을 잡았다. 창을 든 사내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신의 창에 뚫리지 않는 사람도처음 보았고, 맨손으로 창날을 잡은 사람도 오늘 처음 보았다. "이익--!" 그는 창날을 비틀어 당겼다. 이렇게 하면 대개는 상대의 손가락 몇개쯤을 자르고 창은 자유를 찾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창날을 잡은 사내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였다 손아귀 힘이 얼마나 강한지 창날은 전혀 요동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솟구쳤다. 진자앙은 창날을 잡아 목에서 떼어 내고 입을 벌렸다. "양가창의……!" 그때 도끼가 그의 됫목을 후려치는 바람에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앞으로 한걸음 밀려갔다. 싸움 도중에 입을 벌린 것이 잘못이었다. 천하없는 외공도 입을 벌려 말을 할 때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제법 아팠다. 뒷덜미가 욱신거리는 것이 대단한 힘으로 후려친 모양이었다. 검 두 자루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까 옆구리가 결렸던 이유가이 검 두자루 때문, 아니, 그 검을 휘두른 자들 때문인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이번에야말로 성질이 났다. "이이……!" 그는 잡고 있던 창날을 휘둘러 도끼 사내를 후려쳤다. 양가창의 사내가 창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에 진자앙의 공격은 창날을 잡고창대에 매달린 사람까지 휘둘러 쳐가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덕분에그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어어……!" 도끼 사내가 정신얼이 물러섰다. 창태 끝에 사람이 달려 있으니 도끼로 막기도 어려을 뿐 아니라 자칫 잘뭇하다간 그 몸뚱이에 맞을 것같았기 때문이었다. 진자앙은 이번에는 창을 반대편으로 휘둘러 자신을 검으로 공격한두 사내를 쳐갔다. 양가창의 사내는 창대를 잡고 두 바퀴나 돈 셈이라, 이번에는 버티지 못하고 생명처럼 귀한 창을 놓치고 말았다. 검으로 공격한 사내들은 하나는 네 자 세 치의 장검, 다른하나는 세 자가 채 못 되는 잘은 검을사용하고 있었는데, 색깔도 대조적인 검정과 흰색이었다. 이런 검은 강호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라,그 검만 보고도 출신을 짐작할 수 있는 법이었다. 검정색 장검은 오초검이라케서 주로 산동 오초문의 문하생들이 쓰는 것이누 하얀색의 컴은 설산파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빙백검이었다. 무기가 특이한 만픔 나름의 용법이 있고, 또 제대로 사용하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지금 진자앙의 공작은 그들로서도 받기어려웠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창대가 두져운 것이 아니라, 거기 매달려 있던 양가창의 샤태가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한편 검을 거두며, 다른 한편으로는 날아오는 양가창의 사내를 받으려고 허등거리고 있을때, 도끼의 사내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보다는 여태 공격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화려한 칼의 사내가빨랐다. 그의 화려한 칼이 그보다 더 화려한 칼집에서 벗어나 진자앙을 노렸다.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창백한 백색 도광이 서리서리 뻗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것은 쇠를 두부처럼 베어 버린다는 보도가 분명했다. "외공 나부랭이를 좀 익혔나 본데……, 이 한천수라도에도 베어지지 않는지 궁금하군.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진자앙도 사실 그것이 궁금했다.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보도. 그런 유의 신물이기에도 그의 외공이 견딜 수 있는지, 견딘다면 어느 정도까지인지 한번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게 목숨을 걸만큼 가치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진자앙은 손에 든 창을 한천수라도의 사내에게 겨누었다. 그러면서보니 자기가 창을 거꾸로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가 보셨으면 또 야단치셨을 거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바꾸어 쥐지 않았다. 적을 앞에 두고그럴 시간이 없었다. 한천수라도의 사내가 칼을 천천히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누구에게 죽는지나 알고 죽어야 염라전에 가서 고할 말이있겠지? 수라궁의 한천도 위지광이 바로 나다!" "한천도 위지광?" 진자앙은 입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진자앙이 산에 들어가 무공을 익히는 동안 유명해진 단체가 수라궁이고, 그 수라궁의 대표적인 후기지수가 한천도 위지광이니, 진자앙이알 리가 없었다. "나는 광동……!" 진자앙은 자기 소개를 할 여유도 없었다. 위지광의 한천수라도가 잠시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가슴팍을 베어 오고 있었다. 슈슉--! 진자앙의 손이 가벼워졌다.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도 못 한 사이에,한천수라도가 창을 쳐서 창날만 남겨 두고 배어 버린 것이다. 그 다음은 가슴이었다. 진자앙은 이번에는 제대로 대응혔다. 구르듯 뒤로 물러서면서 창날을 던지고 손얘 잡히는 것을 휘둘렀다. 위지광이 창날을 가볍게 쳐서 날피고는 재속 덮쳐 오며 외쳤다. "수라구류도는 적을 죽이지 않는 한, 멈추지 않는다!" 슈슈슉--! 진자앙도 수라구류도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다. 오륙십 년 전에 수라대제라고 자처하는 한 인물이 있었고, 그가 사용하는 도법이 그것이었다고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것이다. 수라대제는 감히 대제라는 과분한 별호를 자칭하는 바람애 관부의 수배를 받아 쫓겨다니다가, 결국 맹방평에게 걸려 압송, 참수되었다. 진자앙은 그제야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지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 수라구류도를 어떻게 상대하느냐는 것이었지만. 정신없이 객잔의 벽까지 밀려간 진자앙이 집어 든 것은 긴 의자였다. 객잔의 긴 의자는 쥐기도 좋고 네 다리가 달려 있어,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 그래서 각 문파에서는 실전수련의 하나로이 긴 의자를 사용하는 수련도 하곤 했다. 물론 진자앙은 그런 수련을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기로 사용할 수 없었다. 슈슈슉--! 한천수라도가 뱀의 혓소리같이 날카로운 신음을 토하면서 그의 목과 가슴, 그리고 배를 한꺼번에 갈라 왔다. 진자앙은 긴 의자를 휘둘렀다. 카칵--! 통나무를 잘라 대충 다듬고, 거기 꺾쇠를 박아 만든 의자는 어지간한 도끼에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거기에다 오랜 세월 동안 객잔에서 구르면 온갖 오물과 기름때가 묻어 기름 먹인 방망이만큼이나 강해지는 것이다. 그런 긴 의자를 위지광은 단번에 세 도막으로자르고, 진자앙의 가슴팍과 목에도 칼질을 했다. "죽어라!" 두 칼이나 맞았으니 이미 중상이겠지만 확인을 위해 위지광이 마지막 칼질을 하려고 할 때, 진자앙은 고개를 숙이고 상처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외공이 강해선지, 아니면 대충 맞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팍에는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붉은 선 한 줄이 마치 손톱으로 그은 듯이 그어져 있을 뿐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곧 증명이 되었다. 땅--! 한천수라도는 진자앙의 머리꼭대기에 박혀들었다. 아니, 박혀들려다가 멈추었다. 그의 보도로도 잘려지지 않을 만큼 진자앙의 머리는단단했던 것이다. 위지광이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릴 때, 진자앙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그의 주먹이 멍청히 선 위지광의 안면을 강타했다. 위지광은 세 바퀴나 구르고서야 간신히 일어섰다.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치아가 세 개는 부러져 나갔을 것이었다. 부러진 치아때문인지 바람 새는 소리로 위지광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금강불괴냐?" 생쥐 얼굴의 사내, 사실 그는 비도술로 유명한 운남연운산장의 후얘인 추명탈흔 연가기로지금은 등천비룡문의 총단 소속 봉공인 이십팔숙의 일 이이었다. 그는 위지팡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세차개 흔들었다. "철대로 아니야! 절대로……!" 그러나 그 또한 진자앙이 비수를 눈동자에 맞고도 꿈쩍도 않던 것을떠올리고는 어쩌면 금강불괴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애감을 갖고있었다. 혁련 공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실례가 많았소만 지금이라도 인사를 해야갰군요. 소생, 혁련자휘라고 하오. 호주 혁련가의 자손이외다." 진자앙은 여태까지의 어떤 공격보다도 이 한마디애 더 놀랐다. 호주 혁련가라면 그와 같은 팔대세가의 자손이 아닌가! "팔대세가의 자손이 암습을 한단 말이오?" 믿어지지 알아 그렇게 감탄처럼 한마디했을 뿐인데 혁련자휘는 심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건 사정이 있어서…… 아니, 어떤 비난을 들어도 어쩔 수 없겠지요. 하여튼. 이왕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그냥 헤어질 수는 없겠구려." 그는 비단장삼 자락을 걷었다. 그는 무기를 장삼 안쪽애 차고 있었는데, 그 무기는 화려한 그의 비단장삼에 어울리지 않는 녹슨 칼이었다. 칼집은 동으로 만들어졌는지 퍼렇게 녹이 슬어 있고, 칼 손잡이에도장식이라곤 없이 그저 검은 가죽을 감아 놓았다. 특이한 것은 칼의 폭이 손바닥 너비만큼이나 되게 넓다는 것이었다. 눈짐작으로도 세 치는되어 보였다. 진자앙은 그 칼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그게 그 유명한 혁련가의 박도요?" 박도라는 것은 원래 나무할 때 쓰는 칼이다. 큰 나무야 도끼로 베어넘기지만 작은 가지까지 도끼를 쓰지는 않으니, 이럴 때 박도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리 날카롭지도 않고, 좋은 칼도 아니다. 오히려 도끼날을 연상케 할 정도로 두터운 데다가 날이 제대로 서 있지않은 것이 박도의 특징이었다. 혁련가의 개조가 나무꾼 출신이었기 때문에 박도를 무기로 삼았다는 전설을 진자앙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혁련자휘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칼을 뽑기 시작했다. "생긴 것과는 달리 제법 날카로우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혁련가의 박도가 이름과 달리 날카롭다는 것은 진자앙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카로움은 칼 때문이 아니라 강기의 막이 칼에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른바 도강이라는 것이었다. '도강에도 내 외공이 견딜 수 있을까?' 진자앙은 이번에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위지광이 말한것처럼 금강불괴는 아니었다. 단지 살가죽이 두꺼을 뿐이고, 거기다단련을 좀 해서 조금 더 질겨진 것에 불과하다. 그런 몸이 도강과 같은 고차원의 무공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 싸우지 않을 수도 없었다. 혁련자휘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분명 암습을했고, 이 소문이 강호애 퍼져 나가면 가문의 망신이라는 것도 분명했다. 당연히 그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할것이다. '좋아, 나도 진가장의 자손이다.' 그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해도 피하지는 않으리라고, 끝까지 버터보리라고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 결심은 실행되지 않았다. 혁련자휘의 칼도 완전히 뽑히지않았다. 그의 칼은 나올 때보다 더 빨리 칼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맹방평이 그의 손을 눌렀기 때문이었다. 짝--! 혁련자휘는 칼 대신 뺨을 쥐고 굴렀다. 맹방평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건, 비겉한 짓을 한 데 대한 어른으로서의 훈계다!" 펑--! 혁련자휘의 몸이 떴다가 가라앉았다. 맹방평은 발을 거두어들이며 다시 중얼거렸다. "이건, 네 가문애 대한 경고다!" 그는 진자앙애게 손짓했다. "그만 가자!" 진자앙이 머뭇거렸다. "안에 여자들은……?" 멩방평이 청년들을 손짓했다. "그들에게 맡기면 될 것 아니냐!" 그는 장거에게 다가가 동전을 세어 계산을 마치고는 아직도 어리등절해 하는 진자앙을 데리고 나가 버렸다. 혁련자휘는 멍청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다른 사내들은 말도 못 하고 서 있기만 하는데, 장거가 쭈뼛거리며 혁련자휘에게 다가갔다. "저……, 부서진 집기와 아까 식대를 주지 않고 나간 손님들 몫의계산은 공자님께 받으라는뎁쇼?" 연가기가 눈을 부률떴지만 혁련자휘가 손을 저어 말렸다. "계산해 줘라!" "저…… 그리고……" 위지광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리고 뭐냐? 계산할 게 더 있나?" 장거는 주방을 가리켰다. "저기 계신 분이 나오셔야 저희도 장사를 계속할 텐데 말입니다……!" 그제야 주방에서 그들 일행 중 마지막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진자앙을 암습하려다가 기회를 못 잡아 나서지 못했던 한 사람이 여태 거기 있었던 것이다. 혁련자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망신이로군……! 이제 어떻게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할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어쨌든 계략은 성공했으니까." 마지막 사내, 주방에 있다가 나온 사문기의 말이었다. [제십칠장] 영리충은 숨고 운리무는 버티다. 진자앙과 맹방평은 배를 타고 항주를 떠나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고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진자앙은 묻지 않았다. 말해 줄 때가 되면 해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맹방평은 배가 남경을 지나고, 호북성 무창을 지나 호남성 경계에 들어왔을 때에야 그가 궁금해 하던 것을 말해 주었다. "네 할애비는 정말 멍청하다!" 맹방평의 첫마디였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자기가 속한 팔대세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하는말이다. " 그의 설명으로는 등천비룡문의 배후에 팔대세가 중 오대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사천 당가. 하토 서문가, 그리고 광동 진가를 제외한 나머지 오대세가가 등천비룡문의 다섯 기등이며, 그 중에도 호주의 혁련가가 맹주격이었다. 팔대세가는 사실 그 지닌 바 실력과 오랜 명문의 전통만큼 대우를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넓은 세력권과 무수한 문하제자들이 없으니 실리도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호주 혁련가는 뚜렷한 고수의 출현 없이 몰락을 거듭해 온 까닭에이제는 다시 초대 가주의 전통을 되살려 나무나 하러가야 할 판이고,하남의 남궁가 또한 하나의 전통 때문에 팔대독자 하나만 남겨 둔 채줄줄이 과부요, 미망인이었다. 하북의 팽가는 훨씬 이전부터 구대문파의 위명을 부러워해 왔고, 진주의 언가는 대력귀왕의 화륜맹과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큰 세력을 필요로 했다. "양양의 재갈씨들은 왜 참가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하여된 그들이 등천비룡문을 만들었다면 모든 일이 이해가 간다. 그 갑작스런 성장도, 강남 명문세가의 자식들이 줄줄이 거기 들어가는 것도……!" "그럼 영리충이 관계되었다는 추측은……?" "그렬게 생각하기는 어렵지. 영리충과 오대새가가 어울린다는 것은,매요신이 아들을 낳았다는 말만큼이나 믿기 어려워." 진자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요신이 아들을 낳았습니까?" 내뱉고 나서야 그는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황사 매요신은 환관이다. 환관이 어떻개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 그런데 맹방평은 그를 힐꿋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은 아니로 딸이 생겼다는 소문은 있다. 양녀겠지만……! 그 나이에 양녀라는 것도 우습지." "아……!" 진자앙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환관들도 노후를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있다고 했으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조도 따지고보면 환관의 손자 아닌가. 맹방평은 깊은 생각에 빠져 중얼거렸다. "환관이 딸을 낳는데 영리충이 오대세가와 관계가 없으리라는 법도없지. 이 일은 더 파헤쳐 볼 구석이 있다." 진자앙이 물었다. "그런데 오대세가가 등천비룡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문주를 직접 만났으니까." "그럼……?" 그가 비둘기를 따라간 곳은 등천비룡문의 소주분타였다. 그리고 이번 달은 그곳이 총단이었다. 등천비룡문은 한 달에 한 번씩번갈아 가며 총단이 되었다. 문주와 그를 호위하는 이십팔숙이 있는곳이 바로 총단이었기 때문이었다. "혁련세가의 당대 가주 마환대도자 혁련천조가 거기 있었지. 그가 문주였다. 제갈세가의 가주인 새와룡제갈사도가 군사, 남궁세가의 독자인 옥수고검 남궁기가 총단주, 팽가와 언가와 가주들은 태상호법이고, 그 아들들은 호법이었다." 맹방평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애들 병정놀이도 아니고, 위신을 알 만한 사람들이 하는 꼴이라는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너무 쉽게 성공한 것이 어께 이상하군요." "뭐라고?" "맹 노대협의 말씀대로 위신을 알 만한 분들이 그런 모습으로 모여있었다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다는 생각이……!" "호오……!" 명방평이 신기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너는 평소애 보면 영 멍청한태 가끔은 예리한 구석도 있구나. 가끔사람 같은 소리도 하는군." 진자앙은 머리를 긁적였다. "멍청하다는 소리는 많이 듣지만 예리하다는 소리는 처옴 듣는군요." 맹방령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자기 말을 하느라 바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볼 땐…… 네 천품이 원래부터 멍청하찐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천적으로……" "후천적으로요?" 진자앙이 기대를 하고는 맹방평을 바라보았다. 그의 체질을 알아보았나 해서였다. 체질을 알아보면 해결책도 알지 않겠는가. 멩방평은 손가락을 들어 진자앙와 팔뚝을 꼬집었다. 물론 전혀 아프지 않았다. "외공수련을 많이 좨서 멍청해진 것 같다. 멀쩡한사람도 많이 맞으면 머리가 나빠지는데, 너처럼 알아서 구르고, 알아서 이리저리 박고다니니 어찌 멍청혀지지 않갰느냐?" 진자앙은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맹방평온 진지하게 말하고있었다. "외롱이라는 것이 사람의 잠재된 능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린다는데 대해서는 나도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하나를 강조하면 다른 모든 것이 가라앉아 버리게 된다. 맞고도 아프지 않으려고 감각을 죽여 버리면 아픔을 느끼는 감각만 죽는 게 아니라 다른 감각까지 같이 죽어 버린단 말이다. 그러니 이목이 둔해지고, 머리도 멍청해지는 것이다."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전보다 더 둔해진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그렇게 돼도 하는 수 없지요. 할 일이 있으니까요." 맹방평은 혀를 찼다. "너도 나이가 들면 알게 되겠지만 삶을 회생해 가면서 할 일이란 없다. " "맹 포두님이 사마를 잡으려는 것은요? 말해 놓고는 진자앙은 아차했다. 이건 강호에 떠도는 맹방평의 욕을한 셈이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맹방평은 욕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깊은 생각애 잠기는 듯 보이더니 한마디를 뱉었다. "범인을 잡고, 법의 손길에 맡기는 것……, 그것이 내 삶이다." 한동안 침욱이 흘렀다. 진자앙은 맹방평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부님껜 금강불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삶이었을 것이다. 결국 안 되긴 했지만……!' 소삼중도 그렇게 생각하면 삶을 회생한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삶을추구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진자앙 그 자신의 삶은 무엇인가. '금강블괴?' 아직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지금 진자앙은 단지 해야 할 것 같아 할뿐인 것이다. "영리충은 분명 등천비룡문과 관계가 있다!" 진자앙은 갑짝스런 맹방평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맹방평은 일어나 걸으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그러고 있은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그는 진자앙보고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등천비룡문이라는 구멍을 쑤시면 영리충이라는 독사 새끼가 반드시 기어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그게 한이로구나!" 진자앙이 불쑥 말했다.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시간은 항상 충분하다!" "응?" 맹방평이 돌아보았다. "뭐라고?" 진자앙은 자기도 모르개 소리를 쳐놓고는 얼굴을 붉혔다. "할아버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멩방평이 고개를 흔들었다. "너 같은 어런아이에게는 맞는 말이지만, 그나 나 같은 사람이 할소리는 아니다. 그나 나나 저승 문턱에 한 발을 디다고 있으니까. 러나 영리충은 다르지. 그게 그의 가장 큰 무기다!" 원레 주색을 밝히면 신기가 약해진다. 신기가 약하다는 것은무공수련에 큰 저해요소가 될 뿐 아니라 수명에도 큰 관계가 있다. 그런데도 영리충은 고금에 드물 정도로 고강한 내공을 연성했다. 뇌공 원굉도가 기연을 얻어 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익혔고 그 후 백여년의 수련으로 그만큼의 내공을 더 익혔을 테지만, 영리충이 그보다훨씬 높으리라는 것이 강호의 소문이었다. 그 이유는 그이 흡정대법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여인의 음기를 흡수해서 자신의 양기를 높이는사공이었다. 그것이 그가 색마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요, 그 무공의 비결이었다. 맹방평은 결론 짓듯 말했다. "하여튼 우연히 걸리면 모르지만 지금은 그를 잡을 시간이 없다. 영리충이라는 별호는 괜히 붙여진 게 아니야. 그가 숨자고 들면 아무도그를 잡을 수 없다. 나조차도!" "그럼 우리는……?" "운리무를 잡으러 간다!" 배는 동정호에 접어들고 있었다. "운리무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자앙은 원래 말하기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게다가 자기가 먼저말을 걸지 않으면 입도 벌리지 말라는 맹방평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지간하면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묻지 않고 못 배길 정도로 궁금한 일이 바로 그것, 운리무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이 질문에는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운리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느냐' 는 것을 묻고 싶었던 것이다. 운리무는 무림십대고수 중에도 가장 신비한 인물이다. 누구도 그의얼굴을 본 적이 없고, 누구도 그의 이름이나 출신 배경, 무공내력을모른다. 심지어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모른다. 예전에는 어른인지 아이인지도 몰랐는데 세월이 가면서 아이였더라도 이젠 노인이 되었을 터이니, 아직 살아 있다면 노인인 것은 분명해졌다. 그 부분은 좀 나아진 셈이었다. 이젠 분명 노인이라는 것, 사람을 죽일 때 화살을 이마에 꽃아 죽인다는 것--소문에는 그가 활을 쏜다고 하지만 쏘는 걸 본 사람이 없으니 그것 역시 함부로 단정 지을 일이 아니었다--그렇게 사람을 찾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단 두 가지만이 확실할 뿐인데 그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래서 맹방평이 영리충과 운리무를 잡으러 간다고했을 때 의아해 했던 것이다. 영리충을 잡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지만 운리무를 잡는 어려움에 비하면 차라리 쉬운 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맹방평의 대답이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저기 있다." "예?" 진자앙은 놀라서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기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맹방평은 손을들어 앞을 가리켰다. 진자앙은 맹방평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옳겼다. 그리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맹방평이 혀를 찼다. "눈이 나쁜 것에도 정도가 있지. 바로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느냐?" 진자앙은 다시 맹방평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고갯마루에 서 있는 그들 앞에는 길이 뻗어 있고, 그 길은 산으로둘러싸인 작은 마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다시 산이었다. 산이라고 하지만 동산이나 다름없이 둥글둥글 나지막한데 온통복숭아 꽃이 피어 있고, 산 아래 마을에서는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으니,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한가한 시골풍경이었다. 그런데 맹방평이 지금 그 마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믿어지지 않아서 세 번째로 되물었다. "저 마을에 운리무가 있다는 겁니까?" 지금 내려다보이는 저 평화로운 마을과 희대의 살인마, 천하제일의자객 운리무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맹방평은 다시 긍정했다. "운리무가 동정호반의 작은 마을 장가구에 은거해 있다는소문이 강호에 퍼진 지 이미 삼 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가 중원으로 나와 사마를 잡을 결심을 한 것도 그때부터였다고 맹방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노인이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이곳 장가구로 이사를 온 것은 삼년 전이었다. 그는 그때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을 인수해서 개축을 한 다음 이름을 운리장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이 강호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우연이라고 하지만 강호인 누구도 말할 때는 괜히 주위를 한번둘러본 다음에야 내놓는다는 그 이름을 장원의 이름으로 삼은 주인에대한 호기심이었다. 게다가 그 운리장의 주인이 은빛 머리칼과 은빛 수염을 날리며 활쏘기를 즐기는, 기골이 장대하고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이라는사실이 더욱 묘한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눈썰미가 좋고, 무엇보다 할 일이 없는 강호인들이 소문의 진상을 알려고 하루에도 몇 명씩 장가구를 찾았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중 용감한 몇몇은 운리장을 찾아가 숙박을 요청하기도 하고, 괜히 주변을 맴돌며 문제의 그 주인을 먼발치에서라도 한번 보려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운리장을 다녀오고 난 그들이 실제 그 주인을 보았는지, 혹은 무엇을 보고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곧 강호에는 운리장에 은거하고 있는 사람은 운리무가 분명하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원래 자객이라는 것이 남에게 내세을 만한 직업은 못 된다. 아니,극력 밝히지 않으려 애써야 할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지만, 누구나 수긍할 만한 복수에는 가끔 보복이 뒤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자객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대의를 위해 떨치고 일어선 고대의 자객이 아닌, 대가를 받고 누군가를 대신 죽이는 직업이라는 것에는 일말의 정당성도 부여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객의 최후는 대개의 경우 비참하다. 정체가 발각된 자객은 더욱 그러하다. 그의 손에 죽은, 혹은 그랬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유족, 친지, 친구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보복을 하는 것이다. 이른바 공분을 일으키는 행위를 한 자에게는 무림도의가 적용되지않는다는 관행 때문이다그런 상황에 운리무가 정체를 드러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손에 죽은 자들이 무수하고, 그 대부분이, 상인이든 학자든 흑은무림인이든 자기가 속해 있던 세계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치열한 보복이 있을 거라는 예상을누구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한 가지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 운리무는 보통 자객이 아니라 무럼십대고수 중 한 명이라는 점이었다. 이 시대에 누가 감히 무림십대고수얘게 덤벼들 수 있을까? 아무도 없었다. 있다 해도 극히 적었다. 운리무의 경우도 그러해서 그에개 원한을 가진 사람들도 눈치만 보고, 혹은 오랜 과거의 일이니 덮어 주자는 쪽으로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운리무가 가장 최근에 자객행을 한 것이 삼십여 년 전이고, 또 꼭운리무가 했다는확증도 없었다. 시신의 이마에 꽃힌 화살 하나로 운리무에게 원한을 갖기에는 충분치가 않은 것이다. 아니, 원한을 갖기에는 층분할지 몰라도 그 원한을 풀기 위해 목숨을 걸기에는 충분치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운리장은 건재했다. 보복의 손길은 없었고,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신화적인 자잭 운리무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하나둘 장가구로 모여들더니 운리무는 나서지도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단체를 결성하고, 운리장을 보호하는 밈무를 떠맡기 시작한 것이다. 자객교가 그것이었다. 진자앙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그 자객교가 저 마을에 있다는 겁니까?" "아마." "처렇게 평화스러워 보이는 마을애 천하제일자객이 살고 그를 추종하는 자객교라는 단체까지 있다니…… 정말 맹 노선배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군요." "무슨 말?" "이름과 실제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말씀 말입니다. 이 경우는보이는 것과 실제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해야 하겠지만……" 맹방평은 비웃는 것처럼 입술을 잠시 실룩이더니 마을로 걸어 내려갔다. 진자앙이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어떻게 잡으실 작정이십니까?" 맹방평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눈치였기 때문에진자앙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보이는 것과 실제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진자앙의 말은 틀린 것같았다. 마을은 멀리서 봤던 것처럼 실제로도 평화로웠다. 대신 맹방평과 진자앙이 그 평화를 깨뜨렸다. 맹방평은 마을로 들어서자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이것저것 묻고 다녔다. 포 자가 새겨진 금패를 휘두르며 자신이 포두라는 것을 밝히고 묻는 것이니 시골 사람들이 거기 반항할 리 없었다. 그러나 대답은 별로 신통한 것이 없었다. 진자앙이 보기에는 그랬다. 자객교라는 그 단체에 쳐들어간다면 모를까, 평범한 시골 사람들이 운리무 같은 초고수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 반나절을돌아다녀도 그들에게서 긁어 낸 것은 어쩌다 먼발치로 봤다거나, 작년말쯤에 집 앞을 지나가더라거나 하는 시시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맹방평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물었다. 그리고 산 아래의 한 집에서 드디어 원하는 것을 찾았다. 시골 부농의 질인지제법 높은 담이 둘러쳐진 그럴듯한 집이었지만, 마당에는 닭과 오리가돌아다니는 평범한 농가였다. 포두가 떴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하인들이 괜히 숨고, 지팡이를 잡은구부정한 주인 노인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중국의 전퉁적인 실내 구조로는 방안에 침상 같은 구들이 있다. 이것을 승갱이라 하는데 맹방명과 진자앙은 거기 앉았다. 포두라고 대접하는 모양이었다. 맹방평은 시립하듯 선 쭈인을 향해 연신 질문을 퍼부었다. 운리장에대해 묻고, 그 주인에 대해 묻고, 흑시 무슨 관계가 있는지, 본 적이나 만난 적은 있는지……! 그러다가 주인이 맹방평이 원하는 것을 내놓았던 것이다. "요 바로 뒷산에서 활을 쏘곤 하시는 모양이던데 하루는 화살이 우리 집 담장 안으로 넘어온 적이 있지요. 직접 화살을 찾으러 왔는데문이 닫혀 있으니까 슬쩍 밀었나 봄니다. 대문이 그냥 떨어져 버리더군요. 놀란 하인들이 나갔는데 손을 슬쪄 혼드니까 전부 날려가지 않겠습니까, 도사갸 따로 없더군요. 화살을 주워 나가시는 것을 쫓아가서 몇 번이고 용서를 빌었지요. 다행히 그 후로도 아무 말씀 없으시더군요. 대단한 분이셨지요." 그날 보았던 운리무의 인상이 대단히 강렬했던 모양이었다. 인세에신선이 있다면 아마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몇 번이나 혀를 내두르는데랭방평의 눈이 빛났다. "여기 왔었다고요?" "예 ." "문을 부수고?" "예 ." "사람은 안 다쳤소?" "그때 하인 몇이 밀려서 조금 다치긴 했는데……!" 맹방평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갑시다." 주인이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어디로요?" ""그놈 잡으러 ," 주인은 맹방평의 손에 끌려 대문을 나서면서도 이게 무슨 영문인지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굴 잡는단 말씀이십니까?" "운리장 주인." "왜요?" "무단 난입에 폭행죄!" 주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진자앙도 마찬가지였다. 반나절을 돌아다닌 것이 저것을 위해서인지 그때야 알았던 것이다. '운리장 주인과 대면할 구실을 만드시는 것이었군!'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맹방평이 정말 무단 난입에 폭행죄로운리장 주인을 잡으려 한다는 것은 짐작도 못 했다. 운리무의 이름 아래 그러한 죄목이 붙는다는 것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맹방평은 운리장의 총관을 만난 자리에서도, 그리고 결국 운리무의 주인미 접객청에 나온 다음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체포하겠다.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운리장의 주인은 소문대로 은발 은염의 노인이었는데, 주름살 하나없이 붉은 얼굴을 유지하고 있어서 나이를 짐작하지 못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길게 뻗은 눈샙도 은빛으로 반짝이고, 그 아래 찢어진 눈꼬리가 섬광처럼 번뜩이고 있어서. 진자앙이 보기에는 맹방평보다도오히려 고수답게 보였다. 그는 태연하계 되물었다. "귀하가 유명한 포두라는 것은 알지만 죄없는 사람을 잡아갈 수는없을 것이오. 도대채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오라를 지라는 거요?" 맹방명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운리장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의 성긴 눈썹과 주름살 아래로 깊이 파인 눈에서는 아무런 섬광도, 살기도 풍겨지지 않았지만 운리장의 주인은 조금썩 눈을 내리깔았다. 진자앙은 그 순간 맹방평의 키가 한 치쯤 커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니면 운리장 주인의 키가 한 치좋 작아졌을 것이다. 맹방평이 불쑥 물었다. "당신이 운리무인가?" 운리장 주인의 눈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는 방금 맹방평의 기세에눌려 평소의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진자앙은 그걸 보고 그는 분명 운리무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이 운리장 주인의 기새는 맹방평보다 훨씬못헨다. 단순 비교는 가능하지 않겠지만, 기세에 있어서 밀린다는 것은 무공애 있어서도 아래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본다면 이 운리장 주인의무공은 맹방평의 한참 아래일 것이다. 십대고수 사이에도 차등이 있을수는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닐 것이므로 운리장 주인은 운리무일 수가얼다. 진자앙온 그렇개 셍각했다. 그러나 운리장 주인은 맹방평의 결문에 긍정하고 있었다. "그렇소. 내가 운리무요." 그는 묘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계속 말했다. 마치 맹방평을 비웃는것 같은 표정이었다. "성이 운, 이름은 리무, 그래서 운리무요." 맹방평의 눈이 비로소 번뜩였다. "자객 운리무가 아니고?" "그런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운리장 주인, 자칭 이름이 운리무라고 밝힌 그는 이제 완전히 침착을 되찾아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난 모르는사람이오, 내가 듣기로는 그는 이름이 아니라 별호가 운리무라고……?" "귀하를 보호하기 위해, 아니 정확하게는 자객 운리무를 기념하고보호하기 위해 자객교가 만들어졌다더군. 그 자객교가 당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래도 아닌가?" 운리무는 손을 펴 보였다. "나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르겠소. 그러지 말라고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소. 자기들이 멋대로 짐작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나보고 책임지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맹방평은 운리무의 뒤쪽 벽에 걸려 있는 물건을 가리켰다"저건 뭔가?"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대 위에 활처럼 생긴 것이 얹혀져있는 기구였다. 운리무는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당신은 관부에 있으면서 노궁도 모르시오?" 노궁은 기관의 힘을 빌려 시위를 당겨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쏘아 보내는 일종의 활이다. 사람의 힘으로 당기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기관으로 그 일을 대신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활보다, 훨씬 무거운 것을 훨씬 멀리 그리고 많이 쏘아 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많이 사용하는 무기로, 사람이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커서 수래에 싣고 다니는 것도 있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는 화살이 가득 담긴 전통도 걸려 있었다. 맹방평은 손가락을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천하에 내가 못 본 종류의 노궁이란 없지 그런데 저런 형태의 것은 처음 보는군." "서역애서 들어온 거요." 운리무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힐끔 맹방평의 눈치를 보더니 보충해설명했다. "몇 년 전에 우연히 구할 수 있었소." "육십칠 년 전이 아니고?" 진자앙은 왜 하필 육십칠 년이라고 맹방평이 못을 박나 잠깐 생각해보고 그것이 운리무가 한 것으로 추정되는 첫 살인 사건이 일어난 때라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운리무의 화려하고도 잔인한 등장이 있었던때였다. 육십칠 년 전의 어느 날 저녁, 당시 무림제일세력이었던 군황성의 샤열 십 위 고수가 정원 한 귀퉁이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마에는 보통보다 조금 쟉지만 화살촉과 대가 한철로 만들어진검은 화살이 꽃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피살은 군황성 내의 내부기밀에 속하는 것이만고, 그래서 자객 운리무의 존재도 극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가 가기 전에 강호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첫 번째 피살자를 시작으로 구 위, 괄 위, 칠 위의 순으로 하나씩 군황성의 고수들이 죽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똑같은 방법, 똑같은 무기에 당해 똑같은 흔적을 남기고서……그 피의 행진은 결국 군황성 서열 일 위인 성주가 태사의에 앉은 채암살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때 군황성에는 그와 그의 일가족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었다. 운리무는 피와 더불어 등장해서 단 열 명을 죽임으로써 군황성이라는 당세 제일의 문파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렸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얼굴도 보이지 않고 무림최고수의 대열에 끼여들었다. "하--!" 운리무는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육십칠 년 전이라면 난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요. 도대체 내가 올해 몇 살이나 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맹방평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훌어보았다 진자앙도 그렇게 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젊은데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진자앙은 그때에야 깨달았다. 그가 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지금 이 운리장 주인은 절대 운리무가아니라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나이도 속일 수 있고, 원래 이름과 별호가 우연히 일치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까지 속일 정도로 비굴해서는 절대로 십대고수 중 하나일 수 없는 것이다. 자존심. 명예와 같은 것은 인간의 가치와 극히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돌아보지 않는 인간이 혹시 잘되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고 해도 결코 그런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한다. 그 사이에 자존심이 생겨 버리거나, 혹은 그 전에 자존심 같은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맹방평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 운리무가 자객 운리무든 아니든 꼭 체포해야겠다고 결심한 모양이펐다. 그는 금빛 포승을 꺼내 들고 예의 무단 난입얘 폭행죄로 체포하겠다고 말했다. 증인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노인이 되어 줄 것이니 그것으로 충분한셈이었다. 운리무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사소한 일로, 그것도 몇 년이나 지난 일로 날 체포하겠단 말이오?" "사소한 일이라고……?" 멩방평은 의미심장하개 중얼거렸다. "목이 떨어질 텐데도 그게 사소한 일일까? 칼날이 생각보다 차갑다고 느껴지거든 한번 잘 생각해 봐라!" "사형?" 운리무는 경악했다. "율조애는 남의 짙 대문을 부수고 침입하는 자는 잡범으로 쳐, 사형에 처한다고 나와 있지. 자, 순순히 포박되겠느냐, 아니면 몇 대 얻어맞고 하겠느냐?" 멩방평이 금빛 포승을 운리무의 앞으로 내밀었다. 운리무는 두려움에 확대된 동공으로 그 포승을 쳐다보았다. 그는 흔들거리는 그 포승이 지금 당장 자신의 목을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할고는 간신히 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율조에는 사정이 없다지만 후사를 부탁할 시간은 주겠지요?" "주지. " 맹방평은 선선히 응낙했다. "이 포승을 받고 난 뒤에 말이다." 운리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더니 하는 수 없는 듯 천천히 팔을내밀었다. 다음 순간 탁자가 뒤집혔다. 원래 그들 세 사람은 붉게 칠해진 등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삼각형으로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맹방평이 그 탁자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운리무가 뒤로 뛰고, 맹방평이탁자를 넘어 덮쳐 간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진자앙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맹방평이 탁자를 뛰어넘으며 발끝으로 그것을 건드리는 바람에 탁자는 비스듬히 됩굴다가 멈추었다. 덕분에 진자앙은 거기 몇 개의뾰족한 강철 조각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에야 운리무의 소매 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본 것도 같다는 점을 기억했다. 맹방평은 아마도 이 암기를 막으려고 탁자를 뒤집은 모양이었다. 진자앙으로서는 보는 것으로도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빠른 암습이요,대응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두 사람이 주고받는 공수의 교환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처음 받았던 인상과는 달리 운리무는 상당한 고수였다. 발은 얼음에 박 밀듯이 소리없이 미끄러졌고, 팔은 열여덟 개나된 듯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 손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쥐어져 있었지만 진자앙의 눈으로는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운리무의 무서운 점은 그 현란한 동작과 라른 손놀림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은 마치 암기의 창고와도 같았다. 손을 흔들면 소매에서 한꺼번에 서너 가지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팔을 움직이면 어깨에서 화살이 쏘아졌다. 발을 움직이자 무릎에서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튀어나오고, 심지어 가슴팍과 등에서까지 독침과 표창들이 쏟아졌다. '그 비굴함은 일부러 꾸민 것이었나?' 진자앙은 온 방안을 메운 그 암기의 폭풍 속얘 그대로 주저앉아 다시는 사람을 한번 보고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고있었다. "멍청히 앉아 있지 말고 어디 숨어라!" 맹방평온 별로 서두르는 느낌도 없이 그를 향해 꾸짖듯 지시하고는한 손은 등글게 휘두르고 다른 손으로는 포승을 흔들었다. 우우우웅--! 맹방평의 손이 전과는 달리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 손에서는은은한 금광이 감돌며 나와 공기를 진동시켜 울부짖게 만들고 있었다. 금문공 맹방굉은 슨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무공을 한다고 평가되고 있었다. 금나, 포박, 점혈, 산수, 솔각에 유술까지 포함한 그의 무공을 여의십이수라고 부르는데, 이 중에튼 암기틀 받는 수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그의 손이 펼치고 있는 무공, 귀종수가 그것이었다. 장풍을 발출할 때와 같은 원리로 장심에서 기를 뿜어 내어 시전자의주위를 감싸고 있는 공기를 움직이는 것이다. 그 움직임이 원을 그리며 모이거나 홑어지는 것은 시전자의 의도에 따르는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서 암기가 시전자의 손으로 끌어당겨지기도 하고 그를 해치지못하게 비껴 가기도 했다. 지금 맹방평은 귀종수의 흡 자 구결을 운용하고 있었고, 그래서방안에 가득 찼던 암기들이 그의 손짓을 따라 빨려들었다. 그 흐름 속을 금빛 포승이 뱀처럼, 화살처럼 움직였다. 원래 각대문파만이 아니라 무공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도 독특한 나름의 절기가 있어서 그것이 대를 이어 가며 발전되고 전수되기마련이다. 대표적인 예로, 군부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무공이 있는데, 한나라 때의 수박, 당나라의 각저, 송나라의 각력, 그리고 당대에 들어서서 장군 척계광이 군사무술을 모아 기효신서를 편집한 바, 거기 나온 송태조삼십이세장전과 같은 것이 병사들이 흔히 수련하는권법이었다. 군사들이 그러한데 포교들에게도 나름의 무공이 없을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군사들이 집단적인 전술 훈련, 예를 들어 원앙진이니 팔문금쇄진과 같은 것에 주력한 데 반해 포교들은보다 개인적인 무공을 수련하였으니, 정교함에 있어서는 위라고 해야옳다. 그 중에서 특히 범인을 따르는 추종술이나 금나술,포박술과 같은 것은 다른 무림문파에서 따르지 못할 정도의발전이 있었다. 그런 고도의 기예들을 모아 여의십이수라는 형태로 정리한 것이 맹방평이고, 지금 시전하는 여의박은 그 중 대표적인, 포교들만의 독문절예라 할 수 있었다. 일전에 친자앙이 물에 떨어졌을 메도 그 깊은 물속까지 밧줄을 던져낚시질하듯 건져 올릴 수 있었던 것이 이 여의박으로 하여 가능했던것이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방안을 메웠던 암기들이 맹방평의 앞에 수확이 쌓인 그 뒤에는 운리무가 금빛 포승에 묶여 뒹굴고 있었다. 온리무가 정말로 가짜여서 노궁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라면 그것온 그에개 불행한 일이었고, 혹시 진짜인례도 미처 사용할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이라면 그것 또한 그것대로 그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맹방평은 진심으로 그를 처형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방평은그 자신보다 오히려 진자룡의 멍청한 손자가 더 걱정이 되어 돌아보았다. 아무리 뛰어난 금나수를 전개했어도 그 많은 암기를다끌어 모은다는 것은 그에게도 볼가능란 일이었으니, 혹시 진자앙이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진자앙은 재빨리 피하지 못하고 그냥 의자에 앉은 채로 있었고, 그의 몸에는 수십 개의 암기가 꽂혀 있었다. 몸의 면적이 넓으니날아오는 대로 다 맞은 것이 붙명했다. 명방멱은 이맛살을 쪄푸렸다. "멍청한 것! 피할 생각도 뭇 했군!" 진자앙이 손을들어 머리를 긁었다. 그 동작과 동시에 몸, 아니, 사실은 옷에 박혀 있던 암기들이 무수수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암기들이 너무 빨라서 피하지 못했습니다." 진자앙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건 진심으로 부끄러워해서 그런 것이지 독에 당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살가죽 하나는 두꺼운 놈이군!' 맹방평은 하마터면 웃음을 흘릴 뻔하다가 겨우 내색하지 않고 몸을돌렸다. "그만 가자! 죄인을 압송해야 한다!" 악주부. 젓 이름으로는 악양이라 불리는 이곳은, 운리장에서 걸어서이틀은 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그 길을 맹방평과 진자앙은 걸어서 갔다. 운리무는 포승으로 둘둘 감다시피 묶어서 천리독각추에 태운 채였다. 진자앙은 운리무를 묶는 방법에서 맹방평의 고지식함을 다시 한번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고수가 한번 잡은 범인이 도망갈까 두려워 그렇게 누에고치 만들듯 밧줄로 말아 놓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이 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손목을 엇갈리게 묶어서 소매 속으로 밧줄을 넣은 다음 저고리앞섬으로 빼서 팔목과 팔꿈치를 포함해 여덟 바퀴를 돌린다. 그 다음 그 줄을 그대로 바지로 넣어 발목으로 빼서 거기마저 묶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줄을 당겨 엉덩이께에서 묶으면 고개는 뒤로 젖혀지고 발목은 위로 당겨지니, 그냥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누에고치였다. 그런 불편한 꼴로 나귀 등에 실려 이틀을 가야 하는 운리무는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동네를 빠져 나을 때는 제법 의연하더니 한 시진쯤 그렇게 나귀 등에서 덜컥거리자 곧 우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지은 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런 꼴을 만든단 말이오! 이건 권력의 횡포라 아니할 수 없소.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학정이, 천하에 그 이름이 자자한 금문공 맹방평 어른의 손에서 저질러질 줄이야 이 불쌍한 민초는 상상도 못 했구려! 제발 다리나 좀풀어 주오. 아니면 위 따로 아래 따로 묶어서 배기지나 않게 해주든지." 맹방평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된다 안 된다는 말이라도 해주면어떻게 엮어 볼 것인데 그렇게 전혀 무반응이니 운리무로서는 허탈한노룻이었다. 온갖 불쌍한 소리를 해가며 사정을 해도 맴방평이 그렇게 목석으로깎아 놓은 사람처럼 무반응이자 운리무는 이번엔 포악을 떨기 시작했다. "더러운 놈! 빌어먹을 늙은이! 삼 년을 패병으로 앓다가 똥통에빠져 죽을 놈! 네놈 뼈는 똥개도 안 핥을 것이다. 무고한 사람을 이렇게 취급하고도 네가 온전할 줄 알아? 이제 악주에 도착하면 추관앞에서 잘잘못을 낱낱이 가려 반드시 네놈을 물고 내고야 말겠다. 네놈 잘 떠드는 대명률에도 무고는 죄 삼등을 더 보탠다고 했어. 이번 기회에 아예 옷 벗겨 가지고 강호로 내보내 주마! 무고한사람을 괴롭혔으니 어디 표국에서도 안 받아 주고, 정도의 뜻있는지사들은 너를 사람 취급도 않을 것이다. 그땐 하는 수 없이 산에들어가 짐승가죽 뒤접어쓰고 녹림도로 행세하며 도적질이나해야 하겠지? 아니지! 네놈은 원한을 많이 져서 녹림도도, 수적질도, 해적질도 못해 먹을 것이다. 어디 얕은 산에나 가서 움막 짓고살다가 농부나 나무꾼 나부랭이나 털어 먹고 살다가 뒈지겠지. 그게싫으면 거적 뒤집어쓰고 개방에나 가서 동냥질이라도 하게 해달라고통사정을 해야 할 것이다. 말년에 거지질이라. 하하, 꼴 좋겠군! 내가 지금 당장 죽어도 그꼴만 보면 한이 없겠다. 에이, 이 빌어먹을말 뼈다귀야!" 대부분 부드러운 억양이 그 특징을 이루는 남방 사투리로 한 말이라 진자앙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언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나오는뼈다귀, 놈, 늙은이 소리는 그도 대충 알아들어 욕인 것만은 알 수있었다. 슬쩍 눈치를 봤지만 맹방평은 정말 철관을 간 듯 표정의 변화라곤없었다. 힘든 자새에다가 목까지 혹사시키는 운리무가 불쌍할 따름이었다. 그헝개 서너 시진을 더 가자 저녁나절이 되었다. 이제는 욕할 기운도 없는지 운리무는 축 늘어져 있었고, 천리독각추도 슬슬 꾀가 나는지 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마침 저만치에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났다. 진자앙은 다시 눈치를 살뤘다. 그냥 이대로 걸을 것인지, 아니면 저마을에서 하룻밤 쉬어 갈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루가 아니라 한 달을 걸어도 그리 지칠 것 같지 않았지만, 운리무가 정말 안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맹방평은 마을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놀던 어린아이들이 그들이 들어서자 구경났다고 떠들어대며 모여들었다. 나이든 포교와 철탑같이 큰 사내, 이상하게 생긴 나귀 등에 누에고치처럼 묶여 실려 가는 죄인을 보는 것은 이런 마을의어린아이들에게는 흔치 않은 구경거리였다. 어린아이들은 참새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손기럭질을 하다가 때로는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 돌이 운리무에게 맞아도 맹방평은 신경을안 썼지만 나귀에게 맞을 것 같으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손을 뻗쳐잡아 버리곤 했다. 운리무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나귀 새끼만도 못한 놈이군!" 그때 주먹만한 돌멩이가 날아와 그의 장딴지를 때렸다. 살이 많은곳이라 다치지는 않았지만 아프긴 했던 모양, 방금까지 곧 죽을 것처럼 늘어져 있던 운리무가 발딱 고개를 들고는 돌을 던진 아이를 노려보았다. 아이는 때 묻은 큰 모자를 깊이 쓰고 있었는데 운리무의 눈이 무서운지 다른 아이 뒤로 숨어 버렸다. 돌멩이가 힘을 주기라도 한 것처럼운리무가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죽을 때 죽더라도 밥은 먹고 가자, 이 더러운 늙은이야! 무단 난입에 폭행이 참형을 당해 좋을 죄인지는 모르겠지만 굻겨 죽일 죄는 아니잖느냐!" 그러잖아도 진자앙 역시 배가 고프던 참이었고, 운리무가 밥 먹는동안에라도 쉬도록 해주는 것이 노인에 대한 도리라는 생각을 하고는얼른 한마디 거들었다. "배는 고프군요." 원래 길게 말하려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던 것이,그가 말을 꺼내자마자 운리무가 그렇게 시끄럽고 구구하게 떠들 때는들은 척도 않던 맹방평이 즉시 그를 노려보았기 테문이었다. 진자앙은괜히 움츠러들었다. 맹방평이 걸윰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나는 죄인을 압송할 때는 어지간하면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네가 이 원칙을 따를 펼요는 없지만 죄인은 따라야하고, 어지간하면 너도 따르기를 바란다. 그러기 싫으면 집으로 돌아가든지." "따르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가장 두려워하는 진자앙이 얼른 대답했다. 어느 곳이나 그렇듯이 이 마을에도 중심가의 길거리에는 담가를 짊어지고 나온 도붓장수들이 떡이니, 교자니, 삶은 돼지고기와 같이 간단하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맹방평은 그도붓장수들을 힐꿋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나는 백여 년의 포두 생활 동안 교자를 먹다가, 혹은 술을 마시다가 길거리애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다. 그 중 대부분은 포쿄였고, 호송 중의 죄수가 그 다음이었지. 어떤 사람들은 죄인이 입을 여는 것을 차라리 그 뢰인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포두를 죽이고 죄수를 구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탄. " 길거리에 늘어선 도붓장수들이 일재히 화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멩방평이 목소리를 낮춘 것 같지만 사실은 진기를 불어넣어 멀리까지 또렷이 들리도록 했던 것이다. 운리무도 안색이 변해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욕을 내뱉었다. "사람을 괴롭히려니 이젠 별소리를 다하는군! 밥을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시오! 괜히 겁주지 말고. 날 죽여 이득을 볼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요!" "없으면 그만이고……!" 말을 하던 맹방평이 문득 손을 등글게 휘둘렀다. 그리고 운리무의앞에 그 손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쇠털처럼 가는 침 몇 개가 잡혀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모침이라고 불리며 강호에 널리 알려진 암기였다. 바람에 흐느적거릴 만큼 두께가 가늘어서 보통 손으로 던지는것이 아니라 특별히 만들어진 암기통에 넣어서 발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누구 짓일까?"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한참이나 그 침을 살펴보던 운리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별 어린애 같은 장난을 다 하는군! 이건 아까 내가 던졌던 것들 중하나 아니오. 어디 감춰 뒀다가 지금 내밀어서 사기를 치려 드는 거요." 맹방굉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네가 던졌던 것에도 독이 묻어 있었나?" 맹방평은 손을 쥐었다가 다시 폈다. 진자앙의 눈이 커졌다. 맹방평의 손바닥에는 이제 침이 없었다 밀가루 반죽뜰 눌러 놓은 것처럼 생긴 작은 쇳덩이 하나가 녹색의 물기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녹색 물기가 침에 발려 있던극독이라는 것을 그는 금세 깨달았다. 운리무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는 금방 구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여유를 되찾고 웃었다. "누군진 몰라도 무림정의를 지키려는 협사겠군! 포악한 포두가 죄없는 민초를 핍박하니 정의의 검을 빼어 든 것 아니겠소?" 맹방평은 그의 비난에도 시큰등한 반응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 얼는 평소의 무표정을 유지하고 묵묵히 걷기만했다. 그러나 그가 그와 진자앙. 그리고 그가 호송하는 죄인에게 다가오는위험을 미리 파악하는 데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났다.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들을 보던 거리의 주민들 중 한 사람이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지나가다가 우연인 듯 진자앙에게 부딪쳐 온 그 순간이었다. 촤악--! "으윽--!" 맹방평의 허리춤에서 흔들리고 있던 금빛 포승이 뻗었고, 취객은 뺨을 움켜쥐고 나가떨어졌다. 그의 소맷자락에서 날이 시퍼런 비수 한자루가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자객이었나?' 맹방평의 말로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진자앙은 놀라서 그 취객을 바라보았다. 암살의 대상이 되기는 쳐음이니 한편으로는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혔던 것이다. 그러나 멋지계 자객의 암살 기도를 봉쇄한 맹방평은 오히려 낭패한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찢어진 뺨을 움컥쥐고 피를 흘리는 취객의 모습에선 자객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포승이 갈기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는 상대가 무공을 익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누렇게 뜬 안색, 붉게 충혈된 줘한 눈, 누르면 술이 떨어질 것 같은딸기코까지, 그이 모습은 가장으로 꾸밀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주정뱅이였다. 그의 소맷자락에서 나온 비수가 그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버지!" 구경꾼들 틈에서 한 소녀가 울부짖으며 뛰어나왔다. 그녀는 취객을부등켜안고 울음부터 터뜨리더니 맹방평을 돌아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렇게 다치게 만들었어요! 포교면 사람을 아무렇게나 상하게 해도 되는 거예요?' 맹방평은 혀를 차고는 다시 걸음을 옳겼다. 소녀가 발딱 일어나 그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사람을 개 패듯이 패놓고 그냥 가면 끝나는 일인가요? 당신들 같은포교들 눈엔 우리 같은 사람은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나 보죠?" 허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아무렇게나 여민 옷에서 더욱 가난의흔적이 묻어났다. 원래는 이쁘장한 얼굴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증오로 비틀린 눈과 앙칼진 목소리에서는 악이 넘쳐 흘렀다. 아버지와 세상이 그녀에게 남겨 준 생존의 요령이 아마 그것, 악을쓰듯 살아 가는 것이었으리라. 맹방평은 품에 손을 넣고 있었다. 동전 한 푼이라도 줘서 보내려는모양이었다. 일반적인 무림고수였다면 소녀의 태도에서 동정심을 느끼기보다는 역겨움부터 느끼고, 동전을 꺼내기보다는 우선 밀어 내었을것이다. 그러나 맹방평은 포두였고, 누구보다도 완벽한 포두였기 매문에 소녀의 비난에 찔림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소녀가,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역할을 했지만 사실은 남편인취호접 부심의, 자객 호접락라 불리는 그들부부가 노린 것이었다. 소녀와 손목 어림, 허름한 옷자락에서 날카로운 갈고리 같은 것이여려 개 튀어나와 맹방평의 팔목을 엮었다. 취호접 부심의는 메뚜기처럼 뛰어올랐다. 그의 소매에서는 사마귀의 커다란 손톱 같은 낫 두 자루가 튀어나왔다. 손을 못 쓰는 맹방평은 더 이상 쾌수난타여의박 금문공 맹방평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소녀의 임무는 손을 봉쇄하는 것이고 암살의 나머지 부분, 즉 생명을 제거라는 것은 낫을 든 부심의가 맡은 모양, 그의낫은 소녀의 목을 통콰하여 멩방평의 목애까지 이르는 일직선을 그어가고 있었다. 최단거리를 최단시간 내에 자르고 지나간다는 악랄한 공격이었지만 더 악랄할 것온, 그래서 자객으로 이십여 년이나 굴러먹은 부심의마저 놀라게 만들 것은 따로 있렀다. 구경꾼들 틈에서 수십 발의화살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역시 쇠단거리를 최단시간 내애 통과하기 위혜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목표물의 이목을 가린다는 목적까지 달성하기 위해서 부심의의 몸을 통과하는, 일직선을 그리는 화살들이었다. 아무리 이목이 둔한 진자앙이지만 구경꾼들이 활을 숨겨 가지고 있였다면 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활은 숨기기에는 너무 거추장스럽고, 사용하려 들면 적얘게 들키지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이 화살들은 활에서 쏘아진 것이 아니라 기관장치에서, 이를테면 용수철이나 화약으로 작동하는 통 같은 것에서 나온 것일 터였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보통의 화살이라면 맹방평 같은 고수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할 테지만 기관에서 발사된 화살은 그것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자앙은 그 짧은 순간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는 그대로 그 철탑같이 큰 키를 려어 나귀를 감싸고 얼드렸다. 발은 나귀의왼쪽 땅에, 머리는 반대편 땅에 닿는 자세였다. 당연히 그 배에는 나귀와, 그 위에 실린 운리무가 깔렸다. 엉덩이와 등판에 우수수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호신강기도 뚫는다는 화살이 그의 피부를 뚫지 못한 것에 진자앙은 잠깐 기쁨을 느꼈지만 그보다 맹방평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져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는 보았다. 그리고 맹방평과 같이 고지식하고 답답하며, 그의 전문분야 외의 일에는 모자라 보이기까지 하는 사랑이 어떻게 십대고수의 하나가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맹방평의 손이 팔꿈치에서부터 이어지는 나선형을 그렸다. 소녀의갈고리가 가닥가닥 부러져 흩어졌다. 소녀는 그 충격으로 피를 토하며뒤로 날려갔다. 취호접의 낫이 바람을 가르며 소녀의 목을 치고 있었다. 맹방평의 손은 그대로 뻗어 갔지만 애초에 목표했던 소녀를 치지는않았다. 대신 한 손은 소녀를 스쳐 가 취호접의 낫을 치고, 다른 한손은 수평으로 뻗어 가 취호접의 가슴팍을 슬쩍 밀었다. 빵--! 압축된 공기가 터지는 답답한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취호접의등판이 갈가리 찢겨져 뒤로 날렸다. 그는 달려오는 마차에 치인 것처럼 공중으로 튕겨져서 다섯 장 뒤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날려가는 바람에 날아드는 화살을 피할 수 있었고, 맹방평의일장은 죽을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어서 취호접 부심의는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금의 일장이 등의 근육을 갈가리 찢어 버렸기 때문에 무공에는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앞으로는 팔도 들어올리기 힘들테니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을 것이다. 소녀를 구하고, 철호접 부심의까지 날려 버린 맹방평의 손은 커다란원을 그리며 가슴팍으로 모였다가 갑자기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그의 손은 하나가 천 개가 된 듯 폭발적으로 튀어나간 것으로밖에는보이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던 화살들이 마치 폭풍을 만난 배처럼 그의 손짓을 따라궤도를 바꾸었다. 화살들은 허공에서 방향을 꺾어 장방평을 향해 모여들더니 이내 천 개의 손에 잡혀 멈추어 버렸다. 갈고리를 부수고, 낫과 부심의를 휭겨 내고, 화살을 움켜잡는 그 손길들은 하나하나가 극혀 명확하고 또렷하계 진자앙의 눈에 잡혔다. 열 사람이 하기에도 험들 일을 해내었지만 알고 보면 단 세 동작에불과하고, 그 전개 시간도 찰나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평소의 진자앙으로서는 도저히 그런 것을 볼 수가 얼었을 것이다. 한 순간 시간은 그와 맹방평을 중심으로 정지하고, 그의 이목은 공중에 움직이는먼지 한 오라기까지 놓치지 않을 정도로 집중되어 있었다고 생각하지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맹방평이 손에 쥔 화살들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소리가 천등과 같이 진자앙의 귀에 울려 비로소 그는 자신이 나귀와 운리무를땅바닥에 깔아뭉갠 채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온몸에 화살이 박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 일행을 제외하고는 그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도 그때에야 깨달은 것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어느 집 창호에서 뜯겨져 나온 것인지 모르는 종이 조각이 그 바람에 실려 허공을 날고 있었다. 거리의 끝얘서부터 불어오는 바람, 그바람에 실린 먼지가 그들의 등을 휘감고 지나가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생기에 넘쳐 있던 마을이 단 한순간에 쥐죽은듯이 적막한, 죽은 마을이 되어 버렸다. 쓰러진 소녀와취호접 부심의, 바닥에 수북이 쌓인 화살들이 없었다면 진자앙은 자신이 잠시 백일몽을꾸지 압았나 의심했을 것이다주위를 들러보던 멩방평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객교!" 진자앙은 고게를 끄덕였다. 자객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신묘한 행동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객교는 자객이 모인 단체고,그들에게는 운리무를 구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마을 전체가 자객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요?" 그 대답은 맹방평이 행동으로 럴여 주었다. 그는 발에 걸리는 대로아무 집 문이나 걷어차 열었던 것이다. 묘한 냄새가 진자앙의 코를 찔렀다. 갓 썩기 시작한 시체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그 집, 평범한 길가의 민가에 불과한 그 집에는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죽어 있는 장년의 사내, 침대에 가로뉘어진 노인,뒷문에는 아이를 안은 연인의 시체도 있었다. 그것은 한 가족의 최후를 그대로 보여 주는 흔적이었고, 손을 쓴 사람들의 악독함을 웅변해주는 말없는 외침이었다. 진자앙은 코를 쥐고 물러섰다. 처음 보는 시체, 처음 보는 살육의현장이었다. "다른…… 곳에도?" 앞서가며 서너 집을 들여다본 맹방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단이 깨끗한 놈들이군!" "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진자앙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다.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는짐승은 너무나 악독한 존재 아닌가. 그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코를 쥔 손을 입으로 옮겼다. 맹방평이 그런 그를 힐끗 보고는 한마디를 던졌다. "사치스런 짓 하지 마라. 우리 발등에 불이 더 급하다!" '사치…… 불……?' 진자앙은 맹방평의 말이 무슨 뜻인가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분노한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심장을 가져야 이런 광경 앞에서도 침착할 수 있는가. 어떤 눈이 아런 모슴을 냉정히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분노는 버려 두고 온 소녀와 취호접얘게 옮겨졌다. 그런 자들과 한편이라면 굳이 살려 둘 필요도 얼는 일이 아니었던가! "저, 저것……!" 진자앙은 뒤를 돌아보고 분노하기도 전에 먼저 사태부터 파악해야했다. 맹방평이 말한 발등의 불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 질로 들어왔던 거리의 저편, 마을 끝에서부터 거대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맹방평이 나귀 등애 실린 운리무를 어깨에 들쳐 멨다. "뛰어라!" 그리고 그가 먼저 거리 반대편, 마을의 반대쪽 끝으로 뛰기 시작했다. 자객교는 그들을 불에 태워 죽일 계산이었던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나귀를 끌고 뛰었다. 그러나 나귀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오히려 그가 방해가 되어 나귀가 못 뛸 지경이었다. 그는 나귀의 고뼈를 놓아 주었다. "나라도 주인을 따라가라!" 저만치 가던 맹방떵이 번개처럼 달려와 진자앙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찌나 빠르던지 진자앙의 발은 땅에서 떨어진 채 날아가듯 끌려가야했다. 그러나 바람얘 실린 불길은 빨랐고, 구름같이 솟아오르는 연기는 그불길보다도 빨랐다. 마을의 반대편 입구에 거의 다 와갈 즈음 맹방평의 안색이 변했다. "독이다! 숨을 멈춰라!" 귀로는 들리지 않고 머릿속으로 울리기만 하는 그것이 전음기공인 것은 나중에 알아도 늦지 않았다.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는지 바람보다 오히려 더 빠르게 그들을 감싸 버린 이 지독한 연기 속에서 일단은 빠져 나가야 했다. 진자앙은 숨을 멈추고 뛰었다. 독기 속에서는 그러는 것이라는 말을어디서 들은 대로 눈도 감고서였다. 그러다가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그는 몇 바퀴나 나뒹굴어야 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떠 바라보니 거기 나귀가 쓰러져 있었다. 정말 큰일난 것은 넘어지는 통에 맹방평의 손을 놓쳐 버렸다는 것이었다어쩔 수 없었다. 진자앙은 나귀까지 들쳐 메고 다시 뛰었다. 연기 속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풍경으로 이미 마을을 벗어나 들판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알 수 있었는데 연기는 손이 달린 것처림 그를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그의 머릿속에 다시 맹방평의 음성이 울렸다. "돌아가라! 함정이다!" 맹방평은 아마도 앞에 있는 모양이었는데, 난처한 일이었다. 불지옥을 통과해 왔는데 이제 앞이 함정이라는 것이다. 진자앙은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욱한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달려가던 방향을 보았다.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결정을 하고 뛰었다. 달려가던 방향, 맹방평의 말이 맞다면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어느쪽이나 위험하다면, 아니 아마도 함정이 있는 곳이 더욱 위험하겠지만 멩방평을 버려 두고 흔자 도망갛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앞이 합정이라는 말은 옳았다. 진자앙은 그것을 눈을 찌르는 연기로 알았다. 마을을 벗어나면 들판이었으니 바닥에 깔린 풀과 들에 자란 곡식 말고는 더 탈 것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연기는 더욱 짙어지고, 기이하게도 푸른 기를 띠고 있었다. 무언가 독물을 테줘 연기를 피우지 않랐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선택은 이미 한 것이고, 돌아갈 길은 없었다. 진자앙은 죽어쓰러져 버릴 때까지 뛰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느라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은 눈이 아프지 않다는점이었다. 독물, 특히 연기 속에 실어서 공격하는 독물은 호흡기와 눈, 퍼부를상하개 하기 마련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호흡기를 통해 침투해서 생명을 끊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눈을 상하겐 해서 시각을 빼앗고, 피부를 상하게 해서 거동을 불편하개 하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도 하독외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진자앙에게선 그 목적이전혀 얻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는 독물에 중독되어 쓰러지지도 않았고, 처응 마을을 벗어날 때를제외하고는 눈을 못 뜨고 있지도 않았다. 퍼부는 오래 달려서 땀이 호른다는 것을 빼고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호흡은 않아서 그런다고 치고, 피부 역시 오랜 수련을 통헤 사람의피부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단련이 되어 있어서 그렬다고 치더라도,눈조차 따갑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노릇이었다. 지금 마을과 들을 온통 독의 바다로 만들어 놓은 시전자가 봤어도 진자앙의 경우는 이해할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수련을 할 때는 유황 속을 뒹굴었고, 그 이전에는 이화복령사를 복용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었다. 유황 속을 뒹굴거나, 심지어 유황을 약에 섞어 복용하거나 하는 것은 선도수련의 중요한 단계 중 하나로 이 단계를 통과하면 보통 사람보다 독에 대한 저항력이 월등히 나아진다. 또 이화복령사는 그 자체가 화기의 덩어리로. 체내를 용광로와 같은 상태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어지간한 독은 가렵지도 않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자앙은 그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독의 연기 속을 뚫고 더이상 앞이 가려지지 않는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우뚝 서버렸다. 그가 나온 곳은 길이 산으로 접어들기 직전, 길 양편으로는 산 능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대한 깔대기처럼 생긴 작은 꼴짜기였다. 거기 맹방평이 서 있었고, 그의 옆에는 운리무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으론 아까 거리에서 그들을 구경하며 따라다니던 아이들, 나중에는 돌을 던지던 그 아이들이 반원형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묘한 것은 그들이 저마다 향로 하나씩을 들고 마치 목석처럼 꼼짝도않고 서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 맹방평의 정면에는 모자를깊이 눌러쓴 그 꼬마가 서 있었다. 더욱 묘한 것은 향로에서는 아무연기도, 향내음도 풍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 꺼진 향로를 든 십여 명의 소년들, 그 중심에 선 꼬마가 말했다. "놀랍군! 여기까지 오다니!" 맹방평은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가 온 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멍청한 놈, 오지 말랬잖느냐!" 진자앙은 나귀를 내려놓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목석처럼 꼼짝도 않는 소년들, 그 가운데 포위되듯 선 맹방평,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라고 생갈하면서 진자앙은 중얼거렸다.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꼬마가 차갑게 말했다. "의리의 사나이인가?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던가?" 내용으로는 감탄에 가까운 것이고, 그런 만큼 칭찬으로 받아들여도좋겠지만 이상하게도 진자앙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쪘다. 깊이 눌러쓴 모자 아래로 드러난 꼬마의 입은 말을 하면서도 거의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목소리는 분명 아이의 것이었지만 그 느낌은도저히 아이의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가운 것이었다. 자세히살펴보니 입술도 시체처럼 파랗게 질려 있는 듯했다. 진자앙은 문득 깨달았다. 파란 입술, 시체처럼 보이는 낮빛을 한 것은 모자를 쓴 꼬마만이 아니었다. 그와 맹방평을둘러싸고 서 있는 아이들 모두가그러했다. '묘지!' 어디선가본 듯한 풍경, 그것은 묘지의 그것이었다. 봉분 하나를 둘러싸고 서 있는 석인들의 모습이 바로 지금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봉분, 거기 묻힐 사람은 맹방평이라는 의미였다. '나도…… 인가?' 진자앙은 피식 웃었다. 봉분의 자리에 선 사람은 맹방평만이 아니었다. 위치상 어느새 그도 반쯤포위된 형태가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둘러선 아이들의 낮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과 다른 하나가 섞여서 만드는 어두운 분위기가 이 자리를 무덤처럼 죽음의 내음을 풍기도록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 바로 맹방평의 등에 깔린 어두운 그림자 때문이었다. 그가 보기에 맹방평은 지금 중독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여기 이 양지바른 산길의 초입에는 가공할 기관매복도 없고, 그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질릴 절대고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명백히 존재하는 함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뚫고 나온 독연이 맹방평을 중독시키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강호의 무명소졸인 진자앙이 뚫은 독연에 십대고수의 하나가 중독된다는 것은 우선 믿기가 어렵고, 혹시 그랬다면 마지막으로 들은전음 중에 '함정'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독연이 함정이었다면 이미 거기 둘 다 빠진 상태에서 구태여 다시함정이라는 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독연은 마치 너구리를 잡을 때 굴 앞에서 피우는 연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 연기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달리다 보면 결국 너구리는 사람들이 그물을 치고 기다리는 곳으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물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적어도 맹방평을 꼼짝못하게 만들 정도의 그물인 것은 틀림없었다. 맹방평이 그때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달리 맥빠진 목소리였다 평소의 완고합도, 가끔 드러나던 자신감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단지 윤은이의 목소리였다. "나를 중독시킬 수 있는 이 독은 도대체 무슨 독일까? 아마도 그 향로에서 풍겨 나오는 무색의 향기가 그것이라고 믿어도 좋겠지?" "대단하군. 그걸 알아차리다니!" 이제 보니 대단하다는 말은 꼬마의 말버룻이었던 모양이었다. 꼬마는 파리한 입슬응 거외 움직이지도 앓고,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로 멩방평의 말을 긍정했다.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는 향기가 있지, 코를 즐겁게 하지는 않아도 마음율 안락하게는 해준다. 이름하며 극락향이다." 극락향. 진자앙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위력은 맹방평을 꼼짝못하개 물들고 있음으로써 이미 충분히 실증되었다. 꼬마는 계속 말했다. "독은 아니야. 단지 마취제일 뿐. 독으로는 천하의 어떤 것을 사용했든 쾌수난타여의박 금문공 맹방평을 잡을 수가 없었겠지. 하지만 이젠 끝이다. 극락향 앞애 맹방평은 쓰러지고, 극락동자가 그뒤처리를 해주는 거야. 그 목은 양지바른 롯에 묻어 주겠다. 자객들사이에선 그곳이 성지가 되겠지. '강하면 살고, 약라면 죽는다는 자연의 법칙 앞에서 한줌 인간의 벌을 고집하던 멍청이, 그러나 무공만 터무니없이 강하던 자가 여기 누웠다'고 묘비명에 써주지!" 극락동자.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맹방평도 그런 모양이었다. 맹방평은한참 조용히 서 있더니 문득 손을 들어 극락동자라 자신을 밝힌 꼬마를 가리켰다. "극락동자보다는 당문의 악동, 독동자 당무기라는 이롬이 더 좋지 않으냐?" 멩방평의 손에서 금빛 선이 뻗어 나오뎌니 꼬마의 목을 휘감았다. 극락향에 중독되고서도 움직이는 것애 놀란 것인지 아니면 맹방평이 그의 이름을 밝힌 것에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꼬마는 적지 않게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맹방평의 포승이 날아가도 전혀 반옹을 보이지 않은 채 그냥 목을 맡겨 두고 있었다. 촤악--! 허공에 꼬마의 머리가 튀어 올라갔다. 그러나 피는 보이지 않았다. 맹방평이 중얼거렸다. "역시 그렇군!" 그는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극락향의 가공할 약효에 저항하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진자앙은 이 의외의 사태에 놀라 눈을 회번덕거렸다. 뭐가 어떻게된 것인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목이 떨어진 자칭 극락동자, 맹방평의 말이 맞다면 사천당문의 독동자 당무기가 배를 움켜러고 웃기 시작한 것이다. 진자앙은 한참 그 모습을 보다가 겨우 사태를 이해할 수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없는 사람은 웃을 수도 없지 그런데 웃고 있으니 넌 사람이아니구나. 피가 없는 인간도 있을 수가 없지. 그럼 인형이군. 인형이어떻게 말을 하나?이럴 때 복화술이라는 것이 있지. 그럼 다른 아이들도 그렇겠군." 그는 아이 하나에게 다가가 가볍게 밀었다. 아이는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시체 같은 게 아니라 시체였군! 그래, 내가 바보였어. 극락향 앞에 아무도 견딜 수 없으면 코앞에서 맡고 있는 아이들이 어떻게 견딜수 있었을까? 원래 호흡을 하지 않는 것이었으니 가능하지. 그런데 내가 누구보고 들으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지? 당신은 혹시 아시오." 진자앙은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물었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더니 곧 허공에서 나지막한 여인의 웃음 소리가들려 왔다. "호호호, 생긴 것과는 달리 제법 날카릅군. 하지만 빈틈이 많은 추리야. 극락향은 냄새를 맡아서 중독되는 것이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멩방평 같은 여우를 중독시킬 수가 없었겠지. 독공을 쓰는 상대를 만나면 호흡을 멈춘다는 것은 기본이니까. 극락향은 모공으로 흡수되어사람을 마줘시키기 메문페 아무리 호흡물 멈춰도 소용이 없는 것이지." "그럼 나는? 나는 왜 중독시키지 못했소?" 진자앙은 소리가 나는 곳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는 정말 조금도 중독된 느낌이 없었다. 그 문제는 소리의 주인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난제였던 모양이었다. 소리의 주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자신없이 말했다. "네 광동어는 정말 해독하기 어렵군, 극락향에도 쓰러지지 않는 너처림 말이다. 그러나 극락향 앞에는 누구도 쓰러지지 않을 재주가 없다. 넌 덩치가 커서 약효가 퍼지는 시간이 느릴 뿐이야. 곧 그 앞에길게 눕개 될 것이다." 진자앙은 싱긋 웃고는 북경어로 바꾸어 말했다. "그럼 아직은 시간이 있다는 말이로군. 난 생애의 대부분을 덩치가크다고 놀림만 받았는대 덩치가 커서 좋은 일도 있다니 별일일세.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목소리로 봐서는 극락동자도 독동자도 어울리지않는데?" 이번에는 상대의 대답이 훨씬 자연스러됐다. "왜 그렇게 생각하자? 내가 당문역사상 최고의 악동이라고 하는 말을 못 들었나? 가주이신 아버지도 어쩌지 못하는 악동, 사천 당문의오백 년 명예를 돌아보지 않고 자객의 길로 들어선 이 독동자 당무기에 대해 전혀 들은 적이 없단 말야?" 진자앙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여인의 것이아니라 아이의 것이었다. 게다가 나충에는 음산하게 깔리는 청년의 목소리로 변했던 것이다. "재미있군! 나중에 시간이 나면 자네에게 목소리를 바꾸는 법을 배우도록 하겠네. 아, 이렇게 갑자기 반말을 해도 괜찮겠지? 스스로 아이라고 우기니까, 그럼 난 이만……!"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여인의 목소리가 물었다. "뭘 하려는 거냐? 네 무덤은 여기야. 명당 자리를 두고 다른 곳에가서 그 덩치를 나르는 데 힘을 쓰게 하지 말란 말이야!" "혹시 수고하게 된다면 미안하게 됐네만……!" 진자앙은 운리무를 들어올려 등에 묶고, 나귀와 맹방평은 각각 양쪽어깨에 메었다. "다른 분들 몫까지 수고해 줘야겠어. 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좀띨고 싶거든!" 진자앙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길을 되짚어서 들로, 그러다가 들에는 아직 독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산으로 뛰었다. 길을 벗어나 나무를 헤치고, 바위를 타고 넘어가며 뛰는 것이다. 무거운 짐들을 들었지만 힘은 넉넉했다. 산길로 뛰는 것은 오랜 세월 수련해 온 것이니 평지보다 오히려 유리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뛴다고 해서 적들을 따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온 맹방평이 다시 깨어날 수 있도륵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독에 중독되었다면 죽올지도 모르지만 마춰약에 증독된 것이라괸 얼마가 걸리든 언젠가는 깨어날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 하루가걸리든 이틀이 걸리든 뛰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때는 어느새 밤이고, 밤은 쫓기는 사람의 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바램온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써 나무를 해쳐 가며 뒤를 따를 적을 최대한 교란시킨다는 생각으로 밤새도록 산을 해매 다니다가 새벽 여명이 되어서야 라져 나왔는데그것이 다였다. 산 뒤에는 다시 산이었고, 그 산의 초입에는 새벽 안개를 배경으로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혹은 앉아 있고 혹은 서 있는 그들은 노인과 아이로 나눌 수 있었는태, 그 중 두셋온 여인이었다. 저령게 다양한 사람들이 산에 놀러 왔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이었다. 진자앙은 산 너머에서 봤던 아이들, 시체임을 확인했던 그것들까지거기 있는 것을 보고는 멈춰 섰다. 놀랍게도 목이 떨어진 극락동자의시체까지 와 있었다. 진자앙은 심호흡을 했다. 오랜만에 맡아 보는 맑은 공기였다. 그러고 보면 마을로 들어팔 때가 전날 오후였으니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은 셈이었다. '긴 하루로군!' 진자앙은 문득 언잰가 오늘 같은 경우를 겪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아주 어렸을 적에. '염정과 함께였지!' 그는 미소를 지었다. 짧은 추억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충실했던 이틀이었다. '다시 한번 충실하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과는 하늘에 맡길 뿐이었다. 진자앙은 어깨의 짐, 맹방평파 나귀를 땅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앞으로 걸어갔다. 운리무는 몸에서 메어 놓을 수 없었다. 최후의 최후에는 운리무가결정적인 도움이 되어 줄 것이었다. [제십팔장] 독연은 하늘을 덮고 극락향은 산길을 막다. 독동자 당무기는 아무래도 자신을 닳은 인형의 목이 떨어진 것이 아까웠다. 잘 생각해 보면 무궁무진한 장난이 그것으로 인해 가능했었는데 이젠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가 모자를 쓴 인형의 머리와 목에서부터 반듯이 잘려 나간 자국이남은 시체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혀를 차자, 옆에 서 있던 노인이 웃었다"아까워하지 말게, 당 공자. 내 그보다 정교한 놈으로 두 개쯤 더만들어 주겠네." 노인은 자객들의 세계에서 기관과 매복의 달인이라고 일컬어지는교수노반 상홍이라는 자였는데, 독동자 인형을 만든사람이 바로 그였다. 무림의 거마로 자랄 싹수가 보이는 당무기에게미리 아부해 두는 셈치고 얘기를 꺼내 본 것인데 당무기는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난 한번 망가진 장난감에는 흥미없어. 대신……!" "대신?" 당무기는 앞을 가리켰다. 거기 새벽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철탑같이큰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놈을 잡아 줘. 그러면 팔다리를 잘라서 장난감 대신 쓰지." 상홍은 잠시 섬뜩하다는 빛을 띠더니 이내 감추고 억지로 웃었다. "곧 뜻대로 되실 겁니다." "쉽지 않을걸?" 목소리는 당무기의 뒤, 소나무 한 그루에 기대 선 여인에게서 나왔다. 위아래로 검은 비단옷을 차려입고, 목걸이 하나와 팔찌 외에는 장식을 전혀 하지 않은 이십대 초반의 미녀였다. 검은빛의 단순함과 금빛 번쩍이는 목걸이, 팔찌가 깨끗하면서도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화분심연도 통하지 않고 극락향도 먹히지 않는 괴물을 무슨 수로 잡겠다는 거야?" "나귀 한 마리, 사람 둘을 들쳐 메고 밤새도록 달릴 정도로 기운도좋은 사람을!" 혹의미녀의 말을 거든 사람은 역시 검은 비단옷을 걸치고, 소맷자락과 관을 황금으로 장식한 이십대의 청년이었다. 혹의미녀와 일부러 맞춰 입기라도 한 듯이 비슷한 복장인데, 얼굴은 전혀 딴판인 것이 대꼬챙이처럼 바싹 말라 광대뼈는 뒤어나오고, 눈은 푹 들어가서 마치 해골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키는 진자앙만큼이나 커서 그가 검은 비단옷을 입고 있으너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보였다. 그런 기괴한 인상의 청년에게 흑의미녀, 독동자 당무기의 고모인 당문의 말괄량이 당삼고는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당신에게는 방법이 있겠지요?" 고래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영웅호걸들이 이 한마디에 녹아버렸던가. 기괴한 인상의 청년, 산서 강시당의 당대 주인인 활고루 고웅풍도 여기에는 별 저항할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바싹마른 얼굴에 한껏 미소를 지으며 일단 여유를 부려 보는 것이다. "우선 다른 사람들의 솜씨를 봅시다." 그리고는 그것이 거절로 받아들여질까 두려운 듯 얼른 말을 붙였다. "내가 먼저 나서면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빼앗는 셈이 아니겠소?" 자신이 나서면 상황은 거기서 끝이라는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는데, 당삼고는 그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눈짓을 한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누가 저 곰을 잡아 보시겠어요?" 좋게 봐줘도 젊은이들의 사랑놀음이요, 고깝게 본다면 고깜기 한이없을 행동인데도 사람들은 별로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누가 감히당문의 여인과 강시당의 주인에게 건방지다는 욕을 할 것인가. 오리알 굵기의 철봉 앞에는 초승달 모양의 날이, 뒤에는 도끼날처럼생긴 것이 달려 있는 무기, 월아산을 꼬나 든 멧돼지처럼 생긴 박박머리의 사내가 일어섰다. "이 화상이 비록 재주는 없지만 한번 해보겠소!" "아니, 무량불제서는 잠시 더 쉬십시오. 우리 삼형제가 한번 해결해 보겠소이다." 월아산의 멧돼지를 가로막고 나선 사람들은 이들 또한 하나같이 돼지같이 생긴 자들로, 도끼를 하나씩 든 세 사람이었다. 원래 무량불이라 불린 자는 가짜 화상으로 중생들을 열반에 들게 해주는 무량광대한 은덕을 자기가 베풀고 있노라고 하여 그렇계 자칭하는 삼류자객이었고, 도끼를 든 세 돼지는 인도부 장삼흉이라고 통칭되는 역시 삼류자객들이었다. 자객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렇게나 사람만 죽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필요애 따라서는 자살처럼 가장퇘 죽이기도 해야 하고, 또 필요에 따라서는 백 겹 천 겹의 호위 속에 있는 목표를 제거해야 할 때도 있는데, 이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산길에 숨어 기다렸다가 목표가 지나가면 나와서 때려 죽이곤 하는 것뿐이었으니 삼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살행을 하고도 십수년을 자객으로 먹고 살 수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꼬강한 무공을 증명해 주기도 했으니 오늘 같은경우에는 제격인 인물들인 셈이었다. 그들은 서로 내가 하겠느니, 당신은 쉬라느니 설왕설래를 하다가 장삼흉 중의 둘쩨가 내세운 의견에 동외하고 진자앙을 맞아 갔다. "우리 네 사람이 사지 중 하나씩 맡으면 될 것 아뇨!" 이것이 둘째의 의견이었으나 막상 누가 먼저 하느냐는 이야기에 이르자 또 한번 설왕설레를 하게 되었다. 이번애는 은근히 서로 꽁무니를 빼는 것이었다. 궁지에 몰리면 생쥐도 고양이를 문다는데 누구든 먼저 나가서 코를물리고 나면 나머지 사람들은 적절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처음얘 의견을 냈던 둘쩨가 제일 먼저 나서게 되었다. 뒤에서 첫째가 옹원한답시고 한마디했다. "둘째야, 조심케서 쳐라! 도끼날 버릴라!" 둘째는 걱정 말라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압고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첫쩨의 우려 아닌 우려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둘째는 찢겨진 손아귀를 움켜쥐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자신의 도끼를 쳐다보고 있어야 했던것이다. 어디를 찍을까 하다가 자세도 제일 편하게 오른쪽 어깻죽지 하나를노리고 휘둘렀는데 피할 줄 알았던 진자앙은 도끼날을 향해 정면으로주먹을 내질렀다. 그 다음은 보는 대로였다. 단목으로 만들어진 도끼 자루는 반원형으로 휘어졌다가 둘째외 손아귀를 찢으며 빠져 나가 버렸고, 거기 달린 도끼날도 같이 날아가 버렸다. 진자앙은 어찌 되었나 하고 봤는데 다친 곳도 한군데 없이멀쩡했다. 뒤에서 장삼흉의 첫쩨가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냥 치자!" 무림도의 같은 것은 애초에 들어 본 적조차 없는 그들이었다. 도끼날이 아직 성한 첫째와 셋째가 진자앙의 좌우로 덮쳐 들며 도끼를 휘두르고, 아직 멍청히 서 있는 둘째의 머리를 타넘으며 솟아오른 무량불이 공중에서부터 일직선으로 하강하며 월아산으로 진자앙의 머리를후려쳤다. 물론 세 공격 중 하나만 성공해도 상황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세 공격 모두가 너무나쉽게 성공했는데도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진자앙은 아까처럼 주먹을 내밀어 도끼를 받아치려고 했다. 월아산은 그냥 머리로 견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하게 후려친 것이 아니라 세 공격 모두가 그나름의 초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의 도끼는 진자앙의 오른쪽 주먹아래로 파고들어 겨드랑이에 박혀들었고, 셋째의 도끼는 반원을 그리며 내밀어진 진자앙의 왼쪽 주먹을 팔꿈치에서부터 잘라 버리려는 듯내리쳐졌디. 마지막으로, 월아산은 진자앙이 이렇다 할 대응도 하지 않았는데도스스로 궤도를 바꾸어 머리가 아닌 목덜미에 초숭달의 뿔을 박아 버렸다. 진자앙은 잠시 꼼짝도 못 하고서 있었다. 세 군데 모두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급소로 취급되는 곳이라 적지 않게 아팠다. 게다가 방어다운 방어를 못 했다는 자책감이 마름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격을 성공시킨 세 사람도 멍청히 서있기만 했다. 특히 첫째는 자기 도끼를 진자앙의 겨드랑이에서 빼지못해 고생을 하고 있었다. 겨드랑이는 원래 그런 곳, 누가 건드리면 본능적으로 팔을 오므려보호하는 곳이다. 비록 미리 오므리지는 못했지만 나중에라도 오므려도끼를 잡아 버린 것이다. 진자앙은 팔에 힘을 주어 도끼를 더욱 단단히 잡고 자유로운 한 손으로 첫쩨를 후려쳐 갔다. '한 놈씩!' 무림인다운 방식으로 일 대 다수의 싸움을 꾸려 나갈 수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무림인이야 이령게 싸우는 법이 없지만 동네 싸움에서의 기본은 하나하나썩 처리하는 것이다. 특히 아이들이 싸울 경우, 거기에는 특별한 고수가 없기 떼문에 두세 명이 덤비면 제아무리 덩치가 크고 재랄라도 맞기 마련이다. 그때 이렇개 하나썩 쩍어서 일단 제압을 하면 나머지 얘들은 도망을 가거나 다시 처리할 시간을 갖게 된다. 아니면 적어도 혼자만 맞지는 않은 셈이니 덜 억울한 것이다. 첫째는 겨드랑이에 도끼를 맞고도 아무렇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팔을 휘둘러 공격을 해오는 진자앙이 사람같이 보이지가 않았다. 얼른도끼 자루를 놓고 뒤로 물러서는데 이번에는 발이 그를 걷어차 오고있었다. '이것들이 뭐 하는 거야?' 그는 손을 내밀어 진자앙의 발을 막으며 눈은 오히려 셋째와 무량불을 찾았다. 명색이 협공인데 그들은 뭘 하고 있기에 자신만 공격을 받게 하는가 말이다. 이런 느리고 단순한 공격에 자신이 다칠 리는 없었지만 이건 다치고 다치지 않고의 문제 이전에 협공의 원칙에 관계된문제인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 그에게 결정적인 실패를 가져 오게 한 것은 셋째와 무량불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격을 하고 있었다는것이며, 또 진자앙의 발차기가 느리고 단순할지는 몰라도 위력이 없는것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아니, 십 년이나 연운십팔박을 하고, 또 십 년이나 철소추를 수련한데다가 지금은 납덩이로 보호대처럼 둘러싼 진자앙의 발은 무시무시한위력을 갖고 있었다. 으드득--! 보기 좋게 진자앙의 발차기를 막은 첫째의 손목이 뒤로 완전히 젖혀졌다. "어어……?" 놀라서 비명도 미처 지르치 못하고 첫째는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진자앙의 발은 그의 손목을 뭉개 놓고도 힘이 남아 그대로 가슴팍으로짓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뒤로……!'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첫째의 가슴팍에 진자앙의발이 닿고 있었다. 콰직--! 첫째는 뱃속의 것을 내뿜으며 뒤로 날아가 버렸다. 방금 들린 소리로 보아 갈비뼈 몇 대는 실히 나가 버렸을 것이다. 그는 땅바닥을 구르며 부러진 갈비뼈의 숫자나 세고 있어야 했다. 무량불은 도대체 이령게 머리가 단단한 놈은 살다 살다 처음 본다고생각하고 있었다. 백 근이나 나가는 월아산의 머리로 벌써 십여 번은족히 두들긴 것 같은데 머리카락이나 몇 가닥 잘릴 뿐, 뭔가 충격다운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이제 장삼흥 중의 첫째를 한번 걷어차 날려 버리고 산발한머리를 홑날리며 그를 돌아보고 있지 않은가! "어…… 어이, 이봐!" 그는 잰히 위축이 되어 월아산을 비껴 들고 뒤로 물러났다. 그말고도 아직 한 사람이 더 있지 않은가. 그는 자기보다 가벼운 무기를 사용했으니 자기가 한번 메릴 때 적어도 세 번은 도끼를 휘둘렀을 것이다. 화가 났다면 그에게 더 화가 나야 정상일 것이다. 무량불은 그래도 차마 그 얘기는 못 하고 월아산의 초승달을 앞으로비스듬히 뻗어 진자앙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기만 했다. 다행히 놈은 셋째에게 관심이 더 많은 모양으로, 돌아서서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이라고 해봤자 일정한 초식도 없이 손발을 휘두르는 것에 불과했지만 몸이 워낙 단단하니 주먹이 곧 흥기였다. '그레도 내가 출가인처럼 차렸다고 봐주는 모양이군!' 무량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진자앙의 뒷등을 쳐다보았다. 강사의 시선이 아니라 허점을 발견하려는 흥악한 눈초리였다. 그는 자신보다 셋째를 먼저 선택한 진자앙에게 감사의 표시로 열반을 선사하기로마음먹은 것이다. 오래 노려보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진자앙의 등판은 워낙 널찍하기도 할 뿐더러 자세 자체가 워낙 허술했기 때문에 운리무를 업은 부분만 빼고는 온 등판이 허점이나 다름없었다. "잘 가라!" 무량불은 한마디 내뱉으며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머리는 단단하니쳐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고, 옆구리나 팔도 도끼가 쉽겨나는 걸로 봐서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가 쳐가는 그곳, 사타구니의 엉덩이 사이 회음혈어름, 속칭 항문이라 불리는 곳은 그렇게 단단할 이유가없었다. 게다가 그의 월아산은 그런 곳을 찍기에는 안성마춤의 무기인것이다. "아래에서부터 두 쪽을 내주마!" 피와 오물이 튀는 더러운 구경을 하게 될 거라는 상상을 하며 무량불이 월아산을 거꾸로 휘둘러 진자앙의 사타구니를 쳤다. 턱--! 턱? 무량불은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월아산을 내려다보았다. 월아산은어디를 뜰고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누굴 반 쪽으로 만들지도 못하고 그냥 진자앙의 엉덩이 사이에 박힌 채 멈춰 있었다. 진자앙이 분노한 표정으로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표정 뒤로 철퇴같이 큰 주먹이 날아왔다. 팍일! 무량불의 눈앞이 갑자기 깜깜해졌다. 으스러진 코뼈가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땅바닥에서 뒹구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샛쩨의 눈이 번뜩였다. 마구잡이 손젓으로 그를 치려 하던 진자앙이 돌아설 때 한군데 좋은허점을 발견헌던 것이다. 천하에 다시없을 외공으로도 귀까지 단련했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그 귀로 반쯤 가려진 곳에는 예풍, 계맥, 노식, 각손의 요혈들이 있고, 귀 앞에는 태양혈이라는 치명적인급소가 있다. 셋째는 땅에 떨어져 뒹구는 도끼 한 자루까지 주워 들고 양쪽에서동시에 진자앙의 귀를 노리고 후려쳤다. 무량불이 코피를 철철 뿌리며 뒤로 넘어가고 있는 도중의 일이었다. 독동자 당무기는 땅바닥을 두드리며 웃었다. 그러나 당삼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기분을 활고루 고웅풍이 대변해 주었다. "저렇게 추악하고 지저분한 싸움은 처음 보는군!" 당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여기 와서 맹방평을 잡게 된 것이 비록 그녀 본인의 뜻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좀 그럴듯한 사람들과 같이 행동했으면 했었다. 그런데 자객다운 최소한의 품위도 지킬 줄 모르는 쓰레기 같은 작자들과 이러고 있어야 한다니! 아니, 애초에 자객에게서 품위 같은 것을 기대한 그녀에게 잘못이있는 건지도 몰랐다. 애초에 조카의 선동에 넘어가 이런 일에 끼여든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굳이 그녀가 맡지 않아도 될 임무였는데……! "더 망신당하기 전에 내가……!" 활고루 고웅풍이 나설 뜻을 비췄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도끼 두 자루가 진자앙의 귀를 때렸다가 다시 튕겨 나왔고, 그 탄력에 비칠비칠물러서는 셋째에게 진자앙의 돌려차기 한 방이 격중되었던 것이다. 분노의 힘인지 여태 진자앙이 했던 수만 번의 돌려차기 중에 가장정확한 돌려차기였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은 몰랐다. 활고루 고웅풍이 앞으로 나섰다. 다른 사람처럼 걸어서가 아니라 무릎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냥 일 장 가량을 건너뛰어서 진자앙에게다가가고 있었다. 강시당의 독문보법인 개로보였다. 길을 연다는 뜻의 이 보법은 저승 신인 개로신이시체들을 저승으로 인도할 때의 걸음을 흉내낸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강시들이 걷는 모습이라고 더 잘 알려진 걸음걸이였다. 고웅풍의 그런 모습으로 진자앙에게 다가가 손을 들었다. 역시 팔꿈치를 뻣뻣하게 편 채로 팔 전체를 움직이는데, 마치 녹슨 마차 바퀴가움직이듯이 '끽끽' 하는 이상한 소음까지 나고 있었다. 고웅풍은 뼈만 남은 앙상한 손으로 진자앙을 가리키며 말했다. "산서 강시당의 고웅풍이오. 대단한 외공이었소. 이제 내가 한 수가르침을 받아 보고자 하는데, 형장의 뜻은?" 원래 강시당의 무공은 익히면 익힐수록 강시에 가까워진다고 했다. 움직이는 것이나, 말하는 것, 심지어 나중에는 생각조차 없어져 문자그대로 강시가 되어 버린다고 강호에 알려졌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고웅풍은, 행동은 강시와 닮았지만 겉보기는 조금 심하게 마른 사람일 뿐이고, 더구나 말하는 것은 법도와 예의에 맞추어 지극히 정중하게 하고 있으니 강시당의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강시당의 역사에 활고루 고웅풍만한 고수가 나온 적이 없다는 것이 강호에 알려진 평이었다. 특히 그가 그의 아버지보다도 오히려 강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강시당의 전대 당주였던 그의 아버지 금면강시고승벽은 강시당에서도 금지된 무공을 익히다가 완전히 사도에 빠져 강호로 뛰쳐 나간 후 구대흉신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런 그보다 강하다는 것은 강호에 그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이 열은 넘을지 몰라도 백은 절대 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런 그가 예의를 갖추어 비무를 청하니 자존심이 있는 무림인이라면 당연히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도전을 받아들여야 옳을 것이었다. 그런데 진자앙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도처히 싸을 수가 없소!"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놀라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물론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강호의 물을 조금만 먹은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신진고수 고응풍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혹시 귀가 나빠 못 들었더라도 강시당의 이름 정도는 들었을 것이다. 그런 강시당의 고웅풍을 상대로 싸우기 싫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놀란 것은 방금까지 당당하게 그들에게 도전해 오던 진자앙이 갑자기 형편없이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방금전까지는 적이지만 제법 존경심이 생길 만큼 멋지게 싸우지 않았던가,고웅풍도 놀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안면 근육은 너무 말라 있어서 표정이 나타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진자앙의 거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에게는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꼭 형장과 싸워야갰소. 이것온 비무대회가 아니라 싸움이니 말이오." 진자앙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알고 있지만…… 못 싸우겠소." "내가 귀하를 죽이려 들어도 말이오?" "그렇다면…… 싸워야갰지요만은……!" 진자앙은 난처한 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의 얼굴은 뭔가 흥분한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당무기가 다시 박장 대소했다. "어, 어, 어……!"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단편적으로 토해 능던 당무기는 간신히 웃음을 누르고 고모의 옷자락을 당겼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서 옷음기를지우지 옷하고 있었다. "그가 왜 안 싸우려 드는지 알아요!" 당삼고가 그를 흘겨보았다. "또 쓸데없는 에기를 하려고!" "그게 아니라!" 당무기는 진자앙의 엉거주춤한 자세를 가리키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고웅풍은 이해할 수 없는 사태의 전개에 불꽤해진 모양이었다. 그는양팔을 들어올려 진자앙을 가리키며 살기를 풍겨 내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난 귀하를 죽여야겠소! 용서를……" 그의 눈이 인광처럼 푸르게 빛나고 손끝은 먹에라도 담근 것처럼검게 물들기 시작렌다. 이른바 강시대법이라고 통칭되는 산서 강시당의 비전무공 중 고루천강수가 운기되기 시작한것이다. 강시당은 이렇다 할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 정사 중간의 문파라고 알려져 있지만 굳이 따진다면 혹도에 가깜다. 그래서 그들의 무공도 사공, 마공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데, 같은 계열의 무공이라도 금면강시 고승풍이 사용하는 것은 고루마공이라 부르는 것이강호인들의 그런 시각을 반영해 주고 있었다. 지금 고웅풍이 운기하고있는 고루천강시만 해도 마공의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어떤 것이든 휴지 조각처럼 갈가리 찢어 버린다는 고루천강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기 걸리면 내 외공도 안 통하는 것일까?' 대단히 궁금한 문제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시험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진자앙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 위기를 빠져 나가야 할때인 것이다. 그리고 진자앙에게는 정말로 지금, 이 상태에서 싸워서는 안 될 문제가 있었다. 당무기가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소리쳤다. "엉덩이가 보였어! 바지가 터졌거든." 진자앙의 얼굴이 홍시처럼 새빨개졌다. 당무기의 말이 핵심을 찔렀던 것이다. 아까 무량불의 월아산이 엉덩이를 파고들었을 때, 엉덩이는 무사했지만 바지야 외공을 안 익혔으니 견딜 리가 없었다. 바지 앞의 아슬아슬한 부분 뒤에서부터 꼬리뼈 있는 곳까지 찢어져 나가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싸우다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엉덩이를 보이며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찢어진 바지 뒷부분을 움켜쥐고어색하게 웃었다. 당삼고가 그 엉거주춤한 자세를 보고 잔뜩 인상을 쌨다가 참지 못하고 옷음을 터뜨렸다. 고웅풍은 그래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단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한참이 지나 그가 말했다. "여기 누가 여벌의 바지를 가지고 있을 거요. 그걸 줄 테니 저쪽 숲에서 갈아입고 오시오. 우린 그 후애 싸웁시다."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여벌의 바지는 내 짐 속에도 있으니 그것까지 주실 필요는 없소. 그러나 나는 방금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소." 모두들 궁금해서 쳐다보는 가운데 진자앙은 등뒤로 손을 돌련 그때까지 업고 있던 운리무를 풀어 내렸다. 운리무는 누에고치처럼 동여진채 혼절한 상태였다. 진자앙은 주위에 굴러 다니는 도끼 한자루를 들어 운리무를 겨누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당신들에게 원한을 진 일이 없소. 혹시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한을 졌다고 해도 이렇게 쫓기도록 지지는 않았을 게요. 그런 큰 원한을 질 만큼 시간이 많지도 않고 능력도 없으니말이오. 아마 맹 노선배님도 그럴 거요. 그러니 짐작컨대 당신들은 이노인을 노리는 것이겠지요? 이 노인을 당신들에게 주면 더 이상 우릴쫓아올 일도 없고, 나는 바지 자락을 움켜려는 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좋지 않겠소?" 고응풍은 말업이 듣고만 있었다. 다른 자객들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시퍼런 도끼날이 운리무의 몸 위에서 왔다갔다하고 있는 것이 그들을더할 나위 없이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그런 그들을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 원하는 대로 드리겠소. 어디를 원하는 거요? 목? 몸뚱이?" 다른 선택은 없었다. 진자앙은 도끼를 치켜 들고 운리무의 목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그들이 말만 하면 어디든 잘라서 줄 태세였다. 고웅풍도, 당무기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도대체 저 미련한 곰새끼같은 사내가 장난을 치는 건지 진지하게 저러는 건지 짐작을 할 수가없었다. 당삼고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진심으로 웃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생각했지만 입술을 비집고 비실거리며 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곰도 재주를 부리는구나.' 이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들을 모두 진짜로 얼어붙게 하는 일이 그때 벌어졌다. 진자앙의 뒤편 저만치에서 힘없는,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힘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목은 안 돼 " 맹방평이었다. 그는 처음 진자앙이 내려놓은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목만 쳐들고신음처림 중얼거리고 있었다. "목은 가져 가서 제출해야 한다." 범인을 잡으면 그대로 압송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도주할 우려가 있다거나 먼 길을 가야 할 경우에는 목만 잘라 가서 내놓는 경우도 있었다. 맹방평은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진자앙은 맹방평이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것이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정신이 들자마자 그 생각부터 하는 것이 기가 막히고 해서 묘한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맹 포두님께선 그런 이유로 이 노인의 목이 펼요하다고 하지만 이사람들은 왜 이 노인의 목이 펼요한지 모르겠군요. 가져 가서 국을 끓여 먹기라도 한다는 걸까요?" 그리고는 고웅풍을 돌아보았다. 고웅풍은 당삼고를 돌아보고 있었다. 당삼고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싸울 힘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곰 한 마리를 때려잡는 데에는 충분한 험이었다. 그러나 맹방평을 때려잡기에 충분한 힘은 아니었다. 한번 중독되면 십 주야는 정신을 못 차린다는 극락향에 당하고도 하루 만에 일어나는 멩방평, 저 괴물 같은 자를 아무러 활고루 고웅풍이라지만 무슨 수로 때려잡는단 말인가! 그녀는 일어섰다. 사태는 명확했고, 결심은 섰다. "소녀는 당려려라고 해요. 강호애서는 당리네 샛쩨 고모라고 해서 당삼고라고 부르지요. 오늘 실래되는 일을 말이 했지만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겠어요. 맹 노선배님이 나중에 따지실 일이 있으면저를 찾으시면 될 거예요. 단지 강호의 삶에는 생각 밖의 화복이 있고, 은원의 변천이 무쌍하다는 것을 생각해 주셨므면 좋겠군요." "당 소저보다는 나를 찾으면 될 거요. 산서 강시당은 어떤 빛이든두 어께로 받을 수 있소. 빛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누구이든!" 고웅풍이었다. 진자앙은 감탄한 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동 진가장도 그렇소!" 그리고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종화 금강당도 그렇고!" "진가장?" 당삼고 당려럭가 놀라 외쳤다. 고웅풍도 놀랐지만 당려려와는 다른것에 의해서였다. "당신이 금강당과 무슨 관계였나? 아니, 그렇군! 그렇게 무식할 정도로 강한 외공은 금강당밖에 달리 가르치는 곳이 없지." 진자앙은 운리무를 놓고 일어나 사방으로 포권했다. 강호에 그가 나섰음을 알리는 첫인사였다. "불초 진자앙, 광동 진가장의 후손으로 종화 금강당의 오 대 당주직을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맡았소. 여러 무림동도께 많은 가르침을부탁하는 바요!" 독동자 당무기가 얼떨떨하게 그를 보더리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배를 잡고 웃었다. "들은 적 있어, 들은 적 있다구! 고모! 저 사람이 금강두 진자앙이래요! 정말 명실상부하군. 정말 단단한 머리야!" 당려려는 그를 흘겨봤지만 그 말로 진자앙에 대해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광동 진가장사상 최악의 돌머리가 태어났다는 소문을 가주인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이 걱정스럽게 나누곤 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야기의끝은 언제나 팔대세가의 몰락에 대한 우려였지만. 진자앙은 머리를 긁으며 어설프게 웃었다. "소형제도 그 별명을 알고 있었나? 사천 당문에까지 내 소문이 퍼졌단 말이지? 그것 참!" 맹방평이 기침을 하며 말했다. 여전히 약한 목소리였지만 그 어조는강렬했다. 특허 어떤 사람둘은들으면 도저히 잊지 못할 말이었다. "내가 당한 일은 금방 잊는다 해도 저 마을에 뒹굴던 시체들은 절대잊지 않을것이다. 너회들이 한 일을." 당려려는 찔끔한 표정이었다. 고웅풍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약간 변화가 있었다. "그건 우리가 한 일은 아니었소만……, 알고도 막지 못한 책임을 묻는다면 하는 수 없겠지요." 그는 여전히 뻣뻣한 손을 들어을려 포권 비슷한 동작을 취해 보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이만. 진 형, 다음에 다시 뵙기를 기원하겠소! 그펀 제대로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지요." "바지에 구멍만 안 난다면!" 당무기가 한마디 덧붙이고는 다시 깔깔거렸다. 당려려가 그를 잡고는 가버렸다. 고웅풍과 자객들이, 땅바닥에 길게누워 있던 무량불과 장삼흉까지 포함해서 그 뒤를 따랐다. 진자앙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긴장이풀리자 비로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맹 노선배님이 깨어나지 않으셨다면 저들은 절대 저렇게 쉽게 물러서지 않았을 겁니다." 대답은 없었다. 진자앙은 맹방평을 돌아보고 놀라 일어났다. 맹방평은 다시 정신을잃고 있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다시 운리무와 맹방평, 나귀까지 짊어지고 뛰기 시작했다. 어딘가 물이 있는 곳에 가야 이들을 해독할 수 있을 것이었다. 독연은몰라도 마취약이라면 찬물로 해독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취약은 아무리 독하더라도 죽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들이 운리무를 죽이려면 더 쉬운 방법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맹방평은 얼굴에 찬물을 뿌려 주자 하루 만에 곧 깨어났지만 나귀와운리무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 후 나홀 동안 진자앙은 나귀와 우리무를 업고 다녀야 했다. 들을 다 합쳐 봐야 몸얘 매달고 다니는 납덩이보다 가벼우니 힘이들 것은 없었지만, 그들은 아직 악주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길을 잃었나 보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에는 산보다는 들이많고, 들에는 다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맹방평은 원래 목적하던 악주로는 가지 않고 사람이 드문 산과 들로만돌아다녔던 것이다. 그것이 누구를 기다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진자앙은 그 기다리던 사람이 왔을 때에야 알았다. 그때 진자앙과 맹방평은 근처 마을에서 산 음식으로 간단한 점심을해결하고 있었다. 교자에는 속이 든 것과 안 든 것 두 종류가 있고, 또 요리 방법에 따라 진 것, 구운 것, 상은 것, 튀긴 것 등 여러 종류로 나뉘지만. 어느것이든 아이 머리통만큼이나 크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맛으로 먹는다기보다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밥 대용이라는 의미가강하기 때문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점심으로 교자 한두 개에 면 한 그룻을 먹으면 배를 두드리기 마련인데 진자앙은 벌써 십여 개를 집어삼키고도 만족할줄을 물랐다. 속도 또한 가공할 만한 것이라서, 어른 머리통만한 손으로 아이 머리통만한 교자를 들어 연신 입으로 나르는 것이다. 맹방평은 그런 진자앙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더니 문득 물었다. "손이라는 것이 무엇에 쓰려고 달려 있다고 생각하느냐?" 진자앙은 그때 교자를 입 안 가득 씹으며 한편으로는 다시 쥐어 가고 있던 참이었는데 맹방평의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너무식탐을 탰나, 해서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맹방평은 겨우 교자 하나만 먹고는 계속 그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맹방평은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같이 다니기 시작한 이래처음으로 그에게 보내는 친근한 태도였다. "네 손을 자세히 봐라.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진자앙은 손을 내려다보았지만 뭐라 대답할수가 없었파. 다행히 맹방평도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질문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손을 자연스럽게 두면 엄지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들과 마주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이게 무엇을 위해서이겠느냐? 바로 무엇인가를잡기 위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원숭이만 해도 무엇인가를 잡을때 보면 엄지손가락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놈들은다른 테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이 같은 방향으로 구부러지기 때문이다. " 그레서 사람의 손은 다른 어떤 동물들보다도 단단히 무엇인가를 잡을 수 있게 된다. "사랸의 손은 물건을 잡기에는 적합하지만 찢거나, 후려치거나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주먹을 사용하는 법을 익혔으니 내 말이 그럴듯하지 않게 들리겠지만 다른 동물의 손과 비교해 보면 확실해지지. 즉,호랑이의 그것과 같은 손톱이 없으니 무엇을 찢기에 적합하지 않고,곰의 그것처럼 단단하지도 않으니 후려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처럼 무엇인가를 잡기 편하게 된 손은 어떤 동물에게도 없다. " 맹방평의 무공, 여의십이수가 바로 그것을 근본원리로 하고 있다는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맞는 것말고는 변변한 특기가 없는 것 같더구나. 그렇지 않느냐?" "맞습니다." "외공도 너 정도로만 익히면 훌륭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오직 그것뿐으로 맞기만 하고 반격을 못 한다면 어디에 써먹겠느냐?"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소삼중이 가장 걱정했던 것이 그것이요, 강호에 나와서 그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도 그것,공격기술이었다. 사실 여태 그가 쓰러뜨렸던 몇몇은 운이 좋아서 맞춘 것이지, 실력이라고 볼 수는 얼었다. 만약 상대들이 그를 쓰러뜨리는 대 급급하지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와 정식으로 겨루었다면 그의 어설픈 공격에 맞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맹방평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여의십이수를 네게 가르쳐 주고 싶어도 네 평소 하는 걸로 봐선 제대로 익히지도 믓할 것이다. 혹시 익혀도 제대로 쓰지도 못하겠지. 그러니 특별히, 간단하지만 제대로 쓰면 효과적인 수를 하나 가르쳐 주마 극락향에 당했을 때 훌륭히 대처한 상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진자앙은 사양하려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맹방평이 손을 뻗쳐 엄지와 검지로 그의 양쪽 볼을 잡았던 것이다. 놀라서 눈만 멀뚱거리고 있는데 맹방평은 볼을 놔주고는 말했다. "이게 끝이다." "예?" "한번 더 보여 주랴?" 말을 하기가 무섭게 맹방평이 다시 손을 뻗었다. 미리 대비를 했어도 어차피 맹방평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피할 생각도 않았기때문에 진자앙은 다시 그에게 볼을 잡혔다. 사실은 아래턱과 위턱이연결되는 부분을 잡힌 것이었다. 그 상태에서 맹방평이 말했다. "이렇게 잡히면 어떻게 대항할까? 손발을 휘둘러 보겠지? 그러면너처럼 팔이 긴 사람은 그냥 쭉 뻗으면 된다. 이빨로 호구를 물면 어떨까? 칼도 안 들어가는 네 살이 이빨 따위에 씹히기나 할까? 그보다이렇게 손가락에 힘을 주면 천하장사도 대항을 못 하고 마는 것이다. " 그러면서 맹방평은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었다. 진자앙은 턱에 굉장한 통증을 느껴야 혔다. 콰연 이렇게 턱을 잡히면 아무 힘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멩방평이 그를 놓아 주고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보퉁 이렇게 작으면 펴이 라지는 게 정상인데……! 네 녀석은 하도단단헤서 약간 아프기만 하고 말겠구나, 어쪘든 이걸로 보상은 끝이다. " 진자앙은 얼얼한 뺨을 쓰다듬다가 물었다. "저……, 죄송한 말쏨인데 일단 잡히면 반항을 못 하는 건 그렇다치고, 문제는 어떻게 잡느냐는 것 아닐까요?" 맹방편이 허허 웃었다. "손을 내미는 방법과 속도, 그리고 시간 선택에 그 답이 있지. 그게내 밑천이다. 하지만 가르쳐 줘도 넌 제대로 못 할걸?" "그럼 됐습니다. " 진자앙은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맞므면서 접근하다 보면 잡을 기회도 가끔은 있겠지요." "멍청한 녀석!" 멩방평은 인상을 깼다. "사내자식이 그렇게 무시를 당하면 오기가 나서라도 졸라 봐야지,안 가르쳐 준다고 그냥 포기해? 일단 가르쳐 줄 태니 하루에 만 번은연습한다고 약속을 해라! 안 그러면 아예 쓰지도 말든지! 어디 가서엉터리로 하고는 맹방평이 가르쳐 준 겁니다, 그러면 내가 더 창피하니까." 사실 이 수벌이야말로 여의십이수 중애도 정화라 할 수 있는 천망꿜인이라는 것이었다. 맹방평이 잡으려 한 자 중에 잡히지 않은 자가 없고, 맹방평에게 잡힌 자 중에 빠져 나간 자가 없다는 신화가 이 천망월인 한 수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중자룽에게서 이미 느꼈고, 맹방평에게서 다시 확인했던 것이지만이들의 무공은 간단하기에 오히려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진자앙은 구결은 한번 듣고 외어 버렸고, 그 원리는 듣는 즉시 이해했지만 막상손을 뻗어 상대의 틱을 움켜쥐는 지극히 간단한 동작은 몇 번을 연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맹방평도 범죄자를 잡는 일로 인내력을 단련한 사람이주기에 꽤 끈기있게 진자앙을 가르쳤지만 드디어는 포기하고 말았다. "멍청한 놈! 너처럼 둔한 놈은 보다 보다 처음 본다. 됐다! 그만 하자! 운이 좋으면 너한테 잡힐 멍청이도 있겠지. 하지만 제발 어디 가서 내게 그 수법을 배웠다는 얘기는 꺼내지 마라! 안 그러며 너부터주리를 틀어 버릴 테다." 진자앙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면서도 습관적으로 웃었다. 어차피한두 번 듣는 얘기가 아닌 바에야 특별히 더 창피할 것도 없었다. 맹방평이 일어섰다. "그만 가자!" "저기……!" 진자앙은 나귀와 운리무를 들어올리려다가맹방평을 불렀다. "뭐냐?" "이 노인이 깬 것 같은데요?" 짜증스럽게 대꾸하던 맹방평이 그 말에 눈을 빛내며운리무에게 다가가 앉았다. 과연 운리무의 눈꺼풀이 조금웍 움직이고있었다. "물!" "예?" "찬물 가져 오란 말이다!" 진자앙이 시내를 찾아 뛰어갔다가 돌아왔을 때 운리무는 이미 일어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구출하려는 시로가 실패했다는 말을이미 들은 모양인지 처음과 달리 형편없이 기가 죽어 있었다. 맹방평이 그를 윽박질렀다. "거짓말 마라!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난 속일 수 없어! 넌 운리무야! 그것도 진짜 운리무임에 틀림없어!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말이다!" 진자앙은 물병을 든 채 엉거주춤 서버렸다. '이건 무슨 소리일까?' 그가 볼 때는 분명 이 노인은 운리무가 아니었다. 맹방평도 그것을인정하는 듯한 눈치가 아니었던가. 운리무는 울상을 지었다. "저 같은 졸장부가 어떻게 그런 거물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거물이면 웨 잡혔겠습니까? 맹 포두님의 날카로운 안목이라면 재가 연기를 하는지 안 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맹방평은 냉소를 홀렸다. "거물이라고? 나는 운리무가 거물이라고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얼다. 흔히 사람들은 자객이라면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신비로운 색깔로 거기 덧칠을 해놓았기 매문에 그럴 뿐이야," 그는 멸시가 가득한 빛을 입가에 띠었다. 니는 숱하게 많은 범죄자를 잡았고, 그 중쉐는 자객도 적지 않았지만 대개의 경우, 범죄자 중에도 제일 못한 놈들이 자객이었다. 물론그들에게는 죽응의 냄새라는 것이 있지. 단 한번이라도 살인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일반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지. 그러나 일단 그것만 한꺼풀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은 형편없이 연약하고 비틀린 인생들이었다. 자객들은 대개 남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어떤 자는 아예 밝을 때는거리에 나오지도 못한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발휘하기도 하지만 막상 그 외의 일에는 전혀 무능력하다. 자기 손으로 밥을 떠넣지도 못하는 위인들이란 말이다. 그런 것이 자객이야. 운리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내 경험으로 볼 때 너야말로 운리무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운리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정곡을 젤려서, 혹은 너무나 황당한궤변에 기가 막혀서일 것이다. 그러나 맹방평은 자신있게 덧붙이고 있었다. "자객은 죽을 때까지 자객이지 다른 것은 될 수가 없다. 넌 사십여년의 자객 생활, 그 후로 삼십여 년의 은거 생활을 하면서 이제 늙어죽을 때가 되니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년에가까운 인생을 살며 이루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겠지, 운리무라는 이름은 천하를 떨쳐 울리지만 넌 나서서 '내가 자객 운리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거야. 그랬다가는 천하의 공분이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지. 그러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겠지. 이제 과거의 원한은 세월이 가면서 흐려지고, 혹시 남았다고 해도 무림십대고수에게 복수할 정도로 강렬한 원한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일단한번 비슷한 냄새라도 풍겨서 어떤 반응이 오는지 확인하자고. 그래서 운리장을 지었겠지, 물론 혼자 그랬으리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 일하는 자객은 없으니까. 네게도 분명 일을 청부하는 누구, 혹은 조직이 있었을 것이야. 이번 일에도 그들이 나섰겠지. 그들이 도중에 우리를 막은 자들이 아니라고 할 태냐? 결정적인 것은……!" 그는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다른 어떤 말보다도 이것에는 자신을가지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진자앙도 그것이 궁금괘 귀를 세웠다. 여태 한 말은 맞는 것도 같고아닌 것도 같아 관단이 서지 않았기 떼문이었다. "네가 정말 가짜 운리무라면 진짜 운리무가 왜 너를 가만히 뒀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은퇴한 지 오래되었다고 해도 삼 년이면 네 소문을듣기에는 충분한 시간, 그가 너 하나쯤 죽이는 것온 전혀 어려운 일이아니었을 탠데!" 운리무가 입을 딱 벌렸다. 진자앙은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여태까지의 어떤 말보다도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이쯤 되니 여기 있는 운리무가 진짜 운리무가 아니기는 어렵개 되어버런 것 같았다. 운리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는 입술을 께물고 고민에 빠지는 듯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가 나를 건드릴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멩방명의 눈이 빛났다. 진자앙은 이것이 바로 맹방평이 노리던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운리무는 진짜 운리무와 관계가 있다고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진짜 운리무는 제 아버지입니다……" 운리무의 본명은 강유덕. 이름을 말하면 누구든 알 수 있는명문세가의 가신 중 하나였다 명문, 그러나 지금은 퇴락한 가문의 몇 안 남은 가신. 명예와 전통은 중요한 것이지만 사람이든 가문이든 그것만으로는살 수가 없는 법이다. 그것을 강유덕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가문을보면서 느꼈다. 정원에는 사람의 손이 가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몇십 명 남지 않은 가문의 식솔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많은 방들은 아무리 쓸고 닦아도 거미줄을 완전히 다 걷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당대의 명인들이 걸작을 남겨 놓은 그림벽이 비에 젖고 바람에 쓸려 무너져 가는 것을 볼 때는 그래도 참을 수가 있었다. 때마다, 절기마다 챙겨야 하는 제사를 위해 가문의 보물들을 하나둘내다 팔아야 했을 때는 차라리 부담이 줄어드는 듯해서 좋기도 했었다. 그러나 팔십 노주인이 열다섯 손주를 이끌고 직접 밭을 일구겠다고나설 때에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돈을 벌 방법을 궁리했고, 가장 손쉽게 가장 많은 돈을 끌어모으는 방법, 그것도 그가 잘할 수 있는 것으로 고르다 보니 하나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구한 보물 전궁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 전궁. 그것은 기관장치로 화살을 날려보내는 노궁의 하나였지만 선대의이인이 손질을 한 이후로는 기관장치든 뭐든 엄청난 재주와 능력이 있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강유덕에게는 그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전궁은 그의 수족이 되었고, 온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살인무기가 되었다. 강유덕이 운리무라는 이름을 단 다음의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천하제일의 자객이 되었고, 무진장한 보화를 가문으로가져 올 수 있었다. 그 후로 근 사십 년 동안이나 그런 일을 계속했던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그의 가족들은 내버려져 있었다. 혹시나 자신의 자객행이 소문이 날까 싶어 강유덕은 가문을 배반하고 도망친 것으로일을 만들었고, 그나마 가족들은 돌보지도 않고 자기 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사십여 년이 지나 운리무의 이름을 버리고 다시 강유덕이 되어 가족을 찾아왔을 떼, 그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맹방평과 진자앙의 앞에 있는 운리무, 본명 강청화는강유덕의 맏아들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얼는 동안 가족의 생계를 대신 책임져야 했던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갓 다섯 살을 넘어섰을 때부터 사십여 년 간 온갖 고생을 해가며 집안을 지켰는태 뒤늦게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가 반가을 리도 없었지만그는 혈육의 정을 끊지 못해 오막 하나 내주고 아버지를 거기 살도록했다. 그러다가 그것을 보았다. 전궁이었다. 살아 가기 위해 안 혜본 것이 얼던 그는 전궁이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보았다. 그리고 혹시 돈이 될까 해서 은밀히 알아보았더니 거기얘서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따라나왔던 것이다. 삼십 년이었다. 그가 아버지얘게서 모든 사실을 말하도록 하기까지, 그리고 그를 버리고 돌아다닌 사십 년의 세월에 대한 보상으로 얼핏 이 터무니없는일을 저지르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그랬다. 자객교는 바로 아버지가 힘을 써서 그를 보호해 주도록 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다른 짓을 못 하도록 감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청화의 얘기를 듣던 맹방평이 불쑥 물었다. "그 가문이 어디냐?" 다른 것은 다 얘기하면서도 강유덕이 충성을 바쳤다는 그 가문의 이름은 얘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네 아버지가 있는 곳은 어디냐?" 강청화는 고개를 숙였다. "앞의 것은 대답해 줄 수 있지만 뒤의 것은 절대 말할 수 없소." "왜?'" "거기에는 아버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가족들도 살고 있으니까." 거기에는 그의 동생과 아내, 자식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아버지의 가족이라기보다는 그의 가족이었다. 아버지가 죽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가족을 회생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당신이 알고 싶어할 것은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소. 그 가문이 어디냐는 것 아버지를 도와 같이 음모를 꾸민 자, 그자가 청부를 거래하는 자였소. 두 이름에 다 굉장한 가치를 주게 될거요. 당신에게라면!" 그때 그가 나타났다. 은빛 화살 하나와 함께. 그것은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발견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강청화의 이마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능고 한참을 더 날아가 땅바닥에 박혀 있을때였고, 그것은 하나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졌옴을 알려 주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한 표정이었다. 진정한 운리무가 나타난 것이다. 진자앙의 경우 시체를 본 것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 방금까지 팔팔하게 살아 떠들던 사람이 눈앞에서 시체가 되는 장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쓰러지는 강청화의 몸을 본능적으로 잡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창백한 이마에는 처음엔 아무 상처도 언어 보였다. 그저 바늘로 찔린 듯 조그만 흔적이 있더니, 이내 그것이 한쪽은 짧고 다른 한쪽은긴 열 십 자로 붉게 변했다. 그리고 곧 분수처럼 피를 토해 내었다. 눈앞이 완전히 붉어졌다. 진자앙은 그령게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얼이 빠져 앉아 있다가 곧주저앉아 토하기 시작했다. 방금 먹은 만두들이 뱃속에서 목구멍으로,목구멍에서 다시 입 밖으로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손으로 입을 닦자 거기에는 토사물의 찌꺼기와 붉은 피가 같이 묻어 나왔다. 진자앙은 다시 토해 버렸다. 그는 그렇게 주저앉아 더 이상 물도, 만두 조각도 나오지 않고 혀를떫게 만드는 쓴물이 나을 때까지 마냥 토하고만 있었다. 생명이란 이다지도 하찮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오늘 이 순간 처음 알았다. 피로 물든 손으로 밥을 먹고, 피에 젖은 신발로 길을 걷는다는 무사의 삶을 이야기로 들었을 때와 직접 보았을 때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다가온다는 것도 이 순간 처음 알았다. '돌아갈까?' 진자앙은 주저앉아 생각했다. 이건 인내력으로 견디고 어쩌고 할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강호의 삶이 체질적으로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냥 가문와 바보자식으로 조용히 살아 나가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운명인지도 모른다. 얼굴을 적시는 뜨끈한 것이 피만은 아니라는 것을 진자앙은 느끼고있었다. 바보처럼 그는 울고 있었다.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눈물을 짜고 있었다. 주인의 몽등이를 바라보는 개새끼처럼 온몸을 떨어 가며울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보 겁쟁이가 그, 금강두 진자앙의 진정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주저앉아 울면서 그렇개 생각했다. 그는 처음본 죽음의 확인 절차를 그렇게 아프게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울지도 않았고, 몸을 털지도 않았다. 진자앙은 발치의 흙을 집어 얼굴에 문질렀다. 더러웠지만 피와 토사물처럼 더럽지는 않았다. 그보다 눈물의 흔적을 누구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진자앙은 그렇게 얼굴을 정리하고, 마음도 같이 정리했다. 죽음을곁에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 강호의 삶이라면, 그리고 어차피 그것을회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자고 생각한 것이다. 놀라지 말자고 결심한것이다. 그는 운리무, 아니 이젠 운리무가 아님이 확실히 밝혀진 강청화의시신을 가지런히 눕혀 놓고 비로소 맹방평을 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맹방평은 진자앙의 기억대로라면 원래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손만 조금 들어올리고 있었는데, 그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진자앙은 강청화가 죽은 것보다도 맹방평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무림십대고수의 몸에서 피를 본다는 것은 용을 잡은사람이 있다는 말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 맹방평은 피를 홀리고 있었다. 손바닥의 엄지와 검지사이, 호구가 찢겨져 거기에서 붉은 피가 방울방을 흘러나와 땅을 적시고 있었다. 진자앙은 그 상처가 주는 의피를 깨닫고 다시 한번 해연히 놀라 버렸다. 맹방평의 호구는 보통사람의 그것과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또 맹방평 본인의 다른 신체 부위와도 다르다. 그의 호구는 여태 수없는 범죄자를 잡아 온 바로 그 부분으로, 턱을 잡아 제압한 신화의 출발점이다. 거기 잡히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그 악명 높은 족쇄인 것이다. 그런 호구가 찢겼다. 운리무가 쏘아 보낸 화살 한 발에! 진자앙은 저만치 땅바닥에 박혀 있는 화살을 뽑아들고 맹방평의 눈앞에 들어올려 보여 주었다. 길이는 한 자. 화살치고는 터무니없이 짧다. 화살촉은 열 십 자의 창처럼 생겼다. 강청화의 이마에 열 십 자의상처가 만들어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점보다도 중요한 것은 화살이 그것 단 한 발뿐이라는것이었다. 날아온 화살은 그것 한 발뿐이었다. 그 한 발이 눈치를 채고 잡으려 혔던 멩방평의 손, 호구를 찢고 강청화의 이마를 깨끗하게관통해서 땅바닥에 끄트머리만 보이고 깊이 박혀들었던 것이다. 멩방형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진자앙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방금의 화살은 그나 진자앙흘 겨냥한 것이 아니라 강청화를 겨냥한것이었다. 운리무 정도 되는 사람이 겨냥이 틀렸을 리가 없으니 그는강청화의 말이 옳다면 자기 아들을 먼저 죽이고자 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자기의 방식으로, 즉 그는암살을 시도하고 멩방평이 그것을 피하는 방식으로 겨루어 보자는 도전장이며, 아들의 펴로 쓴 복수외 경고장일 것이다. 멩방평은 걷고, 진자앙도 나귀률 메고 그 뒤를 따랐다. 맹방평은 온몸의 신경을 모아 낌새를 찾으려 했지만 아까 이미 실패한 것이었기에 그리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운리무는 천하제일의 자객이었다. 누구에게도 그 종적을 들키지 않는 치명적인 일격, 두 발온 절대 펼요치 않은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자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그도 천하제일의 포두였다. 그의 코는 범죄의 음슴한 냄새를 맡는 방면으로는 기형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그것은 보고, 듣고, 연습해서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천부적으로 타고난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레서 그는 운리무가 다시 한변 나타난다면 반드시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멀리서건 가까운 곳에서건 한번 위치를 드러내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그의 눈과 코를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문제는 그 전에 다가을 일 발을 어떻게 막느냐, 혹은 피하느냐는 것이었다. 만약 그 한 발에 그가 쓰러진다면 그 다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그 한 발이 실패한다면 이번엔 운리무의 그 다음이라는 것이 있을 수없을 것이다. 그들의 대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쾌수난타여의박 금문공 맹방평과 이발불요 운리무, 무림십대고수중 두 사람의 대결은 그렇게, 보는 사람이라고는 진자앙이라는 강호무명소졸 하나밖에 엄는 황량한 들판에서 시작된 것이다. [제십구장] 전궁은 묻히고 뇌정은 숲을 나오다. 들판이라고 하면 전에는 몸을 감추려 해도 감출 곳이 없는 평평한땅을 연상했던 진자앙이었다. 그러나 막상 들판에 서서, 누군가가 어디에 숨어 그들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찾을 방법이란 없어 보일 정도로 숨을 곳이 많아 보였다. 혹시, 저만치 뒤에서 구르는 잡풀의 덩어리 속에?아니면 저기 신발바닥을 겨우 적실 정도의 작은 웅덩이에라도 땅을 파고 혹시? 그도 아니면 저편 흙이 뭉쳐 그림자가진 곳에라도 혹시 숨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던 진자앙은 온 포기해 버렸다. 찾을자신도 없을 뿐더러. 혹시 먼저 봤다고 해도 공격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무림최고자객이 쏘든 지나가던 건달이 쏘든, 화살을 피한다거나 하는 일에는 아무 소질이 없으니, 쏘면 맞는 수 외에 달리 다른 방법이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맹방평은 애초에 평소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마음의 동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운리무를 두려워하는지어쩐지, 대책은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은 전혀 모르고 그저 따라 걷기만 하는 진자앙의 심정은 마치 한가로운 산책을 나온 기분과도 흡사했다. 다행인 것은 이젠 더 이상 나귀를 메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귀가정신을 차려 제 발로 걸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귀가 무겁거나 해서 귀찮았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정신을잃고 있는 동안 입에 적셔 주는 물이나 핥던 것이 불쌍했는데, 이제그러지 않게 되어 반가운 것이다. 그래서 진자앙은 걷다가도 길에서 벗어난 곳에 나귀가 먹을 만한 풀이 보이면 얼른 달려가 뜯어다 주곤 했다. 그렇게 사흘을 걸었다. 운리무의 종적은 보이지 않았고, 다시 공격을 시도해 오지도 않았다. 맹방평 역시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정확히하자면 그 사홀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사실은 자기보다 진자앙이 침착하다는 것에 대해 더 경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가 없었다. 그런 기분을 처음 드러낸 것은 사흘계의 밤, 여름이지만 서늘한 날겨 때문에 모닥불을 피워 두고 앉아 잠을 청할 때였다. 진자앙은 맹방평이 설마 잘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아무리 대담하다고 해도 운리무 같은 자를 적으로 대면하고서 어떻게 잠을 잘 것인가. 최소한 눈을 감고 있더라도 경계는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진자앙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눈을 뜨거나 감거나, 자거나 말거나 어차피 그가 경계한다고 운리무를 발견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야 자든 말든 상관이없는 것이다. 하지만 까마득한 어른이 날밤을 새며 보초를서고 있는데 그가 어떻게 잠을 잘 것인가. 다른 면에는 소질이 없어도 다행히 그런 것을 버티는 데에는 소질이있는 진자앙이었다. 그는 무료함을 참기 위해 땅바닥에 의미없는 낙서를 하다가 손에 신경이 미치자 작은 동작으로 천망월인을 연습했다. 그는 아직도 새벽마다 연운십팔박과 금강대력, 금강지식공을 연습하는 것을 빼놓지 않고 있었고, 걷는 도중에도 생각만 나면 천망월인을 연습했다. 물론 그런다고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하루 만 번 연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맹방평이 문득 그를 보고 말했다. "대담한 거냐, 아니면 멍청해서 겁이 없는 거냐?" "예?" 갑작스런 질문에 놀라 되묻는 그를 향해 맹방평은 손을 저었다. "됐다. 물어 본 내가 잘못이다. 그렇게 연습하고도 조금도 진보가없는 놈에게 내가 별걸 다 기대하지 " "죄송합니다." 진자앙은 머리를 긁적이며 계면쩍은 웃음을 흘리다가 평소 생각하던 것을 물어 보았다. "이것도 공격의 일부겠지요?" "뭐?" 이번예는 맹방평이 되물었다. 진자앙이 질문한 의도를 설명했다. "운리무가 그날 바로 공격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기다리는 것 말입니다. 할아버님께서 그러시기를, 고수들의 짜움은 싸움 전 단계에사이미 구 할 이상 승패가 결정되고 막상 맞불었을 때는 그걸 확인하는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하시더군요. 또 말씀하시길, 붙어서 오 초이내에 숭부가 나지 않는 것은 하수들의 싸움에서나 그러하다. 이미결정된 결과을 확인하는 대에 백 초 천 초가 무슨 소용이갰느냐고 하시더군요. 이번 경우에도 그렇겠지요?" "흥?" 멩방평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진자앙은 계속 말했다. "일찍이 그런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그저 마주 대했을 메 풍기는기도나 기세, 또는 형세의 유불리를 판단한다는말씀이신 즐로만 이해했지요. 그런데 이번 경우를 보니 생각과는 아주다르군요. 이거야말로 채혁과 참을성의 경쟁 아닙니까. 그것도 자객의입장에서 극히 유리한. 우리가 잠을 못 자고 경계하는 동안 그는 충분히 자고 먹으며 체력을 안배하고 있을 것 아님니까? "바보 같은 소리!" 멩방평은 가볍계 핀잔을 주었다. "이 싸움이 체력과 참을성의 경쟁이라는 말은 반만 맞춘 것이고 그가 우리보다 유리하다는 말은 아주 틀린 것이다." "그럼……?" "체력과 참을성은 승부채 작은 영향을 미치는 한 부분일 뿐이고, 평정심자 살기를 얼마나 맑고 예리하개 유지하느냐가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평정심이 없으면 상황에 대처하지를 못하고, 살기가 둔해지면 손도 같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또 그나 우리나 지금은 마찬가지상태에 있다. 우리가 잠을 못 자면 그도 못 자고, 우리가 긴장하면 그도 같이 긴장해 있을 것이다. 자객과 목표는 같이 호흡한다고 말하는것이 바로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목표의 신체 주기에 자객의 그것이동화되지 않으면 그 암살은 실패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객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들이 처음 듣는 말이 목표의 호흡과 자신을일치시키라는 것이지." 진자앙은 감탄해 입을 벌렸다. 처음 듣는 말이기도 하지만 맹방평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더욱 신기해서였다. 수사상 필요해서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지금 맹방평이 하는 말은 마치 그 자신이 자객이 되기라도 한 것 같은투가 아닌가. 그는 문득 웃었다. "그럼 범죄자를 쫓는 포두도 범죄자처럼 호흡한다고 말해도 좋겠군요." 맹방평은 코웃음을 치려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수밖에없는 말이었다. "옳은 말이다. 그래서 포두와 범죄자는 상당히 닳아 있다고도 하지 , " 맹방굉이 문득 눈을 빛내었다. 그 눈빛이 말하는 것이 워낙 분명했기 때문에 아무리 둔한 진자앙도 그걸 모를 수가 없었다. 운리무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전혀 낌새를 느끼지 못했지만 맹방평이 그렇다면 그런 것일 터였다. 진자앙은 문득 한 생각을 하고는 자리애서 짐짓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이렇게 평그리고 앉아 있기만 하니 답답해 미치겠군요. 팔다리라도가끔은 좀 풀어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큰 걸음으로 모닥불의 불빛이 비치는 반경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맹방평의 눈빛이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서였다. 맹방평이 다급한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돌아서 있으니 맹방평을 볼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미친놈!' 그는 전음으로 진자앙에게 외치며 자리에서 번개처럼 일어나 달렸다. "미친놈, 엎드려!" 맹방평이 비스듬히 들판에 엎드리며 진자앙의 두 발을 낚아채 넘어뜨리럭는 순간, 진자앙은 뭔가 빛이 반짝인다고 생각하고 그 빛을 향해 손을 련었다. 맹방평이 가르쳐 준 천망월인의 일초였다. 그러나 빛은 너무 빨랐다. 사실 그가 보았다고 느졌을 때는 이미 그빛은 진자앙의 이마에 박혀들고 있었던 것이다. 빡--!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진자앙은 한 순간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는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고대랑이 휘두르는 봉에 머리를 맞았을 때도이렇지는 알았었다. '죽는 건가?'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주저앉았다. 애초에그가 방패가 되는 사이에 맹방평이 운리무를 잡아 주길 바라고 한 행동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정말 지나칠 정도로 겁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그는 그제서야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어!' 진자앙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의 흐린 눈 한편으로 마치 꿈처럼맹방평이 보이고 있었다. 들판에 바짝 붙어 달리는 들쥐처럼, 마치 풀잎을 스치는 바람처럼달려가는 맹방평,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쏘아지는 이차, 삼차의 화살들. 노궁이라는 것이 원래 여러 발을 연속해서 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운리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쩠든 신화는 깨어진 것이다. 이발불요, 두 번 쏠 필요가 없다는 신화는 진자앙과 맹방평의 손 아래 산산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진자앙의 미친 짓은 정말 효과가 있었다. 그는 단 한번의 미친 짓으로 두 명의 절대고수가 치밀하게 짜맞추어가던 싸움의 그림을 전혀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파국이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찾아온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세하게 그림을 그려 놓았던 운리무에게 더욱 타격이 되었다. 운리무의 첫발은 원래 맹방평을 위한 것이었는데 진자앙에게 가버렸다. 그리고 확인을 위해, 그 다음에 비로소 진자앙을 위해 준비된제이탄과 삼탄이 맹방평을 향해 날았다. 정확도도 속도도 덜할 것이 없는 화살들이었지만 거기에 실린 기세와 살기는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 작은 차이가 고수들에게는 중요했다. 맹방평은 창황중에도 그의 이마를 노리고 정확하게 날아드는 화살을 손을 뻗쳐 튕겨 내고, 다른 한 발은 피해서 달렸다. 칙--! 첫 화살은 그의 손가락을 찢고 날아왔지만 방향이 이미 변경되었다. 그것은 그의 어꼇죽지를 뚫고 지나가 버렸다. 두 번쩨 화살은 적절히괴했기 메문얘 얼굴 한쪽을 쓸고 지나갔을 활이었다. 그 다음 화살은없었다. 운리무는 그들로부터 십 장도 체 떨어지지 않은 들판 가운데에 반쯤무릎을 꿇고 앉아 그 묘하개 생긴 활, 전궁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맹방평의 쪘겨진 손이 그의 틱을정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운리무의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새 번쪄 화살이 빗나가는 것을 안 순간, 맹방평의 손이 턱을 쥐어 오던 바로 그 순간에 이미 그는 심맥을 끊어 자결해 버렸던 것이다. 맹방평은 그의 틱을 놓아 주었다. 운리무는 어디얘서나 볼 수 있는 시골 노인 같은 외모를 가졌는데,자유를 되찾은 턱을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모아더듬더듬 말했다. "자객의…… 최후는…… 개처럼…… 죽는 것 당신과…… 겨룰 수있어서…… 영광……!" 그겻이 운리무의 최후였다. 진자앙은 울고 있었다. 얼굴 표정은 분명 히죽거리고 있는데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맹방평은 울고 있는 진자앙을 난감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건 누구도 안 믿을 거야. 운리무의 화살에 미간을 맞고도살아남았다는 것은……!" 미간. 눈썹 사이의 급소였다. 진자앙은 거기 운리무의 화살을 맞았는데도 죽지 않은 것이다. 단지 이마에 동전만한 혹이 생겼고, 그 중심에 작은 부스럼 같은 붉은 상처가 하나 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게 작은 상처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맹방평은 걱정하고있었다. 지금 진자앙이 이유없이 울고 있는 것도 그 영향일지 모른다. 맹방평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진자앙의 혈도를 점해 나갔다. "응?" 몇 군데 마혈을 점해서 일단 안정을 시키려고 했던 것인데 놀랍게도진자앙은 혈도가 잡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예전에 진자룡이 소삼중의 혈도를 점하려다가 실패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그러나 맹방평은 금나술의 대가요, 금나술은 점혈봉맥의수법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해 금나술의 달인이면동시에 점혈과 봉맥의 달인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맹방평이 혈도를 점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맹방평은 자신의 상처를 간단하게 지혈한 후, 곧 진자앙의 경맥을살피며 다시 점혈을 시도했다. 원래 혈도를 공격하는 데에는 발끝으로 걷어차는 척혈, 손바닥으로 치는 타혈, 무릎으로 들이받는 당혈, 손가락으로찌르는 점혈의 네 가지가 있다. 이 중 점혈이 가장 정묘한 기술을 요한다. 그것은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어디가 특별히 사혈이고, 어디는 마혈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부위를 쳐도 그 강약과 경중에 따라 사혈이 되기도 하고 마혈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흔히 판관필이니 점혈괴니 하는 끝이 뾰족한 무기를 사용하여 그 예리함으로 정확도를 높이고, 힘의 분배를 쉽게 한다. 하지만 원래는 침을 사용하는 것이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작은 험으로도 깊은 경맥을 건드려 기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기떼문이다. 그러나 고수는, 특히 맹방평은 구태여 침까지 필요로 하지 않았다. 기를 사용하면 충분히 침과 같은 효과, 때로는 그보다 나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침의 예리함을 빌릴 것인가. 맹방평은 한참 어루만지고, 때리고, 찌르기도 하며 진자앙의 혈도를점하려고 하다가 끝내 포기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침을 사용해야 하나?" 그러다가 문득 그것도 안 될 거라는 것을 깨닫고 맹방평은 허탈하게웃었다. 운리무의 화살도 못 뚫는 가죽을 침으로 어떻게 뚫는단 말인가. "금강당이라……! 철우가 과연 대단하긴 대단한 인물이었던 모양이군!" 진자앙의 몸은 보통의 외공수련으로는 도저히 성취하기 힘든 경지의 단단함을 성취하고 있었다. 맹방평의 넓은 견문으로도 이런 외공이라는 것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을 정도였다. 특히 그와 같은 고수가 혈도를 점할 수조차 없는 외공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철우가 남긴 비전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철우는 당시의 최고고수 중 하나였다. 그가강호에 나왔을 때는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진 뒤였지만, 그의 연배에있는 사람들은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당시 무림사대당 중 하나를 연 사람이라면 평범한 인물은 절대 아닌 것이다. 맹방평은 나귀에게 다가가 짐에서 괴다란 술병을 하나 꺼내었다. "술이나 약했으면 좋겠군!" 그가 보기에 진자앙은 일단 어떻게든 안정을 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점혈이 안 통하니 술의 힘을 빌어 보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취약도 안 통했었지!" 그는 눈쌥을 찌푸렸지만 일단은 해보기로 렸다. 맹방평 자신은 공무 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기 메문에 평생을 통틀어 거의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지금 그가 든 술은 나귀에게 먹이려고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나귀를 유일한 가족으로 알고 살아 온 그였기 때문에 술도 최상품온 아니었지만 질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진자앙외 입을 벌리고 가죽주머니의 주등이를 거기 쑤셔박아다. 한 말들이 가죽주머니얘 든 술이 진자앙와 입으로 전부 넘어갔다. 맹방평은 그 결과를 기다렸다. 다행히 진자앙은 술에는 별 면역이 없는 모양이었다. 금새 취해서얼굴이 불같이 달아을라 곧 넘어갈 것처럼 비틀거렸다. 눈물도 멈추었다. 문제는, 그때부터 횡설수설 지껄이며 술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는것이었다. 평소에는 그리도 말이 없더니 술을 마시자 끝없이 말을 풀어 놓았다. 멩방평은 잔뜩 인상을 깼다. 애초에 술을 먹인 것을 후회했지만 자초한 일이니 어쩔 수가 업었다. 진자앙은 결국 철탑이 기우는 것처럼 옆으로 쓰러져 잠이 들어 버렸다. 맹방평에개 그가 살아 온 이십일 년의 세월을 다 털어놓은 다음의일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할아버지애게도 털어놓지 않은 일까지. 진자앙은 다음날 아침 멀쩡하게 일어나 연운십팔박을 수련했다. 맹방평이 모닥불 가에 누운 채 그를 바라보았다. 사흘 동안 못 잔잠을 한꺼번에 자느라 부은 눈으로였다. "제가 너무 시끄럽게 해드렸습니까?" 진자앙이 그를 보며 미안한 듯 물었다. 맹방평은 그 물음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괜찮으냐?" "아……, 혹이 좀 났더군요." 진자앙은 이마의 부어 오른 곳을 슬쪄 만지고는 눈을 빛내며 맹방평에게 말했다. "어제의 결투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정말 아깥습니다. 화살을 맞고정신을 잃지만 않았으면 두고 두고 자랑할 구경을 했을 텐데요. 저기있는 흙무덤이 그의…… 것이겠지요?' 맹방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도로 보아 어젯밤 자신이 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좋겠지!' 맹방평은 나귀 등에 걸린 묘한 짐 하나를 가리켰다. "저걸 보면 확실해질 거다." 진자앙이 가서 그것을 가져 왔다. 금속으로 된 틀 위에 활 같은 것이 장치된 기구 바로 운리무의 집거실에 걸려 있던 것과 같은 형태의, 그러나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진노궁이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보통의 힘으로는 들지도 못할 정도로 무거웠고, 번개 무의가 음각된 몸체 한 귀퉁이에는 전서로전궁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게 바로……!" 진자앙은 숙연한 기분이 되었다. 일대를 풍미한 자객은 가고, 그 주인만큼이나, 아니, 그 주인보다도 오히려 더 유명했던 유물만 그의 손에 남은 것이다. "원래는 목을 잘라 가야 되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 정도면 되겠지!" 맹방평이 마치 그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진자앙은 전궁의 몸체에 마치 손톱 끌같이 생긴 홈이 있는 것을 보고 살짝 당겨 봤다. 몸체가 열리며 그 안에서 작은 화살 몇 개가 나왔다. 전궁은 그 자체로 전통까지 겸하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 그는 화살 하나를 잡아 팔뚝의 피부를 그어 보았다. 붉은 줄이 가더니 이내 부어 올랐다. 그는 혀를 내둘렀다. "여기에는 저도 어쩔 수 없이 당하겠군요. 뭘로 만들었기에 이렇게강할까?" 그는 다시 한번 팔뚝을 그어 보았다. 이번에는 약간 붉은빛 선만 그어질 뿐, 부어 오르지는 않았다. "역시!" 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먼젓번은 그냥 한 것이고 이번에는 금강지식공을 운용한 상태에서 한 것이었다. 사실 어젯밤에 운리무의 화살을 맞을 때도 남몰래 금강지식공을 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유각주라고 하지," 헹방명이 그외 손에서 전궁을 거둬 가며 말했다. "보물에는 따로 주인이 있는 법이라고……!" 그는 전궁을 이리저리 살펴더니 시위애 화살 하나를 걸고 손잡이처럼 되어 있는 것을 당겨 보았다. 활시위가 조금씩 당겨졌다. 그러나 완전히 당겨지지는 않았다. 맹방평은 그냥 놓아 버렸다. 화살은 타원을 그리며 하늘로 솟구치다가 그리 멀지 않은 들판 한곳에떨어져 박혔다. 맹방평은 전궁을 들고 거기로 걸어가며 말했다. "원래 이런 보물이 자객의 손에 들어가 악행의 도구가 되면 주인을잘못 만났다고 하는 법이다만……!" 진자앙은 그를 따라가며 맹방평이 이제 무슨 일을 하려는지 짐작할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다. 과연 맹방평은 화살이 박힌 긋의 땅을 가볍게 걷어차 구덩이 하나를만들고는 전궁과 화살들을 거기 던져 버렸다. "운리무가 주인이 되고 보니 이제 다른 사람은 네 주인이 될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냥 여기서 잠들어 버려라, 네 주인도 멀지 않은 곳에묻혔으니 외롭진 않겠지." 진자앙은 묵묵히 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나귀를 대하는 것에서도느꼈던 것이지만 맹방평은 사람보다는 짐승이나 물건에 더 공감을 하고, 더 자상하게 대하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전궁을 마치 사람 대하듯 하지 않는가. 맹방평이 구덩이에 홀을 덮기 시작했다. 진자앙이 얼른 나서서 도왔다. 금방 작은 무덤 하나가 만들어졌다. 맹방평이 손을 저었다. "봉분처럼 만들지 말고 평평하게 깎아라!" 진자앙은 맹방평이 말한 뜻을 이해하고 잠시 더 애를 써서 전궁이묻혀 있는 표시가 나지 않게 주변을 정리했다. 맹방평은 또 다른 누구의 손에 전궁이 들어가 악용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아!" 진자앙은 문득 부르짖고는 품속얘 쏜을 널었다가 껴내었다. 그의 손에 전궁의 화살 하나가 잡혀 있었다. "어제 강청화 노인을 죽인 화살인데 재가 깜락 잊고 그냥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구덩이를 다시 파헤치려 했다. 맹방평이 말렸다. "그만, 됐다. 그건 네가 기념으로 가지려무나. 천하계일궁 운리무를기념랄 물건 하나쯤은 있어도 나쁘진 않겠지." 그는 돌아서서 걸었다. 진자앙은 훤가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한 듯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깨닫고 저만치 가는 맹방굉의 등을 보았다. 맹방떡은 운리무를 언급하면서 처음으로 '자객 운리무'라는 말 대신'찬하제일궁 운리무'라는 호칭을 깼던 것이다. 이계야말로 그를 범죄자가 아니라 무림의 동시대를 살아 간 동료의 하나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였다. "너는 안 갈 테냐?" 맹방평이 나귀 켤얘 서서 부르고 있었다. 진자앙이 얼른 뛰어갔다. 들판 저편으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 해를 등지고걷기 시작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쾌여풍을 잡으러."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까?" "이미 광풍사의 여름 순잘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사천얘서 모였지. 그리고 지금 이 호북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강호인들은 모두 알고있는 일이다. 단지 이번이 그들의 마지막 순찰이 되리라는 것은 누구도 모르고 있겠지만……!" 맹방평은 들판 저편을 보았다. 떠오르는 일광을 받아 나무와풀, 들판 전체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 불길한 상상을불러일으켰다. "피를 보게 될 거다. 아주 많은, 짙고 붉은 피를……!" 쾌여풍은 광풍사의 두목이고, 광풍사는 도적 떼거리이다. 그 황풍사는 중원의 어느 문파도 따라을 수 없는 넓은 영역을 가지고있었다. 그들은 북으로는 몽고와 섬서에 이르고, 남으로는 안휘 복건에 이르며 서쪽으로 사천, 동쪽으로 산동에 닿는 넓은 행동반경을 가지고 그것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맙은 제자 수를 자랑하는 개방도 그렇게 영역이 크지는 않은데 단 오백 명으로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 영역안애 있는 문파들이 그것을 왜 용납하는가 하는 것은 광풍사만의 독특한 성격에 그 해답이 있었다. 그들애개는 일정한 본거지가 없다. 쾌여풍이 있고, 광풍사가 있는곳이 곧 그들의 본거지요, 영역이었다. 옛 원나라 때의 몽고족이 그랬듯이 말 위에서 천하를 얻어 말 위에서 다스리는 셈이었다. 그들에게도 쉬는 곳은 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십이월이 되어 천지가 눈으로 덮이면 어딘가로 뿔뿔이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해의 여름이 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유월. 여름이 오면 그들은 어딘가에서 모인다. 혹은 산동의 황무지,혹은 몽고의 대초원, 또 혹은 번화한 안휘성의 포구에 오백의 말과 오백의 사람이 모여들고, 거기 쾌여풍이 나타나면 행진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개는 강남에서 강북으로 갔다가 다시 강남으로 내려오는 길을 가는데, 그 과정에서 중원을 한바퀴 도는 큰 원을 그린다. 그 길에 걸리는 것들이 곧 약탈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혹도최고인 화륜맹도, 정도의 태두 소림사도 이들과는 되도록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다. 광풍사에 속한 오백의 무사들은 하나씩따로 떼어 놓으면 그저 조금 실력이 괜찮은 고수급에 불과하지만 광풍사의 깃발 아래 모인 그들은 합쳐져 하나의 막강한 군단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소림사의 고수 오백도, 화륜방의 고수 일천도 상대가되지 않는 것이다. 광풍사는 이제 거의 싸우는 일이 없어졌다. 먼저 그들에게 덤벼드는세력이 단 하나도 없었으니, 심심풀이로 한두 개 무림문파들을 쓸어버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주변의 부호, 세가들이 알아서 보물을 챙겨 들고 나와 상납하는 지경이었다. 그 대가는 생명이었다. 그렇게 수십 년간 천하를 질타해 오던 황풍사가 작은 반항에 부딪혔다. 호북성의 작은 가문, 황금장이 광풍사에 더 이상 상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포고한 것이다. 황금장은 호북성 갈현에 자리잡은 대상 호불연이 세운 장원이었다. 호불연은 상재를 타고났다. 그는 열다섯에 이미 일가를 이루었고, 서른에는 강남북을 통틀어 그만한 상인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사십에 천하의 상전을 들었다 놓았다 하더너 오십에는 고향호북에 장원을 젓고 일쪄감치 은퇴를 하였다. 그치 계산이 수천만금을헤아련다는 소문은 너무 사실과 근접해서 오히려 소문도 아니라고 하개 되었고, 은퇴한 뒤얘도 천하상권의 반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던 호불연. 그가 작년 겨을 감기가 들어 시름시름 앓더니 향년 오십육 세를 끝으로 세상을 뜨고 황금장은 늦계 본 그의 아들 호두태에개 넘어갔다. 당년 이십삼 레의 병약한 청년 호두태가, 한꺼번에 풀면 천하경제를 기울게 할 수도 있는 재물을 소유하개 되었던 것이다. 원레 호불연은 퍼도 퍼도 마르지 않을 것 같은 황금으로 주변의 무도한 무리들을 다스려 왔었다. 그 중에는 물론 광풍사도 있었다. 그러나 호두태는 아버지의 방식을 거부했다. 그는 보다 효과적으로 그런 무리들을 다루는 방법이 없지 않다고 믿고 있없다. 첫째가 돈으로 살 수 있는 무리들은 아예 사버리는 겻이었다. 그래서 호북성에서 제법 한다는 인물들이 호두태의 아래로 들어왔다. 호두태는 그들에계 황금기사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둘째는 돈으로 해결할 수 언는 무리는 아예 쳐버리는 것. 황금기사단의 첫 번쩨 임무가 그것이었다. 광풍사를 치는 것. 그러나 그는 바래선 안 되는 일을 시도한 것 같았다. 첫날 그가 말을 꺼냈을 때, 온통 황금으로 치장해 누렇게 보이던 황금기사단 기사들의 얼굴돌이 하얗게 혹은 파랗게 변혔다. 그리고 그다음날은 그나마 하얗고 파란 얼굴들도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각자 한 보따리씩의 재물을 챙겨 들고는 도망쳐 버린 것이다. 황금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말도 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가능성이 더 많을 때 하는 말이었다. 지금처럼 죽음만이 기다리는 굴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아무리 황금갑옷을 입고서라도. 호두태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은 황금기사단을 재정비하기 위해 그는 다시 천하의 기사를 모집했다. 물론 광풍사와 싸워 줄 기사였다. 듣고 있던 진자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나치게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 아닙니까? 아무리 황금이면 못하는 일이 없다지만 더 좋은 방법도 있을 텐데요?" 그들은 동정호의 기슭을 떠나 형주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갈현이 바로 거기 있고, 갈현에는 황금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맹방평은 좌측 옆으로 멀리 굽이처며 흐르는 장강의 물결을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조급해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는 진자앙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젊은이들은 대개 아버지가 해오던 방식을 틀렸거나, 혹은 낡은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일을 하려고 서둘지. 아버지가 싫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아버지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주위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은 것이다." 진자앙은 어쩐지 그 미소가 그를 향한 것이라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뜨끔했다. 그렇다면 그 말도 그를 향한 것은 아니었을까? 맹방평은 다시 강을 바라보았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앞지른다지만 그거야 표면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던가. 저 깊은 흐름은 항상 순리를 따라 흐를 뿐이야. 그리고 순리는 위에서 아래로, 라는 것뿐이다." "그럼 맹 노선배님은 이번 싸움에 대해 비관적으로 보십니까?" "쉽지는 않겠지." 맹방평은 생각에 잠겨 천천히 대답했다. "운리무든 누구든…… 사대마두의 누구든 나는 이긴다고 장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쾌여풍에게는 오백의 수하들이 있지. 그들을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좨여풍과 싸운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하게 되겠지, 황금기사단이라……! 거기 누가 있어서 광풍사 오백 고수들과 싸울 수 있울 것인가!" 진자앙은 맹방평의 입 끝에 매달린 웃음이 광풍사보다는 황금기사단이라는 자들애개 향한 것임을 알고 우울해졌다. 맹방평이 계속해서말을 이었다. "하나 세상에는 또 하나의 순리도 있다. 그것은 마는 결국 정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지. 애초에 그것을 믿지 않았으면 나는중원에 나오지도 않았으리라!" 진자앙이 소리쳤다. "제가 감히 그 중 한몫을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너무 건방졌던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맹방평은 그를 탓하지 않고 오히럭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도 네게 기대하고 있다." 형주부의 성도는 강릉,장강애 연해 서워진 고도로 강과 들을 끼고 있어서 예로부터물산이 발달하고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장강을 대강, 즉 그냥 큰 강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그 큰 강을따라 걸어 올라가다 보면 몇 개의 부현을 지나 호아산에 닿게 된다. 호아산은 호랑이 이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도 하늘을 찌르는 몇 개의 산봉우리와 협곡으로 이루어진 산이었다. 거기 깊숙한 산속, 녹림도의 산채가 있으면 더 어울릴 것 같은 곳에 황금장이있었다. 황금장. 이름은 황금이었지만 번쩍이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외관은 그랬다. 검은 돌로 쌓아 올려진 거대한 성채에 검붉게 녹슨철문. 높은 성채 위로 조금 보이는 전각의 뾰족한 지붕은 비바람을 견뎌 낸 오랜 세월을 말해 주듯 검푸르게 죽어 있었다. 원래 청기와를 깔았는데 거기에 이끼가 끼면 저런 색이 나온다는 것을 진자앙은 알고 있었다. 집엑도 그런 곳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기와는 보기에는 멋있어도 곧 삭아 부스러지기 때문에 갈아 줘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황금장의 전체적인 인상은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중죄인을 가둬 두는 뇌옥이나, 정말 녹림도의 산채, 혹은 강호혹도의 비밀세력이 세운 본거지 정도로 생각꿜 정도였다. 진자앙은 묘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돈을 많이 가진 것이 죄는 아닐 텐데……!" "응?" 맹방평이 그게 무슨 소린가, 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진자앙은 머리를 긁으며 설명했다. "남의 이목을 피해 숨어 있는 듯해서 한 소리입니다." "숨어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돈을 많이 가진 것도 일종의 죄이기 때문에 저렇게 숨어 있는 것이지." "호불연이라는 인물이 악독한 방법으로 돈을 끌어 모았습니까?" "아니." 멩방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정말 대단한 상인이었지, 그가 속임수를 쓰거나 타인을 갈취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와 거래한 사람들이 다들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말은 있지." "그런데 무슨 죄란 말입니까?" "평범한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죄. 욕심을 불러일으킨 죄다. 평범하지 않계 사는 자가 당연히 감당혜야 할 죄이기도 하다." 맹방평파 진자앙은 황금장에 다가갔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인적은 없었다. 견자앙은 이 거대한 성체가 드리우는 불길찬 그림자와 육중함에 마음이 눌리는 듯해 다시 우울헤졌다. 그러나 맹방평은 그와는 다른 것을 보는 듯했다. 그는 진입로를 살피고, 황금장을 둘러서 있는 높은 산봉우리들을 관찰하고, 황금장에다가가서는 그 성체를 이루고 있는 검은 돌들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하군? 소두가 제법 혜놓았구나." 진자앙은 여전하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지, 소두는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오늘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을 기억하고 묻지 않았다. 다행히 맹방평이 먼져 말혜 주었다. "이 돌은 굉범해 보이지만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대리국에서만 난다는 흑오석이기 때문이다. 뭔가 예리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내놔 봐라!" 진차앙은 품속을 뒤지다가 잡히는 것이 있어 내놓았다. 맹방평은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받아 들었다. 운리무의 화살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성채를 긁었다. 작은 고랑이 패였다. 맹방평은 피식 웃었다. "예리하다고는 해도 너무 예리한 것을 꺼내면 설명이 안 되지 않느냐. 보통의 보검으로는 금 하나 그어지지 않는 혹오석의 벽이 그냥 상처를 입는구나!" 진자앙은 얼굴을 붉히고 다시 하나를 꺼내었다. 맹방평은 그것을 자세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냐? "산에서 우연히 주운 것입니다." 물건은 양날창, 오지산 화룡동에서 주운 푸르부, 뇌전도라고 부른다는 물건이었다. 진자앙은 추가로 설명했다. "산서 벽력당의 물건으로 보인다고 할아버님이 그러셨지요." 벽력당 소리를 듣자 맹방평은 움찔해서 하마터면 양날창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뇌전도를 살피더니 진자앙을 보며물었다. "설마 화기는 아니겠지?" "아넙니다. 아니, 아마 아닐 겁니다." 진자앙이 자신없게 대답했다. 맹방평은 그것으로 성벽을 다시 긁어 보았다 놀랍게도 가져다 대기만 한 것 같은데 성벽의 모서리가 한 조각 떨어져 나왔다. 진자앙은 입을 벌려 놀라고 맹방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한 물건이군. 겉으로는 전혀 예리함이 드러나 있지 않은데……! 아무래도 벽력당의 물건이라기보다는 밀교 쪽의 법기같다. " 그러면서도 그는 그것을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꽈 두려워하는 듯 조심스럽게 돌려주었다. "하여튼 여기 황금장의 물건에는 평범한 것이 없다. 평범해 보일수록 더욱 놀라운 것들미기 쉽지. 여기 이 철문만 해도……!" 맹방평은 철문에 다가가 손으로 두들겼다. 과아앙--! 철문이 둔중한 신음을 질렀다. "만년한철이니 뭐니 해도 나는 이만큼 크고 단단한 문은달리 본 적이 없으니까."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문. 진자앙은 거기에 놀라 맹방평이 말한 '소두'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묻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안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문 한쪽애 사각형의 금이 그어지더니 러꼼히 열렸다. 처음엔 작은 눈이, 그다옴앤 음어 쭈그러진 노인의 얼굴이 그 시이로 보였다. "누구요?" 별로 곱지 않은 목소리였다. 맹방평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노인가? 나, 맹 포두일세 문 좀 열게!" 이노라고 불린 노인의 눈이 뱅그르르 돌아가 멩방평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멩방평과 아는사람인 듯한데 그 표정이 과히 좋지가 않았다. "왜 오셨소?" 어조도 그리 곱지 않았다. 맹방평은 그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붙이며 대답했다. "자네 작은 주인을 만나러 왔네. 빨리 열어!" 그의 눈빛이 이노의 눈을 찌를 것 같았다. 이노는 거기에 찔끔한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사라지고, 사각형의 구멍이 다시 모습을 감추더니 대신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노는 오 척이 넘을까말까 한 작은 체구인 데다가 머리털은 거의빠졌고, 얼굴에는 주름이 워낙 많아 눈을 찾기 어려을 정도였다. 그래서 오히려 맹방평보다 더 늙어 보이는 모습. "따라오슈!" 그는 자그마한 몸을 돌려 철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거대한 전각을 향해 갔다. 진자앙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황금장은 겉보기에 사각형의 성채로 극히 단순한 모습이었는데 안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철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거대한 전각의 군이 있고, 그 전각군의 좌우로는 바깥 성채만큼이나 높은 담장이바깥 성채의 모서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진자앙은 잠시 생각해 보고 그가 지금 있는 공간이, 짧은 전각군을윗변으로, 그보다 훨씬 긴 바깥 성채를 아랫변으로 하는 사다리꼴처럼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곳도 이렇게 생겼을까?'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황금성은 정말 그렇게 생겼다. 바깥을 큰사각형의 성채로 둘러 놓고, 안에는 그 반만한 길이의 변을 가진 전각들이 둘러싸고 있는 그 안에 다시 널은 공간이 있어서 거기 황금장의핵심이라 할 주인의 처소, 황금각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각들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각 모서러에서 바깥 성채의 각모서리로 담장이 연결되어 있어서 황금장은 총 다섯 게의 공간으로 나누어지는 샘이었다. 이노는 작았지만 걸음이 극히 빨랐다. 개다가 지금은 화난 것처럼빨리 걷고 있었기 때문에 진자앙은 금새 그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맹방평은 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걸어 정면에 있는 전각군 중에서 청룡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전각으로들어갔다. 이노는 거기 기다리고 있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이가 드시더니 이젠 하체까지 부실해지셨소? 왜 그리 늦소?" "자네야말로 늙을수록 철이 안 드는군. 어쩨 그리 손님 대접하는 요령이나 예의가 늘지 않나?" "난 못 배워 먹은 놈이라 그렇소. 특히 주인을 나쁜 길로 인도하는사람얘갠 더욱 그렇지요." "내가 왜 자네 주인을 나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요! 더 말하기 싫소!" 그는 다시 돌아서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맹방평이 쓰게 웃으며 ·"' 그 뒤를 따랐다. 진자앙은 의아한 마음이 적지 않았다. 원레 아는 사이이고, 멩방평의 신분쯤 되면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저 노인은 맹방평을 전혀 존경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가 아닌가! '황금장애 있는 것은 평범해 보일수록 평범하지 않다고 하더니 이노인도 그런가?' 그들은 전각 안의 꼬불꼬불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겉보기와는 달리화려한 장식들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고, 기등과 벽은 값비싼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이제야 황금장다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맹방평은 그런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노를 달래려 애를 쓰고 있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치세. 그래도 솜씨는 왜 있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이런 비상시에는 쓸모가 아주 없지는 않을 걸세." "흥! 병 주고 약 주는 거요? 맹 포두 없어도 싸울 사랑은 많으니 걱정 마시구려. 원씨 늙은이까지 와서 밥을 축내고 있으니 말이오!" "원씨라……!" 맹방평이 눈을 깜빡이더니 놀라물었다. "원굉도 말인가?" "들어가 보면 알 것 아뇨?" 이노는 복도의 끝에 있는 문을 열었다. 밝은빛이 쏟아져 나왔다. 문안은 다시 밖이었다. 꽃과 풀이 있고, 연못과 나무가 있는 넓은정원. 그 한가운데에 아담한 전각이 하나 있었다. 거기가 황금장의 중심인 황금각이었다. 황글장주 호두테는 귀공자다운 창백한 얼굴에 얇은 입술, 우뚝 솟은코를 가진 미남이었는태 아깝게도 다리가 불편한지 바퀴 달린 의자에앉아 있고, 무륨 위얘 호피를 덮고 있었다. 그는 황금각에서도 중심에있는 접객청얘서 그들을 맞이했다. "멀리서 마중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맹 노대협님." 맹방평은 가볕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모양이구나." 청년은 와리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고만고만합니다. 그보다 여기 계신 분들을 소개해 드럭야지요." 그는 등근 원탁외 나머지 의자애 앉은 사람들을 가리켰다. 진자앙은 사실 아까 전부터 그 중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호두테의 좌측얘는 삼십대의 소부, 소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처음 호두태가 나올 테 그 의자를 밀고 왔던 사람이었다. "저희 어머님이십니다." "선부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맹 노대협! 옛정을 잊지 않고 이렇게 도와 주러 오시니 그 고마움을 어떻게 말로 다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소부는 가볍게 일어나 다소곳이 절을 했는데 바로 황금장의 전대 장주 호불연의 셋째 아내 매요요였다. 호두태와는 한 방울의 퍼도 섞이지 않았지만 엄연한 어머니. 호불연의 첫째 부인이자 호두태의친어머니는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둘째 부인은 출가해서 근처산의 암자에 가 있었기 때문에 황금장의 유일한 안주인이기도 했다. 자리에는 그녀말고도 세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노만큼이나 작고 늙어 얼핏 쌍등이처림 보이는 노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치켜진 눈썹이 길기까지 해서 얼굴 밖으로 나을 것 같은 데다가 수염마저 세 갈래로 길게 뻗어서 위맹한 인상을 풍기는 또 한 명의 노인이었다. 이노와 닮은 노인은 이노의 결의형제이며 황금장의 가신이기도 한상노라는 사람이었다. 이노와 상노 둘을 합쳐 활금이노라 했는데, 오래 전부터 호불연을 도와 황금장을 만들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사실 맹방평과도 동배의 사람들로, 한때는 곤륜이노라는 별호를 사용하며 위명을 떨쳤던 고수들이었다. 십대고수에는안 들지만 배분상으로는 그리 꿀릴 게 없는 인물들, 그러니 맹방평예게 그렇게 대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 한 사람, 위맹한 인상의 노인은 근처 무릉산을 본산으로 하는 무릉파의 장문인 철검군자 요무생이었다. 황금장의 위기를 보고 문파의 제자 대부분을 데려와서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지막도 노인인데 놀람게도 형산파의 뇌공 원굉도였다. 그가 귀여워하는 문파의 사손들 중 하나가 호불연의 둘째 부인과 친척이 된다는복잡한 인연으로 그 사손과 함에 황금장에 와 있었던 것이다. 진자앙이 아까 전부터 보고 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어렸을 때 한번 본 기억으로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맹방평과 원굉도도 안면이 있었던 모양, 가볍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것으로 인사는 끝났다. 그때를 기다려 진자앙이 일어나 포권했다. "원 노대협에서는 소손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원굉도는 여나 지금이나 원숭이를 그대로 연상케 하는 작고 등근 눈을 반쯤 감고 진자앙을 바라보았다. "누군고?" "광동 진가장의 후손 진자앙입니다. 어렸을 메 뵈었……!" "네 이놈!" 원굉도가 벌멱 일어나며 소리쳤다. "너 때문애 광동이 발칵 뒤집힌 걸 알기나 하느냐? 그러잖아도 네가저 맹 노인을 따라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의심을 하던 차였다." 진자앙은 왜 광동이 발칵 뒤집혔는지, 또 원굉도는 왜 화를 내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원 노대협님! 약간의 오해가 있어서 여기까지 오게 되펐습니다." "집에 연락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느냐! 어진 것이 고집을 부리고가출이나 하다니, 고연!" 가출. 진자앙은 자신이 한 것이 가출이었는지 어리등절해 하면서도 일단연락을 못 했다는 점은 실수라고 인정해야 했다. 한편 원굉도도 진자앙에게 그렇게 화가 난 것은 아니고, 단지 들리는 소문쎄 가출을 했다기에 어른의 입장에서 잠시 훈계를 하자고 한행동에 불과했다. "잘못을 깨달았다니 그만하면 됐고……, 어디 그 동안 뭘 하며 지냈는지나 들어 볼까?" 그는 자리에 앉아 작은 눈을 반짝거렸다. 어렸을 때 본 그 멍청이가어른이 되어서는 어떻게 변했는지, 또 어떤 사유로 맹방평을 따라다니게 되었는지가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저 선배님, 그 얘기는 천천히 하시고 우선 당면한 일부터 의논을……!" 요무생이 조심스럽게 끼여들었다. 원굉도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의논? 그런 것은 자네들이나 하게. 난 가서 이 녀석 얘기나 좀 들어야겠어. 결정되면 결정된 대로 하면 되겠지." 그는 다시 발딱 일어서더니 다짜고짜 진자앙의 손을 잡아 끌었다. 진자앙이 주저주저하며 끌려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요무생이 고개를 저었다. "마치 어린애 같으시니 원……!" "상황이 어떤지 노부도 좀 들어 볼까?" 맹방평이 말을 꺼내자 본격적인 의논이 시작되었다. 현재 황금장이 지닌 힘은 황금기사단, 무릉파, 그리고 원굉도와 앵방평이 전부였다. 원굉도는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으니 그만이고,황금기사단은 상노가 맡고 있으니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것이었다. "기사단의 기사는 일곱입니다. 사람 수로는 열하나지요." 상노의 보고였다. "일곱에 열하나라는 건 무슨 소린가?" "맹방평이 물었다. 이 자리애서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그 하나뿐이니, 모든 보고가 사실은 그를 위해 행해지는 셈이었다. "기사 중에 하나가 하인 넷을 데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노가 살명했다. 원래 황금기사단을 처음 만들 때만 자도 사람이 워낙 많이 모여 일급고수 이상출 기져 왑는 데에도 한 달이나 걸렸고, 그때 뽑힌 인원만도 백 명이나 되었다. 그 많던 사람돌이 광풍사 한마다에 다섯만 남고모두 도망카 버린 것이다, 나중애 보강된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기사가 그들이었다. "다섯 기사라고는 하지만 저와 이노가 각각 한 자리씩 맡고 나면 나머지 세 명이 전부입니다. 전부 낭인 출진으로 박파 이당, 쇄겸조 풍난백, 낭리찬 돌가파입니다." 박파 이당은 진 자루가 달린 거대한 갈고리, 즉 파를 무기로 사총하는 사랑이었다. 일명 지옥객이라고도 불리는 청부 싸움꾼. 쉐겸조 풍난백은 손틈을 무기로 하는데, 그 손톱이 신체에서 자라난것인지 아니면 만들어 붙인 것인치는 물라도 금강석만끔이나 단단해서한번 긁히면 중상이 보흥이라고 했다. 낭인 중에서는 몹시 드문 여류고수였다. 낭리찬 톨가파는 서역 출신의 낭인으로 긴 송곳 같은 무기를 사용했다. "나중에 들어온 두 명은 귀검헹 사마연과 사인교주 매불염으로, 매불염 소저는 셋째 마님의 먼 친척으로 특별히 모셔 온 분입니다. 하인 넷을 데리고 오셨는데 가마꾼들입니다. " 귀검행 사마연은 청부를 받고 싸워 주는 낭인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비무를 하운 떠도는 것을 낙으로 삼는데, 황금장의 기사가 된 이유도 쾌여풍의 광풍사와 싸워 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사인교주 매불염은 말 그대로 사인교, 즉 네 사람이 메는 가마의 주인이었다. 평상시에도 가마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데다가 어쩌다 한번나와도 얼굴에 항상 검은 면사를 하고 있어서 매 부인을 제외하고는그 용모를 제대로 본 사람이 없었다. 사인교는 언뜻 생각하면 신부 가마처림 양쪽으로 두 명씩 들게 되어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긴 축에 가마가 메달려 있고 그것을앞에 두 사람 뒤에 두 사람이 드는 것이다. 네 사람이 일렬로 서서 메고 가는 형식의 가마. 그래서 가마꾼들을 앞에서부터 차례로 양미토기(고개를쳐들고 하늘을 본다), 불감방비(감히 방귀를 뀌지 못한다),불변동서(동서를 구분하지 못한다), 호무주의(그저앞 사람만 따라간다)라고 놀려서 부르는데 매불염의 가마꾼들이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까 데리고 온 청년처럼 발달된 근육에 큰 체구를 가진 네 명의노인입니다." "노인? 노인이 가마꾼이라고?'" "그렇습니다. 횐 수염에 백발의 노인. 저에 비해서 그리 나이를 덜먹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상노는 거의 맹방평과도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네 가마꾼들도 백여 살은 넘었다는 것이 된다. 상노는 재속 말했다. "그래서 저는그들이 제가젊었을 때 본 그들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누군데 그러는가?" 맹방평이 물었다. 상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는 그런 채구를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그중에 북천사흉이 있었지요." "북천사흉!" 좀처럼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던 맹방평이 이번에는 경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랄 틈도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때 접객청의 문이 열리고원굉도가 뛰어 들어온 것이다. 그는 맹방평을 향해 다짜고짜로 물었다. "운리무가 죽은 게 맞는가?" 맹방평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헌다. 원굉도가 운리무의 화살을 들어 보이며 재차 물었다. "자네가 죽인 게 맞아?" 맹방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앙이 도와 준 덕분에." [제이십장] 도적은 황금을 노리고 청년은 환락을 꿈꾼다. 원래 진자앙은 운리무의 화살에 맞은 것은 자신이 둔하고 멍청해서이고, 거기 맞고도 살아난 것은 대단히 운이 좋았기 때문일 뿐이라고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맹방평에게 뭔가 도움을 줬다거나 남들을 놀래킬 정도로 대단한 일을 했다거나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알았다. 그런 그에게 매불염의 갑작스런 방문은 극히 괴이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영빈관의 복도가 넓다지만, 네사람이 드는 사인교를 문 앞얘까지 타고 와서 다짜고짜 문을 열고는 뛰어들듯이 들어온검은 면사의 여인, 그녀가 한참 동안이나 그를 바라보다가 불쑥 내뱉은 첫마디가, '당신이 운리무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서요?'였으니 더욱 그러했다. 진자앙은 숙소로 배정받은 방안에 서서 금강대력공을 연마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쳐들어온 이 방문객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먼저 머리에떠오른 생각은 오해를 풀어 줘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엉거주춤 선 그 자세 그대로 말했다. "잘못 아셨군요. 난 그가 쏜 화살 하나에 맞은 것밖에 달리 한 일이없소." 그리고는 한참 더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전 매불염이에요. 당신은 진자앙이랬죠? 광동 진가장의?" 진자앙은 그제서야 자신이 손님 대접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것을깨달았다. 얼른 자세를 풀고 손을 내밀어 의자를 가리켰다. "내가 진자앙이 맞긴 하오만…… 우선 자리에 앉으시오. 아…… 차가……!" 그는 찻주전잘를 어디 뒀나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매불염, 그녀가 앉온 의자 바로 앞 탁자에 그것이 있는 것을 보고들어 보였다. "그럼 찻잔은 또 어디에……!" 매불염이 다시 찻주전자 바로 옆에 등글게 놓여진 세 개의 찻잔을들어 보였다. 진자앙은 얼굴을 붉혔다. "여긴 남의 집이고, 손님 접대는 처음 하는 것이라서……!" 그는 찻잔을 매불염의 앞에 놓고 차를 따랐다. 그러나 찻물은 나오지 않았다. 진자앙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아까 방에 들어오자마자 갈증이 난김애 다 마셔 버렸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고 방을 나가려 했다. 매불염이 그를 불렀다. "어디 가시려는 거죠?" "하녀를 찾아야 다시 가져 오게 시킬 수 있지 않겠소?" 매불염이 손을 저었다. "황금장에는 하녀가 없으니 찾아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황금장에는 하녀도 하인도 없었다. 하나 이렇게 큰 장원에 그런 일꾼들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현재는 분명히 없는 것이다. 광풍사의 공격이 임박하자 대부분 도망가 버리고, 도망가지 않은 하인과 하녀들은 호두태가 내보내 버렸다. 일생 먹고 살 만큼 재물을 줘서 보내며 그는 나중에 이기고 나면 돌아오는 사람들을 다시 받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하인들은 다들 이것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고 한다. "식사는 상노가 준비하지만 그 외의 일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해요. 당신 방에 원래 차가 있었으면 그건 상노가 꽤 신경을 쓴 셈이군요." 매불염은 밖을 향해 손짓했다. 가마를 거기까지 메고 온 가마꾼중 제일 앞에 있던 양미토기가 사인교에서 꺼낸 염소 기름같이 반투명한 양지옥쟁반에다 칠보차종 두 개를 얹어 가지고 들어왔다. 이어 다른 한 가마꾼, 위치로 보아 불감방비인 듯한 누렇게 뜬 얼굴의 노인이 백동병을 들어 향기로운 차를 두 잔 따랐다. 진자앙은 그들이 자신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발달된 근육을 가지고 있는 것에 우선 놀랐고, 그 다음에는 그런 그들이 호호백발의 노인이라는 것에 더욱 놀랐다. 매불염의 가마꾼들은 하나같이 횐 수염을날리는 노인들이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고개를 고덕여 인사를 하고는 그들에개도 자리를 권했다. "밖애서 그러지 마시고 들어와 앉으시지요." 양미토기는 이름 그대로 눈샙이 치켜 을라가 사나운 인상을 가진 노인이었는데, 그를 잠시 노려보더니 고개를 젓오는 나가 버렸다. 불감방비는 말업이 그외 뒤를 따랐다. 그는 진자앙에개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가마 곁애 있는 것이 더 편할 테러 그냥 두새요." 매불엽이 말렸다. 진자앙은 자리얘 앉아 맛쩍은 듯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매불염은 푸른 공단 옷을 입고 소매 얼는 연분흥 겉옷을 걸쳤다. 또아래로는 수놓은 연황색 치마를 입고 거기다 뒤축 높온 꽃신을 신었다. 용이 얽힌 모양으로 틀어 올린 머리는 검은 비단인 듯하고, 상아빛에는 자줏빛이 어리짙 금비녀가 비스듬혀 칸혀 있었다. 신기하게도귀밑머리는 반쯤 세어서 봉황의 날개 같고, 귀애는 진주 귀걸이가 달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귀부인 같은 인상이었지만 몸 전채애서 풍기는 기운은소녀쳐럼 발랄한 것이었다. 아압캐도 두탑고 검쌀 면사로 얼굴 전채를가렸기 때문에 용모는커녕 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진자앙은 저런 면사를 쓰고 어떻개 앞을 보나 신기해 하면서도 한떤으로는 어쩐지 그녀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영 쑥스러됐다. 그례서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절 아십니까?" 매불염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리고 되물었다. "그건 아닌데 이상하게 낮이 익은 듯하군요. 혹시 절 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그러니까…… 비슷한 느낌이라도 받은 적이 없으시냐는 거죠." 진자앙은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검은 천으로 가려진 얼굴. 봤을 리가 없고, 혹시 봤다 해도 알아볼리가 없다. 면사를 벗어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있어 얼굴을 감추는 것일 텐데 보여 달라고 할수가 없지 않은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매불염은 아무 말도 않았지만 실망한 기색이 완연했다. 진자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앞에서 얼굴 가득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잘 못 알아볼 정도로 둔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불염의 천으로 가려진 그 너머로 떠오르는 감정이 마치 자신이 느끼는것처럼 전해져 오는 것이다. 방금 전에도 매불염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이여인은 실망스러워하고 있다는 감정이 바로 가슴으로 전해졌다. 그의가슴이 싸하게 아려 오도록. '언젠가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진자앙은 기억 속으로 되짚어 나갔다. 그 길을 매불염이 막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며 작별인사를 고했다. "불쑥 찾아와서 이상한 얘기만 한 것 같군요. 운리무의 화살을 막은최초의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와본 것뿐인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 진자앙온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다시 앉힐 듯이 하다가실례를 깨닫고 얼른 손을 치웠다. 그리고는 불어진 얼굴로 용서를 구했다. "아니, 저기…… 벌써 가시나 해서……! 음…… 일이 있으시면 가셔야지요. 운리무의 일은 정말 부끄러워서 말하기도 싫은데 높이 평가해주시니 오허려 부끄럽군요. 그럼 가셔야……! 배웅을……!" 허등지등하는 그를 매불염은 잠자코 보고 있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 급한 일은 엄으니 좀더 얘기나 나누기로 하지요." 진자앙은 반갑게 앉으며 손을 뻗쳐 찻주전자를 잡았다. "그럼 차나 한잔 더…… 아이쿠!" 그의 크고 투박한 손애 찻주전자의 손잡이가 걸려 넘어갔다. 탁자위로 찻물이 흘렀고 진자앙은 뭘로 닦으려고 허등지등거렸다. 매불염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찻물을 훔쳤다. 작은 일이었지만 그녀는 당황하는 법이 없고, 뭐든 침착하게 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인상이 진자앙에게 새겨졌다. 그것은 처음 들어왔을 때의 놀란 새 같은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유, 그를 찾아온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졌지만 묻지 않았다. 하나 그는 매불염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운리무의 화살을 막은 최초의 사람'을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운리무와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그렇다면 오히려 그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일 수도 있다. 진자앙은약간 긴장을 하며 그녀를 세밀히 관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을 핑계로 매불염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어 편한 기분도 엄지 않다는 묘한 기분이 형성되고 있었다. 어쩐지 관심을 끄는 여자였던 것이다. 매불염의 손수건은 탁자 위에 흐른 찻물을 다 훔치기에는 너무 작았다. 철벅철벅 젖은 그 수건을 바라보며 진자앙이 소매로라도 닦을까당황해 하고 있을 때 매불염은 손가락으로 찻물을 찍어 뭔가를 그렸다. "이번 회의에서 이렇게 결정이 났다죠?" 진자앙은 그 그림이 황금장을 위에서 본 간단한 도면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놜금장은 처음 들어을 때 그가 한 추측대로 큰 성곽과 전각군, 그리고 그것을 잇는 성곽으로 다섯 개로 구획되어 있었다. 매불염은 그 각 부분을 지적하며 말을 이었다"여기 황금장에서는 이 큰 성곽과 전각군 사이에 있는 구역을 사신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요.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과 북쪽의 현무라는 식이죠. 바깥 성채를 통과해서 들어오면 전각군에 마주치게 되고, 그 무수한 전각들엔 실제로 사람이 살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 진정한 황금장, 즉 중앙의 황금각으로 오는 통로는 동쪽의 청룡전, 남쪽의 주작전밖에 없는 것이죠."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청룡전을 통해서 들어왔소. 거기 그런 뜻이 있었는지는 눈치도 못 채었소만……!" 매불염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진자앙은 그 소리에 자신의가슴이 같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의 둔함에 실망하는 것은 아닐까? 매불염은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럼 그 전각들에 온통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도 눈치채지못하셨겠군요. 그계 황금장의 이차 방어선이에요." 젼자앙은 고게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둔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한두 번인가. 유독 이 여인이 그런다고 더 기분 나쁠 것이 무언가. "그럼 일차 방어선은 성곽이겠군요. 성곽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벌이겠다는 겁니까?" "황풍사는 군대로 치면 기마병들이고, 기마병은 공성전에 약할 것이라는 게 여기 수뇌들의 생각이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자앙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둔하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쾌여풍을 잡고 못 잡고의 문제도 아니고, 그들 전부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는 그렇개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광풍사는 기마병이라도 보퉁 기마병은 아니지요. 무공의 고수들로만 이루어진 기마병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대응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매불염은 그외 말을 경청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진자앙은 말을 이었다. "말이 성곽을 뛰어넘을 수 없는 이상, 그들도 결국엔 보통 기마병과마찬가지 신세가 될 거요. 즉 원래 가진 장점인 기동력을 버리고 단지무럼고수로서 공성전을 벌여야 된다는 거지요. 황금장의 단단한 성벽과 철문이 그렇게 만든 셈이지요. 보통 성문 같았으면 일장애 박살이날 테니까." 그것도 조금 생각만 하면 짐작할 수 있는 얘기. 매불염은 듣고만 있었다. "들어올 때 보니 황금장은 천험의 요새라 할 만하오. 소위 병가에서 백으로 만을 막을 수 있는 위치라고 하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겠지요. 삼 면이 절벽이고, 정면 한곳만 뚫려 있는 데다가 그 정면마저 협곡을 통과해 광장으로 나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소. 그들이 기마병인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지리의 이점도 사라진다는 거요. 절벽과 협곡은 무림고수들에게는약간의 불리함 정도일 뿐일 테니까," 매불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요점이지요. 그때가 되면 쌍방은 무림인 대 무림인으로 싸울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고수의 수가 싸움의 성패를 결정하지요." "절대고수의 수는 우리가 유리하오. 그쪽은 하나지만 우리는 둘이니까. 운리무와 대적했을 때 느낀 것이지만 십대고수 한 분 한 분의능력에 다소의 고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승패에 거의 영향을미치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소. 한번에 백 명을 죽일 수 있든 오십명을 죽일 수 있든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고, 일장에산을 무너뜨릴 수 있든 언덕밖에 못 무너뜨리든 사람의 능력을 벗어났다는 것은 마찬가지. 순간의 실수, 혹은 상황의 변수가 오히려 더욱승패에 중요할 것 같소.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나는 생각하오." 그는 맹방평과 원굉도, 그리고 호두태의 의자를 밀어 주는 매 부인까지 어느새 방안에 들어온 것도 모르고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광풍사를 생각에서 제외하면 쾌여풍은 이번애 당연히 질 것이오. 맹 노대협과 원 할아버지가 힘을 합치기만 한다면! 하지만 아마 두 분은 그러지 않으려 할 거요!" "잘 아는구나! 그깟 도둑 하나 잡는 데 둘이나 나설 것이 없지, 나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자앙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았다. 원굉도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얼른 일어나는데 원굉도의 긴 팔이 뻗어 오더니 거기 달린 긴 손이그의 어께를 두드렸다. "둔하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구나! 넌 아마 이런 장난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할걸?" 뭔굉도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해 보였다. 그리 넓지 압은 방에 중앙에는 탁자가 있고, 한쪽에는 침상이 있으며사람도 다섯이나서 있는 곳에서 공중제비를 하는 것이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락르게 돌던 원굉도는 한 순간 그대로 딱 멈추더니 진자앙애게 물었다. "말해 봐라, 몇 바퀴지? 진자앙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 원굉도를 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열 바쥐는 넘는 것 같은데……!" 방금 분명 눈도 끔랙하지 않고 지켜보았었지만 도대체 몇 바퀴를 돌았는지 셀 수가 얼었던 것이다. 매불염이 짧게 말했다. "이핵스물세 바퀴요!" "어라!" 원굉도는 놀라서 매불염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세어 보았지요."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원굉도가 정말 궁금해 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넌 그게 다 보이더냐?" "예!" 그는 매불염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특히 그 얼굴에 가린 면사를뚫어지게 보더니 불쑥 물었다. "얼굴도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가 왜 가리고 다니느냐?" 그와 같은 고수로 공력이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어느 정도의 두께는뚫어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역으로, 그런 천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다니려면 그 사람도 그 정도의 고수라야 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천에 따라서는 가깝게 대고 있으면 그 건너편이 보이고, 눈을떼면 보이지 않는 것도 있지만 지금 매불염이 쓰고 있는 천은 그런 종류도 아니었다. 그래서 원굉도는 매불염의 무공이 그 정도 경지에 오른 것을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매불염이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사정이 있어 그런 것이니 노선배님께서 해량해 주십시오." "사정? 해량? 난 그런 말은 어려워서 몰라. 그리고 웬 놈의 사정은그렇게들 많은 것인지. 하여튼 네 얼굴이니 네가 알아서 하는 것이겠지. 내가 알 게 뭐겠느냐. 그럼 내가 해량인지 뭔지 그 어려운 걸 할필요도 없겠지? 맹방평이 손을 혼들어 주의를 모았다. "방금 하던 말이나 마저 들어 보자. 우리는 공성전을 하기로 했다만. 그게 좋다는 말이냐 안 좋다는 말이냐?" 진자앙은 머리를 긁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맹방평은 가볍게 인상을 깼다. "지금은 개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다. 누구의 의견이든 하나라도 더 문재를 발견하면 좋겠지. 부담없이 말해 봐라! 여기 매 소저도 생각한 개 있는 모앙이니까, 조금 있다가 그것도 듣고." 황금장이 있는 호아산에서 북쪽으로 사흘을 걸어가면 드넓은 이룽의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옛부터 수많은 격전이 이곳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릉의 혈전'이니 '이릉의 승전'이니 하는 말이 귀에익숙하게 들리는 곳이었다. 때는 한여름. 들판에는 푸른 벼들이 가득 펼져져 바다처럼 보이고,아침저녁으로는 논에 나가는 농민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곤 하는 이릉의 들판에 기묘한 행렬이 나타났다. 네 명의 건장한 노인이 가마 하나를 메고 날듯이 달려가는데, 그 옆으로는 그 노인들보다 더욱 건장한 청년이 작아서 보이지도 않을 나귀한 마리를 타고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인교주 매불염과 진자앙이었다. 천리독각추는 천리마를 무색케 할 정도로 빠를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이 힘이 세다. 팔다리의 납고리까지 포함해 육백 근을 육박하는 진자앙을 싣고도 푸른 논 사이로 한 줄기 금을 그으며 빠르게 움직여 가고 있었다. 진자앙의 귀에 매불염의 음성이 전해졌다. "그 나귀는 정말 빠르군요!" 진자앙은 작은 나귀 등에 불안하게 쪼그리고 앉아서 가마를 돌아보았다. "그 가마야말로 정말 빠르오! 네 분의 경공은 궁서생 중자릉 할아버지 이후로 처음 보는 빠르기요." 양미토기, 불감방비, 불변동서, 호무주의 등 네 가마꾼은 정말 빨랐다. 그들은 논과 논 사이로 난 좁은 논둑길을 달리기보다는 벼 이삭을탑고 달리는 길을 선택했는데, 그 발 아래에서는 벼 이삭 하나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초상비의 경공이 펼쳐지고 있는것이다. 그것도 하루 종일……매불염이 탄 사인교 안에서는 잠시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렴 사이로 매불염의 얼굴, 물론 면사를 쓴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옆에서 달리는 진자앙을 바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금은 제 가마를 메주고 계시지만 이분들은 결코 맹 노대협의 아래가 아니에요. 당신도 북천사흉이란 이름을 들었으면 아실 거예요." "역시!" 진자앙은 놀란 눈으로 가마꾼들, 북천사흉을 다시 보았다. 매불염이 재속 말혔다. "백여 년 전의 대살육의 결과는 참혹했죠. 이분들의 손에 죽은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이분들에게도. 당시 이미 천하제일고수셨던 황사 매요신은 금의위와 동창의 고수들을 직접 이끌고 나가 격전을 벌이고,결국 넷 모두를 잡아 영생뢰에 가둬 버리셨어요." 영생뢰는 황궁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뇌옥이었다. 그것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관리하는 사람들은말하지 않고, 거기 잡혀간 사람들은 다시 세상에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 북천사흉은 그곳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매불염은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고는 말을 이었다. "이분들은 순간의 실수로 그런 엄청난 살육을 저질렀지만 영생뢰 안에서 뼈를 깎는 반성과 회오의 나날을 보냈어요. 장장 백 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낸 분들이죠." 아무 말이 없이 달리던 호무주의가불쑥 입을 열었다. "가장 오래는 아니지!" 그리고는 말을 한 것을 후회한다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매불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 두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니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어쨌든 황사께서는 다시 황제께 주청해 이 네 분을 풀어 주고 제게 가마꾼으로쓰시도록 내주셨어요. 영생뢰 안에서 못다 한 반성을 가마꾼이라는 천한 일을수행하면서 계속하라는 뜻이었지요. 이게 그 사면장이에요." 매불염이 든 종이를 진자앙도 볼 수 있었다. 눈도 뜰 수 없도록 쾌속하게 달려가는 도중애도 그 종이는 무슨 조화인지 빳빳하게 펴져 있었다.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는 분명 매불염이 말한 내용이 적혀 있고, 형부상서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매불염은 종이를 다시 거두어들였다. 그때 종이가 펄럭이는 것을 보고 진자앙온 메볼염이 여태 종이률 랏랏하개 펴지도록 공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감탄했다. 그럴 수 있는 공력도 공력이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까지 신경을 쓰는 새심함이 신기했던 것이다. 비교가 안 되긴 하지만 그 자신이었다면 도저히 그런 것을 생각하지못했을 것이다. 그는 문득 매불염이 왜 그에게 비사를 얘기해 주었는지 깨닫고 말했다. "맹 노대렵께 꼭 전해 주겠소." 멩방편이 그들을 알아보고 다시 체포하겠노라고 나서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매불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왜 재 신분을 묻지 않죠? 진자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꾸했다. "항사 매요신 매 노대협이 아름다운 양녀를 맞아들였다는 얘기는 이미 듣고 있었소." "맞아요, 계가 그 양녀예요." 진자앙은 감탄했다. "혹시 했는테 추측이 맞았군요." 매불염이 다시 물었다. "계가 매볼염이라는 이름 이전에는 어떤 이름을 가졌었는지는 궁금한지 않으세요?" 과연 양녀로 들어가기 전애는 본명도 있었을 것이다. 진자앙은 왜그런 생각을 뭇 헨는지 자신을 탓하다가 물었다. "여쭈어도 되갰소?" "물론 되지요. 단지 가르쳐 주지는 않겠어요." 진자앙은 실소를 흘렸다. "그건 왜 그렇소?" "나중에……, 어쩌면 먼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매불염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에 그녀의 하얀귀밑머리가 홑날리고 있었다. 진자앙은 그녀가 대답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묻지 않았다. 한참을 더 간 다음에 매불염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총명하니 어쩌면 제가 말해 주기 전에 알아 낼지도 모르죠." 진자앙은 웃었다. 예의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간 항상 멍청하다는 소리만 듣고 살았는데 소저께서 그렇게 평해주시니 정말 의외의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소! 소저와 같은 절세의 재녀가……" "왜 저를 재녀라고 생각하셨나요?" "어제의 그 작전 계획과 같은 것은 재녀가 아니고서야 어찌 생각해낼 수 있겠소?" "그건 같이 생각한 것이니 당신도 재주가 없지는 않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저도 같은 이유로 당신이 명석하다고 한 거예요." 진자앙은 말문이 막혀 다른 말로 이야기를 돌려 버렸다. "생각해 보니 이곳도 적합한 것 같소!" "뭐가요?" "앞에서 실패하면 이곳에서라도 그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말이오." "기마병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이런 평원 아니었던가요? "나는 솜써 좋은 궁사가 몇 명 있다면 여기 논바닥에 매복시켜 저격을 할 수도 있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오," "보통 화살로는 그들을 상대하지 못할 걸요?"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지만 운리무 같은……, 운리무 같은 명궁이야 다시 드물겠지만 그의 활과 같은 무기만 있어도……!" 매불염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자앙은 전궁을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미 묻은 이상 다시 꺼낼 수도없을 뿐더러, 이제 와서는 가지러 갈 시간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푸른 이릉의 곡창 지대를 빠져 나가 백호령을 향해달려가고 있었다. 호두태는 방으로 돌아오자 여태 애써 꾸미고 있던 평정한 표정을 풀어 버렸다. 그러자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많이 고통스럽니?" 그의 의자를 밀고 방에까지 들어온 매 부인이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호두태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호두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매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견딜 만합니다, 어머니!" 그가 다리를 처음 앓은 것은 십오 세가 넘어서였다. 갑자기 무릎관절에 통증이 오고, 점점 힘이 빠지더니 나중에는 서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게다가 이제 와서는 움직이지 않는데도 격심한 통증이 등골을 타고기어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매 부인이 얼른 침상으로 의자를 밀고 가 호두태를 들어올려 뉘였다 호두태는 이십대의 사내답지 않게 깃털처럼 가벼웠다. 매 부인은 침상 머리의 용두 장식을 만졌다. 비밀리에 감추어진 서랍 하나가 열리고 거기 작은 약병 여러 개와 환약들이 드러났다. 매 부인은 환약 둘과 약병을 내밀었다. 호두태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 매 부인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옥으로 깎아 만든 것같이 작고 하얀 손 안에서 빛나는 붉은 환약, 그리고붉은 약물이 들어 있는 투명한 약병. 그 백색과 욜은색의 조화가 묘한매력을 가지고 그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깊고 어두운 구멍과 같은 것이었다. 처음 호두태는 저 환약을 반만 먹었다. 그러고도 한 달은 아무 고통없이 생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약은 점점 늘고, 고통을 줄여 주는 기간도 점점 줄었다. 처음앤 약효가 못해진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곧 그의 몸이 약효를다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면 점점 내성이 강해진 때문일 것이다. 그의 몸은 점점 약해지는데 병마는 점점 강해진 것이다. 약을 먹기 시작한 지 이제 일 년, 그는 이재 매일같이 두 알의 환약을 먹고, 그것도 모자라 액채 상태의 그 약 한 병을 더 마셔야 했다. 그러면 고통은 가벼운 쾌감처럼 그를 간지르고, 의식은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 드는 것이다. 옳은 일은 아니었다. 약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고, 약의부작용은 점점 그를 사로잡아 가고 있었다. 이제 그는 단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약을 먹은 날도 하루의 극히 일부 시간을 제외하고는 몽롱한 환상 속을 헤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먹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약이 그에게 주는 환락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환락을 즐기기 위해 약을 먹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같은 약의 유혹을 온몸으로 느끼며 손을뻗어 매 부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 손에 담긴 약이 그의 입 속에 굴러 들어갔다. 매 부인은 약병을 한 손으로 열고 호두태의 입에 부어 주었다. 그리고는 호두태를 가만히 눕히고 다리를 안마하기 시작했다. 호두태는 솜처럼 부드러운 깃털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눈을 지그시감았다. 곧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리에서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올라온 고통이 배에서 시작된 열기에밀려 척추를 타고 다시 내려갔다. 온몸의 신경이 바르르 작은 경련을일으키기 시작했다. 메말라 비틀어졌던 나뭇가지에 다시 물이 오르기시작한 것처럼, 그의 핏줄들이 부풀어 피를 홀려 보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 망치에 맞은 것처럼 멍한 충격이 뒷골을 후려쳤다. 그는 곧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환상을 보는 듯 몽롱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곧, 이제 곧!' 그는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이제 곧 그가 꿈꾸어 오던, 그러나 깨어난 뒤에는 가슴을 움켜러고두려워할 만픔 강적한 환락이 그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는 애타계 기다리고 있었다. 매 부인은 호두태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완전한다리였지만 병마가 골수까지 파고들어 나무토막이나 다름없는 다리였다. 그녀의 손은 깃털처럼 부드럽게 호두태의 다리를 어루만지고, 때로는 만 근 바위처럼 무겁게 짓누르며, 때로는 절정검사의 칼끝처럼 요혈을 파고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손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손끝에 호두테의 바지를 동여맨 매듭이 걸리자 매 부인은 가볍게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은 후회할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어김없이찾아드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속의 분홍빛 열기를 이기지 못해 달콤한 입김으로 내보내는 것 같기도했다. 그녀의 손끝애서 매듭이 맥없이 풀렸다. 그녀는 호두태의 바지 속으로 부드럽계 손을 밀어 넣었다. 차가운 맨살이 그녀의 손끝에서 풀리고 있었다. 병마에 시달린 청년의 육체는 여인의 살결처럼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운 살결을 매 부인의 부드러운 손이 스치고 있었다. 아직 기능을 잃지 않은 호두태의 한 부분이 금세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매 부인은그것을 감짜 잡고 바지 밖으로 꺼내었다. 그리고 거기에 입을 가져다대었다. 호두태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눈 속에서 만 개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환락, 환회, 분노, 갈증, 그 모든 것들이 웅집된 꽃이었다. 그러나 그 불꽃의 배경인 어둠은 더욱 깊어 갔다. 불안과 가책의어둠. 호두태는 그 깊고 어두운 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정찰을 끝내고 돌아온 진자앙과 매불염은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맹방평과 원굉도, 그리고 이노와 상노를 재외한 황금기사단의 나머지 인원들까지 포함린 일행이었다. 올헤 광풍사는 사천의 원시림 속에서 튀어나와 장강의 물줄기를 옆애 끼고 아래로 휩쓸어 오고 있었다. 무산을 지나면 사천땅은끝이 나고 곧 호북이 시작된다. 그리고 사천성과의 호북쪽 경계인 파동을 지나면 백호령은 지척이었다. 진자앙 일행은 그 백호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도정에 원굉도는 내내 투덜거렸다. "나 혼자 가도 될 일을 이렇게 때거지로 물려가다니, 참으로 창피스러운 일 아닌가……" 그와 맞상대를 할 만한 인물은 맹방평밖애 없었다. 그는 원굉도를향해 물었다. "혼자 가서 어떻게 할 셈인가? "그야 가서 광풍산지 뭔지 그 떼도적 놈들을 세우고는 '야, 쾌여풍나와!' 그러면 되지 않겠나! 자기도 체면이 있으면 도전을 거절하지는않겠지 ." "체면이 있는 사람이 메도적질을 하겠는가? 급여화라면 자네 말에화가 나서 달려나을지도 모르지만 쾌여풍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걸세." 원굉도는 그래도 툴툴거렸다. "화기를 사용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제아무리 강력한 화기라도 몇 놈 죽이면 그만이지 별 소용이 있겠는가!" 매불염이 끼여들었다. "황금장에서 준비한 화기는 산서 벽력당에서 특별히 제조한 것으로군부에서 쓰는 것보다도 오히려 몇 배 뛰어납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벽력탄이라는 것이지요." 벽력탄이라고 하셨소? 진자앙이 말을 받았다. "그거라면 내게도 몇 개 있는데……?" 그는 품속을 뒤져 상자를 꺼내었다. 그리고 상자 뚜껑을 열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잠깐! 움직이지 마세요!" 매불염이 소리쳤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빠르게 사인교에서 뛰어나와 진자앙의 앞에 가 섰다. 진자앙은 걸어가면서 상자를 열어 보여 주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안색이 하얗게 바래졌다가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하나같이 슬금슬금 진자앙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매불염은 진자앙이 손에 든 상자 안을 보고 놀란 빛이 역력했다. 안광이 두거운 면사를 뚫고 나올 정도였다. "이건 벽력탄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굉도가 화를 벌컥 냈다. "이놈아, 사람을 놀래켜도 분수가 있지. 그런 물건을 아무렇게나 들고 다녀? 벽력탄이 아니라 다행이지, 만약 그것이었는데 떨어뜨리기라도 했으면……!" 그의 말은 매불염의 이어지는 말애 막혔다. 그리고 그는 벌란 입을다물지 못했다. "벽력탄은 아니고 벽력혼천구예요. 벽력탄보다 백 배강하다는 것이죠. 딱 한번밖에 못 본 것이지만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녀가 그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진자앙과 같이 걸으려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이 벽력혼천구는 불속에 집어넣지 않는 한, 흔자서는 터지지 않아요. 지금과 같은 때에 이런 기물이 우리에게 들어왔으니 우리가 성공할 가능굉이 이 할은 올라간 것 같군요." 원굉도가 물었다. "원래는 몇 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느냐?" "삼 할 정도요." 원굉도는 고개를 설래설레 흔들었다. "좨여풍이 그렇게 세다는 평을 듣고 있으니 같은 십대고수 중의 하나로 자부심을 느끼지 압을 수 없군그래!" 멩방평도 고개즐 저었다. 그는 원굉도의 말을 부정하고 있었다. "쾌여풍이 아니라 광풍사가 센 것이지." 매불염이 원굉도에게 말을 붙였다. "뇌공께서는 꼭 쾌여풍과 겨뤄 보고 싶으세요?" "물론이지! 그게 강호인다운 싸움법 아니겠느냐?' "그럼 그렇게 해드리지요." 원굉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회번덕거렸다. "그게 정말이냐?" "물론 정말이지요." 진자앙이 어리등절해서 물었다.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뭘 말이냐?" "원래 계획상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원 할아버님이 먼저 나가서싸움을 거는 걸로요." 그리고 그 싸움은 백호령을 넘는 관도의 한가운데에서 벌어질 예정이었다. < 제3권 끝 > [제이십일장] 벽력은 광풍을 태우고 이공은 쾌여풍을 노리다. 철질려는 삼각형의 뾰족한 쇠를 이어서 땅바닥에 박아 적의침입을 막는 데 쓰이는 무기. 일종의 암기로도 취급된다. 그 철질려가백호령 관도 위에 넓게 깔려 있었다. 쾌여풍은 웃었다. 그는 암기의 천하제일인, 그가 모르는 암기는 암기도 아니라고 자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들판에 깔린 철질려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는 구부러진 매부리코 아래 자리한 얇은 입술을 비틀어 웃고, 뒤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봤나?" 마검 종리명은 별호와 달리 하북 일대에서는 정도무림의 명숙으로 떠받들어지는 인물이지만 매년 여름이 오면 반 년정도씩 잡을 비우는 버룻이 있었다. 그리고는 서리가 내리면 집으로돌아왔다. 그가 그 기간 동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일가 친척도 몰랐다. 그는 여름과 겨울을 주기로 각각 다른 두 개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종리명이라 하여 검에 일가를 이루었다 평가되며 그 손끝이 매워 마검으로 불려지고, 다른 하나는 지금 쾌여풍의 뒤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광풍사의 정예, 광풍이십팔수중 제일인자인 현무두사가 바로 그였다. 종리명은 이미 울부짖는 사자의 문양을 새긴 복면에 뚫린 구멍을 통해 쾌여풍이 가리키는 물건을 보고, 알고 있었던 참이었다. "예, 보았습니다." "어떻게 할까?" 말을 타고 달리면서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말발굽에 날리는 먼지를 그대로 들이마셔야 하기 매문이다. 그래서 그들 광풍사는 평소에도 말을 짧게 했고, 지금도 길게 대답할 이유는 없었다. "밟아 버리죠!" 쾌여풍은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애마 광풍비는 철질려를 무시하고 관도를 달려나갔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천리준구였고, 오랫동안 거기 탄기수들과 호흡을 맞철 왔다. 게다가 그들이 발굽에 단 편자는 적혈동으로 만들어져 충격을 완화시키면서도 쇠욜이 같은 것에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 철질려 따위가 무서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름은, 그리고 이 철질려만큼은 그들도 두려워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철질려가 깔린 길을 사오 장쯤 달려나가던 광풍비가 무심코 그 중하나를 밟았다. 여태까지 밟아 뭉갠 것과 전혀 다르지 않게 생겼지만그것은 벽력탄을 그 안에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광풍비의 발굽 아래에서 하얀 섬광이 솟구쳤다. 그 다음은 붉은 화염과 노란 연기였다. 콰앙--! 순간적이지만 폭음은 가장 나중에야 터져 나왔다. 그 다음엔 천지가무너지는 듯찬 굉음이 연달아 울려 최졌다. 화염이 거기 있는 벽력탄이십여 개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철질려의 밭으로 이미 달려 들어온 십여 마리의 말이 화염과 연기에 휩싸였다. 뒤에서 달려오던 말들이 그 자리에 멈추느라 대열은 한꺼번에 흐트러졌다. 그들의 앞으로 이십여 장의 관도가 이미 불바다로 화하고 있었다. 창룡각교는 광풍사 서열 삼 위, 이십팔수 중 제이인자였는데, 보통 대열의 제일 뒤에서 달리며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임무였다. 지금도 그는 폭음과 화염을 보자마자 앞으로 치고 달리며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광풍사의 주인이자 그의우상 쾌여풍의 안위였다. "대당가는?" 자욱한 먼지와 화염이 차츰 가라앉으면서 우왕좌왕하던 광풍사의대원들이 차츰 침착을 되찾고 말들도 진정이 되자 그들은 피해 상황을파악하려 애썼다. 죽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는 컸다. 이십팔수의 대부분이 가장 선두에서 달렸기 때문에 죽은 세 사람이 전부 이십팔수에 들어가는 인물들이었다. 서열 이 위 현무두사, 칠 위 백호루구의 시신은 갈기갈기찢겨져 육편만 보였고, 팔 위 주작귀양도 반쯤 타버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광풍비도 폭사한 것이 분명했다. 보통 말보다 두 배는 됨직한 머리통만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에 탔던 쾌여풍이 보이지그때 대원 중 하나가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각교님, 저기!" 창룡각교는 그 손짓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쾌여풍은 거기 있었다. 찢어진 피풍을 펄럭이며 창천허공에 떠 있다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뒷짐을 진 손. 우뚝 선 자세는 도저히 허공에 떠 있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십여 장이나 허공에 떠 있었고, 그 눈은 멀리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우리를 보는군!" 맹방평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주름살 사이로 깊이 박혀있었지만 멀리 보는 것에는 매의 그것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우리를 본다고? 그럼 감자나 한 개 먹여 주게!" 원굉도가 여태 앉아 있던 바위에는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달려오게 말일세. 그럼 내가 기다렸다가 진짜 화끈한 걸로 한 방 먹여 주지." 그는 무릎까지 닿는 긴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히죽거리며, 들어올린 팔을 좌우로 흔들고 엉덩이를실룩거리며 춤을 추었다. 나중에는 돌아서서 저 멀리 쾌여풍을 향해 엉덩이를 두드리기도 했다. "어이, 이봐! 도둑놈 두목아! 이리 와! 이리 와보라닌까? 이 할아버지가 맛있는 걸 먹여 주마!" 맹방평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인상을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주책없는 늙은이 같으니……!" 원굉도의 모습을 봤는지 어쩠는지 쾌여풍은 천천히 가라앉아 모습을 감추었다. 맹방평은 그것을 끝까지 주시하다가 문득 물었다. "정말 혼자 붙어 보고 싶나?" 원굉도가 대답했다. "그 지저분한 메거리만 궁등이에서 떼주면 그렇게 하겠네! 여러 놈을 상대하려면 여러 방을 쏴야 하고, 그러면 아무리 나라 해도 기력이딸리지. 이 나이에 기력이 딸리면 침상에 누워 쉬어도 삭신이 쑤신단말이야." "터무니없는 자신감 하고는……!" 맹방평은 다시 실소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얼음처럼 냉정하고, 뱀처럼 교활한 놈이직. 도둑은 대개 그렇다네. 절대 혼자서 자넬 상대하지도 않겠지만, 혹시 상대한다고 해도싸우면 안 좌. 이번 기회에 저들을 모조리 소탕하지 않으면 귀찮아지네 계획대로 해야 하네," "젠장. 난 평생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아 왔는데 이 나이에 누구 지시를 따라야 하다니. 말년이 더러운 셈이군!" 원굉도는 투덜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춤을 춘 덕분에 몸이 풀렸는지 백호령의 유일한 계곡, 노호구의 입구에 버티고서서 앞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맹방평은 뒤애서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없이 굴긴 하지만 제대로 해볼 마음이 아주 없진 않은가 보군!' 원굉도의 뒷등에는 방금까지의 경망스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바위 같은 무거움만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대 도적단에 홀로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맹방평은 조금 뒤로 물러나, 거기에서 입을 우물거리며 되새김질을하고 있는 나귀, 천리독각추의 목을 쓰다듬었다. "네 발에 우리 두 늙은이 목숨이 달렸다." 나귀는 그 말을 알아듣는지 모르는지 입만 우물거릴 뿐이었다. 그들은 노호구에 있었다. 그 입구에선 맹방평과 원굉도 두고수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노닥거리고 있었고. 천하제일 도적탈, 공포의 광풍사는 분노에 떨며 그곳을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 노호구의 깊숙한 안쪽엔 진자앙과 매불염,그리고 황금기사단의 이름을 단 낭인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매불염이 지적한 장소에 구멍을 파고, 거기다 벽력흔천구를매설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전날 밤 기름을 먹여서 말려 놓은 삼끈을얇은 무명으로 몇십 겹 동이고 그 줄의 한끝을 벽력흔천구와 함께 묻은 다음 나머지 선을 돌틈에 최대한 숨겨서 계곡의 위로 끌어올리면그것으로 작업은 끝이었다. 진자앙은 손이 커서 그런지 손재주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동안 망을 봐야 했다.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작업은 세심함을 요하는 것이고, 동시에 약간의 손재주도 요구하는하지만 그가 경계는 잘 볼 수 있을 것인가. 키가 크다고 꼭 멀리 볼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곡 중턱 바위 위에 버티고는 섰지만 곡 입구가 보일락말락 할 정도의 거리애 있었으니 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멀리서 폭음이 들려 오고 연기가 솟아을랐다. 그는 얼른 말해 주려고 돌아보았지만 이미 매불염은 그의 뒤에 서있었다. 귀 있고 눈 있는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 소리요, 광경이었던 것이다. "성공한 모양이군요!" 매볼염이 중얼거렸다. "진 공자의 덕이 커요." "내게 무슨 공이 있단 말이오. 철질려에 벽력탄을 넣는다는 생각은소저가 했고, 그 벽력탄도 황금장의 것인데." 매불염은 고개를 저었다. "공자가 가져 오신 벽력혼천구 다섯 개는 황금장에서 준비한 벽력탄이벡 개보다 오히려 나아요. 벽력탄은 충격엔 약해도 불에는 그리 쉽계 폭발하지 않고, 우리가 준비한 저 끈은 그리 큰 화력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사실 꽤 걱정을 했어요. 게다가 벽력혼천구가 없었다면 철질려와 벽력탄을 이용한 계략도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혔겠죠. 여기 이 계곡에 백오십 개는 들어가야 했을 테니까요." 전자앙은 머리를 긁적였다. "말씀을 들으면 그렇긴 하오만…… 하여튼 내 공은 없는 것 같소." 매불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단지 걱정이 되는 것은 이차 삼차의 계략도 성공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에요." "걱정하지 마시오." 매불염이 그를 돌아보았다. 진자앙은 씩 웃어 보였다. "계략을 짜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고도 하지 않소. 게다가 우리 계략은 어차피 십 할의 성공률을 가진 것도 아니니실패한다 해도 아무도 소저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는 계곡의 입구를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중요한 것은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한다는 것, 할 수있다는 것이지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이 결과를 기다리는 것보다 답답한 일은 없으니까 말이오." 매불염은 그런 진자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현듯 항상 바보 같은 미소만 흘리칠 다니는 그가 처음으로 마음속의 어두운 구석을 드러내 보인 듯해서 마음이 같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바보……!' 그녀는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아래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적이 임박했어요. 다들 마무리를 지어요!" 광풍사는 질주하고 있었다. 앞서 예기치 않은 한 방을 얻어맞았던탓에 그들의 질주에는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들은 지금 이름 그대로미쳐 버린 바람이 되었다. 특히 좨여풍이 그랬다. 수족 같던 세 명의 수하를 잃은 것은 그례도참을 수 있었지만 애마 광풍비를 잃은 것은 심장을 잃은 것과도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에미의 에미의 에미의 에미 때부터, 오 대애걸쳐서 그를 태우고 다녔던 뿌리 깊은 명마의 자손으로, 여인보다 제자보다 아끼던 말이었다. 팔은 잘라 가도 좋지만 말은 줄 수 없다고생각했었는데, 오늘 그 말을 빼앗긴 것이다. 그는 수하의 말로 갈아 타고 달리면서 연신 이를 갈고 있었다. '건방지게 도망도 안 가고 기다리고 있단 말이지. 조금만 기다려라! 이 좨여풍이 누구고, 광풍사가 무엇인지 확실히 가르쳐 주지!' 그령지만 사실 그도 켕기는 구석이 아주 얼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떼강도 짓으로 말이 마모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벗어 버릴 수 엄는천부적인 도둑의 조심성으로 그는 지금의 상황이, 그들을 기다리며 준비한 일련의 재략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뭔가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단 한번도 남의 힘에 의해 멈춰 본 적이 없는 그들 광풍사가처음으로 고역을 겪어야 찰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그는 뒤를 들아보았다. 아직 광풍사는 건재했다. 그들은 피에 굶주려 있었고, 오랜 동안 적수가 없었기 떼문에 생겨난 권태에 시달리고 있었다. 흥미있는 일만있다면 무엇이든 회생할 수 있을 것 같은 자들이 그의 수하였다. 좨여풍은 손을 살짝 옴적여 현무두사 대신 그의 뒤에서 말을 달리는백호규랑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보며 바람막이로 감싼 입술을 슬쩍 움직여 웃었다. 타인의 손얘 의해 멈추어지기엔 그들은 너무 강한 것이다. 백호규랑이 크게 손을 저어 앞을 가리켰다. "적이 기다리고 있다! 전속 전진이다!" "우와아!" 광풍사의 대원들이 떠나갈 듯한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꺼내 들고 흔들었다. 이것이 그들의 결전 태세였다. 말을 처음부터 빨리 달리게 하는 것은 경주를 위해서는 몰라도 전투에서는 금기사항이다. 어쩌면 반나절 이상을 달려야 될지도 모르는상황에서 너무 급작스런 출발과 그에 이은 질주는 말을 죽이는 행위나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천천히 걷게 하다가 차츰 빠르게, 그리고 나중에는전력의 삼분의 이 정도의 속도로 달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몸을덥게 하고, 또 조금씩 흥분을 하게 하는 것이 전투 태세의 기본이었다. 그렇게 한번 흥분하면 전투가 끝날 때까지 말은 기수와 일체가 되어그 자신이 병사가 된 듯이 전의에 불타게 되는 법이었다. 지금 광풍사의 말들이 그런 상태였다. 그것들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 밟아 버릴 기세와 살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단 두 사람이었다. 그 두 사람은처음에는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여서, 그리고 나중에는 너무나 가공할위력을 발휘해서 광풍사의 말과 사람들을 한꺼번에 놀라게 했다. 그의 유명한 무공과 함께 달리 일격휴라고도 불리는 뇌공 원굉도는넓은 관도의 중앙에 버티고 서서 하늘을 가릴 듯 퍼져 오르는 먼지를노려보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무릎까지 닿는 손, 구부정한 허리는 젊을 때부터 그랬거니와, 지금 그가 풍기는 기세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그 높이와 넓이를 크계 해서, 이재는 마치 응장한 산을 연상케 했다. 그의 주책스런 면만 보고 지내던 형산파의 재자들이 보면 놀랄 장면이었다. 평소에는 내면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가 평생의 대적을 만나게 된지금에야 비로소 발현되는 기세이기 메문이었다. 자욱한 먼지구름 속에서 어렴풋이 말과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되자원굉도는 구부정한 허리를 잠시 펴더니 다시 구부리고, 무릎을 반쯤굽혀 정말 큰 원승이 같은 모습으로 앞으로 한걸음 걸어나갔다. 그의손은 땅에 끌릴 듯이 내려져 흔들리고 있었다. 두 걸음줴에 그는 손을 들어 가슴 앞에 모으더니 오른쪽 옆구리 어림으로 후퇴시켰다. 무언가를 힘꼇 밀기 위해 일단 뒤로 빼고 있는 것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세 걸음째! 등근 공을 쥐듯 하나로 모인 그외 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테 갑자기 뇌성이 터져 나와 공기를 쩐어발겼다. 콰아앙--! 먼지가 일었다. 말발굴이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것과달리 기등처럼 하늘로 솟구쳐는 먼지, 그 솔에 쪘겨진 말과 사람의 살조각들이 함께 담겨 올라가는 그런 먼지구름이었다. "뇌공!" 쾌여풍은 경악외 한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의 몸은 말보다 랄리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두 번째로 하늘로 도망치는 셈이었다. 그레도 그의 판단은 정확하고 신속한 것이었다. 그치 발 아래에서는보기도 싫은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리보다 더 말을 자극하는 것은 없다. 훈련된 말일수록 덜하긴 하지만 그것은 참는 것이지 싫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까의폭발음, 지금의 뇌성과 같은 것에는 아무리 훈련된 말도 놀라고 마는것이다. 말들의 전진은 멈춰졌고, 기수들은 말을 달래는 데에 정신이 없어적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원굉도의 일장이 한번 더 그들에게 닥쳐 들었다. 콰콰쾅--! 또 일장. 콰르르릉--! 그렇게 연달아 삼 장이나 때려 내고 원굉도는 비로소 소리쳤다. "쾌여풍! 이리 나와!" 그의 목소리는 말과 사람의 소리로 소란스러운 중에도 또렷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 원굉도가 무섭지 않으면 이리 나오란 말이다! 한번 불어 보자!" "저놈이!" 꽤여풍은 이를 갈았다. 그의 몸은 공중에서 세 바퀴째 회전하고 있었는데 높이는 처음세 비해 전혀 낮아지지 않았다. 지금 그는 소매를 펄럭여 몸을 아래로 기울였다. 몸이 비스듬히 원호를 그리며 아래로 향했다. 그러다가 그가 다시 한번 소매를 펄럭이며 몸을 비틀자 공중에서 순간적으로 멈춰 버렸다. 그는 순간적으로울컥해 원굉도와 붙어 보려던 마음을 돌린 것이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발을 받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는 마치 계단을 밟는 것처럼 공중을 밟고 있었다. 허공답보, 청온재의 절정경공이었다. 팡풍사는 극도로 훈련된 무리이고 꽤여풍을 신처럼 추앙하는 자들이었다. 그가 그런 신위를 보이는 동안 광풍사의 대원들은 안정을 되찾고 사기를 끌어을렸다. 그러고 나니 분노가 타을랐다. 거기 쾌여풍이 불을질렀다. "상대는 쪼그라든 늙은이다! 쳐라!" "우와아--!" 그들은 다시 칼과 창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나왔다. 원굉도의 장력에 찢겨진 동료들의 시신을 밟아 뭉개면서. 원굉도는 이를 갈았다. 애상은 했지만 막상 무시당하고 보니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저것들이!" 팔을 걷어붙이며 다시 앞으로 나서는데 맹방평이 어느새 다가와 그의 소매를 당겼다. "싸울 떼가 아니야. 일단 물러나세!" 그들은 뒤에 대기한 천리독각추를 타고 질풍같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뒤를 광풍사의 기마대가 쫓았다. 행렬의 마지막미 아래를 지날 메애야 쾌여풍이 내려왔다. 청룡각교가 대원 두 명을 한 말에 타게 하고 준비한 말의 고삐를 건네 주었다. "몇이나 죽었나?" 좨여풍은 말에 올라타면서 물었다. 평정한 어조였지만 깊은 분노를담고 있다는 것을 청룡각교는 알아챘다. "지금 파악한 것으로는……" "음!" 백호규랑을 비롯한 여덟 명입니다." 쾌여풍은 어쩔 수 없이 신음을 흘려 버렸다. 원굉도의 삼 장에 벽력탄의 화염에 당한 것보다 오히려 많은 회생을 보았던 것이다. 쾌여풍은 말에 올라타고 채찍을 휘둘렀다. "반드시 쫓아가 죽여 버린다!" 청룡각교가 뒤를 따랐다. "대당가! 그보다 원핑도의 뒤에 있던 고은이는 그가 끌고 있던 나귀로 보아 맹방평인 듯합니다!" 쾌여풍이 놀라 돌아보았다. "틀림없나?" "그가 무림사마…… 를 잡기 위해 강호로 나섰고, 이미 운리무가 그의 손에 죽었다는 소문도 있으니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쾌여풍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등에서 뛰쳐 일어나 앞으로 달려나갔다. 청룡각교가 경신술을 발휘해 그 뒤를 따랐다. "대당가! 그들이 쫓겨가는 것이 계략은 아닌지 조심하셔야 합니다!" "계략이라도 상관없고, 계략이면 더욱 빨리 쫓아가야 한다!" 쾌여풍과 청룡각교는 광풍사의 대원들이 탄 말을 발아 가며 앞으로내달렸다. 그런 도중에 쾌여풍이 말을 이었다. "계곡에서 할 수 있는 계략이래 봤자 화공 아니면 바위 굴리기겠지. 하지만 꽁무니를 바짝 쫓아가도 그런 계략을 쓸 수 있을까?" 눈앞으로 협곡의 양쪽 절벽이 달려 지나가고 있었다. 귓전을 스치는바람결이 칼날같이 날카로웠다. 그렇게 달리는데도 쾌여풍이 쫓아오고있었다. 그들이 탄 나귀가 제아무리 날아가는 비둘기도 쫓아가는 천리독각추라지만 광풍사의 말들도 하나같이 천 마리, 만 마리 중에서 골라잡은 명마들,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쾌여풍과 청룡각교가경신술을 사용하여 그 뒤를 바짝 따라잡고 있었다. 청룡각교는 쾌여풍의 수제자였던 것이다. 맹방평은 뒤를 잠간 돌아보고 쾌여풍이 거의 바짝 붙다시피 했다는것에 놀랐다. "명불허전이군!" 감탄은 나중이었다. 그는 일변 말을 하면서 일변 원굉도의 옆구리를쳤다. "하나 둘 셋!" 쾌여풍이 그들의 일 장 뒤로 바짝 붙었을 때였다. 그의 손에서 무언가 번쩍이는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찰나, 원굉도와 맹방평이 동시에나귀에서 뛰어내렸다. "엇!" 쾌여풍이 잠시 놀라 멈칫하는 순간, 원굉도와 맹방평은 절벽 옆의바위들을 밟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등이 가벼워진 천리독각추는 네 발굽을 모으더니 번개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약은 수작!" 쾌여풍은 허공을 향해 손을 들었다. 팡--! 그의 손에서 은빛 섬광들이 터져 나와 원굉도와 맹방평의 뒤를 따랐다. 은린폭망이라 불리는 암기. 한번 닿기만 하면 꺼지지않는 불이 붙는다고 해서 달리 지옥염화라고도 불리는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지!" 말은 원굉도가 하고, 대응은 맹방평이 했다. 맹방평은 기다리기라도 찬 듯이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은빛 섬광들을 향해 포승줄을 풀었다. 포승줄은 소용돌이처럼 휘감기며 은빛 섬광들을 그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일대절기인 귀종수를 포승으로 시전한 것이다. 은린폭망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금빛 광망만이 허공에 가득한가 싶더니, 어느새 맹방평과 원굉도는 절벽 위에 올라서고 허공에는 쾌여풍만 남아 있었다. 그 쾌여풍을 향해 푸른빛이 날아갔다. 푸른 화염에휩싸여 불타고 있는 맹방평의 포승줄이었다. 과연 은린폭망의 위력은 이름 그대로였다. 적등에 자금사를 섞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물불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맹방평의포숭줄을 태워 버림으로써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쾌여풍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은린폭망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은린폭망은 주인을 알아보지 않는다. 다른 것에 옮겨 붙은 화염이라도 몸에 닿으면그도 같이 화염에 쵱싸여 버릿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다음 행동물 결정하고 연속으로 아흉 번이나 공중회전을 했다. 창응구전. 원래 천하장사도 공중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새가 아닌 바에야 디디고 설 자리가 없으면 방향 전환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 상식을 깨는 것이 쾌여풍의 창응구전이었다. 그는 한 번 회전할 때마다 공중으로 삼 장씩 솟구쳐서 마지막 회전을 끝내었을 때는 삼십여 장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것이 실수였다. 맹방평과 원굉도는 그의 손을 벗어나 오른쪽 벼랑 위에 서 있었고,그 옆에는 진자앙과 낭인들이 서 있없다. 그리고 그의 광풍사가 협곡중간까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 시점에 그는 삼십 장 허공에 떠있는 것이다. 왼쪽 벼랑 위에서 매욜염이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지금이라요!" 계곡에 매설한 벽력혼천구의 수는 모두 다섯, 왼쪽에 둘, 오른쪽에셋이 매설되어 있고 거기에는 벽력탄이 하나썩 같이 묻혀 있다. 도화선은 그 각각에서 뽑아져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벼랑 위까지 을라와 있었다. 이 두 군데에 불을 붙이면 협곡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불을 붙이는 일은 오른쪽을 진자앙, 왼쪽을 매불염이 맡았는데 매불염이 그 시기를 지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금 그 지시가 떨어졌다. 진자앙은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뒤로 물러났다. 벼랑이 무너지면 거기 있는 사람들도 같이 떨어지기 마련이니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하는것이다. 매불염 역시 그렇게 하고 있었다. 도화선은 벼랑의 경사면 돌틈, 흑은 흙 속에 몸을 얕게 숨기고 불꽃을 전달하고 있었다. 쾌여풍은 이 모든 일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도화선을 사용했으면 분명 화기일 것이다. 위력이 어떨지는 몰라도 벼랑이라도 무너지는 날에는 그의 광풍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는 급히 몸을 뒤틀었다. 급전직하! 쾌여풍은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거꾸로 선 자세로 쏜살같이 아래로떨어져 내렸다. 그의 매처림 날카로운 눈이 벼랑 사이로 달려가는 불꽃을 발견했다. 왼쪽에 하나, 오른쪽에 또 하나였다. 그의 손이 양쪽으로 뻗었다. 그 손에서 검은 물체가 각각 하나씩 뻗어 나갔다. 휘파람 소리와 유사한 날카로운 음향이 그 물체에서 퍼졌다. 삐이이이이익--! 이것이 쾌여풍의 성명암기인 귀견수였다. 반월형의 몸체에 뚫린 구멍에서 혼백을 사로잡는 소리가 울리면, 그 날카로운 칼날에는 당할 자가 없다. 암기로서 이것의 최고 장점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날아간다는 것이었다. 그 귀견수가 양쪽 절벽을 파고들첬다. 불꽃이 아니라 그 바로 아래,아직 불이 붙지 않은 도파선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꽤여풍은 귀견수를 던져 도화선을 중간에서 자르려는 것이었다. 맹방평의 낮빛이 침중해졌다. 원굉도도, 진자앙의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귀견수의 날에 도화선이 끊어진다면, 그래서 벽력혼천구가점화되지 압는다면 오늘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점화한타는 겻은 볼가능헨다. 광풍사는 그들의 바로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좨여풍이 있다. 그는 이재 천천히 선회하면서 벼랑의 중간쏨에서 상황의 진행을 감시하고 있었다. 만약 도화선이 계속타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직접 고기라도 할 태세였다. 매불염이 짧게 말했다. "됐다!" 그녀가 있는 쪽 벼랑 중간에서 불꽃이 반짝였다. 그쪽의 도화선은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반대쪽을 바라보고는 실망해 버렸다. 진자앙이 붙인도화선은 불꽃을 보이지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한쪽만 무너지계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작전은 반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거의 실폐혔다고 롸야 했다. 그녀는 양쪽에 장치된 벽력혼천구가 서로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최대의 위력을 발휘하게끔 장치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쾌여풍이 간신히 살아남은 불꿎을 향해 날아가고있었다. 직접 꺼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 "어딜!" 원굉도가 손을 모았다. 그러나 그는 일격휴 한 방을 날리지 못했다. 북천사흉, 매불염의 네 가마꾼이 각각 앞 사람의 다리를 잡고 벼랑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장 뒤의 호무주의가 절벽 가장자리에 발을 걸치고, 가장 앞의 양미토기가 가마를 지탱하는 굵은 채를 두 손으로 잡고 휘둘러 꽤여풍을 때려 갔다. 후교, 소위 '원숭이 다리'라고 불리는, 무공이라기보다는 기예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꽤여풍은 이 의외의 공격에 일순 당황해 소맷자락으로부터 무수한비침을 날리며 한쪽 발로 양미토기가 휘두른 가마채를 밟고 다시 뛰려 했다. 그러나 그의 발은 허공을 짚었고, 그는 잠시 중심을 잃고 날개 부러진 새처럼 떨어져 내렸다. 양미토기의 가마채는 그를 기다리지 않았기때문이었다. 양미토기는 암기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한편으로는 가마채를 바람개비처럼 휘둘러 쾌여풍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놀랍게도 그가 숨을 들이마시자 옷이 팽팽하게 부풀어오르더니 비침들을 튕겨 내었다. 작은 기등만큼이나 굵은 그의 가마채는 쾌여풍의머리를 정확하게 노리고 있었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만을 했다면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호신강기를 운기해서 몸을 보호하고 다른한편으로는 적을 공격하는 이중의 행위를 동시에 하고 있었고, 이것은초절정고수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쾌여풍은 하는 수 없이 떨어지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천근추를 운용해 최대한 몸을 무겁게 하고, 자세는 꼿꼿하게 해 바람의 저항을 덜 받음으로써 가능했다. 부웅--! 가마채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좨여풍은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땅에 거의 닿으려 하는 발을 구부리고 바닥을향해 일장을 날림으로써 추락하는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덕분에 안전하개 땅애 내려설 수는 있었지만 그가 이를 갈며 다시뛰어오르려 했을 때 북천사흉은 다시 절벽 위로 올라간 뒤였다. 그들을 쫓아가려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더 다급한 일이 그와 광풍사에게 닥쳐 왔턴 것이다. 절벽의 오른쪽에 철탑만큼이나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내 하나가 기어 내려가고 있었다. 진자앙이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채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진자앙은 꺼져 버린 도화선에 다시 불을 붙이고 있었다. 매불염이 소리쳤다. "안 돼요" 미친 짓이었다. 적들이 들끓는 계곡 속으로 흘로 뛰어들어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것은 용감하다기보다는 만응이었다.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행동을진자앙이 해버린 것이다. "바보 같은!" 매불염은 진자앙예계 해주고 싫었던 말을 결국 입 밖으로 소리내어했지만, 그녀는 그브다 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날려 절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삐이이이익--! 귀청을 찢는 소리. 귀견수가 진자앙과 매불염에게 날아들었다. 그순간 왼쪽 절벽에서 혼천구가 폭발했다. 콰아앙--! 흙과 바위가튀었다. 노호곡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하게 흔들리고, 절벽을 이루고 있던 거대한 바위들이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려 쓰러지기 시작했다. "물러나--!" 누가 소리를 질렀는지도 몰랐다. 맹방평과 원굉도, 그리고 황금기사단의 무리, 북천사흉마저 흔들리는 벼랑에서 반대편을 향해 전속력으로 몸을 날렸다. 쾌여풍 역시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날린 귀견수가 진자앙의 몸에 맞았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찢어질 듯 소리치며 쏟아지는 바위 사이로 해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피해라!" 이 순간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청룡각교였다. 그는 쾌여풍과 함에 맹방평의 뒤를 쫓고 있다가 협곡 아래에 서서 광풍사의전진을 감독하던 차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사태 앞에서 달리 할 것은 없었지만 정신을 차리고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없다고 판단했다. "전속 전진!" 지금 와서 돌아서 봤자 어차피 협곡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절벽을 빠져 나가야 하는 것이다. 광풍사는 그의 지휘에 따라 쏟아지는 바위 아래로 말을 달렸다. 그 순간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진자앙이 붙인 도화선이 흔천군에 당았던 것이다. 콰콰콰쾅--! 협곡은 먼지로 가득 찼다. 앞을 볼수 있는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들 목숨을 하늘얘 맡기고 무조건 앞을 향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것은 진자앙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폭발 이전의 상황은 누구보다 생생하게 보고, 알고 있었다. 매불염이 그를 끌어을리려 다가와 소매를 잡고, 그 뒤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는 컴은 물체가 덮쳐 들었었다. 그것이 매불염의 등뒤로날아드는 엇을 보고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뒤로 채서 매불염을 감싸안고 등을 돌려 대었다. 그의 외공이 귀견수를 견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행동이었다. 다행히 귀견수는 그와 매불염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츄칵--! 외공을 익힌 후 느긴 것 중 가장 격렬한 통증이 그의 팔을 스치고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그 통증보다도 매불염의 옆구리에 붉은빛이 언뜻 보인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괜찮……!" 말을 채 다할 수 업었다. 그 순간 고막을 쩐는 듯한 굉음과 함깨 그들이 버티고 있는 절벽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자앙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와 매불염의 목숨은 누구도 보장할 수없게 되어 버렸다. 매불염이 진자앙의 소매를 잡은 채 몸을 날렸다. 무너져 가는 절벽에 붙어 있어 봤자 유리할 것은 아무것도 엄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뛰어도 유리할 것은 없었다. 하늘을 가리고 쏟아지는바위의 빗속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흔자라면 또 몰라도 그녀 덩치의 두 배나 되는 이 거대한 사내를 끌고서. 그녀의 경공은 거의 쾌여풍에 육박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곧 그들은 몇 개의 바위에 비껴 맞고, 더 이상 운신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버렸다. 갑자기 진자앙이 그녀를 안았다. 매불염이 그 처지에서도 놀라 외치려 했지만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바위를 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서 달콤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느끼고 있었다. 떨어지는 바위를 몸으로 막아 주는 사람, 그녀 매불염, 어릴 적의 염정이 기억하던 진자앙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변치 않았다. 비록 저 바위 아래 깔려 두 사람이 함께죽는다 해도 그녀는 보고 싶던 사람을 보았고, 그를 다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단지 아러운 것은 그는 그녀가 그때의 염정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밝힐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 무덤에 묻히면 얘기할 기회는 많을 거예요, 자앙!' 그녀는 그녀의 위를 덮고 있는 진자앙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그의 품에 깊이 안겼다. 콰앙---! 거대한 충격, 그 다음은 어둠이었다. 매불염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도 눈앞에는 단지 어둠만이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죽어 황천에 온 것이 아닌가, 라고도 생각했지만 곧아닌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온몸에 맺혀 있다가 이제야 말문이 트인고통들이 저마다 입을 벌려 절규하고 있었다. 이럴 때 아픔은 삶을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이 지금은 죽은 것만도 못한 상황일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곧 깨달았다. 이 어둠 이전에 그녀가 마지막 본 어둠이 어디에서 근원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지금의 상황은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그녀는 바위 아래, 혹은 흙 속에 갇혀 있다. 어쩌면 굶어 죽을 때까지 이대로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천천히 찾아오는 죽음이란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가. 매불염은 두려움에 몸을 떨다가 죽음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일을 생각해 내었다. 그 죽음을 같이하게 된 사람,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그 사람, 진자앙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의문은 바로 풀렸다. 고통에, 혹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던 것이느껴졌는지 얼굴 바로 앞에서 진자앙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깨어났소?" 매불염은 몸을 떨었다. 두꺼운 면사를 사이에 두었지만 남자의 체천, 입김이 그녀의 뺨에 전해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너었다. 그와 단둘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십 년 전, 그리고 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생사고락을 같이하게 된 이 인연이 좀체로 현실로다가오지 않아서였다. "깨어난 모양이군요. 몸은 괜찮소?" 그녀는 본능적으로 운기행공을 해보았다.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것처럼 온몸이 아프지만 왼쪽 옆구리가 쑤시고, 왼쪽 발목 어림에서기의 흐름이 끊기는 것말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 바위에 깔린 것치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경상인 셈이었다. "괜찮아요. 당신은……!"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진자앙의 모습을 흐릿하게나마 비추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처참한 것이었다. 그녀는 원래 무공을 익히기 전에도 감각이 예민하고, 밤에도 사물을잘 보는 선목이라는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데다 나중에무공을 익히게 되면서부터는 그 감각이 극도로 발달하여 어둠에 적응할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특별히 야안공 같은 것을 운기하지않아도 낮처럼 환하게 볼 수가 있었다. 칠흑 같던 어둠이 점차 흐릿해지면서 그녀의 눈에 비추어지는 것들은 반대로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이 진자앙의 모습이었다. 그는 가슴팍으로 그녀의 눈앞을 거의 전부 가리고 있었다. 그의 철탑 같은 체구가 그녀를 거의 덮고 있었기 때문에 넓은 가슴팍이 그녀의 얼굴 바로 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그의 피 묻온 입슬이었다. 진자앙의 입술은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지금도 계속피를 떨구고 있었다. "왜? 어디 다쳤어요……?" 매불염은 놀라 물으며 손을 뻗치려 했다. 그러나 손은 웅직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손뿐만 아니라 발, 다리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에 눌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스한 느낌. 진자앙이 온몸으로 그녀를 덮고 있었다. 그나마 가슴팍은 들어 그녀의 얼굴은 누르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 진자앙의 배려였던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피 묻은 입술을 움직여 웃었다. "답답하지요? 미안하오. 수련을 게을리 해서 이 모양이오." 매불염은 무슨 말이냐고 눈을 깜박였지만 두꺼운 면사 때문에 그게보일 리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뜻이 전달될 리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매불염이 얼른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진자앙온 그떠와 뜻을 이해혔는지 아니면 원래 그 말을 하려했던 것인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금강당에서 재일 면저 배우는 무공이 철우경지지요. 지금 상황에 딱 적합한 자세요. 그런데 힘이 들어서 점점 자세가 허물어지더니 이제는 이 모양이오. 사부님이 보셨으면 욕을 많이 하셨을 거요. 또 내가 그것만 제대로 취할 수 있었으면 매 소저가 휠씬 편하게 있을수 있지 않았겠소?" 매불염은 철우경지 따위의 기초자세를 무공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흙 속에 묻혀서도 그런 자세 얘기나 하는 것도 이상해서 웃으려했다. 그러나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고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림……?" 지금 진자앙은 무너져 내리는 바위를 자신의 등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매불염은 갑자기 목이 메여 오는것을 느꼈다. "내 생각에는…… 여기 어딘가에 틈이 있는 것 같소. 갇힌 지 세 시진이나 지났는데도 숨을 쉴 수가 있으니 말이오. 바위 몇 개만 치우면나갈 수 있을지도……!" "그만 말하세요! 그 몸으로……!" 매불염은 진자앙의 입에서 떨어지는 선혈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것을 생각하고 그를 제지했다. 상처에서 흐르는 퍼와 내상을 입어 토해 내는 피는 같은 피라도 그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그저 고기 먹고 밥 먹으면 보충되는 것이지만후자인 기혈은 그 한 방울 한 방울이 한 달을 열심히 수련해야겨우 얻을 수 있는 내공의 정화이자 생명의 근원, 본원진기인 것이다. 그녀는 진자앙이 떨어지는 바위를 등에 얻어맞아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세 시진 동안이나 떠받치고 있느라고 힘을 썼기 때문에 기혈을쏟아 내고 있다고 추측했다. "세 시진이 정확해요?" 이런 곳에 갇히면 시간 감각이 흐려지기 마련이니 진자앙이 세 시진이 지났다고 한 말의 근거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진자앙이 대답했다. "예전에 사부님 밑에서 수련할 때……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일각이 천추 같았었소. 그러다가 나중에는 시간을 해아리는버릇이 들었자요. 되도륵 정확한 시간을 내 신체의 느낌만으로 알고싶었던 거요. 난 대부분외 수련을 이런 식으로 버터 냈고. 곧 정확한시간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지요." 그는 다시 웃었다. 매불염은 그 웃음이 겉보기에는 바보스럽지만 뭔가 위기감을 깔고 있다는 것을 느쪘다. 예전에도 그는 어려울 때마다웃지 않았던가. '힘들어하고 있군요……!'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단 일 각을 더 버티기힘든 상황일 수도 있었다. 그럴 때 말은 정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귀얘 신경을 집중해서 뭔가를 들어 보져고 했다. 조용했다. '세 시진이나 지났으니 광풍사의 무리도 다 철수한 것일까? 그럴 것이라로 그녀는 확신했다. 그둘이 등료들의 시신을 찾아 바위들을 파해치고 있다면 모르지만그렇지 않다면 황금장을 향해 이미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료의 시신을 재대로 묻머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들에 버려 두고 떠나그 보복을 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녀는 다시 운기했다. 진자앙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면 그녀라도 어떻게 이 바위들을 치울 방도를 마련해야 헌다. 일주천의 운기가 끝나자 기의 흐름은 더욱 원활해졌고, 다시 이주천을 행공하고 나자 이젠 거의 불편한 점을 모르게 되었다. 단지 왼쪽 옆구리와 발목의 결림은 여전했는데 아무래도 부상을입은 것 같았다. "일단……!" 매불염은 말했다. "공기가 어디서부터 흘러 들어오는지 알아야겠어요. 아무래도 그쪽이 뚫고 나가기 쉽겠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고 온몸의 감각을 깨워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잡으려 했다. 그런데 진자앙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놀라눈을 떴다. "자앙! 아니, 진 공자! 진 공자!" "왜 그러시오?" 그녀는 겨우 안도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놀랐어요. 혹시나……!" "지식법을 운용하고 있었던 거요. 내가 숨을 쉬고 있으면 공기를 포착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아……! 그랬군요. 그럼 다시 해주세요." 매불염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들이 있는 공간은 좁고, 더웠다. 게다가 진자앙이 흘린 땀 내음과피 냉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매불염의 신경을 자극한 것은 남자 냄새였다. 땀냄새와 피 냄새, 그 모든 것을 합하고도 무언가를 더 가지고 있는 냄새였다. 매불염은 문득 얼굴을 붉히고 진자앙이 지금 그녀를 덮고 있다시피한 상태라는 것을 의식했다. 그녀를 누르고 있는 이 묵직한 중량감은바위의 무게가 아닌 것이다. 그 옛날 나뭇가지 위에서 갑자기 나타난 아이, 탯속을 뚫고 같이 달리던 아이, 자기 품에 있던 음식을 나눠 주던 아이…… 그녀에게 나말고도 나보다 가까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우쳐준 아이, 그 아이는 사내였던 것이다. 지금 든든한 보호막처럼 그녀를바위로부터 지켜 주고 있는 사내! 바로 그가 그때의 진자앙이었다. 그가 풍기는 사내 냄새는 그래서 역겹지 않았다. 꽃향기일지라도 조금 짙다 싶으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예민한 그녀가 진자앙의 냄새는조금도 싫지가 않온 것이다. 그러니 죽을 수 없었다. 매불염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녀와 그의 목숨 모두가 그녀의 손에 갈려 있었다. 무너진 바위를 세 시진이나 떠받들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진자앙은 초인적인 힘을 발회한 것이다.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나머지는 그녀의몫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공기의 미세한 흐름은 곧 그녀의 감각에잡혔다. 머리맡, 비스듬허 오른쪽위였다. 그녀는 손가락부터 조금씩 움직였다. 진자앙의 몸과 흙 사이에서 꼼짝못하고 잡혀 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나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펼요했다. 갇혀 있어서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매불염이 생각하기에는 영원처럼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그녀는결국 오른손을 머리 위쪽으로 올릴 수 있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하나……?' 조금 더, 조금만 더 공간이 펼요했다. 손을 움직여 흙을 긁어 낼 공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엎드려 땅을 팔 공간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진자앙이 움직였다. "으--윽!" 그는 신음을 토하고 입술을 깨물더니 팔다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뭐 해요?" 매불염은 물으면서도 진자앙이 무얼 하려는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았다. 잔뜩 긴장된 근육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엄청난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으--으--음!" 진자앙이 다시 한번 신음을 토했다. 그의 온몸에서 혈관이 솟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매불염은 느낄 수 있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진자앙은 조금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등을 누르던 바위가 들리고 있다는 의미와 일치했다. 또한 매불염이 움직일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고맙지 않았다. "당신 몸으로는 무리하면 안 돼요!" 화내는 그녀에게 진자앙은 단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매불염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리맡으로 팔을 뻗었다.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거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좁은 공간의 후끈한 열기와는 달리 약간은 차가운 느낌도 그곳에서 느껴졌다. '경하기!'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치며 진력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단전에서 끌어올려진 진기가 독맥을 따라서 팔로 움직이고, 그것은강력하지만 느리게 움직이는 힘으로 변해 손에서 분출되었다. 한 순간 공기는 무거워지고, 그들이 있는 공간이 좁혀드는 것 같았다. 매불염이 운기한 경하기의 강력한 힘이 한편 흙을 밀어 내면서 그반탄력으로 되들아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진자앙에게 전음을 보냈다. "조금만 참아요!" 진자앙은 온몸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무리하게 힘을 쓰느라 근육이 뒤틀린 대다가 등을 누르는 만근 바위의 힘, 거기에경하기의 압력까지 그를 옥죄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옷고, 매불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참는것이 그의 유일한 장기인 것이다. 매불염은 진자앙이 웃고 있긴 하지만 최악의 상태라는 것을 알아볼수가 있었다. 그의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나오고있었다. 이제 모험을 할 때였다. 어차피 더 이상의 고통은 견디지 못할 것이니 위험하더라도 한번에 뚫어 버려야 한다. 그녀는 경하기를 거두고 경천자하강럭을 운기했다. 도가에 전해지는 오대강기신공중 하나였다. 그녀의 양아버지인 황사 매요신은 소문처럼 모르는 무공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환판들 사이에 비밀리에 전해지는 무공에서부터 나중에동창의 수장이 되면서 얻은 무공들, 게다가 황궁 서고에서 찾은 것들을 합치면 그의 몸과 머리는 무공의 보고라 할 만했다. 그 모든것들이 그녀 매불염에게 전해진 것이다. 매불염은 염정이었으며, 진자앙과 함깨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두 아기 중 하나이기도 헨다. 결정적으로 대력금강 철우가 남긴 신약, 모려반석근을 먹은 것이 그녀였다. 덕분에 그녀는 테어나자마자 임독양맥이 뚫리고 생사현관이 타통되었으며, 초인적인 감각을 갖추게 되었다. 인간으로서는 완벽한 체질을 자기도 모르게 이루게 된 셈이었다. 그러 그녀였으니 매요신의 무공을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녀의 지금 무공은가히 왕년의 매요신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러 있었다. 매요신이 천하제일고수로 불려지기 시작할 무렵의 수준이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자색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안개처럼 뿌옇게 손끝을 감싸더니 이내 손 전체에서 뿜어졌고, 이윽고 그녀의 몸전체를 그 빛으로 물들였다. 한 순간 그 자색의 광채가 손끝을 떠났다. 콰앙--!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공간이 흔들렸다. 진자앙의 등을 누르는 바위가 크게 요동쳤다. 크윽--! 진자앙은 다시 한 모금의 피를 토했다. 그의 무릎과 팔이 절로 구부러졌다. '안 돼--!' 이대로 무너지면 그도 매불염도 죽고 말 것이다. 그는 온 힘을 끌어모아 필사적으로 버텄다. 그러나 눈앞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때 손 하나가 뻗어 와 그의 등을 누르는 바위를 떠받들었다. [제이십이장] 황금은 땅속에 묻히고 뇌정은 진자앙에게 전해지다. 눈앞이 다시 밝아졌다. 아니. 이제는 눈이 부셨다. 진자앙은 눈을 깜박거렸다. 밝은 햇살이 그에게 쏘아져 오고 있었다. 그 햇살을 등에 업고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다. 햇살 속에 서 있기때문에 형체가 부서져 보였지만 그것이 매불염이라는 것을 그는 금방알아차렸다. 매불염은 한 손으로는 바위를 지탱하고, 다른 한 손은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물론 움직일 수 있지요." 진자앙은 회미하게 미소를 짓고 일어서려 했지만 사실 그는 움직이기조차 어려운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는 매불염의 손을 잡고서야 간신히 바위 아래에서 기어나올 수 있었다. 그는 벌렁 누워 하늘을 보았다. 흰구름이 흘러가는 푸르른 하늘 한구석은 벌써 황금빛 노을이 지고있었다. 그는 억지로 몸을 지탱하고 일어서려 했따. 매불염이 그를 말렸다. "아직 움직이면 안돼요.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도 모르는데……!" "시간이 늦었소. 어쩌면 이미 그들이 황금장에 들이닥쳤을지도……!" "이 몸으로 가서 뭘 하겠어요? 일단 치료부터 받아야 해요!" 진자앙은 그대도 일어나 앉았다. 피는 입으로 흘린 것뿐이고." "그게 더 위험해요! 기혈을 한 단지나 흘린 사람이……!" 그녀는 화난 것처럼 소리쳤다. "어서 정좌하고 운기부터 해봐요! 어디 이상이 있으면 말하고!" 그 등살에 진자앙은 하는 수 없이 운기행공을 했다. 물론 그가 아는간단한 토납법이었다. 고도의 내공심법을 운기했을 때처럼 내상치료는 안 되지만 그래도몸에 시원한 기운이 돌았고, 무엇보다 어디가 나쁜지를 알 수 있었다.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특히 등이 몹시 아픈 것으로 보아 바위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부분이 상했음을 알 수 있었다. 왼팔도 마비가 될 정도였는데 아마 쾌여풍의 귀견수에 당한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상처는 겉이 아니라 속에 난 상처, 즉 내상이었다. 기혈이 뒤틀렸는지 내장이 꼬인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그는 눈을 뜨고 매불염에게 말했다. "별로 아픈 곳이 없군요. 그만 가봐도 되겠소." "아픈 곳이 없다구요? 여기……!" 매불염이 그의 등을 건드렸다. 진자앙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번개에라도 맞은 듯 신경이 놀랐던 것이다. 매불염은 다시 그의 왼팔을 건드렸다. "그리고 여기!" 진자앙은 눈썹을 치켜 떴다. 매불염은 지금 그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가 운기하고 있는 동안 매불염이 이미 그의 상세를 진단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진기요상법을 써보세요!" 진자앙은 다시 웃었다. "그런 건 배운 적이 없소. 난 그냥 조금 쉬면 나을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오. 그래요, 어차피 이 상태로 가봤자 도움이 안 될 테니좀 낫거든 갑시다. 소저의 상처도 치료하고." "제 상처요?" 매불염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진자앙이 그녀의 옆구리와 왼발을가리켰다. 옆구리는 역시 귀견수에 스친 부분이고, 발목은 바위에 깔려 접질러진 상처였다. 그는 품속에 손을 넣어 약을 꺼내었다. 사문의 비전 화타고였다. "상처에 바르시오. 발목은 좀 만져 드리지요."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매불염의 발목을 잡았다. 매불염이 움찔피하는 듯하더니 포기하고 그의 손에 발목을 맡겼다. 금강당은 맞고 다치는 것에 대해서는 강호 어느 문파의 추종도 불허할 정도로 전문가적인 단체, 그 오 대 당주인 진자앙도 남 못지않게무수한 상처와 타박상을 경험해 왔다. 그런 그얘개 매불염의 상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간단하게 매불염의 발목을 고쳐 주고는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약은 직접 바르시오. 효과가 있을 거요," "아……!" 열굴을 붉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매불염은 곧 옆으로 돌아앉아 옆구리의 옷자락을 들추고 화타고를 발랐다. 그리고는 진자앙의 왼팔을잡았다. 하지만 진자앙의 괄에는 고양이 발톱에라도 할퀴어진 것처럼 붉은자국 하나만이 있을 놘이었다. "대단하군요. 귀견수애도 끄덕없다니! 그래도……!" 매불염은 그 자국 위에 약을 바르고는 물러났다. "일반적인 외공으로는 도저혀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을 텐데……, 이상하군요. 금강당에는 특별한 수련법이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특별한 심법이라든가……!" "진기요상법도 배우지 못한 내가 특별한 심법을 알고 있다고요?" "진기요상법은 자잘한 것이니 모를 수도 있지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녀는 잠시 침목하터너 진자앙의 상처를 가리켰다. "보세요, 급속도로 상처가 아물어 가잖아요? 설마 약효가 이령게 좋은 건 아니겠지요? 뭔가 진 공자도 모르는 특별한 것이 금강당의 무공에 있는 거지요." 진자앙은 다시 웃었다. "소저의 상처도 그렇잖소. 아까는 근육이 상한 것 같았는데 이제는자국뿐이구려. 아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요." "저야 어려서 영약을 먹어 그렇다지만……!" 매불염은 간단하게 진자앙을 반박하다 말고 두 가지 점을 떠올렸다. 영약은 그녀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자앙도 영약을 먹었기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옆구리라고 하지만 어쨌든 속살인데 진자앙이 어느새 보고 있었다는점이었다. 그녀는 돌아앉으며 눈을 흘겼다. "나빠요!" 그녀의 눈은 물론 면사 아래 감추어져 있으니 진자앙에게 보일 리가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태도에서 수줍어하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웃었다. 억지로, 혹은 습관적인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유쾌해져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무언가 달콤한 감정이 가슴을 부드럽게 풀어 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광동어는 언제 배우셨소?" 매불염이 흠칫 놀랐다. "무슨 말씀이시죠?" "지금 광동어로 말하고 계시잖소. 그것도 완벽한 억양으로. 광동 출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데…… !" 매불염은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그들은 북경어로만 대화를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광동어로 바뀐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 잠시 광동에 살았지요." 그녀는 짧게 말하고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이미 해는 모습을 감추고, 남은 잔영만이 하늘을 보랒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보랏빛 하늘과 구름들, 보랏빛의 산과 협곡이었다. 이재는 무너진 협곡이지만. 그녀는 생각을 현실로 돌려 과연 이 무너진 돌더미 안에 몇 명의 사람들이 묻혀 있는지, 남은 광풍사는 몇 명일지 생각괘 보았다. 어떤 타격을 받았든 간에 광풍사는 한번 노린 먹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후퇴도 없다. 만약 이 두 가지 전제를 어기면 그때는광풍사에겐 전멸되었을 때보다 더한 패배감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녀는 이재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깊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진자앙과 매불염은 그날 밤이 깊어서야 겨우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진자앙은 몸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사실 회복되었다 해도경공이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매불염의 손에 잡혀서 반쯤 떠가다시피할 수밖에 없었다. 팔을 잡혀 끌려가는 것이 아주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직접 뛰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자앙의 이마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산만한 사내가 조막만한 여인네에게 들려 가는 것처럼 된 형세가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부드러움, 따스함, 그리고 묘한 신뢰감…… 그가 잡은 이 작은 손에서 시작된 묘한 느낌이 그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정말 이런 기분은 처음인데……!' 그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쉽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매요신의 양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여인에게.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일까……?' 그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아주 오래 전에 만난 염정을 제외하면 그가 만나 본, 그리고 잘 아는 여인이라고는 어머니와 누나들밖에 없지않은가. '아, 또 있지!' 잘 아는 것은 몰라도 만나 본 여인이라면 과연 또 있었다. 검은 비단옷을 차려입은 당문의 여인. 당삼고 당려려도 본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녀는 절대 아니었다. 몸매는 비슷했지만 당문의 여인이 매요신의 양녀가 될 리가 없었고,결정적으로 분위기라는 것이 전혀 달랐다. 당려려가 차갑고, 도도하면서도 노숙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면 매불염은 신비롭고도 어딘지 친밀한 분위기였다. '내가 윌 눈치챈다는 게 무리지!' 진자앙은 포기해 버리고는 광풍사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들은 어디까지 갔을까?' 출발 시간으로 보아서 광풍사는 그들보다 적어도 아흡 시진은 앞서있다. 게다가 그 속도라면 지금 그들이 달리는 속도에 별로 떨어지지도 않으니 아홉 시진의 시간차는 황금장에 도착할 때까지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생사의 승부에 아홉 시진이나 늦는다는 것은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도착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 그는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힘이모자라 돕지 옷한다면 모르지만 시간에 늦어서 못 돔는다는 것은 참을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들의 앞에 그것이 보였다. 이릉의 들판을 바라보는 고갯마루에서 그들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였다. 그들의 맘에는 거대한 화염이 쏠고 간 잔해만이 남아 있었턴 것이다. 이릉의 들판, 끝이 보이지 않던 곡식의 푸른 바다는 지금 완전히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이곳저곳애서는 아직도 작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고. 달빛 아례 검은 연기가 펴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더러운 놈들!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진자앙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과거의 전쟁 때애도 이런무참한 짓은 없었다. 농민들의 생명과 같은 곡식을 모두 태우고도 어쪄 그들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잘됐군요!" 진자앙은 놀라서 메불염을 노려보았다. 매볼염은 들판의 끝을 가리켰다. "바람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불고 있어요. 그건 들판의 이쪽에서 불을 붙였다는 뜻이지요. 아마도 이 들관에 흑시 메복괴 있을까 봐 그런모양인데……, 한편으로는 이성을 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어쨌든 그들은 볼이 머느 정도 껴질 레까지 들판 이쪽편에서 쉬고 있었을 테고, 그건 우리가 그만큼 시간을 벌었다는 뜻이 돼요. 그들이이성을 잃었다는 것도 중요하고……,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투지도 어느 정도 감소렌을 테고…… 여러모로 유리하지요." "농만들은 어쩐단 말이오?" 진자앙은 매불염의 생각이 맘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정확한 판단이라 해도 이런 참상을 보고도 어떻게 계산만 할 수 있단 말인가. 매불염이 그를 힐끗 보았다. "그들은 언제라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위인들이에요. 이번 기회에그들을 없애면 다시는 이런 일도 없겠지요. 들판의 곡식은 어떻게든보상할 수도 있지만 지금 그들을 놓쳐 버리면 천추의 한이 될 거예요!"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불염의 말이 옳았고, 그는 지금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평생 처음 느져 보는 격렬한 분노였다. "갑시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매불염의 손을 잡아당겼다. 자기 걸음이 더 느린 걸 알면서도 잡아 끌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로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앞에 어느 순간 북천사흉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가마와 함께였다. 황금장의 일차 격전은 끝났다. 혈곡에서 살아남은 광풍사의 무리는 이백여 명, 그들은 매불염의 예상대로 원래와 예정 시간보다 다섯 시진 늦게 왔고, 황금장의 성채를둘러싸고 다시 두 시진의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제 황금장 내부,전각군을 앞에 놓고 다시 한번 격전의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금장 내부에서는 그런 준비가 전혀 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황금각의 넓은 취의청에 모여 긴장된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원굉도가 그답지 않게 분노한 표정으로 외쳤다. "야, 이 개똥 같은 놈아! 네가 그러고도 일개 문파의 장문인이냐! 이 말라 비틀어진 말 뼈다귀야, 개도 안 핥을 똥막대가 같은 놈!" 원래 마음 같아서는 하고 싶은 욕이 더 많았을 것이지만 그는 표현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평생 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는 욕이 별로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욕설만으로도 철검군자 요무생은 충분히 분노했다. 구대문파에도 못 드는 군소문파인 무릉파의 주인이지만 그래도 그는일개 문파의 장문인, 언제 이렇게 험한 욕을 들어 보았을 것인가. 게다가 그는 평생 떠받들어지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요무생은 낮빛을 시커멓게 물들이며 두 눈에서는 살기를 흩뿌렸다. "아무리 대선배라지만 참는 데도 찬계가 있소! 또 나는 참아도 이검은 절대 참지 못할 것이오." 그는 검을 살짝 움직여 보였다. 강호에 유명한 그의 철검이었다. 그러나 지금 모두가 그 철검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그의 성명병기여서도 아니었고, 또 그것이 철을 두부 베듯 한다는 보검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점은 그 철검이 황금장의 주인인 호두태의 목에겨누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음충맞은 웃음을 흘리며 호두태를 향해 말했다. "너무 날 욕하지 마시게, 호 장주! 우리 무릉파가 아까 얼마나 많은희생을 했나? 여기 온 이백여 명 중에 불과 삼십 명밖에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우리도 열심히 싸웠단 말일세! 하나 그들은 얼마나 죽었지? 겨우 오십 명일세! 광풍사의 그 도적놈들은 정말 강해도 너무 강하단말이야. 이젠 원 노선배, 맹 노선배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함락은 시간 문제야! 그 전에 살아 보자는 것 아닌가? 또 그냥 가면 백오십 우리 무릉파의 죽음은 뭘로 보상하나? 그러니 여기 지천으로 널린 황금좀 나눠 갖자는 거 아닌가! 비밀통로도 가르쳐 주고……" 그는 긴장된 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오십여 무릉파의 문도들,그리고 맹, 원 두 사람과 황금이노, 매요요, 살아남은 황금기사단의마지막 두 명인 박파 이당과 귀검행 사마연 등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호두태를 보며 웃었다. "비밀통로가 없다는 얘긴 말게. 이런 곳에 비밀통로가 없다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거야!" "옷어 보려무나!" 호두태가 차갑게 말했다. "지나가는 개를 부를 필요 없이 네가 그냥 웃어라! 우리 황금장에는비밀통로 같은 건 없으니까." "정말 없나?" "없다!" 요무생은 눈을 살기로 번들거리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도극도의 긴장상태 속에 있는 것이다. 여기 호두태를 제압했으니 이 취의청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무서울 것도 없지만 취의청 밖, 그보다 황금각 밖애 있을 광풍사가 두려웠다. 그래서 얼른 금을 챙겨서 빠져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밀려오기 전에. 그것이 애초 여기 황금장에 올 때부터의 계획이었다. 재수없이 기화를 놓쳐서 백오십이나 죽은 것이 한스러을 뿐이었다. 그는 검을 내밀러 호두태의 목을 살짝 베었다. "죽어도 없어?" 호두태의 않섹은 태연하기만 했다. "아버지나 나나 두려운 계 없는데 왜 도망갈 구멍 같은 것을 만들었겠나? 날 죽여도 그런 건 없다. 죽일 기회도 없겠지만!" "뭐라고?" 마지막 말이 이상하다고 느낀 요무생은 뒤로 꺾은 호두태의 팔을 더욱 힘있게 움켜쥐고, 다른 한편으로는 검을 더 바짝 밀었다 이렇게하다가 죽이게 돼도 하는 수 없다는 의미의 난폭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비스듬히 넘어가서 바닥과 입맞춤을 해야했다. 호두태를 잡은 팔은 오히려 뒤로 꺾이고, 그의 철검은 호두태의손가락에 잡혀 있었다. "이런 것으로 날 위협해?" 호두태는 철검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쨍--! 철검이 반 동강이 나서 날아가 버렸다. 실은 호두태, 그도 무공을익혔던 것이다. 그것도 일개 문파의 장문인을 제압할 정도의 무옹을……그보다 더욱 중인들을, 특히 매요요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천천히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근 이 년간 그의 몸을 의탁해 온 바퀴 의자에서 일어나 그 발로 요무생의 등을 밟았다. "네가 불순한 마음을 먹고 왔다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스스로군자라고 떠드는 놈치고 진짜 군자는 없지. 군자는 스스로 일컫는 게아니란 말이다!" 맹방평이 입을 벌렸다. "소두야, 빨리 정리하고 싸을 준비를 해야 한다." "예, 사부님!" 이번에는 원굉도의 눈이 휘등그래졌다. "뭐? 소두? 사부? 이게 무슨 소리야?" 맹방평이 대답했다. "그가 내 유일한 제자일세." 호두태가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긍정하고 검을 움직였다. 요무생의머리는 간단하게 그의 목에서 떨어져 굴렀다. 호두태는 그 머리를 철검애 꽃아 치켜 들었다. "이런 위군자 따위에게 충성을 바칠 쓸개 빠진 사람이라면여기서 마저 죽여 주겠다. 그러나 이제라도 마음을 돌려 황금기사단에들어오겠다는 사람에겐 죄를 묻지 않겠다. 여기서 도망갈 구멍도 없으려니와 혹시 있다 해도 너회들은 알 수도 없을것이다. 하지만 죽기를각오하고 싸우면 혹시 살 수도 있겠지." 무릉파의 잔당들얘게 한 말이었다. 잠시 망설이턴 그들이 하나둘씩 굴복하고 나자 그는 그들을 취의청밖으로 내보냈다.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매요요가 그를 향해 말했다. "이재 제 차롄가요, 가주?" 호두태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군요, 어머니, 어머니가 저를 층동질해서 광풍사와 싸우게 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저는 광풍사와 싸우려고 했습니다. 비록 어머니가, 매요신이 계획적으로 여기침투시켜 아버님의 소실이 되게 한 첩자라 해도, 사인교주를 부르고형산파의 대부도를 시괴 원 노선배님까지 끌어들인 장본인이라 해도 전 문재삼지 않습니다. 다 계 계획에 방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단지……!" 그는 철검을 메요요치 발 앞에 던졌다. "한 가지는 도저히 응서가 되지 않는군요. 하지만 그건 제게도 잘못이 있으니 어머니를 탓할수 엄군요. 알아서 결정하실 일이겠지요." 그는 돌아서서 칠의청을 나갔다. "전투 시작입니다!" 매요요는 이제 아무도 없는 취의청에 홀로 서서 호두태가 던지고 간철검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아직도 요무생의 머리가 꽃혀 있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나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했거니와……!" 그녀는 요무생의 머리를 발로 걷어차 검에서 빼내었다. "너도 나를 사랑했던 모양이구나……! 어머니와 아들……! 슬픈 운명이 아니랴?" 그는 허리를 굽혀 철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품에서 수건을 꺼내거기 묻은 피를 닦았다. "이제 내게 죽음을 주는 것이 네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 것인지도 알지……! 그러기에 차라리 죽어 주마. 네가 준 이 검으로……!" 그녀는 검을 안고 앞으로 엎드렸다. 철검은 그녀의 가슴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서 등으로 빠져 나왔다. 피도, 신음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황금장의 진짜 방어선은 전각군이었다. 황금장의 진짜 무기도 바로그것이었다. 맹방평은 그것을 미리 짐작했으면서도 막상 그 위력을 보고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방어군의 수는 총 오십칠 명, 그나마 오십명의 무릉파의 쓸모없는 졸개들이었다. 그들은 기껏해야 머릿수밖에 채울 수 없었고, 그나마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각군 안에 장치된 무수한 기관과 암기들은 방패로 해서 싸우는데도 그랬다. 전각군 안은 천하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암기와 기관장치의 숲이었따. 전각 자체가 흑오석과 만년한철 덩어리였기 때문에 무너뜨릴수도, 불에 태울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통로로 들어가지않으면 언제까지나 헤매고 다녀야 했다. 제대로 된 통로로 접어들어도 사태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들어올 때의 그 꼬불꼬불한 통로에 온통 기관장치가 가득한 것이다. 그것은 미로 아니면 사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불공평한 싸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쾌여풍은 도둑, 그만큼 암기에 능한 사람이 없고, 또 그만큼기관장치에 능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싸움은 초반에는 기관장치와 그것을 푸는 쾌여풍의 머리 대결이 되었고, 나중에는 전각군의 마지막문을 놓고 피 뒤기는 격전을 벌이는 공방전이 되었다. 이때 광풍사의 인원은 처음의 십분의 일밖에 안 되는 오십여 명, 황금장의 인뭔은 단 여섯 명이었다. 그들이 청룡전의 마지막 관문 앞에서 흔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원굉도는 평생 단 한 가지 무공만을 주력해서 익혔고, 또 그것만을장기로 삼았다. 경공이니 검법이니 하는 것은 그저 가르치니 배우고심심해서 사용하는 정도일 뿐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 그를 뇌공이라 불리게 한 일격휴, 정식 명칭으로는 자오뇌정추라 불리는 장공에만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던 것이 이 자오뇌정추는 적이 멀리 있으면 먼 대로,또 가까이 있으면 가까운 대로 사용법이 있고, 그 어느것이나 막강한위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비록 맹방평에게는 여러 번 사용하면 삭신이 쑤신다는 등,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농담일 뿐, 체력이 허용하고진기가 남아 있는 동안은 게속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그는 이미 서른네 번째로 자오뇌정추를 격사해 내었다. 그의 손과 팔은 마치 그 자체가 번개가 된 듯이 보이지 않는 불꽃을내뿜었다. 그 손에 정면으로 걸린 복면의 사내, 광풍사 이십팔수 중스물다섯 번째인 창룡기표의 옆구리 전체가 불에 구어진 돼지고기 뜯어지듯이 뜯겨져 나갔다. 그의 옆구리에서는 피도 흐르지 않았다. 단지 역겨운 냄새와 함께흰 김이 솟아올랐을 뿐이었다. 이래서 광풍이십팔수는 열한 명만이 남게 되었다. 아홉이 그의 손에죽은 것이다. 살아남은 광풍이십팔수 중 두 명, 현무허서와 현무위연이 눈을 뒤집고 원굉도에게 달려들었다. 현무허서는 작은쥐꼬리 같은 쇠꼬챙이를 무기로 사용했고, 현무위연은 제비꼬리같이두 갈래로 창날이 갈라진 연자창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는 길고, 다른 하나는 극히 짧은 이 대조적인 협공은 서로의 단점을 적절히 보조해 주면서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현무위연이 현란하게 조화를 부리며 뻗어 낸 연자창 바로 아래로 몸을 숨긴 현무허서가 순간적으로 원굉도의 발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아래에서부터 위로 공격해 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 사람이 싸우면 거리와 자세에 따라 다양한 공격이 나올 수 있지만 극히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발 아래, 혹은 다리 바로 아래에서 행해지는 공격이란 없는 법이었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사각을 찔리는 행위이지만 공격하는 사람도 동시에자기 몸을 무방비 상태로 던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굉도에게는 발 아래가 사각이 아니었다. 그는 바닥에 닿을 정도로 손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기본자세였기때문에 굴러오는 현무허서를 아래에서부터 그대로 후려치면서 머리를찔러 오는 연자창을 향해 던져 버렸다. 크악--! 현무허서는 비통한 단말마를 지르며 동료의 창에 꼬치가 되어 버렸다. 그런 시체를 다시 한번 원굉도의 뇌정추가 관통해 버렸다. 그를공격한 것이 아니라 그 시체를 창에 꿰고는 허등거리고 있는 현무위연을 노린 것이었다. 어떤 죽음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현무위연의 죽음도 그리 보기 좋은죽음은 아니었다. 그는 현무허서의 가슴팍을 등글게 파며 날아온 뇌정추께 어깨 위가 통째로 가루가 되어 버리는 죽음을 당해 비명을 지를틈도 없었다. 원굉도도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따위 조무래기들을 때려잡자고 산을 내려온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장에 붙어 거의내려오지 않고 있는 쾌여풍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 겁쟁이야! 이리 내려와! 내려와서 한판 붙자니까!" 대답은 귀견수가 대신했다. 이것에는 천하의 원굉도도 별 대책이 없어 그는 바닥을 뒹굴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정면으로 붙는다고 해도 이제는 이길 자신도없었다. 쾌여풍은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생각날 때마다 암기를 뿌려그들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고스란히 진기를 소모해 가며 적들을 때려 죽인 것이다. 이제는 그도 지쳐서 앞으로 한두 방 정도 더 쓰면 쓰러져 버릴 것같은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바닥을 뒹군다지만 사실은 절묘한 경공술로 바닥을 손끝 발끝으로짚고 회전하는 원굉도였는데 한 순간 그 신체 균형이 깨어졌다. 바닥에 질펀하게 뿌려진 선혈이 그의 발끝을 미끄러뜨렸던 것이다. 원핑도는 아차 하는 사이에 정말 바닥을 구르는 신세가 되었다. 때를놓치지 않고 이십팔수의 마지막 서열인 주작진인이 이름처럼 지렁이같이 보이는 원통형의 긴 채찍을 휘둘러 그를 후려쳤다. 원굉도는 순간적으로 판단하고는 방향을 바꾸어 시체 더미로 굴렀다. 팍--! 주작진인의 채찍은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단단한 흑오석의 돌바닥이 불꽃을 튀기며 가루를 날렸다. 원굉도는 상처 하나 입지않고도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그때 주작진인의 키가 약간 커졌다. 그리곤 곧 목이 부러져 대롱거렸다. 뒤에서 맹방평이 목을 잡아 꺾어 버린 것이다. 원굉도는 그제야 일어서면서 욕설부터 내뱉었다. "젠장! 말년에 이게 웬……!" 그러나 맹방평은 그의 욕설을 듣고 있을 시간도 없잖아. 원굉도를구해 주느라 방치해 둔 그의 상대들이 벌떼처럼 덤벼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무공도 원굉도의 그것처럼 간단해 보였다. 또한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는 단지 다가오는 자들을 잡아서 목이면 목, 손발이면 손발을 꺾어 버릴 뿐이었지만 이 아수라장에서 그것은 곧 죽음을 선고하는 셈이었다. 싸우는 도중에는 누구도 자신이 밟아 뭉개는 것이 산 사람인지시체인지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싸우는 모습으로 보아 가장 화려한 것은 황금이노였다. 그들은 황금장의 보물창고에서 꺼내 온 듯한 여러 자루의 보검과 보도들을 등에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그 보검들을 마구 휘둘러 사람을 죽이고, 날이무뎌졌다 싶으면 던져 버리고는 다른 것으로 또 휘두르곤 했다. 그래서 그들의 주변은 선혈로 피분수를 이루었고, 버려진 보검과 보도에 횃불이 반사되어 무지개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러나 전세는 그들에게 불리했다. 원굉도나 맹방평, 혹은 쾌여풍과 같은 초고수라고 해도 슷자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죽여도 죽여도 적은 계속 덤비고,좁은 장소 탓에 실력을 발휘할 충분한 공간을 확보할 수도 없었다. 하물며 그들과 잘은 초고수가 아닌 바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박파는 이미 오래 전에 다른 곳에서 죽었고, 승부사 귀검행이 이 자리에까지 온 사람 중에는 제일 먼저 검을 꺾었다. 그는 죽이고 죽이다 지쳐 결국 일격을 허용하고 장검을 휘둘렀지만그것은 바닥을 쳤다. 그 순간 날아든 칼들이 그를 어육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음은 황금이노였다. 아무리 많은 칼도 다할 때가 있고, 바다같이 넓은 공력도 마를 때가있는 것이다. 왕년의 곤륜이노, 전설 속의 산 곤륜에서 왔다는 두 검객도결국엔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광풍 앞에 목을 떨구었다. "이노--!" 호두태가 처절하게 외쳤다. 그와 황금이노의 인연은 단순히 주인과 종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가장 인자한 할아버지였고, 조금 나이가 들첬을 때는 엄한 스승이 되어 주었으며, 나중에 가문을 맡게 되었을 때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언자들이었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어머니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황금벽 안에서 그들만이 그의 유일한 친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도 없었다. 광풍의 도적들은 아직도 이십여 명이나 있었지만 그들은 단 세 명만남았다. 게다가 쾌여풍은 본격적으로 나서지도 않은 참이었다. 그는광풍사의 거의 대부분이 전멸당하는 것을 보면서 마치 자포자기라도한 듯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기르는 개가 호랑이를 사냥하는 것을 보는 주인처럼 산속의 제왕 호랑이가 결국 지쳐 개들에게뜯어 먹히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한 잔인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고있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얘 흐르는 붉은빛은 광기와도 홉사한 것이었다. 그것이 보기 싫었던가. 뭔굉도는 최후의 일격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는 최후의 진력을 두 손에 모아 순간적으로 쾌여풍에게 날려보내었다. 콰앙--! 만년한철로 틀을 만들고 흑오석으로 벽을 쌓은 천룡전의 천장이 맹렬하게 신음하더니 한 순간 폭발하듯 뚫려 버렸다. 원괼도의 지친 눈은 천장의 구멍이 아니라 꽤여풍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없었다. 쾌여풍도 바보는 아니고, 맹방평와 원굉도를 발 아래 볼 정도로 오만한 자도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 둘만은 시선을 례지 않고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굉도의 죄후의 일격 따위는 아무령지 않게 피할 수 있었타. 그 순잔이 그가 등장할 시간이었다. 그는 언제 거기 가 있었는지 천장 반대편에서 나타나더니 천천히 허공을 발으며 아줴로 내려왔다. "이재 끝날 시간이지?" 그가 손을 가볍개 뒤집자 거기 귀견수가 나타났다. 양손에 하나깩두 개의 귀견수. 맹방평과 원굉도의 목을 떨굴 마물이었다. 원굉도는 지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맹방평은 그보다는 사정이 좀 나은지 십여 명의 광풍사 무리에게 둘러싸여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다. 하나, 이젠 그의 손 힘도 다했는지바닥에 떨어진 칼 한 자루를 주워 들고서였다. 어느쪽이든 쾌여풍의 손짓 한번에 당하고 말 상황이었다. 쾌여풍이 손을 흔들었다. "다들 물러서라!" 광풍사의 무리들이 뒤로 물러섰다. 싸움은 멈추었다. 그러나 오늘의모든 싸움 중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싸움이 이제 벌어질 찰나였다. 쾌여풍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치켜 뜨고 두 사람을 보았다. "이공을 한꺼번에 죽이게 되는 행운이 내게 올 줄은 몰랐귄 이쯤되면 사마의 제일은 내가 아니겠나?' "네가 대단하긴 하지!" 원굉도가 주저앉은 채 말했다. "너처럼 정신까지 철저히 개 같은 놈은 보다 보다 처음 봤으니 정말대단하고말고!" "칫!" 쾌여풍이 가볍게 혓소리를 내었다. 원굉도가 움찔했다. 그러나 귀견수는 쾌여풍의 손 안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원굉도의 얼굴은 독한 술을 잔뜩 먹은 것처럼 빨개지고, 쾌여풍은통쾌하게 웃었다. "푸하하하! 누가 누굴 보고 개라고 하는 건가? 이봐 원숭이, 난 개치고는 이빨이 날카롭다네. 한번 물려 볼 텐가?" 그는 다시 한번 손을흔들었다. 역시 귀견수는 날아가지 않았고, 이번애는 뭔굉도도 꿈럭하지 않았다. "모욕을 줄 생각이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누가 네 개이빨 따월 무서워할 줄 알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치 목 어림으로 등글게 혈선이 그어졌다. 귀견수가 소리도 없이 날아와 목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것도목을 완전혀 한바쥐 돌아 그어 놓고 간 것이다. 쾌여풍은 다시 한번 웃었디. "이래도 내 이빨이 무섭지 않나?" 그는 지나치게 여유를 부렸다. 평소 같으면 일단 죽여 놓고 여유를부렸갰지만 오늘 그는 가진 것의 대부분을 잃었고, 그것은 그를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언개 만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공을 죽일 기회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콰앙--! 관문의 뒷문이 터져 나갔다. 그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맹렬하게 뛰쳐 들어왔다. 발이 여러 개 달린 기이한 상자, 북천사륭이 든 사인교였다. 시인교와 북천사흉은 살아남은 이십여 명의 광풍사를 향해 그대로밀고 들어가는대, 그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쾌여풍을 향해 뻗어 갔다. 줴여풍의 몸이 떠밀린 것처럼 뛰로 물러났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는두 개의 귀견수가 날았타. 검은 그림자, 매불염은 그 귀견수 사이로 그림자처럼 라져서 쾌여풍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이 섬광을 뿜어 내며 좨여풍의 목을 노려갔다. 안력이 극히 뛰어난 맹방평 정도외 사람만이 그 섬광이 한 자루검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자 길이의 은빛 검이었다. "흐훗!" 꽤여풍의 입술 사이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여전히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서면서 다가오는 매불염을 향해손을 당겨 보였다. 마치 이리 와보라고 하는 동작 같은데 사실은 공격이었다. 파앙--! 그의 가슴팍에서부터 가는 빗살파도 같은 은빛 섬광들이 분수처럼뿜어졌다. 동시에 공중을 날던 귀견수들이 회전을 하며 매불염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매불염은 번개처럼 덮쳐 가는 도중, 도저히 피할 길이란 없어 보였다. 순간 매불염의 몸이 그 자리에 꼿꼿이 섰다. 달려오던 기세라는 것은 전혀 관계없이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은 자세였다. 그 순간에 쾌여풍의 가슴에서 발사된 은린폭염과 뒤에서부터 날아든 귀견수가 매불염의 몸에 박혀들었다. "하……!" 쾌여풍의 입이 벌어지다가 멈춰 버렸다. 은린폭망과 귀견수가 서로부딪쳐 공중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원래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도 그랬다. 매불염은 허깨비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꼭 그녀의 키만큼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이형환위!" 물론 그도 할 줄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그것을 생각해내고, 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다. 고도의 감각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묘기였다. 매불염은 허공에서 그를 향해 검을 내밀었다. 그 끝에서 하얀 섬광이 쭉 뻗어 나왔다. 꽤여풍은 다시 한번 놀랐다. "검강!" 고도의 수련을 쌓은 절정검객만이, 그것도 내공이 삼화취정, 오기조원의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검강이었다. 공중예 뜬 상테얘서 매불염이 쾌여풍을 향해 쏘아 낸 그 검강은 그러나 아쉽게도 각도가 약간 빗나가 있었다. 쾌여풍은 고대로 뒤로 더 물러났다. 총망중에 한 계산으로도 충분히검강을 피하고 남을 이동이었다. 그러나 그 이동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철벽과도 같은뭔가애 부딪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쾌여풍의 안색이 급변했다. 분명 그는 이미 떨어져 나간 뒷문을 향해 물러서고 있었다. 그가 미리 봐둔 바에 의하면 그의 진로를 막을그 무엇도 없어야 옳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회전하며 방금 매불염이 펼쳤던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옆으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막혔다. 철기등과도 같은 무엇인가가 그의 어깨에서부터 한바퀴 감아 왔다. 그리고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해 버렸다. 그것은 사람의 팔이고, 손이었다. "누구……!" 그 순간 검강이 그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그는 번개를 맞은 것처럼멈칫하더니 그대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 갔다. 그의 눈은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빛이 가득한 채였다. "도대체 누가……!" 진자앙은 쾌여풍의 몸이 경련을 멈추고, 마침내 생명의 징후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 시체를 뒤에서부터 부등켜안고 서 있었다. 쾌여풍의 정수리에서부터 뿜어진 피를 분수처럼 맞으면서 그는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침내 그가 쾌여풍의 시체를 놓아 주자 그것은 비로소 안식을 얻고바닥에 길게 널브러졌다. 매불염이 그를 나무랐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런 위험한 짓을……!" 진자앙은 부상 때문에 나중에야 들어왔다. 그리고 쾌여풍이 그를 향해 물러나자 지식법으로 호흡을 숨기고 잡아 버렸던 것이다진자앙은 더듬더듬 말했다.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이 사람은 너무 죄를 많이 졌소……!" 매불염은 그를 죽이도록 도운 게 잘못됐다가는 게 아니라 위험한 행동을 한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진자앙의 기색이 이상했던 것이다. 진자앙은 눈물이 글썽해서는 쾌여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인을 도왔다는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만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버렸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험난한 강호생활을 어찌 할 것인가……!' 그래도 진자앙이 그러느라고 북천사흉이 광풍사의 남은 인원들을도살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들은 손발로 이십여 명의 사람들을 때려 죽이고 찢어 죽였는데 사람이라면 차마 볼 수 없을정도로 잔혹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맹방평이 천천히 진자앙에게 걸어와 어깨를 두드렸다. "오면서 이릉의 들판을 봤느냐? 전자앙온 고개릉 끄덕었다. "그럼 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들아섰다. 원죙도가 중얼거렸다. "끝인가?" 호두태가 그 말을 받았다. "끝입니다." 황금장을 시체의 더미로 만들어 능고 근 백여 년에 걸친 광풍의 행진은 끝이 났다. 무림사마 중 두 번쩨의 죽음이었다. 밤이 되었지만 진자앙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볼 수 없었을 대살육의 현장을 보고 난 뒤라 속이울렁거려 도저히 잘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정원에 원굉도가 앉아 있을 줄은 그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원굉도는 정원석에 쪼그리고 앉아 달을 보고 있다가 그를 보고는 옆자리를 두들겼다 와서 앉으라는 표시였다. 진자앙은 그를 만나 같이 지낸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원굉도가세속의 체면이나 예의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 옆에 앉았다. 원굉도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켰다. 진자앙은 그가 낮의 격전으로 기력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그의 태도에는 단순한 무기력증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허탈감이라는 것을 그는 나중에야알았다. 그래서 원굉도의 첫마디는 그로서는 의외의 말이었다. "운리무가 왜 그렇개 맥없이 죽었을까?" 오늘 좨여풍의 죽음을 본 그의 입에서 왜 운리무의 죽음 이야기가나온단 말인가! 진자앙은 고개를 갸옷거리다가 대꾸했다. "맹 노선배님이 그보다 고수셨기 때문에……!" 원굉도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싸우는 것을 봤지만 그는 나보다 하수거나 비슷한 정도에 불과해. 운리무는 그럼 그보다도 더 하수였을까?" "그럴 수도 있지요." 원굉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널 거야! 절대 아니지!" 그는 일어나서 정원을 서성거리다가 그를 향해 말했다. "니는 평생애 두려운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운리무였다." 진자앙은 입을 딱 벌렸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원굉도와 같은 고수가 누군가를 두렵다고 말하는 것은 평생 다시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말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고, 그것은 진자앙과 같은 하수가 감히 뭐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와 나는 지닌 무공의 성격이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먼저 발견해서 먼저 공격하면 질 수가 없는 무공이지!" 그의 자오뇌정추와 운리무의 전궁을 비교해서 하는 말인데, 진자앙은 그럴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맹 형의 무공은 접근해야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사람을죽이는 것보다는 제압하자는 쪽이기 때문에 성격상 우리 무공에 당할수가 없어! 죽자고 싸우면 살기가 짙은 무공이 이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 "그와 나를 비교하자면…… 나는 그가 위라고 본다. 내 뇌정추는 거리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효율성에 있어서도 그를 따를 수가 없지. 그래서 내가 일격휴, 그가 이발불요로 의미상 비슷한 별호를 가지고 횡행하는데도 나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솔직히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없었기 때문이지." 진자앙은 그제서야 한마디할 기회를 얻었다. "굳이 싸울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싸울 이유는 있었다. 내가 피했을 뿐이지." 원굉도의 오랜 친구 중에 형산초자 위불악이라는사람이 있었다. 이름 그대로 천하에 다시없는 호인이었는데 어쩌다가강호의 세력 다툼에 말려들어서 시비를 일으키게 되었다. 흔히 있는 일이고, 흔히 그런 싸움의 결과가 그렇듯이 몇몇이 피를보게 되었는데 그가 그 중 하나였다. "어느 날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가 죽었지. 이마에 화살 하나가 꽃혀서." "그럼……?" "운리무의 짓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운리무를 찾아 다녔는데 일 년을 헤매도 못 찾고 그냥 돌아왔지. 그때 사실…… 못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리저리 다니면서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보니 도저히나는 못 이기겠다는 결론이 섰기 때문이다." 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대신 나는 죽은 친구의 손자를 형산파에 입문시켰지. 그 아이에게라도 대신 사죄를 하고 싶었다. 그 아이가 날 여기 데려온 대부도위청진이다." 진자앙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상환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전에 항주얘 있을 때 너를 공격한 몇 놈 중의 하나다. 도끼를 무기로 쓰는 놈!" "아……!" 진자앙은 그재야 기억이 났다. 문 뒤예 숨어 있다가 뒤에서 도끼로쳤던 자가 대부도였던 것이다. 원굉도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이 그때 그런 행동을 한 것은 분명 등천비룡문과 관계가 있는일이었지. 그런태 이번 일은 또 뭔가? 아무러 생각해도 등천비룡문과이 일은 관계가 없다. 오히려 황사 매요신의 사주를 받았다는 생각이짙게 든단 말이다." "……!" 호두태의 말이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어쨌든 그놈은 여기 황금장 지하에 잡혀 있었다. 내가 직접 닦달을해봤는데……, 그냥 등천비룡문 상부의 지시를 받고 한 일이라고 하는구나. 그럼 황사 매요신과 등천비룡문이 뭔가 관계가 있다는 말인데…… 이런 복잡한 일은 나보다는 맹 형이 잘 알 테니 그에게 맡겼다. 대신 사정을 했지. 그놈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그는 진자앙을 보았다. "대신 보답으로 네게 자오뇌정추를 가르쳐 주마!" 진자앙은 벌떡 일어나 손을 저었다. "그분을 데려가시는 거야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 왜 제게그런 은혜를 주시려고 하십니까?' "아까 했던 말이지만 맹 형은 네가 없었으면 운리무를 이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번 꽤여풍의 경우도 그렇고. 그래서 네게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이다. 원래 그 아이를 처단하는 권한은 호두태가 가지고 있지만 그 아이야 맹 형의 제자고. 그러니 네가 좋다고 하면 다 좋은 것이지." 진자앙은 바람개비 흔들듯 손을 계속 내저었지만 원굉도는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말을 계속했다. "십대고수라지만……, 우리는 사실은 백년 전의 십대고수다. 길게잡아도 백년 전에서 오십 년 전까지가 전성기였지. 그럼 그 동안 숱한세월이 흘렀으니 더 강해지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우린 조금도 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못해졌을 것이다. 체력이라면 모르지만 내공이라면 그 세월 동안 늘지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다." 그는 스스로 묻고 대답하면서 그 동안 생각한 깊은 심경을 털어놓았다. "내공은 수련만 하면 무한정 늘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정 단계에 올라가면 그 다음 단계에 오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난관에부닥치게 된다. 그것은 심마일 수도 있고, 기나긴 세월일 수도있고, 불가, 흑은 도가적인 깨달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없으면 한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올라설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외물의 도움으로 일찍 경지에 올랐던 나는 남들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그 고통 속에서 해매 다녔는지도……!" 그의 눈이 아련한 빛을 띠었다. "또 어쪄면 운리무나 쾌여풍 같은 자들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한번 십대고수라고 불리고 사람들에게 떠받들리기 시작하면 도저히 스스로 거기서 내려을 수가 없다. 한번 돌아간 수레바퀴를 우리 스스로도저히 멈추개 할 수가 없었던 것일지도, 그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을누군가가 멈춰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운리무가 죽고, 쾌여풍이 저 나이에 저 미친 짓을 하다가 결국 죽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뭔굉도는 그답지 알개 침중한 모습으로 말을마치더니 일어섰다. "이제 시대는 새로운 영웅을 필요로 하는 거야. 네가 나타났고, 저기 매씨 여자애가 나타났다. 등천비룡문이라는 아이들의 단체도 그 전조일 수 있고." 그는 빙그레 웃었다. "자리가 있으면 누구든 거기 앉겠지만 나는 이왕이면 인연이 닿은네가 거기 앉길 바란다. 진 형을 닳았으너 심성도 쇈찮고,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자 이제 설명할 테니 잘들어라!" 그는 자세를 취해 가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꼿꼿이 들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두 팔을 자연스럽게 내려놓는다. 이것이 무극이다. 그 자세에서 그대로 아래로 평그리고앉는 것을 유극이라 한다. 이른바 무극이 유극을 낳는다는 것이다. " 그 자세에서 그는 손을 모아 뒤로 당겼다. "이개 기본자세지. 무극애서 유극이 생기면 그 다음은 태극인데 그것은 앞의 과정얘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만물은 태극에서 생겨나니 뇌정, 즉 번개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자세를 풀고 웃었다. "어떠냐, 쉽지? 문제는 이 자세에 맞는 내공심법인데, 사실 내공심법이랄 것도 없이 체내의 기를 필요에 맞게 움직이는 법을 배우면 된다. 사람의 몸은 태극이 모인 것이고, 당연히 태극에서 발생하는 모든것들이 갖추어져 있다. 뇌정의 기운도 마찬가지다. 겨울철에 옷을 만지면 찌릿찌릿하지 않더냐. 그런 작은 기운을 극대화하는 것이 자오뇌정추의 요체다." 그는 진자앙에게 구결을 일러주며 자제를 바로잡아 주었다. "처음에는 안 되겠지만 언젠가 네가 내공이 삼 갑자 이상이 되면,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그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장력이 아니라 그냥 손으로 치는거라면 내공이 삼 갑자가 안 돼도 쓸 수 있다. 그러니까 일 갑자만 넘으면 되는 거지." 손에 뇌정의 힘을 모아 적을 타격하는 것이니 멀리 떨어진 적은 공격할 수 없어도 접근전에서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네 공력으로는 그것도 무리겠지만……!" 그는 말을 채 맺지 믓하고 입을 벌리고 있어야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진자앙이 장난처럼 휘두른 팔에 정원석 하나가 폭발하듯 터져 버렸던 것이다. "너……, 너…… 내공이 있었느냐?' 진자앙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도인토납법이라면 조금 했는데 이건……!" 그의 체내에서 처음으로 진기가 제대로 움직이는 경험을 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내공이 적어도 일 갑자 이상이라는것도 확인된 것이다. 원죙도는 눈을 휘등그래 뜨고 있다가 그를 채근했다. "그러계 보릉 외공수련은 아닌 것 같더라니……! 얼른 원래의 것도한번 해봐라! 혹시 모르니까." 진자앙은 자세를 취하고 원죙도가 시킨 대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아무런 반옹도 업었다. ,원굉도는 고게를 끄덕였타,"역시 아직 삼 갑자는 아니겠지. 아무리 영물을 먹었다고 해도 제대로 된 방법으로, 제대로 된 것을 먹지 않으면 삼 갑자는 쉬운 것이 아니다. 음…… 그러고 보니 너도 어렸을 때 약을 잘못 먹어 무공을 못배운다고 했지? 그게 이건가 보다. 전루위복인 샘 아닌가!" "꼭 전화위복은 아닌 듯하군!" 어느새 정원에는 맹방평도 나타나 있었다. 그는 잠자코 어느 돌 위에 앉더니 불쑥 말했다. "매씨 여자에는……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원굉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받긴 했지만 수상한 구석이 적지 않지. 무엇보다 황사 매요신의 딸이라는 것이 영 걸려." "그보다도 황사 매요신이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문제일세. 나는 설마 그까지 개입되었을 줄은 몰랐는데……!" "그까지라면 어디에 누가 개입되었다는 건가?" 맹방평은 잠시 침묵하더니 어둠 속 어딘가를 향해 손짓했다. 놀랍게도 그 어둠 속에서 매불염이 나타났다. "너도 나와라!" 그 말을 신호로 매불염이 있던 인근의 나무 위에서 호두태가 뛰어내렸다. 원굉도는 투덜거렸다. "젠장 여기 다 모여 있을 줄은 몰랐군.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내 유일한 밑천을 훔쳐 배웠을 것 아닌가!" 맹방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그 폭음 때문에 온 것일세. 귀머거리가 아니면 누구나 다 들었겠지 ."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매불염에게 말했다. "이건 혹은 조사로, 혹은 추측으로 알아 낸 것이지만 너는 어쩌면이미 알고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것을 네가 확인해 줄 펄요는 없다. 우린 널 심문하고 싶은 것이 아니니까." 맹방평은 오늘 그녀에게 진 빛 때문에 그녀를 건드리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매불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소녀가 알고 있는 것은 적지 않지만 확인해 드릴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맹방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우선 등천비룡문의 뒤에는 매요신이 있다. 이것은 여거 황금장의일로 알 수 있었다. 또한 등천비룡문의 뒤에는 영리충도 있다. 그것은현재로서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것을 거의 확실하다고 믿는다." 여기까지는 진자앙으로서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다음 한마디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이미 죽은 운리무도 이 조직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추측은 이러했다. 강청화를 통해 들은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가문은 혁련세가밖에없다. 운리무는 혁련세가의 가신으로 세가의 부흥을 위해 돈을 모았다. 그 돈을 기반으로 어느 정도 힘이 축적된 혁련세가는 욕심을 부리기시작했을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작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미 상당히 진척이 되어 광동 진가장을 제외한 팔대세가 전체를 휘하에 포섬했다. 그들이 등천비룡문의 배후였다. 원굉도가 물었다. "영리충은 거기 어느 부분에 환재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가 혁련휘도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혁련휘도! 영웅십자도 혁련휘도?" 맹방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굉도가 하늘을 보고 웃었다. "말도 안 돼는 소리! 자네 말은 마치 공자가 도적이 되었다고 하는소리나 다름없네. 또 관음보살이 탕녀가 됐다는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은 변하네. 그가 왕년에 약관 십칠 세의 청년고수로 강호에 나와 당시 공명이 자자하던 중원삼흉을 때려 죽이고 그 세력까지 뿌리 뽑는 거사를 했을 때 나는 아직 포도아문에서 심부름이나하고 있었지. 그메 그가 당시 무림최고수이던 삼총 중 대흉 옥면수라와 싸우다가 부상을 입어 얼굴에 심 자 형의 큰 홍터가 생겼고, 결국앤 그 후유중으로 죽었다는 얘기는 들었지, 다행히 남긴 아들이 있어서 전대의 혁련세가 가주가 되었지. 그가 인심협성혁련수였지 " "그 아들이 당대 가주 혁련천조고," "그 혁련천조가 등천비룡문의 문주일새." "혁련가가 이 조직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알겠네만 왜하필 죽었다는 혈련휘도가 영리충이라는 건가?'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돈 얼마 후부터 영리충이 등장했기 때문이지!" 모두가 더 이상 말하려 들지 않았다. 단지 영웅십자도의 위명을 아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추리 같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매불염은 처음 자기가 말한 것처럼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맹방평이 천천히 말했다. "나도 내 추리에 근거가 심히 박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하지만…… 이건 괜한 자신감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내 평생 추리한것이 틀린 적은 단 한번도 없네." 그는 진자앙과 호두태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근거없이는 단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 금기를 깨뜨린 이유를 알겠느냐?' 진자앙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호두태가 대답했다. "저회에게 그 의문을 풀어 보라는 뜻인 줄 알겠습니다. 사부님!" 매불염이 문득 물었다. "말씀을 들으니 맹 노대협께서는 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는 뜻으로들리는군요." 맹방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급여화는 마저 잡고 손을 뗄 것이다. 그러나 영리충까지는 힘이 닿지 않는구나. 난 일개 포두에 불과하고, 그는 캐 들어갈수록 엄청난 배경을 등에 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웃었다. "무림의 반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지 않으냐?" "급여화도 그에 못지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멩방평은 고개를 끄턱여 매불염의 말에 긍정했다. "그의 세력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무림의 반과 싸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모한 짓이지. 그래서 난 그에게 결투랄 신청할 생각이다." "결투!" 원굉도가 무릎을 졌다. "그래, 그놈은 성질이 급하고 자기가 골수까지 무림인이라고 생각하는 놈이니 결투를 신청하면 안 나을 리가 없지. 하지만 그 부하들이가만히 있을까? 그놈만큼이나 흉악한 놈들이 여덟이나 더 있지 않은가. 아마 자네가 이겨도 가만히 놔두지를 않을 텐데?" 멩방평은 피식 웃었다. "이긴 다음의 문제겠지. 난 사실 급여화를 이길 자신도 별로 없다네!" 진자앙은 그의 얼굴얘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메불염이 가볍게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그 뜻이 말없이도분명히 전달되었다. 맹 노대협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그는 다시 한번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원굉도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호두태의 표정은 심히 침울했다. 그도 그것을 짐작하고있는 듯했다. 진자앙은 문득 말을 돌렸다. "달밤은 좋지만 시체 썩는 냄세가 꼰 진동하겠군요." "곧 아무 냄세도 나지 않게 될 거요." 호두테의 말이었다. "이 황금장은 내일부로 사라지개 될테니 말이오. 이름도, 성도……!" 그는 힘들여 미소를 지으며 맹방평에게 절했다. "제자는 이제 사람도 잃고 돈도 잃었으니 비로소 사부님의 뒤를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굉도가 눈을 꿈벅였다. "이 많은 재산을 두고 포두가 되겠단 말인가?" "재산이라…… 들고 갈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호두태는 어디라 할 것 없이 손으로 가리켰다. 황금장을 쾌여풍과맞서 싸울 장소로 만드는 데 전재산을 투입했다는 뜻이었다. "시체의 산이니 팔려고 해도 팔리지도 않겠지요, 하하! 그냥 여기누운 사람들의 무덤으로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진자앙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체의 산, 그리고 곧 무덤이 되어 버릴 저택. 명부의 귀신들이 벌써 장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혼백을 수거해가고 있는 듯한 음산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장원의 어떤 모습보다도맹방평과 호두태의 태도가 더 음산했다. 부엉이 울음 속에 밤은 깊어 가고, 긴 여름 다음에 가을이 오고 있었다. [제이십삼장] 광마는 강호에 나오고 금문공은 먼길을 떠나다. 광동 진가장에서는 한창 여행준비를 하느라고 법석이었다. "그래, 그거! 그거 앞을 꿰매라!" "하지만 그러면 입고 벗을 때 불편할 텐데요, 어머니?" "다시 집에 돌아올 때까치 벗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 원래 그러려고 입는 것이고!" "한 달이 넘게 걸릴 텐데요? 그때까지 이 속옷 하나로 버틴다고요?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얘가……! 너야말로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남편도 없는 것이여행 중에 속옷은 왜 갈아입는단 말이냐? 누구한테 보여 줄 일 있니? 잔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썩 하지 못해!" 진청아와 진황아, 그리고 시집인 사회 운양문에서 결국엔 쫓겨온 진주아, 이 셋은 어머니 고대랑의 얼핏 터무니없어 보이는 말을 들으며손에 든 적삼을 내려다보았다. 튼튼해 보이기는 하지만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적삼이었다. 이 적삼의 앞설을 꿰매 입으라는 것이 고대랑의 지시였다. 즉, 통으로 된 속옷을 입으라는 것인데 이령게 해야 포악한 놈들을만나더라도 쉽게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황아는 어머니가 무서워 욜만을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영 맘에 들지를 않아 입을 닷발이나 되게 내밀고는 적삼 속옷을 뒤집어 보다가기어코 한마디를 했다. "위만 꿰매 입으면 뭘 해요. 중요한 건 아래쪽인데……!" 고대랑은 눈을 부라렸다. "저년이 시집이라고 가더니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따위로 자발머리없이 처신을 하니 소박을 맞지 이년아! 에이구, 내가 못 살아! 남편이라고 하나 휘어잡지를 못해서 소박을 맞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이 고대랑 딸에게 그게 말이나 되는 얘기냐?" 한참 해묵은 이야기, 그러나 입에 올릴 때마다 원한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 딸을 나무라던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보따리를 주섬주섬 뒤지더너 옷가지 하나를 들었다. "아래는 이걸 입으면 돼!" "그게 뭔데요?" "고의지 뭐긴 뭐야?" 진청아는 고대랑이 내민 고의를 들고 자새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고의가 위는 이렇게 길고, 거칠긴 또 이렇게 거칠어요? 이거입고 돌아다녔다간 샅이 다 까지겠네." "거친 대신 튼튼하잖아!" 고의는 여인이 아랫도리 가장 안쪽에 입는 속옷. 일종의 속바지다. 이때의 속옷이라는 것이 그리 발달하지 않아 젖가슴은 천으로 동이거나 그냥 풀어 놓고, 그 위에 아이들 턱받이 같이 생긴 두두를입는다. 그 위에는 그냥 윗도리일 뿐이었다. 부잣집 귀한 소저들은 이왹도리 위에 다시 날개옷인 하피나 덧옷을 걸치지만 일반 평민은 윗도리 하나 벗기면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아랫도리도 간단하긴 마찬가지여서 평민들은 고의, 즉 속바지 하나에 치마를 두르면 끝이고, 귀한 집 소저들은 속바지를 여러 겹 입고,치마를 다시 여러 겹 입는다는 것뿐, 기본적으로 차려입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바지를 입고 다니는 강호여인들도 있는데, 이것은 그냥 남장일 뿐. 여인의 옷은 아니었다. 다행히 남장의 풍습이 송나라 이후부터 유행처럼 번져서 전혀 남자같이 보이지 않는 남장을 멋으로 하고 다니는 경우도 많아 강호여인들의 활동이 비교적 편해졌다고 할 수있었다. 그러나 고대랑이 지금 내놓은 두 옷가지는 그런 일반적인 속옷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통으로 둘러 입게 되어 있는 적삼과, 입으면 젖가슴 바로 아래까지올라올 정도로 위가 길고 아래는 짝 달라 붙어 움직이기조차 불편할것 같은 고의는 순전히 강간 방지용 옷이라고 해야 했다. 즉, 고의를 가슴 바로 아래까지 오게 입어 끈을 조르고, 그 위에 통으로 된 적삼을 입고 아랫단을 다시 조르면 만에 하나 치마를 들춰도고의를 쉽게 벗기지 못하는 효과가 있다. 고대로부터 명문가의 여인들은 여행할 때 이런 속옷을 입음으로써정조를 지키곤 했는데 일부 무림 명문에서도 그 습속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진청아. 주아, 황아, 세 딸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의 얼굴은 마치 소태를 셉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진청아가 그녀들의 심정을 대변해 말했다. "이런 속옷을 입고 욜편해서 어떻게 활동을 해요? 게다가 우리가 무슨 바느질이나 배운 쑥맥인 줄 아새요? 우리도 강호에 나가면 당당한여협이라구요. 음적을 만나면 어떻게 목을 베줄라 고민인데 오히려 당하지 않게 방비를 하고 가라고요? 전 못 해요!" 이번얘는 고대랗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년들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고 깝치고 놀기는……! 야 이년들아, 이 어미는 왕년에 강호에 나가면서 이것들도 모자라 두 개나 껴입고, 팔뚝에는 수궁사까지 찍고 나갔어! 나갔다가 돌아오면 어머님께 검사받고……!" 수궁사는 여인의 팔뚝얘 찍으면 봉은 점이 생겨나게 하는 약물로,정조를 잃으면 그 반점이 사라진다. 고대랑의 말은 여인들이 강호에나갈 때 부모들이 걱정하는 두 가지를 동시애 드러내는 말이었다. 즉, 한편으로는 음적을 만나 폭행을 당할까 걱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람등이 화화공자라도 만나 몸을 마구 굴릴까 두려워하는 겄이다. 사실은 고대락 자신이 두 번쩨 강호헹에서 진삼산을 만나 눈이 맞는바람얘 수궁사흘 잃고, 나중에 집애 돌아가 걸려서 죽도록 맞아야 했던 것이다. 아마 그녀의 아버지 고노대가 순리에 따라 일을처리하는 사람이 아니고, 또 상대가 광동 명문 진가장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죽거나 가문애서 축출되었을지도 모르는 위기였었다. 그러나 그런 예기를 어찌 딸들에개 할 것인가! 고대랑은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려 딸들에게 그 강간 방지용 특수속옷을 입히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처음으로 딸들과 합께 나가는 강호행이 어쩐지 기다려지면서도 걱정스럽기도 했다. 기다려지는 것은 그야말로 이십 여 년 만의 강호출도이기 때문이었고, 걱정스러운 것은 작금의 상황이 광동 진가장에 그리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가장은 지금 광동에서도 거의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상태였다. 여타의 팔대세가와도 교류가 끊어진지 한참 되었고, 구대문파에서도 가끔 안부나 물어 오는 정도일 뿐, 정세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 누구든 먼저 말을 꺼내는 쪽이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런 거야! 젠장! 진삼산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도 그것이 사태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이 상황을 돌이킬 만한 전환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기회가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등친비룡문 괄대세가는 진가장을 무시하고 상대를 않을 뿐, 이렇다할 적대 행위는 않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덤비면 목숨을걸고 싸워나 볼 텐데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 강호행을 결정한 것이었다. 바로 삼황야의 어전시합에 유일하게 남은 제자인 악조린을 참가시키겠다는 것이 진삼산의 결정이었다. 이미 떠난 진자앙의 말대로 여기에서 우승이라도 하면 '역시 진자룡'이라는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이후 사태의 주도권을 진가장이 잡을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놈이 아주 바보는 아니란 말이야……!" 고대랑은 혼자 중얼거리고는 가슴이 싸하게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진자앙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랬다. 혹시 친자식일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 박대했는지 후회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보기만 하면 마음부터 답답해지는 것을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처었다. "절대 그놈은 우리 애가 아냐……!"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듯 다짐하는 그녀였다. 어전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떠난 진가장 사람들은 모두 해서 여섯이었다. 참가자인 악조린이 당연히 일행에 끼여 있고, 진삼산과 고대랑이 보호자 겸 정세 파악의 역할을 위해 같이 떠났다. 진청아를 비롯한 세딸은 그냥 구경차 끼여든 것이었고, 진자룡은 이미 오랫동안 강호 발길을 안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별 관심이 없다고 나오지 않았다. 그들 일행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바닷길로 항주로 가서 강을 타고장안까지 가는 뱃길 일만 리였다. 근 한 달이 걸린 여행이었고, 그사이에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 갔다. 가을매미는 마른 버들에서 울고, 대화(전갈자리의 세 별)는 서쪽으로 이동했다. 장안은 중원의 서북단 섬서성의 성도로, 고대로부터 서역교통로의 출발점이 되어 번영을 구가했던 곳이었다. 이제 몽고로 길이막혀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장안은 중원 삼대 도시의 하나였고, 당금 천하애서 황제 다음으로, 아니 어린 황제보다 오히려 강력한힘을 가지고 있는 삼황야의 친궁이 이곳에 있었다. 진삼산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장안은 온통 검을 차고, 칼을 든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고, 때아닌 호황에 장안의 상인 객잔 주인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덕분에 진삼산 일행은 방을 구하기 어려워 한참 동안 거리를 해매다가 간신히 작은 방 셋을 구해 짐을풀었다. 주점에 가서 밥을 먹으며 진삼산은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 왜 이령게 사람이 많은 거냐? 항상 이러냐?" 점소이는 대답은 하지 않고 그를 멀뚱거리며 쳐다보기만 했다. 진삼산이 다시 물었다. "여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으냐고 묻지 않느냐? 왜 대답을 안 해?" 점소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어디 외국에서 오셨습니까?" "뭐라고? "어느 나라 말인지 통 모르겠네……!" 점소이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어이, 얘가 뭐라고 씨부리는지 아는 사람 있어? 어디 사투린지 정말 지독해서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네!" 객잔 안애 폭소가 터졌다. 그재서야 진삼산은 자신이 광동어로 말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북경어를 알고 있으니 듣기는 북경어를 들으면서 입으로는 광동어로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분노했다. 그가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점소이가 마음대로 주절거리고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빙긋 웃으며 점소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북경어로 말했다. "이 어르신네, 아니, 이애는 광동어로 말하고 있었네. 요즘 여기 왜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어르신네께서 좀 가르쳐 주시겠나?" 점소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얼른 허리를 구부리며 뭔가변명의 말을 함과 동시에 최고의 대접을 약속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분노한 진삼산의 주먹은 그 잠시를 허용하지 않았다. 점소이는 어느 사이엔가 공중에 떠서 이층에서 내려가는 계단으로날아가 떨어지고 있었다. 우당탕탕탕--!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한참 나는 것으로 보아 진삼산의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분은 안 풀렸던 모양, 그는 주먹을휘두르며 주점 안을 돌아보았다. "광동어가 그렇게 우습소? 우스운 사람 있으면 나와 보쇼!" 그러고는 한바탕 질펀하게 광동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광동어라는것이 원래 북경어에 비해 억양이 강해서 그냥 말해도 욕같이 들리는데대놓고 욕을 하니 주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뜻은 모르지만 심히 모욕스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까 점소이를 집어던진 힘으로 보나, 지금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팔뚝을 걷어붙이는 모습이 적지 않게 험상궂으니 밥 먹고 술마시던 손님들이 우루루 일어나 아래층으로 도망갔다. 고대랑이 머리를 저었다. 그녀는 딸들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성질 하고는……! 네 아버지 옛날 버룻 나오는 거 봐라! 흥분하면 아무것도 안 본다니까," 과연 진삼산이 아무것도 안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혜심 사태를 못 븐 것만은 분명헌다. 객잔 구석에서 비구니 한 사람이 일어나합장하며 인사했던 것이다. 그것도 광동어로. "안녕하새요, 진 시주. 그만 분노를 푸시지요." 진삼산외 얼굴이 금세 벌겋게 변했다. 이번에는 분노해서가 아니라무안해서였다. 혜심 사태는 몇 년 전까지 아미파의 지파인 광동 등가산 보광암 주지로 있다가 지금은 아미파로 다사 돌아가 장로가 된 인물, 명문 출신에 지역적으로도 가깝고 해서 몇 번 인사도 나누었던 사이였다. 고향도 아니고 멀리 장안까지 와서 혜심 사태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대랑이 얼른 일어나 합장해 인사했다. 그녀는 도교도 좋아했지만마음이 내키면 불공도 드리러 갔었기 때문에 진삼산보다는 훨씬 더 잘아는 사이였다. "스님, 이리 오셔서 합석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녀는 힐끗 해심 사태의 자리를 보고 아직 식사가 나오지 않은 것을 재빨리 파악했다. 게다가 일행은 그녀와 또 한 사람의 비구니밖에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합장하고 말했다. "저희 내외가 저녁공양을 시주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스님!" 싸게 입막음을 하려는 것이었다. 원래 아미파는 시주를 받지 않는 곳이지만 혜심 사태는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옮겼다. 진삼산이 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소란스러움은 역시 어전시합 때문이겠지요? 근 삼십 년래에 이렇게 큰 무림대회는 없었으니 말입니다." 원래 그것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혜심 사태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진삼산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어전시합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눈을 빛내며 진삼산에게 물었다"아드님이 한 분 계셨죠? 그 아드님 이름이 진자앙 맞습니까?' "왜요? 그놈이 무슨 사고라도……?' "사고가 아니라……, 약간이긴 하지만 아드님도 여기 장안이 시끄러운 이유에 관련이 있어서요." 고대랑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대들듯 물었다. "그놈이 판련있을 이유가 밀 있습니까?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았으면요?' "글쎄 사고가 아니라……!" 혜심 사태는 그런 일을 왜 모르고 있냐는 듯 이상한 눈으로 그들을보고는 하나씩 설명했다. "진 시주는 대력귀왕과 금문공이 내일 여기 장안에서 결투를 한다는소식을 전혀 못 들으셨습니까? 천하가 그것 때문에 떠들색해진 바람에낼 모래 열리는 어전시합이 오히려 관심 밖의 일이 되어 버린 형편인데……!" "대력귀왕과 금문공? 내일 여기서 결투를 해요?" "금시초문인데요?" 혜심 사태는 역시 그랬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정오, 장소는 장안성 북문 밖의 초총평이지요." "그런 일이……!" 진삼산은 충격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있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그 일과 재 자식놈과 무슨 관련이……?" "아무리 소식을 못 들으셨다고 해도 금문공이 운리무와 쾌여풍을 처치했다는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그건 들었습니다. 근래 보기 드문 꽤거였지요." "그 쾌거에 아드님이 지대한 공을 올렸다는 얘기는 못 들으셨나요?" 진삼산은 어리등절한 표정이었다. "금시초문인데요?" "그랬었습니다." 혜심 사테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등하불명이라고 한다던가, 자식이 하는 일을 부모가 가장 모르고 있지 않은가. "운리무를 잡을 때도, 좨여풍를 잡을 때도 큰 역할을 했다는군요. 자세한 내막은 알려지지 압았습니다만 요즘 무림은 신진고수 금강두의등장으로 뒤흔들리고 있어요." "금강두요?" 고대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게 왠 집안 망신인가. 안에서도 바보 짓을 하더니 밖에서도 그러지 않았으면 어찌 금강두라는별명이 붙을 것이냐. 그러나 혀심 사태가 말한 금강두는 그 뜻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감탄 반 우려 반의 표정으로 되묻고 있었다. "도대체 그 가공할 외공을 어디서 익혔지요? 운리무의 화살을 이마로 받고도 끄덕없는 외공이라는 것은 저는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 고수가 어전시합에 참가한다니……! 우리 아미파는 그저 구경이나해야겠군요." 그것이 그녀의 우려였다. 그들 아미파에서도 이번 어전시합에 대표를 참가시키는바, 그녀의옆에 앉아 있는 젊은 비구니 공심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런 아미파에, 최근 돌풍을 일으킨 신진고수의 출현이라는 것은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여기 진삼산의 자리에 와앉은 것에는 대화 중에 진자앙의 허실을 파악하자는 속셈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삼산 내외에게는 듣느니 처음이요, 들을수록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뿐이었다. 결국 혜심 사태는 은근히 기대했던 정보는 듣지 못하고 뒤늦게 나온음식이나 먹고 갈 수밖에 없었다. 혜심 사태도 진삼산의 일행과 같은 객잔에 묵고 있었지만 비교적 빨리 왔기 때문에 제법 조용한 객실을 하나 마련할 수 있었다. 객실로돌아오자 여태 침묵을 지켰던 공심이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셨는지 제자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광동어를 모르는 그녀는 여태 대화의 내용이라온 단 하나도 주워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혜심 사태가 그 동안 나눈 얘기를 전해 주자 공심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아미파에서 근래 받아들인 제자 중 단연 뛰어난 재질을지녀 장문인의 눈에 들었고, 덕분에 장문인의 직접 지도를 받아 단숨에 서열 십 위 권 안의 고수로 뛰어오른 고수. 성격 또한 정파이면서도 괴이하고 편벽된 구석이 있는 아미파의 무공에 맞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어떻게 보면 음침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원래 아미파는 육조 혜능으로부터 시작한 선불교남종의 정통을 이어받은 임제종의 본산으로, 무림에는 난화삼십육검을 비롯한 검법의 명문으로 알려졌지만사실은 참선에서 얻어진 불문내가기옹이 절학 중의 절학이었다. 공심은 바로 그 불문내가기공인 아미천강장의 달인, 아미파에서는 내심 형산파 뇌공 원굉도의 뇌정추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엄다고 자부하는 기공의 전수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깨뜨릴 수 없는외공이라는 것은 자못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불쑥 물었다. "사숙님의 말씀을 들으니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군요. 진부인이 말한 내용으로 보나 제가 그때 옆에서 들은 어투로 보나 아무래도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럴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요?" 진 부인, 고대랑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면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 고대랑도 원래는 진 부인이라 부르는게 마땅하지만 그녀가 남편보다 무림에서의 위명은 오히려 나은 편에속해 고대랑이라고 불려졌던 것. 지금 공심은 고대랑이고 진삼산이고그리 대단치 않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호칭을 부른 것이다. 해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광동에서는 고대랑이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공개된 비밀이나 마찬가지인데, 웨 그러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구나. 일설에는 무공에 영 소질이 없어 그런다지만 요즈음 활약을 보면 어디그게 말이나 되겠느냐?" 그녀가 생각할 때는 그건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진자룡의 손자인 데다가 맹방평의 수행, 웬만큼 뛰어난 인물이 아니고서야맹방평이 무림사마를 잡는다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데려갔을것인가. 그 후의 활약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공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무래도 강력한 적수가 하나 늘었다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고, 어쩐지 적수 중에서도 또 가장강력한 적수가 그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호신기공과 파해기공의 사이는 마치 방패와 창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라 부수지 못하면 진다는 공식이 성림하는 것이다. 물론 역사는 거의 언제나 창의 승리를 말해 왔지만 예외가 없다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그녀는 자리에 누워서도 내내 그 생각만 했다. 날이 밝았다. 어겟밤 장안에서 묵었던 모든 무림인들이 북문 밖 초총평에 모여들었다. 살아 있는 동안 두번 다시는 없을지도 모르는 구경거리, 당금천하제일을 다투는 두 고수의 대결을 참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진삼산 일행도 물론 그 중에 있었다. 금문공과 대력귀왕의 대결도 대결이지만 난데없이 불거져 나온 아들 진자앙얘 대한 소문을 확인하고, 할 수 있으면 직접 만나 보고자하는 뜻도 있었음이 물른이다. 알려진 대로라면 대결은 정오였다. 그러나 새벽부터 초총평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해서 사시가 되자 발 디딜 틈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나마 남은 공간은 대결이 거기애서 있을 걸로 짐작되는 반경 오장여 가량 되는 원형의 풀밭이었는데, 화륜맹의 무사들이 그 주위를철통같이 둘러싸고 있어서 사람들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진가장의 세 딸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자리에서 본 것이 처음이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진삼산과 고대랑은 좋은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나이를 먹었어도 진삼산의 근력이 옛날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았고, 고대랑의 강짜 또한 예전과 그리 다름이 없어서 그들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대결장이 한눈에 보이는 제법 좋은 자리를차지할 수 있었다. 초총평에 몇 그루 자라지 않은 거대한 백양나무의가지 위였다. "얌전한 규수가 나뭇가지 위에서 싸움 구경을 해야 한다니…… 어디에서도 조신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처음 말과는 너무 다르잖아요!" 진청아가 농 반 진 반으로 투정을 부렸다. 고대랑도 변명 반 나무람반으로 말을 받았다. "조신하게 처신할 때와 안 그럴 때가 따로 있는 거야! 이만한 자리가 또 어디 있다고 그래?" "쉿, 조용히!" 진삼산이 초총평 한쪽을 가리켰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빽빽히 들어찬 군중들이 풀잎처럼 갈라지는 사이로 한 행렬이 들어오고있었다. 진삼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지만 누가 오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를 툭 치며 물었다"누구야? 뭣 좀 보여?" "글쎄……, 금문공의 행렬치고는 좀 이상한데 대력귀왕도 아니군요. 아무래도 금문공인 모양이네. 철탑처럼 큰 사람이 나귀를 끌고…… 근데 저건…… 저 녀석!" 나퀴애는 한 사람이 타고 있으며 그 뒤로 네 사람이 멘 가마 하나가따라 들어오고 있다는 말은 다하지도 못했다. 제일 앞에서 나귀를 끄는 철탑같이 큰 사람이 바로 진자앙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행렬이 차츰 가까워지자 철탑같이 큰 사내 뒤에는 또 다른 청년도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쩠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진자앙이 아직도 멩방떵을 따라다니고 있었고, 그것은 어재 혜심 사태나오늘 여기 오면서 이쪽저쪽 얻어 들은 말 중에 나온 진자앙의 활약이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저 잠깐!" 말릴 사이도 없이 진청아가 나무에서 기어 내려가더니 군중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는 렉렉히 모여 선 사람들 틈을 뚫고 다가오는 행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애서 불평들이 터져 나왔지만 이미 아버지 어머니가 하는 요령을 본 터라 다른 사람들의 말에는 신경을 끄고 무작정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사람들이 틔어 준 길을 앞장서서 걸어가는 진자앙의 소매를 잡을 수 있었다. 진자앙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 누나……!" 그는 희미하게 반가운 미소를 보내더니 그가 멈추는 바람에 같이 멈춘 맹방평을 보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지금 바쁜데……! 아니, 그래! 같이 가자!" 그는 진청아의 소매를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물결처림 갈라졌다. 진청아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난생 처음이기도 하고, 대부분이 사내인 그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만을 향하고 있는것 같기도 해서 고개를 못 들었다. 그래서 진자앙이 그녀에게 말을했을 때는 어느새 대결 장소 바로 앞 구경꾼들의 가장 앞에 나와 있었다. "누나, 우린 여기 있어야 해. 안에는 맹 노대협 한 분만 들어가기로했어." "우리?" 그녀는 그제서야 진자앙이 우리라고 한 그 일행들을 제대로 볼 수있었다. 진자앙만큼이나 체격이 좋은 네 명의 가마꾼 노인, 파리한 안색의 청년, 그리고 그때 가마에서 고개를 내밀어 그녀를 향해 인사하는 검은 면사의 여인이었다. "저희 다섯째 누님이십니다." 진자앙의 소개에 따라 그들은 수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제대로 소개를 받은 사람은 호두태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사인교주 매불염과 가마꾼들' 이라는 식으로 대충 알아 둘 수밖에 없었다. 맹방평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네 조부는 어떠시냐?" "연세가 드실수록 게을러지셔서 이젠 바깥 걸음을 하기 싫다고 하셨습니다." 진자룡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맹방평은 씁쓸하게 웃었다. "팔자 좋은 분이군.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말투가 이상하게 쓸쓸하게 들린다고 생각하는 그때, 군중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력귀왕이다!" "급여화가 왔다!" 멩방평들이 선 반대쪽 군중들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아흡 명의 군웅이 나타났다. 그들온 양쪽에 각각 네 명쌕 서서 중앙의 한 사람을 호위하는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구대흉신이다!" "구대흉신이 다 등장했어!" 누군지 모르지만 참 친절하개도 해설을 해주고 있다 싶어 진청아가 둘러보았지만 군중들 틈에서 나온 그 말들은 누가 하는지 알 수가없었다. 아마 구대흉신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율렸다가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 아는 것을 자랑하고는 시치미를 떼고 있는 모양이었다. 구대흉신은 대형인 대력귀왕 급떠화를 비롯해서 둘째인 망산귀초, 셋쩨 비발동자, 넷째 대황붕, 다섯째낭심수사, 여섯쩨 금면강시, 일곱쩨 양둔사, 여럽째인 장비수, 그리고 막내인 독각시를 일컫는 말인데누구 하나 모자라지 않는 일대마두요, 거흉들이었다. 그들이 오늘 대형인 대력귀왕의 대결을 맞아 여기 다 모인 것이다. 그들이 대결장애 들어서자 그 중심애서 걸어오던 인물이 앞으로 나서서 맹방평을 가리켰다. "나와 싸우자고? 맹방평! 곱게 늙어 죽기나 할 것이지 이제 와서 노망이라도 든 게냐?" 그는 체구가 맹방평보다 배는 크고 등근 눈과 가로로 찢어진 입이얼핏 보기에도 거물다운 인물이였다. 게다가 단단한 배, 두꺼운 목을가진 것이, 도저히 백 살이 넘은 노마두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어느 산골 고갯마루를 지키는 녹림의 도적 두목이라고나 하면 어울릴 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오른손에 들린 두꺼운 칼은 면도날보다 날카롭고 뱀의혓바닥보다도 영팔하기로 소문이 났다. 천하제일도객급여화의 성명병기인 귀왕령이었다. 그 칼에 따라다니는 소위 '귀왕이 부르면 황천에 가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 여태 그 칼이 뿌린 피를 말해 주고 있었다. 맹방평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나귀에서 내려 천천히 대결장의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급여화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마치 친한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와줘서 고맙네!" 급여화는 커다랗고 검은 손을 들어 칼을 뽑았다. 손바닥 두께만큼이나 두터운 칼, 그리고 피를 칠한 듯이 붉은 칼이었다. 그는 그 칼을들어 맹방평을 가리켰다"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고, 조수가 없으면 물은 고요한 거야. 네가 건드리지 않았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오겠느냐?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으니 무릎을 꿇고 사죄하면 내 넓은 아량으로 그 늙은 모가지는굳이 메가지 않도록 하지!" "나도 네 모가지를 메가고 싶지는 않아. 이번에는 포두가 아니라 단지 무림인으로서 너와 결투하는 것이니 목을 떼가서 바칠 필요도 없지." 급여화는 이름 그대로 성격이 불꽃과 같이 뜨거웠다. 맹방평이 놀림조로 한마디하자 바로 얼굴을 붉히고, 눈에서는 살기를 흉흉하게 뿜으며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화를 냈다. "누구 목이 잘릴지도 모르고 나불거리는 걸 보니 너도 혀는 꽤 부드러운 모양이구나! 잔소리 말고 이리 와 목을 늘여라! 잘 베어서 연잎으로 곱게 포장한 다음 네 상관에게 보내 주마!" 진청아가 퍼식 웃었다. 당대의 두 고수가 격돌하려는 찰나에 손에땀을 쥐지는 못할망정 실소를 흘린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주위 사람에게 미안혔던지 낮온 소리로 변명처럼 말했다. "초일류의 고수들이 저형게 지극히 고수답지 않은 내용으로 말싸움을 하다니……!" 진자앙은 웃지 압고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연잎일까요?" "응?" "왜 하필 연잎으로 싼다고 했는지 모르겠군요. 다른 것도 많을 텐태!" 호두태가 피식 운었다. "푸줏간에 한번도 간 일이 없나 보군! 거기서 고기를 사면 연잎으로싸준다네." 그리고는 그는 잇사이로 중얼거렸다. "누구 목이 연잎에 싸일지는 정말 두고 봐야 알겠지!" 이제 그것을 알 때가 된 것 같았다. 급여화는 칼을 수평으로 들어 맹방평을 가리키며 외쳤다. "귀왕이 삼경에 죽으라 한 일을 누가 감히 사경까지 미루리오!" 싸움 전에 이렬게 외치는 것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시작한 버룻으로, 원래는 '염왕'이었는데 자기 칼 이름에 맞추어 '귀왕'으로 바꾸어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실제 싸움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상대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단 한번도그 예고가 틀린 적은 없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맹방평은 이미 운리무의 '이발불요'와 쾌여풍의 '멈추지 않는 광풍' 이라는 두 신화를 깨뜨리고 여기까지 온 몸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것 또한 하나의 신화,'잡으려 한 자 중에 잡히지 않은 자가 없고, 잡힌 자 중에 빠져 나간자가 없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는 손이었다. 급여화도 그 신화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계산이 있었다. 접근시키지 않으면 그 손으로 잡을 것은 바람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바람보다 빠르게 공격할 것이다급여화의 손에 들린 귀왕령, 금방이라도 선혈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핏빛 대도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귀왕령은수천 수만 개로 불어난 것처럼 허공에 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초총평의 풀들이 폭풍우에 말린 듯 소리쳐 울부짖고 바람이 회오리처럼 일었다. 물샐틈없는 수비식, 급여화의 주위 일 장여를 온통 뒤덮은 칼 그림자를 뚫고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과연맹방평도 달려들듯 하다가 주춤거리고 있었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급여화는 싸을 때까지 시끄러운 사랄이었다. 온몸을 뒤덮은 칼 그림자를 기고 깨질 듯한 목소리와 함께 핏빛 섬광이 뻗어 나오더니 맹방평을 향해 날았다. "죽어라!" 섬광은 세 줄기였고 사람들의 눈에 보였다 싶었을 때는 이미 맹방평을 뚫고 있었다. "도강!" "저건 도저히 피할 수 없어!" 오 장여나 뻗은 도강은 급여화를 제외하고는 아직 아무도 성취한 바가 없고, 사람의 신범으로는 도저혀 피할 수가 없다는 것도 옳은 얘기였지만 이번에 아는 척한 사람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말이 틀리는것을 확인해야 했다. 맹방평은 급여화가 도강을 펼치기 전에 이미 몸을 날렸고, '도강'이라는 소리가 나왔을 때는 급여화가 쳐놓은 칼 그림자 속으로 뛰쳐 들어가고 있었다. 달려들듯 주춤거리고 다시 달려 들어가는 일련의 동작이 마치 춤을 추듯 절묘한데, 사전에 계획을 세워 능은 듯 단호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로 보였다. 급여화가 펼쳐 낸 초식은 천망일섬이라는 것으로, 시전자가 먼저 자기 주위애 방어막율 치고 기회를 보아 일격을 날리는 것이었다. 소위 일천 번 칼을 휘둘러도 그 중 단 한번만이 공격인, 철저한방어 위주의 초식. 이런 방어막에 맨몸으로 뛰어들고 있으니 정말 금강불괴가 아니고서야 목슴을 부지할 수가 업는 것이다. 한 순간 칼바람이 멎고, 피보라가 번졌다 숨쉴 틈도 없이 긴장해서보던 군중들의 눈이 대결장 중심으로 모였다. 거기 두 사람이 얼어붙온 듯 서 았었다. "우우……!" 신음을 억제하지 못한 군중들이 탄성을 지르고, 양편의 사람들이 중심으로 달려가다가 멈췰 섰다. 예상대로 맹방평은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급여화의 귀왕령이 그의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가슴곽에까지 자르고 들어가 박혀 있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중상, 싸움은 그의 패배인 것 같았다. 그러나 급여화 역시 무사하지는 않았다. 그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혀를 반쯤 내밀고 있었는데, 놀라움의 표시가 아니라 그의 목을 졸라 잡고 있는 맹방평의 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 사태는 너무나 간단하고 확실해서 오히려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맹방평은 오른쪽 어깨로 급여화의 칼을 받으며 지근거리까지 밀고들어가 급여화의 목줄기를 부리뜨려 버린 것이다. 이것이 그의 원래계획이었다는 것은 그의 오른쪽 가슴으로 파고 들어간 귀왕령을 봐도알 수 있었다. 급여화는 사실 왼손잡이였고, 그의 도법은 그래서 좌수도였다. 양면으로 날이 선 검과는 달라 도는 한 면으로만 공격을 하게되는데 좌수도의 경우에는 주로 좌에서 우로 비껴 흐르는 궤도를 갖는다. 이것은 공격자의 입장에서는 우에서 좌로 칼날이 날아온다는의미였고, 결국 오른쪽 어깨로 칼날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맹방평은 오른쪽으로 칼날을 받음으로써 심장을 보호하고, 숨이 끊기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급여화의 목줄기를 꺾어 놓는 것을 선택했다. 극히 간단하지만 누구도 하지 않으려 하는 전술이었다. 한마디로 동귀어진을 노리는 필사의 초식이기 때문이었다. 맹방평은 급여화와 함애 죽기로 미리 작정하고 나온 것이다. 이로써 두 개의 신화는 각각 상대편 신화의 주인공을 제물로 삼아완벽하게 지켜졌다. '귀왕이 부르면 황천에 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귀왕령의 그것과'잡으려 한 자 중에 잡히지 않은 자가 없고, 잡힌 자 중에 빠져 나간자가 없다'는 쾌수난타여의박의 신화였다. "이…… 이……, 이런……!" 남은 팔대흉신들이 이를 갈았다. 그들은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대결에 나섰기 때문에 이렇게 손쓸 틈도 없이 단번에 승부가 결정될 줄은짐작도 못 했다. 그것도 죽음이라는 가장 확실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결과가 될 줄은 더욱 몰랐다. 그래서 충격은 더욱 컸다. "사부님!" "맹 노대협!" 호두태와 진자앙이 맹방평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 역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결국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발동자가 그들을 힐끗 보더니 가슴에 손을 대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은빛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성명병기인 비발이 날아간 것이다. 그 목표는 맹방평이었고 공격은 간단히 성공했다. 아직 살아서 거친 숨을 토하고 있던 맹방편외 목이 그 비발에 잘려져 허공에떴다. 호두태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꼼짝못하고 굳어 버렸다. 그의 눈은 허공에 떴다가 천천히 가라앉는 사부의 머리를 쫓고 있었다. 진자앙은 호두태와 동시에 그 광경을 봤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하는 데에 더 시간이 걸렸고. 그가 사태를 파악했을 때는 눈앞이 온통 붉은 핏빛으로 가려졌을 때였다. 맹방평의 목에서 뒤늦게 솟구친 피분수였다. 진자앙의 눈이 순간적으로 충혈되었다.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보다먼저 감정이 발동했고, 평소에는 그리도 둔하던 신경이 그 감정 앞에서는 빨리도 반웅을 했다. "이이익--!" 진자앙은 짐승처럼 고함을 지르며 비발동자를 향해 덮쳐 갔다. 거리는 세 발, 비발동자는 돌아오는 비발을 회수하던 중이었고, 그들 사이애는 장비수와 쌍두사가 서 있었다 그래서 진자앙을 재지하는 일은그 두 사람이 맡았다. 장비수는 거대한 원숭이처럼 기형적으로 길고 두터운 팔을 가지고있는 사람으로 통비공을 익힌 팔이 보검보다 오히려 단단한테다가 한철로 만든 손톰을 달아 조공에도 익숙했다. 그 팔이반원을 그리며 진자앙의 어께를 때렸다. 쌍두사는 냉혹해 보인다는 것을 빼면 외형적으로는 별 특징이 없는사람인데 소매 속에 극독이 발린 쌍비단검을 숨기고 다녔다. 그가 건자앙을 향헤 소매를 흔들자 녹색의 황망을 흩뿌리며 쌍비단검이 날았다. 진자앙의 양눈을 향해서였다. 이 외외의 상황전개얘 군중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그 술렁임은, 결과에 상관없이 내용에 무조건 승복하고 보복을 않는것이 결투의 기본인데 죽어 가는 사람의 목을 자르는 파렴치한 행위에대한 분노이기도 했고, 그 이름도 자자한 구대홍신 중의 두 명이 강호초출의 청년에게 협공을, 그것도 악랄한 방법으로 한다는 것에 대한비난이기도 했다. 일부의 사람들은 진자앙의 죽음을 예상하고 미리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술렁거림이 한 순간에 멈춰졌다. 진자앙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바람에 장비수의 손톱 대신 팔에 옆구리를 얻어맞고, 쌍두사의 단검은 눈동자를 비껴 나가 눈바로 위에 맞았지만, 이것을 노리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무극, 다음엔 유극의 자세로 옳겨 가고있었다. 그때 두 공격이 그에게 격중했지만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뇌정추로 비발동자를 쳐갈 뿐이었다. 비발동자는 무기를 회수하고도 두 형제가 건방진 하룻강아지를 어떻게 요리하나 보느라고 별 방비를 않고 있었다. 결투의 법칙을 어기고 홧김에 맹방평의 목을 날려 버린 것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켕겨 하는 중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두 형제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를 후려쳐 오는 진자앙의 주먹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가슴팍에 손을 대었다. 공격도 방어도 비발로 하는 것이 그의 특기, 한 자루 비발이 그를후려쳐 오는 진자앙의 손목을 향해 날았다. 거리가 너무 가깔긴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의 첫 번째 실수요, 진자앙의 공격이 그리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게도 불구하고 방심하고 맞대응을 한 것이 두번째 실수였다. 마지막으로 진자앙의 팔 전체를 은은하게 감싼 푸른빛기운이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인지 좀더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실수. 진자앙의 팔은 은빛 비발을 얼음 조각처럼 깨뜨려 버리고도 계속 밀고 나가 비발동자의 가슴팍에서 목 언저리까지 한꺼번에 후려쳐 버렸다. 콰쾅--! 사람의 몸과 몸이 부딪쳐 생긴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폭음이 초총평을 흔들었다. 그 다음엔 허공 가득 피보라와 살점들이 홑어졌다. 정신을 차린 군중들의 눈앞애는 항방평과 급여화의 동귀어진보다도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가슴팍에서부터 그 위로 너덜너덜한 살점밖에 남지 않은 비발동자의 주검. 머리통은 그래도 온전한 모양을 유지한 채 저만치에서 흘로뒹굴고 있었다. 진자앙은 그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곧 입을 움켜쥐고 구역질을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흉신들은 얼이 빠져 무얼 할지 결정도 못 하고있었다. 그 사이애 사인교가 밀고 들어갔다.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행보에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네 가마꾼의 기세는 흉신들을 저도 모르게 한걸음썩 후퇴시킬 만픔 위력이 있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들과 진자앙 사이에네 가마꾼이라는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얼굴을 면사로 가린 매불염이 진자앙의 옆에 서서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진자앙은 눈물을 글썽이며 매불염을 을려다보았다. 매불염이 물었다. "첫 번째 살인?"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불염은 조용히 서 있다가 아무 말도 않고 다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것이 힘이 된 듯 진자앙은 일어서서 흉신들을 마주 대했다. 공격에 실패함으로써 한번 체면을 구긴 셈이 된 장비수와 쌍두사가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는 그를 향해 다가왔다. 네 가마꾼 중 선두인 양미토기가 가볍게 발을 들었다가 땅을 찍었다. 등--! 초총평이 잠시 울릴 정도로 강한 진동이 그의 한 동작에 의해 만들어졌다쌍두사가 놀라 물었다. "넌 누구냐?'" 양미토기는 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그것이 쌍두사를 다시 분노케했다. 그때 망산귀초가 앞으로 나서서 그를 제지했다. "물러서라!" 그는 장내를 잠시 돌아보고는 무겁게 말했다. "우리는 오늘 맹주를 잃고 다시 아우를 잃었다. 피는 충분히 흘렸으니 오늘은 이것으로 돌아간다. 패배를 인정할 때는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고. 싸우기보다는 죽음을 애도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진자앙을 보며 말했다. "처음 실수는 우리가 한 것을 인정하지만 아우의 복수를 않으면 우리도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겠지? 애송이, 넌 누구냐? 복수가두려우면 말을 않아도 좋다. 그러나 화륜맹의 눈은 평생 널 따라다닐것이다." 진자앙이 입가의 오물을 닦고는 가슴을 폈다. "난 진자앙, 팡동 진가장의 후손이고 종화 금강당의 오 대 당주요. 미리 말해 두지만 우리 광동 진가장은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소!" 군중들 틈 어디에선가 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잘 말했다!" 나무 위예서 보고 있던 진삼산이었다. 그는 가지에서 뛰어오르더니빽빽히 들어찬 사람들의 머려를 몇 개 발아 가며 중앙의 공터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돌아보며 공수해서 사죄했다. "소생 진삼산, 급한 김에 실례를 저질렀소, 널리 해량하시길!" 그렇게, 하나도 안 미안하게 대충 사과를 끝내고는 다시 망산귀초를향해 포권했다. "내 아들이 말한 대로요. 광동 진가장은 어떤 보복이라도 두려워 않음을 이 자리에서 밝혀 두는 바요. 비록 그 상대가 화륜맹일지라도 말이오!" "신났군!" 고대랑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남편이 오랜만에 호기를 부리는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진삼산을 마음줴 들어하지 않는 것은 망산귀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잔뜩 못마땅한 빛으로 진삼산과 진자앙 부자, 그리고 매불염 일행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잘 기억해 두겠소, 진 가주. 언잰가 그대로 그 말을 되담아야 할 날이 있을 거요. 천기공 진자룡도 불사는 아닐 테니까!" 그는 돌아서서 손을 튼들었다. "돌아가자!" 진삼산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어딘지 실망한 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일로 저놈들이 저렇게 순순히 물러서지? 정말 시시하군!" 매불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에겐 이제 복수보다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죠." 그녀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뭔가 계산을 하더니 중얼거렸다. "이제 화륜맹도 한동안 발호를 못 하겠군. 세력의 균형이 맞게 되었으니 ." 그녀는 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호두태에게 다가갔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맹방평의 목파 몸을 맞추럭 애쓰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그녀가 말했다. "이젠 쉬게 해드릴 때예요." 호두태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단지 고개만 끄덕였다. 백년포두의 신화, 그리고 석 달 동안에 걸친 중원행로는 그것으로끝이 난 것이다. 평생 쌓아 온 위명보다 더 큰 이름을 그 석 달 동안에 다시 쌓아올려 놓은 맹방평의 최후였다. [제이십사장] 궁서생은 진자앙을 찾아 산노인을 만나고 유소림은 매불염을 만나 진자앙을 놓치다. 맹방평은 호두태의 뜻에 따라 목숨을 잃은 바로 그 자리에 묻혔다"사부님은 평생 집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분이셨지……!" 호두태는 군중들이 사라져 이제는 조용해진 무덤 가에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복건성 청하현에서 백여 년이나 포두 생활을 하시면서도 그 흔한기와집 하나 못 갖고 늘상 포도아문 뒷방에서 사셨어. 한 달에 열 섬밖에 안 되는 봉록을 아껴 집 없는 아이들에게 나눠 주셨지. 그런 분이 사부님이셨는데……!"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에게는 더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우 진정하고 다시 고개를 든 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생전에 늘 말씀하셨지. 언젠가 걸음을 멈추게 되면 그곳이 바로 무덤이라고. 여기 초총평은 사부님 마음에 꼭 드실 거야. 오늘을 기억하고, 사부님에 대해 들은 사람들은 오가다 술 한잔이라도 바쳐 드릴 테니까……!" 진자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꼭 다시 오겠습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건방지게 들릴까 두려워 참고 있던 한마디를토해 놓았다. "영리충의 목을 들고 와서 제사를 지내 드리겠습니다. 맹 노대협이하려 하신 일을 저라도 대신 꼭 이루겠습니다." 호두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네가 나 대신 꼭 해주게. 이번 일은 자네가 사부님과 짝이되어 여태까지 해온 일이니까 마무리도 자네가 하는 게 옳겠지. 난 우선 포두부터 돼야겠네." "정말 포두가 되실 생각이십니까?" 진자앙은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은 재산을 다 잃었다지만 그래도 한때는 천하제일의 부를 소유했던 사람 아닌가. 밑천이 없어도 장사는 신용과 인맥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쪽이 호두태에게는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 것이다. 그러나 호두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부님도 내겐 포두 일이 맞지 않는다고 말리셨지만 우선은 포두일을 해볼 참이네. 나중엔 모르겠지만." 그는 빙긋 웃었다. "사실은 예전부터 한번 해보고 싶었어. 사부님이 멋있어서 그런 환상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무료하게 서 있던 진삼산이 불쑥 물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호 장주도 너무 슬퍼하지만 말고 좀 쉬어야 할 테고……, 우리도 그렇다. 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밟혀죽을 뻔했네." 그러고 보니 벌써 황혼이 지고, 다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하루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었으니 진삼산이 조급해 할 만도 했다. 호두태가 일어나 먼지를 털었다. "일단 성으로 돌아가지요. 저도 이번 어전시합은 구경하고 갈 참이었니 동행해도 괜찮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촐 동안 열릴 모양이니보고 돌아가도 광동성 포두 모집에는 늦지 않겠지요." "광동에서 하실 건가요?" 진청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는 이 창백하지만 귀티가 흐르는청년에게 어느새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님이 마지막으로 일을 하시던 곳이니까요. 게다가 거기엔 진탁진 대인도 계시고…… 사부님이 유일하게 칭찬한 관리지요." "그놈이…… 무슨!" 진삼산은 잠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진자앙의 일로 그와 벌였던한바탕 소동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은 것이다. 그땐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타박을 주었지만 결국엔 잘된 셈이었다. 누가 진자앙이 이렬게 훌릉하게 제 몫을 해낼 줄알았더란 말인가. 금강두……! 그리 듣기 좋은 별호는 아니었지만 어쩠든 강호에 이름을 날렸고,어느새 뇌공에게 뇌정추를 배워 구대총신 중의 하나를 단숨에 때려 죽여 버렸다. 내공이 삼 갑자가 안 될 텐데 어떻게 뇌정추를 쓰는지는진자앙 자신도 몰라서 대답을 뭇 하긴 했지만 아무러면 어떨 것인가. 꿩 잡는 게 매라고, 사내 녀석이 싸움만 잘하면 그만 아닌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히죽거리면서 고대랑에게 낮게 말했다. "봐! 내가 아들놈 구박하지 말라고 했지! 크니까 제 몫을 다 해내잖아?" "흥, 더 두고 봐야 알죠!" 고대랑은 콧방귀만 러고 있었다. 성에 도착하자 일행온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각자 다른 객잔에 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매불염도 거기에서 진자앙에게 작별을 고했다. "또 보게 되겠지요." 인사안지 바램인지, 아니면 예언인지 모호한 말 한마디를 남겨 놓고그녀는 사인꾜의 주렴을 내렸고, 사인교는 곧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진자앙의 옆구리를 진청아가 찔렀다. "너 저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나이가 어떻게 되니? 용모늘 어떻게생겼고? 황사의 양녀라면 혹시 나이 많은 노처녀는 아니야?" "몰라." 진자앙은 고개만 흔들었다. 진청아는 그가 매불염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기막혀 했다. 내일 있을 예선에서 보기로 약조하고 아버지 어머니 누나들이, 그들이 묵고 있는 객점으로가고 난 후에도 진자앙은 그저 그녀가 사라진방향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꼭 다시 만나개 되리라는 확신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온 매불염에게는 예언일지도 물랐지만 그에게는 강렬한 바램이었다. 삼황야는 장안성 중심의 장락궁에 살고 있었고 어전시합도당연히 거기에서 열렸다. 평소에는 먼발치에서 구경만 할 뿐, 감히 그 궁문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무리무리 모여서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 중에는진자앙과 호두태도 있었다. 시합 기간은 총 열흘, 엿새 간의 예선, 다음엔 본선 나흘이었다. 예선은 장락궁 동쪽 연병장에 마련된 여러 개의 비무대 위에서 동시에 벌어지는데, 한 사람이 올라가 도전을 받아 연속으로 세번 이기면 통과하는 방식이었다. 예로부터 이런 시합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오는 사람이 한정없이 많으면 안 되기 때문에 열여섯 명의 본선 진출자가 생길 때까지만 예선을 한다는 규칙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 본선시합의 방식도 간단해서 추첨을 퉁해 둘쌕 짝지은 다음에 서로싸워 이긴 사람이 올라가 다른 조의 승자와 겨루게 되어 있었다. 그령게 하면 매 시합마다 반이 탈락되어 결국 네 번 싸워 이기면 최강자가되는 셈이었다. 진자앙은 장락궁에 바글바글하게 모인 군중들을 보면서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 열여삿 명만이 본선에 참가할 수 있단말인가요? 너무 적지 않습니까?" 호두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넨 무림에 고수가 얼마나 되리라고 생각하나? 이미 육대고수로줄었지만 왕년의 십대고수를 포함해서 중원에 고수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백여 명밖에 안 된단 말일세. 백 명이 넘으면 이미 고수라고 불릴 수도 없는 것이고, 위에서 백 명에 들어가면 그가 어떤 무공을 익혔건, 또 내공조예가 어떻게 되건 간에 이미 고수인 것이지. 숨은 고수라는 말도 있지만 그가 숨어 있는 동안은 계속 숨은 고수일 뿐, 고수가 아니고. 그가 세상에 나오면 그냥 고수지 더 이상 숨은 고수가아니니, 역시 백 명이라는 숫자애는 변동이 없네." 그는 원래 변설을 좋아하는 모양으로, 얼핏 들어서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복잡한 논리로 자기 견해를 피력했다. "강호얘 나온 신진고수들, 사실 신진고수라는 말은 고수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 진짜 고수는 아니야. 이들 신진고수들이 진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소위 백대고수 중 하나를 꺾어 놓아야 비로소 고수가 되는 것이지. 그럼 그 백 명이 누군가?" 진자앙도 바로 그게 호두태가 피력한 논리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백대고수를 정한단 말인가, 또 그게 어떻게 고정될수 있단 말인가? 호두태는 거기에 대해서도 반박할 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정해진 사람은 없지.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네. '저 사람은 열 명 중에는 못 들어도 백 명 중에는 분명히 들어'라고사람들이 말하면 그는 백대고수 중 하나인 거야. 불확실하고 부정확한것 같지만 소문은 의외로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네." 요컨대 그러한 백대고수 중에 열여섯 명이 여기 참석할 것 같냐는것이었다. "보통 비무대회가 한번 열리면 그 중에 정말 고수요, 손을 쓰는 것한번만 보아도 혼자 십 년 수련한 것보다 배우는 것이 많을 그런 사람은 열 명이 채 안 되네. 나머지는 거의 허접쓰레기야.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밖에는 안 되는 것이지. 과연 누가 주인공인가를가리기 위한 싸움은 정말 흔치 않다네." 그 말이 을건 어쩠건 진까앙으로서는 별반 반박할 말이 없었다. 대신 그는 다른 문제를 짚었다. "그래도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참가하면 열여섯 명만 뽑고 관둘 경우, 순서가 밀려서 본의 아니게 참가하지 못하는 진짜 고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따로 대책이 있겠지." 과연 진자앙의 걱정에 대한 대책은 따로 있었다. 예선이 치러지는 시합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한편에는 비무대가 마련되어 도전자를 받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도전자가 되기위한 일종의 쓴문이 세워져 있었다. 순전히 호기심에 참가한 자격 미달자를 솎아 내기 위해 만들어진 세개의 관문. 그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비무대에 올라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관문이 진자앙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 관문은 오 장의 거리를 두고 두 개의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었다. 규칙도 극히 단순했다. 한 선에서 다른 선까지 뛰어 넘어갈 수 있으면 예선은 통과였다. 한마디로 경신술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 진자앙은 한쪽에 서서 다른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 장의 거리가 이렇게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는 것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가 가장자신없는 부분이 바로 이 경신슬 분야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그는 심호흡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잠시 거리를 잰 다음에서너 걸음을 달려가서 뛰었는데 그대로 실패해 버렸다. 그는 단 삼 장도 제대로 날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구경꾼들 틈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자앙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구경꾼들 보기가 창피해서가 아니었다. 언제 왔는지 그 구경꾼들 사이에는 그의 부모님과 누나들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 보기가 그렇게 창피해서 얼굴을 물들인 것도 아니었다. 그가 정말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사부인 소삼중에 대해서였다. 십 년에 걸친 고련이 이 오 장의 거리를 두고 한 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이런 결과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 갈 수 있단 말인가. 눈물이 나을 것 같은 기분으로 그는 터덜터덜 물러서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선 한쪽에 서 있는 시험관에게 물었다. "한번 더 해봐도 됩니까?" 시험관은 생쥐 수염을 한 문사였는데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졸린 듯 앉아 있다가 그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만족할 때까지 몇 번이건 뛰어 보게나!" "뛰어오는 거리는 상관없겠지요? 그러니까……!" 한참 뒤에서 달려와서 그 힘으로 뛰어넘어도 되냐는 질문이었다. 생쥐 수염은 그제야 졸린 눈을 비비며 그를 힐끔 보고는 입가에 비웃음을 흘렸다. "상관이야 없네만……, 그냥 돌아가는 것이 힘 빼지 않는 방법이겠군!" 다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진자앙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신중하게 거리를 재어서 뒤로 물러나러니 달릴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서서 옷자락을 끌어올리더니 팔다리에서 뭔가를 떼어냈다. 여태 달고 다니던 납 덩어리였다.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보호대쯤 떼낸다고 무게가 가벼워지겠어?" "아예 옷도 벗어 던지지그래!" 언뜻 보기에는 전혀 무거워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기에 그러는 것이었는데 그 말은, 그 구경꾼들 틈에 서 있는 진자앙의 가족에게는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얼굴이 뜨끔거리는 고통을 주었다. "난 갈래요!" 돌아서는 고대랑을 진삼산이 잡았다. 진삼산의 얼굴도 썰은 간처럼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극도의 울화를 참아 누르는 모습이었다. "조금만 더 봅시다." 평소 같으면 놀린 구경꾼을 잡아죽이든지, 아니면 놀림당한 아들 자식을 때려 죽이든지 둘 중 하나를 했을 그였지만 그는 참고 있었다. 마음속에 그래도 아들에 대한 한 오라기의 기대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자 악조진은 이미 가뿐하게 통과한 관문. 그 앞에서 허덕거리고있긴 하지만 그래도 진자앙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것이다. 진자앙은 몸이 훨씬 가놘해진 것을 느끼고 이번애는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백 근의 무게를 떼어 내고도 안 된다면 그 다음에는시도할 방법도 없었다. '꼭……!' 그는 마음속으로 외치고 뛰기 시작했다. 선은 금방 눈앞으로 다가왔고, 그는 건너편으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눈앞에 다시 땅이 보였다. 그는 그 땅위를 굴렀다. "이번엔……?" 그는 시험관을 바라보았다. 주위는 조용했다. 시험관이 고개를 저었다. "안됐네만 조금 모자라는군. 여긴 한치라도 모자라면 통과가 안 된단 말일세!" 그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극도의 실망감과 그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쭉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귓전으로 가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 창랑보는 어디다 팔아 먹고 안 쓰는 거야? 너 정말 바보냐?" 전음이었다. 진자앙은 누가 말을 했나 둘러보았다. 구경꾼들 틈에 낮익은 노인의모슴이 보였다. 궁서생 중자릉이었다. 진자앙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것을 써먹을수나 있을 것인가. 오히려 망신만 더 사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서 반대편 선으로 갔다. 사람들이 다시 손가락질하며 웃어대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응원도 보내었다. "좋다! 포기하지 않아야 남자다!" 고대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고 손발이부르르 떨렸다. "이젠 진짜 가요." 그녀는 돌아섰다. 진삼산이 그녀의 소매를 잡아 억지로 끌어당겼다. "한 번, 한 번만 더 봅시다." 그의 손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광동 진가장의 수백 년 명예가오늘 한 순간에 떨어지는 것을 그는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확실히 봐둬야 한다고, 그래서 믓난 아들에 대한 한 오라기의기대마저 버려야 한다고 그는 다짐하고 있었다. 진자앙은 이번에는 선 바로 앞에 섰다. 별다른 자세도 취하지 않고그는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창랑보의 구결을 외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번개처럼 사라져서 반대편선을 훨씬 뛰어넘어, 둘러싼 군중들의 한가운데로 돌진하고 있었다. "우왁--! 이놈이!" "에구, 사람 죽이네!" 철탑 같은 덩치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비명을 질렀지만 사람들은 환성을 질렀다. 그 환성 속에는 끝까지 지켜본 진삼산의 그것도 있었다. 이관문은 진자앙에게는 더없이 쉬운 것이었다. 청동으로 주조된 고대의 저대한 향로 하나가 관문의 전부인데, 그향로를 집어 들고 열을 셀 때까지 땅에 떨어뜨리지 알으면 관문은 통과였다. 향로의 무게는 일천 근. 진자앙은 별로 힘도들이지 않고 들어서 열을 셌다. 통과였다. 그렬계 통과하고 다음 관문으로 가면서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저야 경신술을 워낙 못 하니 그렇다고 쳐도 이런 식의 관문이면 적지 않은 사람이 통과할 것 같군요." "자넨 여기 몇 명쯤이나 참가한 것 같은가?" 호두태는 오히려 반문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대답을 내놓았다. "강호에 무공을 배운 사람이 모두 몇 명일까? 땅이 거칠고 인심은험하니, 우리 백성들이 하나같이 호신을 위해, 흑은 무애를 좋아해서배웠다고 쳐도, 병역을 가서 창 휘두르는 거나 조금 배웠거나 부져칼이나 대충 휘두르는 어중이 떠중이를 레면 일만을 안 넘을 걸세 그래도 이만으로 잡아 보지, 그 이만 중에 몇이나 여기에 왔을까? 난 십분의 일만 잡아서 이천 정도라고 보네 물론 이건 많이 과장해서 계산한거야." 진자앙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어도 사오천은 넘는 군중들이 운집해 있었다. "사오천은 넘어 보이는데요?" "대부분 구경꾼이지. 자네, 관문 통과할 때 줄서서 기다렸나? 아니지. 그냥 세 번 연달아 했잖은가. 첫날이라 탐색을 하는 거라고 쳐도이천 정도밖에 안 왔을 거야." "이천도 많지요." "그 이천 중에 일차 관문을 통과하는 사람이 몇일까? 오 장을 뛰어넘는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아. 보통 사람은 자네가 두 번계 했던 것처럼 죽을 힘을 다해 뛰어도 이 장은 어려워. 어쩠든 조금 후하게 쳐서반은 통과한다고 하세." 그는 그들이 방금지나온 이관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천 근을 든다는 건 어때? 쉬운 일인가? 소 한 마리를 잡으면 보통고기 이백 근 정도가 나오지. 뼈와 내장을 합하면 아마 사백 근 정도가 될 거야, 황소 두 마리 반을 한번에 드는 사람 본 적 있나? 나는 거기서도 반은 탈락할 거라고 보네. 그럼 오백 명 남았지? 이제 나머지한 관문에서 다시 반, 혹은 그 이상이 탈락하겠지. 그럼 난 아무리 잘봐질도 백 명 이상 남는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 중에서 열여섯 명이본선에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지." 세 번째 관문은 비로소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었다. 열 명의 무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이들은 장락궁의 호위무사들, 그 중에도 무공의 고수들을 골라 특별히 삼황야가 가까이 두는 친위무사들이었다. 이들 중 하나와 십 초를 겨루어 지지 않고 견뎌야만통과되는 방식이었다. 진자앙은 그들의 얼굴을 보다가 제일 앞의 사람을 가리켰다. 그 중가장 젊었기 때문이었다 젊어서 쉬을 것처럼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이 든 사람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어쩐지 미안해서 그런 것이었는데일관문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구경꾼들은 손가락질을 했다. "쉽게 넘어가려고 고른 게 하필이면 친위대장이야? 재수도 없지,참." 생각해 준다고 한 말이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말이었고, 그 듣는 사람이 참가자의 부모일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아까부터 참고 있던 진삼산의 울화가 드디어 폭발했다. 그는 주위를둘러보며 벽력 같온 노성을 질렀다. "어떤 놈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만 지껄여대고 있는 거냐?이리 썩 나와!" 물론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진삼산은 화가 더욱 복받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대채로 광동어로 표현되는 것은 욕설이고, 가끔 북경어도 들어갔는데 그중에 '비발동자를 이긴 우리 아들'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그 말이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럼 소협이 금강두 진자앙이란 분이시오?" 상대로 나온 청년무사, 정통 무가에서 태어나 황제 직속의 어림군에서 제대로 무공을 배워 온 쌍창장 양학림이 물었다. 진자앙은 포권해 인사하고 대답했다. "광동 진가장 출신으로, 종화 금강당 오 대 당주인 진자앙이오. 금강두는 제 부끄러운 별명이 분명하오." 양학림은 마주 포권하고는 말했다. "쌍창장이라 불리는 양학림이오. 대명은 익히 들었소. 원래 상대가못 되니 그냥 물러나는 것이 분수를 아는 행위겠지만 규칙에 따라 십초를 공격하겠으니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별말씀을……!" 그래서 강호애서는 이롬이라고 했던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정중한인사를 나누고서야 관문 시험이 시작되었다. 비웃음도 없고, 떠들썩함도 없이 모두들 긴장해서 최근 강호를 놀래킨 젊은 고수의 신위를 구경하는 것이다. 양학림의 창술은 기본적으로 양가창법에서 출발하는 것이었지만 한가지 다른 것은 쌍창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왼쪽 오른쪽의 수련을 동일하게 했다는 의미, 한 자루만 사용하는 경우와는 달리 그 변화가신묘하고 허초가 많아서 피하기 쉽지 않은 창술이었다. 그러나 진자앙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 어차피 피할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눈앞을 가리며 번뜩이는 창 그림자를 그저 보다가 간단하게 세 번이나 얻어맞았다. 양학림이 창을 거두고 물러섰다. "제가 졌소이다. 과연 진 소협의 외공은 듣던 바대로군요." 공격해도 다치질 않으니 더 싸울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함성이 일었다. 오늘의 다섯 번째 관문 통과자가 탄생한 것이다. 진자앙은 얼떨떨한 가운데 사람들에게 떠밀려 가서 예선 통과자의방명록에 이름을 기입하고 다시 사람들에게 떠밀려 갔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중자릉이었다. "갈 곳이 있느니……!" 그래서 그는 그 후 진삼산과 호두태가 아무리 찾아 다녀도 찾을 수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디로 간다고 말을 전할 틈도 없이 납치되듯 끌려 가야 했던 것이다. 해는 서산으로 떨어지고, 달은 동해에서 솟아올랐다. 그 달밤에 진자앙은 중자릉과 함께 산길을 해매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달마저 져버리니 도저히 더 움직일 수가 없어 그들은 모닥불을피우고 앉아 쉬었다. 그때에야 중자릉은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올해 몇이라고?" "스물하납니다." "그래……, 벌써 이십일 년이 흘렀군." 중자릉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십일 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 한숨의 길이로 표현하려는 듯이,"내가 네 인생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알고 있느냐?"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할아버님은늘 말씀하셨지요. 궁서생 할아버님이 아니었으면 전 세상에 있지도 않았을 거라고……!" 중자릉은 진자앙의 말이 진심인지 보려는 듯 한참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잘 모르겠다만 다만 한 가지, 네게 미안한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것 같다. 음……, 염정이라는 아이에게도." 진자앙의 눈이 반짝였다. "염정이요? 염정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리고 염정에게는 왜 미안하십니까?" "그야……! 너 그 일은 잘 모르고 있구나. 염정이랑 네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거. 근데 넌 염정을 어떻게 알지?" 두 사람은 서로를 유어지게 쳐다보았다. 서로 무엇을 알고 무엇을모르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감탄사를 외쳤다. "그럼……?'" "그럼……!" 중자릉이 진자앙을 가리키며 놀라 외렀다. "그림 네가 칠선관에서 염정이 도망갈 때 도와 줬다는 아이냐? 삼선녀에게서 얘기를 듣긴 했지만 난 그게 설마 넌 줄은 몰랐지." 진자앙도 놀라 물었다. "제가 태어난 날, 같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는 여자아이가 염정이었습니까? 저희 사부님 따님인데요? 그리고 바꿔었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와 뭐가 바뀌어요? 아! 그럼……?" 진자앙의 머리가 지금처럼 빨리 돌아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는 말응 하면서 동시얘 깨달았다. 그의 출생과 체질에 대한, 사부 소삼중과 진가장 사이에 얽힌 묘한 꼬임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있어서중자룽이 한 역할들을. 중자룽도 진자앙의 말을 들으면서 연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꼬여도 그렇게 꼬일 수가 있나! 인연이 얽혀도 그렇게까지 얽힐 수가 있나? 그것 참……!" 두사람은 연신 말하며 동시에 듣고, 동시에 질문을 퍼부었다. 남들이 들었다면 두 사람이 싸운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밝혀지자 두 사람은 다시 조용해졌다. 진자앙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깊은 생각에 잠기고, 중자릉역시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지만 진자앙과는 달리 깊은 죄책감에 잠겨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내 죄로다. 하아…… 알고 보니 내 죄가 적지 않구나! 이십일 년간 이 꼬인 매듭을 풀려고 이리저리 뛰었는데 단 하나도푼 것이 없이 세월만 흘렀구나. 난 작은 실수에 보상은 크다고 생각했지만 죄는 크고 한 일은 없었어. 그 세월이 길다고 생각했더니 오히려짧기만 했었구나." 그렇게 한탄조로 감회를 토로하던 중자릉은 문득 진자앙에게 깊이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미안해. 이 늙은이가 일을 제대로 못 해 네게 깊은 아프을 안겨 주었다." 진자앙이 펄쩍 뛰어 일어나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할아버님께는 죄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에게 진짜 잘못이 있는 것일까. 잘못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아무에게도 잘못은 없었습니다. 그저 운명이 그런 거죠." 진자앙은 히죽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덕분에 이만큼이나 컸을지도, 또 할아버님 말씀처림 애초에 생명을 구한 것이 다 궁서생 할아버님 덕분이기도 하구요. 단지…… 염정만 찾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은 제대로 돌아갈 텐데요." 그는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염정이 진짜 진가장의 자손이면 좋겠습니다. 평생 부모님을 모르고살았었는데 얼마나 좋아할까요? 저도……, 아니, 저회 사부님도 저승에서나마 외로워하진 않으시겠지요. 알든 모르든 간에 저랑 십 년 가까이나 같이 살았으니까요. 한번도 아버님이라고 불러 본 적은 없지만, " "그건 아직 모르는 얘기니까 함부로 단정 짓지 마라. 그리고 염정은이미 찾아 놓은 것이나 진배없다." "정말이요?" "물론!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때 칠선관에서 도망간 후 그애를 데려갔다는 고관이 누군지 알아 냈거든. 네 이번일만 처리하면 바로 그를 찾아가 만나 볼 작정이었다." "그 고관이 누구……!" 묻다 말고 진자앙의 머리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그는 불쑥 외쳤다. "혹시 매요신 아닙니까?" 중자릉이 어리벙벙해서 그를 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나도 얼마 전에 묘선고를 만나서야 겨우 알아 낸 건데?"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어쩐지 친숙한 느낌이라더니!" 진자앙은 벌떡 일어나 뛰려고 했다. 중자릉이 얼른 그의 소매를 잡았다. "어딜 가려는 게냐?" "염정을 만나져고요." "그건 나중애도 괜찮다. 지금은 네 일이 급해!" "제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네가 어전시합에서 이기려면 록 해야 하는 일이다." 중자릉은 말했다. 그는 원래 맺힌 구석이 없고, 매인 곳도 없는 사람이었다. 일처리가트릿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리 큰 잘못을 저질러 본 적도 없는 사람 그런 그가 평생에 가슴에 사무친 것이 있다면 바로 진자앙과염정의 일 하나뿐이었다. ' 그리고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이십여 년을 동분서주하면서 염정을 찾아 해매었던 것이다. 여자아이를 안고 간 도사 하나를 찾는 일은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찾아 내었다. 그 일에 비하면 진자앙의 일은 누워 떡 먹기나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었다. 바로 체질을 고쳐 주는 문제였다. 처음엔 영약인 줄 알고 잘못 복용한 이화복령사의 독만 없애 주면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미 그것은 필요없어져 버렸고, 이젠나름대로 길을 찾은 진자앙이 완성되도록 도와 주기만 하면 될 거라고생각하게 되었다. 그레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남악 화산. 그 무수한 봉우리 중에 하나를 찾아 산노인을 만나기 위해. "그를 왜 만나야 합니까?" "그가 반선이다! 네 금강불괴를 완성시켜 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하나뿐이지." 진자앙은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겁니까?" 정확한 나이야 알 수 없지만 금강당의 초대 조사인 대력금강 철우를기준해 생각한다면 대충 이백 살은 넘고 삼백 살은 안 될 정도의 나이일 것이다. 중자릉은 그 비현실적인 일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화산의 어느 봉우리에 신선이 산다는 얘기는 고래로부터 무수히 많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난 이 산노인의 얘기만큼 흥미로운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중자릉은 원래 도가의 불로장생술 같은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산노인을 보고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내공의 덕이겠지!" 내공을 익히는 데에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배워, 주야로 운기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방법이다. 이 방법을 따라 고수가 된 사람이 당대에는 진자룡이 있다. 영약을 먹어 내공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또 있다. 원굉도가 그 예였다. 사도에 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채음보양술, 혹은 흡정술을 사용해내공을 무한대로 끌어올리는 경우도 있다. 영리충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것말고는 없을까? 아니, 있다. 산노인이 그 나머지 한 방법의 유일한 실천자이자, 성공자다." 이른바 천지의 정기를 수렴하여 몸에 쌓는다는 것이었다. 도가에는아픈 사람이 건강한 나무를 안고 있으면 그 생명력이 전해져서 병이낫고, 대신 나무가 시들해진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나무나 풀, 심지어 들과 하늘얘서도 기를 받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가에도 그런 것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아침이 오기 직전인 새벽녈, 밤의 기툰이 극성이 될 때 조용히 좌정을 하면 소위 야기를몸에 쌓을 수 있다고 한다. 맹자가 말한 바 호연지기도 단지 도덕적인 가르침만이 아니라 실제의 기를 몸에 쌓는 것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산노인은 그것을 실천애 옳긴 사람이었다. 어느 해 약초를 채집하러 화산애 오른 사람이 한 골짜기에서 이상한것을 보았다. 벼랑에 한 사람이 반쯤 박혀 있는데 나무뿌리가 그 몸에뿌리를 박고 있으며, 하반신은 흙과 동화된 것처럼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처음애는 벼랑에 새겨진 불상인 줄 알았는대 자세히 살펴보니 호흡을 하고 있더라는 것. 약초꾼이 귀신을 만난 줄 알고 비명을 지르며 마을로 도망간 후 그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화산 아랫마을에 전해졌다. 이와 똑같은 것을톡격한 사람이 그 후 백여 년 동안 열서너 차례나 있었으며 그때마다그 벼랑 속의 사람은 살아 있타는 것이 확인되었다. "예전애 이곳을 지나가다가 그 소문을 들었지. 알다시피 나는 호기심이 유달리 왕성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사람 아니냐. 당장산으로 올라가 봤지. 전설은 부정확하고 산에 골짜기는 맡으니 열흘을 넘게 찾아 헤매었지만 비슷한 것도 볼 수가 없었다. " 그러다가 밤이 오고 그는 길을 잃어버렸다. 화산의 최고봉은 연화봉,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그 자체가 산과 다름없는 곳으로 거기 화산파가 자리잡고 있다 화산 어디에서든 그 다섯 개의 특징적인 봉우리만 찾으면 자기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연화봉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그는 아늑한 골짜기 하나를 찾아 들어가 거기서 쉬기로 했다. 그러다가 그를 보았다. 산노인이었다. "나는 그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전설은 사실이었고, 더구나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반선이었던 것이지." 반선을 그는 진자룡이나 소삼중과는 다른 경로를 통해 알고 있었다. 바로 그의 사조뻘인 유림의 거두 유장거사 손이원의 오랜 친구 진양 도인이 바로 반선으로, 그도 어릴 적에 한두 번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전진파의 마지막 장로 진양 도인. 그는 한 가닥 가늘게나마 전해져 오던 전진파의 명맥을 마지막으로이은 사람이라고 알려졌었다. 그 말은 중원의 정통 내가심법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우화등선했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를 마지막으로 전진교의 정통심법이 사라지게 된 것을아쉬워했었다. "그런데 그가 거기 있을 줄은 난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아마도 뭔가 사이한 신공을 연마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기도 했지, 그러나 네할아버지를 만나 보고, 거기서 네 이야기와 금강불괴에 관한 이야기를듣게 되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 또한 자기 방식으로 금강불괴에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야."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고 진자앙은 갈등했다. 장안에서 화산은 그리 먼 곳이 아니지만 오는 데 하루나 걸렸다. 다시 돌아가는 데에도아마 그 정도는 걸릴 것이다. 그는 엿새, 아니 이미 하루는 지났으니 닷새 안에 장안에 돌아가 예선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중자릉은 그것도 문제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을지 난 모른다. 사실 숨은 쉬고 있지만 거의 죽은 것처럼 말도 없고, 반응도 없었지, 하지만 분명 죽은 것은 아니었어, 흔들어 보려고 건드렸다가 오히려 내가 죽을 뻔했지. 그엄청난 반탄력이라니……!" 그는 혀를 내둘렀다. 진자앙이 물었다. "그런 상태라면 가봤자 별 볼일도 없지 않습니까?" 나는 그애개 책의 나머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인연에 따라괴는 얻는 것이 다를 수도 있고. 그는 내가 예전에사부님 아래 있을 때부터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 내가 보기 싫어눈율 뜨자 알았는지도 모르지." 그는 흔자 하하 웃고는 고개를 설레설례 흔들었다. "그보다 그곳을 어떻게 찾느냐가 더 문제로구나." "연화봉 아닐까요?" "뭐라고?" "화산에서 연화붕을 볼수 언는 곳은 연화봉 안에 있을 때밖에 없지않졌습니까?" 중자릉은 입을 딱 벌리고 한참을 있더니 갑자기 진자앙의 손을 잡고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헨다. 과연 골짜기는 거기 있었다. 연화봉 북쪽사람들이 흔히 다니는 길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작은 골짜기였다. "평범한 것 속에 담긴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라더니……정말 등잔 밑이 어둡구나." 골짜기를 찾았으니 산노인, 반선을 찾는 것은 이미 일도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서도 중자릉은 금세 산노인을 찾아 그 앞에 섰다. 들은 대로 산노인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등은 돌 속에 파묻혀 있고, 아래는 흙과 풀 속에 묻혀 있는데 단순히 묻힌 게 아니라 마치 돌과 흙, 풀과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바위틈에서 나온 나무뿌리는 산노인의 몸에도 파고 들어가 반대편에그 끝을 보이기도 했다. 중자릉이 문득 말했다. "절이라도 해봐." 진자앙은 시킨 대로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대력금강 철우의 사대손이며 선인께 오칠비결을 가르침받은진자룡의 손자 진자앙이 선인을 뵈러 왔습니다."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흠…… 역시 너로도 안 되는구나. 전에도 내가 별짓을 다 해봤지만눈도 꿈쩍 않았거든. 나중에 건드렸다가 죽을 뻔한 뒤에는 포기를 했지만…… 아, 안 돼!" 뒤에 서 있던 중자룽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진자앙은 산노인의 옆구리를 건드리고 있었다. 거기로 파고든 나무뿌리 하나가 아무래도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중자릉이 뒤늦게야 보고 소리를 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진자앙의손은 나무뿌리 어림의 옆구리까지 건드리고 있었고, 다음 순간 갑자기번개를 맞온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중자릉이 급히 그를 잡아 때려다가 입으로 피를 토하며 뒤로 날려갔다. 진자앙의 어깨를 잡는 순간, 아니, 거기 옷자락에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엄청난 충격이 그의 손끝을 마비시키고 가슴을 때렸던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중자릉은 다시 진자앙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감히 건드리지를 못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진자앙은 고통스러운듯 눈을 부릅뜨고 입슬을 꽉 깨몰고 있지만 동공이 열려 있어 죽은 것과 진배없는 모슴이었다. 중자릉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수밖애 없었다. "이거 병 고치려고 데려왔다가 죽이고 마는구나! 네가 죽으면 난 자룡을 어멓게 보느냐. 나도 여기서 같이 죽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 그러더니 그는 이번엔 산노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 보세요, 진양 도인 어른. 애전에 제가 도인 어른에게 알코도사라고 놀란 것은 벌써 백여 년이나 전의 일이고, 일전에 이미 사과를했잖습니까. 아까 그 아이가 말한 것처럼 그 아이는 도인 어른과도 아주 관재가 없지 않은 두 사람의 마지막 씨앗인데 이대로 죽이시면 어쩝니까? 신선이 되더라도 혹시 황천에서 오다가다 그들을 만나기라도하면 그 원망을 어쩌실 것입니까?" 그떼 그의 머릿속으로 천등 같은 음성이 들려 왔다. "버르장머리얼는 것이 선인이 참수하는 데 와서 평정을 깨더너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다 하는구나! 죽이긴누가 누굴 죽인단 말이냐! 이 아이는 선근이 있어 약간의 도움을 주려니와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니 어서 데리고 썩 꺼져라! 나는 이제 정말 동천으로 가노니 다시는 여기 오지 말고, 이제 나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아라!" 산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그 눈에서 번갯불 같은 안광이 폭사되어한 순간 골짜기가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자릉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진자앙은 꼿꼿이 선 채 정신을잃고 있었고, 그 손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산노인은 이제진짜 시체가 되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입을 다물어라! 죽어도 입을 열면 안 된다. 수행하는 사람은 입을 열면 신기가 흩어지고, 혀를 놀리면 재앙이생기는 법이다." 불길과도 같고 번개와도 같은 강렬한 기운이 손끝을 통해 단전으로밀려들고 다시 삼관을 지나고 명당을 돌아 일곱 구멍을밀어 열었다. 삼관은 뇌의 뒤쪽에 있는 옥침관, 등에 있는 녹로관,신장과 심장 새에 있는 미려관을 일컫는데, 달리 생사현관이라고도 하는 곳이다. 진자앙은 한 순간에 생사현관을 뚫고 내공을 몇 단계증진시킨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끝으로는 끊임없이 뇌전과 같은 기운이 밀려들고, 머릿속에는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위로는 니환궁(정수리)에 이르고, 아래로는 용천혈(발바닥)에 이르고, 신수는 두루 돌아 화지(혀 아래)에 들어가고. 간화는 심장으로 들어간다. 단전은 보를 얻어 더워지더라, 영아와차녀를 음양으로 배합하니, 납과 수은이 합쳐져 일월로 나뉘고. 이용(팔괘의 하나,불)과 감호(팔괘의 하나, 물)를 조합했더니. 영구는 금오의 피를 빨더라. 삼화(정, 기, 신)는정수리에 모여 뿌리 내리고, 오기(오행의 기운)는 원으로 모이더라……" 영아와 차녀란 납과 수은을 도가에서 일컫는 용어. 납과 수은은 역시 도가에서 연단의 재료로 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내공수련에 적용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혹은 마음을 뜨겁게 하라는 뜻이 되었다. 그는 지금 전진도교의 심오한 내공심법을 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은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오칠비결과그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가장 근본적이고,보편적인 원리로서 인체와 우주를 통괄하는 기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애 근본을 파고들면 모든 내공심법들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단지 해석하는 방법에 있어서 불가의 것은 선과 오와 같은불가의 용어를 사용하고, 도가의 그것은 영아와 차녀 같은 도가적인용어를 사용하며, 유가의 것은 유가의 성와 리를 사용하여 해석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내공의 성격이 같다 다르다 하는 것은 강조하는 분야가다름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이해하기 쉽고 어려움은 이미 알고 있는것과 해석하는 방법이 같고 다름애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온몸의 구석구석을 찬물로 셋어 내리는 것과 같은 기의 폭우를 맞으면서 진자앙은 다른 한편으로는 발이 땅에서 떠 구름 위에 노니는 듯한 깨달음과 탈각의 황흘경 속에 잠겨 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머리에는 두 개의 아계(도사들이 하는 상투)를 짓고 몸에는 자투리 천을 이어 댄 백납의를 입고 손으로 어고간(한쪽을 고기의 쩔질로 싼 두 개의 죽통)을 치고 입으로는 도정사(도사가 부르는 악가)를 부르면서 그의 앞에 꿈결처럼 다가오더니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보면 계피학발의 노인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붉은 얼굴의 청년도사 같기도 하며, 보고 있는 사이에 토실토실한 뺨의어린 도동같이 보이기도 했다. 한 몸에 그가 살아 온 여러 시간의 흔적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고간을 가볍게 한번 두들기더니 그에게 말했다. 예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음성이었다. "당년에 나와 네 오대조. 그리고 고불화상은 무의 궁극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놓고 칠 주야 간 논의를 했더니라. 결국 무의 궁극은 완전한 인간, 즉 금강불괴라는데까지는 일치했는데 그 금강불괴가 어떤 것인가를 두고다시 논쟁을 했었더니라. 네 오대조는 육신의 완벽함을,나는 천지의 기와 하나되어 진정한 삼재의 하나로서의 인이 되는 것을. 그리고 고불화상은 깨어지지 않는지고한 정신의 경지, 즉 부처가 되는 것을 주장했었으니,그 생각들을 각자 저술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 <금강불괴요결>이었다. 겉으로는 한 가지 결론에 합의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우린 모두 각자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있었기 때문에 각자가 주장한 바대로 성취하여 다시 만나기로 결정하고 헤어졌더니라." 그리고 나서 그는 이 골짜기로 와서 백수십 년을 참수했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꿈꾸었지만 아직 아무도 성취하지 못한 천지교류의 내공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잘 되어 가는 듯했더러라. 십 년이 지나고 이십년이 지나면서 나는 내공의 극을 달리게 되었으며 그 극뒤에 또 다른 극이 있음을 보게 되었음이니…… 내 앞에서인간의 한계와 모든 장벽들이 허물어지고 부스러졌으며 나는 뛰고 또 뛰어 장벽에서 또 다른 장벽으로 넘어가고 있었더니라.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인간이 아니게 되었음을 알았더니라. 끝없이 밀려드는 기의 홍수 앞에 나는 그저 한정업이 받아들이고 믐 안에 쌓아 놓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육신에 얽매이게 되었음을……!" 그렇게 백 년이 지나고 또 다른 백 년이 시작되었다. 그는 진정한인간이 되고자 했지만 오히려 나무나 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거기애서 빠져 나을 수가 없었다. "그때 테가 나타난 것이니라. 나와 같은 성질의 내공을 익힌. 그러면서도 채워져 있지 않고 비어 있는 상태의 그룻을 가진 내가! 나는네 그룻에 내 기운을 옮겨 담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졌으니……! 비록 바다에서 한 그룻 물을 푼것롸도 같으나 그 한 그룻의 여유가 없어 여태 나무도 돌도 아닌 상태로 있었음이여. 나는 이제 진정한 자유를 찾았으니 동천으로 돌아가려니와 너는 네 오대조와 고불화상을 찾아 지난날 우리가 하려 했던 부질없는 짓에서 나는빠져 나갔음을 알려 주려무나." 도인은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흐릿해졌다. 그가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진자앙의 머릿속에는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도정사만 남아 울리고 있었다. "가장 많은 것은 모자라 보이며 온전히 등근 것은 이지러져 보이나니……!" 진자앙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중자릉의 근심스런 얼굴, 그 다음에는 하늘에 뜬 달이었다. "어이구, 겨우 정신을 차렸구나. 괜찮으냐?" 진자앙은 일어나 앉아 팔을 혼들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전보다 몸이 가뿐한 것 같군요."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벼랑에는 여전히 산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싸늘한 시체, 정과 령을 잃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는 일어나 조심스럽계 절했다. 중자릉이 그에게 책 한 권을 넘겨주었다. <금강불괴요결>의 두 번째 부분, 연기편이었다. 진자앙은 그것을 펴보았다. 내용은 이미 짐작했던 대로 오칠비결이었다. 그 내용을 세밀하게 나누어 서른여섯 단계로 기술해 놓은 것이금강삼십칠로에서 칠십이로까지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는 책을 품속에 간직하고 중자릉에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겠습니다. 이제 새벽이니 저녁때쯤에는 장안에 도착할수 있겠지요. 그럼 하루 쉬고 그 다음날 예선을 치르면 되겠지요." 중자릉이 잠시 조용히 앉아만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전시합은 포기해라. 이미 늦었다." "예?" 중자룽은 더할 수 없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이 우리가 장안을 출발한 지 육 일째 되는 새벽이란 말이다. 넌 오 일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어!" "예?" 진자앙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중자릉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그냥 옮겨 갈까도 생각했치만 네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손도 댈 수가 없었다. 미안하구나. 일이 이렇게 되다니. 나 혼자라면 반나절 만에 가겠지만 널 데리고는 아무리 달려도 밤 늦게나 도착할 텐데……!" 그떼는 물론 얘선이 끝난 상태일 것이었다. "강호애 이름을 날리는 일이 꼭 비무대회 우승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 있으면 이름은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지. 이번 비무대회는 너와 인연이 없는 것 같으니 포기하려무나."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꼭 이름을 날리려고 어전시합에 참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제 자신을 시험해 보고픈 마음이었고, 황사 매요신과도 관련이 있으니 ……!" 그의 머리에 순간적으로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비무대회는 삼항야가 개최했지만 그 배후에는 황사 매요신이 있다. 황사 매요신은 최근 무림에 깔린 음모의 배후라는 의혹이 농후하니 어쩌면 이번 비무대회얘도 무언가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되든 안 되든 한번 해보기는 해야겠습니다. 장안으로 가지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몸이 번개처럼 사라졌다가 벼랑 한쪽에 부딪친 채로 나타났다. 중자릉이 그 옆에 섰다. "너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거냐? 설마……?" 그 설마가 바로 정확한 답이었다. 진자앙은 어설픈 창랑보로 장안까지 뛰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다시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그때마다 어딘가에 부딪친 상태였다. 그의 외공이 당년의 대력금강 철우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되어있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지도 몰랐다. 중자릉은 처음에는 말렸지만 결심이 이미 확고하니 어쩔 도궈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말리는 대신 넘쳐나는 공력을 조절해서 제대로 창랑보를 사용하는 방법을 전수하려고'했다. 달리고, 부딪치고, 배워 가면서 진자앙은 장안으로 가고 있었다. "겁나게 이쁘군!" 유소림은 한참이나 입을 벌리고 있어야 했다. 푸른 공단옷에 연분흥겉옷을 걸친 그 여인이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그를 지나쳐서 사람들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사람 치료하다 말고 뭐 하는 거요?" "응?"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발치에 누운 사람을 보았다. 이름이 태악검객 단무흔이라고 했던 그 사내는 멋있는 이름만큼 무공이 세지는 못해서 방금 비무대에서 두들겨 맞고 떨어진 참이었다. 그리고 장자궁에 임시 고용된 떠돌이 의원인 그의 손에그 치료가 맡겨진 것인데……! 유소림은 그에게 화타고 하나를 던져 주고는 일어섰다. "그냥 조금 찢어지고 다친 것이니 내가 손댈 것도 없군! 찢어진 데는 이걸 바르고 멍든 데는 찬물로 찜질이나 하시오." 그는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단무흔이어이없다는 듯 보다가 소리쳐 물었다. "고작 그게 다요?" "밥 잘 먹으면 나을 거요!" 유소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한마디 외치고는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어전시합의 예선 마지막 날 오후쯤 되면 그 동안 용기가 없어 나서길 망설였던 사람도 나서기 마련이고, 마지막의 화려한 등장을 위해벼렀던 사람도 박수를 받으며 등장하기 마련이다. 구경꾼들은 그것을기다리고 있었고, 그래서 장락궁엔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소림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금방 푸른 공단옷의 여인을 찾을수가 있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그의 날카로운 눈은 놓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그녀가 지체 높은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단상에 앉아 있음에야. 푸른 공단옷의 여인, 매불염은 평소에 항상 쓰고 다니던 면사를 벗고 단상 위에 흘로 앉아 있었다. 원래는 이번 시합의 공증인으로 초대된 명숙들과 삼황야가 앉을 자리로 마련된 단상. 아직 예선전에 불과해 아무도 나오지 않은 그 자리에 그녀 혼자 앉아 있는 것이다. 유소림은 그녀의 미모를 넋을 쓴고 보면서도 어딘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람에게 그녀를 보이기 위해 거기 앉아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 중에도 누군가에게 그녀 스스로를 보여주기 위해. 시간은 흐르고 멀리 서쪽 하늘이 불그스레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예선은 해가 중천에 가기 전인 사시에 시작해서 해가지기 직전인신시 말까지 행혜진다. 이제 시간은 신시 중엽을 넘어 말엽을향해 달리고 있었다. 곧 나흘간에 걸쳐 벌어진 예선전이 모두 끝나고열여섯 명만이 남아 본선을 치르개 되는 것이다. 유소림은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에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그때 징이 울리고 예선전 첫 관문의 시험관인 생쥐 수염이 비무대위로 올라갔다. "에헴, 본인은 서삼락이라 하고, 이번 예선전의 시험관을맡고 있는 필부외다. 이제 애선잔 시한이 일 각여 가량밖에 남지 않았기에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었소. 혹시 시간이 없어 여태 나서지 않았던 분들이나, 여태 나온 분들과 다 친분이 있어 나서지 않았던 분들이밌으면 이 일각내에 나와 주시기 바라오. 시간이 지나면 기회도 같이얼어지고, 그메 가서 후회해 봤자 만시지탄에 불과하단 말씀이오." 사람들이 혹은 웃음을 터뜨리고 혹은 다른 사람들을 보곤 했다. 그들 중에 누가 나설 사람이 없나 해서였다. 누군가가 물었다. "아직 열여섯 명이 차지 않았단 말이오?" 서삼자이 어께를 으쓱했다. "거 이상한 일이지요. 오신 분은 많은데 인원은 안 차니 다들 겸양지덕이 맡으신 것인지, 아니면 용기가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소이다. 계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면 나오시오들." "사람이 부족하면 그냥 나오는 사람은 다 시켜 주면 어떻소? 선착순으로 말이오. 나도 다른 것에는 자신이 없어도 줄 서기는 꽤 고수급이라서 말이오."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서삼락이 짐짓 인상을 쓰며 손을 저었다. "이안하지만 규칙은 끝까지 적용할 것이외다. 세 사람을 이기기 어려워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실력이라면 삼황야 전하의 눈만 더럽히지않겠소? 자 이제 시간이 대충 된 것 같으니 징을 치겠소. 세 번 칠 때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으면 이것으로 예선전을 마치게 될 것이오. 하나!" 그의 구령에 따라 징이 울렸다. 그 징 소리가 유소림의 정신을 일깨웠다. 진자앙! 진자앙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누구의 말을 들어도, 그리고 그가 그 동안 본 것으로도 진자앙은 관문만 통과하고 예선엔 나오지 않았다. 지이이이이잉--! 두 번째 징 소리가 울렸다. 이제 한 번만 더 울리면 예선은 끝나고진자앙은 참가가 불가능해진다. 그는 힐끗 단상을 보았다. 푸른 공단옷의 여인이 일어나서 두 손을마주잡고 있었다. 먼발치로도 그녀가 극도로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알 수 있었다. '설마 진 사제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 테지……!' 이제 곧 세 번째 징이 울릴 시간. 그때 굉음이 울렸다. 그러나 징소리는 아니었다. 콰앙--! 유소림은 눈을 비볐다. "이럴 수가……!" 그가 보는 앞에서 비무대 한쪽이 무너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번개처럼 날아와서 비무대를 부숴 버린 것이다. 나무 조각이 날고 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한 사내가 그 파괴의현장예서 천천히 일어났다. 철탑처럼 큰몸집외 사내, 진자앙이었다서삼락이 저만치 나동그라져 있다가 그를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저었다. "또 자넨가?" 진자앙은 미안한 듯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늦진 않았겠지요? 저도 얘선에 참가하고 싶어서요." 서삼락이 못마땅한 듯 사방을 둘러보며 외쳤다. "이 사람이 마지막 도전자요. 이 사람을 시험해 볼사람 없소?" 진자앙도 포켠하며 주위를 향해 외쳤다. "광동 진가장 출신, 금강당 오 대 당주 진자앙입니다. 가르침 바람니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진자앙이 맹방평을 따라다니며 벌인 활약과 관문 통과 때 벌인 사건은 중인들의 이야깃거리로 널리 돌아다녔었다. 이제 여기 참가한 사람이나 구경 온 사람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좋았다. 서삼락이 다시 외쳤다. "나오는 사람 없소? 없으면 이 사람은 그냥 통과요. 나중에 불공평하다 하지 말고 지금 나와서 실력을 발휘하기 바라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징이 세 번 울리고, 진자앙은 애선을 통과했다. 유소림은 자기도 모르게 다시 단상을 보았다. 매불염은 단상에 이미없었다.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돌렸다. 진자앙도 이미 없었다. "이런 젠장!"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진자앙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그 철탑 같은 체구는 보이지 않았다. "작지도 않은 녀석이 빨리도 사라지네 !" 투덜거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왔다. 장락궁의 서리가 그를 향해 군을 부라렸다. 그를 고용한 자였다. "아니, 바빠 죽겠는데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 여기 기다리는 환자들안 보여? 잘리고 싶어?" "자른다니 잘됐군. 돈이나 주쇼!" 하루, 그것도 반나절밖에 안 했기 때문에 보수는 보잘것없었다. 유소림은 그래도 자기가 남들 하루 종일 보는 것보다 더 많은 환자를 상대했으며 치료한 사람들은 다 쌩쌩하게 걸어나갔다고 우겨 돈을 더 받아 내었다. "다시는 오지 마!" 그는 서리의 욕설을 뒤로하고 장락궁을 나와 상춘대로를걸어 내혀갔다. 장안성 남서쪽은 북쪽과 동쪽에 비해 초라한 집이 많고, 그래서 허름한 객잔도 있었다. 그는 그 중 하나에 들어갔다. 거기가 바로 그가숙박하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어두운 방안에 들어서서 그는 등잔부터 켰다. 그리고는 침상 쪽을 보았다. 한 사람이 누워 있다가 눈을 떠 그를보았다. 퀭하니 뚫린 눈에 바짝 마른 몸매, 완연한 병자인데 눈만은살아서 빛이 나고 있었다. 유소림이 그에게 투덜거렸다. "깨어 있었으면 불이나 켜고 있지 그랬어요. 창문도 없는 방에!" "자앙은……?" 침상애 누운 사람이 바싹 마른 입술을 메어 묻고 있엇다. "자앙은 봤느냐? 어떻게 됐느냐?" 죽은 줄 알았던 소삼중이 거기 있었다. [제이십오장] 철두는 작두로 손가락을 자르고 금강두는 뇌정으로 비무대를 부수다. 장안성 서북쪽에는 삼성육부의 당조황성이 있고, 동북으로는 후당천자들이 거처했던 동내제궁들이 늘어서 있다. 그 웅장한 지붕머리들 아래 뻗은 길을 달려 동문인춘명문에서 바라보면 흥경궁 너머 근정전,화악루의 화동주렴이 눈부시고, 서남 주작대로를 돌아보면 천복사의 석탐군이 홍등가의 청등흥등 속에서 말없이 서 있으며, 남쪽 저편으로 자은사의 대안탑이 달빛 속에 빛난다. 장안성 웅장한 성벽 너머로 해가 지고, 다시 달이 뜬 지도 한참이지난 야반 삼경에 진자앙은 장안성 춘명문 근처 동내제궁들 틈에 비집고 선 작은 절의 허물어진 한 법당 마루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들어을 때 본 부서진 현판에는 칙건금장사라는 이름이금박으로 새겨져 있었고, 민가도 없는 궁궐 사이에 네모지게 자리잡고선 것으로 보아 원래는 왕가의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던 곳 같았다. 한때는 화려한 불사들이 연일 벌어지던 옷이었겠지만 불심 깊은 왕후장상들이 다 유명을 달리하고 궁귈 사이에 박혀 있어 민간의 사람들은 찾아을 수가 얼게 되니 새월과 함께 퇴락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런 추측만이 대도시 장안의 한가운데에 이런 낡은 절의 폐허가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담장은 반쯤 허물어지고 불당은 들개나 들고양이의 집이 되어 떠렸다. 원래 금불상, 은불상이 있었을 자리에는 거미가 집을 짓고 수십년은 더 되었을 듯한 먼지가 괴퉈이 쌓여 있는 것이다. 이 퇴락한 절간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것은 무너진 종루에 뒹굴고있는 거대한 구리종이었다. 종은 반쯤 땅에 묻혀 있었는데 상반부는 눈같이 회고 하반부는 남청같이 파랬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위쪽은 비를 맞아 퇴색이 되고 아래는 흙의 습기 때문에 녹이 슬었던 것이다. 진자앙이 엎드려 있는 곳에서는 그 종이 정면으로 보였기 때문에 초저녁부터 지금까지 제법 긴 시간 동안 그것을 보며 지루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곁에는 얘선이 끝나자마자 그를 여기로 끌고 오다시펴 한 호두태가 엎드려 일지만 엄한 경고에 따라 아무 대화도 나눌수가 없었던 것이다. --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서거나 입을 벌리지 말게. 그러면 우린 극히 중 요한 사건 하나를 볼 수 있을 걸세! 그것이 그를 데려오면서 호두태가 했던 설명의 전부였고, 해가지고달이 동천에 떠오를매까지 여기 엎드려 있는 이유의 모든 것이었다. 진자앙은 원체 기다리고 버티는 일에는 이력이 난 사람, 이유야 어쨌든 거기 엎드려 있는 것이 괴릅다거나 지루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빨리 염정을 찾아 그간의 사정을 알려 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그것에 대해서까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의식이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돌아가신 사부를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사부는 또 하나의 아버지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아버지 어머니라고 생각해 왔던 사람들이 아무 상관이 없는 타인이 된다는 것은생각하기조차 두려운 일이었다. 하나, 한편으로는 염정이 부모를 찾게 된다는 것은 기쁘기 한량없는일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가 잘되기를 바랬다. 염정을 생각하자그는 가슴이 끓는 것 같은 초조함을 다시 한번 느졌다. 도대체 그녀와 매요신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단순히 그녀를 구해주고 구함받은 인연으로 양녀로 삼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매요신과 등천비룡문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그 옛날, 영리충이 염정을 탐내 오지산을 뒤집어엎으며 찾았던 일을 알고 있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한다면 염정이 어떤 식으로든 등천비룡문의 일을 돕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등천비룡문의 일을 돕는 것 같은 행동을 하고있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불안한 생각을 하는 동안 이경이 넘었다. 그때까지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압았고, 그래서 진자앙은 맥락없는 생각에 잠겄 있을수 있었다. 그러나 삼경이 다가오자 상황은 변했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한 사람이 나타나고, 그가 이미 두 번이나만난 적이 있던 옥룡 가휘섭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을 때에도 진자앙은 놀라지 않았다. 호두태가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때 그런 일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단 두 가지밖애 없을 것이고, 그것은 사실 한 가지 일이라고 해도무방할 것이었다. 등천비룡문과 영리충에 관한 일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달빛 아래 검은 면사를 쓴 여인, 매불염이 나타났을 때진자앙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온 충격을 느쪘다. 달빛 아래 퇴락한 절터에서 젊은 남녀가 무엇 때문에 만난단 말인가. 더구나 두 사람은 무너진 주춧돌 한 귀퉁이애 나란히 앉아 정답게무언가릉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진자앙은 어쩐지 분한 생각이 들어 주먹을 움줘쥐었다. 그때 호두태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진자앙이 돌아보자 그는 눈을 깜박거리고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진자앙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히죽 웃었다. 안심하라. 내가 월 어쩐단 말인가. 저 여인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런 의미였지만 기실 그의 가슴속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길로 끓고 있었다. 가휘섭꽈 매불염은 한참 동안이나 정답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휘섭이 매불염의 손목을 잡았다. 매불염은 움쩔하더너 그냥 그에계 손을 허락했다. 진자앙의 가승이 다시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고숨을 죽였다.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매불염의 초인적인 감각이라면 그들이 여기 숨어 있는 것을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다른 누구에게 들켜도 좋지만 그녀에게는 그리고 지금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 진자앙의 심정이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몰랐지만 그녀에게 들키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분해하지 말게!" 그의 귓속으로 호두태의 가는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전음이었다. "남녀관계에는 헤아리지 못할 변천이 있고, 기복이 있다네. 잘못 오해하면어처구니없는 일로 혜어지고 평생을 후최하게 되지." 혜어진다는 그 말이 진자앙의 심기를 묘하게 건드렸다. 그가 전음을할 수 있었다면 곧바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 무얼 헤어지느냐'고쏘아붙였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전음을 못 하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호두태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자넬 여기 데려온 것은 저 모습을 보여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어. 조금 더 참고 있으면 진짜가 나타날 걸세. 그때까지 꼼짝 말고 참게."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매불염과 가휘섭을 보았다. 차라리안 보는 게 나았을 것이다. 가휘섭은 이제 매불염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자앙의 눈에 불이 나게 했다. 더구나 가휘접의 손이 매불염의 가슴 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 먼발치로도 보이지 않는가. 매불염이 돌연 가휘섭을 밀치고 일어났다. 그녀는 뭐라고 몇 마디하더니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가휘섭이 소리쳤다. 덕분에 그 소리는들을 수 있었다. "이번 어전시합에서 이기면 당신에게 청혼하겠소!" 매불염은 돌아서서 가휘섭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진자앙은 눈을 감았다. 이미 본 장면들에서도 층분히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가휘섭의마지막 말로 그의 추측은 확실해졌다. 두 사람은 분명 보통 사이가 아턴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은 고민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아까 호두태에게 해주고 싶었던말처럼 그와 매불염이 도대체 무슨 사이란 말인가. 그저 어렸을 때 하루 반나절 동안 같이 사선을 넘어 도망친 것, 그리고 십 년이 지나서야 다시 만나 한 달쯤 같이 여행한 것뿐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염정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부모가 바꿔어 운명도 같이 바러었을지도 모르지만 어느쪽이 어느쪽 자식이든 사태는 변하는 것이 없다. 둘은 그저 남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가휘섭와 어떵게 되든 그가 고민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그는 깊이 고민했지만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녀가 잘되면 모든 게 잘되는 것이지. 애초부터 그렇게 바라지 않았나. 말로만 그랬으면 진자앙, 넌 나쁜 자식이다. 쓰레기나다름없어!' 결론은 확실했지만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2는어쪄면 자기가 진짜 쓰레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 호두태의 전음이 다시 을렸다. "보게!" 그것은 한 편의 연극과도 같았다. 그들이 숨어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한 편의 연극. 말은 간간이 들려왔지만 내용을 짐작하는 데에는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매불염이 사라진 자리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가휘섭과 얘기를 주고받더니 무언가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긴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달빛에 비친 장포가 유난히 흐릿해 보이는것으로 보아 검은색이 아니라 녹색외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체격과 옷의 윤곽, 그리고 녹색의 긴 장포라는 것을 진자앙은 이미본 적이 있었다. 구대흉신 중 대황봉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등천비룡문의 가휘섭과 화륜맹의 대황봉이라……!' 얼핏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이거나, 혹은적어도 지금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대황봉이 하는 일을 보고 있던 가휘섭이 무언가를 얻어서 자기도 이리저리 다니며 흑은 뿌리고, 혹은 나무등치 같은 것에 바르곤 하는 것이다. 호두태의 전음이 상황을 짐작할 단서를 주었다. "대황봉은 말벌을 의미하지. 놈은 독공의 고수야." 그들은 누군가를 암습하기 위해 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가휘섭과 대황봉이 사라지고 삼경이 되자 그들이 누굴 암습하려 하는지 분명해졌다. 무대에는 이제 새로운 배우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처음 나타난 것은 금면강시 고승풍이었다. 그의 유명한 얼굴은 이제달도 기울어 더욱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에서도 뚜렷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사랍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체가입을 열어 말하면 저런 소리가 나겠다. 싶게 귀에 거슬리는 끽끽거리는소리였다. "둘째 형 어디 있소? 사람을 불렀으면 나와야 할 것 아니오!" 그 소리를 신호로 세 사람이 나타났다. 시기의 공교로움으로 보아이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담을 넘어온 것임이 분명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 중에는 고승풍이 부른 둘째 형, 망산귀초는 없다는 것이었다. 호두태의 설명이 계속됐다. "낭심수사, 양두사, 장비수 이렇게 세 놈이군! 망산귀초와 반대편에 선 자들로 강호에 알려져 있네!" 원래 화륜맹은 구대흉신이 만든 것이라지만 대력귀왕이 살아 있는동안 나머지 팔대흉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력귀왕 급여화가 흔자전권을 행사하는 독제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본성이 흉악해 이름도 흉신인 자들이 야망이 없고, 욕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급여화에게는 안 된다고 해도 최소한 이인자의 자리는 차지하려고 서로 암투를 벌였던 것인데 명목상의 이인자인 망산귀초는통솔력이 없어 사람이 잘 따르지 않았고 대신 오 위인 낭심수사가 도당을 만들어 망산귀초를 견제했다. 낭심수사 그 자신을 뻬고도 양두사와 장비수, 그리고 얼마 전 진자앙에게 죽은 비발동자까지 합쳐서 구대흉신 중의 세력 반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망산귀초에게는 독각시와 대황봉이 있었다. 도당이 넷인 낭심수사의 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데다가 대황봉은 묘족이고 독각시는 흉악하기만 할 뿐, 저능아나 다름없는 자였다. 실질적으로 맹도들을 따르게 하는 데에는 훨씬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맹 내외를 통틀어서 가장 인망이 있다는 금면강시를 포섭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급여화의 심복이었다. 이런 세력균형이 깨어진 것은 맹방평과 진자앙 때문이었다. 맹방평은 급여화를 죽임으로써 그들이 노릴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진자앙은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한 낭심수사 쪽의 한 명을 죽여 망산귀초 쪽에힘을 보태 준 셈이 되었다. 거기에 이제 주인 잃은 금면강시만 포섭하면 힘의 우위를 확실하게점유하게 되는 것이다애초에 그날 초총평에서 발작하지 않고 제법 너그러운 티를 낸 것은대인다운 풍모를 보임과 동시에 자신이 화륜맹의 차기 맹주라는 것을과시하고자 한 것이기도 혔지만, 내심으로는 진자앙이 고맙기도 했기때문일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 보아 망산귀초의 연락을 받고 나온 듯한 금면강시가 낭심수사 일행애개 추궁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망산귀초 편에 붙을 작정이냐는 것이겠지!" 호두태가 설명을 해주는 동안 장내의 상황은 이상한 쪽으로 흐르고있었다. 낭심수사가 종이 한 장을 꺼내 금면강시 앞에 흔들며 소리쳤던 것이다. "여기 네가 우리를 불러 낸 서한이 있는데도 발뺌이냐?" "내가 언제 다섯째 형을 불러 냈단 말이오! 이건 음모요!" 그때 다시 세 명이 나타났다. 구대흉신 중의 나머지 세 명, 망산귀초, 대황봉, 독각시였다. 그들도 한 장의 서신을 꺼내 들고 외쳤다. "다섯쩨, 네가 무슨배짱으로 우리까지 불러 놓고 이제 와서 꼬리를마는 게냐? 두려움을 느끼고 분수를 알았으면 이제라도 무릎을 기고충성을 맹세해라. 그러면 지위를 보장해 주겠다." 그 다음은 계속 티격태격이었다. 강호에 총명이 자자한 흉신 일곱이 모였으니 흉악한 일이 벌어지지않고 어쩔 것인가. 온 그들의 말다툼은 주먹다짐으로 변했고, 고수들의 주먹다짐은 피를 보는 법이었다. 잠간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적아 없이 한데 엉켜 흉기를 휘둘러 가며 싸우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군! 이렇게 초보적인 계략에 속다니……!" 만일 계략이라면 초보적이긴 하지만 지극히 효과적인 계략이었다. 싸울 이유률 가진 사람들은 한군데 모아 놓기만 해도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초보적민 계략이 사람을 오래 속게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곧 낭심수사가 외쳤다. "그만! 이건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한 계략이다!" "웃기는 소리!" 망산귀초가 그를 공격하며 외쳤다. "어떻게든 빠져 나가려고 하지만 힘들 것이다. 가려면 목을 내놓고가라!" 낭심수사는 이를 갈면서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어느편도들지 않고 있던 금면강시 고승풍이 싸움장에 뛰어들었다. "디섯째 형의 말이 맞소! 누군가의 계략이오! 싸움을 멈추시오!" 이리 막고 저리 밀어 내는 식의 고군분투로 싸움은 겨우 진정되었지만 그 피해는 막대한 것이었다. 독각시는 이미 머리가 박살나 땅바닥에 홑어져 있고, 장비수도 그 긴 괄을 잘리고 땅바닥에 누워 헐떡이고있었는데 곧 죽을 것 같았다. 양두사 역시 중상을 입고 나무에 기대어 겨우 서 있고, 낭심수사와망산귀초 역시 피를 홀리고 있었다. 비교적 경상을 입은 사람은 대황봉과 고승풍밖에 없었다. 망산귀초가 소리쳤다. "계략? 계략이라면 도대체 누구의 계략이란 말이냐!" "바로 우리 작품이오." 말과 함께 십여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혹은 노인이고 혹은 청년이며, 또 중년문사에 여인까지 낀 다양한행색의 차람들이었다. 진자앙은 그 중에서 적어도 네 사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 웃을 어울리게 차려입은 당삼고와 강시처럼 마른 활고루 고웅풍은 아주 쉬웠고, 혁련가의 소가주 혁련자휘와 가휘섭은 별다른 특징이 없지만 안면이 있어서 어둠 속애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호두태가 그 나머지 사람들을 하나색 가리키며 이름을 불러 주었다. 다들 들어 본 이름, 그리고 당금 강호애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이들의 이륨이었다. "마환대도자 혁련천조, 세와룡 제갈사도, 옥수고검 남궁기, 팽가, 언가당가의 가주들, 음…… 하토 서문가의 가주도 와 있군……!" 황동 진가를 제외한 소위 팔대세가의 가주들이 거기 다 모여 있다는뜻이었다. 그것은 또한 등천비룡문의 감추어진 실세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는 의이이기도 랬다. 그들이 오늘밤 음모의 주체였던 것이다. 망산귀초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그들을 보더니 천천허 뒤로물러섰다. 그를 중심으로 남은 오대총신이 모였다. 공동의 적을 만을자 비로소 단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힘이 되었는지 망산귀초가 뭐라고 말했다. 태도로 보아 아직도 그들에게는 힘이 있다는 식의 엄포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힘마저 곧 사라져 버렸다. 한 순간 망산귀초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등에서부터 그를 찌르고 튀어나온 대황봉의 손이 그치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고승풍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대답은 대황봉이 등천비룡문의 대열에 가서 서는 것으로 대신되었다. 이미 진자앙과 호두태가 본 것처럼 그는 가휘섭과 다른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갈사도가 학익선으로 나머지 셋을 가리켰다. "너희들의 긴 악행이 오늘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무림정의를 지키려 조직된 우리 등천비룡문의 손에!" 고승풍이 마주 외쳤다. "암계 따위로 우리를 쓰러뜨리고도 무림정의 운운할 수 있을까? 나또한 한 가문의 주인이었지만 너회 같은 일은 부끄러워 샌각조차 한적이 없다." 제갈사도는 화도 내지 않고 여유있게 학익선을 부치다가 갑자기 한소리 외치며 부채를 흔들었다"그런 소리는 땅바닥에 누워서 하는 게 더 어울리겠지!" 그 부채에는 신비한 힘이라도 있는 양, 양두사가 나무를 잡고 스르르 미끄러졌다. 낭심수사 역시 무릎을 꿇었다. 대황봉의 독이 이제 그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고승풍은 큰 부상을 당하지 않고 기력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비틀거렸을 뿐, 쓰러지지는 않았다. 제갈사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옆에 선 청년 셋에게 손짓을 했다. 세 사람이 하나같이 몽등이를 꼬나 쥐고는 앞으로 나서서 고승풍에게다가갔다호두태도. 진자앙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진삼산의 제자 운한경과 동평중, 그리고 맹비룡이었다. 그것을 진자앙은 그들이 펼치는곤법을 보고 알아차렸다. 그들이 펼치는 곤법은 아버지 진삼산이 삼십여 년을 고심참담해서 만들어 낸 비기 광마십삼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마십삼곤이 비록 절세의 곤법이라고는 하나 세 청년이 그속에 담긴 고대랑에 대한 진삼산의 한을 알 리가 없으니 그 진가를 발휘할 수가 없었다. 혹시 그들이 광마십삼곤의 제 위력을 다 발휘할 수 있다거 하더 라도한때 강시당의 주인이었으며 지금은 그와 배반자 대황봉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지만 흑도의 거두 구대흉신의 일 인이기도 한 고승풍을 쉽게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도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미 중독된 상태였고, 진가곤의 세 청년은 젊은 혈기가 넘치는 상태, 곧 고승풍은 이곳저곳 몽등이애 얻어맞고 무릎을 끓어 버렸다. 제갈사도가 학익선을 까닥거렸다. 죽이라는 뜻인 듯한데 세 청년은망설이기만 할 놘, 몽등이를 낸리치지는 않았다. 아무리 흑도의 거흉이라 하나 샛이 하나를, 그것도 중독된 사람을 협공한 것만 해도 부끄러운데 죽이기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아직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대황봉이 앞으로 나섰다. 그외 손에는 무언가 길쭉한 물체가 들려있었는데 바로 그의 성명병기인 봉미침이었다. 이름은 벌침이지만 생긴 것으로 보나 그 악독함으로 보나 야차의 창이라고나 해야할 흉기였다. 그는 그것을 고승풍의 목에 쩔러 넣으려 했다. 그 순간 활고루 고웅풍이 개입혔다. 고웅풍은 강시가 뛰듯이 한걸음 겅충 뛰어 대황봉의 옆으로 오더니두 팔을 동시애 휘둘러 쳤다. 모양은 우습지만 강시당의 비전절기인 고루천강수였다. 대황봉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 이 공격을 퍼했다. 제갈사도가 소리쳤다. "고 가주! 정도를 버리고 사도로 돌아설 것인가?" 고웅풍은 쓰러진 아버지를 들어올려 어깨에 메며 말했다. "난 우리 강시당이 당신들 팔대세가에 짓밟혀 버린다고 해도, 온 세상 사람들이 나더러 소를 위해 대를 잊은 소인배라고 해도 아버지를버릴 수는 없소!" 제갈사도가 외쳤다. "그럴 줄 알았다. 쳐라!" 대황봉이 다시 앞으로 달려나오며 봉미침을 쨀러 갔다. 그 양 옆으로 혁련자휘와 가휘섭이 동시에 공격했다. 호두태가 다시 전음을 보냈다. 등천비룡문의 인물들이 등장한 이후극도로 조심해 입술 움직이는 소리도 내려 하지 않던 그도 참을 수가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번 어전시합은 정말 재미있겠군! 저런 놈들이 본선 진출자라니!" 지금 고웅풍을 덮쳐 간 세 사람이 모두 어전시합 본선에 진출한 참가자였다. 그리고 고웅풍도 그랬다. 진자앙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호두태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진자앙은 그 손을 뿌리쳤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호두태 또한 그를 말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싸워서는 승부가 되지 않아. 신속하게 덮쳐서 치고 빠지는게 가장좋은 방법일세! 자네가 양 옆의 놈들을 맡아. 내가 대황봉을 맡지, 그리고도망가는 걸세 무조전 뛰어서 거리로 나가면 그들도 따라오진 못할 걸세. 체면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자들이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두태는 뛰쳐 나갔다. 진자앙이 그 뒤를 따랐다. 제갈사도가 경호성을 터뜨렸다. "조심……!" 화산에서 장안으로 오는 동안에 진자앙은 창랑보를 이전보다는 훨씬 능숙하개 쓸 수 았었다. 아직 방향을 바꿀 때나 멈출 때 요령이 모자라 실수를 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자앙은 성난 곰처림 달려가서 고웅풍을 공격하는 세 사람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다른 공격방법을 모르기도 할 뿐더러달리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무식한 공격이 의외로 효과를 보았다. 대황봉의 침이 그의 목덜미를 찔렀지만 미끄러져 버렸다. 혁련자휘외 칼은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그를 밀어 내기 위해 휘두른 것에 불과했고, 그 결과 그의 가슴팍을 치고는 되튕겨져 버렸다. 그 칼이 가휘섭에게 향해진 것은 행운이었다. 가휘섭은 용이 새겨진 장검을 들어진자앙을 치려다가 먼저 혁련자휘의 칼부터 튕겨 내야 했다. "튀어!" 호두태가 고웅풍의 어깨를 건드리고는 먼저 담장을 넘었다. 고웅풍은 둬를 돌아보면서도 고승풍을 안고 그 뒤를 따랐다 진자앙은 담장앞에 가자 오히려 멈혀 서서 버티고 섰다. 그의 눈애서 불길이 쏟아져나왔다. "나를 죽이기 전에는 그들을 쫓지 못할 것이오!" 가휘섭이 입술을 비틀며 앞으로 나섰다. 제갈사도가 학익선을 들어진자앙을 가리켰다. "네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천등벌거숭이라고들 하던데 직접 보니 과연 그러하군. 네 할아버지가 무서워 우리가손을 쓰지 못할 줄 알았더냐?" 진자앙은 양팔을 늘어뜨리고 뇌정추를 운기하며 대답했다. "나 진자앙, 금강당 오 대 당주로서 누구의 힘을 빌려 행세할 생각은 없소. 채무가 있어도 내가 감당하고, 일이 있어도 내가 할 터이니조부의 함자를 망녕되이 그 더러운 입에 올리지 마시오!" "더러운 입이라고?" 지낭답게 청수한 제갈사도의 안색이 파르스름하게 변해 갔다. 그러자 그의 인상은 조금 전과는 달리 독사의 그것처럼 차갑고 독랄하게보였다. "그만 하게, 군사!" 혁련천조가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오늘의 일은 무림의 마두, 거흉들을 잡으려는 우리 등천비룡문의충심에서 나온 것일 뿐이야. 자네가 그렇게까지 그를 옹호한다면 자네도 사도의 무리로 몰릴 수 있을 것일세." 그 말투가 제법 온화하고 조리가 있어 진자앙은 분노를 거두고 포권했다. "어떤 사도의 패륜아도 아들에게 아버지 죽는 꼴을 보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휘섭이 나서서 욕했다. "네가 감히 문주님을 패륜이라 모욕하는 것이냐?" 그를 욕하는 것 같지만 은근히 혁련천조의 심기를 동시에 건드리는말이었다. 과연 둘러선 사람들의 낯빛이 조금씩 변했다. 진자앙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진자앙은 태연했다. "당신이 진정 문주를 생각한다면 패륜이라 욕한 나보다는 문주를 패륜으로 몰고 가는 사람을 비난해야 할 것이오!" "건방진 놈이……!" 제갈사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서는데 혁련천조가 제지했다. 그는 진자앙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패륜, 패륜이라……! 패륜이야 해서는 안 되겠지! 그래, 오늘 충고는 고맙네 그만 가보게나. 오늘은 더 이상 쫓지 않겠네." 진자앙은 잠시 얼떨떨해서 서 있었다 이렇게 쉽게 일이 끝날 줄은몰랐던 것이다.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깊이 포권하고는 담장을 뛰어넘었다. 호두태와 고웅풍은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진자앙이 거리를 조금달려 내려가자 곧 그를 기다리는 호두태를 만났고, 그를 따라 몇 구비골목을 돌자 어느 퇴락한 궁귈 정원의 풀숲 우거진 그늘 아래 있는 고웅풍 부자를 볼 수 있었다. "어떠십니까?" 진자앙은 먼저 고승풍의 안부부터 물었다. 호두태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고승풍은 이미 죽었고, 고웅풍은깊이 고개 숙여 오열을 참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고웅풍이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일어섰다. 그는 먼저 그들 둘에게깊이 감사를 표했다. "잊지 않겠습니다." 말은 짧았지만 그 말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음을 진자앙은 느낄 수있었다. 돌아서 가는 그의 뒤에 대고 호두태가 말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거기 있었는지 아시오?" 고웅풍은 멈춰 섰다. 그러나 뒤돌아보지는 않고 고개를 혼들었다"거기에서 뭔가 일이 있을 거라고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제보를 받았지요. 이 편지인데 혹시 고 가주는 누가 보냈는지 알지 모르니 보시오!" 호두태는 편지 한 장을 꺼내 던졌고, 고웅풍은 그 편지를 잠시 보더니 품에 간직하고는 떠났다. "당삼고야!" 호두태는 누가 편지를 보냈는지 모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연인이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던 것이겠지. 슬기로운 행동이랄밖에 없군 덕분에 우린 고생을 했지만……!" "연인이었군요. 두 사람이……!" 진자앙은 연인이라는 말에서 매불염을 떠올리는 그 자신이 이상해고개를 흔들었다. 새벽 여명 속에 뿌연 안개가 깔리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교활하고 그만큼 다루기 어려운 방법으로 공략해오고 있네." 호두태는 본선이 열릴 비무대를 바라보는 관람석 중간에 앉아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진자앙은 호두태가 말하는 그들이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갔기 메문에 별 대꾸 않고 듣기만 했다. "그들의 무서운 점은 정파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이네, 팔대세가라는 요지부동의 정파를 배경으로 깔고, 하는 행동은 그령지 않지만 겉보기애는 정파 같은 문파를 만들어 활동하지. 그들이 화륜맹을없애고, 사부님이 운리무와 황풍사를 얼애도록 물밑으로 응원하며 이번 어전시합에 다수를 참가시키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은다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네." 과연 팔대세가와 등천비룡문이 한통속이라 보면 이번 어전시합은그들의 독무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본선에 진출한 열여섯 명은 요동삼도 중 대형인 정일과 둘째 정이, 산서의 유철두, 모산파의 장문제자도수린 도사, 오대파에서 온 공공 화상,아미파의 비구니 공심, 강시당주인 활고루 고웅풍, 진가장의 대표로참석한 악조린, 마지막으로 진자앙을 합쳐서 아홉 명을 제외하면 전원등천비룡문, 혹은 팔대세가의 후예이거나 암중으로 관련이 있는 자들이었다. 등천비룡문장안분타의 향주인 옥랑군, 낙양분타의 향주인풍류검객 옥반안 황보언, 항주분타 향주인옥룡 가휘섭, 총당호법이자 혈련세가의 소가주 혁련자휘, 역시 총당호법인 번운룡 사문기, 사천 당문의 후계자이자 당삼고의 오빠인 사천일수 당대붕, 마지막으로 어제까지는 구대흉신의 일 인이었으나 이제는 등천비룡문의 방수임이 밝혀진 대황봉까지 총 일곱 명이 그들이었다. 열여섯 명 중께 일곱 명이 한 세력의사람이라면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진자앙은 그들을 하나씩 생각해 보다가 히죽 웃었다. "어쨌든 최후에 남는 사람은 하나겠지요." "그렇기야 하지." 호두태는 진자앙의 괸한 태도에 같이 마음이 풀런 듯 따라 웃다가다시 낮빛을 어둡게 했다. "화륜맹이 거의 와해된 이상, 강호 최대세력은 그들이야. 거기에 이번 어전시합 우승까지 그들 중 한 사람이 한다면 그들의 기세는 그야말로 욱일승천일 걸세. 번거롭게 이 땅 저 땅 쫓아다니며 피 흘리고싸워서 영역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훨씬 고단수의 수법이지.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안 들어줄 문파가 없으면 그것이 바로 무림일통이 아니고무엇이겠나?" 지이이이잉--! 징이 울리고 본선이 시작되었다. 어제의 염소 수염 대신 제법 청수한 인상의 중년 관리가 나와 참관인부터 소개했다. 놀랄게도 현 무림십대고수 중 쌍성으로 불리며 신비 속에 가려져 있던 두 사람, 소림장문인 대보 선사와.무당장문인 육수정 진인이 공동으로 참판인 중의 수좌률 맡았고, 나머지 칠대문락의 장문인들이 우루루 나와 참관인이 되었다. 무림안들은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를 거물들의 얼굴을 보려고 한참이나 소란을 부렸다. 그 중애는 진삼산도 있었다. 그는 장락궁애서 특별히 마련한 관람석에서 다른 팔대새가의 가주및 개방 방주 등과 함깨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장문인들은 몰라도 쌍성의 얼굴은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지라 체면을 돌보지 않고 고개를 내밀어 가며 살펴보았다. 그리곤 실망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문대론가 보군! 저렇게 허약하게 생겨서 무슨 무공을 알겠어? 개방 방주인 표리주전 두공생은 술을 암기로 사용한다 해서 그런 별호가 붙은 육십대의 거지로, 진삼산과는 왜 친한편이었다. 게다가 이 천막 안얘는 진삼산에게나 그에게나, 같이 자리한 것조차 불편한 사람들만 모여 있으니 둘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두공셍이 진삼산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혼들었다. "자네 말을 들으면 꼭 체격 좋은 사람만 고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같군. 고래로 볼품없이 생긴 사람 중애 얼마나 고수가 많았는지 모르는 무식의 소치라고 내가 이해해 두지." 성긴 머리카락에 생기다 만 눈쌥, 술에 중독된 사람 특유의 붉고 큰코. 그가 바로 볼품없이 생긴 사람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진삼산은 그를 힐끗 보고는 물었다. "그래, 볼품없이 생긴 사람 중에 누가 고수인데?" "물론 나지!" "흥--!" 진삼산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한마디 핀잔의 말을 해주려고 했는데 지금 막 비무대에 올라오는 사람을 보고는 표리주전의 말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비무대에는 열여섯 본선 진출자 중에 추첨에 의해 첫 시합을 하기로결정된 두 사람이 나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혁련자휘였고, 다른 한사람은 어찌나 보고 싶어하지 않던 사람이었는지 한동안은 그가 과연그 사람인지도 못 알아볼 지경이었던 사람, 바로 사문기였다. "으윽--!" 진삼산은 버럭 고함을 지르려다가 자리를 생각하고는 겨우 눌러 참았다. 그러나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표리주전이 그런 그를 힐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 "자네 성질 많이 죽었군! 예전 같았으면 일단 달려가 박살내고 봤을텐데……!" 그 말이 간산히 눌러 놓았던 진삼산의 성질을 돋우어 버렸다. 그는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문기를 가리키며 입을 벌렸다.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마침 비무대를 사이에 두고 그와 정반대 자리에 앉아 있던 고대랑의 호랑이 같은 눈과 마주쳤던 것이다. 진삼산은 그저 손을 앞으로 린은 체 부들부들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터질 것 같은 성질을 눌러 참느라린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사문기가 그런 그률 보고 고개를 숙였다. 진삼산은 얼른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혀 버렸다. 그는 정말 인사를받는 것조차 싫을 정도로 배신감을 느껴고 있었다. 시합이 시작되었다. 혁련자휘는 예의 유명한 박도를 들고 나왔고, 사문기의 무기는 비무대 위의 병기가에서 아무렇게나 뽑아 든 제미곤 한 자루였다. 녹이 슨 투박한 칼 한 자루와 몽등이 하나. 겉보기에는 한없이 초라한 두 사랑의 병기였지만 그들이 이어받은 진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병기이기도 했다. 진삼산의 가슴이 다시 벌렁거렸다. 이번애는 울화 때문이 아니라 긴장과 흥분 때문이었다. 가장 아꼈던 재자이기 메문에 또 가장 배신감을 느껴야 했던 제자, 사문기가 아니었던가. 그 제자가 등천비룡문 문주의 아들이자 듣기로는 서열상 바로 위인혁련자휘와 겨루계 되겄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응?" 그는 문득 이 대결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고 가슴이덜컹 내려앉는 불안감에 쉽싸여 혁련천조를 보았다. 혁련천조는 비무대에 시선을 고정시켜 두고 있었지만 계갈사도가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진삼산의 머릿속이 팽팽 돌기 시작했다. 말로는, 혹은 겉으로는 공정한 대결이라고 하지만 문주의 아들과 그부하의 대잘이 공정할 수가 얼다는 것은 상식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중요한 시합의 경우, 부하가 나가 주인과 맞서는 경우란 져주기 위한 경우밖에 없었다. 진삼산은 대진표를 떠올렸다. 첫 번째로 사문기와 혁련자휘 . 둘 다 등천비룡문이다. 두 번째는 옥랑군과 모산 도수린. 하나는 등천비룡문, 다른 하나는등천비룡문이 아니다. 세 번째는 진자앙과 산서 유철두. 둘 다 등천비룡문이 아니었다. 네 번째 악조린과 오대파 공공도 등천비룡문이 아니지만, 다섯 번째옥랑군과 아미 공심, 여섯 번째의 당대붕과 정일, 일곱 번째의 고웅풍과 대황봉, 그리고 마지막 가휘섭과 정이의 싸움까지 모두 등천비룡문대 비 등천비룡문의 싸움이었다. 물론 지금 진삼산은 고웅풍이 등천비룡문이고 대황봉이 아니라고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두 시합이 비 등천비룡문끼리의 대결, 다섯 시합이 등천 대 비등천의 대결, 마지막 하나가 등천비룡문끼리의 대결이었다. 냄새가 나도 지나치게 났다. 그냥 쁩은 제비가 우연히 이렇게 되는 경우가 있을까? 불가능하지는않다고 해도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제비를 뽑는 과정에까지등천비룡문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추리였다만약 제대로 된다면 여덟 명이 겨루는 본선 이차전에서는 두 번째시합만 빼고는 전부 등천비룡문끼리의 시합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나마 두 번째 시합도 여차하면 진가장의 후예인 악조린과 진자앙이 겨루는 것이 될 위험이 있지 않은가. 지금 문제는 왜 첫 번째 시합만 등천비룡문끼리 겨루도록 꾸며졌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혁련자휘의 위치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문주의 아들인 혁련자휘를 우숭으로 밀려고 하는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희생물로 사문기를 바치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때 제갈사도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뱀같이 차가운 그 눈을보면서 진삼산은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젠 누가 말려도 상관없었다. "이겨라, 문기야! 꼭 이겨야 한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인 양, 비무대 위에서 여태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던 두 사람이 격돌했다. 혁련자휘의 칼은 비록 투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그 움직임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그것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없이 움직여서 수십 개의 칼 그림자를 만들며 사문기의 요혈들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칼에 은은히 흐르는 청광들은 도강을 운용하고 있다는 증거. 그는 단칼에 승부를 보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부우우웅--! 사문기의 제미곤도 맹렬히 움직였다. 그것은 혁련자휘의 칼과는 달리 요란한 파공음을내면서 허공을 가르더니 정확히 한 점을 쩍었다. 파앗--! 사문기의 목을 가르려 날아오던 혁련자휘의 칼이 부러질 듯 휘어지면서 튀어나갔다. 정확히 칼의 옆 부분 넓은 면을 때린 한 수였다. 다시 칼이 날아들고, 사문기의 계미곤이 그 옆 면을 때렸다. 그것이수십 번 반복되었다. 칼은 빠르고 예리했지만 봉은 더욱 빠르고 정확했다. 사문기의 제미곤에는 강기니 뭐니 하는 것도 없었지만 칼과 수십 번을 부딪치고도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진자룡이 그 이름을 날린 천기곤의 조파가 사문기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란 현란한 변화도, 기이한 초식이나 산을 무너뜨리는 위력도 없이, 정확하게 때리고 후리며 찔러 적을 무력화하는 곤법의 정수였다. 그리고 그 제미곤의 끝이 다시 한번 혁련자취의 칼을 튕겨 내고, 수십번 반복된 실패에 혁련자휘의 손끝이 흔들리고, 마음이 같이 흔들려버리자 제미곤은 그 사이를 파고들어 손목을 제압해 버렸다. 챙--! 허공을 가리던 칼 그림자는 사라지고, 바람을 가르던 파공음도 같이사라져 버렸다. 비무대에는 떨어진 칼과, 손목을 움켜쥐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혁련자휘와, 제미곤을 거두어 수직으로 세우고 예를 표하는사문기만이 있을 뿐이었다. "우와아--!" 함성은 그제야 울렸고, 첫 시합의 승자는 사문기가 되었다. 푸하하하하하--! 진삼산은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터뜨리며 혁련천조를 돌아보았다. 혁련천조는 머리가 아픈 듯이 고개를 숙이고 양쪽 손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패배를 인정하는 빛이 그대로 떠올라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언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뿐이었다. 진삼산은 그 얼굴들에다 대고 다시 찬번 웃어 줄까 하다가 그래도결국 사문기는 그들의 수하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우울해져서 그만둬 버렸다 방금 그렇게 기뻐한 것이 후회스러을 정도였다. "혁련가의 도법이 원래는 저렇지가 않았지!" 표리주전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아마 혁련가의 가조께서 처음 강호에 나왔을 때는 저 칼만큼이나투박하면서도 쾌속하고, 또 위력적인 도법을 쓰셨대지? 나무꾼답게. 근데 언제부턴가 빠르고 이리한 도법만을 추구하게 되었단 말이야. 그때부터 원래의 맛이 사라져 버렸어," 혀까지 차가며 얘기하는 그에게 혁련천조가 고개즐 끄덕여 수긍했다. "지적하신 부분이 옳소이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고는 다시 관자놀이를 눌렀다. 진삼산은 문득 그가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어딘지 초라하고 힘없어 보이는 것이 마치 손발 다 잘린허수아비 같아 보일 정도땄다. 그러는 동안 비무대애는 다시 두 사람이 나왔다. 등천비룡문의 옥랑군과 모산파의 도수린이었다. 옥랑군이라는 자는 그 출신이 천산, 혹은 장백으로 소문이 돌고 있는 검객인데, 용모가 수려해서 옥랑군이라는 별호를 얻으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출신만 해도 천산이니 장백이니 하고 소문이 난다는 것은, 사실은 그유파가 극히 외이해서 정확한 연원을 모른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모산파 또한 묘한 구석이 적치 않은 곳이었다. 정파라고는 하지만구대문파에 들지도 않고, 무공을 익힌다지만 사실 그보다는 방술쪽에 가까운 것들을 사용한다. 원래 모산파는 상청파라고도 불리며 고대에 위화존이라는 여자 무당이 있어 그녀가 시조라고 했다. 도가경전으로 유명한황정경을 그녀가 지었다는테, 그 내용이 이미 방술이나 법술을 짙게 깔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출신이 묘한 두 사람이 만났으너 그 대결이 자못 흥미로을것으로 사람들은 기대하고 봤는데 의외로 결말은 간단했고 그러면서도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옥랑군은 검을 반쯤 뽑다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어 버렸고, 그순간 도수린은 복숭아나무로 만든 목검으로 옥랑군의 목을 얼음처럼매끄럽게 잘라 버렸다. 별다른 공격도, 초식도 보이지 않은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잘려진 수급을 목검에 얹은 채 서 있는 도수린의 전신에서풍기는 귀기 때문에 비무대는 밝은 대낮인데도 음산해 보였다. 의문을 남기고 도수린이 승자가 된 다음, 두 사람이 또 비무대에 올랐다. 서로 지지 않을 정도로 큰 체구의 사내 둘, 진자앙과 산서제일권인 패권 유철. 일명 유철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또 무식할 정도로 발달한 근육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공통점이 있었으며, 별호 또한 하나는 금강두, 다른 하나는 철두로,비슷한 점이 있었다. 원래 유철두는 소림외가 계열의 외공을 익히다가 나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 산서 지방에 널리 전해지는 권법을 익히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는데, 소위 산서의 유단타라는 것이었다. 계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 산서 유단타는 머리로 받고팔꿈치로 치는 기술이 많은 권법으로 일설에 의하면 역시 소림외가의비전권법인 박투술의 한 변형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 유철두는 권법 대신 무기로 겨루려는 모양이었다. 비무대에 올라을 때부터 옆구리에 보자기로 싼 무엇인가를 끼고 나오더니인사를 마치자 보자기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풀었다. 거기서 나온 것은 뱀을 조각한 몸체에 자루 달린 칼날이 연결된 작두였다. 유철두는 진자앙을 보며 써익 웃었다. 진자앙도 마주 웃어 주었다. 막상막하의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 한번의 미소 교환으로 두 사람은 서로 통한다논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 신농의가라는 의술을 전문으로 하는 가문에서 전해내려오던 약초 써는 작두로, 이름은 단옥전이라 하오. 우연히얻었지요." "귀한 물건 같군요." "귀한 물건이지요. 하지만 나는 이게 약초를 썰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소. 왜냐하면 이걸로 썰어야만 썰릴 약초라딴 사람의 뱃속에서절대로 녹을 리가 없을 테니까. 아마 팔괘로에 넣고 석 달 열흘을 달여도 국물 한 방을 안 나을 만큼 단단한 약초가 아니면 굳이이런 작두를 필요로 하지도 않을 거요." "그렇게 예리합너까?" "그렇소!" 유철두는 작두의 날을 보여 주며 감탄했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의 말과는 달리 작둔 날은 그리 예리해 보이지 않얀다. 그저 우윳빛광채를 흘리는 것이, 보물은 분명 보물이라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내가 비무에 나와서 싸우지는 않고 이런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은 보물을 가졌다고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오. 나는 그저 이 작두가내가 여태 본 어떤 보검이나 보도보다도 더 예리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오. 그래야만 그 다음 말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오. 어느 동도께서보검을 아까워 않고 내주셔서 이 작두의 얘리함을 시험할 수 있도록해주시지 않겠소? 비무에 나온 사람이 싸움은 않고 말만 많으니 짜증스러을 수도 있을텐데 사람들은 전혀 그런 빛이 없었다. 유철두가 또 무슨 괴상한 일을허려는지 궁금증만 중폭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장락궁의 근위대장 양학림이 비수를 하나 들고 비무대 위로 뛰어 을라왔다. "이 비수는 한혈비라는 것으로 가지고 있으면 친인을 죽인다는 전설이 따라다니는 물건이오. 일전에 우연히 구했는데 수차 버리려 했지만 보물을 망치는 것 또한 하늘의 뜻을 망치는 게 아닐까 저어하여 여태 가지고 있었소. 이것이 소용이 된다면 유 대협께서 써주셨으면 좋겠소." 유철두가 감사를 표하고 한혈비를 받아 작두에 대었다. 놀랍게도 써는 대로 한혈비는 동강이 나버렸다. 마치 떡가래 썰리듯 고르고 쉽게썰어지는 것이다. 유철두가 그 작두를 손에 들고 다시 말했다. "이제 이 유철두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는 분은 없으실 것이오. 나는 여기 진 당주가 외공의 고수라는 말을 듣고, 또 나와 첫 시합을 치르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상당히 고민을 했소. 아시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나도 나름대로는 외공을 익혔기 때문에 어지간히 맞아서는 가렵지도 않은 사람이오. 여기 진 당주도 그렇다고 하니 우리 두 사람이투닥거리고 싸워 봤자 손발만 불쌍하지 않겠소? 그래서 이걸 들고 나온 것이오." 그는 진자앙의 앞에 작두를 내려놓고 엄숙하게 말했다. "누구 외공이 더 강한지를 겨루는 것으로 승부를 가름하는 것이 어떻소? 이 작두에 손가락을 잘라 보는 것이오. 그렇게 해서 잘리지 않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혹은 황당해 하고, 혹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식의 비무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려니와 만에 하나 둘 다 손가락이잘리거나 둘 다 안 잘리면 그땐 또 뭐로 승부를 가린단 말인가? 그런데 진자앙은 냉큼 작두를 가져다 놓더니 손가락을 그 사이에 넣고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유철두가 얼른 그를 제지했다. "한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하시오. 만일 진 당주가 다른 방법으로 숭부를 가릴 생각이 있다면 유철두는 아무 소리 없이 그 외견을 따르겠소. 손가락은 한번 잘리면 다시 붙이기 어려운 것이니 말이오." "유 대혐의 의견이 제가 보기에 심히 타당하고, 또 재미있는데 제가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진자앙온 그렇게 한마디하고는 작두를 힘껏 눌렀다. 손가락은 잘리지 않았다. 진자앙은 다시 유철두를 보고 말했다. "제가 힘이 모자라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유 대협애서 한번 밟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유철두는 입을 벌리고 보고 있다가 천천히 다가와 작두를 밟았다. 역시 손가락은 잘리지 않았다. 그는 얼굴에 붉은 핏줄이 솟구치도록힘껏 밟았다. 쨍--! 작두날이 두 동강이가 나서 허공에 튀었다. 진자앙의 손가락은 그래도 멀쩡했다. 유철두는 멍하리 그 파편을 보고 있다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절했다. "유철두가 졌소이다!" 그리곤 손을 들어 모두가 볼 수 있개 손가락을 펴 보였다. 그의 왼손 새끼손가락이 중동에서부터 잘려져 나간 것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그는 이미 혼자 시험해 봤던 것이다. "그런 무지막지한 외공을 어찌 이길 참이냐? 아무리 때려도 안 될텐데……?" "외공을 이기는 것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요. 소제가 유철두처럼 무식한 줄 아십니까?" 악조린은 탁자 건너편에 앉은 진황아를 향해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눈이 파묻히도록 웃으며 밀전병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씹다가 문득 생각난 듯 악조린에게도 하나를 집어 주었다. 악조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군것질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요즘은 진황아가 주는 음식이라면 입도 대기 싫은 것이 솔직한심정이었다. 사실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진황아는 괜찮으니 어려워 말고 먹으라는 듯 턱을 주억거리며 밀전병을 그의 입에까지 들이밀었다. 악조린은 구역질이 나을 것같은데도 억지로 받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야 진황아는 계속 물었다. "외공을 이기는 데 어떤 방법이 있다는 것이지?" 악조린은 그녀가 밀전병을 더 먹이려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얼른 대답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세 가지입너다. 우선 독을 쓰는것입니다. 겉이 단단하다고 장까지 단단한 것은 아니지요. 독공에 당하거나 독물을 마시면 죽는 것은 누구나 같지요. 둘째는 초식의 빠름과 화려함으로 제압하는 것입니다. 제가 관찰해 본 바에 의하면 그는외공 외에는 아는 무공이 거의 없을 뿐더러 동작이 서툴고 극히 느리기까지 합니다. 이럴 때 화려한 초식으로 잘 다루어서 비무대 아래로떨어뜨려 버리면 패배를 시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이건 아무리 누님이라도 못 가르쳐 드리겠군요. 그는 누님의 친동생이니 제가 이런 방법까지 생각하는 것을 알면 저를 원망하실 겁니다." "아무리 동생이라도내가 린아 너를 더 아끼는 걸 알지 않니! 난 네가 우숭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단다. 괜찮으니 어서 말해 봐." 악조린은 다시 한번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고 간신히 웃음을 짓는 데 성공했다. "음경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물의 겉부터 파괴하고 들어가는 양경얘 반해 이 음경은 내부에서부터 진동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니 외공을 익힌 고수에게는 직효약이지요. 겉이 동장철벽으로 이루어졌다 한들 내부 장기가 다 파괴된 상태에서 어찌 버티겠습니까?" "린아 동생은 음경 같은 걸 배운 적이 없잖아. 우리 진가장도 그런건 다루지 않고, 내가 알기로는 린아 동생의 집에도 그런 무공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악조린은 정말로 웃었다. 이것만은 그녀에게도 말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우연히 배우게 되었지요, 하하!" 그때 방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악조린에게한마디 내뱉었다. "그럼 내일 있을 이차전에서도 승리는 확실하겠군!" 악조린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들어온 사람은 그의 사부 진삼산이었던 것이다. 앞에 앉아 있는 진황아에게 집중하느라 밖에서 들리는인기척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너는 저쪽 구석에 가서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어!" 진황아가 우거지상을 지었다. "어서 못 가?" 진삼산의 눈이 성난 말의 그것으로 변했다. 진황아는 하는 수 없이비척거리며 방 구석으로 다가갔다. 진삼산이 한마디 더 추가했다. "요강 들고!" 딸이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다시 악조린을 보았다. "내일 무얼 어떻게 해서 이기든 그건 상관없다. 내가 궁금한 것은단지……, 단지 오늘 왜 오대파의 공공 화상을 죽였느냐는 것이다." 그랬다. 오늘 악조린은 네 번째 시합에 나기써 오대파의 공공을 때려 죽여버렸다. 격투 중에 일어난 불상사라고는 하지만 이미 승부는 결정된상태애서 과하게 손을 써서 상대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을 진삼산은 예리하게 알아보았턴 것이다. "이기기 위해서었습니다." 악조린은 그헝게 대답했다. "넌 이미 그매 이겼었다. 공공의 역벽화산 초식을 광마분종으로 막아 내고 광마당곤으로 가슴팍을 제압했을 그때얘 넌 이미 이겼다. 공공은 포기한 상태였고, 더 싸울 힘도 없었어. 네가 물러서면 곧 패배를 시인할 태세였단 말이다. 그런대 광마압저로 정수리를 후려갈기는 게 왜 필요했던가, 그것이 꼭필요했던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삼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조적으로 그의 꽉 움켜컨 주먹은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거기 땀방울이 맺히기시작했다. '광마의 콧잔등에 땀이 맺히면 누군가 하나는 죽는다!' 악조린은 그 유명한 격언을 생각해야 했다. 아마도 그를 향해 주먹이 날아오겠지만 죽는 것이 꼭 그가 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다행히, 누구에게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다행히 진상산의 성질은여전에 비하면 많이 온순해졌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탁자를 들어 창 밖으로 던졌다. 벽에 붙박이로 박힌 침상을 뜯어 맨손으로 그 나무판자들을 찢더니 이불마저 갈가리 찢어 버렸다. 그러고도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세 개밖에 없는 의자중 두 개를 작은 나무토막들과 나무 부스러기의 더미로 만들어 버렸다,그러고는 간신히 이성을 회복해서 악조린을 향해 외켰다. "개 같은 놈의 종자! 썩 꺼져 버려라! 넌 오늘부로 파문이다!" 이런 일련의 행동은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자리에서 졸도하게 만들수 있고, 웬만한 무림인들도 꼬리를 감고 도망가게 할 수 있는 강력한시위였다. 그러나 악조린은 웬만하지가 않았다. 그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단지 그 동안의 세월이 억울했을 뿐이었다. "내가! 이 내가 태상문주의 명으로 당신 딸을 버려 놓기 위해 그 동안 참지 않았다면 여기 더 있으래도 있지 않았을 것이오! 저, 저 구역질나는 돼지를 유혹하기 위해 그 동안 온갖 애를 썼던 것 이 억울할 뿐이오! 가라면 가지, 내가 못 갈 줄 아시오?" 상상도 못 한 일을 당하면, 그것도 지나치게 그런 일을 당하면 사람은 흥분을 넘어 오히려 침착해지기 마련이다. 지금 진삼산이 그랬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전력으로 머리를굴려야 했다. 그리고 조금씩 이해가 가면서부터 또 한 가지 일, 즉 이 패륜의 제자를 어떻게 때려 죽여야 가장 속이 시원할까 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 "네가 말한 태상문주는 영리충이겠지?" 방금까지 태연자약하던 악조린이 얼음덩어리같이 딱딱하게 굳어서입도 벌리지 못했다. 문간에 진자룡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진자룡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악조린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 꼼짝못하고 서 있어야 했다. 진자룡이 말했다. "괜찮다. 지금 와서 널 책망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확인하고자할 뿐이니 대답하거라. 영리충이 맞지?" 악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자룡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에게 그렇게 큰 죄를 지지 않았는데 그는 왜 그리 나를 미워하는 것일까? 자앙의 일 때문이라면 지나치지 않은가……" 그는 지금에 와서 완전히 이성을 회복해 악조린을 때려잡으려 준비하는 진삼산을 가볍게 제지하고는 말했다. "악행에 대한 벌은 더러운 이름보다 더한 것이 없고, 악한 성품에대한 벌은 그의 삶에 단 한번도 평화란 없을 것이라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세월이 그를 심판하도록 두자꾸나. 린아, 너는 그만 가보아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우리 죄를 용서해라. 하지만 이제 어딜 가서든 진가곤의 후예라고는 하지 말아리. 그것이 네게도 편하겠지." 악조린이 나가고 나자 진삼산은 늙은 아버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잘못 가르쳐서 그러한 줄 압니다. 벌을 주십시오." "너는 비단 잘못 가르쳤을 뿐 아니라 눈도 없지.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는 너를 제대로 가르쳤겠느냐? 그만두자. 욕된다." 그때 진황아가 들고 있던 요강을 슬그머니 머리에 이는 것이 진삼산의 눈에 비쳤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그리고 외쳤다. "밖에 던진 탁자 주워 와서 들고 있어!" 본선 이틀째였다. 어제의 일차전에서는 몇 가지 고무적인 결과가 나왔다. 아는 사람은 다 우승후보로 꼽았던 혁련자휘가 사문기에게 졌고, 상대적으로 약세적으로 평가되었던 모산파의 도수린이 옥랑군을 이기고 아미파의 비구니 공심이 황보언을 이긴 것은 하나같이 등천비룡문에 대한통렬한 일격이었다. 등천비룡문 측에서도 놀고만 있지는 않아서 당대붕이 요동삼검 중정일을 이기고 가휘섭이 정이를 이겨 이차전에 진출했는데, 첫 시합의사문기까지 치면 세 명이 진출한 셈이었다. 가장 관심을 모았던 것은 강시당의 당주 활고루 고웅풍과 구대흉신중 하나인 대황봉의 격돌이었다. 양쪽 다 당금 무림을 움직이는 사십 명의 고수를 뽑는다면 당연히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인물들이었지만 막상 위아래를 비교한다면 애매한 점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천하에 이름을 날린 구대흉신 중 한 사람이 구파일방 팔대세가 삼당 중 하나의 주인과 격돌한다면 어느쪽이우세할까, 하는 것이 중인들이 궁금해 하는 점이었다그러나 사실 승부는 싸우기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활고루 고웅풍은 현 강시당 최고의 고수로 아버지보다 오히려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그 아버지가 구대흉신 중에서도 대황봉보다서열이 위가 아니던가. 대결은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벌어졌고, 결국 십여 초 만에 대황봉의 머리통이 부서져 흩어지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중인들은 모르는일이지만 그것으로 구대흉신은 전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여덟 명의 진출자가 결정된 가운데 이제 이차전이 시작되었다. 진삼산이 전에는 가장 미워했으나 어제 악조린의 일로 서열 이위로밀려난 사문기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방술로 단번에 두려움의 대상이된 모산파 장문제자 도수린의 시합이 오늘의 첫 시합이었다. 도수린은 태극이 그려진 도복을 입고 머리에도 태극건을 썼으며, 진주구슬을 엮은 신발을 신은 청년도사였다. 무기도 괴상해서복숭아나무로 만든 목검을 들고 있는데 왼손 검지와 중지 손가락은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모아 쥔 상태, 즉 검결을 짚고 있었고 그검결을 쥔 손가라 사이에는 붉은 부적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 중 어느것이 진짜 무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도교, 특히 부록파라 불리며 귀신을 쫓고 부적으로 병을 고쳐 주고 하는 종파들에서는 실제의 무기보다는 오히려 검결을 중시하고, 이것을 무형지검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귀신을 쫓을 때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위력을 발휘한다고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부적까지 려어져 있으니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알수가 없었다. 사실 구경하는 사람들은 끝내 어느쪽이 진짜 무기인지, 또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볼 수가 없었다. 도수린은 비무대에 올라오자 한 손의 도화목검, 다른 쪽의 부적을 쳐들고 사문기를 노려보고만 서 있었고, 사문기 또한 곤을정면으로 내밀었다가 잠시 후 자세를 바꾸어 마치 비사문천이 악귀를 쫓아 내듯 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뚫어지게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것은 고수들 간의 격돌애서 기세로 먼저 승부를 내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대결이었다. 단순한 기세의 대결이 아니라 명백히 존재하는 방술의 한 가지로서안광탈혼의 요법을 사용하는 공격과,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금강부동의 심법을 사용하는 방어가 오가는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약점을 찾고, 기세로 상대를 누르는 정신력의 대결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이런 대결에서 정신력의 강약은 승부의 관건이다. 게다가 방술이라는 것이 원래 자신의 정신력을 극대화하고 상대의 심령상의 약점을 공격하도륵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로 열을 이길 수있는 법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방술을 사용하는 상대를 순전히 정신력만으로, 마음의 평정과 수양만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방술을 사용하는 자보다 적어도 열 배에 달하는 정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우리 진가곤은 아무래도 기아에게 넘어가겠구나!" 진삼산은 놀라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다른 문파에 들어간 애에게 어떻게……?" 진자룡은 그런 아들이 안됐다는 듯 측은한 눈빛으로 보았다. "너는 정말 보는 눈이 없구나. 저 정도의 아이가 어떤 행동을 했으면 당연히 거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않느냐?" "이유야 있겠지요. 그게 어떤 이유냐가 문제지." "너는 내가 그 동안 놀고만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진자룡은 이해가 될 듯 말 듯찬 말 한마디를 던지고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진삼산으로서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묻지도 못했다. 그들이 있는 자리가 자리인 만큼 자세한 얘기를 나눌 수가 없는 데다가 말하는 동안 비무대에서는 승부가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도수린이 든 도화목검이 중동부터 부러져 나가고, 왼손의 부적은 불씨도 없는데 갑자기 타올라 재가 되어 버렸다. 도수린은 한 모금 피를토하고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제서야 사문기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비쳤다. 그의 승리였다. 표리주전이 진자룡을 향해 손을 모아 흔들며 축하했다. "역시 천기공이시군요. 훌륭한 후예를 두신 것 축하드립니다." 진삼산이 벌컥 화를 냈다. "훌륭한 후예는 무슨 후예!" "지금 이긴 사문기도 그렇지만 이제 나올 두 사람이 모두 자네 후예이니 곧 진 노선배님의 후애도 되는 것 아런가!" 진가장의 두 후예, 악조린과 진자앙이 비무대에 올라가고 있었다. 처음에 진자앙은 악조린에게는 져도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차전에서는 운이 좋아 가장 장기로 삼는 외공으로 겨를 수가 있었지만이제부터는 진짜 실력으로 겨루게 될 터였다. 그는 그게 자신이 없었다. 아는 무공이 한쪽 손으로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인데, 아니 오히려 손가락이 남을 정도이니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왕 질 바에는 할아버지의 후예에게 지는 것이 나올지도 몰랐다. 변변히 공격도 못 하고 그저 맞기만 한다면 적당한 시점에서 패배를시인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시합이 시작하고, 처음 생각대로 몇 대 맞고 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그보다는 기분이 달라졌다고 하는 것이 더 을을 수도 있었다. 진가곤의 후예라연 곤을 쓰는 것이 마땅할 텐데도 불구하고 시종 장력으로만 그를 후려치는 것도 이상하지만, 처음 몇 번은 제법 소리도 요란하게 그를 후려치더니 세 번에 한 번 꼴로 아무 소리도 없고 눈에 보이는 위력도 없이 그자 산들바람 스치는 것 같은 장럭을 내뻗는 것이다. 그나마 처음에는 그런 묘한 배합으로 그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렌다. 진자앙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산들바람을 세 번째 맞았을 때, 그러니까 총 아홉 번째의 장력이 그것이었을 매였다. 그냥 멍하니 서서 맞고만 있는 것도 어색해 팔을 들어을리고 있는데산들바람이 팔꿈치를 스쳤고, 그 순간 팔꿈치 관절이 쑤시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겉은 조금도 아프지 않은데 뼈가 저리는 것이다. 열두 번째의 장력, 네 번째의 산들바람에서 그 느낌은 더욱 확실했다. 위장이 울렁거리는 느낌, 마치 못 먹을 것을 먹어서 위장이 요동을 치듯이 역겨운 느낌이었다. 그때 관람석의 누군가가 '흑심투골장'이라고 외쳤고, 그 순간 진자앙은 악조린이 사용하는 무공의 성질과 그 목적,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묘한 점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음경이군!' 내부에서부터 장기를 흔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내가기공. 그 중에서도 흑심투골장이었다. 진자앙은 흐심투골장에 당한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관람석의 누가그 말을 외친 이후. 악조린의 안색이 여러 번 변하더니 아예 음경만연속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았다. 악조린의 태도는 이왕 발각되었으니 이젠 아예 드러내 놓고 사용하겠다는듯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음경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방술도 사용하는 마당에 음경이 어디가 어떨 것인가. 그러나 문제는 혹심투골장이었다. 그것은 영리충이 즐겨 사용하는무공. 옛날은 몰라도 지금은 그만이 알고 있는 무공이 아닌가. 악조린은 어디에서 그것을 배웠을까? 진자앙의 머릿속에서 점차 그림이 그려졌다. 영리충이 등천비룡문의 배후가 틀림없다면 다른 칠대세가에는 손을 뻗쳤으면서도 광동 진가장만 그냥 둔 이유가 설명이 된다. 그는 진자룡을 꺼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자극하기보다는 우회하여 타격을 주는 방향으로 계략을 꾸몄던 것이다. 진가장의 제자들을 빼감으로써 모욕을 즉고, 주변의 무림세력으로부터 단절시켜 소외되도륵 하고, 빼내 간 제자들에게 허드렛일을 시켜모욕을 준 것이다. 그 하나하나가 진가장, 더 나아가 진자룡에게는 심령상의 타격이 될 테니까. 그런 영리충이 악조린 하나만 남겨 둔 것에는 당연히 또 다른 계략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왜 진가장의 반응을 자세히 관찰하고 보고하며, 나중에 결정적인 기회가 올 때 치명상을 줄 첩자를 박아 두지 못한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륵 그림은 분명해졌고, 그에 따라 진자앙의 분노가치솟았다. 그는 양팔을 내려 무방비 상태로 선 다음에 천천히 앞으로 한걸음을 디디고, 허리를 낮추어 반쯤 주저앉은 것처럼 섰다. 악조린의흑심투골장이 폭우처림 그를 후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면서. 흑심투골장이 남긴 저진느낌과 한기는 자춰를 찾아볼 수도 없이 사라졌다. 진자앙은 그 뜨거운기운을 팔에 실어 천천히 가슴까지 들어올렸다가 옆구리로 빼내었다. 산노인으로부터 받은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도 잘 몰랐지만 이전에 몇 번 이 자세를 취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지금 그의 몸은뇌정의 기운으로 터질 것처럼 충만해 있었다. -- 무극이 유극을 낳으면 천지의 자연스러운 과정에 의혜 태극이 형성된 다. 만물은 태극으로부터 비롯하나니 뇌정도 예외는 아니다. 이 기운을 극대화하여 뿌뢰는 것이 자오뇌정추의 요체다! 진자앙은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한없이 조용한 움직임에서천지를 진동시키는 뇌성이 터져 나왔다. "뇌정추!" 진삼산은 눈이 튀어나을 것처럼 놀라 비무대를 보았다. 그의 눈앞에서 비무대 한 귀퉁이가 갈라져 나가더니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는 옆을 보았다. 표리주전이 그와 같이 일어서서 그와 같은 표정을 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뇌정추가 아니고는 저런 소리를 낼 수 없겠지?" 표리주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위력을 보일 수도 없을 걸세!" "전날 비발동자를 죽인 것도 그럼……?" "그때 알아봤어야 했어!" 그래도 이들 둘은 빨리 상황을 알아차린 셈이었다. 비무대의 먼지가가라앉고 상황이 분명히 들어왔을 때 중인들은 비로소 감탄성을 터뜨렸다. 비무대는 진자앙이 선 반쪽말고는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고 악조린은땅바닥에 주저앉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자앙은 그래도 차마사람을 겨누지는 못하고 그가 선 바로 앞의 비무대를 때렸던 것이다. 진삼산은 여전히 태연한 신색으로 앉아 있는 진자룡을 보며 물었다. "아버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뇌공이 위험한 무기를 전해 줬어. 어린애가 다루기에는 너무 위험한 무기를……!" 진자룡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제이십육장] 매요신은 영리충을 보여 주고 비불은 금강불괴를 들려 주다. 진자앙은 주위의 환호에는 상관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아까 '혹심투골장'이라고 외친 사람을 찾고 있었다. 거기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혹심투골장을 알아본 것도 신기했지만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는 생각이 자꾸 뒤통수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극히 귀에 익은 목소리. 그러나 절대로 그사람의 것일 리가 없는 목소리 사부인 소삼중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곧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 것을 단념해야 했다. 그보다더 중요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훨씬 강력하게 그의 관심을 사로잡는일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진자앙은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서야 했다. 그리고 잠시 입을 떼지못했다.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염정, 매불염이 눈앞에 서 있는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면사를 벗어 버리고 얼굴을 드러낸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바로 몇 걸음 앞에서. 나이가 좀더 들긴 했지만 그 얼굴에서는 분명 어릴 적 염정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용모 속에 예민함과 지혜, 그리고 어딘지 신비스런 느낌이 그대로 스며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목이 타오는 것을 느끼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천등처럼 귀에 울려서 그는 흠칫 놀랐다. 그래도 이렇게 아무 말도 않고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는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축이고 입을 벌리려 했다. 그때 매불염이 먼저 말했고, 진자앙은 다시침묵했다. 매불염은 그애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따라오세요." "왜 만나려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게 보고 싶다고 졸라서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전 뭐 힘이 남아돌아서 이러고 다니는 줄 아십니까? 투덜거리는 유소림의 목소리에도 소삼중은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진자앙이 떠나던 그날, 소삼중은 조용히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그날, 유소림이 돌아왔고, 그 이후 그에게 의지하여 살아 온 지도 이미 일 년이 다되어 가는 소삼중으로서는 그런 말투에 충분히 익숙해져있었다. 신기한 것은 한번 나간 유소림이 돌아왔다는 것이요, 또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라 어디서 배줬는지 제법 신통한 의술까지 익히고 돌아와서 꺼져 가턴 그의 생명을 지금까지 유지시켰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제자의 활약상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았던가. 그가 자기 입으로 '금강당 오 대 당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을수도 있지 않았던가. 고집과 어리석음으로 인한 슬픔, 그리고 한만이 전부였던 그의 삶에진자앙은 한 점 빛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그를 업고 돌아다니는 유소림의 정은 자식에게서나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따스함을 느끼게 했다. 비록 툴툴거리고 있긴 하지만 유소림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소삼중은 느끼고 있는 것이다. 평생 살아 온 방식이 그런 것이라, 그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내색은않지만……, 사실 그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리라. 소삼중은 천천히 말했다. "지금 앞에 나타나서 마음을 어지럽힐 이유가 없다 나중에 봐도 늦지 않아!" "쳇! 보챌 뻔 언제고 갑자기 웬 여유래요? 사부님은 나중에 봐도 될지 모르지만 난 빨리 만나서 그 동안 쌓인 빛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이제 얼마야……? 하여튼 은자 서른 냥은 넘을걸요? 출세했다고 괄시하진 못하겠지. 그랬다간 소문을 확 퍼뜨려 버릴 테다. 빌린돈도 갚지 않는 무신의한 작자라고." "도대체……!" 소삼중이 물었다. "자앙이 네게 언제 돈을 빌렸다는 거냐? 산에서는 돈을 쓸 일도 없었을 텐데 !" 유소림은 순간 흠칫했지만 곧 짜증을 내며 말을 돌려 버렸다. "그런 게 있어요! 그보다 나중에 자앙을 데려간 여자는 누굴까요? 전날 단상에 앉아 있던 것으로 보아 분명 내력이 있는 여인인 듯한데……! 음…… 다시 봐도 정말 이쁘군!" 그는 매불염의 그 아름다운 자태를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게 침을 흘리다가 이내 인상을 굳히고는 진자앙과 그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하고 생각에 잠겼다. 매블염이 진자앙을 데리고 간 곳은 장락궁의 후뭔에 자리한 한 독립된 전각이었다. 그 중 한 방에 진자앙은 안내되어 앉고 매불염은 어디론가 나갔다. 벽에는 간단한 서화가 걸려 있었고, 탁자와 의자는 화려했지만 난하지는 않았다. 고풍스러운 맛이 방안 전체에서 은은히 풍겨나고 있었다. 작은 향로애서 풍겨 오는 보이지 않는 향기처럼. 문이 열렸다. 누런 옷을 입은 두 동녀가 붉은 옻칠을 한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소반 위얘는 자기그룻이 다섯 개 놓여 있고 그룻 마다애는 기이한 향로가 몇 가지 들어 있었다. 백철에 황동을 박은 찻주전자에서는 향내가 코를 찔렀다. 동녀들이 그렇게 탁자 위에 차려 놓고 벽에 가 서자 열려진 문으로매불염이 한 노인을 부축하고 들어왔다. 노인을 명아주 지팡이를 손에 잡고 창포초신을 신고 건은 두건을 쓰고 하얀 옷을 입었는데 늙어 고부라져서 매불염의 키에 반도 못 미치게 작고, 얼굴에는 수염은 물론 눈썹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태생은 비천하지 않은지 원래는 하얀 살결이 보기 좋았으련만 지금은 그 살들이 번데기 주름처럼 겹쳐져서 얼굴 윤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치아도 모두 빠졌는지 합죽이였다. 늙었다, 늙었다 하지만 이렇게 늙어 보이는 사람을 진자앙은 처음보는 것이다. 노인은 매불염의 부축을 받고 있으면서도 다리에 힘이 없는지 의자에 앉으려다 휘청, 옆으로 쓰러지려 했다. 진자앙은 얼른 손을 내밀어노인을 부축했다. 팔에 닿는 노인의 살결이 너무 부드러우면서도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어딘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이안하이. 나이가들면 육신이 말을 듣지 않아." 노인은 자리에 앉고 나서 그렇게 말을 꺼내었다. "사람들은 날 보고 배울 점이 많을 것이야. 한때의 영화와 한때의재능이 모두 소용없는 것이라고. 그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늙어서 죽을 때를 아는 것이라고 말이야." 매불염이 붉은 입술을 열어 짧게 책망했다. "불길한 말씀을!" "그래, 그래! 귀한 손님을 모셔 두고 쓸데없는 말만 했구나. 그럼어디……!" 노인은 진자앙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개를 않았네만 자넨 내가 누군지 알겠나?" 진자앙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저야말로 인사를 않아 예의를 잃었습니다. 광동 출신 진자앙입니다. 재가 감히 짐작하건대 귀인에선 황사 어르신이신 걸로 생각됩니다만, 틀렸으면 용서해 주십시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즐거워했다. "전혀 틀리지 않았네. 내가 바로 황사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은 적이있는 매요신일세. 이젠 그나마 그 자리도 내놓았으니 그냥 아무것도아닌 폐물에 불과하지." 그리고는 매불염을 보며 가볍게 나무랬다. "봐라! 내가 분명히 이 젊은이는 영민해서 사람을 금방 알아볼 거라고 하지 않았니. 어디가 둔하고 미욱하단 말이냐?" 그의 말대로라면 매불염이 진자앙을 소개할 때 둔하고 미욱하다고말했다는 뜻이 된다. 매불염은 얼굴에 홍조를 지으며 얼른 부정했다. "소녀가 언제 그런 말을……! 아버님께서 자꾸 놀리시면 전 자리를비키겠어요." 그러면서 짐짓 일어서려 하자 매요신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다. 이 아비가 잘못했다. 네가 없으면 난 어떻게 움직이랴? 실언했으니 용서하려무나." 그렇게 한참이나 농을 주고받는 모습이 진자앙이 보기에는 조2도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그 광경에서 매요신이 매불염을 지심으로 아끼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매불염 또한 매요신을 진심으로 따른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말과 행동은 꾸밀 수 있지만 오고가는눈빛과손끝애 맺히는정은 억지로 꾸미기 어려운 것이었다. 매요신이 진자앙을 보며 말했다. "나는 다 늙어 이렇게 귀여운 딸을 얻었네. 하늘이 말년에 내린 복이지. 하지만 이제 딸이 장성하고 보니 걱정거리가 생겨 버렸어. 누구에게 이 아이를 맡길까, 하는 것이지. 자네가 내 딸아이와 어릴 적에적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단지 그걸 이유로 딸을 내주기에는 충분치 않지. 어렸을 땐 영민하다가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모자라지는 경우를 한두 번 봤어야지. 하나 지금 자넬 보니 다행히 헌앙한 장부요, 오관이 단정하고 삼정이 고르니 뛰어난 인물일 것일세. 하지만 나는 그것도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네.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누구애게나 자기 자식은 사실보다 대단해 보이기 마련이거든. 또우스갯말에 모든 아버지들은 딸이 행여나 젊은 시절 자신과 똑같은 사내를 만나지나 않을까 전전 긍긍하며 살아 간다고도 하지 않던가. 혹시나 중매도 증인도 없이, 납채도 안 받고 딸을 강탈당하지나 않을까해서 두려워하는 것이지. 그래서 이번 기회를 나는 속으로 크게 기꺼워하고 있네. 내가 모시는 삼황야께서 여신 어전시합이 있고, 자네도참가하지 않았나. 그래서 생각한 것이지, 우승자에게 내 딸을 주리라고. 자네가 진정 내 딸을 갖고 싶다면 반드시 우승해야 할 걸세," 진자앙은 갑자기 웬 결혼얘긴가 해서 잔뜩 의아해 하다가 마지막의어전시합 우숭 얘기가 나오자 그제서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와 똑같은 얘기를 그는 이미 들은 바가 있는 것이다. 그날 달밤에 금장사에서 가휘섭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우승하여 매불염을 차지하겠노라고. 이러니저러니 말을 돌리고 차를 대접하며 장광설을 늘어놓은 목적이 바로 그것인 모양이었다. 그를 떼어 버리고 가휘섭을 사위로 삼고 싶은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진자앙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유없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자꾸 들어 매요신과 매불염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것을 이제 와서 그녀가 다른곳에 시집간다고 한들 그가 무어라 말할 수 있으랴. 더구나 그녀의 아버지가 그렇게 결정했다는데 또 무어라 말할 수 있으랴. 단지 우스운 것은 가휘섭이 꼭 우승할 거라고 믿고 있는 그들의 생각이었다. 진자앙은 자신이 보란 듯이 우승한 다음에는 이들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상상하며 약간의 잔인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황사 매요신쯤 되는 인물, 단적으로 말해 천하제일고수가 우승은가휘섭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충분히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가휘섭에게는 그가 알지 못하는 대단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는 지게 될 것이고 사문의 영광, 가문의 부흥은고사하고 매불염마저 남의 손얘 넘어가게 된다. 한참이나 이런 맥락없는 생각에 빠져 있던 진자앙은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매요신을 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잔뜩부끄러뭐하며 홍조를 띠고 있는 매불염의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매 소저는 천하의 가인이시니 절세영웅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불초는 능력도 없거니와 그럴 마음도 없으니 안심하시기바랍니다." 매불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또 진자앙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의심스러운 듯 쳐다보다가 얼굴을 가리고는 밖으로 뛰쳐 나가 버렸다. 진자앙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매요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더터 아무렇게나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자네가 내 딸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는 줄 알았더니아니었군 그래. 어쪘든 좋네. 그럼 그 일애 대해서는 그만 얘기하기로하고, 오늘 자레를 부른 진짜 이유를 말하기로 하세." 진자앙은 무뚝뚝하개 대답했다. "하교하실 일이 있으시면 듣갰습니다." "하교랄것은 없고, 소개해 드릴 분이 있어서 그러네." 매요신도 짧게 에기하고는 대기하고 있는 동녀애게 손짓을 했다. 동녀가 얼른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 어섹한 침묵이 호르는 동안 진자앙은 도대채 누굴 소개시켜주채다는 것인지 궁금해 했지만, 그 사람이 누구일지는 곧 짐작할 수있었다. 천하의 매요신이 그분이라고 호칭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왜 자신을 '그분'에게 소개하겠다는 것이냐는 점이었다. 그는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쪘고, 문제의 그 사람이 들어왔을 때,그 불길한 예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진자앙은 일어나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도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천한 백성 진자앙이 삼황야를 뵙습니다." 삼황야. 전대 황제의 동생이며 당금 황제의 숙부인 삼황야가 손수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오 대에 걸친 명문인 광동 진가장의 자손이 천하면, 천하지 않은사람이 누가 있을까? 겸손이 지나치군 " 삼황야는 올해 대충 오십여 세쯤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지금 보니붉은 얼굴에 굵은 눈깹과 빛나는 눈 등은 사십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게다가 몸에서 풍기는 위엄과 기세는 단순히 그가 황족이라 몸에 갖추게 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니 반역을 꿈꾸겠지!' 진자앙은 이제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등천비룡문과 영리충, 그리고 황사 매요신. 이 모든 요소들이 바로이 삼황야에 의해 연결된 것이라고 하면 그 동안의 모든 의문이 풀린다. 삼황야에게는 힘이 필요한 이유가 있고, 매요신과 영리충에게는 그힘을 꾸릴 능력이 있다. 화륜맹, 광풍사, 운리무를 처치하면 가장 이득을 보는 단체는 등천비룡문이었지만, 그것은 삼황야의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일 터였다. 얼굴 보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할 무림쌍성을 참관인이라고 비무대옆얘까지 불러들일 힘도 삼황야에겐 있는 것이다. 단지 궁금한 것은 그런 삼황야가 왜 그를 불러서 만나는 것이냐는점이었다. 그것을 질문하려는데 삼황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듣기에 자네가 후기지수 중에는 무공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최고라고들 하기에 한번 만나려 했네. 얘기를 하고 도움을 청할 일이있어서." "천한 백성을 지나치게 놀리시는군요. 불초가 어찌 최고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밖에서 비무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보다는 위라고 불초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매요신이 손을 저었다. "지나친 겸손! 방금 내가 자네 팔을 만졌을 때 나는 알 수 있었지. 자넨 족히 여기 모인 후기지수들 중에 최고일 뿐 아니라, 두세 명을제외한다면 무림최강이라고 할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네. 신체는 극도로 단련되어 있고, 내공은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넘쳐 흐르고 있지. 단지 내부의 기운과 신체의 그것이 아직은 서로 조화가 되지 않고 있어 내외겸수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일세. 내가 알기로 외가에서 시작해서 자네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왜냐하면그건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지." 삼황야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진자앙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황사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우연이든 아니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외가기공을 익히는 사람들의 꿈은 금강불괴겠지? 그러나 사실은 내가의 사람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라줴, 그리고 길은 내가 쪽에 더 가깝게 있네."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심법이 어느 경지에 이른 후에야 외공을 익히고 금강불괴가 되기 위한 몇 가지 단련을 거치는 쪽이 외공을 익히다가 어려움을 알고 내공을 더불어 익힌 것보다 정도라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봐야겠지. 외공 다음에 내공의 조합은 무리란 말일세. 내공 혹은 외공만으로도 물론 안 되고. 그러나 자넨 거의 근접했네. 그건 자네가 배운 외공이 단지 외공만은 아니었기때문이고, 다른 인연, 예를 들어 영약을 먹었다던가 하는 것이 있었기때문일 것이야." 진자앙은 식은땀을 흘렸다. 황사의 말대로라면 그도, 그의 사부도전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 심지어는 대력금강 사조도……! 황사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잘못된 길을 걸었다고 후회하고 있나?그럴 필요도 없네. 내 말이전적으로 옳다면 무수한 내가고수들 증에서 왜 금강불괴가 나오지 않았겠나? 그들은 자네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오히려 실패한것일세. 무림의 유수한 문파들 중에서 이렇다 할 신체 단련법 하나 행하고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내공과 더불어 외공도 익혀야 한다고 훈도하는 스승이 얼마나 될까? 무공은 근본적으로 몸을 통해 발현되는것이니 몸을 소중히 여기라고 충고해 주는 선배는 또 얼마나 될까? 이렇게 몸을 하찮게 여기고 정신만 고도로 강조하는 풍토에서는 제대로된 고수가 나오기 어렵지. 가끔 나오는 자들이라고 해야 원굉도니, 운리무니, 쾌여풍, 급여화같이 하나만 할 줄 아는 기형적인 아이들, 또는 쌍성과 같이 공부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것 같은 창백한 고수들이고작이란 말일세. 그에 비해 자넨 제대로 되었지. 자네 할아버지와 같이……!" "저도 외공만 익혔으니 기형적이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누가 자네에게 외공만 익혔다고 하던가?" "그게 사실……!" "처음 예선에 나타날 때 사용한 경공술이 궁서생의 창랑보였지?" "예……!" "비발동자를 죽일 때 손을 뻗은 수법은 뇌정추이기도 했지만 맹방평의 천망월인에 더 가깝다더군, 사실인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방금은 뇌정추로 비무대를 부숴 버렸다면서?" "예." "할아버지에게 오칠비결을 배웠겠지? 몸 속에 흐르는 기운이 그것과같던 것을……?" "음……예!" "그럼 윌 더 배워야 하나? 삼공의 진전을 다 익혔는데 그래도 부족하다면 욕심이 아니던가?" 진자앙은 말이 그렇게 될 수도 있구나, 생각하고는 해연히 놀라 버렸다. "천 초를 아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 초를 숙련한자를 두려워한다는 무언이 있지. 요즘사람들은 말의 살만 취하지, 그 려까지 푹 고아 먹으려 하지는 않는 것이 큰 문제거든. 이 말을 알면 자네도 알고 있는 것이 적어서 걱정이 아니라 제대로 익히지못해서 걱정이라고 생각하게 될 걸세."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러합니다." "그래도 지금의 자네가 원굉도나 운리무보다는 낫다고 나는 보네. 그것은 자네가 바탕이 되어 있기 래문이야. 안므로나 밖으로나 최고가 될터전을 꾸며 놓았다는 것이지. 글쩨 문제는 안을 골라서 집을 짓기 쉽게 하고, 밖을 다듬어 보기에도 좋게 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깨달음이필요하다네. 그래서 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겠네. 그가 아마 깨달음의계기를 마련해 줄 걸세! 그때 자넨 진짜 금강불괴가 될지도 모르지." 진자앙은 들으면 들을수록 말이 이상하게 되어 간다는 생각을 하고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제게 이런 친절을 베푸시는 이유가 뭡니까? 무얼 바라시고……!" "물론 바라는 게 있지!" 황사 매요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자앙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키는 매불염에게도 반이 겨우 되니 진자앙에게는 무릎을 겨우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눈빛을 빛내며 됫짐을 지자 한 순간 진자앙은 태산 앞에 선 듯한 위압감을 맛보았다. "천하의 안위를 생각하고 국조의 성덕을 잇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근래 수십 년 동안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을 것이네. 밖으로는 오랑캐와 왜구가 발호하고 안으로는 부패한 관리들이 국가의 근간을갉아먹는데 강호의 무도한 무리들은 저회들끼리 죽고 죽이며 노닥거리는 것도 부족해 죄없는 백성을 핍박하고 그 고혈을 빨아먹고 있네. 이모든 것이 힘없는 성상 때문에 국가 기강이 바로잡히지 않아서그런 것이야. 뜻있는 자들이면 마땅히 귈기하여 이러한 현상을 타파하고자 하여야 하지 않을까?" 이쯤 되니 진자앙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 했던 모든 말이역모를 정당화하고 그를 그 도당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슨 말로도 역모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황사께서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역모의 무리에 가장 앞장서다니, 정말 실망이 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매요신은 그 반박애 잠시 말을 중단하고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삼황야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를 향해 매요신도 미소를보내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렸을 때 매요신의 눈빛은 추상 같은 엄격함만을 담고 있었다. "하늘이 하는 일을 범인이 알게 되면 득보다는 실이 크지. 기왕에자네가 그것까지 짐작했다면 이 사람을 보아도 놀라지 않갰군!"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단아한 청삼애 영웅건, 손에장검 대신 섭선 하나를 들고 있다는 것만 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청년협사의 모습인데 툭이한 것은 놀라을 정도로 영준하다는 것이었다. 상관 공자, 영리충이 나타난 것이다. 동시에 진자앙의 눈앞이 흐려졌다. 그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바라보이는 사물이 모두 비틀어져 보이는 것을 보고 문득 말했다. "독?" 황사가 비틀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극락향을 맣아도 안 쓰러지지만 그걸 마시고는 안 쓰러질 수가 없갰지. 이것도 아직 내외의 조화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자면서 반성이나 하게! 지금 자네가 설치면 곤란해?" 진자앙은 펼사적으로 손을 런어 주전자를 잡아 영리충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는 창이 있는 쪽을 향혜 한걸음을 내디잔다. 그것이 그의한계였다. 진자앙은 고목이 쓰러지는 것처럼 길게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체력 하나는 정말 좋은 놈이군요!" 영리충은 가볍게 감탄하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황사가 함께 웃었다. "영생뢰에서는 그게 많이 필요할 걸세!" "죽여서 후환을 끊지 않으시고요?" "난 일흔이 넘으면서부터 살인을 한 적이 없어. 영생뢰에 가두면 결과는 마찬가지니까 토 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게!" "그렇군요. 결과는 마찬가지겠지요." 영리충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밖의 비무대에서는 하나하나 결과가 맺어지고 있었다. 진자앙의 바로 다음 시합에서 아미파의 비구니 공심이 '강기로 독을이긴다'는 놀라운 경지를 보이며 사천 당문의 당대붕을 눌러 이겼다. 하늘을 가릴 듯한 암기의 폭풍도, 땅을 뒤엎는 독의 안개도 공심의 몸주변 한 자 이내를 범접치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 시합에서 강시당주 고웅풍은 전날 대황봉을 쳐죽이는 데 너무 힘을 썼던지 의외로 별 이름도 없는 등천비룡문의 옥룡 가휘섭에게져버렸다. 장장 일천여 초를 교환하는 대혈투 끝에 매듐 지어진 결과였다. 고웅풍은 시합이 끝나자 당삼고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는데소문에 의하면 이것으로 강호에서 은퇴하고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이래서 내일 있을 삼차전은 광동 진가곤의 사문기와 금강당의 진자앙, 그리고 아미 공심과 옥룡 가휘섭의 대결로 결정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진자앙은 자신이 완벽하게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알았다. 그는 강철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관 같은 것에 박혀서 벽에 세워져있었는데, 그 강철관은 다시 벽에 박혀 있었다. 한마디로 벽장과 같은곳에 그대로 박혀 있는 셈이었다. 그 상태에서 다시 오른손은 등뒤로 돌려져 있고, 왼손은 배 위에 을려져 있는테 대접 굵기만한 강철따로 동여져 있어 조금도 움직일 수가없었다. 또 다리는 꼿꿋이 펴진 채 두 발이 한데 묶여 있었다. 역시대접 굵기만한 강철띠로 결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강철의 관을 두 부분으로 나눈 듯한 강철판이정확하게 그의 목 부위에서 가로질러져 있어서 머리를 그 사이에 밀어넣고 결박된 상태에서만이 서 있을 수 있었다. 붙박이 항쇄(목을묶은 쇠고락, 칼)인 셈이었다. 그대로는 목을 돌리기도, 숙이기도 어려워 정면을 똑바로 주시하는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몸의 상태를 아는가? 그의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그와 똑같은 자세로 한 사람이 묶여 있기 때문에 겨우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진자앙 앞에 있는 자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자세로 서 있었는지옷은 낡아 부스러져서 흔적도 없고, 강철관과 강철띠는 붉게 녹이 슬어 있었으며 몸 또한 말라 비틀어져서, 말린 지 오래되는 생선 조각처럼 보였다. 팔과 발을 결박하고 있는 강철의 띠가 더 이상 결박이 아니라 그 마른 몸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 같이 생긴 사내. 옷이 부스러져 없었기때문에 그 사람이 사내인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진자앙은 그 사람이 움직여서 그의 정면으로 다가왔을 때에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이 방안에 구속되어 있지 않은 한 사람.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매불염이었다. 진자앙의 기억 속에는 그런 눈빛은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매불염이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진자앙은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잘못한 것은단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여기 있소?" 매불염의 눈빛이 더욱 슬퍼졌다. 순간적으로 진자앙은 그녀의 눈 속에 수정 같은 눈물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고 느졌다. 그러나 그녀가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자 슬픔도, 눈물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품속을 뒤지더니 비수 한 자루를 꺼내었다. 어딘지 낮이 익은 비수 진자앙은 그것이 얘전에 그가 누나에게서받아, 다시 염정에게 주었던 단룡비임을 알아볼수 있었다. 어떤 물건은 특정한 시간을 그것에 비끄러매어 두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단룡비를 보는 순간, 그가 그것을 염정에게 주었던 그순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비가 내리고,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비가 대지와 강물 위로퍼부었고, 뿌연 우막이 천지를 메우고 있었던 그때에, 염정의 작은 모습이 두터운 우막 속으로 사라져 갔던 그때에 그는 그녀를 다시는 볼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진자앙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떠서 매불염을 보았다. 그때의 염정은 사라지고 이제 그의 앞에는 매불염만이 남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염정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염정아!" 매불염이 가만히 그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을 따라 속눈썹에 은빛 구슬이 맺히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염정아!" 진자앙은 무어라 말혜야 할지 몰라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쥐어짜듯 한마디했다. "행복하개 살아야 해!" 매불염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번쩍 손을치켜 들어 비수를 꽃았다. 진자앙의 허리 옆, 강철의 관에. 그리고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진자앙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외치듯 불렀다. "염정아!" 매불염이 멈추어 섰다. 그러나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진자앙은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충동적므로 소리쳤다. "왜 가휘섭 같은 자를 좋아하는 거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을 결국에는 내뱉고야 만 것이다. 진자앙은 눈을 감아 버렸다. 차라리 이 순간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런 그에게 매불염이 다가왔다. 이 순간 눈을 떴으면 그는 눈물을 홀리면서도 웃고 있는 매불염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것이다. 그의 귓가에 향기로운 숨결이 닿았다. "바보!"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매불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진자앙은 혼란한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매불염의 마지막말이 무슨 의미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여기는 어떤 곳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영겁같이 느껴지는 긴 시간이 흘러갔다. 매불염이 떠난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는 배가 고파 오는 것을 느끼고, 영겁이라 생각한 시간이 사실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나타난사람이 커다란 물통 같은 것에 죽과 만두를 잔뜩 가져 왔기 때문에 배가 고팠던 것임도 또한 깨달았다. 갇혀 있는 사람도 무언가를 먹어야 산다. 꼼짝도 못 하는 사람이 무엇을 먹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먹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진자앙은 놀랐고, 음식을 가져 온사람이 만두를 입에 물려 줄 때 또 한번 놀랐다. 진자앙은 지금까지살아 오면서 자기보다 큰 사람은 여기에서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날라 온 사람은 정말 집채만큼이나 컸다. 원래 그런지 아니면 천장이 낮아서인지는 몰라도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는데도뒤통수가 천장에 닿을락말락 했고, 만두를 쥔 손은 진자앙의 머리통과비슷한 크기였다. 온통 틸로 가득한 그 얼굴에 깊이 박힌 눈이 한없이 순해 보이는 것이 또 이상했다. 마치 백치의 그것을 보는 듯한 막연함이 거가 있었다집채만한 사내는 진자앙이 그를 바라만 볼 뿐, 만두를 먹지 않자 턱을 몇 번 주억거렸다.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처림진자앙은 받아 먹었다. 그렇게 몇 개인가를 먹자 이번에는 죽이었다. 커다란 주걱에 가득 담아 조금씩 입에 홀려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까지 진자앙이 아무 소리 않고 받아 먹자 집채는 기쁜 듯 히죽거리더니 이번엔 맞은편에 박혀 있는 생선꼬다리에게 다가갔다. 생선꼬다리는 집채가 주는 음식을 거절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죽어 버린 시채일지도 몰랐다. 집채는 몇 번이나 생선꼬다리의 입에 만두를 넣어 주려 하다가 안되자 강아지가 우는 듯한 신음을 내고는 물러섰다. 그때 생선꼬다리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되었으니 다른 중생을 보살피게나, 철우!" 철우라 불린 집채가 다시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생선꼬다리는만두를 먹을 생각은 않고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색은 색이지만 원래는 색이 아니고 공은 공이지만 또 공이 아니다조용한 것과 떠들썩한 것,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도 본래는 같은것. 꿈속에서 어쩌 헤몽을 할까? 유용한 용 가운데 가운데 없고 무공의 공 가운데 공을 베풀다. 과일이 익으면 자연히 붉어지는것과 같다. 묻지 말지어다, 어떻게 수행하는가를." 그것이 완강한 거절의 표현이었던 모양, 철우라 불린 집채는 조용히물러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진자앙은 눈을 부릅뜨고 생선꼬다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물었다. "설마 방금 그분이 대력금강 철우는 아니겠지요?" 묻고도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해 흔자 웃는데 생선꼬다리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그를 마주보았다. "그를 아는 중생은 누군가?" 진자앙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아서 입을 벌리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저는 진자앙이라고 하는데 방금 그분의 사대손뻘 되는 제자입니다." 생선꼬다리가 그 말을 듣더니 다시 이상한 말을 읊조렸다. 자세히듣고서야 진자앙은 그것이 불경을 인용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 가지의 인연을 꾼고 성을 깨닫는 자에게 있어서는 제법이 다 공인 것 큰 지혜가 있는 자는 담박함이 불생하는 속에 있고 천기를 아는 자는 묵묵히 적멸 가운데에 소요한다. 삼계는 공연해서 백단이 다스려지고 육근은 정결해서 천종이 궁극한다. 사 대니 오 대니 다 부질없는 것이니 잊는 것이 좋으리라!" 신화 속의 인물을 보고, 그것도 까마득한 조사를 보고 어떻게 잊을것인가. 진자앙은 소리치기 시작했다. "조사님! 조사님! 소손 금강당 오 대 제자 진자앙입니다. 대력금강 철우 조사님 한번만 더 존안을 보여 주십시오!" 방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 고함이었지만 대답은 없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진자앙은 문득 생각이 나 다시 외쳤다. "조사님, 반선 진양도인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만 더존안을 보여 주십시오!" 이번 말에는 대응이 있었다. 그러나 철우가 아니라 생선꼬다리에게서였다. "반선이라고? 네가 그를 보았느냐? 무어라 말하더냐?" "빈선을 아십니까?" 생선꼬다리는 잠시 침묵하더너 짧게 대답했다. "내가 비불이라 불리는 고불화상이다!" 진자앙은 다시 기절할 뻔했다. 이로써 그는 전설 속의 삼선을 현실에서 다 만나 보는 셈이었다. "사천왕 중에는 천대받는 왕이 하나 있으니 다른 누군가의발아래 깔려 있는 왕이 그것이다. 그러나그 왕은 불사신이다." 비불, 고불화상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혔다. 당넌애 삼선이 모여 논쟁을 벌일 때, 그도 다른 두 명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금강불괴는 불경에 나온 바그대로 견고한 지덕으로 일체의 번뇌를 깨뜨린 후애야 도달하는 정신의 지고한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지,육채적인 단단함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육체적으로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정신의 동일한 수준으로의 발전이 없다면 그것 또한 진정한 금강불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고행이었다. "나는 심원한 지혜로 삼계를 두루 살펴보았다. 근본의 성원은필경은 적멸이어라. 허공은 상과 마찬가지로 하나라도 있는것이 없다. 삶과 죽음 애욕의 정리는 내가 알 바 아니다. 이름이 생기면 죽음이 시작되는 법, 법상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른바 천 가지 번뇌와 만 가지 인연을 끊어 적멸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부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금강불괴라고 하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영리함은 어리석음과 같으니 매사를 다 할 수 없는 것을알아야 하고, 좋은 계획은 짐짓 마련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느것이나 저절로 맞아야 되느니. 다만 한마음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만가지 행동이 저절로 온전해진다. 티끌과 같은 속된 인연을 모조리 다버린다면 모든 물건의 색은 죄다 공이 되고 소소순순하여애욕이 적어지면 그것이 부처이니 무궁할 것이다." 진자앙은 그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한참 듣다가 문득 물었다. "그럼 지금 여기 갇혀 있는 것이 스스로의 뜻에 의한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물경 백수십여 년을요?" 비불은 그렇다고 했다. "제 사조님은요? 그분은 어떻게 여기 오시게 되었습니까?" 비불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철우가 어떻게 여기 영생뢰에 갇히게 되었는지는 그도 모른다. 단지어느 날 그는 갇혀 있던 상태를 풀고 나오더니 일을 시작했다. 영생뢰를 관리하는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갇히지 않았고, 나중에는 가둘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나가지 않았던것이다. 그때 그는 이미 백치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여기 영생뢰에 갇힌 모든 죄수들의 수발을 그가 들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수십 년이 지나자철우는 영생뢰의 항쇄나 쇠사슬과도 같이 여기 당연히 존재하는 일부분처럼 받아들여졌다. 진자앙은 놀라 외쳤다. "그럼 여기가 영생뢰입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진자앙은 북천사흥과 매요신에 얽힌 이야기를 생각하고는 더 이상 그 점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다시 영겁과 같은 시간이 홀렀다. 철우가 한번 더 왔지만 그를 아는척도 하지 않았고, 그의 말에 대꾸하지도 않았다. 진자앙은 점차 모든 것을 포기하고 깊은 생각에 잠걱들게 되었다. 솨를 끊는 비수가 옆에 있어도 손을 움직일 수 엄으니 소용이 없고,살아 있다고 해도 움직일 수 얼으니 산 것이 아니었다. 과연 비불이고행을 택했다면 제대로 택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수십 년을 살아 간단 말인가. 하지만 이렬게 고행을 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정을 모두 끊어 버려차가운 재같이 마음을 식혀야만 금강불괴가 되는 것일까? 진자앙은 만약 금강불괴가 그런 것이라면 자신은 그렇게 되고 싶지않다고 생각했다. 비불이 그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가로젓다가 다시 끄덕였다. "감정을 죽여야만 부처가 된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네 말대로 금강불괴가 꼭 될 펄요도 얼다. 부처는 완전한 인간이지만 모든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 완전해지는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침묵하다가 문득 몸을 뒤척였다. 그 순간 그는강철의 띠도, 족쇄도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몸으로 진자앙의 앞에 섰다. "마음이 자유로우면 강철의 띠로 묶여 있으나 맨몸으로 장강 물에떠 있으나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것이다. 하나, 마음이 얽매여 있으면설사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된다 해도 자유로을 수 없을 것이다. 만사가 이와 같으니 저기 음식을 들고 바닥을 기어다니는 철우나 여기벽 속에 박혀 백여 년을 갇힌 나나 자유롭고 또한 부자유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린 아직도 금강불괴라는 네 글자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금……, 강……, 불……, 괴……!" 어느새 철우가 나타나 비불의 옆에 섰다. 그의 순한 눈에서 묘한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비불이 손을 들어 철우의 머리를 만졌다. "보라! 미망은 길고 인연의 끈은 질기다. 맺힌 것 온전히 풀고 엮인 것 온전히 벗어나지 않고서는 부처가될 수 없으니, 육신은 가도 정신은 일만겁을 더 헤매일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여 깊이 슬퍼하는 듯하다가 문득 진자앙을 보았다. "떠나거라!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긴 세월을 미망 속에 잠겨 살아 온 뜻이 여기 있으니, 우린 널 기다리기 위해 여기 매여 있었던 모양이다. 인연의 끈이 끊어지면 일체가 함께 끊기는 법. 우리는온 곳으로 다시 가리라. 너도 네가 온 곳으로 다시 떠나라!" 진자앙은 자기도 모르게 그 말에 따라 앞으로 나서려다가 그대로 꼬꾸라졌다. 배와 팔을 같이 결박한 쇠고리가 그대로 떨어졌지만 발목을묶은 쇠고리는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진자앙은 잘려진 쇠고리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날카롭게 끊어진 자국은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는 쇠고리 옆에 박혀 있는 단룡비를 보고 다시 쇠고리를 내려다보고서야 원인을 알아차렸다. 매불염이 왔다가 떠나가는 그때에 그의 결박은 이미 풀려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결박이라 생각하는 그 동안 그것을 분명히 결박이었지만 자유로이 움직이는 그 순간에는 그것은 결박이 아님이 밝혀졌다. "만사가 이런 것인가?" 그는 종잡을 수 없었던 비불의 이야기가 비로소 조금은 이해되는 듯이 느꼈다. 따지고 보면 그의 내공이라는 것도 자유로이 놔둘 때 아무 문제가없지 않았던가. 그가 가장 상처를 입었을 때는 내공을 쓰지 않았을 때가 아니라 억지로 움직여 경공을 하고자 했을 매였다. '그냥 두면 몸에 따라 줄 것이니 굳이 움직일 이유가 없지!' 그의 눈앞이 갑자기 밝아지는 듯했다. 그는 이 작은깨달음을 전하려고 비불과 철우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얘기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다. 원인도 증상도 없이 갑자기 싸늘한 두 구의 시체로 변해 버린 두사람을 보며 진자앙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애 업었다. 비불의 말처럼 그들은 그를 기다린 것일까? 쳔우도, 반선도 그랬던 것일까? 그는 문득 바불의 손가락이 벽면의 한곳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기에는 께알 같은 작은 글씨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거의 알아보기 험들 정도로 마모되어 있었지만 진자앙은 그것을 읽는 데 거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금강백팔로연혼지보라고 커다란 표제가 달려있는 그 밑에는 금강칠십삼로부터 금강백팔로까지의 제목만 나열되어 있고 내용은 전부 공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텅 빈 공간을 쳐다보며 진자앙의 마음속도 같이 비어 버리는 듯했다. 무엇인가가 거기 있을 거라 믿고 온갖 고난을 겪으며 간신히 도달한 길의 끝에는 비어 버린 공간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돌아서서 이제는 시체가 되어 버린 두 사람. 비불과 철우를 향해 절을 했다. "애써 온 곳에 아무것도 없지만 제자는 만족합니다. 이 길을 걷지않았으면 제자는 그저 마보 금강두일 뿐이었겠지요. 지금도 저는 금강두이지만 적어도 바보는 아니잖습니까.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알았으니 까요." 소림의 대보 선사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듯이 다시 한번 물었다. "사 시주, 진정으로 하는 말씀이시겠지요? 지금 기권을 하면 승리는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은 진 시주에게 돌아가는 것이오. 그것을 원하시오?" 사문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그리고는 더 이상의 말은 펼요없다는 듯 비무대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어전시합본선 사흘째, 시간이 되도록 나오지 않은 진자앙의 실격이눈앞에 보이는 순간에 사문기가 기권을 함으로써 나오지도 않은 진자앙이 마지막 대결에 나설 자격을 갖게 되었다. 사문기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걸어나오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의 눈앞에 학성 사가장의 장주, 그의 아버지 사방득이 서있었다. 사문기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했다. "불초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사방득이 그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니다! 잘했다! 여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고통을 참느라고정말 수고했지만 나는 그보다 오늘 네가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 스스로를 회생한 것이 더욱 자랑스럽구나!" "그렇게 된 것이었소?" 진삼산이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하고 옆에 나타났다. 진자룡도,고대랑도, 그리꼬 눈물이 글썽한 진청아도 거기 있었다. "우리 광동 진가장, 나 광마 진삼산이 고육계에 항장지계까지 써야 된다고 판단한 것이 바로 사 장주였소?' 사방득이 깊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진 장주! 적은 깊이 감추어져 있고, 우리는 백일하에드러나 있으니 그런 하책이라도 쓰지 않고는 어쩔 수 없다고 소제가 판단했었소이다." 진삼산이 사방득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의 손은 경련을 일으키고있었다. 분노 때문이 아니라 감동 때문이었다. "그걸 책망하자는 것이 아니오! 내가, 이 진삼산이 사형에게 빛진것이 너무 많은 듯해서 부끄러워 이러하오! 제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결국 기아 하나만이 진짜구려!" 진자룡이 문득 사문기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기권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을……! 흔치 않은 기회였을텐데……? 자앙이 나가서 우승한다는 보장도 없고. 오늘 나오지 않았는데 내일은 나모겠느냐? 사문기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생각해 두었던 일이고, 전적으로 혼자서 결정한 일입니다. 진형에게서 진가곤을 가져 오는 대가가 이 정도라면 저는 헐값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진자룡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네개 의해서 값이 올라가는 셈인가……? 허허!" 그는 가볍게 웃고는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내일은 자앙이 나올 수 있을까? 나온다 해도 이길 수는 있을까? 손자가 원인도 모르는 행방불명이 되었는데도 한가롭게 읊조리듯말하던 그의 신색이 갑자기 굳었다. 비무대 위에서는 아미 공심과 가휘섭이 최종전얘 나갈 승자를 결정하기 위해 대결을 벌이고 있었는데가휘섭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단 한번 보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영리충……!" "분명 그가 영리충이지?" 황사 매요신이 오늘 처음으로 단상얘 나와 앉아 있다가 매불염에게말했다. 메불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가휘섭은 그냥 가휘섭이었지만 지금의 가휘섭은 분명 영리층이에요. 제가 가휘섭을 가까이 하면서 관잘한 것과 지금의 그와는너무 달라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사실이겠지, 네 눈을 누가 속이랴!" 그는 단상 위의 가휘섭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야. 천하제일의 기공을 익혀 장생을 보장받고, 주안과를 먹어 불로까지 하는 데다 천하제일의 세력까지손에 거머쥐었으면서도 이제 부끄러운 이름과 얼굴을 버리고 제대로된 얼굴을 갖기를 원한단 말인가? 그래 봤자 어차퍼 남의 인생인 것을……" 옆에 앉아 있던 대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빈승은 아직도 믿을 수 없습니다. 왕년의 영웅십자도 혁련휘도가영리충이라니……! 인심은 세월따라 변한다지만 어떻게 대영웅이 대색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일까요?" 맹방평의 추리는 맞얀다. 영리충이 바로 혁련휘도요, 혁련휘도가 바로 영리충이었던 것이다. 당년에 중원이 중원삼흉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갓 강호출두를 한혁련세가의 소가주 혁련휘도는 삼흉을 잡아죽이는 것으로 이름을 떨치고자 했다. 결국 성공은 했지만 마지막 옥면수라와의 대결에서 얼굴에십 자의 큰 칼자국이 생기고 내장이 거의 파열되는 치명상을 입고 집으로 실려 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죽었다는 소문이 강호에 돌았고, 강호인들은 그의 칭호에 '영웅'이라는 두 글자를 붙여 주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숨긴 것은 그를 살리는 데 강호무림인들이 알면 안 되는방법, 즉 채음보양술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사도의 치료술을 통해 몸이 나은 혁련휘도가 색공에 깊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혁련휘도는 색공에 빠져 여인의 숲에 탐닉하는 그를 제지하고자 한가문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얼굴을 변용한 채 강호를 떠돌았다. 그것이 영리충의 탄생이었다. 한편으로 운리무 또한 혁련세가의 인물이었다. 혁련휘도를 고치기위해 무수히 사들인 영약과 여인들 때문에 탕진한 주인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전궁을 들고 자객의 길로 나갔으니 혁련휘도 한 사람으로인해 두 명의 거마가 탄생한 셈이었다. 무당의 육수정 진인이 말을 거들었다. "그 운리무를 부추긴 것이 양양 제갈가의 전전대 가주였고요!" 매요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등천비룡문의 탄생과 영리충에 얽힌 모든 비사의 주인공은 혁현세가와 재갈세가에 귀착되는 것이지요. 다행히 지금 혁련천조가 마음을 고쳐 먹고 제갈사도를 숙청했을 뿐 아니라 등천비룡문만저 해체하겠다고 했으니 모든 일은 끝난 것이오. 저기 저 영리충만 재거하면……!" 대보가 혀를 찼다. "혁련 가주도 고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할아버지가 영리충이고 보면 말을 따를 수도, 안 따를 수도 없었겠지요." "어쨌든 일은 반이 해결된 셈이고, 거기에는 팔대세가의 힘이 컸소. 특혀 당문과 서문가는 하기 싫은 일일 텐데도 내 부탁 때문에 억지로허리를 굽혔었지요." 잠자코 듣고 친던 삼황야가 매요신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른 황사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여러 사람이 활약을 했기 때문게일이 해결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황사의 신묘한 계략이아니었으면 어쪄 가능했겠소? 강호가 어지럽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에어 나오지 못하려는 위기를 황사 덕택에 바로잡게 되었으니 나도 황상께 얼굴이 서게 되었소!" "삼황야께서야말로 오해를 사서 그 이름이 진흙탕에 뒹구는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고 직접 나서서 강호 분란의 소지를 제거하셨으니 그야말로 주공의 공을 능가하실 것입니다." 일은 그렇게 진행되고, 그렇게 매듭 지어진 것이었다. 어린 조카 황제의 주변을 정리하고자 가면을 쓰고 칼을 든 삼황야, 그를 돕기 위해영리충을 끌어들이고 자신의 힘과 영리충의 욕심을 이용해 팔대세가를등천비룡문으로 묶은 황사, 삼황야와 황사의 의도를 야심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세력 결성과 확대에 이용하려 한 영리충. 이러한 제반요소가 작용하여 결성된 것이 등천비룡문이었고, 그것은 곧 어지러운 무림세력들을 정리하는 작업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거기 맹방평의 중원행은 생각지도 않던 행운이었다. 가장 껄끄러운상대인 운리무, 쾌여풍, 급여화가 그의 손에 처단되지 않았던가. 그들은 맹방평을 암중으로 후원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일이 끝나고, 모든 것이 얻어졌다고 각자가 믿게되었을 때, 영리충이 얻은 것은 영리충도 모르는 사이에 부스러져 버리고 만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등천비룡문은 해체되고, 최후의 승자는 삼황야와 황사가 되는 것이다. 승리의 주인공, 삼황야가 대보를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런 말로 공연히 사람 얼굴에 금칠하지 마시오. 대사와 진인께서야말로 청정도량을 벗어나 피비린내 자욱한 곳에 와 구경하게 했으니 제 죄가 크고 두 분의 공이 막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소이다!" 매불염이 그때 말했다. "소녀가 소견이 좁사오나 아직 일은 끝나지 않은 줄로 아룁니다. 원흉은 아직도 건재하고, 만약 저 흉적이 이번 시합에서 우승이라도 하면 잡아죽이기가 적잖이 곤란해질 것입니다. 그게 흉적이 노리는 바이기도 하겠구요. 그는 아마도 이번 시합에서 우승한 위광을 뒤에 업고결국에는 등천비룡문의 차기 문주가 되려는 속셈이겠지요. 그펀 가휘섭의 이롬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영리충이아니라 가휘섭으로!" 매요신과 대보, 육수정이 그 말에 근심 어린 빛으로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가휘섭이 아미 공심을 간단히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시간을 끌며 겨우 이긴 것처럼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눈에 분명히 들어왔다. 대보가 중얼거렸다. "꽈연 저 괴물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요? 세월이 갈수록 더욱 젊어지는 저 괴물을." 육수정이 그 말을 받았다. "황사 어른이시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메요신이 고개를 저었다. "니는 이미 늙었소. 관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 나와 앉아 있는 것만해도 스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요. 저기 관람석에 있는 천기공이 나선다면 물라도!" 천기공 진자룡은 이때 의외의 손님을 맞고 있었다. 중자릉, 그리고 그가 억지로 끌고 오다시피 한 소삼중과 유소림이었다. "여기 다 모였군! 아니 문제의 두 사람만 빼고……! 애들은 어디 갔지?" 고대랑은 이를 갈고, 진삼산은 인상을 쌨다. 그러나 진자룡은 희미하게 웃으며 중자릉을 달랬다. "이 사람아 차근차근 얘기하세! 뭐가 다 모였고, 뭐가 문제란 말인가?" 중자릉은 눈을 때굴때굴 굴려 가며 사람들을 보았다. "아니, 그럼 아직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물론 아무도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이상하군! 자앙이 와서 자기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아이가 저기 저 단상에 있는 황사의 양녀라는 얘길 않던가? 그리고 두 아이 중하나의 아버지가 여기 소 대협이라는 것도?" 번개가 그들이 선 자리 한가운데에 떨어졌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대랑은 거품을 뿜으며 쓰러졌고, 소삼중의 검은 얼굴도 충격 때문에 하얗게 바래져 버렸다. 진자룡은 짐작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고, 진삼산은 자기가 방금 무슨 소릴 들었는지 이해를 못해 눈만 굴리고 있었다. 폭음이 을리고, 관중들의 함성이 하늘로 치솟았다. 비무대 위에서는아미 공심이 무릎을 꿇고 가휘섭은 그와 반대로 우뚝 서서 손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태양이 그의 뒤에서 비쳐 사실 이상으로 그를 빛나게하고 있었다. 가휘섭이 단상을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공심 사테께서 불초 소생에게 양보하셔서 다행히 이겼습니다. 소생은 이제 다음 결승전을 굳이 내일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시작했으면하는데 어떻습니까?" 단상 위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보가 일어나 말했다. "이미 정해진 시간이고, 또 가 시주깨서는 한판 격전을 벌이느라 피곤하실 테니 예정대로 진행함이 어떠하오?" 가휘섭은 고개를 저었다. "소생이 성질이 급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것을 재촉하여 그러는것입니다. 오늘 진자앙 진 당주는 참석하지 않았지요. 규정대로라면당연히 실격입니다만 사문기 사 호법이 양보하여 실격을 막았습니다. 이 편법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소생은 내일도 그냥 나와 기다리다가 여기 계신 무림동도분들을 실망시켜 드릴까 저어하여 드리는말씀입니다." 중인들이 그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 이왕 본 싸움이니 계속 이어 보는 것이 낫지 하루를 더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기분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가휘섭이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키고 계속 말했다. "괜찮다면 소생은 여기서 일 각을 기다려 진 당주가 나을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첫 시합에 참석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두 시진의 기회를 준 셈이니 제가 불공평한 것은 아니겠지요!" 매불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요신이 그 소매를 잡았다. "너는 상대가 못 된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가 우승이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구나! 자칫 그를 핍박한다는 인상을 주면 중인들이 분노할 것이고 그는 더욱 신망을 얻게 될 것이다. 일단 손발을 잘라 놓은셈이니 나중 기회를 기다려 보자!" 매불염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 우린 아직 그들의 손발을 완전히 자르지 못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등천비룡문이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수뇌부에서만 아는이야기지, 각자의 조직은 건재하고, 그들은 가휘섭의 명에 따를 확률이 높지요. 비밀리에 감추어진 문주보다는 그들 중에 가장 유명한 향주를 따르는 것이 훨씬 구미에 맞을 테니까요. 지금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기회는 우리 손을 벗어날지도 모릅니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매요신의 눈이 그때 번뜩였다. "우리에게도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가 나왔구나!" 무수한 구경꾼들을 헤치며 진자앙이 비무대를 향해 나오고 있었다. 영생뢰를 나오는 그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영생뢰의 출구에 가자 비무대로 안내하기 위해 북천사흉이 기다리고있었다. 황사 매요신이 진자앙에게 만나게 해준다던 사람은 원래 영리충이 아니라 비불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금강불괴의 완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진자앙은 비무대얘 을라가 먼저 단상을 향해 공수했다. "소생 진자앙 늦어서 죄송합니다. 원래 이 자리에 나와 가 향주와겨루려 한다는 것은 양심을 찾아볼 수 없이 파렴치한 짓이겠지만 반드시 이루어야 할 소망이 있으니 나오지 않을수가 업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주위를 둘러보오 다시 단상을 향해 공수했다. 이번인사는 특히 매불염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 매불영의 마음과 그녀가 가휘섭에게 접근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매불염을 바라보며 말했다. "염정! 내가 이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난당신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도저히 그냥 흘려 보낼수 없소. 물론 내가 이긴다고 꼭 당신이 나와 혼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오. 나는 단지 내 마음을 보이고 싶을 뿐이오. 당신을 생각하는……내 마음을" 그는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붉어진 얼굴을 돌리고 가휘섭을 보았다. "시작합시다!" 가휘섭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더니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진자앙의 귓속으로 가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젊다는건 좋은 거군, 애송이!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던 일이지만 염정을두고 두 번이나 너 같은 어린애와 싸우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네 뜻대로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젓은 아니다만 아쉽게도 기회가 좋지않구나! 저숭에 가서라도 날 원망하지 말아라!" 진자앙의 안색이 변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그가 여기 서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귓속에다시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바보! 난 당신이 우승을 하든 못 하든 이미 당신 것이에요. 예전에 당신인 단룡비를 내게 준 그 순간부터! 가휘섭에게는 알아 낼 것이 있어서 접근했던 것이고, 지금 앞얘 있는 사람은 영리충이니 당신이 처리해요! 그손에 오히려 죽기라도 한다면 용서치 않겠어요. 저승까지라도 따라가 혼을 내줄 테니까!" 진자앙의 얼굴이 우는 듯 운는 듯 묘하게 변했다. 그의 인생에 최대의 적을 앞에 두고, 이제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생사의 격전을 벌이려는 그 찰나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의 고백을 들은 것이다. 그는 머리를 흔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 그는 죽을 수 없는 것이다. 그 하나의 목숨은 이제 그 하나의 목숨만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는 죽어도 좋지만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어찌 죽일 수 있을것인가! 진자앙은 영리충의 장력을 가슴으로 맞는 동시에 자신의 주먹을 뻗어 뇌정추를 내지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제이십칠장] 금강탁은 금강신을 깨고 광마는 노호를 누르다. 콰앙--! 진자앙은 누구와 맞서 싸워 본 이래 처음으로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것도 세 걸음씩이나. '영리충은……?' 영리충은 끄덕도 없었다. 가슴팍의 타버린 옷자락을 보면 분명 뇌정추가 격중되었을 텐데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말했다. "금강불괴?" 영리충은 회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자앙의 귓가로 다시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금강불괴가 너회 금강당만의 전유물인 줄 아느냐? 나는 이미 오래 전에그 경지에 다다랐더니라! 꿈에도 그리던 것을 봤으면 그만 죽어라!" 영리충의 손에서 등근 공 같은 것이 형성되더너 진자앙을 향해 날아왔다. 이기생형의 절정기공이었다. 진자앙은 숨을 멈추고 진기는 단전에 모아 둔 채 그 자리에 버티고섰다. 따앙--! 진자앙의 가슴팍애서 빛이 일그러지는 듯한 광경이 순간적으로 보이더니 장내를 흔드는 충격이 사방으로 퍼졌다. 중인들은 귀를 막으며괴로워해야 했다. 소리가 커서가 아니라 공기가 순간적으로 각자의 귀를 떼리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구경은 구경, 중인들은 눈을 두리번거리며 비무대 위에서 진자앙의 시채를 찾으럭고 헌다. 저런 가공할 위력의 강기에 얻어맞으면누군들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진자앙의 시채는 없었다. 대신 온전한 진자앙만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번얘는 가휘섭, 영리충이 놀라 외졌다. "금강불괴?"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소!" 노는 말과 함께 두 손을 모아 쥐었다가 앞으로 내밀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뇌성이 터져 나와 공기를 찢어발겼다. 콰아앙--! 뇌공 원웡도가 시전해 보였던 자오뇌정추가 제 위력을 발휘하며 날아가 그대로 영리층을 두들겼다. 영리충은 휘청 뒤로 밀릴 듯하다가 다시 중심을 잡고 섰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두 배로 길어져서 진자앙의 가슴팍을 때렸다. 밀종대수인애 흑심투골장의 침투경을 응용한 공격이었다. 팍--! 작은 소리가 나며 진자앙의 가슴팍에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 그러나이내 사라져 버렸다. 최악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살인적인 공격이진자앙에게는 벌레가 문 것보다도 효과가 없었다. 진자앙이 다시 일격을 가했다. 이미 소용없음이 드러난, 그러나 그것 외에는 달리 아는 것이 없는 유일한 공격수인 자오뇌정추였다. 콰아아앙--! 두 사람은 상대의 공격을 피할 마음이 전혀 없는지 그대로 꼿꼿이버티고 선 채 서로 일장씩을 교환했다. 그 하나하나가 동장철벽이라도무너뜨릴 순 있는 강력한 장공이라는 것도 같았고, 서로 상대의 강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똑같았다. 유일하게 다른 것이라면 진자앙이 자오뇌정추만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데 반해 영리충, 가휘섭은 매번 다른 기공들을 사용한다는 것만이달랐다. 무림에 존재하는 악랄하고 가공할 위력의 장공들이 그의 손에서 이 순간 모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연신 폭음이 울리고 충격파가 공기를 갈랐다. 폭우가 몰아치는 밤, 연속적으로 대지를 두들겨대는 뇌전과 우레처럼 하늘과 땅을 가를 듯한 기공강기들이 비무대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 중인들은 그 빛에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를 막으면서 다리를 떨고있었다. 이렇게 처절하고 또 이렇게 격렬한 싸움은 그들의 생애에 본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도망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무대 위의 두 사람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진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그들의 금강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고있었다. 이대로 수십, 수백 장이라도 더 때려 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때에 진자앙의 눈빛이 번뜩였다. 가휘섭의 얼굴이 한꺼풀 벗겨지는 듯하더너 십 자의 칼자국이 전면에 그어진 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앗!" "아니……!" 놀란 중인들사이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드러난 영리충의 얼굴은 맹방평이 묘사해 준 한 사람의 용모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굵은 뱀이 기어간 자국처럼 또렷이 얼굴에 그어진 네줄기 흉터. 원래는 영준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천하의 추물이 된 영리충, 영웅십자도 혁련휘도의 본색이었다. "영웅십자도 혁련휘도! 과연 당신이었군!" 진자앙이 소리친 순간, 그의 가슴팍에 응축된 장력이 터졌고, 진자앙은 피를 뿌리면서 뒤로 날려가 뒹굴었다. 이 순간, 진자앙의 머릿속을 사로잡은 것은 '입을 벌리면 신기가 흐트러진다'는 산노인 반선의 말뿐이었다. '바보같이!' 쓰러진 그를 향해 영리충의 장공이 연속적으로 밀려와 두들겼다. 그는 정체가 발각된 것을 알고 광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 진자앙을 두들겨 죽이치 못한다련 납작하게 눌러 놓기라도 할 태세였다. 매불염이 하얗게 질려 일어서고, 진삼산과 소삼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젼자룡은 그둘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 사태는 결코 밝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았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바닥에 뒹굴오 있던 진자앙의 손에서 밝은 빛이 번뜩이는가 하더니한 순간 모든 것이 멈추고, 영리충의 등뒤로 붉은 선혈이 폭풍같이 뿜어져 나왔다. 모두가 놀랐다. 거기에는 진자앙도 예외가 아니었다. 방금 자신이 바닥에서 잡아 던진 것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너……, 너……! 이 애숭이가……!" 영리충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가슴팍에 난 구멍을 파고들던 손에,피에 물든 한 물체가 잡혀 나왔다. 진자앙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수 있었다. 뇌전도, 혹은 금강저라 불리는 그것, 벽력당의 것으로 짐작되는 양날의 창이었다. 어느새 그의 가슴팍에서 빠져 나와 바닥에뒹굴고 있었던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잡아 던진 것이다. 영리충이 손을 들었다. 그는 뇌전도를 들어 진자앙에게 던지려는 듯손을 떨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금강탁 아냐? 저게 어떻게 자앙의 손에 들어갔지?" 중자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자룡이 그에게 물었다. "저게 뭔지 자넨 아나?" "금강탁이잖아. 서유기에 나오지, 왜…… 손오공을 잡으려고 태상노군이 던졌다는 무기 말야. 저게 바로 그건 아니겠지만 포달랍궁에서그것을 보관하고 있다는 전설은 있었지. 근데 저게 어떻게 자앙의 손에 들어간 거야?" 탁은 목탁의 탁이라는 뜻도 있지만 '양날이 달린 창'이라는 뜻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양날의 창이 금강신을 이루었다 믿고 있던영리충의 가슴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진자앙은 쓰러져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는 영리충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당신도 결국 금강불괴는 아니었군요. 내가 아닌 것처럼. 어쩌면 금강불괴는 영원혀 완성할 수 없는 목표인지도 모르겠소!"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계 그것은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삼선과 스승의 예에서 배웠듯이 인간을 버리고, 정마저 끊어야 되는것이 금강불괴라면 그는 차라리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매불염, 염정이 그의 옆애 있는 한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파. 지금 남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겨 오는 그녀가 있는 한은……! 진자앙과 매불염의 흔례식은 삼황야가 지켜보는 가운데 장락궁에서열렸다. 매요신이 투덜커린 대로 납채(혼례 예단)도 없고, 문명(신랑이 신부측얘 사람을 보태 신부의 이름와 생년월일을 물어 보는것)도 않고, 납길(신랑측에서 신부측애게 혼례 날짜를 알리는것)도 생략하고, 납징(신랑이 신부에개 주는 갖가지 선물)은 당장 구해지는 것으로 대충 하고, 청기(신랑이 신부측에 혼례 날짜를 알리고 허락을 받는 일)는 아예 생각도 않은 혼례식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친영(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여혼례를 거행하는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신부가 필요하긴 한 모양이라고투덜거렸지만 그 하나를 제외하곤 격식 때문에 문제를 삼는 사람은 없었고, 실은 매요신 자신도 즐거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한 소리였다. 두 사람은 소삼중과 진삼산 둘 다를 부모로 생각하고 광동 진가장에서 신혼 살림을 꾸몄다.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를 알아 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모든 일은 제자리를 찾고, 모두가 행복해진 것 같았지만 한사람은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떨 땐 얘가 내 애 같고 다른 땐 얘가 내 애 같으니 갈피를 못 잡겠네. 여보, 당신은 누가 진짜 우리 애인 것 같소?' 고대랑은 그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좋은 일을 치르는 김에 간신히 눌러 참고 있던 진삼산의 분노가 이순간에 대폭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고대랑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채를 휘감아 땅에 내동댕이치며소리쳤다. "이놈의 여편네야! 다 네가 초래한 일인데 이제 와서 그걸 따져 뭘하겠다는 거야? 애초에 용단 일만 없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나 했겠어? 네가 제대로 말만 했으면 자앙이가 어찌 이십 년이나 구박을 받고, 불염이가 강호를 떠돌았겠느냐구! 그러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이년이 하는 말이라고는……!" 하는 말마다 옳은 말이니 천하의 노호 고대랑도 오늘은 광마에게 꼼짝없이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삼산이 몽등이를 집어 드는 것을 본 사람은 몇 있었지만고대랑이 맞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명이 울리고 집기가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비명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 대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