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산기협 중국문학의 맥(脈) 중국 초인소설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대(唐代)의 전기소설(傳奇小說), 송대(宋代)의 이야기 책(話本), 명대(明代)의 수호전(水滸傳) 이후에 등장했던 평민문학(平民文學)으로 이어진다. 순수한 의미에서 중국 초인소설은 명(明)나라를 멸하고 청(淸) 왕조가 들어섰을 무렵, 각지의 무 사들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위해 결사를 만들고, 조직적으로 반청운동을 일으켰던 시기에 출현 했다. 의화단(義和團)의 난(亂)으로 수많은 무인들이 청조관원들이 쏘아대는 총과 화약에 참혹하게 죽 어가고, 중원무예의 총본산이었던 성지(聖地) 소림사(少林寺)가 불탄 이후로 서민들의 마음 속에 쌓인 한(恨), 울분,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촉발했던 암울한 시대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통쾌무비하 고 환상적인 측면이 강조된 새로운 서민문학의 출현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근대 중국 초인문학이 현실에 근거한 리얼리즘 문학과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로부 터 탈피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를 주무대로 삼게 된 것은 당시의 숨막히는 극한 상황 에 절망하고 있던 서민들의 궁벽한 마음에 환타지(幻想)와 도피의 이상향(理想鄕)을 제공해야 했 던 역사적 배경을 근저에 깔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민의 울분을 달래주고 읽는 이를 통쾌한 환상의 세계로 몰입시켜 간 초인소설을 후 대의 평자들은 출세파(出世派) 문학이라고 일컫게 되었으니, 리얼리즘 문학이나 역사적 상황을 저 술한 세칭 입세파(入世派) 문학과 구별되어 많은 독자를 끌어들이고 서민의 사랑을 받는 문예의 한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초인문학의 새벽을 열었다고 일컬어지는 근대중국의 기인(奇人) 李壽民(筆名:還珠樓圭)이 중국문 단을 경악시키고 십억 중국인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혜성과도 같이 등단하게 되는 시기 는 중국의 무예부흥시대(武藝復興時代)라고 일컬어지던 l930년대 초반이었다. 李壽民은 중국 초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의 대표작 <촉산기협(蜀山奇俠)>을 발표하 면서 기환선협파(奇幻仙俠波)의 신화를 창출했으며 平江, 向愷然과 함께 근대 초인문학의 비조로 서 중국문단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李壽民의 작품세계를 출세파와 입세파의 한가운데라고 지적한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그가 단순 한 환상이나 가공의 세계만을 작품의 무대로 삼지 않고 만 년 중국사를 면면히 이어온 사상적 줄 기와 평민문학의 맥을 받아 개화시킨 최초의 작가라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유(儒), 불(佛), 도(道), 묵가(墨家) 사상이 광범위하고 짜임새 있게 용해되어 있으며, 대륙인의 전통적인 선(善)과 추(醜)의 관념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상해(上海) 정기서국(正氣書局)에서 193l년에서 l948년까지 무려 십팔 년 간에 걸쳐 발 간했으니 촉산기협 51집(集), 후전(候傳) 5집으로 구성되어 총 329장(章) 50만 자(字)에 이르는 방 대한 내용을 담고 완결되었다. 이러한 대하소설이 한 인간의 손으로 집필되었다는 사실에 우선 그 누구나 경악을 금치 못할 것 이며, 이 소설이 발간될 당시에 다음 편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성화가 요원의 불길 같았다고 전해 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문학의 엄청난 저력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이 작품은 석가와 공자와 노자의 인의사상(仁義思想)을 띤 변모된 세상사에 대비하여 설득력 있 게 설파하며, 그 배경을 묘사함에 있어 중국의 만리 기경(奇景)을 눈으로 보는 듯이 선명하게 묘 사했으며, 줄거리의 전개가 도도히 흐르는 황하와도 같이 막힘이 없고, 예측을 불허하는 사건의 변환이 읽는 사람을 경심동백(驚心動魄)케 하면서 손에서 차마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 고 있다. 다채로운 줄거리, 세련되고 힘찬 문장은 마치 칠보루대(七寶樓臺)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눈이 부 신 느낌을 준다. 검선(劍仙)과 비선(飛仙)의 등장, 영금(靈衾)과 괴수(怪獸)의 출현, 산정해매(山精海魅), 신병이기 (神兵利器), 기진이보(奇珍異 寶), 천부명역(天府冥域), 그리고 치밀하게 짜여진 정(正)과 사(邪)의 쟁투 속에 인과응보와 유, 불, 도, 삼가의 사상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며 그 향기를 더해간다. <촉산기협>은 중국 전통민속문학(封神演義), (水滸傳)의 맥을 이어 발전, 개화된 작품으로 그 문 학적 성과는 중국의 역사가 이어가는 한 영원토록 남을 것이다. 문호 李壽民은 타계했지만, 그는 동시대인 平江과, 제자 金庸과 함께 중국 초인문학의 삼봉(三 峯)으로 널리 추앙받고 있다. 작가 李壽民이 평생에 걸쳐 이루어 놓은 위대한 업적, 장장 오백만 자, 등장인물 천여 명에 이르 는 인류역사상 최장(最長)의 대하소설 촉산기협의 예술적 성과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현존 중 국 최고의 작가 金庸은 스승의 명저 촉산기협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초인문학의 새 지평을 연 李壽民 선생의 <촉산기협>을 우리는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건곤(乾 坤)의 창조, 중국문학의 천지개벽>으로 표현한다. 근대문학사의 기인 李壽民은 이 필생의 작품 속 에 일만 년 중국역사를 계승해 온 내상적 원류(源流) 유, 불, 도, 묵가 사상을 짜임새 있게 직조 (織組)해 넣었으며, 그 광오하고 심원한 문학적 향기로 중국문학의 한 세기를 진동시켰다. 이 소설에 담긴 사상적 연원과 문학적 가치를 새삼 거론하는 일은 의미가 없으므로 나는 여기서 이 작품이 가진 압도적인 소설적 재미, 천변만화하는 스토리의 전개와 환상, 박진, 장쾌를 극하는 감동적 요소에 대하여 찬탄을 금치 못하며, 이러한 초거작 장편에서 장을 거듭할수록 새로와지는 흥취로 독자를 사로잡아 가는 선생의 작가적 재능에 새삼 외경의 뜻을 표함으로써 감히 평(評)을 졸(卒)한다." 聯經出版公司 刊行 <近代中國名作小說大系>에서 촉산기협(蜀山奇俠)의 연구 대만대학 교수 唐文標 나는 최근에 근대중국의 명저 <촉산기협>을 다시 읽으면서 수십 년 전 첫 번째로 이 작품을 읽 었던 때와는 매우 다른 감흥을 받았다. 우리는 확실히 이 작품이 처음 나왔던 수십 년 전에 비해 변화된 세상과 진보된 지식을 접하며 살고 있다. 세상살이의 고달픔과 나름대로의 잔걱정에 찌들고 있지만, 우리는 산에 올라 신선이 되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과학의 발달과 세계관의 변화, 그리고 온갖 분야의 지식이 풍부해진 지금 세상에서 <촉산기협> 을 진리가 담긴 책, 혹은 지식을 전해 주는 책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촉산기협>은 그저 대단히 재미있는 가상의 이야기, 읽을거리가 충만되어 있는 한 편의 소설일 뿐이다. 이러한 소설은 본래 여러 분야에서 생활 주변의 잡다한 일에 쫓기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정신적 인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한다고 할 수 있으니, 마치 우리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액션영화를 재미있게 보듯이 보는 일 그 자체로 족한 것이다. 도를 닦아 신선이 되기 위한 길잡이로써 이 책을 탐독할 현대인은 없을 것이며, 또한 이 책을 정신없이 읽은 독자가 깊은 산으로 출가하여 신선이 되겠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 책은 요즈음 서구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공상과학소설과 비슷한 유형의 작품 으로써, 읽는 일이 그저 즐겁고 신비하고 재미있는 픽션이다. 공상과학소설을 읽은 독자가 몇만 광년이나 떨어진 별나라에 고등생물이 살고 있다고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신선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할 까닭은 조금도 없으며, 작 가 자신 역시 그런 일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대하소설 <촉산기협>은 어떠한 측면에서 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까? 나는 그 기능 과 효용에 관하여 결코 과소평가를 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학과 지식의 발달이 더해 갈수록 이 소 설의 효용은 증폭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검선(劍仙)이 가상적인 존재이며 선계(仙界)가 실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 다. 그러나 우리들 속세의 풍진에 찌든 인간들이 신선의 생활, 신선의 마음가짐을 동경하고 선망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실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신선의 이야기가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 신선의 세계를 가장 훌륭하고 기발하게 그려낸 작품이 바로 '촉산기협'이 다. 기환선협파(奇幻仙俠波)의 거장 이수민은 어떻게 신선의 세계를 창조했는가? 청나라 초기, 이민족(異民族)이 중국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면서 규염객(叫髥客)과 같은 사람은 한 지방에 웅거하여 스스로 왕을 자처했다. 명(明)나라의 우국지사와 뼈있는 무사들은 변경으로 몸을 피했고, 시간이 갈수록 궁산악수(窮山惡水)로 모여들어 무리를 지어 외부세계의 압박에 대항 하게 되었다. 이수민의 <촉산기협>에 등장하는 신선은 곧 산사람(山人)이라 할 수 있다. 산사람을 결함이 없 는 완전한 존재로 묘사해 나가다보니 곧 신선이 되고 만 것이다. 인간이 수도하고 정진하여 불로장생하고 영원한 자아(自我)를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 겠는가? 그리하여 이수민의 작품 속에서 세계는 둘로 나누어졌다. 한 쪽 세상에는 생로병사의 온갖 재난 과 아픔과 고통을 속절없이 감내해야 하는 범인(凡人)이 있고, 다른 한편의 세상에는 그러한 모든 세속의 일로부터 격리되고 초탈된 신선이 있다. 신선의 세계란 어떤 것일까? 범인을 번거롭게 하는 온갖 것, 범인이 좋아하지 않는 모든 것, 곧 인간의 번뇌와 고통과 미망의 요소를 속시원하게 제거한 세계가 바로 선계이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 범인이 신선이 되고 속세의 인간이 선계로 들어갈 수 있는가가 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이 작품의 세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열망을 토양으로 하여 성립되고 전개되는 것이다. 소설 <촉산기협>은 어둠 속에 허덕이는 인간들에게 광명을 향한 희원을 상상 속에서나마 증족 시키면서 방대하고 끊임이 없는 인기를 유지해 온 것이다. <촉산기협>을 읽으면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소품(小品)은 각종의 진기한 법보(法寶)이다. 정(正)과 사(邪)를 막론하고 검선들은 법보를 무기로 싸운다. 원래 인간이란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쓰임새와 능력 역시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인간들의 불만이 천수관음(千手觀音)이나 팔비나타(八臂娜咤)의 신화를 만들어 내었는지도 모른다. 법보는 검선의 능력을 무한하게 보강해 준다. 오행(五行)의 상생상극 원리와 각종 기기묘묘한 법보의 묘사야말로 작가 이수민의 천의무봉(天 衣蕪封)한 상상력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촉산기협>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기상천외한 주제는 중생평등(衆生平等)의 사상이다. 정령(精 靈)과 원령(元靈), 그리고 육지(肉芝)의 출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 고유의 특성인 영성(靈性) 이 자연물에까지 파급되고 있다. 이러한 특이한 내용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맥이 통하는 면이 있으며, <산해경(山海經)>을 능가하 는 각종의 진기한 영금(靈禽)과 괴수(怪獸)의 출현은 신비하고 흥미로운 사상의 세계를 끝없이 펼 쳐준다. 이 작품을 모두 읽은 사람은 우선 한 편의 장편소설을 쓸 만한 능력과 상상력을 갖추었다고 보 아도 무방하겠다. 끝없는 기환(奇幻)의 세계, 이수민의 선계(仙界)에 입문하기를 권한다. 이수민과 촉산기협 중국문인협회 회장 葉洪生 중국문학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긴 근세의 기인 이수민의 필명(筆名)은 환주루주(還珠樓主), 아명 (兒名)은 이선기(李善其)였다. 그는 사천성(四川省) 장수연에서 출생했다. 청(淸)나라 광서(光緖) 이십팔 년(l902년) 전통적인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시절부터 지방관리로 일하던 아버지 를 따라 천하각처를 유람했으며 대강(大江) 남북을 두루 떠돌아다니며 자랐다. 그의 일기에는 아미산(蛾嵋山)에 세 번, 청성산(靑城山)에 네 번 올라가서 십팔 개월 동안 산 속 을 돌아다녔다는 세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찍힌 대자연에 대한 감 흥이 그후 불멸의 대작 '촉산기협'을 저술할 때 크게 작용했으며 기경(奇景)을 절묘하게 묘사하는 독보적 필치의 기초가 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수민은 평생 동안 정식으로 학교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소년 시절에 십 년 동안 서당에서 글 을 배웠다. 그는 총명이 절륜한 신동이었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엉뚱하고 한 번 본 것은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기억력과 표현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독학으로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여행 했다. 그의 독서는 종횡무진이었고 고거, 불경이나 비장된 도가(道家)의 장서들을 두루 섭렵했으 며, 의(醫), 복(卜), 성(星), 상(相)의 온갖 부문에 광범위한 지식을 갖추었다. 말하자면 그는 고금 의 역사와 그 흐름, 방향과 변화의 법칙에 두루 통달한 절대기재 (絶對奇才)였다. 이수민은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자 열아홉 살 때 어머니를 모시고 천진(天 津)으로 이주했다. 가장이 된 그는 처음에 <대공보(大公報)>에서 교정과 편집일을 보고 저녁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민국(民國) 십사 년에 그는 군계(軍界)에 초빙되어 호경익(胡景翼), 송철원(宋哲元), 부작의(傅作 義) 등 장군막하에서 비서일을 맡았다. 당시 부작의는 천진지역 경비사령관이었는데 중문(中文)과 영문(英文)을 담당하는 두 명의 비서가 있었으니, 영문비서는 외교관 단무란(段茂瀾: 후일 대만대 학 교수)이었고, 중문비서는 이수민이었다. 그는 평생에 희곡을 좋아해서 남곤(南崑), 북과(北戈), 동류(東柳) 서방 등의 온갖 창극과 희곡에 능통했다. 민국 십육 년에 그는 명단(名旦: 연극배우) 상소운(尙小雲)과 사귀고 형제의 의를 맺었으며, 평극 (平劇)의 표현예술에 대한 기발하고 혁신적인 견해들을 지면에 발표했다. 그는 극에 심취하여 상 파(尙波)의 명극(名劇), <한명비(漢明妃)>를 썼으며, 항전시기(抗戰時期)에 많은 명품을 발표했으 니 대표작은 <주개>였다. 민국 이십 년에 결혼한 그는 가중된 가계부담과 등산 여행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선기 (禪機)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으니, 처음에 쓴 연애소설 <윤제(輪蹄)>는 문 단의 주목을 받은 소품이었다. 그는 노년에 가서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꿈꾸는 것처럼 머릿속이 달콤해진다고 술회 했던 소년시절의 첫사랑을 기리기 위해 장적(張籍)의 시구 '환군명주쌍루수(還君明珠雙淚垂: 그대 에게 명주를 돌려주면서 두 줄기 눈물을 흘린다)'에 담긴 아름다운 뜻을 취하여 필명으로 사용하 게 되었으니, 이것이 중국문학의 신천지를 개척한 세칭 <환주파(還珠波)>의 유래가 되었다. 그 후 그의 작품 세계는 한정된 현실로부터 막힘이 없는 무한대의 시공(時空)으로 바뀌게 되었 으니, 그리하여 중국문학의 굵은 흐름을 창출한 광세기서(曠世奇書) <촉산기협>을 집필하여 <천 풍보(天風報)>에 연재하게 되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중국천하는 지진이 일어난 듯이 떠들썩했고 신문을 사려는 독자들이 새벽마 다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천풍보>의 주필이었던 당노손(唐魯孫)의 회고에 의하면 그때 이수민은 매일 만 자의 원 고를 막힘이 없이 줄줄이 써 나갔다고 한다. 그는 <촉산기협>을 쓸때 둘레가 일 장여나 되는 나 무로 만든 지구 평면도를 만들고 각기 색깔이 다른 수백 개의 깃발을 만들어 그 위에 작중인물의 이름을 써서 지구평면도 위에 배치해 놓고 작품을 써 나갔다고 한다. 진행됨에 따라 깃발이 종횡 무진으로 지구 위를 움직였으니, 만 리 하늘과 땅이 그의 손바닥 안에 들어 있었던 형국이었다. 그리하여 불멸의 거작 <촉산기협>은 십팔 년 동안 신문에 연재되었으며, 이 한 작품으로 그는 일약 중국문학 기환선협파의 대종사(大宗師)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수민은 또한 유가의 인(仁), 불가의 자비, 도가의 장생(長生)등 중국 수천 년의 역사를 이끌어 온 모든 사상을 일이관지(一而寬之)하여 '불충불효(不忠不孝)한 신선(神仙)은 없다' 등의 명언을 남겼다. 소설 <촉산기협> 전권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는 '정(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수민이 그 려나가는 인간의 정은 매우 다채롭고 다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남녀의 연정, 육친의 모정과 효 정, 사도(師徒)의 정과 친구의 정을 온갖 다양한 상황과 무대에서 일관되게 그려나간다. 그의 문체는 웅위(雄偉)하고 필력은 도도히 흐르는 황하처럼 막힘이 없다. 눈으로 보는 듯한 배 경묘사와 손에 잡힐 듯한 감정처리는 칠보루대(七寶樓臺)를 바라보듯 읽는 이를 눈부시게 한다. 이야기의 전개는 천마(天馬)가 하늘을 가로지르듯 시원하고 전환이 빠르고 신비로우니 <삼국지 >,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등 중국 전통소설이 가진 온갖 장점을 고르게 갖추고 있다. 그의 문체와 필법을 '칠보루대체'라고 일컫는 것도 <촉산기협>의 작풍(作風)으로부터 비롯된 말 이다. <촉산기협>은 중국문학사에 우뚝 솟은 거봉으로서 그 이후에 배출된 수많은 기재(奇才)들을 커 다란 그늘 아래 넓게 포용한다. 뜻밖의 만남 月夜棹孤舟, 巫峽啼猿登棧道 天涯逢知己, 移家結伴隱名山 사천성(四川省)의 아미산(蛾嵋山)은 촉(蜀) 지방에서도 가장 이름난 명승지다. 서촉(西蜀)의 산수(山水), 기이한 절경 허다하나, 그 중에서 아미산이 더욱 빼어나네. 옛시인이 읊은 이 시구는 실로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더구나 아미산 서남쪽 산록(山麓)에는 도 가(道家)와 불가(佛家)의 사찰(寺刹)이 수백 군데나 크게 번창하고 있어 해마다 이곳들을 참배하 러 불원천리(不遠千里) 머나먼 길을 찾아드는 선남선녀(善男善女)가 끊일 줄 모른다. 이 참배객들이 오르는 산길 곳곳은 하나같이 청산록수(靑山綠 水), 층암절벽(層岩絶壁)이 천태 만상을 이루고 있어, 절간을 찾는 신도들뿐만 아니라 뜻없이 산천경개를 유람하러 다니는 사람들 의 발길 또한 끊임없는 곳이다. 아미산의 절경은 서남에서 동북쪽 뒷산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그윽하고 기관(奇觀)을 이룬다. 자고로 깊은 산, 커다란 늪지에는 용이나 이무기, 독사들이 도사리고 울창한 숲 속이나 골짜기에 는 호랑이, 표범, 이리, 늑대와 갇은 맹수들이 득실거리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가끔씩 아미 후산 깊숙이 들어갔던 유람객들이 행방불명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곤 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호랑이나 늑대한테 물려갔다>는 등, <요괴의 밥이 되었다>는 등, <신선의 눈에 들어 속세를 버리고 선술(仙術)을 배우게 되었다>는 등 자기나름의 상상을 멋대로들 하게 되지만, 그게 사실인지 어떤지는 아무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런 사건들은 한동안 시끌벅적 소 동만 일어나다가 이내 잠잠해지고 뭇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질 뿐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인간의 몸뚱이는 혈육(血肉)으로 뭉쳐진 고깃덩어리다. 열에 여덟아홉은 웅대한 자연 앞에서 담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유람객의 실종 소문이 한 번씩 나돌 때마다 아미 후산 을 오르는 발길 또한 점차 줄어들고 인적이 드물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겠는가. 후산을 찾아드는 속세의 인간들이 줄어든 만큼 그와 반대로 산중에 은둔하여 수양하 는 고인은사(高人隱士)들이 세상 풍진의 소란을 덜고 영산(靈山) 승경(勝景)의 청복(淸福)을 마음 껏 누리기에는 오히려 족한 선경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천지방은 명(明)나라 말엽 장헌충(張獻忠)의 반란을 겪은 이래 십육 년 동안 전화(戰火)에 휩쓸려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어떤 곳은 수백리 길에 밥짓는 연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늘이 내리신 풍요한 낙토가 오로지 귀신의 울음과 야수들만이 들끓는 땅으로 변한 것이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滿洲)의 여진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들어와 중원을 통일하고 청(淸)나 라를 세웠다. 건국 초기의 혼란이 진정되고 나자, 사천지방을 맡은 관리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호 남(湖南), 호북(湖北), 강서(江西), 섬서(陝西) 지방의 백성들을 황폐한 사천땅으로 대거 이주시켰 다. 기름진 농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이루어진 사천으로 옮겨진 이주민들은 고향을 쫓겨난 당초 의 설움을 잊고 새로운 생활 터전에 애착했다. 살림살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당장 구할 수 있을 만큼 천부(天府)의 낙토(樂土)였다. 사천지방은 다시 점차로 인구가 조밀한 낙원으로 회복되 어 갔다. 그리고 소문은 듣고 제발로 찾아오는 이주민 역시 점점 늘어났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등극한 지 이 년(1663)째 되던 해, 이곳 사천성 무협(巫峽)으로부터 양 자강(揚子江)을 거슬러 오르는 배 한 척이 있었다. 배 안에는 사공과 두 명의 남녀가 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남녀는 아버지와 딸 사이가 분명했다. 초라한 괴나리 봇짐 한 개를 어깨에 둘러메고 처량한 신색으로 뱃전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흐르 는 강물에 눈길을 던진 채 망연자실한 중년의 사나이, 수염과 머리칼은 이미 온통 은백색이지만 이따금씩 고개를 쳐들고 강변을 두리번거리는 눈빛 속엔 날카로운 기백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 마와 얼굴에 그어진 주름살은 그가 얼마나 숱한 풍상고초(風霜苦楚)에 시달려 살아왔는가를 여실 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발밑에는 또 한 개의 짐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물결따라 흔들리는 뱃바 닥에 자못 묵직하게 놓여진 그것은 무슨 쇠붙이가 들어 있는 듯했다. 열 두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자태는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중년 사나이 곁에 기대 어 앉아 서서히 바뀌어 가는 강변의 경치를 손가락질해 가리키며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천진난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어 강물 위에는 어느덧 저녁 안개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어둠의 장막이 사면을 뒤덮고 물결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데도 사공들은 말없이 노를 젓고 선객은 뱃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강 건너 산모퉁이에서 밝은 달이 둥실 떠오르더니 맑고 차가운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중년 사나이는 불현듯 무슨 감회가 솟구쳤는지 갑작스레 목청을 돋구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하늘에 뜬 달은 오늘도 밝기만 하구나! 이 산천 명월이 언제 다시 내 나라 땅으로 돌아올꼬?" 처연한 기색이 감도는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소녀가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빠, 또 마음이 상하셨군요. 세상 일이란 게 모두 정한 운명대로 흘러간다고 아니 그러셨어요? 상심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진정하셔요." 이때 사공이 뱃전으로 건너왔다. "나으리, 해가 저물었습니다요. 저 앞쪽이 바로 유명한 오아취(烏鴉嘴)올시다. 그 나루터에 마을 이 있으니까, 거기 닻을 내리고 하룻밤 쉬어 가시지요. 저희도 상륙을 해서 저녁 끼니를 때울 겸 대포 한 잔을 걸쳐야겠습니다요." "그렇게 합시다. 오아취에 닿거들랑 당신네나 마을에 들어가구려. 나는 좀 피곤해서 상륙할 생각 이 없구먼." 오아취에 도착하자, 사공들은 더 이상 권하지도 않고 제각기 뭍에 내려 흩어져 갔다. 중천에 높이 떠오른 달빛은 그림처럼 맑고 밝았다. 배에 남겨진 아버지와 딸은 등짐 보따리를 풀어가지고 술과 음식을 꺼내더니 뱃머리에 늘어놓고 달빛을 벗삼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중년 사나이는 아무리 흥취어린 강변의 절경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지만 그래도 마냥 무료하기만 했다. 어린 딸과 대작(對酌)할 수도 없고 이태백 같은 시객(詩客)이 아닌 이상 무심한 명월(明月) 을 술벗으로 삼을 수도 없었다. 그는 묵묵히 술잔만 거듭 비울 따름이었다. 홀연듯 강변 숲 속 멀리서 노랫가락이 울려퍼졌다. 뒤미처 어두운 숲 그늘 속으로부터 하얀 그 림자가 나타나더니 달빛을 가득 받으며 강변 자갈밭을 걷기 시작했다. 한가로운 가락도 그 발길 을 따라서 점점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백의인의 모습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자, 중년 사나이는 일시에 흥이 솟구쳤다. 술벗으로 끌어 들일 욕심이 생긴 것이다. "척보 노형, 맑은 달빛에 강변 밤경치가 아주 그만이외다. 여기 배 위에 술과 안주가 좀 있으니 오르셔서 몇 잔 나누지 않으시려오?" 한참 제멋에 겨워서 구성지게 가락을 뽑던 백의인은 강선(江船)에서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 에 문득 노래를 멈추었다. '이상하군. 여기에는 대부분 사천지방이나 호남출신 사람들만 사는 곳인데 어떻게 북방인의 사 투리가 들리는고? 저 말씨는 분명 북경(北京) 아니면 하북성 사람이야. 아무래도 우리 동향인 듯 싶은데... 흐흠, 기왕에 날 불렀으니 어디 올라가서 한 잔 나누고 알아보는 것도 괜찮으렷다?' 선창으로 슬금슬금 다가선 백의인은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널판을 딛고 배에 올랐다. 중년의 사나이와 백의인은 허투로 인사를 나누고서 머리를 들어 상대편의 면모를 바라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앗!" "아이구 형님!"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태성통곡을 터뜨렸다. 중년 사나이는 복받쳐 오르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면서 오열섞인 목소리로 탄식을 내뱉았다. "경사(京師: 북경)에서 헤어진 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더니 이제 다시 살아서 만나게 될 줄이 야!... 허나 옛친구는 다시 보았다 해도 산천은 남의 땅이 되고 말았으니, 정말 애간장이 끊는구먼! 여보게, 안 그런가?" "양주(楊洲) 전투에서 형님이 전사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머나먼 이역 땅에서 상봉하게 되었습니다그려! 그 싸움 이후로 저는 외톨박이 신세가 되어 피신해 다니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었습죠. 이제 형님을 만났으니 저도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아가씨는 따님이 신가요?" "허헛, 내가 아우를 만나서 반가운 나머지 깜빡 잊었구먼! 바로 내 딸년 영경(英瓊)일세... 얘, 경 아, 어서 주(周)숙부님께 인사 올리거라." 소녀는 아버지의 분부대로 백의인을 향해 다소곳이 절을 올렸다. 백의인은 답례를 하고서 중년 사나이에게 한마디 건넸다. "현질녀의 자태가 장문(將門)의 따님답게 아주 영민하구려. 형님의 절예는 모두 따님한테 전수하 셨겠지요?" "모르는 소리 말게. 어리석은 형이 무예를 조금 안답시고 설쳐대다가 집도 망하고 식구마저 잃 었다네. 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미는 날 따라 싸움터에 나섰다가 난군(亂軍)들한테 죽음을 당 하고, 나 또한 십여 년을 분주히 도망다니느라고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지. 이 애는 늘상 날 더러 무예를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지만 평범하게 사는 것이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르쳐 주 지 않았네. 게다가 이 어린 것은 양눈에 살기가 너무 끼어서 무예를 전수했다가는 장차 큰일을 저지르고 말 것일세. 내 무공실력도 변변치 못하고, 천하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 또한 적지 않을 터, 공연히 어쭙잖게 가르쳐 내보냈다간 도리어 살신지화(殺身之禍)나 당하기 십상이 아니겠는가? 도무지 나는 이 딸년 하나밖에 없지만 정말 마음을 놓지 못하겠네. 그래서 단 한 가지 무예도 전 수하지 않았거든. 그저 소원은 어느 때든 어울릴 만한 책벌레나 한 사람 사위로 맞아 짝지워 주 고 저승으로 갔으면 하는 마음뿐일세." "형님 말씀이야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현질녀의 관상이 범상치 않소. 절대로 평범하게 시집가서 늙을 팔자가 아니외다. 두고 보시구려." 소녀는 곁에서 백의인이 하는 말을 듣더니 그 고운 이마를 활짝 펴면서 기쁜 빛을 드러냈다. 그 녀는 살며시 늙은 아버지를 훔쳐 보았다. 그 눈빛에는 또 희미하게나마 원망이 서렸다. 백의인이 다시 물었다. "형님, 무슨 일로 사천엔 오셨소?" "허허, 나라는 망하고 집안도 풍비박산이 난 몸인데 누가 반겨 주기나 한다고 여행길을 나섰겠 나? 그저 세상에서 멀찌감치 피해서 살고 싶은 생각뿐이라네." "그럼 잘됐습니다. 제가 사천땅에 들어온 지는 벌써 삼 년이나 지났습니다. 아미산 동북편 깊은 뒷산에 갔다가 석굴을 하나 찾아냈는데, 아주 그윽하고도 조용한 데다 경치 또한 썩 훌륭하더군 요. 어제까지도 그곳에 가서 며칠 머물고 돌아왔습니다. 이 마을에 온 후로는 여지껏 아이들을 몇 몇 모아 놓고 글방 훈장노릇을 해왔습니다만, 아예 집어치우고 그리로 들어가 은거할까 생각을 굳히던 참이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오늘 형님까지 만나고 보니 이제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곳은 인적도 없고 조용하기는 한데 사나운 짐승들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어린 현질녀가 두려워하지 만 않는다면 우리 셋이 함께 숨어 살며 때를 기다려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거 썩 잘 되었네. 한데, 그 산까지 가려면 얼마나 먼가?" "산길로 해서 팔구십 리밖에 안됩니다. 형님, 여기서 이 배는 돌려보내시고, 저희 집으로 가셔서 한 이틀 묵은 다음 저와 함께 그리로 떠나시지요." "그렇다면 오늘은 아우 먼저 돌아가게. 나는 오늘밤 이 배에서 쉬고 아침 일찌감치 배를 돌려보 낸 뒤에 찾아가도록 하지. 집은 어디쯤 있는가? 자네도 나도 모두 도망꾼들인데 성명을 바꾸지는 않았나?" "이름은 바꿨지만 성은 그대로입니다. 내일 아침 마을에 오셔서 훈장노릇하는 주순(周淳)을 찾으 십시오.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아침 일찍 누구와 만날 약속이 있어서 제가 직접 마 중은 못나가지만, 그리 멀지 않으니까 이내 돌아올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백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과 헤어져 뭍으로 내려갔다. 숲 속으로 백의인이 사라지자 소녀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저분이 바로 늘 말씀하시던 <제로삼영(齊魯三英)>의 주랑(周琅) 숙부님 아니신가요?" "아무렴! 당년에 이 애비 이령(李寧)과 양달(楊達), 주랑 두 숙부는 제(齊: 하북 지방), 노(魯: 산 동 지방), 연(燕: 요동 반도), 예(豫: 하남성) 일대에서 위명을 드날렸지. 그중 양숙부는 나라가 멸 망한 뒤 이민족에게 빼앗긴 강토를 되찾으려 활약하시다가 원수들에게 잡혀 죽었단다. 이제 남은 것은 나하고 주숙부뿐이지만, 얼마나 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구나. 이번에 아미산 으로 들어가면서 좋은 동반자를 얻었으니 마음 속 근심도 한결 덜어진 셈이다. 얘야, 오늘은 일찍 쉬고 내일 아침 일찌감치 상륙하자꾸나!" 때마침 두 사공이 얼큰하게 취해 가지고 돌아왔다. 중년 사나이 이령은 사공더러 여행계획을 바꾸었다고 통보했다. "내 이 근처에 친척 한 분이 있는 걸 생각해냈소이다. 그 집으로 가서 몇 달 묵기로 하고 내일 아침 일찍 상륙할 테니까 그리 알고 배를 돌리시구려. 예까지 오느라고 고생도 많았는데, 뱃삯은 그대로 계산해 드리고 따로 은자 넉 냥을 술값삼아 더 드리리다." 사공들은 그 말을 듣더니 허리를 연방 굽신거리면서 고마워했다. 그리고 흔들흔들 기분좋게 선 실로 들어가 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튿날 새벽, 이령과 영경 부녀는 짐을 챙기고 사공들에게 작별을 고한 다음 오아취 앞마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반 리쯤이나 걸었을까. 한데 길섶에서 어린 소년 하나가 풀쩍 뛰쳐나왔다. 대략 열두 살쯤 됨직한데 얼굴은 관옥처럼 곱고 총기가 또렷했다. 계절은 음력 칠팔 월의 초가을이기만 촉지방은 원래 분지(盆地)라서 아직도 무더위가 한창이었 다. 소년은 푸른색 짧은 홑저고리에 바지만 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서자 소년은 쪼르르 달려오더니 대뜸 굽신하면서 물었다. "두 분께선 저희 주순 사부님을 찾아오시는 길이 아니신지요?" "그래, 우리는 주선생을 만나려는 사람이다. 네가 그건 어찌 아는고?" 이령의 대꾸를 듣자, 소년은 털썩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부터 올렸다. "어젯밤 스승님께선 아주 기분이 좋으셔서, 돌아오신 후에도 한 잠도 주무시질 않았습니다. 오아 취 강변을 산책하시던 중 사백님과 사저(師姐)를 우연히 만나셨다고 하셨습지요. 그리고 오늘 새 벽 다른 약속 때문에 영접하지 못하신다고 저더러 안내하라 이르셨습니다. 저 앞채가 바로 스승 님의 서당입니다. 머잖아 어르신께서도 돌아오실 테니까 사백님은 들어가셔서 우선 조반을 드시 지요." 이령이 소년을 보아하니 의표(儀表)가 비범한 데다 말씨조차 영리하고 자못 귀염성스러웠다. 그 는 단박에 소년에게 정이 끌렸다. 주순의 서당에 당도하자, 앞장서서 안내를 하던 소년은 쪼르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대나무 울타 리를 둘러친 초가집이지만 한결 깨끗하고 정돈이 잘되어 보였다. 조그만 뜨락에는 역시 대나무로 엮은 식탁과 걸상이 놓여 있었다. 소년이 부엌에서 음식을 날라 오기 시작했다. 수저 세 벌, 소금에 절인 고기 한 쟁반, 두부 한 접시, 술 한 병을 늘어놓고서 이 령 부녀를 상좌에 앉힌 다음 자기는 아래 자리로 비켜앉아 접대를 했다. "사백님, 해장술부터 한 잔 드시지요." 이령이 막 무슨 말인가를 물으려는데, 소년은 술을 따라 놓고선 냉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국수 세 그릇에 반찬을 곁들여 받쳐들고 나왔다. 어리디어린 나이에도 손님을 접대 하는 법도가 여간 은근하고 야무진 게 아니었다. 이령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탄복하고 말았다. 그는 술과 안주를 들면서 물었다. "어린 친구는 이름이 뭣인가? 언제부터 주선생한테서 글을 배웠지?" "제 이름은 조연아(趙燕兒)올시다. 아버님께선 본래 명나라 조정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계셨는 데, 이자성(李自成)의 난리 때에 반란군 손에 돌아가셨습지요. 저는 어머니와 외삼촌을 따라서 이 곳으로 피신해 왔지만, 뜻밖에도 외삼촌마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집안도 가난하기 짝이 없어 저는 남의 집 소를 봐주고, 어머님은 부잣집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나날이 생계를 꾸려왔습니다. 그런데 삼 년 전에 주선생님께서 이 마을로 이사를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충신의 후손임을 어여삐 보시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모자의 생계를 돌봐주시면서 매일같이 저에게 글과 무예를 익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주선생님께서는 슬하에 아들이 없고 경운(輕雲)이란 따님 한 분만 두셨지요. 그런데 지난 해 어디선가 낯선 여도사 한 분이 마을에 들어오셨습니다. 아주 나이가 많은 분이었어요. 그 여도사는 저를 보시더니 제자로 삼겠다고 하셨어요. 그렇지만 저희 집에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 고로 멀리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여도사는 또 경운사매를 눈여겨 보시더니, 스승님께 제자로 달라는 것이었어요. 두 어르신네가 반나절 가량 의논하신 끝에 사매를 데려가시더군요. 말씀인즉 무슨 황산(黃山)이란 데로 가서 도술(道術)을 가르치겠다는 것 입니다. 같이 놀아주던 사매가 없어졌으니 제가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그래서 틈만 나면 스승님 께 사매를 다시 데려오자고 떼를 썼지요. 하지만 스승님은 '아직 때가 이르다'고만 하실 뿐 도무 지 사매를 찾아오실 생각조차 안하시지 뭡니까? 저 혼자서라도 찾아나서려고 했지만 스승님은 또 황산까지 가는 길조차 일러주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제 조금만 더 크면 꼭 사매를 찾아서 데려 오고 말 겁니다. 우리 경운사매는 여기 이분 사저하고 키가 엇비슷해요. 하지만 사저처럼 눈썹 위 에 빨간 사마귀 두 개는 없거든요." 소년이 한창 주워섬기는 말을 이령은 미소를 머금은 채 끝까지 다 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다 시 물었다. "그래, 무공은 어떤 걸 배웠느냐?" "저는 자질이 우둔해서 겨우 육합검법(六合劍法) 한 가지와 표창(標槍)날리기와 받기만 배웠습니 다. 스승님 말씀으로는 사백님께서 무공이 아주 높으시다는데, 며칠 좀 지나서 아무래도 제가 떼 를 써서라도 가르침을 청해야겠습니다." 한창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 판에 주순이 돌아왔다. 소년 조연아는 황망히 손모아 시립하고 영경은 다시 사숙을 뵙는 예로 절을 올렸다. 이령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껄껄 웃었다. "아우, 축하하네. 아주 훌륭한 제자를 두었구먼!" "이 녀석은 머리도 영리하고 재능 또한 뛰어나기는 한데, 입만 벌렸다 하면 지껄이기를 좋아해 서 사람의 진을 뽑아놓는 버릇이 있지요. 아마 제가 없는 동안 저 녀석이 다 불었을 테니까 다시 소개할 것도 없을 겁니다." "자기 내력을 다 얘기해 주더군. 그런데 아우, 자네 나이 근 오십이 다 된 처지에 어쩌자고 딸아 이를 남의 손에 맡겨 기르도록 내보냈는가?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나?" "그건 저 연아녀석이 말씀드리지 않던가요? 딸년이 떠난 것은 정말 하늘이 내리신 복이었습니 다. 지난 해 연아가 늙수구레한 여도사 한 분을 모시고 들어와 내게 안내했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그분이 바로 이름높은 검선(劍仙), 황산의 찬하대사(餐霞大師)라는 걸 알았지요. 그분은 제 딸 경운을 보시더니 천생 선골(仙骨)이라고 칭찬하시면서 데려다가 끝 제자를 삼고 싶다고 요청 하셨습니다. 게다가 이 연아녀석까지 함께 데려갈 생각이셨지만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할 사람이 없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경운만 데리고 갔습니다. 이런 행운은 억지로 구걸해도 얻기 어려운데 만약 형님도 그 처지였다면 안 보내고 배겨내셨겠소?" 이령은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곁에 선 영경의 눈꼬리가 샐쭉해지고 뾰로통해졌다. 오늘날까지 그토록 떼를 쓰고 앙탈하면서 아버지더러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어도 매정하게 거절만 당해서 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차 에, 주숙부의 딸이 그런 천재일우의 행운을 잡았다니 얼마나 셈이 나고 부러운가 말이다. 그녀는 속으로, '내가 경운사매와 입장이 바뀌었더라면.....' 하고 상상해 보면서도 심통이 당장 터질 지경이었다. 주순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서 무슨 심사인지 대뜸 눈치챘다. "현질녀도 그런 행운을 맞고 싶겠구먼?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법이니까, 헛헛! 내가 진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현질녀 역시 천품이 비상해. 근골(筋骨)이나 품성 어느 모로 보아서 아무도 그 전반에 미치지 못할 정도야. 아마 찬하대사님이 보셨더라면 당장 탐을 내고 채뜨려 가 셨을 걸!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라구. 조만간에 또다른 기연(機緣)이 찾아올 테니까. 그땐 아버님 도 어쩌지 못하실 걸?" "여보게 아우, 조카년 데리고 농담 말게나. 그건 그렇고... 우리 아미산으로는 언제 떠날 참인가? 연아도 데리고 가려나?" "자질구레 처리할 일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한 열흘 정도 있으면 다 끝내고 떠날 수 있을 듯하 군요. 연아녀석은 어머니를 두고 저를 따르지 못할 겁니다. 한동안 여기 남아서 봉양해 드려야 할 테니까요." 조연아는 스승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다는 말에 당장 울상을 짓더니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그 꼴을 본 주순이 가볍게 질책했다. "못난 것! 울기는 왜 우느냐? 세상천지 어느 영웅호한 치고 불충불효한 인물은 없었느니라. 내가 떠난다고 영 이별하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몇십 리 길 밖으로 더 떨어지는 게 아니냐.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와 네게 학문과 무예를 계속 전수해 주겠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아침 저녁으로 함께 살지만 않는 거야. 알아듣겠느냐?" "예....." 연아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은 했지만 그래도 눈물이 자꾸 흘렀다. 스승이 한 번 결정을 내 린 바에야 아무리 서운해 해도 그로서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울음을 삼 켰다. 이령이 주순에게 또 물었다. "이 서당의 학동은 연아 하나뿐은 아닐 터인데?" "그저께 아미산에서 돌아오던 길에 선비 한 사람을 만났지요. 이름은 마상(馬湘)이라고 하는데,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이었습니다. 주변머리도 없는지 밥 한 술 얻어먹지 못해 길 바닥에 쓰러진 걸 구해다가 저 건너편 문창각(文昌閣) 안에 처소를 마련해 주고 요기를 시켰지요. 몇 마디 말을 나누어 보았더니 학문도 괜찮고 성품마저 훌륭한 선비더군요. 그래서 기왕 산으로 들어갈 생각을 한 바에야 이 서당을 몽땅 그 사람한테 넘겨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강변 산책을 나갔다가 형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흐흠, 일이 그렇게 되었구먼. 어째서 서당 안에 연아 말고 다른 학동이 하나도 없는가 했더니 만....." "연아녀석도 그리로 보냈습니다. 한데, 형님께서 오시는 바람에 시중꾼이 없길래 잠깐 데려다 모 시도록 한 거지요." 십 년 만에 상봉한 의형제 두 사람은 그동안 지나온 나날을 술회하느라고 시간가는 줄도 몰랐 다. 어느덧 해는 서편에 졌다. 일행이 저녁을 마치자 연아는 스승과과 손님들의 잠자리를 보살펴 놓 고서 돌아갔다. 소녀 영경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엎치락뒤치락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랜 뱃길 여행 끝에 집의 평안한 침상에 눕고 보니 단꿈을 꿀 법도 한데 눈망울만 초롱초롱할 뿐 잠이 오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 낮 진종일 아버지와 숙부의 대화를 들은 것이 자꾸만 새록새록 떠올라서 그런 모양 이었다. 삼경 무렵이 거의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이 감기려다가 곁방에서 누군가 두런두런 주고받는 말소 리를 듣고서 도로 잠이 깨고 말았다. 그것은 주순과 연아의 목소리였다. 조금 있자니 스승 제자 두 사람이 방문을 열고 뜨락으로 내려서는 기척이 들렸다. 어린 소녀는 워낙 호기심이 많았다. 잠도 안 오는 판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영경은 살그머니 일 어나 창문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장검을 꼬나잡고 마주서더니 뜨락 한가운데 어우러져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했다. 연아의 칼은 조금 짧기는 하나 그래도 세 자 가웃 길이는 됨직했다. 처음에 둘이서 칼 춤을 시작했을 때는 제법 한 사람씩 인영(人影)이 보이더니 삽시간에 쾌속도로 변환하면서 갈수 록 그림자조차 사라져 버리고, 오직 보이는 것이라곤 눈덩이 뭉치듯 두 줄기 한광(寒光)만이 뜨락 안을 여기저기 온통 구르는 장면뿐이었다. 영경은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뜨락에는 사람도 칼바람도 없이 하얀 서릿발만 가득 쌓 였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주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아, 좀더 자세히 보거라!" 말이 미처 끌나기도 전에 희부연 달빛 아래 홀연 사람의 그림자가 형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뿐, 흰 그림자는 한 줄기 싸느란 서릿발을 끼고서 전광석화와도 같이 안마당에 우뚝 선 아름드리 계수나무를 향해 쏘아져 나가는 게 아닌가! 철썩! 하늘까지 치솟듯 우람한 계수나무는 남쪽으로 뻗은 줄기 하나를 단번에 잘리고 말았다. 밑둥까 지 부르르 떨린 나무에선 푸른 잎이 비오듯이 우수수 떨어졌다. 영경은 놀라움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한번 눈에 힘을 주고 내다보았다. 뜨락 한 가운데에는 아까처럼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원래의 위치에 그대트 서 있을 따름이었다. 천지 간 에는 오로지 정적만이 감돌았다. 가벼운 밤바람이 불어와 처마 끝 풍경(風磬)을 흔들고 지나갔다. 땡그렁, 땡그렁! 영경은 풍경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휘둥그래진 눈망울로 창틈만 엿보고 있었다. 입을 딱 벌린 채..... 주순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방금 마지막 일 초는 <천운나월(穿雲拿月)>이라고 한다. 육합검법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상승 검초이지. 장차 네가 고수급 상대와 맞닥뜨렸을 때는 아무쪼록 이 검초를 최대한 이용하여 패중 취승(敗中取勝),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야만 한다. 내 너의 효성이 지극한 면을 갸륵하게 여기고 또 천부적으로 총명한 자질을 아껴서 내 평생 절기를 전수해 주는 것이다. 며칠 후면 나는 네 사 백과 함께 산으로 들어간다. 이 검법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벽과 밤중을 이용해 삼가 익히고 또 익혀라. 내일밤 또 가르쳐 주마. 이젠 쉬러 가야겠다." 주순은 당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연아와 주순이 사라진 뒤에도 영경은 텅빈 뜨락을 한참 동안 넋 잃은 채 바라보았다. 이윽고 한 숨을 내리쉬고 나서 잠자리로 파고들었다. 이렇듯 사흘 동안을 영경은 밤마다 일어나서 주순과 연아의 검술 전수 과정을 엿보았다. 그리고 안달이 나서 아버지 이령더러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정신 못 차리게 졸라댔다. 이령은 딸애의 들 볶음에 견디다 못해 자신의 검범을 전수해 줄 생각이 움텄다. 물론 주순의 권유도 작용했을 것이 다. 그는 딸에게 일러주었다. "듣거라. 검술이란 무학(武學)의 원조(元祖)요, 가장 배우기 어려운 무예다. 그러므로 검술을 수 련하려면 첫째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항심(恒心)부터 길러야 하며, 둘째로 기공(氣孔)을 연마하 고 정신을 응집시켜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이 두 과정을 거쳐 기초를 쌓은 다음, 다시 명인(名人)에게 검법을 전수받는 것이다. 너는 어릴 적부터 어리광만 피우고 체 력단련은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그래서 검술을 익히기에 아주 부적합한 상태다. 네가 그 래도 기어이 검술을 배우겠다면, 우리 모두 아미산에 들어간 후 매일 새벽 우선 진기(眞氣)부터 양성하면서 내공력을 기르는 수련 과정을 지도해 주마. 그리고 이삼 년이 지나면 네게 검술을 전 수할 만한 기초가 닦일 것이다. 그 대신 너의 불같은 성미 가지고 아무때나 아비를 번거롭게 졸 라서는 안 된다." 그래도 영경은 불만이 많았다. "아빠, 연아는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데 저만큼 멋진 검법을 배웠잖아요? 아빠 말씀은 아무래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둘러대시는 거예요. 흥, 어렵다고 엄포를 놓아 보셨자 제가 안 넘어갈 걸 요?" 곁에서 주순이 거들며 그녀를 타일렀다. "방금 네 아버님 말씀은 지당한 것이다. 상승검법을 배우려면 그 말씀대로 진기를 연성하지 않 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내가 매일밤 연아에게 검법을 전수하는 걸 엿보고서 아주 쉽게 생각 한 모양이다만, 연아가 그동안 검법을 수련하면서 얼마나 피땀 흘려가며 고초를 겪었는지는 모를 것이다. 나도 네가 밤마다 엿보는 모습을 보고 그 정성이 갸륵해서 아버님한테 경읽듯이 얼마나 설득했는지 아느냐? 그래서 겨우 허락을 얻어냈단다. 아버님의 검술은 이 숙부보다 월등하게 강 하시다. 그리고 말씀하신 바는 추호라도 거짓이 아니다. 현질녀는 절대로 아버님의 뜻을 오해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그러자 이령은 또다시 못박듯 엄숙하게 어린 딸을 타일렀다. "경아, 네년이 제법 총명하다고 자부심이 대단한 모양이지만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검법을 배 우는 길은 정말 어렵고도 어렵다. 정신을 응집시키고 진기를 양성하지 않고선 검술 연마는 어림 도 없는 일이야. 공력이 완성된 후에는 십 장(丈) 안팎에서 모래알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 듣고서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낼 수 있게 된다. 네가 밤마다 엿본 것을 주숙부님이 어찌 알 았겠느냐? 그 역시 응신양기(凝神養氣)의 공력을 연성했기 때문이다. 눈앞의 사물도 제대로 간파 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검술을 배우겠다고 떼를 쓰느냐. 다행히 훔쳐본 놈이 너였으니 망정이 지, 주숙부나 연아가 내공진기를 양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창틈으로 암습이라도 가했 더라면 칼춤 추는 무아지경에서 꼼짝없이 당하지 않았겠느냐? 또 네가 남의 검술을 훔쳐보고도 죽음을 당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한바탕 훈계를 듣고 그녀는 풀이 죽어 바깥으로 나왔다. 두 어르신의 말씀이 천만지당하기는 하 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그머니 연아를 찾아가 고집대로 물었다. "연아, 검술을 배우기 전에 무엇부터 했니?" "아이쿠, 말도 마세요. 그놈의 응신양기로 기초를 닦느라고 얼마나 혼줄이 났는지 아세요?" 그제서야 영경은 마음 속으로 아버지와 주숙부의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깊이 승복했다. 날짜는 훌쩍훌쩍 잘도 지나갔다. 어느 새 아미산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서당에서 글을 배우던 학동들과 마을 사람들 그리고 새로 훈장이 된 마상도 모두 전송을 나왔다. 마을 밖 이십 리 길이나 혼자 뒤따르던 연아는 세 사람에게 몇 차례나 재촉을 받고서야 눈물을 뿌리고 돌아섰다. 찾아온 괴승(怪僧) 舞長劍, 師徒逞身手 上峨嵋, 煙雨鎖空蒙 이령 부녀와 주순 일행은 일로 아미산을 향해 여유자적하게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갈 일도 없 으려니와 경치 또한 볼 만한지라 의형제 두 사람은 산천을 두루두루 살피면서 천천히 걸어나갔 다. 한시바삐 어서 아미산으로 들어가 검술을 익히지 못해 안달이 난 영경이 아무리 재촉해도 어른 들은 쇠귀에 경 읽기라, 그녀는 심술이 뻗칠 대로 뻗쳤다. 일행은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에야 비로소 아미산 아래 당도했다. 산으로 오르는 어구 일대엔 객점(客店)들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미산에 올라 참배하려 는 신도들도 많거니와 유람객 또한 적지 않은 터라서 가게마다 왁자지껄 성황을 이루었다. 일행 셋은 객점 하나를 찾아들어 숙소를 정해 놓고 내일 아침 사들일 물품 목록을 만들었다. 산 속에서 은거하는 동안 오래 쓸 일용품은 여기서 마련해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세 사람은 각각 의논한 대로 생활필수품을 사러 나섰다. 이령은 소금과 쌀, 밀가루, 간장, 초, 술과 고기 등 식료품을 맡았고, 주순은 서적과 지필묵, 솥, 남비, 식기, 물통 따위 취사 도구를 사들이더니 마지막으로 수십 자 길이나 되는 밧줄 한 꾸러미도 사가지고 돌아왔다. "주숙부님, 그 밧줄은 어디 쓰실 거예요?" "좀 있으면 알게 된다. 쓸 데야 아주 많지!" 주순은 영경의 물음에 싱글싱글 웃으면서 소녀의 호기심만 잔뜩 돋구어 놓았다. 식구는 세 사람, 단촐하지만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다 사들이다가 보니 짐보따리가 적지 않았 다. 일행은 짐꾼 몇몇을 고용해 짐을 지우고 객점을 나섰다. 산길 초장은 참배객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부처님이나 태상노군(太上老君) 신전에 향불을 사르고 평생 소원을 빌러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는 세 남녀의 행색을 보고서 모두 으아스런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일행은 짐꾼을 재촉하면서 곧바로 산길을 휘적휘적 올라갔다. 초입의 길은 몇 군데 좁디좁은 자갈밭도 있었지만 그렇게 어려운 걸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 절을 오르고 보니 산길은 점점 가파르고 험악해질 뿐 아니라 경치 또한 기관(奇觀)을 이루기 시 작했다. 흰 구름 조각이 머리 위를 오락가락 떠돌고, 자욱한 안개 속에 일행의 얼굴조차 서로 보이지 않 을 지경이었다. 어린 소녀 영경은 그래도 신이 나는지 연신 맞은편 산골짜기가 떠나가라고, "야호!" 소리를 질러댔다. 메아리가 울려퍼지는 깊은 산 속이라서 그녀는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얼굴 모습은 보이질 않고 그녀의 귀에 주순이 하는 이야기만 들렸다. "우리가 산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는 날씨가 맑았지? 헌데 지금 이토록 구름이 짙은 걸 보니 아 마도 산 아래에선 비가 내리고 있을 게다. 우리는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게 아니다. 구름을 헤치고 가는 거야. 그러니까 아주 조심해야만 한다. 발 한번 헛딛는 날에는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서 뼈 도 못추릴 테니까 말이다." 다시 반 리 남짓 더 오르자 사신암(捨身巖)에 이르렀다. 바위에 우뚝 서서 산 아래쪽을 굽어보았 으나 몽롱한 운해(雲海)만 눈에 가득찰 뿐 집도 인적도 찾을 수 없었다. 산 중턱을 지나치는 길에 잠시 쉬었던 절간조차도 모두 자욱한 구름 속에 잠겼는지 방향마저 가 늠이 되지 않았다. 머리 위에는 짙푸른 창공 가득히 햇살이 퍼져 있었다. 그것은 구름바다의 표면 을 비추고 무지개처럼 찬란한 광채를 반사했다. 그 광경은 과연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 나이의 영경에게 처음 경험하는 대자연의 신비요 조화였다. 그녀는 넋을 잃고서 사방을 두 리번거렸다. 한참 쉬던 짐꾼 하나가 주순에게로 다가왔다. "손님, 여기가 사신암입지요. 예서 다시 더 나아가면 귀견수(鬼見愁)가 됩니다요. 거기는 길도 없 고 우리 패거리들도 가기를 꺼려합니다. 저희는 이쯤해서 도로 내려가야겠는뎁쇼. 산 아래 구름빛 을 보건대 중턱도 못 내려가서 비를 맞기 십상이지만, 오늘 하산을 못하면 내일 하루벌이는 공치 고 맙니다요. 손님, 잘 좀 봐주십쇼." "우리 역시 자네들을 이곳까지만 고용할 생각이었네. 내가 정상에 올라갈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게. 저 벼랑 위에서 밧줄을 내릴 테니까 짐보따리를 하나씩 묶어서 받쳐 주도록 하게나. 짐을 다 끌어올린 다음 내 짐삯에다 술값을 톡톡히 얹어 줌세. 어떤가?" "그렇게 합지요!" 주순은 짐꾼이 선선히 응락하자 이내 몸을 솟구쳐 곁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줄기가 중천에 곧 추뻗은 잣나무였다. 그는 계단을 건너뛰듯 껑충껑충 나뭇가지를 타고 꼭대기까지 오르더니 다시 한 차례 도약을 해서 벼랑에 찰싹 붙었다. 이윽고 슬금슬금 절벽을 타고 올라간 그는 어깨에서 밧줄꾸러미를 끌러가지고 아래쪽으로 드리웠다. 일행은 짐꾼들과 함께 보따리를 하나씩 하나씩 밧줄에 매달아 올려보냈다. 짐이 다 끌어올려지 자, 이령은 다시 내려진 밧줄로 영경의 허리와 양어깨를 단단히 묶었다. 중간쯤 끌려 올라가던 영경은 아찔하게 현기증을 일으켰다. 절벽은 험준하다는 말만으로는 표현 할 수가 없었다. 정상의 외로운 봉우리까지는 암면이 깎아지른 듯 경사(傾斜)도 없고 발디딜 틈도 없었다. 그녀는 혀를 내둘렀다. '주숙부는 이런 델 어떻게 올라가셨을까?' 문득 발치 아래를 굽어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천길 만길 까마득한 지옥의 골짜기에 아련하 게 뒤덮인 운무(雲霧)뿐이었다. 제아무리 당찬 영경이었지만 속이 메슥메슥해지고 현기증이 일어 나 도무지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절벽 꼭대기까지 이르는 동안 아예 두 눈을 찔끈 감고 올 라갔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이령은 짐꾼들에게 술값으로 은자 한 냥을 얹어서 삯을 치른 다음, 주순이 올라간 요령대로 몸을 솟구쳤다. 짐꾼 일행은 홀가분히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이제 절벽 위에는 산더미같이 쌓인 짐보따리와 함께 세 사람만 덩그렇게 남았다. 주순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제가 여러 번 왔으니까 길은 아주 익숙합니다. 먼저 형님과 영경을 동굴에 안내해 드린 다음, 짐을 나르기로 하지요." 이령으로선 전혀 생소한 길인지라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일행은 저마다 힘에 알맞을 만큼 짐을 골라 지고서 출발했다. 앞길을 또 몇 군데 벼랑이 가로막았지만, 주순은 익숙하게 샛길로 접어들어 통과했다. 일행은 삼 리 남짓 행군하고서야 마침내 목적했던 동굴 어귀에 다다랐다. 동굴 문턱 암벽에는 큼지막하게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수석서운(漱石棲雲)> 망국(亡國)의 한을 머금고 구름 속에 깃든다는 뜻이다. 동굴 속은 아늑하고도 넓었다. 안쪽으로 석실 네 칸이 마련되었는데, 그중 세 칸은 각자 침실로 삼고, 가장 빛이 잘 드는 한 칸을 독서와 정양하는 방으로 함께 쓰기로 결정을 보았다. 일단 거처가 정해지자, 주순은 다시 사신암까지 세 차례나 왕복하면서 두고 온 짐을 모조리 날 라왔다. 그럭저럭 짐보따리를 정돈하고 보니 벌써 저녁놀이 하늘 가득히 물들었다. 일행은 준비해 간 마른 음식으로 대충 요기를 마치고 나서 동굴 입구를 바윗돌로 봉쇄해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부터 이령은 딸에게 약속한 대로 수련과정을 약정해 놓고 검술지도에 들어갔다. 그 는 우선 진기토납(眞氣吐納)의 연마와 정신집중력을 키우는 요령부터 가르쳤다. 그것이 내공수련 의 기초였다. 영경은 본래 천부적으로 비상하게 총명한 자질을 지닌 소녀였다. 게다가 감수성 또한 예민해서 지도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시일이 안 지나 벌써 각종의 유연(柔軟)한 무공쯤은 한꺼번에 구사 할 만큼 진전이 빨랐다. 그래도 천성이 조급한 그녀는 날이면 날마다 아버지와 주숙부더러 본격 적인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졸다댔다. 주순 역시 그녀의 수련 진도가 무척이나 빠른 걸 보고서 이쯤 되었으면 검술을 전수해 주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령은 끝내 안 된다고 고집을 세웠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느날 주순은 기회를 잡아 또 한번 영경을 대신해서 설득했다. 이때도 이령은 반대를 했다. "여보게 아우,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릴세. 내 어찌 딸년의 수련지도를 모르겠는가? 천품이 뛰어난 자일수록 그 기초 또한 더욱 튼튼하게 다져야 한다는 사실을 자네도 알지 않는가? 경아의 자질로 보자면 내 결코 이 아이의 스승감이 못 된다네. 그러길래 지금 나는 전심전력으로 아이의 기초를 다지는데 주력하는 것일세. 그러나 일단 기연(機緣)이 닥쳐오면 고명한 스승을 만 날 수 있게 되고, 그때 가서 경아는 큰 그릇으로 성장하게 되네. 만약 지금 경솔하게 내 평생 배 운 바를 모두 전수했다고 치세. 그래도 경아는 일세 무림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네. 게다가 아이 성미가 너무도 격렬해서 좀처럼 남에게 굴복하지 않거든. 세상 천하에 우리보다 더 고강한 영웅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다 우리를 능가하는 적수를 만나게 되는 날, 이 애의 운명은 끝장 이 나지 않겠느냐 말일세. 내 생각은 이렇다네. 이 아이가 무공을 안 배우면 그만이려니와 일단 배워야 한다면 절묘하고도 심오막측한 무공이라야 하네. 비록 고래(古來)의 검선(劍仙)처럼 입신 (入神)의 경지를 초월하기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당대 무적의 검술 경지에는 이르러야 한다 그 말일세. 내 당초 경아를 가르치지 않으려고 했던 까닭도 이 애가 총명하면서 성미가 급한 때문이 고, 또 내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에 가면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일세. 이제 내 뜻을 이해하겠나?" 주순은 그 말을 듣고서 더 이상 깊이 권유할 수가 없었다. 그런다고 성미가 불같은 영경이 아버 지의 말에 승복할 리가 있겠는가? 그녀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이 동굴 주변 일대의 경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왔다. 그런 중에도 불편한 점은 식수 (食水)의 부족이었다. 물이 있는 곳 이라고는 동굴에서 일 리 가량 떨어진 산허리께에 떨어지는 한 줄기 폭포뿐인데, 그 아래의 시냇물을 길어다 쓰는 길밖에 없었다. 요행히도 냇물은 바닥이 온 통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맛이 달았다. 이령과 주순 두 사람은 이틀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며 그곳에서 물을 길어오곤 했다. 그리고 체력 과 근골(筋骨)이 풀어질까 봐서 매일 아침 기상하는 즉시 동굴 앞 공터에서 검술과 권법을 연마 했다. 영경은 두 어른 모두가 그 신나는 무술을 가르쳐 주지 않기로 합의한 이래 늘 함께 일어나 두 사람이 단련하는 모습을 곁에서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아무도 없을 때 남몰래 혼자 흉내내어 수련 하곤 했다. 이 아미산 일대에는 원숭이가 적지 않았다. 어느 날 영경은 원숭이들이 산비탈과 낭떠러지를 날 으듯 민첩하게 치닫는 모습을 보고서 자기도 경신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매일 새벽이면 밧줄 두 뭉치를 나무 꼭대기 가지에 늘어뜨려 잡아 매고 그 밧줄 위에 서 걷는 연습을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주순과 이령을 들볶듯 졸라서 경신술을 본격적으로 익혔다. 그녀는 천생 신력(神力)을 지닌 데다 두 고수의 지도까지 받게 되자, 마침내 제비처럼 날렵한 신 법을 익혔을 뿐 아니라 체력 또한 무섭게 단련이 되었던 것이다. 주순은 한 달 걸러 만큼씩 연아를 지도하러 오아취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녀올 때마다 제 자의 무공 수준이 크게 진전된 것을 보고 흡족한 기색이었다. 그날도 주순은 연아를 보려고 하산하던 도중 사신암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제자녀석이 헐레벌 떡 달려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손에는 편지 한 통이 쥐여 있었다. 깜짝 놀라서 뜯어 보니 그것은 글방 선생 마상이 적어 보낸 사연이었다. <사흘 전, 마을에 웬 중놈 하나가 들어왔소. 생김새도 아주 흉악스럽고 등에는 쇠로 만든 목탁 을 걸머졌는데, 그 무게가 삼사백 근은 족히 되어 보였소. 자기 말로는 오대산(五臺山)의 승려 묘 통(妙通)이라는데, 천하를 유람하면서 주(周)씨 성을 가진 친구를 찾아다닌다 합디다. 마을 안팎 이 집 저 집을 찾아가 보시(布施)를 청하지만 은연중에 주씨를 염탐하는 기색이 역력했소이다. 마을 사람들도 그 자의 생김새는 흉악스러워 뵈지만, 단순히 주는 시주 됫박이나 받고 또 예의 에 어긋난 짓거리도 하지 않는지라 그대로 내버려 두었소. 그 자는 이틀 동안 동구밖 객점에 머 물면서 기척을 살피다가 주씨 성 가진 사람이 없으므로 어제 저녁 떠나려 했으나, 귓결에 어떤 입빠른 영감이 주선생의 얘기를 하는 걸 듣고서 이름과 모습을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습니다. 물 론 영감은 아무 뜻도 없이 사실대로 주선생 얘기를 해주었지요. 그 자는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 펄쩍 뛰면서 기꺼워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야! 내 생전 <운중비학(雲中飛鶴)> 주노삼(周老三)을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그 얼굴은 말도 못할 정도로 일그러졌소이다. 그 자는 영감더러 주선생이 계신 곳을 물었는데, 그때 마침 나는 연아를 데리고 외출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영감은 나한테 물으라고 밀어부쳤습니 다. 그래서 그 자는 날 붙잡고 물을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 자가 주선생을 찾는 의 도가 불량하게 보이길래, '주선생은 성도(成都)로 나가셨소. 거기에 새로 서당이 지어졌다더군요.' 하고 둘러댔습니다. 선생이 아미산에 계시다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지요. 오늘 그 자의 모 습이 마을 안에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선생을 찾아 성도로 떠난 게 분명합니다. 내가 보건 대 그 자는 악의를 품고 선생을 찾아다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연아 편에 통지하는 바이니 적절한 대책을 미리 세우심이 어떨는지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주순은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연아에게 분부했다. "날 따라오너라. 올라가서 다시 얘기하자꾸나." 그는 허둥지둥 연아를 데리고 동굴로 되돌아 왔다. 연아는 이령 부녀에게 문안을 마친 다음 보고 들은 대로 이렇게 스승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엊저녁 연아는 마선생에게서 그 중이 악심을 품고 주순을 찾는다는 말을 듣자, 밤중에 몰래 그 가 묵는 객점으로 잠입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정탐해 보기 위해서였다. 밤도 이슥한 삼경 무렵, 연아는 중이 묵는 객실 지붕 위에 찰싹 엎드려 진주도권렴(珍珠倒捲簾) 의 자세로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방 한가운데는 과연 그 흉악스런 몰골의 화상이 가부좌를 틀 고 앉아 있었다. 얼마쯤 지나자 화상은 벌떡 일어나더니 쇠로 만든 목탁 속에서 말라비틀어진 사람의 손가락 두 개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또 보더니 오른손을 펼쳐 손가락과 맞춰보는 것이었 다. 오른손에는 세 개의 손가락뿐이었다. 나머지 두 자리는 칼로 베어진 듯 텅 비었다. 그는 말라 빠진 손가락을 베어진 자리에 맞추어 놓고 보는 것이었다. 잠시 후 화상은 조그만 보따리를 끄르더니 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 한 개를 또 꺼냈다. 인형의 모습은 바로 주순과 똑같았다. 흰옷 차림에 장검까지 찬 모습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인형의 등복판에서의 날개와 같은 천조각 두 개가 펼쳐진 것이었다. 화상은 주순의 인형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이빨을 으득득! 갈았다. 어린 조연아가 보기에도 원 한이 구천에 사무친 모습이었다. 화상은 인형에다 대고 삿대질까지 해가며 쉴새없이 저주와 악담 을 퍼부었다. 얼마나 지독스런 욕설인지 조연아는 듣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저도 모르게 몸을 도사려 방 안으 로 뛰어들 채비를 갖추었다. 뛰어들어 가서 '어째서 스승한테 저주 악담을 퍼붓는 거냐? 무슨 원 수를 졌는지는 몰다도 비겁하게 남의 등 뒤에다 대고 욕설을 퍼붓는 게 남아대장부가 할 짓거리 냐?'고 따질 셈이었다. 만약 그래도 사과를 않고 뻗대면 반쯤 죽여 놓고야 말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그가 지붕에서 막 뛰어내리려는 찰나, 누구인지 그의 등줄기를 움 켜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앗!'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다음 순간에는 몸뚱이가 어두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귓 전에선 휙, 휙! 바람이 스쳤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평지 바닥에 사뿐히 내려졌다. 연아는 혼비백산,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은 객점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삼 관묘(三官廟) 부근이 아닌가! 그는 겁이 더럭 솟구쳤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기의 철없는 모 험을 막았다고 직감했다. 마음 한구석에선 불현듯 어머니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저녁 무렵 그 화상은 마선생과 함께 외출하던 자기를 눈여겨보았을 터, 자기 집에 또다른 패거 리가 찾아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집으로 달려갔다. 집 안은 조용했다. 어머니의 방에서도 고른 숨소리만 들릴 따름이었다. 어린 마음에 공연한 걱정 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루 식탁 위에 낯선 종이쪽지가 놓인 것을 발견하고 그는 다시 한번 가슴이 철렁 내 려앉았다. 황급히 펼쳐 보니, 달필로 자기를 꾸짖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연아 이놈! 간도 크구나. 불쌍한 어머님 생각도 않고 위험한 짓을 하다니! 내일 아침 일찌감치 아미산으로 냉큼 달려가거라. 가서 훈장님의 편지를 전해야 하느니라. 지체했다가는 큰일이 날 줄 알아라!> 연아는 곰곰 생각했다. 누구 짓인지 모르지만, 쪽지 내용으로 보건대 객점에 있는 화상의 무공이 자기는 상대도 안 될 만큼 고강한 게 분명했다. 지붕 꼭대기에서 자기를 나꿔채 가지고 삼관묘에 다 내려준 것도 편지를 남긴 인물과 같은 사람이리라. 조연아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이튿날 아침 일찍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어머니 역시 놀 라기는 했으나 명문대가 출신의 아내답게 침착했다. 그녀는 아들더러 속히 서당으로 가서 마선생 을 만나라고 일러주었다. 연아는 서당으로 달려갔다. 글방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마선생은 그를 아무도 없는 뒷곁으로 데 려가더니 편지 한 통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 편지를 아미산 주선생님께 전해라. 늦으면 안 된다. 이 돈은 가는 길에 요기하는 데 쓰거라." 조연아는 마선생이 주는 은자 오 전을 받아 편지와 함께 품속에 간직하고 그 길로 마을을 떠났 다. 십 리쯤 달렸을까. 그는 앞길에시 두 사나이가 말다툼을 벌이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은 바로 그 흉악스런 화상이고, 또 하나는 도인차림의 낯선이였다. 조연아는 대경실색, 질겁을 해서 길섶의 수풀로 뛰어들었다. 다행히도 거리가 먼 데다 두 사람이 한창 입씨름을 벌이느라 정신이 팔렸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화상에게 잡힐 뻔했던 것이다. 그는 큰길을 피해 산비탈 샛길로 빠졌다. 그리고 멀찌감치 돌아서 아미산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동안 줄곧 화상의 정체를 상상하면서..... 붉은 호로병 雲中鶴深山話前因 多臂熊截江逢俠士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구나! 연아, 이 녀석, 어린것이 담도 크지, 그런 모험을 하다니!... 내가 뭐 라고 그랬는지 잊었느냐? 강호상에서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은 중과 거지, 그리고 홀몸 으로 길 가는 여자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일렀느냐? 천만다행히도 누구인지 모르 나 너를 지붕에서 끌어낸 분이 있었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네 녀석의 어린 목숨은 지 금쯤 지옥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 게다!" 연아의 말을 듣고 나서 주순은 하얗게 질려 가차없이 제자를 꾸짖었다. 곁에서 편지를 뒤적이던 이령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편지 내용은 암만 봐도 모르겠는 걸? 자네 언제 그 회상과 원한을 맺었던가? 어디 얘기 좀 해 보게나." "형님, 그 중놈이 누군지나 아시오? 바로 십 년 전 강남지방을 흔들던 다비웅(多臂熊) 모태(毛 太), 그놈이라오!" "아니 뭐라고? 정말 그 작자라면 일이 재미적은데....." "애당초 내 잘못이오. 공연스레 한때 객기를 부려서 뿌리까지 뽑아버리지 못하고 화근을 남겨 두었으니. 이제 겨우 형님과 안주할 곳을 찾았는가 했더니만 불쌍한 놈의 신세, 또다시 도망꾼이 되어야 하다니! 세상에 이런 신세가 또 어디 있단 말이오?" 이령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경아가 톡 튀어 나섰다. "주숙부님, 너무 겁먹으신 것 아니세요? 제까짓 녀석이 날고 기어 봤자 한 몸뿐이고 우리는 네 사람이나 되는데, 어째서 달아나야 한단 말이에요." 그건 조연아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두 소년 소녀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주순이 낙심천만하여 도망갈 생각부터 하는 게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조연아는 그래도 스승 앞에서 감히 입을 벌리지 못했지만 왈가닥 소녀는 거리낄 게 없었다. 얼 마나 분한지 얼굴은 새빨개지고 자그만 양가슴마저 씨근벌떡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 주순은 씁쓸하게 웃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인데 현질녀가 알 리 없지. 아마도 아버님조차 기억이 희미해졌을 테니까 말 이야. 내 당시 사건을 자세히 말해 주지. 그래서 젊은 너희들도 견문을 조금이나마 넓히는 게 좋 을 게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나하고 아버님, 그리고 양숙부는 중원 북부 다섯 성(省)에서 무 척 유명한 협객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아버님은 검술도 셋중 최고이셨고 또 갖가지 암기를 능숙하게 쓰셨으므로 강호인들에게서 <통비신원(通臂神猿)>이라고 불리웠지. 양숙부는 박도(朴 刀)를 잘 구사하고 게다가 연자창(鍊子槍)까지 능통하여 <신도(神刀)>, 양달(楊達)이라면 흑도의 인물들은 벌벌 떨었단다. 당시 우리 셋은 골육을 나눈 형제처럼 친하여 무예 연마를 할 때나 어 디 여행을 할 때나 늘 함께 다녔거든....." 맏형격인 이령은 경신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거기서 자극을 받은 주순 역시 자기 나름대로 특별한 경신법을 고안했다. 그는 흰 비단폭으로 세 날개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양 어깨에 비끌어 매었다. 그리고 백 장 높이나 되는 산 위에 올 라 나래를 펼치고 뛰어내렸다. 바람을 잔뜩 안은 나래 덕분에 그는 손가락 한 개 다치지 않고 무 사히 평지에 내려앉을 수가 있었다. 그로부터 여러 차례 수련을 거듭한 끝에 그는 아무리 높고 험한 곳에서도 새처럼 자유로이 기동 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순은 스스로 영웅을 자처하는 몸으로서 의로운 일을 행할 때 의당 공명정대해야 된다는 의미 로 야행(夜行) 시에도 상대방이 어떻게 보든지 간에 흰옷을 입고서 떳떳이 나섰다. 그러기에 사람 들은 그에게 운중비학이란 별호를 붙여 주었던 것이다. 이령과 주순, 양달 세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강호상에서 의로운 일을 행하는 협객이 되었다. 그 리고 무림인들로부터 제로삼영이라고 추앙을 받았다. 주순에게는 또다른 친구가 있었다. 그는 상인(商人)이었다. 주순의 뛰어난 무공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그 친구가 어느 날 섬서성(陝西省)에서 양주(揚州)까 지 여행할 거래가 생기자 경호(警護) 겸 해서 자기와 동행하자고 제의해 왔다. 당시 중원 천지는 장헌충(張獻忠)과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이 연거푸 일어나 온통 전란의 소용돌 이에 빠져 있었으므로 민심도 흉흉하거니와 어느 여행길도 안전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주순은 당연히 승락했다. 주순 일행은 여행 도중 남방 일대에 무서운 강도 하나가 출현해서 날뛴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강도의 이름이 다비웅 모태였었다. 통상 비적(匪賊)이나 산적(山賊), 또는 노상강도를 막론하고 길에서 나그네를 털든가, 혹은 남의 집에 뛰어들어 재물을 강탈할 때, 주인이 항거하지 않거나 원수가 아닌 바에는 절대로 경솔하게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더구나 범행도중 부녀자를 강간하는 따위의 짓은 아주 커다란 금기(禁忌) 로 삼았다. 그런데 이 모태란 놈은 잔혹스럽기 이를 데 없어서 노상강도 짓을 할 때나 남의 집을 털 때나 가리지 않고 재물을 빼앗은 다음에는 현장에 있던 사람은 물론 개나 닭 한 마리 남기지 않고 가 차없이 몰살을 했다. 어쩌다 아름다운 계집이라도 맞닥뜨리는 날이면 먼저 강간을 하고 나서 죽 여버리곤 했다. 주순은 이 소문을 듣고서 단단히 가슴 속에 새겨 두었다. 일행이 남경(南京) 부근 강변에 도착해서 객점을 잡아 투숙한 날이었다. 저녁 준비를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는 주순에게 객점의 심부름꾼이 명함을 한 장 가져왔다. 여행중인 나그네한테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스런 기색으로 받아 펼쳐 보니, 명함에는 성명이 적 힌 대신 곰의 모습을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팔이 여덟 개나 달린 괴상망칙한 형상이었다. 주순은 즉각 모태란 놈이 찾아왔음을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그 자의 별명이 다비웅, '팔이 여덟 달린 곰'이니까. 정작 그 자를 잡지 못해 은근히 기회가 오기만을 고대하던 주순인지라, 이내 신 변 가까이 병기를 감춰 놓고서 그 자를 들어오게 했다. 마음 속으로는 오늘 적잖은 난리가 벌어 지리라 예상하고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이윽고 객실 안으로 모태가 들어왔다. 과연 소문대로 사뭇 흉악스럽게 생긴 자였다. 그럼에도 병 기를 휴대하지 않고 있는 것이 뜻밖이었다. 잠시 후 그 의문은 풀렸다. 그러나 모태가 찾아온 용건이란 것이 주순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 들었다. 모태는 '운중비학' 주순의 명성을 소문으로 듣고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 주순과 의형제를 맺고 싶다는 것이었다. 주순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아무리 결의형제를 맺을 친구가 없어 강간이나 살인을 밥먹듯 저지 르는 강도놈과 의형제가 되다니,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리냐 말이다. 뜻밖에도 모태는 고집스럽게 강요하지 않았다. 더 이상 의형제를 맺자는 말도 하지 않고 피차 겪어온 경험담이나 녹림(綠林) 패거리들의 의기(義氣) 섞인 얘기를 주고받으며 한동안 있더니 제 풀에 지쳤는지 작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모태가 객점을 나설 때 주순은 유심히 그 자의 걸음걸이를 살펴보았다. 과연 무공실력은 대단한 자였다. 지나치게 주색(酒色)에 골아서 그런지 신기(神氣)가 조금 약할 뿐이었다. 주순은 대문까지 전송을 나갔다. 행여나 다른 꿍꿍이속을 차리지나 않는가 해서 경계하기 위해 서였다. 때마침 저녁 바람이 한바탕 불어와 활짝 열린 대문짝을 반 남짓 닫아버렸다. 문턱을 넘어서던 모태가 별다른 뜻도 없이 닫히던 문짝을 슬쩍 밀어 열고 나섰다. 그렇지만 아 무래도 그 몸짓은 주순더러 보라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주순은 모태와 더 이상 어울리기가 귀찮아 모른 척 무시해 버렸다. 모태는 주순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정말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지 일부러 고개를 돌려 점원에게 한마디 건넸다. "자네 집 대문짝이 요렇게 약해 빠져서야 도둑놈 들기 꼭 알맞구먼. 헤헤헤, 조심하지!" 그가 나갈 때 문짝이 삐걱 흔들렸다. 한데, 다음 순간 손바닥이 닿았던 부분에서 톱밥 같은 나뭇 가루가 푸스스 떨어지니 다섯 손가락 자국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모태가 짐짓 수단을 뽐내자 주순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분명 모태는 그의 기를 죽이려고 그런 솜씨를 보인 것이었다. 대문 밖까지 따라나간 주순이 얼핏 고개를 들고 보니, 건너편 집 지 붕 위의 기왓장 몇 개가 바람에 쓸렸는지 방금이라도 떨어질 듯 처마끝머리에서 흔들거렸다. 그는 모태를 향해 한마디 던졌다. "저기 기왓장이 아무래도 위험하군요. 바람 한번 더 불었다간 당장 떨어질 텐데, 누가 만약 지나 가다간 다치기 십상인 걸." 주순은 그러고 나서 혼원기(混元氣)를 약간 섞어 기왓장을 향해 가래침을 한 모금 뱉았다. 철썩! 처마 끝에 걸렸던 기왓장들은 가래침에 얻어맞자 산산조각이 나서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모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주순에게 깊이 감복했다. "제로삼영께선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시외다. 언제 다시 만나뵙더라도 방금 저와 나누신 의 리의 말씀, 아무쪼록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순은 그 말을 건성으로 듣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손님 접대하는 셈치고 허튼수작을 들어준 것뿐인데 양심도 없는 악적의 말을 귀담아 둘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태가 사라진 후, 주순 일행은 양주로 가기 위해 배 한 척을 고용하고 화물을 모두 옮겨 실었 다. 주순의 배가 출항할 무렵, 또 한 척의 거대한 강선(江船)이 뒤따르듯 닻을 올렸다. 그 배에는 양주 어딘가 새로 부임해 가는 관원과 그 가족들이 타고 있었다. 두 척의 배는 거의 맞닿을 듯 시이좋게 나란히 항해했다. 뱃길 첫날 밤 삼경 무렵, 주순은 선실에서 잠이 들었다가 꿈결에 여인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남경 객점에서 모태와 꺼림직한 첫대면을 한 뒤로 주순은 경계심을 풀지 않고 옷을 입은 채 잠 을 잤다. 그리고 언제든지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도록 몸 가까운 데 병기를 놓아 두었다. 그는 즉시 선실 밖으로 기어나와 사방 인기척을 살폈다. 여인의 곡성은 바로 이웃 배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잘못 되었구나!' 그는 의기가 발동했다. 더 생각할 여지도 없이 몸을 날려 이웃 배로 건너갔다. 주갑판 위에는 온통 수부와 선객의 몸뚱아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주순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주 저하다가 울음소리가 들리는 선실 벽에 바짝 붙어가서 창문 틈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순의 추측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음적 모태란 놈이 한손에 번들거리는 칼을 잡고, 또 한손으 로는 여자의 아랫도리를 벗기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모태가 군침을 흘릴 만큼 절색의 미녀였다. 웃옷은 이미 말짱하게 벗겨져 젖가슴을 온통 드러낸 채 거의 혼절한 상태에서 기진맥진하여 가늘게 울음소리만 흘리고 있었다. 그놈은 여자의 속곳마저 벗겨냈다. 이제 일을 저지를 판이었다. 주순은 금표(金標) 한 자루를 꺼 내들었다. 그리고 선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동시에 모태의 등판을 노리고 금표를 날렸다. 모태 또한 실로 대단한 놈이었다. 뒤통수에서 암기가 덮쳐드는 파공성이 들리자 잽싸게 몸을 틀 면서 선뜻 금표를 나꿔채더니 다음 순간 입으로 등불을 훅! 불어 끄며 손에 들린 금표를 문 밖으 로 되날려 보냈다. 뒤미처 모태가 선실을 뛰쳐나왔다. 그는 두 말없이 강도(鋼刀)를 휘두르면서 주순에게 덤벼들었다. 이윽고 갑판 위에선 무시무시한 결투가 벌어졌다. 두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평생토록 익혀온 무예를 다 써가면서 상대방을 공격했으나 좀처럼 승부를 낼 수 없었다. 한창 어우러져 싸우던 주순은 문득 모태의 패거리가 부근 어디에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평수(平手)를 유지하고 있는 판에 적의 증원군이라도 오는 날엔 끝장이다. 수십 합 을 또 교환하면서 주순의 초조감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최후 공격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이윽고 주순은 육합검(六合劍) 중에서도 절초인 <천운나월>을 구사했다. 그의 손에서 전광석화 와도 같은 일검이 모태를 향해 찔러갔다. "앗!" 모태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졌다. 그는 주순이 내찌른 회심의 일격을 막지 못했다. 얼결에 가로내민 강도(鋼刀)는 허공을 후리고, 칼을 잡았던 오른손에서 손가락 두 개가 싹둑 잘려나간 것 이었다. 주순은 재차 장검을 겨누었다. 이런 음탕한 도적놈일랑은 단칼에 찔러 죽여 후환을 없애야 옳다 고 생각했다. 땡그렁! 모태의 손에서 강도가 떨어졌다. 그는 스스로 주순의 적수가 못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기 심 장을 겨눈 칼끝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냅다 소리쳤다 "친구, 대낮에 한 말을 잊었는가? 내 수단으로는 자네 적수가 못 되니 솔직히 진 걸 인정하겠네. 죽이려거든 어서 죽이게!" 그 말을 듣고서 주순은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이래선 안 되는데...' 하면서도 가슴 한귀퉁이에 서는 모태의 빼어난 무공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자의 스승인 <화안금사 (火眼金獅)> 오명(吳明)의 체면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 대낮에 비무장으로 몸소 객점까지 찾아와 의형제를 맺고자 간청하던 호기(豪氣)도 기억에 떠 올랐다. 이제껏 저질러 온 행위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만, 눈앞에서 칼을 내동댕이치고 솔직히 패배를 자인한 놈에게 칼질을 해서야 대장부답지 못한 것이었다. 주순은 겨누었던 장검을 내렸다. 그리고 모태더러 천지신명을 걸어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오늘 이후 마음과 손을 씻고서 다시는 악한 짓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모태는 그 요구대로 순순히 복종했다. 천지신명께 또한 맹세를 마치자 주순은 그를 놓아 보냈다. "...다행히도 그날밤 모태는 배에 침입해서도 인명을 해치지 않았다. 갑판 위에 쓰러진 사람들은 모두 혈도를 찔려서 기절했을 뿐이었거든. 나는 그들을 하나씩 해혈(解穴)시켜 구해낸 다음 곧장 내 배로 건너왔지. 그 후에 들리는 소문으로 모태가 머리를 깎고 오대산으로 들어갔다는 게야. < 금신나한(金身羅漢)> 법원(法元)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승이 되었다길래 아주 잘 되었구나 했지. 그랬더니 웬걸, 그 자는 법원에게서 비검술(飛劍術)을 배워 가지고 십 리 밖 사람의 머리통을 베 어낼 만큼 무서운 검초의 소유자가 되었어. 신검합일(身劍合一)의 상승경지에 이르자 모태는 공개 적으로 강호인들에게 선포했다. 이 주순을 찾아 해묵은 빚을 갚고 수치를 씻겠다는 거지. 그가 내 게 재도전했단 소식을 듣고서 나는 그 비검술에 적수가 못된다고 판단했다. 어쩔 수 없이 딸년 경운을 데리고 이곳 사천 땅으로 피신해 왔지. 내 무공실력도 어지간하다만, 그렇다고 어떻게 검 선(劍仙)의 적전제자(嫡傳弟子)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주순은 기나긴 설명을 마치고서 한숨을 푸우! 내쉬었다. 갑자기 공중에서 학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림은 구름 속을 뚫고 산골짜기에 메아리칠 만큼 맑고도 기운찼다. 이령이나 영경, 조연아들은 주순의 기막힌 이야기를 듣느라고 정신이 팔려 학 울음소리에는 주 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주순은 그 울음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부님, 학 울음소리야 늘상 마을에서 들으신 건데 오늘따라 어째 이러십니까?" 잠시 후 돌아온 주순에게 연아가 물었다. "모르는 소리 말거라. 이 동굴은 아미산에서도 제일 높은 봉우리에 있다. 산중턱께부터 늘 구름 이 짙게 덮여서 여간한 새들은 절대로 날아오를 수가 없는데 들산에 깃드는 학이 올라온단 말이 냐?... 그것 참 이상하다. 금방 뒤쫓아 나갔는 데도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으니 별일이로군!" 주순은 제자를 꾸중하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영경은 날짐승 울음보다도 주숙부의 얘기가 더 흥미있는지 다시 물었다. "주숙부님 말씀은 그렇지만, 그 모태란 놈이 아무려면 그토록이나 지독한 재간을 가졌을라구요? 숙부님께선 피신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전혀 없으셨나요?" "그놈의 검술이 막강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나 끝내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등봉조극(登峰造極) 의 경지에까지 이를 정도로 연마하지는 못했을 거다. 검선들 가운데 그놈보다 더 강한 분은 얼마 든지 있지. 내 딸 경운이 스승으로 모신 황산의 찬하대사만 하더라도 그놈의 실력 가지고는 어림 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 황산까지 얼마나 머냐? 게다가 너무 넓어서 단시일에 그분을 찾아낼지 어떨지 전혀 자신이 없구나." "여보게 아우, 그놈을 피해 다니는 것만이 상책이 아닐세. 달리 해결방법을 생각해 보세나." 이령이 듣다못해 주순을 부추겼다. 주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아니랍니까? 저도 도망꾼 신세 이젠 아주 넌덜머리가 났습니다. 형님, 아무래도 산을 내려 가야겠습니다. 마을로 돌아가서 연아 어머님과 상의하고, 그분 뒷바라지는 마상 선생한테 부탁드 린 다음 연아를 제 곁에 두겠습니다. 그 모태란 놈이 날 찾기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내 발로 그 놈을 찾아가서 결투 날짜를 약속하고 가능한 한 시간을 벌어서 황산으로 찬하대사를 찾아볼 작정 입니다. 제 청이라면 그분도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생각되는군요. 남을 끌어들여 그 자와 싸움을 붙인다는 게 좀 면구스럽긴 합니다만, 지금 상태로선 이것저것 체면차릴 여지가 없군요." "으음, 그 방법도 괜찮겠군. 하지만 나도 따라가겠네." "아닙니다. 그러실 것까진 없습니다. 이번 여행길은 정작 싸우러 가는 게 아니고, 또 인원수가 많으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지도 모릅니다. 매일 수련하느라 애쓰는 따님도 바로 본궤도에 올랐으 니까 지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어린 따님을 혼자 산 속에 버려 두고 가선 안 되지요. 그러니 형님은 아무래도 여기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의논이 결정되었다. 주순은 이령 부녀와 작별하고 연아와 함께 서둘러서 하산했다. 때는 이미 늦가을도 다 저물고 소슬바람이 코끝에 매웁게 느껴 질 만큼 싸늘한 계절이 되었다. 온 산의 낙엽도 다 지고 나무마다 으시시하게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반나절을 걸어서 아미산 아래 도달했다. 가파른 산길을 벗어나 겨우 평지길에 이르렀을 무렵, 두 사람은 길섶 언덕 비탈에 도인 하나가 누워 자는 모습을 발견했다. 홑옷 한 벌만 걸친 채 몹시도 남루한 몰골인데, 허리께에는 술이 담 긴 듯 묵직하고도 큼직한 붉은 호로병이 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흠뻑 마시고 취해서 잠이 든 모 양이었다. 홑겹 옷자락이 써늘한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맨살이 드러나 보이는 게 딱했던지 조연아는 다가 서서 옷깃을 여며 주면서 스승에게 말했다. "사부님, 이 도인 좀 보세요. 가난뱅이 처지에도 저토록이나 술타령만 즐기다니, 정말 술귀신 아 니겠어요? 도인이 모주꾼이라니 딱하기도 하지." "어린 놈이 뭘 안다고 조잘대느냐? 우리 중원의 금수강산이 오랑캐놈들 손에 멸망당하고 난 후, 기개있는 지사들은 원수의 무릎 아래 꿇리지 않으려고 풍진(風塵) 속에 몸을 던진 사람이 그 얼 마나 많은가? 이 도인 어른도 굴레에 얽매이기 싫어 은둔하는 우리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싸늘한 날씨에 취해 쓰러졌다 감기가 들겠구나. 연아야, 나도 반나절을 줄창 걸었더니 시 장기가 도는구나. 우리 이분을 깨워서 함께 음식점으로 가자꾸나. 한 끼나마 푸짐하게 대접하고 은자 몇 냥을 드리기로 하자." 제자가 이의를 내세울 리 없었다. 주순은 도인 곁으로 걸어가서 가볍게 두어 번 흔들었다. "여보, 도인 양반, 이제 그만 일어나시구려?" 그리고 또다시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그 궁상맞은 도인은 얼마나 취했는지 우뢰처럼 코를 골 뿐 좀처럼 깨어날 기색이 아니었 다. 아무리 흔들어도 요지부동이라, 주순은 하는 수 없이 허리를 잡아 일으켰다. 기름때에 찌든 얼굴, 손톱 새에도 새까맣게 때가 끼여 영낙없는 상거지 꼬락서니였다. 하지만 얼 핏 바람결에 소맷자락이 날리면서 드러난 손목은 옥같이 매끄럽고 깔끔했다. 주순은 도인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갈 길도 바쁘려니와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깨 어나지 않는지라, 그는 할 수 없이 보따리를 끌러서 자기가 입던 솜옷 한 벌을 꺼냈다. 지난 봄 제자 연아의 어머니가 바느질해 선물한 것으로써 아직 새옷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솜옷을 도인의 잔등에 덮어 준 다음, 혹시나 해서 한두 번 흔들어 보았다. 도인이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 걸 보고서 주순은 가벼운 탄식을 남긴 채 연아를 데리고 일어섰다. 그들은 부근 객점 마을로 찾아들어 대충 요기를 마친 다음 서둘러서 길을 떠났다. 너른 관도(官道)를 걸으면서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자 스승과 제자는 육지비행(陸地飛行)의 신법 으로 오아취 마을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두 시진 남짓 지나자 일행은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다다를 수가 있었다. 해는 이미 뉘엿뉘엿 서산 마루턱에 걸렸다. 이 시각에 연아의 집으로 들이닥치면, 공연스레 그 현숙한 부인에게만 수고를 끼칠 뿐이다. 주순 은 차라리 근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가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찾아든 음식점은 새로 개업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었다. <지미루(知味樓)>라는 옥 호(屋號)에도 걸맞게 요리 솜씨가 일품인 데다 술 손님도 많아 여간 흥청거리는 게 아니었다. 어서 바삐 마을로 갈 생각밖에 없는지라, 주순은 느긋하게 술맛 안주 맛이나 즐길 여가도 없었 다. 곁 탁자에서 누가 흥청거리든 말든 그는 개의치 않고 점원이 안내하는 대로 깔끔한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음식을 주문했다. "사부님, 저것 좀 보세요!" 연아가 문득 무엇을 보았는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놀란 목소리로 스승을 재촉했다. 웬 일인가 싶어 제자가 손가락질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아주 눈에 익은 물건 하나가 보였다. 선학(仙鶴)과 구렁이 見首神龍, 醉道人揮金縱飮 離巢孤雛, 趙燕兒別母從師 주순과 제자 연아의 눈길을 끈 것은 음식점 계산대 옆 벽에 걸려 있는 한 개의 술병이었다. 붉 은 칠을 곱게 먹인 그 큼직한 호로병, 아미산 아래 산비탈에 술취해 누워 자던 도인의 몸 곁에 나뒹굴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스승에게 그 도인의 호로병인 것 같다고 귀엣말을 나눴다. 주순은 음식점 안팎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호로병의 임자는 아무 데도 없었다. "세상에 어디 저런 호로병이 한둘만 있을 거냐? 우연히 같은 날 두 개를 보았을 뿐이겠지. 연아 녀석, 공연한 걸 가지고 호들갑이로구나....." 주순은 어린 제자를 향해 눈을 한번 흘겨 보이고 마침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연아도 스승의 눈총을 받고서 풀이 죽었다. 공손히 주전자를 들어 스승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한참을 먹고 마시던 주순은 아무래도 그 호로병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지, 몸을 돌이켜 지미루 주인을 불렀다. "여보 주인장, 저 계산대 윗벽에 걸린 호로병 말이오. 술 담아 가지고 다니기 안성맞춤인데, 저 런 걸 어디서 샀소?" "손님, 저 호로병은 우리집 물건이 아닙니다요. 한 닷새 전쯤 되었는가, 웬 거렁뱅이 도인이 우 리 집엘 왔는데 그때 등에 메고 왔던 겁지요. 몰골은 말씀아니게 꾀죄죄하지만, 주량이 얼마나 센 지 매일같이 왔다 하면 단번에 배갈 열 근은 마십지요. 취할 때까지 퍼마셔 대고, 취했다 하면 잠 이 들고 또 깨어나기가 무섭게 술타령이더군요. 처음에 왔을 땐 그 꼬락서니를 봐서 공짜술이나 마시는 게 아닌가 의심했는데, 실컷 먹고 마신 다음엔 푼돈 한 닢 깎지 않고 계산을 깨끗이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잔뜩 두들겨 팰 생각으로 벼르고 있다가 그만두었습죠. 얼큰하니 취해 돌아 갈 때는 또 저 호로병에 하나 가득 술을 담아 달래 가지고 어깨에 메고 갑지요. 매일같이 열 근 이상 배갈을 마셔댔으니까 오늘까지 치면 줄잡아도 배갈 오륙십 근 정도는 족히 마셨거든요. 그 러고 보니 우리한테 이런 좋은 단골손님이 또 어디 있습니까요? 들어섰다 하면 퍼마시고,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잠만 잘 뿐, 그저 '술 떨어졌다, 더 가져오너라!' 소리밖엔 아무 소리도 없으니, 이토록 얌전한 술꾼을 만나기가 어디가 쉽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은 신주 모시듯 그분을 위해 드릴밖에요." 주순과 제자는 수저를 손에 든 채 먹기도 잊고 듣기만 했다. 지미루 주인은 입심도 좋게 계속 지껄였다. "... 오늘 아침에도 그 도사는 우리집을 찾아와 해장술을 흠뻑 젖도록 마시고 나서 언제나와 같 이 호로병을 가득 채워 가지고 나갔습죠. 헌데 한 두세 시진쯤 지나서 또 들렀는데, 어디서 얻었 는지는 모르지만 솜옷 한 벌을 걸치고 왔더군요. 그건 속가인들이나 입는 옷이었습죠. 이번에도 한 시진 남짓 앉아서 퍼마시더니, 떠날 무렵 저 호로병을 불쑥 내밀고선 '오늘 술값은 안 가져왔 으니까 이걸 맡아 두게' 하는 게 아닙니까요? 그리고 또 '한 두어 시진쯤 있으면 누군가 찾아와 서 대신 외상 술값을 갚아 줄 거네' 하더군요....." 솜옷 얘기가 나왔을 때 스승과 제자는 무언중에 짚이는 것이 있어 마주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 렴풋이나마 호로병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듯했던 것이다. 주인은 손님들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떠벌였다. "... 그 도인 영감이 닷새 동안 마신 술은 오륙십 근도 넘습지요. 우리집에서 한 달 동안 팔아도 남을 만큼 엄청난 매상을 올려 준 셈인데, 그까짓 열 근 술이야 뭐 대단하다고 손님 물건을 잡는 단 말입니까? 그래서 그냥 외상장부에다 달아만 놓자고 했더니 그 도인은 끝끝내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자기 평생토록 남의 물건을 공짜로 받아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오늘 그만 깜빡 잊고 돈 을 가져오지 않았구먼. 내 다음에 술값을 보낼 테니까, 이 호로병을 증표로 삼아 계산해 받게나' 하더니만 휑하니 가버렸습지요. 그래서 억지로 이것을 떠맡아 잠시 보관하게 되었습죠. 손님께서 이 호로병이 마음에 드신 모양인데, 저희집 물건도 아니고 값도 모르니 어쩔 도리가 없군요. 이런 걸 어디서 파는지조차 모릅지요." 주인의 말이 끝났다. 주순은 잠자코 듣기만 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주인더러 일렀다. "그 도인의 술값이 얼만가? 좀 있다 한꺼번에 계산해 줄 테니까 내 음식값에다 옮겨 놓게." 그러자 주인은 불쑥 의심이 들었다. '이 손님, 아무래도 호로병이 마음에 든 모양이로군. 그러니까 도인 외상값을 갚아 주고 대신 가 져가려는 게야. 흠흠, 그렇게는 안 되지!' "안 팝니다요. 그 도인 영감님은 우리 가게 단골 손님인뎁쇼. 그분이 외상 술값 몇 푼을 떼어먹 을 분도 아니니까 손님께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요." 그러자 조연아가 무슨 말인가 반박하려는 걸 주순이 연신 눈짓을 보내 말렸다. 조연아는 스승의 말뜻을 알아챘다. "주인장, 공연한 의심일랑 말게. 그 도인 어른은 바로 우리 친척일세. 내가 그 외상값을 갚아 주 기로 했네. 그리고 호로병은 그대로 자네 집에 보관해 두게. 본주인이 아니면 절대로 내주어선 안 되네. 알겠나?" 말을 듣고 보니 술집주인은 자기가 오해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인은 본래 거렁뱅이 도인이 외상술을 먹었을 때부터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하고 의아스러워했다. 가뜩이나 손님 시중에 바쁜 판에, 귀찮다는 데도 억지로 호로병 한 개를 맡겨 놓고 가는 것이 자못 수상쩍었던 것이다. 딴 사람을 시켜 호로병을 빼돌린 다음 도인 본인이 나타나서 손을 내밀고 트집거리 삼아 야료를 부리려는 게 아닌가 했다. 그래서 주순이 도사의 외상술 값을 대신 갚아 주겠다는 것도 거절했다. 그런데 이제 말을 듣고 보니 술값은 술값대로 갚고 호로병도 건드리지 않겠단다. 그렇다면야 불 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인지라 얼른 사과를 하고 도인의 외상값을 두 손님 음식값에 얹었다. 도합 은자 두냥 일전 오푼. 주순은 요구하는 대로 계산을 마치고 훌쩍 음식점을 나섰다. 집으로 가는 도중 연아가 그 도인의 내력을 물었지만 주순은 갈 길만 재촉할 뿐 대꾸도 하지 않 았다. 얼마 안 지나 두 사람은 오아취 마을에 도착했다. 제자의 집 앞에 이르니, 조연아의 어머니 조씨 (趙氏)부인이 사립문까지 마중 나와 그들이 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 조연아는 스승 곁을 떠나 후닥닥 어머니한테 달려가더니만 그 품속에 덥석 뛰어들어 안겼다. 다 정한 모자의 상봉 장면을 보면서 주순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십시오." 조씨부인은 정중하게 주순을 향해 인사하고 아들과 함께 공손히 안으로 모셔들였다. 방 세 칸밖 에 없는 토담집이기는 하나 정갈하기 짝이 없었다. 아담한 쪽마루에는 베틀 한 대가 놓여 있고 짜다 만 베폭이 걸려 있었다. 방 안을 둘러보던 주순은 흠칫 놀랐다. 옷걸이에 낯익은 솜옷 한 벌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 었기 때문이다. 그 아래 방바닥에는 또 하나 큼직한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은자꾸러미라도 들었 는지 사뭇 묵직해 보였다. 조연아도 스승의 눈길을 따라 그 솜옷을 보았다. "아, 사부님! 저건 사부님께서 거렁뱅이 도인 영감에게 주신 솜옷 아닙니까? 헌데 저게 어떻게 우리 집에 와 있죠?" 그러자 조씨부인이 대신 대답했다. "방금 어떤 도인 한 분이 다녀갔단다. 주선생님과 네가 오는 도중 일이 좀 생겨서 늦는다고 하 더구나. 또 주선생님이 가져오시는 돈꾸러미가 너무 거추장스러워 부탁을 받고 먼저 받아 가지고 왔다는데, 내 들여놓기는 했다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구나. 주선생처럼 뛰어난 무공을 지니신 분 이 아무렴 저 정도 보따리를 무거워하실 리가 있느냐 말이다. 너 역시 송아지 정도는 잡을 만한 힘이 있는 판인데 말이다. 저 솜옷은 이 에미 손수 지어서 주선생님께 드린 것이다. 한눈에 보아 도 내 바느질 자국을 알 만했다. 저걸 도인이 들이대니, 내 그 말을 안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 서 돈꾸러미를 받아 놓은 거란다. 도인 영감이 가면서 '좀 있으면 선생이 오실 테니까 문 밖에 나가 기다리시오' 하길래 나가봤더니 과연 그 말대로 너하고 선생님이 오시더구나." 잠자코 조씨부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주순은 돈보따리를 풀었다. 세 사람의 눈앞에 어림잡아 삼백여 냥이나 되어 보이는 은자가 번쩍번쩍 드러났다. 은자꾸러미 틈새에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취도인(醉道人)은 절부(節婦), 효자(孝子)에게 이 돈을 선사하노라.> 짧은 문장이지만 용이 꿈틀거리듯 필체가 웅혼하고 헌걸찼다. 주순은 제자 조연아를 돌아보았다. "연아야, 어떠냐? 세상 천지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숱하게 많다고 했지? 생각 좀 해보렴. 너 나 나나 걸음걸이가 느린 편은 아니라고 자신만만하게 육지비행술로 달려왔는데, 이 도인 어른은 우리를 앞질러서 그 짧은 시간에 어린애 장난치듯 이백여 리 길을 왕복한 것이다. 이분의 무공은 우리보다 열 배 이상이나 높다. 천만다행으로 아미산 아래서 뵈었을 때 우리가 공경스런 태도를 보인 게 얼마나 잘한 일이냐?" 곁에서 듣던 조씨부인이 도중에 무슨 변고라도 생겼는가 걱정되는지 그 연유를 물었다. 주순은 아미산을 내려오다 술취해 잠든 도인을 만난 일, 그리고 도중 지미루란 술집에서 외상값 을 갚아 주었던 일, 또 여기까지 연아와 내기하듯 육지비행 경신술로 달려온 일들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조부인, 이 돈은 취도인이란 분께서 마음먹고 선사한 것이니 거두어 쓰셔도 되겠습니다." 현숙한 조씨부인은 가볍게 탄식을 했다. "저희 가난뱅이 모자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벌써 굶어죽거나 얼어죽었을 것입니다. 이 어린 혈육도 제딴에는 총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고명하신 스승님이 없었다면 그 또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겠지요. 주선생님, 제 걱정일랑 마시고 이 애를 데리고 떠나십시오. 세상 경험도 시켜 주시고 선생님이 지니신 학문과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 늙은이의 소원입니다. 제게 남은 일 점혈육(一點血肉)이 잘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이해를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주순은 깊이 사의를 표했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는 서당으로 마상을 찾아가 조씨부인의 뒷일을 부탁했다. 이튿날 아침 주순과 조연아는 성도(成都)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 그들은 일부러 길을 돌아 지미루 술집에 들러 취도인이라는 풍진기인(風塵奇人)의 행 방을 찾았다. 주순에게는 꼭 인연을 맺고 싶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술집에는 도인도 호로병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어제 설명을 해주던 주인을 찾아서 취도 인이 언제 다녀갔는가 물었다. 주인이 대답했다. "어제 손님이 떠나신 직후 그 도인이 왔습지요. 헌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술도 안 마 시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보배단지같은 호로병만 달래 가지고 나가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별일도 다 있구나 싶어서 등 뒤에다 대고 '손님, 어떤 분이 외상 술값을 다 갚아 놓았습니다!'라고 소리 쳤더니, '그건 나도 아네'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내일 그 친구가 들르거들랑 우리 성도에서 만나잔다고 전해 주게나!' 하더니만 뒤도 안 돌아보고 휑하니 가버렸습죠. 문 밖까지 쫓아나가 봤 지만 어느 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죠." "어디서 사는 분인지도 모르나?" "모릅지요." 주순은 적잖이 실망했다. 기껏 길을 돌아서 찾아왔는데 허탕만 친 셈이었다. '성도에서 만나잔다고? 그럼 그 도사도 성도에 볼일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성도로 가는 걸 알고서 일부러 앞질러 간 게 아닐까? 허면 내가 성도에 가는 목적까지도.....?' 그는 지미루를 나섰다. 가슴 속 가득 의문을 품은 채 연아를 데리고 곧장 성도를 향해 길을 떠 났다. 며칠 길 만에 그들은 삼차구(三叉口)라는 곳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가면 성도까지 곧바 로 뚫린 대로가 있고, 그냥 서쪽으로 향해도 작은 산길이기는 하지만 성도로 통하는 지름길이 있 었다. 큰길보다 근 이백여 리나 가깝지만, 험산준령을 숱하게 넘어야 하므로 여간 담이 큰 나그네 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낼 여로였다. 주순은 언젠가 전에 이 지름길에 절경이 많다는 소문을 들은 데다 하루바삐 성도에 도착할 욕심 으로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길 따라 반나절쯤 나아갔더니 비탈이 점차 심해지기 시작했다. 해묵은 나무숲이 하늘을 온통 가리고 어디를 둘러봐도 기암 괴석들이 여기저기 눈에 가득차게 즐비했다. 산 이름은 운령산(雲 靈山), 스승과 어린 제자는 눈이 시원해질 정도로 장관을 이룬 승경(勝景)에 도취한 채 피로한 줄 도 몰랐다. 한참을 가다가 목이 말라 시냇물을 찾아 계곡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시냇가에 다리를 쉬고 한동 안 머물렀다. 풀섶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니 어느 새 태양은 서편 산봉우리에 걸쳐져 있었다. "얘야, 어서 떠나자. 이러다간 오늘밤 이슬맞고 노숙하기 십상이겠다." 조연아는 스승의 재촉을 받고 물통에 맑은 시냇물을 가득 채웠다. 그들이 서둘러 다시 길에 오 르려는 참에 문득 '꺼억꺼억!' 학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 참, 학의 울음도 인연이로군. 지난번 아미산에서 내려오던 날에도 학이 우는 소릴 들었는 데....."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주순은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새 파란 쪽빛 하늘에는 나는 새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부님, 저기 있어요!" 문득 조연아가 소리쳤다. 얼른 그쪽을 바라보니 길섶 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무지무지하게 큰 선학(仙鶴) 한 마리가 우뚝 서 있었다. 핏빛처럼 붉은 벼슬을 머리에 얹은 채 잡털 한 올 섞이지 않고 온통 눈처럼 터럭이 눈부시게 빛났다. 정말 신선의 새라더니 속세 인간들이 여간해서 보기드문 희한한 모습이었다. 금빛 광채가 감도 는 두 눈알, 쇠처럼 단단한 부리로 나래 밑 터럭을 쪼아 고르는데 바위를 움켜쥔 발톱은 갈고리 모양 억세 보였다. 몸통의 크기도 여덟아홉 자는 좋이 되어 보이는 게 도무지 이 세상 동물은 아닌 듯싶어, 그 모 습을 올려다보던 주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허어, 저토록 커다란 선학은 정말 난생 처음 보는구먼!"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그 커다란 바위 곁 풀숲이 푸스스 푸스스! 흔들리는 소리가 나더니 엄청 나게 큰 청색 구렁이 한 마리가 기어나왔다. 어림잡아 일고여덟 자도 더 되어 보이는 놈이었다. 바위 위에 우뚝선 학이 구렁이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훌쩍 내려 덮치면서 쇠부리로 쪼았다. 그러 나 구렁이란 놈도 재빠르기 짝이 없었다. 번개처럼 쪼아대는 부리를 날쌔게 피하더니 어느 새 바 위틈 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버렸다. 눈앞에서 먹이를 놓친 학은 강철처럼 단단한 부리로 바위를 쪼기 시작했다. 얼마나 무섭게 쪼아 대는지, 보라! 부리가 찍어대는 자리에서 돌조각이 사방으로 흩날고 대낮처럼 불똥이 어지럽게 튀 지 않는가! 그래도 학은 성이 안 차는지 이번에는 강철처럼 억센 발톱까지 써서 바위를 쪼아대고 할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구렁이가 자취를 감춘 바위틈은 둘레 여섯 자 크기의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푸른 몸뚱이의 구렁이가 대가리를 곧추세우고 쏜살같이 기어나왔다. 아무래도 굴 속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구렁이가 되돌아 나오기가 무섭게 학의 부리는 가차없이 그 몸통을 쪼아버렸다. 휘이! 괴성을 토해내면서 구렁이는 두루루 말리더니, 그 기다란 몸뚱이로 학의 두 다리를 단번에 휘감 아 버렸다. 구렁이가 억센 힘으로 다리를 죄거나 말거나 학은 날개 한 번 푸득이지 않고 침착하 게 구렁이의 대가리를 덥석 물어 한 입에 끊어버렸다. 실로 무서운 힘이었다. 다음 찰나, 학은 부리를 자기 두 다리 사이로 집어넣더니 칭칭 휘감고 있는 구렁이의 몸뚱이를 당장에 칠팔십 토막으로 잘라버렸다. 잠시 후 구렁이의 몸뚱아리를 깡그리 뱃속에 집어삼킨 선학은 전신의 깃털을 부르르 떨쳐 가다 듬더니 꺼억! 긴 울음을 한 번 토해 내고선 창공으로 솟구쳐 날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산 등성이를 넘어 사라졌다. "얘야, 어서 떠나자!" 기이한 짐승들의 목숨을 건 혈투에 넋이 빠진 제자를 주순이 재촉했다. 어느덧 저녁놀도 서산 너머에 희뿌옇게 잔영만 남았고, 계곡에는 땅거미가 깔렸다. 주순은 어린 제자를 데리고 갈 길을 재촉했다. 삼 리 남짓 걸었을까. 날은 아주 저물어 사방천지 가 어둠으로 뒤덮혀서 길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오늘밤엔 영낙없이 풍찬노숙을 하나 보다.' 은근히 걱정하던 참인데, 이 깊은 산중에서 주순은 뜻밖에도 인가 한 채를 발견했다. 천만다행이 다 싶어 달려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한참 동안이나 두드려서야 겨우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은 열지도 않고 남자의 묻는 소리 만 들렸다. "어디서 오는 길손이시오!" "오아취 마을에서 오는 길이외다. 날이 저물어 그러니 하룻밤만 묵고 가게 해주십시오." "그럴 수 없소. 내 목숨도 지금 경각에 달려 있다오.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니까 어서 떠나도록 하시오! 오늘밤 묵으실 데를 찾는 모양인데, 서남쪽 웃길로 한 오 리만 더 가시면 암자가 하나 있 을 거요. 백운대사(白雲大師)란 여승이 살고 계시니까 그분한테 부탁을 드리면 하루 묵을 수도 있 고 또 위험도 모면할 게요." 이것으로 끝이었다. 아무리 다시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끝내 응답이 없었다. 부시럭거리던 인 기척마저도 끊어졌다. 주순은 슬그머니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제자를 대문 곁에 세워놓고 단단히 일렀다. "내 들어갔다 나올 테니 그때까지 예서 꼼짝 말고 있거라.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 알았느냐?" "예!" 주순은 몸을 솟구쳐 담을 넘었다. 때마침 밝은 달이 둥실 높이 떠서 뜨락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온통 정적에 잠긴 뜨락은 그림처럼 맑고 깨끗하기만 할 뿐 어느 구석에도 불길한 기척이 나 살벌한 기운이 없었다.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것일까?' 주순은 의아스런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대청마루를 자세히 주목했다. 마루 한가운데 등나무로 엮은 침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주순이 마루로 올라서자 침상 위의 사나이가 냅다 악을 썼다. "당신,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는 거요! 어서 멀찌감치 달아나시오! 내게 가까이 왔다간 큰일나오. 어서 해를 입기 전에 가란 말이오!" 주순은 그래도 가까이 다가섰다. "세상 천지 모든 사람은 친구라오. 무슨 괴로운 일이 있는지, 여기가 어째서 위험한 곳인지 말씀 해 주시구려. 내 힘 닿는 한 도와드리리다. 구태여 이렇게 앉아서 죽기만 기다릴 필요가 어디 있 단 말이오?" "아니, 그렇게 말해도 가지 못하겠소? 나는 이미 요물에게 중독을 당했단 말이오. 내 몸 세 자 가까이만 와도 그 독이 옮을 거외다. 나는 벌써 사흘째나 몸부림치면서 살아보려고 했지만 지금 은 배가 고프고 지쳐서 꼼짝도 못하겠소. 혹시 말린 음식 같은 거 지니고 계시거든 좀 나눠 주시 겠소? 그리고 어서 달아나시구려. 그놈의 요물이 찾아드는 날엔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신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게요. 가능한 한 빨리 백운대사를 찾아가시오. 그럼 혹시라도 나를 도와 주실지 모르겠소. 내 이 형편을 그분께 보신 대로 말씀 전해 주시면 고맙겠구려." 숨을 헐떡거리면서 여기까지 말하더니 사나이는 기력이 쇠진했는지 말을 더 잇지도 못했다. 주순은 그 사나이의 손등에 일곱 개의 붉은 반점이 찍힌 것을 보았다. 사마귀처럼 도드라진 그 점은 아주 선명한 핏빛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사나이의 말마따나 여기가 상서롭지 못한 곳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품속에 갈무리했던 건량을 꺼내 사나이에게 던져 준 다음, 즉시 뜨락으로 내려와 담장 밖을 뛰어넘었다. 대문 앞으로 돌아와 보니 조연아가 보이질 않았다. "연아야, 연아야!" 소스라치게 놀라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돌연지간에 제자는 유령처럼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운령산의 요물 鶴舞空山, 俠客驚蛇怪 雲迷蜀嶺,孝子拜仙師 가뜩이나 사나이한테서 불길한 말을 듣고 나온 터라, 주순은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랐다. 처음엔 그래도 요 부근 어딘가 쭈그려 앉아 급한 용무를 치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으나, 사 방을 둘러 고함치는 소리에 응답조차 없으니 그게 아닌 것은 분명했다. "연아야, 연아야! 어디 있느냐?" 고함쳐 부르는 소리는 허망하게 산골짜기를 울릴 따름이었다. 그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등줄기에서 후줄근하도록 식은땀이 흘렀다. 주변을 찾아나설까도 생각 해 보았으나, 자기 없는 사이에 또 그 녀석이 돌아올지도 몰라 선뜻 발걸음을 뗄 수도 없었다. 어쩔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는 참인데 집 안에서 또 그 사나이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 아직도 안 달아났소?" "아니오. 방금 나왔더니 나하고 같이 온 동행이 사라졌소.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구려. 옷 이랑 짐보따리도 여기 그대로 있는데... 설마 당신이 말한 그 요괴놈한테 잡혀 먹힌 것이나 아닌 지....." "그 요물은 음기(陰氣)에 속하는 놈이라서 한밤중 삼경 무렵이 안 되면 나타나지 않소. 당신 동 료가 이 시각에 자취없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요괴한테 해를 당한 건 아닐 거외다. 내가 장담하 겠소. 어서 암자로 달려가 백운대사님께 말씀드리시오. 아마 좋은 점괘를 뽑아 주리다. 그럼 동료 의 행방도 알 수가 있소. 시각이 늦어 가오. 어서 달려가시오! 공연히 예서 어물거리다간 당신도, 나도, 그리고 동료분 모두 죽음을 당할 거요!" 주순은 백방으로 생각해 보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사나이의 말대로 따르기로 작정했 다. 서남쪽 산길로 접어들어 한 오 리 남짓 달렸을까? 등 뒤에서 난데없는 바람이 휘리리, 휘리리! 불더니만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콱 쑤셨다. '이거, 재미가 적구나!' 주순은 즉각 두 다리에 힘을 모아 죽어라고 달리기 시작했다. 쏜살같이 달리는 데도 비린내를 풍기는 바람은 등 뒤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암자를 발견했다. 겨우 암자 문턱에 다다르자, 뒤쫓던 바람소리가 홀연히 멎었다. 흘낏 돌 아다 보니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낀 속에 등잔 만큼이나 큼직한 빛덩어리 두 개가 은은히 드러 나 보였다. 달빛 아래 그 등잔불은 더 이상 접근해 오지 않고 멈춰 있었다. 그는 불빛이 맹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인광(燐光) 이라고 단정했다. 저도 모르게 전신에서 식은땀이 솟아 주르르 흘 러내렸다. 암자는 그리 크지도 않은 건물이지만 자못 그윽하고도 조용했다. 문전에 우뚝선 버드나무 두 그 루가 달빛을 받아 축 늘어진 그림자를 땅에 비추고 있었다. 암자 안에서는 차분하게 독경(讀經)하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암자의 주인이 밤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순은 등 뒤의 괴물을 무시하고 돌아서 가볍게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계십니까?" 그러자 암자 안에서 앳된 소녀의 음성이 응답했다. "이곳은 여승들만 사는 곳입니다. 묵으실 곳을 찾으시려거든 다른 데로나 가보십시오." "도중에 환란을 당하고 백운대사님을 만나뵈오려 일부러 왔습니다." 주순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문부터 활짝 열렸다. 이내 묘령의 여승 하나가 나오더니 잠시 주순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나이는 십삼사 세쯤 되어 보이는데 사뭇 곱고도 빼어난 미모의 아 가씨였다. "대사님께선 지금 야간 독경 중이시니 잠시만 불당 안에 드셔서 기다리십시오" 주순은 시키는 대로 그녀를 따라 불당에 들어가서 좌정했다. 여승은 차 한 잔에 소병(素餠) 몇 조각을 얹어서 쟁반째로 들여다가 요기하라고 내려놓더니 물러가서는 다시 나타날 줄 몰랐다. 한참을 기다려도 기척이 없어 조바심을 끓이던 참이었는데, 난데없이 불당 앞들에서 무슨 인영 이 번득 움직이는가 싶더니 새가 날듯 후원 쪽으로 휙 날아가는 것이었다. 조바심에다 호기심까 지 겹치자 주순은 더 이상 무료하게 앉아 기다리지 못하고 불당을 나와서 살그머니 후원으로 발 걸음 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창문 가까이 근접했을 때, 그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 리였다. "둘째 사형, 아닌 밤중에 여기까지 어인 일로 오셨소?" 여인의 물음에 남자가 대답했다. "내 마침 운령산을 지나가는데 중턱 계곡에서 요사스런 기운이 충천하더구먼. 웬 일인가 싶어 내려가서 살펴봤더니만 길가 어떤 집 처마 밑에 어린 동자녀석이 서 있더군. 한데 요물이 그 녀 석 부근 십 장 거리도 안 되는 곳까지 다가왔더란 말씀이야. 가만 보니까 그 동자녀석 근골(筋骨) 이 아주 웅후하고 비범하길래 차마 요물의 독수에 희생당하게 놔둘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우선 그놈을 안아다가 멀찌감치 안전한 곳에 옮겨다 놓고서 장검을 휘둘러 요물을 쫓아 버렸거든. 그 리고 나서 동자녀석에게 내력을 물었더니만 제로삼영 가운데 둘째인 주순의 제자라는 거야." 창문 곁에서 숨어 엿듣던 주순은 놀랍고도 기뻤다. 이제껏 속을 끓이다 비도로 제자놈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대절명의 위기를 벗어나 안전한 곳에 구출되어 있다니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실로 천만다행이 아닌가! 남자의 설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 그 동자녀석은 선골(仙骨)을 지녔더군. 아주 훌륭해. 이런 녀석이 속세의 협객이나 따라다녀 서야 너무 아깝지 않은가 말이야. 그래서 내가 제자로 거두어 들였지. 아마 지금쯤 백아(白兒)란 놈이 업어다가 우리 산에 데려다 놓았을 거야. 흠흠, 나이도 어린 녀석인데 제 스승과 어머니를 무척이나 걱정하더군. 그래서 편지를 쓰라고 했지. 내 전해 주마고 했더니 두말없이 즉석에서 쓰 더군. 그걸 가지고 주순이란 선생을 찾다가 또 우연하게도 일곱째 사제의 제자 시림(施林)을 구해 냈지 뭔가? 그 녀석도 요물한테 중독을 당해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더군. 그래서 해독을 시켜 산으로 돌려보냈지. 덕분에 주순이란 친구가 백운대사, 자네를 찾아 떠났다는 말을 들었거든. 방 금 들어오다 보니 불당 안에 웬 남자가 앉아 있던데 그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군." "아까 자견(紫絹)이 그러더군요. 주씨란 분이 날 만나러 왔다고... 이제 막 독경을 끝내고 불당으 로 나가려든 참에 사형께서 오셨기에 아직 못 만났지요." "헌데 그놈의 요물은 아주 지독하더군. 내 현영검(玄英劍)으로 그놈을 쫓아버리긴 했지만 끝까지 그놈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했단 말씀이야. 나 또한 그놈의 정체를 모르는 판이라 감히 모험을 해보지도 못했네. 그놈의 소굴이 사매가 사는 이 암자 근처에 있는 모양인데, 어째서 그런 요물이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저도 그놈의 요물 때문에 정말 얼마나 심력을 많이 썼는지 몰라요. 이 얼마 전에야 겨우 그놈 을 제압할 물건이 손에 들어왔는데 도와줄 사람이 부족해서 이제껏 그냥 두었어요. 때마침 사형 께서 오셨으니 아주 잘됐군요. 절 좀 도와주세요." 여기까지 말하던 여인이 문득 창밖을 향해 한마디 건네었다. "주장사(周壯士), 날 보려고 먼 길을 오셨으면 이 안으로 드셔서 말씀을 나눌 것이지 벽창호노릇 을 하셔서 어쩔 셈인가요?" '아이쿠! 들켰구나.....' 한창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느라 정신이 팔렸던 주순은 방 안에서 힐문하는 소리가 나오자 그만 부끄러움에 귓부리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비록 자기와 관련된 것이라지만 남의 말을 숨어 엿듣는 짓은 떳떳치 못하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후원 별채 앞으로 돌아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포단(蒲團) 깔개 위에 사 오십 살쯤 되어 보이는 여승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상석(上席)에는 텁석부리 도인 한 사람이 형형한 눈빛으로 방 안에 들어선 주순을 쏘아보고 앉아 있었다. 그 안광(眼光)이 얼마나 예리한지, 주순은 그만 기가 죽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움츠리고 꿇어 엎드렸다. "괜찮소, 괜찮아! 일어나시오." 여승과 도인이 황망스레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주순이 옆자리에 송구스런 자세로 좌정하자 그 여승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얘기는 다 들으셨을 테고... 우선 소개를 해드리지요. 이분은 내 사형이신 <염선(髥 仙)> 이 원화(李元化)입니다. 내 이름은 이 원경(李元敬), 남들이 백운대사라고 부르지요. 당신 제 자는 이미 염선사형께서 문하 제자로 거두어 들이셨는데, 어떠십니까, 양보해 주지 않으시려는 지?" 주순은 조용히 대답했다. "제 어린 제자놈이 검선 선배님의 눈에 드셨다니 그놈에게는 세 번 태어나도 다시 못 얻을 행운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주도 학식도 천박한 이 몸, 그 총명한 천품을 제대로 이끌어 주지 못해 장래를 그르치지 않을까 우려막심하던 차였는데, 오늘 천만다행으로 선연(仙緣)을 만나게 되었다 니, 제 어찌 마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까 산길을 오던 중 요물에게 중독당해 목숨이 경각에 다다른 사람을 만났습니다. 두 분께선 부디 그분도 구해 주십시오." 그러자 염도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 사람은 시림이라고, 바로 내 사질되는 청년이외다. 내 조금전 오던 길에 벌써 구출해다가 산 으로 돌려보냈소이다." "아, 그러셨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순은 연신 머리를 조아려 사례했다. 백운대사가 화제를 바꾸었다. "마침 좋은 때 사형께서 여기 오셨으니 아주 잘됐어요. 더 이상 지체할 것 없이 내일 새벽에 저 와 함께 그 요물을 처치하러 가십시다!" "도대체 그 요물의 정체가 뭔가? 정말 지독스럽더구먼." "옛날에는 이 산을 운령산이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한 백여 년 전, 산중에 난데없는 뱀의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그놈은 아침 저녁으로 독을 품은 안개를 토해냈는데, 그 독무(毒霧)가 구름 놀처럼 엉겨서 산봉우리의 아침 저녁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퍼졌지요. 그 놀이 도리어 이 산의 절경이 되고, 보는 사람마다 신기하게 여겨 마침내 이 산에 운령산이란 이름까지 붙이게 되었어 요. 당초 이 요물은 산머리에다 안개나 뿜고 구름을 토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을 해치지는 않 았는데, 어찌된 셈인지 삼 년 전부터 성질이 아주 포악스러워졌답니다. 이른아침 진시(辰時)부터 늦은 저녁 유시(酉時)까지 그 요물이 동굴 속에시 수련(修鍊)하는 동안은 길손이 지나가도 무사하 지만, 그밖의 시각에 운령산 속을 헤맸다간 십중팔구 그놈의 독수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지요. 나 역시 그놈과 몇 차례 싸워 보았으나 터럭 한 올 건드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놈도 내 솜씨가 쓸 만한 줄은 알았는지, 우리 암자 근처까지 사람을 쫓아왔다간 스스로 달아나 버리곤 하지요. 아까 도 비린내 담긴 바람소리가 들리길래 그 요물이 온 줄 알았더니만 이내 아무런 기척도 없고, 뒤 미처 주장사님이 문을 두드리더군요." 주순은 그제서야 화등잔만한 붉은 빛덩어리가 그 요물의 눈이라는 걸 깨닫고 등줄기에 새삼 후 줄근하게 식은땀이 흘렀다. 그 놈은 백운대사를 꺼려서 더 이상 자기를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간 것이다. 백운대사는 말을 이었다.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나 서로 상극되는 천적(天敵)이란 게 있는 법이지요. 나는 근자에 들어 겨 우 그 요물이 지네를 제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그리고 오래 전부터 황산에 계신 찬 하대사님이 아주 기이한 지네를 기르고 계신단 말을 들었기에 제자 자견을 보내 그것을 빌려 주 십사고 간청했지요. 찬하대사는 그 지네가 황산을 수호하는 보물이라시면서 내어 주지 않으셨어 요. 그래서 내가 다시 그분을 찾아갔지요. 여러 모로 빌고 설득한 끝에 어제야 비로소 그 지네를 겨우 빌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때맞추어 주장사와 사형께서 여기 오셨지 뭡니까? 그러 니 그놈의 요물이 이제 죽을 날이 닥친 셈이 아니겠어요?" 선인들의 등장 名山借靈物, 仙俠夜話 古洞斬妖蛇, 父女重逢 백운대사는 벽장을 열고서 커다란 궤짝 한 개를 꺼냈다. 그것은 정강(精鋼)으로 주조한 철궤였 다. 사방 모서리에 틈도 하나없이 단단하게 완전 밀폐된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호로병 속에서 단 약 수십 알을 쏟아내더니 철궤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쏟아 넣었다. 철궤 속에는 길이가 두 자 네 치 남짓, 엄청나게 커다란 지네 한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머리 끝부터 꼬리까지 몸통이 번쩍거리는 홍색 비늘로 뒤덮혔고 찻종지만한 두 눈알이 초록빛을 쏘아 냈다. 백운대사가 단약을 쏟아 넣자, 그놈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대사는 지네가 움직이 는 것을 보고서 재빨리 뚜껑을 닫아버렸다. 염도인도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래졌다. "화아, 이렇게 무시무시한 놈이라면 그 독성도 요물보다 지독스럽겠는 걸! 한데 찬하대사는 이런 영물(靈物)을 어떻게 제압해서 부리는지 모르겠구먼." "찬하대사님께선 젊은 처녀시절부터 아주 성미가 괄괄한 말괄량이였대요. 어느 날인가 지네 한 마리를 잡아다 함 속에 넣어 두고 매일같이 먹이를 주어 길렀대요. 처음 잡았을 때는 몸통이 이 삼 치밖에 안 되던 놈이었지만 나날이 자라서 그분이 시집갈 무렵에는 오륙 치나 되었다지 뭡니 까? 혼인하던 날도 그 말괄량이 신부님은 지네를 시집으로 데려가려고 우겼는데, 아버님이 펄쩍 뛰면서 말리셨지요. 새색씨가 지네 따위 요물을 가지고 시집에 들어가다니 말이나 될 법하냐고 반대하신 거지요 새댁은 할 수 없이 그놈을 산에 내다 버렸어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신랑은 세 상을 떠나고 청상과부가 된 그분은 신니(神尼) 우담대사(優曇大師)님의 문하 제자로 들어가 검술 을 연마하신 끝에 검선(劍仙)이란 명칭까지 얻으셨거든요. 그후 찬하대사는 시집가던 날 지네를 내다 버렸던 산으로 다시 찾아가서 그놈을 거두어다 황산에 두었어요. 그로부터 근 백 년 동안 지네란 놈은 찬하대사의 부적(符籍)과 주술(呪術)로 단련을 받고 신통력도 비할 데 없이 대단해졌 지만 인성(人性)마저 깊이 터득해서 사람을 쉽사리 해치지 않을 만큼 영특해졌답니다. 그러니 황 산의 수호물이 되고 찬하대사가 애지중지하는 보배가 될 수밖에 없잖습니까. 이번에 저도 가서 세 번 네번 혀가 닳도록 간청한 끝에야 겨우 잠시 동안만 빌려 준다는 허락을 얻어냈어요. 그러 니까 사형도 이놈을 얕보아선 안 됩니 다." 세 사람이 후원 별채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어느 새 동녘이 희뿌옇게 밝아왔 다. "자, 떠날 때가 되었군요!" 백운대사가 먼저 일어섰다. 그녀는 다시 주순을 돌아보고 신신당부했다. "이번 길은 아주 위험스럽기 짝이 없소. 주장사께서 우리와 함께 가시더라도 한쪽 곁에 피해서 엄호만 하시도록 하세요. 절대로 경솔히 나섰다가는 큰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염도인과 주순은 백운대사를 뒤따라 암자 문을 나섰다. 그리고 산계곡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 다. 이 무렵, 아침해도 지평선 위로 둥실 떠올라 금빛 찬란하게 천지 만물을 내리비쳤으므로, 당초 어렴풋하던 오솔길도 이제는 아주 뚜렷해졌다. 얼마쯤이나 올라갔을까. 앞장을 섰던 백운대사의 발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산세도 가파르거니와 풀 한 포기 보이지 않고 험준한 바위 투성이의 골짜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그놈의 소굴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요. 제가 가서 그놈을 유인해 올 테니까, 사형은 그것 이 저하고 싸우는 틈을 타서 현영검으로 그것이 소굴로 달아날 길을 막아 주세요." 백운대사는 염도인에게 부탁의 말을 남긴 다음 혼자서 휘적휘적 앞으로 나아갔다. 염도인은 주순을 데리고 산등성이로 뛰어올랐다. 앞길 계곡에는 과연 큼직한 동굴 하나가 절벽 아래 뻥 뚫려 있는 게 보였다. 어두컴컴한 동굴 아가리를 보건대 밑바닥도 없을 정도로 깊은 모양이었다. 백운대사의 옷자락이 동굴 입구에서 희끗희끗 날리는 게 보였다. 그녀의 모습이 동굴 속으로 사 라진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우우우웅, 우르릉! 우르릉! 동굴 속으로부터 무시무시한 괴성이 몇 차례 쏟아져 나오더니, 다음 순간 난데없는 광풍이 우당 탕, 퉁탕!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백운대사가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뛰쳐나와 오던 길 로 쏜살같이 달렸다. 뒤미처 시커먼 먼지바람이 자욱한 가운데 황금빛을 번뜩이면서 엄청나게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 가 솟구쳐 나왔다. 전신은 온통 금빚 비늘로 감싸인 데다 두 눈알은 화등잔만한게 불길처럼 이글 이글 타오르는 독종이었다. 몸통 굵기가 기름독만큼이나 되고 대가리에서 꼬리 끝까지 십여 장은 넘어 보이는 데도 백운대사를 뒤쫓는 동작은 새매가 참새를 덮칠 때만큼 날렵했다. 그놈을 이끌고 반 리 남짓 달아나던 백운대사가 돌아서더니 고함을 질렀다. "잘 왔구나, 이놈!" 어느 새 장검을 뽑아들었는지 그녀의 손에서 자주색의 광선 한 줄기가 섬전(閃電)과도 같이 뻗 어나갔다. 사괴(蛇怪)는 자색 검광을 보기가 무섭게 한 길 남짓이나 되는 화염을 토해냈다. 삽시간에 불덩 어리와 검광은 함께 어우러져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한동안 엎치락뒤치락 꿈틀대면서 싸우던 사괴는 백운대사를 상대하기 어렸웠든지 스르르 몸을 도사리더니 대가리를 동굴 쪽으로 휙 틀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동굴 쪽 퇴로에는 벌써부터 염도인이 현영검을 빼들고서 기다리 던 중이었다. 사괴가 대가리를 돌려 다가오자 그의 손에서 현영검이 번쩍 빛을 발했다. 일순, 차갑고도 시퍼런 검광 한 줄기가 사괴의 머리통을 노리고 내리찔렀다. 앞뒤로 갈 길이 막히자, 사괴란 놈은 그 기나긴 몸뚱이를 똬리 틀 듯 도사리고 앉은 채 지글지 글 타오르는 불덩이와 독한 안개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백운대사와 염도인은 각자 반대편 산등성이를 하나씩 차지하고 선채로 비검술(飛劍術)로 괴물을 공격했다. 치열한 불덩어리, 독한 안개를 뚫고 백운대사의 자줏빛 검광과 염도사가 뻗어내는 싸느 란 푸른 검광이 쉴새없이 번뜩였으나 그 무서운 검선들의 칼끝은 괴물의 비늘 한 쪽조차 건드리 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반나절이 훨씬 지나도록 싸웠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자, 백운대사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맞 은편 염도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은 각자 휘날려 보내던 장검을 거두어 들였다. 눈알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어지러이 난무하던 검광이 갑작스레 사라지자 괴물은 이내 백운대사 를 향해 덮쳐들었다. 자신의 적수가 기진맥진해졌다고 느낀 나머지 반격으로 나온 것이었다. 우르릉, 우워! 괴성을 지르면서 구렁이의 딱 벌어진 아가리가 바짝 다가올 때까지 미동도 않고 기다리던 백운 대사의 손에서 무엇인가 번쩍 허공으포 날아올랐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이 지네의 몸뚱이에 서 뿜어져 나와 산골짜기를 온통 붉게 물들였다. 검술로써 이길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최후의 수 단으로 철궤 속의 지네를 풀어 놓았던 것이다. 두 자 남짓밖에 안 되어 지네는 철괴 속에서 풀려나와 산바람을 한 모금 머금기가 무섭게 삽시 간에 일 장이나 길어졌다. 요물은 지네를 보는 순간 동물적인 본능으로 천하의 강적을 만났다고 직감한 듯, 그놈은 더욱 신중하게 몸뚱아리를 도사리고 앉아서 필사적으로 불덩이와 안개를 뿜어내면서 지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두 영물이 어우러져 싸우기를 얼마나 했던가. 돌연 으적! 하고 살덩이가 씹히는 소리와 함께 지 네는 구렁이의 몸뚱이를 두 치 깊이나 되게 물어뜯었다. 우르릉, 우워! 요물은 괴성을 토하더니 지네의 꼬리 부분에 이빨을 박았다. 어느 쪽도 단단히 물고 늘어진 채 좀처럼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 실로 침이 마르고 목이 탈 정도의 긴박한 순간이었다. 허리께를 물어뜯긴 구렁이는 아픔을 참지 못하겠는지 쉴새없이 기나긴 꼬리를 휘둘러 바윗더미 를 후려갈겼다. 꼬리가 한 번 철썩, 철썩! 요동질칠 때마다 바윗덩이는 얼음조각 부서지듯 사방으 로 흩날렸다. 그야말로 처절을 극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무렵, 백운대사와 염도인과 주순 세 사람은 이미 한군데로 모여선 채, 두 영악스런 짐승들의 기막힌 사투를 관전하고 있었다. 염도인이 몇 번이나 현영검을 빼들고서 지네를 도우려 했지만, 그때마다 백운대사에게 제지를 당했다. 그녀는 검광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짐승들을 잘못 노려 지네한테 상처를 입힐까 두려웠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우르르 퉁탕! 난데없이 천지개벽을 하는 소리와 함께 산골짜기부터 무서운 진동이 한바탕 휘몰아쳤다. 자욱한 먼지 구름 속에 구렁이와 지네의 몸뚱이는 요지부동, 움직일 줄 몰랐다. 구렁이는 물어뜯긴 상처의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꼬리를 휘둘러 바윗더미만 후려깨던 중 산벽에 돌출한 바위를 휩쓸어 건드리고 만 것이다. 일 장 가웃도 넘는 집채 만한 바윗덩이가 절벽 중턱 에서부터 산계곡을 온통 뒤흔들면서 굴러떨어져 곧바로 거대한 구렁이의 대가리를 산산조각으로 바수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지네 역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었다. 구렁이에게 꼬리를 꽉 물린 채로 바윗덩이에 짓눌려 몸뚱 이 아래 쪽이 짓이겨져 죽고 말았다. 백운대사와 염도인이 땅을 박차고 날 듯이 내려갔다. 먼지 구름이 걷혀지자 두 사람은 장검을 뽑아 구렁이의 몸뚱이를 난도질해 버렸다. 삽시간에 짐승은 십여 토막으로 잘려 흩어졌다. 백운대사는 장검을 거두어 들이면서 지네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탄식했다. "내 당초 여간해선 양패구상(兩敗俱傷)을 당할까 보아 널 풀어 놓지 않으려 했더니만... 이제 무 슨 면목으로 찬하대사님을 뵙고 변명할꼬....." 염도인 역시 추연한 기색으로 사매를 위로했다. "저놈의 요물이 숱한 생령에게 해악을 끼쳐왔네. 찬하대사께서 아끼던 지네가 그 해독을 제거하 느라고 생명까지 바쳤으니 그 공덕은 적은 게 아니지. 그분께서도 그 보람을 생각하신다면 자네 를 책망하지는 않으시리라 믿네." 두 사람이 서로 뒷일 처리를 놓고 의논하고 있는 차에 불현듯 산봉우리로부터 흑의를 걸친 처녀 가 날렵하게 뛰쳐내렸다. 허리띠에는 호로병 한 개만이 달랑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와 사뿐히 예를 올리고 나서 말문을 열었다. "제자 주경운(周輕雲)이 찬하대사님의 명을 받들고 찾아뵙습니다. 찬하 사부님께서 이르시기를 ' 백운대사는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지네가 죽은 것도 바로 정한 운명이었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더러 대사님께 사의를 올리고 지네의 주검을 가져오라 분부하셨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녀는 단약 한 알을 꺼내더니 지네 곁으로 가서 입 안에 물려 주었다. 그러자 지 네는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칠팔 치 길이로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다시 허리춤에서 호로병을 돌려 마개를 뽑더니 지네를 집어다가 그 속에 넣고 허리에 찼 다. 일을 끝내자 처녀는 다시 백운대사를 향해 다소곳이 예를 올리더니 한마디 물었다. "스승께옵서 말씀하시기를 제 아버님 주순이 이곳에 계시다 하셨습니다. 한번 뵙도록 허락해 주 시겠습니까?" "아, 그랬군요! 아무렴, 뵈어야지요." 백운대사는 그녀가 주순의 딸이란 말에 크게 기꺼워하면서 아직도 산등성이에 서 있는 주순을 향해 손짓으로 불렀다. "아버지!" "경운아, 이게 어찌 된 셈이냐? 예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그들 부녀는 오랜만의 상봉에 어쩔 바를 모르고 반가와했다. 본래 주순에게는 할 일이 있어 성도로 모태를 만나러 가던 도중이었다. 그리고 결투 약속이 정 해지는 대로 황산 찬하대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운령산 백운대사와 함께 요물을 잡아 죽이느라고 시간을 빼앗기고 백운대사나 염도인에게도 아직껏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 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목적했던 대로 요물도 퇴치했거니와 황산 찬하대사의 제자가 된 딸도 만나고 보니 이 기회에 딸을 통해 사정을 전하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 사람에게 다비웅 모태란 놈과 십 년 전 원수를 맺었던 사연과 근자에 그놈이 오대산의 금신나한 법원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상승비검술을 연마한 다음 원수를 갚으려고 자기를 찾아나섰 다는 사연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 얘야, 황산으로 돌아가거든 찬하대사님께 잘 말씀드려서 이 애비를 도와 하산해 주십사 고 간청을 좀 해다오." "그까짓 사소한 일을 가지고 사부님까지 번거롭게 할 게 뭐 있겠어요? 제가 이번에 내려온 또 한 가지 목적도 아버지를 도와드리기 위해서였어요. 저는 사부님을 따라 황산에 올라가서부터 곧 바로 수련을 시작해 지금 벌써 선검(仙劍)을 연성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검술이 아직 완성되시 지 못한 게 안타까와 사부님께 여러 번 전수해 주십사고 졸라댔지요. 하지만 사부님 말씀이 '아 버님은 나와 인연도 없거니와 나는 평생토록 남제자를 두어 본 적도 없다' 하시면서 '아버님은 따로 기연이 닿아서 고명하신 스승을 만나실 거야' 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더러 그냥 성도 까지 가라는 말씀이셨어요. 성도에 도착하는 대로 누군가 이끌어 주실 분이 나타날 거라구요. 저 도 일단 황산에 돌아가서 사부님께 복명해 올린 다음 성도로 가겠어요. 가서 아버지를 도와 그 모태란 놈을 죽여 없애지요." 주순이 듣고 보니 가슴을 짓눌렀던 천 근짜리 바윗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듯 홀가분해졌다. 주경운은 세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고 황산으로 돌아갔다. 딸을 보내고 나서 주순은 백운대사와 염도인을 번갈아 흘낏거렸다. 눈앞에 계신 두 분은 모두 검선(劍仙)으로 이름난 고수들이다. 이런 분들을 스승으로 섬기면 어떨까 상상을 해보는 것이었 다. 백운대사가 그의 심중을 눈치챘다. "당신은 비록 나이 사십 세가 넘었지만 심기도 바르고 근골 또한 훌륭하신 분입니다. 조만간에 우리 항렬 가운데 드실 분이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오늘날 강호상에는 검객들의 문파가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들 문파는 때를 가리지 않고 서로 싸움만 일으키고 있지요. 곤륜파 (崑崙派)나 아미파(峨嵋派) 말고도 요즈음 새로 창립한 황산파(黃山派)와 오대파(五臺派)가 물과 불처럼 대립하는 실정입니다 이 모두 정(正) 사(邪)는 세불양립(勢不兩立)이기 때문이지요. 이번에 모태가 주장사에게 원한을 갚겠다고 나선 것도 서막(序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후로는 더 크 고 기막힌 사건들이 정신도 못 차리게 벌어질 것입니다." 주순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여지도 없이 백운대사는 말을 마치자마자 이내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섬주섬 모아쌓더니 흩어진 구렁이의 몸뚱이를 주려다 올려놓고서 불질러 태워버렸다. "사매, 나는 지금 사부님의 명을 받들고 바삐 지나던 길이었네. 선근(仙根)이 아주 뛰어난 인물 이 하나 있는데 지금 오대파에서 그를 제자로 거두어 들이려고 하거든. 그걸 막고 구해내라는 분 부가 계셨네. 그럼 나도 이쯤에서 떠나야겠네! 다시 만나세." 염도인은 백운대사와 하직인사를 나누더니 입술을 오므려 길게 휘파람을 한 차례 불었다. 그러자 창공의 구름조각 끝머리에서 거대한 선학 한 마리가 날아내려왔다. 염도인은 성큼 그 날짐승의 등에 올라탔다. "잘들 있게나!" 그 한마디를 남기고 염도인은 하늘높이 솟구치더니 삽시간에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순은 그제서야 며칠 전 산중에서 뱀과 싸우던 선학이 바로 방금 날아간 염도인의 탈것이었다 는 걸 깨달았다. 그는 다시 백운대사에게 간청을 드렸다. "대사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성도에 들어가서 모태란 놈을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딸아이 경운이 걱정 말라고 당부까지 하고 갔지만 그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운대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주장사, 아까 따님 말씀대로 성도까지 가기만 하시오. 아마 어려운 일은 없을 거외다. 그래도 만약 위급한 난을 당하신다면 그때 가서 내가 나설 테니까 너무 염려 마시구려. 지금은 나로서도 아무런 도울 일이 없소이다." 주순은 그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녀가 거절하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백운대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서 그는 홀몸으로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며칠 고생 끝에 성도에 도착한 그는 이튿날부터 다비웅 모태를 찾아나섰다. 온 성안을 헤매다시 피 떠돌아다니면서 모태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고 지나는 사람, 술집, 객점을 다 뒤져 물었으나 하 나같이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주순은 하릴없이 황산에 돌아간 딸 경운이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 역시 석 달 남짓 세월이 흐르도록 나타나는 기척이 없었다. 주순은 애가 타고 속이 끓었지만 원수 놈 도 응원군도 보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때는 이미 정월 하순도 다 지나고 있었다. 객점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나날이 울적한 심사를 달 래던 그는 마침내 무료함을 참지 못하여 객방 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성도는 후한(後漢)이 멸망하고 삼국이 정립하던 당시 촉한(蜀漢)의 황제 유비(劉備)가 도읍을 정 한 천사백여 년의 유서깊은 도시였다. 그러기에 도성 안팎으로 이름난 고적이 즐비했다. 그 중에 서도 유람객들의 인기를 끄는 것이 남문 밖 무후사(武侯祠)였다. 유비, 관우, 장비를 도와 촉한을 세우고 위(魏)나라 조조(曹操) 부자와 사마의(司馬懿), 그리고 오 (吳)나라 손권(孫權) 등의 세력들과 중원땅을 놓고 패권을 다투었던 일세의 기인 제갈공명(諸葛孔 明)의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주순의 발길은 어느덧 유람객들의 어깨에 밀리고 밀면서 그 무후사를 향해 옮겨지고 있었다. 다비웅의 제자 擒淫賊, 大關施家巷 逢俠路, 智敵八指僧 제갈무후(諸葛武侯) 공명의 사당은 촉지방 중에서도 이름난 고적이니만큼 그곳을 참배한 역대 유명한 시인 묵객도 많았다. 그리하여 사당 안팎 사면 벽에는 온통 그들이 남기고 간 명언절구로 뒤덮이다시피 되었던 것이다. 주순은 본디 학문도 깊이 있는 터라 유심히 글귀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감상하면서 무후사의 경 내를 거닐었다. 잠시 후 그의 발걸음은 사당 근처 망강루(望江樓)로 향했다. 망강루는 성도성을 끼고 감돌아 흐 르는 낙수(洛水)의 지류인 전수(前水)를 굽어보도록 지어 놓은 술집이었다. 전망도 좋은 데다 술 맛 또한 훌륭해서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항상 붐비는 성도의 명소였다. 주순은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 자리잡고 앉아서 술 한 병에 안주 몇 접시를 시켜 놓고 혼자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한창 여유있게 술잔을 기울이던 판인데 느닷없이 누각 층계가 삐거덕 소리를 낼 정도로 부산스 런 발 움직임으로 올라오는 자가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흘겨 보니 주먹질깨나 함직한 젊은 녀 석이었다. 생김새는 관옥(冠玉)처럼 곱상하게 빠졌으나 얼굴 가득 탕기(蕩氣)가 서린 것이 올바른 생활을 해나가는 놈은 아닌 듯싶었다. 가뜩이나 빤지르르한 용모에다 멋까지 잔뜩 부리느라고 쪽빛 비단 에 꽃술을 수놓은 모자를 걸치고 귀밑머리엔 사발만큼 커다란 모란꽃 한 송이틀 꽂았다. 청년은 술과 안주를 시켜다 놓고서도 먹고 마실 생각은 않고 누각 아래 큰길 쪽만 잔뜩 주시하 고 있을 뿐이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술잔 요리접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줄곧 누각 아래쪽에 시선을 던지는 품이 하도 이상해서 주순 역시 청년의 눈길을 따라 내려다보았다. 청년이 보고 있는 것은 큰길이 아니었다. 강변 선착장에 갓닿은 유람선 한 척에서 여인들이 내 려서는 중이었다. 그 일행 가운데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처녀 하나가 주순의 시선을 끌었다. 청년 의 이글거리는 듯한 눈길도 그녀에게 꽂혀 떨어질 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처녀가 부두에 내려선 것을 확인하고서 청년은 부랴부랴 은자 한 덩이를 꺼내 식탁에 던져 놓더 니 휑하니 급한 걸음으로 누각을 내려갔다. 그 은자는 술값, 요리값을 훨씬 넘는 거액인데도 그는 거침없이 내버리듯 던지고 떠났다. '요녀석 봐라! 아주 질이 못된 놈 같은 걸? 어디 따라가 보자 .....' 주순은 서둘러 술값을 지불하고 청년을 뒤따라 나섰다. 한창 번화한 시가지를 돌면서 청년을 따 르다 보니 맞은편 길목에서 도인 한 사람이 큼직한 호로병을 등에 진 채 어슬렁어슬렁 지나치고 있었다. 붉은 칠을 먹인 그 호로병은 아무래도 낯이 익었다. 유심히 도인의 탯거리를 살폈더니 옷 매무새는 변했어도 언젠가 아미산 아래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분명했다. 주순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지금 자기가 뒤쫓고 있는 청년은 남의 양가댁 규수나 겁 탈하고 다니는 채화음적(採花淫賊)임에 틀림었다. 이 놈을 쫓아가 혼을 내자니 모처럼 사귀려던 일세기인을 놓치겠고 취도인을 따르자니 저 불한당 녀석을 제 갈 대로 놓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야 자기 욕심 때문에 협객으로서의 천직을 포기하는 짓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 다. '좋다! 취도인은 언제든지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날 수 있을 터, 우선 저놈의 못된 짓부터 막아 놓 고 보자.' 한데 그 잠깐 머뭇거린 게 사단이 되었다. 생각하는 사이에도 청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 고 있었는데, 두 사람 틈새로 가마꾼 하나가 후딱 스쳐 지나간 후 다시 보니 그 청년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놓쳐버리고 말았다. 녀석이 걸어가던 곳까지 달려가 사방 을 두리번거렸으나 연기처럼 흔적도 없었다. 이쯤 되면 낯선 지방에서 그놈을 찾아내기란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는 격밖에 안 된다. 그는 추격을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보았다. 취도인은 아직도 저만치서 어슬렁거리며 걸어 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지. 저 도사나 만나보아야겠군.' 주순은 다시 멀찍이 간격을 두고 취도인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 도인은 주순이 뒤따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롭게 시장 거리를 빠져나갔다. 이번에야말 로 놓칠세라 단단히 마음먹고서 뒤쫓던 그는 도인이 논뚝길, 밭뚝길 천방지축으로 가는 걸 보고 서 문득 의아심이 일었다. 널찍한 들판에 이르자 그 앞쪽으로는 인가 한 채도 없는 황무지뿐이었 다. 그런데도 취도인의 발길은 멎을 줄 몰랐다. 정처없이 방황하는 들짐승과도 같이 그저 헤맬 뿐이 었다. 어디까지 따라가야 하는지 주순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거리 간격은 일이십 장, 그는 도사를 따라잡기로 결심했다. 다리에 힘을 주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껏 쫓아도 일이십 장 거리는 그대로였다. 주순은 다급해지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앞에 가는 도인어른! 잠깐 멈추시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외침이 도인에게 들린 모양이었다. 한데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도인은 발걸음을 멈추기 는커녕 그 소리가 촉진제라도 된 것처럼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주순은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평소 경신술에 있어서만큼은 내노라고 자부심이 대단하던 그였 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서 바야흐로 유령처럼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도사의 신법이 도대체 무엇이 란 말이냐? 그는 단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다. 시야를 벗어나는 도인을 쫓아봐야 헛수고일 뿐이 라고 순간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 도인은 날 만나기 싫은 거야.' 취도인이 자기와 만나기를 원치 않는다고 단정한 그는 맥풀린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더욱 울적 해진 심사로 객점에 돌아왔다. 오늘은 도대체 어찌 된 셈이냐. 귀신한데 홀리듯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다가 말았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 닭을 몽땅 놓친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하루였다. 초경(初更) 무렵이 지나서 그는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누웠다. 재수없는 날은 아예 일찍 눈감아 보내는 게 상수라고 생각한 것이다. 등잔불을 훅 불어 끄고는 막 누우려는 참이었다. 창틈으로 미풍이 가볍게 스며드는 기척에 주순 은 번쩍 눈을 떴다. 이어서 탁자 위에 난데없이 종이가 한 장 멀어진 것이 눈에 띄자 그는 벼락 같이 문을 밀어젖히고 뛰쳐나갔다.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는 하늘 아래 사방은 온통 정적에 싸였다. 이따금씩 먼 동네의 개가 짖어 대는 소리만이 아련하게 들려올 뿐, 눈 씻고 둘러봐도 인기척은 어디서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객방으로 돌아온 그는 등불을 밝혀 놓고 탁자 위의 종잇조각을 집어들었다. <시가항(施家巷)으로 가게.> 먹물을 듬뿍 찍어 휘갈긴 필적에 신채(神采)가 양양하게 돋보였다. 주순은 쪽지의 필적이 아주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글씨체였던 것이다. 그러 나 어디서 보았는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가항이란 골목은 성도에서도 부잣집들만 모인 동네인데, 나더러 가서 어쩌란 말인가?' 요령부득의 쪽지 내용을 들고서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가항 골목이라, 시가항 골목... 일순,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아하, 그 동네에서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 게 아닐까? 쪽지를 보면 사람이 혼자 힘으로 감당하 기 어려워서 나한테 협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현장에 가보고 태도를 정하기로 하자.' 주순은 서둘러서 평소 애용하는 병기를 몸에 간직하고 방문은 안으로 단단히 잠근 다음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객점 지붕 위로 솟구쳐 오르자 그는 앞쪽에서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을 발견했으나 시가항에 거의 다다를 무렵 그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거 원, 시가항은 골목길이 사뭇 길고도 여러 갈래인데 나더러 어느 집을 찾으라는 거야? 하 는 수 없군. 첫째 집부터 하나씩 뒤져 나갈밖에.' 무턱대고 골목 어귀 첫 번째 집으로 들어가니 잠잠한 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둘째도 허탕을 치고 세 번째 집 담을 넘어섰다. 그 집은 거대한 장원과도 같았다. 누각과 정자가 너른 뜰 안 여 기저기 으리으리하게 세워진 것이 여간한 부호의 저택이 아니었다. 돌연 누각 한 채에서 아직 이 시각에도 등불빛이 비쳐나오는 것을 보고서 주순은 살그머니 달려 가 벽에 몸을 찰싹 붙이고 창문 틈새로 들여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온몸의 터럭이 곤두섰다. '아차! 저것이로구나.' 보라! 방 안에는 희뿌연 등잔불 아래 절색의 미녀가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고 발가벗긴 채 기다 란 의자 위에 결박당해 있지 않은가! 삼단 같은 머리채 속에 고개를 파묻고 축 늘어진 폼이 벌써부터 혼절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곁에선 남자가 옷을 벗어부치고 있었다. 바로 아까 낮에 망강루를 뛰쳐내려가던 그 젊은놈이 눈 여겨 둔 처녀를 기어코 뒤쫓아 지금 막 겁간하려는 장면이었다. '옳다구나. 이 나쁜놈을 찾았구나!' 주순은 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었다. "요놈의 자식, 잘 만났다! 간도 크게 양가집 부녀자를 겁탈하려 들다니! 어디 내 손에 죽어봐랏!" 주순이 호통을 지르면서 누각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떤 놈이 감히 어르신네의 흥을 깨는 거냐!" 젊은놈도 만만치 않게 응수하더니 날쌔게 등불부터 훅 불어 껐다. 뒤미처 문턱을 넘어서던 주순 을 향해 어둠 속에서 의자 한 개가 날아왔다. 철썩! 주순의 장검이 번쩍 빛을 발하면서 의자를 두 동강내어 날려 보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뒷걸음 질쳐 바깥 뜰로 물러났다. 어두운 방에서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널찍한 공터가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찌 된 셈인지 캄캄한 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온 신경을 잔뜩 모아 누각 안을 경 계하는 판에 느닷없이 뒤통수에서 칼바람이 매섭게 덮쳐들었다. 그놈의 패거리가 암습을 가한다 고 직감한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소리나는 쪽으로 비스듬이 장검을 내찔렀다. 쨍! 귀청이 따가울 만큼 지겨운 쇳소리가 울리더니 뒤이어 두 번째 칼바람이 정수리를 내려찍어 왔 다. 주순은 더 이상 누각 쪽에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되돌아 서면서 장검을 들어 내려치는 칼 날을 가로막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장검을 쓰윽 내뻗어 상대방을 요격했다. 그리고 가만 보니 암습을 가한 놈은 이제껏 누각 안에 있어야 할 그 젊은놈이 아닌가! 주순은 비로소 상황을 짐작했다. 이놈은 여간 교활한 게 아니었다. 방 안에서 문턱을 넘어선 주순에게 의 자를 집어던진 다음 창문을 뛰쳐나와 슬금슬금 뒤로 돌아서 기습적인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주 순처럼 수십 년을 별별 적수 다 상대해 보지 못한 자였다면 꼼짝도 못하고 그놈의 간계에 걸려 흙바닥에 나둥그렀을 것이다. 그놈은 두 차례 기습 공격이 연거푸 실패로 돌아가자 일단 한 두 걸음 물러서더니 재차 덤벼들 었다. 주순도 사양치 않고 선뜻 막아 싸우기 시작했다. 십여 합쯤 어우러져 싸우다 보니 이 젊은놈의 도법(刀法)이 아무래도 눈에 익은지라, 주순은 대 뜸 호통을 쳤다. "이놈, 도대체 어떤 작자의 문하인고? 또 이름은 무엇인가? 통성명을 해라. 이 운중비학의 검 아 래 무명의 귀신으로 죽어간 놈은 없다!" 그러자 젊은놈은 미친 듯이 껄껄껄 웃더니 주순을 손가락질하면서 외쳤다. "네가 바로 주순이란 놈이로구나! 으하하핫! 우리 사부님이 그렇게 목빠지게 기다려도 이 성도에 나타나지 않길래 어디서 죽어 나자빠진 줄 알았더니만, 뜻밖에도 내 칼에 목을 바치려고 기어들 다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팔지선(八指禪)> 묘통(妙通), 아니지. 그렇게 말해서야 못 알아듣겠 군... 속세 녀석들이 다비웅 모태라고 부르는 어르신네의 문하 제자요. <신행무영 분모란(神行無影 粉牡丹)> 장량(張亮)이란 나으리시다! 어때, 이젠 알아듣겠느냐?" 주순은 원수놈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그 모태란 놈도 이 부근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평생토록 익혀 온 절기를 모두 쏟아내어 장량이란 놈을 공격했다. 모태가 제자녀석을 응원이라도 하기 위해 달여온 다면 자기 목숨은 끝장이다. 도저히 그놈의 상승비검술을 당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주순의 칼끝에서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인 평생 절기가 펼쳐지자, 전후좌우, 사면팔방에는 무수한 검화(劍花)가 안개처럼 싸느랗게 일렁거리더니 삽시간에 장량을 철통같이 가두어 버렸다. 제아무리 성도일대에서 날고 기는 재주가 있고 무예가 고강한 장량이라고는 하나 역시 주순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그는 꼼짝없이 검막(劍幕)에 갇힌 채 도무지 어디를 쳐야 그 검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조차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안채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아닌 밤중에 후원 별당에서 칼 부딪치는 소리와 호통치 는 소리가 들리자 집주인이 놀라 깨어 하인들을 이끌고 달려온 것이었다. 부잣집 주인이라곤 하 지만 그래도 무술을 한가락 배운 사람이라 손에는 큼직한 단도(單刀)가 들렸고, 하인들 역시 칼이 나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주인은 당초 두 사람이 어우러져 무섭게 칼바람을 나누는 동안 멀찌감치 물러서서 누각과 안채 로 통하는 길만 경계한 채 침착하게 관망을 했다. 두 침입자 가운데 한 사람은 분명코 자기 집을 위해서 싸우는 협객이라고 짐작은 가는데 그게 어느 쪽인지 분간할 수 없으므로 감히 싸움판에 뛰어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젊은놈의 입에서 스스로 이름을 밝히는 대목에 이르자, 주인은 당장 어느 놈을 쳐야 할지 알아챘다. 그는 가솔(家率)들에게 호령을 내리고 한꺼번에 우르르 장량을 둘러싸 버렸 다. 장량은 이제 틀렸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주순 한 사람도 감당하지 못할 판국에 아무리 오합지 졸이라고는 하지만 이삼십 명씩이나 떼거리로 몰려와 마구 병기를 휘둘러 대니 배겨날 도리가 없 었다. 그는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면서 담장 쪽에 흘낏 눈길을 던져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래도 신 행무영이란 별명을 얻어들을 만큼 발걸음과 몸놀림이 잽싼 놈이라 아무렴 달아날 길이야 없겠는 가고 자신을 달랬다. 휙!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허공으로 곧장 솟구쳐 올랐다. 이제 눈아래 보이는 담장을 박차고 그 바 깥으로 멀어지면 내 세상이다. 암흑천지에서 자기를 따를 자는 없다. 장량의 발이 막 담장에 내리닿는 순간 주순의 호통이 터졌다 "어딜 도망치려고!" 다음 찰나, 칼빛과 사람의 몸둥이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더니 허공에서 번쩍 하고 빛을 뿌렸다. "우아앗!" 음적 장량은 외마디 비명을 토해내면서 거꾸로 굴러떨어졌다. 신행무영의 두 발목이 한꺼번에 깨끗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무서운 고통에 몸부림치는 음적을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인정사정도 두지 않고 결박지워서 태질을 쳤다. "고맙습니다! 제 딸년의 몸을 지켜 주시다니, 이 은덕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순을 내당으로 모셔 올리고서 주인 왕승수(王承水)는 연신 고두사례를 했다. "오늘밤 요행으로 이 음탕한 도적놈을 잡기는 했지만 주인장께선 절대로 소문을 내지 마십시오. 저놈한테는 모태라고 선검(仙劍)을 연성한 스승이 있습니다. 만에 하나 그 스승놈이 알아채는 날 이면 당신네 집 식구들은 몰살당하고 강아지 한 마리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외다." 주순의 말을 듣자 왕승수는 혼비백산,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순을 붙잡고 늘어졌다. "제발 저희들을 좀 살려 줍쇼!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다 드릴테니, 제발 도와주십쇼!" "우리는 다같이 호랑이 꼬리를 잡은 셈이오. 부끄럽지만 내 실력으로도 그 모태란 놈의 적수가 못된다오. 그저 바라기는 조만간에 그놈을 제압할 분이 오기까지 오늘밤 있었던 일을 그놈이 모 르기만을 빌 뿐이외다. 그러니까 왕선생은 절대로 이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집안 식구들을 단속하십시오. 그리고 내일 새벽 일찌감치 저 도적놈을 가죽부대에 넣어 가지고 남의 눈에 뜨이 지 않도록 은밀히 관가로 압송하신 다음 사건을 신고하고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뇌옥(牢獄)에 다 가두라고 하십시오. 훗날 그놈의 스승 모태까지 잡아 놓고서 한꺼번에 처형하도록 말입니다. 모태와 나는 원수지간이라, 내가 여기 머물러 봤자 이롭기 보다는 화가 닥칠 위험성이 더 큽니다. 그놈이 냄새라도 맡는 날엔 나뿐만 아니라 왕선생 일가족도 피해를 입고 말 테니까요." 왕승수는 만류하다 못해 도리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주순은 왔던 길로 객점까지 조용히 되돌아 갔다. 오늘밤 속이 후련하게 좋은 일 한 가지는 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태와 더 깊은 원한의 씨앗을 뿌려 놓고 말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마음이 한결 무거워졌다. 호로병을 메고 다니는 취도인이 자기에게 있어 든든한 조력자라는 것도 짐작은 되지만 자기와의 직접 면대를 꺼리니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파묻혀서 잠을 이루 지 못하고 그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튿날 아침, 느지막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아침 겸 점심을 때우고 거리로 나섰다. 어떻게 해 서든지 취도인을 만나야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고서 도성 안팎 각처에 흩어져 있는 도관(道觀)을 이잡듯이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며칠 동안 쏘다녔어도 여전히 취도인의 종적을 찾아낼 수가 없 었다. 그날도 주순은 발길 닿는 대로 성문을 벗어나 근교 숲 속을 거닐고서 사찰(寺刹)이나 도관이 없 는가고 찾아다녔다. 한참 산책하다 보니 문득 숲 속 녹음이 짙은 그늘 아래 길게 뻗은 붉은 칠을 한 담장이 보였다 '절간이로구나!' 때마침 목도 마르던 참이라, 주순은 참배할 겸 물 한모금 얻어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대문을 찾아 걸어갔다. 그가 막 절간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불현듯 등 뒤쪽에서 말방울소리가 요란 하게 울리더니 자욱한 먼지, 구름 속에 십여 기(騎)의 인마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땅이 뒤흔들릴 정도로 말을 왁살스레 몰고온 일행들은 분명 주순이 들어가려던 절간 대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세심한 주순은 재빨리 길가 덤불 뒤로 몸을 숨겼다. 절문 앞에 멈춰선 그들 일행은 십삼사 명 정도, 선두의 한 사람만이 도인 복색이고 나머지는 모 두 속가(俗家)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흉신악살(凶神惡煞)과도 같은 생김새에다 등 에 진 보따리가 묵직해 보이는 것이 병장기를 감추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이 강도나 화적패거 리라는 것은 한눈으로도 알 만했다. 철썩, 철썩, 철썩! 선두에 선 도인 차림의 사나이가 불문곡직하고 문짝에다 채찍질을 연거푸 세 차례나 후려쳤다. 그러자 잠시 후 굳게 닫혀 있던 절문이 좌우로 갈라지듯 활짝 열렸다. 일행은 말을 탄 채로 두 말없이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마지막 인마가 지나치자, 절간 대문은 아까처럼 굳게 닫혀버리고 인기척 하나 없었다. 주순의 가슴 속에는 의혹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일었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방금 절 안으로 들어간 인물은 절대로 선한 자들이 아니다. 하지만 도성 근교의 절간에서 강도, 화적들의 무리를 용납한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도성 밖 사찰이 도적떼의 소굴이라니 누가 믿겠는가? 그는 좀더 자세히 살펴볼 요량으로 덤불 속에서 나와 절문 앞에 버텨섰다. 사찰의 규모는 황성 (皇城)에 못지 않게 웅대하고도 장엄했다. 대문 위 편액(扁額)에는 큼지막한 금빛 글씨로 <칙건 자운선사(勅建慈雲禪寺)>라고 쓰여져 있었다. 어느 시대 황제의 칙명을 받아 세워진 사찰임에 틀 림없는 것이다. 주순의 의혹은 갈수록 짙어졌다. '자운사가 성도에서도 이름난 고찰이란 소문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자운사의 방장스님 지통 화상(智通和尙) 또한 계율이 근엄한 데다 승도(僧徒)들은 모두 청규(淸規)에 깊이 침잠한 덕승이 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강도의 무리들이 서슴지 않고 드나든단 말인가? 방금 들어간 놈들은 결코 지나가던 참배객은 아닌 게 분명한데... 필시 이 절간 안에선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어디 들어가서 살펴 보아야겠구나!' 그는 참배객으로 가장하고 자운사 안의 정황을 탐지해 보기로 작정했다. 한데 대문 앞에 서서 문짝을 두드리려는 순간이었다. 철썩! 난데없이 날아든 진흙덩어리 한 개가 정통으로 주순의 뺨에 들러붙는 게 아닌가! 미처 피할 틈 도 없이 진흙덩이로 따귀를 맞은 그는 대경실색을 하고 대문에서 멀어졌다. 항급히 사방을 두리 번거렸으나 인기척은커녕 참새 한 마리도 보이질 않았다. '도대체 이놈의 진흙덩어리가 어디서 날아왔을꼬? 이상하구나!' 적지 않게 놀랍고도 의아심이 일었지만 결국 자운사 안을 보고야 말리라는 호기심을 누를 수 없 어, 그는 또다시 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문짝을 두드리고 손을 막 쳐드는데 뒤통수에서 또 한 차례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났다. 이번만큼은 바짝 경계심을 높이고 있던 터라, 바람소리를 듣기 가 무섭게 재빨리 고개를 움츠렸다. 털썩 ! 진흙덩이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또 진흙덩어리였다. 후딱 고개를 돌려 왼쪽을 살폈다. 바람소리 로 흙덩이가 날아온 방향을 가늠한 것이다. 숲 속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번 뜩이더니 삽시간에 숲 속으로 사라졌다. 주순은 놀림을 당한 것 같아 슬그머니 분기가 솟구쳤다. 절 안으로 들어가려던 생각도 팽개치고 날듯이 숲 속으로 괴한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달리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괴한을 잡아 족칠 궁리 부터 했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진흙덩어리를 던지는 거냐? 이유를 대라! 나하고 장난치자는 거야 뭐야?' 하지만 헛수고였다. 사방 숲 속을 이리저리 미친 듯이 쑤셔 다녔으나 괴한은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제풀에 지쳐 발걸음을 멈추려던 때였다. 한 덩어리 진흙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순도 전신으로 충분히 대비하고 있던 터라 날쌔게 그것을 피해낸 다음 곧바로 앞쪽을 뚫어져라 바라보 았다. 키가 작달막한 남자가 바야흐로 숲을 벗어나 들판으로 쏜살같이 치닫고 있었다. 아마도 눈 한번 깜박였더라면 그마저 놓쳤으리라. 울화통이 정수리까지 뻗칠 대로 뻗친 주순은 비상한 각오로 즉각 추격을 개시했다. 괴한의 신법 이 얼찌나 빠른지 발밑에서 먼지구름 한 조각 일지 않았다. 아마도 흙이 신발 바닥에조차 묻지 않는 듯했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자부하던 주순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괴한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뒤쫓으면서 삽시간에 십여 리를 달렸으나 간격은 도 무지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주순의 숨결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무작정 쫓을 수 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 이 작자와 평소 아는 사이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토록이나 희롱하는지 모르겠구 나. 원수지간이었다면 아까 자운사 대문 앞에 서 있었을 때 일찌감치 내 목을 베어갔을 것이다. 하물며 저렇게 달리는 신법만 보더라도 저자의 무예 수준은 결코 나보다 처지는 게 아닐 터, 나 하나 처치하기란 식은죽 먹기리라. 한데 지금 저 자는 다만 나를 이끌고 인적도 없는 들판을 마 구 달리기만 한다. 무슨 의도에서 저러는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구나!' 주순은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앞쪽 치한을 향해 목이 터져 라고 소리쳤다. "형씨! 멈추시오. 주순이 할 말이 있소!" 그러나 '너는 악이나 써라. 나는 간다'는 식으로 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치닫기만 했다. 할 수 없다. 주순은 또 뒤쫓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괴한은 어떤 나무 그루터기 앞에 부닥치자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옳다. 됐구나!' 싶어, 주순은 젖 먹던 힘까지 다 뽑아 이십여 장 거리를 달려갔다. 괴한의 얼굴 윤곽이 어렴풋이나마 보일 정도로 접근했을 때였다. 그 자는 훌쩍 돌아서더니만 살별처럼 치닫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주순은 더 이상 뒤쫓을 여력도 없었다. 그는 마침내 단념하고 발길을 멈추었다. 헐떡헐떡 가쁜 숨을 두어번 몰아쉬는 사이에 괴한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괴한이 서 있던 나무 그루터기에 가 보았다. 나무 곁 흙바닥에 종이뭉치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집어들고 펼쳐서 보니, 환약 두 알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포장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두어 마디 사연이 적혀 있었다. <잘 간직하게. 훗날 쓰일 때가 있을 터이니, 이 약은 백독불침 (百毒不侵)일세.> 주순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글월이 지시한 대로 환약을 다시 싸서 품속에 간직했다. 괴한 이 여기서 잠시 멈춘 의도는 분명히 환약을 자기에게 남기려고 한 짓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자기를 해치거나 골탕먹이려고 질질 끌고다닌 게 아니다. 분명 호의에서 나온 행동이 었다. 주순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자운사, 그곳은 범상한 곳이 아니다. 아마도 사악한 무리들이 도사리고 있는 용담호혈(龍潭虎 穴), 무서운 함정인지도 모른다. 방금 나를 이끌고 달리던 인물은 호의를 베풀어 그 험지로부터 벗어나도록 유인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 내 한 몸으로는 그들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일 터, 잠시 나를 인도한 인물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게 좋을 듯하다.....' 주순은 맥없이 터덜터덜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사오 리 남짓 갔을까. 한데 길섶의 고목 위에 눈이 번쩍 뜨이게 들어오는 물건이 걸렸다. 제아무 리 정신놓고 지나쳐 달렸지만 아까 올 때는 전혀 못 보던 물건이었다. 그것은 절간에나 걸렸을 법한 범종(梵鐘)이었다. 줄잡아도 육백 근은 됨직한 큰 종이었다. '이렇게 무지막대한 범종을 누가 나무 위에다 올려 놓았을꼬? 저만한 무게를 걸어 놓자면 체력 이 삼사천 근 폭이나 되게 길러야만 가능할 텐데... 어떻게 옮겼을꼬?' 범종이 걸린 고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와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종하고 그 집 이 무슨 연관이 있을 듯해서 주순은 슬그머니 발길을 돌렸다. 집 대문 앞에 다다른 그는 난데없는 여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뒤미처 '사람 살리라!'는 고함소리도 들렸다. 주순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생 협객으로 태어난 그가 남의 위기를 보고 지나칠 리 만무했다. 그는 잽싸게 담벽을 뛰어넘었다. 예전 같으면 은밀히 뒤뜰로 돌았겠지만 이제 다급한 여인네의 통곡성과 아우성을 들은 이 마당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뜨락을 가로질러서 지붕으로 솟구쳐 오른 주순은 진주도권렴(珍珠倒捲廉)의 익숙한 자세로 찰싹 엎드려 방 안을 굽어 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혼비백산, 하마터면 지붕에서 거꾸로 떨어질 뻔하였다. 그림자 없는 괴인(怪人) 林中比劍, 雲中鶴絶處逢生 寺內談心, 小火神西行求救 주순은 살이 떨리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방 안에선 뜻밖의 인물이 희한한 실랑이를 벌이고 있 었던 것이다. 화상 하나가 손에 계도(戒刀)를 잡은 채로 집 안주인인 듯한 여인의 멱살을 거머쥐고 협박하는 광경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내 너를 보고 첫눈에 홀딱 반했다구. 나 같은 사람을 만난 게 네년한테 얼마나 행운인지 아느 냐? 자꾸 앙탈부리지 말고 날 따라 자운사로 가자꾸나. 맛만 실컷 즐기다 뿐이냐? 부귀영화도 무 궁무진 누리게 해주마. 아니, 말 안 듣겠어? 당장 꽉 찔러 죽일까부다! 이걸.....!" 멱살을 잡힌 여인도 독기가 오를 대로 올라 만만치 않게 대들었다. "이거 빨리 놔요! 내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나 알아? 당신 같은 중놈 열이 덤벼도 작살을 내고 말 걸! 어서 이 손을 놓고 도망치지그래. 내 남편 위청(魏靑)한테 들키면 끝장일 테니까!" 패악을 부리던 여인이 이번에는 바깥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사람 살류, 사람 좀 살류!" "에잇, 이년이!" 역정이 뻗쳤는지 화상놈은 계도를 꼬놔 여인의 멱줄기를 겨누고 찌르려 들었다. 이쯤 되면 자기 처지가 어찌 되든 참을 수 없는 주순이었다. "흉악한 중놈! 무례를 범하지 마라. 내가 왔다!" 호통소리와 함께 한 줄기 싸늘한 칼빛이 곧바로 화상의 가슴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주순이 엿보던 창문을 박차고 어느 새 방 안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한창 빈집 안에서 여인을 붙잡고 드잡이질에 열중하던 화상은 느닷없이 불의의 일격을 당하자 혼비백산, 성큼 한 발짝 비켜서면서 펄쩍 뛰어오르다가 엉겁결에 계도를 놓쳐 버렸다. 그러나 다 음 순간, 그는 벽에 기대어 놓았던 선장(禪杖)을 냉큼 집어들더니 숨 한번 돌리지 않고 장검의 공 세를 가로막았다. 그 솜씨는 다급한 중에서도 아주 능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쨍, 쨍그렁! 몇 합을 어우러져 싸우고 나서, 여유를 되찾은 화상이 그제서야 주순을 알아보았는지 너털웃음 을 터뜨렸다. "웬 놈인가 했더니 바로 자네였구먼! 흐흐흐, 내 자넬 찾느라고 몇 달 동안 발바닥이 다 닳아빠 졌네.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게 되다니, 이것도 부처님의 인연일세그려. 흐흐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상의 손에 들린 선장이 윙! 소리를 내면서 번개치듯 휩쓸어 왔다. '긴가 민가, 설마하니.....?' 했던 주순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맞닥뜨린다고 하더니 성도에 온 지 반 년 동안을 가슴 조이면서 찾아다니던 다비웅 모태란 놈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놈의 무공실력은 자기 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졌다. 그걸 알면서도 자청해 뛰어든 판이니 물릴 도리가 없었다. 주순은 비장한 각오로 장검을 잡은 손아귀에 바짝 힘을 주었다.그리고 <장사출동(長蛇出洞)>의 검초로 인정사정없이 모태의 목젖을 노리고 냅다 찔러갔다. 일검의 공세가 너무도 사나운지라 모태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 몸을 틀어 칼끝을 피했다. 주순은 상대방이 일보 뒷걸음질치는 순간, '옳다. 됐구나!' 하고 후딱 싸움터 밖으로 벗어나서 모태를 향해 외쳤다. "잠깐, 잠깐! 할 말이나 다하고 다시 싸우세." "나하고 자네, 원수끼리 만난 판국에 뭐 말라비틀어진 할 말이 있어?"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말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닐세. 자네 생각해 보게. 십 년 전 처음 나하고 겨루었을 때 자넨 내 손에 패장(敗將)이 되었네. 그때 내가 자네의 목숨을 빼앗자고 마음만 먹었 다면 그거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쉬웠지 않나? 하지만 나는 자네의 일신 무예가 아까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자넬 풀어 주었지. 한데 자네는 은혜를 원수로 여기고 또 복수를 하려 들다니, 이 게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자네, 이걸 알게. 사람 위에 사람 있고, 하늘 밖에는 또 다른 하늘 이 있는 법일세. 자네가 나한테 패한 십 년 동안에 또 상승검법을 익혔다고 자부심이 대단한 모 양이네만, 어디 나라고 가만히 있었겠는가? 나 역시 황산의 찬하대사와 취도인을 스승으로 모신 몸이라네, 알겠나? 공연히 헛수고 해봤자 자넨 내 상대가 안 된다, 이 말일세. 어서 그 여자를 내 려놓게. 그럼 나도 자넬 놓아 보내지. 굳이 못하겠다면... 흐흐, 오늘이 바로 자네 제삿날이 될 걸 세." 주순이야 다급한 김에 꾀를 내어 천연덕스럽게 둘러댄 말이지만, 모태는 듣고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순, 이놈이 찬하대사를 십 년 동안 스승으로 모셔왔다면 내 검술 가지곤 도저히 상대가 못된 다. 하지만 나 역시 십 년 간을 피땀 흘려가며 겨우 상승무공을 연성해냈는데, 오늘 이 원수를 눈 앞에 두고 어찌 그냥 갈까 보냐? 죽든 살든 끝장을 봐야 속이 확 풀리겠다. 좋다! 어디 한번 붙어 보자!' 모태는 마음을 다잡고서 상대방에게 소리쳤다. "당초 내가 자네 손에 패했던 것은 도(刀)를 가지고 싸웠기 때문일세. 허나 지금 내 손에는 선장 이 들려 있네. 이걸 십 년 동안 연마해 왔거든. 그러니까 오늘 이 마당에서 자네나 나나 구태여 검술만 가지고 겨룰 게 아니라 각자 손에 든 병기로 결판을 내세. 만약 오늘도 내가 패한다면 당 장에 머리 깎고 입산을 하겠네. 그리고 인간세상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겠네. 자네 생각은 어 떤가?" 주순은 그 말을 듣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모태란 놈은 <찬하대사, 취도인>이라는 엄포에 주눅이 들어 스스로 검술 대결을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놈은 상승의 비검술을 쓰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내 장기는 검술이니까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순은 호기있게 응수했다. "좋아, 자네가 하자는 대로 따르지!" 대화는 끝이 났다. 이윽고 두 원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에게 덮쳐들었다. 삽시간에 비좁은 집 안에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살기로 가득차 버렸다. 무시무시한 칼바람, 쇠몽둥이질에 세 간살림과 집기가 온통 산산조각으로 흩날리고 한광(寒光), 냉기가 무섭게 소용돌이쳤다.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싸웠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막상막하의 격투가 전개되었다. 주순은 싸울수록 신바람이 났다. "여보게, 이 방 안은 싸우기에 너무 비좁구먼! 어떤가, 널찍한 데로 나가서 어울려 보지 않겠나." "좋아, 바깥으로 나가세! 내 기어코 자네 그 개 같은 목숨을 끊어 주지!" 모태가 응수했다. 두 원수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걸어나갔다. 이 무렵, 하마터면 음탕한 화상한테 몸을 빼앗길 뻔했 던 여인은 어느 틈엔가 달아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담장 밖을 돌아나서자 널찍한 공터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두 말도 않고 다시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모태는 십 년 원수와 맞대면한 판이라 한결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그는 두 눈에 불을 켜고 평생 을 바쳐 연마한 전기를 남김없이 모두 쏟아냈다. 비록 승세는 잡지 못했지만 갈수록 점점 공세가 사나와졌다. 주순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상대방에게서 지난날의 미숙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는 모태가 생각을 바꾸어 느닷없이 비검(飛劍)을 발사하지나 않을까 은근히 두려웠다. 막상막하로 평수(平手)를 이루고 있는 판에 검이라도 날아드는 날에는 그것으로 끝장인 것이다. 그는 바쁜 가운데서도 손아귀에 힘을 주어 보검을 꽉 잡았다. 바야흐로 모태는 태산압정(泰山壓 頂)의 초식을 구사하여 번쩍 치켜든 선장으로 주순의 머리통을 박살내려고 덮쳐왔다. 쇠몽둥이가 정수리에 떨어지기 직전, 주순은 뱀처럼 허리를 틀어 살짝 피해 버렸다. 어깨를 스칠 듯 떨어지던 쇠몽둥이가 중도에서 방향을 바꾸더니 윙! 하고 허리께로 가로 휩쓸어 오자, 그는 발끝으로 지면 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쇠몽둥이의 기세가 너무도 사나와 장검으로 막아내기에 벅차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순의 몸뚱이가 허공 칠팔 자 높이까지 솟아오르자 모태의 입은 기쁨에 겨워서 찢어지도록 벌 어졌다. "하아!" 상승력이 다해 주순의 몸뚱이가 허공에 매달리듯 정지한 순간, 쇠몽둥이는 그 두 다리를 노리고 휩쓸어 쳤다. '네놈이 안 떨어지고 배겨 나겠느냐! 다리가 부러지든 허리뼈가 꺾이든, 목뼈나, 잘하면 골통이 박살나고 말겠지!' 그러나 다음 순간 모태는 그만 어처구니없는 꼬락서니가 되고 말았다. 회심의 일격이 허공만 후 리고 빙그르르 돌아가 버린 것이다. 주순은 미리부터 상대방의 공격초식을 계산에 넣고 몸을 솟구쳤다. 무섭게 휘둘러 친 쇠몽둥이 가 자기 다리에 거의 근접하는 찰나, 그는 오른발로 왼발등을 가볍게 찍었다. 그 순간적인 반탄력 을 이용하여 주순의 몸뚱이는 멀어지기는커녕 도리어 하늘 높이 서너 자를 더 치솟아 오른 것이 다. 그것이야말로 주순의 평생의 절기 청정점수(晴挺點水), 연자비운종(燕子飛雲縱)이란 경신술이 었다. 모태는 놀랄 틈도 없었다. 회심의 일격에 너무나 과도하게 힘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쇠몽둥이 끝 머리가 허공을 치고 돌아가자 그의 몸뚱이도 중심을 잃고서 앞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거렸다. 그 순간, 주순이 마치 참새를 노린 새매처럼 몸을 훌떡 뒤집고서 쏜살같이 덮쳐내렸다. 허공으로 부터 장검을 내밀고 전신으로 모태의 정수리를 향해 곧바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이크!" 모태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힘껏 땅을 박차고 앞으로 고꾸라지던 그 자세대로 물 속에나 뛰어들 듯이 튕겨나갔다. 빠르기는 빨랐다. 하지만 머리통을 찔리는 대신에 왼손이 주순의 칼끝에 대여섯 치나 길게 찢어지는 것만은 면할 수 없었다. 섬뜩한 감각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피 범벅이 된 팔뚝을 보자, 모태는 저릿저릿하게 쑤시는 아픔보다 분노가 먼저 끓어올랐다. 그의 몸뚱이가 균형을 잡을 때까지 주순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제이격이 무서운 속도로 덮쳐들었다. 그러자 피를 본 모태 역시 선불 맞은 범처럼 이성을 잃고서 미친 듯이 맞덤벼들었다. 그는 사생결판을 내기로 작심한 것이다. 어느덧 황혼이 깔리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반나절을 지루하게 싸운 주순은 어지간한 수단으로 모태를 제압하기는 이미 글렀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시간만 끌다간 자신이 패하기가 십상이었다.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훌 쩍 솟구쳤다 싶자, 뒤이어 휘두른 칼끝에서 일 장 남짓 높이나 되는 검화(劍花)가 한 줄기 그어져 나왔다. '이게 뭐냐? 기어코 찬하대사의 절기가 나오는구나!' 흠칫 놀란 모태가 주춤하는 순간, 주순은 잽싸게 그 틈을 타서 마구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뿔싸, 속았구나!" 원수놈이 달아나는 것이다. 곧따라 모태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손가락 두 개를 잘리우고 온갖 수 모를 겪은 남아대장부 모태가 원수를 그냥 곱게 보낼 리가 없었다. 주순의 뒷덜미에 모태의 씩씩거리는 거친 숨결이 닿을 듯 말 듯했다. 추격자가 바짝 뒤쫓고 있 는 것이다. 그는 한편 죽어라고 뛰면서 슬그머니 품속에서 연주노(連珠弩) 틀을 꺼내 잡았다. 그 바람에 발걸음의 속도가 늦추어졌다. 모태는 도망자의 속력이 떨어지자 이것저것 더 생각할 것 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듯 두 손을 뻗쳤 다. 단숨에 뒤덜미를 움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음 순간, 휘딱 고개를 돌린 주순이 손을 번쩍 휘둘렀다. "맞아랏!" 싸느란 빛줄기가 모태의 면상을 노리고 직통으로 날아갔다. '암기로구나.....!' 모태는 황급하게 자라 목처럼 움츠렸다. 씽! 하는 손리와 함께 무엇인가 정수리 살갗을 스칠 듯 말 듯 차디찬 감촉을 전하고 흘러갔다. 하지만 모태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주순의 연주강노(連珠鋼弩)는 일단 발사되었다 하면 열두 자 루가 차례로 날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만큼 지독스럽기 때문에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리지 않는 이상, 여간해서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지만, 일단 꺼내는 날엔 제아무리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라도 좀처럼 피해내기 어려웠다. 모태는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겨우 위기를 피했다고 마음놓으려는 순간, 두 번째 세 번째가 쌔 액, 쌔액! 바람을 가르면서 연거푸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에쿠, 큰일났다!' 속으로 진저리를 치면서도 모태는 좌우 상하로 눈썰미 좋게 뛰고 수그리고 하면서 피해냈다. 그가 막 일곱 자루째를 간신히 피했을 때였다. 뜻밖에도 주순은 다섯 자루의 노전(弩箭)을 한꺼 번에 발사해 버렸다. 한 자루는 목통을, 두 자루는 동시에 아랫배를, 또 두 자루는 좌우 어깨를 각각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것을 사람들은 주순의 다섯 떨기 매화천운노(梅花穿雲弩)라고 불렀다. 제아무리 귀신처럼 날쌘 모태이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속절없이 두 자루쯤을 맞지 않을 수 없다 고 직감했다. 아랫배로 날아온 두 개는 피할 수 있다. 오른쪽 어깨의 것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왼쪽 어깨와 면상을 노리고 날아드는 놈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어깨에 한 대쯤 맞는 거야 대수롭지 않지만 곧바로 면문(面門)을 덮치는 것은 절대로 맞아선 안 되었다. 피할 방법은 없고 시간은 촉박했다. 그래서 모태는 입으로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다. 해보 자! 그런데 뜻밖에도 다섯 자루 가운데 제일 먼저 날아온 놈이 왼쪽 어깨로 파고들었다. 그 다음 석 자루를 피하느라 모태는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저쪽을 살피자니 이쪽을 돌아볼 여 지가 없다. 아차! 하는 순간에 겨냥이 빗나가는 날, 목구멍이나 아니면 골통을 꿰뚫리고 말 것이 다. 딱! 정신이 헷갈리는 틈에 날아든 무심한 그놈은 인정사정도 없이 모태의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어이쿠!" 모태의 입에선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핏줄기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조각난 이빨에 살촉이 으지직! 씹혔다. 엄청난 통증이 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싸움이고 원수고 다 팽개쳤다. 얼마 나 아픈지 눈알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는 되돌아 서서 마구 도망질치 기 시작했다. 본래 주순은 연주노의 공격이 성공하더라도 그를 추격할 의사는 없었다. 한데 모태란 놈이 피를 철철 흘리며 달아나는 모습을 보자니까 마음이 달라졌다. 통쾌한 기분을 좀더 맛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는 즉시 뒤쫓기 시작했다. 주순이 찬하대사에게 검술을 배웠다는 엄포에 주눅이 들어 감히 비검(飛劍)을 써서 상대하지 못 한 모태였다. 그 후에도 좀처럼 승부를 내지 못해 안타까와하면서도 급한 성미에 울화통까지 겹 치는 바람에 비검술은 아예 깡그리 잊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부상까지 당한 데다 또 주순이란 놈한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보니 절대절명의 위기에서도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주순이란 놈, 찬하대사를 스승으로 모셨다니, 저놈의 검술은 자연 나보다 더 지독할 터, 그게 무 서워서 언감생심(焉敢生心), 비검술을 못 썼다. 한데 나보다 더 고강한 검술을 배웠다는 놈이 어 째서 한 번도 쓰지 않았을꼬? 그렇다면 허장성세(虛張盛勢)로 사기를 친 게 아닐까?... 내 그놈의 도깨비 놀음에 말린대서야 될 법이나 한 소린가?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구나.....' 흘낏 돌아다보니 주순은 벌써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한참 달아나던 모태는 휘딱 돌아섰다. 그의 손에는 벌써 스승 금신나한(金身羅漢) 법원(法元)이 하사한 적음검(赤陰劍)이 들려 있었다. 뒤이어 한 줄기 누런 검광이 씽! 하고 주순을 향해 날아갔 다. 한창 신바람나게 뒤쫓던 주순은 도망가던 모태가 갑작스레 멈춰 돌아서는 것을 보고서 그만 가 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태가 비검을 날리려는 것이다. '아뿔싸! 내가 너무 겁도 없이 쫓아왔구나. 병법에도 궁지에 몰린 도적은 쫓지 말라 했는데... 이 걸 어쩐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모태의 손에서 어느덧 검광이 번개처럼 날아오고 있 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를 주순이 아니었다. 그는 후딱 돌아서서 쏜살같이 오던 길을 치닫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저놈이 찬하대사 어쩌고 저쩌고... 한 게 말짱 거짓말이었구나! 맙소사, 내가 당해도 호되게 당했어!' 모태는 울화통에 분노까지 겹쳐 가슴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그는 적음검을 마구 휘둘러 검광을 뻗으먼서 미쳐 날뛰는 맹수처럼 무섭게 주순을 뒤쫓았다. 주순은 헐레벌떡 눈앞에 보이는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뒤따라 들이닥친 검광이 숲 속을 마구 휘저었다. 칼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나뭇가지들이 비오듯 우수수 잘려 떨어졌다. 주순과 검광의 거 리 간격은 불과 일 장 남짓, 이제 위기는 코 앞에 닥쳐왔다.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눈이나 감고 기다리는 수밖에.....' 모태가 바짝 따라붙었다. 막바지에 몰린 주순을 보고서 그는 의기양양, 너털웃음을 참지 못했다. 적음검에서 뻗친 검광은 이미 주순의 정수리 위에 머물러 있었다. 한번 내려치기만 하면 주순의 머리는 싹뚝! 몸통에서 수박덩어리처럼 굴러떨어질 판이었다. "으하하핫!" 모태는 너무도 통쾌해서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보검을 잡은 손에 점점 힘이 주어졌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돌연 긴 휘파람소리가 삐익! 하고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울리더니, 나무 위에서 싯퍼런 서슬이 번개처럼 날아왔다. "이게 뭐냐?" 모태가 소스라칠 여유도 없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뻗은 푸른빛이 주순의 머리통을 조각내려 던 적음검의 누른빛을 대뜸 맞받아 밀쳐냈다. 일순, 제정신을 차린 모태가 적음검을 휘두르면서 서슬 푸른 검광과 맞붙기 시작했다. 하늘빛도 땅빛도 분간하기 어려운 초저녁 어둠 속에서 푸르 고 누른 두 줄기 검광이 신룡(神龍)처럼 꿈틀거리면서 난무했다. '주순, 이 원수놈도 기어코 내 칼 아래 외로운 넋이 되는구나!' 하고 기꺼워하던 모태였다. 이제 막 요절을 낼 참에 난데없는 훼방꾼이 끼어들어 찬물을 끼얹었 으니, 그는 놀라움과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의 손에 들린 적음검이 독오른 살모사처럼 무시무시 하게 번뜩이면서 정체모를 푸른 검광을 향해 분풀이라도 하듯 마구 휘저어 나갔다. 눈을 질끈 내리감고 꼼짝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던 주순,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기척이 없어 고개 를 쳐들고 보니 머리통을 짓누르던 검기(劍氣)도 사라지고 모태의 검광이 멀찌감치 멀어져서 웬 푸른 검광과 허공에서 한창 겨루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 어느 고수가 날 구원하러 온 것이구나!' 놀란 넋, 뛰던 가슴이 진정되자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자기를 구하려고 비검을 발사한 인물이 어디 있는지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온 신경을 눈에 집중시키고 다시 한번 푸른 검광의 줄기를 쫓아보았다. 과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람 하나가 보였다. 아름드리 고목의 가장자리 나뭇가지에 선 채로 푸른 검광을 구사하고 있는 도인이었다. 주순은 슬금슬금 고목 쪽으로 접근했다. 모태를 죽여버린 다음 감사의 예를 올려야 하겠기 때문 이었다. 도인의 모습이 뚜렷하게 윤곽으로 보였을 때 주순은 그만 반가움에 겨워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등에 진 붉은 호로병이 눈길을 확 끌었던 것이다. '취도인, 취도인이다!' 그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 놀렸다. 고목의 밑동까지 다가간 주순이 입을 열려고 하자, 취도인은 손을 내저었다. 주순은 벅찬 기쁨만을 가슴 가득히 품은 채로 입을 다물었다. 모태의 적음검에서 뿜어나온 누런 검광은 갈수록 눌려서 검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반대로 취도 인의 푸른 검광은 점점 더 밝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다비웅 모태야말로 가슴을 치고 귓부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젠 분노보다도 공포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도대체 이게 어떤 놈이란 말이냐? 어디서 굴러온 놈이 남의 대사(大事)를 이토록 망쳐 놓는 거 냐? 아니야, 주순은 둘째치고 내 목숨도 부지하기 틀렸다. 이 곤경을 어떻게 해야 벗어날꼬?' 점점 줄어드는 적음검의 검광으로 겨우겨우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탈출할 방도를 모색해 봤지만 앞뒤가 꽉꽉 막혀 옴치고 뛸 수도 없었다. 오직 전심전력, 그 자리에서 적의 공세를 막기 에만 온 신경을 접중시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모태가 취도인의 공격을 막느라 정신이 없는 걸 보자 주순은 슬그머니 품속에서 암기 <몰우비 황석(沒羽飛蝗石)> 한 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모태가 칼을 휘두르느라 가슴이 열리기를 기다렸 다가 힘껏 집어던졌다. "어이쿠!" 모태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털썩 넘어졌다. 집중력이 끊어지면서 적음검의 검광은 더욱 줄어 들었다.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눈앞에 푸른 서슬이 닥쳐오는 걸 보면서 모태는 살기를 단념했다. 그러나 극악무도한 음적에게도 질긴 운명은 있는지,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문득 숲 속 서남쪽 하늘에서 어렴풋이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더니 아주 가늘기 짝이 없는 붉은 빛줄기가 싸움터로 쏟아져 왔기 때문이다. 취도인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주순을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어서 날 따라오게!" 말은 따라오라고 하면서도 주순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를 덥석 옆구리에 끼어차더니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앞길은 성도로 통하는 대로였다. 겨우 발버둥질쳐서 몸을 일으킨 모태가 다시 대항하려고 했을 때는 이제껏 짓누르던 적의 검광 이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는 가슴이 탁 트이도록 호흡을 몰아쉰 다음 검광을 거두어들였다. 주순 을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벌써 어디로 달아났는지 자취도 없었다. 여지껏 땀을 뻘뻘 흘려가며 상대했던 적수가 누구였는지 그는 끝내 얼굴조차도 못 보았다. 그것 이 분해서 그는 이를 갈아붙였다. 어두운 숲 속에 혼자 떨어져 울분을 삭이는 참인데, 불현듯 눈 앞이 확 밝아지더니 붉은 빛이 번쩍 했다. 누군가 그의 면전에 우뚝 서 있었다. '적이구나!' 모태는 다짜고짜 적음검을 내뻗었다. 그의 눈에 띄는 것은 모두 적인 것이다. "아우, 무례한 짓 말게!" 호통을 듣고서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자기와 막역한 사이요, 형님으로 모시는 <비천야차(飛天夜 叉)> 진랑(秦郞) 아닌가! "아이쿠, 형님! 여기 웬 일이십니까!" 모태는 지옥에나 갔다 온 표정으로 반색을 하면서 굽신 절을 했다. "도대체 혼자 이 숲 속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진랑이 묻자, 모태는 맥풀린 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산에서 내려온 후로 주순이란 놈을 잡아 원수를 갚으려고 자운사에 가 있었습죠. 그러다가 오 늘에야 공교롭게도 주순과 맞닥뜨렸지 뭡니까? 속임수에 넘어가 화살을 한두 대 맞긴 했습니다 만, 막판에 적음검으로 겨우 그놈을 찍어누르게 되었거든요. 한데 어디선가 느닷없이 엉뚱한 놈이 끼어들어 선검(仙劍)을 쏘아 저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서 주순을 구해 달아났습니다. 저로 선 도무지 그놈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주순하고 그놈이 어디 로 사라졌는지 도대체 모르겠군요. 에잇 참, 오늘은 일진이 아주 사나운 날이라니까!" "흐흠, 내 지나치다 보니까 이 숲 속에서 검광 두 줄기가 번쩍 번쩍 하더군. 하나는 푸른색, 하 나는 누른색, 그래서 여기에 우리 문하 인물이 적수를 만나 싸우고 있는 줄 알았지. 내 나름대로 돕겠다고 급히 달려왔는데 벌써 달아나 버렸구먼. 헤헤헤, 그 녀석들, 내가 오는 걸 보구서 꽁지 가 빠져라고 도망쳤어. 아무렴, 어디 내 상대야 될라구. 거참 아까운데... 한걸음 늦는 바람에 놓쳐 버리다니!" 진랑은 화산(華山) 열화조사(烈火祖師)가 제일 아끼는 문하제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고강한 검술 을 믿고 온갖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은 서슴지 않고 저질러 온 자였다. 그가 연성한 검법은 홍주검 (紅蛛劍), 모태도 그 지독스런 검광을 보고서 형님으로 모실 정도였다. 진랑 또한 당초에는 모태의 사부 금신나한 법원의 제자였으나 후에 법원이 열화조사를 자기 패 거리로 끌어들인 후 그에게 넘겨 주었으므로 지금은 사문(師門)이 틀리기는 하지만 모태와 동문 사형제간이 되는 셈이고, 이들 두 사람의 우정은 각별하게 두터운 사이였다. "형님, 고맙소! 그놈들이 어째서 꽁무니를 뺐는가 했더니만 형님이 오는 걸 보고서 삼십육계 줄 행랑을 쳤구려. 어쨌든 나는 오늘 형님 덕분에 살아났소." "난 지금 열화조사 어르신의 명을 받고 서장(西藏) 땅으로 약초를 캐러 가는 길일세. 달아나지만 않았다면 내 손에 깡그리 죽어 없어질 놈들인데, 눈치 한번 되게 빠른 작자들이로군." 한창 사형, 사제 둘이서 허풍을 떨고 보비위를 맞추고 떠벌리는 판인데 난데없이 부근에서 누군 가 퇴박을 주었다. "진랑 요녀석! 혼자 잘난 체 지껄이지 말아라. 그 사람들이 변변치 못한 네 녀석의 사부 체면을 봐줘서 피한 거란 말이다! 네놈들 불초 후배하고 손을 써 봐야 입만 더러워질 뿐이지... 그것도 모 르고 염치좋게 의기양양들 했구나! 허허허." 성미가 불같은 진랑이 남한테 비웃음을 당하고 가만 있을 리 만무했다. 울화통이 뻗쳐 대뜸 욕 지거리부터 퍼부었다. "어떤 쥐새끼가 감히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는 거냐? 어서 썩 나서지 못할까!" 그 말도 끝나기 전이었다. 철썩! 진랑의 왼뺨에 야무진 소리와 함께 몸이 기우뚱거릴 정도로 호되게 따귀 한 대가 올려부쳐졌다. 얼마나 억세게 맞았는지 진랑은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후딱 돌아서서 맞아 싸울 자세를 갖추었 으나 사방천지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눈 씻고 봐도 없었다. 도대체 아우 모태의 면전에서 이게 무 슨 창피란 말인가! 그는 분노와 수모감에 전신이 와들와들 떨렸다. 어금니를 '뿌드득' 갈아붙이면서 다시 욕설을 퍼 부었다 . "제미랄, 후레자식 같으니! 비겁하게 몰래 숨어서 암습이나 하는 놈이 무슨 영웅이냐. 배짱 있거 든 이리 썩 기어나와라! 어디 나하고 승부를 겨루어 보자!" 게거품을 물고 악을 고래고래 지르는 진랑의 곁에서 또 귀신처럼 대꾸가 들려왔다. "누가 암습을 했나? 이봐, 난 바로 자네 눈앞에 있단 말일세. 화산에 들어박혀 수십 년 헛공부했 구먼. 내가 안 보이나? 쯧쯧!" 진랑은 듣다못해 열화통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한두 마디 더 주고받으면서 이 작자가 서 있는 방향을 가늠해 둔 다음 불시에 비검을 날려 두 동강으로 쪼개버릴 심산이었다. 그래서 짐짓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응수했다. "나야 본래 시력이 나쁘지만 말씀이야, 보아하니 자네 수단이 보통 아닌 모양인데 정체를 드러 내고 나하고 한번 겨뤄보지 않으려나?" "아직은 네 녀석이 나를 볼 해가 되지 않았어. 때가 되면 날 안 보려고 해도 보지 않고는 못 배 길 걸!" '옳지, 됐다!' 진랑은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했다. 좌측방 십여 보 거리 이내에 목표가 있다고 어림 잡고는 상대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번쩍 들어 세차게 내뻗었다. 위잉, 위잉! 갑자기 캄캄한 어둠 속을 찢으며 다섯 줄기 붉은 검광이 직선으로 날아갔다. 상대방이 서 있던 지점을 중심으로 검광은 산지 사방 흩어져 난무하면서 주위 수십 장 둘레를 갈갈이 찢어놓았다. 숲 속은 은통 검광에서 뿜어나온 붉은빛으로 물들고 그 빛이 스치는 곳마다 나뭇잎과 가지들이 비오듯 우수수 꺾이고 잘려 떨어졌다. 방원(方圓) 이십 장 이내의 숲은 한바탕 돌개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듯 온통 수라장으로 화했다. 만약 그 안에 사람이나 짐승들이 숨어 있었다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도록 난도질을 당했을 게 분 명했다. 진랑과 모태는 귀를 곤두세우고 인기척을 살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사람의 숨결은 들리지 않았다. "형님, 됐수다. 그 미친 놈은 죽은 게 틀림없소. 이제 나하고 자운사로 돌아갑시다." 모태는 미처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바람결이 휙! 하고 일더니 가뜩이나 앞니가 부러져 퉁퉁 부어오른 주둥이에 퍽 소리가 나도록 주먹이 강타를 먹였던 것이다. "어쿠!" 겨우 피가 멎은 상처가 다시 터지면서 입과 코로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태의 얼굴은 악귀와도 같았다. 뽀개질 듯 아픈 골통 때문에 가슴은 분노로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어느 새 그 손에는 적음검이 뽑혀 들렸다. 허나 다음 순간, 어두운 숲 속을 뒤흔드는 웃음소리가 귀청이 터져라고 울렸다. "으하하핫! 네 녀석들 오대파의 검법이 굉장하다더니 그것밖에 안 되는구나. 어디 자네들 사양 말고 남은 재간이 있거든 마저 다 부려보게. 덕분에 나도 견식 좀 넓혀야겠구먼." 유령과 같은 음성이었다. 진랑과 모태는 등골이 오싹했다. 분하고 원통하기는 하지만 상대방의 무공은 자기네들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어둠 속에서 마주쳤다. '이런 상황에 비검을 날려 발버둥쳐 봐야 헛일이다. 그러나 한번 뽑은 칼인데 그냥 꽂을 수야 있겠는가!' 사형, 사제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보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야앗! 이앗!" 숲 속은 또 한 차례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성난 소경 지팡이 두드리듯 맹목적으로 쏘아대 는 검기가 애꿎은 나뭇가지와 풀덤불만 결딴내면서 난무했다. 그러나 두 눈에 불을 켜고 둘러봐 도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미친 년 널 뛰듯 비검을 날리는 사이에도 모태와 진랑은 보이지 않는 주먹에 무수히 두들겨 맞 았다. 아까 맞았던 따귀는 그래도 약과였다. 이번만큼은 얼마나 호되게 패는지 얼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아팠다. 매번 주먹이 날아든 방향으로 비검을 던져봤으나 공연히 나뭇가지만 잘라내고 되돌아 올 뿐이 다. 어디 그뿐인가. 그 보답은 반드시 호된 주먹질로 갚아지곤 했다. 마침내 모태가 먼저 견디다 못해 손을 들었다.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적수라고 생각된 것이다. 그는 진랑을 향해 들릴락말락 소근거렸다. "형님, 안 되겠소.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르는 놈하고 싸워봐야 헛일이오. 달아납시다!" 진랑도 별 수가 없었다. 사형 체면에 먼저 뛰지는 못했으나 그 역시 기진맥긴, 벌써부터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으므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제각기 보검으로 전신을 보호하면서 슬금슬금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 다. 유령이 독하게 마음먹었다면야 둘 다 벌써 죽은 몸이었겠지만, 그래도 그 지겨운 주먹질을 한 대나마 덜 맞으려고 잔뜩 경계하며 물러서는 것이었다. 요행히도 유령은 그들을 추격하는 기척이 없었다. 숲을 벗어나자 두 사람은 다리야 날 살려라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일단 도망치기 시작하니 뒤쫓는 것이 없어도 공포심은 더욱 부풀어났다. 젖 먹은 힘까지 다해 달렸다. 이윽고 무사하게 자운사 대문 앞까지 도달했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숨 이 턱까지 차올라, 내쉬지도 들여마시지도 못할 정도였다. 두 사람이 허둥지둥 절 안으로 들어서는 통에 자운사 방장 지통(智通)마저 놀라 깨었다. "아닌 밤중에 도대체 이게 웬 소동들인가? 어디서 그토록 낭패를 당하고 왔소?" 모태와 진랑 앞에 나타난 지통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모태는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다. 외딴 집에 그럴싸한 계집이 있길래 재미 좀 보려다가 주순과 맞닥뜨린 일부터 절대절명 위기에 처했을 때 진랑이 나타나 구원해 준 일, 유령하고 온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싸우고 쫓겨온 일까지 낱낱이 보고했다. 모태의 설명을 다 듣고 난 후, 지통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묵묵히 깊은 생각에 잠겨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는지라, 모태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통방장님, 말씀 좀 해주십시오. 주순을 구해 달아난 놈하고 그 유령 같은 놈은 도대체 어떤 놈들입니까?" 지통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숲 속에서 자네와 처음 싸웠던 인물은 아미파 출신 검객인 듯싶네. 우연히 거길 지나치다가 주 순이 자네한테 몰린 걸 보고서 의협심을 일으켜 도와주었을 테지. 그러다 진랑 도우가 오는 걸 발견하고서 슬그머니 주순만 데리고 달아났겠지. 그 자가 왜 도망쳤는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정체를 드러내서 우리와 원수를 맺기 싫었거나, 아니면 진랑 도우(道友)를 제압할 승산이 없기 때 문일 걸세. 하지만 그 사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바로 뒤에 나타난 괴인일세. 소리도 형 체도 없다니 나로서도 얼른 짐작하기가 매우 어렵구먼. 그러나... 그러나 말일세. 만약 괴인이 바 로 그 자였다면... 바로 그 자가 나타나서 참견을 했다면 말일세. 우리 항렬 동배(同輩)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노선배이신 금신나한 법원, 화산의 열화조사 같은 분일지라도 그 자한테 걸 렸다간 모두 맥도 못 출 걸세!" "옛?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들이 비검을 쏘아도 그 자가 반격하는 건 한 번도 못 보았습니 다. 기껏해야 은신법(隱身法) 좀 쓸 줄 아는 듯한데, 어째서 법원선사나 우리 사부 열화조사도 못 당한단 말씀이지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무렴, 제아무리 유령 같은 놈이기로서니 그 정 도 경지에 이르렀단 말씀은 믿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동감입니다. 제 스승 금신나한께서 그 자를 못 당하신다니 될 법이나 합니까? 그거 너 무 심한 말씀입니다!" 진랑과 모태 두 사람은 놀라운 가운데서도 자기네 스승까지 들먹이자 당장 반박부터 했다. 사실 그들로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통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두 분은 모르실 거요.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 강호상에 갑자기 늙수그레한 괴인이 출현했소. 그 자는 성미가 괴팍해서 닥치는 대로 남의 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했거든. 중원 남북(南北) 일대를 통틀어 어떤 검객, 협사든지 자기 하는 일에 동조하지 않는 인물에겐 가차없이 결투를 신청했소. 아마 그 자의 손에 패한 사람은 수도 헤아릴 수 없을 걸. 당시 그 자는 벌써 신검합일(身劍合一), 상승의 어검술(御劍術)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신형(身形)을 마음대로 바꾸어서 나타났다 감췄다 하는 술법까지도 연성했단 말이오." 당시 강호상의 인물들은 그 이름도 몰랐다. 출신 내력은 물론 사문(師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바람처럼 표연히 나타났다간 뭇사람들의 눈앞에서 연기 흩어지듯 사라지는 데다 번개같이 쾌속하 고도 무서운 검법을 칭송하여 추운수(追雲搜)라는 별호를 붙혀 주었다. 그 후 우연히도 추운수의 본명이 밝혀졌다. 강호의 호사가들이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추운수 백 곡일(白谷逸)이 사랑하는 아내 능설홍(凌雪鴻)과 함께 개원사(開元寺)에 은둔하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이 무렵, 강호 무림의 흑도(黑道)들은 추운수란 이름만 들어도 기가 꺾여 몸을 도사리고 못된 짓 을 저지르다 나는 새 그림자만 보아도 혼비백산, 꽁지빠지게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는 분명 정파 의 대들보였다. 그런데 오십 년 전, 추운수 백곡일은 평생의 반려자였던 능설홍이 개원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홀 연듯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는 강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또 어느 누구 그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었다. 마침내 무림계에는 추운수도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소문은 점차 사실로 굳어지고 세 월이 흐를수록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잊혀져 갔다. 지난 해였다. 열화조사는 서장에서 자기 볼일을 마치고 화산으로 돌아오던 중 성도에 들렀다가 우연히도 시장 바닥에서 약장수 노릇을 하고 있는 추운수를 발견했다. 전설처럼 까마득히 잊혀졌던 추운수를 보는 순간 열화조사는 놀라움에 앞서 오십여 년 전 자기 가 그의 손에 패했을 때 무릎을 꿇고 맹세하던 말이 떠올랐다. 추운수가 살아 있는 한 자기는 절대로 세상에 나타나지도 않겠거니와 어떤 분쟁에도 뛰어들어 싸우지 않는다는 맹세였다. 열화조사는 허둥지둥 화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폐관정수(閉關靜修)에 들어가 일체 두문불출했 다. 폐관에 들기 직전,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아무런 사유없이 절간을 벗어나 사고를 저지르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 명령은 각처에 흩어진 흑도 무리들의 근거지에도 전해졌다. 성도 교외 자운사에도 전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 나 역시 자운사 안에 기거하는 모든 사람들한테 단단히 당부했다네. 그리고 며칠 전까지 아 무런 탈도 없었지. 한데 이틀 전인가 이상한 일이 생겼네. 모태 아우의 문하제자 장량이란 녀석이 한밤중에 절을 몰래 빠져나간 것일세. 동료들한테는 '성 안에 들어가서 부잣집 하나 털어 용돈 좀 마련해 오겠다'고 간 녀석이 지금까지도 종무소식이 아닌가? 하도 궁금해서 사람을 풀어 여기 저기 수소문도 해 보고 관청 근처와 부잣집 동네를 기웃거려 냄새를 맡아봤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속으로 숨었는지 도대체 그림자조차 없단 말일세. 지금 두 분 말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그 추 운수란 놈의 독수에 걸린 것 같네. 그 자 아니고는 이토록 감쪽같이 해치울 수가 없거든." 지통의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모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길로 성 안으로 들어가 장 량의 행방을 뒤질 판이다. 신행무영 분모란 장량이 누구냐? 고심참담 끝에 겨우 하나 얻은 제자 놈이다. 성격도 자기를 쏙 빼어 닮았고, 근골 또한 뛰어나 한 가지를 가르쳐 주면 두 번 묻는 법 이 없다. 그 얼마나 애지중지하던 제자녀석인데 행방불명이 되었더란 말이냐? 그는 당장 제자를 못 찾으 면 추운수란 놈을 찾아가 사생결단을 낼 작정이었다. 지통이 황급히 그를 붙들어 앉혔다. 그리고 온갖 말로 설득했다. 지금은 경솔히 나설 때가 아니 다. 시기가 오면 자연 모든 게 밝혀질 것이고, 그때 가서 결전을 벌여도 늦지 않다. 장량의 행방 에 관해서는 자기가 책임지고 계속 수소문하겠다고 거듭 신신당부를 했다. 모태가 조금 진정하자 지통은 다시 진랑을 향해 부탁했다. "우리 절에서 매일같이 재미없는 사고가 연거푸 일어나고 있소. 그 때문에 내 예감이 아주좋지 않구려. 진랑 도우도 예서 오래 머물지 말고 내일 당장 서장으로 떠나도록 하시오. 가시는 김에 내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소. 여행길을 좀 돌아서라도 타전로(打箭爐)에 들러서 온신묘(瘟神廟) 의 방장 분면불(紛面佛)더러 <비천야차(飛天夜叉)> 마각(馬覺)을 데리고 성도까지 빠른 시일 안 에 오라고 전갈해 주시오. 그 두 사람의 도움이 꼭 필요하오. 어떻소, 그렇게 수고 좀 해주시겠 소?" 진랑이 헛기침을 하더니 대답했다. "그러지요. 저 역시 이번에 스승님의 분부를 받들고 서역으로 가는 길에 타전로에 들러 효월선 사(曉月禪師)님을 뵈오려던 참이었습니다. 대사님의 말씀까지 듣고 보니 그 일 아니더라도 들러야 겠군요. 좋습니다. 내일 새벽에는 일찍 떠나겠습니다!" "고맙소!" 지통은 사의를 표한 다음 즉시 측근을 시켜서 문하제자 사금강(四金剛)과 오늘낮에 찾아온 손님 일행을 대웅전으로 모이도록 지시했다. 손님들이란 바로 서천(西川) 일대를 주름잡는 노상강도 <비천오공(飛天蜈蚣)>을 비롯하여 <다 보진인(多寶眞人)> 김광정(金光鼎), <독각망(獨角莽)> 마웅(馬雄), <분수서우(分水犀牛)> 육호(陸 虎), <요해은룡(鬧海銀龍)> 백진(白縉)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자운사의 호법승 사금강들이었다. 대력금강(大力金剛), <철장승(鐵掌僧)> 혜명(慧明)과 무적금강(無敵金剛) <새달마(賽達摩)> 혜능(慧能), 그리고 다비금강(多臂金剛) <나 타(那咤)> 혜행(慧行)과 다목금강(多目金剛) <소화신(小火神)> 혜성(慧性)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조금 후 김광정 일행도 모여들어 좌정했다. 지통은 지명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잡고 앉을 때까지 묵묵히 눈을 감고 있더니 이윽고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그대들을 밤중에 모이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요즈음 이 자운사에 심상치 않은 사건 들이 자주 일어나므로 그대들에게 알려 주고 함께 상의하기 위해서요. 그보다 먼저 옛날에 있었 던 일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군. 으흠... 오래 전, 우리 사조이신 태을혼원(太乙混元)조사께서는 아 미파의 검선(劍仙)들과 깊은 원한을 맺으셨소. 그래서 아미산 옥녀봉에서 검술로 결투한 결과 아 미파의 으뜸가는 검선 <건곤정기 묘일진인(乾坤正氣, 妙一眞人)> 제수명(齊漱溟)에게 한쪽 팔을 잘려 잃으셨소. 물론 승부는 조사께서 참패하셨지. 조사 어르신께서는 참패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 고 다시 모산(茅山)으로 들어가 십 년 동안 고심참담 수련 끝에 <오독선검(五毒仙劍)>을 연마해 내셨소. 그리고 또 아미파에 도전하여 황산 절정봉 위에서 두 번째 검술대결을 벌였소. 이번만큼 은 태을혼원 조사의 완벽한 승리였지. 한데 그분이 아미파 검선들에게 결정적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그 결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동해삼선(東海三仙)>이 나타나서 참견을 했소. 소위 동해삼 선이란 자들은 현진자(玄眞子)와 고행두타(苦行頭陀), 그리고 노괴두 <추운수> 백곡일, 이렇게 셋 을 지칭하는 것이오. 아무튼 그들은 화해를 붙인답시고 나서서 조사 어른께 불리한 판정을 내렸 던 거요. 말다툼 끝에 안 되니까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우리 조사 어른은 고행두타한테 오독검 (五毒劍)을 빼앗기고, 또 현진자의 무형검(無形劍)에 찔려, 원통하게도 칠 일 후 세상을 떠나고 마 셨소. 임종하실 무렵, 조사께선 몇몇 신임하던 문하제자와 내 스승 탈탈대사(脫脫大師)를 불러들 여 연검법(煉劍法)을 전수하시고 아울러 검법이 완성되는 날 아미파로 찾아가 원수를 갚아 달라 는 유언을 남기셨소. 그 후 내 스승이신 탈탈대사는 연검 도중 주화입마(走化入魔)에 빠져 목숨을 잃으셨고... 나는 성도로 옮겨왔소. 그리고 이 황폐한 자운사를 맡아 십여 년 간 죽을 고생 끝에 겨우 오늘날 이토록 번창한 사찰로 일으켜 놓았지. 이곳에 와서 나는 옛날에 하던 대낮 영업은 전혀 손도 안 댔소. 모자라는 게 있어서 부득이 출입을 해야만 할 때는 일체 깊은 밤중에 했소. 그래서 여지껏 현지 관원들이나 부호, 일반 백성들한테 의심은커녕 적지 않은 신망을 얻었소. 헌 데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거요. 보름 전부터 모태 아우의 제자 장량이 내 분부를 어기 고 밤마다 들락거리더니, 그저께는 성 안에 눈독들인 여자를 보아 놓고서 동료들한테는 '몸도 좀 풀고 용돈도 벌러 간다'고 나간 후로 영영 돌아올 줄 모르는 거요. 사방 천지에 알아봤으나 전혀 행방을 찾지 못했지. 분명 임자를 만나 저승으로 간 게 아닌가 생각되나 더 수소문해 볼 작정이 오. 그 일만 가지고도 속을 썩이는 참인데 또 기막힌 변고가 이 자운사 안에서 벌어지고 말았소." "무슨 변고가 일어났습니까?" 망나니 제자녀석 때문에 뭇 영웅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모태가 벌개진 얼굴로 얼른 그 말끝을 잡고 늘어졌다. 모태의 얄팍한 심사를 들여다보기나 하려는 듯, 지통은 실처럼 가늘게 눈을 뜨고서 지그시 바라 보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물론 자네야 알 리 없지. 말하자면 그것도 내가 한때 자비심이 우러난 탓으로 화근덩어리를 남 긴 셈이네만... 며칠 전, 나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환희불전(歡喜佛殿)에 들어가 한창 기분좋게 즐 기고 있었다네. 그런데 갑자기 암실문의 석종(石鐘)이 땡그렁, 땡그렁! 울리는 거야. 그래서 처음 엔 자네가 돌아온 줄로만 알았지 뭔가. 헌데 그게 아니었어. 귀주(貴州) 땅에 사는 서생(書生) 열 일곱 놈이 서울로 과거보러 올라가던 중 성도에 들러 유람하다가 숲 속에 있는 우리 절을 발견하 고 참배하러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손님을 맞던 지객승(知客僧) 녀석이 한눈 파는 사이에 그 녀석들이 멋도 모르고 운방(雲房)으로 들어왔다네. 잘못 들어왔어도 곱게 나갔으면 또 모를 텐 데, 그 가운데 한 놈이 암실의 기관을 건드리고 비밀 지하통로가 열리니까 우르르 환희불전까지 따라 들어오지 않았는가 말일세... 벌거숭이 계집들이랑, 제자놈이랑 그놈들은 이미 볼건 다 보고 말았으니 그걸 어쩌는가? 하는 수 없이 모조리 서방(西方) 극락세계로 보낼밖에. 열일곱 녀석을 깡그리 결박지워 놓고 내 손으로 하나씩 하나씩 목줄기룰 끊어 저승행차시켰지. 그런데 맨 마지 막 한 놈이 말썽거리가 됐네. 나이는 십칠팔 세쯤, 제법 말쑥한 생김새를 한 놈인데, 이게 털썩 꿇어 엎드려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지 않겠나? 어찌나 애절하게 울어대는지 그만 내 간장마저 녹아버리고 말았다네. 도저히 내 손으로 못 죽이겠더군. 그래 생각다 못해 그 녀석을 뒷산 석뢰 (石牢) 속에다 가둬 놓고선 동아줄 한 바리, 칼 한 자루, 독약 한 봉지를 넣어 주고, 목을 매든 칼 로 찔러 죽든, 아무거나 택해서 자결하라고 했지. 그랬더니 이놈 하는 말이 '죽어서 아귀(餓鬼)는 되기 싫으니까 두세 끼 실컷 먹고 죽겠다'는 거야. 생각해 보니 기왕 죽을 놈 소원 하나 못 들어 주랴 싶어, 만두 오십 개를 더 밀어 넣으라고 했지. 그 정도면 기껏해야 사흘밖에 못 살 테니까 말일세. 그리고 나흘째 가 봐서 그때까지 자결을 안했으면 다시 멱줄기를 끊어버릴 셈이었어. 몸 집도 왜소한 데다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어 보이길래 도망치리라곤 꿈에나 생각했겠는가? 게다가 그 석뢰의 천정은 얼마나 높은지 자네도 알지 않나? 그래서 아주 안심을 하고 있었지." 지통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더니, 지금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 그 이튿날과 사흩날 연달아 이틀 동안 천둥 번개에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어. 나흘째 되던 날 아침, 제자녀석더러 가보라고 했지. 가서 아직 살아 있거들랑 목을 끊어오라고 말야. 헌데 뜻 밖에도 제자녀석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없어졌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 하고 내 직접 가봤더 니만 정말 없어졌지 뭔가. 그놈이 탈출해 도망한 거야. 절간 안팎, 사면팔방에는 우리 패거리들이 꽉 들어찼는데 그 약해빠진 선비놈이 달아나야 어딜 갔겠나 싶어 사람들을 쫙 풀었지. 바깥으로 통하는 출입구란 입구는 다 봉쇄해 놓고 이 잡듯이 샅샅이 수색을 했네. 그래도 도무지 흔적이 없어.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귀신도 곡할 노릇이 아니고 뭔가?...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했지. 그놈 은 우리 자운사의 비밀을 목격했고, 또 자기 동료 십육 명이 한꺼번에 몰살을 당했으니 가만 있 을 리가 없다. 일단 탈출에 성공했다면 성내로 달려가 관가에 고발할 것이고, 관헌들은 곧장 날 잡으러 쳐들어 올 게 틀림없지! 그래서 그날부터 절간 대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관군의 습격에 대비했지. 일단 관군이 쳐들어 오면 한바탕 신나게 살륙전을 벌인 다음 곧바로 자네 스승 금신나 한이 계신 오대산으로 달아나 투신할 계획이었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제까지 여드레가 지나서 도 아무런 낌새가 없는 거야. 그래, 슬그머니 사람을 놓아 관청의 동정을 살피게 했더니, 관군 역 시 평상대로 근무할 뿐, 전혀 출동할 기척이 없었네. 그러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말을 끝내고 나서 지통은 한숨을 풀 내쉬더니 고개만 절레절레 내둘렀다. 사금강의 막내, 다목금강 <소화신> 혜성이 스승을 위로하느라 듣기 좋은 말을 했다. "사부님, 그 선비녀석은 세상 물정도 모르고 방구석에만 틀어박혔던 책벌레가 아닙니까? 어린녀 석이 그토록 험한 꼴을 봤는데 제정신이 아닐 겁니다. 달아났다 하더라도 얼이 빠져서 엉뚱한 데 로 뛰다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 묵사발이 됐거나, 아니면 놀란 병이 도져서 산속 어디선가 오 들오들 떨다 지쳐 죽었을 겁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그러자 지통은 또 고개를 내저었다. "말이야 그렇지만, 우리로선 대비책을 세워놓아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추운수란 놈까기 성도에 나타난 바에야 더욱 철저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어. 조만간에 그놈을 틀림없이 여기로 찾아와 시 비를 걸 테니까... 내 이 밤중에 너나 영웅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것은 모두들 패를 짜서 경계도 해야겠거니와 몇몇은 내 편지를 가지고 각처에 흩어진 동도(同道)들을 초빙해 오도록 부탁하기 위해서네. 절에 남는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일체 외출을 금한다. 그리고 원군(援軍)이 오는 대로 다시 계획을 짜겠다." 사금강을 비롯한 자운사 승도(僧徒)들은 방장의 엄명이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머지 무리들 역 시 손님인 주제에 주인더러 이래라 저래라 주장할 처지도 아니었다. 대웅전 심야회의는 그것으로 두말없이 끝났다. 회의가 끝난 후, 유독 모태만이 자유로이 외출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지통을 졸랐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주순을 찾아내어 사생결단을 내야만 직성이 풀릴 모양이었다. 지통은 말리다 못해 골치가 지끈거려 하는 수 없이 마음대로 하라고 내뱉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 진랑이 먼저 자운사를 떠났다. 타전로를 거쳐 머나먼 서장까지 가는 길에 오른 것 이다. 뒤이어 지통의 서찰을 지닌 청병(請兵) 사절들이 떠났다. 그들은 중원 천지 사방에 흩어져 있는 흑도의 무리들을 성도 자운사로 몰아올 것이다. 모태는 조반을 마치기가 무섭게 홀몸으로 자운사를 떠났다. 방장 지통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성내로 들어가 주순을 찾아서 복수할 꿈을 불태우면서. 자운사의 요지경 古廟逢兇, 衆孝廉禪堂遭毒手 石牢逃命, 敢公子夜雨越東牆 귀주성(貴州省) 귀양현(貴陽縣)에 대대로 농사짓고 학문을 하는 주씨(周氏) 가문이 있었다. 이 집안은 조상 때부터 크게 번창하여 말대에 이르러서는 형제 아홉이 모두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돈독했다. 그리하여 제각기 혼인을 하고서도 뿔뿔이 분가해 살지 않고 한집 안에 대가족 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아홉 형제 모두가 학문이 뛰어나 제일 낮은 벼슬이 수재(秀才)요, 그 나머지는 거인(擧人) 또는 진사(進士)에 올라 있었다. 형제간의 우애가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각별할 뿐 아니라 동서 간에도 화목해서 담장 밖으로 큰 소리 한번 나가는 법이 없었다. 주씨 가문은 이른바 천륜(天倫)의 복락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지 나친 말이 아닐 것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하늘의 시샘인지 대대로 풍성한 자손이 그들 대에 이르러 뚝 끊기고, 오직 일곱째아우 주자경(周子敬)만이 삼십칠 세 늘그막에 겨우 아들 하나를 두었다는 사 실이다. 결국 아홉 형제의 대를 이을 자식은 주자경의 아들 운종(雲從) 하나뿐인 셈이었다. 주운종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성품이 독실했다. 부친을 비롯하여 두 숙부와 여섯 백부 모두가 자못 풍족한 재산을 지녔으므로 대를 이을 이 자식에게는 뭣이든 원하는 대로 해주었고, 금이야 옥이야 일족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으면서도 교만하거나 사치를 즐기기는커녕 일 심전력 학문에만 열중하여 십오 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십팔 세에는 거과(擧科)에 차점자로 급제하여 귀주 일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운종은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경사(京師)로 올라가 문과 대과(大科)에 응시할 야망을 품었다. 그 뜻을 밝혔을 당초, 아버지와 백부, 숙부들은 머나먼 만릿길 험한 여로와 객지생활이 걱정되어 금지옥엽과 같은 외아들을 만류했지만, 청운의 꿈에 부풀은 주운종의 공명심을 꺾지 못하고 힘 좋은 하인 왕복(王福)과 서동(書童) 소삼아(小三兒)를 딸려서 상경하도록 허락했다. 주운종은 마침내 길일을 택해 숙부모와 고향 벗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하인과 동자를 거느리고 일로 상경길에 올랐다. 며칠 후 주운종 일행은 중도에서 같은 연배의 길손 몇몇과 만났다. 그들 역시 과거를 치르려고 상경하는 선비들이었다. 낯설고 외로운 여로에 동반자를 만나고 보니 나중 시험장에서는 비록 경 쟁자가 될지언정 우선 심심하지 않으니 좋았다. 귀주성에서 경사로 올라가는 대로(大路)는 하나뿐이라서 갈수록 동행이 늘어 마침내는 십칠 명 에 이르렀다 이들은 하나같이 제 고향에서 내노라 하는 귀한 집 자제들인 데다 상경해서 대과에 장원급제를 노릴 만큼 수재들이라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금방 의기투합, 형제와 같은 정분으로 맺어졌다. 하루는 노상에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주운종이 기발한 제안을 꺼냈다. "여보게들, 우리가 서울에 거의 도착했으나 과거날까지는 아직도 몇 달 좋이 남지 않았나? 옛사 람 말씀에, '선비는 독서만권(讀書萬卷)에 행로만리(行路萬里)라' 했으니, 우리 모두 만 권 책을 읽었으면 만 리 여행길도 걸어야 할 게 아닌가? 실제 경험과 학문의 이론은 다같이 중한 것, 우 리 이 기회에 명승고적을 한 차례 유람하고 올라가는 게 좋겠네. 다들 어떤가?" 일행 가운데 거인 급제를 한 송시(宋時)란 친구가 선뜻 그 말을 받았다. "주형 그 말씀, 나도 동감이오. 오래 전부터 촉지방에 명승이 많다고 들었는데, 성도에 들러서 어디 며칠 동안 놀다가 가기로 합시다." 모두들 젊은 나이라 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일행 십칠 명이 한 사람도 이의없이 찬성했다. 그 들은 수종들던 하인들에게 책이랑 지필묵(紙筆墨)이랑 골치썩이는 짐보따리 지워서 먼저 중경(重 慶)으로 떠나보낸 다음, 홀가분하니 일용품만 싸가지고 길을 돌아 성도 유람에 나서기로 결정했 다. 주운종만은 동자 소삼아를 거느렸을 뿐, 나머지 십육 명은 모두 혈혈단신이었다. 하인 왕복은 듣자하니 기가 막혔다. 생전 제 집 대문 밖 물정도 모르는 귀공자들이 겁도 없이 단신 유람길에 나선다는 것은 고생을 사서 하는 꼴밖에 안 된다. 앞길에는 위험스런 사고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왕복은 주운종을 간곡히 만류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송시가 허풍까지 섞어 엄포를 때렸다. "내 객지생활 십 년에 세상천지 안 디뎌 본 길이 없네! 자넨 염려 말고 젊은 주인 시키는 대로 떠나게!" 왕복은 아무리 혀가 닮도록 말려봤지만 헛수고라, 젊은 주인이 고집부리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 에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동자 소삼아 녀석을 구석으로 불러내다 젊은 주인을 잘 모시 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기야 성도까지 뻗은 길은 탄탄대로니 별 위험은 없으리라고 자위하면서 왕복은 중경을 향해 무거운 발길을 떼었다. 과연 주운종 일행 십칠 명은 도중에 별탈없이 희희낙락하면서 마침내 성도에 당도했다. 그날로 큼직한 객점 하나를 잡아 숙소로 정해 놓고서, 이튿날부터는 날이 새기 무섭게 제 세상이나 만난 듯 왁자지껄 명승고적을 찾아다녔다. 며칠이 지났다. 그날도 주운종은 일행과 함께 한바탕 유람이 끝나자 한두 번 들른 적이 있던 성 도의 명문 망강루(望江樓)로 달려갔다. 점심 겸해서 간단히 한 잔씩 걸치기 위해서였다. 망강루 주인은 일행이 왁자지껄 몰려들자 반색을 하면서 이층 누각으로 모셨다. 십칠 명 가운데 집안이 가난한 서넛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잣집 자제들이라 돈을 물쓰듯 했다. 이런 봉들을 극진 히 모시지 않는 술청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들은 칙사대접을 받으며 의기양양 누각 층계를 올랐다. 일행이 엊그제처럼 당연한 듯 으스대며 특등석으로 들어가려 하자 주운종은 그것을 말렸다. "여보게들, 특실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닐세. 의자가 좀 푹신하다고 그 갑갑한 방 안에 옹기종기 꿇어앉는 것보다 차라리 이 탁 트인 술청에 널찍하게 앉아서 바깥 강물이나 시원스레 전망하는 게 어떤가?" "그것도 운치가 있겠군!" "여보, 주인장! 우리 서넛씩 한 탁자에 앉을 테니까, 창문이나 난간 쪽으로 자리 좀 만들어 주시 오!" 동료들은 난간에 의지하여 술잔을 기울이는 풍류도 괜찮겠다 싶었는지 저마다 한마디씩 주문을 했다. 주인의 분부를 받고서 점원들은 서둘러서 창문 난간 쪽의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생겼다. 바깥 강물 경치를 전망할 만한 창문 쪽에는 탁자가 나란히 넷이 놓 였는데, 그 가운데 탁자를 앞서 온 손님 하나가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손님만 없다 면 일행이 너댓씩 앉아서 한 잔 기울이면 안성맞춤인 것이다. 식탁 하나를 온통 차지한 손님은 도인이었다. 벌써 얼큰하게 취했는지 식탁 위에 두 팔을 겹쳐 놓고 머리를 푹 파묻은 채 한창 낮잠을 자는 판이었다. 망강루 주인은 그 꼬락서니를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른 아침부터 어슬렁어슬렁 기어 들어 와 퍼마시기 시작해서 정오가 되도록 끈덕지게 술동이를 비우더니, 이젠 팔자 좋게 코를 골아가 며 꿈나라로 들어간 것이다. 이게 벌써 며칠째냐 말이다. 손님이 북적거리지 않을 때야 자리가 수두룩하니까 진종일 퍼마신 들 어떠랴만, 오늘처럼 새끼 봉들이 근 스물이나 몰려온 날에는 저렇게 식탁 하나를 통째로 차지 한 손님은 달갑지 않을 뿐더러 은근히 밉살스럽기까지 했다. 부잣집 젊은이들이 술을 마실 때는 운치있는 분위기부터 따진다. 그 흥취를 궁상맞은 도인 하나 가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덕분에 좌석도 모자랄 판이다. 주인은 우선 세 자리에 손님을 앉혀 놓고선 슬금슬금 도인 곁으로 걸어가 헛기침을 두어 번 했 다. "저어, 손님, 손님!" 대답이 없었다. 또 두어 차례 손끝으로 밀어보았다. 그래도 도인은 깨어나기는커녕 코고는 소리 만 드르렁, 드르렁! 더욱 커질 뿐이었다. 일행 가운데서도 제일 성미 급하고 방자한 친구가 송시였다. 도인의 하는 꼴을 보자하니 당장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한바탕 욕설을 퍼부으려고 입을 열려는 참인데, 불쑥 도인이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깨어난 첫마디가 걸작이었다. "술 한 병 더 채워다 주게!" 그제서야 사람들은 도인이 큼직한 호로병을 껴안고 잠들었던 것을 깨달았다. 불쑥 내민 그 호로 병은 붉게 옻칠을 먹인 것이었다. 또 술을 달라고 하니까 주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도인께서는 또 자시렵니까? 아침 일찍부터 와서 그만큼 드셨으면 됐지, 어째 또 마시려구... 몸 도 좀 생각해얍지요. 이쯤해서 돌아가시는 게 좋겠구먼요!" "개 방귀 같은 소리! 자넨 술집을 열었으면 술이나 팔 일이지 웬 말이 그리 많은가? 술청에서 손님더러 술 먹지 말란 작자는 난생 처음 보는구먼. 잔소리 말고 어서 이 병에다 가득 채워오게!" "아, 예, 예!" 대답은 해놓고서 주인은 간사스런 웃음을 가득 담은 말씨로 다시 도인한테 수작을 걸었다. "도인나으리, 소인이 좀 부탁드릴 게 있는뎁쇼." "나 같은 거렁뱅이한테 뭘 부탁한단 말인가?" "여기 창문가 식탁 넷은 어제 이분들이 예약해 놓은 자리입니다. 오늘 이 시각에 오시기로 말씀 입죠. 도인께서 아침 일찌감치 오셨길래 저희는 금방 드시고 떠날 분이라고 생각해서 그 자리를 내드렸습지요. 헌데 지금 예약 손님들께서 오셨으니 어쩝니까? 저쪽 자리로 옮겨 드시도록 하시 지요." 도인은 그 말을 듣자 벌컥 성을 냈다. "남이 돈 내고 먹는다면 나도 돈 내고 마시는 거야! 그런데 어째 날더러 오라가라 귀찮게 굴어? 이 자리가 예약되었으면 왜 미리 내가 들어왔을 때 말해 주지 않았어? 흐흠, 네 녀석들, 내가 출 가한 도인이라고 아주 깔아뭉개려고 하는구먼? 그럼 좋아. 오늘 해질 때까지 이 자리에 앉아서 실컷 마셔 주지!" 벌써부터 속이 화끈 달아 씨근벌떡거리던 송시였다. 보아하니 영낙없는 거렁뱅이 도인 꼬락서니 인데 어거지가 말씀이 아니다. 송시는 울화통이 치미는 걸 한번 더 참고 도사 앞으로 다가섰다. "이 좌석은 우리가 예약한 자릴세! 영감이 양보를 안하겠다면 이 어르신네한테 맛 좀 봐야겠어! 나중에 후회 말라구!" "허어, 자넨 나하고 초면인데 내가 뭣 때문에 양보해야 하는가? 그래, 비키지 않겠다면 자네가 어쩔 테야!" 송시가 쌍심지를 돋구더니 대뜸 손바닥으로 도인의 뺨따귀를 후려갈겼다. 철썩! "송군, 참게나!" 주운종이 황급히 말리려 들었지만 한발 늦었다. "어이쿠!" 뜻밖에도 송시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어디 그뿐인가? 따귀를 쳤던 제 손목을 부여잡 고 그 자리에서 '고추먹고 맴맴' 돌기만 할 뿐, 어쩔 줄을 몰랐다. 도인의 뺨따귀를 분명 때리기 는 때렸는데, 어찌 된 셈이냐? 도인의 얼굴은 살덩이가 아니라 쇳덩어리, 바윗덩어리였다. 무쇠 담벼락에 손찌검이라도 한 것처럼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고 염통까지 찌르르! 하니 아팠던 것이다. 송시는 선불맞은 범처럼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놈이 양반을 쳤다! 양반을 쳤어! 끌어내다가 초주검이 되게 패야 돼! 관청으로 끌고 가자구!" 일행들이 너도나도 와르르 도인에게 덤벼들었다. "잠깐만, 형씨들 내 말 좀 들으시오!" 주운종이 황급하게 그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십칠 명 일행 가운데 제일 주머니가 두둑한 주 운종이었다. 또 도중에서 일행들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은자를 뿌려온 그였다. 누가 말을 꺼낸 것도 아니면서 주운종은 어느덧 은연중에 일행의 우두머리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리는 데야 뿌리칠 사람도 없었다. 일행들은 도사를 마구잡이로 움켜쥐려다 그만 손을 놓았다. 그리고 주운종이 어쩌려는가 주목을 했다. 주운종이 다가올 때부터 그 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유심히 살펴보고 또 살피고 있었다. 두 눈빛에서 쏘는 듯한 신광(神光)이 번뜩이는 것을 발견한 주운종은 속으로 이 도인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고향집에 있을 적에 늙은 하인 왕복이 늘 뭐라고 했던가? 강호에 나가 보면 기인이사(奇人異士) 가 숱하게 많다고 했다. 그리고 함부로 건드리거나 무례하게 굴었다간 크게 다칠 거라고 하지 않 았던가? 그는 이 도인도 왕복이 말한 그런 부류의 인물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하물며 잘못은 우 리 측 송형한테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는 일행을 진정시켜 놓고 도인을 향해 돌아서서 공손히 사과했다. "도사님, 고정하십시오. 저희 열일곱은 모두 동년배 벗들인데 함께 상경하던 길에 유람차 성도를 찾아들었습지요. 오늘 아침에 망강루에 올라 술 한 잔 마시면서 경치를 즐기려고 자리 안배를 하 다보니 공연스레 도사님을 귀찮게 해드렸습니다. 좌석일랑 옮기지 않으셔도 좋으니 노여움을 푸 시고 저희를 꾸짖지나 마십시오." "내 언젠 꾸짖으러 왔는가? 자네도 봤지? 저 녀석이 날 때렸지, 난 손가락 하나 끄덕도 안했어!" 이 무렵, 송시의 오른손은 시뻘겋게 퉁퉁 부어올랐다. 얼마나 아픈지 끙끙 신음소리까지 나오면 서도 입으로는 여전히 욕지거리였다. "저 죽일 놈의 영감이 나한테 요술을 썼어! 관청으로 끌어가 혼찌검을 내야 한단 말이야! 요술을 썼단 말야!" 주운종은 연신 눈짓을 보내 그 입을 막으면서 다시 도인에게 간청했다. "제 동료가 경거망동해서 도사님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무슨 신통한 수법으로 벌하셨는지 모르 오나 저토록 아파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온즉, 도사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부디 낫게 해주십시 오." "흠, 제녀석이 잘못하고 누구더러 고쳐 달라는 게야? 손찌검질도 못하는 주제에 사람을 치니까 다칠 수밖에. 난 손끝 하나 까딱도 안했어! 신통한 수법이라니? 그게 뭐 말라비틀어진 말뼈다귀 야? 난 모르네!" 도인 역시 고집불통, 심술이 대단했다. 망강루 주인이 보자하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기네 가게 안에서 손님끼리 싸움이 붙어 젊은 것이 늙은이 따귀를 치지 않나, 늙은이는 또 무슨 수단을 부렸는지 젊은녀석의 손바닥에 장 난질을 쳐놓고 시치미를 떼고 앉았지 않나, 이쯤 되면 봉이고 거렁뱅이고 다 귀찮았다. 장사가 되 든 말든 우선 이 싸움부터 말려 화해를 붙여야 했다. 그는 주운종에 이어 덩달아 거렁뱅이 도인한테 애걸복걸 빌었다. 자리를 옮기라는 말은 취소할 테니, 제발 고정하시고 손님 손을 고쳐 주십사 통사정했지만, 도인은 여전히 딴전만 부리고 요지 부동이었다. 한참만에야 도인은 주운종의 안타까운 정성이 통했든지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내 본래 곧 죽을 녀석한테 화를 낼 생각은 없었네. 주먹질도 할 줄 모르는 녀석이 힘을 잘못 써서 손목 힘줄이 늘어난 게야. 자네 처럼 살아날 사람의 체면을 봐서 내 고쳐 줌세. 저 녀석을 이리 데려오게. 어디 얼마나 아픈가 보세." 도사의 입에서 '죽을 녀석... 살아날 사람'이라는 뜻모를 말이 나왔어도 누구 하나 귀담아 듣는 자가 없었다. 송시는 여전히 길길이 날뛰면서 '찢어죽일 놈의 도사, 기름에 튀겨죽일 늙은이!'라는 등, 억수같 이 악담과 저주를 퍼부어댔다. 주운종은 잠자코 송시를 부축해서 도인 앞으로 데리고 갔다. 마지못한 척 끌려가면서도 송시는 광망(狂妄)스런 오기에 욕설을 그치지 않았다. 도인이 성을 내 고 치료해 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서 주운종이 달랬지만 송시는 막무가내로 계속 입을 다물지 않았다. 난처한 기색을 지은 채 도인 앞으로 끌고 오자, 뜻밖에도 그 도인은 송시의 욕설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도리어 주운종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자네, 난처해 할 것 없네. 곧 죽을 녀석한테 내가 성깔을 부릴 리가 있겠나? 마음놓게나!" 또 이상한 소리를 했으나 주운종은 귓결로 흘려버렸다. 도인은 송시의 손목을 끌어다 자기 양손바닥에 끼고서 슬금슬금 한 차례 문지르는가 싶더니 이 내 풀어 주었다. "됐어! 다음부턴 절대 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손찌검하면 못 쓴다. 알겠느냐?" 훈계 한마디를 던진 다음 도인은 송시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고 나서 들릴락 말락 한마디 탄식을 내뱉았다. 송시는 도사가 탄식을 하든 기침을 하든 피를 토하든 알 바 없었다. 얼른 손바닥부터 들여다보 니 아직 벌건 기운은 남아 있으나 저릿저릿하던 아픔도 부기도 어느 새 말짱하게 가시고 없었다. 주운종은 그의 입에서 또 악담이 쏟아질까 봐서, 재빨리 끌어다 일행한테 맡기고는 다시 도인에 게 다가와서 고마운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주인장더러 도인이 드신 술값, 또 드실 술값 모두를 자기 앞으로 달아놓도록 분부했다. 그러자 도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난 벌써 마실 만큼 마셨네. 이 호로병에다 배갈 다섯 근만 채워주면 저녁 끼니나 때울까?" 주운종은 주인한테 호로병을 안겨 주고 얼른 담아 오라고 했다. 도인은 술이 가득 담긴 호로병을 어깨로 넘겨 등에다 턱 걸쳐 메더니 주운종한테 고맙단 인사 한마디는커녕 고개 한번 돌리지도 않고 휘적휘적 걸어 내려갔다. 도인이 떠나자 젊은이들은 또 한 차례 왁자지껄 소란을 피웠다. "저 영감, 요물 아냐?" "아니야, 건달일세. 남을 속여서 술잔이나 뺏아 먹는 작자지!" "그 말이 맞는구먼.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남이 술값 내어줄 때까지 끊질기게 버티 고 시비나 거는 거야. 그래야만 공술이 생기지. 안 그런가?" "허긴 그래. 우리 맘씨 고운 주형이 그 술수에 넘어갔어!" 주운종은 그 도인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길로 전송했다. 그러다가 문 득 그 이름을 물어본다는 걸 잊었다 싶어 얼른 창가에 기대어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일행들이 뭐 라고 떠들든 아랑곳하지 않고 술청을 나간 그 도인이 어디로 가는지 살피기로 한 것이다. 이윽고 술청 문을 나서는 도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창 오가는 행인들, 장사꾼들로 북적대 는 거리였다. 어깨를 부딪고 지나칠 정도로 붐볐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가? 그 도인이 걸어가고 있는 길도 초만원이다 싶게 붐비지만 그의 신변 일이 자 주위에 무슨 보이지 않는 장벽이라도 있 는 것처럼 행인들이 다가왔다간 소스라쳐서 비켜 나가곤 했다. 말하자면 도인 주변의 전후 좌우 에 널찍한 공백이 터져 있는 형국이었다. 이상하다 여기면서 주운종은 이름을 물어볼 요량으로 버럭 소리쳐 불렀다. "도인 어른! 잠깐만....." 흔들흔들 느린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도인이 흘낏 고개를 돌려 이층 누각 쪽을 치올려 보았다. '옳다. 이제 되돌아 오려나 보다!'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그 도인의 가던 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 어, 이것 보게. 어찌 된 일이야?" 너무나 어이없어 더 부르지도 못하고 창 밖만 멍청하니 바라보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아당 겼다. "여보 주형, 우리도 한 잔 먹어야 할 게 아닌가? 술 좀 시키세." 돌아보니, 한바탕 왁자지껄 토론을 벌이던 일행들이 모두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술과 안주 몇 가지를 주문해 놓고서 다시 거리로 눈길을 돌렸을 때, 이미 도인의 뒷모습은 자취도 없었다. 주운종은 아쉬운 마음을 품은 채로 다시 일행들과 어울려서 마시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참 만 에 얼큰하니 취하게 되자, 주운종의 뇌리에선 도인의 기억도 점차 흐려져 갔다. 정체 모를 거렁뱅이 도인에게 한바탕 호되게 손찌검을 당한 송시는 그 술청이 싫었다. 아니 싫 다기보다 정나미가 떨어진 것이다. 그는 몇 잔 들고 나더니 객점으로 돌아가자고 보챘다. 일행들 역시 그 기분을 이해하겠는지라, 하나 둘씩 잔을 내려놓고 말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날 술값을 주운종이 떠맡아 계산하고 객점으로 돌아온 것은 말할 것도 었었다. 이튿날 아침 조반을 끝내자 어제 낮에 혼줄이 났던 송시는 벌써 기분이 풀어졌는지 또 놀러 나 가자고 일행들을 재촉했다. 도성 밖 교외에 있는 자운사가 명승고찰(名勝古刹)이라며, 그 절 구경 을 가자는 것이었다. 물론 자운사는 성도에서도 이름난 선림(禪林)이요 고찰(古刹)이다. 건물의 규모도 웅장하고 으리 으리하거니와 온갖 기화요초(奇花瑤草)로 가꾸어진 정원, 우아하고도 그윽한 산사(山寺)의 분위기 는 그곳을 찾아드는 이의 불심(佛心)에 더욱 깊은 감명을 더해 주었으며, 자운사 승려 모두가 청 규(淸規)를 굳게 지켜 불도(佛道)에 열심이기로 촉지방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 소문은 물론 주운종 일행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성도 남문 밖 이삼십 리만 나아가면 자운사가 있고, 또 유람객, 참배객이 많은 만큼 절간부근에 이들을 상대로 객점과 음식점과 술청 이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단 말도 들었다. 주운종은 일행 십육 명에게 제안을 했다. "성도 성내의 명승지는 이미 두루 다녀보았고, 이제 남은 데라 곤 남문밖 자운사뿐인 모양이오. 그러니까 아예 오늘로 성도를 떠나서 자운사 부근 마을에 객점 하나 정해 놓고 절구경에 들어갑 시다. 그럼 다시 성내로 들어올 것도 없이 내일 저기서 곧장 중경으로 출발할 수 있지 않겠소!" 송시가 제일 먼저 찬성했다. 체통을 있는 대로 깎이고 손찌검을 당한 성도 시내에 아예 넌멀머 리가 난지라, 한시바삐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머지야 무슨 주견(主見)이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서둘러 짐을 챙겨 가지고 훌훌 객점 문을 나섰다. 정오 무렵, 한 삼십 리 길을 걸었더니 과연 마을이 나타났다. 객점도 있고 제법 큼직한 음식점도 여럿 줄지어 있었다. 자운사를 물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원래 이 마을 땅은 대부분 자운사의 소유인 데다, 또 참배객을 상대로 장사해서 먹고 사는 사람 들이라 손님에게 친절하기가 짝이 없었다. 객점 하나를 잡아서 짐보따리를 내려놓고 일행은 입맛대로 점심을 들었다. 그리고 주운종의 동 자 소삼아만 남겨 짐을 간수하라 이른 다음, 일행 십칠 명은 자운사를 향해 떠났다. 반 리쯤 가다 보니까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나무마다 수백 년 좋이 해묵은 희귀종들인데 그것 도 길만 내놓고 총총하게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나무숲 사이로 붉은 담장 한귀퉁이가 보였다. 시원한 바람결에 섞여 승려의 독경소리, 풍 경(風磬)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것이 과연 소문대로 청수(淸修)의 복지(福地)라 이를 만했다. 일행은 절문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드렸다. 지객승이 나왔다. 그는 참배객 십칠 명을 안으로 맞아들여 차와 과자를 대접했다. 삼사십 리 길을 걷느라 피곤했던 다리가 풀리자, 일행은 지객승의 안내를 받으며 불전(佛殿)과 선방(禪房)들을 두루두루 살피고 다녔다. 지객승의 법명은 요일(了一), 아주 학식도 깊고 예절 또한 바른 승려였다. 그 자상하고도 은근한 태도가 주운종의 마음에 꼭 들었다. 반나절 가량 절간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니 일행은 또 피곤해졌다. 눈치를 챈 지객승 요일이 그 들을 또다른 전방으로 안내해서 쉬도록 해주었다. 그 선방은 불당에서도 훨씬 뒤쪽에 자리잡고 있어, 웬만한 참배객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아늑했다. 방안 또한 정결하기 짝이 없었다. 벽마다 명인(名人)들의 묵적(墨蹟)이 가득 걸린 데다 탁상에 가지런히 정돈돼 놓은 필방(筆房) 도구마저 눈길을 끌었다. 서편 구석 선상(禪狀)에는 삼베 포단(蒲團)들이 놓여 있었다. 저녁 불공 드릴 때 승려가 쓰는 정선용(靜禪用) 깔개라는 설명이다. "방장스님을 뵙고 불도에 관해 토론하고 싶은데, 모셔오시겠소?" 누군가 묻자 요일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 스승 지통께선 후원에서 참선중이라 일체 진연(塵緣)을 사절하시고 좀처럼 나오시지 않습 니다. 여러 시주님들, 훗날 인연이 닿으면 뵙겠지요." 일행은 모두들 아쉬운 한숨만 내쉬었다. 이때 송시가 벽에 걸린 시화(詩畵) 폭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요일을 돌아보고 손가 락질해 가리켰다. 그리고 막 입을 열어 물으려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동자승이 들어왔다. "방장스님께옵서 지객스님을 모셔오라십니다." "알겠다. 곧 가마." 요일은 응답을 하고 나서 일행에게 당부했다. "저희 절은 건물도 많고 길도 꾸불꾸불 갈래진 곳이 여럿입니다.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우니, 제 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곧 다녀오겠습니다." 지객승이 총총걸음으로 선방을 나가자 방금까지 야릇한 기색을 지은 채 벽화를 주시하던 송시가 대뜸 주운종더러 물었다. "주형, 이것 좀 봐! 선방 안의 모든 서화는 하나같이 명품이요, 절필인데 이 그림은 아주 안 어 울리거든... 부처님 머리에다 똥을 뿌린 격이야. 안 그렇소?" 선방은 무척이나 넓었다. 동쪽 창문과 남쪽 출입문을 제외하곤 서쪽 벽에는 양양(襄陽)의 미불 (米不)이 그린 <연우도(煉雨圖)> 한 폭, 또 북쪽 벽에는 방효유(方孝孺)의 <백석청송도(白石靑松 圖)> 중간 폭이 걸렸고, 그림 가장자리에 화제(畵題)가 적혀 있었다. 푸른 원앙새 몇 해 만에 난초를 활짝 피울꼬? 백학은 때때로 새끼를 찾아드네. 그러나 송시가 지적한 것은 그게 아니라 선상(禪床) 한가운데 덩그러니 걸려 있는 <팔선과해(八 仙過海)>란 그림이었다. 그 화폭은 필치도 거칠고 저속한 데다가 솜씨 또한 어설프기 짝이 없었 다. 다른 사람들도 처음 선방에 들어섰을 때 이 그림을 보긴 했지만 그저 지나가는 눈길로 무관심하 게 넘겼을 뿐인데, 새삼 송시의 말을 듣고서 우르르 몰려가서 기웃거렸다. 주운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선상 위에 올라앉아서 <팔선과해> 족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더 니 그 아래 석종(石鐘)을 치는 데 쓰는 망치 한 개가 얌전히 가로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운종은 손에 잡히는 대로 그것을 집어들고 뒤적거리다가 무심결에 그만 족자 아랫부분을 건드 리고 말았다. 그림을 고정시킨 못대가리는 박은 지 꽤나 오래되어 처음부터 흔들흔들 움직였는데, 망치로 툭 치기가 무섭게 푹 들어가고 말았다. 그뿐인가. 족자가 빙그르 돌면서 사람의 키 높이에 폭이 한 자 가량 되는 공간이 드러났고, 거기에 조그만 돌종(石磬) 한 개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어째서 스님들은 별것도 아닌 돌종을 이렇게 깊숙이 감춰 놓았을꼬?' 의아스레 생각하면서 그 돌종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등 뒤에 섰던 송시가 그의 손에서 망치를 냉큼 빼앗아 가지고 말릴 틈도 없이 돌종을 쳤다. 땡! 종소리는 얼마나 맑고도 깨끗한지 모를 지경이었다.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송시는 신바람이 났는지 연거푸 두 번을 더 두드렸다. 땡그렁! 땡그렁! 다음 순간, 종 뒤쪽의 벽에 난 구멍에서 젊은 화상의 머리통이 불쑥 나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주운종은 그것을 보고서 당황했다. "송형, 장난치지 마시오.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린 걸 지객 스님이 아시면 언짢아하리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뎅, 뎅, 뎅!' 종소리가 세 번 울리더니 뒤이어 '차르르, 차르 르!' 쇠사슬 감기는 소리와 함께 담벼락이 갈라지면서 자그만 출입문 하나가 일행의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것만이라면 젊은이들은 신기하게 여겼을 뿐, 더 이상 놀라지도 않았으리라. 그런데 그들은 희 한한 것을 목격했다. 바로 그 문 앞에 화려한 옷차림을 한 미녀가 오똑 서 있다가 낯선 젊은이들 이 눈에 뜨이자 '악!' 소리를 지르면서 허겁지겁 사라지는 것이었다. 주운종을 비롯한 십육 명의 청년은 놀랍기도 하려니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입빠른 송시부터 분개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런 데다 암실을 만들어 놓고 중놈들이 여자를 숨겨 놓다니... 암만해 도 이 자운사 방장은 못된 작자로군. 여보게들, 우리 저 문으로 따라 들어가서 대머리 화상 놈한 테 욕이나 한바탕 퍼붓고 떠나세!" "송형, 잠깐만!" 성큼 비밀문으로 들어서려는 송시를 주운종이 황급히 말렸다. "송형,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에 우리 집 하인 왕복이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소. 어떤 암자든 절간이든, 그곳의 승려가 안내해 주지 않으면 절대 함부로 그 경내를 나다니지 말라고 말이오. 왜 냐하면 출가승은 대부분 삼계(三界) 오행(五行)을 벗어나 청정적멸(淸淨寂滅)을 누리고 속세의 티 끌 한 톨 묻히지 않지만, 그럴 듯이 위장하고서 암암리에 강도, 살인, 간음 따위 악행을 일삼는 악승(惡僧)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였소. 그래서 외부 사람들한테 평소 그들의 행각이 드러 나지 않으면 그런 대로 조용하지만 어쩌다 우연히라도 발각당하는 날에는 당장 살심(殺心)을 일 으켜 해친단 말이오. 이 자운사와 같은 청정한 불지(佛地) 안에 어째서 암실 기관이나 부녀자를 감추어 두었겠소? 그야 뻔한 일이 아니오? 그러니 우리 모른 척하고 소동을 일으키지 맙시다. 공 연히 이곳 승려들의 치부(恥部)를 들춰냈다간 방귀뀐 놈이 성을 낸다고 악심이나 품고 해치려 들 면 어쩌겠소? 우리처럼 약해빠진 선비들은 꼼짝없이 눈 뜨고 당할밖에. 그리 되면 재미 적을 거 요." 그 말을 듣고서 일행들은 또 한바탕 왁자지껄 의논이 분분했다. 그런데 문득 동료 중에서 한 사 람이 무얼 보았는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운종형, 저것 봐! 우리가 들어온 문이 어딜 갔지?" 일행들이 잠에서 깬 듯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돌아다보니 과연 좀전에 들어섰던 출입문이 온데 간데 없었다. 문이 있던 자리에는 어느 새 시커먼 담벽이 가리워졌을 뿐이었다. 그뿐인가. 삼면 벽에 걸어 놓았던 족자도 시화폭도 감쪽같이 사라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기절초풍 할 노릇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달려가서 담벽을 밀어 보았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열몇 명의 젊은이 가 안간힘을 다 써도 매미가 돌기둥 잡고 씨름하는 격이었다. 이제 그들이 선방에서 빠져나갈 길이라고는 벽쪽에 있는 비밀문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놀 라움과 공포에 질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운종이 창문을 손가락질했다. "이런! 창문이 있잖아? 문이 없으면 들창을 넘어가지 뭐! 그들은 창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리고 문짝을 힘껏 밀쳤다. 그러나 웬걸! 바깥에서 걸어잠갔는지, 문짝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것만이라도 또 괜찮았다. 문틀이 나무라면 때려부수고라도 나갈 텐데, 이게 모두 강철로 주조 된 게 아닌가! 창호지를 바른 창 살은 하나같이 만(卍)자 무늬인데 그것조차도 엄지손가락만큼이 나 굵은 철봉을 구부려 만든 것이었다. 문틀 창살 할 것 없이 모두 겉에다가 붉은 칠을 입혀서 얼핏 보아선 전혀 알아볼 수 없게 위장 해 놓았던 것이다. 창살 틈으로는 주먹 한 개 내밀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다급해진 청년들이 사면 벽을 마구 두드리고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분노에 공포심까지 겹치 니 아무리 골샌님 같은 서생들의 힘이지만 거세기 짝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사면 벽이 와르르 무 너질 듯 기세가 대단했다. 쿵쾅, 쿵쾅! 쿵!..... 그러나 곧이어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이쿠!" "아얏! 아파!" "어이구, 내 발이야!" 사면 벽은 흙이나 나무판자가 아니었다. 단단한 화강석을 쌓아 만든 것이었다. 선방 안에서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고래고래 악을 썼어도 바깥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들은 꼼짝없이 갇혀버린 것이다. 고함을 지르던 일행은 제풀에 지쳐 이번에는 송시한테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이게 다 송형이 저 돌종을 건드린 탓이지! 그걸 어쩌자고 치는 거야?" "글쎄, 누가 아니래? 송형은 너무 경솔해서 탈이야! 이제 어떻게 하지?" "아니야, 여기 중놈들이 나빠! 이런 기관장치까지 해 놓은 걸 보면 아까 주형의 말대로 살인 강 도나 음탕한 중놈들이 분명해." "이보게들, 송형 탓은 해서 뭣 하나? 어쩌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우리 모두 양반들이고 또 인 원이 많지 않은가? 제깐 중 녀석들이 우리를 어쩔 텐가? 이쯤 혼을 냈으면 조금 있다 지객승이 와서 풀어줄 걸세." 의논이 분분하다 보니 고요한 선방(禪房) 안은 시끌벅적 시장바닥으로 변하고 말았다. 주운종은 동료들의 끝없는 입씨름에 질렸는지 귀를 막고 크게 소리쳤다. "여보게들, 이 지경에 와서 누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떠들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네. 죽을지 살지 아무것도 모르는 판국인데 누구 탓만 해서 어쩔 텐가? 조용히 앉아서 빠져나갈 궁리나 해보세. 그동안 저쪽에서도 무슨 변화가 있겠지!" 시끄럽던 선방 안은 금시 쥐죽은 듯 잠잠해졌다. 모두들 하나같이 턱을 괸 채로 이맛살을 찌푸 리고 온갖 궁리를 다 짜내보았으나 독 안에 든 쥐들이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동네북 뭇매질당하듯 한바탕 동료들에게 면박을 당한 송시는 아무래도 비밀문 쪽에 관심이 쏠린 모양으로 한참을 넋빠지게 바라보더니, 문득 결심이 섰는지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형씨들, 우리 모험을 해봅시다! 기껏해야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니겠소? 나갈 문도 없고 또 중놈 들은 대가리 하나 디밀지 않는 판인데 이렇게 앉아 끙끙대 봐야 어쩌겠소? 차라리 저 비밀 문 안 으로 들어갑시다! 가보면 뭐가 있을 게 아니겠소? 중놈이 있으면 붙잡아서 방장한테 안내시키고, 방장을 만나면 우리가 무심결에 기관장치를 발견해 건드리게 되었다고 솔직히 해명합시다. 그럼 저들이 우릴 안 풀어주겠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절간 물건을 깨뜨리거나 못 쓰게 만든 것도 아니고, 또 이곳을 지나치는 여행자들이니까, 설혹 절의 비밀을 알았다고 쳐도 입을 꼭 봉하 고 소문 내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소? 우리 일행 십칠 명은 모두 양반 자제요, 또 과거를 보아 입 신양명할 인재들인데 제아무리 담대한 악승들이기로서니 설마 우리 모두를 깡그리 몰살하기야 하 겠는가 말이오. 일단 어떻게 해서든 이놈의 절만 빠져나간다면, 그 후 문제는 우리들이 마음먹기 에 달렸으니까, 우선 백방으로 사정해 봅시다." 송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또 한바탕 옥신각신 끝 에 결국 송시의 의견대로 따르게 되었다. 일행 십칠 명은 송시를 선두에 세우고 줄줄이 비밀문으로 들어섰다. 그 문은 겨우 한 사람이 지 나칠 만큼 비좁았다. 앞장선 송시의 뒤를 따라 나머지 십육 명이 굴비두름처럼 차례로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다. 제일 끝에 따르는 사람이 주운종이었다. 이것이 죽음의 행렬, 가련한 첫발인 줄 은 하늘만 알았으리라. 문에 들어서자, 아래로 향한 십여 칸의 계단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계단을 다 내려서자 곧바로 기 나긴 비밀통로가 뻗어 있었다. 지하 통로는 몹시도 어두운 데다 좌우 벽이 꼭 끼도록 비좁았다. 그들은 양쪽 벽 사이에 눌려 죽을 것만 같아서 걷는 다리가 후둘후둘 떨렸다. 다행히도 사오십 보 간격으로 등잔 한 개씩 걸려 있어 겨우 희미하게나마 길을 밝혀 주었다. 백여 보쯤 나아갔을까. 통로가 끝나면서 앞쪽에 또 십여 칸의 오르는 계단이 보였다. 그 계단 위 에서는 광선 몇 줄기가 뿌옇게 비치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윽고 계단을 올라갔 다. 계단 좌우의 벽은 암석이었다. 그 계단 끝이 바로 출입구, 답답하고 어두운 통로의 끝이기도 했다. 출입구를 벗어나면서 그들은 산속을 뚫고 나온 기분이었다. 사실 그것은 인공(人工)으로 쌓은 가 산(假山)이기도 했다. 눈앞이 탁 트이면서 아름다운 화원이 가득 다가왔다. 기화요초가 아주 조화 를 이루어 기막히게 꾸며져 있어 낙원이라 할 만큼 매우 아름다웠다. 어둠 속을 한참 헤매던 끝에 갑자기 밝은 데로 나서니 현기증이 일도록 눈부셨다. 그들은 꽃밭 을 헤치고 걸으면서도 흥겨운 감이 들지 않았다. 장차 무슨 일이 닥쳐올 것인가. 그 불안감만 가 득할 뿐이었다. 그들은 꽃밭에 눈길 한번 제대로 던질 여유도 없었다. 그저 길이 나 있으니까 묵 묵히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갈 뿐이었다. "으하하핫!" 난데없이 괴상한 웃음소리가 일행들을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시주님들, 아주 흥취있게 노시는군!" 이어서 거친 비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송시를 비롯한 청년 십칠 명은 그 자리에 우뚝서고 말았다. 휘둥그래진 눈망울로 앞을 내다보았 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선방에서 지객승이 나간 이후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화단의 길 끝, 안마당을 가로지른 저쪽에 거대한 전각(殿閣)이 우뚝 서 있었다. 전각으로 오르는 돌계단 중턱에 우람한 체구의 화상 하나가 다리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흉악스런 생김 새, 헌걸찬 거구의 그 화상은 웃통을 훌렁 벗어부친 알몸에 넙적다리까지 걷어올리고 발도 맨발 이었다.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그 곁에는 승무(僧舞) 바라춤을 출때 마주 쳐 울리는 비발(飛鉢)이 접시 쌓듯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버티고 앉은 화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두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치렁치렁한 붉은 외투로 몸 을 감싼 두 여인은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얼굴은 온통 짙은 화장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송시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슬금슬금 화상 앞으로 다가섰다. "대사님, 저희 학생들이 문안드립니다." 그러나 흉악스런 화상은 두 눈을 내리감은 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송시는 또 궁색한 말을 늘어놓았다. "저희들은 여행길에 유람차 온 선비입니다. 귀사의 지객스님께서 안내해 주시어 경내 불당을 두 루 참배하던 중 뜻밖에 기관을 잘못 건드려 나갈 길도 잃고, 어쩌다가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 니다. 대사님, 제발 누구 좀 시켜서 저희들을 내보내 주십시오. 나가서는 절대로 자운사란 말도 입밖에 내지 않겠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아무리 간곡하게 간청해도 화상과 두 여인은 두 손을 모아 합장 한 채 묵묵부답 눈조차 뜨지 않 았다. 기다리다 못해 송시는 또 한 번 반복해서 간청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다른 동료가 울화통을 참지 못하고 버럭 호통을 쳤다. "스님, 이러지 마시오! 당신은 출가인의 신분으로 어찌하여 절간에 비밀 기관장치를 해 놓았으며 부녀자들까지 감추었소? 우리는 모두 서울에 올라가 과거시험을 치를 양반 자제들이란 말이오! 오늘 우리를 곱게 보내준다면 입도 봉하고 아무 일도 없을 테지만, 끝내 거절한다면 여길 나가는 대로 관가에 고발해서 당신네 죄상을 엄히 다스리겠소!" 이쯤 엄포를 때리면 제아무리 흉폭한 악승이라도 벌벌 떨고 풀어 주지 않으랴 싶었다. 이윽고 화상은 눈을 감은 채로 말문을 열었다. "참, 한심한 놈들이로군. 천당가는 길은 가지 않고 제 발로 문도 없는 지옥으로 들어오다니... 그 래 너희들 소원대로 내가 손 좀 써 주지!" 뜻밖의 말이었다. 청년들은 일이 재미없게 돌아간다고 직감했다. 그들은 서로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눈앞의 화상이 아무리 사납게 보이기는 하지만 한 사람뿐, 그 밖에 여자 둘이 있어 봐 야 십칠 명의 젊은 힘을 당해낼손가? 주먹을 불끈 쥐고 그들은 한 걸음씩 돌계단 앞으로 다가갔 다. 한꺼번에 덮쳐 상대방 셋을 제압해 놓고 탈출구를 찾아 내뺄 판국이었다. 화상이 번쩍 눈을 떴다.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징글맞은 웃음을 흘리면서 곁에 쌓인 비발 두 장 을 집어들었다. 챙그렁! 놋쇠장이 마주쳐 요란한 소리를 내기가 무섭게 청년들의 발걸음이 멎어버렸다. 제 발로 선 게 아니라 갑자기 양어깨를 무지막지하게 억센 손아귀에 움켜잡혀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 던 것이다. 너나 할것없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도대체 어느 틈에 접근했는지 삼사십 명의 흉물스런 화상들 이 동료들을 하나씩 병아리 채듯이 움켜잡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자기도 이미 꼼짝 못하게 죄 인 몸이었다. 그리고 곁에는 칼을 든 화상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그들은 놀랄 틈마저도 없었다. 삽시간에 십칠 명의 청년들은 옴짝달싹도 못하게 칭칭 결박당하 여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뒤이어 또다른 화상들이 나무기둥 십여 개를 안고 나타나더니 섬돌 앞 에서 이십 보 남짓 거리를 두고 앞마당에다 하나씩 가지런히 세워 박았다. 청년들은 어느덧 기둥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챙, 챙! 비발이 두 번 울리자 화상들은 썰물처럼 물러갔다. 이 무렵, 청년들은 말 한 마디도 없었다. 혼비백산, 오장육부가 다 터져나가고 얼이 빠졌는지 모 두 혼절해 버린 것이다. 그중에서도 주운종은 담이 조금 커서 기절하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쯤 되었으면 자기들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평생 품어온 포부도 못 펴보고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이다. 문득 고향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 어머니... 백부님, 숙부님들! 운종이 오늘 죽습니다. 모두 인생 황혼을 바라보시는 연세 에 이 못난놈 하나만 의지하시고 아홉 집안 대를 잇기만 소원하시더니, 이제 그것도 물거품이 되 고 맙니다그려! 이 어린것은 철없이 놀기만 탐하다가 천지개벽할 화근을 건드려 마침내 몸도 죽 고 가문도 죽게 되었습니다. 이 원통지극한 사연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어머니, 아버지!' 비통을 못 이겨 주운종은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것도 잠깐, 이윽고 목을 놓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화상은 주운종이 애절하게 통곡을 하는 게 재미있는지 배를 움켜잡고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좌우 여인들을 돌아보고서 말했다. "너희들 보았지? 저 궁상떠는 꼬락서니라니,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로구나! 제 집에선 점잖이나 빼면서 거들먹거리고 '이리 오너라, 저리 가거라!' 호령을 내리거나 하인배를 턱짓으로 부리던 녀석들이 남의 손에 결박당하고 죽을지 살지 모르는 지경에 빠지니까 그 호기는 다 어딜 갔는지 젖먹이처럼 빽빽 울어대기만 하는구나. 밥버러지들 같으니라구! 얘들아, 춤이나 한바탕 멋 들어지게 추어 우는 애기 좀 달래 주려므나!" "법지(法旨)를 삼가 받드오리다!" 두 여인은 응답소리와 함께 걸치고 있던 외투를 훌쩍 뒤로 벗어 던졌다. "으앗!" 대성통곡을 하던 주운종의 입에서 울음 대신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이미 섬돌 아래로 뛰어내려 너울너울 춤을 추는 두 여인, 백설 같이 고운 어깨며 팔뚝이며 출렁 출렁 흔들리는 젖무덤 아래로 배꼽마저 춤을 추고 있었다. 흐드러진 엉덩이, 매끈하게 빠진 다리가 번쩍 들릴 때마다 여자의 비밀스런 숲 속마저 거침없이 드러났다. 그녀들은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로 춤을 추는 것이다. 처음부터 치렁치렁한 외투 속에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있었을 줄이야! 챙, 챙, 챙! 비발이 연거푸 울리자, 점차 양편 낭하에서 승려들이 호금(胡琴)이며, 피리며, 북, 장구, 나팔을 들고 쏟아져 나오더니, 이윽고 자지러지게 풍악을 잡았다. 두 여인의 풍만하고도 윤기도는 나체가 한낮 태양빛을 받으며 풍악소리에 맞추어 더욱 신나게 어지러이 돌아갔다. 실로 기가 막힐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난데없는 풍악소리에 혼절했던 청년들도 하나 둘 깨어났다. 결박지운 말뚝 사이로 감돌며 난무 하는 여인들의 검은 머릿결, 옥같이 희고도 흐드러진 다리가 그들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향수와 지분(脂粉) 냄새에 청년들은 또 한번 얼이 빠졌다.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무심결에 가까이 다가서서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발을 떼다가는 문득 꽁꽁 동여매여 자유를 잃은 자신을 깨닫고 가슴이 터질 듯한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혀 떨었다. 그들은 비로소 이 나녀(裸女)들 의 난무가 자기 죽음 앞에 바쳐지는 제사라는 것을 알았다. 이윽고 가련한 희생자들의 입에서는 비통한 울음소리, 아우성이 마구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하늘 에 사무치도록, 지하의 귀신마저도 소름끼쳐 놀라 깰 만큼 애절한 통곡성은 흥겨운 풍악소리와 어우러져 으스스한 공포감을 자아냈다. "아이구, 어머니!" "부처님, 살려주세요!" "나 죽네! 나 죽어!" 눈물 콧물에 흥건히니 땀까지 뒤섞어 엉망진창이 된 얼굴, 애간장을 끊는 통곡성, 죽음을 목전에 둔 그들에겐 흥겨운 가락도 미녀들의 나체도 아무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환 청(幻聽)이요, 헛것이었다. 전각 앞뜰은 울음바다에 풍악소리에 온통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춤추던 여인마저도 희생자들 의 비통한 통곡성, 처절한 표정을 보고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위협적인 분부를 받은 터라 춤을 멈 추지는 못하지만 그녀들도 모르게 팔 다리에 맥이 풀리고 장단 가락이 흐트러져 날렵하던 맵시가 굳어버렸다. 한창 흥겨워하던 화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청년들의 통곡성이 풍악소리를 가리고, 신바람나게 돌아가던 여인들의 춤마저 혼란을 일으켜 어지러워진 것이다. 이쯤 되면 분위기는 살풍경할 수밖 에 도리없었다. 챙, 챙! 비발이 요란스레 울렸다. 그 즉시 나체의 춤동작이 멎었다. 청년들도 울음을 뚝 삼켰다. 풍악도 그쳤다. 연주하던 화상들은 악기를 챙겨 가지고 슬금슬금 사라졌다. 알몸의 여인들도 섬돌에 올라 외투로 몸을 감싸고선 화상 곁으로 다가가 섰다. 전각 주변은 아까처림 정적이 감돌았다. 기둥에 비끌어매인 청년들은 문득 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대화상님, 살려주세요!" "부처님 제발 저 한 목숨만....."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살려만 줍쇼!" 너도나도 애걸복걸 목숨을 빌었으나 화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때가 되었다. 화상은 아무 소리도 않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왼손에는 놋쇠 비발이 십여 장 들려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그중 한 장을 빼들었다. 오른손이 번쩍 들리는가 하는 순간, 종잇장처럼 얇은 놋쇠 원반이 그림자를 땅에 드리운 채 '위 잉!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날았다. 한 줄기 금빛 테가 첫 번째 나무기둥을 향해 번개처럼 덮쳐들 었다. 그 말뚝에 묶여 있는 것은 송시였다. 비발이 눈부신 햇빛 아래 번쩍거리면서 날아오자, 그는 본 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몸을 틀었다. 그러나 어쩌랴! 머리채를 말뚝에 단단히 묶여 피할 수가 없 었다. "으악!" 외마디 단말마의 비명이 흙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송시의 머리통에서 울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치익! 놋쇠 원반은 사람의 목줄기를 끊어 떨어뜨리고 말뚝에 절반 깊이나 파묻히더니, 용솟음치는 뜨 거운 선혈을 흠뻑 뒤집어쓰고서 기세좋게 부르르 떨었다. 송시의 동료들은 흉칙스런 화상이 벌떡 일어난 찰나, 그의 손아귀에서 싯누런 물건이 날아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의아스럽긴 했으나 그래도 어수룩한 생각에 그가 또 별다른 장난거리를 보여주는 줄로만 알았 다. 그렇게만 알았던 것이 끔직스럽게도 송시의 머리통이 몸통에서 뚝 떨어져 나와 흙바닥에 뒹 굴지 않는가! 그제서야 비로소 그들은 화상이 그 방법으로 자기네의 목숨도 요리할 것임을 확실 히 깨달았다. 그들은 혼비백산, 만에 하나의 요행을 바라고 여전히 애걸복걸했다. 벌써 까무라쳐서 반죽음이 된 자도 있었다. 조용하던 선당(禪堂)은 또다시 초상집으로 변하고 애끓는 통곡성만이 가득찼다. 울부짖음, 애걸하는 소리에 파묻혀 비발이 공기를 끊으며 날아 가는 파공성도 들리지 않았다. 화상은 갖은 솜씨를 다 부려가며 쉴새없이 껑충 솟구치고 팔딱 재주를 넘었다. 섬돌 계단에 꺾 여 비치는 그의 그림자는 악귀의 춤 바로 그것이었다. 씨잉, 씽! 푸르르! 그의 손에선 쉴새없이 비발이 날았다. 악귀의 손을 벗어난 놋쇠 원반은 말뚝을 향해 달 쫓는 유 성(流星)처럼 한 장 한 장 연달아 날아갔다. 말뚝에 얽매인 청년들이 비발의 목표였다. 그 목표를 벗어난 것은 한 장도 없었다. 털썩!... 털색!... 털썩!..... 목이 떨어지고 나서도 버둥거리는 몸뚱이, 그 위쪽 말뚝에 가로꽂혀서 푸르르 떨고 있는 비발들 은 희생자의 피로 흠뻑 젖었다. 이제는 비명도 아우성도 없었다. 십육 장의 놋쇠 원반은 모조리 나무 기둥에 박혀 있었다. 마치 목 없는 시체에 목 대신이라도 되는 듯. 전각 앞마당, 질척한 피바다에는 사람의 머리통 십육 개가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주운종의 목숨뿐이다. 그는 키와 몸집이 너무도 작아, 큰 체구부터 골 라가며 처치해 온 악승(惡僧)에게 제일 꼴찌로 점찍혀 잠시나마 잔명(殘命)을 부지했던 것이다. 화상은 최후의 희생자 주운종을 잠시 노려보더니 이윽고 비발 한 장을 집어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대사부님, 저희들 낯을 보시와 제발 이 아이 하나만은 살려주십시오!" 뜻밖에도 주운종을 대신해 구명탄원을 한 것은 춤추던 무희였다. 비록 몇 년 동안 이 흉악스런 화상을 따라 섬기면서 온갖 끔찍한 꼴도 다 보아왔지만 오늘처럼 처참하기 짝이 없는 도살극은 처음 당면해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소녀와도 같이 곱상한 주운종이 처음 애걸복걸 하던 정경이 너무나도 애처롭게 인상에 박혔던 것이다. 그러나 화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네깐년들이 뭘 안다고 나불대는 거냐? 옛말에도 범을 잡기는 쉬워도 놓아 주긴 어렵다고 했다. 자기 동료 십여 명이 내 손에 죽었는데, 살려뒀다가 무에 좋은 꼴을 보겠다구? 하나 남은 건 더 욱 용서할 수 없지! 불쌍하게 이승에 남겨 두느니 차라리 친구 따라 저승으로 보내 주는 게 우정 으로 보아도 낫지 않겠느냐?" "그래도 대사부님, 저토록 처참하게 죽이는 건 너무 애처롭습니다." "저도 그래요. 이젠 보기도 징그럽구요. 꿈에 나타날까 무서워요!" 두 여인은 고집을 꺾지 않고 여전히 간청했다. 화상은 이제 대꾸도 하기 싫은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젠 필경 죽었구나 싶어 묵묵히 놋쇠 원반이 날아들기만 기다리던 주운종의 귓결에 누군가 자 기를 위해 목숨을 빌어 주는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쩌면 한 가닥 살 아날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울면서 화상에게 애걸복걸 빌었다. "대화상님, 제발 한 목숨 살려 줍시오! 저희 집은 귀양현에 있습니다. 아버님 아홉 형제한테 자 식이라곤 저 하나뿐입니다. 여기 잘못 들어온 것도 제 탓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죽은 송형 때문 입니다. 제발 자비심을 베풀어 하나 남은 이 목숨 살려 줍시오! 제가 비밀을 누설할까 봐 그러십 니까? 제 혓바닥을 잘라내십쇼! 손가락마저 자르셔도 좋아요. 말 못하고 글씨도 못 쓰게 되면 대 화상님 비밀도 지켜질 게 아닙니까? 그저 고향으로 내려가 아홉 집안 대나 잇게 해주신다면 더 소원이 없습니다. 대화상님! 두 분 누님! 은혜 좀 베풀어 줍시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빌었는지조차 몰랐다. 목이 타고 혓바닥도 굳어버리고 입술마저 메말라 툭 툭 갈라졌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그는 계속 빌고 애걸했다. 이윽고 화상은 비발을 내려놓았다. 그 역시 한바탕 십여 명을 살륙하고 나니 손의 맥도 풀리고 심드렁해진 것이다. 게다가 애지중지하는 두 여인마저 열심히 통사정하는 걸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좋다. 네놈 정성이 하도 갸륵하고 또 요것 둘 낯을 봐서 오늘은 죽이지 않으마! 네 녀석을 사흘 만 더 살게 해주지!" 그리고 화상은 여자를 돌아보고서 분부했다. "너 가서 요일더러 법물(法物) 세 가지를 가져오라고 일러라." "예, 고맙습니다. 대사부님!" 여인이 얼른 응답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마 후, 지객승 요일의 낯익은 모습이 나타났다. 예절 바르고 학식도 많고 자상했던 그 얼굴은 이제 무표정하기만 했다. 손에 받쳐든 붉은 쟁반 위에는 세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붉은 종이 로 싼 약 한 봉지, 밧줄 한 꾸러미, 그리고 번들번들 빛나는 칼 한 자루. 주운종은 그것들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오늘 목숨이 붙어 있어도 오 일 후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만이 가득차 있을 뿐이었다. 주운종은 또 빌고 다시 빌 었다. 그러나 화상은 아예 들은 척도 않고, 요일을 돌아보곤 분부를 내렸다. "요일, 이 철부지를 끌어다가 석뢰 안에 가두고 그 세 가지 법물을 주어라. 그리고 만두 오십 개 만 넣어 주고 사흘 동안 먹고 살게 하라. 저놈이 몸뚱이가 온전하게 죽고 싶은 모양이니 제손으 로 목숨을 끊도록 해주는 것도 자비심 때문이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일찍 가 봐서 그때까지 살 아 있거든 그 칼로 모가지를 잘라 가지고 내게 와서 보고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분부대로 거행하오리다!" 요일은 굽신 응답을 하고 나서 주운종이 묶여 있는 말뚝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말없이 결박 을 풀어주었다. 반나절 동안 살이 박히도록 꽁꽁 묶였던 주운종은 몸뚱이 전체가 뼛속까지 저릿저릿 쑤시고 감 각이 없었다. 게다가 진이 다 빠지도록 놀란 끝이라 정신의 피로 또한 극도에 달했다. 밧줄이 풀 리기가 무섭게 그는 말뚝 아래로 무너져내리듯 스르르 고꾸라졌다. 비로소 요일이 한 마디 했다. "부잣집 자제들이라면 집에서 편안히 하늘이 내리신 복이나 누릴 것이지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 고 제 발로 죽을 데를 찾아들었느냐? 내 사부님의 분부를 받들고 너를 석뢰에다 가두어 놓되, 본 래는 결박을 지워야 하지만, 나이어린 것이라 달아날 염려도 없을 듯하니 오랏줄은 쓰지 않겠다. 어서 일어나 날 따라오너라!" 주운종은 온몸이 쑤시고 저려 단 한 발짝도 떼놓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따라가야 했다. 그는 기를 쓰고 일어섰다. 이를 악물고 휘청휘청 요일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지옥처럼 처참한 피바다에 동료들의 시 체를 남겨 두고서. 요일은 대웅전 뒤편으로 한 바퀴 돌아 다시 삼 층 누각을 지나치더니 또 하나의 전각 앞에 가서 우뚝 멈추었다. 그 건물 옆으로 거대한 석벽이 보였다. 높이가 삼 장쯤 되는 석실이었다. 요일은 전각과 석실 사이로 걸어가 돌벽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바윗덩이를 밀어냈다. 그것은 동 굴이었다. 천연석은 아닌 듯, 가공한 흔적이 여러 군데 보였다. 주운종은 이내 그 동굴 속이 자기 몸을 묻어야 할 장소라고 직감했다. 그래서 털썩 무릎을 꿇고 지객승 요일의 다리를 부여안았다. "살려 줍시오, 스님! 저 죽으면 아홉 집 대가 끊깁니다!" 두 마디 할 힘조차도 없었다. 필사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청년을 요일은 가련하게 여겼다. 그 차갑고도 무표정하던 기색도 어느 정도 풀렸다. "자네가 처음 절 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몇 마디 대화밖에는 없었으나 썩 마음에 들었네. 그런만 큼 어찌 자네 목숨을 구해 주고 싶은 생각이야 없겠나? 하지만 일이 너무나 크게 벌어져 내 힘으 로도 어쩔 도리가 없네그려. 게다가 우리 사부님은 계율이 몹시 엄해서 인정사정도 없다네. 그래 서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는 걸세. 어쨌든 자네와 나는 그런 대로 인연을 맺은 터, 탈출시켜 달라는 청만 빼놓고 다른 건 내 힘껏 도울 테니까 어서 말해 보게." 주운종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 살아날 길은 끊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흘은 목 숨을 연장할 수가 있다. "먹을 것이나 좀 넉넉히 넣어 주시구려. 죽어서도 아귀(餓鬼)는 되기 싫으니....." "그렇게 하지... 그리고 이걸 받게. 봉지 속에 든 것은 독약일세. 단숨에 죽고 싶거든 이걸 먹게. 아주 약효가 빠르니까. 음식은 내 곧 보내 주겠네." 주운종은 그 말을 듣고서 더 이상 요구할 생각도 없었다. 두말없이 성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요일은 바윗돌을 굴려 입구를 단단히 봉쇄한 다음 되돌아 가버렸다. 음침하고도 눅눅한 동굴 속, 입구가 닫히자 한 줄기 광선마저도 빼앗긴 채 암흑천지로 변하고 말았다. 주운종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허망하고 서글프게 느껴졌다. 온갖 추억과 절망의 감회가 어지러이 엇갈려서 떠올랐다. 남부러울 게 없는 집안에서 온갖 행복을 다 차지하면서 자라난 이 몸이 어떻게 이런 곤경을 견뎌낸단 말이냐?..... 그의 눈앞에는 며칠이나마 짧은 나날 동안 사귀었던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이 선히 떠올랐다. 그 들 역시 자기처럼 행복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란 몸이리라. 이제 남은 목숨은 사흘밖에 없다. 늙으 신 부모님, 백부, 숙부모님... 아홉 가문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운종이 사흘분의 목숨만 지녔다 니... 어떻게 죽든 분명 죽어야만 한다. 이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외롭게 죽어 널브러진 자기 몸뚱 이를 생각하니 더욱 애간장이 탔다. 드르륵! 바윗덩이가 움직이더니 작은 틈새로 먹을 것을 담은 쟁반이 불쑥 들어왔다. 물 한 병, 만두 한 쟁반이었다. 입구가 다시 닫히고 암흑천지 속에서 슬금슬금 더듬어 보니, 그것 말고도 몇 가지 요리가 더 잡혔다. 지객승 요일이 호의를 베푼 것이다. 주운종은 먹고 마실 생각도 없었다. 그저 '꺼이, 꺼이' 서럽게 울기만 할 따름이었다. 목이 쉬어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고 피눈물만 쏟았다. 아무리 구슬프게 울었지만, 하늘도 응답이 없고 땅도 무심하기만 했다. 들어줄 사람조차 없었다 정오 무렵, 이 앞마을에서 점심을 들면서도 절구경의 기대에 들떠서 뜨는 둥 마는 둥 요기를 했 던 그는 초저녁도 훨씬 지난 지금 몹시 기갈이 심했으나 음식에 손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후 내내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면서 그 무서운 고통을 겪어내느라 놀라고 질린 데다 진종일 통곡하다 보니 이제는 기진맥진, 홀로 울다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얼음처럼 차디찬 돌벽의 감촉에 놀라서 깨어난 주운종은 춥고 배가 고팠다. 손에 잡히는 대로 만두 한 개를 들고 한두 입 베어 물다가는 또다시 깊은 절망감을 못 이겨 목놓아 울 기 시작했다. 무협(武俠)의 원숭이들이 제아무리 구성지게 운다 해도 지금 주운종의 울음보다 더 구슬프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울다가 지쳐 잠이 들고, 깨어나선 또 울었다. 어떤 때는 눈에 불을 켜고 미친 듯이 음식을 움켜쥐고서 아귀아귀 먹어댔다. 동굴 속은 암흑천지였다. 해가 뜨는지 달이 뜨는지조차 분간할 수도 없고, 몇 날 며칠이 지났는 지도 몰랐다. 심신이 모두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그는 미칠 지경에 이르러 정신마저 혼란을 일으 켰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난 이틀째 저녁이었으나 그에게는 몇 날 몇 달처럼 길게 느껴진 것이 다. 어둠 속에 오래 있는 사람은 고양이처럼 밤눈이 밝아진다. 주운종 역시 하루 밤낮을 동굴 속에 서 시달리다 보니 희미하게나마 시력이 트여서 주변의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릴없이 돌벽 에 기대앉아 훌쩍거리다가 문득 곁에 무엇인가 번쩍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손을 뻗쳐 집어들다 가 그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얏!" 그것은 칼이었다. 집어든다는 것이 잘못 칼날을 잡아 손가락을 베이고 만 것이다. 웬 칼인가 생 각해 볼 여지도 없었다. 그 흉악스런 중놈이 자기더러 죽으라고 준 것이다. 자결하지 않으면 이 칼은 조만간 남의 손에 들려서 목을 끊어낼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이 칼을 쓸 임자는 곧 나타날 것이다. 주운종은 베인 손가락보다 가슴이 더 쓰리고 아팠다. 두 눈에서는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한창 슬피 울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미풍 한 줄기가 코끝을 스치는 듯하더니 섬뜩하도록 차가 운 물방울이 몇 방울 얼굴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기가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한 줄 기 바람결과 빗방울은 이제껏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기진맥진했던 주운종에게 생기를 불어넣었 다. 어쩌면 그것은 칼날에 손끝을 베었을 때부터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늘도 해도 보이지 않는 동굴 속에 웬 바람과 빗방울이냐?... 그는 비 로소 자기의 죽음을 벗어나서 또다른 사물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아심과 함께 그 의 사고력도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득 한 줄기 섬광이 번쩍 하더니, 순간적으로 동굴 속이 환해졌다. 뒤이어 '우르르!...' 천둥소리 가 울렸다. 번개치는 그 순간, 주운종은 후딱 고개를 쳐들었다. 동굴 천정 위에 둘레 한 자 가웃이나 되어 보이는 구멍이 뚫려 있지 않은가! 처음 동굴 속에 처박히듯 들어왔을 때는 절망과 비탄에 싸이고 또 갑작스레 암흑세상에 갇혀 아 무것도 볼 여지도 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다친 손가락의 아픈 감각에서부터 꿈틀거리기 시작 한 생기는 바람결과 빗방울로 부풀어지고 또 번갯불빛으로 천정 구멍까지 발견하고 나니, 그는 저도 모르게 살아서 달아날 욕심이 무럭무럭 일었다. 번갯불의 섬광은 사라졌다. 그러나 주운종은 벌떡 일어나서 어둠 속 사면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석실이 천연으로 된 것이 아니라 큼직한 벽돌을 쌓아 만든 것임을 알았다. 천연동굴이 라면 행여 틈새라도 있겠지만 사람의 손으로 공들여 쌓은 것이라면 비집고 나갈 구멍을 만들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는 다시 한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천정은 자연석인 듯했다. 자운사 승려들은 지붕처럼 머리 가 돌출한 절벽에 세로로 벽을 쌓아 공간을 만들어 감옥 대신으로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천정 의 구멍은 통풍구로 그냥 남겨 두었으리라. '너무 높구나.....' 매끄러운 벽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주변에 있는 것이라곤 목을 매고 죽으라는 밧줄 한 타래와 칼 한 자루뿐, 쓸 만한 도구라곤 더 이상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독약 한 봉지를 쓴다면 죽은 넋이나 저 구멍을 빠져나갈 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므로 자기 목줄기를 끊으러 올 사람이 언제 불쑥 나타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갑작스레 마음이 다급해졌다. 살아야겠다는 욕망은 희망과 함께 절박한 위기감을 그 의 가슴에 심어준 것이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주운종은 허둥거려지기만 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달아날 길을 곰곰이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 나 결론은 역시 하나, 머리 위의 천정 구멍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올라가는가? 목을 매기 좋도록 올가미까지 만들어 준 밧줄을 칼 등쪽에 묶어서 늘여 천 정으로 집어던진다. 구멍을 벗어난 칼은 바깥으로 멀어져 나무 그루터기나 바위 틈새에 걸리리라.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늘어진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아무렴 그럴 힘조차 없을까 보냐? 그러나 반나절을 허비해 가면서 궁리 끝에 짜낸 묘책도 수포로 돌아갔다. 천정까지의 높이는 삼 장도 넘어 보이는데 밧줄은 겨우 이 장밖에 안 되는 것이다. 요행으로 올가미지운 칼이 바깥으로 떨어져 바위 틈새, 나무 둥치에 걸렸다손 치더라도 나머지 일 장 남짓 높이의 허공에서 너울거릴 밧줄 끝은 아무리 옴치고 뛰어도 잡을 도리가 없었다. 유일한 탈출구로 생각한 것이 물거품으로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무심한 구멍은 그림의 떡처럼 굶주린 사람의 원망어린 눈길을 받고서도 태연하게 거기 있는 것이 다. 주운종은 낙심천만, 동굴 속에 처음 갇혔을 때보다 더욱 슬피 울었다. 울면서도 그의 가슴 속에 는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더욱 들끓어 올랐다. 이렇게 죽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를 빠져 나가리라! 그는 울기를 그쳤다. 또다른 방도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저것이다!' 한참 만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길로 벽을 노려보았다. 벽돌로 쌓았으면 틈이 있을 것이다. 벽돌과 벽돌 사이 틈새를 헐어놓는다면 그것은 이미 벽이 아니라 돌 조각을 겹쳐 쌓아 올린 것에 불과하다. 그는 칼을 집어들고 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힘주어 벽돌 틈새를 깎아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깎아내고 후볐을까. 문득 위아래로 겹친 벽돌 두 장이 흔들거렸다. 양 끝을 잡고 힘껏 당 기니 앓던 이 빠지듯 쑥 빠져나오는 게 아닌가! '옳다. 이 벽이 살아나갈 길이다!' 그는 용기백배, 힘을 다해서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벽돌 몇 장이 더 빠졌다. 그의 손이 신들린 것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칼질에도 요령이 붙었다. 쨍! 갑자기 칼 끝에 무엇인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손으로 벽돌이 빠진 구멍을 더듬던 그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맙소사!" 손가락 끝에 싸늘한 쇠붙이의 감촉이 와서 닿았던 것이다. 벽돌의 장벽 뒤에는 또 한 겹의 철판 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리 칼질을 하더라도 철벽은 못 뚫을 터, 역시 벽은 그대로 장벽 이었다. 탈주자의 살 길은 아닌 것이다. 두 번째도 좌절을 당하자, 이번만큼은 슬픔보다도 분노가 치솟았다. 운명에게 조롱을 당한 것 같 아 약이 올랐다. 죽을 생각은 이제 천 리 만 리 달아났다. 분노는 투지로 바뀌었다. 그만큼 마음 도 다급해졌다. 살아날 욕망 때문에 뱃속이 '꾸루럭, 꾸루럭!' 소리를 내었다. 시장끼가 돈 것이다. 그는 허겁지겁 먹을 게 놓인 곳으로 뛰어갔다. 뛰다가 밧줄 꾸러미에 발이 걸려 고꾸라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던 그의 뇌리를 또 한번 스치는 영감(靈感)이 있었다. '바로 그거야!'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또 달리 살아날 길이 트인 것이다.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고 다시 벽쪽으로 돌아가서 칼을 잡더니 미친 듯이 벽돌을 후벼 파내기 시 작했다. 벽돌은 연달아 떨어져 나왔다. 한쪽을 헐어서 틈이 벌어지면 나머지는 좌우 상하 어느 쪽 이든 한두 번만 후벼도 힘없이 떨어졌다. 10개, 20개... 50개, 60개... 어느 덧 백 장 가까운 벽돌이 동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천정 구멍으로 우뢰소리와 빗방울이 요동치듯 쏟아져 들어왔다. 섬광은 쉴새없이 번쩍였다. 하늘조차 주운종을 가련하게 여겨 돕는가 싶었다. 그는 점점 손아귀 맥이 풀리고 저려왔다. 체력도 한계가 있는 터라, 도저히 의욕을 따를 수 없었 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헐떡 거리면서 겨우 사오십 장을 뽑아내고 나니 기진맥진, 칼 잡은 손 마저 쳐들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벽돌의 두께는 사오 치, 너비는 한 자 남짓, 모두 가마굴에서 틀로 빚어 구워낸 것들이라 규격이 반듯반듯 했다. 그는 두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으므로 너무 힘을 쓰느라 땀에 젖었는가 했다. 그러나 얼얼하도 록 쓰라린 걸 느끼고서야 비로소 피가 배어 미끄러지는 것을 알았다. 붓대나 잡던 선비의 곱상한 손이 칼날에 찔리고 베이고 밀려서 여러 군데나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언제 이같은 고초를 겪어 봤던가? 온갖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쇠붙이라곤 바 늘 한 개 안 잡아본 도련님이었다. 이제 기진맥진, 긴장마저 풀리고 나니까, 처음에는 느껴지지도 않던 아픔이 온몸을 못 견디게 쑤셔왔다. 두 다리마저 버틸 기력을 잃고 뻣뻣하게 나무토막이 되 어버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벽돌더미 위로 털썩 엎어져서 목놓아 울었다.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자기 신세 가 너무도 처량했던 것이다. 한참을 울고 나니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깔리면서 스르르 잠이 덮쳤다. '에라, 모르겠다! 죽거나 말거나...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서 막 잠이 들려는 참에, 문득 가슴 속 에서 들리지 않는 질타가 우뢰처럼 크게 울려왔다. '주운종! 네가 살고 죽기는 모두 네 노력에 달려 있다. 잠들어선 안 된다. 그러면 죽어! 부모님의 대를 잇고 아홉 가문의 향촉(香燭)을 받들 몸이 아니냐? 피맺힌 열여섯 동료들의 원수를 갚아 줘 야 할 몸이 아니냐? 그 책임은 모두 네 한몸에 달려 있어! 그런데도 잠이 오느냐? 깨어라! 일어 나서 힘을 내어라!' 순간적으로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 여기는 부모 앞에서 어리광이나 부리는 고향집이 아니 다. 낙심한다고 위로해 줄 사람도 오지 않는다. 죽도록 울어봤자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은커 녕 지금 이 순간에도 아까운 기회는 깨어진 독에서 물 새듯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모가지가 몸 통에서 떨어질 그 순간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문득 처참하게 목이 떨 어져 뒹굴던 동료들의 시체를 떠올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용기를 북돋아 안간힘을 써서 엉금엉금 벽쪽으로 기어갔다. 전신 사지백해, 마디마디가 끊어져 나갈 듯이 아팠다. 그래도 칼을 잡고 벽에 매달려 벽돌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손끝은 말을 듣지 않고 힘에 겨웠지만 그래도 요령만은 부쩍 늘었다. 벽돌이 무더기로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손바닥이 저려 숨을 돌릴 때마다 천정 구멍을 가늠해서 수직되는 동굴 바닥에 벽돌을 옮겨 다 쌓아 놓았다. 벽돌 무더기는 차츰 탑모양을 이루면서 높아졌다. 벽에서 떼어내고 옮기고 쌓고... 또 떼어 놓고 쌓는 동작을 무수히 반복하는 동안 시간이 또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몰랐다. 어쨌든 간에 동굴 바 닥 한가운데 칠팔 자 높이나 되는 벽돌의 탑이 세워졌다. 주운종은 어림잡아 날짜를 꼽아보았다. 오늘밤이 사흘째, 더 이상 지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벽돌의 탑 높이를 가늠했다. 이만한 높이라면 그 위에 서서 밧줄을 천정 구멍으로 날려 던질만 했다. 그는 비로소 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벽돌은 이만하면 충분한 것이다. 두어 모금 물을 마시고 만두 몇 개도 씹어 삼켰다. 벽돌을 후벼 파느라 칼날은 이미 말려서 두 부도 못 썰 만큼 무뎌졌다. 밧줄 묶음을 끄르고 올가미에 칼날 중간턱을 걸어 졸라매었다. 결국 올가미는 주운종의 목 대신 엉뚱한 칼날을 얽고 단단히 조여진 것이다. 벽돌의 탑은 아래 펑퍼짐한 기단(基壇)부터 한 층 한 층씩 계단을 이루면서 좁혀져 올라갔다. 주 운종은 밧줄 무더기를 어깨에 메고서 조심조심 탑 위로 기어올랐다. 탑 꼭대기의 면적은 사방 두 자도 못되지만 그래도 발붙이기에는 그만하면 넉넉했다. 발밑이 흔들거렸다. 어둠 속에서 쌓아 올리느라 중심이 잡히지 않는 데다 벽돌진이 똑바르게 놓 이지 못한 탓이다. 몸뚱이의 방향을 더듬어 바로 잡을 때마다 탑은 금시라도 와르르 허물어질 듯 이 기우뚱거렸다.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자칫 주의력을 흐트렸다간 굴러떨어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공든 탑이 정말로 무너지는 것이다. 일단 와르르! 하는 날엔 또다시 치올려 쌓을 기력도 없거니와 시간마저도 없는 것이다. 주운종은 후둘후둘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먼저 무릎을 펴고 다음에는 허리를 펴고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칼이 매달린 밧줄 끝을 몇 자 가량 늘어뜨려 빙글빙글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 천정 구멍을 어림잡아 노려본 채로 번개칠 때까지 기다렸다. 번쩍 섬광 이 빛나는 찰나에 구멍을 겨냥하고 집어 던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렴, 그 다음에 늘어진 밧줄을 타고 기어오르기야 어떻게 해서든 못해낼손가! 잔뜩 온 신경을 눈에 집중시키고 기회만 오기를 기대하는 주운종, 눈언저리가 당겨오고 천정 구 멍마저 가물가물 흐려지면서 작아보였다. 가련한 주운종은 벌써 몇 차례씩이 번갯불이 번쩍였지만 그때마다 먼저 놀라 움찔거리는 통에 기회를 모두 놓쳤다. 그래도 밧줄을 잡은 손은 쉴새없이 움직였다. 칼이 묶인 밧줄 끝은 점점 갈수록 힘차게, 그리고 더욱 크게 원을 그리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돌 면서 밖으로 당기는 힘에 팔뚝이 끊어질 듯 아프고 저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멈출 수도 없 는 처지였다. 칼날이 튕겨 와서 자기 몸에 박힐지도 몰랐다. 번개가 또 한 차례 번쩍 섬광을 흩뿌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기회를 놓쳤다. 손을 움찔하는 순간, 발 밑의 벽돌 탑이 기우뚱거려 중심을 잃고 굴러떨어질 뻔했던 것이다. 이거야말로 낭패 중 에도 낭패였다. 밧줄 던지기에만 전력을 다하자니 발밑이 허물어질까 두렵고, 탑 아래 중심을 잡으려면 번개도 구멍도 다 놓친다. 머리 위와 발치 아래에 모두 고루 신경을 쓰려 했으나 마음만 조급해질 뿐, 도 무지 눈도 팔도 발바닥도 말을 듣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눈마저 어찔어찔 현기증을 일으켰다. 팔뚝은 마비되어 내 것이 아닌 듯, 돌아가는 지 멎었는지조차도 모를 지경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시무시한 섬광이 대낮 같은 빛을 동굴 속으로 쏟아붓는 찰나, 그는 문득 자기 손이 홀가분해진 느낌을 받았다. 왼손에 거머쥐고 있던 밧줄 뭉치마저 없어졌다. 땅그랑! 곧이어 동굴 천정에서 무엇인가 부딪치는 음향이 울렸다. "아뿔싸!" 그의 양손은 텅 비어 있었다. 섬광이 비치자 무심결에 반사적으로 다 던져 날린 것이다. 칼도 밧 줄 뭉치도 모두 손을 벗어나 없어지고 말았다. 놀라 움찔거리는 바람에 흔들흔들 탑마저 기울었다. 그는 중심을 잃고 굴러떨어질 듯이 탑 아래 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어둠 속 동굴 바닥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칼은커녕 밧줄 끄트머리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행여 겨냥이 빗나가서 천정을 부딪고 떨어졌으면... 했으나 허사였다. 겨냥은 정확했다. 유일한 희망, 구 명의 밧줄은 분명 칼에 이끌려 천정 바깥으로 날아간 게 틀림없었다. 한 가닥 기대마저 산산조각, 물거품으로 화한 것이다. 온 밤의 전반을 후둘후둘 떨리는 다리로 버텨선 채 팔이 빠져나가라고 휘둘러댔던 구명의 줄이 손아귀에서 통째로 날아간 것이 아닌가! 주운종은 마침내 투지를 잃었다. 남은 기력마저 전신에서 쭉 빠져나갔다. 이제는 죽는 일 말고 다른 길은 없었다. 그는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저 어서어서 죽고만 싶을 따름이었다. 독약 봉지를 더듬더듬 찾았으나 그것마저도 어디로 갔는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젊은 선비는 마 침내 다시 방성대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 스스로 목숨 끓을 기회마저도 사라지고 이젠 남의 손 에 멱줄기를 끊겨야만 하는 신세가 너무나도 처참했기 때문이다. 뇌성벽력이 치고 번개가 번쩍번쩍 빛나도 그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천정으로부터 억수같이 퍼붓 는 비를 온통 맞으면서 털썩 주저앉은 채 발버둥치고 울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뒤범벅으로 얼굴을 적셔가며 '꺼이, 꺼이!' 목놓아 울던 주운종은 또 한 줄기 번갯불이 스치는 찰나 동굴벽에 어렸다 사라지는 그림자를 얼핏 보았다. 그것은 자기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뱀처럼 꿈틀거리는 기다란 그림자였다. 그가 번쩍 고개를 드는 찰나 또 한 차례 번개가 쳤다. 보라! 동굴 천정으로부터 길게 늘어진 밧 줄 하나가 무심하게 흔들거리고 있지 않는가! 빗물 또한 쉴새없이 밧줄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헛것을 본 게야.....'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의 입에선 비통한 울음소리도 그쳤고 쳐들린 눈길마저 내릴 줄 모른 채 위쪽으로만 고정되었다. '신령하신 번개님!' 그는 어둠 속에서 속으로 빌었다. 간절한 기원이 통했는가, 고마우신 번개님이 번쩍번쩍 한 번도 아니고 두세 차례 연거푸 청백의 섬광을 흩뿌렸다. '아, 밧줄이다. 분명 그거야! 밧줄이 저기 매달려 있어! 저것 봐, 흔들흔들 하고 있잖아? 내가 던 진 거야!' 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어느 새 두 팔 두 다리로 벽돌의 탑을 마구 기어오르고 있었다. 탑의 흔들거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까 미끄러져 내리면서 흩어진 벽돌 몇 장을 다시 정돈하고 그 위에 우뚝 올라섰다. 발 밑의 위태로움마저 잊었다. 선 채로 두 손으로 어둠 속 허공을 마구 헤집었다. 그러나 잡히는 것이 없었다. 또 한 차례 번개 불빛이 스치는 찰나, 머리 꼭대기 한 자도 못 되는 높이에서 밧줄 끝이 흔들리는 것을 눈여겨 두 었다. 숨을 멈추고 온 신경을 모아 그곳을 노려보다가 두 번째 번갯불이 번쩍인 것과 동시에 주운종은 몸을 솟구쳤다. 다음 순간 두 손은 이미 밧줄을 단단히 움켜잡고 있었다. 후두둑! 돌연 밧줄이 풀리면서 그의 몸뚱이는 또다시 탑 꼭대기로 털썩 떨어졌다. "으앗!" 허물어질 듯 기우뚱거리는 탑 꼭대기에서 그는 혼비백산, 필사적으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놀란 가운데서도 움켜쥔 밧줄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아아, 칼이 바깥 어디에고 걸쳐진 곳이 없구나! 그래서 흘러내린 거야.....' 그러나 반갑게도 밧줄은 일이 자 남짓 흘러내리더니 더 이상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자포자기인 중에도 있는 힘껏 당겨보았다. '걸렸다!' 과연 동굴 밖으로 날아간 칼은 암초에 낚싯바늘 걸리듯 단단히 아주 단단히 걸린 것이다. 더 이 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그는 번개가 다시 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슬금슬금 두 손목으로 밧줄 을 당기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칼질로 상처투성이가 된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것도 아픈 것도 잊었다. 그게 대수냐? 이제 지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무공이라곤 손짓 발짓 하나도 못하는 샌님이지만 그래도 젊은이의 힘은 있다. 이 장 높이를 그 리 많은 시간도 소비하지 않고 올라가 마침내 통풍구 바깥으로 상반신을 걸쳐 놓을 수가 있었다. 주운종은 팔꿈치로 땅바닥을 찍어누른 채 헐떡헐떡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힘도 다하고 근육도 풀리고 극도의 피로가 엄습하여 더 이상은 손가락 한 개 까딱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머리 위 하늘에서는 뇌성벽력, 번개빛에 섞여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비는 갈수록 점점 억수같이 퍼부었다. 전신이 온통 후줄근하게 젖어 물 속에 잠겨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한참을 쉬고 난 데다 차가운 빗물에 흠빽 젖고 보니 머리가 비로소 좀 맑아졌다. 그리고 다음으 로 떠오른 생각은 이제 동굴을 벗어난다손 치더라도 자운사 경내를 완전히 탈출하기 전에는 완전 히 용담호혈(龍潭虎穴) 속에 들어 있는 셈이라는 것이었다. 시간은 쉬지 않고 자꾸만 흘러갔다. 여기서 멈출 게 아니라 계속 애쓰지 않는다면 동굴 속에 있 기나 다를 바 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상반신만 지상에 내놓은 채, 주운종은 사방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전히 노출되기 전에 우선 달아 날 방향부터 결정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쪽은 사흘 전 요일에게 끌려온 길, 그 서쪽은 참극이 벌어졌던 전각으로 향하는 길, 남쪽으로 는 자운사 안뜰로 뻗은 길, 북쪽만이 담장으로 꽉 막혔다. 그는 북쪽으로 도주 방향을 결정했다. 틀림없이 담장 뒤 바깥 쪽에는 인가가 있으리라. 이 무렵, 비는 점점 더 억수같이 심하게 쏟아졌다. 하늘도 땅도 온통 물바다를 이루어 공백조차 도 없는 듯싶었다. 사방은 뇌성벽력,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밖에는 오로지 무겁게 내리누르는 적막으로 가득찼다. 이따금씩 번쩍이는 번개의 섬광 말고 빛이라곤 한 줄기도 없었다. 나뭇가지를 타고 흐르는 빗물은 폭포처럼 흙바닥을 두드렸다. 동굴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온 그는 몇 번이나 미끄러져 나뒹굴었다. 두 다리에 기력도 없으려니 와 어둠 속에서 도무지 발밑의 굴곡을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빠져나온 동굴의 통풍구가 둔덕을 이루고 있고, 그 주변은 모두 가파른 경사로 비탈져 있 었으므로 그 내리막길은 이루 형언할 수 없게 미끄러졌다. 그는 또 번갯불 섬광을 이용해서 한 걸음씩 엉금엉금 옮기는 도리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북쪽 담장까지 다다르자 그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졌다. "맙소사!" 무공을 모르는 주운종이 비바람까지 휘몰아치는 한밤의 어둠 속에서 무슨 수로 담장을 뛰어넘는 단 말인가? 또 설사 넘었다손 치자. 담장 바깥이 평지인지, 아니면 절벽인지 그것도 모른다. 만약 낭떠러지라면 뼈도 못추리고 말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이는 참에 갑자기 '쏴아!'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더니 무엇인가 얼굴을 후려갈겼다. 얼떨결에 손이 나가 그놈을 움켜잡았다. 반대편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얼마나 센지 하 마터면 통채로 끌려갈 뻔했다. 놀란 속에서도 그는 손을 풀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번갯불에 비춰보니 손바닥 안에 든 것은 황각수(黃角樹) 잎 새 몇 닢이었다. 그렇다면 담장 곁에 거대한 나무가 있다는 셈이다. 세찬 바람에 나부낀 나뭇가지 가 이쪽으로 불려서 얼굴을 후려갈긴 것이다. 우르르!... 철썩! 중천에서 천둥소리가 은은히 울리더니 뒤미처 무섭게 커다란 번갯불이 천지를 온통 회백색으로 밝혔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그 순간 주운종은 담장 곁에 높이 솟아오른 거목(巨木)을 확인했다. 미친 듯이 나부끼는 가지와 또 담벼락 아래 기댄 것처럼 부러져 누운 가지도 보였다. 분명 자기가 방금 잡아 나꿔챘던 놈이다. 섬광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뇌성벽력이 땅을 뒤흔들었다. 그 가운데 서서 주운종은 생각에 잠겼 다. 거목의 가지가 다시 한번 자기 쪽으로 나부껴 온다면 그것을 붙잡고 튕겨올라 담장 위로 기 어오르리라. 벼락이 불꽃을 튀기며 연거푸 떨어졌다. 광풍 속에 거목이 뿌리째 뽑힐 듯 흔들렸다. 지면에 닿 을 정도로 굽은 가지가 자기쪽으로 휠 때마다 그는 손을 뻗었으나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기회를 잃을 때마다 이내 후회를 하면서도 번번이 놓치곤 했다. 주운종은 마지막 용기를 짜냈다. 어금니가 '뿌드득!' 갈릴 정도로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리고 덮치듯 안으로 몸을 기울인 자세를 취했다. 동굴을 빠져나올 때처럼 또 한 번 죽을 각오로 모험 해 볼 결심이 선 것이다. 천둥과 번개, 그리고 세찬 바람이 동시에 일었다.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손아귀로 거목의 나부끼 는 가지를 휘어잡기가 무섭게 홀연듯 무서운 돌개바람이 몰아쳤다. 그의 몸뚱이는 철처럼 휜 나 뭇가지의 반탄력을 업고서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다음 순간 쏜살같이 담장 밖으로 날아갔다. 주운종은 죽거나 살거나 하늘의 손에 맡긴 채 두 눈을 질끈 감고서 나뭇가지를 단단히 붙잡고 늘어졌다. 다음 순간, 발바닥을 무엇인가 호되게 후려치는 아픔이 머리 끝까지 울려왔다. 뒤이어 ' 쿠다당, 쾅!' 고막이 터져라고 벼락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차례의 진동을 느꼈다. "으아아!" 그는 외마디소리와 함께 얼결에 손을 풀었다. 그의 몸뚱이는 맥없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에게는 깊은 잠이었으리라. 얼마나 오래도록 혼절했을까?... 그는 잠에서 깨어나듯 부스스 눈을 떴다. 문득 등받이 감촉이 다른 것을 느끼고 둘러보니 자기 몸은 침상에 뉘여져 있는 게 아닌가? "아빠, 저분 이제 깨어났어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닥닥 놀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침상 곁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녀인 듯, 늙수그레한 남자와 처녀였다. 주운종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서 처녀는 더운 물그릇을 받쳐 들고 입가에 대어 주었다. 마시 라는 것이다. 그는 비로소 간밤의 악몽과도 같은 탈출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자기가 나뭇가지에서 멀어져 기 절한 것을 이들 부녀가 구출했다고 짐작했다. 주운종은 사양 않고 물그릇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더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으면서 뱃속까 지 짜릿한 감촉을 전해 왔다. "고맙습니다....." 몸을 일으켜 감사의 의사를 표하려 했으나 도무지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남자는 그가 몸을 뒤척이자 황급히 제지했다. "가만 누워 있게.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절간 담장은 왜 뛰어넘었는가?" 주운종은 다시 눈을 감았다. 두 다리가 쿡쿡 쑤셨다. 아마도 휘어진 나뭇가지를 타고 넘는 순간 담장에 부딪쳐서 다친 모양이다. 몸이 물먹은 솜더미처럼 나른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피로와 둔 통(鈍痛)이 파도같이 밀려왔다. 잠을 자고 싶지만 모처럼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 묻고 있는 것이 다. 그는 여전히 눈을 내리감은 채, 차분한 어조로 이제껏 겪어온 일들을 조용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주운종, 귀주성 귀양현에 사는 주씨 가문의 유일한 외동아들입니다. 향시에 합격하고 서울로 올라가 대과시험을 치기 위해 여행하던 길에....." 기사회생 拯孤窮 淑女垂靑 訂良姻 醉仙作伐 두 부녀는 운종의 이야기를 듣자 무척 놀라와하며 격동된 표정이었다. 운종이 자기를 어떻게 구했는지 자초지종을 묻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장노사(張老四)란 사람이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행실을 좇아 장노실(張老 實: 노실은 진실하다는 뜻)이라 부르기도 한다오. 내 안사람은 일찍이 세상을 떠서 우리 부녀만이 쓸쓸히 세상을 살아왔지요. 한데 이 묘의 채원에 온 지가 벌써 십 년도 훨씬 넘었는데 저들 화상 이 그렇게 흉악한 줄은 상상도 못하였소. 공자는 지금 가까스로 도망은 나왔어도 내일이면 위태 할 것이오. 화상들은 석뢰에서부터 종적을 찾아 공자가 이 늙은이의 집으로 도망온 것을 틀림없 이 찾아내리다." 장노사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말했다. "이 늙은이는 어려서 권각과 봉술을 약간 배웠지만 두 주먹은 네 손을 못 당하는 법이라, 우리 부녀는 결코 화상들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 부녀가 어찌 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으나 공 자의 생명이 정말 큰일이오! 오늘밤 내 일찍 잠이 들었는데, 나의 딸 옥진(玉珍)이 불러 깨웁디다. 담벼락에서 소년이 떨어져 내렸다는 거요. 나는 처음 강호의 친구가 절에 노자를 얻으러 들어갔 다가 상처를 입고 우리 뜰 쪽으로 도망왔나 하였지요. 하기야 당신한테 물어보면 될 것이지만, 신 과(新科: 지방과거)에 오른 한 분 공자인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만약 새벽이 되고 보면 아주 위험할 터이니 빨리 대책을 세워야겠습니다." 운종은 그의 말을 듣자 두렵고 놀라왔다. 그는 손과 발이 저리고 아픈 것은 생각할 여가도 없이 급히 무릎을 꿇고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장노사가 말했다. "공자는 빨리 일어나시오. 우리 딸과 의논한 뒤 다시 이야기하십시다." 노인은 옥진을 불러 밖으로 나가 한동안 상의하더니 되돌아 왔다. 노인이 운종에게 말했다. "우리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당신을 결박해 절에 데려다 주면 되는 일이오. 그러면 쓸데없는 일 에 간여하지 않게 되고 화상들한테 점수를 딸 것이고, 그러나 그런 짓거리는 나 장노사가 결단코 할 수가 없소. 현재로선 두 가지 길이 있으니 당신이 하나를 택하시구려. 첫째는 당신을 문 밖에 내보내 줘 도망가게 하고 우리는 중들한테 아무 보고도 하지 않는 것이오. 이 주위의 십 리 내에 있는 인가는 모두 절의 전답에 붙어먹는 사람들이라 그들의 눈에서 벗어나기는 쉽지가 않소. 따 라서 살고 죽고는 모두 당신의 운수 소관이지요. 두 번째는 우리 부녀가 당신과 함께 도주하는 방법인데 확신은 할 수 없다 해도 비교적 안전할 것입니다. 늙은이는 옛 살던 곳을 옮기기 어려 운 바라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나 하나밖에 없는 딸의 소원을 반백이 된 내가 떨쳐 버릴 수가 없 구려. 하나 당신을 무사히 도망시켜 준 뒤 우리 부녀가 어디 가서 안신하느냐 하는 일이 문제요. 이 문제에 대해선 당신이 명백한 답변을 해주시오." 운종은 노인의 정기가 혁혁하고 두 눈에 광채가 이는 것을 보자 무지렁이 시골 농사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도 앞뒤 사려가 분명했다. 더구나 자신이 당한 환난을 위해 집을 버리고 모 험을 하면서까지 구해 주겠다 하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네의 협의로움은 제가 보답키 어렵군요. 저는 아홉 집안의 대를 잇는 몸이라 재산은 무 척 많습니다. 분부만 하신다면 오로지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다만 어르신네께서 다년간 안거하던 곳을 저를 위해 버리고 떠나셔야 한다니, 그것이 난감할 뿐입니다." 이때 그동안 말없이 이야기만 귀담아 듣던 옥진이 밖으로 나갔다. 장노사가 말을 받았다. "당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으면 되었소이다. 위급한 상태라 말을 많이 할 여가가 없소. 나도 당신이 은혜를 잊거나 의리를 저버리지 않으리라고 믿습네다. 한데 그대는 책을 읽은 분이 니 남녀간에는 수수불친(授受不親: 남녀사이는 직접 물건을 주고받지 않는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남녀는 유별이라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썼음) 하는 도리를 알겠구려." 운종이 대답했다. "어르신네의 말씀은 터무니없으십니다. 제가 머리를 묶고 책을 읽은 서생이오만 도의는 훤히 알 고 있습니다. 비록 어두운 밤에 따님과 같이 간다 해도, 또 어르신네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 해 도 그녀에겐 털끝 한오라기 불민한 행동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제가 짐승과 마찬가 지지요." 장노사는 그의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정말 책벌레시구려! 그대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도망하려 하오?" 운종은 무슨 말인지 몰라 망연히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장노사가 말했다. "당신은 부귀하게 자라 정말로 험한 세상을 모르시오. 이 며칠 흉험한 일을 당하고 사나운 비바 람 속에서 구사일생 하느라고 그대는 이미 손발이 상처투성이요. 만일 비가 상금도 그치지 않으 면 멀리는커녕 일 리나 반 리도 제대로 갈 수 없을 것 아니겠소!" 운종은 그 말을 듣자 상처를 입은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나 두 어 걸음 걸어보았다. 과연 통증 이 말할 수 없이 아파 금세 두 줄기 눈물이 양볼로 좌르르 흘러내렸다. 장노사가 말했다. "다급해 하진 마시오. 당신을 위해 아무 방안이 없다면 늙은이가 어찌 목숨을 걸고 구하려 하겠 소?"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옥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두 개의 보따리와 마포(麻布)를 들고 있었 다. 그녀가 말했다. "곧 하늘이 밝아올 거예요. 일체 필요한 물건은 모두 챙겼거든요. 아빠는 이 천으로 공자를 등에 잘 질 수 있게 묶으세요. 제가 음식을 준비할 테니, 식사 뒤 즉시 떠나기로 해요. 조금이라도 늦 었다간 변이 날 테니까요." 그녀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장노사는 마포를 넷으로 접어 두 쪽을 낸 뒤 운종의 등을 십자로 묶고 다른 한 쪽으로는 두 다 리를 동여맸다. 이윽고 옥진이 냉주와 냉채 등 음식을 한 상 차려와 세 사람은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옥진이 또 한 차례 밖을 나갔다 와서 두 사람을 재촉했다. 장노사는 운종을 등에 업고 천을 자기의 가슴에 돌려 십자로 묶었다. 옥진도 급히 긴 옷을 벗고 짧은 겉옷을 걸쳤다. 그녀는 부녀가 쓸 두 자루 병기와 보따리 두 개 를 등 양켠에 나눠 메었다. 장노사가 집 밖의 기름등잔을 불어 끄자, 세 사람은 조용히 후문을 열고 담장을 휘돌아 관도로 올라섰다. 이때도 비는 완전히 그치지 않고 줄줄줄 내리고 있어서 길은 진흙투성이었다. 발목까지 푹푹 진 흙탕 속에 빠져 걷기가 아주 힘들었다. 더군다나 컴컴한 밤에 등불도 들고 있지 않아 그들 부녀 는 한걸음 한걸음 아무리 빨리 걸으려 해도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오륙 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때 그들은 저 멀리 희뿌연 속에 곧 나무와 한 채의 띠집이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띠 집에서는 한창 밥짓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옥진이 홀연 입을 떼었다. "아빠, 저 앞에 있는 띠집이 구숙부님네 두부집이 아녜요? 우리 저기 가서 잠시 다리도 쉬고, 지 는 것도 바꾸어요." "아 참, 그렇지! 네가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깜빡 잊어버릴 뻔했다. 아직 위험을 벗어난 건 아니 지만 구숙부 집에서 잠시 쉬는 거야 괜찮겠지." 그들은 띠집을 향해 걸어갔다. 띠집에 거의 다가가 문을 두드리려다 눈썰미가 빠른 장노사는 갑 자기 한 도인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아주 헐어빠진 옷을 입은 도인은 등에 붉은 호로 병을 메고 있었고 알딸딸하게 취한 모습이었다. 장노사는 급히 옥진의 손을 잡아당겨 길 옆 나무 뒤에 숨었다. 도인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아마도 두 부녀를 보지 못한 듯했다. 이 띠집의 주인은 구림(邱林)이란 사람으로서 장노사와는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 도인이 나간 직 후 나무 뒤에서 장노사 부녀가 나타나자 구림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짓해서 불 렀다. "자네 집에 또 사람이 있나? 두부 한 그릇 들며 다리를 쉬고 싶은데." 구림이 대답했다. "집에 사람이 한 사람 있긴 하네만 멀리서 온 꼬마로 아무관계 없네.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이 야기함세." 그는 말을 끝내자 부녀를 안으로 청해 들였다. 장노사는 운종을 내려놓고 인사를 나눈 뒤 딸과 함께 젖은 옷을 벗어 불에 말렸다. 구림이 급히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지? 그리고 자네들은 왜 이렇게들 낭패한 꼴인가?" 구림은 오래 된 친구인지라 장노사는 전후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구림은 한바탕 이야기를 듣 자, 운종에게 어쩔 작정이냐고 물었다. 운종이 대답했다. "저는 겨우 목숨을 살렸으나 동료 십육 명이 모두 참살당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성도에 가서 보고를 하여 나쁜 중놈들한테 복수를 하고 이곳 사람들의 해악도 제거했으면 합니다." 구림이 말했다. "주공자, 내 당신의 의기를 막고자 하는 건 아니오. 그러나 이 흉악한 중들의 내력과 그들의 세 력에 대해서는 나도 소상히 알고 있소. 그들의 행위는 천인공노할 터이나 아직 운수가 다하지는 아니한 듯하오. 그들과 성도의 문무관원은 아주 친밀한 사이고 명성도 크게 얻고 있습니다. 또 절 의 설비가 기묘해 작은 성보다도 나을 것이오. 살인한 뒤에 이미 흔적을 깨끗이 없앴을 뿐만 아 니라, 공자가 고소하면 관부는 필히 그들에게 몰래 알려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동시에 한편으 로는 당신을 죽여 입을 봉하려 할 것입니다. 그들은 돈도 있고 무예도 정통한 데다 검술에 빼어 난 사람이 아주 많아 관부가 그들을 잡으려 해도 적수가 되지 않을 터인데, 더구나 한통속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소? 괜히 목숨을 버리느니 조용히 경사(京師)로 올라가 공명이나 이루고 사십시 오. 저들 악으로만 가득찬 자들은 하늘의 뜻으로 언젠가 망할 날이 있으리다." 운종이 뭐라 답변하려는데 홀연 미풍과 함께 언제 나타났는지 한 사람이 그의 앞에 버티어 섰 다. 그 사람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를 또 만나리라곤 생각지 못했네그려!" 장노사 부녀는 깜짝 놀라 앞으로 덤비며 손을 쓰려 했다. 그러자 구림이 급히 소리쳤다. "놀라지들 마십시오. 여긴 모두 우리 사람입니다!" 운종은 그 사람을 보자 즉시 절을 하며 인사했다. 원래 이 사람은 장씨 부녀가 길가에서 만났던 도인이었다. 운종은 장노사의 등에 업혀 있었으므로 그를 보지 못했었다. 구림이 급히 그를 소개했다. "이분은 나의 사숙으로, 아미파의 대선배이신 취도인(醉道人)입니다." 장씨 부녀는 취도인의 명성을 일찍부터 듣고 있었기에 극진히 예를 올렸다. 구림이 운종에게 어떻게 취도인을 아느냐고 묻자, 취도인이 망강루에서 만났던 일을 한바탕 늘 어놓았다. "조금 전 나는 당신들의 행색을 보고 약간 허둥지둥하는 기미가 있어 슬쩍 의심을 했지요. 나중 에 몰래 보니 구현질의 집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겠소. 그래서 돌아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았 지요. 그 덕에 쓸데없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소이다....." 운종이 말했다. "그날 망강루에서 선사(仙師)의 현묘한 암시를 우매한 후배는 알아듣지 못하고 여러 번 살신의 화를 당할 뻔했습니다. 더구나 구선생 말씀이 선사께선 무림의 검협으로서 대선배라 하시니, 후배 는 그저 존경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처럼 구사일생하여 선사를 뵈온 것도 다 인연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이제는 풍진세상의 공명이니 출세니 모두가 물거품 같고, 다만 선사를 따라 심산에서 수 도나 하였으면 하옵니다." 그는 말을 끝내자 취도인 안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취도인이 이를 보자 껄껄 크게 웃었다. "일어나게 일어나. 자네가 나의 제자가 되고 싶은가 보나, 말이 그렇지 그 일이 그렇게 쉽겠는 가! 자네의 자질이 워낙 좋아 제자로 삼는 것은 어렵지 않네만 우선 세 가지 일을 승낙해야 가능 하다네. 첫째, 인생은 효가 으뜸일세. 자네는 아홉 집안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니 덜렁 출 가해 버리면 후손이 끊기지 않겠는가? 부모와 백부, 숙부들은 누가 봉양을 할 건가? 자네는 우선 즉각 귀가해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 나서 나를 따라 입산을 하게. 둘째, 우리들은 모두 전조(前朝)의 유민이라는 점일세. 지금은 비록 나라가 망했다 해도 본파 문하제자는 절대 이민족 을 위해 일할 수는 없다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이왕 우리가 검협으로 자처한다면 이민족에 유린당하고 간악한 무리에 시달림받고 있는 동포를 구해야 하네. 알겠는가? 그밖에 우리 문하의 계율 같은 것은 그대가 정식으로 제자가 된 뒤에 자연히 하나하나 알게 될 것이네. 한데 이 세 가지 일을 자네는 해낼 수가 있겠는가?" 운종은 원래 영특하게 태어나 총명이 과인한지라 지금 희세에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연을 만났 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싶어 다시 무릎꿇고 앉아 일일이 응락하며 스승을 받드는 예를 갖추었다. 옥진은 이러한 모습을 보자 문득 영감을 느낀 나머지 운종이 절을 끝내자 그녀도 쫓아가 무릎을 꿇었다. 취도인이 말했다. "아가씨는 이러지 말고 빨리 일어나시게. 우리는 여제자는 받아들이지 않네. 그대는 장래 나보다 훨씬 훌륭한 스승을 섬기게 될 거야. 그대들 둘은 앞으로 본파를 대신해 무림에 빛을 내리다. 너 무 마음이 급할 것이 없다네." 옥진은 막무가내로 애원했다. 그래도 취도인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그녀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도인이 다시 운종에게 말했다. "참, 자네에게 이야기함세. 그날 망강루에서 자네들 열일곱 사람을 보니 모두 죽음의 기색으로 가득하더구만. 그중에서 자네 한 사람만이 살 가망성이 있고 나머지는 도저히 그 액운을 만회할 수 없어 보이더군. 그러나 하늘은 호생지덕(好生之德)이 있는 바 아닌가. 어찌 죽는 것을 보고 구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자네들을 살살 따라갔지. 한데 우리 문파 노선배의 지시가 갑자기 내렸다네. 나는 급히 그 일을 처리하느라고 그만 삼 일을 지체하고 말았지." 취도인은 한숨을 푹 쉬며 잠시 뜸을 들였다. "돌아오자마자 자네들의 행방을 찾지 않았겠나. 이곳 저곳을 찾다 어젯밤 여기에 도착했는데 숲 속에 한 꼬마녀석이 매달려 있는 걸 보고 구해 주었다네. 그 녀석을 이 구형 집에 데려와 요양시 켰더니 오늘 새벽에야 정신은 들어 이야기를 하는데 바로 자네의 서동이더구만. 그는 자네가 외 출한 지 삼 일이 돼도 아무 소식이 없어 객점 사람한테 묘의 이름을 알려달랬으나 알려주질 않더 라는 거야. 한데 어젯저녁 한 화상이 찾아와 객점 주인과 한동안 밀담을 나누고 가더라는 거지. 소년은 자네를 찾기 위해 그 중을 따라나섰는데 그 숲에서 큰 비를 맞고 중은 놓쳐 버려 상심 끝 에 죽어버리려고 나무에 목을 맨 것이었어." 운종은 놀랍고 기뻤다. 취도인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서동의 말을 듣자 나는 자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알았지. 그래서 이 새벽에 서둘러 묘 로 가서 자네들의 행방을 탐문하려는 참이었네. 자네야 무사히 도망왔으나 내가 삼 일을 지체해 열여섯 사람의 목숨을 잃었으니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는가. 하기야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린 거니까. 하나 저들 흉악한 중들의 운수는 아직 다하지 않은 듯하이. 원수를 갚는 일은 다음 으로 미루세. 지금 소삼아(小三兒)는 방에서 쉬고 있고, 이곳은 내가 있으니 나쁜 중들도 오지 않 는 게 좋을 것이야. 자넨 여기서 하루를 푹 쉬게. 내일 내가 호송해 주며 노상에서 내공심법도 가 르쳐 주겠네." 이때 소삼아는 방 안에 있다가 귀에 익은 말소리가 들려 밖을 살그머니 내다보았다. 주인을 보 자 그는 뛰쳐나와 한바탕 통곡을 했다. 취도인이 운종의 상처에 단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이제 하늘이 밝아 노상에 행인이 많아졌고, 묘의 이목이 많으니 방에 들어가서 쉬게나. 저들이 오면 구림과 내가 처치해서 보낼 테니." 운종은 침상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한편 옥진은 갑작스런 사태에 만감이 교차하는 데다 취도인이 제자로 받아주지 않는 게 기분이 나빠 시종 앙앙불락하고 있었다. 하오가 되자 절에서도 운종이 도주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워낙 퍼부어 대는 비 때문에 운 종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사방으로 사람을 급파해 운종을 추적하게 했다. 구림의 집에도 두 차례나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저렇게 생긴 젊은이를 못 보았느냐고 물었으나, 두번 다 구림이 적당히 대답해 보냈다. 며칠이 지나면 그들은 장노사가 집을 버리고 도망하며 운종을 구해 준 것을 알겠지만 그때는 이 미 도망간 뒤의 일일 것이었다. 운종은 구림의 집에서 하루를 푹 쉬며 사이사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구림도 아미파 대협 가운 데 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별호는 <신안(神眼)>으로 칭했는데 상부의 지시를 받고 이곳에 두부집을 차려 묘의 동정을 살펴오고 있었다. 장노사도 종전에는 사천(四川) 노상의 수로(水路) 영웅이었다. 그는 별호가 <분수연자(分水燕 子)>로서 본명은 장경(張瓊)이었다. 그러나 녹림에서 사는 게 싫어 손을 씻고 채원에서 농사나 지 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경황중에 정신을 차린 운종은 그동안의 전후 인과(因果)를 곰곰 생각하다가 장씨 부녀의 의리에 감동했다. 더구나 장옥진이 자기에게 극진히 대하는 게 너무나 고마왔다. 그들 부녀가 집을 버리 면서까지 그를 구한 것도 모두 그녀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여자의 의리로 살아났다고 생각하자 그는 마음이 짜릿짜릿해지며 수시로 그녀를 쳐다보곤 했다. 옥진은 천생의 아름다운 눈과 하늘하늘한 몸매를 지닌 빼어난 미녀였다. 미려한 중에 영기가 발 랄하여 누가 보아도 사랑스럽고 우아해 보였다. 한데 그녀는 웬지 모르게 어여쁜 눈썹을 잔특 찡 그리고 가이없는 수심에 잠긴 듯 얼굴을 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부녀간에 뭔가 자꾸 논쟁하는 것 같았다. 하룻밤이 지나자 비바람이 멎었다. 하늘이 아직 밝지 않았는데 구림과 취도인이 출발하자고 재 촉했다. 문 밖에는 이미 네 필의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장씨 부녀와 운종 그리고 소삼아 에게 말을 타라고 권했다. 운종은 취도인이 혹시나 같이 가지 않을까 의심이 갔다. 그는 소삼아와 함께 말을 타고 말 한 필은 취도인에게 양보하려 했다. 취도인이 웃었다. "자네가 말을 한 필 양보할 모양인데, 그래도 나는 말을 타지 않는다네. 나 혼자라도 말보다 더 빨리 달린다네." 운종은 스승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장씨 부녀와 함께 말을 탄 뒤 구림에게 작별하고 고향을 향 해 출발했다. 고삐를 잡고 몇 걸음 가지 않았는데 취도인은 이미 종적이 없이 사라졌다. 운종은 그와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하지 못한 것을 못내 후회했다. 피차 길을 잘못 가면 어쩌랴 싶었다. 하나 그들이 저녁에 투숙한 객점에 들자 취도인은 이미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호로병을 끼고 한참 신이 나게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다섯 사람이 저녁식사를 끝내자 취도인은 운종에게 내공입문의 구결과 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운종은 천부적인 자질이 총명했으므로 쉽게 배우고, 장씨 부녀는 원래 내공심법을 조금 알고 있 는 터라 연원이 다른 심법이라도 옆에서 듣자 많은 보탬이 되었다. 이어 한창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을 때, 홀연 취도인이 정색을 하며 운종에게 말했다. "내 긴요히 할 말이 있네. 자네 이 말은 잘 새겨 듣게나." 운종은 무슨 말인가 하여 근엄히 귀를 기울였다. "나는 평생 의리가 없는 자를 제일 증오한다네! 장노선생은 이분 따님과 함께 집까지 버리며 목 숨을 걸고 자네의 생명을 구해 주었지. 그런데 자네는 이번에 돌아가면 어떻게 보답할 생각인가? 그걸 한번 듣고 싶구먼." 취도인의 말에 장노사가 뭐라 말을 하려 하자 취도인이 급히 눈짓을 해서 이를 말렸다. 운종이 입을 열었다. "제자는 어려서부더 시서(詩書)를 읽었습니다. 어찌 은혜를 모르고 의리를 저버리겠습니까? 제자 의 집은 재산이 퍽 많으니 장노선생을 상빈의 예로 극진히 모심과 동시에 부모님께 품명해서 집 과 전답을 떼어드려 장노선생께 평생 먹고 사시는 데는 부족함이 없게 하오리다. 그렇게 하면 되 올는지요." "자네는 잘못 생각하고 있네. 장노선생이 이전에 강호를 풍미할 때 금은재화는 초개와 같이 알 았을 게야. 겨우 돈으로써 이분을 대한단 말인가. 그것은 보답이라 할 수 없어. 선생 자신도 그런 걸 받을 수도 없을 게구 말야. 자네는 조금 생각을 해보게." "제자는 그저 은혜에 감동하고 있으나 우매해서 무슨 말씀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 다." "대장부는 은혜를 말로 갚는 건 아닐세. 장노선생이 자네를 구하신 것은 당초 인재를 아끼는 일 념에서였네. 내가 보기에 옥진 소저는 장노선생의 하나밖에 없는 금지옥엽으로 아름답고 나이 찬 것이 자네하고 좋은 짝이 될 성싶으이. 내가 중매를 서서 혼인을 성사시키고 싶은데 어떤가? 장 노선생을 장인으로 모시며 이분을 행복하게 해드린다면 자연히 은혜에도 보답하게 되고 두루 좋 지 않겠는가?" 장씨 부녀는 이 말을 듣자 저희들의 맘에 쏙 드는지라 은연히 좋아했다. 운종은 스승의 말이 이치에 합당하는 데다 옥진이 아름답고 어질며 무예 또한 출중하므로 자신 도 모르게 마음이 설레었다. 더군다나 옥진은 그의 은인 중의 은인인 것이다. 부모한테 허락을 받 지는 않았으나 자신들의 외아들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한다면 승낙하지 않을 이치가 없다. 그는 옥진과 결혼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마냥 두근두근해 뭐라고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한편 옥진은 처음부터 운종의 재모에 반해 억척스레 그를 구하자고 주장했고, 그 뒤 이틀 동안 같이 있으면서 그의 됨됨이가 훌륭한 것을 보자 평생을 맡길 만한 사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부친한테 그 의사를 밝혔는데, 장노사는 운종이 훌륭한 사내임은 틀림없으나 워낙 부유한 집안에다 가문의 차이가 커서 두 사람의 결혼에 반대해 왔다. 그는 결혼했다가 자칫 자신의 딸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소박맞을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옥진은 부친이 이처럼 우유부단히 일을 추진하자 앙앙불락하고 있던 참인데, 취도인의 갑작스런 말을 듣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기쁘기 한이 없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렸는 데도 운종이 뭐라 응답을 하지 않아 불안해졌다. 운종이 자기를 싫어한 다는 말인가? 어쩌면 저렇게 배은망덕한 사내가 있을 수 있을까? 그녀는 원한이 가슴에 뭉클뭉클 일어 살그머니 머리를 들고 운종을 훔쳐보았다. 마침 공교롭게도 운종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자 마치 전기가 부딪 친 양 불꽃이 튀며 똑같이 부끄러워 머리를 돌렸다. 그들의 얼굴은 동시에 빨갛게 물들었다. 취도인은 그런 모습을 보자 둘이 서로 좋아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장노사를 향해 말했다. "자, 장선생 내 말을 이상히 듣지는 않았겠지요. 어떻습니까, 이 문제는 장선생의 한 마디 승낙 만이 남은 듯 싶은데요?" 장노사는 처음부터 한 마디 하려다가 취도인이 말려 조용히 듣고만 있었는데 취도인이 대놓고 묻자 그는 즉각 입을 열었다. "후배는 십 년 전 손을 씻고서 자운사의 승려들을 한 번 사귄 연유로 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습니다. 본래 성도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산수를 사랑해 딴 곳보다 이곳을 택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 중들이 그처럼 흉악무도한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금년 봄인가요, 모태라는 화상 하나 가 나한테 와서 아미파의 간세(奸細: 첩자)라고 몰아붙이며 지통한테 저를 쫓아내라고 우겨댑디 다. 하지만 지통은 저와는 십 년을 사귄 정리가 있고, 평소 제가 쉬이 문 밖 출입을 않는 데다 왕 래하는 사람도 없는 것을 알아 지객승인 요일을 보내 걱정하지 말라고 위안까지 하더군요." 장노인은 잠시 휘이 여러 사람을 둘러본 뒤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때 감사하다고 그들에게 인사는 했지만 때를 보아 딴 곳으로 옮기는 게 상책이라 생각 했지요. 주공자가 우리 채원으로 도망나왔을 때도 처음엔 공자 자신이 도망할 수 있으면 하고 못 하면 운수 아니냐고 치부했습니다. 그러나 딸아이 옥진이 끈질기게 그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집을 버리고 떠날 계획을 한 것입니다. 지난 이틀 동안 주공자의 인품과 학문에 대해선 충분히 감복할 만큼 알 수 있었고, 더욱 선배 검협의 제자까지 되셨으니 우리로서는 어찌 사양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나 주공자는 부귀한 집안의 자제라 우리같이 곤궁한 집과 정말 혼인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장래 피차 불편할 것이니 선배께서 그 걸 확실히 확인해 주십시오." 취도인은 그 말을 듣자 껄껄 크게 웃더니 운종에게 물었다. "하하하, 여기엔 아무 외인이 없으니 너는 정정당당한 남아대장부답게 태도를 밝히거라! 만약 마 음에 싫으면 싫다 하고 좋으면 성큼 일어나 장인어른께 인사를 하라고!" 운종은 우물쭈물하던 태도를 내쳐버리고 냉큼 일어나 장노사에게 세 번 절을 올린 다음 조용히 불렀다. "장인어른!" 이어 그는 사부한테도 감사의 말을 올렸다. 취도인이 말했다. "이것으로써 일은 모두 끝났네. 내 근심걱정도 없어졌지. 자네들 둘은 부부가 되기로 했으니 길 을 가면서 오빠 동생으로 부르며 친근히 하고, 집에 도착하거든 부모한테 품명해 빨리 결혼하도 록 하게. 여기에 검법입문에 대한 책이 있으니 앞쪽에 있는 내외공의 심법과 함께 열심히 연마하 도록 해라. 내 이 년 뒤에 너를 집으로 찾아가 다시 검술비결을 전해 주겠다." 취도인은 말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낡은 책자 하나를 꺼내 운종에게 주었다. 운종은 즉각 무릎을 꿇고 책자를 받아들었다. 취도인은 다시 허리에 찼던 검 한 자루를 풀어서 운종에게 주었다. "이 검의 이름은 <상심(霜甚)>으로써 전국시대의 명검이다. 머리카락을 불어 스쳐도 토막나고 쇠도 진흙같이 자를 수 있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검이라, 내가 몸과 검이 합일(슴-)하지 못할 때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갖고 다니던 무기였느니라. 오늘 이 검을 너희둘의 약혼을 기념하여 선 사할 터인즉 소중히 간직하여 사용하고, 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길 바란다." 검집이 무척 낡아 보였고 고색이 창연했으나 문양이 정치한 것이 보통 검 같아 보이질 않았다. 운종은 아주 기뻐 다시 무릎을 꿇고 정중히 받았다. 그는 검을 가져다 장인인 장노사에게 보여 주었다. 장노사는 세상 물정이 환한 사람이라 이 검이 보통 진귀한 물건이 아님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검을 검집에서 한두 자쯤 살짝 빼보았다. 영롱한 검기가 싸늘히 눈을 찌르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휩싸는 듯 사람을 압박해 왔다. "좋은 검이로다. 대단한 보검이야!" 장노사는 찬사를 연발하고는 옥진이 몸에 지니고 있는 청옥(靑玉) 보석을 취도인에게 답례로 증 정했다. 취도인이 운종에게 다시 말했다. "내 성도에 일이 있어 몸을 뺄 수가 없다. 너희들의 일은 모두 잘 처리되었으니 그동안 검법에 만 정진하기 바란다. 그럼 나는 이만 가겠다!" 말이 끝나고 취도인의 신형이 한 번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는 이미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은 급히 밖으로 쫓아나갔다. 취도인의 신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저 멀리 햇빛 아래 하얀 점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이날 밤 객점에서 쉬고 다음날 운종의 집을 향해 일찍 출발했다. 한편 지통대사는 운종이 도주한 삼 일째 되는 날, 장노사 부녀가 갑자기 집을 버리고 사라졌다 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장노사 부녀의 행방을 찾기 위해 채원을 일차로 샅샅이 뒤지다 주운종 이 담장을 넘어 도망나온 흔적을 발견했다. 이로써 장노실 부녀가 주운종을 구해 준 것이 확실했 다. 이때서야 지통대사는 모태의 권고를 들어 그들을 일찍 쫓아버리지 않은 게 영 후회될 뿐이었다. 지통은 또 모태가 사람 볼 줄 모른다고 놀릴까 봐 기분이 나빴고, 그의 권고를 하나는 듣는 셈치 고 묘의 방비를 엄밀히 하는 한편, 몰래 절의 재산을 처리해 다른 곳에 거점을 마련할 준비를 하 기 시작했다. 희한한 노인 潛心避禍, 小住碧筠庵 一忿眞誠, 情感追雲搜 주순은 그날 모태와 싸우다 위기에 몰린 판에 다행히 취도인의 도움으로 위급한 지경을 모면할 수 있었다. 모태와 취도인이 섬광을 흩뿌리며 어지러이 싸우고 있을 때 갑자기 다섯 줄기의 붉은 검기가 홀연히 날아 들어왔다. 이를 보자 취도인은 급히 주순을 껴안고 성도를 향해 바람처럼 날 아갔다. 주순은 취도인이 그를 붙들고 달려가는 대로 눈을 감고 몸을 맡겼다. 휙휙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성도 성 밖의 무후사 근처 은벽한 곳에 도착했다. 땅에 내려서자 주순은 즉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취도인에게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감사했 다. 취도인은 주순의 감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풀 사이에 있는 작은 암자로 걸어 들어갔다. 주순 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암자 안은 단촐했으나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한가히 노닐고 있던 두 도동(道童)이 그들을 보 자 급히 달려나와 차를 끓여내오는 등 부산을 떨었다. 취도인은 주순이 아직 저녁을 들지 않았음을 알고 도동에게 식사와 술을 준비하라 일렀다. 두 도동이 물러가자 주순은 또다시 취도인 앞에 엎드려 문하 제자로 거두어 달라 애원했다. 취도인은 고개를 마냥 저었다. "자네의 심기와 자질로 보면 성취를 이루지 못할 리 없네. 그러나 그대는 이미 나이 사십에 동 정(童貞)의 몸도 아닐세. 검술을 배우기가 무척 어려워 나를 스승으로 삼아도 헛고생만 할 것이 야." 그는 고집불통으로 주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순이 재삼 간청하자 취도인이 말했다. "내가 자네를 제자로 거둬들이지 않으려는 것은 아닐세. 자네를 제자로 거둘 사람은 따로 있다 네. 그분은 <숭산이로> <동해삼선> 가운데 한 사람이지. 나보다 훨씬 무공이 고매하신 분이라 네. 그분은 몸을 보하는 신단(神丹)도 갖고 있어 그대가 동정의 몸이 아니라도 성취에 걱정이 없 을 것이네." 주순은 취도인이 이렇게까지 터놓고 이야기하자 더 이상 우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숭산이로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몇 번 물어보았지만, 취도인은 때가 되면 알게 된다며 끝내 알려주 지 않았다. 지금 미리 알아봐야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주순은 취도인의 운방(雲房)으로 아침인사를 드리러 갔다. 한데 취도인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방에 없었다. 주순은 급히 도동들을 찾았다. 그들의 이름은 송아(松兒)와 학아(鶴兒)였다. 주순이 송아에게 물었다. "여보게, 사부님은 어디로 가셨는가? 어제는 총망중에 그분의 성명을 묻지 못했는데, 두 소사형 은 사부를 오랫동안 모셨으니 성함을 알겠지?" 송아가 대답했다. "우리 사부께서는 절에 별로 계시질 않는답니다. 두세 달에 한 번쯤 오시곤 하죠. 이번에 가시면 서도 아무 말씀도 안하시더군요. 그리고 그분의 성함은요, 저희들도 몰라요. 다른 분네들이 그 어 른을 보고 취도인이라 부르더군요. 아마도 술을 워낙 좋아하시니까 붙인 이름인가 보아요. 매번 오시는 손님마다 '취도인, 취도인' 하는 걸 보아 취도인이 이름이겠죠." "그럼 여기는 원래 취도인의 거처냐?" "그렇지 않아요. 여기는 벽균암(碧筠庵)이란 곳으로 우담신니(優曇神尼)의 대제자 소인대사(素因 大師)가 참선하는 암자랍니다. 우리 사부님은 이렇게 조용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셔서 잠시 와서 머무르시는 거죠. 우리가 온 지도 이제 겨우 반 년밖에 안 돼요. 이곳은 거의 찾아오는 사람이 없 으니, 선생님이 성도에 혼자 계신다면 여기에 와서 묵으셔도 될 거예요. 사부님 말씀이 선생님은 무공이 아주 높다면서요. 우리한테 무공을 배우라고 하셨는데 가르쳐 주실래요?" 주순은 그가 말하는 게 무척 영리해서 이곳에 와서 머무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취도인이 그를 이곳에 데려온 것을 보면 그 역시 허락하는 셈이 아닌가. 주순은 성도 성 안의 객점에 가서 계산을 치르고 암자로 처소를 옮겼다. 암자로 숙소를 옮긴 며칠 동안 주순은 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 두문불출했다. 취도인은 한 번 떠 난 뒤로 여러 날이 지났건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매일 송, 학 두 도동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 어 적막하지는 않았다. 주순은 워낙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 이야기가 무술에 이르면 슬그머니 말을 흐려 쓸데없는 자랑 은 삼갔다. 어느날 아침 주순이 일찍 일어났을 때 가벼운 발디딤 소리가 창 밖에서 들려왔다. 그는 즉자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송, 학 두 도동이 죽검으로 한창 무예를 겨루고 있었다. 처음엔 별로 기이할 것도 없고 동작이 무던히도 느린 게 서로 초식을 연마하고 있는 듯했다. 그 러다가 주순이 부주의로 기침을 한번 하자 두 도동의 죽검은 점차 빨리 움직였다. 그들은 주순이 엿보는 줄 알고 슬슬 본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들의 죽검은 토끼 가 뛰고 솔개가 덮치듯 바람처럼 날기 시작했다. 육합검(六合劍)의 고수인 주순으로서도 그들의 신법을 알 수가 없었다. 주순이 한참 정신을 쏟고 관망하는 중에 홀연 송아가 파탄을 드러내며 선학전시(仙鶴展翅)를 펼 쳤다. 학아는 이를 놓칠세라 왼손으로 검결을 떨쳐 장사입동(長蛇入洞) 초식을 시전했다. 학아는 송아의 가슴을 냅다 찌르며 소리쳤다. "쓰러져라!" 주순이 보기에도 이 일 초는 송아가 막아내기 극히 힘들었다. 위급한 순간 송아는 초식으로 맞대결하지 않고 검으로 막아내는 동시에 땅을 차고 공중으로 뛰 어올라 연자천운(燕子穿雲)을 전개했다. 이어 '칙!' 하는 소리와 함께 신응착토(神鷹捉兎) 초식을 써서 아래로 비호처럼 치며 학아의 배후를 급습했다. 학아는 머리 뒤편에서 바람소리가 이는 것을 듣자 급히 앞으로 엎어져 옆으로 뒹굴었다. 그는 등을 땅에 대고 전도취팔선검(顚倒醉八仙劍)을 펼쳐 송아의 일검을 가까스로 피했다. 바로 이 순 간 이상한 물체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아이쿠!" 학아는 비명과 함께 이어타정(鯉魚打挺) 초식을 써서 옆으로 비스듬이 날아 일곱 자쯤의 공중에 섰다. 그의 왼발은 이미 연자삼초수(燕子三抄水)의 수법에 따라 흐르는 구름처럼 나무의 가지에 사뿐히 내려섰다. 학아는 가쁜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사형은 부끄럽지도 않소. 아무리 못 이긴다 해도 암기를 사용 하다니!" 송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암기를 썼다는 거야? 조금 전 공중에 솟았을 때 지나가던 참새들 중 한 마리가 내 검에 맞고 떨어진 것뿐야! 내가 치사하게 암기를 쓸 것 같애?" 주순은 방에서 나와 땅에 떨어진 암기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과연 죽검에 맞아죽은 참새였다. 그 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어린 나이에 이처럼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니,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쓸데없이 무공을 자랑하다 소년들한테 망신 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뭇가지 위에 있던 학아가 사뿐히 내려와 주순에게 검술을 한 번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 러나 주순은 지금 이들 두 소년의 신기에 너무나 감탄하고 있는 터여서 감히 검을 들 수가 없었 다. 그런데도 그들이 끈질기게 졸라대 주순은 그의 절기인 오타매화천운노(五朶梅花穿雲弩)를 한 차 례 시범으로 보여줬다. 송, 학 두 도동은 취도인으로부터 암기를 쓰지 못하도록 엄명을 받고 있었다. 주순의 절기를 보 자 송아가 입을 열었다. "주선생님, 저희 스승은 암기 수법은 배우지 말라고 엄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선생님의 비 법을 배웠다고 사부한테 이야기 하지 마세요?" "하하하, 스승을 속이고 암기수법을 배우고 싶다 이거냐?" "그래요. 부탁드립니다." 주순은 매일 열심히 도동들에게 자신의 몇 가지 암기비결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십여 일이 지나갔다. 문득 주순은 딸 주경운이 자기를 만나기 위해 성도로 오겠다던 약속이 생각났다. 자신이 이 은 벽한 암자에 와 있고, 객점에서 아무 전갈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딸아이가 자기를 못 찾고 허탕을 칠게 걱정이 됐다. 더구나 취도인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머지 않아 훌륭한 스승을 만나리다고 하지 않았던가. 만약 계속 이 암자에 숨어 있다면 화야 피하겠지만 언제 딸이나 스승을 만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는 송, 학 두 도동에게 그런 연유를 설명하고 내일 미지의 스승을 만나기 위해 성도에 가보기 로 했다. 만일 한 번 나간 지 삼 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사고가 난 것일 터이니 두 사람이 알아서 취도인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주순은 정오를 지나 식사를 끝낸 뒤 도동들과 작별하고 벽균암을 나왔다. 그는 성 안으로 가지 않고 성 밖의 청양궁(靑陽宮), 무후사 등 유명한 암자와 절 등을 두루 돌며 어느 곳에 스승이 될 고인(高人)이 있나 찾아보았다. 망강루에 들러 다리를 쉬며 술을 들기도 했다. 이렇게 며칠을 돌아다녔건만 누구 한 사람 만나 지 못했다. 하루는 그가 머물렀던 객점에 찾아가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점소이가 대답했다. "이틀 전인가요 약 오십 세쯤 되는 거대한 노인과 얼굴이 불그스 레한 흰 눈썹의 노화상이 당신 을 찾던데요. 우리는 그날 손님이 하도 서둘러 가시기에 고향으로 돌아간 줄 알고, 그분들께 당신 이 떠난 지 오래이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말했습죠. 그랬더니 두 분은 아주 실망합디다. 그분 들은 떠나기 전에 손님이 만약 다시 오면 말을 전해 달라고 당부하더군요. 아미파 친구가 백미화 상을 따라 운무산(雲霧山)으로 출가하러 갔으니 고향엔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존함이 어떻게 되시느냐 물었더니, 도시 대답을 안합디다. 그들이 손님의 친구세요?" 주순은 찾아온 사람이 이령임을 알 수 있었다. 헌데 그는 왜 갑자기 출가한다는 것이며 그의 딸 영경은 왜 같이 있지 않는 걸까? 그가 자기한테 아미산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모태 그놈이 그곳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주순은 뭔가 마음에 켕겨 며칠 있다가 아마산에 가보기로 작심했다. 그는 점소이와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고 객점을 나왔다. 거리에 나오자 앞쪽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하고 있었다. 주순은 가까이 다가서 사 람들 등 사이로 머리를 밀고 살펴보았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비쩍 마른 노인이 객점의 돌 계단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눈을 꼭 감고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킥킥대고 웃거나 욕을 하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주순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이야기를 좋아할 성싶은 중년의 사나이가 떠벌였다. "저 노인이요, 아침일찍 객점에 왔더랍니다. 술과 안주를 실컷 시켜 들더란 거예요. 하지만 보시 다시피 노인은 저렇게 남루하게 생겨 어디 돈을 갖고 있을 것같이 보입니까? 그래서 혹 먹고 도 망가지나 않을까 하여 주인은 열심히 감시를 했다는 거예요." "노인이 술을 먹고 도망갔답니까?" "그게 그렇질 않았다니까요. 노인이 갑자기 밖으로 나가기에 급히 쫓아가 잡았대요. 한데 자칫 실수하여 남루한 옷이 부욱 찢어지고 말았다는 거지요." "호오, 그래서요?" "노인은 벌컥 화를 낼 뿐 아니라 자기는 도망가려는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는 잠시 구경하러 밖에 나가는 참이었고 혹 주인이 의심할까 봐 보따리를 주점에 놓고 나왔다는 거였어요.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보따리가 있었답니다. 더구나 그 허름한 보따리에는 은자 외에도 큰 콩 알만한 진주 한 꾸러미가 들어 있더래요. 진주알이 무려 백팔 개나 되더라나요. 누가 상상이나 했 겠습니까? 노인은 이렇게 화를 내더랍니다. '사람을 우습게 보지 마라! 이처럼 귀중한 보따리를 자네 객점에 놓고 나오는데 술을 거저 먹고 도망간다고? 자네는 모르겠지만 내 이 의복은 진주보 다도 귀한 것이다. 자네가 내 의복을 찢어 놓았으니 즉시 배상을 해. 배상을 하지 않으면 절대 가 지 않겠다!' 노인은 그렇게 소리치고 저렇게 죽치고 앉아 있답니다. 여러 사람들이 아무리 권해도 주인이 의복을 배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박박 우기는 중이에요." 이야기를 듣자 주순은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되어 노인을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뚫 고 나갔다. 노인은 더러웠으며 다 헤진 신발을 꿰어차고 있었다. 너덜너덜한 옷 사이로 드러난 노인의 다리 는 시커멓고 비썩 말랐는데 그의 옆에는 과연 작은 보따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인의 옆에 서 있는 주점 주인은 상기된 얼굴로 계속 노인을 설득하느라고 경황이 없었다. 그 러나 노인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대꾸가 없었다. 주순은 볼수록 기이한 생각이 들고 차츰 주인이 안 됐다는 동정심이 일었다. 그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거들려는 순간 노인이 눈을 번쩍 뜨고 주순을 노려보았다. "자네가 왔군. 난 자네가 꼭 올 줄 알았지." 주순이 말했다. "노인어른, 어른께서는 어째서 저들에게 그처럼 화를 내십니까?" "이 자들이 나를 아주 업신여기잖아! 괘씸한 것들이야. 자네가 나의 성실한 제자라면 이 녀석들 의 방은 때려부수고 집은 불을 질러버리라구! 내 말 알아듣겠나?" 주순은 노인의 말을 도통 종잡을 수가 없고 무슨 말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노인이 주순에게 다정히 말을 걸고 그의 의표가 당당한 것을 보자, 저 괴짜 노인 이 저처럼 훌륭한 제자를 두었기에 그토록 함부로 행동하는구나 해서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객점의 주인은 노인의 말을 듣자 마음이 다급해져 주순에게 변명을 하려 했다. 이때 노인은 벌떡 일어나더니 보따리를 옆에 끼며 큰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아주 제때에 잘 왔다. 여기 일은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그러나 우리 사도 둘이 공짜 로 얻어먹는 놈이란 말을 들어서는 안 될 테니까 집에 불을 지르긴 해도 술값은 먼저 갚아야겠 지. 자, 내 먼저 가마!" 노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너울너울 춤추듯 걸어가 버렸다. 노인의 말씨는 사투리가 섞인 데다 굉장히 빠르고 갑작스레 주워섬기는 바람에 주순은 그의 말 을 듣느라고 잠시 멍한 채 서 있었다. 노인이 가버리자 주인은 주순이 정말로 불을 지를까 봐 연신 좋은 말로 하소연했다. 주순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노인의 모습은 사라진 후였다. 그는 노인이 있을 때 자신이 제 자가 아님을 명명백백히 밝히지 않았으므로 방화야 않는다 하더라도 음식값은 치러야 할 입장이 되고 말았다. 주순으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순은 수양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십삼 냥쯤 되는 은자를 던져주고 급히 사람들을 헤치며 노인의 뒤를 쫓았다. 거리 두 개를 잽싸게 가로질러 가보았으나 노인의 그림자는 보이지 가 않았다. 그는 이 거리 저 거리를 빙빙 돌며 찾아 헤매다 망강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망강루를 바라보자 배가 꼬르륵 꼬르륵 소리를 냈다. 우선 음식점에 올라가 술과 밥으로 배나 채우고 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순이 터덜터덜 누각을 오르자 그를 잘 아는 점원인 유대(劉大)가 호들갑스럽게 맞아들였다. "아이쿠, 드디어 주나으리께서 오셨군요. 이리로 앉으시지요." 유대가 안내한 탁상에는 술과 음식이 수북이 차려져 있고 젓가락 두 벌이 놓여 있었다. 그중 절 반은 누군가가 들어 안주가 너저분히 흩어져 있었는데 나머지 반은 깨끗이 남아 있었다. 주순은 유대가 잘못 안내한 것으로 생각했다. "여보게, 여기는 다른 분이 아직 들다 말았군 그래. 다른 자리로 앉게 해주게나." "아닙니다. 여기는 나으리를 위해 남겨 놓은 자린 걸요." "그 무슨 말인가? 나를 위해 남겨 놓았다니?" "나으리의 스승께서 남겨 놓으신 거예요." "뭐야?" 주순은 조금 전의 일이 생각 나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누가 나의 스승이란 말인가?" 유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했다 "그 궁상스럽게 생긴 노인 말입지요. 주나으리, 천천히 제 얘길 들어보십시오. 우리들이 식사를 끝낸 직후였는데요, 누군가가 전해 주더군요. 한 노인이 음식점에서 술을 먹고 이상스레 떼를 쓰 고 있다구 말입니다. 그것 참 구경거리다 싶어 달려가 보았습죠. 그때 마침 나으리께서 그 노인을 대신해 술값을 지불합디다. 그런데 저희 술집에 돌아와 보니 그 노인이 여기서 음식을 잔뜩 시켜 서 신나게 먹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아침식사를 제대로 못했노라며 나으리와 함께 다시 식 사를 하겠다는 거였어요." 유대는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두 눈을 디룩거리며 다시 계속했다. "그 양반은 참 빨리도 잡수십디다. 이 절반을 글쎄 눈 깜짝할 사이에 들더군요. 그리고는 말하기 를 나머지는 사랑하는 제자가 들거라고 했어요. 바로 나으리를 말하는 겁죠. 사실 그 노인이 시킨 이 음식들은 또 평소 당신이 즐기던 것들이라 '아하 이 스승과 주나으리는 오랫동안 같이 생활한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다 들자 나으리께서 아직도 안 온다고 중얼중얼 하시더 니 일이 있어 더 기다릴 수 없다며 가버렸습니다. 그분 말씀이, 자운사에 갈 터이니 그곳에서 자 기를 기다리라더군요. 우리야 뭐 나으리께서 방금 아까 술값을 치르는 것을 보았고 그분을 공경 히 대하는 것을 목도한 터이라, 그런가 보다 했지요. 뭐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주순은 이야기를 다 듣자 화도 나고 우습기도 했다. 점원과 뭐라고 말싸움할 이유도 없는지라 술과 안주를 데워오라고 시켜 한 바탕 실컷 마시고 먹었다. 술을 두어 잔 꿀꺽꿀꺽 마시고 생각 하니 두고두고 화가 났다. '이런 젠장! 내가 강호를 넘나든지 수 년에 이런 수모는 난생 처음이다. 뭣이 어째? 실컷 퍼먹고 마시고 그리곤 나의 스승이라?' 바로 이때 '쿵쾅 쿵쾅!' 하며 거대한 몸집의 남자가 계단을 으스러뜨릴 듯 밟으며 올라왔다. 거 한은 붉은 얼굴에 누런 수염, 표범머리, 고리눈을 지녔고 푸른 옷을 걸치고 있었다. 주보가 즉시 달려가 자리를 안내하려 했으나 거한은 그를 밀치고 쓰윽 좌중을 훑어보았다. 눈길 이 주순과 마주치자 성큼성큼 다가와서 우렁우렁한 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바로 주노삼이란 사람이오?" 주순은 상대방이 워낙 거칠게 나오자 놀란 나머지 술잔을 내동댕이치고 휘익 몸을 날려 길쪽 창 가로 날아갔다. 그는 언제라도 창 밖으로 도망칠 태세를 갖추고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주노삼이오. 나와 당신은 난생 처음 만나는가 본데 왜 나를 찾소?" 거한은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히하하, 당신이 비호같이 난다는 그 노인 말씀이 맞긴맞군! 나는 당신과 싸우러 온 건 아니올시 다. 이리로 내려와서 이야기 좀 합시다그려." 주순은 거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비록 덩치가 크고 거칠게 생겼지만 얼굴엔 정기(正氣)가 흐르 고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주순은 창에서 뛰어내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거한이 물었다. "술과 음식을 다 드셨습니까?" 주순은 먹을 만큼 먹었으나 거한이 음식을 원하는가 싶어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이제 실컷 먹었습니다. 그대가 원하신다면 술과 안주를 더 가져오라 하겠소." 그리고 나서 주순이 이어 상대방의 이름과 출신 따위를 물어보려는 참인데, 거한은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서 은자 한 냥을 꺼내 탁자에 던져 놓았다. 스스로 술값을 치른 것이다. 주순이 이를 사양하려 하자, 거한은 주순의 곁으로 다가와 갑자기 그의 팔을 잡아당겨 등에 번 쩍 업어버렸다. 주순은 아무 방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엉겁결에 그만 당하고 만 것이었다. 거한은 주순을 등에다 업자마자 번개같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거한의 동작은 그야말로 쾌속 무비했다. 주순같이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도 두 손의 맥문이 짚인 바람에 손 하나 까딱해 보지 못하고 꼼짝없이 등에 업혀 끌려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주루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 거한이 나타나고 주순이 비호같이 창문으로 날아가는 것만 보고도 기절초풍할 노릇인데, 남자가 번개같이 주순을 등에 들쳐업고 사라지는 것을 보자 떠들썩하게 말 이 많았다. 그들은 주순이 틀림없는 비적(匪賊)이며 그 거한은 군관이니, 비적을 잡아간 군관은 틀림없이 큰 상을 받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시끌벅적한 중에도 냉정한 사람이 있었다. 주순의 자리에서 가까운 탁자에 앉아 있던 문사 차림의 수사(秀士)가 두어 번 냉소를 흘리고는 총총히 술값을 치르고 누각을 내려갔다. 거한의 등짝에 업혀 끌려가는 주순은 화가 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수십 년 강호를 넘나 든 이래 이처럼 골탕을 먹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허망 하게 붙들려 큰 거리로 떼메어져 가다니 실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몸은 이미 여러 군데 혈도가 찍혀 꼼짝할 수 없었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이나 떼록거 리며 어디로 데려가는지 익혀 두는 것뿐이었다. 그가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 거한은 비호처럼 달려 성 밖으로 나갔다. 주순이 보니 거한은 자 운사로 가는 큰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주순은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어이쿠! 이것 좋지 않구나. 이 녀석이 혹 자운사의 일당이 아닐까?' 자운사 앞 수풀에 다다르자 거한은 주순을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주순을 바라보며 능글 맞게 웃었다. 주순은 속으로 부아가 부글부글 끓었으나 맥문이 찍혀 꼼짝할 수가 없었으므로 상 대방의 눈치만 살폈다. 거한은 여전히 히죽댈 뿐 별 말이 없는데 악의 또한 없는 것 같았다. 주순이 왜 자꾸 웃어대느냐 물으려는 순간, 흰빛이 번쩍하는 동시에 그들 앞에 십팔구 세의 문 생수사 하나가 버티어 섰다. 하얀 비단옷을 걸친 청수한 몸매의 청년이었다. 그가 어느결에 손을 썼는지, 주순을 들쳐 메고 왔던 거한은 혈도가 찍혀 땅바닥에 쓰러진 채 눈만 멀뚱히 뜨고 있었 다. 청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멍텅구리 같은 놈아, 너 따위가 뭐라고 그 써금써금한 계단을 그처럼 쿵쾅거리고 올라와 어 르신네 술잔에다 먼지를 잔뜩 털어 넣는 거야? 그리고 상대가 준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악랄하게 분근착골법(分筋錯骨法)을 시전해 사람을 떼메오다니! 이봐, 그대는 염치도 없는 사람인가? 무슨 재주가 있는지 어디 한번 펼쳐 보라구." 거한은 청년의 호통소리를 들으며 두 눈만 껌벅거렸다. 주순을 애타게 쳐다보는 폼새가 도와주 었으면 하는 태도였다. 주순은 거한이 콩알만한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자 청년의 점혈수법이 독문공부 로 보통 악랄한 수단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조금만 더 저렇게 놓아둔다면 필히 내상을 입을 것 같았다. 거한은 주순을 한때 농락하긴 했어도 의표가 당당하고 무예가 어지간했으며, 주순한테 한 행위 역시 뭔가 곡절이 있을 것 같았다. 거한이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자 주순은 참지 못하고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이 사람이 좀 거칠기는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소. 젊은 영웅께선 그의 혈도를 풀어 주시 구려." 주순이 극진히 권했건만 청년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주순은 청년이 자존심이 강해 마음 속의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는가 싶어 다시 권할 요량으로 가 까이 다가갔다. 한데 청년은 거한과 마찬가지로 눈동자가 고정된 채 멍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어, 이 청년은 또 언제 혈도가 찍혔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청년의 혈도를 찍힌 모습은 거한과는 또 달라서 주 순이 풀어줄 수 있는 수법이 아니었다. 주순은 내외공이 상승의 경지에 있기 때문에, 조금 전 아 차하는 순간 거한에게 수모를 당하긴 했어도 보통의 점혈수법은 능히 풀 수가 있었다. 그는 거한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 밑을 툭 한 번 쳤다. 거한은 혈도가 풀리자 주순을 향해 고개를 끄덕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거한은 멍하니 서 있는 청년을 보자 화가 불끈 치솟는지 대번에 발길질로 세차게 후려차려고 했다. 놀란 주순이 급히 막으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거한은 외공이 워낙 심후해서 그의 이 일격 은 수백 근의 힘이 실려 있으므로 얻어맞는 즉시 뼈마디가 부러질 판이었다. 청년은 혈도가 찍혀 꼼짝할 수 없었으므로 눈을 멀쩡히 뜨고 얻어맞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 청년 옆에 노인 하나가 번개처럼 나타났다. 그는 힘 하나 안 들이고 거한의 발길질을 슬쩍 받아넘겼다. 거한은 노인을 보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영감님은 나더러 주가를 짊어지고 오라더니, 그새 어딜 가시었소? 내 이 꼬맹이한테 잘못 걸려 한바탕 크게 수모를 당했단 말입니다. 영감님은 잠깐 비켜요. 내 발길질 한 대로 요절을 내버릴 테니까." 노인이 엄숙히 나무랐다. "자넨 창피하지도 않나? 저리 비키라구. 저 녀석이 너무 으스대서 내가 제압했기 망정이지, 그렇 지 않았으면 자네는 큰코 다쳤을 걸." 그 노인은 바로 주순으로 하여금 술값을 내게 했었고 그의 사부라고 둘러대며 술과 음식을 마음 대로 퍼먹은 괴인이었다. 노인의 행동을 보니 이제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확연히 알 수가 있었다. 주순은 급히 그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제자 주순이 인사를 드리옵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자넨 내가 자기를 속여 술을 뺏아 먹었다고 투덜대진 않았나? 으핫하하! 자, 급할 건 없으니 이 청년을 구하고 보세." 노인은 청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혈도가 풀린 청년은 만면에 부끄러움을 가득 띠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단검을 쏘아 냈다. "얏!" 그러나 노인은 여유만만하게 껄껄대며 웃었다. "이 녀석, 그래도 호락호락 당하진 않겠다는 거냐?" 노인은 손을 번쩍 올려 섬광처럼 날아오는 단검을 움켜잡았다. 단검은 살아 있는 뱀처럼 노인의 주먹 안에서 부르르 떨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아귀에서 빠져나 갈 듯한 모양이었다. 청년은 노인이 단검을 손쉽게 제압하는 것을 보자 실망하여 한 숨을 푹 쉬었다. 청년은 이내 몸 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않아서 노인이 앞길을 막아섰다. 청년은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달려갔다. 하나 이 역시 몇 걸음 가지 않은 상태에서 노인에게 가 로막히고 말았다. 청년은 홱 몸을 돌려 이 번에는 정반대인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어느 사이 에 날아왔는지 그쪽에도 노인이 길을 막아 서 있었다. 허둥대던 청년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이 늙은이! 당신은 내 혈도도 찍고 단검까지 빼앗아 가졌으면 됐지, 왜 이다지도 괴롭히는 거 요?" "흥, 처음 만난 주제에 그렇게 악랄한 독수를 펼치고는 안 되니까 그냥 가겠다 이거냐? 너희 스 승인 이원화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더냐?" 청년은 노인의 말을 듣자 파르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과연 이 노인은 생각대로 보통 사연이 있 는 분이 아닌 것이었다. 청년은 대번에 기가 죽어 부드럽게 말했다. "이 후배는 연로하신 어른께서 몰래 혈도를 찍고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주시기에 잠시 화가 났 었습니다. 멍청한 놈이 일시의 분기를 못 참아 단검을 꺼냈사오나 어른의 터럭 하나 못 건드린 우둔함을 보아 용서해 주십시오. 가사께선 만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 하셨으 나 욱 하는 성미에 그만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노인은 손에 쥔 단검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좋다. 좋아! 자네가 처음 한 짓이라니 내 용서를 해주지. 그러나 벌로써 내가 시키는 일을 한 가지 해내야 하네. 나는 이번이 두 번째 하산인데, 옛날 부리던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은퇴해서 한 사람도 없고, 또 자네같이 핑핑하게 젊은 사람들을 좋아하거든. 그래, 젊은이는 늘 일을 상쾌 하게 처리한단 말씀이야." 노인은 빼앗았던 단검을 청년에게 되돌려 주었다. 청년이 급히 응답했다. "노선배어른의 지시라면 가사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한 끓는 물 타는 불 속 어디든 죽음을 무 릅쓰고 시행해 올리겠습니다." 노인은 기분이 좋아 히죽히죽 웃으며 청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청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체했다. 이때 주순은 자기를 짊어지고 온 사나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한은 일전에 주순이 처음 모태를 만났을 때 구해 준 여인의 남편인 육지금룡(陸地金龍) 위청(魏靑)이었다. 위청은 돌아오는 즉시 아내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듣고 노기가 탱천해 줄곧 모태와 주순을 찾아 다녔다. 한 사람한테는 은혜에 감사하고 다른 한 사람한테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며칠이 지나도 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는 판인데 마침 이 노인을 만난 것이었다. 노인은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그를 한참 놀리다가, 주순이 망강루에서 술을 들고 있노라 알려주 었다. "그러나 여보게, 자네가 아무리 호의를 보인다 해도 그는 자네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야." "그 무슨 말씀입니까?" "그 녀석은 사소한 은혜 보답 따위엔 관심이 없거든. 내가 그 녀석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노인은 위청에게 분근착골법을 가르쳐 주며, 주순을 들쳐 메고 이 숲 속으로 오라고 일렀다. 본 래 약간 우둔한 위청은 노인의 말대로 시행한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주순은 위청의 아둔함에 어이가 없었다. 마침 노인과 청년의 밀담이 끝났으므 로, 주순은 청년과 함께 노인의 성함을 물었다. "노어르신께선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노인이 청년에게 대답했다. "너는 산에 돌아가거든 사부한테 숭산 소실(少室)의 백노인을 만났다 전하거라. 그러면 너희 사 부는 즉시 알 것이다." 청년은 노인의 말을 듣자 급히 무릎을 꿇고 절했다. "노어르신께선 오십 년 전,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시던 신행무영(神行無影) 추운수(追雲搜) 어른 이시군요. 동해삼선의 한 분이시며 <숭산이로>의 한 분이신 백노검협이신... 이 후배는 눈은 있어 도 태산을 몰라뵈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노인은 지그시 웃으며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주순은 취도인의 말이 생각나서 재차 무릎을 꿇고 제자로 거두어 줄 것을 간청했다. 노인이 웃었다. "너는 만나는 사람마다 스승으로 섬기겠다 하니 사람들이 죄다 비웃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이 노부는 성질이 독특해서 사람들이 싫다하면 좋아하고 필요없다 하면 필요하다 하는 양반이다. 하 나 내 이미 두 번이나 너를 보고 오라 했거늘 오려 하지 않았으니 지금은 제자로 거둬들일 수 없 다." 주순이 허둥대며 변명했다. "사부어른께선 제자를 놀리셔도 너무 하십니다. 이 미련한 놈이 어찌 스승의 현묘한 암시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제발 이 제자의 고심하는 모습을 굽어살피소서!" 주순은 말과 함께 이마를 땅에 계속 부딪쳤다. 노인은 주순의 간절한 태도를 보자 너털웃음을 더뜨렸다. "내 자넬 한번 놀려보았지! 너의 가련한 모습을 보니 제자로 거두어 주겠다만, 단 한 가지 조건 이 있다. 어떤가, 조건을 지킬 수 있겠나?" "제자는 어르신네께서 거두어만 주신다면 은혜가 태산과 같거늘, 어느 명령이라고 듣지 않겠습 니까?" "내 천성이 술을 좋아한다네. 그러나 돈이 없다 이걸세. 그렇다고 이 나이에 취도인처럼 훔쳐서 술을 마실 수야 있겠는가? 너는 아침저녁으로 세 동이의 술값을 치를 수 있겠느냐?" 그제서야 주순은 노인이 농담을 하는 줄 짐작하고, 공경스레 그의 옆에 시립해 섰다. 노인은 청년의 신세에 대해 물었다. 그는 염선 이원화의 득의 제자로서 이름이 손남(孫南)이었 다. 이원화의 제자란 말이 나오자 주순은 조연아의 소식에 대해 물었다. "그는 현재 열심히 무공을 연마중이라 앞으로 삼 년이 있어야 하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남이 대답했다. 주순은 그가 평안히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어머니를 대신해서 무척 기뻐했 다. 손남은 항상 하얀 옷을 즐겨 입은 탓에 강호에 나온 지 이 년이 안 되었지만 벌써 백협(白俠)이 란 칭호를 얻고 있었다. 이들이 한창 대화를 하고 있는 중에 홀연 숲 속에서 괴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노선배, 누가 술을 훔쳐먹었다는 거요?" 그들 모두 깜짝 놀라 바라보니, 등에 주홍색 호로병을 짊어진 도인이 한 여인과 함께 서서히 걸 어나왔다. 위청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가 유명한 검선인 취도인이란 것을 즉각 알 수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검정옷을 입은 여인을 힐끔 살펴보던 주순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그녀는 다름아닌 그의 딸 주경운이었던 것이다. 주경운은 쪼르르 달려와 주순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법보(法寶)를 제련하느라 하산이 늦어 이제 야 오게 됐는데, 도중에 허사백을 만나 아버지가 백노검협과 함께 있는 것을 알아 따라온 것이었 다. 주순은 그녀를 추운수 등 여러 사람에게 소개시켰다. 인사가 끝나자 취도인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영웅검객들이 여기 모였으니 저 대머리 일당들과 한바탕 고하를 가릴 수 있게 되었군그 래?" 사실 주순도 사부와 취도인 등이 여기 함께 모인 게 우연은 아닌 듯했다. 어쩌면 자운사를 복멸 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순이 말했다. "자운사는 준비가 없겠습니까?" 취도인이 대답했다. "듣자니 방장 지통이 서장에 채약하러 가는 진랑 편에 온신묘 방장 분면불 유덕, 비천야차 마각 등을 초청했다네. 마각이라는 자는 별 대단할 게 없지만, 분면불 유덕은 오독추혼홍운사(五毒追魂 紅雲砂)를 연성해 무시못할 존재지. 우리 같은 선배들이야 두려워할 바 없지만, 여러 소형제들은 당해내기 어려울 걸. 그러니 한시바삐 손을 쓰는 게 상책이리라. 저들의 원병이 온 뒤에 소굴을 공격해 부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되는군. 노선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추운수는 대꾸를 하지 않고 손가락을 헤며 중얼거렸다. "안 되겠는데 안 되겠어. 저들의 소굴을 쳐야 할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는 걸. 악의 무리를 완전히 소탕하자면 무릇 인내를 가져야겠어. 저들의 구원병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하나하나 일망타진해야 세상사람들의 해악을 없애는 거 아니겠나. 저들이 몇 안 된다 해도 지금 묘를 공격하기엔 우리의 수효가 너무 적구먼." 주순이 되물었다. "저희들이 싸워서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으흠, 저들 문하의 사대금강이나 모태만 해도 비록 좌도방문이지만 십분 위험한 인물들이라네. 우리 쪽의 위청과 주순은 검술을 모르고, 손남과 주경운은 좀 안다 해도 모태 수준에 불과하지. 내 일전에 노상에서 손남의 사부 이호자(李葫子)를 만나 몇몇 친구들을 초청해 오도록 부탁하였 다. 그들과 내달 정월 초하루 벽균암에서 만나기로 했으며, 그때 자운사를 칠 방책을 정하도록 하 세." 취도인이 말했다. "선배의 말씀이 적합할 듯합니다. 한데 길에서 만나 같이 온 주경운이 동정을 볼겸 정탐하자고 조르니 어찌합니까?" 추운수가 응답했다. "옛날 고행두타가 나한테 이야기한 바가 있네. 우리 문파가 크게 흥성하는 것은 모두 이운(二雲) 에 달렸다고 했지. 그 이운 가운데 일운이 구화산에서 수련하고 있고 여기 경운소저가 이처럼 정 진했으니 정말 기쁘구려. 정탐하러 가는 것은 좋지만 취도인 그대는 정체를 드러내지 말고 암암 리에 경운을 도와 적을 쓰러뜨린 다음 즉시 돌아오도록 하시오. 요승 지통은 우리들이 내년에 대 거 출동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테니, 괜히 건드려서 그의 죽은 사부 친구들을 불러내거나 하여 법석을 떨까 걱정이오." 추운수는 말을 마치자마자 즉시 주순, 위청, 손남과 함께 취도인과 작별했다. 주순은 딸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금방 헤어지게 되자 마냥 서운해서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추운수가 나무랐다. "여자처럼 정이 그렇게 깊어서야 어찌 검협이 될 수 있겠느냐? 딸아이는 지금 자운사에 가더라 도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고, 너희 부녀는 내일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 가서 터놓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잖느냐." 주순은 딸에게 실수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미인 쟁탈전 白日宣淫, 多臂熊隔戶聽春聲 黑夜鋤奸, 一俠女禪關殲巨盜 자운사의 흉승 지통은 이 한두 달 동안 분접아 장량의 실종, 주운종의 탈주, 장사 부녀의 행방불 명 등 연속되는 사건으로 심사가 좋지 못했다.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생각에 불안마저 심화돼 있었다. 그러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태는 자기 복수심에만 열정을 태워 두세 번이나 주순을 찾으 러 나가다 지통의 제지를 받곤 했다. 복수에 안달하는 모태는 지통이 겁장이라고 투덜댔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는 보이지 않게 간격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날, 두 사람은 저녁 참선 때 마무(魔舞)를 구경하다 지통의 총희(寵姬)로 인해 큰 오 해가 발생하고 말았다. 원래 지통은 그의 사부와 마찬가지로 황음하고 흉악해, 매년 두 차례씩 문하의 사대금강을 이웃 성에 파견해서 미모의 여자들을 사오거나 강탈해와 음탕하게 즐기곤 했다. 그는 극단적으로 새 여자를 좋아했으므로, 새로 강탈해 온 여자들은 아무리 지조가 굳다 해도 죽지 않는 한 수청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한 일 년을 즐기면 이내 싫증이 나서 그 여자를 무녀(舞女)로 충당해 버리고 또 새 여자를 찾곤 했다. 삼 년 전 지통은 절 안에 침입한 여자 도적 하나를 사로잡은 적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양화 (楊花)였는데, 도적이라 그런지 별로 미녀는 아니었다. 지통은 그녀가 감히 자신들을 모욕했다 해서 문하 제자들을 시켜 윤간한 뒤 죽이라고 명령했다. 인물 자체가 워낙 평범해 자신은 전혀 탐하지 않았었는데. 그녀의 옷을 벗겼을 때 본즉 옥같이 뽀오얀 피부가 천하미녀보다 월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옥 같은 피부는 보드랍고 섬세하기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고, 구슬피 애걸하는 품이 나 교태어린 동작이 유별나 보였다. 갑자기 음심이 발동한 지통은 방장 자격으로 그녀를 먼저 차 지하기로 했다. 한데 그 여자는 피부만 희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음탕함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여서 남자 홀리는 수법이 천하의 일품이었다. 그렇게 많은 여자를 겪은 지통으로서도 이처럼 춘풍이 넘실대 는 여자는 처음이라 단박에 총애를 주고, 어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사부 못지 않게 음탕한 중들은 입 안에 다 들어왔던 만두가 사부의 변덕으로 사라지자 무척 서 운했으나 차마 뭐라 불평은 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지통은 절 안에 미인이 아무리 많아도 한 번 도 눈여겨보지 않게 되었다. 모태가 묘에 처음 온 날, 지통은 아미검협들과의 복수문제가 워낙 급한 판이라 모태와 그의 사 부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생각에, 그 미끼로써 양화를 모태에게 주어 인심을 사기로 했다. 그런 사연을 모르는 양화는 어찌해서 지통이 자기를 버렸는지 몰라 앙앙불락하며 모태에게로 갔 다. 모태는 양화를 얻자 무슨 기이한 보배를 얻은 양 귀히 여기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한편 지통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즐겨봤으나 마치 모래를 씹는 것 같아, 양화를 괜히 양보했다 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태가 묘에 없을 때를 틈타 몰래 양화를 즐기곤 했는데 이것이야말 로 주객이 뒤바뀌어도 한참 바뀐 꼴이었다. 양화 또한 요녀 중의 요녀라, 지통과 관계를 하면 더욱 울부짖고 감창의 극을 더해 남자의 간장 을 녹이는 한편 그를 떠나보낼 수 없는 듯 하염없이 울곤 했다. 양화의 진맛을 다시 확인한 지통은 이웃 성에서 미녀를 데려와 양화와 되바꾸기로 작심했다. 하 나 똑같은 맛을 본 모태가 즐거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지금 지통의 신세를 지고 있는 터라 뭐 라 단호히 거절은 못했지만 우물우물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두 사람은 공개적으로 삼각연애를 하기 시작했고, 그 방법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둘 은 각자 기분나쁜 대목이 있었으나 눌러 참고 발작하거나 상대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들은 돌아가며 하루씩 양화를 차지하기로 했다. 말썽이 난 그날은 모태가 양화와 즐기는 날이었다. 모태는 구원병이 오기 전에 경망하게 밖에 나가지 말라는 지통의 권고를 무시하고 이날 낮 성도로 나가 주순을 찾기로 했다. 모태는 겁장이 지통 몰래 성 안에 들어가서 주순의 소식을 탐문해야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원수 주순의 행적을 알아내는 대신, 모태는 관아가 채화음적을 처치해서 곧 매장할 것이 라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 채화음적을 혹시 도당들이 알고 탈취하러 올 것이 두려워 미리 관아 에서 사형을 집행한 다음 지방관리에 넘겨 성 밖에다 곧 매장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모태는 귀여워하던 제자가 실종된 뒤 걱정과 근심이 되던 차에 이 말을 듣자 혹 장량이 아닌가 하여 귀가 쫑긋했다. 소식을 좀더 캐어본즉 범인은 아무 연고자가 없어 지방관리가 곧 성 밖에 매장할 것이라 했다. 이때가 정오였다. 따라서 점심식사를 끝낸 직후 매장될 게 뻔했다. 모태는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사람들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시신을 덮은 거적을 슬쩍 들춰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시신은 바로 그의 사랑하는 제자 장량이 아닌가! 머리와 몸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고 두 다리는 무릎 아래쪽에서 잘라져 있어 모습이 처참하기 짝 이 없었다. "죽일 놈들!" 모태는 자신도 모르게 저주의 말을 씹어뱉았다. 범인의 신분을 밝힌 명패가 아직도 시신에 매여 있었다. <채화대도(採花大盜) 장량을 여기 참하노라.> 모태는 순간 아뜩하니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현아(縣衙)의 사람 가운데는 어느 누구도 장량 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필히 능력있는 고수가 장량을 상대했으리라. 그토록 다정했던 사제지간의 정리를 생각하자 생각할수록 상심이 되었다. 그는 묘에 돌아가 지 통과 상의해서 원수가 누군지 꼭 찾아내리라 마음을 굳게 다졌다. 마침 이때 식사를 끝내고 나오던 지방관리가 모태를 발견했다. 엄청나게 몸집이 큰 화상이 거적대기를 들치고 시신을 살피는 모습은 여간 의심스런 게 아니었 다. "거기 있는 화상은 뭘 하시는 거요?" 모태는 관리와 말썽을 내고 싶지 않았다. "소승은 자운사의 중올시다. 출가인은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바, 이런 처참한 광경은 차마 그냥 볼 수 없구려. 내 약간의 은자를 드릴 테니 관이라도 사서 잘 염을 해 묻어주시구려." 모태는 이십여 냥의 은자와 술값으로 약간을 보태 관리에게 쥐어 주었다. 원래 자운사는 성도에서 이름이 자자하고 관부에서도 심히 존경하는 터라 황차 작은 지방의 관 리가 작으나마 뇌물까지 받고 보니 허술히 대할 수가 없었다. "스님은 과연 불가의 생불이십니다. 저희가 장사를 잘 지내죠." 모태는 관리들이 관을 사다가 염을 하고 땅에 정중히 묻는 것을 확인하고 봉분을 할 때는 아내 를 잃은 사람처럼 슬피 곡까지 했다. 관리들은 아무래도 좀 이상한 중이구나 싶긴 해도 이미 뇌물까지 받은지라 오직 자운사의 고승 으로 은근히 대하는 것이었다. 일이 다 끝나는 것을 보자 모태는 섭섭치 않게 다섯 냥의 은자를 더 주고 그곳을 떠났다. 그가 이처럼 장량의 장사를 지낼 때, 주순은 망강루에서 위청의 등에 업혀 숲 속으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주순과 위청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껄껄 웃을 때, 모태는 절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니 드디어 두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끼는 제자의 참사를 본 모태는 슬프고 한스러운 나머지 급히 절에 돌아가 지통과 의논 할 생각밖에 없었다. 숲가에 이르렀을 때 모태는 숲 속이 짙은 안개에 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벌써 저녁놀이 지고 있어 참 멋있는 해거름이구나 하고 그는 찬탄을 할 뿐 별 의심을 갖지 않았 다. 하나 일몰 풍경치고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아무리 저녁놀의 경치가 좋다 하더라 도 이다지 아름다운 안개가 있을까 하고 순간 의심이 일었다. 짙게 안개가 깔린 숲의 수십 장 밖 은 하늘이 청청할 정도로 맑디맑은 게 아닌가? '그것 참 이상하다? 숲 속에 무슨 보물이 있어 정기를 발산하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는 도중에 모태는 이미 절 앞에 당도했으므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선방과 곁방을 휘휘 돌며 급히 지통을 찾았다. 지통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때 마침 지객승 요일을 만났다. "지통대사는 어디 계신가?" "방금 전에 후전에서 뵈었습니다. 아마 스님을 찾으시러 간 모양이던데요?" 모태는 마저 응답도 않고 후전으로 달려갔다. 이 후전에는 두 개의 선방이 있었는데 바로 모태 의 숙소였다. 그가 자신의 숙소 창밑에 도착했을 때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태는 깜짝 놀라 주춤 멈추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영락없는 운우(雲雨)의 소리다. '이런 빌어먹을!' 모태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창살 틈으로 슬그머니 들여다 보았다. 순간 숨이 콱 막히고 가 슴은 금방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의 유일한 애인이요 지통과 공유하는 여인 양화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하얀 알몸뚱이 로 선방의 침상에 누워 있고 지통은 그 위에 덮쳐 한창 성희를 즐기고 있었다. 지통은 절륜한 정력을 맘껏 힘껏 펼쳐내고 있었다. 점차 맹렬해지는 격동은 갈수록 긴밀해져 거 친 숨소리와 은근한 밀어로 환상의 극치를 다하고 있었다. 모태는 왈칵 달려들어 지통에게 약속 불이행을 준절히 꾸짖으려 했다. 원래 오늘은 모태의 차례 였으므로 지통은 지금 신성한 승려끼리의 약속을 크게 어기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니 저 양화는 사실 지통의 여인이 아니었던가. 그가 선심을 써서 하루 번갈 아 가며 향유하기로 한 것이고 한 번쯤 양보한들 나쁠 것도 없다. 더구나 현재는 지통의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라 그의 체면도 생각해 줘야 할 일이다. 또 양화의 입장으로서는 지통이 흉맹히 대들 때는 힘으로써 반항할 수 없는 입장이라 그녀를 나 무랄 수도 없었다. 오히려 오늘같이 두 사람이 춘정을 나누는 얻기 어려운 기회를 얻었으니 저들 이 뭐라 하며 즐기는지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성싶었다. 양화가 진정으로 자기를 좋아하는지 어쩐지를 살필 절호의 기회 아닌가. 모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한데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 마디 듣자 마자 모태는 분통이 터져 그만 앞이 아뜩하고 기절할 것만 같았다. 원래 양화란 여자는 천생이 음녀인 데다 언사가 간특해 누구에게든 듣기 좋은 말을 조잘대곤 했 다. 그렇다고 속마음이 없는 건 아니겠으나 당장 필요하다면 아무 말이건 엮어내는 여자였다. 두 사람의 정열이 약간 시들 때쯤 되자 지통이 은근하게 양화한테 속삭였다. "이 귀여운 것아, 어떠냐. 그 녀석과 나 둘 중 누가 나으냐?" 모태는 창 밖에서 이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나서 귀를 기울였다. 그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 각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해 주었으니 지통보다 낫다고 하진 않더라도 어지간히 적당히 말하겠지.' 그러나 양화의 앵두 같은 입술에서는 엉뚱한 말이 쏟아졌다. "아이구 스님도! 하필이면 그 배라먹을 놈 이야기를 하세요. 스님은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 늑대 같은 놈에게 내주셨어요? 정말 해도 너무 하셨어. 그리고 또 생 각나니까 하루 걸러 저를 찾으시구. 남의 여자 훔치는 것처럼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난 그 놈하고 잘 때마다 이가 갈리고 분해서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고 새벽까지 지샌답니다." 모태는 그녀의 뱀 같은 입놀림에 숨이 막히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며 금세라도 폭발할 듯이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요녀의 사갈 같은 말소리가 계속 새어나왔다. "자기, 그놈의 털이 숭숭하게 돋은 물통 같은 다리와 물소같이 무거운 몸뚱이를 생각해 봐요. 난 그놈한테 눌릴 때마다 숨을 쉴 수도 없을 지경이라구요. 늑대 같은 놈의 몸이 닿을 때마다 바늘 에 쿡쿡 찔리는 것 같구요, 무슨 놈의 손이 그 모양인지, 손가락이 두 개나 짤려 있어서 보기만 해도 징그러워 죽겠다구요. 그놈의 말인즉슨 어렸을 때 부스럼이 나서 그렇게 되었다는데, 난 뭐 무예를 조금도 모르는 줄 아나 봐요? 그건 틀림없이 칼에 잘린 거라구요." "그래도 쓸모가 있을 놈이니 당분간은 잘 대해 주라구." "그래서 제가 참는 거죠 뭐. 제가 보기에 그놈은요, 별로 재주도 없고 허풍만 센 것 같아요. 그 놈이 어지간한 적과 싸우는 꼴을 봤으면 싶지만 보지 못해 갑갑해 죽겠어요. 실력이 신통치 않으 면 당장 쫓아버려서 스님이 이처럼 서방질하듯 고까운 짓을 안해도 되잖아요." 그녀는 지통에게 아부하느라 신나게 주워섬기고 있었지만, 정작 모태가 엿듣고 있으리라고는 꿈 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지통도 사실 크게 실수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모태가 주순을 찾으러 갔다 해도 열흘이나 한 달 이 걸리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여하튼 두 사람이 신나게 모태를 개 같은 놈으로 몰아붙이는 바람에, 장본인인 모태는 불같이 화가 끓어오른 나머지 드디어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는 더 이상 생각이고 자시고 없이 소리를 꽥 지르며 방으로 달려들었다. "야, 이 개 같은 요부야!" 외침과 동시 모태는 누런 빛을 발하며 양화를 향해 날아갔다. 양화는 벼락맞은 듯 놀라 비명을 질렀다. "어마나! 사부님, 사람 살려요!" 지통은 너무나 뜻밖이었으므로 창졸간에 손발을 허우적대며 양화를 겨드랑이에 꿰어차고 좌우로 정신없이 피했다. 모태는 양화를 죽일 결심이라 적음검(赤陰劍)을 빼어들고 매섭게 핍박해 들어갔다. 지통으로서는 다행히도 선방이 워낙 커서 맨몸이나마 이리저리 피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해도 절의 방장대사인 지통이 발가벗은 채 역시 홀딱 벗은 계집을 꿰어차고 허둥대며 이리 피하고 저 리 피하는 꼬락서니는 정말로 체통이 안 서는 일이었다. 지통은 경신공부가 워낙 능숙해 나르는 새처럼 훨훨 피해 양화의 목숨을 살려내고 있었다. 그렇 지 않았다면 양화의 목숨은커녕 자신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하나 여자를 끼고 육박전을 벌이 자니 기력도 달리고 여러 차례 위험한 경지에 몰렸다. 한창 위험할 때 창 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께서는 어째서 검을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말이 끝남과 함께 하얀 섬광이 방 안으로 쏘아 들어오며 모태의 검광을 맞받아 쳤다. 지통은 모태의 돌연한 급습을 받자 도우(道友)를 배반하고 사통했다는 죄책감으로 부끄러움에 휩싸여 있었고, 한편으론 위급천만의 양화를 구해 주느라 너무 당항해 검을 쓸 생각도 미처 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는 한 마디 깨우침을 받자 갑자기 힘을 얻은 듯 날아온 검을 거머쥐고 비호처럼 후려쳤다. 세 가닥 검광이 모태의 검에 부딪쳐 갔다. 양화는 이 기회를 틈타 옷가지 하나를 집어 허둥지둥 걸치고는 옆방으로 도망쳤다. 모태는 홀연 적이 하나 더 생기자 깜짝 놀라 뛰어 들어온 사람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는 다름아닌 지객승 요 일이었다. 요일은 긴요한 손님을 맞아 잠시 기다리게 한 뒤 방장 지통대사에게 보고하기 위해 후전에 달려 왔었다. 그때 마침 양화의 외침소리가 들리므로, 요일은 그녀와 지통이 크게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원래 사부의 음탕한 행실을 싫어하는 요일은 저들의 싸움에 끼어들기가 싫어 돌아갔다가 다시 오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때 사나이의 대갈일성이 들리고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무섭게 울리는 것이었다. 요일이 깜짝 놀라 선방 안을 들여다 보니 모태가 사납게 검광을 뿌리고 있고 사부와 양화는 가 관인 몰골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느라 낭패한 꼴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스승은 검을 쓸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있는 게 이상했다. 더구나 모태는 모두 다 죽일 듯 만면에 흉포한 기 색을 띠고 무섭게 달려들고 있어 위험천만의 정세로 돌입하고 있었다. 스승의 음탕함을 싫어하긴 했어도 역시 사제의 정리는 두터운 것이라, 요일은 검을 발출하며 큰소리로 스승을 깨우쳐 준 것 이다. 모태는 상대가 검을 빼어들자 이젠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싸움을 안할 수도 그칠 수 도 없어 한바탕 겨뤄볼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통은 역시 오대파 비조인 낙안봉(落雁峰) 태을혼원조사(太乙混元祖師)의 적전제자였다. 방문좌도라 해도 진전을 받은 고수이니 모태가 어찌 그의 적수가 되겠는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안 돼 지통의 푸르고 붉고 검은 세 가닥 검광은 모태의 누런 검광을 휩싸 며 맹렬히 쪼아 들어갔다. 모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직감했다. '이제 죽었구나! 빌어먹을 계집년 때문에 천하의 모태가 이렇게 죽다니!' 다행히도 지객승 요일은 사부가 검을 휘두르자 같이 덤비지 않고 방구석에 조용히 서서 관전만 했다. 그 덕에 모태는 좀더 버틸 수가 있었다. 이처럼 극히 위험한 순간, 창 밖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 멀리서 손님은 오게 해 놓고 자네들은 영접도 하지 않은 채 몰래 검술연습만 하는 건가? 세상에 이런 도리가 어디 있는가? 자, 내가 자네들의 싸움을 풀어줄까?" 목소리의 임자는 창 밖에서 금빛을 흩뿌려 일 장 둘레의 휘황찬란한 원을 만들더니 지통과 모태 의 검광을 냉큼 삼켜버렸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가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놀라 펄쩍 뒤로 빠지며 새로 나타난 방해꾼을 쳐다보았다. 팔 척 장신에 머리통이 커 다란 남자는 고리눈에 번쩍이는 대머리였고 얼굴은 창백하리만치 하얘서 혈색이라곤 일점도 없었 다. 두 눈에서는 흉광이 번뜩거려 한눈에 흉포한 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었는데 바람막이 같은 큼지막한 귀에는 금귀고리를 달고 있었고 맨발에 마혜를 신고 있는 폼이 아주 흉맹해 보였다. 지통은 그를 보자 기뻐 소리쳤다. "사형, 무슨 바람이 불어 여길 다 오셨소?" 모태는 위급한 중에 싸움을 멈추게 해줘 감지덕지했지만 그 거한이 알 듯 알 듯하면서도 생각이 나지 않아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거한이 먼저 말했다. "두 분 동생들, 무기를 거두게! 다 한편인 사람들이 어째서 화기를 상하며 이렇게 험악히 싸우고 있나? 자, 이야기를 해보게. 내가 공정히 심판해 줌세." 지통과 모태는 비록 똑같은 음탕한 중이긴 했어도 막상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니 창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병기만 거두어들였다. 그 거한도 병기를 거두었다. 모태가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소제가 우둔하와 사형을 어디서 뵈었는지 일시에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거한은 이 말을 듣자 껄껄 크게 웃었다. "현제, 자넨 금신나한 문하의 유덕을 아예 잊어버렸단 말인가?" 모태는 이 말에 모든 생각이 후련히 떠올랐다. 원래 분면불 유덕은 모태의 사형으로서 처음엔 금신나한의 문하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서장 의 독룡존자(毒龍尊者)가 금신나한을 찾아왔다가 유덕의 생김새가 특이한 것을 보고 금신나한에 게 부탁해 그를 제자로 삼아 서장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 무렵, 독룡존자의 유일한 문인이었던 주중회(周中匯)는 아미파와 싸우다가 <건곤묘일진인> 제수명의 검 아래 죽어 독룡존자는 제자가 없었다. 그런 연고로 모태는 단 며칠 동안 유덕과 동문의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유덕은 두 음탕한 중을 그래도 후배라 하여 화해시키기 위해 한 손에 한 사람씩 끌고 대전으로 갔다. 유덕이 자꾸 싸운 연유를 캐묻자 좀더 창피한 입장인 지통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모태 가 그래도 낫다 싶었던지 분한 기색을 띠며 자세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자 분면불 유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들 두 사람이 죽어라 반나절을 싸운 게 기껏해야 그까짓 사소한 일 때문이었나? 부끄러운 줄 알게. 자, 나의 얄팍한 체면을 봐서라도 화해를 하게나!" 지통과 모태는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 둘 다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 셈이었던 것이다. 둘은 유덕 이라는 사형의 연고에 못 이겨 우물대며 서로 잘못을 사과했다. 화해를 하고 저녁이 끝나고 대화가 한창 무르익자 지통은 지난 한두 달 동안 자운사가 겪은 사 고들을 자세히 유덕에게 설명하고 그의 도움을 청했다. 유덕은 지통의 말을 듣자 뭐라고 가타부타 응락이 없이 묵묵부답으로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했 다. 모태가 홀연 입을 열었다. "참, 말씀드릴 게 두 가지 있습니다. 그동안 방장사형과 괜히 다투고 유사형이 멀리서 오셔서 기 쁜 나머지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유덕과 지통이 동시에 묻자 모태가 대답했다. "오늘 성에 들어간 것은 원수를 찾아 복수를 하려는 거였었죠. 한데 원수는 못 만나고 실종됐던 제 제자 장량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애는 누군가에게 붙들려 두 다리를 잘리고 관아에 보내져 서 이미 처형을 당했지 뭡니까." 지통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 이상하다! 장량 사질이 실종됐기에 혹 독수를 당하지 않았나 의심은 했어도 관아에서 죽다 니? 관아에는 내 부단히 사람을 놓아 탐문했거늘 왜 아무 소식이 없었을꼬? 모현제가 혹 잘못 들 은 것은 아니오?" 모태가 펄쩍 뛰었다 "잘못 듣다니요? 관아가 채화대도를 처형했다기에 내가 직접 가서 이 두 눈으로 확인까지 하였 소. 붙들릴 때 다쳤는지 두 다리가 잘려 있고 목이 날아가 죽어 있습니다. 난 그 처참한 모습을 보자 분하고 떨리어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하였다오. 사형께 의논드려 원수를 갚고자 허겁지겁 이 렇게 달려왔는데 그까짓 천한 계집 때문에 형제의 화기만 크게 상할 뻔하였지요." 유덕이 말했다. "현제는 너무 황급히 서둘지 말게. 이 일은 자네 혼자의 것은 아닐세. 틀림없이 아미파의 유능한 인물이 성도에 있어 우리를 골탕먹이느라 그런 짓을 하였을 것이네. 복수하는 일로 경거망동해서 는 안 되겠어. 여러 사람들이 오면 함께 상의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으이. 그리고 또 한 건은 뭔 가?" 모태가 대답했다. "아까 절로 돌아올 때가 저녁 무렵이었고 아직 해가 완전히 서산을 넘지 않았는데, 절 앞 숲 속 에 갑자기 하얀 안개가 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약 수십 장 방원을 이루고 있습디다. 뭔가 증기 가 두텁게 올라 숲을 감싼 듯해서 처음엔 황혼이 멋지게 져 기이한 풍광을 이룬 것으로만 생각했 습지요. 한데 자세히 보니 그곳 말고는 주위가 청청하니 맑지 않겠습니까? 그 참, 이상하더군요. 혹 보물이 세상에 나오려는 징후는 아닐까요?" 유덕은 모태의 말을 십분 주의해서 유심히 듣다가 질문했다. "자넨 하얀 안개가 이는 곳을 들어가 보았는가?" "그럴 시간이 없었죠. 전 제자의 복수에 마음이 급해 절로 곧장 왔습니다. 또 저 혼자로서는 보 물이 있다 해도 파내기 힘들거라 나중에 사람을 데리고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잘했네! 천만다행이야!" 유덕의 얼굴에는 뭔가 다급하고 긴장한 표정이 나타났다. 지통이 물었다. "사형이 보시기에 모현제가 말한 하얀 안개는 정말로 보물이 나타나려는 것인가요?" "무슨 보물이겠나 그게. 그건 우리의 상대가 도착한 징표라네. 보물이 나오려면 지하에서 하얀 안개가 솟아 올라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건 틀림없이 사람이 쏘아낸 것일 게야. 예전 우리 의 큰 적이었던 노파 능설홍(凌雪鴻)이 죽은 뒤로는 추운수 백곡일만이 그런 장안법(障眼法)을 쓸 줄 아는데, 그걸 보통은 영무진(靈霧陣)이라고 부르지. 심산에서 수도하는 신선들은 왕왕 자신들 의 청수한 도장을 보호해 악마들이 쳐들어 오지 못하게 그런 술수를 쓴다고 하더군." 모태가 물었다. "그러면 그 백곡일이란 자가 우리 절 앞에까지 왔다는 겁니까?" "그럴 것이네. 그 괴노인은 세상출입을 삼간 지 벌써 십 년이 넘어 강호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 그 사람에 대해 사부 독룡존자한테 가끔 들은 바가 있지만 사부도 만나본 적이 없으시다는 게야. 조금 전 지통현제가 백노괴가 나왔다 하기에 반신반의했는데 그렇다면 사실이 확실하겠구 먼. 그가 이미 절 앞에까지 와서 그런 짓을 했다면 뭔가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네. 우리 몇 사람으 로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빨리 준비를 해야겠군." 지통은 추운수와 겨뤄본 적은 없지만 자신의 사부한테서는 자주 들어온 터라 유덕의 말을 듣자 무척 당황했다. 그러나 유독 모태만은 무서움을 모르고 분한 듯 씩씩대며 중얼댔다. "사형께서 그에게 남을 추켜올려서 우리의 위풍을 깎을 건 뭐 있소? 인간이란 백 년을 못 사는 법이라 그 노괴가 삼십 년을 강호에 안 나왔다면 이미 심산유곡서 죽지 않았겠소. 그리고 아까 그것도 어찌 한 사람이 한 짓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숲 속의 하얀 안개는 저들이 우리를 놀리려 고 꾸며낸 장안법에 불과할 것이외다. 뭐가 대단하다고 그렇게들 겁을 내슈?" 모태는 강호에 나와 상당한 기간 동안 횡행했지만 그때는 이미 추운수가 은둔한 뒤라서 그의 명 성과 무서움을 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덕은 모태의 수작이 어처구니없는지 냉소를 치고 말았다. "자네 따위가 그 사람의 무서움을 어떻게 알겠는가? 절에 돌아 오는 게 급해 영무진 속에 들어 가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네. 그렇지 않았다면 독수를 당했겠지. 아미파에는 유능한 고수가 수없 이 많고 노피와 기인이 여럿 있는데, 그 백노괴도 특출난 기인 중의 한 사람이라네. 우리는 그저 아까 나타난 자가 그 사람이 아니길 바랄 뿐이야. 만약 그 사람이 틀림었다면 나의 사부 독룡존 자가 오셔도 제압할 수가 없을 걸세. 그들은 삼십 년 내지 오십 년 만에 꼭 한 번씩 이 세상에 나와 자질이 좋은 소년을 골라 제자로 삼는 다더군. 꼭 전인을 남기는 수법이겠지." 지통이 물었다. "요즈음이 제자를 거둬들이는 시기일까요?" "어쩌면 그럴 것이네. 지난해 사부 독룡존자의 말씀에 의하면 저들은 이미 사천, 협서, 운남, 귀 주 일대에서 행동을 개시했다는 것이야. 공교롭게 오대파와 몽장파(蒙藏派)도 요즈음이 제자를 거 둬들이는 시기라서 많은 시비가 벌어지게 된 것이지.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황산의 찬하대사는 이 미 여제자 하나를 기둬들였다더군. 이름이 주경운으로 제로삼영인 주순의 딸인데, 나이는 어려도 어여쁘고 재질이 좋아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단한 무공을 수련했다는 거야. 그외 고행 두타 제수명, 염선 이원화 등도 벌써 제자들을 두어 조만간 시끄럽게 될 거라더군. 자네들은 정말 조심해야 되네." 모태가 급히 물었다. "사형께서 말씀하시는 그 주경운은 주순의 딸이 확실합니까? 주순은 저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사형께서는 그런 내용을 어쩌면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시오?" "황산 오로봉(五老峰) 뒤쪽에 큰 절벽 하나가 있는데, 천길 만길 아스라이 깎여 있어 오운보(五 雲步)라 부른다네. 한데 아까 말한 오대파의 한 분 대선배인 여검협이 그곳에서 참선을 하고 있 지. 그 분은 우리 세 사람의 사조(師祖)와 동배되시는 분인데, 일찌기 오십 년 전 아미파와의 비 검(比劍)에도 참여하신 적이 있다는 거야. 그러나 그분은 노조사께서 무형검을 맞으시는 것을 보 자 세력이 달려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나타나 싸우지 않고 도망하셨다더군. 표면으로는 싸움의 와중에서 피신한 것처럼 보이나 와신상담하려는 것이었지. 수련을 쌓아 사조의 복수를 하려는 장 한 뜻인 것이야. 생각해 보게. 그분이 그때 아미파와 겨뤘다면 그들이 얼굴을 알 게 될 것이고 경 계도 할 것이며 지금처럼 어떻게 찬하대사와 같이 황산에 머물 수 있겠는가 말일세. 그분은 삼사 십 년 전부터 몇 명의 남녀제자를 거둬 착실히 수련시키고 있다 하네. 그런데 요즘들어 찬하대사 가 부쩍 의심을 한다는 거지. 누차에 걸쳐 그 어른의 집안과 문파에 대해 꼬치꼬치 묻더라던데, 그분은 병독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더군. 그분은 문하의 사랑하는 제자들한테도 아직 신분을 드러 내지 않을 정도니 찬하대사가 아무리 의심을 품었다 한들 알아낼 수가 없었겠지. 더욱 그분은 천 도봉(天都峰)에서 선지(仙芝)를 얻는 기연을 만나 늙지를 않게 되었다더군. 그래서 구십 세에 가 까운 그분은 이제 겨우 삼사십 세의 미녀와 똑같아 보인다는 거야. 찬하대사는 가끔 주경운을 데 리고 그분을 찾아와 놀다 가신다더구먼. 그런 때문에 내가 안 것이지. 그분은 또 우리 사부 독룡 존자와 교우가 두터워 이삽 년에 한 번 꼭 서장에 오시기 때문에, 이번에 오기 전에 나도 만났었 다네. 그분 말씀이 주경운 같이 좋은 인재를 놓친 게 정말 한이라 하더군. 자기가 사천과 사장 일 대를 돌아다닐 때는 왜 그녀가 눈에 안 띄고 적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마냥 안타깝다는 것이었 어." 지통이 끼어들어 말했다. "사형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은 황산 오운보의 만묘선고 허비랑이군요?" "맞았어. 그분일세." 모태는 이야기가 재미있어 싱글거리다 돌연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주노삼이 그렇게 이쁜 딸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언젠가 그녀를 만나면 붙들어다가 우리 쏠쏠히 재미를 봅시다. 어떻습니까? 근사한 생각 아닙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홀연 눈앞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푸른빛이 번개처럼 모태의 가슴을 찔러왔 다. "아이쿠!" 모태는 몸을 옆으로 날리며 황급히 피했다. 그러나 상대의 검은 더 한층 빨라 왼쪽 어깨를 푸욱 그어버렸다. 모태의 왼팔은 순식간에 거의 반이나 어깻죽지에서 잘려나갔다. 경험이 풍부한 지통은 벼락같이 검을 내질렀다. 세 가닥의 검광은 쏜살같이 쏘아나가 적을 에워 쌌다. 유덕의 검은 이보다 약간 늦었지만 검광이 둥글게 원을 이루며 적의 검광을 에워쌌다. 모태 는 극렬한 통증 속에서도 검을 빼어들어 적을 맞았다. 그러나 적은 어찌나 교활한지, 유덕의 태을권(太乙圈)이 상대의 검을 둘러싸는 순간 흔적도 없이 검광이 사라져 버렸다. 유덕 등 세 사람은 급히 밖으로 쫓아나갔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정원의 나무는 바람에 살랑댈 뿐 적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유덕은 조심스레 반공중에 몸을 날려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남쪽에 푸른빛이 번뜩이며 앞 으로 달려가고 있는 게 보였다. 유덕이 고함쳤다. "건방진 자객놈아, 어디로 도망가느냐!" 지통은 모태에게 상처를 싸매라고 재촉하고는 그도 유덕을 따라 자객을 쫓아갔다. 그들이 숲 가 까이까지 추격했을 때 푸른빛은 홀연 사라져 종적도 보이지 않았다. 지통이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가려고 하자 유덕이 급히 말렸다. "현제,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네. 숲 속은 어둡고 달빛도 비치지 않는데 어디서 자객을 찾는단 말인가? 오히려 저들의 암산에 걸리기 십상일세. 오늘밤의 정세는 '오는 자는 선하지 않고 선한 자는 오지 않는다'는 말대로 불길할 뿐 좋질 않으이. 절에 돌아가서 계책을 의논하세." 지통은 분통이 터져 발광할 지경인지라 검광으로 숲 속의 이곳 저곳을 후려쳤다. 한동안 여러 군데를 검으로 찌르고 후렸으나 뭔가 걸리적거리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덕이 쓸데없는 짓이라 적극 말리는 바람에 지통은 어쩔 수 없이 절로 되돌아 왔다. 사기가 저상된 그는 고개마저 푹 숙 이고 있었다. 그들이 절 가까이 왔을 때 절 안에서 갑자기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급히 담장으로 뛰 어올랐다. 모태와 요일이 푸른옷의 여자와 극렬히 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 여자를 상대하면서도 제대 로 버티지 못해 절절매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몸매의 여자는 수려하고 나이도 무척 어려보였으나 휘두르는 검만은 영험한 용처럼 힘차고 변화가 막측했다. 이제 모태와 요일은 여자의 검광에 갇 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었다. '챙!' 하고 된 쇳소리가 나는 순간 요일의 검이 별똥별 같은 산란한 빛을 발하며 두 동강이가 나 서 땅에 떨어졌다. 모태는 어깨에 검을 맞아 통증이 심한 데다 여자의 영활한 검에 몰려 점점 궁 지에 몰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담장에 올라왔던 지통과 유덕이 동시에 손을 놀렸다. 지통은 '얏!'하는 기합소리와 함 께 세 가닥 검광을 쏘아냈고, 유덕은 왼손으로 태을권을 발사하는 동시 오른손으로 오독추혼홍운 사를 던지려 했다. 바로 이 찰나, 허공에서 굵직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암기를 조심해라!" 여자는 경고소리를 듣자 유덕의 태을권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몸을 휙 공중으로 날더니 '빨리!' 하는 소리와 함께 몸과 검이 하나가 되어 재빠르게 공중으로 날아갔다. 마치 푸른빛이 허공을 가 르는 것만 같았다. 유덕과 지통은 적이 또 도망하는 것을 보자 화기가 충천해 그들도 검광을 흩뿌리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이때 공중에서 흰빛이 그들을 덮쳐왔다. 유덕은 번개처럼 손에 쥐고 있던 홍운사를 뿌렸다. 누런 안개 같은 홍운이 하늘을 덮고 온천지 가 어두워지는 동시 우뢰 같은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그것은 마치 귀신이 울고 도깨비가 호곡하는 것처럼 으스스했다. 홍운사와 적의 병기가 부딪쳐 굉음을 낸 것이었다. 약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다. 유덕은 적이 틀림없이 중상을 입고 기절해 쓰러져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는 즉시 홍운사를 거둬들이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땅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덕이 중얼거렸다. "그것 참 이상하다!" 지통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오?" "나의 이 자모음혼탈명신사(子母陰魂奪命神砂)는 사부 독룡존자의 진산지보(鎭山之寶)일세. 어떤 천하의 검선이나 협객이라도 한 알만 몸에 닿으면 죽거나 기절하게 마련이지. 그런데 오늘 적의 검광이 내 홍운에 휩싸였는 데도 적의 종적이 보이지 않으니 이거 기절초풍할 일 아니겠는가!" 이때 지통이 소리쳤다. "저것 보세요. 뭔가 빛을 발하는 게 있소이다. 우리 빨리 가서 살펴봅시다." 유덕과 지통은 앞으로 쏘아나갔다. 과연 십 장쯤 저쪽에 뭔가 빛을 발하는 게 땅에 놓여 있었다. 유신이 주워 보니 그것은 한 자가 약간 넘는 단검이었다. 아마 적의 보검인 듯한데 홍운사에 맞아 땅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단검은 비록 홍운사에 약간 더럽혀지긴 했어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단검은 유 덕이 손에 쥐자 꿈틀꿈틀 움직여 금방이라도 손에서 빠져나갈 것 같았다. 영기(靈氣)는 이미 사라 졌어도 아직도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무림의 고수가 쓰던 병기인 듯했다. 유덕이 단검을 바라보며 지통에게 말했다. "여보게 현제, 이 단검은 쉽게 볼 것이 아닐세. 영기는 사라졌다 해도 나의 홍운독사를 맞고도 이처럼 꿈틀대질 않는가? 상대는 대단한 인물일 거야. 한 백 년쯤 수련하지 않고서야 이런 경지 에 이르지 못할 거네. 하지만 적도 나의 홍운사가 대단히 무섭다는 것은 아는가 보이. 도저히 몸 을 뺄 수 없다 싶자 이 단검을 버리고 도주한 것일세. 그렇지만 그 자는 보검을 잃었을 정도이니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 같네. 우리 빨리 쫓아가 보세!" 유덕이 말을 끝내고 모태와 요일이 어떻게 되었나 바라보는 사이 홀연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귓전 을 때렸다. 유덕은 깜짝 놀라 머리를 숙였다. 하나 적의 내습은 상상보다 빨라 '팍!' 하고 왼쪽 뺨 을 갈겼다. 무슨 암기를 썼는지 모르나 유덕은 어금니가 두 개나 부러지고 입에서는 선혈이 주르 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순간 검은 그림자가 화살과 흡사히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덕은 순간의 통증에 아찔했고 그 찰나, 검은 그림자는 유덕의 수중에 있던 전리품을 앗아갔다. 검은 그림자는 왼손으로는 보검을 빼앗는 동시 두 발은 유덕의 가슴을 쌍비원앙퇴(雙飛鴛鴦腿) 수법으로 후려찼다. 유덕의 가슴을 찬 두 발은 그 여세로 연자비운종(燕子飛雲踵) 수법을 전개해 몇 장이나 하늘로 치솟더니 푸른빛을 번쩍이며 신검합일이 되어 공중을 가르면서 날아가 버렸다. 적의 몸놀림은 너 무나도 캐속무비해 한다 하는 유덕과 지통 같은 백전고수도 손발 하나 놀려볼 틈이 없었다. 지통은 적이 또다시 비호처럼 사라지자 노기가 천 길이나 솟아 호통을 터뜨리며 뒤를 쫓았다. 그러나 푸른빛은 공중을 가르고 구름 속으로 사라졌는지 벌써 간 곳이 없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 고 부아가 났으나 절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유덕은 적의 기습으로 가슴을 채여 기절한 채 땅에 쓰러져 있었다. 지통은 유덕의 가슴을 문질 러 숨을 돌이키게 하고 그를 방에 옮겨 뉘었다. 유덕의 가슴에는 두 발에 찍힌 푸른 멍이 선명히 나있었다. 상대는 여자였는데 아마도 쇠로 굽 을 넣은 신발을 신어 이처럼 중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유덕이 내외공을 겸비해 상승무공을 지니 고 있었으니 이 정도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일찍이 비명에 죽었을 것이었다. 유덕은 깨어나자마자 두 차례 피를 토하고 재차 기절했다. 두 군데 상처가 워낙 심중했던 것이 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한 걸 본 지통은 어쩔 줄 몰라 허둥대며 우선 구급약으로 유덕의 통증을 덜어주었다. 상처가 워낙 중해서 유덕은 계속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모태도 덜렁거리던 왼팔이 마저 잘려나가 아픔에 연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지통은 자객에게 욕을 한 차례 실컷 퍼부어대고는 두 사람을 벽에 기대놓은 채 계속 치료해 주 었다. 한편 그들 두 자객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것은 물론 취도인과 주경운이었다. 두 사람은 추운 수 등과 이별하자 우선 숲 속에서 마른 음식과 호로병의 술로 배를 채웠다. 저녁이 이슥해지자 둘은 자운사로 숨어 들어갔다. 자운사에서는 마침 유덕, 지통, 모태 세 사람이 한창 논의에 열중 하고 있었다. 주경운은 대뜸 달려나가 그들과 길고 짧음을 겨뤄보려 했다. 그럴 때마다 취도인은 그녀를 말리 며 유덕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소상히 알려주었고, 만약 정 싸우려거든 이렇게 저렇게 하라 세세히 가르쳐 주었다. "저들 세 사람은 무예가 절륜해서 암중에 기습을 해야 한다. 그들과 정면으로 상대했다가는 도 저히 적수가 되지 않느니라." 이처럼 긴밀히 의논을 하고 있는데 모태가 주경운을 잡아다 재미를 보자느니 어쩌느니 주절댔던 것이다. 불끈 화가 솟은 주경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날렸다. 주경운의 검은 대번에 모태 의 머리통을 자를 심산이었는데, 그래도 한다 하는 모태인지라 가까스로 피했고 그 결과 왼쪽 팔 이 날아간 것이다. 이어 유덕이 태을권을 쏘아내고 홍운사를 뿌리려 하자 취도인의 경고를 들은 주경운은 잽싸게 몸을 빼냈다. 사실 지통의 세 가닥 검광은 보통이 아니어서 주경운의 힘을 빨아들이는 바람에 그 녀도 찔끔하던 판이었다. 주경운은 계획대로 숲 속에 숨었고, 그곳에서 취도인을 만났다. 지통과 유덕이 숲에서 상의할 때, 주경운도 역시 숲 속에 있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모태가 괘 씸한지라 취도인의 권고도 뿌리치고 숲을 빙 돌아 자운사로 되돌아 갔던 것이다.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을 때 모태의 목을 베어버려 분을 삭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활에 놀란 새 는 늘상 준비를 하는 법이라 모태도 벌써 그녀의 습격을 예견하고 있었다. 주경운의 검광이 날아들자 즉각 모태의 검광이 맞받아쳐 왔다. 마침 후전에서 쫓아나온 지객승 요일은 모태가 푸른옷의 여자와 싸우는 것을 보자 검을 빼어들고 함께 덤볐다. 그러나 원래 선골(仙骨)에다 몇 년 동안 찬하대사의 진전을 받아 고된 수련을 한 주경운이 이들 을 안중에 둘 리가 없었다. 몇 초 나누지 않아 요일의 검을 부러뜨렸고 드디어는 모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바로 이때 유덕과 지통이 쫓아왔으므로 주경운은 재빨리 자운사를 떠나버렸다. 만일 한 발이라도 늦었더라면 홍운사의 독수를 당할 뻔했던 것이다. 한편 취도인은 주경운이 권고를 뿌리치고 험지에 들어가자 혹시 당하지 않을까 조바심하고 있었 다. 찬하대사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그녀가 상하게 놔둘 수 없어 암중에 방비를 하고 있었지만 홍 운사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었다. 그럴 때 주경운이 도망나왔고 유덕과 지통이 쫓아나왔으 므로 취도인은 백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제련한 단검을 쏘아냈다. 단검의 검광으로 경운은 쉽게 도망나왔으나 홍운사의 위력은 과연 대단했다. 단검은 홍운사에 부딪치자 단번에 땅에 떨어졌고 취도인은 홍운사의 무서움 때문에 단검을 주으러 홍운이 깔린 험 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주경운은 취도인이 자신을 구하느라 보검을 잃자 부끄럽고 미안한 한편 화도 나서 이것저것 돌 볼 것 없이 보검을 되찾기 위해 자운사 쪽으로 달려갔다. 저들을 기습해 보검을 되찾으려는 배짱 이었다. 취도인이 가지 말라고 붙들었으나 그녀는 막무가내로 듣지 않았다. 주경운이 자운사 쪽으로 되달려 가자 취도인은 불안으로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이때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취도인, 바로 여기 있었군. 그동안 재미는 보았나?" 취도인은 추운수의 목소리를 듣자 대번에 얼굴을 폈다. 취도인이 말했다. "모두 노선배 때문이오. 저 어린 계집애는 도통 내 말을 듣지 않는다오. 노선배께서 나더러 저 애를 돌보라 했으니 내 보검을 물어내요!" "하하하, 내가 그대의 귀한 보검을 훔친 사람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렇게 흰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저 애가 혹 다치기라도 한다면 나중 찬하대사를 어떻게 볼 수 있겠소?" "저 아이는 옛날 내가 무술을 배우던 시절과 똑같구려. 언젠가 아미파를 위해 필히 빛을 내리다. 저 애는 두세 차례 겁난을 당하겠지만 오늘은 아무 일 없을 것이오. 그대의 검도 그녀가 찾아오 고 승리까지 얻어낼 테니 아무 걱정 마시오. 다만 보검은 홍운사를 맞아 버렸겠지만 그것도 나의 처소에 있는 백초구전선단(百草九轉仙丹)으로 한 번 씻으면 원상으로 되돌아 갈 것이네. 자, 그래 도 이 늙은이를 탓할 텐가?" 취도인이 뭐라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데 주경운이 검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녀는 검을 빼앗은 상황과 유덕에게 원앙쌍각을 먹인 정경을 소상히 설명하며 의기양양해 했다. 이때 추운수가 슬그머니 나타나자 주경운은 급히 대선배에게 절을 올렸다. 취도인이 말했다. "넌 정말 어쩔 수 없는 아이로구나. 호랑이굴에 들어가 내 보검을 빼앗아 온 것은 그렇다 하더 라도 유덕한테 그런 독수를 쓴 건 큰 잘못이다. 만약 유덕이 죽기라도 한다면 서장파와 영원히 씻지 못할 원한관계를 맺는 게 아니겠느냐? 강호에는 이인기사가 심히 많으니 함부로 죄를 지어 서는 아니 된다. 너는 아직도 나이가 어리고 한참 정진을 해야 하는데 이름도 나기 전에 원한을 맺으면 전도가 좋지 않느니라. 앞으로는 그런 짓일랑은 하지 말아라." 취도인이 주경운을 준절히 꾸짖자 추운수가 이야기 도중 급히 끼어들었다. "취도인, 자네는 좀 그만하게! 우리들이 만사를 걱정하면 걱정할수록 일이 생겨나던 것을 알고 있으면서 뭘 그러나. 옛날 아미에서의 비검(比劍)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때 우리는 얼마나 양보했 었던가 말야. 양보를 할수록 그 나쁜 놈들은 우리를 핍박해 왔고 결국엔 일대 간과(干戈)를 벌려 야 했었지 않은가. 요즘이 바로 또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판일세. 이제 자네같이 늙은 사람들은 저들 젊은이들의 용기와 지혜를 권장할 일만 남았어. 자넨 독룡이란 자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 가 누누이 말하네만 그들은 제자를 기르며 아미파에 복수할 생각밖에 없다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하나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일일세. 서장의 저 악의 무리는 서장서 얼마나 나쁜 짓을 하고 있나 말이네. 그들의 문하도 누구 하나 용서할 수가 없네. 지금이 바로 정, 사 양도(兩 道)가 존망을 걸고 싸울 그 시기일세. 그렇지 않은가?" 취도인이 대답했다. "왜 그런 사연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찬하대사가 경운의 미간에 붉은 선이 세 가닥 있어 큰 살 겁이 있을 터이니 조심하도록 해 달래서 경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때 홀연 서쪽에서 붉은빛이 맹렬한 속도로 다가왔다. 이를 본 추운수가 조용히 속삭였다. "여보게들, 우리 빨리 여기를 뜨세!"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 얽히고 설킨 은원 周輕雲學道壁邪村 金羅漢搬兵五雲步 추운수 등 세 사람은 바람처럼 몸을 날려 벽균암으로 달려갔다. 이때는 오경 전후였으나 겨울밤 은 길고 긴지라 아직 동이 트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주순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객실로 들어갔 다. 취도인이 송, 학 두 도동을 불러 차를 준비하라 이르자 주경운이 물었다. "아까 서쪽에서 나타난 붉은빛을 보자마자 우리가 피해 왔는데 왜 그랬나요?" 추운수가 대답했다. "자운사는 주운종이 너희 취사숙의 도움을 받아 도주하고, 장량이 피살되자 우리 아미파가 저희 들을 괴롭히려 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통은 지난달 문하의 사대금강과 다보진인 금 광정 및 서천의 저명한 도적들을 삼산오악에 보내 유능한 검객들을 자운사로 초청했다. 우리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지. 아까의 붉은빛은 바로 모태의 사부인 금신나한 법원일 것이다. 나는 잠시 저들에게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너희들과 함께 살짝 피해 온 거야." 주경운이 다시 물었다. "사조(師祖)의 말씀대로 저들이 사방에 구원을 청하고 있다면 우리도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 아 닌가요. 우리 몇이서 상대할 일이 아니잖습니까?" "물론 그렇다. 내 일찍이 너의 사숙 이호자를 시켜 사람들을 청했으니 곧 소식이 올 것이다. 지 통 그 녀석은 우리의 허실을 모르고 그저 내가 강호에 나타났나 의심만 하고 있을 게다. 자기 사 부 태을혼원조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허둥대며 동문을 소집해선 대책을 강구하겠지. 사실 우 리의 진정한 적들은 아직 출두를 하지 않은 상태야."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주순이 깨어서 그들에게로 왔다. 주경운은 쫓아가 아버지를 뵈었고 주순은 추운수와 취도인에게 인사했다. 주경운이 내실로 들어가 한 차례 내공의 연마를 끝내니, 해는 이미 하늘 높이 떠 있었다. 마침 그때 취도인이 등에 호로병을 지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추운수가 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추운수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취도인에게 주자 취도인은 연방 감사의 인사를 했다. 취도인은 그 물건을 품속에 고이 넣더니 밖으로 나갔다. 추운수가 주경운에게 말했다. "현재 적들은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고 우리의 허실이나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지도 못하다. 나는 너의 부친을 데리고 형산 주렴동(珠簾洞)에 있는 나의 대제자 악문(岳雯)한테 가서 검법을 전수하고 취사숙의 보검도 원상으로 되돌릴 계획이다. 위청도 내가 어떤 사람한테 보냈으니 너 혼자 남겠는데, 있을 곳이 마땅치 않구나. 그렇다 해서 수시로 쓸모가 있을 것 같은 너를 돌아가 라 하기도 그러하니, 도대체 어떻게 한다?" 경운이 대답했다. "사조어른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 사부께서 저를 보낼 때 자운사 일은 아직 이르고 부친을 만난 뒤 거처가 없으면 성도 북문에 있는 벽사촌(壁邪村)으로 가라고 일러주셨어요. 그곳에 옥청사태 (玉淸師太)가 계시니 거기에 잠시 유하라며 소개하는 편지도 써 주셨답니다. 사조어른께서 떠나시 고 나면 저는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추운수는 놀라며 기뻐했다. "호오, 마가선자(摩伽仙子) 옥청대사가 성도에 은거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 걸. 그 사람은 우리를 잘 도와주실 양반이다. 그녀는 우담신니가 세상을 뜬 뒤 세속에 살고 싶지 않아 은거했는데, 내가 동해에서 참수(參修)할 때 채약하러 와서 만나본 적이 있지. 그때 그녀를 위해 작은 편의도 봐준 적이 있는데, 한번 헤어지고 벌써 오십 년이 되었구나. 그녀도 무예가 아주 고강해졌을 테지. 네 가 이번에 가거들랑 특별히 공경해서 잘 모시고 조석으로 배우면 크게 도움을 얻을 것이다." 주경운이 아주 좋아하며 마가선자 옥청대사의 내력에 대해 물으려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어른 거리더니 여자의 또록또록한 목소리가 들렸다. "백노선배, 남의 뒷전에서 이러쿵저러쿵 나쁜 말을 해선 못 씁니다. 난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 요." 어느 결엔지 방 안에 묘령의 여인이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머리에 법모(法帽)를 썼고 누런 승의 를 걸쳤는데 손에는 불진을 들고 있었다. 장엄한 풍채가 새삼 아름다운 것이 방 안을 화사하게 해 주었다. 추운수가 껄껄 웃었다. "오랜만이오 대사, 이 노괴는 남의 단점을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게 크나큰 결점이니 마음을 턱 놓으시게. 아마도 대사는 우리가 악당들과 대적할 때 우리를 크게 도와주셔야 할 것이오." 묘령의 여승이 대답했다. "노선배의 분부를 어찌 받들지 않사오리까. 한데 이 두 분 중 한 사람은 내 이미 아는 분이구먼. 틀림없이 나를 찾아올 귀한 손님이겠고, 또 한 사람은 누구실까?" 추운수가 웃으며 말했다. "미리부터 잘도 아시는군. 자, 주순과 경운아,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바로 이분이 우리가 조금 전 이야기하던 옥청대사시다!" 주순과 주경운은 무척 의아해 했다. 추운수와 그녀가 헤어진 지 이미 오십 년이라 했으니 그 말 대로라면 백여 세는 됐을 터인데 이 여승은 아직도 소녀 같지 않은가? 추운수가 그들의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대들 두 사람은 대사의 나이가 젊어 보여 이상한 모양이지? 이 대사는 주안술(駐顔術)을 알 아 이처럼 젊어 보인단다. 이 늙은이보다 더 먹진 않았어도 아마 금년에 백삼십여 세는 되었을 걸." 옥청대사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쫑알거렸다. "노선배는 또 저를 놀리시긴가요?" "하하하, 놀리긴. 여긴 내가 새로 거둔 제자 주순일세. 이제 겨우 출가를 해서 검법은 아직 배우 질 못했다네. 대사가 보시기에 어떤가? 성취를 이룰 수 있겠는가?" "노선배는 하늘과 땅도 뒤바꾸어 놓을 만한 힘이 있으시고 무딘 쇠로도 금을 만드실 재주를 지 니셨는데, 황차 근본이 좋은 주도우야 말해 뭣 하겠습니까?" "허허허, 고맙군 고마와. 한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시었소?" "여긴 원래 대사형 소인(素因)의 하원(下院)입지요. 금년에 그 분이 운남에서 채약을 하고 가사 (家師)한테 들렀다가 저한테 왔었는데, 그때 이곳을 취도인에게 빌려주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일찍이 한번 찾아보리라 마음먹었었지요." 그녀는 주경운을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어제, 저 애 사부 찬하대사의 친구인 낙안산(落雁山) 수응동(愁鷹洞)의 완석대사(頑石大師)가 나 한테 전갈을 가져왔더군요. 저 애가 사부의 서신을 갖고 나를 찾아올 것이라구요. 그래서 날짜를 세어보니 올 때가 이미 지났지 뭡니까. 아시다시피 요즘 군마(群摩)가 강호에 나타나고 있는 참이 라 혹 무슨 잘못이라도 있나 해서 걱정이 돼 이렇게 들러봤죠. 노선배가 여기 계실 줄은 정말 몰 랐습니다." 그녀는 손바닥을 툭 치며 신이 난 듯 계속했다. "맞았어요. 때마침 아미파의 주요인물에게 알릴 일이 있었는데 참 잘되었습니다. 그동안 법보 하 나를 만드느라 멀리 몸을 뺄 수 없어 알리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노선배를 이렇게 만났군요." "무슨 일인데?" "노선배는 태을혼원조사의 사매 만묘선고 허비랑을 아시지요?" 주경운이 사이에 끼어들어 물었다. "사백께서 말씀하시는 분은 황산 오운보에서 수련하고 계신 그 중년 여승입니까?" "맞아, 그 사람이야. 두 차례에 걸친 아미비검에서 그녀의 사형이 참사하자 그녀는 황산에 은거 하여 보복이니 복수니 하는 따위는 입에도 올리지 않고 지냈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가 사형 못지않은 실력을 지녔으면서도 사형이 죽는 것을 보고 그처럼 무관심할 수 있느냐며 그녀의 무심 함을 탓했었죠. 동문의 정리가 어쩌면 그렇게 없을 수 있느냐 매도했던 거예요. 한데 나는 작년에 그녀가 가슴 속 깊이 다른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냈어요. 그녀는 사형의 복수를 위해 이 오 십 년 동안 고된 수련을 했고, 이미 무예도 옛날의 사형보다 월등하더군요. 이 사람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미파에게는 나중에 큰 후환이 될 것입니다." 주경운이 물었다. "사백께선 어떻게 그 사실을 아셨습니까?" "나는 서장의 독룡존자와 팔십 년 전 동문이었답니다. 가사께서 돌아가신 뒤 나는 그 문하에서 떠나 바른 길로 들어섰지요. 그래도 옛날의 정리가 있어서 모든 일은 아미파와 보조를 맞추면서 도 서장파와는 말썽이 없이 잘 지냈고 항시 중립을 지켜 서장파와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은 없습니 다. 그런데 독룡존자는 최근들어 내가 도법(道法)이 상당히 진보한 걸 어떻게 알았던지 여러 차례 에 걸쳐 서장파에 입교하라고 권해 왔어요. 나는 단연코 이를 거절하며 영원히 중립을 지키겠노 라 말했답니다." "허비랑은 그 독룡존자 때문에 아시게 됐군요?" 주경운이 묻자 옥청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전에 독룡존자가 그 허비랑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었지요. 나는 그녀를 우습게 보고 별로 극진히 대접하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정말로 바른 길로 마음을 고친 것 같은 데다 바둑을 썩 잘 두어서 내왕도 많았고 친근하게 지냈답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은 역시 알 수 없는 거였어요. 지난 해 겨울 나한테 찾아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끝에 마음 속의 모든 것을 토로하더군요. 알고보니 그녀는 혼원조사의 사매였을 뿐 아니라 아내였다는 거예요." 추운수 등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옥청대사를 응시했다. "그녀는 오십 년 동안 와신상담하며 하루도 복수를 잊은 날이 없었답니다. 그녀는 모든 심력를 쌓으며 이제고 저제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면서 나에게 도움을 청하더군요. 날 보고 그들 서장 파의 교조(敎祖)가 되어 같이 일하자는 거였어요. 나는 그 말을 듣자 금세 발작할 것 같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의 입장으로는 또 그럴 만도 했고 가련한 생각도 들어 완곡한 말로 사양 하고는 그녀를 십분 다독거려 주었지요.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를 자기와 같은 비 천한 여자로 생각하더군요. 하루는 독룡존자의 세객으로 나를 찾아와 가지고는 나더러 독룡존자 에게 시집가라는 거예요. 그래서는 셋이서 서장교를 빛내 보자나요?" 추운수 등은 어이가 없어 입을 멍하니 벌렸고, 옥청대사는 잠시 뜸을 두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어찌나 화가 났던지 당장 그녀와 절교를 선언했어요. 그녀는 떠나갈 때 아주 딱딱거리며 을러대더군요. 자기가 오십 년 동안 고심참담하고 있는 사실을 지척에 있는 찬 하대사도 모르는데, 그 비밀을 오로지 나 혼자만 알고 있다는 걸 강조합디다. 우리가 앞으로 서로 를 침범하지 않는 것은 좋다 해도 만일 그 비밀이 샌다면 나와 생사를 걸고 싸우겠다는 거예요. 그녀 말이 자신은 찬하대사 따위는 하나도 겁이 안 나지만 기밀이 새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현재 한 자루 백마주선검(百魔誅仙劍)을 아직 다 만들지 못해 황산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라 했 어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한을 머금고 돌아갔지요. 내가 보기에 이상한 것은 허비 랑이 아니라 찬하대사랍니다. 그분은 이런 사정을 아마 다 알 터인데 어째서 집 가까이에 그런 맹호를 가만 놔두고 있느냐 이거예요. 허비랑이 모든 것을 이룬다면 아미파로서는 큰 낭패를 겪 을 겁니다." 추운수가 말했다. "찬하대사는 그분대로 묘산이 있을 게요.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그렇게 머물도록 편안히 놔둘 리가 있겠소. 이제 그녀의 가면도 벗겨졌으니 겁화를 당할 날도 멀지 않았겠구먼. 대사는 일후 그 내막을 자세히 알게 되리다. 일간 영사와 영사형을 만나시거든 이 늙은이의 안부나 전해 주시오. 머잖아 그분들을 귀찮게 할 일이 있을 거외다. 자, 우리는 이만 헤어집시다." 옥청대사가 주경운을 데리고 벽사촌으로 돌아가자, 추운수 역시 주순과 함께 형산으로 떠나갔다. 한편 지통은 유덕과 모태의 상처를 성심껏 보살폈으나 아무 효험도 없어 허둥대기만 했다. 확실히 외가닥으로는 실이 안 되고 나무 한 그루로는 수풀이 안 되는 법이라, 워낙 곤궁한 입장 이 되니 지통 혼자서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유덕은 계속 혼수상태요, 모태는 마냥 신음소리를 내 지르고 있었다. 바로 이때 요일이 들어와 보고했다. "대전에 한 분 선사가 오셨는데 오대산서 오셨다며 사부와 모사숙을 뵙잡니다." 지통은 대번에 법원대사인 것을 알고 급히 쫓아나갔다. 과연 작고 뚱뚱하며 흉악한 모습에 붉은 가사를 걸친 법원대사가 철선장을 짚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법원은 지통을 보자마자 우렁우렁한 소리로 물었다. "지통은 잘 지냈는가? 모태가 여기 와 있겠지?"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뭔가 낌새가 이상한 것을 느낀 법원은 눈을 부라렸고, 지통은 조심스럽게 모태가 주순에게 복수 하려다 고수를 만난 일로부터 분면불 유덕과 함께 부상을 당한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일일이 자 세히 설명했다. 법원은 이야기를 다 듣자 대노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이헌 놈들이로고! 그래 지금 모태는 어디 있느냐?" 지통은 법원대사를 모태와 유덕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법원은 모태가 왼쪽 팔이 잘리고 혼수상태에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보자 혀를 끌끌 차며 안타 까와했다. 그는 급히 지통에게 명했다. "정갈한 물을 한 대야 떠오게!" 법원은 두 알의 단약을 물에 타서 두 사람한테 먹이고, 또 두 알의 단약은 물에 개어 상처에 발 라주었다. 이윽고 정신이 든 모태는 스승 법원을 보자 침상에서 내려와 절을 하려 했다. 법원이 말렸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으니 예를 차릴 건 없다." 모태는 극통을 참으며 스승에게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한 뒤 눈물을 뿌리며 하소연했다. "사부님, 저의 원수를 꼭 좀 갚아 주십시오. 제자는 정말 분해 죽겠나이다." "알았다. 마음을 놓아라. 이 일은 너 혼자 관계된 게 아니니라. 복수하는 일 따위를 부탁할 필요 는 없다." 그리고 나서 법원은 지통에게 물었다. "모태의 잘려나간 팔은 현재 어디에 있나?" "불당의 탁자 위에 두었습니다. 모현제가 상심할까 봐 보이지 않도록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 팔을 잃어버리면 안 되네. 좋은 생각이 있으니 그걸 가져다가 잘 보관하게나." 모태는 폐인이 되어 우울하던 중에 스승의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어 물었다. "사부님, 사부님은 법술이 신통하시니, 제자의 잘려진 팔을 붙일 수 있겠습지요?" 법원이 대답했다. "내가 무슨 신통술이 있단 말이냐? 혹 북해 무정도(無定島)의 함공노조(陷空老祖)가 제련한 만년 속단(萬年續斷)과 뼈를 잇고 살이 돋아나게 한다는 영옥고(靈玉膏)가 있다면 원상대로 이을 수 있 을지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여름이면 잘린 팔이 금세 썩을 것을, 다행히 추운 겨울이라 살이 쉽 게 썩지 않을 테니 그 점은 괜찮구나. 아미파의 고본단(固本丹)이 없어 참말 애석하다. 그것만 있 으면 지혈을 하고 살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지통이 말했다. "그런 영약이 있다면 사숙께선 빨리 서신을 써 주십시오. 제자가 가서 그것을 구해 와 현제의 팔을 치료하도록 하시지요." "세상에 일이 어디 그렇게 쉽게 되는가? 그 함공노조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라. 더구나 무정도는 주위 삼천 리가 온통 물이어서 나는 참새도 건너기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조는 이미 세속 과 인연을 끊어 외인과 일체 만나지 않는다. 내가 직접 간다 해도 섬에 한 발을 들여 놓을 성싶 지가 않다." 지통이 실망해서 대꾸했다. "그렇다면 아무 가망이 없군요." "그렇지만도 않아. 함공노조는 평생동안 딱 두 명의 제자를 두었다. 첫째인 영위수(靈威搜)는 현 재 북해 빙원(氷原)의 영산(靈山)에 은거하고 있는데 사람됨이 올바르고 사부를 닮아 조용히 수련 만 하며 바깥 일에는 간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공동산에 사는 장비신마(長臂神魔) 정 원규(鄭元規)로, 무공이 강해 일가를 이루긴 했지만 마음이 악랄해 노조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이다. 십 년 전인가. 어떤 일로 해서 사제지간에 불화가 생겼고 이로 인해 화가 났던지 노조는 갑 자기 검을 날려 그를 죽이려 했다고 했다. 하나 사형 영위수가 이를 먼저 알고 몰래 정원규에게 알려줘 도망가게 하는 한편 함공노조를 설득해 일을 무사히 끝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함공 노조는 영위수가 정원규를 도망시킨 죄로 면벽 삼 년의 벌을 내렸다더구나. 한편 도망쳐 나온 정 원규는 어디 갈 데가 없자 운남 백만산(百蠻山) 적신동(赤身洞)의 오독천왕(五毒天王) 열패다(列 覇多) 수하로 들어가 안신하였지. 나중 그는 오독천왕의 지시를 받아 운남, 귀주, 협서, 사천 일대 에서 제자를 거둬들여서 공동산(控洞山)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무렵부터 나와 의기가 투합해 자 주 왕래를 하였다네. 그런데 정원규는 도망할 때 함공노조의 영약을 상당히 많이 훔쳐 가지고 왔 다더구먼." 지통이 물었다. "그럼 그 사람한테 영약을 얻으면 되겠습니다." "그렇구말구. 그래서 내가 직접 갈 생각이지. 내가 손수 가지 않으면 약을 구할 수 없을 것이야." "그러나 사숙께서 가시면 이곳이 걱정됩니다. 아미파가 상도에 모여들길래 조만간 필히 무슨 사 건이 터질 것 같아 문하 제자들을 사방에 보내 구원을 청했으나 아직 한 사람도 오질 않았거든 요." 법원은 그 말을 듣자 껄껄 웃으며 나무랐다. "자네는 오랜 세월동안 수도한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냉철히 꿰뚫어 보질 못하는가? 그래서야 자네 사조의 유업을 회복하지는 못하겠네그려. 생각해 보게. 아미파가 제아무리 고수가 많다 해도 쉽사리 경거망동할 것 같은가? 지금은 바로 각파가 제자를 거둬들이는 시기일세. 저들은 틀림없 이 일제히 도전해 지난번 아미투검(峨嵋鬪劍)처럼 여러 파를 일시에 소멸시키고 저들만이 지존으 로 남으려 할 걸세. 그런 마당에 이까짓 자운사 하나를 마음 속에 크게 신경쓰겠는가. 만약 추운 수가 강호에 발을 디뎠다면 그 혼자의 힘으로도 이 자운사를 복멸시키는 것은 여반장일 것이네. 지난번 자객은 아마 그들의 새로운 제자가 동향을 보느라 슬쩍 건드려 본 것일 게야. 우리가 어 떻게 대처하는가 보고 준비를 하려는 거지. 우리쪽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저들도 일을 크게 벌 일 것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양 가만히 있으면 저들도 쓸데없는 짓은 아니할 것이다." 유덕이 단약을 복용한 뒤 정신이 들어 법원을 알아보았다. 아직 완전히 다 낫지는 않아 통증이 계속되긴 했어도 옛날의 스승인 법원이 구해 준 것을 알고는 침상에서 내려와 절을 하며 감사했 다. 법원이 말했다. "네가 나를 떠나간 뒤 독룡존자의 문하에서 무공에 정진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 리 무공이 고강하고 담력이 세다 해도 남의 암산에 걸리기 쉬우니, 이후로 적과 싸울 때는 일층 조심하도록 하라. 내 너희 두 사람을 위해 단약 몇 알을 더 남겨 놓을 테니 아마 삼 일 후면 깨 끗이 나을 것이다. 일이 늦어지면 안 되겠기에 나는 이만 공동산에 다녀와야겠다." 그는 말을 끝내자 훨훨 방을 나가더니, 이윽고 한 줄기 붉은빛이 되어 공중을 날아갔다. 이틀 뒤, 지통이 모태, 유덕과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 대력금강 철봉승(鐵峰僧) 혜명(慧明)이 먼 저 돌아와 보고했다. "사부님께 아룁니다. 제자는 사부님 명을 받고 형산(衡山) 쇄운동(鎖雲洞)에 가서 악금빈(岳琴濱) 사숙을 찾았습지요. 먼저 동자가 사부님 서신을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되돌아 와서는 악사숙이 안 계신다 하더이다. 무이산(武彛山) 비뢰동(飛雷洞)으로 용비(龍飛) 사숙한테 바둑을 두 러 가셨다는 거였습니다. 제자는 곧장 무이산에 가보았으나 용사숙은 안 계시고 그분의 제자 소 영후(小靈侯) 유종잠(柳宗潛)이 맞아주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용사숙은 동해로 친구를 찾아 갔고, 악사숙은 아직 안 오셨다 하더군요. 그러나 유종잠 자신은 이곳 일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몇몇 동문 도우들과 함께 도우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하나 제자는 사부께서 오래 기다리실까 두 려워 먼저 보고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지통은 제자의 말을 듣자 한탄을 했다. "너의 악사숙은 아마도 아미파 세력이 두려워 일부러 너를 안 만난 모양이다.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구나. 건너가 쉬도록 해라." 다시 삼사 일이 지나자 무적금강 혜능, 다비금강 혜행, 다목금강 혜성 등이 전후해서 돌아왔다. 그들이 초청한 사람들 중에는 오겠다는 사람, 일이 있다는 사람, 부재중인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 다. 오겠다는 사람들은 노산(勞山) 철장선(鐵掌仙) 축악(祝顎), 강소성 태호 동정산(洞庭山)의 벽력수 (霹歷手) 울지원(蔚遲元), 창주 초상비(草上飛) 임성조(林成祖), 운남 대죽자산(大竹子山)의 파발후 (波髮侯) 예적은아(猊狄銀兒), 화산 열화조사의 제자 비천야차 진랑 등이었다. 열화조사는 다른 일파이니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지통과 모태의 사형제들로서 아미파와는 오랫동안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들 중에는 대선배가 되는 사숙, 사백들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 서장의 독룡존자마저도 일이 있어 그것이 끝나면 오겠다고 했으니 역시 올 똥말똥이었다. 그의 문하인 대제자 유덕은 이미 먼저 왔지만 비천야차 마각은 출타중이고 없다고 한다. 온다는 사람의 숫자야 적지 않았으나 빼어난 검선이 없어 지통으로서는 크게 실망이었다. 또 이틀이 지나자 비천오송(飛天蜈松) 다보진인 김광정이 그의 제자들인 독각망(獨角莽) 마웅(馬 雄), 분수서우(分水犀牛) 육호(陸虎), 요해은룡(鬧海銀龍) 백진(白縉) 등을 이끌고 의기당당히 돌아 왔다. 여러 사람과 인사가 끝나자 김광정이 입을 열었다. "나는 자운사를 떠나자 원래 청성산(靑城山)의 친구 기등(紀登)한테 가서 그의 조사인 왜수(矮 搜) 주매(朱梅)를 초청하려 했었지요. 한데 관현(灌縣)의 이랑묘(二郞廟) 앞에서 나이 십사오 세쯤 되어 보이는 절색미녀를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그 소녀는 중년의 도고(道姑)에게서 약을 사고 있 습디다. 우리는 아름다운 그 처녀를보자 방장대사 생각이 나서 기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녀를 훔쳐다 대사께 선사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지통은 김광정의 선심공세에 우선 기분이 좋아 코를 벌름거렸다. 김광정이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청성산 금편애(金鞭崖)의 백운관(白雲觀)엘 가보니 기등은 유람하러 나가고 없고 도동 하나가 관을 지키고 있더군요. 도동의 말이 사부는 곧 돌아올 것이라기에 그곳에서 며칠을 묵었 지요. 하나 며칠이 지나도 기등은 오지 않더구만요. 우리는 이곳 일이 걱정되고 또 그 여자의 건 도 있어서 곧 돌아왔습니다. 그날 우리는 소녀의 집을 알아 놓았으므로 그곳으로 덮쳐갔습지요." 김광정은 괜히 신나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처음 연약한 소녀라 손쉽게 붙들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집에는 무 공을 아는 아버지가 있었고, 그 계집애도 애비 못지 않게 무공이 세어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나 중에 마웅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검을 날려 여자의 부친을 죽여 버렸지요. 하지만 마웅도 그 녀를 붙잡는 도중 여자의 수리검을 맞았고 손도 물리는 등 곤욕을 치렀습니다. 붙잡힐 때 성깔이 대단한 계집애는 기절을 했기에 얇은 이불에 싸서 마웅한테 지워 들쳐업고 뛰게 했습니다. 한데 성밖 십 리도 못 와서 그날 소녀한테 약을 팔던 중년 도고를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그 도고는 대 뜸 여자를 내려놓고 가라더군요. 저는 돌아올 마음이 급했거니와 일을 벌인 바에는 빨리 끝내는 게 상책인지라 즉시 비검을 발출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답니다. 그 도고는 제비검을 보 더니 냉소를 치며 손을 한번 슬쩍 뿌립디다. 한 가닥 금빛이 무섭게 뻗어와 저의 금빛을 이내 박 살내 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녀의 검광은 벌써 우리를 꽁꽁 에워쌌고, 우리는 그저 눈을 꼭 감 고 죽기 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는 데도 아무 동정도 없길래 눈을 떠보니 약을 말던 도고와 우리가 붙들어 왔던 소녀는 간 곳 없이 사라졌더군요. 정말 허망한 일 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도고가 살계(殺戒)를 펴지 않아 산 것만도 다행이었지요." 김광정은 다행이란 표정이었고 지통은 실망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하룻밤 헛고생만 하고 미인까지 빼앗겨 허탈했지만,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 도에 반쯤 왔을까. 길에서 우린 마각도장을 만났습죠. 워낙 분한 터라 우리가 당한 이야기를 들려 줬더니 도장이 빙그레 웃으십디다. 그분 말이 참 놀랍더군요. '여보게, 그분이 누군지 아는가? 그 분은 황산 오운보의 만묘선고 허비랑으로서 우리 파 중에 가장 무공이 고강한 사람일세. 그분은 황산에서 수련하며 아미파의 동정을 특별히 살피고 계시는 중이야. 어쩌면 그분은 자네들이 사람 을 죽이고 여자를 강탈하는 것을 보자 그 기회를 틈타 여자에게 은혜를 베풀며 데려다 제자로 삼 을 모양일세. 그녀가 자질이 있어 유심히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지. 어쨌든 자네들은 일을 잘한 셈 이네. 하지만 허비랑 선고(仙姑)는 아직 진면목을 드러낼 수 없는 입장이니 비밀이 새나가지 않게 주의하게' 하고 말하더이다. 방장대사, 우리 파에 그런 이인이 계시다니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 까?" 유덕과 지통은 그 말을 듣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며칠이 지나자 법원대사가 공동산에서 돌아왔다. 벌써 시일이 오래 지났지만 얻어온 영약으로 잘라진 모태의 팔을 붙여주었다. 효험이 약간은 기대치 이하였으나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법원은 모태의 팔을 붙이고 잘 싸맨 뒤 대려금강 혜명을 시켜 모태를 오대산에 데려다 주게 지 시했다. 모태와 혜명이 떠나자 법원은 주요인물들을 대전에 모으고 당부겸 설교를 했다. "이번의 쟁투는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적과 마주할 때 첫째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두려워하지 말며, 저들을 또한 가벼이 보지 말라. 내가 보기에 아직은 때가 이르고 도와줄 사람들이 미처 오 지 않았으므로 내 다시 친히 돌며 유력한 고수들을 초빙해 오겠다. 내가 떠난 뒤 그대들은 어느 누구라도 경망히 밖에 나가지 말고 밤에는 번갈아 경계를 하라. 만일 무공이 센 적이 오거든 유 덕이 나가 상대하되 날짜를 정해 승부를 가리자고 시간을 늦추는 게 좋을 것이다. 지난번처럼 함 부로 싸워 실패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법원은 일장 훈시를 끝내자 여러 사람들과 작별하고는 고수를 초빙키 위해 삼산오악으로 떠났 다. 구화산의 결투 天都峯白俠遇凶僧 鎭雲洞紅藥逢仙侶 금신나한 법원은 자운사를 떠났다. 삼산오악(三山五岳)에 흩어져 있는 흑도의 검협 고수들을 초 빙해다 내년 봄 아미파와 승부를 가릴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절간 문을 나서자 그는 우선 갈 곳부터 정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먼저 구화산(九華山) 금정봉 (金頂峯)의 귀원사(歸元寺)로 가서 사자천왕(獅子天王) 용화(龍化)와 자면가람(紫面伽藍) 뇌음(雷 音)을 설득해서 끌어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는 검광을 일으켜 질풍노도같이 치달렸다. 이틀이 못 걸려서 구화산 아래 당도하자, 검광을 거 두고 지상으로 내려서서 금정봉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구화산은 황산과도 아주 가까운 데다, 금정봉은 그중에서 최고 봉이요, 정상에는 지장보살(地藏 菩薩)의 육신을 모신 탑이 우뚝 서 있었다. 산세도 웅장하고 험준하여 온 산이 기막힌 절경을 이 루고 있지만 절기도 엄동설한이고 또 긴박한 용무를 가지고 가는 터라 법원은 산수(山水)을 감상 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한창 산길을 더듬어 오르고 있노라니 문득 울창한 숲 속에서 여인과 어린 소년이 까르르 웃어가 며 무슨 얘긴지 재미있게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법원은 가던 길을 멈추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 산바람도 몹시 찬데 황막하고 외따른 산중에서 어린애가 놀다니?... 그것 참 이상하군.' 그는 의아심이 불쑥 들어 나무숲 근처로 접근해서 유심히 둘러보았다. 불타는 듯 시뻘건 저녁놀만이 서편 나무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뿐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참에 홀연듯 어린 소년의 음성이 또 들려왔다. "누나, 손사형(孫師兄)도 이리 오라고 해요. 저것 좀 봐! 웬 중놈이 엉큼스럽게 이쪽을 두리번거 리고 있잖아? 누나, 손사형더러 이리 오라고 불러요. 저 도깨비 같은 중놈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골 치 아프니까 말야!" 가만 듣자 하니 <도깨비 중놈>이란 게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법원은 숲 쪽으로 가 까이 다가서서 소리나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그래도 사람의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요괴나 귀신이 아니면 솜씨가 제법인 고수가 틀림없었다. 슬그머니 호기심이 일어 수작이나 걸어볼 요량으로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문득 맞은편 산머리 에서 쏜살같이 등성이를 타넘으면서 이쪽 숲으로 달려오는 청년이 눈에 띄었다. 겨우 십칠팔 세 나 되었을까, 온통 눈빛처럼 새하얀 옷을 걸치고 있었다. 숲 속의 보이지 않는 소년에게도 그게 보였는지 또다시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손사형 마중을 나가요. 아무래도 저 중놈이 못된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도무지 안심 이 안 되는 걸." 그러자 앳된 처녀의 응답이 법원을 놀라게 만들었다. "쬐꼬만 녀석이 어째 그리 방정맞으냐? 허둥대지 마! 중이 왔으면 왔지 그게 무슨 대수야? 제깐 중놈이 아무리 담대하기로소니 구화산의 풀 한 포기 나뭇가지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거 같으냐? 그래도 머리가 좀 돌아가는 작자라면 일찌감치 자리를 떠서 볼썽사나운 꼴이나 면하려고 할 텐데 뭘 무서워하니?" 법원은 슬그머니 울화가 치밀었다. 어린 것들이 맞대놓고 하듯 이 자기한테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당장 뛰어들어 가서 발칙한 연놈을 요절내고 싶지만 어디 숨었는지 모르니 어쩌겠는가? 손을 쓸래야 써 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치솟는 노기를 억누르고 잠시 관망해 보기로 했다. 이때쯤 백의 청년도 날 듯이 숲 속으로 들어갔다. 법원은 그 청년이 발길을 거기서 멈추는 것을 보고 그 또한 숲 속의 연놈들과 한 패라는 걸 깨 달았다. 그렇다면 역시 용서할 수가 없다. 이놈부터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암습해서 거꾸러뜨리 자! 법원은 숲가에서 물러나 그대로 계속 산길을 오를 것처럼 몇 발짝 걸음을 옮기다가 후딱 뒤돌아 섰다. 순간, 수십 줄기의 붉은 검광이 번개보다도 빠르게 숲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다. '흐흐흐, 저놈이 검광을 덮어썼다 하면 그걸로 끝장이야! 살아날 생각은 아예 말아야지!' 그는 비검을 연신 조종하면서 숲 속의 어린 연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유심히 주목했다. 한데 백의청년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자약, 나무 사이로 어른거리더니만 찰나지간에 훌쩍 모습을 감추고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요놈 봐라! 제법 눈치 한번 빠르구나. 하지만 이 숲 둘레 수십 장은 벌써 내 검광 속에 에워싸 였단 말이다. 그 따위 은신법을 쓴다고 달아날 듯싶으냐? 어림 반푼도 없다! 흐흐흐.....' 법원이 한창 의기양양해 하는 판인데, 자기가 쏘아낸 검광 줄기가 어쩐 셈인지 뻗어나가지 못하 고 제자리 허공에 딱 멎어버리는 게 아닌가. 보이지 않는 장벽에라도 가로막힌 것처럼 말이다. 법 원은 부아가 치밀었다. 손가락을 뿌리듯 내뻗으며 호통을 쳤다. "받아랏!" 수십 줄기의 검광이 무서운 기세로 춤추듯이 위아래로 마구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 붉은 칼빛은 일락서산(日落西山) 노을에 어울려서 숲 속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이며 살아 있는 꽃뱀처럼 어지 러이 꿈틀거렸다. 마침내 법원의 칼빛은 일대의 수풀을 단단히 에워쌌다. 칼빛이 스쳐 지나가는 곳마다 나뭇가지 와 잎사귀들이 비오듯 우수수 떨어지고, 어쩌다 정통으로 맞은 아름드리 거목까지도 '쩍!' 소리를 내면서 꺾여 쓰러졌다. 어느 새 젊은이들의 음성이 들리던 부근은 텅빈 공터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성이 차지 못한 칼빛은 한 자 두 자, 형체없는 장벽이 되어 전진했다. 하지만 빛줄기들은 뚫고 들지 못하고 부딪 치기가 무섭게 튕겨 되돌아 날아올 뿐이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숲 속에선 여전히 낄낄거리며 주고받는 세 남녀의 말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무 엇이 그리도 아기자기 재미가 있는지..... 법원은 세 사람을 검광 속에 꼼짝도 못하게 가두어 놓기는 했지만, 맹랑하게도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피차가 두고 갇힌 상태로 대치한 채 한참 동안을 버텼다. 문득 여인의 토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금선(金蟬)아, 이거 모두 네 녀석이 저지른 일이야! 어머니도 집에 안 계신데 어쩔 셈이냐?" 뒤미처 제법 굵직한 청년의 음성이 들렸다. "사저, 내 낯을 봐서라도 그대가 나가서 상대 좀 해주구려. 저 흉물스런 중놈이 뭐가 불만인지는 모르지만 다짜고짜 독하게 살수를 쓰다니. 정말 못된 놈 아니오? 사저가 날 잡아당기지 않았더라 면 저놈의 암습에 맞을 뻔했단 말씀이야. 설마 내가 이토록 남한테 얕보여도 가만 있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여인이 대꾸도 하기 전에 어린 소년의 음성이 건방지게 불쑥 끼어들었다 "사형, 그러지 말아요. 우리 누나는 누가 추켜주면 추켜줄수록 콧대가 높아지는 버릇이 있거든? 우리 나가지 말고 여기 앉아서 저 중놈 노는 꼬락서니나 구경합시다. 어머니 야단만 무섭지 않으 면 내가 당장 뛰쳐나가서 저 녀석하고 결판을 낼 텐데... 저걸 그냥! 에이그....." "흐흥!" 여인은 코웃음만 칠 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거니받거니 하는 음성은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법원은 젊은이들의 말투가 아예 자기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깔보는 기색마저 보이는지라 저도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섣불리 쉽게 상대할 놈들이 아닌 듯했다. '그거 참 이상하다? 수십 년 이래 아미파 쪽에서 특출한 인재를 길러냈단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 는데 어찌 된 셈인가? 나이도 어린 것들이 어떻게 저토록 놀랄 만한 재간을 지녔을꼬? ...철부지 가 저 정도라면 어른은 말할 것로 없겠지. 정체를 알 수 없구나.' 태을혼원 조사가 세상을 떠난 후로 오대파, 화산파는 비록 구심점을 잃었다고 하나, 자기만 하더 라고 아직은 문파 안에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런 만큼 아미파 검선 중에 우두머리로 일컫는 건 곤정기 묘일진인 제수명과 해동삼선, 숭산이로를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모두 자기와 상대할 적수 가 못 된다고 자부해 온 터였다. 그런데 이제 자기를 면전에 세워두고 조롱을 퍼붓는 적수가 있는데도 접근할 도리도 없거니와 상대방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벌써 반나절씩이나 비검술을 쓰느라 기력을 허비하고 있 는데 적은 도리어 장난삼아 껄껄 대고 있지 않은가. 법원은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적수가 정체를 드러내고 눈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도무지 승부 를 낼 도리가 없다. 그냥 모른 척 떠날까도 생각해 봤지만 용두사미(龍頭蛇尾)격으로 적들에게 개 꼬리를 보이는 것 같아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태까지 적의 낯짝도 보지 못했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럽고 울 화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는 방법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직공(直攻)보다는 간접적으로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쓰기로 한 것이다. 목청을 잔뜩 돋구고 숲 속을 향해 크게 외쳤다. "요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녀석들! 나하고 상대할 배짱이 있거든 이리 썩 나오너라! 이 나한어 르신께서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 네놈들 목숨만은 절대로 안 다치마. 계속 그 따위 장안법(障眼 法)으로 눈가림이나 할 테면 내 벼락불로 네놈들을 깡그리 통구이로 만들어 죽이고야 말겠다!" 그 엄포도 끝나기 전에 숲 속에선 또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저 중놈이 아무래도 똥이 마려운가 봐. 저렇게 악을 고래고래 지르는 걸 보니까 아주 급 한 모양인데? 여기서 냄샐 피우면 큰일인 걸! 누나, 어서 쫓아내 줘. 나도 슬슬 배가 고프단 말야. 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지!" "네 녀석이 저지른 거니까, 난 모른다!" "누나, 정말 이러기야? 그럼 좋아! 내가 나가서 한바탕 혼찌검을 내 주지!" 법원은 그 말을 듣고 '옳다, 됐구나!' 싶었다. 한 마디 충동질을 했더니만 과연 적이 나타날 모양 이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쉴새없이 검광을 번뜩이며 기다렸다. 도대체 어떤 놈들인가? 잔 뜩 기대를 하면서 시력을 모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을 뚫어져라 봐도 숲 속에선 여전히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이게 또 웬일인가. 마음이 변했나?' 의아스런 느낌에 조바심이 또 일기 시작하는 판인데, 느닷없이 여인의 앙칼진 음성이 귀청을 때 렸다. "요 못된 중놈! 엉큼스럽게 뭘 훔쳐보는 거야?" 뒤이어 눈앞에 무엇이 희끗하더니 어느 틈엔가 두 사람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남자는 아까 보았던 그 백의청년이고, 자주빛 옷을 걸진 여자는 십팔구 세쯤 되었을까 한 아주 절색의 미녀였다. 그녀의 허리에는 장검 한 자루가 천연덕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적이 너무나 뜻밖의 방향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법원은 펄쩍 뛸 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 는 자기 손아귀에 들린 비검이 텅빈 숲을 아직도 쓸데없이 마주 헤집고 있는 걸 깨닫고 얼굴이 붉어져 황급히 검광부터 거두어들였다. 그 당황하는 꼴을 보고서 처녀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서두를 것 없어! 천천히 하라구. 네 녀석의 그 개 같은 모가지를 끊어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말 야!" 법원은 분명 두 귀로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화가 나기보다도 차라리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 질 지경이었다. 아무리 재간 좋은 계집애기로서니 세상에 이 금신나한 법원의 모가지를 놓고서 죽인다 살린다 장난질을 치다니!..... 혹시라도 정신이 돌아 버린 게 아닌가 싶어 다시 한번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신색은 태 연자약, 그것쯤은 약과라는 표정이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찢어죽어야 하나?' 잠시 어이없는 기색으로 쳐다보자니, 그녀의 입에서는 아이를 꾸짖듯 엄한 호통이 또 터져나왔 다. "이 흉칙스런 중놈, 너무도 못됐구나! 네 갈 길이나 고분고분 갈 일이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엿듣기는 왜 엿들었으며, 또 아무 까닭도 없이 악독하게 사람을 해치려 들다니, 그건 무슨 심보 냐?" 법원은 속으로 경각심을 잔뜩 높였다. 이 계집을 경솔하게 건드려선 안 되겠다고 직감했던 것이 다. 그는 부득불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이곳을 지나치기로 작정했다. "그건 도우(道友)께서 모르시는 말씀이외다. 난 그저 친구를 만나려고 지나가는 길인데, 숲 속에 서 두런두런 말소리는 나고 사람은 보이지 않길래 혹시나 산속 요괴는 아닌가 싶어 비검을 쏘아 본 거요. 절대로 사람을 해칠 뜻은 없었소. 자, 이젠 해명이 되었으니까 난 가겠소. 또 봅시다!" 말을 마치자 법원은 여자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휘적휘적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한데 그가 몇 걸음도 안 걸었을 때였다. 측면으로부터 난데없는 금환(金丸) 한 알이 벼락치듯 바 람을 몰고서 날아드는 게 아닌가! '아차, 이거 재미 적군!' 방어자세를 취하려고 했으나 이미 손 쓸 틈도 없었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겨우 급소는 면했지 만, 무서운 기세로 날아온 금환은 그의 왼쪽 어깨를 '딱' 소리가 나도록 호되게 때렸다. 만약 법원처럼 고도의 무공을 연마한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 일격에 최소한 목숨을 잃지는 않더 라도 뼈와 살이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졌을 것이다. 법원은 저릿저릿, 말도 못할 아픔에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건 보통 아픈 게 아니었다. 그대로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일었지만 저들이 놓아줄 성싶지 않았다. 그는 독이 올랐다. 팔뚝이 떨어져 나갈 듯한 통증을 억누르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어댔다. "요 젖비린내도 안 가신 놈들! 내 불쌍히 봐줘서 그냥 살려두고 가려 했더니만, 감히 암습을 해 서 남을 해치다니! 오늘이 나한어르신깨서 네 연놈의 멱줄기를 따놓지 않는다면 성을 갈겠다. 어 디 맛좀 봐라. 에잇!" 짐승처럼 으르렁거린 법원은 보검을 뽑아들기가 무섭게 두 남녀를 노리고 번쩍 검광을 쏘아보냈 다. 슬쩍 가볍게 몸을 비틀어 법원의 일격을 피하고 나서 여자는 금빛 찬란한 장검을 뽑아잡았다. 다음 순간 삽시간에 한 줄기 금빛이 허공으로 치솟더니 법원의 검광을 맞받아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백의청년이 비검을 날려 협공 태세를 취하자 여자가 말렸다. "손사제, 그냥 있어요! 나 혼자서도 넉넉히 요리할 수 있으니까요." 백의청년은 더 이상 나서지 않고 한편에서 팔짱을 낀 채 관전하기 시작했다. 법원과 여자의 장검은 반 공중에서 어금니가 시릴 정도로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면서 무서운 광 채를 쏟아냈다. 어느 쪽이 우세를 잡았는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법원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토록 나이어린 계집이 상승의 검술을 익혔다니 정말 놀랍고도 기이한 노릇이 아닌가! 여자가 이 정도로 막강하다면 저 백의청년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지독할 게다. 이것 참 큰일났구나!' 한창 이 궁리 저 궁리 골치를 썩이고 있는 판인데, 이건 또 웬 날벼락인가? 눈알에 금빛이 번쩍 하더니 천둥벼락치듯 엄청난 파공음을 내면서 금환 몇 알이 허공을 찢고 날아왔다. 일찌감치 전신으로 경계하고 있던 법원은 미꾸라지처럼 금빛 쇳덩이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갔 다. 표적이 빗나가자 금환은 빙그르 포물선을 그리면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일단 투척했던 금환을 회수해야만 재차 던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지독한 놈의 쇳덩어리는 도대체 누가 던지는 거야?' 하마터면 어깨뼈가 으스러질 뻔하도록 혼줄이 난 터라 법원은 한편으로 여자의 공세를 막아내면 서 흘낏 금환이 날아든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저놈은 어린애가 아닌가!' 그리 멀지 않은 언덕받이에 한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놈이 오똑하게 서 있었다. 머리카 락을 양쪽으로 갈라 땋아서 염소 뿔처럼 묶어 뻗쳤고 분홍색 저고리를 입었는데, 가슴팍에 황금 빛 고리가 걸려 있었다. 짤막한 흰 바짓가랑이 아래로는 맨종아리, 깁신을 신고 있는 품이 앙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관옥 처럼 해맑은 얼굴에 미목도 수려한데 입을 헤죽 벌리고 싱글싱글 웃음짓는 모습이 여간한 장난꾸 러기가 아닌 듯했다. '저놈이 던졌구나! 좋다, 요 말썽꾸러기놈, 어디 맛 좀 봐라.' 어처구니없이 어린놈한테 당했다고 생각하니, 법원은 그만 분통이 머리 꼭지까지 뻗쳤다. 그는 악심을 품고서 한 대 맞은 보복을 톡톡히 하기로 작정했다. 살기어린 손아귀에서 번쩍 하고 붉은 빛 한 줄기가 갈라져 나오더니 곧바로 그 소년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갔다. "금선아, 조심해!" 동생에게 기습적인 독수가 펼쳐지자 여자는 대경실색, 황급히 고함을 질렀다. 법원의 비검을 차 단하고는 싶지만 도저히 몸을 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의청년도 기급을 해서 장검을 뽑아들고 허둥지둥 법원의 검광을 뒤쫓아 달렸다. 어린녀석도 누이의 당황한 고함소리를 듣고선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얼른 품속에서 열 두 개의 금환을 꺼내들더니 덮쳐오는 붉은 검광을 겨누고 연거푸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슈욱... 땅! 슈욱... 땅! 손에 들었던 금환 열두 개를 모조리 던지고 나자, 그는 두 팔로 머리통을 감싸안더니 언덕 비탈 아래로 마구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금환에 부딪칠 때마다 멈칫멈칫 하면서도 검광은 기세를 잃지 않고 소년의 등어리를 향해 뻗어 나갔다. 하지만 열두 차례나 검광이 방해를 받아서 주춤거리는 사이에 소년은 산비탈 동굴 속으 로 사라졌다. 검광에 부딪친 금환은 모조리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법원의 검광을 겨우 따라잡은 백의청년이 동굴 어귀에서 그것을 요격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법원의 공세를 착실하게 막으면서 한 발 한 발씩 뒷걸음질치더니 이윽고 그녀 역시 동굴 입구까지 후퇴했다. 법원의 예측과는 달리 백의청년의 검술은 여자 쪽보다 뒤떨어지는 듯, 소년을 추격하던 한 줄기 의 비검을 맞아 싸우면서도 적잖게 힘이 부쳐 고전하고 있었다. 여인은 청년이 버텨내지 못한다고 직감했는지 동굴 어귀에 당도하기 무섭게 고함을 질렀다. "손사제, 빨리 동굴 속으로!" 다음 순간, 그녀는 자기 장검 끝을 노려보면서 한 모금 진기를 불어넣는 것과 동시에 기합성을 질렀다. "얍!" 장검의 칼빛이 문득 한 줄기 무지개로 변하더니 백의청년을 압박하던 법원의 검광 속으로 내리 꽂혔다. 그 찰나, 백의청년은 몸을 빼내 동굴 속으로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어디 놓칠까 보냐고 쏜살같이 뒤를 따라온 법원은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어린녀석도 백의청 년도 놓치고 보니 계집년을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판이었다. 그는 더욱 기세를 돋구어 사정없 이 여인을 공격했다. 하지만 자기편의 위기가 사라지고 나자, 그녀는 또다시 차분한 기색으로 돌아와 법원의 엄청난 공세에 대항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싸웠으나 법원은 도무지 우세를 잡을 수 없어 분노에 초조 감마저 겹쳤다. 해는 벌써 진 지가 오래였다. 둥근 만월이 둥실 떠올라 나뭇가지에 걸린 채 얼음장보다 더 싸늘 한 빛을 뿌리며 자의(紫意) 미녀와 흉악스런 화상의 격전장을 또렷하게도 비춰주었다. '어떻게 하면 요년의 목줄기를 끊을 수 있을꼬?' 한창 악에 받쳐 묘수를 궁리하고 있는 판인데, 돌연 '씽!' 하고 파공성을 울리며 누군가 나는 듯 이 달려오는 게 아닌가? 그는 직감적으로 고수급 검객이 나타났음을 깨달았다. 여인 쪽도 그것을 감지했는지 눈빛이 바 뀌었다. 이어서 쌍방 모두 공수(攻守)의 손길을 늦추고서 이제 나타날 제삼자의 정체에 대해 경각심을 돋구었다. '적이냐, 아군이냐?' 구화산을 오르던 나그네 법원으로선 상대편의 증원군이 닥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자도 방금 울린 파공음으로 보아 이제 나타날 자가 자기편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윽고 언덕비탈 아래로 새털처럼 가볍게 뛰어내리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도 아 닌 여도사와 소녀 두 사람이었다. 이들을 발견하자, 법원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여인의 입에서도 환호성이 터졌다. "아앗!" 두 사람이 그렇게도 가슴조이며 기다린 제삼자는 바로 황산 오운보의 만묘선고 허비랑, 그녀였 다. 혹시 상대편의 원군(援軍)이나 아닌가 해서 놀랍고 두려워했던 인물이 쌍방에게 모두 적이 아니 라 우군이었다. 법원과 허비랑은 원래 수십 년 전부터 오대파의 동문으로 인연을 맺은 터였고, 또 여인의 어머 니는 허비랑과 늘 왕래하면서 친숙하게 교분을 맺어온 사이였다. 그러기에 두 사람 모두가 허비 랑을 우군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법원은 동문 허비랑이 자기를 도우리라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의 입에선 엉뚱한 호통소리가 터져나왔다. "웬 중놈이 대담하게도 구화산에 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게냐? 여기 쇄운동(鎖雲洞)은 바로 건곤 정기 묘일진인 제수명이 계시는 별부(別府)란 말이다! 알겠느냐? 알았으면 썩 물러가거라. 나 허 비랑이 한 번은 용서해 준다만 두 번째 걸렸다가는 내 손아귀에 뼈도 못 추리게 될 것이다!" 법원은 기가 막혔다. 동문 허비랑이 자기를 돕기는커녕 도리어 아는 척도 않고 적대시하다니! 그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속으로 저주를 퍼부어댔다. '이 의리도 없는 계집년... 동문을 보고서도 안면을 싹 바꾸고 모른 척하다니! 이게 될 법이나 한 경우냐 말이다. 아무래도 이년은 변심했어. 우리 오대파를 배반하고 적에게 들러붙은 거야! 괘씸 한 년!' 분기탱천한 법원은 허비랑에게 맞대거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으려다가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 나가는 것이 있어 입을 다물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지난번 비천야차 마각이 귀띔해 준 말이 있지. 허비랑은 거짓으로 아 미파와 깊은 교분을 맺고 본문의 광복을 위해 은밀하게 공작을 꾸미는 중이라고. 그리고 언젠가 는 태을혼원조사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고 해지. 바로 그거다! 허비랑이 방금 날 모른 척하 고 꾸짖는 말은 날 깨우쳐 주는 뜻에서다. 이곳이 제수명의 소굴이라면 내 혼자 힘으로는 감당치 못할 터. 그걸 알았으면 어서 여기를 벗어나라는 암시다. 나와 싸우던 저 계집은 분명 제수명의 딸년일 게다. 그러니까 검술도 그토록 대단했구나. 천만다행으로 그 늙은 애비놈이 마침 없었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 목숨을 부지했겠나 말이다. 좋다, 내 물러가지! 다음 기회를 보 자!' 그는 보검을 거두어들였다. "나 또한 처음부터 싸울 뜻은 없었소. 쌍방간에 오해가 좀 있었지만 기왕 허씨 도우께서 화해를 붙이시니, 당신 체면을 생각해서 이쯤 하고 그냥 가리다." 법원은 말을 마치고 선뜻 돌아서더니 바람소리률 일으키며 날 듯이 달렸다. 그러나 여인이 그냥 놓아 보낼 리가 없었다. 대뜸 장검을 휘두르면서 법원을 뒤쫓으려 하자, 허 비랑이 다급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운소저, 내 낯을 봐서 그냥 놓아 보내구려." 허비랑의 간곡한 만류에, 여인은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머리숙여 사례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도와주셔서." 이때 달아났던 소년이 동굴에서 나오더니 주섬주섬 금환 열두 알을 주워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 봐, 누나! 내 금환이 요모양 요꼴이 됐어!" 울상을 짓고 내미는 손바닥 안에는 열두 개의 금환이 스물네 조각으로 잘려져 있는 게 아닌가. 법원의 비검에 모조리 반동강이가 났던 것이다. 소년은 앙탈을 부리면서 누이에게 떼를 쓰기 시작했다. "왜 그놈을 놓아줬어? 이걸 물어내란 말야! 찬하대사님이 선사한 걸 일 년도 못 갖고 놀았는데 요꼴로 만들었어. 난 몰라! 누나가 물어내든지, 중놈을 이것 모양 두 쪽으로 만들든지 하란 말야" "정말 염치도 좋구나. 일은 네 녀석이 저질러 놓고 누구더러 떼거지를 쓰는 거야? 공연히 날 끌 어다 내세우고서 왜 암습을 했니? 아까 그 중놈이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섰을 때 그냥 가도록 내버 려 두었으면 그만이지 어쩌자고 화를 돋구어 다시 덤벼들게 했느냐 말야! 그놈이 비검을 쏘았을 때 그 알량한 금환이 아니었더라면 네놈의 목숨은 열두 개, 스물네 개가 있어도 모자랄 뻔했어. 어디 그뿐이냐? 손사제 장검은 그놈의 비검을 막느라고 하마터면 부러져 못쓰게 될 뻔했단 말야! 이런 판인데도 어거지만 쓸 테냐?" 누이한테 한바탕 면박을 당하자, 소년은 대거리도 못하고 얼굴만 시뻘겋게 부어서 씨근거렸다. "흠, 내 금환이 요모양으로 못 쓰게 된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손사형의 장검이 안 부러진 것만 신통하단 말이지? 알았어!" 약이 바짝 오른 소년은 누이한테 한 마디를 던지고 산동굴로 뛰어 들어갔다. 동생의 말을 듣자, 무엇에 찔렸는지 처녀의 얼굴이 대뜸 발그레하니 상기되고 말았다. 그리고 허 비랑에게 변명하듯이 말했다. "도사님, 용서하세요. 저 아이가 너무 버릇없이 굴기는 하지만 그래도 총명하고 근기(根基)도 웅 후해요. 저희 부모님과 전세(前世)에 깊은 인연을 맺어서 귀염만 받느라 어리광에 장난꾸러기가 되고 말았지요. 조그만 게 제 힘만 믿고 아무한테나 시비를 걸거든요. 세 살 적에 황소 아홉 마 리, 범 두 마리를 거꾸러뜨릴 만큼 힘도 장사이긴 한데....." 그 말을 듣고 허비랑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 문파는 인물도 많거니와 또 당신네들처럼 훌륭한 후배가 뒤를 든든히 받치고 있다니, 정말 부럽기 짝이 없군요. 나도 어떻게 의발(衣鉢)이나 전수할 제자 하나 얻어보려고 수십 년을 헤매고 다녔지만, 운소저의 동생처럼 근기가 웅후한 후배는 여지껏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여기서 말을 끊더니 멀찌감치 자기 뒤편에 선 처녀를 가리켰다. "... 겨우 이 애 하나를 구하긴 했지만, 근골도 품성도 운소저의 동생에 비하면 어림 반푼이나 될 는지 어쩔지 원....." 말 끝을 흐리고선 처녀를 손짓해 부르더니 인사를 시켰다. 처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운소저라고 불린 여자는 호들갑스레 자신을 탓했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동생녀석하고 입씨름하기에 바빠서 이분 아가씨한테 인사도 못 드렸네 요. 덤벙대느라고 허선고(許仙姑)님을 안으로 모시지도 못하고 말이에요." 허비랑은 빙그레 웃고 나서 처녀를 소개했다. "운소저님, 너무 언짢게 생각 마셔요. 이 애는 염홍약(廉紅藥) 내가 새로 거두어들인 제자예요. 첫눈에 보고 마음이 가서 두어 차례 권유한 끝에 응락은 받았지요. 이 애 아버지는 왕년에 삼상 (三湘) 지방을 떨치던 소패왕(小覇王) 철편(鐵鞭) 염수경(廉守敬) 그분인데, 오래 전 표국(標局) 사 람들을 잘못 건드려 원한을 사고 촉지방으로 피신해 들어왔다는 것이었어요. 내가 이 애를 제자 로 달라니까 슬하에 하나밖에 없는 딸년이라고 막무가내로 수락을 안했지만, 본인이 날 따를 마 음이 생겨, 춘추 칠순인 아버님이 세상을 뜨시면 황산으로 날 찾아오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소문을 듣자니까 이 애 집이 불이 나서 없어졌다는 거였어요. 황급히 달려가 보니 집은 이미 잿더미로 변하고, 노친네는 목 떨어진 시체가 되었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애 모습은 아무 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돌아올 요량으로 성문을 나섰죠. 그런데 오는 도중 웬 강도 패거리와 맞닥뜨리고 말았어요. 한 짐 잔뜩 걸머진 것이 뉘집을 털어가지고 돌아가는 모양이길래 '웬 놈들이냐?' 묻고 시비를 걸었지요. 그리곤 이내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놈들도 모두 한 가닥씩 하는 검술가였는데, 별것은 아니지만 내 솜씨를 당해낼 수 없으니까 짐보따리마저 팽개치고 모조 리 달아나더군요. 아깝게도 그놈들 정체도 몰랐어요. 뭐가 들었나 싶어 그 보따리를 풀어 보았더 니 웬걸 이 애가 기절해서 들어 있지 않겠어요? 놀랍고도 반가워서 얼른 깨운 다음 집으로 데려 가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해서 극락으로 모시게 했지요. 장례가 끝나자, 이 애는 그 즉시 내 제자 가 되겠다고 자청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흉악한 강도놈들을 찾아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를 하면서 말이지요." 곁에 선 염홍약은 당시의 기억이 새로운지 벌써부터 구슬 같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고 있었다. 그 청초하고도 가련한 모습을 보자니, 운소저 역시 가슴이 찡하도록 동정심을 금치 못했다. 화사 한 용모가 자기와 몹시도 닮아서 마음이 끌리는 데다 그녀의 애처로운 신세를 듣고서 같은 여자 처지로 애뜻한 정감이 우러났던 것이다. 운소저는 염홍약과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허비랑을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고 청했다. 허비랑은 공연히 처녀들 수다에 휩쓸리기 싫어 점잖게 사양했지만 운소저는 막무가내로 재삼 강 권했다. 흘깃 제자 염홍약의 눈치를 보니 말은 못하지만 제 벗이나 만난 듯이 운소저를 따라 들 어가고 싶은 기색이 완연했다. 허비랑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에겐 아미파 인물들이 알아선 안 될 비밀이 가슴 속 깊숙이 감추 어져 있었다. 그게 발각될까 봐 밤 낮으로 전전긍긍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아미파 쪽과 교분을 맺고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간격을 두어 섣부르게 참견한다든지 방문하는 일이 드물었다. 뒤가 켕기는 만큼 쓸데없이 만나는 짓은 되도록이면 삼가고 삼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정은 다르다. 공연히 거절만 하다가는 도리어 의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형편 이었다.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내 그냥 떠날까 했지만 홍약이 운소저와 사귀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고서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구먼. 기왕 운소저도 굳이 청하시니 어디 그럼 들어가 맛 좋은 차나 한 잔 얻어마시기로 할 까요?" 스승의 허락이 떨어지자 염홍약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운조저는 그녀가 거짓없이 천진난만하게 기꺼워하는 표정을 보고서 자기도 기분이 좋아졌다. 허 비랑을 앞에 모시고 자신은 염홍약의 손을 잡고서 다정하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구화보산(九華寶山)에 난생 처음 온 염홍약은 보는 것마다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이제 운소저 를 따라 들어선 동굴만 해도 그랬다. 바윗굴 속이라 어두컴컴하고 음산할 것으로 여겼더니 촛불 등잔불 하나 없으면서도 사면 벽이 환하게 탁 트였고 대낮처럼 밝았다. 꾸며진 장식들도 우아하고 깔끔한 데다 마치 봄날처럼 공기 가 따뜻했다. 방금 전에 누이와 입씨름을 하고 뛰쳐 들어온 그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 여기 면서 운소저의 안내를 받고 스승 옆에 자리잡아 앉았다. 찻잔을 놓고서 두 처녀의 대화에 몇 마디 끼어들었던 허비랑은 어쩐지 자꾸 마음이 불안해져서 당장 일어나고 싶은데, 제자 염홍약은 속도 모른 채 운소저와 아주 의기가 투합되어 일어설 줄을 몰랐다. 스승의 재촉을 거듭 받고서 일어나기는 했지만 못내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운소저도 마찬가지였다. 동굴 어구까지 배웅을 하면서 염홍약의 두 손을 잡은 채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염소저, 황산에서 여기까지는 아주 가까와요. 가시더라도 틈이 나시거든 언제라도 오셔요. 언제 저희 어머님도 뵙게 해드릴 테니까, 꼭 오셔야 해요. 알았죠?" "언니, 말씀 아주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님의 원수도 못 갚아드린 불효 자식인 데다 사부 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수련해야만 할 처지라서 어디 쉽사리 틈을 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어려서부터 아버님한테 몇 수 무공을 배우기는 했지만 황산 오운보는 산세도 험준하 고 여기까지 백 몇십 리나 되는 길이라던데 왔다 갔다 그 먼 길을 어떻게 쉽사리 다닐 수 있겠어 요? 저처럼 우둔한 것이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없고....." 운소저가 듣고 보니 사뭇 애처롭다. 그녀는 허비랑의 눈치를 흘깃 살피면서 다시 말했다. "염소저가 올 수 없다... 그럼 반대로 내가 오운보로 찾아가면 어떨까요? 물론 염소저의 수련을 방해한다고 사부님께서 꾸짖지만 않으신다면 말이에요." "운소저가 그 외진 데까지 오셔서 이 애를 여러 모로 가르쳐만 준다면 더할 나위없이 큰 복이지 요. 우리 사도(師徒)가 감히 청하지는 못할망정 오시는 걸 막을 리가 있겠어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아까 올 때처럼 염홍약을 옆구리에 꿰차더니, 운소저에게 목례한 다음 지면 을 박차고 산비탈로 솟구쳐 올라 갔다. 그들이 사리지는 모습을 운소저는 아쉬운 눈길로 전송했다. 그리고 한동안 발걸음을 돌리지 못 하고 그 자리에 넋잃은 듯 우두커니 있었다. 농담 한 마디 齊漱溟訪道入名山 荀蘭因深閨失愛女 금신나한 법원과 겨루어 막상막하의 실력을 보였던 운소저는 과연 누구인가? 그녀에 대해서 말 하기보다는 먼저 그 부모부터 소개를 해야겠다. 법원이 짐작했던 것처럼 운소저의 아버지는 바로 건곤정기 묘일진인 제수명, 아미파의 으뜸가는 검선이었다. 제씨(齊氏) 집안은 원래 사천성 중경부(重慶府) 장수현(長壽縣)에서도 명망있는 가문이었다. 장수 현으로 말하자면 물맛이 달고 차갑기로 유명한 우물 장수정(長壽井)을 자랑하는 고을로써 인심도 좋고 순박하거니와 대대로 수명이 길어서 우물탓이라 여겨 고을 이름마저 그렇게 붙인 곳이다. 제씨 가문은 사천성 일대에서도 이름난 호족(豪族)이요, 문사(文士)와 무관(武官)을 많이 배출하 여 명(明)나라 중엽에는 중원 전체에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번성했는데, 그 중 제수명의 집안 은 가장 미미한 혈족으로서 자손도 귀하고 그저 제법 넉넉한 재산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부모는 거의 중년을 넘기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제수명을 낳았다. 만년 에 얻은 외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려서부터 총기가 또렷하고 남다른 기상을 지녔으므로 그는 노부 모의 사랑뿐만 아니라 외가 친척들에게도 온갖 총애와 촉망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제수명은 총명한 자질에 학문도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체력 또한 비범한 데다 뛰어난 용기까지 겸비한 청년이었다. 그가 소년시절부터 흠모하던 인물은 주가(朱家)나 곽해(郭解)와 같은 협객들이었다. 주가는 한(漢)나라 초기 호걸 문객들을 모아 들이고 충신 계포(啓布)와의 의리를 끝끝내 지킨 협 사(俠士)요, 곽해는 한무제(漢武帝)에게 죽임을 당한 역사상 최후의 협객으로 기록된 인물이었다. 이들을 본받은 제수명은 기인(奇人) 이사(異士)가 있다는 소문만 들리면 찾아가서 자기 심경을 토로하며 깊은 교분을 맺곤 하였다. 그리하여 사천성과 호남성(湖南省) 일대 사람들은 그를 맹상 군(孟嘗君)에 비겨서 <소맹상(小孟嘗)>이란 별호를 붙여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의 명성은 규방 의 처녀, 어린아이들조차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십구 세 되던 해에 부모를 연달아 잃고 젊은 가장이 되었다. 그래도 집안 살림을 돌보기는 커녕 벗들과 사귀기에만 정신이 팔렸다. 제수명에게는 어릴 적부터 소꼽동무로 함께 자라온 이성이 있었다. 이름은 순란인(荀蘭因), 성장 해서는 용모도 아리땁고 현숙한 덕성을 지닌 규수가 되었는데, 두 집안이 가까운 터라서 허물없 이 어울리던 사이가 마침내는 애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순씨의 가문도 처음에는 청년 제수명과 순란인의 혼인에 별다른 뜻이 없어 순순히 허락했다. 그 리고 매파를 거쳐 사주단자와 예물을 교환하고 약혼식까지 올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정식 혼 례식을 거쳐서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뿐이었다. 두 청춘남녀의 장래는 양 가문의 축복을 받으면서 순탄하게 열리도록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행복에 겨워하던 두 남녀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제수명의 부모가 연달아서 세상을 떠나 고 또 세상물정도 모르는 청년이 살림을 떠맡으면서 재산을 제 마음대로 물 쓰듯 낭비하다 보니 점차로 가세마저 기울었던 것이다. 약혼녀 순란인의 집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의 생모가 죽고 계모를 맞이하게 되자, 아버지는 계모의 부추김을 받고서 가난한 사윗감에 대해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파혼할 생각마 저 바깥에 드러냈던 것이다. 제수명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래 장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순란인도 마찬가 지였다. 그녀는 한사코 부모의 변심에 저항하며 약혼자를 멀리하라는 분부를 어겼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을 바꿀 수가 없었다. 혼인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두 남녀는 뜻을 굽히지 않고 온갖 곡경(曲境)을 겪어냈 다. 그들이 마침내 백년해로를 한 것은 제수명이 적지 않은 노력 끝에 다시 가세를 회복하고 공 명(功名)이 떨쳐진 삼십이 세의 나이 때였다. 약혼녀 순란인도 이십육 세의 과년한 노처녀가 되도록 일편단심 그날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 들이 겪었던 어려움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그만큼 애정이 각별하게 두터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이 부부로 맺어진 지 이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슬하에 아들 딸도 태어났다. 아들에 게는 승기(承基)란 이름을 지어 주고, 딸에겐 영운(靈雲)이란 이름을 붙였다. 순란인이 딸을 낳을 때 지붕 꼭대기에 채색 구름이 자욱하게 뭉쳐서 사흘 동안 흩어지지 않았으 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이다. 승기와 영운 남매는 용모도 빼어나게 아름다왔고 천성 또한 영민한 자질을 갖춘 신동(神童)이라, 마을 사람들은 물론 냉담하기 짝이 없던 외조부의 마음까지도 되돌려 놓았다. 제수명은 필생의 반려자를 얻고 또 장중(掌中)의 보옥(寶玉)과도 같은 남매를 얻은 터라 벼슬길 에 올라 부귀공명을 누릴 생각조차 포기해 버렸다. 훗날 영운이 장성하더라도 명문 귀족의 집안 에 시집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백정(白丁)에게 주어 자기 부부와 같은 행복을 누릴 수만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해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는 인생의 행복을 세속적인 명리(名利)에서 추구하지 않았다. 꿀처럼 달콤하고도 즐거운 나날 을 보내면서 어쩌다 외출하여 산수(山水)를 즐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내 순란인의 학문 수준도 남편에 버금갈 정도로 깊었고, 시집온 이후 틈틈이 남편 제수명을 따라서 몇 수나마 무공을 익히기까지 했다. 그들 부부는 집 안에서나 문 밖을 나서거나 멀어져 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산천경개 유람을 떠날 때도 그림자는 항상 둘이었다. 어느 날, 제수명 부부는 조반을 마치고 어린 남매를 하나씩 안고서 어우르며 재롱을 즐겼다. 한창 어린것들의 재롱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던 제수명은 얼핏 귓결에 아내의 가벼운 탄식 을 들었다. 흘깃 돌아보니 순란인의 표정조차도 썩 좋은 게 아닌지라, 그는 의아해서 물었다. "여보, 웬 한숨이오? 어디가 편치 않소?" 얼마나 금슬이 좋은 사이냐? 집 안에는 늘 평화로운 웃음소리가 충만하고 서로 얼굴 한번 붉힌 적이 없다. 결혼한 이래 아내에게서 저토록 한숨어린 표정을 언제 보았는가 말이다. 순란인은 아들의 재롱 떠는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당초 당신과 저는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어내고 오늘처럼 화목한 가정을 이루지 않았나요? 저 도 당신도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어요. 하지만 여보, 활짝 핀 꽃도 질 때가 있 고 달도 기울 해가 있듯이 우리 인생 역시 백 년뿐, 잠깐 행복에 겨워하다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남는 건 한 줌 흙에 백골밖에 없지요. 우리가 아무리 도타운 애정으로 내세(來世)에서 다 시 부부가 되자고 철썩같이 약속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저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르지 않아 요? 우리가 이 아이들 재롱이나 즐기는 사이에도 무정한 세월은 흘러가고 죽음은 한 발짝 한 발 짝 다가오고 있어요. 문득 그걸 생각하니까 정말로 못 견디겠는 거예요." 제수명은 가슴이 뜨끔했다. 아내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몇 마디 좋은 말로 아내를 달래주었다. 그러나 그날부터 제수명이 아내 대신으로 우울증에 걸렸다. 순란인은 잠시 울적했다가 이내 잊 어버렸지만 그 심사는 남편에게 그대로 전염되고 말았던 것이다. 제수명은 자는 것 먹는 것조차도 귀잖아졌다. 별일도 없는데 공연히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했다. 도무지 아무것을 보고 듣고 맛을 보아도 즐겁지가 않은 것이다. 아내가 몇 차례고 그 까닭을 물 었지만 그는 시종 속마음을 털어보이지 않았다. 너무 끈덕지게 물어오면 겨우 몇 마디 말로 얼버 무려 넘기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듯 또 반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듬해 봄 날, 순란인은 임신 두 달째로 접어들었다. 어느 날 아침, 제수명은 문득 아내에게 뜻밖의 말을 했다. "여보, 나 아무래도 아미산을 한 번 다녀와야겠소. 거기에 은거 하고 있는 옛친구 간빙여(簡氷 如)를 만나보고 싶구먼. 당신은 아이를 가졌으니까 산을 오르다 태아라도 놀라면 어쩌겠소? 그러 니 나혼자 갔다오리다." 그들 부부는 결혼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멀어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운해 한들 어쩌겠는 가? 남편 말대로 순란인은 현재 임신한 몸이라 산을 탈 수도 없거니와 또 집에서 원인 모를 우울 증에 걸린 남편이 외출해서 기분전환을 하겠다는데 혼자는 못 간다고 말릴 처지도 아니다. 그녀 는 아쉬운 내색을 하지 않고 선선히 응락했다. 작별할 무렵, 제수명은 아내한테 몇 차례고 무슨 말인가 할 듯하더니 끝내 입을 다물었다. 남편 의 기색을 눈치챈 그녀가 되물었으나 별일 아니라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다. 그저 홀몸도 아닌 데 두 아이까지 돌보느라면 고생이 자심하리라 안쓰러워서 그렇다는 말이 고작이었다. 워낙 솔직 하고 단순한 성품인 아내는 아무리 남편에게 향한 정이 깊었어도 기껏해서 몇 마디 아쉬운 작별 의 인사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그녀는 남편의 표정을 깊이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제수명은 집을 나서면서 '길어야 반 년이면 돌아오마'고 했다. 그러나 순란인이 만삭이 되어 또 딸애를 낳았는 데도 그때까지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순란인은 날이 갈수록 점점 불안하고 두려운 생각만 깊어졌다. 겨우 자리를 걷고 몸을 추스릴 만하자 그녀는 더 이상 집에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유모를 한 사람 사서 젖먹이를 맡기고 또 집 안 살림과 승기, 영운의 뒷바라지는 친척 장씨댁에 부탁해 놓은 다음 그 길로 아미산을 향해 떠 났다. 그녀는 성치 못한 몸을 이끌고서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아미후산에 올라가 남편의 친구 간빙여 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간빙여 또한 협객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로, 후산 석굴 속에 은거하고 있었다. 순란인은 간빙여를 만나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남편의 안부부터 물어보았다. "제 남편이 여기에 왔었습니까?" "예, 왔습니다. 서너 달 동안 와서 묵었지요. 그런데 한 두어 달쯤 전부터 밤늦게 돌아와 잠자는 일만 빼고 매일같이 아미산 일대를 돌아다니기만 했습니다. 요즈음에는 열흘이 훨신 지나도록 오 지 않는 일이 많길래, 한 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느냐?' 물어봤더니 우물쭈물 얼버무리기만 하고 대답은 않길래 더 이상 깊이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석굴을 아주 떠나게 되었는데, 작별하면서 하는 말이 '우연히 산중에서 노선배를 한 분 만나 함께 지내게 되었네. 만 약 내 아내가 여기 찾아오거든 그냥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이나 잘 기르고 있으라고 당부해 주게.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아미산에 더 머물렀다가 머지 않아 일이 끝나는 대로 귀가하겠다고 전하 게' 하더군요. 여기 서찰을 한 통 남기고 갔습니다. 저더러는 형수님을 안전하게 댁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부탁을 했지요. 지금쯤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아마도 그가 있는 곳은 인적 도 끊긴 은밀한 장소일 터인즉, 형수님께서 찾아보셔야 헛수고만 하실 겁니다....." 간빙여는 잠시 쉬었다가 설명을 계속했다. "... 그가 떠나던 날, 저는 동굴 밖까지 배웅나갔습니다. 한데 바깥에는 그의 일행인 듯한 사람이 하나 서성거리고 있더군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도인이었는데, 아마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 이었습니다. 그 도인은 제수명이 나오자, '사제, 그토록이나 아녀자처럼 정이 많아서 쓰겠나? 사부 님께서 아시면 자네를 다시 일겁(一劫)에 떨어뜨리실 걸세' 하고 웃음 섞어 탓하더군요. 그러자 제수명도 응수했습니다. '사형, 농담 마시구려. 내가 스승님을 찾아나선 동기도 아녀자의 깊은 정 때문이라오' 저는 그들이 주고받는 말이 하도 이상해서 슬그머니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러나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그 도인은 내가 뒤따른다는 걸 눈치챘는지, 느닷없이 소맷자락을 한 번 휘둘렀습니다. 그러자 삽시간에 계곡 낭떠러지 아래서부터 연무(煙霧)가 자욱하게 피어 오르더 니 앞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겨우 안개가 흩어진 다음 두리번거리고 찾아보았지만 두 사람 모두 자취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저 역시 아미산에 들어와 수 년 동안 이인(異人)을 만나려고 했습니 다만 인연이 닿지 않아 아직껏 이렇게 은둔하고 있는데 제수명은 아마도 운좋게 선연(仙緣)을 만 나서 수련중인 모양이더군요. 그후 저도 제수명을 찾아보려고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역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간빙여의 기나긴 설명은 여기서 끝났다. 순란인은 듣고 보니 기가 막히고 마음이 아팠다. 여자의 몸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장부의 기질을 지녔다. 아무리 낙심하고 슬퍼도 남 앞에서 쉽사리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면서 간빙여가 건네준 남편의 글월을 펼쳤다. <"사랑하는 아내여 보시오. 그대의 아쉬운 전별을 받으며 집을 나선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다 되었구려. 나는 지난해 가을, 그대가 무심결에 한 말을 듣고서부터 문득 '인생 백 년 이란 삽시간에 지나쳐 버리는 허무한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소. 그리하여 속세를 떠날 생각을 갖게 되었소. 내 결심이 서고 집을 나서야 했을 무렵, 그대는 공교 롭게도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말로써 마음 상하게 할 수가 없어 차마 진심을 털어놓지 못 하고 그대로 작별을 고했던 것이었소. 나는 아미산에 들어와서 여러 달 동안 헤매면서 선도(仙道)를 깨우치려고 노력했소. 그리고 우연 히도 스승님을 만나게 되었소. 그분은 전세(前世)의 인연을 설파하시고 나를 제자로 거두어들였 소. 지금은 이미 그분을 따라 입산하여 지극히 오묘한 신비의 도리를 일심전력 깨우치는 중이라오. 아직은 비록 하승(下乘)의 경지에 들었으나 다행히도 귀취(鬼趣)의 탈은 벗어났소. 그대와 다시 만나려면 앞으로 삼 년이 더 지나야 될 듯싶소. 그동안 우리 아이들을 잘 기르고 아무쪼록 그대 몸조심하오. 훗날 원만하게 득도하면 내 반드시 그대와 함께 은거하리다. 그때가 오면 천지(天地)와 함께 수명을 누리고 주안술(駐顔術)로 젊음을 유지할 수 있소. 구태여 내세에 다시 만날 약속 따위도 할 것이 없단 말이오. 내 걱정은 일체 떨쳐버리고 부디 그대와 아이들 몸 건강히 지내기만 바랄 뿐이오."> 순란인은 그제서야 비로소 지난해 가을부터 남편이 어째서 우울증에 걸렸는지 그 원인을 깨달았 다. 어느 날 자기가 무심결에 농담 비슷하게 인생 백 년의 허망함을 탄식 섞어 한 말이 남편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 남편은 스승을 찾아 선도를 깨우친 다음 나까지도 초도(超渡)할 마음에서 아미산으로 들어온 것이로구나! 기다리자. 더 이상 남편을 번거롭게 마음쓰도록 해선 안 된다. 기다려야지!' 남편 제수명은 삼 년을 기약했다. 삼 년이면 그리 긴 세월은 아니다. 그녀는 비통한 마음을 달래고 간빙여의 호송을 받으면서 아미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 오자, 일체 잡념을 털어버리고 오로지 집안 살림과 자녀의 교육에만 온갖 정성을 기울이기 시작 했다. 세월은 거침없이 흘렀다. 아들 승기도 벌써 일곱 살이 되었다. 천성이 총명한 데다 힘도 무진장 세어서 얼핏 모르는 사람은 열두어 살쯤으로 볼 정도였다. 순란인은 그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별도로 스승을 모시지 않고 자기가 배운 학문만 정성을 다 하여 가르쳤다. 영운도 다섯 살, 새로 태어난 막내딸도 벌써 세 살이 되었다. 영운은 어머니가 오빠에게만 공부롤 가르치는 게 샘이 나서 자기도 배우겠다고 졸라대더니만 곁 에 쪼그려 앉아 오빠 흉내를 내어가면서 한 자 두 자씩 글을 깨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오빠 인 승기보다도 이해가 빠르고 총명하기까지 했다. 순란인은 마냥 흐뭇하기만 했다. 무릎 앞에 보석처럼 귀엽고 총기어린 세 자녀를 나란히 앉혀 놓은 채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이 아는 것 글과 무예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노라면 고독과 적막감 도 모두 잊혀지는 것이다. 이따금씩 생각이 트인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아빠는 어디 가셨느냐?' 물을 때가 그녀로선 제일 괴로왔다. '아빠는 친구를 만나려고 멀리 가셨단다. 얼마 안 있으면 집에 돌아오실 게다.' 이렇게 거짓말 섞어 달래주면서도 속으로는 손가락을 꼽아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삼 년의 기약도 벌써 지난 지 까마득했다. 남편 제수명이 약조를 어길 사람은 절대로 아니라고 자위하면서도 산 속에서 말 못할 고초나 겪고 있는 건 아닌지, 또 무슨 사고라도 일어난 게 아닌 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다. 바로 이럴 무렵, 또다시 기막힌 일이 벌어져 그녀의 가슴 속에 시름의 못을 박았다. 막내둥이로 태어난 딸아이는 남편이 돌아와서 이름을 지어주리라 생각하고 우선은 젖이름으로 하아(霞兒)라는 아명을 붙였다. 몇 년 전 순란인이 아미산으로 남편을 찾아갈 적에 이 어린 것에게는 유모를 붙여주었으나 젖이 잘 나오지 않으므로 때마침 젖먹이를 잃은 친척 장대랑(張大娘)에게 맡겨 기를 수가 있었다. 장대랑은 인품도 서글서글한 데다 자기 아이를 갓 잃은 후 정 붙일 대상이 없어 허전하던 참에 하아를 맡았으므로 젖을 뗀 후까지도 온갓 정성을 다 기울여서 키웠던 것이다. 어린 하아 역시 엄마 이상으로 장대랑을 따랐다. 집도 이웃이려니와 동구밖으로 탁 트인 전원이 있어, 장대랑은 어린 것을 안고 논둑 밭둑을 산책하면서 어우르는 게 가장 큰 낙이었다. 그날도 장대랑은 점심을 마치고 나서 평소처럼 하아를 품에 안고 논둑길을 걸으며 농부들이 김 매는 광경을 한창 구경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큰길 저쪽에서부터 웬 낯선 여승 하나가 마을로 들어서더니 하아를 안고 있는 장대랑에 게로 곧장 다가왔다. "귀엽게 생긴 아기로군요." 여승은 한참 동안이나 하아를 내려다보더니 손을 내밀어 토닥 토닥 쓰다듬어 주었다. 장대랑은 아기가 놀라서 낯을 가릴까 보아 여승의 손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아는 뜻밖에도 낯을 가 리고 울기는커녕 예전부터 알고 있는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고사리 같은 작은 두 손을 쑥 뻗치더니 여승에게 안기려고 버둥거렸다. 그러자 여승이 빙그레 웃더니만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을 건넸다. "신통한 것, 아직도 예전의 약속을 잊지는 않았구나. 좋다, 그럼 내 너의 주인을 만나보아야겠구 나!" 그 여승은 선뜻 장대랑의 품에서 하아를 나꿔채더니 그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앗, 우리 애를 훔쳐가요!" 장대랑은 얼결에 아이를 빼앗기고 다급하게 고함을 지르며 여승의 뒤를 허겁지겁 쫓아갔다. 이 무렵, 농부들도 오전 일을 끝내고 밭두렁에 모여 앉아 점심을 들던 중이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도 그 여승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뒤따르던 장대랑은 그 여승이 제수명의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 조금 마음이 놓였 다. 아기 엄마 순란인의 무예 솜씨가 뛰어난 줄 익히 아는 터였으므로 아기를 손쉽게 빼앗기지는 않으리라 짐작한 것이다. 장대랑은 전족(纏足)을 한지라 발이 작아서 도무지 빨리 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있는 힘껏 뒤쫓 아서 헐레벌떡 대문을 들어서고 보니 여승에게 빼앗겼던 하아는 어느 틈엔지 엄마의 품안에 안겨 있지 않는가. 그제서야 장대랑은 안심을 했다. 그리고 괘씸한 여승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으려는 참인데 문득 여승의 말소리가 들렸다. "... 이 아이가 부인의 손에 그대로 길러지면 재성(災星)을 크게 만날 것이외다. 하물며 부인께선 훗날 입산하실 분인즉, 지금 아예 번거로움을 덜으시고 선연(善緣)을 맺도록 하시지요. 이 아기는 빈니(貧尼)가 데리고 먼저 입산하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물론 손에서 떼어 놓기야 서운하겠으나 잠시 동안의 이별이니까 너무 가슴 아파하실 것은 없습니다." 그러자 순란인은 아기를 더욱 힘주어 껴안고서 응수했다. "이 애가 세상에 태어날 적에는 제 남편도 외유 중이라서 아빠 얼굴을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대사께서 얘를 제자로 거두시겠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어디 있겠습니까만, 애 아빠가 돌아오시 고 얼굴이나 한번 보여드리고 싶군요. 그때 가서 남편이 허락한다면 소첩 또한 상관치 않겠습니 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아기의 부친께선 이레 안에 돌아오실 테니 부녀간의 면회를 시켜드려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하오나 빈니는 긴요한 일이 있는 몸이오라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또 부인은 벌써부터 혜성(慧性) 이 가리워져 조속히 깨우침을 받어야만 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여기 단약(丹藥) 한 알을 드리겠습니다. 복용하시고 나면 제가 말씀올린 뜻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여승은 품속에서 단약 한 알을 꺼내어 순란인에게 건네주었다. 순란인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약을 받았다. 짙은 향기가 당장 코끝에 스며들었다. 놀랍고도 당황하여 이 여승의 말을 믿어야 좋을지 어떨지 몰라 입에 넣지 못하고 망설이는 판인데, 그 어 찌 된 셈인가 품안에 얌전하게 있던 하아가 엄마의 손을 뿌리치면서 곧장 여승에게로 기어가서 품에 덥석 안겼다. 여승은 흡족한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웃음지었다. "아가야, 엄마는 널 안 보내시려고 하는데 넌 따라가겠다는 말이냐?" 하아는 이 무렵 겨우 옹알옹알 말을 배우던 터였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아주 어른처럼 말도 하 고 여승을 대하는 기색마저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스님, 나 따라갈래. 하지만 얼마쯤 있다가 돌아와야 해!" 여승이 흔쾌히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원하는 바니까, 누구도 날 탓하지는 않겠군!" 그리고 선뜻 하아를 안아들었다. 순란인은 큰일났다 싶어 황급히 손을 뻗어 아기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여승이 소맷자락을 번 뜩 휘두르자 온 방 안은 눈부신 금빛으로 가득차고 말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을 때는 여승과 아기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 광경을 보던 장대랑은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털씩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혜롭고 침착한 순란인은 당황한 중에도 속을 감추고 도리어 장대랑을 위로해 주었다. "아기가 죽은 것도 아니고 재산을 도둑맞은 것도 아닌데, 그리 애통해 하지 말아요. 바깥양반이 집에 계실 적에 늘 하던 말씀이 있지 않소? 강호상에는 기인이사가 매우 많다고 말이오. 내 보건 대 그 여승도 평범한 승려가 아닌 듯싶소.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어린 하아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소?" 훌쩍거리던 장대랑은 겨우 진정하더니 그 여승이 집안에 들어와서 어떻게 하더냐고 물었다. 순란인은 차근차근 말해 주었다. "당신이 하아를 데리고 나간 후 승기와 영운이는 외할머니 댁에 놀러갔어요. 나는 원래부터 친 정 식구들이 우리 부부를 허투로 대하는 게 싫어서 가지 않고 혼자 책을 읽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어린 하아가 까르르, 까르르! 웃으면서 기어 들어오지 않겠어요? 그러더니만 내 앞에 무릎 꿇고 공손히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나서 하는 말이 '엄마, 우리 사부님이 날 산으로 데려가려고 오셨 어!' 하는 거예요. 제 할 말을 다했는지 그대로 다시 기어나가길래 뒤쫓아 나가서 안아들었죠. 그 러고 보니 대청 마루에 그 여승이 서 있지 않겠어요? 누구냐고 물었지요. 백화산(百花山) 조음동 (潮音洞)에 사는 신니(神尼) 우담이란 대답이었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하아는 전생에 소승의 제 자였는데, 계율을 범한 죄로 인간이 되어 태어났으나 벌이 다하여 특별히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하는 것이었어요. 그 다음 말은 당신도 들은 그대로지요." 장대랑 역시 밭두렁에서 그 여승과 만나 벌어졌던 일을 설명했다. 서로 궁금한 내용을 다 주고 받고 보니 기이하면서도 새삼 마음이 쓰라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무리 곰곰 생각해 봐도 어 린게 제 입으로 여승을 따라가겠다고 한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대랑은 문득 생각이 떠오르는지 순란인의 무릎을 꾹 찌르면서 짓궂은 소리를 했다. "이게 모두 당신네 부부 자신의 탓이야! 어쩌면 고렇게도 예쁘고 영리한 걸 셋씩이나 낳았담. 그 러니 남들이 눈독을 들이는 것도 당연하지 뭘 그래?" 그제서야 순란인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친정댁에 놀러간 남매가 또 있지 않는가? '얘들은 어떻게 됐을꼬? 혹시라도 이 애들마저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황급히 하인을 시켜 부르러 보낼 참인데 마침 승기와 영운 남매가 손을 맞잡고 징징 울면서 들 어왔다. 가뜩이나 애 하나를 잃어버리고 속이 상한 판에 또 두 남매까지 훌쩍거리면서 들어오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후닥닥 달려가서 두 어린것을 안고서 물었다. "왜들 울고 다니는 거냐? 외할머님께서 너희들 배웅을 안해 주시더냐?" 어머니가 물어도 승기는 눈물만 주르르 흘릴 뿐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영운이 잔뜩 분한 표정으로 엄마한테 일러바쳤다. "나하고 오빠하고 외할머니댁에 가서 외사촌 오빠, 외사촌 언니 들이랑 함께 놀았지. 그러다 외 사촌 오빠가 날 얕잡아 보고 놀리지 않아? 승기오빠도 화가 나서 외사촌오빠를 두들겨 팼지 뭘. 조금 있다 외숙모님이 나오더니 우리한테 막 욕을 하는 거야. '어린 놈들이 제 애비를 닮아서 흉 악스럽기 짝이 없구나! 정말 씨알머리는 어쩔 수 없다니까! 너희 애비도 그렇게 악착스럽지만 않 았으면 아미산에 들어가서 굶어 뒈지지는 않았을 게다. 무슨 놈의 신선놀음을 한답시고 처자식 다 내버렸는지, 원! 남 부끄럽지도 않니?' 하지 않겠어? 엄마, 외사촌 오빠도 승기 오빠더러 '애비 없는 후레자식!' 이라고 욕했단 말야. 오빠는 어른한테 대들지는 못하겠고 화가 나니까 날 끌고서 뛰어온 거야." 영운은 엄마한테 미주알고주알 고해 바치더니 장대랑의 손이 빈 것을 보고서 물었다. "내 동생은요?" 천진난만한 딸애의 물음을 듣자니 순란인은 또 가슴이 메어질 듯 아팠다. 그래도 억지로 화사한 표정을 짓고선 남매를 달랬다. "네 동생은 아빠가 사람을 시켜 데려갔단다!" 두 남매는 엄마의 말을 듣자마자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활짝 웃었다. "그것 봐, 외숙모가 거짓말을 했어! 아빠는 죽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집에 돌아오시질 않는 거지? 왜 동생만 데려가시고 우리는 안 데려가시느냔 말야!" 장대랑이 철부지들에게 한 마디 귀띔해 주었다. "너희 아빠는 이레 밤만 자면 돌아오실 게다." 남매는 그만 뛸 듯이 기뻤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엄마가 서글픈 눈길로 망연히 쳐다보는 것도 몰랐다. 그날부터 남매는 날마다 장대랑을 졸라댔다. 함께 대문 밖에 나가서 아버지가 오시는 걸 마중하 자는 것이다. 장대랑은 펄쩍 뛰면서 말렸다. 막내를 잃어버린 터에 두 아이들마저 잃어버릴까 보아 대문 밖에 다 내놓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엄마 순란인은 체념한 기색으로 아이들의 성화를 말리지 않았다. 신니 우담과 같은 인물 이라면 대문 방문을 꽁꽁 걸어잠근다 해도 아이들을 납치해 가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애들이 하겠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저 장대랑더러 더욱 주의해서 살피라는 당부 한 마디만 했을 따름이었다. 엿새째가 되었다. 어린 남매는 어머니에게 당부를 마치자 매일하던 버릇대로 장대랑과 함께 대 문 밖에 나아가 동네로 들어오는 큰길 쪽을 살폈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리는 천륜으로 맺어진 것 이다. 어린 나이에도 그들은 한시라도 어서 아빠가 돌아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문간에 기대 어 그 작은 눈망울을 잔득 크게 뜨고서 하루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순란인 역시 신니 우담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가의 부친께선 이레 안에 돌아오십니다.....' 그 날짜가 다가오자 그녀 또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앉으나 서나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 는 것이다. 천성이 조용한 그녀는 남편 제수명이 집을 떠난 이후로 좀처럼 여간한 일이 아니면 대문 밖을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새 아이들을 따라서 문간에 서서 기다리는 것이다. 엄마까지도 나서자 어린 것들은 아빠가 이내 나타나리라고 더욱 굳게 믿었다. 문간에 기대서서 동구밖 길을 한창 바라보다가는 엄마한테 물었다. "아빠는 어째 아직도 안 보이시는 거야?" 아이들은 번갈아 가며 물었다. 엄마는 그래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처음 몇 차례는 대답해 주었 지만 같은 말만 되풀이하기에 지쳐버렸다. 반나절이 넘도록 기다리는 동안 해는 이미 서산으로 반넘게 기울었다. 엄마와 아이들의 마음 속 에는 점점 실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어린것들 앞에서 내색은 않지만 순란인의 가슴 속은 더할 나 위없이 조급했다. 이제 남은 날짜는 내일 하루뿐, 그래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기약이 없다. 몇 달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것이다. 아빠를 애타게 기다리는 두 남매를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속은 더욱 쓰라리기만 했다. 벌써 몇 번이나 문 닫고 들어가자는 말을 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무슨 영감(靈 感) 같은 것이라도 있는지 남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아이들처럼 '오늘은 남편이 반드시 돌아온다!' 확신하고서 돌기둥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또 시간이 흘렀다. 해는 벌써 서산너머 진 지가 오래고 자욱한 저녁 안개만이 사방으로 깔렸다. 밭 갈던 농부들도 쟁기를 어깨에 걸머지고 석양빛 아래 웅얼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성내에 들어갔던 장대랑의 남편이 돌아왔는지 아내를 소리쳐 불렀다. 잠시 후 대지 위에는 적막이 감돌고 남편과 아빠를 목이 메도록 고대하는 사람들의 외로운 모습 만이 망부석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이따금씩 둥지로 찾아든 까마귀들이 나무 위에서 시끄럽게 우짖어 정적을 깨뜨렸다. 순란인은 오늘도 가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무릎 앞에 옹기종기 서 있는 두 남매의 눈에 글썽글 썽 눈물이 고였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겠는 모양이다. 그녀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무정한 아빠, 오늘도 안 오시는구나! 얘들아, 이젠 들어가자. 내 왕씨(王氏) 영감더러 고기볶음 하고 닭 두 마리를 튀겨 놓으라고 일렀다. 아마 지금쯤 다 익었을 걸? 우리 들어가서 맛있게 먹 자꾸나!"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귓결을 스치는 파공성을 들었다. 두 아이가 무얼 발견했는지 호들갑스레 소리쳤다. "엄마, 저 비둘기 좀 봐! 어서요!" 다음 순간, 눈앞에 무엇인가 번뜩하더니 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기절초풍을 한 그녀가 황급 히 아이들을 끌어안고서 문 안으로 피해 들어가려는데 문득 귀에 익은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 가? "난매, 어째서 날 피하시오?" 아들 승기가 제일 눈치가 빨랐다. 그는 이미 아빠가 돌아오신 것을 깨달았다. 영운 역시 어린 기 억에도 아빠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아빠, 아빠!" 두 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르르 아빠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과연, 이분이 돌아오셨어! 이분이.' 남편의 모습을 그제서야 알아본 아내는 멍하니 넋잃은 표정으로 한곁에 서 있을 따름이었다. 가 슴이 찡하도록 격한 감정이 물결처럼 밀려드는데 천만마디 하소연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사방 천지는 이미 어두컴컴하게 땅거미가 깔렸다. "여보, 우리 들어갑시다." 제수명은 두 아이를 덥석 안아들고서 아내를 재촉했다. 왕씨 영감이 저녁 준비를 마쳐 놓고 안주인을 부르려고 부엌에서 나오다가 주인 부부가 나란히 들어서는 모습을 보더니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했다. 저녁식사는 이미 식탁에 차려져 있었다. 순란인은 남편이 선도(仙道)를 배운 것을 아는지라, 비린 음식을 제외하고 소식(素食)을 들기를 권했다. 제수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곡기(穀氣)를 끊고 벽곡(壁穀)하는 몸이오. 우선 식사부터 하구려. 다 먹고 난 다음 내 얘기를 해주리다." 아내가 재삼 권해도 제수명은 끝내 익힌 음식을 들지 않았다. 결혼한 이래 부부가 한 자리에 있으면서 혼자 밥을 먹기는 처음이라, 순란인도 아이들도 입맛이 있을 리 없었다.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상을 물리고는 제수명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제수명이 입을 열었다. "내 당초 선도(仙道)에 뜻을 두고 아미산으로 스승을 찾아 나섰던 것은 모두 당신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소. 당신 푸념처럼 인생 백 년이 하룻밤 허망한 꿈처럼 스러져 간다는 것을 깨닫고서 나 는 몇 날 며칠 밤낮을 고민한 끝에 마침내 선술(仙術)을 터득하여 죽음의 겁난(劫難)으로부터 벗 어나리라 결심한 거요. 내가 먼저 성공하면 그 다음으로 당신을 이끌어 우리 모두가 불로장생의 도를 추구하고 윤회(輪廻)의 수레바퀴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할 생각이었지. 당시 그대는 임신한 몸이라 공연히 심신(心身)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친구 찾아 나선다는 말로 둘러댄 것이었소. 나 는 아미산이 영기(靈氣)가 서리고 빼어난 명산이라고 익히 들었기에 그곳이라면 반드시 진인(眞 人)이 은거하고 있으리라 확신했소. 그래서 얼음처럼 싸늘한 동굴 속에 거처를 정해 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온 산을 헤매고 다녔다오. 더구나 인적(人跡)이 닿지 않는 곳을 샅샅이 뒤졌지. 이렇듯 두 달 남짓 헤매던 끝에 나는 드디어 장미조사(長眉祖師)님을 만나게 되었소. 그분은 나를 자세히 살피더니 일언지하에 제자로 거두어 주시더군. 그리고 당신까지도 이끌어 입도(入道)하도록 허락 을 내리셨다오. 장미조사님은 우리 부부와 또다른 선연(仙緣)을 맺고 있다고 하셨소. 그래서 쉽사 리 허락해 주신 것이지. 다만 그대와 나 모두가 이미 동신(童身)을 잃었으므로 지금은 겨우 하승 (下乘)의 검법만 익힐 수 있고, 장차 다시 병법(兵法)을 전수받은 다음 입도(入道) 과정에 들어가 비로소 상승(上乘) 경지를 깨닫게 된다고 하셨소. 나는 빙벽의 동굴 속에서 삼 년 동안 고심참담 하며 검법 수련에 정진했지. 수련 도중 몇 번이나 사부님께 아뢰고 하산하려는 욕망이 끓었지만 그래도 꾹 참고 버텼소. 며칠 전에는 정말 못 견디게 당신과 아이들이 보고 싶었소. 그때 마침, 어제 일이지만 우담대사께서 한 계집아이를 데리고 동굴로 날 찾아왔더군. 내 혈육이라는 말씀이 셨소. 그리고 부녀간의 첫대면을 시킨 다음, 장미조사께 내가 하산하도록 부탁 말씀까지 드려줍디 다. 집에 돌아가 당신을 데려다 입문시키라는 것이지. 우담대사가 당신에게 단약 한 알을 선사하 셨다는데 복용했는지 모르겠소. 그 단약이 바로 <역골선단(易骨仙丹)>인데." 순란인은 남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하늘에라도 오른 것처럼 기뻤다. 제일 걱정했던 막내 하아 가 아빠를 대면하고 무사하다는 소식이 더욱 반가왔던 것이다. 그녀는 막내가 우담대사를 따라갔 을 때의 일을 낱낱이 말해 주었다. 그리고 단약은 아직 복용하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제수명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입산한 다음에 복용하는 게 좋겠군!" 찬하대사의 법보 散家財, 合籍注長生 承衣鉢, 一門歸正果 순란인은 부부가 함께 집안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집안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 겠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제수명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몸 밖의 물건(身外之物)을 무엇에 쓰겠소? 재산을 정리하여 사촌형님께 맡기고 약간은 집안의 남녀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 딸아이는 선골(仙骨)을 타고 났으니 함께 데려 가야겠소. 승아는 장사촌 형님을 의부로 삼아 장래 우리 제씨 문중의 종사를 잇도록 합시다. 이 아이는 인품이 뛰어나니만큼 반드시 우리 가문을 빛내게 될 것이오." 승기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를 떼어놓고 선(仙)을 배우러 간다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영운 역시 오빠와 멀어지기를 싫어하였으므로 몇 번이고 잘 타일러야 했다.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정(情)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오욕칠정을 잘 억제하고 일을 처 리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느니라." 그는 승기를 가까이 불러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재삼 타일렀다.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불효라는 말도 했다. 승기는 감히 부친의 분부를 어길 수 없었 으나 속으로는 여간 괴롭지 않았다. 순란인은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래서 자식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불러서 간절하게 따로 타 일렀다. "너는 몸을 정갈히 하고 공부에 매진하여 사람의 도리를 다하도록 해라. 나는 평범한 사람에 불 과하지만 네 아버지께서 도를 닦으신 후에 나를 끌어주시려고 하지 않니. 그러니 내가 나중에 도 를 닦아 성취가 있게 된다면 너를 끌어줄 수 있지 않겠느냐? 너는 정말 바보같이 그런 도리를 모 르고, 헤어지는 일에만 서러워해서 되겠느냐?" 승기는 어머니가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제서야 좀 마음 을 놓고 누이동생에게 부탁했다. "만약 어머님께서 나중에 나를 찾아 이끌어 주시지 않는다면 네가 아무쪼록 부탁드려서 나를 데 려가도록 애써 주려므나." 제수명은 집에서 사흘 동안 머물렀다. 그는 장씨 부부를 불렀다. 장씨의 남편 명덕(明德)은 청렴한 관리로 봉직하다가 은퇴했으나 그들은 몹시 가난했다. 제수명은 재산을 모두 장씨 부부에게 주고 자식을 의탁하면서 잘 돌보아 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 했다. 장명덕은 반나절 동안이나 가산을 모두 물려주고 떠나시면 안 된다고 만류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어 그가 하는 대로 따르기로 약속했다. 제수명은 온 집안 사람들을 불러 자기가 식구들과 떨어져 외지로 벼슬을 살러 떠나니 집안의 재 산을 장씨에게 물려주니 승기의 교육에 쓰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상당한 금전을 사람들에 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꾀해서 두 개의 봇짐과 하나의 상자를 준비했다. 그리고 두 필의 말을 사서 봇짐과 상자를 싣고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한 다 음 길을 떠났다. 집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자 제수명은 순란인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했다. 그리고 봇짐 안에서 몇 가지 일용품을 꺼낸 후 말에 채찍질을 가해 두 필의 말이 멋대로 달려가도록 했다. 그는 바람막 이로 딸아이 영운을 감싸 등에 메고 아내의 손을 잡았다. 제수명의 입에서 '일어나라!' 하고 외침 소리가 터지는 순간 그의 몸은 비호처럼 허공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미산에 이르러서 그는 장미진인과 동문 사형제들에게 아내와 딸을 인사시켰다. 그후 두 부부 는 동굴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전심 전력으로 수도했다. 몇 날 장미진인이 봉래(蓬萊)로 떠나고 제 수명 부부가 여러 도우들과 함께 아미파를 창건한 이후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도우며 오직 의협 의 길을 걸었다. 그는 두 명의 자랑스런 제자를 길러냈다. 그후 그는 병해(兵解: 다시 태어남)했고, 사형 현진자 (玄眞子)는 두 번 그들을 도화(渡化)시켰다. 부부 두 사람은 마침내 상승의 도법(道法)으로 참선하 여 아미검선(峨嵋劍仙)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순란인은 구화산의 청정(淸靜)함을 몹시 좋아하여 그곳에 하나의 동굴을 만들고 영운과 함께 기 거했다. 그녀는 아미산과 구화산을 왔다 갔다 하며 딸을 가르치고 돌보았다. 어느날 그녀는 우연히 허비랑을 만났다. 허비랑은 유난히 친근하게 굴며 몇 번이나 순란인을 사 부로 모시겠다고 간청했으나 순란인은 겸손하게 거절했다. 허비랑은 종종 동굴에 와서 바둑을 두 었고 영운을 운고(雲姑)라고 불렀다. 승기는 부모가 신선의 도를 찾아 떠난 후 열심히 노력하여 문무겸전한 인재가 되어 이름을 날리 게 되었다. 그는 부모의 뜻을 받들어 아내를 맞아들이고 자식을 낳았다. 그는 매일같이 어머니가 약속대로 돌아와서 자기를 신선의 길로 인도해 주기를 기다렸으나 한번 떠난 부모로부터는 감감 소식이 없었다. 그는 아미산으로 세 번이나 찾아갔었으나 부모님을 만날 수가 없었다. 후에 현진자가 불쌍히 여 기고 그에게 한 그루의 육지(인간의 모습을 한 영험한 약초)를 얻도록 배려해 주었다. 육지를 복용한 그는 오래도록 수명을 누릴 수 있었고, 영약의 힘으로 병해하여 사천성 동쪽의 이(李)씨 집안에 다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금선(金蟬)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순란인을 기억 하고 있었으며 매일 전생의 부모를 그리워했다. 순란인은 성도(成道)하게 되자 예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금선을 구화산으로 데려와 영운과 함 께 살도록 했다. 그가 바로 이 어린아이인 것이다. 그 백의청년 백협 손남은 추운수의 명을 받고 제수명 순란인 부부를 초청하는 한편 또 한 가지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아미산을 거쳐 구화산에 온 것이었다. 손남이 먼저 아미산에 도착해 보니 제수명은 벌써 동부(洞府)를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구화산에 달려와 순란인을 만난 손남은 그제서야 이번에 각파에서 제자를 거두어들이고 많은 다른 파의 방 문좌도 무리들이 아미파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대, 화산 두 파는 이번 기회에 오랫동안 쌓인 원한을 풀고자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 러내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 싸움이 벌어진다면 각파 의 검선들은 공전의 재앙을 받게 될 형편이었다. 순란인은 손남에게 말했다. "내년 봄에는 자운사를 파괴하게 될 것인데, 그 사건이 도화선이 될 것이다. 자운사를 깨뜨리는 것은 물론 어렵지 않지. 나도 응당 도울 것이니까. 제수명 어른도 지금 이를 준비하고 있으며 그 래서 묘강(苗疆) 일대로 떠난 것이야. 아직 때가 이르니 너는 동부에서 잠시 머물며 나를 도와 한 가지 조그만 일을 처리해 주도록 해라. 나중에 일이 끝나고 가면 시기가 적절할 것이다." 손남은 사부의 명을 받고 하산하기 전부터 몇 분의 이인(異人)들을 알고 있었으며 짧은 기간에 잇따라 추운수와 취도인, 순란인 등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하늘 같은 선배였고 이름높은 검선(劍仙)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자기를 총애했으므로 여간 기쁘지 않았다. 지금 순란인이 자기 를 높이 평가하여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니 더욱 기뻤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어렸고 아직까지 도 동심에 젖어 있는 상태였다. "사백께서는 무슨 일을 저에게 시키려 하시는지요.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 다." 순란인이 대답했다. "아직 말할 때가 되지 않았다. 우선 반나절 동안은 나가서 친구를 만나 꼭 필요한 물건을 한 가 지 빌어오도록 해라. 돌아온 다음에 이야기해 주겠다." 이야기를 끝냈을 때 황산의 찬하대사에게 갔던 영운과 금선이 돌아왔다. 순란인은 그 두 사람과 손남을 인사시켰다. 사흘째 되던 날 순란인은 산을 내려가기 전에 영운에게 당부를 했다. "내가 떠난 후 손사제를 선아의 방에 있도록 해주어라. 손사제는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 행(功行)이 아직 얕다. 네가 수시로 네 아버님께서 지으신 <원원경(元元經)>에 있는 검술편을 그 에게 가르쳐 주면 그가 우리를 찾아온 일이 헛되지 않게 될 것이다. 선아는 짓궂게 행동하지 말 것이며 별일이 없는 한 이 산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라. 지금 사마외도의 각 문파는 하나같이 아 미파를 원수로 여기고 있다. 만약 정체가 수상한 사람이 이곳에 나타나고 너희들이 미처 동굴 안 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즉시 이 전도팔진도(顚倒八陳圖) 안으로 피하도록 해라. 그러면 무사할 것이다." 그녀는 당부의 말을 마치고 떠나갔다. 원래 건곤정기 묘일진인 제수명은 두 번째로 입도(入道)하여 백여 년 간 고된 수련을 한 끝에 천지가 흩어지고 합일하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영운 일행이 아직 나이가 어리고 구화산 부근에는 다른 문파와 좌도방문의 무리들뿐이었므로 혹시 무슨 변고가 일어날까 염려하여 이 동 굴을 타우의 산세(山勢)에 따라 음양(陰陽)으로 나누고, 밖에는 부적을 붙이는 등 공을 들여 전도 팔진도를 펼쳐 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무도에 조예가 깊은 좌도방문의 무리들이라도 함부로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일단 진 안으로 몸을 숨기면 적은 진 안에 숨은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고, 아무리 무서운 검광(劍光)도 진 안으로 침범할 수 없었다. 이날 영운은 손남에게 원원경에 있는 검술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었고, 금선은 동굴 밖을 여기 저기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홀연 허공에 몇 가닥의 붉은빛이 어른거리더니 바위 앞에 키가 작고 뚱뚱한 화상이 내려섰다. 금선은 즉시 그 화상이 요사스런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재빨리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가 영 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영운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구화산은 제수명이 동굴을 깎아 별부(別府)를 만든 후 좌도방문의 무리들은 감히 이 근처에 들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나타난 사람이 필시 좋은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침입자의 동정을 엿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 자의 무예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전도팔진 도의 감방(坎方)과 곤위(坤位)의 사이에 몸을 숨기고 살펴보았으며 손남은 건궁(乾宮)에 자리잡고 응원토록 했다. 그후 금선이 무례한 말로 법원을 격노하게 만들었을 때 손남은 영운이 있는 쪽으로 오려고 했었 다. 그런데 일단 방위를 이탈한 다음 다시 진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때 그것은 하늘에 오르기 보다 더 어려웠다. 그가 처음 건궁에 서 있을 때 멀리서 영운과 금선 두 사람이 웃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무척 재미있다고 느끼고 두 남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일단 그가 건궁 의 방위에서 벗어나자 맞은편은 빽빽한 나무숲이 우거져 있을 뿐이었다. 두 남매의 음성은 들려 왔지만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화상이 흉악한 눈빛으로 숲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고, 강적이 눈앞에 있으니 되돌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원래의 위치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방위를 잡을 때는 영운이 인도를 했지 만 지금은 혼자 힘으로 방위를 찾아야 했다. 그는 방향을 가늠할 수 없게 되자 기억을 더듬으며 건궁으로 돌아가려고 애썼다. 그가 막 감궁(坎宮)으로 몸을 이동했을 때는 법원이 독수(毒手)를 펼치고 있었다. 만약 영운이 빨리 손을 써서 그를 진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그는 한순간에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웬 일인지 금선은 평소에 허비랑을 이상스러울 만큼 극도로 미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거 들떠보지 않다가 그녀가 떠나간 이후에야 비로소 손남과 함께 나왔다. 영운은 입을 열어 그를 나무랐다. "이 녀석, 너는 갈수록 말썽이구나. 허비랑은 나쁜 사람이긴 하지만, 아직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 았다. 어머님마저도 그녀에게 예의를 차리는데, 너는 어째서 오늘 그를 본체만체했느냐? 상대방이 우리 집안 사람들이 너무도 예의를 모른다고 비웃지 않겠느냐? 더군다나 너는 그저 몇 개의 하찮 은 금환을 망가뜨렸을 뿐인데 그게 뭐가 대수로운 일이냐? 그리고 외부사람 앞에서 그 따위 말을 할 수 있느냐?" 말을 마치고 영운은 손남을 곁눈질해 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전생(前生)에서 나의 오라버니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금생(今生)에서는 나의 동생이란 말이야. 물론 네가 그렇기 때문에 사사건건 나에게 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오늘부터 나는 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살겠다. 너 혼자 여기서 살도록 해라." 말을 마치자 그녀는 금선의 말도 듣지 않고 한 줄기의 하얀 광채로 화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손남은 두 사람이 입씨름을 하자 만류할 생각이었으나 어느 사이에 그녀는 종적을 감춘 이후였 다. 그는 몇 마디의 말로 금선을 나무랬다. 금선은 속으로는 당황했으나 겉으르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짐짓 말했다. "손사형, 너무 초조해 하지 마세요. 우리 누나는 사실은 나를 귀여워한답니다. 우리 남매는 하루 에도 몇 번씩 말싸움을 하곤 했어요. 누나는 신법이 굉장해서 다른 사람은 누나를 쫓아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초조하게 생각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단 말이에요. 어머님이 돌아오신 다음에 천 천히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합시다. 사형, 형께서는 재간이 별로 뛰어나지 못하잖아요. 물론 저는 더욱 형편없지요. 원래 저는 어머님이 떠나시면 여기저기 놀러다닐 생각이었어요. 이제 재간이 뛰 어난 누나가 떠나고 없으니 할 수 없이 저는 가까운 부근에서나 놀아야겠네요. 먼 곳으로는 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손남은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사제는 무척 담이 큰 사람이잖아? 어째서 멀리 가서 놀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혹시 무슨 단단 히 쓴맛을 본 거 아니냐?" 사요(蛇妖)의 출현 閒尋幽壑 巧遇肉芝 獨劈華門 驚逢妖蛇 금선은 그 말을 듣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헤헤헤! 누가 아니랬어요? 얼마 전 어머님이 안 계실 때 나는 뒷산 취선애(醉仙崖)가 매우 놀기 좋다는 소문을 듣고 누나더러 함께 가자고 졸랐지요. 하필 그날 그 도깨비 같은 도고(道姑)가 바 둑을 두러 왔기 때문에 누나는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너는 금환과 보검을 들고 몰래 동 굴을 빠져나와 그곳으로 달려갔답니다. 때는 마침 늦가을이라서 단풍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빨간 감이 주렁주렁 익어 있었어요. 산은 마치 불타는 듯 선홍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게다 가 저녁놀이 온 누리에 쏟아지고 있어서 경치가 아주 볼 만했어요. 내가 한창 신이 나서 놀고 있 는데 갑자기 벼랑가에 있는 동굴에서 조그만 말 한 마리가 뛰어나왔지 뭡니까. 그 말은 두 뼘도 채 안 될 정도로 작아서 매우 앙증 맞았어오. 그 위에는 한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 역시 한 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꼬마더군요. 그 작은 사람은 단풍나무 숲 속에서 날 듯이 말을 달립디 다. 나는 너무나 신기했어요. 그리고 무척 기뻤어요. 말과 사람을 잡아 집에 가지고 와서 데리고 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나도 발걸음이 꽤나 빠른 편이지만 몇 바퀴나 맴돌았으나 그것들을 따 라가 잡을 수가 없더군요. 마침내 그것들은 돌비알에 있는 조그만 동굴 속으로 숨어 들어가 보이 지 않았습니다. 그 동굴은 입구가 아주 좁아서 나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다급해진 나는 보검을 빼들고 돌비알을 마구 찔러댔지요. 동굴을 넓힌 다음 들어가서 그놈들을 잡을 생각이었답니다. 나 는 그때 한 자루의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원래 어머님께서 입도(入道)하실 때 몸을 보호하 기 위해 단련했던 이기(利器)였어요. 무척 예리하기 때문에 돌은 말할 것도 없고 강철이라 해도 한 번 후려치면 두 토막이 나고 말아요. 그런데 내가 반나절이나 후려쳤는 데도 그 바위는 털끝 만큼도 손상되지 않는단 말이에요. 나중에서야 나는 바위에 지렁이같이 구불구불한 글자가 쓰여 져 있는 것을 보았죠. 나는 바위를 깨뜨릴 수 없는 원인이 그 글자부적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 각했어요. 신경질이 나더군요. 그래서 찬하대사께서 나에게 준 금환을 꺼내서 그 바위를 후려쳤어 요. 그 바람에 하마터면 나는 죽을 뻔했어요. 금환으로 겨우 세 번을 때렸을 뿐인데 그 바위가 내 쪽으로 무너져 내렸거든요! 곧이어 한 기닥 황풍(黃風)이 일어나며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찌릅디 다. 그러더니 문득 바위틈 사이로 한 여인의 머리가 나타나지 뭡니까. 누런 머리칼을 산발하고 있 었는데 몸뚱이는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나는 무척 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무서워하지는 않았 어요. 여인의 몸뚱이는 바위틈에 끼인 듯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나를 향해 끊임없 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나보고 바위를 한 번 더 깨뜨려서 자기가 빠져나오도록 틈을 넓혀 달라는 뜻 같았어요. 내가 막 그녀의 뜻을 따르려고 할 때였어요. 여인은 내가 잠시 생각하느라고 시간을 지체한 데 대해 화가 났는지 얼굴 가득 노기를 띠더군요. 그때 그녀의 두 눈에서는 짙은 남색의 광채가 번쩍거렸으며 나를 향해 '꺅! 꺅!' 하고 두 번 소리를 질렀는데, 그 소리는 날카롭 고도 소름끼치게 무서웠어요. 동시에 더욱 역겨운 비린내가 왈칵 풍깁디다. 사람으로 하여금 구역 질이 나게 만드는 지독한 냄새였어요. 그제서야 나는 여인이 이상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죠. 인적 없는 심산궁곡(深山窮谷)의 동굴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내 뇌리를 스쳤어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두려워지데요. 나는 금환으로 그 여인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만약에 그녀가 선량한 사람으로서 요법(妖法)에 걸려 있을 뿐이라면 죄없는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어요. 그 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그 여인은 갑자기 더욱 화를 내며 맹렬히 힘을 주어 몸뚱이를 앞쪽으로 솟구쳤는데, 그 결과 대여섯 자 정도 바위틈에서 몸을 내밀게 되었어요. 그리고 커다린 입을 쩍 벌리는 것이었어요. 마치 나를 와락 물어뜯으려는 것 같았어요. 다행히 나는 그 여인과 상당히 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고 그녀 역시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녀의 독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이때서야 나는 그 요괴가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뚱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어요. 빠져나온 몸뚱이는 납작했고 보통 뱀처럼 둥글둥글하지 않았으며 몸뚱이는 온 통 파란색 비늘로 덮혀 있었는데 햇살을 받자 번쩍번쩍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어요. 나는 그것 이 사요(蛇妖)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어찌 가만 놔둘 수가 있었겠어요? 나는 금환을 꺼내어 사요를 때려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했어요. 그런데 누가 알았겠어요? 금환을 막 꺼내들었을 때 한 차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지는 바람에 나는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곳에 돌아와 있었으며 어머님께서 나를 품안에 끌어안고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어요. 조금 전의 일이 꿈만같이 느껴져서 나는 재빨 리 어머님께 물어보았어요. 어머님은 나보고 조용히 정양을 하라고만 하시며 대답하시지 않았어 요. 나는 그제서야 온몸이 시큰거리고 아픈 것을 느꼈지요. 며칠이 지난 후에야 완쾌됐어요. 그후 내가 다시 어머님께 물어보았더니 그제서야 어머님은 그날의 사정을 이야기해 주셨어요. 취선애 아래 있는 그 사람의 머리통에 뱀의 몸뚱아리를 한 요물은 원래 미인망(美人莽)이라는 요괴였어 요. 그놈의 독성은 비할 수 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화를 끼치기 때문에 도력(道力)이 뛰어난 선인 (仙人)께서 취선애 아래에다 가두어 봉쇄(封鎖)시키고 두 장의 부적으로 그놈이 움직이지 못하도 록 했던가 봐요. 그날 나에게 쫓겨 도망치던 그 작은 사람과 작은 말은 육지(肉芝)라는 신물로서 사람이 그것을 복용하면 탈퇴환골할 뿐 아니라 수백 년이나 더 살 수 있다나 봐요. 특히 도행(道 行)을 쌓는 사람이 기연을 만나 그 물을 먹게 되면 수백 년 동안 고된 수련을 한 정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어요. 이와같이 영물이 살고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이한 맹수나 독충이 있어서 사람의 침임을 방비한다고 했어요. 그 당시 나는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그 영물을 잡아서 가지고 놀겠다는 생각만으로 금환을 꺼내 산바위를 후려쳤던 거예요.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부적을 훼손하게 되었고, 하마터면 사요를 풀어놓아 커다란 화를 불러일으킬 뻔했던 거지요. 다행 히 옛날에 그 요물을 잡으신 분은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시고 쇠사슬로 그 요물의 몸뚱이 아랫부분을 묶어 놓았기 때문에 그 사요는 몸뚱이를 반밖에 빼낼 수 없었던 거예요. 내가 두 번째로 금환을 던졌을 때 남아 있던 하나의 부적이 효력을 나타내어 앞에 있던 산바위가 무너 져서 다시금 그 요괴를 눌러버렸던 거예요. 이때 나는 사요의 독기에 쐬였고 산바위가 무너지느 라고 받은 충격에 의해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지요. 다행히도 그때 어머님께 서 나를 구해 주셨어요. 어머님께서는 그 요물은 동굴 안에 갇힌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에 동굴 안에서 고된 수련을 쌓았기 때문에 공행이 크게 중진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셨어요. 육 지는 암수 두 놈이었는데, 수컷은 좀더 오래되어 이미 사람의 형체로 변화되었고, 암컷은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아 말의 모습으로 변화되었어요. 그 육지들은 영통하여 사람이 사요의 독에 쏘이면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는 것을 알고 그 작은 동굴 부근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었던 거지요. 그날 수컷 육지는 암컷 육지를 타고 놀러 나가다가 내가 잡으려고 쫓아가자 황망히 이곳저곳을 가리지 않고 도망치다가 사요가 있는 곳으로 도망치게 되었던 거예요. 그 사요는 벌써부터 두 놈의 육지 를 잡아먹으려고 침을 삼키고 있었으나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눈앞으로 달려오는 데야 어떻게 그 것들을 그냥 놔두겠어요? 가련하게도 그 육지는 얼른 피하지 못했어요. 수컷은 재빨리 뛰어 달아 나 재앙을 피할 수 있었으나, 암컷은 도망치는 것이 느려서 아차 하는 순간에 그만 사요가 한입 에 삼켜버리고 말았어요. 그 사요는 그와 같은 영약(靈藥)을 먹고 더욱 그 요기가 무서워졌어요. 원래 부적은 두 개였는데 나 때문에 하나가 망가졌기 때문에 사요를 제압하는 효력이 점점 감소 하고 있었어요. 그리하여 사요가 매일같이 죽어라 하고 발버둥치는 바람에 현재 상반신은 동굴 밖에까지 빠져나오게 되었어요.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어나와 세상사람들에게 커다란 재앙 을 안겨줄 것이 틀림없어요." 손남은 듣기를 마치자 깜짝 놀랐다. "그 사요라는 요물이 그토록 무서워? 하지만 사백님처럼 신통 광대하신 분께서 사요가 나오면 세상에 재앙이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 또한 그 사요가 이 산 부근에 있다는 것을 아시 면서 방법을 강구해서 세상을 위해 그 요물을 죽여 해를 제거할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니 정말 믿 어지지 않는군." 금선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그 요물을 가만 내버려 둔다고 누가 그래요? 내가 그와같은 큰 화를 불러일으켰기 때문 에 나는 몇 번이나 어머님께 그것을 죽여 없애자고 거듭 부탁했어요. 그러자 어머님께서는 그 일 에는 하나의 복잡한 사연이 있다고 하시면서, 한 사람이 와서 도와주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 어요." 손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 도와줄 사람은 반드시 일신에 커다란 도력을 지니고 있겠군?"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의 일신재간은 크게 뛰어나 지 않지만 그가 이곳에 오면 사요는 운이 다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 사람은 바로 오년(午年) 오월(五月) 단오일(端五日) 오시(午時)에 출생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생극(生剋)의 원리에 따라 그 가 와서 돕는다면 쉽게 그 사요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손남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깨달았다. "사백께서 내가 이곳에 남아 도와주라고 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로군! 내가 바로 말띠에 오월 단 오날 오시에 태어난 그 사람이야!" 금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나는 이제 좀 마음이 놓여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일 때문에 매우 초조해 하고 있었답니다. 나는 누나의 재간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 몰래 누나에게 가서 나와 함께 그 사요를 죽이 자고 부탁한 적이 있었어요. 누나는 어머님께 혼날까 봐 내 말을 듣지 않았어요. 어제 어머님이 떠나신 다음 나는 다시 몇 번이나 부탁을 했는데, 누나는 여전히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 요. 나는 사형께도 도움을 청할까 생각해 보았으니 조금 전 사형이 그 사마외도의 땡초와 싸울 때 검광(劍光)이 별로 대단하지 못한 것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아예 얘기조차 꺼내지 않은 겁니 다. 조금 전에 누나가 화를 내고 떠나가자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사형이 바로 어머님이 말씀하시던 바로 그 도움을 줄 사람이었군요?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할 수 없고, 우리 내일 정오에 함께 가서 사요를 죽여버려요." 손남은 그 금선이란 소년이 성격이 활발하고 담이 하늘을 덮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남은 이 금선의 말을 듣고 자기에게 사요를 제거할 책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만일 싸우다가 사요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어떤 변고를 당하게 될까 염려스러웠다. 이 천 근처럼 무거 운 중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는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는 응낙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금선이 자 기보고 담이 작다고 비웃을 것을 생각 하니 일이 진퇴양난이었다. 그는 그 문제를 얼버무리려고 했다. "나는 능력은 없으나 너를 도와 그 사요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구나. 하지만 사백께서 나 가 계시고 사저마저 동굴에 계시지 않는 처지가 아니냐. 나중에 사백께서 내가 너를 데리고서 위 험한 짓을 했다고 꾸짖으실까 염려되는구나. 차라리 방법을 강구해서 먼저 사저를 찾아온 후 세 사람이 함께 그 요물을 처치하면 그처럼 좋은 일이 없을 거야." 금선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은 검협(劍俠)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일을 처리할 때 조금도 시원시원하지 못하군요. 언제 나 머뭇거리기만 하더라. 내가 처음 취선애에 갔을 때 어머님께서는 사요가 곧 세상에 나올 것이 라고 말했어요. 그후 이미 두 달이나 지났어요. 어쩌면 오늘이나 내일 사요가 세상에 나올지도 몰 라요. 우리들이 자꾸만 날짜를 지연시키다가는 수습할 수 없는 화근을 키우는 일이 되고 말아요. 그거야말로 야단이 아니겠어요? 옛 사람들은 '악을 제거할 때는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하고, 선수 를 쓰는 자는 강자가 되고 후수를 쓰는 사람은 재난은 당한다'고 했어요. 나는 일전에 황산에서 주매(朱梅)누나를 만나 이 일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답니다. 그녀는 나를 도와주겠다고 시원시원 하게 응락했어요. 그녀는 자기 사부가 꾸짖으실까 봐 살그머니 찬하대사의 법보(法寶)를 훔쳐서 나에게 몇 가지를 빌려준 적도 있어요. 조금 전 그 사마외도의 땡초와 싸우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중이 금환을 망가뜨리게 되면 장차 그 신물을 돌려줄 때 주매 누나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 함부로 꺼내 사용하지 못했어요. 방금 사형의 사주팔자를 들었을 때 나는 기쁘기 짝이 없었으며 아무쪼 록 사형이 나와 의기투합하여 해를 제거하고 사람들을 평안케 하고 후환을 영원히 제거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형 역시 누나처럼 나를 업수이 여기는군요. 사형도 알다시피 나는 비록 체구는 작지만 용기는 작지 않은 사람이라구요. 사형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혼자 못할 줄 아세요? 나는 오늘 나의 이 작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 사요와 생사를 걸 고 싸워야겠어요. 사형은 용기가 없고 겁이 많으니 아무래도 나 혼자 가는 게 낫겠어요." 금선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연신 지껄여댔다. 말을 끝내자 그는 얼굴 가득히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남은 이 소년이 스스로 내뱉은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성미를 가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사실은 호승심이 강한 사람 이었는데 금선이 겁쟁이라고 몰아붙이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 다. 더군다나 자기는 손님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탓할 수도 없 었고 위험한 짓을 저지르게 내버려 둘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사부의 말씀을 되새겨 볼 때 자신은 한평생 흉험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선 응낙해 놓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일을 처리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물러서면 그뿐이라고 생 각했다. "사제, 너무 화내지 마라. 나는 그저 네가 용기있는 아이인지 어떤지 한번 시험해 보았을 뿐이 야. 결코 내가 너와 함께 가기 싫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 원래 나는 너의 누나가 돌아와서 우 리가 함께 가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거야. 그녀의 검술은 신기에 가까우니 우리가 그녀와 함께 요괴를 잡으러 간다면 여러 가지로 안전하고 일이 잘 될 것 같아서 말이야. 하지만 네가 꼭 우리끼리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으니, 우리 내일 같이 가보도록 하자." 금선은 그 말을 듣자 급히 희색이 만면해졌다. "나는 원래 손사형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마음 속에 있는 말 몇 마디를 아직 사 형에게 하지 못했는데, 사형이 보기에 나의 누나라는 사람이 어때요?" 손남이 막 대답을 하려고 했을 때 홀연 눈앞이 환해지면서 영운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었 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야무지게 소리쳤다. "이 꼬마녀석, 또 나를 흉보려고 그러는 거지?" 원래 영운은 종종 부모님으로부터 자기는 다시 속세의 액겁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말을 듣고 여 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 공교롭게도 손남이 왔을 때 어머니가 그에게 따뜻하 게 대해 주는 것을 보게 되었고, 하는 말 속에도 수상쩍은 기미가 엿보여 액겁에 떨어지리라는 무서운 이야기가 그대로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백여 년을 쌓아온 공행이 쉽게 얻은 것이 아닌 만큼 언제나 스스로 근신했으며 손남과 대화하기를 피해 왔다. 손남 역시 달리 생각하는 바는 없었고 그저 영운의 높은 무공을 우러러보았기 때문에 종종 성심 껏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영운의 어머니는 떠날 때 손남에게 영운으로부터 검술편의 검법비결을 가르침 받으라는 말을 남 겼기에, 부모님께 평소 효성을 다하고 한 번도 그분들의 말씀을 어긴 적이 없었던 영운은 내키지 는 않았지만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배울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또 사람은 떨떠름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영운은 사람됨이 부드럽고 온순했다. 그녀는 손남이 정직하고 광명정대하다는 점을 알고 또한 그가 성심성의껏 배우려고 하자 감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거나 그의 부탁을 냉정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어머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해 본 것은 아니었지 만, 어찌 된 노릇인지 손남과 한 번 만나자마자 미묘한 감정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 상은 평소 의젓하고 도행(道行)이 심후해짐에 따라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맑디맑은 그녀로서는 뜻 밖의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사랑도 아니고 미움도 아닌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것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그를 아랑곳하지 않으려 했으나 상대방이 광명정대하고 지극히 성실한 데다가 아무 흠이 없다는 점에 은근히 끌렸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일도 없었으나 그녀 스스로 겸연쩍어하고 불안 해 했으며, 때로는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조금 전 금선이 허비랑 앞에서 던진 비웃음의 말은 어린아이가 생각없이 불쑥 지껄여댄 것으로 서 별다른 편견이 그 속에 깃들어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매우 부끄러워했으며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홀연 그녀는 황산으로 간다는 핑계를 대고 매일 금선의 동정을 감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부러 금선과 입씨름을 벌인 이후 황산 쪽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그녀는 도중에 찬하대사를 만났다. 찬하대사는 그녀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영운은 그만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찬하대사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착한 아이야, 나는 너의 심정을 알고 있느니라. 가련하구나! 정말 내가 처음 입도할 때의 모습 과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으냐." 영운은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땅에 엎드려서 어찌 해야 할지 방법을 강구해 달라고 청을 드렸다. 찬하대사는 부드럽게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본산(本山)에는 육지(肉芝)가 있으니 너의 공행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맑고 깨끗한 심 성으로 평소처럼 외마(外魔)를 대할 수 있다면 결코 속세의 액겁 속으로 떨어지지 않을 텐데 그 런 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영운은 육지를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는가를 물었다. 찬하대사는 대답해 주었다. "그것은 너에게 선연(仙緣)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내일은 바로 사요가 죽게 되는 날이 다. 육지를 손에 넣고 넣지 못하고는 그대들 세 사람 각자에 달렸다. 지금으로서는 말하기 힘들구 나. 너는 한마음 한뜻으로 속세의 인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나의 주매란 녀석은 기를 쓰고 정 의 그물 안으로 스스로 기어들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로구나. 일전에 그녀는 내가 주 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두 가지의 진산지보(鎭山之寶)를 몰래 그대의 동생에게 빌려주었지. 참으 로 철없는 것들의 몹쓸 장난들이지." 영운은 그 말을 듣자 재빨리 금선을 대신해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주매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사고 청을 드렸다. 찬하대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니 마음쓰지 말아라. 누가 두 어린아이를 탓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금선은 그 물건의 사용방법을 모르고 있으니 나는 주매로 하여금 그대들을 도와 사요를 잡는 일을 성사 시킬 생각이다." 영운은 깊이 감사의 인사를 올린 후 발길을 되돌려 동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고서 금선이 겁을 먹고 하룻밤 동안 초조해 하는 꼴을 몰래 보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금선과 손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을 심산이었다. 마침 금선이 손남을 충동하고 있었고, 손남이 그의 계책에 말려들고 있는 참이었다. 그녀는 속으 로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다시 금선이 그녀 자신에 대해 묘한 말을 꺼내자 혹시나 그가 되는 대로 씨부렁거릴까 봐 걱정이 되어서 모습을 드러내고 금선의 입을 막았던 것 이다. 금선은 누나가 돌아오자 속으로는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그러한 기색을 드러 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빈정거렸다. "누나는 황산으로 떠나지 않았나? 왜 돌아왔지? 혹시 내일 나와 손사형이 신통력을 크게 떨쳐 그 요괴를 잡아 세상의 해를 제거하는 위대한 업적을 보고 싶어서 돌아온 게 아니야?" 영운은 쳇! 하고 혀를 찼다. "부끄럽지도 않니? 너는 주매누나를 꼬드겨 찬하사백님의 진산지보(鎭山之寶)를 훔치게 했지? 그 바람에 주매는 크게 벌을 받았단 말야. 지금 사백께서는 크게 진노하셔서 주매를 내쫓으려 하 셔. 너는 그것을 알기나 하고 그렇게 철없이 날뛰는 거냐?" 금선은 그 말을 듣고 부끄럽기도 하고 다급하기도 했다. 얼른 뛰어와 영운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착한 누나, 그게 정말이야? 주매누나가 진산지보를 훔쳐 나에게 준 것은 요괴를 제거하여 세상 을 구하라고 그런 것이에요. 그런 행동이야말로 의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잖아. 그러나저러나 주매 누나가 나로 인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담. 착한 누나, 누나가 이 아우의 얼굴을 봐서라도 사백님께 사정해서 좋은 방법을 강구해 줘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의 어려움 을 풀어줘야 해요." 영운은 금선의 작은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변하고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며 초조해 하는 걸 보 고 속으로 웃으며 그를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평소에 그토록 제멋대로 굴더니 오늘은 나에게 사정을 다 하다니 정말 신기한 노릇이구 나.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니 나는 깊이 관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구나. 사백님께서 너를 좋아 하시는 것 같던데 어째서 네가 스스로 가서 부탁을 드리지 못하니?" "착한 누나, 제발 나를 놀리지 말아요. 누나가 이번에 나를 도와주기만 한다면 나는 이제부터 누 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감히 거역하지 않을 거예요. 착한 누나, 이번만 이 아우를 한번 크게 도와줘요." 금선의 두 눈가가 붉어지면서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영운은 금선의 성격이 매우 오만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적당한 때에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착한 동생, 서두를 필요는 없단다. 네가 아무리 이 누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하기로서니 이 누 나가 아무려면 너와 똑같이 행동할 것 같으냐? 더군다나 너의 그 주매누나는 무척 좋은 사람이 아니더냐? 너에게 솔직히 말해 줄게. 조금 전 네가 말을 듣지 않자 나는 너를 버려두고 아미산으 로 가서 잠시 머무를까도 생각해 보았어. 그런데 허공에서 찬하사백께서 어기비행(馭氣飛行)을 하 며 오시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단다. 그때 그분은 사요를 제거하는 데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너의 매누나가 진산지보를 훔친 데 대해서는 사백님께 내가 몇 번이나 용서를 빌었다. 사백님께서는 비단 주매를 벌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일 그녀를 이곳으로 보내 우리를 도와 사요를 잡 는 일을 돕도록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너와 같은 어린아이를 상대할 때 똑같이 다루지 말라고 전하셨다. 그래서 나는 돌아온 것이란다. 내 말을 듣고 나니까 기쁘지?" 아니나 다를까, 금선은 좋아서 입이 벌어졌다 "착한 누나, 정말 나의 좋은 누나로구나. 내일 누나와 매누나가 나를 도와 사요를 잡으려고 한다 면 일은 필시 성공할 거야. 나는 아직 도를 제대로 닦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세상을 위해 사요를 제거하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하지?" "정신빠진 소리 그만해라. 어머님께서 그러시는데 그 사요는 매우 무서운 요물이래. 만약 평범한 요물이라면 찬하사백께서 어찌 주매를 보내시겠어? 너는 사람이 많고 법보(法寶)가 있는 것만 믿 고 있는가 본데, 함부로 날뛰다간 큰코 다친다는 걸 알아야 한단 말이야." 금선은 웃으며 대답했다. "누나 말이 맞아. 내 방금 말했잖아. 이번 일은 누나가 지휘를 하도록 해. 누나가 하라는 대로 나는 시키는 대로만 따를 테니까. 그러면 된 거지?" "네가 내 말을 잘 듣기만 한다면 이 일은 성공할 것이다. 네가 훔쳐온 법보는 아직 사용법을 모 르니 주매가 오기를 기다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런데 너는 지금 그 법보를 가져와서 우리들에게 구경을 시켜줄 수 있겠니?" 금선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가 찬하대사의 진산지보를 가지고 나왔다. 이 몇 가지 법보는 원래 한 자 정도 되는 크기의 비단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금선이 비단주머니를 거꾸로 들고 몇 번 흔들자 안에서 지름이 세 치 가량 되는 하나의 둥근 구 슬이 떨어졌다. 그 구슬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의 누런 광채가 뿜어나와 사방을 누렇게 물들였다. 그리고 삼첨양인(三尖兩刃)의 조그만 칼 백팔 자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 작은 칼들의 길이는 오 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비단주머니에서 나오자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이 부시게 하는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영운은 금선에게 말했다. "너는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아이로구나! 다른 사람을 꾀어 법보를 훔치게 하면서도 훔친 물 건의 용법조차 모르다니 그게 말이나 되니? 너는 이 물건들을 손에 넣으면서 그래, 용법을 물어 보지도 않았단 말이냐?" 금선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목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일전에 내가 황산에 갔을 때 사백께서는 안 계셨어. 나는 매누나와 동굴 밖에서 한참 동안 재 미있게 놀았지. 그 후에 사요를 보았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내가 도와줄 사람도 없고 법보도 없어 서 마음은 있지만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매우 안타까와했지. 만일에 사요가 동굴 속에서 뛰쳐나 와 세상 사람들을 해친다면 그건 내 탓이라는 말도 했어요. 그때 나는 땅이 꺼져라고 연신 한숨 을 내쉬었더니 매누나는 나를 위로해 주면서 무언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했 어. 하지만 사백의 분부가 지엄하셔서 함부로 동부(洞府)에서 나갈 수 없는 일이 안타깝다고 하더 군. 아울러 그녀는 용기가 없어서 사백께 감히 여쭙지도 못한다는 말도 했어. 그 말을 듣고 내가 몹시 낙담하자, 그녀는 얼른 사백께 열두 가지의 법보가 있다는 말을 해줬어. 사백께서는 평소에 법보를 가지고 다니시지 않으며 그녀에게 엄중히 지키라고 하신다고 하면서, 몰래 갖다가 나에게 잠시 빌려줄 수도 있다고 했어. 일이 성공한 이후에 살그머니 몰래 자리에 갖다놓으면 된다고 말 이야. 그리고 만약 일이 탄로가 나면 어머니와 누나에게 부탁해서 사백께 용서를 빌라는 말도 했 어. 그녀는 법보 가운데 두 가지를 선택해서 나에게 주면서 말했어요. '이 칼은 주사인(誅邪刃)이 라고 하며 모두 백팔 개야. 던져낼 수도 있고 거둬들일 수도 있는 신기한 법보야. 그리고 이 구슬 은 천황정기주(天黃正氣珠)라고 하는 보물이야.' 그녀가 그 용법을 설명하기도 전에 하필이면 그 때 사백님께서 돌아오셨어. 나는 재빨리 두 가지 법보를 몸에 숨기고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드렸 거든. 그리고 나서 작별할 때 보니 사백께서 빙그레 웃으시는데 마치 우리의 수작을 모두 알고 계시는 듯했어. 나는 매누나에게 누를 끼치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사백께 모든 일을 말씀드리려고 도 생각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사백께서 모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고, 이 물건으로 내가 사요를 죽이기만 한다면 다른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었지. 이리로 온 다음에도 양심에 가책이 되어 몇 번이나 몰래 달려가 되돌려 주려고 했지만 그럴 기회가 영 오지 않았어." 영운은 그 말을 듣고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때 홀연히 동굴 밖에서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괴이한 음향이 들려왔다. 이상하게 여긴 그녀는 재빨리 동굴 밖으로 달려나가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달빛만이 교교하고 은은한 별무리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을 뿐 별다른 종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문득 일종의 기이한 피리소리가 바람에 실려 취선애 쪽에서 은은히 들려오고 있었다. 작전전야 驚怪異 深宵聞勵聲 策群刀 仙崖誅毒莽 영운은 별빛과 달빛을 빌어 취선애 쪽을 바라보았다. 취선애는 짙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영 롱한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는데, 때때로 연기 같기도 하고 불길 같기도 한 붉은 광채가 간헐적 으로 뿜어져 나오곤 했다. 하늘의 성좌를 살펴보니 자시(子時) 말 축시(丑時)였다. 영운은 사태가 중대하다고 생각하고 즉 시 몸을 날려 동굴로 되돌아 갔다. 금선과 손남 두 사람이 막 동굴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영운은 두 사람을 이끌고 동굴 안으로 도로 들어가 방금 본 바를 이야기해 주었다. 금선은 매우 다급해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것 봐! 사요가 이미 도망쳤잖아! 진작 내 말을 들었으면 됐을 텐데. 이제 큰 화근이 생기고 말았으니 이를 어째! 이미 때는 늦었지만 우리 빨리 달려가 살펴봐요!" 영운 역시 당황했다. 그녀는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 상의하려고 했다. 갑자기 동 굴 밖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금선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누나! 빨리 검을 던져! 사요가 왔어!" 손남 역시 당황해 있던 차라 급히 칼을 내찔렀다. 영운은 도력(道力)이 고심해서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금세 알아채고 재빨리 소리쳤다. "손사제, 무례한 행동을 하면 못 써요! 우리편 사람이에요!" 나타난 사람은 검광이 자기 몸을 향해 맹렬히 쏟아져 오는 것을 보자 급히 손을 쳐들어 한 가닥 푸른빛을 발출해 냈다. 손남은 영운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칼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자기가 경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금선은 앞으로 달려나가 나타난 사람의 손을 잡고 손남에게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나의 주매누나예요. 주매누나, 이분은 나의 사형이며 백협 손남이란 분이에요." 각기 인사를 나눈 후 영운은 금선을 나무랬다. "네 녀석은 언제나 방정맞더라. 이 동굴 안에 어떻게 감히 요물이 들어온다고 그래? 똑똑히 보 지도 않고 무턱대고 비명을 지르면 어떻하니? 만약 주사매의 검법이 고매하고 손과 눈이 빠르지 않았더라면 상처을 입었을 것 아니냐? 손사제 역시 너무 성급했어요." 주매는 재빨리 금선을 대신해서 변명의 말을 했다. "이 일은 선아우를 탓할 수가 없어요. 본래 제가 경솔했던 탓이에요. 사저는 그를 탓하지 마세 요." 영운은 그녀가 금선을 위해 변명하는 것을 보자, 조금 전에 금선이 다급해 하던 모습을 상기하 고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이어 주매에게 여기에 오게 된 까닭을 물어보았다. 주매는 대답했다. "조금 전에 제가 한창 무예를 익히고 있는데 사부께서 돌아오셔서 말씀하셨어요. '취선애의 사요 가 내일 오시에 동굴에서 나온다. 사요는 이미 백여 마리나 되는 기이한 독사와 커다란 구렁이들 을 모으고 있으니 반드시 큰 후환을 남길 것이다. 혹시 나의 영운 사저가 잘못 손을 쓴다면 오히 려 사요를 도와주어 도망치게 만들기 쉽다.' 그리고 사부께서는 저를 이곳에 보내 함께 대책을 마련하라고 하셨어요." 영운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네 사람은 자리에 앉아 요물을 잡을 계책을 이야기했으며 법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주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주매는 말했다. "저는 나이가 어리니 마땅히 사저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사부께서는 저를 이곳에 보내실 때 그 요물에 대처할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저께서는 나의 말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운은 겸양했다. "우리 사이에 너무 겸손할 필요는 없어요. 사백께서 명을 내리셨으면 우리는 마땅히 분부대로 행동해야 되니, 이 일은 사매가 지도하도록 해요." 주매는 생글생글 웃으며 금선에게 물었다. "그대가 가져온 법보는 어떻게 됐어요?" 금선은 재빨리 법보를 꺼내 주매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매누나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요. 그날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셔서 나는 고맙기 이를 데 없 었지만 사백께서 이 일을 아시고 누나를 탓하실까 봐 매우 염려하였고 후회스러웠어요. 나는 이 법보를 되돌려 주려 했으나 기회가 없었어요. 조금 전에 누나의 말에 의하면 사백께서는 이 일을 다 아시고 계셨다고 했는데, 혹시 누나에게 벌을 내리시지는 않았어요?" 주매는 말했다. "괜찮았어요. 사부께서는 몇 마디 말로 나무라기만 하셨어요. 그대가 나를 걱정해 주어서 고마워 요." 영운은 그들 두 사람이 다정히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손남을 향해 웃음지었다. 주매는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금선은 얼른 깨닫고 누나가 조롱을 할까 봐 재빨리 말 했다. "사백께서 누나를 탓하시지 않았다니 정말 잘된 일이군요. 언젠가 내가 달려가 누나를 대신해서 벌을 받겠다고 청을 드릴게요. 이제 법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줘요." 주매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 일에 있어서 우리는 마땅히 사저를 지휘자로 모시고 일사불란하게 행동해야 해요. 저는 군 사(軍師)쯤으로 작전을 짤게요. 이것은 제가 사부님을 대신해서 계책을 말씀드리겠단 말이에요." 금선은 크게 기뻐 재촉했다. "좋아요! 무척 좋은 생각이에요! 어서 말해 봐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고 본론을 말해 주세요." 주매는 빙그레 웃었다. "그대 혼자 바쁘군요? 지금은 겨우 인시(寅時) 초이고 오시(午時)가 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있어 야 해요. 그대는 어째서 이리 서둘러요. 천천히 내 이야기를 들어봐요." 주매는 한 알의 천황주(天黃珠)를 들더니 영운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이 구슬은 천 년 묵은 웅황(雄黃)으로 만든 것인데 전문적으로 사요를 제압하는 데 써요. 내던 지면 만 가닥이나 되는 누런 광채를 쏟아내며 주위 수 마장을 온통 뒤덮어 버리지요. 이번에 사 요는 많은 뱀들을 모아서 동굴에서 뛰어나온 다음에 이 동굴을 노리고 쳐들어올 것이에요. 그 가 운데 몇 마리는 아주 기이한 독을 지닌 구렁이에요. 아무쪼록 사저는 이 구슬을 몸에 지니고 한 높은 봉우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사요가 동굴을 부수고 달려나와 나머지 독사들을 거느리고 우리에게 공격을 가해 올 때 그 구슬과 함께 검광(劍光)을 동시에 던져내세요. 그러면 자연히 묘 한 결과가 나타날 겁니다." 그녀는 다시 세 포기의 약초를 꺼냈다. 그 길이는 서너 자 정도였는데 한 줄기마다 아홉 개의 순이 달려 있었다. 전체가 새빨간 빛이었으며 기이한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한 포기의 약초를 금선에게 건네주고 설명했다. "이것은 주초(朱草)라고 해요. 일명 홍벽사(紅壁邪)라고도 하죠. 이것을 입에 물고 있으면 백독 (百毒)이 침범하지 못해요. 사요는 매일 자시나 오시에 그 기이한 울음소리로 자기의 동류를 소집 해 왔어요. 우리는 미리 백팔 자루의 선인(仙刃)을 사요의 동굴 밖에 세 걸음 간격으로 한 자루씩 박아 놓아야 해요. 이 일을 오시 이전에 끝마쳐야 해요. 그리고 땅에 꽂을 때 사요의 동굴과 가까 우니 반드시 주초를 입에 머금고 독의 침범을 막아야 해요. 이것은 지극히 위험하고 고생스러운 데 그대는 나와 함께 그 일을 할 용기가 있나요?" 금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 말했다. "가고말고요! 가고말고요! 그 사요가 동굴에서 벗어나기 전에 다 꽂아야 한다면 우리는 지금 당 장 가서 꽂도록 합시다." 주매는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언제나 이토록 성질이 급하더라. 아직 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영운에게 말했다. "이곳에 오년(午年) 단오절 오시에 출생한 분이 계신가요?" 영운은 손남을 가리켰다. "이분 손사제가 바로 그 사람이에요." 손남은 주매가 무척 아름답고 뛰어난 재간을 지니고 있으며 얼굴에 영기가 가득하고 또한 의협 스러운 풍모를 은연중에 드러내자 그녀에 대해 감복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오랜 세월을 두고 고된 수련을 쌓았으나 산을 내려와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보 다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을 느꼈다. 선배는 고사하고 사형제들도 하나같이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매와 금선이 다정스레 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가 어리벙벙한 상태로 있는데 갑자기 주매가 그에 대해 질문을 해왔으므로 그는 자 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제가 바로 그때 태어난 사람입니다. 무슨 분부하실 일이 계십니까?" 주매는 설명했다. "이 사요는 수천 년 동안 도를 닦았기 때문에 그 능력이 대단해요. 그런데 육지(肉芝)를 복용한 이후에는 백 번 단련한 강철처럼 몸이 단단해져서 웬만한 검선(劍仙)들로서는 그 요물에게 털끝 만한 손상도 입힐 수가 없게 됐지만, 그 사요에게는 치명적인 곳이 두 군데 있어요. 한 곳은 바로 뱀의 칠촌자(七寸子)이고, 또 한 부분은 사요의 배에 나 있는 허연 줄기 즉, 분수백선(分水白線)이 에요. 그러나 그 사요는 이미 탈골어신(脫骨御身)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설사 그 두 곳의 치명 적인 급소에 상처를 입힌다고 해도 위세를 반쯤 꺾어 놓을 수 있을 뿐이지 그를 죽일 수는 없어 요. 그러니까 사저의 주화검(朱和劍)으로 끝장을 내야만 해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손남에게 한 포기의 주초를 건네주었다. 이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금빛찬란 한 한 자루의 짧은 창을 꺼내 손남에게 주며 말했다. "손사형은 나중에 입에 주초를 물고 손에 이 여의신모(如意神矛)를 들고 사요의 동굴 위에 올라 가 눈도 깜박이지 말고 사요의 동굴을 지켜야 합니다. 그 사요는 매우 교활해요. 사요는 동굴을 나오기 전에 다른 뱀들을 먼저 동굴 밖으로 나가게 할는지도 몰라요. 냉철하게 살펴보지 않다가 이 창을 엉뚱하게 사용하게 되면 일을 그르치게 돼요. 사요가 일단 동굴을 나설 때는 질풍처럼 빠르게 몸을 움직일 터이니 특별히 주의하셔야 해요. 다행히 사요의 머리 위에는 한 가닥 기다란 머리카락이 곤두서 있으니 알아보기 쉬울 거예요. 그때 손사형은 그 요물의 칠촌자를 똑바로 겨 냥하고 입으로 '여의신모를 받아랏!'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창을 던지세요. 그렇게 하면 자연히 절묘한 조화가 일어나서 마음먹은 대로 손짓하는 대로의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이에요." <제2권으로 계속> 촉산기협(1부) 2 육지(肉芝)의 영험 獨抱熱腸 芝仙乞命 勸服靈藥 俠女多情 손남(孫南)은 두 가지 물건을 받으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주매(朱梅)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영운(靈雲)과 손남을 향해 말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두 분께서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도록 하세요. 저와 금선(金蟬)사제는 먼저 가서 비수를 꽂고 오겠습니다." 영운은 이미 반선지체(半仙之體)였지만 남녀유별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그녀는 손남과 함께 동굴 안에 있기가 쑥스러워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 함께 가기로 해요." 주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아요." 영운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급히 주매에게 물었다. "사요의 머리통은 이미 동굴 밖으로 나와 있어요. 동굴 앞에서 비수를 꽂다가 사요에게 발각되 지 않을까요!" 주매가 대답했다. "사부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젯밤 자시에 사요는 이미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동굴 안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있다나 봐요. 사요가 동굴을 나오는 시각은 내일 오시(午時)랍니다. 오시 가 되기 전까지 사요는 고개를 동굴 밖으로 내밀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녀는 금선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큰소리로 떠들기를 좋아하는데 그곳에 가서는 그러면 안 돼요. 조용조용 행동해야 합니 다. 만약 사요를 놀라게 하여 그 요물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빨리 동굴에서 나온다면 일을 그르치 고 말아요." 금선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시늉을 했다. 이때 시각은 인시(寅時)가 지나고 묘시(卯時)에 접어들고 있었다. 영운 등 네 사람은 동굴에서 나온 다음 동굴 밖에 설치된 팔진도의 방향을 틀어서 동굴의 문을 봉쇄하고 취선애 쪽으로 달려 갔다. 취선애 앞에 이르자 영운과 손남은 자기네들이 위치할 방향을 찾아보았다. 주매는 주사인의 절반을 금선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요의 동굴은 원래 서쪽에 있었다. 주매는 동굴 입구를 따라 동쪽을 향해 나아가면서 주사인을 땅에 꽂기 시작했다. 칼날이 위를 향하도록 묻되 칼날이 땅바닥 위로 나올 듯 말 듯하게 꽂았다. 그녀는 금선에게 명하여 반대편에 서부터 비수를 꽂으며 오되 간격이 일정해야 하며 중앙에서 두 사람이 만나야 한다고 알려주었 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가운데의 빈터를 향해 양쪽에서 비수를 묻었고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되 자 중앙에서 만나게 되었다. 주사인을 묻는 일이 끝난 셈이었다. 두 사람의 손은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금선은 주매에게 함께 계곡 아래의 개울물에 가서 손을 씻자고 했다. 주매는 고개를 끄덕여 응 락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개울을 향해 내려갔다. 이때 불타는 듯한 붉은 태양이 지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햇살은 취선애 앞의 앙상한 나뭇 가지도 비추고 있었다. 겨울 까마귀는 아직 둥지 안에 웅크린 채였으며, 주위의 공기는 신선하고 고적했다. 게다가 옥으 로 조각을 한 것같이 결곡한 생김새의 몇 명 소년소녀들이 서 있으니 그 광경은 세외선경(世外仙 境)을 방불케 했다. 주매와 금선은 나란히 개울가에 이르렀다. 그들이 차가운 샘물에 손을 씻고 있을 때 홀연 '꺅! 꺅!'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매는 황급히 금선의 팔을 잡아끌어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소리난 곳을 살펴보았다. 알고보니 한 마리의 겨울 까마귀가 앙상한 고목나무에서 날아올라 동쪽 하늘을 향해 날아가면서 낸 소리였다. 금선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매누나, 한 마리의 까마귀에 불과한데 웬 호들갑이죠?" 주매는 급히 금선의 입을 틀어막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온 산은 적막하기 그지없었고 아무런 기 척도 들려오지 않는지라 그제서야 안심한 그녀는 금선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금선은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어째서 그렇게 놀라느냐고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주매는 말했다. "아우는 잘 몰라요.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그 까마귀가 이렇게 추운 날 울며 날아갔겠어요? 우리는 까마귀와 멀리 떨어졌으므로 우리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에요. 내가 보기 에 오늘 사요를 죽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한 그루의 육지(肉芝)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해요. 우리가 사요에게 정신을 팔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슬그머니 접근 하여 육지를 가로채기란 쉬운 일이니까요." 금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매는 방그레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육지가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면 상관이 없지만 만약에 사마외도(邪魔外 道)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의 기세를 돋구는 결과가 되지요. 사제, 그대는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 아서 공행(功行)이 아직 얕아요. 그러니 사부님께서 나에게 내리신 이 홍예검(紅霓劍)을 빌려줄 테니 사요를 죽이도록 해요. 나는 육지를 지켜보고 있다가 손에 넣도록 하겠어요. 내가 먹지 않고 그대에게 줄 작정이에요. 그대는 나에게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고 육지를 먹도록 해요. 다행히 그 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쌓은 공행이 상당하니 그 영물을 먹지 않아도 괜찮아요." 금선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었다. "누나, 나는 처음에 그놈을 잡아서 가지고 놀려고 했었어요. 먹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그 런데 그 육지란 놈은 이미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잖아요. 그러니 차마 그 육지를 먹을 수 는 없을 것 같아요. 꼭 살인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역시 매누나가 먹는 게 좋을 것 같 군요." 주매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아우님은 잘 모르고 있어요. 이와 같은 선연(仙緣)은 백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일이니 기 회를 놓치면 안 돼요. 육지로 말하면 일종의 진기한 풀에 불과해요. 다만 천지의 영기를 받고 나 서 사람의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고 진짜 사람은 결코 아니지요. 이 육지를 먹으면 탈태환골하게 되고 몇십 년 동안 애써 수련한 효과가 있어요. 그대는 아낙네같이 인정에 끌려서는 안 돼요." 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공행이란 모름지기 자기 스스로 닦아야 하는 법이에요. 나는 초목의 영기에 의지하고 싶지 않 습니다. 더군다나 그 육지로 말하면 천 년 동안 고된 수련을 하고 나서야 겨우 사람의 형체를 갖 추게 되었다면서요. 사람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고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지를 생각해 보라구요. 이제서야 겨우 사람의 형체를 이루었는데 다시 사람의 입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닙니까. 육지는 평소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으니 오히려 우 리들은 육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육지를 먹는단 말이에요? 선도(仙道)를 갈고 닦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서 정리(情理)를 돌보지 않는다면 말이 되는가요?" 주매는 금선이 억지를 쓰자 짐짓 화가 난다는 듯 뾰로통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대는 정말 좋고 나쁜 일도 분별하지 못하는군요. 내가 여러 모로 그대를 위하려고 하는데 그 대는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까탈을 부려 나의 말에 반박하는군요. 나는 그대와 다시는 말을 하지 않을래요." 말이 끝나자 그녀는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금선은 그녀가 정말 화를 내는 줄 알고 무척 당황해 했다. 그는 재빨리 웃음지으며 말했다. "매누나! 화를 내지 말아요. 누나도 반나절 동안 고생을 했는데 좋은 물건을 어찌 나 혼자 차지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우리가 육지를 잡게 되면 사백님과 어머님께 갖다드리도록 해요. 그 두 분 어르신께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말이에요." 주매는 매섭게 쏘아불였다.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아요. 아직 그 영물을 잡은 것도 아닌데 누구에게 바친다고 그러는 거예 요. 내가 뭐 그대가 먹지 않을까 봐 근심걱정을 하고 있는 줄 아세요?" 두 사람은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늘어놓느라고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홀연 영운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두 사람은 무슨 다정한 말을 주고받고 있지? 지금이 어느 땐지 알고나 있는 거야? 동굴 쪽에서 는 이미 사요가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단 말이야!" 주매와 금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귀를 기울이니 아니나 다를까, 벼랑가에 있 는 동굴에서 휘파람소리 같기도 하고 피리소리 같기도 한 기이한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퍼지고 있 었다. 세 사람은 서둘러 동굴 쪽을 향해 달려갔다. 주매는 뛰어가는 동안에 홍예검을 금선에게 건네주며 당부했다. "사요를 죽이는 일은 세 분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가서 그 육지를 사로잡아야겠 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날 듯이 벼랑 뒤쪽으로 달려갔다. 영운은 금선의 나이가 어리니만큼 그에게 위험한 일을 맡기고 싶지가 않아서 그를 달랬다. "너는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라." 금선은 대답했다. "그런 명령이라면 받들지 못할 까닭이 없지요. 그러나 그 사요의 목숨은 남겨 놓아서 나에게 최 후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주어야 해요." 영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선은 기뻐하며 누나의 옆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방 위를 찾아 똑바로 서서 사요를 대적할 준비를 했다. 영운은 손남이 실수를 할까 걱정되어 달려가 몇 마디 당부의 말을 했다. 이때 햇살은 온누리에 따뜻하게 쏟아져 내렸고 나뭇가지와 마른풀 위에 맺혀 있던 서리와 이슬 은 아침햇살을 받아 증발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엷은 안개와도 같고 가벼운 연기와도 같은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매우 운치있는 광경이었다. 금선은 혼자 있기가 무료하여 나뭇가지에 맺힌 이슬방울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갑자기 땅을 뚫고 눈처럼 흰 물건이 기어나왔다. 금선이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그가 잡으려 했으나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육지였다. 금선이 몇 걸음 다가가 육지를 움켜쥐려고 하는데 그 육지는 돌연 금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연 신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고 있는 것 같았다. 금선은 그 모습을 보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 이렇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너는 정말 착하구나. 도망치지 말고 이쪽으로 오너라. 나는 결코 너를 잡아먹지 않겠다." 이 육지는 인성(人性)을 갖추고 있었다. 금선의 말을 듣자 도망치지 않고 한 걸음에 한 번씩 큰 절을 올리며 금선을 향해 다가왔다. 금선은 손바닥으로 육지를 받쳐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육지의 몸뚱이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육지의 온몸은 옥처럼 희고 고왔으며 은은한 푸른 기 운이 감돌고 있었다. 혈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은 수십 가닥에 불과했는데 역시 하얀색이었다. 육지는 눈썹이 없었지만 얼굴은 매우 잘생긴 편이었다. 금선은 귀여운 생각이 들어 손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았고 육지 역시 영통하여 그가 품속에 안고 마음대로 어루만졌건만 다소곳이 가만히 있었다. 금선은 보면 볼수록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꼬마야, 얼마 전에 너는 나를 보고 도망을 쳤지. 그러느라고 네가 탔던 말은 사요에게 잡아먹히 지 않았느냐? 지금 나를 보고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온 것으로 보아, 너는 혹시 내가 너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니냐?" 육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금선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안심해라. 나는 너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를 보호해 주겠다. 너는 나를 따라 내가 살고 있는 동굴로 갈 용의가 있느냐?" 육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으로는 나직한 소리를 토해냈다. 아마도 고맙다는 뜻인 것 같았다. 금 선이 무척 기뻐하고 있는데 영운이 금선 쪽으로 다가왔다. 육지는 영운을 보자 몸을 이리저리 뒤 틀며 도망치려고 했다. 금선은 그 바람에 몇 번이나 그 영물을 놓칠 뻔했다. 금선은 육지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꼭 껴안으며 속삭였다. "저 사람은 나의 누님이란다. 너를 해치지 않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운이 가까이 이르렀다. 육지는 갑자기 크게 부르짖더니 놀라 까무라치고 말았다. 금선은 영운에게 화를 냈다. "누나, 누나가 나의 작은 귀염둥이를 놀라 죽게 만들었잖아!" 영운은 금선의 손에 들려 있는 육지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화낼 것 없다. 나에겐 그 육지를 살아나게 할 방법이 있단다. 만약 그가 살아난다면 우리는 동 굴로 가져가서 데리고 놀도록 하자. 만약 그가 죽었다면 먹어치우자꾸나." 금선이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을 때 그 육지는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영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 였다. 이렇게 되자 남매 두 사람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금선은 말했다. "요 쪼끄만 녀석이 꾀가 많군!" 영운은 말했다. "너는 이 영물이 인간의 성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조금 전 그가 까무러친 것을 보 고 땅에 내려놓았더라면 그는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을 것이다. 너는 어떻게 이 절세의 귀물을 사로잡았느냐? 너는 정말 복도 많구나." 금선은 육지가 스스로 찾아은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영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정말 그를 해치면 안 되겠구나." 금선은 너무 기뻐 깡총깡총 뛰며 소리쳤다. "맞았어요! 우리들과 함께 도를 닦도록 해주어요!" 금선이 기뻐 날뛰는 바람에 육지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땅위로 떨어졌다. 영운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야단났네!" 이어 냅다 손을 뻗쳐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육지는 도망가지 않고 조그만 손을 들어 서쪽을 가 리키며 입으로는 연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금선은 다시 그를 품에 끌어안고 서쪽 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취선애 아래의 사요가 갇힌 동굴 쪽에서는 한무더기의 짙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줄기줄기 불꽃이 뻗쳐나오고 있었는데 그 형상은 마치 많은 폭죽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 같았다. 별안간 동굴 안에서 요물이 울부짖는 기이한 음향이 들려왔다. 어느덧 시간은 오시에 접어들고 있었다. 모두 사요가 곧 나오리라고 판단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손을 쓸 채비를 했다. 사요가 들어 있는 동굴 위에 서 있는 손남은 여의신모를 꺼내들고 아래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 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밑의 동굴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요물의 머리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손 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홀연 동굴 안에서 짙은 안개와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선초를 입에 머금고 있어서 독의 침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지만 역시 일진의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사요가 있는 동굴 안에서는 처절하기 그지없는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졌으며 그 소리는 갈 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자 개울 맞은편에 산비탈에서 수십 가닥의 허연 비단폭 같은 것들이 꿈틀거리며 기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니 십여 마리나 되는 흰비늘을 가진 커다란 구렁이들이었다. 구렁이의 길이는 무려 십여 장이나 되었다. 구렁이들은 개울을 건너더니 속도를 늦추며 기어왔 다. 사요의 동굴로부터 백여 보 정도까지 가까이 이르자 구렁이들은 전진을 멈추었다. 또아리를 틀고 고개를 높이 쳐든 채 두어 번 '갹! 갹!' 하고 울었다. 그 모습은 흡사 동굴 안에 있는 사요 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동굴 안에서 사요가 울부짖는 소리는 더욱 날카로와졌으며 다가오는 뱀들도 더욱 많아졌다. 기 이하고 괴이하게 생긴 뱀들도 많이 섞여 있었고, 크고 작은 것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최후로 크고 작은 두 마리의 괴사(怪蛇)가 다가왔다. 작은 뱀은 큰 뱀의 등에 올라타고 있었는데 질풍과 같이 순식간에 벼랑 앞에 이르렀다. 큰 뱀은 머리가 두 개였다. 목 부위에서 두 개의 머리가 나누어져 있었으며 길이가 이삼 장이나 되었다. 온 몸뚱이는 불타는 듯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두 개의 머리 위엔 각기 뿔이 돋아 있었 고, 그 뿔은 산호처럼 생겼으며 햇살을 받자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작은 뱀은 길이가 대여섯 자밖에 되지 않았으며 이상하게도 머리는 하나밖에 없는데 몸뚱이는 두 개였다. 그 작은 뱀은 큰 뱀의 등에서 내리더니 두 개의 꼬리로 땅을 딛고 똑바로 몸을 곧추 세웠다. 그 모습은 흡사 사람과 같았다. 그 뱀은 몸에 표범 같은 무늬를 지니고 있었는데 입에서 파란 불길을 토해냈다. 이 두 마리의 괴이하게 생긴 뱀이 나타나자 나머지 뱀들은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길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두 마리의 뱀이 다가오자 다른 뱀들은 좌우로 길을 터주었다. 이리하여 동굴 앞에는 길이 나게 되었고 두 마리의 뱀은 동굴 앞에 이르자 각기 좌우에 나누어 섰다. 손남이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동굴 속에서 길게 울부짖는 소리가 나더니 '콰당 탕!' 하는 음향과 함께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바위 한 조각이 삼사 장 밖으로 날아갔다. 손남은 재빨리 여의신모를 단단히 고쳐 잡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동굴 입구에 서려 있던 안개 와 불꽃은 갈수록 짙어지면서 동굴 입구를 자욱이 가리고 있었다. 사요가 도망쳐 나올 때 안개 때문에 급소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동굴 안에서 '콰당탕! 우르릉!' 하 는 굉음이 울려퍼졌으며 그 진동으로 인해 산골짜기가 우렁우렁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남은 곧 사요가 출현하리라 생각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숨을 죽인 채 아래쪽을 눈여겨 바라보 았다. 갑자기 동굴로부터 한 무더기의 연기와 불꽃이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곧이어 어렴풋이 머 리카락을 산발한 머리통이 보였다. 손남이 급히 여의신모를 쳐들고 찌르려고 하는데 그 머리통은 다시 동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손남은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느끼고 온 정신을 집중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돌연 동굴 밖의 모든 뱀들이 고개를 높이 치켜들고 길게 부르짖었는데 그 소리는 몹시 처절한 여운을 남기고 멀리 울려퍼졌다. 이때 다시 동굴에서 짙은 연기와 불꽃이 세차게 뿜어져 나와 동굴 입구를 잠시 동안 밝혀 주었 다. 그 순간 뱀의 몸뚱이에서 사람의 머리통을 가진 한 괴물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드리 우고 질풍과 같이 동굴에서 달려나왔다. 손남은 일찍이 표창 따위를 던지는 수법을 연마한 적이 있었고 백발백중 목표물을 적중시킬 정 도로 익숙해 있었다. 이 찰나지간에 그는 단단히 여의신모를 움켜쥐고 사요의 치명적인 급소를 겨누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여의신모를 받아랏!" 이어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여의신모를 던져냈다. 금빛 광채가 사위를 확 밝히고 지나가며 한 소리 처참한 비명이 커다랗게 산에 울려퍼졌다. 여의신모는 정확하게 사요의 칠촌자(七寸子)를 꿰뚫고 사요의 머리통을 땅바닥에 못박아 놓은 것이다. 여의신모는 자루만이 보일 정도로 깊숙이 꽂혔다. 다른 뱀들은 사요가 여의신모에 의해 땅에 못박히는 광경을 보자 혀를 낼름거리며 손남이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손남은 뱀의 숫자가 많은 것을 보고 급히 검을 빼들어 몸을 지키면서 영운이 있는 쪽으로 날아 갔다. 설명으로는 길게 느껴지지만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사요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듯 머리 통을 마구 흔들어대며 꼬리를 이리저리 휘둘러치고 있었 다. 그 기다란 꼬리에 부딪힌 단단한 암석은 분분히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렸으며 파편들은 사방 으로 튀었다. 만약 손남이 일찍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머리에 맞아 중상을 입었을 것이었다. 사요는 입으로 불꽃을 내뿜으며 몸뚱이를 잇달아 네 번이나 들썩거리더니 맹렬히 머리통을 휘둘 러댔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의신모가 수십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 즉시 사요의 칠촌자에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나갔다. 그 선혈은 무려 일 장 높이까지 솟구쳐 올랐다. 사요는 상처를 입고도 앞으로 곧장 달려나갔다. 그 빠름은 질풍과 같았다. 약 백여 장쯤 달려가 던 사요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고통을 참지 못해 앞으로 달려가는 동안 땅 속에 묻어 두었던 백 팔 자루의 주사인이 하나하나 땅 위로 솟아올라 사요의 치명적인 급소를 찔렀던 것이다. 더군다나 사요가 빠르게 달리는 통에 주사인이 뱀의 배밑에 있는 흰줄을 따라 몸통을 쭉 갈라 놓았고 껍질도 난도질을 당한 것처럼 되어 땅 위에 여기저기 뿌려졌던 것이다. 사요의 신통력이 제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두 번이나 잇따라 깊은 상처를 입고 난 다음에야 고통 에 겨워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사요가 도달한 곳은 바로 영운이 서 있는 산비탈의 아래쪽 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금선은 팔짝팔짝 뛰며 기뻐하면서 급히 다가가 사요의 머리통을 자르려고 했 다. 영운이 재빨리 만류했다. "함부로 행동하지 마랏!" 금선은 흠칫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사요는 두어 번 몸부림치더니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무수한 다른 뱀들이 밀물처럼 달겨들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큰 뱀과 몸뚱이가 두 개인 작은 뱀이 사요의 껍질을 힘주어 깨물었다. 그 순간 사요가 크게 용을 쓰며 몸을 뒤틀자 사요의 알몸뚱이가 껍질 속에서 쏙 빠져나왔다. 여 전히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체를 하고 있었지만 껍질에서 나오고 보니 온몸이 눈처럼 새하얗고 비늘은 한 조각도 붙어 있지 않았다. 사요는 또아리를 틀고 사방을 노려보는 데 아마도 자기를 해친 원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영운과 금선, 그리고 손남은 아직 동심(童心)이 가시지 않은 터라 사요가 껍질에서 나오는 것만 무척 재미있어서 엄청난 위험이 닥쳐온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주매가 달려오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언니, 빨리 구슬을 던져요! 언제까지 기다릴 참이에요?"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금선은 급히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영운은 주매의 말을 듣자 정신을 차리고 급히 천황주를 꺼냈다. 그것을 막 던지려고 했을 때, 사 요는 이미 네 사람을 발견하고 길게 휘파람을 불어대더니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새빨간 불덩이 하나가 그의 입에서 쏘아져 나왔고 사방으로 연기 같은 기체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사요가 내뱉은 불덩이는 곧장 네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왔다. 동시에 뭇뱀들도 밀물처럼 달려들었다. 영운은 즉시 천황주를 내던져 날아오는 불덩이를 정확히 맞추었다. 자고로 사악함은 올바름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천황주는 손에서 떠나는 순간 무수한 빛줄기를 사방으로 발산해냈으며 온산을 웅황(雄黃) 냄새 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사요가 토해낸 불덩어리에 닿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불덩 이를 수십 조각으로 깨뜨렸다. 그 순간 자욱하게 피어오르던 연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 다. 한 떼의 독사들과 구렁이들은 이때 산비탈을 반쯤 기어오르고 있다가 천황주의 누런 광채에 뒤 덮이고 웅황 냄새를 맡게 되자 견디지 못하고 땅에 널브러졌다. 뼈가 흐물거리고 근육이 시큰거 렸던 것이다. 사요는 사태가 불리한 것을 알고 도망치려고 했다. 이때 금선의 품에 안겨 있던 주매는 그와 같은 기미를 알아차리고 금선을 밀쳐내며 소리쳤다. "저 요물의 몸에 있는 보물로 나를 구할 수 있어요. 빨리 저놈의 머리통을 잘라오세요." 금선은 재빨리 소리쳤다. "손사형, 내 대신 매누나를 좀 부축해 줘요! 내가 사요의 목을 자를 테니까." 주매는 손남을 한번 바라보더니 얼른 입을 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부축하는 것은 싫어요. 우선 나를 바위 위에 눕혀 쉬도록 해줘요." 금선은 주매의 몸이 뼈가 없는 듯 흐물거리는 것을 보자 재빨리 그녀를 바위 위에 눕히고는 홍 예검을 빼들고 산비탈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산비탈에는 누런 광채를 쐬고 죽어자빠진 뱀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영운이 살펴보니 천황주의 광채가 눈을 부시게 해서 사요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 는 급히 금선에게로 뛰어가 그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산 아래에는 누런 광채로 뒤덮혀 있어서 똑똑히 볼 수가 없다. 사요가 있을 만한 곳을 향해 검 을 날리도록 해라. 위험하니 내려 갈 생각은 말아라." 금선은 다급해서 발을 굴렀다. "빨리 나를 놓아줘! 나는 볼 수가 있어. 매누나가 중상을 입었단 말야. 사요의 몸에 있는 보물로 매누나를 구해야 해. 저것 봐, 사요가 이미 멀리 도망치고 말았잖아!" 아까 주매와 손남이 오기 전에 금선은 육지가 몹시 귀엽게 느껴져서 그 조그만 뺨에 입맞춤을 해주었는데 육지는 혀를 내밀어 금선의 두 눈동자를 핥아주었다. 금선은 시원하고 축축하며 근질근질한 느낌을 받고 매우 기분이 좋았었다. 그러나 그는 육지가 자신의 눈을 핥아준 것이 어떤 묘용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손남이 달려왔고, 육지는 급 히 땅으로 뛰어내리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금선은 와락 영운의 손을 뿌리치고 나는 듯이 동남쪽을 향해 달려갔다. 손남은 뱀떼들이 죽지 않았을까 걱정되어 뱀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을 향해 검을 날렸다. 그가 내공을 끌어올려 허공을 격하고 검을 조종하니 검은 위아래로 움직이며 뱀떼들을 마구 난자질하 기 시작했다. 영운은 손남이 검을 날리는 것을 보고 역시 검을 날려 뱀들을 토막내기 시작했다. 두 줄기의 금빛 광채는 수만 가닥의 노란 빛줄기 속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뱀떼들을 무찔렀 는데 그 모습은 마치 신룡(神龍)이 창공을 누비듯 눈부시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이 정신없이 뱀떼를 죽이기 시작하며 약 반 시진 정도가 흘렀을 때 금선의 어머니 순란 인이 금선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금선의 손에 들린 보검에는 물동이 크기만한 사요의 머리통이 끊어져 있었다. 금선은 가까이 다가오자 씩 웃으며 말했다. "뱀은 이미 죽었는데 어째서 헛수고를 하고 있나요? 장난치지 말아요." 영운과 손남은 즉시 검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순란인(荀蘭因)에게 인사를 했다. 순란인은 손을 휘저어 허공에 떠 있던 천황주를 거둬들였다. 산비탈을 바라보니 땅바닥은 토막 난 뱀들의 선혈로 인해 온똥 불그죽죽했다. 순란인은 가지고 온 호로병에서 맑은 물을 따르어 죽 어 있는 뱀떼 위에 끼얹었다. 순식간에 뱀의 몸통들은 맑은 물로 변해 땅바닥 속으로 스며들었다. 금선은 재빨리 주매에게 달려가 살펴보았다. 주매는 이미 기절 한 상태였다. 금선은 큰소리로 울 부짖으며 순란인에게 달려와 빨리 매누나를 구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순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마(情魔)로 인해 이 지경이 되었구나!" 순란인은 금선을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얘야, 놀라거나 당황할 필요없다. 저 애는 잘못하다가 암수에 걸린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는 이상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금선은 그제서야 눈물을 거두고 물었다. "그녀에게 암수를 쓴 자가 누군가요?" "먼저 저 애를 업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천천히 말해 주마." 금선은 즉시 주매를 업으려고 했다. 그러자 영운이 웃으며 말했다. "너는 너의 전리품이나 가지도록 해. 이 수고는 내가 하겠다." 금선은 그제서야 깨닫는 바가 있는지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붉어졌다. 이윽고 영운은 주매를 업 었고 금선은 검에 꿰어져 있는 사요의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았다. 막 걸음을 옮기려 할때, 금선은 갑자기 육지가 생각나 순란인에게 육지가 그를 찾아온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순란인은 빙그레 웃었다. "너는 나이가 어린 데도 자비스런 마음으로 하늘이 내려주신 신물을 취하려 하지 않았구나. 정 말 그 육지가 그 정도로 영통한 지경까지 이르렀다니 쉽지 않은 노릇이다. 아예 뿌리를 우리 동 굴에 옮겨 심도록 하고 그를 보호해 주기로 하자. 이곳에서 계속 살다가는 조만간 남에게 해를 입을 것이다." 순란인은 영운과 손남에게 먼저 동굴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그리고 금선의 손을 잡고 육지를 찾 으러 나섰다. 수십 보 정도 걸었을까? 길 옆의 흙더미 안에서 육지가 기어나오더니 두 모자를 향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순란인은 웃음지으며 감탄했다. "정말 영물(靈物)이로구나!" 금선이 달려가 육지를 안으려고 하자 육지는 몸을 돌려 달려가며 한 쪽을 향해 연신 손짓을 했 다. 순란인은 육지의 뜻을 알아차렸다. 육지는 자기가 영기를 받은 뿌리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자 하 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육지를 따라 나아갔다. 백골상문전(白骨喪門箭) 金蟬初會碧眼佛 朱梅誤中白骨箭 육지가 앞장을 섰고 금선과 순란인은 그로부터 십여 장의 간격을 두고 뒤따랐다. 그 둘이 한 벼 랑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육지의 참담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벼랑 아래에서 시 커먼 물체가 날아올랐다. 이때 벼랑 옆의 바위 뒤에서 키가 작고 퉁퉁한 사나이가 번개처럼 달려 나왔는데 그의 표정은 몹시 흉악했다. 그 자는 나타나자마자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시커먼 물 체를 낚아채고 곧장 도망을 치려고 했다. 순란인은 날카롭게 호통을 내질렀다. "감히 그 누가 이곳에서 방자한 짓을 자행하느냐? 빨리 육지를 내려놓지 못할까?" 그 사나이는 대답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 순간 그의 몸은 한 줄기 의 누런 빛줄기로 변해 번개처럼 도망을 치는 것이었다. 금선은 화가 치밀어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이 도적놈아! 남의 물건을 가로채려 하다니?" 그는 즉시 홍예검을 던졌다. 찬하대사의 진산지보는 정녕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한 가닥의 붉은 빛 줄기가 일직선을 그으며 쏘아져나가는 동시에 그 사람은 대뜸 검광에 휩싸이고 말았다. 순란인은 재빨리 부르짖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말과 함께 그녀는 홍예검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그 사람의 왼팔이 잘 라져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들고 있던 시커먼 물체도 팔과 함께 땅바닥 위로 굴렀다. 그것은 머리카락을 엮어 만든 그물이 었는데 육지는 그 속에 갇혀 있었다. 육지는 땅에 떨어지는 충격을 받고 반죽음이 되어 정신을 잃었다. 금선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그 사나이를 향해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그 사나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금선은 급히 순란인에게 물었다. "어머니, 그 도적놈은 누구입니까? 어째서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 건가요?" 순란인이 대답했다. "너는 너무나 경솔했구나. 내가 이곳에 있는 이상 어찌 그가 육지를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 두겠 느냐? 네가 함부로 검을 날려 사람을 해쳤으니 정말 야단났구나. 지금 우리 아미파에는 원수가 너무나 많거늘 그런데도 너희들은 더 많은 원한을 맺으려고 하고 있다. 조금 전의 그 땅딸보는 바로 노산(盧山) 신마동(神魔洞)의 백골신군(白骨神君)이 총애하는 제자 벽안신불(碧眼神佛) 나효 (羅梟)라는 자다. 아마도 그는 너희들이 뱀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과 이곳에 천 년 묵은 육지가 있 다는 것을 알고 어부지리를 노린 것 같구나. 그는 이곳에서 반나절을 기다리면서 이미 육지가 사 요에게 해를 입고 다른 곳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육지의 뿌리가 이곳에 있는지라 육 지가 반드시 되돌아 오리라 생각하고 계속 이곳에서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육지가 돌 아오자 가로채가려고 했던 것이야. 그런데 그는 육지를 손에 넣기는커녕 오히려 왼팔을 잃고 말 았으니....." 그녀는 말을 마치고 머리카락으로 만든 그물을 들고 바라보더니 크게 놀랐다. "이것은 백골신군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것이구나! 그렇다면 벽안신불이 백골신군의 명을 받고 왔단 말인가? 이거야말로 큰일이구나." 이때 육지는 점차 정신을 차렸지만 매우 피곤해 보였다. 순란인은 육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선(芝仙)아, 우리는 결코 너를 해치지 않겠다. 네가 우리를 따라 동굴에 가서 도를 닦고 싶어 한다면 우리가 너의 뿌리를 옮겨 심도록 해주마. 뿌리는 어디에 있느냐?" 육지는 땅바닥에 엎드려 몇 번 큰절을 올린 다음 앞장서서 걸어갔다. 어떤 바위틈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육지의 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금선은 급히 바위틈에 눈을 갖다대고 안을 들여 다 보았다. 원래 바위틈 속은 조그만 동굴이었으며 그윽한 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노라니 동굴 속의 땅에서 한 줄기의 영지선초(靈芝仙草)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오색찬란할 뿐 아니라 기 이한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었으며, 마치 선향균(仙香菌)이라는 버섯같이 생겼는데 둘레는 약 한 자 정도 되어 보였다. 그 중앙에는 네 개의 잎을 달고 있는 영지가 솟아 있었다. 순란인은 문득 북쪽을 향해 꿇어엎드 려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서 몸에서 한 자루의 죽도(竹刀)를 꺼내들고 영지가 돋아난 부근 의 흙을 가볍게 쑤셔서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어서 그녀는 '일어나라!' 하고 외 치며 영지를 뿌리째 들어올렸다. 금선이 재빨리 물었다. "육지가 변한 그 꼬마는 어디로 갔나요?" "동굴에 돌아가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너는 왜 이리 서두르느냐?" 바로 이때였다. 그윽한 향기 속에서 갑자기 일진의 비린내가 풍겨왔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바위 틈바구니 옆에 한 마리의 괴이하게 생긴 짐승이 엎드려 있었다. 생긴 모양을 볼 것 같으면 사자 의 머리에 용의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발이 여섯 개에다 뿔이 하나, 한 자나 되는 기다란 코를 지니고 있었다. 양쪽으로 두 개의 금빛 이빨이 입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이빨의 길이는 세 자 정도였다. 순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내린 영약은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고 하더니 정말이로구나. 이 독각신휴 (獨角神携)는 누구에게 해침을 당했을까? 그 때문에 영지(靈芝)는 큰 난이 닥친 것을 알고 밖으로 도망을 친 것이로구나." 금선은 그 독각신휴라는 괴상한 짐승의 가죽이 번쩍번쩍 빛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까운 생각 이 들어 껍질을 벗기려고 했다. 순란인이 입을 열었다. "이 짐승 역시 좋은 동물은 아니다. 성질이 몹시 잔인하니 껍질을 벗겨버려도 무방하다. 이 두 개의 커다란 이빨은 무쇠를 진흙처럼 꿰뚫을 수 있어 퍽 쓸모가 있을 게다. 가죽과 함께 가져가 도록 하자." 금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는 그 짐승의 가죽과 이빨을 벗기고 뽑으려 했다. 그 런데 그는 갑자기 땅바닥에 백색의 작은 화살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살은 교묘하 게 만들어져 있어서 금선으로서는 처음 보는 터였다. 금선이 화살을 만지는 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 손과 발에 찌르르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깜짝 놀라 급히 화살을 팽개쳤다. 순란인은 다가가서 화살을 집어들더니 말했다. "이것은 백골신군의 백골상문전(白骨喪門箭)이다. 조금 전 주매는 나효의 암수에 걸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단다." 금선은 급히 말했다. "어머님은 진작 그와 같은 사정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어째서 그를 놓아주셨어요? 마땅히 주매누 나의 원수를 갚아야 했어요." "우리는 역시 일을 적당한 선에서 멈추어야 한다. 다행히 주매는 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를 놓아줬겠느냐?" 금선은 주매의 안위가 걱정되어 서둘러 짐승의 껍질을 벗기고 이빨을 뽑아냈다. 그리고 껍질과 이빨을 들고 영지를 받쳐든 순란인과 함께 취선애를 떠나 동굴로 되돌아 왔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주매가 돌침상 위에 눕혀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매는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영운과 손남은 그 옆에 서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순란인과 금선이 돌 아오자 재빨리 다가와 영지를 받아들었다. 순란인은 영운에게 영지를 뒷동굴에 옮겨 심고 잘 기르라고 일렀다. 분부가 끝나자 순란인은 의 식을 잃고 누워 있는 주매 곁으로 다가갔다. 금선은 주매가 입술을 꼭 깨물고 있고 온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 채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금선은 재빨리 '매누나!' 하고 불렀으나 대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금선은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시체의 그것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는 어머니 에게 그녀를 구할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때는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눈물 을 펑펑 쏟았다. 순란인이 그를 꾸짖었다. "이 애는 요사한 인물[妖人]의 화살에 맞았다. 그러나 이 애의 도행(道行)이 심후했기 때문에 정 신을 잃긴 했으나 죽지는 않은 거야. 네가 그와 같이 슬퍼하면 이 애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고 이 애에게 이득은커녕 해를 끼치는 결과를 주게 된다." 금선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눈물을 닦았다. 순란인은 사요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했다. 금선이 명을 받아 즉시 사요의 머리통을 가져오자, 순 란인은 검으로 사요의 이마를 쪼개고 하나의 오리알만한 크기의 새빨간 구슬을 꺼냈다. 구슬이 내뿜는 붉은빛으로 인해 동굴안은 핏빛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다시 손남에게 뒷동굴로 가서 영지를 살펴보라고 분부하면서, 영지가 인간의 몸으로 변 할 때까지 지키고 있다가 자기에게 알리라고 명했다. 손남은 명을 받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란인은 품속에서 두 알의 알약을 꺼내더니 주매의 콧구멍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일곱 알 의 알약을 꺼내 주매의 입을 벌리고 입속에 넣었다. 그런 후에 주매의 가슴 옷자락을 풀어헤치고 사요의 이마에서 꺼낸 붉은 구슬을 그녀의 심장이 있는 곳에 갖다댔다. 그리고는 손으로 구슬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매의 가슴팍을 문질렀다. 약 반 시진쯤 흐르자 갑자기 주매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는가 싶더니 다시 노란색으로 변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매우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 었다. 금선은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주매를 바라보았다. 심정 같아서는 그녀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싶었다. 순란인은 알약을 먹이고 뱀의 구슬로 반나절 동안 문질렀으나 주매의 상태가 약간 호전 되었을 뿐 큰 효과가 없는 것을 보고 얼굴에 난색을 띠었다. 금선은 이와 같은 정경을 보고 몹시 초조했다. 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뒷동굴에 가서 그 영지를 가져오겠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동굴 뒤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가 뒷동굴에 가보니 영운과 손남 이 이미 영지를 옮겨 심은 이후였다. 붉은 줄기와 파란 잎사귀는 오색영롱한 빛을 발산하고 있어 보기에 매우 아름다왔다. 영운은 손남과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금선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너는 앞동굴에서 어머니가 매누나를 치료하는 것을 돕지 않고 어째서 이리로 왔느냐?" 금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가가 영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기원을 했다. 손남이 기이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제, 지금 뭐하는 거지?" 금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운이 급히 말했다. "손사형, 상관하지 말아요. 아마도 어머니께서 주매를 구하려 하시는데 치료가 잘 되지 않자, 저 아이가 걱정이 되어 지성으로 영지선초에게 주매를 낫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있는 것 같아 요." 갑자기 그 영지가 바람 하나 없는데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빛깔은 더욱 영롱하게 변했으며 짙은 향기를 발산했다.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세 사람은 폐부가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금선은 꿇어앉아 한참이나 기원을 해도 소용이 없자 화를 내려고 했다. 바로 그때 영지에서 한 줄기 붉은빛이 금선을 향해 뿜어나왔다. 이어서 영지의 줄기에서 갓난아기의 머리처럼 생긴 물체 가 불쑥 솟아났고, 곧이어 몸뚱이를 드러내더니 땅바닥으로 기어 내려왔다. 금선은 육지를 보자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손남은 여지껏 이와 같이 진귀한 광경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재미있어 했다. 육지는 금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달려와 금선의 손을 잡았 다. 금선은 재빨리 그를 잡아 일으켰다. 육지는 다시 손을 들어 앞동굴을 가리켰다. 금선은 처음에 주매가 인사불성이 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매우 초조하게 생각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육지가 사람의 수명을 늘일 수도 있고 기사회생을 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 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육지에게 그의 몸에 있는 피와 살을 조금만 내주어서 주매의 목숨을 구하 게 해달라고 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영운이나 손남이 그를 비웃을까 봐 그저 땅바 닥에 꿇어앉아 그런 부탁을 입속말로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런데 육지가 앞동굴을 가리키게 되자 자기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싶어 즉시 걸음을 옮겼다. 영운과 손남 역시 어느 정도 사정을 알아차리고 금선의 뒤를 따랐다. 앞동굴에 이르자 순란인은 육지에게 말을 건넸다. "찬하대사의 제자 주매가 오늘 백골신군의 백골상문전에 맞아 명이 경각에 달렸단다. 지선(芝仙) 아, 네가 만약 피를 조금만 써 준다면 그 효력은 지대할 것이다." 육지는 순란인의 말이 끝나자 입으로 뭐라고 재잘거렸다. 순란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선은 성질이 급했다. 육지가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물었다. "어머니, 이 꼬마가 뭐라고 하는 거지요? 저희들은 어째서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나요?" 순란인은 대답했다. "너희들은 아직 도행이 얕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지선은 자기가 세 번의 재난을 넘 겨야 정과(正果)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구나. 그는 세 번의 재난 가운데 두 번은 간신히 넘겼단 다. 우리가 자기 뿌리를 이곳에 안전하게 옮겨 심었으니 마땅히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했다. 그 런데 스스로 영액(靈液)을 내어 주면 효력은 지대하지만 이 때문에 그는 삼백 년 동안 쌓은 것과 맞먹는 도행을 상실한다는구나. 그래서 피를 흘린 이후 자기를 더욱 잘 돌보아 달라고 했어. 아울 러 훗날 다시 커다란 액겁을 당할 때 우리의 도움으로 그 액겁을 면하기를 바란다고 했단다." 금신은 얼른 물어보았다. "어머니께서는 응락하였나요?" "이것은 피차간의 좋은 일이라서 나는 응락했다." 육지는 다시 뭐라고 재잘거렸다. 순란인은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금선과 영운, 그리고 손남은 인을 모아 말했다. "지선아, 너는 안심해라. 우리는 결코 너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겠다. 이제 상처입은 사람이 매우 고통스러워하니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지선아, 어느 부분에서 피를 뽑아야 하는지 말을 해라." 육지는 그 말을 듣고 대뜸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매우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육지 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순란인 앞으로 다가가 왼팔을 내밀었다. 갓난아기와 같은 육지가 희고 부드러운 조그만 팔을 내밀고 고개를 숙인 채 팔을 찔러 피를 뽑 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자 모두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순란인은 더욱 그가 가련하고 귀엽다고 느꼈다. 그러나 사람을 구하는 일이 중대한지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육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영운에게 침대 위로 올라가 주매의 가슴팍을 문 지르라고 분부했다. 다시 금선더러 옥배(玉杯)를 가져오라고 한 후, 손남에게 옥배를 들고 지선의 팔목 아래에 갖다대어 그 영약을 받도록 했다. 순란인은 금선의 허리띠에서 한 조각의 옥결(玉結)를 떼어들고 육지에게 말했다. "지선아, 안심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시의 고통만 참으면 되니, 일이 끝나면 나는 영단을 꺼 내 너의 상처를 치료해 주도록 하겠다." 육지는 두려운 듯 두 눈을 꼭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마지못 해 고개를 끄덕였다. 순란인은 먼저 그의 왼팔을 두 번 어루만졌다. 정말 희고 부드러워 차마 손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모질게 마음을 가다듬고 오른손의 옥결로 육지의 팔 목에 있는 핏줄을 그어 한 치 정도 길이의 상처를 냈다. 손남은 무척 긴장하여 조심스럽게 옥배에다 영액을 받았다. 육지의 상처난 팔에서는 유백색의 액체가 솟아 방울방울 옥배 속으로 떨어졌다. 그 액체는 약간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는데 향기롭 기 이를 데 없는 냄새가 나서 동굴 안을 진동시켰다. 유백색의 액체는 옥배와 조화를 이루어 무 척 깨끗하고 아름다왔다. 어느덧 액체가 옥배의 절반까지 찼다. 순란인이 재빨리 말했다. "됐다. 됐어." 그런데 육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에 옥배 가득히 유백 색의 액체가 담겼을 때에야 육 지는 고개를 끄덕여 됐다는 시늉을 했다. 순란인은 재빨리 품속에서 두 개의 알약을 꺼내 손으로 문 질러 가루로 만들어 육지의 상처에 발라주었다. 금선이 육지를 바라보니 얼굴은 몹시 초췌해 있었고 탈진한 듯 후둘거리고 있었다. 그는 귀엽기 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대뜸 육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순란인이 재빨리 말했다. "경솔한 행동을 하지 말아라. 그는 원기를 크게 잃었다. 너는 빨리 너의 옷자락을 풀고 지선을 가슴에 꼭 대고 끌어안도록 해라. 너의 동양(童陽)으로 그의 진기(眞氣)를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 다. 절대로 그가 땅 속으로 들어가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매를 우선 치료한 다음 다 시 그를 구하도록 하마." 금선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순란인은 급히 손남의 손에서 육지의 피가 담긴 옥배를 받아들 고 침상 위에 올라가 주매를 내려다보았다. 뱀의 구슬로 가슴을 문지른 결과 안색은 훨씬 좋아져 있었다. 하지만 입을 꽉 악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신을 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순란인은 영운에게 옥으로 만든 숟가락을 가져오라고 해서는 조금씩 영지의 피를 떠서 주매의 입을 벌리고 먹이려고 했다. 그리고 보니 처음 그녀의 입속에 넣었던 일 곱 개의 알약은 여전히 그녀의 이빨과 입술 사이에 끼여 있었다. 아직 삼키지 못한 것이다. 순란인은 속으로 백골상문전의 무서운 독성을 상기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영단이 효과가 없었던 것이 무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영지의 피를 먹인다고 해도 목구멍을 통해 뱃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흘러나오게 된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만다. 순란인은 감히 경솔하게 손을 쓰지 못하고 금선을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 영지를 손남에에 안겨 주어 손남으로 하여금 가슴팍에 육지를 품고 있으라고 일렀다. 그런 후에 순란인은 금선에게 말했다. "주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어서 영지의 피가 아니고서는 살릴 도리가 없다. 그런데 밖의 독 은 사요의 구슬에 의해 해소되었지만 체내에 스며 있는 독은 가시지 않았다. 네가 입안에 영지의 피를 머금었다가 그녀의 입속에 넣어주도록 해라. 그녀가 너의 진양지기(眞陽之氣)를 얻게 된다면 효과가 클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너에게 손해만 있을 뿐 이득은 없다. 너는 그렇게 할 용의가 있느냐." 금선은 곧 대답했다. "매누나는 원래 저 때문에 독수에 당한 것입니다. 그녀를 구할 수만 있다면 끓는 물 속이나 타 는 불길 속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겠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우선 이 영지의 피를 입에 조금 머금도록 해라. 그리고 두 손으로 그녀의 아래 턱을 비틀어라. 그녀의 아래턱이 내려와 입이 벌어졌을 때 너는 너의 입을 그녀의 입에 갖다대고 영지의 피를 흘려 주어라. 너희 두 사람의 입은 영지의 피가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꼭 밀착되어야 하며 조금의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연후에 너는 그녀의 몸 위에 네 몸을 포개고 손을 등 뒤로 돌려 그녀를 힘껏 껴안도록 해라. 그리고 단전(丹田)의 진기를 끌어올려 그녀의 몸속으로 밀어넣도록 해라. 만약 그녀의 뱃속에서 '쭈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구린내가 나는 탁한 기운이 그녀의 입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지거든 너는 반드시 힘을 다하여 그 탁기를 그녀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탁기가 반드시 아래쪽으로 내려가도록 해야지 위로 거 슬러 오르도록 해서는 안 된다." 금선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서로 정을 주고받으며 허물없이 지내던 아름다운 소녀가 요인(妖人)의 암수에 걸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가 옆으로 다가오자 한 쌍의 맑은 눈동자를 들어 그를 응시하 는데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너무나 측은하여 금 선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무시하고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누나, 어머니께서는 나보고 누나를 구하라고 하셨어요. 고생스럽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내가 누 나의 입을 벌려 약을 삼킬 수 있도록 하겠어요." 주매는 여전히 두 눈을 뜬 채 입을 꼭 악물고 있을 뿐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 금선은 모질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두 손으로 주매의 턱을 잡고 힘주어 비틀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턱이 빠지고 앵두 같은 입술이 벌어졌다. 금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어머니의 말 에 따라 주매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포갠 다음 그녀의 등 뒤로 팔을 돌리고 힘껏 껴안았다. 순란인은 재빨리 옥배를 금선의 입가로 가져갔고, 금선은 즉시 한 모금 육지의 피를 머금고 주 매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다행히 주매는 입이 작았기 때문에 금선은 그녀의 입을 자기의 입으로 완전히 막을 수 있었다. 과연 영지의 피는 영험했다. 잠시가 지나자 '꼴깍!' 하는 소리가 나며 영지의 피는 주매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금선은 영지 의 피가 그녀의 뱃속으로 들어간 것을 느끼자 재빨리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단전에서 한 줄기의 진 양진기를 끌어올려 그녀의 입을 통해 밀어넣었다. 그러자 주매의 뱃속에서 '꾸루룩 꾸루룩' 하는 소리가 자꾸 났다. 그녀의 안색도 점차 불그레한 화색을 되찾고 있었다. 조금 전 금선이 몸을 포갤 때만 해도 그녀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차갑기 그지없었으며 입과 혀 역시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의 몸이 마치 온옥(溫玉)처럼 따뜻하고 은은 한 여인의 체향마저 풍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어찌나 따스하고 보드라운지 금선은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주매의 뱃속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갑자기 그녀는 트림을 했고, 곧이어 한 모 금의 비릿하고 구린내가 나는 탁기가 목구멍을 통해 뿜어져 올라왔다. 금선은 이미 준비하고 있던 터라 재빨리 운기행공을 해서 그 탁한 기운을 되돌려 보냈다. 나오 려는 기세와 되돌리는 기운이 약 반 잔의 차를 마실 시간 동안 실랑이를 했을 때 주매가 '뽕!' 하 고 방귀를 귀었다. 그 냄새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금선은 코를 감쌀 여유도 없이 재빨 리 단전의 기운을 재차 끌어올려 그녀의 입속으로 밀어넣었다. 이때 순란인이 입을 열었다. "됐구나, 됐어.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얘야, 그만 일어나거라." 이미 주매의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금선이 자기의 몸 위에 업드려 입으로 자기의 입술을 막고 떼지 않자 수치심에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후딱 몸을 일으켜 앉았다. 금선은 이런 기습적인 사태를 예비하고 있지 못했던 연고로 털썩 하니 침대 밑으로 나가떨어지 고 말았다. 주매는 세상에 태어날 때 영근(靈根)을 타고 난 몸인 데다 황산에서 몇 년간 수련을 한 결과 검 술에 있어서는 단단한 기초가 닦여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사한 인물의 암수에 걸려들었는 데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부끄럼 때문에 금선을 나자빠지게 만든 데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손을 뻗 쳐 그를 부축하려고 하다가 머리가 어지러워져 그녀는 다시 침대 위에 쓰지려고 말았다. 이때 금 선은 막 몸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그 역시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순란인은 재빨리 주매에게 소리쳐 명했다. "너의 몸에 스며들었던 요사스러운 독은 이미 모조리 가셔졌으나 정신이 아직 흐릿한 상태이다. 예의에 구애받지 말고 잠시 누워서 정신을 차리고 힘을 회복하도록 해라." 그러면서 순란인은 손을 써서 그녀의 턱을 원래의 위치대로 맞추어 주었다. 주매는 몸이 나른하 여 일어나 앉을 수가 없자 어쩔 수 없이 순란인이 지시한 대로 정신을 가다듬는 한편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아랫도리가 축축한 것을 느꼈다. 손으로 만져보던 그녀는 너무 나 부끄러워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녀는 즉시 손짓으로 영운을 불렀다. 영운이 가까 이 다가가자 주매는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순란인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고 금선과 손남을 동굴 밖으로 내보내면서 육지 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알약을 꺼내 육지에게 먹여주고 뒷동굴의 영지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앞동굴로 돌아와 보니 주매는 이미 영운의 옷으로 바꿔입고는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가다 듬고 있었다. 주매는 순란인에게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한다는 인사를 했다. 순란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 백골전(白骨箭)은 정말 대단하더구나. 만약 지선이 자기의 몸을 해치면서 구하지 않았더라면 천하에서 오직 숭산이로(嵩山二老)만이 너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숭산이로는 수천 리 나 떨어져 있으니 그들의 해약을 얻기 전에 너는 죽었을 거야. 설사 그들의 해약이 있다손 치더 라도 이토록 쉽게 회복할 수는 없었을 게다." 이때 금선이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어쩌다가 백골전에 맞았느냐고 물었다. 주매는 그때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대와 함께 개울물에 손을 씻을 때 까마귀가 울며 날아 가는 것을 보고 옆에 다른 사람 이 있으리라 짐작을 했어요. 외부의 사람이 있어 우리가 한창 사요를 잡느라고 분주한 틈을 타서 육지를 잡아갈까 봐 매우 걱정이 되더군요. 나는 이미 육지가 뿌리내린 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들이 사요를 잡을 동안 그곳으로 달려가 육지가 오기를 기다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곳에 가는 도중에 다리가 여섯 개 달리고 하나의 뿔을 가진 괴물을 발견했답니다. 나는 본래 그 짐승을 해치지 않고 방법을 강구해서 그 짐승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짐승은 갑자기 미친 듯이 울부짖더니 벼랑 뒤쪽에 있는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뭐예요. 내가 그 짐승을 추격하는데 뒤에서 바람소리가 났어요. 나는 누군가가 암습을 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재빨리 몸을 날려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어요. 나는 즉시 왼팔이 마비되고 머리가 어지러우며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요사한 수법에 당했다는 사실을 직감했 지요. 나는 보검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아 급히 그대들이 있는 곳 을 향해 달려갔어요. 그래서 그대들의 옆에 이르자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어서 쓰러졌던 거예요. 그때부터 온몸이 끓는 가마솥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극렬한 고통이 오더군요." 금선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매누나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매우 당황했어요. 매누나가 사요의 몸에 보물이 있다고 하기에 나는 사요를 추격해 갔지요. 그 사요는 이미 반 마장이나 도망친 후였는데, 내가 뒤를 쫓 는 것을 보고 고개를 쳐들더니 한 모금의 안개와 같은 기체를 내뿜더군요. 그때 마침 어머니가 달려오셔서 검광(劍光)을 발출해 사요의 독기를 막아주셨고, 그제서야 나는 칼을 휘둘러 그 사요 를 몇 토막으로 잘라 머리통을 떼어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어머니는 사요의 이마빡에서 한 알의 둥글고 붉은 구슬을 꺼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대가 말하던 보물인가요?" "맞아요." 순란인이 설명을 했다. "이 구슬은 사보(蛇寶)라고 하며, 천 년 묵은 독구렁이의 정화(精華)란다. 아무리 무서운 독에 중 독되었다 하더라도 이 구슬을 전신의 살갗에 대고 문지르기만 하면 독을 모조리 몰아낼 수 있지. 그러나 이번에 사요를 죽이면서 백골신군과 원한을 맺게 되었으니 우리는 또 한 사람의 강적을 만든 셈이다." 영운이 끼어들었다. "그 자가 제자를 시켜 나쁜 짓을 하게 하고 몰래 사람을 해치게 한 걸로 보아 그 사람은 악독한 무리임에 틀림없어요. 그렇다고 우리가 그를 두려워해야 한단 말씀이에요?" 순란인이 말했다.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다." 주매는 여러 사람들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황산으로 되돌아 가 사부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란인은 남아 있는 영지의 피를 그녀에게 복용시키고 영운이 빌어온 몇 가지의 법보를 되돌려 주었다. 주매는 무척 피곤해져 있었으므로 영운과 금선 두 사람을 함께 딸려 보내면서 찬하대사 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라고 했다. 세 사람은 순란인에게 인사를 하고 동굴을 나섰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세 사람은 경신술을 전개해서 황산을 향해 달려갔다. 동굴에 남아 있던 순란인은 손남에게 말했다. "돌아오다가 너의 사부와 추운수(追雲搜)를 만났지. 우리는 각 문파가 검을 겨룰 일에 대해 의논 한 바 있다. 추운수는 내년 정월에 우선 자운사를 파괴하고 그 일당을 없앤 다음에 다시 일을 상 의하자고 하셨어. 나도 물론 찬성을 했지. 나의 계산에 따르면 정식으로 아미산에서 검을 겨루는 시기가 오려면 아직 삼십오 년이 흘러야 할 것이다. 너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심지가 굳으니 누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함께 선공을 연구하고 연마하도록 하자. 나는 이미 너의 사부님께 이와 같은 말씀을 올렸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손남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 급히 무릎을 꿇고 은혜에 감사 드린다는 인사를 올렸다. 이때부 터 손남은 구화산에서 영운, 금선과 함께 검술을 연마했다. 문전축객 金羅漢訪友紫金瀧 許飛娘傳書五雲步 한편 금신나한(金身羅漢) 법원(法元)은 구화산(九華山)에서 영운과 검술을 겨루면서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다가 공교롭게도 허비랑(許飛娘)을 만났었다. 그는 겉으론 싸움을 말리는 듯하면서 몰 래 법원을 깨우쳐 주었다. 그제서야 그는 영운이 건곤정기묘일진인(乾坤正氣妙一眞人) 제수명(齊 漱溟)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그는 큰일났다 싶어 기회를 틈타 물러 섰다. 그후 법원은 구화산을 떠나 금정(金頂)으로 향했다. 그는 금정으로 길을 재촉하다가 문득 떠오르 는 생각이 있었다. '구화산이 묘일부인 순란인의 별부(別府)가 되었다면 사자천왕(獅子天王) 용화(龍化)와 자면가람 (紫面伽藍) 뇌음(雷音)은 금정봉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 금정까지 가보았자 헛수고만 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그는 그와 같은 생각을 했지만 여전히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금정이 멀지 않으니 헛수고를 하는 셈치고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약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되어서 그는 금정 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즉시 용화와 뇌음이 함께 살고 있는 귀원사(歸元寺)로 걸음을 옮겨놓 았다. 귀원사의 산문(山門)은 활짝 열려 있었고, 산문 앞에는 시든 풀포기와 마른 나뭇잎이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절간 안에는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었다. 대전 안에 들어가보니 대전에 모 셔 놓은 부처상 위에는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박쥐들은 사람이 들어오자 이리저리 푸드득 거리며 날아올랐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법원은 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선방 안에 들어가보니 역시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한 자루의 검은 빛이 나는 선장(禪丈)이 두 토막이 난 채 뒹굴고 있었다. 어떤 무기에 맞아 부러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래 그 선장은 순수한 강철로 만든 것이었고 용화가 항상 휴대하고 다니던 무기였다. 법원은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땅바닥에는 한 무더기의 핏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산이 높고 날씨가 추운 탓으로 그 핏덩이는 얼음이 되어 있었다. 법원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곳에 아미파 검선의 동부(洞府)가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산에 살고 있는 사람은 비 단 제수명 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많고 세력이 크다. 그들에게 발견되는 날이면 재수없는 일이 벌어질 게다. 이와 같이 생각한 그는 급히 귀원사에서 떠났다. '이번에 내가 집을 나선 이유는 몇 명의 조력자를 찾자는 데 있었다. 헛수고만 하고 말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허비랑으로 말하면 교조(敎祖)가 죽은 이후 동문의 사람들은 그녀가 원한을 갚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모두들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그 녀가 깊은 뜻이 있어서 본색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 전 산 아래에서 만났을 때 보니 허비랑은 어디에 갔다가 돌아오는 모양이던데, 황산이 지척지간에 있으니 그녀에게 한번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그녀가 지금 당장은 나를 도와주지 못할지 모르나 적어도 용화와 뇌음 두 사람의 종적은 알아낼 수 있을 게다.' 법원은 생각을 마치자 곧장 황산을 향해 경신술을 전개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법원은 일찌기 황산을 두 번 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허비랑이 은거하고 있는 곳은 오운보(五 雲步)였다. 오운보는 산에서 가장 높고 추운 곳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가장 은밀한 곳이라서 법원 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소문에 듣기로는 찬하대사 역시 그곳에 은거하고 있다고 했으므로 법원은 어검비행술(馭劍飛行 術)을 써서 날아가면서도 매우 조심했다. 이윽고 그는 황산 앞에 있는 문필봉(文筆峯)의 오솔길로 들어섰다.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니 산계 곡이 층층으로 이어져 있고, 산봉우리 역시 첩첩하기 그지없어 어느 곳이 허비랑이 은거하고 있 는 오운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텅빈 산속은 적막하기만 했다. 오래 된 나무와 까마귀의 울음소리, 그리고 솔잎이 부딪치는 소리 외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 아볼 수 없었다. 이토록 드높은 황산에서 어디로 가야 오운보를 찾을 수 있을지 막연하기만 했다. 정말 난감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 갑자기 멀리서 허공을 가르는 미세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그는 급히 고개를 쳐들고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공중에 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얼 핏 보기에 한 나이어린 동자(童子) 같았다. 갑자기 허공에서 무엇인가가 땅바닥에 '탁!' 하는 소리 를 내며 떨어졌다. 그 순간 동자의 모습은 똑바로 동북 쪽을 향해 날아가 어느 사이엔가 보이지 않았다. 법원은 즉시 떨어진 물건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때였다. 발밑의 계곡에서 하얀 그림자가 어 른거리더니 그 물건 옆으로 달려가 집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동작은 화살과도 같이 빨랐는데 눈여겨 바라보니 흰옷 걸친 소녀였다. 법원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녀는 이미 허공에서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법원은 그 물건이 한 조각의 돌멩이고 거기에 한 가닥 붉은 실로 편지 한 통이 매어져 있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날아 간 자가 그 소녀에게 떨어뜨려 준 것이라고 여기고 별로 주 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창산에는 선령(仙靈)들이 살고 있는 동굴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 타난 소녀의 동작이 평범한 사람 같지가 않은지라 더 이상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몸 을 돌려 떠날려고 했다. 갑자기 발밑의 계곡에 나 있는 동굴 속에서 남색 옷을 입은 소녀가 걸어나오며 말했다. "사매, 손에 넣었느냐? 무슨 물건이지?" "한 통의 편지예요.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보기로 해요." 이때 그녀들의 말투나 행동거지는 법원이 옆에 있는 것을 모르는 듯 방약무인했다. 법원은 문득 어디가 오운보인지 모르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두 소녀가 이 산에 살고 있는 걸로 보아 그 녀들의 어른은 반드시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슬쩍 말 머리를 돌려 수소문을 해봐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앞으로 몇 발짝 나서며 말 을 건넸다. "두 분 여시주께서는 잠시 발을 멈추시고 제 말씀을 좀 들어주시오. 빈승이 여쭐 말이 있소이 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보이는 남의 소녀는 백의 소녀로부터 편지를 건네받으며 입을 열었다. "대화상께선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황산에 찬하대사란 분이 계신다고 히더군요. 그분이 어디에 살고 계신지 두 분 시주는 아시는 지요?" 두 소녀는 법원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분은 우리의 사부님이에요. 화상께서는 어째서 사부님을 찾으시는지요?" 법원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움찔 놀랐다. 원래 그는 찬하대사를 피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상대 방에게 스스로 찾아든 꼴이 아닌가? 법원은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빈승은 만묘선고 허비랑과 일면식이 있는 사이외다. 그녀는 스스로 말하기를 찬하대사와 이웃 에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오운보에 살고 있다는 말도 했지요. 그런데 이 산이 너무 광활하여 그 녀가 있는 곳을 찾을 도리가 없구려. 그래서 대사님이 살고 계신 곳을 알아낸다면 자연히 그 옆 에 살고 있는 허비랑도 만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오." 소녀는 이 말을 듣더니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띠었다. "대화상의 법호는 어찌 되시는지요?" 법원으로 말하면 오대파에서는 제법 세도깨나 있는 인물이었다. 두 소녀 앞에서 자기의 이름을 숨기다가 나중에 탄로나게 된다면 찬하대사를 두려워해서 자기의 이름마저도 밝히지 못했다는 비웃음을 받게 되겠구나 싶었다. 법원은 즉시 대답했다. "빈승은 법원이라 하오." 남의 소녀는 그 말을 듣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대가 알고 보니 금신나한 법원이군요? 저는 사부님으로부터 그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대는 허비랑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그대에게 주는 편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저희 자매 두 사람이 보고 난 후에 그대에게 되돌려 드리도록 하죠." 말을 하면서 그녀는 편지를 쳐들어 보였다. 법원은 그제서야 편지를 똑똑히 살펴볼 수 있었다. 과연 편지 위에는 <법원신사 친전>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법원은 다급해졌다. "그것은 빈승의 사사로운 편지인데 다른 사람이 어찌 볼 수 있단 말이오? 농담은 그만둡시다." 소녀는 그 말을 듣더니 방그레 웃었다. "옛말에 '주운 것은 산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삼 년이 흐른다 해도 되찾아 갈 수 없다'고 했어 요. 이 편지는 우리가 주운 것이지 그대의 절에 가서 훔쳐온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도를 닦는 사 람은 언제나 광명정대해야 하는 법이죠. 그대는 화상이고 그녀는 도인이에요. 설마하니 화상과 여 도인이 남에게 알리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그런가요? 그렇지 않 다면 어째서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무서워하나요? 그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산골짜기를 통과하 는 사람이니 반드시 우리의 승인을 받아야 해요. 만약 좋지 못한 뜻을 지니고 이곳에 왔다면 그 대는 오기는 쉬웠지만 떠나기는 무척 힘들 것이에요." 법원은 그 소녀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담을 하는 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자 기를 모욕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가슴 가득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억제하고 생각에 잠겼다. '허비랑이 편지를 써서 나에게 준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허비랑과 아미파는 겉으로 는 친숙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은 그 반대다. 만약 편지에 불리한 말이 쓰여 있다면 자칫 일 을 그르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찬하대사가 이곳에 있는지도 모르며 함부로 손을 쓸 수도 없 구나. 이거 정말 일이 어렵게 됐는 걸.' 법원은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억지로 누르고 기회를 보아 편지를 빼앗아 도망치리라고 마음먹었 다. 그 소녀는 무척 영리했다. 법원이 슬금슬금 다가서자 얼른 편지를 백의소녀에게 건네주며 말했 다. "사매, 네가 빨리 보아라. 대화상께서 무척 다급해 하시는 것 같구나." 법원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버럭 노성을 질렀다. "만약 편지를 되돌려 주지 않는다면 빈승은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남의소녀는 재촉했다. "사매, 어서 빨리 편지를 뜯고 읽어! 내가 이 화상을 상대할 터이니!" 백의소녀가 편지를 뜯으려 하고 법원이 막 칼을 뽑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봉우리 뒤쪽으로 한 사람이 날아오며 고함을 질렀다. "두 분 누님, 손을 쓰지 마시오! 이 불쌍한 사람의 얼굴을 봐서라도 손을 멈춰주시오!" 백의소녀는 그 말을 듣고 즉시 편지를 뜯던 손을 멈추었고, 법원 역시 칼을 반쯤 검집에서 뽑은 채 행동을 멈추었다. 달려오는 사람은 십육 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몸에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순 식간에 지척지간에 이르러 두 소녀에게 손을 내저어 보이고 이어 법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숙(師叔)께선 노기를 가라앉히십시오. 제가 사숙을 대신해서 편지를 되돌려 받도록 하겠습니 다." 법원은 나타난 소년이 자기를 보고 사숙이라 부르는 데도 그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흑의소년이 좋은 일을 해주겠다는데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빈승은 본래 손을 쓰려고 하지 않았소이다. 그저 편지만 되돌려 받으면 돼요." 그 흑의소년은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두 분 누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구려. 이 편지는 내가 전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오. 만약 임무 를 완수하지 못하게 된다면 저는 우근편(牛筋鞭: 쇠 힘줄로 만든 채찍)에 오백여 차례나 두들겨 맞아야 한다오. 오백대의 채찍을 맞고 어떻게 살 수가 있겠소?" 백의소녀가 입을 열었다. "언니, 그가 사정을 하니 이 편지를 돌려주도록 해요." 그녀는 법원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이 사람이 나서서 사정하지 않았다면 오늘 그대는 몸성히 떠나기 어려웠을 거예요." 법원은 울컥 화가 났으나 억지로 심화를 가라앉히고 편지를 받아 품속에 간직했다. 흑의소년이 입을 열었다. "저의 사부님이 바로 허비랑이십니다. 저보고 편지를 주시면서 사숙님께 건네주되 사숙을 직접 대면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조심을 하지 못해 편지가 두 분 누이의 손에 들어가고 말 았던 거죠. 하지만 뜯어보지 않았으니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훗날 저의 사부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사숙께선 이 일을 들먹이지 말아주십시오." 법원은 고개를 끄덕여 응락했다. 그리고 두 소녀가 다시 함부로 입을 놀릴까 두려워 발로 땅을 차며 허공으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산등성이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흑의소년은 두 소녀를 향해 다시 고맙다는 말을 했다. "두 분 누님이 나의 체면을 세워주셔서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남의소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조금 전 사매와 함께 계곡 아래의 동굴 속에서 놀고 있었어요. 갑자기 한 사람이 날아오 는 것을 보니 다른 문파 사람이더군요.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대가 허공을 날아오더군요. 처음에는 그대가 지난 해처럼 우리들과 놀기 위해 날아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대가 편지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얼른 사매가 나가서 편지를 가로챘던 거예요. 이때서야 나는 그 편지가 그 화상에게 가는 것인 줄 알게 되었죠. 그런데 그 자는 바로 사부님께서 가끔 말씀하시던 금신나한 법원이 아니겠어요? 우리는 본래 남의 사사로운 편지를 보 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그저 그와 잠깐 동안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었죠. 그런데 그대는 금년 에는 어째서 우리에게 와서 같이 놀아주지 않는 거죠?"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운수가 사나운 사람이랍니다. 부모님을 여의고 온 가족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지요. 간신히 지금의 사부님을 만나게 되었고, 나는 사부님을 따라 산 위에 올라와 검술을 익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사부님께서 종종 나를 데리고 찬하대사님을 찾아뵙기 도 하고 여러 누이들과 어울리도록 했지요. 그땐 얼마나 좋았습니까? 그런데 작년에 가사께서 외 출하셨을 때 저는 갑갑하고 따분한 나머지 누님들을 만나보고 싶어 이리로 달려왔어요. 그 광경 을 사제인 설망(薛莽)이 목격하고 사부님께 있지도 않은 일까지 날조하여 고자질을 했답니다. 그 리하여 나는 가사로부터 우근편으로 오백 대의 매를 맞았죠. 그때 하마터면 근골을 못 쓰게 될 뻔했소이다. 수개월 동안 조섭을 한 후에야 비로소 완전히 치유할 수 있었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심오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으며 이곳에 와서 놀아서 도 안 된다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그저 고된 일과 거친 뒷바라지를 하라고 하셨답니 다. 나에 대한 대우는 옛날에 비하면 현격한 차이가 생겼던 거랍니다. 오늘 이 봉우리 위에 내려 서지 말라고 하신 것도 아마 내가 누이들과 만나는 것을 꺼려하셨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두 소녀는 그 말을 듣고 그를 매우 동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대가 이곳에 오질 못했었군요." 이때 갑자기 허공에서 한 줄기의 푸른 광채가 번쩍거렸다. 흑의소년은 그 광채를 보더니 깜짝 놀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 분 누님은 나를 아랑곳하지 마시고 빨리 피하시오. 사제인 설망이 왔소이다. 만약 그가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사부님께 고자질을 할 것이고 내 목숨은 부지하기 어렵 게 될 것입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절벽 밑에 있는 동굴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 직후 푸른 광채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십칠 세 가량의 소년 이었다. 두 소녀는 그를 보는 순간 대뜸 얼굴에 증오하는 빛을 드러냈다. 그 소년은 키가 매우 작 았다. 일신에는 붉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발에는 망혜(芒鞋)를 신고 있었으며 길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것은 승려나 도인의 차림새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푸르스름한 힘줄이 돋아 있었고 두 눈썹이 만나는 곳에는 눈처럼 생긴 자색의 점이 있었다. 입술은 뒤집어졌고, 그 사이로 싯누런 이빨이 드러나 있었다. 진정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이 자가 바로 허비랑이 가장 총 애하는 제자로서 삼안홍예(三眼紅霓) 설망이었다. 설망은 두 소녀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두 소녀는 그 를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러 상관없는 대화를 늘어놓았다. 마치 방금 동굴에서 나온 듯한 태도였 다. 설망은 아무리 살펴봐도 흑의소년이 보이지 않자 이윽고 동굴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유심히 살펴 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끝내 참을 수 없는지 입을 열었다. "두 분 도우(道友)께서는 혹시 나의 사형 사도평(司徒平)을 보지 못했소?" 백의소녀가 뭐라고 말을 하려 할때 남의소녀가 먼저 얼른 입을 열었다. "사도평 말이에요?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그를 찾고 있는 중이었어요. 작년에 우리들과 그가 반 나절 동안 이야기를 한 다음에 그는 우리 경운 사매가 가지고 있던 천운노(穿雲弩)를 빌어가면서 다시 올때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어요. 대사께서는 우리보고 이곳에서 떠나면 안 된다고 분부하셨기 때문에 가서 달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그대가 그를 만나게 되거든 아무쪼록 천운노를 우리에게 돌려달라고 전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는 너무도 태연자약했다. 설망은 사도평이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의심했으나 증거를 찾을 수가 없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분명히 붉은빛이 서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째서 그가 보이지 않는 거지?" 남의소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빛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혹시 그 여검선(女劍仙)이 황산에 나타났단 말이에요?" 설망은 대답하지 않고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홱 돌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의소녀는 불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좀 봐. 자기는 물어보면서 나의 질문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잖아? 정말 어처구니가 없 군!" 설망은 그 소녀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나 짐짓 못 들은 척했다. 남의소녀의 그 말을 듣고 설망은 사도평이 이곳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곧 다른 곳으로 사형을 찾아 떠나갔 다. 두 소녀는 설망의 모습이 사라진 연후에야 사도평에게 굴 속에서 나오라고 했다. "그대의 사제가 갔어요. 이제 그대도 돌아가세요." 사도평은 동굴에서 걸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나와 그는 앙숙이랍니다. 그는 전문적으로 나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답니다. 가사께서 나더러 편지를 전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일부러 내 뒤를 미행하여 나의 잘못을 찾아내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대는 돌아가도록 하세요. 만약 부득이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하세요. 오늘밤 내가 사부님께 그대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어요." 남의소녀의 말에 사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날도 저물었으니 더 이상 남아 있을 수도 없구려. 두 분 누님의 은혜는 정말 잊지 않겠소 이다." 말이 끝나자 그는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이 두 소녀 가운데 나이가 어리고 흰옷을 입은 소녀는 바로 찬하대사의 제자인 주매였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남의소녀는 오문기(吳文琪)로서 찬하대사의 대제자였다. 그녀는 주경운(周輕 雲)보다도 먼저 입문했다. 검법을 매우 심오한 경지까지 수련했으며 찬하대사의 절기를 대체로 전 수받은 상태였다. 그녀의 어검비행술은 그야말로 자취를 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빨랐다. 번개를 방불케 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여공공(女空空)이라고 불렀다. 문필봉은 바로 찬하대사가 그녀 에게 검법을 연마하도록 지정해 준 장소였다. 대사는 주매를 시켜 오문기가 지니고 있는 여의신모를 얻어다가 금선을 도와 사요를 죽이라고 했던 것이다. 여의신모를 비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법원을 만나게 되었고,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별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훗날 허비랑이 사용한 백령참선검 (百靈斬仙劍)과 이번의 사건은 큰 관계가 있다. 이때 법원은 문필봉을 떠나 운소(雲巢)를 돌아 한 조용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서 편지를 뜯어보 았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검술을 아직 완벽히 연마하지 못했으므로 얼마 동안은 도와드리기가 힘듭니다. 효월선사(曉月 禪師)께서 서쪽에서 오셔서 연화봉(蓮花峯)에 있는 자금롱(紫金瀧)의 절경에 흠뻑 매료되시어 그 곳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분께 가셔서 도움을 청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보다 훨씬 커다란 도움을 베풀 것입니다.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아는 사람으로부터.> 법원은 편지를 읽고 난 다음 크게 기뻐했다. '그렇지 않아도 효월선사를 찾아갈 참이었는데 마침 이곳에 계셨군! 타전로(打箭爐)까지 가는 헛 수고를 던 셈이로군.' 그는 편지를 품속에 간직하고 즉시 연화봉을 향해 달려갔다. 연화봉과 천도봉(天都峯)은 황산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자금롱은 연화봉에서 얼마 떨어지 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경치가 그윽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과거 천심도인(天心道人)이 이곳에 은거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법원은 연화봉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입설대(立雪台)를 올라가 다시 백보운제(白步雲梯)를 건너 형태가 자라처럼 생긴 동굴 입구를 가로질렀다. 뭇봉우리들은 높고 장엄했으며 안개가 사방 에 자욱히 깔려 있어 정말 별천지를 이루고 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앞쪽에 앙상한 나무들이 빽빽히 늘어선 숲이 나타났다. 그 숲 중앙으로 한 폭의 흰 비단폭이 가로지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법원은 그와 같은 현상을 일컬어 운포해(雲浦海)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몽롱한 안개 가 뭉쳤다간 흩어지고 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하얀 비단폭을 펼쳐 놓은 듯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때 뭇산봉우리들은 하얀 구름 위로 뾰족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백옥응지(白 玉凝脂), 위로 수십 개의 옥롱(玉瀧)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것 같아서 매우 보기가 좋았다. 고개를 돌려 동북쪽을 바라보니 하늘은 유난히 맑게 개여 있었다. 서편 하늘을 살펴보니 붉은 해가 중앙의 가장 높은 봉우리 위에 얹혀 있었는데 그 모습은 걸려 있는 것도 같고 산봉우리에 의해 떠받쳐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진정 인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홀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법운은 잠시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 다. 그런데 구름은 갈수록 짙어져 가기만 했고 맞은편은 그저 허옇게만 보였다. 그 때문에 산바위 사이로 나 있는 길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자금롱은 산세가 험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산길 아래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골짜기였다. 골짜기 밑에는 날카롭게 모가 난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그 난석더미들은 길이가 무려 일 장이나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을 향 해 무섭게 곤두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까딱 실수하여 미끄러지는 날이면 몸뚱이는 처참하게 박살이 나고 만다. 법원은 다년간 무술을 수련한 검선으로써 허공을 타고 날으는 어검비행은 할 수 있었지만 이와 같이 험악한 길을 만나게 되고, 또 구름이 자욱하여 맞은편의 경물을 도무지 바라볼 수가 없는지 라 감히 모험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시 주저하는 사이에 구름은 점점 사방에서 몰려들었고 날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오늘 효월 선사와 만나기는 어려우니 차라리 이곳에서 하룻밤을 새고 내일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황산의 산봉우리 위에는 사시사철 강풍(强風)이 무섭게 휘몰아 치고 있었다. 더우기 지금은 엄동 설한이었다. 수도한 사람은 비록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법원으로서는 참 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입설대로 내려가 바람을 피할 만한 동굴을 찾아 하룻밤 을 묵었다.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 일어나서 산세를 살펴보니까 구름은 이미 흩어지고 없었다. 그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자금롱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이윽고 그는 자금롱에 이르렀다. 자금롱의 양쪽은 천야만야의 절벽이어서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인데 두 개의 절벽 사이로 백사강(白沙江)의 물줄기가 떨어져 내리는 큰 폭포가 걸려 있었다. 폭포물이 떨어지는 음 향은 천둥소리처럼 굉장했으며 떨어지는 기세는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법원으로서는 효월선사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법원은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 았다. 홀연 폭포가 떨어져 호수를 이룬 저 건너편에 한 명의 소사미(少沙彌)가 등에 커다란 물통 을 짊어지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소사미의 행동은 상당히 민첩했다. 소사미는 날 듯 경쾌한 걸음걸이로 개울가에 이르더니 맑은 개울물을 물통에 길었다. 둑과 개울 물을 수장의 간격이나 떨어져 있는 데도 소사미는 둑 위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서서 커다 란 물통을 강물의 상류쪽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즉시 물통 안에 물이 가득 담겨지는 것이었다. 두 통에 담긴 물의 무게는 적게 잡아도 이백여 근은 넘음직한데 소사미는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고 어깨에 메고는 발로 바위를 가볍게 차며 언덕 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동작은 빠르고도 깨끗했다. 이때 물통 안에 담겼던 물은 한 방울도 흘러넘치지 않았다. 법원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소사미는 뒤에서 '멋지구나!' 하고 외치는 소리 를 듣고는 두 개의 물통을 가볍게 땅 위에 내려놓더니 발로 살짝 땅을 차며 칠팔 장이나 되는 개 울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그 모습은 진정 비조(飛鳥) 같았다. 소사미는 법원의 앞에 내려서더니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봐요. 그대는 갈 길이나 갈 것이지 왜 터무니없이 소란을 피우는 거요? 그대는 우리 사형이 병이 났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오?" 법원은 소사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벌(蜂)처럼 잘록한 허리에 넓은 어깨, 청수한 얼굴을 지니 고 있는 소사미는 버선도 없이 다만 한 쌍의 마혜를 신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두 눈동자에서 형 형한 광채가 빛나고 있는 걸로 보아 내외공(內外功)이 이미 상승의 경지에 이른 듯했다. 법원은 그의 말을 듣고 매우 불쾌했다. '내가 어쩌다가 이 며칠 동안 함부로 지껄여대는 사람들만 만나게 되었다지? 더구나 모두가 애 송이녀석들이라니! 혹시... 이 소사미는 효월선사의 제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되지.....' 법원은 생각을 마치고 소사미를 향해 점잖게 말했다. "나는 그대같은 젊은이가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닌 것을 보고 매우 탄복했소이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되었소이다. 그대의 사형이 누구이며 또 어떤 병에 걸렸는지 나는 알 고 있지 못하외다. 그러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구려. 사람을 보자마자 꾸짖기부터 해서야 쓰겠소?" "흥! 시치미떼지 마시오. 이곳에는 외부 사람이 얼씬거려서는 안 된단 말이외다. 나는 진작부터 그대가 이곳에 와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소. 지금 우리 사부님께서 집에 계시지 않는 틈을 노리고 우리의 보배를 훔치러 온 게 아니란 말이오? 그대가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꺼지는 게 좋을 것이외다. 다시 힐끔힐끔 사방을 살피기만 해봐요. 그 대에게 부득이 통비신원(通臂神猿) 녹청(鹿淸)의 무서움을 맛보여드리겠소." 말이 끝나자 그는 비쩍 말라 뼈가 드러나 보이는 주먹을 쳐들고 법원의 코앞으로 불쑥 내밀며 흔들어 보였다. 법원은 소사미의 행동을 보고 화도 나고 한편 우습기도 하여 입을 열었다. "자네의 사부님은 뉘신가? 이야기해 주게나. 어쩌면 내가 알고 계신 분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자 네가 나를 내쫓기는 좀 어려울 걸?" 녹청은 크게 화를 냈다. "나에게 대들겠다 이거지? 그렇다면 매운 맛을 보여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사미는 좌장(左掌)을 들어 법원의 얼굴 앞에서 흔들어 보이고는 우장(右 掌)을 들어 힘껏 그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법원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기울여 피하며 소리쳤다. "어서 사부님이 누구인지나 말해라! 그 다음에 손을 써도 늦지는 않다. 까닭없이 서로 감정을 상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녹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금강권(金剛拳)에서 변화돼 나온 강룡팔장(降龍八章)을 펼쳤다. 그 가 한번 손을 쓰기 시작하자 그 기세는 광풍폭우처럼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법원을 핍박해 갔 다. 이 금강권으로 말하면 바로 달마노조(達磨老祖)의 비전수법이었고 강룡팔장은 금강권이 다시 분 화된 수법으로써 금강권보다도 훨씬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법원이 오랫동안 무술을 갈고 닦지 않았다면 단번에 피를 토하고 뼈마더가 박살나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법원은 소사미가 혹시 효월선사의 제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특기인 비검술(飛劍 術)을 펼치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 상대했다. 그런데 소사미의 권법은 매우 정기(精氣)했으며 변화 또한 무궁했다. 어느덧 수십여 합을 겨루게 되었다. 법원은 이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두 대의 주먹에 가격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가 무 쇠처럼 단단하게 신체를 단련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근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게 되 고 말았을 것이다. 녹청은 법원이 잇따라 두 대나 맞고도 끄떡도 없는 것을 보고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갑자 기 그는 벼락같이 일 장 밖으로 몸을 날려 싸움권 밖으로 물러나더니 다른 권법으로 바꾸어 공격 을 해왔다. 법원은 냉소를 날렸다. "네 녀석의 무예는 그럴 듯하다만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게다!" 법원은 상대방이 지치기를 기다려 지난날 자신이 명성을 떨치던 칠조타공권(七祖打空拳)을 펼쳐 녹청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녹청이 효월선사의 제자라면 그를 앞장세우고 효월선사가 있는 곳으로 갈 참이었다. 만약에 녹 청이 효월선사의 제자가 아니라면 자질이 뛰어난 소년이니만큼 제자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법원은 부쩍 힘을 돋구고 녹청을 상대했다. 녹청은 승리할 수 없게 되자 일부러 슬쩍 빈틈을 노 출시켰다. 무릎을 굽히고 허공 높이 몸을 솟구친 것이다. 법원은 그가 밑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려 발목을 움켜잡으려고 했는데 녹청은 법원의 마음 속을 헤아려 보고 있었다. 땅에서 다섯 자 정도 떨어져 내릴 때 녹청은 금강권 가운데서도 가장 위력 이 무시무시한 초식을 힘차게 전개해냈다. 즉,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려 이어약룡문식(鯉魚躍龍門式)을 써서 법원이 내밀어 오는 두 손을 슬쩍 피하는 동시에 철장(鐵掌)을 좌우로 확 벌리듯 밀어내고 왼손의 두 손가락을 한 데 모으더 니 법원의 오른쪽 눈알을 향해 찔러갔던 것이다 법원은 상대방의 공세에 살기가 담겨 있는 걸 직감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즉시 상체를 뒤로 젖히고 수평으로 몸을 날려 상대방의 손가락 공격을 번개처럼 피해냈다. 녹청은 재차 벼락 같은 공세를 펼쳐냈다. 어느 샌가 그는 오른손으로 붕권(繃拳)의 수법을 써서 법원의 아래턱을 강타하고 있었다. 곧이어 녹청은 당리연환(螳裡連還)이라는 수법을 써서 움츠리고 있던 다리를 번개처럼 뻗으며 법원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반탄력을 빌어 비스듬이 삼사 장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는 우뚝 서서 법원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법원은 비록 당당한 고수였지만 의표를 찔린 나머지 상대방에게 연거푸 두 차례나 얻어맞게 되 자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십여 걸음 물러섰다. 이렇게 되자 법원은 그만 울화가 치밀 어 크게 부르짖었다. "이 짐승 같은 자식! 정말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 모르는구나! 이 금신나한 나으리는 네가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감안해서 너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거늘 네놈이 비겁하게 속임수를 써서 나를 때려? 너는 빨리 사부의 이름을 대라. 그렇지 않다면 너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자기 뒤통수를 '탁!' 후려쳤다. 녹청은 몇 가닥의 붉은 광채가 법원의 뒤통수에서 쏘아져 나오는 것을 보자 안색이 확 변하여 부르짖었다. "아앗! 비검술!" 그는 급히 땅바닥을 차고 개울을 가로질러 도망치기 시작했다. 법원은 원래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다만 검광(劍光)을 뿌려내 그에게 겁을 주려고 했을 뿐이 었다. 녹청이 도망치는 걸 보자 즉시 개울을 건너뛰어 뒤쫓았다. 녹청은 법원이 쫓아오는 것을 보자 재빨리 도망치면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형, 빨리와요!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벼랑 뒤쪽에서 한 줄기 자색 광채가 쏟아져 나와 법원이 쏘아낸 검광을 향해 마주쳐갔다. 법원은 검을 휘둘러 방어하면서 상대방을 살펴보았다. 나타난 사람은 승려도 아니고 도인도 아 니었다. 두 눈은 움푹 꺼져 있고 폼은 장작개비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몸엔 허름한 선의(禪衣)를 걸쳤고 머리칼은 산발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이 자가 바로 녹청이란 녀석의 사형인가 보군!' 법원이 이렇게 생각하고 급히 검을 거두자 그 자 역시 공격을 멈추고 느릿하고 쇠잔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디서 온 화상이시오? 그대는 효월선사의 대제자인 병유마(病維摩) 주홍(朱洪)이 무섭 지 않단 말이오?" 법원은 그자가 효월선사의 제자라고 하자 크게 기뻐했다. "아, 그렇소이까? 우리들은 그럼 한 집안 사람이로군요." 법원은 즉시 검을 거두어들였다. 병유마라는 자도 급히 검광을 거두고 물어보았다. "대사님의 법호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리고 어떻게 사부님을 알고 계시며 이곳에는 무슨 용무 가 있어 오셨소이까?" 법원은 말했다. "빈승은 법원이라 하오. 구화산에 들렀다가 영사께서 이곳에 머물러 계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 소이다. 긴히 아뢸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으니 형씨께서 효월선사께 통보해 주십시오." "정말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가사께서는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 계셨소이다. 그러다가 어젯 밤 갑자기 저를 부르시더니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반드시 달려가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가사께서는 오늘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떠나셨소이다." 법원은 그 두 사람이 무엇을 숨기는 듯하고 그 태도나 표정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보고 의심 이 생겼다. '효월선사는 나를 만나보기를 싫어하여 이곳에 없다고 하는 게 아닐까? 상대방이 만나기를 싫어 하는 이상 더 이상 간청을 할 수 는 없지." 병유마 주홍은 그에게 동굴 안으로 드시라는 인사말조차 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법원을 바 라보고 있었다. 법원은 부득이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공자(公子)와 무술선생 晤薛莽 三上紫金瀧 訪異人 結嫌白鹿洞 법원은 산을 내려가면서 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홀연 정남쪽에서 몇 가닥 붉은 광채가 날아왔다. 법원은 그것이 진랑(秦朗)임을 알아보고 재빨리 마주 달려나갔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지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진랑이 말했다. "타전로에 갔더니 효월선사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고 안 계시더군요. 그런데 이리 오는 도중에 서장(西藏)의 홍교(紅敎)에 몸담고 있는 전등화상(傳燈和尙)을 만났습니다. 그는 효월선사께서 자 금롱에 은거하신다고 하더군요. 그후 저는 자운사를 지나다가 지객승 마원(馬元)을 만났는데, 그 의 이야긴즉 자운사에 많은 변고가 있었으며, 사부님께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나섰 다고 하더군요. 제자는 효월선사께서 이곳에 은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사부님께서 모르고 계신 줄 알고 제가 대신 그분을 초청할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자운사를 도와달라고 간청할 작정이 었지요."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구화산에 가서 사람을 만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제수명의 딸과 한바탕 칼싸움만 벌리고 말았어. 그때 허비랑이 달려와 말리면서, 효월선사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더구나. 정작 이곳까지 달려왔으나 효월선사께서는 외출하고 안 계신다고 그의 두 제자가 그러잖겠나. 그런데 나로서는 효월선사께서 자금롱에 계신지 안 계신지 판단할 길이 없구 나. 만약 효월선사께서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 자금롱에 계시면서도 없다고 했다면 구태여 그 분을 고려할 필요가 없지. 우리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도록 하자." "효월선사께서 서쪽에서 이곳으로 온 이유는 이곳이 맑고 조용 할 뿐 아니라 한 가지 보물 단옥 구(斷玉鉤)가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옥구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써 자금롱 밑의 천안(泉眼)에 있습니다. 효월선사께서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자금롱에 머물고 계 신 것입지요. 따라서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제자가 사부님과 함께 가서 효월선사께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다시 한번 물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추운수(追雲漱)를 제압 할 만한 사람은 정말 찾아내기 힘듭니다. 효월선사께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 열 명의 도움보다 낫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자금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막 자금롱 부근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을 발견한 녹청이 매우 언짢은 투로 말했다. "대화상은 어째서 또 오셨소? 우리 사부님께서는 동굴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 소? 솔직히 말해서 설사 이곳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분 어르신께서는 이미 속세의 번거로운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단 말이오. 그대들과 휩쓸리기를 바라지 않고 계신단 말씀이오." 법원이 녹청의 말을 듣고 보니 의미가 깊은지라 웃음을 띠며 물었다. "영사께서는 나의 한 분 선배님과 망년지교(忘年之交)의 사이라네. 이번에 찾아온 것은 실로 긴 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니 아무쪼록 소형제가 통보해 주게나. 선사께서 어디로 가셨다면 그 장 소라도 알려주기 바라네. 우리가 친히 그곳에 찾아가 뵙도록 하겠네." 법원이 좋은 말로 권했으나 녹청은 냉랭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했다. "우리 사부님께선 외출하셨소이다. 한번 운유(雲遊)의 길을 떠나시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신답니 다. 그리고 동굴에 돌아오시는 시기 역시 예측할 수 없소이다. 어떤 해는 반나절밖에 안 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일 년이나 반 년이 걸릴 때도 있구요. 그러니 대사께서 진정 중요한 일이 있다면 이틀 정도 어디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찾아오시구려. 그때쯤이면 선사께서 돌아와 계실지도 모르니까요. 실례했소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벼랑 뒤쪽으로 돌아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법원은 이같은 대우를 받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진랑은 녹청의 언행이 크게 불손한 것을 보고 가슴 가득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 나 효월선사의 도법(道法)이 고심한지라 감히 경거망동할 수가 없어 부득이 법원을 따라 산 아래 로 내려갔다. 사부와 제자 두 사람이 산중턱까지 내려와 어디로 가서 도움을 청할까를 상의하고 있을 때였다. 홀연 한 가닥 검은 그림자가 파장을 내며 허공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빠르기는 화살과 같아서 눈 깜짝할 사이에 가까이 다가왔다. 매우 추악한 모습의 소년이었는데 승려도 아 니고 도인도 아니고 기이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진랑은 그가 호의를 품고 오는지 아니면 자기들에게 시비를 걸려고 오는지 알 수 없어 재빨리 대적할 준비를 했으나 법원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얼른 말렸다. 그 소년은 법원을 발견하더니 재빨리 허리를 굽혔다. "제자 삼안홍예 설망이 허비랑 사부님의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대사께서 효월선 사를 쉽게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며 저에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효월 선사는 결코 자금롱을 떠나신 게 아니랍니다. 대사께서는 실망하지 마십시오. 지금 아미파의 검협 들이 성도(成都)에 있는 벽균암(碧筠庵)에 모여서 자운사를 파괴할 계획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효월선사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가사께서는 아직도 검술을 완벽히 연성하시지 못하 신 연고로 산을 내려가 도와줄 수 없으니, 대사께서는 반드시 효월선사를 만나셔야만 합니다. 사 부께서는 이미 효월선사께 비검전서(飛劍傳書)의 방법을 써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법원은 말했다. "나는 이미 두 번이나 찾아갔으나 그분의 제자 녹청이 매정하게 거절하는 통에 물러섰다네. 그 러나 기왕 내친 걸음이니 영사의 두터우신 뜻을 생각해서 한 번 더 가보기로 하지." 설망은 그 말을 듣더니 즉시 작별을 고하고 떠나려 했다. 그러나 몇 발걸음 가다가 말고 고개를 돌리더니 이렇게 물었다. "어제 저의 사형 고해아 사도평이 편지를 전해드릴 때 그는 대사를 직접 만나 건네주셨습니까?" 법원은 그들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는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어제 그가 편지를 허공에서 던지는 바람에 뜻밖에도 문필봉 앞에 있던 두 여인이 그걸 가로채 고 말았네. 내가 가서 달라고 했으나 두 소녀가 한사코 내놓지 않으려고 하더군. 그녀들과 나는 하마터면 한바탕 싸움을 벌일 뻔했지. 그때 그대의 사형이 달려와 만류하고 한동안 그녀들을 설 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편지를 건네받을 수 있었지 뭔가. 영사를 만나거든 내가 고맙다고 하더 라고 전해 주시게." 설망은 법원의 말을 듣자 얼굴에 흉칙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효월선사의 제자 녹청은 가사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대사께서는 그를 만나거든 사 부님의 명을 받들고 왔노라고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는 즉시 대사님을 효월선사께 로 인도할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 그는 작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법원과 진랑 두 사람은 설망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승의의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 고 자금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효월선사는 대체 어느 문파의 검선이기에 법원이 그토륵 존경하는 것일까? 그가 도교(道敎)에 몸 담고 있을 때만 해도 그의 이름은 멸진자(滅塵子)였다. 효월선사는 원래 아미파 검선의 비조(鼻祖)인 장미진인(長眉眞人)의 제자였다. 그는 천생적으로 마음이 편협하여 사제 건곤정기묘일진인 제수명이 그보다도 늦게 입문했는데, 오히려 그보다 성 취가 빠른 것을 보자 그를 시기하는 마음이 생겼다. 장미진인은 그런 효월선사를 못마땅히 여겨서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에 효월선사는 가슴에 한을 품었다. 장미진인은 임종시에 뭇제자들을 앞으로 불러놓은 자리에서 도통(道統)을 현진자(玄 眞子)와 제수명에게 전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효월선사는 크게 분노했다. 장미진인은 그때 여러 제자들에게 이런 말도 했었다. "이번에 도통을 잇도록 하는 데 있어 나는 그 사람의 근행(根行)이 얼마나 두터운가, 그리고 공 부(功夫)가 얼마나 깊은가를 가지고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입문을 빨리하고 늦게 한 것은 하등 상 관이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이란 예측할 수 없는 법, 이후 나쁜 짓을 일삼으며 우리 문파를 욕되 게 하는 자도 나올 것이니라. 내가 죽은 이후 계율을 어기는 자가 있을 터이므로 나는 그를 제재 할 방법을 강구해 놓았다." 장미진인은 한 개의 석갑(石匣)을 꺼냈다. "이 석갑 속에는 내가 마(魔)를 물리칠 때 사용한 비검(飛劍)이 들어 있다. 이제부터는 제수명이 이 석갑을 가지고 있으면서, 규율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사실을 정확히 규명한 후에 이 석갑을 향해 꿇어엎드려 빌어라. 그러면 석갑 안에 있는 비검이 저절로 허공으로 날아올라 그 사람의 목 을 자를 것이다. 그러나 시비를 잘 가리지 못하고 그 자를 죽이려 한다면 아무리 빌어봐도 이 석 갑 속의 비검은 날아오르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자기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니라. 모 두들 잘 기억하도록 해라." 장미진인은 유언을 마치고 승천했다. 여러 동문들이 다가와 제수명과 현진자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유독 효월선사만이 얼 굴을 붉히고 있을 따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효월선사는 화가 치밀었다. 마침내 그는 좋은 일을 하겠다는 구실을 붙이고 산 을 내려왔다. 그는 노산(盧山)으로 달려가 은거할 생각이었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고민이 생기 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여러 동문들을 대하면 기분이 나빴으며 그렇다고 그들과 싸워 이 길 자신도 없었다. 게다가 장미진인이 남긴 석갑 때문에 감히 교를 배반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몇 년 동안 노산에서 은거하며 조용히 세월을 보내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천태산(天台 山) 과 안탕산(雁蕩山)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추운수였다. 도통에 관해 이 야기를 나누다가 두 사람은 대판 싸움을 벌였다. 그후 모든 동문들이 멀리했으므로 그는 귀주(貴州) 야인산(野人山)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불문에 귀의하여 장적동(長狄洞)의 합합노조(哈哈老祖)를 사부로 모시고 많은 이파(異派)의 수법을 연마 했다. 하지만 그가 그때부터 나쁜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미파의 동문들은 그가 다른 파의 법술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애석히 여겼으나 간섭하 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후 효월선사는 타전로에서 한 부잣집 자제를 제자로 거두어들였다. 그가 바로 주홍이었다. 타 전로는 사천성과 귀주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기거하는 동안 많은 홍교(紅敎)의 인물들과 사귀게 되었다. 그는 우연히 황산에 유람차 왔다가 자금롱의 절경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곳으로 거처 를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허비랑을 알게 된 것은 어느날 함공노조(陷空老祖)의 간계에 빠졌을 때 그녀가 달려와 구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법원이 찾아온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제수명과 현진자 두 사람과 다투고 싶지 않아 녹청을 시켜 되돌려 보냈던 것이다. 법원을 두 번씩이나 따돌린 다음 허비랑이 비검전서를 써서 보내준 편지를 받고 그는 한동안 고민했다. 마침대 결심한 그는 녹청을 불러서 법원이 다시 찾아오면 이 러이러한 대답을 해주라고 일렀다. 법원과 그 제자가 마침내 세 번째 자금롱에 찾아왔다. 이때 녹청은 개울가에 서 있다가 그들이 오는 것을 보자 법원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마주 나아가 며 말했다. "방금 가사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가사께서는 두 분이 찾아온 뜻을 미리 헤아려 보시고 저에게 이렇게 뜻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두 분께서는 마음을 놓으시고 자운사로 되돌아 가십 시오.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사부님께서는 즉시 달려가 구원을 해주시겠답니다. 오늘은 다른 중요 한 일이 있어서 두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여가가 없다고 하시는군요. 그런 당부의 말씀을 남 기시고 가사께서는 다시 총총히 산을 내려가셨습니다." 법원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할지를 미처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진랑이 녹청을 붙들고 설 망을 만난 일을 이야기했다. 녹청은 설망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대뜸 반색을 하며 진랑을 보며 존함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 었다. 몇 마디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두 사람은 금방 의기가 투합됐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개울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한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법원은 기회를 보다가 넌지시 맡을 꺼냈다. "내기 효월선사를 만난 것은 삼십 년 전의 일이라네. 그분께서 타전로에 은거하신 이후로 뵙기 가 힘들었지. 소형제는 언제 효월선사의 제자가 되었길래 공행(功行)이 그토록 뛰어나신가?" 녹청이 대답했다. "대사께서는 제가 출가하게 된 원인이 궁금하신 모양이지요? 그건 저도 잘 모르고 있답니다. 저 는 그저 제가 사천성의 어느 황량한 동굴 안에서 살았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이랍니다. 저에게는 어머니가 안 계셨지요. 저에게 젖을 먹여준 것은 한 마리의 매화록(梅花鹿)이었지요. 어느 날 사 부님께서 그곳을 지나시다가 제가 한 무리의 사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보신 모양입니다. 사부 님께서는 제가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언젠가는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시고 저를 타전로에 데려다 검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가 십이 년 전의 일이지 요. 설망의 사부는 저의 사부님을 도와준 적도 있고 저를 도와준 적도 있어요. 제가 진작 두 분께 서 설망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처럼 매정하게 뿌리치진 않았을 겁니다." "효월선사께서는 정말 산 아래로 내려가셨나?" 법원이 질문을 던지자 녹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사부님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답니다. 두 분께서도 마음을 놓으시고 자운사로 돌아가십 시오." 법원은 녹청의 언행을 자세히 관찰해 보았다. 약간 짓궂은 구석은 있지만 천진난만한 성품을 지 니고 있는 순진하고 귀여운 소년이라고 생각되었다. 문득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법원은 효월선사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단옥구 때문이 아닌가를 물어보려고 했다. 막 입 을 열려고 했을 때 벼랑 위에서 병든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녹청사제, 이야기가 끝났으면 빨리 돌아오게. 내 그대에게 할 이야기가 있네." 녹청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두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저희 가사께서는 동굴에 계시지 않으니 두 분을 동굴로 안내할 수가 없군요. 사형께서 저를 부 르시니, 이만 훗날을 기약하도록 합시다." 말이 끝나자 그는 급히 동굴 쪽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마침내 법원과 진랑은 자금롱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났다. 날짜를 계산해 본 법원은 노산 백록동(白鹿洞)에 가서 뇌음의 사숙(師叔)인 팔수관음(八手觀音) 비룡사태(飛龍師太)에게도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뇌음과 용화의 행방을 알아봐야 했다. 그들은 경신술을 전개하여 화살보다 빨리 허공을 날아갔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노산 백록동 앞에 내려섰다. 그 순간 비린내가 왈칵 코를 찔렀다. 눈을 들어 살펴보니, 동굴 안에서 눈 알이 톡 튀어나오고 이마가 하얀 한 마리 호랑이가 두 사람을 노려보며 막 덮치려고 하지 않는 가? 법원은 그 호랑이가 바로 비룡사태가 기르고 있는 짐승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감히 칼을 써서 그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뒤미처 동굴 안에 서 뿔이 한 개 달리고 온몸이 흰 비늘로 덮인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곧장 진 랑을 향해 덮쳐갔다. "좋다! 오너라!" 진랑은 큰소리로 부르짖고 자기 뒤통수를 탁 쳤다. 일순 몇 가닥의 붉은빛이 구렁이를 항해 쏘 아져 나갔다. 법원이 재빨리 주의를 주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러나 그 말을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진랑의 검광이 닿자마자 삼 장이나 되는 그 커다란 구 렁이의 몸뚱이는 토막토막 끊어지고 말았다. 호랑이는 자기 친구가 두 동강이가 나는 것을 보자 뒷발로 땅을 버티고 앞발을 움츠리더니 땅바 닥을 탁 치면서 정면으로 덮쳐들려고 했다. 법원은 진랑이 흰구렁이를 죽이는 것을 보고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이때 동굴 안에서 우뢰가 치 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법원은 진랑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나직이 말했다. "빨리 도망쳐야겠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몸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법원은 가면서도 진랑에게 핀잔을 주었다. "너는 어째서 그리 경망스러우냐? 내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했는 데도 너는 비룡사태가 동굴을 지키도록 기르는 뱀을 죽이고 말았구나. 비룡사태는 성질이 괴팍하여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잖느냐. 그녀는 선한 사람이라고 착하게 대하고 악한 사람이라고 나쁘게 대하지 않는다. 무조건 상대방이 자기에게 잘 대해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단 말이다. 내가 그녀를 아는 것도 뇌음이 소개를 해주어 겨우 안면이 있을 정도에 불과하고 깊은 관계는 아니다. 따라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힘든 처진데 그녀가 기르는 뱀을 마구 죽여? 그녀는 매우 신중한 여자야. 그녀보고 아미파를 돕지만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이제 그녀의 도움을 받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화만 나게 만들고 말았으니... 다행히 우리가 재빨리 도망 쳤기에 망정이지, 그녀가 동굴에서 나와 우리를 발견했다면 우리는 어떤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진랑은 사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기가 너무 경솔했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이었다. 진랑은 입도한 지는 오래 되었지만 욕심과 기호에 현혹되는 때가 많았고, 식탐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법원 역시 며칠 동안은 배고픔을 참을 수 있었으나 음식을 끊고 지낼 수는 없었 다. 두 사람은 뇌음을 찾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달리 초청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자운사로 돌아갈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아미파의 검선들이 쳐들어 온다면 법원의 힘으로는 감당 할 수 없을 것 같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추운수를 매우 두려워했으므로 감히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불현듯 무창(武昌)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에서 며칠을 보내느라고 비린 음식이라곤 먹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먹고 마시면서 실컷 놀아나 보아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는 경신술을 전개하지 않고 강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산천 경개나 감상하리라 생각하고 진랑에게 그 뜻을 비추었다. 진랑은 그 말을 듣고 대뜸 찬성했다. 이윽고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한양(漢陽)에 다다랐다. 그들은 한적한 곳에서 조그만 배를 빌어 강에 띄우고 걸판지게 놀았다. 그걸로써 성이 차지 않아 황학루(黃鶴樓)에 올라가 진탕 놀 결심으로 배에서 내렸다. 올라가 보 니 황학루는 손님이 꽉 들어차 있어서 몹시 시끌벅적했다. 그들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자 얼마 후 주보(酒保)가 나와서 주문을 받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최고급의 술과 안주를 빨리 가져오시오!" 술과 음식을 시켜 놓고 먹고 마시며 멀리 창 밖 풍경을 바라보니 드넓은 강에는 물결이 넘실거 리고, 강가에는 나무들이 파랗게 늘어서 있었다. 강물 위에 떠서 물결을 따라 흔들거리는 몇 척의 돛단배는 매우 정취가 있어 보였다. 손님들은 괴이하게 생긴 화상과 속인이 황학루에 올라와 먹고 마시는 걸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 하지 않았다. 원래 형(荊)과 초(楚) 지방에는 이인(異人)들이 많았고 무당을 믿는 풍속이 아주 성했기 때문이 다. 손님들 가운데에는 귀골로 생긴 공자 한 사람이 섞여 있었다. 그 귀공자는 강서성(江西省) 남창 (南昌) 사람인데 백만장자였다. 그의 성은 외자인 도(陶), 이름은 균(鈞), 자(字)는 맹임(孟任)인데 선비의 집안에 태어났으면서도 어릴 때부터 무예를 좋아했다. 그의 부모들은 외동아들인 도균을 무척 귀여워했으므로 무공을 배우는 것을 금지하기는커녕 오 히려 사방에서 유명한 무사들을 초청하여 무공을 가르치게 했다. 도균이 십육 세 되던 해 그의 부모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임종할 때 도균을 앞에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의 조부께서는 명(明)나라가 망한 이후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결코 오랑캐를 받들지 않으 셨다. 그 때문에 나 역시 벼슬을 하려고 꿈꾼 적이 없다. 네가 책을 읽기는 싫고 아무쪼록 칼이나 봉(棒)쓰는 법을 배우고 싶다니 그렇게 해라. 하지만 내가 죽은 다음에 네가 남의 꾀임에 빠져 타 락할까 두렵구나. 그래서 너는 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배려해 놓았다. 벌써 가산(家 産)을 십 등분했으니, 그중의 한 몫을 너한테 주마. 네 맘대로 쓰도록 해라. 그 돈으로 무공을 배 워도 괜찮다. 그리고 삼 분(三分)은 늙은 청지기 도전(陶全)에게 주어 관리하게 했다. 그는 너를 대신해서 밭을 경작하면서 재산을 꾸려나갈 것이다. 네가 네 몫을 모두 써버린 후에 도전이 관리 하는 재산 중에서 원금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너는 그저 이자만을 받아서 써라. 그래야 네가 죽 을 때까지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육 분(六分)은 나의 절친한 친구에게 맡 겼다. 그 친구는 등(騰)....." 여기까지 말한 그는 기운이 다한 듯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도균은 본성이 착했으므로 아버지가 병들어 눕게 되자 옷을 벗는 법도 없이 그 옆을 떠나지 않 고 시중을 들며 약을 달여드리곤 했다. 부친의 유언을 듣고 나자 그는 눈물을 뿌리며 며칠 동안 애통해 했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인 <등>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도 없었지만 너무나 슬픈 나머지 알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나서야 그는 청지기인 도전을 불러 재산 을 확인해 보았다.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일 분의 재산은 모두 칠팔만 냥 정도의 은자(銀子)였다. 도전이 관리할 밭과 재산은 이십여만 냥의 가치가 있는 부동산이었다. 하지만 육 분의 가산만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전은 그 육 분의 재산 가운데는 한구(漢口)에 있는 가게 세 개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다. 그는 옛주인을 따라 그곳에 가본 적이 있었고, 그 중의 한 가게가 영발상(永發祥)이라는 사 실을 알고 있었다. 그 외의 재산에 관해서는 옛주인이 관리했으므로 그 역시 알 수 없었다. 도균은 부잣집 자제답게 당장 쓸 용돈이 있으면 그걸로 만족할 뿐 그밖의 재산에 관해서는 관심 이 없었다. 상복을 입고 외출을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는 매일같이 무인들을 불러다가 집 안에서 무예를 배우고 익혔다. 삼 년이 지나고 상을 벗게 되었을 때, 그는 많은 무예에 통달하게 되었으며 시합을 할 때마다 어떤 고수라도 이길 수 있었다. 그는 득의양양하여 천하에 자기의 적수가 없다고 깊이 믿게 되었 다. 그를 가르치는 무인들은 자신들에게 더 가르칠 무예가 없어질 만하면 즉시 다른 고수를 추천하 면서 무예를 사도록 권했다. 그러면 도균은 그때마다 비싼 값을 주고 새로운 무인을 고용했다. 그는 워낙 위인됨이 선량했으므로 먼저 가르치던 무인들이 떠나야 할 처지면 그냥 머물러 있으 라고 했으며 새로 온 무인들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 그래서 그를 가르치는 무인들 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가 지닌 바 무예를 아낌없이 그에게 전해주며 마음 속으로 즐거워했다. 도균은 천부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라서 무인들이 비전의 수법을 가르쳤을 때도 어 려움없이 소화해내곤 했다. 어느덧 그의 집에는 천하자처의 무인들이 구름처럼 모여 북적거렸다. 청명(淸明)이면 무인들은 그를 전후좌우에서 옹위하고 바깥 출입을 했는데, 그 위용은 마치 별들 이 달을 떠받드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어느 대담한 자가 있어 도균에게 시비를 걸 수 있었겠는 가? 마침내 그는 소맹상(小孟嘗)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각지의 유명한 영웅호걸들은 그를 만나 러 불원천리하고 찾아와 무술을 겨루고 싶어했다. 그를 모시고 있는 무인들 역시 무술을 겨루러 찾아온 사람들에게 예의를 깍듯이 지켜 도균이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는 대장부임을 입증하는 한 편, 자기들 중에서 가장 고수인 백령조(白靈鳥) 새소진(賽蘇秦)으로 하여금 도전을 받아 싸우도록 했다. 백령조와 겨루어 이기는 자가 있으면 그는 다시 도균과 직접 무술을 겨루었다. 하지만 도균과 싸워 이기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도균이 도전자를 꺾을 때마다 그의 수하무인들은 패자에게 은 자 오십 냥 정도의 사례를 노자에 보태라고 주어 돌려보내면서 앙심을 품지 않도록 부드러운 말 로 위로를 했다. 도균은 이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돈이란 벌기는 어렵지만 쓰기는 쉬운 법이라, 그가 유산으로 받은 은자는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모두 거덜나고 말았다. 도균은 도전에게 가서 돈을 좀 달라고 했다. 도전은 옛주인과 유언을 내세워 한사코 돈을 주려 고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색을 하고 충고했다. "노주인 어른께서는 한평생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재산을 모으셨습니다. 재산이 많기는 하나 그 태반은 이미 노주인께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셨으며, 행인지 불행인지 위탁받은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형편입니다. 제가 부동산을 맡아 관장해 온 결과 다행히도 매년 풍년이 들어 수확이 넘쳤습니다. 저는 그 남아 도는 곡식을 다시 투자하여 재산을 늘리느라고 지금 현금을 가지고 있 지 않습니다. 나리께서 꼭 돈이 필요하시다면 부득이 부동산을 팔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이 나리 를 얕볼 것입니다. 나리께서 그처럼 돈을 낭비하신다면 설사 금산(金山)이 있다 해도 얼마 가지 않아 돈은 모조리 거덜이 나고 말 것입니다. 애당초 제가 나리께 근검절약을 그렇게 말씀드렸는 데도 이런 결과가 생겼군요. 아까와서 이 늙은이가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재산을 불려서 나 리에게 이 다음에 집안을 일으키고 사업을 벌일 때의 비용으로 대어드리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나리께서 낭비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제가 지하에 계신 노주인어른께도 떳떳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리께서 무예를 익히시는 것을 반대하는 바는 아 니지만, 제가 볼때 그 선생이라는 자들이 대부분 강호의 무뢰배들에 불과하며 올바른 무술명가 (武術名家)의 인물들은 아닌 듯합니다. 어느 세상에 제자를 못 당해내는 스승이 있단 말입니까? 이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엉터리인가가 드러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들은 나리 한테 도전해 오는 무인들과 먼저 겨룹니다. 참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작태입니다. 이 늙은이 는 무예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만, 나리께서 설사 천생신력(天生神力)을 지니셨다 해도 그 나이 에 천하무적의 고수가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나리께서는 형편이 어려워졌다는 구실을 붙여 그들을 모두 내보내십시오. 진정 나리께서 훌륭한 무예를 배우고 싶으시다면 친히 밖으로 나가 명성이 쟁쟁한 영웅들을 초빙하여 오도록 하십시오. 진정한 무술선생을 초청하는 일이라면 이 늙은이도 돈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 따위 무뢰배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동산을 팔아야 한다면, 이 늙은이는 죽는 한이 있어도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균은 본래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었다. 도전의 말을 듣자 화를 내기에 앞서 곰곰 생 각해 보았다. 물론 도전의 말에는 지나친 면도 없는 바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일리가 있었다. 도균은 담을 뛰어넘고 벽에 달라붙어 빨리 기어오르는 경신법을 배우고 싶어했지만 지금까지 그 에게 무예를 가르친 선생들은 하나같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비법을 전수해 주지 않았던 것 이다. 도균이 하도 조르면 할수없이 모래주머니를 정강이에 매달고 뜀뛰기를 하라고 했고, 구덩이 안에서 밖으로 뛰어나온다든가 밖에서 구덩이 속으로 뛰어내리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이와 같은 연습을 꾸준히 한 결과 이 년이 지난 후에는 일 장 남짓한 담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비처럼 가볍게 날아간다는 소문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지붕의 기왓장을 밟아 몇 조각 으로 깨뜨리기 일쑤였는데, 이래가지고 어찌 제비처럼 가볍고 날렵하며 소리를 내지 않는 경지라 고 하겠는가? 처음에는 도균도 선생들이 지닌 바 무술을 전수해 주지 않는 줄 알았지만, 그들이 경신법을 전 개하는 광경을 우연히 몇 번 목격한 결과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선생들은 또 이런 말도 했다. "진정한 영웅은 솜씨 자랑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호걸이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수 있단 말입 니까? 경신법은 도적질에나 쓰는 삼류 무술에 불과하며, 따라서 익힐 가치조차 없습니다." 선생들 중에서 가장 경신법이 탁월한 두 사람의 실력 역시 도균과 비슷한 정도였다. 선생들이 자진해서 도균에게 경신법의 고수를 소개시켜 줄 때도 있었다. 하도 그가 졸랐기 때문에 새로운 선생을 천거한 것이지만, 막상 만나고 보면 별로 볼 것이 없었다. 그러던 중 오늘 청지기 도전으로부터 따가운 충고를 받은 터이므로 그도 어느 정도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마음이 여려서 차마 선생들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해보던 그는 도전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은 것 같구려. 내 며칠 동안 심사숙고해 보겠소. 그런데 오늘 한 선생이 며느리 를 맞아들이고, 또 한 선생은 집에 돌아가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했소. 나는 그 두 사람에게 각 기 은자 오백 냥을 주겠다고 약속했소. 그리고 이달 말에 나는 천 냥 이상의 돈을 써야 할 곳이 있소. 따라서 은자 삼천 냥이 없으면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됩니다. 내 현금을 관리하는 장방(帳房) 에는 이미 돈이 바닥난 즉, 이번만 나의 체면을 세워주구려.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대의 의견을 따 르도록 하겠소이다." 도전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기실 이 늙은이가 관리하는 재산은 주인나리의 소유입니다. 노주인나리께서 작은주인나리의 낭 비벽을 아시고 저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워주셨던 것이지요. 이번이 나리의 처음 간청이신데, 이 늙은이가 어찌 분부를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나리께서는 노주인나리의 유언을 생각하 셔서 절대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저 엉터리 무인들을 내쫓으십 시오." 말을 마친 도전은 몹시 마땅찮아 하는 기색인 채 다른 곳에 가서 은자 삼천 냥을 구해다 도균에 게 건네주었다. 도균은 은자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선생들을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마음이 약해 차마 그 말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청지기 도전이 몇 번이나 재촉을 했지만 그때마다 도균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 이처럼 십여 일이 지나자 도균은 가 슴이 무척 답답해졌다. 어느 `날 선생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뛰어 들어오며 알렸다. "장원 밖에 거지 같은 사람이 와서 주인을 뵙자고 합니다." 도균이 막 무슨 말을 하려고 할때 새소진이 말했다. "아마도 흔히 떠돌아다니는 거렁뱅이겠지요. 공자께서 친히 접대를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제 가 나가서 돌려보내겠습니다." 말을 마친 새소진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나갔다. 도균이 등 뒤에다 대고 재빨리 말했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거든 장방으로 가서 약간의 노자를 얻어다 주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와 무 술을 겨루려고 한다면 어서 나에게 데려오구려." 새소진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황망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찾아온 사람은 중년의 남자였는데 걸레처럼 헤진 옷을 걸쳤고, 얼굴에는 기름과 때가 덕지덕지 앉았으며, 허리는 새끼줄로 동이고 있었다. 그 사람은 한창 하인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새소진은 앞으로 썩 나서며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대체 무엇 하는 놈이냐? 감히 이곳에 와서 시끄럽게 굴다니!" 그 남자는 새소진의 아래위를 한 번 훑어보더니 씩 웃었다. "그대가 아마도 이곳에 모여 사는 교사들의 우두머리인 모양이군그래. 언젠가 나의 제자 육지금 룡(陸地金龍) 위청(魏靑)에게, 우리를 먹여주고 입혀주는 공자와 겨루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 사람 이 바로 당신 아니오? 공자에게 일부러 패한 척해 준다면 오십 냥의 은자를 주겠다고... 허허허! 애석하게도 내 제자는 나이도 어리고 순진하여 그대가 달콤한 말로 유혹하자 그만 넘어가고 말았 지. 하지만 나는 내 제자하고는 다르단 말씀이야. 험험... 나는 지금 돈이 몹시 필요하오. 내 제자 에게 오십 냥의 은자를 주었다고 한다면 나는 그의 사부이고 더 큰 재간이 있는 몸이 아니겠소? 그래서 나는 오백 냥의 은자를 요구하는 바이오. 한 냥이라도 부족할 경우 나는 즉시 그대들을 입혀주고 먹여주는 공자의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버리겠소. 이건 결코 흰소리가 아니외다." 처음에 새소진은 그 사람이 빈궁한 걸 보고 구걸을 하러 온 줄 알고 기세등등하게 나왔었다. 그 런데 이제 말을 듣고 보니 위청이란 자의 사부라고 하지 않는가! 작년에 위청이 찾아왔을 때 새소진은 그를 맞이하여 직접 대결을 했는데 그는 상대방이 한 번 내찌르는 손가락을 막아내지 못하고 쓰러졌었다. 그래서 새소진은 위청에게 오십 냥의 은자를 건 네주면서 도균은 우리 가난한 무인들의 밥줄이니 제발 거짓으로 패한 척해 달라고 애걸했던 것이 다. 그러나 위청은 돈을 받지 않고 그들을 희롱하는 말을 던지고 표연히 떠났다. 지금 나타난 이 자가 위청의 사부라면 지닌 바 무예는 더욱 놀라울 게 아닌가? 하지만 새소진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치부를 여러 하인이 보는 앞에서 떠벌려대고 있는지라 수치심과 분노를 억 누를 수가 없었다. 또한 나타난 자가 거짓말로 위청의 사부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며, 실제로 는 무예가 형편없는 모리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소진은 갑자기 좋은 계책이 떠올라 그 사람에게 말했다. "알고 보니 그대는 무술을 겨루러 오셨군? 우리 서로 좋은 말로 합시다. 자자, 안으로 들어가 앉 으십시오. 내가 이곳에서 무공을 겨루는 규칙에 대해 설명드린 후에 한번 겨뤄보는 게 어떻겠 소?" 그 남자가 대답했다. "그대들의 규칙은 나도 잘 알고 있소. 일부러 지는 체하면 삼십 냥이고 그대들을 먹여주고 입혀 주는 사람의 손에 지는 척하면 오십 냥이고 안 그렇소. 그 오십 냥과 삼십 냥 은자의 명목이 그 럴 듯하더군. 언필칭 노자돈이라고 했던가. 내 말이 틀렸소?" 새소진은 부끄럽고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으나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눈짓을 해서 이 사람을 잘 수습해야 한다는 뜻을 전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보고 공손히 안으로 들자고 간 청했다. 그 사람은 새소진이 쩔쩔매는 꼴을 보자 두어 번 냉소를 터뜨리더니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새소진은 앞장서서 안내를 하며, 화원 가운데 있는 무술을 겨루는 장소로 그를 데려갔다. 그가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공격을 펼쳐 진정 무예가 대단한지 아니면 말뿐인지 시험해 볼 작정 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진정 무예가 훌륭하다면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좋은 말로 달랜 다 음 도균에게 손을 내밀 작정이었다. 새소진은 그 사람의 걸음걸이를 유의해서 살펴보았다. 그의 발 걸음은 힘이 없어 보였고, 어떤 재간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알고 보니 엉터리로 사람을 속여 돈을 갈취하려고 했었군! 흥, 너는 오늘 임자를 잘못 만난 거 다!' 새소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화원으로 들어서면서 새소진은 그 사람을 앞장서게 하여 매우 비굴한 태도로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했다. 그 사람이 막 자기의 앞으로 나서는 순간, 새소진은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그의 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마치 쇳덩이와 바위를 친 것처럼 주먹이 아파왔다. 질겁을 한 새소진은 그제서야 상대방이 보통 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재빨리 몇 자 밖 으로 물러서는 한편 상대방의 공격을 대비하여 몸을 잔뜩 움츠리고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자약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새소진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오늘은 정말 재수 옴붙었구나! 이거 정말 큰일났는 걸?' 하지만 어쩔 도리기 없었으므로 그는 오직 그 사람의 뒤를 조심조심 따라가기만 했다. 그래서 자기 방 앞에 도착하자 그 사람을 안으로 모셔들었다. 이때 자신의 손을 살펴보니 한 치 정도나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참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불쑥 말을 던져왔다. "어떻소, 나를 한 대 쳐보니 은자 오백 냥의 가치는 있지요?" 새소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불초가 무지한 연고로 대영웅을 몰라뵈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찾아오신 뜻과 진정한 성명을 말 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방법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나는 성도에서 온 조심원(趙心源)이라 하오. 오래 전부터 이곳 무술선생들의 위명을 귀가 따갑 도록 들었기에 크게 흠모하던 터라, 오늘 가르침을 받자고 찾아오게 되었소이다. 내가 무술선생들 에게 패배한다면 만사는 깨끗이 해결되는 것이지만, 내가 만일 그대들이 나를 못 당해낸다면 나 는 그대들이 남의 집 귀한 공자를 더 이상 타락시키지 못하도록 모조리 내쫓아 버리고 말겠소." 새소진은 이미 쓴맛을 단단히 본 터라서 자기네가 모두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그를 감당할 수 없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즉시 애걸을 했다. "역시 선생을 속일 수 없군요. 사실 우리는 재간이 보잘것 없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처자식 과 연로하신 부모님이 있으며, 이 부양가족은 도균 공자님께서 주시는 돈으로 모든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대영웅께서는 아무쪼록 이 일에서 손을 떼어주십시오. 대영웅께서 이곳에 머물 고 싶으시다면 우리는 도공자님께 당신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이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 으신다면 오백 냥의 은자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무릎을 꿇고 연신 큰절을 올리며 애걸복걸을 했다. 그 사람은 껄껄 웃었다. "당신들 같은 무리 때문에 우리 무술인들이 욕을 먹고 있다오. 약자 앞에서는 거드름을 피우고, 다수의 힘을 동원해 이기려 하며,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서 몰래 암습이나 하고, 그런 비열한 방법을 써도 소용이 없게 되면 이토록 비굴하게 애걸복걸을 하니 이 어찌 무술인의 수치가 아니 란 말인가. 그대들을 용서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잘못이 없을 터, 빨리 가서 무술선생을 모조리 데리고 와서 한꺼번에 덤비도록 하시오. 더 이상 애걸해 봤자 볼썽사납기만 하니까." 새소진이 다시 애걸하려고 할 때였다. 홀연 창 밖에서 바락 역정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정말 울화통이 터져서 못견디겠군!" 호통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뛰어올랐다. 바로 도균 그 사람이었다. 새로운 스승 小孟嘗結客揮金 莽敎師當場出醜 도균은 도전의 충고를 듣고 난 이후부터 여러 무술선생들의 행동을 눈여겨 관찰했다. 그러던 차 에 밖에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새소진이 서둘러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한 가닥 의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하지만 새소진을 따라나갔다가는 여러 무술선생들이 눈치를 챌 것 같 아, 그는 변소에 가는 것처럼 방을 나와서는 화원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폈다. 새소진은 그 사람을 데리고 화원으로 들어서자마자 비겁하게 뒤에서 암습을 가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그는 내심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무공을 겨루려면 정정당당해야 하거늘 암산를 써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그 거지차림의 사나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데 반해 새소진이 주먹 을 쥐고 아파서 쩔쩔매는 꼴을 보이자 도균은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살그머니 두 사람의 뒤를 미행했다.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간 뒤 창 밖에서 대화를 엿듣고 야 결국 새소진이란 인간의 더럽고 추악한 면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고, 사나이의 말대로 한 떼 의 무술선생들이 자기를 기만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터지는 분통을 주체할 수 없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도균은 새소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거지차림의 남자에게 깊이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입을 열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십니까? 이 도균은 무예를 배운답시고 몇 년 동안 엉터리 선생들에 게 속아왔습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훌륭한 무예를 익힐 수가 없었습니다. 장사께서 만약 저희 집 에 있는 몇 사람과 무공을 겨루면서 저의 시야를 넓혀 주신다면 저로서는 더한 영광이 없겠습니 다." 새소진은 도균이 들어오자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그 멍청한 녀석들은 어째서 공자를 잘 감시하지 못해 일을 망쳐놓는 거지? 정말 울화 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구나!' 그러나 남을 원망해 봤자 때는 이미 늦었고 모든 진상은 명명백백히 밝혀진 이후였다. 새소진은 그 사람이 대답하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우리 무술인들은 서로 예의를 지키고 양보하는 것을 큰 덕목으로 중요시합니다. 부득이한 경우 가 아니면 가볍게 손을 쓰지 않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감정을 상하거나 깊은 원한을 맺지 않으려는 배려입니다. 이분 조노사(趙老師)로 말씀드리면 성도에서 유명한 영웅이십니다. 공자의 명성이 마치 중천에 떠 있는 태양처럼 혁혁한 것을 알고 오래 전부러 공자를 흠모해 왔다는군요. 그래서 무공을 겨루기 위해 이곳까지 왕림하셨나 봅니다. 저는 공자의 무공이 아직 완숙되지 못 했으므로 만일 실수라도 하게 되는 날이면 무공을 겨루어 친구를 사귄다는 본래의 뜻을 그르치게 될까 봐 염려했답니다. 마침 공자께서는 고수(高手)를 초빙하여 사부로 삼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 까? 그래서 저는 이분 조노사를 공자님의 무술 스승으로 모신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겠다 싶어 이리로 모셔와서 저의 이와 같은 뜻을 말씀드리려 하던 참입니다. 공자께서는 아무쪼록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심원은 그 말을 듣자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대는 정말 혓바닥에서 연꽃을 피워낼 정도로 언변이 뛰어나구려! 이 조심원으로 말하 면 남을 등쳐먹는 사람이 아니외다. 그대와 한통속이 된다는 것은 나로서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 를 쳐다보는 것과 같소이다. 하지만 그대들처럼 고명하신 분들과 한번 겨뤄보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겠구려." 도균은 새소진이 여전히 자기를 속이려고 하는 것을 보고 가슴 가득 분노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 꼈다. 그러나 화를 억누르고 두어 번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분 조노사께서 한사코 무공을 겨루어 보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데 어째서 피하려고만 하시 오? 자자, 내가 그대들 두 사람의 시합을 지켜보겠소이다. 이기는 분께는 금 오십 냥을 드리도록 하겠소이다.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조심원이 말했다. "역시 공자님은 시원시원하시군요. 이 몸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바입니다." 새소진은 자기가 조심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지라 의기소침해져서 눈살을 찌 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그의 뇌리에 좋은 계책이 떠올랐다. "조노사와 공자께서 원하신다면 불초로서는 상대해 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조노사께서는 하룻밤을 묵으시고 내일 아침 일찍 장원 밖의 잔디밭에서 여러 선생들을 모셔 놓고 저와 고하를 겨루는 것이 어떻습니까?" 도균은 이미 조심원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를 오 래 머물게 하고 싶었던 참이다. 하루라도 붙들어 놓고 여러 가지 궁금한 점에 대해 물어볼 생각 으로 즉시 찬성하고 나섰다. 조심원 역시 거절하지 않았다. 도균은 즉시 조심원을 서재로 데리고 들어간 다음 주방에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환영식을 거행 하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윽고 환영연이 마련되고 도균과 조심원을 비롯한 여러 무술 선 생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조심원은 상좌에 앉아 거침없이 술잔을 비웠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올랐을 때, 도균은 그를 스승 으로 모시고 싶다는 뜻을 은근히 비쳐 보았다. 조심원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공자께서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신다는 소문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파다하게 퍼 져 있답니다. 오늘 친히 보니 그 소문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겠소이다. 그리고 잘났거나 못났거 나 차별없이 거두어들이며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고 형편없는 사람이고 가리지 않는다는 소문 역 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조모로 말씀드리면 사해를 내 집처럼 두루 떠돌아다니는 사람으로서 그렇지 않아도 몸둘 곳이 없었던 참입니다. 공자께서 나를 이토록 아껴주시니 불초로서는 속으로 은근히 바라던 일이오이다. 그러나 이 조모는 아직 여러 무술선생들과 무예를 겨루어 보지 않았 고, 또한 공자께서는 아직 나의 실력을 잘 모르시는 터에 제가 어찌 외람되게 응락할 수 있겠습 니까? 만약에 이 조모가 여러 선생들의 손 아래 패하게 된다면 공자께서 나를 붙잡아 두어도 체 면이 서지 않는 일이고, 내가 요행 그들을 굴복시키게 된다면 여러 선생들은 자연히 이 사람이 댁에서 밥을 얻어먹어도 막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공자의 성의는 가슴 속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어쨌든 내일 무술을 겨루어 본 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도균은 조심원이 먼 길을 달려오느라고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완연함에도 불구하고 눈동자에 형 형한 안광이 쏟아지고, 말투가 시원시원할 뿐만 아니라 행동거지가 의젓한 것을 보고는 지금까지 가깝게 지냈던 비열하고 속된 무술선생들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꼈다. 그는 이미 마음 속으로 감 복하고 있었으므로 정성을 다해 공경했고 나머지 무술선생들은 아예 자리에 없다는 듯이 무시해 버렸다. 새소진을 비롯한 한 떼의 밥통같은 무술선생들은 이와 같은 광경을 보자 하나같이 속으로 이빨 을 갈며 통한을 삼켰다. 술좌석이 파한 이후 도균은 다시 두 벌의 새 옷을 조심원이 거처하는 서재로 가져가 바꾸어 입 도록 했다. 조심원이 말했다. "공자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일 무예를 겨룬 후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도균이 말했다. "우리는 피차 첫눈에 마음이 기울어진 사이 아닙니까?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사소한 예의 에 구애받는 것입니까?" 조심원은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도균이 한사코 권하는지라 부득이 옷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기 잠자리에 들었다. 새소진은 술자리가 파하자마자 여러 무술선생들을 모아 놓고 실컷 욕을 퍼부었다. 그런 다음에 내일 조심원에게 상대할 방책을 의논했다. 무술선생들 가운데 무공이 제법 뛰어난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 사람은 여작(黎綽)이고, 또 한 사람은 황난(黃暖)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지난날 이름난 해적떼의 두목이었는데 무술을 겨루어 친분을 맺고자 도움을 찾아왔다가 공짜로 얻어먹고 얻어입고 얻어자는 게 해적질을 하는 것보다 편했으므로 눌러앉아 있는 처지였다. 한동안 조심원을 상대하는 계책을 논의한 그들은 내일 무술을 겨룰 때 먼저 여작과 황난 두 사 람이 나서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따라 접응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아무리 조심원의 무술이 뛰어나 도 두 주먹으로는 네 주먹을 상대할 수 없을 테니 모두 일제히 달려들어 물고를 낸다. 그래도 그를 이기지 못한다면 마지막 방법으로 각자 지니고 있던 암기(暗器)를 써서 그를 죽이 든가 병신을 만들어 버린다. 그뿐 아니라 조심원을 때려죽인 후에는 도균이 좋은 말로 그들을 대 하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도균마저 죽여버리고 그의 모든 재산을 약탈한 다음에 집에 불을 지 르고 각자 몸둘 곳을 찾아 헤어진다는 끔찍한 흉계도 이루어졌다. 그렇게 계획을 치밀히 짠 다음 에 그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도균은 조심원과 여러 무술선생들의 무리를 이끌고 장원 앞의 잔디밭으로 나갔다. 먼저 손에 단도를 꺼내들고 잔디밭 중앙으로 뛰어든 황난은 조심원에게 덤비라고 고함을 질렀다. 조심원은 상의를 벗지도 않고 맨손으로 여유있는 걸음걸이로 잔디밭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허 리를 굽히고 구경 나온 여러 사람을 향해 정중히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황난에게 말 했다. "그럼 조모는 그대의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아무쪼록 손속에 사정을 두어 주시구려." 황난은 성을 내며 말했다. "왜 병기를 뽑지 않느냐? 나를 우습게 만들지 말고 어서 병기를 뽑아!" "병기를 뽑으라고? 안타깝게도 나는 무기를 집에 두고 왔다네. 그리고 이 장원에 있는 병기란 병기는 하나같이 겉모양만 번지르르하고 그럴 듯했지 쓸모라곤 전혀 없는 장난감들뿐이더군. 나 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사람이 아닐세. 장난감이란 어린애가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닌가." "병기를 들고 싶지 않다면 맨손으로 싸우겠다는 거냐? 도대체 싸울 테냐, 아니면 기권을 할 테 냐?" "조모는 이곳에서 한 이 년 정도 밥을 얻어먹을 작정인데 어찌 싸우지 않을 리가 있겠나? 이렇 게 하는 게 어떨까. 그대는 무기를 들고 나에게 덤비시지. 나는 맨손으로 그대를 데리고 놀아봐야 겠으니." "뭐라고? 흥! 좋다. 이것은 네가 자청한 것이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아라. 엣다, 받아봐랏!" 황난은 말을 끝내자마자 조심원의 안면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도균은 원래 조심원에게 무기를 갖다주려고 했으나 이미 싸움이 벌어진 것을 보자 맨손의 조심원에게 달려드는 황난이 밉살스럽 기도 했고, 조심원이 다치지 않을까 조바심도 났다. 그런데 갑자기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균이 눈을 번쩍 크게 뜨고 바라보니, 조심원이 몸을 번개같이 움직여 황난의 등 뒤로 돌아가 고 있었다. 황난이 몸을 홱 돌려보면 어느 새 조심원은 또 그의 뒤에 가 있었다. 황난은 노기가 치밀어 올라 아래위로 마구 칼을 휘두르며 사면팔방을 가리지 않고 찔러대고 있 었다. 그러나 조심원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조심원은 연신 웃음을 터뜨려 황난으로 하 여금 극도로 수치심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여작이 한 자루의 화창(花槍)을 힘껏 움켜쥐고 싸움에 끼어들었다. 도균이 황망히 소리쳤다. "잠깐 멈추시오! 영웅은 일 대 일로 싸우는 법이외다!" 여작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조심원을 향해 화창을 찔러갔다. 도균은 여작과 황난이 칼과 창을 휘두르며 질풍과 같이 조심원을 공격하는 것을 보자 조심원이 크게 염려되었다. 이때 조심원은 껑충껑충 뛰며 두 사람이 휘두르는 무기 사이로 몸을 피하고 있었는데 그의 동작 은 번개처럼 빨랐고, 제비처럼 유연했다. 그 광경은 마치 어린애를 데리고 장난을 치듯 여유만만 했다. 여작과 황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싸워도 상대방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못하자 수치와 분노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수중의 병기를 미친 듯이 휘둘러댔다. 여작이 조심원의 가슴팍을 노리고 장사입동(長蛇入洞)의 초식을 펼쳐내자 사발만한 창화(槍花)가 눈부시게 일어나며 조심원을 향해 찔러갔다. 조심원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발끝으로 가볍게 땅을 찍더니 일 장이나 솟 구쳐 올랐다. 그의 몸이 막 땅으로 내려서는 찰나 황난이 칼을 벼락처럼 휘둘러 그의 발목을 베 어왔다. 조심원은 돌연 괴망번신(怪莽蒜身)이라는 신법을 펼쳐 몸을 허공에서 수평으로 눕혀 간단 히 상대방의 칼을 피해낸 다음 비스듬히 땅으로 내려섰다. 왼발이 막 땅에 닿는 순간 여작의 창 이 그의 가슴을 찔러왔고, 황난의 칼이 그의 머리를 쪼갤 듯 내리쳐 왔다. 조심원은 큰소리로 외쳤다. "제법이로구나!" 그는 말과 함께 몸을 뒤로 젖히며 발끝으로 땅을 차서 번개처럼 몇 자 밖으로 물러섰다. 이렇게 되니 여작의 창은 허공을 찔렀고, 황난은 무리한 힘을 주었기 때문에 칼을 급히 거두어 들일 수가 없었다. 딱! 여작의 창대가 칼에 맞아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 전광석화 같은 찰나 조심원은 어느 새 몸을 날려 그들 옆으르 바싹 접근하며 두 주먹으로 상 대방의 얼굴을 후려쳤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재빨리 손에 든 병기로 얼굴을 가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머리 위에 가벼운 중압감을 느꼈다. 섬칫하여 고개를 숙여 피하는데 조심원 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하하하! 두 분의 무술은 과연 고강하기 짝이 없구려! 이만 나를 용서해 주는 게 어떻겠소?" 두 사람은 조심원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때 조심원은 한 쪽의 흙더미 위에 우뚝 서 있었는데, 그의 두 손에는 황난과 여작, 자기 두 사람의 모자가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작과 황난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자를 빼앗긴 것 같은데, 어떻게 그것이 상대방의 손에 들어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똑같이 상대방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나 패배를 시인하고 떠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작과 황난은 즉시 두 사람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 들었다. 이어 두 사람은 크게 고함을 지르 며 다시 덤벼들었다. 조심원은 두 사람이 이토록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것을 보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조모가 손에 사정을 두었는 데도 그대들은 여전히 날뛰고 있군! 그렇다면 나로서도 무례한 행동을 취할 수밖에." 새소진은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가자 즉시 나머지 십여 명의 무술선생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 고 그 자신은 살그머니 장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리석은 무술선생들은 아직도 조심원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우 두머리인 새소진의 명령을 받자 다수의 힘으로 제압할 속셈으로 무기를 빼들고 구경하는 척하면 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조심원은 여러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들의 의도를 짐작했다. 그는 한편으론 두 사람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 손이 근질근질하다면 어째서 함께 놀아보려고 하지 않소?" 사람들은 조심원의 도발을 받자마자 크게 소리를 내지르며 벌떼처럼 덤벼들었다. 조심원은 이때까지 여작과 황난을 상대하면서 진짜 실력을 발휘하지 않고 그저 경신법을 써서 몸을 피하고만 있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자 그들에게 무서운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자 기를 우습게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 개의 모자를 무기로 삼아 휘두르며 가볍게 자신의 몸을 방어했다. 여러 사람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 그는 갑자기 몸을 낮추고 소지연환퇴(掃地連環腿)라는 초식을 써서 다리를 뻗어 사방을 한바탕 후렸다. 마치 빗자루로 땅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을 쓸어내는 듯 한 자세였다. 이 초식으로 육칠 명이 간단히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 바람에 여작이 동료의 무기에 상처를 입었는데, 하마터면 팔 하나가 잘려져 나갈 뻔했다. 여작은 형세가 불리하게 변하자 원래의 계획대로 길게 휘파람을 내불었다. 그러자 그를 에워쌌던 사람들은 일제히 구르고 기고 뛰면서 황망히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조심원은 원래 그들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던 터라 적이 물러서는 것을 보고도 뒤쫓지 않았 다. 마침 그의 곁에는 상처를 입은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다가가서 손을 뻗어 그들을 부 축하려고 했다. 막 한 사람을 부축해 일으켰을 때 뭔지 모를 흉기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들었다. 그는 즉시 적이 암기를 던졌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비틀어 피해냈다. '휙' 하며 한 자루 의 비표(飛標)가 뺨을 스칠 듯 말 듯 날아갔다. 사방을 둘러보니 물러선 십여 명의 무술선생들이 각기 손에 암기를 꺼내 쥐고 사방에서 포위하 고 호시탐탐 자기를 노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사방에서 표(標), 추(鎚), 노(弩), 전(箭) 같은 암기 가 메뚜기 떼나 유성처럼 일제히 그에게로 날아왔다. 조심원은 이와 같이 비열한 수단을 보자 울화가 치밀었으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껑충 몸을 솟 구쳐 오르고 땅에 낮게 엎드리면서 암기를 피했다. 이어서 몸을 움츠리고 손으로 막고 발로 걷어 차며 민첩하게 암기를 피하거나 막아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날쌘 잔나비 같아서 아무리 많은 암 기를 퍼부어도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릴 것같지 않았다. 그는 피하면서 받아낸 몇 개의 암기를 되 돌려 던졌다. 그 바람에 삼사 명의 무술선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거꾸러졌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도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처음에 그는 여작과 황난이 실력대결에서 졌을 때 많은 무술선생들이 한꺼번에 조심원에게 달려 드는 것을 보고 분노와 증오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비열하기 짝이 없는 암기공세 까지 펼치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손을 멈추시오!" 그러나 조심원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극에 달한 무술선생들이 그의 말을 들을 턱이 없었다. 도균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도전이 헐레벌떡 달려와 아뢰었다. "방금 한 무술선생이 장원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장방을 묶어놓고 은자가 들어 있는 궤짝을 열어젖히고 많은 금은보화를 갈취하여 서북 쪽으로 달아났습니다!" 도균은 이제야 한떼의 무술선생이란 자들이 악당들로서, 이제 무술에 능한 자가 오자 더 이상 머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는 이런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다. '내가 평소 얼마나 저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왔던가?' 그런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분수가 있지, 자기의 재산마저 강탈해 달아났다고 생각하니 땅이 핑 그르 도는 것처럼 느껴졌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렇지만 이미 도둑을 쫓기는 늦었으므로 싸움이 끝난 다음에 대책을 강구하기로 마음먹고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난전을 바라보았다. 이때 여러 무술선생들은 더욱 졸렬하고 비겁한 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수록 도균은 치미는 울화통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영웅! 사정 둘 필요없소! 그들은 한낱 강도들이외다! 조금 전에 저들 중의 한 떼가 내 재물을 강탈해 도망갔소이다!" 이때 여작은 도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도균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새소진, 이놈이 혼자 보물을 차지해 달아나 버렸구나! 우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우는 틈 을 타서 저 혼자 어부지리를 취했군. 친구의 의리를 배신하다니! 하지만 더욱 괘씸한 놈은 도균이 다. 그간 정분을 추호도 생각지 않고 이제 막 굴러 들어온 웬 껄렁패를 편들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한 여작은 도균 앞으로 슬쩍 몸을 날리며 호통을 내질렀다. "너 이 배은망덕한 짐승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창을 들어 도균의 가슴을 찔러갔다. 도균이 뜻밖의 기습을 받고 속으로 아차하고 부르짖는 찰나! 으악! 소리와 함께 여작은 처참한 비명을 지르려 땅바닥에 털썩 고꾸라졌다. 원래 조심원이 날아오는 암기를 받아내고 있을 때 땅바닥에는 상처입은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 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몸을 옴짝달싹 못한 채 끙끙거리며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성이 모(毛)고 별호가 묘두응(猫頭鷹)인 그는 몹시 교활한 자였다. 그는 조금 전에 조심원의 두 발차기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이므로, 조심원이 암기를 피하느라고 정신없는 것을 틈타 몸에 지니고 있던 세자루의 강표(鋼標)를 살그머니 꺼내 쥐었다. 그러나 조심원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슬그머니 움직이는 것을 바쁜 와중에서 도 눈치채고 있었다. 묘두응이 기회를 틈타 내던진 한 자루의 강표가 조심원의 목젖을 향해 날아 오자, 조심원은 이미 방비하고 있던 터라 날아오는 암기를 간단히 이빨로 꽉 물었다. 이때 조심원 은 오른손에 한 개의 노전(弩箭)을 쥐고 있었는데, 그는 강표를 무는 동시에 둘째 손가락을 튕겨 묘두응을 향해 노전을 날려보냈다. "악!" 묘두응은 두 번째 강표를 날리기도 전에 왼쪽 어깨에 노전을 맞고 풀쩍 뛰어올랐다가 땅에 떨어 졌다. 몹시 고통스러운지 그는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바로 이때 여작이 도균 앞으로 달려 들며 창을 들어 찌르려고 했던 것이다. 조심원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입에 물고 있던 강표를 왼손에 쥐자마자 여작을 향해 던져냈 다. 이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암기를 던져 황난마저 쓰러뜨렸다. 조심원은 연자비운종(燕子飛雲踪)의 신법을 펼쳐 세 번 도움닫기를 하여 도균 앞에 도달했다. 이 때는 도균이 여작의 창을 빼앗아 그의 목을 내리찍으려고 하는 찰나였다. "멈추시오! 경솔한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조심원이 크게 부르짖자 도균은 멈칫 하며 조심원을 올려다 보았다. "공자께서는 먼저 장원으로 돌아가십시오. 이 자들은 내가 맡겠소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균의 손에서 창을 빼앗은 조심원은 여작의 허리께를 찔렀다. 이어 몸을 날려 나머지 무술선생들에게 덮쳐갔다. 그들 가운데 눈치빠른 자들은 이미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을 치고 있었고, 상황판단이 느 린 자들만이 여전히 겁도 없이 조심원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경신법을 펼쳐 그들 앞으로 달려간 조심원은 반 동강난 창을 들고 번개처럼 휘둘러댔다. 몇몇 무술 선생이 삽시간에 땅바닥에 거꾸 러졌다. 도망친 서너 명을 제외한 나머지 무술선생들은 모조리 조심원에게 혈도를 찍혀 뻗어버렸 다. 조심원은 땅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그들을 질질 끌어다가 한곳에 모았다. 조심원이 말했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공자님을 속이고 밥을 빌어먹었다. 그것 자체만으로는 죄악이라고 할 수 없 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작당하여 한 사람을 해치려고 하는 처사는 용납할 수 없구나. 너 희들이 이후부터는 다시 마음을 바르게 먹고 살아가겠다면 나는 이 정도로 용서해 주겠다. 그렇 지 않고 앙앙불락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모조리 관청으로 압송하여 남의 재산을 강탈한 죄의 댓가 를 받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알아서 처신하라." 말을 마치자 그는 무술선생들의 등줄기를 한 대씩 후려쳤다. 무술선생들은 그제서야 혈도가 풀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고 굽신거리며 그곳을 떠나려고 했다. 도균은 문득 그들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불쑥 입을 열었다. "여러분, 잠깐만 걸음을 멈추시오. 내가 여러분들의 봇짐과 의복을 가져오도록 하겠소." 그는 하인을 시켜 여러 무술선생들의 옷가지를 챙겨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도전에게 명하여 은 자 천 냥을 가져오게 하여 노자돈으로 나누어 주었다. 무술선생들은 공자가 이토록 은혜를 베풀자 크게 감격하여 땅바닥에 꿇어앉아 큰절을 올리며 고 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도균 역시 마주 꿇어앉아 반례했다. 이윽고 무술선생들은 하나하나 제 갈길로 떠나갔다. 도균은 무술선생들이 떠나고 나자 조심원을 장원 안으로 청해들여 새삼스레 그를 사부로 모시겠 다고 고집을 피웠다. 조심원이 말했다. "공자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천품(天品)을 타고난 몸입니다. 나에게 어찌 공자 같은 사람의 사부 가 될 자격이 있겠소이까? 나는 그저 이곳으로 피신해 온 몸일 뿐이외다. 공자께서 친구로 대해 준다면 이 조모는 마땅히 성심을 다해 지닌 바 무예를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도균은 한사코 사부로 모셔야 된다고 우겼다. 조심원은 할 수 없이 도균에게서 네 번의 큰절을 받고 이후부터 조석으로 도균에게 무예를 전수 하는 사부가 되었으며 따라서 도균의 무술은 일취월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望門投止 趙心源門內接銀標 渡水登萍 陶孟嘗江心觀絶技 조심원의 본명은 숭소(崇韶), 강서성(江西省)의 세가(世家) 출신이었고, 그의 조상들은 명나라 때 큰 벼슬을 했다. 조심원은 어릴 때 관리인 아버지를 따라 사천성(四川省)에 들어왔는데, 어린 시 절부터 무술을 꽤 좋아하다가 청성산(靑城山)에서 우연히 협승(俠僧) 질범(秩凡)을 만난 뒤부터 놀라운 재간을 익혔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 이민족의 다스림을 받는 형편에 벼슬을 하고 싶지 않아 사천 성 동쪽에 은거하며 아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치고 농사일에 힘을 썼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조심원은 물려받은 재산을 팔아서 각처로 돌아다니며 이인(異人)과 명 사(名士)를 사귀었다. 강호 사람들은 그가 재간이 뛰어나고 산천구경을 남달리 좋아해서 그에게 걸맞는 아호(雅號)를 지어주었으니, 연중신악(煙中神顎)이 그것이다. 그는 육지금룡 위청과 동문 사형제 사이였다. 근년에 그는 사천성 서쪽에서 길을 가다가 한 떼 의 표사(標師)들을 도와 표물을 되찾아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사천성의 팔마왕(八魔王)과 원한을 맺게 되었다. 그는 종종 위청으로부터 도균이 재물을 가볍게 여길 뿐 아니라 친구를 사귀 고 싶어하며, 무공을 좋아하는 데도 아직 그럴 듯한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도균에 게 몸을 의탁하여 팔마왕의 복수를 피할 작정을 한 것이다. 다행히 그의 아호를 아는 사람은 강호에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사천성을 벗어나기만 하 면 팔마왕이 그를 쉽사리 찾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 형편의 조심원이므로 도균이 그토록 대 하며 자꾸 붙잡는 데야 어찌 머물며 무예를 전해 주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어느덧 삼 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도균은 내공과 외공이 모두 상승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어느 날 심원이 도균과 함께 한담을 나누며 처마 아래 서 있는 데, 갑자기 투명한 물체 하나가 날아왔다. 조심원이 재빨리 그 물건을 나꿔채어 살펴보니 한 자루의 은표(銀標)였다. 홀연 멀리서 한 사나이가 날듯이 달려오더니 두 사람의 눈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는 조심원을 향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마왕의 명을 받들어 그대를 오 년 동안이나 찾았으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노심초사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에 숨어 있었구먼. 이제 그대의 허심탄회한 한 마디를 듣고 싶구려. 나는 돌아가 마주(魔主)에게 뭐라고 복명하면 좋겠소?" 사나이는 말을 마치자 다시 껄껄 웃었다. 조심원이 말했다. "나는 당초 팔마왕의 일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소. 사건이 터진 다음에야 나는 크게 후회했지요. 찾아뵙고 사과를 드리려고 했으나, 공교롭게도 절친한 친구와 이곳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기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이곳에 이르니 이분 공자께서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지 않겠소. 그 래서 이곳에서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대가 명을 받들고 왔다고 했는데, 이 조모가 그렇게 분수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오? 이 조모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소. 그러니 귀하는 마주에 게 말씀을 전해 주시구려. 이 조모가 명년 오월 단오에는 반드시 청라곡(靑螺谷)으로 찾아뵙겠다 고 말입니다." 그 사나이는 듣고 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그대가 신의 있는 인물이란 소문을 들어온 바요. 아무쪼록 약속을 어기지 않기 바 라오." 말을 마치자 그는 조심원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두 손을 맞잡고 읍을 하며, "그럼....." 하고 말했다. 심원은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리며 낭랑히 소리쳤다. "좋소! 그럼 이만 가보시오!" 순간 그 사나이는 비칠거리며 일곱 걸음이나 뒷걸음질쳤다.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을 띠고 조심 원과 도균을 힐끔 쳐다보더니 휙 몸을 돌려 줄행랑을 놓았다. 도균은 조심원의 얼굴이 술에 취한 듯 시뻘개진 것을 보며 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막 물어보 려고 입을 달싹이는데, 조심원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에 들어간 조심원은 들어가자마자 가부좌를 하고 앉아 한참 동안이나 운기조식을 했다. 그리 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정말 위험했었군!" 도균은 재빨리 어찌 된 노릇이냐고 물었다. "공자께서 어찌 알 수 있겠소? 조금 전 그 사람은 서천팔마(西川八魔)의 수하인 신수청조(神手靑 雕) 서악(徐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까 손으로 나꿔챈 그 은표를 도균에게 내밀며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들의 초청장입니다. 사 년 전 나는 서천의 어느 길에서 팔마 가운데 여 덟째인 팔비마왕(八臂魔王) 구령(邱鈴)이 표물을 약탈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소. 그들은 표물 을 탈취했을 뿐 아니라 표물을 호송하는 사람까지 죽이려 하더군요. 나는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앞으로 나아가 구령과 맞붙었지요. 그들은 인원이 많았으므로 나 혼자 상대하기에는 벅차서 부득이 뒤로 물러서는 찰나, 어디선가 한 웅큼의 매화독침(梅花毒針)이 날아와 그들을 물리치는 바람에 표사와 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그런데 독침을 뿌린 사람은 시종 모습을 드러 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팔마는 매화독침을 내가 뿌린 줄 알고 나에게 원한을 품고는 나를 기필 코 죽이려고 벼른다오. 나는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몸을 피했 소이다. 아까 밖에서 서악과 맞섰을 때, 나의 내공이 탁월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팔마 를 찾아가 만나기도 전에 중상을 입고 말았을 것이외다. 그 서악이란 자는 바로 오귀금사장(五鬼 金沙掌)이란 무공을 익힌 고수인 바, 그의 오귀금사장은 무섭기 그지없는 무공이외다. 그는 조금 전 내가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독수를 쓰려 했지만 다행히 나는 암암리에 방비하고 있던 차였 기에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그에게 반격을 가했던 것이지요. 그 때문에 그는 내상을 입고 만 것입니다. 어쨌든 팔마의 초청장을 받은 이상 가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명년 단오절이면 앞으로 구 개월 남짓한데 그동안에 그들과 대적할 준비를 해야겠군요. 그러니 이곳에 더 이상 머물 시간 이 없소이다. 공자의 재간은 아직 미숙하며 나 역시 공자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는 몸이외다. 내 가 스승이 된다면 그야말로 공자의 자질을 억누르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천하에는 검선(劍 仙)이나 이인(異人)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 공자께서 집을 떠나 유심히 살펴본다면 풍진세 상에서 분명히 뛰어난 스승을 찾아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교만방자하지 말고 사람을 성의를 가 지고 대하며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신다면 그와 같은 사부를 만날 기회가 반드시 생길 것이오." 도균은 조심원이 떠난다고 하자 여간 서운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만류했으나 조심원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으므로 마침내 슬픔을 참고 그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원을 보내고 난 다음 도균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나도 스승을 찾아 떠나야겠다. 다행히 집안일은 도전이 관장하고 있으니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이윽고 도균은 홀몸에 은자가 두둑한 보따리 하나만 달랑 지닌 채 스승을 찾아 집을 나섰다. 한구(漢口)에는 그의 아버지가 벌려 놓은 가게가 몇 군데 있을 뿐 아니라 사천성에 많은 기인이 있다고 들어왔기 때문에 도균은 한구로 목적지를 정했다. 그 지방에서 가장 큰 약제상인 굉선당 (宏善堂)은 도균의 재산이었다. 도균이 굉선당에 나타나자 관리인인 장흥재(張興財)는 주인나리가 왔답시고 떡 벌어지게 환영연 을 마련하여 술을 자꾸 권했다. 도균은 이름난 스승을 찾아 강호에 나온 것이지 아랫사람들과 술이나 마시자고 집에서 떠난 건 아니므로 그들과 상대하자니 무척이나 따분했다. 그래서 그는 가게의 거래 장부를 대강 살펴본 다음 손님들이 찾아올 때마다 어디로 가면 무술이 뛰어난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굉선당 장흥재는 도균이 무공을 무척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를 무창(武昌)으로 데리고 가서 이 틀 동안 묵으면서 그곳의 유명한 무인들을 도균에게 일일이 소개시켜 주었다. 도균은 조심원에게 무예를 배운 후로는 지난날의 그가 아니었으므로, 그 무인들을 별로 대단하 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견문이 풍부했으므로 그들의 입을 통해 강호의 이야기와 녹림의 이야기를 많이 주워들을 수 있었으므로 기인이사들에 대한 숭배의 마음이 깊어졌다. 그러 나 그런 기인이사들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만나고 싶어한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며칠 더 머문 뒤 사천 땅으로 들어가 스승을 찾아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만난 무 인들 중의 하나가 전시금붕(展翅金鵬) 허월(許鉞)인데, 그는 팔십일 수의 이화창(梨花槍)을 매우 잘 썼으며 경신법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 허월은 원래 선비집안 출신인데, 도균을 만나자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었다. 이때 이미 계절 은 겨울철이었다. 허월이 도균을 보고 말했다. "겨울 동안 내 집에서 기거하다가 봄이 오면 함께 스승을 찾아 떠나는 게 어떻겠나?"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잖아도 약방은 시끄럽고 번잡하여 고민하던 참입니다." 도균은 쾌히 응락하고 허월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함께 겨울을 보냈다. 한구의 기후는 온화하여 한겨울인 데도 별로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화창한 날, 두 사람 은 질탕하게 하루를 즐길 요량으로 솥과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강물 위에 배를 띄웠다. 강물은 넓어서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고, 수면은 거울처럼 맑았다. 두 사람은 흥취가 도도해져 권커니 잣커니 실컷 술을 들이키다가 급기야 사공을 보고 앵무주(鸚 鵡洲)로 가자고 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마음껏 마시고 즐길 참이었다. 앵무주로 배를 저어간 사공은 이윽고 한 곳에다 닻을 내렸다. 도균과 허월은 뱃머리에 앉아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주흥에 겨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창 거나하게 취기가 올랐을 때 물결을 따라 한 척의 작은 배가 흘러 내려왔다. 배 위 에서 한 사람이 노를 젓고 있었는데 배의 속도는 날으는 듯 빨랐다. 도균은 손가락으로 작은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손바닥 만한 배가 어쩌면 저렇게 화살처럼 빠를까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작은 배는 어느 새 그들이 타고 있는 배의 곁에 이르러 있었다. 작 은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비쩍 마르고 키가 작은 노인인데, 겨울철인 데도 몸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소매가 짧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옷은 깨끗하고 풀을 먹여서 빳빳했으므로 조금 도 불결해 보이지 않았다. 그 작은 배는 기껏해야 전장 일곱 자가 채 못 될 작은 배였고, 두 사람 이상은 태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뱃머리에는 옹기로 빚어 만든 찻주전자와 깨어진 찻잔과 그리고 술을 담는 호로병이 놓여 있었다. 노인은 배를 강기슭에 대더니 도균과 허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로병을 들고 언덕으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마 술을 마시러 가는 모양인데, 타고 온 배를 어디에 비끌어 매지도 않고 물결을 따라 흘러가 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도균은 크게 의아하여 허월에게 말했다. "형님! 저 노인은 술을 목숨보다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배를 매지도 않고 닻을 내리지도 않은 채 술병을 들고 언덕으로 올라가는군요. 배가 물결을 따라 흘러가 버리면 어쩌지요?" 이때 그 배는 이미 기슭에서 꽤 멀리 벗어나 있었고 점차 강 한복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도균 은 사공에게 눈짓을 했다. 사공은 즉시 삿대를 사용해서 작은 배를 끌어당겼는데, 우습게도 작은 배 위에는 술과 차를 담는 그릇 외에는 밧줄 한 오라기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노인은 원래 배를 매어 놓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공은 밧줄을 꺼내 작은 배를 자기의 배에 묶어 놓았다. 허월은 서른이 갓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견문이 무척 넓어서 대뜸 도균이 그 노인에게 관심을 가 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도균을 향해 물었다. "아우, 자네가 보기에 그 노인이 어느 지방에서 온 사람 같은가? 약간 이상한 데가 있는 것 같 잖아?" "그 노인은 겨울철에도 소매가 짧은 옷을 입고 있으며 매우 옷이 깨끗했습니다. 그러나 언덕을 오르는 걸 보니 발걸음이 느리고 둔하더군요. 그걸로 미루어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 요. 저로서는 그분의 내력을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분은 풍진세상을 떠돌 아다니는 이인이 아니면 산속에 은거하고 있는 은사같으며,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합니다. 나중에 그분이 돌아오시면 청해서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그러면 자연히 그분의 내력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우의 안목은 역시 날카롭군! 그러나 단정하기엔 아직 이르다네." 허월이 자기 말에 토를 다는 데 대해서 도균이 막 입을 열어 그 이유를 물어보려고 할때 문제의 노인이 커다란 호로병을 들고 어느덧 어슬렁어슬렁 되돌아 오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위치까지 오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노부가 술을 사러 간 동안 내 배를 훔치려 했겠다?" 사공은 노인의 말투가 무례하고 꼬락서니가 매우 빈궁해 보이는지라 썩 나서며 욕을 퍼부으려 했다. 도균이 재빨리 제지한 다음 배를 강기슭에 대게 하여 언덕 위로 올라가 노인을 향해 말했다. "조금 전 어르신께서는 배를 매어 놓는 것을 깜빡 잊으셨었군요. 저는 배가 물결을 따라 흘러가 는 것을 보고 사공에게 명하여 붙잡아 매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호의에서 그랬던 것이지 결코 나 쁜 마음을 품고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르신께선 오해하지 마십시오." 노인은 그 말을 듣자 더욱 대노했다. "너희들은 조직적으로 나쁜 짓을 일삼는 패거리가 분명해! 장물과 도적놈이 이곳에 함께 있거늘 무슨 변명을 늘어놓아? 만약 내가 한걸음만 늦었어도 너희들은 내 배를 훔쳐 달아났을 게 아니냔 말이다! 너희들은 내가 늙었다고 업수이 여기고 바보 먹통으로 간주하고 있구나!" 도균은 노인이 억지를 쓰자 속으로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조심원이 떠나면서 당부 한 말이 생각났고, 노인의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발출되는 것을 보고 함부로 행동해선 안 되 겠다고 생각하고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노인장께선 농담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더욱 화가 나는 듯 욕지거리를 해댔다. "햐! 요놈들 봐라! 산전수전 다 겪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고 해?" 허월은 그 노인이 결코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뭍으로 올라와 노인에게 절을 했다. "어르신네, 노기를 거두십시오. 이 일은 원래 저의 친구가 쓸데없이 간섭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 니 모두 저희들의 불찰입니다. 하지만 훔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맹세컨대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배 위로 오르십시오. 저희 형제 두 사람이 잘못을 사과드리는 의미에서 조촐하게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심이 어떠하올지요?" 노인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희색이 만면해서 말했다. "아니, 그럼 진작에 술을 대접하겠다고 하지 않구. 그랬으면 처음부터 좋은 낯으로 대했을 게 아 닌가? 에이! 요즘 젊은이들은 눈치가 없어서 탈이라니까!" 도균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술을 얻어먹는 방법도 여러 가지군!' 그러나 허월이 깍듯이 대하는 걸 보고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못하고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짐짓 공손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노인을 배 위로 모셨다. 자리에 앉자마자 노인은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술을 목구멍 속으로 마구 퍼붓고 안주를 집어서는 게걸스럽게 먹어대기 시작했다. 도균과 허월은 노인의 이름을 물어볼 엄 두도 내지 못하고 옆에서 술과 안주를 집어주며 실컷 마시도록 시중만 들었다. 노인은 따라주는 족족 잔을 비우는데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사공은 아니꼬운 눈초리로 노인이 게걸스럽게 먹는 모양을 흘겨보더니, 노인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작은 배를 매었던 밧줄을 슬그머니 끌러놓았다. 허월은 이를 보고도 모르는 체하고 있다가 배가 일 장 남짓 흘러간 후에야 일부러 크게 놀란 척 부르짖었다. "아이쿠! 어르신네의 배가 달아나고 있네! 어쩌다가 이런 불상사가 생겼지?" 사공은 얼른 대꾸했다. "이곳은 원래 물살이 세답니다. 그러니 썩은 새끼줄이 지탱하지 못하고 끊어진 모양이에요! 이 큰 배로 저 조그만 배를 쫓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랍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죠? 하지 만 어르신네는 반드시 그 배를 끌어올 방법이 있을 줄 아는 뎁쇼." 노인은 사공의 말을 듣더니 한 손의 술잔을 높이 쳐들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 자네의 말이 옳아! 나는 다른 사람이 훔쳐가지 않나 하는 데만 신경을 쓰지 저 배가 떠 내려 가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네!" 도균은 순진한 편이었다. 그는 허월이 노인의 능력을 시험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작 은 배가 물결을 따라 흘러 이미 몇 장이나 멀어져 가는 것을 보자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여보, 사공! 어서 밧줄을 끌어당겨요. 밧줄이 모자라면 어서 배를 띄우시오. 배를 놓쳐서는 안 돼요!" 사공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노인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버려 두게나. 내 배는 도망치지 못할 것이네. 모두 먹고 마신 후에 내가 끌어올 작정 이니까 그대들은 관여할 필요없어." 허월이 재빨리 말했다. "저는 노선배님께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절기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이 기회에 견문을 좀 넓혀야겠군요." 도균은 그제서야 허월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해 보았 다. '음... 등평도수라면 경신법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수면 위를 걸어간다는 뜻이니 그 신기함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조사부님은 등평도수를 펼칠 때는 어떤 의지할 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달마조사(達磨祖師)께서도 갈대잎 하나가 있었기에 강을 건 널 수 있었다고 했거늘.' 그 작은 배는 자꾸 멀어져 갔다. 아무리 경신법이 뛰어나다손 치더라도 어찌 수십 장이나 되는 강물 위를 뛰어갈 수 있겠는가! 더구나 강물은 바람을 맞아 크게 출렁이고 있었다. 도균은 노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빛나고 있다는 점 이외에 달리 특 별한 점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는 몇 번이나 노인의 성명을 물어보려고 했으나 노인이 자꾸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통 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술잔이나 기울이는 동안 작은 배는 더욱 멀리 흘러가고 말 았다. 도균과 허월의 눈에는 그저 콩알만하게 보일 정도로 까마득한 원거리였다. 노인은 바람이 구름을 몰아내듯 삽시간에 술과 안주를 싹 쓸어 먹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면서 뱃전으로 걸어갔다. 도균은 그가 술에 취해 강물 속으로 빠지게 될까 봐 손을 뻗어 노인을 부축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노인이 자기 손에 부드러운 종이뭉치를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손을 뿌리치고 강 물 위로 몸을 던졌다. 도균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앗! 위험합니다!" 그가 지른 비명의 끝마디가 채 입 밖에 나오기도 전에 노인은 수면을 딛고 물 위에 우뚝 몸을 세우고 있었다. 그의 발은 전혀 물 속으로 빠져들지 않았으며 마치 땅을 딛고 서 있는 듯했다. 노인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다시 만나세." 노인은 이어 첨벙첨벙 물방울을 튀기며 나는 듯이 물 위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크게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사공은 강물의 신(神)이 현신한 줄로 알고 뱃머리에 엎드려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큰절을 올리 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허월은 그 노인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로 등평도수의 경공술을 전개하 리라고는 믿지 않았었다. 기껏해야 삼 장 정도 물 위를 뛰어가는 청정점수(靑靖點水)의 재간을 펼 치겠거니 하고 여겼는데, 노인이 물 위를 달려가는 모습은 마치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하여 아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조금 전에 너무 소홀히 대접하여 절세의 기인을 사귈 기회를 놓쳤다 고 생각하니 크게 후회가 되었다. 도균 역시 노인의 이름을 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다. 넋을 잃고 후회를 하다가 문득 손에 쥐어져 있는 종이의 감촉을 느꼈다. 그제서야 노인이 건네준 물건 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재빨리 펼쳐 보았다. 그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자가 쓰여 있었다. <지여황학 천행의속(遲汝黃鶴 川行宜速)> 필체는 날아갈 듯했고 마치 용과 뱀이 하늘로 오르며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함께 읽어 보았으나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천행의속>이란 말이 아마도 빨리 사천성으로 가라는 뜻인 가 보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상의한 다음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사천성으로 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허월은 열흘 안으로 집안일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출발하겠다고 했다. 허월은 사공에게 말했다. "조금 전의 그 신선은 우리와 인연이 있었기에 이곳까지 찾아오셔서 편지를 남기셨다네. 이와 같은 하늘의 비밀을 누설한다면 복은커녕 재앙을 당할 것이니 명심하게나. 어디 가서도 오늘 있 었던 일을 이야기하지 말도록 하게. 알겠나?" 그는 은자 두 냥을 사공에게 쥐어주며 비밀을 지켜 달라고 당부했고, 사공은 굽신거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도균은 노인을 오래 붙잡아 두고 섬기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렇지만 노인이 남긴 쪽 지에는 <지여황학>이라는 말이 다시 만나고 싶으면 황학루(黃鶴樓)로 가서 기다리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출발하려면 며칠 동안의 여유가 있으므로, 집안일을 정리하느라고 바쁜 허월은 남겨 두 고 매일같이 황학루로 가서 그 노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허월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한 번쯤 그 노인을 만나기를 기대했다. 이레째 되는 날, 황학루에 앉아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홀연 여러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 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옷차림이 이상한 한 화상과 한 속인(俗人)이 자기의 등 뒤 의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도균은 알 턱이 없었지만, 이 두 사람이야말로 금신나한 법원과 그의 제자 진랑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모습은 추악했으며 두 눈에서는 흉칙한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도균은 이들 두 사람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유심히 두 사람의 행동거지를 살펴보았다. 진랑은 도균의 등 뒤에 앉아 있었으므로, 도균이 고개를 돌리자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랑은 도균이 풍채가 뛰어나고 위풍이 늠름한지라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고 법원에게 말했 다. "사부님, 저 젊은이 좀 보십시오. 두 눈에서 빛이 번쩍거리는 것이 상당히 내공이 뛰어난 듯하군 요. 사부께서는 그가 어떤 문파의 인물인지 알아보실 수 있으신가요?" 법원은 진랑의 말을 듣고 도균을 바라보았다. 마침 도균도 고개를 돌리고 두 사람을 바라보는 중이어서 그만 양쪽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법원은 도균의 신체가 건장하고 위풍이 저절로 우러날 뿐만 아니라 영기발랄해 보이는 것이 타 고난 선골(仙骨)인지라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리하여 진랑의 귀에 입을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 다. "저 사람은 이제 막 무예에 입문한 것 같구나. 특히나 검술은 거의 배운 바가 없다. 그러나 저 사람은 천품이 너무나 뛰어나다. 그가 아직도 검술을 배우지 못한 걸로 보면 아미파의 인물에게 발탁되지 못한 게 분명하다. 늦기 전에 나는 그를 제자로 거두어들였으면 싶다. 그래야 아미파에 서 데려가지 못하게 될 테지. 너는 먼저 사시(沙市)에 가서 나를 기다리거라."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술과 밥을 다 먹고 난 터였다. 그래서 진랑은 먼저 황학루를 떠나갔다. 법원은 난간에 기대어 강의 경치를 감상하는 체하면서 도균을 곁눈질해 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인재였다. 심지어 사랑스런 심정까지 우러날 정도였다. 도균은 법원과 진랑이 자기를 보고 귀엣말로 수근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어 마음 속으로 경계하고 있었고, 진랑이 떠나면서 자기를 두어 번 힐끔힐끔 훔쳐보는 걸 보고 더욱 경각심을 돋 구고 있었다. 도균은 일찍이 조심원으로부터 무공이 뛰어나고 검술에 능한 사람은 여러 면에서 남다른 점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자기에게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있다면 매우 귀찮은 꼴 을 당하게 될 게 뻔했다. 그런데 화상은 술과 밥을 다 먹었는 데도 떠나지 않고 힐끔힐끔 자기를 훔쳐보는 것이었다. 도균은 그 점이 무척 꺼림칙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당해낼 수 가 없을 것 같았고 이 자리를 그냥 뜨자니 젊은 혈기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풍진세상에 발을 들여 놓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남에게 죄를 지은 적도 없으니 오해가 있을 수도 있잖을까?' 이런 생각으로 창 밖을 오가는 수레와 말들을 구경하는 척하며 화상의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행동했다. 그런데 돌연 행인들 틈에서 한 작달막한 사람이 자기를 향해 손짓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바로 자기가 만나기를 고대하고 고대해 오던 강물 위를 달려가던 바로 그 도인이 아닌가? 그가 뛸 듯이 기뻐서 입을 벌리고 큰소리로 부르려고 하는데, 그 도인은 재빨리 손짓을 해서 소 리를 내지 말라는 암시를 했다. 이어 도균의 귓전에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의 옆에 앉아 있는 그 화상은 도적놈이라네. 오대파의 요사스런 마두로써 이미 자네를 제 자로 거둬들이려고 노리고 있다네. 자네가 응하지 않으면 그는 반드시 자네를 죽일 거야. 나는 지 금 정체를 드러내기 곤란한 사정이 있네. 자네가 만약 나를 사부로 모시고 싶다면 꾀를 써서 황 학루에서 빠져나오도록 하게. 나는 앵무주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겠네. 그 화상은 그대가 황학루 에서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자네를 납치하려고 하고 있으니 자네는 우선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번 골탕을 먹이고 희롱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네."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인파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균이 그 노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데도 법원 같은 고수가 어째서 듣지 못했을까? 검선(劍仙)들은 내공을 끌어올려 몸과 검을 하나로 합쳐 부드럽거나 강한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고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다. 그 노인이 지금 말한 재간은 백리전음(白里傳音)이라는 무공으로써 완전히 기(氣)를 사용하는 재간이다. 그는 우선 선천진기(先天眞氣)를 가는 실처럼 변화시켜 정확한 목적지, 즉 상대방의 귓구멍 속으 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소리는 비록 가느다랗지만 매우 분명하게 들렸다. 설사 백리 밖에 있는 사 람에게라도 그 음성을 전달할 수 있으며 검선이 검을 날려 적의 머리를 백리 밖에서 잘라내는 것 도 이와 같은 이치다. 도균은 노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법원이 자기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 다. 어쨌든 그 노인이 자기를 제자로 삼겠다고 했으니 그렇게 기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법원이 호시탐탐 자기를 노리고 있었으니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법원은 노인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으므로 도균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음... 아무래도 그 노인이 저 흉악한 도적 화상보다는 무공이 뛰어난가 보구나.' 도균은 정신을 가다듬고 법원의 독수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해보았다. 법원은 원래 도균이 황학루를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재주를 펼쳐 도균에게 보여줄 심산이었다. 도균이 감탄한 나머지 죽자사자 제자로 삼아 달라고 애걸복걸을 하게 만들어 놓은 후에 거드름을 피우며 못 이기는 체 제자로 맞아들여 도균을 완전히 매료시킬 참이었다. 그런데 도균이 그를 아랑곳하지 않자 재간을 펼쳐 보일 기회가 없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런 병신 같은 놈 보게! 어째서 이 위대한 사부님께 눈길을 돌리지 않는 거냐? 빌어먹을 자식! 지지리도 복이 없는 자식! 굴러 들어오는 복덩어리도 마다하다니.' 법원은 그래도 끈기를 가지고 도균이 그를 한 번 쳐다보기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진이 흘러가자 술을 마시던 손님들도 한둘씩 흩어져 황학루에는 그들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각기 창 밖을 보는 척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균은 생각했다. '저 못된 화상은 꽤나 끈질기구나! 이 녀석, 빨리 꺼지기나 할 것이지. 죽치고 앉아 있다가 내가 아래로 내려가면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나를 납치하려고 벼르고 있는 모양인데... 이거 정 말 어찌해야 좋을지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군!' 법원은 생각했다. '이젠 재주고 뭐고 보여주지 않겠다. 굳이 축하주를 마시지 않겠다면야 재주를 강제로 처먹여야 지. 반 시진만 더 기다려도 놈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네 목덜미를 움켜쥐고 개처럼 끌고 갈 것이 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주보(酒保)가 다가왔다. 주보는 도균이 며칠 동안 빠짐없이 황학루에 오는 걸 보고 단골 하나 늘었다고 기뻐하던 참이라 그가 혼자 무료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자 기회를 얻어 환심을 사야겠다고 작심한 것이다. 그는 도균 쪽으로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으리, 술과 음식을 드신 지 한참이 지났으니 배가 고프시죠? 방금 강에서 잡아온 싱싱한 새 우가 있습니다요. 아주 신선한데 요리를 한 상 만들어다 드릴깝쇼? 물론 무료로 드리는 것입니다 요. 헤헤헤... 손님께선 이미 황학루의 귀빈이 아니시겠습니까? 이런 특별대우는 우리 황학루가 생 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랍니다." 도균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중요한 일을 상의하기 위해 여지껏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원래 해질 무렵, 이곳에 서 만나기로 했으니 아마도 곧 들이닥칠 테지. 새우가 그처럼 싱싱해요? 그럼 어디 맛을 봅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속이 조금 거북하군. 아래층으로 내려가 볼일을 좀 보고 올라올 테니 그 친구 가 나타나면 꽉 붙잡아 놓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 주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은 한 덩이를 꺼내 주보에게 맡겼다. "이걸로 오늘 먹을 음식값을 계산해요. 남는 돈은 당신이 가져도 좋고." 주보는 입이 쩍 벌어졌다. "아이쿠!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길몽이었나 봅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흠! 종이 좀 있으면 주시겠소? 뒤가 급하구려." "예, 예, 여기 있습니다요." 도균은 종이를 받아 들고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법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겠다. 이 녀석이 자질이 놀라울 정도이니 친구란 놈 역시 상당한 천품을 지 니고 있을 것이 아닌가? 오늘은 정말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오는 셈이군!' 그는 흐뭇해져서 도균의 친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는 가슴이 크게 설레이고 있었다. 기쁨 에 넘친 나머지 종이를 구깃구깃하여 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도균이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흠! 사람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고 평가받게 마련이다. 나는 무공뿐만 아니라 돈도 많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여 오늘 두 명의 제자로 하여금 하늘처럼 떠받들게끔 만들어 놓고야 말아야 지.' 그는 주보를 불러 황학루에서 제일 값비싼 요리를 시켜 자기의 식탁 위에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 려놓고 도균과 그의 친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 정도의 진귀하고 값비싼 요리도 자 기에게는 아주 하찮은 음식에 불과하다는 티를 보여 남들의 눈에는 무척이나 대단한 부자처럼 거 드름을 피웠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렸건만 도균의 친구란 작자가 나타나기는 고사하고 도균조차 낯짝을 들이밀 지 않았다. 그는 차츰 의심이 생겼다. '이놈이 왜 안 올라오지? 뒤 한번 거창하게 보는군! 아냐, 뭔가 이상해. 그 자식이 혹시 내 정체 를 알아채고 줄행랑을 놓은 게 아닐까?' 겨울철이라 낮은 짧고 밤은 길었다. 이때는 이미 황혼녘이어서 놀이 온 강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으며 까마귀는 둥우리를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주보가 등불을 달면서 법원에게 술과 음식이 맛이 없느냐고 물었다. 법원은 넌지시 물어보았다. "이봐요, 아까 그 젊은이는 이 지방 말투를 쓰지 않던데 이곳에 와서 종종 술을 마시는가? 혹시 그 사람 이름이나 거처를 알고 있소." 주보는 법원의 얼굴이 흉칙할 뿐더러 중인 주제에 술과 고기를 가리지 않고 먹어대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여기던 중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도균에 대해서 묻는다고 사실대로 말해 줄 까닭이 없었다. "그 공자는 이곳에 두어 번 온 적이 있습니다. 그저 지나가다 들렸던 거죠. 저는 그분 성이 도씨 라는 것만 알았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답니다." 법원은 생각했다. '놈이 변소에 가는 도중에 친구를 만났는지도 모르겠군. 나를 따돌리려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 을 거야. 제까짓 게 나를 알아볼 안목이 있을 턱이 없지. 며칠 동안 이 지방에 머물면서 반드시 그 녀석을 붙잡아 제자로 삼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법원은 계산을 치르고 황학루에서 나왔다. 객점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걸어가는데, 홀연 강변 쪽으로 난 길에서 키가 작고 비쩍 마른 노인이 걸어왔다. 그 노인은 아주 술독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흠뻑 취해 있었으며, 한 손에는 호로병을 들고 비틀 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 노인이 크게 휘청거리더니 법원에게로 쓰러져 왔다. 법원은 무공이 대단한 사람인 데도 어찌 된 노릇인지 피할 수가 없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만 노인과 부딪쳐서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고 말았다. 노인은 충격을 받자 왁! 왁! 하며 먹었던 술과 안주를 모조리 법원의 몸에다 토해냈다. 시큼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갔다. 그 노인은 크게 실례했다고 느꼈는지, 한 마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총총히 도망을 쳤다. 법원은 온몸에 오물 세례를 받자 크게 울화가 치밀었다. 당장 검을 날려 노인을 두 동강내 버리 고 싶었으나 존엄한 자기 신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낱 늙은 고주망태를 쳐죽였다는 소 문이 나기라도 하는 날엔 남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저 밉살스런 영감장이를 흔적도 없이 죽여버리자 싶어 슬금슬금 뒤따라 가던 법원은 문득 길 옆 에 서 있는 한 사나이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사나이가 바로 주루에서 본 도균이 아닌가! 법원은 오물을 뒤집어 썼다는 불쾌감이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그는 재빨리 도균을 향해 주춤주춤 다가갔다. 그러자 도균이 냅다 도망쳤다. 법원은 그가 도망치 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므로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급히 뒤쫓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나자 세 갈랫길이 나타났다. 도균이 어느쪽으로 도망을 쳤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법원은 닭쫓던 개 지 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멍청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그 노인의 얼굴이 어디서 본 듯한 기억이 났다. 게다가 검술에 깊이 통달한 자기의 발걸음 은 태산과 같이 무거워서 몇 만근의 중력이 부딪쳐 와도 밀려나게 할 수 없을 텐데, 그 노인이 비를거리면서 한 번 툭 밀쳤을 뿐인 데도 자기는 몇 걸음이나 물러서야 하지 않았던가? 생각하면 할수록 그 노인이 범상치 않은 인물처럼 느껴졌고 일부러 그네에게 찾아와 희롱을 한 것만 같이 느껴졌다. 법원은 자기 몸을 살펴보았다. 새로 사 입은 승의는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있었다. 정말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미칠 것만 같았다. 법원은 그래도 도균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그래서 부득이 가까운 객점을 찾아들었 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젖은 수건을 달라고 해서 오물을 깨끗이 닦아내고 옷을 벗어 난롯가에 걸어 말리기 시작했다. 그는 침상에 걸터앉아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 젊은 새끼는 아무래도 그 영감장이와 한패거리 같은 걸. 만약 그 젊은 새끼가 아미파와 관 련되어 있다면 검법을 익히기 전에 죽여버려야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어떤 방법과 수단을 써 서라도 내 제자로 삼아야겠어. 그놈은 정말 엄청난 화근덩어리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큰 복덩어리 이거나 둘 중 하나야!' 법원은 이렇게 생각하다가 단정히 정좌하고 운기행공을 하기 시작했다. 운기행공을 끝내니 어느덧 삼경이 지나 있었다. 그는 옷이 말랐겠거니 생각하고 승의를 가져다 가 입으려고 난롯가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승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비싼 음식을 시키느라고 거의 다 쓰고 남은 몇 냥의 은자마저도 없어지고 말았다. 법원은 어검비행(馭劍飛行)으로 하루에 천 리는 거뜬히 갈 수가 있었다. 또 아직 곡식을 먹지 않 는 경지까진 도달하진 못해도 며칠 동안 굶어도 배고픈 줄을 모를 정도는 되므로 음식값으로 치 를 돈은 없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누군가 훔쳐갔다고 생각하니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화가 치밀 었다. '어느 겁도 없는 새끼가 감히 호랑이 수염을 뽑았담! 이런 육시를 할 놈 같으니!' 법원은 한참 동안 씩씩거리다가 점차 냉정함을 되찾고 생각해 보았다. '내 무공은 대단한 경치에 도달해 있다. 내 청각은 예민하기 짝이 없어서 나뭇잎이 땅에 멀어지 는 소리도 분간할 수 있다. 나는 방안에 줄곧 앉아 있었고 문이나 창문 역시 열린 적이 없지 않 았던가?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 어느 귀신이 내가 버젓이 살아 숨쉬고 있는 방안에서 내 옷과 돈 을 훔쳐갔단 말이냐? 결코 심상한 일이 아니다. 좀도적의 소행일 리는 없다. 나보다 무공이 높은 고수의 짓이 분명하며 일부러 나를 우롱하려는 수작이다. 그런데 옷이 없으니 밖에 나갈 수도 없 고 사람을 대하기도 민망스럽구나. 더구나 방값조차 지불하지 못하게 됐으니 어처구니없군. 나는 유명한 검선이 아닌가 말이다. 이런 신분에 뺑소니를 쳐야만 하는가? 정말 기가 막혀 죽을 지경 이고 울화통이 터져 온 몸이 산산조각이 날 지경이구나. 아, 그렇지! 아직은 캄캄한 밤중이니 어 느 집이든 들어가서 옷과 돈을 좀 슬쩍하도록 하자. 그리고 나서 방법을 강구하여 기필코 이 도 적놈을 붙잡아 물고를 내야겠다.' 이런 결정이 내려지자 법원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허공으로 솟구쳐 인가가 밀집해 있는 곳을 향 해 달려갔다. 그는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돈이 많은 집을 털 수 있었다. 그는 지필묵을 찾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놓기까지 했다. <길을 가다가 노자가 떨어져서 만부득이 은자 이십 냥을 빌리노라. 이레가 지나기 전에 곱배기 로 돌려주겠으니 너무 근심하지 말 것이며 도둑을 맞았다는 소문도 내지 말지어다. 소문이 나면 즉시 죽음으로 다스리겠노라.> 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 가서 객점으로 들어가 침상에 걸터앉았다. '에이! 재수없고 부끄럽구나! 난 이래뵈도 검선인데.....' 그는 투덜거리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허리께가 뜨금해 졌던 것이다. 급히 고개를 들어보 니 머리 위로 무엇인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쿠!" 비명을 지르며 얼떨결에 칼을 뽑아 마구 난도질을 했으나 그 물건은 어느 샌가 그의 머리에 철 썩 하니 달라붙는 것이 아닌가? 질겁을 하여 손으로 와락 잡아뜯어 팽개치고 보니 그것은 조금 전에 도난당했던 자기 승의였다. 승의는 이미 걸레처럼 그의 검에 발기발기 찢어져 있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승의 를 내려다보다 가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아... 정말 화가 나서 미치겠구나!" 그런데 침상 가에 놓았던 은자 이십 냥이 또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맥이 빠져 침대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 이토록 우롱을 당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 다. 그러고 보면 상대방의 재간은 그보다도 뛰어난 게 분명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반짝이는 물건을 발견했다. 눈을 부비고 살펴 보니 아까 승의와 함께 도난당했던 은자가 틀림없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와락 다가갔다. 은자 밑 에 종이쪽지가 눌려져 있었다. 펼쳐 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거듭 경고하는 의미에서 잠시 장난을 쳐보았노라. 부처를 섬기는 나한이 도적놈이 되다니 그토 록 부끄러운 일이 세상에 있을손가? 앞으로는 경망되이 굴지 마라. 그렇지 않을 시엔 죽음으로 다스리겠노라.> 글자 아래엔 비쩍 마르고 작달막한 늙은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한 손에 술잔을, 다른 한 손에는 호로병을 들고 있었다. 법원은 착잡한 표정으로 종이쪽지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인물그림을 찬찬히 눈여겨 보 니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눈을 부비고 다시 보아도 눈에 익었다. 그것은 바로 그 의 몸에 토악질을 한 그 영감쟁이가 아닌가! 그는 갑자기 놀란 어조로 부르짖었다. "아이쿠! 그... 그 영감쟁이가... 바로 그 자였구나! 그렇다면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법원 그는 제자를 거둬들이는 건 물론이고 옷조차 입을 생각을 못한 채 창문 밖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는 진랑을 찾아서 함께 자운사로 되돌아 가고 말았는데, 도대체 그림 속의 노인이 누구 이길래 그토록 법원을 놀라게 한 것일까? 선연(仙緣) 賽仙朔三次戱法元 小孟嘗二番逢矮搜 그 노인은 누구일까? 그는 바로 숭산이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새선삭(賽仙朔) 왜수(矮搜) 주매 (朱梅)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청성산에서 득도(得道)한 후 은거하고 있었다. 백 년 전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峰)에 서 보물을 찾던 중에 동해삼선 가운데 한 사람인 추운수 백곡일(白谷逸)을 만났는데, 두 사람은 모두 검술이 화경(化境)에 이르렀고 도를 닦아 신통광대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비슷하여 만 난 날부터 십 년 동안 함께 생활했다. 그들은 소실봉에 머무르면서 원공(元功)을 연구했다. 그래서 강호의 각문파와의 검선들은 숭산에 살고 있는 그 두 사람을 <숭산이로>라고 불렀던 것이다. 주매는 행동거지가 익살맞았고 슬쩍 훔쳐서 남을 놀려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출귀 몰한 기술로 도둑질을 했는데 정말 감쪽같았다. 그가 남의 물건을 귀신처럼 훔치는 것은 그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기술, 즉 형체를 감출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데도 그 이유가 있었다. 그는 검술에 있어서도 나름대로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십 년 전 제자 하나를 거두어들인 적이 있었다. 그 제자가 바로 다보진인(多寶眞人) 김광정 (金光鼎)이 초청하려 했던 기등(紀登)이었다. 기등은 비쩍 마르고 키가 장대같이 커서 사부와 나 란히 서면 사부는 기등의 배꼽에도 닿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 걸 보 고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주매에게는 한 명의 사제(師弟)가 있었다. 유명한 검선인 복마 진인(伏魔眞人) 강서(姜庶)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복마진인은 <석도인(石道人>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법원은 원래 복마진인의 제자였는데, 복마진인은 법원의 심성이 올바르지 못한 것을 알고 절기 를 전수하지 않아 법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오대파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법원은 주매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그림자만 보아도 도망치기에 바빴다. 주매와 추운수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숭산 소실봉에서 삼 년에 한 번씩 만나곤 했는데, 금 년은 본래 그들 두 사람이 만나는 해였다. 그런데 홀연 염선(髥仙) 이원화(李元化)가 학을 타고 소실봉에 와서 주매에게 추운수의 말을 전해 주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 소실봉에 올 수가 없다는 것과, 산에서 내려와 자운사를 파괴하는 일을 도와 달라는 내용의 전갈이었다. 주매는 즉시 소실봉에서 내려왔다. 그는 우선 청성산으로 가서 기등이 어느 정도 진전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옛날보다 많이 진전한 것을 보고 그에게 몇 마디 칭찬의 말을 해주었다. 기등은 김광정과 죽마고우였다. 그러다가 기등이 주매의 제자가 되어 도를 닦게 되자, 두 사람은 각기 정(正)과 사(邪)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끔 왕래를 했으며 친구의 의리는 계속하여 지켜나가고 있었다. 주매는 이를 못마땅히 여기고 제자를 꾸짖었다. 그리하여 기등은 동 자를 시켜 자기가 운유(雲遊)의 길을 떠나고 산에 없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던 것이다. 주매는 도관에서 며칠을 보내며 여러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각파는 모두 어진 인재를 거둬들이느라고 바쁘구나. 나는 한평생 기등이라는 한 명의 제자를 두었을 뿐이다. 기등은 노력파이긴 해. 그러나 자질이 뛰어나지 못해 나의 의발(衣鉢)을 전수받을 인재가 될 수 없어. 아무래도 몇 명의 특출한 인재를 물색하여 제자로 삼아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그는 청성산에서 내려와 천하를 주유하며 제자를 구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강 줄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던 중 몇 명의 젊은이를 만났다. 그러나 제자로 들일 만큼 마음에 썩 드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전 그는 한양의 강가에서 수상(水上) 강도 하나를 죽이고는 그 강도가 남긴 작은 배에 몸 을 싣고 그 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는 날 때부터 술을 좋아했다. 추운수나 취도인 못지 않을 만큼 술고래였다. 주매는 빼앗아 탄 그 배에서 술을 퍼마시며 보내다가 도균을 발견하게 되었는 데, 도균의 자질이 극히 빼어난 것을 알고 일부러 배를 언덕에 매지 않음으로써 그와 인연을 맺 었던 것이다. 도균은 거짓말로 법원을 속이고 황학루를 벗어나 왜수 주매를 찾아 강변으로 나가보니 물이 얕 은 곳에 그 노인이 탔던 작은 배가 놓여 있었다. 도인이 그 안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도균 은 속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배 곁으로 가봤더니 배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애석하게도 한걸음 늦어 천재일우를 놓치고 말았구나!' 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와 뒷덜미를 단단히 움켜 쥐고 허공으로 번쩍 치켜들더니 두어 번 빙빙 돌렸다. 이어 벼락 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꺼져랏!" 순간 도균의 몸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 사오 장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심하게 패대기질을 당하면 반쯤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균은 조심 원으로부터 일 년 동안 무공을 배 운 뒤라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허공을 후려치며 노응삼집(老鷹三集)이라는 재간을 펼쳤다. 그래서 다음 순간 사뿐히 땅 위로 내 려설 수 있었다. 그는 몸을 홱 돌리며 등 뒤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그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그 난쟁이 도인과 손에 불진(拂塵)을 든 늙은 여승이 서 있지 않은가. 그 여승은 은백색의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길 게 자라 있었고, 얼굴은 불그레했으며, 두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균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난쟁이 도인에게로 달려가 큰절을 올렸다. 난쟁이 도인이 여승을 돌아보며 득의양양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어떠시오? 이 녀석은 심지가 굳고 자질이 썩 훌륭해 보이지 않소?" "선배님의 혜안으로 잘못 보실 리가 있겠어요?" 이때 도균은 재차 큰절을 올리며 '사부님!' 하고 불렀다. "이 녀석, 빨리 일어나서 운령산(雲靈山)의 백운대사(白雲大師)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겠느냐?" 도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균은 재빨리 백운대사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이어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난쟁이 도인을 향해 물어보았다. "사부님, 사부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허허허... 사부님의 이름도 모르는 제자녀석이 어딨냐? 나는 숭산이로 가운데 한 사람인 왜수 주매라고 한다. 너의 기골이 매우 튼튼한 것을 보고 네가 나쁜 사람의 제자가 되면 큰일이다 싶 어 특별히 달려와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려는 참이니라. 너는 나 같은 스승을 섬기게 된 것을 영 광으로 알아야 하느니라. 나는 한평생 한 명의 제자밖에 거두지 않았는데 그 녀석은 아무래도 자 질이 부족해. 그래서 나의 무술과 검술을 반도 전수하지 못했다. 네가 만약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너의 사형보다 열 배는 뛰어나게 될 것이다. 나는 백운대사와 함께 수일 내에 성도에 가서 너의 사백부이신 추운수 어른을 만날 참이다. 그러니 너는 급히 집으로 돌아가 소지품을 챙기고 기다 렸다가 이레가 되는 날 나를 따라가자. 우선 너를 청성산 금편애로 데려가 너의 사형에게 소개시 킬 생각이다. 너의 그 허월이란 친구는 도를 닦으려는 마음은 있지만 애석하게도 내 제자가 될 만한 인재가 못돼. 그에게는 내년 봄에 가산을 정리한 후 의창(宜昌)의 삼유동(三遊洞)으로 가서 협승(俠僧) 질범을 찾으라고 전해라. 그리고 협승을 만나거든 협승의 제자 조심원이 사천팔마(四 川八魔)의 핍박을 받아 내년 단오날에 마궁(魔宮)으로 찾아가는데, 매우 위험하니 그를 돕도록 하 라는 말도 전하라고 일러주어라. 네가 황학루에서 만난 화상은 금신나한 법원이라는 녀석이다. 처 음엔 너의 사숙 복마진인의 제자였다가 그후 사도(邪道)로 돌아선 미친 놈이다. 놈은 반드시 너를 잡으려고 할 것이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알아서서 처리하마. 이레째 되는 날 새벽에 혼 자 이곳으로 나를 찾아오도록 해라. 그럼 이제 그만 가봐라." 도균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듣고 있다가 주매의 말이 끝나자 꾸벅 절을 했다. 그리고는 집으 로 향했다. 백운대사는 여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매를 만났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자운사의 일을 의논하게 되었는데, 이때 주매는 의기양양해서 자기가 훌륭한 제자를 거둬들였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백운대사도 운령산에 볼일이 남아 있다면서 주매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도균이 객점에 돌아가 보니 허월은 객청에 홀로 앉아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듯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도균은 얼른 말을 붙였다. "무슨 고민이라고 있으십니까?" 허월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자네는 몰라도 되네. 나는 사천으로 갈 수 없는 사정이 생겼어. 그러니 자네 혼자 가도록 하게 나." 도균은 주매가 일러준 대로 허월더러 협승 질범을 찾아가라고 했다. 허월은 탄식을 하고 말했다. "아우, 축하하네. 뛰어난 사부가 스스로 찾아와 자네를 제자로 거두어들이셨으니 무척 기쁘겠네 그려. 이 못난 형은 그 어르신의 분부대로 협승의 문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겠군. 하기야 나 같은 둔재는 협승의 문하제자가 된다는 것도 과분하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나도 장차 검협의 대열에 끼일 수가 있을까?" 도균은 허월이 매우 의기소침한 것이 크게 의아하여 그 이유를 물어보았으나 허월은 끝내 말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엿새 동안 두 사람은 무한삼진(武漢三鎭)의 명승고적을 두루 유람하며 즐겼다. 그러다 가 엿새째 되는 날 저녁에는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밤은 어느 샌가 다 지나가고 문득 닭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균은 밖으로 나가 하늘을 살펴보았다. 사방은 아직 어슴프레 했고 날이 밝으려면 상당한 시간 이 필요할 것 같았다. 도균은 사부와의 약속을 어길까 염려되었다. 동녘 하늘이 밝기 전에 허월과 헤어져 홀로 강변으 로 나가 스승을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허월에게 작별을 고했다. 허월은 한사코 도균을 배웅하겠다고 우기더니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여보게 아우, 그대는 이 못난 형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데도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을 생각인가?" 도균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갑자기 엉뚱한 말이 허월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얼른 물어보았 다. "형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허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 못난 형은 지금 위험에 빠져 있다네. 아우의 재간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지. 하지만 그 사람을 결코 이길 수는 없을 것이네. 그래서 나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거야. 이제 무얼 숨기겠 는가? 오늘 오전에 나는 원수와 강변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다네. 아우를 따라 강변으로 나가면 혹시 영사께서 나의 어려움을 풀어주실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고 있었지. 그런데 자네가 굳이 혼자 영사를 만나겠다고 우기니 나는 어찌하란 말인가? 내가 죽고 사는 문제는 아우의 손에 달렸 네. 영사를 만나게 해준다면 나는 살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네." 도균은 허월이 그와 같이 위험한 처지에 직면해 있다는 소리를 들고 그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스승이 좋아할는지 어떨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즉시 허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형님께선 마음을 푹 놓으십시오. 제가 반드시 형님이 사부님을 만나뵙도록 주선해 보겠습니다." "날이 밝아오고 있네. 우선 강변으로 나가보세. 가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지." 이미 동녘 하늘은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싸놓은 봇짐을 들고 객점을 나섰다. 길은 그다지 멀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잠시 후에 강변에 도달했다. 강변에는 아무도 없고 적막하기만 했다. 때로 차가운 물결이 강기슭에 부딪칠 때마다 철썩! 하는 소리만이 단조롭게 깨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주매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겨울이라곤 하나 며칠 동안 날씨가 맑았고, 또 남쪽 지방이라서 새벽의 공기는 그리 싸늘하지 않았다. 허월은 자기가 어떻게 원한을 맺게 되었는지 천천히 들려주기 시작했다. 강기슭의 결투 白露橫江 良朋談往事 靑霓撤電 俠女報親仇 허월이 이야기했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명나라에서 무관을 지냈다네. 가전무공(家傳武功)으로 팔십일 수의 이화 창이 있었는데, 무한삼진 일대에선 꽤나 명성을 떨친 무공이지. 나에게 아우 뻘이 되는 친척이 있 었네. 허창(許昌)이라는 자로서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무술을 익혔고 매우 우애가 돈독했었지. 선친께서는 오랑캐가 이 강산을 점령하자 매우 분개하시고 한스럽게 여기셔서 벼슬을 그만두시고 는 나보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네. 그리하여 허창은 무예를 익힌 후 장사를 하 러 외지로 나갔고, 나는 두문불출하고 농삿일에 힘썼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홀로 무공을 익혔 지." 그러던 팔 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허창이 갑자기 고향에 돌아왔는데, 누구에게 당했는지 오른손 이 잘려 나가고 몸에는 암기가 박혀 있었다. 허창은 장사(長沙) 지방에 갔다가 어느 고을에서 한 노파와 그녀의 두 딸을 만났다. 큰딸은 불과 십칠팔 세 정도였다. 그 노파는 큰 깃발 옆에 서 있었는데, 그 깃발에는 <무공을 겨루어 사위를 뽑는다(比武招壻)>라 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 노파와 두 소녀는 그 고을에서 삼 일 간 머물며 무공솜씨를 자랑했는데, 노파와 겨루다가 패 한 사람 가운데는 그 지방의 유명한 무인들도 있었다. 허창은 한창 나이인 데다 또 은근히 소녀 에게 마음이 움직였으므로 그녀와 무술을 겨루게 되었다. 먼저 권각법(拳脚法)을 겨루었으나 그만 소녀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병기를 들고 싸울 차례였다. 그 때 그 노파가 나서서 말했다. "우리 딸아이는 연일 무공을 겨루느라고 몹시 지쳐 있소이다. 무기에는 눈이 없는 법, 서로가 상 처를 입히게 되면 좋을 게 없잖소. 더군다나 조금 전 이미 승패는 결정났습니다. 설사 이번에 젊 은이가 이긴다 해도 일승일패로 비기게 됩니다. 그러니 이 늙은 몸이 딸을 대신해서 그대와 겨루 어 보겠소. 만약에 이 늙은이가 승리하게 된다면 그대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썩 물러서도록 하시오." 그래서 허창은 병기를 들고 그 노파와 싸우게 되었는데 반나절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 노파는 마고서(麻故鋤)라는 한 쌍의 날이 선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그 솜씨가 매우 절묘했 지만 나이가 많은 탓으로 시간이 흐르자 기력이 달린 나머지 손놀림이 어지러워지며 점차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허창은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쪽 어깨가 시큰거리고 아팠다. 그가 멈칫 하는 찰나, 노파는 무기를 맹렬히 휘둘러 허창의 오른손을 잘라버렸다. 허창은 대경실색하여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거처로 돌아와 살펴보니 오른쪽 어깨에 한 대 의 매화침(梅花針)이 박혀 있었다. 정당하게 싸우다가 패배했다면 더 할 말이 없겠으나, 이와 같 이 암기로 해침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불구자가 되어 버렸으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허창은 즉시 형인 허월에게 달려와 진상을 말하고 복수를 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허월은 본래 가전무공인 이화창 외에도 선사인 맹심일(孟心一)로부터 몇 년 동안 내공을 배운 바가 있었다. 허월은 허창을 데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고을을 향해 달려갔다. 그래서 이윽고 그녀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그 소녀가 나섰는데, 그녀는 무예가 탁월했을 뿐만 아 니라 얼굴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허월은 차마 그녀를 죽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동생에게 상처를 입힌 장본인은 그녀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허월은 나이가 젊고 혈기가 왕성할 때라 문득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 졌다. 마침 삼복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기에 그녀는 홑옷을 걸치고 있었다. 허월은 옳다구나 싶어 취선원검법(醉仙猿劍法)을 사용하여 싸우면서 그 소녀의 몸을 여기저기 건드렸다. 그러다가 느닷 없이 응조공(鷹爪功)을 써서 그녀의 허리띠를 살짝 끊어버렸다. 그 순간 허월은 일부러 빈틈을 드러냈다. 그것도 모르고 그녀는 원앙연환퇴(鴛鴦連煥腿)의 수법 을 써서 발길질을 했다. 허월은 손을 들어 그녀의 공세를 막았다. 그녀가 발길질을 하느라고 힘을 쓰는 순간 허리띠가 끊어져 바지가 그만 벗겨져 내리고 말았다. 그녀는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으므로 치부가 활짝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꼴을 당한 소녀는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노파는 옷을 주워 딸의 치부를 가리게 한 다음 허월을 꾸짖었다. "우리 모녀는 본래 무술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무예가 뛰어난 자를 사위로 삼으려 했소! 내 딸아이가 그대에게 졌으니 그대는 이 아이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오!" 허월은 본래 복수를 하려는 일념뿐이었고 게다가 이미 처와 자식이 있으므로 노파의 요구에 응 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노파의 말을 듣고는 모욕적인 말로 응수했다. 노파는 크게 분노하여 허월에게 덤벼들었다. 무기를 맞부딪치며 목숨을 걸고 한참 싸우는 판인데, 갑자기 허월은 왼팔이 시큰거리며 아파오 는 걸 느꼈다. 그는 즉시 소녀들이 매화침을 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때 노파는 양손의 마고서를 마구 휘두르며 허월의 머리를 찍어내렸다. 오강벌계(吳剛伐桂)라는 수법이었다. 허월은 팔의 아픔을 억지로 참고 괴망번신(怪莽飜身)이라는 수법을 써서 둥근 창화를 점점이 허공에 수놓으며 그녀의 무기를 튕겨버렸다. 그 순간 노파의 앞가슴에 빈틈이 보였다. 허월은 그녀를 단번에 이화창으로 찔러 죽일 수도 있 었지만 살인을 하고 관가로 끌려가고 싶지가 않아 창끝을 비스듬이 아래로 내찔러 그녀의 허벅지 근육을 도려내 버렸다. 노인은 크게 비명을 지르더니 땅바닥에 쓰러졌다. 허월은 크게 호통을 질렀다. "나 허모는 결코 부녀자를 해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이 암기를 써서 사람을 해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허벅지 근육을 자르니 앞으로 다시는 비겁한 수작을 부리지 말아라!" 허월은 말을 마치고 허창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살펴보니 매화침의 상처는 가벼운 찰과상에 불과했다. 후에 소문을 들으니 그 노파는 남오성(南五省)의 큰도적 강양대도(江洋大盜) 여화호(余化虎)의 부인인 나찰선(羅刹仙) 채삼랑(蔡三娘)이고, 큰딸은 팔수용녀(八手龍女) 여순고(余珣姑), 작은딸은 홍낭자(紅娘子) 여영고(余瑩姑)라고 했다. 큰딸은 그 일로 분통이 터져서 자살했고, 노파 역시 허월에게 입은 상처가 도져 죽고 말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작은딸 여영고는 매일같이 어머니와 언니의 무덤 앞에서 울면서 복수를 맹세하다가 우연히 나부산(羅浮山)의 여검선(女劍仙) 원원대사(元元大師)를 만났는데, 원원대사는 여영고를 불쌍히 여 겨 제자로 삼아 검술을 가르쳤다. 마침 허월은 나부산의 원원대사의 제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그 사람으로부터 여영고가 그를 죽이려고 벼른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다가 마침 도균을 만나 그가 사천 땅에 간다는 말을 들고는 함께 다니면서 여영고의 보복을 피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칠 일 전 허월은 도균이 황학루로 떠나고 난 후 문 밖에 서 있다가 홍의여인을 만 났다. 그 여인이 물었다. "이곳이 허월선생의 집이 맞나요?" 허월은 그녀가 홍낭자임을 직감했다. "맞소이다. 그러나 그 허선생은 지금 집에 계시지 않소이다." 하자 홍의여인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팔 년 전의 원수를 갚기 위해 허월을 찾으러 온 거예요. 나의 이름은 여영고라고 해요. 그 가 만약 사나이라면, 이레째가 되는 날 오전에 강변에서 나와 만나야만 해요. 그렇지 않을 시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라고 전해 주세요." 허월은 그녀가 집에까지 찾아온 걸로 보아 일이 좋게 끝나기는 틀렸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도 망을 친다고 해도 가족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허월은 그 칠 일이라는 기간 동안 대처 방안 을 강구하기로 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낭자, 당신은 혹시 원원대사님의 고제자이신 홍낭자가 아니시오? 과거의 일에 대해 말한다면 그 사건은 허월만의 잘못이라고 탓할 수도 없소이다. 그가 일부러 찾아가서 시비를 건 것도 아니 지 않소? 하지만 결판을 내야 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소이다. 그는 이미 홍낭자가 언젠가 찾아 올 것이라고 내다보고 나에게 명해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라고 했소. 그는 중요한 볼일이 있어 서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된 것이외다. 이레 후라... 그대는 안심하시오. 그때 그는 반드시 약속 장 소로 나가서 당신을 기디릴 것이외다." 여영고는 알았다고 하더니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녀는 몇 발짝 가다 말고 몸을 돌려 허월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더니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눈이 있으면서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군요. 원래 당신이 바로 허월 본인이었군요. 그것 참 잘 되었네. 오늘 그대와 생사를 걸고 싸워 어머니와 언니를 죽인 원한을 갚아야 하겠지만 우 리 문파의 규칙에 의하면 남과 생사의 결투를 할 때는 칠 일 전에 경고함으로써 그동안에 구원병 을 청하거나 후사를 정리할 여유를 주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오늘은 그대의 목숨을 붙여주죠. 하 지만 이레째 되는 날 오전에 강변에서 그대를 기다리겠어요." 허월은 자기가 그녀를 당해내지 못하리란 사실을 잘 알았지만 기죽은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꼿 꼿하게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홍의여인은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냉소를 몇 번 흘리더니 떠나갔다. "나는 아우의 능력으로서는 그녀를 물리칠 수 없음을 알고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네. 그날 저녁 아우가 나에게 근심하는 이유를 물어왔지만 대답하지 않은 것은 아우를 이런 일에 끌어들여 해를 입히고 싶지 않아서였다네." 이때 시간은 진시 초였다. 햇살은 점차 양자강의 물결 위로 퍼져나가고 있었고, 강 위의 안개는 햇살을 받자 영롱한 무지갯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홀연 상류 쪽에서 한 척의 작은 배가 쏜살같이 빠르게 물결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도균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사부님의 배가 왔소! 우리 빨리 영접토록 합시다!" 그러나 허월은 몇 번이나 작은 배를 눈여겨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배는 결코 주선배님의 배가 아니네. 조금 큰 것 같지 않은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느 샌가 그 작은 배는 강기슭과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이르러 있었다. 그제서야 배에 탄 사람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타는 듯 붉은 홍의를 입고 있는 여인과 청의를 걸친 젊은 여승이 배의 갑판 위에 우뚝 서 있었 다. 홍의소녀는 칠팔십 근은 됨직한 커다란 닻을 들고 있다가 배가 언덕에서 이삼 장 정도 떨어 진 곳에 이르자 손을 번쩍 쳐들고 닻을 던졌다. 휙! 파공성과 함께 닻은 허공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언덕에 와서 퍽 하니 땅 속에 깊숙이 박혔다. 곧 이어 그녀는 가볍게 발끝으로 뱃머리를 찼다. 그 순간 그녀는 제비처럼 날렵하게 언덕 위로 건너 뛰었다. 곧이어 묘령의 여승도 언덕 위로 몸을 날렸다. 그녀들의 동작은 우아하면서도 날랬다. 도균이 놀라 탄성을 지르는데, 허월은 '으음!' 하고 신음소리를 내었다. 두 여인은 나란히 몸을 날려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홍의소녀가 고우면서도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뜻밖이군요! 당신이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니 말이에요. 이분은 그대가 청해 온 사람인가요? 자 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지, 어째서 친구에게까지 누를 끼치는 거죠?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이에요." 도균은 그 소녀가 바로 홍낭자 여영고라고 짐작했다. 그녀의 말투가 오만방자하고 무례한 것을 보고 막 입을 열고 한 마디 하려고 하는데 허월이 급히 그의 소매를 잡아당겨 말을 꺼내지 못하 게 한 다음 여영고를 향해 말했다. "낭자는 함부로 속단하지 마시오. 이 허모는 당당한 남자외다. 내 일은 나 혼자 해결하지 결코 친구에게 누를 끼치는 짓은 하지 않소. 이분 소맹상 도균으로 말하면 나와는 절친한 친구지간이 외다. 그는 볼일이 있어 사천성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그의 사부님을 기다리고 있는 중 이었소. 나는 그를 전송도 할 겸 약속을 지키려고 나온 거요. 그대는 우리 두 사람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보고 내가 협조자를 구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신 모양이오만 그대 역시 저 여승을 데리고 왔구려. 내가 다른 사람을 초청하여 그대를 상대할까 봐 두려웠던 게 아니오?" 여영고는 눈썹을 찡끗하며 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와 당신과는 불공대천의 원수예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계속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 며 나를 모욕할 작정이에요? 오늘 내가 이곳으로 달려온 것은 당신의 이화창을 상대해 보려는 거 예요. 당신은 어째서 이 소저 앞에서 한번 펼쳐보지 않는 건가요?" 말을 끝내자 그녀는 허리에서 보검을 빼들고 허월이 무기를 뽑아들기를 기다렸다. 허월은 그 말을 듣고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애당초 내가 그대의 모친과 언니를 상대로 손을 쓰게 된 것은 원래 그대들이 암기로 나의 형제에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나는 나서서 훈계를 하려고 했던 것이오. 나는 손에 사정을 두고 두 사람의 목숨을 해치려고 하지 않았소이다. 그대의 언니가 낭패한 꼴을 당했 고, 그대의 어머니가 상처를 입은 것은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인데 그 누구를 탓할 수 있 겠소? 오늘 그대가 어머니의 원한을 갚겠다는 뜻은 가상하오. 오래 전부터 그대는 나부산에서 검 술을 연마하게 되었다는데, 이 허모는 무예에 있어서는 남보다 못지 않다고 자신하지만 검술을 논할 때는 전혀 모르는 처지외다. 그대가 만약 검술을 펼치겠다면 이 허모는 목을 내밀고 받아들 일 뿐이며 손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외다. 그러나 주먹질과 발길질로 겨루겠다고 한다면 이 허모는 기꺼이 삼합(三合)을 상대해 드리겠소." 그리고 나서 두 손을 앞으로 가져가 팔짱을 끼고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청의여인은 강기슭으로 올라온 후 도균을 발견하자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두 사 람이 손을 쓰려는 것을 보고서야 재빨리 입을 열었다. "두 분은 협조자 문제로 입씨름할 필요가 없어요. 나 역시 그대의 친구처럼 전송하러 온 것이에 요. 두 분에게는 예전의 감정이 있다 하니 오늘 물론 고하를 가려야 할 테죠. 이 일의 원인에 대 해서 나는 이미 훤히 알고 있어요. 나의 의견으로 말하면 그대들 두 사람은 무공을 겨루되, 나와 저분은 공증인이 되어 지켜볼 것이며, 그 누구도 어느 쪽을 돕지 않기로 하는 것이 어때요?" 허월은 주매가 오지 않는 한 도균마저도 덩달아 고통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던 터라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재빨리 말했다. "적극 찬성하는 바이오! 그런데 스님의 법호가 어떻게 되는지 아직 가르침을 받지 못했구려." 청의여인은 말했다. "나는 신니(神尼)의 문하제자인 소인(素因)이라고 해요. 여영고는 동문의 사매예요. 그녀가 사숙 의 명을 받고 우리 한양 백룡암(白龍庵)에 와서 머물게 되었기 때문에 나도 두 집안의 일을 알게 된 것이에요. 나는 오래 전부터 허선생이 어느 정도 잘못한 점이 있음을 알고 있었어요. 오늘의 일은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그런데 허선생의 말씀을 듣고 보니 검술에 대해서는 깊은 조예를 쌓지 못한 것 같군요. 우리 선도(仙道)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은 검술을 모르는 사람한테 칼을 던져 죽였을 경우, 그 원인이 단지 사사로운 원한 때문이고, 또 그 상대방이 간악한 도적이 아니면 그것은 본문의 규칙을 어기는 짓이 될 뿐 아니라 광명정대한 수단이라고도 할 수 없지요. 따라서 우리 사매 역시 그러진 않을 것이니, 허선생께서는 안심하시고 무기를 뽑도록 하세요." 허월은 그 말을 듣자 무거운 짐을 벗어놓기라도 한 듯 고마왔고 한편으로는 용기도 솟아났다. 그의 창은 원래 강하지만 탄력이 있었으므로, 보통 때는 휘어서 허리에 두르고 다녔다. 그는 고맙다는 한 마디와 더불어 허리에서 창을 꺼냈다. 한 번 손을 펼치자 창이 붓대처럼 쭉 뻗어나갔다. 허월은 그 창을 들고 상대방이 손 쓰기를 기다렸다. 여영고는 원래 말이 약간 어눌한 편이었다. 그런데 허월과 소인이 주고받는 말은 모두 사천성과 호북성 일대의 말투로서 매우 빨리 지껄였기 때문에 그녀 자신은 입을 벌려 끼어들 수가 없어 은 근히 화가 나 있었다. 그러던 중에 무기를 들고 싸우되 비검술을 펼치지 않기로 하자는 소인의 말을 듣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적을 감싸고 도는 듯한 말투가 아닌가. 그녀로서는 소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 다. 애당초 그녀는 불공대천의 원수 허월을 한껏 희롱한 후 칼을 날려 죽임으로써 원한을 갚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소인이 나서서 광명정대한 말을 하니, 그것이 확실히 본문의 규칙이기도 한 바에야 반박할 수도 없어서 더욱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는 편이 오히려 일을 처리하는데 수월했을 텐데, 떠나 올 때 시부님께서 소인 사저를 마치 사부님을 뵈옵듯 하라는 하명만 아니하셨어도 그녀의 말을 반박하고 검을 날려 보란 듯이 상대방을 죽여버릴 텐데.....' 이런 답답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허월이 무기를 뽑아들고 즉시 손을 쓸 눈치를 보이는지라, 그 녀는 불현듯 노기가 다시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대담한 친구! 이 소저는 비검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너를 죽여 원수를 갚을 수 있다. 빨리 목 숨을 바쳐라!"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발로 땅을 박차고 일 장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왼손으로 칼을 짚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어깨쪽으로 뻗어올려 청란전시(靑鸞展翅)라는 자세를 취하며 상대방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그와 같은 모습은 여유가 있어 보였고 침착하고 용감한 기개가 엿보였 다. 허월과 도균은 그녀의 어여쁘고 우아한 모습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들뿐 아니라 소인이라는 청의여승 역시 홍낭자가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데도 공행이 그토록 증진한 데 대해 속으로 감탄 해 마지 않았다. 이때 허월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처지였다.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장창을 힘주어 잡고 앞 으로 몸을 날리며 호통을 내질렀다. "실례하오!" 냅다 쟁반 같은 창화(槍花)를 눈부시게 뿌려내며 상대방의 가슴팍을 찔러갔다. 여영고가 소리쳤다. "훌륭하군!" 그녀는 급히 칼을 집어들어 막았다. 그런데 허월의 창법은 정말 기묘해서 그 일초는 바로 허초 였다. 여영고가 칼을 들어 막으려고 했을 때, 허월은 적의 보검에서 싸늘한 광채가 내뿜어지는 것 을 보고 자기의 창과 맞닥들이면 반드시 창이 두 동강이 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칼이 미처 와 닿기도 전에 창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창자루를 왼손으로 옮기고 창날을 세워서 여영고의 발을 향해 쓸어쳐갔다. 그녀는 미처 칼로 막을 수가 없어서 두 발로 땅을 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렇게 되면 쉽 게 창날을 피할 것 같았고 이 순간에 허월에게 일검을 가할 속셈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허월은 이미 그녀가 그같이 나오리라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막 몸을 띄워 피할 때 허월의 창자루는 다시 오른손으로 옮겨졌고, 그 즉시 장사입동(長蛇入洞)이라는 일초가 펼쳐졌으며 창날은 여영고의 복부를 향해 찔러갔다. 그 수법은 신묘하고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 다. 허씨 집안의 이화창은 본래 변화무쌍했다. 허월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십여 년 간 연마를 했 을 뿐 아니라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거기다 명사로부터 내공을 익힌 후이므로 능수능란하 게 구사할 수가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여영고가 배운 월녀검법(月女劍法)은 본래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일시 상대방을 경 시했기 때문에 낭패한 꼴을 당했던 것이다. 허월이 손에 사정을 두지 않는 이상 죽거나 중상을 입게 될 형국이었다. 허월은 이 몇 년 동안 보고 듣고 겪은 것이 많아서 모든 사람에게 겸손하게 대해 왔다. 그리고 애써 남과 원한을 맺게 되는 것을 피했다. 그는 여영고가 검선이 사랑하는 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독수를 쓰지 못했다. 창날이 여영고 복부에 바싹 근접하여 그녀가 미 처 피할 사이가 없이 되었을 때 살짝 창을 끌어당겼다. 여영고는 이 틈에 재빨리 몸을 일 장 밖으로 날려 피한 다음 자기 몸을 살펴보니 옷이 허월의 창끝에 찢어져 있었다. 수치와 분노를 함께 느낀 그녀는 칼끝으로 허월을 가리키며 다시 몸을 날 려 장하자교(長河刺蛟)라는 초식을 써서 허월의 가슴팍을 향해 찔러갔다. 허월은 자기가 손에 사정을 두었는 데도 그녀가 조금도 고맙게 생각하지 않자, 이 여자는 어떻 게 해볼 도리가 없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서운 수단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칼날이 무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창으로 마주쳐 나가지 못하고 몸을 오 른쪽으로 살짝 기울여 여영고의 보검을 피하며 상대방의 측면으로 몸을 날렸다. 발이 땅에 닿자 마자 창을 쳐들어 금룡회수(金龍回首)라는 초식으로 여영고의 왼팔을 찔러 들어갔다. 이번엔 여영고도 조금 전처럼 그렇게 소홀히 행동하지 않았다. 허월의 몸뚱이가 날렵하기 이를 데 없고, 자기의 일검이 허공을 찌르자 허월이 오히려 자기 등 뒤로 돌아가는 걸 보고는 바짝 정 신을 차렸다. 그래서 허월의 창날이 찔러오자 홱 몸을 틀며 칼을 들어 창날을 후려쳤다. 허월은 어려워졌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미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자기의 창은 온갖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로써 평소에도 목숨처럼 아끼던 물건인데 어찌 두 동강이 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위기일발의 순간, 갑자기 한 가지 좋은 꾀가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창을 움츠리지 않고 오 히려 허공으로 던졌다. 그리고 발로 땅을 차면서 황학충소(黃鶴沖掃)라는 수법을 펼쳐 학이 구름 을 가로지르는 듯한 자세로 창을 따라 몸을 날렸다. 그 창날이 햇살을 받아 번쩍 빛났고, 창이 날 아가던 기세와 감소로 풀밭 위에 비스듬히 멀어지게 되었을 때 어느덧 허월이 달려와 손으로 받 아들었다. 그 순간 뒷통수에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위급하다는 것을 알고 감히 뒤를 돌아다 볼 겨 를도 없이 급히 머리를 숙이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칼날은 어느 새 그의 오른쪽 어깻죽 지 옷자락에 구멍을 뚫어놓고 말았다. 만약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오른쪽 어깨는 여영고의 칼 에 맞아 싹둑 잘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원래 그녀는 일검으로 허월의 창을 두 동강이 내려고 했을 때 그가 창을 던지리리라고는 생각지 도 못했다. 그러나 허월이 다시 허공에 띄운 창을 잡기 위해 구름을 가르고 달을 낚아채는 듯한 자세로 솟구쳐 오르자 그 같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허월이 이같이 좀처럼 보기 드문 기이한 초식을 펼칠 때가 바로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 다.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녀 역시 발로 땅바닥을 차며 몸을 솟구쳤다. 두 사람의 간격은 일 장 남짓 하였으나 허월이 창을 받느라고 약간 몸을 날리는 속도가 늦춰짐 에 따라 그녀가 바짝 따라붙은 것이다. 만약 칼을 바람의 방향대로 수평으로 찌른다면 예리한 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일으키지 않 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허월은 단단히 경계를 하고 있던 참이라 미세한 기척이나마 듣게 되자 적이 등 뒤에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몸을 왼쪽으로 숙이며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어깻죽지의 옷자락이 찢어졌으나 상처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간발의 차이로 적의 예리한 검날을 피했다는 것을 알자 갑자기 괴망번신(怪莽飜身)이라는 일식을 펼쳐서 창화를 뿌려냈다. 이것은 패배한 가운데서 승리를 취하는 허씨 집안의 독보적인 수법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가슴팍을 향해 바로 찔러갔다. 여영고는 자기의 칼이 단지 허공을 찔렀을 뿐이자 애석하다는 생각뿐, 그가 이토록 빨리 반격하 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 전처럼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므 로 제 때에 상체를 발딱 젖혔다. 그 바람에 창끝은 여영고의 가슴 위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위험한 가운데 그녀가 다시 땅을 차며 수평으로 비스듬히 이삼 장 정도 물러나 막 몸을 일으키 려는데 허월의 창이 재차 그녀의 얼굴 앞으로 찔러 들어왔다. 원래 허월은 시종 여영고의 목숨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몸을 홱 돌려 맹렬히 찔러 가면서도 자기가 이같은 한 수의 절초를 펼치지 말았어야 했다고 순간적으로 후회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영고가 몸을 뒤로 벌렁 젖히면서 자기의 창끝을 피하자 내심 그녀의 용기와 지혜에 감 탄하면서 창날을 아래쪽으로 냅다 꽂으면서 그녀의 하체를 걷어차서 나가떨어지게 만들려고 했 다. 여영고는 위기에 처한 가운데 여전히 칼로 상대방 무기를 받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처음 일검은 허공을 치기에는 늦었음을 알고 급히 몸을 뒤로 젖혀 창끝을 피한 다음 칼을 거두어들였다가 재 빨리 쳐올린 것이다. 허월은 그녀가 이토록 빠른 수법으로 손을 써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까닭에 급히 창을 잡아 당겼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창끝 모서리가 이미 상대방의 검에 잘려 땅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여간 마음이 아프고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증오심에 복받친 그는 여영고가 미처 자세를 가다듬 기도 전에 몸을 날려 덮치며 창끝으로 찔러갔다. 여영고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급히 반격 했다. 두 사람이 이와 같이 험악한 싸움을 벌리는 모습은 아슬아슬하기 이를 데 없어서 구경을 하는 소인과 도균 두 사람의 손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도균은 처음 허월이 적의 적수가 되지 못할까 봐 매우 초조했다. 그러다 허월이 한 자루 창을 출신입화의 경지까지 연성한 것을 보고 이름을 드날리는 사람은 역시 헛되이 명성을 날리지 않는 다는 진리를 믿게 되었고 그제서야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절세의 용모를 지닌 검선이고 한 사람은 풍채가 뛰어난 협사였다. 허 월이 자기의 절친한 친구이기는 하나 적이 허월에게 찔려 죽는 것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어느 쪽이든 물러서서 싸움의 중단되기만 한다면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호랑이가 싸우면 반드시 조만간 한쪽이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은 뻔한 이치다. 그래 서 도균은 속으로 사부님이 빨리 와서 이 싸움을 말려 참혹한 사태가 발생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 랐다. 그 같은 생각을 품게 되자 자연 초조한 표정을 드러내면서 입으로는 뭐라고 연신 기도를 했다. 소인은 처음 도균을 보는 순간부터 크게 호감을 느끼고 연신 상대방을 살펴보기에 급급했다. 그 러다가 도균이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므로 몹시 수줍어서 두 볼을 살짝 붉혔다. 이처럼 그녀는 허월과 여영고 두 사람의 싸움을 관전하는 척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때때로 도 균을 훔쳐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영준해 보이고 낯이 익은 듯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강 변에 서 있었고 서로의 간격은 멀지 않았다. 소인은 처음 도균과 허월 두 사람을 만났을 때 두 사람의 기골이 탄탄하여 조만간 기연(奇緣)을 만나게 되고 도를 닦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영고를 말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공증인으로 나섰던 것인데, 애당초 허월이 목숨 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도균이 입속으로 무엇이라고 중얼중얼하 는 것을 보고는 혹시 그가 방문좌도의 법술을 펼쳐서 허월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닌가 싶어 겁이 나서 귀를 기울였다. 만약 도균과 허월 두 사람이 이파의 요술로써 여영고를 암살하려고 한다면, 이 사람의 품행은 방정하지 못할 터이니 비검으로 두 사람의 목을 일제히 잘라도 무방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균이 입속으로 무엇인가 중얼거리면서도 얼굴표정이 매우 초조해지는 게 그런 것 같지 는 않은지라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서서 귀를 기울여 들어보았다. 도균은 온 정신을 모아 싸움을 주시하며 입속말로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인은 귀가 영민해서 도균이 말하는 소리를 모조리 들을 수 있었는데 말하는 소리는 다음과 같 았다. "대자대비하신 왜수 주매 사부님, 어르신께서 빨리 오셔서 저들 두 사람을 뜯어 말려 주십시오." 소인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왜수로 말하면 숭산이로인 주매 즉, 주사백부가 아닌가? 그 어르신은 이미 오랫동안 제자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는데, 오늘에 이르러 파격적으로 이 사람을 거 둬들인 것을 보면 그의 근골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가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도균을 한 번 더 쳐다보다가 별안간 도균의 귓볼 뒤에 붉은 사마귀가 나 있는 것을 보 고는 그만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용관(龍官)!" 도균은 한창 싸움을 주시하면서 사부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데, 갑자기 누가 자기의 어릴 때 이름을 부르는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집안의 웃어른이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불쑥 대 답을 했다. "네. 용관이 여기 있습니다!" "정말 너였구나! 이곳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도균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소인이라는 묘령의 여승이 바로 옆에서 활짝 웃음을 띠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어떻게 자기의 어릴적 이름을 알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 어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데, 소인이 크게 부르짖었다. "앗! 야단났다!" 필살 청예검 逐洪濤 投江遇救 背師言 爲寶傾生 도균은 청의여인이 그의 어릴 때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홀연 한 줄기의 하얀 광채가 싸움터로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도균은 여영고가 비검을 써서 허월을 죽이려고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싸움터를 바라보니 목숨을 걸고 싸우는 두 남녀를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도균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스승인 왜수 주매였다. 도균은 크게 기뻐 달려가서 주매의 발 아래 꿇어엎 드렸다. 소인은 십오 년 전 사부와 함께 아미 마천애(摩天崖)로 일진대사(一眞大師)를 만나러 가던 도중 에 산기슭에서 주매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그가 명성이 쟁쟁한 숭산이로 가운 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당시 그녀는 입도한 이후로는 처음으로 만나는 검선이었고, 그 검 선이 매우 이상하게 생겼기 때문에 뇌리에 박혀 인상이 매우 깊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급히 달려나가 주매에게 인사를 올렸다 여영고는 허월과 더불어 이삼 시진을 싸웠으나 고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여영고 는 역시 강호의 경험이 없는지라 성질을 누르지 못한 나머지 몇 번이나 허월의 암수에 걸려들 뻔 했다. 그녀는 허월이 손에 사정을 둔다는 사실을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수치심이 분노로 변했다. 허월은 여영고와 아침나절 내내 싸우면서 자신은 그녀를 해치려 하지 않는 데도 그녀가 한사코 자기를 죽이려고 하자, 이같이 싸우다가는 언제 끝이 날지 모른다 싶어 아예 그녀에게 쓴맛을 보 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힘써 싸우는 한편, 적을 유인할 계책을 궁리했다. 여영고는 오랫동안 싸워도 이길 수 없게 되자 마음이 초조해져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너무나 교활해.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지 않는다면 좀처럼 속임수에 빠지지 않겠는 걸.' 허씨 집안의 이화창 아래에서는 결코 요령을 피워선 안 된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서 투른 속임수를 쓰려다가는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바로 이때 허월의 창이 정면으로 들어왔다. 여영고는 허월이 다시 허초 속에 실초를 감춘 초식 으로 자기를 유인하려 한다고 생각하고는 속으로 욕을 했다. '이런 도적놈! 오늘 나의 손 아래서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허월이 다시 창을 좌우 양손으로 번갈아 잡으며 공격해 오리라 짐작했다. 이번에 도 창을 왼손으로 옮기고 여전히 먼저처럼 자기에게 암수를 쓰리라고 생각한 그녀는 일부러 빈틈 을 보여주면서 칼로 그의 창날을 베는 척하면서 앞가슴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허월의 창날이 찔 러들어 올 때 몸을 날려 상대방의 상체 세 부분을 공격할 참이었다. 그러나 허월의 무공은 순수하고 원숙했다. 창법은 소위 '네 냥의 무게로 천 근을 물리칠 수 있 는 경지'에 도달해 있어서 기회가 오지 않는 한 좀처럼 허초를 쓰지 않았다. 그는 여영고가 펼치 는 기세가 약간 누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살짝 물러섰다. 그런데 별안간 상대방 칼이 앞으로 쑥 뻗어나오지 않는가? 허월은 즉시 창날을 살짝 기울여 상대방의 칼날에 갖다붙이며 힘껏 휘둘렀 다. 쨍그랑! 창!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여영고는 검을 거둘 수도 뻗쳐낼 수도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더군다나 허월이 실력을 다해서 자기 칼을 누른 상태로 휙휙 돌려대는지라 그만 손아귀가 저려 보검을 놓 치고 말았다. 보검은 맥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허월의 창은 상대방의 칼날에 스쳐 두 동강이 났고 손에는 창자루만 쥐어져 있었다. 허월은 조금도 사이를 두지 않고 사오 자 길이의 창자루만으로 용귀대해(龍歸大海)라는 일초를 펼쳐 번개와 같이 여영고의 아랫 배를 찔러갔다. 여영고는 수치스럽고도 다급했으나 막아낼 수 없음을 느끼고 부득이 몸을 뒤로 날렸다. 그런데 그 일초를 피하고 보니 허월은 어느 새 자기의 칼을 주워드는 것이 아닌가? 허월은 그녀를 쫓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칼의 요모조모를 살펴보고 있었다. 여영고는 보검이 상대방의 손에 들어가자 그만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 었다. 그래서 사부가 지난날 마(魔)를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청예검(靑霓劍)을 품속에서 꺼 냈다. 허월은 여영고의 고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갑자기 허리춤에서 한 자 남짓한 검갑(劍匣)을 꺼내는 것을 보고 사태가 잘못 되어 간다고 느꼈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여영고는 이미 보검 을 검갑에서 꺼냈고, 한 줄기 청광을 허공에 뿌려내며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허월은 상대방의 비검이 무섭다는 것을 알았고 또 피할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장탄 식을 내뱉으며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이처럼 속수무책일 때 홀연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 다. 다시 눈을 떠보니, 얼마 전에 강에서 만났던 왜수 주매가 바로 자기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비단 폭 같은 광채가 묘령의 청의여인으로부터 날아왔다. 그러나 그녀가 펼친 검광은 어느 틈에 주매 의 손에 잡혀 있었다. 작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눈부신 광채를 내쏘는 검광은 파르스름 한 빛이었고 싸늘한 기운을 서릿발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이때 도균 등이 차례로 달려와 주매 앞에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허월은 주매가 달려오지 않았 다면 자기의 목숨이 남아날 수 없었는데 자기가 어째서 아직도 정신빠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을 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재빨리 주매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드렸다. 주매는 여러 사람들이 자기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자 매우 불쾌한 듯이 부르짖었 다. "너희들 모두 일어나거라! 이와 같이 형식적인 예절에 구애받는 건 나를 화나게 하는 짓이다." 소인은 종종 스승으로부터 주매의 성질이 괴팍하다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얼른 몸을 일으켰 다. 그런데 허월과 도균은 입장이 달랐다. 한 사람은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입었고 한 사람은 너 무 기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은 그저 예의를 차리기에 급급할 뿐 주매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주매는 마침내 성질을 참지 못하고 도균에게 다가가자마자 대뜸 따귀를 후려쳤다. 도균은 그만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래도 그는 주매의 뜻을 오해하고, 스승이 자기를 탓하는 것은 지시를 어기고 허월을 데려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급해진 나머지 연신 큰절을 올리면서 용서를 빌었다. 허월은 도균이 무단히 얻어맞는 것을 보고 즉시 그를 대신해서 꿇어엎드려 빌었다. 주매는 두 사람이 큰절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성질이 나서 다시 앞으로 나가 도균에게 두 번 발길질을 했 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허월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 늙은이가 자네를 구한 것이 잘못이었어. 그리고 자네한테서 큰절을 받고도 되돌려 주지 않 으면 자네를 내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단 말이야! 그런 골치아픈 짓은 할 수 없어! 자네는 나의 못난 제자가 아니니 나는 때릴 수가 없네. 그러나 내가 맞절을 몇 번 해서 갚아주면 되겠 지?" 이렇게 되자 도균과 허월 두 사람은 더욱더 간담이 써늘해서 죽은 듯이 땅바닥에 꿇어엎드려 있 었다. 주매는 땅바닥에 엎드려 허월과 맞절을 하는 형국이었는데 자기 입장이 화가 나는지 다시 등 뒤 에 있는 도균을 뒷발질로 걷어찼다. 도균은 스승이 자기에게 발길질을 가해오자 감히 피할 생각 은 못하고 오히려 그 매를 맞아 스승의 노기를 가라앉히고자 했다. 이렇게 되자 도균의 코는 시 퍼렇게 멍이 들었고 눈언저리도 퉁퉁 부어올랐다. 소인은 이미 영문을 알고 있었으나 주매의 성질을 잘 알기 때문에 감히 나서서 깨우쳐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도균이 주매에게 얻어맞고 발길질에 채여 몇 군데 상처를 입었을 뿐 아니라 앞니 마저 하마터면 빠질 뻔하도록 입언저리에 피가 철철 흐르자 몹시 애처롭고 안타까왔다. 앞으로 나와 도균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대는 멋도 모르면서 주사백부님의 제자가 되었군요! 어찌하여 그 어르신의 성질을 모른단 말 이에요? 그 어르신은 자기에게 무릎을 꿇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단 말이에요." 이때 도균은 이미 주매의 발길에 차여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급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소인이 한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엎드리려고 했다. 그러나 허월은 어느 정도 주매의 말뜻을 알아듣고 있던 차에 다시 소인의 해명을 듣자 확연히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저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아무쪼록 일어나십시오." 그는 도균에게 달려가 소인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서 들려주었다. 곡절을 알 수 없는 재난이 바로 너무 좋은 예의를 차린 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자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공 손한 태도로 서 있었다. 그제사 주매는 몸을 일으키더니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소인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그저 공증인일 뿐인 데도 친척이 얻어맞는다고 남의 일에 쓸데없이 관여하는구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원원대사는 제자를 잘못 가르쳤어!" 소인은 그 말을 듣자 당황하지 않고 주매에게 말했다. "제자가 어찌 그 누구를 감싸겠습니까? 원원사숙께선 이미 오늘의 인과를 알고 계십니다. 사숙 께서 여영고로 하여금 제자를 찾아보게 한 것은 원래 그녀의 불같은 성질을 단련시키고 누그러뜨 려 완전한 인재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검합일을 이루지 못했고 공행이 아 직 얕은 여영고가 다른 문파가 횡행하고 있는 이때 산을 내려와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어찌 용납 하셨겠습니까?" 도균과 허월 두 사람은 그때서야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람은 바로 여영 고였다. 그녀는 뭇사람들이 절을 하느라고 바쁜 틈을 타서 멀리 사라진 모양인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매가 말했다. "아마도 그 계집아이는 마음이 좁고 또 칼을 두 자루나 잃게 되자 산으로 돌아가 사부를 뵐 체 면이 서지 않아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한 모양이다." 허월은 여영고가 죽는다면 너무나 애석한 노릇이라 자기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매는 소인을 한 번 바라보더니 껄껄 웃었다. "하하하! 강한 장수 아래에 약한 병졸이 없다더니, 너야말로 너의 사부인 그 노니(老尼)가 말하 는 투를 꼭 닮았구나! 그 애는 너무나 성질이 급하다. 그러니 그의 사부가 그 애에게 진전을 이어 주려 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강하류 쪽으로 기슭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약 반 마장 정도 가다가 주매는 걸음을 멈추었다. 전방을 바라보니 여영고가 앞쪽 강변에서 물에 뛰어들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앗!" 도균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주매가 손을 쳐들어 저지하는 바람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영고는 몸을 날려 강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여영고가 물에 뛰어들 때마다 마치 어떤 물건이 있어서 튕겨내듯 그녀를 언덕 위로 던지는 것이 아닌가? 여영고의 표정 은 매우 초조했다. 도균과 허월은 그녀의 그 같은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매는 갑자기 두 손을 입에다 모으고 강을 향해 나직이 뭐라고 몇 마디 중얼거렸다. 도균은 사 부의 그 같은 동작을 보고 바로 지난날 황학루 아래에서 자기한테 했던 것처럼 강 한복판 어딘가 에 있는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싸늘한 파도만 넘실거리며 흘러가고 있을 뿐 강 에는 한 척의 배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는 다시 맞은편 강기슭을 건너다보 았다. 시력을 다 쏟아 바라보니 어렴풋이나마 맞은편 산 아래의 강기슭에 일엽편주가 떠 있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주매는 그처럼 <천리전음>으로 맞은편 강 기슭을 향해 몇 마디 말을 뱉더니 이번엔 고개를 돌 려서 소인에게 낮게 속삭였다. 소인이 허월에게 말했다. "방울을 매단 사람이 역시 방울을 풀어야 한다고, 허선생께서는 저와 함께 저의 사매를 구해 주 시겠어요?" 허월은 이미 그럴 마음이 간절했지만 주매의 분부가 없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을 못하고 있던 참 이었다. 그런데 소인이 그렇게 청하므로 주매의 동의를 얻었음을 알고는 즉시 찬성했다. 허월과 소인은 여영고가 있는 언덕쪽으로 달려갔다. 그녀와의 거리가 이삼 장쯤 되었을 때 소인은 큰소리를 불렀다. "사매! 자결할 생각은 말아라! 이 못난 언니가 왔다!" 이때 여영고는 여전히 물 속으로 뛰어드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인이 부 르는 소리를 듣자 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고는 소인이 자기의 원수인 허월과 함께 걸어오는 것 을 발견하고 더욱더 수치와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어 당장 죽고만 싶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 고 발로 땅바닥을 차며 필생의 힘을 다해 이 장이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고기나 독수리 가 물 속으로 뛰어드는 자세로 강 한복판을 향해 내리꽂혔다. 이번에야말로 사력을 다한 탓인지 막힘이 없었다. 텀벙! 하는 소리와 함께 일 장 남짓한 물방울 을 튀기고 강 한복판의 싸늘한 파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그녀는 강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 다. 그런데 이번에도 여영고는 갑자기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두 손을 허공에 대고 마구 허우적거 리며 물결을 따라 동동 떠내려갔다. 허월은 여영고가 강물 속에 뛰어들 때마다 튕겨져 나오는 것은 주매의 법술 때문이라고 생각했 다. 그리고 소인이 자기더러 함께 사람을 구하자고 한 것은 바로 여영고에게 사과를 함으로써 그 녀의 화를 누그려뜨려 달라는 의도적인 주문임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마지막 투신에서 여영고가 강기슭으로 튕겨나오지 않고 물결에 두둥실 떠내려 가자 어떻 게 된 노릇인지 모르지만 무척 다급해졌다. 평소 헤엄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소인에게 말 할 틈도 없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겨울 날씨라 양자강의 물은 차가왔지만 다행히 깊지 않았고 물결도 세차지 않은 편이었다. 수 십 장이나 헤엄을 쳐서야 그는 겨우 여영고의 머리카락을 감아 쥘 수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뻗 어 여영고 뒷덜미를 잡고 물을 차면서 강변으로 헤엄쳐 나왔다. 그는 뼈를 에이는 추위에 몸을 벌벌 떨며 여영고를 언덕으로 안고 올라왔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새파래져 있었고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허월은 자기 추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소인에게 부탁하여 여영고의 두 다리를 잡도록 한 다음 자기는 그녀의 옆구리 아래쪽을 힘주어 누르면서 머리를 거꾸로 쳐박아 물을 토해내게 했다. 그 리고 나서 그녀의 가슴을 만져보니 한 가닥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주매가 어느 새 도균을 데리고 달려왔다. 주매는 이쪽 사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강쪽을 향해 연달아 손짓을 했다. 잠시후 맞은편 강기슭에 있던 작은 배가 이쪽으로 건너왔다. 바로 주매가 탔던 그 배였다. 그런 데 뱃머리에는 한 사람의 늙은 여승이 서 있었다. 체구가 우람하고 얼굴이 새빨간 그 여승은 강 기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자 표연히 몸을 날려 그들 옆에 사뿐 내려섰다. 소인은 재빨리 앞으로 나가 절을 하며 부르짖었다. "제자가 그만 분부를 저버리게 되었군요. 사숙께선 아무쪼록 벌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늙은 여승이 말했다. "이 일은 순전히 그녀 스스로 자초한 것인데 어찌 너를 탓할 수 있겠느냐. 나는 그저 허시주로 하여금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어 지나간 날의 감정을 풀도록 해주려고 한 것뿐이다." 주매가 끼어들었다. "되었소, 되었어. 빨리 그녀를 구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날이 춥고 물은 차니 시간이 길 어지면 내상을 입을 것이오." 늙은 여승은 그 말을 듣고 허리춤에서 두 알의 알약을 꺼내더니, 소인더러 그녀가 타고 온 배로 가서 반 잔의 따뜻한 물을 따라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여영고의 입을 벌리고 약을 먹인 후 물 을 먹여주었다. 곧이어 왁 하는 소리와 함께 여영고는 다시 강물을 토해냈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의 몸을 누군 가 얼싸안은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는데, 바로 자기의 원수인 허월이 아닌가? 더군다나 한 손을 자기의 허리 아래쪽에 갖다댄 채 반쯤 자기의 몸을 얼싸안고 있었으며 다른 한 손은 자기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만 수치감과 울화가 치밀어 누가 서 있는지 똑똑히 보지도 않고 호통을 내질렀다. "이 대담한 도적놈아! 감히 위험에 빠져 있는 나를 희롱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냅다 허월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허월은 미처 방비하지 못한 터라 그녀의 주먹질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대뜸 얼굴이 시퍼 렇게 부어오르면서 입가로 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서 여영고는 허월의 품을 빠져나가려고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자기의 몸이 몹시 허하 여 제대로 설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강변으로 허월을 찾아가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에 음식을 입에 대 지도 않고 나섰을 뿐 아니라 의외로 강적인 허월과 한나절이나 싸우느라고 아무것도 먹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뱃속 가득 찬물을 들이켜 크게 원기를 손상한 것도 그녀에겐 상당한 무리 였다. 몸을 날리자마자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으며 두어 번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자세를 가다듬 었다. 그녀가 다시 허월을 향해 크게 욕을 퍼부으려 하는데 갑자기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 대담하고 당돌한 것 같으니, 이곳에 누가 있는지 보아라!" 여영고가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자기의 스승인 향설동의 원원대사가 아닌가? 그 옆에는 소 인과 한 늙은이가 서 있었는데, 그 늙은이가 바로 조금 전 자기의 보검을 거두어 간 장본인이었 다. 조금 전 만났던 도씨라는 젊은이도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놀람과 두려움에 급히 땅바닥에 엎 드려 큰절을 하며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원래 여영고는 성질이 열화같았기 때문에, 당초 나부산에서 무공을 배울 때도 원원대사는 그 성 질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 같은 성질을 버리기 전에는 그녀에게 경신법과 월녀검법만 가르칠 뿐 비검술은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여영고는 원한을 갚기로 결심한 터라 사부에게 몇 번이나 애걸하고 또 여러 동문의 사숙과 사형 되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대사는 여전히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부산은 가히 인간세상의 복지(福地)라고 할 수 있는 산이었다. 온 산은 매화나무로 뒤덮여 있 어 경치가 아주 좋았고 매번 시월 말이 되면 매화가 만개하여 다음해 봄까지 화색을 자랑하다가 차츰 꽃잎이 떨어지면서 시드는 것이었다. 여영고는 본래 할 일이 없을 때면 사부의 명을 받아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약을 캐오곤 했다. 어느 해 봄날, 우연히 그녀는 뒷산에서 하나의 동굴을 발견했다. 입구 쪽은 좁았으나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동굴은 차츰 넓고, 높아지면서 나선형의 통로가 쭉 이어져 있었다. 한참동안 가다보니 점차 빛이 스며드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코끝으로 매화 향기가 풍겨왔다. 여 영고는 본래 호기심이 많았다. 그리고 자기가 들고 있는 보검이 예리하다는 것을 믿었으므로 독 사나 맹수의 기습도 두려워하지 않고 서슴없이 동굴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한참 가다가 한 종유석이 달려 있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별안간 그의 앞에 평탄한 초원이 나타 났다. 초원에는 수천 그루나 되는 아름드리 천년 묵은 매화나무들이 빽빽히 서 있었는데 한창 매 화가 만발해 있었다. 사방은 절벽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절벽 위 한 곳에 <향설해(香雪海)>라는 커다란 글씨가 부조되어 있었다. 글씨 아래쪽에는 동굴이 있었다. 여영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이 거처하시는 동굴은 만 그루나 되는 매화나무들이 둘러쳐 있고 동굴 안에는 사 계절 동안 시들지 않는 꽃이 있어 <향설동(香雪洞)>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는 또 무언가? 향설해라 고 한 것은 아마도 매화가 바다처럼 흐드러졌다는 뜻인 모양이구나. 이 동굴의 경치는 향설동과 비교해서 어떤지 모르겠구나. 오늘 내 눈에 띈 이상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없잖아. 만약 향설동보 다 좋다면 사부님께 말씀드려 이곳으로 옮겨와 살자. 그러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의 동굴은 한걸음 한걸음 위로 오르게 되어 있는데 이번 동굴은 완만하게 아래로 경사져 있었다. 여영고가 십여 보 걸어 내 려가니 안쪽에 돌로 만든 병풍 같은 것이 서 있었다. 그 돌병 풍을 돌자 어렴풋이 안쪽에서 어떤 빛이 시선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빛은 한 조각의 석판(石版) 아래서 뻗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칼을 틈서리에 끼워 그 석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 아래 에 한 자 세 치 길이의 한 자 루 작은 보검이 나타났다. 한눈에도 상당한 보물인 것 같았다. 그녀는 칼을 집어들고 석판을 도로 닫았다. 동굴의 광선이 너무나 약하고 어두웠기 때문에 그녀는 바깥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때 불현듯 발걸음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혹시 이 동굴의 주인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들었으나 도망칠 여유가 없어 그녀는 돌병풍 뒤에 몸을 숨기고 누구인가 지켜보기로 했다. 그녀가 있는 위치는 안쪽이어서 어두웠으므로 밝은 입구 쪽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들어오는 사람은 두 사람의 여인이었다. 앞선 사람은 바지 위에다 나뭇잎을 더덕더덕 붙인 괴상한 웃도리를 받쳐입고 있었다. 몸매가 날 씬할 뿐 아니라 눈과 눈썹 사이에는 첫인상에도 음탕한 기가 감돌고 있었다. 뒤에서 걸어오는 여 인은 남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얼굴이 매우 아름다우며 목걸이를 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돌 병풍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 자리에 서서 다투기 시작했다. 나뭇잎 옷을 걸친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삼십육 년이라는 긴 세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이에요? 나는 동(洞)에서 실컷 부귀영화를 누렸답니다. 그대를 참하리라고 한 것은 그저 겁을 주는 말에 불과해요. 만약 그대가 돌아와서 물 건을 가져가려고 하지만 않았다면, 우리들은 이미 수백 리 밖에 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또 새삼스럽게 두려움을 느꼈죠?" 남의여인이 말했다. "내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우리 사부님의 무서움을 잘 알기 때문이에요. 조금 전 그대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 이곳에서 저를 놓아주고 동굴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을 땐, 다시 돌아와 이 보물을 가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나 그건 내가 너무나 어렵게 얻은 것이고 또 동굴에서 십여 년 동안 지내며 고생을 한 것도 그 물건들 때문이었어요. 사부님께서는 그날 그 보물을 묻으시면 서 이 물건들이 만약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건네지면 얼마나 참담한 사건이 많이 일어날지 모른 다고 했어요. 나는 이 보물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바로 이 바위 아래에다 묻었으며, 동시에 사부님이 과거에 마를 방비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청예검을 윗쪽에다 묻었지요. 검술을 연성했을 때 나는 그 보물을 훔치기 위해서 한 번 계율을 어기고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부 님께서는 본래 나를 죽이려고 했으나 내가 몹시 애걸복걸할 뿐 아니라 정혜(定慧) 대사저가 나를 도와 간청해서 나는 죽음을 면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사부님은 이 동굴에다 삼십육 년 간 저를 가둬둔다고 했으며, 면벽하며 도를 닦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보물을 묻을 때 나에게 몇 말씀 하셨어요. 만약 내가 기회를 보아 도망치거나 욕심을 품고 보물을 다시 꺼내려고 하면 어떤 사람 이 청예검으로 나의 목을 자를 거라고 말이죠. 사부님이 평소 하신 말씀은 모조리 맞아떨어졌어 요. 나는 아까와서 다시 되돌아 오긴 했지만, 그러나 차마 손수 그 석판을 들어낼 만한 용기는 없 어요." 나뭇잎을 걸치고 있는 여인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십여 년 동안 만나보지 못했는데, 나는 비로소 그대가 이곳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았어요. 마침 동주(洞主)께서도 그대와 같은 인재를 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불원천리하고 달려 와 구하고자 한 것이에요. 그런데 다년간 보지 못한 사이에 어째서 이토록 담이 작아졌나요? 그 대가 그토록 무서워한다면 그대가 그곳을 말씀해 줘요. 그러면 내가 대신 꺼내죠. 어때요?" 남의여인이 말했다. "바로 저 돌병풍 뒷쪽에 있는 한 조각의 석판 아래에 있어요. 하지만 그대는 반드시 조심해야 할 거예요." 나뭇잎 옷을 걸친 여인이 말했다. "상관없어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돌병풍을 돌아서 다가왔다. 이때 여영고가 든 작은 보검은 마치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듯이 부르르 요동치고 있었다. 제대로 잡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며, 금방이라도 손에서 빠져 달아날 것 같았다. 그러나 여영고는 두 여인이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는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칼자루를 힘껏 붙잡았다. 한편 남의 여인이 말하는 보물이 어떤 물건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조금 전 석판을 들어올렸을 때 아래쪽을 더듬어 보지 않았던 사실이 후회되기도 했다. 두 여인이 돌병풍 앞쪽으로 나왔다. 여영고는 담이 무척 큰 편이라 자기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잊고 그녀들이 말하는 보 배가 무엇인지 훔쳐보고 싶었다. 시야를 넓히고 싶다는 생각에 그녀는 어두컴컴한 곳에 몸을 숨 기고, 두 사람의 동정을 엿보았다. 나뭇잎 옷을 걸치고 있는 여인은 한 자루의 강차(鋼叉)를 들고 있었는데 강차의 끝에서는 붉은 빛이 번쩍거렸다. 그녀는 그 강차를 틈서리에 끼워 석판을 들어올린 다음 아래쪽을 한참 파헤쳤 다. 그러더니 다시 한 장의 작은 석판을 들어올렸다. 그 다음 들어내어진 것은 하나의 석갑(石匣) 이었다. 나뭇잎 옷을 걸친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사부가 일부러 그대에게 겁을 주었다고 내가 그랬죠? 봐요,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이것 이 바로 그대가 말하는 석갑이 아니에요? 그런데 보검은 어디 있나요?" 남의여인은 재빨리 석갑을 받아 들며 말했다. "아마도 보검은 사부께서 이미 가져가신 모양이군요. 보물을 이미 손에 넣었으니 우리들은 빨리 떠납시다." 나뭇잎 옷을 걸친 여인이 말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옛날 명나라 종친인 정왕부(靖王府)가 이 구룡조보경(九龍照寶鏡)과 야광주 (夜光珠)를 얻기 위해서 세 명의 아미파 검객을 해치고 십여 명의 인명을 살해했다는 말을 들었 고, 그것이 무척 진귀한 보물이라고 들어왔답니다. 동굴 밖은 밝아서 이곳 안에서처럼 두 가지 보 물의 신기한 점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지금 좀 꺼네서 나의 시야를 넓혀 주실 래요?" 남의여인은 남에게 은혜를 입은 이상 거절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 매우 난처해 하다가 끝내 들 고 있던 석갑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여영고는 어둠 속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석갑은 사방 여덟 치 둘레에 네 치 정도의 두께 였다. 그 안에는 하나의 구리거울이 들어 있었다. 구리거울 뒤쪽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용의 비늘과 뿔은 생동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더군다나 수정과 같은 빛을 사방으로 뿜어냈으며 싸늘한 광채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밖에 지름이 한 치쯤 되는 커다란 구슬이 하나 있었는데, 그 구슬은 석갑에서 나오자마자 금 방 동굴 안을 환히 밝혀 주었다. 나뭇잎 옷을 걸친 여인은 거울과 구슬 두 가지 보물을 받아 들더니 연신 칭찬의 말을 했다. "정말 훌륭한 보물이군! 정말 성 한 채의 값보다 더 나가겠네!" 별안간 남의여인이 대경실색해서 소리쳤다. "아이쿠! 야단났어요!" 그리고는 곧장 나뭇잎 옷을 걸친 여인의 등 뒤로 가서 숨었다. 여영고는 어둠에 숨어 있으면 상 대방에게 발각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야광주가 석갑에서 나오자마자 수천 수백 자루의 초에 불을 밝힌 듯 동굴 안이 대낮처럼 환해지는 것이 아닌가? 나뭇잎 옷을 걸친 여자는 오로지 보물 구경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남의여인은 그렇지 않아 도 마음 속에 두려움을 품고 있는 터라 혹시나 사부의 비검이 날아들지나 않나 하고 사방을 두리 번 거렸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한 홍의소녀가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고, 더군다나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자 기 사부가 보물과 함께 넣었던 청예검이고 보니 어찌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만약 자기가 배반을 한다면 누군가가 그 칼로 자기를 죽일 것이라던 말이 생각났다. 나뭇잎 옷을 걸치고 있는 여인 역시 여영고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보자 오래 전부터 원원대사 의 무서움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깜짝 놀랐다. 남의여인은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고 두 보물을 품속에 숨겼고, 나뭇잎 옷을 걸친 여인은 여영고 를 향해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는 누구인데 감히 우리를 훔쳐보는 거죠? 그대는 귀모산(鬼母山) 현음동(玄陰洞) 적발동주 (赤髮洞主)의 큰 제자인 교교(翹翹)의 무서움을 모르나요?" 여영고는 이때 자기가 겁을 집어먹으면 그녀들에게 해를 입게 되리라 생각하고 아예 그녀들을 속이기로 작정했다. "어디서 온 요녀인데 감히 본산에 달려와 사사로이 죄인을 풀어주고 보물을 훔치려고 하는가? 나는 사부의 명을 받고 이곳에서 기다린 지 오래 되었으니 빨리 두 가지의 보물을 내려놓아라! 그러면 그대를 용서하고 죽이진 않겠다." 나뭇잎 옷을 걸친 여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영고가 들고 있는 청예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펄떡거렸다. 그래서 손의 힘을 살짝 풀자마자 청예검은 그녀의 손을 떠나 날아갔다. 한 가닥의 푸 른 빛줄기가 그어진다 싶은 순간, 남의여인이 '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교교라고 자신을 밝힌 나뭇잎 옷 걸친 여인은 대노해서 들고 있던 강차를 내던졌다. 강차는 허 공으로 날아올라 타는 듯한 홍광을 내쏟으면서 청예검과 함께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여영고는 검술을 모르는지라 초조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홀연 동굴 밖에서 호통소리가 들렸다. "대담한 요물 같으니! 감히 우리 산으로 들어와 시끄럽게 굴다니?" 말이 끝나자마자 원원대사가 달려 들어왔다. 교교는 대사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지라 강차를 거 둬들여 땅바닥을 차고 한 줄기의 홍광으로 변해 도망을 쳤다. 원원대사는 그녀를 쫓지 않고 허공 으로 손을 뻗어 청예검을 거두어들였다. 여영고는 그제서야 마음이 놓여 크게 기뻐하며 그간의 사정을 말하려고 했다. 원원대사는 손을 내저었다. "모든 일은 내가 다 알고 있다. 죽은 사람은 나의 못난 제자 왕연연(王娟娟)이다. 자기가 지은 죄의 대가를 받아 지금 이같이 된 것이다. 그녀가 다른 교에 투신하게 되었다면 많은 사람을 해 쳤을 터,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너의 손을 빌어 그녀를 처단한 것이다. 우리 문하의 규칙은 무척 엄하다. 너는 마땅히 오늘 일을 잊지 말고 매사에 조심해라. 이 청예검은 옛날 내가 마를 제 압하려고 만든 물건인데, 쏘아낼 수도 있고 거둬들일 수도 있다. 네가 발견했으니 너에게 주마. 그러나 훗날 네가 우리 문하의 규칙을 어기는 경우 너의 사저처럼 그 검에 처단될 것이다. 이곳 은 바로 향설동의 뒷동굴이다. 아침저녁으로 장기(腸氣)가 피어오르기 때문에 처음 도를 닦는 사 람들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빨리 너의 사저를 묻어주고 나를 따라 돌아가자." 여영고는 우연히 한 자루의 비검을 얻게 되어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다. 왕연연을 매장한 후 그녀는 대사를 따라 동굴을 나섰다. 대사는 그녀에게 비검을 운용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대사는 아울러 그녀에게 검을 믿고 멋대로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지 말 것이며 살생을 많이 하지 말고, 또 마음을 정직하고 바르게 가지되 누구도 편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유독 그녀가 원 한을 갚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여영고는 그 불언급을 자기의 복수에 대한 묵인이라 생각했다 거기다 비검마저 얻었으므로 산에서 내려가 허월을 죽일 생각에 좀이 쑤셨던 것이다. 기막힌 은원 得靑霓 余塋姑下山 認株砂 秦素因感舊 호걸대협이며 남의 일을 잘 도와주고 후배들을 잘 이끌어주는 것으로 유명한 형산(衡山) 백작동 (白雀洞) 금모모(金姆姆) 나자연(羅紫煙)은 원원대사와 매우 막역한 사이였다. 그녀는 해마다 나부산에 매화가 활짝 필 때면 반드시 향설동으로 찾아와 한두 달 묵어가곤 했 다. 그녀는 여영고를 무척 사랑하고 아끼어, 향설동에 올 때마다 정성껏 그녀를 가르치라고 부추 기곤 했다. 대사는 과거에 왕연연이 검술을 연성한 후 규칙을 어기는 못된 짓을 하는 것을 보아왔으므로, 성질이 급한 여영고에게 검술만은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었다. 청예검을 내린 것도 금모모의 체면을 봐서였다. 그녀 역시 여영고의 천부적인 자질에 주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영고로 하여금 좌절을 당할 대로 당하게 하여 불같은 성질을 고치게 한 다 음에야 검법을 전수해 줄 작정이었다. 여영고는 금모모가 자기를 대신해서 간곡히 부탁하면 사부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라 생 각하고, 시월 말께 금모모가 향설동에 오기를 기다렸다가 기회를 봐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부 탁을 드렸다. 금모모는 그녀가 정성이 지극한 것을 불쌍히 여겨 대사에게 간청했다. 대사는 말했다. "애당초 허모에게는 잘못이 없었소. 그가 단지 싸움을 걸었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외다. 쌍방 이 다투게 된다면 어떻게든 승패가 나게 마련 아닙니까. 여영고 어머니가 먼저 암기를 써서 상대 방의 아우되는 사람을 불구자로 만든 게 잘못이에요. 허모란 사람이 자기 형제의 원한을 갚기 위 해 나선 것은 자기의 본분을 지킨 것이지요. 그러나 그가 사람을 해치지 않은 것을 보면 마음이 얼마나 너그러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색을 탐하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사야만 될 것입 니다. 저 애의 어머니와 언니는 마음이 좁아서 스스로 울화병이 도져 죽은 것이니 그 사람과 무 슨 상관이 있어요? 애당초 나는 저 애가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몸이고, 또 그 자질이 아까워 문 하로 거둬들였는데 그대는 여전히 내가 진전을 전수하지 않는다고 탓하는구려. 그런데 그 애는 한 자루의 훌륭한 보검을 얻게 되자 아직 검술에 입문도 하기 전이면서 내 곁을 떠나 산을 내려 가 원수를 갚을 생각에만 몰두해 있으니 참 어처구니가 없어요." 금모모가 말했다. "그대는 저 애를 훌륭한 인재로 만들 계획이었잖소? 그러니 이 기회에 계책을 써서 그 애가 가 도록 허락을 하는 것이 어떨까 싶군요. 그리하여 만약 허모가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 못된다면 저 애의 손을 빌어 처치함으로써 그 애의 소원을 풀어주고, 만약 허모가 정말로 괜찮은 사람일 경우 달리 좋은 쪽으로 일을 유도하면 될 것이 아니겠소?" 대사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고 승낙을 했다. 그리고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여영고에게 주며 말했다. "네가 검술이 아직도 깊은 경지에 들어가기도 전인데 산을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다만, 이번 걸음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 일이니 효도를 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일의 원인을 따져본다면 허모의 탓만은 아니다. 네가 꼭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너는 아직 신검합일의 경지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외로운 여인의 몸으로 어느 곳으로 찾아가서 묻겠느냐? 그러니 너는 이 편지를 들고 한양 백룡암에 있는 동문 사저에게 가서 몸을 의탁하도록 해라. 그 녀는 나의 사저인 신니(神尼) 우담(優曇)의 제자로서 이름은 소인이라 하며, 바로 그곳에 살고 있 다. 이 편지는 소인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모든 점에서 그녀의 분부를 받도록 하고 그녀를 대할 때는 마치 나를 대하듯 해라. 그리고 한구에 이 르거든 먼저 허모의 위인됨이 어떤가 수소문을 해보도록 해라. 만약 좋은 사람이라면 너의 어머 니와 언니가 애초에 생각없이 저지른 잘못이니,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사로운 원한은 잊어버리도 록 해라. 만약 허모가 간악한 위인이라면 너는 마땅히 그를 이 세상에서 없애 해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내 말을 꼭 명심해야 한다. 이 청예검은 과거 내가 사용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성도 (成道)한 이후에는 필요가 없어 전적으로 본문의 상벌을 집행하는 데만 사용하고 있다. 너의 사저 가 죽은 것도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제 너에게 주겠으니 잘 간직하라. 만약 무단히 잊어버리 거나 다른 교(敎)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너는 다시 돌아와 나를 볼 필요가 없다. 대사백 께서 마침 호남성으로 되돌아 가시길래 너를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드렸다. 너는 혼자서 길을 다 니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일이 끝난 이후에는 소인 사저와 함께 백룡암에 머물며 수련을 하되 그의 명에 따라 움직이도록 해라." 여영고는 어릴 적부터 녹림(綠林)에서 자라난 몸이었다. 거기다가 어머니와 언니를 따라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파란만장한 생활을 겪어보기도 했었다. 산 속에서 고달프고 외롭게 오랜 세월을 보내다가 이제 스승이 산을 내려가도 좋다고 허락을 하 자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기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즉시 고개를 숙이고 스승에게 감사 를 드렸다. 이튿날 금모모 나자연은 여영고를 데리고 어기비행으로 곧장 한양 백룡암으로 날아가 여영고를 땅에 내려놓고 형산으로 되돌아 갔다. 소인은 대사의 편지를 보고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여영고에게 말했다. "그대의 원수 허월은 위인됨이 정직하고 호남성과 호북 일대에서는 퍽으나 협명을 떨치고 있다 네. 사숙의 편지에 감추어진 뜻을 살펴보건대 그대의 이 원한은 아무래도 갚기가 어렵겠군." 그러나 팔 년 동안 와신상담한 끝에 간신히 복수할 기회를 얻은 여영고가 어찌 쉽게 포기하겠는 가? 그런데 소인은 여영고에게 규칙에 따라 먼저 칠 일 전에 허월에게 통지를 하라고 시켰다. 여영고가 동굴을 나선 직후 갑자기 원원대사가 달려왔다. 그리고 소인에게 여영고와 함께 동행 을 하되 이리이리 하라고 지시했다. 원래 원원대사는 여영고가 떠나간 후 즉시 뒤따라 달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소인에게 모든 것을 당부한 이후 백룡암을 나와 산으로 되돌아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주매를 만나게 되었다. 주매는 추운수를 대신해서 대사에게 성도로 함께 가서 자운사를 깨뜨리자고 종용했고, 원원대사 는 주매에게 여영고의 일을 말해 주었다. 두 사람은 칠 일째 되던 날 동시에 얼굴을 내밀기로 약 속하고, 대사는 주매의 배를 타고 맞은편 강기슭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여영고는 허월과 한창 싸우다가 청예검을 내던졌을 때 홀연 한 키작은 노인이 나타나 청 예검을 거두어 가는 바람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 소인이 도와주기를 바라던 터인데, 소인은 오히려 그 노인에게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여영고는 노인의 내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불손한 언사를 감히 쓸 수 없어서 꾹 눌러 참았다. 그녀는 스승으로부터 받은 두 자루의 칼을 모조리 잃고 나자 산으로 돌아갈 체면이 서질 않았다. 감히 스승을 만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절망감에 휩싸인 그녀는 급히 달려나가 강 물에 몸을 던지려고 했던 것이다. 원원대사는 맞은편 강기슭에서 여영고가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자기를 내뻗쳐 그녀의 몸을 튕겨 언덕에 떨어지도록 만들곤 했다. 그러던 차에 소인이 달려오는 것이 보 였다. 대사는 소인에게 바다로 뛰어들어 바늘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여영고로 하여금 고통을 좀 당하도록 하기 위해 마지막 한 번은 그녀를 제멋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영고를 구출해낸 것은 허월이었던 것이다. 원원대사는 이젠 완전히 기운을 차린 여영고에게 말했다. "너는 산을 내려오자마자 사문의 훈계 따위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허월은 너에게 핍박을 당해 왔는데, 너는 그래도 감히 나의 비검을 사용하여 헛되이 사사로운 원한을 갚으려고 했고, 선 량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려고 했구나. 만약 주사백부께서 검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면 그는 머리 와 몸이 두 동강이 났을 게 아니냐? 그런데 그는 네가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너의 지 극한 효심을 기특하게 여기고 이와 같이 추운 날인 데도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거센 강물에 뛰 어들어 너를 구해 주었다. 그런데 너는 오히려 그 은덕을 고맙게 여기고 보답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서 상대방을 때려 입에서 피가 흐르도록 만들다니! 나의 문하에 너와 같 이 은혜를 저버리고 근본을 등지는 발칙한 자가 어디 있었더냐? 이제부터 너를 우리 문하에서 쫓 아내겠으니 다시는 나의 제자라는 것을 들먹이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비검으로 너의 수급을 자르고 말겠다." 여영고는 그 말을 듣자 간담이 찢어질 정도로 놀랐다. 그저 큰절을 꾸벅꾸벅하며 용서를 빌 뿐 감히 소리내어 말을 하지도 못했다. 소인은 한 항렬이 낮은 아랫 사람이라 감히 용서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고, 도균과 허월 두 사 람도 쩔쩔매기만 할 뿐인데 그래도 말발이 서는 것은 역시 주매였다. "됐소. 이제 충분하오. 내 체면을 봐서라도 저 애를 한 번만 용서하시구려. 두 사람 모두 물에 빠진 생쥐꼴이니 가엾잖소. 다행히 이 주모가 여기로 오면서 길에 짙은 안개가 덮이도록 했으니 오늘의 일을 눈여겨 본 사람이 없을 거요. 그러니 이제 우리는 가까운 허씨 집으로 가서 잠시 앉 아 기다리며 두 사람이 옷을 갈아 입고 밥을 먹게 합시다." 원원대사는 그제서야 얼굴이 조금 풀어지며 말했다. "주사백께서 사정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불칙한 너를 반드시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앞으로 나가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지 못하느냐?" 그제서야 안심이 된 여영고는 낭패한 꼴로 주춤주춤 주매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 려고 했다. 주매는 몹시 다급해서 연신 발을 구르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허허 아니! 그대는 내 성격을 모른단 말이오? 어찌하여 이같은 수작으로 날 번거롭게 하지?" 대사가 재빨리 말했다. "너의 주사백께서 절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니 그만두어라. 그럼 이번에는 네 목숨을 구해 준 은 혜에 고마움을 표하도록 해라." 여영고는 싸우는 동안 허월이 몇 번이나 양보하는 것을 보고 화가 잔뜩 났던 터이므로 강물에 투신하는 행위의 창피함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막상 강물에 빠질 때야 죽는 것이 결코 떳떳한 짓이 아니라고 절감하고 크게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강에서 끌려나와 정신을 차린 다음 바로 코 앞에서 원수의 얼굴을 보았을 때도 분기충 천하기만 했지 허월에게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 사부의 말을 듣고 보니 허월이 스스로 몸을 던져 자기를 구했는지라 그의 너그러운 아량에 크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허월의 얼굴엔 아직도 핏자국이 마르지 않고 있었 다. 그녀는 점차 허월에 대한 적대감이 사그러들며 오히려 미안하고 측은해졌다. 그에게 사과를 하라는 사부의 명을 어길 수 없어서 겸연쩍은 얼굴로 앞으로 나서는데, 눈치가 빠른 허월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불초는 애초 동생을 위해 원한을 갚는다는 것이 그만 자당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었소이다. 오 늘 그 같은 큰일에 대해 해명이 되었고, 소저께서 커다란 아량을 베풀어 주시니 이 허모로서는 그저 감격할 뿐인데, 어찌 소저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여영고는 장성한 후 한 번도 남자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이제 허월이 점잖고 우아하며 여유있는 태도로 말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허월에 대한 적대감이 완 전히 누그러지는 것이었다. 그녀 역시 두어 마디 겸손의 말을 하려고 했으나 부끄러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두 번 절을 하 고 얼굴을 붉히며 급히 사부의 곁으로 가서 섰다. 허월은 여러 사람들에게 자기 집으로 함께 가서 옷도 갈아 입고 요기도 하자고 청했다. 주매가 말했다. "자네는 먼저 도균과 함께 들어가게. 우리는 즉시 뒤따라 가겠네." 도균과 허월 두 사람은 감히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떴다. 거리에 들어섰을 때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물었다. "허교사, 지금 강변에서 오는 길이오? 어찌하여 물에 젖었소. 조금 전 그쪽에 커다란 안개가 마 치 가마솥의 김처럼 피어오릅디다. 혹시 안개 때문에 실족하여 강물에 빠진 것이 아니오?" 도균과 허월 두 사람은 그제서야 강변에서 한나절이나 싸웠지만 구경을 하려고 찾아드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자욱한 안개가 길을 차단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몇 마디 말 로 얼버무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막 집으로 들어가 대청으로 올라서는데 갑자기 눈앞이 환히 밝아지면서 주매, 원원대 사, 소인, 여영고 네 사람이 허공에서 툭 떨어져 내렸다. 허월의 조강지처는 이미 작고한 지 사 년이나 되었으나 남긴 옷가지들이 무척 많았다. 슬하에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이들은 모두 친척집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고, 집안일은 나 이가 많은 고모가 돌보고 있었다. 허월은 즉시 웃사람들에게 자리를 권하는 한편 사람을 시켜 차를 날라오고 술자리를 준비하라고 시켰다. 그리고 고모를 불러서 여영고를 데리고 가 젖은 옷을 갈아 입히도록 부탁한 후 자기 역 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나와서 손님들을 접대했다. 대사는 이미 음식을 끊은 지 오래 되었고 소인은 소채만 먹었으나, 주매와 도균은 아직 비린 것 이든 술이든 꺼려하지 않았고, 주량이 무척 센 편이어서 따르는 술잔마다 거침없이 비워댔다. 잠시 후 여영고가 옷을 갈아 입고 나왔다. 그녀는 아직 비린 음식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노루를 잡아 고기를 구워 먹곤 했다. 대사는 그녀를 자리에 앉게 한 다음 소인을 따라 열심히 검술을 익히라고 당부했다. 그리고는 새해가 되기 전에 성도에서 만나자고 주매와 약속을 한 다음 마룻바닥을 차며 검광을 타고 허공 을 가로지르며 떠나갔다. 여영고는 아직도 청예검이 주매의 손에 있는지, 스승이 노여움 끝에 거두어 갔는지 알 수가 없 었다. 스승이 떠나는 것을 보고도 감히 여쭤볼 수도 없고 해서 속으로 애만 태우고 있었다. 소인은 여영고가 좌불안석인 것을 보자 바로 두 자루의 보검 때문임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말했 다. "사매의 두 자루 보검은 모두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물건이야. 거기다 원원사숙의 진전과 사매 의 천부적인 자질이 있으니 두 자루 검은 더욱 진가를 발휘하게 될 거야. 조금 전 사숙께선 그 칼을 내가 대신 보관하되 아침저녁으로 사매와 더불어 열심히 무공을 익히라고 하셨어. 그러니 이제부터 나의 을씨년스런 암자는 적막감이 감돌지 않게 되었지 뭐야." 여영고는 그 말을 듣자 두 자루의 검을 스승이 거두어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제서야 마 음을 놓았다. 이때 도균과 허월 두 사람은 주매를 상대로 술을 마시고 있었는 데다 주매의 기분을 살피고 맞 추느라고 다른 쓸데없는 말을 꺼낼 여가가 없었다. 소인은 마음 속으로 느끼는 바가 있어서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으나 주매가 술을 매우 좋아 하고 또 이 노인의 성질이 괴팍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감히 불쑥 끼어들어 그의 흥을 깨지 못 했다. 도균은 싸움이 벌어졌을 때 갑자기 소인이 그녀의 어릴 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여간 의문 을 느끼지 않았던 터였으므로 몇 번이나 곡절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역시 흥이 나서 연 신 마셔대는 주매의 술잔에 술을 따르느라고 입을 열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모두들 의문을 가슴 에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술자리는 미시에서 시작하여 유시 초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인은 본래 비린 것과 술을 먹지 않았고, 여영고 역시 양이 크지 않았다. 도균과 허월 두 사람 역시 술과 밥을 배불리 먹었지 만 모두 후배이기 때문에 그저 공손히 주매를 시중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불을 밝혔을 때야 주매는 거나하게 취해서 눈빛이 몽롱한 얼굴로 소인에게 말을 붙였다. "너희 남매는 만나보지 못한 지 어언 이십 년이나 되었지 않느냐? 이제 곧 헤어지게 될 텐데 어 째서 서로 피붙이임을 확인하지 않느냐?" 소인은 그 말을 듣자 몸을 일으키고 대답했다. "제자는 일찍이 묻고 싶었으나 사백께서 한창 술을 드시고 계신 터라 감히 흥취를 깨뜨릴 수 없 어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주매는 껄껄 웃었다. "너는 또 쓸데없는 예의에 구속을 받는구나! 나는 이호자(李葫子)와는 다르다. 쓸데없는 규칙을 세워 놓는 걸 가장 싫어하느니라. 골육끼리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할 말 이 있으먼 실컷 나누어라." 소인은 그 말을 듣자 도균에게 말했다. "도사제, 실례지만 존대인(尊大人)께서는 이름이 외자이신 주(鑄) 자가 아니오?" 도균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대답을 했다. "선친께서는 외자로 주자를 쓰셨습니다. 사저가 어떻게 아시는지요?" 소인은 그 말을 듣자 그만 눈물을 흘렸다. "그럭저럭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모부님께서 세상을 떠나셨구나. 고모이신 왕태 부인(王太夫人)께서는?" "선친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님도 잇따라 이듬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소제는 어릴 적부터 저의 집 안에 별다른 친척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저께선 어째서 그같이 부르시는지 자세한 말씀을 듣고 싶군요." 소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용관아, 너는 공문(空門)에 몸을 던진 이 외사촌 누나를 몰라 보겠니? 너는 십구 년 전 눈오는 밤, 내가 고모댁에서 너와 한창 신이 나서 놀고 있을 때, 집에 와서 설을 쇠라고 갑자기 계모가 사람을 보내서 나를 끌고간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나 보구나. 그때 너는 나를 붙잡고 안 보내려고 오랫동안 투정을 부렸기 때문에 난 너에게 이튿날 아침 일찍 틀림없이 오겠다고 한 후 헤어졌단 다. 그때 이후로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 나 진소인(秦素因)을 모르겠니?" 도균은 그 말을 듣고서야 어릴 때 일이 생각나 목멘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가 바로 내 외사촌 누나였군요? 어릴 때 이름은 옥니(玉尼)라고 했지요. 외삼촌께서는 어떻 게 되셨습니까?" 소인은 말했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뜨신 후 선친께서는 계모를 정실로 삼았지 뭐냐. 계모는 나를 무척 학대했 지. 그래서 고모부님, 고모님이 나를 애처롭고 어여삐 보셨으므로 너희 집으로 옮겨져 양육되었던 거야. 그때 나의 나이 열두 살이었고 너는 겨우 다섯 살이 될 무렵이었지." 소인의 아버지는 본래 청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싶지 않았으나, 후처가 아침저녁으로 조르고 꼬 드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소인과 도균이 헤어지던 그 날은 그녀의 아버지가 임지로 떠나는 날이었는데, 그녀의 아버지도 후처가 딸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는 딸을 고모부 집에서 크도록 내버려 두려고 했다. 그러나 후처가 고집을 피우며 마다할 뿐 아니라 혹시 도균의 아버지가 대의를 들어 꾸짖을까 봐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구실을 붙여 딸을 데리고 곧장 부임지로 향했던 것이다. 백성들은 이민족의 폭력과 위압에 굴복하여 억지로 그들의 말에 복종하고 있었으나 충절과 의리 를 내세우는 호협지사(豪俠之士)들은 대부분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고, 명나라를 되 찾으려고 했다. 소인의 아버지는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알면서도 동포들이 만주 오랑캐 관리들의 가혹한 시달림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나서서 일을 원만히 처리해 주기도 했 다. 소인의 아버지는 위인됨이 중후하긴 했으나 집안에 하인 한 사람을 잘못 받아들였다. 그 사람은 바로 도균의 집에 있는 소인을 데리러 왔던 석승(石升)이란 자였다. 그는 주인을 따라 임지에 도달하자 양심이라곤 전혀 없는 현지 벼슬아치들과 결탁하고 거기에 소인의 계모까지 끌어들여 함께 주인을 속여 가면서 못된 짓을 자행하는 바람에 청주에서 원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그곳의 협승 초관(超觀)은 본래 명나라 종실로서 무공이 매우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밤중에 관아의 내실로 잠입해 탐관오리로 지목된 소인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소인의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그 연유를 물었다. 그제서야 집안 사람과 아래 벼 슬아치들이 잘못을 저질렀는 데도 자기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관은 그가 직접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살펴 헤아리지 못한 죄를 지었으니 역시 너그럽 게 용서할 수 없다 하여 그의 한쪽 귀를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고약한 하인과 벼슬아치들은 모조리 수급을 잘라서 동헌의 처마 끝에 걸었다. 소인의 아버지는 일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알았으나 오랫동안 시달림을 받았던 터라 아내를 감 히 원망하지도 못하고, 급히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되돌아 오려고만 하였다. 그러나 울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소인의 계모는 아들딸도 없었고, 게다가 남편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매장한 다음 모든 옷가지와 물건들을 팔아서 은자로 바꾸었다. 그리고 소인을 데리고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그의 친정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중도에서 다시 강도들을 만나 소인의 계모는 죽음을 당하였고, 소인은 그때 마침 신니 우담이 지나치다가 그 광경을 보고 그 강도들을 죽이고 산속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소인은 도를 닦기에 이르렀고, 십 년 동안 면벽을 한 결과 신검합일의 경지에까지 도달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담의 명을 받고 산에서 내려와 벽균암(碧筠庵)에서 거처하게 되었는데, 이 년 전 또다른 명을 받고 벽균암을 취도인에게 빌려주어 거주하도록 하는 한편, 훗날 여러 사 백부와 사숙, 사자매들이 모이는 장소로 삼도록 했다. 그래서 소인은 한양 백룡암에 은거하며 도 를 닦았다. 소인은 도균의 얼굴이 매우 눈에 익을 뿐 아니라 성이 도씨라는 말을 듣고 긴가민가 하는 차에 다시 그의 귀 뒤에 있는 붉은 사마귀를 발견하자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어릴 때 이름을 부른 것이 었다. 그녀는 그가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 더욱 심증을 굳혔다. 그래서 앞으로 나가 원인과 결과를 자세히 이야기하려고 했을 때, 왜수 주매가 법신(法身)을 드 러냈고 그 다음에는 여영고를 구하느라고 법석을 치르는 바람에 말할 기회가 없었다. "주사백은 선배 검선 가운데서도 신룡(神龍)과 같은 분이시고, 또한 숭산이로 가운데 한 분으로 서 가볍게 제자를 거두어들이지 않으신다. 아우가 어떻게 주사백부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커다란 행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구나." 도균은 그 말을 듣자 서글픈 감회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 역시 어려서 소인과 헤어진 이후부터 주매를 사부로 모시게 되기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허월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유명한 검선의 제자인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매우 부러워했으며, 무심결에 그와 같은 신색을 얼굴에 드러냈다. 주매는 허월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도 조만간 우리 검협의 대열에 끼게 될 사람인데 왜 그리 서두르는가? 장래 아미에서 검술 을 겨룰 때 그대와 여영고는 한 쌍의 주요 인물이 될 거야. 자네가 만약 뇌(瀨) 화상의 제자가 되 지 않는다면 백골전을 그 누가 깨뜨리겠는가? 내가 자네를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은 바로 자네에 게 좋은 인연을 맺어주려고 함이거늘, 자네는 어째서 마음 속으로 개운찮게 여기는가?" 허월은 주매의 말을 듣고도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장래 자기 역시 검협의 대열에 끼게 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매가 말하는 협승 질범의 검술이 어떠한지 잘 몰라 몸 을 일으키며 물었다. "노선배님께서 어여삐 여기시고 사부님을 모시는 길을 지시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런 데 삼유동에 은거하고 계신 저의 사부님은 어느 파의 검선이시며, 저와 같은 용렬한 인재를 과연 제자로 받아들여 주실까요?" 주매는 말했다. "자네가 말하는 뇌화상? 그의 재능은 대단하지. 특히 전문적으로 마교들을 항복시키는 데 뛰어 난 재능을 갖추고 있다네. 내가 자네를 보내는데 그가 어찌 거두어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하겠는 가? 하지만 그의 성질은 나보다 더 괴팍하니 자네는 조심해야 될 게야. 만약 그때 가서 자네가 참지 못하고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자네는 한평생 그만한 스승을 만날 수 없게 될 것일세." 허월은 재빨리 허리를 구부리고,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대답을 했다. 주매는 다시 소인에게 말했다. "자운사를 깨뜨리는 데는 너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너는 영고와 더 불어 암자로 돌아가거라. 나는 도균을 데리고 청성산으로 가겠다. 우리 이제 헤어지도록 하자." 허월은 작별이 아쉬웠지만 주매의 성격이 유별나다는 것을 알고 더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혼자만 내년 봄 삼유동으로 가서 스승에게 몸을 맡기게 될 때를 기다리느라고 잠시 떠나지 않 았을 뿐, 소인과 여영고는 백룡암으로 돌아갔고, 주매는 도균을 데리고 검광을 이용해 청성산 금 편애(金鞭崖)로 떠났다. 천 년 주령초 金鞭崖陶鈞學劍 碧筠庵朱梅赴約 한편 왜수 주매의 큰제자 기등은 스승이 산을 내려간 후 김광정 등이 다시 소란을 피울까 봐 함 부로 문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은 스승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싶어 아침 일찍 일어나 금 편애에 서서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두 개의 까만 점이 금편애 쪽으 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주매는 도균의 손을 잡고 금편애 앞에 내려섰던 것이다. 기등은 재빨리 앞으로 나가 절을 했다. 주매는 도균더러 사형께 인사를 드리라 하고는 함께 관문으로 들어섰다. 주매는 기등더러 타좌 법과 기를 연마하는 구결을 밤낮으로 도균에게 전수하라고 분부했다. 그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한 자루의 장검을 꺼내 도균에게 주면서 검결에 따라 연습을 하도록 분부했다. 도균은 사 배 인사를 올린 후 보검을 받아들었다. 칼의 길이는 세 자 여섯 치 정도였다. 칼자루 에는 칠 개의 금빛 별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 금서(金犀)라는 두 자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 었다. 칼자루를 쥐고 살짝 힘주어 당기자 칼은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싸늘한 광 채가 번쩍이는데 사람의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할 정도로 날카롭다. 정말 훌륭한 칼이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날부터 그는 매일 기등을 따라 아침 저녁으로 무공을 익혔다. 주매는 거기서 며칠을 머문 후 기등을 불러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몇 마디 당부의 말을 하고 산을 내려가 성도로 향했다. 이때 성도 벽균암에는 취도인이 와 있었다. 그는 추운수와 헤어질 때 태을구(太乙鉤)를 얻어 사 용했기 때문에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았으며 태을구가 본래의 자기 보검보다도 더욱더 신령하다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시장에 나가 술을 사 마시는 일 외에는 암자에서 송, 학 두 동자에게 검술을 전 수했다. 문득 하늘에서 날아드는 푸른 광채가 눈에 띄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바로 추운수가 형 산으로 들어가 천년 주령초(朱靈草)로 씻고 다듬어 주겠다던 자기 보검이었다. 그는 크게 기뻐서 손을 쳐들었다. 그 보검은 빨려오듯 그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정 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며 여전히 예전과 같이 신령해져 있었다. 그는 추운수의 두터운 의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칼은 내 스스로 벼려서 갈고 닦아 만든 신물이지만 삼선이로(三仙二老)의 칼처럼 완전한 오 행지기에 다섯 가지 금속의 정화를 캐어다가 단련시켜 만든 것은 아니다. 형산은 이곳에서 수천 리가 되는데, 어떻게 주인을 찾아 들어옴에 조금의 착오도 없을까?' 정말 놀랍고 의아한 일이라고 감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파공성이 들렸다. 얼핏 쳐다보니 주순이 검광을 조종하며 허공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주순은 취도인을 발견하자 앞으로 나와 절을 했다. 취도인은 말했다. "주도우(周道友), 그렇게 겸손해 할 것 없소. 우리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도우의 공행 이 이토록 정진되었구려. 백노선 배에게는 출신입화(出神入化)의 능력이 있다고 하겠으나 도우의 근기와 천부는 그에 못지 않소이다." 주순은 허리를 구부리고 대답했다. "사숙께서는 과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는 가사에게 거두어 지긴 했으나 나이가 많아 혹시 입문하지 못하게 될까 봐 크게 두려워했답니다. 그날 가사를 따라 형산으로 돌아갔을 때 가사께 선 비결을 가르쳐 주셨으며, 또 저에게 몇 알의 단약(丹藥)을 내리시더군요. 그리고 칠 일째 되는 날 가사께서는 저에게 뒷산 최고봉인 홍사애(紅砂崖) 아래로 가서 천 년 묵은 주령초(朱靈草)를 캐어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홍사애 밑으로 달려가는데 갑자기 붉은 안개가 사방에서 피 어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만 저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앞이 가물가물해져서 쓰러졌지요. 그런데 전에 제가 자운사로 놀러갔을 때, 웬 작달막한 노선배님의 흙덩이에 얻어맞고는 깨닫는 바가 있 어 자운사에 들어가지 않고 다급히 그 노선배님의 뒤를 쫓았으나 뒤따라 잡지는 못했습니다. 그 런데 그때 그 노선배님은 저에게 종이봉지를 남겨 놓았었지요. 그 안에는 두 개의 알약이 들어 있었는데 봉지에는 '이후 사용될 때가 있으니 지니고 있거라. 백독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는 글 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이미 주순의 두 다리에는 마비가 왔다. 그런데 다행히 두 손은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그는 재빨리 그 두 알의 단약을 꺼내 씹어 삼켰다. 그러자 즉시 정신이 상쾌하게 맑아졌다. 그러나 붉 은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게 깔려 있었으므로 그는 홍사애가 결코 좋은 장소가 아님을 알아차렸 다. 더군다나 형산의 정상은 일 년 내내 하얀 구름으로 꽉 덮혀 있다가 겨울에만 두 번 구름이 흩어 지는데, 바로 그때가 구름이 흩어지는 시기였다. 따라서 만약 약초를 찾지 못하고 내려가면 가사 의 명을 어기게 되는 결과가 되므로 아무래도 벌을 받게 될 것 같아서 그는 허겁지겁 천 년 주령 초를 찾아 헤매었다. 그때 홍사애 옆의 동굴 안에서 어린애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으므로, 주순은 가까이 다가가보 았다. 그곳은 산동굴인데 높이와 넓이가 약 이 장 정도 실히 되어 보였다. 별안간 동굴 입구에 커다란 전갈이 나타났다. 약 칠팔 자 정도의 길이에 입으로 붉은 안개를 뿜 어내고, 우는 소리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와 흡사했다. 다행히 전갈은 이제 겨우 탈피한 듯 동작이 지극히 둔하고 어릿어릿했다. 게다가 주순은 영단을 먹었기 때문에 독안개가 침범하지 못했다. 그는 재빨리 보검을 휘둘러 전갈을 몇 토막으로 잘라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붉은 빛이 동굴에서 뻗쳐나왔다. 주순이 깜짝 놀라 뛰어 들어가 보니 한 그루의 신령스런 식물이 줄기를 뻗고 있었는데, 그게 바 로 천 년 주령초였다. 주령초에는 귤만한 크기의 열매가 일곱 개 열려 있었는데 새빨간 것이 정 말 탐스러워 보였다. 주순은 주령초를 뿌리채 뽑아들고 나와 지체없이 아래로 내달았다. 중도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 니 구름은 어느 새 온산을 뒤덮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길을 찾아 내려올 수 없을 뻔했 던 것이다. 추운수는 제자가 선초(仙草)를 구해 가지고 돌아오자 가상 하다고 격려해 주었다. 주순이 전갈의 이야기를 하자 추운수는 말했다. "애초 그 같은 괴물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네. 다행히 그 괴물이 아직도 형태를 제대로 이룩하지 못했고, 또 영단의 효험이 있어서 너를 구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 뻔했어. 그 전갈의 몸 가까이 가기만 해도 사람의 몸뚱이는 피고름으로 변하고 말거든." 주령초는 천삼백 년 만에 한 번씩 열매를 맺으며, 눈에 띄는 기간은 고작 칠 일이고, 칠 일이 지 나면 빨려들듯 땅 속으로 사라지는 진기한 영초였다. 그 열매를 먹으면 장수할 뿐 아니라 탈태환 골하며 백여 년 간 고된 공행을 쌓는 것과 맞먹는 효력을 얻을 수 있었다. 추운수는 그 선과(仙果) 일곱 개를 모조리 주순에게 내렸다. 주순은 사양하다가 끝내 사부가 뜻 을 굽히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선과를 받아먹었다. 먹고 나자 온몸이 갑자기 나른해지면서 잇따라 삼 일 간 설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난 후 어지간 히 설사가 멎자 온 몸에 엄청난 힘이 솟고 몸이 아주 가벼워서 옛날과는 딴판인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호랑이와 표범을 때려 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날아가는 새를 손으로 잡을 수도 있었다. 주순은 스승이 베푼 깊은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추운수는 주순에게 많은 검법을 전수해 주었고, 한 자루의 보검도 만들어 주었다. 주순은 검결에 따라 사십구 일 동안 부지런히 연습한 결과 그 칼을 조종하여 몸을 날릴 수 있게 되었다. 자운사 앞에서 구해 준 장본인이 누구일까 하는 의문을 사부에게 털어놓은 결과 그가 바로 스승 의 절친한 친구인 왜수 주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사부님은 오늘 아침 저더러, 이곳으로 달려가 말씀을 전하라 하시면서 가는 길에 사숙 의 보검도 갖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도 가까이 이르자 보검이 마치 자기 갈 곳을 제가 아는 듯, 한눈 파는 사이 손에서 쏙 빠져나갔지 뭡니까. 저는 깜짝 놀라 그 뒤를 쫓다가 보검이 이곳으로 날아왔고, 이미 사숙께서 거두신 줄 알고는 겨우 마음을 놓았습니다. 가사께선 이(李)사 숙께서 각파의 검선들을 초청하고 계시므로 모두들 며칠 사이 잇따라 찾아오실 것이라고 말씀하 시면서 사숙께서 대신 접대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 가사께선 아직 다른 볼일이 있으나 명년 정 월 초닷새까지는 반드시 도착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정, 사가 정면충돌하는 국면이고, 쌍 방이 초청한 뛰어난 사람들과 검객들의 수가 적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이번 싸움에서는 반드시 그들의 의기를 꺾어놔야 하며 동시에 그들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자운사를 일거에 소멸하여 그들 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숙께서 그믐날 전까지 자운사로 잠입해 들 어가 동정을 엿보시랍니다. 그런데 그쪽에는 뛰어난 사람이 무척 많으니, 만약 그들에게 발각되었 을 때는 검술을 겨룰 날짜를 통지하러 왔다고 할 뿐 가볍게 손을 쓰지 않도록 하시라고 분부하였 습니다. 저는 그저 명을 받고 전달하는 바이니, 사숙께선 아무쪼록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취도인은 그 말을 들자 즉시 주순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주령초를 캐어온 수고에 대해 칭찬해 주 었다 추운수는 아미파 검선은 아니지만 아미파의 개파조사와는 친구로 사귄 처지였다. 장미진인이 비 승(飛昇)하게 되었을 때 내공 수련에 여념이 없던 큰제자 품명진인(稟明眞人)에게 근기가 가장 두 터운 사제 제수명에게 도통을 양보해 주기 바란다는 권고를 했다. 그리고 나서 그 자신은 추운수, 고행두타와 함께 동해로 나가 은거하면서 함께 상승의 현종(玄 宗)을 연구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취도인은 제수명의 사제였다. 그는 추운수가 사제와 절친한 사이지만 역시 상대방은 득도한 지 오래 되었고, 또한 장미진인과 친구로 지내는 터라 평소 언제나 후배로 자처했다. 주순이 그를 사 숙이라고 부르는 데 대해 그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순은 그 칭호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취도인은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 다. 사흘째 되는 날, 먼저 후배검선 가운데 아미파의 건곤정기묘일진인의 딸인 제영운이 그의 동생 금선과, 염선 이원화의 제자 백협 손남을 데리고 묘일부인 순란인의 명을 받고 달려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염선과 동문 사형제 되는 풍화도인(風火道人) 오원지(吳元智)가 큰제자 칠 성수(七星手) 시림(施林)을 데리고 도착했다. 시림과 주순은 본래 한 번 만나본 인연이 있었다. 주순은 즉시 지난날 시림이 자기를 안내해 준 은혜에 대해 사의를 표했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 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튿날부터 나부산 향설동의 원원대사, 무산협(巫山俠) 백죽간(白竹澗) 정수암(正修庵)의 백운대 사, 협서성 태백산(太白山) 적취애(積翠崖)의 만리비홍(萬里飛虹) 동원기(瞳元岐)가 그의 제자 흑 해아(黑孩兒) 울지화(蔚遲火)를 데리고 나타났으며, 감리진인(坎離眞人) 허원통(許元通), 운남성의 앙명지(昻明池), 개천사(開天寺)의 합합승(哈哈僧)이라 불리우는 원각선사(元覺禪師) 및 그의 제자 철사미(鐵沙彌) 오수(悟修), 아미산 비뢰령(飛雷嶺)의 염선 이원화 등이 차례로 도착했다. 취도인과 주순은 성의를 다해 그들을 접대했으며 송, 학 두 동자는 바쁘게 돌아가 조금도 쉴 틈 이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취도인은 여러 검협들과 운방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부칠선(羅浮七仙) 가운데 한 사람인 만리비홍 동원기가 입을 열었다. "동문의 여러 도우들께서는 모두 명산에 은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서로 수천 리나 떨어져 있습 니다. 매 삼 년 마다 아미산으로 달려와 모이는 외에는 만나보기가 힘들지요. 이번에는 비단 동문 사제들과 모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본문에 계시지 않은 많은 선배 도우들께서도 참가해 주셨습니 다. 동시에 소형제들 역시 서로 좀 더 알게 되어 장래 좋은 협조를 얻게 되었으니 정말 커다란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을 깨뜨려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숭산이로와 장교사 형, 그리고 찬하대사 같은 분은 어째서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것일까요?" 염선 이원화가 대답했다. "사형께서는 잘 모르시는군. 이번 일에서는 추운수 도우께서 장교사형의 부탁으로 모든 일을 이 끌게 되어 있습니다. 장교사형은 최후로 아미에서 검술을 겨루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만반준비로 지금 동해에서 보물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 이곳으로 올 여가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번 자운사에 서 초청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은 한도가 있기 때문에 이로께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이므로, 장교사형께서 이곳에 오실지 안 오실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찬하대사는 바로 근 처의 허비랑을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에 허비랑이 타나나지 않는다면 대사깨서도 아마 오지 않으실 것 입니다. 그녀는 단지 자기가 자랑하는 여제자 주매를 특별히 보내어 참가시키겠다고 했는데, 주매는 반드시 수일 내 도착할 것입니다." 취도인이 입을 열었다. "찬하대사 여제자가 어찌해서 왜수 주도인과 동성동명이지요? 문호가 다르지만 역시 아랫사람이 웃사람의 이름을 얻어 가진다는 것은 웃사람의 위엄을 거슬리는 것이고 여간 거북한 노릇이 아니 오. 찬하대사께선 설마하니 이 점을 생각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을 바꾸지 않은 것일까요?" 염선 이원화는 그 말을 듣더니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취도우, 그대는 본문에서 그래도 도행이 심후하고 견문이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어째서 그대마저도 주노선배와 찬하대사의 여제자 주매가 동명동성이 된 한 토막의 인과를 모르 고 계시오?" 취도인은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여러 검협들 역시 염선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염선은 말했다. "처음엔 나도 몰랐소이다. 몇 달 전 추운수의 명령을 받고 찬하대사를 모시러 갔을 때 그분은 제자 주매를 이번 일에 참가시키며 동시에 여러 선배 검선들 및 동문형제들과 대면을 가지게 함 으로써 피차 서로 도와주도록 하겠다는 말씀이 계셨소이다. 나는 그분의 제자가 주노선배와는 동 명이기 때문에 어째서 이름을 바꾸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대사께서는 그 인과관계를 이 야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대사의 여제자와 주매 노선배와의 관계는 무척 깊으며, 그녀가 액겁에 떨어지기를 세 번이나 거듭한 끝에 대사의 문하제자로 들어가게 된 것도 주노선배님의 부 탁을 받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모두 염선 이원화의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한 줄기 미풍이 일더니 어느덧 왜수 주매가 사람들 앞에 우뚝 서서 염선을 손가락질했 다. "이런 털북숭이 같으니! 그대는 아직도 철이 덜 든 모양이군! 등 뒤에서 남의 사사로운 비밀을 발설하다니. 그대는 신이 나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 위기가 사면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여러 검선들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재빨리 어떻게 된 노릇 인가를 물었다. 주매가 말했다. "서두를 것 없네. 잠시 후면 자연히 달려와 보고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외다. 내가 쓸데없이 입술을 놀리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처마 앞에서 무엇인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휘장이 들려지며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오는데 얼굴이 샛노랬다. 그 사람은 여러 검선들을 보더니 땅바닥에 엎드렸다. 왜수 주매가 재빨리 몸에서 한 알의 백초탈명신단(白草奪命神丹)을 꺼내서 그 사람의 입에 넣어 주었다. 취도인과 염선이 바라보니 나타난 사람은 바로 민산(岷山) 장송령(蔣松嶺)에 있는 조천관(朝天 觀) 수경도인(水鏡道人)의 제자인 신안(神眼) 구림(邱林)이었다. 어떻게 이처럼 낭패한 꼴을 당했 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급히 그를 부축해서 침대 위로 눕히고 한 잔의 따뜻한 차를 먹였다. 차를 반 잔쯤 마시 고 나자 구림의 뱃속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샛노란 얼굴이 점차 하얗게 되다가 붉어지더니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곧이어 그는 눈을 뜨고 여러 검협들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벌 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때 각파의 검협 가운데 젊은 층들은 주순, 손남 등과 함께 옆의 대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그러다가 왜수 주매와 구림이 차례로 도달했다는 말을 듣고 방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구림은 먼저 주매에게 단약을 내린 은혜에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자운사의 상황과 그 가 위험에서 벗어난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군들 모여들다 燭影忽搖紅 漢殿陰風來鬼祖 劍光同閃電 昏林黑月會妖人 원래 취도인과 장노사(張老四) 부녀가 주운종을 보호하여 구림의 두부집을 출발했을 때, 자운사 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주운종의 너무나 기막힌 도주에 발을 동동 굴렀다. 절 주위의 민가나 가게는 거의가 절과 한패거리였다. 그런 그들이 낯선 사람들을 보고 절에다 통지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유독 구림만은 큰길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고, 또 절과는 비교적 거리가 멀어서 그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운사에서는 그를 의심하고 사람을 보내 매번 조사를 해왔으나 그때마다 아무런 단서도 알아낼 수 없자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주경운(周輕雲)이 밤중에 자운사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우고, 모태(毛太)의 왼팔이 끊어지고, 유덕 (兪德)이 상처를 입고 하자, 법원은 아미파의 무서움을 주지시켰다. 그리고는 지통(知通)에게 문하의 제자들을 잘 다스려 좀처럼 절에서 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 한 다음 자신은 친히 나가서 능력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아미파와 승부를 내려고 했던 것이다. 법원이 떠나간 후 유덕의 상처는 곧 치유되었고, 상처가 치유되자 그는 서장으로 돌아가겠다고 작별인사를 했다. 가서 스승 독룡존자(毒龍尊者)를 모셔와서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었다. 지통은 그가 떠나면 인원이 적어져 세력이 약해질까 봐 서장으로 갈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한 통의 편지를 먼저 쓰라고 했다. 그래서 유덕은 아미파 문하에게 괜히 우롱당하고 몸에 중상을 입어 스스로 돌아갈 수 없으니 스 승께서 왕림하여 원수를 갚아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유덕은 본래 줏대가 없는 인간이라 지통의 말에 따라 그런 간절한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이다. 혜 능(慧能)에게 편지를 주어 보낸 후 그는 지통과 매일같이 문을 잠그고 여자와의 황음을 즐겼다. 어느덧 시일이 물처럼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설이 팔구 일밖에 남지 않았다. 편지를 가지고 떠 난 혜능에게서 소식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금신나한 법원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초청을 한 사람들 역시 하나도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지통은 속으로 매우 초조해졌다. 마침내 스물사흗날 저녁, 지통은 유덕과 더불어 선방에서 대책을 의논했다. 그때 홀연 한 줄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앞에 두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유덕은 화살에 놀란 새꼴이 된지라 다짜고짜 검을 날리려고 했다. 지통은 나타난 사람이 바로 무이산(巫彛山) 비뢰동(飛雷洞)의 칠수야차(七手夜叉) 용비(龍飛)와 그의 제자 소령후(小靈侯) 유종잠(柳宗潛)인 것을 알아보고 재빨리 유덕을 말렸다. 그리고 쌍방을 소개시켜 주었다. 용비는 바로 구화산 귀원사의 사자천왕(獅者天王) 용화(龍火)의 형이었고, 지통과는 사형제지간 이었다. 그의 사조며 오대파 교조인 태을혼원조사(太乙混元祖師)가 죽은 후 여산 신마동의 백골신군 휘 하로 들어가 스물네 자루의 구자모음혼검(九子母陰魂劍)을 연성하고 많은 술법을 터득한 다음 석 산에서 동굴로 돌아오니, 소령후 유종잠 이지통이 자기더러 산을 내려와 도와주십사 하는 청을 했다는 것과 아미파와 적대관계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용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해서 말했다. "나는 아미파와 불공대천의 원한이 있다. 과거 태을혼원조사께서는 바로 그들의 암수에 돌아가 신 것이다. 이제 그들이 오대파에 우두머리가 없는 것을 알고 모조리 도륙을 하려고 하는구나. 며 칠 전 나의 사제 나효가 구화산으로 가서 약을 캐려다가 제수명의 아들에게 한 팔을 잘리게 되었 으니 원한은 바다와 같이 깊다. 쇠뿔은 단숨에 빼랬다고, 우리는 곧바로 달려가서 너의 사백부에 게 한 팔 힘이 되어 드리자." 그리고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법보를 들고 음풍(陰風)을 조종해서 곧장 자운사로 달려온 것이다. 지통을 만난 용비는 예전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더욱 분노했다. 용비는 그날 밤 당장 아미파의 사람들을 찾아가 승부를 내겠다고 날뛰었다. 지통이 만류했다. "아미파의 사람들은 행적이 표홀(飄忽)하며 일정한 거처가 없네. 자네의 신통력이 큰 줄 모르지 않으나, 우리쪽은 아직 인원이 적어 세력이 약한 편이니 금신나한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 겠네. 초청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본 후에 다시 상의하도록 하세." 용비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눌렀다. 이날 지난 번 지통이 초청한 사람들이 도달했다. 그 사람들은 노산(勞山) 철장선(鐵掌仙) 축악 (祝顎), 태호(太湖) 동정산(洞庭山) 벽력수(霹靂手) 위지원(尉遲元), 창주 초상비 임성조(林聖祖), 운남 대죽자산(大竹子山)의 피발산예(披髮酸猊) 적은아(狄銀兒), 사천 운모산(雲母山)의 여곤륜(女 崑崙) 석옥주(石玉珠) 광서 발우봉(鉢盂峰) 보은사(報恩寺)의 망투타 등이었다. 지통은 이처럼 유능한 고수들이 속속 도달한 것을 보고 속으로 크게 기뻤다. 그래서 모두들에게 어째서 똑같은 날에 도달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피발산예 적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들에게 어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겠소? 지난 번 그대의 초청을 받고 우리들은 아 미파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했으나, 역시 옛날 아미에서 검술시합을 가졌을 때 패배한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있어야지요. 그들은 사람이 많고 세력이 커서 대항하기 쉽지 않으므로 모두 다 달리 좀더 몇 명의 협조자를 모셔와야 한다고 생각했소. 그런데 최근 여러 도우들은 차례로 만묘 선고 허비랑의 비검전서를 받았소이다. 자기에게 특별한 사유가 있어서 아무래도 달려와 돕기 힘 들다는 것이었소. 그래서 이파 검선 가운데 특별히 뛰어나고 능력이 있는 분을 초청해서 도와 달 라고 했으니, 아미파가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결코 우리를 못 당해낼 것이라고 하면서 안심하고 자운사로 돌아가되 섣달 스무 나흗날 자운사에 도달하도록 하라고 하십디다. 허비랑은 교조께서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아무런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교를 배반하 지 않았나 의심하고, 어떤 도우들은 그 편지를 받고도 별로 믿으려 하지 않았소. 그후 다시 효월 선사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전갈을 보내온 후에야 그녀의 말이 틀림없다는 것이 증명되었 기에 우리들은 그제서야 그 편지에 따라 일을 처리하기로 한 것이외다. 이 비검전서로 말하면 옛 날 교조 외에는 천하의 검선들 가운데 다만 사오 명 만이 그 같은 재간을 가지고 있었소. 그런데 뜻밖에도 허비랑은 수십 년 보지 못한 사이에 이 경지에까지 연성을 했구려. 정말 놀라운 일이외 다." 지통이 말했다. "전에 모두들 허비랑을 헐뜯고 매도했는데 그녀 입장에선 억울한 노릇이었소. 수십 년 동안 아 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오랫동안 와신상담을 한 것이지요. 나 역시 근년에야 비로 소 전말을 알게 되었소." 그는 앞서의 일을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법원이 아직도 도달하지 않은 데다 용비의 재간이 가장 뛰어나므로 그를 임시 우두머 리로 삼았다. 용비가 말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긴 했으나 적들의 소굴을 아직 모르고 있소. 만일 그들이 우리쪽의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머리를 감추고 얼굴을 내밀지 않다가 우리가 떠난 후 다시 사람 수를 믿 고 공격해 온다면 사태가 달라지지 않겠소? 그렇게 되면 큰일이오. 우리가 문을 닫고 스스로 지 키기보다는 우선 그들의 소굴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소. 그래서 그들에게 우리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도 좋지 않겠소?" 그러나 지통은 신중했다. 한동안 상의한 후 먼저 몇 사람을 보내 아미파에서 성도로 보낸 사람 들이 몇 명이고 또 어떤 사람들이며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를 알아보자고 중지를 모았다. 그런 후 효월선사와 금신나한이 돌아온 후 다시 의논하기로 했다. 의견을 모은 결과 적은아는 길을 가장 잘 알고 소령후 유종잠은 옛날에 성도를 두루 구경하고 놀았던 사람이라는 점에 착안, 두 사람에게 정탐을 책임지되 성도성 안팎을 수소문해 보도록 했 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법원이 돌아왔다. 그는 유명한 검선을 초청해 왔는데 유근선사(有根禪師), 제갈영(諸葛英), 뇌도인(瀨道人), 창랑우사(滄浪羽士) 수심일(隨心一) 등이었다. 모두 무당산의 유 명한 검선들이었다. 다들 수인사가 끝나자 법원이 용비에게 물었다. "내 아우 용화는 뇌음도우와 함께 오랫동안 구화산 귀원사에서 수련을 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 번에 그를 초청하여 도와 달라고 할 참이었는데 그곳에 갔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오히려 제수명의 딸과 한바탕 싸움만 했다네. 여러 곳으로 두 사람의 행방을 수소문해 봤지만 알아낼 수가 없더군. 자네는 그들 두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는가?" 용비는 그 말을 듣자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사숙께서는 그 못난 아우를 다시 들먹이지 마십시오. 들먹이게 된다면 오히려 우리 동문인들에 게 수치를 안겨주는 게 될 뿐입니다. 나는 이제 그를 형제라고 인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일단 그를 만나면 가볍게 용서하지도 않을 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 근육이 실룩실룩 움직이고 있었다. 크게 울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법원은 그들 두 형제가 평소부터 화목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남모르는 사연 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더 깊이 묻지 않았다. 그는 다시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추운수가 성도에 모습을 드러냈소. 게다가 아미파의 문하가 두 번이나 절 안으로 뛰어 들어와 소란을 일으켰고, 그들이 조만간 들이닥칠 것 같기에 특별히 사방으로 여러 고수들의 도움을 청 하게 된 것이외다. 이번에는 지난 번 아미에서 검술시합을 가졌을 때처럼 미리 날짜를 정한 게 아니외다. 나는 추운수 이 늙은 도적의 종적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오. 그가 우리를 찾아오게 하느니 차라리 우리가 완전히 준비를 갖춘 후 먼저 그를 찾아가 원한을 갚는 것이 어떻겠소? 그 들의 소굴은 여러 군데요. 그러나 성도에서 모일 장소로는 벽균암 한 곳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소. 애당초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첫째로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까 두려웠 고, 둘째로는 사람들이 다 모이기도 전에 유아우님이 원한을 갚고 싶은 마음에 경거망동할까 두 려웠기 때문이오. 추운수라는 이 늙은 도적은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제 우리쪽의 사람들이 다 모이다시피 했으니, 그가 오기를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찾아갈 것인지, 또는 그와 장소 를 정하고 약속을 한 후 검술을 겨룰 것인지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 싶소이다." 모두들 한동안 겸양의 말을 하다가 먼저 나선 것은 용비였다. 구자모음혼검을 믿고 혼자서라도 원한을 갚겠다고 덤볐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 두 추운수의 적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효월선사나 독룡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오거 든 다시 의논하자고 주장했다. 결국은 인원이 많고 세력이 웅후해졌으니 상대방에서 문 앞까지 찾아온다 해도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정도에서 의견이 모아졌다. 공공연히 날짜를 정해 무공을 겨루는 것이 아니니 이 기간에 완전책을 강구하려는 심산에서였다. 용비와 유덕 두 사람은 내키지 않은 듯했으나 대중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한 창 토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줄기의 불빛이 번쩍이더니 적은아가 한 사나이를 붙들고 허공 에서 날아내렸으며, 잇따라 소령후 유종잠이 들어왔다. 적은아는 여러 사람들에게 빨리 지통을 부르고 밧줄을 가져와 첩자를 묶으라고 했다. 그러다 고 개를 돌려 법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다가와 인사를 했다. 붙들려 온 사나이는 어느 새 꽁꽁 묶여졌다. 사람들은 적은아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적은아가 말했다 "유현질과 나는 여기서 나가자마자 적의 거처를 수소문해 보았지요. 만강루를 지나다 그 위로 올라가 술을 마셨답니다. 그런데 누상에서는 많은 주객들이 논쟁하고 있잖겠소. '조금 전의 그 도 인영감은 정말 이상하군! 시도 철도 없이 언제나 다 떨어진 얇은 도포만 걸치고 있단 말이야! 게 다가 주량은 또 어떤가. 열 근을 마시고도 떠날 때 커다란 호로병에 술을 가득 채워가지 않나 말 일세. 그 붉은 호로병에는 적어도 십칠팔 근 정도는 들어갈 걸. 성도의 대국주(大麴酒)는 주량이 큰 사람인 데도 한 근을 채 마시지 못하는데 그 영감은 그토록 많이 마시니, 혹시 주선(酒仙)이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이 아미에서 검술시합을 가졌을 때 우리 사형 화덕성군(火德星君) 육대호(陸大虎)를 살해한 취도인이 아닌가 생각했소. 그래서 내일 그 자 의 뒤를 따라가 소재지를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소이다. 그런데 내가 유현질과 거기서 내려와 얼 마 가지 않았을 때 누가 따라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 우리 두 사람은 모른 척하고 걸 음을 옮겼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 녀석에게 어째서 우리 뒤를 따르는가 하고 물었 소. 그랬더니 이 녀석이 딱 잡아떼면서 오히려 유현질에게 싸움을 걸지 않아요. 외모는 보잘것 없 지만 무공은 약하지 않습디다. 만약 내가 앞으로 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유현질은 하마터면 독 수를 당할 뻔했소이다. 본래는 그를 죽여 없애려고 했으나, 그들의 소굴을 모르기 때문에 특별히 잡아와 여러분들이 처리하게끔 한 것이오." 여러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새삼스런 관심으로 그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다섯 자 단 구에 얼굴이 해맑고 코가 우뚝 솟았으며 눈이 붉었다. 그리고 옷차림은 장사치 같았다. 사로잡히 기는 했어도 영기발랄한 것이 무공의 기틀이 상당히 닦인 사람이었 다. 법원이 질문을 던졌다. "자네 성명은 무엇인가? 아미파의 문하가 틀림없지? 지금 성도에는 추운수 외에 또 어떤 사람들 이 와 있나? 그들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솔직히 실토를 한다면 죽이지 않고 용서하마." 사나이는 그 말을 듣고 껄껄 소리내 웃었다. "이 사람으로 말하면 바로 아미문하 신안 구림이라는 사람이오. 성도에 있는 본파의 인원수를 묻는다면 대답해 주지. 장교이신 건곤정기묘일진인 외에도 동해삼선, 숭산 소실이로 그리고 본문 의 각파 검협들, 근 백 명이나 되는 분들이 모두 성도에 계시지만 일정한 거처는 없소. 조만간 요 사한 소굴을 쳐 없애고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할 것이오. 나는 이미 잡힌 몸이 되었으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더 말할 것 없소!" 용비와 유덕은 성격이 가장 포악했다. 구림의 말투가 오만한 것을 보고 즉시 앞으로 나가 손을 쓰려고 했다. 바로 이때였다. 사면 벽에서 짹짹! 도깨비 울음 같은 소리가 났다. 일진의 바람이 이는 곳에 촛 불이 흔들리면서 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여러 사람들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고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한 수가 없었다. 모두들 구림을 죽이는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각기 검광과 법보를 꺼내 들고 동정을 살 폈다. 갑자기 땅바닥이 움푹 꺼져 구덩이가 생겨나더니 그 구덩이 안에서 함지박만한 사람의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잡초더미처럼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새파란 두 눈은 사방을 마구 희번덕거렸다. 사람들이 칼을 날리려 했을 때 법원과 유덕이 재빨리 막았다. 이윽고 그의 전신이 모두 드러났다. 그처럼 큰 머리통과는 달리 체구는 비쩍 마르고 키도 작고 가냘펐다. 몸에는 녹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키는 세 자도 되지 않았고 얼굴은 흉칙하기 이를 데 없었 다. 만약 법원과 유덕이 먼저 손짓을 해 말리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이같이 괴상한 모양만 보고도 모 두 웃음을 터뜨렸으리라. 법원은 그 사람이 구덩이 아래서 모습을 드러내자 허리를 굽히고 합장을 했다. "노조(老祖)께서 왕림하는 것을 모르고 저희들이 멀리까지 나가 영접하지 못한 점, 양해해 주시 기 바랍니다." 법원은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을 상좌로 모셨다. 그 사람은 겸손해 하지 않고 대뜸 앉으라는 자리 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깨비 울음 같은 소리는 이미 멎었고, 촛불은 아까처럼 밝은 빛을 내고 있 었다. 법원과 유덕은 다시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 괴인을 소개시켰다. "이분 노조께선 바로 백만산(百蠻山) 음풍동(陰風洞)의 녹포노조(綠袍老祖)라는 분이시오. 헤아릴 수 없는 마법(魔法)과 백만 가지나 되는 마병(魔兵)을 창조하신 분으로 바로 마교남파(魔敎南派) 의 개파조사이십니다. 옛날 서장에서 노조는 독룡존자와 법술을 겨루었는데 적지 않은 기적을 드 러냈소이다. 오늘 여기 왕림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외다. 한데 노조께선 어떤 가르침을 베풀 고자 하십니까?" 녹포노조가 대답했다. "나는 그 해 독룡존자와 사이좋게 지내기로 약속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년간 문 밖을 나서지 않았지. 며칠 전 독룡존자가 나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더군. 그 편지를 보니 그대들이 다시 아미파와 법술로 다툰다고 하지 않겠나. 그런데 자기는 한 가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나서지 못하니 나보고 그대들의 한 팔의 힘이 되어 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미 손을 썼는 가?" 그렇게 말하는 음성은 아주 가늘어서 마치 갓난아기가 말하는 것 같았다. 법원이 말했다. "저희들은 최근에야 비로소 모두 모였고, 아직은 적과 대면을 한 적이 없습니다. 노조께서 달려 와 도와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수고스럽겠지만 노조께서 저희들의 영도자가 되어 주십시오." 녹포노조는 말했다. "그거야 뭐 어려울 게 있겠나? 나는 수십 년 간 한 가지의 법보를 만들었는데, 이른바 백독금잠 고(百毒金蠶錮)라고 하지. 이들을 풀어놓기만 하면 수백만 마리의 벌떼들이 하늘과 땅을 뒤덮듯이 날아가게 되지. 아무리 뛰어난 검선이라 해도 금잠고에 한 번 물리기만 하면 한 시진 안으로 독 이 심장에 스며들어 죽는다. 아미파에 많은 사람이 있다고는 하나 내가 있는 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다만 구림만이 속으로 크게 놀라 안색이 확 변했다. 달려 가 전갈을 할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기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녹포노조는 그 한숨소리를 듣고 땅바닥에 눕혀져 있는 구림을 발견했다. "이 사람은 누구냐?" 법원은 구림이 미행하다가 사로잡힌 아미파로 막 심문을 하려던 참인데 노조께서 왕림하시는 바 람에 아직 처리를 못했다는 사실을 일일이 보고했다. 그리고 노조에게 어떤 고견이 있느냐고 물 었다. 녹포노조는 말했다. "오랫동안 사람의 염통을 먹지 못했구나. 나에게 한 그릇 인심탕(人心湯)을 먹여다오." 법원은 그 말을 듣고 지통에게 명해서 냉수를 담은 대야를 가져와 구림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도록 했다. 구림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통은 명령을 받자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친히 손을 썼다. 그는 냉수를 담은 대야를 구림의 옆 에 놓고 한 자루의 우이첨도(牛耳尖刀)를 꺼냈다. 그리고 막 구림의 옆구리 밑을 찌르려고 했을 때 갑자기 앞쪽에서 눈부신 광채가 번쩍 했다. 그 한 줄기 금빛 광채는 번개같이 덮쳐오더니 그 를 휘말아 버리려고 했다. 지통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렸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두 검광과 법 보를 마구잡이로 날리고 던졌으나, 그 금빛 광채는 이미 허공으로 날아간 후였다. 용비와 유덕 등이 급히 밖으로 달려나가 살펴보니 하늘에는 별만 반짝이고 절 밖 숲 속에서 바 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아무 종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묶여 있던 구림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다만 한 무더기 잘라진 밧줄이 널려 있을 뿐 이었다. 다행히 그 정체불명의 괴한은 사로잡힌 사람을 구하는 것만 목적인 듯, 구림과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지객승 요일이 금광에 스쳐 왼쪽 귀가 반쯤 잘려나간 외에 나머지 사람은 아무도 상처를 입 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바람이 나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이같은 변고를 당하자 투지가 크게 꺾이고 말았 다. 아미파에는 정말 능력있는 고수들이 많구나 하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고, 유덕의 홍사(紅砂) 마저도 괴한의 머리칼 하나 손상시키지 못한 것을 보면 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상상할 수 있는 일이라,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던 구림은 갑자기 앞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하늘로부터 금빛 광채가 내 려와 자기를 구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자 갑자기 한 가닥 비린내가 코끝에 스치는 것을 느꼈다. 즉시 머리가 흐릿해지고 정신이 가물가물하면서 입을 열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후 금빛 광채를 조종하는 사람은 구림을 어느 곳에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구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십 칠팔 세쯤 되는 묘령의 여인에게 말했다. "야단났구나. 경운아! 빨리 가서 내 단약을 가져오너라!" 말이 끝나기 전에 여인이 바람처럼 달려가더니, 잠시후 아홉 알의 약을 가져왔다. 그 사람은 단 약을 한 그릇의 물과 함께 구림에게 먹였다. 그리고 그를 침대 위로 부축해 올리고 누워 쉬도록 했다. 이때 구림은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온몸이 시큰거리고 견딜 수 없이 아팠다. 곧장 이튿 날 아침나절까지 깊은 혼수에 빠졌고 다시 몇 번이나 단약을 먹은 이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 다. 눈을 뜬 구림은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했다. 타고난 선골로서 영기발랄하여 한눈에 공행이 상당 히 뛰어남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구림은 즉시 침대에서 내려와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사의를 표하려고 했다. 그러자 여인은 재빨리 만류했다. "사형은 정신을 차렸지만 유덕의 음혼사(陰魂砂)에 중독되어 독기가 아직 가셔지지 않았으니 움 직이면 안 돼요. 제가 가서 먹을 것을 갖다드리죠." 그리고 나서 그녀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구림은 온몸이 아파서 참을 길이 없는지라 그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여인이 자기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동문의 사람인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성이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인지, 또 누구의 제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젊은 나이에 유덕의 홍사와 녹포노조 등의 요사스런 법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를 구출해낸 것을 보면 소형제들 가운데서도 탁월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나 자신은 입문한 지 삼십 년이나 되었는 데도 새로 들어온 저 소녀티가 나는 젊은 여자만도 못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구나.' 구림이 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여자가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소반에는 두 그릇의 김이 무럭무럭나는 음식이 들어 있었는데 콩자반과 밥이 있었다. 그녀는 구 림더러 요기를 하라고 했다. 구림은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팠던 참이라 사양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배를 채우고 나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목숨을 살려준 은혜에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이곳 이 어딘가 물었다. 그 여인이 말했다. "사형은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어찌 그렇게 큰 재간이 있겠어요? 이곳은 벽사촌 옥 청관이에요. 어젯밤 그대를 구한 것은 바로 옥청대사랍니다. 제 이름은 주경운이라 하며, 황산 찬 하대사의 제자입니다. 사형은 신안 구림이라는 분이시죠? 어제 옥청대사께서는 자운사 앞을 지나 치시다가 내친 김에 적의 허실을 염탐하려고 했대요. 그런데 사형이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검 광으로 사형을 구출한 것이죠. 그런데 뜻밖에도 사형의 어깻죽지에 한 알의 홍사가 묻어 있었어 요. 만약 대사의 영약이 아니었다면 사형께서 어찌 목숨을 건질 수 있었겠어요? 대사께선 오늘 이른 아침 볼일이 있어 나가셨는데, 떠나실 때 사형은 이곳에서 휴식을 하며 매일 영약을 복용하 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하기를 칠팔 일 동안 계속하면 회복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구림은 그 말을 듣고 자기가 옥청대사에게 구원을 받았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벽균암으로 가 서 적의 허실을 보고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경운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직 낫지 않은 몸이지만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경운이 말했다. "옥청대사의 말씀을 듣건대 이번에 자운사를 깨뜨리기 위해 동해삼선과 숭산이로께서 모두 오신 다고 했어요. 미리 앞을 내다보는 분이 무척 많으니 자운사의 허실은 이미 그쪽에서 미리 알고 계실 거예요. 사형은 아직도 몸이 낫지 않았으니 수고를 하시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그러나 구림이 어제 취도인과 헤어질 때만 해도 삼선이로 가운데 한 사람도 오지 않았었다. 게 다가 자운사에는 상당수의 요사한 인물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검협들이 대비책을 강구 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것 같아 굳이 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경운은 아무리 만류해도 상대방이 계속 말을 듣지 않자 그와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구림의 상 태가 여전히 심한 편이라 혼자 찬 바람 속에 보내기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벽사촌은 벽균암에서 이십여 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 되자 경운은 구림과 함 께 그곳을 출발했다. 두 사람이 막 넓은 들판길에 이르렀을 때 앞쪽에서 십육칠 세쯤 되는 두 어린 남녀가 허겁지겁 뛰어오는데, 그 뒤에 네 사람이 바싹 쫓아오고 있었다. 그 한 쌍의 남녀가 곁을 스치듯 지나쳤을 때 구림은 뒤쫓는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온 갖 못된 짓만 골라서 자행하는 다보진인 김광정임을 알아보고 경운에게 말했다. "사매, 저 앞에 오는 자는 채화음적이니 결코 놓쳐서는 안 돼요. 그 자는 바로 다보진인 김광정 이외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광정, 독각망 마웅, 분수지우 육호, 요해은룡 백진 등 네 사람이 그들 앞에 도달했다. 주경운은 상대방의 인원수가 자기들보다 많을 뿐 아니라 구림이 다친 몸이라 손을 쓸 수 없으므 로 이렇게 말했다. "사형은 빨리 한걸음 먼저 가세요. 내가 그들을 처리할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번개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네 음적의 죽음 力誅四寇 周俠女送友碧筠庵 夜探强敵 醉道人飛身慈雲寺 김광정 등 네 사람은 천성적으로 여색을 탐하는 음적이었다. 법원이 지통에게 사람들을 잘 다스려 함부로 밖으로 나가 사건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지시한 뒤 로, 그들 네 사람은 절에서 며칠 간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매일마다 유덕과 지통이 여인과 음탕한 성희를 즐기는 것을 보자, 자기들은 저 지경이면 서 나한테는 여자 손목도 잡지 못하게 하는구나 싶어 속으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절 안에는 여인들이 많았으나 모두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상대뿐이었다. 그렇다고 나가서 꽃을 꺾자니 지통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지통이 자기 혼자 즐거움을 맛보면서 남의 사정은 돌 보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아랫사람이라 성질을 억누를 수밖에 도리가 없었 다. 그러나 상대방에서 한창 즐거움을 누리고 있을 때마다 몸이 근질근질해졌고 침을 꿀꺽꿀꺽 삼켜야 했다. 자운사에 차례차례 유능한 고수들이 많이 찾아오자 김광정 등 네 사람은 항렬도 낮고 재간도 보 잘것 없는지라 종놈처럼 절의 중들을 도와 귀한 손님들을 접대해야 했고, 여러 사람들의 의논하 는 석상에서도 자기들에게는 앉을 자리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서운했으며 그럴수 록 음탕한 욕망이 부풀 대로 부풀어 올라 하체가 뻣뻣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어제 구림이란 자를 요절내려고 하다가 난데없이 괴한에게 빼앗겼고, 그런데도 여러 사 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꼬락서니를 본 뒤로 소문에 듣던 바와는 딴판으로 이 한 떼의 패거 리들은 결코 아미파의 적수가 못된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럴 바엔 차라리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 낫겠구나 싶어 오늘 아침 일찍 네 사람은 상의를 한 끝 에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그들은 청성산으로 가서 기등을 모셔오겠다고 둘러대었다. 지통은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언제나 충성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 사람에게 풍부한 노자돈까지 주면서 빨리 갖다오라고 했다. 네 사람이 지통과 작별하고 절을 나오자마자 김광정이 말했다. "우리는 질범이라는 도적같은 화상에게 쫓김을 당해 이곳에 투신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위 세에 편승해 원수를 갚으려고 했었던 것이지. 그런데 뜻밖에도 자기네들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 하지 않고 힘을 다했건만 행동까지도 자유스럽지 못할 뿐더러 저들은 오히려 우리들을 사람같이 여기지도 않았단 말일세. 이제 저들은 아미파 사람들과 원수가 되고 쌍방이 모두 몰래 준비를 하 고 있는 판인데 차라리 이 기회에 성내로 들어가 자운사의 위세를 내세워 실컷 계집질이나 하세 그려. 쌍방을 대신해 화약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주는 셈이지. 그같이 한번 속시원하게 일을 해치 운 후 멀리 달아나 팔마에게 투신하여 평안히 여생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자네들 생각엔 이 계획이 어때?" 이 사람들은 원래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음적들이다. 김광정은 그들 중에서 우두머리격이었고 매 사에 김광정의 지휘를 받았으며 이 같은 위계질서는 한 번도 어그러진 적이 없었다. 거기다 꽃을 꺾자는 데야 마다할 놈이 없을 수밖에..... 네 사람은 각자 갈라져서 수소문을 하고 정탐을 한 끝에 그날로 사오 명의 대상을 점찍었는데 하나같이 절색의 여인들이었다. 마웅과 육호는 밤 삼경쯤에서 쳐들어 가자고 했으나 백진이 굳이 우겼다. "오늘 이왕 일을 저지를 바에야 크게 한바탕 놀아야 할 것이 아닌가? 아직 시간도 이르고 하니 몇 명 더 물색해 보자구!" 네 사람은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겨 어느덧 북문을 나서게 되었다. 그 당시 북문 밖은 무척 황량했다. 마웅이 말했다. "여러 형제들, 우리가 근사한 계집년을 점찍는다는 것이 그만 묘지쪽으로 왔구려. 빨리 왔던 길 을 되돌아 가 우선 저녁밥을 먹도록 합시다. 너댓 명이면 하룻밤 정도는 질탕히 즐길 수 있는데 왜 쓸데없는 헛걸음을 해야 한단 말이오. 더군다나 날이 어두워지고 있으니 공연히 즐기는 시간 을 단축하지 맙시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서쪽 흙무더기 너머에서 젊은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토끼를 겨우 세 마리 잡았는데 날이 어두워졌군요. 이젠 빨리 집으로 돌아가요. 할머 니께서 또 꾸중을 하시겠어요." 여자가 그렇게 말했는데 매우 또랑또랑하고 부드러워 무척 기분좋은 음성이었다. 음적들은 그 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곧 흙무더기 옆에서 젊은 남자와 여자가 달려나왔는데 그들은 각기 한 자루의 단검을 허리에 차 고 있었고 손에는 세 마리의 산토끼를 들고 있었다. 나이는 약 십육칠 세쯤으로 하나같이 옥으로 깎은 듯 준수하고 아름다웠다. 네 명의 음적은 크게 마음이 동했다. 마웅이 훌쩍 뛰어나가 길을 떡 막아서며 히죽 웃었다. "너희 두 꼬마는 걸음을 멈추어라! 우리와 더불어 운우의 즐거움을 한번 누려보자!" 그런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소년이 마웅의 따귀를 힘껏 올려붙였다. 마웅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하마터면 땅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크게 분노한 그는 욕을 퍼부었다. "이 분수를 모르는 새끼 같으니! 내가 너의 개 같은 목숨을 없애버리겠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쌍의 남녀가 칼을 뽑아들었다. 마웅 역시 몸에 지니고 있던 무기를 뽑아들고 덮쳐갔고, 김광정과 육호, 백진 등도 앞으로 나와 싸움을 도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 소년 소녀는 무공이 뛰어날 뿐 아니라 몸놀림도 매우 민첩했다. 거기다 몇 가지 암기도 퍽 잘 구사했다. 그들은 네 음적이 우루루 달려들었으나 조금도 두려운 빛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후 네 음적 가 운데 이미 두 놈이 상처를 입었다. 마웅은 소년이 던지는 비황석에 얻어맞았고, 육호는 소녀의 수 전에 얻어맞은 것이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아프기 이를 데 없었다. 김광정은 상황이 불리한 것을 보고 얼른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검을 날리려고 했다. 한 쌍의 남녀는 그 눈치를 채고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앗! 큰일났다!" 그리고는 발로 땅을 차더니 사오 장 밖으로 재빨리 물러섰다. 이어 홱 몸을 돌리더니 질풍처럼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김광정은 소녀를 사로잡아 실컷 희롱할 작정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검을 높이 치켜들고 뒤쫓았다. 사로잡아서는 칼로 겁을 주어 욕심을 채우려는 심보였다. 그렇게 한참 쫓고 있는데 문득 앞쪽에 한 절세미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년 소녀와 한패거 리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별로 마음에 두지 않고 우르르 달려가는데, 그 여인이 어깨 를 한 번 흔들 하더니 한 줄기 청광을 뻗어내는 것이 아닌가? 김광정은 재빨리 고함을 질렀다. "조심해!"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마웅과 백진의 모가지가 어느 새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육호는 가장 뒷쪽에 있었기 때문에 하찮은 목숨이나마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김광정은 앞에 나타난 사람의 비검술이 무서운 것을 보자 얼른 칼을 날렸다. 그러자 하나는 푸 르고, 하나는 노란 검광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두 소년 소녀는 길을 가리지 않고 허둥지둥 도망을 치다가 문득 적이 쫓아오지 않는 것을 알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한 여인이 푸른 광채를 띄워 노란 광채와 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 네 명의 적 가운데 이미 두 사람이 죽어 있는지라 그들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 되돌 아 섰다. 육호는 김광정의 비검이 뛰어난 줄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이길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그 소녀를 잡아 한바탕 실컷 즐겨서 동료의 원수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는 김광정이 여인과 맞서서 검광을 조종하는 것을 보고 옆에서 암기를 던져 도우려고 했다. 이때 두 소년 소녀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몸을 날려 육호를 덮쳤다. 소년 소녀는 단검으로 하나 는 위에서 하나는 아래에서 육호의 가슴을 향해 찔러왔다. 육호는 급히 칼을 들어 맞섰다. 그러나 두 합도 지나기 전에 소년의 칼이 육호의 가슴을 찔렀다. 육호는 땅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김광정은 그 한 쌍의 소년 소녀가 되돌아 오고 다시 육호까지 목숨을 잃은 것을 보자 정신이 아 찔해졌다. 그 순간 노란 광채가 푸른 광채에 의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김광정은 비명을 질렀다. "아이쿠!" 도망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어느덧 푸른 광채가 김광정의 허리를 따라 한 바퀴 빙 돌자 그는 허리께로부터 잘라져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두 소년 소녀는 네 음적이 모조리 죽어버리자 크게 기뻐 주경운에게 깍듯이 절을 하고 도와준 은혜에 감사드렸다. 주경운은 소년 소녀의 풍채와 용모가 수려할 뿐 아니라 골격이 매우 뛰어난 것을 보고 내심 찬 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즉시 통성명을 했다. 그 소년 소녀는 친남매였다. 소년의 이름은 장기(張琪), 소녀의 이름은 장요청(張瑤靑)으로 바로 산천대협 장인무(張人武)의 손자와 손녀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다만 할머니인 백(白)씨가 살아 있을 뿐인데, 그 할머니 역시 명나라 말엽에 유명한 협녀였다. 장남매는 어려서부터 할머니로부터 무예를 전수받아 일신에 놀라운 재간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 은 산토끼를 사냥하러 나왔다가 음적을 만났던 것인데, 아무리 재간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상대가 상대인만큼 만약 주경운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행한 일을 당할 뻔했다. 장요청은 주경운이 나이가 자기와 비슷한 데도 검술이 대단한 것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 그래 서 주경운에게 자기 집으로 가자고 몇 번이나 간청했고, 주경운을 스승으로 모시고 검술을 배우 겠다고도 했다. 주경운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스승의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 주제에 어찌 감히 제자를 거두어들이겠는가? 그래서 자운사를 깨뜨린 이후 두 사람을 훌륭한 스승에게 소개시 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구림이 길 옆의 으슥한 곳에서 나왔으므로 모두들 또다시 통성명을 했다. 구림이 경운에게 말했다. "사매, 이건 좀 낭패로구려. 이곳이 외딴 곳이기는 하나 시체를 없애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발견 하지 않겠소?" 그러자 주경운이 말했다. "사형은 안심하세요. 저에게 방법이 있어요." 그녀는 허리에서 하나의 병을 꺼냈다. 그리고 그 병에서 약간의 분홍색 약을 손바닥에 따르더니 네 음적의 상처 있는 곳에 뿌렸다. "이 약은 만염소골산(萬艶消骨散)이라고 해요. 바로 옥청대사가 비밀리에 만든 약이지요. 저는 도관에서 머문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대사께서 조석으로 무공을 가르쳐 주시고, 또 이 한 병의 약도 주시더군요. 죽은 사람의 몸에 뿌리게 되면 순식간에 누런 물로 변해 형체도 없이 사라진답 니다." 경운이 이같이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훤히 밝아지면서 한 줄기 금빛 광채가 나타났다. 네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어느덧 옥청대사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옥청 대사는 경운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운고(雲姑)야, 처음 출도하여 세상의 해독을 제거했으니 정말 장하다." 구림은 먼저 무릎을 꿇어엎드려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사의를 표했다. 주경운은 장남매더러 옥 청대사에게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옥청대사가 남매를 보고 말했다. "나는 너희들 일이 아니면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금 전 기반봉(棋盤峰)을 지나다가 우연히 다른 두 문파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지. 그들은 성도 북문 밖의 장가장(張家場)으로 가 서 그 집 남매 두 사람을 제자로 삼겠다고 하더구나. 나는 이들 남매가 기초가 반드시 튼튼하리 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나는 일을 돌볼 여유도 없이 황망히 장가장으로 가서 이들의 조모님을 만 나뵙고는 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들의 조모로 말하면 바로 추운수 노선배님의 질증손녀였 거든. 그후 그들 남매가 산토끼를 잡으러 갔다는 말을 듣고 이곳으로 달려왔는데 너희들이 이미 음적을 죽이고 말았구나. 너희 남매는 자질이 뛰어나니 검술을 배우는 데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 다." 장남매는 옥청대사가 선풍도골이며 또 자기 외고조 할아버지인 분과는 잘 아는 모양인지라 결코 보통 검협에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더군다나 자기들을 귀여워하는데 어찌 이 기회 를 잃을까 보냐? 두 남매는 서로 눈짓을 하고는 나란히 나아가 땅에 엎드렸다. 그리고 대사에게 자기들을 제자로 삼아 달라고 했으며, 그렇지 않을 때는 일어나지 않겠다고 했다. 옥청대사가 말했다. "너희들 두 사람은 빨리 일어나거라. 내가 제자로 맞아들일 일이 아니다. 나는 한평생 남자제자 를 거둬들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운사를 깨뜨린 후 여러 도우들을 만나보고 너희 두 사람과 인연 이 있는 사람을 골라 사부로 모시게 할 참이니라. 그런데도 너희 두 사람은 어찌 이렇게 급히 서 두르느냐?" 장남매는 대사가 응하지 않자 계속해서 애걸했다. 옥청대사는 두 사람의 마음이 그토록 성심에 차 있는 것을 보고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장기에게 말했다. "너희 두 사람의 정성이 갸륵하구나. 혹시 너희들이 집으로 돌아갔다가는 이파의 사람들에게 사 로잡히게 될까 봐 두렵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먼저 너의 누이동생을 제자로 삼도록 하지. 그 러니 너도 나와 함께 도관으로 가자꾸나. 그러면 나는 먼저 토납과 운기의 방법을 전수해 주겠다. 그랬다가 자운사를 깨뜨린 후 다시 다른 도우에게 소개해 주도록 하마." 장남매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 다시 여러 번 조아린 후 몸을 일으키더니 공손히 한켠으로 물 러났다. 구림은 병이 다 낫지 않은 데다가 다시 들판에서 찬바람을 맞고 한참 동안 서 있었기 때문에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옥청대사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이 애들과 이야기를 하느라고 그대가 병들었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군. 그대는 이미 독기가 깊이 파고들어 크게 위험한 상태다. 내 약기운은 목숨을 연장할 뿐이야. 내가 오늘 아침 문을 나 선 것은 바로 영약을 찾아 그대의 독을 해소시켜 목숨을 구해 주려는 뜻에서였지. 역시 착한 사 람은 하늘이 돌보아 준다고, 내가 기반봉에서 되돌아 설 때 숭산이로 가운데 한 분이신 괴수 주 매 선배님을 만나게 되었네. 그에게는 전문적으로 백독을 깨뜨리는 선단이 있는데, 그 선단은 내 약보다 백 배나 효과가 좋다네. 그런데 그 역시 벽균암으로 가고 있는 중이더군. 그대가 만약 살 고 싶다면 날이 어두워졌을 때 한평생 배운 재간을 펼쳐 나는 듯 달려가도록 하게. 아무리 지치 고 괴롭다 해도 중도에서 머뭇거리며 숨을 돌리지 말아야 하네. 그대가 몸을 날려 벽균암에 도착 하자마자 전신에 퍼져 있는 죽은 피가 유동할 거야. 그때 다시 주노선배의 선단을 얻게 된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니 아무쪼록 조심하게. 나는 운고로 하여금 뒤에서 몰래 호위하도록 하 겠네." 그는 다시 주경운에게 말했다. "너는 구림사형를 벽균암까지 모시되 집 안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 먼저 도관으로 돌아가 나 를 기다려라. 나는 이들 남매 두 사람을 데리고 먼저 그들 조모님을 만나뵙고 사정을 이야기 한 후 곧 도관으로 달려가겠다." 구림은 즉시 작별을 고한 다음 온몸이 저리고 아프며 눈이 가물가물해지는 것도 돌보지 않고 나 는 듯이 달려갔다. 숨이 턱에 차도록 헉헉거렸으나 걸음도 늦추지 않았다. 마침내 벽균암에 이른 구림은 일 장 남짓한 높이의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자기 능력으로 뛰어넘 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대문쪽으로 가지 않고 입술을 깨물고 진기를 돋구어 훌쩍 몸을 날려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주경운은 목적을 이루자 되돌아 갔다. 구림은 방안으로 들어서며 많은 검선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가물거 려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이 놓이고 기쁜 나머지 진기가 흩어져 더 이상 지 탱하지 못하고 방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즉시 왜수 주매가 영약을 먹였고, 그래서 몇 시진이 흐른 후에야 구림은 정신을 차렸다. 온몸의 통증이 많이 감소되었으므로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주매에게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드린 다음 자운사에서 목격한 일을 이야기했다. 여러 사람들은 구림의 보고를 듣고 주매에게 어떤 고견이 있느냐고 물었다. 주매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녹포노조의 요법과 유덕의 홍사가 무섭긴 하나 때가 되면 자연 히 그들에게 항복받을 사람이 나타날 것이오. 하지만 그들이 이미 그곳에 도달했다니 조만간 반 드시 여기 달려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킬 테지. 모두들 한동안 막아낼 수 있지만 벽균암은 장소가 너무 협소하고 또 성내에 있기 때문에 부근의 주민들이 그 요법에 희생될 것이 두렵구려. 거기다 소형제들의 공행이 아직도 얕아 한 사람이라도 견뎌내지 못하고 암수에 걸려든다면 구하기 어려 울 것이오. 쓸데없는 희생을 내기 쉬우니, 쇠뿔은 담김에 빼랬다고 우리 모두 벽사촌 옥청관으로 갑시다. 그곳은 장소도 넓고 바위산이 둘러싼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 손을 써도 무고한 사람들 에게 화가 미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러니 오늘밤 두 분 도우가 먼저 자운사로 가서 날짜를 정 하고, 그들에게 우리가 모두 벽사촌 옥청관에 있는 것을 알려주시오. 그들이 오든 아니면 우리가 찾아가든 그걸 빌미로 상대방의 허실을 탐지합시다. 여러분들의 고견은 어떻소?" 여러 검선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그리고는 취도인이 자운사의 사정을 잘 알고 또 지리에도 익숙한지라 그를 자운사로 가서 약속을 받아내는 사절로 뽑았다. 왜수 주매가 말했다. "취도우가 간다면 더없이 잘된 일이오. 하지만 적은 우리와 너무 깊은 원한을 맺고 있소. 거기다 그들은 요사한 무리들이라 이치를 따져 말할 상대가 아니니 이번 길은 매우 위험하니, 또 한 분 재간이 뛰어난 사람이 몰래 따라가서 호응하는 것이 좋겠소."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 줄기 미풍이 일어나더니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주난쟁이, 내가 가는 것이 어떻겠소?" 여러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주매와 어울리게 땅딸막한 여도인 이 서 있었다.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 네모진 입술, 코는 우뚝 솟았으며 얼굴은 짙은 대춧빛, 손에는 아홉 개의 쇠가 달린 고리가 쥐어져 짤그랑! 짤그랑! 소리가 났다. 그 도인이 낙안산(落雁 山)의 완석대사(頑石大師)였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나가 인사를 했다. 주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가며 완석대사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대 완석도 재미를 보자고 나타난 것인가? 그대가 취도우와 행동을 같이 한다면야 더 바랄 것 없이 잘된 일이지.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두 분은 가보시오. 우리들은 벽사촌으로 가서 좋은 소 식이 오기를 기다릴 테니." 주매의 말이 끝나자마자 취도인과 완석대사는 여러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곧장 자운사로 향 했다. 식인귀 彌天星雨 兩次破金蠶 徹地金光 一番誅醜怪 이때 법원은 녹포노조와 함께 어떻게 적과 맞서 싸울 것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용비는 녹포노조와 유덕 등 세 사람이 각기 연성한 법보를 가지고 먼저 벽균암으로 쳐들어 가 기선을 잡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효월선사가 온 후에 다시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자고 이의를 제기했다. 다행히 도 와줄 사람들이 많이 왔으니, 자운사는 이미 철벽과 다름없다는 것이 그가 내세우는 이유였다. 앞으로 나가 싸울 수 있고 뒤로 물러서서 지킬 수 있으니 모든 사람들이 다 올 때까지 기다려 힘을 충분히 결집시킨 후에 단 일격에 박살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용비는 성격이 아주 급해서 그런 우유부단한 결정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적의 허실을 염탐하겠 다고 구실을 대고는 즉시 유덕과 함께 절을 나와 벽균암으로 뛰어갔다. 그들이 막 무후사(武侯祠)에 도달해 보니 앞에는 하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는데 안개에 뒤덮인 범위가 한 마장 정도나 되어서 벽균암이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곳은 안개가 끼어 있지 않았다. 용비는 아미파가 장안법(障眼法)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즉시 구자모음혼검을 날리며 안개 속을 파고들어 갔다. 홀연 그들이 온 방향으로부터 무수한 금빛 별들이 날아왔다. 때는 바로 숙시 초라서 온 천지가 캄캄할 무렵이라 금빛 별무리는 유난히 노랗게 보였다. 유덕은 이것을 보자 깜짝 놀라 재빨리 말했다. "조심하시오!" 그리고는 급히 용비를 자기의 곁으로 끌어당기며 몸에서 하나의 금권(金圈)을 꺼내 한 줄기 광 채를 뻗어내어 자기와 용비를 그 금권이 뻗어내는 금빛 광채 속에 가두었다. 용비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으나 유덕은 재빨리 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주의 깊게 동정을 엿보았다. 수만 개의 금빛 별무리는 찬란한 별무리를 그리며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유덕이 뻗어낸 한 줄 기의 광채는 금빛 별무리의 진행로를 가로막았다. 금빛 별무리는 허공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양쪽으로 쫙 갈라져 광채의 테두리를 돌아가서 다시 한 덩이로 뭉쳐졌다. 용비의 귀에는 마치 봄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한 덩이의 금빛 별무리는 흐트러지지 않은 채 곧장 하얀 안개 속으로 돌진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하얀 안개 속에서 수천 수만 갈래의 붉은 빛줄기가 뻗쳐나왔다. 붉은 빛줄 기와 금빛 별무리가 부딪치는 순간 한 차례 지극히 미세하고도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붉 은 빛 줄기에 부딪친 금빛 별무리는 우수수 땅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정월 초하룻날 터뜨리는 연 화포(煙火砲)와 같았으며 땅에 떨어지자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양이 상당한 구경거리였다. 미처 붉은 빛줄기와 접촉을 하지 않은 절반 가량의 금빛 별무리는 마치 영성(靈性)을 지닌 듯 사태가 불리하자 번개와 같이 방향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물러갔다. 그 수천 수만 갈래의 붉 은 빛줄기는 마치 하얀 안개 속에 그 누가 있어 조종을 하는 듯 금빛 별무리를 쫓아가지 않고 안 개 속으로 되날아 갔다. 유덕은 입을 딱 벌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용비에게 나직이 외쳤다. "사태가 심각하오. 빨리 돌아갑시다." 용비가 어리둥절해서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보려 하는데 유덕은 검광을 조종해서 그를 데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자운사 근처에 도착하자 유덕은 절앞의 숲 속으로 뛰어들며 용비에게 말했다. "정말 위험했소!" 용비가 물었다. "조금 전의 그 물체가 대체 뭐길래 두렵다는 것이오?" 유덕은 나직이 말했다. "처음 우리가 본 수만 송이의 금빛 별무리는 바로 녹포노조가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백독금잠고였소. 풀어놓으면 전문적으로 사람의 골수를 파먹는 지독한 독충이지요. 아무리 무서운 검선이라도 그 백독금잠에 한 번 물리기만 하면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죽고 만다오. 골수가 없는 데 어찌 살아날 수 있겠소? 금신나한이 모든 사람에게 효월선사가 도달한 이후 다시 이야기하기 로 하자고 했을 때, 나는 녹포노조가 그대처럼 못마땅한 표정을 띠는 것을 보았소이다. 아니나 다 를까, 그는 우리가 떠나는 것을 보고 벽균암에 이르기도 전에 백독금잠을 풀어 수십 명의 검선을 물어 죽여 자기의 능력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이외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에선 이미 방비를 하고 있어서 먼저 벽균암을 안개로 보호했을 뿐 아니라 달려오느라고 지친 우리들을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었소. 수만 가닥의 붉은 빛줄기는 무슨 물건인지 모르지만 놀랍게도 백독금 잠을 태반이나 죽였소. 지금 녹포노조는 마음 속으로 무척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오. 그의 위인됨 은 악랄하오. 성격이 괴팍하여 얼굴을 붉혔다 하면 아무에게나 독수를 펼친다오. 우리는 늦게 돌 아가 그 같은 일은 보지 못한 척합시다. 그래야 그의 수치가 분노로 변해 우리에게 화풀이를 하 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것이오.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공연히 큰 협조자 한 사람을 잃는 것 밖에 더 되겠소? 내가 보기에 벽균암에는 반드시 대단한 인물이 있소. 거기다 우리는 허실을 모 르기 때문에 암습을 받기 쉬우니, 오늘밤은 그대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겠소이다. 공공연히 싸우게 되었을 때 통쾌하게 죽이되 한 사람을 죽이면 밑천을 건지는 것이고 그 이상을 죽이면 이자로 계 산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둡시다." 용비는 그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으나 유덕의 태도가 단호하므로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 다. 잠시 지체한 다음 그들은 각기 검광을 조종하여 자운사로 돌아갔다. 여러 사람들에게 돌아왔다는 인사를 하고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녹포노조가 날카롭게 소리쳤 다. "그대들 두 사람은 이번에 나갔다가 헛걸음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길에서 무슨 이상한 광 경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유덕이 대답했다. "우리는 길을 잘못 기억하여 한동안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러다가 간신히 벽균암으로 달려갔는데, 공교롭게도 한 무더기의 짙은 안개가 에워싸고 있어 아무리 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더군요. 적 의 암수에 걸려 화를 입게 될까 봐 되돌아 오고 말았으니, 아무것도 본 것은 없습니다." 녹포노조는 그 말을 듣더니 한바탕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가늘고 긴 손과 팔을 쭉 뻗쳤다. 그 손과 팔은 마치 새발 같았다. 녹포노조는 흔들흔들 함지박 같은 머리통 을 움직이면서 파란 두 눈을 부릅뜨고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그는 유덕의 앞에 이르자마자 멱살을 거머쥐고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솔직히 만해라!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느냐?" 그 소리는 부엉이가 우는 것처럼 귀에 거슬렸다. 여러 사람들은 그 소리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유덕은 조금도 얼굴색을 고치지 않고 말했다. "저는 독룡존자의 제자로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녹포노조는 그제서야 천천히 두 손을 내렸다. 녹포노조는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용비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기괴한 웃음을 흘리더니 여전 히 흔들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이때 유덕은 녹포노조의 등 뒤에 있었는데 손을 슬쩍 흔드는 시늉을 했다. 용비더러 빨리 피하 라는 뜻이었다. 용비 역시 녹포노조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이 결코 좋은 뜻을 가져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피하려고 했을 때 공교롭게도 반미갈(盤尾蝎)이라고 불리우는 흉칙하게 생긴 화상 요연(了緣)이 간식용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그 뒤에는 지객승 요일이 따르고 있었는데 요일이 두 손으로 떠 받든 커다란 쟁반에는 과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곧장 대전 안으로 들어가던 그들은 공교롭게도 녹포노조와 용비의 중간에 이 르게 되었다. 법원이 손짓을 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요일보다 앞장선 요연은 그만 녹포노조와 딱 마주쳤다. 그 순간 녹포노조가 대뜸 요연의 팔을 움켜잡았다. 요연은 고통을 못 이겨 들고 있던 사기쟁반을 놓치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쟁반은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났다. 그리고 쟁반에 담겨 있던 고기만두가 땅바닥에 떨어져 떼굴 떼굴 굴렀다. 이때 여러 사람들의 귀에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요연을 바라보니, 요연의 갈비뼈 두 대가 이미 녹포노조의 한 손에 뽑혀 있었다. 곧이어 녹포노조는 핏빛 대야와 같은 입을 벌려 요연의 옆구리에 갖다댔다. 숨 한번 들여마시고 내뱉는 사이에 염통을 입 안에 빨아들인 녹포노 조는 질겅질겅 씹어 삼켰다. 곧이어 요연의 가슴팍을 물어뜯더니 잇따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는 가슴 속의 선혈과 창 자, 간 , 폐 등을 모조리 씹어먹는 것이 아닌가? 그런 다음 너덜너덜한 요연의 시체를 집어들어 용비에게 내던졌다. 용비는 기급을 해서 피하며 구자모음혼검을 던져내려고 했다. 유덕이 재빨리 달려가 그를 막았다. "노조께선 한 사람의 염통으로 배가 부르시니 염려 마시오." 흘낏 녹포노조를 바라보니 사람의 피와 오장육부를 다 먹고 난 그는 졸린 듯 눈꺼풀이 아래로 처져서 눈에서는 미미한 한 가닥의 파란 광채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았다. 녹포노조는 두 손을 내린 채 천천히 자기 자리로 되돌아 가더니 금방 코를 골며 잠에 골아떨어져 버렸다. 이 같은 참상을 언제 또 보았더란 말인가? 운모산의 여곤륜 석옥주는 특히 못마땅하게 생각했 다. 자기의 실력으로는 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검을 던 져 녹포노조를 베려고 했을 것이다. 지객승 요일 역시 절 안에 저런 요물이 있다는 것을 결코 좋 은 징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법원은 암암리에 지통을 시켜 요연의 시체를 가져가 묻도록 했으며 속으로는 역시 불쾌했다. 이때부터 모두 녹포노조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혐오감을 품게 되어, 법원 외에는 그 누구도 감 히 그를 가까이해서 말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녹포노조는 어제의 일을 전혀 들먹이지 않았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유덕과 용비 두 사람은 그가 다시 묻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저녁 무렵, 두 명의 여자가 찾아왔다. 한 사람은 백화랑(百花娘) 소련(蘇蓮)이고, 한 사람은 구미 선호(九尾先狐) 유연랑(柳燕娘)이었다. 모두 유명한 음마(淫魔)이자 무서운 요녀(妖女)였다. 법원은 그녀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했으며, 성대한 주연을 베풀면서 생고기를 즐겨 먹는 녹 포노조의 비위에 맞게 살아 있는 소와 양을 가져와 맛을 즐기도록 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모두들 대전으로 나와 대책을 의논했다. 갑자기 한 줄기 부드러운 바람이 일더니 대전 안에 켜 놓은 십여 자루의 굵은 촛불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촛불의 그늘 속에 공처 럼 둥글둥글하게 생긴 한 사람의 도사가 서 있었다. 버선을 신지 않은 맨발에 망혜를 걸치고, 등 에는 커다란 붉은 호로명과 한 자루의 여의금구(如意金鉤)를 메고 있었다. 사람들 가운데 태반은 그 사람이 명성이 쟁쟁한 취도인임을 알아보았다. 그가 홀몸으로 용담호 혈에 뛰어든 것을 보자 모두 그의 뛰어난 담력에 탄복했다. 법원이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취도인이 읍을 하며 먼저 말했다. "여러 도우들, 인사 받으시오. 빈도는 본파 교조와 삼선이로의 명을 받아 말을 전하고 가르침 받 을 일이 있어서 달려왔소이다. 그런데 어느 분이 이곳의 영도자인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어떻겠소?" 법원은 즉시 몸을 일으키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우리의 현재 영도자는 바로 녹포노조 어른이시오. 하지만 그분은 이곳의 귀빈이니 그대 같은 까마득한 후배와는 이야기하려고 하시지 않을 것이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여러 사람들에게 들 려주시오. 조금이라도 억지를 쓴다면 그대는 올 수는 있었어도 떠나기는 어려울 것이오." 취도인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옛날 태을혼원조사께서 귀파를 창립했을 때 문하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지만 그 사람들은 그래도 도를 닦는 신분임을 망각하진 않았소. 혼원조사는 고약한 도배 주중안(周中 雁)의 말을 너무 믿어 여러 모로 의롭지 못한 일을 자행했고, 걸핏하면 화를 냈기 때문에 몸을 망 쳤고 명성은 땅에 떨어졌소이다. 그분이 세상을 떠난 이후 문하제자들은 더욱더 날뛰며 법을 지 키지 않았지요. 간음과 살인과 약탈을 밥먹듯 저질렀으며, 오래 된 교의 규칙을 모조리 잊었소.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들과 사악한 길에서 벗어나 정당한 길로 돌아선 몇몇을 제외하곤 대체로 이 단파에 투신, 요사한 인물이 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적을 어버이처럼 모시고 그 기술을 배워 날 뛰었소. 우리 아미파는 선한 사람을 구출하고 악을 제거하여 왔으며 세상사람의 해를 제거해 왔 기 때문에 그대들의 못된 행위를 용납하기 어렵소. 지금 삼선이로와 본파의 도우들은 모두 벽사 촌 옥청관에 모여 있소. 명년 정월 보름날 밤, 귀파가 찾아가든지 아니면 우리가 찾아와서 가르침 을 받겠으니 최후의 생사를 가르는 일전을 벌이도록 합시다. 따라서 사파가 존재하는지 아니면 정파가 승리하는지 두고 봅시다. 여러분들에게 만약 재간이 있다면 얼마든지 대보름날 밤에 자웅 을 겨루도록 하시오. 빈도는 홀몸으로 이곳에 왔으며 한 사람의 손님이라 할 수 있는데, 여러분들 은 왜 기세등등해서 날뛰려고 하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랑, 유덕, 용비 등은 분통이 터져 제각기 법보를 꺼내들고 수법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취도인은 짐짓 안중에도 없는 척,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이야기하며 그 사람들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법원은 노기가 끓어올랐으나 취도인은 혼자 이곳에 찾아온 몸이고 그를 제압한다 해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 들먹거리는 사람들을 재빨리 눈짓으로 제지하며 말했다. "그대는 입으로 이기려고 할 필요가 없소. 얼마 후면 최후의 판가름을 낼 수 있을 것이 아니겠 소? 명년 정월 보름날 우리들은 벽사촌으로 틀림없이 달려가 가르침을 받겠소." 취도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됐소이다. 빈도가 말을 하다가 선방의 위엄을 거슬린 점, 너무 탓하지 말기 바라오. 그럼 이 몸은 이만 가보겠소이다." 취도인이 읍하고 몸을 돌리려 할때 갑자기 대전에서 기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더니 누군가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 취도인은 대전 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암암리에 방비를 하고 있었다. 가운데 높이 앉아 있는 녹포노조를 보았기 때문이다. 취도인은 그가 입을 열어 그를 제지하자 짐짓 알아보지 못한 체 물 었다. "저분은 뉘시오? 내 눈이 어두워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겠구려." 녹포노조는 그 말을 듣자 지극히 듣기 거북한 괴성을 지르며 큰 머리통을 흔들어댔다. 그러더니 까마귀 발톱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을 활짝 펼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앞으로 걸어나왔다. 취도인이 녹포노조의 독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한 여러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법원은 내심 녹포노조가 찾아온 사자를 해치는 데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녹포노조의 성 격이 괴팍스러워 저지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취도인의 말투가 오만하여 쓴맛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선자불래(善者不來)라고 했듯이, 취도인은 그 말에 합당할 정도로 무례하지 않은가? 법원은 여러 사람들에게 대비를 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녹포노조가 미처 취도인의 곁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한 줄기 비단폭 같은 광채가 대전 안으로 날 아 들어오면서 누군가가 외쳤다. "취도우, 그 따위 요사한 인간들과 사리를 따져 이야기를 할 필요없소이다! 말이 끝났으면 빨리 떠나지 언제까지 기다릴 참이오?" 사람들은 취도인의 조력자가 나타났음을 알았다. 그런데 그 금빛 광채는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 다. 다시 눈길을 돌리니 지금까지 대전에 서 있던 취도인이 온데간데 없었다. 사람들이 즉시 추격 하려고 했을 때, 녹포노조가 길게 휘파람을 불며 한 웅큼의 무슨 물건을 허공에다 뿌렸다. 법원과 유덕은 사람들에게 빨리 검광이나 법보를 거두어들이도록 하여 녹포노조 한 사람만 솜씨 를 펼치게 했다. 사람들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녹포노조가 손을 들어 뿌리는 곳에 무수한 금빛 별이 허공으로 날 아오르고 있었다. 곧이어 녹포노조가 발을 한 번 구르자 그의 모습은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덕과 용비와 진랑 세 사람은 허공으로 날아올라 살펴보았다. 멀리 앞에 한 줄기 푸른 광채가 나는 듯 내닫는데, 그 뒤에는 한 덩이의 금빛 별무리가 번개같 이 뒤쫓고 있었다. 이처럼 쫓고 쫓기는데, 홀연 금빛 별무리의 뒤에서 수만 가닥의 붉은 빛줄기가 허공으로 뻗쳐올랐다. 그 빛줄기는 금빛 별무리보다 더 빨랐으며 순식간에 금빛 별무리를 뒤따라 잡았다. 금빛 별무리는 마치 강적이라도 만난 듯 주춤해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퇴로는 붉은 빛 줄기에 의해 차단되었다. 멈칫한 금빛 별무리와 무수한 붉은 빛줄기는 허공에서 정통으로 부딪쳤 다. 그 순간 싸악! 하는 소리와 함께 금빛 별무리는 마치 유성처럼, 소나기처럼 땅바닥으로 우수 수 떨어졌다. 곧이어 괴이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사방에서 도깨비가 통곡하고 울부짖는 것 같은 음향 이 울려퍼졌다. 그 소리는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고 온 천지가 암담해지며 싸늘한 안개가 뭉실뭉 실 피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유덕이 고함을 질렀다. "야단났소! 두 분은 빨리 땅에 내려서서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 그리고는 곧 커다란 광채를 내쏟아 사람들을 에워쌌다. 이때 파란 불꽃 속에서 녹포노조가 나타 났다. 함지박만한 괴이한 얼굴이 파란 불빛에 비치니 너무 보기 흉칙했다. 녹포노조는 몸에서 하얀 종이로 만든 깃발을 뽑아들었다. 기폭에는 일곱 개의 해골과 일곱 명의 벌거숭이 마녀가 그려져 있었다. 녹포노조가 깃발을 한 번 휘두르자 유덕 등 세 사람은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면서 머리가 띵해지며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녹포노조가 연방 깃발을 휘두를 때, 갑자기 둘레가 일 장이나 되는 한 덩어리의 오색 광채가 깃 발을 향해 뻗쳐왔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깃대가 두 동강으로 부러지며 오색의 광채 역시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곧 이어 한 줄기 비단폭 같은 금빛 광채가 허공에서 떨어지더니 녹포노조를 둘러싸며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러자 녹포노조가 참담한 비명을 내질렀다. 어느 새 그의 몸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별안간 동북쪽에서 한 줄기 파란 불꽃이 빠른 속도로 뻗어와 녹포노조의 몸을 스쳐 눈 깜짝할 사이에 서남쪽으로 사라졌다. 이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목격한 세 사람은 입이 떡 벌어졌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유덕은 사태가 자못 심각함을 알고 고함을 질렀다. "빨리 갑시다!" 그리고 히겁지겁 진랑과 용비 두 사람을 데리고 자운사로 줄행랑을 놓았다. 원래 취도인은 녹포노조가 몸을 흔들며 자기 곁으로 다가오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그 래서 맞서 적과 싸우려고 준비하다가, 갑자기 한 줄기 금빛 광채에 에워싸여 자기도 모르는 새 절을 벗어났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취도우, 빨리 왔던 길로 되돌아 가서 적을 유인하도록 하시오. 나와 완석대사가 저 요물을 제거 하리다." 취도인은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치 십일이 세 정도의 아이 같은 몸에 꾀꼬리색 노란 단삼을 걸치고 있었고, 목에 금테를 둘렀으며, 분을 바른 듯 희고, 고운 발은 버선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마치 관음보살 앞의 선재동자(善才童子) 같았다. 결코 아미파 사람은 아니었으 나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러나 얼른 떠오르는 인물이 아닌지라 속으로 놀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때, 뒤따르는 녹포노조가 어느덧 금잠을 펼쳐냈다. 그 동자 같은 사람은 취도인에게 빨리 가라 고 외쳤다. 취도인은 그의 성명을 물어볼 겨를도 없이 검광을 조종해 앞으로 내달았다. 힐끔 고개 를 돌려보니 뒤쫓아 오던 금빛 별무리가 찍, 찍! 하는 소리와 더불어 온 하늘과 땅을 뒤덮듯 하며 그를 뒤쫓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금잠임을 알고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잠이 어지간히 그의 뒤를 따라잡았을 때, 홀연 뒤에서 수천 수만 가닥의 붉은 빛줄기가 날아 오더니 순식간에 금잠을 거의 다 죽여버렸다. 취도인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바로 이 때 한 줄기 금빛 광채가 막 녹포노조를 두 토막으로 내고 있었다. 취도인이 크게 기뻐하며 급히 달려가 보니 땅바닥에는 녹포노조의 하반신이 나뒹굴고 있었고, 상반신과 머리는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방금 금빛 광채로 자기를 구출한 사람은 완 석대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완석대사는 취도인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취도인, 어서 인사하시오. 이 노선배님은 바로 운남 웅사령(雄獅嶺)에 있는 장춘암(長春岩) 무우 동(無憂洞)의 극락동자(極樂童子) 이(李)노선배님이외다. 이번에 만약 노선배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녹포노조의 요사한 금잠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해쳤을지 모르며, 얼마나 많은 동도들이 액겁을 당했을지 모르는 일이오. 내가 몇 년 간 고된 공을 들여 만들었고 명성이 자자한 오운석 (五雲石)도 그 요사한 물건에 맞자 못쓰게 되고 말았으니 말이오." 취도인은 그 말을 듣자 이 사람이 바로 과거 청성파의 비조, 극락진인(極樂眞人) 이정허(李靜虛) 임을 알았다. 옛날 장미진인을 모시고 있을 때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극락진인은 검술에 있어서 특출한 일가를 이루었고 아미파의 비조인 장미진인과는 막상막하였 다. 그 당시 극락진인은 제자를 잘못 거두어들여 골치를 썩였다. 그 두 제자는 규칙을 어기고 못된 짓을 일삼았다. 극락진인은 홍원조사처럼 고약한 제자들은 감싸고 돌지 않았으며, 스스로 문호를 정리하고는 제자들을 사로잡아 청성으로 데리고 가서 두루 여러 검선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규율에 따라 처치했다. 그로부터 극락진인은 제자를 거두어들여 도술을 전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무우동에 은거하 여 조용히 현종(玄宗)을 연구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그는 상승의 도술을 터득하게 되었고,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젊은 모습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여 허물을 벗고 산선(散仙)이 되었다. 그후부터 그는 스스로 극락동자라 일컬었다. 그는 본래 동굴 안에서 일편단심 도법만 정진하면서 신선의 경지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랬다. 그 러나 청성파의 검법을 전수할 전인이 없으니 애석한 노릇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자 진실로 근기가 심후하고 마음이 단정한 사람을 찾아 도통을 이어받도록 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날 우연 히 현진자를 만나 각파의 사정을 논의하다가 얼마 후면 성도에서 살벌한 싸움이 전개되리라는 것 을 알았다. 그는 성도에 도착하자 그들 쌍방의 거처를 찾아가 한 번 두루 살펴보며 훌륭한 자질을 가진 사 람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극락진인이 자운사로 막 들어서니 녹포노조가 높은 곳에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 그는 정파와 사파를 구분할 수 있었다. 실망한 나머지 막 자운사를 떠나다 완석대사를 만났다. 그녀는 녹포노조의 요술이 무섭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완석대사는 극락진인이 삼 만 육천 개의 건곤침(乾坤針)을 만들어 놓았음을 알고는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다. 극락진인은 한쪽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녹포노조를 제거해 세상의 해를 없애는 데 는 찬성이었다. 그래서 녹포노조가 먼저 금잠을 풀어서 공세를 펼 것을 내다보고 먼저 벽균암을 안개로 봉쇄했다. 그리고는 안개 속에서 건곤침을 던져 금잠을 태반이나 죽여버린 것이다. 극락진인은 그 정도로 녹포노조가 결코 기가 꺾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내다보고 몰래 감시하 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밤 취도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운사 안으로 들어가고 완석대사가 그 뒤 를 따르자 정체를 나타내어 돕게 된 것이다. 그는 완석대사에게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긴 후 자기 지시에 따라 다시 손을 쓰도록 했다. 그리고 는 자운사에 들어가 취도인을 구출하여 취도인으로 하여금 도망치면서 적을 유인하도록 부탁한 뒤, 자신은 뒤에서 건곤침으로 금잠을 몰살한 것이다. 녹포노조가 현빈번(玄牝磻)을 펼쳤을 때 완석대사는 암암리에 오운석으로 그를 때려죽이려고 했 다. 그런데 완석은 깃대를 망가뜨려 그 역시 요사한 깃발에 더럽힘을 당하여 무용지물이 되어 버 린 것이다. 다년간 힘을 기울여 온 법보가 하룻밤 사이에 못 쓰게 되자 완석대사는 애석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래도 완석대사는 극락진인에게 우선 사례를 올렸다. 극락진인이 말했다. "세상의 해를 제거하는 것은 우리의 본분이니 나를 추켜세울 건 없소. 하지만 요괴는 한 알의 현빈주(玄牝珠)를 연성하여 뒷통수에 숨기고 있었는데, 조금 전 미처 펼칠 기회도 없이 나에게 두 토막이 나고 말았소. 그때 난데없이 팔이 없는 한 요물이 나타나 그의 머리통을 훔쳐서 도망칩디 다. 그걸 가져갔으니 이 세상에 재앙을 끼치게 될 것이 틀림없소. 내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유 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귀찮은 사단만 불러 일으킨 셈이외다." 취도인은 극락진인의 말을 듣고 벽사촌(壁邪村)으로 가서 자운사를 깨뜨리는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극락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 각파는 검술로 겨루려고 하지 않소? 검술이란 서로 정과 사의 구분은 있으되 요사한 것 은 아니오. 나는 그 일에 관여하지 않겠소." 취도인은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자 극락진인더러 잠시 벽사촌으로 가서 쉬는 게 어떠냐고 청 했다. 그렇게 하여 여러 후배들이 그의 풍채나마 우러러볼 수 있게 하자는 속셈이었다. 극락진인 역시 아미파의 신진들 가운데 근기와 공행이 뛰어난 자가 있는지 알고 싶었던 참이라 같이 가기로 했다. 벽사촌에 도착한 극락진인은 아미파의 문하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근기와 공행이 심후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특히 주경운과 금선이 가장 탐이 났다. 그러나 한 사람은 찬하대사의 사랑하는 제자였고, 한 사 람은 제수명의 아들이라 그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아미파가 장래 반드시 크게 명성을 떨치리 라는 것을 알고 칭찬의 말을 했다. 훌륭한 인재를 찾아 재간을 전수해야겠다는 생각은 더욱 절실해졌다. 그는 각파의 검선들이 서 로 죽고 죽이는 참상을 보고 싶지 않아 잠시 앉았다가 떠나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은 도관 문밖까지 나와 전송을 했다. 극락진인이 소맷자락을 한 번 떨치자 한 줄기 금빛 광채가 마치 장강의 물결처럼 온 마을을 환히 비추면서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곧이어 사라 져 갔다. 왜수 주매는 한 번도 남에게 승복한 적이 없었지만 자기로서는 도저히 극락진인을 뒤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니 나머지 사람들이야 더욱 탄복해 마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전생의 업보 秘級誤良朋 三世重逢始結師生完夙孼 寒月森劍氣 四俠傾蓋同施身手探慈雲 그들은 도관으로 돌아왔다. 취도인은 사절로서 자운사에 갔다가 겪은 모든 일을 이야기했으며, 요사한 무리들과 결투 날짜를 정월 보름날로 정했다고 알렸다. 그리고는 그가 보기에 적의 인원 이 많기는 했으나 특별히 뛰어난 인물들은 눈에 띄지 않는 걸 보건대 그들이 초청한 사람이 다 안 왔는지도 모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왜수 주매가 말했다. "그동안에 어떻게 다 모일 수 있겠는가? 지금 모인 자들은 대개 시원찮은 자들일 게요. 허비랑, 효월선사 같은 무서운 고수들은 아직은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을 것이외다." 여러 사람들은 한참 동안 의논한 끝에 옥청대사, 취도인, 완석대사, 염선, 네 사람이 차례로 매일 같이 자운사로 달려가 그들의 허실을 탐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날짜는 빨리 지나가 어느덧 정월 초닷새가 되었다. 쌍방에는 적지 않은 조력자들이 잇달아 찾아 왔다. 벽사촌 옥청관에 온 사람들은 찬하대사의 제자인 여공공(女空空) 오문기와 여신동(女神童) 주매, 동해삼선 현진자의 대제자인 제갈경아(諸葛警我), 고행두타의 대제자인 소화상(笑和尙), 신니 우담 의 대제자인 소인 등이었다. 자운사에 온 사람들은 허비랑의 제자 삼안 홍예설망, 효월선사의 두 제자 통비신원 녹청과 병유 마 주홍, 무당산 금하동(金霞洞)의 명주선사(明珠禪師), 비래봉(飛來峯)의 철종도인(鐵鍾道人) 등이 었다. 허비랑은 특별한 원인이 있어 올 수 없고, 효월선사는 며칠 안으로 틀림없이 도달하겠다고 전갈을 보내왔다. 법원은 그 소식을 듣고서야 조금 마음을 놓았다. 초아흐렛날 추운수 백곡일이 벽사촌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나가서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추운수는 왜수 주매가 먼저 온 데 대해서 사의를 표하고 곧이어 소인과 옥청대사에게 물었다. "영사이신 신니 우담은 어째서 오시지 않았지?" 소인이 대답했다. "가사께서는 이번 일에 선배님과 도우들이 계시면 충분하므로 동참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만약에 화산의 열화조사(烈火祖師)가 옛날의 맹세를 깨뜨리고, 서장의 독룡존자가 악의 무 리를 도와 포악한 일을 행한다면 모르지만, 가사께서는 그때 가서 나서도 늦지 않다고 하셨습니 다. 그러나 가사께선 이미 사람을 시켜 그들에게 경고의 말을 전했으니 아마도 그들 역시 경거망 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추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화와 독룡 두 불칙한 자들은 신니의 경고를 받았으니 감히 나서지 못하겠지. 그러면 우리는 성가신 일을 적잖이 덜겠군. 허비랑은 찬하대사께서 감시를 하고 있고,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근본 적인 방법은 될 수 없지. 나는 언제나 악을 무찌르되 반드시 뿌리까지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 왔 소. 이 같은 악인들은 결코 마음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없소. 그러니 차라리 그들이 일제히 달려오 기를 기다려 일망타진하는 것이 좋겠소." 그 말이 끝나자 여신동 주매가 갑자기 다가와 추운수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 던 한 통의 서신을 바친 다음 일어서서 한 쪽에 물러나 시립해 섰다. 추운수는 찬하대사의 편지를 읽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왜수 주매를 향해 말했다. "주도우, 이것은 찬하대사의 편지외다. 그분은 이번에 그녀의 두 제자로 하여금 성도로 와서 자 운사를 깨뜨리는 데 참가하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그녀들이 경력을 쌓게 하자는 것이고, 둘째로는 선후배의 몇 분 도우들과 얼굴을 익혀 훗날 서로 도와주고 도움받도록 하자는 것이고, 셋째로 자기 제자 여신동 주매는 어릴 적에 그대가 찬하대사에게 키워 달라고 부탁한 아이로서 당시 겨우 두 살짜리였다는구려. 찬하대사가 당시 그대에게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묻자 그대는 <주매>라고 부르라 하고는 훌쩍 떠났다지. 그리하여 그 주매는 그대와 더불어 동성동명 이 되었소이다. 그대가 어째서 자기랑 똑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는지, 그리고 그대들 두 사람 사이 의 관계가 어떤지에 대해서 나는 이미 알고 있소. 그래서 대사는 나에게 부탁하여 그대들 두 사 람의 좋지 못한 관계를 해결해 주고, 아울러 그녀의 이름을 고쳐서, 부르기에 거북한 점이 없도록 하라는구려. 그대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왜수 주매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며 말했다. "그것이 뭐가 나쁘단 말이오. 애당초 나는 마음에도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소. 그 바람에 뜻 밖에 삼사 대에 걸쳐 귀찮은 일을 당하게 되었소. 그녀는 두 번 다 나를 원수로만 여겼었소. 그러 던 그녀는 이번 세대에 이르러서야 다행히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찬하의 문하로 들여보낸 것이외다. 이제 그대와 찬하가 나의 업보를 해결해 주려고 하니 내가 늘 바라던 바이외 다." 그 말의 뜻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 오로지 두세 사람만 알고 있었다. 여신동 주매 자신만 해도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 전부터 삼선이로의 이름을 들어왔고, 또 그 이로 가 운데 자기와 동성동명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지 왜수 주매를 보자마자 마음 속에 지독한 혐오감이 일어났다. 그녀 자 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제 추운수의 말을 듣고 보니 그 가운데 어떤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감히 묻지 못하고 그저 터무니없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홀연 추운수가 입을 열고 말했다. "사람인 이상 어찌 허물이 없을 수 있겠소? 우리가 마음을 밝게 가지기만 한다면 남에게 털어놓 지 못할 일이란 없소. 내가 이 일의 원인으로부터 과정에 대해 설명을 해드리리다. 백수십 년 전, 왜수 주매 주도우와 여신동 주매의 전신(前身)인 문근(文瑾)은 동문으로 절친한 친구였소. 그리고 어려서부터 함께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명나라 말기 간신들이 정권을 휘어잡자 두 사람은 벼슬에 뜻이 없어 함께 아미로 찾아들어 사부를 구해 도를 배우게 된 것이었소. 그들 은 아미파의 비조 장미진인의 사제인 수정자(水晶子)의 제자가 되었소. 오 년이란 세월이 흘러 도 행이 크게 정진되었을 때 사부 수정자 역시 중생하여 신선이 되었소. 어느 날 두 사람은 각기 산 속으로 약을 캐러 들어갔다가 문도우는 한 석벽 안에서 반 권의 낭환비급(瑯環秘級)을 발견했는 데, 그 가운데는 호흡법과 하늘로 날아오르는 술법이 적혀 있지 뭐요. 문도우는 좋아라 하고 이것 을 가지고 와서 주도우와 함께 연구했는데, 삼 년 동안 연마한 끝에 두 사람 모두 어린아이 모양 으로 젊어지고 원령(元靈)은 육신에서 벗어나 허공을 떠돌아다니며 놀 수 있게 되었소. 그때 문도 우는 매우 왜소했으나 주도우는 비범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소. 도가에서는 어린아이 모양의 원령 을 연성하여 형체를 이루게 되면 자기 본래의 육체를 보호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는 법 이었소. 처음 두 사람은 매우 조심을 했소. 언제나 한 사람의 원신(元神)이 나가 놀게 되면 한 사 람은 문을 지키지요. 그들은 교대로 문을 지켰소. 그 후 담이 점점 커짐에 따라 이따금 한꺼번에 원신이 놀러 나가는 때가 있지만, 항상 껍질인 몸뚱이를 어느 은밀하고 으슥한 산동굴에 안치하 곤 했소. 그런데 문제는 문도우가 주도우에게 장난을 한 것이 발단이외다. 그는 '낭환비급은 원래 상하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가 공개한 것은 상권에 지나지 않으며 하권은 반드시 주도우 가 나를 사부로 삼아야만 내놓겠다'라고 한 겁니다. 주도우는 도를 행하는 마음이 성실하여 끊임 없이 간청을 했고, 마침내 문도우를 사부로 모시겠다고까지 했소. 그런데 문도우는 원래 농담으로 한 말이었거든요. 어찌 있지도 않은 하권을 어디서 찾아 내놓는단 말이오? 그러나 주도우는 문도 우가 혼자서 현묘한 비급을 차지했다고 화를 벌컥냈고, 그래서 두 사람은 잠시 의견 충돌이 잦아 졌소." 사람들은 몹시 흥미있어 하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 후 주도우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내었소. 문도우의 원신이 놀러 나가자 그 역시 원신으로 화해 몸뚱이, 즉 껍질에서 벗어나서는 자기의 껍질을 산 뒤의 어느 동굴에 은밀히 감추었소. 그리 고는 자기 원신은 문도우의 껍질 속으로 들어간 거외다. 이걸 빌미로 협박한다면 문도우가 하권 의 낭환비급을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이윽고 문도우가 돌아왔소. 그는 자기의 껍질을 주도우가 차지한 것을 보고 따졌소. 주도우는 계획한 대로 문도우를 협박하며 반드시 비급의 원 서를 내놓아야 껍질을 돌려주겠다고 했소이다. 그리하여 문도우는 천지신명께 맹세하며 모든 사 실을 해명했소.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주도우로서는 문도우에게 껍질을 되돌려 주어야 할 수밖에, 그러나 이미 그렇게 할 수 없었소. 원래 다른 사람의 껍질을 비는 것은 반드시 공력이 심후해진 후에라야 하고, 그러기 전에는 결코 마음대로 왔다갔다 할 수 없소. 이렇게 되자 문도우는 놀라서 혼비백산했고 주도우 역시 어쩔 줄 모르게 되었으며, 피차 서로를 원망해 보았지민 아무런 소용 이 없는 일이었소. 그러다가 주도우가 이때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었소. 즉 쌍방이 껍질을 바꾸되, 나중에 성도한 이후 다시 원래의 껍질로 환원하자고 말이외다. 이 방법은 원래 꽤 그럴싸한 것이 었소. 그런데 주도우 자신의 껍질을 찾다보니 숨길 때 약간 소홀히 하여 그 동굴에 산짐승이 들 어가 그만 그 껍질을 먹어 치워 뼈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지 뭐요. 문도우는 일이 그렇게 되자 주 도우가 일부러 자기를 모해했다고 오해하여 주도우에게 덤벼들었소. 하지만 자신은 이제 겨우 어 린아이의 형체를 이룬 원신에 불과한데 어찌 주도우를 이길 수 있었겠소? 그리하여 매일 원신이 허공에서 너울거리고, 밤이면 초목에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언제나 ' 내 껍질을 되돌려 달라'고 부르짖었지요. 산 속은 높고 날씨는 차가운지라 몇 번이나 세찬 강풍 (强風)에 날려 사라질 뻔한 적도 있었소. 주도우는 후회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소. 매일같이 슬 피 우는 소리를 듣고 주도우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다 못해 아미산 위에서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 죽을까도 생각해 보았소. 그때 마침 장미진인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문도우의 원신을 발견하고는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 방금 죽은 어느 농사꾼의 몸뚱아리로 들어가게 해주었지요. 주도우는 그 같은 소식을 듣자 그 농사꾼을 산으로 끌어올려 밤낮으로 함께 도를 닦았소. 그런데 그 농사 꾼은 원래 자질이 천박하고 천성이 너무 우둔하여 도에 정진할 수 없었소. 그런데도 원한은 깊어 여러 차례 주도우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번번히 실패로 끝났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농사 꾼은 좌절감을 이길 수 없어 화를 내며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소." 그리고 수십 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주매는 자랑할 만한 제자를 거두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제자 의 얼굴 모습은 문근의 살아 생전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주매는 문도우에 대한 애정의 연장으 로써 그 제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각별히 정성을 다해 가르쳤다. 그런데 그 제자는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 놀랍게도 주매를 찔러 죽이려고 했다. 그때 주매는 이 미 출신입화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제자는 그를 찔러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주매의 원신에 의해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를 죽인 후 장미진인을 만나보았고 그제서야 주매는 그 제자가 바 로 문근의 후신(後身)임을 알았다. 주매는 후회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시 몇 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주매는 중경(重慶)에서 한 거지 부부가 길 옆에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옆에 두 살 먹은 계집애가 울고 있는데, 그 모습이 문근과 흡사했다. 주매는 이미 앞날을 헤아려 보는 경지에 도달한 터라 문근이 세 번째로 사람의 몸을 빌어 태어 났음을 알아차렸다. 당시 그는 그녀를 산 속으로 데려가 키울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지난 번 잇 따라 보복을 받을 뻔한 사실을 감안해 볼때 장래에 귀찮은 일을 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본 척 지나칠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첫째, 양심적으로 차마 어린아이 를 죽게 버려 둘 수 없고, 둘째, 이 계집애가 선골을 타고 태어나 자질과 천품이 뛰어난 바가 있 는지라 만약 다른 문파가 거두어 간다면 전생의 원한을 갚기 위해 자기에게 덤비는 것은 물론이 려니와 나쁜 길로 들어서서 인간세상에서 해악을 저지르면 그것은 자기 책임이라는 생각이 머리 를 눌렀다. 그러나 자기는 한평생 여제자를 거둬들인 일이 없으므로 매우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리하여 주매는 문득 황산의 찬하대사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는 즉시 관을 두 벌 사서 계집애 의 부모를 매장한 다음 계집애를 황산으로 데리고 가서 찬하대사에게 맡겼던 것이다. 찬하대사는 그 계집애의 자질이 뛰어난 것을 첫눈에 알아보고 흡족하여 즉시 주매의 부탁을 응 낙했다. 그런데 그 계집애는 먼 길을 오는 동안 감기가 들어 신열이 대단했다. 주매의 단약은 본 래 영효하기 이를 데 없는지라 그는 한 알을 꺼내 계집애에게 먹였다. 계집애는 주매의 영약을 먹자마자 정신이 맑아지며, 대뜸 두 사람의 대화를 참견하려고 했다. 계 집애는 이목이 수려하기 이를 데 없어 찬하대사와 주매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저절로 즐거 워졌다. 주매는 귀여운 나머지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 계집애는 전생의 원한을 잊어 버리지 못한 모양인지 한눈에 주매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매섭게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작 은 두 손으로 주매의 얼굴을 할퀴려고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스스로 치미는 울화를 참지 못하 고 울음을 터뜨렸다. 주매는 그 계집애가 자기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음을 알자 한숨을 쉬고는 훌훌 자리를 거두었 다. 찬하대사는 문득 계집애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주매를 불러세워 계집애의 이 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주매는 옛날의 사건을 기리는 뜻에서 '그럼 주매라고 부릅시다' 하고 는 표연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상이 바로 여신동 주매와 주도우의 인과관계외다. 이 여신동 주매는 금면 구화산에서 독망을 주살하려다가 잘못하여 백골전에 맞았소. 그래서 육지의 피를 마셨는데, 그 피 덕분에 그녀가 태 어날 때 가지고 있던 악의 뿌리를 모조리 제거할 수 있었지요. 이후로는 결코 어떤 잘못도 저지 르지 않게 될 거요. 아미파는 머지 않아 문호를 크게 빛내게 될 것이오. 여신동 주매는 후배 가운 데서도 가장 우수한 제자인데, 그녀는 너무 많은 험난한 길을 걸어왔고 그때마다 주도우의 도움 에 의지할 때가 많았지. 나는 찬하대사의 부탁을 받고 그대들 두 집안의 원한을 해소시키고자 하 는 바이니, 나의 의견에 따른다면 차라리 주도우가 파격적으로 이 여신동을 기명제자로 삼는 것 이 어떻겠소? 그리하여 이후 어떤 위험을 당하더라도 주도우는 자기 일처럼 돌보고 노력하여 그 녀를 도와주고 이끌어 나가는 것이외다. 그리하여 옛날 동문끼리의 우정을 사도지간의 정으로 바 꾸고 그녀의 이름도 고쳐, 호칭할 때 거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구려. 그리하여 이 사건의 대단원을 내린다면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겠소?" 왜수 주매는 그 말을 듣고 미소를 띤 채 잠자코 있었다. 여신동의 주매는 그제서야 학연히 깨닫 는 바가 있었다. 전생의 슬픈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만 두 줄기 눈물이 그녀의 예쁜 눈에서 쏟아 졌다. 육지의 피를 마시고 난 이후부터 오만방자하던 마음과 조급하던 성질이 가라앉은 그녀는 거기다 찬하대사가 항상 가르치고 이끌어 주는 데 힘입어 마음이 맑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가 하면 평소 스승으로부터 자기의 자질과 공행이 뛰어나 이후 반드시 대성할 수 있겠지만 다재다난하리라는 말을 들어왔고, 스승은 지금부터 삼십 년 내로 승천하리란 말을 누차 들어왔는 지라 오래도록 자기를 보호해주는 사람이 있어 돌봐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그러므 로 추운수가 자기더러 왜수 주매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하자 이와 같이 좋은 기회를 어찌 잃을 수 있느냐고 생각했다. 누가 거듭 권하기도 전에 그녀는 스스로 나아가 추운수와 주매 두 사람에게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께선 이 제자의 절을 받으십시오." 왜수 주매는 그녀가 꿇어엎드리는 것을 보자 그 전생의 원신을 생각하고 그만 눈물이 주루루룩 쏟아졌다. 평소의 익살스런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엄숙하게 몸을 숙이고 손으로 그녀를 부 축하며 말했다. "빨리 일어나거라! 나는 옛날 큰 실수를 저질렀다. 조금 전 너도 사백께서 하시는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너와 나로 말하면 옛날에는 동문이었고 이승에서는 사제지간이 되었으니 여느 사제자 간 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차후로 네가 규칙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무릇 내 힘이 닿는 대 로 전력을 다해 너를 도와주마. 구태여 이름은 고치지 않아도 되겠지만 호칭하기가 거북하니 고 쳐야겠구나. 너의 전신은 원래 성이 문씨였으니, 내 생각엔 주문(朱文)이라고 이름을 고치는 게 좋겠다. 나에게는 여제자라곤 너 한 사람밖에 없다. 이후에도 너는 계속 황산에서 수련을 해라. 나는 수시로 친히 찾아가 내가 한평생 배운 것을 전수해 주마." 말이 끝나자 그는 품속에서 지름이 삼 인치인 구리거울을 꺼냈다. "이 거울은 천둔(天遁)이라고 한단다. 네가 나를 사부로 모시는 이 마당에 특별히 전수할 것도 없고 하니 이것을 너에게 하사하노라. 만약 무서운 적을 만나거든 거울을 꺼내 주문을 외며 대응 해라. 그러면 거울에서 오색광채가 피어오를 것이다. 아무리 무서운 검광이나 법보라 해도 그 오 색광채에 닿으면 그 효용을 잃고 만다. 동시에 적으로 하여금 너의 위치를 알아볼 수 없게 할 거 다. 이것은 바로 오천 년 전 광성자(廣成子)가 마(魔)를 제압하기 위하여 만든 보물인데, 나는 이 보물을 삼십 년 동안 찾은 끝에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너는 반드시 이를 잘 보호하고 소홀히 하지 말아라. 나중에 내가 다시 주문과 사용법을 너에게 전수해 주마." 여신동 주매는 고풍스런 거울을 받아든 후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준 사부의 은혜에 새삼 감사드렸 다. 나이어린 검협들은 모두 여신동 주매의 행운을 부러워했다. 모든 사람이 다가와 주매를 축하 해 주었다. 이때부터 여신동 주매의 이름은 주문으로 바뀌었다. 추운수와 왜수 주매는 검협들을 데리고 벽사촌 옥청관에서 며칠을 묵었다. 어느덧 대보름날이 가까워 왔다. 정월 열사흗날 오후, 취도인이 염탐에서 돌아와 보고를 했다. "모래가 바로 보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초청한 주요 인물들인 효월선사와 독룡존자, 그리고 열 화조사, 만묘선고 허비랑 등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데 어인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추운수는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다가 계속하여 염탐하되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때 가장 괴롭고 참기 힘든 것은 나이어린 검협들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성도에 도착하기만 하 면 당장 자운사 사람들과 승부를 겨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모두들 신이 나서 달려왔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도에 이른 지 이십 일이 되었으나 싸울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매일같이 노 선배들을 모셔야 하고, 또 옥청관에서는 행동거지를 여간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모 두들 산 속에서 자유롭게 지내던 때보다 못하다고 속으로 불만들을 품었다. 그중에서도 금선은 성질이 가장 활발하고 짓궂었다. 그는 보름 날이 되어 봤자 여기에는 여러 선배들이 있고 자기 누나도 있으니,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저한테는 참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 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떠나올 적에 어머니로부터 한 쌍의 원앙벽력검(鴛鴦霹靂劍)을 하사받 은 그는 당장에 어느 곳에서 누구하고라도 좋으니 원앙벽력검의 신통하고 예리한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나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를 낼 수 없고 한 그루 나무로서는 숲을 이룰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두어 명 협조자를 구해서 자운사로 달려가 몇몇 요사한 인물들을 죽이고 돌아와 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누나인 영운이 한 걸음도 옆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을 진행 시킬 수 없어 더욱 초조하고 답답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취도인이 명을 받들고 떠난 후, 제영운이 여신동 주문더러 바둑을 두자고 제의 했다. 제영운은 금선더러 함께 가서 바둑을 구경하라고 시켰다. 금선은 겉으로는 그러겠다고 순순 히 응했지만, 제영운과 주문 두 사람이 바둑판에 온정신을 쏟을 때 몰래 빠져나왔다. 그는 소형제들 가운데서도 주경운, 손남, 장기남매, 고행두타의 대제자 소화상과 가장 뜻이 맞았 다. 장기 남매는 나이가 어리고 검술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함께 가서 위험한 짓을 하자고 할 수 없어 먼저 주경운과 손남 그리고 소화상에게 눈짓을 했다. 이리하여 네 사람은 함께 도관 뒤의 대나무밭으로 기어들어 각자 하나의 돌을 찾아 깔고 앉았 다. 주경운과 소화상이 그에게 무슨 일 때문에 불렀느냐고 물었다. 금선이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게 벌써 언제야? 장장 한 달이 됐단 말입니다. 처음 생각에는 이곳에 도착하 기만 하면 적과 싸움이 벌어지리 라고 생각했건만 뜻밖에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손 한 번 못 썼잖 아요. 매일같이 도관에서 지내자니 갑갑하여 죽을 노릇이거든요! 내가 보기에 보름날이 되어도 노 선배님들이 계신 한 우리에겐 싸울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조금 전 취사숙의 말씀을 듣건대 그들 쪽에는 무서운 인물이라고는 한 녀석도 없나 봐요. 지금 남아있는 녀석들은 모두 밥 통같은 자들이라고 했어요.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가 아니냐구요! 나는 본 래 주문 누나를 청하여 함께 가려고 했어요. 그녀는 원래 나의 말이면 꽤나 존중해 주는 편인데 사요를 죽이고 몸이 회복된 뒤부터는 어른으로 변한 듯이 행동한단 말예요. 마치 우리 누나에게 영향을 받아 근엄한 체하고 있거든요. 나하고 놀아주지도 않고, 제기랄, 내가 자운사로 가자고 한 다면 그녀는 따라가기는커녕 우리 누나에게 고자질을 할 거예요! 나는 세 분 사형과 사제들과 가 장 막역한 사이잖아요? 그래서 영광을 세 분에게 골고루 나눠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오늘 밤 삼경 무렵 함께 자운사로 달려가 그쪽의 가장 무서운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공격을 가해 낙화 유수처럼 떨어뜨린다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대들의 의향은 어때요?" 손남은 이 일이 보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추운수 같은 커다란 법력을 지니고 있는 분도 신 중을 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같이 큰일을 어찌 몇 아이의 힘으로 해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는 금선이 자기보고 겁장이라고 비웃을까 봐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폈 다. 주경운은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난 몸이어서 찬하대사의 문하로 들어간 지 가장 시일이 짧은 편 이었지만 공행에 있어서는 가장 뛰어났다. 최근에 또 옥청대사에게 많은 법술을 배운 터라 재주 가 높은 만큼 담도 훨씬 커져 있었다. 그녀는 이번 일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만큼 재 미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화상은 본래 출신부터 매우 기이했다. 나이는 십사오 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행두타가 한평 생 거두어들인 유일한 제자였다. 다섯 살부터 사부의 문하로 들어가 일신에 놀라운 재간을 연성 하게 되었고 그 성격도 금선과 거의 비슷했다. 생김새는 둥근 얼굴에 오동통했으며 언제나 싱글 벙글 웃고 있어서 천진난만했고, 멍청할 정도로 순진해 보이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의 담은 여느 사람보다 훨씬 컸다. 거기다가 태어날 때부터 천품을 타고 태어난 몸이었다. 그래서 고행두타는 좀처럼 제자를 거두지 않았지만 자기의 절기를 정성껏 소화상에게 전수하고 많이 격려해 주던 터였다. 이번에 그는 스승의 명을 받고 이곳에 오면서 편지를 한 통 가지고 와 이로에게 전한 바 있었다. 그 편지에는 소화상이 언제라도 지휘를 받들어 무슨 일이고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즉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처럼 재간이 있고 담도 큰 소화상인지라 벌써부터 큰일을 벌여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금선의 말을 듣고 손남과 주경운이 모두 말이 없는 것을 보자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금선 사제의 말은 내맘에 꼭 드는군! 그런데 손사형과 주사제의 뜻은 어떤지 모르겠구만!" 주경운은 본래 이래도 저래도 좋았다. 그런데 소화상이 어린 나이에 이토록 용기있게 나서는 것 을 보고 어찌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겠는가? 그녀는 즉시 고개를 끄덕여 응낙했다. 손남은 두 사람이 찬성을 하자 반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다시 한동안 신중히 생각하다가 응 낙했다. 그들 네 소년 소녀는 삼경 무렵 함께 자운사로 가기로 약속을 정했다. 금선은 소화상에 게, 자기를 불러 한 침대에서 자면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자는 제안을 하여 제영운이 의심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네 사람이 막 이야기를 끝냈을 때 제영운과 주문, 오문기 세 사람이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면 서 후원으로 걸어왔다. 제영운은 그들 네 사람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보고 앞으로 나서며 금선에게 물었다. "너는 어째서 바둑을 구경하지 않고 뺑소니를 쳤지? 그리고 이 후원에는 무엇하러 왔느냐? 네가 짓궂은 짓을 하면 나는 용서하지 않을 거야." 금선은 그 말을 듣고 냉소했다. "누나는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나보고는 친구들과 놀지 말라는 거야? 방금 소사형의 검법을 보 려고 함께 후원으로 오니까 손사형, 주사저가 차례로 따라왔잖아. 우리는 서로 산 속의 경치를 이 야기했어. 설마 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잘못이란 말이야." 제영운이 대답을 하려고 했을 때 오문기가 재빨리 말했다. "너희 남매는 얼굴을 맞대기만 하면 입씨름을 벌이는구나. 금선 사제가 너무 장난이 심하니까 누나가 걱정을 하는 거야. 그러나 소형제들끼리 만나서 노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 관여할 필요 는 없을 테지." 제영운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모르는 소리 말아요. 이 애는 누구랑 함께 있게 되면 이상야릇한 짓만 일삼는다니까. 언제나 못 된 꾀를 내놓아 시비를 일으킨단 말이에요. 그러니 간섭을 안할 수 있어야죠." 금선이 말했다. "누구나 자기가 행한 일엔 자기가 책임을 지는 법이야. 누가 누나보고 책임을 지라고 했어?" 쏘아붙이기가 무섭게 그는 제영운의 만류도 듣지 않고 훌쩍 달아나 버렸다. 제영운은 소화상에게 조금 전 동생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어 보았다. 소화상은 한 번도 거짓 말을 해본 적이 없는지라 머뭇머뭇 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큰 입을 헤벌죽 벌리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둥근 머리통을 흔들어 보이더니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내우외환 小靈侯僧舍宣淫 女崑崙密室被困 모두들 소화상의 이러한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자 배꼽을 잡았다. 손, 주 두 사람은 제영운이 따 져 물을까 겁이나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자, 영운은 더욱 의심이 갔지만 캐물어도 그들이 말하 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그냥 두었다. 비록 의구심을 떨쳐버리진 못했지만, 그들이 그날 밤에 당장 일을 저지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주문, 오문기 두 사람과 약간 이야기를 나눈 후에 각자 달빛 아래서 헤어졌다. 제영운이 전전(前殿)으로 돌아오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전의 돌계단에 앉아 있는 금선과 소화 상이 보였다. 웃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이 매우 즐거워 보여서 무슨 일을 저지를 것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금선은 제영운을 발견하자 일부러 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것이 그 사요를 죽인 첫날밤의 일이에요. 나머지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 줄게." 그리고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제영운을 보더니 누나의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소사형이 나에게 사요를 죽인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잖아. 오늘밤 나는 소사형과 같이 자면서 이야기를 할 테니 누나 혼자 방으로 돌아가." 제영운은 금선이 제발 그렇게 하길 바라마지 않던 참이었다. 그래서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승락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만가만히 동쪽 행랑채로 가보았다. 방안에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는 것이 보였는데, 모두 나이어린 사형제자매들이었다. 그들은 주 순이 늘어놓는 강호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제영운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동쪽의 월문(月門)을 지나 옥청대사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대사는 장기 오누이에게 내공을 강연하고 있었다. 들어가면 방해가 될 것 같아 돌아가려고 하자 갑자기 대사가 불러세웠다. "영운 소저께서는 어째서 들어오지 않나요? 들어와서 좀 앉으시지." 제영운은 이 말을 듣자 하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제영운이 입을 열기 전에 대사가 먼저 말했다. "옛날 내가 아직 개사귀정(改邪歸正)하기 이전에 몇 가지 법보를 만들었지요. 당초 만약 소저의 자당(玆堂)이신 묘일부인께서 재삼 부탁하지 않았다면 사부님이 어떻게 나를 받아들였겠어요? 또 어떻게 정(正)으로 돌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 은덕은 죽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법보 는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아미파가 빛나고 성대해짐이 모두 신진(新進) 삼영이운(三英二 雲)의 손에 달렸습니다. 경운사매는 이곳에 온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어 내가 두 가지 호신물을 주 었어요. 영운 소저는 요즘 붉은 빛이 계속 나타나니 길흉이 일순간에 있을 조짐입니다. 나에게 외 교(外敎)의 사법(邪法)을 막아낼 수 있는 호신용 법보가 하나 있어서 특별히 선사하려 하니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웃으면서 받아주어요!" 옥청대사는 허리에서 실로 짠 그물 하나를 꺼냈다. 부드럽고 빛이 나며 얇기가 매미날개와 같았 다. 제영운의 손에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 법보는 오운신교망(烏雲神鮫網)이라고 해요. 상어의 수염으로 짠 것인데, 크게 할 수도 있고 작게 할 수도 있답니다. 만약에 요술사법(妖術邪法)을 만나 당할 수가 없을 때 이것을 꺼내어 뒤 집어 쓰면 적의 침해를 막을 수가 있을 거예요. 또 적의 법보를 빼앗을 수도 있으며 그 쓰임이 무궁합니다. 늦었으니 약속이 있으면 먼저 가보아요." 제영운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그녀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황급히 받아들고는 고맙다고 사 례한 후에 방을 나왔다. 그녀는 주경운을 찾아가서 다시 이야기를 좀 하려고 생각했다. 이때 이미 삼경이 다 되었고 두 루 찾아보았지만 주경운은 보이지 않았다. 서쪽 행랑채 안에 등불에 비치는 두 그림자가 보였다. 소화상과 금선이 그곳에서 이야기를 한다 고 추측하니 마음이 놓여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다시 상방(上房)의 창 아래로 돌아와 보니 한 방에 선배 검선들이 모두 각자 가부좌를 틀고 편 안한 자세로 토납(吐納) 수련을 하고 있었다. 제영운은 별 중요한 일이 없었으므로 주문과 오문기 를 찾아갔다. 거짓말로 누나를 속여넘긴 금선은 제영운이 간 것을 확인한 후에 소화상을 끌고 몰래 관외(觀 外)의 숲 속으로 갔다. 손뼉을 가볍게 두 번 치자 숲 속에서 주경운, 손남 두 사람이 걸어나왔다. 네 사람은 모여서 일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를 상의하였다. 주경운과 손남은 금선이 나이가 어려서 아무래도 단독으로 한몫의 책임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주경운은 소화상과 손남이 선두가 되어 자운사에 잠입해 기회를 보아 행동을 하며, 자기는 금선과 후미가 되어 뒤에서 응원하자고 했다. 소화상이 말했다. "잠깐만, 나와 금선 사제는 이미 약속을 했어요. 나와 그가 선두가 되어 먼저 공격을 하기로 말 입니다. 비록 꼭 이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금선 사제가 적의 침해를 받지 않게 하겠어요 그대 두 사람이 어떻게 공격하는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을게요." 주경운과 손남은 소화상의 이러한 방자하고 오만한 행동을 보자 매우 못마땅하였다. 주경운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소화상은 금선의 손을 잡고 큰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자운사에서 만납시다." 그리고는 금방 자취를 감췄다. 그의 이 주법(走法)은 바로 고행두타의 무형검을 그대로 전수받은 것이니, 주경운과 손남이 어찌 그 오묘함을 알겠는가? 성도 나고 또 우습기도 하였다. 자운사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렇게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 렇다고 가지 않는다는 것도 또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 매우 곤란하였다. 손남은 돌아가서 추운수, 주매 등 여러 선배검협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고 했다. 그러나 주경운 은 그것이 별로 떳떳하지 못한 짓이라고 여겼다. 더군다나 소화상과 금선이 이미 떠난 후에 보고 를 한다는 것은 더욱 이상한 노릇이었다. 한동안 상의를 한 후 그들은 역시 자기들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데 합의했다. 두 사람은 즉시 검광을 타고 뒤따라 갔다. 두 사람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무 옆의 바위 뒤에서 몹시 호리호리한 선사(禪師) 한 사람 이 나타나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젊은 녀석들, 내가 오지 않았다면 너희들이 오늘밤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겠느 냐?"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문득 옥청관 안에서 푸른빛, 흰빛의 세 줄기 검광이 날아와 숲 속 에 내려섰다. 세 여인이었다. 그중 나이가 좀 들은 듯한 여인이 말했다. "주사매! 오사매! 한 사람은 내 오른쪽에 한 사람은 내 왼쪽에 있다가 요법이 흉폭하면 빨리 중 앙으로 모이세요. 나에게 호신용 법보가 있으니, 절대로 방향을 혼돈하지 않도록 해요! 늦었으니 빨리 갑시다." 말을 마치자 세 사람은 검광을 타고 자운사쪽을 향해 날아갔다. 세 사람이 떠난 후 그 선사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머잖아 아미파가 곧 크게 빛날 것이라고 현진자가 말하더니 무리가 아니군. 이 후배들은 어떻 게 해서 모두 저렇게 기초가 단단한 사람들뿐인가? 그러나 그들이 이처럼 대담하게 망동하는 것 을 이로(二老)가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우선은 잠시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자. 몰래 따 라가서 그들이 정히 위험할 때 도와주면 되겠지.' 선사는 즉시 몸을 전환시켜 무형검광을 타고 곧바로 자운사로 향해 날아갔다. 한편, 자운사 안에 있던 법원, 지통, 유덕 등은 녹포노조가 죽은 후로 갈수록 아미파의 기세가 등등하며 재사(才士)가 늘어나니 보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학수고대하는 몇몇 조력자 는 한 사람도 도착하지 않았다. 현재 절에 있는 몇 사람들은 결코 아미파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 이 분명하므로 마음이 몹시 초조하였다. 용비까지도 적을 얕잡아 볼 수 없다고 느껴 처음 올 때의 그 의기양양하던 오만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석으로 기다리는 조력자는 십삼 일 오후가 되어도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법원은 그래도 좀 나았으나 지통은 뜨거운 가마솥 안의 개미처럼 안절부절 못한 채 수하들에게 문 밖에 나가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쓸데없는 명령만 남발하고 있었다. 음락을 즐기러 갈 기분도 나지 않아 하루종일 끙끙 골머리만 싸매었다. 정작 보름날이 되었을 때 일에 차질이 생긴다면, 자기가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철벽 처럼 튼튼한 자운사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처음에는 아미파가 미리 와서 교란술책을 쓸까 두려워 주야로 조를 나누어 엄밀히 방비하였다. 그러나 십여 일이 지나도 아무 동정이 없자, 보름날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겠구나 싶어 차츰 경계 를 게을리하였다. 자운사에 모여든 사람들은 대다수가 허비랑의 부탁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법원과 여곤륜 석옥주를 제외하고 거의가 모두 음마색귀(淫魔色鬼)들이었다. 게다가 뒤에 온 백화랑 소련, 구미 선호 유연랑 두 음마는 더욱 유난히 색을 밝히는 편이어서 어느덧 서로 눈이 맞아 어떤 때는 공 공연히 대낮에 선방에서 그짓을 벌일 정도니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지통이 사랑하는 양화는 본래 지통과 유덕의 전유물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대접하느라고 밀실에 숨겨놓은 무녀들을 모두 끌어내었기 때문에, 마침내 양화도 끌어내어 모두가 같이 즐겼다. 자운사는 하나의 윤락장소로 변해 버렸다. 법원은 비록 연배가 비교적 높았고 보기 흉하다고 느 끼지만 간섭을 할 수가 없어 제멋대로 놀아나게 그냥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들 중에서 여곤륜 석옥주는 벌써부터 비위가 뒤틀려 있었다. 그녀는 본시 무당파에서도 젊은 연배의 검선이었다. 형산(衡山)에서 약초를 캐다가 사천팔마의 스승인 황종도인(黃腫道人)을 만났 는데, 황종도인은 석옥주가 절세미인인 것을 보고 색심(色心)이 크게 동하여 금고법(禁錮法)을 써 서 갑자기 그녀를 가두고는 자기를 따르라고 타일렀다. 석옥주는 상대방의 검술이 대단한 데다 자기가 이미 먼저 당하여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거짓으로 승락하는 척하였다. 황종도인이 그녀를 풀어주자 그녀는 즉시 비검을 쏘아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자기의 비검이 황종도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녀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바로 이 위험한 순간에 공교롭게도 허비랑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석옥주가 쓰는 비검이 무당파임 을 알아보고, 이 기회를 빌어서 인연을 맺어 놓으면 좋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황종도인에게도 죄를 짓고 싶지 않아 그녀는 즉시 암암리에 혼원강기투(混元崗氣套)를 던져 석옥주를 위험에서 구출해내고 자기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석옥주는 허비랑이 구해 준 은혜에 감복한 나머지 종신토록 그녀를 돕겠다고 맹세했다. 그리하 여 나중에 여곤륜이 세 번이나 허비랑을 구해 준 사건이 발생했는데, 허비랑은 모두 여곤륜에 의 지하여 겨우 참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석옥주가 허비랑의 초청장을 받자, 그녀의 언니 표묘아(票妙兒) 석명주(石明珠)는 몇 차 례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석옥주도 자운사 안에 있는 무리들의 질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 고 있지만, 남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려 달려왔던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녹포노조 같은 요사(妖邪)를 보고 곧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첫째는 이왕 남 의 부탁을 받았으면 좋든 나쁘든 결과를 본 후에 돌아가야 도리겠고, 둘째는 자기의 고강한 재능 을 믿는 나머지 잘못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여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 유연랑이 온 후에는 용비, 유종잠, 적은아, 망두타와 같은 요괴들과 주야로 음탕 한 짓거리를 벌이니 도대체가 사람 같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혐오감이 쌓였다. 그래서 그녀는 어서 보름날이 되어 아미파와 한판 승부를 낸 후에 속히 떠나기만을 바라 고 있었다.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바깥을 들락거리는 소령후 유종잠은 가히 색에 굶주린 색마였다. 그의 스 승인 칠수야차 용비의 세력을 믿고 나쁜 짓만 골라서 했다. 자운사에 와서 밀실에 있는 허다한 미녀뿐 아니라 소, 유, 두 음녀를 보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하나는 백화랑 소련과, 하나는 구미선호 유연랑과 조석으로 즐기며 죽어 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투였다. 다른 사람들은 은근히 부아가 돋았지만, 첫째로 용비의 구자모음혼 검이 두려웠고, 둘째로 자운사 안에는 아직 다른 미녀가 많았기 때문에 이 일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통은 석옥주가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녀가 오자마자 조용한 방을 하나 준비해 주고 중년여자 둘을 골라 아침저녁으로 시중을 들게 하였다. 석옥주는 절 안의 문란한 꼴을 알고 난 후부터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성도로 나가서 명승지를 유람하다가는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와 잠자리에 들곤 했다. 날마다 그런 식이었으므로 다른 사람 들과 만나는 경우가 적었다. 다른 사람들도 석옥주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녀가 선녀같이 예 뻤지만 감히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품는 자가 없었으므로 하루하루 안락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날도 석옥주는 여전히 아침에 자운사를 나와서 가까운 산 위에 올라가 조용한 장소를 찾아 내 공을 수련하였다. 그리고는 오후가 되자 성 안으로 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막 성 밖 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그녀의 보검이 땡그랑! 하는 소리를 내며 한 치 정도 칼집에서 빠져나왔 다. 그 바람에 싸늘한 빛이 눈을 찌르며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이 패검(佩劍)은 석옥주가 연성한 비검만큼 신화(神化)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주진(周秦)시대의 고물(故物)로써 그녀가 도를 이루기 전에는 이것을 호신용으로 썼었다. 패검은 그녀에게 길흉이 생길 때면 미리 징조를 나타내어 대비를 하게 하는 신통한 칼이었다.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 지난 번에 형산에서 약초를 캘 때에는 비검이 있어 필요가 없다고 느꼈고, 또 무겁고 귀찮아 가 지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황종도인의 암수에 당할 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는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었다. 그런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빠져나왔으니 자운사에 무슨 일이 일어난 조짐이 아닌가 싶었다. 그녀는 자운사의 형편이 염려되어 부리나케 달려갔다. 절 안에 들어섰을 때는 어느덧 날이 저물어가는 무렵이었다. 법원과 기타 여러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평소와 다름이 없는지라 자기가 지나치게 신경을 썼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에 자기 방으로 향했다. 방 앞에 막 다다랐을 때 돌연 화상 하나가 자기 방에서 살금살금 나오는 것이 보였다. 석옥주는 대노하여 그 화상 앞으로 몸을 날리자마자 손을 뻗어 화상의 활혈(活穴)을 찍었다. 기 습을 당한 화상은 꼼짝하지 못하고 사로잡혔다. "이 머리 벗겨진 도둑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내 처소엘 침범하다니!" 이렇게 소리치며 칼을 뽑아들고 당장 목을 자르려고 하였다. 화상은 비록 그녀에게 활혈을 찍히긴 했지만 말을 할 수는 있었다. 다급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 다. "대선(大仙)께서는 오해하지 마십시오! 소승은 기밀을 전하려고 온 것입니다. 방에 들어가 보시 면 알 수 있습니다." 석옥주는 그의 말에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또 상대방을 보니 지객승 요일인지라, 그가 평소에 분수를 지키는 사람으로서 감히 허튼 수작을 부릴 담력의 소유자가 아님을 생각했다. 또 설령 도 망치려고 해도 독 안에 든 쥐인지라, 그녀는 잡았던 손을 놓았다. "무슨 기밀이냐? 빨리 말하라! 만약에 거짓말이라면 살아 남지 못하리라." "대선께서는 소리를 낮추십시오. 방에 들어가 보시면 저절로 알 게 됩니다." 석옥주는 요일과 같이 방으로 들어가서 부싯돌을 꺼내 손수 등불을 밝혔다. 그러자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한 장의 종이가 보였다. <용, 유가 그대를 겁탈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소이다. 오늘밤 아무쪼록 엄밀히 방비하십시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것을 보고서야 석옥주는 요일이 자기에게 그 편지를 전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석옥주는 기가 막혔다. 용비와 유종잠이 비록 간이 크다고 하여도 어찌 감히 나를 겁탈하려고 한단 말인가. 얼마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돌연 얼굴색이 변하면서 요일에게 자세한 설명 을 요구했다. 요일은 비록 지통의 문하이지만 그의 사람됨이 지통과는 달랐다. 전심으로 검술을 배우려는 일 념뿐 여태껏 음사(淫邪)를 범한 적이 없었다. 그가 연일 절 안의 상황을 살펴보니 머지 않아 틀림 없이 옥석구분(玉石傾焚: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재앙을 당함)될 것인지라 매우 걱 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용비의 창문 아래를 지나가다가 석옥주의 미모에 반한 용비와 유종잠이 밤이 깊어지면 미향(迷香)을 써서 석옥주를 취하게 한 후 겁간하자고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요일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석옥주는 비록 여자이지만 검술이 고강할 뿐 아니 라 인간됨도 바르다. 그런데 자운사는 머지 않아 망할 것이 틀림없다. 이 기회를 빌어 그녀에게 나를 무당파에 갈 수 있게 소개를 해 달라고 부탁하면 증과(證果: 수행의 인연으로 얻는 깨달음 의 결과)를 도모하기 쉽잖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섣불리 석옥주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만약 이 일을 용비가 알 게 된다면 큰일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종이에다 써서 석옥주의 방에다 갖다 놓고 나오려고 하던 참인데, 공교롭게도 석옥주 본인에게 발각된 것이다. 석옥주는 요일의 말을 듣고 나자 이를 부드득 갈며 원통해 하였다. 그녀는 요일에게 사건이 실 증이 된 후에 방법을 강구하여 무당파에 들어갈 수 있게 소개를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요일은 매우 기뻐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혹시 다른 사람들이 알까 겁이나 즉각 인 사를 하고 물러갔다 석옥주는 요일이 가고 나자 혼자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 요마외도(妖魔外道)들과 같이 있 어서 결코 좋은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일찌감치 손을 떼고 돌아갈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이틀만 있으면 보름인데 지금까지 참았거늘 어찌 이틀쯤이야 못 참겠는가 싶었다. 그래서 기왕지사 보름 이나 넘기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을 돌렸다. 하지만 요일의 귀띔도 있으므로 조심겠다고 생 각했다. 그녀가 혼자서 골똘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돌연 이상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앗!" 그녀는 낮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려 방을 나가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사지에 힘이 쑥 빠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득 귓가에 음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멍한 가운데서도 자 기 몸이 누군가에게 떠메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은 매우 부드 러운 침상 위에 눕혀졌다. '내가 적의 암수에 당했구나!' 석옥주는 이렇게 생각하며 몇 번이나 몸을 일으키려고 있는 기력을 다 썼지만 도무지 몸이 움직 여 주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했다. 애당초 언니 명주의 말을 듣 지 않아 오늘의 화를 당하는구나 싶어 후회가 되었다. 그녀는 또 생각하였다. '이번에 자운사에 온 것은 원래 허비랑의 부탁을 받고 법원과 지통을 도우러 온 것이다. 그런데 용비사도(龍飛師徒)가 이렇게 횡포를 부리는 것을 법원은 어째서 수수방관하는가? 놈들이 나를 이곳으로 떠메고 왔지만 아직 덮치지 않는 것은 틀림없이 법원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만류하기 때 문일 거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한 가닥 희망이 생겼다. 또 만일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되면 오행진기를 써 서 자결함으로써 몸을 더럽히는 수치를 면하리라고 결의를 다졌다. 만약 하늘이 불쌍히 여겨 주 어 깨끗한 몸으로 도망갈 수 있다면 나중에 용비 등을 찾아가 복수하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였 다. 석옥주는 원래 동녀(童女)의 몸으로 도를 닦았고, 또 무당파의 비급을 전수받은 신분이었다. 비 록 용비가 뿌린 미향의 독에 중독되었지만, 그것은 한 순간의 실수로 암수에 걸린 것일 뿐이니 정신은 아직도 말짱하였다.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은 후에 침상에 누운 채로 내공을 써서 사기(邪氣)를 몰아내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팔다리에 힘이 없어서 운기가 매우 힘들었다. 몇 차례나 기가 모일 듯 모일 듯하 다가 다시 흩어지곤 하였다. 약 한 시진쯤 지나서야 겨우 오행진기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비로소 희망이 생긴 그녀는 매 우 기뻐하며 정신을 편안히 하고 의지를 굳혀 오행진기를 용천혈(湧泉穴)에서 단전으로 끌여들었 다. 몸이 상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을 상관할 때가 아니었다. 두 눈을 꼭 감고 필생의 힘을 다하여 진기를 칠십이 개의 혈도(穴道) 안으로 쏟아넣었다. 이렇게 하여 몸 안의 사독(邪毒)을 깨끗이 축출하였다. 다만 기를 너무 소모하였기 때문에 원기가 크게 상하였다. 그녀는 억지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나서 한동안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지만, 다행히 몸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 앉아서 한동안 편안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가 눈을 떴다. 사방은 캄캄했다. 손으로 앉아 있는 곳을 더듬어 보니 촉감이 매우 부드러웠다. 추측컨대 절 안 의 암실인 것 같았다. 또 얼마 동안 휴식을 취하고 나자 비로소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 다. 그녀는 검광을 내쏘아 주위를 밝힌 다음 도망갈 방향을 찾았다. 그렇게 살펴보다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아뿔싸! 소리를 질렀다. 원래 이곳은 흉승들의 행락 밀 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사면은 모두 큰 바위인데 틈서리는 구리를 부어서 막았고, 바닥에는 비 단이 깔려 있었다. 한참 동안 살펴보았지만 문을 여는 장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곤륜 석옥주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쩔 도리가 없다고 체념할 때 문득 뒤에서 구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벽이 자동으로 돌아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용비가 오고 있구나 싶어 몸을 어두운 곳에 숨기고 사생결단을 낼 결심을 했다. 벽은 한동안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이윽고 높지 않은 작은 문이 나타났다. 그 문으로 한 화상이 들어오고 있었다. 석옥주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검을 뽑아 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화상은 벌떡 침상 앞으로 다가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석선고(石仙姑)님, 소승이 구하러 왔습니다. 빨리 소승을 따라 도망가십시다." 일곱 소협의 활약 密室困崑崙 艶艶紅霞飛劍驚芒寒敵膽 禪林逢異敎 漢漢黃霧迅雷忽震散妖氣 석옥주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매우 귀에 익었다. 검광을 비추어서 보니 지객승 요일이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요일이 말했다. "지금 밖에는 적지 않은 아미파 검선들이 쳐들어 와서 우리편 사람이 이미 몇 명이나 죽었습니 다. 지금 자세히 말씀드릴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우선 빨리 소승을 따라 피신부터 하고 보시지 오." 변고가 생겼다는 바람에 석옥주도 다시 자세한 내용을 물을 여유가 없었다. 요일이 앞장을 서고 석옥주는 그 뒤를 따라 함께 굴을 빠져나갔다. 막 굴 문에 도착했을 때 돌연히 어둠 속에서 시꺼멓고 둥근 물체가 하나 날아왔다. 요일이 '앗!' 하는 기합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한쪽으로 비켰으나 그 물체는 그의 어깨에 와서 맞았다. 순간 요 일은 축축한 것이 얼굴에 뿌려지는 것을 느꼈다. 피비린내가 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사 람 머리인 듯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치지는 않았다. 석옥주는 어두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공격을 받지 않았다. 즉시 몸과 검이 하나가 되어 날아서 굴 속에서 빠져나왔다. 요일도 검광을 타고 어두운 굴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이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문득 눈앞이 번쩍 하더니, 돌연 작은 화상 하나가 서 있었다. 달빛 아래에 드러난 화상의 모습은 매우 낯이 익었다. 그 작은 화상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당신이었군." 그뿐, 다시 한 번 번쩍이더니 화상은 이미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석옥주는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가 사라지는 그 화상이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요일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요일이 대답했다. "아까 소승이 선고님의 방에서 나오다가 정면으로 소령후 유종잠과 딱 맞닥뜨리지 않았겠습니 까. 그는 소승에게 싸늘한 웃음을 짓고는 곧바로 선고님의 창문 아래로 걸어가더군요. 소승은 서 둘러 당신에게 알려드리려고 했지요. 그런데 돌연 뒤에서 누군가가 기침을 하길래 돌아보니 바로 용비, 소련, 유연랑 세 사람이 등 뒤에 서 있더군요. 용비 대선배님은 흉악한 얼굴을 하고서 소승 에게 '쓸데없이 참견하면 죽을 줄 알아라!'라고 경고를 합디다. 그러니 저로선 한쪽으로 비킬 수 밖에요. 소승은 우두커니 서서 그들이 미향으로 선고님을 쓰러뜨리고 소, 유, 두 음부(淫婦)가 떠 메고 밀실 안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밀실은 원래 네 칸인데, 매우 견고하여 그 기관 장치를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은 겨우 너댓 사람밖에 없습니다. 원래는 저희 사부님과 양화가 사용 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용비 대선배님에게로 넘겨주었지요." 요일은 지통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미향은 용비가 직접 만든 것으로써 여자를 겁탈 할 때 사용하며 그 냄새를 맡으면 사오 시진 동안 몸의 힘이 빠져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석옥주가 그 독수에 걸린 것을 알고 곧장 금신나한 법원에게로 달려가 저지 해 달라고 부탁했다. 법원은 즉시 유종잠의 방으로 달려가 말로써 그들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말다툼이 일어나 바야흐로 대판 싸움이 벌어질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때 별안간 후전(後殿)에 육칠 명의 아미파 사람들이 나타나 전전(前殿)에 있는 몇몇 사람과 싸 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법원과 유종잠은 더 이상 집안 싸움을 하지 않고 전전으로 달려가서 적 을 맞아 싸웠지요." 아미파 사람들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솜씨가 대단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여인의 솜씨는 매우 고강했다. 그녀는 단번에 초상비 임성조를 두 토막내고, 철장선 축악자 소화신 진랑한테도 중상을 입혔다. 뒤이어 금신나한 법원과 용비가 달려오고, 유덕도 후전에서 나타났다. 유덕은 홍사(紅紗)를 뿌리 고 용비도 구자모음혼검을 쏘았다. 이 두 사람의 법보는 과연 대단했다. 홍사가 뿌려진 곳에 붉은 먼지가 가득하고 음풍(陰風)이 싸 늘하며, 구자모음혼검의 음산한 푸른빛이 눈부시게 춤을 추었다. 그러나 그 여인도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던 듯, 손에 든 한 물건을 활짝 폈다. 그러자 그것이 곧 오색 상서로운 구름으로 변하면 서 같이 온 사람들까지 보호하니 여하한 법보로도 그들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유덕은 고심끝에 홍사를 있는 대로 다 뿌려 사면을 포위해 버렸다. 그러는 동안에 요일은 살며 시 빠져나와 석옥주를 구하러 달려온 것이다. "소승이 보기에 이 자운사 안의 사람들은 비록 오늘밤에는 득세를 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적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온 사람들은 모두가 나이어린 아이들이며 그 아 이들이 이렇게 솜씨가 대단하니 삼선이로(三仙二老)쯤 되면 말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제가 오 늘밤의 정세를 보건대 이 어린 사람들이 비록 갇혀 있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재사(才士)들이 이들 을 구하러 올 것이 분명합니다. 머잖아 대세가 저쪽으로 기울어질 것 같은데 선고께서는 무슨 좋 은 고견이 계신지요?" 석옥주는 이 말을 듣고 한동안 곰곰이 생각한 후 말했다. "그들의 행위가 어떠하였던 간에 나는 만묘선고 허비랑의 부탁을 받고 왔으니, 착수를 하더라도 다음에 해야지. 오늘밤에 그를 찾아 복수를 한다면 도리어 아미파에 좋은 일을 시켜주는 셈이 아 니겠소. 나는 이미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 없습니다. 좀더 있다가 곧바로 선산(仙山)으로 돌아갈 작정이오. 훗날 허비랑이 이 일을 안다고 해도 나를 탓하지 못할 테지요. 그대는 지통대사와 사제 지간으로서 여러 해를 섬겼으니, 비록 그가 옳지 못하지만 이렇게 위급한 시기에 그를 버리고 떠 나간다면 인정상 도리가 아닐 거예요. 잠시 동안만이라도 전전으로 나가서 요령껏 행동하세요. 사 세가 정 만회할 수 없이 기울어지면 그때 물러나도 늦지 않을 겁니다. 만약 위험을 당할까 두렵 다면 내가 뒤에서 도와주지요." "소승은 결코 죽음을 겁내어 남이 위험할 때 양심을 속이고 도망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다 만 당초에 소승이 눈이 삐어 곁길로 잘못 들어선 것을 원망할 뿐입지요.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 는 이미 늦었습니다. 중도에서 물러서려면 생명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잠시 참으면서 기회를 기 다리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주(周)씨 성을 가진 젊은 거인(擧人: 향시에 합격한 사람)이 십육 명의 젊은 거인과 함께 밀실로 잘못 들어가 사부님에게 모두 죽음을 당한 적이 있었지요. 다만 그 주 씨성을 가진 청년만이 양화, 도화 두 음부의 간청으로 당장 죽음을 면하고 석뢰 속에 갇혔습니다. 소승도 그 사람이 근기(根器)가 매우 두터운 것을 보고 그를 구해서 같이 도망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천둥이 치며 큰 비가 내려 할 수 없이 날이 밝아올 때쯤에 가서 보았더니 그는 이 미 도망가 버리지 않았겠습니까. 소승은 당시에 재빨리 그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가 얼마 도망 가지 못하고 다시 잡혀 올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한 젊은 여 인이 침입해서는 다비웅 모태의 한 팔을 자르고 또 쌍비원앙퇴로 차서 유덕은 심장에 구멍이 날 뻔했지요. 이리하여 아미파와 옛날의 원한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겁니다. 쌍방은 대결할 날짜를 정 해 놓고 모두가 암암리에 준비를 하였답니다. 소승은 자운사가 머지 않아 잿더미가 되리란 것을 알기 때문에 빠져나갈 궁리를 했지만 몸을 맡길 만한 곳이 있어야지요. 선고께서 소승을 버리지 않고 무당파에 소개해 주시겠다니 지금 소승은 이미 반은 개사귀정(改邪歸正)을 한 셈입니다. 하 지만 지통의 검법을 전수받았으니, 언젠가는 꼭 보답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오늘밤의 이러한 상황 에서는 소승같이 능력이 약한 사람은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부질없이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잖겠습니까. 그래서 소승은 잠시 앞에 나서지 않을 생각입니다. 소승한 테 한 가지 계획이 있으니, 훗날 선고께서 소승의 속마음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석옥주는 이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앞으 로 나아가 그 젊은 남녀가 어떠한 인물인지 보고 그들과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싶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때 갑자기 전방에서 하늘이 뒤집히는 듯한 천둥소리가 났다. 기왓장이 어 지럽게 날리고 나뭇가지가 진동하였다.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석옥주는 요일과 더 이야 기를 하고 있을 수가 없어, 몸을 날려 전전으로 나아갔다. 대전의 용마루 뒤에 숨어서 관전을 하 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들보 위에 올라가 보니 어찌 된 셈인지 공중과 지상이 모두 조용할 뿐 아무런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정원에 두 줄로 늘어서 있는 하늘을 찌를 듯한 측백나무들만 달빛 아래서 찬바 람을 맞아 '쏴악 쏴아!' 마치 파도 같은 소리를 낼 뿐 밤빛이 이를 데 없이 맑고 고요하여 전혀 살생의 전장(戰場) 같지 않았다. 잠시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까 대전 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무슨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유덕의 홍사에 갇혔다는 젊은 남녀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려고 하는 순간에 갑자기 대전 중앙에서 한 줄기 푸른빛이 날아왔다. 석옥 주는 재빨리 검광을 운용하여 적을 맞았다. 한 번 부딪치자 상대방의 칼이 두 동강이 나면서 별 똥처럼 땅으로 떨어졌다. 석옥주는 대전 안에 있는 사람이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리서려고 하는 순간, 돌연 뒤통수 쪽에서 벼락같이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미파의 새파란 후배놈! 어설픈 솜씨를 믿고 함부로 날뛰다니! 네 놈들이 신의를 지키지 않았 으니, 노승이 매정하다고 원망하지 말아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전에서 또 칠팔 명이 튀어나와 석옥주를 포위하였다. 석옥주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자세히 보니 바로 법원, 지통, 유덕, 용비, 소련, 유연랑 등이었다. 큰소리를 지르던 그 화상은 얼굴이 보름달같이 생겼고 체구가 매우 컸다. 바로 황산 자금롱(紫 金瀧)에 잠시 머물고 있는 효월선사였다. 용비는 본래 사숙인 효월선사에게 인사를 한 후에 밀실로 가서 석옥주를 겁탈하려고 했는데 지 금은 그녀가 밀실을 빠져나왔는지라 깜짝 놀랐다. 석옥주는 원수를 보자마자 안면을 바꾸려고 했으나 자신은 혼자고 그들은 패거리가 있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느껴 잠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석옥주에게 처음 공격을 가한 것은 구미선호 유연랑이었다. 유연랑은 본시 대전에서 용비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문득 달빛 아래로 사람 그림자가 나타 난 것을 보고는 아미파 사람이 아직 이곳에 남아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방이 방심을 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급습을 하여 조금 전에 패배한 수치를 만회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첫 번째 칼은 이미 금선에게 두 동강이 난 데다 두 번째 칼마저 석옥주의 손에 두 동강이 났으므로 성이 났지만, 자기 능력이 모자라는지라 감히 덤비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만 분노를 씹었다. 법원은 석옥주가 용비에게 잡혀 있고 용비가 자기의 권고를 듣지 않아 훗날 무당파와 원한을 맺 게 될 것을 염려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녀가 무사히 빠져나왔으므로 내심 다행스럽 고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아무 내색도 내보이지 않고 얼른 둘러대었다 "누군가 했더니 석도우였군요. 모두 한편이니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들이나 나눕시다." 석옥주는 마지 못해 효월대사와 인사를 나눈 후 대전으로 들어갔다. 석옥주는 유심히 주위를 둘 러보았다. 대전 안은 한 마디로 말해 쑥밭이었다. 임성조, 유종잠은 이미 허리가 잘렸고, 경중상을 입은 자 도 여럿이었으며, 몇몇 화상들이 바쁘게 시체를 치우고 핏자국을 지우기에 분주했다. 그녀는 요일의 말이 딱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방금 그 청천벽력같은 소리와 함께 공격해 온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정말로 신기할 정도로 신속해서 마음 속으로 탄복해 마 지 않았다. 석옥주는 법원에게 어떻게 해서 오늘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쳤느냐고 물었다. 법원은 긴 한숨을 쉬고 방금 생긴 일을 이야기하였다. 원래 오늘밤 아미파의 어린 소형제들은 서로가 모르는 가운데 이 개조로 나누어 각자 계략을 꾸 민 것이었다. 첫째 조는 이 진으로 나누어졌으니 제일진은 금선과 소화상이었다. 두 사람은 벽사 촌 옥청관 밖 숲 속에서 미리 계획한 대로 검광을 타고 자운사로 달려왔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선배 검선들로부터 자운사는 비밀기관이 전면에 쫙 깔려 있기 때문에 잘못 발을 들 여놓으면 검술이 정통(精通)하여도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소리를 누누이 들었다. 그래서 어지간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운사 앞에 도착하자 먼저 오행생극(五行生克)을 살핀 후 중앙인 무기토(戊己土)에서 검광을 내 려 대전의 용마루 위에 내려앉았다. 그런데 마침 공교롭게도 이곳은 법원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 이 모인 장소였다 법원은 효월선사를 비롯한 조력자가 제 때에 도착하지 않아 걱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또 좋지 않은 보고가 들어왔다. 칠수야차 용비, 소령후 유종잠, 백화랑 소련, 구미선호 유연랑이 모략 을 꾸며 여곤륜 석옥주를 밀실인 석동(石洞)에 가두어 두고 음락을 즐기려 한다는 보고였다. 법원은 깜짝 놀랐다.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비단 석옥주에게 미안할 뿐 아니라, 또 이 때문에 무당파와 원한을 맺는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보고를 들은 후 급히 용비와 유종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말렸다. 두 사람에게 빨리 손을 거두고 제발 엉뚱한 짓을 하지 말라고 부탁 하였다. 법원이 그런 이유로 자리를 뜬 지 얼마 안 되어 금선과 소화상이 그곳에 도착했던 것이 다. 소화상은 대전에 키가 크고, 작고, 뚱뚱하고, 빼빼한 삼산오악(三山五岳)의 검객들이 절 안의 흉 승 몇십 명을 거느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만만한 나머지 그 사람들 앞에 자기 솜 씨를 한껏 내보이려고 마음이 부풀었다. 그래서 금선에게 분부했다. "사제는 잠시 여기에 숨어서 함부로 움직이지마. 내가 내려가서 소란을 피워 적을 유인해낼 테 니, 그때 사제가 원앙벽력검으로 몽땅 죽여버리라구." 그는 본래 금선이 위험에 빠질까 봐 이렇게 둘러댄 것이다. 그러나 금선은 어렸기 때문에 소화 상의 말을 그대로 믿고 매복하고 있었다. 소화상은 무형검을 타고 살그머니 대전으로 들어가 돌 연히 모습을 나타내며 '히히!' 웃었다. "여러 화주님들, 고생이 많구려. 시주 좀 하시지요!" 말을 마치자 합장을 하며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철장선 축악, 벽력수 위지원, 초상비 임성조, 소화신 진랑, 피발산예 적은아, 삼안홍예 설망, 통비신원 녹청, 병유마 주홍, 명주선사, 칠종도인, 본사방장인 지통과 그 문하의 사대금강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법원이 초청한 무당 창랑우사 수심일, 유근선사, 뇌도인, 제갈영, 이 네 검선은 그날 취도인이 와 서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날짜가 아직 남았을 뿐 아니라, 녹포노조의 흉악한 행동과 절 안의 음 란한 분위기가 비위에 맞지 않아 이 일에 관여하지 않고 산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당초에 법원과 교제가 매우 깊어 이미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남아 있었지만, 단 이 틀을 묵지 않아서 심란스런 절 안 분위기에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핑계를 대 고 보름날에는 꼭 오겠다고 차례차례 자운사를 떠나갔다. 유덕은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마셔 약간 취하였다. 그러자 술주(酒)자 밑엣글자[色]가 동하여 평 소에 자기와 친한 망두타를 끌고는 뒤쪽에 있는 밀실로 갔다. 미인 하나씩을 골라 누가 정력이 센지 시합하기 위해서였다. 이 여섯 명을 제외한 자운사의 전체 인원이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돌연히 작은 화상이 불 쑥 나타난 것이다. 그가 어디로 통해서 들어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많은 사람들은 소화상의 입술이 빨갛고 이빨이 하얀 것을 보고 절 안의 제자거니 생각하고 대수 롭게 여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지통도 그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확실히 보지 못했고, 또 나이도 어려서 아미파 사람이 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본사에 와서 잠시 기거하는 화상의 제자가 무심코 대전으로 들어온 것 이려니 생각했다. 그래서 규칙에 어두울 뿐더러 우스꽝스럽게 생긴 모습을 보자 성도 났고 웃음 도 나왔다. 그러나 자기의 신분으로 화를 내기도 뭣해서 사금강을 향해 말했다. "앞에 있는 저놈은 꽤나 멍청한 놈이구나! 지금 여기가 여러 선인들이 의논하는 장소인 줄 모른 단 말이냐? 어떻게 해서 이런 당나귀 같은 놈을 대전 안으로 들여보냈느냐! 빨리 끌어내지 못할 까!" 사금강이 이 말을 듣고 어찌 태만할 수 있겠는가? 즉시 무적금강 색달마 혜능이 성큼 앞으로 나 섰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런 젖비린내 나는 어린 화상에게 힘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집어들고 밖으로 나가서 패대기를 쳐버리라 생각했다. 소화상은 지통의 말이 끝나자 덩치가 크고 포악하게 생긴 화상이 자기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 았다. 그의 솜씨가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묘칙을 구사하여 상대하기로 작정했다. 지통은 말을 하고서야 문득 작년에 주운종이 도망가고 모태와 유덕이 부상을 입은 후부터 다른 절의 승려는 기거를 허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하물며 전전에서 대전까지 오려면 몇 개 의 문을 지나야 하고 곳곳에 문지기가 있는데 이 어린 화상이 어떻게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지통은 혜능을 부르려 했다. 그때 혜능은 이미 소화상의 덜미를 나꿔채어 들 고는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괜히 의심을 했구나 싶어 지통이 웃음을 짓는 순간,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쿠, 죽겠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혜능이 이미 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어린 화상은 얼른 합장을 하며 염불을 외웠다. "아미타불." 원래 혜능은 아무 의심없이 소화상을 밖으로 끌어낼 생각만 했다. 그런데 별안간 팔이 싸늘해지 는 듯하더니 격심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소화상을 잡고 있던 팔이 자기 몸 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가! 이어서 아랫배로 주먹이 들어왔다. 그는 삽시간에 비명을 지르고 땅에 나가떨어진 것이다. 어깻죽지에서는 피가 물처럼 쏟아졌다. 여러 사람은 혜능의 팔이 잘려나간 것을 보았지만 그 어린 화상이 무슨 병기를 사용했는지는 보 지 못해 간담이 서늘해졌다. 지통은 어린 화상이 뜻밖에도 함부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보고 극도로 화가 났다. 즉시 수 십 줄기의 검광이 동시에 소화상에게 날아갔다. 소화상은 이런 광경을 보더니 깔깔 웃으며 밖으 로 튀어나갔다. 그들은 급히 검광을 거두고 쫓아나갔다. 그러나 달이 밝고 별이 드문드문하여 밝 은 빛이 낮과 같이 밝았지만 어린 화상은 이미 종적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돌연 용마루 위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 치는 것이었다. "이 천벌을 받을 흉승들아! 어르신네의 선물을 받아라!" 달빛 아래 똑똑히 드러난 그 모습은 또 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짚신을 신고 짧은 옷을 입고 있었다. 목에는 금목걸이를 두르고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매듭이 하늘을 향했는데, 손에는 한 쌍의 보검을 들고 있었다. 생긴 것이 꼭 관등보살 앞에 있는 선재동자(善才童子)와 같았다. 지통은 언젠가 법원에게 들은 적이 있는 생김새와 옷차림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급히 주위 에 경고했다. "다들 저 어린놈을 얕보지 마라! 저 놈은 제수명의 아들이니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말을 마친 지통은 소년이 칼을 거꾸로 들고 두 가닥 붉은 빛, 보랏빛 검광을 칼끝으로 쏘아대는 것을 보았다. 지통은 소년이 어머니 묘일부인 순란인의 원앙벽력검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들이 당해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급히 소리를 질렀다. "모두 조심해라!" 그러나 이미 늦었다. 벌써 검광이 뻗쳐와 초상비 임성조는 이미 몸뚱아리가 두 동강이 나버렸고, 진랑은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 왼팔에 맞아 옷과 살이 엉겨붙은 채 떨어져나가 비명을 지르고 있 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일제히 검광을 쏘아 상대방의 검광에 대항했다. 지통은 급히 법원과 유덕을 불러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금선은 정신을 집중하여 한 손의 검광으로는 몸을 보호하고 한 손의 검광으로는 적을 맞아 싸웠 다. 과연 묘일부인이 만든 보검은 유난했다. 자운사 쪽은 인원이 많았지만 조금도 우세를 차지하 지 못했다. 그 붉은 빛과 보랏빛의 두 줄기 광채가 춤을 추니 마치 두 마리의 교룡(蛟龍)이 날면 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기초가 여물지 못한 검광은 벽력검에 부딪치기만 해도 며느리가 독한 시어머니 만난 듯 빛이 변하였다. 금선은 잠시 동안의 싸움에서 한 명을 죽였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였다. 소화상은 적을 유인 만 해놓고는 어디로 갔는지 코끝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에 숨어 있는 것이라고 추측하여 한편 으로 적과 싸우며 한편으로 소리를 쳤다. "적이 너무 많아요. 소사형, 빨리 좀 도와줘요!" 몇 번이나 외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문득 자기 혼자서는 세력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니 금선은 조금 다급해졌다. 소령후 유종잠은 사람됨이 가장 교활하였다. 그는 방에서 나와 금선의 검광이 그 위세가 대단한 것을 보자 스스로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짐작하였다. 그는 금선이 어리고 또 혼자며 도와주는 사 람이 없는 것을 보고는 용마루 뒤쪽으로 돌아가 기습을 하려고 했다. 금선은 용마루 위에서 여러 사람과 대적하느라고 모든 정신을 앞쪽에만 쏟았다. 그러니 뒤쪽에 서 기습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종잠은 금선이 뒤쪽은 전혀 방비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뻤다. 곧 그의 스승 칠수야차 용 비가 전해 준 상문검을 휘둘러 한 줄기 짙푸른 검광을 금선의 머리를 향해 날렸다. 그는 적이 절 대로 피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웬 걸, 한 줄기 파란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자기의 검광 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이어서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도둑놈같이 뒤에서 공격을 하다니! 나 주경운이 왔다!" 말이 끝나자 곧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날아와 파란빛과 하얀빛의 검광을 유종잠을 향해 날렸다. 유종잠은 형세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러서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검광이 지나가면서 유종잠의 몸뚱아리는 두 동강이가 나버린 것이다. 금선은 방금 온 두 사람이 바로 백협 손남과 주경운인 것을 보고 속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더욱 신이 나서 붉은 빛과 보랏빛의 두 줄기 벽력검광을 휘둘렀다. 손, 주, 두 사람의 검광과 합쳐 세 줄기의 검광이 마치 번개치는 무지개와 같이 자운사의 검객들을 숨가쁘게 몰아붙이니 그 검객들 은 제대로 막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장선 축악이 잠시 한눈을 팔다 경운의 검광에 그의 검광이 갇혀 버렸다. 축악은 상황이 좋지 못한 것을 알았다. "안 되겠다!" 네 글자가 채 입 밖에 나오기도 전에, 손남이 비검을 움직여 비스듬히 날렸다. 축악은 기급을 해 서 옆으로 피했다. 축악의 위험을 본 지통이 급히 공중의 자기 비검을 회수하여 손남의 검광을 막았을 때는 이미 축악의 팔이 어깻죽지와 함께 떨어져 나간 다음이었다. 축악은 비명을 지르면서 땅에 쓰러졌다. 동시에 그의 칼도 주경운에 의해 두 동강이 나버렸다. 주경운, 손남, 금선 세 소협(小俠)들은 적이 꺾이는 것을 보고 의기양양했다 바로 그때 별안간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돼먹지 않은 아미파 잡종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함부로 날뛰는 거냐?" 그와 함께 목소리의 주인공도 나타났다. 흉악하게 생긴 도인이 대전 옆에 있는 월문(月門)에서부 터 뛰어온 것이다. 손을 드는 곳에 한 줄기 음침한 푸른빛 검광이 여덟 가닥의 잿빛 검광을 대동 하고 으스스하게 용마루로 날아 올라왔다. 손남과 주경운의 검광은 그것과 부딪치자 이상하게 빛이 흐려졌다. 그들은 상황이 좋지 못하다 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 금선의 벽력검은 사기(邪氣)에 대한 대응능력이 있으므로 금선은 급히 앞 으로 나가 혼자 버텨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칠수야차 용비였다. 사람들은 아미파의 세력이 떨어지자 비로소 용기백배하여 부지런히 검광을 날렸다. 검광은 일제 히 용마루 위로 올라가 세 사람의 퇴로를 차단했다. 사랑하는 제자 유종잠이 참사한 것을 보고 분통이 터진 용비는 오늘밤 이 세놈을 사로잡아 찢어죽여 복수를 하지않으면 안 된다고 이를 갈 았다. 동시에 법원도 뒤따라 와서 검광을 날렸다. 주경운, 손남, 금선, 세 사람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보고 도망치려 했으나 적의 검광에 포위되었고, 또 그 위에 법원의 검광이 더해지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용비의 검광은 금선 혼자라도 막아낼 수 있었지만, 법원의 검광은 주경운, 손남 두 사 람이 힘을 합쳐도 적수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지통을 비롯한 모두가 보통의 적수가 아니었다. 눈앞에 적의 세력이 부풀어날수록 이쪽 검광은 밀리고 위축되어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검광이 점점 시들어 가니 세 사람은 모두 숨이 가빠서 씩씩거리며 땀이 비오듯했다. '소화상은 대체 어디로 갔담? 친구로 사귈 자격이 없구나!' 금선은 이렇게 속으로 원망했다. 바로 이 위급한 순간에 돌연히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금선 아우, 걱정하지 마! 내가 제사저 등 세 사람과 함께 아까부터 여기 있었어." 말과 함께 두 줄기 금빛이 푸른빛과 하얀빛의 두 줄기 검광과 같이 남쪽에서 날아왔다. 동시에 소화상, 제영운, 주매, 오문기의 세력이 금방 커져버렸다. 원래 소화상의 무형검은 아직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고행두타처럼 몸과 칼을 같이 숨기 지 못하고 다만 검광을 빌려서 만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금선이 자기의 벽력검은 천하무적이라 고 자랑하는 것을 누누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적을 유인한 후 그 보검의 위력을 보려고 몸을 숨 긴 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금선이 다급하게 자기를 부를 때 나오려고 했으나, 주경운과 손남이 도착한 것을 보고는 다시 멈칫해 버렸다. 그들이 그런 대로 득세를 하고 있었으므로, 성질이 고행두타와 같은 소화상 은 남의 승리에 편승하는 따위의 짓을 하기 싫어 계속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 려보니 제영운 등 세 여협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곧 그들에게 다가가 사전 경과를 이야기했다. 제영운은 금선을 비롯한 세 사람이 이파(異派)의 무리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잠자코 바 라보았다. 마음 속으로 아우가 사랑스럽기도 했고 얄밉기도 했다. 사랑스러운 것은 금선이 어린 나이에 저만큼 담력이 있어 호혈용담(虎穴龍潭)에 깊이 들어가서 침착하게 적을 대하며 조금의 두려움도 없기 때문이다. 얄미운 것은 자기 말을 전혀 듣지 않을 뿐 아니라 감쪽같이 속이고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제영운의 눈에는 금선이 꼭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었다. 만약에 그냥 제멋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앞으로 큰 화를 저지를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또 자운사의 무리들을 보니 별로 특별한 재주를 가진 자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금선 으로 하여금 약간 혼이 나도록 하여 경계심을 심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일행에 게 용마루 뒤에 숨어서 우군이 위험하지 않는 이상 나서지 말라고 했다. 처음에는 금선을 비롯한 세 사람의 형세가 순조로운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후 용비가 나와 구자모음혼검을 펼치자 주경운, 손남 두 사람은 그의 적수가 못되 어 검광이 뒤로 밀렸다. 금선의 벽력검 역시 비록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도대체가 중과부적이었다. 소화상은 상황이 위험한 것을 보고 제영운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곧 한 줄기 금광을 날렸다. 마침 공교롭게도 법원의 머리 위에 있는 홍사비검과 금광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동시에 제영운 등 세 사람이 소리를 내지르면서 각자 자기의 검광을 발출하였다. 금선은 지원자가 온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곧 손남, 주경운과 함께 적을 막는 한편 누나에게 다가갔다. 제씨 오누이의 보검은 부정(不淨)이 동하지 않아 용비의 구자모음혼검을 막아냈다. 소화상은 법원의 검광이 다섯 줄기 홍사(紅絲)인 것을 보고 자기가 만든 오도검광을 동 시에 뽑아쏘았다. 금빛과 붉은 빛 두 색깔의 열 줄기 검광은 서로 꼬여서 한 덩이가 되었다. 주매, 오문기 손남, 주경운 네 사람은 나머지 사람을 맡았다. 법원은 오늘밤에 침입한 이 아미파 사람들이 모두 나이가 어린 데도 각기 놀랄 만한 솜씨를 지 니고 있는 것을 보자, 그들 뒤에는 또 얼마나 고강한 고수가 많으랴 싶었다. 비록 지금 맞닥뜨린 무리들은 자기들을 이기기 어렵지만 그래도 마음으로 찬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유덕과 망두타는 밀실에서 하나는 양화를, 하나는 가녀(歌女)를 껴안고 편안하게 쾌락을 즐 기고 있었다. 그런데 홀연히 잇따라 세 차례나 긴급보고가 왔다. 아미파가 쳐들어 왔는데 모두가 나이 어린 놈들로서 솜씨가 매우 대단하니 빨리 와 달라는 보고였다. 두 사람은 마침 한창 재미를 보고 있을 때였다. 처음에 유덕은 다만 아미파의 조무라기들이 동 정을 살피러 온 것이라 여겼다. 이쪽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그들이 어디로 도망가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여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연달아 지원 요청이 올 뿐 아니라 벌써 사상자 가 여럿이고, 한 발 먼저 달려간 칠수야차와 금신나한까지도 이기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야 약간 당황하였다. 유덕은 즉시 망두타를 불렀다. 망두타는 마침 발가벗은 채 젊은 미모의 가녀를 껴안고 침상에서 그짓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장 중요한 고비에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는가? 일부러 옷을 입고 버선을 신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유덕이 그에게 옷을 빨리 입으라고 재촉할 때에 또 급보가 왔다. 유덕은 비로소 상황이 몹시 좋 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망두타를 기다릴 수 없어 그는 먼저 달려갔다. 망두타는 유덕이 먼저 가는 것을 보자, 마침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었다 싶어 옷과 버선을 벗지 도 않은 채 굶주린 호랑이가 양에게 덤벼드는 자세로 다시 침상으로 뛰어 올라가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그 여자에게 덤벼들었다. "아미파는 무슨 놈의 아미파야! 내가 먼저 네 뱃가죽 위에서 죽으리라!" 이렇게 지껄이며 다시 그짓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 한 마디는 얼마 있지 않아 그대 로 들어맞은 것이다. 유덕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 뒤라 감기에 걸릴까 봐 염려스럽긴 했지만 사태가 워낙 급박 하였기 때문에 채 옷도 제대로 꿰어 입지 못한 채 양화를 밀쳐버리고 달려나갔다. 대전에 도착해 보니 여러 가지 빛깔의 수십 줄기의 검광이 마치 교룡이 떼지어 바다에서 노는 것같이 공중을 가 득 날고 있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두 줄기의 금빛과 붉은 빛과 보랏빛의 두 검광이 특히 뛰어났 다. 그는 몸을 솟구쳐 대전의 모퉁이로 날아가며 손을 휙 쳐들었다. 순간, 고리가 날자마자 한 줄기 광채를 이루더니 삽시간에 적의 검광을 중간에 가두고 말았다 용비는 제씨 오누이의 검광이 유덕에게 갇힌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그가 손 을 한 번 쳐들자 구자모음혼검이 제씨 오누이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별안간 '빡!'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유덕의 여의권(如意圈)은 금선의 검광에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에 뿌려지고 말 았다. 유덕은 이 모양을 보자 매우 성이 났다. 그래서 높은 소리로 외쳤다. "여러 도우들은 물러서시오. 내가 이 잡종들을 잡아버리겠소!" 자운사 쪽의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 유덕이 곧 홍사를 뿌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법원과 용 비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도의 검법을 수련했으므로 사오(邪汚)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 었다. 그래서 적과 긴박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 이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며 각기 검광 을 거두어들였다. 유덕은 몸을 공중으로 솟구치며 한 줌의 홍사를 휙 뿌렸다. 삽시간에 천지가 캄캄하게 어두워지 며 달과 별도 빛이 가려져 버렸다. 누런 안개와 붉은 구름이 은은한 우레소리를 띠고 천지에 가 득차 영운 등 일곱 명의 머리를 향하여 내려오고 있었다. 소화상이 고개를 들어 보고서 외쳤다. "이거 재미적군!" 소화상은 원래 무형검을 이용하여 금선을 데리고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금선이 너무 멀리 떨 어져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금선을 남겨 둔 채 머리를 번쩍이더 니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제영운은 방금 유덕이 나타날 때 차림새가 이상한 것을 보고 미리 주의를 했었다. 또 그가 사람 들에게 물러나라고 외치는 것을 듣고 적이 요술사법을 쓸까 봐 암암리에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 다. 그래서 그녀는 유덕이 뿌린 홍사의 위력이 대단한 것을 보자 재빨리 가슴에서 옥청대사가 준 오운신교망을 꺼내들었던 것이다. 자운사, 불타다 誅淫孼 化焚色界天 救麗姝 大鬧紫雲寺 홍사가 그들의 머리 위 세 자가 채 못되는 곳까지 내려오자, 제영운은 급히 오운신교망을 공중 으로 던졌다. 그러자 금방 한 폭의 먹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 넓게 퍼져 그들의 머리를 보호하면 서 홍사를 떠받쳐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 법원과 용비는 자기의 검광이 홍사에 상할 것이 두려울 뿐 아니라 아미파 젊은 것들이 홍사에 죽을 것이 틀림없는지라 각기 검광을 거두고 물러나서 동정을 살폈다. 제영운은 홍사를 보았을 때 이미 유덕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홍사에 닿지 않도록 검광 을 거두어들여 오운신교망 밑에 숨기라고 일행에게 경고했다. 그녀는 오운신교망이 과연 위력이 대단한 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일말의 불안감마저 떨쳐버렸다. 그런데 일행의 숫자를 파악해 보니 소화상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찾고 자시고 할 도리가 없어서 놀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법원은 제영운이 오운신교망을 펼쳐 홍사를 막아내는 것을 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용비에게 눈짓을 하여 두 사람이 일시에 다시 검광을 쏘아내어 상대방의 아래쪽을 공격했 다. 그러나 웬 일인지 두 사람의 검광은 제영운 일행의 앞에까지 날아가기는 했으나 마치 어떤 물건 에 가로막힌 듯이 오운신교망 밖에서 맴돌기만 할 뿐 한 치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유덕은 화가 뻗칠 대로 뻗쳤다. 곧 호로병 안에 든 추혼탈명홍사를 모두 쏟아 날려보내 영운을 비롯한 여섯 사람을 빈틈없이 둘러쌌다. 그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해놓고 다시 방법을 강구하여 사로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 한 시진이 지났다. 제영운 일행은 비록 아무도 부상을입진 않았지만, 유덕이 계속 홍 사를 뿌려대는 바람에 오운신교망의 지탱이 점점 어려울 것 같았다. 머리 위의 오운신교망은 홍 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점점 내려앉고 있었다. 유덕은 이것을 보고 매우 기뻤다. 제영운 일행이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별안간 하늘을 뒤흔드는 벼락소리가 났다. 기와가 어지럽게 날리고 창살이 모두 부서지며 삽시간에 누런 안개와 붉은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 졌다. 제영운 일행은 적이 또 무슨 사술(邪術)을 쓰는구나 싶어 겁이 덜컥 났다. 그래서 오운신교망을 거두어들인 다음 각자가 검광을 움직여 몸을 보호하였다. 주의하여 앞을 쳐다보니, 문득 공중에서 두 사람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수려하게 생긴 선사고, 한 사람은 머리와 수염이 모두 하얀 뚱뚱한 화상이였다. 제영운은 이 두 사람이 동해삼선 가운데 한 사람인 고행두타와 황산 자금롱의 효월선사라는 것 을 알았다. 그러나 한 사람은 정(正)이며 한 사람은 사(邪)인데 어떻게 같이 왔는지 알다가도 모 를 일이었다. 금선은 어린만큼 침착성이 부족했다. 이 사람들이 틀림없이 자운사를 도우러 왔거니 싶어 사정 을 묻지도 않고 즉시 자신의 벽력검을 그 뚱뚱한 화상에게 겨누어 한 줄기 보랏빛을 날려보냈다. 고행두타가 급히 꾸짖었다. "무례한 짓을 하지 마라!" 그가 손을 들어올리자, 금선의 쌍검은 그의 소맷자락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제영운은 급히 금선을 가로막고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며 그가 누군지를 알려주었다. 법원을 비롯한 자운사 사람들은 효월선사와 고행두타가 동시에 나타나자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어 몹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 물어보려고 하는데, 고행두타가 효월 선사를 향해 말했다. "사형께서 이 후배들과 다툴 것까지야 없지 않겠소. 방금 한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 라오. 만약 받아들일 수 없다면, 모레 저와 이로가 옥청관에서 가르침을 기다리겠소이다." 말을 마친 고행두타는 효월선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소매를 한 번 펼쳤다. 순간, 정원에는 금광이 가득찼다. 고행두타는 제영운을 비롯한 여섯 사람을 거느리고 공중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 법원은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한 후 곧 효월선사를 대전으로 오르게 했 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시켜 시체와 부상자를 대전 안으로 운반하게 하여 시체는 입관하고 부 상자는 치료를 받게 하였다. 용비는 사랑하는 제자가 죽었으므로 슬픔과 적개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장 벽사촌 으로 달려가 복수를 하자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이 모자란 것을 알고는 모두 효월선사에게 전권을 일임하였다. 효월선사는 들어가 좌정한 다음 자기가 어떻게 찾아온 내력을 말하였다. 원래 그는 허비랑의 재촉을 받자 달려와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아미파에는 숭 산이로를 비롯하여 많은 검선이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암만 생각해 봐도 적은 숫자로 많 은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두 제자에에 먼저 가라고 하고 자기는 황산 자금롱을 떠나 사천(四川: 금불사(金佛寺)로 갔던 것이다. 가장 뜻이 맞는 친구인 지비선사(知非禪師)를 찾아 자기를 대신하여 천동(川東)의 은명검선(隱名劍仙) 종선생(鐘先生)을 청해오도록 부탁을 하고는, 그외 친한 사람을 스스로 청하 였다. 그는 아미파가 정확하게 정월 보름날 자운사를 공격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비선사와 십사 일 밤에 자운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다음 자기는 십오 일 밤에 금불사에서 검광을 타고 먼저 이곳으로 출발하였다. 자운사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왔을 때 문득 수십 줄기의 검광이 번개처럼 공중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미파와 자운사의 사람들이 벌써 한판 벌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검광 을 재촉하여 내달으려는데, 별안간 귓가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사형께서는 어디로 가시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효월선사는 누군가가 운로(雲路) 상에서 자기를 따라와 말을 건네는구나 싶어 깜짝 놀라 재빨리 검광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따라오는 사람은 바로 동해삼선 중의 하나인 고행두타가 아닌가! 고행두타로 말하면 마음에 드는 제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의발(衣鉢)을 전수해 주고 이미 자기는 다시 속세 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효월선사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 쌍방의 충돌이 격렬할 때 돌연히 나타났으니, 그 의도하는 바를 짐작할 수 없지 는 않으나, 효월선사로서는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대답하였다. "빈승은 이미 오랫동안 바깥 일에 상관하지 않았소. 다만 이전에 한 친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지금 그가 아미파와 약간 다툼이 생겼다고 빈승에게 도움을 청하니 도의상 거절할 수 없기 에 빈승은 더 이상 한적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소이다. 사형께서는 의발을 누군가에게 계승해 주고 조만간에 성불(成佛)하여 승천할 것이란 말을 들은 지 오래 되었는데, 어떻게 속세에 와서 유희(遊戱)하시오?" 고행두타는 이 말을 듣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몸도 어쩌다 속세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과 마찬가지로 상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구려. 내가 보기에는 이번 두 파가 서로 마찰을 일으킨 것은 실로 정과 사가 양립할 수 없는 까닭 때문인 것 같소이다. 사형께서는 옛날에 아미파 도우들과 동문의 우의도 있고, 장미 진인의 유언도 있는데, 어찌 이 소용돌이에 끼어들어 고생을 하려 하시오?" "그대의 말씀은 어폐가 있소이다. 아미파는 장미진인이 돌아가신 후부터 자기세력만 믿고 약자 를 억눌렀소. 더우기 후배들을 방임하여 안중무인이니 사람들이 어찌 참을 수 있겠소. 예를 들면 오늘밤만 해도 그렇소이다. 저기를 봐요. 저 검광이 아미파가 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 아니면 무 엇이겠소? 오늘 일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고, 이미 날짜를 정했으니 이 싸움은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소이다." 고행두타는 타일러도 효월선사가 듣지 않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재난이 목전에 있으니 어찌 해탈할 수가 있겠소. 어쨌든 오늘 밤은 정식 싸움이 아니니, 나와 사형이 함께 가서 그들의 싸움을 멈추게 하고, 보름날 밤에 사형의 가르침을 기다리겠소이다." 효월선사는 이 말을 듣자 냉소를 지었다. "좋소이다." 그리고는 고행두타의 다음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검광을 타고 먼저 자리를 떴다. 자운사에 막 도착하니 벼락같은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고 홍사가 난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행진기 태을 신뢰로 홍사를 부수고 제영운 일행을 위험에서 구해내었다. 효월선사는 고행두타의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자기에게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태을신뢰를 쓰자 이것은 분명히 자기에게 본때를 보이려는 수작이구나 싶어 적잖이 불쾌했다. 그 래서 한 마디 하려고 했으나, 이 때는 이미 고행두타가 제영운 일행을 거느리고 허공을 뚫고 사 라져 버린 다음이었다. 효월선사는 몹시 불쾌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대전으로 들어온 효월선사는 거드름을 피우며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몇 명의 고수를 청했는데 머지 않아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 두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는 아미파에서 지정한 날짜와 장소대로 보름날 밤에 벽사촌으로 가서 승패를 가름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밀실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석옥주는 처음엔 사람들과 만나지 않고 즉시 돌아가려고 했었 다. 그러나 사태의 귀추가 궁금할 뿐 아니라 효월선사로부터 방금 일어난 일들을 듣고 싶기도 해 서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따라 대전으로 들어왔다. 법원은 석옥주가 도망나온 것을 보고 다행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러나 용비는 석옥주의 밀실탈출이 법원의 조작이 아닌가 의심이 갈 뿐 아니라 조금 전에 말다 툼까지 했으므로 법원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대전의 등불 아래 미끈하고 교태스럽게 비치는 석옥주의 몸매를 보자 맛있는 양고기를 입 앞에서 놓친 것 같아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석옥주는 효월선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가, 문득 자신이 용담호혈(龍潭虎穴)에 들어와 있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효월선사와 여러 사람들에게 예를 갖추고 말했다. "이 몸은 본시 무당의 문하로서 다른 종파와 원수진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전에 만묘선고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그분의 비검전서를 두 차례나 받자 특별히 자운사에 와서 약간의 도 움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간사한 자의 함정에 빠져 자칫하면 여러 해의 공력이 하루아 침에 물거품이 될 뻔하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사문의 명예에 먹칠할 뻔했으나 다행히 함정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원수를 가려 복수를 하고 싶지만, 부탁받은 일이 끝나지 도 않았는데 도리어 큰일에 방해가 되어 만묘선고의 성의를 저버리게 될까 봐 생각을 바꾸었습니 다. 다행히 지금 효월선사께서 오셨고 머지 않아 또 적지 않은 검선들이 올 모양이니, 저는 공력 이 부족하여 남아 있어도 별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청산(靑山)이 바뀌지 않으면 후에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저는 여기서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발을 한 번 굴러 검광을 타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용비는 석옥주의 말에 가시가 있는 데다가 지금 그녀를 그냥 가게 두면 무당파와 원수를 맺게 될 것이 뻔했다. 차라리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끝장을 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 천한 년이 우리를 배신하고 어디로 도망가려고 하느냐?" 이렇게 욕을 퍼부으며 즉각 몸을 솟구쳐 대전 밖으로 나간 용비는 손을 치켜올려 구자모음혼검 을 들고 석옥주를 뒤쫓아 갔다. 석옥주는 검광을 타고 막 떠나려다가 문득 뒤에서 용비가 따라 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구자 모음혼검의 위력이 대단하여 자기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망설 이고 있을 때 용비가 검광을 써서 그녀를 빈틈없이 포위하여 빨리 내려오라고 윽박질렀다. 석옥주는 할 수 없이 용마루 위로 내려왔지만 매우 낭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로잡힌다면 욕 을 당할 것이 아닌가. 그녀는 즉시 칼을 들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문득 귓가에 어떤 사람 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시주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시오. 못 이기는 척 내려가면 좀 있다가 누군가가 그대를 구해 줄 것이오." 목소리가 매우 낯익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시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밑에서는 내려오라 고 용비가 계속 재촉하고 있었다. 효월선사는 법원에게 진상을 듣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석옥주더러 화 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선 내려오라고 권하였다. 석옥주는 어쩔 도리가 없어 못 이기는 체 용마루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대전 안으로 들어갔 다. 그녀는 대전 한가운데 서서 용비를 가리키며 욕을 퍼부었다. "너희들은 황음무도한 사마(邪魔)들이다. 더구나 네 놈은 나를 끌여내려 어떻게 할 작정이냐? 나 와 네 놈은 원한이 뼈에 사무쳤으니, 이 세상에 네 놈이 있으면 내가 없고, 내가 있으면 네 놈이 없을 것이다. 머지 않아 누군가가 네 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아라." 감정이 복받친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효월선사는 용비의 그런 추태가 매우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석옥주가 싸잡아서 욕을 한 바람에, 음란한 짓을 한 자들은 모두가 성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자기가 비록 연배가 가장 높지만 그렇다고 한 쪽만을 편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생각한 효월선사는 용비가 석옥주와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먼저 말을 끄집어냈다. "석도우께서 이곳에 온 것은 원래 좋은 취지에서였소. 용도우와의 사이에 오해가 발생한 것은 예기치 못한 일입니다. 그대가 돌아가는 것은 제삼자가 상관할 수 없지만, 아미파와의 싸움이 임 박했으니 약간의 문제가 생기는구려. 노승의 얇은 얼굴을 봐서라도 꾹 참고 사흘만 더 머물러 주 시오. 사흘 후에는 마음대로 해도 탓하지 않으리다. 모든 것은 이 노승이 책임지겠소. 석도우의 생각은 어떠시오?" 이 뜻은 원래 두 사람의 사이를 잠시 완화시킨 후에 기회를 보아 석옥주가 도망할 수 있게 해주 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옥주는 자운사에 있는 무리는 다 그렇고 그런 부류라고 단정지었다. 그래서 그녀는 효 월선사의 선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기분이 아니었다. 다시 한바탕 욕을 퍼부으려고 하는 순간, 돌 연 멀리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흉악하게 생긴 한 화상이 뛰어 들어와 보고 를 하였다. "뒤쪽 대전에 불이 났습니다." 지통이 당황하여 사람들을 데리고 불을 끄러 나갔을 때, 또 창고와 밀실 등 방에서 불이 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용비와 유덕은 밀실에 불이 났다는 보고를 듣자, 그 속에 있는 여자 중의 두 사람은 자기네가 가장 총애하는 여인들인지라 마음이 몹시 급했다. 보고를 듣자마자 유덕이 먼저 달려갔다. 용비는 석옥주를 가리키며 법원에게 말했다. "이 계집년은 그대에게 맡기겠소. 만약 이 계집년이 도망간다면그대와 끝장을 내고 말 테니 그 리 아시오." 말을 마치자 사람들과 함께 불을 끄러 달려갔다. 이때 대전 안에는 밀실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가장 사랑하는 여자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허겁 지겁 달려가 버린 바람에 마침내 안에는 법원, 석옥주, 효월선사와 그 제자만이 남아 있었다. 석옥주는 용비가 자리를 뜨자 도망을 치려고 했었지만 용비가 나가면서 한 말이 있으므로 차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법원으로 말하면 자기가 당해내기 어려운 상대일 뿐 아니라 효월선 사는 그보다도 훨씬 고강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켠에 서서 씩씩거리고만 있었다 이때 밖은 붉은 불길이 하늘을 물들이며 더욱 거세어져, 바야흐로 자운사는 잿더미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 효월선사에게는 불을 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다만 그가 비록 이파(異派)에 투신하긴 했 지만 그것은 당시의 한순간 노여움 때문이었지, 양심이 깡그리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자운사에 온 것도 각파가 연합하여 아미파와 대적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복수하려는 것뿐 이었다. 그러나 자운사에 와서, 모여 있는 위인들의 이모저모를 보니 성공하기 힘들겠다는 느낌이 들어 울적하던 참이었다. 사방에 불이 나는 것으로 보아 아미파 침입자가 불을 지른 것이 명백했 다. 따라서 이 기회를 빌어 음탕한 소굴을 없애는 것도 좋겠다고 여겼다. 이 절은 아미파와 싸우는 데 별 도움도 되지 않으니 차라리 그냥 타도록 놓아 두고, 거의 다 탔을 때 나가서 첩자나 잡으 리라고 생각했다. 효월선사는 원래 석옥주에게 기회를 보아 도망가라고 할 참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입을 열자마 자 석옥주가 욕을 퍼붓는 고로 그녀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것을 알고는 다시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효월선사 앞에서 시중을 들던 주홍과, 녹청은 석옥주가 매우 불손한 것을 보고 성이 났지만, 자 기 스승이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차마 앞으로 나설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이때 밖의 불길은 많은 이파의 검선들에 의해 가까스로 잡히는 듯했다. 석옥주가 어떻게 도망갈 까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문득 귓가에 어떤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는 고행두타의 제자 소화상입니다. 동해에서 선배님을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선배님은 멋 도 모르고 나쁜 무리를 도우러 왔다가 함정에 빠진 것을 알기 때문에 특별히 선배님을 구해 드리 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희 사부님처럼 무형검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고 다만 무형검을 써서 몸을 숨겨 날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선배님은 제가 모습을 나타내면 재빨리 저의 옷소매를 잡으 세요. 그러면 제가 선배님을 모시고 나갈 수 있으니까요." 석옥주는 이 말을 듣고서 문득 깨달았다. '아까 밀실에서 도망나올 때 만났던 어린 화상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 그녀는 마음 속으로 매우 기뻐하며 정신을 집중하여 기회를 기다렸다. 무당파에는 몇 명의 재사(才士)가 있었다. 효월선사는 그들을 거의 다 한 번씩 만나본 적이 있는 데, 그중에서도 석옥주의 스승인 반변노니(半邊老尼)가 특별히 뛰어난 존재였다. 때문에 석옥주와 원한을 맺어서 좋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몹시 필요한 이때 용비의 비위를 건드려 그의 구자모음혼검과 그 스승의 도움을 차단하는 태도를 공공연히 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때 돌연 깔깔 웃는 소리가 나면서 키가 작고 뚱뚱한 어린 화상이 나타났다. 화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석옥주 앞으로 다가갔다. 법원은 그가 오늘밤에 쳐들어 온 아미파 아이들 중에 가장 뛰어 난 자란 것을 알아보았다. 사람 을 부를 겨를도 없이 뒤통수를 쳐서 검광을 날리며 외쳤다. "선사님, 저 자를 놓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소화상은 이미 석옥주 앞에 가 있었다. 법원의 검광이 뻗어오자마자 머리를 번쩍 흔들더 니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효월선사는 석옥주와 소화상이 무형검을 빌어 도망가는 것을 보고 소매를 한 번 펼쳐 검광을 타 고 뒤쫓아 갔다. 그 소화상은 어떻게 해서 다시 나타난 것일까? 그는 먼저 용마루 위에서 자운사 사람들과 한창 싸우던 때에 유덕의 홍사가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자 금선을 돌볼 틈도 없이 먼저 무형검을 빌어 공중에 숨어버렸다. 그러다가 제영운이 한 폭의 오운신교망을 펼쳐 여섯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보고는 당장은 별 위 험이 없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벽사촌으로 돌아가 원군을 청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 해 보니 오늘밤의 거사는 웃사람들의 허락도 못 얻은 채 몰래 나와서 벌인 소동이므로 패하고 돌 아간다면 망신을 당할 것이 분명하였다. 하물며 자운사 쪽의 하늘에 붉은 빛이 가득하고, 벽사촌에서는 취도인을 보내어 수시로 탐색하 고 있는 형편이니 동료들이 위기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필요없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악을 보고는 참지 못하였다. 그는 모두 전방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틈을 타서 뒤쪽으로 돌아가 혼란을 불러일으키려고 생각하 였다. 몸을 날려 후전으로 들어갔을 때 문득 한 화상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정원에 만들어 놓은 작은 동산 뒤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이 사람이 바로 지객승 요일이었던 것이다. 소하상은 본래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두고 보자 싶어 몸을 숨겨 뒤따라 석굴로 들어갔다. 석굴 중간에 도착하자 요일이 돌 하나를 옆으로 치우니 한 개의 쇠고리가 나타 났다. 그 쇠고리를 왼쪽으로 세 번을 돌리니 '구르릉!'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땅굴이 나타났 다. 여기저기 등불이 켜져 있었고, 사방 칠팔 자 정도의 공간으로써 아래쪽으로 뻗은 돌계단이 보 였다. 소화상은 여전히 몸을 감춘 채 요일의 뒤를 따라갔다. 이 장 정도 걸어 들어가니 길을 비추는 유리등이 있고, 정면 석벽에 <개대 환희(皆大歡喜)>라는 커다란 음각 글자가 보였다. 요일이 먼저 '환' 자 앞으로 가서 그 밑에 달린 구리로 만든 손잡이를 돌려 돌문을 열었다. 그리 고는 고개를 들이밀더니 낮은 소리로 '죽일 것들!' 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소화상은 여기가 틀림없이 흉승들의 음락장소라 생각했다. 그러나 요일이 왜 '죽일 것들!'이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요일이 그 자리를 떠난 후 자기도 고개를 디밀어 본 소화상은 불끈 노기 가 치솟아 올랐다. 본래 밀실은 모두 네 곳인데 요일과 소화상이 번갈아 들여다 본 그곳은 바로 유덕과 망두타가 양화 같은 음녀를 데리고 즐기던 장소였던 것이다. 망두타는 유덕이 나간 후에도 다시 한 음녀와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양화란 계집이 그 방 면에 뛰어난 물건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양화는 노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자기에게 차례가 오 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지금 모두들 정신없이 적과 싸우고 있고 양화는 지금 옆방에 있으니 아무 도 신경쓰지 않는 이 기회를 놓칠손가. 이런 생각이 들자 벌떡 일어난 망두타는 곧장 옆방으로 달려갔다. 한편 양화는 한창 절정의 시기에 사람이 와서 유덕을 불러가 버렸으므로 못내 아쉬웠다. 게다가 유덕과 술을 몇 잔 마셨기 때문에 몸이 나른하고 기분이 이상야릇하였다. 침상에 누워 먼저 한숨을 자려 하였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엎치락뒤치락 몸을 뒤채기만 하 였다. 처음에는 망두타도 유덕을 따라 적을 상대하러 나간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 있으니까 옆방 에서 미묘한 신음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그녀는 더욱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이 불자락을 꽉 잡고 이빨을 사려 물었다. 좀 있으니까 그제사 옆방에서는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간 조용하더니 돌연 누군 가가 자기 방으로 걸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아하! 저 화상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내 맛을 보려고 오는군.' 그녀는 천성적으로 음탕한 데다 또 무료하던 차라 상대가 누구든지 자기를 즐겁게만 해준다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흉승과 탕녀는 한바탕 음락을 즐겼다. 망두타는 그러고도 모자라 또 옆방으로 가서 아까의 여인과 다시 즐겼다. 그렇게 한참 즐기는 도중에 요일과 소화상에게 그 장면을 들켰던 것이다. 요일은 비록 그 같은 추태를 혐오하긴 했지만 자주 보아왔었고 또 자기의 능력이 모자라 함부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화상은 천성이 정직하여 악을 보면 못 참는 성미고 보니 어찌 그런 추태를 그냥 보고 넘기겠는가? 즉시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간덩이가 부운 흉승놈!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감히 음탕한 짓을 하다니, 오늘 네 놈의 죄값을 치르게 해주마!" 망두타는 누군가가 들어와 욕을 하자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방어를 하려 고 하는 순간 이미 소화상의 검광이 번쩍였고, 동시에 그와 양화의 머리가 떨어졌다. 소화상은 침상 구석에 발가벗은 한 여인이 기절해 있는 것을 보았지만 더 살륙을 하고 싶지 않 아 망두타의 머리를 들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요일을 찾았지만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방금 요일이 한 것처럼 석벽 앞으로 가서 여러 곳을 더듬어 암실의 기관을 찾았다. 의외로 쉽게 기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석벽이 움직이면서 한 사람 정도 출입할 수 있는 통로가 나타났다 소화상은 무예가 고강할 뿐 아니라 간도 컸다. 망설이지 않고 걸어 들어갔다. 몇 발짝 들어가지 않아 한 칸의 석실이 보였다. 게다가 문은 반쯤 열려 있었으므로, 그는 고개를 들이밀고 보았다. 한쪽 구석에 한 여인이 경계 태세를 취한 채 있는데, 요일이 침상 쪽으로 다가가면서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소화상은 처음엔 요일과 석옥주 간에 무슨 은밀한 치정관계가 있는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거 동을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문득 그는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오기 전에 미리 통로 밖으로 나가서 대기하다가 망두타의 머리를 요 일에게 집어던진 것이다. 두 사람이 바깥에 나와서 달빛 아래 섰을 때에야 소화상은 그 여인이 무당파 고수인 석옥주임을 알아보았다. 이전에 동해에서 그들 자매를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자기 스승이 그 자매는 기초가 단단하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은 바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즉시 몸을 숨겨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고서야 사정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제영운 등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전전으로 가려고 하다가 돌연 벼락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기 스승이 온 것을 알고 기뻐서 급히 전전으로 달려가 보았다. 과연 스승인 고행 두타가 이미 제영운 등을 구하여 벽사촌으로 떠난 뒤였다. 그래서 그도 뒤따라 가려고 하였으나 마침 효월선사를 비롯한 자운사 사람들이 대전에서 회의를 하는 것을 보고는 좀더 동정을 살펴도 좋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는 효월선사가 매우 대단한 인물임을 알았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만 한쪽 구석에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었다. 그래서 석옥주가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용비가 나와서 막는 것을 보고서야 석옥주가 이곳에 온 이유와 그동안의 사정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구하려고 귓가에다 몇 마디 말 을 했던 것이다. 석옥주가 내려간 후 용마루 위에서 그는 문득 후전에 불꽃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불은 후전에 켜 놓은 유리등이 방금 벼락소리에 땅에 떨어지면서 건물로 옮겨붙은 우연한 화재였던 것 이다. 그런데 모두들 부상자를 치료하고 시체를 치우느라고 아무도 주의를 하지 않아 불은 번졌고 창 틀에 옮겨 붙으면서 점점 커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발견하였을 때는 이미 진압하기 어려울 정도 의 대화재였다. 소화상은 후원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급히 뛰어 내려와 동서 양쪽 건물로 가서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밀실로 가서 기관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밀실에는 수 십 명의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들이 양화와 망두타의 시체 옆에 서 있었다. 조금 전에 기절해 있 던 여인은 이미 깨어나 사람들에게 망두타와 양화가 살해당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자운사는 전방이 모두 삼백여 칸이나 되었다. 또 따로 네 개의 밀실이 있어 지통이 행락하는 곳으로 사용해 왔다. 마지막 밀실은 세 개의 땅굴이 통해져 있었는데, 하나는 방장실로 통하고, 방장실은 또 정원에 구축된 작은 동산의 굴을 통하여 후전 계단 앞으로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바로 이전에 주운종이 갇혔던 곳이다. 또다른 두 개의 땅굴은 담장 밖으로 통했으며, 그곳에는 따로 수십 칸의 화려한 방이 있었다. 바 로 여인들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녀들의 거처는 사면이 높은 담으로 둘러 쌓여져 있었다. 화상 과 자기 위해 땅굴로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들이 나갈 문이란 전혀 없었다. 이 여인들의 대다수는 모두 흉승들에게 잡혀와 간음을 강요당했다. 비록 먹고 입는 것은 염려하 지 않았지만 고향의 부모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날이 갈수록 자연히 담을 넘 어 도망가려는 여인이 생겼다. 그러나 악랄한 지통은 높은 담 부근에 부하들을 매복시켜 놓고 또 수십 마리의 맹견을 길러 담 밖에 풀어놓았다. 그리고는 고의로 도망갈 기회를 주었다. 가련한 여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도망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도망은커녕 매복하고 있는 화상들에 게 잡혀 죽지 않으면 맹견에게 물려 죽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나머지 여인들은 너무 놀라 혼비백산하였다. 눈물을 머금고 화상들에게 몸을 바치는 것 이외에 누구도 감히 도망가려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 네 개의 밀실에는 각 방에 모두 종이 설치되어 있었다. 종이 울리면 여인들이 우루루 나와서 흉승들의 선택을 받았다. 방금 망두타와 음락을 즐긴 그 여자의 이름은 봉선(鳳仙)이라고 하는데, 어느 탐관오리의 딸이었 다. 해임당한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천동에서 지통이 보낸 사람들에게 탈취당해 온 것이다. 그녀는 용모가 뛰어나 흉승들에게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하룻밤도 혼자 지내는 날이 없었으니, 이것도 탐관오리의 인과응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밤에도 그녀는 불려나와 재미를 볼때 돌연 한 어린 화상이 들어와 망두타와 양화를 죽이는 것을 보고는 즉시 기절해 버렸던 것이다. 잠시 후에 깨어난 그녀는 두 시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무심결에 종을 잡아당겼다. 모든 여자들이 종소리를 듣고 밀실로 와서 원인을 물었다. 그래서 모두들 자운사에 뜻밖의 재난 이 닥쳤음을 알아챘다. 바깥 출구에는 흉승들이 빈틈없이 매복하고 있고 게다가 담은 높아 넘을 수도 없으므로 모두들 하얗게 질려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녀들이 그렇게 무서워 불안에 떨고 있을 때, 홀연 긴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어린 화상 하나 가 날아 들어왔다. 여자들은 절 안의 동승으로만 여겨 주의하지 않았으나, 봉선만은 그가 방금 살인한 사람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라 급히 소화상을 바라보며 꿇어앉았다. "부처님! 나한(羅漢)님,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양화를 죽인 분이 바로 이 나한 어른이셔, 다들 빨리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어!" 소화상이 다시 돌아온 것은 불을 지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인들이 애걸복걸하는 것을 보니 차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앞에 석문이 이미 열렸으니 빨리 도망가시오. 불에 타 죽지 않으려면!" 이렇게 말한 다음 석실에 있는 등불을 들어 불이 잘 붙을 만한 곳을 찾아 던졌다. 여자들이 이 광경을 보자마자 일시에 다투어 빠져나갔다. 소화상은 몇 개의 밀실에 불을 다 지른 후에야 튀어나왔다. 여인들은 다급한 나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몇 명이 소화상의 말대로 전방을 항해 뛰어 갔다. 과연 석벽이 열려 있었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으므로 후다닥 달려나갔다. 그러나 몇 명의 담이 작은 여인들은 땅굴을 통해 원래의 처소로 돌아갔다. 이 밀실은 모두 지하에 지은 것이라 본래는 불을 내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습기가 많은 데다 또 지통이 화려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입구의 기관부분을 제외하고는 문과 바닥을 거의 나무로 만들었고, 게다가 가구와 침구들도 모두 불이 잘 붙는 물건이라 소화상이 불을 지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불꽃이 지면으로 솟아나왔다. 도망쳐 나온 여자들은 엉겁결에 큰소리로 외쳐댔다. "불이야! 사람 살려요!" 그래서 순라를 돌고 있던 중들이 뛰어와 여자들을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한편, 전전에다 보고를 했던 것이다. 이때 지통 일행은 동서쪽 건물의 불을 끄고 있었다. 그런데 밀실에 불이 났다는 보고가 왔으므 로 자기가 반평생 공을 들인 곳인 데다, 또 많은 살아 있는 보물들이 안에 있는지라 매우 놀랐다. 그래서 이쪽은 타거나 말거나 곧바로 밀실로 달려갔다. 그때 용비도 동시에 달려왔다. 역시 용비의 구자모음혼검은 위력이 대단하였다. 그가 검광으로 불길을 막는 한편, 여러 사람들은 물을 뿌려 불을 진압하였다. 가까스로 불을 다 끄고 나니 밀실 은 이미 폐허가 되어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즉시 여자들에게 불난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유인즉, 한 어린 화상이 들어와 먼저 망두타 와 양화를 죽이고 두 번째 다시 들어와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지통은 이것이 거짓이 아닌 것을 알았다. 부하들에게 이 여자들을 다른 곳에 가두고 잘 지켰다 가 내일 밀실을 치운 후에 다시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쯤 앞쪽의 불도 가까스로 꺼졌다. 이 불로 인해 자운사는 전방(殿房)이 삼 분의 일 정도 타 버려 손실이 매우 컸다. 지통과 용비가 대전에 돌아와 보니 효월선사와 석옥주가 보이지 않았다. 원인을 물어보니 또 그 어린 화상이 석옥주를 구해 달아나고 효월선사가 뒤쫓아 갔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호리산(調虎離山: 계락으로 호랑이를 원래의 산에서 다른 산으로 떠나게 함)의 수법에 당한 것이다. 그런데 효월선사가 석옥주를 쫓아갈 때의 사정을 자신이 직접 목격하지 못한 데다가 떠난 지 오 래 되었는 데도 아직 효월선사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매우 이상했다. 용비는 석옥주가 도망간 것을 보고 매우 성이 나서 법원에게 덤벼들었다. 이 때문에 둘은 서로 원한을 맺게 되었다. 이처럼 자운사가 요란법석을 떤 밤은 지나고 아침은 밝아왔다. 돌연 정원에 세 사람이 내려섰다. 한 사람은 효월선사요, 다른 한 사람은 비천야차 마각이요, 또 한 사람은 긴 눈썹, 흰 머리칼, 얼 굴은 동안(童顔)이면서 둥근 도인이었다.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효월선사는 그 늙은 도인을 전전 안으로 들어가 앉게 한 후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다. 그 사람은 바로 무산(巫山) 선녀봉(仙女峰)의 원음동(元陰洞)에 은거하는 음양수(陰陽搜)였다. 그의 원래 성 은 사도(司徒), 이름은 뇌(雷)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반음반양의 신체를 가졌다. 말하자면 상반신은 남자요, 하반신은 여자인 것이 다. 그러니 음란한 짓을 많이 저지른 것은 당연했고, 그래서 관청에서 체포하려 하자 무산으로 도 망쳤다. 그는 무산에서 이인을 만나 세 권의 천서(天書)를 전수받았다. 제이권을 배울 때 어찌 된 영문인지 제일권의 천서를 도둑맞았다. 그의 스승은 노하여 너와의 인연은 이것이 끝이라고 하며 한숨을 쉬고는 떠나버렸다. 그는 무산 의 열두 봉우리 중에서 이 선녀봉 원음동을 수련의 장소로 택하여 이 동굴을 매우 화려하게 꾸미 었다. 그리고 삼 년마다 한 차례 하산하여 십오륙 세의 동남동녀를 사서 법술을 써서 산으로 데려왔 다. 상반신은 여자의 정기를 취하고 하반신은 남자의 정기를 취하여 보신했다. 몇십 년 간 그에게 얼마나 많은 동남동녀들이 당했는지 모른다. 다행히도 그는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사온 동남동녀를 길어야 삼 년만 데리고 있되 그동안에는 매월 한 번만 이용하였다. 삼 년이 되면 금은보화를 주고 남녀 쌍방이 원하면 그들을 부부로 결합시켜 주었다. 결혼한 지 삼 일이 되면 법술을 써서 각자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남에게 그동안 있었던 사 실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단지 후덕한 사람을 만나 양자와 양녀가 되어 결혼하여 살 다가 그 은인이 세상을 떠난 바람에 그 가족들에게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둘러대게 했다. 그 어린아이들을 판 사람은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일단 아들 딸들이 돌 아왔고, 또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왔으니 누가 일일이 따져 묻겠는가? 혹 그 비밀을 지키지 않고 입을 나불대는 사람이 없진 않았지만, 그러면 즉각 죽음을 면치 못했 다. 음양수 자신은 그처럼 사람의 목숨을 해치지 않았고 또 많은 불우한 사람을 짝지워 주었으니 잘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이 하늘의 도리에 어긋나는 큰 죄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결전전야 訪能人 馬夜叉獨上玄陰宮 窺秘戱 柳燕娘動情天魔舞 지통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효월선사의 소개로 그가 신통력이 광대하고 보통인물이 아니란 것 을 알자 한 사람씩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였다. 효월선사에게 석옥주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말하기도 부끄럽소. 내가 오늘 젓비린내나는 화상에게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나는 동해삼선만 무형검을 사용할 줄 안다고 믿었거든. 또 그들은 지금까지 광명정대하여 한 번도 암수를 쓴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들의 후배 중에 그런 인물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잠시 소홀했 던 것이오. 만약 미리 그런 일이 생길 줄 알고 내가 검광을 발출했다면 그 어린것이 어떻게 들어 올 수 있었겠나? 녀석이 석옥주를 데리고 도망치기에 나는 벽사촌 부근까지 쫓아갔지요. 거의 다 쫓아갔을 무렵, 갑자기 앞에서 아미파의 취도인과 염선 이원화가 불쑥 나타나지 않겠는가. 이 두 사람은 나와 옛날에 동문의 정이 있는 사람들로서 이전에 나에게 여러 모로 은혜를 베푼 적이 있 었지. 그때 나는 그들에게 언젠가는 보답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지금껏 기회가 없었소. 그런 데 그들 두 사람이 나를 가로막으면서 부탁을 하니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이 기회를 빌어 이전 의 빚을 갚을 수밖에. 할 수 없이 돌아오면서 보니 이곳의 불길이 점점 잦아지는지라 별일이 없 을 거라 마음을 놓았소. 문득 이 옛 친구가 생각나서 도움을 청하려고 했더니 공교롭게도 마도우 가 이미 그를 청해 같이 오고 있지 않겠소. 그래서 우연히 만난 거요." 마각은 자운사에 와서 며칠 묵은 적이 있었다. 하루는 절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우연히 그의 사숙인 철적선(鐵笛仙) 이곤오(李昆吾)를 만났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마각은 매 우 기뻐했다. 그래서 자운사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이곤오가 말했다. "그대와 나는 모두가 아미파의 적수가 아닐세. 가장 좋은 방법은 무산 신녀봉 원음동에 가서 음 양수를 청해 오는 것이야. 가서 이렇게 말하게. 아미파는 지금 수십 명의 남녀제자가 있는데 모두 가 선골(仙骨)로 생겼을 뿐 아니라 동정(童情)을 보존하고 있으니 참가하여 덕을 보지 않겠느냐 고, 그 사람은 성질이 괴팍하니 잘 구슬러서 마음에만 들게 한다면 아마도 도와줄 것이네. 이 사 람 한 명이면 다른 사람 열 명보다 나을 것이네. 지금 적 가운데는 나의 상극(相剋)이 있어 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너까지도 특별히 조심해서 행동해야 할 것이니라." 말을 마치자 마각과 다음을 약속하고는 훌훌히 떠나버렸다. 마각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채 직접 음양수를 찾아갔다. 그래서 신녀봉에 도착하여 음양수를 만나 이곤오가 가르쳐 준 대로 했더니 음양수는 냉소를 지으며 쏘아 붙이는 것이었다. "이곤오가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모양이군. 나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은가? 가서 꿈꾸지 말라고 이르시오!" 마각은 상황을 보니 희망이 없는 것 같아 작별을 고하려고 하였다. 갑자기 밖에서 한 동자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그 아이를 어떤 사람이 구해서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사형은 맞서다가 그 도인에게 살해되었습 니다." 음양수는 이 말을 듣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나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얼마간 그렇게 맴 돌더니 갑자기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각은 그가 자기를 상대하기 싫어한다고 생각하여 일어나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동자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사부님께서는 나가셨다가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마각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세히 물어보려고 하는데 음양수가 갑자기 깨어나면서 말했다. "정말 빨리도 도망갔군. 애석하게도 너무 멀리 도망하였어.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그냥 두 었겠느냐?" 말을 마치자 일어나서 마각의 손을 잡았다. "잠깐 기다리시오. 준비를 좀 한 후에 그대와 같이 자운사로 가리다." 마각은 그가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음양수가 말했다. "그대 보기에 내가 지조가 없는 것 같소? 나는 본래 이기주의자요.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며 누 구라도 나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의 편이라오. 어제 한 소년을 잡았는데 근기(根基)가 매우 좋아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더군. 그런데 오늘 웬 놈이 그 애를 데리고 도망치면서 내 사랑하는 제자까지 죽이지 않았겠소. 나는 방금 원신(元神)을 써서 쫓아갔으나 잡을 수가 없었소. 단지 검 광의 그림자를 보아 아미파 사람의 소행이란 것만 알았지. 내가 그들을 괴롭힌 적이 없는데 그들 이 나를 괴롭혔으니 이대로 참을 수 없어서 그대와 함께 가기로 결정한 것이오." 그리고는 즉시 동자를 불렀다. "마대선배님께 쉴 곳을 마련해 드려라."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밤이 깊어서야 나왔다. 술에 얼큰히 취한 얼굴이었는 데도 허리에 호 로병을 하나 차고 있었다. 그는 문하의 제자들을 소집하여 몇 마디 분부를 한 후 마각과 함께 떠 났다. 그래서 반쯤 왔을 때 효월대사를 만났던 것이다. 두 사람은 원래가 친한 친구인지라 매우 기뻐하며 같이 자운사로 와서 적을 맞을 계책을 상의하 였다. 그날 오후가 되자 자운사에 계속하여 이름 있는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신강(新疆) 천산(天山) 목 우령(牧牛嶺) 화운동(火雲洞)의 적염(赤焰) 도인과 그의 두 사제인 금안비비(金眼沸沸)와 좌청허 (左淸虛), 추혼동자(追魂童子) 소태(蕭泰), 그리고 운남(雲南) 고죽협(苦竹俠)의 무발선(無髮仙) 여 원자(呂元子)와, 귀주(貴州) 묘강(苗疆) 유인동(留人洞)의 세 동주(山洞主)인 화로제(火魯齊) 화무 량(火無量) 화수라(火修羅)가 문하의 몇 명 검선을 데리고 동시에 도착했다. 이들은 모두 이파 중에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허비랑의 꾐에 빠졌고, 어떤 사람들은 효월선사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자운사는 이 많은 마군(魔君)들이 더해지자 기 세가 왕성해졌다. 적염도인은 이날 밤 당장 벽사촌으로 쳐들어 가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효월선사는 조청한 몇몇 검선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역시 보름날 공격하자고 주장하 였다. 이 사람들은 거의가 속세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다만 묘강의 세 동주와 그들과 같이 온 사 람들은 짐승을 생식하는 원시시대의 야만생활을 하므로 고기를 먹었다. 효월선사는 지통 대신에 주인격이 되어 양과 돼지를 잡아 주연을 베풀어 손님을 접대하도록 분부하였다. 자운사는 본시 재물이 풍족하여 무엇이든지 금방 조달할 수 있었으므로 잠깐 사이에 주연이 갖 추어졌다. 효월선사는 여러 사람을 청하여 앉히고 자기는 술과 고기를 손대지 않고 하석에 앉아 접대하였다. 주연이 끝나니 어느덧 이경이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대전에 남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편안히 하여 내공을 수련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통의 주선에 따라 미녀들을 꿰차고 각자 숙소를 찾아갔 다. 용비는 음양수가 채보공부(採補功夫)를 한다는 것을 알고 비법을 배울 생각으로 음양수더러 자 기와 같은 방에 들자고 청하였다. 백화랑 소련과 구미선호 유연랑은 그의 명성에 반하여 스스로 몸을 바쳐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고, 또 지통이 젊은 미녀 몇을 골라 시중을 들게 하였다. 음양수 는 거절하지도 승락하지도 못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들의 방은 중간은 객청이고 좌우로 침실이 있었다. 음양수와 용비는 각기 좌우의 침실에 묵게 되었다. 용비, 소련, 유연랑은 음양수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나 음양수는 다만 빙그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재삼 가르침을 구하자 견딜 수 없는지 입을 열었다. "내가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오. 만약 이것을 배우고 나서 스스로 절제를 못하여 과용되면 유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죽이게 되기 때문이오." 세 사람은 음양수가 끝내 거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불쾌하였다. 하지만 그의 솜씨가 고강하고 또 늙은 선배인지라 내색도 하지 못하였다. 음양수는 잠시 앉아 있더니 쉬어야겠다고 말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세 사람은 원래 그와 함께 나체유희를 즐기려고 했으나 그가 이렇게 나오자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어 보내주었다. 음양수의 방에는 본래 지통이 보낸 두 명의 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방으로 들어 가자마자 곧 그녀들을 내보내고 문을 잠갔다. 세 사람은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전에 사람들이 말하길, 그는 하 룻밤도 혼자 지내는 법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살금살금 음양수의 방 창문 밑으로 가서 틈새로 들여다보았다. 음양수는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풀어 탁자 위에다 놓고 뚜껑을 열고 호로를 향하여 계속하 여 절을 하며 입으로는 뭐라고 주문을 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로 속에서 키가 칠팔 치에 불 과한 발가벗은 일곱 소녀들이 튀어나왔다. 모두 피부가 백옥 같고 생긴 것이 아름다왔다. 음양수는 옷을 벗더니 소녀들을 향해 빨리! 하고 외쳤다. 그러자 소녀들은 탁자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가 십오륙 세 몸매의 소녀로 변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든 한 소녀가 분부도 기다리지 않고 침상 머리 맡에 가서 누웠다. 음양수 는 그녀의 몸 위에 포개어 누웠다. 나머지 소녀들은 다가와서 하나는 음양수의 머리 위에, 하나는 음양수의 가슴 위에 올라탔다. 나머지 넷 중 둘이 음양수의 상체 양편으로 갈라앉자 음양수는 두 팔을 벌려 각 손바닥을 여자 의 사타구니에 붙였다. 나머지 둘 중 하나는 침상 위에 엎드리고 하나는 누웠다. 음양수는 다리를 뻗쳐 발끝으로 각기 두 소녀의 사타구니를 받쳤다. 이런 형태를 한 뒤에 음양 수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소녀들의 앵두 같은 입술에서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용, 소, 유, 세 사람은 그의 해괴한 행위를 보고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음양수가 별안간 뭐라고 호령하자 소녀들은 일제히 일어나 가로로 나란히 누웠다. 그러자 음양수는 침상으로 다가가 차례차례 소녀들 위에 엎어져서 애무를 했다. 그것은 실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어찔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용비는 넋을 잃고 바라보다 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아하!' 하는 탄성을 내고 말았다.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을 차려 방안을 보니 음양수만 침상에 단정히 앉아 있고, 호로병은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방금 본 그 모든 환락의 장면이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암만 생각해도 헛것을 본 것 같았다. 용비는 음양수가 한 짓이 진짜인지 환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이해서 다시 들여다보니 방안에 는 촛불만 가물거릴 뿐 음양수조차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용비는 자신의 대단한 안력(眼力)으로도 그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되자 마음 속으로 매우 기 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련과 유연랑은 그 일막의 환락경을 보고는 벌써 몸이 봄눈처럼 창 문 앞에서 녹아내렸다. 음양수가 이미 사라져 다시는 구경할 수 없게 되자, 둘은 용비에게 추파를 던지며 스스로 용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용비는 마침 속에 불이 붙고 있었던 중인지라 급히 따라 들어갔다. 그래서 한 손에 한 사람씩 껴안고 바야흐로 희롱하려고 하는데, 돌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효월선사가 사람을 시켜 상의할 일이 있으니 대전으로 모이라는 전갈을 보내온 것이다. 소, 유, 두 사람은 이 말을 듣자 얼굴을 찡그리며 '쳇!' 하고 혀를 찼다. 그러나 경우가 경우니만 큼 마음의 불을 억누르고 용비를 따라 전전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절 안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효월선사와 음양수 그리고 새로 온 몇 명의 유명한 이 파 검선들이 상좌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용비가 자세히 보니 천동 남천현진 금불산의 금불사 방장인 지비 선사, 장백산(長白山) 마운령 (摩雲嶺)의 천지상인(天池上人), 무산 풍상협(風箱俠) 사자동(獅子洞)의 유용자(遊龍子) 위소소(韋 少少) 같은 사람들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사십대의 얼굴에 등에는 쌍검을 비스듬히 꼽고 손에 는 불진을 들고 있었다. 선인 같은 풍채는 가히 속세를 떠난 사람의 전형과 같은 모습이었다. 용, 소, 유, 세 사람은 모두 이 사람을 알지 못했다. 효월선사가 소개를 해서야 이 사람이 바로 천동의 은명검선 종선생이란 것을 알았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모두가 인사를 나눈 후 효월선사가 일의 경위와 전말을 이야기했다. 지비선사가 말했다. "좋구나 좋아! 우리 출가한 사람은 속세를 떠나 증과(證果)를 얻기 위해 수련해야 하오. 일신의 의협심 때문에 이렇게 살인을 불러일으켜서야 되겠소? 내가 말을 하리다. 나와 고행두타는 본래 동문의 우애가 있으니, 나와 종선생 그리고 고행두타가 나서서 중재를 해서 각파가 화해를 하여 이 악연(惡緣)을 풀어버립시다." 효월선사는 지비선사가 검술이 고강하고 또 많은 놀랄 만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특별히 직접 가서 그를 청해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정작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 지 않은가. 마음 속으로 불쾌하였지만 그렇다고 성을 낼 수가 없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종선생은 지비선사가 청해 왔고, 천지상인과 위소소는 가부를 표시하 지 않았으며, 음양수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불쾌하였다. 하지만 지비선사의 위명에 눌려 감히 토를 달지 못하였다. 유독 적염도인만 이름 그대로 성질이 불과 같아서 냉소를 지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선사의 말씀은 틀렸소이다. 아미파는 제수명이 장악한 이래 자기네 세력만 믿고 약자를 깔보며, 제자를 지나치게 사랑하여 그 제자들이 제멋대로 날뛴단 말이오.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 도우선 사께서도 열에 여덟은 그들에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소이다. 오늘 이렇게 공동의 적에 대하여 다 같이 적개심을 품고 모인 자리는 정말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요. 만약 다시 화해를 한다면 적은 필시 우리가 자기들을 무서워한다고 여겨 갈수록 날뛸 것이오. 이대로 나간다면 얼마 후에는 아 미파를 제외하고 우리가 설 자리는 없어지고 말 거요. 내 의견으로는 그들이 어젯밤 약간 득세를 한 후에 기고만장하여 우리의 허실강약을 모르고 있을 것이오. 이 틈을 타서 내일밤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지금 날이 밝기 전에 벽사촌에 쳐들어 가서 그들이 손쓸 여지가 없게 하는 것이 상책이 라 보오. 만약 그들의 세력이 강하므로 자기는 적수가 못된다고 생각하는 시람은 그냥 물러가시 오. 쓸데없이 유세하여 괜히 사람 마음을 산만하게 하지 마시고." 말을 마치자 얼굴에 노기가 가득하였다. 지비선사는 적염도인이 자기를 비꼬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였다. 그는 갑자기 손 으로 한구석을 가리켰다. 순간 사람들은 한 줄기 불빛이 날아가는 것을 보는 듯하였다. 지비선사는 웃음을 띠고 이렇게 해명했다. "적도우께서는 빈승이 겁을 낸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빈승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지 이미 오래 되었소. 다만 이번에 각파에 재난이 닥쳐온 것을 알고, 효월선사와는 일찍이 두터운 우애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그를 도와주려고 한 것이오. 다만, 방금 여러 도우들을 뵈니 모두들 살기가 뻗쳐 있어 대부분이 재난을 면하기 어렵다고 여겨지오. 내일의 이 싸움은 승부가 이미 난 것이나 다름이 없소. 그런고로 불길한 정세를 상서롭게 바꾸자는 취지에서 서로 화해를 하라고 청한 것 이오. 그런데도 적도우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빈승이 괜한 헛소리를 한 것 같구려. 내일 여러분 들은 앞장을 서시오. 빈승은 종도우와 함께 후미에서 그대들을 응원하리다." 적염도인이 또 말을 하려고 하자 효월선사는 급히 그에게 눈짓을 보내고 나서 지비선사에게 말 하였다. "빈승도 화해가 하기 싫은 것이 아니오. 다만 그들이 사람을 너무 깔보기 때문에 그들과 싸울 수밖에 없소이다. 사형께서 도와주시겠다고 하시니 은혜에 감격할 뿐이외다. 그러나 그들은 인원 도 많고 세력도 크니, 아무래도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모르는 틈을 타서 먼저 공격하는 것이 좋 을 것 같구려. 그러면 그들이 사형과 여러 도우께서 이곳에 오신 것을 알아 또다른 원군을 청하 는 것도 막을 수 있지 않겠소? 사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형께서는 어찌 아미파를 그렇게 얕보시오?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들은 눈이 없는 줄 아시나 본데, 그들은 우리 좌우에서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있단 말이오. 여러 분이 비록 빈승의 충고를 듣지 않아도 빈승은 이미 이곳에 온 이상 수수방관하지는 않을 것이오. 쌍방이 이미 보름날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각자 광명정대한 마음가짐으로 내일 승부를 겨루기로 합시다. 우리가 가도 좋고 그들이 와도 좋지 않겠소?" 사람들은 지비선사가 아미파의 눈이 곁에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사방을 살폈다. 지비선사가 말했다. "여러분은 잘못 아셨소이다. 첩자가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겠소? 방금 내가 화도우와 이야기할 때 검광을 써서 밖에다 가두어 놓았소이다." 말을 마치자 일어서서 건물 밖 모퉁이를 향해 말했다. "겁내지 마라. 빈승은 절대로 그대를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돌아가서 이로와 고행두 타에게, 효월선사와 각파의 도우들이 정확하게 내일 벽사촌으로 가서 가르침을 받겠다고 전해라." 말을 마치자마자 손을 내뻗으니 한 줄기 불빛이 바깥 모퉁이에서부터 지비선사의 손으로 날아 들어왔다. 지통과 마각은 문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뛰어나가 보았다. 그러 나 사방에 찬바람만 불 뿐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지비선사가 다시 말했다. "아미파가 강하다더니 빈말이 아니군. 방금 동정을 살피러 온 어린 화상은 나이가 겨우 열몇 살 밖에 안 되었는 데도 태을현문의 무형검둔을 연마하였으니 앞길을 헤아릴 수가 없구나!"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모두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였다. 지비선사는 재난이 눈앞에 닥쳤지만 충고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앞질러 말해 버렸다. 자기와 종선생은 후미를 맡겠으니 다른 사람들은 선두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용비와 세 동주는 지비선사의 솜씨를 알지 못했다. 그가 검을 낸다고 생각하여 계속 비꼬는 말 을 했다. 지비선사는 웃기만 할 뿐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효월선사는 역시 음양수 등 몇 명의 고수만 믿고 지비선사의 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효월선사는 지통, 명주선사, 축악, 위지원, 마각 등 몇 사람은 남아서 절을 지키고, 나머지 사람 은 모두 보름날 신시(申時) 말 유시(酉時) 초에 일제히 벽사촌으로 출발하기로 정하였다. 그 전날밤 추운수와 왜수 주매가 여러 검선과 옥청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돌연히 취도인 과 완석대사가 창망히 방으로 들어왔다. "방금 우리 두 사람이 자운사 근처 숲 속에서 동서로 나뉘어 염탐을 하고 있는데 앞서거니 뒤서 거니 하며 여러 사람이 각기 검광을 타고 자운사로 날아 들어가지 않겠소. 쫓아가 보고서야 제영 운 오누이와 주영운, 주문, 오문기, 손남, 소화상 등 일곱 명인 것을 알았소이다. 이윽고 싸움이 벌어져 처음에는 이길 것 같더니, 나중에 유덕과 용비가 나타나는 바람에 우리 두 사람은 상황이 좋지 않은 줄 알았지요. 아니나 다를까, 유덕이 홍사를 뿌립디다. 다행히 제영운의 주위에 한 폭 의 오운이 일어나 그들을 보호해 주었지만 이미 적의 홍사에 포위되어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 지 뭡니까. 우리 두 사람은 힘이 부족하여 내려가 구할 수가 없었소. 시간이 오래 되면 일을 그르 칠까 봐 즉시 돌아와 보고를 하니, 이로께서 빨리 방법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외다." 염선 이원화는 제자가 홍사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린것들이 정말 간덩이가 부었군. 이전부터 유덕의 홍사가 무섭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시간 을 끌면 틀림없이 견디지 못할 것이오.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합시다." 왜수 주매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털복숭이! 당신은 정말 성질이 급하구려.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소란을 피 우시오!" 이원화가 주매의 짓궂은 웃음에 뭐라고 대꾸를 하려고 할때 밖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 선배님들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행차를 빈도는 미 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점괘를 뽑아보니 이기고 돌아올 뿐 아니라 한 분 유력한 조력자를 모시고 온다고 나옵습니다. 만약 잘못된다면 나중에 저에게 따져도 좋습니다." 염선이 고개를 돌려보니 옥청대사였다. 비록 그의 점패가 귀신같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백운대사에게 같이 가서 의견을 듣자고 청하였다. 추운수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도우,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의 제자 손남은 복이 매우 많은 상이오. 젊은 무리 중에서는 그 같은 자가 불과 몇 명 되지 않지. 일생 동안 극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오. 경운과 영운 오누이, 그리고 소화상 모두가 선연(仙緣)을 갖추고 있으니 더 말한 필요도 없고, 주문과 오문기 둘만 보 더라도 요절할 상은 아니오. 그러니 홍사가 비록 대단하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소. 서로 보름날 로 약정을 해놓고 애들이 가서 소란을 피운 자체만으로도 이미 잘못되었는데, 우리가 또 쫓아가 서 약속을 깨뜨리는 짓 따위를 어찌 할 수 있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조금 있으면 위험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오. 이번에 적의 요법을 빌어 제자놈들의 버릇을 고치고 다음부터 조심하도록....."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의 말을 막듯이 돌연 멀리 벼락치는 듯 한 큰소리가 자운사 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추운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좋구나 좋아! 고행두타도 와서 같이 놀아보려고 하는구만." 손가락을 꼽아보며 계산을 하더니 취도인, 완석대사, 염선 이원화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고행두타와 효월선사가 동시에 자운사에 도착했군. 고행두타가 태을신뢰로 홍사를 부수고 조금 있으면 그들과 같이 올 것이오. 그의 제자 소화상은 공을 탐내 마지막에 돌아오겠는데 아마도 효 월선사의 독수를 만나게 될 것 같소. 세 분은 벽사촌 앞에 있는 석교 옆에서 기다리시오. 만약 효 월선사가 따라오는 것이 보이면 완석대사가 소화상을 데리고 오고 취, 이, 두 분께서는 효월선사 앞으로 나서시오. 효월선사는 이전에 두 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으므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외 다. 두 분은 이 때 그냥 돌아오면 될 거요." 취도인 등은 추운수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 그 세 사람이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고행두타가 영운 등 여섯 사람을 구해 돌아와서 서로 인사를 하였다. "아미타불! 아미파의 일을 위해 또 세 번째 속세로 돌아왔소이다." 왜수 주매가 말했다. "노선사께서는 공행(功行)이 원만하시어 멀지 않아서 입성(入聖)하실 텐데, 아직도 속세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아미파를 도와주시니 정말로 공덕이 무량하십니다. 다만 제수명에게 좋은 일을 시 켜주는 것이 되어 버렸구려. 제수명은 공연히 교주자리만 지키고 있고, 반대로 우리 외인들이 와 서 쓸데없는 참견을 합니다그려. 정말이지 이런 법이 어디 있겠소?" "주시주는 그를 잘못 탓하고 있소. 제도우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대파(五臺派)에 두 사람의 특 별한 인물이 있기 때문이외다. 제삼차 아미투검은 두 파의 흥망과 관련이 지대하므로 미리부터 준비를 하는 터이지요. 비밀이 새어나갈 것이 두려워 현진자의 동굴을 빌려 쓰고 있는 것이외다. 일전에는 또 자기 부인마저 청하여 데리고 갔지요. 그러면서도 자운사에 허다한 사법요술을 쓰는 이파가 있는 것을 알고는 빈승더러 이로를 보좌하고 여러 검선을 도와드리라고 합디다. 그가 오 지 못하는 것은 마침 그런 특별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외다. 그러니 지금 그런 사정을 밝힐 수가 있겠소?" "누가 그를 탓했소? 그냥 우스개 소리를 한 것뿐이지." 모두가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후, 추운수는 제영운에게 아까 자운사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 다. 원래 제영운이 자운사에 간 동기는 단지 몰래 그들의 허실을 살피자는 것이었다. 금선, 소화상 등 네 사람이 앞서 가서 싸우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치 못했었다. 어쨌거나 명령을 받지 않은 개별행동이기 때문에 추운수에게 단단히 꾸지람을 들을 터이므로 걱 정이 태산 같았지만, 기왕 드러난 일이므로 아까 있었던 상황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추운 수와 여러 선배들이 아무 책망을 할 낌새가 없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대답을 끝내고는 한쪽에 가서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금선이 문 밖에서 자기 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제영운은 살며시 방을 빠져나가 동생에게 왜 그렇게 당황하느냐고 물었다. 금선이 대답했다. "아까 우리가 홍사에 갇혔을 때 소화상은 무형검을 빌어 도망쳤었잖아. 나는 그가 이미 돌아온 줄 알았는데, 사형, 사매에게 물어봐도 모두들 그가 돌아온 것을 보지 못했대. 아마도 자운사에 갇혔나 봐. 누나가 빨리 가서 사백님께 구해 달라고 부탁드려 봐." 제영운도 소화상이 먼저 돌아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므로 금선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곧 방 으로 들어가 보고를 하고, 사람을 보내 구해 줄 것을 이로에게 간청하였다. 왜수 주매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다. 그 어린놈이 은신법으로 효월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 그런 줄도 모르고 대담하게 모험을 했으니! 방금 백사백이 사람을 보내 맞으러 갔으니 안심하거라! 그렇지 않다면야 이 늙은 화상이 여기에 이렇게 죽치고 앉아 있겠느냐?" 제영운과 금선은 이 말을 듣고서야 방안에 다른 선배들은 모두 있지만, 취도인 등 세 사람이 보 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마음을 놓았다. 고행두타가 탄식했다. "그놈은 정말 이 빈승의 짐이군. 빈승은 그래도 그놈이 생긴 게 근기가 있어 보여 평생 배운 절 기를 모두 전수해 주었소이다. 그런데 그놈은 간덩이만 커져 계속 말썽만 일으키니! 다행히도 전 생의 인연이 좋고 천성이 순박하여 평생에 조금의 흉험(凶險)도 없을 터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 에 빈승은 방금도 녀석을 찾지 않고 그냥 온 거외다. 지금 취도우를 비롯한 세 분이 가셨다니, 빈 승은 마음이 놓이는구려." 원원대사가 말했다. "노선사께서는 제자를 잘 받아들이지 않으셨는데 이번에 선불(仙佛)의 근기가 있는 그런 훌륭한 제자를 얻었으니 후에 의발을 전할 사람이 없어 걱정하는 일은 않으셔도 되겠군요." 이어서 여러 검선들도 고행두타가 쓸 만한 제자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말들을 하였다. 모두가 한참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날은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취도인, 염선, 완석대사가 소화상을 데리고 돌아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여곤륜 석옥주는 소화상 과 옥청관 앞에까지 왔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떠나갔다. 소화상은 스승이 온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 얼른 앞으로 나아가 절을 올렸으나, 고행두타로부 터 따끔한 훈계 몇 마디를 들었다. 이때 이들 선배 검선들 이외에는 모두 방으로 들어가서 자거나 수련을 하고 있었다. 금선은 문 밖에서 조용히 소화상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소화상이 나왔다. 둘은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며 자운사 안에서 있었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껄껄거렸다. 이날 저녁, 추운수는 전체 검협을 모아 놓고 말했다. "이제 오늘밤만 지나면 내일은 정식으로 적과 싸우는 날이다. 누가 다시 자운사로 가서 적에게 또 어떤 원군이 왔는가 살펴보겠느냐?" 소화상은 무형검둔을 할 줄 아니까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는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 추운수가 웃으며 말했다. "좋다 가거라. 하지만 지금 그들은 적지 않은 재사(才士)들이 와 있을 것이다. 너는 단지 몰래 허실만 탐지해야지,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어 말썽을 피우면 안 된다. 꼭 기억해야 하느니라." 소화상은 명령을 받은 후 검광을 타고 자운사로 날아갔다. 절 안에 들어가니 과연 흉칙맞고 괴 상하게 생긴 사람이 상당수 새로 와 있었다. 자기 솜씨를 믿는 소화상은 내려가서 또 한바탕 소 란을 피워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돌연 공중에서 내려오는 네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소화상은 건 물 모퉁이에 은신하여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그들 중에 지비선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전에 동해에서 만난 적이 있 으므로 그가 대단한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몸을 기왓골 사 이에 감춘 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돌연 지비선사가 자기를 쳐다보며 말을 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소화상은 재빨리 도망가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지비선사가 방출한 검광에 포 위되어 몸을 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가 지비선사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 에 감히 검을 날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적의 검광은 자기의 몸을 감싸고만 있을 뿐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는 몸과 검을 하나로 합쳐 조용히 도망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윽고 지비선사가 자기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면서 검광을 거두어들이지 않는가. 소화상은 상대방의 실력을 알고 나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급히 벽사촌으로 돌아 와 여러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보고했던 것이다. 추운수가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적이 많은 원군을 청해 왔으니, 내일의 대전에서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이렇게 말한 후 여러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내일 적을 맞아 싸울 계획을 상의했다. 황야의 결전 頒束勅令 四劍俠奉命回武當 齊集廣場 衆凶邪同心敵正敎 벽사촌 다음 밖으로는 자그마한 산이 하나 있고 그 산 아래 널찍한 광장이 펼쳐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위가장(魏家場)이라고 불렀다. 명나라 말엽 수 차례에 걸쳐서 큰 난리를 겪은 이후, 위씨 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이 터 에는 깨어진 기왓장, 벽돌 무더기가 황폐한 언덕을 이루고, 인적도 끊긴 채 주인 없는 무덤만 가 득하게 되어, 을씨년스런 날이면 귀신들의 울음소리와 백골에서 흘러나온 인광(燐光)이 도깨비 불 처럼 허공을 떠돌아서 누구도 이 위가장 근처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옥청관에 집결해 있던 아미파 인물들은 위가장의 공터를 결전장으로 선택하고 여기서 적을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벽사촌과 거리도 제법 멀찍하게 떨어졌거니와 위치도 외지고 조용하여 진종 일 왕래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었다. 아미파의 검협(劍俠)들은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좌측을 담당할 인원은 염선 이원화, 풍화도인 오원지, 취도인, 원원대사 등 네 명의 검선이 제갈 경아, 흑해아, 울지화, 칠성수 시림, 철사미 오수들을 거느리고 대적한다. 우측은 합합승 원각선사와 완석대사, 소인대사, 감리진인 허원통 이상 네 명의 검선이 여신동 주 문, 여공공, 오문기, 제영운 남매들을 거느리고 배치하기로 한다. 숭산의 소실이로 추운수 백곡일과 왜수 주매, 그리고 고행두타 다섯 명은 중앙에서 전체 지휘를 맡는다. 백운대사는 주순과 구림, 장기 남매, 송, 학, 두 동자를 거느리고 옥청관에 남아 수비하면서 전투 의 추세를 보아 지원 출전한다. 그리고 옥청대사와 만리비홍 동원기 두 검선은 소화상, 주경운, 백협 손남 셋을 거느리고 은밀히 자운사로 잠입하여 적의 본거지를 격파하기로 했다. 인원 부서의 편성을 마치자 어느덧 하룻밤이 다 지나고 마침내 결전의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 다. 동틀 무렵부터 젊은 형제들은 신바람이 나게 서둘러 적을 맞아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신시(申時) 초에 이르러 좌우 중앙의 각 포진(布陣) 지점에는 저마다 담당한 검협들이 부서를 정 한 대로 배치를 완료했다. 이에 앞서 추운수 백곡일은 현진자의 대제자 제갈경아를 자운사로 파견하여, 효월선사 이하 오 대파측의 검선들에게 <신시(申時), 유시(酉時) 무렵 위가장 공터에서 대결하자>는 도전장을 보내 두었다. 정월 보름날, 그날은 진종일 햇빛도 가리워져 음산한 날씨였다. 해거름녘 유시 초가 되자 아미 검선들은 제각기 배속된 지점에 방위를 정하고 서서 자운사 측의 진공을 조용히 기다렸다. 효월선사는 추운수로부터 결전 장소와 시각을 통보받고서 전체 인원을 소집하여 전투계획을 논 의 결정한 다음, 예정한 대로 위가장을 목표로 진발했다. 한데 이들은 출발 직전 언짢은 꼴을 당 해야 했다. 이들이 떠나기 두 시진 전에 마지막까지 학수고대하던 응원군 네 사람이 도착했다. 무당파에서 유근선사, 제갈영, 창랑우사 수심일, 뇌도인 등 네 명의 검선들이 합류하게 된 것이다. 법원은 무당파가 약속을 어기지 않고 때에 맞추어 유명한 검선들을 보내준 데 대해 크게 기뻐했 다. 효월선사 또한 아미파 측에 자신이 상대하기 어려운 적수가 몇몇 있음을 익히 아는지라 속으 로 여간 걱정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런 판국에 유력한 응원군이 넷씩이나 당도했으니 마음 도 한결 든든해지고 투지가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출발을 앞두고 한창 소개와 인사말을 나누던 참인데, 홀연듯 대웅전 앞마당에 한 줄기 푸른빛이 내리꽂히더니 낯선 여자가 대전으로 들어섰다. "웬 잡사람인가!" 법원이 호통을 쳤다. 분명 자기편 인물도 아닌 여자가 느닷없이 불쑥 들어선 것이다. 가뜩이나 중대한 출전을 앞두고 신경이 바늘 끝처럼 날카로와진 판국이라 법원은 힐문조로 짜증스레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인은 대꾸도 않고 무당파의 유근선사 일행 앞으로 걸어갔다. "네 분 사형, 여기 머물지 마시고 즉시 무당산으로 귀환하라는 사숙님의 분부가 내리셨습니다. 제 동생 석옥주는 간악한 놈들의 충동질에 넘어가 요사스런 무리들을 도우려고 자운사에 합세했 습니다만, 이 무리 가운데 있는 음적의 암습을 받고 하마터면 치욕스러운 꼴을 당할 뻔했습니다. 사부 반변대사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영령(靈靈) 사숙님에게 고하여 <쌍룡칙령(雙龍勅令)>을 내 리셨습니다. 이것이 그 쌍룡칙령입니다. 네 분 사형, 자운사 측에 협력하지 마시고 즉각 귀산하십 시오!" 그녀는 품속에서 금패(金牌) 한 개를 꺼내 번쩍 쳐들고 명령을 전했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 섭게 땅을 박차더니 파공성과 함께 사라졌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누구 한 사람 제지할 틈조차 없었다. 그녀는 바로 여곤륜 석옥주의 친언 니, 표묘아 석명주였다. 석옥주는 자운사 패거리를 도우려고 왔다가 하마터면 음탕한 용비, 유종잠 두 놈에게 강간당할 뻔한 끝에 겨우 탈출하여 그 길로 곧장 무당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스승 반변대사에게 원통한 사연을 울면서 낱낱이 아뢰었다. 반변노니는 여자의 몸이지만 그 불같은 성미는 여느 남자에 못지않을 만큼 대단했다. 자기의 사 랑스런 제자가 남에게 업수이 보이고 순결까지 잃을 뻔했다는 말을 듣자, 길길이 날뛰면서 그 즉 시 석옥주, 석명주 자매를 이끌고 자운사로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음탕한 악적 칠수야차 용비란 놈을 잡아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때마침 그녀의 사제 영령자(靈靈子)가 찾아와서 석옥주의 사연을 들었다. 그리고 반변대사 를 만류했다. "사형, 지금 강호상의 각파 검선들은 서로 원수가 되어 보복의 살륙전을 거듭하고 있소. 그 악순 환이 바야흐로 언제나 끝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구태여 우리 무당파마저 그 소용돌이에 휩쓸릴 필요가 어디 있소? 자운사의 무리들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숭산이로나 동해삼선의 적수 는 못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월 보름날 결전 결과를 기다려서 행동에 옮기는 게 좋을 듯싶군 요. 용비란 놈이 아미파의 손에 죽는다면 자업자득의 악보(惡報)를 받은 것이니 당연한 이치요, 또 우리 수고도 덜게 될 것이고, 만약 그놈이 천라지망을 벗어난다면 그때 우리가 찾아나서서 복 수를 해도 늦지 않을 것이외다." 반변대사는 사제 영령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했다. 그리고 정월 보름날, 자운사 결전까지 은인자중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석옥주는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아, 스승과 사숙에게 유근 선사를 비롯한 제갈영, 뇌도인, 창랑우사 수심일 등 사형들도 자운사 패거리에 끼어 있다고 털어 놓았다. 그녀의 고자질은 사숙 영령자를 노발대발하게 만들었다. "그 멍청이 같은 네 녀석들, 남의 꼬임에 넘어간 줄도 모르고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이용을 당하 다니! 정말 한심한 놈들이로구나. 이거, 그냥 두었다간 떼죽음 나겠다. 반변사형, 영패를 내려 주 십시오. 그놈들을 당장 되돌아 오도록 해야겠습니다." 반변사태는 두말없이 쌍룡칙령을 내주었다. 영령자는 즉시 석옥주의 언니 표묘아 석명주에게 분부하여 유근선사 이하 네 제자들을 소환하도 록 했다. 그리하여 석명주는 쌍룡칙령을 받들고 자운사로 출발했던 것이다. 쌍룡칙령은 황금패에 <칙령(勅令)> 두 글자와 쌍룡을 아로새긴 부록(符錄)이었다. 무당파의 가 법(家法)을 상징하는 이 황금패를 면대하게 되면, 무당의 문하제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부의 명 령을 받들 듯 무조건 복종해야만 한다. 이 금패를 소지한 자의 명령도 어김없이 따라야 함은 물 론이었다. 유근선사를 비롯한 무당파의 문하들은 본래 몇몇 친구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데다 또 법원이 두 번 세 번 협조를 간청하는 바람에 자운사로 오기는 했다. 그러나 와서 보니 모였던 작자들이 음 탕하고 포악스러운 잡것들이라,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짓을 하는 무리가 아닌가. 무당제자들은 이 패거리와 어울리게 된 것을 몹시 후회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핑계거리를 찾아 떠나려 했는데 공교롭게도 아미파 측에서 그들이 도착한 그날을 결전의 날로 못박아 두는 바람에 꼼짝 못하고 발이 묶였던 것이다. 참전 약속은 했으니 그 약조를 어길 수 없는 터, 그래도 마음은 달갑지 않아 어떻게든지 기회를 잡아 빠져나갈 심산이었으나 마땅한 구실도 없어 조바심만 끌이던 참이었다. 그들은 사매 석옥주 가 용비란 놈에게 당할 뻔한 내막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치 석명주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쌍룡칙령을 내밀고 귀환하라는 사부의 법지(法 旨)를 전하니, 얼마나 놀랍고 반가운지 몰랐다. 넷이서 무릎꿇어 영패의 분부를 받들고 나자, 석명 주는 더 이상 머물기도 싫다는 듯이 그대로 자운사를 떠나버렸다. 유근선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법원을 향해 말했다. "빈승 이하 넷은 이번에 법원 사형을 위해 있는 힘껏 도와드리려고 했소이다만, 방금 보신 것처 럼 사부님의 전령이 내렸으니 이를 어찌하오리까? 부득불 무당산으로 돌아가 분부를 받들어야만 하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그들은 법원이 답변할 틈도 주지 않고 일제히 마룻바닥을 구르더니 대웅전 바깥 허공으로 솟구 쳐 나갔다. 좌중에서 용비가 벼락치듯 악을 썼다. "이 신의도 없는 필부놈들,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다음 순간, 그의 손이 번쩍 쳐들리고 대전 밖 허공을 향해 구자모음혼검이 번쩍 날아갔다. 어차 피 무당파와는 이미 깊은 원수를 맺은 판국이다. 그럴 바에야 죽기 살기로 결판을 내리라! 뇌도인이 사형 셋 다음으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다가 문득 용비가 쏘아낸 검광이 덮쳐오는 것 을 발견했다. 그게 얼마나 지독한지 익히 아는 터라 뇌도인은 감히 맞받아 치지 못하고 '얍!' 대갈일성을 터뜨 리며 도포자락을 펼쳤다. 그의 몸뚱이는 신검합일(身劍合一), 번개보다도 빠르게 사라졌다. "에잇!" 목표물을 놓친 용비가 폭갈을 터뜨리면서 추격하려 나섰다. 효월선사는 얼른 그 앞을 막았다. "저런 자들은 있어 봐야 나을 것도 없고 떠났다고 해서 아쉬워 할 것도 없소. 공연히 입맛 쓰게 분풀이 할 것이 아니라, 이제 앞으로 해야 할 급선무부터 처리하고 갑시다!" 용비는 그제서야 비로소 검광을 거두어들였다. 효월선사의 말대로 지금은 아미파 측과 결전이 목전에 닥쳐 있는 것이었다. 그는 우울해졌다. 이제 무당파와 곱게 풀리지 못할 원수지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 잊어야 했다. 일단 결전이 끝나고 나서 잠시 은신하여 기회를 보아 무당파놈들을 요리해야만 했다. 효월선사는 용비를 진정시켜 놓고 다시 작전 계획을 변경했다. 무당파 인물이 빠져나간 공백을 메꾸어 넣은 것이다. "아미파 문하에는 유능한 고수들이 매우 많소. 이번 공격전에서 여러분은 분명히 상대방의 실력 을 파악하고 접전해야만 합니다. 만약 스스로 판단해서 힘이 부칠 경우에는 차라리 곁에서 관전 만 하고 절대로 감정에 휩쓸려 뛰어들거나 난동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옥청관에서 기다 리는 게 아니라 위가장 들판으로 결전터를 옮겼습니다. 이는 분명코 우리측을 그리로 유인해 놓 고서 기습타격을 가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그러니만치 우리도 최소한 그들을 처치하진 못하더 라도 그 유인술수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효월선사는 공격대 편성을 발표했다. 선봉대는 신강성(新疆省) 목우령(牧牛嶺) 화운동(火雲洞)에서 온 직염도인과 금안비비 좌청허, 추 혼동자 소태 그리고 운남성 고죽협의 무발선 여원자, 피발산예 적은아, 소화신 진랑, 묘강 유인동 의 화씨 삼동주인 좌로제, 화무량, 화수라 그리고 금신나한 법원 등 열 명에게는 최초 공격을 맡 고 본대의 도착 전에 지형 탐색까지 겸하기로 했다. 제이공격대는 효월선사와 음양수가 맡아서 철종도인, 칠수야차 용비, 유덕, 통비신원 녹청, 병유 마 주홍, 삼안홍예 설망, 백화랑 소련, 구미선호 유연랑 등을 거느리고 주력대가 되어 공격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는 지비선사와 천지상인, 위소소, 종선생이 후대(後隊)가 되어 적의 측면기습을 방비 하면서 필요시에 응원군으로 투입되도록 결정했다. 자운사에서 위가장까지는 불과 수십 리 길, 검술의 고수들에게 있어선 단숨의 거리였다. 적염도인 이하 선봉대 열 명은 삽시간에 약속된 위가장 전투장에 도착했다. 나지막한 토산(土山) 전면으로 황무지가 널리 펼쳐졌고 드문드문 황각수(黃脚樹)의 숲이 둘러친 가운데 사면천지가 이 름 없는 무덤으로 뒤덮였다. 인가도 없거니와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두터운 잿빛 구 름이 음산하게 깔려, 당장에라도 한바탕 폭우를 퍼부을 듯했다. 뒤미처 효월선사가 이끄는 제이의 공격대도 현장에 도차했다. 그들 역시 사방을 유심히 관찰하 기 시작했다. 눈앞의 토산은 그리 높지 않은데, 이백여 보 평방의 구름덩어리 두 개가 산허리를 두른 채 하늘로 떠오를 듯 말듯 휘감겨 있었다. 두 구름덩어리의 간격은 수십 장도 넘어 보이는 데 적들이 그 속에 잠복해 있는지 없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얼핏 생각하면 아미파 측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도 같았다. "잠깐 멈추시오!" 효월선사는 이제 막 토산을 향해 전진하려던 적염도인의 선봉대를 저지했다. 아무래도 낌새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신속히 명령을 내려, 선봉대와 제이공격대, 그리고 지비선사의 후속대를 토산 앞 정면 삼 개소에 전개시켰다. 그리고 음양수가 제일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도발적인 발언을 던졌다. "난 또 아미파가 얼마나 대단한 작자들인가 했더니만, 기껏해야 장안범(障眼法)이나 부려 남의 눈을 속이는 게 고작이로군! 귀한 신랑감들이 약속대로 오셨는데 수줍은 색씨모양 꼬리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으려고 하는구먼. 핫핫핫!" 말을 마치자, 음양수는 손을 쭉 내밀어 두 무더기 백운을 향해서 검광을 흩뿌려내려고 했다. 그 러나 금광이 미처 방출되기 직전, '휙!' 하고 눈앞에서 인영이 번뜩이더니, 두 늙은이가 모습을 드 러냈다. 한 사람은 육칠십 세쯤 되었을까, 누덕누덕 말씀도 아니게 찢어진 겉옷을 걸치고 생김새마저 궁 상맞은 몰골인데, 또 하나는 사 척도 못되어 보이는 단신에 고목처럼 비쩍 말라비틀어진 노인이 었다. 낡고 헤어진 홑옷을 걸쳤으면서도 깔끔하기 짝이 없어, 곁의 동료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들은 얼핏 생김새부터가 속되어 보였지만 자운사 측의 안목으로는 한눈에도 선풍도골(仙風道 骨)의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자운사 측은 당장에 원한과 두려움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다. 선두에 나서서 도전장을 던진 음양수 역시 첫대면임에도 이들이 중원 천하에 명 성을 떨치는 숭산이로, 추운수 백곡일과 왜수 주매 두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난생 처음 보는 숭산이로였지만 과연 명불허전의 고수들이라는 느낌을 받고서 저도 모르게 뒷걸 음질쳐 한쪽 곁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효월선사와 추운수가 담판할 여지를 터주었다. 추운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효월선사, 그대는 지난날 우리 아미파와 동문의 의리로 맺어진 인물이외다. 오대파나 화산파는 흉악스럽고 음탕한 사파의 무리들, 은갖 불법이란 불법은 거침없이 저지르는 귀신인 줄 그대는 모르시는가? 아미파의 장교(掌敎) 제수명 도우(道友)는 스승이신 장미조사의 법지를 받들어 삼가 외공(外功)을 수련하고 천하의 요사스런 무리를 남김없이 소탕하는 중이오. 그대처럼 도행(道行) 도 심후하고 남에게 구속받기를 싫어하는 인물이 어째서 구차스레 이단의 무리에 몸을 섞고 방자 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거요? 그대의 속셈은 나도 잘 알고 있소. 혼원조사가 죽은 후 오대파는 중심을 잃고 영도할 인물도 없이 지금껏 명맥만 근근히 유지해 오고 있는 터, 그대는 지난날 아 미와 오대 양파간의 분쟁을 기화로 삼고 혼원조사의 복수, 오대파의 영광을 재현시킨다는 명분을 구실삼아 그 무리들을 규합하여 주물러 놓고 장차 새로운 일파를 세우려는 꿈을 꾸고 있소. 그대 좌우에 늘어선 요물들이 효월선사 그대를 개산조사(開山祖師)로 추대하면, 훗날 기회를 잡아 아미 파의 제수명 도우와 재차 대결하여 궁지에 몰아넣고 과거 그대가 법통(法統)을 이어받지 못한 분 풀이를 할 셈이지. 그렇소, 안 그렇소?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는 너무 억울하고 원통한 처사가 아 니었소? 그러나 현진자의 안목은 그대보다 열 배, 백 배나 고명했소. 스스로 근기(根基)가 사제인 제수명에 비해 훨씬 못 미친다는 판단이 서자, 법통을 사제에게 양보하고 미련없이 동해(東海)로 은퇴했단 말이외다. 그대는 현진자의 깊은 뜻도 헤아리지 못하고 천리(天理)를 어겼소. 사(邪)로써 정(正)을 치려 들었으니 이 어찌 크나큰 착각이 아니겠는가? 내 효월선사에게 권고하리다. 일찌감 치 야심을 버리고 선산(仙山)으로 돌아가 후회될 결과를 모면하도록 하시오. 지난 백 년 고행 끝 에 쌓아올린 공업(功業)을 하루 아침 이슬처럼 잃는다면 너무 애석하지 않겠소? 그때는 후회해도 늦으리다!" 효월선사는 속에서 부글부글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내색은 않고 차디차게 웃으면서 추운수에 게 응수했다. "지난날 장미진인께서 교주로 계실 적에는 그 얼마나 관대하셨던가! 하지만 제수명이 법통을 이 어받은 이래로 오로지 자기 문하제자만을 감싸고 돌아, 제자놈들은 세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거 나 저희와 다른 문파의 인물이라면 가리지 않고 마구 살륙해 버렸지. 게다가 포악스런 제수명의 세력을 돕는 몇몇 소인배들도 제 솜씨 강한 것만 믿고서 다른 문파의 인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날뛰는 꼴이라니! 이제 우리 각 문파는 공분(公憤)을 느끼고 일제히 아미파와 더 이상 양립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소. 빈승은 그대 허풍처럼 무슨 문파의 수령이 될 생각도 없고, 그저 친구들 의 부탁을 받아 한바탕 구경삼아 감시하러 왔을 따름이오. 오늘 싸움에서 강한 자는 존재하고 약 한 자는 멸망할 터, 제각기 필생의 절기를 다 써서 실력의 고하를 겨루고, 생사의 판가름을 내는 마당에서 시비나 따져 봐야 헛소리 아니겠는가? 추운수, 그리고 왜수, 피차 쌍방간에 이런 상태로 는 승부를 내기 어려우니, 우선 저 운무진(雲霧陣)부터 거두시고 아미 측 도우들을 나오라고 하시 오. 그리고 쌍방이 실력껏 겨루어 누가 망하고 누가 흥하는지 승부를 냅시다. 어떻소?" 추운수는 실소를 터뜨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효월선사께서는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망상에 사로잡혀 고집을 부리시는군. 기왕 그러시다면 요구대로 응해 드리리다!" 왜수 주매도 각오를 다시 하고 추운수를 돌아보았다. "저들이 이렇게 나온다면야, 우리도 더 이상 겸손할 것 없겠네!" 왜수 주매는 그 자리에 선 채 두 손을 등 뒤로 번쩍 들었다. 그러자 토산을 가리웠던 구름이 좌 우로 갈라지면서 십육 명의 검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순간, 숭산이로도 몸을 번뜩여 산상 으로 돌아갔다. 자운사 측 화운동(火雲洞)의 세 동주와 묘강 유인동(留人洞)의 동주 세 사람은 모두 귀주성(貴州 省) 야인산(野人山) 장적동에서 합합노조에게 사사받은 동문들이며, 효월선사는 그들 여섯 형제들 의 사형뻘이 된다. 허비랑으로부터 응원요청의 편지를 받았을 당초, 효월선사는 동해삼선과 숭산이로의 무공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서 선뜻 나설 의욕이 없었다. 그러나 후에 다시 생각해 보니 오대파의 문하 가 구름같이 많은데 이번 기회를 구실삼아 그 전원을 소집하고 아미파와의 대결을 추진하는 한편 은밀히 또다른 문파를 세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일단 오대파 문하만 장 악한다면 그 세력으로 과거의 치욕을 씻는 것쯤이야 쉽지 않겠는가! 그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이를 성사시키기에 너무 벅차다고 판단했다. 그 즉시 귀주 야인산 장 적동으로 스승 합합노조를 찾아가서 협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스승인 합합노조 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반신(半身)이 불길에 타버리고 운신도 못하는 처지였다. 앞으로 삼십 년은 더 수련해야만 비로소 원상회복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낙심천만, 발길을 돌 리려던 효월선사는 궁여지책으로 화운동과 유인동에서 동주노릇을 하는 여섯 사제를 기억해 내고 서 합합노조의 동의 아래 이들을 협력자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장미진인이 제수명에게 남기고 간 석갑(石匣)의 비검이 출현하는 날, 그 날로 자신은 치명 적으로 패하여 재기불능이 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황산(黃山) 자금롱(紫金瀧) 폭포 밑 연못 속에서 단옥구(斷玉鉤)를 발견, 그것을 수중에 넣는 순 간, 석갑의 비검을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로써 효월선사는 무서울 게 없어진 것이 다. 그는 숭산이로와의 회견을 마치고 결전에 돌입하기 전, 잠시 동안 작전계획을 재검토했다. 누구 를 선봉으로 내세울 것인가? 상대편은 기다리고 있다. 초장부터 강력한 고수를 출전시켜야 하는 가, 아니면 하수급을 내보내 저쪽의 전력부터 탐색해야 할 것인가? 그는 세밀하게 계산을 거듭했다. 아까 자기가 숭산이로와 설전(舌戰)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선봉대의 주장 적염도인은 울끈불끈 주먹을 쥐고 몇 차례나 덮쳐들 태세였다. 그는 적염도인이 숭산이로의 무서움을 모르고 상대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염도인에게 거 듭 눈짓을 보내 지금까지 만류했다. 그러나 이제는 풀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분이 첫 싸움에 적을 격파해 보시겠소?" 효월선사의 첫 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적염도인이 선뜻 앞으로 나타났다. "나요!" 그러자 뒤미처 유인동의 동주 화씨 삼형제도 일제히 앞으로 나섰다. "저희들을 내보내 주십쇼, 사형!" "네 분 모두 출전하시오. 부디 조심하고 신중하게 싸우도록!" "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적염도인과 화씨 삼형제가 응답하고 토산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우 몇 걸음도 옮 기지 않았는데 맞은편 산상에서 역시 네명의 고수가 날아 내려왔다. 도인 둘, 승려 하나, 그리고 여승 하나였다. 아미파 측에서 적염도인 이하 화씨 삼형제의 상대로 선발하여 출전시킨 인물은 바로 취도인과 염선 이원화, 원각선사, 소인대사 등 네 명의 검선이었다. 추운수는 방금 효월과의 회견을 마치고 나서 상대방이 일 대 일의 대결을 원하고 있음을 간파했 다. 그리고 자운사 진영에서 괴상망측스런 생김새의 요물들이 출전하자, 더 이상 적측의 의도를 읽을 것도 없이 첫 출전자의 선발을 마쳤던 것이다. 적염도인은 금관(金冠)을 쓰고 불꽃처럼 시뻘건 도포를 걸친 채 맨발에 짚신을 신었다. 육 척이 훨씬 넘는 키, 주사(朱砂)처럼 붉은 얼굴에 뾰죽 내민 입술, 움푹패인 콧등, 토끼의 귀와 사나운 소리개처럼 툭 불거진 양 뺨을 가진 몰골인데, 허리에는 쌍검을 지르고, 등판에는 쪽빛이 번쩍거 리는 호로병 한 개를 또 짊어지고 있었다. 화씨 삼형제들도 짧은 반바지에 아래 맨종아리를 온통 드러내고 짚신을 신었다. 상체 역시 헐렁 헐렁한 적색 반소매 저고리 차림에 붉은 머리수건을 동여매었다. 십 척을 넘는 장신, 푸르스름한 얼굴에 입술만큼은 샛빨갛고 들짐승의 어금니 두 개가 삐죽 빠져나왔다. 삼형제 모두 허리춤에 묘도(苗刀) 한 자루를 차고 있는 품이 보기만 해도 질릴 밀큼 흉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미 측 검선들은 상대방의 요란한 생김새를 보고 첫눈에 화씨 삼형제가 사술(邪術)을 쓰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경각심을 한층 높였다. 적수가 출현하자, 적염도인은 두 말도 않고 대뜸 칼집부터 두드려 비검을 쏘아냈다. 그의 손에서 한 줄기 쪽빛 검광이 정면에 대치했던 취도인을 노리고 쏜살같이 뻗어나갔다. 취도인 역시 이에 질세라 비검을 날려 요격하기 시작했다. 화씨 삼형제의 서슬 푸른 묘도가 허공 높직이 솟구치더니, 이내 쪽빛의 도광(刀光)이 목표를 잡 고서 염선 이원화와 원각선사 소인대사의 정수리를 향해 제각기 수직으로 내리떨어졌다. 선제 공격을 당한 염선 일행도 지체없이 검광을 발출하여 일격의 공세를 차단했다. 삽시간에 싸움터의 허공은 두 줄기 푸른빛 검광과 두 줄기의 흰빛 검광이 적의 쪽빛 검광을 차 단하고 어우러져 무서운 파공음을 일으키면서 난무했다. 검광의 빛깔은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일순간에 상대방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살기찬 흉기들이었다. 얼마가 지나자, 쪽빛 검광과 도광이 기세를 잃고 점차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지탱할 진 력이 모자란 것이다. 적염도인은 조급해졌다. 이 상태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자, 그는 등에 짊어졌던 호로병을 허 리께로 돌려잡더니 병마개를 뽑으면서 중얼중얼 주문(呪文)을 외웠다. 다음 순간, '쏴르르, 쏴아!' 하는 굉음이 벼락치듯 울리고 수십 길이나 되는 화염이 호로병 속에 서 쏟아져 나와 곧바로 아미 검선들을 당장 태워버릴 기세로 뻗쳐갔다. "하하하, 어디서 감히 사술을 부리려는 게냐?" 소인대사가 껄껄 웃더니만 허공을 향해 일검을 찌르며 소리쳤다. "나가랏!" 외마디 호통과 함께 검끝에서 무수한 검화가 싸느랗게 일면서 불길을 눌러 막았다. 적염도인의 화염은 무형의 강기(剛氣)에 부딪쳐 더 이상은 뻗지 못하고 산산이 갈라졌다. 소인대사 곁에서 원각대사가 훌쩍 검광을 회수하더니 이내 신검합일로 번개같이 화염 속을 뚫고 적염도인에게 날아갔다. 화염 공세가 무위로 돌아가자 죽을 상이 된 적염도인이 재차 또다른 요법 펼치려다 느닷없이 불 길 속을 뚫고 신검합일로 덮쳐드는 검광에 소스라치고 말았다. "아앗!" 달아날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으나 벌써 때는 늦었다. 외마디 비명도 끝나기 전에 그의 몸뚱이 는 검광에 '푹!' 하고 꿰뚫려 벌렁 나가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화씨 삼형제는 적염도인이 검광에 꼬치산적처럼 꿰뚫려 즉사하자 대경실색했다. 너무 놀란 나머 지 저희끼리 무의식중에 눈길을 한 번 주고받느라고 정신이 흩어져 도광(刀光)마저 흠칫 줄어들 어 버렸다. 겨우 수비태세로 바꾸어서 몸을 지탱하는 판국에 무정한 염선 이원화의 비검이 날아 들었다. '아야, 지독하구나! 이젠 끝장인가.....' 투지를 잃고 허둥거리는 찰나, 자운사 측에서 수십 줄기의 붉은 빛이 파공성을 동반하고 쏘아져 오더니 아미 검선들의 검광을 차단했다. 지원군이 왔다는 걸 안 화씨 형제들은 비로소 위기를 벗 어나 안정을 되찾고 재차 공세로 전환했다. 그들 삼형제는 도광을 마구 뿌리면서 죽어라고 싸우 기 시작했다. 적염도인을 척살해 버린 원각선사가 아군 진영으로 되돌아 설 무렵, 적의 증원대가 들이닥쳤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응전태세를 취하고 선두로 날아든 철종도인과 맞섰다. 적염의 죽음에 분노가 복받친 철종도인이 서슬 푸른 일격을 가하자, 원각선사는 더 생각할 여지 도 없이 재빠르게 공세를 피해낸 다음 뒤미처 반격에 들어갔다. 철종도인을 앞세워 전열(戰列)에 뛰어든 인물은 금신나한 법원과 소화신 진랑 두 사람이었다. 서 전에서 한 사람을 잃고 화씨 형제 세 사람까지 위기에 몰리자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 없어, 효월 의 명령도 떨어지기 전에 싸움터로 뛰쳐나온 것이다. 금신나한의 검술은 비상했다. 일단 그의 비검이 발사되자 아미 세 검선은 힘겹게 그것을 맞아 싸워야만 했다. 원각선사는 철종도인과 겨루어 대등한 형세를 유지하면서 적의 허점이 보이기만 참고 기다렸다. 한데 그 싸움판의 균형을 깨뜨리고 뛰어든 자가 생겼다. 삼안홍예 설망이란 놈은 자기 편에 증원군 세 명이 가세하여 도합 여섯 명인데 반해 아미 측은 겨우 네 명으로 상대하는 것을 보자 이런 판국에 뛰어들어 전공(戰功)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생 긴 것이다. 그는 철종도인과 경수를 겨루고 있는 원각선사가 만만하게 보였다. 그래서 설망은 그 즉시 원각선사를 노리고 비검을 날렸다. 마침내 원각선사는 일 대 이로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가 다른 문파의 검선 둘을 맞았다고 해도 일패도지를 당할 실력은 아니다. 하지만 양손으로 네 손을 대적해야 하는지라 여간 분주하 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쌍방 세 사람은 수십 차례나 간발(間髮)의 위기를 넘기면서 결사적 으로 싸웠다. 악에 받친 철종도인과 설망은 수세보다 완전한 공세로써 원각선사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원각선 사 역시 만만치 않았다. 엄밀한 좌우 상하 수비로 문호(門戶)를 보호하면서 날카로운 일격의 공세 로 적들이 뒷걸음질치도록 만들곤 했던 것이다. 효월선사는 처음부터 자기 편 인물들의 실력이 너무나 고르지 못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 다. 그러므로 아미파 측 인물과 일 대 일로 단독대결해서 무공실력이 뒤떨어지는 하류급들의 손 해를 가능한 한 줄여보려고 계획을 했다. 한데 이제 막상 싸움을 시작하고 보니 자기편 사람들이 다시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미파 측 에서는 더 이상 증원하지 않고 종전 그대로 네 명만이 상대하는 것이다. 법원과 진랑, 화씨 삼형 제의 공세는 갈수록 맵고 사나와지는데, 아미 측 검선 취도인과 이원화, 소인대사의 검광은 점점 버텨내지 못하고 흔들리고 이 대 일로 원각대사를 협공하는 철종도인과 설망도 전황을 주도했다. 그쪽도 우세하게 싸우고 있는 편이다. 그렇다면 계획을 바꾸어야 한다. 일 대 일, 단독대결을 추 구할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다수로 밀어붙여 승세를 잡아놓고 우선 몇 놈을 죽여 적염도인의 원 수부터 갚아야 했다. 일단 초전에 압도적으로 우세를 차지하고 위엄을 떨친다면 상대는 사기가 떨어져 전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효월선사는 좌우에 포진한 자기편 고수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역시 효월선사와 같은 생각을 품 었던 모양으로 약속이나 한 듯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더 주저할 것도 없다. "쳐라!" 효월선사의 입에서 호통이 터졌다. 자운사 측 괴걸들은 일제히 비검을 날리면서 성난 야수처럼 무서운 기세로 싸움터에 뛰어들었다. 선두는 칠수야차 용비, 그 뒤를 바짝 따라서 피발산예 적은아, 백화랑 소련, 구미선호 유연랑, 통 비신원 녹청, 병유마 주홍 등 일곱 명의 검선들이 시윗줄을 벗어난 화살처럼 연달아서 아미 측 네 명에게 덮쳐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막 전투장에 돌입했을 때였다. 돌연 토산 위에서 벼락 튀듯 호통이 터졌다. "염치없는 요물들! 다수라고 이길 성싶으냐?" 뒤이어 섬전(閃電)과도 같은 검광 십여 줄기가 쏘아져 내려왔다. 싸움터는 삽시간에 칼빛과 인영 으로 그득차고 무서운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취도인과 염선 이원화, 소인대사는 여전히 화씨 삼형제를 상대로 가차없이 공세를 퍼부었다. 원 각대사도 철종도인과 일 대 일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에게 협공을 가하던 삼안홍예 설망은 어느 틈엔가 뛰쳐나온 여신동 주문에게 걸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방금 아미파 측에서 쏟아져 나온 병력은 모두 열 명, 여신동 주문을 선봉으로 풍화도인 오원지 가 소화신 진랑의 공세를 차단하고, 원원대사는 금신나한 법원을, 또 흑해아 울지화는 구미선호 유연랑을, 여공공 오문기는 백화랑 소련을, 제갈경아는 병유마 주홍을, 감리진인 허원통은 유덕을, 철사미 오수는 통비신원 녹청을, 완석대사는 칠수야차 용비를, 칠성수 시림은 피발산예 적은아를 각각 맡아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격전장이었다. 열세 쌍, 이십육 명의 고수들이 뿜어내는 수십 줄기 의 검광, 검화가 저녁놀이 불타기 시작한 창공에 황금빛으로 오색찬란하게 번뜩이며 상대방을 거 꾸러뜨리려고 용처럼 뱀처럼 꿈틀꿈틀 난무하는 것이다. 귀청을 에는 파공성과 금속성이 인적도 없는 황량한 저녁 들판을 진동하고 살기찬 검광에 눈이 부셨다. '아뿔싸!' 관전하던 효월선사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일거에 기선을 제압하려고 주력군 을 한꺼번에 투입한 것이 잘못된 것이다. 아미 측은 그들보다 한 수 높은 검선들을 지명해서 미 리 상대를 정하고 밀려 내려온 것이 아닌가! 효월대사는 적의 유인책에 말려든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만회할 길은 없어졌다. 이쯤 되었으면 오직 한 가지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자기편 최고수급인 음양수와 지비선사 등을 출전시켜 숭 산이로와 결정적 승부를 내는 길뿐이다. 그는 음양수, 지비선사를 돌아보고 자신의 의도를 말하고 출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지비선사는 '아직 결정적 시기가 오지 않았으니 좀 더 관망해 보자'고 밀어붙이면서 좀처럼 움직일 기색이 아니고, 음양수는 아예 효월선사의 말을 못 들은 척 시침떼 고서 아미파의 젊은 남녀 검선들의 몸매만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효월선사가 그들을 붙잡고 출전하느니 마느니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 동안, 싸움터의 전황은 이 미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효월선사가 후회한 것처럼 추운수는 과연 전투장에 뛰쳐든 적의 허실을 하나하나 간파하고 각자 그에 충분히 대처할 만한 고수를 골라서 출전, 요격시켰던 것이다. 그 역시 효월선사의 의도대로 아미파 측 젊은 검선들이 경험없이 나서서 희생당하는 것을 회피 했다. 그는 자운사 측에서 용비를 비롯한 고수급 열 명이 벌떼처럼 몰려나오자, 즉각 그들을 대적 할 만한 검선 열 명을 출동시켜 각자 일 대 일로 요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더 이상 머뭇거렸다 가는 이미 초전에 나선 네 명부터 낭패를 면치 못하리라 직감했던 것이다. 일단 상대방의 천적(天敵)들을 풀어보내고 나서 추운수는 다시 왜수 주매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부탁을 했다. 왜수 주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동의하더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여신동 주문이 상대로 고른 것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삼안홍예 설망이었다. 그녀는 설망의 면전 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빽!' 소리가 나도록 고함부터 질렀다. "요 멍청한 애물덩어리 녀석! 날 알아보겠느냐?" 그녀가 황산 찬하대사의 제자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설망이라고 모를 리 없 다. 한창 철종도인과 함께 원각선사를 협공하던 그는 황급히 공격방향을 돌려 주문의 정수리를 노리고 냅다 비검을 쏘았다. 주문이 깔깔 웃었다. "쥐새끼 같은 녀석, 내가 암습이라도 할 줄 알았더냐?" 이윽고 그녀의 검봉(劍鋒)에서도 칼빛이 뻗어나와 설망의 비검과 한 데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 다. 설망은 결코 검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문은 육지(肉之)의 혈즙(血汁)을 마신 이후 공력도 정진(精進)한 데다가, 근자에 들어서는 또 새로이 몇 가지 법보(法寶)마저 얻어 솜씨가 더 욱 증강된 몸이었다. 설망이 선불맞은 범처럼 덮쳐오자, 그녀는 쉽사리 이길 수 없다고 직감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는 또 한 자루의 보검이 쥐어졌다. 그 칼은 찬하대사가 내려준 홍예검(虹霓劍)이었다. 가뜩이나 겁을 먹은 판국에 '씽!' 하고 또 한 자루 붉은 검광이 날아들자, 설망은 혼비백산, 자기 도 모르게 그만 아우성을 쳤다. "주매사형, 목숨만 살려주!" 황산에 있을 적부터 주문은 설망과 익히 아는 사이였다. 그놈이 심술이 모질고 사나와 자기 사 형인 고해아(苦孩兒)까지도 모함하여 해치려던 것을 용서할 수 없어 이제 단칼에 베어버릴 참인 데, 그놈의 입에서 '목숨만 살려 달라'는 애걸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문득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동했다. 설망의 머리통을 수박덩이 쪼개듯 두 조각내려다가 떨어지는 검광을 황급히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칼빛은 이미 설망의 얼굴을 휩쓴 다음이었다. "으와앗!" 설망은 왼쪽 눈을 찔리고 뺨에 툭 불거진 광대뼈마저 '철썩!' 베어져 날아갔다. 비명소리와 함께 핏물이 댓줄기처럼 뿜어나왔다. 그래도 주문이 그만큼이나 재빠르게 비검을 회수했으니 망정이지, 애꾸나 광대뼈는 고사하고 하마터면 생목숨이 통째로 날아갈 뻔했던 것이다. 설망은 혼비백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문의 검광에 찍어눌렸다기보다는 차라리 넋이 빠져 몸을 지탱하고 설 힘조차도 없어졌다는 게 옳을 것이다. 주문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네 놈의 사형 고해아의 낯을 보아 죽이지는 않겠다. 어서 칼을 거두고 달아나지 못할까!" 정수리를 짓누르던 검기(劍氣)가 풀어지자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설망은 저릿저릿 쑤 셔오는 아픔을 참고 두 말없이 냅다 뛰기 시작했다. 달아날 곳은 자운사가 아니라 스승 허비랑이 있는 황산 오운보였다. 설망이 피를 흘리며 달아나자, 주문은 즉시 몸을 솟구쳐 싸움터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통비신원 녹청과 피발산예 적은아였다. 녹청과 적은아는 이제 한창 아미파의 칠성수 시림, 철사미 오수를 상대로 백중지세의 혈전을 벌 이고 있었다. 그 배후로 주문이 덮쳐들었던 것이다. '쏴아!' 하는 파공음과 함께 적은아의 등 복판 으로 칼빛이 관통했다. 적은아는 영문도 모른 채, 정면의 적을 노려보면서 죽었다. 적은아의 몸뚱이가 맥없이 쓰러지자, 녹청마저도 찔끔 놀랐다. 뜻밖의 사태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헛갈린 순간, 그의 비검은 철사미 오수가 날린 쌍검에 옭매여 '쩡!' 하고 토막나고 말았다. "아차!" 녹청은 사세가 글렀다고 판단했다. 막 몸을 돌이켜 빠지려는 참인데 그 방향으로부터 칼빛이 날 아드는 게 아닌가! 하필이면 도주 방향에서 주문의 보검이 가로 후려쳐 왔던 것이다. 녹청은 외마디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허리를 잘렸다. 그의 몸뚱이는 허망하게 두 토막으로 나뉘 어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화씨 형제 셋은 여전히 염선 이원화, 취도인, 소인대사를 맞아 싸우고 있었다. 이들 삼형제는 가 뜩이나 힘이 달려서 애를 먹는 데다 상대방의 검기에까지 눌려 사술(邪術)도 제대로 구사해 보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시림과 주문, 오수 세 명의 강적마저 합세했으니 견뎌낼 재간이 있겠는가 말이다. 놀랍고 당황한 나머지 수비가 풀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인대사의 장검이 번쩍 찔러들었다. "끼야앗!"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리며 두 동강으로 쪼개진 것은 막내 화수라였다. 일도양단으로 적수 하나를 참살하고 나서 소인대사는 취도인에게 말했다. "두 분 선배님, 나머지 요물들은 세 도우(道友)와 함께 처치하십시오. 저는 완석대사를 도우러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완석대사의 싸움터로 뛰어들더니 이내 그와 함께 강적 용비를 협공하기 시 작했다. 화로제, 화무량 형제는 막내 아우가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자, 슬픔과 놀라움이 겹쳐 도 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격한 감정을 못 이겨 손발이 흐트러진 사이에 이번에는 맏형 화로제가 취도인의 일격을 받고서 어깻죽지와 두개골까지 절반이 날아가 즉사했다. 그와 동시에 화무량의 비검도 염선 주문, 오수 세 사람의 검광에 쌓여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래도 화무량은 눈치가 빨라서 병기를 잃는 찰나, 즉각 요법(妖法)을 전개하고 전광석화처럼 지 옥에서 빠져나갔다. 마침내 그는 두 형제의 비참한 전철을 밟지 않고 그 길로 묘강(苗疆)까지 뒤 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쳤다. 백화랑 소련은 여공공 오문기와 맞붙어 싸웠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녀는 오문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십여 합을 겨루기도 전에 소련은 검광을 격파당하고 음락(淫樂)으로 점철된 더러운 인생 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구미선호 유연랑은 그래도 흑애아 울지화를 상대로 백중(伯仲)의 형세를 유지하면서 버티고 있 었다. 그러나 단짝이던 백화랑 소련이 참살을 당하고 그녀를 죽인 여공공 오문기가 무서운 기세 로 달려오는 걸 보고서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녀는 과연 꼬리 아홉 달린 여우답게 울 지화를 향해 허장성세로 강공을 펼치는 듯하더니 냉큼 검광을 거두어들이면서 신검합일, 허공으 로 번뜻 솟구쳐 올라, 그 길로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고 말았다. 이 무렵 칠수야차 용비는 완석대사를 상대로 싸우면서 구자모음혼검을 전개하여 일방적으로 압 도하고 있었다. 위기에 몰린 완석대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할 판국이 되었을 때 요행으로 제영운, 금선 남매가 쫓아왔다. 제씨 남매의 도움을 받아 완석대사는 겨우 처참한 패 국을 모면할 수 있었다. 원래 산머리 위에 예비대로 남아 있던 금선은 그동안에도 몇 차례나 싸움판에 끼어들어 한바탕 설쳐대고 싶었지만 그가 움찔거릴때마다 모두 누나 제영운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완석대사가 용비의 구자모음혼검에 제압당하여 위급한 처지로 몰리는 것을 목격했다. 금선은 제영운의 눈길 이 다른 편 싸움판에 쏠린 틈을 타서 후딱 원앙벽력검을 뽑아들기가 무섭게 전광석화와도 같이 산 아래로 날아갔다. 깜짝 놀란 제영운이 잡아채려 했을 때는 이미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그녀는 말썽꾸러기 동 생에게 무슨 일이 닥치면 어쩌나 걱정했다. 걱정만 한다고 되지 않았다. 그 즉시 몸을 솟구쳐 동 생의 뒤를 따라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칠수야차 용비는 강적들과 삼 대 일로 싸우게 되 었던 것이다. 용비의 구자모음혼검은 본래 일검만으로 푸른빛 검광 한 줄기, 흰빛 검광 여덟 줄기, 도합 아홉 줄기의 검기를 발출하는데, 그것 만으로도 웬간한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무서운 비검이 었다. 그는 평상시 일검 이상은 좀처럼 구사해 본 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제 완석대사를 여유있게 제압하고 목줄기를 끊으려는 판에 두 아이가 느닷없이 가세하 자 그는 울화통이 치밀었다. 열화같이 성난 용비의 손에서 이십사 자루의 구자모음혼검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삽시간에 이백십육 가닥의 검광이 귀기(鬼氣)서린 불꽃을 토해내면서 하늘을 가득 메 우더니 제영운 남매와 완석대사를 전후 좌우로 포위해 버렸다. 위기일발의 순간, 소인대사와 취도인, 염선 이원화가 선두를 다투며 쫓아왔다. 노련한 세 검선들 은 삼 면에서 용비의 비검을 차단하고 요격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위험을 벗어난 완석대사와 제영운 남매는 겨우 안정을 되찾고 나머지 한쪽의 검광에 맞서 평수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금선 의 눈에 얼핏 척신동 주문이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설망과 적은아, 녹청을 차례로 격파하고 기세등등해진 주문은 취도인 일행 셋이 완석대사를 돕 기 위해 달려가는 것을 발견하고 그 판에 끼어들어 용비와 싸울 작정을 했다. 그리고 신바람나게 장검을 휘두르며 뒤따르던 도중, 그녀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코끝에 달콤하고도 따뜻한 향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주문의 머릿속은 술에나 취한 듯 어찔어찔 현기증이 일고 삽시간에 전신은 물에 젖 은 솜처럼 나른해져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적의 암습에 걸렸구나!' 그녀는 비검을 발사하려 했다. 하지만 도무지 손가락 한 개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암흑 속에 서 언제 적의 일격이 날아들지도 몰랐다.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놀란 마음만 다급할 뿐 그녀의 몸뚱이는 스스로 무너지듯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돌연 한 줄기 오색찬란한 광채가 자기 가슴을 꿰뚫고 나갔다. 가슴을 적의 검기에 관통당했다고 느낀 찰나, 갑작스레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순간적으로 번 갯빛이 스치고 지나간 듯한 환상을 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중천에서 어렴풋이 싸 늘한 광채를 흩뿌리는 달빛 아래 수라장을 이룬 싸움터의 움직임이 또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칼빛을 번쩍이며 어우러져 날뛰는 그림자들을 보면서 그녀는 비로소 자기가 살아 있음을 실감했 다.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두 늙은이가 마주 선 채로 손짓, 발짓하며 춤을 추듯이 겨루고 있는 게 보 였다. 주먹질, 발길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말다툼 끝에 삿대질도 멀찌거니 상대방을 치는 듯 해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은 바로 그녀가 새로운 스승으로 맞이한 왜수 주매였다. 그 상대는 동안 (童顔)에 호호백발의 늙은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실로 요사스런 생김새를 가진 괴인이었다. 주문은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이 방금 착각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오색찬란한 검광이 자신의 가 슴을 꿰뚫어 나간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발출되어 요법(妖法)을 깨뜨렸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녀는 얼른 품속에 손을 넣고 더듬어 보았다. 과연 손끝에 닿는 것은 왜수 주매가 선사한 거울, 바로 천둔동경(天遁銅鏡)이 아닌가! 스승으로 부터 얻은 이후 한 번도 써볼 기회가 없어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오늘 무의식중에 스스로 반사광을 뿜어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거울을 꺼내들자 오색찬란한 광화(光華)가 천지간에 눈부시도록 비추었다. 그녀는 스승과 괴노가 무슨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발길은 왜수 주매 쪽으 로 향했다. 그러나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스승의 호통이 터졌다. "가까이 오지 마라! 어서 그 천둔보경을 가지고 다른 도우들을 위기로부터 구해내거라! 이 요마 는 내가 처치하겠다." 소스라치게 놀란 주문은 후딱 뒤돌아 보았다. 맙소사! 어느 틈엔가 어두컴컴한 중천에 온통 도광 과 검광이 가득차고 수만마리의 뱀처럼 용처럼 마구 날뛰고 있지 않는가! 적측에서는 또다시 푸르고 흰빛이 번쩍 날아오르더니 곧바로 구름처럼 뒤엉킨 검광의 층(層)을 꿰뚫고 말 듯 기세등등하게 쏘아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토산 위에서도 서너 줄기의 금빛이 날 아내려와 푸르고 흰빛을 차단했다. 주문은 이내 완석대사, 제영운 남매의 전세(戰勢)가 악화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지체없이 천 둔동경을 한 손에 높이 쳐들고 용비가 있는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제3권으로 계속> 촉산기협(1부) 3 승패의 갈림길 寶鏡散子母陰魂 諸劍仙鬪法完小劫 神雷破都天惡煞 一俠女輕敵受重傷 효월선사(曉月禪師)는 자기가 출전시킨 고수들이 연전연패를 당하자 조급하고 분한 마음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화씨 삼형제 가운데 둘이 죽어 넘어지고, 게다가 애지중지하던 제자 녹청(鹿淸) 마저 적의 검광에 두 토막이 나고 말았으니 어찌 부끄럽고 통분하지 않겠는가!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격한 감정만이 들끓었다. 이젠 작전계획이고 뭐고 없었다. 그는 쌍검을 뽑 아 양손에 갈라잡고서 길게 탄성을 터뜨렸다. "이야압!" 기합소리와 함께 두 가닥 검광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지비선사(知非禪師)와 천지상인(天池上人), 유룡자(遊龍子) 위소소(韋少少), 종선생 (鍾先生) 등 네 명의 검선들도 일제히 비검을 날리며 싸움터로 뛰어들었다. 당초부터 이들이 자운 사 측의 열세를 빤히 보면서도 참전하지 않았던 것은 자운사 무리들이 너무도 사악하고 음탕하여 공연히 끼어들었구나 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혐오감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 속 한 귀퉁이에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아미파의 손을 빌어 이 요마들을 깨끗이 소 탕했으면 하는 생각마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출전한 자들의 태반이 눈앞에서 참살당하고 이제 효월선사조차 목숨을 던질 각오로 뛰어드는 것을 보니 그냥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기왕에 도우러 왔으면 승패야 어찌 되든지 간에 단 한 차례나마 손을 내밀어 주어야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말이다. 효월 이하 다섯 고수들의 검술은 고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이 공격전에 뛰어드는 걸 목격 한 추운수(追雲搜) 백곡일(白谷逸)이 어찌 감히 소홀하게 넘길 수 있으랴! 그는 지체없이 고행두 타(苦行頭陀)와 함께 일제히 땅을 박차고 쏜살같이 내려갔다. 그들의 비검에서 뻗어나간 금빛 검 광은 반공중에서 어우러져 효월선사들의 직공(直攻)을 가로막고서 살기를 뿜으며 요격하기 시작 했다. 싸움터 한편에서는 왜수(矮搜) 주매(朱梅)가 음양수(陰陽搜)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원래 음양수가 자운사 결전에 참여한 속은 따로 있었다. 그런 만큼 오대파와 아미파 간에 전투 가 벌어지고 효월선사로부터 누차 참전요청을 받고서도 못 들은 척 무시해 버리고, 이제까지 줄 곧 아미파의 젊은 남녀제자들의 동태만 주목해 왔던 것이다. 마침내 그 눈길에 여신동(女神童) 주 문(朱文)의 자태가 들어왔다. 전신이 선골(仙骨)을 타고난 데다, 그 미색이야말로 하늘의 선녀보다 도 아리따왔다. '바로 저것이다!' 음양수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껏 싸움터에 나서지 않고 눈여겨 보았던 목표가 드디어 발견된 것이다. 그의 신형이 훌쩍 사라지더니, 어느 틈엔가 주문의 몸 곁에 나타났다. 이어서 음양수는 오행나이미마장(五行那移迷魔障)의 술법을 펼쳐 그녀를 가두어 버렸다. 맛좋은 먹이를 포획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음양수가 손을 뻗어 막 움켜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누가 그의 궁둥이를 호되게 걷어찼다. 그 아픔은 심폐(心肺)까지 찌르르 울릴 만큼 대단했다. 순 간적으로 적의 암습에 걸렸다고 생각이 들자, 그는 먹이를 채뜨릴 겨를도 없이 후닥닥 뒤돌아 보 았다. 궁둥이에 발길질을 한 사람은 바로 왜수 주매, 그 늙은 놈이 아닌가! 속에서 울화가 뻗친 음양수는 두 말없이 전도미선오운장(顚倒迷仙五雲掌)의 수법으로 주매를 제 압하려 들었다. 그 금나수(擒拿手)는 음양수가 자랑하는 절기였다. 그것은 오행진기(五行眞氣)를 상대방의 눈, 코, 입 속으로 불어넣어 단숨에 감각을 마비시켜 꺼꾸러뜨리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그러나 주매는 피하기는커녕 입을 쩍 벌리고 껄껄 웃기까지 했다. "곰 같은 녀석, 어디 그 재주 한번 더 부려보아라. 아주 재미있는 걸!" 음양수는 내심 찔끔 놀랐다. 모처럼 절기를 펼쳤는데 효과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 설 수야 있는가.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입속으로는 쉴새없이 주문(呪文)을 외기 시작했다. 이어서 손짓발짓 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그 요법을 파해 하는 방법을 모르면 단 한 번의 손짓 만으로도 상대방을 꺼꾸러뜨릴 수가 있는 것이다. 주문이 천둔경의 반사광 덕분에 정신을 차렸을 때 목격한 것이 바로 이 광경이었다. 왜수 주매는 음양수가 부리는 술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지치 면 단칼에 목을 베어 다시는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만들 심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자 주문이 물정도 모르고 자기 쪽으로 달려오는 걸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호통을 질러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바람에 자칫 정신이 헛갈렸다. 그 찰나 음양수의 수법이 뚫고 들어왔다. 왜수 주매는 심기가 흔들려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걸 느꼈다.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차, 큰일날 뻔했다!' 황급히 심신(心身)을 진정시키고 또다시 잠잠한 가운데 상대편의 변화를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 술법의 지독스러움에는 그만 혀를 내둘렀다. 두 번째 술법도 무위로 돌아가자 음양수는 마침내 도망칠 채비를 차렸다. 그러나 주매 역시 그 낌새를 놓치지 않고 발을 빼기가 무섭게 '윙!' 하니 비검을 날려 단칼에 음양수의 몸뚱이를 두 동 강이로 베어버렸다. 한데, 다음 순간 푸른 연기가 풀썩 일더니 갈라진 뱃속에서 음양수와 꼭같이 생긴 인형(人形) 하 나가 툭 뛰쳐나와 구름 위로 날아오르는 게 아닌가! 왜수 주매가 영문을 차릴 틈도 없이 그 인형 은 한 마디 말을 남겨 놓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 은혜 아주 고맙소! 훗날 인연이 닿거든 후히 보답하리다." 음양수는 주매의 검기를 빌어 탈각(脫殼)을 하고 도주한 것이다. '아뿔싸!' 주매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달아날 낌새를 눈치채고 기습적으로 요참(腰斬)을 한다 는 것이 도리어 음양수에게 좋은 일을 해준 셈이 된 것이다. 주매는 추격을 아예 단념했다. 싸움터의 상황을 훑어보니, 이미 살륙의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 다. 칠수야차(七手夜叉) 용비(龍飛)도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철사미(鐵沙彌) 오수(悟修)와 풍화도인(風火道人) 오원지(吳元智)가 이제 막 소화신 (小火神) 진랑(秦郞)의 허리께를 잘라버리는 광경이 보였다. 효월선사 역시 진랑이 참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추운수, 고행두타와 상대하면서 단시각에 승리 하기는커녕 몸조차 빼돌릴 여유마저도 없는 처지다. 그러나 진랑의 복수는 해야만 했다. 효월은 쌍검을 갈라 검광 한 가닥을 오원지에게 쏘아보냈다. 이제 갓 진랑을 참살한 오원지가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을 때 효월의 검광이 번쩍 하고 들이닥쳤다. 선뜻 피신하려 했으나 칼 빛이 사정없이 베고 지나간 후였다. 오원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함께 섰던 오수는 혼비백산, 감히 효월의 검기를 맞받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솟구쳐 옥청관 쪽 을 향해 달아났다. 유덕(兪德)은 감리진인(坎離眞人) 허원통(許元通)과 맹렬한 칼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자신의 평 생 절기인 홍사(紅砂)가 고행두타에게 무참히도 격파당한 지 이미 오래였고, 지금은 겨우 비검으 로 구차하게 맞서 근근히 백중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갈경아(諸葛警我)까지 달려와서 허원통과 합세하여 협공을 가하는 바람에 유 덕은 당장 열세로 몰리고 말았다. 제갈경아는 일검에 병유마(病維摩) 주홍(朱洪)의 한 팔을 베어 떨어뜨리고, 주홍이 검광을 일으켜 필사적으로 도주하자 상대를 잃고서 유덕에게 달려든 것이다. 유덕은 전후 좌우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들릴 때마다 자기 편의 사상자가 속출하고 패주하는 걸 보면서 간담이 서늘하던 판국에 거의 증원군마저 가세하자 이제는 틀렸구나 싶어 틈을 노리다가 마침내 비검을 거두고 쏜살같이 싸움터 밖으로 벗어났다. 이제 잔명(殘命)을 부지하여 도망칠 곳 은 오직 하나, 서장(西藏)까지 뒤도 안 돌아보고 내빼는 것이었다. 결국 허원통과 제갈경아는 그의 기습적인 양동공세(陽動攻勢)에 말려들어 잠시 주춤거린 사이에 유덕을 놓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다시 싸울 상대를 찾아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철종도인(鐵鐘道人)은 초전부터 원각선사(元覺禪師)와 단독으로 싸우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 었다. 자기를 도와 원각선사에게 협공을 가하던 삼안홍예(三眼紅猊) 설망(薛莽)이 주문한테 호되 게 당하고 꽁지 빠져라고 달아난 이후, 의지를 잃자 그 길로 열세에 몰려 공격 한번 제대로 펼쳐 보지 못하고 원각선사의 매서운 검격(劍擊) 아래 어쩌다 겨우 숨 한모금 돌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때 허원통과 제갈경아의 협공마저 덮쳐들었다. 그러니 철종도인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느 공격부터 막아야 할지 모르고 허둥거렸다. 감리진인 허원통의 손에서 청백 쌍검이 날아드는 걸 보고 황급히 막아내려 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제갈경아의 검광이 비스듬히 찔러왔다. 이제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 즉시 검광을 거두어들이는 순간, 허원통의 쌍 검과 제갈경아의 일검이 한꺼번에 몸통을 꿰뚫더니 그대로 네 토막으로 걸레 찢듯 쪼개버리고 말 았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장검이 푸른 서슬을 번쩍거리며 서북쪽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칼은 철종도인이 평생을 두고 수련한 보검이었다. 위가장 싸움터를 떠난 그 보검은 마침내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떨어져 땅 속 깊숙이 파묻힌 채 훗날 인연이 있는 자의 눈에 다시 발 견되기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다. 철종도인을 걸레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후, 세 검선은 다시 원원대사(元元大師)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금신나한(金身羅漢) 법원(法元)에게 덤벼들었다. 칠수야차 용비와 싸우던 검선들은 그가 전장을 이탈하여 달아나자 이번에는 숭산이로(崇山二老) 의 싸움판에 합세하였다. 칠수야차 용비는 어떻게 도망쳤는가? 그는 첫상대로 완석대사(頑石大師)와 겨루어 승기(勝機)를 잡고 있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제영운(齊靈雲)과 금선(金蟬) 남매의 검광이 훼방을 놓고 뒤미 처 신니(神尼) 우담(優曇)의 진전(眞傳)을 받은 소인대사(素因大師) 마저 가세하자, 그는 미칠 듯 이 분노가 폭발했다. 여기에 취도인(醉道人)과 염선(髥仙) 이원화(李元花)의 검기까지 끼어들자, 이제는 여유도 잃고 점차 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급해진 용비는 암암리에 오행진기를 일으키면서 쓰고 있던 금관 마저 벗어 던졌다. 산발(散髮)이 된 그는 가운데 손가락을 깨물어 자기 검광에 피를 한 모금 뿜어 적셨다. 구자모음혼검은 과연 무섭기 짝이 없었다. 피를 머금은 검광이 위력을 발휘한 지 얼마 안 되어 완석대사와 염선 이원화의 검광이 사기(邪氣)에 더럽혀져서 점차 흐릿하게 빛을 잃기 시작했다. 완석대사는 불안감을 느끼고 몸을 날려 후퇴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주의가 흐트러져 왼팔을 용비의 일검에 찔리고 말았다. 녹색 검화가 이글거리며 옮겨 붙어 옷자락과 살을 태우기 시작했 다. 그것은 치명상이었다. 금선은 완석대사가 중상을 입고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았다. 손에 든 벽력검을 어지러이 휘둘러 금빛 검막을 일으키면서 그의 곁으로 달려가 부축했다. 완석대사가 검화를 끄고 불타는 옷자락을 마구 찢어내는 동안 적의 재공격에 대비해서 단단히 호위하고 단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염선 이원화도 내심 당황했다. 자기 검광이 돈좌(頓挫) 당하고 완석대사마저 부상을 입고 물러서 자, 전열(戰列)이 흐트러진 틈에 용비의 음혼검이 더욱 치열하게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사면 천 지가 모두 적의 검광에 둘러싸여 어느 방위로도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결정적인 위기에 몰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미 검선들의 연합 공격진은 여기저기서 토막토막 끊겨지고 그 틈새로는 녹색 검화가 뚫고 들어왔다. 이때였다. 홀연듯 한 가닥 오색 빛줄기가 일 장 남짓 크기의 방원(方圓)을 형성하고 적의 포위망 바깥으로부터 비쳐들더니 이어 푸른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여신동 주문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왔 다. 그녀의 손에는 오색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거울이 쥐어져 있었다. 천둔경에서 쏟아져 나온 빛줄기는 곧바로 용비의 구자모음혼검에 반사되었다. 빛이 닿는 곳마다 적의 녹색 검광은 여지없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반딧불처럼 바람결을 따라서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백열아홉 줄기의 음혼검광이 격파된 것이다. 곤욕을 치르고 있던 아미 검선들은 그 즉시 전의를 회복하고 용기 백 배, 재차 공격에 들어갔다. 전세는 삽시간에 뒤집혔다. 그들은 용비를 중심으로 각각 방위를 잡아 역포위망 구축에 착수했다. 칠수야차 용비는 대경실색했다. 이제 완석대사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쟁쟁한 아미 검선들 의 기세를 꺾어 의기양양해진 그는 최후의 일격으로 적을 섬멸하려고 스물네 자루 음혼검에 혼신 의 진원(眞元)을 다 쏟아붓고 있었다. 그런 찰나, 난데없는 오색 광채가 허공으로부터 쏟아져 내 린 것이다. 그 빛을 보는 순간, 그는 음혼검의 극성(剋星)과 맞닥뜨렸음을 직감했다. 황급히 검광을 거두어 들이기 시작했으나 한 수가 늦었다. 오색의 광채는 비정하게도 그의 비검 스물네 자루 가운데 스 물한 자루를 연거푸 격파해 버리고 말았다. 수십 년 동안 고생 끝에 연성해낸 공력이 한순간에 무참히 박살나고 이제 손아귀에 남은 것은 겨우 석 자루의 구자모음혼검뿐이었다. 당혹감과 비통한 마음에 전신의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듯했지만 이걸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목을 늘이고 순순히 죽음을 맞을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버티다간 목숨마저 건질 기회도 놓치고 말리라. 그는 나머지 석 자루 비검을 한꺼번에 쏘아냈다. 번쩍 하고 검광이 발출되는 순 간, 그는 음풍(陰風)을 일으켜 몸을 감추고 적의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미 검선들의 포위망이 구축되었을 때는 그가 이미 도주한 다음이었다. 강적이 달아나자, 검선들은 완석대사에게 달려갔다. 그는 중상을 입고 혼절해 있었다. 취도인(醉 道人)과 염선 이원화가 즉시 완석대사를 부축하고 벽사촌 옥청관으로 날아갔다. 어떻게 해서든지 요검의 화상을 치료하여 살려내야만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지체없이 숭산이로에게 합세했다. 그들의 상대는 효월선사였다. 자운사 측 선봉대로 왔던 금안비비(金眼沸沸) 좌청허(左淸虛), 추혼동자(追魂童子) 소태(蕭泰), 무 발선(無髮仙) 여원자(呂元子) 세 사람은 이미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그들은 당초 적염도인(赤 焰道人)의 협박을 받고 마지못해 참가했는데, 그 협박자가 초전에 맥없이 죽어자빠지고 아미파의 기세 또한 갈수록 엄두를 못낼 만큼 드세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미 자운사 쪽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인사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슬그머니 싸움터를 빠져나가 그 길로 종적을 감추었던 것이다. 죽을 자는 죽고, 달아날 자는 달아났다. 이제 싸움터에 남은 것은 효월선사, 금신나한 법원, 천지 상인, 유룡자, 위소소, 종선생뿐이었다. 이들 다섯이 아미 측의 숭산이로와 고행두타를 비롯 여러 검선들을 상대로 결사적인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효월선사는 자기가 거느리고 온 숱한 병력이 몇 시진 못되어 거의 모두 쓰러지자 부끄러움과 분 노가 들끓어 올랐다. 자신도 현재 추운수를 상대하고는 있지만 쌍방간의 실력 차이는 이미 드러 난 지 오래였다. 만약 종선생의 비검이 곁에서 추운수를 협공하지 않았더라면 자기 역시 벌써 패 했을 것이다. 어차피 오늘 이 싸움에서는 조금의 승산도 없었다. 그 사실을 자신도 뻔히 알지만 자기가 초빙 해 끌어들인 조력자들은 용전분투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자기부터 물러날 수 있단 말인가? 적 방의 증원군은 갈수록 점점 늘어나고 성세를 크게 떨치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젊은 층의 검선들은 더욱 교활하고 가증스러우나, 요 어린 것들은 하나같이 소인 대사의 사주를 받아가며 상대방의 검세가 사나울 때는 정면공격을 회피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사 태를 관망하다가 상대방의 공수(攻守) 간에 실오리만한 파탄이 드러나기가 무섭게 그 허점을 뚫 고 비검을 날려 집중공격을 퍼붓는 것이다. 효월선사나 그 동료가 그들에게 요격을 가하려들면 얄밉게도 즉시 검을 거두어들여 잽싸게 원위 치로 달아나 버리기도 했다. 악에 바친 효월 일행이 뒤쫓으려 해도 그때마다 숭산이로나 고행두 타를 비롯한 노장들에게 차단당하여 번번이 놓치는 것이었다. 이렇듯 정면대결에 기습까지 출몰무상한 데다 전후 좌우 모두 적에게 둘러싸였으니 효월선사와 금신나한 법원은 계궁력갈(計窮力竭), 적의 칼에 맞기보다 먼저 피로에 지쳐 죽을 판국이었다. 얼마 후 법원은 원원대사의 검광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멀찌감치서 관망하고 있던 주문이 허점 을 타서 그의 뒤통수로 홍예검을 날려보냈다. 역전 노장 법원은 검술만 고강한 게 아니라 오랜 경험을 통해 방금 날아드는 공격의 강도(强度)가 이 상태로선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만큼 비상하 다고 직감했다. 그는 단전(丹田)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오행진기를 한껏 끌어올려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그의 검 광 수십 줄기가 홀연듯 사라지고 바람을 찢는 파공성만 남긴 채 금신나한은 전투장을 이탈하여 도주해 버렸다. 아미 검선들 역시 법원을 뒤쫓지 않고 달아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법원이 어린 계집의 손에 쫒겨 달아나는 걸 보고서 효월선사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제 자기 만 더 바쁘게 된 것이다. '요 젖비린내 나는 종자들, 어디 두고 보자! 훗날 외나무 다리에서 마주쳤다간 네놈들 죽어 묻힐 곳도 없게 요절을 내고야 말리라.....!' 숭산이로나 고행두타가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효월선사 하나쯤은 벌써 죽이거나 사로잡고도 남 았을 것이다. 그런데 효월이 끌어들인 네 명의 조력자는 모두 곤륜파(崑崙派)에서도 명숙(名宿)에 속하는 원로들이었고, 지비선사 등의 사부인 일원조사(一元祖師)와 감승(敢僧) 공료(空了) 또한 아 미 측 원로들과 허물없이 대하는 지기(知己)들이었다. 하물며 지비선사, 위소소, 천지상인, 종선생이 아미파와의 결전에 참여한 것은 단지 효월선사의 체면을 보아 마지못해 끼어들었을 뿐, 결코 본심에서 아미파를 적대시 하는 게 아님을 익히 아는 터,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공개적으로 곤륜파와 원한을 맺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효월선사는 장미진인(長眉眞人)의 유언대로 조만간에 석갑비검(石匣飛劍)의 칼날 아래 처 형당할 몸이었다. 아직은 그가 죽을 겁수(劫數)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며칠 더 살아 있도록 내버려 두어도 괜찮다. 아미 검선들은 이러한 상황을 신중히 고려하여 효월이나 지비선사 일행에게 살수 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곤경으로 몰아넣어 젊은 층들에게 교란기습(攪亂奇襲)을 반복시켜 지 칠 대로 지치게 만든 다음, 스스로 깨달아 물러나게 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룡자 위소소가 오해를 했다. 그는 숭산이로 등 아미파 사람들이 자기들을 고 양이 쥐 놀리듯 희롱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화가 뻗칠 대로 뻗친 위소소는 연거푸 오행진기 를 끌어올려 장검에 부어넣으며 왜수 주매를 집중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초 주매 역시 추운수와 같은 생각으로 곤륜파 원로들을 공공연히 창피줄 의도는 없었다. 그런 데 위소소가 남의 속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마구 공격을 퍼붓자 주매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 었다. 게다가 이런 대치상태로 언제까지 가야 끝날지도 모르므로 벌써부터 진력이 나던 참인 그는 위 소소가 정신을 차리도록 좀더 뜨거운 맛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효월 등이 자극을 받으면 깨 달음도 빠르리라는 계산까지 넣었다. 주매의 손에서 장검이 번쩍 빛났다. 검끝이 지향한 곳은 유룡자 위소소의 정면, 삽시간에 무수한 검광이 자욱하게 퍼지더니 미친 범처럼 날뛰는 위소소를 에워싸버렸다. 그 무렵 법원을 쫓아버린 소인대사의 일검도 날아들었다. 불시에 측면 협공까지 당한 위소소는 손발이 뒤엉켜 허둥거리고 정신마저 흐트러졌다. 그 바람에 위소소의 비검은 주매의 검광을 맞고 두 동강으로 꺾여 떨어졌 다. 소인대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정수리에 일격을 내리쳤다. 그러나 주매는 시종 곤륜파의 원한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위기일발의 순간, 급히 장검을 날려 소인대사의 일격을 가로막았다. 병기가 부러지고 뒤미처 소인대사의 장검이 허공에서 날아들자 위소소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 나 싶어, 장탄식을 터뜨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비겁하게 도망질치기보다 차라리 떳떳이 죽음을 맞으리라 각오한 것이다. 그리고 싸늘한 칼감촉과 함께 목줄이 끊기기를 기다렸다. 한데 이내 떨어져내릴 줄만 알았던 칼바람이 도시 느껴지질 않았다. 아무 기척도 없길래 번쩍 눈을 뜨고 보니, 왜수 주매가 낄낄거리며 코앞에 서 있지 않은가. "위도우, 이 늙은이가 실수로 그대의 검을 못 쓰게 만들었구려. 훗날 찾아뵙고 사죄할 테니, 너 무 속상하게 여기지 마시오!" 주매가 사과했다. 위소소는 만면에 부끄러운 빛을 띠고 우물쭈물 대답했다. "주도우께서 손속에 사정을 봐주셨소이다. 다시 뵈올 날이 있겠지요." 그리고 아무에게도 인사 한 마디 없이 일어서서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위소소마저 패전하고 달아나자, 효월선사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당혹감을 어쩌지 못하고 칼빛 조차 위력이 줄어들었다. 문득 그의 귓전에 추운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효월선사, 저길 좀 보시오! 자운사도 이미 우리 손에 격파되었지 않소? 당신네 편 사람들은 모 두 죽거나 도망친 지 오래요. 이런 판국에 아직껏 깨닫지 못하고 어느 좋은 시절을 기다리시는 거요?" 효월은 소스라쳐 뒤를 돌아보았다. 추운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과연 자운사가 있는 쪽에 화 광(火光)이 충천하며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자신의 심원(心願)이 그 연기 속에 섞여 허무하게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자기는 한낱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효월은 원한에 사무쳐 으스러져라고 이를 갈았다. 그 가슴 속에는 독심(毒心)이 꿈틀거렸다. 어 차피 이판사판, 결전을 벌여서 이 자리에 피를 뿌리고 죽어가든가, 아니면 적을 쓰러뜨리고야 말 리라! 이제 남은 최후의 수단은 오직 하나, 스승인 합합노조(哈哈老祖)가 전수해 준 십이도천신살 (十二都天神煞)로 상대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마지막 패를 던졌다. 십이도천신살은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사술(邪術)이었다. 합합노조가 전수했을 때만 해도 신신 당부한 말이 있었다. 누구든지 일단 십이도천신살을 전개하면, 그것으로 수명이 십이 년 줄어들거 나 혹은 중겁(重劫)에 한 차례 빠져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와 더 이상 가망이 없 을 절박한 상황에 몰리지 않았다면 절대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했다. 오늘 효월선사는 패배의 수치감이 분노로 바뀌어 이성을 잃고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아미 검 선들에게 이기고야 말리라는 승부욕에 사로잡혀 십이도천신살의 마법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머리터럭 한 줌을 움켜 뽑아 입 속에 머금고서 혀끝을 깨물어 피에 섞었다. 그리고 중얼중 얼 몇 마디 주문을 외운 다음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적수들에게 힘껏 뿜어보냈다. 그러자 삽시간에 음산한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싸움터 일대를 가득 덮고, 그 안으로부터 초록빛 불꽃에 에워싸인 화룡(火龍) 수백 마리가 나타나 아미 검선들을 노리고 일제히 덮쳐가는 게 아닌 가! 한편에선 지비선사 일행 셋이 눈을 부릅뜨고 왜수 주매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기네 동료 위소소 가 그의 손에 비검을 잃고 패주하자, 후회스러움과 수치심에 분노마저 들끓어 올랐던 것이다. 그 들은 주매의 비정함을 원망했다. 아무리 소식불통 자기네 사람이 적대편에 가담했기로서니 차마 벗의 체면을 보아 마지못해 온 것이요 본의가 아닌 데도 그것을 몰라주고 평생 수련한 비검술을 무참하게 박살내 버리다니 너무 심하지 않는가. 곤륜파를 깔보아도 너무한 짓이다. 이로써 주매의 일검은 곤륜파와 깊은 원한을 맺게 되었다. 지비선사와 종선생, 천지상인 세 사람은 왜수 주매를 상대로 한바탕 분풀이를 하고 싶어도 나설 도리가 없었다. 자기들 앞에 가로막고 버텨선 숭산이로와 고행두타를 격파하고 나갈 승산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퇴장할 마음을 먹고 적당한 기회가 오기만을 고대했다. 이런 판국에 효월이 마법 십이도천신살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효월이 막판에 몰려 최후의 수단을 동원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마법이 얼마나 지독 스러운 것인가도 익히 들어서 알았다. 지비선사들은 자기네 비검이 오염될까 봐 두려워 그 즉시로 적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 셋이서 여러분과 검술대련을 해보았자 승부짓기 어려울 거요! 이제 효월선사께서 술법으 로 실력 겨루기를 원하시니, 우리는 잠시 물러가리다. 훗날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기로 합시 다!" 작별을 고한 다음, 그들은 즉시 검기를 거두고 물러갔다. 숭산이로 역시 황급히 그들 뒤를 쫓으 려는 동료들을 제지시켰다. 이 무렵 효월선사가 발출한 마법의 녹화오운(綠火烏雲)은 이미 이미파 사람들의 머리 위로 덮어 씌워지고 있었다. 숭산이로와 고행두타는 일행들에게 조속히 몸을 빼내 옥청관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이들이 명령대로 재빠르게 싸움터를 벗어나 퇴각하는데, 여신동 주문은 자기가 지닌 천둔 경이 호신해 주리라 믿고서 물러서기는커녕 대담하게도 효월선사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러나 효월선사의 마법은 보통 사술(邪術)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주문의 정면에 깔린 녹화오운은 천둔경의 광채에 막혀 몰려들지 못했지만, 좌우편 불기둥과 먹 구름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주문을 에워싸버린 것이다. 알뜰한 제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당돌하게 나서자, 왜수 주매는 아연실색을 했다. 급히 달려가서 끌어내려 했지만 벌써 때는 늦고 말았다. 십이도천신살을 펼친 후 아미파 사람들이 퇴각하자, 효월선사는 일단 안심하고 숭산이로와 고행 두타 세 적수만 상대할 수가 있어, 그대로 불기둥과 구름덩이를 세 사람에게 밀어붙이기 시작했 다. 그런데 느닷없이 숭산이로의 등 뒤에서 젊은 여인 하나가 툭 튀어나오더니 대담하게도 거울 하나, 보검 한 자루만 휘두르면서 덤벼드는 게 아닌가! 무슨 보경인지 모르지만 거울 면에는 수십 장 남짓이나 되는 오색 광채가 쏟아져 나와, 정면의 불기둥, 먹구름덩이를 눈 녹이듯 헤치며 사잇길을 만들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애제자 녹청과 적은아를 단칼에 죽이고 설망, 용비, 법원을 연거푸 격파하여 도망치게 만든 그 계집이었다. 효월 선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숭산이로와 고행두타가 어째서 물려가지 않았는가 했더니, 바로 요 계집년의 거울을 믿고서 그 랬구나! 그 따위로 내 술법이 깨질 듯싶으냐? 대낮에 꿈을 꾸고들 있구나, 흐흐흐!' 그는 거울 정면의 진로가 막힌 것을 보고서 즉시 불기둥 구름 속으로 몸을 감춘 다음, 은밀히 주문의 왼쪽으로 날쌔게 접근하여 불시에 피 한 모금을 뿜어보냈다. "으악!" 주문이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하늘과 땅이 핑글핑글 돌고 전신의 맥이 쭉 풀렸다. 그녀는 당 장 혼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효월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장검을 휘둘러 그녀의 모가지를 싹둑 베어내려는 참에, 난데없는 금 광 두 가닥이 번쩍 빛나면서 눈이 부셨다. 효월은 즉각 한쪽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눈을 비비고 보니, 옥돌처럼 매끈하게 생긴 소년이 손에 금광 두 가닥을 춤추듯 흔들면서 땅바닥에 쓰러진 계 집을 구해 달아나고 있었다. 십이도천신살이 어떤 마법인가? 여느 보검이나 비도(飛刀)라도 닿기만 하면 고철덩어리로 화하 는 무서운 사술이다. 그런데 저 녀석의 검광은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길래 끄떡도 않는단 말인 가! 효월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속에서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급히 초록빛 불기둥을 타고 소년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손쉽게 소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어린 연놈들 에게 불벼락을 때리려는 순간, 그보다 앞서 천지가 진동할 뇌성벽력소리가 '콰당!' 하고 터지더니 뒤이어 맞은편 진영에서 번갯불이 쏟아져 나와 삽시간에 음산한 먹구름덩어리를 사면팔방 흩어버 리고 초록빛 불기둥마저 꺼뜨리고 말았다. 효월은 영문을 차릴 틈도 없었다. 구름과 불기둥이 소멸되자, 텅빈 하늘에 밝은 빛이 가득차고 둥그런 만월이 토산 등성으로부터 천천히 떠오르며 사방천지에 맑고도 싸늘한 빛을 흩뿌렸다. 효월선사는 뇌성벽력이 울리자마자 진탕(震湯)을 당하고 체내의 마법이 반탄력까지 일으키는 바 람에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남천(南川) 지방 금불사(金佛寺)의 방장실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 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비선사 일행은 그가 사술을 구사하던 순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벗이 허무한 죽음을 당 하고 수백 년 쌓은 공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변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싸움터에서 모 습을 감추고 나서도 멀리 가지 못하고 은밀한 곳에 숨어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효월이 마침내 고행두타의 태을신뢰(太乙神雷)를 맞고 거꾸러지자, 지비선사와 천지상 인은 다시 싸움터로 날아 들어갔다. 그리고 아미파 검선들에게 소리쳤다. "도우 여러분, 그쯤에서 용서해 주시오! 너무 심하지 않소?" 간청 겸 질책 한 마디를 던지고 나서 그들은 효월을 옆구리에 끼고 그 길로 종선생과 함께 금불 사까지 돌아갔던 것이다. 효월은 그곳에서 단약으로 치료를 받으며 몇 달 동안 요양을 하고서야 겨우 원상태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효월과 지비선사 일행의 아미파에 대한 원한은 한층 더 깊어져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다. 금선은 어떻게 효월의 무서운 사마대법(邪魔大法)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벼들었던가? 그것은 금 선과 주문 두 남녀 간의 미묘하고도 천진난만한 우애관계에서 격발된 행동이었다. 두 젊은이의 나이 차이는 세 살밖에 안 된다. 찬하대사(餐霞大師)와 금선의 전신(前身)을 낳은 묘일부인 순란인(荀蘭因) 역시 같은 도우(道友) 로서 교분이 깊다. 묘일부인은 구화산에 거주하고 찬하대사는 황산에 있다. 거리도 불과 일백오십 여 리, 그리 멀지 않은 사이라서 왕래도 잦거니와 서로 의기가 투합되어 친숙하기 짝이 없다. 금 선과 주문은 예닐곱 살 때부터 어머니와 스승에게 경신술을 전수받고 구화산과 황산을 오가며 어 른들처럼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처음 몇 번은 어른을 따라 오갔으나 후에 차츰 정이 깊어지자 하루가 멀다 하고 이쪽에서 찾아 가지 않으면 저쪽에서 날아왔다. 두 남녀는 죽마고우로서 십 년 남짓 어울려 지내온 것이다. 무슨 사춘기의 애정 같은 것은 이해할 나이도 아니었지만 하루 이틀 떨어져 있으면 서로 허전함을 느 끼고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마음에 안절부절 하루해를 넘기고 이튿날 아침 동이 트기가 무섭게 찾아다니곤 했다. 이런 가운데 은연중 사랑의 뿌리가 심어진 것이다. 찬하대사와 묘일부인도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진 않았다. 전생의 인연으로 맺어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두 어린것들의 왕래에 일체 간섭은 않았으나, 공부만큼은 엄격히 지도하고 추호도 늦 춰주지 않았다. 어른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금선에게는 어머니 묘일부인과 누이 제영운이 있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검선이다. 게다가 금선 자신도 선근(仙根) 선골(仙骨)을 갖춘 터라 어린 나이에도 놀랄 만한 무공을 연성했다. 주문 역시 찬하대사의 엄격한 지도 아래 이미 검선의 경지에 들었다. 황산이나 구화산은 모두 산천경개가 뛰어난 동천복지(洞天福地)다. 한 쌍의 어린 남녀는 매일 공부가 끝나면 손에 손을 잡고 깊은 계곡 산등성이를 온통 뒤지며 돌 아다녔다. 산악 전체가 그들에게 숨바꼭질 놀이터였다. 십대 치기(稚氣)를 벗어난 나이가 되어서 도 순진무구하고 천진스런 정분은 골육(骨肉)보다 더욱 깊어졌다. 두 남녀의 심령은 하나로 녹아 융합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주문이 나효(羅梟)의 백골전(白骨箭)에 맞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육지(肉芝)의 혈즙(血汁) 을 마신 후로부터 상황은 일변하고 말았다. 혈즙의 영기가 체내에 들어가자 그녀는 문득 대오(大 悟)의 관문을 넘어서 어렴풋이나마 남녀간의 차이를 느끼게 되고 처녀다운 수치심이 싹텄다. 그리 하여 어린 금선과도 가깝게 지내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차츰 금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러한 변신을 금선이 이해할 리가 없었다. 짓궂은 장난꾸러기의 기질도 다분한 소년으 로서 그녀가 자기를 멀리하면 할수록 심술맞게 접근해서 치근덕거렸다. 아무런 까닭도 없이 냉담 해진 주문이 얄밉기도 했지만, 혹시나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게 아닌가 해서 무턱대 고 빌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주문은 좋은 말로 둘러댔다. "아우가 나한테 무슨 잘못을 해서 그런 게 아니야. 요 근래 무공의 진도가 너무 떨어졌어. 앞으 로 검술을 좀더 익히려면 시간이 많아야 해. 그러니 어디 아우하고 놀 틈이 있겠어? 딴 생각 말 고 아우도 열심히 공부나 해요." 그러나 금선이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옛날처럼 가까와지려고 틈만 있으면 지분덕거렸다. 그럴수록 주문은 귀찮아져서 요리조리 피해다니다가 나중에는 아예 만나주지도 않 았다. 구화산으로 찾아가는 일조차도 없어졌다. 그러자 어린 소년도 토라져서 다시는 그녀를 만나 려고 하지 않았다. 십여 년을 두고 그토록 친숙하게 지내던 죽마지우가 완전히 정을 떼어버린 것 이다. 금선은 이렇게 사이가 갈라진 원인도 모르고 홧김에 절교를 한 셈이지만 그녀로서는 자기의 심 경변화로 소년을 멀리하게 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미안스런 감도 없진 않았으나 금선 쪽에서 도 찾아오는 일이 없어지고 보니 해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 후 제영운과 금선 남매는 어머니 묘일부인의 분부대로 백협(白俠) 손남(孫南)과 함께 황산 찬 하대사를 뵈오러 갔었다. 그리고 주문과 여공공(女空空) 오문기(吳文琪)를 데리고 다섯 남녀가 자 운 사 공격전에 참가하기 위해 성도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 남녀는 출발에 앞서 스승 찬하대사로부터 엄명을 받았다. 자운사를 공파(攻破)한 후 다섯 남녀는 산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이 인간 세상에 나아가 도가(道家)의 삼 천 외공(外功)을 수련하 면서 만주족의 혹독한 정치와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에게 시달림을 받는 백성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의협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다섯이 함께 산을 내려오면서 금선은 주문이 여전히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자, 공연스레 마음 이 상하고 화가 났다. 성도에 도착하고 보니 다행히도 벽균암(碧筠庵)이나 옥청관(玉淸觀)에 자기 또래의 어린 형제, 자매들이 매우 많아 함께 어울리면서 울분을 달랠 수가 있었다. 그는 주문 쪽에서 언제까지나 자기를 못 본 척하는지 두고 보기로 했다. 여느 때는 만나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옛날과 같이 친근한 정분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침내 자운사쪽과의 결전을 맞아 선배 어른들을 따라 위가장으로 출동하자 주문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눈부신 활약으로 공을 세우고 그 모습을 보면서 금선은 속으로 몹시 기뻐했다. 그러면 서도 금선은 적의 무리 가운데 유능한 고수들이 너무 많아 그들을 상대하는 주문의 안위(安危)에 조바심도 일었다. 효월선사가 십이도천신살의 마법을 전개한 것은 제영운이 시무룩하니 맥빠진 동생 금선을 이끌 고 벽사촌 옥청관으로 철수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주문은 천둔경의 효력만 믿고서 단신으로 마법 의 불기둥과 먹구름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술(邪術)이 정기(正氣)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신념에 서였다. 왜수 주매가 그녀를 잡아 말리지 못하고 다급하게 고행두타를 향해 소리쳤다. "저 애가 위험하오! 어서 저 마법을 깨뜨리시오!" 금선이 주매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주문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그 한 마디가 금선에게 충격을 주 었다. 그녀를 구출하라는 지상(至上)의 명령이 소리없이 금선의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는 제영운 이 제지할 틈도 없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녹색의 불기둥 속으로 날아 들어간 것이다. 금선은 품속에 안긴 주문의 상세부터 살폈다. 얼굴은 이미 금빛으로 누렇게 변했고 이를 악문 채 인사불성이었다. 그 모습을 지그시 굽어보던 금선은 가슴이 쓰라려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왜수 주매도 제자의 혼절한 모습을 보고 적지 아니 당황했다. 그러나 내색은 못하고 젊은 후배 들을 위안했다. "너희들, 걱정할 것 없다. 우선 옥청관까지 업어 가거라. 내 일을 마저 끝내고 구할 방도를 마련 하마." 이럴 무렵, 갑자기 자운사 쪽에서 한 덩이 핏빛처럼 붉은 구름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위가장 결전을 승리로 이끌고서 한숨 돌리던 숭산이로가 그 광경을 보더니 대경실색했다. "도우 여러분, 제자들과 함께 절반은 오원지 도우의 시신을 모시고 옥청관으로 철수하시오! 그 나머지 분들은 싸움터의 시체를 깨끗이 불사른 다음 돌아가도록! 부상자에 대해선 너무 걱정 마 시오. 우리 셋이 돌아와 치료해 드리겠소." 걷히는 먹구름 煙雲淨掃 同返壁邪村 毒腸全消 大破慈雲寺 숭산이로와 고행두타는 경각지간에 수십 리 길을 날아 자운사에 당도했다. 때맞추어 자운사 공격을 맡았던 옥청대사(玉淸大師) 이하 검선들이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벗어나 절간 경내를 쫓기던 중 응원군이 도착한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왜수 주매는 옥청대사 일행에게 상황을 물으려다가 또 한 명의 낯선 여승이 허공에서 하강하는 것을 발견했다. "나무아미타불!" 범종이 울리듯 우렁찬 목소리로 불호를 외며 지상에 내려선 여승은 옥청대사 일행과 숭산이로, 고행두타에게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건넸다. 그녀는 신니(神尼) 우담(優曇)이었다. 자운사의 적들은 난데없이 아미쪽 선배 검선들이 대거 나타나자 전의를 잃고 산지사방으로 뿔뿔 이 흩어져 달아났다. 자운사 공격대는 어찌하여 위기에 몰렸으며, 또 신니 우담이 어떻게 자운사에 나타난 것인가? 그 내막인즉 이러하다. 옥청대사와 만리비홍(萬里飛虹) 동원기(冬元奇)는 소화상(笑和尙), 백협(白俠) 손남(孫南), 주경운 (周輕雲) 등 세 젊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위가장 토산 위에서 잠복 대기하다가 적장(敵將) 효월이 숭산이로와 최후 결전에 돌입하자, 예정했던 계획대로 곧장 자운사로 날아갔다. 일행 다섯은 대웅 전 앞뜰 광장에 소리없이 내려섰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자운사에 두어 번 침투하여 지리를 빤히 아는 소화상이 앞장서서 후전(後 殿) 쪽으로 훌쩍 사라졌다. 손남, 주경운 등 젊은 동료들에게 솜씨껏 첫 전공(戰功)을 세워서 뽐내 보이고 싶은 나머지 선수를 친 것이다. "염치도 없는 음적들아! 이리 썩 나와 목숨을 바치지 못할까?" 만리비홍 동원기는 전각 앞에 우뚝 버텨서서 벼락치듯 호통을 질렀다. 선배 검선의 신분으로 적 에게 암중 기습을 가하는 행동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정면 도전을 한 것이다. 호통소리의 여운이 미처 시라지기도 전에 과연 전각 안으로부터 두 가닥 잿빛 검광이 쏟아져 나 왔다. 그리고 뒤이어 우람한 체구를 가진 화상 두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원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쭙지 않은 재롱을 가지고 어른 앞에서 놀아볼 셈이냐?" 그의 손끝이 지향하는 곳에 한 가닥 백색 검기가 뻗어나가더니 화상들의 검광을 단숨에 두 동강 으로 베어 떨어뜨렸다. "아이쿠! 큰일났다....." 두 화상은 대경실색, 그 즉시 몸을 빼어 달아나려고 했다. 자신들의 솜씨 가지곤 어림도 없는 강 적을 만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딜 달아나려고? 쥐새끼 놈들!" 동원기의 검광이 번쩍 움직이더니 두 놈의 허리를 감돌면서 단 번에 가위질하듯 싹둑 잘라버렸 다. 허리께부터 두 토막이 나서 거꾸러진 화상은 대력금강(大力金剛) 혜명(慧明)과 다목금강(多目 金剛) 혜성(慧星)이었다. 두 악승은 지통(智通) 문하의 사금강에 드는 놈들로서 음사(淫事)와 악행이라면 가리지 않고 저 질러 왔으나 오늘 마침내는 동원기의 칼 아래 처참한 죽음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의 도리는 보이지 않으나 무심치 않기도 한 것이다. 대웅전 안에는 아직도 몇몇 악승들이 있었다. 허공으로부터 적이 습격해 오자 그들은 혜명, 혜성 을 앞세워 요격하는 동시에 검술을 익히지 못한 자들은 경종을 울려 자운사 경내에 적의 습격을 알렸다. 이 무렵 자운사 방장 지통은 명주선사(明珠禪師)와 비천야차(飛天夜叉) 마각(馬覺), 철장선(鐵掌 仙) 축악(祝鄂), 벽력수(霹靂手) 울지원(蔚遲元) 등 몇몇 고수들을 데리고 후전에 앉아 위가장 결 전에서 효월선사의 승첩(勝捷)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잡담을 나누던 중이었다 그들은 경종이 시끄럽게 연거푸 울리자, 이내 적이 내습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명주선사와 비천 야차 마각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웅전으로 뛰쳐나갔다. 전각 안뜰에 당도하고 보니, 광장 한가운데 혜명과 혜성 두 금강이 처참한 시체로 변해 나뒹굴 고 있는 게 아닌가! 그 곁에는 기위(奇偉)한 모습의 도인과 묘령의 여승이 영준하게 생긴 백의청 년과 전신을 흑의로 감싼 미녀를 데리고 우뚝 서 있었다. "웬 놈들이냐?... 에잇!" 분노가 머리끝까지 뻗친 명주화상이 한두 마디 힐문을 던지려다가 말도 끝내지 못하고 대갈일 성, 마각과 동시에 비검을 날려 다짜고짜 선제공격을 개시했다. 아미 쪽 습격자들도 사양치 찮고 응전했다. 동원기는 명주선사를 상대로 하고, 옥청대사는 비천야차 마각을 맞아 싸웠다. 금빛 검기와 백광 (白光)이 적의 두 가닥 푸른 칼빛과 어우러져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일으키면서 난무하기 시작했 다. 주경운과 손남은 그 틈을 타서 전각 안으로 뛰어들었다.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으나 경종을 울 리던 놈들은 벌써 깨끗이 도망쳐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원래 자운사에는 방장 지통 예하에 사대금강과 십팔나한(十八羅漢)이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이십이 명 모두가 고강한 무공을 지니기는 했으나 비검승을 익힌 자는 오직 혜능, 혜명, 혜행, 혜 성 넷뿐이었다. 이들은 패를 갈라 교대로 전각 경내를 순찰하면서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오늘 당번을 혜명과 혜성이 맡았던 것이다. 이들 두 금강은 부하 아홉 악승을 거느리고 대웅전에 경계초소를 설치하 고 있다가 옥청대사와 동원기 등 아미 쪽 공격대를 맞아서 초진에 요참(腰斬)당하는 비운의 주인 공이 되고 말았다. 나머지 아홉 놈은 하늘같이 의지했던 사형들이 적과 맞닥뜨리기가 무섭게 두 동강으로 베어져 참살당하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비검술을 쓰는 사형들이 저모양인 데, 하물며 자기네 재간 가지고 검선들과 맞대거리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짓이었다. 그들은 경종을 울리던 방망이마저 팽개치고 미륵불상 뒤로 돌아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후전을 향해 도망갔다. 주경운과 손남은 대웅전 안에 분명 있을 화상들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대응전뿐만 아니라 전체 경내에 비밀 기관장지가 엄중하게 설치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바닥을 딛지 않고 경신법 으로 날 듯이 후전을 향해 뚫고 나갔다. 후전 앞에도 널찍하니 광장이 있었다. 광장의 좌우 앙쪽으로 네 그루의 잣나무가 우뚝 서 있었 는데, 담장이 둘러친 사방 협문(俠門)은 굳게 잠긴 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두 남녀는 후전 건물을 뒤져 나가기 시작했다. 후전으로 오르는 섬돌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개 같은 연놈들, 대담하게도 이곳까지 기어 들어와 목숨을 버리려느냐? 꼼짝 말고 내 칼부터 받아랏!" 누군가 느닷없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건물 모퉁이의 월동문(月洞門) 안쪽으로부터 한 가닥 누른 빛 검기를 쏘아보냈다. "이얍!" 잔뜩 경계심을 높이고 있던 백협 손남이 기합을 터뜨리고 지체없이 백검(白劍)으로 맞받아 쳤다. 주경운 역시 보검을 들고 암습자가 숨은 방향으로 덮치려는데 동쪽 담장의 협문이 벌컥 열리더 니 우람한 체구를 가진 악승 놈이 살기등등, 뛰쳐 들어왔다. 그리고 눈앞에 묘령의 처녀가 아리따 운 자태로 서 있는 걸 보고서 입이 찢어져라고 웃었다. "사형, 고 암평아리일랑 놓치지 마시구려! 산 채로 잡아서 오늘밤 사부님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합시다." 말도 끝내기 전에 두 놈은 제각기 비검을 날리면서 주경운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검광은 순백 (純白)도 회색도 아닌 잡스러운 칼빛이었다. 자기 몸뚱아리를 두고 거침없이 음탕한 농지거리를 하자, 주경운은 그만 울화통이 치밀었다. 이 를 뽀드득 갈아붙이면서 단칼에 베어죽이려고 마주쳐 나가는 참인데, 두 놈이 막 들어선 동쪽 협 문 안에서부터 무슨 보따리 같은 물건 한 개가 휙 날아와 악승과 주경운 사이에 털썩 떨어졌다. 적이 요법을 쓰는가 싶어 기급을 한 주경운은 잽싸게 검광을 일으켜 자기 전신을 온통 감싸고 엄밀한 수비태세부터 취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단말마의 비명이 처절하게 터져나오더니 짐보따리는 두 악승의 검광 아래 세 토막으로 잘려 널브리지는 것이 아닌가! 주경운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동강난 보따리를 응시했다. 그 물건은 동아줄에 단단히 묶인 시람 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사지를 결박당한 채로 악승들의 서슬 푸른 칼날에 토막토막 잘리워서 죽은 것이다. 놀란 것은 주경운뿐만이 아니었다. 엉겁결에 거추장스런 장애물을 베어 꺼꾸러뜨린 악승들도 낭 패스런 기색을 짓고 어리둥절해 버렸다. 뒤미처 그녀의 앞에 번뜩 인영이 나타났다. 장난꾸러기 소화상이었다. 그는 한 손에 금검을 번쩍 거리며 두 악승의 칼빛을 여유만만히 찍어누르며 소리쳤다. "주누님, 이 두 녀석일랑 내게 넘겨 주시우! 내가 데리고 놀아야겠소. 누님은 어서 원흉 지통화 상이나 잡으러 가시구려!" 주경운은 방금 후전에 들어와서 맞이한 세 적수들이 뛰어난 실력의 고수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정도 피라미들이라면 소화상과 손남의 실력가지고도 너끈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소화상에게 두 놈 모두 넘겨 주기로 했다. 그러나 자기한테 무례한 농지지리를 던진 놈의 상판을 보자 그냥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 는 소화상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선뜻 비검을 날렸다. 청광이 섬전처럼 번쩍 빛을 뿜더니 방금 주둥이를 놀렸던 악승에게 날아갔다. 그 사나운 검세에 기급을 한 악승은 소화상의 제압을 겨우 벗어나 황급히 막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으 로 주경운의 공격을 막기란 턱도 없이 모자랐다. 두 검광이 맞부딪기가 무섭게 악승의 비검은 무 토막 잘리듯 맥없이 두 동강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주경운의 검광은 적의 칼을 고철로 만들고서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악승의 정수리에 ' 쌩' 하고 떨어져 버렸다. 악승은 틀렸구나 싶어 몸을 빼내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앗.....!" 비명소리가 미처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거침없이 내려친 그녀의 비검은 적을 그 자리에 세워 둔 자세로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두 토막으로 쪼개버렸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울리지 않았던 것 이다. 소화상이 다급하게 그녀를 만류했다. "주누님, 이놈 하나는 살려주쇼! 내가 좀 갖고 놀아야 한대두 그러우?" 주경운은 비검을 거두어들였다. 분풀이를 했으니 더 이상 소화상의 요청을 못 들어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녀는 선뜻 몸을 돌려 후전 뒤편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방금 주경운의 칼날에 처참히도 도륙당한 것은 다비금강(多臂金剛) 혜행(慧行)이었다. 그는 무적 금강(無敵金剛) 혜능(慧能)을 데리고 중앙 전각 뒷뜰에서 스승 지통의 명령대로 매복 경계를 하던 중이었다. 경종이 들리고 후전 앞뜰로 적이 침입해 오자 그 즉시 뛰쳐나와 가로막은 것이야 좋았 지만 적수의 몸매를 보고 군침을 삼키며 한 마디 잘못 놀린 탓으로 이렇듯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당하고 만 것이다. 옥청대사, 동원기를 따라서 자운사 앞뜰에 당도하기가 무섭게 선두로 후전까지 뚫고 들어간 소 화상은 누구보다도 자운사 경내 지리에 밝은 데다가 또 무형검(無形劍)의 둔신술에 능통하니만큼 서슴지 않고 곧바로 지통 이하 수뇌들이 집결한 전각을 찻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무형검은 둔신술에 이용할 수는 있으나 신형을 감춘 상태로 무형검을 써서 적과 대전할 만 큼 상승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적의 숫자가 많은 것을 보고서 감히 건드려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 씩 끌어내어 각개 격파를 해야겠다고 머리를 짜내던 참인데 갑자기 경종이 연달아 울리더니 안에 서 명주선사와 비천야차 마각이 뛰쳐나와 대웅전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자운사의 방장 지통도 뒤따라 나갔다. 이제 실내에 남은 것은 겨우 두 녀석, 벽력수 울지원과 철장선(鐵掌仙) 축악(祝鄂) 뿐이었다. 소화상은 그래도 선뜻 뛰어들지 않고서 은밀히 두 놈의 동태를 살펴보기만 했다. 섣불리 건드렸 다간 뜻밖의 협공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축악의 비검은 이틀 전 여기 잠입했던 주경운의 손에 격파당하여 지금은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한시바삐 본거지로 돌아가 다시 연검(鍊劍)을 해가지고 복수하겠단 마음이 굴뚝같지만, 비검을 잃 었으니 어검비행(御劍飛行)은 꿈도 못 꿀 처지가 되었다. 수천 리 길을 두 다리만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다간 중도에서 아미파 고수는 둘째치고 어떤 무리들한테 걸려서 곤욕을 치를지 알 수 없 어, 그것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고 끙끙 속을 끓이는 판이었다. 지통이 보기에도 안쓰러워, 자기 때문에 비검을 잃은 축악을 위로하면서 이번 아미파와의 결전 이 끝나는 즉시 자신이 호송해서 귀환시키겠노라고 제안하여 은근히 붙들어 앉혔던 것이다. 축악은 방장 지통의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거니와 또 본성이 호색한인 터라, 절 안에 숱한 계집 들을 두고 그냥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통의 만류대로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 결전을 맞이하여 효월선사가 주력을 이끌고 위가장으로 떠난 후, 축악은 울지원과 함께 지 통 방장을 도와서 자운사 본거지의 방어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하여 목이 빠지도록 효월선사 의 승전보가 오기만을 고대하던 판에 느닷없이 적침(敵侵)을 알리는 경종이 연거푸 울렸던 것이 다. 명주선사와 마각, 지통 방장이 앞을 다투어 현장으로 급행하고 울지원도 싸우러 나가는 순간 축 악은 연신 울지원에게 눈짓을 보내 제지시켰다. 지통의 모습이 사라진 후, 축악은 슬며시 울지원을 꾀었다. "울지사형,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아미파의 세력이 너무 강성한 듯싶소. 오늘 자운사의 주력은 적의 계략에 넘어가 조호리산지계(調虎離山之計)로 위가장까지 끌려나간 상태에서 또 적의 기습 대가 이 자운사 본거지로 쳐들어 온 거요. 아무래도 안팎 전군이 참패를 면치 못할 예감이 드는 데, 이걸 어쩌면 좋겠소? 나는 또 비검마저 잃어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아득하기만 하구려. 울지 사형, 우리 동문의 옛정을 생각하셔서 날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으시려오? 우선 탈출한 다 음, 사형의 비검술로 날 산까지만 돌아가도록 해주구려. 그 수고는 내 잊지 않으리다. 공연히 여 기서 어물쩡거리다간 너 나 할것없이 옥석구분(玉石俱焚)을 당하고 말 거요. 어제 오늘 당한 치욕 이야 훗날 다시 보복해도 늦지 않을 터. 오늘은 그대로 떠납시다. 어떻겠소?" 울지원은 묵묵히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 틀린 건 아니네만, 그래도 우리는 남의 초빙을 받고 도와주러 온 처지가 아닌가? 끝 장을 보지 않고 중간에 새버렸다가, 만일 효월선사가 벽사촌을 격파하고 돌아오는 날엔 무슨 면 목으로 다시금 대하겠는가 말일세. 지금 자운사에 쳐들어 온 적은 그 강약 정도조차도 파악되지 않았네. 그러니 자네는 잠시 여기 머물러 있게. 나 혼자 가보고 쌍방간의 허실을 탐지해 올 테니 까... 적이 형편없는 놈들이라면 나도 끼여서 생색 좀 내고, 만약 당적하기 어려운 패거리라면 내 곧 돌아오겠네. 와서 자네를 데리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더라도 늦지는 않을 걸세. 그게 어떤 가?" 축악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지라, 당장 그리 하자고 동의했다. 한데, 울지원이 전각 밖으로 사 라지기가 무섭게 축악의 눈앞에는 소화상이 냉큼 나타났다. '앗!' 소리도 한 번 못 지르고 축악은 그만 분근착골법(分筋錯骨法)에 걸려 고꾸라진 채 사지를 꽁꽁 결박당하고 말았다. 소화상은 포로 하나를 산 채로 끌어다가 자랑이나 해볼 생각에서 축악을 걸머지고 후전에서 나 왔다. 그런데 담장의 협문을 막 나서려던 그는 두 악승과 울지원이 바야흐로 손남, 주경운을 상대 로 격전을 벌이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거추장스런 짐도 귀찮아지던 참에 그 꼴을 보니 마침 잘 됐구나 싶어, 짊어지고 있던 축악을 번 쩍 쳐들어 두 악승의 칼날 쪽에다 내팽개쳤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보검을 뽑아, 이제 막 엉겁결에 축악의 몸뚱이를 세 동강내고 어처구니없어 하는 두 악승의 검광을 찍어눌렀던 것이다. 무적금강 혜능은 이미 얼마 전에 한쪽 팔을 소화상의 칼날에 잘려 잃은 처지였다. 그런만치 소 화상이 얼마나 지독스런 솜씨를 가진 검선인가는 익히 체험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제 혜행이 주 경운의 손에 옴짝달싹도 못하고 두 동강나서 꺼꾸러지는 걸 보았으니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이런 판국에 어디라고 싸울 엄두가 나겠는가? 달아나려 해도 이미 자기를 노리개 삼아 갖고 놀 기로 작정한 소화상의 검기가 사방을 철통같이 차단하고 있는 터라, 옴치고 뛸 틈조차 없었다. 자 기 비검은 점차 상대방의 금광에 눌려 완전히 빛을 잃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혜능은 헐떡거리면서 젖먹던 힘까지 뽑아 소화상의 짓누르는 금광을 막고 버티다가 마침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 필사적인 애원이 쏟아졌다. "부처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아기 부처님, 제발 죽이지만 마십쇼. 이렇게 빕니다!" 소화상은 이만큼 자라도록 앞에서 무릎 꿇고 비는 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한데 이제 나 이도 지긋한 혜능이 어른의 몸으로 어린 자기 앞에 엎드려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처음 보니 자기 도 모르게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힘주어 찍어누르던 보검을 풀었다. "네 한 목숨 살려주는 건 어렵지 않아! 그 대신 예서 꼼짝도 말고 엎드려 있어야 한다. 네 놈의 그 엉터리 사부녀석까지 잡아다 놓고 다시 처리해 주마. 만에 하나, 내 분부을 어기고 슬그머니 내뺏다간 봐라! 얼마나 멀리 도망치든지 간에 내 비검은 용서없이 그 모가지를 날려보낼 수 있단 말이다. 어디 시험해 볼래?" "아이구 맙소사, 천만에 말씀입니다!" 목숨을 살려준다는데 그것만 해도 어디냔 말이다. 혜능을 살았구나 싶어 얼른 대답했다. 혜능의 항복을 받아내고서 소화상은 다시 울지원과 싸우는 손남을 도우려고 뛰어갔다. 이때 울지원 역시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소화상마저 가세해 덤벼들자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아미문하 친구들, 자운사를 몰살할 셈인가? 허지만 나는 가야겠네!" 말도 끝내지 않고 울지원은 선뜻 먼저 검광부터 회수하더니 파공성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적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소화상과 손남은 보검을 휘두르면서 추 격에 나섰다. 그들이 신바람나게 뒤쫓으려는 찰나, 갑작스레 울지원이 훌쩍 돌아서더니 냅다 무엇 인가 집어던졌다. 그것은 새파란 불꽃을 기다랗게 꼬리를 그으면서 곧장 두 사람의 면상을 노리 고 후려쳐 왔다. 소화상은 첫눈에 그 불덩이가 무서운 위력을 지녔다고 판단했다. 손남에게 경고 한 마디 던질 여유도 없어, 그 즉시로 손남의 면전으로 덮쳐들면서 확 떠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허공으로 삼 장 가웃이나 높이 솟아올랐다. 철썩, 우지끈! 광장 한쪽에 우뚝 솟은 아름드리 잣나무가 불덩이의 직격을 맞고서 밑둥부터 뚝 부러져 나갔다. 손남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고개를 들고 사방 구석구석 두리번 거렸으나, 울지원은 벌써 멀리 달 아나고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래 울지원에게 백협 손남은 힘에 벅찬 상대였다. 온갖 젖먹던 힘까지 다 뽑아 싸웠으나 손남 을 거꾸러뜨리기는커녕 겨우 평수(平手)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판국에 축악과 혜성이 연거푸 참살당하고 혜능마저 적에게 투항하는 꼬락서니가 눈에 잡혔다. 게다가 손남보다 더 지독한 고수인 소화상마저 협공을 가하려고 달려오니 그는 더 이상 버틸 만 한 투지가 없었다. 그래서 겨우 허공으로 몸을 빼어 달아나려고 하는데, 두 녀석은 끈질기게 추격 해 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울지원에게도 최후의 수단은 남아 있었다. 벽력수(霹靂手)라는 그의 별호도 그 절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급한 궁지로 몰린 그는 마침내 오행뇌화사(五行雷火梭)를 투척했다. 경험 적은 상대방이 요행 그것을 피해내더다도 추격의 속도는 자연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과연 그의 예상이 맞 아떨어졌다. 최후의 탈신지계(脫身之計)로 쓴 오행뇌화사는 적의 발길을 주춤거리게 만들었고, 덕 택에 울지원은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가 있었다. 한 사오 리쯤 도주했을까. 울지원은 뒤를 돌아보았으나 적이 추격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 제서야 겨우 한숨 돌리고 속도를 늦추어 여유있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가는 도중, 그는 문득 건너편 허공에서 바람을 가르며 누군가 날아오는 기척을 느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후딱 숲 속으로 뛰어들고서 엎드려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아, 우리 문하 도우로구나!' 울지원은 이내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숲을 헤치고 나오자마자 검 광을 일으켜 마중나갔다. 울지원이 그토록 반긴 인물은 승려와 도인 차림의 두 사람이었다. 그 중에서도 화상의 생김새는 괴상망칙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마 양쪽에 큼직한 혹이 불거져 나와 흐느적거리고 얼굴빛도 반쪽 은 짙은 남빛, 또 반대쪽은 누른 빛인 데다, 하늘로 치솟은 들창코에 아랫입술 사이로는 늑대의 어금니가 삐죽하니 드러난 몰골이었다. 은행빛 누른 승포(僧袍)만 걸치지 앉았더라면 화상이랄 것 도 없이 짐승의 탈을 썼다고나 할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도인의 모습은 깔끔하고도 빼어났다. 소녀처럼 화사한 용모에 속세를 떠난 선골(仙 骨)의 기풍이 표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이들 두 사람은 오대파의 원로요, 울지원에게는 동문 사숙이었다. 화상은 운남성(雲南省) 사르윈 산(薩彌溫山) 낙혼곡(落魂谷)에 거주하는 일월승(日月僧) 천효(千曉)이고, 도인은 바로 오대파 검 선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현도우사(玄都羽士) 임연(林淵)으로서 지금껏 귀주성(貴州省) 천묘령(天 苗嶺) 만수산(萬秀山)에 들어가 은거하고 있는 고수였다. 이들은 울지원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사질(師姪)에게 인사를 받고 나자 임연 은 어째서 그토록 낭패스런 기색으로 허겁지겁 뛰느냐고 물었다. 울지원은 숨김없이 보고 들은 대로 자운사에 도착한 이래 일어난 사건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임연은 그 말을 듣고서도 얼굴에 옳으니 그르니 이렇다 할 내색도 나타내지 않았으나, 일월승 천효는 노발대발, 길길이 날뛰며 팔을 걷어붙였다. "아미파 놈들이 그토록 세력을 믿고서 남을 업신여기다니, 이걸 어찌 그냥 내버려 둔단 말이냐! 빨리 가자! 우선 지통을 도와 그 어린 새끼들부터 쳐죽이고 나서 다시 벽사촌을 습격해야겠어! 효월선사가 지금쯤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정 안 되면 우리 둘이서라도 아미파 놈들과 목숨 걸 고 결판을 내기로 하세." 이 일월승 천효와 현도우사 임연은 그들의 사부 혼원조사(混元祖師)가 아미산 투검(鬪劍)에서 패 하여 죽은 이후 곧바로 운남 귀주성의 묘강(苗疆)지역에 은거하고 오로지 검술 연마에만 몰두하 면서 오랫동안 속세에 발을 딛지 않아 왔었다. 그러기에 오대파 동문들도 이 두 사람의 행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십 년 전, 울지원의 스승 초삼도인(蕉衫道人)이 좌화(坐化)하였을 때, 이들 두 사람은 어 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동정호(洞庭湖)까지 찾아와서 초삼도인을 영별(永別)해 주었다. 그리고 그 곳 승경(勝京)이 썩 마음에 들어 울지원의 동굴에서 반 년 남짓을 머물다가 떠났다. 떠날 때도 간 다는 말 한 마디 남기지 않았으므로 울지원 역시 그간의 거처를 끝내 알지 못하고 말았다. 일월승과 현도우사 임연이 이번 아미파와의 결전에 동참하게 된 것도 순전히 만묘선고(萬妙仙 姑) 허비랑(許飛娘)이 배후에서 책동한 결과였다. 어떤 경로를 통해 알아내었는지 모르나 허비랑 은 이들의 거처를 파악하고서, 지난날 일월승과는 막역지우(莫逆之友)로 지내던 음장태(陰長泰)에 게 편지를 써주어 보냈다. 그녀는 찬하대사의 감시하에 놓여 황산 오운보를 떠날 수 없으므로 음장태를 통하여 일월승과 임연을 움직이도록 한 것이다. 허비랑의 편지는 간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 태을혼원조사께서 아미산 옥녀봉 대결에서 패퇴하시고 십 년 후 황산 절정의 결투마저 참패 하여 목숨을 잃으신 이래 나 허비랑은 황산 오운보에 이름을 묻어 놓고 와신상담(臥薪嘗膽), 복수 의 칼날을 갈고 있소. 그리고 아직 결정적인 시기가 오지 않았으므로 잠정적이나마 정체를 모두 앞에 드러낼 수 없는 실정을 십분 양해하시기 바라오..... 그러나 이번 정월 보름날 벽사촌 결전장에 집결하게 될 적의 무리는 모두 아미파의 주요인물이 외다. 요행으로 우리가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아미파 쪽 우익(右翼)의 태반을 섬멸하게 될 것이 며, 그렇게 해서 날갯죽지가 떨어진 아미파는 최후의 결전에서 미약한 전력(戰力)밖에 발휘하지 못하고, 결국 우리 오대파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되는 것이외다..... 이와 동시에 두 분께서 효월선사를 도와 대국을 주관하고, 지난날 오대파의 선후배 동문들을 다 시 모아들여 오대파 문호를 크게 빛낼 계기도 마련될 것이오. 이렇듯 탄탄하게 기초가 세워진 후 라야, 다시 아미파에 정식으로 도전하여 혼원조사 어르신의 피어린 원수를 갚을 수가 있소. 부디 두 분께서 자운사 결전에 참여하시어 저희들의 큰일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도록 힘써 주시기를 간 청하는 바이외다.....> 일월승은 허비랑의 간곡한 요청에 마음이 움직였다. 음장태가 돌아간 후, 그는 편지를 가지고 현 도우사 임연을 찾아가 의논했다. 그러나 임연은 생각이 깊고 신중하며 탁월한 지모(智謀)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편지 내용을 읽어보고는 단박에 허비랑의 교묘한 책략을 간파했다. 허비랑은 이번 기회를 오대파를 중흥시키 는 계기로 삼고 그녀의 가슴 깊숙이 숨겨진 웅지를 펼치기 전에 일월승과 자기마저 강력한 적수 앞에 내세워 적의 실력을 가늠하는 시금석(試金石)으로 삼아 힘을 소모시킬 계획인 것이다. 그는 또 아미파 인물 중에 유능한 고수들이 사뭇 성세(盛勢)를 이루고 있음을 잘 알고, 이들의 세력과 맞서 싸울 만한 시기가 아님도 아는 터였다. 근년에 이르러 자신의 무공이 정진(精進)하기 는 했으나 역시 필승의 자신감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리를 따져가며 간절하게 출전을 요청하는 허비랑의 편지를 딱 잡아 떼고 못 간 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임연은 일월승의 예측을 벗어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날짜만 끌었다. 이렇듯 정월 십사 일까지 줄곧 출발을 미루어 오던 임연은 일월승의 성화 같은 재촉에 못이겨 마침내 자운사 결전장으로 떠나겠다고 승락했다. 하지만 그는 출발에 앞서 자기 나름대로 행동방 침을 결정해 놓았다. 이번 싸움도 지난날 아미 황산의 결전처럼 벌어진다면 쌍방의 병력이 집결하는 시기는 보름날 이른새벽이 될 것이다. 묘강에서 성도까지 거리는 천릿길이 훨씬 넘는 터라 아무리 어검비행술 (御劍飛行術)로 치닫는다 해도 당일 저녁 무렵에야 겨우 도착할 것이다. 그때 가보아서 효월선사 측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으면 기꺼이 협력해서 명분과 체면을 살리고, 만약 열세로 몰려 승산이 없을 경우에는 두말없이 물러서도록 충고해 주면 되는 것이다. 임연의 생각과는 달리 일월승은 무턱대고 갈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임연의 교묘한 수에 넘어가, 그들이 자운사 부근 머지않은 곳에 다다르게 된 것은 어스름하니 황혼도 저물녁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공교롭게도 사질 울지원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그 입을 통해 절망적인 자운사의 상황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임연은 속으로 자운사뿐만 아니라 효월선사의 공격대도 승세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러나 일월승은 자운사를 기습 격파하려고 잠입한 아미 측 습격대에는 유능한 고수들 이 몇 되지 않으리라 판단하고서 자기가 먼저 앞서 자운사로 떠나겠다고 제의했다. 일월승의 제 안은 임연이 내심 바라는 바였다. 그는 두말없이 응락했다. 울지원의 인도를 받아가며 앞장선 일월승은 이윽고 자운사에 도착했다. 그들의 첫 눈길을 끈 것 은 대웅전 앞 광장에 뒤엉켜 난무하는 검광의 덩어리, 흙바닥에 나뒹구는 세 사람의 시체, 그 곁 에서는 명주선사와 지통 두 사람만이 남아서 바야흐로 아미파의 만리비홍 동원기, 마가선자(麻伽 仙子) 옥청대사, 주경운 세 고수를 상대하여 죽기살기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었다. 임연은 아미파 세 사람의 칼빛이 바다 위로 솟구쳐 승천하는 신룡(神龍)처럼 변화무쌍한 것을 보고서 은연중 놀라고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것은 정통 고수의 칼부림이었던 것이다. 일월승은 그것조차 관찰할 여유가 없었다. 자기편이 몰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벌 써부터 참아온 불같은 성미가 폭발하였다. 그의 손끝 비검에서 붉고 누른 검광 두 줄기가 파공음 을 일으키면서 곧바로 옥청대사의 정문(頂門)을 노리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간 것이다. 울지원이 달아나기 이전부터 옥청대사와 동원기는 앞서 달려나온 비천야차 마각과 명주선사를 맞이하여 두 말도 않고 어우러져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지통까지 뒤쫓아 나와 응전하기 시작했다. 지통은 자신의 비검술법으로 뒤통수를 철썩! 쳐가지고 세 줄기 검기를 발사하여 곧바로 만리비 홍 동원기부터 직공(直攻)했다. 동원기 역시 지통의 비검이 지독한 것임을 간파하고 경각심을 높였다. 그는 자신의 검기를 한 줄기 무지개처럼 길게 변화시켜 지통과 명주선사를 한꺼번에 상대하였다. 비천야차 마각과 어우러져 싸우던 옥청대사는 느닷없이 지통까지 나타나 비검으로 동원기를 공 격하는 걸 보았다. 그녀는 두 강적과 이 대 일로 싸우는 동원기가 몰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일각이라도 빨리 마각을 거꾸러뜨려 놓고 동원기를 응원하리라 마음먹고서 거세게 마각을 몰아 붙이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후전으로부터 주경운이 뛰어나오더니 대뜸 지통 앞을 가로막고 호통 을 쳤다. "요사한 중놈, 어디라고 담도 크게 함부로 날뛰느나? 주경운이 왔다!" 그녀는 호통소리도 끝나기 전에 벌써 공격을 개시했다. 지통이 자기 앞을 가로막은 자를 눈여겨 보니, 웬걸! 지난해 연말 밤중에 자운사로 침입해서 한 바탕 소동을 부렸던 계집이 아닌가? 이년의 손에 유덕과 모태가 연거푸 부상당하고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것이다. '이 원수년! 너 한번 잘 만났구나. 오늘은 용서없이 갈기갈기 찢어죽이고야 말리라!' 지통의 눈에선 복수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 즉시 동료인 명주선사에게 손짓 신호를 보 낸 다음 동원기를 놓아두고 주경운에게 덤벼들었다. 옥청대사는 원래 신니 우담의 감화를 받아 그 문하로 들어간 후부터 여간한 경우가 아니고선 좀 처럼 생령(生靈)을 살상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부득불 살계(殺戒)를 열어야 한다면 사양치 않으리라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지통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주경운을 잡아먹을 듯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그 무서운 기 세에 자칫하다가는 주경운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부쩍 일었다. 그녀는 마각을 상대로 싸 우면서 슬금슬금 주경운이 있는 쪽으로 이동해 갔다. 주경운에게 마각을 넘겨주고 자신은 지통과 싸울 속셈에서였다. 마각은 처음부터 옥청대사의 적수가 못되었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착각을 했다. 옥청대사가 자 기와 싸우면서 슬금슬금 후퇴하자, 마각은 상대방이 겁을 먹고 도망치려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의기양양해진 마각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옥청대사를 압박하면서 호통을 질러댔다. "이 음탕한 중년, 어딜 달아나려구! 어서 빨리 항복하지 못할까? 이 어르신네를 기분좋게 주물러 주면 죽이지는 않겠다!" 마각이 지저분한 욕설을 퍼붓자, 옥청대사는 그만 대노했다. 그녀의 눈꼬리가 곤두서더니 무시무 시한 추혼령(追魂令)이 떨어졌다. "이놈,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요물아! 그렇지 않아도 목숨을 붙여줄까 말까 한데, 더러운 주둥이 를 함부로 놀리다니! 네놈은 나를 감화시키기는 아예 틀렸구나. 본 사태가 뭇생령을 위해서 네놈 을 세상에 남겨두지 않으리라!" 그녀의 보검에서 번쩍 금광 한 줄기가 뱀처럼 꾸불텅거리며 단 번에 마각의 전신을 통째로 에워 싸 버렸다. '에쿠, 잘못 건드렸구나! 도망치자.....' 마음은 먹었지만 달아날 곳이 없었다. 그리고 때 역시 이미 늦었다. 마각의 몸뚱이는 삽시간에 옥청대사의 금광에 옭아매이더니 사람과 비검이 한꺼번에 싹뚝 잘려나가고 말았다. 한쪽에서는 벌써 지통의 검광이 세 방향으로 갈라져 주경운을 에워싸고 무서운 압력을 가하는 중이었다. 주경운은 거의 절망적으로 지통의 공세에 저항하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없어 졌을 때 비로소 마각의 목줄기를 끊어날린 옥청대사가 뛰어들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주경운 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옥청대사와 함께 반격에 나섰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 저물었다. 주경운을 도와 지통과 싸우면서 옥청대사는 차츰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통의 비검술도 대단하거니와 명주선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런 판국에 소화상과 손 남은 여지껏 어딜 쑤시고 다니는지 코끝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자운사 쪽 병력이 이것만으로 전부인지, 어디 또 매복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노 릇이었다. 이런 상태로 싸움을 질질 끌어가다가는 자기뿐만 아니라 이끌고 온 동료와 후배들까지 도 희생당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래서야 무슨 면목으로 숭산이로나 아미 동도들을 대하겠는 가? 그녀는 마침내 독하게 마음먹고 품속에서 자오화운침(子午火雲針)을 한 줌 끄집어내어 휘딱 고개를 돌리면서 명주선사에게 쏘아보냈다. 한창 동원기의 검광에 눌려 진땀을 흘리며 헐떡거리던 명주선사, 느닷없이 수십 방울이나 되는 불티가 살벌처럼 날아드는 것을 목격했다. "이크!" 낭패스런 고함소리와 함께 황급히 땅을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신법이 쾌속했던 만큼 급소를 겨 우 모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왼쪽 넓적다리에 화운침 두 대를 맞고야 말았다. 생살을 뚫고 들어온 불덩어리 바늘에 그는 심장부까지 찌르르한 통증을 느끼면서 숨이 딱 막혔 다. 이게 얼마나 지독스런 암기냐? 급소에 정통으로 맞았다간 목숨마저 날릴 뻔했다. 아픔에 못 이겨 순간적으로 허둥대는 틈을 타고 옥청대사의 칼빛이 번쩍 날아들더니 그의 비검을 싹뚝 잘라 내고 말았다. 그 위급한 순간에 일월승이 뛰어들었던 것이다. 구원병이 도착한 걸 보고서 지통은 신바람나게 주경운을 몰아쳤다. 그런 판국에 난데없는 통곡성이 귀를 어지럽혔다. 후딱 뒤를 돌아다보니 이게 또 웬 일인가? 후전 쪽 사방 천지에 불길이 뭉게뭉게 검은 구름을 일으키면서 길길이 솟구치고 있지 않은가. '맙소사, 아미파 고수들이 또 다른 길로 잠입했구나! 도대체 몇 패거리나 보낸 거야? 효월선사들 은 뭣들 하고 이렇게 기습당하도록 내버려 두나?' 역정도 나고 다급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 자기 몸을 둘로 나누어 불 끄러 갈 처지도 못되었다. '문하 제자놈들은 다 어디로 달아났을꼬? 요일(了一)이란 놈도 코빼기 한번 보이지 않는구나. 그 렇지, 우리 쪽에 이 아미 고수들과 맞설 놈은 하나도 없을 거야. 하지만 수십 년 공력을 들여 쌓 아놓은 기업(基業)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다니!' 지통은 불타오르는 자운사 건물을 바라보고 망연자실했다. 효월선사가 설혹 승리를 거두고 개선 한다 치더라도 자운사의 기업을 재건하려면 또다시 얼마나 피땀 흘려야 하는가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 결전의 승패는 어찌 되었든 간에 앞으로 아미파는 자기가 이 자운사를 다 시 일으켜 세우고 평안하게 앉아 있도록 내버려 둘 리가 만무했다. 지통은 가슴이 쓰라렸다. 악이 치밀대로 치밀자 그는 이를 악물고 적에게 야수처럼 돌진했다. 생 사문제는 이미 하늘 밖 멀리 던져버렸다. 쌍방의 고수 여섯 명이 휘두르는 칠팔 줄기의 검광은 필사적으로 상대방을 베어 넘어뜨리려고 난마(亂麻)와도 같이 얽히고설켰다. 어느 편을 막론하고 한창 신위(神威)를 떨쳐가며 기세도 사납게 어우러져 막상막하의 결사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문득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마저 활짝 개이더니 밝은 빛줄기가 사방천지에 온통 흩뿌려지고 대웅전 앞뜰 광장을 대낮처럼 밝혔다. 쌍방이 또 한바탕 힘껏 싸우고 나자 명주선사는 넓적다리의 상처가 이젠 더 못 견딜 만큼 쑤셨 다. 그런데도 동원기의 공세는 줄어들지 않고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기만 했다. 이제 더 이상 버텨 낼 힘조차 고갈되었다. 슬그머니 몸을 빼어 달아날 궁리를 하는 참인데, 갑작스럽게 옆구리의 요 혈(要穴)에 무엇이 호되게 부딪쳐 왔다. 얼마나 거센 충격인지 명주선사는 자기도 모르게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로 그 순간 맞은편으로부터 또 한 줄기 백광(白光)이 지면을 휩쓸듯 날아들면서 그의 목줄기 를 베어오지 않는가! 명주선사는 미처 자기의 비검을 회수할 틈도 잃은 채 쏜살같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엉겁결에 손을 들어 후려쳐 백광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흰빛 검기는 거침없이 그의 손가락 다섯 개를 우수수 잘라 떨어뜨리고 계속해서 옆구리마저 휘감아 돌았다. 절대절명의 순간, 그는 손가락을 잘린 아픔마저도 잊고 모험을 감행했다. 한덩어리로 엉킨 검광 의 싸늘한 빛 속에 훌쩍 뛰어들면서 명주선사는 아직도 꿈틀거리던 자기 비검을 나꿔챘다. 그리 고 신검합일의 어검술로 동남방을 향해 쏜살같이 도망치고 말았다. 실로 간발의 차이로 구사일생 의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때 지통 역시 오른편 어깻죽지에 옥청대사의 자오화운침을 몇 대 얻어맞고 놀라움과 고통에 못 이겨 허둥거렸다. 그런 판국인데 명주선사마저 무엇엔가 된통으로 부딪쳐 고꾸라지고 뒤이어 그젯밤 절에 찾아와 야료를 부렸던 그놈의 소화상이 백의청년을 데리고 불쑥 나타난 것을 보았 다. 백의청년은 대뜸 일검에 명주선사의 다섯 손가락을 모조리 잘라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게 만들더 니, 소화상이란 놈과 합세해서 자기에게 집중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지 않는가! 가뜩이나 불덩어리 바늘에 한 개도 아니고 대여섯 군데나 찔려 팔뚝이 떨어져 나갈 듯 말도 못하게 아픈 판국에 세 찬 협공을 받았으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손에 잡고 있던 두 자루 비검 중 한 자루를 잘 리고 말았다. 왁살스럽게 싸움판으로 뛰어든 일월승도 낭패스런 몰골로 허둥지둥 몰리고 있었다. 젊은 것들이 라 얕잡아 보고 자신만만 덤벼들긴 했으나 뜻밖의 강적과 맞닥뜨린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몸 을 빼돌릴 틈도 없이 휘말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두 명의 적에게 협공을 당하면서 말이다. 지통과 일월승이 한창 조급하게 허둥거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학의 울음과도 같은 휘파람소리 가 길게 울리더니 광장 안으로 도인 한 사람이 사뿐 내려앉았다. "지통은 물러서거라! 이 애물덩이들은 내가 사로잡겠다." 옥청대사는 첫눈에 그 도인를 알아보았다. 현도우사 임연이었던 것이다. 그가 지통더러 물러서라 고 호통치는 순간 옥청대사는 임연이 지독스런 요법을 쓰리라고 직감했다. 그래서 암암리에 방어 책을 준비하면서 급히 주경운과 손남, 소화상을 자기 곁으로 불러모아 응전태세를 갖추었다. 과연 그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임연이 하강하자, 일월승은 선뜻 비검을 거두어들였다. 그 다음 순간, 임연의 보검에서 자줏빛, 붉은빛, 누른빛 세 줄기의 검광이 쏘아져 나오더니 옥청대사 의 공세를 차단했다. 그렇게 하여 지통부터 퇴각시켜 놓은 다음 임연은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 내 허공에 냅다 흩뿌렸다. 그러자 삽시간에 십여 장 너비나 되는 홍운(紅雲)이 활짝 펼쳐 지면서 오색 안개가 숨막힐 듯 자욱해지더니 그대로 옥청대사 일행의 정수리부터 덮어씌워 내렸다. 만리비홍 동원기는 당황했다. 처음 당하는 요법의 파해술(破解術)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그 위력 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옥청대사의 신중한 수비태세로 보건대 상당히 재미적게 돌아가 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는 운무에 휩싸이기 직전 잽싸게 비검을 회수하여 무지개로 변화 시키고 쏜살같이 전장을 이탈했다. 옥청대사는 젊은 시절 사교(邪敎)에 몸을 던져 독룡존자(毒龍尊者)와는 사형제간이었다. 그런 관 계로 방금 적이 전개한 병기가 묘강(苗疆)에서 독람(毒嵐) 연장(煙腸)을 채집해서 연성해낸 채하 홍운장(彩霞紅雲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던 것이다. 누구든지 이 악독한 장기(腸氣)에 맞부닥쳐 입이나 코, 귀로 한 모금이라도 들이키는 날에는 불 과 며칠 만에 독이 발작하여 심장으로 침투하고 온 몸에 자줏빛 부종(浮腫)이 생겨서 죽고 만다. 다행히도 그 위력을 미리부터 알고 있던 터라, 옥청대사는 재빨리 소화상 등 경험없는 젊은이들 을 한 군데로 불러모으는 동시에 검막(劍幕)을 형성하여 바람 한 점 빗방울 하나 뚫지 못하도록 철통같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잠정적으로나마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초조 하게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외부로부터 응원군이 접응해 오기만을 고대하였다. 만리비홍 동원기는 자운사를 탈출하자 그 길로 벽사촌을 향해 날아갔다. 임연의 지독스런 요법 을 깨뜨릴 만한 강력한 구원병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그는 숭산이로와 고행두타 일행과 마주쳤다. 긴 말도 나눌 겨를이 없이 네 사람은 자운사로 직행했다. 이들이 도착하기 직전, 공교롭게도 신니 우담이 나타났다. 그녀는 숭산이로 일행이 손을 미처 쓰 기도 전에 먼저 열 손가락의 길다란 손톱을 뻗어 붉은 구름덩어리를 향해 튕겨냈다. 손톱 끝에서 몇 점의 불티가 자욱하게 퍼진 운무(雲霧) 속으로 날아들더니 이내 불이 당겨지면서 활활 타오르 기 시작했다. 운무에 휩싸여 있던 옥청대사의 금빛 검기는 불길에 반사되면서 오색 찬란한 무지개의 광채를 번뜩여 자못 기관(奇觀)을 이루었다. 구름과 안개를 지글지글 태우면서도 그 불길은 포위당한 옥 청대사 일행에게 옮겨 붙지 않았으나 참기 어려울 만큼 비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옥청대사는 그제서야 스승 신니 우담과 숭산이로와 고행두타가 동시에 당도한 것을 알고 기꺼워 했다. 임연의 무서운 요법은 여지없이 깨졌다. 금빛 검막 바깥으로 사면팔방 둘러쳤던 붉은 구름 덩어리와 연무(煙霧)는 불이 옮겨 붙는 대로 바람결에 맥없이 흩어져 훨훨 날아 사라졌다. 이제 위기는 넘겼다. 그래도 신중한 옥청대사는 만일에 대비해서 일행들에게 호신검막을 더욱 강화시키도록 했다. 요사스런 구름이 완전히 무산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벗어날 의도에 서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 숱한 독장(毒腸) 요람(妖嵐)은 남김없이 불타 소멸되었다. 그리고 해말간 달 빛, 시원스런 바람이 먼저처럼 사방천지를 가득 메웠다. 자운사 뒤쪽 후전에는 화광이 충천했다. 불길은 갈수록 점점 치열해지면서 중전(中殿)을 거쳐 앞 쪽 대웅보전으로 옮겨 붙어왔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에 왁자지껄하는 남자들의 아우성, 고함치는 소리가 뒤섞여 어지럽게 들려왔다. 임연은 본디 음험한 성미에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지모(智謀) 또한 깊고 신 중했다. 평소부터 명주선사와 사이가 나빴던 그는 일월승이 싸움판에 뛰어들었어도 남의 일처럼 냉정하게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가 이윽고 앙숙인 명주선사가 중상을 입은 채 패주하고 나서야 비 로소 전단(戰團)에 돌입했던 것이다. 그는 채하홍운장을 구사하여 단숨에 아미 측 검선들을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그가 자부하리만큼 채하홍운장은 과연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아미 쪽 검선 한 명만 요행으로 탈출했을 뿐 나머지 는 꼼짝도 못하고 그물 속의 고기떼 신세가 되자 임연은 의기양양해서 더욱 그물의 벼릿줄을 당 겼던 것이다. 적의 섬멸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이렇게 한창 득의만면해서 여유있게 포위망을 좁혀가던 그는 눈앞에 느닷없이 숭산이로와 고행두타, 신니 우담 세 검선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경악 을 금치 못했다. 눈치빠른 임연은 순간적으로 시세가 글렀음을 직감했다. 신니 우담의 열 손가락에서 불문(佛門)의 전광석화(電光石火)가 튕겨나왔다. 그 즉시 홍운장을 거두어들이려고 했으나 벌써 때는 늦었다. 운무가 불타오르기 시작하자 임연은 다른 사람을 돌아 볼 여유가 없었다. 그저 자기와 제일 가까운 곳에 지통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으므로 냉큼 그 어깨를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날 따라 도망치지 않고 뭣을 기다리는 게야?" 그는 지통을 잡아끌면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공중에 오르자 임연은 지통이 그 나름대로 탈 출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잡았던 어깨를 선뜻 풀어주고서 홀가분히 앞서 날아가 버렸다. 지통 역시 숭산이로가 당도한 순간 효월선사의 패거리는 이미 전멸당했다고 직감했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라도 목숨 건져서 달아나는 게 급선무였다. 임연이 잡아끄는 대로 허공에 솟구친 그는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이 풀리자 이내 어기비행(御氣飛行)의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지상으로부터 한 가닥 금빛 검광이 섬전과도 같이 날아 올라왔다. 몸뚱이는 삼사 장 높이에 둥실 떠 있는 상태였다. "이크!" 지통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비검으로 금빛 검기를 막아내려 했다. 그 생각이 미처 동작에 옮겨지기도 전에 적의 칼빛은 뱀처럼 두 넓적다리를 휘감아 버렸다. "우와아!" 눈 깜짝할 틈도 없이 지통의 두 다리는 싹둑 잘려 몸뚱이보다 먼저 지상으로 떨어졌다. 생살과 뼈가 한꺼번에 베어져 나가는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뒤미처 몸뚱이도 상승력을 잃고서 지상으 로 곤두박질쳤다. 지통의 검술은 그래도 보통이 넘었다. 지면 수 척까지 추락하던 그는 저릿저릿한 아픔마저 잊은 채, 이를 뿌드득 갈아붙이면서 운리번신(雲裡飜身)의 수법으로 재차 도약을 시도했다. 어떻게 해 서든지 도망쳐 살아야겠다는 필사적인 의지가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무리였다. 지통의 몸뚱이가 다시 한 번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지상으로부터 푸르고 흰 두 줄기의 검광이 번쩍 날아오르더니 삽시간에 가차없이 그 몸뚱이를 세 토막으로 쪼개버린 것이 다. 머리와 두 조각의 몸통은 선혈과 내장을 쏟아내면서 '털썩, 털썩!' 떨어졌다. 자운사의 방장 지통은 마침내 흙먼지 속에 걸레쪽처럼 갈라진 더러운 몸뚱이를 처박고서 죽었다. 울지원은 일월승이 싸움판에 뛰어들고서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 하는 걸 보았을 때 이미 실속 차 려 뺑소니를 칠 궁리가 섰다. 그런데 임연이 등장하면서부터 전세가 일변하여 아미 측 고수들이 모두 포위되자 꽁무니를 빼려던 생각이 천 리 만 리 사라져 버렸다. 신바람이 날 대로 난 울지원은 슬그머니 벽사촌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싸움판에서 야 자기 하나 있어 보았자 더 나을 것도 없고 빠진다고 해서 당장 열세에 처할 리도 없다. 그렇 다면 구경만 할 게 아니라 효월선사의 공격대 쪽 승부가 어찌 되었는지 알아다가 임연한테 보고 해서 생색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래서 울지원은 자운사를 떠났다. 한데 절간 경내를 막 벗어날 즈음, 그는 반대쪽으로부터 무지 개처럼 뻗은 금빛 검광이 마주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미파의 장교(掌敎) 묘일진인(妙一眞人) 제수명(齊漱溟)이나 동해삼선, 숭산이로를 제외하고 이러한 능력을 지닌 자는 없을 것이다. 뒤미처 벽사촌 방면에서 파공음이 울리기에 후딱 고개를 들고 보니 그쪽에서도 금빛과 흰빛 줄 기가 서넛이나 함께 뒤섞여 날아오는 게 아닌가! 앞선 검광과 벽사촌 쪽에서 날아든 검광들은 거 의 동시에 서로 맞은편 각 용마루로 내려앉았다. 담장 벽에 찰싹 붙어가 시력을 집중하고 살펴보 던 그는 그만 혼비백산을 하고 말았다. 아미 측에서 말도 못 붙일 고수들이 연달아 당도한 것이다. 심장도 얼어붙고 숨통마저 꽉 막혔 다. 가뜩이나 옥청대사의 습격대한테 낭패를 하고 오금이 저리다가 이제 임연과 일월승의 참전으 로 기를 좀 펴는가 싶더니, 또 상황이 급전직하로 뒤바뀐 것이다. 대세는 아예 글러먹은 터,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일이 무엇이냐? 벌써 발바닥부터 근질거렸다. 물론 뺑소니를 치려고 마음먹은 게 어디 지금이 처음인가? 울지원은 뒤도 안 돌아다보고 그 길로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하기야 평소 큰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었으니까 요행으로 비참하게 도살당 하는 운명을 모면했는지도 모른다. 그들 가운데 제일 아둔한 것은 일월승 천효였다. 그가 첫 번째로 맞닥뜨린 아미 고수는 바로 왜 수 주매였는데, 난생 처음 보는 인물이고 또 무예 실력조차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저 상대편이 끌어들인 구원병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적개심만 불태웠다. 그는 임연처럼 꼼꼼히 상대방의 전력을 탐색하는 버릇도 없었다. 그래서 두 말도 않고 왜수 주 매를 향해 냅다 두 줄기 검광부터 쏘아보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매의 등 뒤로 추운수 백곡일 과 고행두타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호랑이 꼬리를 잡았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제아무리 난폭스럽고 우직한 일월승 천효였지만 그래도 추운수나 고행두타의 실력이 어느 정도 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자기 솜씨가지곤 도저히 상대가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월승 천효는 마침내 도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미 공격을 개시한 비검부터 회수해야만 한다. 다짜고짜로 일월승에게 공격을 당한 왜수 주매는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월승 따위의 비검 실력 가지고 덤벼드는 게 재롱이라도 너무 했다 싶어서였다. "그 따위 솜씨로 감히 어르신네 앞에서 재간 좀 부려보겠다는 게냐? 허허, 참!" 주매의 손끝이 지향하는 곳에서 번쩍! 하고 금광 한 줄기가 뻗어나갔다. 쨍그렁! 일월승 천효의 비검은 무참하게도 유리 깨어지듯 산산조각이 나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동원기가 지체없이 검광을 쏘았다. 허무하게도 주매의 일격에 병기를 잃고서 놀란 일월승은 ' 앗!' 소리도 못 지른 채 즉사하고 말았다. 자운사의 요운(妖雲)은 이제 걷혔다. 옥청대사는 동문과 제자를 거느리고 스승인 신니 우담 이하 선배들 앞으로 나아가 예를 올렸다. "절 안에 남은 잔당들을 어떻게 처치했는가?" 추운수의 물음에 옥청대사 대신 백협 손남이 송구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방금 제가 소사제와 함께 잔당을 거의 생포했습니다. 달아난 놈은 몇 명 안 됩니다. 절 뒤쪽에 부녀자들 몇이 있는데 심문해 보았더니 모두 악승들에게 강제로 납치당해 욕을 당한 아녀자였습 니다. 그래서 제 생각대로 후전과 밀실을 불태워 버리면서 담장 한쪽을 헐어내고 그리로 탈출시 켰습니다. 보내면서 자운사 악승들이 강탈해 왔던 재물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부녀자들의 말에 따 르면 자운사 화상 가운데 지객승 요일 한 사람만 빼고 나머지 전부가 모질고 음탕한 놈들이라기 에 그냥 살려 두었다가는 세상에 화근만 남길까 두려워서 요일을 제외한 칠십여 놈의 악승들은 모조리 분근착골법으로 제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반항하는 놈은 당장 쳐죽이고 나머지 포로들 은 밀실의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절 안 주방일을 맡은 승려와 불목하니들도 수십 명이 있 습니다만, 그들은 사역꾼에 불과하고 또 크게 악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엄하게 훈계를 해 서 저들 갈대로 도망치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악승 혜능이란 놈이 하나 남았는데, 당장 목 을 치려다가 그놈이 전죄(前罪)를 통절히 뉘우치면서 소사제를 붙들고 애걸복걸 목숨을 빌기에 살려주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그놈이 썼던 비검을 아예 고철덩이로 만들고 두 귀쪽을 베 어 일평생 두고두고 교훈삼도록 한 다음 풀어 놓았습니다. 철없는 제자들이 마음대로 일을 처리 하였사온바, 사백님께서는 부디 관대히 용서해 주십시오." 추운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손남과 소화상이 조리있게 일을 처 리한 것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왜수 주매가 문득 생각났는지 추운수더러 물었다. "방금까지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조용할까? 아마도 부근 마을 사람 들이 불을 끄러 왔던 모양이구만." "그들은 내가 미리 못 들어오게 막았네. 절간에서 살륙전이 벌어지고 죽어자빠진 사람이 많은 걸 보게. 관청에서 가만히 있겠나? 관청을 경동(驚動)시키면 조정의 오랑캐놈들은 더욱 우리 한족 (漢族) 백성을 업신여길 것일세. 그래서 나는 이 자운사 둘레에 짙은 안개를 덮어씌워서 마을 사 람들이 불난 장면을 잘 못 보게 만들었네. 내일 새벽이면 이 절간은 기왓장 하나 성한 것 없이 폐허로 변할 것일세. 내 생각은 이렇다네. 여기다가 다시 영험스런 이적(異蹟) 비슷한 걸 남겨서 현지 관원들로 하여금 하늘이 불벼락을 때려 악승 패거리를 주멸(誅滅)한 것처럼 의심하도록 만 드세. 그러면 무고한 주민들이 끌려가 곤욕을 치르는 일도 없을 게 아닌가? 물론 여기서 도망쳐 나간 부녀자들도 있기는 하네만, 그 여자들이야 자기가 욕을 당한 사실을 누구한테 지껄이겠나? 자연 입을 봉하고 모른 척하겠지. 잡승이나 불목하니들도 공연히 떠벌이지는 않을 걸세. 자칫하면 절간 재물을 훔치려고 살인 방화했단 누명이나 쓸 테니까 말이야. 하물며 이곳 성도에는 우리 동 문 도우들께서 늘 왕래가 있으니까, 나중에라도 자운사 화재 문제가 시끄러워지면 그때 가서 다 시 적절히 대처하고 무마시킬 수도 있으니까 크게 염려할 것도 없지. 문제는 이제 여기다 영험스 러운 이적을 남겨 놓아야겠는데... 아무래도 우담대사님의 법력(法力)을 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떠십니까? 시각도 이미 늦었는데 대사님께서 베풀어 주시지요." 신니 우담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정 그러시다면 빈니가 손을 써 볼까요?" 이 무렵 거센 불길은 이미 대웅전을 불태우고 앞뜰까지 번져와서 소나무 잣나무의 마른 가지마 저 '후두둑, 톡탁!'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신니 우담은 즉시 옥청대사더러 큼직한 비석(碑石) 한 개를 찾아오라고 분부했다. 옥청대사는 이 내 오 척 남짓 장방형의 돌비석 하나를 들어다가 대웅전 뜨락 한가운데 세워놓았다. 우담의 손가락이 돌비석을 가리켰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금빛 줄기가 쏘아져 나오면서 비석의 표면에도 황금빛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살인 강도, 음탕한 간적들, 제멋대로 세상에 해악을 끼치니 천뢰신화(天雷神火)로써 주륙(誅戮) 하여 경계하노라.> 전서체(篆書體)인 듯 아닌 듯 황금빛 문자는 다 새겨진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번쩍번쩍 빛을 발 했다. 뜨거운 불길이 점차 사람들을 압박해 왔다. 추운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히면, 이 자운사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을걸세. 현지 관원들이 와서 조사해 봐야 귀신의 조화로밖에 알 도리가 없겠지. 물론 인근 마을 사람도 무고하게 끌려갈 일도 없을 테고... 이쯤 됐으면 돌아가세. 옥청관에도 부상자들이 있으니까 어서 가서 치료해야지." 우담도 자운사 일이 원만하게 끝나자 안심하고 작별을 고했다. "저는 아직 다른 일이 남아 있어 여러 사형 도우들과 벽사촌으로 갈 수가 없군요. 여기서 떠나 렵니다. 그럼 여러분, 모두 평안하시길....." 신니 우담이 떠나자, 나머지 사람들도 숭산이로, 고행두타를 따라서 옥청관을 향해 출발했다. 격전장에 흩어져 있던 적의 시체도 이미 검선들이 소골산(消骨散)을 써서 깨끗이 녹여 없앴다. 풍화도인 오원지의 시신은 옥청관으로 옮겨가서 법의(法衣)를 입혀 놓았다. 숭산이로와 고행두타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화장(火葬)으로 영결할 계획이었다. 칠성수 시림은 스승의 시신을 지 키면서 애절하게 통곡했다. 그리고 스승의 원수를 갚아 한을 씻어드리겠노라고 하늘에 맹세했다. 완석대사는 왼팔에 용비의 구자모음혼검을 맞았고, 여신동 주문은 효월선사의 십이도천신살에 중상을 입었다. 원원대사가 두 부상자에게 구전탈명신단(九轉奪命神丹)을 먹였으나 그들은 여전히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누구보다 안절부절 애를 태우는 사람은 금선이었다. 그는 주문의 병상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 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눈물만 글썽글썽, 어째서 숭산이로와 고행두타가 속히 돌아와 치 료를 하지 않을까, 그것만이 원망스러웠다. 겨울나기 受纏綿 採藥上名山 驚搖落 携女遊城市 악의 소굴 자운사는 이제 소멸되었다. 아미파가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아미 투검(峨嵋鬪劍)에서 전 병력이 무사하게 개선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결전에서는 한 명의 검선이 전사하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옥청관의 사람들이 초조하게 기다리던 숭산이로와 고행두타가 자운사 습격대를 이끌고 귀환했 다. 암자에 들어서자마자 왜수 주매는 황망히 단약 몇 알을 꺼내더니 그 절반을 추운수에게 주어 완 석대사를 치료하도록 부탁하고 주매 자신은 제자 주문에게로 갔다. 한참 조바심이 나서 끌탕을 하던 금선 남매는 주매가 들어서자 부처님이라도 만난 듯 반갑게 인 사를 올렸다. 주매는 만면에 수심이 가득 어린 금선의 모습을 보고서 코끝이 찡하도록 감동을 받았다. 그는 즉시 제영운에게 맑은 물을 한 그릇 떠오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물에 단약 한 덩어리를 곱게 개 어 놓은 다음 가위로 주문의 옷자락을 찢고 상처 부위를 관찰했다. 그녀의 왼팔뚝은 자흑색(紫黑色)으로 변하여 두 치 남짓이나 부어올라 있었다. 부종(浮腫) 한가 운데 쌀알만한 상처가 터져서 그리로부터 누른빛깔의 진물이 뭉클뭉클 솟고 있었다. 주매는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큰일날 뻔했구나! 이 애 근기(根基)가 심후하고 원원대사의 신단(神丹)을 먹었기 망정이지, 그렇 지 않았더라면 벌써 끝장났을 게다." 그는 상처를 환약 한 개로 틀어막고서 제영운더러 물로 갠 약즙을 환자의 왼팔에서부터 가슴까 지 골고루 발라주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한참이 지나자 누른 빛깔의 진물이 겨우 멎었다. 주매는 또다시 제영운더러 환자의 턱뼈을 비틀어 입을 벌리게 한 다음 단약 두 알을 집어 넣었 다. 그리고 약이 녹아서 저절로 삼켜질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주매는 제영운 남매를 붙잡고 푸념을 터뜨렸다. "그놈의 십이도천신살이 얼마나 지독스러운 줄 모르느냐? 우리 같은 사람들도 좀처럼 쉽사리 상 대하기를 꺼리는데, 어쩌자고 이 애가 겁도 없이 나섰는지 모르겠다. 목숨이야 어떻게 해서든 부 지하겠지만 저 왼팔은 아마 못 쓰게 될 거야. 그렇다면 연검(煉劍) 수련도 크게 지장을 받겠지. 이렇게 훌륭한 자질을 버리게 되다니 정말 애석하기 짝이 없구나. 이것도 운명이 다한 탓으로 돌 려야겠지. 한데 금선아, 내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다. 효월 그 망할 놈의 화상이 마법을 썼을 때 말이다. 우리처럼 공력이 심후한 도우들도 그저 음운녹화(陰雲綠火)에 화룡(火龍)들만 보았을 뿐 그놈이 숨어 있는 곳은 찾아내지 못했는데, 너는 어떻게 그 위치를 똑똑히 보고서 주문을 채어 올 수가 있었느냐?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구나. 어디 말 좀 해보아라." 그러자 제영운이 동생을 대신해서 자기 남매와 주문, 손남들이 구화산의 사요(蛇妖)를 참살했던 일부터 육지(肉芝)를 얻고도 살려준 일, 그 수컷 육지가 은혜를 갚으려고 금선의 안광(眼光)을 트 여준 일까기 자세히 설명을 했다. 사연을 다 듣고 나자 왜수 주매는 느닷없이 껄껄대면서 손뼉을 쳤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럼 이 아이 목숨은 구할 수가 있다. 이 애뿐만 아니라 완석대사도 살려 낼 수 있어! 너희들이 그 선연(仙緣)을 만나게 될는지는 모르나 그 이보(異寶)을 얻게만 된다면 모든 일이 통쾌하게 해결될 것이다." 그는 황급히 추운수를 오라고 해서 완석대사더러 마음놓고 기다리라는 당부를 전했다. 완석대사의 상세는 극도로 중태였다. 추운수가 약을 써서 신기(神氣)를 회복하기는 했으나 왼팔 은 뼈와 살갗이 삼 할 정도만 남기고 잘려 없어졌다. 게다가 전신은 온통 자흑색으로 변하고 상 처뿐만 아니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칼로 저며내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픔을 견디다 못해 완석대사는 스스로 육신을 해탈해서 지긋지긋한 고통을 벗어나려고 벌써 몇 차례나 술법을 쓰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추운수에게 제지당하고 설득을 받았다. 주문이 원상태로 회복되지 못하고 불구자가 된다는 푸념을 들었을 때, 금선은 설움이 복받쳐서 체면이고 뭐고 하마터면 대성통곡까지 터뜨릴 뻔했다. 그런데 다시 주문을 완치시킬 방도가 있단 말을 듣고서 근심에 기쁨이 엇갈렸다. 심장의 고동은 귀에 들릴 정도로 쿵쿵! 뛰었다. 주매 선배 한테 어떻게 구할 방도가 있느냐고 묻고 싶지만, 어른한테 너무 당돌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 꾹 참고 두 눈만 휘둥그래 뜨고 주매의 얼굴을 간절히 바라볼 뿐이었다. 넋잃은 듯 멍청하니 주문의 얼굴과 주매의 표정만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금선의 애처로운 모습 이 같은 또래의 소화상이나 송·학 두 동자, 주경운, 손남들이 보기에 여간 우습지 않았다. 하지 만 여러 선배들 앞에서 낄낄대고 웃을 수는 없었다. 방관자야 어떻든 간에 금선과 주문은 전세의 인연으로 맺어진 터, 아무리 우스운 몰골로 허둥거 린다 해도 당사자의 심정은 남이 알아주든 모르든 다급하기만 할 뿐이었다. 추운수도 이들 어린 남녀의 연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구해낼 방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것들에게 너무나 어려운 시련이 닥칠 것을 생각하니 선뜻 입을 열어 알려줄 수가 없었다. 그런 중에 왜수 주매가 오라는 전갈을 보낸 것이다. 그는 원원대사에게 환자가 육신의 해탈을 못하도록 감시하라고 신신당부한 다음, 총총히 왜수 주매가 있는 방으로 갔다. "주도우, 자네가 두 사람을 구해낼 수 있단 말을 했는데, 설마 하니 계화산(桂花山) 복선담(福仙 潭) 물 속에 있는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와 <오풍초(烏風草)>를 두고 한 말은 아니겠지? 만 약 그것을 찾아다가 쓰자는 말이라면, 이 급박한 시기에 어디 가서 천안통(天眼通)의 혜근(慧根) 을 지닌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구해 온단 말인가?" "핫핫핫, 자네가 사해팔굉(四海八宏)에 명성을 떨치는 노검선이란 것도 부질없구만그래! 설마 복 선담을 지키고 있는 그 괴팍스런 노파의 조건을 모르고 있지는 않겠지? 하기야 그 늙은이가 아무 리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더라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 젊은 애들한테 설명해 주어야겠군.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벌써 오랜 옛날, 성미 고약스런 노파 가 무슨 일로 인해서 실의(失意)에 빠졌단 말씀이야. 그래 가지고 성미가 비뚤어졌지. 하늘에 맹 세코 심원(心願)을 세웠는데, 기가 막히게도 전 생애를 걸어 세상사람과는 일체 원수지간이 되겠 다는 거야. 그래서 자기가 거주하는 계화산 복선담을 봉쇄했지. 연못 안에 있는 몇몇 요물들을 부 려서 독한 운무(雲霧)를 뿜어내게 하고 입구를 완전히 차단했거든. 어디 그뿐이냐? 그놈의 노파도 여러 가지 법술(法術)을 써가지고 아름다운 동천복지(洞天福地)를 아예 아비지옥(阿鼻地獄)으로 만들어 버렸단 말이야....." 왜수 주매의 말은 이러했다. 천지의 기이한 영기를 담은 천년하수오와 오풍초를 우연히 발견한 그 여검선은 그것을 자기 개 인의 소유물로 독차지하고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물론 세상사람들을 원수처럼 대하는 그녀인지 라 그 영물이 이롭게 쓰이기를 바라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미파의 조사 장미진인이 그 영물의 출현을 점쳐서 알아냈다. 인간을 구제할 그 영험한 약초를 한 사람이 차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끝에 장미조사는 몸소 계화산으로 그녀를 찾아가서 조리있게 설득하기로 했다. 여검선은 그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받았다. 그리하여 계화산 앞 뒤 좌우 요로마다 놀랄 만한 마 법으로 함정과 기관을 설치하여 통로를 봉쇄했다. 그러나 장미진인은 그녀의 술법을 깨뜨리고 거 침없이 처소까지 뚫고 들어갔다. 최후로 검술대결을 벌였지만 결파는 역시 그녀의 완패였다. 장미진인은 그녀더러 복선담의 봉쇄와 독무(毒霧), 요운(妖雲)의 장벽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하 지만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다. 장미진인에게 마지막까지 설득을 당하자, 그녀는 복선담의 상황을 들려주고 또 조건을 제시했다. "하늘이 내리신 영물은 오랜 세월을 두고 숙근(夙根)이 심후한 사람에게 인연이 닿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때 아무나 그것을 손에 넣게 된다면 멸종을 당할 것이요, 또 필요치도 않 은 자들이 손쉽게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가져간다면 정말 필요하고 근행이 심후한 사람은 도리어 그 복록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비록 일시적인 분노로 복선담을 봉쇄했습니다만, 그것은 사람들이 나와 인연이 없어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지, 결코 그들을 미워해서 만은 아닙니 다. 만약 복선담의 봉쇄와 장애물을 철거시키려 한다면 그 전에 내가 지난날 맹세한 언약이 이루 어져야 합니다. 나 역시 그때 기분내키는 대로 안배한 짓을 후회하고는 있습니다. 또 내가 연못 속에 설치한 매복기관이나 장애물도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삼세(三世)의 동 신(童身)에 천생 숙근을 겸비한 남녀 한 쌍이 온다면 내 동의를 얻은 다음 그 물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풍초는 본래 안개 속에서 자라고 안개에 따라서 사람의 눈에 출몰합니다. 게 다가 물 속에는 신령스런 악어(鰐魚)와 독을 뿜는 바윗돌이 있어 영초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 로 오풍초의 실체를 확인하려면 혜안(慧眼)을 가지고 구유(九幽)를 꿰뚫어 볼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하고 검술에 능통해서 악어를 처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능력을 지닌 삼세동신이 아니라 면 나로서도 도와줄 수가 없어요. 이는 하늘이 정한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장미진인께 내가 연못 에 들어가시도록 수락하고 매복기관을 철거해 드리더라도 진인께선 들어갈 방법이 없을 것입니 다." 장미진인은 껄껄 웃었다. "그대 말씀은 사실이외다. 하지만 내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칠십 년 후에 다른 사람을 보낼 테 니까 그대의 조건에 알맞는 인물이거든 기왕에 설치한 매복과 장애물은 그대로 두더라도 달리 그 들을 곤경에 빠뜨리지는 마시오. 그렇게만 해주면 되겠소." 사실 장미진인의 도력(道力)은 그녀가 연못 주변에 설치한 술법을 충분히 깨뜨리고도 남았다. 그 리고 물 속의 악어와 독을 뿜는 바위를 제거할 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편협한 심리를 한껏 이용하여 시기가 올 때까지 영초를 보호하고 있도록 내버려 둔 것이 다. 그는 아미산으로 돌아가서 문하 제자들에게 하늘이 내리신 영물은 여간해서 얻기 힘들다는 사실 을 깊이 주지시켰다. 장미진인과 여검선 사이에 교섭이 이루어진 후로 다른 문파들은 그 두 가지 영초를 손에 넣어보 려고 얼마나 많은 문하인들을 복선담으로 파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임무를 맡고 간 사람들은 초입부터 실패하고 스스로 물러난 자가 대부분이었다. 간혹 여검선의 법술을 뚫고 연못까지 당도한 사람도 있었지만 안개에 가로막혀 나갈 길조차 잃 은 채 목숨을 잃거나, 악어의 밥이 되거나 독기운에 쏘여 죽었다. 그렇게 운명이 정해졌던 것이 다. 그후 계화산을 찾아와 여검선을 성가시게 구는 사람이 점점 드물어졌다. 여검선의 이름은 홍화파(紅花婆), 수십 년을 두고 계화산 복선담에 은거하는 동안 연륜이 쌓인 만큼 수양도 깊어졌고, 도행 역시 정진한지라, 지난날의 분노도 풀려 안신입명(安身立命)의 경지 에 들었다. 게다가 몇 년 전에는 또 도서(道書) 한 권을 얻어 도술의 조화를 더욱 깊이 참오(參 悟)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 장미진인과의 약속도 있고 스스로 맹세한 바도 깨뜨리기 어려워 마음은 있으나 복 선담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서 빨리 영초와 인연을 맺은 동남동녀가 나타나 자신의 봉쇄 를 깨뜨리고 독바위도 뽑아내고 악어도 굴복시켜서 그녀로 하여금 하루라도 빨리 비승(飛昇)할 수 있게 해주기를 갈망했다. 즉 홍화파는 이승의 육신을 해탈할 경지에 다달았던 것이다. 그런만치 두 종류의 영초도 이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시기가 온 것 같았다. "... 여보 추운수, 오늘 금선이 효월이란 놈의 십이도천신살 운무 속으로 뛰어들어 주문을 구출해 내고도 무사했네. 희한한 일도 다 있구나 생각했지만 그때 마침 자운사 공격이 시급한 터라서 자 세한 내막을 묻지 못했거든. 그런데 지금 영운이 하는 말을 들었더니 저 녀석은 구화산에 있을 때 육지(肉芝)의 정혈(精血) 선액(仙液)으로 눈을 씻어냈다지 않은가? 그래서 신안(神眼)이 트였다 는 거야. 게다가 금선하고 주문은 다같이 전세의 동신이니까 이 두 애를 계화산으로 보내 영초를 구해 오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이번 기회에 좀 많이 따다가 단약을 제련해 가지고 훗날 아미검 투 때 요긴하게 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일세." 왜수 주매의 말이 끝났다. 추운수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도 완석대사는 고통을 못 이겨 벌써 몇 차례나 스스로 육신을 해탈하려고 했다네. 그 럴 때마다 내가 막기는 했으나 여하튼 큰일일세. 계화산의 오풍초가 독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하는 영약인 줄은 알지만 자격을 갖춘 인물이 없어 아예 생각조차도 안했거든. 그런데 금선이 뜻 밖에 그런 재간을 갖춘 적격자라니, 등잔 밑이 어둡단 말이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가 보이. 금선 과 주문 이 두 아이가 만약 계화산을 다녀와서 큰 공을 세우고 훗날 우리 도우들의 숱한 재난을 면하게 해준다면 더없이 다행스런 일이지. 자아, 이렇게들 노닥거리고 지체할 여유가 없을 듯하 네. 자운사는 이미 격파하고 폐허로 만들었으니, 이제 각자 산으로 돌아가세나. 나는 완석대사를 데리고 형산으로 돌아가 치료할 대로 손을 쓰겠네. 거기서 금선이 영약을 구해 올 때까지 기다리 고 있으려네. 금선은 나이도 어리거니와 오늘까지 좌도방문의 무리들과 너무 많은 원수를 맺었으 므로 갈 길이 몹시 위태롭네. 그러니까 제 누이 영운더러 금선하고 주문을 호송하도록 하는 게 좋을 듯싶으이. 운남성 계화산에 가거든 홍화모모(紅花姆姆)를 만나뵙고 영약을 구하러 왔다고 말 씀드리면 될 테니까." 이 무렵, 주문도 사부 주매의 단약을 삼킨 후 점차로 의식을 회복했다. 그녀의 고통은 완석대사 와는 달랐다. 좌반신은 마비되어 감각이 없고 우반신은 불에 덴 듯 쓰라리고 화끈거렸다. 화상의 통증도 뼈가 부러진 것만큼이나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혼절상태에서 깨어나자 그녀는 침상 곁에 원로 두 사람이 있는 걸 보고서 황급히 내려서서 예를 올리려 했다. 주매는 얼른 제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말리고선 이제껏 있었던 일과 계화산의 영초에 관해서 다 시 한 차례 일러주었다. 추운수 역시 완석대사의 방으로 돌아가 영약을 구하러 떠나는 금선 일행에 대해 설명해 준 다 음, 잠시 마음을 놓고 참아 달라고 위로했다. 완석대사는 상처의 아픔이 너무나 심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사세가 그 런 바에야 고통을 참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의논은 정해졌다. 날도 이미 동틀 무렵이었다. 그들은 풍화도인 오원지를 화장(火葬)하여 영결한 다음 부산히 각자 돌아갈 준비를 갖추었다. 오원지의 유회(遺灰)를 모신 영전에는 제자 칠성수 시림이 떠날 줄 모르고 슬피 통곡했다. 그 모 습을 보는 검선들도 마음이 쓰라려 눈시울을 붉혔다. 장례가 끝난 후, 피눈물을 쏟던 시림이 선배 검선들 앞으로 다가와서 무릎을 꿇었다. "여러 어르신네 들어주십시오. 저희 선사(仙師)께서 백십 년을 고심참담 수련하시다가 오늘의 이 겁수(劫數)를 맞아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문하에는 오직 불초 제자와 서상아(徐祥鵝) 둘밖에 없습니다. 불쌍한 제자, 천품과 자질이 노둔하와 공업(功業)도 이루지 못하여 선사의 도통(道統)을 이을 길이 없습니다. 선사께서 살아 계시다면 의당 조석으로 모시고 정진(精進)에 노력하오리다 만, 이제 선사님은 세상을 뜨셨으니, 제자들은 둥지 잃은 새끼새처럼 귀의할 곳이 없습니다. 간절 히 바라건대 여러 어르신께서는 지난날 저희 선사님과 사귀시던 옛정을 생각하시어 불초한 저희 들을 문하에 거두어 주십시오. 제자들은 전심전력하여 훗날 원수의 목을 베어 선사의 피어린 원 한을 씻으오리다!" 말을 마치자, 시림은 다시 설움이 복받쳐 목을 놓아 통곡했다. 여러 검선들도 발 앞에 몸을 던지고 애절하게 간청하는 시림을 굽어보면서 측은지심이 솟구치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하물며 풍화도인 오원지와의 옛정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쓰라렸다. 추운수가 시림에게 말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법, 이것도 겁수(劫數)에 정해져 있다. 그대의 일은 내 벌써 안배해 놓았으니 마음쓸 것 없다. 서상아는 그 나름대로 훗날 기연(機緣)을 만나서 성취 할 것이다. 그러니 서상아더러 산중에 남아 사부님을 위해 시묘(侍墓)하도록 일러라. 어서 일어나 내 분부를 받들어라. 그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거냐?" 시림이 듣고서 눈물을 글썽거린 채 일어섰다. 추운수는 다시 분부를 내렸다. "내가 보건대, 너는 사람됨이 정직하고 도심(道心) 또한 자못 굳세어 벌써부터 내게 입문하리라 예측을 하고는 있었다. 우선 사부님의 유골을 모시고 본산으로 돌아가 속히 정갈한 땅을 골라서 안장(安葬)한 다음, 형산으로 날 찾아오너라. 그리고 우리 산에서 주순 이하 제자들과 함께 수련 을 계속하면 되겠지." 시림은 슬픔에 기쁨이 겹쳤다. 스승을 잃자마자 또다시 훌륭한 스승을 모시게 된 것이다. 그는 즉시 추운수 앞에 무릎을 꿇고 팔배(八拜)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여러 선배 검선과 동 문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일일이 사례했다.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스승 오원지의 유골을 안고서 본산으로 돌아갔다. 제영운 남매도 주문을 데리고 여행길에 올랐다. 중상을 입은 환자 때문에 어검비행을 못하고 길 따라 수레나 교자를 빌어 환자를 태우고 나아갔다. 떠나기 전, 옥청대사는 장기(張琪) 남매를 시켜 넉넉한 노자돈을 집에서 가져다가 전해 주었다. 제영운은 남장(男裝)을 했다. 추운수와 주매는 마음이 안 놓이는지 세 사람에게 번갈아 가며 이 것저것 신신당부를 하고서도 매사에 상황을 따라서 임기응변하도록 거듭 일러주었다. 제영운 일행 셋이 떠난 후, 추운수를 비롯한 이로와 고행두타도 여러 검선들과 훗날을 기약하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이들이 헤어질 무렵, 갑자기 금빛 한 줄기가 옥청관의 암자 창문을 뚫고 날아 들어왔다. 추운수가 받아보니, 그것은 건곤정기묘일진인 제수명이 동해(東海)에서 날려보낸 비검전서(飛劍 傳書)였다. 그리고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 현재 운남, 귀주, 사천, 호남성 일대에서는 숱한 사교(邪敎)의 무리가 출현하고 있소. 오대파 와 화산파의 잔당들도 아미투검 이래 통어자(統馭者)를 잃고 쇠약해졌지만, 지금 또다시 각처에서 눈을 뜨고 대담하게 준동하기 시작하는 중이오. 그 일부는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의 오랑캐들에게 몸을 던져 그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아미파에 적대행위(敵對行爲)를 도발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소. 그런 만큼 본파의 도우 여러분께서도 각자 본산으로 귀환하실 게 아니라, 사방 각처를 유심히 수탐(搜探)하셔서 근기(根基)가 심후한 젊은 남녀들을 찾아내시고 사전에 문하 제자로 이끌어들이 십시오. 지금 사파(邪派)의 무리도 세력을 확장하려고 유능한 인재를 얻고자 눈에 불을 켜고 물색 중입니다. 이들에게 빼앗겨 포악스런 사교도를 돕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근래 연기(年期)를 계산해 보니 정파의 젊은패들이 대외적으로 공을 세울 때가 닥쳤습니다. 이로 와 고행두타께서는 부디 이들을 몇몇 방면으로 나누어 파견하시어 그 공업(功業)을 이루도록 선 처하시기 바랍니다.....> 추운수는 묘일진인의 서찰을 다 읽고 나서 검선들에게 이 뜻을 전했다. 그리고 신중히 의논을 거듭한 끝에 제각기 임무를 정하고 목표를 세웠다. 숭산이로와 고행두타는 일단 귀산했다가 다시 내려오기로 하고 완석대사는 추운수를 따라 형산 에 들어가 요양하기로 했다. 나머지 선배 검선들도 각자 예정된 목적지를 향해 떠나기로 했다. 젊은 형제들은 두 명 내지 세 명씩 패를 짜고 이로가 지시한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떠났다. 그들은 일체 변장하고 정체를 감춘 채 도(道)를 행하면서 위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도록 분부를 받았다. 그리고 모두 이 년에 한 차례씩 아미산에 집결하여 자기가 행한 공과(功過)를 보고하기로 약속 했다. 교조(敎祖) 묘일진인이 부재중일 경우에는 그 해의 당직을 맡은 사백, 사숙이 그들의 실적 을 규찰하여 상벌을 대신 내리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임무가 주어지고 패가 짜여지자 선후배 검선들은 옥청, 소인대사의 전송을 받으면서 옥청관 암 자를 떠나갔다. 주경운과 여공공 오문기는 성도 일대를 맡았으므로 여전히 옥청관이 처소로 정해졌다. 소화상은 운남 계화산으로 떠난 금선과 막역지우(莫逆之友)인지라, 흑해아(黑孩兒) 위지화(尉遲 火)와 짝을 맺고서 운남지방 전체를 맡겠다고 자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금선 일행과 합류하여 함께 어울려 보려면 그 방면을 맡는 게 제일 좋기 때문이었다. 숭산이로나 소화상의 사부 고행두타도 두말없이 승락했다.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그만한 책임쯤 은 능히 감당할 만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소화상은 위지화를 데리고 우선 곤명(昆明)으로 떠났다. 거기서 공적을 좀 세운 다음 다시 길을 잡아서 금선 일행 셋을 뒤쫓기로 작정한 것이다. 제영운 남매는 주문을 호위하고 계화산으로 영약을 구하러 내려갔다. 그리고 아미 문하의 젊은 검객들도 중원 천지에 뿔뿔이 흩어져 갔다. 이 젊은패들의 기막힌 활약과 숱한 이적(異蹟)에 대해서는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한다. 왜냐하면 촉산(蜀山)의 가장 중요한 여협(女俠), 즉 이령(李寧)의 딸인 이영경(李英瓊)이 서두에 잠시 등장 한 이래 이제껏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그녀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때가 왔기 때문 이다. 이영경은 과연 어떻게 하여 아미파의 선검(仙劍)을 배우게 되었으며, 또 곤륜파(崑崙派)의 적성 자(赤城子)에게 유인을 받고 망창산(莽蒼山)까지 끌려갔는가. 달밤에 매화림(梅花林) 숲 속에서 검 룡(劍龍)과의 격투, 자영검(紫映劍)의 획득, 중우령(重牛嶺)에서 산정(山精) 인소(人騷)는 어떻게 베어 죽였으며, 마웅(馬熊) 백여 마리를 구해 주었는가, 또 오협(五俠)은 팔마(八魔)를 맞아서 어 떻게 싸웠는가, 이제부터 그 경과를 펼쳐보기로 하자. 이령 부녀는 주순(周淳)이 모태(毛太)와 결투약속을 하기 위해 하산한 후, 눈 깜짝할 사이에 아 미산 동굴에서 가을을 보내고 첫 겨울을 맞이했다. 한번 산을 내려간 후로 주순은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도 않고 소식조차 전해지지 않았 다. 그러니 이령으로서는 우울하고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도 이른 새벽에 일어난 이령은 딸에게 말했다. "네 주숙부가 하산한 지도 벌써 두 달이 훨씬 넘었구나. 촉산 지방은 고지대라서 추위도 심하고 길 것이다. 얼마 후면 큰눈이 내려 산길도 막힐 텐데 그때가서는 일용품을 사러 내려갈 수가 없 을 거야. 한 이틀쯤 있다가 나하고 같이 마을로 내려가서 기름과 소금, 쌀, 채소, 절인 고기 등을 좀 사오기로 하자꾸나. 그래야 우리 둘이 겨울을 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년 봄철에 성도로 나가보자. 가서 주숙부의 행방도 알아봐야지. 어떠냐, 네 생각은?" 영경은 잠시 응답을 하지 않았다. 기막힌 산중 절경에 홀딱 반해서 좀처럼 번거롭기만한 속세에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밧줄을 두 나뭇가지에 걸쳐 메어놓고 익히던 경신 술도 이제 자못 진경(進境)에 들어갔는데, 하산해서 신경을 딴 데 쓰다보면 몸이 도로 둔해질지도 몰랐다. 그녀는 아버지 혼자 다녀오시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짐들을 당신 혼자 사 지고 나 르실 것을 생각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셔요.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날씨는 다행스럽게도 연일 화창했다. 이틀째 되던 날, 이령 부녀는 동굴 입구를 바윗돌로 단단히 막아놓고서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몇 달 좋이 산중생활을 하느라고 주변 일대 안 가본 데가 없는 터라 새로운 길도 여럿 찾아냈으므로, 처음 올라왔을 때 지나쳤던 그 위험스런 사신암 (捨身巖)을 거치지 않고서도 뒷산 지름길을 통해 내려갈 수가 있었다. 그들은 가봉계(歌鳳溪)를 건넜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가봉교(歌鳳橋)를 지나야 했다. 다리 밑 백 장 아래로 얼음처럼 써늘한 한천(寒泉)이 드러누워 있고 계곡 양편으로 휘몰아치는 산바람에 솟구친 안개비가 그칠 새 없었다. 다리 위에 서 있노라면 거대한 물결이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었고, 천지가 뒤흔들리도록 무시무 시한 격랑의 소음에 귀청이 먹먹할 지경이었다. 실로 인간세상에서 보고 들을 수 없는 천지의 기 관(奇觀)이었다. 가봉교 다리 곁에서 한동안 폭조의 장관을 감상하던 부녀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보장봉(寶掌 峰)으로부터 왼편으로 꺾어 돌자 대아산(大峨山)이 나타났다. 그 정상에는 명나라의 독학(督學) 곽자장(郭子章)이 이 절벽에 새겨놓은 절필 <영릉태묘지천(靈陵太妙之天)>의 여섯 자가 까마득하 게 올려다보였다. 부녀는 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위를 올려다본 다음, 정심교(正心橋)와 원점자(袁店子), 마안산 (馬鞍山)을 차례로 지나쳐 남평(楠枰)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는 산 밑까지 큰길이 나 있는 것이다. 남평이란 이름은 그 산마루에 있는 천 년이나 묵은 녹나무에서 얻어진 것이다. 해마다 늦은봄과 초여름이 되면 몇 아름이나 훨씬 넘는 이 녹나무가 붓끝처럼 수 장 높이로 곧추선 채로 가지와 줄기가 울창하게 녹음을 만들어 지나가는 길손 수십 명이 들어앉아도 남을 그늘을 만들어 주었 다. 한여름 내내 나무그늘 아래서 옷깃을 열어젖히고 시원한 산바람에 무더위를 쫓는 그 상쾌함 때 문에 사람들은 이 나무에 <목량산(木凉傘)>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령 부녀는 초겨울에 지나치는 길손이라 아깝게도 그 청복(淸福)을 누릴 수야 없었지만. 길을 가면서도 이령은 딸에게 산중의 고적(古蹟)이나 민담(民談)을 들려주었다. 영경에게는 하나 같이 흥미진진하고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아빠는 강호상에 여러 해를 돌아다니셨지만 이 아미산엔 처음 오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리 자세히도 아세요? 제가 모르는 때 언제 한 번 다녀가신 것은 아니세요?" "허허, 이 녀석이 허구한 날 그저 칼춤이나 추고 천방지축 뛰어다니기만 했지, 책이라곤 한 장도 거들떠보지 않았구나! 너 때문에 그렇게 많은 책을 구비해 놓았더니만 공연히 헛수고를 했구나. 얘야, 이 아비는 늘 어느 곳에 가든지 미리부터 그 지방 풍습이나 민정, 산천경개의 형세, 고사 등을 책과 소문을 통해서 파악한 다음에야 가곤 했다. 그래야 그 지방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 황하거나 실패할 염려가 없단 말이다. 방금 너한테 들려준 것도 절반은 주숙부가 말한 것이고, 또 나머지는 아미현지(峨嵋縣志)를 들춰보고서 알아낸 내용이란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고 유심히 관 찰하면 알고 싶은 것은 쉽사리 찾아낼 수 있단다. 지금 내가 한 얘기야 뭐 신기할 것도 없다." 부녀가 오손도손 얘기를 나누면서 걷는 동안, 어느 새 화엄후(華嚴侯)에 이르렀다. 때는 벌써 정 오 무렵이었다. "얘야, 슬슬 배고플 때도 되었지?" 아버지의 말씀에 영경은 그 즉시 괴나리봇짐을 풀어 마른 음식부터 꺼내더니 샘물을 찾으려고 표주박을 들고 일어섰다. "그럴 것 없다. 이 아래로 십오 리쯤 더 내려가면 산길이 끝이거든. 오늘밤은 어차피 성내에 들 어가 묵을 텐데 일찌감치 내려가서 뭘 하겠느냐? 차라리 천천히 산중 절경이나 구경하면서 오후 를 보내자꾸나. 주숙부 말로는 이 근처 어딘가에 해탈암(解脫庵)이란 암자가 있는데, 그곳 잿밥이 아주 맛깔스럽다더구나. 어디 우리 그리로 찾아가서 입맛 한 번 돋구어 볼까?" 이령은 다시 딸을 데리고 화엄후 언덕을 넘어섰다. 오래잖아 해탈파(解脫坡)에 당도한 그들은 둔 덕 오른쪽에서 작은 암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멀찌거니에서도 바람결에 은은히 범패(梵唄)소리가 들려왔다. 암자 가까이 다가가 보니 두 짝의 사립문이 꼭 닫혀 있었다. 이령은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늙수그레한 불파(佛婆) 한 사람이 나왔다. 이령은 그녀에게 암자를 찾아온 뜻 을 밝혔다. 이윽고 부녀는 불파의 안내를 받아 선당(禪堂)에 들어가 좌정했다. 불파는 맑은 차 두 잔을 내오 더니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독경소리가 멎더니 사십여 세쯤 되는 여승이 나왔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인사가 오간 후, 이령은 딸아이와 산수를 유람하던 참에 시장해서 잿밥 한 술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다. 여승의 법호는 광혜(廣慧)라고 했다. 이령의 말을 듣고 나서 그녀는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이시주님, 사실 이 해탈암은 전에 제 사형이신 광명(廣明)사태께서 참수(參修)하던 곳입니다. 비 록 넉넉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밭뙈기도 몇 이랑 갈고 죽원(竹園)도 있어서 그렁저렁 손님 접대는 해왔지요. 또 사형의 잿밥짓는 솜씨가 자못 훌륭한지라 해를 두고 참배오시는 거사(居士)들이 즐 겨 찾으셨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데 뜻밖에도 지난달 사형께선 원적(圓寂)하시고, 게다가 절간 재 물은 저희 못난 사질 두 녀석이 훔쳐내다 딴 지방 불한당 패거리한테 팔아먹지 않았겠습니까. 그 후 제가 그 소식을 듣고 이렇게 훌륭한 청정불지(淸淨佛地)를 그냥 허술히 내버려 둘 수가 없어 아예 이리로 거처를 옮겨왔습니다. 이사하고 보니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데다 저당잡힌 절간 토 지마저 되찾을 힘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암자 생활도 가난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전처럼 대 접해 드리지는 못하겠고, 시주께서 초라하다 탓하지만 않으신다면 제자 영남(英男)더러 소면(素 麵) 두 그릇을 올리라 이르겠습니다. 시주님, 그만해도 드시겠습니까?" 이령은 연신 허리 굽혀 사례했다. 여승 광혜는 말씨가 맑고도 거침이 없는 데다 모습 또한 깔끔 하고 기이했다. 두 눈 속 깊숙하게 신광(神光)을 감추고 있는 품이 세외(世外)의 고인(高人)임을 단박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광혜사태는 불파를 부르더니 국수를 끓여 내오도록 분부했다. 그리고 다시 이령에게 말을 건넸 다. "이분 여공자는 일신에 선골(仙骨)을 갖추었으나, 이마 한가운 데 붉은 사마귀 두 개가 달려 있 군요. 그것은 살기(煞氣)가 너무 무겁다는 증좌입니다. 훗날 큰 뜻을 얻게 되더라도 부디 약간의 자비심을 품고 본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흉함을 만나더라도 길함으로 화하고, 어려움 도 상서로움으로 바뀌게 되오리다." 이령은 여승의 말뜻에서 깊은 예지(豫知)를 느꼈다. 그리하여 영경의 장래와 자신이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지 알려주십사고 청을 드렸다. 그러자 여승 광혜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이주께선 본디 불문의 제자이시고 따님 또한 머지않아 기연을 만날 것입니다. 빈니는 관상법에 대해 겨우 대강만 알 뿐인데 공연히 시주님 앞에서 주제넘은 말씀을 드렸군요. 제가 무슨 인과 (因果)를 꿰뚫어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령이 재삼 가르침을 청했으나 광혜는 그렁저렁 얼버무리기만 할 뿐 속시원히 분명한 말을 하 려들지 않았다. 잠시 후 머리타래를 틀어올린 소녀 하나가 큼직한 대접에 담긴 국수를 내왔다. 이령 부녀는 한 창 시장기가 돌던 판에 죽순(竹筍)과 잣, 버섯을 곁들여서 뜨끈뜨끈하게 끓인 소면이 나오자 아주 맛있게 먹었다. 국수는 정말 향긋하고 혀에 달았다. 식사가 끝나자 소녀는 다시 양치질할 물그릇 을 바쳤다. 이영경은 물끄러미 소녀의 자태를 바라보았다. 생김새도 빼어나고 아리따운 데다 두 눈은 샛별 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몸매조차 자기와 비등한 걸 보고서 영경은 그만 부러운 느낌에 친근감마 저 들어 눈을 떼지 못했다. 소녀 역시 영경과 눈길이 마주치자 못박힌 듯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이 손님 은 용모도 절색이려니와 준수하고도 영걸스러운 기풍마저 몸 전체에 풍기고 있는 것이다. 말 한 마디 나누지도 않았지만 두 소녀는 이미 서로 아끼는 마음이 통하고 어떤 묵계(默契)와도 같은 것을 주고받았다. 이령이 딸의 기색을 눈치챘다. 그리고 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여승 광혜에게 물었다. "이분 소사부(小師傅)는 법호가 어찌 되시는지요? 삭발하지 않으신 걸 보니 속가 제자로 수련하 시는 듯합니다만....." 그러자 광혜는 탄식을 섞어 대답했다. "이 애도 팔자가 사나운 애랍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삼 년도 못 되어 집안이 원통하게 기막힌 참변을 당했는지라 빈니의 손으로 공문(空門)에 끌어들였습니다. 천생 숙근(夙根)을 지녔으면서도 애석하게 불문의 제자가 될 상이 아닌 데다 일신에 혈해(血海)와 같은 원한을 품고 있어, 조만간 에 원수를 갚으러 떠날 몸이므로 그래서 삭발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본성은 여씨(余氏)요, 이름은 없었는데 빈니가 영남(英男)이라고 붙여 주었습지요. 이 애는 시주의 따님과 인연을 맺고는 있으 나 지금은 서로 어울릴 때가 아닙니다... 자아, 날도 이미 늦었으니 시주께서 성내로 들어가시려면 속히 떠나셔야겠습니다. 지체하다가는 성문이 닫힐지도 모르니까요. 빈니도 후원으로 돌아가서 공 과(功課)를 올릴 때가 되었군요." 광혜의 말투에는 축객(逐客)의 뜻이 다분한지라, 이령은 더 묻지도 못하고 딸과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하직인사를 드리면서 향촉(香燭)값으로 쇄은자(碎銀子) 두 냥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하던 광혜도 이령의 뜻이 은근하고 간곡한 걸 알고 어기지 못하고 마침내 웃으며 거두었다. "저희 암자가 빈궁하기는 합니다만, 그런 대로 자급자족은 합니다. 시주께서도 어차피 머지않아 신외지물(身外之物)을 쓰실 데가 없게 되겠지요. 그럼 잠시나마 빈니가 맡아 두었다가 시주님을 대신해서 산 아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이령 부녀는 암자 문을 나섰다. 여승 광혜는 공과를 마치겠노라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신 배웅 나온 것은 영남이라고 불리우던 소녀였다. 이령 부녀가 영남과 작별하고 막 떠나려는 즈음, 문득 영남이 불러 세웠다. "언니, 오셨다 금방 떠나시기에 성함도 여쭙지 못했어요. 두 분께선 저 후산 정상에 은거하시는 이 노영웅 부녀시지요?" 이령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답변을 하기도 전에 딸이 냉큼 말을 받았다. "그래요. 거기 사는 이영경이라고 해요. 이분은 아빠이시고...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요?" 여영남은 그 말을 듣더니 희색이 만면했다. "과연, 제 생각이 틀림없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 사부님이 저더러 국수를 대접해 드리게 하셨 겠어요? 바쁘신 모양인데 어서 가보세요. 우린 한집안 식구나 마찬가지니까, 나중에 제가 후산으 로 언니를 찾아뵙죠." 이때 불파가 나와서 여영남을 불렀다. "영고(英姑), 사태께서 부르시오. 어서 들어가요!" "알았어요." 여영남은 응답을 하고서 다시 영경에게 다짐이라도 하듯이 한 마디를 건넸다. "언니, 내 이름은 여영남, 광혜사태님의 제자예요. 이후라도 잊으면 안 돼요!" 그리고 영경이 대답할 틈도 없이 돌아서서 들어가 버렸다. 암자 문도 닫혔다. 이령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 자그만 암자의 어린 소녀가 엄연히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 는 것이다. 얼마나 기괴한 노릇이냐 말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암자 문을 두드리려다가 생각을 바 꾸었다. 방금 광혜사태의 기색으로 보아 또 들어가 봤자 바른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 이다. 광혜사태의 얼굴에는 정기(正氣)가 서려 있고, 그 스승과 제자의 말씨에 악의라곤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그는 이대로 떠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다. '성내에 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찾아뵙고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기로 하자!' 산중에서 벗할 짝도 없어 외톨박이로 고적해 하던 영경은 뜻밖의 장소에서 의기가 투합하는 친 구감을 만났으니 기쁜 마음이야 어떻겠는가! 어서 빨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또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딸은 제각기 딴 상념을 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버지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긴장이 되고, 딸은 기대감에 부풀어서 이제는 주변 경치마저 즐길 여유도 없었다. 어느덧 양풍동(凉風洞)을 지나고 복호사(伏虎寺) 산문 앞으로부터 울창한 고목의 숲을 뚫고 나아 갔다. 관아장(冠峨場) 유가하(瑜伽河)를 지나쳐 유림교(儒林橋)를 건너서면 이내 승풍문(勝風門)에 다다른다. 그 문이 바로 현성(縣城)의 남문이었다. 성 안으로 들어선 그들 부녀는 우선 객점을 찾아 처소부터 정해놓고 시끌벅적 번화스런 시장으 로 나가서 식료품을 사들였다. 기름, 소금, 간장, 식초에 쌀과 고기, 채소 등... 거의 반 년 넘게 먹 을 양식거리를 푸짐하게 마련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짐이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가게마다 짐꾼을 시켜 객점으로 날라다 놓게 한 다음, 그들은 다시 추위를 막을 겨울 옷가지와 바느질감과 집기들을 곁들여서 마련했다. 하다못해 어린 영경이 졸라대는 대로 새해 설날 장식할 꽃등과 폭죽까지 사들였으니까. 겨울차비 마련이 모두 끝나자, 아버지와 딸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구경삼아 거리를 산책했다. 내 일 아침 떠나면 몇 달 후에나 사람 구경을 할 것이다. 한참 할일없이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 참인데, 갑자기 등 뒤에서 종을 치듯 우렁찬 목소리로 불호(佛號)를 외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아미타불!" 놀란 이령이 후딱 뒤돌아 보았다. 불그스레한 홍안(紅顔)에 새하얀 눈섭을 띤 늙은 화상이 가게 앞에 서서 보시를 청하고 있었다. 우람한 체구에 포대(布袋) 하나를 메고서 이제 가게 주인으로부 터 엽전 몇 닢을 받는 중이었다. 사천 지방 사람들은 대부분이 부처님을 신봉한다. 그러니만치 아미현(峨嵋縣) 일대에도 사찰(寺 刹)과 도장(道場)이 숲을 이루고 있고, 주민들 또한 즐겨 선행을 베풀곤 했다. 엽전을 받아든 그 화상은 많다 적다 말 한 마디도 없이 가게 앞을 떠나 걷기 시작했다. 화상은 이령과 어깨를 스치듯 지나치면서 한순간 부녀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방향을 바꾸어 다른 가게로 찾아 들어갔다. 이령은 그 화상의 헌걸찬 몸매를 보자, 한눈에 강호상의 이인(異人)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어떻 게 궁리 좀 해서 내력을 물어볼까도 생각했으나, 자기는 남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몸이다. 구태여 말썽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시비를 공연히 사서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는 영경을 데리고 총총히 객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점원을 시켜 술병과 입에 맞는 안주 몇 접시를 차려놓고 아버지와 딸이 마주앉아서 산에 돌아가 겨울 날 계획을 의논했다. 반평생을 강호상에 떠돌아다니던 이령, 그 영웅의 말로는 이제 아미산 선경복지(仙境福地)에 이 르러 여생의 몸을 파묻게 된 것이다. 중원 천지 금수강산은 이민족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멸망한 나라, 풍비박산이 된 집안은 다시 일으켜 세울 방도가 없다. 객방 안, 희미한 호롱불 아래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이령은 이미 상심이 극한에 달하였다. 문득 티끌 가득한 속세를 떠나 출가승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일었다. 그러나 아직 장성하지 못한 이 사랑스런 딸을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날 것이냐? 영경은 무예를 좋아한다. 시집은 아니 가고 평생토록 아버지를 모시겠노라 홀로 맹세까지 한 모 양이다. 눈앞에 다소곳이 앉아서 술잔을 올리는 딸의 모습에서 그의 눈길이 떨어질 줄 몰랐다. 옥 을 다듬어도 저 얼굴 모습은 닮지 못하리라. 빙설처럼 깔끔한 자태, 총명하기 그지없는 딸을 바라 보면서, 그 또한 범부속자(凡夫俗子)에게 시집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백년배필을 찾아 짝 지워 주어야만 한다. 앞으로 길이길이 심산유곡(深山幽谷) 에 은거한다면 지금이야 더할 나위도 없이 즐거운 생활이다. 그러나 장차 이 애와 짝할 배필은 그 산중에서 어찌 구한단 말인가? 몇 잔 술을 기울이고도 심사는 이런 일, 저런 시름으로 울쩍하기만 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망연 자실, 영경의 모습만 넋잃은 듯 바라보았다. 영경은 아버지가 술잔을 손에 든 채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내 예의 수심병(愁心病)이 도 졌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응석어린 말로 아버지를 위로해 주려고 입을 열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작스레 객점 안팎이 온통 왁자지껄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고립무원에서 客館對孤燈 不世仙緣白眉留尺簡 凍雲迷蜀嶺 幾番腸斷孝女哭衰親 영경은 천성이 가만 있지 못하는 성미였다. 바깥에서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자, 이내 쪼르르 창문가로 달려가서 문틈에 눈을 바짝 붙이고 내다보았다. 그녀가 보기도 좋게 마침 객방이 대문에서 그리 멀리 않았으므로 바깥 소동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때마침 객점 하인이 고기찜을 들고 들어왔다. "얘야! 이리 와 앉거라. 식기 전에 들자꾸나." 이령은 딸을 불렀다. 그런데 영경은 식탁으로 오는 대신 도리어 아버지를 손짓해 불렀다. "아빠, 어서 좀 보셔요. 저분이 아까 그 화상 아닌가요?" 이령 또한 호기심이 솟구치는지라, 슬그머니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갔다. 바깥을 내다보니, 객점 대문 밖에는 사람들이 한 떼 몰려서 어느 화상을 둘러싸고 있지 않는가. '아, 그 화상이로구나!' 과연 그는 아까 시장길에서 우연히 어깨를 스쳤던 홍안백미(紅顔白眉)의 화상이었다. 이령은 화상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그 내력도 궁금하거니와 어째서 화상이 사람들에게 둘 러싸여 소동을 빚고 있는지도 알고 싶어 나가서 물어보려고 돌아섰다. 한데 고기찜을 가져왔던 하인이 아직 나가지 않고 방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객점에서 온갖 손님을 다 맞이해 시중드느라 눈치만 늘었는지, 하인녀석은 이령의 기색을 보고서는 미처 묻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청산유수로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손님, 나가보실 것도 없습니다요. 어서 식사나 하십쇼. 날씨도 매서운데 식으면 맛이 없습지요. 저희 가게로 말씀드리자면 본래 손님들을 집안 어른 뫼시듯 친절본위로 장사합지요. 그래서 어느 손님이든지 아미현에 오셨다 하면 저희집부터 찾습니다. 그러니 늘상 객방이 만원사례일 수밖에 더 있습니까? 오늘만 해도 시월 초겨울이지만 대목을 맞아서 객방이 다 차고 이 방 하나만 남았 는데 마침 손님께서 차지하게 되었더라, 이 말씀입지요. 헌데, 저 눈썹 흰 화상은 성내에 절간이 수두룩한데 거기 가서 하룻밤 묵으면 방값도 안 들고 얼마나 좋으련만, 하필이면 재수없이 저희 집으로 와서는 방을 내놓으라고 억지 떼를 쓰는 겁니다. 저희 단골손님도 못 다 뫼시는 판인데 화상이 잘 방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그래서 저희 주인은 허드레 골방을 내주겠다고 했습죠. 한데 저 빌어먹을 놈의 화상이 막무가내로 그건 싫다는 거예요.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곱게 싫다 는 것도 아니고 눈알을 부라리면서 손님께 드린 이 객방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아무리 어르고 구 슬러 봐도 막무가내로 이 방만 비워 달라고 떼를 쓰는 겁니다. 주인이 하도 기가 막혀서 '어째서 이 방을 달라고 하느냐'고 물었지요. 했더니만 그 대답이 걸작 아닙니까? '이 방은 풍수(風水)가 너무도 좋아서 누가 묵든지 간에 신선이 된다' 이겁니다. 게다가 만약 이 방을 양보해 주지 않으 면 불을 확 싸지르고 말겠다고 야료까지 부리는 겁니다. 손님, 사실 말씀이지 저희들은 부처님 덕 분으로 장사해 먹고 살고 있습지요. 이 아미현 아미산에는 절간투성이 아닙니까? 그러니 해마다 참배객도 수천 수만 명이나 넘게 모여듭니다. 그 참배객들이 모두 우리 장사 손님입지요. 이런 판 에 어느 누가 부처님의 제자한테 감히 섭섭하게 대하겠습니까요? 만약 다른 지방에서 이렇게 야 료를 부리는 화상이 있다면 관가 사람들한테 잡혀서 물볼기 맞고 쫓겨날 일입지요. 하지만 아미 현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손끝 하나 못 건드립지요. 아무렴요!" 얼마나 입이 빠른지 마치 연주포(連珠暑)를 쏘아대듯 침까지 튀겨가며 한바탕 엮어대었다. 이령은 묵묵히 객점 하인의 사설을 다 듣고 나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영경은 슬그머니 부아가 솟구쳤다. "아빠, 저 화상은 너무 뻔뻔스러워요. 염치도 없이 우리 방을 내놓으라구? 어디 그래, 오기만 해 봐라, 가만 두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바깥에서 그 화상이 목청을 돋구어서 냅다 고함치는 게 아닌가! "그래, 내가 왔다! 내 올 줄 몰랐느냐? 나더러 뻔뻔스럽다고, 염치도 없다고? 얘야, 염치가 있으 면 방 좀 비워 주려므나, 양보를 안 해주면 내 그냥 가버리고 말 테다!" 영경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화가 치밀기보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상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음식이 식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급히 방을 뛰쳐나간 그는 화상 앞에 다가서서 깊숙이 허리 굽혀 예를 올 렸다. "노선사님, 이 객점은 사실 만원이랍니다. 괜찮으시다면 우선 저희 방으로 드시지요. 제가 다시 주인한테 부탁해서 노선사님이 묵으실 방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또 굳이 제 방이 마음에 드신다 면 저희가 골방으로 옮기고 양보해 드리지요. 어떠십니까?" "흠흠, 그래도 자네가 사리분별쯤은 할 줄 아는구먼! 자네가 방을 양보해 준다니 좋기는 좋은 데, 아무래도 호의적으로는 양보하는 게 아닌 듯싶구먼. 훗날 나한테 골치를 썩이고 귀찮게 굴려 고 그러는 거지? 선심쓰는 척 하룻밤 묵을 방을 내주고서 찰거머리같이 두고두고 매달리면 그거 재미적은 걸. 내가 자네 꾐에 넘어갈 듯싶은가? 어림도 없네! 아무래도 자네 방에는 안 들어가는 게 좋겠는 걸!" 객점 대문간에는 구경꾼들이 운집했다. 손님, 주인, 너나 할것 없이 모두 쏟아져 나와 이령과 화 상을 둘러싼 것이다. 그들은 출가승이 너무 어거지로 떼쓰는 게 흥미도 있지만 초면인 듯싶은 데 도 이령이 불쑥 끼어들어 싸움판을 뜯어 말리고 화상한테 공손히 대하는 것도 이상스럽게 생각했 다. 분명 이령은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그런데 화상은 그 주제에 호의를 거절할 뿐 아니라 의심까 지 하는 것이다. 정말 돼먹지 않은 대거리였다. "노선사님, 제게 무슨 딴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오직 일심으로 모시고 싶어서 청을 드리는 것이오니, 어서 드시지요." 이령은 더욱 공손한 말씨로 진정을 담아 화상에게 청했다. 그러자 화상은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자네 날 그렇게 어수룩하게 봐선 안 되네. 내가 출가승이라고 눈치가 하나도 없는 줄 아 나? 나 같은 거렁뱅이 중이 어디 그렇게 흥청망청 쓸 돈을 갖고 다니겠는가 말이야? 자네가 빌린 방값에다 밥값까지 얹으면 아무리 못해도 하루에 은자 사오 전 템이는 날아갈 게 아니겠나? 그런 방을 나한테 내주고 내가 몇 날 며칠 동안 혀가 닳도록 불경을 외고 구걸하다시피 애써 번 돈을 날려버리란 말이지? 흠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수작이야! 이봐, 자네하고 상의 좀 하세. 어떤가? 내 그 방에서 묵기는 꼭 묵어야겠는데, 자네는 골방으로 가서 특실 방값을 내면 어때? 방금 객점 주인 말이 골방 값은 먹고 자고 일 전도 못 되는 겨우 팔 푼이라니까, 나로서야 그 정도면 적당 하거든. 우리 방을 바꾸되 계산만큼은 분명히 하세. 이건 아주 공평한 흥정이니까. 어떤가, 자네 좋으면 그리하고, 싫다면 어서 꺼지게. 나는 아까처럼 이 집 주인한테 떼를 쓰면 편안히 잘 방을 마련해 주겠지. 그거야 자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거든. 방을 내주고 방값 계산도 바꾸겠나, 아니면 그냥 꺼지겠나?"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노선사님이나 저나 한가지로 떠돌아다니는 신세, 이렇듯 우연히 만난 것도 인연입지요. 그까짓 방값 몇 푼이 무에 대수롭겠습니까? 제자가 진정 원해서 노선사님께 특실에 거하시라고 말씀드렸으니 방값도 의당 제자가 내야 합지요. 작은 성의나마 받 아주시겠습니까?" 그제서야 화상은 입이 헤벌어졌다. "그거 좋구말구!" 그리고 다시 객점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의기양양해서 소리쳤다. "당신네들, 모두 들었지? 방값은 저 사람이 내는 거야! 그것도 진정으로 원해서 내는 거니까 나 더러 속임수를 썼다고 하면 안 돼. 내가 저 사람에게 어거지를 부린 건 아니니까! 내 아까 뭐라고 했나? 저 방이 내꺼라고 하면 누구든지 양보를 안하고는 못 배긴다고 말야. 보라구, 내 말이 허튼 소린가!" 이쯤 되면 객점 사람들이나 구경꾼이나 모두 속에서 울화가 터질 지경이다. 한쪽은 얌전하게 손 해까지 보아가면서도 조롱을 당하는데 또 한쪽은 남의 것을 가로채서 공짜로 먹고 자고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저 편리할 대로만 지껄이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에 이런 몰경우가 또 어디 있는 가? 참다못한 객점 주인이 불쌍한 이령에게 눈짓을 연신 보내면서 몇 마디 일깨워 주려고 했지만 이 령은 모른 척 무시했다. 그리고 도리어 하인들에게 호통까지 치면서 화상의 짐을 자기 방으로 옮 기라고 독촉까지 했다. 쌍방이 원하는 바인지라 객점 주인도 더 이상 참견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이령을 붙잡고 '특실 방값은 분명히 계산에 달아놓겠다'고 확답을 들은 다음 물러갈 수밖에. 그제서야 이령은 딸을 불러내어 골방으로 옮겨갔다. 화상도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목에 바짝 힘을 주고 당당하게 특실로 들어가더니, 의자에 턱 걸터앉아서 술이랑 안주요리랑 주문이 그칠 새도 없이 쏟아졌다. 이령 부녀한테 차지가 돌아온 골방은 보기에도 가관이었다. 계산대 뒤켠 칸막이로 공간을 터놓 았는데, 지저분하고 어두운 건 둘째 치고라도 공기도 안 통하는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으로 퀴퀴 한 냄새가 그득했다. 그곳은 원래 객점 주인이 허드레 물건이나 처박아두는 창고였던 것이다. 주인은 골방 앞까지 안내하고서도 여간 미안스럽지 않은지 이령에게 연방 사과를 했다. 당초 주 인 생각으로는 화상이 일부러 마음먹고 헤살이나 한 차례 떨어 돈푼이나 뜯어가려는 것이려니 했 는데, 사태가 묘하게 돌아서 특실 손님을 내쫓은 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령은 태연자약, 주인의 사과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도리어 주인더러 '집 대문 나선 객이 어딜 가든 편할 리 있겠느냐'고 안심을 시킬 정도였다. 특실 시중을 맡은 하인이 아연질색을 해가지고 골방으로 뛰어왔다. 빌어먹을 놈의 화상이 소식 (素食)을 하긴 하는 모양인데 주문하는 게 모두 최고 요리인 데다 식탁이 그득찰 정도로 시켜놓 고선 질탕하게 먹어치우기 때문이었다. 누가 비싼 값을 치르든 내 알바 아니라는 기색으로 아귀처럼 먹고 마셨다. 하인은 그 꼴을 보니 아무리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부아가 치밀었다.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이령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겼다. 어쩌면 화상이 이토록 고급 요리 를 진탕 먹고 마시는 걸 손님이 모르고 있으리라. 그래서 이 요리값은 못 내겠다고 우기면 어쩌 겠는가 말이다. 하인은 이령한테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지 쭈빗거리면서 보고했다. "저 화상은 정말 염치도 모르는 영감입니다요. 손님은 어쩌자고 저런 땡초 중한테 생돈을 쓰시 는 거죠? 아무리 스님한테 보시하기를 좋아하시더라도 명분은 있게 쓰셔야 할 게 아닙니까? 공연 스레 돈 버리고 남한테 비웃음이나 살 일을 어째서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이령은 특실 사정을 자초지종 다 듣고 나서 속으로 웃었다. 하인녀석 안목이 너무 좁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한테 호의를 품고 걱정해 주는 데야 그를 탓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물어물 딴소리로 얼버무렸다. "내가 아미산 참배를 떠나면서 평생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빌기로 한 만큼, 불문의 제자를 만나 기만 하면 돈이 얼마나 들든지 간에 따지지 않고 대접하리라 맹세했다네. 어서 돌아가 그분이나 잘 모셔 드리게나. 그럼 내가 나중에 따로 술값을 줄 테니까." 하인은 속으로 불만이 많았지만 당사자가 고집을 세우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투덜거 리면서 화상이 있는 특실로 돌아가 손님이 요청한 대로 고분고분 시중을 들었다. 곁에서 시종 지켜보던 영경은 아버지의 언동에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비록 나이도 어 리고 세상 경험도 없지만 그녀는 여느 소녀와 달랐다. 손해를 좀 보았다고 해서 아까와할 만큼 도량이 좁지도 않았다. 하지만 천생 여자의 호기심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인이 돌아간 뒤에도 벌써 몇 차례나 화상 의 내력을 물었지만 이령은 그럴 때마다 대꾸도 않고, 나중에는 아예 못 들은 척해 버렸다. 한바탕 소동이 가라앉은 후, 날도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화상과 승강이를 하는 바람에 저녁 도 반쯤 들다가 설친지라, 이령은 다시 음식을 좀 시켜놓고서 딸과 함께 나머지 덜 찬 배를 채웠 다. 그럭저럭 식사를 마쳤을 때는 벌써 초경(初更)도 훨씬 지났다. 객점 대문도 닫히고 투숙한 손님 들도 모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지 잠잠하기만 했다. 이령은 탁자를 마주한 채 희미한 등잔불을 넋잃은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영경이 갑갑증을 못 이기고 또 캐물으려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함부로 밖에 나가지 말아라. 졸립거든 먼저 자고." "어딜 가시려고요? 웃방 화상을 만나러 가시나요?" 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얘길랑 산에 돌아가서 해주마. 그러니까 지금은 묻지 말아라." 딸에게 당부하고 나서 그는 살그머니 골방 문을 열고 나왔다. 객실마다 흐릿한 등잔빛만 어리는 걸 보니 객들은 벌써부터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내일 새벽 일찌감치 산에 오르려면 다들 충분히 자두어야 했다. 이령은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특실 복도로 통한 창문 아래로 접근했다. 창틈으로 들여다보 니, 심지를 갓 잘라낸 듯 등잔불이 환하게 밝은데 등잔받이 밑에는 종이쪽지가 한 장 눌려 있을 뿐 화상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이령은 크게 놀랐다. 아무리 구석구석 두리번거려도 화상은 보이지 않았다. 방문 빗장은 여전히 안으로 걸려 있었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창문의 고리를 벗겨내고 안으로 몸을 날렸 다. 그리고는 등잔받이 밑에 눌려 있던 종이쪽지를 꺼내 보았다. <응벽애(凝碧崖)> 먹물 자국이 아직도 축축하게 젖은 걸 보면 방안에 있던 사람 역시 나간 지 얼마 안 된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쪽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서 얼른 바깥 창문을 빠져나와 지붕 꼭대기로 솟구쳐 올랐다. 큰길거리에는 인적 하나 없었다. 밝은 달빛, 총총한 별의 바다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 사방천지는 정적에 잠겨 있었다. 어쩌다 멀리서 동네 개짖는 소리만 아련히 바람결에 실려왔다. 그렇다. 신룡(神龍)은 머리를 내밀기 무섭게 벌써 아득한 천공(天空)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 제 어디서 그 자취를 찾으랴? 이령은 후회막심했다. 화상은 멀리 사라졌다. 이인(異人)과 사귈 기 회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름도 거처도 묻지 않은 자신의 부주의를 탓해 보았으나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몸을 번뜻 뒤집어 지상으로 내려서고는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응벽애라, 혹시 거기가 화상이 거처하는 곳을 암시하는 건 아닌지? 일부러 쪽지를 남겨 나더러 그리로 찾아오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응벽애라!' 문득 그 쪽지를 방안에 두고 나왔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유일한 단서를 잃을까 봐 황망 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실내 정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데 쪽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 미 보이지 않았다. '아뿔싸!' 방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으나 쪽지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도 통하지 않았으니 창 밖 으로 날아갔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화상은 멀리 간 게 아니다. 내 몸 곁 어딘가에 아주 가까이서 나의 성의를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이다. 내 추측이 틀림없다면, 그분은 나를 위해서 이리로 찾아든 것이다. 그리고 따 로 단서를 남겨서 나더러 자기를 찾아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령은 확신을 가졌다. 그 즉시 객점 사람들이 놀라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까처럼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골방으로 돌아와 보니 영경은 탁자에 턱을 괴고 일렁거리는 등불 그림자 아래 눈을 크게 뜬 채 아버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는 종이쪽지가 끼워 져 있는 게 아닌가! 이령이 들어서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대뜸 질문을 던졌다. "아빠, 그 화상 만나보셨어요?" 이령은 대답 대신 종이 쪽지를 나꿔챘다. <응벽애> 바로 그 방안에서 보았던 필적이었다. 화상이 남겨 놓은 그 종이쪽지가 분명했다. "이거 어디서 났느냐?" "방금 아빠가 나가신 뒤 저 역시 그 화상의 행적이 하도 이상하다 싶어 여기 그대로 앉은 채 생 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등잔 불빛이 한 번 껌벅하고 일렁거리더니 어느 틈엔가 탁자 위에 이 종이가 떨어져 있지 않겠어요? 창문 쪽으로 뛰어갔죠. 아빠가 막 방안에서 나오시 더니만 바깥으로 사라지시더군요. 그것밖에 못 보았어요. 아빠, 이 응벽애가 무슨 뜻이에요? 어떻 게 허공에서 이런 게 날아들었는지 아세요? 어쩌면 이렇게 신기한 일이 다 있죠?" 이령은 딸의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영경도 심상치 않은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이령은 결심을 했다. 마음 속 품은 뜻을 딸에게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네게는 숨겨 왔지만, 사실 아비는 요즈음에 들어 일심으로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불제자가 되 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 정성이 통해서 고인선불(高人仙佛)께서 나에게 길을 일러주시려고 나타난 모양이로구나. 이 응벽애라는 것도 그분께서 나더러 찾아오라는 곳인 듯하다. 아비는 오늘 이후부터 혹 일세의 기연을 만나서 속진(俗塵) 세상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단지 너만 은....." 여기까지 말하다 말고 이령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뭉클 솟구쳤다. 눈시울에 물기가 핑그르 돌면서 딸의 얼굴마저 흐려졌다. "아빠가 잘 되신다면 이 딸도 기쁜 일이지요... 그럼 저는 어쩝니까?" "지금으로선 나도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 그분께서 내 앞 가까이 계시기는 하지만 아직 뵙기는 원하지 않으시니, 어찌 할 도리가 없구나. 우리 산으로 돌아가서 다시 의논하기로 하자." "아빠, 언제부터 결심하셨는지 모르지만, 어째서 불제자가 되시려고 해요? 산에 계실 때는 전혀 그런 말씀이 없으시더니, 하필이면 오늘 이런 곳에서 말씀을 꺼내시는 거예요?" "내가 어린 너를 데리고 떠돌아다니던 끝에 이 사천 아미산까지 흘러들어 왔지만, 평생 꿈꾸어 온 대장부의 뜻도 못 펼친 채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세태를 보니 광복의 염원도 이루어 지기는 글렀고, 심사만 암울해져서 모든 게 귀찮아졌단 말이다. 그래도 혹시 때가 이르지 않았는 가 하는 한 가닥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머리 풀고 입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시장 길거리에서 그 화상을 만났지. 그분의 불호소리가 순간적으로 내 고막을 쩌렁쩌렁 진동시키더라. 그 음성은 내가기공(內家氣功)을 연성한 강기(剛氣)의 한 가지란다. 그분이 아무 까닭도 없이 초 면인 나에게 강기를 베풀어 깨우쳐 줄 리가 있겠느냐 말이다. 그분은 선불(仙佛)이 아니면 검협 (劍俠)이시다. 그래서 문득 달려가 뵙고 싶은 마음이 움텄지... 하지만 또다시 생각하고 보니, 나야 어떻게 되든 네 한 몸의 장래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말았지. 그런데 뜻밖에도 그분이 우 리를 뒤따라 오지 않았겠니? 처음에는 나도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이 분명하게 우리 방을 지목하고 비워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날 붙잡고서 밑도끝도 없이 사리를 뒤집어 터무니없는 말씀으로 강짜를 부리는 순간, 나는 우연이 아니라 그분과의 필연적인 만남이라고 직 감했다. 서로 억지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는 속으로 신중히 생각했다. 지난날 내가 강호를 누벼오 는 동안 맺은 원수가 어디 한둘이냐? 혹시 만에 하나, 적이 내 정체를 간파하고 보복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선 방을 양보해 주고 다시 동정을 살펴 보기로 했지. 그 방에 가서 보니 사람은 없어지고 탁자 위에 이 종이쪽지만 있었다. 나는 그제서 야 그분께서 진정으로 나를 이끌어 주실 스승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얘야, 이 망망한 사해천지 에 명산도 수없이 많은데 어디 가서 이 <응벽애>를 찾는단 말이냐? 설혹 찾아냈다 하더라도 여 자 몸인 너를 함께 데려갈 수는 없을 터, 내가 그분을 따라간 후 네 뒷일을 또 어떻게 해야만 하 느냐? 너와 떨어지지 않으려면 광세선연(曠世仙緣)을 만날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렇듯 어려운 일들을 짧은 시간에 여기서 해결할 수도 결심을 세울 수도 없기 때문에 산으로 돌 아가 다시 의논해 보자고 말한 것이다." "아빠, 그 말씀은 틀렸어요! 제가 비록 나이 어리지만 근래에 내공과 외공을 익혀 이제는 어느 정도 요결을 터득한 몸이에요. 게다가 우리 동굴은 앞쪽으로 깎아지른 만 길 절벽이고 뒤쪽도 새 한 마리 날아오르지 못할 만큼 까마득한 계곡이 아닌가요? 사람이라곤 근처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이 외진 곳인데 무슨 위험이 있겠어요? 아빠가 한 사오 년 양식거리 값만 남겨 주신다면 제가 일 년에 두어 차례 일용품을 사다 쓰면서 힘껏 수련해도 괜찮아요. 산중 맹수도 두려울 게 없고, 또 누가 와서 귀찮게 굴지도 않을 텐데, 호젓이 무공을 수련하기에 얼마나 좋아요? 사오 년 후, 제 무예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아빠를 찾아나서겠어요. 그때쯤이면 아빠도 저에게 본격 적으로 검술을 가르치실 만한 여승 한 분 찾아서 저의 스승으로 모시게 해주시겠죠. 아빠께선 득 도성불(得道成佛)하시고, 저는 검술을 성취하여 세상사람을 구제하게 된다면 그 얼마나 보람있고 기쁜 일이겠어요? 사람의 목숨은 길어야 백 년, 아빠께서 득도하시면 천 년의 수명은 누리실 터, 그때 이 딸도 입도(入道)하도록 이끌어 주시고 구차스런 속진을 훌쩍 떠날 수 있게만 된다면, 잠 시 헤어지는 고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아빠, 저 때문에 걱정 마시고 결단을 내리셔요. 마음 약하게 가지시면 아빠답지 않아요!" 이령은 딸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애처롭게도 보였다. 아직까지 아버지 무릎 앞에서 어리광이나 부릴 나이인 데도 이토록이나 웅심(雄心)을 품고 서슴없이 아빠를 안심시키는 말까지 하게 될 줄 이야! 그는 묵묵히 딸의 눈빛을 들여다보았다. 아빠와 헤어지는 아픔, 가녀린 소녀의 몸으로 거친 산중 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는 고독감 같은 것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기색이 완연했다. 아녀자의 연약한 탯거리는 추호도 보이지 않고 사내대장부 같은 떳떳하고도 굳센 기상이 가득했다. 그 당 찬 모습을 보자니 이령은 또 가슴이 쓰라렸다. 그는 씁슬하게 웃었다. "세상 일이 어디 그렇게 뜻대로 된다드냐? 네가 혼자 절경심곡(絶境深谷)에서 사오 년을 살겠다 고는 하지만, 말이야 쉽지... 얘야, 밤이 너무 깊었다. 내일은 짐을 지고 산으로 돌아갈 길도 바쁘 다. 장차 얘기는 산에 가서 하기로 하고 잠시 눈을 붙이자꾸나. 천하에 명산이 천봉만령(千峰萬 嶺)인데, 응벽애는 어느 산에 있는 절벽일꼬? 먼 데 있는지, 가까운 데 있는지도 모르고....." "그분 화상께서 기왕 아빠를 이끌어 주시기로 한 분이라면 그렇게 몰인정한 처사를 하시지는 않 을 거예요. 아빠가 절 데리고 계신 걸 아시느니만큼 그분이 써놓은 장소도 천만 리 먼 거리를 가 리키는 게 아닐 듯하군요. 너무 마음쓰시지 마셔요." 영경은 어른답게 아버지를 위로하더니, 허공을 향해 조심스러운 자태로 큰절을 올렸다. "고승님, 선불님! 저희 부친을 자비심으로 이끌어 주시려면 속시원히 손을 내밀어 주세요. 어느 곳에 사시는지 어서 말씀 좀 해주세요! 이토록 저희를 애타게 하지 마시고 응벽애가 어딘지 알려 주세요!" 딸의 어리광스런 모습을 보자니 이령은 우습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얘야, 그만 하고 어서 잠이나 자거라." 이윽고 부녀는 제가끔씩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누워서도 영경은 잠이 안 오는지 부시럭부시럭 뒤채면서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얼핏 귓결에 '응 벽애, 응벽애...'라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수수께끼 같은 그 장소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령은 속으로 쏜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골방 신세가 되어서 형편없는 이부자리를 얻어 덮기는 했으나, 더럽고 지저분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퀴퀴한 냄새까지 코를 찌르니 잠이 올 리가 없으리 라. 그래도 볼멘 소리 하나 없이 누워 있는 걸 보면 자라기도 다 자랐구나 싶었다. 부녀는 모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시간은 잘도 지나갔다. 새벽 닭이 울기가 무섭게 바깥에서는 웅성웅성, 참배객들이 일어나 부산 을 떠는 소리가 소란스레 나기 시작했다. "왜, 좀 더 자지 않구?" 영경이 자리를 걷고 일어나자 이령이 말렸다. 어차피 일찍 산에 돌아가 봐야 바쁜 일도 없기 때 문이었다. "괜찮아요. 실컷 잔 걸요." 영경은 기어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성미도 깔끔하고 급한 데다 이부자리마저 냄새나고 지저 분하기 짝이 없으니 더 누워 있으라는 게 고역일 만도 했다. 할 수 없이 같이 일어난 이령은 방문을 열고 세수물을 떠 오라고 하인에게 소리쳤다. 이윽고 날이 환하게 밝아왔다. 동트기 전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던 참배객들이 우루루 객점 대문 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아미산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누구보다 먼저 부처님 께 첫 번째 향불을 올려 심원(心願)이 성취되도록 빌려는 것이었다. 객점 손님들 가운데 절반이 떠났는 데도 소란스런 소리와 북적대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출발 하지 않은 패거리들이 저마다가 마꾼을 불러들이느라 서로 다투고 있었다. 이윽고 하인이 세수물을 떠다 바쳤다. 엊저녁에 특실 화상의 시중을 들던 녀석이다. '화상이 벌써 떠난 걸 알았을 테니 무슨 말을 하겠지!' 이령은 짐짓 모른 척하고 시침을 뗐다. 하인녀석이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어쩌나 두고 보기로 한 것이다. 한데 뜻밖에도 세수가 끝나자 하인녀석은 대야를 내다 두고 오더니 입을 꽉 다문 채 이령 부녀 가 엊저녁에 사들인 짐보따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이령 쪽이 궁금증을 못 참아 좀이 쑤셨다. "오늘이 참배하러 가는 날인 줄 몰랐구만. 며칠 더 묵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떠나야겠네. 자네 주인한테 가서 어젯밤 스님이 묵은 특실 방값하고 음식값을 계산해 오게. 우리 숙식비도 함께 말 일세. 그리고 튼튼한 짐꾼 두어 사람을 불러다 주지 않겠나? 이 물건들은 아미산에 사는 친구에 게 선사할 것인데, 지고 갈 사람이 있어야겠네. 자네한테는 내 따로 술값을 두둑히 주지!" 이령이 운을 떼자 하인은 히죽 웃었다. "손님, 이제 보니 눈썰미 한번 좋으시군요. 히히, 그 화상은 과연 남의 등이나 쳐먹는 땡초가 아 닙디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히히히 엊저녁 그 화상이 억지 떼를 쓴 것도 일부러 우리 주인을 약올리려고 한 짓이었습지요. 그러다가 손님같이 점잖은 분을 만나서 그만두신 겁니다. 방에 들어가서도 '술을 가져와라, 안주 떨어졌다!' 하며 마구 시켜 자시길래 아무래도 손님 주머니를 빈털털이로 만들려고 작심한 줄 알 았습죠. 왜냐구요? 식탁에다 흥청망청 벌여놓고는 이것 한 입, 저것 한 입 남도 못 먹게 헤질러 놓고선 또 바꿔 시키니까, 우리도 화가 날 수밖에요. 이러다간 뒤끝에 가서 난리 한번 치르겠구나 걱정을 했더니만, 그게 아니지 뭡니까? 그분은 알고 보니 아주 좋은 화상이었어요. 공연히 우리를 가지고 놀리느라 그랬던 거죠. 힛힛!" 이령으로선 그 화상의 행방을 아는 게 시급했다. 말도 안 되게 두서없이 지껄여대는 걸 중도에 서 가로막고 다시 물었다. "그 스님이 다시 돌아왔는가?" 하인은 그제서야 슬그머니 편지 한 통을 내놓았다. "가신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돌아오지는 않으셨습죠. 그런데 떠나기 전에 손님 숙식비하고 특실 숙식비 모두 합쳐서 그 스님이 내고 가셨습니다요. 저한테는 따로 술값이라면서 은자 다섯 냥까 지 주십디다. 그런 큰 돈은 처음 만져봤지요. 스님 말씀이 '골방 손님은 아미산에 계신 분인데 나 하고 이웃이란 말이다!'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가만 생각해 보니, 그 스님은 손님께서 부처님 을 모시면서도 남의 절에나 참배하고 이웃 그분 절간에는 향불도 올리지 않는 걸 괘씸하게 여기 다가 어젯저녁 손님을 만나니까 일부러 심술을 부린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손님이 점잖게 나 와 놀림감이 되면서도 참는 걸 보고 기분이 풀어진 게 틀림없습니다요. 제가 어느 절에 계신 뉘 시냐고 물었지만. '그건 손님이 다 알고 계시다. 지척지간에 있으니, 찾아나서기만 하면 이내 안다 ' 하시질 않겠습니까? 계산을 끝내고 나서 저더러 이 편지를 맡아 두었다가 손님이 아침에 일어 나시거든 전해 드리라 하셨지요." 객점 하인의 말을 들으면서 이령은 황급히 봉투를 뜯었다. <합치려면 그 먼저 헤어져야 하는 법, 헤어짐이 없이 다시 만날 수 없도다. 응벽(凝碧)을 찾는 가? 천 번 돌아 뒤져도 촉산(蜀山)의 일각(一角)인 것을, 손 안의 구슬을 어찌 걱정하느냐? 먼저 해탈(解脫)의 길부터 찾으라. 밝은 달 매화 꽃숲, 신물(神物)은 스스로 그 손아귀에 떨어지리니, 유룡(遊龍)의 목을 비틀고 홀로 뭇마귀를 베어 없애리라. 삼십 년이면 거듭 상봉할 터, 그때에야 비로소 진각(眞覺)을 증험하리라.> 간략하면서도 힘찬 필치에 고풍이 창연한 진묵(眞墨)이었다. '아, 이분은 어젯밤 내 곁을 떠나지 않으셨구나! 영경이와 주고받던 말까지 다 듣고 계셨어. 그 렇다. 이렇게 서찰까지 남기신 걸 보면 영경에 대해서도 필경 좋은 안배를 해 놓으신 게 분명하 다!' 이령은 가슴을 짓누르던 바윗덩어리가 당장 떨어져 나간 듯 속이 후련해졌다. 아버지와 딸은 약 속이나 한 것처럼 서찰에서 눈을 떼자마자 서로 마주 바라보았다. 할 얘기, 전할 편지 다 전해 준 하인이 멀거니 두 부녀를 쳐다 보고 있다가 이령한테 불쑥 물었 다. "편지에 뭐라 쓰였습니까? 손님더러 자기네 절에 와서 참배드리란 말씀입죠? 히히히, 그분은 출 가승이면서도 장사속 하나만은 아주 밝단 말씀이야! 손님 대신 방값 밥값 물어내 놓고 그거 밑천 삼아 절간 단골을 끌어들일 모양입죠?" "자네한테 대포값 두둑이 주라시는군!" "원, 농담의 말씀을!" 잠시 후 하인이 짐꾼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령 부녀는 보따리를 챙겨 회정길에 올랐다. 해탈교를 건너면 산으로 오르는 큰길에 들어서게 된다. 맞은편 멀리 두 개의 산봉우리가 개 이 빨을 엇갈려 세운 듯 기괴한 형상으로 우뚝 선 것이 자못 웅장하기 짝이 없었다. 길은 온통 참배가는 선남선녀들로 메워져 있었다. 그리고도 일행의 뒤쪽에서는 꾸역꾸역 밀려들 고 있었다. 산록(山麓)에 이르러서부터는 아예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절 한 번씩 올리면서 가는 신 도들도 있었다. 중턱부터 앞산 정상까지 이르는 동안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 도관이 백 곳이 넘 었다. 웅대한 아미 명산의 승경(勝景)은 산등성이고 골짜기고 없이 범패(梵唄)소리, 목탁소리, 범종(梵 鐘)치는 소리가 참배신도들의 염불소리와 어우러져 장엄한 불경(佛境)의 복지(福地)를 이루고 있 었다. 그 장관은 미약한 인간들의 외경(畏敬)을 불러일으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건한 신심 (信心)을 절로 우러나게 만들었다. 이령은 어차피 참배가는 신도가 아닌지라 그 숱한 짐더미를 이끌고 인파 속을 넘어가기가 어려 웠다. 그래서 짐꾼들에게 지시하여 지난날 아미산을 처음 오를 때 지나갔던 지름길로 접어들게 했다. 그 산길은 사신암(捨身巖)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일행은 마침내 사신암에 도착했다. 정상으로 오르는 절벽 아래 짐들을 모두 풀어놓게 한 다음, 이령은 짐꾼들에게 웃돈을 얹어 삯을 지불하여 돌려보냈다. 짐꾼이 멀찌감치 사라지자 그는 지난 번에 주순이 한 방법대로 절벽 위까지 짐들을 하나하나씩 끌어올렸다. 겨울 해는 짧다. 그들이 석굴에 돌아왔을 무렵은 날도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이틀 만에 다시 찾은 보금자리였지만, 이령과 영경은 사뭇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그립고 안온한 느낌을 받았다. 등잔불을 밝히고 짐보따리를 풀어 단도리하고 나자, 아버지나 딸 모두가 물먹은 솜처럼 전신이 나른했다. 두 사람은 대충 저녁 요기를 마치고 나서 제각기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부녀는 겨울을 날 채비를 의논하고 그에 따라 식료품과 땔감 따위를 쓰기 쉽도록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또다시 그 화상이 남긴 편지 두 장과 객점 하인의 말을 토대로 의견을 나 누면서 응벽애의 위치를 추정해 보았다. 머리를 짜내고 온갖 추리를 다 동원했으나, 응벽은 점점 더 먼 데 있는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생각다 못해 이령은 딸에게 자신이 직접 찾아나서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분명 우리와 이웃해서 살고 계시다는 말씀을 남겼다. 그렇다면 응벽애란 곳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데 있을 게 틀림없다. 요 며칠 사이 날씨도 맑고 하니 아무래도 내 발로 직접 찾 아나서는 게 좋을 듯싶구나. 우선 이 동굴을 중심으로 가까운 데부터 답사하겠다. 아미산은 워낙 높고 험하니까, 어쩌면 내가 당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을 게다. 그렇다고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리거라. 절대로 이 석굴 부근에서 멀리 나가면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아빠!" 영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이령은 아침 일찍 석굴을 나서 이 산 저 산 천방지축으로 쏘다니며 응벽애를 찾기 시 작했다. 한 번 지나쳤던 곳도 거듭해서 뒤졌다. 그 숱한 절간, 암자를 이잡듯 샅샅이 방문하면서 응벽애란 절벽을 아느냐고 수소문했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모른다는 대답이 고작, 심지어는 그런 데가 어디냐고 반문하는 이까지 있었다. 아버지가 나가면 딸은 한가로왔다. 매일같이 정해진 수련일과를 마치고 나면 왕년에 아버지가 쓰던 암기(暗器)들을 챙겨 가지고 온산을 쏘다니며 날짐승, 들짐승을 잡는 게 일이었다. 때로는 적지 않은 사냥감을 잡아 고기를 소금에 절여 겨울나기 식량으로 갈무리했다. 그녀는 천성이 사뭇 영리한 데다 체력 또한 놀랄 만큼 강인했다. 아버지한테 무슨 무공을 전수 받든지 간에 일단 배웠다 하면 금방 구사할 줄 알았다. 손에 익히기가 무섭게 능통한 솜씨로 바 뀌는 것이었다. 그래서 입산 후 지금까지 겨우 몇 달밖에 안 지났지만 그녀는 그 사이 적지 않은 재간을 배울 수 있었다. 경신술도 더욱 정진해서, 당초 그렇게나 부러워하던 원숭이보다 더 민첩한 신법을 지 녀 나는 새처럼 쾌속해졌다. 영경은 허구헌날 산을 온통 날고 뛰면서 차츰 담력도 크게 자라, 사 냥터 역시 멀리 넓혀갔다. 이령은 사나흘에 한 차례씩 산중턱 바위 아래 샘에서 식수를 길어오는 일만 빼놓고 전심전력, 그 고승의 행방을 찾는 데만 나날을 보냈다. 영경은 아버지의 상심이 더 깊어질까 염려하여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부녀 두 사람은 매일같이 새벽이면 석굴에서 나갔다가 저녁 느지막해져서야 돌아와 만나곤 했다. 그것이 일상생활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어느덧 아미현에서 고승을 만난 지도 한 달 가까이 되고 있었다. 그래도 응벽애의 위치는 여전 히 오리무중, 이령의 가슴에는 초조감과 수심만 늘어갈 뿐이었다. 철도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어, 날씨는 날이 갈수록 추위를 더 해갔다. 그들이 살고 있는 동굴 은 아미산의 차디찬 북풍을 등지고 남향으로 뚫렸으므로 겨울철에는 양지볕을 받아 따뜻하고 여 름철엔 반대로 시원했다. 게다가 이령이 솜씨를 부려서 큼지막한 흙화덕을 설치한 덕분에 굴 속 은 음랭한 추위도 느껴지지 않고 늘 봄날처럼 훈훈했다. 그날 이령은 평상시와 달리 초저녁에 동굴로 돌아왔다. 온종일 피곤을 무릅쓰고 노심초사 미친 듯이 온산을 쏘다닌 끝에 후산 깊은 계곡으로 내려가 갈증을 풀려고 찬 샘물을 몇 모금 마신 것 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그는 오슬오슬 몸이 떨리고 추위를 느꼈다. 오한이 나면서 전신이 찌뿌둥 한 게 아무래도 감기 몸살에 걸린 듯싶어 일찌감치 돌아온 것이다. 시름에 찬 얼굴로 터덜터덜 돌아은 아버지를 보고서 영경은 크게 놀랐다. 여지껏 이토록 무력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둘러서 화덕의 불을 세게 지피고 뜨거운 죽을 끓여 드시도록 했다. 그리고 며칠 푹 쉰 다음 다시 그 절벽을 찾아나서도록 권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부터 나갔다가 초저녁 어두워져서야 발걸음을 돌리니 무쇠 인간의 몸뚱이라도 배겨 낼 재간이 없을 것이라고 원망섞어 푸념까지 했다. 이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룻밤 푹 땀을 흘리고 일어나면 감기쯤이야 거뜬하게 사라 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튿날 새벽, 그는 여느 때처럼 눈을 떴다. 그러나 아직도 오한이 가시지 않은 걸 느꼈다. 두터 운 솜이불을 덮고 있는 데다 벌겋게 달아오른 화덕불로 굴 속이 훈훈한 데도 온몸이 저리고 오슬 오슬 떨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리 걷고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가 보니 사방천지에 주먹만큼한 눈송이가 분분히 흩날 리고 있는 게 아닌가. 밤새껏 내리고도 그치질 않았는지 주변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도 다림궁 (多琳宮)의 범우(梵宇)처럼 새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채 은빛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산허리 아래 도 온통 설해(雪海)로 변했다. 솜뭉치 같은 눈꽃이 허공을 온통 메우고서 칼날처럼 매서운 산바람 에 나부껴 어지러이 흩날리곤 했다. 이령은 눈경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힘없이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상 위에 털썩 드러누 워 눈을 감아버렸다. "아빠, 눈이 왔어요! 히야, 기막힌 경치네!" 한숨 늦게 일어난 영경이 바깥에 나가자마자 소리치더니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세상에 태어 난 이래로 산중 눈구경을 처음 보는 영경이었다. 얼마나 신기한지 저도 모르게 깡총깡총 뛰면서 흥분에 들떴다. "아빠, 눈구경 나가세요!" 영경은 아버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이령의 입에선 나지막이 한숨만 흘러나왔다. "응벽애는 아직 찾지도 못했는데... 산길도 이제 다 막혔구나! 내 운명이 어쩌면 이토록 박절한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탄식에 영경은 들뜨던 흥분이 당장 식어버렸다. 그래도 그녀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아 빠를 위로해 드렸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에요? 신선이라도 이런 날씨엔 도리가 없지 않겠어요? 우리 정성이 모자라 못 찾는 게 아니라 그분께서 일부러 어려운 일을 만들어 가지고 남을 골탕먹이려는 거죠. 그분께 서 어차피 아빠를 점찍으신 바에야 만나는 게 늦으나 이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빠도 기력이 예전같지 않으세요. 그러니까 차라리 이 추운 겨울을 이대로 나고 내년 봄에 다시 방도를 궁리해 서 찾아뵙도록 해요. 아빠, 그렇게 하세요." 이령은 차마 딸의 지극한 뜻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기는 병이 들지 않았는가?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경은 냉큼 뒷굴 석실로 달려가더니 불을 지펴서 따끈한 죽을 끓여 내왔다. 거기다 어제 캐온 산나물로 만든 무침과 절인 고기를 삶아 한 쟁반 그득하게 썰어 내놓았다. 동굴에는 가구라고 할 게 없어 넓고 펑퍼짐한 바위가 식탁이었다. 영경은 그 식탁을 아버지 침 상 곁까지 옮겨다 놓고 화로가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장작을 지핀 다음 비로소 아버지에게 식 사를 권하려 했다. "아빠, 진지....." 그러나 이령은 그새 또 잠이 들었다. 잠결에도 미약하게 신음소리기 흘러나왔다. "아빠!" 영경은 깜짝 놀라 얼른 아버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이마뿐만 아니라 온몸이 화끈화끈 불덩어 리였다. 한기(寒氣)에 열이 겹쳐 중태로 발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아버가는 주무시는 게 아 니라 의식을 잃은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급하게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아빠, 정신 차리세요! 아빠!....." 그래도 이령의 눈은 떠지지 않고 신음소리만 잦아졌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나이 어린 소녀가 반백(半白)의 늙은 아비를 따라서 고향 떠나 만리길을 헤매던 끝에 겨우 이 심산궁곡(深山窮谷)에 터를 잡아 서로 의지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판인데, 하루아침에 부친이 병들어 눕다니, 이야말로 사람의 애간장을 말리는 노릇 아닌가! 영경은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꾹 삼키고 침착하게 아버지 귓전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빠, 어디 좀 편찮으세요? 죽을 끓여 왔어요... 뜨끈할 때 자시고 땀을 내시도록 하세요....." 이령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잠결에서도 입술은 보일 듯 말 듯 움직였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 는 말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미약하지만 그는 중얼거림을 그칠 줄 몰랐다. "응벽애... 응벽애!....." 아버지의 잠꼬대를 들으면서 영경은 그가 심화병(心火病)에 날마다 찬바람을 맞아가며 노심초사, 온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극도로 피로에 지쳐서 몸살까지 덧난 것임을 알았다. '아빠를 의원한테 보여야 한다!' 하지만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이고 하산길마저 머나먼데, 연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어찌 모시고 내려간단 말이냐? 의원을 데려올 궁리도 해봤다. 그러나 자기가 서툰 길을 더듬어 아미현 성내까 지 간 동안, 병자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 끝에 몹시 낙담하고 말았다. 도무지 방법이 없고 오도 가도 못할 처지인 것이다. 마음도 쓰라리거니와 두려움마저 고개를 쳐들었다. 공포감이 극도에 다다르자, 그녀는 소 리쳐 아버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빠!... 아빠!... 아빠!" 이령은 인사불성, 딸이 제아무리 목메도록 소리쳐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영경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향촉(香燭)을 밝혔다. 동굴 입구에 무릎꿇고 쉴새없이 이마를 조 아리며 하늘에 빌었다. 그래도 속이 안 풀리자 동굴 바깥으로 뛰어나가 한바탕 서럽게 울었다. 통 곡성이 눈바람에 휘말려 하늘까지 사무치도록 목을 놓아 울었다. 나뭇가지에 수북이 쌓인 눈이 울음소리에 울려 사태나듯 푸스스 떨어졌다. 두견새라도 한 마리 날아들었다면 그녀를 대신해 피 를 토하며 울어주었으리라. 아미 후산은 이젠 아예 거세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천지였다. 그들이 거처하는 동굴은 정상 가까 이에 있어 눈보라의 기세가 비교적 약한 편이지만. 그래도 십 장 바깥은 거의 보이는 게 없을 만 큼 비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영경은 사방천지를 둘러보았다. 망망한 설해(雪海)만 눈앞 가득할 뿐, 의지할 것도 부여잡을 지 푸라기도 하나 없었다. 속수무책 인 것이다. 애간장이 끊어지도록 한참 울다 그녀는 문득 눈물을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의 묵상 끝에는 또다시 절망의 통곡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울다가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소리쳐 불렀다. 불러도 깨어나지 않는 아버지, 그러면 그녀는 또 바깥에 나와 울음을 터뜨렸다. 벌써 몇 차례나 그짓을 거듭하고 있는지조차 모 를 정도였다. 한참 아버지를 흔들면서 울던 그녀는 문득 창졸지간에 자기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빠, 저 여기 있어요!" 그러나 이령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들은 것은 환청(幻聽)이었던 것이다. 헛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니 영경의 슬픔은 극도로 부풀어났다. 이제는 아버지가 울음소리를 듣 거나 말거나, 미친 듯이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서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울면서도 아버지를 소리 쳐 부르고 또 불렀다. 얼마나 울었을까? 홀연듯 그녀의 귓가에 미약하게나마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영경아, 왜 우니? 아빠는 감기가 좀 들어서 기분이 언짢고 움직일 수 없을 뿐이란다. 이제 금방 나을 테니까 두려워하지 말렴." 정신없이 울던 영경은 갑작스레 아버지가 입을 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라움은 이내 기쁨으 로 바뀌었다. '아빠가 정신을 차리셨다! 이제 곧 나으실 거야!' 그녀는 울음을 뚝 그치고 급히 물었다. "아빠, 죽 좀 드실래요?" 이령은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된 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죽그릇을 들고 보니 싸느랗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얼른 석실로 돌아가 불을 지피고 허둥지둥 죽을 데우기 시작했다. 죽이 끓기도 전에 아버지가 또 혼수상태에 빠졌을까 무서워, 그녀는 얼른 침상으로 달려와 보기도 했다. 불길이 약해서 그런가? 죽그릇은 좀처럼 끓지 않았다. 왔다갔다 안절부절, 영경은 조바심을 못 이겨 발을 동동 굴었다. 이윽고 죽이 끓었다. 병자에게 고기를 먹일 수 없어 절인 채소를 곁들여 가지고 침상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앉히고 이마를 짚어보았다. 아직도 열이 심했다. 베개로 등받이를 해드 린 다음, 그녀는 죽그릇을 받쳐 들고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아버지 입에 떠넣었다. 죽 한 모금 채 소 한 입, 조심스레 먹이는 것이다. 이령은 평소에도 워낙 식성이 좋아 남보다 훨씬 많이 먹는 편이었다. 그것을 딸 영경이 모를 리 가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더 달라고 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뜻밖 에도 아버지는 반 그릇을 겨우 받아먹고선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다시 털썩 누워버렸다. 영경은 가슴이 터질 듯 쓰라렸다. 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슬픔을 꾹 눌러 참고 아버지 에게 이불을 곱게 덮어드렸다. 그도 모자라서 자기 침상에서 이불이랑 솜옷이랑 모두 걷어 가지 고 와서 겹겹이 포개어 덮었다. '어서어서 땀을 푹 흘리고 깨어나시면 좋으련만.....' 날자, 검정독수리야 大雪空山 割股療親行拙孝 沖宵健羽 碧崖舟澗拜眞仙 날은 이미 저물었다. 바깥은 그래도 눈빛이 반사되어 밝았으나 동굴 안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영경은 문득 자기가 아직 한 술 밥도 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너무나 슬프고 당황한 나머지 진종일 식사마저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지금도 식욕이 없기 는 마찬가지였으나, 자기마저 병들어 쓰러지는 날에는 아버지를 돌보아드릴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녀는 차디차게 식어버린 죽그릇을 집어들고 몇 술 떠먹었다. 아버지가 언제 또 시장기를 느끼고 달라고 하실지 몰라서, 그녀는 아예 죽솥을 아궁이에서 떼어 다가 화덕 위에 얹어놓았다. 그리고는 불길이 줄어들지 않도록 장작도 넉넉하게 갖다 쌓아 놓고 부지런히 지폈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채로 침상 곁에 쪼그려 앉아서 아버지를 굽어보았다. 그리고는 이따금 이 마와 가슴에 손을 대어 땀이 나는가 살펴보았으나, 무섭게 뜨거운 열기만 느껴질 뿐 땀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었다. 한밤중 동굴 바깥에서는 광풍(狂風)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르르, 쿵쾅! 성난 파도와 같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면서 미친 듯이 불어닥치는 저런 밤바람에는 나무도 뿌 리채 뽑혀 나갈 듯했다. 그 거센 바람소리를 듣기만 해도 영경은 간담이 써늘했다. 원래 동굴 속은 두 층으로 나뉘어 있어서 바깥 층은 모두 바위로 벽을 쌓아 단단히 봉쇄하고 출 입구 한 군데만 터놓아서 드나들 때 여닫게 만들어져 있었다. 동굴의 안쪽 층은 당초 주순이 이 곳을 발견하여 거실로 만들었을 때 겨울나기 채비로 바람막이를 설치해 놓았었다. 바람막이의 틈새는 솜으로 겹겹이 삼사 치 두께나 되게 누빈 천을 덮어씌워 밀봉해 놓았으므로, 아무리 한겨울의 북풍한설(北風寒雪)이라도 침투할 수 없었다. 영경은 허리띠도 끄르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이듣날 새벽이 되자 이령은 전신으로 땀을 흠뻑 쏟아내더니 천천히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빠, 기분이 어떠세요? 이젠 다 나으신 거예요?" "이제 차츰 풀리는구나. 걱정할 것 없다." 아버지의 대답을 듣고서 영경은 기운이 솟았다. 얼른 죽그릇부터 올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내려놓자 영경의 마음은 다시 울적해졌다. 아버지의 식욕이 떨어지는 이 유를 그녀는 모르기 때문이었다. 겨우 정신이 맑아진 이령은 딸의 얼굴을 바라보고 몹시나 안쓰러웠다. 밤을 꼬박 지새우느라 그 녀의 눈이 토끼처럼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던 것이다. "얘야, 감기란 게 큰 병은 아니지만 병이 들면 밥맛을 잃는단다. 이젠 땀도 푹 냈으니까 좋아지 겠지. 너무 걱정 말고 한 잠 자려무나." 이령이 안심시켰으나 딸은 그 말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어물어물 못 들은 척 그냥 넘기고서 좀처럼 눈을 붙일 기색이 아니었다. 이령이 짐짓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재촉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발치께에 자리를 펴고 눕기는 했지만 걱정 근심이 태산같은데 편안한 잠이 올 리 가 있겠는가? 겨우 눈을 감았다간 이내 아버지의 부름이 들리는 듯한 환청(幻聽)에 소스라쳐 일 어나, '아빠, 부르셨어요?' 하고 되묻곤 했다. 딸의 지극스런 효심을 아는 이령은 어쩔 도리가 없 었다. 딸의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와 이령은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 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 병마(病魔)에 사로잡힌 몸뚱이는 좀처럼 낫지 않았다. 땀을 흘리고 열꽃이 가시면서 가까스로 몸을 추스를 것 같다 싶자, 저녁에는 한열(寒熱)이 학질로 바뀌고 말았다. 증세는 그렇게 좋아졌 다 나빠졌다 하면서 닷새를 끌었다. 영경은 이제 피로에 지쳐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벌써 몇 차례나 의원을 데리러 하산 하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이령은 완강하게 막았다. 게다가 자기가 없으면 아버지 시중은 또 누 가 들어줄 것인가? 영경은 오도 가도 못하고 마음만 칼로 저미듯 아팠다. 엿새째 되는 날, 드디어 폭풍설이 멎고 날씨도 화창하게 개었다. 병세가 악화되어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 이령의 곁에서 안절부절하던 영경은 문득 옛날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도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렇지, 나도 할 수 있어! 아빠 병환만 나으신다면 그깐 놈의 고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녀는 아버지 머리맡에 놓인 패도(佩刀)를 뽑아들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향불을 살라놓 고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향하여 묵도했다. 이제부터 옛날 효자가 자기 살을 베어 병든 어머니 에게 먹이고 완쾌시켰다는 고사(古事)에 따라 그대로 흉내낼 참이었다. 하늘에 축원(祝願)을 마치고 다시 일어날 무렵이었다. 꾸우, 꾸르르! 문득 독수리의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후딱 고개를 쳐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더니, 벼랑쪽 암반 모서리 위에 사람 몸집만큼이나 됨직하게 거대한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독수리는 황금빛 눈알을 번뜩이면서 영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새빨간 부리, 강철같은 발톱에 몸 뚱이 전체가 먹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잡털 한 가닥 섞이지 않고 짙은 검정빛 터럭으로 덮인 것 이 여간 우람한 놈이 아니었다. 꾸우, 꾸르르! 그놈은 영경을 향해 두어 번 우짖더니 부리로 몸의 깃털을 여기저기 쪼아 가다듬고 쓸어내렸다. 제딴에 맵시를 내는 것이었다. 여느때 같았으면 영경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벌써 암기라도 쏘아 잡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다. 위급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 그녀는 검정독수리를 흘낏 쳐다본 후 더 이상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칼을 입에 물고서 왼팔 소매를 걷어올렸다. 눈빛보다 더 새하얗고 보드라운 팔뚝이 드러났다.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왼팔뚝에 겨누었다. 얼마나 베어낼 것이냐? 잠 시 가늠해 본 다음 칼날을 살에 갖다대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입술을 악물고 막 베어내려는 찰나였다. 느닷없이 귓전으로 씽! 하고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그와 동시에 검은빛 그림자가 눈앞에 번쩍 스쳤다. "아이쿠!" 그녀는 흠칫 놀라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한데 다음 순간, 그녀는 오른손이 허전해진 걸 느끼고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손에 잡고 있던 칼이 없어진 것이다. 영문을 알고 보니, 그놈의 검 정독수리가 억센 발톱으로 채어간 것이 아닌가! 영경은 약이 오를 대로 바짝 올랐다. "이 죽일 놈의 짐승 같으니! 감히 어르신네를 건드렸어! 어디 두고 봐라, 내 그냥 둘 성싶으냐?"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 그녀는 대뜸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암기 몇 가지와 장검을 찾 아들고 되돌아 나왔다. 단숨에 못된 짐승을 쳐죽여 분풀이라도 해야지 속이 시원해질 터였다. 독수리란 놈은 푸드득 날아오르더니 반공중에서 움켜쥐고 있던 영경의 패도를 슬쩍 던져버렸다. 칼은 그대로 천야만야 끝도 모를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본 영경의 눈에서는 불이 났다. '어서 내려오렴... 이리로 가까이 내려 앉으려므나! 요 밉살스런 짐승아, 이리 오라구... 칼탕을 쳐 서 갈기갈기 찢어놓고야 말 테다!' 그녀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애타게 기다렸다. 그 마음이 통하기라도 했는지, 과연 독수리는 공중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만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벼랑 모서리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아까처 럼 부리로 깃털을 쪼면서 가다듬어 맵시를 내기 시작했다. 금빛 눈알을 디룩거리며 영경이 있는 쪽을 쳐다보지만, 상대방의 살기(殺氣)쯤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듯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영경은 새가 날아갈까 보아 그 자리에서 암기를 쏘지 않고 살금살금 벼랑 모서리로 접근했다 그녀가 흉기를 등 뒤로 감추고 살금살금 다가서는 걸 보면서도 그 거대한 독수리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허공으로 훌쩍 날아 도망치기는커녕 도리어 금빛 번쩍이는 두 눈으로 영경을 무섭 게 쏘아보고 있는 것이다. 그 짐승의 눈빛에는 이제 자기 앞으로 다가 오고 있는 인간에 대한 멸 시의 기색이 완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런 오만스런 눈빛이 영경의 성미를 더욱 불질렀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달음에 쏜 살같이 일 장 거리까지 다가갔다. 우뚝 발을 멈추기가 무섭게 그녀는 독수리를 노리고 왼손의 연 주노(連珠弩)와 오른손의 금표(金標)를 한꺼번에 쏘아날렸다. 영경이 방금 발사한 연주노와 금표는 백발백중, 평소부터 손에 익힐 대로 익힌 병기다. 제아무리 잽싸고 날랜 짐승도 그녀가 날린 암기 앞에서 요행을 바랄 수 없었다. 영경은 손을 모두 비웠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눈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질 짐승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독수리는 영경이 발사한 흉기를 빤히 쳐다 보면서도 날아오르지 않았다. 어 디 그뿐이냐. 왼발톱을 번쩍 들고서 날아온 금표부터 척 움켜쥐더니, 뒤미처 쇠부리를 쩍 벌리곤 고개를 외로 꼬면서 석 자루 연주노마저 덥썩 물어 받지 않는가! 그리고는 영경을 향해 내 재간 이 어떠냐는 듯 우짖었다. 꾸우, 꾸르르! 독수리가 앉아 있는 벼랑 모서리, 그곳은 동굴 앞 공터에서 일 장 남짓한 간격밖에는 안 되었다. 펑퍼짐하게 트인 공터의 오른쪽으로는 천길만길, 끝도 모를 깊은 계곡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굽어봐도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깊이였다. 영경은 요 며칠 동안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옷고름 한 번 제대로 끄르지 못하고 잠도 못 잤다. 낮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노심초사한 끝에 쓰러지지만 않았을 뿐 피로가 극심했고,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와진 신경 때문에 평소와 같은 침착성도 결여되어 있었다. 마음도 몸도 흔들릴 대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벼랑 모서리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경신술을 익히던 장소였다. 그렇지만 오늘 검정독 수리의 장난질 때문에 독이 머리 끝까지 뻗쳐 사생결단을 내려고 덤벼드는 판국이라, 그녀는 모 서리 옆으로는 천야만야 끝도 모를 계곡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걸 깜빡 잊고 말았다. 그녀는 더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몇 달 전 오아취 마을 서당에서 주순이 조연아(趙燕兒)에게 전 수해 주던 걸 문틈으로 훔쳐 배운 검초 육합검(六合劍)의 천운나월(穿雲拿月)을 쓰기로 한 것이 다. 영경은 칼끝에 진기를 모았다. 그리고 장검에 체중을 얹어 내뻗으면서 쏜살같이 모서리에 천 연덕스레 앉아 있는 독수리의 목줄기를 곧장 찔러 들어갔다. 그놈은 영경이 칼끝을 앞세우고 몸 전체로 덮쳐드는 걸 보았다. 푸드득! 두 나래가 펼쳐지면서 그놈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바람에 영경은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벼랑 끝에서 멈추어 몸의 중심을 잡기도 전에, 수레바퀴와도 같은 독수리의 두 날개가 영경의 정수리 를 덮쳐 내려왔다. "아차!" 독수리의 역습은 거세고 사납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황급히 장검을 곤 두세워서 날아드는 독수리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칼끝을 모으기도 전에 독수리는 왼쪽 날개로 영경의 등짝을 휩쓸듯 후려갈겼다. 철썩! 날갯죽지는 정통으로 그녀의 등판에 격중했다. 비록 큰 힘은 쓰지 않았으나 양날개로 휘말아 일 으킨 돌개바람은 사람의 중심을 잃게 하기에 충분했다. 발을 헛디딘 영경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 면서 천만길 까마득한 계곡으로 떨어져 버렸다. 돌덩이처럼 추락하는 그녀의 눈에는 오직 양쪽 벼랑을 따라 희끄무레하게 스치고 올라가는 눈더 미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자기 몸은 허공에 둥실 떠 있고 낭떠러지 벽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눈 쌓인 절벽은 그녀의 두 눈에 현기증이 일도록 눈부시게 빛났다. '이제 난 죽는 거야... 밑바닥에 닿는 순간 몸뚱이가 박살나겠지. 아픈 것도 못 느끼고 죽겠지. 아 빠!' 떨어져 내리면서 생각이 아빠에게 미치자, 그녀는 가슴을 에이는 듯했다. 죽음의 공포와 슬픔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갑자기 영경은 등줄기가 무엇엔가 움켜채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아플 만큼 세찬 충격 이었다. 다음 순간, 떨어져 내리던 속도감마저 줄어든 듯한 감각이 왔다. 방금까지 얼굴에 매섭게 스치던 바람결이 한결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다. 후딱 고개를 들고 보니 바로 그놈의 독수리가 아닌가! 언제 쫓아내려왔는지 그 억센 발톱으로 자기 허리띠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언젠가 아빠가 하시던 말씀대로야! 새는 커다란 먹이를 채어가지고 높직이 날아 올라갔 다간 바윗돌에 메다꽂아 죽여 놓고서 내려와 뜯어먹는다고 했지. 이놈의 짐승이 나한테 호의를 품었을 리가 없어. 천만에 말씀이지!' 중심을 잃고 추락하는 순간에 보검도 놓쳐버렸다. 칼은 아마 주인보다 먼저 계곡 아래로 떨어져 서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허공중에 매달려서는 힘을 쓸 수도 없다. 버둥거리다가 이놈의 성미 를 건드리면 바위에 태질하기 전에 먼저 이대로 공중에서 쪼아 먹힐지도 모른다. 그녀는 목숨을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칼도 없고 힘도 없이 사나운 날짐승에게 사로잡혔으니 무 슨 수가 있겠는가. 어차피 이놈은 계곡 위까지 솟구쳐 올라갈 테니까,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가 다시 궁리해 볼 도리밖에 없었다. 솔개한테 채인 병아리처럼 멀쩡하게 눈 뜨고 팔자에도 없는 비행을 하는 신세가 된 그녀는 슬금 슬금 품속을 뒤져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은 쇠붙이의 감촉 때 문이었다. 아직도 품속에는 금표 두 자루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천만다행이었다. 한 가닥 살 아날 길이 열린 것이다. 그녀는 슬그머니 그것을 꺼내 손바닥과 팔목 사이로 끼워 넣었다. '절벽 위에 내려서는 순간 이놈한테 선물을 안겨주어야지! 그리곤 잽싸게 피신하는 거야. 오냐, 두고 보아라! 이번만큼은 어림도 없다!' 그러나 독수리란 놈은 그녀의 예상을 뒤엎고 절벽 위로 오르기는커녕 반대로 힘차게 하강하고 있었다. 양쪽 나래 끝에서 얼굴이 따가울 만큼 매서운 돌풍을 일으키며 곧바로 천천히 아주 천천 히 계곡 밑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영경은 다급해졌다. 이놈이 어쩌자고 자꾸만 내려가고 있는가. 이쯤 되면 살아나기는 아예 틀린 노릇이 아닌가 싶었다. 이제는 '날 잡아 잡수!' 하고 이놈의 처분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뜯어먹히는 게 전부 아닌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도리어 마음이 느긋해졌다. 평소에도 워낙 담이 큰 영경이었다. 죽거나 말거 나 이제는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도리어 푸근해진 마음에 기막힌 주변 경물(景物)이나 실컷 구경 하리란 여유마저 들었다. 벌써 수십 장도 더 내려왔다. 어느 새 눈더미의 흔적도 없었다. 추운 느낌도 사라지고 점점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눈길 위 아래로는 솜뭉치 같은 흰구름이 뽀얗게 안개를 피우고 있었다. 구 름덩어리는 발치 끝에서부터 삽시간에 머리 위로 날아 올라갔다. 어느 때는 구름 속에 푹 파묻혀 사방천지 희뿌연 기류(氣流)만 가득해져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 었다. 그런가 하면 구름조각이 솜 조각처럼 흩어져 옷깃 소매 속으로 날아들었다가 이내 다시 유 령처럼 사라지기도 했다. 밑바닥을 내려다보아도 구름에 가로막혀 막막하기만 할 뿐, 어디가 끝인 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구름층을 뚫고 나오면 또 구름층이었다. 느닷없이 발밑에 시커먼 물체가 눈 하나 가득차게 성큼 다가왔다. 벼랑 중턱 모서리가 거의 수 평으로 돌출되고 그 위로 칼날같이 예리한 기암괴석들이 숲을 이루듯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거 기에 떨어졌다가는 콩가루처럼 풍비박산이 나고 말 것이다. 가슴이 써늘해진 영경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갈데없이 죽었구나!' 그 순간 독수리가 속력을 더욱 높이더니 측면으로 빙그르 회전 하면서 양날개를 훌쩍 접어버렸 다. 그리고는 기암괴석이 삼엄하게 솟구친 절벽 중턱의, 직경이 육칠 척이나 되는 굴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캄캄한 동굴 아가리로 빨려들듯 들어선 순간 영경은 영낙없이 독수리 둥지로 들어와 죽음을 맞 이했다고 직감했다. 영경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뜯어먹든 새끼 밥을 삼든 마 음대로 하라는 기분이었다. 한데 등 뒤쪽 허리띠를 움켜잡은 발톱이 풀어지는 기척이 없었다. 독 수리는 여전히 어두운 수직 동굴 아래로 하강하고 있는 것이다. 영경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번쩍 떴다. 위쪽은 캄캄절벽, 아래쪽을 굽어보았다. 어느덧 독수리 는 밑바닥 지면 위 십여 장 높이까지 내려온 것이다. 영경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선가 은은히 목탁과 종을 치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왔던 것이다. '이상하구나. 이렇듯 천만길이나 깊은 골짜기 아래 수도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죽을 때가 되면 헛것도 보이고 헛소리도 들린다든데... 정말로 부처님 계신 극락세계에 온 것은 아니겠지.....' 저승사자와도 갈은 독수리의 몸뚱이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갈수록 점점 하강을 계속하 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극락세상에 다다른 건 아닐 게다. 그녀는 정신을 바짝차리고 사면을 둘러보았 다. 발치 아래 돌벽에는 울긋불긋, 형형색색의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해 있다. 밝고도 깨끗한 꽃향기가 바람결에 실려와 그녀의 코에 스몄다. 면적도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기온도 늦은 봄처럼 따사로왔다. 절기가 섣달 초순도 다 지나가는 때인데도 엄동의 설한은 간 데 없는 것이다. 넋을 잃고 둘러보던 영경은 그만 저도 모르게 기분 이 즐거워졌다. 그러다가 맴돌듯 몸뚱이가 빙그르 선회하는 바람에 그녀는 문득 아직도 독수리의 발톱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도 위험을 벗어난 게 아니고 앞으로 어찌 될 운명인지조차 모르는 판이다. '설혹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아빠가 계신 동굴까지 수천길 높이를 무슨 수로 기 어 올라간단 말이냐? 아버지도 지금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으리라. 나를 불러도 내가 없으면 얼마나 당황하실까? 걱정도 이만저만 아니시겠지.' 그녀는 또 슬퍼지기 시작했다. 독수리는 지상에 더욱 접근했다. 푸른 둔덕이 우뚝 솟은 그 곁에 수십길 높이나 됨직한 고목 한 그루가 잎이 무성한 가지를 펼치고 서 있었다. 곧추 뻗은 나무등걸은 우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목탁소리와 종소리가 문득 멎더니 나무줄기 속에서 웬 소사미가 불쑥 나타났다. 그 어린 화상은 고개를 쳐들고선 독수리를 향해 소리쳤다. "불노(佛奴)야, 귀한 손님 모시고 왔니?" 그 소리를 듣고도 독수리는 영경을 움켜쥔 채 여전히 지상으로부터 삼사 장 높이나 되는 공중을 선회할 뿐 내려앉을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지상이 가까와지자, 영경은 벌써부터 금표를 꺼내들고 기회만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수리는 좀처럼 쉽게 내려서지 않을 듯, 끊임없이 허공을 맴돌기만 했다. 그리곤 마지못해 나래 의 돌개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뚝심이 센 영경이었지만 허공중에 매달려 몇 차례 맴을 돌고 나니 하늘도 땅도 빙글빙 글,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어지러워졌다. 아래에 선 소사미가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래도 독수리란 놈은 못 들은 척 맴만 계속 돌고 있었다. 영경은 눈알이 빙글빙글 돌았다. 술에라도 취한 듯 몸뚱이가 무기력해졌다. 꺼억, 꺼억! 마지막으로 한 바퀴를 더 선회한 다음 그놈은 길게 우짖더니 양날개를 덥석 접고선 활시위를 벗 어난 화살처럼 지상으로 곤두박질쳐 내려갔다. 그리고 지상 삼사 척 높이에 이르자 쇠갈퀴 같은 발톱을 냉큼 풀었다. 영경의 몸뚱이가 지면에 닿기도 전에 그놈은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 다. 이때쯤 너무 많이 맴을 돌고 난 영경은 벌써 제정신이 아니었다. 거의 까무라치다시피 고꾸라진 채 심장의 고동만 펄떡펄떡 뛸 뿐 온몸이 저리고 쑤셔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하늘과 땅덩어리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느끼지 않으려고 두 눈을 찔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지친 숨을 몰아쉬면서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만 기다렸다. 한참이 지났다. 귓결에 무슨 소린가 들려왔다. 번쩍 눈을 뜨고 보니, 자기 옆에 웬 소사미가 한 사람 오똑하니 서 있었다. 나이도 자기와 거의 비슷한 또래의 어린 화상이었다. "불노, 이 무례한 녀석! 시주님을 놀라게 해드렸구나!" 소사미가 독수리를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영경은 안간힘을 다해 일어섰다.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리는 걸 억지로 버티고 선 것이다. 그리고 소사미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나는 방금 산꼭대기에서 웬 독수리한테 채여 여기까지 끌려왔어요. 내가 어 떻게 해서 그놈의 발톱을 벗어났는지 사미스님은 알고 계시나요?" 어린 사미승은 합장을 하고 웃었다. "여시주께서 여기 오시게 된 것도 전세의 인연올시다. 한데 그 놈의 불노녀석이 방금 망나니짓 을 한 것은 여시주께서 암기로 자기를 해칠까 봐 그래서였지요. 가뜩이나 놀란 분을 이토록 더 괴롭혀드린 죄, 조금 있다가 그놈을 혼내서 다스리겠습니다. 사부님이 지금 운소(雲巢)에서 기다 리고 계시니 나를 따라오십시오. 그분을 뵈오면 모든 걸 아시게 될 겁니다." 그제서야 영경은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똑똑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이야말로 선령(仙靈)어린 동천복지(洞天福地)가 아니고 어디란 말인가! 사면은 병풍처럼 수려한 산봉우리로 둘러쳐졌고, 하늘 위 반공중에선 한 줄기 폭포가 쏟아져 내 려 수정처럼 맑은 연꽃, 시내를 이루고 있었다. 푸르른 둔덕 곁에는 거대한 녹나무 한 그루가 우 뚝 솟아 있었다. 높이는 몇 장 남짓밖에 안 되지만 줄기의 밑둥만 일장 오육 척 둘레나 되어 보였다. 곁가지는 모두 아래로 처져 일산(日傘)처럼 울창한 그늘을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나무에서 어린 사미 승이 나타났던 것이다. 나무 뒤쪽 산벽에는 등나무줄기와 잎새가 얼크러져 있고, 이름도 모를 푸른 이끼도 숱한 꽃들이 여기저기 활짝 피었다. 바위벽 사이로 은은하게나마 두 글자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는 게 보였 다. <응벽(凝碧)> 아직도 머릿속이 맑아지지 않았으나, 영경은 이곳에서 더 이상 위험스런 일을 당하지는 않으리 라 생각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어린 사미승의 뒤를 따라 고목 앞으로 걸어갔다. 놀랍게도 고 목의 몸통 속은 텅 비어 있었고 그 꼭대기에 덩그라니 띠집 한 채가 엮어져 올려놓인 게 보였다. '이곳 주인은 꽤나 재미있는 분이로군. 나무꼭대기에다 집을 짓고 살다니 말이야.' 그녀는 산벽 바위 곁에 거의 다 가서야 거기 새겨진 <응벽> 두 글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미현 객점에서 눈썹이 하얀 노승이 쪽지로 남기고 간 글귀를 연상했다. 영경은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어린 사미승의 옷 소매를 잡고 물었다. "그럼 여기가 바로 응벽애란 말이에요?" 어린 화상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응벽애가 여기지요. 저희 사부님께서는 혹시 여시주의 아버님이 여기를 찾지 못하시지나 않을까 염려하시고, 불노(佛奴)란 녀석더러 모셔오도록 분부를 내리셨는데, 이 멍청한 녀석, 어찌 된 셈인지 여시주를 모셔왔군요. 자, 가시지요. 사부님을 뵈오면 다시 무슨 말씀이 계 실 것입니다." 소사미의 말을 듣자, 영경은 슬픔과 기쁨이 뒤범벅으로 섞여버렸다. 하늘은 끝내 아버지의 정성 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그렇게나 애타게 찾아다니던 응벽애의 소재를 알려준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병상에 누운 아버지는 이 기쁜 사실도 까마득히 모르고 행방이 묘연한 딸 때문에 태산 같은 걱정만 하고 계실 것을 생각하니 서글픔만 앞섰다. 그러나 슬퍼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방법은 오직 하나, 사미의 사부라는 화상을 만나서 의논하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는 것이었다. "나무아미타불!" 고목의 밑둥 입구로 발을 들이미는 순간, 문득 귀에 익은 불호(佛號)가 들려왔다. 이어서 눈앞에 무엇인가 번뜩이더니, 어느 새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영경은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아, 바로 그분이다!' 바로 아미현 성내 저자거리를 걷다가 마주쳤던 그 화상, 눈썹이 하얗게 센 고승이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영경은 황망히 그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렸다. 뺨에는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박명한 소녀 이영경 아룁니다. 아비의 병환이 깊어 지금 사경(死境)을 헤매고 계십니다. 오늘 잘못하여 천만길 깊은 계곡으로 떨어진 이 몸, 다시 올라가 늙은 아비를 모실 방법이 없사옵니다. 선사님께 간절히 바라옵건대 부디 자비를 베푸시와 불법(佛法)으로 절 이끌어 올리시고 제자의 아비를 구해 주소서!" 그녀는 목이 메도록 애통해하며 간구했다. 이윽고 화상의 말문이 열렸다. "네 아비는 애초부터 노승과 인연을 맺어 불문(佛門)에 들 인물이었다. 그를 제도(濟渡)할 뜻에 서 믿음이 깊은가 시험하기 위해 응벽애의 이름만 남겨 두었던 것이다. 과연 네 아비는 일심전력 귀의(歸依)할 뜻을 지니고 변함없이 참된 정성을 보였다. 그래서 오늘에야 불노에게 명을 내려 동 굴로 가서 인도해 오도록 한 것이다. 그 날짐승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오랜 해를 두고 불가(佛家) 의 경문을 익혔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영성(靈性)을 깊이 통달한 녀석이다. 네가 아비의 병을 고 치려고 살을 베려 했을 때 그놈은 너의 지나친 효행을 보고서 칼을 빼앗아 던졌다. 물론 너야 웬 날짐승이 장난질을 치는 줄 알았겠지. 그래서 암기로 그 녀석을 해치려 들었을 게다. 그놈의 야성 (野性)은 아직껏 완전히 길들여진 것이 아니란다. 너는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그놈은 그놈 나름 의 방법대로 너하고 정말 장난을 치고 싶어진 것이다. 그 녀석의 양날개가 한번 바람을 일으키면 일천 근의 힘도 훨씬 넘는다. 한데 너를 슬쩍 놀려본다는 것이 지나쳤던 것이다. 며칠밤을 꼬박 새우고 허약해진 네 힘을 잘못 어림잡은 탓이지. 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니까, 그놈은 별수없이 너를 이곳까지 데려와서 나를 만나게 한 것이다. 이 모두 그놈의 입으로 내게 전한 말이었다... 이 제 알겠느냐? 그리고 네 아비의 병은 추위와 찬바람을 맞고 생긴 것이니까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주는 단약을 가져다 먹이면 이내 완쾌될 것이다. 병이 다 나으면 내 또다시 불노란 놈을 보내서 네 아비가 이곳에 내려오도록 하마. 그리고 정과(正果)를 얻게 하면 될 테니까 말이 다." 영경은 비로소 그 독수리가 응벽애의 노선사가 기르는 날짐승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버 지의 병도 별 걱정없이 나으리란 말을 듣고서 뛸 듯이 기뻤다. 일만 근심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 린 것이다. 노선사는 자기에게 단약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절벽 위까지 올라갈 방법 도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아미현 성내 객점에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과연 틀림이 없었다. 자애로운 미소로 자기를 맞이 한 눈앞의 이 노선사야말로 선불(仙佛)의 으뜸이 아닌가! 그녀의 심중에는 또다른 속셈이 불쑥 움 텄다. 생각이 떠오르자 그 즉시 머리를 조아리고 재차 간청을 올렸다. "제자와 아비는 서로 의지하며 목숨을 이어 왔사옵니다. 이제 아비는 사조님의 이끄심을 받아 정과에 들게 되셨으매, 실로 만생(萬生)의 행운을 얻으셨습니다만, 아비가 사조님을 따라 출가하 신 후 어린 이 몸 하나만 외롭고 쓸쓸하게 버려질 터이온즉, 이 불쌍한 제자는 어찌하면 좋으리 까? 바라건대 사조께옵서 자비를 베푸시와 이 어린 제자마저 아비와 함께 정과에 들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그러자 노승은 껄껄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말이야 그렇다만, 어디 그리 쉬운 줄 아느냐? 불가의 문이 비록 너르다고는 해도 인연 없는 사람은 제도(濟渡)시키기 어렵단다. 하물며 나는 이 날 이 때까지 여자를 제자로 둔 적이 없다. 너 역시 근행(根行)과 천품이 두루 심후하니 언젠가는 따로 선연(仙緣)이 맺어질 것이다. 내가 전 에 쪽지로 남긴 게어(偈語)를 보았을 게다. '헤어짐이 있어야 다시 만남이 있다' 한 그 말, 훗날에 반드시 증험이 있으리라. 이 노승을 붙잡고 말해 봐야 너한테는 혀만 수고로울 뿐이다. 어서 일어 나서 돌아갈 채비나 차리거라!" 노승은 엄한 말씨로 거절했다. 영경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간곡하게 원해도 들어줄 성싶지 않거니와 또 지금 쯤 절벽 위 동굴 속에서 신음하고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어서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사조님의 범호는 어찌 되시온지?" "노승을 백미화상(白眉和尙)이라고들 부르지. 또 이곳 응벽애는 바로 <칠십이 동천복지> 가운데 하나란다. 사시사철 봄만 있고 그윽하고도 조용해서 노승이 정양(靜養)하는 장소로 쓰고 있지. 네 가 저 위까지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불노란 녀석의 힘을 좀 빌어야겠구나. 그놈이라면 널 업어다 줄 것이다. 새 등에 탄다고 해서 두려울 것은 없다. 저놈은 날 따라다니는 동안 제법 재간을 익혔 거든. 하하하!" 곁에 시립하고 있던 소사미가 스승의 말을 듣고 눈치 빠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는 봉황 새의 울음과도 같이 길고도 맑게 퍼졌다. 그러자 잠시 후 짙푸른 벽공(碧空)에 검은 점 하나가 아 련히 나타나더니 차츰 원모습을 드러내며 지상으로 날아내렸다. 바로 금빛 눈을 가진 독수리였다. 그놈은 입에 금표 한 개와 노전(弩箭) 석 자루를 한꺼번에 물 고 양쪽 쇠발톱으로는 패도(佩刀)한 자루, 장검 한 자루를 각각 움켜쥐고 있었다. 모두 영경이 그 놈을 공격하다가 잃어버린 병기였다. 독수리는 물고 쥐고 있던 쇠붙이들을 내려놓더니 꾸우, 쿠르르! 하고 영경을 향해 우짖었다. 땅 에 내려선 그 날짐승의 몸집은 영경의 키보다도 높았다. 두 눈에 금빛 광채가 감돌고 전신은 온 통 흑광(黑光)의 윤기로 반지르르한 것이 자못 비범하고도 날쌘 탯거리를 지닌 날짐승이었다. 이때에서야 영경은 도저히 적수가 아닌 그 새를 요모조모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자기를 공 격했던 흉기들을 샅샅이 찾아내 가지고 돌아온 그 영리함에 새삼 놀라움과 찬탄을 금치 못했다. 새는 뒤뚱걸음으로 백미화상 앞에 걸어가서 쭈그려 앉더니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백미화상이 사람의 말로 가볍게 꾸짖고 분부를 내렸다. "네 이 녀석! 뻔히 이 소저가 효녀인 줄 알면서도 어쩌자고 그토록 놀라게 만들었느냐? 어서 이 분을 얌전히 모시고 돌아가 지은 죄를 용서받아라. 훗날 네놈에게 큰 겁난(劫難)이 닥칠 터인데, 그때 이분께서 수수방관, 모른 척하면 어쩔 셈이냐?" 독수리는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나서 다시 뒤뚱거리며 영경 앞으로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백미화상이 소맷자락에서 단약 세 알을 꺼내가지고 영경에게 주었다. "이 약은 내가 아미산 일대를 찾아다니며 채집한 영초(靈草)로 만든 것이다. 한 알이면 네 아비 의 병을 고칠 수가 있다. 나머지 두 알은 네 효성이 지극해서 주는 것이니, 몸에 꼭 지니고 다니 거라. 훗날 너한테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지금 무림천하는 정(正), 사(邪)를 막론하고 어느 문파 의 검선이든 저마다 유능한 인재를 문하로 끌어들이려 온갖 힘을 다 쏟고 있다. 너처럼 훌륭한 재목이라면 머지않아 찾아올 사람도 많을 것이니 안심하고 어서 돌아가거라!" "예, 말씀대로 하오리다." 영경이 응답을 하고 고개 숙여 사례를 올리려는데 백미화상은 삽시간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 렸다. 그녀는 고목 위의 띠집을 향해 무릎 꿇고 이마를 조아렸다. "여시주님, 어서 그 칼들을 챙기고 올라타시지요." 어린 사미승이 새끼줄을 가져다 독수리의 목덜미에 잡아 걸고서 영경을 재촉했다. 영경은 기꺼워하며 그 즉시 어린 사미승한테 작별인사를 하고서 독수리 등에 올라탔다. 이번만 큼은 올 때와 경우가 달랐다. 심술궂은 독수리의 정체도 알았고 백미화상의 법력까지 깊이 믿는 터였다. 아버지도 약을 먹은 후면 병이 완쾌되고 정과에 들게 되리라는 약조도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 가고만 싶었다. 어서 아버지한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했다. 그녀는 한 손에 새끼줄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또 한 손으로는 날짐승의 날갯죽지를 부여안았다. 푸드득! 독수리가 활개짓을 했다. 영경의 몸이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날짐승은 파공성을 일으 키며 창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영경은 몸과 함께 마음도 들떴다. 희희낙락, 즐거움에 겨워 발 밑 아래쪽 응벽애를 굽어보았다. 그 거대한 고목이 냉이 포기만큼 작아지고 나무 곁의 사람도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꾸우, 푸르르! 문득 날짐승이 고개를 돌려 영경을 향해 두어 번 우짖고선 허공에 머물렀다. 황급히 좌우 상하 를 둘러보며, 머리 위쪽으로 절벽이 펀펀하게 돌출하여 올라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바위 벽에는 둘레가 몇 자 남짓한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영경은 그제야 날짐승이 우짖는 뜻을 알아챘다. 이놈은 그 동굴로 뚫고 들어가기 전에 자기한테 조심하라는 경고를 말한 것이었 다. 그녀는 즉시 두 손을 앞쪽으로 뻗어 새의 양 날갯죽지를 단단히 부여안았다. 그리고 두 다리로 그놈의 앞가슴을 바짝 조였다. 그제서야 독수리는 날개를 접고 머리를 위로 향한 채 어두운 동굴 속으로 뚫고 올라갔다. 그것은 수직상승이었다. 아까 내려올 때는 밑바닥이 안 보이더니 이번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동굴에서 벗어나자 망망한 구름바다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온통 흰구름만 솜덩이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을 뿐 도무지 방향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독수 리는 구름바다 속에 길이 보이는 것처럼 익숙한 날개짓으로 구름층을 한 겹 한 겹씩 뚫고 올랐 다. 위험한 곳에 맞닥뜨리면 고개를 돌리고 아까처럼 미리 조심하도록 꾸욱, 쿠르르! 경고를 발했다. 제 목숨만큼이나 영경을 아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 또한 날짐승의 등과 목덜미를 자꾸만 쓰다듬어 주었다. 강철처럼 억세면서도 기름칠이나 한 듯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이 깃털 속에 얼마나 무한한 힘이 잠겨 있단 말인가!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언어조차 또 알아듣는 그 신통력을 어디서 받았는가! 이제 영경은 날짐승이 사랑스 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그녀는 점차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새 움푹 패인 암벽에는 적설(積 雪)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벼랑 위까지 거리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과연 얼마 후 독수리는 벼랑 위를 스치듯 솟구쳐 오르더니 허공에서 한 바퀴 빙그르 선회한 다 음 곧바로 영경의 동굴가에 내려앉았다. 때는 이미 해가 서산에 걸린 저녁 무렵이 되었다. 독수리 등에서 내려선 영경은 아버지의 병세 도 궁금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가 이대로 훌훌 날아가 버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사람한테 말하듯 독수리에게 부탁했다. "금안사형(金眼師兄), 날 데리고 조사님을 뵙게 하여 아버지의 병환이 낫도록 도와주신 것 정말 고맙기가 이를 데 없네요. 이대로 떠나지 말고 나를 따라 우리 아빠 좀 만나보지 않겠어요?" 과연 독수리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알았다. 목덜미에 비끌어 맨 새끼줄을 그녀가 끄는 대로 성큼성큼 따라 들어가더니 날개짓 한 번 아니하고 얌전하게 이령의 침상 곁에 쭈그려 앉았다. 이령은 아직도 열이 내리지 않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영경이 반나절 동 안 어디로 가서 위험을 겪고 왔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영경은 칼과 암기들을 풀어놓고서 침상에 다가갔다. "아빠!"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두어 번 불렀으나 아버지는 응답이 없었다. 서둘러서 등잔불을 밝히고 부 엌으로 가보니 아궁이의 불도 꺼졌고 솥 안의 물도 싸느랗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장작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끓는 동안에도 그녀는 혹여나 독 수리가 떠나버릴까 봐 눈치를 살피며 말을 붙이곤 했다. 다행히도 그놈은 동굴에 들어선 이래 줄곧 영경이 부엌으로 가면 그리로, 석실의 아버지 침상으 로 가면 또 그리로 뒤뚱뒤뚱 따라다니며 쭈그려 앉는 것이었다. 기쁨과 근심, 슬픔이 엇갈려 무엇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모르고 안절부절 속을 끓이던 그녀는 한참만에 물이 끓자 남은 밥을 풀어 불에 얹어놓고서 더운물 한 사발을 떠가지고 이령에게로 왔 다. 아버지를 흔들어서 깨우고 나자 백미화상이 준 영단을 물에 개어가지고 마시게 했다. 그런 다음 독수리의 목덜미에 찰싹 달라붙듯 끌어안은 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침상 위의 병 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얼마 안 지나서 이령이 문득 큰소리로 딸을 불렀다. "영아, 뭐 먹을 것 좀 없냐? 배가 몹시 고프구나!" 영경은 뛸 듯이 기뻤다. 과연 영약이 절묘한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그녀는 댓바람에 깡총깡총 부엌으로 달려갔다. 물에 말아 끓인 밥도 어느 새 뜨끈뜨끈한 죽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신이 나서 죽사발을 들고 뛰어나왔다. 독수리란 놈도 그녀를 총내내듯 껑충껑충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뒤뚱걸음으로 쫓아나왔다. 이령은 영단을 삼킨 후, 이제 정신이 맑게 깨어났다. 뱃속에서는 꾸르륵, 꾸르륵! 소리가 나며 시 장기가 몹시 들었다. 영경더러 먹을 걸 달래서 가지러 보냈는데 이건 또 뭐냐! 난데없이 침상 곁 에 검은 그림자가 번뜩하더니 딸애의 뒤를 좇아서 부엌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기급을 하고 놀란 이령이 등불빛에 다시 보니 뾰족한 주둥이에 금빛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괴물이었다. '위험하다!' 마음이 다급해지자 전신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그는 자기가 병든 몸이란 것도 잊었다. 머리맡을 더듬어 보검을 찾았으나 빈 칼집만 손에 잡혔다. 칼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급한 김에 칼집만 들고서 쏜살같이 부엌으로 쫓아가 이제 막 되돌아 나오는 괴물을 후려쳤다. 딱! 힘을 너무 세게 가하느라고 빈 칼집은 노렸던 목표물을 벗어나 애꿎은 돌의자 한 개만 두 조각 으로 쪼개내고서 깔집마저 부서져 버렸다. 꽈아, 꽈악! 괴물은 두어 번 껑충껑충 뛰면서 우짖었으나 어쩐 셈인지 도망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령은 여간 다급한 게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빈손으로 괴물과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앗, 아빠, 안 돼요!" 음식 쟁반을 들고 나오던 영경이 기절초풍했다. 아버지의 태도로 보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 번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는 석탁(石卓)에 그릇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먼저 아버지의 두 손부터 붙 들었다. "아빠, 오해하지 마세요. 이 새는 응벽애 백미조사께서 기르시는 거예요. 방금 절 태우고 온 것 도 이 신조(神鳥)란 말이에요. 아빠, 몸도 편찮고 아직 움직이실 때도 아닌데 힘쓰지 말고 누우세 요. 우선 진지를 드시면서 제가 자세한 말씀을 드릴 테니까, 들어보면 아실 거예요." 그제서야 이령도 괴물이 금빛 눈망울을 가진 독수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딸의 말을 듣고서 그는 속으로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먹는 일도 잊고 곧바로 영경에게 재촉부터 했다. "그래, 어서 말 좀 해보렴!" 영경은 아버지를 침상에 앉히고 차분하게 음식을 떠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늘 겪었던 그 놀라운 경험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령은 먹으면서 들으면서 뜻밖의 엄청난 사실에 접하자, 이제껏 품어왔던 절망과 실의 속에서 새로운 기쁨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실망이 극도에 달한 만큼, 그 기쁨도 극도에 달하는 법이 다. 영경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몸과 마음의 재앙을 속시원하게 깨끗이 씻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딸이 끓여다 주는 죽을 솥 밑바닥이 천정을 향할 정도로 들고 마셔버렸다. 딸의 말이 끝나자, 이령은 더 묻지도 않고 선뜻 침상에서 내려서더니 독수리 앞으로 가서 허리 를 구부렸다. "은혜 막중한 손님이 오셨는데 이 어리석은 자가 눈 멀고 무지했소이다. 아무쪼록 사형은 너르 신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고 성질일랑 부리지 마시오." 독수리도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이령은 다시 어린 딸을 품안에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영아, 못난 아비 때문에 널 고생시켰구나!" "아빠, 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너무 가슴 아파하시지 마셔요." 영경은 소리내어 우는 아버지를 위로했다. 아버지에게 불의의 공격을 당한 독수리가 성이 나면 어쩌나 해서 가슴이 조마조마하던 참인데 아버지가 미물인 짐승한테까지 솔직히 사과하고 또 독 수리마저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여간 기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아버지 품에서 살포시 벗어나 그를 침상에 다시 앉혔다. 이제 갓 병환이 나은 터에 너무 격동하면 안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이령은 깊이 숨 한 모금을 들여마시고서 홀가분해진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영단을 삼키고 보니 금방 한열(寒熱)도 모두 가시고 속이 시원한 게 아주 상쾌하구나. 봐 라, 내 지금 얼마나 돼지처럼 많이 먹더냐? 정신이 번쩍나는구나. 어디 병자 같아 보이느냐?"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야 영경은 문득 자기도 뱃속이 텅 비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귀한 손님까 지도 왔는데 환자 시중드느라고 대접할 것마저 까많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야 어디 손님한테 인사치레가 되나?' 그녀는 다시 부엌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갈무리해 두었던 별식을 몇 가지 꺼냈다. 그것은 자기가 산을 뒤져서 잡아다가 소금에 절여놓고 아껴서 먹던 들짐승 고기였다. 그것을 정성들여 칼로 잘 게잘게 썰어서 한 접시 그득 담아 가지고 나와 독수리 앞에 내려놓았다. 꾸우, 꾸르르! 영경이 목에 걸어맨 새끼줄을 끌러주자 독수리는 고마움이라도 표하듯이 두어 번 우짖더니 이내 고기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영경도 되는 대로 밥과 찬을 가져다 놓고서 아버지 곁에 기대앉아 주린 배를 채웠다. 눈으로는 연신 독수리를 바라보면서, 밥 한 술에 잔소리를 조잘조잘 한 마디씩 섞어가며 때늦은 저녁을 먹 는 것이었다. 이제 석실 안은 천륜(天倫)의 화목스런 즐거움으로 가득찼다. 실로 고진감래(苦盡甘來)라더니, 며 칠을 두고 짓누르던 우울과 수심의 먹구름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이령은 독수리가 떠날 생각도 않는 걸 보았다. 자기에게 백미화상을 보러 가자는 무언의 요구임 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스런 딸을 혼자 남겨놓고 멀리 떠날 것을 생각하니 차마 영경에게 입을 열어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봐도 진퇴양난, 훌쩍 떠나지도 머무를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마침내 그의 입에선 깊은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영경은 또 얼마나 총명스런 아가씨인가? 탄식소리를 듣자마자 아버지의 깊은 마음 속을 꿰뚫어 보았다. "아빠, 병환도 이제 다 나으셨는데 또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셔요? 어째서 한숨을 쉬셔요?" 그러자 이령은 얼른 도리질을 하면서 시침을 뗐다. "아무 근심도 없다. 네가 너무 예민해졌구나. 허허, 공연한 의심을 해서야 어디 쓰겠니?" "아빠는 날 또 속이시려구? 백미사조님의 독수리가 떠나지 않는 걸 보시고 아빠와 저하고 헤어 져야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감추고 계신 거예요. 절 버리지도 못하고 모처럼의 선연(仙緣)을 어 기자니 그도 어렵고, 진퇴양난이라 그 말씀이죠." 딸의 매서운 추궁을 받고서 이령은 고개만 떨군 채 묵묵히 신음만 터뜨릴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영경은 도리어 측은해졌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빠, 그러실 것 없어요. 마음 놓으세요. 아까 응벽애에 내려갔을 때 저도 함께 이끌어 주십사 고 백미조사님에게 무릎 꿇고 간청을 드렸어요. 그때 사조님의 말씀이 '너는 불문(佛門)에 들어올 사람도 아니고 여제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 하시면서 머지않아 저에게도 인연이 닿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오늘 이후 아빠는 응벽애에서 참수(參修)를 하시겠지만, 여기 금안사형이 도와준다면 천만길 깊은 계곡이라도 왕래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저도 나이가 어리나 하루바삐 검선을 사부 님으로 모시고 남보다 뛰어난 무공을 연마하여 출입공몽(出入空蒙), 비행절적(飛行絶跡)의 경지에 들고야 말겠어요. 백미사조님께서 남기신 게언(偈言)대로라면 '먼저 헤어짐이 있어야 다시 만남이 있다' 하셨으니 훗날 저와 아빠가 다시 상봉할 것은 정한 이치 아닌가요? 그런데 무슨 걱정을 하 신단 말씀입니까?... 사실 아빠한테 숨김없이 말씀드리자면, 저도 이전에는 아빠가 '언제까지나 제 곁을 떠나시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어요. 그러나 응벽애에서 백미사조님을 뵈온 후로부터 '어서 하루라도 빨리 아빠가 도를 이루시고 이 딸을 이끌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어요... 아 빠, 계곡에 내려가셔서 사조님을 뵈옵거든 이 어린 딸년이 심산궁곡에서 홀로 외롭게 사는 고통 을 말씀드리고 이 금안사형을 보내주셔서 제게 선연이 닿을 때까지 벗삼아 수련하도록 간청해 주 세요. 그럼 아빠도 제 걱정을 안하셔도 될 테니까, 서로 좋은 일 아니겠어요?" 독수리야, 독수리야 隻影感蒼茫 寂寂寒山欣逢佳侶 孺心傷離別 漫漫前路喜得神鳥 이령은 딸애가 연주포(連珠砲) 쏘아대듯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을 다 쏟아낼 때까지 묵묵히 들 어주었다. 영경의 말이야 구구절절 맞기는 했다. 딸이 품은 소원 모두가 아버지인 자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이령은 차마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애처로운 눈길로 딸의 얼굴만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두 마디 위로를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절인 고기 한 접시를 모두 먹어치우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이령 부녀간의 입 씨름을 듣는 듯하던 독수리가 이윽고 영경의 설명이 끝나자 느닷없이 꽈악, 꽈악! 우짖었다. 영경은 새가 목말라 그러는가 보다 싶어 물을 뜨려고 부엌으로 갔다. 한데, 독수리란 놈은 이령 부녀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 하더니 성큼 바람막이 앞으로 뛰어가서 병풍을 쪼아 열어젖히고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부녀는 황급히 뒤쫓아 갔다. 독수리는 어느 새 동굴 바깥층 입구에 서서 입구를 봉쇄한 바윗덩어리를 머리통으로 받아쳐서 열고 있었다. "금안사형! 왜 그래?" 영경이 소리쳐 불렀으나 독수리는 이미 바윗덩어리를 굴려내고 뒤뚱뒤뚱 바깥으로 걸어나가더니 푸드득! 활개를 치면서 창공으로 솟구쳐 날았다. 다급해진 영경은 동굴 밖까지 뛰쳐나갔다. "금안사형, 돌아와! 어딜 가는 거야? 어서 내려오라구!" 입이 닳도록 연거푸 애타게 불렀지만 그녀의 머리 위에서 맴돌던 독수리는 꽈악, 꽈악! 두어 차 례 우짖고는 싸늘한 눈밭에 그림자를 남기면서 곧바로 만장(萬丈) 깊숙한 계곡으로 떨어져 내려 가 버렸다. 미친 듯이 소리쳐 부르던 영경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독수리는 무정하게도 이미 멀리 날아가 버린 것이다. 좋은 벗을 눈 깜짝할 사이에 놓쳤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의기소침해진 그 녀는 고개를 푹 떨구고 아버지를 따라 석실로 되돌아 왔다. 이령은 속이 상해 잔뜩 부어오른 딸을 좋은 말로 달랬다. 그리고 조금 전 그녀가 지껄인 말에 대해서도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좀전에 네가 한 말은 말로써 끝날 일이지 실제로 될 것은 아니다. 그 독수리를 보아라. 네가 사 조님께 부탁해서 짝이 되게 해 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날아가 버리지 않더냐? 그 날짐승은 여기에 있기 싫은 것이다. 아무래도 내 생각은 이렇다. 언젠가는 저 새가 날 데리러 오겠지. 그럼 나는 응벽애로 내려가 백미화상님을 뵙고 너한테 실력 있는 여승 한 분을 스승으로 소개해 달라 고 간청하겠다. 그게 오히려 현실에 가까운 이치가 아니겠니? 그분께서 네게 머지않아 따로 선연 을 만나게 되리라고 말씀을 하셨다만 이번에 나더러 당신을 찾아오라는 그 막연한 말씀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느냐 말이다. 아마도 너한테 하신 그 말씀도 쉽사리 이루어질 일이 아닌 듯싶 구나!" 영경은 몸만 숙성했지 마음은 아직 철이 덜 든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이제 하루 이 틀 안에 속세를 떠나 출가하실 테고, 자기도 비록 선연을 만나서 합쳐질 것이라지만 도대체 며칠 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녀는 아까 이 생각 저 궁리 끝에 숙부 주순의 딸 주경운을 기억 속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경운은 지금 황산(黃山) 찬하대사(餐霞大師)가 계신 곳에서 검술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이제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이지만 기왕에 검선의 문하 제자라면 나와도 의기가 투합될 거야. 게다 가 아버지끼리는 전부터 의형제를 맺어 세교(世交)를 나누는 처지가 아닌가? 만약 검정독수리란 놈을 잘 길들일 수만 있다면 그놈을 타고 황산까지 가서 주경운과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그 녀의 소개를 받아서 찬하대사도 뵙게 되겠지! 주숙부의 말씀을 따라 찾아왔다고 말씀드린 다음, 나도 정성을 다해 간청한단 말이야. 그럼 찬하대사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쯤이야 식은죽 먹기지 뭐. 절대로 안 될 리가 없어... 일단 그분의 제자가 되어서 검술을 상승경지까지 연마하고 난 후라 면 자유자재로 허공을 누빌 수 있게 되고 아무리 산천강하(山川江河)가 멀다 하더라도 아빠를 못 볼 염려는 없는 것이 아니냐?' 영경은 그럴 속셈에서 아버지와의 이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병환이 나 아 응벽애로 내려보내 독수리를 자기한테 빌어달라고 대신 부탁해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 일이란 역시 아버지 말씀대로 그리 쉬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독수리란 놈은 뜻밖에도 명백히 거절의 뜻을 보이고 훌쩍 날아가 버리지 않았는가 말이 다. 영경은 아버지가 행여 자기 속셈을 꿰뚫어 볼까 해서 겉으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스 런 표정을 지었지만 모처럼의 계획이 깨진 판이라 마음 속으로는 견딜 수 없이 서럽고 원통해서 자칫하면 눈물이 펑펑 쏟아질 지경이었다. 이령이 백미화상에게 간청을 드려 훌륭한 여승을 사부 로 모시게 해주마고 말했을 때야 비로소 서글픈 웃음을 지었을 따름이었다. 아버지와 딸은 헤어진 후의 생활계획에 대해 다시 의논을 했다. 그러나 딸을 내버리다시피 두고 떠나는 아버지의 심정도 칼로 에이는 듯 괴롭고 아프고, 딸 역시 아버지와 생이별하는 두려움과 슬픔은 물론이려니와 독수리를 잃은 허망함까지 겹쳐 그저 막막하기만 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 으면서 도무지 시원한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다. 이래도 마땅치 않고 저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겨울밤이 깊도록 두 사람은 어느 것 하나 흡족하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령은 지쳤다. 아무리 궁리를 거듭해 봐도 딸은 이 황막한 심산궁곡에서 홀몸으로 살아가야 하 는 것이다.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려고 해봐도 오십 보 백 보, 마찬가지다. 결국 그는 딸을 재촉해서 잠자리에 들게 했다. 심란할 대로 심란한 영경은 아버지의 재촉을 받고서 침상에 눕긴 했으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또록또록 굴려가며 제나름대로 별 궁리를 다 꾸미느라 한밤을 꼬박 지새우고 말았다. 동틀 무렵 겨우 눈을 붙였으나 꿈속에서 독수리의 우짖는 소리를 듣고는 벌떡 깨어났다. 몽유병 (夢遊病)에라도 걸린 듯, 서둘러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찬바람 에이는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오직 보이는 것이라곤 은빛 눈세상, 희뿌옇게 비쳐오는 아침 햇살을 받고서 바위 모서리 에 매달린 고드름만 영롱하게 오색 광채를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벼랑 끝에 서서 만장 계곡을 굽어보았다. 증기(蒸氣)처럼 새하얀 구름이 자욱하게 끼어 있고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결에 눈가루만 뽀얗게 흩날렸다. 그녀의 시선은 독수리가 사라진 구름 속을 헤매었다. 이령이 뒤따라 나왔다. 평소에도 딸보다 먼저 새벽에 일어나서 내공을 수련하는 것이 습관이었 는데, 오늘따라 딸이 먼저 나가는 걸 발견하고 놀라서 황급히 쫓아나왔던 것이다. "아빠, 여기예요!" 영경은 이령을 손짓해 불렀다. 그리고 어제 독수리와 싸우던 장소를 가리켜 가며 자기가 겪었던 모험담을 다시 한 번 실감나게 설명해 주었다. 딸이 손가락질해 가리키는 곳을 하나 하나 바라보면서 이령은 눈알이 빙빙 돌 정도로 현기증을 일으켰다. 심장도 마구 뛰고 살이 떨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딸의 자그만 몸뚱이를 와락 끌어안 고서 오열을 터뜨렸다. 이령과 영경 부녀는 시간 가는 줄도 잊은 채 하염없이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어느덧 아침해도 동쪽 산 위로 둥실 떠올랐다. 날씨도 쾌청했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햇살이 동굴 주변 은빛 천지를 화사하게 비추었다. 우르르! 두 사람은 문득 발밑 땅덩이가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어서 천지개벽을 하는 듯한 소리가 귀청을 때리더니 맞은편 산머리에 쌓였던 눈더미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눈사태를 일으킨 것 이다. 엄청난 양의 눈이 폭포처럼 갈래갈래 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음덩이를 짓부수고 키 작은 관목(灌木)과 모래 자갈을 휩쓸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계곡의 주름을 타고서 곧장 쏟아져 내린 눈은 응달진 계곡 아래에서 세찬 한풍(寒風)과 맞부딪치면서 사면팔방 너른 둔덕으로 흩어 지며 빙원(氷原)을 겹겹이 뒤덮었다. 한참 넋을 잃고 설경(雪景)을 바라보던 이령이 문득 벼랑 아래 쪽으로부터 구름을 몰고 솟구치 는 검정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빠른 화살처럼 곧바로 두 사람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대경 실색을 한 이령이 황급하게 딸을 등뒤로 끌어당겨 감추었다. 자세히 눈여겨 볼 틈도 없이 그림자 는 어느 새 절벽 모서리 위쪽으로 날아 올라왔다. 그것은 바로 금빛 눈의 신조(神鳥), 영경으로 하여금 그토록 애타게 했던 독수리였다. 영경은 두 팔을 마구 휘저으며 반가움에 겨워 소리쳤다. "금안사형, 빨리 내려와!" 고함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허둥지둥 동굴 속으로 들어가더니 절인 고기를 듬 뿍 썰어가지고 나왔다. 지상에 내려앉은 독수리는 곧장 이령 앞으로 뒤뚱거리며 다가가더니 '꾸우, 꾸르르!' 두어 차례 우짖고 나서 눈덮인 바닥에 쇠부리로 무엇인가 획을 그었다. 이령은 당장 그 글자를 알아보았다. <갑시다(行)> 마침내 백미화상이 자기를 부른 것이다. 그는 독수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무릎 꿇고 하늘을 우러러 묵도를 올렸다. 그리고 일어나서 다시 독수리를 향해 부탁했다. "내 어린 딸에게 몇 마디 당부할 게 있소. 잠시 함께 동굴에 들어가 기다려 주시려오?" 독수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령의 뒤를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영경이 가득 썰어 내온 고기 접시를 앞에 놓고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맛있게 쪼아먹기 시작했다. '이제는 딸과 헤어져야 한다.' 이령은 쓰라린 가슴을 억누르고 영경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신조(神鳥)가 백미사조님의 명을 받들고 날 데려가려고 왔구나. 이토록 보잘것 없는 아비를 사 조께서 은혜로 대하시는데 내 어찌 감히 마다 하겠느냐? 그러나 어리고 연약한 네가 이 황막한 무주공산(無主空山)에 홀로 남아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실로 마음이 놓이질 않는구나. 나 떠난 뒤 엘랑 아무쪼록 이 산머리에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거라. 동굴에서 멀리 나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나 또한 틈이 나는 대로 사조님께 간청을 드려 하루라도 속히 네가 스승을 만날 수 있도록 애써 보마. 양식과 기름, 소금은 반 년 남짓 쓸 만큼 사다놓았다. 양이 큰 아빠가 떠나고 나면 너 혼자 서 일 년은 넉넉히 먹고 살 수 있을 게다. 아미산을 떠난 네 주숙부는 평생토록 올바른 마음으로 충직하게 사신 분이다. 그런 분이 원수에게 암살을 당하실 리는 만무하다. 그분이 언제 돌아올지 는 모르지만, 나와 맺은 생사지교(生死之交)를 생각해서라도 우리 부녀의 기대에 어긋날 일은 아 니할 것이다. 만약 주숙부가 돌아오거든 널 황산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드리거라. 그곳에 가서 언니쯤 되는 경운을 찾아 네가 찬하대사님의 문하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만약 내가 사조 님의 허락을 받을 수만 있다면 한 달에 한 번씩이나마 독수리를 타고 와서 널 만나게 될지도 모 른다. 부디 몸조심하고 아침저녁 추위 더위에 상하지 않도록 해라. 그래야만 나도 마음놓고 수련 에 정진할 수 있은 게다." 범 같은 사나이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간곡한 당부를 들으면서 영경은 대꾸할 말을 잊었다. 마음 속이 온통 헝클어져 도무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독수리가 두 번째로 날아들었을 때는 이것 저 것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아버지와 머지않아 이별해야 한다는 것은 벌써부터 각오해 왔던 일이다. 하지만 이토록 빨리 떠 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영경이었다. 아버지를 붙잡자니 천재일우의 선연을 놓칠 게 분 명하고, 그대로 떠나시게 하자니 홀로 남는 자기는 또 어찌 되는가? 그녀의 생각은 가슴 속에서 온갖 상념만 들끓을 뿐, 입 밖으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푸짐한 식사를 마치고 나자 독수리는 '꾸우, 꾸르르, 꾸르르!' 연거푸 우짖었다. 이령더러 어차피 갈 길이니까 어서 떠나자고 재촉하는 뜻인 모양이었다. 이령 또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탁자 앞에 걸터 앉아 총총히 붓을 잡아 기나긴 편지를 썼다. 주순에게 남기는 사연이었다. 자기네 부녀가 어찌해 서 헤어지게 되었으며 영경 홀로 동굴에 남아서 살게 되었는지 자초지종 그 경위를 적은 것이다. 한데 영경은 독수리의 우짖는 소리를 듣고서 무슨 꾀가 났는지 후딱 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서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금안사형, 아빠가 이 길로 떠나시면 언제나 돌아오실지 모르잖아요? 이젠 나 혼자 여기 남아서 의지할 데도 없이 외롭게 쓸쓸하게 지내야 해요. 그게 불쌍하지도 않아? 금안사형, 제발 부탁이니 자비심 좀 발휘해서 사조님께 말씀드리고 내 벗이 되어 줘요. 내가 이렇게 빌게요. 후에 나한테도 사부님이 생긴다니까, 그때 가서 사조님께 돌아가셔도 되잖아. 그래 그때는 금안사형이 안 간대도 꼭 보내줄게. 어때요?" 그 말을 듣더니 독수리는 고개를 갸우뚱 외로 꼬고선 부리부리한 금빛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 다가 문득 길게 우짖었다. 영경이 날짐승의 심사를 어찌 헤아리겠는가? 그 울음소리의 뜻도 모르 고 여전히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며 간청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이령은 주순에게 남길 사연을 다 적고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딸에게 몇 마디를 더 당부 하려는 참인데, 독수리는 벌써 나래를 떨치면서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이령은 열던 입 을 다물고서 딸과 함께 서둘러 뒤쫓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독수리는 땅바닥에 납죽 엎드려 있었다. 갈 사람이 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슬픈 심사를 참고 아버지를 부축해서 독수리 등에 태우던 영경은 문득 새끼줄이 생각났다. 얼른 동굴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가지고 나와서 독수리의 목덜미에 얽어맨 다음, 아버지한테 타는 방 법이며 내려가는 도중의 몇몇 군데 위험한 곳을 단단히 일러주었다. 이령도 귀를 기울여 한 마디 도 빼놓지 않고 마음 속에 새겼다. 아버지와 딸은 말이 없었다. 수심어린 눈길로 마주 바라보기만 할 뿐, 가슴 속에 가득찬 천만 마 디를 어찌 다 쏟아낼 것이냐? 그들은 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 부녀가 말없이 두 손을 맞잡은 채 떨어질 줄 모르자, 쭈그리고 있던 독수리란 놈은 더 이 상 기다려 줄 수가 없다는 듯이 머리통을 푹 수그리고 대뜸 이령의 가랑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 다. 무례한 짓이거나 말거나 탈 사람이 안 타니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빠, 조심하세요!" 영경이 부르짖는 소리를 뒤로 하고, 무정한 날짐승은 벌써 푸드득! 활개치며 벽공으로 솟구쳤다. 독수리는 이령을 태우고 허공에서 한 바퀴 선회하더니 쏜살같이 깊은 계곡을 향해 몸뚱이를 던졌 다. '아차, 사조님한테 독수리를 벗으로 빌려달라는 부탁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는 걸 잊었구나!' 영경은 독수리의 그림자를 놓치고 나서야 아버지에게 할 말도 못 다한 걸 깨달았다. 상심이 큰 나머지 울고 싶어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덮인 삭막한 겨울산 낙조(落照)가 비껴 어리는 가운데 그림자를 드리우고 망연자실 홀로 서 있자니 갑작스레 외로움과 설움이 한꺼번에 물결쳐 왔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고 소리쳐 울기 시 작했다. 아버지와 생이별하고 적막강산(寂寞江山)에 홀몸으로 떨어져 의지할 데가 없다는 현실이 뼈저리 게 느껴진 것이다. 그녀의 슬픔은 텅빈 산골짜기와 산등성이를 쩌렁쩌렁 울리고 메아리쳐 돌아왔 다. 제아무리 다부지고 억센 영경이지만 역시 소녀였다. 황혼도 저물고 천지가 어둠 속에 잠겼으나 눈발 휘몰아 날리는 삭풍 속에서 그녀는 돌처럼 굳어 진 채 소리쳐 울고 또 울었다. 울다 지친 영경은 마침내 한 가닥 실낱 같은 희망을 끌어내었다. '아빠가 득도(得道)하시면 필경 나를 이끌어 주실 거야. 또 백미사조께서 뭐라고 하셨던가! 나한 테도 머지않아 인연이 닿으리라 하셨어. 훗날 선검(仙劍)을 익히고 나면 비행절적(飛行絶跡)의 상 승무공으로 천 리가 지척이 된다. 그때는 아빠를 만나보는 것도 식은죽 먹기가 아닌가 말야.....' 한참 제 흥에 겨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영경의 얼굴에 찬바람이 눈가루를 몰아다가 휙 끼얹으 면서 다시금 그녀를 현실로 밀어붙였다. 밤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 인적도 끊긴 이 텅빈 높은 산 봉우리, 싸늘한 동굴 속에 홀로 누울 생각을 하니 또다시 슬픔이 울컥 치밀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울다가 지쳐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경험, 육친과의 생이별, 고독감과 슬픔이 하루 밤낮 동안 어린 그녀를 못 견디게 흔들어 놓은 것이다. 산란한 의식 속에서도 그녀 는 시장기를 느꼈다. 더운 물에 밥을 말아서 반 그릇 남짓 비우고 나니 슬픈심사도 어느 정도 덜 어지고 정신도 한결 맑아졌다. 일단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나자 문득 자신의 주제가 그렇게 초라하고 못나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깊은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흠, 이영경! 그대도 여중호걸(女中豪傑)이라고 자부하는 네가 어쩌면 이토록 나약해 빠졌단 말 이냐? 백미사조께서도 아빠처럼 연세가 지긋하신 분을 마다 않고 문하에 거두어들이셨는데, 이렇 게 천품도 뛰어나고 생기발랄한 이영경을 누가 탐내지 않으랴? 용기를 내자! 이제 아빠도 떠나셨 으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수련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기회다. 주숙부님이 돌아오시면 황산 에 계신 경운언니를 만나러 가야지. 만약 그분이 안 오신다 하더라도 혼자 황산까지 갈 거야. 내 년 봄, 산길이 풀려 봐라! 나 혼자서는 못 갈 듯싶으냐? 이 동굴 안에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하 게 쌓였는데 공연한 걱정을 해 어쩌겠다는 거냐?' 생각이 바뀌니 금방 몸도 마음도 환해졌다. 그녀는 아예 내친 김에 정신을 집중시켜 한 차례 운 기조식을 했다. 그런 다음에 침상으로 올라가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겨 뒤집어쓰고 잠이 들 었다. 며칠 동안 온갖 고생을 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몸에다 걱정 근심이 태산같이 쌓였으니 어 느 한 밤을 편안하게 잘 수 있었으랴. 비로소 그녀는 온갖 시름을 훌훌 털어내고 편안하게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영경은 꿈 한 조각 꾸지 않고 죽은 듯이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이튿날 정오 무렵에야 비로소 깨어 났다. 몽롱하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첫 번째로 느낀 것은 귓결에 가볍게 들리는 누군가의 소리였 다. 순간 그녀의 온 신경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어젯밤 너무도 서럽고 외로와서 울고불고 정신이 어지러워진 바람에 들어오면서 깜박 동굴 입구를 막아놓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것 봐라, 산짐승이 침입한 게 아냐? 큰일났구나!'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살그머니 이불깃을 들치고 빼꼼 내다보았다. "와아!" 다음 순간 그녀는 야수와도 같이 기성을 지르며서 이불을 박차고 침상에서 뛰어내렸다. 속옷바 람이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달음에 달려가 그 짐승의 기나긴 목을 껴안고는 뜨겁게 얼굴을 마구 부볐다. 그녀의 침상 머리맡에서 '씨익, 씩!' 하는 숨소리를 낸 것은 바로 금안의 신조, 검정독수리였던 것이다. 언제 동굴 속으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그 날짐승은 영경이 깊이 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서 이제껏 그 곁에 엎드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금안사형, 금안사형!" 영경은 끊임없이 날짐승의 부드러운 깃털을 쓰다듬으면서 부르고 또 불렀다. 꾸우, 꾸르르.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자 독수리도 반갑게 우짖었다. "아빠는 무사히 사조님 계신 데로 가셨지?" 영경이 묻자, 독수리는 고개를 한 번 끄떡하더니 쇠부리로 왼 날갯죽지 속을 후벼 편지 한 장을 물어 꺼냈다. 아버지 이령의 편지였다. <얘야, 이제 겨우 밤이 지났지만 너와 오랜 세월동안 헤어진 것 처럼 느껴지는구나. 아비는 백 미사조님을 뵙자마자 그분의 문하 제자로 들어갔단다. 사조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아비는 비로소 그분이 원래 전세의 외숙(外叔)이었음을 알았다. 그 사이의 숱한 인과(因果)를 설명해 주셨지만 여기에 다 옮겨 적을 수는 없구나. 아무튼 그분은 아비의 마음을 전세부터 다 헤아리시고 때가 이르는 오늘까지 기다리셨다가 수고 로움을 아끼지 않고 아미현 성내로 내려가 이 아비와 첫 대면을 하신 것이란다. 사조님은 나와의 인연만을 생각지 않으시고 정성과 노력을 시험하시어 마침내 오늘에야 아비를 이끌어 불문에 들 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너는 머지않아 흉액(凶厄)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흉액은 길상(吉祥)으로 변하여 불세(佛世)의 선연(仙緣)을 얻게 된다 하셨다. 부디 좌절하지 말고 모름지기 힘써 역경을 헤쳐나가야 한다. 너도 이미 알겠지만 그 독수리는 오랜 햇수를 두고 사조님을 모시면서 불도(佛道)에 감화되어 영성(靈性)을 깊이 통달한 신조(神鳥)다. 사조께서 허락을 내리시어 너와 함께 지내도록 보내셨으 니 잘 돌보아 주어라. 다만, 그 독수리는 매달 보름과 그믐 두 차례 응벽애로 내려와 불경을 들어 야 하므로, 그 이틀은 네 곁에 있지 못할 것이다. 고생스럽겠지만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수련하고 몸 조심하면서 주숙부가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영경은 아버지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제 아버지는 소원대로 입문하셨다. 그리고 자기도 그토 록 간절하게 바라던 독수리를 벗으로 얻은 것이다. 그녀는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뻤다. 얼른 부엌에 들어가서 친구가 좋아하는 고기를 듬뿍 썰어다가 먹였다. '어쩌면 저렇게도 맛있게 먹을까?' 독수리가 절인 고기를 쪼아먹는 모습을 곁에서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영경은 문득 걱정거리 가 생겼다. '아이 참! 큰일났구나. 모처럼 얻은 친구라서 반갑기는 한데 저렇게 많이 먹는다면 하루 세 끼를 무슨 수로 대접하지? 이 겨울철, 눈 덮인 산중에서 어떻게 사냥을 해다가 먹인단 말이냐?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니로군!' 독수리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내 알바 아니라는 투였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고기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나더니 성큼성큼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영경은 혹시나 그대로 달아날세라, 조마조마하면서 바짝 그 뒤를 따라나갔다. 꾸우, 꾸르르! 독수리는 그녀를 향해 길게 우짖더니 푸드득! 날개짓으로 땅바닥의 눈을 휩쓸면서 날아올랐다. "내려와! 어딜 가는 거야?" 당황한 영경이 소리쳤다. 공중을 한 바퀴 선회한 날짐승이 훌떡 몸을 뒤채더니 그 길로 홍장평(洪樟坪) 들판 쪽을 향해 곤두박질쳐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나서 얼마쯤 있자 독수리는 다시 솟구쳐 올라왔다. 조바심에 애를 끓이던 영경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가까이 접근하는 걸 보니 그 쇠발톱으 로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었다. 동굴 앞 공터 십여 장 거리까지 날아온 독수리는 허공에서 묵직한 것을 하나 떨어뜨렸다. 그것은 매화록(梅花鹿)이었다. 사슴은 뿔도 꺾이고 머리통이 터진 채 이미 죽어 있었다. 꾸르르, 꾸르르, 꾸르르! 독수리는 '이봐, 어떠냐?' 하듯이 영경을 향해 기운차게 연방 우짖었다. 이제는 영경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독수리는 제 먹이를 스스로 마련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영경은 신바람이 났다. 아직도 따뜻하게 온기가 남아 있는 사슴의 가죽무늬가 이렇듯 곱고 부드 러울 수 있을까? 그녀는 해도(解刀)를 들고 나와 사슴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둔중한 솜옷보다 얼마나 가볍고 따듯한 옷감이란 말이냐? 영경의 손은 서투르지만 바쁘게 움직였다. 껍질을 벗겨 널어놓고선 다시 고기를 작은 덩어리로 잘라냈다. 말려서 두고두고 먹을 것은 따로 남겨놓고 나머지는 쇠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웠다. 오 랜만에 싱싱한 고기가 생긴 것이다. 독수리는 옆에 쭈그려 앉아서 영경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날고기를 집어주었지만 웬일인지 독수리는 쪼아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로군.....' 그러나 영경의 생각은 잘못이었다. 독수리란 놈은 껑충껑충 부엌으로 들어가서 멧돼지 뼈다귀 한 개를 물어다가는 그녀의 발치에 내던진 것이다. 영경은 그만 제 이마를 가볍게 치고선 깔깔 웃었다. 독수리가 원하는 것은 날고기가 아니라 여 지껏 입맛 들였던 소금절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즉시 뒷동굴에서 물통과 소금을 꺼내왔다. 그리 고 양지쪽에 자리잡고 앉아서 사슴고기를 깨끗이 씻은 다음 소금에 절였다. 그녀는 지난날 주숙부가 가르쳐 준 것을 차분히 기억에 떠올리면서, 사천지방 사람들의 사냥감 훈제법(燻製法)대로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바람없이 후미진 곳에서 불을 지핀 다음 절인 사 슴고기를 그을렸다. 그로부터 독수리는 영경과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이 되었다. 새벽에 눈을 뜨고부터 해질녘까지 독 수리는 잠시도 영경의 곁을 안 떨어지고 동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이따금 사냥하려고 계곡 아 래로 내려가는 경우만은 예외였다 영경은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귀신같이 헤아리는 날 짐승을 벗삼아 마음내키는 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어린 소녀에게 이보다 더 큰 낙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아버지와 헤어진 슬픔도, 홀로 떨어져 사는 외로움도 모두 잊었다. 나날이 즐겁 기만 했다. 단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독수리를 타고 훨훨 날아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독수리 등에 올라타려 했지만, 그때마다 놈은 끝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온갖 방법으로 꾀어도 막 무가내였다. 결국 그녀쪽에서 먼저 지쳐 단념하고 말았다. 독수리는 분명 응벽애를 떠나면서 그녀를 등에 태 우지 말라는 분부를 엄하게 받고 온 모양이었다. 며칠 후 섣달 보름날이 되자, 독수리는 응벽애로 날아 내려갔다. 그러더니 이튿날 영경의 곁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그녀의 아버지가 보낸 서찰을 지니고 있 었다. <오늘 아비는 사조님을 따라 성도(成都) 지방으로 떠난다. 그곳 어딘가에 계실 명나라 황실의 황족 한 분을 찾기 위해서다. 그곳 일이 끝나면 다시 운남성(雲南省) 석호산(石虎山)으로 사형 채 미승(采薇僧) 주유목(朱由穆)을 만나러 가야 한다. 이번 여행길은 아마도 이삼 년이 걸려야 돌아 올 수 있을 듯하구나. 성도에 도착하는 대로 가능하면 너희 주숙부를 찾아서 네가 있는 아미산으로 돌아가게 해주마. 아비가 없더라도 아무 데나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몸을 아껴 수련에 힘써야 한다.> 편지는 여기서 끝났다. 아버지가 어디 계시든 만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제 더욱 멀리, 더욱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영경은 마음이 쓰라렸다. 그렇지만 더 생각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 그저 하늘에 묵도를 올려 부디 아버지를 보우(保祐)하사 하루속히 정과(正 果)에 드시기만 간절히 빌 따름이었다. 날짜는 빠르게도 지나갔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섣날 그믐이었다. 영경은 아무래도 아직은 소녀였다. 그녀는 지난번 아버지와 함께 아미현 성내에 내려갔을 때 사 들인 설날맞이 폭죽이랑 장식물 따위를 석실 저장고에서 모조리 끌어냈다. 그리고는 특별히 독수 리를 위해서 사슴 뒷다리 십여 개를 정성들여 소금 발라 훈제로 만들어놓았다. 둘이서 새해를 오 붓하게 맞이할 작정인 것이다. 그녀의 손발은 이런 일 말고도 바쁘게 돌아갔다. 물론 하루같이 거듭되는 수련공부도 빼먹을 수 없는 일과지만. 그믐밤을 밝힐 장식용 궁등(宮燈)을 얽어 만들고 재간껏 채색하고 무늬를 오려 붙 이느라 하루해가 꼬박 질 때도 더러 있었다. 아무도 보아 줄 사람 없는 텅빈 공산(空山)에 혼자 살면서 제법 명절 구색을 맞추자니 두 손 두 다리 가지고 정신없이 뛰어다녀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벗이 있기는 하지만, 장식등 색칠, 하나 도와줄 수 없는 짐승에 불과했다. 섣달 스무이렛 날, 독수리는 다시 휑하니 날아가서는 멧돼지 두 마리, 사슴 한 마리를 연거푸 잡 아왔다. 독수리도 푸짐한 설 맞이 잔치를 즐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신나게 껍질을 벗겨 놓은 다음, 영경은 석실 저장고로 뛰어갔다. 소금을 가 져다 절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맙소사! 이 노릇을 어쩌지?' 독 뚜껑을 열어본 영경은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소금 독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닥닥 긁어모아 봤자 겨우 한 번 절일 분량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귀중한 소금이 떨어지면 앞으 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그녀는 뒷동굴 창고로 달려갔다. 소금 말고는 혼자서 일 년도 거뜬히 먹고 남을 식량이 있었다. 오직 소금 한 가지만 모자라는 것이다. 독수리에게 잘 보이느라고 허구 헌날 빠짐없이 절인 고기를 대접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 는 사이에 결과적으로는 귀한 소금을 낭비한 것이었다. 그녀는 바닥이 드러난 소금 독 앞에서 정신놓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가만히 어 림셈을 해보았다. '지금까지 절여서 저장해 놓은 채소와 고기만 해도 서너 달 넘기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반 그 후 로 독수리가 잡아올 사냥감은 어떻게 하지?' 빈 독을 내려다 보면서 수심만 가득찬 이영경,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신통한 궁리가 떠오르 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산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깡그리 퍼 쓰고 말자꾸나. 설마 소금 없다고 죽기야 할라구?' 영경은 호기있게 남은 소금을 긁어 담아가지고 나왔다. 고기를 저며서 소금을 뿌리며, 그녀는 곁 에 쭈그려 앉아 멀뚱멀뚱 금빛 눈으로 지켜보는 독수리에게 맡을 건넸다. "금안사형, 소금이 너무 빨리 없어졌어. 아무래도 설을 지내고 성내로 내려가서 사와야겠는 걸? 당분간 사냥은 안 돼요. 잡아와 봤자 내가 요리를 할 방법이 없거든." 그러자 독수리가 푸드득! 나래를 펼치더니 곧장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딜 가려는지 몰라도 영경은 늘 당해오던 터라 마음에 두지 않고 한 마디만 소리쳐 당부했다. "이제 금방 점심때야! 한바탕 놀고 빨리 돌아와야 해! 우리 맛있는 점심을 같이 먹잔 말이야!" 허공에서 빙그르 한 바퀴 맴돌고 나서 독수리는 하늘 밖 까마득히 사라졌다. 그런데 정오도 훨씬 넘어 미시(未時)초가 되었는 데도 독수리는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영경은 시장기를 참다못해 혼자 먼저 점심을 들었다. 그리고 멧돼지와 사슴의 심장을 맛있게 조리해 놓 고 독수리가 날아오기만 기다렸다. 독수리가 돌아온 것은 한낮의 해도 거의 기울 무렵인 신시(申時) 때였다. 동굴 앞 공터에서 검범 연습을 하고 있던 영경은 어렴풋한 흑점(黑點)을 이내 알아보고 두 손까지 휘둘러 가며 반가와 소리쳤다. 한데 잠시 후 머리 위 가까이 날아와서 빙글빙글 선회하는 그놈의 발톱에는 또 큼직한 물체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금안사형, 내 아까 뭐라고 했어? 소금이 없다고 했잖아? 날고기도 안 먹으면서 어쩔려고 쓸데 없이 산 목숨을 해치는 거야?" 그녀의 짜증을 못 들은 척 그 못된 날짐승은 사뿐하게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영경은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여느때 같으면 잡아 가지고 온 사냥감을 공중에서 내던지는 게 예 사인데 오늘따라 노획물을 얌전히 움켜쥔 채로 내려온 것이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았더니 그것은 사방 세자 가웃이나 됨직한 가마니였다. 무엇이 들었는가 싶 어 가마니 한귀퉁이를 찢어보니 좁쌀만한 크기의 하얀 결정체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것도 유정(油井)에서 산출되는 극상품의 관염(官鹽)이 아닌가? 무게도 어림잡아 이삼백 근은 족히 되어 보였다. 영경은 미칠 듯이 기뻤다. 그녀는 어깨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다. "금안사형, 정말 신통력이 대단하시군, 내가 아주 감복했어! 하지만 남의 물건을 함부로 집어와 서는 안 돼요. 아빠도 그러셨어. '남아대장부가 하는 일은 공명정대, 떳떳해야 하느니라' 알아듣겠 지?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짓을 하면 못 써요!" 독수리는 눈을 내리깔고 응답이 없었다. 한바탕 훈계는 했으면서도 소금이야 도로 갖다주란 말 은 입 밖에도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소금 가마니를 풀어헤치고 한 짐 한 짐씩 져다가 창고 독 을 채웠다. 운반이 끝나자, 그녀는 준비해 놓고 기다렸던 그 맛있는 점심을 독수리에게 먹였다. 한 가지 시름을 덜고 나니, 몸까지도 홀가분했다. 그녀는 독수리를 상대로 다시 장검을 휘두르며 검술 연습에 들어갔다. 독수리는 과연 훌륭한 상대자였다. 상대하는 무기도 하나가 아니었다. 부 리로 쪼고 양발톱, 양날개로 후리고 휩쓸면서 그녀의 세찬 공격을 여유만만하게 막아내는 것이었 다. 한창 희희낙락, 장난을 섞어가며 칼춤을 추던 그녀는 문득 독수리의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결에 은은한 향기가 실려오는 걸 느꼈다. 그것은 동굴이 있는 돌비탈 뒤쪽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한달음에 향기를 따라가 보았더니 그곳에는 오랜 세월 해묵은 매화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 었다. 언제부터 피기 시작했는지, 가지마다 꽃이 흐드러지게 매달려서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한 향(寒香)을 뿜어내는 것이었다. 샛노란 매화떨기는 차디찬 은빛 세상에 시달린 소녀의 눈을 싱그 럽게 해주었다. 영경은 꽃향기에 흠뻑 취한 채 독수리와 함께 매화 나무 주변에서 노닐다가 저녁 무렵 황혼이 이슥해져서야 동굴쪽으로 내려왔다. 저녁준비를 할 셈으로 이제 막 동굴로 들어서려던 그녀는 불현듯 건너편 절벽에 눈길을 던지다 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절벽은 동굴 맞은편 일백여 장 거리를 두고 깎아지른 듯 솟구 친 험난한 암벽이었다. 그 암벽 아래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바위를 날렵한 신법으로 건너뛰는 사 람의 그림자가 눈에 띈 것이다. 한 사람이었다. 몸매도 가냘프고 작달막한 키에 푸른옷을 걸쳤는데, 미끄러운 암벽을 딛고 높직 이 멀리 도약하는 보법이 날으는 새 처럼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그의 진행 방향은 바로 영경의 동굴 쪽이었다. 지금 영경이 살고 있는 이 동굴은 지형상으로 보아 뒤쪽은 천야만야 끝도 모를 벼랑인 데다, 앞 쪽 또한 수십 장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에 길조차도 없는 골짜기로 끊겨, 천연의 장벽이 병풍처럼 둘러싼 곳이다. 동굴 입구에서 내려다 보면 십여 리 안팎의 산경(山景)이 한눈에 다 들어오면서도 사신암(捨身 巖)을 거쳐 오르는 통로는 구절양장(九折羊腸)만큼이나 구부러지고 험악해서 좀처럼 찾아내기 어 려운 샛길 한 줄기뿐이다. 그러기에 이 동굴은 주순이 처음 발견한 이래 그와 이령 부녀를 제외 하고 조연아가 그후 단 한 차례 다녀갔을 뿐, 이제껏 어느 누구도 발을 디딘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영경은 몸을 숨긴 자세로 그 청의인의 동태를 눈여겨 보았다. 이상하게도 침입자는 추호도 망설 이는 기색이 없이 날아오고 있었다. 마치 여러 차례 다녀본 길을 가듯 익숙한 걸음걸이로 날렵하 게 접근하는 것이다. 영경은 속으로 두려워하면서도 그 신법의 경쾌함에는 그만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가뜩이 나 험준하고 가파른 지형이라서 걷기 좋은 봄 가을철에도 오금이 저리고 조마조마한데 이제 얼음 과 눈으로 온통 뒤덮여 미끄럽기 짝이 없는 바위로 뜀박질을 하다니 꿈에도 못할 짓이 아닌가!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어디 한두 군데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분골쇄신, 박살이 날 판이 었다. 영경 자신도 경신술을 제법 익혔다고 자부는 하지만 저런 산길을 감히 오르내린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저토록 멋진 신법을 지닌 인물이라면 검선임에 틀림없어. 그렇다면 백미사조께서 말씀하신 대 로 저 사람이 날 이끌어 갈 선연을 가지고 오는 게 아닐까?' 한창 제멋대로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청의인은 암벽 모퉁이를 돌아서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못 실망해서 발길을 돌리려는 참에 공터 끝 십여 장 거리쯤 되는 벼랑 모서리에서 불쑥 인영 하나가 솟구쳐 올라왔다. 독수리도 침입자를 발견했다. 푸드득! 하고 창공으로 날아오르더니 영경의 머리 위에서 두 날개 를 활짝 펼치고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 자세는 완연히 영경을 적의 공격 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의도였다. 영경은 몸을 숨기지도 않았다. 잔뜩 경계심만 북돋우고서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불청객을 주의 깊게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전신을 푸른옷으로 감싸고, 머리에도 푸른빛 두건을 썼으며, 등에 장 검 한 자루를 비껴 메었는데 키는 자기와 엇비슷했다. 옷차림은 분명 남장이기는 하나, 얼굴 모습 은 빼어나게 아리따운게 도대체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영경은 아무리 보아도 상대방의 낯이 익은지라 입을 열어 물으려 했다. "당신은....." 첫마디가 나오기 무섭게 불청객이 말을 가로막았다. "난 지금 사부님의 분부를 받잡고 이곳 능소애의 송매(宋梅)를 따다가 부처님께 바치려고 왔어 요. 그런데 언니가 바로 여기 은거하고 계신 줄은 까맣게 몰랐지 뭐야. 아이 참, 내가 오늘 재수 가 좋은 걸?" 푸른 두건을 벗어버리자, 삼단 같은 흑발(黑髮)이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렸다. 시원하게 다듬어진 이마, 고운 눈썹 아래로 웃음을 머금고 있는 부리부리한 눈, 어찌 보면 그 빼어난 얼굴 모습 속에 희미하게나마 오만스런 기운마저 감도는 듯했다. "아, 이제 알았다! 영남....." 영경은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질렀다. 그제서야 침입자의 정체를 기억해낸 것이다. 영경이 반색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방금 나타난 여자는 바로 아미전산 해탈암에서 처음 만났던 광혜사태의 문하 제자 여영남,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날 아미현 성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가 몸져 눕고 그 시중을 드느라 정신이 없는 데다 뒤이 어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고 번민과 슬픔으로 나날을 보내는 바람에 여영남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설혹 어쩌다 생각이 났더라도 엄청난 눈보라에 길이 막혔으니 해탈암으로 찾아갈 엄두도 못 냈을 터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늘 텅빈 산, 이 외로운 곳에 잊고 있었던 그 반가운 손님이 불쑥 찾아든 것이다. 영경 은 기쁜 마음에 존경심마저 일어났다. 여영남의 놀랄 만한 경신술을 본 때문이리라. 이젠 어떻게 해서든지 놓칠 수 없다고 마음 속으로는 단단히 다짐했다. 곁에 항상 독수리가 벗하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없는 날짐승이다. 사람은 사람과 사귀어야만 제대로 살맛이 나지 않겠는가. 그녀는 생각지도 않았던 산중의 반려자를 얻자 새삼스럽게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적막한 생활을 해왔는지를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서로 오가며 사귀어 지독한 고독에서 벗어나리라고 영경은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매화꽃을 따러 오셨다고요?" 이렇게 물은 영경은 여영남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앞장 서서 그녀를 암벽 뒤쪽 매화 나 무로 데리고 갔다. 여영남이 몇 가지를 골라 꺾은 다음, 그들은 동굴로 돌아가 자리잡고 마주앉았 다. 잠시 만났던 두 소녀가 헤어진 후 뜻밖의 상봉을 했으니 오죽 하고 싶은 말이 많겠는가? 오손도 손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서로의 나이도 알게 되었다. 여영남이 영경보다 두 살이나 위였다. 활달한 이영경은 즉석에서 여영남을 언니로 모시고 스스로 동생을 자처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두 소녀는 아교로 붙인 듯이 의기가 투합했다. 어찌해서 이제야 사귀게 되었는지 원망 스러울 지경이었다. 한참만에야 여영남은 영경의 아버지 이령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님은 어딜 가셨지?" 여영남의 물음에 영경은 가슴이 찌르르하게 울리고 눈물부터 왈칵 솟구쳤다. "아버지는 응벽애 백미사조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불문에 입도하셨어요." 그리고 해탈암을 떠난 이후 아미현 성내에서 백미화상을 처음 만나게 되었던 일부터 이곳에 돌 아와 노심초사 응벽애를 찾다가 몸져 눕고, 자신은 아버지를 간호하던 끝에 절망하여 살을 베어 드리려던 일, 독수리와 싸우다 절벽으로 떨어지고 마침내 응벽애를 찾아 백미사조를 뵙게 된 일, 그리고 아버지가 소원을 이루어 그분의 문하로 들어가게 된 과정을 소상하게 일러주었다. 잠자코 영경의 말을 듣던 여영남도 그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상심하던 때를 연상하고 자기가 당한 것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하늘빛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영경이 등불을 밝혔다. "영남 언니, 여기서 저녁을 잡수시고 가셔요." "안 돼, 사부님이 기다리고 계셔. 오늘중으로 뵙고 매화꽃을 드려야 하거든. 그리고 내일 오전에 는 제자들 모두 무술강론을 들어야 해." "그래도 오늘만....." "아니야, 이제 알았으니까 자주 올 텐데 뭘....." 영경이 아무리 붙잡아도 여영남은 막무가내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동굴의 주인은 마지 못해 아쉬운 마음으로 손님을 전송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놀이 창공을 한창 불태우고 있었다. 사방천지에 어둑어둑 땅 거미가 덮이면서 산은 거대한 그림자를 펼치기 시작했다. 산머리의 적설(積雪)이 아직도 석양을 반사해서 빛을 내고 있기 때문 에 그나마 한 줄기 하산길을 분별할 수 있을 뿐으로 여간해서는 발걸음을 내딛기조차 망설여졌 다. 영경은 산길을 가리키면서 또 한번 만류했다. "언니가 올라온 저 길은 아주 미끄럽고 위험해요. 이렇게 어두웠는데 가다가 무슨 사고가 날지 도 모르겠네. 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걸. 아무래도 오늘만은 여기서 묵고 내일 다시 내려가세 요." 그때 별안간 공중에서 독수리가 우짖었다. 꾸와, 꾸르르! 그제서야 영경도 아직껏 허공을 선회하던 독수리에게 생각이 미쳤다. "나 좀 봐, 언니하고 얘기하느라고 우리 금안사형을 언니한테 소개시키는 것도 깜박 잊었네요!" 그녀는 요 며칠 동안에 배워 하던 습관대로 입술을 오므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독수리는 휘파람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지상으로 내려앉더니 금빛나는 두 눈을 부라리며 여영남의 위아래를 훑어 보았다. 여영남은 어이가 없는지 깔깔 웃으면서 독수리 앞으로 다가섰다. "동생이 아까 나한테 너무 열심히 얘기해 주느라고 물어볼 틈도 안 주었구만. 그러니까 바로 이 친구가 동생을 백미사조님께 데리고 갔단 말이지? 그래, 이렇게 신통한 짐승이 지켜주니까 동생 도 여기 살면서 걱정 근심을 안하는 게 당연하지!" 그녀는 두려움도 없이 손을 내밀어 독수리의 단단한 깃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날짐승도 꼼짝 않고 여영남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영경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쳤다. "내가 언니를 보내드릴게!" "어떻게 말이야?" "아직은 모르겠지만, 금안사형이 허락한다면 갈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의논해 보죠." 영경은 다시 독수리를 향해 의견을 물었다. "금안서형, 이분은 내가 새로 사귄 여영남 언니야. 지금 산을 내려가야 하는데 날도 저물고 길이 험해서 갈 수가 없네요. 어때요, 내 체면 좀 봐서 언니를 데려다 주지 않겠어요?" 꾸우, 꾸르르! 독수리가 길게 우짖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영경은 신이 나서 여영남을 돌아보았다. "금안사형이 언니를 데려다 주겠다고 승락했어! 무섭지 않죠?" "괜찮을까?" "언니, 우리 금안사형의 성의를 얕보면 안 돼요. 여지껏 나도 두 번밖에 못 타 봤거든. 지금 내 가 타고 싶어도 태워주질 않는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않았다면 아무데나 날아다니고 얼마나 재미 있었을지 모를 텐데. 어서 타세요. 괜히 머뭇거리다간 금안사형이 화를 내고 안 갈지도 모르니 까." 여영남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진난만하게 자기를 위하느라 말 못하는 날짐승한테 부탁까지 했는데 안 타겠다면 겁장이 언니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또 속으로 고마운 느낌마저 드는 것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바람이 난 영경은 새끼줄을 가져다 독수리의 목에 걸고서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언제 오실 거죠?" "내일!" 작별인사가 끝나자, 여영남을 태우고 날아오른 독수리는 한두 번 날개짓으로 삽시간에 구름을 헤치며 사라져 버렸다. 영경은 석굴로 돌아와 저녁밥을 먹은 후 들뜬 마음으로 밤을 도와 바쁘게 움직였다. 모처럼의 청소로 석실 안이 깨끗해지자 설맞이 꽃등을 걸어놓고 온갖 장식을 꾸몄다. 내일 방문하기로 약 속된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다. 얼마 후 독수리도 돌아왔다. 영경은 밤늦게 평온한 잠 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동트기가 무섭게 영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젯 밤 못다 마친 보금자리 꾸밈새를 마치고 나서 그녀는 잔치상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영남 언니는 암자에서 소식(素食)을 했겠다? 하지만 부처님이 눈앞에 안 계시면 맛있는 고기를 거절할 리야 없겠지.' 그녀는 손님에게 대접할 특별식으로 몇 가지 고기요리를 만들었다. 거기다 아껴 두었던 움 속 채소와 죽순까지 꺼내서 한 상 듬뿍 차려놓았다. 접대 준비가 끝나자 주인은 절벽 앞까지 나가서 손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정오 무렵, 초조해진 주인이 독수리를 시켜 손님 마중을 내보내려는 참에야 고대하던 여영남이 올라왔다. 주인과 객은 어제보다도 더욱 친밀하게 만났다. 석실 안에 들어서자 영경은 은근하고도 정중하 게 손님을 접대했다. 여영남 역시 사양치 않고 주인이 권하는 대로 유쾌하게 먹고 마셨다. 화병에 꽂아놓은 매화가지도 이제 갓 꽃망울을 터뜨리고, 화로의 장작불도 손이 큰 주인 덕분에 기세좋게 활활 타올랐다. 꽃향기, 술 향기가 한데 어우러져 석실 안을 가득 메웠는데, 돌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절색의 두 협녀(俠女)가 화기애애, 끝도 없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해탈암의 주지 광혜사태는 원래 지난날 일세의 검협으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다. 후에 정체를 감추고 공문(空門)에 들어선 이래 오로지 선열(禪悅)의 추구에만 뜻을 두어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로 광혜사태는 손에 칼을 잡은 적이 없었다. 아무도 그녀가 유명한 검객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영남도 그녀를 어려서부터 스승으로 섬겨오면서 근근히 검술 의 입문(入門) 내공구결만 전수받아 호신용으로 쓸 수 있었을 뿐이다. 스승은 여영남을 불문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속세로 돌려보내 또다른 공 업(功業)을 이루게 할 생각으로 그녀의 머리도 깎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젯저녁 여영남이 암자로 돌아가서 이영경과 만난 사실을 스승에게 보고했을 때, 광혜사태는 미소를 짓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그 여마왕(女魔王)을 만났다니, 너한테 기연(機緣)이 빠르게도 오는구나. 내일아침이 되거 든 내 곁을 떠나서 그 애와 함께 살도록 하렴." 여영남은 그 말을 듣고서 스승이 자기와 영경의 교우(交友)를 불만스럽게 여기는 줄 알고 다급 히 변명했다. "사부님, 이영경은 아주 총명하고 성격도 활달한 아가씨예요. 제가 보기엔 썩 훌륭한 자질도 갖 춘 것 같은데,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까? 사부님께서 그 아가씨더러 <여마왕>이라고 말씀하신 것 은 장차 그녀가 정말 못된 짓을 저지르기 때문입니까?" "그 애가 못된 짓을 저지르다니? 네가 억측을 했구나. 그 애더러 <여마왕>이라고 부른 까닭은 그 애의 살심(煞心)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그걸 꺼려서 그랬던 것이다. 너하고 그 애는 본래 한 길을 걸어야 할 운명이란다. 둘이서 사귀게 된 그 날이 바로 네가 세상으로 나가야 할 때이니라. 내가 너더러 그 애한테 가라고 한 뜻은 두 사람에게 지워진 운명의 길을 막자는 게 아니다. 너무 오해 말아라." 여영남은 스승인 광혜사태의 해명을 듣고서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도 한편 어린 나이 에 스승을 모시기 시작하여 이날 이때껏 기르고 가르쳐 주신 은공을 하루아침에 저버릴 수가 없 어 무릎 꿇고 간청을 드렸다. "사부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와 그 말씀만은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제자가 이영경과 사귀는 것 이 옳지 않다면 기꺼이 끊으오리다. 하오나 그런 뜻이 아니시라면 저를 이 해탈암에 그대로 머물 게 해주시고 이영경과 늘 만나볼 수 있도록 허락을 내리소서." "못난 아이 같으니, 너는 정도 많구나. 세상에 어느 잔치가 풍성 하기로소니 끝내 손님들이 흩어 지지 않으랴? 세상일 치고 두 가지를 한꺼번에 모두 이루는 도리란 없느니라. 나 또한 네게 얽매 이지만 않았더라면 벌써 이곳을 떠났을 게다. 오늘 모처럼 그 애를 만나고 네가 몸붙일 곳도 생 겼는데 어째서 이 암자를 떠나려고 하지 않느냐? 설마 날 따라서 극락까지 갈 셈은 아니겠지?" 스승의 속뜻을 모르는 여영남, 그 자리에 엎드려 계속 애타게 간청했다. 광해사태도 마지못해 깔깔 웃으면서 응락을 했다. "네가 기어이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겠다니 그것도 좋지! 다행히 아직 한 달의 여유는 있으니 까, 그동안 양쪽을 왕래하기로 해라. 때가 오면 다시 상의하자꾸나." "한 달 후에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영남이 또 물었으나 스승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여영남은 계속 기다 렸다. 광혜사태의 끝마디 말은 '어서 가 자거라!'였다. 이튿날 아침, 여영남은 암자에서의 일상 일과를 마치고 나서 스승에게 영경을 만나러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선선히 허락을 얻어 아미후산까지 올라온 것이 정오 무렵이었던 것이다. 영경의 동굴로 들어가서 그녀는 스승이 어제 한 말을 낱낱이 영경에게 들려주었다. "... 광혜사백님께서 나더러 <여마왕>이라고 말씀하셨단 말이지요?" "그래, 정말이야." "난 검술도 제대로 못 배웠는데....." "앞으로 배우면 되지 않아?" "영남 언니, 사백님도 승락하셨으니까 이리 옮겨 와 사세요." "그건 안 돼, 나는 스승님 곁을 차마 떠날 수 없거든." 이영경은 혼자서 검법을 익히느라 여간 애를 먹고 있는 게 아니었다. 곁에서 지도해 주는 사람 이 없으니 쉽사리 진전될 리도 없었다. 여영남은 비록 <비행절적>의 상승경지에 이르지 못했지 만 그래도 이영경 자기보다는 훨씬 고강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여영남을 붙들어 놓고 싶 었다. 그녀는 끈질기게 졸라댔다. 나중에는 여영남이 지쳤다. "그래 좋아, 이리로 아주 옮겨 올 수는 없지만, 내가 올 때마다 아는껏 검술을 가르쳐 줄게. 그 리고 해가 저물거나 날씨가 궂을 때만은 여기서 함께 밤을 새우기로 하지! 그쯤이면 되지 않겠 어?" 아무리 떼를 써 봐도 그 이상은 효과가 없자, 영경도 하는 수 없이 그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 다. 여영남은 약속대로 광혜사태에게서 전수받은 검술의 내공구결을 정성껏 영경한테 전해 주었다. 영경도 정신을 집중하여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억 속에 집어넣었다. 여영남이 암자로 돌아간 후, 아침저녁 전심전력으로 그 내공심법 수련에 소비하였다. 여영남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녀는 자기를 광혜사태에게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말을 전해 듣고서 광혜사태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훗날 검선과 인연이 닿아 상승검술을 연성하거든 부디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 살상(殺傷)을 줄 여주기 바란다." 그 말만 여영남을 통해서 전할 따름이었다. 불안한 선연(仙緣) 李英瓊萬里走孤身 赤城子中途逢異派 섣달 그믐날, 여영남은 광혜사태의 허락을 받고 이영경과 함께 동굴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영경은 새로 얻게 된 의형(義兄)이 늘 왕래하면서 검술도 지도해 주고 말벗이 되어준 후로부터 고독감을 깨끗이 털어버렸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즐거웠다. 아쉬운 게 있다면 빙설(氷雪)로 뒤덮인 산과 골짜기를 언니 여영남과 함께 마음대로 쏘다니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정월 초닷새 아침, 영경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조반 준비를 하다가 문득 동굴 밖에서 독수리가 우짖는 소리를 듣고 뛰어나갔다. 동굴 밖 공터에는 그녀의 벗인 검정독수리가 우뚝 서서 창공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꾸우, 꾸르 르!' 우짖고 있었다. "불노사형, 왜 그래?" 영경은 독수리의 눈길을 쫓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창공에는 또 한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가 이제 막 지상을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몸집도 불노만 큼이나 크고 금빛 눈에 강철 같은 발톱을 가진 놈이었다. 불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은 뱃가죽 만 빼고 전신이 온통 순백(純白)의 깃털로 덮혔다는 점이었다. 흰독수리가 막 지상에 내려앉자, 불노는 뒤뚱걸음으로 마중나갔다. 두 날짐승은 오랜 친구나 만 난 것처럼 아주 친밀한 기색으로 고개를 마주 꼬고서 길게 길게 우짖었다. 이른아침부터 귀한 손님이 날아들자, 영경은 크게 기뻤다.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불노한테 물었 다. "금안사형, 이건 누구야? 금안사형하고 친구 사인가? 그럼 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맛있는 걸 대접해야겠는 걸?" 그녀는 댓바람에 동굴로 뛰어 들어가서 절인 고기를 한 쟁반 듬뿍 썰어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흰독수리는 입도 대지 않고 영경을 향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 대신 고기 맛을 아는 불노가 영경의 성의를 깨끗이 받아먹었다. 꾸우, 꾸우, 꾸르르! 불노는 아침식사를 푸짐하게 들고 나서 맛있다는 듯이 영경을 향해 세 차례 긴 울음을 토하더니 흰독수리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손님을 전송하는 것인지 아니면 손님 따라 아주 가버리려는 것인지 모르는 터라, 영경은 불안해 서 독수리를 소리쳐 불렀다. "금안사형!" 독수리는 그 외침 소리를 듣자 푸드득! 하며 날아 내려왔다. 그래도 영경의 불안한 눈길은 허공을 헤매었다. 과연 흰독수리는 동반자를 기다리기나 하듯 나 지막한 허공에서 빙빙 선회를 하고 있었다. 영경은 친구를 빼앗기나 싶어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불노의 긴 모가지를 그러안으며 물었다. "금안사형, 내가 얼마나 사형을 의지하고 사는지 알아? 사형이 여기서 나를 벗해 주는 덕분에 쓸쓸하지도 않고 위험도 없었단 말야. 사형이 지금 손님을 배웅하고 금방 돌아온다연 괜찮겠지만, 이대로 떠나서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하지?" 독수리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자기 몸뚱이를 영경에게 비벼댔다. 그 몸짓은 서운하기 그지없다는 표현이었다. "그럼 손님만 보내고 오는 거지?" 독수리는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영경이 다급해졌다.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고, 그럼 도대체 어쩌겠단 말이야?" 독수리가 하늘을 우러르고 이제라도 당장 날아오를 듯이 활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영경의 머릿속에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백미사조님이 사형더러 불경을 들으라고 저 친구를 보낸 거로군! 그럼 먼젓번처럼 갔다가 돌아 오겠지? 안 그래? 나하고 사형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몇 밤 있다가 올 것인지 소리로 대답해 줘요. 그래야 나도 목빠지게 기다리지 않을 테니까 말야. 어때?" 과연 독수리가 우짖기 시작했다. 꾸우, 꾸우, 꾸우..... 모두 열 아홉 번이었다. 영경은 속으로 차근차근 수를 헤아렸다. 열아홉 밤을 지내고 돌아오겠다 는 뜻인 것이다. 꾸우, 쿠르르! 허공에서 흰독수리가 길게 우짖었다. 기다리기 지루한 모양이었다. 불노는 머리통을 슬쩍 숙이고 이제껏 끌어안고 있던 영경의 팔에서 빠져나가더니 긴 울음 한소 리만 남기고서 푸드득! 날아올랐다. 영경의 허망한 눈길이 독수리 한 쌍을 뒤쫓았다. 사이좋게 나래를 가지런히 펼치고서 두 마리 날짐승은 벽공을 가로질러 해탈파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이상하다. 해탈암쪽으로 가다니?... 내가 심심할까 봐서 영남 언니를 업어가지고 오려나?' 그런데 잠시 후 독수리들은 해탈파 서쪽에서 날아오르더니 눈 깜작할 사이 구름 속으로 파고 들 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천진난만한 이영경,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오직 의지할 것이라곤 이 검정독수리 불노밖에 없었다. 그녀와 날짐승 사이의 정감은 깊을 대로 깊어겼다. 이제 잠시 동안 이별이기는 하지만, 막상 눈앞 에서 훨훨 날아 사라지고 보니, 그녀의 마음은 아주 형언할 수 없이 쓰리고 아팠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기대라고는 여영남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영남도 이 며칠 동안 암자에 할 일이 쌓여 이삼 일 후에나 겨우 몸을 빼 찾아올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영경은 홀로 텅빈 산에 외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자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돌비석처럼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독수리가 사라진 하늘 끝을 바라보다가는 시름없이 동굴 석실로 돌아왔다. 어차피 외로운 신세가 된 몸, 수심에 잠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녀는 심기일전(心機一轉),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해졌다.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점심 끼니를 때우고 나서 아버 지가 쓰던 장검을 들고 석실 밖 공터로 나왔다. 그리고 여영남이 일러준 검술을 연습하기 시작했 다. 한창 기운차게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찬바람이 몰아쳤다. 깜짝 놀라 뒤돌아 보니 낯선 떠돌이 도인 한 사람이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황관(黃冠)에 포의(布衣)를 걸치고 짚신을 신었는데 생김새가 말도 못하게 상스럽고 꾀죄죄했다. 엉겁결에 뒷걸음질치던 영경은, 도인의 얼굴 가득히 조소(嘲笑)가 어린 것을 보고서 적지 않게 기분이 상했다. 속으로는 비위가 뒤틀렸지만 그녀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던가? 자기네 동굴 주변은 사방이 천인(千刃) 절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져서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므로, 누구든지 여기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여간 한 인물이 아니니까 함부로 경솔히 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이곳에 소리도 없이 침입해 올라온 인물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당돌한 영경은 놀라움보다 앞서 울화가 치밀었으나 꾹 눌러 참고서 장검을 거두었다. "방금 도장께서 저를 비웃었는데, 검법이 변변치 못하다는 뜻인가요?" 그러자 도인의 얼굴에는 경멸하는 기색이 가득하더니 미친 사람처럼 낄낄대고 웃기 시작했다. "변변치 못한 건 둘째로 치고, 아예 문턱도 못 넘어갔어!" 영경은 그만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재간 좋은 고수이기로소니 초면에 사람을 맞대놓 고 너무 광망스런 언동을 지껄이는 게 아닌가? '돼먹잖은 늙다리 같으니!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아빠하고 주숙부는 수십 년간 천하를 종횡하 면서 적수를 만난 적도 없는 당대 협객이요, 이 검법만 하더라도 언니가 광혜사태에게서 친히 전 수받은 것인데, 아무리 내 손에서 변변치 못하게 펼쳐졌을망정 문턱도 못 넘어섰다고?... 이놈의 궁상맞은 도사, 감히 나한테 요토록 무례하게 굴다니! 정말 실력있는 고수라 할지언정 어디 이렇 게 건방질 수가 있어? 분명 이 작자는 나 혼자만 있는 걸 미리 알고 찾아와서 날 겁주어 쫓아낸 다음 우리 동굴을 차지할 속셈인가 봐. 공교롭게 독수리도 없는 날이니, 아무래도 장계취계(將計 就計)로 꾀를 써서 겨뤄보고 무슨 꿍꿍이를 품었는지 알아내야겠다... 만약 이 인물이 정말 검협 (劍俠) 선인(仙人)의 하나라면 백미사조가 말씀하신 대로 내 기꺼이 스승으로 모실 터이고 우리 보금자리를 강탈하러 왔다면 싸워 쫓아내야지... 싸워서도 승산이 없으면 영남 언니가 있는 암자 로 피신했다가 독수리가 돌아오는 즉시 쳐들어 와서 빚을 갚기로 하자!' 그녀가 눈을 떼굴떼굴 굴리면서 한창 궁리하는 판인데, 정체불명의 도인은 그 심증을 꿰뚫어 본 것처럼 또다시 낄낄거렸다. "어린 아가씨, 나한테 불만이 많은 게로군? 걱정할 필요없네. 아가씨처럼 어린것하고 내가 정말 싸울 듯싶은가? 설혹 싸워 이겼다 하더라도 각 문파 도우들한테 비웃음이나 사기 십상인 걸. 내 아가씨에게 유리하도록 양보를 하지! 그러니까 나는 여기 이대로 서 있고 아가씨는 수단껏 칼로 나를 찌르란 말야. 만약 내 살갗이라도 건드렸다 하면 내쪽에서 실력이 떨어져서 진 걸로 하고 아가씨한테 큰절 올려 사과를 하지! 아가씨가 나를 못 찌르면 나는 숨 한 모금으로 아가씨를 삼 장 밖에 날려보낼 테야. 그럼 아가씨 쪽이 진 걸로 승복하고 내가 가자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되거 든. 거기 가서 아가씨한테 여검선 한 분을 스승으로 소개해 주지! 어때, 괜찮겠나?" 그 제안은 영경의 마음에 꼭 들었다. 도인이 하는 말을 듣고 보니, 백미사조께서 예언한 바와 딱 들어맞지 않은가. 혹시나 동굴을 빼앗으러 온 게 아닌가 했던 의심은 얼음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영경은 아직도 이 도인이 너무 허풍을 떠는 게 아닌가 하는 한 가닥 의구심은 버리지 않았다. '어디 정말 그런 재간이 있는가 한번 찔러나 볼까? 자기 입으로 먼저 제안을 했으니 나중에 군 말이야 없겠지!' 영경은 결심을 하고 도인에게 응락했다. "도장께서 모처럼 분부하셨으니, 제자가 무례를 범하더라도 용서하십쇼!"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오른손으로 검결(劍訣)을 맺어 도사가 서 있는 방위를 지향하면서 발끝 으로 지면을 박차고 이삼 장 거리나 되게 멀찌감치 물러났다. "이얍!" 뒤이어 앙칼진 기합소리와 함께 그녀는 대붕전시(大鵬殿翅)의 검초를 발휘하여 왼손의 검결로 방위를 지향하더니 오른손에 바꾸어 쥔 장검에 몸을 싣고서 쏜살같이 도사의 앞가슴을 노리고 찔 러 들어갔다. 그녀의 일격은 사실상 허초(虛招)였다. 상대방이 만약 그 수평공격을 꾀하려고 움직였다간 그대 로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적이 움직여 피하지 않을 때는 그냥 실초(實招)로 찔러버리 면 끝나고 만다. 그러나 도인의 신형은 공격을 피하기는커녕 태연자약, 요지부동이었다. 검격(劍擊)을 가하는 순 간에도 영경의 뇌리에 온갖 상념이 다 떠올랐다. '이 도인이 내 칼을 피하지 않는 걸 보면 필시 금종조(金鐘爪)의 무공을 믿고 그러는 모양이로 구나! 하지만 아빠가 쓰시던 이 보검이 쇳덩이도 두부처럼 조각낼 만큼 날카롭단 사실을 모르고 하는 짓이다. 미친놈 같은 소리로 내 속을 뒤집어 놓긴 했지만 나하고 무슨 철천지 원수를 맺은 것도 아닌데 구태여 죽일 필요까지는 없겠지. 저 도인 말마따나 슬쩍 칼끝으로 살갗을 건드려서 항복이나 받기로 하자!' 전광석화처럼 찔러 들어가면서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마지막 순간 칼끝을 약간 비켜가지고 도 사의 왼편어깨를 그어내렸다. 칼날이 도사의 몸뚱이에서 한 치 남짓까지 닥쳤을 때였다. 영경은 갑자기 칼끝에 무엇인가 가로막듯 부딪치는 감각을 받았다. 부딪치고 튕겨내는 반탄력이 여간 세찬 게 아니었다. 다행히도 자신의 힘을 삼 할밖에 쓰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장검 까지 튕겨져 놓칠 뻔했다. 영경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생각보다도 강한 적을 만난 것이다. 그녀는 지면을 박차고 연자천운 (燕子穿雲)의 자세로 허공 이 장 높이까지 솟구쳐 오르더니 훌떡 몸을 뒤집고 황곡마공(黃鵠摩空) 의 기세로 낙하하면서 도인의 어깻죽지를 수직으로 찔러내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처음과 같이 상대방의 몸뚱이에 미처 닿기도 전에 칼끝은 튕겨져 돌아왔다. 살 갗을 베기는 고사하고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적의 반격에 대비해서 일격이 실패할 때마다 즉각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렇듯 이삼여 검을 공격했으나, 그녀는 상대방의 털끝 한 개 건드리지도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 고 말았다. 영경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기가 솟구쳤다. 하지만 있는 수단을 다 써가며 공격해도 상대방은 요 지부동이니 도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기가 공격을 퍼부을 때마다 도인은 시종 정면으로 공격자를 응시하고만 있을 뿐, 등 뒤로 돌아서 배후를 공격했을 때도 몸을 돌이켜 정면으로 마주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는 이제껏 단 한 차례의 반격도 가하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영경은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이 도인은 사법(邪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공(氣功)으로 자기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장검이 어느 부위로 찔러들든 지 간에 그는 기막(氣幕)을 그리로 이동시켜 튕겨낸다. 그래서 한 차례 공격도 성공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그녀는 그 즉시 기막힌 검초를 생각해냈다. 일부러 전력을 다 쏟 아 야마분종(野馬分踪)의 자세를 취하고 암암리에 신룡탐조(神龍探爪) 검초를 감추어 곧바로 도사 의 앞가슴으로 찔러든 다음, 무형의 장벽이 있을 한 치 간격에서 급속히 공격력을 회수하면서 무 릎을 굽혔다가 이 장 높이로 솟구쳐 올랐다. 뒤미처 어응입수(魚鷹入手)의 자세로 도인의 정면에 찔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다시 장검으 로 측면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 공겨 검초는 실로 이중 삼중의 변화를 감추고 펼쳐 졌다. 도인은 눈동자 한 번 굴리지도 않은 채 영경의 공격자세를 간파했다. 영경이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르자 그는 낙하지점을 미리 가늠해 두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기 머리 위 삼사 척 높이까지 도약하고서 이내 떨어져 내릴 줄 알았던 공격자는 다음 순간에 오른발로 왼발등을 찍더니 그 탄 력을 빌어 놀랍게도 한 척 높이를 더 솟구쳐 오르는 게 아닌가! 그 신법은 연자삼초수(燕子三抄 水)였다. 예측이 빗나가자 도인은 급히 몸을 틀었다. 영경의 눈에도 목표의 이동위치가 잡혔다. 그녀는 풍취낙화(風吹落花)의 자세로 바꾸어 공중에서 곤두박질치면서 마치 먹이를 채뜨리는 매처럼 머리부터 거꾸로 내리꽂히는 동시에 수중의 장검에 다 오 할의 힘을 넣어가지고 직녀투사(織女投梭)의 검초로써 질풍같이 상대방의 후심(後心)을 찔 렀다. '성공이다!' 칼끝에 닿는 촉감으로 그녀는 이번 기습의 성공을 확신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느닷없이 한 줄 기 흰빛 광채가 번뜩이면서 쨍그렁! 하는 금속성이 그녀의 귀청을 때렸다. 그것은 금속 병기가 서 로 맞부딪는 소리였다. '아차, 당했구나!' 기급을 한 영경은 반사적으로 두 손 두 발로 땅을 구르면서 삼 장 거리 밖까지 빠져나왔다. 볼 품없게도 원후하수(猿侯下樹)의 신법을 써서 적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난 것이다. 가슴이 두근두근, 식은땀을 쭉 흘리고 나서 수중의 장검부터 살펴보았다. 천만다행으로 아버지의 귀중한 보검은 상한 데 없이 온전했다. 이제 써먹을 수단은 다 쓰고 없다. 도대체 이 도인의 약점은 어디 있단 말이냐? 회심의 일격마 저 수포로 돌아가자, 그녀는 장검을 든 손을 축 늘어뜨린 채 망연자실,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도 인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바짝 다가선 도인은 득의만면해서 낄낄거렸다. "너같이 어린 소녀가 그런 꾀를 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떻게 내가 혼원기공(混元氣功) 으로 상대하는 걸 알아채고 배후를 기습 공격했는가 말이다. 정말 놀라운 아이로구나! 막판에 검 기(劍氣)를 써서 호신(護身)했길래 망정이지, 하마터면 고 앙큼한 꾀에 걸려 꼼짝없이 당할 뻔했 다! 자아, 이제 그만하면 써먹을 절초(絶招)는 다 써먹었겠지? 아직도 할 말이 있느냐? 어서어서 고개 숙이고 진 걸 인정해라!" 그제서야 영경은 침입자가 상승검술에 통달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런 검선을 만나지 못해 안달이 났던 그녀였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도인을 보는 순간 정이 싹 가 시고 시종 혐오감만 치솟는 걸 어쩔 수 없었다. 힘으로 상대해 봤자 결과는 뻔했다. 영경은 그만 속이 상했다. 공연스레 독수리만 원망했다. '그놈의 날짐승, 가려거든 일찍 가거나 아예 늦게 갈 것이지, 하필이면 오늘같이 재수없는 날 떠 나버릴 게 뭐람? 이 악다귀 같은 도사한테 걸려서 내가 골탕 먹어야 좋으냐 말이다!' 마음은 다급한데 손쓸 방법은 없다.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눈에선 그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도인은 매몰차게 재촉을 했다. "너 그래도 아직 불복할 테냐? 방금 내 뭐라고 했지? 입김을 한 모금만 불면 네 몸뚱아리는 몇 장 밖으로 날려보낼 수 있단 말이다! 거기가 어디쯤인지 잘 알고 있겠지? 낭떠러지 바깥 허공이 야! 한 번 더 내 능력을 시험해 보고 날 따라 사부님한테 갈 셈이냐?" 그때쯤 해서 영경은 이 우악스런 도인이 완전히 싫어졌다.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공포심도 불어났다. 두려운 생각에 감히 더 이상 겨루어 보겠단 말도 못 꺼내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난처한 입장에서 어물어물 벗어날 생각만 앞섰다. "어떻게 할 테냐?" 도인이 또 재촉했다. 입을 꼭 다물고서 이때껏 궁리를 하던 이영경, 궁여지책으로 지연작전을 쓰기 시작했다. "제자는 진정코 패배했음을 인정합니다. 지금껏 보잘것 없는 무공을 익혀오면서 검선 한 분이 나타나셔서 제자의 사부님으로 모실 수 있기만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릅니다. 하오나 부친께서 친구분을 만나러 산을 내려가시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돌아오셔서 제가 없는 걸 아시게 된다면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까? 그리고 제게 또 하나 동반자가 있는데 그도 역시 안 돌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도장님의 법호도 모르고 또 제가 모실 그 사부님의 존함이나 계 신 곳도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 제 동반자가 후에 저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도장님, 저 한테 한 달 여유만 주십시오. 그 안에 부친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사연을 말씀드리고 떠나렵니다. 그게 안 되면 제 동반자가 올 때까지라도 기다려 그를 통해 제 사정을 부친께 전해 올리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야만 저도 부친도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 도장님, 그리 허락해 주시렵니까?" "핫핫핫, 어린것이 감언이설로 나를 속여볼 작정이구나. 네가 아버지 얼굴을 다시 보려면 적어도 이삼십 년은 있어야 할 게다. 동반자라니? 흐흠, 그 날질승이 돌아와서 널 보호해 주기만 기다리 는 모양인데, 그놈이 백미화상한테서 몇 년 불경 좀 듣고 변변치도 못한 도행을 익혔기로소니, 내 적수가 될 듯싶으냐? 하기야 네가 그놈을 벗삼아 데리고 가겠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허나 내게는 그놈이 올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 너는 혹시나 내가 무슨 악심을 품고 이러는 줄 아 는 모양인데 오해는 하지 마라. 물론 내 정체도 알 리 없겠지! 그래, 알려주마. 내 법호는 적성자 (赤城子), <곤륜구우(崑崙九友)>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천성이 남과 달라서 평생토록 제자를 거 느려 본 적이 없다. 이번에 널 데리러 온 것도 나 때문이 아니라 내 사형 음소당(陰素棠)의 부탁 을 받아서이다. 네가 그녀의 문하 제자로 들어간다면 그야 천재일우의 다시 없이 좋은 기회를 얻 는 셈이지. 이걸 놓치면 훗날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야!... 너는 그 독수리가 돌아와서 널 찾 지 못할까 봐 걱정인 모양이다만, 그건 네가 모르고 하는 생각이다. 그 짐승은 백미화상의 명을 받고 영원히 너를 호위하도록 되어 있단 말이다. 그놈은 하루에 수만 리를 날아갈 수도 있고 또 영성(靈性)을 깊이 통달해서 네가 어디 있다는 표시만 남겨도 스스로 찾아올 능력이 있는데 뭘 그리 공연한 걱정을 하느냐?... 나는 남에게서 부탁받은 일은 철두철미하게 해주어야 직성이 풀리 는 사람이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널 꼭 데리고 가야겠단 말이다. 그리고 네가 내 사형 을 만나뵙고도 그분의 제자가 되기 싫다면 그때 가서 널 다시 이리로 데려다 주마. 그러니까 지 금은 좋든 싫든 날 따라가야만 된다 이 말이다!" 영경은 잠자코 도인이 지껄이는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러자 자신의 내력까지 아는 도인에 대해 서 마음 한구석에서 신뢰감이 차츰 우러나왔다. '어차피 안 따라가겠다고 앙탈을 부려봐야 헛일이다. 생김새는 상스럽기 짝이 없고 꾀죄죄하지 만 이 도인의 사형 음소당이란 여검선은 반대로 훌륭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도사가 하는 대로 따라가서 그 여검선을 만나본 다음 다시 거취를 결정하는 게 좋겠다. 이 도사는 성미가 꼼 꼼해서 일단 자기 입으로 말한 약속이라면 지키지 않고 못 배기는 기질을 가진 모양이다. 내가 그 여검선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다시 데려다 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이 기회에 견식도 넓힐 겸 세상 구경도 한번 해보는 게 나쁘지는 않겠지!' 영경은 마침내 결심이 섰다. 그래도 몇 가지 조건을 더 걸어 보았다. "도장께서는 기어이 그 여검선에게 절 데리고 가시겠다니 저로서도 안 따라갈 도리가 없군요. 하지만 그전에 도장님은 그 여검선의 내력이 어떻고 또 어디 사는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셔야 합 니다. 그래야만 저도 금안사형이 돌아와서 저를 찾아올 수 있도록 알려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산중턱 해탈암에 제 언니가 한 분 계신데 우선 저를 그리로 데려다 주세요. 언니한테 몇 마디 당부를 해두어서 아버님이 돌아오시더라도 안심을 시켜드려야 하니까요. 마지막으로 또 하나, 도장님의 입으로 분명하게 약속해 주세요. 그 여검선이 계신 곳에 가서 만약 제 마음에 들 지 않을 경우, 반드시 저를 여기로 데려다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안 따라갈 거예요." "허허, 조건 한번 많기도 하구나! 그래, 광혜사태는 나하고 사이가 별로 좋지 않으니까 해탈암에 데려다 달라는 것만 빼고 나머지 조건은 다 들어주지! 우리 사형 음소당은 바로 곤륜파(崑崙派)에 서도 가장 이름난 여검선이고 지금 운남성(雲南省) 변방에 있는 수월령(修月嶺) 조화애(棗花崖)에 서 은거하고 계시다. 이제 알았느냐? 알았거든 어서 편지나 한 장 써 두고 떠나자!" "그 음소당이란 여검선이 저한테 비검술을 가르쳐 주실까요? 비행절적(飛行絶跡)이란 상승검술 말입니다." "아무렴, 그렇구말구!" "아, 이제 생각났어요! 도장님도 그분의 사제라고 하셨죠? 그럼 물론 비검술도 쓰실 줄 알겠네 요. 도장님이 먼저 제 눈앞에서 그걸 보여주세요! 봐서 과연 훌륭한 검술이라면 도사님이 우격다 짐으로 끌고 가지 않더라도 제 발로 따라가죠. 한 걸음에 한 번씩 절하면서 가라고 해도 따라가 겠어요!" "그야 어렵지 않지!" 도인의 입에서 응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이 번쩍 쳐들리더니 한 줄기 흰빛 검광이 허공으로 쏘아져 나갔다. 반공중에서 어지러이 꿈틀대는 그 금광은 주변 일대에 서릿발처럼 싸늘한 기운을 흩뿌리면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났다. 도인의 손가락이 방위를 가리키자, 흰 빛줄기는 암벽 곁에 우뚝 솟은 고목으로 날아가 철썩! 휘 감기는가 싶었는데 어느 틈에 밑둥부터 싹둑 베어내 쓰러뜨렸다. 부러진 가지가 지면에 부딪쳐 튀면서 곁에 늙은 매화 나무를 후려쳤다. 당장 무수한 매화꽃이 비오듯 우수수 떨어지는 가운데 하얀 빛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도인 적성자만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침을 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영경이 품었던 혐오감은 봄눈 녹듯 풀어져 버렸다. 더 이상 볼 것도 없고 조건을 따질 것도 없었다. 그녀는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바람 이 나서 한달음에 동굴로 뛰어 들어가 붓과 종이를 찾았다. 아버지 이령과 여영남에게 각각 편지 한 통씩 써서 남기자는 것이다. 그녀는 여영남더러 불노를 만나거든 운남지방 수월령 조화애에 있는 곤륜파의 여검선 음소당을 찾아서 자기와 만나도록 일러주라는 부탁을 남겼다. 자초지종 미주알고주알 사연을 다 적고 나서 옷가지와 병기 보따리를 챙겨가지고 나왔더니, 적 성자는 기다리다 지쳐 이제 막 발작을 일으키려는 중이었다. 영경은 백미사조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다고 깊이 믿었다. 그래서 적성자를 부르는 호칭까지도 바 꾸었다. "사숙님, 운남성까지 가자면 며칠이나 걸려요?" <사숙>이라고 불러주었더니 적성자가 자못 어깨가 으쓱해지는 모양이었다. "며칠까지 걸릴 게 뭐냐? 그저 두 눈만 딱 감고 무서워하지 말아라! 자아, 그럼 어디 떠나볼까?" 적성자는 한 손으로 영경의 몸뚱이를 냉큼 집어가지고 옆구리에 끼더니만 이얍! 하는 기합소리 와 함께 검광을 일으켜 타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병아리처럼 나꿔채인 채 영경은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이 꾀죄죄한 떠돌이 도인한테 이런 놀라운 재주가 다 있다니!... 그녀의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귓전 에 씽씽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그녀는 살그머니 눈을 뜨고 대담하게 하계(下界)를 굽어보 았다. 구름은 다리를 휘감고, 방원(方圓) 수백 리의 아미산도 한눈에 남김없이 들어왔다. 몇 시간도 안 지났는 데도 벌써 몇 백 몇 천 리를 날았는지 모른다. 수없이 많은 산천과 성곽 도시를 흘려보내고 날도 이미 황혼 무렵인데, 그래도 목적지는 아직도 먼 모양이었다. 하늘엔 별빛이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래 세상에서 치올려다 보는 것보다도 한결 밝아 보였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몇 차례나 이런 기관(奇觀)을 경험했던가. 한창 신바람나서 두리번거리는 판인데, 문득 맞은편 구름 끝머리에서 수십 줄기나 되는 오색 광 채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적성자는 그것을 발견하였다. "이크, 잘못 걸렸구나!" 그는 검광을 거두어들이면서 어느 산등성이로 하강했다. 지상에 내려서자, 영경은 휘둥그래진 눈길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산은 얕으막한 강물로 삼면이 둘러싸였는데 기암괴석 투성이의 골짜기가 자못 깊숙하게 눈앞에 열려 있었다. 계곡은 말할 나위 도 없고 산등성이까지 온통 아름드리 매화나무 숲으로 가득찼다. 숲 속은 파릇파릇 잔디의 새싹이 돋아나와 융단처럼 깔리고 개울가에선 물총새들이 시끄럽도록 지저귀고 있었다. 그것은 강남지방의 한창 봄철 풍경이었다. 맞은편 암벽 모퉁이로 보일 듯 말듯 매화 숲에 가리워진 사찰이 나타났다. 적성자는 영경의 뒷 덜미를 움켜쥐고 재빠르게 암벽 모서리를 돌아 절쪽으로 곧장 치달렸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담장도 제멋대로 허물어졌고 대문짝은 문기둥에서 떨어져 나가 흙바닥에 누운 채 오랜 풍우(風雨)를 맞았는지 절반 남짓이나 삭아버렸다. 추녀의 단청 채색도 거 의 벗겨지고 우중충한 나무 빛깔만 드러내고 있었다. 안뜰에는 이층으로 지은 종루(鐘樓)가 우뚝 서 있었는데 사면으로 터진 창문도 두 짝만 남았을 뿐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종루의 아래층에는 큼직한 나무틀에 북 한 개가 덩그라니 매달려 있는데, 겉에 바른 붉은 색칠이 눈부실 만큼 선명했다. 안뜰은 대웅전 앞까지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전각의 문짝도 떨어져 나가고 안이 휑하게 드러 났다. 영경은 전각 안에 나무로 만든 관(棺)이 몇 개 놓여 있는 걸 어렴풋이 보았다. 아무리 보아 도 이 절은 오래도록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게 틀림없었다. 앞장서서 절 문턱을 막 넘어서려던 적성자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엇?" 그는 앞뜰 종루에 매달린 북을 보자마자 황급히 다리를 움츠리더니 영경의 몸을 옆구리에 들쳐 끼고서 허공으로 솟구친 다음 그 길로 종루까지 날아 들어갔다. 그의 행동은 절 안의 흙을 밟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사숙님....." 영경은 '어째서 이런 데로 왔느냐?' 물으려고 입을 열었으나, 적성자가 연방 손짓으로 말리는 바 람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들릴락말락 속삭였다. "지금 소리를 낼 처지가 못된다. 지금 날아가던 도중, 구름길에서 내 원수 두 놈을 보았단 말이 다. 조금 있으면 그놈들도 이리로 찾아올 게다. 널 데리고서는 아무래도 거추장스러워 안 되겠다. 나 혼자 마주쳐 나가서 상대할 테니까, 너는 여기 꼼짝도 말고 있거라. 옛다, 이걸 받아라. 이 뿌 리는 하수오(何首烏)다. 배고플 때 한 뿌리씩 먹으면 사나흘은 시장기가 돌지 않는다. 두 뿌리니 까 넉넉하겠지... 얘야, 사흘 동안은 절대로 여기에서 떠나면 안 된다. 그 안으로 내가 돌아오지 않거든 그때 가서 네 마음대로 떠나도 좋다. 심심풀이로 절간 바깥에 나가 놀더라도 이 종루 아 래 뜨락을 지나거나 대웅전 안에는 절대로 들어가선 안 된다. 이것은 아주 깊이 명심해서 지켜야 하느니라. 절 밖으로 나갈 때는 종루 창에서 저 건너 담장 머리까지 도약을 해서 나가도록 하고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거다. 이 산은 망창산(莽蒼山)이라 고 부른다. 내가 보기에 이 절간은 아주 상서롭지 못한 곳이야. 네가 잘못해서 위험한 지경에 빠 지더라도 내 몸을 쪼개서 구하러 올 수가 없으니까,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아무쪼록 내 말 명심하고 조심조심 또 조심하거라!" 적성자는 거듭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나서 어린애 팔뚝만한 하수오 두 뿌리를 꺼내놓더니 영 경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일어섰다. 뒤이어 그는 한 줄기 하얀 광채를 번뜩이고서 벽공으로 솟 구쳐 날아가 버렸다. 영경처럼 오기도 있고 당찬 아가씨도 드물지만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적성자의 모습을 뒤쫓으며 그녀는 벌써 마음 속으로 깊이 감복하고 있었다. 과연 비행절적(飛行絶跡)의 검선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영경은 그의 적수가 누구며 또 어째서 이 낡아빠진 절간이 불길한 곳인지 물으려 했으나 입도 벌리기 전에 적성자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가버리고 없는 데야 어쩌겠는가? 당부한 말대로 꼼짝 없이 종루 안에서 앉아 있다가 돌아오면 다시 물을 수밖에. 그녀는 하릴없이 종루 안을 훑어보았다. 온통 거미줄 투성이에다 먼지만 가득할 뿐, 공양(供養) 을 바치던 불감(佛龕)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부서져 있었다. 어쩌다 이런 데까지 왔는지, 그 녀는 자기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생면부지의 떠돌이 도인에게 잡혀 수천 리 밖 허물어진 절간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다니! 그것도 장차 앞일이 길한지 흉한지조차 모른 채로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다니, 심 기가 사못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멀거니 앉아서 기다리기에도 지쳐 몇 번이고 절 밖으로 나가서 경치나 구경해 볼 생각도 들었지 만 적성자가 떠날 때 신신당부하던 말이 떠올라서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 하늘 빛은 어느덧 황혼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적성자는 아직도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시장기 를 느끼자 그녀는 하수오 한 뿌리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맛이 얼마나 달고 향긋한지 모를 지경 이었다. 겨우 반 토막을 먹고 났더니 시장기가 싹 가셔버렸다. 혹시나 적성자에게 무슨 사고라도 생겨서 약속대로 사나흘 안에 돌아오지 못하면 큰일이다 싶 어, 그녀는 입맛을 다셔가며 나머지 토막과 한 뿌리를 품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다. 불상 앞에 놓인 포단(蒲團)을 대충 툭툭 털고서 깔고 앉아 쉬기는 해도 가슴 속에는 수심과 조 바심만 오락가락, 도무지 평안히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서 창가에 기대선 채 저물 어 가는 놀빛을 멀리 바라보았다. 이윽고 천지에 어둠이 깔리더니 얼마 후 동쪽 산마루에는 둥근 만월이 둥실 떠오르면서 밝은 빛 을 사방 천지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달빛은 절 앞 들판을 뒤덮고 수천 그루의 매화 숲에 그림자 를 비껴 드리웠다. 이따금씩 바람결에 실려오는 매화의 그윽한 향기가 영경으로 하여금 저도 모 르는 사이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아아!" 꽃향기에 도취한 그녀는 가슴 속까지 후련해졌다. 온갖 시름도 모두 잊었다. 영경은 절 바깥 매화 숲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맑은 달빛,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는 매화 나무 숲이 어린 그녀를 말 없이 유혹하는 것이다. 한동안 망설이던 영경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적성자가 떠날 때 당부하던 말도 까맣게 잊 은 지 오래였다. 종루의 누각은 지상에서 삼사 장 높이나 되었다. 층계는 어느 세월에 무너져 내 렸는지 썩은 나무토막만이 흙바닥에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아미산에서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가며 경신술을 익힌 몸이었다. 삼사 장 높이라도 제비 처럼 날렵하게 뛰어내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아래쪽보다도 맞은편 담장이 눈길을 끌었다. 종루 일 층 대문으로부터 일 장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창문틀을 딛고 서서 무릎을 구 부렸다가 용수철 튀듯 도약을 했다. 담장 머리를 딛기가 무섭게 그 아래로 뛰어내렸다. 절간 밖은 끝도 모를 승경(勝景)이 펼쳐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밝은 달빛 아래 숨막힐 듯한 매화 향기가 대지에 가득찼다. 영경의 발길은 신들린 듯, 흥겹게 매화나무 숲 속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었다. 요괴와 거인 步明月 古寺鬪疆屍 賞梅花 擒龍得寶劍 밝은 만월의 빛은 사방 천리를 그림같이 맑게 비추었다. 십여 개 별이 드문드문 천공(天空) 아득 히 반짝일 뿐, 달빛이 어린 곳마다 한결 두드러지게 사물의 윤곽이 깔끔하게 돋보였다. 꽃향기에 이끌려 매화나무 숲으로 뚫고 들어간 이영경은 여간 흥취가 돋는 게 아니었다. 가도가 도 울창한 향기의 숲은 끝이 없었고, 영경의 발걸음도 멎을 줄 몰랐다. 한번 떠난 적성자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그가 맞닥뜨린 적수란 어떤 인물들일까? 얼마나 지독 스런 자이길래 적성자와 같은 검선도 당황해서 이런 곳에 몸을 숨기게 만들었을까? 지금쯤 싸움 도 결판이 났겠지. 승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경은 적성자가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밤기운이 점점 써늘하게 느껴지자 그녀는 종루 뒤로 돌아가서 보따리에 싸가지고 온 겹옷이나 껴입고 나와 노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발길을 돌려 매화 숲을 벗어나면서 한껏 기막힌 야경(夜 景)에 도취해 마음이 풀어진 그녀는 자기가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마저 까마득히 잊었 다. 무심결에 그녀의 발걸음은 절간 정문을 지나쳐 들어갔다. 종루 앞에 다다르자, 눈앞에는 몇 아름 은 좋이 됨직한 북 하나가 틀 위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정말 굉장히 큼직한 것이었다. 북의 가죽 면에는 종이조각이 한 장 붙어 있었다. 알아보기도 힘든 꼬부랑 글씨를 몇 자 끄적거 려 놓은 쪽지였다. 영경은 물끄러미 거대한 북을 쳐다보면서 사뭇 이상스런 느낌을 받았다. '거 참 별난 것도 다 있네. 이토록 다 부서진 절간에 어디를 봐도 먼지투성인데 이 큰 북 하나 만 새로 칠한 듯 붉은 빛이 선명하다니, 먼지 한 점 묻지도 않았잖아?' 북 치는 방망이도 제자리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그것 또한 크고 묵직해 보였다. '어디 북이나 한번 쳐볼까?' 심심하던 차에 장난스런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그녀의 손길에 방망이를 막 집어들려는 때였다. 갑자기 대웅전 전각 안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찌익, 찌익! 그 소리는 딱 두 차례 울리고 그쳤으나, 영경은 그만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사방 천 지는 다시 기괴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래도 그녀의 놀란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깊 은 밤 매화 나무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산바람 소리만 시원하게 들릴 뿐인데, 느닷없이 괴수(怪 獸)의 숨결과도 같은 소리가 울린 것이다. 이 황막한 산 속, 다 허물어진 절에 자기 말고 또다른 생물이 숨쉬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반가 움보다 소름끼치도록 불안한 느낌이 앞서는 것은 어인 일일까? 문득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초저녁 이 절에 막 도착했을 때 대웅전 한가운데 관 몇 개가 세워져 있는 걸 얼핏 보지 않았는가? 그 다음 순간, 적성자가 떠나면서 신신당부하던 말 도 꼬리를 물고 기억에 떠올랐다. '이 절은 절대로 상서로운 곳이 아니다!... 네가 위험한 지경에 빠지더라도 나는 구해 줄 수가 없 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어떤 위기를 느꼈다. 갑자기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그 자리에 말뚝처럼 우뚝 선 채, 곁눈질로 전각 안쪽을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교교하게 내리비치는 달빛 그림자 속에 시커 먼 관이 네 개나 우뚝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언제 열렸는지 관 뚜껑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선 채 동정을 살폈으나 더 이상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녀는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 장난삼아 북을 두드려 보겠단 생각마저 사라졌다. 종루의 이 층 누각 으로 올라가려다 문득 사다리가 없다는 걸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까처럼 담장 위로 뛰어올라 창 문까지 도약해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찌익, 찌익! 방금 들었던 그 괴성이 또 한 차례 울리더니 느닷없이 검은 물체가 덮쳐드는 게 아닌가! "이크!" 영경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뒤돌아 볼 여지도 없이 담장 위로 몸을 솟구쳤다. 눈이 휘둥그래져 서 내려다보니, 방금 날아 덮친 것은 괴물이 아니라 큼지막한 박쥐였다. 별것도 아닌 날짐승 한 마리 때문에 기절초풍 놀랐던 것이었다. "피이, 공연스레 호들갑을 떨었구나....." 영경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박쥐란 놈은 그녀를 본 척도 않고 어두운 산 그늘 밑 으로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영경은 문득 바람결에 비릿한 냄새가 실려와 코를 자극하는 느낌을 받 았다. 뒤미처 무엇인가 숨을 토해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슈우, 슈우! 이 무렵 영경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에도 놀란다는 격으로 이제 겨우 진정되었던 가슴이 또 뛰기 시작했다. 두 눈을 화등잔 만큼이나 크게 뜨고 조심조심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아무 런 기척도 없었다. '아무래도 낯설고 외딴 곳에 혼자 있으니까 간덩이가 졸아들어 지레 겁을 먹는 거야.....' 담장 위에서 이제 막 종루 창문으로 건너뛰려던 그녀는 다시 한차례 짙은 비린내를 맡았다. 그 와 동시에 슈우, 슈우! 하는 숨결소리도 뒤통수 가까이서 들려왔다. 후딱 뒤돌아 보던 영경은 그 만 혼비백산을 하고 말았다. "우와아! 아빠" 그녀의 등 뒤에 우뚝 서 있는 것은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촉루(觸婁), 백골의 인간이었다. 시뻘건 두 눈알, 살점이라곤 한 점도 붙지 않은 몸뚱아리에는 온통 초록빛 털이 뒤덮여 있고, 시퍼런 인 광(燐光)을 뚝뚝 흘리는 괴물이 영경의 눈앞에 육박해 들어온 것이다. 그 촉루는 이제 막 새매의 발톱 같은 두 팔을 뻗쳐 등 뒤로부터 덮쳐들기 직전이었다. 허물어진 담장 높이가 칠팔 자 되는 데도 괴물의 가슴까지밖에 닿지 않는 것이다. 혼비백산한 채로, 이제 막 종루로 도약하려는 자세를 취한 영경은 다행히 위기에서도 헛발질은 면했다. 두 다리가 허공에 뜨는 순간, 몸뚱이는 벌써 앞쪽으로 솟구쳐 나아갔다. 그러나 비린내 때문에 숨을 들이킬 여유조차 없어 가슴 속에 탁기(濁氣)가 그득차면서 두 발이 아래로 처졌다. 그녀는 경황 중에도 기지를 발휘했다. 왼발로 오른쪽 발등을 툭 걷어차면서 힘을 쓰자, 낙하하던 몸뚱이는 다시 솟구쳐 누각 위에 다다랐다. 바로<청정점수(淸廷點水)>, 잠자리가 수면을 찍듯 사 뿐히 올라선 것이다. 겨우 두 다리에 중심이 잡히고 몸을 가누는 참인데, 맞은편 전각 안에서 또다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차르르, 차르르! 뒤미처 꽈당, 꽈당!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전각 마룻바닥에 세워져 있는 관뚜껑이 저절로 열려 나뒹굴었다. 슈우, 슈우, 슈우! 그러나 전각 안쪽을 돌아다 볼 틈이 없었다. 담장 바깥에서 덮치려던 촉루란 놈이 어느 새 절 문을 돌아서 뜨락으로 들어오더니 곧장 누각 앞으로 껑충껑충 달려온 것이다. 슈우, 슈우! 찌이, 찌이 싯누런 이빨 사이로 쉴새없이 괴성을 토해내면서 종루 앞에 우뚝 선 촉루는 몸을 장대처럼 곧추 세우고 이 층 다락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하지만 영경이 있는 다락 높이는 지면으로부터 삼사 장 도 넘고, 사다리도 무너져서 없었다. 괴물은 제 키보다도 세 갑절이나 되는 다락 위까지 솟구칠 재주가 없는지 도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대웅전 전각 안에서 또다시 세 놈의 촉루가 껑충거리며 뛰쳐나왔다. 초록빛 털투성이, 시뻘건 눈알, 시퍼런 인광을 철철 흘리면서 앞에 나타난 그놈과 합류하더니, 영경 쪽을 향해 갈구 리 같은 두 팔을 휘저으면서 꼭같은 자세로 장대 뛰듯 도약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악귀의 부르짖음이 절 안팎을 온통 뒤흔들었다. 슈우, 슈우!... 슈우, 슈우! 그 괴성은 먹이를 잡아챈 악마가 득의양양해서 외치는 소리였다. 제아무리 당차고 담대하다는 이영경이지만, 난생 처음 보는 괴물들이 그것도 네 마리씩이나 바 로 코밑에서 날뛰는 몰골을 굽어보자니,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솟아올랐다. 하늘의 도움인지, 천만다행으로 다락의 높이는 너무도 높았다. 게다가 괴물들은 몸놀림이 뻣뻣해 서 도약을 하면서도 무릎이 굽혀지지 않았다. 흉악스런 기세로 솟구쳐 올랐지만, 기껏해야 제 키 두 배 높이까지 솟았다가는 되떨어져 내리곤 하는 것이다. 그 높이에서 다락까지는 아직도 일 장 남짓이나 여유가 있었다. 이영경은 촉루들이 다락 위로 솟아 올라오지 못하는 걸 보자, 겨우 마음을 놓았다. 놀랐던 가슴 이 어느 정도 가리앉은 그녀는 만약에 대비해서 몸을 보호할 만한 무기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 했다. 종루 다락 안을 두리번두리번 찾다보니, 문뜩 허물어진 불감(佛龕)속에 안치된 불상(佛像)이 눈에 뜨였다. '부처님, 절 좀 살려주세요!' 비록 흙으로 빚어졌고 말 못하는 부처님이지만, 다급해진 영경에게는 구원의 화신처럼 비쳤다. 그녀는 불상 앞으로 다가가서 무릎꿇고 빌었다. 어린아이 몸집만큼이나 되어 보이는 토불(土佛)의 뱃가죽이 언제 부서졌는지 구멍이 뻥 뚫려 있 었다. 영경은 그 구멍 속에서 은은하게 초록빛 광채가 비쳐나오는 걸 보았다. '이건 또 무엇일까?' 의아스런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불상의 뱃속에 손을 넣어보았다. 손끝에 섬뜩한 감촉이 닿 자, 그녀는 찔끔 놀라서 잡아뽑았다. 손아귀에 잡혀 나온 것은 칼자루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그 겉면에도 부적(符籍) 같은 것이 한 장 붙어 있었다. 칼자루는 쇠를 벼려 만든 것도, 돌로 깎아 만든 것도 아닌 듯했다. 고풍스럽고도 우아한 무늬가 아로새겨진 데다 암록색(暗綠色)의 광채를 뿜어내어 그것을 쥔 손가락의 윤곽조차 보이지 않게 뒤덮었다. 무엇에 쓰이는지 모르지만 길이는 팔 치가 채 못되었다. 영경은 다급한 중에 더 이상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아내지 못한 터라, 그 칼자루를 쥐고서 다 락 끝으로 돌아갔다. 아랫쪽을 다시 내려다보니 촉루 네 마리는 여전히 도약을 계속하고 있었는 데, 그럴수록 힘이 더욱 솟는지 점점 높이 뛰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 장 남짓 여유가 있더니, 어느덧 그 여유 높이가 삼사 자로 줄어들었 다. 몇 자 간격을 남기고 그놈들은 끝내 뛰어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여덟 개의 갈고리 같은 손이 닥치는 대로 종루의 나무판자를 움켜 뜯어 팽개치고 있었다. "우와아!" 맨 앞에 선 놈이 갑작스레 노성을 터뜨렸다. 아무리 기를 써서 뛰어도 눈앞에 있는 목표물을 손 에 넣지 못하자 성이 난 모양이었다. 그놈은 미친 듯이 으르렁거리면서 종루 아래에 있는 나무기 둥을 부여안고 뒤흔들기 시작했다. 종루를 밀어 쓰러뜨려서 다락 위에 있는 사람을 떨어뜨릴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러자 맛좋은 먹 이를 한 놈에게 줄 수 없다는 듯 나머지 세 놈도 합세를 했다. 우지직! 우지직! 종루가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온통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래 해묵은 데다 수리 한 번 제대로 하 지 않았던 터라 이미 썩을 대로 썩은 건물이었다. 괴물들의 힘은 과연 무지막지했다. 종루 네 귀 퉁이를 버티고 있는 기둥들은 괴물들이 몇 번 부여안고 밀치고 당기자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그 네처럼 휘청거렸다. 영경은 다락의 기둥을 잔뜩 움켜잡고 중심을 잡느라 무진 애를 썼다. 다락 전체가 풍랑에 휩쓸 린 조각배처럼 정신없이 기우뚱거리는 것이다. 창문에 붙어 있던 문짝 두 개도 떨어져 나가고, 지 붕 위의 기왓장마저 와르르 쏟아져 산사태를 일으키듯 먼지구름 속에 떨어졌다.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이대로 있다간 꼼짝도 못하고 괴물들에게 잡힐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둥을 놓고서 엉금엉금 창문 쪽으로 기어가, 몸을 가누어 문틀 위에 올라 섰다. 종루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 담장으로 솟구쳐서 달아날 참이었다. 그녀가 막 창문틀에 몸을 세웠을 때였다. 우지직! 느닷없이 통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누각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 한 개가 드디어 제자리에 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끝장인가!' 절대절명 위기의 순간, 영경은 앞뒤 가늠없이 창문틀을 박차고 담장으로 몸을 날렸다. 담장 위에 올라선 그녀는 누각이 담장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담장도 휩쓸려 무너질 것 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길은 대웅전 지붕 위 용마루에 가서 머물렀다. 용미루 역시 지상으로부터 삼 장 높이가 넘는다. 이놈들 재간가지곤 도저히 뛰어오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곧 제비처 럼 날렵하게 몸을 솟구쳐 용마루까지 날아갔다.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면서 용마루에 찰싹 달라붙 은 채 균형이 잡히자, 발치 아래 종루 쪽을 살그머니 내려다 보았다. 와르르, 콰당! 이윽고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다. 종루가 괴물들의 무서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간 것 이다. 뒤미처 쿵! 소리를 내면서 종루의 대들보 한 개가 거대한 북에 떨어져 꽂혔다. 눈이 부시도록 붉 은빛이 찬란한 북의 가죽이 무참하게 찢어지면서 큼지막한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촉루 네 마리는 당초 누각을 밀어 허물어뜨릴 때부터 미련하게 때려부수는 일에만 정신이 팔렸 는지라, 그녀가 일찌감치 빠져 달아나는 것도 못 본 모양이었다. 이윽고 누각이 와르르 허물어지 자 그놈들은 기왓장 벽돌더미를 헤치면서 먹이를 찾기 시작했다. 강철처럼 억센 네 쌍 여덟 손이 달빛 아래 허우적거릴 때마다 기왓장과 부러진 나무토막들이 어 지럽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한참 동안을 뒤져보고 젖혀봐도 영경을 찾을 도리가 없자 괴물들은 제풀에 성이 뻗쳤는지, 이번에는 애꿎은 북을 가지고 분풀이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손톱에 붉은 칠을 먹인 가죽이 마구 찢겨나가고, 북틀도 산산조각 뜯겨져 나갔다. 그래서 큰 북은 얼개만 겨우 남은 채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우와아, 우와아!" 손에 걸리는 것이 없자, 괴물들은 미친 듯이 노호(怒號)를 터뜨리면서 다시 사방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놓친 먹이는 꼭 찾아내고야 말 모양이었다. 우중충한 대웅전 건물 그림 자가 뜨락 한가운데 비쳤다. 그림자를 눈여겨 보던 한 놈이 문득 대가리를 쳐들더니 지붕 용마루 에 엎드려 있는 먹이를 발견했다. 슈우, 슈우! 찌익! 저들끼리 몇 마디 지껄이고 나서, 그 괴물 네 마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대웅전 건물을 에워쌌다. 그리고 동료에게 질세라 앞을 다투어 지붕으로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그중 한 놈은 전각으로 달려들기까지 부서진 북 앞에 서 있었는 데, 영경을 찾아내고 황급히 달 려나오다 한 발이 그만 북 속을 헛딛고 말았다. 걸레쪽처럼 부서진 북조각은 그놈의 다리에 걸리 적 거리다가 나머지 한쪽 발까지 휘감아 버렸다. 몸의 중심을 잃고 쿵! 소리가 나도록 앞으로 고 꾸라진 괴물은 마음만 다급할 뿐, 여간해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본래 이 촉루들은 시체가 오랜 세월 동안 풍상(風霜)을 겪으면서 강시 (疆屍)로 변한 요물이었 다. 일단 뛰었다 하면 날듯이 빠르지만 뼈마디가 굳어진 터라서 두 손의 움직임만 빼고는 몸뚱이 전체가 그리 민첩하지 못한 상태였다. 무릎조차 구부릴 수가 없으니 한 번 고꾸라진 몸을 쉽사리 일으킬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놈이 버둥거리는 동안에, 나머지 셋은 이미 처마끝 기와 받침을 움켜잡고 지붕 위로 뛰쳐오르기 시작했다. 영경은 여간 다급해진 게 아니었다. 총망 중에 어떻게 괴물들을 막아야 할지 궁리도 서지 않아 얼떨결에 기왓장을 한 겹 벗겨내어 들고서 막 처마끝 위로 대가리를 내민 두 녀석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퍽, 퍽! 기왓장은 괴물의 대가리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우와아, 우와아! 타격을 받은 두 놈이 더욱 흉포스럽게 노성을 터뜨렸다. 기왓장에 맞고서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도리어 성미만 덧들여 놓았는지, 더욱 사나운 기세로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대웅전 역시 오랜 세월을 두고 수리를 해본 적이 없는 터라, 대들보에 서까래조차 이미 썩을 대로 썩어빠진 상태였다. 괴물들이 움켜잡은 기와받침도 흐물흐물 썩어 있었다. 그것을 붙잡은 채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도약을 하려고 힘을 쓰자니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두 괴물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왓장을 흠뻑 뒤집어 쓰고서 땅바닥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 다. 당장에 급한 위기를 모면하자, 영경은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붕 위에 있어 도 안전하기는 틀린 것이다. 다시 살아날 길을 찾아야 했다. 당황한 눈길이 사방팔방을 헤매다가 문득 무너져 내린 종루 쪽에 가서 멎었다. 깨어진 북조각에 걸려 넘어졌던 괴물이 벽돌무더기 속에서 마침내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놈의 손아귀에는 북틀 잔해(殘骸) 속에서 꺼냈는가 싶은 나무상자 한 개가 들려 있었다. 새하 얀 백양목으로 만들어진 그 나무상자는 길이가 세 자 남짓, 두께도 너댓치는 훨씬 넘어 보였다. 나무상자 겉면에는 어렴풋이나마 부적이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넘어졌던 강시는 여간 성이 난 게 아니었다. 잡아먹을 생사람이 눈앞에서 동료들의 수중에 들어 갈 판이니 행여 뒤질세라 달려나오다가 발이 빠져 넘어져서 꼴찌가 되었으니 분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가뜩이나 잔인하고 흉포스런 놈이 울화통마저 터졌으니 시비곡절 가릴 것도 없었다. 손아귀에 들린 나무상자를 닭모가지 비틀듯 우지직! 꺾어서 두 조각을 내고선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리고 두 발로 짓이겨 버릴 셈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런데 다음 순간, 두 조각으로 부서진 나무상자 속에서 한 줄기 자줏빛 광선이 미끌어지듯 빠 져나오더니, 괴물의 허리를 선뜻 휘감아 버리는 게 아닌가! "끼야악!" 세상에 다시 들어보지도 못할 처참한 비명이 터져나오면서, 강시는 몸통이 상하 두 토막으로 잘 려 그 자리에 털썩 고꾸라졌다. 지붕 기와받침을 잡고 올라가려다 굴러떨어진 두 놈은 이제 겨우 다시 몸을 일으키던 참에 동료 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대웅전 뒷곁으로 돌아갔던 한 놈마저 쏜살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시들은 자기 동료가 허리가 끊긴 채로 흙바닥에 쓰러져 있는 몰골을 똑똑히 보았다. 어디 그 뿐인가? 달빛 아래 푸른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자욱하게 안개가 서리고, 그 속으로부터 한 마리 의 자주색 용(龍)이 번개와도 같이 날아드는 것도 발견했다. "까악, 까악!" 세 놈의 강시들은 까마귀처럼 울부짖었다. 더 이상 사람을 잡아먹을 생각도 못하고 일제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아나겠다는 것도 마음뿐, 껑충껑충 두어 발짝도 못 뛰었는데 자줏빛 용은 어느덧 휘몰아 닥치더니 세 놈을 한꺼번에 칭칭 감아버렸다. 우지직! 뼈다귀가 통째로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남은 것이라곤 땅바닥에 흩어진 백골의 무더기뿐이었 다. 강시 넷을 단숨에 처치한 용은 머리를 우뚝 세우고서 대웅전 지붕 위를 노려보았다. 영경의 모 습이 눈에 뜨이기가 무섭게 그 자줏빛 용은 쏜살같이 지붕 꼭대기로 솟구쳐 올라왔다. 영경은 강시들이 용과 싸우는 동안 자기가 위험한 처지에 빠졌다는 사실마저도 잊었다. 이제껏 괴물들에게 쫓겨 위기를 당하면서도 경신술을 톡톡히 익힌 덕분으로 그럭저럭 피해 온 그녀였다. 아무리 흉포한 놈들이지만 결국 죽은 사람의 해골이 오랜 세월을 묵어서 요정(妖精)으로 변신되 었을 뿐이고, 또 몸뚱이를 솟구치거나 구부리지 못하는 것을 잘 아는 터라, 이것들의 손아귀에서 피신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새로 나타난 자줏빛 요룡(妖龍)은 그게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괴물들을 처치해 버리 는 걸 보니 더욱 지독스럽기 짝이 없는 놈인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지 않고 기다려 봐야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솟구쳐서 우선 담장 위로 오른 다음, 다시 절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자줏빛 용도 이미 그녀의 등 뒤까지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영경은 등줄기에 뼛속 깊숙이 스며드는 한기(寒氣)를 느꼈다. 용의 숨결이 와서 닿은 것이라고 생각되자, 절 앞쪽 매화 나무 숲을 향해 죽어라고 달려갔다. 용은 그녀의 뒤쪽 칠팔 자 거리까지 바짝 추격해 왔다. 쉴새없 이 두 다리를 놀리면서도 그녀는 흘낏 뒤를 돌아다 보았다. 과연 무시무시하게 큰 짐승이었다. 몸뚱이가 삼 장이나 됨직한 데다 앞 머리는 다섯 자 길이의 코가 길게 뻗어나왔고, 온몸은 자줏빛 광채로 번쩍이면서 푸른 안개에 휩 싸여 있어, 비늘도 발톱도 보이지 않았다. 영경은 죽어라고 달아나는 판국이니, 더 자세히 볼 여지도 없었다. 그저 저놈의 짐승은 몸통이 길고 크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나뭇가지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 속을 찾아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고 느꼈을 뿐이었다. 때는 벌써 야반 삼경도 훨씬 지났다. 우뚝 솟은 산마루에 떠오른 달덩이는 작지만 그래도 빛은 맑고 선명했다. 매화 나무 숲은 사방 삼 리 넓이쯤 되는 듯한데, 교교하게 내리비치는 달빛 아래 맑은 향기가 온통 숨막히도록 가득찼다. 흐드러지게 엇갈려 핀 꽃떨기 속으로 자줏빛 용 한 마리와 붉은 치마를 펄럭이며 달음박질치는 소녀 한 사람이 사력을 다하여 숨바꼭질을 하는 중이었다. 백설과도 같은 매화의 바닷속을 이리 저리 헤매고 다니는 통에 놀라서 잠을 깬 새떼들이 나래를 치고 우짖었다. 용의 몸뚱이에서 뿜어 나오는 자줏빛 광채가 스칠 때마다, 매화 나무 가지들은 우지직, 우지직! 소리를 내며 꺾여져 떨 어지고 뒤따라 꽃잎이 소나기 쏟아지듯 우수수 흩날렸다. 귓결에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영경은 뒷덜미까지 따라붙은 용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폐부까지 찌르르 하는 한기에 간담이 써늘해졌다. 그녀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적성자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놈의 늙은 도사놈, 어쩌자고 이런 데다 날 팽개쳐서 이런 고생을 시키는가 말이다. 귀신한테 나 물려가라!" 죽어라고 달리다 보니, 앞쪽은 나무 숲이 더욱 울창했다. 그 중에서도 몇 아름이나 됨직한 매화 거목이 정면에 우뚝 서 있었다. 그녀는 몸을 던지듯 고목의 밑둥 등걸이 '사람 인(人)'처럼 갈래 진 틈바구니로 뛰어들었다. 한밤중 반나절을 숨이 턱에 차도록 달음박질친 데다 경황조차 없는 터라, 발 밑도 미처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그녀는 그만 돌부리에 걸려 고꾸라지고 말았다. 두어 바퀴 나뒹굴고 났더니 정신 은 어찔어찔, 팔 다리마저 나른하게 풀려서 도무지 일어설 수가 없었다. 뒤쫓아 오는 용도 막 고목의 갈래진 틈서리로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살기를 단념했다. 입에선 장탄식만 터져나왔다. "이제 끝장이로구나! 아아....." 기진맥진, 손톱 하나 까딱거릴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아예 '날 잡아 잡수!' 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영경은 자기 몸뚱이가 이제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시무시한 용의 아가리가 덥썩 물어뜯기만 하면 끝장나는 것이다. '얼마나 아플까? 어디부터 이빨이 뚫고 들어오려나?' 그런데 뜻밖에도 한참 동안을 기다려도 용이란 놈은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저 매화 나무 가지 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쏴아, 쏴아! 들릴 뿐이었다. 짙은 꽃향기도 바람결에 실려 콧속으로 스며들 었다. 살그머니 눈을 뜨고 보자니, 달빛 가득한 천지에 드문드문 별자리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 심하 게 부는 바람도 아닌데, 매화 숲은 온통 요동질을 치고 꽃잎들이 눈 내리듯 안개처럼 자욱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목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놈의 용은 급하게 뒤쫓다가 두 갈래진 나 무 밑둥에 배때기를 깐 채로 몸통이 꽉 끼여서 오도가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놈은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오려고 꼬리와 머리통을 마구 휘저으며 안간힘을 다해 요동질치는 중이었다. '그렇다. 이건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다!' 영경은 놀란 넋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온통 저릿저릿 쑤셔대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우고, 큼 지막한 바윗덩이가 어디 없는가 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위로 용의 대갈통을 쳐서 박살내겠 다는 생각에서였다. 바위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제일 작다는 게 사오 자 높이나 되고 수백 근, 아니 천 근도 넘어 보이는 것이다. 영경의 힘 가지곤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다. 용은 더욱 사납게 몸뚱이를 비틀어대면서 요동질을 치고 있었다. 그 억센 몸부림에 고목도 질렸 는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저놈의 몸뚱이가 빠져나오는 것도 시간문제다 싶었다. 다급해진 영경은 품속에 손을 넣어 불상의 뱃속에서 얻었던 칼자루 토막을 꺼냈다. 그러나 이걸 로 용을 쳐죽이기는 무리라고 생각한 그녀는 속이 상한 나머지 칼자루 토막으로 바윗덩이를 내려 쳤다. "이런!....." 화풀이 삼아 바윗돌을 치고 나서 다시 생각하니 아까운 노리개만 부러뜨렸다는 아쉬움이 들었 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거의 제 키 만큼이나 한 바위가 쩍!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조화냐? 우연이겠지.....' 그래도 우연치고는 너무도 기묘했다. 칼자루에 맞은 바위가 아무렴 흠집이 나면 났지, 통째로 갈 라질 리는 없는 것이다. 영경은 시험삼아 또다른 바위를 내리쳤다. 과연, 칼자루가 닿기 무섭게 바위는 부서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영경은 우연히 얻은 노리개가 희 대의 기보(奇寶)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세상 천지에 이런 조화가 또 어디 있겠는가! 용은 무섭게 발광하고 있었다. 영경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고서 더욱 사나와진 듯했다. 몸부림을 치면서 마구 휘둘러대는 꼬리바람에 주변의 수백 그루 매화 나무들이 성난 파도에라도 휩쓸린 것 처럼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지 않고 쏴아, 쏴아! 뿌리째 뒤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놈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머리와 꼬리끝으로 땅바닥을 버티고서 힘껏 몸통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천 년 묵은 매화 거목이 뿌리째 으지직! 뽑혀나가더니 허공으로 십여 장 높이나 솟구쳐 오르는 게 아닌가! 자줏빛 용의 신력(神力)은 과연 무섭기 짝이 없었다. 매화 나무를 등짐지듯 업고서 하늘 높이 올라간 그놈은 허공에서 빙그르 선회하더니 푸수수! 몸 을 털어 매화나무를 지상으로 떨어뜨렸다. 여지껏 가지에 매달려 있던 꽃송이들은 극렬한 진동에 못 이겨서 비오듯이 떨어져 나가 밤바람을 타고 뽀얗게 안개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달빛 아래 글자 그대로 오색 꽃비가 내리는 장면이었다. 창황 중에 영경도 한순간이나마 그 절경에 눈길을 빼앗겨 넋잃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고목의 굴레를 벗어난 용은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린 것처럼 한창 정신놓고 꽃비 의 황홀경에 빠져 있는 영경을 향해 곧바로 덤벼들었다. 자줏빛 광채가 눈앞에서 번뜩이는 것을 보고 영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놈은 벌써 몸 가까 이 날아왔다. 이제 한 순간이면 목숨은 없다. 당황한 끝에 그녀는 수중의 칼자루를 번쩍 치켜들었 다. 어찌 되든 결판이야 나고 말 것이다. 망설일 게 뭐 있으랴! 손아귀에 잡고 있던 칼자루를 평 소 금표(金標) 날리던 솜씨로 용의 대갈통을 향해 냅다 집어던졌다. 딱! 야무진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번쩍 튀면서 자줏빛 광채가 사방을 뒤덮어 버렸다. 그까짓 암기 한 개로 저놈의 용대가리가 부서질 리는 만무하다. 그걸 뻔히 알지만 영경은 속수 무책이었다. 빈손으로 어쩔 바를 모르고 허둥대던 그녀는 바로 곁에 커다란 바위 두 덩어리가 서 로 엇갈려 동굴처럼 깊숙이 패여 있는 걸 발견했다. 그 구멍은 두세 자 높이로 뚫려 있었다. 영경은 용이 다쳤는지 어쨌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그 즉시 머리를 수그리고 구멍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화끈해지면서 굴 속 맞은편에 무엇인가 온통 새하얀 몸뚱 이를 가진 괴물이 우뚝 선 것이 보였다. 너무나도 다급한 바람에 사나운 기세로 뛰어드느라 물러설 여지도 없었다. 엉겁결에 그녀는 괴 물의 몸뚱이와 정통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다음 순간, 머리가 터져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어렴풋한 의식 속에 문득 독수리의 울음이 들려왔다. 헛것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싶었다. 하지만 가물가물 흐려지는 정신에 막연하게나마 희망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소리였다. '금안사형, 금안사형이 왔구나!' 눈앞에 있던 하얀 괴물은 어느 새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을 되찾자 굴 바깥으로 뛰쳐나왔 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자신도 몰랐다. 바위 곁에는 하얀 괴물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고, 공중에선 독수리와 용 한 마리가 어우러져 필사적으로 싸우는 중이었다. 깃털이며 비늘이 어지럽게 휘날리는 가운데 우열을 가릴 수도 없었 다. 영경은 독수리가 다칠까 보아 몹시 가슴을 졸였다. 그 불안한 예감은 과연 적중했다. 용의 발톱 이 독수리를 움켜잡은 것이다. 영경은 허리춤에서 연주노(連珠弩)를 꺼내들고서 용의 두 눈을 노려 방아틀을 당겼다. 화살이 날 아들자 용은 한 바퀴 공중제비를 틀더니 독수리를 버리고 두 앞발톱을 벌리면서 와락 그녀에게 덮쳐들었다. "으앗!" 영경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두 팔로 얼굴을 감싸안았다. 다음 순간 몸뚱이가 휘청 기울어지면 서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물 속으로 떨어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 뒷걸음질치던 끝에 매화 나무 숲 곁의 연못으로 빠진 것이다. 물 속으로 잠겨들면서 그녀는 팔다리를 마구 허우적거렸다. 하지 만 수영을 할 줄 모르니 어쩌겠는가? 차가운 물에 뼛속까지 시려왔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꿀꺽꿀꺽 물을 삼키다가 어느덧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빠, 살려줘!' 희미한 의식 속에 아버지 이령의 모습이 떠오르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포근한 햇살 한 줄기가 얼굴에 내리쬐는 바람에 영경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독수리도 없고 용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연못 속에 빠져 죽는 줄만 알았는데, 어찌 된 셈인지 자기는 굴 속 웅덩이 곁에 엎드려 지금껏 잠을 자고 있었던 게 아닌가? 바람결을 타고 꽃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그 햇살은 바위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영경은 아직도 바위굴 속에 혼절한 상태로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 프고 어찔어찔했다. 문득 그녀는 엊저녁에 적성자에게 이끌려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밤새껏 혼자서 백골의 괴물, 자줏빛 용과 싸우던 일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껏 몽롱 하기만 한데, 몸이 현재 이 바위굴 속에 있는 걸 보면 용한테 쫓겨서 마지막으로 뛰어든 일은 분 명코 사실이다. 그러나 하얀 괴물과 맞부딪쳐 기절했다면 그놈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건 아무래도 꿈이 아니야!' 영경은 살그머니 일어섰다. 바깥에는 아직껏 그놈의 용이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므로 겁이 나서 감히 굴 밖으로 나갈 엄두도 못 내고 한참 동안 기척을 살펴보았다. 온몸이 저릿저릿 쑤시고 아 팠다. 웅덩이 물에 젖었는지 웃저고리가 온통 축축했다. 밖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제서야 용기를 내어 살금살금 기어나갔다. 어느 새 태양은 중천에 높이 떠서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샘물 흐르는 소리와 매화 나무 가지 에서 온갖 산새들이 재잘재잘 지저귀고 있을 뿐, 텅빈 산은 적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영경은 긴장 을 풀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사면팔방 기웃거려 보았으나 온 산에 활짝 핀 매화만 눈에 가득찰 뿐이었다. 가지 끝이 흔들릴 때마다 무르녹은 향기와 함께 서너 떨기가 소리도 없이 흩어져 내렸 다. 한낮의 매화 숲이야 절경이지만, 그것을 감상할 만한 마음이 아니었다. 두려움과 놀라움, 아직껏 전신에 배인 위기감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간밤의 싸움터를 살펴보기로 작정했다. 도대체 어제 있었던 일들이 사실인가, 헛것인가? 얼마 멀리 가지 않아서 영경은 숲 속 한가운데 큼지막한 웅덩이가 패인 것을 발견했다. 둘레가 이삼 장을 훨씬 넘는 큰 웅덩이였다. 주변에는 매화 꽃잎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 자리는 어젯밤 밑둥이 갈래진 매화 고목이 서 있던 장소였다. 용은 그 갈라진 그루터기에 끼여서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뿌리째 뽑아 던지고 나서 자기를 쫓아 왔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떨리기 시작한 가슴을 억누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떨어진 곳에는 과연 아름드리 고목 한 그루가 뿌리를 온통 드러내고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직도 생명이 끊긴 줄 모르는 꽃떨기가 무수히 매달려 한낮의 햇빛을 받으면서 자랑스럽게 사람의 눈길을 끄는 것이었 다. 어젯밤 도망쳐 뛰던 길을 되밟으면서 영경은 새삼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화 나무 숲은 한 줄로 길을 낸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꺾이고 부러진 나뭇가지와 꽃잎들이 온통 땅을 뒤 덮고 있었다. 간밤의 무시무시한 싸움터를 눈여겨 보면서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절문 앞까지 이르렀다. 가슴 속에서 또다시 고동이 뛰기 시작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뜨락에는 허물어져 내린 종루의 잔해가 쌓여 있고, 기왓장 벽돌더미 곁에는 백골이 한 무더기로 남아 있었다. 퀭하니 움푹 패인 눈,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이빨을 드러낸 몰골이 영경에게 또 한 차례 공포심을 안겨다 주었다. 그녀의 전신에 식은땀이 솟았다. 더 이상 그 흉칙스런 몰골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뛰쳐나왔다. 매화 나무 숲 속으로 다시 달음박질쳐 들어와서는 그만 울음이 터져버렸다. '이젠 어쩌란 말이냐? 밤만 되면 요괴들이 또 숱하게 쏟아져 나올 텐데, 적성자는 돌아오지 않 고 나갈 길조차도 모르니! 이 황막한 산중, 무서운 절간에서 어떻게 또 밤을 지새야 하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설움이 복받쳤다. 꺼이꺼이 서럽게 한참을 울고 났더니 갑작스레 시장기가 돌았다. 어제 먹다 남은 하수오 반토막을 찾으려고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제서야 영경은 불상 뱃 속에서 얻었던 칼자루가 생각났다. 그건 정말 다시 얻기 힘든 보배가 아니었던가? '그걸 도대체 어쨌지? 그렇구나, 어젯밤 다급한 김에 암기삼아 용한테 집어던졌어! 지금 용이 자 취도 없이 사라진 걸 보면 그 신통한 칼자루에 얻어맞고 도망친 게 분명하다. 그토록 신묘한 보 배를 얻자마자 잃어버리다니, 너무 아깝지 않은가, 다시 한번 찾아보자!' 그녀는 배고픈 것도 잊고 당장 바위굴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바윗덩어리 두 개가 엇 갈린 곳에서 일 장 남짓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그녀는 햇볕 아래 한 줄기 자줏빛 광 채가 번쩍 빛나는 것을 발견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놈의 용이 아직도 저기 있었구나!' 영경은 혼비백산, 머리터럭마저 곤두섰다. 두 번 다시 생각할 것도 없이 그길로 돌아서서 달아나 기 시작했다. 거의 일백여 걸음이나 뛰었는 데도 뒤쪽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우뚝 멈춰 서서 동정을 살 폈으나 용이 쫓아오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마음 한구석에서 또다시 잃어버린 칼자루 가 아깝다는 생각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살금살금 왔던 길을 되밟아 갔다. 자줏빛 광채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햇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영경은 마음을 다잡고서 용기 있게 접근했다. 그것은 한 자루 의 장검이었다. 자줏빛은 그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이게 웬 칼인가?' 장검을 집어들고 보니, 칼자루가 무척 낯이 익었다. 바로 어제 보았던 그 보배와 신통하게도 똑 같았다. 손잡이 쪽 칼날에는 전서체(篆書體)로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영(紫暎)> '이상하다! 어젯밤에는 분명 칼자루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온전한 보검으로 변했을까?' 의아스런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손잡이를 꼬옥 쥐어보았더니 맞춘 것처럼 손아귀에 딱 들어맞 았다. 정말 신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검법대로 칼을 휘둘러 보았다. 그 즉 시 자줏빛 광망(光芒) 한 줄기가 십여 장 남짓이나 뻗어나갔다. 세찬 빛줄기에 기급을 한 영경은 하마터면 칼자루마저 놓칠 뻔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 키고, 또 한 차례 검무를 추어보았다. 과연 자줏빛 광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십여 장이나 뻗으면 서 햇살을 받고 눈부시도록 빛났다. 영경은 미칠 듯이 기뻤다. 한참 동안 보검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칼집이 없는 것이다. 세상천지에 제일 가는 명검을 <간장(干將)>, <막야(莫邪)>라고 하는데 그 보검 두 자루를 만든 부부가 칼집 을 만들지 않아 비명(非命)에 죽었다. 이 장검은 <간장>이나 <막야>에 못지 않은 명검인지 모른 다. 그런데 역시 칼집이 없으니 어떻게 보관해야 좋을지 막연했다. 그래도 칼집은 나중 문제였다. 이제껏 괴물들한테 죽을 둥 살 둥 쫓겨다니면서 병기 한 자루 없 어 쩔쩔매던 판국이었는데, 뜻밖에도 이토록 신기한 물건을 얻었으니 저도 모르게 호기(豪氣)가 끓어올랐다. '칼이 생겼는데 설마하면 칼집을 못 찾으랴? 산중 어디쯤엔가 숨겨져 있을 게야. 운이 좋으면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보검도 얻었겠다, 한창 밝은 대낮이겠다, 영경은 이제 요괴가 나타나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간 밤에 지나쳤던 길을 더듬어 가며 여기저기 칼집이 떨어졌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한참 헤매던 끝에 그녀는 뿌리째 뽑혀 나뒹굴고 있던 매화 고목까지 다시 찾아갔다. 그때 홀연듯 손에 잡은 장검이 힘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목을 스쳐 지나치자, 칼은 더 욱 세차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이상스럽다 싶어 고목 쪽을 뒤돌아 보니 무성한 나뭇가지 틈새로 햇빛을 받아 번뜩이 는 물건이 하나 눈에 띄었다. 황급히 다가가서 잎새와 나뭇가지를 헤집고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 를까, 고목의 밑둥 갈래진 줄기 사이에 칼집 한 개가 끼여 있었다. 영경은 그제서야 확연하게 깨달아졌다. '아, 그랬구나! 어젯밤 북 속에서 나타난 자줏빛 용은 이 보검이었어! 보용이 바로 이 보검의 화 신(化身)이었던 거야... 칼자루를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그 짝을 맞추려고 날 쫓아왔던 걸 몰랐 어!' 영경은 벅찬 기쁨 속에서도 은근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절세의 신물을 가지고 검술을 연마한다면 아무리 사나운 맹수나 요괴들이 나타나도 무서울 게 없지만 이 칼 자체가 밤마다 요 괴로 변신한다면 그걸 무슨 수로 당해낸단 말이냐? 그녀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하염없이 칼의 손잡이만 쓰다듬었다. '차라리 눈 딱 감고 이 칼을 버릴까?... 아주 땅 속 깊숙이 파묻어 버리면 나타나지 못할 거야... 아니지, 그럴 수는 없어. 간밤의 일을 생각해 봐, 이 칼자루로 암기 대신 용의 머리에 내던졌을 때 화광이 번쩍 튕겼잖아? 그것은 신물이 제몸의 일부와 다시 결합하는 증거였어! 그렇다면 칼자 루의 법력(法力)이 용이 지니고 있던 요기를 제압한 게 분명하다.' 한동안 온갖 생각을 다해 보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끝내 보검을 버릴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졌 다. 마침내 결심이 서자, 그녀는 칼집을 빼내려고 했다. 나무 틈서리에 깊숙이 틀어박힌 칼집은 좀처 럼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들고 있던 장검을 휘둘러 고목의 줄기를 베었다. 아름드리 밑둥은 맥없 이 갈라지면서 잔뜩 조이고 있던 칼집을 내놓았다. 과연 천의무봉(天衣無縫), 장검은 칼집에 딱 들어맞았다. 칼이 그토록 고스란히 제 집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영경의 희열감은 극치에 달했다. 이제 무얼 걱정한단 말이냐? 그녀는 남겨 두었던 하수오 반토막을 꺼내들고 시냇가로 내려갔다. 세수를 하고 몸매무새까지 가다듬고 나서 천천히 물을 떠마시며 요기를 했다. 그리고 다시 장검을 빼어들고선 검범대로 몇 초 연습해 보았다. 칼날이 자줏빛 검광을 무수히 토해내어 햇빛을 받아 끝없는 환상의 광채를 흩뿌렸다. 그렇게나 쑤시고 저리던 온몸의 통증도 말끔히 가셨다. 근육과 뼈마디도 가쁜하게 움직였다. 영경은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곰곰이 궁리를 해보았 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 지긋지긋한 절을 떠나 어디 깊숙한 동굴이나 한 군데 찾아서 머물 고 싶지만, 혹시라도 적성자가 돌아와 자기를 찾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냥 절에 남 아 있자니, 밤중에는 또 귀신들이 나타나 소동을 부릴 게 분명할 터, 그걸 생각하면 단 일각이라 도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여길 떠나자!'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보니 문득 보따리가 생각났다. 아버지 장검과 옷가지와 여비로 쓸 은냥 (銀兩)이 들어 있는 보따리였다. 그것을 종루 다락에 두고 도망친 것이다. 종루가 허물어졌으니까 지금쯤 기왓장, 벽돌 무더기 속에 파묻혀 있을 게다. 그 보따리부터 찾아내야 했다. 이런 대낮에 야 요괴들도 나타나지 못할 테니까. 그녀는 자영검(紫暎劍)을 뽑아들고 칼집은 허리춤에 찔러 넣은 다음 용기를 내어 절로 향했다. 안뜰에 들어서자 먼저 바윗돌 두어 개를 집어 백골의 무더기에 던져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이상 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징그러운 해골들은 진종일 햇빛을 쪼여 누르끼리 한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골치가 어찔어찔할 정도였다. 영경은 손으로 코를 감싸고 그 곁을 지나쳤다. 무너진 종루의 기왓장더미 속에 예상했던 대로 보따리가 파묻혀 있었다. 요행스럽게도 어젯밤 촉루들이 날뛰면서도 그 보따리만큼은 찢어발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보따리를 찾아들고서 곧바로 절을 벗어났다. 잠시라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녀는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서 봇짐은 등에 걸쳐메었다. 이제 할 일이라곤 적성자가 돌아올 때까 지 기다리는 일뿐이다. 어느덧 시각도 느지막한 오후, 미시(未時)가 지나고 신시(申時)초에 이르렀다. 적성자는 여전히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이제 서너 시진만 지나면 해도 저물고 지긋지긋한 밤이 찾아올 것이다. 어젯밤 겪었던 그 끔찍스런 정경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이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이 산을 떠나야겠다고 단단 히 마음을 먹었다. '적성자와 그 음소당이란 여검선은 어차피 나를 제자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없더라도 다시 아미산까지 찾아올 게 분명하다. 내가 여기를 떠나는 거야 실상 요괴들한테 쫓겨 가는 것이니까, 그들도 내막을 알고 나면 날 탓하지 않겠지... 돈도 풍족하게 있으니 우선 이 산을 내려가서 인가를 찾아보자. 돌아가는 길쯤이야 알아낼 수 있을 테지.' 그녀는 중천에 뜬 해를 쳐다보고 낮시간을 어림했다. 그리고 내리막 샛길을 따라서 걸음을 내딛 기 시작했다. 망창산(莽蒼山)은 방원(方圓) 수백 리가 넘었다. 연봉(連峯)이 헤아릴 수도 없이 잇달아 놓인 산 악(山岳)이었다. 영경은 그런 줄 도 모르고 무작정 산길 따라 내려가면 인가를 찾을 수 있으려니 했다. 그러나 산봉우리를 하나 내려가면 앞길은 또 오르막 비탈이다. 그 길은 다른 봉우리로 이어 진 길이다. 게다가 잘못 접어들면 지나쳐 왔던 산등성이로 되돌아 온다. 초행길이라 몇 차례나 헛걸음을 친 끝에 그녀도 요령이 생겼다. 바람부는 방향과 해 그림자를 가늠해서 가야 할 방위를 잡고 계속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산맥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고개를 넘고 산등성이를 봐야 여전히 첩첩산중이었다. 마침내 제비처럼 날렵하게 달리던 그녀도 땀에 흠뻑 젖은 채 지치기 시작했다. 어둑어둑 황혼빛 저물녘까지 그녀는 겨우 칠팔십 리를 나아갔을 뿐이었다. 곧 밤이 오므로 바람 을 피할 만한 장소를 찾아서 노숙(露宿)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산행길을 십여 일이나 걸었지만 끝내 망창산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다행 스럽게도 자영검은 밤에 요괴로 변하지 않았고, 도중에 괴물이나 맹수 따위도 맞닥뜨리지 않아서 안심이 되었다. 산천의 경개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그윽하고도 아름다왔다. 늘상 보이는 매화 나 무 숲 말고 발길을 옮길 때마다 온통 새로운 경치가 눈앞에 그득하게 바뀌어 펼쳐지는 것이다. 인적이 없는 산속이니만치 이름 모를 과실도 숱하게 널려 있었다. 황정(黃精), 하수오(河首烏), 송인(宋仁), 진률(榛栗) 따위의 과일과 열매는 영경의 양식거리가 넉 넉히 되고도 남았다. 이런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녀는 우선 먹을 만큼 먹고 나서 이삼 일 분은 보따리에 따로 챙겨 넣었다. 가다가 새로운 과일을 찾아내면 묵은 것을 버리고 신선한 놈으로 바 꾸곤 했다. 익힌 음식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도 몰랐다. 매일같이 먹는 것이라곤 모두가 신체의 기력을 돕고 수명을 연장시키는 묘약(妙藥)들이라, 몸은 갈수록 거뜬해지고 기분도 상쾌해졌다. 그저 이 산중 을 하루빨리 벗어나서 아미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초조감뿐이었다. 그날도 영경은 수십 리 길을 산중에서 헤맸다. 날은 저물지 않았으나, 일찌감치 쉴 곳을 찾아 하 룻밤 지새우기로 작정하고, 후미진 동굴 같은 데가 없는가 살펴보았다. 한데, 이날 걸어서 올라온 산은 뜻밖에도 펑퍼짐하게 솟구친 민둥산이라, 몸을 깃들일 적당한 장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 산등성이에 올라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문득 울창한 숲 속에 싸여 있는 건너편 봉우 리를 발견했다. 그만하면 계곡 아래 후미진 장소도 있으리라 싶어, 그녀는 민둥산을 내려와서 단 숨에 그곳까지 달려갔다. 과연 산 밑에는 빽빽하게 나무 숲이 들어차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이상하게도 숲 한가운데로 넓이가 이 장 남짓이나 됨직한 대로(大路)가 뚫려 있었다. 길바닥에는 풀 한 포기도 없는데, 두세 아름도 넘는 거목들이 뿌리째 뽑혀서 길섶에 누워 있었 다. 쓰러진 나무만 해도 어림잡아 일백여 그루가 넘었다. 뿐만 아니라 큰길가에서 일 장 남짓한 주변 나무들도 무엇엔가 긁히고 할퀸 것처럼 껍질이 벗겨지고 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의아스런 생각이 들기는 했어도 영경은 아직 세상 경험도 적은 터라, 어째서 황량한 무인지경에 길이 뚫렸고 거대한 수목들이 뿌리째 뽑혀서 나뒹굴고 있는지 생각해볼 여지가 없었다. 그저 여 기까지 오는 동안 사나운 짐승 한 마리도 못 보았기 때문에 담이 커질 대로 커졌을 뿐이다. 길은 일백여 장 길이나 뻗어나갔다. 그리고 길 끝에 다다르자 영경의 눈앞에는 자그마한 벼랑이 가로막았다. 그녀는 별다른 생각도 없이 벼랑 아래로 접근했다. 벼랑 밑에는 오 장 높이쯤 되는 거대한 바위가 병풍처럼 길 곁에 놓여 있었다. 바위 모퉁이를 돌아가 보았더니 큼지막하게 뚫린 동굴이 나타났다. 절간을 떠난 이래, 날마다 밤 을 지새운 곳이라곤 암벽의 틈서리나 숲 속 나무등걸을 비고서 겨우 이슬만 면해 왔던 그녀였다. '옳지, 오늘밤은 바람도 이슬도 안 맞고 푹 자게 되었구나!' 영경은 신바람이 났다. 모처럼 기막힌 숙소를 찾았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소냐? 두 번 다시 생 각할 것도 없었다. 성큼성큼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 봤더니, 이건 또 웬 떡인가. 동굴 한가운데 에는 폭이 칠팔 자나 됨직한 바위가 침상처럼 펑퍼짐하게 놓여 있는 것이다. 그녀는 바위 위에 올라앉아, 주인이나 된 것처럼 의젓하게 보따리를 끌르고 황정과 하수오 등, 오는 도중에 챙겨 두었던 열매를 꺼내어 천천히 씹어먹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굴 밖에는 반월이 둥실 떠올라 나뭇가지에 걸쳐서 맑디맑은 달빛을 쏟아내렸 다. 달빛은 굴 속까지 비춰 들어왔다. 저녁 끼니를 때우고 마음이 풀어진 영경은 그제서야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안쪽 깊숙한 곳에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눈에 뜨이자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며칠 전의 그 위험한 지경이 새삼스레 머리에 떠올랐다. '저게 뭘까? 괴물은 아닌지.....' 겁이 더럭 났지만 그래도 아직 담력이 남아 있는 영경은 돌멩이 한 개를 집어들고 시커먼 물체 를 향해 던졌다. 퍽! 돌멩이가 부드러운 물체에 닿는 듯한 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진흙더미에 놀랐구먼..... 쯧쯧!" 너무도 소심해진 자기 처사에 그녀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혀를 찼다. 그녀는 보따리를 베개 삼아 베고서 보검은 팔과 허리 사이에 놓고 동굴 바깥의 반달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생각에 잠겼 다. 젊은이는 원래 잠이 빠르게 드는 법인 데다 연일을 두고 산행을 했으니 피곤하고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영경은 어느덧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 쨍그렁! 한밤중까지 혼곤한 잠에 빠졌던 그녀는 난데없는 쇳소리에 놀라서 깨었다. 눈을 뜨고 보니 어느 덧 반달도 기울었는지 보이지 않고 천지가 온통 캄캄한 어둠이었다. 방금 그 쇳소리는 그녀가 목 숨처럼 아끼는 자영검에서 난 것이었다. 칼은 그녀의 허리춤을 빠져나와 바위 아래로 굴러떨어진 모양으로, 칼날 절반이 칼집에서 빠져 나온 채 자줏빛 광채를 번쩍이고 있었다. 꿈결에 몸을 뒤채다가 잘못 건드려 떨어뜨린 게 분명했 다. 그녀는 장검을 집어서 칼집에 도로 꽂은 다음 꼬옥 품은 채 다시 잠을 청했다. 하늘은 심상치 않게 어둡기만 했다. 눈을 감고 누워서 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어찌 된 셈인지 정신은 또렷해지 기만 하고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억지로 눈을 질끈 감고 운기를 해보았으나 온몸이 화 끈거릴 뿐, 신기(神氣)도 집중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조바심만 날까? 요 며칠 동안 달빛도 그토록 밝더니 오늘은 어째서 캄캄절벽이 됐 지? 별빛 한 점도 보이지 않고 날씨가 궂은 모양이야... 헌데 비바람 소리조차 없다니.....' 영경이 누워 있던 침상 바위가 놓인 곳은 동굴 어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위치가 아니었다. 바 깥 날씨가 어떤지 싶어 그녀는 바위에서 내려와 어둠 속을 더듬더듬 헤집으며 동굴입구 쪽으로 기어갔다. 영경이 입구까지 접근해서 바깥으로 몸을 빼내려는 그때였다. 쨍그렁! 침상 바위에 놓아 두었던 자영검이 또다시 쇳소리를 내면서 일 장 가웃이나 되는 자색 검광을 뻗어내는 게 아닌가! 영경은 기절초풍을 할 뻔했다. 그 보검이 또 용으로 변해서 달아나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바깥 에 나가 날씨를 알아볼 생각은 천 리 만 리 달아나 버리고, 황급히 돌아와서 자영검부터 움켜안 았다. 칼은 아무 까닭도 없이 저절로 칼집에서 절반이나 빠져나와 있었다. 그녀는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칼을 꽉 부여잡고 요모조모 살피다가, 문득 아버지가 들려준 말 한 마디가 뇌리를 스쳤다. '... 옛부터 진기한 명검은 주인이 위기에 빠지게 되면 저절로 울면서 경고를 해준단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조금 전 꿈결에서 들었던 쇳소리도 같은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영검은 오래 전부터 신통력을 지닌 칼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오늘밤 두 차례나 소리를 낸 것은 자신에게 앞으로 닥칠 흉조(凶兆)를 알려주기 위한 경고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영검을 받들어 눈앞까지 올리고서 사람에게 말하듯 다정하게 질문을 던졌 다. "네가 정말 신통력이 있다면 대답해다오. 오늘밤 나한테 무슨 나쁜 일이 생기겠니? 사실이거든 다시 한 번 울려보렴." 묻는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자영검은 두 손바닥이 찌르르 울리도록 힘차게 쨍그렁! 소리를 내 면서 절반 남짓이나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검신의 자줏빛 광채가 비추는 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다. 검광이 가리키고 있는 빙향은 바로 엊저녁에 들어섰던 동굴의 입구였다. 이상하게도 동굴 입구는 엄청나게 거대한 바윗덩이로 꽉 막혀 있는 것이다. "아이구머니, 이게 웬일이야?" 황급히 달려가서 힘껏 밀어붙였으나 바위는 옴짝달싹도 안했다. 젖먹던 힘까지 다 뽑아 흔들어 보아도 바윗덩어리의 무게는 천 근 만 근이 아닌 듯, 영경은 마치 돌기둥에 달라붙은 잠자리 격 이었다. 그녀는 전신에 식은땀이 왈칵 솟구쳤다. 당황하고 초조한 마음에 어찌한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후딱 뒤돌아 보니 동굴바닥에 한 줄기 흰빛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또 한 번 기급을 했다. 눈길을 모아 자세히 보았더니 그 빛 줄기는 다른 게 아니라 햇빛이 비껴 쏘아져 들어온 것이었다. '아니, 지금이 한낮이란 말일가?' 그렇다. 그녀가 깨달은 것처럼 때는 한창 대낮이었다. 동굴 입구가 바윗덩이로 봉쇄당한 까닭에 암흑천지로 변했을 뿐, 혼곤히 잠든 사이에 밤이 지나고 아침도 훨씬 넘었던 것이다. 바위 틈서리로 비춰든 햇빛으로, 그녀는 희미하게나마 동굴 속의 상황을 판별해 볼 수가 있었다. 엊저녁 자기가 진흙더미로 알았던 그 시커먼 물체도 알고 보니 굴 속 한귀퉁이에 쌓여 있는 들짐 승의 털가죽과 뼈다귀였다. 가까이 가서 조심스레 뒤적여 보았으나, 역겨운 비린내만 코를 찔렀 다. 동굴 입구는 봉쇄당했지만 어디 또 나갈 길이 있을까 해서, 그녀는 자영검을 뽑아들고 햇빛을 칼날에 받아 이리저리 반사시키며 동굴 안쪽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헛수고였다. 출구는 봉 쇄당한 그곳 말고 아무 데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발길은 다시 꽉 틀어막힌 입구 쪽으로 돌아 왔다. 이 동굴이 상서롭지 못한 곳임을 깨닫게 되자, 그녀는 공포심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렸 다. 바위에 걸터앉아 돌 틈서리로 쏘아져 들어오는 광선을 노려보면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그 녀는 문득 희망이 솟았다. 궁리가 떠오른 것이다. '이런 멍청이! 바위 틈으로 기어나갈 수도 있지 않아? 저렇게 햇살이 들어오는 틈서리가 있다면 아주 꽉 막힌 것은 아닐 거야. 어디 올라가 보자!' 수심을 떨치고 영경은 발딱 일어섰다. 살 길이 있으리라 생각하니 정신도 번쩍 들었다. 동굴의 출구를 틀어막은 바윗덩이는 산같이 커다랗지만 그래도 겉면은 울퉁불퉁, 발끝을 걸치고 오를 만 했다. 엉금엉금 기어서 바위 틈서리까지 올라가서 붙잡고 살펴보았더니, 웬걸, 가장 넓은 틈새래 야 겨우 네 치도 안 되었다. 그 구멍으로 바깥이야 내다보이지만 몸뚱이가 빠져나가려면 하늘에 오르기보다도 어려운 일이 다. 영경은 낙심천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절망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광명이 비쳐드 는 그 틈서리에서 내려갈 마음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먹만한 그 구멍이 살아날 길이라고 생각되어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구멍에 얼굴을 바짝 갖다붙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적어도 신선한 바람은 맛볼 수 있으니까. 그때 건너편 산등성이에 웬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람한 체구에 웃통을 훌떡 벗어붙이고 두 손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발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그 사람은 바로 이 동굴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궁지에 빠져 있던 영경은 부처님을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당장 목청을 가다듬고 '사람 살려!' 소리를 지르려다가 그녀는 문득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갑작스 레 의심이 부쩍 솟았던 것이다. '잠깐. ... 이 산속을 내가 벌써 며칠이나 헤매고 다녔는데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들짐승 한 마리 본 적도 없다. 아무래도 이상한걸?... 저것 봐! 맞은편 민둥산 등성이에서 저기까지는 암만 못해도 오 리는 넘어 보이는데, 사람의 몸집이 저렇게 크고 뚜렷이 보일 수가 있어? 거기다 옷도 걸치지 않았는 걸. 필시 요괴란 놈이 아니면 야만인일 거야. 이걸 또 어쩌면 좋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사람 살려!' 소리는커녕 반대로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러는 사이에 나무 숲을 뒤흔드는 발자국소리와 함께 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은 엄청난 거인 이었다. 숲 속을 가로지르면서 이쪽 산등성이로 오르는데, 아름드리 고목 끝은 겨우 그 거인의 가 슴 높이밖에 닿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구머니!" 영경은 저도 모르게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바위 아래로 굴 러떨어질 뻔했다. 그녀는 와들와들 떨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서 구멍 틈으로 다시 거인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거인은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곧장 길을 따라서 동굴 앞으로 걸어왔다. 하늘 높이 솟은 아름드 리 고목나무를 발길에 걸리적거리는 대로 덥썩 움켜잡아 뿌리째 뽑아서 팽개치곤 했다. 그 모양 을 보고서야 영경은 엊저녁 큰길가에 나뒹굴고 있던 일백여 그루나 되는 나무들이 어째서 뽑혀나 갔는지 그 까닭을 알만했다. 바로 이 괴물 같은 거인의 짓이었던 것이다. 영경은 보면 볼수록 오금이 저렸다. 하지만 호랑이한테 물려가더라도 정신은 차리라고 했다. 숨 소리도 죽이고 잔뜩 긴장한 채 바깥을 주시했다. 기인이 동굴 앞으로 다가올수록, 영경도 그 몰골을 더욱 뚜렷이 볼 수가 있었다. 생김새는 온전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몸집을 가진 괴물이었다. 물독만큼이나 커다란 머 리통에 두 눈은 사발만한 데다 초록빛 안광(眼光)이 번쩍거리며, 하늘로 치솟은 들창코는 두 자 길이도 넘었다. 피를 머금은 듯 시뻘건 아가리 밖으로 송곳니 넷이 삐죽하게 뻗어나와 위 아래로 엇물려 있는 데, 당나귀처럼 생긴 귀가 쪽빛 머리터럭을 헤집으며 일 장 가웃이나 뻗어나와 있었다. 다리 역시 삼사 장도 넘는데 굵기가 아름드리 통나무 같았다. 병풍처럼 생긴 두 손을 흐느적거리면서 다가 온 거인은 동굴 입구에 우뚝 섰다. 전신은 온통 서너 치 길이나 됨직한 누른 털로 뒤덮였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십여 장은 좋이 넘어 보였다. 그 몰골을 내다보던 영경은 넋을 잃고 두려움마저 달아나 버렸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지독스러운 비린내가 코를 쿡 찔렀다. 동굴 앞에 바짝 다가선 거인의 몸뚱이가 햇볕 드는 구멍을 막아버린 것이다. 동굴 입구의 높이는 일 장도 훨씬 넘었으나, 거인의 무릎에 겨우 닿을 정도였 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영경은 갑자기 자신의 몸뚱이가 마구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올라타고 있는 바윗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이다. '앗, 위험하다!' 절박한 위기를 느낀 그녀는 지체없이 바위 아래로 굴러떨어지듯 잽싸게 내려섰다. 우르릉! 지면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동굴 속이 뒤흔들리도록 굉음을 내면서 출구를 막고 있던 바윗덩어리 가 굴려지더니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영경은 황급히 침상으로 쓰던 바위 뒤쪽으로 몸을 숨겼 다. 그리고는 한동안 아무런 기척도 없길래 살그머니 바위 모서리로 돌아서 내다보았다. 다음 순 간 영경은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거인의 머리통이 동굴 입구를 꽉 들어차게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초록빛 안광을 번뜩이면서 영경의 눈길과 마주치자, 거인은 소리없이 징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쩍 벌어진 입, 쇠뿔 같은 송 곳니 사이로 역겨운 냄새를 풍기면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혼비백산한 영경은 몸뚱이마저 얼어붙은 듯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숨길조차 굳어져 목이 꽉 막혔다. 천만다행이랄까, 괴물의 머리통은 너무도 커서 동굴 안으로 들이밀 수가 없었다. 이윽고 징그러 운 괴물의 얼굴이 사라지더니 뒤미처 병풍 같은 손아귀가 들어왔다. 황소 넓적다리 만큼씩이나 굵은 다섯손가락이 불쑥 헤집고 들어와선 영경이 몸을 숨긴 바윗덩이를 툭 치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정확하게 영경을 와락 움켜잡으려고 뻗어왔다. 영경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급히 몸을 솟구쳐 괴물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동 굴 왼쪽 귀퉁이까지 기어가서 웅크리고 앉았다. 첫손질을 허탕치자, 그놈은 동굴 안 사면팔방을 마구 헤집으며 움켜잡기 시작했다. 영경은 이미 두려움 같은 것은 잊었다. 이쯤 되면 필사적으로 괴물의 손아귀에 걸리지 않도록 뛰어야 하는 것이다. 정말로 그녀는 정신없이 뛰었다. 다행스럽게도 가냘픈 몸매에 잽싸기 이를 데 없는 경신술을 익혔고 또 두 눈마저 또렷또렷한 영경이고 보니 거인의 손아귀가 제아무리 크 고 억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게 없으니 어쩌랴? 영경은 바람을 일으키며, 미친 듯이 헤집고 할퀴 어대는 손가락 틈새로 요리조리 빠져 달아났다. 반나절을 헤집어도 걸리는 것이 없자 괴물의 털북숭이 손아귀는 별안간에 쑥 빠져나가 버렸다. 말곰과 성성이 斬巨人 馬熊報恩 摘朱果 猩猩隕命 영경이 안심하기에는 아직도 일렀다. 괴물은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동굴 속의 목표를 가늠해 보 더니 재차 손아귀를 들이밀었다. 그짓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항 속에 손을 집어넣고 금붕어를 건 져내려는 것과도 같았다. 영경은 또다시 정신없이 뛰어야만 했다. 괴물은 그녀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번번이 손가락을 스치고 빠져 달아나자, 마침내 울화통이 터졌는지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노성을 지르면서 미친 듯이 마구 손을 내젓기 시작했다. 그것은 움켜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짓쪄 죽여버리겠다는 수작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이 닥쳐왔다. 영경은 한층 경각심을 높이고서 눈알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뛰고 날았다. 아차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될 판이었다. 정신없이 괴물의 손아귀와 동굴 돌벽 틈새로 도망질 치다 보니 어느덧 전신이 후줄그레 땀에 젖어버리고, 온 몸이 욱씬욱씬 저리고 쑤셔왔다. 마침내 그녀도 지친 것이다. 허리에 매달린 장검은 뛸 때마다 팔다리에 걸려 거추장스러웠다. 겨우 주먹질을 피해서 오른쪽 돌벽으로 달라붙는가 싶었는데, 괴물의 손가락에도 이번만큼은 눈 알이 달렸는지 재빠르게 방향을 바꾸어 그물질하듯 훑어오는 것이 아닌가! 영경은 숨을 몰아쉴 여유도 없었다. 또 한 차례 천정 위로 솟구쳐 오르는 찰나, 구부린 두 무릎 사이에 장검이 끼여들고 말았다. 몸의 중심을 잃고 막 고꾸라지는 판에 털북숭이 손가락이 그물 처럼 펼쳐진 채 들이닥쳤다. 일순간이라도 지체했다가는 마늘 쪽 짓이겨지듯 박살이 나고 말 형 편이었다. 그래도 영경은 천생 용기와 담력이 어지간한 소녀이므로 다급한 중에도 기지를 발휘했다. 손바 닥의 그물질이 눈앞에 닥치기 직전에 그녀는 몸을 뒤로 벌렁 젖히고 거인의 손바닥이 지나갈 공 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등이 지면에 닿기도 전에 오른손으로 땅바닥을 짚고서 <금리도룡문(金鯉跳 龍門)>의 신법을 펼쳐 미끄러지듯 수평으로 빠져나와 동굴 입구 바위 틈새로 쑤시고 들어갔다. 쿵! 거인의 손바닥이 애꿎은 돌벽을 후려쳤다. 바위 부스러기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하마터면 이놈의 칼 때문에.....'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영경은 허리에 매달린 장검을 원망했다. 칼자루가 다리에 걸려 넘어질 뻔 했던 방금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녀는 마치 움직이지 말라는 듯이 칼 자루를 잡고 눌렀다. '가만 있자! 내가 어째서 그 생각을 못했지?... 이 보검이 무서운 강시 네 놈을 눈 깜짝할 사이에 힘도 안 들이고 베어버렸잖아! 게다가 신룡(神龍)으로 변화하면 검망(劍芒)이 십여 장이나 뿜어나 오는 칼인 걸! 이걸 안 써 보고 언제까지나 저놈의 손하고 숨박꼭질을 할 거냐? 이런 멍텅구리!' 생각이 마침내 자영검에 미치자,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휴, 멍청이 같으니!" 그녀는 선듯 장검을 뽑아들었다. 보검도 오늘은 영웅이 때를 만났다는 듯이 투명한 자줏빛 광채 를 한껏 뻗어 동굴 속을 환하게 밝혔다. 이때 애꿎은 돌벽만 두들겨 부수고 허탕친 거인의 손아귀는 또 한 차례 미친 듯이 구석구석까지 휘둘러 찾기 시작했다. 영경이 몸을 숨긴 동굴 어귀 밖에서는 으르렁, 으르렁! 괴물의 포효가 그 칠 새 없었다. 영경은 장검을 곧추세우고 잠잠히 기다렸다. 과연 얼마 있더니 거인의 손아귀도 무슨 각오가 되 었는지, 스스로 동굴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출구 곁 바위 틈서리에 찾는 목표가 숨어 있는 줄도 까맣게 모른 채. 문득 영경의 두 손이 꿈틀거렸다. 그 다음 순간, 자영검의 자줏빛 검망은 주인의 뜻도 아랑곳하 지 않고 저절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선뜻 괴물의 손가락 두 개를 휘감아 버렸다. "우와아!" 뒤미처 동굴 바깥에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 천둥 벼락치는 비명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굴 속 에서도 쏴! 하고 소나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마치 홍수에 제방 뚝이 터진 것처럼 시뻘건 핏 물의 폭포가 일 장 가웃이나 용솟음쳤다. 황소의 넓적다리 같은 거인의 손가락 두 개가 싹둑 잘 리워 바닥에 뒹굴었다. "우와아! 으와!....." 동굴이 뒤흔들릴 정도로 미친 듯이 질러대는 노호(怒號) 속에 거인의 엄청난 손은 쏜살같이 물 러갔고 동굴 속은 다시 환하게 광명이 찾아들었다. 출구가 환하게 터진 것을 보고서 영경은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간발(間髮)의 순간도 지체해선 안 된다. 비좁은 동굴 안에서 머뭇거리다간 끝장이야. 저놈의 괴 물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거든. 바깥으로 뛰쳐나가 죽기살기로 결판을 내야 해. 이미 저 놈은 손가락을 잘리고 이 보검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알았을 거야. 그렇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것 도 아니다. 만약 저 괴물을 거꾸러 뜨릴 수만 있다면, 이 근방 수백 리 안에 사는 생령(生靈)들을 위해서도 크나큰 해악을 없애주는 결과가 되겠지!' 영경의 가슴 속에선 투지가 용솟음쳤다. 여지껏 공포에 질려서 벌벌 떨고 피해다니기만 하던 자신이 새삼 우스워졌다. 근심 걱정도 구만 리 하늘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생각과 결단은 신속했다. 그녀는 칼집을 등 뒤로 잡아맸다. 동굴 바깥 흙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물질을 하다가 느닷없이 뼛속까지 치미는 아픔에 그만 혼비백산을 해가지고 손을 잡아 뺀 괴물은 자기의 손가락 다섯 개 중 두 개가 잘려지고 없는 것 을 보았다. 굴 속에 있는 놈이 무서운 걸 가지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괴물은 다친 손을 움켜쥐고 아 우성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나 뒤쪽으로 물러났다. 괴물이 일어나는 순간, 영경은 쏜살같이 그놈의 벌어진 두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간단히 말하면 괴물은 산귀신의 일종이었다. 자고로 깊은 산 연못에는 용이나 구렁이가 살고 있 듯이 사람이 없는 심산궁곡 해묵은 동굴에는 의당 산괴(山怪)나 목괴(木怪)의 정령들이 숱하게 도 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이 거인도 바로 그러한 산괴의 부류 가운데 하나로써,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영감(靈感)이 트이고 강대 무비한 힘을 지니게 된 것이다. 영경이 하룻밤 묵으려 들어섰던 그 동굴은 바로 산괴란 놈이 먹을 것을 저장해 두는 창고인 셈 이었다. 산괴는 산중의 야수들을 잡아다가 동굴 속에 가둬 넣고 그 입구를 병풍 같은 바윗덩이로 막아 버려 달아나지 못하게 한 것인데, 어젯밤 영경이 제발로 걸어 들어가 잠자는 것을 산괴란 놈이 새벽녘에 발견하고는 입구를 봉쇄해 놓았던 것이다. 바윗덩이는 무게가 만 근도 넘었다. 영경은커녕 제아무리 날고 기는 야수라도 그걸 움직인다는 것은 꿈조차 못 꿀 일이었다. 산괴가 동굴의 출입구를 봉쇄하는 순간, 영경이 지닌 신검(神劍)은 주인의 위험을 느끼고 칼집에 서 나와 경고를 발했던 것이다. 그럭저럭 시간이 흐르고 깨어난 영경이 동굴의 입구가 막힌 것을 알아챘을 때는 마침 뱃속이 출출해진 산괴가 돌아오고 있었다. 산괴는 평소 늘 하던 대로 먼저 고개를 숙이고 먹이가 있는 지점부터 가늠해 가지고 손을 집어 넣어 영경을 끌어내서 잡아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맛있는 먹이가 발악하고 덤비는 바람 에 손 가락 두 개만 싹뚝 잘리고 말았던 것이다. 생전 처음 당해 보는 아픔에 산괴란 놈은 길길이 날뛰면서 격노했다. 엄청난 두 다리가 내리밟 는 곳마다 바위가 터져나가고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굉음이 울렸다. 두 팔을 휘둘러 치는 곳마다 거목들이 뿌리째 날아갔다. 발광을 하다못해 산괴는 다시 통나무 한 그루를 뽑아들더니 동굴 속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원수놈을 짓이겨서 묵사발을 만들 심산 이었다. 하지만 영경은 벌써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왔던 것이다. 영경은 이내 산괴의 눈에 띄고 말았다. 노발대발, 분기탱천한 산괴란 놈은 그 무지막지한 두 손 아귀를 있는 대로 펼쳐가지고 영경을 와락 움켜잡았다. 그러나 사방 천지 광명세상에 뛰쳐나온 영경이 그렇게 호락호락 잡힐 리가 없다. 날렵한 신법으 로 연거푸 몇 차례 도약을 하고 나자, 벌써 괴물의 손아귀에서 수십 장 거리나 멀찌감치 달아난 후였던 것이다. 도망치면서 그녀는 흘낏 뒤를 돌아다 보았다. 정말 흉악스럽기 짝이 없는 괴물의 몰골이었다. 자 신의 키를 견주어 보더라도 겨우 그놈의 발꿈치 복사뼈에나 닿을까 말까 한 정도였다. 부릅뜬 눈 에는 초록빛 눈동자가 데굴데굴, 함지박만한 아가리는 피를 마신 듯 시뻘겋게 벌리고 두 팔을 내 뻗은 채 무시무시한 기세로 쫓아오고 있었다. 영경은 수중의 보검이 얼마나 대단한 신기(神器)인가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토록 엄 청난 거구에 무궁무진한 괴력을 지닌 놈을 보니 좀처럼 맞서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동굴이 열렸을 때 죽기살기로 결판을 내고 수백 리 안에 사는 생령들을 위해 어쩌고 저쩌고 하던 오기마 저 사그러들 정도였다. 아무리 신검이 매섭다 하더라도 일격에 급소를 찔러 거꾸러뜨리지 못하는 날이면 선불 맞은 범 처럼 날뛸 것은 물론, 당장에 움켜잡혀서 주물럭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녀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 숲만 골라서 마구 헤쳐가며 뛰었다. 산괴는 영경이 제비 날듯 솟구쳐 달아나는 걸 움켜잡을 재주가 없었다. 성미가 터질 대로 터진 괴물은 쉴새없이 으르렁, 으르렁! 울부짖으면서 뒤를 쫓았다. 그 소리는 산악을 온통 진동시키고 메아리쳤다. 마구잡이로 뛰어 달아나던 영경도 기진맥진할 때가 되었다. 아무리 잽싸고 날렵한 재주로 괴물 을 따돌리려 해도 새벽부터 지금 오정 무렵까지, 동굴 속에서부터 이 숲 속까지 젖먹던 힘을 다 뽑아내어 뛰어다녔으니 더 이상 견디어낼 재주가 없는 것이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산괴 역시 추격하다 힘이 달리는지 뒤쫓던 속도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 다. 영경은 커다란 나무 등걸 뒤쪽으로 돌아서자마자 울창한 나무 잎새가지 위로 솟구쳐 올라가서 몸을 감추었다. 급하게 쫓아오던 산괴는 표적을 잃고서 그 자리에 우뚝 서더니 영경이 숨은 나무 를 등지고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영경은 속으로 기뻐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나서 기발한 검초(檢招)로 저놈의 모가지를 뎅겅 잘라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산괴란 놈은 그녀보다 한 수 더 교활했다. 영경이 뽑아 들고 있는 장검에서 자줏빛 광채 가 뻗치는 걸 눈여겨 보아두었던 것이다. 그 빛은 칼을 가진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 다. 그래서 그녀가 바람처럼 도망칠 때도 그 광채는 끊어지지 않고 따라갔다. 뛸 때는 도저히 잡 을 수 없지만 어디로 향해 가는지 그 방향 만큼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산괴는 분명히 나무 위로 솟구쳐 올라간 영경을 보았다. 그러고도 일부러 못 본 척 나무 를 등지고 엉뚱한 데만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해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질로 영경이 숨은 쪽을 향해 접근하자는 수작이었다. 그 나무도 어지간히 크고 높았지만 겨우 산괴의 턱에 닿을까 말까 한 높이에 지나지 않았다. 헐떡헐떡 가쁜 숨을 몰아쉬던 영경은 겨우 호흡이 진정되자, 괴물의 동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그놈은 나무 근처 불과 몇 장 거리까지 뒷걸음질쳐 왔다. 그 정도라면 손을 뻗어도 나무에 닿을 만한 거리였다. 괴물이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경 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영경은 슬그머니 맞은편 나무까지 도약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옳지, 저 나무 꼭대기라면 너끈히 뛸 만하다!' 그녀가 이제 막 솟구쳐 오르려 할 때였다. 뜻밖에도 괴물은 후딱 돌아서기가 무섭게 "우하하핫!" 광소(狂笑)를 터뜨리더니 그 무시무시한 두 팔로 나무의 중동을 껴안는 것이 아닌가! 우지직, 뚝딱! 나무줄기와 가지들이 한꺼번에 부러지고 꺾였다. 영경이 서 있는 곳은 지상으로부터 삼사 장 높이나 되는 가지 위였다. 거기서 건너편 나무꼭대 기까지 도약을 하려는 참에 괴물이 돌아서서 나무와 사람을 통째로 껴안고 비틀어 꺾는 것이다. 그녀는 아연실색을 하고 말았다. 교활한 괴물의 간계에 넘어간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일순의 여유 도 없었다. 그 즉시<요자번신(耀子飜身)>의 신법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오다가, 지상 일 장 거리에 이르러 두 발을 수평으로 뻗고 나무줄기를 걷어차면서 <수사박식(水蛇撲食)>의 기세로 비스듬히 몸을 날렸다. 그 신법이면 넉넉히 건너편 나무꼭대기까지 재도약할 자세가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창황 중 에 신기도 어지러워진 데다가 반나절을 도망치느라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 았다. 그녀는 낙하력을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마침내 땅까지 떨어져 내렸다. 두 발이 막 땅에 닿는 순간, 나무 등걸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요동질쳤다. 괴물이 나무 중동이를 잔뜩 부여안고서 손가락이 잘려진 손으로 피를 철철 흘려가며 방금까지 그녀가 숨어 있던 가지 속을 마구 후벼대는 것이었다. 당초 영경이 검술로 괴물과 상대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도 이놈의 팔뚝이 너무나 길고, 체구 또한 엄청나게 커서 가까이 범접(犯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급소만 노리다가는 칼끝이 닿기도 전에 움켜잡혀 참새 모가지처럼 비틀려 죽기가 십상인 것이다. 설사 요행으로 급소를 찔러 거꾸러뜨렸다 하더라도 자기 또한 그놈의 손아귀에서 살아나 오기는 처음부터 단념을 해야 할 처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껏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자영신검을 손에 넣은 지도 며칠 안 되는 터라 그 신묘한 위력조차 터득하지 못한 상태 였다. 그러므로 영경이 오늘 반나절 동안 숱하게 죽을 고생을 당해 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때마침 괴물은 자기가 빠져나온 것도 못 보고 나무등걸만 잔뜩 껴안은 채 미친 듯이 마구 가지 틈새를 쑤셔대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손을 쓸 절호의 기회였다. 영경은 두 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있는 힘껏 땅을 걷어차면서 <연자천운(燕子穿 雲)>의 신법을 구사하여 허공 사오 장 높이까지 재차 솟구쳐 올랐다. 몸이 괴물의 허리께에 이르 자, 그녀는 자영검을 바로잡고 평생의 기력을 다 쏟아 후려쳤다. 등 뒤로부터 허리를 베어나가는 것이었다. 칼잡은 손이 가로로 휘둘러 친 순간, 자영검은 어느덧 십여 장 길이의 자줏빛 광채로 화하더니 손아귀를 벗어나 날아갔다. "아이쿠!" 영경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실성이 터졌다. 공중에 몸을 날린 채 힘을 써본 적이 없으면서 젖먹 던 힘까지 다 쏟아 후려쳤으니 제대로 목표를 맞출 수 있겠는가! 그건 둘째치고 손아귀에 들려 있던 보검이 어처구니없게도 날아가 버렸다. 너무 힘을 주느라 놓쳐버린 것이다. 아연실색을 한 영경은 다음 순간 본능적으로 살 길을 찾아야겠다고 직감했다. 그 즉시 <풍권잔 화(風捲殘花)>의 기세로 곤두박질쳐 내리자마자 도망갈 방향부터 허겁지겁 찾았다. "우와아!" 칼을 놓친 순간과 동시에 포효를 들은 그녀는 혼비백산, 얼떨결에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자줏빛 의 검망이 괴물의 허리와 나무줄기 중동을 한꺼번에 휘감고 있었다. 영경은 달아날 생각도 잊고 말았다. 괴물의 눈길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넋이 빠져나간 듯 입이 딱 벌어지고 화등잔만하게 휘둥그래진 두 눈동자도 움직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 같았다. 그녀는 자줏빛 광채가 괴물의 허리와 나무 줄기를 단숨에 조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괴물의 포효와 뒤미처 엄청난 굉음이 천지간을 진동시켰다. 꽈당! 철썩! 쏴아! 귀청이 떨어져 나가도록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지면에서 흙먼지가 이삼 장 높이까지 풀썩 솟 아올라 창공을 부옇게 흐려버렸다. 먼지 안개 속에 거대한 나무줄기와 거인의 몸뚱이가 잘려 넘 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영경은 가물가물 눈앞이 흐려왔다. 그녀는 요동질치는 땅 위에 서서 몸을 가누어야겠다고 안간힘을 썼다.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쓰러지면 안 돼! 어서, 어서!' 그리고는 기절하고 말았다. 한참만에야 영경은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다. 그러자 맨 처음 느낀 것은 코를 찌르는 비린내였다. 그 다음으로 몸뚱이를 온통 축축하게 적신 액체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내가 괴물의 손바닥에 떨어졌구나!' 질겁을 해서 눈을 떠보니 푸르른 창공에 흰구름만 한가롭게 떠 있었다. 살그머니 곁눈질로 주변 을 훑어보았다. 괴물은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질퍽한 피웅덩이 속에 엎어져 있었다. 그 몸뚱이에선 지금까지 도 엄청나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샘물처럼 울컥울컥 쏟아지는 핏물이 시내를 이루고 낮은 웅덩이로 흘러 내려가는 것이다. 아까 쏟아지던 소나기도 핏물의 비였다. 영경은 전신이 온통 욱신거리고 저려왔다. 그래도 괴물이 자기의 신검에 베어져 죽었다는 생각 을 하니, 마음은 그렇게 기쁘고 통쾌할 수가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이 처참한 싸움터 의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 휘청휘청 두어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영경은 그만 발길이 딱 얼어붙고 말았다. 슈우, 슈우! 찌익, 찌익! 갑자기 사방 주위에서 짐승들의 우짖는 소리가 들린 것이었다. 영경은 황급히 둘러보았다. 이건 또 무슨 변인가? 그녀의 몸 주위 사방 오륙 장 간격을 두고서 수백 수천 마리의 말곰(馬熊) 떼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지 않는가! 괴물의 시체가 나자빠진 방향만 제외하고 온통 말대가리에 곰의 몸뚱이를 가진 짐승들이 긴 터 럭을 흩날리면서 엎드려 있었다. 몸집도 큼직한 데다 사납고 흉칙스런 몰골에 머리 꼭대기에는 뿔 한 개가 우뚝 솟았다. 뒷발굽을 구부리고 앞발 한 쌍을 나란히 내민 채로 붉은 눈동자를 부릅 뜨고서 영경을 노려보면서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이 말곰의 씨종자는 바로 교마(驕馬), 즉 얼룩말이 암곰과 교배해서 낳은 놈들인데, 교마는 머리 에 외뿔이 돋아 있고 몸통 전체가 얼룩무늬 비늘로 덮였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마치 북을 두드리 는 것처럼 우렁차고 성미 또한 사나와서 호랑이나 표범까지 잡아먹는다. 곰이란 놈 또한 기운 세 기로 이름난 산중의 맹수다. 이 무서운 야수들끼리 교합하여 낳은 놈이 바로 말곰이니, 그 흉맹스런 성미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리라. 어려서부터 아버지 앞에서 응석받이로 위험을 전혀 모르고 자란 이영경이 언제 어디서 이토록 흉악스런 짐승들을 본 적이 있었겠는가? 그것도 한두 마리 같으면 어찌 해보겠지만 수천 마리 떼 를 이루어 삼면으로 에워싸고 있는 판국이니 하늘을 날고 기는 재주가 있더라도 달아나긴 애당초 그른 것이었다. 하물며 거의 한 나절 동안 무진 고생을 겪고 난 끝이라 힘줄도 풀리고 기력도 말라버려, 온몸이 그저 쑤시고 저리기만 하는데 이 맹수의 떼거리와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믿고 의지했던 자영검마저 날아가 버린 판국에 그것을 찾아가지고 상대를 하려 해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저절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기어이 내 목숨은 끝장이로구나!" 그녀는 맹수들에게 산 채로 갈기갈기 찢겨 먹히는 것보다 차라리 바윗돌에 부딪쳐 머리를 깨고 죽는 게 처참한 꼴을 안 보고 나으리라 싶었다. 그럴 셈으로 몸을 일으켰으나 두 다리는 맥이 빠 져 나른하기만 한 것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걸음을 떼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사방을 둘러싼 말곰의 무리들은 옴짝달싹도 않고 있더니 영경이 도로 주저앉는 걸 보고서 도리 어 앞발톱을 모은 채 그녀를 향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영경은 슬금슬금 주변의 기색을 살폈다. 그리고 수천 마리 모두가 자기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서 적지 아니 의아심이 들었다. '이거 참 괴상한 놈들이로구나. 어째서 날 보고 절을 하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앙칼지게 소리쳤다. "네 이놈들! 나 이영경은 신선님께 자영검을 하사받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 괴물과 요사스런 무 리만 전문으로 처치하시는 몸이다. 여기 이 산괴란 놈도 방금 내 손에 두 동강이 나서 죽었단 말 이다! 네놈들, 무지한 짐승이 감히 나를 에워싸다니, 내 보검도 무섭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여기까지 호통을 치고 나서는 엄포를 놓아볼 요량으로 무심결에 등 뒤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문득 손끝에 칼자루가 와서 닿는 촉감을 느꼈다. '이게 또 웬일이냐? 그럼 아까 보검을 놓친 것이 아니란 말인가?... 너무 놀란 나머지 멍청한 생 각을 했던 모양이야.' 사나운 짐승들 앞에서 눈길을 감히 돌려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움직여 더듬었다. 만질수록 칼자 루는 진짜같이 느껴졌다. '꿈이냐, 생시냐?' 지긋이 칼자루를 잡고서 슬그머니 당겨보았다. 챙!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자줏빛 광채가 번뜩였다. 바로 자영검 그 칼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당장 호기가 왈칵 용솟음쳤다. 이 신검이 어떻게 해서 저절로 칼집에 들어왔는지 조차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물 먹은 솜뭉치처럼 나른해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서 영경 은 수중의 장검을 말곰의 무리에게 겨누며 냅다 호통을 질렀다. "어서 물러들 가지 못할까! 말 안 듣는 짐승은 이 보검을 맞을 줄 알아라. 어떤 놈이 나설 테 냐?" 과연 말곰떼는 그 보검을 몹시나 두려워했다. 칼집에서 뽑혀 나오기가 무섭게 벌써 십여 장씩을 쏜살같이 뒷걸음질쳤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흩어지지 않은 채, 하나같이 땅바닥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만 계속했다. 영경은 갈수록 요령부득이었다. '도대체 이 야수 떼는 무슨 생각으로 날 에워싸고 있단 말이냐? 하는 짓거리를 보면 나를 해칠 뜻은 없는 모양인데.' 그녀는 또 한 번 호통을 쳤다. "네놈들이 나한테 절을 하는 걸 보아하니 내 성미를 건드릴 생각은 아닌 듯하구나. 그럼 내게 무슨 간청할 일이라도 있단 말이냐?" 말곰들은 그 말을 듣자 과연 그렇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제히 앞발을 들어 영경의 등 뒤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 보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등 뒤에 있는 것은 산괴의 시체다. 문 득 연상되는 것이 바로 엊저녁 동굴 속에서 보았던 짐승들의 털가죽과 뼈다귀의 무덤이었다. 영경은 겨우 마음이 조금 놓였다. "너희들은 내가 저 괴물을 죽여 주었다고 감사하는 뜻에서 절을 하는구나. 그렇지?" 말곰들은 또 연신 머리를 굽신거렸다. 무리 중에서 제일 덩치가 큰 두 말곰이 영경의 면전까지 무릎걸음으로 몇 발짝 나오더니 그녀에게서 아무런 기색이 없는 걸 확인하고 또 다가왔다. 이윽 고 삼사 장 거리에 이르러서는 넙죽 엎드려 앞밭톱을 공손히 내밀었다. 영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마리가 분명 말곰들의 우두머리로구나. 하는 짓을 보니 내 장검이 아주 두려운 모양인 데... 어디 어쩌나 보자!' 영경은 장검을 거두어 꽂고 나서 물었다. "내가 너희들의 원수를 처치한 것은 사실 우연이었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나한테 감사하는 마음 을 받아들여 무엇에 쓰겠느냐? 더구나 괴물이 죽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무 상관도 없는 노릇이 다. 그러니 어서들 돌아가거라. 여기서 언제까지 어쩌자는 게냐?" 그러자 큰 말곰은 고개를 내젓더니 뒤로 돌아서서 두어 번 발끝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입 으로는 북소리와 같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곧이어 십여 마리의 말곰이 영경의 등 뒤로 돌아 쏜살 같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였다. 땅이 울리고 나서 요란한 북소리 같은 울음이 진동하더니, 좌우 곁에 엎드려 있던 말곰떼가 어지러이 흩어져 사방으로 뛰어가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영경의 등 뒤로 돌아와 엎드렸다. 영경은 짐승들의 행동이 너무도 뜻밖이라 화들짝 놀라서 돌아섰다. 등 뒤에 숨어 엎드린 놈들은 너 나 할것없이 앞발로 다시 앞 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또 한 차례 맴을 돌았다. 어리둥절해서 눈앞에 널브러진 산괴의 시체를 노려보던 영경은 문득 맞은편 산비탈에서 흙먼지 를 일으키면서 쏜살같이 달려오는 말곰 십여 마리를 발견했다. 그놈들 역시 입으로 북소리 같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도망쳐 오는 그 말곰들의 등 뒤에는 수십 장 거리를 두고 또 한 놈의 거인이 발광하듯 노성을 터뜨리면서 휘적휘적 쫓아오고 있었다. 그것 역시 죽은 산괴와 몸 집도 형체도 꼭같이 생긴 괴물이었다. 영경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 녀석들의 간청이란 게 알고 보니 또 한 놈을 마저 죽여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맥도 풀리고 기력도 다 빠져, 바람만 불어도 흐느적거릴 판인데 어떻게 저 무지막지스런 놈을 또 상대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일은 이미 코앞에 닥쳐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국면이었다. 그녀는 섣불리 나서지 않고 황망히 가까운 곳의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기면서 자영검을 뽑아들었다. 기회를 보아 능소능대하게 상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산괴는 본래 암수 한 쌍이었다. 이 괴물 부부는 망창산의 큼직한 석동(石洞)을 집 삼아 살면서 말곰을 주식으로 잡아먹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숫놈이 저장 동굴로 먹이를 가지러 떠난 후 한 나절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지라, 석동에 남아 기다리던 암놈 산괴는 지치고 허기가 저서 미 칠 지경으로 속을 끓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산등성이 여기저기서 말곰들의 우짖는 소리가 다른 때와는 다른 것을 보고 암놈은 석동 밖으로 나와 보았다. 확실히 말곰들의 거동은 수상했다. 평소 같으면 석동 부근에 얼씬도 안 하던 놈들이 오늘따라 겁도 없이 얼씬거리고 떠들고 있는 것이다. 이건 자기를 얕보아도 너무 얕 보는 짓거리라고 암놈은 생각했다. 숫놈이 아직 오지 않아 울화통이 치밀대로 치민 암놈 산괴는 홧김에 말곰들을 쫓기 시작했다. 자기가 말곰에게 유인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추격한 것이다. 달아나던 말곰 중에 뜀박질이 느린 놈 하나가 마침내 산괴한데 잡혔다. 암놈 산괴는 말곰의 몸 통을 움켜잡고 한 입에 물어뜯어 피를 빨아마신 후 내팽개치고 나서 또다시 앞서 달아난 말곰떼 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암놈 산괴가 막상 눈앞에 나타나자, 영경은 그 흉악스런 기세에 벌써부터 질려버렸다. 먼젓번 놈 을 죽였을 때만 하더라도 구사일생 요행으로 그렇게 되었을 뿐인데, 이번에는 지칠 대로 지친 몸 으로 상대를 해야 할 판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산등성 숲 속까지 말곰을 뒤쫓아 온 암놈 산괴는 드디어 수놈의 시체를 발견했다. "우와아!" 온 숲이 뒤흔들릴 정도로 사납게 포효를 터뜨리더니, 그놈은 말곰을 쫓는 대신 흙바닥에 널브러 진 숫놈의 동강난 몸뚱아리를 부여안고서 미친 듯이 날뛰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초록빛 두 눈에 서는 주먹만큼씩이나 커다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리 흉악한 괴물이더라도 부부간의 정분 은 깊고 애틋한 모양이다. 한동안 비통하게 울부짖고 길길이 날뛰던 암놈 산괴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울음을 멈추고 숫놈의 상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원인을 알아보려는 심사인 듯했다. 한참 고개 숙이고 살피던 암놈은 갑자기 천둥치듯 노성을 터뜨리면서 발광했다. 부근의 나무며 바윗덩어리를 닥치는 대로 움켜 잡아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아름드리 통나무가 뿌리째 공중을 어 지럽게 날고, 흙먼지, 바위 부스러기는 우박처럼 마구 쏟아져 내렸다. 그 광경을 숨어서 바라보던 영경은 심장의 고동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놈은 먼저 놈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난폭스런 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면팔방, 미친 듯이 날뛰던 암놈 산괴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바윗더미 뒤편에서 한 줄기 광채가 번뜩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영경이 들고 있는 자영검에서 뻗어나온 자줏빛 검 망이었다. 암놈은 본능적으로 남편을 죽인 원수를 알아보았다. 몸뚱이가 돌아서기 무섭게 쏜살같이 영경이 숨어 있는 바윗더미로 덮쳐들었다. 한동안 넋빠진 듯 암놈의 광태를 바라보던 영경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느 틈엔가 괴물 이 정면으로 덮쳐온 것이다. 너무도 빠르고 갑작스런 공격이라, 그녀는 순간적으로 당혹감과 공포 심에 휩싸였다. 이놈의 괴물은 팔이 너무도 길다. 칼을 써서 정면 공격으로 맞서다가는 칼끝이 닿기도 전에 먼 저 얻어맞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이제 기진맥진한 몸을 움직여 도약할 여유도 힘도 없다. 그녀는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순간적으로 이판사판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자기 몸뚱이의 두 배 크기도 훨씬 넘는 손아귀가 들이닥치기 전에 영경은 괴물의 목줄기를 겨누고 자영검을 힘껏 집어던졌다. 뒤미처 마지막 힘을 모두 짜내어 측면으로 일 장 남짓 도약을 해서 상대방의 손아귀 를 벗어났다. 일단 몸을 빼내는 데 성공한 그녀가 재차 몸을 일으켜 안전거리까지 달아나려고 했을 때는 자영 검의 광채가 십여 장 길이로 뻗어 괴물의 목줄기를 휘감아 조이고 있었다. 쿵, 철썩! 검광이 구렁이처럼 산괴의 목에서 스르르 풀려 허공으로 솟자마자 물독만큼이나 커다란 머리통 이 싹둑 끊어져 땅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십여 장 크기의 몸뚱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거 꾸러졌다. 우지끈, 뚝딱! 나무들이 부러져 나가고 바윗더미가 산산조각,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부서졌다. 숲과 하늘을 뿌옇 게 덮은 먼지구름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요괴를 쓰러뜨린 자영검은 무지개처럼 휘황한 광채를 뿜으며 허공중에서 한 바퀴 선회하고 나더 니 스스로 영경의 등에 멘 칼집으로 찾아 들어와서 꽂혔다. 신검의 움직임은 그녀를 펄쩍 뛰도록 놀라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무리 신묘한 보검이라 하더라도 이토록 신통력을 보일 줄이야 꿈에나 상상했는가! 영경은 칼을 풀어서 꼬옥 끌어안고 쉴새없이 입을 맞추었다. 암놈 산괴마저 영경의 칼에 죽어 넘어지자, 말곰의 무리들은 환희작약(歡喜雀躍), 기뻐 어쩔 줄 모르고 아우성치며 날뛰더니, 한꺼번에 산괴의 시체로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아직 두려움이 좀 남았는지 덥썩 접근을 못하다가, 우두머리 두 마리가 앞발로 쳐서 기척이 없는 걸 알고는 수천 마리가 와르르 덤벼들어 마구 물어뜯고 찢어발겼다. 삽시간에 산괴 두 놈은 누르께한 뼈다귀만 남아 산지사방에 흩어지고 말았다. 방금까지 갖은 힘을 다 쓰고 난 영경은 시장기가 몹시 돌았다. 그래서 그녀는 어젯밤에 묵었던 동굴로 돌아가 보따리를 챙겨 갖고 다시 나왔다. 옷가지랑 식량 은 무사한데, 동굴에서 가지고 떠났던 아버지의 보검은 괴물의 손찌검에 당했는지 아깝게도 두 토막으로 부러져 있었다. 산괴의 피로 얼룩진 옷을 벗어버리고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보니, 동굴 입구 주변 삼 장 간 격을 남겨 놓고 말곰의 떼가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영경의 갈 길을 막고 있었다. 영경은 한 손을 칼자루에 얹고서 황정 한 뿌리를 씹으며 물었다. "너희들 원수는 다 갚았는데, 또 어쩌자고 내 갈 길을 막는 거냐? 설마하니 은혜를 원수로 갚으 려는 심사는 아니겠지?" 말곰들은 일제히 머리통을 내둘렀다. 우두머니 두 마리가 영경에게 손짓발짓해 보이는 품이, 그 녀더러 손에 들고 있는 황정 뿌리를 먹지 말라는 뜻 같았다. 우두머리는 다시 아까처럼 붐, 붐! 하고 입으로 북 치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당장에 십여 마리 가 뛰쳐나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또다른 두 마리는 부근에서 큼지막한 나무 한 그루를 뿌리째 흔들어 뽑고서 이빨과 발톱으로 잔 가지와 껍질을 말끔히 벗겨 기둥 같은 통나무로 만들었다. 그리고 두 놈이 각자 한쪽만을 어깨에 메고서 사람처럼 일어나 동굴 앞으로 다가왔다. 우두머리 한 놈이 통나무에 올라타자, 두 마리는 그대로 멘 채 몇 걸음 옮기더니 다시 내려놓았 다. 그리고 나서 영경에게 통나무를 가리켰다. 하지만 영경은 망설였다. 자기더러 통나무에 올라타고 함께 가자는 뜻인 줄은 알 수 있었다. 분 명히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만일에 이 사나운 짐승들이 자기를 메고 가다가 갑작스레 야성 이라도 발작한다면 어쩌겠는가? 또 이것들이 자기를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려는지조차 모르는 헝 편이었다. 그런 점이 불안한 것이다. 바야흐로 때는 정오도 훨씬 넘긴 미시(未時) 초였다. 날이 저물려면 아직 멀었지만, 지치고 피곤 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쉬고만 싶었다. '이 짐승들을 따라가 볼까? 나를 떼메다 준다면, 한시름 덜긴 하겠는데.....' 어느덧 영경의 마음은 승락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사실은 흥미가 동하기도 했다. 그녀의 눈길 이 손에 들린 신검으로 쏠렸다. 이제껏 몇 차례나 길흉(吉凶)을 알려준 적이 있지 않은가? 문득 칼에게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 다. "자영검아, 이 짐승들이 날 데려갈 모양이구나. 내가 따라가도 괜찮겠다면 두 번만 울어다오. 그 리고 안 된다면 한 번을 울리렴. 내 그대로 마음을 정할 테니까....." 그러자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신검은 과연 '쨍그렁, 쨍그렁!' 두 차례 울음을 내는 것이었 다. 영경은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통나무 위에 올라앉았다. 말곰떼들은 영경이 자기네 뜻대 로 따르는 줄 알자 모두 기꺼운 기색으로 붐, 붐, 붐! 환호성을 질렀다. 우두머리 두 마리는 통나무 앞뒤로 갈라서더니 저희들의 언어로 북소리 울음을 내었다. 출발신 호인 모양이었다. 일천여 마리의 말곰떼는 전후좌우로 나뉘어 대오를 이루고 일제히 산을 내려가 기 시작했다. 그들이 달리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산마루를 몇 개 연거푸 넘은 말곰떼는 마지막으로 어느 산봉우리 정상에 올라가서 이윽고 걸음 을 늦추었다. 그 산은 온통 기화요초(奇花瑤草)로 뒤덮여 있었다. 영경 일행이 산마루에 거의 올라서자 길섶에 있던 일백여 마리의 말곰떼가 줄지어 꿇어엎드리거나 사람처럼 서서 일행을 맞이했다. 다시 수십 걸음을 더 나아가자 멀찌감치 커다란 동굴이 보이는데, 거기서도 십여 마리의 말곰들 이 성성이(猩猩) 한 떼를 거느리고 나왔다. 성성이들은 저마다 이름도 모를 산과일을 두 손에 받 쳐들고서 영경 앞으로 날 듯이 달려왔다. 통나무에 올라앉은 채 영경은 손길이 닿는 대로 몇 개를 집어먹었다. 그 사이에도 통나무는 멈 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동굴은 엄청나게 크고도 넓었다. 곰과 성성이 떼들은 왁자지껄 소란을 피우면서 안으로 들어 갔다. 이윽고 통나무가 멈추었다. 땅에 내려선 영경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일백여 장도 넘도 록 넓고 밝은 광장 한가운데, 높이가 이 장, 넓이가 십여 장 가량 되는 평석(平石)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짐승의 가죽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성성이 두 마리가 냉큼 뛰어오르더니 사람처럼 앉고 눕는 흉내를 내고서 도로 뛰어내려 왔다. 그리고는 무슨 소린가 쉴새없이 지껄이며 영경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 뜻을 모를 리가 없는지라, 그너는 바위 위로 뛰어올라 가 앉았다. 아래를 굽어보니까 일천여 마리의 말곰떼와 숱한 성성이들이 동굴 안팎을 가득 메우고 앉아 있었다. 또다시 성성이 십여 마 리가 과일을 가져다 바쳤다. 한창 배가 고팠던 영경은 사양치 않고 집어먹었다. 이것저것 먹다보니까 이름도 모를 신기한 과 일 몇 개가 눈에 띄었다. 과일은 씨를 뺀 용안육(龍眼肉) 만큼이나 큰데 껍질은 핏빛처럼 붉었다. 쪼갠 그 속살은 희고 연두빛 씨가 곱게 박혀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이 입에 넣고보니 단맛과 향기가 입속 하나 가득찼다. 영경은 입맛이 당겨 십여 개를 단숨에 먹어치웠다. 뱃 속까지 싸늘한 청량감이 배어들고, 정신마 저 번쩍 들었다. 여지껏 기진맥진하던 피로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먹어치운 그 열 개가 전부였으므로 영경은 아쉬운 생각이 들어, 껍질을 성성이에게 내보였 다. "이거, 아주 맛있는데, 어디서 좀 더 따올 수 없을까?" 그 말을 듣자, 곁에 서 있던 성성이는 자못 난처한 기색은 띠더니, 이윽고 돌아서서 자기네 동료 몇몇에게 두어 마디 뜻모를 소리를 질렀다. 그 즉시 십여 마리가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반 시진 남짓 지나서야 대여섯이 돌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겨우 붉은 과일 한 개씩만 들려 있었다. 돌아온 놈들이 앞서 분부를 내렸던 성성이에게 과일을 바치면서 무어라고 지껄여댔다. 그 소리 에는 어쩐지 비애가 섞여 있었다. 다음 순간 동굴 속에 들어와 있던 성성이들이 한꺼번에 슬픈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영경은 말곰이나 성성이들이 어떤 의도로 자기를 이곳까지 끌어다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쓰 지 않았다. 그저 사람의 말뜻을 신통하게 알아듣는 게 흡족할 뿐이었다. 게다가 성성이가 붉은 과 실을 따오기만 넋빠지게 기다리느라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동굴 속은 몹시 밝았다. 바깥에선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무는 때인 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동굴의 출입구는 정서향(正西向)으로 뚫려 있었다. 그녀가 한창 뭇짐승들을 부리는 재미에 빠져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였다. 홀연듯 동굴 바깥 서산 에 떨어지는 태양이 불타는 놀빛을 동굴 안으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내 동굴 속은 온통 붉은 빛들로 물들어 버렸다. 그제서야 영경은 날이 저물었음을 깨달았다. 밤중에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짓이다. 그녀는 마음이 다급하고 초조해졌다. 동굴 속은 여전히 대낮처럼 밝았다. 석벽에 저녁놀이 비껴서 경이로운 광채가 찬란하게 어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수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오늘밤은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에나 일찍이 떠나야겠다... 하지만 홀몸으로 인적도 없는 산중에 서 호랑이, 표범보다 더 사나운 짐승떼에 섞여 자야 하다니, 도무지 마음이 놓이질 않는구나. 어 떻게 할까? 저 성성이들은 사람보다 더 크고 무서운 걸.' 이윽고 영경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성성이와 말곰의 무리를 향해 엄포 비슷하게 말했다. "오늘은 날이 저물어서 떠날 수가 없구나. 부득불 너희들 동굴에서 하룻밤을 지내려고 한다. 만 악 내가 여기에 있기를 원한다면, 모두들 동굴 밖으로 나가거라. 밤중에라도 혹시 내 보검이 칼집 에서 빠져나오는 날이면 자칫 너희들의 목숨을 다칠지도 모르니까." 과연 칼 이야기는 위력이 있었다. 일천여 마리나 되는 말곰과 성성이들은 동굴 안이 떠나가도록 왁자지껄 아우성을 치더니 와르르 바깥으로 몰려나가 버렸다. 그리고는 커다란 성성이 한 마리가 동굴 입구에 버티고 서서 지키는 것이었다. 비록 야수들이지만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진퇴(進退) 또한 정연히 해나가는 것을 보자 여간 흐 뭇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시간도 이르고 해서 나중에 잠을 잔 요량으로 바위에서 뛰어내려 와 하릴없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 온 산과 들판은 모두 곰들의 휴식처가 되어 있었는데, 커다란 암벽 모퉁이 아래에는 일백여 마리의 성성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앉아 처량하게 우짖고 있었다. 영경은 짐승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성성이떼의 하는 짓거리로 보건대 무엇인가 의논 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영경이 그쪽으로 걸어가자, 무리 가운데 늙은 성성이 한 마리가 흘낏 고개를 돌리더니 긴 소리 로 우짖었다.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성성이들은 일제히 돌아앉아 땅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쉴새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늙은 우두머리도 영경에게 다가오더니 역시 무릎 꿇고서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영경은 그들이 이끄는 대로 무리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성성이들이 둘러싸고 있던 것은 땅 바닥에 뉘어진 성성이의 시체 다섯 구였다. 우두머리는 앞발로 죽은 성성이의 머리통을 가리켜 보였다. 영경이 허리를 구부리고 살펴봤더니, 다섯 마리 모두가 하나같이 머리에 구멍이 뻥 뚫렸는데, 뇌 수(腦髓)는 어디로 갔는지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모두 무슨 물건에 찍혀 치명상을 입고 죽은 것이다. 영경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다섯 마리 가운데 한 놈은 아직도 붉은 과실 한 개를 단단히 움 켜쥔 채로 죽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문득 아까 자기 요청에 따라서 십여 마리 가 그 맛 좋은 과일을 다시 따러 나갔으나 정작 돌아온 놈은 절반밖에 안 되고, 또 따온 과일도 많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당시 자신은 해도 저물고 했으니까 내일 아침에 성성이더러 길을 안내하라고 해서 그것을 직 접 따먹을 요량을 하고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 보니 여기 죽은 다섯 마리는 그 과 일을 따려다 변을 당한 게 분명했다. 영경은 자기 욕심 때문에 몇몇 생령(生靈)이 희생당했다는 생각을 하니, 몹시 안쓰러웠다. 게다 가 시체의 모습을 보건대 실수 끝에 떨어져 죽은 게 아니라, 이 산중 어딘가 또다른 괴물이나 무 서운 야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짐승의 시체들을 묵묵히 내려다 보면서 그녀는 미안스런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보통 성성이는 사람의 말도 곧잘 지껄일 줄 안다고 하던데, 이녀석들은 알아듣기만 할 뿐 말을 못하니 도무지 물어볼 재간이 없구나... 그렇군! 손짓 발짓에다 말을 섞어서 물어보기로 하자. 만 약에 정말 성성이의 뇌수만 전문으로 파먹는 야수가 있다면 이 보검을 가지고 처치해 주리라. 이 것들의 정성을 보아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곧바로 늙은 성성이에게 물었다. "너희 동료들이 죽은 모양을 보건대 그 붉은 과실을 따다가 무슨 괴물한테 당한 것 같구나. 어 떠냐, 나를 그놈이 있는 데까지 안내해 주면 내 너희들을 위해서 그놈을 처치해 줄 텐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성이의 무리 속에선 미친 듯이 환희의 부르짖음이 터져나왔다. 바야흐로 사방에는 밝은 달빛이 대낮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자기가 또 한번 신검으로 요괴를 처치하리라 생각하니 영경은 당장에 웅심(雄心)이 솟구쳐 오르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앞장서거라!" 그러나 의외로 늙은 성성이가 머리를 흔들며 앞발로 달을 가리켰다. 밤중에는 기동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짐작하고서, 영경은 다시 물었다. "밤중에는 괴물을 찾기 힘들단 말이냐? 그럼 내일 아침 찾아나서기로 할까?" 그제사 우두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성성이들은 한바탕 기쁨의 소동을 피우고 나더니 십여 마리가 동료의 시체를 떠메고서 뒷산으로 사라졌다. 달빛 아래 한참 동안 산보한 다음 영경은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굴 속 텅빈 광장은 여전히 대 낮처럼 환했다. '이것 참 이상하구나. 무슨 보배가 숨겨져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 놀라운 현상에 그녀는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한 시진 남짓 동굴 속을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보았 다. 그렇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영경은 하는 수 없이 단념하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평안한 잠에 떨어졌다. 동굴 속의 기온은 초여름처럼 따뜻했다. 이제껏 허구헌날 기한(饑寒)에 떨며 고생해 오던 때와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녀는 해가 동쪽에 떠오를 때까지 그야말로 세상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윽고 단잠에서 깨어난 영경이 바위 위에 좌정하자, 동굴 어귀를 지키고 있던 성성이가 휘파람 을 길게 불었다. 그 즉시 북소리 같은 아우성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동굴 밖의 말곰떼와 성성이들 이 왁자지껄 소동을 피우면서 밀물처럼 몰려들어 왔다. 갓 잠에서 깨어난 영경은 왁살스런 짐승들의 소동에 펄쩍 뛸 듯이 놀랐다. 말곰의 무리가 대열 을 갖추고 엎드리자, 성성이들은 저마다 꽃과 과일을 가져다 바쳤다. 영경은 조반을 들면서 과일 가운데 어제 먹었던 붉은 것이 한 개도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오늘 성성이들의 원수를 갚아 주겠노라 약속했던 일이 기억에 떠올랐다. 아침 요기를 마치고 나서 그녀는 바위 위에 우뚝 일어섰다. "내 오늘 곧 떠나야 할 몸이지만, 어제 너희들 가운데 다섯이 나를 위해서 그 붉은 과일을 따다 가 죽은 걸 보고서야 그냥 갈 수가 없구나. 어서 앞장들 서거라. 내 그놈의 괴물을 처치해서 다시 는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해주마!" 짐승들이 한덩어리로 아우성을 질렀다. 영경이 보따리를 챙겨 메고서 바위 아래로 뛰어내리자, 말곰들이 양쪽으로 갈라서면서 큰 길을 틔어주었다. 늙은 우두머리 성성이가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말곰과 성성이의 떼거리들은 일 장 남짓 간격 을 두고 그녀 뒤를 따랐다. 우두머리 성성이는 걸으면서도 무시로 뒤를 돌아보았다. 앞선 성성이 무리나 뒤따르는 말곰의 무리들은 모두 한결같이 고개를 수그린 채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울부짖는 소리도 없었다. 적막한 심산궁곡에 오직 흙먼지를 일으키는 발굽소리만 요란하게 울릴 따름이었다. 영경도 묵묵히 늙은 성성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산등성이를 넘어서 어느 절벽 모퉁이를 돌아서 자, 성성이와 말곰의 무리는 약속이나 한 듯 발을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늙은 성 성이만 영경을 데리고 그 절벽을 감돌아서 앞으로 전진했다. 문득 앞길 맞은편에 돌출해 있는 일백여 장 높이는 됨직한 봉우리 하나가 우뚝 눈앞을 가로막았 다. 그 산등성이에는 이름도 모를 기화이과(奇花異果)들이 온통 그득하게 자라고 있었고, 봉우리 곁으로는 자못 길고도 깊은 시냇물이 맑디맑은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있었다. 샘솟는 소리마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상쾌하게 들렸다. 한창 그 맑고 고운 정경에 도취하면서 걸어가려니까 문득 앞장선 우두머리 성성이가 우뚝 발길 을 멈췄다. 성성이의 전신에는 공포에 질린 기색이 완연했다. 웬일인가 물으려 하자, 우두머리는 앞발로 시냇가 비탈에 뻥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영경은 눈에 힘을 모아 그 구멍을 주시했다. 가파른 언덕 비탈 중턱에 뚫려 있는 구멍은 둘레가 육칠 자 가량 됨직한데, 입구부터 어두컴컴한 것이 자못 깊어 보였다. 구멍 옆에는 기괴하게 생긴 암석이 펑퍼짐하니 깔려 있었다. 그 바윗돌 위에 일 장도 채 못되는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는데 이것은 마치 깊은 바닷속 홍산호(紅珊瑚)처럼 생겼으면서도 주황 빛 가지에 푸른 잎이 무성한 게 여간 깔끔해 보이지 않았다. 나무에는 일백 수십 개나 되는 열매 가 달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어제 맛보았던 붉은 과일이었다. 영경으로선 이렇게 괴상한 나무를 보기는 평생 처음이었다. 세상천지 어떻게 바위 위에 나무가 자랄 수 있단 말인가? 문득 귓결에 짐승들의 아우성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흘낏 돌아보니 이제껏 길을 인도하 던 늙은 성성이는 어느 틈엔가 오던 길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것도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지 벌써 일백여 장 거리나 멀어져 있었다. 아우성을 치는 것은 절벽 모퉁이의 동료 성성이들이었다. '그럼 여기가 바로 괴물이 숨어 있는 곳이란 말이지?' 영경은 잔뜩 긴장해 가지고 주변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한참 있어도 아무 수상한 기척이 없 었다. 과일나무를 바라보는 영경의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에라, 모르겠다. 우선 저것부터 먹고 보자꾸나!' 영경이 시내를 건너서 막 바위 위로 뛰어오르려는 참인데, 벼랑 쪽 짐승들의 아우성이 뚝 그쳤 다. 그와 동시에 등에 진 칼집에서 쨍그렁! 소리가 나면서 보검이 마구 꿈틀거렸다. 영경은 깜짝 놀랐다. '이상한 조짐이다!' 군침이 돌던 입안이 금방 싹 마르고 머리터럭마저 곤두섰다. 그녀는 경계심을 한껏 돋구고서 침 침한 구멍 속을 응시했다. 두 방울의 초록빛 점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휙 소리를 내면서 원숭이 비슷한 괴물 하나가 툭 뛰쳐나왔다. 몸뚱이는 황금빛 섬세한 터럭으로 덮였는데 키는 겨우 오륙육 척밖 에 안 되지만 양 팔이 길이는 제 키보다도 길었다. 새 발톱처럼 생긴 손도 가느다랗고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괴물은 금발을 흩날리며 초록빛 광채가 번뜩이는 왕방울 눈동자를 훌떡 까뒤집고 영경을 노려보 더니,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늑대와도 같이 으르렁! 울부짖으면서 발톱을 활짝 펼치고 사오 장 높이까지 솟구친 그 황금빛의 괴물은 영경의 정수리를 겨누고서 덮쳐내렸다. 그 동작의 민첩함이 란 섬전(閃電)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괴물의 공격기세가 너무나도 빠른지라 영경은 미처 방어할 틈도 얻지 못하고 황급히 몸을 틀어 이 장 남짓이나 수평도약을 꾀했다. 그와 동시에 찍어내리던 괴물의 열손가락은 목표물을 놓치고 영경이 서 있던 바위에 꽂혔다. 충격을 받은 바위에선 팍! 소리와 함께 돌부스러기가 사방으로 어 지러이 날았다. 우후우! 발광하는 늑대의 그것과 같은 울음소리가 괴물의 입에서 터졌다. 괴물은 번개같이 방향을 틀고 서 영경에게 재공격을 퍼부었다. 그 동작이야말로 자로 잰 듯 정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무렵, 영경도 벌써 신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자영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한 줄기 자줏빛 광채가 태양과 빛을 다투면서 찬란히 뻗었다. 괴물은 신검의 위력을 익히 아는 듯이 사납기 짝이 없던 공세를 중도에서 딱 멈추었다. 영경이 위치한 지점은 공교롭게도 괴물의 퇴로였다. 소굴로 돌아갈 길이 막히자 그놈은 잽싸게 방향을 바꾸어 영경이 왔던 길로 쏜살같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뒤를 급히 쫓으면서 신검을 날리려는 순간, 느닷없이 곰과 원숭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래서 멈칫하는 사이에 괴물은 이미 어공비행(御空飛行) 수법으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 렸다. 한참 있으려니까 늙은 성성이는 숱한 동료들을 이끌고 왁자지껄 달려오더니 영경 앞에 털썩 엎 드려 큰절을 올렸다. 성성이의 무리 중에는 팔다리가 잘리고 부러지거나 머리통이 터지고 배가 갈라진 놈들이 여럿 섞여 있었다. 그 괴물은 달아나던 길에 원숭이떼를 발견하자 화풀이로 한바 탕 짓밟아 놓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괴물을 놓친 영경은 방금 선수를 쳐서 공격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이 넓고넓은 망창산, 어느 구석에서 그놈의 괴물을 찾아낸다는 말인가? 이대로 소매를 떨치고 떠나자니 남은 성성이들의 운 명이 가련하다. 늙은 우두머리 역시 그녀가 훌쩍 떠나버릴 듯싶었는지 흙바닥에 엎드려 영경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다. 부상을 입은 성성이들도 더욱 애달프게 울부짖었다. 이쯤 되니 영경도 끓어오르는 의협심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우두머리를 향해 다짐했다. "내 비록 갈 길이 바쁘기는 하나, 애석하게도 그놈의 괴물을 놓쳐버렸다. 약속대로 이루지 못했 으니 어쩌겠는가? 앞으로 열흘 동안 여기 머물면서 그놈의 행방을 찾아내어 처치해 주마. 그렇지 만 열흘이 지나도록 찾지 못한다면, 그것도 괴물한테 짓밟힐 너희들의 운명이니 어쩔 도리가 없 다. 그때는 나 또한 떠나야 할 테니까" 우두머리는 사람의 말귀를 완전히 알아들었다. 기꺼운 표정으로 영경을 이끌고 산봉우리 밑까지 다가간 늙은 성성이는 앞장서서 높은 곳에 뛰어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동료들한테도 뭐라고 지껄였다. 뒤미처 십여 마리도 방향을 나누어 기어오르더니 사방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리 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두머리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스스로 다시 한 차례 살펴보고 나서야 내려왔다. 그리 고는 바위 위에 껑충 올라서서 신비스런 붉은 과일을 남김없이 따다가 영경에게 바쳤다. 그 열매 는 어제 먹었던 것보다도 더욱 신선하고 향그러웠다. 영경은 입에 당기는 대로 십여 개를 먹어 치우고 나서 나머지를 봇짐 속에 챙겨 넣었다. 여행 도중 먹을 심산이었다. 보따리를 수습하자, 문득 늙은 성성이가 훌쩍 다가오더니 영경을 이끌고 그 기묘한 나무 아래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자영신검과 하수오 紫電飛芒誅木魃 靑山賞雨動歸思 시내 건너편에서 보고 이상스럽게 여긴 게 무리가 아닐 만큼, 과연 그 나무는 뿌리를 바위 속에 깊숙이 박은 채 자라고 있었다. 몸체도 가지, 줄기 할것없이 불꽃처럼 붉은 데다 수맥(樹脈)까지 들여다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나무 곁에 아직도 몇 군데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핏자국을 가리키면서 늙은 성성이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또 애달프게 부르짖었다. 영경은 이 자리가 바로 어제 과일을 따러 온 성성이들이 괴물한테 습격당한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괴물이 뛰쳐나왔던 구멍은 몹시도 깊어 보였다. 우두머리 성성이는 그녀더러 바깥에서 기다리라 는 손짓을 보내고서 구멍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괴물의 소굴 앞에서 영경은 자영검을 빼들고 잔뜩 긴장한 채 사면 경계를 맡았다. 그리고 틈틈 이 그 붉은 열매의 나무가 뿌리박힌 괴석(怪石)을 눈여겨 보았다. 바위는 이 장 높이에 모난 데가 없고 둥그스름했는데, 윗면은 펑퍼짐한 대신 아래쪽이 뾰족하게 오똑 서 있어, 얼핏 보아서는 여간 위태롭지 않았다. 게다가 바위 전체에 영롱한 구멍이 뚫려 있 고 비취(翡翠)와도 같은 벽록색(碧綠色)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바위를 어루만지면서 한참 들여다 보다가, 그녀는 무심결에 바위 뒤쪽으로 돌아가 보 았다. 뒷면에는 사방 두 자 가량 매끄럽게 깎인 부분이 있었다. 거기에 전서체(篆書體) 비슷한 필 법으로 넉 줄의 글씨가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수컷의 이름은 자영(紫暎) 암컷의 이름은 청삭(靑索) 영(英)과 운(雲)을 만나면 신물(神物)도 비로소 나타나리. 글귀 아래쪽에 가느다란 사람의 눈썹 한 줄기가 새겨졌을 뿐, 관지(款識) 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영경은 그제서야 허리에 차고 있는 자영검이 웅검(雄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 신검은 원래부터 자웅(雌雄) 한 쌍이었구나! 그렇다면 청삭(靑索)이란 자검(雌劍)도 이곳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말인가? 영(英)은 이영경, 내 이름과 같다. 그럼 운(雲)은 누구일까?' <운>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영경은 <청삭검>이란 그 칼마저도 탐이 났다. 신검 한 쌍을 고스 란히 손아귀에 넣고 싶은 것이다. 영경은 갑작스레 바빠졌다. 온 신경을 모아서 두 눈에 불을 켜고 바위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져 보기 시작했다. 한창 정신없이 수색을 하는 판인데 구멍 속에서 우두머리 성성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등에는 숨 을 할딱거리면서 거의 죽어가는 성성이 한 마리를 업고, 또 두 손에는 젖먹이 아이처럼 생긴 물 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과연 우두머리답게 무시무시한 괴물의 소굴에서 용약 동료를 구출해낸 것이다. 우두머리는 손에 든 것을 영경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도망친 괴물의 이름은 목괴(木魁), 일명 목발(木魃)이라고도 불렀다. 힘이 무지막대하고 성질이 강포(强暴)한 데다, 강철 같은 발톱은 쇳덩이나 바윗돌을 꿰뚫을 만큼 날카롭기 이를 데 없었다. 이놈은 생물의 뇌수(腦獸)만 전문으로 파먹고 살았다. 비취빛 바위에 뿌리박고 자라는 그 나무는 <도가(道家)>에서 이른바 <주과목(朱果木)>이라고 하는 신수(神樹)였다. 그 열매인 주과를 먹으면 몸이 거뜬해지고 기(氣)가 돋우어지는 데다가 수 명 또한 연장되어 장수를 누릴 수 있다. 주과는 삼십 년이 되어야 비로소 꽃을 한 번 피운다. 망창산 일대에 살고 있는 성성이들은 굳이 말한다면 성원(猩猿)의 부류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성성이와 원숭이가 교배해서 낳은 종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적인 말은 못하지만 산중 야수 들이면서 천생 사람의 말뜻을 알아듣는 지능은 갖추고 있었다. 이 성성이들은 평소 말곰들이 산괴한테 잡혀 먹히듯, 목괴란 놈에게 짓밟히고 끼닛거리로 희생 당해 왔다. 이놈들은 영경이 말곰의 천적(天敵)을 깡그리 처치하고 동굴에 찾아들자, 영리하게 꾀 를 썼다. 우선 동료 몇 마리를 시켜 괴물이 잠든 틈을 타서 결사적으로 주과를 따다가 영경의 입 맛부터 당겨놓고서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어다 자기네 원수마저 갚도록 유혹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경은 성성이들의 교활한 술책에 넘어간 셈이지만, 그놈들로선 종족의 운명과 생존 이 걸린 필사적인 노력인 셈이었다. 목괴란 놈은 천성적으로 잠을 몹시 즐겼다. 더구나 오정이 지나서는 더욱 깊은 잠에 빠져 여간 해 가지곤 깨어날 줄 모를 정도였다. 영경이 두 번째로 주과를 요구하자, 성성이들은 목괴의 평소 습성을 익히 아는 터라 대담하게 열매를 따러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목괴의 잠버릇을 너무 믿은 나머지 겁도 없이 경계를 풀고 나 무에 매달렸다. 그리고 겨우 몇 개를 손에 넣었을 때 신경이 예민한 목괴를 놀라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이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뿔뿔이 흩어져서 죽어라고 달아나기는 했으 나 목괴의 강철 발톱은 순식간에 다섯 마리를 사정없이 찍어 거꾸러뜨렸다. 목괴는 평소 습관대로 성성이의 뇌수를 파먹고 나자 시체들을 끌어다 바위 위에 널어놓았다. 다 른 놈들한테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한 놈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목괴의 갑작스 런 기습에 혼비백산해서 제풀에 기절해서 쓰러진 놈을 목괴는 산 채로 잡아끌고 들어간 것이다. 목괴는 생물의 뇌혈(腦血)을 마시고 나면 으레 술마신 듯 취해서 잠을 자야만 한다. 눈꺼풀이 내 려앉으면서 '사로잡은 놈은 내일 아침 해장거리로 쓰자!' 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 틈에 달아났 던 놈들이 살금살금 되돌아 와서 동료들의 시체를 업고 뛴 것이다. 아침이 밝아오자, 목괴는 성성이의 시체가 없어진 걸 알았다. 잔뜩 기분이 잡쳐 굴 속에서 바깥 을 내다보는 판인데 영경이 찾아든 것이다. 그놈은 조반거리다 싶어 기세좋게 뛰쳐나갔다. 그러나 뜻밖에 맛좋은 조반먹이는 엄청난 걸 들고 있었다. 오랜 세월 해묵어 신통력을 지닌 괴물은 영경의 손에 들린 자영검에서 자색 검광이 번뜩이는 걸 본 순간, 일이 잘못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황급히 바람을 타고 꽁지빠지게 달아났던 것이다. 어제 동류의 시체 다섯이 돌아왔을 때부터 우두머리는 한 마리가 부족한 걸 알았다. 그래서 생 사를 알 수 없는 놈을 마음 속에 단단히 기억하고 있다가, 목괴가 달아나자 우선 영경에게 주과 부터 따다 바치고서 곧장 소굴로 들어갔다. 괴물은 오직 성성이의 뇌수만 파먹을 뿐 그 고기는 먹지 않는 걸 전부터 아는지라, 시체가 없다면 아직 살았을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우두머리는 동굴 입구에 다다랐을 때부터 동류의 숨결을 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 고 굴 속에 들어가 마침내는 괴물의 손아귀에 짓눌려 반죽음이 된 동류를 찾아냈다. 우두머리는 동류를 들쳐업고 나오다가 무심결에 굴 속 깊숙이 또다른 시체 두 개가 널린 것을 발견했다. 젖 먹이 인간의 시체였다. 짐승은 일순간 영경의 생김새를 연상하고 그것마저 집어들고 굴을 빠져나 왔다. 늙은 성성이가 인간의 시체라고 본 것은 원래 형체를 갖출 만큼 해묵은 하수오(何首烏)였다. 정 기(精氣)를 얻고 생물의 형체가 이루어지자, 그것들은 산 속을 마음대로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목괴에게 발견되어 잡히고 만 것이다. 목괴는 동물인 줄 알고 발톱으로 찍어 눌러 죽인 다음 뇌수를 파먹으려다 보니 동물이 아닌지라 입맛을 잃었다. 평소에는 혈식(血食)만 즐기던 놈이 천 년 묵은 영물(靈物)의 묘용(妙用)을 알 까 닭이 없다. 목괴는 손 가는 대로 하수오 두 뿌리를 굴 속 한 귀퉁이에 내팽개치고 말았다. 그것이 늙은 성성이의 눈에 띄어서 영경에게 고스란히 바쳐진 것이다. 영경도 처음에는 어린애의 시체인 줄 알았다. 한데 손에 받아들고 보니, 키는 한 자도 못되고 얼 굴 모습도 귀염성스러운 것이 사람을 닮았으나 역시 진짜 사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해말간 향기까지 코를 찔렀다. 목괴의 손에 찍힌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피가 아니라 옥처럼 맑은 액체였다. 영경은 문득 아버지가 한 말이 기억에 떠올랐다. '깊은 산중에서 인형같이 작은 사람이나 망아지가 뛰고 나는 걸 보거든 천 년 묵은 영지(靈芝) 나 하수오가 변신한 놈인 줄 알라고 하셨지. 이것을 먹기만 한다면 신선이 된다고도 하셨어. 그럼 이 조그만 시체도 천 년 영지나 하수오의 종류가 아닐까?... 정말로 영물(靈物)이라면 이 얼마나 큰 행운이냐? 아니지! 괴물의 소굴에서 꺼낸 것이니까 독이 들어 있는지도 몰라. 만에 하나, 극독 을 먹었다가는 보통 큰일이 아니지!' 그녀는 흘낏 우두버리를 돌아보았다. 늙은 성성이는 영경이 무슨 분부를 내릴까 싶어 그 자리에 선 채로 꿈쩍도 않고 있었다. '그렇다. 성성이나 원숭이 종류는 비린 것을 전혀 안 먹는다고 했겠다? 어디 이걸 시험해 봐야 지!' 그녀는 두 개 중 작은 것을 우두머리한테 불쑥 내밀었다. "이걸 먹어봐!" 우두머리 생각에도 이건 사람의 몸뚱이라 받아들기는 했으면서도 감히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랴, 흘금흘금 영경의 눈치를 살폈더니 그 무시무시한 칼자루에 손을 얹고서 사납게 눈을 부릅뜨고 있지 않는가! 우두머리의 모가지는 찔끔 자라목처럼 쏙 들어가 버렸다. 이젠 도리 없다. 망설였다간 목이 달아날 판이다. 우두머리는 눈을 질끈 감고서 한 입 덥썩 물어뜯었다. 곁에서 영경이 보자니까, 이놈은 한 입을 삼키고 나더니 느닷없이 펄쩍 뛰면서 단숨에 그것을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영경조차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뿔싸, 진귀한 걸 버렸구나! 저것을 그냥.....'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서너 입에 깨끗이 먹어치운 우두머리는 다시 그녀의 손에 들린 큰 것을 쳐다보면서 침까지 질질 흘리더니, 그것마저 달라고 염치좋게 두 손을 번쩍 내밀었다. 영경은 아쉬움에 약이 올랐다. 대뜸 눈꼬리가 샐쭉해지더니 미련한 놈을 흘기면서 빽하고 악을 쓴다. "야, 이것아! 널더러 손 한 쪽만 먹으라고 했지, 누가 그걸 통째로 삼키라고 했어!... 이거 마저 달라고? 흥, 어림없다 없어!" 독이 들기는커녕, 세상에 다시 없는 진품 한 개만 잃은 셈이었다. 하기야 이것을 애당초 발견한 임자니까 저 녀석이 먹을 운수는 어쩔 수 없다고 영경은 단념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성형(成形) 하수오의 팔뚝 하나를 꺾었다. 당장에 새하얀 액체가 물씬 솟아나 왔다. 얼른 입을 대고 빨았더니 상큼한 향기가 말도 못하게 달디달았다. 혀끝에 쌉싸름한 맛이 감 돌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입맛을 돋구는 작용을 했다. 향기는 점점 갈수록 진하게 풍겼다. 몸통을 씹으면서 비로소 이 하수오가 뼈마디 한 개도 없다는 걸 알았다. 황정(黃精)을 먹을 때와 느낌은 별로 다르지 않았으나 방향(芳香)과 감미(甘味)는 사뭇 두드러진 것이다. 영경은 평소에 먹성도 좋은 데다가 이 해묵은 영물이 혹시라도 때가 지나면 효력이 사라질까 무 서워서 단숨에 깡그리 먹어치우고 입맛을 다셔가며 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다행히도 성형 하수오 는 몸집이 크지 않았기에 남기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다시 자검(雌劍) <청삭(靑索)>을 찾기 시작했다. 한데 갑자기 바위 틈에서 흰 연기가 풀 썩 솟아나왔다. 깜짝 놀라서 멀찌거니 멀어져 관망을 하는 참인데, 산등성에 올라가 망을 보던 놈 들이 마구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우두머리도 당장 안색이 변하더니 앞발로 연신 손짓을 해보였다. 영경은 그 목괴가 돌아왔다고 직감했다. 지체없이 자영검을 휘두르면서 산등성이로 뛰어올라 갔 다. 영경의 신변에서 자줏빛 광채가 뿜어나오자, 우두머리는 감히 접근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뒤따라 올라왔다. 그러나 함께 망을 보는 게 아니라 잔뜩 겁에 질려 으슥한 곳을 쑤시고 들어가 서는 옴짝달싹도 않았다. 돌출한 산봉우리에 올라선 영경은 이마에 손을 얹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해는 이미 중천에 높직 이 떠서 거의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길섶 서북편 모퉁이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다. 그런데 그 숲 속에서 십여 마리의 취조(翠鳥)가 무엇에 놀랐는지 푸드득 날아오르더니 그 녀가 서 있는 봉우리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햇빛 아래 새들의 녹색 깃털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 였다. 새떼가 봉우리 남녘 숲 속으로 사라지고 나자 더 이상 아무런 기척도 없이 사면팔방은 고요하기 만 했다. 우두머리가 숨어 있던 장소에서 훌쩍 뛰쳐나오더니 저희들 동료와 머리를 맞대고 한동안 수근거 렸다. 그리고 다시 영경을 향해 새떼가 날아오른 서북편 숲을 가리켜 보였다. 영경은 그 손짓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거니와, 아까부터 바위 벽에 새겨진 그 <청삭검>이란 글 자에 마음이 빼앗겨 있었다. '바위 부근에서는 아무리 뒤져도 없다. 그렇다면 시냇가로 내려가 찾아야 하지 않을까?' 깊고 푸른 시냇물을 굽어보다가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계곡으로 한번 들어가 보기로 작정 했다. 그런데 그녀가 막 뛰쳐내리려는 찰나, 이제껏 바위 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흰 연기가 갑작스레 짙은 안개처럼 뭉게뭉게 솟아나더니, 삽시간에 시내와 골짜기를 온통 뒤덮으며 바윗덩 이마저 감추어 흔적조차 남기지 남는 것이었다. 아미산에서 몇 달 사는 동안 산 속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한두 번 보고 겪은 영경이 아니다. 그 녀는 이 정도 짙은 안개라면 단 시간에 개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이처럼 자욱한 안개 속 에서 그 신검이 어디에 감춰져 있는 줄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시냇물이 흐르는 주위의 계곡은 아까 지나치면서 보았을 때 칼날 같은 바위투성이였다. 모험을 해서 뛰어내려 봤자 그 신검을 찾는다는 보장은커녕 몸을 다치기 십상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단 념해야만 했다. 목괴가 나타나기만 기다렸으나 그놈 역시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자세로 기다 리기에도 지치고 진력이 난 영경은 속이 풀릴까 해서 사념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 산에는 어째서 괴물들도 많고 영약(靈藥), 이과(異果)도 많을까? 어젯밤 묵었던 그 동굴 속 이 유별나게 대낮처럼 환하고 따스한 걸 보면, 거기에도 무슨 진귀한 보배가 묻혀 있을 거야. 엊 저녁에는 못 찾았지만 또 한번 뒤져봐야지. 지금 별다른 일도 없으니까 동굴로 돌아가기로 하자. 혹시 누가 알아? 기막힌 행운이 날 기다릴지도 모르잖아!' 어린 영경은 성미가 급하고 단순하여 무엇이든지 생각하면 그 즉시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 이었다. 그녀는 당장에 성성이떼를 거느리고, 오던 길을 되밟아 동굴로 향해 떠났다. 하수오를 먹은 지 겨우 반 시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벌써 기운이 부쩍 솟아나고 거뜬 한 데다 가슴 속까지 상쾌한 느낌이 가득차서 영경은 여간 신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의기양양, 신검을 손에 든 채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윽고 새떼가 날아오르던 서북쪽 나무 숲 근처 십여 장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던 놈들이 갑작스레 놀란 비명을 터뜨렸다. 후닥딱 달려나가 보니 말곰 두 마리가 땅 바닥에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뇌수는 파내지고 머리통이 텅비었다. 그 괴물은 달아나던 도중에 맞닥뜨린 말곰 으로 조반을 든 것이 분명했다. 영경은 전신에 잔뜩 힘을 주고 유심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런 기척도 없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가자!" 경각심을 더욱 높이고서 그녀는 길을 재촉했다. 성성이 무리들은 영경의 몸 주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놈은 앞장서서, 또 어떤 놈은 뒷전에서, 네 발로 기는 놈에 사람처럼 서서 껑충거리는 놈도 있었다. 사납기 이를 데 없는 야수들 한가운데 화용절색(花容絶色)의 홍의소녀가 끼여 있는 광경 은 실로 기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이 막 수풀을 돌아나와 십여 걸음쯤 떨어졌을 때였다. 갑자기 뒤편에 처져서 따르던 한 놈 이 미친 듯이 아우성을 쳤다. 뒤미처 그녀를 에워싸고 있던 놈들마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더니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그놈이 왔구나!' 영경은 홱 몸을 돌렸다. 어느 사이에 해치웠는지 길바닥에는 성성이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장검 을 번쩍 치켜세우고 왼쪽 숲 속을 바라보는 순간, 머리 위에서 늑대의 포효성이 터졌다. "끼약! 우후훗!" 초록빛 눈동자, 황금의 머리터럭, 새 발톱과도 같은 긴 팔을 활짝 펼치고서 목괴는 번개와 같이 창공으로부터 덮쳐내렸다. 다섯 개의 가느다란 손가락 두 쌍은 어느덧 정수리 바로 위, 한 자 남 짓까지 내려왔다. 대경실색한 영경은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다급한 나머지 장검을 머리꼭대기로 치밀듯 뻗어올 리면서 마구 휘저었다. 한 줄기의 자줏빛 광채가 번쩍 솟구치더니 십여 장 길이의 무지개가 스쳐 지나는 곳에 별안간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끼약!" 그 소리는 처절을 극한 것이었다. 영경은 잽싸게 몸을 날려 섰던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햇빛 아래 검은 그림자 둘이 지면을 덮는 가 싶자 이내 육중한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털썩! 털썩! 목괴는 머리통부터 발끝까지 정확하게 수직으로 양단(兩斷)이 되어 있었다. 덮쳐내리던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몸통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떨어지고 나서도 남은 힘을 다 쏟으려는 듯이 칠팔 장 가량을 뒹굴고서야 멎었다. 성미가 불보다도 사나운 목괴는 영경에게 소굴을 빼앗기고 쫓겨나자, 적의 검광이 정면으로 상 대하기에는 너무도 위력적인 것을 알고서 숲 속 길가에 잠복한 채로 적을 기다렸다. 측면 기습공 격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길을 말곰 두 마리가 먼저 지 나갔다. 때마침 배가 고팠던 그 놈은 앞뒤 생각없이 말곰을 잡아 뇌수를 파먹었다. 한데 그 장면이 뜻밖에도 산봉우리 위에서 망을 보던 성성이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경고의 부르 짖음이 울리고 놀란 영경이 돌아보는 순간, 목괴도 날쌔게 숲 속으로 숨긴 했지만, 놈의 움직임이 새떼를 놀라게 만들었고, 그 새들이 날아오르는 광경이 영경의 눈에도 띄었던 것이다. 영경이 성성이들을 이끌고 돌아가는 도중에 목괴는 세 차례나 기습을 시도하려 했지만 적의 손 에 들린 보검이 두려워 포기했다. 그녀가 숲을 돌아 지나칠 때가 마지막 공격기회임을 그 놈은 직감했다. 열화같이 끓어오르는 성질을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괴는 적의 등 뒤로 돌아 배후에서 날아덮치면서 단 일격으로 그녀의 뇌수를 박살내려고 작정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허공으로 훌쩍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목괴의 기습에는 뜻밖의 방해꾼이 있었다. 영경의 뒤에서 따라가던 성성이떼들은 말곰의 시체를 목격한 순간부터 괴물이 부근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벌써부터 전전긍긍 떨면서 눈을 부릅뜨고 경계했던 것이다. 짐승들은 눈과 귀가 극도로 예민하다. 성성이들은 목괴가 날아덮치는 것을 발견하자 삽시간에 발광하듯 비명을 지르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기습의 효과를 잃어버린 목괴는 울화가 치밀어 닥치는 대로 몇 놈을 때려죽였다. 그 통에 속도 가 지체되고 영경은 그 나름대로 경고를 받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자영검을 뻗어서 요격했던 것 이다. 만약 목괴가 성성이를 쳐죽이느라 순간적인 지체만 하지 않았더라면 제아무리 신통력을 가진 자 영검이라도 그놈의 질풍같은 공중 기습에 위기를 모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하튼 자영검은 목괴를 두 동강으로 잘라버리고, 영경은 요행히 위난을 면했다. 목괴가 죽어 나 자빠지자 영경보다 더욱 기뻐 날뛰는 것은 성성이의 무리들이었다. 허구한 날 목괴의 양식거리로 희생당하던 그 짐승들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는지, 시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경이 다시 목괴의 몸뚱이에 깔질을 퍼부어 걸레조각처럼 찢고 나 서야 비로소 아우성을 지르면서 덤벼들었다. 목괴의 사지 몸통은 갈갈이 찢기고 물어뜯겨 남아나 지 않았다. 짐승들의 원한이 그토록 깊게 사무친 줄 아는 터라, 영경도 말리지 않았다. 한참 뒤에 우두머리가 영경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늙은 성성이의 손바닥에는 보랏빛 광채 가 감도는 물체가 하나 놓여 있었다. 방금 목괴의 몸뚱이를 발기발기 찢어내던 중, 두개골 뇌해 속에서 꺼낸 것이다. 그것은 옥 같으면서도 옥이 아니고 구슬 같으면서도 구슬이 아닌 아주 투명 한 물체였다. 영경이 받아들고 보니 그 투명체는 길이가 한 치 남짓 됨직한데 눈이 부시도록 광채를 내쏘고 있었다. 어떤 효용이 있는 것인지는 둘째치고 여간 예쁘지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품속에 고이 간직했다. 어려운 일은 끝났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자, 이제 모두 떠나자!" 우두머리에게 그렇게 분부를 내리고 앞장서서 막 떠나려고 할 때였다. 문득 사방 천지에 거친 돌풍이 휘리릭! 불기 시작하더니 멀리서부터 우레치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하늘을 쳐다보 니 붉은 태양도 어느 새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기 직전에 불어닥치는 돌풍이 길 가의 나무들을 미친 파도처럼 뒤흔들고 있었다. 검은 구름덩어리가 뭉게뭉게 중천에 모여들면서 두터이 내리깔렸다. 검은 장막 속에서는 수십 줄기의 금빛 뱀이 천둥소리와 함께 어지러이 날뛰기 시작했다. 구름층은 순식간에 온갖 기암괴석, 용마, 산봉우리, 고루거각(高樓巨閣)을 짓고 허물어뜨리려고 했다. 환상적인 풍운의 조화는 실로 천변만화(千變萬化)였다. '큰 비가 쏟아지려나 보다.....' 산길을 가다가 비를 만나는 일이야 흔하지만, 방금까지도 맑은 하늘에 붉은 해가 걸려 있었는데 이토록 갑작스레 날씨가 조화를 부리니 영경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동굴까지는 아 직도 십 리 길인데 보따리마저 젖어버리면 갈아입을 옷도 없는 것이다. 그녀는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이걸 어째! 모두 네 녀석들이 괴물을 찢어발기느라고 시간을 잡아먹은 탓이야. 봐라, 금방이라 도 비바람이 몰려올 텐데, 어쩌면 좋아!" 공연스레 짐승들한테 화풀이를 퍼붓자니까 홀연듯 눈앞에서 금빛 번개 한 줄기가 번쩍 일더니, 뒤미처 우르르! 콰당! 천지개벽을 하는 소리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천둥이 얼마나 큰지 귀까지 먹 먹해질 정도였다. 기급을 한 짐승들은 우왕좌왕, 저희끼리 서로 껴안고는 어쩔 바를 몰랐다. '숲 속으로 들어가서 잠시 비를 피할까 보다.....' 그러나 그것도 생각뿐, 어느 새 십 장 밖에서 주먹만한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더니 삽 시간에 폭죽(爆竹)을 터뜨리듯 정신 못 차리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무숲도 거센 비바람에 방향도 없이 마구 휘둘리면서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치달리듯 쏴아, 쏴아! 철썩, 철썩! 파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르르... 꽈당, 쿵쾅! 번개가 번쩍 일더니 다시 천둥소리가 귀청을 찢으면서 벼락을 때렸다. 영경은 앞쪽에만 비구름이 몰려 쏟아지는 줄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서서 보니 자기가 서 있는 둘레 일정한 공간만 빼놓고서 사방 천지 모두 대야물이라도 쏟는 듯, 억수 같은 장대비가 퍼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먹만한 빗방울이 떨어지는 곳마다 진흙탕이 사방으로 튀는데, 다만 영경의 주위 수십 장 범위에는 단 한 방울의 비도 흙탕물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 봐라? 거 참 이상한데... 그녀는 시험삼아 이삼십 보를 걸어가 보았다. 과연 가는 곳마다 둘레 십 장 안팎의 지역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다. '흠흠, 보검이 신통을 부렸구나!'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시각을 어림잡아 보니 벌써 날도 기울 때가 되었다. 이러다가는 오늘밤 또다시 동굴에서 지내야 할 판이다. 하늘빛은 갈수록 음침해지고 암흑천지로 변하고 있었다. 비바람도 점차 극성스럽게 퍼붓는 기세 로 보아 쉽사리 멎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동굴로 돌아가 다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성성이들은 자기네 동료의 시체를 떠메고서 전전긍긍, 영경의 곁에 바짝 붙어 따라가기 시작했 다. 이곳 산봉우리는 어느 것 하나 기암절경이 아닌 데가 없었다. 거기에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사 방천지 높은 곳마다 은하수(銀河水)를 거꾸로 쏟아낸 것처럼 수십 줄기의 폭포 펼쳐지면서 다시 못 볼 장관을 이루었다. 일행이 가는 방향으로 맞은편 십여 장 이내에는 그런 대로 길을 분간해낼 수 있지만 그 바깥으 로는 자욱한 연무가 휩싸여 아득하기만 했다. 어쩌다가 한두 개씩 푸르른 산봉우리들이 뾰족하니 모습을 드러냈다간 이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듯, 폭포수가 떨어져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마저 우뢰처럼 대단해 귀청이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비 내리는 산중 절경을 한껏 즐기면서 영경은 마침내 동굴까지 이르렀다. 그때쯤은 비바람의 기 세도 점점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길바닥은 온통 짐승들의 발자국 투성이였다. 멀찌감치서 동굴 입 구를 바라보니, 은빛 구슬의 주렴을 걸쳐 놓은 것 같았다. 그것은 동굴 위쪽에서 흘러내린 빗방울 이 수정처럼 반짝이면서 가지런하게 떨어져, 주렴을 한 겹 드리우고 있는 듯 보였다. 동굴 속으로 들어서자마자 씨익 씩, 슈우, 슈! 짐승들의 숨소리가 귀에 쏟아져 들어왔다. 언제 기 어들었는지 중앙에 놓인 바윗덩이만 빼놓고 동굴 안 사면은 온통 말곰들의 떼로 그득차 있었다. 영경의 모습이 나타나자, 일천여 마리나 되는 짐승들은 한꺼번에 '붐, 붐, 붐!' 정신 못 차리도록 환호성을 질렀다. 야수들의 소동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날 대로 난 영경이다. 귀를 틀어막고서 빽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그 한 마디로 동굴 속은 물이라도 뿌린 듯 금방 잠잠해졌다. 말곰과 성성이들의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깜찍스런 야수의 여왕은 그녀가 짐승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는 사실에 저절로 으쓱해졌다. 동굴 밖에는 기세가 주춤하긴 해도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하늘빛도 점점 칠흑으로 어두워져 갔으나, 굴 속은 대낮같이 밝기만 했다. 영경은 보검을 잡은 채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동굴 속을 밝히는 발광체를 찾을 욕심 으로 사방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삼사 시진을 좋이 소비하며 한밤중이 되도록 뒤졌으나 이번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녀는 성형 하수오를 먹은 이후부터 시장기나 갈증도 전혀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피로감마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듯 한바탕 뒤지다가는 잠깐 쉬고 또 일어나서 바위 아래로 뛰어내리 기를 동틀 무렵까지 계속했다. 그래도 여전히 신통한 걸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짐승들은 그녀가 어쩌자고 밤이 새도록 가로 뛰고 세로 뛰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그녀의 발 길이 옮겨지는 대로 거기 몰려 있던 놈들만 '와르르!' 사방으로 흩어져 길을 비켜 주고, 지나가면 다시 '와르르!' 모여들 따름이다. 우두머리 늙은 성성이만큼은 그래도 영경의 심사를 짐작했는지 이리저리 따라다니면서 뛰는 걸 도와주었다. 어떤 때는 투명한 돌멩이 몇 개를 주워다가 그녀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그 돌멩이를 들고 굴 밖으로 나가 어둠 속에 비춰보았으나 아무런 이적(異 蹟)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중에는 주워다 바쳐도 시큰둥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 짐승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따라다니는 게 신통했다. "너, 이 굴 속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는 게 뭔지 아느냐?" 우두머리가 머리통을 가로저었다. 짐승이 발광체를 알건 모르건, 영경은 그 은근하고도 영특한 지혜가 마음에 들었다. 문득 생각나 는 게 있어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렸다. "너같이 똑똑한 짐승도 드물구나! 널 아미산으로 데려갈 수만 있다면 우리집 문지기를 삼을 텐 데....." 그 말이 떨어지자, 짐승은 문득 영경의 소맷자락을 당기더니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영경은 더욱 애석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사람의 말뜻을 잘 알아듣는가 말이다. "너도 날 따라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나 떠난 후에 그저 마음을 착하게 먹 고 생령(生靈)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내가 검선(劍仙)이 된 후에 곧 찾아와서 너를 제도(濟渡)해 주마." 그러나 짐승은 여전히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영경으로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즉흥적인 발상이라 마음에 둘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계속 해서 발광체를 찾기 시작했다. 짐승은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영경의 옷깃을 당기며 바위 위로 올라가 앉으라는 손짓 을 해보이더니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부하들에게 그녀 대신 찾도록 시킨 것이다. 영경은 바위에 올라 좌정했다. '이 짐승들은 동굴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반드시 뭣이라도 찾아내겠지.....' 넓디넓은 동굴 속에는 성성이들이 쫘악 깔렸다. 민첩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를 가지고 영경의 눈 이 채 미치지 못했던 구석구석까지 올라가 이잡듯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실망뿐이 었다. 영경으로서도 더 이상 기대를 걸 만한 방법이 없게 되었다. 보물을 찾아가지고 내일 아침 날 밝는 대로 떠나리라 작정했지만, 보물도 손에 넣지 못하고 비 바람 역시 그치지 않으니 조바심만 무럭무럭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는 아미산으로 한시바삐 돌아 가고 싶기만 했다. 비바람은 사흘 밤낮을 줄기차게 퍼붓고 나서야 차츰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동녘이 부옇게 트이더니 오래간만에 붉은 해가 둥실 떠올랐다. 영경은 숨 막힐 듯 답답한 동굴에서 나와 신선한 아침 공기를 가슴이 뿌듯해지도록 들이마셨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새들은 아직도 축축히 젖은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애교스럽게 우짖었다. 지면은 온통 붉은 꽃잎으로 뒤덮이고, 아득히 바라보이는 수십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연봉(連峰) 들도 씻은 듯이 푸르렀다. 사면천지는 먹물에 가깝도록 짙은 암청색, 까마득하게 패인 골짜기의 깊이를 연상시켰다. 비 그친 후에 새로 생긴 폭포수가 온 산중턱에 비단폭을 드리운 듯 귀가 따 가울 정도로 요란스레 쏟아져 내리는데, 산록(山麓)의 싱그러운 초원에는 온갖 들꽃이 봉오리를 터뜨리고 바람따라 물결치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온몸에 받으면서 무르녹은 봄날의 한 폭 절경을 두 눈 그득하게 담은 영경 은 마음이 부풀 대로 부풀었다. 이처럼 화사한 봄빛 속을 배회하려니, 문득 산들바람이 불면서 복 사꽃, 매화가 백설처럼 우수수 흩날려 떨어져 내렸다. 불현듯 아미산 옛집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어졌다. 거기가 그래도 고향인 것이다. 가슴 속에서 그 리움이 용솟음쳐 올랐다. 동굴 안에 있던 짐승들은 모두 나와 너른 공터를 가득 메우고 엎드렸다. 생명의 은인이 오래도 록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성성이의 우두머리는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섰다. 그 표정 속에는 자기를 데려가 달라는 애원이 간절하게 서려 있다. 영경이 짐을 꾸리기 시작하자, 짐승의 무리는 목을 늘이고 길게 울부짖었다. 사람처럼 눈물을 흘 리지는 못하지만 그 애달픈 울음소리만큼은 산골짜기를 떠내려 보낼 듯 진동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럽게 울부짖는 소리에도 영경은 못 들은 척 묵묵히 보따리를 챙겼다. 그녀의 입장에선 제일 지겨운 것이 짐승들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래서 사흘 동안 굴 속에서 함께 지내면서도 걸핏하면 악을 쓰고 찍소리도 못 지르게 해온 터였다. 그런데 막상 헤어져야 할 마당 에 이르자 지금은 도리어 그 울음소리를 막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이젠 이 시끄러운 소리도 못 듣겠지. 저놈들은 나하고 헤어지기가 섭섭한 거야.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아무래도 검술을 완전히 익힌 후에나 저놈들의 환호성을 듣게 되겠지.....' 영경은 공연히 비감이 들면서 자기 신세가 처량해졌다. 상대가 아무리 짐승이지만 그녀 역시 작 별은 아쉬웠던 것이다. 봇짐을 메고서 눈길 닿는 데까지 산천을 둘러보았다. 그냥 주저앉고도 싶 은 욕심을 억누르면서 떠나가야 할 방향을 가늠했다. 길이 잡히자, 그녀는 미련을 떨치고 출발했 다. 성성이와 말곰의 무리가 황급하게 그녀를 에워쌌다. 일천여 마리나 되는 맹수들에게 둘러싸여 그녀는 착잡한 감격에 사로잡혔다. 문득 먼 하늘가에 은빛 기러기와도 같는 흰 점이 보였다. 그것은 영경이 서 있는 봉우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점점 다가오면서 이윽고 사람의 모습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영경은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사람이냐. "여기예요!" 그녀는 두 손을 미친 듯이 휘두르면서 소리쳐 불렀다. 접근하는 인물은 흰옷을 걸친 여인이었다. 몸매도 자못 빼어나고 아리따운 처녀였다. 차림새로 보아하니 검협(劍俠)의 부류임에 틀림없었다. 백의여인은 영경이 있는 곳 백여 장 거리까지 날아왔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 았다. 쌔액! 허공을 찢는 금속성과 함께 한 줄기 푸른 서슬이 번개처럼 쏘아져 내려오더니 다짜고짜로 짐승 들의 무리를 향해 덮쳐든 것이다. 말곰과 성성이들은 혼비백산, 사면팔방으로 와르르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말곰 서너 마리는 그 자리에서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안 돼!" 영경이 바락 악을 썼다. 반갑게 맞이하려던 자가 벗이 아니라 적이라니! 그녀는 놀라움과 분노가 한꺼번에 솟구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정체불명의 적이 발사한 푸른빛 검광을 가로막았다. 천 년 하수오를 먹은 이후로 그녀의 몸은 나뭇잎처럼 가벼워 평지에서 수십 장 높이까지 힘 안 들이고 도약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 변화를 영경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몸을 날리면서 자신도 깜짝 놀랐던 것이다. 성성이와 말곰의 무리들도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따랐다. 푸른 빛의 검광은 달을 쫓는 유성처럼 짐승들의 뒤를 가차없이 바짝 추격했다. 대경실색한 이영경, 그녀의 손이 재빠르게 칼자루를 잡았다. 다음 순간, 자줏빛 광채가 번뜩이더 니 눈부시게 찬란한 빛을 쏟으면서 곧바로 상대방의 검광을 휘감아 버렸다. 상대방도 무슨 낌새를 챘는지 훌쩍 검광을 거두어들였다. 짐승들을 도륙하려던 백의여인의 검세가 물러서자, 영경은 자신감이 솟아났다. 상대방은 나의 보 검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반격을 시작해야 한다. 자영검의 광채는 즉시 십여 장 길이로 무지개처럼 뻗어나갔다. 아미산으로 가는 길 別猩熊 巧遇石明珠 擒猛虎 驚逢鬼道士 이때 이영경의 주위에 있던 성성이와 말곰들은 어느 새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곁 에는 늙은 성성이 한 마리만 덩그라니 혼자 남아 있었다. 이영경은 백의여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무고한 짐승을 마구 죽이는 것을 보자 화가 솟을 대로 솟았다. 그녀는 공중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천한 계집년! 왜 괜히 나의 말곰과 성성이를 죽이는 거냐? 네가 자신이 있으면 내려와 나와 죽 음으로써 싸울 테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섬광이 번쩍 하면서 백의여인이 영경 앞에 우뚝 내려섰다. 백의여인 은 삼사 장 거리를 두고 서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가씨는 점잖게 이야기할 수 없나요? 나는 무당산의 표묘아(票渺兒) 석명주(石明珠)라고 해요. 나의 의매 신약란(申若蘭)이 운남 계화산(桂花山)으로 연검하러 돌아가는 걸 전송하고 돌아오다 여길 지나가게 됐지요. 한데 마침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들리고 아가씨가 홀로 저 말대가리에 곰의 몸뚱이를 한 괴물들에 포위되어 있더군요. 난 혹시 그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줄 알고 비검을 쏘아내 도운 것이었어요. 호의로 그런 거지, 아가씨의 사랑스런 말곰을 해치려던 건 아니 었답니다." 그녀는 영경을 한 차례 쓰윽 훑어보고는 다시 계속했다. "아가씬 어린 나이에 선풍도골이고 저런 맹수를 잘도 길들인 데다 쏘아내는 검광도 나의 비검보 다 열 배나 강한 실력을 갖추었으니 진정 놀랄 뿐이에요. 사실 내가 일찍 방비를 했고, 아가씨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십 년 동안 무당산서 닦은 수련이 하루아침에 물 거품이 될 뻔하였군요. 아가씬 이 산에서 수련 중이세요? 영사는 누구시고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 까? 일후 꼭 가르침을 받고 싶군요." 이영경은 백의여인이 이십 세 전후에 자태가 삽상한 데다 언사가 청량한 것을 보자 그녀의 빼어 난 비검술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짐승을 죽인 것도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라 금방이라도 정이 들어 온갖 이야기를 터놓고 싶었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얘야, 세상 사람의 마음은 측량키 어려운 것이다. 쉬이 믿었다가는 큰코 다치니 조심해야 한다.' 이 생각이 들자 갑자기 석명주가 자신의 검광을 칭찬하는 말에 의심이 갔다. '저 여자가 나의 보검을 칭찬하는 이유가 뭘까? 그녀의 비검은 나보다 월등 고강한데 만일 모든 걸 털어놓았다가 보검을 빼앗아 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한다? 내 실력으로 저 여자를 당할 수 없으니 재주가 있는 양하여 이 위기를 벗어날 수밖에 없겠구나.' 영경은 마음을 정하자 먼저 보검을 칼집에 넣고 백의여인에게 한 발 다가서서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영경이라 합니다. 사조는 백미화상이라 하죠. 아미산에서 한가로이 놀러나왔다가 한때의 흥취로 이들 성성이와 말곰들을 길들여 보았답니다. 언니의 호의도 몰라보고 욕을 퍼부어댔으니 정말 미안하기 그지없군요." "그 칼은 명검인 것 같은데요?" "네, 그래요. 이 칼은 사조께서 하사해 주셨는데 자영검이라 부르죠. 한데 언니의 사조는 어떻게 되십니까? 나중 여가가 있으면 아미산으로 한 번 놀러오시지 않겠어요?" 석명주는 이영경의 말을 듣자 소스라쳐 놀랐다. "원래 아가씨께선 백미노조의 고제자였군요! 그러니까 그런 대단한 실력을 지니셨지. 나의 가사 는 무당산의 반변노니(半邊老尼)라고 해요. 무당산에 돌아가 스승을 뵌 뒤 아미산에 꼭 놀러가겠 어요. 하지만 아가씨도 틈을 내 무당산에 한번 놀러오세요. 가사께선 아가씨를 보시면 반가와하시 며 아주 잘 대해주실 거예요." 그녀는 한참 호들갑을 떨고는 뭔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확인하듯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가 말한 그 자영검은 장미진인이 쓰시던 게 아닌가요? 그 칼은 장미진인이 성도 (成道)할 때 부적으로 봉해 어디 깊은 산 속 은벽한 곳에 숨겨놓아 아미파 교조 건곤정기묘일진 인 외에는 아무도 소재를 모른다고 하던데, 당시 이야기로는 이 칼을 발견하는 사람은 필히 훗날 도통하는 고인이 되리라 믿었지요. 그런 것이 어떻게 해서 백미노조의 장중에 들어갔는지 모르겠 네요. 그것 참 이상하다. 아가씨가 갖고 있는 게 정말로 장미진인의 보검이라면 보통 인연이 아니 죠. 어때요, 한번 보여주시지 않을래요?" 영경은 어느 누구라도 자기의 검을 보자고 하면 겁을 낼 판이었다. 더구나 석명주는 아직도 속 셈을 헤아릴 수 없는 여자인데 과연 보자고 덤비니 은연중 두려움이 앞섰다. 영경이 잠시 망설이는데, 석명주가 앞으로 다가오며 그녀의 의중을 떠보았다. "칼을 좀 보여주실래요?" "그러죠. 자, 보세요." 재빨리 머리를 굴린 영경은 칼을 검집에서 꺼내 선뜻 석명주에게 건넸다. 석명주의 말하는 품이 나 태도가 나쁜 여자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영검은 석명주의 손에 들려지자 한 가닥 자줏빛을 싸늘히 뻗어내었다. 아까 자신에게 뻗쳤을 때와는 또다른 으스스한 검광을 보자, 석명주는 대번에 이 칼이 보통 칼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 었다. 그녀는 찬찬히 칼을 뜯어보며 자신도 모르게 찬사를 토했다. "이 칼은 정말 근사한 명검이로군요. 아가씨가 얻게 되었으니 과연 제 주인을 만났다고나 할까 요?" 석명주는 칼을 보다가 영경의 얼굴을 훑어보고, 그러다가 다시 칼을 쓸어보곤 했다. 이윽고 그녀 가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내뱉았다. "이 칼은 비록 천하의 기보(奇寶)이긴 하지만 아가씨 자신의 영기(靈氣)는 아직 깃들지 않았군 요. 신검합일은 아직 안 되어 있어요. 아가씨가 검을 얻은 지가 며칠 안 되는 모양이지요?" 영경은 그녀의 말에 놀라서 찔끔했다. 더구나 석명주가 보검을 낀 채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품이 돌려주기를 안타까와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여태껏 신검합일이 되지 못한 걸 알았다면 나의 실력도 이미 눈치를 채었으리라. 그리하여 만일 강제로 보검을 탈취해 간다면 영경으로선 그녀의 적수가 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상대가 악의를 확실히 드러내기 전에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단호히 돌려 달라고 하기도 어색했다. 그녀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마음 속으로 빌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영검아, 빨리 나한테 돌아와다오!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가지 않도록 말이야!' 이영경이 뭐라 더 마음 속으로 축도를 하려는데 석명주의 수중에 있던 자영검이 갑자기 부르르 떨렸다. 홀연 칼에서 자줏빛이 나오는가 싶더니 떨리던 칼이 석명주의 손에서 벗어나 휘익! 하고 날아 이영경에게 되돌아 왔다. 칼은 철커덕! 하고 칼집으로 들어가 꽂혔다. 칼이 돌아오자 그렇게도 가슴을 졸이던 이영경은 쿵쿵 두근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연한 모습 으로 석명주를 바라보았다. 석명주는 돌연 칼이 꿈틀대며 되돌아 가는 것을 보자 놀라 마지 않는 한편 은근히 화가 났다. 이건 틀림없이 이영경이 진기를 써서 칼을 회수해 간 게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는 영경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선골의 몸을 지녔고, 장미진인의 자영검을 얻은 데 대해 사랑스러우면서도 선망의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칼에 아직도 사람의 영기가 깃들지 않은 것을 보고는 영경에 대해 이상히 생각했다. 신검합일이 되지 못한 영경이 어떻게 해서 이 인적없는 깊은 산골에서, 야수가 득시글거리는 가 운데에서 어떻게 이 명검을 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쑥 나오는 대로 신검합일 하지 못한 점을 물었고,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과 호의에서 한 소리였다. 그런데도 영경은 묵묵부 답이다가 느닷없이 진기를 써서 칼을 회수해 버렸으니, 이것은 자기를 소인배로 생각한 게 틀림 없는 일이었다. 석명주는 사실 이 자영검이 얼마나 신령한 보검인지를 알지 못 하고 있었다. 영경이 다급한 마 음에 암암리에 기도를 해서 칼을 회수해 가자 그녀는 적잖이 놀랐다. 진기로 칼을 회수한다는 것 은 신검합일보다 더한 능력으로써 이십 년 수련한 석명주 자기의 재주로써는 감히 흉내낼 수 없 는 경지였기 때문이다. 석명주는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해 상대방의 의심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나 이영경 은 예쁜 눈을 새초롬이 뜨고 말 한 마디 없이 자기를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더 이상 우물쭈물 남아 있기가 싫어 말을 건넸다. "방금 전에 내가 말을 잘못한 모양이지요? 아가씨는 이상히 생각하지 말아요. 오늘은 사부님께 돌아가야 하니 다음에 다시 아미산에 찾아 가르침을 받을게요." 이영경은 그녀가 떠나간다는 말을 듣자 무거운 짐을 벗은 양 홀가분했다. "언니의 고마운 정에 감사해요. 저는 여기서 약간 처리할 일이 남아 있거든요. 언니께서 아미산 에 오시려거든 육 개월쯤 뒤에 오세요!" 석명주는 다시 한번 마음이 뒤틀렸다. 육 개월 뒤에 오라는 것은 바로 거절의 뜻이 아닌가. 그때 는 무척이나 불쾌해서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아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영경은 석명주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망연히 서 있었다. 하루하루 스승으 로 섬길 검선을 찾아 헤매는 중이면서 어찌하여 저런 여검선한테 실망을 주었단 말인가? 그녀의 재주로 보아 스승이라는 반변노니는 필히 무공이 고강한 대종사이리라. 그분을 만날 좋은 기회를 자기 스스로 박차버린 결과 아닌가.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자 소리쳐 석명주를 불렀다. "석언니! 석언니!" 그러나 뜬구름만 두둥실 떠갈 뿐 서명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영경은 한순간의 허튼소 리로 천우의 기회를 놓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붉은 해는 하늘에 우뚝 솟았고 날씨가 쾌청했다. 그녀는 이제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다졌 다. 이때, 어느 틈엔지 성성이들이 죄다 몰려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영경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이제 가야 해. 너희들은 비록 짐승이긴 해도 영특하니까 잘 살 수 있을 거야. 산 속에는 먹을 것도 없으니 내가 간 뒤 사람을 상하는 따위 나쁜 짓을 하지 말아라. 내 후일 훌륭한 스승 을 모셔 검술을 이룬 뒤에 수시로 너희들을 찾아올게."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아 성성이와 말곰들은 영경을 에워싸고 아우성을 쳤다. 영경이 늙은 성성이에게 물었다. "저 애들이 저렇게 외치는 걸 보니 이 산에 또 괴물이 있다는 거냐? 나더러 또 그 괴물을 죽여 달라는 거니?" 늙은 성성이는 고개를 연신 저어댔다. 아마도 그들은 영경이 떠나가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영 경도 짐승들 못지 않게 연연해 하며 그들을 놓치기가 아쉬웠다. "너희들은 너무 이럴 것 없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의 금안사형이 아미산에 돌아와서도 나 를 못 찾아 얼마나 걱정할지 모른단다." 성성이들이 아무리 시람의 심성을 알아챌 정도로 영특하긴 했어도 그녀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영경을 에워싸고 야단법석을 떨며 흩어질 줄을 몰랐다. 영경은 검을 빼어 무릎 위에 얹고 엄숙한 표정으로 호통쳤다. "너희들이 정 내가 갈길을 막는다면 내 이 칼로 너희들을 치겠다!" 호통이야 이렇게 쳤지만 영경은 그들을 칠 수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저 한번 으름장을 놓아 길을 열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매무새를 고치고 보따리를 챙기자 경신술을 써서 앞으로 나아갔 다. 짐승들은 그대로 차마 그녀를 떠나보낼 수 없는 듯 뒤를 졸졸 따라왔다. 소녀와 짐승들은 묘한 행렬을 지어 삼십 리쯤 되는 산길을 걸어갔다. 산길이라 해도 전인미답의 산 속이라 개울과 바위와 돌이 엉클어진 험한 길이었으나 영경은 경신술이 빼어나 힘 하나 들이 지 않고 지나갔다. 짐승들은 천생의 날렵한 힘과 익숙한 행동으로 그녀의 뒤를 졸랑졸랑 따라갔 다. 해가 설핏 기우는 오후가 되자 그들은 어느 높은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산꼭대기서 아래 저쪽 을 내려다 보니 멀리 복숭아와 버드나무 숲 속으로 인가가 은은히 보였다. 이제 촌락에 가까와진 것이다. 계속 이들 짐승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영경이 짐승들에게 말했다. "손님을 천 리까지 송별한들 이별은 어쩔 수 없는 법이란다. 이젠 그만 따라와. 내 이번에 가서 검술을 연마하게 되면 너희들을 잊지 않고 꼭 만나러 올게. 이 산을 내려가면 바로 마을이라 너 희들이 떼지어 갔다가는 사람들이 놀라 난리가 날 것이다. 이제 너희들의 산골로 돌아들 가!" 성성이와 말곰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구슬픈 목소리로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그들은 더 이 상 그녀를 따라오지 않고 멈춰섰다. 늙은 성성이가 짐승들 앞에 다가가 뭐라 두어 마디 소리치자 수 많은 성성이들이 기이한 과일들 을 영경에게 바쳤다. 천하에 보기 드문 과일을 선사하는 짐승들의 태도가 그렇게도 정감이 넘치 고 은근할 수가 없었다. 이영경은 그들의 고운 뜻을 저버릴 수가 없어 얼마는 그 자리에서 먹고 황정(黃精), 잣 등 일부 는 봇짐에 챙겨 넣었다. 늙은 성성이는 나머지 과일을 공손히 손에 담아들었는데 영경은 별로 주의해 보지 않았다. 짐승들이 더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이영경은 그들에게 작별하고 빠른 걸음으로 봉우리를 내려왔다. 반 리쯤 내려와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성성이들은 아직도 꼭대기에 모여서서 그녀를 눈 으로 전송하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 늙은 성성이는 그녀를 먼 발치서 뒤따라 오고 있었다. 영경은 기괴한 생각이 들어 그를 손짓해 불렀다. "너희 동료들은 이제 돌아가고 있잖아. 너는 왜 나를 이렇게 따라오는 거니?" 이렇게 말하다가 이영경은 성성이가 손에 과일들을 받쳐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짐승 인 성성이가 동료들의 선물을 함부로 버릴 수 없어 자기를 졸졸 따라왔음을 직감했다. 축생인 주 제에 사람보다 충실한 데 대해 그녀는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너희 친구들이 나한테 준 과일 때문에 따라왔구나! 내가 다 먹지 않아서 기분이 나빴니? 내 보 따리도 꽉 차서 이젠 더 이상 가져갈 수 없는 걸!" 성성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는 과일을 옆에 있는 바위에 올려놓더니 손으로 영경을 가 리키고 다시 자기를 가리키고는 이윽고 앞쪽 길을 가리켰다. 이영경은 비로소 무슨 뜻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며칠 전 농담한 것을 성성이가 기억하고 자 기를 따라가려는 것이다. "너는 나와 같이 가겠다는 모양이구나?" "나, 함께, 간다." "어마!" 이영경은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세상에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있는가! 성성이가 말을 한 것이 다. 원래 이 늙은 성성이는 그들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일찍이 사람과 같은 지혜를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영경이 준 성형 하수오를 복용하자 며칠 사이에 목의 횡골(橫骨)이 점차 연화되고 영특함도 월등해졌다. 그래서 그는 이 은혜를 베푼 영경을 따라가면 후일 필히 좋은 일이 있으리 라 확신하게 됐고, 급기야 부하와 자식을 버리면서까지 이영경을 따라가기로 작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경이 자기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을 줄 미리 알고 이렇게 슬며시 그녀를 먼발치 서 따라온 것이었다. 한데 영경이 자기의 뜻을 알고 다그쳐 묻자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말을 토해낸 것 이다. 성성이는 사실 일찍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는 있었다. 다만 목에 짐승 특유의 횡골이 가로질 러 있어 직접 말은 하지 못했는데, 다급한 상황에서 연화되던 횡골이 스르르 끊어지며 자연스럽 게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성성이는 조상 때부터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고, 그는 특히 숫성성이와 암원숭이 사이에서 태어난 데다 이제 영약으로 환골탈태했으니, 이런 상황에선 사람의 말쯤이야 흉내내기가 어렵지 않았다. "아니, 니가 지금 말한 것이니?" "응!" 영경은 그가 삼사 일 만에 말을 배운 걸 보자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 그를 데려갈까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은 터라 다정하게 성성이에게 말했다. "성성아, 너의 뜻은 잘 알겠어. 네가 말도 할 줄 알고 영리해서 크게 쓸모는 있겠지만 함께 길을 가기는 영 불편할 거야. 그러니까 이번엔 그만 돌아가. 내가 훌륭한 사부를 만나 검술을 익힌 뒤 에 데리러 오마." 성성이는 그 말을 듣자 허둥대며 말도 채 안 되는 소리를 주워섬겼다. "나는, 간다. 나는, 간다. 붉은 과일을 딸 거다!" 이영경은 그가 호들갑을 떨며 다급한 표정을 짓는 게 사랑스럽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했다. 축생 의 성심성의를 저버리기도 그렇거니와 어린 동심도 크게 작용해 성성이를 데리고 길을 간다면 쓸 쓸함을 면하리란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놀라건말건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성성아, 내가 널 싫어서 데려가지 않으려는 건 아냐. 다만 넌 너무나 무섭고 흉칙하리만치 커서 사람들이 보면 놀라 자빠질 거야. 그들은 놀란 나머지 모두 널 죽이려 덤빌 거란 말이다. 요괴가 널 해치려 한다면 내가 얼마든지 죽여버릴 수 있지만 사람들한텐 어쩔 도리가 없잖아. 그러니 정 나랑 같이 가고 싶으면 우선 함께 사람들 있는 데를 가보자꾸나. 그들의 동태를 보고 다시 대책 을 강구해 보아야지 뭐." 성성이는 영경의 말을 듣자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하더니 머리를 끄덕끄덕 알았다는 시늉을 했다. 그들은 신이 난 걸음으로 달리듯 산길을 내려갔다. 한동안 달리자 이영경은 갈증을 느껴 개 울을 찾았다. 그녀는 개울물을 손으로 떠서 시원스레 마셨다. 이를 보자 성성이도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려 했다. 그러나 성성이의 손은 사람 손처럼 토실 토실하질 못해 성긴 손가락 새로 물이 모두 흘러내려 마실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손으로 물을 떠봤으나 한 방울도 마실 수 없자 성성이는 마침내 울상이 되고 이영경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화 가 난 성성이는 종전처럼 개울에 코를 박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산을 내려오면서 이영경이 채취한 잣은 무척이나 크고 맛이 신선한 게 아미산에서는 도대체 구 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머물던 산의 동굴에서 십 리까지는 도처에 그런 열매가 있 었으나 일단 그 한계선을 벗어나자 희귀한 과일들은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이영경은 과일들을 볼 때마다 따서 먹거나 보따리에 쑤셔넣었다. 그녀는 주과를 많이 따다가 유 일한 손님인 여영남에게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망창산은 운남의 수많은 산 중의 하나라 이 곳을 벗어나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릴지 가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때에 아미산에 도착하지 않 으면 죄다 썩어버릴 것인데 이영경은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리 성성이와 한 소녀가 한창 신나게 물을 마시고 개울가를 떠날 무렵, 갑자기 비릿하고 이 상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급작스레 바람이 크게 일고 모래와 돌이 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 다. 성성이는 시꺼먼 코를 벌름거리더니 하늘을 향해 길게 울부짖고는 바람처럼 내달았다. 그러더니 저만치에 있는 큰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이영경이 이상히 생각하는 사이 건너편 언덕에서 수많은 원숭이, 사슴, 산토끼들이 어지러이 달 려왔다. 모두 무엇엔가 쫓기는 형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짐승들의 뒤쪽에서 광풍이 노도처럼 일더니 집채만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하얀 얼굴에 누런 얼룩무늬를 지녔고 말할 수 없이 흉맹해 보였다. 호랑이는 산이 떠 나갈 듯 크게 울부짖으며 언덕을 질풍처럼 달려내려 왔다. 연일 요괴들을 주멸해 온 이영경이지만 이렇게 큰 호랑이는 난생 처음 보는 터라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보검을 빼어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호랑이는 이영경 앞쪽 십여 장쯤 달려오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사람이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 한 것이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힘을 모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크고 둥근 두 눈에서 누른 안광 이 무섭게 뻗어나왔으며 한껏 벌린 입의 날카로운 이빨이 으스스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뻣뻣이 곧추섰던 호랑이 꼬리가 매섭게 좌우를 치자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려 자욱한 안개처럼 주위를 뒤덮었다. 호랑이는 갑자기 얼룩덜룩한 황색무늬의 털을 떨치며 덮쳐들 기세를 취했다. 그 순간 호랑이의 몸뚱이가 하늘로 붕 솟았다. 이영경은 깜짝 놀라 검광을 쫓아내려다가 멈칫해 섰다. 호랑이는 덮쳐오는 게 아니라 하늘로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성성이가 그 갈 고리 같은 손아귀로 호랑이의 목덜미를 덥썩 나꿔챈 것이다. 호랑이는 벌써 공중 위 오륙 척 위로 들어올려졌다. 암수에 걸려 목을 잡힌 늙은 호랑이는 산천이 떠나가라 으르렁 대며 성성이의 손아귀에서 벗어 나려 발버둥쳤다. 그러나 성성이는 늙은 호랑이보다 훨씬 교활했다. 그는 두 다리로 나무기둥을 꼭 껴안고 두 손 으로 호랑이 목을 쥐고는 좌우로 크게 흔들더니 그대로 나무밑둥에다 냅다 후려쳐 패대기를 쳤 다. 호랑이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허공에 뜬 몸이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육중한 호랑이 몸뚱이가 쾅! 하고 부딪치자 그 나무는 부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서서히 부러져 쓰러졌다. 성성이가 딛고 선 나무는 엄청나게 컸으나 워낙 큰 호랑이와 성성이가 올라탄 데다 집채만한 호 랑이 몸이 세차게 부딪치는 바람에 끝내 그 중량과 충격을 감당 못하고 부러진 것이다. 성성이는 재미로 호랑이를 나무에 패대기쳤다가 나무가 부러져내리자 허둥지둥 어찌할 줄을 몰 랐다. 자기 몸이 붕 하니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호랑이 목을 쥔 두 손에 더욱 힘을 주 기만 했지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니 자연 성성이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꼴이 되고 말았다. 나무에 부딪친 호랑이는 충격에 잠시 정신을 잃었으나 이내 깨어났다. 성성이의 쇠고랑 같은 손 아귀에 잡힌 목이 너무나도 아파 새삼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으나 호랑이도 드물게 보는 영험한 동물인지라 한바탕 크게 울부짖으며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땅에 발이 닫자 마자 네 발로 박차며 마치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호랑이는 오금아 나 살려라 하며 오던 길로 되돌아 갔고, 호랑이 등에 탄 성성이는 계속 목을 꽉 쥔 채 등 위에 납작 붙었다. 이영경은 성성이가 혹 해를 입을까 봐 경신술을 써서 날렵하게 뒤쫓아 갔다. 짐승과 사람이 한 줄기 광선처럼 달려 두 개의 언덕을 넘어갔다. 이영경이 어느 암벽을 막 돌아갈 무렵, 별안간 성성이의 애처로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 란 이영경이 발걸음을 재촉해 달려가 보니 성성이는 이미 땅에 드러누워 있고 그 늙은 호랑이가 날카로운 앞발톱으로 성성이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으르렁 대며 덤비는 폼이 완전히 형세 역전인데, 그들 옆에는 불그스레한 눈을 지닌 도인이 불진을 손에 들고 느긋이 서 있었다. 이영경은 성성이가 호랑이한테 제압당한 것을 보자 극히 위험한 상태라는 생각에 흑백을 가릴 사이도 없이 수중의 신검을 후려쳐 십여 장의 자줏빛 검광을 쏘아냈다. 다음 순간, 검광이 스치는 곳에 호랑이의 목은 이미 뎅겅 잘려나갔다. 도인은 이영경의 검광을 보자 깜짝 놀라 뒤로 훌쩍 날아 피하면서 호통을 쳤다. "어디서 굴러온 계집애가 감히 내 선부(仙府)를 지키는 신성한 호랑이를 죽이느냐?" 도인은 말과 동시에 수중의 불진을 영경을 겨냥해서 홱 내밀었다. 영경은 순간 머리가 띵 하니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쓰러지지 않고 가까스로 버티어 설 수 있었다. 이 도인은 바로 무선(巫仙) 신녀봉(神女峰) 음양수의 사제로서 별호가 <귀도인(鬼道人)>인 교수 등(喬瘦藤) 그 사람이었다. 그도 사형과 마찬가지로 일신에 요법검술을 익혀 음양수보다 더 사악 한 짓을 많이 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의 맹호는 그의 동굴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는데 먹이를 찾아나갔다가 마침 영경을 만난 것이었다. 호랑이는 한창 노루, 사슴, 산토끼를 쫓다가 전면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 것을 보자 자기의 주인 생각을 했다. 그는 예쁜 여인만 있으면 물어다 주인에게 바쳤고, 주인은 아주 좋아하 며 여인을 즐기곤 했었다. 여색을 즐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여인을 이용해 채보(採補)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성이한테 걸려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혼찌검을 당하고 땅에 내려서자 호랑이는 앞뒤 생각없이 성성이를 등에 태운 채 있는 힘을 다해 급히 동굴로 냅다 뛰었고, 호랑이의 평소와는 다른 울부짖음을 들은 교수등은 필히 강적을 만났 음을 알고 구하기 위해 급히 동굴을 나왔던 것이다. 호랑이가 성성이를 태워 달려오는 것을 본 교수등은 불진을 살짝 펼쳐 성성이를 땅에 떨어뜨렸 다. 호랑이는 그동안 무지무지하게 고통을 받아 화가 뻗쳤던 참이라, 사나운 발톱으로 성성이의 앞가슴을 물어 분풀이를 하려고 했다. 바로 그때 영경이 달려왔고, 그녀의 일검에 호랑이는 두 동 강이 나고 만 것이다. 교수등은 호랑이와 성성이 뒤에 사람이 쫓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다름아닌 어여쁜 소녀인 것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방심을 했고, 어린 소녀가 그 성 성이의 주인이라고는 더더구나 생각지 못했었다. 오히려 불측한 마음이 솟아 저 소녀를 잡아서는 채보를 해보리라 꿍심을 먹었다. 한데 그 가냘프디 가냘픈 소녀가 얼마나 대단한 재주를 지녔는지 눈 깜짝하는 사이 십여 장도 넘는 검광을 뻗어내 애지중지하던 호랑이를 죽여버린 것이다. 그는 크게 노하여 <전도미선(顚倒 迷仙)의 수법으로 이영경을 사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수법은 이영경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 다. 그녀는 이미 허다한 주과를 복용한 터라 쉽사리 그 따위 요법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영경은 흐릿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고 우뚝 버티어 서서 아리따운 목소리로 호통쳐 물었다. "당신이 저 굴에 사는 도인인가요? 어쩌면 당신은 호랑이를 시켜 사람을 해치려 하지요? 나의 성성이는 그와 싸워 당당히 이겼는데 저처럼 쓰러져 있는 걸 보니 당신이 손을 쓴 모양이구려. 좋아요! 내 그를 살펴보아 무슨 암수라도 당했다면 당신을 가만 두지 않겠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땅에 드러누워 있는 성성이에게 다가갔다. 교수등은 상대하는 여인이 비록 나이어린 소녀이지만 쏘아내는 검광이 왕년의 장미진인이 쓰던 자웅 쌍검과 같은 데에 의아해 하며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더욱이나 저렇게 큰 성성이를 길들인 걸 보면 함부로 상대할 일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감히 검광을 날려 상대하지 못하고 동태 를 보는 중인데, 이영경의 천진난만한 말을 듣자 화는 삭이지 못할망정 마음은 놓을 수 있었다. '그래, 이 계집애는 터놓고는 함부로 상대하기 힘들지만 암암리에 수를 쓰면 쉽게 처리할 수 있 겠어. 먼저 <현녀둔장(玄女遁將)>요법으로 주위 십 리의 산길을 모두 봉쇄해 도망치지 못하게 해 야 겠군.' 교수등은 마음을 작정하자 요법을 펼쳐놓고는 아무 말 없이 길가 바위에 걸터앉아 이영경이 어 떻게 행동하나 동정을 살폈다. 이때 영경은 성성이에게 다가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를 살펴보고 있었다. 성성이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눈에서 피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폼새가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는 듯했다. 성성이는 영경을 보자 억지로 일어나 앉아 도인을 손가락질한 채 말을 하지 못했다. 영경은 마 음이 마냥 아픈 중에도 성성이가 도인의 암수를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분통이 터져 욕을 내뱉았다. "저 나쁜 도사땜에 네가 말도 못하는구나! 조금만 기다려. 내가 복수를 해줄게!" 영경은 성성이가 자신의 목을 가리키는 것을 보자 갈증 때문에 말을 못하는 줄 알고 보따리 속 의 주과 두 개를 꺼내 입 속에 넣어주었다. 보따리에는 아직도 수십 개의 주과가 남아 있었다. 성성이가 주과를 받아먹는 것을 보면서 영경은 부아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교수등을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당신은 어째서 나의 성성이가 말도 못하게 해를 가했어요? 빨리 고쳐 놓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혀를 잘라서 평생 동안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그녀는 이 말에 이어 온갖 욕을 쏟아냈다. 성성이는 일찍이 좋은 영약을 먹은 탓으로 요법에서 금세 깨어난 것이지만 교수등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영경이 짐승한테 다가가자 금방 일어나 앉고 그녀가 주과를 꺼내 먹이는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너무나 크게 놀라고 있었다. '저 계집애는 실로 보통 내력의 소유자가 아니구나. 저렇게 백 년에 한 번 얻기도 힘든 주과를 성성이한테까지 먹이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직접 보지 않고서야 믿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는 이영경이 삿대질하며 욕을 하자 속으로는 분통이 끓었으나 겉으로는 눌러 참고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요 풋내기 아가씨, 그대는 누구 문하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나를 이렇게 성가시게 하는 거냐? 내 이미 주위에 천라지망(天羅之網)을 깔았으니 날개가 있다 한들 도망치기 어려울 게야. 어때, 빨리 항복하고 나의 선부에 가서 쾌락이나 맛보지 그래!"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성성이는 이미 주과를 복용하여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성성이 는 정신이 말짱하게 돌아오자 나는 화살처럼 내달아 대번에 도인의 목을 움켜잡았다. 워낙 전광석화같이 빠른 동작이라 교수등은 미처 대비할 새가 없었다. 강철 같은 성성이의 손아귀가 목을 죄어오자 교수등은 고함마저 내지를 수가 없었다. 수많은 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그도 이 순간 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고 얼 굴은 백지장같이 하얘져 금방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영경은 이 도인이 정말 나쁜 짓만 하는 요인(妖人)인지 착한 도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칫하다 선한 사람을 죽일 염려가 있는지라 영경은 소리쳐 성성이를 말렸다. 성성이는 영경의 명령을 듣자 대뜸 손을 놓고 영경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교수등은 성성이가 목을 놓고 물러나서야 겨우 목숨을 건졌음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평생 동안 이처럼 처참한 꼴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살려준 은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손을 갑작스레 뿌리쳤다. 두 줄기 누른 검광이 성성이 의 등짝을 향해 날아왔다. 영경은 정세가 급박한 것을 보고 검을 날리자마자 후려쳤다. 붉은 무지개 같은 검광이 적의 비 검과 맞부딪쳤다. 교수등은 형세가 좋지 않음을 느꼈던지 급히 비검을 회수했다. 하나 그의 비검은 이미 영경의 일검에 두 쪽이 나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영경은 적이 비검술을 구사하는 고수일 것 같아서 마음 속으로 무척 당황하던 참이었다. 한데 자기의 자줏빛 검광에 상대방이 한 발 물러나는 것을 보자 기쁘기 한량없었다. 이때 옆에 있던 성성이가 놀란 듯 소리쳐 외쳤다. "저건, 요괴야!" 비로소 영경은 도인의 생김새가 괴이한 것에 퍼뜩 생각이 미쳤다. 저렇게 큰 호랑이를 키우는 것도 이상하고, 영통한 성성이의 말로 미루어 보면 저 자는 요괴가 둔갑해 사람이 된 건 아닐까? 그녀가 검을 휘둘러 다시 앞으로 나가려는 찰나, 도인의 호통소리가 터져나왔다. "건방진 계집년! 감히 나의 비검을 망가뜨리다니! 너는 이미 나의 천라지망에 갇혀 있다. 빨리 항복하여 쾌락이나 즐길 것이지 뭐하는 수작이야? 죽음이 임박해 후회해도 그땐 이미 늦어!" 영경은 상대방의 말이 뭣을 뜻하는지 잘 알 수 없었으나 좋은 의미의 말은 아닌 성싶어 맞받아 쏘아붙였다. "요괴야, 도망가지 말고 나의 일검을 받아랏!" 그녀는 신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짓쪄나갔다. 교수등은 이영경의 자줏빛 검광이 무지개처럼 뻗쳐옴을 보자 감히 맞받아치지 못하고 입으로 주 문을 외며 불진으로 허공을 한 차례 부욱 그었다. 그 순간 도인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스승과의 만남 鬼鬪森林 李英瓊飛劍斬妖人 春藏魔窟 朱矮搜無心得異寶 도인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자, 이영경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때는 아 직 황혼 전인 데도 도인은 백일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도인은 정말 요괴란 말인가? 이영경은 방금 전에 천라지망을 깔았다던 도인의 말이 생각나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 다. 전후좌우 사방에 쭈뼛쭈뼛 솟은 고목들의 자태는 유달리 으스스한데, 그 사이사이로 햇빛이 싸늘하게 뻗쳐 들어와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그 속에서는 사람의 얼굴색마저도 회색빛으로 물이 드는 게 마치 귀기가 서린 듯했다. 이런 곳에 오래 있다가는 위험한 일을 당할 것이 뻔했다. 그녀는 더 이상 도인의 종적을 찾을 마음이 없어 왔던 길로 되돌아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때 홀연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며 돌과 모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무수한 바람기둥이 사 방에서 휘몰아치며 그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이윽고는 검은 구름이 빽빽히 하늘을 덮고 짙은 안 개가 대지를 덮었다.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해지면서 사방에서 귀신의 울음소리 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싸늘한 바람은 뼈를 에이는 듯 차가와 영경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로 이때 회오리바람과 짙은 안개 속에 수십 개의 발가벗은 여자귀신이 나타났다. 여귀(女鬼)들 은 하얀 깃발을 나부끼며 춤추듯 영경에게 다가왔다. 귀신들이 사방에서 춤추며 다가오자 성성이 는 기절해 버렸다. 이영경은 눈이 어지럽고 마음이 떨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도인의 요 법에 걸려들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제 수중의 보검으로 귀신들을 후려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검을 휘두르려 해도 이미 사지의 힘이 빠져 칼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두려움이 파도처 럼 밀려왔다. 눈앞의 여귀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이때 도인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계집애야, 너는 이미 천라지망에 빠졌다. 수중의 보검을 놓고 빨리 항복하거라. 그리고 너의 이 조사님을 따라 나의 선부에서 인생의 진미를 실컷 즐기자꾸나!" 도인의 능글맞은 목소리를 듣자 영경은 이제 마지막 남은 길이란 거짓 항복을 하고 도인이 요법 을 거둬들였을 때 보검을 날려 모험을 감행하는 것뿐이었다. 이영경이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여귀들은 이 장 가까이 까지 다가와 있었다. 한데 웬일 인지 여귀들은 더 이상 달려들지 않고 이 장 밖까지 오더니 외려 한걸음씩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 다. 그러자 도인이 십여 장 밖에서 영패(令牌)를 두들기며 호통을 쳤다. 영패가 한 차례 울리자 여귀 들은 영경이 있는 곳으로 다시 우르르 달려들어 왔다. 그러나 영경의 전방 이 장 가까이쯤 와서 는 다시 두려운 빛을 띠며 멈춰어 섰다. 귀신들은 무서운 기색을 드러내고 또 두어 걸음 뒤로 물 러났다. 도인은 여귀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자 대단히 화를 냈다. 그는 영패를 마구 두들 기며 계속 호령을 했다. 하지만 그의 호통은 종내 아무 효과가 없었다. 영경은 처음에는 두려움으로 사지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발가벗은 여귀들이 여러 번이나 짓쳐오다가 자기가 있는 곳 이 장 밖에서 멈춰서서는 무서워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자 기 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들고 있는 자영검이 선가(仙家)의 보물임에 생각 이 미쳤다. 귀신들이 자기에게 달려들다가 이 장 밖에 멈춰서서 두려워 벌벌 떤 것은 자영검에서 발출되는 자줏빛 섬광 때문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영경은 비로소 마음이 느긋해졌다. 담력도 서서히 솟아났고 무력했던 손발에는 힘이 되살아났다. 이 귀도인 교수등이 쓴 요법은 <구천도록음마대법(九天都錄陰魔大法)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음험하고 악랄하기 한량없어 일개 소녀는 물론이고, 예사 검선이 요법에 걸리면 지각을 잃고 속 수무책으로 잡히게 마련이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영경은 그동안 많은 괴이한 사건을 겪은 데다 영약과 선과(仙果)를 수없이 사 용해 쉽사리 미혹되지 않을 뿐더러 장미진인의 자영검이 몸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 요법이 추호도 침범하지 못했다. 귀도인은 자신의 요법이 조금도 효험이 없는 것을 보자 크게 노하고 말았다. 그는 처음 영경이 선골의 몸을 지닌 것을 보고 사로잡아 채보하는 데 쓰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요법이 듣지 않자 화가 불같이 일어 선골이고 계집재미이고 간에 머리건 몸통이건 갈가리 찢어죽이고 싶어졌다. 독랄한 심보가 발동한 귀도인은 이빨로 가운데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서는 홍소를 터뜨리며 피 를 훅 뿜어냈다. 짙은 안개 속으로 피를 불자 수십 마리의 불뱀(火蛇)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영경 을 향해 날아왔다. 영경은 아직도 어떻게 해서 이 험경을 벗어나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홀연 여귀들 이 뒤로 물러나더니 수십 갈래로 불뱀 무리가 날아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급한 중에 자신 의 안력(眼力)이 부족한 것을 한탄했다. 저 요물이 어디 있는지만 안다면 자영검을 힘껏 발출해서 그를 기필코 죽이련만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한하는데 갑자기 수중의 보검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마치 손에서 벗어나 금방이라도 적을 향해 날아갈 것 같았다. 이때 이미 불뱀은 그녀 가까이에 접근하고 있었다. 영경은 마음이 다급해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요괴야, 요괴야! 네가 어디 있는 줄만 안다면 내 자영검을 쏘아내 너 따위는 간단히 죽여버릴 수 있어! 그러면 너는 묻힐 장소도 없이 죽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중의 보검은 맹렬한 힘을 발휘하며 용틀임을 했다. 영경은 손이 마비되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말았다. 검은 자줏빛 검광을 그으면 서 안개 속을 뚫고 날아갔다. 보검이 십여 장을 날아갔을 즈음 처절한 비명소리가 허공에 메아리 쳤다. 동시에 수십 마리의 불뱀도 영경의 몸을 덮쳤다. 영경은 순간 사지가 무력함을 느끼며 후끈후끈한 뜨거움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 위기일발 의 순간, 자영검이 번개처럼 되돌아 왔다. 동시에 영경은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찰나 경천동지할 벽력소리가 그녀의 귀청을 때렸다. 영경은 기절해 쓰러졌다. 한참이 지나서 영경은 서서히 일어났다. 그녀는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석양이 서산에 걸쳐 있고 어스름이 맑은 대지에 깔리고 있었다. 하늘엔 어느 틈엔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있었고, 그렇게 도 극성이던 안개는 말끔히 걷혀 있었다. 귀신에 놀라 기절했던 성성이는 뇌성 소리에 깨어나 그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도고(道 姑) 차림의 미부인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낯선 여인을 보는 순간, 영경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맨 보검을 더듬었다. 보검은 칼집에 꽂혀 있었다. 그제서야 영경은 사르르 마음을 놓았다. 도고는 담뿍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검은 머리에 얼굴이 발그스레한 모습이 아주 단아하면서 품 위가 있어 마치 신선 같았다. 도대체 어떤 내력을 지닌 여인인지 몰라 이영경이 한번 물어보아야 겠다 생각하는 참에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인은 그대가 죽였지만 요사스런 안개가 걷히지 않아, 내 태을신뢰(太乙神雷)를 터뜨렸지. 아 가씨는 많이 놀래셨는가?" 도고의 말소리는 옥구슬이 구르듯 청아해 듣는 이의 마음까지 맑게 씻어주는 듯했다. 비범한 자 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녀가 이인(異人)임을 믿게 해주었다. 이영경은 여인의 말을 듣자 조금 전에 자신의 자영검이 저절로 맹렬히 날아갔던 일을 상기했다. 보검은 십여 장이나 무지개를 그리며 날아갔고 이어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었다. 그렇다면 그 요인은 자영검에 의해서 죽었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과연 십여 장 밖의 큼지막한 나무 옆에 목이 짤린 도인의 시체가 보였다. 그녀의 가슴 속에 비로소 환희가 솟구쳐 올랐다. 이영경이 기쁨에 들떠 뭐라 말을 하려는데 다시 도고의 말소리가 울렸다. "아가씨가 차고 있는 자영검은 우리 집안의 가보예요. 내 구름 위에서 보니 그대가 갖고 있기에 한 발 늦어 다른 파의 인물이 가져갔나 했는데, 아가씨가 그 검을 얻었다면 그것도 인연이며 제 주인을 만난 것이겠지. 아가씨는 그 검을 망창산의 신전에서 얻으셨소?" 이영경은 도고가 보검을 자기네 가보라 말하는 것을 듣자 놀라서 주춤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손으로 검을 누르며 대꾸했다. "그래요. 망창산의 허물어진 절터에서 얻었습니다. 이 보검을 당신네 집안의 물건이라 하셨는데 그러면 어째서 그 황폐한 절간 속에 버려져 있었나요? 그리고 이 자영검이 당신네 거라는 무슨 증거라도 있습니까? 저는 이 검을 밤새도록 애쓴 끝에 구사일생으로 얻었답니다. 쉽게 얻은 것이 아니었다구요!" 도고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가씨는 내 말을 오해하고 있구먼. 이 신검은 다른 한 자루와 암수 한 쌍을 이루는데 나머지 하나는 아직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어요. 머지않아 기연을 만나 출세(出世)하리라 믿어요.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구? 그 검은 원래 장미진인이 마귀들을 없앨 때 쓰던 무기였어. 그러나 검이 너 무나 살기가 심해 진인께서 승천하기 전 망창산의 절 속에 부적을 붙여 숨기셨지. 그때 그분은 나의 남편에게 말씀하셨어요. 그 신검은 능히 주인을 고를 능력이 있어서 언젠가 주인을 찾으리 라고 말예요. 하지만 진실한 사람이 찾으면 그 신검을 얻을 터이나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은 필히 화를 입으리라 했거든. 과연 그 뒤 많은 사람들이 검을 엿보았지만 모두 실패하고 처참히 죽었을 뿐이야." 이영경은 도고의 말을 취한 듯 경청했다. 그녀가 계속했다. "근자에 듣자니 네 마리의 강시와 두 마리 산괴, 그리고 한 마리 목괴가 영산(靈山)에 나타나는 바람에 일년 내내 이 지방이 가물었다더군. 엄동시절이 왔는 데도 봄처럼 따뜻하여 춘삼월이 마 치 한여름 같았다는 거예요. 만약 산 속에 있는 영천(靈泉)의 물이 아니었다면 온 산의 영약과 신 비한 화초가 다 말라죽을 뻔했지 뭐야. 그 산은 원래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어서 별 문제는 없었 으나 네 마리의 강시는 갈수록 극성을 부려 머지않아 비천야차가 되어 산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 을 상할 참이었어요. 그 산괴와 목괴는 이미 매일매일 짐승들을 헤치며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있 었지요. 나의 남편은 날짜를 계산해 보더니 머지않아 검의 주인이 나타날 것이라 했으며 그녀가 검술을 아직 배우지 않은 상태이지만 기연으로 검을 얻으리라 했어요." 이영경은 도고의 말에 놀라 입을 짝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이 사람들은 세상일을 훤히 내 다보고 있으니 진정 이인이 아닌가? 도고는 계속 말했다. "한데 빈도는 이 검이 만에 하나 다른 문파의 손에 들어갈까 봐 무척 걱정했어요. 그처럼 무서 운 검이 나쁜 자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어찌 되겠느냐구. 특히 망창산은 몇 마리 요물이 횡행한다 기에 그것들을 없앨 겸 해서 내가 그곳에 갔답니다. 그러나 빈도가 갔을 때는 비가 내린 뒤인 데 다 목괴는 이미 주멸된 다음이더군. 사방을 살펴보니 산괴와 네 마리 강시도 검을 얻은 사람에 의해서 제거됐구. 남편의 예언에 의하면 검을 취득하는 사람은 여자로서 검술을 모를 거라 했으 니 그들을 그처럼 처치할 능력이 없을 거거든요.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흔적을 찾아 뒤를 추격했지요. 그러다 마침 공중에서 자영검이 발하는 자줏빛 섬광을 보고 급히 쫓아 내려오다가 아가씨가 요법에 걸려 곤욕을 치르고 있기에 태을신뢰를 터뜨려 요기(妖氣)를 격퇴한 거야. 과연 당신의 자질은 천고에 드물게 보는 선골이라 이 검을 가질 자격이 있더군. 자, 안심이 되겠어요? 그런데 당신은 마귀가 들끓는 그 망창산엘 어떻게 가게 됐지요? 누군가의 지도라도 받은 건가?" 영경은 도고의 자세한 말을 듣자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은 돌 위의 글 과도 흡사한 것이고 그로 미루어 보면 이 여인은 빼어난 검선일 것이 틀림없었다. 영경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젖었다. 이 순간이 자기의 갈림길임을 알았던 것이다. 스승을 얻을 복(福)이 곁에 사뿐히 내려선 순간이 아닌가. 그녀는 후다닥 무릎을 꿇고 미부인에게 애원했 다. "사부님,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제자는 무의식중 이 검을 얻었을 뿐 누구로부터 지시를 받은 적 은 없었습니다." 영경은 검을 얻게 된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 뒤 도고의 성함을 묻고 제자로 문하에 거둬 달라고 애원하며 무수히 머리를 조아렸다. 도고가 웃으며 말했다 "나의 남편은 건곤정기묘일진인인 제수명(齊漱溟)이고 나는 순란인이다. 너는 이번에 자칫 잘못 해서 다른 문파에 들어갈 뻔했구나. 그러나 너는 천품이 뛰어난 데다 복이 무궁해 위험한 중에 검을 얻기까지 했으니 경하할 일이로다. 너를 우리 부부의 문하에 거둬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지. 그러나 너는 아직 검술을 모르고 이 검과 신검합일을 할 수 없으니, 다른 파의 고인을 만나면 검 을 빼앗길 위험이 많겠구나. 우선 너에게 구결을 전수해 줄 터이니 아미에 돌아가 이를 매일 수 련토록 해라. 이삼 년 후면 필히 큰 진전을 볼 것이니 그때 다시 너를 찾아 내 남편에게도 만나 게 하겠다. 알겠느냐?" "제자, 잘 알아모시겠습니다." 이영경은 즉시 스승으로 섬기는 예를 하고 성성이한테도 절을 하며 인사를 드리게 했다. 묘일부인은 성성이를 아주 귀여운 듯 쳐다보았다. "그가 비록 짐승이라도 이처럼 영통하니 네가 수련 중에 큰 도움이 되며 적막하지는 않겠구나." 영경은 또 백미화상이 한 마리 신조인 불노를 자기에게 붙여주어 하늘을 타고 다닐 수 있게 해 준 일과 주경운이란 사매가 있음도 이야기했다. "언니 주경운은 황산 찬하대사의 제자가 되어 검술을 배우고 있어요. 한데 사부님은 어느 명산 에서 사시는지요. 이삼 년 사이에 그 신조를 타고 뵈오러 가도 되올는지요?" 묘일부인이 담뿍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우리들의 도학이 <삼영이운(三英二雲)>에 의해 크게 흥하리라 하더니 과연 장미진인의 그 예 언이 정확히 들어맞는구나. 네가 짧은 사이 많은 기연을 만났으니 정말 경하할 일이다. 그 백미화 상은 배분이 나보다도 한층 위로써 성정(性情)이 극히 특이한 선배신데 그런 고인이 너에게 상서 로운 독수리를 하사해 주시다니 정말 얻기 힘든 행운이다. 나는 구화산 쇄운동에 사는데, 너에게 는 영운이란 사저와 금선이란 사형이 있단다. 그들은 모두 나의 자녀들이다. 네가 나를 보고 싶겠 지만 일 년이 지난 뒤 그 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될 때에야 가능할 것이다." 영경이 신이 난 듯 대꾸했다. "그러나 제자는 이미 이 검을 마음대로 발출했다가 마음먹은 대로 거둬들일 수 있는 걸요?" "네가 어찌 벌써 검의 묘한 씀씀이를 터득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을 본파의 검결에 의 해 고된 수련을 거쳐야 가능하며 적어도 삼 년은 적공해야 신검합일이 될 것이다. 그때서야 능소 능대하고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제 검은 벌써 제 생각대로 휙 하니 쏘아나갔다가 검집으로 되돌아 오곤 했어요." "그거야 자영이 워낙 영통한 검이기 때문이지. 그가 스스로 알아서 살생을 하고 되돌아 오는 것 이니 그건 별 게 아니니라. 네가 정 못 믿겠다면 너의 검을 나에게 날려보아라. 나를 다칠 수 있 을 것같으냐?" 이영경은 스승의 말을 듣자 그럴 것이라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녀는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심성이 워낙 영민해 자신도 모르게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 다. 그것은 적성자를 보았을 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만사 의심하던 것과는 판이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검의 무서움을 알기에 은근히 걱정이 됐다. 만에 하나 실수하여 부인을 다치게라 도 한다면 어찌 스승에게 도리를 다했다 하겠는가? 그렇다고 스승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을 수도 없어 그녀는 예쁜 눈을 초롱초롱히 뜨고 스승을 말끄럼히 바라보았다. 어찌 응대해야 할지 망설 이는 것이다. 묘일부인은 그녀의 태도를 보자 제자의 천성이 순박함에 한층 마음이 기꺼워졌다. 그녀는 방그 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걱정할 것 없다. 너한테 검을 날리라고 할 때는 검을 막아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 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영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마디 했다. "사부의 명령대로 제자는 검을 쏘아내겠습니다만 좀 멀리 떨어져 던져도 되겠습니까?" "그리해라!" 묘일부인은 제자의 가녀린 심성에 웃음이 절로 났다. 영경은 연일 자영검을 사용하며 그의 무서움을 스스로 익히 알고 있었다. 한번 쏘아내기만 하면 무지개 같은 자줏빛 검광이 십여 장에 뻗쳐 번개처럼 쳐나가는 게 아닌가. 부인이 방비한다 해도 좀더 멀리서 쏘아내는 게 나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차제에 스승의 실력을 보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도 했다. 영경이 소리쳤다. "제자, 실례를 하겠습니다!" 그녀는 뚜벅뚜벅 십여 장을 걸어나간 뒤 몸을 돌려 스승을 향했다. 이어 다시 소리쳤다. "사부께선 조심하십시오. 검을 날리겠습니다!" 챙그렁 하고 검이 검집에서 나왔다. 보검은 검집에서 나와서 자줏빛 검광을 사방에 흩뿌렸다. 으 스스한 검광에 새삼 걱정이 된 영경은 마음 속으로 빌었다. '자영아, 자영아! 이것은 사부님과 함께 시험을 하는 것뿐이란다. 너는 절대로 나의 사부를 해쳐 서는 안 된다. 알았지!' 기도가 끝나자 이영경은 스승을 향해 검을 힘껏 날려보냈다. 자줏빛 검광이 번개처럼 날아가자 묘일부인의 신변에서도 금빛 섬광이 화살처럼 쏘아나와 맞받아쳤다. 두 개의 금광은 허공에서 부딪쳐 한 덩어리가 되더니 두 마리 교룡(交龍)이 엉클어지듯 어울어 졌다. 이때는 이미 황혼 무렵이었다. 금빛과 자줏빛이 허공에서 섬광을 흩뿌리며 어지러이 날으니 어 스름한 산 속은 금세 현란의 도가니로 화한 듯했다. 산 속에 가득한 나무들은 금빛과 자줏빛에 반사돼 기이한 풍랑을 이뤘다. 영경은 묘일부인의 검술이 과연 교묘한데 감탄해 환희에 싸여 있었다. 그녀가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홀연 번개가 스치는 듯하더니 묘일부인이 그녀 옆에 내려섰다. 부인이 입을 떼었다. "저 자영검은 과연 대단하구나. 내가 오랫동안 수련하지 않았으면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다. 자, 내가 검을 거두어 볼까?" 그녀는 두 개의 검광을 향해 일지를 날렸다. 두 검광은 위 아래로 날아오르며 정말 두 마리 교 룡인 양 무섭게 싸웠다. 묘일부인이 다시 일지를 튕기며 소리쳤다. "떨어져라!" 두 개의 금광은 순간 나뉘어지고 금빛 검광은 섬전처럼 부인한 테 날아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 다. 그러나 자줏빛 검광은 허공에 멈추어 서서 날지도 돌아오지도 않았다. 마치 무슨 물건에 걸린 양 공중에 붕 떠 있었다. 영경이 놀라 외쳤다. "자영아, 돌아오라!" 몇 번을 소리쳐 불렀건만 보검은 돌아오지 않았다. 묘일부인은 기이한 생각이 드는 가운데 누군가 고인(高人)이 부근에 있는 듯해 잔뜩 긴장이 됐 다. 그녀가 큰소리로 호통쳤다. "자영은 빨리 돌아오라!" 그녀가 검을 향해 일초를 전개하자 검광은 천천히 날아와 묘일부인의 손 위에 떨어져 내렸다. 부인은 검을 영경에게 건네주었다. "빨리 검집에 넣어라!" 영경이 검을 간수하는 것을 보고 부인은 맞은편 숲을 향해 소리쳐 말했다. "어떤 고인께서 납시었는지요. 왜 나타나지 않으십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동시 그들 앞에 뚱뚱한 늙은이가 나타났다. 늙은이는 껄껄 웃으며 부인에게 말했다. "과연 당신네 집안의 보검은 대단하시오. 아차 하면 내 목도 뎅겅 날아가겠소이다!" 묘일부인은 노인을 보자 급히 예를 갖추었다. "누군가 했더니 주도우이시군요. 어떻게 이렇게 한적한 곳엘 다 납시었습니까?" 그녀는 즉시 영경을 불러 노인에게 절을 하라 일렀다. "이분은 너의 사백되는 주어른이시다. 외자 성함으로 주매라 부르신단다. 바로 유명한 <숭산이 로> 가운데 한 분이시니라." 묘일부인은 왜수 주매에게도 영경을 소개했다. "이 애는 제가 새로 거두어들인 제자 이영경입니다. 어떠세요. 자질이 있어 보입니까?" 주매는 다시 껄껄 웃었다. "허허허, 자질이 있는 아이들은 모두 당신네 문하로 들어가 버리는구려. 나도 도제 두 명을 새로 두었지만 어디 당신네들 제자 만큼이야 하겠소. 성도의 자운사를 깨칠 때 활약한 제자들도 모두 빼어난 그대들의 애송이였었지. 그러지 마시오. 정말 분통이 터져 못 견디겠소." "사백께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요?" 묘일부인이 슬쩍 눈을 흘기자 주매는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그날 자운사를 깨치고 나는 청성산의 금편애로 돌아갔었소. 그러나 몸이 심심한 게 도통 참을 수가 있어야지. 또 그대의 여식과 전생의 아들께서 귀하의 문하제자와 함께 제수명 진인의 명을 받들고 운남과 귀주엘 가질 않았겠소. 무슨 할 일이 있는 모양인데 고 녀석들이 귀엽기도 하고 사마외도의 고수들한테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암중에 도와줄 양으로 쫓아갔었다오. 물론 무슨 기연이 있어 나도 당신네처럼 자질이 근사한 놈을 제자로 만날수 없을까 하는 요행도 노리고 있 었지만 말이오." 주매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운남 곤명에서 고행두타의 득의제자인 소화상 녀석을 만나지 않았겠소. 그들은 벌써 당신의 애 들과 함께 돌아가는 길이라더구만. 녀석들 어찌나 영리하고 똘똘한지 사실 내가 걱정하고 도와줄 필요가 없습디다. 나는 이곳저곳 노닐다가 역시 돌아오고 말았다오. 그런데 비웅령(飛熊嶺)을 지 나다가 산허리에서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사람을 만났지요. 다름아닌 곤륜파의 검선 적성자였소. 왼쪽 팔이 덜렁 짤린 데다 온몸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었더이다. 그의 비검은 어딘가에서 잃어버 리고 낭패한 꼴이 말이 아닙디다." "적성자라구요?" 이영경이 놀라 물었다. "그렇다." 주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왜 그 모양이 됐느냐 물었더니 적성자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합디다. 얼마 전 음소당(陰素 棠)이 아미산을 지나다가 칼춤을 추며 놀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는 겁니다. 천부적인 자질이 비상 하게 좋아 데려다 제자로 삼을 생각이 쏘옥 솟더란 거지요. 그래서 그에게 말을 걸려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 내려오더란 거예요. 그녀는 깜짝 놀랐답니다. 그 신조는 다름 아닌 백미노조의 불노란 새이고 그렇다면 소녀애가 백미노조와 깊은 연원이 있을 터이니 말입니 다. 백미노조와 관련이 있다면 그가 함부로 데려갈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더구나 불노란 독수리 는 보통 새가 아니어서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는 겁니다. 다행히 그 새가 음소당을 보지 못 했으므로 그녀는 살그머니 그곳을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본즉 백미노조는 여 제자는 한 사람도 둔 적이 없었거든요. 백미노조의 신조가 어째서 그 애와 노니는지 그것을 도시 알 수가 없었지요." 왜수 주매는 이영경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녀의 천품을 다시금 재보는 그런 눈초리였다. "음소당은 곤륜파에서 이탈한 뒤 그 자신이 일파(一派)를 창설 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요 근래 들어 바탕이 좋고 자질이 빼어난 문하를 거두어 문호를 넓힐 심산이었다는 거지 요. 그러던 차에 그처럼 훌륭한 재목을 보았으니 어찌 포기할 수가 있었겠소? 그때는 산에 돌아 온 뒤 마냥 그 애 생각만 했답니다. 그러다가 적성자가 옛날 반변노니를 만난 적이 있음이 생각 났다는 거지요. 자연 신조 불노와도 얼굴을 알 터이니 적성자가 그 애를 데려오는데 큰 보탬이 되리라 생각한 겁니다. 그녀를 설득해 데려오라고 부탁했답니다. 적성자는 일찍이 음소당한테 신 세진 일이 있어서 그녀의 청탁을 거절할 입장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성자는 아미산으로 갔고, 또 마침 신조가 없는 때여서 몇 마디 좋은 말로 소녀를 설득해 데려가게 됐다는 겁니다. 한데 어 검비행해 돌아가는 도중 공교롭게도 철천지 원수인 화산의 열화대머리를 만나지 않았겠소. 도저 히 피할 입장이 못됨을 판단한 적성자는 재빨리 부근의 산에 내려 소녀를 숨겼답니다. 불행히 그 녀까지 다치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겁니다." 이영경은 이제서야 적성자가 자기를 허겁지겁 남겨 두고 떠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적성자가 썩 좋은 사람은 아니라 해도 자기까지 해를 입지 않게 배려한 것에는 은근히 감동됐다. "그들이 내린 곳은 망창산의 어느 부서진 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강시가 드글드글한 불길 한 곳이었답니다. 그러나 시간은 없고 마땅한 곳은 찾을 수 없어 적성자는 북이 있고, 딴에는 깊 숙한 곳에 소녀를 숨겨 놓고는 절대로 딴 데로 가지 말라 신신당부한 뒤 검광을 타고 하늘로 날 아올랐답니다. 공중에서 그는 대머리 열화 영감쟁이를 만났는데 재수가 없을려니까 열화는 서장 독룡존자의 사제인 사남계(史南溪)와 일행이었답니다. 열화조사란 영감쟁이만 해도 적성자가 감당 키 어려운 판인데 천하에 악독한 사남계가 있었으니 상대가 되었겠소. 한 차례 싸움에서 그의 검 법은 절단이 나고 일패도지를 했다 합디다. 다행히 그는 음소당한테서 오귀은형둔(五鬼隱形遁) 수 법을 배워둔 바가 있어 가까스로 도망을 쳤다는 거지요. 그러나 그는 이미 왼팔이 열화 영감쟁이 한테 짤리었고, 몸에는 사남계의 추혼오독사를 여러 군데 맞아 아주 중상이라 멀리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 산 언덕에 드러누워 구원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벌써 이십 일 가까이 되었다 더군요. 내가 몇 알 단약을 먹이고 통증을 없애고 이삼 일이 지나면 어지간히 회복할 수 있게 만 들어 주었소이다. 그는 회복되는 대로 돌아가 복수의 칼을 갈겠다고 치를 떱디다." 주매는 이영경을 슬쩍 다시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적성자의 말이 소녀애는 이름이 이영경으로 망창산의 무너진 절 속에 있으니 날보고 구해 주라 부탁하더군요. 남겨 두고 온 지가 벌써 오래라 제대로 있는지 화나 안 당했는지 어린 나이인지라 걱정이 된다 합디다. 사실 깊은 산골의 흉험한 절간에 남겨 놓았으니 걱정이야 되겠지요. 적성자 는 내가 음소당을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하는 줄은 알았으므로 그녀 이름을 팔지는 못하고 여하 튼 그 애를 찾아서, 절이 있는 백 리 이내의 어느 안전한 곳에 데려다 두면 나중 자기가 찾아가 겠다 합디다. 그 애에게 나의 단약 몇 알을 주어 십일 만 기아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면 사람을 시켜서라도 데려갈 것인즉 그리 되면 은혜는 백골난망이라나?" 묘일부인은 주매의 표정이 재미있어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매는 코를 벌름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내가 그 녀석 부탁을 순순히 들어줄 사람이오? 하지만 그 사람이 환난을 당한 상태이고, 둘째 는 소녀의 천품이 빼어나다 하니 얼마나 공전절후(空前絶後)인지 그것이 궁금하고, 셋째는 어린 소녀가 황폐한 절간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측은지심이 발동해 찾아보기로 했지 요. 적성자에게 몇 알 단약을 남겨 주고 급히 망창산으로 갔습니다. 절은 과연 예상했던 대로 크 게 소동이 나 있었습니다. 종루는 쓰러져 있고 네 개의 강시는 허연 백골로 분해돼 있었으며 사 방이 온통 난장판입디다. 무의식 중에 북채 있는 곳에서 장미진인의 부적을 발견했지요. 그걸 보 자 진인이 승천하기 전에 마귀를 잡은 자웅 두 자루의 비검을 인적이 미치지 못한 깊은 산 속에 각각 숨겨 놓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더군요. 그렇다면 이미 하나의 보검이 누군가에 의해 발견된 게 아니겠소이까? 소녀는 보이지 않고 그 애는 검을 탈취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 무척이나 걱정되 고 내막이 궁금합디다. 나중 두 마리의 산괴의 뼈다귀와 주변에 즐비한 허다한 말곰의 시체를 보 자 소녀가 이들 말곰에 의해 살상됐나 싶어 화가 불끈 솟지 않았겠소. 그래서 비검을 날려 그들 나머지 말곰을 깡그리 죽여버리려 했지요." 영경은 주매의 마지막 말을 듣자 놀라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었다. "아아, 안 돼요. 그들 말곰들은 착한 짐승들이에요!" 주매가 껄껄 웃었다. "이야기를 다 듣기 전에는 놀라지 말아라. 어찌 내가 그런 망령된 짓을 했겠느냐?" "그럼 그들을 죽이지 않으셨나요?" "물론이지. 말곰들이 나를 보고 놀라지도 않고 잘 길들인 집짐승처럼 피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 람을 해칠 짐승이 아님을 알았다. 내가 그들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니 잘도 따르더구나. 그래서 그들이 너를 해치지 않았음을 확신했지. 나는 점괘를 따서 네가 어디로 갔나 점쳤다. 네 점괘는 아주 길하고 방향도 나오기에 이쪽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때 마침 벽력소리가 울려서 우리와 같 은 동료가 여기에 있는 줄 알았지. 숲에 숨어 동정을 살펴보니 두 분이서 비검을 하고 있더군요. 장미진인의 자영검이 이렇게 세상에 다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소. 사악한 문파가 다 시 흥기하려 한들 그대같이 어린 나이에 자질이 훌륭한 인재가 있음에 무슨 걱정이겠소. 묘일부 인, 귀파는 크게 문호를 떨치겠소이다!" 묘일부인이 웃으며 답했다. "근골은 빼어나지만 자신이 수련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앞으로의 성공여부는 아직 점칠 수 없지요. 이곳의 요인이 이미 죽었으나 그의 소굴에 뭐가 더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잔당이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자, 영경아, 너와 나는 그들의 뿌리를 아예 뽑자꾸나. 주도우, 날이 저물었 는데 어떻습니까? 함께 가보시지 않겠어요?" 왜수 주매가 걸걸한 목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야, 아무래도 좋소이다. 부인이 하자는 대로 해야지요!" 세 사람은 성성이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사방을 훑어나갔다. 반 리쯤 나아가자 앞쪽에 큰 석봉 (石蜂)이 나타나고 가파른 경사 밑에 큰 동굴 하나가 보였다. 요인의 소굴이었다. 이때는 캄캄한 밤이었으나 이들은 모두 동굴을 알아보았다. 왜수 주매와 묘일부인의 안력(眼力) 은 말할 것도 없지만 영경은 최근 영약과 기이한 약초를 많이 복용해 캄캄한 중에도 털오라기 하 나까지 판별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굴로 들어갔다. 몇 장을 지나자 널찍한 돌병풍이 오고 그 뒤에는 큼지막한 석실이 없 었다. 석실에는 두 사람이 겨우 들 수 있음직한 큰 기름 항아리와 일곱 개의 촛불이 밝혀 있어 방안을 대낮처럼 비추고 있었다. 영경은 벽의 그림들을 보자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영경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지고 고개 를 푹 숙인 채 더는 벽을 바라보지 못했다. 묘일부인도 이미 벽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발 가벗은 남녀들이 엉킨 춘화도였다. 온갖 교합하는 수법이 갖가지로 그려져 있는 것이 이 방은 요 인이 채보하는 장소인 듯했다. 묘일부인이 휙! 일지를 날렸다. 금빛이 방안을 가르며 벽화를 모두 날려버렸다. 영경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춘화는 이미 갈가리 찢겨져 가루가 되어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장난기가 심한 성성이는 기름 항아리 옆에 종이 세워져 있고 종채가 있는 걸 보자 종채를 들어 퉁! 하니 종을 쳤다. 종이 한 번 울리자 석실 한쪽 입구에서 십여 명의 청년 남녀가 우르르 달려 나왔다. 그들은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는데 서로 껴안고 춤을 추며 난잡하기 짝이 없었 다. 영경은 무슨 요법이 발동된 줄 알고 재빨리 검을 빼어 앞으로 몸을 날렸다. 묘일부인은 발가벗은 청춘 남녀를 한 번 쓱 살펴보고는 급히 영경을 가로막았다. "손을 쓰지 마라!" 그들 십여 명의 발가벗은 남녀들은 그들 옆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도통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 은 취한 듯 또는 천치인 듯 마구 춤추고 껴안고 입맞추고 심지어 성교까지 하려고 덤비는 것이었 다. 그들이 어지러이 교합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자 묘일부인이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멈추어라!" 그녀의 호통엔 오행진기가 담겨 있어 진기가 고루 퍼져 날며 발가벗은 남녀들에게 뿜어나갔다. 호통에 담긴 오행진기를 마신 남녀들은 주춤 멈추어 서서 망연한 표정을 짓다가 점차 꿈속에서 깨어나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 발가벗은 남녀들은 원래 양가집의 선남선녀들이었다. 이들은 불행히도 요인한테 붙들려 왔 고, 요술에 걸려 미망에 빠진 채 아무 정신도 없이 요인의 지시대로 매일 음락을 즐기는 신세였 다. 그들은 모두 요인의 채보에 쓰이는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한껏 채보로 쓰이다 진기가 고갈되면 죽고, 요인은 그들을 갖다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묘일부인의 진기가 담긴 호통소리에 요법이 깨지고 그들은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듯 정상 으로 되돌아 왔다. 그들은 껴안았던 팔을 풀고 천천히 사방을 살펴보았다. 발가벗은 상대를 보고 자신을 보고, 그리고는 도대체 모르는 사람들과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도시 알 수 없는 듯 미 망에 빠진 표정들을 지었다. 그들은 처음엔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듯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 에 자기들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통증이 왔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이들 남녀는 모두 총명하고 준수한 인재들인지라 이제 자신들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그들의 마음 속을 울렸다. 그들은 어찌할지 몰라 몸둘 바를 모른 채 자신들의 의복을 두리번두리번 찾았다. 그들의 옷가지 는 이미 요인이 어딘가에 챙겨 놓았을 것이라 금방 눈에 띌 리가 없었다. 그들은 찾고자 하는 옷 이 보이지 않자 털석 주저앉아 두 손으로 하체를 가리고는 이내 찔끔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금 방 방성통곡으로 변했다. 묘일무인은 그들의 참상을 보자 가련한 마음이 우러나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양가집 자녀인 모양인데 요인에 의해 이곳에 끌려와 요법에 빠져서 그의 채보용으로 이용된 것이다. 평소 요인의 사술에 걸려 그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진기를 모두 빼앗겨 왔느니 라. 만일 우리들이 너희들을 구하지 않았으면 머지않아 모두 참사당했을 것이다. 이제 요인은 우 리들의 비검을 맞고 주살됐으니 마음들을 놓아라. 새삼 울고불고 해봐야 아무 이익이 없으니 참 고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우리들이 안으로 들어가 그대들의 옷을 찾아올 터이니 입고 이곳을 떠나도록 하자." 그들은 처음 정신이 들자 창망한 중에 수치심과 두려움에 떨었을 뿐 묘일부인 등의 존재에는 아 무 의식이 없었다. 묘일부인의 말을 듣고서야 그들이 요인의 암산을 받아 끌려왔고 음락의 재물 로 이용됐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요인이 이들한테 죽었다면 이 사람들은 틀림없는 신선이나 보살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계속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들을 구해달라 애원하기 시작했다. 묘일부인은 좋은 말로 그들을 달랬다. 영경은 발가벗은 남녀들을 바라보는 게 낭패스러워 고개를 한 곳에 돌리고 차마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한데 왜수 주매와 성성이는 언제 사라졌는지 석실에서 보이지 않았다. 묘일부인이 중인에게 그들의 신세를 묻는데 홀연 주매가 다시 나타났다. 성성이가 왜수를 뒤따 라 들어오는데 그들은 남녀들의 옷가지를 잔뜩 부여안고 있었다. 그들은 석실 안쪽에서 이들 옷 들을 발견한 것이다. 성성이가 옷을 가져다 남녀들의 앞에 내려놓자 순박한 선남선녀들은 징그러운 성성이에 놀라 기 급을 하며 아우성을 쳤다. 성성이는 순진한 그들의 태도를 실히 아는지라 옷가지를 내려놓고 후 딱 뒤로 물러났다. 묘일부인이 그들에게 설명했다. "너희들은 놀랄 것 없다. 이 성성이는 잘 길들인 짐승이니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은 옷을 보자 정신없이 주워 걸쳤다. 그들이 옷을 다 입은 뒤에도 석실바닥에는 옷가지가 수십 벌이나 남아돌고 있었다. 묘일부인이 주매에게 말했다. "주도우, 의복이 이렇게 많은 걸 보니 아마도 많은 사람이 요인에 의해 죽었나 봅니다. 도우께선 안쪽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하진 못하셨나요?" "내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소이다. 도우께선 이걸 좀 보시오." 묘일부인은 주매가 건네주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삼으로 만든 작은 깃폭이었는데 위쪽에 혈흔이 낭자하고 수많은 부적이 그려져 있었다. 묘일부인은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이것은 혼원번(混元幡) 아닙니까? 사파에서 쓰는 가장 독랄한 요법인데 이 핏자국을 보면 얼마 나 많은 음혼(陰魂)이 서리어 있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군요. 우리가 이걸 발견한 건 천만다행입 니다. 혹 다른 요인(妖人)이 발견해 가져갔다면 어쩔 뻔했겠습니까? 이 물건은 없애야겠으나 그 일은 고행두타가 아니면 안 되겠는데요. 제가 동해로 가져다가 그분께 없애 달라 부탁하겠습니 다." 주매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우의 말씀이 맞소. 이 깃발을 없애려면 고행두타가 적합하겠지요. 그렇지 않고 당신이나 내가 불로써 소멸시킨다 해도 기에 서린 천백의 수많은 원혼은 결코 원통함을 씻지 못하리다. 뒤쪽 석 실에는 아직 숨이 채 끊어지지 않은 진기가 다한 여자들이 십여 명 있습디다. 그들은 음기가 몽 땅 빠져 혼백은 벌써 허공을 날고 있더군요. 겨우겨우 살아 있는 것이 죽느니만 못해 보여 차마 그럴 수 없었지만 눈 딱 감고서 그들의 목숨을 끊어주었소. 하나 하나 고통없이 혈도를 찍어 저 세상으로 보내주었지요. 불쌍한 이승이었으니 저승에서는 좋은 곳으로 가길 축도할 뿐이오이다." 독수리와의 해후 大發鴻慈 鳥難女頑童作伐 小完夙願 偕仙禽異遇同門 묘일부인 앞에 서 있는 일반 남녀들은 모두가 이목이 수려하고 애교와 매력이 넘치는 선남선녀 들이었으나 이미 진원(眞元)이 죄다 고갈돼 있었다. 그들이 이제 친지들한테 돌아간다 해도 삼사 년 단란히 살면 고작, 끝내는 병이 들어 죽을 것이 었다. 그녀가 그들의 수를 헤아려 보니 남녀 각각 열두 명씩이었다. 묘일부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요물은 이제 죽었으므로 그대들의 원수는 깨끗이 갚은 셈이다. 날이 밝으면 하산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그러나 여러분들의 고향은 모두 각각일 것이라 우리가 일일이 직접 데려다 줄 수는 없다. 그러자니 돌아가는 도중 또 무슨 사고가 날까 그것이 걱정된다. 그대들이 이렇게 이곳 에 잡혀와 요법(妖法)에 미혹된 것도 기실 전생의 인연이니, 내 생각에 여러분들이 둘씩 짝을 지 어 연분을 맺는 게 어떨까 한다. 그러면 고향에 돌아가기도 한결 쉬울 것이니, 집이 가까운 이들 은 각자 찾아가도록 하고 먼 사람들은 나와 주선생이 뒤를 보살펴 무사히 돌아가도록 해주겠다. 그대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이들 청년 남녀들은 그녀의 말을 듣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멈칫 멈칫했다. 묘일부인이 보기에 그들은 은연중 좋아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대들도 좋아하는 듯하니 내 방안을 말하리다. 그동안 같이 있었다 해도 서로를 잘 모를 것이 니 각자 선택하기가 불편할 것이오. 그러니 여자들은 옆의 석실로 물러가 있다가 내가 남자를 고 른 뒤 북을 치면 한 여자씩 나와 짝을 짓도록 하시오. 짝을 지을 때는 서로 이름과 고향을 알려 주도록 하오." 묘일부인의 말이 끝나자 여자들은 과연 눈치를 보면서도 슬금슬금 모두 옆방으로 건너갔다. 그 런데 한 여자만이 앉았던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여자는 이제 겨우 십오륙 세쯤의 어린 나이에 어여쁘긴 했으나 여릿한 몸이 무척이나 가련해 보 였다. 영경이 그녀한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의 사부 말씀대로 옆 석실로 갔다가 다시 나와 낭군을 맞이하도록 해요. 이토록 자꾸만 우실 필요는 없답니다. 이 밤만 새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부모도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 자, 울음일랑은 그치세요!" 여자는 영경의 따스한 말에 적이 위안이 되었는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영경을 올려다 보 다가, 돌연 더욱 애처롭게 울어댔다. 묘일부인은 처음 이들 남녀를 보았을 때 측은한 마음이 들어 날이 새기 전에 모든 일을 적당히 처리하려 했던 것인데 한 소녀가 홀로 남아 애처롭게 울어대는 것을 보자 마음이 진정으로 아파 왔다. 허나 사나이의 철심장을 지닌 주매는 계집이 찔찔 우는 꼴이 보기 싫어 성성이를 데리고 다시 한번 석실 쪽으로 가버렸다. 영경은 여자가 아무리 권유해도 듣지 않자 줄줄 우는 그녀를 안아 옆방으로 데려가려 했다. 묘일부인이 이를 보고 말렸다. "영경아, 그녀에게 강요치 말아라. 내 저들을 처리한 뒤 다시 방도를 강구해 보마." 영경은 스승의 분부를 듣자 즉각 응답하고 옆에 시립해 섰다. 묘일부인의 다정한 말을 듣자 여자도 울음을 그쳤다. 부인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들을 주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영경아, 쇠북을 쳐라!" 영경이 북을 한 차례 쳤다. 종전 같으면 히히덕거리며 달려나올 여자들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 다. 부끄러움이 없던 그녀들이 이젠 갑자기 서로 양보하며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묘일부인이 두 세 차례 재촉했건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난 영경이 석실에 들어가 서로 밀어젖히며 양보하고 있는 여자들 중에 하나를 억지로 끌고 나왔다. 여자가 나오자 묘일부인은 남자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짝을 지워주었다. 남자는 일이 이쯤 되 자 어쩔 수 없는지 무릎을 꿇고 자기의 이름과 고향을 댔다. 둘은 통성명이 끝나자 부인의 은덕 을 칭송하고는 옆에 다소곳이 시립해 섰다. 두 번째에도 여자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영경이 다시 억지로 끌고 나와 배필을 맺어주었다. 이렇게 서너 차례 지나가자 북을 칠 때마다 선선히 나오기 시작했다. 열한 쌍을 맺어주고 보니 찔찔 울던 소녀와 남자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소녀는 처음 묘일부인이 남녀를 차례로 짝지워주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문득, 자기와 한 남 자만이 남은 것을 보자 허겁지겁 묘일부인의 발 아래 엎드려 애걸하기 시작했다. "부인어른, 저는 구지선(具芷仙)이라 하옵니다. 원래 학자 집안에 태어났는데 저번에 언니를 따 라 친척의 환갑잔치에 가다가 여기에 끌려왔습지요. 그 흉악한 요물이 힘으로 눌러대니 치욕을 면할 길이 없었사옵니다. 석벽에 머리를 받고 일찍 자진해야 했을 것을 요인이 일지를 튕기어 지 각을 잃고 쓰러졌으며, 그 뒤로는 죽고 싶어도 죽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다행히 구원을 받아 지시 대로 마땅히 따라야 하오나 저는 이미 허혼한 몸인 데다 이렇게 몸까지 망쳤으니 어찌 고향에 돌 아가 언니를 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제 오로지 죽음밖에 없사온즉 제가 죽거들랑 땅에 묻어 이리와 승냥이의 밥이나 되지 않게 해주시옵고 저를 그토록 어여삐 여겨준 언니께 소식이나 전해 주십시오. 금생에 이 은혜는 못 갚으오나 내세에서는 필히 갚겠습니다." 소녀는 또박또박 조리있게 말하는 중에도 얼굴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맺혀 보는 이의 애간장을 녹였다. 짝을 이룬 다른 여자들도 모두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들을 숙였다. 묘일부인이 보기에 구지선은 됨됨이가 아주 비범하여 선골에 속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사나 이는 얼굴이 수려하긴 했어도 음탕함이 몸속 깊이 베어 있는 데다 훌륭한 집안의 자제 같지가 않 아 소녀를 배필로 주기가 은근히 아까왔다. 더구나 정절(貞節)이 있어뵈는 소녀의 가녀린 하소연 을 듣고 보니 그녀가 요법에 몸을 더럽힌 만큼이나 안쓰러운 마음이 더하는 것이었다. 소녀는 넋두리를 끝내자 다소곳이 일어나 묘일부인에게 십여 차례나 절을 했다. 그러더니 별안 간 머리를 벽에 부딪쳐 갔다. 하지만 무술이 고강한 영경의 신법은 그녀보다 훨씬 빨랐다. 영경은 안개처럼 날아가 그녀를 가 슴에 살짝 안아버렸다. 묘일부인이 그녀를 달랬다. "네가 몸을 버렸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한 것이니, 죽음으로 청산할 필요도 없 고 억지로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 너의 순수한 음기(陰氣)가 크게 손상되긴 했어도 기초가 단단하 니 회복할 방도가 있을 것이다. 이왕 집에 돌아가기 민망하다면 내 친한 도우(道友)에게 추천해 줄 테니 그곳에 가서 수련을 하겠느냐?" 구지선은 묘일부인의 말을 듣자 귀가 솔깃해 금세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좋다. 이곳 일이 끝나면 그곳으로 보내주마." 이들의 대화를 들은 다른 남녀들은 무척이나 부러운 눈초리로 구지선을 바라보았다. 묘일부인이 홀로 남은 사나이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 "당서(唐西)라고 합니다." 당서는 원래 파락호의 자제로 배운 것이라곤 가야금을 뜯으며 노래부르는 것뿐이었다. 그는 요 법에 걸려 이곳까지 납치되어 왔지만 어찌 보면 제 길에 접어든 셈이었다. 평소 여자와 노는 것만을 좋아하는 터라 어느 누구보다도 이곳 생활에 익숙했고 오히려 즐기기 도 했다. 따라서 교수등은 그를 우두머리로 삼아 이용했으며 미약을 먹이지도 않았다. 구지선이 붙들려 온 것은 요 며칠 전인데 교수등도 그녀가 선골인 것을 알아보고 춤을 추며 음 란을 피울 때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게 명령했다. 첫눈에 반한 당서는 속으로 불만이 컸으나 예쁜 여자가 많은지라 꾹 눌러참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교수등이 묘일부인 등에 피살됐다는 말을 듣자 당서는 그만 기급할 지경이었다. 이 젠 도망가 목숨이나 연장할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좋게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시치미를 딱 떼고 중인과 똑같은 모양을 지으며 암중에 어찌 해보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묘일부인이 그들을 짝지워 주는 중에 구지선과 자기만 남자, 속으로 얼씨구나 좋아 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오매불망 하던 예쁜 구지선이 자기 차례로 넘겨지기에 이것이야말로 천생 연분이라며 좋아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 이쁜 계집이 갑자기 통곡을 하며 발버둥을 치더니 끝내 는 묘일부인을 감동시켜 누군가의 제자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한때의 꿈이 허망하게 사라지자 그는 묘일부인이 자기를 짝지워 주지 않음을 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처음 마음먹은 대로 장안법(障眼法)을 써서 이곳을 도망치리라 다짐했다. 한편 묘일부인도 한때 부주의로 당서를 소홀히 보아넘기고 있었다. 그가 온몸에 사악한 기운을 띠고 있고 독기가 깊이 스며들지 않은 게 약간 수상하긴 했어도 그가 이미 사술을 배웠으리라고 예측하진 못했다. 다만 그의 양미간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단아하지 못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자 세히 묻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남녀들의 신상에 대해 묻고 행선지로 패를 갈라서 고향에 돌아갈 채비를 하게 했다. 이때도 주매는 석실에 없었으므로 묘일부인은 영경을 시켜 왜수를 불러다 사후의 처리를 의논하 려고 했다. 그때 마침 주매가 성성이와 함께 뒤쪽 석실에서 돌아왔다. 이번엔 성성이의 팔에 먹을 것이 잔득 들려 있었다. 주매가 묘일부인에게 말했다. "도우께서 오늘 멋들어진 매파장이가 된 걸 축하하오이다. 하지만 저 새 신랑신부들은 거의 하 룻동안 먹지 못해 잔뜩 주려 있을 것이오. 매파장이를 하려거든 먹고 힘이 나게 해야 할 것 아니 겠소? 뒷 석실 밀실에 음식과 단약 등이 잔뜩 있길래 가져왔소. 자, 한번 보시구려." 주매의 말을 듣고 보니 영경과 성성이도 한동안 식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묘일부인은 그들 남 녀와 함께 모두 식사를 하라 명령했다. 영경이 보니 그 음식들은 사천의 명물인 과당, 떡 등으로 모두 귀하고 맛있는 것들이었다. 평소 맛보지 못하던 음식이라 정신없이 먹었으나 금세 갈증을 느꼈다. 영경은 자신의 보따리 속에 황정, 잣, 주과 등 싱싱한 과일이 그득 들어 있는 것을 생각하자 그 것들을 꺼냈다. 스승과 사백에게 드릴 좋은 물건을 갖고 있으면서 지금껏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 다. 그녀는 급히 과일들을 스승과 사백에게 권했다. 왜수 주매는 수십 개의 주과를 보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가 묘일부인에게 놀라 물었다. "이것은 주과라는 게 아니오? 나는 말로 듣기만 했지 보기는 처음이오. 나의 사부가 늘 말씀하 시곤 하시었소. 그대의 제자는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주과를 얻었소이까?" 영경은 처음 묘일부인에게 목괴를 죽이던 정경을 이야기할 때 주과라는 과일의 명칭을 몰랐었으 므로 성성이가 자기를 데리고 가서 붉은 과일을 땄다고만 설명했었다. 묘일부인도 영경의 말에 세상엔 기이한 영물이 많다고만 응답했는데 실제로 과일을 보자 경탄해 마지 않았다. 그녀는 영경에게 목괴를 죽인 경과를 다시 한번 주매사백에게 설명해드리라고 지시 했다. 영경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은 주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제자가 기연을 얻은 것은 하늘이 내리신 복인가 보오. 이 과일은 이름이 주과로 먹으면 장생불로하고 진기가 충만해져 몸이 가벼워지고 눈은 밝아진다고 합디다. 깊은 산 속 인적이 닿 지 않는 돌 사이에 생겨나는데 나무줄기가 돌 틈에 숨어 있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전에는 결 코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 하오. 심산에서 채약하는 수도하는 사람들도 백 년이나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한다오. 또 이런 진기한 보물은 필히 괴수가 옆에서 보호를 해 얻을 수가 없는데 너는 한 꺼번에 수십 개를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얻어냈구나. 기연이로다, 기연이야! 네가 데리고 온 성성 이는 비록 축생이나 선기(仙氣)가 넘치는 것이 과연 그 때문에 이 과일을 얻었는가 보다!" 영경은 하수오를 먹은 일도 들려주었다. 묘일부인과 주매는 영경이 상상을 초월한 선연(仙緣)이 있음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처음 영경은 주과를 꺼낼 때 스승과 사백한테 올리고 나머지는 남녀들한테도 나눠주려 했었다. 그러나 묘일부인과 주매의 말을 듣고 보니 보통 진귀한 과일이 아닌지라 아까운 마음이 일었다. 그녀는 십여 개를 주매에게 주고 나머지 삼십여 개를 묘일부인에게 건넸다. 묘일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이 과일이 무척 진귀하다 한들 나는 적절히 쓸 데가 없구나. 나는 두 개 정도만 맛보면 그만이 다." 그녀는 과일을 들어 몇 입 맛을 보았다. 주매도 사양하지 않고 두 개를 먹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를 챙기며 말했다. "이 과일은 쓸모가 있을 것이다. 이왕 당신 제자가 나를 주었으니 후의를 보아 받아두겠소. 하지 만 이 가난뱅이 늙은이가 새까만 후배의 선물을 그냥이야 받을 수가 있겠는가?" 그는 품속에서 이 촌쯤 되는 얼음막대를 꺼냈다. 마치 고드름같이 생긴 것으로 쇠 같기도 하고 쇠가 아닌 듯도 했으며 옥 같은가 하면 옥도 아니었다. 주매는 얼음막대를 영경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물건은 근자에 청성산 금편애 아래에서 캐낸 것이다. 흙 속에서 나올 때 서기가 하늘에 뻗 치더구만. 잘 살펴보니 주작(朱雀)이라 전서체로 쓰여 있는데 컴컴한 어둠 속에서 오색빛을 발하 는 것이 보통 물건은 아닌 듯하이. 물론 쇠나 돌은 부딪치기만 하면 바숴지는 것이 보통 보배는 아닌 듯한데 그 용도를 모르겠단 말일세. 아마도 묘일진인과 현진자는 이게 뭔지 알 것이야. 그들 에게 한번 물어볼 셈이었지. 그대가 이왕 묘일진인의 문하에 들어갔으니 내 이걸 줌세. 진인을 만 나거들랑 용법을 물어보라구." 영경은 주매의 말을 듣자 슬그머니 묘일부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것이다. 묘일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경은 급히 무릎을 꿇고 주매에게 감사하며 얼음막대를 받았다. 그녀는 적성자가 아미산에서 끌고 나온 이후로 숱한 고생을 했지만 허다한 보물과 기이한 과일 등을 얻었고, 검협 중 영수적인 고수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이번의 출사는 대성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기분이 통쾌했으나 그 기쁨을 가슴 속에 눌러 갈무리할 뿐 말로 표하 지는 않았다. 묘일부인은 주과를 두 개만 들고 나머지는 영경에게 다시 보따리에 넣어놓으라 지시했다. 영경 이 재삼 부인에게 몇 개를 더 들라 강권하자 묘일부인은 제자의 천진스런 지성을 저버릴 수 없어 여덟 개를 집어 자신이 간수했다. 영경은 옆에 있는 구지선이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새초롬히 주과를 바라보며 먹고 싶어하는 표 정을 짓자 웬지 가련한 마음이 들어 그녀에게 주과 두 개를 주었다. "아가씨, 반나절이 넘도록 아무것도 먹지 않았죠? 얼마나 배가 고프겠어요. 자, 이 주과를 먹어 봐요. 내가 전에 먹어보니 이건 과일일 뿐만 아니라 먹으면 배가 든든해 배고픈 줄을 모르겠더군 요. 사부와 사백의 말씀을 들으니 이 과일은 쓸모가 많은가 봐요. 아가씨도 두 개만 먹어보세요!" 구지선은 그 말을 듣자 부끄러운 중에 기쁨이 넘쳐 주과를 받아들었다. 바로 그때 동굴이 갑자 기 컴컴해졌다. 자신의 손가락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는데, 순간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이어 처절한 절규가 메아리쳤다. 영경은 무슨 요괴가 나타났나 싶어 검을 빼어들었다. 그러나 묘일부인의 손이 훨씬 빨랐다. 그녀 의 손이 한 번 움직이자 하얀 검광이 석실을 환히 비쳤다. 석실이 밝아오자 한 구의 시체가 배가 파열돼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선혈이 줄줄 흘러 석실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시체 옆에서 성성이는 파지에 손을 쓱쓱 문지르며 손에 묻은 핏자국을 닦고 있었으며 그 건너편 에는 구지선이 기절해 쓰러져 있었다. 여러 젊은 남녀들은 급작스런 변고에 놀라 한 군데로 몰려 서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끝에 찔찔 우는 사람들도 보였다. 장이 파열돼 시체가 된 주인공은 바로 당서였다. 영경은 성성이가 핏자국을 닦고 있는 것을 보자 그가 아직 덜 순치돼 공연히 살상을 하였나 싶 어 마음이 콩콩 뛰었다.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 성성이를 꾸짖으려는데 묘일부인이 입을 열었다. "조그만한 요마가 감히 우리 두 사람 앞에서 재주를 부릴 줄은 몰랐다. 아차 잘못하였다면 사람 을 도둑맞을 뻔하였구나. 영경아, 너의 성성이는 안력이 정말 대단하구나!" 원래 당서는 마음 속에 점찍어 놓았던 여자를 놓치자, 자기의 보잘것 없는 요법으로 구지선을 강탈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묘일부인이 자신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계속 구지선을 살폈다. 기회만 오면 장안술로 그녀를 강탈해서는 줄행랑을 놓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묘일부인도 약간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 사악한 기운이 넘치고 불 량해 보이던 당서가 계속 구지선만 응시하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다른 남녀들이 겨우 진정을 하 고 상심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데도 당서 혼자만은 유독 태연자약해 더욱 눈여겨 살피기 시작했 다. '이 녀석은 틀림없이 선량한 남자가 아닌 것 같군.' 과연 그는 나중 음식을 먹을 때 거동이 민첩하고 가벼운 것이 몸들이 허약해 행보가 노둔한 다 른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세세히 당서를 살피던 묘일부인은 이 자가 멍청한 체 가장할 뿐 틀림없는 요인의 잔당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그녀는 그가 하는 작태를 보리라 마음먹고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당서에게 있어 묘일부인이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자기의 실력으로 그들의 적수는 되지 못하나 요법으로 충분히 도망칠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것이다. 마침 기회가 왔다. 묘일부인은 입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구지선은 주과를 받아들고 있었다. 그는 입으로 요결(妖訣)을 외워 석실의 등불을 동시에 꺼버렸다. 그는 암흑 중에 음풍을 타고 구 지선을 껴안고 바람처럼 동굴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그의 이 따위 장안법으로 어찌 묘일부인과 주매의 혜안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더욱 두 고수에 앞서 영통한 성성이조차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허다한 영약과 선과를 많이 복용해 암흑 속을 대낮처럼 바라보는 성성이는 당서가 여자를 강탈해 동굴 밖으로 달려나가는 게 환히 눈에 비치었다. 성성이는 몸을 번개처럼 날려 당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강철 같은 갈고리 손톱을 부욱 한 번 긋자 당서는 배가 갈라지고 장이 터져 즉사하고 말았다. 영경은 묘일부인의 말을 듣고도 아직 상황을 분명히 알 수가 없었다. 벙벙히 서 있는 그녀에에 성성이가 달려와 꿇어앉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요괴, 요괴!" 묘일부인이 자초지종을 간략히 설명하자 영경은 그때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영경은 쓰러져 있는 구지선에게 다가가 그녀를 불러 깨웠다. 놀라 기절해 있던 구지선은 영경이 몇 차례 불러대자 서서히 깨어났다. 영경이 그녀에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구지선은 놀람이 진정되자 중인과 성성이에게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했다. 이때쯤 하늘이 점차 밝아오기 시작했다. 당서로 인해 조금은 놀란 묘일부인은 나머지 남녀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별 이상함이 없었다. 그녀가 주매에게 말했다. "이들 남녀는 집으로 돌아간 뒤 많으면 오 년 적으면 이 년 안에 진기가 고갈돼 모두 죽을 거예 요. 어떻습니까? 주도우께서 이들에게 덕을 베풀 생각은 없으십니까? 당신의 영단은 죽은 혼도 불러올 정도로 영험하다고 하잖아요. 저들 가련하고 무고한 젊은이들에게 행선(行善)을 하지 않으 시겠어요?" 주매는 어이없는 듯 억지로 웃었다. "나의 단약은 만들기도 어려울 뿐더러 얼마 남지도 않았소. 게다가 나는 자신과 연고가 없는 사 람은 구해 주지도 않소." "그걸 누가 모릅니까? 저 젊은이들은 반나절을 당신과 함께 지냈는데 어찌 연고가 없을 수 있나 요." "잘도 주워대는군. 으흐흐, 결국 부인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군. 좋소, 부인의 위대한 선행에 일조 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려." 주매는 품에서 단약봉지를 꺼내 단약 한 알씩을 중인에게 나눠 주었다. 묘일부인은 석탑 위에 있는 꽃병을 성성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꽃병을 깨끗이 씻고 물을 길어오거라." 한편 주매와 영경은 함께 뒤쪽 석실들을 자세히 뒤져보았다. 석실에는 많은 금붙이 등 돈이 될 게 수두룩했다. 그들은 이것들을 가져다 남녀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이제 성성이가 물을 길어와 약만 복용하고 길을 떠나면 되었다. 구지선은 두 개의 주과를 먹고 나자 금방 정신이 바짝 들고 몸이 상쾌해졌다. 이윽고 하늘이 환히 밝아왔다. 그런데도 성성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영경이 성성이를 찾아나서려는데 홀연 길다란 외침소리가 들리고 성성이가 동굴 안으로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그는 무척이나 두려워하며 영경의 뒤에 가서 숨는 것이었다. 그의 수중에 꽃병 따위는 없었다. 영경이 어찌 된 사연인지 물으려는데 동굴 밖에서 독수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영경은 앞뒤 돌 아볼 것도 없이 쏜살같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과연 그것은 신조였다. 신조 불노는 지난 번에 같이 간 동료 흰독수리와 함께 마악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영경은 너무나 기뻐 신조의 이름을 정신없이 불러댔다. "금안사형, 불노사형!" 그녀는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십여 장을 날아오르자 두 손으로 불노의 발톱을 쥐어잡 을 수 있었다. 불노는 동료를 따라 아미산을 떠나 백미화상한테로 갔었다. 그곳에서 불노는 백미화상의 지시대 로 연골세심(練骨洗心)을 하고 주인이 주는 단약을 복용했다. 불노도 환골탈태를 하게 된 것이다. 백미화상이 불노에게 이야기했다. "너의 동료 옥노(玉奴)는 이미 삼겁(三劫)을 탈태하였느니라. 장차 정과(正果)를 얻어 새로이 태 어나겠지. 그러나 너는 아직 삼겁을 끝내지 못하였고 살기가 아직도 너무 심하니라. 나는 십 년 내에 원적할 것이나 그동안 나를 따른 정리를 잊을 수 없어 특히 옥노를 보내 너를 불러왔다. 이 제 단약을 먹고 환골탈태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새주인인 그녀를 잘 따르도록 하라. 그녀는 선연 이 무궁무진하여 네가 충심껏 따르면 너의 삼겁을 끝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정과도 물 론 얻을 게다. 이번에 가면 다시는 찾아올 필요없다. 잘 가거라." 신조 불노는 이미 영통한 새인지라 백미화상의 말을 듣자 전인(前因)과 후과(後果)를 환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구슬픈 울음을 몇 차례나 토해내며 백미화상을 떠나지 못했다. 백미화상은 그가 연연해 하며 떠나지 못하자 다시 말했다. "너는 너무 연연해 할 것 없다. 너의 새주인은 지금 아미산에 있지 않다. 너는 이번에 갈때 망창 산을 거쳐 가도록 해라. 도중에 그를 만날 것이다. 너의 주인은 너를 타고 아미산에 되돌아 가려 하니 늦지 않게 빨리 가도록 해라!" 신조 불노는 그래도 차마 떠나지 못했고, 백미화상은 가라고 여러 번을 재촉했다. 불노가 못내 아쉬워하며 떠나오는데 동료 백조(白鳥)가 정감이 깊어 그를 한참이나 전송해 같이 왔다. 그들은 구름을 타고 질풍같이 달려 반 시진 만에 망창산에 도착했다. 망창산 경계에 닫자 그들 은 낮게 내려와 사방을 살피며 천천히 날았다. 그때 그들은 물을 긷고 있는 큼지막한 성성이를 발견했다. 평소 장난꾸러기인 신조는 성성이를 보자 대뜸 수도하는 사람이 근처에 있음을 알았다. 성성이 는 수도하는 사람이 시동 대신 부리는 짐승일 것이었다. 불노는 장난하고 싶은 생각이 불끈 일었 다. 저 녀석을 한번 할퀴어 주면 그의 주인이 나타날 것이니 한번 장난하리라 작심했다. 불노와 옥노는 짐승을 챌 때와 같이 무서운 속도로 성성이를 향해 하강했다. 그러나 성성이도 이미 영통한 짐승이다. 그는 물을 긷다가 홀연 두 마리의 시커멓고 하얀독수리 가 사납게 날아 내려오는 것을 눈치챘다. 이건 보통 심상치 않은 일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아 나 살려라 하고 동굴로 도망쳤다. 하지만 발보다 날개가 빠른 법이다. 눈 깜짝할 사 이에 불노는 성성이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불노는 두 발톱으로 성큼 성성이를 들어올렸다. 십여 장 하늘로 오르자 슬쩍 성성이를 놓아버렸 다. 신조의 생각은 성성이를 공중에서 떨어뜨려 반절쯤 죽게 만들 요량이었다. 그러면 그의 주인이 나타날 것 아닌가. 한데 성성이는 생각 밖으로 날렵해서 쿵 하고 떨어지기는커녕 사뿐히 내려서 더니 쏜살같이 동굴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더니 이게 웬일인가. 이번엔 불노의 새주인이 쏜살같이 동굴 밖으로 달려나온 것이었다. 발 에 매달린 젊은 여자가 자기의 새주인인 것을 안 불노는 서서히 날아 땅 위에 내려앉았다. 영경이 땅 위에 내리섰을 즈음 묘일부인과 주매도 동굴 밖으로 나왔다. 신조 불노는 두 차례 길 게 울어 하늘을 날고 있는 옥노를 불렀다. 옥노는 사뿐히 하늘에서 날아내려 영경의 옆에 섰다. 두 마리 독수리는 사람보다도 키가 더 컸다. 묘일부인은 두 마리 독수리를 보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제 저들이 왔으니 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주매는 두 신조를 보고는 감탄해 마지 않았다. "과연 백미화상의 신령스런 새일세그려. 어지간한 검선도 저들을 못 당하겠는 걸." 그는 영경을 불러 속삭였다. "얘야, 너희 사부 부처는 옛날 내가 성도(城都)했을 때 선연을 쉽게 맺었노라 말하더니만 너야말 로 선연과는 무슨 짝꿍이라도 되는가 보다. 무슨 놈의 기연이 그렇게도 주렁주렁 많으냐. 저 백미 화상은 성질이 고약한데 어째서 너한테 저렇게 영험한 독수리를 두 마리나 주는 거냐? 동서고금 에 듣지 못할 기연이로다, 기연이야." 영경이 대답했다. "이 검은 금안사형은 백미사조께서 저한테 주셔서 아미산의 동무가 되게 했지만 저 하얀 옥노는 백미사조의 명을 받고 전송하러 왔을 뿐예요. 불노가 십구일 만에 돌아온다 했는데 오늘이 만기 가 되는 날인가 보지요. 그와 이렇게 도중에 공교롭게 만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묘일부인이 말했다. "이왕 불노와 도중에 만났으니 공교롭다 해도 잘된 일이구나. 자, 주도우, 날도 밝았으니 우리 길을 떠납시다. 당신과 나는 이들 열한 쌍의 남녀를 반씩 나눠 집으로 보내주고, 신조는 아무리 힘이 좋다 한들 천 근씩이야 태울 수 있겠니? 지금은 구지선이 당장 갈 데가 없으니 영경이 네가 그녀를 데리고 아미산으로 가거라. 내 후일 명령을 다시 내리마. 그러자니 성성이는 지금 데려갈 수가 없겠군. 성성이 너는 당분간 남아 참수(參修)하도록 해라. 나중에 영경이 수련된 뒤 데려가 게 하겠다." <제4권으로 계속> 촉산기협(1부) 4 아미산으로 가는 길 竝駕神鳥 逐鹿驚邪火 飢餐朱果 鬪劍遇同門 이영경(李英瓊)과 성성이는 여러 날 동안 환란을 같이 한 처지라 묘일부인(妙一夫人)의 말을 듣 자 차마 떨어지기 싫어 연연해 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사문에 들어간 이영경으로서는 최초로 받 은 스승의 지시를 싫다 하여 이행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영통한 성성이가 부인의 말을 재깍 알아듣고는 성큼 그녀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눈물 을 줄줄 흘리며 애원했다. 사람의 말 짐승의 말 반반씩을 섞어 잘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애소하 는 폼이 정말 처량해서 어지간한 심장이라도 금세 녹아날 지경이었다. 그러한 성성이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묘일부인은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이 짐승이 벌써 이토록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구나. 성성아, 나는 영경이 널 데려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란다. 저 불노가 너까지 셋을 태울 힘이야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어디 셋이 한꺼번에 탈 수야 있겠느냐? 저 독수리가 아무리 영통하다 한들 셋씩이나 태 우고 가다가 공중에서 혹 실수라도 한다면 영경과 구지선(具芷仙)이 동시에 화를 당할까 걱정하 는 것이다. 하긴 저 흰독수리가 도와주면 되련만은 그는 백미화상(白眉和尙)의 짐승이고 보니 그 에게 번거로운 일을 부탁하기가 뭣하구나!" 이영경은 스승의 말을 듣자 무슨 뜻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성성이를 떨쳐두고 가기가 무던히 싫었던 참이라 당장 불노(佛奴)에게 말했다. "저 성성이는 내가 망창산에 있을 때 거둬들인 짐승이란다. 지금껏 나를 따르며 얼마나 애썼는 지 몰라. 또 언젠가는 귀한 수과를 따올 거야. 그가 같이 있으면 정말 유용할 거거든. 너의 친구 옥노(玉奴)한테 부탁해서 그를 아미산까지 태워주지 않겠니?" 그녀의 말이 끝나자 불노 옆에 있던 옥노가 느닷없이 날개를 펄럭이며 성성이에게 덮쳐갔다. 옥 노는 강철 같은 발톱으로 덥석 성성이를 잡아채더니 횡하니 하늘로 솟아올랐다. 놀란 성성이가 '꽥꽥' 고함을 지르는 잠깐 사이 그들 두 짐승의 모습은 구름을 뚫고 하늘 아스 라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날아간 방향은 아미산 쪽이었다. 영경은 흰독수리가 갑자기 사라지자 놀란 나머지 불노를 바라보았다. 성성이가 괜찮을지 너무나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때 묘일부인이 입을 열었다. "성성이는 흰독수리가 데리고 아미산엘 갔으니 그 일은 해결이 됐다. 자, 이제 우리는 여기서 헤 어져야겠는데, 한번 떠나면 몇 달 동안은 만나지 못하겠구나. 너는 영특한 신조와 성성이가 함께 있어 아무 걱정할 건 없겠으나, 우리 둘이서 만난 지 겨우 하루 만이라 무공의 요결을 제대로 전 수해 주지 못한 게 걱정이다. 단시간 내에 어쩔 수 없으니 우선 초보적인 검술 요결만 일러주겠 다. 저쪽 언덕 쪽으로 내려가자." 그녀는 영경을 데리고 언덕 아래 조용한 곳에 가서 요결을 하나 하나 가르쳐 주었다. 영경은 천 부적인 자질이 좋은지라 짧은 시간에 가르쳐 준 요결을 쉽게 암기할 수 있었다. 묘일부인이 구결을 다 전수해 줬을 때는 해가 이미 중천에 와 있었다. 그녀는 동굴 속에 있는 젊은 남자와 여자들을 불러 같은 방향별로 일행을 나눈 뒤 주매(朱梅)와 반씩 거느리고 산을 내 려갔다. 영경과 구지선은 스승인 묘일부인이 떠나가는 것을 마냥 아쉬운 표정으로 전송했다. 그들이 모두 떠나가자 영경이 구지선에게 말했다. "언니, 두려워하지 말아요. 제가 아미산까지 잘 모실 테니까 말예요." 구지선은 영경이 어린 나이임에도 재주가 빼어난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무척 탄복하고 있었다. 영경이 위로하는 말을 듣자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원래가 박명한 탓으로 요사한 인물을 만나 이렇게 참담한 꼴이 됐답니다. 미약에 정신을 잃고 정조를 짓밟히며 몸이 욕되게 됐으니 일찍이 죽어야 할 것을 그러질 못했어요. 다행히 은사 의 은총을 받아 구함을 받고 아가씨의 동굴에서 수련케 됐으니 그 은혜 한이 없군요. 나는 요마 의 손에 떨어진 이래 생사는 초월한 몸이 됐어요. 더구나 아가씨와 함께 행동하는데 뭐 무서워하 겠어요?" "그러면 됐어요. 사부와 사백께서 벌써 가셨으니 우리도 그만 떠나도록 해요." 영경은 보따리를 불노의 목에 걸고 먼저 구지선을 독수리의 등에 태웠다. "눈을 꼭 감고 아래는 내려다보지 말아요." "그럴게요." 영경은 그녀의 뒤에 올라앉아 한 손으로는 신조의 강철 같은 깃털을 잡고 한 손으로는 구지선이 염려되어 그녀의 가슴을 꼭 끌어안았다. "날아라!" 영경의 외침소리에 맞춰 불노는 길게 한 차례 울부짖더니 공중으로 두둥실 날아올랐다. 지상에 서 이삼십 장쯤 날아오르자 영경이 소리쳤다. "금안사형, 낮게 날아요. 지나가는 풍경도 볼 겸 구언니가 놀라지 않게 하자구요!" 불노는 영경의 말을 알아듣고 이삼십 장의 높이를 유지하며 마냥 날아가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발 아래에서 그림처럼 뒤로뒤로 사라져 갔다. 봄날의 산천은 비단결 같고 풍광은 아름답기 한이 없었다. "아! 정말 아름다운 경치야!" 영경은 탄성을 지르면서도 혹 구지선이 실수해서 떨어질까 봐 그녀를 더욱 꼬옥 껴안았다. 이때 갑자기 불노가 속도를 가하며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어느 산중턱께를 향해 질주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영경은 구지선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쳐다봤다. 산허리춤에서 얼룩사슴 한 마리가 한 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불노는 그 사슴을 보자 대번에 자신의 점심식사로 점찍은 모양이었다. 불노는 바람처럼 사슴을 향해 덮쳐갔다. 사슴도 드디어 독수리의 습격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사 슴으로서는 독수리야말로 최대의 천적이 아닌가. 놀란 사슴은 급히 피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 어 있었다. 사슴이 옆으로 튀려는 순간, 불노는 사나운 발톱으로 놈을 채어 하늘 위로 다시 솟구 쳐 올랐다. 독수리에 채인 사슴은 마지막 발악으로 큰 뿔을 휘둘러쳤다. 뿔은 독수리의 목을 스치고 하마터 면 구지선의 몸을 찌를 뻔했다. 서너 자 길이나 되는 사슴뿔은 공중에서 금빛을 뿌리며 생각 밖으로 위맹을 떨치려 하는 것이 다. 화가 난 독수리는 두 발톱에 힘을 주어 사슴의 옆구리를 힘껏 찍었다. 발톱이 사슴의 배를 뚫고 들어가자 얼룩사슴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히이잉! 그리고 나서 사슴은 이내 숨이 끊어져 버렸다. 처량한 사슴의 울음에 연약한 구지선은 가슴이 쿵쾅거렸고, 영경은 측은한 마음에 가슴이 아려왔다. 바로 이때, 아래쪽에서 사나운 호갈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계집년이 나의 신성한 사슴을 해쳤느냐? 냉큼 내려와 내 사슴의 목숨을 내놓지 못할까?" 이영경은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움푹 패인 산봉우리에 중도 아니고 도인도 아닌 여인 이 보검을 쥐고 버텨서서 하늘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이영경은 가슴이 철렁했다. 지난날 그녀는 아버지한테 누누이 들은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이한 복장에 승려도 도인도 아닌 부류들이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경고였었다. 황차 지금은 구지선과 함께 있고 보니 함부로 무예를 펼쳐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영경은 불노에게 속삭였다. "금안사형, 빨리 날아가는 게 좋겠어. 사형이 저 사슴을 잡는 바람에 말썽이 났다구!" 불노도 아래쪽의 인물이 귀찮은 존재인 것을 알아차렸는지 아무소리도 없이 속도를 가했다. 한데, 지상의 여인은 이영경이 아무 응답도 없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 는 뭐라 중얼중얼 구결을 외더니 하늘을 향하여 보검을 흩뿌렸다. 손에서 벗어난 보검은 일진의 검은 연기를 동반하고 영경과 붙노를 향해 날아왔다. 거무튀튀한 연기는 보기에도 무서우리만치 번쩍번쩍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불노는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꽁지깃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번쩍이는 검은 연기가 자기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흠칫 놀라더니, 더욱 빠르게 앞으로 날 아갔다. 그런데 그렇게 주춤하는 사이에 불노는 쥐고 있던 사슴을 무심결에 놓치고 말았고 사슴 은 지상으로 한없이 떨어져 내려갔다. 어쨌든 사슴을 놓고 몸이 가벼워진 신조는 신속무비하게 날아 순식간에 구름으로 날아들었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놀란 구지선은 가슴을 콩콩거리며 바들바들 떨었고 이영경마저도 현기증 이 날 것 같아 몸을 움츠렸다. 귓전을 스치는 맹렬한 바람 탓에 둘은 입을 열 수조차 없어 말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영경은 구지선이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금안사형, 이렇게 도망만 갈 수는 없겠어. 우리 내려가 저 여자와 한번 사생결판을 내는 게 어 떻겠어?" 불노는 영경의 말을 듣자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하는 사이 그들은 십여 리 를 날아왔으므로 여자의 비검과는 이미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불노가 땅에 닿자마자 영경은 구지선을 부축해서 지상으로 내려섰다. 구지선은 정신이 아뜩하고 두 다리에는 힘이 없어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땅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영경이 적이 어디쯤 따라왔나 하고 하늘을 살피는데, 홀연 불노가 길게 울부짖으며 하늘로 날아 올라 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땅에 내려서는 그 순간 적의 비검은 이미 그들을 쏘아 매섭게 날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검을 향해 맞받아 날아간 독수리는 화광이 번뜩이는 검은 연기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영경은 불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몰라 혹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급히 소리쳐 불렀 다 "금안사형, 빨리 내려와요! 내가 그를 상대하겠다구!" 그러나 그녀의 외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불노는 이미 연기 속으로 날아들었고, 그리고는 연기 를 휘저으며 한 번 뒤돌아 날더니 적의 비검을 두 발로 채어 이내 아래로 내려왔다. 영경은 신조가 적의 비검을 낚아챈 것을 보자 기뻐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나 눈여겨보니 검은 연기가 계속 독수리를 따라 함께 내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영경은 급히 자영검을 뽑아들고 검은 연기를 향해 마주 쳐내었다. 불노는 지상 가까이 내려오자 비검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비검 주위에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서 리서리 엉켜 있었다. 영경은 검은 연기의 위력에 놀라서 감히 맞받아치지 못하고 멈칫멈칫 했다. 떨어져 내리던 적의 비검은 지상에서 대략 일 장 높이에서 갑자기 무슨 흡인력에 끌린 양 딱 멈 추더니 다시 공중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영경은 비검이 도주하는 것을 마냥 쳐다보고만 있을 수 없어 수중의 보검으로 재빨리 쓸어쳤다. 십여 장쯤 되는 자줏빛 검광이 싸늘하게 쏘아져 나가자 쨍! 하는 충돌음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동 시에 비검은 딱! 하고 두 쪽으로 부러졌다. 순간 화광도 소멸되고 무참히 부러진 칼은 힘없이 땅 에 떨어져 버렸다. 이영경은 불노의 빼어난 재주를 보자 더욱더 사랑스러워서 그의 날갯죽지를 쓰다듬으며 애무해 주었다. 독수리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건재한 반면 오히려 지상에 가만히 있던 구지선이 두려움과 충 격에 계속 손발을 제대로 놀리지 못한 채 모로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이젠 독수리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조차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영경은 그녀의 연약한 모습을 보자 측은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이렇게 위로했다. "언니, 힘을 내요. 여긴 적의 소굴에서 멀지 않아 위험한 곳이긴 해도 잠시 쉬도록 합시다. 백미 조사의 신조가 우리와 함께 있고 장미진인(長眉眞人)의 이 자영검도 있으니까 겁낼 건 없어요!" "난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요. 마음 편히 쉬세요." 이영경은 불노의 목에 걸린 보따리에서 주과 두 개를 꺼내 구지선에게 주었다. "자, 이 주과를 들어요. 그럼 힘이 날 테니까." "아냐, 난 먹지 않겠어요. 사부와 사백께서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이 주과는 백 년에 한 번도 구 하기 힘든 보물이라던 걸. 그런 걸 어젯저녁 두 개나 먹었는데 또 허비할 순 없어요. 어제 먹은 두 개 덕택인지 지금껏 배도 고프지 않고 정신이 상쾌하군요. 나야 지독하게도 박복한 운명을 타 고 난 사람인데 어찌 이런 선과를 함부로 과분히 먹을 수 있겠어요? 이건 남겼다가 아가씨가 유 용히 쓰도록 해요." 영경이 웃으며 대꾸했다. "이 과일은 얻은 지가 벌써 오래 됐거든요. 아직은 싱싱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상할지 몰라요. 그 저 몇 개만 남겨서 여영남 언니에게 주면 돼요. 자,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우선 들어봐요!" 구지선은 머리가 빠른 여자라 이영경을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고 몇 마디 나누지 않았으나 그 녀가 영판 고집불통이란 걸 눈치채고 있었다. 계속 과일을 먹지 않으면 성질을 낼 것이고 성의에 도 어긋나는지라 끝내는 주과를 받아들었다. 두 사람이 한참 주과를 먹고 있는데 홀연 불노가 한소리 크게 울부짖더니 부리로 보따리 속의 주과 두 개를 꺼내 영경의 옆에 놓고 눈을 껌벅거렸다. 그도 역시 주과를 무척이나 먹고 싶은 모 양이었다. 영경이 웃으며 말했다. "너도 선과를 먹고 싶은 모양이구나. 난 네가 육식만 하는 줄 알았지, 과일도 먹을 줄은 생각 못 했는 걸." 그녀는 주과 하나를 공중 높이 띄워 던졌다. 불노는 바람처럼 날아올라 허공 속에서 주과를 받 아먹었다. 재미를 붙인 영경은 예닐곱 개의 주과를 계속 연주탄을 쏘듯 하늘에 띄워올렸다. 불노도 퍽이나 교활한지라 예닐곱 가지의 독특한 신법을 계속 바꿔 시전하며 주과를 받아먹었 다. 이제 보자기 속에는 아홉 개의 주과밖에 남지 않았다. 영경은 아미산서 만날 여영남 생각을 해서 연주탄 쏘는 것을 멈췄다. 불노는 주과를 다 먹자 갑자기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갔다. 영경은 적이 쳐들어 온 줄 알고 급히 검을 빼어들고 사방을 살폈다. 해는 중천에 떠 있고 파아 란 하늘엔 구름까지 걷힌 채 마냥 밝게 빛날 뿐 적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신조의 모습마저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종적이 없었다. 영경은 불노의 의도를 몰라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구지선은 불노가 말할 수 없이 영리하고 교활한 것을 보고는 어떻게 그를 얻게 되었는지 영경에 게 물었다. 영경은 아미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불노가 훨훨 날아왔다. 불노는 뿔이 유난히 돋보이는 사슴의 머리를 하나 갖고 있었다. 산호처럼 불그스레한 뿔은 아홉 줄기로써 보기에도 무척 멋있었다. 영경은 그때서야 불노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불노는 원래 이 한 쌍의 사슴뿔을 얻으려고 사슴을 습격했고, 나름대로 어딘가에 쓸모가 있는 듯했다. 구지선이 이영경에게 말했다. "난 이제 현기증도 사라지고 정신이 말짱해졌어요. 이곳은 풍경이 아주 좋긴 해도 금안사형이 사슴뿔을 가져오느라고 적이 혹시 따라왔을지 모르니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납시다. 금안사형을 타 고 아가씨의 동굴로 가도록 해요!" 영경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불노를 부르려는데 불노가 먼저 쪼르르 달려와선 빨리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영경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서둘러 봇짐을 불노의 목에 걸고 구지선을 먼저 태웠 다. 이때 불노의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홀연 한 청년과 세 여인이 나타났다. 모두 새파란 젊은이들인데 청년의 나이는 이영경과 비슷해 보였고, 세 여인들은 제일 나이먹은 쪽이 스무 살 전후일 것 같았다. 청년은 남자답게 잘 생겼고 여인들도 선녀인 양 어여뻤다. 그들은 숲을 나서자 그중 제일 나이 먹어뵈는 여인이 입을 열었다. "두 분 아가씨, 잠깐만 기다려요. 우리가 할 말이 좀 있거든." 영경은 처음 그들이 적일 것이라고 지레 생각해 급히 칼을 빼어들려 했다. 그러나 영채가 도는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자마자 마음이 화창해지는 느낌이 들고 자신도 모르게 칼을 빼어들려 는 손이 스르르 멈춰졌다. 그녀가 뭐라 답변을 하려는데 홀연 일진의 광풍이 일고 모래와 돌이 하늘을 날았다. 순간 하늘 은 어두워지고 지상은 컴컴해져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데 으스스한 귀곡성이 듣는 이의 마음을 서늘케 했다. 그것은 마치 전날 요인을 만났을 때의 광경과 흡사했다. 이영경은 화들짝 놀라며 요인의 암수에 걸려들었음을 직감했다. 구지선은 아무 능력없는 순박한 처녀인지라 기급을 하며 이영경의 가슴에 파묻혀 왔다. 이영경은 그녀를 꼭 안아주며 급히 자영검을 뽑아들고 춤추듯 전후좌우로 휘둘렀다. 그녀는 사 방으로 요인이 있을 만한 곳을 살폈다. 요인의 위치를 확인만 하면 자영검을 발출해 목숨을 앗을 생각이었다. 이영경이 칼을 휘둘러 자신들을 보호하며 사방을 살피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여인의 호통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대담한 요물이로고! 어디서 감히 무례한 짓을 하느냐!" 호갈소리와 동시 네 명의 선남선녀가 있던 장소에서 수십 장의 오색불빛이 천지를 환히 비추었 다. 불빛이 사방을 비추자 광풍이 멎고 광풍 속에 어지럽던 수풀은 다시 고요를 되찾아 자욱하던 연기도 서서히 걷혔다. 숲은 다시금 종전의 광명세계로 되돌아 왔다. 네 명의 선남선녀들은 세 줄 기의 붉은빛과 한 줄기 푸른빛을 쏘아내며 두 갈래 금빛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경은 아직도 누가 적이고 벗인지 대뜸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여러 갈래의 검광이 자 기의 머리 위에 뻗친 걸 보자 황망히 자영검을 휘둘러쳤다. 보검은 이내 그녀의 수중에서 벗어나 두 줄기 붉은 검광에 맞받아쳐 갔다. 세 검광이 허공에서 부딪치자 벼락치는 소리가 연달아 터지 며 성난 용처럼 한데 엉켰다. 다른 세 줄기 검광은 영경의 머리 위를 지나 그녀의 뒤쪽으로 쏘아나갔다. 영경은 그들 검광이 자기를 향해 쏘아오지 않는 데 퍽 이상히 생각했다. 이때 가장 연장자인 여인의 쨍쨍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아가씨를 도우려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그대는 왜 같은편과 싸우려 하죠? 빨리 검광 을 거두어요! 이러다간 두 보물 중 하나가 상하고 말 거예요!" 영경은 그녀의 말에 마음이 헷갈렸다. 저 여자의 말이 진실이란 말인가? 혹 거짓은 아닐까? 그녀가 머뭇거리는 중에도 오히려 구지선은 앞뒤 사정을 냉철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소리 쳤다. "아가씨는 오해를 하고 있어요. 저분 아가씨들은 틀림없이 우리를 도와주러 온 것이라구요." 적을 상대해 싸울 능력은 없다손 치더라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속에서도 구지선은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구지선의 외침에 영경은 겨우 상황을 알아챌 수가 있었다. 그녀가 검광을 거두어들 이려는데 여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등쪽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검광을 거두어들이기 전에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장 저쪽에 한 여인이 드러누워 있고 괴이하게 생긴 사나이가 허둥지둥 따라가고 있었다. 땅에 쓰러져 있는 여인은 조금 전 공중에서 보았던 여승도 도인도 아닌 그 괴상한 옷차림의 산발 한 여인이었다. 여인이 소녀들의 검광에 치명상을 입자 동료인 남자도인은 당할 수가 없음을 깨 닫고 뺑소니를 치는 모양이었다. 공중에 뻗쳐 있던 검광은 도망치는 사나이를 쫓아 허공을 날아 가고 있었다. 영경이 다시 이쪽을 살피기 위해 몸을 돌릴 때, 그녀 옆에 연장자인 여인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 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칼을 빨리 회수하지 않겠어요?" 영경의 자영검은 두 줄기 붉은빛과 얽혀 한창 싸우고 있었다. 마치 교룡이 바닷속에서 싸우는 것 같은 형국이다. 영경은 묘일부인이 가르쳐 준 수검법(收劍法)을 사용해 검광을 회수하고 그들 네 명의 선남선녀와 마주쳤다. 이영경이 미처 말을 떼기 전에 나이든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선 어떻게 해서 우리 어머니 묘일부인을 만나셨지요?" "묘일부인이 당신의 어머니세요?" "그래요." 이들 네 사람들은 바로 묘일부인의 자녀인 제영운(齊靈雲)과 금선(金蟬), 찬하대사(餐霞大師)의 제자 여신동 주문(朱文), 그리고 흑봉황 신약란(申若蘭)이었던 것이다. 신약란은 운남 계화산 복선 담 홍화모모(紅花姆姆)의 유일한 제자였다. 홍화모모는 우연히 천서 한 권을 얻은 뒤 하늘과 인간사를 깨치고 자연의 조화를 터득하게 되었 다. 이윽고 자신이 머지않아 좌화(坐化)할 것을 알고는 예언대로 못이 정복될 때 승천하리라 마음 먹었다. 다만 못 속이 워낙 어둡고 독석(毒石)과 신악(神鰐)이 무척 무서운지라 못을 파해하기 위해 오는 젊은이들이 좋게 처리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 특별히 신약란을 무당산에 보내 반변노니(半邊老 尼)로부터 자연서(紫煙鋤)와 우잠유리(于潛琉璃)를 빌어오게 했었다. 신약란이 떠난 후 홍화모모는 점괘를 쳐보았다. 과연 못을 격파할 젊은이들이 길에 오르긴 했으 나, 그들 중 한 사람이 부상을 입어 어검비행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산과 강을 돌며 먼 길을 오고 있는 중이라 혹 잘못하다가는 승천하는 날에 맞추어 오지 못할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옛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친히 하산해서 천리호정(千 里戶庭)과 낭중축영(囊中縮影) 수법으로 영운 등 세 사람을 빨리 도착하게 도와주었던 것이다. 호의냐, 악의냐 感深情 抱病長征 施妙法 神囊縮地 제영운 등 세 사람은 성도에서 장기(張琪) 남매와 헤어지자 마차를 고용해 길을 재촉했다. 마차 삯으로 많은 은전을 주자 마부는 마음이 흡족해서 밤을 도와 길을 서둘렀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 차가 달리는 속도와 거리는 한정이 있는지라, 하루에 일백여 리밖에는 갈 수가 없었다. 이들은 어검비행을 한다면 순식간에 천여 리를 갈 수 있는 실력이었으므로 짜증이 나고 한편 초 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마차를 말로 바꾸어 타고 싶었으나 여신동 주문이 영단 덕 택으로 목숨은 부지하고 있다 해도 여전히 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터라 그럴 수도 없었다. 제영운은 원래 성정이 온화하고 차분해서 주문을 자기 몸처럼 아껴주었다. 마음에 짜증이 나는 일이 있어도 내내 주문을 애써 보살폈다. 금선은 성질이 급하고 활달한 편이라 때론 거친 대목이 없지는 않았지만 주문에 대해서만은 은 근하기 그지없었다. 성심성의껏 대해줄 뿐 아니라 진실로 마음을 쏟는 정은 오히려 영운보다 더 했다. 영운은 생각 밖으로 지성스런 금선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몰래 미소지을 뿐, 병이 중한 주문이 듣는 데서 동생을 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세 사람은 숭산이로(嵩山二老)가 지시한 대로 꾸준히 행군했다. 아흐레째가 되자 드디어 산길이 험해지고 첩첩이 얽힌 산길은 오솔길에서 길이 없는 전인미답의 험지로 변했다. 마침내 열흘째 되는 날 마부가 더는 갈 수 없노라 손을 들었다. "이 앞이 바로 망창산입니다. 더 나아갈 수 없으니 소인은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길이 없어도 조금은 더 나아갈 수 있잖아요?" "길 핑계만은 아닙지요. 이 산엔 호랑이나 늑대뿐만 아니라 귀신과 괴물까지 득시글댄답니다. 아 무리 은전을 많이 주신다 한들 소인으로선 속수무책인 걸요." 영운이 떠나올 때 숭산이로도 망창산은 도보로만이 지날 수 있다 알려주었다. 마부의 말을 듣자 영운은 자신들의 물건을 챙기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망창산 입구에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셋이 그곳에서 잠시 쉬며 갈 길에 대해 의논하고 있 는데, 큼지막한 대바구니를 진 사람이 그곳을 지나치고 있었다. 뭔가 뇌리를 스치는 영감을 느낀 금선이 제영운에게 말했다. "누나, 돈 몇 냥만 줘요." "뭘 하게?" "하여간 줘보라니까." 은자를 받아들고 금선은 금방 지나간 사람을 쫓아가더니 이윽고 바구니를 사서 들고 돌아왔다. 그는 대바구니를 주문의 곁에 털썩 내려놓고 싱글벙글 웃었다. "뭘 하려는 거니?" 제영운이 묻자 금선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응, 뭔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애.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마을 사람들은 신선같이 생긴 미녀일행이 이처럼 황량한 산간에 나타난 게 이상했던지 한 사람 두 사람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들은 금선이 쓰잘데 없는 대바구니를 애써 비싼 돈을 주고 사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중 참을성이 적고 말 많은 사람이 먼저 그들에게 물었다. "젊은이들은 어디서 오셨소?" 금선이 대답했다. "성도에서 왔소." "뭣 하러 오셨나요?" "보면 모르십니까? 우리는 이 망창산에 사냥하러 왔습니다." 이곳 시골사람들은 워낙 순진무구한 사람들이라 금선의 말을 그냥 곧이들었다. 이들 셋이 모두 칼을 차고 있는 폼이 틀림없는 사냥꾼같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분네들, 이 망창산은 여늬 산과는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할 거요. 늑대니 호랑이니 맹 수만 있는 게 아니라 괴상한 괴물과 강시 따위가 우글우글하다오. 괜시리 들어가지 않는 게 좋으 리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괴물들을 모두 처지해 드리죠." "호오, 젊은이들은 제법 용기가 있는 모양이오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시골사람들이 자꾸 모이자 금선이 제영운에게 길을 재촉했다. "우리 그만 갑시다." 그는 말과 동시 큰 대바구니를 덥석 등에 지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떼었다. 금선이 잰 걸음으 로 걸어가는 것을 보자 제영운은 주문을 거의 안다시피 부축해 뒤를 따랐다. 이 리쯤 걸어가자 이제 시골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영운이 금선을 부르려는 참인데 그가 먼저 되돌아 왔다. 그는 바구니를 털썩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높은 곳에 올라가 보니 전방이 제법 평탄합디다. 그 앞쪽이야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얼마 동 안은 우리가 이 바구니에 주누나를 태우고 양쪽에서 들고 갈 수 있을 것 같애." 제영운은 이제사 동생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주문을 태우고 가기 위해 이 대바구니를 굳이 사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주문은 금선의 제의에 마구 싫다고 거절했다. 그녀는 지금껏도 이들 남매에게 많은 폐를 끼쳤는데, 또 이 산길을 그들에게 떠메어져 간다는 것은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제영운이 웃으며 권했다. "주동생, 뭐 그렇게까지 사양할 건 없어. 우리 금선의 호의를 무시하지 말라구. 더구나 우리는 아직도 한참을 가야 하거든. 금선이 좋은 방법을 생각해낸 셈일 뿐이야." 그녀는 주문을 덥석 들어서 대바구니 속에 앉혔다. "자, 가자!" 제영운이 소리치자 금선은 앞에서 대바구니를 치켜들었고, 둘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갔다. 주문은 연일 뼈가 부숴지는 아픔을 겪은 데다 조금 전 제영운이 부축해 주었다 해도 무려 이 리 나 산길을 무리해서 달리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녀는 제영운이 바구니 속에 집어넣자 더 이상 꼼짝하지 못하고 그들이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제영운 남매가 자신이 사양한다 해도 말을 들을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하고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파아란 하늘 이 머리 위에서 울렁거리며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제영운은 주문이 찬바람으로 감기에 걸릴까 봐 일단 걸음을 멈추고는 봇짐에서 이불을 꺼내 덮 어주었다. 금선과 제영운은 오랜만에 경신술을 쓰며 산과 강을 훨훨 날듯 달렸다. 해가 서산에 질 때쯤 그 들은 오륙백 리를 달리고 있었다. 달이 밤하늘에 환히 걸렸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주문은 제영운 남매가 하루종일 쉬지 않고 달리는 게 미안해 조용한 곳에서 쉬어 가자고 연신 졸랐다. 제영운도 그녀의 말이 타당할 듯싶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숲은 어둠 속에 잠겨 괴괴했다. 그들은 숲 속 아늑한 곳에 짐을 풀었다. 주문도 바구니에서 나와 잠시 몸을 풀며 숲 속을 거닐었고 제영운과 금선이 좌우에서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제영운은 바 구니 속의 이불보를 꺼내 잠자리를 만들고 마른식량을 꺼내 요기를 했다. 금선은 제영운의 지시 를 받고 물을 길러 개울가로 내려갔다. 금선이 자리를 뜨자 주문이 제영운에게 말했다. "언니, 정말 고마와요. 난 어떻게 해야 이 은혜를 갚을지 몰라요." 제영운은 주문의 말을 듣자 응답이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녀의 어여쁜 눈망울 속엔 뭔가 짓궂음이 잔뜩 서리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빙긋거리던 제영운이 입을 뗐다. "언니라면 동생을 위해 이쯤 돌봐주는 게 뭐 대수겠어?" 주문은 제영운의 말 속에 다른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잠시 주춤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그녀의 볼이 조금씩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이때는 태양이 완전히 서산 속에 숨고 밝은 달이 동편 산마루에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하늘을 향해 우뚝우뚝 솟은 큰 나무들의 그림자가 달빛에 어른거리며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유난히 아름다운 밤풍경 속에서 연약한 소녀의 미태를 보자 제영운은 사랑스러움을 금치 못했 고, 간혹 주문이 양미간을 찡그리며 아픔을 참는 모습은 더할 데 없이 가슴이 아팠다. 제영운은 조용히 주문의 곁에 다가가 그녀를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 주었다. 주문은 요법에 걸리면서 수시로 한기와 열기가 솟구쳐 통증에 시달려 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려 서 일찍 외로운 몸이 됐고, 세상에 발을 내디딘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동안 찬하대사의 사랑을 받 았다 해도 이번 제영운 남매의 애틋한 정에는 그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문은 봄바람이 넘실대는 밤하늘의 달을 쳐다보았다. 마음이 다정한 이들 남매와 함께 있다 생 각하니 가슴이 뿌듯해 왔다. 그녀의 가슴엔 자연이 지니는 감미로운 정이 물밀듯 밀려오는 것 같 았다. 그녀는 모로 비스듬히 누으며 제영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작은 새가 사람에 의지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제영운과 주문이 한창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는데 한바탕 미풍이 살랑댔다. 바람은 나뭇잎을 건 드리고 자던 새들은 놀라 깨어서 사방으로 날았다. 제영운은 머리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하늘은 마냥 푸르고 나무 그림자는 여전히 대지를 비추는데 이름 모를 새들이 달빛 아래서 은빛을 발산 하며 동북쪽으로 날고 있었다. 새들은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며 하늘 저쪽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별다른 동정이 없자 제영운은 손으로 주문의 이마를 짚어봤다. 열이 뜨끈뜨끈했다. 찬 밤바람을 씌면 안 되겠다 싶어 그녀는 이부자리로 턱밑까지 고이 덮어줬다. 그처럼 주문을 춥지 않게 돌봐 주고 있을 때 금선이 물을 길어 돌아왔다. "왜 이렇게 늦었니?" "개울이 워낙 멀리 있었거든." 제영운은 먼저 주문에게 먹이고 자신도 두 모금을 마셨다. 물은 심산에서 길어온 만큼 그럴 수 없이 시원하고 맛이 좋았다. 제영운이 물을 어디서 길어왔느냐고 금선에게 물으려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눈앞의 자 기 손가락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뭔가 잘못됐구나 하고 제영운은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녀는 한 손으로 주문을 안으며 금선을 소리쳐 불렀다. "선아, 선아! 왜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누나, 나도 보이지 않아. 거, 이상하다. 난 누나들보다 안력이 훨씬 좋은데 왜 이럴까? 겨우 누 나들 윤곽만 알아볼 수 있을 뿐 주위가 온통 흐린 걸. 누군가의 요법에 걸린 모양이야. 암수를 당 한 거라구!" "그래도 너는 우리가 보이니? 그럼 빨리 이쪽으로 와. 이건 뭔가 좋질 않다. 이런 칠흑 속에서 비검을 날릴 수도 없고 큰일이구나. 이쪽으로 와서 우리 같이 있자꾸나. 빨리 신교망(神鮫網)으로 몸을 보호해야겠다." 금선은 누나의 말을 듣자 그녀들과 같이 있는 게 좋을 성싶었다. 그는 얼른 그녀들 곁으로 더듬 어 갔다. 한편, 주문은 처음엔 열이 후끈후끈 나고 눈앞이 칠흑처럼 어두워지자 자기의 병이 갑자기 도진 것으로 생각했다. 한데 제영운 남매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보니 병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암수 에 걸린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때 왜수 주매가 준 거울이 생각났다. 그 거울을 사용한다면 이 위험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급히 제영운에게 소리쳤다. "언니, 너무 당황하지 말아요. 저희 사부가 주신 보경(寶鏡)이 제 품속에 있거든요. 난 손발에 힘 이 하나 없어 꺼낼 수 없으니 언니가 대신 꺼내세요. 저들 요법을 깨칠 수가 있을 거예요!" 주문이 말을 끝냈을 즈음 금선이 그녀들 곁으로 다가왔다. 제영운은 이미 옥청대사(玉淸大師)가 준 오운신교망을 꺼내들고 있다가 금선이 가까이 오자 세 사람의 신변 주위에 둘러쳤다. 그리고 주문의 보경을 꺼내기 위해 그녀의 품을 더듬었다. 금선이 막 제영운 곁에 왔을 때, 그는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순간 하늘과 땅 이 빙글빙글 돌면서 그만 두 여자 위에 볼품없이 나뒹굴고 말았다. 그녀들 역시 금선처럼 천지가 요동치는 환상에 빠지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주문의 보경만 꺼내든다면 사방을 환히 비춰 능히 적의 법술을 파할 수 있으련만, 이젠 몸마저 가누지 못하는 지경이고 보니 거울을 꺼내 들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이처럼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셋은 지금 아까의 장소에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발 아래가 마치 솜을 밟는 듯 푹신푹신했고, 셋이 꼭 붙들고 움직이려 하지 않아도 마냥 몸 전체 가 요동치는 것이었다. 흡사 바람에 흩날리는 바다의 작은 배 같았다. 제영운이 소리쳤다. "선아, 주동생, 허둥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 찬찬히 상황을 살피는 게 좋겠다." 잠시 조용히 앉아 동태를 살펴보자, 그제사 조금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문은 두 남 매가 자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는다는 생각이 나서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가눈 뒤 있는 힘을 다 내어 품속의 거울을 꺼내들려 했다. 드디어 손에 거울이 잡혔다. 그녀는 기뻐 어쩔 쭐 모르며 거울을 꺼내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바로 이때 공중에서 호통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조금만 있으면 계화산에 도착할 것이다. 만약 너희들이 나의 법술을 깨뜨린다면 너희들이나 나나 모두 이로울 게 없느니라!" 호갈소리가 끝나자 다시는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제영운은 아무래도 셋 중 나이가 가장 많고 도행(道行)이 깊은 만큼 생각도 깊었다. 그녀는 얼른 주문의 행동을 막으며 속삭였다. "오늘밤 일은 뭔가 기이해. 다른 문파의 적이 우릴 해치려는 것은 아닌가 봐. 그들이 해치려 했 다면 우리가 막아낼 여가도 없이 해냈을 거야. 금세 독수를 썼겠지. 저 사람 말이 곧 계화산에 도 착한다니까 거기에 도착한 뒤에 보자구. 우리도 어차피 거길 가야 하니까 말야. 하긴 아직도 길흉 을 점칠 순 없으니 각자 검을 잘 간수했다가 임기응변하도록 해."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자 그들은 앉아 있는 곳이 아까보다 훨씬 안온함을 느꼈다. 주문은 그동 안 병환 중이었으나 평소 내공력이 워낙 좋아 혼수상태에 빠진 적은 거의 없었다. 제영운 남매도 본래 선골의 체질에 근본이 좋은 검선들이라 그동안 별로 잠을 자지 않았어도 그 로 인한 큰 애로는 없었다. 그런데 아까와 같은 격동을 겪자 피곤이 쌓였던지 갑자기 졸음이 오 기 시작했다. 먼저 주문이 두 눈을 사르르 감더니 제영운 남매의 몸 위에 쓰러져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금선도 한 차례 크게 하품을 하고는 이내 잠에 골아떨어졌다. 제영운 역시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며 금방 잠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도를 수련한 사람들에게 이 런 현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적의 암수에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주문이 거울을 꺼낼 때 말렸던 자신이 무척 후회스러웠다. 그녀를 말리지 않았던들 보경 으로 요법을 파해했을 것이 아닌가! 그녀는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차리려 안간힘을 쓰며 주문의 품속에 있는 거울을 찾기 위해 손 을 뻗었다. 하나 그녀의 두 눈꺼풀은 천 근이나 되는 듯 내리덮였고 입에서는 하품이 나왔다. 그 녀의 손은 주문의 품속에 들어가는 듯하다가 멈추었다. 그대로 잠이 든 것이다. 몇 시진이나 지났을까. 세 사람은 동시에 정신이 깨어났다. 그들은 한 군데에 엉켜 드러누워 있 었는데 그곳은 어느 산 언덕이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 중에서도 주문이 제일 부끄러워했다. 컴컴한 곳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잠이 든 탓에 셋은 엉망으 로 엉켜 있었던 것이다. 주문은 금선의 품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금선의 외쪽 다리는 주문의 오른쪽 다리 위에 놓여 있었으며, 금선의 머리는 비스듬히 제영운의 가슴을 베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제영운의 손은 주 문의 가슴 속에 들어가 있었고, 주문의 허리띠는 느슨히 풀어져 엉덩이의 하얀 속살이 드러나 보 였다. 그러한 모습들을 본 금선은 정신이 황홀하면서도 아뜩해서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주문은 병중이라 아무 힘이 없는 탓에 금선을 떨치고 일어나거나 속살이 안 보이게 허리띠를 졸라맬 수 가 없어 얼굴만 붉힌 채 계속 금선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를 본 제영운이 금선한테 호통쳤다. "선아, 넌 빨리 일어나지 않고 뭘 하는 거야? 계속 아픈 주동생을 짓누르고 있을 참이냐?" 금선은 두 눈을 부비고 허옇게 밝아오는 새벽의 산 속을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 아도 그곳은 어젯밤 달빛이 곱게 비치던 숲 속은 아니었다. 도대체 어딜까 하고 기이하게 생각하 는 판인데 누나의 호통소리가 다시 터진 것이다. 그는 깜짝 놀라며 그때서야 자신의 오른팔이 주문을 끌어안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후다닥 팔을 내리고 조심스레 주문을 부축해 옆에 앉혔다. 제영운은 주문의 곁에 다가와 그녀의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머리를 손질해 주었다. 금선은 주문의 몸에서 벗어나자 원앙벽력검을 빼어들고 약간 높은 언덕으로 뛰어올라 사방을 정 찰했다. 하늘에 태양이 솟아오르며 온 산이 뿌옇게 밝아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적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산풍경만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곳은 대단한 절 경이었다.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금선은 다시 그녀들 곁으로 내려왔다. "누나, 정말 이상하지 않아? 어젯밤은 확실히 누군가의 암산에 걸렸었는데 깨어나고 보니 이렇 게 요법에서 벗어나 멀쩡하니 말이야. 다만 이름을 알 수 없는 높은 산에 와 있는 것만 다르며 무슨 꿈을 꾼 건 아니겠죠?" "꿈은 무슨 꿈이겠니. 적이었는지 친구였는지, 길할지 흉할지 모르는 판에 쓸데없는 말은 하지도 마! 주동생이 병중에 그처럼 놀라고도 더 도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다. 어제 우리를 놀린사람은 쓸데없이 소란을 피운 건 결코 아닐 텐데, 악의에서 그랬는지 선의에서 그랬는지 그걸 알 수 없 구나. 하여간 이곳을 떠나야 할 거니까 뭐 없어진 건 없나 살펴나 보자."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물건을 챙겨보았다. 다행히 없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금선이 샀던 대바구니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여자의 수치심 登桂屋 靈藥醫奇病 浴溫泉 滌垢去塵氣 제영운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의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법술을 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그는 왜 우리들을 이처럼 멀쩡하게 풀어주었을까? 한참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데 주문이 갑자기 놀란 듯 소리쳤다. "언니, 저걸 봐요, 저 돌 위에 뭐라 새겨 있어요. 저 글씨는 계화산이지요?" 그녀의 외침에 제영운은 생각 속에서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주문은 외외(巍巍)히 솟은 절벽 위 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이끼와 덩굴풀이 무성한 절벽 저 위쪽에 <계화산>이란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계화산임을 확인하자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계화산이 맞지?" "그래, 계화산이야. 우리는 계화산에 와 있는 거라구." "어제 그 사람의 말이 맞군 그래.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영운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백, 주 두 분 사백님 말씀대로라면 우린 적어도 이십 일이 걸려야 이곳에 올 수 있었어.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여길 온 걸 보면 어젯밤 그분은 틀림없이 법술이 높은 대선배 고인일 거야. 특별 히 우리들을 이곳에 데려다 주어 일에 착오가 없도록 도와준 거라구. 저 글자도 두 분 사백의 말 씀과 합치하잖아. 이젠 착오없이 일을 해내는 것만 남은 것 같애."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고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홍화모모가 옛날 맹세한 바에 의하면 삼세동안(三世童顔) 동정을 지킨 사람만이 혜안(慧眼)을 지녀 못 속에서 약초를 얻을 수 있다고 했어. 주동생은 그런 점에서 합격이지만, 요법에 걸려 독 기가 아직 퇴치되지 않았고, 오는 동안 피로가 쌓여 못 속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어쩌지?" "그럼 누나하고 나하고 들어가면 될 거 아냐?" "아냐, 못 속의 신악과 독석은 무서운 존재야. 내가 보기에 홍화모모는 도술이 현통한 분이라 머 지않아 승천하실 참이므로 옛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도와줄 거야. 우리는 먼저 그분을 찾아가 동굴 입구에 있는 안개를 거둬 달라고 부탁하자구. 그런 뒤 우리 셋이 함께 못 속에 들어 가는 거야. 나는 주동생을 보호할 테니 금선이 네가 앞서 나가며 벽력검으로 신악을 죽이고 독석 을 갈라보아." "좋아요, 누나 말대로 합시다." "홍화모모를 뵈면 언어를 조심하고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해. 몸을 단정히 해서 책잡히지 않게 해 야 한다. 알았지?" "알았어 알았다구. 날 뭘루 보는 거야?" 세 사람은 방침을 정하자 홍화모모가 거처하는 복선담(福仙潭)으로 향했다. 주문은 꼼짝할 수 없 을 정도로 힘이 빠졌으므로 제영운이 업고 갔다. 그들이 산허리 하나를 돌아가자 서쪽 산모퉁이에 오색구름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 다. 비단을 둘러친 양 정말로 아름답게 오색이 일렁이고 있었다. 금선이 감탄해 탄성을 질렀다. "야, 멋진 경치다! 그렇지?" 제영운이 대꾸했다. "뭐가 멋진 경치란 거야? 저건 틀림없이 홍화모모가 복선담 입구를 봉쇄하기 위해 쳐논 구름안 개라구. 그분이 저 안개를 스스로 거둬주지 않으면 못 속에 들어가기는커녕 가까이 갈 수도 없다 구!" 셋이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이 다가가 있을 때 복선담 저켠에서 검은 점 하나가 하늘로 펄쩍 뛰 어올라 그들 곁으로 날아왔다. 금선이 제일 먼저 발견하고 두 여자에게 알려주었다. 파공음이 들 리는가 싶더니 흑점은 이내 그들 앞에 내려섰다. 세 사람 앞에 나타난 사람은 흑의여인이었다. 약 십육칠 세쯤의 새파란 처녀로, 원숭이 등에 벌 같은 잘룩한 허리를 지닌 영기발랄한 미모의 여검선이었다. 뽀오얀 코는 보석처텀 오똑하고, 귀는 구슬같이 둥글며, 이는 마치 조개인 양 하얗 고, 입술은 칠을 한 듯 붉었다. 두 갈래 버들잎 같은 눈썹이 그린 듯 머리카락 속에 숨어들며, 두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 다. 긴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눈망울은 가을의 호수처럼 찰랑댔고, 망울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눈 속에서 마냥 흔들렸다. 제영운은 상대가 보통여자가 아니리고 직감했다. 그 처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서 여길 오신 건 복선담의 오풍초를 위해서인가요?" 제영운이 대답했다. "저는 제영운이고, 여기는 동생 금선이에요. 숭산이로의 명을 들어 이분 주동생과 함께 홍화모모 님을 배알하고 오풍초를 얻기 위해 왔답니다. 한데 아가씨께선 성명이 어떻게 되시나요?" 처녀는 은은히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저는 신약란이라 합니다. 가사 홍화모모께선 세 분이 오풍초를 얻으러 오는 것을 이미 알고 계 시었어요. 그래서 일전에 저를 무당산에 보내 반변노니한테 자연서와 우잠유리를 빌려오라 하셨 지요. 여러분들을 돕기 위해서랍니다. 가사께선 머지않아 승천하실 것이므로 연일 뒷일을 걱정하 고 계셨어요." 신약란은 호수처럼 맑은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계속했다. "가사께선 못을 파괴하기 전에 저보고 세 분을 잘 모시라 하더군요. 여러분들을 연못으로 잘 인 도해 드리라는 명령이셨어요. 그리고 저분 주언니가 효월선사(曉月禪師)의 법술에 걸려 독기를 깊 게 입은 것을 아시고 못 속에 들어갈 수 없음을 걱정해 약도 주셨답니다. 이 약은 백독단(百毒丹) 세 알과 오풍주(烏風酒) 한 병인데 못 속의 오풍초만은 못해도 효험이 좋을 거예요. 자, 우선 제 가 사용하는 띠집으로 가십시다. 그곳에서 주언니를 치료하고 내일 아침 복선담을 깨치도록 해 요." 제영운 등은 그녀의 말을 듣자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뻐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자 울창한 삼림이 나타났다. 숲은 아름드리 나무가 하늘을 향해 우뚝우뚝 솟아 있고 사방은 괴괴하리만큼 조용했다. 신약란은 이들 셋을, 팔구 명이 양팔을 뻗쳐야 겨우 두를 만큼 아름드리 계수나무 아래로 데려 갔다. 계수나무는 아스라이 하늘에 뻗쳐 있고 칠팔 자 높이쯤 되는 곳에 입구인 듯한 동굴이 뚫 려 있었다. 신약란은 동굴을 통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과연 나무밑둥은 퀭하니 뚫려 있어서 마치 몇 층으로 된 누각 같았다. 그들이 들어간 곳엔 침상, 탁자, 의자 등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고 돌아가며 창문도 나 있었다. 창가에는 높다란 책상이 있어 붓, 먹, 벼루, 종이 등이 골고루 진열돼 있었다. 향로에는 아직도 불씨가 있고 뭔가가 타고 있는데, 무슨 향료인지 향긋하기 그지없는 냄새가 코 를 찔렀다. 실내는 먼지 한 점이 없을 정도로 깨끗하여 그 정결함이란 더할 나위가 없었다. 문 옆에 작은 사다리가 놓여 있는 게 아마도 위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인 성싶었다. 실내의 설비 가 상상을 절하는 모습이어서 한동안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그러나 갑자기 주문의 얼굴과 몸 에 열이 심하게 뻗히는 게 보여 제영운 남매는 더 이상 방안을 감상할 흥취가 나지 않았다. 제영 운은 급히 주문을 부축해 자리에 앉히며 신약란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신약란은 높이가 세 치쯤 되는 옥병과 알약 세 개를 꺼냈다. 알약은 붉은것 하나와 하얀것 두 알이었는데, 신약란은 붉은 알약 하나를 제영운에게 건네주며 주문의 배꼽에 집어넣으라고 지시 했다. 흰 알약 두 알은 주문의 입에 털어넣고 병의 마개를 딴 후 오풍주를 주문의 입 속으로 흘려주었 다. 옥병의 마개를 따자 새큼한 향기가 방안에 그득했다. 신약란이 주문의 턱을 들어올리니 주문 은 꿀꺽꿀꺽 오풍주를 들이마셨다. 오풍주를 다 마시자 제영운은 주문을 들어다 침상에 뉘고 이불을 목언저리까지 깊숙이 덮어주었 다. 주문이 고이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며 신약란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원래 명칭이 고계평(古桂坪)인데 삼 년 전 제가 이 나무등걸에 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 하고 제가 수도하는 곳으로 만들었지요. 가사께선 천서를 얻은 뒤로 사람이 자신이 수도하는 곳 에 얼씬거리는 것을 싫어하시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저도 매일 가사한테 전수받는 시간 외에는 이곳에 와서 따로 수련을 하곤 했어요. 여긴 사람이 머물기 아주 좋은 곳인 것 같애요. 나무의 높 이가 이십 장이 넘는데 모두가 휑하니 뚫려 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구멍이 나 있어서 저는 그 곳을 전부 창으로 만들었지요. 나무 내부가 워낙 높아 삼 층으로 만들었는데, 위층은 목판을 가로 질러 평평하게 해놓고 창문을 여러 군데 뚫어 사방을 관망할 수 있게 해놓았어요. 어스름 달밤에 달을 감상하기에 아주 좋지요. 지금이야 별 흥취가 나지 않겠지만 가을에 온 산에 계수나무꽃이 만발했을 때 밝은 달을 쳐다보면 시원한 바람이랑 맑은 꽃내음이 그럴 수 없이 좋답니다. 주언니 는 복약한 뒤라 얼마 동안 잠을 푹 자고 야밤중이 돼야 깨어날 터이니, 우리들은 위로 올라가 사 방을 관망하도록 해요!" 제영운은 주문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약효가 좋은 탓인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제영운은 그동안 쌓였던 근심이 일시에 걷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더욱 신약란의 태도가 은근하고 정겨워 마 음이 푸근해지는 것이었다. 그들 남매는 신약란을 따라 사다리를 올라갔다. 바로 위층은 일 층보다 더욱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주렴, 책상, 서가 등 심산유곡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가구들로 틀이 잡혀 있고, 거문고, 퉁소, 피리 등 여러 가지 악기가 비단폭과 함께 사방 벽에 걸려 있으며, 진귀한 고화가 필요한 공간에 장식돼 있었다. 제영운은 낮게 탄성을 질렀다. 신약란은 일개 수도하는 처녀인데 어떻게 이런 진귀한 물건들을 다 구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이 처녀가 도를 닦으면서도 아직 세속의 사치와 향락을 잊지 못한 것일까? 신약란은 그러한 제영운의 심사를 환히 꿰뚫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언니, 언니가 보기에 여기 있는 것들이 죄다 이해가 가지 않지요? 저는 일찍 출가했어요. 그러 니 이런 물건들을 어떻게 구입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가사가 지니시던 애장품이어 요. 가사께선 천서를 얻으신 후로 이런 허다한 세속의 물건들을 초개로 보고 버리셨답니다. 저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때 취미로 이렇게 장식해 본 거예요. 그리고 지난해 계수 나무 열 매가 열자 그것들을 잔뜩 따다가 가루로 만들어 방에 뿌린 겁니다. 냄새가 괜찮았던가요?" 제영운 남매는 신약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방안 장식의 내력을 이제 알 수 있었던 것 이다. 신약란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젯밤 사부님한테서 여러분이 오실 거라는 말을 듣고 저 벽의 판막이로 침상을 만들어 준비해 두었지요. 방금 전 주언니가 누운 침상 말예요. 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소녀는 곧 언니들을 따라 여기를 떠날 겁니다. 이것들은 모두 한때를 즐기는 사소한 물건들일 뿐 이라 그저 신외지물(身外之物)이지요. 자, 우리 제일 위층으로 올라가 볼까요?" 제영운 남매는 그녀를 따라 삼 층에 올라갔다. 그곳은 신약란이 용공(用功)하는 곳인 듯, 약그릇 과 차잔 등이 도술관계 서책 및 장검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아까보다는 한층 고상하고 우아 한 인상을 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제영운이 새삼 생각난 듯 신약란에게 물었다. "아가씨가 우리와 함께 떠난다는 것은 무슨 말이죠?" "가사께선 천서를 얻으신 뒤 하늘과 인생에 대해 깊이 연구하시더니, 제가 아직 세상사에 할 일 이 많이 남았노라 말씀하시더군요. 당신을 함께 따라갈 수 없다는 거예요. 가사께선 평생 제자라 곤 저 하나만을 두어 얼마나 애지중지해 주셨는지 몰라요. 수많은 법술과 비검술도 가르쳐 주셨 죠. 다만 가사는 당신이 승천하신 뒤 제가 동문사형이나 사백, 사숙이 하나도 없어 다른 사람들한 테 멸시나 받지 않을까 걱정을 하셨어요. 그래서 언니들이 약을 구하는 데 편의를 봐주고 함께 아미산에 가서 문하에 들어가라 하시더군요. 어때요, 제가 언니들을 그렇게 따라가도 되겠는지 요!" 자고로 성성이가 성성이를 아끼는 법이다. 제영운은 그동안 신약란의 영풍(英風)이 발랄하고 싱 싱한 모습에 매료되었던지라 그 말을 듣자 대뜸 좋아하는 것이었다. "난 아가씨를 보자마자 얼마나 정이 들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같은 파가 아닌 때문에 수 시로 만나지 못함을 속으로 은근히 원망하고 있었다구요. 홍화모모께서 그런 지시를 내리셨고, 아 가씨 생각도 그렇다면 우리라고 굳이 반대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정말 고마와요." "한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홍화모모께서 그런 생각을 지니셨다면 왜 우리를 한 번 안 만나 주실까? 못 속에는 홍화모모께서 설치하신 안개가 서리어 있어서 우리가 쉽게 들어갈 수 없거든. 나를 홍화모모께 안내해 주면 그 안개를 거두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신약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가사는 성정(性情)이 특이하셔서 한 번 약속한 일은 어기시지 않고 천지조화를 거스르지 않는 분이에요. 더구나 언니와 아우님은 혜안이 있고, 주언니는 천둔경을 지녔으며, 언니는 신교망으로 호신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사부님은 무당산에서 자연서와 우잠유리를 빌어와 저더러 도우라고 하신 거예요. 그런데 뭘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있겠어요?" 제영운은 그 말을 듣자 쉬이 마음이 놓였다. 그들은 신약란을 따라 작은 창문 밖으로 밤하늘의 달풍경을 내다보았다. 창 밖의 전망대는 작은 나뭇가지 세 개를 평평히 깎아 만들었는데 간단하면서도 교묘히 꾸며져 있어 달구경하기에 안성 맞춤이었다. 그곳은 지상에서 십여 장 높이인 데다 숲 속에 우뚝 솟아 있어 모든 산의 풍경이 빠 짐없이 보였다. 계수나무꽃이 피는 시절이라면 풍광이 진정으로 멋들어질 것 같았다. 제영운 남매와 신약란은 전망대에 앉아 밤풍경을 음미하며 한바탕 이야기꽃을 피웠다. 신약란은 여러 가지 맛있는 과일도 가져와 셋이 함께 들기도 했다. 그들이 다시 아래로 내려왔을 즈음 주 문은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제영운이 그녀의 몸을 더듬어 보니 주문은 이제 어제와는 달리 몸매가 솜처럼 부들부들하고 뜨겁던 열도 가라앉았다. 영약 덕분에 거의 완치되고 있는 모양이었 다. 신약란이 말했다. "주언니 얼굴색을 보니 이제 약의 효력이 발동되는가 봐요. 그녀를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놔두 는 게 좋겠어요. 지금은 아무 일도 없으니 복선담에 가보는 게 어때요? 못의 형태도 살필 겸 이 곳 산경치도 감상토록 해요." 금선이 끼어들었다. "나도 방금 전 그 생각을 했지만 주누나가 걱정인걸.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 우리들이 가버 리면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잖아요. 우리가 가버린 뒤 혹 그가 깨어났다가 아무도 없는 걸 보 고 놀라지 않을까 몰라. 누나는 본래 주누나를 그토록 아끼는 터이니 여기 남아 돌봐주는 게 어 때? 내가 신누나와 함께 복선담을 한 번 둘러보고 올 테니까." 제영운은 대답없이 미소만 머금었다. 그러자 신약란이 대신 입을 열었다. "그건 우리 사부님의 약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하는 말씀이에요. 이 약은 한 번 복용했다 하면 적 어도 예닐곱 시간이 지나야 겨우 깨어난답니다. 그리고 이 작은 계수나무집은 사방에 가사의 부 록(符錄)이 붙어 있어 변화가 막측하답니다. 이번 세 분이 이곳에 올 때 사부님의 묵계가 없으면 못 속에 들어가 약초를 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산 속에 들어오는 것조차 맘대로 되지 않았 을 거예요. 주언니가 여기서 잠자는 것은 그 어디보다 안전해요. 아무 근심 걱정할 필요없으니 자, 빨랑 저나 따라오시라구요!" 제영운 남매는 어쩔 수 없이 주문을 남겨둔 채 신약란을 따라 계수나무집을 나왔다. 그들은 산 봉우리로 올라갔다. 복선담은 높고 움푹한 산허리에 있어 마치 주발 같은 모습이었다. 직경 일 리가 약간 넘는 둥그 런 호수에는 붉은 안개가 그득히 덮여 있었다. 제영운이 수십 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 벌써 오색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분간할 수가 없었 다. 신약란이 걸음을 멈추고 제영운에게 설명했다. "이제 조금만 가면 복선담이에요. 저 못은 수심이 백 장이나 되고 독석에서는 독기 어린 장기(腸 氣)가 뿜어나와 수련을 깊이 한 검선도 못 속의 경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해요. 거기에다 가사 가 설치한 운무가 가득 퍼져 있어 함부로 접근할 수가 없죠. 지난 몇 년 동안 약초를 얻으려 수 많은 고수가 왔었으나 대부분은 사부의 운무도 제대로 파해를 못했어요. 그 운무는 가사의 주문 에 따라 변환이 심하고 독기까지 뿜어나오거든요. 그걸 일찍 알아내는 사람은 목숨을 건지지만 조금이라도 늦는 날이면 악어의 밥이 되고 말아요." 신약란은 잠시 숨을 돌이키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에 언니들이 오실 때 사부께서는 법술을 발동해 독기를 뿜어내진 않았으나 스스로 안개를 철수하지도 않았지요. 그건 그분이 옛날 그 누구로부터도 오풍초를 지키겠다고 약속한 때문이에 요. 사실 우리들이 이 안개 속을 뚫고 못가에 가는 것만도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요. 그러나 다행 히 우잠유리를 무당산서 얻어왔으니 그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요. 나의 의언니인 표묘아(票渺 兒) 석명주(石明珠)가 자신의 사부한테 말씀드려 빌 수가 있었어요."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는데 홀연 금선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누나들, 빨랑 이리 와봐요! 이 아래 컴컴한 물 속에 무슨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어!" 신약란은 금선의 외침을 듣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 결엔지 금선은 독안개를 뚫고 못가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급히 우잠유리를 꺼내들고 제영운과 함게 못가로 달려갔다. 금선은 못가에 멀쩡히 서서 아래쪽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약란은 금선이 위험을 당하지 않고 건재한 것을 보자 겨우 마음을 놓았다. "언니의 아우님은 정말 대담한 사람이네요. 어쩌면 저 안개를 뚫고 이렇게 못가에 올 수 있었을 까. 만일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요?" 금선은 신약란이 쥔 푸른빛의 막대가 형형한 빛을 발하는 것을 보자 놀라 물었다. "이건 도대체 뭐요?" "이게 바로 우잠유리란 거예요. 이 유리의 푸른빛으로 안개 속 에서도 우리가 서로 똑똑히 보이 고 있는 거라구요. 이것없이 못 속으로 내려가는 건 어림도 없지요." 그녀는 말과 함께 유리를 못 아래쪽으로 비껴보였다. 금선은 푸른빛을 통해 물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렇지 않은데, 이건 안 되겠어!" "무슨 말이죠!" 신약란이 이상한 듯이 묻자 금선이 대꾸했다. "이 빛으로는 겨우 십 장 길이밖에는 못 보겠는 걸. 십 장 그 밑은 여전히 컴컴해서 보이지 않 잖아요. 이까짓 게 뭐 쓸모가 있어?" 신약란은 원래 무예도 고강하고 성품 역시 오만한 여자였다. 금선의 퉁명스런 말을 듣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실 우잠유리는 십 장 정도의 거리밖에 는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푸른빛이 비추는 아래쪽 칠팔 장 거리에 밖으로 툭 불거져 나온 바위 가 보였다. 그 바위쯤으로 내려가면 호수 속이 좀더 잘 보일 것 같았다. 신약란은 훌쩍 몸을 날려 바위로 내려갔다. 못 가까이 다가가 도대체 신성한 악어가 어떻게 생 겼는지 살펴볼 심산이었다. 한데 그녀의 발이 바위에 닿기도 전에 홀연 괴이한 바람이 어둠 속을 뚫고 몰아쳐 왔다. 어둠 속에서 희끗하고 붉은뱀 같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붉은뱀 같은 물체는 신 약란의 다리를 뚫고 들어올 형세였다. 신약란은 일찍이 스승으로부터 악어의 무서움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부르르 떨리며 다시금 다리를 박차고 위로 솟구쳐 올랐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소홀히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이 순간, 아차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우잠유리를 떨치고 말았다. 우잠유리는 풍덩 물 속 에 빠졌다. 이윽고 수면은 잠잠해졌고 왼쪽은 여전히 칠흑처럼 깜깜했다. 금선도 못 속에 괴이한 바람이 일며 위쪽으로 한 마리 붉은뱀이 덮쳐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뱀 이라기보다는 뱀처럼 보이는 커다란 물체였다. 우잠유리가 신약란의 손에서 떨어져 내리고 못 속 의 요물이 그녀를 습격하는 것을 보자 금선은 불문곡직하고 벽력검을 빼어 아래쪽으로 찔러갔다. 두 갈래 자줏빛 검광이 못 속을 뚫고 쏘아들어 갔다. 그 괴물도 검광의 무서움을 알았던지 맞받 아 치지 못하고 뒤로 물러갔다. 괴물은 순식간에 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푸른빛을 발하는 우잠유 리는 번쩍번쩍하는 빛을 물 속에 흩뿌리며 저 깊숙이 호수 밑으로 가라앉았다. 금선이 갑자기 외쳤다. "괴물을 보았다. 괴물을 보았어! 그건 천산갑이었어. 천산갑." 신약란은 수중의 우잠유리를 놓치자 부끄럽고 분한 중에 그나마 괴물이 계속 공격해 오지 않는 게 다행이라 여겼다. 아쉬운 마음으로 물 속을 내려다보니 실같이 푸르스름한 빛이 아련히 보일 뿐 물속은 여전히 시꺼멓고 침침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무슨 실수라도 있을까 두려워하며 제 영운 남매를 불러 어검비행을 시전해 아래쪽을 정탐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금선의 외침소리가 들린 것이다. 만일 금선의 말대로 천산갑이라 한다면 그것은 홍화모모 가 말해준 것과 흡사하다 할 것이었다. 그녀는 의아한 중에 어떻게 괴물을 보았으냐 물으려 했다. 그때 제영운의 말소리가 들렸다. "선아, 우리 셋 중 이 컴컴한 속에서 괴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인 것 같다. 빨리 이쪽으로 와서 우리와 함께 내려가 보자!" 신약란은 그 말을 듣자 드디어 금선의 안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금선이 위에서 내려오자 그들 셋은 서로 손을 맞잡고 밑으로 내려갔다. 신약란이 제영운에게 말했다. "언니, 아우님의 안력이 그처럼 대단하니 이 연못을 파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다만 제 실수로 반변노니의 우잠유리를 잃어버려 안타깝군요. 그 유리는 반변노니께서 옛날 안탕산에서 수도하실 때 우잠을 지나며 얻은 거래요. 어느날 밤 밭가를 지나는데 작은 둔덕에 푸른빛이 하늘 로 솟아나더란 거죠. 하늘가 은하수까지 빛이 비치더란 거예요. 그분은 무슨 보물이 세상에 나오 나 싶어 수십 일을 그 옆에서 지켜 기다렸대요. 처음 그 물건을 얻었을 때는 액체처럼 물컹물컹 했는데 대사께서 자기의 선천진기를 써서 아까의 그것처럼 보물로 만들었다고 해요. 한데 그걸 제가 잃었으니, 괴물이 훼손이라도 해버리면 뒷날 대사를 뵐 면목이 없게 됐어요. 정말 큰일이에 요." 금선이 말했다. "누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보니 그 푸른빛이 연못 저 밑으로 가라앉아도 그 천산갑 같은 괴물은 감히 달려들지 못하더군요.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이내 뒤로 물러나곤 했어요. 그 푸른빛이 무척 무서운가 봐요. 괴물은 푸른빛에 다가갔다가 곧장 물러나곤 해서 그의 생김새를 볼 수 있었 어요." 제영운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내내 아무 말이 없더니 갑자기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맞았어. 그 우잠유리는 아무 탈이 없을 거예요. 나중 연못을 파해한 뒤 되찾으면 되겠지 뭐." 신약란은 천산갑 같은 악어가 우잠유리를 절대 어쩌지 못하리라는 금선의 말에 웬지 마음이 놓 이지 않던 참인데, 제영운까지 동강내듯 말을 끊어서 하는 것을 보자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무슨 연유로 그렇게 확신을 하시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오랫동안 살아 경험이 많은 영물은 아는 것도 많아 신성한 물건은 함부로 건드리 지 않으리라 싶어요. 우린 먼저 돌아가 주동생의 병환이 어떻게 되었나 살펴봅시다. 그 유리는 연 못을 칠 때 다시 구하도록 연구하고 말이야." 신약란도 제영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생각이 들었다. 악어가 신성한 영물이라면 경거망 동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은 즉시 계수나무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해가 설핏한 하오였 다. 그들이 방안에 들어가자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만 같 았다. 신약란이 급히 소리쳤다. "빨리 밖으로 나가요!" 제영운과 금선은 무슨 연유인지도 모르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왔다. 신약란은 자기가 부르기 전엔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삼 층으로 휘익 몸을 날리더니 창문으로 해서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제영운 남매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주문이 걱정됐다. 그들이 재차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신 약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쏘아나왔다. "언니는 빨리 비켜서요!" 문득 푸른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신약란이 주문을 등에 업고 바람처럼 수풀 밖으로 내닫는 보 습이 보였다. 금선은 주문이 어찌 됐는지 몰라 고함을 지르며 뒤를 쫓았다. 제영운도 마찬가지로 십분 걱정이 되는 터라 그들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신약란은 주문을 들쳐업고 개울가로 내려가며 제영운에게 고함쳤다. "언니는 빨리 와서 나를 도와주고요, 동생은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해요! 알았어요?" 제영운은 무슨 이유인지 몰랐으나 뭔가 사연이 있으리라 믿고 금선을 멈춰세웠다. "너는 여기 있거라." "왜 그러는 거예요?" "그건 나도 모른다. 신약란이 지시하는 거니까 잠시 여기 있어 봐!" 그녀는 개울가로 달려갔다. 주문의 얼굴은 백지장같이 하얗고 몸은 온통 더러움으로 뒤범벅 돼 있었다. 신약란은 주문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주언니의 몸을 보아요. 뭔지 모르겠어요? 빨리 물로 깨끗이 씻겨주세요!" 주문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신색은 종전처럼 병색이 없이 맑고 사기도 말끔히 가셔 있었다. 홍화 모모의 영약이 극히 효험이 있어 완전히 나은 것이었다. 제영운은 이것도 홍하모모의 지시사항이겠거니 생각해 신약란을 도와 주문의 몸을 깨끗이 씻겨 주었다. 앞서 세 사람이 계수나무집을 나간 뒤 주문은 희미하게나마 깨어나고 있었다. 아슴프레한 정신 속에 온 뼈마디가 바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가슴 속은 천만 개도 더 되는 독충이 마구 물어대는 듯 저려왔다. 그녀는 제영운 남매를 소리쳐 부르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 오지 않았다. 이렇게 한참 고통 속에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대변이 마려웠다. 이윽고 그녀는 심한 설사를 마 구 배설하고 말았다. 주문은 고통 속에서도 물컹물컹한 설사를 계속하고 있는 자신이 창피하고 한스러웠다. 지금 몸은 한오라기의 힘도 없어 자신으로서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금선을 저주했다. '빌어먹을 녀석이 필요없을 때는 늘상 옆에서 촐랑대더니 이런 생사관두엔 코쭝배기도 보이질 않다니!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멍텅구리 같은 게 하필 이럴 때 어딜 놀러갔단 말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금선이 원망스러웠다. 창피와 원망과 분함이 교차하는 중에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형언키 어려운 통증이 엄습해 왔 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아픔에 열 배는 더한 것 같았다. 그녀는 수치, 분노 그리고 통증에 얼룩이 져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비명과 함께 그녀는 침상에서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잠시 지나서 그녀는 깨어났다. 그때 제영운 등의 웃음소 리, 속살거리는 소리, 문 여는 소리, 호통치는 소리 등이 들렸고 이윽고 그녀의 몸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급히 달려가고 있었는데 웬지 모르게 기분이 상쾌했다. 머리는 조금 띵하며 어질어질했어도 몸의 통증은 거짓말같이 싹 가셔서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한 다는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눈을 살그머니 뜨고 자기를 업고 가는 사람이 누군가 살펴보 았다. 그것은 여자였다. 한데 그녀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선지 신약란이란 존재를 잊고 있었다. 개울가에 도착해 그 녀를 정면으로 보고서야 신약란이란 여자를 조금 전 만났었지 하는 생각이 났다. 제영운이 뒤미 처 좇아와 자기의 옷을 벗기자 주문은 창피해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눈을 감는 그 찰나 구린 냄새가 그녀의 코를 심히 자극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뜨고 자 기 자신을 살폈다. 그것은 자신의 대변으로 온통 범벅이 된 꼴불견이 아닌가? 신약란의 몸에도 상당히 많은 오물이 묻어 있었다. 아아,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녀는 부끄럽고 창피하고 원 통해서 눈을 꼭 감은 채 아직 깨어나지 못한 시늉을 했다. 제영운은 주문의 옷을 위아래 모두 벗기자 신약란과 함께 부축 해 개울 속으로 들어갔다. 파아 란 물은 거울처럼 맑고 물 아래는 하얀 모래가 보석처럼 깔려 있었다. 모래 사이사이에서 수천만 개의 작은 물방울이 수면으로 떠올라 수포를 이루다가 미풍에 살랑 대는 물살에 흔들리며 터져서 는 작고도 작은 수많은 파문을 이루었다. 물 속에는 푸른 이끼가 잔뜩 끼어 물이 찰랑댈 때마다 더욱 선명한 색채를 띠곤 했다. 수면에 계속 하얀 거품이 이는 게 물이 보글보글 끓는 것만 같았다. 제영운은 손을 물 속 깊이 넣어보았 다. 과연 물은 따뜻한 감촉을 주었다. 그곳은 온천이었던 것이다. 제영운은 속으로 속삭였다. '주문은 복도 많다. 이런 온천에서 목욕을 하니 병에서 완쾌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구나.' 주문은 개울가 평평한 바위에 앉혀져서 버선을 벗기우고 있었다. 몸은 아직 힘이 없고 피곤했지 만 마음이 시원한 것이 며칠 전과는 영판 달랐다. 드디어 독기가 완전히 가시고 병에서 쾌차한 것이었다. 더욱 그녀는 제영운과 신약란이 더러움도 불구하고 좌우에서 부축해 주며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게 마냥 고마왔다. 흐뭇한 중에도 주문은 홀연 누군가 자기 옆에 한 사람이 빈 것 같은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부지불식 중에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저켠 언덕 위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순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얼핏 생각났다. 그녀는 너무나 급한 나 머지 '어머!'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물 속에 몸을 담고 얼 굴만 빼꼼히 내놓았다. 제영운은 주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물 속으로 빠지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 달려들려고 했 다. 그러다 주문이 아무 일 없이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걸 보자 겨우 마음을 놓았다. 신약란은 자신도 더러운 옷을 벗어서 빨고 몸도 씻고 싶었으나 누군가가 엿보면 어쩌나 싶어 은 근히 망설여졌다. 그녀는 제영운에게 말했다. "주언니는 이제 겨우 완쾌됐고 저는 온몸이 더러워 함께 목욕하고 싶은데, 언니가 언덕에 올라 가 망 좀 봐주지 않으실래요?" 제영운은 그녀의 말뜻을 잘 알아들었다. 주문이 저토록 창황해 한 것은 금선이 언덕 위에 있기 때문이므로 신약란 역시 금선이 몰래 자기 몸매를 엿보지 않게 예방하려는 심산임이 뻔했다. 그 녀는 금선이 싹수없이 노는 게 괘씸했으나, 애써 눌러 참고 빙그레 억지웃음을 띠었다. "알았어, 내가 위에 가서 잘 망을 봐줄게." 그녀는 주문의 장검, 보경 등을 단속해 두고 개울가 언덕으로 올라갔다. 금선을 찾아 한바탕 꾸 지람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언덕에 올라와 보니 금선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애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개울로 내려가기 전 틀림없이 여기에서 기다리라 했는데, 어디를 갔지?' 웬지 마음이 철렁하는데, 돌연 전방의 수풀 속에서 검광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금선의 붉은빛 검광과 세 줄기 청회색 검광이 어지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숲 속으로 몸을 날 렸다 숲 속에는 세 이랑쯤 되는 평지가 있었다. 그곳에서 금선은 쌍검을 휘두르며 두 홍의여인과 코 가 움푹 들어간 붉은 얼굴의 괴이한 사나이와 싸우고 있었는데, 일 대 삼의 쟁투라서 가까스로 적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제영운은 홍화모모의 괴팍한 성격이 생각나서, 괴상하게 생긴 이들도 혹 그녀와 가까운 사람들 이 아닐까 염려했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판인데 금선이 마구 행동해 일을 그르친 게 아닌가 걱정이 된 것이다. 그녀가 싸움을 말리고 자초지종을 물으려 할때 금선이 소리쳤다. "누나, 빨리 와서 이 빨간 개코 같은 놈을 없애버려! 우리를 몰래 암살하려 했다구. 내가 미리 알고 있다가 혼을 내서 여기까지 추격해 왔는데, 글쎄, 여자들이 또 나타났단 말야!" 그는 제영운이 나타난 걸 보자 힘이 솟구치는 듯 소리치는 동시에 검광을 더욱 힘차게 흩뿌렸 다. 상대는 금선의 말대로 칼놀림이 비열하고 악랄했다. 아마도 홍화모모의 고상한 벗 같아 보이 진 않았으며, 제영운은 남의 산에서 일을 크게 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일지(一指)로 금빛을 쏘아내 우선 금선의 검광과 적들의 검광을 차단시켰다. 제영운은 금선을 말리며 가로막고는 상대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이 산에 온 건 홍화모모의 허락을 받은 바 있습니다. 당신네 셋은 어느 문하신데 암중 에 우리를 해치려 하셨소? 빨리 그 연유를 밝혀 피차의 화기를 상하지 않게 하시오." 붉은 얼굴의 사나이는 제영운의 검광이 무서운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은근히 겁이 났다. 그렇 다고 쉽게 죽어들 수는 없었다. 사나이는 징글맞게 웃으며 내뱉았다. "뭐야, 홍화모모의 허락을 받았다고? 우리 세 사람은 강서 여산의 백록동(白鹿洞)에 계신 <팔수 관음(八手觀音)> 비룡사태(飛龍師太)의 문하시다. 바로 금씨 삼남매로서 금영(金瓔), 금연(金燕), 금타(金陀)가 우리들이야. 너희들은 누구냐?" 제영운이 대답했다. "나는 건곤정기 묘일진인(乾坤精氣 妙一眞人)의 딸 제영운이오. 여긴 내 동생 금선이고, 우리는 사매 주문과 함께 숭산이로의 명을 받고 이곳 홍화모모의 오풍초를 얻으러 왔어요. 우리가 세 분 께 죄지은 게 없는데 왜 나의 동생과 싸우는 거죠?" 금타는 제영운의 말을 듣자 화를 버럭 냈다. "알고 보니 제수명(齊漱溟)의 딸년이로군. 흥, 오풍초를 훔치러 온 주제에 어쩌고 어째? 너는 오 풍초가 일찍이 우리들의 것이 된 줄 모르느냐? 홍화모모는 우리 사부에게 그 오풍초를 주겠노라 단단히 약속했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감히 이곳에 와서 남의 물건을 넘보다니? 알겠다, 개 같은 신약란 이년이 너희들을 돕고 있는 거로구나. 도대체 너희들이 홍화모모의 윤허를 어떻게 받았다 는 거냐? 신약란 고것이 모모를 속이고 너희들을 끌어들여 약초를 훔치려는 거지? 내 그런 것 같 아서 너희들이 개울로 내려갈 때 구룡사(九龍梭)로 죽이려 했는데, 이 꼬맹이놈이 끼어들어 방해 를 하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한 놈이라 이곳까지 유인해 나의 누이들과 함께 만갈래로 찢어죽일 판이었다. 흥! 내 일찍이 너희들이 아미파의 떨거지인 줄 짐작했었다. 요것들아, 목숨을 내놓아 라!" 그는 호통소리와 함께 일검을 쳐냈다. 하얀 연기가 눈부시게 일며 세 줄기 청회색 검광이 춤추 듯 덮쳐왔다. 금선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지라 검광을 뿌리쳤다. 제영운은 저들이 하는 짓이 야비한 것은 뻔히 알았으나 아무래도 홍화모모와 깊은 연관이 있는 성싶어서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검광으로 적의 검광을 한데 옭아넣어 꼼짝 못 하게 했다. 그러면 그들이 스스로 알고 물러나려니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한바탕 접전을 벌이는 중에 해는 차츰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마음을 느긋이 먹었던 제영운은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서렸다. 뻔뻔스런 적들이 쉬이 물러나지 않는 것을 보자 이들의 잔당이 있어 가세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인 것이다. 이들을 어떻게 핍박해야 물러가게 할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는데, 홀연 날카로운 질책소리가 숲 밖에서 들려왔다. "부끄럼도 모르는 대담한 간적들 같으니! 어디에 와서 또 소란을 피우느냐?" 말소리와 함께 한 줄기 푸른빛 검광이 무서운 속도로 뻗쳐왔다. 검광은 마치 신룡처럼 영활하고 힘찼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고 세 갈래 청회색 검광은 갑자기 하늘가로 사라져 버렸다. 바람처럼 나타난 신약란이 계속 그들을 쫓으려 하자, 제영운이 소리쳐 불러서 그녀를 말렸다. 이 때 주문도 숲 밖에서 걸어들어 왔다. 주문의 얼굴에 번졌던 부종은 말끔히 없어지고 약간은 초췌 해 보였으나 몸놀림이 가볍고 민첩한 게 병에서 완쾌된 모습이었다. 주문은 금선을 새초롬한 눈으로 바라보며 뭐라 몇 마디 하려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지 못했다. "금씨 남매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에요?" 제영운이 묻자, 신약란이 대답하기 전에 금선이 먼저 말했다. "나는 아까부터 저 세 괴물이 우릴 엿보고 있는 걸 알았어. 정말 간악하고 더러운 것들이야. 우 리가 복선담에서 계수나무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뒤쪽에 숨어 우릴 엿보고 있더구만. 그땐 그러나 주누나가 워낙 걱정되는지라 집으로 들어가는 게 급해 모른 체했지. 난 처음 그들이 이 산에 있는 사람들인 줄 알고 별로 주의를 하지 않았어. 한데 나중에 약란 누나가 주누나를 업고 개울가로 달려갈 때 그 빨강납작코가 나무 뒤에 숨어 상문정(喪門釘)으로 누나를 습격하려 하지 않겠어. 금방이라도 상문정을 쏘아내려 하기에 내가 먼저 검광을 발사했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고마와요." 신약란은 한때 그를 의심한 게 미안한 표정이었다. "세 분이 개울가로 내려갈 때 우리 누나가 나를 따라오지 말라고 하기에, 처음엔 무슨 이유가 있나 했어. 그래서 아까 그 녀석도 마음에 걸려 주위를 살펴보았지. 그랬더니 아닌 게 아니라 스 르륵스르륵 옷깃이 풀잎에 스치는 소리가 나고 고 녀석이 몰래 접근해 오지 않겠어. 상문정을 빼 어들고 말야. 빨강납작코는 나와 맞부딪치자 검광을 빼어들었는데, 부딪쳐 보니까 역시 예상대로 별거 아니더구만. 내 벽력검을 맞자 당할 수 없었던지 장안법을 펼치고 여기까지 도망쳐 버렸어." "왜, 우릴 부르지 않았니?" 제영운이 묻자, 금선은 목에 힘을 주고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했다. "나도 처음엔 누나를 부를까 했지. 하지만 주누나가 이제 겨우 나은 상태인데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고, 둘째는 그 녀석의 실력이 신통치 않아 새삼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지. 혼자 라도 충분히 납작코를 잡을 자신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놈이 도망치기에 이 숲 속까지 추격해 왔어. 한데 이곳에 와서 보니 그의 패거리인 두 계집이 있지 않겠어. 더구나 그녀들은 생김새와는 달리 납작코보다는 월등한 무공을 지니고 있더군. 두 여자가 뭐라더라. 무슨 제보(祭寶)니 어쩌니 하며 고함치는데 어쩌면 이상한 요법을 쓰려는 모양이었어. 다행히 그때 우리 사랑하는 누님께서 나타나셨지만 말이야." 오풍초 쟁탈전 相逢狹路 初會飛龍師 預示仙機 同謁紅花姆 금선이 개울가 부근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단 말을 듣고, 주문은 부끄러움을 못 이겨 귀뿌리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래도 당사자인 금선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천연덕스럽기만 했다. 누나 영운이 보다못해 한두 마디 귀띔을 해주려다가 신약란 앞에서 주문이 또 부끄러워할까 보 아 두 처녀 눈치만 살피더니, 이윽고 금선의 설명이 끝나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 애가 참 콩튀듯 팥튀듯 아무하고나 싸우려고만 드는구나! 상대방이 누군지 묻지도 않고 다 짜고짜 맞대결만 하느라 정신을 잃다니... 만약 이 산에 오신 귀한 손님을 해치게 되었더라면 우 리가 무슨 낯으로 홍화모모님을 뵙겠느냔 말이다!" 그러자 신약란이 끼어들었다. "언니, 아우님을 탓하지 마세요. 그 귀신 같은 놈들은 정말 못됐거든요. 저도 방금 출검(出劍)이 늦어서 겨우 그놈의 왼팔만 부상을 입힌 게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요. 목줄기를 싹뚝 끊어버려야 좋았을 텐데. 정말 너무 쉽게 놓아준 거예요." 영운은 그녀가 금씨 남매를 그토록이나 미워할 줄은 생각 밖이었다. 너무도 이상해서 얼른 물었 다. "그 작자 말로는 영사 홍화모모께서 진작부터 오풍초를 자기한테 주시겠다고 약속이 되어 있다 든데... 그건 그 자와 모모님 사이에 무슨 약조를 맺었기 때문 아니겠어요! 한데 어째서 그 자를 그토록이나 원망을 하죠?" "그건 언니가 모르기 때문이에요. 방금 도망친 그 세 남매는 바로 여산(廬山) 백학동(白鶴洞)에 사는 비룡사태의 못난 제자들이거든요. 이 세 사람들은 자기네 사부만 믿고 할 짓 못할 짓 마구 저지르고 다니는 거예요. 사실 말이지만, 그들 사부는 저희 사부님 하고 과거에는 아주 가까운 친 구였는데, 제 사부께서 천서(天書)를 얻으시고 나서부터 지난날의 습성이 아주 변하셨어요. 그래 서 두 분 사이도 점점 서먹서먹해졌거든요. 하지만 겉으로는 예전처럼 왕래를 해오고 계셨답니 다....." 금씨 남매의 스승 비룡사태는 지난 해에도 계화산으로 홍화모모를 찾아왔었다. 그 옛친구는 이 런저런 얘기 끝에, 오풍초를 훔치러 오는 사람이 복선담(福仙潭)을 깨뜨린 후, 홍화모모는 그날로 원적비승(圓寂飛昇)할 것이라는 내용의 말을 들었다. 그 당시 비룡사태는 못된 제자 셋을 거느리고 왔었는데 제자들 가운데 얼굴이 시뻘건 금타란 놈 은 성미가 가장 포악스럽고 교활했다. 금타는 홍화모모가 머지않아 비승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문득 터무니없는 욕심을 품었다. 즉 홍 화모모가 죽은 후 계화산을 차지하고 오풍초를 자기 소유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야심이 꿈틀거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홍화모모의 유일한 제자 신약란에게마저 음심을 품었다. 비룡사태는 원래 귀가 여렸다. 금타를 비롯한 세 제자들이 꼬드기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 녀는 옛친구 홍화모모가 왕실의 기질을 여전히 지닌 인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갖은 말로 홍화모 모를 설득했다. "이것 봐요 홍화도우, 십여의 맹세라는 게 뭐요? 기껏해야 장미진인하고 장난삼아 내기해서 진 끝에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우! 그걸 고지식하게 지킬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러지 말고 홍 화도우께서 비승하거든 이 계화산일랑 나한테 넘겨 주시구려. 내 여기다 별부(別府)를 하나 꾸몄 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도제(徒弟) 신약란은 내 제자녀석 금타한테 시집이나 보내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그 말을 듣자, 홍화모모는 이내 비룡사태와 그 제자들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남녀 제자 셋이 모두 삼세(三世)의 혜근(慧根)도 지니지 못했고 천부적으로 혜안(慧眼)을 가진 동남동녀(童 男童女)가 아니란 사실도 꿰뚫어 보았다. 이들은 복선담에 들어갈 자격도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 다. 홍화모모는 그 사실을 솔직히 설명해 주고 덧붙여 말했다. "지난날의 내 맹세는 깨뜨릴 수 없소! 어느 문파 어떤 인물이든, 복선담의 장애를 파괴하는 자만 이 바로 계화산의 주인이 되는 거요. 그리고 내 제자의 혼인 문제는 본인이 원하는가 여부에 달 려 있을 뿐, 사부라고 해서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수 없는 일이 아니오?" 비룡사태는 면전에서 거절을 당하자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럭저럭 이틀간 더 머물더니 주인한 테 온다간다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한데 그 뒤로도 금타란 녀석은 여전히 단념을 못하겠는지 걸핏하면 복선담을 깨뜨리겠다는 핑계 로 찾아와서 신약란에게 추근거렸다. 핑계야 그럴 듯했지만 워낙 재간이 없는 터라, 단 한 번도 복선담 근처에 얼씬대지 못하고 계화산 이곳 저곳을 쏘다니며 홍화모모 사도(師徒)의 눈치만 살 피다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지난 해 연말, 또다시 계화산으로 찾아왔다. 신약란이 끝끝내 거들떠보지도 않고 박대를 했더니, 그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품었다. 그래서 이번에 올 적에는 뻔뻔스럽게도 자기 누이 금영과 금연 까지 함께 데리고 와서는 먼저 홍화모모에게 자기네 스승이 작별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간 실례부 터 사죄를 한 다음, 마음에도 없는 문안을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들을 부추겨서 갖은 아양으 로 신약란에게 접근하도록 했던 것이다. 흥화모모가 사는 동굴에는 석실이 여러 군데나 있어, 어지간히 많은 손님이라도 넉넉히 묵을 만 했다. 비룡사태의 제자 삼남매는 염치좋게 석실 몇 개를 차지하고 눌러붙었다. 금앵, 금연 자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신약란을 찾아와 친밀하게 접근했다. 과연 그들 남매의 계략은 맞아떨어졌다. 신약란은 나이도 어리고 성품 또한 다정다감했다. 게다가 생각이 단순한 그녀는 삼남매의 음흉 한 계책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그저 금영 자매가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서 함께 놀아주는 게 즐겁기만 했다. 나중에는 금타마저도 어울렸으나, 미워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위해서 복선담을 깨뜨리고 오풍초를 얻어낼 계획에 조언까지 해줄 정도로 친밀해졌던 것이다. 며칠 후, 금영 자매는 신약란에게 계수나무집으로 옮겨 와서 함께 살자고 졸라댔다. 스승 홍화모 모의 청수(淸修)를 방해할는지도 모르고, 또 어른이 계신 곳이라 늘 조마조마해서 어렵기도 하거 니와 매일같이 찾아오는 것보다 차라리 한데 있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희희낙락 즐겁게 지내 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이거였다. 신약란은 즉석에서 승락했다. 그리고 함께 지내고 보니 과연 젊은 처녀들끼리라서 신바람이 나 고 날이 지새는 줄도 모르게 재미있었다. 그동안 흉물스런 금타는 계수나무집 근처에 얼씬도 하 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세 남매의 간계가 여지없이 폭로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날도 신약란은 계수나무집 안에서 금영 자매들과 시시덕거리면서 한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스승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약란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너 혼자만 이리 오너라." 홍화모모의 음성은 다른 사람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 상승의 천리전음(千里傳音)이었다. 금영 자 매의 귀에는 그 소리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신약란은 '석실에 가서 무얼 좀 꺼내 와야겠다'고 핑계를 대고 나서 곧장 스승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홍화모모는 손에 자그만 깃발 한 개를 들고서 제자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신약란은 첫눈에 그 깃발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깃폭의 크기는 세 치밖에 안 되지만 거기에는 팔괘오행(八 卦五行)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스승이 왕년에 쓰시던 가장 무서운 병기 <기과연람(旗菓煙嵐)>, 그것이었다. 홍화모모는 어리둥절, 눈이 휘둥그래진 제자에게 그 깃발을 건네주고서 다시 그 사용법마저 자 세히 가르쳤다. "자, 이젠 됐다. 어서 돌아가거라. 이것은 아무한테도 말해선 안된다. 더구나 계수나무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절대로 눈치채지 않도록 해라." 신약란은 스승의 성미를 너무도 잘 알았다. 홍화모모가 제일 싫어하는 게 꼬치꼬치 물어보는 사 람이었다. 무슨 일을 시키더라도 미리 암시만 줄 뿐, 그 나머지는 일체 분부를 받은 사람이 알아 서 처리해야 되었다. 일이 끝나더라도 스승은 잘했느니 못했느니 전혀 상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길래 지금처럼 극비리에 자기를 불러다가 스승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법보(法寶)를 하사하셨 을 때는 분명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약란은 아직까지도 금씨 남매의 흉계에 대해선 미처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두말없이 스승의 앞에서 물러나와 곧 장 자기처소로 돌아갔다. 계수나무집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그때는 문득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자기 처소로 날아 들 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저건 누구야? 이상한데... 금영 언니가 나왔다 들어가는 걸까? 아니야, 몸집이 전혀 닮지 않았어!... 수상한 작자가 분명해. 어디 무슨 짓을 하는가 봐야겠다!' 그녀는 재빨리 비전(秘傳)의 은둔법을 써서 자취를 감추고서 계수나무집 위층으로 솟구쳐 올라 가 집 안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들어간 괴한은 바로 금씨 자매의 아우 금타였다. '저런! 저 남자가 어쩌자고 남의 규방에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왔지? 여지껏 그런 일은 한 번 도 없었는데.....' 신약란은 자못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기분이 언짢고 자시고 할 여지도 없었다. 그 다음 순간 세 남매가 주거니받거니 낄낄거리는 말을 듣는 순간 거의 까무러칠 뻔했으니까 말이다. 얼굴이 시뻘전 금타놈이 물었다. "그 계집은 어딜 갔수?" "모르겠다. 뭘 가지러 간다고 석굴로 가더니만 아직도 안 오는구나." 금영의 대답이었다. 뒤미처 금연이 아우한테 손을 내밀었다. "얘, 그거 가져왔니? 이리 다우." "여기 있어, 한 알만 먹여도 단박 정신을 잃고 쓰러질 거요." 금타가 품속에서 부시럭부시럭 약봉지 하나를 꺼내더니 둘째누이한테 건네주었다. "됐다, 너 이거, 사부님도 모르게 용케 슬쩍했구나!" "히히히, 그야 누워서 떡먹기지! 한데 언제 어떻게 손을 쓸 거요." "고 계집아이가 내공수련하는 틈을 타서 마실 것에 풀어넣을 거야. 수련이 끝나면 목이 마를 테 니까, 그때 이 미약(迷藥) 탄 물을 먹으면 끝장이지. 기절시킨 다음, 언니하고 둘이서 곱게 안아다 침상에 눕혀놓을 테니 그 다음은 네가 들어와서 옷을 벗기고 떡을 치든 죽을 쑤든 마음대로 하려 므나. 우리야 그것까지 볼 수는 없잖니?" "헤헤, 누이들 고맙수. 어차피 내 수단에 한번 걸리고 나면, 고 계집도 맛을 잊지 못해서 내 바 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거요." 위층에 숨어서 듣던 신약란은 전신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저년 의 계집들이 수치라는 것도 모르고 음탕한 말을 입에 함부로 담다니! 그녀는 비로소 세 남매의 간계를 알았다. 두 자매가 자기한테 친밀하게 접근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내공수련을 하고 나면 미약을 탄 물을 먹여 혼절시킨 다음, 동생놈을 끌어 들여서 내 몸뚱이에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게 할 판이다. 그게 무슨 짓인가는 몰라도 사내가 옷 을 벗긴다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고 몸서리가 쳐졌다. '저 연놈들은 사부님이 무서워서 감히 석실에 있지 못하고 내 처소로 내려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모두 계획적으로 꾸미고 온 것이었어!' 신약란은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사내의 손길이 벌거벗은 자기 몸을 더듬는다는 것 에 생각에 미치니 온 몸뚱아리에 송충이가 기어다니듯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뜸 벽에 걸린 장검을 뽑아들고 아래층으로 펄쩍 뛰어내렸다. "이 괘씸한 여우년들!" 금영 남매는 느닷없이 천정으로부터 나타난 그녀를 보고서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다. "앗!" "저것이....." "약란 동생, 그게 아니라....." 금영은 그래도 혹시나 해서 얼버무려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금타란 놈이 흉물스럽게 빙글거리면서 맏누이의 말을 가로챘다. "누나, 그럴 거 없수. 이미 들통은 났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우? 기왕지사 이럴 바에야 당장 요년 을 끝장내 버립시다! 미약이고 뭐고 다 쓸데없소. 우리 셋이 힘을 합해 즉석에서 거꾸러뜨려 놓고 회를 치는 게 낫지 않수?" 신약란은 너무도 분했다. 더 이상 들어봤자 귀만 더러워질 판이었다. 그녀는 장검을 휘둘러 대뜸 능글맞은 금타부터 후려쳤다. 일대 일로 싸워서야 신약란을 당해낼 금타가 아니다. 그는 잽싸게 칼날을 피해 쏜살같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 뒤를 물귀신처럼 신약란의 칼이 쫓아나갔다. 금영 자매도 놀란 넋을 진정하고 제각기 병기를 찾아들었다. 막내동생을 도와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계수나무 앞 공터에선 일 대 삼의 격전이 벌어졌다. 신약란은 그토록 곰살궂고 다정했던 금영, 금연이 안면을 바꾸어 자기한테 칼끝을 겨누는 걸 보니 더욱 분통이 터졌다. 단칼에 세 연 놈을 요절내고 싶지만, 어쩌랴! 홀몸으로 셋을 상대하기도 벅찬데 분노 때문에 기혈(氣血)이 들끓 어서 도무지 마음대로 칼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곤경에 몰리자 최후의 수단을 강구했다. 스승으로부터 갓 전해받은 기과연람을 펼쳐들고서 주문을 외쳤다. 작은 깃발에서 '번쩍!' 하고 오색 광채가 일더니 그 즉시 백여 장이나 되는 연무운람(煙霧雲嵐)이 천지를 자욱하게 뒤덮고서 금영 남매 세 사람을 철통같이 에워싸버렸 다. 잠시 후 흙바닥에는 금영, 금연, 금타가 술취한 강아지 꼬락서니로 고꾸라져서 버둥거리고 있 었다. 악이 받칠 대로 받친 신약란은 장검을 치켜들고 세 연놈의 모가지를 내리치려 했다. 이때 스승의 음성이 들렸다. "얘야, 손을 멈추어라. 그것들이 못됐기는 하다마는, 아무래도 그들 사부 체면을 봐주어야 하겠 구나. 정신이나 차리도록 혼을 좀 내주고, 목숨일랑은 다치지 말아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요절을 내고 싶지만 어디 감히 스승의 명을 거역하겠는가? 흥분한 상태에서 시근벌떡, 흙바닥에 널브러진 강아지 새끼들을 노려보다간, 문득 혼구멍을 내줄 만한 장소가 머리 에 떠올랐다. 그곳은 골짜기 아래 시냇가에 있는 웅덩이였다. 거기서는 사시사철 발도 못 담글 만큼 뼛골이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솟고 있었다. 그녀는 세 남매를 하나씩 떠메다가 한천(寒泉) 속에 처넣었 다. 사흘 동안 담갔다가 꺼내줄 생각에서였다. 나흘째 되던 날 밤, 그녀는 다시 한천으로 갔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세 남매는 벌써 누구의 손에 구출되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신약란은 사뭇 의아스럽게 여겼으나, 그것 또한 세 남매의 운수려니 생각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로부더 계화산에는 연거푸 시끄러운 일이 벌어졌다. 혼줄이 날 대로 났던 세 남매는 그래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고서 숱한 좌도방문(左道旁門)의 패거리들을 꼬드겨 가지고 계화산으로 습격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란은 스승에게서 전수받은 법력(法力)으로 어렵지 않게 그들을 격퇴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금타 남매의 원한은 뼈에 사무쳐 좀처럼 단념을 않고 집요하게 신약란을 정신 못 차리게 기습해 왔던 것이다. "... 제 사부께선 비승하실 날이 목전에 다가왔으므로, 제가 원수를 여럿 맺어서 훗날 화근이 남 겨지는 걸 바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이 계화산 일대에 운람(雲嵐)의 장막을 쳐서 봉쇄하고 어지 간한 재간을 가지고선 단 한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만드셨죠. 언니들 일행이 왔을 때만 하더라도 사부께서 미리 운람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셨더라면 복선담을 깨뜨리고 오풍초를 얻기는커녕 산에 들어서기조차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금타란 놈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오늘 또다시 찾아와서 언니들한테 집적거린 모양이로군요. 너무도 미운 놈이라 단칼에 목을 쳤으면 좋았으련 만, 겨우 팔뚝 한 덩이를 베어냈지 뭡니까? 그것들하고 원한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졌어요. 하 지만 말할거리도 못되는 거죠." 신약란의 설명이 끝났다. 영운, 금선, 주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볼 따름 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괴상한 음성이 호통을 쳤다. "요 담도 큰 계집년, 어디 감히 내 제자를 다친단 말이냐!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벌써 몇 차 례나... 어디 오늘 내 손에 혼 좀 나봐라!" 영운 일행이 깜짝 놀랄 틈도 없었다. 어느 새 나타났는지 눈앞에 웬 중년의 여도인이 우뚝 서 있었다. 표독스런 얼굴에 고리눈을 부릅뜨고 누른빛 머리칼을 어깨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렸는데, 여간 사납게 생기지 않았다. 불꽃이 타오르듯 시뻘건 도복(道服)을 걸치고, 손에는 아홉 마디로 꺾인 용두괴장(龍頭拐杖)을 짚었다. 손이 떨리지도 않는데 용머리에 매달린 고리 열여덟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 고 있었다. 신약란은 첫눈에 여도사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바로 금씨 남매의 사부, 여산 백학동에 은거하는 <팔수관음(八手觀音)> 비룡사태, 그녀였던 것이다. "사숙님....." 신약란은 일이 재미적게 되었다고 느끼면서 뻣뻣해진 고개를 억지로 숙이고 인사했다. 비룡사태가 징글맞게 웃었다. "네 눈에는 그래도 사숙이란 존재가 보이긴 하는 모양이로구나. 흠흠... 아냐! 보일 리가 없어... 머지않아 너는 사부를 배반하고 아미 문하로 가버릴 테니까... 그야 네 멍청이 같은 사부가 너무 귀엽게만 길러서 버릇이 없어진 거니까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저 오 풍초는 본래부터 이 계화산에서 자란 영약이고, 너의 사부가 가져온 것도 아닌데 강제로 수십 년 동안 그걸 독차지하고 있었지 않느냐? 난 네 사부가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줄 다 안다. 죽은 다음 에야 오풍초를 독차지할 수 없지. 그래서 좋은 말로 양보해 달라고 청했다. 또 네 사부도 응락을 했고... 그런데 어째서 네년이 앙큼스럽게도 외부 사람을 끌어들여 오풍초를 훔치려고 한단 말이 냐? 게다가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내 제자놈까지 협박하고 부상까지 입히다니! 이제 더 할 말도 없다. 어서 꿇어 엎드려 결박을 받거라! 네년을 사부 앞에 끌어다 놓고 따질 것은 따져봐야겠다. 어서 꿇지 못할까! 내 손속이 무정하다고 후회해 봐야 그때는 늦다!" 신약란이 억울한 듯 변명하려고 입을 벌리려는 참인데, 벌써부터 부아가 치밀 대로 치민 금선과 주문이 두말도 없이 검광부터 쏘아냈다. 비룡사태는 노발대발, 욕설을 퍼부었다. "요년이 어째서 당돌하게 구는가 했더니만, 알고 보니 믿는 데가 있어서 그랬구나!" 욕설도 끝나기 전에 휘파람 소리가 길게 울리더니. 손이 번쩍 들리면서 청회색의 광채 다섯 줄 기가 뻗어나갔다. 그 검광은 주문과 금선의 공세를 선뜻 가로막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비룡사태 의 또 한 손이 냉큼 신약란을 움켜잡으려고 뻗어나갔다. 실로 번개처럼 쾌속한 금나수(擒拿手)였 다. 신약란은 미처 몸을 피할 여지도 없었다. 비룡사태의 손가락이 그녀를 움켜쥐는 찰나, 홀연듯 천지가 아득해지더니 삽시간에 온 산악이 채색 안개구름으로 뒤덮여 버리고 동서남북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다음 순간, 영운 일행의 귀에는 신약란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들, 놀라지 마세요! 저의 사부님께서 오셨어요." 뒤미처 송곳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고막을 찢어내듯 정말 그냥 듣기 어려운 울림이었다. "비룡도우, 무슨 일이든 간에 함부로 남을 탓하거나 한쪽 말만 믿어선 아니 되오. 내 지난번에 뭐라 했소? 어느 문파 어떤 인물이라도 복선담 아래 내려가서 장애물을 격파할 수만 있다면, 오 풍초는 바로 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분명히 내 맹세를 전하지 않았소? 비룡도우의 제자가 오풍초를 손에 넣으려고 온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째서 사악한 마음을 품고 약란에게 손을 대 는 거요? 비룡도우로 말하자면 다년간 도(道)를 터득한 어른인데, 그리 쉽게 아이들의 험담을 믿 어선 안 되리라 생각되오. 이 늙은이가 언제 그런 승낙을 했단 말이오? 비룡도우, 철딱서니없는 애들 말만 듣고 날 건드리지 마시구려. 내일 나는 원적(圓寂)을 하오. 오늘 내가 원공(元功)을 운 행하느라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 없는 걸 알고서 어린애들을 얕잡아 보고 핍박하는 모양이지만, 나 역시 진작부터 생각해 놓은 게 있다오. 만약 그런 대비가 없었더라면 당신 제자들 손아귀에 약란의 순결한 몸이 여지껏 성해났겠소? 불만이 있더라도 꾹 참으시구려. 나는 당신네나 아미파 사람들에게나 어느편도 역성을 들지 않겠소. 정녕코 그 오풍초를 차지하고 싶다면, 내일 아침 당 신네가 먼저 복선담으로 내려가도 좋소. 자기네 재간가지고 어림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쓸데없이 그 애들만 들볶을 필요가 어디 있소?" 그러자 이어서 비룡사태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홍화도우, 당신 제자라고 너무 역성들지 말라구! 흥, 내가 복선담에 못 들어갈 줄 아는 모양인 데, 어디 내일 아침 오풍초부터 손에 넣은 다음에 보자! 저 발칙한 강아지 새끼들을 내 손으로 멱 줄을 끊어놓을 테니까!"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쳐 지나갔다. 오색 채운도 안개도 사라지고 비룡사태의 모습도 보이지 않 았다. 붉은 해만 나뭇가지에 걸려 눈부신 빛살을 흩뿌리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그윽한 산경 (山景)이 눈에 가득 들어올 뿐, 이제껏 칼부림을 나누던 살벌함은 언제 그랬는가 싶게 씻은 듯 녹 아버렸다. 신약란이 한숨을 토해냈다. "저놈의 늙은이가 못된 모함하는 소리를 곧이듣고 우리한테 분풀이하러 나타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군요. 사부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했어요." 금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금 운무(雲霧) 속에선 그 비룡노파만 보이고, 당신 사부님은 어디 계신지 끝내 못찾겠든 걸? 난 그놈의 노파가 구름에 갇혀진 틈을 타서 한칼을 먹이려고 내찔렀지. 그랬더니 무슨 물건인가 이상한 것이 내 검광을 딱 막아버리더군. 그걸 보면 비룡노파도 여간한 상대가 아닌 듯하던 걸?" "두 분의 검광을 막은 분은 제 사부님이셨어요. 그분은 남하고 원한을 맺지 않기만 바라고 계신 듯해요. 그러나 저러나 내일 아침 우리가 복선담으로 내려갈 때 저 자들이 막을 텐데 몹시 힘이 들겠군요." 곁에 섰던 영운이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 보건대 비룡사태가 발출한 검광은 비록 정파의 것이 아니지만 역시 위력적이었어. 성품도 포악스럽고 괴팍해서 여간해 가지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거야. 내일 만약 그 노파한테 오풍 초를 빼앗겼다가는 우리가 헛걸음한 건 둘째 치고라도 완석대사(頑石大師)의 목숨은 그걸로 끝장 이야. 설혹 우리가 오풍초를 손에 넣었다 치더라도 그 노파가 또 가만 있을 것 같애? 아무래도 이번 일만큼은 적절한 대비책부터 세워놓고 시작해야만 되겠어." 말을 마치고서 영운은 무거운 시선을 신약란에게 던졌다. "언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놈의 노파 성미가 괴팍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사부님보다 더 특출난 인물은 아니니까요. 그저 제 사부님이 눈 딱 감고 이제껏 봐줘서 굴복시키지 않았을 뿐이 거든요. 방금 그들더러 내일 먼저 복선담을 깨뜨려 보라고 응락하신 것도 필경 무슨 깊은 뜻이 있으셔서 한 말씀이거든요. 그분은 우리를 절대로 실패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완석대사란 분이 오풍초를 급히 가져가야만 생명을 구하실 모양인데, 사부님께서 그 풀로 배합해 두신 약술 (藥酒)이 아직도 많이 저장되어 있어요. 주언니도 그걸 자시고 기사회생을 하셨으니까, 완석대사 께서 복용하셔도 효과는 분명 나타날 겁니다. 제 사부님께서 약술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오풍 초를 캐어가도록 하시는 목적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지난날의 맹세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또 하 나는 도를 깨우치신 후 그 영약을 올바른 분에게 맡기셔서 그분을 대신하여 세상사람의 고초를 없애는 데 쓰도록 하기 위해서랍니다. 그러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노파한테는 절대로 넘기지 않으실 거예요." 영운은 그제서야 홍화모모의 깊은 뜻을 알고서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 네 사람은 달빛 아래서 내일의 계획을 진지하게 의논했다. 약란은 워낙 깔끔한 걸 좋아하는 성미였다. 계수나무집 안이 주문의 토사물(吐瀉物)로 온통 더럽 혀진 데다 또 어차피 자신도 스승의 분부대로 제영운 일행과 함께 형산으로 떠나야 할 몸인지라, 집안 청소마저도 손대고 싶지 않았다. 삼경도 거의 지샐 무렵, 그녀는 제영운 일행에게 떠날 것을 권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날이 밝을 겁니다. 우리 계수나무집 안에 들어갈 것 없이 곧장 사부님의 석굴로 갔다가 거기서 아침이 되거든 복선담을 깨뜨리기로 하죠!" "그렇지, 우리도 홍화모모님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으니까 뵙고 인사를 드려야 마땅하고말고. 한 데 약란의 말로는 그분께서는 낯선 사람을 만나지 않으신다기에 여지껏 감히 찾아뵙지를 못했거 든. 이제 얼마 후면 우리도 오풍초를 얻어가지고 그 즉시 여기를 떠나야 할 테니까... 약란, 그대 가 우리를 사부님의 동굴로 안내한다면 내친 김에 말씀 좀 드리고 우리들이 그분께 감사의 예를 올릴 수 있도록 주선해 줘. 그래야 또 보산(寶山)을 찾아온 보람도 있지 않겠어?" "사부님 계신 석굴은 복선담 뒤편에 있는데 무척이나 넓어요. 언니들 같은 외부 사람은 둘째치 고라도 저 역시 날이 밝으면 여길 떠나야 할 몸이니까 작별의 예를 올려야 하겠죠. 그때 혹 그분 을 함께 뵈올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신약란의 안내를 받으면서 제영운 일행 셋은 홍화모모가 은거한 동부(洞府)에 이르렀다. 석실은 과연 그녀 말대로 웅장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곳곳마다 꾸밈새와 장식이 우아하고 또 화 려했다. 더욱 기괴한 것은 전체 동굴 안이 온통 대낮처럼 밝다는 점이다. 주문과 금선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몇 번이고 물으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영운이 눈짓으로 말렸다. 세 사람은 약란을 따라서 석실 안 구석구석까지 한바탕 구경한 다음 홍화모모가 예전에 단약(丹 藥)을 제련하던 방으로 들어가서 휴식을 취했다. 약란은 품속에서 호미처럼 생긴 물건을 하나 꺼내들었다. 바로 자연서(紫煙鋤)였다. 그리고 맥없 이 입을 열었다. "영운 언니, 복선담 한가운데 그 독바위(毒石)가 뿌리박혀 있어요. 바위 둘레 십 장 이내에는 검 은 독안개가 퍼져 있는데 여간 무섭지 않답니다. 오풍초는 바로 그 독바위 뒤편에서 자라고 있 고... 그 독바위를 캐낼 수 있는 것은 이 자연서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깝게도 <우잠유리(于潛琉 璃)>를 그 속에 벌써 빠뜨렸으니 어쩌면 좋아요. 내일 아침 복선담을 깨뜨릴 때 만약 사부님께서 미리 안배를 해주시지 않는다면 정말 일이 낭패되고 말 텐데." 영운이 위로의 말을 건네려 할 때였다. 네 사람은 동시에 날카로운 음성을 들었다. "너희들은 날이 밝은 뒤, 그 단방(丹房) 곁에 뚫려 있는 굴 속으로 들어가거라. 거기가 바로 복 선담의 중심이다. 진흙수렁 밑바닥에서 겨우 십여 장 높이밖에 안 되는 곳이지. 그 굴 바깥 쪽으 로 수평 암석 하나가 돌출했는데. 그 바위 부근에는 소초(素草) 수십 줄기가 자라고 있을 것이다. 그 풀이 독기를 막으니까 각자 한 뿌리씩 뽑아서 입에 물고 있어야 한다. 아침 진시(辰時)가 되면 누군가 복선담을 깨뜨리러 올 게다. 그때 너희들은 숨소리도 내지 말고 꼼짝달싹도 해선 안 된다. 그 자들은 너희 대신에 악어(鰐魚)를 처치해 줄 것이다. 그러나 독바위는 깨뜨릴 재간이 없으니까 그때는 필경 나를 찾아오겠지... 엊저녁 내가 너희 세 아이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했을 때, 너희들 이 왜수 주매어른의 천둔보경(天遁寶鏡)을 지니고 온 걸 보았다. 그것은 우잠유리보다 훨씬 훌륭 한 것이다. 앞서 복선담을 깨뜨리러 온 자가 돌아가거든 너희들 중에 삼세의 동남동녀만 나서거 라. 한 사람은 천둔보경으로 아래쪽을 비추고, 또 한 사람은 자연서를 가지고 독바위를 캐내야 한 다. 독바위의 뿌리가 뽑히고 나서 얼마 안 있으면 진흙수렁의 밑바닥에서 불길이 솟아나오고 사 방 주위의 산봉우리도 갈라져 무너질 것이다. 그런만큼 너희들은 오풍초를 얻거든 시급히 그곳에 서 탈출해야 한다. 그때쯤이면 나도 원적(圓寂)할 것이다. 물론 먼저 왔던 자들이 단념하지 않고 너희들을 몰아붙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 진작부터 미리 안배해 놓았으니 때가 되면 자연 알게 되 리라. 약란은 내 법술(法術)이 미처 풀리기 전에 나의 법체(法體)를 업어다가 불타는 복선담에 던 져넣어야 한다. 그리고 화장(火葬)이 끝나는 대로 속히 저 아이들을 따라서 떠나도록 해라." 홍화모모의 음성이 끝나자, 약란은 그 자리에 무릎 꿇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스승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원적비승을 하실 것이다. 생전에 다시 스승을 뵙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나왔던 것이다. 십여 년을 키워 주신 의리와 은혜가 그 얼마나 깊고도 크단 말 이냐! 제영운도 주문과 금선을 거느리고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홍화모모가 이끌어 준 은덕에 대해 감 사의 예를 올리는 것이었다. 약란의 통곡은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그러자 또다시 홍화모모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 지난 평생을 두고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히도 천서를 얻은 후 부터는 과거의 죄악을 깊이 뉘우쳤다. 그리고 비로소 오늘날에야 소원을 이루게 되었구나! 얘야, 네가 진실로 스승의 은혜를 깊이 새기고 있다면 내 지난 해 계수나무집에서 네게 당부한 그 말을 꿈에라도 잊지 말기 바란다. 그것이 나한테 보답하는 길이다. 무얼 그리도 슬퍼하느냐? 나는 소원 대로 원적비승을 하는 거란다. 이제 금방 날이 밝아온다. 너희들은 어서 떠나거라!" 스승이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그대로 결행하는 분인 줄 너무나 잘 아는 약란은 스승이 뵙기를 허락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애걸해도 쓸데없는 짓이기에 비통한 가슴을 억누르고 일어섰 다. 그리고 영운 일행 세 사람을 이끌고서 단방을 나왔다. 과연 홍화모모의 말대로 단방 곁에는 땅굴 하나가 뚫려 있었다. 눈이 밝은 금선이 앞길을 인도 하면서 일행은 땅굴로 들어섰다. 그 길은 거의 수직으로 경사져 있었다. 수십 장 거리를 내려가 자, 통로는 몇 차례나 소라껍질처럼 맴돌면서 뚫렸는데, 갈수록 점점 암흑지대로 변했다. 때없이 구역질이 날 만큼 지독한 장기(腸氣)가 앞을 가로막았으나. 일행은 꾹 참고 통과했다. 다행스럽게 도 금선이 어둠 속에서 물체를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을 가졌기에, 세 사람은 장님들처럼 손에 손을 맞잡고서 끌고당기며 금선의 신호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일행은 가까스로 홍화모모가 말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복선담 절벽 옆구리로 손바 닥처럼 돌출한 거석(巨石)이었다. 사면은 더욱 캄캄해지고 쉴새없이 코를 찌르는 장기(腸氣) 때문 에 어찔어찔 현기증이 일어났다. 금선을 빼놓고 영운과 주문, 약란 세 처녀는 서로 상대방의 얼굴조차 분간해 낼 수가 없었다. 네 사람은 바위 주변을 더듬어 소초(素草)를 찾기 시작했다. 한창 눈알이 빠져나올 정도로 쓰라리고 현기증을 일으키던 영운이 문득 코끝에 맑고도 그윽한 향기를 맡았다. 정신이 번쩍 들자 그녀는 황급히 손을 뻗어 더듬어 보았다. 과연 기름한 풀잎이 손에 잡혔다. "여기 있어!" 한 움큼을 잡아가지고 얼른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기는 했어도 누구 하나 선뜻 입에 넣는 사람이 없었다. 코끝에 대고 냄서부터 맡아 보았더니 터질 듯이 쑤셔대던 두통이 단박 가시고 시원해졌 다. 답답하던 가슴 속도 후련하게 뚫렸다. 그제서야 일행은 홍화모모 말이 틀림없는 줄 알고 풀잎 을 입에 머금었다. 금선이 바위의 돌출부 끝에 서서 복선담 밑바닥을 굽어보았다. 바위 끝에서 밑바닥 수렁까지는 과연 어림잡아 십여 장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밑바닥 한가운데서 푸른빛 형광(熒光)이 꿈틀거리 는 게 보였다. 그것은 어젯밤 떨어뜨린 우잠유리가 분명했다. 우잠유리 근처에는 어디 숨어 있는지 악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홍화모모가 신신당 부한 대로 숨을 멈추고서 조용히 복선담에서 소동이 일어나기만 기다렸다. 네 사람이 거석 위에 앉아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문득 머리 위켠 절벽 끝에서 누군가 몇 마디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일행은 바짝 긴장했다. 뒤미처 금선의 눈길에 한 마리 용과도 같은 물체가 직선으로 복선담 밑바닥을 향해 던져지는 것 이 잡혔다. 그 물체가 밑바닥에 미처 다다르기 직전, 영운 일행이 앉아 있는 거석의 돌출부 바로 밑에서 '철썩!' 소리가 들리더니 어제 보았던 그 홍망(紅網) 같은 짐승이 별안간 나타나서 방금 떨어져 내려간 화룡(火龍)을 맞아 싸우기 시작했다. '악어가 나타났구나!' 금선은 흥분에 들떠 가슴이 마구 뛰었다. 악어란 놈은 자기들의 발치 아래 잠복하고 있었던 것 이다.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힘주어 싸움판을 응시했다. 그러나 주변 일대는 흑기(黑氣)가 짙 게 뒤덮여 자욱하기만 할 뿐, 그저 두 줄기 붉은빛이 번쩍번쩍 꿈틀거리면서 춤을 추는 모습만 어렴풋이 보였다. 도대체 어느 것이 머리고 꼬리 쪽인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화룡과 악어는 거의 한 시진 이상을 어우러져 싸웠으나 좀처럼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얍!" 갑자기 절벽 위에서 대갈일성이 터지더니, 또 한 줄기 희뿌연 푸른 빛줄기가 쏘아져 내렸다. 푸 른 빛줄기는 화룡과 악어의 싸움판에 꽂혀 양쪽으로 갈라놓고서 뒤이어 악어를 빙그르르 휘감아 버렸다. 우워어! 괴물의 처참한 비명이 단 한 번 울렸다. 그 다음 순간, 앞서 날아갔던 화룡과 푸른 빛줄기는 아 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복선담 위 편으로 솟아올라 갔다. 밑바닥 수렁은 캄캄절벽,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악어는 이제 죽음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내려가는 기척은 들리지 않 았다. '홍화모모의 말씀대로 악어는 처치되었다. 그 다음, 비룡사태 일당이 내려가 독바위를 캐기로 했 지? 물론 실패하고 물러나게 되리라. 그런데 어째서 움직이는 기척이 없을까?' 금선은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절벽 위에선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자기 편에서 내려갈 때라고 생각했다. 주문을 손짓해 불렀다. "천둔경을 꺼내요!" 속삭이듯 주문에게 내려갈 차비를 시키는 참인데, 문득 절벽 끝에서 '번쩍!' 하고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찔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아까 악어를 처치했던 푸른 빛줄기였다. 눈 깜 짝할 사이에 그 청광은 또다시 복선담 밑바닥으로 쏜살같이 내려갔다. 이번에는 또 한 줄기 조금 가느다란 청광도 함께 끼여 있었다. 푸른 빛줄기의 윗면에는 일 장 너비의 둥그렇고 하얀 원반이 얹혀져 있었다. 푸른 빛줄기들은 수렁 밑바닥을 빙글빙글 선회하면서 자욱하게 낀 흑색 안개층을 돌파하려고 이 곳저곳 부딪쳐 보았다. 하얀 원반의 광채가 검은 안개를 흩어내려는 듯 빛의 둘레를 확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안개층이 워낙 두텁고 짙어서 좀처럼 넓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얀 원반에서 검 은 안개가 뿜어나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렇듯 상하좌우로 어지럽게 선회하더니 청백의 세 줄기 광채는 훌쩍 한덩어리로 뭉쳐지기가 무 섭게 직선을 그으면서 밑바닥으로 쏘아져 내려갔다. 자욱한 안개층이 순간적으로 갈라졌다가는 이내 닫혀졌다. 빛덩어리의 목표는 우잠유리(于潛琉璃)가 떨어져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하얀 원반이 뿜어낸 광채가 우잠유리 표면에서 발산하는 푸른빛 형광에 반사되더니 마침내 복선 담 밑바닥을 온통 환하게 밝혔다. 금선은 그제서야 밑바닥을 뚜렷하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넓디 너른 평지 서남방 귀퉁이에 시커 먼 물체가 한 뭉치 있을 뿐, 나머지는 텅텅 빈 공지였다. 하얀 원반의 광채는 어느 새 밑바닥에 이르렀다. 그것을 굽어보면서 신약란은 자기가 애써 빌어 온 우잠유리를 남에게 빼앗기는가 싶어 여간 초조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하얀 원반은 제자리에 서 멈칫멈칫하더니 뒤따라 온 푸른빛과 더불어 서남방으로 직행했다. 그 청백의 두 빛줄기가 미 처 막바지까지 이르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암흑 속에서 몇 가닥 가느다란 검정 연기가 뿜어나오 더니 삽시간에 사면으로 흩어지면서 자욱한 안개로 변하고 청백의 세 줄기 광채를 훌쩍 에워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우와앗!" 외마디 괴성이 터져나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세 줄기 광채는 그 검정빛 연기를 당해낼 수 없다 는 듯, 머리를 돌리고 태풍에 벼락처럼 절벽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금선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 위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몇몇 그림자가 어렴풋이 움직 였다. 뒤이어 속닥속닥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더니 이내 잠잠해지고 인기척도 사라졌다. 금선은 여전히 숨을 죽이고 위쪽의 동정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조금 전 섣불리 나서려다가 들킬 뻔했던지라, 이번에는 아주 신중을 기할 작정이었다. 이때, 네 사람의 귓결에 누군가의 음성이 울렸다. "복선담을 깨뜨릴 두 아이는 아직도 안 내려가고 뭘 기다리는 게냐?" 일행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홍화모모의 천리전음을 받은 것이었다. 금선은 당장 용기백배, 신약란으로부터 자연서를 건네받았다. 주문도 품속에서 천둔보경을 꺼냈다. 보자기를 끄르자마자 수십 장의 오색 광채가 복선담 밑바 닥까지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비추었다. 그것을 본 신약란이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더뜨 렸다. 스승은 삼세의 동남동녀 한 쌍만 내려갈 수 있다고 했으므로 그녀는 제영운과 함께 거석 위에 그대로 남아서 경계를 맡기로 했다. 천둔경의 광채가 내리비추는 가운데, 밑바닥은 잠잠하기만 할 뿐, 뒤덮혔던 검은 구름도 자줏빛 안개도 남김없이 흩어져 사라졌다. 오직 서남방 귀퉁이를 차지한 바윗덩이가 우중충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황소처럼 생긴 그 괴석(怪石)에서는 끊임없이 검은빛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 다. 이윽고 금선과 주문이 뛰어내렸다. 신약란의 마음은 온통 잃어버린 우잠유리에 쏠려 있었다. 밑바닥을 굽어보니 푸른 형광체는 가 련하게도 천둔경에서 발산된 오색 광채에 눌려 태양빛 아래의 등잔불처럼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 신령스런 악어가 어떻게 생긴 놈인지 보고 싶었지만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룡 사태가 거두어 갔으리라고 생각했다. 한창 사면을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발밑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얏!" 그 소리는 금선과 주문이 동시에 지른 것이다. 신약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황급히 발치 아 래를 굽어보았다. 주문과 금선은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뛰어내렸다. 성미 급한 금선의 발이 먼저 밑바닥에 닿았다. 그런데 감촉이 사뭇 이상했다. 딱딱하게 굳은 평지인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물렁물렁한 것이다. 두 발은 지면에 닿기가 무섭게 푹 빠져들어 갔다. "엇!" 마음이 다급해져 저도 모르게 움찔 힘을 쓰는 바람에 한 자 가웃이나 더 파묻혀 들어갔다. 진흙 수렁이었다. "아이쿠 뜨거워!" 수렁은 펄펄 끓는 물 속처럼 뜨거웠다. 금선은 불구덩이로 녹아 버린 늪에 빠져든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세심한 주문이 낙하할 순간부터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돌발적인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맞잡은 금선의 몸뚱이가 지면에 내려선 순간 맥없이 더 떨어져 내리는 느낌 을 받았다. 손을 잡은 자기 팔까지 거센 힘으로 당겨지고 있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 으로 기공을 운행하여 손목을 쳐들었다. '쩍 ' 소리와 함께 금선의 몸뚱이가 달리어 올라왔다. 그 래도 순간적으로 금선의 추락세(墜落勢)에 이끌려 그녀의 발바닥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아얏!" 금선을 끌어올리면서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가까스로 균형이 잡힌 두 사람은 밑바닥 지면 세 자 높이에 둥실 뜬 채로 몸을 날려 전진하기 시작했다. 절벽 중턱의 돌출부에서 영운과 약란이 대경실색을 한 것도 그때였다. 하마터면 천연의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던 금선은 후줄근하게 땀을 흘렸다. 그는 섣불리 아무데 나 내려서던 자신을 질책하고 또 원망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면서 경각심을 드높였다. 그는 우잠유리가 떨어져 있는 곳까지 날아가 자연서를 옆구리에 끼고서 그걸 집어가지고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주문과 함께 서남방으로 날아갔다. 독바위를 깨뜨리기 위해서였다. 도중에 두 남녀는 지면에 흥건하게 고인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천산갑(穿山甲)처럼 생긴 악어 한 마 리가 억센 꼬리를 늘어뜨린 채 서서히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도 보았다. 머리쪽 상반신은 깨끗이 잘리워져 이미 수렁 깊숙하게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불구덩이 늪 속에 빠져드는 악어의 몸뚱이를 보면서 금선은 새삼 넋이 빠졌다. 하마터면 같은 꼴을 당할 뻔했던 것이다. 주문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다시 독바위 쪽으로 날아 갔다. 바위에 접근할수록 검은 연기는 더욱 세차게 뿜어나와 자욱한 안개층을 이루었다. 두 남녀 가 마침내 최악의 장벽에 부닥친 것이다. 주문은 천둔보경을 정면으로 독바위에 겨누었다. 검정 연기가 거울의 오색 광채를 받더니 스물 스물 흩어지기 시작했다. 독바위는 보경의 위력에 제압당하는 것이 분명했다. 두 남녀는 용기를 내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금선은 자연서를 번쩍 들어 바윗돌을 힘껏 내리찍었다. 호미 의 날이 바위면에 박히는 것과 동시에 자줏빛 안개가 풀썩 일더니 시퍼런 불똥이 사방으로 튕겨 져 날았다. 꾸르르... 푸우! 자연서의 날카로운 일격을 받고서 독바위는 짐승과도 같은 신음성을 토해내더니, 두 조각으로 쩍 갈라져 버렸다. 무시무시한 독바위의 위력이 소멸되는 것을 보고서, 금선은 주문의 왼팔을 잡아끌어 바위의 갈 라진 틈서리에 거울을 비추게 한 다음, 있는 힘을 다해 연거푸 호미를 휘둘러 찍었다. 십여 차례 나 호미날에 찍히자, 네다섯 자 높이나 되는 바윗덩이가 뿌리째 뽑혀나오더니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져 날았다. 그 뒤켠에는 연잎처럼 생긴 식물 수십 뿌리가 자라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잎사귀들이 바람 한 점도 없는데 스스로 너울너울 흔들리는 것이 틀림없는 오풍초였다. 그래도 금선은 신중하게 그곳까지 움직여 나아갔다. 처음 뛰어내릴 때 당한 낭패를 두 번 거듭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오풍초는 다행히도 한 군데 밀생(密生)하고 있었다. 금선은 자연서를 써서 줄기와 뿌리까지 통째 로 뽑아가지고 등에 걸쳐메었다. 이 무렵 산산조각으로 갈라진 독바위는 악어의 시체와 마찬가지 로 천천히 수렁 속으로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오풍초를 뽑을 때, 금선은 몸이 허공에 뜬 채로 작업을 하느라 여간 힘이 든 게 아니었다. 만약 주문이 곁에서 힘껏 떠받쳐 주지 않았더라면 두 다리가 수렁에 또 빠질 뻔했다. 두 사람이 목적을 이루고 또 왜수 주매가 말했던 그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마저 찾아볼 생각으 로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문득 귓결에 부글부글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면서 온몸이 지독한 열기에 휩싸이는 느낌을 받았다. 주문은 황급히 천둔경으로 밑바닥 중심을 비추어 보았다. 평지와도 같이 매끈하던 수렁이 팥죽 끓듯 마구 들끓고 뜨거운 열이 '쉬익, 쉬익!' 솟아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진흙탕은 복선담 중심으로부터 파문(波紋)을 일으키면서 점점 사방으로 둥글게 퍼지더니 삽시간에 여기저기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들끓어 오르는 것이었다. 복선담은 어느덧 거대하게 끓어오르는 남비솥으로 변한 것이다. 주문은 불현듯 홍화모모가 신신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 독바위의 뿌리가 뽑히고 나서 얼마 안 있으면 진흙수렁의 밑바닥에서 불길이 솟아나오고 사 방 주위의 산봉우리도 갈라져 무너질 테니까 오풍초를 얻거든 시급히 탈출하라고 하셨지.' "앗, 큰일났다!" 그녀가 금선을 잡아끌고 독바위의 뿌리를 캐내던 곳까지 당도했을 때였다. 발밑에서 느닷없이 '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회갈색 용암(熔岩)의 기둥이 십여 장 높이까지 풀썩 솟구쳐 올랐다. 그 밑바닥에서는 은은하게 시뻘건 불길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복선담 전체가 거인이 몸뚱이를 뒤채듯 부르르 떨렸다. 밑바닥의 진흙수렁도 천만 갈래로 주름 이 잡히면서 곳곳마다 '철썩, 철썩!' 길길이 용솟음치는 진흙기둥 천지가 되었다. 그 사이사이로 불길이 꾸역꾸역 솟아나오고 있었다. 주문과 금선은 뒤돌아 볼 틈도 없었다. 쏜살같이 아까 뛰어내렸던 돌출부까지 상승하고 보니 거 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영운과 약란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다. 홍화모모가 말한 대로 이제 복선 담을 둘러싼 사면 절벽은 곧 붕괴되고 말 것이다. 돌출부로 통하는 지하통로도 무너져 막히고 홍 화모모의 석굴까지 나갈 길은 없어졌을 것이다. 두 사람은 별수없이 절벽 위로 날아올랐다. 천만다행으로 자욱하게 복선담 일대를 뒤덮고 있던 연기와 구름이 모조리 걷혀져서 사방천지가 환하게 밝았으므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벼랑 끝에 올라서자, 주문과 금선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발치 아래를 굽어보았다. 우르르, 쿵, 쿵! 복선담의 밑바닥은 온통 용의 혓바닥처럼 널름거리는 불길로 뒤덮였고, 잿빛 수렁은 사방으로 비말(飛沫)을 흩뿌리면서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우르르! 딛고 있는 발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오래 지체해선 안 된다. 피신할 곳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안전지대를 찾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동시에 한 군데로 쏠렸다. 맞은편 절벽가에서 황금빛 검광과 푸른빛 검광 한 줄기가 번쩍이며 바야흐로 청회색의 광채를 쫓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앗, 누나다!" 금선이 부르짖었다. 제영운과 신약란이 적과 맞부딪쳐 싸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어서 가요!" 두 사람이 발길을 막 떼려는 순간, 밑마닥에서 초록빛 안개가 풀썩 솟구치더니 뒤미처 시커먼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우르르... 쿵!... 콰당!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이 연거푸 울렸다. 이제껏 딛고 있던 절벽 끝머리가 쩌억 갈라지면서 바 닥 아래로 흔들흔들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주문과 금선은 더 이상 지체할 여지도 없어졌다. 황급히 몸을 솟구쳐 맞은편 싸움터로 날아갔다. 허공에서 흘낏 내려다보니 홍화모모의 동부(洞府)는 어느 틈엔가 지진에 강습을 받은 듯 폭싹 허 물어져 본래의 형체를 잃었다. 싸움터에선 비룡사태가 전날 숲 속에서 마주쳤던 금씨 남매를 이끌고 녹색 안개를 자욱하게 피 우고 있었다. 영운과 약란은 안개의 장막에 갇힌 채 신망(神網)을 활짝 펼치고 금빛 찬란한 광막 (光幕)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버티는 중이었다. "이얍!" 싸움터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주문은 금선부터 밀어내더니 야무진 기합성을 지르면서 천둔경을 번쩍 치켜들었다. 오색 광채의 거울빛이 비치자, 자욱하던 초록빛 안개는 햇볕 아래 얼음녹듯 산 산이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안개장막 속에 적을 가두어 놓고 의기양양하던 비룡사태가 기급을 했다. 난데없이 어린 두 남녀 가 전단(戰團)에 끼여든 것이다. 계집의 손에 들린 거울에서 백여 장이나 되는 오색 광채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비추자, 뒤미처 사내놈의 손이 번쩍 쳐들리더니 '우르르!' 벼락치는 소리와 함 께 두 줄기 자홍빛 검광이 섬전처럼 날아오는 것이다. "위험하다!" 비룡사태는 안개장막이 녹아버린 순간에 위기를 직감했다. 오늘의 승리는 이미 글렀다. 그녀는 어금니를 '으드득!' 갈아붙였다. 자홍빛 검광이 눈앞에 닥치기도 전에 두 발로 땅바닥을 박차고 솟구쳐 오르더니 세 제자를 움켜들고서 검광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허공이 찢겨지는 소리와 함께 비룡사태와 그 제자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나 버렸다. "아이쿠 뜨거워! 아얏, 아얏!" 적을 격퇴시키고 검광을 거두어들이던 금선이 갑자기 털썩 주저앉더니 데굴데굴 구르면서 마구 비명을 질렀다. 적을 추격하려던 주문은 깜짝 놀랐다. 금선의 두 다리는 온통 화상을 입어 물집투 성이가 되었다. 그걸 보는 순간, 주문도 발바닥을 찌르는 듯한 열통(熱痛)을 느꼈다. "영운 언니!" 그녀는 제영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금선이 뜨거운 수렁 속에 빠졌던 일을 설명하려고 입을 여 는데, 곁에 섰던 신약란이 갑자기 무슨 생각에 미쳤는지 발작한 사람처럼 석굴로 달려갔다. 잠시 후, 신약란은 다시 뛰쳐나오면서 크게 소리쳤다. "언니들, 비켜요!" 그녀의 등에는 붉은 두건으로 얼굴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감싸고 붉은 옷을 걸친 사람 하나가 업혀 있었다. 영운과 주문은 약란이 눈물투성이의 얼굴에 비통한 기색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황급 히 길을 비켜준 다음,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이 무렵, 복선담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불기둥만 수십 장 높이로 길길이 치솟는 화염 지옥으 로 변해 있었다. 그 불빛에 주변 산악마저 온통 붉게 물들어 석양을 방불케 하였다. 신약란은 정신없이 복선담 절벽 끝머리까지 달려가 섰다. 그리고 업고 왔던 홍화모모의 시신을 두 손으로 받들어 불구덩이 속으로 대던지더니,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고서 목놓아 울기 시작했 다. 얼마나 비통하게 소리쳐 우는지, 목청이 갈라지고 기진맥진,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 이었다. 영운은 가까스로 그녀를 불지옥 끝에서 일으켜 세우고 부축해 나왔다. 한참 만에야 신약란은 울음을 그치고 힘없이 영운의 품에서 벗어났다. "언니, 동생은 이제 오로지 언니밖에 의지할 데가 없어요. 골육을 나눈 자매처럼 돌보아 주세요. 이렇게 빌겠어요! 제발 이 약란을 동생이라고 한 번만 불러주세요. 언니!" 제영운은 자기 발밑에 무릎 꿇고 애원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련한 약란, 세상천지에 오직 한 분 스승만을 의지하고 자란 그녀는 이제 스승을 잃고서 천애고아의 몸이 된 것이다. "동생!" 제영운은 목청이 떨렸다. 애처롭게 흐느끼는 약란을 부축해 일으키면서 두 손마저 떨렸다. 불길 에 그슬리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곱게 매만져 주고 나서 손에 손을 맞잡고 돌아섰다. 이제부터 두 처녀는 자매의 의를 맺은 것이다. 이때 금선은 화독(火毒)이 발작하여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두 다리가 떨어져 나갈 듯한 저릿 저릿 쑤시는 통증을 참아보려고 애써서 전신이 후줄근하게 땀으로 젖었다. 주문의 화상은 그보다 가볍긴 하지만 그래도 발바닥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쑤셨다. 그녀는 아픔 을 호소할 수가 없다. 금선의 상처에 비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풀어 오른 물집 이 여기저기 터지고 피가 흐르는데 금선은 고통에 못 이겨 미친 듯이 뒹굴기만 했다. 주문은 보다못해 그의 두 손을 움켜잡고 정신없이 위안했다. 금선은 아예 그녀의 품속으로 굴러 들어가 몸부림쳤다. 그랬더니 불에 덴 다리는 여전히 못 견디게 쓰라렸지만 그녀의 따뜻하고 부 드러운 품에 안긴 마음은 한결 편안히 가라앉았다. "어서 일어나요! 언니가 와!" 주문은 제영운에게 이 꼴을 들킬까 봐 안달을 했지만, 그렇다고 중환자를 떠밀어낼 용기는 없었 다. 한창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를 태우는 판인데, 공교롭게도 영운과 약란이 손을 맞잡고 돌아왔다. 주문은 적지 아니 다급해졌다. 얼떨결에 두 사람을 향해 고함을 쳤다. "언니, 빨리 좀 와요! 금선 동생이 큰일났어요!" "이게 어찌 된 거야?" 영운이 금선의 다리를 보고 대경실색을 했다. 주문은 그가 열탕의 수렁 속에 빠졌던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신약란이 그 말을 듣더니 두말 않고 다시 무너진 석굴로 달려갔다가 얼마 후에 그녀는 큼지막한 병을 하나 들고 나왔다. "이거, 사부님께서 담가 놓으신 오풍주(烏風酒)예요. 주언니하고 금선 아우가 화상을 입었다면 이 술로 닦아보세요. 아주 깨끗이 나을 테니까." "아, 그렇게 좋은 약이 있었군!" 제영운이 반색을 했다. 허겁지겁 술병을 받아가지고 뚜껑을 열더니 먼저 금선의 물집투성이 다 리부터 발라주었다. "어이쿠 시원해! 어이쿠 뱃속까지 시원해지는 걸? 히야, 기막힌 술이구나!" 열기에 들떠 몸부림치던 금선은 단박 발작을 멈추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영운은 다시 동생 의 짚신마저 벗기고서 퉁퉁 부어오른 발에 약술이 흥건하게 배이도록 발라주었다. 시뻘겋게 짓눌 러 터진 상처가 당장 꾸들꾸들 말라붙더니 콱콱 쑤시던 통증도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통증이 사라지자, 금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주문을 가리켰다. "누나, 어서 주누이한테 발라줘! 나처럼 데었단 말야." 피붙이만 돌보느라 정신없던 영운은 그제서야 주문에게 생각이 미쳤다. "내 정신 좀 봐! 어머나, 미안해서 어쩌지?" 무안감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가지고 황급히 주문의 신발을 벗기려 했다. "안 돼요, 안 돼!" 뜻밖에도 주문은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고개를 내저으면서 죽어라고 발을 움츠렸다. "왜 이래, 화났어?" "아니요....." 주문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상하다 싶어 표정을 살폈더니 그 곱상한 눈매로 금 선 쪽을 향해 눈짓해 보였다. 눈치 빠른 금선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헤헤헤, 주누인 내가 있으니까 약을 안 바를 모양이군. 하지만 내 다리도 이제 겨우 아픈 것만 가셨지 다 나은 건 아닌데 하는 수 없구먼. 내가 저 비탈 아래로 굴러갈 도리밖에... 내가 안 보이 거든 흠씬 바르시우!" 말을 마치자 그는 정말로 데굴데굴 언덕 비탈을 굴러 내려갔다. 주문은 그 꼴을 보고서 너무도 우스운지 깔깔대었다. "누가 굴러가라고 했어? 여기서 등만 돌리고 있어도 되지 않느냔 말야!" "히힛, 젠장 전세에 무슨 업보가 많아서 남자 몸으로 태어나 가지고 이렇게 피해야 하는지 원." 금선은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보이고선 냉큼 물구나무를 서더니 고목 뒤꼍으로 돌아가 숨었다. 신약란도 보다못해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주문은 화상을 입은 발이 갈수록 더 쑤셔왔다. 금선의 모습이 사라지자 영운 앞으로 두 다리를 살그머니 내밀었다. 영운은 아무 소리도 않고 그녀의 신발을 벗겼다. 버선마저 벗기려니까 주문은 다시 움츠러든다. "내가 벗을게요." 그 말에 영운도 피식 웃었다. "아니, 왜 그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시중을 덜 들어드려서 삐쳤나? 이리 내라구! 사양할 거 없 어." "호호, 그래도 언니노릇은 톡톡히 할 셈이구려. 내 병도 다 나았는데 아직껏 보살펴 준답시고 생 색을 내다니, 뻔뻔스런 언니야! 그래요. 이 동생은 언니의 크신 은공일랑 죽어두 잊지 않겠수!" "잊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렴. 그게 뭐 대수냐?" 한 마디 핀잔을 던지고 나서 영운은 주문의 표정에 얄궂은 홍조가 발그레 피어오르는 걸 보았 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버선을 벗겨내고 나서 영운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 탄성을 질렀다. 발이 너무나 귀엽고 예쁜 것 이다. 손가락으로 찔러도 튕겨나올 것만 같이 풍만하고도 탄력 있는 종아리, 눈처럼 희고 매끄러 운 살갗이며, 뼈마디도 없는 것처럼 부드럽고 따사로운 각선미에 영운은 같은 여자이면서도 그렇 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발끝부터 뒤꿈치까지 영운의 손길이 어루만질 때마다 그녀는 나지막이 신음을 터뜨렸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영운은 한가롭게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처지 가 아니었다. 화독(火毒)이 깊숙하게 치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날쌘 솜씨로 오풍주를 따라서 상처에 발라주었다. "아이, 시원해! 화끈거리던 것도 싹 없어졌네!" 주문은 통증이 가시기가 무섭게 버선부터 챙겨 신으려고 했다. 영운이 그걸 말렸다. "오풍주가 약효를 보인 바에야 조금만 더 있다 또 한 번 바르자구. 그럼 아주 싹 나을 거 아니 겠어?" 영운은 그녀의 손에서 버선을 빼앗아 멀찌감치 던져 놓더니만 술병을 들고서 금선한테로 갔다. 동생의 상처에도 또 한 번 발라줄 셈이다. 금선은 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어 앉아서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멍청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가 영운이 오는 걸 발견했다. "누나, 주누이도 약 발라줬어? 어때, 좀 나았지!" 그러자 영운은 대뜸 정색을 하고 꾸짖었다. "우리 남매하고 주누나는 몇 년을 함께 자란 동문이야. 또 생사고락을 함께 겪은 사이니까 형제 자매나 다름없이 지내는 게 자연스럽긴 하다. 허나, 너도 이제는 나이도 그만큼 먹고 어린애 티도 벗었지 않았느냐? 어릴 때처럼 아무데서나 함부로 우스개소리나 지껄여서 남의 조롱을 받아서야 쓰겠니? 게다가 주누나는 성미가 곧잘 발끈한단 말이야. 네가 공연히 그 성질을 건드렸가는 아마 한평생 널 거들떠보지도 않을 게다. 아무리 절친한 형제, 자매 사이라도 농담 한 마디 잘못하면 틈이 벌어져서 서먹서먹해지고 만다. 그래서야 되겠니? 남녀간에 못할 말이 있고 삼가야 할 일도 있는 법이다. 앞으로 조심해라!" 금선은 영운의 질책을 받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금선과 주문, 두 남녀의 당초 감정은 친밀하기 더 이상 짝이 없던 터, 한동안 그 사이가 소원(疎 遠)해진 것도 사실상 서로 짙은 정을 고집스럽게 표현한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 몇 날 며칠 동안을 조석(朝夕)으로 환란 속에 함께 처하면서 부지불식간에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의 변 화를 일으켰다. 또한 그 심리 작용은 세속적인 남녀지간의 애정관계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저 너와 나 사 이에 남다른 무엇이 개재해 있다는 그런 막연한 이끌림이 상호작용할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두 남녀는 일체 의례적이거나 형식적인 면에 구애받지 않고, 품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의사를 표현하 고도 마음이 거리낌 없고 깨끗하며 순수했었다. 하지만 곁에서 보는 제삼자로선 그 순결무구한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무슨 상사병 이나 난 사람처럼 인정하여 비웃고 조롱한다니, 금선 또한 그런 오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끄러 움에 얼굴을 붉혔던 것이다. 방금 그는 주문의 눈치를 보아 고목 뒤편으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리고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망연자실, 하늘만 쳐다보면서 자기 나름대로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남녀지간이라니?... 남자와 여자 사이는 어째서 그런 형식에 구애를 받아야만 할까? 주문누나와 함께 성장하는 동안 서로 손발보다도 더욱 친밀한 벗으로 사귀어 왔었다. 그런데 도중에서 갑작 스레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도우셨는가, 그녀는 요독(妖毒)에 중독되고, 나는 그녀 앞에 서 진심을 다 바쳐 가깝게 지낼 기회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나는 거리낌없이 그녀를 대해왔다. 그 러나 이제 병이 완쾌된 지금, 또다시 그녀와 나 사이는 소원해질 것인가, 아닌가?... 그걸 모르겠 구나.' 그 즈음에 누나 영운이 건너와서 한바탕 꾸짖은 것이다. 금선은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자기에게 털끝만치의 잘못이 없다고 억울한 느낌을 받았다. '누나도 이 동생보다 그녀를 더 감싸고 날 배척하는 건 아닐까?' 누이가 너무 이치에도 닿지 않는 꾸지람을 내린다고 불만이 가득했지만 도대체 변명 한 마디를 할 수가 없다. 어찌 된 셈인지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화끈 붉어지기만 하는 것이다. 금선은 그저 고개를 쳐들고 하늘에 뜬구름만 바라보면서 애꿎은 풀잎을 뜯어 흩날릴 따름이었다. 영운은 그녀대로 동생이 마음 속에 켕기는 바가 있어 대꾸 한 마디도 못하는 줄만 알았다. 그녀 는 이제 일행을 거느리고 떠나야 했다. 주문에게 오풍주를 한 차례 더 발라주려고 되돌아가 보니 약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주문 혼자서 풀밭에 앉은 채 고개를 푹 떨구고 두 다리만 멍 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운은 먼발치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생 금선이나 주문이나 꼭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고 단정을 내린 것이다. 그녀는 말없이 다가가서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주문은 더 이상 아무런 통증도 없자, 금선이 와서 볼까 봐 얼른 버선과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석굴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복선담과 석굴 일대는 화광이 충천하고 있었다. 길길이 치솟는 불길 속에 '우르르! 쿵쾅!' 그칠 새 없이 천지개벽을 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영운이 물었다. "약란은 어딜 갔지?" "모르겠어요. 방금 뭘 잊고 있었는지 동굴 쪽으로 막 뛰어가더군요. 어딜 가느냐고 물었더니만, 금방 다녀오마고 하던데....." 묻고 대답하는 순간, 갑작스레 광풍이 한바탕 '우르르!' 몰아치더니 동굴 쪽의 불더미가 더욱 기 세차게 솟구쳐 올랐다. 그 뜨거운 열기는 이곳까지 밀어닥쳐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금선이 뛰어와서 짚신을 찾아 신고 났을 때였다. 동굴 속에서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익은 약란이 등에 보따리를 지고 쏜살같이 날아왔다. 그녀는 세 사람 앞에 이르기도 전에 목이 터져라고 악을 썼다. "언니들, 어서 빨리 검광을 타고 달아나세요! 여기도 무너져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그녀가 먼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신약란이 그토록 당황해서 도망치자 영운남매와 주문도 감히 머뭇거릴 수 없었다. 오풍초를 챙 겨 등에 지기가 무섭게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지면이 흔들흔들 요동질하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풀썩 내려앉았다. 뒤미처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치달리듯 '우르르, 우르르!' 지동(地動)을 하면서 사면 주위가 가뭄 에 논바닥 갈라지는 것처럼 전후좌우, 쩍쩍 균열을 일으키더니, 크고 작은 바윗덩이에 나무숲까지 뿌리째 뽑혀 허공으로 어지러이 흩날렸다. 일행들이 한 순간을 놓쳤더라면 바윗덩어리 소나기 속 에 꼼짝도 못하고 파묻힐 뻔했다. 공중에서 일행들은 방금까지 서 있던 언덕비탈이 움푹 패여 끝도 모를 무저갱(無底坑)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 갈라진 지층(地層) 사이로 시퍼런 불빛과 연기가 수직의 기둥을 이루면서 솟구쳐 오 르더니 햇빛 아래 불타는 구름덩이를 이루었다. 쿵쿵!... 쿵!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그칠새 없이 울렸다. 수십 장도 넘는 불기둥이 여기저기 솟구치고 뜨거 운 열기를 못 이겨 녹아버린 바윗물이 끓어넘쳐 산지사방으로 뜨거운 비말(飛沫)을 흩뿌리고 있 다. 용암이 떨어진 곳마다 불이 옮겨 붙은 나무숲에서 또다른 화염지옥을 이루기 시작했다. 홍화 모모의 동굴도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봉선암 역시 어느덧 불의 바다로 화해버렸다. 불길이 아직 뚫고 나오지 못한 지역도 무시무시한 지진이 일어나면서 주변 수십 리 일대가 이를 갈듯 요동질치더니 갈라지는 부분부터 함몰되기 시 작했다. 명산 승경(名山勝景)의 동천복지(洞天福地)가 찰나지간에 불구덩이의 지옥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허공에 머물러 있던 영운도 그 뜨거운 불길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일행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 어서 여길 떠나자구!" 그녀가 앞장서서 나아가려는데 문득 신약란이 손을 흔들었다. "언니, 잠깐만! 일이 좀 남았어요." "뭔데?" "절 따라오세요!" 약란은 고개를 돌리고 서남쪽으로 날아갔다. 영문도 모른 채 일행이 따라나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그만 산봉우리 두 개가 보였다. 약란이 내려서자 일행도 따라 봉우리에 내려섰다. 하늘도 계화산의 동천복지를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기가 섭섭했는지, 작디작은 산봉우리 하나만은 기암절벽, 기화요초의 선경을 그대로 남기고 있었다. 가까운 데서 터져나온 화산과 지진 의 영향을 털끝만큼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일행 네 사람은 정상에 잠시 머물면서 숨을 가라앉히고 방금 온 쪽을 돌아다보았다. 동북편 하 늘마저 불타오르듯 온통 붉게 물들고 수십 줄기나 되는 불기둥이 창공에 화염의 숲을 이룬 가운 데 잿빛 먼지구름, 바위의 소낙비가 푸른 하늘 한귀퉁이를 뿌옇게 뒤덮고 있었다. 일행들은 맞바람을 안고서 뜨겁게 휘몰아치는 열기에 전신이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금 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어서들 떠나자고 재촉이 성화같았다. 그래도 영운은 떠날 수가 없 었다. 신약란이 어째서 이리로 데려왔는지, 또 남아 있다는 일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 다. 약란은 복선담 쪽을 향해 무릎 꿇고 엎드려 또다시 큰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러면 뭘 해? 그만 울음을 그쳐요. 돌아가신 분이 다시 살아오실 것도 아니잖아?" 영운과 주문이 달래는 참이었다. 문득 복선담 속에서 이제껏 보지 못하던 화염이 '우르르!' 치솟 더니 잠깐 사이에 이 장 남짓이나 됨직한 오색채운(五色彩雲)으로 변하여 허공에 머물고선 흩어 질 줄 몰랐다. 그것도 순간적인 일이었다. 홀연듯 채운 속에서 한 가닥 붉은빛이 충천하는데 그 빛줄기의 중심은 투명체의 윤곽이 어리었 다. 그것은 기괴하게도 벌거숭이 여인의 형상이었다. 투명한 여인상은 붉은 광채에 휩싸인 채 일 행이 서 있는 정상을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영운 남매와 주문은 질겁을 했다. 불구덩이 속에서 괴물이 나타난 줄로만 알고 황급히 비검을 발사하려 했다. 이때 신약란이 울면서 소리쳤다. "언니들, 그러지 말아요! 제 사부님이에요!" 제영운은 소스라쳐서 주문과 금선을 제지하고 그 자리에 함께 꿇어 엎드렸다. 순식간에 홍광 속의 여인은 네 사람의 머리 위까지 날아오더니 미소를 머금고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서남쪽을 향해 유성처럼 사라져 버렸다. 잠시 동안 태양빛 아래 붉은 점 하나만 보이는가 싶더니 그것마저도 시야를 벗어나 없어진 것이다. 홍화모모가 성도(成道)하고 육신을 벗어난 것을 알면서도 제자 신약란의 비통스런 통곡성은 좀 처럼 멎을 줄 몰랐다. 영운 일행 셋이 혀가 닳도록 달래고 나서야 그녀의 질긴 울음이 그쳤다. 제영운은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동생, 우리 함께 형산으로 가자구. 추운수님을 뵙고 이 오풍초를 드려야 하거든. 그리고 나서 구화산에 돌아가서 우리 어머니의 문하 제자로 들어오면 돼." 신약란은 아직도 오열을 삼키면서 영운과 주문의 손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애절하게 간청했다. "앞으로 이 동생은 오직 언니들이 돌보아 주셔야 해요. 언니들 곁에서 한 걸음도 안 떨어지고 시키는 대로 따를 테니, 부디 잘 이끌어 주세요." 그녀의 모습은 품속에 뛰어든 참새 새끼처럼 가련하고 측은하기만 했다. 영운이 다시 물었다. "자, 어떻게 할까. 아무래도 계수나무집에는 들려야겠지? 동생 짐도 챙겨야 할 테니까....." "꼭 필요한 물건은 모두 꺼내 왔으니까, 그 집에는 가도 안 가도 그만이에요. 허지만 언니들 짐 이 아직도 거기 있겠네요." "우리도 뭐 특별한 짐은 없어. 기껏해 봐야 장기 남매가 선사한 이불 보따리뿐인데, 그것도 이제 주문 동생의 병이 다 나았으니까? 필요없게 된 셈이지. 그 이불마저 더러워졌으니 본주인한테 돌 려주기도 뭣 하고... 약란이 갈 필요가 없다면 그만두기로 하지." 이때 주문이 졸다댔다. "언니, 한 번 가 봐요. 금선 동생 얘기로는 아주 경치가 기막히다던데, 저는 어제 병중이라 못 보았잖아요." "그냥 떠나지 뭘." "그래두 한 번만 가 봐요." 제영운은 주문의 성화에 못 이겨 응락하고 말았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았던 아름드리 계수나무는 지진에 흔들려 중둥부터 부러진 채로 무참하 게 쓰러져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불길은 번지지 않아 옛모습은 그대로 지켰다. 땅마닥에는 온통 살림살이 가재도구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신약란은 서글픈 눈길로 이것저것 두리번거리더니 문득 조그만 합(盒)을 한 개 주워가지고 품속 에 넣었다. "그게 뭐야?" 주문이 묻자, 그녀는 멋쩍게 대답했다. "계수나무 열매를 빻아서 만든 분향(粉香)이에요. 가져갈 생각은 없었는데 문득 손길에 잡히고 보니 아까운 마음이 드는군요. 내버려 썩히느니보다 구화산에 가져가서 한가할 때 태우면 아주 향기가 그윽할 거예요." 곁에 섰던 제영운이 향기 얘기를 듣더니 불현듯 무슨 생각이 났다. "아하, 저쪽으로 가자구! 우리 모두 몇 날 며칠 여행길에 먼지깨나 뒤집어 썼는데 어제 갔던 온 천물에 목욕이나 시원하게 하는 것이 어때?" "참, 그렇지! 언니가 말씀해 주지 않았더라면 깜박 잊고 갈 뻔했어요. 어제 주문 언니 몸을 씻겨 드릴 때 거기다 바람막이 외투를 벗어놓고 그냥왔어요. 빨래를 해서 바위에다 널어놓구선 잊어버 렸거든요. 이 계화산이야 사시사철 따뜻하지만 구화산은 높고 추울 테니까 그게 쓸모가 있을 거 예요. 더군다나 선사(先師)께서 내려주신 것인데 버리고 갈 수 없죠." 일행은 계곡 아래 온천이 솟아나오는 샘터로 내려갔다. 어제보다 물이 좀 더 뜨거워졌을 뿐, 별 다른 이상은 없었다. 네 사람은 패를 나누었다. 금선이 주변을 순찰하는 동안 세 처녀가 먼저 목욕을 하고, 다시 교대 하여 사내녀석이 물에 들어가기로 했다. 일행은 무사히 목욕을 마쳤다.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느긋이 휴식을 취하면서 그들은 비로소 밀렸던 얘기를 주고받았다. 금선과 주문이 먼저 복선담에 내려가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나서 영운에게 물었다. "누나, 그런데 어떻게 해서 비룡사태와 만나 싸움이 벌어진 거야!" "너희들이 밑바닥으로 내려간 지 얼마 안 돼 비명을 지르지 않았니?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 다. 그래서 나도 뛰어내리려고 했지....." 당시 거석의 돌출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제영운은 주문과 금선의 비명을 듣고서 혼비백산, 당장에 밑바닥으로 뛰어내릴 자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두 줄기 검광이 서남쪽으로 안 온하게 날아가는 것을 발견하고 겨우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도로 바위 위에 주저앉아 온몸의 신 경을 집중시키고 복선담 밑바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래 전부터 그 악어와 독바위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익히 들어 아는 터라, 어린 동생 들을 내려보내 놓고 도무지 마음이 놓이질 않았던 것이다. 금선과 주문, 악어와 독바위, 그들 중 어느 한쪽은 오늘 생사간에 결단이 나야 하는 것이다. 한창 정신을 놓고 초조한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영운과 약란은 동시에 홍화모모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얘들아! 어서 뒷동굴로 돌아오너라! 너희들이 서 있는 바위가 무너진다!" 영운이 대경실색을 했다. 늪바닥에 내려간 금선과 주문부터 불러올리려고 입을 막 여는데 신약 란이 손을 내저었다. "언니, 아래쪽은 걱정할 것 없어요. 그냥 뒷동굴로 빨리 갑시다. 사부님은 적에게 포위당해 있어 요. 아주 위험하신 모양이에요. 자, 어서....." 그래도 영운은 미덥지가 않아서 좀처럼 일어서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란이 하도 자신있게 두 번 세 번을 거듭 장담하는 바람에 마침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두 사람은 지하통로를 거 쳐 다시 홍화모모의 석실로 빠져나왔다. 그들이 지하굴을 벗어나자마자, 느닷없이 천지개벽을 하 는 굉음과 함께 갓 빠져나온 동굴이 폭싹 무너져 내렸다. 실로 위기일발의 순간을 벗어났던 것이 다. 앞동굴의 석실도 벌써 무너진 지 한참 된 듯, 처음 당도했을 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신약란은 정신없이 동굴 앞 광장으로 달려갔다. 제영운도 그 뒤를 따랐다. "언니, 빨리 와요! 사부님이 비룡노파한테 당하셨어요!" 한참 뛰던 약란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영운에게 부르 짖었다. 휘둥그래진 영운의 눈앞에 젖먹이 아기처럼 온몸이 새빨간 나체의 여인이 오똑 서 있었다. 키는 두 자 남짓, 전신에서 십여 장 남짓한 붉은 광채를 발산하면서 비룡사태와 그 제자들을 상대로 고전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영운은 첫눈에 홍화모모의 동신(童身)을 알아보았다. 젖먹이 아기처럼 원신(元身)을 연성한 것이 다. 약란의 부르짖음도 미처 끝나기 전에 한 줄기 금빛이 교룡(蛟龍)처럼 번뜩 날아가더니 침입자 네 사람의 청회색 검광을 선듯 가로막아 버렸다. 젖먹이의 원신은 영운이 앞으로 나서자 황급히 뒷곁 석실로 뛰어 들어갔다. 신약란도 뒤따르면서 또 한 번 고함을 쳤다. "언니, 그 개 같은 연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줘요! 저도 사부님을 모셔다드리고 금방 돌아 올게!" 이윽고 사 대 일의 격전이 벌어졌다. 비룡사태는 애당초 영운 혼자 힘으로 자기네 사도(師徒)들 과 맞싸운다는 게 가소로왔다.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된다고 여긴 나머지 경계심마저 풀어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비룡사태의 큰 착각이었다. 일단 겨루어 보았더니 뜻밖의 엄청난 고수와 맞닥뜨 린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싸움판을 떠맡고 나선 이 젊은 처녀의 비검술은 상상을 초월한 것 이었다. 제자들 앞에서 호랑이의 꼬리를 잡은 격으로, 비룡사태는 진퇴양난, 빼도 박도 못할 곤경 에 처하고 만 것이다. 그녀는 즉각 온몸의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신중하게 상대방과 겨루기 시 작했다. 영운은 어제 숲 속에서 금씨 남매와 싸워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상대편의 정체를 몰랐기에 크 게 마음먹고 양보를 해주었는데, 오늘만은 사정이 달랐다. 홍화모모가 이들의 손에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무슨 놈의 양보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녀는 검광을 반출하는 순간 부모에게서 받은 진 전(眞傳)을 운기하여 칼끝에 한 모금 혼원진기(混元眞氣)를 뿜어 실었다.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것은 금연의 검광이었다. 금연은 스승의 위세만 믿고 기세 좋게 영운을 향 해 덤벼들다가 문득 상대방의 검광이 태산보다도 무겁게 짓눌러 오자 기급을 해서 비켜나려고 했 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당한 금연의 비검은 일격을 받자마자 당장 고철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너무도 허망하고 어이가 없어 금연은 물러서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물러서거라!" 비룡사태가 소리쳤다. 자기 제자놈들 실력으로는 터무니없음이 너무도 자명했던 것이다. 그녀가 호통을 치자 금연뿐 아니라 금영과 금타란 놈마저 찔끔해서 뒷전으로 꽁무니를 뺐다. 비룡사태는 두말없이 허리의 호로병을 끌러내더니 다년간 여산에서 수련한 <녹운장(綠雲腸)>을 발사했다. 때마침 홍화모모를 호송하고 나갔던 신약란이 돌아와 비검을 들고 영운에게 합세했다. 비룡사태가 방출한 녹운장은 점차 초록빛 안개로 퍼지더니 코를 쏘는 듯한 비린내마저 풍기기 시작했다. 영운은 그 파해법을 모르는지라 섣부르게 상대하지 못하고 수비태세로 전환했다. 그녀는 옥청대사가 선사한 <오운신교망(烏雲神鮫網)>을 꺼내 공중에 펼쳤다. 스무 장 남짓한 둘 레의 검은 구름이 뿜어나왔다. 검정 구름에 휩싸이면서 영운은 신약란과 함께 그 중심에 위치하 고 검광을 거두어들였다. 이 무렵 사방천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면은 쩍쩍 갈라지고 바위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사면 팔방에 연기와 불기둥이 길길이 솟구쳐 올랐다. 오운신교망의 구름장벽으로 적의 공세를 차단하고서도 영운은 초조와 불안에 싸였다. '이토록 천지가 무너져 지옥이 되는 판인데, 금선과 주문은 무사할까?' 그녀는 황급하게 약란더러 물었다. "홍화모모께선 무슨 말 없으셨나?" 그 말뜻을 약란이라고 모를 리 없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대답은 명쾌했다. "언니, 두 사람은 절대 무사해요! 저 못된 노파가 오풍초를 얻기는커녕 하마터면 독바위에 죽을 뻔한 데다 악어를 베어죽인 게 도리어 우리 수고를 덜어준 결과로 되니까 머리끝까지 울화통이 치밀었어요. 그 독바위도 천연적으로 생긴 게 아니라 제 사부님이 설치했다고 오해까지 하고 보 니 분풀이를 할 생각으로 이리 달려왔어요. 저 노파는 사부님이 원신(元身)을 써서 해탈하는 절정 의 순간에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순간을 노려 <열화모충(烈火毛蟲)>이란 요법을 펼쳤답니다. 그것은 수만 마리의 독거미를 풀어서 사람의 눈, 코, 입, 칠규(七竅)로 파고들게 하는 거죠. 저놈의 노파는 열화모충을 가지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부님더러 독바위와 채운(彩雲)을 철 거하도록 위협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사부님은 진작부터 안배를 해놓고 계셨죠. 그분이 앉아 계신 앞쪽에 왕년의 법보(法寶)였던 <오화건곤라(五火乾坤羅)>를 설치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독으로 독을 친 셈이지요. 결국 노파가 풀어놓은 독거미 수만 마리는 산 채로 불에 타죽고 말았어요. 협 박이 수포로 돌아가자, 저놈의 노파는 더욱 노발대발 사부님께 죽기살기로 대들었죠. 비검을 꺼내 들고선 신검합일(身劍合一)로 사부님의 가슴을 꿰꿇고 나간 거예요. 아마도 단 일격에 사부님의 영육(靈肉), 형신(形神)을 찔러죽일 생각에서였을 겁니다. 그러나 사부님은 과거에 외공(外功)을 익히지 않으셨고 또 삼겁(三劫) 중 겨우 일겁만 면하셨기 때문에 차라리 저 노파의 손에 일겁을 더 거치면서 육신의 껍질도 벗어나리라 생각하셨어요. 게다가 이제 갓 젖먹이 아기의 몸으로 바 뀌었는데 그 상태에서 비검을 써서 대적하다가는 영아(瓔兒)의 진기가 흩어지면 보통 큰일이 아 니거든요. 그 때문에 사부님은 꼼짝없이 앉아서 죽음을 맞으시기로 한 겁니다. 한데 저놈의 노파 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노린 목표가 영아의 치명적인 급소였어요. 칼 끝이 찔 러든 간발의 순간, 천만다행으로 사부님의 원신이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셨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 노파의 독수에 백여 년 넘도록 수련하신 공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뻔하지 않았겠어요? 사부님이 치명타를 벗어나긴 했지만 젖먹이의 원신은 이제 갓 형체를 이룬 것이라서 원기(元氣) 도 튼튼하지 못했죠. 그 몸으로 악귀같이 날뛰는 노파와 싸우자니 오래 버티실 힘이 없었죠. 그래 서 언니와 절 부르신 거였어요. 절더러 화장(火葬)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은 삼겁을 모두 이루기 위해서였답니다... 저놈의 노파가 방출한 건 <녹운장>이라고, 산중의 대망(大莽)이 흘린 침독으로 만들었어요. 방금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언니한테 호신할 방법이 있으니까 저 노파의 비검만 주의하면서 기다리면 잠시 후 녹운장을 깨뜨릴 사람이 온다고 하셨어요." 영운은 그 말을 듣고 나서 약란이 이끄는 대로 오운신교망의 장막을 맞은편 절벽 끝까지 이동시 켜 적들을 유인해냈다. 그러자 잠시 후 장벽 바깥에서 과연 오색 광채가 수십 장이나 눈부시게 비추더니 녹운장의 안개 를 산산이 흩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주문과 금선이 복선담을 깨뜨리고 올라와 왜수 주매 의 천둔보경으로 비룡사태의 녹운장을 격파하여 깨끗하게 쫓아버렸던 것이다. 영운의 이야기도 여기서 끝났다. 아미산의 새 식구들 遇髥仙, 奉命返峨嵋 結同門, 商量闢仙府 "그러고 보니 우리들만 고생한 게 아니라 누나들도 아주 위험했었구려!" 제영운의 기나긴 얘기가 끝나자 금선은 혀를 내둘렀다. 영운은 이때서야 처음으로 오풍초를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었다. 생김새는 연잎처럼 생겼는데 그리 크지 않고 뿌리도 두자 남짓하지만 새카맣고 반들반들 윤기가 돌았다. 손에 들고 있자니 마 치 산 동물처럼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천년하수오는 어찌 됐니?" "암만 찾아도 없더군요. 그건 분명히 악어란 놈이 잡수신 모양이야." "아깝게 되었네....." 온천 샘가에서 노닥거리는 동안 어느덧 해는 서산에 멀어지고 밝은 달이 동편으로부터 둥실 떠 올랐다. 멀리 바라보이는 복선담 쪽에선 화염과 연기가 여전히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천공(天空)을 온통 불태우듯 붉은 안개로 뒤덮여 저녁놀의 잔영(殘映)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따금씩 생각난 듯 우르릉! 폭음소리가 발밑을 뒤흔들었다. "이제 그만 떠나자!" 영운은 형산(衡山)에서 학수고대하고 있을 추운수와 완석대사를 생각하고는 일행들을 재촉해서 일어났다. 계화산에서 할 일은 이제 없는 셈이다. 주문과 금선, 신약란과 함께 일제히 검광을 일 으켜 타고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귀로에 오른 일행 넷이 어검비행으로 얼마 가지 못해 문득 허공에서 학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 염선께서 지나시는 모양이다. 우리 영접을 해드리자!" 제영운 일행은 학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과연 학을 타고 오는 이는 <염선 (髥仙)> 이원화(李元化)였다. 일행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영운은 염선에게 신약란을 소개했다. "홍화모모의 제자 신약란입니다. 그분이 원적비승을 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을 따라가게 되었어 요." "음, 아주 훌륭한 처녀로군. 근골도 썩 뛰어난 아가씨야!" 신약란의 예를 받으면서 이원화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첫눈에 보아서도 근골이 빼어나고 영 리하게 생긴 데다 비록 좌도방문의 문하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얼굴 가득히 늠름한 정기가 엿보이 는 선골(仙骨)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제영운은 계화산에서 홍화모모와 신약란의 도움을 받아 복선담을 깨뜨리고 간신히 오풍초를 손 에 넣은 경과를 자세히 설명한 다음, 이원화에게 물었다. "저희들은 지금 형산으로 오풍초를 가져가는 길입니다만, 사숙께선 어디로 운유(雲遊)를 하시는 중입니까!" 그러자 염선 이원화는 대견스런 표정으로 텁석부리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빙그레 웃었다. "허허, 고생들이 많았구나... 나는 그 오풍초를 가지러 왔지." 이어서 그는 후배들에게 형산 쪽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완석대사가 자운사 결전에서 중상을 입은 후, 추운수는 그를 형산으로 데리고 가서 백작동(白雀 洞)의 금모모(金姆姆)에게 간호를 부탁했다. 완석대사는 그동안 추운수가 적지 않은 공력으로 단약을 만들어 복용시킨 덕분에 목숨은 건졌으 나 그 통증만큼은 조금도 가시지 않아 견디지를 못하고 벌써 몇 차례나 육신을 해탈하려고 시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금모모에게 제지를 받고 설득당해 실패했던 것이다. 추운수는 제영운 일행이 떠난 후 지금까지 날짜를 꼽아보고서 곧 염선 이원화에게 부탁하여 일 행을 마중 나가서 오풍초부터 서둘러 받아가지고 오도록 했다. 이원화는 그간의 경과를 소상히 알려주고 나서 제영운에게 덧붙여 말했다. "이 오풍초는 내가 형산으로 가져갈 것이니, 너희들은 구태여 그곳에 가져갈 필요가 없겠지. 그 리고 추운수 어른의 말씀으로는 너희더러 구화산에 돌아가지 말고 곧장 아미산으로 향하라 하더 구나. 그럼 중도에서 어머님 묘일부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시면서, 만나뵙고 나면 또다른 분 부가 내리게 된다니까, 그대로 따르려므나." 제영운과 금선은 어머니를 만난다는 전갈을 듣고서 뛸 듯이 기뻐했다. 무슨 분부가 있는지는 몰 라도 우선 어머니 모습을 보게 된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영운은 마음이 들떠서 혹여나 중도에서 길이라도 어긋날까 봐 서둘러 이원화에게 작별인사를 올 리고 일행을 재촉해서 떠났다. 망창산을 지나서 곧장 아미산으로 통하는 길에 오르려는 것이다. 오풍초를 인수받은 염선 이원화도 형산으로 서둘러서 돌아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일행은 도중에서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망창산을 거의 지나고 아미산 쪽으로 날아갔다. 이튿날 아침 진시(辰時) 무렵, 망창산 동북방 어구 조그만 부락에 다다른 그들은 십여 명의 남녀 들이 나귀들를 둘러싸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력이 예민한 금선은 한눈에 그 남녀들 모두가 아주 나이 젊고 화려한 옷차림을 한 것을 보고서 사뭇 이상하게 여겼다. 보잘것 없는 시골 사람 들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한층 신경을 모아 살피던 그는 남녀 무리 속에서 여도인 한 사람이 걸어나오는 걸 보았다. 아무 리 뜯어봐도 어머니 묘일부인이 분명했다. 그는 누나에게 손짓을 보냈다. 영운 일행은 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내려앉아 검광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을 안으로 뛰 어 들어갔다. 과연 금선이 보기는 틀림없이 보았다. 묘일부인은 그곳에서 십여 명의 청년 남녀들을 거느리고 한창 나귀와 가마꾼을 흥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성미 급한 금선이 반가움을 못 이겨 다가서자, 묘일부인은 황급하게 눈짓을 보냈다. 모른 척하고 가까이 오지 말라는 신호였다. 영운 일행도 걸음을 멈추고 짐짓 모르는 사람들처럼 곁에서 나귀 만 요모조모 뜯어보며 눈치를 살폈다. 얼마 후 가마꾼과 나귀의 흥정이 끝났다. 묘일부인은 젊은이들을 재촉해서 태우더니 곧바로 길 을 떠나게 했다. 동네 사람들 틈에 끼여 구경만 하던 영운은 그 남녀들이 모두 눈물을 글썽거리 면서 묘일부인에게 무언의 감사를 보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더구나 여자들은 묘일부인의 옷소 매를 잡고서 놓을 줄 모르는 것이다. '거 참 이상스럽네? 이 젊은이들은 어떻게 외따른 산골짜기 마을에 몰려 있을까? 또 어머니는 어쩐 일로 한가하게 나귀를 몇 마리나 흥정하고 계시지? 저 사람들을 태워서 어디로 보내시려는 거야?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인 걸.' 묘일부인은 젊은이들을 떠나보내고 나서 동네 사람들과 몇 마디 인사를 나누더니 마을 밖으로 걸어나갔다. 한바탕 구경거리가 없어지자, 제가끔씩 흩어지던 동네 사람들은 또 낯선 젊은이들을 발견하고 다시 우르르 몰려들었다. 말쑥하니 생긴 삼녀 일남의 행색을 보아하니 이들도 가마채나 나귀 등 탈것이 필요해서 왔으리라 짐작했다. 나이도 어린 데다 경험이 없는 듯한데 그렇다면 봉이 또 굴 러 들어온 셈이다. 방금 전까지 묘일부인과 흥정하던 거간꾼이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고서 금선한테 말을 걸었다. 여자하고 흥정하기보다는 남자 쪽이 한층 어수룩해서 손쉽게 넘어간다는 걸 잘 아는 모양이다. "젊은 양반, 어디로 가시려는지요? 세 분 아가씨를 데리고 역시 사천성 아미산엘 가시는 모양이 로군요? 하하, 그거 참 안 됐소이다그려! 저 앞산에 이무기 한 마리가 살고 있어서 길을 가로막고 있답디다. 방금 여기서 떠난 일행도 거길 지나치다가 혼비백산을 해서 돌아왔다더군요. 그래서 부 랴부랴 나귀랑 가마랑 빌어 타고는 고향으로 줄행랑친 거라구요. 네 분도 그냥 돌아가시는 게 아 마 신상에 좋을 듯싶소이다. 헌데 우리 마을에 있던 나귀하고 가마채는 이제 방금 모조리 동이 났고 없는데 어쩔꼬?... 흠흠, 그렇지! 예서 한 이십 리쯤 가면 오장패(吳場覇)가 있는데 그 동네에 는 탈것이 아주 좋거든. 어떻소, 젊은 양반? 타고 가시겠거든 돈을 좀 내시구려. 우리들이 오장패 에 가서 대신 세를 내올 테니까." 서글서글 웃는 폼을 보아하니, 어수룩한 봉들한테 한몫 단단히 긁어내자는 심보가 분명했다. 거간꾼의 짐작대로 사내 쪽은 과연 어수룩하다. 금선은 두 눈만 휘둥그래 뜨고서 도대체 이 남 자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종잡을 수 없어 멍청하게 마주 바라보기만 했던 것이다. "앞산 어디에 이무기란 놈이 있단 말인가요?" 괴물이라면 잠자는 것도 잊고 덤벼들 금선이다. 거간꾼은 요 어린 녀석이 겁도 많구나 싶어 한번 더 엄포를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저기, 아미산으로 가는 길 쪽인데....." 막 입을 열고 너스레를 떨려는 판인데, 영운이 가로막고 나섰다. 눈치빠른 그녀는 벌써부터 어머 니가 어디서 젊은 남녀들을 구출해 가지고 아미산 참배여행 도중 이무기를 만났단 핑계로 이 마 을에 들어와 탈것을 빌어간 사실을 알아챘던 것이다. 어머니도 일을 성사시키고 떠난 이 마당에 쓸데없는 수작이나 들으면서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그녀는 멍청한 동생한테 눈짓을 보내고 대신 거간꾼을 상대했다. "아이 참, 우리도 이무기란 놈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차를 좀 세낼 생각이었는데... 모두 앞사람들이 차지해 버렸다니 할 수 없죠. 그럼 가르쳐 주신 대로 오장패에나 가서 빌어 탈 수밖 에, 어쨌든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서 그녀는 일행 세 사람을 부르더니 곧장 묘일부인이 떠난 방향으로 뒤쫓 아 나갔다. 그 길은 동구 밖에서 산중으로 통한 방향이었다. 공연히 입빠른 소리로 오장패를 가르쳐 주고 봉들을 놓쳤구나 싶어 거간꾼은 닭쫓던 개 지붕 쳐 다보는 격으로 입맛만 쩝쩝 다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산 속으로 접어든 지 얼마 안 돼서 영운 일행은 묘일부인을 따라잡았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영운은 계화산에서의 일을 말한 다음, 신약란을 묘일부인에게 소개했다. 묘일부인은 차근차근 약란을 살펴보더니 근기(根氣)가 자못 심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즉석에서 문하 제자로 거두어들이기로 승락했다. 신약란이 크게 기뻐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장에 앞으로 나서더니 묘일부인에게 정성을 다해 스승을 뵙는 예로 무릎 꿇어 이마를 조아렸 다. 묘일부인은 아들 딸, 제자들에게 이영경을 만난 일부터 무산(巫山) 신녀봉(神女峯)의 요인(妖人) 음양수(陰陽搜)란 놈의 사제<귀도인(鬼道人)> 교수등(喬瘦藤)을 쳐죽이고 숱한 남녀들을 구출해 낸 일까지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까 떠나보낸 아이들도 교수등이란 놈에게 잡혀서 희생당한 애들이다. 그리고 영운아, 너한테 당부할 게 있다. 지금쯤 아버님께선 동해(東海)에 계시면서 현진자(玄眞子) 어른을 도와 법보(法 寶) 한 가지를 연성하시는 중이다. 허지만 머지않아 아미산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미 후산에 은거 하시던 백미화상은 벌써 다른 데로 떠나셨고, 이령 부녀의 거처인 서운동(棲雲洞)은 골짜기 아래 그분이 계시던 응벽애(凝碧崖)까지 직통으로 뚫려 있다. 나는 그 응벽애에다 별부(別府)를 하나 더 만들어 너희 젊은이들이 모여 살도록 하고 싶구나. 지금 이영경은 그리로 돌아가는 중이니까, 너희들 넷이서 뒤쫓으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게다. 그 애를 만나거든 함께 아미산으로 돌아가거라. 약란아, 너는 반변노니께 빌어 온 자연서를 아직도 가지고 있겠지? 그 호미로 서운동 뒤편 석굴 에 백미화상이 오래 전 봉쇄해 놓은 입구를 깨뜨릴 수가 있을 것이다." 통로에 들어서면 백여 층의 돌계단이 나타날 것이고, 층계 끝까지 내려가면 바로 통로 곁을 돌 아서 큰 바윗덩이가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골짜기 아래로 통하는 문인데, 바위 틈서리 로 비집고 내려가면 곧장 비탈길이 되며 그길로 응벽애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잘 알아듣겠느냐?... 응벽애는 사시사철 봄날처럼 따뜻하다. 도처에 기화요초들이 만발하고 사면 에 폭포수와 샘물이 콸콸 쏟아져 일 년 내내 비가 안 와도 걱정할 게 없단다. 너희들이 검술을 익히고 수도하는 데는 더 없이 좋은 곳이지... 그곳에 내려가거든 모두들 영운의 말을 듣고 아침 저녁 공부에 게을러선 아니 된다. 영운은 나 대신으로 약란과 영경에게 구결(口訣)을 전수해 주어 라. 또 석 달이 지나거든 구화산으로 가서 육지(肉芝)를 가져다 아미산에 옮겨 심거라. 구화산의 동부(洞府)는 지난번 추운수 어른께서 사람을 보내 빌어 달라시기에 내가 응락했다. 그러니 너희 들은 거기 다시 갈 수 없게 되었다... 금년 말쯤이면 너희 아버님도 아미산으로 돌아오실 테니까 그때 가서 어르신의 분부대로 따르거라... 난 이제 가봐야겠다. 아까 너희들이 본 것처럼 귀도인 교수등의 마수에서 구출해낸 젊은애들을 왜수 주매하고 나누어서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너 희들도 눈치는 빠르니까 알아챘겠지만, 아까는 탈것을 한꺼번에 많이 빌리느라고 그 애들이 부근 지방에서 아미산 참배하러 가는 사람들인 것처럼 거짓말 좀 했지. 도중에 망창산 이무기를 만나 혼이 나서 돌아가는 길이라고 둘러댔다. 그래야 호기심 많은 시골 수다장이들의 이목을 피하겠길 래 말이다. 어쨌든 떠나보내기는 했는데 나이도 어리고 집 대문 밖도 나서본 경험조차 없다는 애 들이라 도무지 마음이 놓이질 않는구나. 아마도 지금 어디선가 제 갈 길도 못찾을지 모르겠다. 그 애들 거의가 이 운남지방 부근에서 납치당한 모양이니 집들도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을 게 다. 몰래 숨어서 제각기 집까지 무사히 도착하도록 보호해 주어야 옳을 듯싶구나... 앞서 아미산으 로 떠난 영경도 구지선이라는 여자애와 동행하고 있다. 그 아이도 납치되어 몹쓸 고생을 해온 애 란다... 둘이서 백미화상의 신조(神鳥)를 타고 갔는데, 그 독수리가 사람을 태우지 않았다면 너희 들의 검광보다 더 빠를 거야. 아미산까지 가는 길목에 사파(邪派)의 인물들이 수두룩하게 숨어 있 다. 영경은 지금 장미사조님의 자영검(紫暎劍)을 얻어가지고 있지만 무술을 전혀 모르는 구지선을 데리고 가는 중이니, 노상에서 번거로운 일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서 급히 뒤쫓아 가서 도와주도 록 해라. 여기 오래 머물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럼 나 먼저 떠나겠다. 어서들 가거라!" 말을 마치고 나서 묘일부인은 그 길로 매정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 자기 자녀들에 대한 신 뢰감이 컸던 것이다. 영운 일행도 검광을 일으켜 타고 미지의 이영경을 뒤쫓아 아미산을 향해 날아갔다. 한창 길을 재촉하던 영운 일행은 앞쪽에서 사파의 무리가 쏘아 날린 비검 한 자루를 발견했다. 그것은 흑색 연막에 휩싸인 채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금선이 끼어들 셈으로 앞장서 나아 가자 영운은 얼른 동생을 제지하고 귀추를 기다리면서 비검의 뒤를 바짝 쫓아가기 시작했다. 금선은 연기 불꽃 사이로 어렴풋하게나마 비검의 앞쪽에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는 것 을 발견했다. 그 새의 등 뒤에 두 여자가 앉아 있었다. 금선은 어머니가 말한 이영경, 구지선 두 사람이 신조(神鳥)를 타고 사파인들에게 쫓겨 달아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누나, 도와줘야겠어!" 영운을 손짓해 부르는 참에, 그 거대한 새가 갑자기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휙!' 하고 지상 아 래쪽 산비탈을 향해 내려떨어졌다. 앞을 가리웠던 불꽃 연기를 벗어나자 사면이 깨끗하게 돋보였 다. 검정독수리가 두 처녀를 등에 업은 채 지상으로 내려앉고 있다. '이영경이란 여자가 틀림없다!' 영운 일행도 뒤따라 하강을 개시했다. 그러나 미처 독수리가 내린 곳에 닿기도 전에 날짐승은 어느 새 두 여자를 내려놓고서 훌쩍 창공으로 솟구치더니 서슴없이 불꽃 연기 속으로 돌진하는 게 아닌가! 영운은 첫눈에 그 사파의 비검이 자못 위력적인 것임을 알아차렸던 터라 독수리가 부상당할까 보아 마음을 조였다. 그러나 역시 기우(杞憂)였다. 독수리는 벌써 강철같이 억센 발톱으로 불타는 비검을 움켜잡고서 쏜살같이 곤두박질쳐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뒤미처 산비탈 아래에서 한 줄기 자줏빛 광채가 번쩍 치솟더니 검은 불빛 연기를 삽시간에 휘저 어 소멸시키고 독수리의 발톱에 걸린 비검을 고철덩어리로 만들어서 떨어뜨렸다. 자줏빛 검광이 발출되는 순간, 제영운은 그 주인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앳된 나이에도 제비처럼 날렵한 몸놀림으로 검광을 쏘아내는 것을 보고서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더구나 그 검광은 자신의 것 못지 않게 광채가 유달리 크고 위압적인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매서운 솜씨로구나. 적도 귀중한 비검이 고철덩어리로 변한 바에야 그냥 곱게 물러설 리가 없 겠지.....' 그녀는 일행들을 불러 멀찌감치 내려앉아 숲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암암리에 두 여자를 돕기도 할 겸, 또 그녀의 솜씨도 살펴볼 겸 해서였다. 숲 속에 몸을 감추고 한참 동안을 기다렸으나 적은 끝내 나타날 기척이 없다. 두 여인의 동정을 살폈다. 독수리가 자주색 검광을 구사하던 여자한테서 붉은 열매 몇 개를 받아먹고서 또 한 차례 훌쩍 창공으로 날아 올라갔다. 그리고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더니 이번에는 큼직한 사슴뿔 한 개를 통째로 움켜쥐고 돌아왔다. 독수리가 그처럼 신통한 걸 보고서 금선은 그만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매료되었다. 어 서 가서 안아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그래도 누나 영운의 눈총이 무서워서 옴싹달싹도 못하 다가, 끝내 적의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영운이 말릴 틈도 없이 숲 밖 으로 뛰쳐나갔다. 영운과 주문, 약란도 하는 수 없는지라 뒤따라 갈밖에... 사실 그녀도 어머니의 말대로 이영경과 구지선인지 아닌지 자못 궁금했던 참이고, 또 두 여자가 금시라도 떠날 기색이었으므로 나가 보 기로 한 것이다. "두 분 아가씨, 잠깐만!" 영운이 이제 막 불러 세우는 순간이었다. 홀연 듯 광풍이 크게 휘몰아치더니 모래와 돌덩이가 마구 흩날리면서 '쉬익, 쉬익!' 귀신 우는 소리와 함께 천지가 온통 암흑으로 뒤덮였다. 마침내 뒤 늦게 적이 나타난 것이다. 앞서 나가던 금선의 혜안(慧眼)이 벌써 어둠 속을 뚫고 기괴한 형태를 한 남녀 한 쌍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아득한 암흑 속에 몸을 감춘 채로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요법(妖法)을 펼치면서 접근하고 있었다. "주문 누이, 요괴들이 왔어!" 그때 주문도 이미 요법을 쓰는 자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황급히 품속에서 천둔보경부터 끄집어 내어 번쩍 쳐들었다. 거울은 어김없이 십여 장 둘레의 솜털 같은 오색 광채를 뿜어내어 삽시간에 요법을 안개처럼 녹여버렸다. 영운과 금선은 요물들이 접근해 오는 방향을 가늠하고서 일제히 검광을 쏘아보냈다. 영운의 쾌 검이 누구보다도 빠르게 두 놈 중 계집의 가슴부터 꿰꿇고 나갔다. "으악!" 참혹스런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요사를 부리던 계집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사내놈은 그만 혼 비백산, 허둥지둥 요운(妖雲)을 일으켜 타고서 꽁지빠지게 달아나 버렸다. 저토록 나이어린 아이 들 수단에 얼굴을 맞대기가 무섭게 단짝을 잃고 말았으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 다. 영운 일행은 이영경과 만났다. "두 분 중 어느 쪽이 이영경인가요?" 한바탕 소동을 겪은 뒤라, 영경은 당혹스런 눈초리로 영운 일행을 노려보았다. "저올시다만, 누구신지요?" "아하, 바로 맞았네! 그럼 이쪽은 구지선 누님이겠군!" 금선의 말에 이번에는 구지선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영운이 방글방글 웃으면서 자기네 일행을 소개했다. "놀랐겠군요. 그러니까 나는 제영운, 당신한테 사저(師姐) 뻘이 되고, 이 애는 내 동생 금선, 또 이쪽은 황산 찬하대사(餐霞大師)님의 애제자 주문, 그리고 역시 영경처럼 어머님의 제자 신약란이 죠. 우리 모두 동문 사형제들이 되는 거예요." "아이구머니, 영운 언니! 사부님께 말씀은 듣고 있었지만, 이토록 빨리 만나뵐 줄은 꿈에도 생각 지 못했네요. 금선 사형, 주문 언니, 약란 언니! 아이구, 이렇게 저한테 언니 오빠가 많이 생기다 니!" 영경은 하늘에라도 오를 듯 기쁨에 벅차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 여섯은 새삼 차례대로 나누 어 은근하게 처음 대면하는 사형제의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둘러앉아 잠시 동안 서로 겪었던 얘기꽃을 피웠다. 얼마 있다 도망친 요인을 추격했던 독수리 불노(佛奴)가 돌아왔다. 영경은 독수리의 목을 다정스레 끌어안고 물었다. "그놈을 잡아 죽였어?" 불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놓친 것이다. 일행은 요물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으나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꺼림직한 대로 일단 덮어 둘 수밖에..... 금선과 약란은 신통한 날짐승이 사람의 말뜻까지 알아듣는 걸 보고서 숫제 미치고 환장할 지경 이다. 두 남녀는 독수리한테 다가가서 쇳조각같이 억세고도 윤기나는 깃털을 정신없이 어루만졌 다. 독수리는 두 눈에 금빛을 번뜩이면서 눈을 부릅뜨고 우뚝 선 채 두 사람이 쓰다듬는 대로 몸 을 맡기고는 요지부동 움직일 줄 몰랐다. 금선과 약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걸 한번 타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한쪽에선 이영경과 제영운, 구지선과 주문이 수다스런 처녀들답게 깔깔대며 무슨 얘긴가 재미있 게 주고받았다. 그녀들은 방금 만나서도 의기가 서로 투합되어 이제서야 만나게 된 걸 한탄할 지 경이었다. 이윽고 그들 일행 여섯은 다시 아미산으로 함께 출발하게 되었다. 영경과 지선은 아직 비검술을 익히지 못한 터라 아까처럼 독수리의 등에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영운과 주문, 금선, 약란은 모 두 독수리의 뒤를 따라서 바싹 붙은 채 일제히 아미산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독수리 불노의 날개 힘이라면 본래 검광보다도 훨씬 빠르고 힘차다. 하지만 등에 범태육골(凡胎 肉骨)의 인간을 둘씩이나 업은 데다 고공(高空)에 몰아치는 세찬 역풍까지 안은 터라 느릿느릿 날 수밖에 없었다. 검광을 타고 가는 영운 일행도 독수리와 보조를 맞추어 나란히 전후좌우로 에워싼 채 날아갔다. 금선과 약란은 아직도 동심에 젖어 있어 새로 사귄 두 동문도 반갑지만 신통스런 독수리를 만나 게 된 것이 더욱 신바람 났다. 두 철부지는 독수리를 사이에 두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번갈아 가며 숨바꼭질을 했다. 이따금씩 영경과 지선에게 악을 써가면서 말도 걸었으나 독수리가 빠른 속력으로 나는 데다 세찬 맞바람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영경은 지선의 연약한 허리를 껴안아 부축하면서 그녀의 등에 머리를 파묻었다. 어쩌다 금선이 나 약란이 소리쳐 부르면 그런 대로 대답은 할 만했다. 그렇지만 지선은 사정이 달랐다. 두 손으로 독수리의 날갯죽지를 죽어라고 움켜쥔 채 와들와들 떠는 판인데 맞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니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벌어진 입조차 다물지 못하고 찬공기만 배가 터지도록 마시는 판국에 어디 대꾸나 할 여지가 있느냐 말이다. 구지선은 천성이 고매하고 또 명예심을 극도로 귀중하게 여기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악의 소굴 에서 천행으로 구출된 이후부터 요사스런 놈한테 짓밟힐 대로 짓밟혀 억울하게 처녀성을 잃은 자 기 몸을 원망하고 수치감을 못 이겨 죽고 싶기만 했다. 그런 마당에 또 이영경, 신약란들과 같은 젊은 검협을 만나고 보니, 모두가 자기보다도 어린 나 이에 하나같이 고강한 무공을 소유하고 비행절적(飛行絶跡)의 재간까지 지닌 데다, 선녀처럼 아리 땁고 준수한 자태, 늠름한 기상을 갖추었으니 그녀로선 오직 부럽기만 하고 우러러보일 따름이었 다. 그럴수록 지선은 자신이 부끄럽고 추레하게 여겨졌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비참해진 자신을 속으로 무섭게 채찍질하면서 굳게 마음 다져먹었다. '아미산에 당도하면 무슨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이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무공을 익혀서 여봐란 듯이 천공(天空)을 자유롭게 누벼야지. 그 열망을 이루기 위해선 자존심도 체면도 모두 다 버리고 이들의 마음에 들도록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리라.' 그녀의 한때 좌절감은 분발을 자극하는 촉진제로 작용한 것이다. 곁에서 금선과 약란이 번갈아 접근하여 미주알고주알 캐묻는데 구지선은 입술조차도 움직일 수 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 두 사람이 자기더러 나이값을 하느라 점잖을 뺀다고 탓할까 봐 두려워, 그저 억지로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미소를 짓는 게 고작이었다. 한 번 고개를 수그릴 때마다 몸 이 흔들려서 중심을 잃고 떨어질 것만 같아 식은땀이 철철 흘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구지선의 등 뒤에 앉은 이영경은 느긋하고도 즐거운 기분으로 오늘의 행운을 되씹고 있 었다. 뜻밖에도 무공이 엄청나게 뛰어난 동문들을 만나고 반려자가 되어 그들과 아미산에서 영영 함께 살 수 있게 되다니 이건 정말 꿈만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더 이상 적막강산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 그걸 생각하면 입이 저절로 벌어질 판이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친구도 한둘이 아니라 다섯씩이나 한꺼번에 생긴 것이다. 하물며 아미파 최고의 여검선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지 않았는가? 그녀는 의기양양, 신바람이 났 다. 흥얼흥얼 콧노래마저 나왔다. 곁까지 바짝 다가온 금선과 약란이 무슨 소리인지 또 묻는다. 다시 듣고 보니 금안사형의 내력 을 묻고 있는 것이다. 신바람이 난 이영경, 그 입에서 빨래줄 늘이듯 술술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 다. 주숙부를 따라서 아미산에 은거한 일... 아버지 이령과 백미사조가 만난 일, 아버지가 병들고 응 벽애를 찾던 기구한 사연부터 시작해서 망창산 달밤에 백골의 강시, 용과 싸우고 떠난 이래 산괴 부부와 목괴를 쳐죽이고 곰과 성성이들이 목숨을 바쳐 따르게 된 일까지, 하다못해 묘일부인과 왜수 주매, 또 제영운 일행을 만나기까지 겪어왔던 사연들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면서 낱낱이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중, 금선과 약란은 아미산에 신통스런 독수리가 또 한 마리 있고, 거기다 사람과 감정이 통하는 성성이까지 있단 말에 마음이 들뜰 대로 들떠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영운과 나란히 날고 있던 주문도 어쩌다가 귓결에 토막토막 들리는 영경의 이야기에 차츰 솔깃 해졌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예 영운마저 잡아끌고 독수리 곁으로 바짝 접근해서는 흥미진진하게 영경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독수리는 양날개를 대문짝처럼 가로 활짝 펼치고 느긋이 활공을 즐기고 있었다. 주문은 그 양탄자처럼 펼쳐진 나래폭을 눈여겨 보았다. 문득 올라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 이다. '이 날짐승은 도대체 얼마만큼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어디 내가 시험해 봐야겠다. 나는 비 검술을 익히고 있으니까 추락할 염려도 없으니, 만약의 경우 도로 뛰어나오면 되겠지! 더군다나 영경의 얘기가 한창 아기자기한 대목을 넘기는 중이라 더 가까이서 자세히 듣고 싶어서 그녀는 성큼 검광을 거두어들이고 훌쩍 독수리의 오른 날개에 올라탔다. 꾸우, 쿠르르! 독수리는 한 사람이 더 올라타자, 고개를 뒤로 돌리고 노려보더니 다시 왼날개 쪽을 돌아보면서 두어 번 우짖었다. 곁에서 따라가던 영운이 주문을 향해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저것 봐, 동생이 올라타니까 한쪽 균형이 맞지 않는 거야! 동생 하자는 대로 따르긴 하지만 아 주 혼줄이 나는 모양인데?" 주문은 독수리의 눈치를 살폈다. 흔들리기는커녕 편안하기만 하다. '휙, 휙!' 불어닥치는 맞바람 에 검광을 조절하면서 몸의 중심을 잡던 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녀는 영운을 향해 눈 한번 흘겨보이곤 이내 금선에게 미소를 던지면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금선도 그녀의 뜻을 알아챘다. 그 즉시로 검광을 거두어들이고서 왼날개 위에 털썩 올라탔다. 이번에는 약란의 애가 끓었다. 자기는 또 얼마나 타보고 싶으냐 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먼저 가로채어 탈 자리를 놓쳤으니 한 발 늦은 자기만 원망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독수리는 그래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앞으로 앞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한창 신나게 지껄이던 영경은 외따로 떨어진 약란을 보고서 사뭇 미안스런 감이 들었다. 그녀는 다급한 손짓으로 약란더러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제영운이 다가와서는 깔깔대고 웃었다. "다 태우고도 넉넉하겠는 걸?" "언니도 올라오세요! 내 뒤쪽에 빈 데가 아직 많아요. 뒤에서 절 꼬옥 껴안으면 되죠!" 신약란이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다. 영운은 영경에게 누차 재촉을 받고 나서야 호의를 뿌리칠 수 없든지, 독수리의 무게 중심을 가늠해 본 다음 영경의 등 뒤쪽 왼날개 근처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여섯 명을 태우고도 이영경의 금안사형은 힘에 겨워하기는커녕 더욱 힘차게 속력을 내기 시작했 다. 실로 엄청난 비상력(飛翔力)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섯 승객들에게 평온감마저 안겨주는 것이다. 금선과 약란은 쉴새없이 재잘재잘 지껄여댔다. 제일 신나는 사람은 그 두 철부지였다. 꾸와아! 쿠르르! 한창 힘차게 날던 독수리가 불현듯 목청을 길게 뽑고 우짖었다. 그와 동시에 여섯 일행은 한 줄 기 푸른빛이 달리는 유성(流星)처럼 남쪽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가는 것을 발견했다. 뒤미처 맞은편 구름 속에서도 길게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독수리 한 마리가 모습을 드 러내더니 일 장 남짓 커다란 흰빛 날개를 활짝 펼치고 폭풍 속에 번개치듯 허공을 누비면서 곧바 로 푸른 빛줄기를 뒤쫓아 가고 있었다. 영경 일행이 탄 불노도 그쪽으로 솟구쳐 오르면서 마주 길게 우짖었다. 흰빛 독수리가 동료의 울음소리를 알아들었다. 이내 뒤쫓던 청광(靑光)을 버리고 훌쩍 회전하더니 속도를 늦추고서 불노 의 곁으로 날아왔다. 두 마리 날짐승은 번갈아 가며 '꽈악, 꽈악! 꾸르르, 꾸르르!' 자못 친숙하게 우짖으면서 나래를 가지런히 하고 같은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다. 영운 일행은 연신 감탄성을 질러댔다. 영경의 금안사형보다 더 몸집이 헌걸찬 데다 번쩍번쩍 화 광을 쏘아내는 두 눈알이 여간 사나와 보이지 않았다. 흰빛 깃털로 온통 뒤덮인 몸뚱이는 태양을 받고서 눈이 부시도록 광채를 내는 것이다. 신약란은 슬그머니 마음이 동했다. 그녀는 호기심을 못 이겨 영경에게 물었다. "영경 아가씨, 이 흰독수리도 아가씨 것인가요?" 영경이 미처 대꾸하기도 전이었다. 금선은 하얀 놈도 깜둥이하고 같으려니 생각했는지, 시비곡직 가릴 것없이 다짜고짜로 몸을 솟구쳤다. 하얀 놈에게 옮겨 탈 심산이었다. 그러나 금선의 욕심은 어림반푼도 없었다. 느닷없이 웬 녀석이 자기 등으로 날아오자 흰독수리 는 훌쩍 동료의 곁을 떠나더니 공중에서 빙그르르 선회하는 것이다. "아이쿠!" 허방을 짚은 금선이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검비행술이 아니었더라면 까마득히 내 려다보이는 지상으로 추락해서 여지없이 고기떡으로 되어 버릴 뻔했던 것이다. "이놈의 짐승이!..." 울화통이 터진 금선은 욕지거리를 한 마디 내뱉고는 허겁지겁 검광부터 일으켜 타더니 재차 흰 독수리에게로 덤벼들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놈을 제압해 가지고 제것으로 만들어 놓고야 말 심 산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주문과 신약란마저 들떠가지고 박수까지 쳐가면서 응원을 보냈다. 일행 가운데 연장자로 우두머리 격인 영운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직감했다. 백미 화상이 길들여 타고 다닌다는 저 날짐승의 위력을 그녀는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방금 푸른 빛줄기를 추격하던 몸놀림으로 보아 어지간한 검선의 무공 실력 가지고는 도저히 상 대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금선의 솜씨로 제압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짓인 것이다. 그녀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금선아, 멈춰! 무례한 짓 말아라! 다른 사람도 조용하라구." 그리고 다시 흰빛 독수리를 향해 한 마디 건넸다. "용서해요. 아우녀석이 철부지라서 그랬어요! 아미산에 가거든 혼줄을 낼 테니까 너무 노여워하 지 말아요." 흰독수리는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또 한 번 길게 우짖었다. 영운은 서둘러 금선을 불러올렸다. 그리고는 금선을 눈물이 글썽해지도록 야단을 쳤다. 금선은 볼멘 소리로 잘못을 빌었다. 속으로 불만이 가득하지만 어머니 묘일부인의 당부대로 누나에게 복종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 이다. 그뿐이 아니다. 금선은 누나 한테 약점을 하나 단단히 잡혀 있는 처지다. 자기가 꼭 배우고 싶은 검술의 구결 한 가지를 누나가 인색하게도 꽉 틀어쥔 채 입을 봉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결 을 빼내려면 누나의 비위를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하는 수 없이 금안사형의 날개 위로 돌 아와 앉아선 부글부글 속만 끓이는 수밖에 없었다. 두 마리의 독수리는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줄곧 날아서 마침내 아미 후산에 당도한 것은 밤도 이슥해진 이경 때였다. 달과 별빛이 어우러져 무수한 광채를 쏟아내리는 가운데 일행 여섯은 서운동 석굴 앞에 섰다. 벌써부터 동굴 입구에는 성성이가 하늘 쪽을 바라보며 서성거리고 있더니 주인과 몇몇 손님의 모 습을 발견하고서 기뻐 날뛰었다. "너 벌써 와 있었구나!" 영경도 그놈이 무사하게 도착한 것이 반가와서 물었다. 그러자 망창산에서 영경과 함께 천년하 수오를 나누어 먹은 그놈은 이미 횡골(橫骨)이 변하여 사람의 말까지도 흉내낼 줄 알았다. "너, 벌써 돌아왔다!" 영경은 너무도 신통해서 어쩔 줄 몰랐다. 곁에서 짐승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금선이 물었다. "누이가 말했던 그 성성이요? 헌데 웬놈의 덩지가 이렇게 크지?" "덩지 크다고 미련한 게 아니에요. 얼마나 영리한지 모르죠?" 독수리 한 쌍은 어두운 하늘에서 제 마음대로 빙글빙글 선회하고 있었다. 그리운 옛집에 돌아온 영경이 주인답게 허리를 굽히고 손님들을 정중히 동굴 안으로 모셔들였 다. 주인의 뜻을 헤아린 성성이가 선뜻 앞으로 나서더니 동굴 출입문을 봉쇄하고 있던 바위부터 밀쳐내어 열었다. 그걸 보고서 주인은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 "저 녀석, 정말 영리하네! 하마터면 대문도 안 열고 손님더러 들어오랄 뻔했네" 제영운도 그녀가 허둥대는 꼴이 우스웠던지 미소를 지었다. "이봐 동생, 우리 모두 한집안 식구 아니겠어? 주인이니 손님이니 그런 격식일랑 다 집어치우라 구. 우리는 초행이라서 이곳 지리를 모르니까 아무래도 동생이 앞장서서 안내해야겠는 걸." 영경은 성성이를 데리고 앞서 들어갔다. 등불이 밝혀지자, 일행들도 따라 들어와서 좌정했다. 주인은 보따리를 끌러 놓기가 바쁘게 뒷동굴로 뛰어들어 가더니 절여놓은 사슴 뒷다리 네 짝을 들고 나왔다. "언니들, 잠시만 기다려요. 우선 금안사형하고 그 친구한테 먹이를 갖다주고 올 테니까." 영경이 총총걸음으로 나가자, 금선과 약란은 호기심을 못 이기고 후다닥 따라나갔다. 주문 역시 궁금증이 났는지 영운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진종일 독수리 등에 앉아서 어지럼증에 시달리던 구지선은 만사가 다 귀찮기만 했다. 머릿속이 어찔어찔, 두 다리도 후들후들 떨려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찬바람을 쏘인 얼굴도 따귀를 맞은 것처럼 화끈거리고 사지가 온통 뻐개지는 듯했다. 그녀의 눈길은 자연 돌침상에 가 서 멎었다.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워 두 다리나 쭉 뻗으면 얼마나 시원하랴! 영운은 지칠 대로 지친 그녀를 이해했다. 물먹은 솜처럼 흐느적거리는 게 여간 측은하지 않았던 것이다. "움직이지 말고 편안히 누워 있어요. 몹시 피곤한 모양인데." 자기가 있으면 감히 눕지 못하리라 여기고서 영운은 일행의 뒤를 따라 동굴 바깥으로 피해 주었 다. 지선은 이제 제 세상을 만났다. 주인 허락도 받지 않았으나 실례 좀 해야 할 판이다. 돌침상을 덮은 털가죽 보료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팔 다리를 힘껏 뻗으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등 허리에서 무엇인가 부시럭거렸다. 손을 돌려 집어넣었더니 웬 종이가 잡혔다. 그것은 편지봉투였 다. 겉봉에 얌전한 붓글씨로 받을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영경, 보아라.> 누군지 모르지만 이영경에게 남긴 편지다. 그녀는 생각없이 품 속에 찔러넣고 눈을 감았다. 잠시 동안만 쉬려니 했지만 결국 얼마 못 가서 죽은 사람처럼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동문 사형들이 둘러서서 보는 가운데 영경은 독수리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검정독수리 불노 는 발톱과 부리를 한꺼번에 써가면서 그녀가 쪼개놓기가 무섭게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깡그리 먹어치웠다. 그러나 그 곁의 은빛 친구는 꼼짝달싹도 않고 먹이에 덤벼들 기척도 없었다. 금선은 아직껏 낮에 그놈이 자기를 태워주지 않았던 데 대해 원망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속마 음으로는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날짐승의 환심을 좀 사볼 요량으로 영경처럼 사슴 고기를 집어서 흰독수리 코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그 날짐승은 머리통을 홱 돌리더니 껑충껑충 피해 버렸다. 금선이 단념하지 않고 뒤쫓자, 그놈은 나래를 푸드득거리면서 고깃덩어리를 피하느 라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영운이 장난질 심한 동생을 황급히 가로막고 또 나무랐다. "저 은빛 선금(仙禽)은 벌써 오래 전부터 도를 얻었기에 인간의 화식(火食)은 안 먹는 모양이다. 싫다는 고기를 짓궂게 쫓아다니면서 억지로 먹여 어쩔 셈이냐? 혹시 과일 같으면 먹을지 모르겠 는데... 그러나 이 밤중에 따올 만한 데가 없구나. 성성이가 따다놓은 게 없을까?" 그 마지막 한 마디가 영경을 일깨워 주었다. "아하, 참 그렇지! 내 보따리 속에는 아직도 과일이 많이 있다. 주과도 아홉 개나 있고, 또 황정, 송인 따위가 숱하게 남았거든! 그걸 잊고 있었어." 이때 불노와 은빛 옥노가 길게 길게 우짖었다. 영경은 혹여나 그들이 당장에라도 날아갈까 보아 얼른 동굴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보따리를 펼치다 보니 침상 위에는 구지선이 세상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끌어다 조심스레 덮어주고 나서 황정 몇 뿌리와 주과 네 알을 꺼내들고 다시 나왔다. "옥노형이 소식(素食)을 하는 걸 내 깜박 잊었어. 자, 이 붉은 열매는 주과라는 것인데 우리 사 부님 말씀은 이걸 먹으면 수명도 길어지고 몸도 가뿐해진다고 하시더군. 오는 동안 이 사람 저 사람 나눠주느라 겨우 아홉 개만 남았는데, 그 중 두 개를 줄게. 그리고 여기 두 개는 우리 아빠 한테 갖다 드려요. 나머지 다섯개는 우리 손님들을 대접할 거야." 영경의 말은 금방 상대방에게 통했나 보다. 옥노는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다가와서 주과 두 개 를 널름 쪼아먹더니 고맙다는 듯 길게 우짖고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강철 같은 발톱 한 쪽을 내밀었다. 영경이 쇠발톱 사이에 열매를 건네주자, 날짐승은 뒤뚱걸음으로 돌아서더니 허공 을 바라고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러자 불노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달빛을 온몸에 받으면서 희고 검은 독수리는 눈 깜짝 할 사이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영경 동생, 저 새들은 돌아올까?" 금선은 아쉬운 눈길로 독수리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더니 이내 영경더러 물었다. 그 곁에 신 약란도 같은 생각인 듯, 영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 검은 새는 내가 금안사형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이름은 불노예요. 백미사조께서 저한테 주신 것이니까 돌아오겠죠. 그렇지만 흰독수리는 사조님이 타고 다니시는 선금(仙禽)이에요. 불노를 마 중하느라 오늘 여기 왔으나 우리 곁에 머물게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거 참 아까운데, 그거 참!" 금선은 섭섭해서 연방 입맛을 다셨다. 얼마 안 있어, 과연 불노는 혼자서만 돌아왔다. 영경은 일행을 데리고 다시 동굴로 들어갔다. 모두 자리잡고 앉은 후, 그녀는 주과 를 한 개씩 골고루 건네주었다. "구지선 언니는 벌써 전에 몇 개 자셨고, 이것 한 개는 여영남 언니몫으로 남겨 두죠. 진작부터 이 열매가 선과(仙果)이고 얻기 어려운 줄 알았더라면 내 그렇게 밥먹듯 먹어없애진 않았을 텐 데... 아마 저팔계(猪八戒)도 인삼과(人蔘果)를 그렇게 먹어보지는 못했을 거예요." 동문 사형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너도 나도 그 귀한 열매를 받아들고서 찬찬히 살피다가는 야금 야금 씹어먹었다. 낮에 독수리를 타고 오면서 들었던 대로 과연 진귀한 맛이었다. 입 속 그득하게 차는 향기와 달디단 맛은 다 먹고 나서도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제영운은 동굴 안쪽을 구석구석 세심하게 살폈다. 몇 칸 짜리 석실도 서넛이나 되고 돌로 만든 침상과 탁자, 부엌의 부뚜막, 화로 등등 필요한 것은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동굴 밖의 풍경 또 한 자못 그윽하고 청정했다. 여기가 이 정도라면 서운동 골짜기 아래 있다는 응벽애의 풍경이야 또 어떻겠는가? 그녀는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응벽애를 탐사하기로 작정했다. 제영운은 등불 아래서 새삼 영경의 모습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과연 어머니가 즉석에서 제자로 삼을 만큼 일신에 선풍도골(仙風道骨)을 갖춘 처녀였다. 말씨도 총명하기 짝이 없고 행적으로 보아 남자만큼이나 담대하고도 늠름한 기상을 지녔다. 마음가짐 또 한 서글서글하고 시원스러운 것이 여자다운 편협성은 눈꼽만치도 없는 것이다. 겨울하늘 별빛처럼 맑고도 싸느란 눈매가 사람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듯싶다. 그 눈빛을 바 라보면서 제영운은 문득 홍화모모의 제자 신약란과 비교해 본다. '영경은 이제야 비로소 우리 문하에 들어왔지만 이제껏 오랜 세월을 수련한 사람보다도 심후한 공력을 지녔다. 홍화모모의 진전을 이어받은 약란과 비교하더라도 정말 고하를 가려내기 어려울 정도로구나. 영경이 천생 기이한 품성을 갖추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은 하셨으나, 이 수준에까지 이르렀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과연 어머님의 안목은 대단하시구나!' 한창 다섯이서 둘러앉아 재미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참인데, 느닷없이 침상에서 잠을 자 던 구지선이 악을 버럭 지른다. "언니, 제발 이 불쌍한 동생을 버리지 말아요! 절 두고 가면 안 돼요... 가지 말아요!" 모두들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으나 이내 잠꼬대를 한 것을 깨닫고 씁쓰레 웃으면서 도로 앉았 다. 구지선이 겪었던 몹쓸 과거는 모두들 벌써 들어 알고 있었다. 거의 같은 나이또래, 같은 여자 의 입장으로써 그녀들은 하나같이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연민과 깊은 동정심을 억제하지 못했다. 더구나 제영운은 구지선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의 온화한 성품과 내면에 잠재해 있는 순결무 구함, 침착성을 꿰뚫어 보았다. 잠결에 또 무슨 악몽을 꾸었는가? 가위에 눌려 부르짖는 소리는 뭇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영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침 사건 抱不平, 余英男神針禦寇 尋仇隙, 魏楓娘飛劍傷人 이영경으로 말하자면 황막하고도 외딴 산 속 오래된 동굴에서의 적막한 생활이 습관처럼 된 몸 이다. 그런 그녀가 하루아침에 납치되다시피 하여 멀고먼 산천을 건너 기막힌 모험을 겪은 끝에 구사 일생 목숨을 건지고 돌아오면서 우연히도 비행절적(飛行絶跡)의 고강한 무공을 지닌 청년 남녀 검선들을 사귀게 되었으며, 또 이들과 함께 하고 많은 날을 살게 되었으니, 도무지 꿈만 같은 사 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밤도 이슥해졌는데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호들갑스럽게 성성이를 부려가면서 한동안 비워두었던 석실 안쪽을 깨끗이 청소했다. 또 한편으로는 물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있는 정성, 있는 재주를 다 부려서 때늦은 저녁상을 푸짐하게 마련하더니, 그것만으로도 성이 안 찼는지 이번에는 지난해 아미현 성내에서 사가지고 온 설날맞이 꽃장식 궁등(宮燈)을 사면 벽에 걸어 불 밝혀 놓고선 이윽고 잔치상 앞으로 손님들 을 청해다 앉혔다. 한바탕 바쁘게 수선을 떨고 나서도 그녀는 오직 기쁘기만 한 것이다. 그 바람에 금선과 약란마 저 기분이 들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영경의 손발을 도와준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성성이도 덩달아서 뭇 사람들 사이에 끼여 눈알이 빙글빙글 돌아갈 정도로 겅정겅정 따라다녔 다. 사면의 휘황찬란한 등불빛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동굴 안은 온통 때아닌 봄기운으 로 가득찼다. 왁자지껄 한밤중 소동 속에 깔깔대는 웃음꽃이 여기저기 활짝 피고 있었다. 제영운과 주문은 연화(煙火)의 음식을 끊은 지 오래였으나 그래도 아주 입에 대지 않는 것은 아 니다. 이들은 영경의 은근한 권유를 뿌리칠 수가 없어 요것조것 권하는 대로 맛을 보았다. 그토록 소란을 피웠는 데도 한쪽 침상 위에 엎드러진 구지선은 여전히 단잠을 깨지 못하고 꿈나 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단란하고 흥겨운 식사 도중에도 영경은 틈틈이 침상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악마 같은 귀도인에게 납치당해 온갖 욕을 당하는 동안 몇 날 며칠이나 편히 잠들어 보았을꼬? 가련한 지선 언니! 오늘 이후로는 악몽을 꾸지 않아도 돼요.' 영경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어젯저녁 그 악귀 같은 귀도인 교수등을 쳐죽이고도 교활한 당서(唐西)란 놈한테 그녀가 납치당할 뻔했던 그 순간을 연상하면 제삼자인 자기도 몸서 리를 칠 판인데 하물며 당사자야 얼마나 혼비백산을 했겠느냐 말이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한두 번 우여곡절을 겪은 게 아니다. 난생 처음 날짐승의 등에 타고 세찬 맞 바람에 기우뚱거릴 때마다 떨어져 죽을까 봐 시종 공포에 질린 채 쉴새없이 후들후들 떨던 몸의 감촉이 아직도 영경의 두 팔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녀는 구지선을 깨우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깨어나서 먹일 음식은 따로 덜어 불에 얹어놓았다. 영경은 다시 일행과 함께 둘러앉아 내일 아침 응벽애까지 내려갈 지하통로 굴착에 대하여 의논 했다. 그리고 얘기 끝에 해탈파(解脫坡)의 여영남(余英男)과 사귀게 되었던 사연을 들려주었다. 여영남이 광혜사태의 제자란 말에 영운은 깜짝 놀라며 반색을 했다. "<여위호(女韋護)> 광혜사태(廣慧師太)라면 바로 <한경선자(寒瓊仙子)> 광명사태(光明師太)의 사제 아닌가? 광명사태에 대해선 내가 좀 아는 게 있지! 그분은 한때 잘못 생각해서 <신수비구 (神手比丘)> 위풍낭(魏楓娘)을 제자로 맞아들이고 평생의 절기를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어. 한데 그 위풍낭은 말 한 마디 없이 사부 곁을 떠나서 신강(新疆) 지방 바크산(博克山)으로 숨었어. 그 리고 십 년 동안 빙설한풍(氷雪寒風)을 견뎌내면서 광명사태의 독문 절기인 천산파(天山派)의 술 법을 완전히 연성하고 나서, 사부의 명령이라고 빙자하여 서남방 각 성(省)을 두루 섭렵한 끝에 마침내 자기나름대로 유능한 제자들을 거두어들여서 문호를 열었다더군. 그래서 일문의 우두머리 가 되자 제 재간만 믿고 안하무인(眼下無人), 온갖 악행과 음란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면서 날뛰기 시작했던 거야. 그 못된 여자의 제자들이 바로 <서천팔마(西川八魔)>인 황수(黃繡), 설평 (薛萍), 전청선(錢靑選), 이홍영(李紅瓔), 공손무(公孫武), 여후(勵吼), 오인룡(伍人龍), 구령(邱鈴), 이렇게 남녀 여덟 명이지. 이 연놈들은 살인, 강도, 방화, 강간, 온갖 못된 짓이라면 밥먹듯 저지 르면서 설쳐대고 다녔어." 마침내 강호상에는 위풍낭이 광명사태의 제자요, 서천팔마는 위풍낭의 제자라는 사실이 쫙 퍼졌 다. 이에 광명사태는 노발대발, 그 길로 신강성 바크산부터 사천 일대까지 뒤져 위풍낭 일파를 추 적하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마침내는 위풍낭을 찾아냈다. 스승이 머지않아 자기를 찾아오리란 걸 안 위풍낭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맞대 결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티베트 마교(魔敎) 인물 중에서 부르잉가(布魯音加)란 번승(番僧)을 초빙해다 자기 소굴에 매복시켰다. 부르잉가는 요법을 잘 쓰는 놈이었다. 이렇게 만반의 대비를 갖춰놓고서 위풍낭은 거짓으로 죄악을 뉘우치고 사죄하면서 자기 스승을 유인해들였다. 고지식한 광명사태는 진정인 줄 알고 그녀의 소굴로 들어갔던 것이다. 스승이 방심한 틈을 타서 위풍낭은 부르잉가를 시켜 암습을 가했다. 짐독(斟毒)을 먹인 <오짐자 (烏斟刺)>로 공격했는데 광명사태는 천만다행, 목숨은 잃지 않고 왼팔만 잘린 채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올 수가 있었다. 제자의 소굴에서 탈출해 나온 후, 광명사태는 그래도 제자한테 당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지만 워 낙 호승심(好勝心)이 강한 터라서 자신이 제자와 싸웠다는 소문이 듣기가 싫어 복수를 단념하고 도리어 멀찌감치 피신하여, 귀머거리, 벙어리노릇을 했다. 그렇게 스승이 참견을 안하니까 위풍낭 은 더 기고만장, 자기 제자 서천팔마를 거느리고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날뛰었으며, 그녀가 저지 른 죄는 지옥의 염라대왕도 외면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위풍낭은 작년에 묘일부인과 찬하대사에게 걸려들어, 그녀는 성도(成都) 성 밖에서 두 사람의 손에 맞아죽고 말았던 것이다. "위풍낭의 술법만 믿고 날뛰던 서천팔마도 그제서야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지. 그놈들은 혼비백산을 해가지고 청라욕(靑羅欲)으로 숨어들어 가 꼬리를 감추고는 한동안 머리 를 내밀기는커녕 숨도 크게 못쉬고 살았지. 그 일이 있은 후, 광명사태는 우리 어머니와 찬하대사 님께 서신을 보내, 자기 대신 천산파의 문호를 다스려 준 데 대해 사례했어. 그리고 자기는 극악 무도한 제자의 독침에 찔린 상처로 머지않아 원적(圓寂)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죽은 위풍낭 이외 또 제자 둘이 있는데 하나는 별 재주가 없으나 여영남이란 제자는 썩 훌륭한 근골을 갖추었다고 하셨어. 또 애석하게도 여영남은 천생 불문(佛門)에 들 인물이 아니므로 사제 광혜사태의 문하에 임시나마 의탁케 했으니 어머니와 찬하대사님이 데려다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을 남겼지... 그러니까 영경 아우와 사귄 여영남이 바로 광명사태의 제자가 되는 셈이지?" 이영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전에 본인한테 들은 대로 차근차근 여영남의 신세를 말해 주었다. "영남 언니는 아주 어렸을 적에 양친을 잃고 숙모 손에서 자란 고아였어요. 그런데 그 숙모가 여간 못되지 않아 하고한날 구박을 당하다가는 여섯 살 어린 나이에 그나마도 쫓겨나고 말았대 요. 세상천지 어디 의지할 데도 없이 엄동설한에 쫓겨났으니 얼어죽기밖에 더하겠어요? 울며울며 눈바람을 맞고서 떠돌아다니던 끝에 굶주리고 추위에 지쳐 눈덮인 들판 위에 기진맥진 쓰러졌다 더군요. 한데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동굴 속 모닥불 결에 뉘여 있더래요. 또 처음 보는 여승 두 분이 자기를 주물러 주고 있더랍니다. 얼마후 두 분 중 연세가 지긋한 여승이 자기를 제자로 거두어들였대요....." 연경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어린 여영남이 동사(凍死) 직전에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지 며칠 후, 두 사람 가운데 젊은 여 승이 불현듯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 나이 지긋한 여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형, 이 애도 자질은 썩 훌륭한데, 어떻습니까? 또 먼젓번처럼 잘못 기르시지는 않겠지요?" 그러자 나이 지긋한 여승이 서글프게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대답했다. "자네가 그토록 염려되거든 이 애를 데리고 가게. 내 손에 구함을 받았으니 내게도 제자가 된 셈이나 마찬가지일세." 말을 마치고 나서 그 여승은 여영남더러 자기 사제에게 다시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올리라고 분 부했다. 결국 두 스승을 모시게 된 것이다. 여영남이 대례(大禮)를 올리고 일어서자, 젊은 여승은 승포(僧袍)자락을 활짝 헤치더니 가냘픈 영남의 몸을 품어안았다. 여영남은 승포자락에 휩싸여 갑갑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감히 입을 열지는 못하였다. 잠시 후 그녀는 갑작스레 써늘한 추위가 몰아닥치길래 살그머니 옷자락 틈새를 벌리고 바깥을 내다보 았다. 뜻밖에도 눈 아래쪽은 온통 흰구름과 백설 천지였다. 구름과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진 눈보라가 발밑을 '휘리리, 휘리리!' 지나쳐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녀의 어리디어린 마음에도 두 분 스승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기쁨과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반나절 남짓 지나서 새로운 스승은 어느 산 정상에 내려앉았다. 벌써부터 그녀가 옷자락 틈으로 내다보고 있었던 걸 여승도 짐작 했는지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어떠냐, 구름 속을 달려보니 꽤나 재미있었지?" 여영남은 그 자리에 무릎 꿇고 간청을 했다. "사부님, 저도 부처님 제자가 되게 해주세요!" "아직은 이르다! 먼저 네 사부의 이름부터 알려주마. 내 법명은 광혜(廣慧), 아까 그분은 광명(光 明)이란다. 바로 나의 사형이시지. 하지만 그분이나 나나 모두 너를 가르칠 수는 없단다. 알겠느 냐? 너하고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오로지 어린 네 목숨을 구하고 돌보아 주는 것뿐이란다. 만약에 네가 우리 두 사람의 무공을 배운다면 이 길로 좌도방문(左道旁門)에 빠질 것이고 우리가 너를 그르치게 만드는 결과가 된단 말이다. 언젠가는 너한테 올바른 기회가 온다. 그때 가서 배워 도 늦지 않을 테니까 서두르지 말아라." 당시 여영남은 광명, 광혜사태와 낯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데다가 어린 마음에 엄한 어른으로부 터 거절을 당하자 더 이상 보채지 않고 순종했다. 광혜사태의 정성어린 보살핌 속에 여영남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느 정도 철이 들자, 그녀는 스 승이 외출할 때마다 허공을 날아서 오가는 모습을 보고 여간 부러워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지 그 신통스런 재간을 배워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스승이 자기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고 아껴주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깜찍스런 아양 에 심술마저 부려가며 그 재간을 가르쳐 달라고 들볶았다. 광혜사태는 어린 제자의 성화에 견디다 못해 마침내 좌공연기술(坐功練氣術)과 경신술, 그리고 격검법(擊劍法)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만 해도 자신의 맹세를 깨뜨려가면서 크게 양보해 준 셈이 었다. 그러나 여영남의 욕심은 한이 없었다. 몇 년이 또 흘러갔다. 그녀는 스승이 이삼십 리 밖에서도 비검을 날려 적의 모가지를 베어내는 걸 목격했다. 그뿐 아니라 기막힌 매화침(梅花針) 발사수법까지 지닌 걸 알고서 그 두 가지 무공 마저 가르쳐 달라고 보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스승도 완강하게 거절했다. "내가 너한테 가르쳐 준 타좌어기술(打坐馭氣術)이 바로 비검술의 기초가 된다. 이제 처음 밝힌 다만, 그 술법은 아미파의 절친한 친구에게 배운 것이고, 네 비검술과는 완전히 기초가 다르단다. 너야 아직은 모를 터이나, 내 비검술은 사실상 정도(正道)가 아니라 좌도방문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만큼 순수하지도 못하다. 아미파의 좌공연기술을 익힌 네가 좌도방문의 비검술을 익히게 되 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고 몸을 망친단 말이다. 나야 더 이상 아무런 욕심도 없으니 기왕 배운 그 비검을 그대로 쓴다만 너의 자질은 너무도 훌륭하고 순수하다. 그런 너를 내가 그르쳐서 야 되겠느냐?" "그럼, 매화침 쏘는 법은 가르쳐 주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허허, 이 녀석은 정말 보는 것마다 모두 배우려고 덤벼드는구나! 매화침은 내가 위급할 때 호신 용으로 쓰려고 만든 것이란다. 네 녀석이 기를 쓰고 배우겠다 들볶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다행히 도 지금 네가 수련하는 내공(內功)과 아무런 상극이 되는 게 아니니까... 좋다, 가르쳐 주마!" 여영남은 드디어 매화침 발사법을 배웠다. 그것도 아주 훌륭해서 스승인 광혜사태마저 감탄할 정도로 절묘한 매화침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오 년 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스승 광혜사태를 따라서 서천(西川) 지방을 여행하던 중, 노상에 서 웬 강도떼가 표국(標局)의 화물을 강탈하는 걸 목격했다. 강도들은 재물을 빼앗은 다음 호송하 던 표사(標士)들마저 깡그리 쳐죽이려고 했다. 그 장면을 본 여영남은 의분(義憤)이 솟구쳐서 당장에 쫓아나가 강도떼를 때려 눕히려고 들먹였 다. 그러나 광혜사태는 제자를 만류했다. "서두를 것 없다. 이제 곧 누가 나설 테니까... 사실 저 강도들은 그래도 우리 문파와 관련이 있 는 놈들이니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스승의 말뜻도 미처 이해하기 전이었다. 과연 길가에서 웬 장사(將士)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오 면서 강도들에게 표사들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래도 강도떼가 듣지 않자 이내 병기를 빼들고서 싸움판이 벌어졌다. 그 장사의 무공은 대단했다. 하지만 강도들의 숫자도 너무 많았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이 중과부 적, 장사는 몰리기 시작했다. 진작부터 분통이 치밀던 여영남, 그 위급한 광경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있겠는가? 그녀는 스승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슬그머니 매화침 한 줌을 꺼내들고 기회만 엿보다가 강도들에게 집어던졌다. 매화침의 위력은 엄청났다. 급소를 맞은 강도들이 어디엔가 무서운 적수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 는지 화물도 표사도 장사도 모두 뿌리치고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광혜사태는 철부지 제자가 매화침으로 강도들을 쫓아버리자 대경실색, 그 길로 황급히 여영남을 이끌고 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엄하게 제자를 꾸짖었다. "넌 어쩌자고 일만 저지르는 게냐! 그 장사가 비록 위기에 몰리기는 했지만 그 숲 속에는 또다 른 고수가 숨어 있었단 말이다. 도대체 어쩌자고 사서 원수를 맺는 거냐?... 잘 듣거라. 한 사오 일 있으면 누가 날 찾아올 게다. 그러거든 내가 열흘 전부터 병이 나서 여러 날 하산한 적이 없 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 방문객이 아무리 무례하게 굴더라도 너는 절대로 경거망동을 해선 안 된 다. 그래야 또다른 사단(事端)을 면할 수 있을 게다. 꾹 참고 기다려라. 그자 역시 머지않아서 누 구에겐가 처치될 것이니까... 아무리 극악무도한 인물이기로소니 같은 문파끼리 상잔(相殘)을 해서 야 어디 쓰겠느냐?" 그날 밤, 광혜사태는 정말로 병이 났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병이라 영남은 놀랍고 당황한 나머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스승의 병 시중을 드느라 허리띠 한 번 끌르지 못한 채 꼬박 사흘을 지새웠 다. 나흘째 되던 날, 과연 스승을 찾아온 방문객이 한 사람 있었다. 방문객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암 자 안으로 다짜고짜 들어선 그녀는 자기 앞에 당돌한 자세로 버티고 서 있는 여영남을 보더니 어 처구니가 없는지 냉소를 터뜨렸다. "내 알량한 사부가 눈더미 속에서 웬 계집아이 하나를 구해냈다더니, 그게 바로 너로구나?" 콧대 세고 혈기왕성한 여영남이 그 모욕적이고도 도도한 언사를 그냥 넘길 리가 없다. 당장에 시비조로 반박을 하려는 참인데 광혜사태가 방안에서 먼저 신음소리를 섞어 묻는 것이었 다. "밖에 누가 오셨소? 내 병석에 누운지라 기동를 못하니 도우께선 양해하시고 이리 들어오시구 려." 여인은 그 말을 듣더니 여영남을 향해 또 한 번 코웃음치고선 대뜸 광혜사태의 방으로 들어갔 다. 여영남은 방문 바깥에서 귀를 기울이고 엿들었다. 광혜사태와 여인 간에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 었다. 여인은 광혜사태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 각 문파 검선 중에 이런 매화침을 쓰는 인물은 오직 내 사부와 사숙뿐이오! 여기 이렇게 증 거물이 있는 데도 아니라고 발뺌을 하실 셈인가요?" "나는 도대체 모를 일이네. 산에서 캐온 약초를 잘못 먹고 병이 난 지가 벌써 열흘일세. 이런 몸 으로 어떻게 산을 내려갔겠나." 광혜사태의 목소리는 힘도 없고 맥이 빠져 겨우 들릴락 말락했다. 병세가 더욱 침중해진 모양이 었다. 여영남은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가슴이 아팠다. 이 모두 자기가 경솔하게 참견한 때문이 아니냔 말이다. 스승한테 병을 들게 만들고, 또 모욕스런 힐문을 당하도록 한 장본인은 자기가 아닌가!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허나 다음 순간에 광혜사태가 연신 눈짓 을 보내 하는 수 없이 도로 물러나고 말았다. 한동안 포악스럽게 광혜사태를 몰아붙이던 여인이 제풀에 지쳤는지, 아니면 광혜사태의 병이 정 말인 줄로 알았는지 모르나 점점 말투가 가라앉고 반신반의하는 기색이다. "좋아요! 어찌 됐든 이 매화침을 쏜 놈하고 내 제자들에게 덤벼들었던 그 장사놈은 기어코 찾아 내서 내 비검으로 요절을 내고 말 테니까!" 방문을 열고 나서던 그녀는 바깥에서 기다리는 여영남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흉광 (凶光)이 번뜩였다. "요년, 내 앞장을 서라!" "싫어요!" 여영남은 고집스럽게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때 방안에서 스승의 호통이 터져나왔다. "네 요년! 내 밑에서 몇 년을 지내면서 배운 건 없고 앙큼만 늘었구나. 네 사형이 배웅해 달라는 데도 안하겠다니, 그런 버르장머리를 어디서 배웠느냐?" 여영남은 산에 오른 지 거의 십 년이 되었지만 여지껏 스승한테 이런 욕설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거역했다가 스승의 병세가 악화되면 어쩌나 싶어, 울분을 삭이면서 마지못해 그 여인을 동구밖까지 배웅해 나갔다. 한참 동안 묵묵히 걷던 여인은 퍼뜩 무슨 생각에 미쳤는지 후딱 고개를 돌리더니 귀신 같은 소 리를 외쳤다. "너, 요살맞은년! 그 일은 네 년이 몰래 저질렀지?" 말끝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이 번쩍 쳐들리더니, 푸르고 흰 두 줄기 검광이 쏜살같이 덮쳐들었 다. 여영남은 비검이 날아오자 그녀가 자길 죽이려고 독수를 쓰는가 싶어 혼비백산을 했다. "사부님, 살려줘요!" 그녀는 악을 고래고래 지르면서 다리야 날 살려라 뒤도 안 돌아보고 암자로 뛰어들어 갔다. 죽을 둥 살 둥 정신없이 스승의 병상까지 뛰어들어 털썩 고꾸라지자, 광혜사태는 그녀를 품속에 끌어안으면서 달래주었다. "놀랄 것 없다. 네 사형이 장난질로 놀려본 거니까." 뱀한테 놀란 참새새끼처럼 할딱거리던 여영남,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바깥에서는 아무런 기척 이 없었다. 갑작스레 광혜사태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혼자말로 중얼 거렸다. "이 애물덩어리는 정말 살려두어선 안 되겠구나!" 여영남은 깜짝 놀라서 다시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누르끼끼한 병색은 어느덧 간데 없고 얼굴에 는 여느 때처럼 불그스레하니 윤기가 감돌고 있었다. 스승은 정말로 병들어 누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도망쳐 들어왔던 바깥을 다시 흘끔흘끔 내다보았다. 등 뒤까지 바짝 쫓아오던 청백색 검 광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사부님이 그걸 빼앗았는가 보다!' 어찌 된 셈인지 물으려고 입을 여는데, 광혜사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방금 날 찾아왔던 여자는 <신수비구> 위풍낭이다. 내 사형 광명사태께서 이전에 자랑했던 문 하 제자였지. 또 네가 쏜 매화침을 맞은 강도떼도 위풍낭의 패거리들이다. 그때 네가 화근을 잘못 건드린 것을 보고서 반드시 그녀가 날 찾아오리라 짐작을 했지. 매화침은 사형과 나만이 사용하 는 독문절기니까, 위풍낭이 못 알아볼 리가 없거든. 그녀는 우리를 찾아와서 앙갚음을 안하곤 못 배기는 성미거든. 그래서 나는 진기를 체내 깊숙이 거두어들이고 병든 척 그녀를 속여서 따돌려 보낸 것이다... 뜻밖에도 이번 일로 네가 나한테 보인 효심과 진정이 정말 가상하기 짝이 없구나. 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위풍낭은 여기 들어섰을 때부터 내가 병들었단 말을 눈꼽만치도 믿 지 않았단다. 그녀 눈치가지고 내 꾀병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거든. 한데 말다툼 도중 네가 들어 와서 나의 병이 정말인 줄 알고 수심에 가득찬 기색을 보이자, 위풍낭은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하산하지 않았다는 걸 깊이 믿고 만 것이지... 방금 네 전송을 받으면서 나가다가도 그녀는 네가 일신에 선골(仙骨)을 지니고 영준한 자태인 걸 발견했다. 그리고 나한테서 비검술과 매화침 발사 수법을 모두 전수받은 줄 오해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하산을 안했더라도 너 혼자 몰래 내 려갔다가 그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 방금 너한테 강제로 배웅을 시키고 비검을 쏘 아 시험해 본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만약 네가 비검술을 익히고 있었다면 급박한 위기에서 반사적으로 검을 날려 상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녀는 내 사형의 적전절기(嫡傳絶技)를 남 김없이 전수받은 여자다. 너는 둘째치고라도 나 또한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란다. 아무리 극악무도 한 그녀라도 저항능력이 하나 없는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일 수야 없지. 그래서 너에게 독수를 쓰 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우리 사도가 과연 하산한 적이 없다고 굳게 믿은 나머지 비검을 거 두어들였던 것이다. 아마도 또 어디 가서 분풀이할 상대를 찾을 게다. 그 못된 계집년! 이젠 눈에 보이는 어른도 잊고 교만스럽게 횡포까지 부리다니! 악업(惡業)은 이미 꽉 찼으니까 얼마 못 가서 참혹한 죽음을 당할 것이다. 우리 사도가 구태여 건드리지 않아도 그녀 스스로 자업자득, 업보를 받게 될 게야. 재주가 아깝지만....." "... 영남 언니는 그 풍파를, 겪고 나서부터 연검(煉劍)의 욕심이 더욱 불붙었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내공단련에 정진하는 한편으로 줄기차게 광혜사태를 졸라댔죠. 그러나 그분은 오늘 에 이르기까지 막무가내로 단 한 줄의 비검구결도 전수해 주지 않았어요. 제가 아미산을 떠나기 전, 영남 언니와 만났을 때 저한테 여러 가지 타좌척검법(打坐刺劍法)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그 구결은 후에 사부님 묘일부인께서 전수해 주신 것과 아주 닮은 데가 있더군요... 당시 영남 언니는 '머지않아 동생이 사는 이리로 옮겨와서 함께 살겠다' 했으니까, 내일 아침 여 러 언니들과 응벽애 통로를 뚫는 일만 끝나면 제가 해탈암으로 내려가서 영남 언니를 모셔와야겠 어요." 이영경의 설명은 끝났다. 제영운도 여영남을 데려와 함께 살겠단 의견에 적극 찬동했다. 이렇듯 새로 사귄 사형, 사매들은 한자리에 둘러앉아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의기 가 투합된 젊은이들은 너 나 할것없이 신바람나게 지난 과거의 경험담과 모험담을 주고받느라 연 공(練功)할 것도 잊고 잠자는 것도 잊었다. 그들은 날이 훤하게 밝아올 때까지 줄곧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침상에서 하룻밤을 꼬박 자고 난 구지선도 부시럭부시럭 눈을 비비면서 깨어났다. 동굴 입구로 부터 비쳐 들어오는 아침햇살을 보더니 그녀는 아직도 달빛인가 했다. 한쪽에서는 뭇 사형, 사매 들이 둘러앉아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니,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주무시지 않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서 신약란이 깔깔 웃는다. "언니는 아직껏 꿈을 꾸고 있수? 날은 벌써 밝았단 말이에요. 우리들은 어제 밤새도록 신나게 얘기판을 벌였거든. 누구 하나 자리도 뜰 수 없을 만큼 진진하게 놀았어요. 언니 한 분만 실컷 주 무셨지!" 날이 밝았단 말에 아연실색, 구지선은 다급하게 침상 아래로 기어내려 왔다. "이게 어찌 된 셈이야? 내 어쩐 일로 그토록 고단했지? 잠시만 드러누워서 쉰다는 게 아예 하룻 밤을 꼬박 돼지처럼 쿨쿨 잤단 말이네! 어머나 부끄러워... 그런데 여러분도 여러 날 좋이 고생을 했을 텐데 졸립기는커녕 망아지들모양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기만 하니, 정말 놀랐어!" 그러자 영경이 말을 받았다. "모르시는 말씀... 검술을 연성한 언니들은 둘째치고라도 나처럼 수박 겉핥기로 좌공(坐功)을 익 힌 사람이면 사나흘 잠을 안 자는 것쯤이야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죠. 지선 언니, 그렇게 눈이 휘 둥그래질 것 없다우." 피곤한 사람은 잠을 푹 잤고, 나머지는 쉴 것도 없으니까, 이제는 응벽애 통로를 뚫으러 갈 일만 남았다. 일행 여섯은 모두 기분이 들떠서 영경을 도와 물을 끓이고 조반준비를 시작했다. 밤새껏 돌탁자 곁에 엎드려 있던 성성이도 주인 영경을 따라 부엌으로 뛰어들어 가더니 아궁이 에 장작을 지피고 물을 끓여 내왔다. 모두들 더운 물에 세수하는 걸 보고서 그 녀석도 따라서 ' 허푸, 허푸!' 얼굴에 물칠을 하더니 대야째로 바깥에 내다 던졌다. 신약란과 금선은 영경의 아침 준비를 도왔다. 금선은 남자지만 그래도 달가닥 달가닥 그릇 씻는 게 여간 재미있지 않았다. 구지선은 세수도 마다한 채 식탁 위에 수저와 접시를 늘어놓았다. 모두들 한바탕 수선을 떨고 나자, 영경은 죽을 끓여 내오고, 또 절인 사슴고기 한 쟁반, 절인 채 소 한 쟁반을 듬뿍 담아가지고 나왔다. 금선과 약란은 사슴고기에 입맛이 당겼는지 한 입 먹을 때마다 칭찬이 그칠 줄 몰랐다. 주문이 그 꼴을 보고서 깔깔댔다. "금선 동생, 구화산에 살 때는 검소하게 사느라 못 먹고, 벽사촌 옥청대사님이 소식(素食)과 육 식(肉食)을 그토록 많이 준비해 내놓았을 때는 체면 때문에 못 먹더니, 망창산엘 한 번 다녀오고 서는 아예 아귀(餓鬼)로 변하고 말았군. 오늘 겨우 이틀째인데 영경 사매 집에 돼지 한 마리가 생 겼어! 남들이 놀리는 줄도 모르나 봐?" 주문에게 놀림을 당하자, 금선도 지지 않고 맞대거리를 했다. "히힛, 저것 봐? 주누이도 저렇게 정신놓고 사슴고기를 뜯잖아? 그러면서 남의 탓을 뭣하러 하 누? 독수리 먹이까지 싹 쓸어먹으면 그놈도 주누이를 좋아하지 않을 텐데... 히힛!" 주문이 또 대거리를 하려 들자, 영경은 두 사람의 입씨름을 얼른 가로막았다. "주언니, 금선 오빠, 걱정들 할 것 없어요. 얼마든지 잡수셔도 넉넉하니까. 우리가 다 먹어치우고 나선 금안사형을 시켜 또 잡아오게 하죠. 몇 번만 갔다 오면 진력이 나도록 실컷 자실 수 있거든 요. 우리 모두가 친형제, 친자매들이나 마찬가진데 누굴 놀리겠어요? 금선 오빠, 마음 푹 놓고 잡 수세요." 주문이 새침해져서 코웃음을 쳤다. "난 그저 금선 동생의 먹성이 너무 버릇없길래 호의적으로 한두 마디 해본 것뿐인데 도리어 나 에게 훈계를 하는구먼! 이렇게 불에 익힌 음식은 일 년 가야 두 번 먹기도 힘들고, 또 영경이가 하도 은근하게 권하길래 처음 먹어 보는 사슴고기가 싱싱하다 싶어 이제 겨우 두 젓가락 먹었을 뿐이라구요... 저것 봐, 금선 동생은 늑대같이 한 쟁반 고기를 절반이나 먹어치웠잖아? 좋은 말로 타일렀더니만 되레 날더러 독수리 먹이까지 싹 쓸어 먹었다고 탓하다니? 내가 언제 네 걸 뺏아 먹었어?" 금선은 뾰로통해진 주문의 얼굴을 보고서 당장 고개를 떨군 채 주섬주섬 먹기만 할 뿐, 더 이상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제영운도 금선과 주문이 티격태격 말싸움하는 데 이골이 난 터라, 참견조차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여태껏 사슴고기에 젓가락도 안 대봤지만 모두들 다투다시피 진진하게 먹는 걸 보고서 자기도 이끌려서 한 조각 집어서 씹었다. 과연 젓가락 다툼을 벌일 만큼 맛이 기막힌 고 기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젓가락이 자꾸만 쟁반으로 뻗어갔다. 먹을수록 진미였다. 그녀는 마침내 금선을 돌아보곤 웃었다. "너희 둘이서 다툰 것도 무리는 아니로구나. 어쩌면 사슴고기가 이렇게 맛있니? 영경 동생은 나 이도 어리고 깊은 산중에 혼자 살면서도 이토록 살림살이가 짜임새 있고, 또 무슨 음식이든 맛깔 스럽게 솜씨를 부릴 줄 알다니, 약란 동생과 함께 재간덩어리로는 쌍벽(雙璧)이야. 그러니 남들한 테 귀염도 받고 찬사도 받게 마련이지! 이렇게 손님들을 은근히 환대하다간 어디 이 서운동까지 남아나겠어?" 신약란은 곁에서 주문과 금선이 입씨름을 벌여도 모른 척하고 그저 입맛 다셔가며 먹기만 하다 가 제영운이 자신까지 도매금으로 칭찬을 해주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아이 참, 언니도! 어째서 저까지 끌어넣어요? 제가 언니들보다 나은 게 뭐가 있단 말이에요? 기 껏해야 돌아가신 사부님한테 어리광이나 부리며 배운 재간으로 대접해 드렸는 걸. 그거야 다 익 은 밥 뜸만 들이기죠." 이영경은 금안사형 생각이 났는지 총종걸음으로 사슴 뒷다리 두 개를 꺼내가지고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 구지선은 주문과 금선 두 사람이 서로 뻗대다가 진퇴양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걸 안타깝 게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금선 쪽이 먼저 풀어진 걸 눈치채고서 화해를 붙이기 쉬우리라 싶어 주문을 달래보았다. "언니, 화내지 말고 어서 들어요. 식으면 맛이 없거든." 일단 말을 꺼내고서 계속 금선과의 화해를 붙이려는 참인데 영운이 얼른 가로막았다. "저 애들 화해 붙일 것 없어. 두 사람 모두 늘 저 모양이니까." 주문은 대뜸 영운이 동생 역성을 든다고 오해하고 말았다. 한두마디 쏘아붙이려다가는 문득 계 화산까지 병든 자기를 정성으로 보살펴준 그녀의 은공이 떠올라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 니 점점 금선만 더 미워질 수밖에 없었다. "독수리나 보러 가야지!" 그녀는 발딱 일어나서 혼자 동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녀가 나가버리자, 금선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자기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났으리라 생각하고선 비맞은 중처럼 툴툴거리면서 쑥스럽게 뒤따라 일어나서 어정어정 쫓아갔다. 신약란은 천진난만해서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영운 말고는 나이가 제일 많은 구지 선이 두 남녀 사이의 감정이 보통과 다르다는 것을 간파했다. '알고 보니 검선들 사이에도 여느 사람처럼 남녀간의 애정은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기의 약혼자 견유명(甄維明)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리고 자기의 처지가 한 스러워 자못 비감에 빠지고 말았다. 식탁 앞에 멍청하니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제영운이 부드럽게 말을 건네었다. "동생,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어! 곁에서 보자니까 너무도 처량하구려. 말해 봐요. 우리 모두가 자매들인데 얼마 안 되는 힘이지만 우리가 힘껏 도와드릴게." "아니에요. 나는 너무 엄청난 환란을 겪고 나서부터 온갖 꿈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 버렸어요. 그 동안 그저 죽지 못하는 게 한이었지요. 사부님께 구함을 받고 또 제자로 거두어 주셔서 여러 신 선 같은 언니들과 길이 함께 살게 된 것만도 정말 평생 다시없는 행운이죠. 하지만 이 동생은 천 성이 노둔하고 자질도 얕아서 도를 이루지 못할까 보아 두렵기만 해요. 사부님께도 실망을 안겨 드리고 또 언니들의 두터운 정을 버리지나 않을지... 그것 말고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영운은 그녀가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자 더 이상 추궁을 하지 않았다. 남은 음식을 독차지하고서 푸짐하게 먹어치운 신약란, 이윽고 수저를 놓았다. 그제야 제 할 일이 생각난 듯 영운에게 말을 건넸다. "언니, 해도 한창 떠올랐네요. 제가 나가서 사형하고 두 아가씨를 모셔올 테니까 함께 응벽애 통 로를 열 일부터 의논하죠." 그리고 나서 신약란은 바깥으로 나갔다. 이영경은 절벽 끝에 서서 까마득한 계곡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문과 금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생, 사형과 주언니는 어디로 가셨지?" "주언니는 방금 나하고 얘기를 나누다가 금선 사형이 뒤따라 나오는 걸 보더니 성성이를 데리고 동굴 뒤쪽으로 가더군요. 사형도 쫓아갔는데, 아마 매화꽃을 따러갔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방금 금안사형더러 영남 언니를 데려오라고 보냈어요." 꿩 대신 닭 輕嗔簿怒 同摘梅花 慧質仙根 共尋碧澗 약란은 문득 두 사람이 방금 전 사슴고기를 먹다가 말다툼을 벌이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렇지, 금선 사형이 주문 언니한테 사과하려고 뒤쫓아 갔을 거야.' 그녀는 영경이 가리키는 쪽으로 걸어갔다. 동굴 뒤편 암벽을 돌아서자마자 주문의 웃음소리가 들리길래, 무슨 아기자기한 얘기를 하는가 싶어 얼른 한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엿듣기 시작했다. 주문이 또 까르르 웃었다. "저런 녀석 봤나! 꽃은 따기도 전에 꽃잎 소나기부터 내 머리에다 퍼붓는구나... 아니, 그것 말고 저쪽이야! 그래... 저기 비스듬하게 뻗은 가지를 꺾으라구! 아니야, 누가 그렇게 굵은 걸 달랬어? 그건 집에 갖다가 장작불이나 지펴야 되겠네!" 신약란은 부지불식간에 그윽한 꽃향기가 콧속으로 흠뻑 스며드는 걸 느꼈다. 살그머니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암벽 곁에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가 우뚝 자라고 있는데 가지마다 온통 매화가 무 성한 것이 사뭇 장관을 이루었다. 주문은 나무 아래 선 채로 이것저것 흐드러지게 핀 꽃가지를 손가락질해 가리키면서 외치고 있 는데, 고목 위에는 금선과 성성이란 놈이 올라타고서 주문이 가리키는 꽃가지를 꺾는 중이었다. 얼마 있더니 금선은 주문이 바라던 대로 자그만 가지를 꺾어가지고 내려왔다. 뒤미처 성성이란 놈도 대여섯 자나 됨직한 큰 가지 하나를 우지끈 부러뜨려 들고서 내려왔다. 금선과 성성이는 제각기 매화가지를 주문한테 건네주었다. "흥, 네것은 필요없어! 안 받는다구." 주문은 금선이 내민 가지를 밀치며 사뭇 눈을 흘겼다. 화가 아직껏 안 풀린 듯 뾰로통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꺼운 빛이었다. 그녀는 성성이가 내민 그 무지막지스런 나뭇가지를 받아들고 홱 돌아섰다. 성성이란 놈은 신바람이 났다. 의기양양해 가지고 사람의 말투를 흉내내어 금선한테 한 마디 던 졌다. "네꺼 필요없어! 안 받는다." 주문에게 면박을 당하고 가뜩이나 속상한 판에 짐승한테까지 놀림감이 되자 금선은 그만 부아통 이 터지고 말았다. 대뜸 주먹을 휘두르면서 성성이란 놈에게 덤벼들었다. 짐승은 기급을 해서 펄 쩍 뛰더니 꽁무니가 빠져라고 쏜살같이 절벽 아래로 도망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놈은 그림자 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얄미운 짐승을 쫓아버리고 나자 금선은 주문에게 돌아서서 사과를 했다. "누나, 아직도 화났수? 요 다음부턴 내 다시 누나한테 말대거리 하지 않을게." 그러나 주문은 그 자리에 선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금선은 온갖 말로 아첨을 떨면서 그녀의 비위를 맞추느라 입이 쉴 새가 없었다. 두 손으로 받들 어 그녀 앞에 내민 꽃가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누나, 이게 더 예쁘지 않아? 내 잘못했다구... 아야, 어깻죽지 떨어지겠어. 이거 어서 좀 받아줘 요!" 사내녀석이 너무 아양을 부리고 끈덕지게 졸라대니, 주문도 토라졌던 속이 풀렸다. 피식 웃으면 서 마지못해 금선의 꽃가지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숨어서 엿보고 있던 철부지 약란은 너무도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키득키득 터져나오는 웃 음을 억누르다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언니, 오빠! 아니 지금 몇 신데 아직도 꽃놀음을 하고 있수. 호호호... 큰언니가 빨리 오시래요. 응벽애로 내려갈 준비도 해야잖아요!" 두 남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신약란이 바위 뒤편에서 낄낄거리며 불쑥 나타나자, 주문은 저 도 모르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이내 새초롬해져서 금선을 더 이상 거들떠보지 도 않고 싹 돌아서서 가버렸다. 금선은 무안해져서 내밀고 있던 꽃가지를 엉거주춤 거둬들이고선 맥풀린 걸음걸이로 약란의 뒤 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동굴 앞 공터에는 벌써부터 일행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탈암으로 보냈던 독수리도 어느 새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여영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영경은 흰색 반소매 옷 한 벌을 손에 들고서 영운, 지선과 무슨 얘긴가 한창 나누고 있었다. 주 문, 금선, 약란은 후딱 달려가 합류했다. 이영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 조금 전에 금안사형을 시켜서 영남 언니를 데려오게 했지요. 우리와 함께 응벽애로 내려가자 고 말예요. 그런데 언니 대신 이 옷 한 벌만 가져왔지 뭐예요. 영남 언니가 암자에 있더냐고 물었 더니, 금안사형은 고개를 흔드는군요. 아무래도 사부 광혜사태님을 따라서 어디 외출했는지....." 제영운도 사뭇 의아스런 기색이었다. "독수리가 빈손으로 돌아온 걸 보면 영남은 암자에 없는 게 분명하군. 한데 이 반소매 옷은 또 누가 내주었지? 이걸 돌려보낸 까닭은 무엇일까? 무슨 의미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 이때, 독수리는 갑자기 쇠부리로 영경의 옷자락을 몇 번 끌어당기더니 해탈파 쪽을 향해서 '꾸 우, 쿠르르!' 두어 차례 우짖었다. 영경은 무슨 짐작이라도 되었는지 사형들에게 말했다. "저하고 금안사형은 함께 산 지 오래 되었어요. 그래서 몸짓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알아맞히죠. 지 금 절 잡아끌고 해탈파 쪽을 가리킨 걸 보면 영남 언니가 큰 병이 들어 돌봐주는 사람도 없는 모 양이군요. 언니 입던 옷을 가져온 것은 절더러 가서 돌봐주라는 뜻인가 본데....." 그러자 독수리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꺼억, 꺼억!' 우짖더니 머리를 연신 내저었다. 이쯤 되면 영경도 요령부득,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주문이 선뜻 나서더니 시원시원하게 해결방안을 내놓았다. "그거 뭐 어려운 일인가? 해탈파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면서! 이런 일 가지고 속들 썩일 것 없지. 날도 아직 한창인데 큰언니는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서둘러서 응벽애 통로를 뚫기 시작하 세요. 제가 영경 아우 대신 해탈파로 내려가 보겠어요. 만약 여영남이 정말 병들어 누웠다면 저한 테 약이 있어요. 지난번 <숭산이로>께서 주신 영단이 남았으니까 그걸 두어 알 먹여서 업고 돌 아오면 되지 않겠어요?" "아, 주언니가 그렇게 해주신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네요! 저는 여기 남아서 언니들 안내를 해야 하니까....." 영경은 크게 기뻐서 그녀에게 해탈파로 내려가는 길목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리고 금안사형을 타고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독수리는 그 말을 듣더니 영경이 뭐라기도 전에 뒤뚱뒤뚱 주문에게 다가가서는 냉큼 쭈그려앉았 다. 주문은 신바람이 났다. 선뜻 독수리 등에 올라타자, 날짐승은 푸드득 나래를 치고 솟구치더니 일 행의 머리 위를 한 바퀴 선회한 다음 곧바로 창공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 남은 사람들에겐 응벽애 통로를 개척할 일이 급했다. 모두들 시시덕거리면서 동굴 안으로 들어 가서 영경의 안내를 받아 후동 석실에 모였다. "아니!" 앞장서서 인도하던 영경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제영운이 물었다. 영경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탈암자는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 금안사형이 어째서 그리로 내려가지 않고 반대편인 서 남쪽을 향해 솟구쳤을까? 이상하네요. 여지껏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내 생각엔 그 독수리는 백미사조님께 여러 해 동안 경을 익힌 신조라서 보통 날짐승하곤 다를 거야. 주문 아우를 태우고서 그쪽 방향으로 서슴없이 날아간 걸 보면 무슨 곡절이 있어서 그랬을 성싶은데... 아무튼 독수리도 신령스럽고 주문 아우 역시 나약한 사람은 아니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얼마 안 있으면 돌아와서 얘길 해주겠지. 자, 서둘러서 우리 할 일이나 시작하자구!" 제영운은 영경을 재촉해서 앞장세우고 어머니 묘일부인이 가르쳐준 방향을 따라 석실 뒤쪽으로 계속 들어갔다. 이윽고 반 칸 남짓한 석실 끝에 다다르자 돌벽이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두드려 보았더니 돌벽은 여간 단단한 게 아니었다. 제영운은 뚫어야 할 부분을 어림으로 가늠하고 나서 신약란에 게 자연서(紫煙鋤)를 꺼내들라고 분부했다. 쿵, 쿵! 화강암의 석벽을 내리찍자, 호미 끝에서 자줏빛 광채가 번쩍번쩍 빛나면서 석실이 온통 자욱한 연무(煙霧)로 휩싸였다. 십여 차례도 안 걸려 그 단단하던 화강암 석벽은 맥없이 조각조각 부서져 떨어지고 마침내 높이 예닐곱 자, 너비 두 자 남짓 되는 석문이 뚫렸다. 일행은 그제서야 석벽의 두께가 석 자도 넘는 것을 보고서 자연서의 위력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잠깐 멈춰요!" 영운은 신약란의 행동을 중지시키고 앞장서서 돌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과연 옛날의 후동 (後洞) 출입구가 분명했다. 거대한 화강암의 석벽은 뒤에 다른 데서 옮겨다 봉쇄한 것이었다. 출구 바깥에는 두 장 남짓한 공터가 있고, 그 한 끝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비탈로 이루어졌는데, 그 아래쪽은 캄캄절벽이었다. 공터의 주변은 글자 그대로 천야만야한 낭떠러지였다. 안개 구름만 뿌옇게 시야를 가리워 도무지 밑바닥을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공터 한가운데 일 장 둘레에 두께가 서너 자나 되는 바윗덩어리가 놓여 있는 데다 바위 가장자 리는 온통 부적(符籍)의 주문(呪文)이 새겨져 있었다. 그 바윗덩이 아래가 바로 응벽애로 통하는 첩경인 것이다. 호미를 든 신약란이 앞으로 나섰다. 동문 사형들이 둘러싼 가운데 적당히 자리잡고서 바윗덩어 리 위에다 자연서를 힘껏 내리쳤다. 탕!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이 울리면서 금빛 불똥이 번쩍 하고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바위는 흠 집 한 군데도 없이 요지부동이었다. 반변대사의 위력적인 진산지보(眞山之寶) 자연서를 맞고서도 깨어지기는커녕 옴짝달싹도 않는 것이다. 제영운은 자연서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 보고서 필경 백미화상의 법력(法力) 때문 이라고 직감했다. 그녀는 여전히 힘들여 바위를 치는 신약란을 제지시키고 일행들과 함께 바위 앞에 무릎 꿇고 묵도(默禱)를 올렸다. '백미사조님, 저희 젊은이들에게 응벽애를 열어주소서. 사조님의 동천복지(洞天福地)에 내려가 공업(功業)을 이룩하고 제세부민(濟世扶民), 군마소탕(群魔掃蕩)할 힘을 기르도록 이끌어 주소서.' 간절하게 심원(心願)을 바치고 일어서자, 불현듯 눈앞에 금빛 한 줄기가 번쩍 일더니, 어느 새 바위에 새겨졌던 부적이 스스로 자취없이 사라져 버렸다. "약란 아우, 다시 한 번 힘차게 바위를 쳐봐요!" 영운의 분부가 떨어졌다. 신약란은 부적이 사라진 것을 보고서 용기 백 배, 자연서를 고쳐잡고 바윗덩이를 내리쳤다. 호미날이 떨어지자, 그 거대한 바위는 쩍! 소리를 내면서 서너 조각으로 부 서졌다. 제영운과 이영경도 일제히 장검을 뽑아들고서 약란의 호미질에 합세했다.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못되어 바윗덩이는 산산이 쪼개져나가고, 그 밑바닥에 마침내는 석굴이 쩍 하니 자취를 드러냈다. 영운은 석굴 어구에 허리를 구부리고 내려다보았다. 굴 속은 온통 암흑천지였다. "이 지하굴은 응벽애로 통하는 지름길임에 틀림없어.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걸... 지금쯤 주문 동생도 해탈암에 도착했겠지. 그 애가 돌아오거든 천둔경으로 비춰보면서 내려 가야 되겠어." 이때 신약란은 문득 금선의 혜안(慧眼)을 생각해냈다. 복선담에서 그만큼 무서운 연무(煙霧)도 꿰뚫어 본 안력(眼力)이라면 이쯤 어두운 거야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흘낏 뒤돌아 보면서 금선 을 찾았다. 한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 금선 사형은 어딜 갔지?" 영운도 그제서야 동생이 없는 걸 깨달았지만 이내 알아냈는지 고개를 내젓는다. "그 녀석, 뻔해. 주문을 뒤쫓아 갔겠지 뭐." 그녀의 추측은 틀림없었다. 주문이 독수리를 타고 날아 올랐을때, 금선은 기분전환도 할 겸 또 주문에게 못다한 사죄도 할 요량으로 석실에 들어오면서 맨 뒤꽁무니에 일부러 붙었다가 제영운, 신약란 등이 바위를 깨뜨리느라고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슬쩍 빠져나와 곧장 주문의 뒤를 쫓아 갔던 것이다. 어둠 속을 인도할 앞잡이 두 사람 모두 없고 보면 영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금선과 주문이 돌아오거든 다시 착수하기로 마음 먹고 일행을 데리고 동굴 바깥으로 물러나왔다. 예상 외로 주문과 금선은 두 시진이 훨씬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독수리의 등에서 내려서기가 무섭게 주문은 영경을 향해 물었다. "영경이 말한 그 여영남, 아무래도 누구한테 납치당한 모양이야! 이걸 어쩌면 좋아?" "납치를 당하다니요? 그럴 리가... 도대체 어딜 다녀온 거예요?" 대경실색을 한 이영경이 다급하게 되물었다. "글쎄 말이지, 독수리는 날 태우고선 곧바로 아미산을 벗어나 육칠백 리나 날아가지 않겠어? 그 리고도 아래쪽으로 내려갈 기색이 없길래 나는 매우 이상스럽다 생각했지. 독수리는 틈만 있으면 뒤를 돌아보고 '꾸우, 쿠르르!' 우짖는 거야. 자기 딴에는 우리의 검광보다 빠르다는 걸 자랑이라 도 하는 듯싶더군. 거기서 또 몇 백 리를 더 날아가더니만 이름도 모를 큰 산악으로 하강하길래 나도 몹시 긴장을 했지. 땅에 내려서서 얼마쯤 가자니까 이내 동부(洞府) 한 곳이 나타나지 않겠 어? 조심스레 살펴보았지만, 동굴 입구는 단단히 봉쇄되고 인기척도 없었어. 누군가 살긴 사는 모 양인데 어딜 갔는지 아무도 안 보이더군. 사면 팔방 경치도 기가 막히게 좋은 곳이야... 도대체 영 문을 몰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는 참인데 독수리가 또 껑충껑충 뛰어오더니 내 앞에 쭈그려앉 길래 다시 올라탔지. 아무래도 독수리가 지쳐서 거기 잠깐 쉬느라 내려왔나 보다 생각했어. 독수 리는 도 하늘로 날아오르더군. 한데 가는 방향이 왔던 길로 되돌아 가는 게 아니겠어? 얼마쯤 가 다 보니 금선 동생이 뒤쫓아 오더군. 그래서 독수리 등에 올라타게 했지... 독수리는 그때서야 영 경 아우가 말한 대로 그 해탈파를 향해 날아가더니 암자 앞에 내려섰어. 해탈암 안에는 웬 노파 가 죽을상이 되어 가지고 정신없이 염불을 외고 있더니만 우리가 허공에서 날아내리는 걸 보고 혼비백산, 벌벌 떨더군." 주문이 암자를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그제서야 노파는 자기가 본래 광명사태의 시중꾼이었으나 후에 다시 광혜사태를 모시게 되었다고 신분을 밝혔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광혜사태는 닷새 전 그 암자에서 좌화(坐化)하여 서방 극락세계로 갔다는 것이었다. 여영남은 노파와 함께 스승을 매장하고 나서 고인의 유언대로 아미후산 영경이 있는 곳에 합류 할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그런 한편 사흘 동안 날마다 영경이 돌아왔나 어쩌나 해서 계속 아미 후산을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난데없이 여도인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는 영남이 자기와 인연이 있 다며 억지로 제자를 삼으려고 했다. 영남은 싫다고 우겼지만 그 여도인도 술법이 여간 아니어서, 협박을 당하고 시달리다 못해 하는 수 없이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굴복하고 말았다. 여도인은 그 길로 영남을 데리고 떠나려 했지만 영남은 영경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여도 인에게 혀가 닳도록 사정을 했다. 그래서 여도인이 이틀의 여유를 주었는데, 영남은 영경이 돌아와서 자기를 못 찾을까 보아 편지 를 한 통 써서 영경의 동굴에다 남겨놓았다. 그리고는 오늘 새벽, 그 여도인한테 끌려간 것이다. "우리가 하루만 일찍 왔더라면 만났을 텐데... 떠나면서 영남은 노파더러 '암자 안의 가재도구랑 재물은 다 정리해 가지고 떠나세요. 만약 이씨 성을 가진 아가씨가 절 찾아오거든 내가 잡혀간 사실을 꼭 전해 주세요'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는 거야. 노파는 날 보자마자 영경으로 오인하고 부 탁받은 대로 낱낱이 일러주지 뭐야. 영남을 납치해 간 여도인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더니만, 성 은 음씨(陰氏)라든가 했는데, 자기보다 몇 살쯤 더 먹었고, 생김새나 옷차림새는 자세히 기억을 못하겠다더구만. 허나 말투를 들어보니까, 그 여도인은 절대로 정파인물이 아니더래. 결국 여영남 은 강제로 납치당해 간 게 틀림없어... 그런데 처음에 독수리가 엉뚱하게 나를 데리고 간 그 동부 (洞府)는 여도인의 소굴인지도 몰라. 하기야 웬만한 검선의 검광보다 빠르게 날아갔으니 그 납치 범보다 앞서 우리가 먼저 도착했는지 모르겠는데." 일행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주문의 기막힌 보고를 들었다. '아차!' 구지선이 속으로 부르짖었다. 불현듯 어젯밤 침상 위에 누울 때 보았던 편지 봉투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 그 편지 겉봉에는 분명 '영경 보아라'라고 쓰여 있었지. 그걸 어디다 두었더라? 영경은 독수리한테 먹이를 주려고 나갔고, 일행들도 따라 구경을 나갔고... 나는 고단해서 잠시만 누워 쉰 다는게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곯아떨어졌고... 편지는... 그래, 맞았어! 이불 속에다 그냥 놔두고 일 어났지!... 헌데 이 노릇을 어쩌나? 여영남이 오늘 새벽에 끌려갔다니... 어젯밤에만 영경이 그 편 지를 뜯어봤더라도 일이 달라졌을 게 아닌가. 내 잠이 남의 운명을 그르쳐 놓은 모양이다. 이걸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하는가? 큰일이구나!' 구지선은 속이 탈 대로 탔다.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남의 다급한 상황에 잘못을 저질렀으니 어째 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영경의 당황한 음성이 그녀에게 천둥 벼락보다 크게 울렸다. "그 노파 말대로 영남 언니가 끌려가기 전 우리 동굴에 편지를 남겼다면, 어째서 본 사람이 하 나도 없지?" 지선은 영경과 그 여영남이란 처녀 사이에 교분이 보통을 넘는 것인 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안타까와 발을 동동 구르는 영경을 보고서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 하물며 자신도 무심결에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닌가? 그녀는 허겁지겁 영경의 말 끝을 잡았다. "아 참, 엊저녁 내가 피곤해서 돌침상에 누울 때 편지 하나 놓인 걸 봤는데, 뭐라고 쓰였는지 자 세히 보지 못했어요. 그때 몸이 너무 고단한 바람에 그냥 엎어져 잠들었는데 이부자리 밑에 깔렸 는지 모르겠네." 영경은 두말도 기다릴 것 없이 후딱 안으로 들어갔다. 이부자리를 걷어냈더니 과연 편지가 한 통 놓여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여영남의 친필이었다. 그리고 사연이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십여 일 전, 여영남은 아미후산 동굴로 영경을 찾아왔다가, 동굴 문이 단단히 잠겨 있는 것을 보 았다. 혹시 부근 어딘가에 놀러나갔는가 싶어 한바탕 둘러보았으나 그녀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 다. 당초에는 독수리를 타고서 나갔는가 해서 그냥 돌아갔으나, 며칠을 연달아 방문해도 그때마다 없으므로 급기야는 동굴을 봉쇄해 놓은 바위를 굴려 치우고 들어가 자기 앞으로 남긴 편지를 발 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영경이 적성자(赤城子)를 따라서 곤륜파 음소당(陰素棠)의 제자가 되려고 운남성 경계에 있는 수월령(修月嶺) 조화애(棗花崖)로 떠난 사실과 독수리 불노도 그날 아 침 당분간 백미화상에게로 날아간 것을 알았던 것이다.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여영남은 내막을 모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간 하는 수 없이 암자로 되 돌아 가 스승 광혜사태에게 낱낱이 고했다. 광혜사태 또한 이영경이 음소당에게 유인당해 갔다는 말을 듣자 몹시도 놀라고 의아스럽게 여겼 다. 스승은 음소당이 현재 곤륜파에서 이탈한 몸으로 그녀한테 꼬임을 당해 잡혀갔다면 결과가 좋지 못하리라고 우려했다. 광혜사태는 아울러서 제자에게 자신이 이틀 후면 원적(圓寂)할 것이며, 그 후에는 이영경과 함께 아미후산 동굴에서 살도록 안배를 해놓았는데 뜻밖에도 차질이 생겼다고 몹시나 안타까와했다. 스승의 말을 듣고 나서 여영남은 놀라움과 슬픔이 겹쳤다. 모처럼 얻은 친구 안위(安危)도 걱정 되는 판인데 하늘같이 섬기던 스승마저 영결(永訣)하게 된다니, 그 얼마나 비통막심한 일이냐 말 이다. 영남은 그날부터 스승 광혜사태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눈물로 밤낮을 지새웠다. 이틀이 지나자 과연 광혜사태는 좌선(坐禪)을 한 채로 원적했다. 그녀를 모시던 노파는 본디 왕년에 서천(西川) 대로상을 휩쓸던 유명한 여비적(女匪賊) <철조무 적(鐵爪無敵)> 당가파(唐家婆)였다. 그녀는 주로 여행 중인 부호(富豪)들만 전문으로 재물을 털다 가 광명사태에게 제압을 당하고 그로부터 강도질하던 손을 씻어 불문(佛門)에 귀의했던 것이다. 그녀가 암자로 쫓겨와 광혜사태를 모신 지도 벌써 십여 년이 되었고, 광혜사태에 대한 그녀의 충성심은 비길데 없이 두터운 것이었다. 여영남은 슬픔 속에 당가파와 더불어 광혜사태의 법체(法體)를 매장하고 나서 또다시 아미 후산 에 올라갔다. 이제 앞으로 의지할 상대는 오직 이영경,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도 독수리 불노 는 돌아왔을 것이다. 독수리를 만나면 자기를 백미화상 계신 데로 데려다 달래가지고 그분과 상 의할 작정이었다. 만약 음소당이란 여검선이 정파 인물이라면 자기도 어떻게 해서든 찾아가서 영경과 함께 그녀의 문하로 투신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백미화상의 법력을 빌어 이영경을 구출해내어 아미산으로 돌아와 함께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몇 차례를 올라가 보아도 사람은커녕 날짐승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그녀는 또다시 후산 동굴에 올라갔다. 그리고 난데없이 한 중년의 여도인과 맞 닥뜨렸다. 여도인은 자칭 여검선 음소당이라고 자기를 밝히며 여영남더러 제자로 삼을 테니 자기 를 따라가자고 요구했다. 나중에 물어서 안 일이지만, 음소당은 사제(師弟) 적성자에게 부탁해서 이영경을 데려오도록 하 고 그녀는 자기의 은거지인 수월영 조화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영경을 유인해 오던 적성자는 망창산을 지나던 중, 숙적(宿敵)인 사남계(史南溪)와 맞닥 뜨려 하는 수 없이 대판 싸움을 벌인 끝에 중상을 입고 참패했다. 그는 천만다행으로 우연히 숭 산이로 가운데 한 사람인 왜수 주매에게 구함을 받고 <탈명신단(奪命神丹)> 몇 알을 얻어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며칠 동안 은밀한 곳에 숨어 상처를 치료한 다음 그는 조화애로 돌아가 음소당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고 간청했다. 음소당은 자기 문하 제자로 점찍어 놓았던 이영경이 망창산 폐사(廢寺)에 내버려졌단 말을 듣고 서 황급히 망창산으로 날아갔다. 사제 적성자를 격패시킨 원수 사남계와 열화조사(烈火祖師)란 놈 은 하루아침에 종적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복수하는 일은 잠시 뒷전에 미뤄두기로 한 것이 다. 그녀는 검광을 일으켜 타고 질풍같이 망창산으로 향했다. 그 너른 산악을 이 잡듯 샅샅이 뒤져 봤으나 영경의 자취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영경이 적성자를 기다리다 지쳐 오던 중 아미산으로 되돌아 갔으리라 짐작하고 연로(沿路)를 살피면서 마침내 아미산까지 추적했다. 그 러나 영경은 여전히 돌아와 있지 않았다. 자못 실망했던 그녀는 엉뚱하게도 그곳을 찾아 올라온 여영남을 발견했다. 가만 살펴보니 여영 남 또한 근골(根骨)이 매우 심후한지라, 그녀는 꿩 대신 닭이라도 쓰는 격으로 여영남더러 자기 제자가 되라고 강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영남은 기왕에 돌아가신 스승으로부터 음소당이 정파의 인물이 아니란 얘기를 들은 터라, 영 경이 중도에서 떨어져 실종되었단 말을 듣고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음소당의 그물질에서 벗어난 게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리디어린 몸으로 황막한 산중 허물어진 폐사에 버려진 채 행 방불명되었다는 소식 또한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설상가상, 그 음소당이란 여도인은 이영경을 찾지 못하자 그 대신 자기를 끌어가려고 안달을 하 기 시작했다. 영남은 음소당의 신분내력이 의심스러운 터라 그녀를 따라가는 게 두렵고 싫었다. 여영남이 고집을 세우고 거절하자, 음소당은 왁살스럽게 위협하더니 나중에는 비검까지 꺼내들 고 핍박했다. 자기를 안 따라가겠다면 죽여서 시체라도 끌고 가겠다는 데야, 영남도 어쩔 도리가 없어 마지못해 응낙을 하고 말았다. 제자가 되겠노라는 다짐을 받자 음소당은 그제서야 살심(殺心)을 거두고 표정이 느긋해졌다. 영 남은 다시 두 번 세 번을 거듭해서 애걸복걸 며칠 간만 여유를 달라고 빌었다. 돌아가신 스승 광 혜사태의 뒷처리도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시일이 필요하다는 구실을 붙였다. 음소당은 막무가내 로 고개를 내저었다. 영남도 단념하지 않고 혀가 닳아빠지게 설득했다. 그녀는 입심이 좋았다. 온갖 달콤한 말솜씨로 음소당을 추켜주면서 애절하게 통사정한 끝에 겨우 허락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음소당은 해탈 암에서 이틀 동안만 머물겠다고 선언했다. 가능한 대로 시일을 더 끌어보려 했지만 이틀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여영남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주어진 시일을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이영경의 편지에 따르자면 독수리가 돌아오는 것도 십여 일 남았다. 그때 독수리를 타고 뺑소니 치는 것이다. 그러자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시일을 더 벌어야 한다. 여영남은 다시 음소당을 붙잡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영경과 자기는 골육을 나눈 친자매나 마 찬가지로 친하다. 처음 적성자가 데리러 왔을 때는 함께 따라갈 마음이 없었지만, 지금에 와선 반 대로 영경 혼자 두고 떠나기가 아쉽다. 그러니까 며칠만 더 기다려서 두 제자를 거느리는 것도 누이좋고 매부좋은 격이 아니냐고 설득했다. 그러나 음소당은 이틀 이상 절대로 더 지체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영남은 그럼 그 이틀 동 안만이라도 후산 동굴에 올라가 영경을 기다리도록 해 달라고 졸랐다. 암자에 처박혀 있으면 그 녀가 찾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핑계를 댄 것이다. 유능한 제자를 둘씩이나 거느릴 수 있단 말은 과연 음소당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그야말로 바라고 바라는 소원이 아닌가? 음소당은 여영남이 비검술을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므로 섣부르게 달아나지 못하리라 단정하고 있었다. 더구나 어린 제자감이 응석을 섞어가며 진정으로 하는 말을 매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여영남은 그녀의 감시를 피해서 영경에게 남기는 사연을 적었다. 그리고 후산 동굴에 올 라와 그 편지를 두고 갔다. 영경더러 독수리를 수월령 조화애에 있는 음소당의 소굴로 보내 자기 를 구출해 달라고 신신당부까지 겸해 적어 놓고. 여영남의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영경은 가슴 속에 슬픔이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언니들, 어떻게 하죠? 영남 언니를 구해 올 방법이 없을까요?"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제영운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으로는 음소당이 그토록 인재를 아낀다면 영남 아우가 끌려갔더라도 위험스런 일은 아 직 없을 거야. 여하튼 그녀를 좌도방문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선 우리들이 구출해 와야 옳은 이치 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에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우선 응벽애를 찾아 내려갈 일이 급하니까, 이것부터 해낸 다음에 차근차근 다시 구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떨까?" 일행들은 모두 그 의견에 찬동했다. 영경도 마음은 조급하지만 영운의 신중한 처리에 따르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재차 후동 석실로 들어갔다. 영운의 분부를 받고서 주문과 금선 두 사람이 천둔보경을 비추며 앞장서서 지하굴로 진입했다. 초입(初入)은 겨우 한 사람이 운신할 정도로 비좁고 또 덮개 바위를 깨뜨릴 때 무너진 돌멩이더 미가 거추장스럽게 길을 막은 데다 천정도 얕아서 일행은 생선꿰미처럼 줄줄이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수십 장 거리까지 나아가고 보니 불현듯 통로가 끊어지고 공기마저 신선해졌다. "저기 좀 비춰 봐요!" 영운이 다급한 목소리로 주문에게 보경을 비추라고 말했다. 앞쪽 한 귀퉁이에서 아침 햇살과도 같은 빛줄기가 아스라이 바라보였다. 일행은 그 빛줄기를 향 하여 곧장 걸어 내려갔다. 몇 구비 길을 감돌고 나자 앞쪽은 더욱 환하게 밝아졌다. 이윽고 그들 여섯은 통로의 끝머리에 다다랐다. 그곳은 뻥 뚫린 동굴의 출구였다. 바로 눈앞에는 멀찌거니 간격을 두고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막아섰다. 동굴 출구 바깥쪽은 낭떠러지였다. 어구에 서서 위편을 치올려 보았더니 구름과 안개만 손에 잡 힐 듯 자욱하고 푸른 하늘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래를 굽어 보았으나 역시 두터운 구름층으로 가 로막혀 밑바닥이 어디쯤인지 알 수도 없었다. 결국 일행이 서 있는 지점은 천길 낭떠러지 중간에 뚫린 구멍이었던 것이다. "여기가 바로 그 응벽애란 말이에요! 바깥은 하늘도 땅도 안 보이고, 굴 속은 또 이렇게나 어둠침 침한데... 우리가 무슨 도망꾼들도 아닌 바에야 헐레벌떡 이런 데로 들어와 살 필요가 어디 있어 요?" 신약란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깔깔거리면서 불평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였다. 금선이 갑작스레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저기다, 바로 저기 있어!" 일행은 그 소리에 귀가 번쩍 트였다. 당초 묘일부인이 말한 응벽애란 곳은 백미화상의 선열지소 (禪悅之所)요, 또 구화산에도 다시는 못 가고 여기서 수련하라는 분부를 받았으므로 대단한 선경 (仙境)이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암흑의 통로를 내려오면서 호기심과 기대감에 사뭇 부풀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겨우 한 줄기 광명을 발견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기대감은 줄지 않았다. 그런데 길 끝머리에 다다르고 보 니 웬걸, 풀 한 포기는커녕 막다른 낭떠러지 중턱이 아닌가 말이다. 모든 사람이 실망한 것은 이루 형언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연장자인 제영운만큼은 어머니 묘일 부인의 말대로라면 여기가 길의 끝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이영경은 응벽애를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으므로, 현재 서 있는 곳이 결코 응벽애가 아니란 사 실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낙심천만, 실망에 빠진 동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신약란이 입빠르게 먼저 불만을 터뜨리고 뒤미처 금선이 고함치는 바람에 입을 열어볼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 금선은 더구나 성미가 급했다. 신약란의 불평을 듣는 둥 마는 둥, 낭떠러지 아래를 굽어보다가는 구름층에 시력이 가리워지자 두말없이 주문의 손에서 천둔보경을 빼앗아 비춰본 것이다. 그의 밝 은 혜안은 오색 찬란한 거울의 광채에 힘입어 흩어진 운무(雲霧) 사이로 마침내 동천복지의 선경 을 발견해내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눈 아래 펼쳐진 것은 질펀하게 너른 벼랑이었다. 그 위아래로 온갖 기화요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고 계곡을 흐르는 시냇물, 여기 저기 흩날려 떨어지는 폭포의 줄기들이 은실처럼 걸려 있는 것이 과연 선령(仙靈)의 굴택(窟宅)임에 틀림없었다. 영경은 그제서야 영운을 붙잡고 이곳이 응벽애가 아니란 사실을 일러줄 만한 틈이 생겼다. 한데 그것도 한순간, 동문들은 벼락치듯 소리지르는 금선의 손길에 신경이 집중되고 말았다. 영경도 하 릴없이 금선을 둘러싼 일행 가운데 끼여들었다. 그들은 비록 금선처럼 뚜렷하게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계곡의 푸른 산빛과 녹 색의 물그림자는 한눈에 들어왔다. 과연 응벽(凝碧)이란 이름대로 손색없는 별유천지(別有天地)였 다. 그들은 당장에 검광을 일으켜 타고 내려가자고 들먹거렸다. 신중한 제영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보기엔 이 통로가 여기서 끝났다고 해서 검광을 타야만 내려갈 수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 는다.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단 말이야.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위에서부터 통로를 개 척하면서 내려가야 옳은 거야. 그러므로 필경 또 달리 뚫어야 할 통로가 있을 법하구나. 나하고 주문, 금선, 약란이야 검광을 빌어서 내려가는 것쯤 힘들지 않지만, 지선하고 영경 아우는 어검비 행을 못하는데 어떻게 내려간단 말이야?" 그러자 금선이 불쑥 면박을 준다. "누나는 언제나 미주알고주알 재기만 하고 어물쩡거린단 말씀이야! 우리가 내려갈 길이 어디 저 답답한 통로 하나뿐이겠수. 지선 누이와 영경 누이만도 그렇지, 누나하고 주문 누나 둘이서 모두 고강한 검선들인데 업고 내려갈 수 없단 말요?" "말이라고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누구든지 자기한테 주어진 일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야 하 는 법이다. 영경 아우는 선골(仙骨)을 타고난 데다 신검도 한 자루 얻었고 또 선약(仙藥), 영과(靈 果)를 숱하게 먹었으니까 몸도 잎새처럼 가벼워졌지. 그래서 어머님이 전수해 주신 구결을 내가 좀 도와주고 수련하기만 하면 일 개월도 안 걸려 어검비행을 할 수 있으니까 문제없다만, 지선 아우는 그게 어렵단 말씀이야. 적어도 삼 년 육 개월은 걸려야만 어검술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 는데 그동안의 외부 출입은 어떻게 한단 말이냐? 내 힘에 의지해서 드나들 터인데 우리가 만약 일이 있어 떠나게 된다면 혼자 힘으로 어찌할 거니?" 금선은 그래도 지지 않고 입씨름을 벌이려 대드는 판인데 주문이 먼저 가로막고 나섰다. "우리가 계곡 아래 경치를 보기는 했지만 저곳이 정말 응벽애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르고 있어 요. 그러니까 여럿이서 지선, 영경 언니를 업거나 메거나 하고 우선 내려가 보는 것도 좋지 않겠 어요? 만약 응벽애가 아니라면 비검술을 하는 사람들끼리 흩어져서 다시 통로를 찾아도 무방할 듯싶은데, 어떨까요?" 금선은 두말없이 찬성이다. 나머지도 거반 일 저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인지라 모두 찬동했다. 영운 역시 내키지 않으나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이윽고 인간화물 운반 담당자가 결정되었다. 제영운은 구지선을, 그리고 주문은 영경을 맡았다. <화물짐>을 업은 두 사람과 금선, 약란이 막 출발하려는 때였다. 문득 머리 위에서 독수리의 울 음이 들려왔다. "아, 잠깐만... 금안사형이 왔네요!" 주문의 등에 업힌 <화물>이 반색을 하고 외쳤다. 잠시 후, 맞은편 병풍처럼 세워진 응벽 위편 구멍 속에서 '푸드득' 날개짓을 하며 독수리가 나타 났다. 그 등에는 성성이란 놈이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성성이의 거드름 피우는 꼴을 보고서 신약란은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 "저 녀석, 참말 복도 많네. 독수리를 구슬러 타고 제놈도 응벽애를 산보할 셈이로구나!" 불노는 어느 새 영경 앞에 내려앉았다. 주인의 모습을 알아본 성성이가 훌쩍 뛰어내리더니 그녀 발치에 꿇어 엎드렸다. 영경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영운과 주문에게 말했다. "언니들, 저희 좀 내려놓아 줘요. 힘 안 들일 좋은 수가 있으니까." 그녀는 지선을 잡아끌어 독수리 등에 올라탔다. 불노가 선뜻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더니 강철 같 은 두 발톱으로 성성이마저 덥석 움켜쥐고선 두 나래를 활짝 펼친 다음 푸드득 날아올랐다. 삽시 간에 날짐승은 방금 나왔던 절벽 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금선과 신약란은 너무도 신기했던지 손뼉을 쳐가면서 깔깔거렸다. "얼마나 재미들 있을까! 나도 언젠가 저런 독수리 하나 길들여 타고 다녔으면 좋겠네....." 곁에서 주문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다. "남 가는 것 보고 침만 질질 흘릴 거야? 우리도 어서 내려가자구!" 나머지 네 사람은 그 길로 검광을 일으켜 타고 계곡 아래로 날아내려갔다. 그들은 지면에 내려 서자, 먼저 도착한 영경과 지선의 마중을 받았다. 영경이 활짝 웃으면서 암벽을 가리켰다. "여기가 바로 응벽애예요. 지난번 금안사형을 타고 내려와 본 적이 있거든요. 자, 보세요! 저기 <응벽>이란 글씨가 새겨 있죠." 눈을 들어 바라보니 과연 칠팔십 장 높이나 되는 암벽 중턱에 둘레가 일 장 가웃도 넘어보이는 <응벽> 두 글자가 깊숙이 새겨 있었다. 왼쪽 곁에 일백여 장이나 됨직한 외로운 봉우리가 방금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동감 있게 영롱한 자태로 지상에 불쑥 솟구쳐 있고, 응벽애는 그 고봉(孤峰)과 나란히 서 있었다. 암벽은 온통 칡 덩굴과 등나무 줄기로 뒤덮였는데 이름조차 모를 기화이훼(奇花異卉)가 그 위로 겹겹이 싸여 맑 디맑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응벽애는 여간 가파르고 험준한 게 아니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또 하나 용트림을 하는 기암 괴석이 돌출해 있고 바위 끄트머리에선 너비 이삼 장이나 되는 비폭(飛瀑) 한 줄기가 자욱하게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영운 일행은 기막힌 절경에 넋을 잃고 발길이 가는 대로 이끌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기암괴석에서 수십 장 간격을 두고 또 하나의 고봉(孤峰)이 돌출해 있었다. 봉우리가 차지한 면 적은 반 묘(苗)나 됨직한데 십여 장 높이의 꼭대기까지 갈수록 뾰족해져서 마치 붓끝을 곧추세워 놓은 것 같은데, 그 정상에는 또 절간의 바리때처럼 움푹 파인 바위가 얹혀 있어 그 위로부터 쏟 아져 내리는 거대한 폭포수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나는 수증기가 폭포의 줄기를 에워싸고 백룡(白龍)과도 같은 폭포 줄기 는 우뢰 같은 굉음을 내면서 붓끝 봉우리로 떨어졌다. 넓적한 암석에 벌어진 물줄기는 다시 일 장 가웃이나 솟구쳐 흩어지고 수도 헤아릴 수 없이 작은 폭포로 변하여 봉우리 아래로 흘러내리 고 있었다. 바리때처럼 생긴 바위는 둘레의 모습이 한결같지 않아 숱하게 쏟아지는 폭포수 또한 제각기 오 묘한 기관(奇觀)을 이루었다. 어느 것은 맑디맑게 투명한 수정(水晶)의 주렴(珠簾)처럼 드리우고, 어떤 것은 수척 굵기가 되게 기둥처럼 우뚝 섰는가 하면, 또 어느 것은 새끼줄 만큼이나 가늘어 허공을 내리면서 바람결에 따라 흔들렸다. 폭포수는 어느 것이나 모두 봉우리 아래 깊은 연못으 로 떨어져 모이고 다시 응벽애를 감돌아 암벽 뒤편으로 흘러갔다. 바위에 부딪쳐 울리는 그 무수한 물소리와 연못으로부터 흘러나가는 시내소리가 한데 어우러지 면서 완연히 한 가락 절묘한 화음을 이루고 있어 가만히 마음 기울여 듣는 이로 하여금 저 높은 정상에서 떨어지는 대폭포의 굉음마저도 잊게 만드는 것이다. 흩뿌려진 수천만 개의 물방울은 푸르른 풀잎에 떨어져 알알이 구슬처럼 반짝거리며 빛나다가는 때없이 불어온 바람결을 못 이기고 떼그르 굴러떨어지곤 한다. 봉우리 근처에 핀 화초들은 영천 (靈泉)의 자양(滋養)을 받아 윤기가 흐르고, 기름진 토양에 뿌리박아 꽃떨기마다 싱그러운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폭포 앞에 둘러선 사람들은 말을 잊었다. 오로지 두 귀로 자연의 음악을 듣고, 두 눈으로는 무궁 무진한 선경(仙景)을 접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느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대로 선 채 바위처럼 자연의 일부분이 된 듯 아무도 움직이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정적을 찢으면서 발광하는 환호성이 터졌다. "와앗!" 환희에 벅찬 금선이 지른 소리였다. "와아, 와앗!....." 금선의 목소리가 다섯 처녀들에게도 전염되었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면 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들은 엄청난 자연의 절경에 압도당한 채 오래도록 그곳을 떠날 줄 몰랐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도취된 상태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윽고 영경은 제영운 일행을 응벽애 암벽 앞으로 이끌어 갔 다. 거기에는 울창한 녹음이 거대한 우산처럼 지상을 뒤덮고 하늘로 찌를 듯 치솟은 큰 아름드리 녹 나무 고목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그녀는 고목 꼭대기를 가리키면서 바로 백미화상이 거처하 던 곳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지난날 여기 내려와서 백미사조와 만났던 사연도 덧붙여 말 했다. 한창 신나게 지껄이던 영경은 느닷없이 고목 꼭대기로부터 시커먼 그림자덩어리가 쭈르르 미끄 러져 내리는 바람에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더구나 담이 작은 구지선은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영운의 품속으로 뛰쳐들었다. 일행들이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보았더니 시커먼 놈들은 다른 게 아닌 독수리 불노와 성성이였다. 성성이는 움켜쥐고 있던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염주(念珠) 한벌과 편지 한 통이 영경에게 건 네졌다. 편지는 백미화상이 남긴 것이었다. <... 나는 벌써부터 너희들이 여기로 옮겨와 살리라고 예상했다. 암벽의 위쪽으로 가면 동부(洞 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석실과 단실(丹室) 백여 칸이 있느니라. 예전에 장미진인께서 아미파 문호를 크게 빛 낼 사전 준비로 개척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후에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고 장미진인이 성도승선 (成道升仙)하신 후, 지금까지 비어 있었다. 그분은 이 응벽애에 머물면서 또 영천(靈泉)을 굴착하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두루 섭렵하여 숱 한 영약과 이훼(異卉), 기화요초(琪花瑤草)를 옮겨다 심으셨다. 그 동부 안에 있는 돌덩이들도 모 두 투명질이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히 빛을 내므로 수도(修道)하는 사람들의 거처로 아주 적합 한 장소다..... 동굴 서편에는 위쪽으로 뻗은 도로가 있다. 그 길은 아미후산 비뢰령(飛雷嶺)까지 직통한다. 바 로 염선 이원화의 동부(洞府) 곁으로 오래 전부터 폐쇄된 석굴로 연결되고 있다. 남쪽에도 위쪽으 로 뻗은 도로가 또 하나 있는데, 그 길은 바로 이령 부녀의 처소인 서운동(棲雲洞)까지 곧바로 통 한다..... 여기 편지와 함께 남긴 묵주는 내가 영경에게 주는 선물이다. 장차 유익하게 쓰일 때가 있으리 라.....> 영경은 단숨에 백미화상의 편지를 읽어내렸다. 그러나 사연 가운데 단 한 마디도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 없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섭섭한 나머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가슴이 뭉클하 도록 그리운 아버지를 보고 싶은 정이 솟아나온 것이다. 제영운은 영경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깨를 쓰다듬어 주며 좋은 말로 위로해 주 고 그녀의 손에 힘없이 걸린 묵주꾸러미를 건네받았다. 용안(龍眼) 열매 크기나 되는 묵주알은 모 두 열여덟, 바람결에라도 흩날릴 듯 가벼운 것이 금도 아니고 옥도 아니다. 나무도 쇠도 아니면서 한 알 한 알 모두가 판에 박은 듯 고르고 검정빛 광채가 머릿결처럼 물결쳤다. 그녀는 한눈에도 범연한 물건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어느 때인가 반드시 크게 쓰일 데가 있으리 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영경의 손목에 염주를 걸었다. 뜻밖의 비검전서 闢洞天 絿芷仙學道 傳飛東 李英瓊出山 이영경은 백미화상의 처소에 또다른 유품이 남아 있을까 싶어 몸을 솟구쳐 고목 위로 올라갔다. 나무 꼭대기까지 높이는 십여 장, 그녀는 중도에 두어 차례 뻗은 가지를 잡고 훌쩍 뒤집으면서 제비처럼 날렵하게 위로 올랐다. 영운과 주문, 금선, 약란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찬탄했다. 비조(飛鳥)처럼 날렵하고 원숭이보다도 민첩한 영경의 몸놀림은 비록 비행절적의 상승어검술을 익힌 그들로서도 부러워할 만큼 기막힌 신법이었던 것이다. 금선과 약란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영경의 뒤를 좇아 나무꼭대기로 올라갔다. 백미화상이 머물던 처소는 그 안이 온통 희고 검은 새의 깃털로 꾸며진 것이었다. 면적도 겨우 두 장 남짓, 그리 넓지 않으나 정결하고도 깔끔하기 짝이 없었다. 한가운데 포단(蒲團)이 하나 펼 쳐져 있고, 그 곁에 또 작은 것 두 장이 있을 뿐,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깔개밖에는 남은 품목이 없었다. 세 사람은 비록 텅 빈 방이지만 선배 고승의 거처에 감히 오래 머물 수 없어 그대로 지 상으로 내려왔다. 제영운은 동문 사제들을 이끌고 백미화상이 편지로 알려준 그 동부(洞府)를 찾아나섰다. 응벽(凝 碧)의 암벽을 올라 그 뒤편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그들은 또다시 기적과도 같은 선경(仙景)에 황홀해 했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동부를 미처 찾아내기도 전에 난데없이 귀청을 찢는 듯한 물흐름 소리에 놀 라고 말았다. 그들의 발걸음은 우뢰처럼 울리는 물소리를 쫓아 바쁘게 움직였다. 맞은편 암벽 계곡 아래에 너비가 이삼 장이나 됨직한 시내가 길게 흐르고 있는데 그 중류에는 거대한 석봉이 불쑥 돌출해 있고 봉우리 위는 소나무, 잣나무가 무성하게 뒤덮였다. 바위는 온통 크고 작은 동공(洞孔)으로 곰보처럼 기괴하게 얽혀 있었다. 암벽을 감돌아 허리께로부터 마구 쏟아져 나온 물줄기는 급류를 이루고 흘러내리다간 석봉 주변 의 바위 무더기에 부딪치면서 수십 마리의 은룡(銀龍)이 되어 분수처럼 물보라를 일으키며 솟구 쳤다. 석봉의 양곁을 갈라져 흐른 다음에는 또다시 크고 작은 소용돌이로 변하여 무수한 파문을 일으키며 굽이쳐 흘러내리고 있었다. 귀청을 찢는 듯한 물소리는 급류가 석봉의 숱한 동공과 바위 틈서리에 부딪고 삼켜지고 뱉아내 면서 울려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황종(黃鐘) 대려(大呂)의 음계를 울리듯 오묘한 음률의 조화를 이루면서 아까 일행이 들 었던 폭포 소리와 또다른 감흥을 자아내는 소리였다. 영운 일행은 발길을 멈추고 또 한번 절정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이때 신약란은 중류에 우뚝 솟 은 석봉의 탯거리가 너무도 아리따운 데 반했는지, 두말도 않고서 훌쩍 몸을 날려 석봉 위 소나 무 숲으로 날아가더니 이내 숲 속 깊숙이 사라져 버렸다. 금선이 나도 질소냐 하고 그녀의 뒤를 따르자, 이어서 한껏 흥에 겨웠던 주문과 영경도 몸을 날 렸다. "언니들, 저 아래가 동부 아니어요?" 문득 신약란의 외침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영운마서 쏜살같이 석봉으로 날아갔다. 나무 숲을 헤치고 신약란 곁으로 가보니,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과연 엄청나게 커다란 석동이 있었다. "내려가 보자!" 제영운이 앞장을 섰다. 너르고도 웅장한 그 석동의 입구는 정면으로 중류에 돌출된 석봉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어구 에는 등나무 줄기들이 풀어헤친 머리결처럼 드리워졌고, 주변 일대가 온통 기화요초로 뒤덮였다. 출입구 윗면 바위에는 큼지막하게 석 자가 새겨져 있었다. <태원동(太元洞)> 영운 일행은 기대감에 부풀어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석굴 안으로 들어섰다. 너르고도 너른 석실 에는 단약(丹藥)을 굽는 화로와 돌침상, 탁자, 석궤(石机) 등등 수련생활의 일용품이 고루 갖추어 져 있었다. 안쪽으로는 거울같이 투명한 종유석(鐘乳石)이 늘어뜨려져 기이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 다. 백여 칸도 넘음직한 석실들의 규모도 제각기 크고 넓고 좁은 것이 용도에 따라서 마음대로 골라 쓸 수 있게 안배되었다. 이 또한 아미파의 조사 장미진인이 남긴 유적임에 분명했다. 제일 뒤쪽까지 다다르고 보니 별도로 이삼 묘(苗) 너비나 되는 석실이 있었다. 그 안에 가로놓인 것은 이십오 개의 돌의자였다. 그 좌석은 장래의 동문들이 모여 앉아 집회를 가지도록 한 배치이 리라 짐작되었다. 집회소의 석실을 지나쳐 들어가자, 지세는 갑자기 높아지기 시작했다. 영운은 백미화상의 편지에 쓰인 대로 일행을 이끌고 남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에는 과연 한 줄기 지하통로가 뻗어 있었다. 지하통로를 따라서 한참이나 좋이 들어가자니, 앞길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는 주문과 금선을 앞장세워 천둔경으로 비추면서 전진 하도록 했다. 다시 이십여 장쯤 나아갔더니 문득 돌벽이 일 행들의 앞길을 딱 가로막아 섰다. 통로의 끝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방향을 잘못 짚었는가 싶어 의아스러워하면서도 영운은 주문에게 거울빛을 사방에 비추어 보도 록 했다. 거울빛이 가로막힌 돌벽을 비추자, 글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영운은 벽에 바짝 접근했 다. <서운문호(棲雲門戶)> 전서체(篆書體)로 새겨진 넉 자가 뚜렷하게 보였다. 돌벽을 더듬어 보니 손끝에 굳어진 석고(石 膏)의 감촉이 와 닿았다. 영운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약란을 손짓해 불렀다. "자연서를 가지고 왔지? 그걸로 이 돌벽을 깨뜨려 봐요." 과연 그 돌벽은 호미날에 찍히자마자 두부덩어리처럼 떨어져 나갔다. "잠깐만!" 제영운은 황급히 약란의 손에서 호미를 나꿔채 가지고 직접 손을 쓰기 시작했다. 예상은 어긋나 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돌벽에는 여섯 자 높이, 석 자 너비나 됨직한 문호가 뚫린 것이다. 그것도 <서운문호>라는 넉 자 바로 밑에 뚫려서 글자 그대로 대문의 편액(扁額)까지 만들어진 셈이다. 돌문이 열리고야 알았지만 그 석벽의 두께는 석 자 이상이나 되는 것이었다. 머리를 디밀고 둘러보았더니 환한 빛줄기가 쏟아졌다. 안으로 들어선 영운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와아!'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바깥은 영경의 후동 지하통로에서 내려와 더 이상 갈데없이 막혀 낙심천만, 불평을 쏟아놓던 그 장소였던 것이다. 그들은 방금 깨뜨린 석벽을 끝내 찾지 못한 채 독수리와 검광을 나누어 타고서 응벽애로 내려간 것이다. 석벽의 문이 깨뜨려져 열림으로써 그들은 영경의 처소였던 절벽 위 서운동으로부터 응벽애까지 완전한 통로를 확보하고 더 이상 반공중에서 검광이나 날짐승의 힘을 빌지 않아도 왕래할 수 있 게 된 것이다. 영경을 비롯한 동문 사형제들은 즉석에서 의논을 결정했다. 우선 서운동으로 올라가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내일 다시 일상용품을 정리해 가지고 응벽애까지 옮기기로 했다. 그들은 곧장 아미후 산 동굴로 올라갔다. 어느덧 그날 하루해도 저물고 황혼 무렵이 되었다. 동문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한창 저녁 준비 에 바쁘던 이영경은 문득 독수리와 성성이가 아직도 응벽애에 남아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너무 서둘러서 올라오느라 그 짐승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황급히 동굴 바깥으로 나가보았더니 언제 돌아왔는지 불노와 성성이가 천연덕스럽게 공터에 앉 아 저녁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경은 반색을 하면서 다시 들어가 사슴의 뒷다리를 썰어 가지고 나와서 대접했다. 한데 성성이 는 소식(素食)에 길들여진 짐승이라 제아무리 진미라도 고기는 먹을 수 없었다. 망창산에서 가져 온 황정, 송인 따위의 열매도 몇 끼니면 바닥이 날 판이다. 그 문제는 여간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영경은 생각다 못해 성성이와 협상을 했다. "금안사형의 양식은 자기 스스로 잡아와서 늘 넉넉하고 우리도 그 덕분에 고기맛을 보거든? 하 지만 너는 과일이나 열매, 뿌리 같은 걸 먹어야 사는데 어떻겠니? 너도 스스로 양식거리를 찾을 수 있는지....." 그러자 성성이는 머리통을 끄덕였다. 이쯤 되면 걱정할 게 없다. 그녀는 나머지 과일들을 깡그리 쓸어다가 짐승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들어가서 사형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저녁을 들기 전, 영운은 동문들에게 근엄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번에 우리는 크게 고생하지 않고 아미파 장미조사 어르신께서 남겨 주신 선부(仙府)를 찾아 냈어요. 앞으로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니만큼 위계질서를 분명히 가리고 지 켜야 할 거예요. 나 제영운은 여러분보다 연장자이므로 사양치 않고 여러분의 큰언니노릇을 하겠 어요. 그리고 여러분도 이 자리에서 나이에 따라 웃사람과 아랫사람을 가려 형제자매로서의 위계 를 정합시다. 그 위계에 따라서 호칭도 바뀌겠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 엄격하게 형식적인 예절에 구애를 받자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늘 하듯이 골육을 나눈 형제보다도 친밀하게 화목을 유지 하면 되니까요. 오늘부터 우리는 함께 검술을 연마하고 선도를 익히는 바로 한집안 식구들이에 요." 젊은이들은 좋아라고 즉석에서 나이를 따져보았다. 영운을 제외하고는 구지선이 가장 위가 되고 그 다음으로 주문, 신약란, 금선이었으며, 막내는 역시 이영경이었다. 이렇게 해서 동문 사형제 여 섯 명의 서열이 결정된 것이다. 제영운은 다시 그들과 한 가족이 된 짐승에게도 이름을 붙여주었다. 독수리의 본이름은 불노였 으나, 그것은 백미화상이 부릴 때의 호칭이라 쓰기에 불편하다고 해서 새롭게 <강우(鋼羽)>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모두들 동년배의 항렬로써 대우하기로 했다. 성성이에게는 성원(猩猿)에서 짐승 의 뜻인 개견 변(犬)을 떼고, 그것을 다시 뒤집어 <원성(袁星)>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했다. 밤이 되었다. 맏형 제영운은 새로 맞이한 아우들에게 처음으로 검법의 비결을 전수해 주었다. 즉 신약란과 이영경, 구지선의 기초실력을 감안해서 그에 알맞는 수준의 것을 배우도록 한 것이다. 처음 입문하는 구지선에게는 우선 좌공(坐功)만을 학습시키고 신약란과 이영경 두 사람은 이미 방문(旁門)의 진체(眞諦)를 터득했거나 천생으로 선골(仙骨), 혜심(慧心)을 갖추었기에 조금만 암 시를 주더라도 이내 깨치곤 했다. 구지선 또한 총명하기 짝이 없었으나 근행(根行)이 비교적 남보 다 얕을 따름이었다. 검결의 전수가 끝나자, 영운은 더 이상 밤새워 심신을 소모하지 않도록 돌침상 위에 각각 갈라 앉아서 타좌연공(打坐煉功)을 실시하라고 분부했다. 얼마쯤 시각이 지나, 구지선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입정(入定)의 경지에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서운동에 비축된 일상용품들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새로 발견한 지름길을 통해서 응벽애 태원동까지 옮기는 작업이었다. 영경은 옛날을 생각하고 절벽 끝에서 독수리의 등에 올라 응벽애로 날아 내려가기로 했다. 이번 에는 그녀 나름대로 속셈이 있다. 훗날 비검술을 완전히 연성하고 나서 지하통로가 아닌 또 하나의 공중통로를 별도로 확보해 놓 고 싶어서였다. 이 무렵 구지선은 영운, 주문, 금선과 함께 벌써 태원동에 내려가고, 서운동에는 신약란 혼자서 남아 자질구레한 물품을 정리하는 영경을 돕고 있었다. 영경은 가져갈 물건을 간편하게 두 보따리를 싸서 들고 신약란과 함께 동굴 밖으로 나왔다. 어느 틈엔가 공터에는 사슴 두 마리와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독수리 <강우>와 성성 이 <원성>이 둘이서 제각기 먹을 양식을 마련한 것이다. 영경은 원성에게 그 양식거리를 후동 석실로 옮겨놓도록 한 다음, 응벽애 태원동까지 내려가는 통로를 가리켜 주고, 그리로 통해서 무 거운 짐보따리와 양식거리를 태원동까지 계속해서 운반하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나서 신약란과 함께 간편한 봇짐을 하나씩 메고서 독수리 등에 올라탔다. 독수리는 지체 없이 천길 낭떠러지 아래 계곡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약란은 난생 처음으로 안개구름 속을 날아보는 터라서 마치 꿈 속을 헤매듯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무심한 날짐승은 등에 태운 처녀가 더 이상 황홀경을 헤매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그저 제 갈길대로 쏜살같이 하강해서 잠시 만에 태원동 입구로 내려선 것이다. 동부 안에는 이미 영운의 지휘 아래 각자 거처할 석실이 정해졌고 수련할 장소와 저장고까지 안 배되어 있었다. 거실은 금선과 약란이 각각 독방을 쓰기로 하고, 주문은 영경과 한 방을, 그리고 영운은 지선과 한 방을 쓰면서 아침저녁으로 수련을 지도하도록 하였다. 몇 시진도 안 걸려 원성은 영경의 분부대로 서운동에 꾸려놓았던 일용품을 모조리 운반해 왔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차지한 그들은 기막힌 절경에 매혹되어 물 가로 나아가 폭포를 구경하거나 산봉우리에 올라 휘파람을 불면서 마음껏 즐겼다. 그 어느 누구도 다시는 윗세상에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천진난만한 약란과 금선은 누구보다도 즐거웠다. 독수리 강우마저 갑작스레 길들었는지 어떤 사 람이 타더라도 거절하는 법이 없어, 그들은 소원대로 다투어 가며 날짐승의 등에 올라타고 날아 다녔던 것이다. 주문과 단짝이 된 영경은 원성을 데리고 반나절 동안이나 응벽애 일대 구석구석까지 쏘다니면서 기이한 꽃과 진귀한 과일을 따 가지고 돌아와 모두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로부터 형제들은 매일같이 영운의 지도를 받으면서 태원동과 응벽애를 중심으로 수련에 들어 갔다. 그들은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거운 나날을 맞이하고 보냈다. 영경은 그동안에도 몇 차례나 맏형 영운에게 여영남을 구출하러 가자고 졸랐지만 맏형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서두르지 말아라. 아직 때가 오지 않았으니까....." 산중의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 월 하순이 되었다. 비록 서너 달 동안의 짧은 수련이었으나 영경은 동문 사형들이 경악할 만큼 쾌속적인 진전을 보 였다. 단 한 번 뵈온 스승 묘일부인에게서 전수받은 구결대로 수련하면서 아침저녁 가리지 않고 영운이 지도해 준 결과, 마침내는 자유자재로 어검술을 구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형들은 그 녀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원대한 앞날을 생각하고 깊은 흠모의 정을 느꼈다. 어느날 아침, 제영운은 형제들을 이끌고 일찍부터 검술 연습에 들어갔다. 그녀는 여러 군데 방위 를 정해놓고 한 사람씩 그 방위의 나무꼭대기에 발라 배치한 다음 비검을 쏘아보이고 있었다. 한창 연습이 무르익었을 때, 난데없이 하늘 위 구름 속으로부터 금빛 한 줄기가 섬전(閃電)과도 같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앗!" 영경과 약란은 외마디 소리를 치면서 맞받아 내려고 나섰다. "잠깐 멈춰!" 제영운이 그들을 막았다. 어느 틈엔가 금빛 광선은 그녀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금빛은 훌쩍 솟구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창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무꼭대기에서 우르르 뛰어내린 형제들이 영운 앞으로 달려가 에워쌌다. 영운의 손에는 서찰 한 통이 들려 있다. 그것은 <건곤정기 묘일진인> 제수명이 딸 제영운에게 보낸 비검전서(飛劍傳 書)였다. 영운은 조심스럽게 겉봉을 뜯었다. <... 서천팔마(西川八魔)는 스승 위풍낭이 죽음을 당하자 후환이 두려워 청라욕(靑螺欲)에 은둔한 사실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이 몇 년 동안 아무도 그들을 추적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또다시 대담하게 악념(惡念)을 품고 청라욕을 벗어나왔다. 그들은 최근에 티베트의 독룡존자(毒龍尊者) 문하로 들어가서 기명제자(記名弟子)가 된 후, 예전 보다 더욱 음학(淫虐)과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서천일대의 양민들은 거의 모두가 그들의 해 침을 받고 공포에 질려 있는 상황이다..... 왜수 주매가 보낸 사연은 이렇다. 삼유동(三遊洞)의 협승(俠僧) 질범(秩凡)의 제자 조심원(趙心源)은 그가 새로 거두어들인 문도(門 徒) 도균(陶鈞)과 또 몇몇 청년 검협들을 규합하여 금년 단오일(端午日) 청욕산(靑欲山) 아래에서 서천팔마와 결투를 벌이기로 약속했다. 지난날 팔마(八魔) 구령이 표국의 화물을 탈취할 때 조심원이 나서서 방해를 한 사건을 결판짓 자고 도전했기 때문이다..... 왜수 주매는 자신의 일이 매우 바빠서 적시에 그들을 도와주러 가지 못할까 보아 우려하고 있 다. 왜수의 지원이 없다면 조심원과 도균 두 사람은 사천팔마의 독수에 희생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왜수의 요청에 따라서 너희들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영운과 주문, 금선 세 사람은 이 글을 받는 즉시 그날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서천 변경에 있는 청욕산으로 향발하되, 반드시 티베트의 포달라(巴達拉) 궁(宮)부터 방문하고 활불(活佛) 달라이라 마(達懶伊喇麻)는 참배객으로 가장하여 궁궐 내부의 지형과 인물을 익혀두어야 한다. 그 다음, 청욕산 부근 은밀한 곳에 거점을 확보하고 수시로 마궁(魔宮)의 동정을 살펴가면서 결 투 당일 조심원과 도균 두 사람이 위기에 처하거든 암암리에 협력해 주기 바란다.....> 새로운 일이 생겼다니 가장 기뻐서 날뛰는 것은 금선이었다. 영운은 철부지 동생을 딱하다는 눈 길로 바라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금선이 좋아라고 날뛰자 영경도 덩달아서 따라나섰다. "큰언니, 저도 데려가 줘요." 영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서찰에 영경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막내의 검술은 아직도 미숙하고 또 악명 높은 서천팔마의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므로 섣 불리 데려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수록 영경은 몸이 달았다. "큰언니, 나도 어엿한 아미교조의 문하 제자예요. 사부님과는 한 번밖에 뵙지 못했지만 본문의 정통 검술도 이만하면 됐지 않아요? 물론 편지에는 제 이름이 없죠. 사부님께서 아직 말씀을 못 드렸을 테니까... 언니, 나도 함께 따라갈래. 꼭 데리고 가 줘요. 응?" 영운은 막내의 응석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영경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영경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달리 무슨 까닭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응벽애로 비검전서를 보내실 정도라면, 어머니의 새 제자 이영경과 구지선, 신약란의 존재를 모 를 리 있겠는가 말이다. 그녀는 부드럽게 영경을 달랬다. "네 검술은 아직도 이런 큰 싸움에 나설 만큼 정순(精純)하지가 못해. 그 비범한 자질하고 지혜 라면 앞으로 일 년 반 안에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고 또 외공(外功)까지 익힌 다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거야. 그때 가서도 이런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 무얼 그리 서두 르지?" 그래도 영경은 막무가내, 영운에게 떼를 썼다. 그러다가 문득 영운의 등 뒤에서 약란이 연신 눈 짓을 보내는 걸 발견했다. '이상하네. 지선 언니야 아직 무공실력이 변변치 않으니까 그렇다치고, 약란 언니는 진작부터 비 검술에다 여러 가지 술법마저 능통했는데 어째서 따라나서겠단 말 한 마디도 없을까? 게다가 날 더러 조르지 말라고 눈짓을 보내는 걸 보면 필시 무슨 속셈이 있는 모양이다.' 응벽애에서 몇 달 지내는 동안, 누구보다도 제일 친숙하게 마음까지 터놓고 사귄 사람이 신약란 이었다. 영경은 일단 그녀와 상의해 보고 나서 다시 영운을 졸라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화난 척하고 냉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약란이 뒤따라 들어왔다. 영운한테는 막 내를 달래주어야겠단 핑계를 댄 것이다. 영경은 그녀가 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다급하게 물었다. 약란은 방금 보였던 것처럼 눈을 찡끗하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교조께서 우리 얘기를 안하신 것은 사부님 묘일부인이 그분과 아직 못 만나셨기 때문일 거야. 그러니까 교조님은 아직도 우리 두 사람을 모르고 계신 셈이지. 막내는 영운 언니가 어떤 성격인 줄 알고 있잖아? 매사에 도학군자(道學君子)처럼 신중하고 꼼꼼하고 어르신네 분부라면 콩으로 메주를 쑤래도 쑬 만큼 고지식하단 말씀이야. 그런 고집불통을 붙잡고 떼를 써봤자 입만 아프지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겠어? 이것 봐요, 막내도 어차피 어검비행도 할 줄 알고 게다가 독수리 강 우까지 있는데 어린애처럼 데려가 달라고 발버둥칠 필요가 어디 있어? 큰언니 가는 데에 우리라 고 못 가란 법이 있느냐 이 말이야! 그러니까 우선 못 이기는 척하고 언니 일행을 떠나보내자구... 다행히 단오절까지는 아직도 칠팔 일이나 있으니까 언니 일행 세 사람의 뒤를 쫓아서 살금살금 따라가도 넉넉하거든!" "그거 참 기막힌 생각이구려! 우리 둘이서 아무렴 언니들을 놓칠라구?" 영경은 너무도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한데 기뻐하기는 아직 일렀다. "혜헤헤, 그거 참 기막힌 꾀로군! 이봐, 난 다 들었어. 이런 기막힌 꾀를 혼자서 알아서야 쓰겠 나? 누나한테도 일러줘야지." 문 밖에서 누군가 낄낄거리는 바람에 영경과 약란은 그만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다. 이윽고 금선이 시침을 뚝 떼고 들어섰다. 제일 발이 저린 것은 영경이었다. 그녀는 얼른 금선의 소맷자락부터 움켜잡았다. "금선 오빠, 정말 큰언니한테 고자질할 거요?" "히힛, 놀라기는... 한번 해본 소리야! 우리 모두 다 간다면 얼마나 좋겠어? 시끌벅적 재미도 있 고 또 기세등등하게 서로 도와가면서 싸울 수도 있잖아? 아무렴, 나같은 무용지물도 필요한 판인 데 검술이 뛰어난 약란 누이야 이를 말인가? 또 영경 동생은 장미사조님께서 주신 자영검에다 신 통한 독수리까지 거느리고 있단 말씀이야... 이봐 누이들, 겁낼 거 하나도 없어. 나 역시 불만이니 까. 큰누나는 어른이랍시고 동생들한테 으스대는 게 버릇이야. 털끝만치라도 사리에 어긋나면 용 서가 없으니까. 그러니 누나를 붙잡고 떼를 써봐야 말짱 헛일이지... 방금 말한 대로 우리가 먼저 떠나고 누이들은 뒤따라온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수가 없을 거야. 아무렴!" "금선 오빠, 참 심술맞네! 어찌 알고 따라 들어왔수?" "흠흠, 내 눈치가 얼마나 빠르다구? 약란 누이도 졸라댈 만한데 입을 꼭 봉하고, 또 한참 떼를 쓰던 영경 동생이 뚝 그치고 들어가니까 또 뭣이 급한지 냉큼 뒤쫓는 게 여간 수상쩍더란 말씀이 야. 그래서 둘이 무슨 꿍꿍이속을 차리는가 싶었지. 살금살금 따라와서 듣자니 아니나 다를까? 고 런 꾀를 쓰고 있더라, 이거야!" "정말 큰언니한테 이르지 않을 거죠?" "염려 말라구! 내가 어떤 사람인데 째째하게 고자질이나 한단 말야?" "고마워요, 이 신세를 어떻게 갚지?" "헷헷, 그거야 쉽지... 독수리나 한 번 타게 해줘." 약란이 곁에서 듣다못해 허리를 잡고 웃는다. "어쩐지... 미심쩍더라! 금선이는 딴 궁리가 있어서 첩자노릇을 했구나." 그때 영운과 주문, 지선이 한꺼번에 따라 들어왔다. 약란은 얼른 막내에게 눈짓을 보냈다. 영경은 재빨리 아직껏 성이 난 것처럼 뾰로통해 보였다. 금선도 시침을 뚝 떼고서 영경한테 강우를 빌려달라고 졸랐다. "정말 안 빌려줄 거야?" 그러자 영운이 대뜸 나무랐다. "넌 어떻게 그리도 철이 없니? 어검비행을 할 줄 알면서 독수리는 빌어다 뭣에 쓸 거냐?" "누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야단이야! 독수리를 어디다 쓰냐구? 있지, 아무렴, 쓸데가 있구말구! 첫 째, 나는 신검합일의 경지에 든지 겨우 반 년도 못되니까 누이들보다 검광이 느리단 말야. 청욕산 까지 가면서 괜히 나 때문에 늦었다고 구박은 받기 싫거든. 둘째, 만약 우리가 청라욕에 가서도 적을 못 이기게 되면 약란 누이하고 영경 동생이 독수리를 타고 응원하러 올 텐데, 길을 모르지 않겠어? 그러니까 독수리에게 먼저 길을 익혀두게 해야 한단 말이거든... 어때, 내 생각도 누나만 큼 꼼꼼하지?" "흥, 귀신도 울겠구나!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떠나자." 영운은 동생의 억지를 한 마디로 쥐어박고서 더 이상은 상대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제영운과 금선, 주문 세 사람은 여행 준비를 챙기고 나서 약란, 영경, 지선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동구까지 전송을 나가자, 영운은 재삼 거듭해서 남는 사람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열 심히 배운 것을 연습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그리고 주문, 금선과 함께 검광과 독수리룰 나누어 타 고서 청욕산을 향해 출발했다. 영운 일행이 떠나자 영경도 그 즉시 뒤따라 나서려고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신약란이 그것을 만류했다. "그렇게 서두를 것 없어요. 독수리가 돌아오거든 그때 출발해도 늦지 않아. 잘못하다간 길을 잃 기 십상이지." 그 말을 듣고서야 구지선은 두 사람의 꿍꿍이속을 알아차렸다. 이거 큰일났구나 싶어 황급히 두 사람을 떠나지 못하게 말렸다. 하지만 첫마디부터 거절이었다. 지선은 여간 당황한 게 아니다. 이 몇 달 동안 하늘처럼 의지하던 영운이 훌쩍 떠나고 이제 또 자기만 남겨 놓은 채 약란과 영경마저 뒤따라 가 버리면 도대체 어떻게 살란 말인가? 만약에 무 슨 일이라도 생기면 적막강산에 혼자 떨어진 자기 힘으로 어찌 감당할 것인가 말이다. 그녀는 언 니의 체면도 버리고 아우들에게 통사정을 했다. 그러나 역시 막무가내였다. 지선은 작전을 바꾸었다. 두 사람을 다 붙잡고 설득하기보다 말씨가 먹혀들어 갈 만한 상대를 골라 집중 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잠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군, 약란을 붙잡고 얘기해 보자! 그래도 성품이 온화해서 어쩌면 들어줄 것 같다. 이영경? 이 막내는 평소에도 성미가 괄괄한 데다 고집이 세다. 한 번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만 직 성이 풀리는 애야. 누가 뭐래도 제 고집대로만 나가거든. 영운의 말이라면 어쩌지 못하지만, 그녀 마저 떠나버린 이 마당에 더 간섭할 어른도 없는 셈이다. 그러니까 약란을 설득해 보자!' 얼마 후 지선은 막내가 없는 틈을 타서 살그머니 약란을 만났다. 그리고 간곡히 통사정했다. 어 떻게 해서든 영경을 달래가지고 제발 좀 떠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선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영경이 고집 세고 괄괄하기는 하지만 나이도 어린 데다 속 마음은 솜결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나 약란은 겉으로는 온화하게 보이지만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 고 속은 여간 강단(剛斷)이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표면적으로 영경처럼 나서지는 않았으나 그녀 역시 청욕산으로 뒤따라 가는 데 적극성을 띠고 있는 줄 지선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승벽(勝癖) 또한 영경보다 앞서면 앞섰지 절대로 뒤떨 어지지 않는 약란이었다. 약란은 지선한테 붙들려 통사정을 듣고 보니 난처하기만 했다. 그래도 면전에 대고 거절하기가 뭣해서 모든 핑계를 영경한테 밀어붙였다. 이제 지선은 애가 탈 대로 탔다. 두 사람의 고집을 꺾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들과 함께 떠나 자니 태원동부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영운이 돌아와서 책망할 것은 뻔한 이치다. 하물며 무공실 력도 변변치 못한데 따라가 보았자 사형제들을 돕기는커녕 부담스러운 짐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울상을 짓고 말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판이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약란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난 어쩌면 좋아? 제발 가지 말아줘. 이 동부를 지키는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지 몰라? 외부 사 람이 쳐들어 와서 강제로 차지하면 비검술도 쓸 줄 모르는 내가 어떻게 감당하란 말야? 보금자리 를 빼앗기고 형제들 앞에 무슨 면목으로 서겠어? 아니, 그보다도 나 먼저 도둑의 손에 죽고 말 거야!" 약란이 보자 하니 여간 딱하고 측은한 게 아니다. 그녀는 다시 부드러운 말로 지선을 달랬다. "언니, 이 동부는 천길 벼랑 밑에 깊숙이 감춰져 있으니까 아무나 쉽사리 찾지 못해요. 이런 데 가 있는 줄 밖에서 누가 알겠어요? 우리들이 떠난다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돌아올 텐데, 그 사이 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든지 할 리가 없어요. 세상에 그토록 공교로운 우연이 어디 있겠어요? 지 선 언니의 무공 수준은 형제들도 익히 아는 터, 가령 무슨 사고가 생겼다손 치더라도 언니를 탓 할 사람은 절대로 없어요. 언니 신변이 걱정된다면 제가 변변치는 않지만 두어 가지 호신술을 가 르쳐 드리죠. 오래 전 제가 깊은 산중에 들어가 약초를 캘 때 몸을 지키라고 선사 홍화모모께서 전수해 주신 술법이에요. 하나는 <목석잠종(木石潛踵)>이라고 은신술 비슷한 거예요. 또 하나는 자그만 깃발인데, 만약 적이나 괴물을 만나서 당해낼 수 없을 때 휘두르면 그 즉시 구름과 안개 가 피어나서 적의 시야를 가리워 버려요. 난 언제나 그 틈에 검광을 타고 뺑소니를 쳤거든요... 언 니는 검둔(劍遁)을 못하시니까 그 대신 <목석잠종>을 배우세요. 안개구름으로 적의 눈길이 가려 지면 그 즉시 이 구결을 외우고 주변에 있는 나무나 바위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해도 언니의 몸 은 그 바위나 나무와 똑같이 변해 버릴 거예요. 그리고 적이 가버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달아나면 되죠. 이 두 가지를 가르쳐드릴 테니 만일의 사태라도 벌어지면 호신용으로 쓰세요. 또 원성이도 힘이 세고 신통한 데다 비조처럼 날렵해서 웬만한 호랑이나 표범 따위 맹수는 단 한 주먹에 찢어 죽일 수 있잖아요? 이 녀석도 언니의 호위병으로 남게 되니까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죠." 이렇게 되고 보니 지선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녕 떠나겠다면 하는 수 없지. 그럼 그 호신술이라도 가르쳐 줘요." 약란은 품속에서 자그만 깃발 한 장을 꺼내가지고 그것을 사용하는 여러 가지 구결까지 함께 전 수해 주었다. <목석잠종>의 구결도 일러준 것은 물론이다. 지선은 정성을 다해 구결과 사용법을 익혔다. 몇 차례 거듭해서 연습까지 하고 났더니 어줍잖은 임시 스승도 감탄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해질녘까지 밖에서 목이 빠지게 독수리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영경은 기다림에 지쳐 약란과 의 논하려고 뛰어들어 왔다. 석실에 들어섰더니 때마침 두 사람이 한창 은신술을 연습하고 있다. "뭣들 하는 거야?... 어라? 그거 아주 재미있는데. 언니, 나도 좀 가르쳐 줘!" "참, 너두... 그저 보는 것마다 욕심 사납게 배우려 드는구나... 그래, 이리 오려므나. 가르쳐 주 지!" 영경은 잠시 만에 지선만큼 익숙해졌다. 배우고 보니 갑작스레 왜 배우는지 궁금해졌다. "지선 언니, 어째서 이걸 배워요?" 그러자 약란이 대신 그 까닭을 설명해 주었다. 영경도 혼자 남을 지선의 불안한 심사를 이해할 만했다. 그녀는 지선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요. 당분간이라곤 하지만 외따른 산 속에 혼자 사는 게 얼마나 쓸쓸하고 무서 운지 나도 겪어봐서 잘 알아요. 우리 갔다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올게." 영경은 좋은 말로 지선을 위로해 주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동굴 밖에 나갔더니 독수리 강우는 밤새 돌아와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의논하 고 지체할 것도 없었다. 영경은 원성에게 몇 마디 엄하게 당부를 했다. 무슨 일이든지 지선이 시키는 대로 따를 것, 함부 로 태원동부를 떠나지 말 것, 청소를 떠맡고 지선의 식사준비도 열심히 도와줄 것 등등, 미주알고 주알 자잘구레한 일들까지 빼놓지 않고 일러주었다. 사람의 세계에서 몇 달을 함께 기거하는 동안 인간의 말을 배우고 듣는 데 익숙해진 원성이라, 주인이 분부를 한 마디 흘리지 않고 연신 고개를 끄덕여 가며 새겨들었다. 이제 영경과 약란은 손에 손을 맞잡고서 독수리의 등에 올라탔다.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벅찬 흥분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지선 언니, 몸조심하세요!" 작별인사를 건네자, 독수리는 힘차게 나래를 치면서 창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 길로 곧장 청욕 산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가물가물 눈길 밖으로 사라지는 영경과 신약란의 뒷모습을 말없이 전송하고 나서, 지선은 허탈 감과 외로움이 밀물처럼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원성이를 시켜 절벽 위 세상 서운동으로 통하는 지하통로를 봉쇄하도록 분부했다. 그리 고 밤낮으로 좌공 수련에 정진하면서 동문들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봉잡힌 조심원 湘江避禍 窮途感知音 嶽麓憑臨 風塵識怪搜 제영운 일행과 이영경, 신약란이 조심원을 도우려고 앞뒤로 청욕산을 향해 떠나간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럼 <서천팔마>와 결투약속을 했던 <연중신악(煙中神顎)> 조심원은 과연 어 찌 되었는가, 우선 그 행적부터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연중신악 조심원은 강서성(江西省) 남창현(南昌縣) 도가장(陶家莊)에서 도균을 속여먹던 엉터리 무술교사들을 일거에 두들겨 내쫓은 후로 도균의 극진한 대접을 받아가면서 그곳에 눌러앉았다. 그는 도균의 심기가 순박하고 의리도 두터울 뿐 아니라 자질 또한 총명한 것을 눈여겨보고 기탄 없이 평생 연마한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 그들 사도(師徒)는 매일같이 어울려 무공을 익히면서 자 못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심원은 그의 행적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원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제는 안전하게 은신했다고 마음을 놓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적의 눈길에 잡히고 만 것이다. 어느 날 제자 도균과 함께 한가로이 장원을 산책하던 그는 난데없이 맞은편 언덕 숲 속에서 날 아든 은표(銀標) 한 개를 받아들었다. 뒤미처 나타난 사람이 바로 <서천팔마>의 부하 <건장신수 (健將神手)> 서악(徐岳)임을 알아보고서 그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언젠가 팔마주 구령이 서천 노상에서 표국(標局)의 화물을 강탈하고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하던 판국에 조심원이 뛰어들어 방해를 했던 일이 있었다. 그것도 좋았지만 그때 조심원보다 수단이 월등한 구령은 그와 겨루어 단숨에 몰아붙이고 이제 막 목줄기를 끊어버릴 순간, 어디선가 날아 온 한 줌 매화침(梅花針)의 암습을 받고서 중상을 입은 끝에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났던 것이다. 구령은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매화침을 쏜 놈을 찾으려고 서천 일대 사방천지를 뒤져보았지만 도대체 하늘로 솟았는지 땅 속으로 꺼졌는지 상대의 종적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자기에게 암습 을 가한 놈도 조심원과 한패거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강성 바크산으로 돌아가서 일곱 사형들과 복수할 일을 상의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조 심원과 매화침을 쏜 그 원수놈을 찾아내어 갈갈이 찢어죽여야만 속이 풀리겠기에 말이다. 사실 조심원으로선 한때의 의분을 못 참고 강도판에 뛰어든 것이지, 본래부터 구령의 정체를 알 거나 무슨 원한이 있어서 한 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에 알고 보니 자기는 멋도 모르고 호랑이 수염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어차피 원수는 맺어진 터, 그렇다고 맞서봤자 자신의 실력으로는 < 서천팔마>의 상대가 못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조심원은 그 길로 곧장 의창현(宜昌縣) 삼유동(三遊洞)으로 돌아가 스승인 <협승> 질범에게 사 실대로 고하고 도움을 간청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스승에게 도움은커녕 도리어 호된 꾸지람 만 당하고 쫓겨났다. 그는 어쩔 도리가 없어 그저 원수의 손길을 피해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몇 년 동안이 나 강호천지를 떠돌아다니던 끝에 겨우 도균의 장원을 찾아들어 안주(安住)하게 되었는가 싶었더 니 그것도 얼마 못 가서 <팔마>의 부하녀석한테 들통이 나고 만 것이다. 그는 팔마로부터 은표 (銀標)의 도전장을 받았다. 조심원은 커다란 화가 코앞에 들이닥쳤음을 깨달았다. 자기 실력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도망질만 친다고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망꾼 신세는 이제 지긋지긋해 졌다. 그동안 적의 손길이 미친다 싶으면 그 즉시 빠져나와 줄행랑을 놓곤 했지만 이번에는 사정 이 전혀 다르다. 적은 정면에 나타나서 도전한 것이다. 여기서 또 피신해 숨는대서야 천하의 웃음 거리밖에 더 되겠는가 말이다. 그는 떳떳하게 구령과의 관계를 인정했다. 그리고 명년 단오절에 틀림없이 청욕산으로 구령을 찾아가 결투에 응하겠노라고 언약을 했다. 도전장을 전달한 서악이 돌아간 후 그는 제자 도균과 작별하고 정들었던 장원을 떠났다. 앞으로 남은 육 개월여의 기간 동안 몇몇 조력자를 찾아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된 그는 노상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곰곰이 생각했다. 사부인 협승 질범은 지금 여간 노발대발한 게 아니다. 자기가 학업의 성취도 이루기 전에 자청해서 산을 내려간 행위를 몹시나 괘씸하게 여기고 있는 판인데, 거기다 섣불리 일까지 사서 저질러 놓고 변변히 수습조차 못하는 제자녀석을 곱게 받아 줄 리가 만무했다. 스승의 도움을 받기는 당초부터 그른 일이다. 그는 다시 친한 벗들을 떠올려보았다. 스승을 빼놓고도 평생에 사귄 친구가 몇몇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기껏해야 <육지금룡(陸地金龍)> 위청(魏靑)의 실력 정도가 고작인데, 이런 솜씨 가지고서 는 팔마의 무공에 상대도 못된다. 하물며 귀중한 벗들의 목숨을 자기 하나 때문에 승산도 없는 싸움에 끌어들여 희생시켜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이 궁리 저 생각 끝에 떠오른 것은 스승님의 절친한 친구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숭산이로 > 중의 하나인 왜수 주매였다. 한데 이 노친네는 행적이 일정치 않아서 어쩌다 맞닥뜨리기나 할 까 찾아낸다는 일은 어림도 없었다. 세상천지에 주매를 찾아다녀서 만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천지조화라고 할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장사(長沙) 부근 곡왕봉(谷王峰)에 은거 중인 철사도인(鐵娑道人)이다. 이 어르신네 는 일 년 내내 하산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뜬구름 잡듯 왜수를 찾아다니기보다 훨씬 만나보기 가 쉽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간에 이 두 사람 중 하나만 끌어낸다면 팔마쯤이야 넉넉히 상대할 수 있고 또 잘만 하면 스승까지도 끌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조심원은 마음을 정했다. 그는 그 길로 장사를 향해 떠났다. 장사로 가는 도중 그는 도처에서 학정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했다. 여진(女眞)의 만주 부족(滿洲部族)이 중원천지에 침입하여 명(明)나라를 무너뜨리고 청(淸)을 건국한 지 얼마 안 되 는 때라, 조정에는 나라를 팔아먹은 한간(漢奸)들만 득시글거리고 절개있는 지사(志士) 모습이 사 라진 지도 오래 되었다. 부귀영화를 탐해 나라와 겨레를 이민족의 손에 넘겨준 그들이 청렴하게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펼 리가 만무하다. 중앙이 그러한데 지방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지방에는 한술 더 떠서 물정 모르는 오랑캐 관리의 위세를 빙자하고 날뛰는 토호(土豪) 악패(惡 覇)와 간사스럽고도 교활한 서리(胥吏)들이 제 마음대로 백성들의 화복(禍福)을 주무르면서 사복 (私腹)을 채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디든 가는 곳마다 보이고 들리는 것은 민간의 질고(疾苦)와 불평 가득찬 비명소리뿐이었다. 조심원은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의분을 느꼈다. '이전 사천 지방에 살 때에는 땅도 넓고 사람도 드물고 토지는 비옥해서 탐관오리들 또한 많이 보아왔지만 호남성처럼 이토록 지독스럽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뒤엎어 놓고 싶다만 결투날짜도 촉박하고 또 그래봐야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한두 집 구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짓일 뿐 아니라, 공연히 뱀 같은 놈들을 건드려 주민들까지 연루되고 좋은 결과를 보기 어려울 게 십상이지. 잠시 그대로 고생을 하면서 살게 놓아 두자. 단오절 결투가 끝나고 요 행히 <사천팔마>를 처치할 수만 있다면 그때가서 동도(同道)들을 많이 규합해 가지고 와서 통쾌 하게 뒤엎어 놓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지금은 그저 눈 딱 감고 모른 척 지나치기로 하자. 단단히 기억해 놓았다가 내 일이 끝나거든 다시 올 테니까.' 의협 남아에게 또 할 일이 생기고 보니 발걸음도 자연 더 빨라 졌다. 며칠 후, 조심원은 마침내 곡왕봉에 다다랐다. 길을 묻고 암자 도관을 물어가며 온 산을 샅샅이 뒤졌다. 한데 어찌 된 셈인지 쉽사리 만나리라 여겼던 철사도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산촌에 사는 주민들에게 알아보아도 철사도인의 행적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조심원은 낙심천만 허탈감에 빠진 채 끝으로 악록(惡麓) 일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악록의 산 밑 에 이르렀을 때 그는 우연히도 생김새와 옷차림이 자못 색다른 도인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첫 눈에 그 도인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아봤다. 도인 역시 그를 비범하게 보았던지, 서로 앞서거 니 뒤서거니 악묘(嶽廟)의 절간 문턱에 이르러서 마침내는 통성명을 나누게 되었다. 피차간에 내력까지 주고받은 다음, 그는 도인의 이름이 황현극(黃玄極), 그 또한 철사도인을 만 나려고 악록에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황현극은 조심원이 불원천리하고 철사도인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때를 잘못 맞추셨소. 그분은 벌써 사흘 전에 운남(雲南), 귀주(貴州) 일대로 떠나고 안 계시오." 조심원은 적잖이 실망했다.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다. <왜수> 주매를 만나기란 바닷속에 빠뜨린 바늘을 찾는 격이다. 할 말도 잊고 한창 안절부절 서성거리던 조심원은 문득 엉뚱한 생각을 떠올 렸다. '그렇지, 이 황현극은 정파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무공실력도 약해 보이지 않는다. 어디 이 도인 에게 협력을 간청해 보기로 하자.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그는 도인에게 찬찬히 <서천팔마>와 원한을 맺게 된 사연부터 결투약속까지 하고 스승의 책망 을 받아 쫓겨난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 지금 저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어디로 피해 달아날 데조차 없이 절박한 상황에 몰린 몸입니 다. 요행히 철사도인을 뵙고 도와주십사 간청을 드리러 왔는데 그분마저 출유(出遊)를 하고 안 계 시다니, 이제는 한 가닥 소망도 끊겨지고 만 셈입니다... 황형, 어떻게 저를 좀 도와주시지 않으렵 니까? 그 은혜는 백골난망, 결초보은하겠습니다." 묵묵히 조심원의 딱한 신세를 다 듣고 나서 황현극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그의 청을 수락했다. "그거 참 공교로운 일이외다. 당신의 원수 <서천팔마>는 나하고도 원한을 맺고 있소. 한데 나 역시 혼자 몸으로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에 처한 터라서 그 자들을 어쩌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 소. 기왕 당신을 알았으니 같은 처지에 서로 모른 척할 것 없겠지요. 우리 함께 손을 맞잡고 또다 른 고수들을 찾아내어 조력을 얻기로 합시다. 그놈들은 우리에게 사사로운 원수일 뿐만 아니라 하늘조차도 용납치 못할 종자들이오. 우리의 협력자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외다. 오늘은 우선 내 처소로 갑시다. 하루만 묵으시면 내 처리할 일을 좀 보고 함께 떠날 수 있으니까요." 조심원은 아무리 마음이 다급하지만 유능한 협력자를 얻은 마당에 하루가 문제될 리 없었다. 그 는 즉시 봇짐을 둘러메고 황현극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황현극의 처소는 자그많고 허름한 절간이었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날도 벌써 저물어, 뜨락 에선 누군가 서성거리며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현극이 문에 들어서자 그 백의(白衣)의 중년인은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아, 이제 오시는군요." "오래 기다리셨소이다. 미안하오!" "저의 사부님께서....." 말문을 열려던 백의 중년인은 황현극의 뒤를 따라 들어서는 조심원을 발견하고 얼른 입을 다물 었다. 몹시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쌍방간에 잠시 긴장을 보였으나 황현극이 얼른 끼어들었다. "아, 참! 두 분 인사들 하시지요. 주도우, 방금 저하고 같이 온 이분은 <연중신악> 조심원, 바로 협승 질범대사의 제자이십니다. 또 이쪽은 <운중비학(雲中飛學)> 주순(周淳)이시고....." 조심원은 중년인과 인사를 나누면서 속으로 은근히 놀랐다. <운중비학>이라면 왕년에 기북(冀 北) 지방에서 명성을 떨치던 협객 <제로삼영(齊魯三英)>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가? 제로삼영은 여지껏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소문에 듣고서 꽤나 흠모해 온 협사들이었다. 주순의 차림새는 비록 속가(俗家)의 형색이지만 영풍도골(英風道骨)에 늠름한 기상이 엿보이고 말씨 또한 솔직하고도 낭랑한데, 눈빛은 겨울밤 하늘의 별빛처럼 맑고 싸느랗다. 인사가 끝나고도 주순은 황현극에게 하려던 말을 잇지 않고 미적미적 조심원의 기색만 살폈다. 조심원은 자기가 들어서 안 될 이야기인 줄 눈치채고 그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두 분, 말씀을 나누고 계십시오. 저는 절구경이나 해야겠습니다." 황현극도 미안스러운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양해를 구했다. "하하, 사실 우리 얘기가 무슨 별달리 감출 일은 아니지만, 잠시면 끝날 테니까요. 바깥 경치나 한번 산보삼아 보고 오시지요." "그리하지요." 주순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사과했다. "도우께선 너무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원, 별 말씀을!" 조심원은 홀가분하게 절간 문을 나와서 산등성 쪽으로 발길이 가는 대로 걸었다.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석양도 이미 짙은 보라빛으로 변하고 사면에 우뚝우뚝 솟은 산봉우 리들마저 아련하게 저녁 안개로 휩싸였다. 동편을 바라보니 한 줄기 상강(湘江)이 비단폭을 길게 펼쳐놓은 듯 유유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쪽 천지는 군봉(群峰)이 빽빽하게 구름을 꿰뚫고 솟아 있는데 또 한쪽은 질펀하니 퍼진 광야 에 촌락들이 오밀조밀, 저녁짓는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무줄기도 앙상한 엄동의 계절이면서도 한결 맑고 탁 트인 경치가 사뭇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오랜 만에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저녁경치를 즐기고 있는 참 인데 문득 등 뒤에서 발자국 소 리가 들려왔다. '황형이 날 찾아나왔는가?' 흘낏 돌아보았더니 웬 궁상맞은 늙은이가 나막신을 '딸가닥 딸가닥!' 끌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다 해져빠진 홑옷 한 벌을 꿰어 걸치고 얼굴은 온통 기름때투성이였다. 얼핏 보아선 영낙없는 상거지 꼴이라서 여느 사람 같으면 불쌍하게 여기고 동전이라도 몇 푼 던 져주거나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조심원의 눈길은 얼마나 예민한가? 늙은이가 가까이 오기도 전 에 그는 벌써 노인의 행동거지가 사뭇 색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윽고 서로 얼굴이 마주칠 만큼 접근하자, 조심원은 그만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노인의 겉모습은 해진 누더기에 기름때투성이였지만 생김새는 학려연견(鶴廬鳶肩), 선학처럼 해말 간 기풍을 갖추고 있지 않는가! 일신에는 속세의 먼지라곤 한 톨도 묻지 않고, 기름때로 더럽게 가리워진 얼굴에서는 절반 남짓 감긴 두 눈이 무섭게 신광(神光)을 쏘아냈다. 조심원은 노인을 보는 순간 가슴이 마구 뛰었다. 더러운 차림새로 행적을 감춘 선배 고인의 한 분임에 분명하다고 직감한 것이다. 그는 멈칫멈칫 노인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 데 선뜻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 입에서 나온 말이 경치얘기였다. "노인장, 저녁 경치가 볼 만합지요?" 그 물음을 듣자마자 노인은 뜻밖에도 노발대발,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개 같은 녀석! 속으로는 날더러 늙고 궁상맞은 거지영감으로 깔보면서, 뭐가 어쩌고 어째? 저녁 경치가 볼 만하냐구? 야, 이놈아, 어쩌자구 나한테 시비를 걸고 까닭없이 빈정대는 거냐?" 노인은 욕설뿐만 아니다. 두 주먹까지 어루만져 가면서 노기등등, 당장에라도 사람을 두들겨 팰 기세로 대드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욕설을 뒤집어 쓴 조심원, 한순간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자기 말을 고깝게 듣고 오해를 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노인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노인장, 역정내실 것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순수하게 서산에 지는 노을 경치였지, 노인 장의 늙고 궁상맞은 만년(晩年)을 빗대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해서 오해하신 모양 인데 부디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노인은 사과의 말을 듣고서 이내 성난 얼굴이 풀어졌다. 그리고는 땅이 꺼져라고 장탄식을 내뱉 더니 냉큼 돌아서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노인장, 잠깐 멈추십시오! 무슨 걱정이 있으시길래 그리도 한탄을 하십니까? 말씀 주시면 미력 하나마 제 힘껏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조심원이 황급히 뒤를 쫓아서 불러세웠으나, 노인은 들은 척 만 척, 도리어 발걸음조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늙은이의 발걸음이 유별나게 힘차고도 민첩했다. 조심원은 더욱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자신도 속력을 가해 추격하기 시작했다. 악록 산을 한바탕 감돌고 헐레벌떡 동편 계곡 아래로 내려갔더니 그 노인은 이제 막 바윗덩어리에 궁 둥이를 걸치는 중이었다. 입에서는 여전히 궁상맞은 탄식이 멎을 줄 몰랐다. "노인장, 이러지 마시고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껏....."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이었다. 늙은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짜고짜 조심원의 면상에다 '퉤' 하 고 가래침을 한 모금 내뱉았다. "네놈이 날 도와줘? 너 따위가? 자기 일도 감당하지 못하는 녀석이! 웬 참견이야! 어림 반푼어치 도 없는 짓이지....." 늙은이는 그래도 모자라는지 악을 고래고래 질러댔다. 호의를 베풀려다가 느닷없이 가래침을 뒤집어 쓴 조심원, 속에는 울화통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 나 꾹 눌러 참고 내색도 하지 않았다. 호통을 친 노인의 마지막 한 마디를 듣고 보니 그건 사실 이 아닌가 말이다. 지금 자신은 제 앞가림도 못하고 원수에게 쫓겨다니는 주제에 또 누굴 돕겠다 고 나선단 말이냐?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치고는 너무도 신통한 호통이었다. 그는 얼굴에 묻은 침을 쓰윽 문질러 닦고 웃음까지 곁들여서 대꾸했다. "허헛, 소인도 노인장을 도와드릴 만한 힘이 없는 것은 잘 압니다. 그래도 노인장의 존함과 내력 을 들려주신다면 후배로서 흠모의 정을 바칠까 하옵는데 그것도 안 되겠습니까?" 그제사 노인이 껄껄껄 웃었다. "그것 참... 자네 수양 한번 깊게 쌓았군그래! 웬만한 녀석이라면 성질을 버럭 내고 덤벼들 텐데 말이야. 그건 그렇구... 자네 말은 이해가 좀 안 되는 걸? 날더러 왜 한숨을 내쉬냐고 물었든가? 자네야 모르지. 나한테 능설흥(凌雪鴻)이라고 아주 기막힌 마누라가 있었는데 이 늙은이 하나를 외롭게 남겨 두고 오래 전에 죽었단 말씀이야. 마누라가 살아 있을 적에는 곧잘 재간을 부려서 남의 집 담을 넘어가서 돈을 좀 훔쳐다가 늙은이한테 술도 사 먹이고 했는데 지금 내 처지는 술 은커녕 끼니도 못 때울 형편이 되고 말았어. 나한테 주가(周哥)성을 가진 제자 한 놈이 있기는 한 데, 이놈은 날더러 술을 대줄 테니까 제발 훔쳐 마시거나 남을 속여서 빼앗아 먹지 말라는 거야. 그건 내가 싫다고 했지. 재미가 없거든. 하물며 그 녀석도 몇 해 전에는 도적질이나 하던 놈이라 그놈이 사 주는 술에선 도둑놈의 비린내가 나더란 말씀이야. 그러니 아무리 뱃심좋게 마시려고 해도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야지. 그래서 제자놈 몰래 겨우 이 악록산까지 피해 와서 건달녀석 이나 한두 놈 봉으로 잡아가지고 술 좀 빼앗아 먹으러 왔거든. 한데 어찌 된 셈인지 사흘씩이나 기다려도 봉은 한 마리도 걸리지 않는 거야. 기껏 걸린다는 게 저기 저 낡아빠진 절간에 왔다갔 다 하는 도인, 그 늙다리가 술을 사 준다는 게 고작이었지. 하지만 이래뵈도 내 눈치가 얼마나 빠 르다구. 저 녀석은 나한테 술 몇 잔 먹여놓고서 아주 귀찮게 난처한 일을 하나 떠맡길 속셈이란 말씀이야. 그런 술을 내가 어찌 마시겠나?... 하지만 술 생각에 목젖이 근질거려서 어디 떠날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저놈의 절간 부근에서 어슬렁어슬렁, 한참 동안이나 생각을 했지. 그놈이 떠맡 기는 일을 안해 주면 술을 먹여줄 리가 만무하고, 또 일을 대신 떠맡아 해주자니 귀찮고... 사실 말이지, 나는 요 몇 년 동안 그보다 더 어려운 사건들을 식은죽 먹기로 해결해 왔거든. 한데 이젠 늙고 지치고 귀찮아진 거야. 그래서 어수룩한 봉이나 잡아서 공술이나 뺏어 마실까 했는데 이거 어디 쉽사리 손에 걸려야 말이지. 어쩌다 겨우 자네 하나 만났더니만, 뭐 저녁 경치가 어떠니, 우 물물이 어떠니 하면서 남의 심사를 덧뜨려 가슴 아프게 만들지 않는가 말이야. 그것도 모자라서 또 여기까지 쫓아와 가지곤 반나절씩이나 도와줍네 어쩌네,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나 늘어놓고... 자 네가 어쩔 셈인지는 모르지만, 나한테 공술 한 잔 먹여줄 얼간이인지 아닌지는 알 만하다, 이 말 씀이야!" 늙은이 말마따나 반나절 동안 미친소리를 주절주절 지껄여댄 것은 그쪽이었다. 그러나 조심원은 잠자코 끝까지 들어주었다. 진인(眞人)이 자신의 면모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얼토당토하게 둘러대 는 말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노인의 아내가 <능설홍>이란 말을 들었을 때 그 이름이 몹시나 귀에 익으면서도 얼핏 기억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이 노인의 정체가 분명코 검협의 부류 아니면 이름을 감춘 도술 높은 인물임에 틀림없다고 느껴졌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다져먹었다. 노인이 자기한테 침을 뱉든 욕설 을 퍼붓든, 또 아무리 모욕적인 행동으로 괴롭히든 간에 꾹 참고 잠시 동안 어울리면서 끝내 그 신분내력을 캐내고야 말리라고 결심한 것이었다. 조심원은 속을 감춘 채 웃음섞어 대꾸를 했다. "아, 노인장께서 약주 한 잔 드시고 싶은 거로군요. 알겠습니다. 소인이 대접해 드립지요! 어떻습 니까?" "잠깐만!... 요 몇 년 동안 남의 술을 적지 않게 얻어 먹으면서 내가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 야. 처음에는 나도 곧잘 어수룩한 녀석을 봉으로 낚아서 술을 뺏아 마셨는데, 어찌 된 셈인지 나 중에 다 마시고 나면 꼭 술 사준 녀석의 매끈한 혓바닥에 놀아나서 신바람나게 그놈 대신 정신빼 고 뛰어다니느라고 지쳐서 죽을 뻔하곤 했거든. 한데 자네도 평소 나하고 안면도 없는 처지이면 서 처음 보자마자 나한테 술을 사주겠다니, 지금 세상천지에 자네처럼 인심 후한 자가 또 어디 있겠어? 흠흠, 설마하니 어수룩하게 나한테 넘어가는 척하고서 내가 술을 흠뻑 마신 다음에 거꾸 로 날 봉으로 낚을 작정인가? 흠흠, 그 수단에 내가 넘어갈 성싶은가? 어림도 없는 수작 말게!" "그건 노인장께서 지나치신 생각입니다. 소인은 딴 뜻없이 진정으로 대접해 드리고 싶은 것입니 다... 하지만 소인이 이곳에는 초행이라 어딜 가야 술집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노인장께서 어디 좋은 집이 있거든 앞장서십시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어떠십니까?" "그렇다면 자네 진정으로 원해서 봉노릇을 하고 내 술값을 책임지는 거네!" 조심원은 그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세상 천지에 사람을 맞대놓고서 서슴없이 봉노릇을 하라고 윽박지르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노인이 짐짓 그래 보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는 실소를 금 할 수가 없었다. 조심원은 그래도 공순하게 응대를 했다. "소인, 진정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뿐, 전혀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자아, 날도 벌써 어두워졌으니 어서 가시지요." "가자면 가구말구! 방금 내가 보니까 자네 저 낡아빠진 절간에서 나오더군. 그래서 대뜸 봉인 줄 알아봤지. 절간에 사는 도인녀석과 혹시 짜고 하는 수작은 아니겠지? 그 작자, 나한테 술 먹이고 봉잡으려는 줄 뻔히 아는데 자네가 그 작자마저 내 술판에 끼어넣을 생각이라면 내 차라리 맹탕 으로 굶었지 자네 안 따라가겠어!" 조심원은 가슴이 뜨끔했다. 원래는 속으로 황현극과 주순을 함께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어느 틈엔가 노인도 그 낌새를 채고서 미리 앞질러 입막음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두 사람을 한자 리에 청하려던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랄까. 황현극은 내일 하룻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게 주순과 관계된 일인지 는 모르지만 또 어렵게 사귄 주순하고 술 한 잔 나누며 속시원히 흉금을 터놓을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자못 기대를 걸어보았다. 오늘 저녁 그 기회를 마련하지 못하는 게 섭섭하기는 했으나 우 선은 단념해야만 했다. 노인과 조심원은 그 길로 의창현 서문(西門)을 향해 내려갔다. "노인장의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 술집으로 가는 도중에 조심원이 또 물었다. 노인은 시침을 뚝 떼고 대답했다. "몇 해 전까지는 나도 이름이 있기는 있었지. 허나 오랫동안 버리고 쓰지 않았어... 자넨 말 끝마 다 걸핏하면 자기더러 '소인, 소인(小人)'이라고 일컫는데, 그게 자네 어릴 적 이름인 모양이로군 그래. 그렇다면 나도 자네더러 '소인'이라고 불러주지. 자네도 날 그냥 '노인장'이라고 부르지 말 게나. 이제 내 술값 신세를 지는 판에 봉한테 '노인장'이라고 불리우니까 아주 귀에 듣기 껄끄럽 구만. 이렇게 함세. 나는 평소에 흰옷을 즐겨 입거든. 한데 하루만 입었다 하면 이내 새까맣게 더 러워지는 게 안 됐긴 하지만, 어쨌든 백의(白衣)는 좋아하네. 그러니까 자넨 날더러 백형(白兄)' 하고, 또 나는 자네더러 '소인' 하고 부르기로 하지! 그리고 앞으론 누구도 존함이나 이름 같은 건 아예 묻지 않기로 하자구. 또 그 따위로 귀찮게 굴면 자네하고 같이 가지 않겠어!" 이쯤 되어서 조심원은 이미 노인의 내력을 대충 알아챘다. 그러나 겸손을 떨고 공경해 드리기보 다는 차라리 노인장의 분부대로 따르는 게 좋을 듯싶어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의창현 성내로 들어선 후, 두 사람은 서문 큰 길가에서 제일 유명한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야, 술 가져와! 안주도 최고급으로 푸짐하게 내오구!" 자리를 정하고 앉기가 무섭게 노인은 고래고래 악을 써가며 주문을 했다. 이윽고 푸짐한 술상이 떡 벌어지게 차려졌다. 노인은 <봉>한테 한 잔 마셔보라는 말 한 마디도 없이 걸신(乞神)이 들린 듯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입술에 닿았다 하면 술잔이 비고 손길이 닿기가 무섭게 요리접시는 동이 났다. 조심원은 몇 차례나 말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말 붙일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식탁에 놓인 술 과 안주만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있었다. "야, 술 주전자 바닥났다! 안주도 떨어졌다!" 이런 판국에 조심원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가는 노인과 함께 갈 데까 지 가보면 무슨 결말이 나리라고 막연히 기대해 보는 것이 그로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소란스런 술잔치는 두 시진이나 넘게 계속되었다. 술청에 노닥거리던 술꾼들도 깨끗이 가버 리고 이제 가게 문까지 닫을 시각이 되었다. "그럼 나도 슬슬 가볼까?" 술집 주인과 주보(酒保)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노인은 그제서야 겨우 흥건하니 젖은 기운 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값 안주값을 계산하던 주보의 입이 그만 딱 벌어지고 말았다. 계산서를 받아든 조심원도 눈알이 튕겨져 나왔다. 노인 혼자서 마셔댄 술이 자그마치 배갈 사십 여 근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조심원은 두말도 않고 그 엄청난 술값을 물었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는 노인의 뒤를 따라 술청에 서 나왔다. "자, 이제 난 가려네." 길거리에 나오자마자, 노인은 고맙단 말도 않고 대뜸 작별인사부터 건넸다. "어디 사시는지요? 많이 취하신 듯한데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조심원은 공손하게 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노인의 거처를 알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노인은 벌컥 성을 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네 녀석도 날 봉으로 잡으려고 꿍꿍이 속셈을 품었지? 이제껏 나를 곤죽이 되도록 취하게 만들어 놓고 그걸 핑계삼아 형산(衡山)까지 모셔다 줍네 하면서 내 거처를 몰래 알아낼 작정이군그래? 뭘 훔쳐가려구?... 흠흠, 본전 생각이 간절하지? 옛다. 그럼 도로 토해 주 마!" 고래고래 악을 쓰더니만 정말로 입을 쩍 벌리고 배터지게 먹어 댄 술과 음식을 '웩, 웩!' 토해내 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조심원은 질겁을 해서 황급히 곁으로 피했다. 너무도 갑작스런 짓이라 그는 엉겁결에 피하다가 지나가던 행인을 들이받고 말았다. "아이쿠, 죄송하게 됐습니다!" "원, 별 말씀을... 실수로 그럴 때도 있지요." 조심원은 미안해서 연신 허리 굽혀 사과했다. 행인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닌 줄 아는 터라 겸사의 말을 건네고 제 갈 길을 갔다. 조심원과 부딪친 행인은 나이 젊어 보이는 공자였다. 훤칠한 몸매 에 기상도 늠름한데 양미간에는 영준한 기품이 서렸다. 어둠 속에서 흘낏 바라본 순간 어딘지 모르게 수심이 얼굴 가득히 차 있는 느낌을 받았으나, 조 심원은 그걸 다시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어느 새 노인은 멀찌감치 달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뿔싸!' 그는 허겁지겁 노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도망꾼 노인은 홀연 뒤돌아 보더니만 봉녀석이 추격 해 오는 걸 발견하고서 다리야 날 살려라 냅다 뛰는데 얼마나 빠른지 하루에 천리길을 달린다는 조심원의 다리 힘 가지고서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쫓고 쫓기는 자의 거리는 시종 이삼 장 간 격으로 도무지 줄어드는 기색이 안 보였다. 노인을 놓칠세라 조심원은 어릴 적 젖먹던 힘까지 다 뽑아 추격했다. 어느 사이엔가 두 사람은 의창현 성벽(城壁)까지 달음박질쳐 갔다. 성문은 이미 닫힌 지 오래 되었을 터, 도망꾼이 뛰어봤 자 이제는 독 안에 든 쥐다. 그러나 조심원의 안심은 아직 일렀다. 눈 깜빡할 사이에 노인의 몸뚱이는 벌써 성벽 위를 올라 타고 있는 것이었다. 추격자의 안목은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노인이 어떤 방법으로 올라갔는지 뚜렷이 목격은 못했으나 그 행적만큼은 충분히 간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런 봉을 놓쳐서야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노인장, 잠깐만!" 성벽 밑까지 다다른 그는 애원섞어 부르짖더니 힘껏 땅을 박차고 솟구쳐 올라갔다. "아이구 맙소사!" 조심원이 성벽까지 따라 올라가자, 노인은 기급을 하고서 벌써 몸을 뒤채더니 성 밖 해자(垓字) 물 속으로 '풍덩!' 떨어져 내렸다. 뒤미처 조심원도 뛰어내렸다. 풍덩! 물보라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려 허우적허우적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노인의 모습은 간데없이 사 라졌다. 제아무리 뚝심 좋은 장사라도 이 엄동설한에 유유자적 헤엄을 칠 수야 없는 일이다. 그는 허겁 지겁 물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당장에 뼛골까지 쑤실 만큼 찬바람이 전신을 휩싸버렸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웃니 아래턱이 '딱, 딱, 딱!' 마주쳐 소리를 냈다. 이 추위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 다. 흠뻑 젖은 생쥐꼴을 해가지고 그는 악록산 절간을 향해 죽어라고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하늘에 초롱초롱하던 별빛도 희미해지고 뼈를 에이는 듯한 바람이 시커먼 구름장을 휘몰아 왔다. 아무래 도 한바탕 큰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헐레벌떡 절간에 뛰어든 조심원은 방안의 보따리부터 골라가지고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숨을 돌이키고 보니 주인 황현극과 주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제단의 촛대 밑에 종이가 한 장 눌려 있었다. 황현극이 그를 찾다가 떠나면서 남긴 편지였다. <조도우, 암만 찾아도 안 계시길래 그냥 떠나오. 주순 도우와 함께 볼 일이 있어 형산에 다녀올 참이오. 늦어도 내일 오후까지는 돌아오겠소. 방안에 음식과 등불은 다 마련되어 있으니까 하룻밤 묵으시고 내일 함께 출발하기로 합시다.....> 조심원은 편지를 읽고 나서 황현극이 돌아올 때까지 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얼었던 몸도 녹고 하룻저녁 동안 도깨비놀음을 하고 났더니 나른하게 심신이 모두 풀렸다. 나무 침상 위에 벌렁 누 워 두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고 온갖 상념이 떠올랐다. '그 노인은 누구일까? 틀림없는 기인(奇人)이다. 짐짓 나를 요모조모 떠보느라고 그 소동을 피운 것은 이해가 된다. 허나 무슨 의도로 내게 접근했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귀신같이 사라져 버리 다니... 악의로 그랬을까, 아니면 호의적으로 접근했을까?... 기괴한 인물이로구나.....' 피곤하기는 한데 떠오르는 생각도 많고 더구나 소나무 숲을 뒤 흔드는 겨울밤 찬바람 소리가 ' 우르르, 쏴아!' 하고 파도치듯 귀청을 울리는 통에 마음만 어지러울 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조심원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어젖히고 내다보니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혀 있 다. 잠도 안 오고 할일없이 밖으로 나가서 이리저리 거닐어 보았다. 대낮에는 그 많던 산봉우리도 암흑 속에 잠겨 윤곽조차 어림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대문 곁 큼지막한 바윗덩이에 걸터앉았다. 잠시 있자니 파도치던 소나무 숲도 잠잠해지고 매서운 바람도 멎었다. 그리곤 이내 손바닥만큼 씩이나 큰 눈송이가 한 조각 두 조각 흩날리면서 떨어졌다. 스르륵, 스르륵..... 만뢰구적(萬賴俱寂), 세상 천지가 온통 고요 속에 잠긴 이 겨울 밤에, 조심원은 눈송이들이 땅에 내려앉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었다. 우두커니 앉아 암흑의 천공(天空)을 우러러보고 있자니까 더 욱 무료하기만 했다. 문득 이마에 섬뜩하게 차가운 감촉이 닿더니 물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더듬는 손 끝에 물이 묻었다. 눈송이가 떨어져 체온을 받고 녹아 흐른 것이다. '여간해서 금방 그칠 듯싶지 않은 걸... 아주 많이 내리겠어.' 그는 바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고서 대문 안으로 돌아서는 순간, 불 현듯 허공을 찢는 파공음이 멀리서부터 울리는 것을 들었다. 검술의 솜씨는 비록 고명하지 못한 그였으나 평생 무도(武道)를 걸어온 터라, 파공성을 듣기가 무섭게 상대방이 대단한 고수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잽싸게 대문 앞 공터를 가로질러 우람 한 고목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조심원이 나무 뒤로 피신한 것과 거의 동시에 검광을 탄 인물은 벌써 공터까지 모습을 드러냈 다. 두 줄기 누런 검광이 번뜩 사라지더니 이윽고 절간 대문 앞에는 기괴한 옷차림의 두 사나이 가 우뚝 내려섰다. 숨어서 침입자의 동정을 살피던 조심원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앗!' 소리를 지를 뻔했다. 침입자 들의 옷차림은 승려도 도인도 아닌 모습으로 머리를 온통 풀어헤친 채 손에는 한 자루 상문장검 (喪門長劍)이 들려 있었다. 누르스름한 칼빛 그림자 아래 사뭇 흉악스런 면상이 드러났다. 그들의 차림새는 지난날 서천 대로상에서 마주쳤던 팔마주(八魔主) 구령, 그와 추호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차, 기어코 팔마들이 내 종적을 발견했구나!... 이 노릇을 어찌한다?' 자기 실력 가지고는 상대가 안 되는 줄 뻔히 아는 터라, 조심원은 그 자리에 납죽 엎드려 옴짝 달싹도 못했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대문 앞 공터에 당도한 두 침입자는 서슴지 않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구나. 안에 있었다가는 꼼짝없이 잡혔을 게다.' 조심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두 놈이 안 보이는 틈을 타서 멀찌감치 줄행랑을 놓아야겠 다고 결심했다. 그가 막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왼쪽 팔이 찌르르! 마비되더니만 뒤미처 몸뚱이마저 딱 굳어져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뿔싸, 여기도 적이 있었구나!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침입자가 두 놈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는 벌써 늦었다. 그는 장탄식을 터뜨리고 말았 다. 이젠 꼼짝도 못하고 앉아서 죽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얼마 안 있어, 절 안으로 들어갔던 두 놈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돌아 나왔다. "그것 참 이상한 걸... 서악은 분명 그놈이 여기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안 보이지?" "셋째형, 서두를 것 없수. 방안에 촛불이 켜진 걸 보면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 같소. 우리 저쪽 구석 바위 위에 앉아서 기다려 봅시다. 밤중에 촛불 켜놓은 놈이 안 돌아올 리야 있겠소?" 두 침입자는 이러쿵저러쿵 말을 주고받으면서 하필이면 방금 전까지 조심원이 앉아 있던 바위 쪽으로 걸어왔다. 뜻밖에 대판 쏟아지리라고 생각했던 눈이 어느 새 멈추어 버렸다. 적설량은 땅에 한 치 남짓밖 에 쌓이지 않았다. 옴짝달싹도 못하고 나무 뒤에 엎드려 멀뚱하니 동정만 살피던 조심원, 그들이 어슬렁어슬렁 자 기 곁을 지나치는 동안에 식은땀을 흠뻑 흘리고 말았다. 그 순간이 어쩌면 그리도 긴지 호흡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천만다행으로 두 침입자는 시종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무 앞을 지나쳐 그 바위 앞에 멈춰서더 니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고선 털썩 주저앉았다. "이것 봐라, 여섯째! 이 바위에 눈자국이 수상한데? 누가 앉았다 간 것처럼 궁둥이에 깔린 자국 이 나 있어. 아무래도 그 자식 요 근처 어딘가 있는 게 분명해!" 뒤미처 따라 앉던 녀석이 바위를 손가락질해 보이면서 소리쳤다. 또 한 놈이 느긋하게 응수했다. "그거 뭐 어려울 게 있수? 우리 둘이서 검광을 쏘아가지고 이 주변을 싹 쓸어버립시다. 제깐 놈 이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있고서야 안 나타나고 배겨나겠소?" 말이 미처 끝나기 전이었다. 느닷없이 '철썩!' 하는 소리가 나더니 앞서 입을 벌렸던 녀석이 용 수철에나 튕겨지듯 펄쩍 뛰어 일어났다. "여섯째, 조심해! 어떤 놈이 우리를 노리고 있어!" 그와 동시에 검광 한 줄기가 번쩍 솟구쳤다. 악을 쓴 놈이 잽싸게 호신검을 펼친 것이었다. "아니, 형님! 어째 그러슈?" "나도 모르겠다. 방금 네 말대로 막 칼을 꺼내려는데 느닷없이 누군가 내 따뀌를 후려갈겼어! 아 이쿠, 지금도 눈에서 별이 번쩍번쩍 하는 걸... 어떤 시러배 아들놈이 우리를 암습하는 게 아니면 또 뭐란 말이냐?" 투덜거리는 도중에 또 '철썩, 철썩!' 호되게 따뀌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한 놈이 한 대 씩 맞은 모양이다. "우와앗!" 어둠 속에서 노발대발, 귀신같은 아우성이 터지더니 두 녀석은 일제히 검광을 쏘아내어 마구 휘 두르기 시작했다. 두 줄기 검광은 발광한 무당 춤추듯이 상하좌우로 정신 못 차리게 사방을 찔러 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썩, 철썩!' 따귀를 후려치는 소리도 그치지 않았다. 두 녀석의 검무가 빠르면 빠를수록 따귀소리도 점차 거세어졌다. 무엇에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두 녀석은 고래고래 돼지 멱 따는 소리로 비명을 질러가면서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정신도 못 차릴 지경이 되었는지 허공에다 미친 듯 휘둘러대던 칼부림의 속력도 줄어들고 검광마저 제 빛이 흐려지고 있었다. 나무 뒤편 그늘에서 공포에 질려 가슴을 죄던 조심원은 자신도 꼼짝달싹 못하고 절대절명의 처 지에 빠져 있다는 사실마저 거의 잊었다. 이제나 저제나 오직 죽음밖에 안 남은 이 마당에 와서 저 극악스런 놈들이 별안간 누구인가 어둠 속의 보이지 않는 인물에게 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지는 꼴을 보자니까 두려움보다는 웃음보가 먼저 터지려 했다. 이윽고 발광하던 검무도 시들해지고 그에 따라 따귀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던 녀석이 아우에게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봐, 여섯째,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밤은 아주 괴이하단 말야. 찾는 놈이 안 보이는 거야 그렇 다 치고, 어째서 이 바윗덩이에 앉자마자 얻어터지는 거지? 우릴 때린 사람이 만약 자네나 나한 테 원수진 놈이라면 저토록 기막힌 은형술(隱形術)을 써가지고 우리 모가지를 썩둑 베어내기야 식은죽 먹기가 아니겠나? 그런데 죽도록 두들겨 패기만 하니 어쩔 셈이냔 말이야. 아무래도 사람 은 아닌 것 같은 걸, 혹시 우리가 저 나무귀신을 건드려서 노하게 만들었는지도 몰라." "원 형님두 별소리 다하시우! 이게 귀신장난인지 도깨비놀음인지도 알지 못하고 넋이 빠져 헛소 리를 지껄이는구려. 여러 말 할것없이 오늘은 그냥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 일찌감치 다시 옵시다. 설마 그때까지도 이 작자가 안 돌아올라구!" "그러세. 제미랄!... 시러배 아들놈 같으니, 비겁하게 귀신 장난질로....." 투덜투털 욕설이 터져나오는 순간, 두 녀석은 또다시 '철썩, 철썩!' 모가지가 돌아갈 정도로 호되 게 얻어맞았다. "아이쿠, 맙소사!" 혼비백산을 한 두 마왕(魔王), 욕설도 더는 못하고 앞뒤 가릴 것 없이 허둥지둥 검광을 일으켜 타더니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워낙 신경이 굵은 조심원이다. 자기 역시 옴짝달싹 요동도 못하는 주제에 적들이 겁에 질려 낭 패스럽게 뺑소니치는 꼬락서니를 보고서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웃어젖혔다. 그러나 요절복통을 한 순간, 허공으로 줄행랑을 놓던 두 줄기 황색 검광이 갑작스레 무엇엔가 딱 부딪친 듯, 반공중에서 빙그르 맴돌더니 마치 파리가 문창호지를 뚫으려고 파닥거리는 것처럼 사면팔방으로 마구 짓찧고 들쑤시는 것이 아닌가! 한데 이상스럽게도 그 너르디너른 허공에 보이 지 않는 철벽의 테두리가 둘러쳐 있는 듯이 뚫고 나갈 틈이 없었다. 마왕들의 검광은 그 속에 갇 힌 채로 부질없이 파공성만 일으키면서 맴을 돌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만에 두 줄기 누른빛 검광이 절간 빈터로 다시 날아왔다. 조심원은 또 한 차례 긴장을 했 다. 아까 도망질치던 두 녀석이 재차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번에는 조심원이 숨어 있는 아름드리 고목 앞으로 슬금슬금 조심스럽게 다가왔던 것이다. 머리를 마주대고서 한바탕 무엇인가 수근거리던 그들은 고목 앞 눈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검광 으로 전신을 감싼 채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무슨 요법이라도 일으킬 모양이었다. 조심원은 숨을 딱 끊고 죽을 둥 살 둥 전신경을 두 귀에 집중시켰다. '툭탁, 툭탁!' 마구 뛰는 심 장의 고동소리가 적에게 금방 들리기라도 하는 듯했다. 허나 반나절을 기다려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윽고 부시럭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들리더니 둘 중 한 녀석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이상한 걸... 정말로 이상해! 오늘밤은 어째서 우리 법술마저도 효력이 없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보기에 이 부근에서 신형을 드러내지 않고도 우리 묘법을 깨뜨릴 만큼 유력한 고수는 없 다고 생각하네. 아무래도 저 나무귀신이 노해서 우리들을 못 가게 가둬놓고 골탕을 먹이는 게 분 명해. 우리 이렇게 해보세." 여기까지 말하고선 음성을 바짝 낮추더니 동료의 귀에다 뭐라고 소근거렸다. 잠시 후 두 마왕은 고목 앞으로 나란히 다가와서는 무릎 꿇고 나무 그루터기를 향해 공손히 절 을 올렸다. "신령님, 저희 두 형제는 원수놈을 찾으려고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신령님께는 손톱만큼도 불경 스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어찌해서 저희들을 심술맞게 골탕먹이시는 겁니까? 제발 노여움을 푸시고 저희들일랑 놓아주십쇼." 아닌 밤중에 홍두깨 雪夜尋仇 錢靑選嶽麓遭毒打 殘年買醉 趙心源酒肆結新知 조심원은 무시무시한 원수 두 놈이 자기 앞 일 장 거리도 안 되는 곳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걸 보고서 놀란 나머지 숨도 감히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그들이 비는 소리를 듣자니까 자기까지도 산신령의 노염을 탄 것이나 아닌지 몰라서 잔뜩 겁에 질리고 말았다. 하기야 자기 마음대로 몸을 움직여 달아날 처지도 못되지만 말이다. 한창 조바심에 속으로 안절부절 끌탕을 하는 판인데 느닷없이 누군가 뒤통수에서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 조심원은 잔뜩 앞 쪽 두 놈한테 정신이 팔려 있다가 그만 혼비백산을 하고 말았다. 조심원이 짐작했던 대로 두 사람의 침입자는 <서천팔마> 가운데 삼마주 전청선과 육마주 여후 였다. 그들 역시 오래 전부터 황현극과 깊은 원수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알아본즉 황현극은 <동 해삼선> 중의 하나인 현진자(玄眞子)의 제자라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이를 갈면서 훗날 기회가 오기만을 고대하던 참이었다. 한데 지난해 소문을 듣고 보니 원수 갚을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황현극은 스승의 명령을 받들고 사형 제갈경아(諸葛警我)와 함께 단로(丹爐) 두 좌(座)를 각각 갈라 맡아 성심성의로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황현극은 도근(道根)이 깨끗치 못해 주화입마(走火 入魔)에 빠져서 이레째 되는 날 지키고 있던 단로를 엎어뜨림으로 스승 현진자와 더불어 다년간 천하의 명산 복지를 섭렵한 끝에 체취해 놓은 영약 선초를 못 쓰게 만들어 버렸다. 오랜 세월 동 안 쌓은 공력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과연 스승 현진자는 크게 노하였다. 제자가 속된 마음을 깨끗이 씻어버리지 못하고 망념(妄念)에 빠져 도규(道規)를 범한 것이다. 스승은 가차없이 중벌에 처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현극은 입문한 이래로 여지껏 단 한 번의 과오도 범한 적이 없었다. 진심(塵心)은 버리지 못한 대신에 그의 성실 성만큼은 여느 제자보다 못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현진자는 그를 문하에서 축출하는 것으로 벌을 대신했다. 그때 사형 제갈경아는 또다시 스승에게 황현극을 위해서 거듭 간청을 올리고 나섰다. "사부님, 황사제는 지난날 분부를 받잡고 약초 채취에 나갔다가 이단(異端) 문파의 무리들과 적 지 않은 원한을 맺어왔습니다. 그러하온즉 황사제를 문중에서 쫓아내시되 부디 제 한 몸을 지킬 무공만큼은 남겨 주십시오. 비검마저 추탈(追奪)하신다면 황사제는 하루도 못 가서 원수들의 손에 죽고 말 것입니다. 사부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갈경아의 정성어린 간청이 스승의 마음을 움직였다. 덕분에 황현극은 겨우 비검을 폐기당하지 않고 온전히 스승의 문하를 떠날 수 있었다. 사문에서 축출당한 그는 굳게 결심했다. 기필코 삼 년 안에 자기가 실수로 잃은 단로의 영약재 료를 모두 다시 채집해 놓고 선배 사숙들의 도움을 얻어 스승 현진자의 용서를 받아 문하 제자로 복귀하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과연 일심전력,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천하의 명산을 샅샅이 뒤진 끝에 마침내 잃었던 영 약 선초를 고루 갖추어 놓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일은 자신을 대신해서 스승에게 죄를 빌어줄 선배 사숙을 찾는 것이었다. 스승 현진 자가 중재를 거절치 못할 선배 검선으로는 건곤정기 묘일진인 제수명과 숭산이로뿐이다. 이들만 이 현진자를 움직여 황현극을 다시 문하 제자로 받아들이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점을 익히 잘 아는 터라 황현극은 누구를 찾아갈까 신중히 생각했다. 묘일진인은 평소 교규(敎規)가 몹시 엄격하므로 자신의 간청을 용납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럼 숭산이로는 어떨까? 왜수 주매를 찾기란 물 속에서 바늘찾기보다도 더 힘들다. 추운수 백곡일 (白谷逸)은 가능하다. 이 선배 검선은 아미파의 장미진인과도 깊은 교분을 맺었을 뿐 아니라 그 제자인 현진자와 묘일진인 두 분과 지기지우(知己之友)로 막역한 교우를 맺었다. 즉 아미파 교조 양대(兩代)에 걸쳐 밀접한 관계를 이어온 분이므로 자신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적임자인 것이다. '그렇다. 추운수를 찾아가기로 하자!' 적절한 선배를 골라냈으면서도 황현극은 또다시 세심한 계획을 짜야 했다. 성미가 워낙 유별난 그 노인들를 자기 혼자 힘으로 설득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뇌리에 떠올린 인물이 장 사(長沙) 곡왕봉(谷王峰)에서 은거 중인 철사도인이었다. 그는 추운수와 아주 깊은 연원(淵源)이 있고 또 황현극 자신과도 오래 전부터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은 사이였다. 황현극은 약초의 채집이 끝나자 우선 은밀한 곳을 찾아서 약초를 감추어 놓고 그 길로 막역지우 철사도인을 찾아갔다. 그러나 벗은 이미 운남, 귀주 지방으로 운유(雲遊)를 떠나고 없었다. 언제 돌아올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못 낙담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만난 사람이 바로 조심원이었다. 그 역시 철사도인의 협력을 구하려고 곡왕봉에 찾아든 것이엇다. 그는 조심원의 근골이 비범한 데다 또 협승 질범의 제자였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끌렸다. 협승 질범이라면 고행두타(苦行頭陀)와 동문 사형제간이다. 그러니까 만약에 철사도인이나 추운수를 찾 지 못하거나 설득에 실패할 경우, 그는 조심원을 통하여 협승 질범을 만나고 다시 협승의 협조를 구하여 고행두타에게 스승과의 중재를 부탁해 보리라는 계산이 선 것이다. 그는 조심원을 마지막 패로 쓰기로 했다. 조심원의 경우처럼 황현극도 서천팔마와 깊은 원한을 맺고 있었다. 몇 년 전에 그는 스승 현진 자의 명을 받고 청라산(靑螺山)에서 약초를 채집하다가 팔마의 형제들과 영초를 놓고 싸움이 벌 어졌는데, 그때 황현극은 상대방의 손가락을 끊어 불구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팔마는 황현극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복수하기 위해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 그가 현 진자의 사문에서 축출당했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활동을 개시하였다. 황현극 또한 팔마의 준 동(蠢動) 기미를 눈치채고 단 한 시각도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조심원과 만나게 되었고, 그 역시 팔마와 원수지간이란 사실에 더욱 동병상 련(同病相憐)의 정을 느꼈던 것이다. 황현극과 조심원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여 철사도인의 행 방을 찾아 협력을 얻고 공동의 적 팔마에 대처하기로 약속했다. 조심원은 황현극에게 있어 스승의 문하로 복귀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협승 질범, 고행두 타를 통하여 시도한 중재가 실패로 돌아가고 스승이 끝내 자신을 용납해 주지 않을 때는 오직 스 승 앞에서 칼을 물고 자결하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그만큼 비장한 각오로 계획을 추진했다. 조심원과 만나기 전, 그는 뜻밖의 동조자를 알게 되었다. 철사도인을 만나지 못하고 울적한 심사로 빈 절간을 지키면서 번민하던 어느 날, 그는 느닷없이 머리 위에서 울리는 파공성을 들었다. 그동안 팔마의 기습이 있을까 전전긍긍(戰戰兢兢) 단 일각 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던 그는 즉각 응전태세부터 갖추고 동태를 살폈다. 뜻밖에도 어검비행으로 곡왕봉을 지나가던 인물은 그의 동문이었다. 첫눈에 검광을 보고 알아차 릴 수 있었던 것이다. 황현극은 잠시 망설였다. 현재 자신의 처지는 사문(師門)에서 쫓겨난 욕된 몸이다. 은인자중하면 서 사문에의 복귀를 꿈꾸고 있는 이 마당에 먼저 동문들을 면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 다. 그러나 다음 순간 동문을 보고 싶은 그리움이 끓어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황현극은 자기도 검광을 일으켜 타고 그 뒤를 좇으면서 크게 소리질렀다. "사형, 나요! 잠시만 멈추시오!" 잠시 후 그들은 검광을 거두어들이고 지상에 내려섰다. 과객(過客)은 두 사람, 그중 하나는 짐작 했던 것처럼 대사형 제갈경아였다. "사제, 이게 얼마 만인가? 그동안 어찌 지내고 있었나? 정말 반갑네!" 언제 들어도 아우에게 자상한 대사형의 목소리였다. 황현극은 반가움에 겨워 목이 메였다. "대사형, 사부님께선 평안하시온지? 저는 이 곡왕봉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제갈경아의 등 뒤에는 의표(儀表)가 비범하고 늠름한 기상을 갖춘 중년 사나이가 서 있었다. 황현극은 대사형의 소개로 사나이와 초대면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추운수의 새 로운 제자 운중비학 주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순은 이제 갓 검술의 경지에 입문하였으면 서도 명사(名師)의 진전을 전수받은 까닭인지, 벌써 자못 볼만한 어검술의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황현극은 대사형에게 자기 심사를 솔직히 밝히고 사문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계획까지 털어놓았 다. 그러자 제갈경아도 깊은 동정을 표하고 철사도인의 행방을 일러주었다. "요즈음 우리 선배, 후배들은 모두 자운사 결전계획 때문에 몹시 바쁘다네. 여기 주순 사제도 얼 마 전 취사숙(醉師叔)의 비검을 닦는 데 쓸 주령초(朱靈草)를 캐려고 형산(衡山) 절정봉 홍사애 (紅砂崖)로 온 적이 있지. 나는 지금 사숙 묘일진인의 명을 받들고 추운수 백사백(白師伯)을 뵈오 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일세. 주사제는 호의를 베풀어 나를 배웅하러 나왔거든. 도중에 얘기를 나 누려고 저공으로 가는데 악록산 아래 자네를 닮은 도우가 서 있더구만. 긴가민가하던 판인데 과 연 자네가 뒤쫓아 온 것일세... 지금 나는 몹시 바쁘다네. 사부님께 시급히 보고를 드려야 하거든. 또 복명을 마치고 나서도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 일이 있네. 철사도인은 벌써 귀주에 도착 했을 거야. 자네가 그를 찾으려면 안룡(安龍)이나 정풍(貞豊) 일대에 가서 장기(腸氣)와 고독(蠱 毒)이 제일 많은 곳을 뒤져보게. 그럼 틀림없이 만날 것일세. 사부님께서도 말씀은 안하시지만 자 네가 요 삼 년 동안 모진 고생을 하면서 약초 캐러 다니는 사실만큼은 알고 계시다네. 속마음도 많이 누그러지셨지. 이럴 때 추운수 사백님이 중재를 해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걸세... 자 네가 몇 년 동안 고생한 끝에 채집해 놓은 그 약초는 모두 귀중한 영물이네. 만약 자네가 여기저 기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잃어버린다면 너무 아깝지 않겠나? 우선 나한테 맡기게. 가져다가 잘 보 관해 두고 사부님께도 미리 말씀을 드려 그분의 마음을 돌려보겠네. 자, 이제 주순 사제와도 아는 사이가 되었으니 주사제한테 추운수 백사백님을 뵙게 해달라고 부탁해 보게나." 제갈경아는 다시 주순을 손짓해 부르더니 황현극 대신에 몇 마디 부탁을 했다. 그리고 작별인사 가 끝나자 더 이상 주순의 배웅을 마다하고 혼자 귀로에 올랐다. 주순은 제갈경아의 뜻을 따라서 황현극과 함께 남았다. 절방으로 들어가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 니 자못 의기가 투합할 만한 사이가 되었다. 황현극은 자기 신세를 낱낱이 털어놓고 주순의 스승 추운수 백곡일과 만날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순은 즉석에서 쾌히 승락하고 며칠 후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한 다음 형산으로 돌아갔다. 주순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그날, 황현극은 우연히도 조심원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절간으로 함께 돌아왔을 때, 주순은 기약한 대로 황현극을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순은 그날로 황현극을 데리고 형산에 가서 스승 추운수를 만나도록 주선하러 온 것이었다. 그 런데 낯선 인물이 동행을 했다. 비록 통성명은 나눈 처지라도 황현극의 남부끄러운 사실을 드러 내서 의논할 수가 없었다. 눈치 빠른 조심원이 자리를 비켜주자, 두 사람은 추운수의 괴팍스런 성 미를 건드리지 않고 중재 청탁을 원만히 하는 방법에 대해서 작전을 짰다. 추운수의 문하 제자로 들아갈 당초부터 그 유별난 스승의 성미를 호되게 들은 터라, 주순은 경험을 되살려 가며 황현극 에게 조언해 주었다. 두 사람이 의논을 마치고 나왔을 때 조심원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황현극은 편지 한 장을 써놓고 그 길로 주순을 따라서 형산으로 떠나갔던 것이다. 그럼 다시 화제를 돌려서 서천팔마의 두 형제는 어떻게 악록산에 나타났는가? 삼마 전청선과 육마 여후는 원래부터 호색한들이다. 이 무렵 그들 두 색마(色魔)는 하릴없이 놀 이삼아 장사현(長沙縣)을 어슬렁어슬렁 찾아들었다. 성내를 한바탕 뒤집어 엎고 몸집이 반반한 계 집이라도 눈에 뜨이면 낚아채뜨려 산으로 데려다가 요긴하게 쓸 참이었다. 한데 그들은 장사현에 도착하자마자 우연히 부하녀석 서악을 만났다. 서악은 팔마주 구령의 원수 조심원에게 도전장을 전하고 그로부터 내년 단오절 청라산 결투에 응하겠노라는 약속을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사백 두 사람을 만나자 조심원의 언약 을 보고했다. 그리고 얘기 끝에 또 하나의 원수 황현극이 악록산 낡은 절간에 은신하고 있는 걸 우연히 발견한 것까지 말해 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제일 기뻐 날뛴 것은 육마 여후였다. 그에게 있어 조심원보다 더 이가 갈리는 원수가 황현극이었다. 황현극은 청라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팔마들과 충돌, 격전을 벌이던 끝에 청강검(靑剛劍)으로 사 마주(四魔主) 이홍영의 손가락 넷을 썽둥 잘라냈을 뿐 아니라, 진소추(震宵鎚)로 육마주 여후와 칠마주 저인룡을 연거푸 때려눕혔던 것이다. 육마 여후는 원수가 숨어 있는 장소를 듣자 지난날 그 치욕을 당한 참패의 기억이 새삼스레 떠 올라 이를 갈았다. 삼마 전청선 역시 형제들의 원수를 찾아냈다는 말에 흥분했다. 근년에 들어서 천팔마는 <신수비구> 위풍낭으로부터 비검술을 연성한 데다 또 여러 가지 기묘 한 술법을 익혔으므로 한창 기고만장,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날뛰는 판이었다. 그러니 원수의 종 적을 알고서 그낭 넘어갈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삼마와 육마는 당장에 악록산으로 달려가 황현극을 요절내려고 서둘렀으나 서악이 곁에서 '신중 을 기해 조심스럽게 처치하라'고 입이 닳도록 간곡히 권고하는 바람에 일단 주저앉았다. 부하의 말대로 우선 적의 동정부터 살펴보고 적측에 유력한 협조자가 없으면 그때 쳐들어 가서 복수극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삼마 전청선으로서야 어쨋든 간에 느긋이 처리하는 게 좋겠지만, 황현극의 손에 직접 당한 육마 여후는 보통 다급한 게 아니었다. 삼마와 서악은 길길이 날뛰는 육마를 겨우 달래가지고 우선 적 당한 거처로 찾아들었다. 삼마는 서악을 시켜 성 안의 동정을 살피도록 떠나보낸 다음, 숙소에 시골 창녀 두 계집을 끌어 들이고는 밤낮없이 술을 퍼마시면서 음탕한 놀이에 빠졌다. 명색은 시골 계집들이지만 하나같이 곱상하게 생긴 데다 밤놀음 재간마저 골고루 구색을 갖추어 질탕하게 놀아나는지라, 두 색마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홀딱 빠졌다. 계집의 수단과 기교가 얼마 나 좋았으면 두 놈이 장사현 성내를 몽땅 뒤엎어 버리겠단 생각마저 포기하고서 두 계집만 산으 로 데려갈 의논까지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성내 동정을 살피러 나갔던 서악은 그날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전청선과 여후는 자못 괴이하게 여기면서도 무슨 사정이 생겨서 그러려니 했다. 이튿날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도 부하녀 석은 여전히 돌아올 줄 몰랐다. 분명코 적의 독수에 걸린 것 같았다. '어떤 놈이 담도 크게 서천팔마의 부하를 해친단 말이냐?' 삼마와 육마는 노기충천, 그날 밤으로 객점에서 뛰쳐나왔다. 주야장천(晝夜長川) 주물러대던 갈 보 계집도 이제는 시들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내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검광을 일으켜 타고서 악록산으로 날아갔다. 황현극이 숨어 있다는 절간으로 기세등등하게 쳐들어가 보니 원수놈은 자 취도 없고 방안에는 촛불만 덩그러니 밝혀져 있을 뿐이었다. 절간 안팎을 샅샅이 뒤져봤으나 사람이라곤 그림자조차 하나 없었다. 그들은 대문 밖으로 나와 서 황현극이 돌아올 때까지 밤 새워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누구에겐가 마른 하 늘 벼락을 맞듯 따귀를 숱하게 얻어맞았던 것이다. 혼비백산을 한 삼마와 육마는 장님 지팡이 휘두르듯 마구 비검을 쏘았지만 역시 허탕이었다. 사 세가 글렀다고 판단하고 검광을 일으켜 달아나겠다는 생각까지도 좋았다. 공중에는 생각지도 않 게 천라지망(天羅地網)이 펼쳐져 그들의 퇴로를 막아버린 게 아닌가? 아무리 기를 쓰고 발악을 했으나 도무지 달아날 도리가 없었다. 위대하신 사천팔마의 검광이 무형강기(無形剛氣) 같은 그물에 가로막혀 날 수가 없게 된 것이었 다. 그들은 방금 뺑소니치던 길로 되돌아 섰다. 따귀를 맞던 바위 곁 고목의 뒤편에 누군가가 숨 어서 자기들을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의심을 하고 보니 이제는 자기들이 독하게 역습 을 가할 차례였다. 그들이 쑤군쑤군 의논한 방범은 요법(妖法)을 부려서 암암리에 독수를 가하자는 것이었다. 눈바 닥에 앉아서 주어(呪語)를 외우기 시작했다. 반나절이 되도록 중얼중얼 외웠으나 뜻밖에도 음화 (陰火)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방법을 바꾸어서 이번에는 둔형술(遁形術)로 전신을 감추고 달아나 려 했지만 그것조차 허사였다. 그제서야 삼마와 육마는 공포에 질려 나무귀신을 향해 애걸복걸 빌기 시작했다. 싹싹 빌기는 하 지만 두 쌍의 눈알은 잠시도 쉬지 않고 교활하게 고목 주변을 살폈다. 거짓으로 빌면서 나무귀신 이든 사람이든 간에 조금이라도 파탄을 보이거나 이상이 생겼을 때는 즉각 기습을 가할 작정이었 다. 그들이 가장 자랑하는 절기 <오귀음풍정(五鬼陰風釘)>에다 비검까지 배합해서 쏘아내기만 하면 천하무적의 위력이 나타날 것이다. 두 사람 모두가 양손에 <오귀음풍정>과 비검을 감추어 잡고 기회만을 노렸다. 중얼중얼 기도를 절반도 못 드렸을 때 난데없이 나무 뒤편에서 '피식!' 냉소를 터뜨리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정말로 나무귀신이 웃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그것도 한 순간, 눈치 빠른 삼마는 대뜸 자기들이 어떤 작자한테 당해도 크게 당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입으로 연신 주절거리면서 나무 뒤쪽을 유심히 살폈다. 과연 사람의 형체가 있기는 있었다. 그래도 짐짓 못 본 척 어물쩡어물쩡하다가는 돌발적으로 왼 손의 음풍정, 오른손의 비검을 한꺼번에 냅다 집어던졌다. 회심의 일격을 가하면서 삼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젠 걸려들었다. 가증스런 놈 같으니.' 뒤통수에서 냉소가 터지는 바람에 찔끔 놀란 나머지 삼마의 날카로운 눈에 발각된 조심원은 황 금빛 광채와 녹화(綠火)가 느닷없이 '윙!' 하고 날아들자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도 못하는 주제에 어딜 도망치고 자시고 할 여지가 있느냔 말이다. 이젠 속절없이 죽음 만 기다릴 뿐이었다. '아... 조심원은 결국 이렇게 죽고 마는구나!' 장탄식을 내뱉으며 멱줄기가 끊길 순간만 기다리노라니 마음 속은 도리어 한갓졌다. 온갖 세상 시름도 사라졌다. 찰싹... 찰싹! 귓결에 문득 어린아이 손뼉치듯 아주 여리고도 맑은 소리가 들렸다. 목덜미에 들이닥치던 초록 빛 불덩어리와 금빛광선은 좀처럼 닿는 느낌이 없었다. '죽을 때가 되어 이명(耳鳴)이 울리는 걸까?' 살그머니 눈을 뜨고 보니 이건 또 웬 변고냐? 이제껏 고목 앞에 꿇어앉았던 삼마와 육마는 어느 새 서로 마주 보고 돌아앉은 채로 상대방의 따귀를 후려치고 있는 게 아닌가! 철썩!... 철썩! 한 놈이 때리고 나서 또 한 대를 얻어맞고 있었다. 얼마나 힘차게 후려갈기는지 두 마왕 형제가 생전부터 무슨 원수지간이나 되듯 이를 악물고 솥뚜껑처럼 무지막지스런 손바닥으로 아우가 형을 치고 형은 아우를 치는 것이었다. 조심원은 영문을 모르고 눈이 휘둥그래진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머지않은 곳에 방금 전까지 자신한테 덮쳐들려던 녹색 불덩어리와 금빛 광채가 여전히 번쩍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 다. '아차, 이놈들과 한패거리가 아직도 저기 있구나!' 낙심천만하는 가운데 다시 어둠 속을 뚫어져라고 바라보던 그는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나왔 다. "앗, 그분이다!" 한 손에는 초록빛 불덩이를, 또 한 손에는 금빛 광채를 받쳐 들고서 주물럭주물럭 장난질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오늘 저녁 조심원 자신을 봉으로 낚아서 배가 터지도록 공술을 퍼마시 고 달아났던 그 궁상맞은 늙은이였다. 그제서야 조심원은 크게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렇구나. 저 마귀녀석들이 어째서 까닭도 없이 흠씬 얻어터지고 뺑소니치다 되쫓겨 왔는가 했 더니, 바로 저 늙은이의 법술(法術)에 걸려서 그 모양이었어... 놀라운 일이다. 지독스런 팔마의 눈 에 뜨이지 않을 만큼 귀신같이 은형술(隱形術)을 쓰고 또 적의 비검과 술법마저 움켜잡다니, 여간 한 내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어... 그건 그렇다치고, 어째서 내 혈도까지 찍어서 옴짝달싹도 못하 게 만들어 놓았을까?... 정말 답답해 미칠 지경이로구나! 몸뚱이라도 움직여야 가서 인사를 드리 지.' 조바심에 안달을 하면서 그는 멀뚱멀뚱 희한한 광경을 지켜보다가 속으로 묵도(默禱)를 올리기 시작했다. '황천후토(皇天后土) 천지신명님, 석가여래 부처님, 보살님... 제발 이 몸을 좀 풀어주소서. 어떻게 해서든 저 노인을 꼭 잡아야만 합니다. 절박한 제 처지를 구해 줄 분은 저 노인 말고는 없습니다. 제발 빌고 또 비오니 저를 풀어주십시오.' 철썩!... 철썩!... 철썩! 한 밤이 거의 다 지나도록 삼마와 육마는 줄곧 따귀질을 하고 있다. 어느 쪽도 손을 멈추는 기 색이 없었다. 두 녀석 모두 하반신이 땅 속에 뿌리박힌 듯 요지부동인 채로 그저 움직이는 것이 라곤 두 손 뿐이었다. 삼마의 왼손이 육마의 뺨을 '철썩!' 하고 후려갈기는 것과 동시에 육마의 왼손도 삼마의 오른뺨을 '철썩!' 올려붙인다. 왼손이 끝나면 또 이어서 바른손 차례다. 어쩌면 두 녀석 사이의 간격도 따귀때리기에 그처럼 알맞게 떨어졌을 수가 없었다. 때리는 속도까지도 형님 아우의 장단 박자가 여합부절(如合符節), 빈 틈이 없었다. 철썩! 철썩!... 철썩!... 철썩! 두 쌍의 손바닥 네 개가 느리게 빠르게 쉬지도 않고 풍차(風車)돌 듯 번갈아 가며 올라가서 상 대방의 뺨다귀에 해말간 소리를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 조심원은 놀란 혼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두 마귀 녀석이 노인의 손에 잡혀 있는 이상은 자기 한테 해꼬지를 못하리라고 안심이 된 것이다. 느긋해진 마음에 두 녀석의 꼬락서니를 자세히 바 라볼 여유까지 생겼다. 백설의 반사광 아래 희끄무레하니 두 작자의 얼굴은 이미 눈 뜨고 못 볼 만큼 부어터져 온통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살갗도 찢기고 콧마루도 이지러져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그 위에 또 손바닥 이 '철썩!' 하고 올라간다. 그들은 벌써 기진맥진 모두 제몸뚱이가 아니었다. 조심원의 눈길이 노인 쪽으로 쫓아갔다. 초록빛 불덩어리와 금빛 검광을 장난삼아 주물럭거리던 노인은 이제 그 장난에 싫증이라도 났는지 번쩍 두 손바닥을 합쳐서 맞비비고 있었다. 불덩어리 와 비검의 광채가 차츰 오그라들더니 삽시간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손바닥이 텅 비자 노인은 장난감을 부서뜨린 아이처럼 따분한 표정을 짓고서 '딸가닥, 딸가닥!' 나막신 소리를 내며 삼마와 육마 앞으로 다가서더니 흥이 되살아 났는지 낄낄대고 웃었다. "요런 새끼마귀 녀석들, 그래 맛이 어떠냐? 이날 이때껏 범가죽을 뒤집어 쓴 여우처럼 못된 짓 은 도맡아 저질렀지? 요 녀석들아, 마귀도 체통이 있고 위엄도 있는 법이다. 누가 네놈들 털끝 한 개 건드리기만 해도 옳고 그른 쪽은 따져보지도 않고서 죽을 둥 살 둥 원수를 갚겠다고 쫓아다니 다니. 그래서야 어디 위대하신 서천팔마의 체통이 서겠느냐 이 말이다. 그건 쫌팽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내 오늘 네 녀석들한테 가벼운 교훈을 좀 베풀었다만, 이후로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회개 하지 않는다면, 흠흠... 어디 이 늙은이가 네놈들을 무슨 꼴로 만들어 놓는지 한 번 볼 테냐?" 삼마와 육마는 진작부터 죽을 맛이었다. 얼마나 아픔이 심한가는 상대방의 손바닥이 올라오기도 전에 몸뚱아리가 먼저 놀라서 부르르 진저리를 치는 판이었다. 두 팔을 휘두를 힘조차도 이미 다 빠지고 없는데 어찌 된 셈인지 상대방의 손에 한 대 맞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철썩!' 하고 날아 가는 것이다. 그들은 사이좋게 따귀질을 주고받으면서 곁눈질로 자기들 형제를 제압한 늙은이를 흘겨보았다. 이제 달아날 도리는 없다. 임자를 만나도 아주 톡톡히 만난 것이다. 늙은이의 말을 들으면서도 수치감과 분노, 저릿저릿한 아픔에 두려움까지 뒤섞여 입이 열 개 달 려도 대꾸 한 마디 나오지 않았다. 손을 멈추고 싶은 생각이 그동안에 어디 한두 번 들었는가 말 이다. 벌써 골백번도 더 해보았지만 사지육신이 도통 생각대로 말을 들어먹지 않는 걸 어쩌겠는 가? 두 손은 도무지 쉴 줄을 몰랐다. 철썩!... 철썩! 늙은이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망울에 동정을 바라는 빛이 가득 담겼다. 노인은 그들의 눈빛을 보고서 그만큼 했으면 혼줄이 났으리라 생각했는지 또다시 낄낄거리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흠흠, 새끼마귀들도 남을 때리다 못해 지칠 때가 있긴 있구나! 그럼 어디 물어볼까? 그 악록산 이 네 녀석들의 지랄치는 놀이터냐, 아니냐? 또다시 와서 행패를 부릴 테냐, 안할 테냐? 그것만 말해 봐라!" 대답을 하려고 해도 터진 입술에서 피만 울컥 솟아나왔다. 삼마와 육마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 다. 바로 그때, 아렴풋이 허공을 찢는 파공성이 울려왔다. 노인은 하늘을 치올려 보더니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저런, 내 빚장이가 또 오는구만. 요 새끼마귀녀석들만 좋게 되었군그려. 젠장!"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삼마와 육마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축 늘어진 두 팔은 눈바닥 에 흐느적거리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부어터진 얼굴에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피를 닦고는 싶으나 팔이 쳐들리기는커녕 손가락 한 개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두 마귀는 서로 얼굴만 마주 본 채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당초 기세등등하게 들이닥쳤던 호기도, 열화같이 솟구쳤던 분노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가슴 속은 온통 허전하기만 했다. 그들의 눈길은 약속이나 한 듯 노인 쪽으로 돌아갔다. 딸가닥, 딸가닥! 나막신을 끌면서 절간 뒤편으로 사라지는 노인의 뒷모습만 초라하게 보일 뿐이었다. 고목의 뒤쪽에 숨어 있는 조심원도 한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제껏 보아온 노인의 행동 거지와 낮에 들었던 몇 마디 말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맞추어 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몽둥이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처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앗, 그분이다! 능설홍의 남편이라면 누구냐? 오십 년 전 강호상에서 추운수라고 일컫던 인물, 숭산이로의 한 분인 백곡일 노선배가 아닌가?... 아내 능설홍이 개원사에서 좌화(坐化)한 뒤로 오 랫동안 종적을 감추고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소문을 들었는데... 아아, 내가 오늘 뜻밖에도 그분을 만났다니!... 조심원, 너는 어째서 그리 박복한 놈이냐? 그분이 낮에 아내의 이름을 들려주 어 암시했는 데도 그걸 생각해내지 못하고 흘려버리다니!... 멍청이 같은 녀석, 천하에 제일가는 검선을 뻔히 보고서도 놓친 거야.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조심원은 생각할수록 후회막심이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울화가 뻗쳐 견딜 수가 없었다. 저도 모 르게 손을 번쩍 들어 못난 제 뺨 따귀를 '철썩!' 후려쳤다. '아뿔싸!' 어느 틈엔가 옴짝달싹도 못하게 찍혔던 혈도가 풀려 있었다. 그래서 홧김에 한번 움직인 손이 그대로 뺨에 가서 들어맞은 것이었다. 두 다리도 움직여졌다. 그렇다면 이제는 삼십육계 줄행랑칠 일만 남았다. 선뜻 걸어 나서려던 그는 발을 우뚝 멈추었다. '안 돼! 이 앞에는 극악스런 마주(魔主) 두 놈이 아직도 남아 있다. 혼찌검이 나기는 했지만, 노 선배는 아예 요절을 내주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섣불리 나갔다가는 원수 녀석들과 이마나 부 딪기 십상이다.' 내뻗던 발이 도로 움츠러들었다. 법술이 풀린 후에도 삼마 전청선과 육마 여후는 숨을 헐떡헐떡 몰아쉬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 다.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는데 반나절 동안이나 형제끼리 치고 박는 통에 손발은 끊어질 듯 쑤시고 저리고, 온 몸뚱아리가 장작개비처럼 뻣뻣하게 굳어져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호된 매질을 당한 대갈통도 얼굴 근육이 씰룩씰룩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골수까지 푹푹 쑤셔대는 것이 었다. 두 사형제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슬금슬금 일어섰다. 몇 걸음이라도 걸어 서 마비된 근육과 혈맥이 풀어져야만 도망이라도 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휘청휘청 두어 발자국 을 떼어놓는 판인데, 느닷없이 고목 뒤에서 '철썩!'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기절초풍을 해가지고 얼떨결에 자기 얼굴로 손이 올라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 금껏 얻어맞은 따귀소리가 또다시 울린 것이다. "형님, 뜁시다!" "잠깐만!" 아프고 자시고 따질 것도 없다. 육마 여후는 그 길로 냅다 뛰려다가는 사형에게 옷소매를 잡혔 다. 그래도 삼마 전청선이 형님답게 침착했다. 놀라고 다급한 중에도 나무 그늘에서 걸어나오는 또 한 사람을 본 것이다. 자기들 처지로는 뛰어봤자 벼룩이다. 상대방의 처분만 얌전하게 기다리 는 것이 상책인 줄 깨달았다. 고목 뒤에서 나타난 사람이 범 같은 목청으로 냅다 호통을 쳤다. "요런 새끼마귀녀석들, 간뎅이가 부었지, 아직껏 여기서 어슬렁 거리느냐! 그래도 매가 부족해서 그러는구나?" 동생보다는 형이 역시 대담했다. 삼마 전청선은 얼른 대답을 했다. "아니, 아니오! 잠시 숨 좀 돌리고 금방 떠날 참입니다. 선장(仙長)께선 존함이나 알려주십쇼. 그 래야 훗날 뵙더라도 저희가 알아 모실 수 있으니까요." "내 이름은 알 것 없다. 방금 떠나신 분은 바로 내 사부이신 <추운수> 어른이시다. 너희 두 놈 이 본산(本山)에 기어 들어와 괘씸하게 행패를 부리길래 사부님께서 혼뜨검을 좀 내리신 거다. 나 는 사부님의 분부대로 네놈들이 여기서 꺼질 때까지 감시하는 중이다. 흠흠, 그래도 안 떠나고 미 적미적거릴 테냐? 어디 내 손 맛도 좀 봐야 떠날 참이로구나!" "우왓, 추운수 백곡일!" 전청선과 여후, 두 마귀 형제들은 넋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기급을 했다. 자기네가 상대했던 그 늙은 영감이 바로 숭산이로의 한 사람, 추운수였다니! 걸려도 하필이면 그 지독스런 늙은이한테 걸렸단 말이냐? 그들은 이만해도 천만다행이라 싶었던지 아픈 것도 싹 잊었다. 상대방의 엄포가 미처 다 끝나기 도 전에 삼마와 육마는 허겁지겁 검광을 일으켜 타고서 청라욕(靑羅欲) 소굴을 향해 꽁지가 빠져 라고 달아나 버렸다. 방금 고목 뒤에서 나타나 엄포를 때린 자는 말할 것도 없이 조심원이었다. 홧김에 제 따귀를 ' 철썩!' 올려붙이고 보니 당장 원수들 눈에 들통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더 이상 숨어 있어봤자 헛 일이고 어차피 나가서 싸워봤자 두 놈의 상대도 못되는 솜씨밖에 없다. 조심원은 다급한 가운데서도 기막힌 꾀가 떠올랐다. '이놈들은 추운수에게 밤이 지새도록 농락을 당하고 얼빠진 상태다. 그리고 팔마 가운데 내 얼 굴을 아는 놈은 구령 한 놈뿐, 여기에 있는 삼마, 육마야 내 정체를 알 리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 리 내 편에서 먼저 한바탕 으름장을 놓아서 쫓아버릴 만도 하리라.' 그의 계략은 기막히게 들어맞았다. 두 마귀녀석은 과연 혼비백산을 해가지고 그 지독스런 아픔 마저 잊은 채 꽁지빠져라고 줄행랑을 놓고 만 것이다. 너무도 통쾌해서 허리를 쥐고 껄껄대는 참인데 건너편 산록에서 또 두 사람이 뛰쳐나왔다. 기급 을 해서 다시 바라보니 황현극과 주순의 모습이었다. 조심원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세 사람은 다시 만났다. 주순을 따라 형산으로 갔던 황현극은 추운수가 외출하고 없자, 사뭇 실망을 했다. 그래도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려 보았지만 도대체 어딜 갔는지 추운수는 돌아올 줄 몰랐다. 주순은 제갈경아로부터 간곡히 당부를 받고 있던 터라, 어떻게 해서든지 황현극과 스승 추운수 의 상면을 성사시켜 주려고 고심했다. 그는 평소 스승이 장사현 성내와 악록산 일대를 즐겨 돌아 다니는 습관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실망한 황현극을 달래가지고 함께 악록산으로 돌아가 추운수를 찾기로 했다. 도중에서 운이 좋으면 추운수와 맞닥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황현극도 하릴없이 발길을 돌렸다. 두 사람이 검광을 일으켜 타고 악록산 부근 멀지 않은 곳까지 날아왔을 때였다. 밤눈이 남다르 게 밝은 황현극은 벌써 절간 앞 눈덮인 공터에 웬 기괴망칙스런 옷차림을 한 침입자 두 사람이 휘청휘청 맴을 돌고 있는 걸 발견했다. '수상한 놈들이로구나. 아무래도 곧장 들어가선 안 되겠는 걸.' 황현극은 성격도 원래 세심한 데다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팔마의 기습에 대비해서 밤낮으로 긴 장해 있던 사람이다. 그는 즉시 경각심을 높이고 주순의 옷자락을 당겼다. 두 사람은 절간에서 멀 찌감치 떨어진 곳에 내려앉았다. 큼지막한 바위 뒤에 납죽 엎드려 조심스럽게 공터를 살펴보던 황현극은 하마터면 '앗!' 소리를 지를 뻔했다. 침입자 두 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왕년에 자기와 원수를 맺었던 육마 여후였기 때 문이었다. 나머지 한 놈 또한 더 생각할 여지도 없이 팔마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이들은 자기에 게 앙갚음을 하려고 쳐들어 왔을 것이다. 황현극은 가슴살이 후들후들 떨렸다. 지금의 팔마는 옛날 실력이 아닌 줄 뻔히 알고 있다. 그동 안 <신수비구> 위풍낭의 문하에서 숱한 요법을 익혔다는 소문도 들었다. 자기 솜씨 가지곤 절대 로 상대할 수가 없는 고수들이다. 그는 곁에 엎드린 주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이내 보일듯 말듯 도리질을 했다. 주순도 이제 갓 검술에 입문한 수준이라 근기(根氣) 또한 아직 일천(日淺)하다. 더구나 친구를 자기 싸움 에 끌어들여 피해를 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주형, 아무래도 먼저 피신하셔야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영문도 모르고 의아스럽게 묻는 벗을 향해 그 사유를 일러주려다가 황현극은 그만 입을 다물었 다. 공터 앞의 상황이 돌변하는 걸 목격한 것이다. 아니 설명할 틈조차도 없었다. 갑자기 나무 뒤 편에서 웬 사람이 걸어나오고 이어서 몇 마디 호통을 치기가 무섭게 육마 여후와 그 한패는 기절 초풍을 하더니 쏜살같이 달아나 버린 것이다. 호통을 친 인물을 보아하니 뜻밖에도 어제 사귄 조 심원이었다. 황현극은 두 애물덩어리를 추운수가 제압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조심원의 놀라운 솜씨에 자못 탄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뒤미처 세 사람이 한데 모여 그동안 일어났던 사연을 당사자의 입으로 듣고 나서 황현극 의 실망이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기를 쓰고 형산까지 찾아간 자기를 헛걸음치게 만들고 추 운수 영감님은 천연덕스레 여기서 팔마의 귀신 두 마리를 데리고 여유작작 장난질치고 있었던 것 이다. 황현극은 원망보다 후회가 앞섰다. 차라리 떠나지 말고 예서 차분히 기다리거나 아니면 형산에 서 한 걸음 일찍 떠나기만 했더라도 만나 뵈었을 게 아닌가 말이다. 형산까지 헛걸음을 한 것은 둘째치고 제 집 대문 앞에서 그 어른을 놓쳤다는 사실이 더욱 원통한 것이다. 조심원은 주순과 어제에 이어 두 번째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주순의 늠름하고도 부리부리한 눈 망울을 보면서 어젯밤 성내 술집에서 봉잡히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망 나니 스승 추운수더러 남을 속여 술이나 뺏아먹지 말라던 주씨(周氏)란 제자가 바로 그였음을 비 로소 알아챈 것이다. 이때서야 황현극도 조심원에게 더 이상 감추지는 못하고 사문에 죄를 지어 축출당한 자기 신세 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추운수를 찾아 스승인 현진자와의 중재를 부탁하기 위해 형산을 다녀왔다 는 사실도 밝혔다. 세 사람은 절 안으로 들어가 좌정하고서 의논을 계속했다. 황현극이나 조심원이나 모두 추운수 의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운수를 붙잡고 매달 려야만 했다. 그분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면 만사는 해결되는 것이다. 주순은 두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일어섰다. 형산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황현극과 조심원은 배웅을 하면서 그에게 간곡하게 당부했다. "주형, 형산에 돌아가시거든 영사(令師)께 저희 두 사람을 대신해서 먼저 잘 말씀드려 주시오. 저희들도 내일 찾아뵙고 간청을 드릴 테니." 주순도 선선히 응락했다. "저희 사부님은 문하 제자들에게 아주 관대하십니다. 저 역시 입문한 지 오래지 않아서 때로는 사부님께 불쑥불쑥 무례한 언동을 저지를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그 어르신께서는 여지껏 한 번도 꾸짖으신 적이 없었지요. 돌아가서 그분을 뵈옵는 대로 힘껏 말씀 올려보겠습니다. 어르신께서도 어지간하면 두 분의 소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분 마음에 내키지 않으셔서 뵙 기를 거절하신다면 두 형들이 무슨 수를 쓰시더라도 헛일이 될 것입니다." 이튿날 새벽, 황현극과 조심원은 정성껏 몸단장을 하고 공경스런 마음가짐으로 형산에 당도했다. 그러나 추운수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료하게 반나절을 기다리던 끝에 조심원은 추운수가 술을 몹시도 즐긴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지금쯤 어딘가에서 봉이라도 낚아가지고 진탕 퍼마시고 있을 사람을 여기 앉아서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이쪽 편에서 찾아나서는 게 빠를 듯싶었다. 그는 황현극과 함께 형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장사현 성 안팎의 크고 작은 술집을 모조리 뒤지고 다녔다. 일류급 주루(酒樓)에서부터 선술집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둘러보았다. 그러나 목마르게 찾는 추운수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이렇듯 두 사람은 며칠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형산과 성내를 오가며 추운수를 찾았지만 역시 아 무런 소득이 없었다. 십여 일이 후딱 지나갔다. 그 날도 두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형산으로 떠날 차비를 갖추고 있는 데 갑작스럽게 주순이 먼저 찾아왔다. 그는 추운수의 말을 전했다. "황형, 조형, 형산에 오지 마시오. 사부님께서 돌아오셨기는 한데 저에게 몇 가지 검술을 전수해 주시고 오늘밤 안에 성도(成都)로 떠나 거기에 계신 취도인(醉道人) 사숙님께 비검을 돌려드리라 는 분부를 내리셨소. 지금 아미파 쪽 검선들은 오대파를 비롯한 이단의 무리들과 내년 정월 보름 날을 기해 성도 자운사와 벽사촌 두 곳에서 일대 결전을 벌이게 되었소. 그 일로 인해 사부님도 몹시 바쁘신 모양이오. 제가 두 형의 말씀을 전해 올렸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소. '지금은 성도 투 검(鬪劍) 준비 때문에 그런 일을 돌아볼 틈이 없다. 단오절까지는 아직 날짜도 많이 남았으니 황 현극과 조심원더러 너무 성급하게 서둘지 말고 기다리라 일러라. 성도로 날 찾아와도 만나지 못 할 것이고, 운남 지방에 가 있는 철사도인을 찾아갈 필요도 없다. 잠시 악록산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내가 따로 그 두 사람에게 시킬 일이 있을 것이다...' 사부님께선 분명 두 형들의 일을 유 념하고 계시니까 안심하고 여기서 분부를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 서찰을 두 형께 전하 라 하셨소. 읽어 보시면 아실 게요. 이 사람은 지금 성도로 떠나야 합니다. 부디 자중하시기를." 주순을 전송하고 나서 황현극과 조심원은 추운수의 편지를 뜯었다. 적힌 내용은 간략했다. <... 명년 이 월 초사흗날, 두 사람은 이리이리하라. 황현극의 문제와 조심원의 결투는 반드시 협 력자가 나설 터인즉 염려할 것 없다. 내가 약속하마.> 편지를 읽고 나자 황현극과 조심원의 기쁨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바윗덩어리가 굴러내린 것처럼 홀가분해졌다. 추운수 노선배가 도와주겠다고 일단 언약한 이상 또 걱정할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의 심화병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주순이 성도로 출발한 후 그들은 악록산 절간에 남았다. <서천 팔마>들도 삼마주, 육마주가 추 운수에게 혼뜨검이 나서 돌아갔으니 형산과 악록산 일대에 어떤 고수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줄 뻔 히 알았을 터, 경솔하게 쳐들어 와서 행패를 부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조심원은 내공면에선 뛰어나나 비검술의 조예만큼은 깊지 못했다. 황현극은 현진자의 진전을 이 어받았으므로 그에 비해서 월등한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악록산에서 함께 거주하는 동안 조심 원은 그에게 늘 가르침을 청했다. 황현극도 거리낌없이 마음을 기울여 그를 지도해 주었다. 악록 산의 생활은 나날이 안온하게 지나갔다. 형산은 본래부터 칠십이 봉정(峰頂)을 자랑하는 명산이다. 광대한 산악 아래로 상강(湘江)이 굽 이쳐 흐르고 산록에서 굽어보면 일망무제(一望無際), 황토의 평원이 끝도 모르게 펼쳐진 가운데 청산 녹수(靑山綠水)의 장광이 엇갈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하여 금 입승(入勝)의 몰아경지 로 이끌어들이곤 한다. 황현극과 조심원도 검술 연마와 좌공(坐功)하는 틈틈이 형산 칠십이 봉정 의 명승을 찾아서 유람하며 즐겼다. 광음(光陰)은 살같이 지나갔다. 어느덧 세밑도 며칠 남지 않게 다가왔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모처럼 틈이 나서 산을 내려와 장사현 성내로 들어갔다. 새해를 며칠 앞두고 성 안의 거리는 벌써부터 명절 기분에 들떠 웅성웅성 활기찬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황형, 잠깐만....." 큰길 곁 술집을 지나치던 조심원이 문득 빙그레 웃더니 황현극의 옷소매를 당겼다. 손님들로 북 적대는 그 술집이 지난 번 추운수에게 봉으로 잡혀서 들렸던 그 집인 줄을 기억해낸 것이다. "지난번 이 아우가 추운수 어른을 처음 뵙고서 들렸던 그 집입니다. 어떻습니까. 들어가서 한 잔 나눌까요?" "그거 좋습니다!" 황현극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층 주루(酒樓)로 올라가 보니 좌석은 벌써 차서 빈 데가 없었다. 그래도 그냥 내려가기가 뭣 해서 일각(刻) 남짓, 서성거리자니까 길거리로 향한 귀퉁이에 자그만 식탁 한 개가 비워졌다. 주보(酒保)의 안내를 받아 그 자리에 좌정하면서 조심원은 사뭇 의아스런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벌써 섣달 스무여드레, 앞으로 이틀만 지니면 설날이다. 이때쯤 되어선 가게들마다 외상 값이나 거둬들이고 일 년 장부계산에 바쁠 텐데... 손님들도 그렇지. 설맞이 준비는 안하고 대낮부 터 술집에 들어앉아 유유자적 술잔이나 기울이다니,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군. 설마하니 장 사현 토박이들이 다 모주꾼은 아닐 테고.' "손님, 뭘 드시겠습니까?" 술잔과 수저를 갖춰놓고서 주보가 물었다. 조심원은 생각나는 대로 안주 몇 접시에 술을 주문했다. 주보는 시원스럽게 응답을 하고 내려갔다. 한데 반나절이 지나도록 술과 안주가 올라오는 기척 이 없었다. 주보마저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것이었다. 조심원과 황현극은 모두 수양이 깊은 사람이다. 손님들이 많아 바빠서 늦으려니 생각하고 마음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술꾼들이야 그렇지 못했다. 두 사람 바로 곁 식탁에는 장사치 차림의 손님들이 앉았는데 벌써부터 술병이 비고 안주가 떨어져 기다리다 못해 악을 고래고래 지르기 시 작했다. "여봐, 술 떨어졌어!" "안주도 없단 말이야! 빨리 가져오라구!" 그래도 아래층에선 감감무소식이다. "아니, 이것들이 모두 얼어 죽었나? 어째 대꾸도 없는 거야?" "여봐, 주인장! 정말 이러기야?" 울화통이 터진 장사치가 발작이라도 일으킬 듯 마구 욕설을 퍼붓자, 그제서야 주보녀석이 올라 왔다. "손님들, 조용하십쇼. 지금....." 주보는 손님의 귓속에 무슨 말인가 몇 마디 소근소근 일러주었다. 그러자 뜻밖의 반응이 나타났 다. 악을 고래고래 지르면서 발작하던 두 손님은 주보의 속삭임을 듣기가 무섭게 안색이 새하얗 게 질리더니 술 안주 독촉은 고사하고 허둥지둥 쇄은자(鎖銀子)를 몇 푼 꺼내 주보한테 건네주고 서 도망질치듯 총총히 누각 아래로 사라졌다. 두 손님이 갓 떠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또다른 손님이 올라왔다. 범 같은 체격에 의표가 사뭇 당 당한 사나이였다. 누각으로 올라와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사나이는 방금 비워진 좌석을 발견하 고 냉큼 그 자리에 앉았다. 술청 누각 안은 손님들이 꽉 들어차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식탁마다 술기운에 흥취가 도도해진 사람들은 시끌벅적 호기를 부리며 술잔을 비우고 권하고 요리를 집었다. 철철 흐르는 땀방울을 연신 훔쳐가며 두 다리에서 비파 소리가 나도록 술시중을 드느라 천방지 축 뛰어다니던 주보가 새로이 나타난 손님을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겨우 두 사람을 쫓아 냈는데 그 자리에 또다른 손님이 버티고 앉은 것이다. 괴이하게도 주보의 얼굴에 귀찮다는 기색 이 역려했다. 주보가 사나이 앞으로 나가왔다. 찌푸리던 눈살도 사라지고 예의 간드러진 웃음이 곁들여졌다. "헤헤헤, 손님, 죄송스럽게 됐습니다. 오늘 저희 집은 술도 안주도 깡그리 동이 나고 없습니다. 연말이라서 음식거리를 조금밖에 장만해 두지 않았더니만 뜻밖에도 손님들이 아침나절부터 밀어 닥치셨군요... 미안합니다만, 다른 집으로 가보시지요." 사나이가 막 응수를 하려는 참에, 황현극의 식탁에는 기다리던 음식이 올라왔다. 음식상을 훑어 보고서 조심원과 황현극 두 사람은 그만 아연실색,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천천히 얘기나 나누면서 몇 잔 술을 마시려고 요리 주문을 했는데 목이 빠지도록 기다린 끝에 주보녀석이 날라온 것은 밥그릇과 반찬 접시들이다. 술병도 반주삼아 마시라는 것인지 고작 한 병만 덩그라니 놓였다. 한 병 가지곤 조심원 혼자 마셔도 목구멍의 갈증조차 안 풀리는 양이다. 아무리 수양 깊고 점잖은 사람도 이쯤 되면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오르게 마련이다. '이런 녀석들 봤나! 누가 밥 먹겠다고 한나절씩 기다린 줄 아는가. 주방장녀석, 너무도 바빠서 머리가 돌아버린 모양이로군... 아니면 이 주보녀석이 주문을 잘못 들었든지. 기왕 가져온 음식이 니 먹기는 하겠다만 술 한 병 가지고서야 어떻게 두 사람이 마시란 말인가?' 그래도 부글거리는 속을 꾹 참고서 조심원은 주보한테 점잖게 한마디 건넸다. "이봐, 자네 우리 주문을 어떻게 받아간 거야? 기왕 가져온 음식이니 먹기는 하겠네만 술은 너 무 적구만. 다시 내려가서 여덟 병만 더 올려보내게!" 그러자 주보는 아까 쫓아보낸 장사치 손님에게 하듯이 입을 조심원의 귀에 바짝 갖다대고 속삭 였다. "손님, 오늘은 저희 집에 무슨 일이 좀 있습니다요. 그러니까 오늘은 조금만 드시고 일찌감치 떠 나시는 게 좋습니다. 훗날 오시면 잘 대접해 드립죠." 아까부터 손님을 내쫓는 게 수상쩍어 자못 의아스럽던 조심원이다. 주보의 귀엣말을 듣는 순간, 오늘 이 술청에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판단했다. '오늘 이 집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분명코 이 지방을 주름잡고 있을 토호(土豪)나 악패의 무리가 야료를 부리는 게 틀림없다. 가만 있거라... 어쩐지 누각 안의 술꾼들 이 유별나게 시끌벅적하게 굴더라니.....' 당초 누각으로 올라올 때는 주위 손님들한테 주의를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새삼스레 주변 의 술꾼들을 흘금흘금 살펴보았다. 과연 짐작한 대로 술꾼들의 인상은 심상치가 않았다. 으슥한 특실만 보이지 않을 뿐, 누각 안에 그득찬 나머지 술꾼들은 하나같이 우락부락하고 사나운 패거리들이었다. 질끈 동여맨 옷차림새도 보통 사람들과는 판이하다. 이쯤 되면 대충 알 만했다. 주보녀석한테 물어봤자 대답이 없을 것은 뻔하였다. 시정(市政)의 잡배, 불한당, 무뢰배들이 술청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따위 패거리쯤은 나 혼자라도 너끈히 상대할 수 있지. 하물며 황형도 있는 판인데. 제깐놈들 백 명이 덤벼들기로소니 눈이나 한번 깜짝하겠느냐?' 조심원은 태연자약했다. 주보한테 물어볼 것도 없고 이 술청에서 나갈 필요도 없다. 어디 천천히 먹고 마시면서 돌아가는 상황이나 관망하자고 생각을 굳혔다. 그는 다시 주보에게 좋은 말로 음식을 요청했다. "자넨 아무 염려 말게. 나하고 이 어르신께서는 모두 타향 사람이니까 여기서 누구한테 폐를 끼 치거나 참견하는 일이 없을 걸세. 우리들이야 그저 자네 술집 요리가 맛좋다고들 하길래 한 잔 마시러 왔다네. 밥은 먹어도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술맛은 안 보고 못 떠나겠구만. 우린 술배도 크고 술버릇도 괜찮으니 이 구석에 앉아서 얌전히 마시겠네. 이따가 떠날 때 자네한테도 대포값 좀 주지. 그래도 안 되겠나?"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열 냥짜리 은자(銀子) 한 덩어리를 선뜻 꺼내 주보의 손바닥에 덥석 얹 었다. "이걸 우선 받아 놓게. 우리가 다 먹고 나거든 계산해 주면 되네." 은자 열 냥이면 보통 사람 일 년치 끼니를 댈 만한 값어치다. 그걸 받아들고서 잠깐 생각을 굴 려보더니, 주보녀석은 다시 귓전에다 대고 소근소근 당부했다. "좋습니다. 그 대신 조금 있다가 여기서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절대로 입을 열거나 움쩍달싹도 해선 안 됩니다요. 만약 잡숫는 도중에 누가 싸움이라도 벌이거든요, 귀퉁이에 샛문이 있으니까 그리로 피하십쇼. 바깥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걸쳐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잔돈 계산일랑 다음날 오셔서 받아가시구요." 주보녀석이 눈짓 손짓으로 샛문 쪽을 가리키면서 신신당부하고 막 돌아서려는데 누군가 느닷없 이 호통을 쳤다 "야, 이놈아! 누구한테는 술 팔고 어째서 나한테만 안 파는 거냐?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여기서 먹고 가야겠으니까 알아서 해라!" 조심원이 흘낏 돌아다보니 방금 전 주보녀석에게 '다른 데로 가서 드시라'고 거절당한 그 사나 이였다. "제가 뭘 어쨌다굽쇼?" 조심원의 주문을 받아 내려가던 주보녀석이 대들었다. "말이나 되는 소리야? 저 사람들에겐 술도 안주도 팔고, 내 돈은 똥이 묻었나, 어째서 나가라는 거냔 말이다! 술장사하는 놈들이 손님 낯을 가려가면서 술을 팔다니, 괘씸한 자식!" "아니, 어째서 다짜고짜 생사람을 붙잡고 '이놈 저놈' 하십니까? 전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요!" "이놈의 자식이!" 그때서야 앞서 사나이를 끌아내려던 그 주보녀석이 달려왔다. "왜 이러십니까? 제발 고정하십쇼." "술을 팔 거야, 안 팔 거야?"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술하고 안주가 동이 나서....." "씨도 안 먹힐 소리! 저쪽 손님들은 술이 아니고 맹물을 마신단 말이냐? 지금도 주문을 받아간 놈이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지 마시고 다른 데로....." "안 돼! 난 여기서 꼭 마실 테야!" 아무리 주보녀석이 통사정을 해도 사나이는 고집불통, 의자에 떡 버티고 앉은 채 요지부동이었 다. 조심원은 첫 눈길에 그 사나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우람한 체구에 기품도 당당하다. 얼굴에 가 득 서린 정기(正氣)로 보아서도 강호상의 호걸임에 틀림없었다. 사나이는 사나이끼리 통하는 바가 있다. 조심원의 마음 속에도 어느덧 호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나이와 주보의 실랑이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조심원은 기분좋게 일어나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여봐 주보, 그쯤 하고 물러가게나... 손님, 실례입니다만 고정하시지요. 오늘 이 술청이 너무 바 빠서 그런지 손님 대접도 소홀한 것 같습니다. 어디 하찮은 녀석하고 말다툼하실 거야 있습니까? 저 역시 이곳을 지나던 나그네올시다. 손님 같은 분과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 아닌가 하는데, 어 떻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저희들과 합석을 하시는 게?" 사나이는 꼼짝도 않고서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조심원의 말투는 시원스럽고도 호쾌했다. 영걸 다운 의표가 내부 깊숙이 감추어진 것이 한눈에 보아도 여간 비범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겸손히 자기를 청하는 자세가 은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나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 다. 그 역시 조심원처럼 호한(好漢)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범같이 기세등등하던 사나이가 성미를 누그러뜨리고 조심스럽게 응답했다. "소인도 집 떠나온 나그네 신세라 객지에서 남과 다툴 뜻은 없었습니다. 당초 저 녀석이 말만 좀 곱게 했더라도 제 성미가 터지지는 않았을 텐데 끝에 가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좀 있다 가 말썽이 생겨 다치더라도 자기들 원망일랑 말라고 공갈을 치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 었지만 그 대꾸는 하지 않으면서 되레 겁만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어떻게 잠자코 있을 수 있어야지요... 여하튼 고맙습니다. 귀찮게 떠들어서 방해를 드렸는 데도 너그러이 말려주시니... 합석하시잔 말씀도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만... 아무리 나그네끼리라도 처음 뵙자마자 폐를 끼 쳐서야 너무 염치없는 짓이지요. 그 마음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원 별 말씀을... 떠돌이 간에 서로 의지할 수 없대서야 그게 말이나 됩니까? 사양 마시고 저희 자리로 옮겨오십시오." 사나이는 거듭 정중한 청을 받고서 여전히 머뭇거렸다. 그 사이에도 조심원의 주문을 받던 주보 가 사나이 등 뒤에서 연신 눈짓을 보냈다. 합석시키지 말라는 뜻인 줄 뻔히 알면서도 조심원은 짐짓 모른 척하고 마침내는 그 사나이를 자기쪽 식탁에 합석시켰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주보녀석도 할 수 없는지라 사나이에게 물었다. "손님, 무얼 드시겠습니까?" 그러자 조심원이 얼른 대답을 가로챘다. "그럴 것 없네. 방금 자네가 가져온 요리들도 아직 젓가락 한 번 안 대었어. 오늘 이 집 음식을 입맛대로 시켜 먹다가는 해가 질 테니까. 자넨 내려가서 아무거나 빨리 되는 대로 만들어 올리게. 우선은 술만 더 가져오면 되네." 그래도 주보는 사나이를 밉살스런 눈초리로 흘겨보더니 거듭해서 조심원에게 소근거렸다. "손님은 너무 호인이십니다요. 방금 제가 말씀을 드린 것도 다 좋은 뜻에서 그런 것이니 마음 속 단단히 새겨두십시오. 절대로 마음 놓으시면 안 됩니다요." "알았네. 어서 가 보게!" 주보가 내려간 후, 그는 사나이와 통성명을 했다. "나는 조심원이라고 하오." 그리고 나서 황현극에게 인사를 시키려는데, 사나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한걸음 물러서서 거듭 큰절을 올렸다. "아이쿠, 제가 몰라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뵐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날 아신단 말씀이오? 어디서 뵈었을까... 도통 기억에 없는데 ... 장사의 존함은 어찌 되시오?" 조심원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두 사람은 초면임에 틀림없었다. 사나이는 차근차근 자기 신분 내력을 설명했다. 그는 바로 조심원의 제자 도균이 고향을 떠나서 한양(漢陽)에 와 새로 사귄 친구 <전시금붕(展 翅金鵬)> 허월(許鉞)이었다. 허월은 여영고(余瑩姑)와 강변의 결투를 벌이고 왜수 주매의 중재로 위기를 벗어난 이후, 친구, 선배들과 헤어져 돌아오자마자 집안 살림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왜수 주매가 일러준 대로 봄이 되면 의창현 삼유동에 은거한 협승 질범의 문하로 투신하기 위해서였다. 한양에서도 이름난 부자 허월이 그동안 대대로 지켜오던 가업을 정리하면서 대충 그 끝마무리를 지었을 때는 어느덧 동짓달도 지나고 섣달에 들어섰다. 그는 한시름 놓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지방에 벌인 점포가 생각났다. '그렇지! 장사현에는 아직 점포 두 군데가 남아 있구만... 한 이 년을 여행하기 싫어 게으름을 피 우느라고 연말 계산도 못해 봤어. 내년 봄이면 사부를 찾아나설 몸인데 그곳마저 이번에 깨끗이 정리를 해야겠지. 받을 돈은 받고 갚을 빚은 깨끗이 갚아서 이후에라도 남의 원망을 듣는 일은 없어야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일남일녀 아이들을 데려다 고모에게 맡기고 집안살림을 부탁했다. 고모한테는 장사현으로 수금차 여행을 떠나는데 새해 명절까지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 기고서 섣달스무날 무렵쯤 되어 장사로 출발했다. 며칠 후 장사현에 도착한 그는 두 군데 점포를 차례로 다니면서 영업실적을 조사했다. 한 군데 는 좀 밑진 편이나 또 한 점포는 자못 이익을 남겼다. 그는 장부를 대충 훑어본 다음 지배인더러 연말 마감을 시키고 가게 문도 닫게 했다. 그리고 거간꾼을 놓아 점포를 모두 팔도록 지시했다. 두 점포의 지배인들은 모두 장사수단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 년 만에 주인이 모처럼 나타나 서 그동안의 솜씨를 자랑하던 판인데 뜻밖에도 점포를 남에게 팔겠다는 선언이 내려진 것이다. 지배인들이 갖은 말로 만류했으나 주인은 막무가내였다. 이윽고 분부대로 지배인들은 거간꾼을 놓고 작자를 물색했다. 점포는 워낙 장사 몫이 좋은 터라 이내 작자가 나서고 섣달 이십칠일에는 깨끗이 거래를 끝마칠 수가 있었다. 거래상의 빚마저 청산하고 보니 그래도 주인 허월의 수중에는 은자 삼천여 냥이나 되는 거액이 굴러들어 왔다. 그는 이익금의 절반을 보따리에 챙겨 넣고 나머지는 다시 절반으로 갈라 두 점포 의 지배인과 점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제 허월은 장사현에서 할 일도 없다. 한양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고 나서 그는 따분하게 집 에 돌아가 섣달 명절로 북적대는 것보다 내친 김에 형산 칠십이 봉정, 악록산 일대를 유람하면서 자연의 승경(勝景) 속에 마음껏 파묻혀 보고 싶어졌다. 생각이 굳어지자 그는 다음날 아침 한양으 로 돌아간다는 핑계를 대고 뭇사람들과 작별했다. 그리고 나서 객점으로 짐을 옮겨 놓았다. 첫날은 소원대로 악록산 유람에 소일한 그는 이튿날 바로 이 술청으로 찾아들었다. 귓결에 이 집 술맛과 안주가 기막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청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주보녀석한테 면전축객(面前逐客)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대가장으로의 발길 抱不平 同訪戴家場 負深恩 阻婚凌氏女 허월은 원래 아주 온화한 사람이면서도 재치가 넘치는 재사였다. 처음 주보와 이야기할 때 그 자가 협박 비슷한 말을 뇌까리는 게 괘씸하기도 했으나 거기에는 필히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했 다. 그래서 애초부터 녀석과 쓰잘데 없는 입씨름 따위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탁자에 앉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일당이 있었는데 그들 칠팔 명 모두가 생김새 나 차린 모습이 불량하고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사나이가 눈에 거슬렸는데 녀석은 시종 주보와 말다툼하고 있는 허월을 흘 끔흘끔 쳐다보는 것이었다. 사발 같은 귀에 코는 매부리요, 오기가 다닥다닥 불은 턱살하며, 한눈 에 보아도 흉포한 꼬락서니다. 옆눈질로 허월을 흘겨보는 낌새는 영판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허월은 애시당초 꾹꾹 눌러 참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몰골들을 보자 생각이 싹 바뀌었다. '일전에 들으니 장사성 안에 <구흘탑(九紇塔)> 나문림(羅文林)이란 불한당이 나타났는가 하면 < 옥면후(玉面吼)> 백기(白琦)라는 영웅이 있다더니, 오늘 이놈의 술집 형세가 바로 그들 두 인물 때문인가 보다. 그것 참, 잘되었다. 나도 이왕 세상에 발을 디딜판이니 견식도 넓히고 신통치 않 은 놈이 있으면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혼을 내줘야겠다. 나야 뭐 가산을 정리하는 참이라 사건이 터진다 해도 집을 정리하고 멀리 훨훨 날아가면 그만 아닌가!' 그는 이렇게 마음을 먹자 웅심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래서 일부러 큰소리로 떠들어댔고 돌아가 는 폼새를 보며 즐기려는 심산이었다. 한데 조심원이 건너와 은근히 권고할 때 보니 이 양반은 첫눈에도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통성명을 하는데 그는 다름아닌 친구 도균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또다른 일행인 도인도 일류검협이라 허월은 마음 속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쌍방은 예를 베풀고 자리에 앉자 금세 옛친구인 양 이야기를 나눴다. 허월은 도균이 이미 유명 한 검선을 스승으로 모신 일도 알려주었다. 그러나 자신이 협승 질범을 스승으로 모실 거라는 말 은 아직 확실치 않으므로 거론치 않았다. 세 사람이 주루에서 의기투합하여 한창 이야기에 빠져 있는데 홀연 누각 아래가 소란해지고 이 어 '쿵쿵쿵!' 하며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올라온 사람은 무던히도 왜소한 사나이로 수중에 네 개의 쇠구슬을 쥐고 연방 '철거덕, 철거덕!'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나이는 축 늘어진 귀에 사자코를 지녔고, 입은 얇고 날카로왔으며, 매 같은 눈은 번쩍번쩍 사나운 눈빛을 사방에 쏘아내고 있었다. 한눈에 표한하기 짝이 없는 악한 이었다. 이 사나이가 올라오기 전, 주루의 손님들은 술을 권하고 마시며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고 있었 다. 그러나 그가 나타나자 주루는 즉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오히려 손님들은 죄다 벌떡 일어나 깊이 머리를 조아리며 공경스레 외쳤다. "구대야(九大爺)님 납시었습니까?" 사나이는 그러한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흥!' 하는 코웃음을 치고는 한쪽에 마련돼 있는 특 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뒤를 따르는 칠팔 명의 사나이들은 그를 왕이라도 모시는 듯 옹위하며 따라 들어갔다. 조심원 등이 앉아 있는 곳은 한 쪽 귀퉁이라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한데 먼 저 특실에 있다가 구대야를 맞으러 나왔던 한 사나이만은 유독 조심원 등을 눈여겨 쳐다보았다. 그 사나이는 세 사람이 마냥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 그들을 째려보다가 뒤따라 들어갔다. 그 짝달이가 들어간 뒤 주객들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은 아까처럼 시끄 럽게 떠드는 게 아니고 귀에 대고 속삭이거나 사방의 눈치를 보며 우물우물 조잘대는 등, 풍광이 홰까닥 바뀌어 있었다. 술집의 주보란 주보도 몽땅 주루로 올라오더니 그 특실로 들어갔다. 조금 전 조심원의 탁자에 시중들던 주보가 조심원에게로 다가와 조용조용히 속삭였다. "손님께서는 술을 다 드셨으면 이만 돌아가시지요!" 조심원이 이 말에 응답하려는데 마침 이때 특실에서 한 사람이 나와 주루에 있는 어느 사나이를 불러 뭐라고 한마디 했다. 주루에 그득찬 손님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벼락을 맞은 듯 몽땅 자리 에서 일어났다. 주루는 대번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물건을 챙기는 사람, 옷을 찾아입는 사람 등 온통 아우성이더니 한동안이 지나자 다시 조용해졌 다. 모두 누각 아래로 내려가 사라지고 주루는 휑뎅그러니 텅 비고 말았다. 허월은 귀가 영민해 그 사나이 말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대가장(戴家場)이란 말이었는데 창황 중에 들어선지 분명치도 않았고 도대체 무슨 뜻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주보는 조심원이 자신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이들 셋이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판단 했다. 그리고 갑자기 손님이란 손님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보자 뭔가 잘못이 있었나 싶어 당황하 는 눈치였다. 주보는 아래층에서 자기를 부르는 모양을 지으며 황급히 달려 내려갔다. 허월이 물었다. "주보란 녀석이 우릴 가라 재촉하던가요?" "그랬네. 내가 보기에 여기 모인 자들은 모조리 불량한 놈들 같은데 그들은 능(凌) 뭐라는 선량 한 사람을 해칠 꿍짝을 벌이고 있는 것 같으이. 뭘 하려는지는 잘 모르겠네만." "후배가 일전에 수금을 하러 오다가 도중 들은 바가 있습니다. 최근 장사에는 악당 하나가 나타 났는데, 뭐 구흘탑이라던가 <구두사자(九頭獅子)>라는 별호를 가진 나문림이란 자라더군요. 저들 중에 그가 끼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번 일과는 필히 연관이 있을 겁니다. 저들이 금방 대가장이 란 말을 했는데, 그건 아마 그들이 가는 장소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때 황현극이 두 사람한테 눈짓을 했다. 그들은 즉시 대화를 그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특 실의 발이 올라가고 키 작은 사나이가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그의 뒤를 칠팔 명이 따랐다. 그들 중 유난히 몸집이 큰 사나이가 계단 가까이쯤에서 조심원 등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춰 뭐 라고 말할 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마침 이때, 쿵쿵거리며 한 사나이가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그 사나이는 짝달이한테 몇 마디 보고를 했다. 키작은 사내는 보고를 듣자 대번에 두 눈썹을 곧 추세우고는 조심원 등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단을 내려가며 호통쳤다. "가자!" 나머지 추종자들도 그를 옹위하여 우르르 달려 내려갔다. 그들이 사라진 뒤 아까의 주보가 또다시 올라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는 태도가 싹 바뀌어 있 었다. "아, 이제 조용해졌군요. 손님들께서는 이젠 마음놓고 술을 드십시오. 저희 주인께선 세 분이 지 나가는 과객이라 대접을 소홀히 했노라고 무척 미안해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 주방장한테 특별히 몇 가지 요리를 시켜 대접하라 하시더군요. 세 분께서 뭐 달리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분 부하십시오. 제가 즉각 해다 올리겠습니다." 말을 끝내자 주보는 짐을 벗은 듯 후련하다는 태도로 누각을 내려가려 했다. 조심원이 급히 그를 붙잡아 세웠다. "당신네들 그렇게 좋은 요리가 있으면 진작 낼 것이지, 인제서야 무슨 소리야. 우린 지금 술을 많이 들어 더 이상은 생각 없네. 다음에 다시 부탁하겠어. 하지만 자네들, 조금 전 이분 친구가 술과 요리를 청할 땐 왜 안 팔려고 그랬나? 술집이 장사를 할려고 문을 연 건가, 안할려고 연 건 가?" 주보는 조심원의 말을 듣자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했다. "세 분께서는 너무 화를 내지 마십시오. 사실 오늘은 구대야께서 손님을 맞는 날입니다. 따라서 이 누각은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면 안 되게 되어 있었습죠. 보시지 않았습니까? 우락부락한 구대 야 부하들이 진치고 있는 걸 말입니다. 우리들은 이곳 사람들은 죄다 아니까 주루에 오르지 못하 게 했습니다만 선생들은 얼굴을 알지 못하는지라 그만 구대야의 손님인 줄 알았지 뭡니까. 두 분 을 안내하고 술과 안주를 시키는 것을 보고서야 구대야의 손님이 아니고 그냥 이곳을 지나는 분 네들인 걸 알았습죠.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뒤늦게 음식을 안 드릴 수도 없구요. 나중 주인어른 이 알고 저는 된통 혼이 났습니다." 주보는 말을 하면서 조심원 등의 눈치도 보랴, 계단으로 누가 올라오지 않나 살피랴 경황이 없 었다. "그렇다고 두 분을 쫓아낼 수도 없고 해서 주방장을 재촉해 술과 음식을 몽땅 한꺼번에 갖다드 린 겁니다. 빨리 드시고 빨리 가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한데 이분이 또 올라오시고 말썽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빌어먹을 주부에서 받질 말아야 할 걸 우리들이 옴팡 뒤집어 쓰고 난리가 나서 정 말 난감했었습니다. 결국 세 분이 여기서 함께 술을 드시게 됐지만 저희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식 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구대야가 올라왔을 때 세 분은 역시 일어나지 않으시 더군요. 물론 그러셔야죠. 그러나 저의 간은 얼마나 오그라붙었는지 모릅니다요. 다행히 이 탁상 이 워낙 귀퉁이에 있어 구대야가 보지를 못했고 그들 수하는 괘씸하게는 생각한 모양이나, 구대 야의 지금 심사가 그런 것에 신경쓸 여가가 없는지라 보고하지 않은 듯하였습니다요." 조심원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 구대야가 그처럼 행세가 당당한 걸 보니 벼슬이 대단히 높은가 보군?" 주보는 입을 삐죽거리며 헤프게 웃었다. "헤헤헤, 세상일은 많이 알면 알수록 귀찮은 법 아닙니까? 세 분께선 과객이시니 들어도 못 들 은 척, 보아도 못 본 척하십시오. 하나를 덜 들으면 그만큼 번거로움이 덜할 것입니다. 술을 다 드시면 떠나가시겠으나, 하시는 일마다 잘되기를 빌겠습니다." 조심원은 그가 말을 둘러치는 걸 보자 궁금증이 더했다.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을 흥이 나게 해서 말을 끄집어낼까 하고 궁리중인데 주루 아래서 주보를 부르는 외침소리가 들렸다. 주보가 쭈르르 내려가 버리니 주루엔 이제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허월이 잠깐 소세를 하고 자리에 올아오다 계단 옆을 지나는데 주점 주인이 뭐라 재잘거리며 아까의 주보를 책망하는 게 보였다. 나무라는 말 속에 대가장이란 소리가 또 허월의 귀청을 스쳤다. 허월이 탁자에 돌아와 조심원에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이곳엔 좋지 못한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 대가장을 들먹이며 아주 근심어린 표정들이던데요." "글쎄, 그 말이 틀림없는 것 같으이. 주점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함부로 말을 못하는 거야. 허 형이 궁금한 모양이니 우리 대가장이 어디 있는지 탐문해설랑 함께 가보지 않으려나?" "저야 물론 찬동입니다." 그들은 즉시 주보를 불러 계산을 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들이 주인 옆을 지나칠 때 허월이 대 가장 가는 길을 물었다. 주인은 대가장이란 말을 듣자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누구를 찾으시려는 겁니까?" 허월은 뜻밖의 질문에 재꺽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우물하다가 백모라는 협사 생각이 나서 둘러댔 다. "성이 백씨라는 분을 찾고 있소." 주인은 그 말을 듣자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당황해 하며 대꾸했다. "그런 곳은 우린 모릅니다. 남문 밖에 나가 물어보시구려." 허월은 그의 말하는 폼새로 보아 절대 대답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이 자는 뭔가 무척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그가 말하는 투로 보아 대가장이 남문 밖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 다.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남문으로 향했다. 남문 밖 십 리쯤 나와 여러 사람한테 물어본 끝에 대가장이 백약포(白若鋪) 서편, 장사에서 오십 리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또 나구와 백기의 인물됨에 대해서도 탐문해 보았다. 사람들은 백기에 대해서는 좋은 사 나이라 입을 모으면서도 나구에 대해서는 어물어물 결론을 맺지 않았다. 차츰 어두워지고 있었으므로 세 사람은 더 이상 탐문을 포기하고 대가장으로 길을 재촉했다. 허 월은 아직 검술을 몰랐으나 하루 수백 리를 갈 수 있는 잰 걸음이어서 저녁이 다 되기 전에 그들 은 백약포에 닿았다. 그곳서 육칠 리 앞쪽으로 나가자 산곡 속의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황혼이 무르익고 있는 산촌엔 작은 마을 외에 대가장 같아 뵈는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 농가를 찾아 물어보았다. "이곳에 대가장이 있습니까?" 시골 농군은 세 사람을 위아래로 쓸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성이 모두 대가(大家)입지요. 세 분께선 우리 마을의 대어른을 찾으시나요? 그분을 만나려면 안쪽으로 쭉 들어가며 물어보시구랴." 농군은 말 못할 것이라도 내뱉은 듯 시큰둥해서 돌아섰다. 조심원은 냉랭한 농군을 더 물고늘어 지기도 싫어 황, 허 두 사람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쯤 가자 앞에 높은 산이 우뚝 나타나고 길이 홀연 없어져 버렸다. 그들이 길을 잃었나 당황해 할 참에 계곡 사이의 길이 눈에 띄었다. 양쪽으로 절벽이 가파른 사이에 샛길이 하나 있었다. 마차 두 대가 비껴 지나가기도 힘든 좁은 길이었다. 어찌나 험준한지 장수 한 사람이 지켜도 천군만마가 못 당할 그런 지형이었다. 그들은 계곡을 따라 이삼 리를 달렸다. 계곡은 본래 컴컴하고 으스스한 곳이었는데 짙게 어둠이 깔린 데다 세 사람의 발소리만이 처량하게 산 속에 울려퍼져 한층 음산했다. 절벽 중간쯤에는 수 십 개의 큼지막한 새집이 거무튀튀한 속에 희끗희끗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새집이 저리도 클까, 의아스럽게 생각할 뿐 괘념치 않았다. 다시 몇 리를 나아가자 갑자기 앞이 환히 트이고 큰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왼켠에 약 백 호쯤 의 인가가 촘촘히 앉아 있고 그 뒤 켠의 얕으막한 산허리엔 전답이 층층이 줄을 섰다. 마침 겨울 이라 발가벗은 전답은 마치 바둑판처럼 경계가 뚜렷이 나 있었다. 그들은 흑암을 뚫고 인가에 다가갔다. 인가에선 베틀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베를 짜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때 인가에서 중년 사나이가 걸어나왔다. 그가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여기서 뭘 하시는 거요?" "우리는 대가장을 찾아왔소이다." 조심원이 대답할 때, 또 집안에서 젊은 사나이가 쫓아나왔다. 금방 대화를 나눈 사나이가 젊은이 에게 뭐라고 속삭이자, 젊은이는 조심원 등을 한번 훑어보고는 집 뒤쪽으로 사라졌다.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바로 대가장이오. 당신들은 무슨 일로 여기 오시었소이까?" 질문을 받자 조심원은 멈칫 입을 다물고 멍하니 서 있을 뿐 응답을 못했다. 사실 조심원과 허월 은 강호를 다년간 돌아다녔어도 임기응변에는 능하지 못한 편이었다. 그날 술집에서 나구야란 자의 기염을 토하는 모습에 기분이 상했고, 그가 많은 무리를 이끌고 대가장으로 가서 선량한 사람을 해치려는 것 같아 부랴부랴 쫓아온 그들이었다. 의협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지만 상대의 힐문하는 듯한 질문에는 대답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본 황현극이 앞으로 썩 나섰다. 그는 평소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터라 입심에 는 딴에 자신이 있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내일 대가장에 모임이 있다 합디다. 그래서 새해 물품이나 좀 구할까 해서 특별히 왔소이다." 사나이는 황현극의 말을 듣자 냉소를 치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현극은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말을 잘못 둘러댔나 하고 그는 조심원 등을 둘러보았다. 조심 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긴 제야가 이틀밖에 안 남은 이 마당에 성 안에서 이제사 이곳에 올 사람은 없을 성싶었다. 세 사람은 일이 탐탁치 않자 그 집을 떠났다. 황현극이 갑자기 한탄조로 탄식했다. "여보게들, 우리가 정말 멍청해도 분수가 없군그래. 생각해 보게, 그 자들이 주루를 떠난 건 우 리보다 몇 발짝 먼저가 아니었는가? 우리 셋은 경공이 출중한데 여태껏 그 자들을 따라잡지 못했 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그 나구대야란 자는 우리 못지 않게 대단할지 모르나 부하들은 쓰잘데 없는 녀석들이었단 말일세.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이치가 없거든. 허 참, 우리가 그들에게 속은 게 아닐까?" 조심원과 허월도 황현극의 깨우침에 아연실색했다. "그 말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구려. 뭔가 잘못됐는 걸!" 황현극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일단은 악록산에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 행동을 정합시다." 조심원이 행동거지를 제의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불꽃이 터졌다. 불꽃은 광장 북쪽의 한 집에 서 쏘아올려져 큼지막한 사발꽃을 터뜨리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것은 구룡간월(九龍稈月)이란 값비싼 폭죽으로 정말 보기에 아름다웠다. 허월이 감탄해 소리쳤다. "야, 이런 깊은 산골의 작은 마을에서 저런 불꽃놀이를 하다니! 이곳 사람들은 생각보다 잘 사는 모양인데요." 허월의 감탄을 뒤로 하며 셋이 왔던 길로 되돌아 가려는데 홀연 징소리가 밤하늘을 메아리쳤다. 당당... 당..... 징소리는 이곳저곳의 산에서 메아리쳐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아마도 징을 요란히 치며 이곳 주민들은 연말을 장식하려는 듯했다. 과연 징소리는 이곳 저곳에서 울려퍼졌다. "이곳 사람들은 징도 근사하게 칩니다그려." 허월의 중얼거리는 말에 황현극이 고개를 저었다. "허거사 말씀은 틀린 것 같소. 징소리에 살기가 스며 있소이다. 저건 필경 싸움을 돋우는 선전포 고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광장 북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와 때를 맞춰 온 산이 횃불로 휘황찬란해졌다. 갑작스런 변화에 셋은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광장에 돌연 나타난 사람들은 황현극 등을 에워싸 며 다가왔다. 두 사나이와 한 여인이 앞장서고 있었는데, 사나이들은 연자삭(練子索)과 장창을, 여 인은 쌍검을 들고 있었다. 연자삭을 든 사나이만 약간 나이들어 보일 뿐 나머지 남녀는 이십 세 전후로 앳돼 보였다. 그들 은 가까이 다가오며 호령에 맞춰 재빨리 산개해서는 황현극 등을 완전히 포위했다. 연자삭의 사나이가 호통쳤다. "나구 문하의 주구들은 썩 나와서 목숨을 바쳐라!" 허월은 창을 쓰는 사나이가 웬지 얼굴이 익어보였다. 그가 창을 들고 있는 동작도 자기 집안 전 래의 수법이 아닌가. 기이한 일도 다 있다며 이상히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나이가 소리쳐 물었 다. "거기 계신 분이 혹 형(馨)형님 아니시오?" 허월은 사나이가 자신의 아명(兒名)을 부르자 더욱 놀라마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다가서서 창을 든 사나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 다보았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그러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허월이 멈칫하고 서 있자, 사나이가 앞으로 다가와 예를 갖추며 말했 다. "형님은 그래 이 동생을 잊으셨소? 저는 십이 년 전 집에서 뛰쳐 나온 형님의 열세째 동생 허철 아(許鐵兒)올시다. 지금은 허초(許超)라고 부르죠. 겨우 십이 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저를 이렇 게 잊어버릴 수가 있단 말이오?" 허월은 이제서야 그가 십이 년 전 집을 나간 사촌동생 허철아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 그는 겨 우 아홉 살이었다. 철아는 삼촌의 여덟째 아들이었는데, 공부는 마다하고 무공을 배우고 싶어 큰 아버지 집에 와서는 허월이 무술을 수련하는 것을 훔쳐보곤 했다. 허씨 집안에는 독문무공인 이화창(梨花槍)이 있었고, 철아는 이를 몰래 엿봐서 혼자 연습하곤 했 다. 그가 공부에 열중하길 바란 철아의 아버지는 무공에 쏙 빠진 자식을 한번 무섭게 패주었고, 그 결과 철아는 집을 뛰쳐나갔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던 차 에 여기서 그를 만난 것이다. 허월은 동생을 껴안고 회포를 풀고, 허초를 조심원과 황현극에게 소개했다. 허초도 그들을 대가 장 사람들에게 인사시켰다. 연자삭을 쓰는 사나이는 대가장의 지주인 비기린(飛麒麟) 대형옥(戴衡玉)이고, 여자는 그의 여동 생 대상영(戴湘英)이었다. 사람들은 대상영을 등평선자(登萍仙子)란 예쁜 별호로 불러준다 했다. 인사가 끝나자 대형옥은 적인 줄 알았던 조심원 등이 자기편 사람임에 기꺼워했다. "우리편 사람인 줄 모르고 이렇게 소란을 피웠소이다." "도대체 나구란 자는 어떤 위인입니까? 저들과는 어떻게 해서 원수가 되셨소이까?" 조심원이 묻자, 대형옥은 우선 그들을 집 안으로 초청했다. "자, 먼저 안으로 드십시다." 대형옥이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자, 골육을 만난 허월은 그렇지 않아도 바라던 바라 고개를 끄덕 이며 좋아했다. 이때 조심원이 다시 물었다. "난리가 평정된 뒤 지금은 각 지방이 안온한데, 귀하의 마을이 이처럼 치밀한 설비를 갖춘 건 특이합니다그려. 부근에 무슨 몹쓸 놈들이라도 있나요?" 허초가 끼어들어 대답했다. "말을 하자면 깁니다. 세 분께선 집 안에 드셔서 큰형님을 뵙고 나서 이야기하시지요." 이때 산 위의 횃불은 아직도 환히 사방을 비추고 있었고, 그들 주위의 사람들도 대오가 정연하 게 일행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에 생각이 미친 대형옥이 웃으며 말했다. "멀리서 온 가객을 맞느라 저들을 잊고 있었구나." 그는 손을 들어 신호했다. 딱딱이 소리가 한 번 울리자 대오는 좌우로 나뉘고 그들은 남쪽과 북 쪽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마치 두 마리 화룡(火龍)이 움직이듯 유연하게 마을 뒤쪽으로 사라져 갔 다. 산에 그득했던 횃불도 씻은 듯이 없어지고 광장은 이제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공지가 되었다. 하늘의 밝은 별만이 싸늘한 빛을 반짝이고 있었고, 차가운 바람만이 고목을 휙휙 스치며 불어왔 다. 조심원은 그들이 걸어왔던 계곡의 산길을 멀리 내다보았다. 절벽 중간쯤에 보이던 불빛이 하나 둘 꺼져가는 것이었다. 계곡을 들어오며 보았던 새둥지가 사실은 매복처였던 것이다. 그는 이들의 조직이 치밀한 데 대해 마음 속으르 감탄했다. '허월과 같이 와서 형제가 극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황현극과 내가 검술을 안다 해도 한참 곤 욕을 치렀겠구나!' 일행은 담소를 나누며 북쪽의 한 인가로 안내됐다. 그 집은 다른 여느 가옥보다 규모가 컸고 담 장도 높았다. 문 앞에 한 사람이 마중나와 있었는데 그 뒤에 많은 사람이 시립해 서 있었다.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사나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조금 전에 잘못 보고를 받고 우리 사람을 나구의 패거리로 오판했습니다. 쓰잘데 없이 소란을 핀 점 용서하십시오." 허초가 급히 그를 황현극 등 세 사람한테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저희의 큰형님인 옥면후 백기올시다. 마을의 모든 군사관계는 이 형님이 관장하신 답니다." 황현극, 조심원, 허월은 백기와 깍듯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서로가 앙모(仰慕)의 찬사와 점 잖은 말투로 초면치레를 훌륭히 차리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이 들어간 실내는 무척 넓고 부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백기가 입을 열었다. "오늘이 우리 둘째 집안의 제삿날이라 마침 주연(酒筵)을 준비 하고 있었지요. 제사를 끝내고 식 사를 하려는데 진가장(陳家莊)의 간적이 쳐들어 왔노라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금년엔 제사 잔치도 제대로 못 드나 했는데, 이렇게 세 분 귀한 손님이 오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소이다. 정말 반갑습니다!" 황현극 등 세 사람은 이곳의 주인 셋이 모두 영기가 발랄하고 호기가 넘치는 걸 보자 마음을 놓 고 손님대접을 받았다. 술과 음식을 한 차례 들고 난 뒤 그들은 저간의 사정을 들었다. 대형옥이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 나구라는 자는 원래 장사성 밖의 한낱 파락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왜소한 체구에도 불 구하고 힘만은 황소보다 더해서 팔뚝에 힘을 주면 울퉁불퉁한 알통이 무려 아홉 개나 솟아난답니 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구흘탑(아홉 알통)이라 불렀죠. 한데 뒤에 그는 도박장에서 싸움을 하 다가 유명한 무사인 위홍(衛洪)한테 큰코 다쳤습니다. 목이 부러지고 서는 것조차 어려웠는데 어 떻게 했는지 섬서성 태백산 적취애(積翠崖)로 도망가서 아미파 검선 만리비홍(萬里飛紅) 동원기 (瞳元岐)의 문하가 돼 일신에 놀라운 무공을 익혔지요. 그는 지난해 연말 장사로 돌아와 즉시 위 무사에게 복수했고 그의 내공으로 상처를 입은 위홍은 사흘도 못 돼 장이 터져 죽고 말았습니 다." 그 위무사는 장사성 내의 부호 유윤중(兪允中)이 초대한 무술교사였었다. 위홍이 죽자 그 멀쩡한 놈의 나구는 유윤중에게 자신이 대신 무술교사가 되겠다고 자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유공자는 비 록 나이가 어린 사람이지만 정파인물이고 정의가 깊은지라 그를 거절할 뿐 아니라 사방에 유능한 사람을 구해 위무사의 복수를 꾀하려 했었다. "그는 제가 권각술을 좀 안다는 말을 듣자 여러 차례 초빙하겠노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 만 나는 원래 농사에 뜻을 둔 데다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고, 한발 더 나아가서는 위무사 같 은 유명인물도 적수가 되지 않은 그 자의 실력을 알 수도 없어 만에 하나 당해내지 못한다면 그 무슨 낭패입니까? 그래서 거절하고 말았죠." 대형옥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차분히 계속했다. "이곳에서 서남 이십 리쯤 가면 작은 계곡 속에 진가장이 있습니다. 이 진씨네는 아까의 유씨와 는 대대로 원한관계인데, 나구의 재주가 비상하다는 말을 듣자 온갖 감언이설과 후한 예물을 보 내 자기들의 무사로 초청했습니다. 나구는 유가장에서 자기를 쓰지 않는 데 원한을 품고 있었는 데, 진가장에서 초빙하자 얼씨구나 받아들였습니다." 진가장의 수령은 진장태(陳長泰)란 자로 외호가 <지두사 추혼태세(地頭蛇 追魂太歲)>였다. 일찍 이 향촌을 횡행하며 눈에 뵈는 게 없었는데 나구까지 합세하자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 더욱 날뛰 게 되었고, 얼마 후 유윤중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유윤중은 자신이 적수가 되지 않음을 통감해 저한테 찾아왔습니다. 그때 저는 마침 선영(先瑩) 관계로 몸을 뺄 수 없었고, 또 저 자신도 그들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지요. 그래서 유윤중에게 계 책을 하나 일러주었습니다. 진가장에 서한을 보내 시간을 벌라는 것이었지요. 내용은 '그대들이 비록 많은 수와 힘을 믿는 모양이나 나 유가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오. 내가 가사를 깨끗이 정리 하도록 일 년을 기다려 주시오. 그러면 그때 진가장에 가서 지도를 받겠소'라는 거였지요. 그 일 년이 바로 오는 이 월 초사흗날입니다." "그들이 일 년을 기다려 준다 했습니까?" 허월이 묻자 대형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의 규칙상 그들도 어쩔 수 없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유윤중에게 시비를 걸진 않았어도 진 가장 가까이 있는 유씨네 사유 도장을 강점했습니다. 유윤중은 분했으나 어쩔 방법이 없어 꾹 참 고 널리 유능한 사람을 구할 뿐이었지요. 그러던 중추절 얼마 전 백대형이 선화에서 장사로 돌아 왔습니다. 형님은 악록산을 지나다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싸우는 것을 보고 육칠 척도 더 되는 큰 바위를 들어올려 싸움을 말렸고, 명성은 장사를 뜨르르하게 울렸습니다. 형님의 소식을 듣자 유윤중은 밤을 도와 찾아와서 그를 도와 분풀이를 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죠. 백대형은 처음에 는 승낙을 하지 않다가 제가 옆에서 간곡히 권하자 끝내는 응락하시었습니다. 다만 기일 전에는 나가 싸우지 않겠다는 생각이셨지요." 대형옥은 백기를 슬쩍 쳐다보고 그를 자세히 소개했다. "백대형은 원래 호남의 선화대협인 나신(羅新)의 외사촌동생입니다. 일찍이 장사에서 명성을 날 렸는데, 어렸을 적엔 저와 함께 자라났습죠. 형님의 집은 장사성 내에서 필방(筆房)을 했는데, 늙 은 과부 형수와 어린 조카 둘밖에 친척이라곤 없답니다. 형님이 집을 떠날 때 그들을 나한테 부 탁했기에 지금은 그들을 우리집에 데려와 화목하고 흥겹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님은 돌아올 때마다 저의 집과 장사를 왔다갔다 하지요." 한데 나구는 백기가 유윤중의 부탁을 듣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아주 좋아했다. 그 진장태란 자 는 위무사가 살아 있을 때 그가 두려워 시골로 피신해서 이 년을 살다가 위무사가 죽고 무서운 방조자가 생기자 이젠 두려울 게 없다며 그 나구 등 개뼉다구들과 함께 다시 장사로 돌아왔던 것 이다. 유윤중은 그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그를 피해 두문불출했고, 얼마 동안 두 사람의 사이엔 별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십이 월 초 유윤중이 장가를 들게 되었습니다. 상대인 여자집은 성이 능씨로 대대에 걸쳐 무인집안인데 계속 외아들로 대를 이어왔고 이번엔 그나마 외동딸인 겁니다. 장인될 사람은 능조(凌操)란 분이고 딸은 능운봉(凌雲鳳)이란 처녀로 대단한 미녀인 데다 무예도 출중하 답니다. 그녀가 미녀로 소문이 자자하자 진장태란 자도 일찍이 여려 차례 구혼을 했었더랍니다. 그러나 능조는 본래 관상술과 사주보는 법이 빼어나 진장태를 보자 재깍 거절을 했습니다. 진장 태가 삼 년 내에 필히 화를 당할 상이라나요. 진장태는 그때 못내 분해했지만 자기 실력으로는 능조를 어쩌지 못했고, 나중 아내와 첩을 여럿 두게 되어 그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능 운봉이 자기의 원수인 유윤중한테 시집간다는 말을 듣자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는 내년 봄의 약 속기일을 기다리지 않고 유윤중을 폐인으로 만들어서 두 사람 모두에게 동시에 보복을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나구의 입장은 퍽이나 곤란한 처지였습니다. 그가 장사에서 낙백하던 시절 능 조의 도움을 많이 받은 데다 위무사한테 당해 크게 상처를 입었을 때도 그가 집에 전해오는 금창 악으로 치료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차마 능조를 치고 싶지는 않았으나 남의 밥을 먹는 신세 라 결국은 어쩔 수 없었지 않겠어요?" "그 능조는 유윤중과 진장태의 관계를 알지 못했습니까?" 허월이 묻자, 대형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몰랐겠습니까? 능씨 집안은 처음 혼사 말이 나왔을 때 그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누군가가 말했다는 거예요. '현재 진장태와 나구는 유윤중과 원한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번 혼사를 치르 다가는 큰 파란이 일 것이오' 그러나 능조는 이 말에 태연했다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 유윤중은 위인이 돈후하고 기도가 단정한 품이 문무양전에 결코 요절할 상이 아닐세. 그리고 나구 그 녀석 은 나한테 신세를 많이 졌으니 함부로 어쩌지 못할 것이야' 능조는 즉각 혼인을 승락함은 물론 널리 자랑까지 했습니다. 유윤중 역시 무슨 위험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고, 능씨 딸이 미녀이며, 그들 부녀가 대단한 실력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혼사 때문에 무슨 말썽이 났소이까?" 조심원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결혼날 유윤중은 친히 능씨 집으로 신부를 맞으러 갔습니다. 그가 능씨 집 가까이 갔을 때 진장태와 나구가 매복해 있다가 뛰쳐나왔습니다. 피할 수 없는 접전이 벌어지려 할때 능 조가 달려나와 나구를 크게 나무랐습지요. 나구는 처음에는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듯했 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화를 버럭 내며 능조에게 달려들었답니다. 능조는 그보다 두 살 위인데 자 칫 실수하여 나구의 일 장을 맞고 말았습니다. 유윤중은 장인이 상처를 입는 것을 보자 상대가 무서운 것도 따지지 않고 대들었지요. 그러나 어찌 나구 일당의 상대가 되었겠습니까?" 아주 위험한 순간, 마침 허월의 동생인 허초가 사천서 돌아오다 이를 보고 그들을 도왔다. 능운 봉도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고, 쌍방은 일대 혼전을 벌여 진장태 수하들이 많이 다쳤고, 허초와 능조 부녀 및 유윤중도 끝내는 나구 등을 못 당해, 싸우며 남문 밖 이십 리까지 물러나왔다. 그때 대형옥과 백기가 급보를 받고 쫓아가 가까스로 구해왔는데, 그 덕에 대가장도 이젠 원수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대형옥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제 잠깐이면 내년 춘삼월이 될 것입니다. 쌍방은 서로 경계를 엄히 하고 있고, 나구는 우리가 인원이 많으며, 여러 곳에 조력할 고수를 구하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이곳은 비록 깊은 산골 이지만 생각 밖으로 풍요합니다.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실패한 뒤 도처에 비적(匪賊)이 창궐하고 있으나, 백대협의 지시대로 곳곳에 전망대와 시설을 갖추어 험난한 지형과 함께 어느 누구의 침 공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던 참에 진가장 및 나구와 원한관계를 맺어 한층 계곡입구 의 수비를 엄중히 하고 있답니다. 조금만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즉시 등불로 신호를 보내오지 요. 이 등불 신호방법도 큰형님이 가르쳐 준 것인데 등의 삼면은 나무판자로 가리고, 한쪽 면에 붉은 유지를 붙여 신호하는 수법입니다. 특히 밤에 이 신호등을 들지 않은 자가 나타나면 그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히 등불로 보낼 수 있습니다. 만약 아주 많은 침입자가 있을 경우엔 유성불꽃을 쏘아올리고, 낮에는 향전(響箭 :소리나는 화살)을 쏘아냅니다. 그때는 무예를 익힌 모든 마을 사람 들이 즉각 집합해 적을 막게 됩지요. 마을엔 도처에 매복처가 많고 험준한 곳도 많아 아무리 강 적일지라도 십중팔구는 포로로 잡을 수 있습니다." 대형옥은 잠시 말을 거두고 좌중을 훑어보았다. 방문객 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하 는 눈치였다.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들의 단단한 채비에 나구는 뭔가 기분이 나빴던지 어제 저녁 비적 한 녀석을 몰래 보내 동 정을 살피게 했습니다. 그 녀석은 쌍두서(雙頭鼠)라는 별칭을 가진 문보훈(文寶薰)이란 자인데 재 깍 보고가 들어와 수십 명의 장정이 놈을 잡으러 나갔습니다. 쌍두서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자 계곡으로 튀었으나 미리 숨겨둔 용수망(龍鬚網)에 걸려 붙들렸습니다. 우리도 처음 그 녀석을 심 문할 때는 사소한 졸개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이름, 즉 쌍두서 문보훈 인 걸 알고서는 그를 그냥 살려 둘 수가 없었죠. 그놈은 친형제를 잔뜩 두들겨 패서 쫓아냈는가 하면, 집안의 재산을 몽땅 병탄한 뒤, 자기 모친이 쓸모없이 밥만 축낸다 해서 강제로 시집을 보 낸 악한 중의 악한입니다. 장사성 내에서 사람같지 않은 짓만 골라 하는 불한당을 어찌 살려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놈을 산에다 생매장시키고 그의 유물을 나구에게 보냈습니다. 진장태와 나구는 이 사실을 알자 천둥처럼 노해서 명춘까지 기다리지 않고 수일 내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 더랍니다. 그러던 오늘밤, 세 분이 계곡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신법이 자유자재하다는 급보가 뒤이어 와서 무척 긴장했습니다. 진장태와 나구 두 간적이 유능한 사람을 불러 우리를 치 게 했는가 하여 정말 소홀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만약 셋째가 형님을 만나는 행운이 없이 헛 된 싸움으로 화기를 다쳤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꼴이었겠습니까?" 대형옥의 말에 허월과 허초 등도 모두 싱그럽게 웃으며 술잔을 치켜들었다. 대가장과 여가장 深宵煮酒 同話葵花谷 險道搜敵 雙探魚神洞 한편 백기와 대형옥 남매는 허월로부터 황현극과 조심원이 검술을 안다는 말을 듣자 십분 흠모 하며 기뻐했다. 그들은 허초에게 부탁해 황현극 등 세 사람이 자신들을 도와주도록 권하게 했다. 이에 대해 조심원이 대답했다. "포악함을 제거하여 선량을 편안케 하고 약한 자를 돕는 게 우리들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저와 황도형은 오는 삼 월 초사흗날에 한 분 선배 검선의 명을 받아 행동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분 의 지시를 담은 서신을 지금 갖고 있으며 그때 가서 어떤 지시에 따를지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제대로 여러분들을 도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삼 월 초사흘 이전에 교전이 있으면 일차 도와드릴 수는 있을 것이외다." 그는 추운수가 주순을 통해 서신을 보내온 사실을 한 차례 설명 한 뒤 백기와 대형옥이 믿지 않 을까 봐 서신을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백기가 웃으며 말했다. "조형께선 심려도 많으십니다. 제가 보기에 나구란 녀석은 쌍두서가 죽은 걸 보고 가만히 있을 턱이 없다는 것이죠. 두 분께서 그처럼 일이 있으시다면야 저희가 어찌 억지를 부리겠습니까! 하 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 아니겠습니까? 아직 시간은 있으니 우선 그때까지 조용한 이곳에 머무시도록 하십시오. 계곡의 풍경도 악록산에 버금갈 것입니다. 그 사이 저들이 쳐들어 오지 않 으면 그것으로 좋고, 그 뒤에야 저희들이 대책을 세우면 될 겁니다. 세 분 의향은 어떠신지요?" 황현극과 조심원은 본래 야학한운(野鶴閒雲) 같은 사람이라 주인들의 성의가 완곡한 것을 보자 의기가 투합됐다. 더욱 진장태와 나구가 저처럼 횡포를 부리고 있다니, 추운수의 명령만 어기지 않는 내에서 이들을 도와 해학을 제거하는 거야 마다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일 악록산에 다녀와 일용품을 가져온 뒤 대가장에 머물기로 약속했다. 백기와 대씨남 매는 진실로 좋아했다. 한편 능조와 유윤중은 나구한테 상처를 입고 현재 후원에서 요양 중이었다. 다행히 백기가 약간 의 의술을 알고 있어 그들을 치료해 줄 수 있었다. 능조와 유윤중은 세 분 검협이 왔다는 말을 듣자 아픈 것도 생각지 않고 능운봉의 부축을 받으며 대청에 나와 인사를 나누려다 백기는 그들 이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세 사람을 안내해서로 상견토록 주선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능조는 조심원이 처음 무술을 배우던 시절의 동문 사숙에 해당했다. 둘은 자신들의 관계를 확인하자 더 친근해져 즐거워했다. 다음날 황현극 등 셋은 장사 악록산으로 돌아가 필요한 물품을 챙겨서 돌아왔다. 대가장에 잠시 거주를 정한 것이다. 한데 오로지 허월만은 급히 삼유동(三遊洞)에 가서 스승을 모실 것에 마음이 달아 있었다. 그는 집에 돌아가 가산을 정리해야 하므로 정월 대보름날까지는 꼭 떠나야 한다고 우겨댔다. 백기는 그의 마음이 굳어 있는 걸 보자 굳이 만류하지 않고 새해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다시 상 황을 보리라 마음먹었다. 드디어 그해 그믐날이 되었다. 대형옥은 큰 잔치를 벌여 세 가객을 극진히 접대했다. 주석이 한창 무르익을 때 황현극이 입을 열었다. "그날 우리들이 주루에 있을 때 허형은 분명히 대가장이란 말을 들었지 않소? 한데 지금껏 삼 일이 지났는 데도 녀석들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 무슨 귀계(鬼計)일까? 그 점에 대해 소홀히 하면 절대 아니되겠소이다!" 그의 말에 대형옥이 새삼 생각났다는 듯이 뒤를 이었다. "황도형이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깜빡 잊을 뻔했습니다. 이 분지는 본명이 규화욕(葵花欲)입지요. 해바라기꽃같이 널찍한 계곡이란 뜻입니다. 이 산 속에 두 씨족이 살고 있어, 그중 하나가 대가장 이고, 다른 하나는 여가촌(呂家村)입니다. 한데 수년 전 큰 비가 내려 산 위에 홍수가 나고 봉우 리가 쏟아져 내리면서 엄청난 돌과 흙이 두 마을을 잇는 통로를 메꿔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절벽 사이로 이어졌던 어신동(魚神洞)이 완전 두절돼서 여가촌을 가려면 두 개의 큰 봉우리를 넘어야 가능케 됐답니다." "그러면 두 집안끼리 왕래가 힘들게 됐겠습니다그려?" 조심원이 묻자 대형옥이 즉시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죠. 두 봉우리는 극히 험준해 왕래가 아주 어렵게 됐고, 사실 두 집안이 평소 잘 융 합을 못해 내왕이 별로였던 차에 관계가 아예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해에 오삼계의 반란이 실패하자 궤멸한 잔당은 비적이 돼 여가촌을 침공해서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크게 노략질을 자행 했습니다. 그런데 여가촌은 그 해에도 산이 무너지고 홍수가 났으며, 그 뒤 매년 홍수와 침몰로 전답이 몽땅 침해를 받곤 했더랍니다." 여가장에서는 도대체 이게 웬 재앙인가 싶어 유일한 지관(地官)을 불러다 자문을 받았다. 지관은 지세를 살펴보더니 여가촌의 용맥(龍脈)이 이미 끊겨 그곳서 살 수 없다고 진단을 했다. 그곳에서 계속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다 망하고 목숨을 잃을 거란 예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풍수 지리를 철석같이 믿는 데다 또 매년 홍수로 곤욕을 치른 터라 그들은 마을을 버리고 인근 높은 지역으로 이주했다. 하나 전답이란 것은 가져갈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냥 버리자니 마냥 아 까울 뿐이어서 그들은 그 다음 해에 그곳에 가서 파종을 하곤 했었다. 추수를 거둬들이고 거둬들 이지 못하고는 하늘의 뜻일 뿐이라 그냥 맡겨 놓았던 것이다. 대형옥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들이 떠난 그 해는 홍수도 나지 않고 추수도 풍성하였다는 겁 니다. 그들은 다시 돌아갔습니다. 한데 그들이 돌아간 며칠이 안 돼 대판 홍수가 나고 말았습니 다. 별수없이 그들은 경작하는 밭과 살림처를 따로따로 두기로 했지요. 몇 가구만 아주 높은 곳에 집을 짓고 남아서 전답을 지키게 했습니다. 경작이 필요할 때는 그들이 연락하고, 이쪽에서 가서 밭을 가는 그런 판국이었죠. 그 얼마나 번거롭고 불편한 일입니까. 하지만 그 전답들은 정말로 비 옥해서 버리자니 아깝고 팔자니 임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까운 마음에 수시로 지관들을 불러 다 보이곤 했는데 거의가 비슷한 말들을 하더란 겁니다. 개중에는 봉우리가 무너져 내리기 전엔 여가촌과 대가장이 똑같이 나눠가졌던 풍수를 지금은 대가장이 몽땅 차지해서 그 때문에 여가촌 이 그곳서 경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상한 논리를 편 자도 있더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여씨 들은 은근히 우리가 고까왔겠지만 우리가 일부러 산을 무너뜨린 것도 아니요, 원래 방비가 엄한 대가장인지라 그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황현극 등은 세상에 기이한 일도 다 있다 싶어 귀를 쫑긋하고 대형옥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 다. "옛날의 여가촌과 새 여가촌은 산길로 약 오륙 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그 사단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옛집들은 거의 태반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합니다. 만약 진장태와 나구 두 간적이 우 리 대가장이 정면으로 침범하기 어려운 걸 알고 그 여가촌의 옛집에 숨어들어 어신동의 막힌 절 벽을 뚫고 습격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생각도 가능하려니와 아주 위협이 되는 일이라 적 극 방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백기가 말을 받았다. "둘째의 말이 틀림없네. 이 간적들은 신의란 일체 없는 것들이라 쌍두서가 죽은 것에 필히 발작 해서 약속이고 뭐고 지키지 않을 것이야. 앞으로 약속한 기일은 많고 그 사이 그들이 언제 올 지 몰라 많은 장정들이 헛고생할 게 뻔하이. 그러니 우리들 셋이서 돌아가며 어신동 입구를 순시하 도록 하지. 품속에 불꽃을 지니고 있다가 적의 동정이 있을 때 즉각 신호를 하면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네. 동생들 생각은 어떤가?" 이때 허월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이 일로 백형까지 고생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급히 삼유동으로 사부를 쫓아가야 할 몸이니, 그 전까지는 제가 그 일을 맡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조심원과 황현극도 그들이 가겠다고 자청했다. 백기가 말했다. "세 분 가객은 이번에 특별히 오신 손님이시고 더욱 연말이라 그런 고생을 시키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당분간은 저희 마을에서 편안히 즐기며 보내도록 해주십시오." 그래도 허월은 끝내 그가 맡겠노라 고집을 부렸다. 백기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정 그러시다면 오늘은 편히 쉬시고 다음에 부탁해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저와 저희 동 생들이 그 임무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끝내자 술잔에 술을 그득 붓고는 잔을 허초에게 권하며 말했다. "이 아둔한 형은 손님들을 위해 여기서 접대하고 있을 테니 번거롭지만 오늘은 동생이 어신동을 살펴봐 주지 않겠는가?" 허초는 백기의 말을 듣자 즉각 허리를 굽혀 명을 받았다. "삼가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그는 술잔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누군가가 그의 병기를 가져오자 허초는 사람들에게 공 손히 예를 하고는 청당을 나갔다. 허월은 자기의 동생이 임무를 맡고 나가자 더 이상 말리거나 주장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다시 연회에 묻혔다. 백기는 은근하게 손님들을 접대하며 자연스레 가객들을 즐겁게 했다.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경이 되도록 연말의 감회를 풀었다. 일꾼들이 젖가락을 거둘 때가 되자 백기와 대형옥은 다시 가객을 방으로 안내해 한담을 나누었다. 한해의 슬픔과 고뇌를 말끔히 씻는 전야답게 모두 잠을 잘 생각들을 잊은 채 서로의 회포를 풀며 삼경을 넘겼다. 새해가 되자 대형옥은 차례를 지내고 나와 모든 사람들과 신년 축하인사를 나눴다. 허월은 대형옥 일가가 단란하고 풍성한 것을 보자 웬지 처량함을 느꼈다. '철아와 어릴 적에 헤어졌다가 이제 겨우 만났으나 그와 다정히 이야기할 시간도 없구나. 더구 나 이 몸은 머지않아 삼유동으로 사부를 찾아가야 할 신세, 어쩌면 영원히 이 풍진세상을 등지고 애들과도 헤어질 터이니 세상사가 허무런가?' 그는 이렇게 상념에 젖으며 신년을 축하하는 무리들 속에서 빠져나왔다. 문을 지키는 장정은 마 을의 귀객이 바람을 쐬러나가나 해서 아무 말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허월은 회식 때 어신동으로 가는 길을 미리 알아두었으므로 그 쪽으로 발길을 놓았다. 온 마을 사람들의 새해 맞는 소리를 귀담아들으며 각양각색의 불꽃이 하늘 높이 쏘아올려지는 것을 보았 다. 별의별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는데 그 전날의 구룡간월 불꽃은 보이지 않았다. 허월은 곳곳에서 풍년을 기리는 민속음악이 펼쳐지는 것을 보자 마신 술기운이 달아오르며 그들 처럼 흥이 났다. 한참을 달리자 수십 장 높이의 언덕이 앞을 가로지르며 옆쪽으로 길다랗게 뻗어 있었다. 어신동에 가까와진 모양이었다. 하늘에는 차가운 별이 쓸쓸히 반짝이고 있었고, 산 언덕은 적막 하리만큼 조용했다. 사람의 그림 자도 보이지 않았다. 허초는 지금 어디 있을까? 허월이 뒤돌아 보니 아직도 불꽃이 하늘에서 계속 난비하고 있었다. 폭죽 터지는 소리와 징소리가 바람에 실려 은은히 들려왔다. 허월이 아무 사념없이 터덜터덜 걷 는 사이 그는 높은 언덕에 올라 있었다. 허월이 사방으로 눈길을 주면서 허초를 찾고 있는데 홀연 소리와 함께 번쩍 하며 두 자루 강도 (綱刀)가 섬광처럼 가슴을 찔러왔다. 서늘하리만좀 백광을 뿜는 칼날이 섬뜩했다. 허월은 급히 몸을 뒤로 날려 사오 장쯤 비켜섰다. 그의 앞에 두 사람의 마을 장정이 나타났다. 그들은 신호등 하나와 강도 한 자루씩을 들고 있었다. 허월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큰 적과 싸워본 경 험이 적은 허월은 급히 머리를 숙이며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이들 두 사람도 대가장 장정이었다. 그들은 두 자루 장창으로 그를 휩쓸어 왔다. 이들은 모두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 허월이 재빨리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면 끝내는 허월을 상하게 하고 말 것이었다. 허월은 몸을 옆으로 빼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두 분 장주의 명을 받들고 허초형제와 교대하기 위해서 왔소!" 네 사람은 허월의 말을 듣자 네 개의 홍등을 들어올려 그의 얼굴을 비췄다. 일전에 온 장주의 귀빈인 것을 확인하자 그들은 허둥대며 사과했다. "저희들 넷은 오늘밤 이곳 순시담당입니다. 귀객께서 저희의 신호등을 갖고 계시지 않았기에 그 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야반이 되기 전에 삼장주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더군요. 어신동에 일간 간세 가 나타날 테니 각별히 지키라더군요. 그 때문에 귀객을 외인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괴이쩍게 여 기지 마십시오." 허월은 겸양의 말을 한두 마디 건네고 삼장주 허초가 어디로 가더냐 물었다. 넷 중 우두머리인 대만관(戴滿官)이란 자가 대답했다. "야반 전에 삼장주께서 오시더니 어신동 옛 통로를 정탐해 보시겠다 하더이다. 저희들 넷은 그 쪽에 얼씬거리지도 말라 했습니다. 만약 아침이 밝아와도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다음 조와 교 대할 때 대장주 및 여러분께 알려달라 하시더군요. 처음 그분이 장창을 들고 어신동 입구를 어슬 렁거리는 것을 보았는데 이경이 지나 동굴 안으로 들어가신 뒤로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보지 못했다구?" "그렇습니다." "어신동 입구는 어딘가?" "바로 저기입니다. 저 어신동은 깊이가 사오십 장 되며 여가촌을 가려면 꼭 지나야 합죠. 몇 해 전 산이 붕괴하면서 돌과 흙이 쏟아져설랑 통로가 막히고 말았지요. 이제는 도통 통할 수 없게 되었답니다. 한데 일전에 저희들이 이곳을 순시하다 이상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니 그 무슨 말인가?" "저희들은요, 넷이 두 조로 나눠 한 조는 순시를 하고, 한 조는 동굴 입구에 들어가 가져온 술을 들며 불을 쬐어 몸을 녹이곤 했답니다. 한데 동굴서 술을 들던 녀석들이 귀신 울음소리가 들린다 며 쫓겨나오질 않겠습니까? 동굴 깊숙한 데서 푸른빛이 번쩍이며 요괴가 금방 나올 것 같다는 것 이었어요. 우리들은 우스꽝스러워 급기야 동굴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한데 홀연 동굴 저편에서 푸 른빛과 하얀빛이 우리 머리 위를 날아 밖으로 사라지질 않겠습니까? 저희들은 화들짝 놀라고 말 았죠. 한참 뒤 동굴을 나와 본즉,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장주께 보고를 했나?" 대만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조로 대답했다. "처음엔 세 분 장주께 보고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분 장주가 평소 귀신 따위를 믿지 않는다는 생각이 나질 않겠습니까? 이야기드렸다가 자네들이 간이 작다는 말을 들을까 봐 그만두 었습죠. 그러다 마침 아까 삼장주께서 오시길래 말씀해 올렸습니다. 삼장주는 평소 저희들과 이야 기를 다정히 나누곤 했거든요. 한데 그 이야기를 듣고 동굴로 들어가신 삼장주가 돌아오시지 않 으니 영 걱정이 됩니다요." 허월은 대강 듣자 크게 놀랐다. 그는 잠시 생각을 굴리다 대만관에게 말했다. "작은 동굴 속에 무슨 요괴 따위가 있겠나? 삼장주는 아마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겠네. 자네들은 여기서 엄밀히 지키다 혹 외인이 오면 싸울 생각 말고 신속히 등불로 신호나 하게. 내가 동생을 한번 찾아보겠네." 그는 말을 끝내자 수중에 병기를 집어들고 어신동 입구로 곧장 나아갔다. 어신동 입구는 약 이 장 높이였는데 부서진 돌과 흙더미 등이 잔뜩 쌓여 있어 한두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동굴 속은 유난히 컴컴했다. 허월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허월은 허초의 아명을 두 차례 불러보았다. "철아, 철아! 너 어디 있느냐?" 허월은 단전의 진기로 분명히 크게 외쳤건만 동굴은 그의 소리를 잡아먹은 양 아무 소리가 들리 지 않았다. 허월은 다시 두 번 소리쳐 부르고 메아리가 들리나 귀를 기울였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허월이 놀란 듯 부르짖었다. "어이쿠, 뭔가 안 좋다!" 그는 동굴로 들어가지 않고 언덕 쪽으로 가서 대만관한테서 등불 하나를 빌었다. 다시 동굴 입 구로 돌아온 허월은 등불을 손으로 가리고 안쪽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그는 손으로 더듬어 돌멩이를 하나 찾아 그 위에 앉았다. 허월은 이어 컴컴한 곳을 향해 차 반 잔을 마실 시간 동안 눈을 똑바로 뜨고 응시하더니 눈을 감고 한동안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다가 눈을 번쩍 뜨고 앞을 내다보았다. 컴컴한 속이 환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동굴엔 빛이 스며드는 곳이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컴컴힌 속이 밝 게 보일 리가 없을 터였다. 허월이 이렇게 어둠 속을 보는 수법은 허실생백야광안(虛室生白夜光眼)이란 것이었다. 처음 이를 수련하기 위해서는 어두운 방에서 향불을 켜놓고, 밖에서 밟은 빛을 보다가 갑자기 향불을 응시 하며 안력을 키워야 했다. 한동안 향불을 응시하던 수련생은 갑자기 눈을 감고 머릿속에 향불의 모습을 그리며 이내 다시 눈을 떠서는 또 향불을 바라본다. 이렇게 수없이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면 컴컴한 속에 향불이 보이고 주위 경물도 환히 볼 수 있 게 되는 것이다. 석 달쯤 수련한 사람은 차츰 향불도 필요없게 되어 최종엔 향불 같은 미미한 불 빛의 도움 없이도 어둠 속을 청초히 보게 마련이다. 허월이 조금 전 놀라 외친 건 두 번씩이나 소리쳐도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만 관의 말에 의하면 허초가 동굴에 들어간 지 오래인 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고, 메아리마저 없으니, 이 동굴이 벌써 누군가에 의해 뚫린 게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허초는 아마도 동굴에서 독수를 만났을 것이다. 이런 추리가 머릿속을 헤엄치자 허월은 즉시 돌아가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허초가 아무 일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때는 자신이 맥없이 심약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허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이 빼어난 야안(夜眼)을 지녔음을 생각했다. 그렇다, 우선 나의 밝 은 밤눈으로 허초의 행방을 찾고 보자. 그렇게 마음먹은 허월은 대만관에게서 등불을 하나 가져 와 돌벽에 올려놓고 만일 자신이 길을 잃었을 때의 표지로 삼았다. 그 등불은 삼면이 가리워져 있어 홍색이 얇게 뻗쳐나오는 반만 돌벽에 불여 놓으면 희미한 그림 자만이 여릿하게 비추어 밤눈이 밝지 않은 사람은 여간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허월은 어둠 속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을 다독거리며 다시 눈을 감고 운기조식했다. 이윽고 눈 을 뜨니 어둠 속이 더욱 환히 보였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가 앉는 돌멩이 주위에 타다 남은 잿 더미와 술병이 뒹굴고 있었다. 순시하던 장정들이 남긴 것들이다. 그는 앞쪽을 내다보았다. 동굴은 상당한 굴곡을 이루고 있었다. 허월은 원체 세심한 사람이라 야안을 십분 발휘해 앞을 조심스럽게 내다보며 살살 전진했다. 삼 사십 장을 걸어가자 갑자기 동굴이 끝나버렸다. 사방을 찾아봐도 출로가 없다. '이것 봐라. 네 녀석은 확실히 아우가 이 동굴로 들어갔다 했지 않았는가? 동굴은 약간 꾸불탕 하긴 해도 내가 걸어온 길밖에 없는데 길도 끝나고 아우도 없으니 이게 어인 일일까? 그들이 잘 못 본 걸까? 아우는 동굴에 들어오지 않았나? 동굴 밖에 길이 있을까? 한데 전날 밤 들었다는 귀 신의 울음소리와 하얗고 푸른빛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한창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극히 경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끝이 난 동굴 석벽의 저켠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였다. 허월은 석벽에 귀를 찰싹 댔다. 과연 말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쇳소리같이 날카로운 목청이 말했다. "내가 일찍 말했지. 그 두 계집이 이쪽으로 도망쳤으니 이 험악해 보이는 통로도 결코 믿을 수 없다고 말이야. 글쎄 우리가 알고 있는데 저들이라고 모를 턱이 있겠어? 거 봐, 저 녀석들이 먼저 사람을 보내오지 않던가? 우리가 미리 준비하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어쩔 뻔했나? 우리가 이왕 곽 진인의 도움을 받을 바에야 약속 날짜에 정정당당히 고하(高下)를 가릴 것이지, 하필 남 몰래 기 습할 생각을 하는 건 또 뭐야? 그리고선 새삼 통로를 막아? 사실 저들이 이 많은 돌을 뚫고 들어 오는 것도 어디 손쉽게 될 일이겠어? 적의 동정을 알고 싶으면 곽진인의 문인을 시켜 검광을 타 고 가서 쉽사리 알아낼 것이지. 으이그, 하는 일마다 쫌생이들이라....." 쇳소리의 한탄이 그치자 털털이 같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셋째형님의 말이 맞소. 사실 이 모든 일이 죄다 그 배라먹을 나구란 놈 때문이어라우. 일전에 두 계집이 이 동굴을 통해 도망쳤다는 말을 듣자 나구는 이곳을 통해 대가장을 기습하자고 주장 했다는 겁니다. 대가장의 방비가 워낙 튼튼한지라 외부 사람은 비록 날개가 있더라도 들어가기가 어렵다나. 그저 이 지름길만 통하면 신년을 맞아 저들의 닭이나 개 한 마리도 남기지 않겠다는데 어디 그게 될 법이나 한 일이유? 더구나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들이 어제 반나절이나 끙끙대고 고생해서 길을 뚫자 마자 저들의 간세(奸細)가 먼저 힘 한 톨 들이지 않고 스며들 줄을 말이오. 다행히 곽진인이 놈을 사로잡게 되자, 이번 공사를 알고 장주한테 권해서 이런 치사한 짓 은 못하게 했답디다. 그 통에 다시금 통로를 메우는 헛짓을 하고 있으니... 하여튼 치사 더럭더럭 한 나구란 놈 땜에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연말을 집에서 지내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우 리 다섯째동생이 간세한테 다시 근육을 찢겨 평생 병신까지 되었으니, 이 모두 나구 그 개자식 때문 아니겠수?" "그래 넷째야, 그렇지만 이젠 괜찮겠지 뭐. 자, 이놈의 돌이나 올려놓고 장주한테 보고하러 가자 꾸나. 벌써 하늘이 밝아온다. 새해는 너의 집에서 보내야겠어." 말소리가 그치고 돌을 들어 이동하는 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이어 발자국 소리가 가까와졌다가 멀어지고 이윽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멀리 가버린 모양이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허초는 생사불명이요, 흉다길소(兇多 吉少)인 것이다. 허초는 급히 달려가 등불을 가져와 석벽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과연 석벽 사이에 구멍이 하 나 뻥 뚫려 있었다. 석벽 왼켠으로 약 너댓 자 위쪽인데 너비는 넉 자쯤 되어 보였다. 그 밑 지하 에 사람 발자국이 너저분하게 나 있었다. 이 구멍은 저쪽에서 큰 돌이 막힌 듯했지만 역시 사람의 손으로 일시 막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허월은 손을 써서 두세 차례 밀어보았다. 끄떡도 하지 않는다. 허월은 실망하지 않고 다른 쪽을 밀어보았다. 웬지 오른쪽 밑의 돌이 흔들릴 것 같아 그쪽을 밀 었다. 조금 흔들리는 것 같다. 그는 등불로 그곳을 자세히 비춰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금이 간 돌이 하나 있었다. 허월은 마음 속으로 됐다 싶어 쾌재를 불렀다. 그는 우선 힘을 쓰지 않고 석벽들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이 어신동의 중간지점은 어느 곳보다 넓었는데 산 위에서 쏟아져 내린 바위들은 그 중간을 뚫고 내려앉아 통로를 차단시키고 있었다. 돌들이 동굴 안에 쏟아져 내릴 때 그 충격으로 몇 군데가 서로 어긋나면서 약간의 통로를 만들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그 러나 사람들은 이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완전히 막힌 것으로 치 부했다가, 적들이 통로를 내려고 고심하면서 그 허점을 비로소 찾아내 통로를 뚫은 것이었다. 즉 금이 간 돌을 옆으로 들어내고 길을 연 것이었다. 오늘밤 저들은 이런 통로가 필요없다 해서 재차 틀어막았지만 그가 또다시 발견하리라고는 상상 도 못하리라. 하지만 허초가 이곳으로 들어갔다가 붙들렸으니 석벽 저쪽엔 필히 지키는 사람이 있을 터 아닌가. 그렇다고 이 통로를 통하지 않고 동굴을 나가 우회한다면 자신은 이곳 지리에 익숙치 못할 뿐더러 시간이 오래 걸려 허초를 구하는 데 큰 차질을 빚을 게 뻔했다. 그는 곰곰 생각하다가 이 통로를 뚫으리라고 작심했다. 허월은 장창을 내려놓고 보검을 꺼내 균열이 간 바위 틈새에 찔 러넣었다. 힘을 주자 틈이 벌어 겼다. 허월은 석벽 뒤쪽에 있는 적 이 알까 두려워 검은 다시 검집에 넣고 두 손으로 돌의 모서 리를 잡고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필생의 힘을 다 들여 살그머니 끌어 냈다. 큼지막한 돌은 소리없이 끌려나와 그의 가슴에 안겼다. 사방 두 자씩의 널찍한 바위는 조용히 큰 바위 틈에서 빠져나왔고 바위엔 구멍이 뻥 뚫렸다. 허월이 구멍 속으로 머리를 디밀고 앞을 내다보았다. 한 줄기 햇빛이 그의 머리로 쏘아왔다. 어 둠 속 에서 빛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후딱 목을 움츠렸다. 허월은 석동 속에 혹 적의 매복이 있을까 저어하여 재깍 기어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가 썼던 작 은 모자를 창끝에 꿰어 구멍 안쪽으로 쓰윽 집어넣어 보았다. 모자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무 동 정이 없다. 그제사 마음을 놓은 허월은 돌다리를 두들기는 셈치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역시 아 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들이밀었던 모자를 끌어당기고 장창은 석벽에 기대어 세웠다. 허월은 소리를 내지 않고 살살 구멍 속을 기어 들어갔다. 구멍 속은 생각보다 넓고 한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넉 넉했다. 삼사 장쯤 기어가자 돌벽이 나왔다. 이 돌벽 저켠이 바로 여가장인 성싶었다. 돌벽 사이로 서너 치 의 작은 구멍이 나 있고 그곳을 통해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허월은 괜시리 얼굴이 빨개졌다. 너무 소심한 그는 이 빛에 소 스라치듯 놀라마지 않았던 것이 다. 아무리 조심한다 한들 자신은 사나이 대장부가 아닌가. 그는 혼자 멋쩍게 싱긋 웃고 구멍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밖엔 과연 예상대로 사나이들이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꼴이 잠이 든 모양이다. 그들 옆에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술과 안주요리 등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들이 깊이 잠들었다 해도 이 돌벽의 작은 돌을 밀쳐내고 나간 다치면 그 시끄러운 소리에 깨 어날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한다? 구멍 사이로 암기를 쓸까? 하시만 저들을 죽여야 할 특별한 이 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무고한 사람만 죽이는 셈일 터였다. 그는 살그머니 금이 간 돌을 밀어보았다.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병기로 밀어뜨리기 전에는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허월이 주저주저 망설이고 있을 때 홀연 머리 뒤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사납게 몰아쳐 왔다. 적 의 암기인가 해서 허월은 털퍼덕 바닥에 몸을 숙였다. 순간 몸은 옆으로 틀었다.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싸사삭' 바람소리도 날카롭게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쿠르릉!' 하 고 석벽의 돌멩이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흙과 먼지가 어지러이 주위를 흔들었다. 그 어지러운 찰나, 허월의 앞에 두 사람이 내려섰고, 놀라 잠에서 깨어난 두 사나이는 그들에 의 해 혈도가 찍혀 재차 땅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허월은 희색이 만면해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바 로 황현극과 조심원이었다. "어떻게 여길 오셨소?" "자네의 동생은 이미 적에게 생포됐네. 이야기를 길게 할 여가가 없어. 빨리 동생을 구하고 보세 나." 조심원이 잽싸게 대답하고는 과수보는 사나이들을 들어올려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는 황현극과 함께 한 사람씩 무섭게 다그쳤다. "이놈들, 우리 쪽에서 온 사람이 어떻게 되었느냐?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빨리 말해!" 두 사나이가 번갈아 가며 떠벌였다. "일전 한밤중에 두 명의 여자가 여가촌엘 찾아왔었습니다. 그네들은 재주가 비상해서 하얀 검광 과 푸른 검광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더군요. 그런데 마침 여가장에 와 있던 곽진인이 술 법을 써서 그네들을 사로잡았답니다. 진인은 두 여자를 이곳 어신동에 감금하고 밖에 부적을 붙 여서 도망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곽진인의 생각은 그네들을 며칠 감금시켜 항복을 받을 심산이었 던 거예요. 견디다 못해 자진해서 투항하면 곽진인과 장주가 한 여인씩 첩으로 삼을 생각이었죠. 그런데 다음날 여자들은 어신동의 옛 통로를 뚫고 그만 귀신같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정말 뜻 밖이었으므로 곽진인은 얼마나 상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분 말에 의하면 그 여자들은 형산 금모모 의 제자들이란 거예요. 곽진인이 그네들을 첩으로 삼으려 한 것은 사실 두 여자를 자기 편으로 만들려는 것뿐만 아니라 금모모까지도 끌어들이려는 심모원려였던 것입니다. 한데 그녀들이 도망 갔으니 틀림없이 그녀들 사부한테 고해바칠 것이고 앞으로 골치아플 일만 남았으니 얼마나 후회 스러웠겠습니까?" "이놈들아, 그 일하고 우리 허초 동생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냐?" 허월이 호통치자 다른 사나이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내숭을 떨었다. "관계가 있구 말굽쇼. 이야기를 들어보시라구요. 사실 이 일이 있기 전 나구란 자와 진가장의 장 주가 여가촌을 찾아왔었답니다. 그들은 어신동의 통로를 통해 대가장을 습격했으면 했어요. 저희 장주와 진장주는 다년간의 벗이라 그분이 대가장과 원수를 삼았다는 말을 듣자 도와주겠노라 약 속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장주와 진장주 그리고 나구는 이곳 어신동 동굴에 와서 통로가 있나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바위가 쏟아져 내려 통로가 여간해서 있을 것 같지 않았습죠. 한 참 살펴보던 나구와 진장주는 그만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어신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느냐?" "아닙니다요. 그분들, 즉 진장주와 나구란 사람이 또 왔걸랑요. 그들은 저희 장주의 손님인 곽진 인이 오셨다는 말을 듣자 그분의 도움을 받을까 싶어 재차 여가장에 쫓아왔습니다. 그랬다가 두 여자가 어신동의 옛 통로를 뚫고 도망갔다는 말에 귀가 쫑긋한 겁니다. 그렇다면 어딘가 길이 있 을 것이란 생각이 든 거죠. 나구는 저희 장주를 보채서 이곳의 통로를 찾아내게 했습니다. 빌어먹 을, 그 사람들 땜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십니까. 여하간 어제 하루종일 생고생을 해서 통 로를 뚫긴 뚫었습니다. 그랬더니 야밤이 되기 전에 귀하 쪽에서 한 사람이 쳐들어 왔습니다요. 정 말 날벼락이었습니다. 무공도 대단했구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친 줄 아십니까? 다행히 진장주 와 곽진인이 제때에 나타나 그분을 사로잡았습지요. 그 허씨인가 하는 사람은 두 분이 데려갔습 니다. 아마 고문을 할 거라는군요. 여하간 그 북새통에 곽진인은 우리들이 통로를 왜 뚫었는지 내 막을 알게 됐습니다. 이야기를 듣자 곽진인은 아주 기분 나빠하셨습니다. 강호 인물은 신의를 제 일로 삼는데 이처럼 남몰래 기습이나 하는 치사한 짓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이미 내년 봄에 약속을 했으면 정정당당히 그때 승부를 가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정말 근사한 분이 셨어요. 저희 장주도 그 말에 승복하고 다시 이 통로를 막아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야 그저 이 입구를 지키는 순번에 불과합니다요. 그저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그 허씨의 생사에 대해선 추호도 모르고 관련도 없습니다." 사나이들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애걸했다. 황현극과 조심원은 그들한테서 모든 상황을 알아내자 그들을 밧줄로 꽁꽁 묶고 헝겊으로 재갈을 물려 한쪽에 밀쳐놓았다. 순박한 시골 장정을 죽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셋은 이윽고 어신동을 나와 여가촌으로 향했다. 허월, 창법을 시연하다 妖法肆凶淫 郭雲璞無心擒俠女 深情逢薄怒 戴湘英立志學神槍 이때 날은 이미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설날 아침이라 여촌 주민들이 재신(財神)을 맞아들이는 폭죽 소리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 동굴의 입구는 벼랑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동 굴을 나가니 맞은편에 수십 장 높이의 벼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인공으로 만든 돌계단이 있었는데 형세가 매우 험준했다. 세 사람은 계곡을 지나 맞은편의 벼랑으로 날아 올라갔다. 벼랑 위에 서자 산이 앞을 가로막았 다. 왼편에 시내가 흐르고 오른편에 높은 산이 있어 매우 빼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허초가 밤에 잡혔으니 여촌은 틀림없이 경계가 삼엄할 것이라 세 사람은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허월은 검술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곳에 남아 망이나 보게 하고 황, 조 두 사람은 낮 에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서 날아 들어가 허초를 구하자고 의논하였다. 세 사람이 막 헤어지려고 할때, 문득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 조 두 사람은 적인 줄 알고 급히 바위 밑에 엎드려 동정을 살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리는 더욱 가까와겼다. 안광이 가장 좋은 허월은 벌써 두 그림자가 계곡 아래 동굴 입구에 내려온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깜 짝 놀라 의아해 하며 황, 조 두 사람을 황급히 잡아당겼다. 동굴 입구에 내려온 두 사람 중, 하나는 그들 세 사람이 구출하 려고 고심하는 허초 바로 그 사 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푸른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땅에 내려오자마자 여인이 앞장을 서고 사나이가 그 뒤를 따라 동굴로 들어가려고 하 다가 허초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황, 조, 허 세 사람이 벼랑 위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자를 불러세우더니 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황, 조, 허 세 사람은 허초가 이미 탈출한 것을 보자 몸을 날려 계곡 밑으로 내려왔다. 허초는 그 여인을 세 사람에게 소개했다. "이 여협께서는 바로 형산 금모모의 득의(得意) 제자로 <여비웅(女飛熊)> 하매(何梅)라고 합니 다. 제가 어젯밤에 사로잡혔다가 방 금 이분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답니다. 어젯밤 잡힐 때에 요도 (妖道)가 굴을 이미 막아버렸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 사람을 보내 지 키는 것을 알았기에 산을 넘어가려고 하는 중이랍니다. 그러나 하여협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신동 입구에 옮길 수 있는 바위 하나가 있으며, 지키는 사람들은 무능한 자들이라 하기에 이곳으로 돌아가는 길에 뜻밖에 세 분 을 만나게 되었군요. 그 요도의 요법이 매우 무서우니 우선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허월은 여비웅 하매가 용모가 수려하고 자태가 시원함을 보고 매우 탄복하며 앞으로 나가 허초 를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였다. 모 두 예를 갖춘 후에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어신동으로 들어갔 다. 여비웅 하매는 석벽이 이미 사람이 들락거릴 수 있도록 무너져 있고, 그곳을 지키던 두 사람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원인을 물었다. 황, 조, 허 세 사람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자 그들을 한쪽 으로 데리고 가서 가만히 말했다. "동굴이 이미 뚫렸으니 저는 대기장으로 갈 필요가 없군요. 제 동료가 요도에게 쌍검을 더럽혀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지금 앞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곧 호산으로 돌아가서 사부님 께 말씀드리고 다시 와서 요도에게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먼저 돌아가십시오.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하지요." 허초는 그녀에게 대가장으로 가서 장주와 협객들을 만나본 후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청했지만 하 매는 사양했다. "저는 아직 다른 일이 남아 있어 같이 갈 수가 없군요. 이 석벽 이 뚫렸으니 다시 막지 않으면 요도가 이리로 쳐들어 가서 귀촌(貴村)을 괴롭힐 우려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선 돌아가십시오. 저는 두 마을이 정식으로 싸우기 전에 대가장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어 석동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갑자기 큰소리가 두 번 났다. 그들은 여촌 사람들이 쫓아온 줄 알고 하매가 위험하다고 여겼다. 일제히 고개를 돌 려보니 아까 황, 조 두 사람이 검광으로 뚫은 석벽이 하매의 손에 의해 다시 원상복구가 되었고, 다만 한 자 정도의 구멍만 남아 있었다. 하매가 저쪽편에서 그들이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자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이 바위를 원래대로 막았습니다. 또 여기를 지키던 자들 에게 우리가 여기를 지나간 적이 없다고 말하도록 조치를 했습니 다. 이 사람들이 내가 시키는 대로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언젠가 는 비검으로 목을 자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돌아가셔서 이 굴을 잘 지키시고 모든 사소로운 일 들을 꾹 참고 계십시오. 때가 되면 자연히 누가 와서 도와줄 것입니다. 요도의 요법이 대단하니 절대로 적을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마치자 그 지키던 두 사람의 결박을 풀어주고 돌을 날라 그 구멍마저 막도록 했다. 그들은 하매가 매우 빈틈이 없는 것을 보자 더욱 경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들은 한참 귀를 기 울이다가 석벽 저쪽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비로소 다시 돌아갔다. 어신동을 나와 얼마를 걸어가니 앞에서 백, 대 두 사람이 여러 사람들과 같의 서둘러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들이 떠난 지 하룻밤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긴급명령을 내려 사람들 을 데리고 구출하러 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네 사람이 모두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보자 매우 기뻐하며 맞았다. 대형옥이 남아 동굴 을 지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와 능조의 방으로 가서 그간의 경과를 이야기했다. 원래 어젯밤에 백기는 허월이 간 후에 사람을 보내 찾으려고 하였다. 그때 광장 앞쪽 봉우리 위 에 있는 전망대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허초가 쏘아올린 구명신호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이 구명신호는 백기가 궁리해 낸 일종의 불화살 같은 것이다. 안에 화약장치가 있어서 필요할 때 꺼내어 바위에 때리면 불을 붙이지 않아도 자동으로 터져 일이백 장 정도 공중으로 솟아올라 오색의 불꽃이 퍼지게 된다. 이 위급신호는 대단히 위태롭다고 판단되는 시기가 아니면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백기는 보고를 받자, 만약 어신동에서 적을 발견하였다면 틀림없이 호등(號燈)으로 신호를 보냈 을 텐데, 지금 허초가 구명신호를 보냈다면 필시 외진 곳에서 적을 만나 중상을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즉시 구명신호가 나타난 곳을 물었다. 보고하러 온 사람이 말했다. "그 신호를 보니 아마도 이전에 여가장으로 통하던 옛 길쪽에서 쏘아올린 것 같았습니다." 백기는 이 말을 듣고 어신동의 옛 길이 이미 뚫렸고, 허초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을 들어가다 가 재난을 당했다고 추측하고 곧 사람들과 대응책을 상의하였다. 황현극, 조심원이 구원하러 가기를 자원했다. 백기는 두 사람이 검술을 어느 정도 터득하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떡이며 고맙다 고 승낙했다. 그는 즉시 전 마을에 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직접 두 사람을 전송하였다. 황, 조 두 사람은 어신동에 도착하여 그곳을 지키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허씨형제가 차례로 들 어간 것을 알아내고 급히 뒤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서 검광으로 석벽을 뚫을 때 허월을 만 났던 것이었다. 허초는 어젯밤 순찰 명령을 받들어 어신동에 동정을 살펴보러 갔었다. 대만관이 지난 밤에 동굴 에서 요괴가 나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동굴 안으로 허실을 살피러 들어갔던 것이다. 얼마쯤 들어가니 희미한 빛이 보였다. 발걸음을 죽여 가만가만 앞으로 가보니, 원래 어신동 옛 길이 이미 여촌 사람들에 의해 뚫려 있고 많은 여촌 사람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기회 를 보아 몰래 급습하여 한 명을 잡아와서 여촌의 허실을 탐문하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 중에 <금두리자(金頭狸子)라고 불리는 여사(呂四)가 있었다. 여사는 허초가 어둠 속에 서 몰래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불러 일제히 덤벼들었다. 이 사람들은 결코 허초의 적수가 되지 못했기에 싸움이 붙자 곧바로 몇 명이 부상을 당했다. 허초가 그 틈을 타서 한 명을 잡아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공교롭게도 여촌의 장주 <화편 복(火翩鰒 :불 박쥐)> 여헌명(呂憲命)이 나구와 같이 동굴을 살피러 나왔다. 그 나구는 원래 <만리비홍> 동원기의 제자였는데, 검술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동원기는 그의 마음이 올바르지 못함을 알아채고 사문에서 쫓아내 버렸다. 비록 검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 구의 내, 외공은 모두 상승에 다다라 충분히 허초를 상대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 화편복 여헌명은 화산 <열화조사>의 제자로 비검, 법술에 어느 정도 근저가 있었 으니 허초가 어떻게 그들 모두의 상대가 되겠는가? 다행히 여, 나 두 사람은 산 채로 잡으려고 작정하였기 때문에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허초는 사람 됨됨이가 원체 눈치가 빨랐다. 여헌명이 비검을 발출하는 것을 보자 재빨리 항복하 겠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어신동을 나갈 때 여, 나 두 사람이 앞장서서 앞쪽 벼랑으로 올라갔다. 허초는 뒤에서 사람들이 산을 오르기에 바쁜 틈을 타서 기공을 이용하여 결박을 끊고 일부러 도 망가는 척하였다. 옆에 있는 사람을 몇 명 쓰러뜨리고 그 틈을 이용하여 품에서 구명신호를 꺼내 산모퉁이에 있는 바위에다 던졌다. 여, 나 두 사람이 돌아와 다시 그를 잡았을 때 그의 신호는 이 미 공중에서 터진 후였다. 여헌명은 피아를 떠나서 남자다운 데가 있는 사람이기에 허초를 죽이지 않고 마을로 데려가 그 냥 감금시켰다. 동굴을 지키던 두 사람이 말했던 곽진인은 이름이 운박(雲璞)이었다. 어려서부터 운남 산동(山 洞)에서 요법을 배웠고, 또 열화조사 문하에서 정식으로 검술을 배웠다. 성질은 고집이 세며 괴팍 스러웠고, 여헌명과는 동문의 우의가 있었다. 운남에서 각 이파가 연합하여 아미파와 성도에서 싸운다는 말을 듣고 그는 참전하려고 하였다. 운남으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화산에서 돌아오던 여헌명을 만난 것이다. 열화조사는 아미파에 숭산이로가 가입했다는 말을 듣고 여헌명을 시켜 문하 제자 진랑(秦郞) 등 에게 절대로 그 싸움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여헌명과 곽운박은 매우 사이가 좋았다. 여헌명은 스승의 명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후 그가 진랑을 찾아가려고 할때, 곽운박은 진랑과 묵은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여헌명이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여헌명은 그의 말을 감히 거역할 수가 없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여촌으로 가서 며칠 놀다 가라고 청하였다. 곽운박은 술을 매우 좋아했기에 여헌명의 집에 수십 년 묵은 좋은 술이 있다는 말을 듣자, 우선 친구와 약속한 곳에 갔다가 연말에 여촌으로 가겠다고 약속하였다. 두 사람이 약속을 한 후 여헌명은 진랑을 찾아가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여촌이 그가 화 산으로 간 후부터 해마다 홍수가 나서 모두가 고원으로 이사하여 농사짓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말 을 들었는데, 여헌명은 본래 몇 가지 요법과 여지지학(輿地之學)을 배웠다. 곧 직접 가서 지형을 살펴보았다. 살펴본 결과 역시 산이 붕괴된 후 대가장이 왕기(旺氣)를 차지 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어신동 밖에 있는 산의 수로를 메꾸어서 대가장의 용맥(龍脈)을 막아야만 처음같이 마을이 회복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모두들 설날을 지낼 준비로 바쁘기 때문에 설을 지낸 후에 다시 자세히 보고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후에 진, 나 두 사람이 찾아와 대가장과 싸우는데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자, 여헌명은 하산한 이 래 그동안 배운 무예를 고향에서 뽐내보지 못해 안달하던 차라 즉시 승락을 했다. 진, 나 두 사람 이 성으로 돌아간 후 곽운박이 여촌으로 왔다. 진, 나 두 사람이 다시 돌아와 어신동이 이미 뚫린 것을 알고 그 통로를 이용하여 대가장을 기습하려고 생각하였다. 여헌명은 곽운박의 성질이 괴팍하여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을 속이고 엉큼한 짓을 하는 것을 가 장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로서는 진, 나 두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기도 미안하였다. 난처한 입장에 빠진 그는 가만히 사람을 보내 어신동 길을 뚫어놓게 해놓고 기회를 보아 곽운박과 그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 곽운박은 본래 색을 좋아하였다, 여촌에 온 날 우연히 두 미모 의 푸른옷을 입은 여자를 보고 갑자기 색심(色心)이 동하여 요법을 써서 그 두 여자를 잡았다. 이름을 물어보고서야 이 두 여자 가 자기 사부 열화조사조차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금모모> 나자연의 제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곧 큰 화를 자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잡은 여자들을 죽이려고 해도 감히 그럴 수 없고, 그냥 놓아주려고 하니 또한 아까웠다. 그리하여 그는 이 두 여자를 잠시 어신동에다 가두어 놓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밖을 부적으로 봉쇄해 놓았다. 그러나 두 여자가 굴을 뚫어 검광을 타고 도망 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곽운박은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성도 났고, 후회도 되고, 또 애 석했다. 그때 여헌명이 대가장 의 첩자를 잡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서야 진, 나 두 사람이 몰래 대가장을 기습하려고 획책했다는 사 실을 알았다. 그는 매우 못마땅해 하면서 여헌명과 진, 나 두 사람 면전에서 몇 마디 꾸짖는 말을 하고, 여헌 명에게 즉시 어신동을 막으라고 했다. 대가장이 쳐들어 오지 않는 한 이 월 초사흗날 이 전에는 싸우지 못하게 못을 박았다. 여, 진, 나 세 사람으로서는 그가 꼭 필요한 때라 어찌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의 정 론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섣달 그믐날이라 사람을 죽이기도 꺼림직하기에 잡아온 첩자를 가두어 놓고 초닷새가 지난 후에 다시 처리하기로 했다. 잡혀갔다가 다시 도망한 두 여자 중 한 명은 <여비웅> 하매였고, 다른 한 명은 <여대붕(女大 鵬)> 최기(崔綺)였다. 두 여자는 어신동에서 도망쳐 나온 후에도 계곡에서 이틀 동안을 기다리며 최기가 잃어버린 보검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믐날 밤 허초가 동굴로 들어갈 때 그녀들은 몸을 숨기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었다. 허초가 여촌 사람들과 싸우는 틈을 타서 여촌으로 날아 들어가 여헌명의 방에서 보검을 되찾고, 후에 허 초가 잡혔던 곳으로 가서 그를 지키는 사람들의 혈도를 찍고 그를 구해낸 것이었다. 모두들 그간의 경과를 이야기한 후에 백기는 여러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대책에 관한 의견을 물 었다. 황현극이 먼저 말했다. "빈도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곽운박이 이처럼 위세를 부리니 귀촌(貴村)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 을 겁니다. 이번에 허장주께서 위험을 무릅썼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이미 그들의 허실을 알고 있 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밤낮으로 조심하여 방비를 더욱 엄하게 해야 합니 다. 만약 삼 일 안에 무슨 동정이 없다면 이 월 초사흘이 되기 전에는 공격해 오지 않는다고 보 아아 합니다." 백기가 받아서 말했다. "말은 비록 이렇지만, 이 월 초사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올 것입니다. 진, 나 두 사람은 별 걱정이 없지만, 여헌명과 그 곽 요도가 모두 요법검술을 할 줄 압니다. 저희 삼형제는 보통 사람 들이 쓰는 무예는 조금 흉내낼 줄 압니다만 제대로 된 검술을 아직 배우지 못했으니, 우리 마을 의 재산과 생명이 모두 조법사와 황도장 두 분의 손에 달렸습니다." 황현극이 말했다. "빈도와 조도우는 검술을 약간 배운 바가 있습니다만, 익힌 공행이 미천하여 아마도 여, 곽 두 사람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곽운박이 부단히 금모모의 문하 제자들에게 음 심을 품고 죄를 지었으니, 그 두 협녀가 결코 가만 있기는 않을 겁니다. 하매 소저가 이 월 초사 흘 이전에 오겠다고 약속했으니 어쩌면 사부 금모모를 모시고 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협녀가 금모모를 청해 올지 어떨는지는 예측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제 생각에는 우선 며칠 기다려 봐서 그들이 쳐들어 오지 않는다면 본촌의 일을 황도장과 조협사께서 대신 맡아 주십시 오. 소제는 그동안에 선화(善化)로 가서 사촌형 나신(羅新)을 청하여 모셔오고, 또 그에게 우리를 대신하여 금모모께 하산하도록 부탁을 해보라고 청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또 몇 분의 능력있 는 사람들을 청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황, 조 두 사람은 일제히 대답했다. "본촌의 일은 당연히 두 장주가 대신 맡아야 하고 우리는 옆에 서 돕도록 하겠습니다." 백기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두 아우는 경험이 없고 매우 경망하니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습니다. 두 분께서는 사양하지 마 시고 맡아주십시오." 조심원은 별안간 곡왕봉에 있는 철사도인이 돌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람들 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백기가 떠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장사 곡왕봉에 가보아 만약 철사도인 이 돌아왔으면 모셔오겠다고 했다. 모두가 찬성했다. 잠시 후에 점심을 먹고 허월이 가서 교대하여 경계를 하고 대형옥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한동안 앞으로의 대책을 상의하다가 저녁을 먹고 삼경이 되어도 아무런 동정이 없자 각자 방으로 돌아갔 다. 어신동은 허씨형제와 백, 대 두 사람이 교대로 지켰다. 어느덧 오 일이 지났다. 여촌 쪽에서 아무런 거동이 없었고, 능조와 유윤중도 점차 회복이 되었 다. 백기는 조심원에게 철사도인을 청해 오라고 하였다. 조심원이 곡왕봉으로 가보았으나 철사도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악록산 아래서 우연히 <육지금룡> 위청을 만났다. 조심원과 위청은 헤어진 후의 상황을 서로 이야기하고, 헤어질 때 조심원은 위청에게 대가장으 로 와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위청은 다른 약속이 있다며 갈 수 없다고 거절했는데 대답이 매우 모호하여 분명치 않았다. 조심원은 위청이 평소에 매우 강직한 성격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런데 그의 언사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그와 위청은 본래 동문의 사형제였다. 백기는 심원이 철사도인을 모셔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선화로 가서 나신을 청해 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침 이 날은 파오(破五 :정월 오 일, 옛날에는 이날까지 밥을 짓는 것과 부녀들 의 외출을 금하는 풍속이 있었음)였다. 대형옥은 술상을 차려 백기의 송별연을 베풀었다. 백기는 마을의 지휘권을 황현극에게 넘겨주고 조심원과 대형옥은 옆에서 보좌하도록 했다. 백기가 떠난 후 며칠 동안 온 마을이 아무 일 없이 편안하였다. 능조의 딸 능운봉과 대형옥의 누이 대상영은 의기상통하여 항상 같이 붙어 있었다, 대형옥은 원 래 누이 상영을 허초에게 시집 보내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마을에 일이 많은 때라 두 사람에게 이 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허초는 나이가 가장 젊었고 원래부터 상영과 마음이 맞았다. 다만 두 사람 모두가 쓰잘데 없는 위세부리기를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기질이 약간씩 있었다. 허초는 형옥이 상영을 자기에게 시집 보내려는 것을 눈치채고 속으로 매우 흔쾌했으나 겉으로는 도리어 그녀를 피하는 척 멀리하였다. 가끔 상영이 그에게 산으로 놀러가자고 조르면, 허초는 강 적이 눈앞에 있고 오빠도 없으니 놀러다닐 수가 없다고 타이르곤 했다. 상영은 정월에만도 허초에게 몇 번이나 놀러가자고 청하였으나 모두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당하 여 속으로 약간 불쾌하게 생각했다. 다행히 능조의 몸이 회복되어 날마다 능운봉과 같이 놀 수 있어서 그 일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날 능조가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허씨 집안의 독문(獨門) 이화창(利花槍)은 신출귀몰하며 그 안에 이십사 가지의 반패위승(反敗爲勝)의 절초가 있어 국내의 독보(獨步)라고 하는 말을 들었 다. 상영은 평소 성격이 불과 같아서 뭐든지 듣기만 하면 즉각 배우려고 설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 몰래 허초에게 눈짓을 보내고 밖으로 나갔다. 허 초도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와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상영이 말했다. "방금 능조 선생님께서 당신 집안의 독문비결인 이화창이 그렇 게 신묘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요 즘 연초라 할 일도 없는데 나에게 그 창법을 가르쳐 줘요!" 허초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현매(賢妹)는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우리 집안의 이화창이 유 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어려 서 고향을 떠나 그 무공의 진전(眞傳)을 배우지 못하였다오. 현매가 정 배우려면 내가 형님에게 가르쳐 주도록 부탁해 보겠소. 형님은 나보다 훨씬 강하다오. 현 매의 생각은 어떻소?" 허초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고 또 좋은 뜻에서 한 말이었다. 그 러나 상영은 요즘 허초가 이전과 는 달리 자기를 피하는 것을 보고 속이 상해 있던 중이었다. 오늘 그런 것을 풀어보려고 그를 눈 짓으로 불러내어 가르쳐 달라고 청했는데, 허초가 그의 형 허월에게 미루는 것을 보자 자기를 얕 보고 고의로 회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전의 원망스러웠던 마음까지 한꺼번에 겹쳐서 화가 치밀었다. '내가 당신을 좋게 생각하여 특히 무예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당신은 내가 남에게 좀처럼 아 무것도 부탁하지 않는 성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르쳐 주지 않으면 그만이지, 뭐, 형님한테 배 우라고? 그걸 꼭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아는가 보지.' 상영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허초에게 더 이상 부탁하지 않고 발을 한 번 콩 하고 구르면서 내뱉았다. "좋아요, 당신이 할 줄 모른다니, 나도 배우려 들지 않으면 그 만 아니에요?" 상영은 말을 마치자 잔뜩 토라진 얼굴을 하고 돌아가 버렸다. 허초는 그녀가 오해하고 성내는 것을 보자 쫓아가서 해명을 하 려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그때 능운봉이 상영을 찾아서 나왔다 가 멀리서 상영이 허초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운봉은 본시 세심한 사람이었고 평소 상영으로부터 그녀와 허초가 매우 사이가 좋다는 말을 들 어왔었다. 두 사람이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돌아가려고 할때 별안간 상영이 종종걸음으로 돌아서 가는 것을 보았다. 또 허초가 고개를 돌리고 아는 척을 하였기 때문에 그냥 돌아가기도 거북하게 되어 앞으로 다가 가 허초에게 짐짓 물었다. "상영을 보지 못했어요?" "방금 저와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뒤쪽으로 갔습니다." "그럼 제가 가서 찾아볼게요." 허초는 무심결에 상영에게 죄를 짓게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곧 대청으로 돌아가는 수밖 에 없었다. 운봉은 허초와 헤어져 상영의 방으로 갔다. 상영이 혼자 화장대 앞에 앉아 손에 거울을 들고 잔 뜩 볼이 부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운봉이 온 것을 보고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으며 앉으라고 권했다. 운봉은 상영이 성난 것이 허초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영이 부끄러워할까 봐 묻지 않 고 일부러 겸연쩍게 말했다. "모두들 대청에서 한참 재미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혼자 방 안에 심심하게 앉아 있어요? 내 일이 대보름이니 백오빠도 돌아오시겠지요?" "정말 분이 나서 못 참겠이요. 내가 자주 말하던 허오빠 있지 요? 그가 오빠와 결의형제를 맺고 는 그동안 내내 나에게 잘 대해 주었어요. 나는 평소에 앞산에 가서 사냥을 자주했지요. 산에는 호랑이, 표범 같은 맹수가 없으므로 설날을 지내고 그와 같이 남악산에 호랑이사냥을 가자고 약 속을 했었어요. 그런데 진, 나 두 나쁜 놈들이 소란을 피울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리고 말이에 요. 얼마 전에 그의 사촌형님이 여기에 온 후로 그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남악산에 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앞산에 가서 새나 토끼를 잡자고 해도 몇 번이나 거절했어요. 오늘 내가 춘부장 어르신네가 그의 가문의 비결 이화창이 신묘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특별히 그를 불러내어 창술을 배우려고 했어요.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가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려는 것은 그래도 괜찮아요. 나더러 글쎄, 자기 형 허월에게 부탁하라고 할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내가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둘째치고 그의 형이 보름이 지나면 돌아간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 줄 아나봐요. 내가 철부지한 여 자아이라고 깔보는 것이 틀림없으니 성나지 않게 생겼어요?" 운봉은 그녀가 발끈하는 성질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이 며칠 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허초는 상영에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고 있는데 어찌 창법 하나를 가르쳐 주길 아까 워한다는 말인가? 이상하게 생각한 운봉이 상영에게 물었다. "허오빠는 재주가 뛰어나고 정직 총명하며, 또 당신네 오누이와는 친형제자매보다 더 가까운데 어찌 창법 하나를 가르쳐 주는 것을 아까워하겠어요? 어쩌면 그럴 만한 연유가 있는 것을 잘못 탓하는 것이 아니에요?" 상영은 이 말을 듣자 벌떡 일어니며 소리쳤다. "누가 그를 잘못 탓한단 말이에요? 못 믿겠으면 나하고 같이 가서 직접 물어봐도 좋아요." 운봉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상영이 충고를 받으면 더 욱 고집을 피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권하지 않고 화 제를 바꾸었다. 상영이 여전히 언짢아하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대청으로 가서 이야기나 듣자고 권했다. 상영은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가 도리어 먼저 가자고 서 둘렀다. 두 사람이 대청으로 가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있는데 허초만 보이지 않았다. 상영은 가만히 운봉을 향해 이를 악물며 속삭였다. "봐요. 그가 나를 피해 숨어버렸잖아요? 내가 끝까지 배우려고 떼쓸 줄 아나봐요." 운봉은 상영이 이렇게 천진난만한 것을 보자 매우 우스웠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적당히 몇 마디 하여 비위를 맞춰주었다. 상영이 또 무슨 불평을 하려고 할때 운봉의 약혼자 유윤중이 허월에게 말했다. "장인어른 말씀이 허형의 가전창법이 매우 신묘하다고 하셨습니다. 허형께서는 내일이나 모레 떠나시면 언제 또다시 만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방금 허형의 아우가 말한 제칠십삼초 <질번구절 (跌飜九絶)>의 초수를 저희들에게 한번 보여주실 수 없으십니까?" "소제가 배운 이화창은 가전창법이긴 하지만 결코 그렇게 뛰어난 것이 못됩니다. 능노영웅과 황, 조 두 분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어쭙지도 않은 재주로 약을 팔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유형이 정히 보시겠다고 하시니, 소제의 추태를 애교로 받아주실 수 있으시다면 고집을 부리지 않겠습니 다. 소제가 오늘 내일 중에 멀리 떠나야 하니 겸손을 떠는 것보다 부탁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창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시연해 보이겠으니 여러분께서는 많은 지적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흔쾌해 했다. 상영과 운봉은 마침 이화창 법을 보지 못해 안달하던 참이 었다. 모두가 일제히 뒤뜰 화원으로 나갔다. 그곳은 평소 여러 사람이 무술을 연습하던 빈 터로, 크고 작은 나무말뚝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허월은 준비를 마치고 병기받침대에서 장창을 하나 집어 들고 웃으며 말했다. "당초 제가 쓰던 창은 교근(蛟根)을 비틀어 만든 것으로 단단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여 평소 에 몸에다 둘러 묶을 수 있었습니다. 뜻밖에 소년시절에 실수하여 한 늙은 부인을 상하게 하였는 데, 후에 그의 딸이 나부산 향운동 원원대사(元元大師) 문하에서 검술을 배워 나에게 복수를 하려 고 했습니다. 그때 그녀에게 내 창이 잘려 짧아져 버렸습니다. 후에 다시 개조하였지만 전처럼 몸 에 지닐 수 없게 되었답니다. 이번에는 그 창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이 창을 한번 써보겠습니 다." 말을 마친 허월이 발을 땅에 가볍게 찍자 <청정점수(淸廷點水)> 식으로 몸을 솟구쳐 중앙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시 발끝이 땅에 닿자마자 한 손으로 창을 휘둘러 큰 원을 만들었다. 돌연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지며 왼발을 앞으로 뻗고 오른발은 약간 구부렸다. 오른손에 창의 손잡이를 잡고 왼손 세 손가락으로 창대를 둥글게 쥐고는 오른손을 뒤로 빼니 돌연 <장사입동(長蛇入洞)>의 초 식이 이루어졌다. 장창을 앞으로 내미니 창끝이 있는 붉은 영(纓 :창끝에 장식으도 단 끈)이 한 가닥 한 가닥 창신 을 단단히 싸매여 창끝과 같이 수평을 이루었다. 앞쪽에 있는 나무말뚝을 향해 부드럽게 찔렀다. 창끝이 나무말뚝에 닿을락말락 할 때에 갑자기 거두어들이며 손을 약간 떨치니 큼직한 창화(槍 花)가 눈부시게 만들어졌다. 제이초 <사류천어(斜柳穿魚)>, 다시 말뚝을 향해 사뿐히 찌르고 이번에는 다시 거두어들이지 않 고 무형의 형체가 창대를 튕기는 것처럼 창을 꺼꾸로 하여 손잡이로 말뚝을 쳐내며 나갔다. 창대 가 말뚝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발을 굴르며 두 자 정도 몸을 솟구쳐올랐다. 창대가 위를 향하 고 창끝은 아래를 향하여 내려가는 길을 보호하였다. 나무말뚝을 뛰어넘어 땅에서 너댓 자 정도 떨어진 곳에서 오른발을 왼발 위에 올려놓아 <연자 삼초수(燕子三抄水)> 식을 만들었다. 몸이 발을 엇갈린 힘을 빌어 또 위로 두세 자 정도 올라가 서는 별안간 공중에서 구렁이가 몸을 뒤집는 것같이 땅에 내려앉지 않고 창과 사람이 같이 옆으 로 날아 돌아왔다. 창 끝이 <은룡입해(銀龍入海)>식으로 다시 또 그 나무말뚝을 향해 찔러 들어 가고 있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허월의 이 일초가 전신의 힘을 창끝에 모아 틀림없이 나무말뚝을 꿰뚫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허월의 창끝은 마치 앞에 무슨 병기를 비켜가는 것처럼 나무말뚝을 살 짝 건드리고, 번개처럼 창끝을 끌어당겼다. 창을 거꾸로 돌려 창대를 밑으로 한 번 튕기며, 즉시 <풍괄잔화(豊括殘花)> 식이 이어졌다. 몸 이 한쪽으로 기울며 여전히 오른발이 왼발을 밟는 힘을 빌어 옆으로 솟아오르며 나갔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별안간 몸을 돌며 창대를 위로 향해 어지럽게 흔 들며 또 큼직한 창화를 만들어냈다. 번개가 치듯 나무말뚝 위를 찌르는 척하다가 살짝 건드리기 만 하고, 창을 거꾸로 잡고 창대를 위로 받치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 발뒤꿈치가 땅에 닿으며 힘 을 한 번 주니 몸이 비스듬히 <어약룡문(魚躍龍門)> 식으로 뒤로 솟구치며 삼 장 정도 물러섰다. 이어서 또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오른손은 창 손잡이를 꽉 쥐고 왼손으로 창 중앙을 받쳤 다. 오른발이 앞으로 한 걸음 나가 며 창끝이 앞으로 나갔다. 창끝이 나무말뚝에 닿자 왼손을 놓 았다. 창끝이 나무에 박히자 오른손에 어떻게 힘을 썼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 창이 뽑 혀 돌아갔다. 창끝이 왼손에 오자 왼손은 더욱 태만하지 않고 창끝을 잡아쥐고 앞의 나무말뚝을 향해 내리쳤 다. 나무말뚝 위를 때리는 것을 보고는, 또 벼랑 끝에서 말을 멈추는 듯한 힘으로 앞의 힘을 거두 어들였다. 발에 힘을 주며 창대를 끌면서 뒤로 너댓 장 정도 물러났다. 손발이 허우적거리며 매우 위험한 형상을 만들었다. 갑자기 창끝을 오른손으로 바꿔 쥐고 왼손은 반대로 창대를 잡으며 <해록반고(駭鹿反顧)>의 자 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오른발은 앞에 왼발은 뒤에, 발에 먼지도 묻히지 않는 듯 질풍처럼 세 걸음을 다가갔다. 손에 든 창마저 <봉황삼점두(鳳凰三點頭)> 식으로 위를 한 번 찍은 후 번개처 럼 중앙을 찔렀다. 이 일초는 허가독문 <탈명칠초(奪命七招)> 가운데의 <회신삼보 추혼탈명연환창법(回身三步追魂 奪命連環槍法)>으로 강적을 만나지 않았을 때는 이 절초를 쉽게 쓰지 않는다. 한 번 사용하면 상 로(上路)는 피할 수 있지만, 하로(下路)는 피할 수가 없어 적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게 된다. 원래 창은 모든 병기의 시조이다. 허가의 이화창은 제미백곤(齊眉百棍) 중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 으로 창대가 긴 것을 겸했다. 때문에 천하에 이름을 날렸고 당시 무예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허월은 <탈명칠초>를 시범해 보이고 난 후에 백팔초 이화창법을 <질번구절>까지 순서에 따라 시연해 보였다. 후벼내듯 찌르며, 비스듬히 튕기고, 후려치며, 높이 솟고, 멀리 뛰는 것이 마치 마 음먹은 대로 나비가 날듯, 수리가 찍듯 가볍고 빠르고 사나웠다. 어떤 때는 태도가 편안하며 초식이 침착하고, 어떤 때는 놀란 사슴, 달리는 무소처럼 빠르기가 질풍과 갈았다. 초식이 오묘한 곳에 이르러서는 창과 몸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주위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일가견을 가진 전문가였다. 유윤중은 둘째치고라도 능조 와 황, 조 두 검선마저도 모두 탄복하여 마지 않았다. 상영은 두 손으로 운봉을 꽉 잡고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숨도 제대 로 쉬지 않고 보고 있었다. 허월이 시범을 다 보인 후, 그 자리에 서서 추태를 보였다고 겸양하며 여러 선배분의 지적을 바란다고 말했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와서 그를 둘러싸고 환호성을 지르며 모두 감탄의 인사를 했다. 사랑과 미움 兩番負氣 陳우宇下書 無限關情 呂村涉險 능조가 유윤중에게 말했다. "자네는 허형의 창법이 신묘하다는 것만 알았지, 그의 천생적 신력(神力)과 내용이 이미 절정에 달한 것은 모르고 있군." 능조는 유윤중을 끌고 허월이 목표로 했던 그 나무말뚝으로 다 가가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 명했다. "허형은 이 나무말뚝을 가상의 적으로 삼았다. 이 찔린 자국들을 보아라. 모두 깊이가 일정하지 않은가?" 이때 다른 사람들도 몰려와 나무말뚝을 살펴보았다. 과연 허월이 찔렀던 자국은 두 푼 정도 깊 이로 구멍의 크기가 모두 같았다. 원래 무공이 상승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천근 만근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힘을 내는 것 은 결코 어렵지 않지만, 가장 힘든 것은 그 힘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가령 백 근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 힘을 모두 손이나 혹은 병기에 모 아 상대를 때렸을 때, 만약 목표한 상대방을 맞추지 못하고, 또 온몸의 힘을 빨리 거두어들이지 못하게 되면 빈 몸만 허점투성이로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 몸을 상대방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또 무공이 매우 높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는 이쪽을 때리지 않고 다만 표표한 신법으로 자기의 힘이 빈 곳을 때리게 하고는 그냥 이쪽을 한번 슬쩍 건드리게 되면 이쪽은 저절로 제힘을 못 이 겨 넘어지게 된다. 마음을 약간 독하게 먹고 그가 이쪽의 힘을 빌어 당신을 때리면 이쪽은 꼼짝 없이 내상을 입게 된다. 또 군사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팔이 손을 사용하듯 손이 손가락을 부리는 듯 자연스러 워야 한다. 북이 울리면 전진하고 꽹과리가 울리면 후퇴하여 승리를 얻으면 전승을 거두고 패배 를 하면 전패를 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무학의 명가들이 말하길, '힘이 얼마만큼 센 것은 막론하고 힘을 쓰고 거두어들일 줄 알 아야만 자기의 힘이라 할 수 있다'라고 했다. 흔히 말하는 <사량가이발천근(四兩可以撥千斤 :네 냥이 천근을 튕길 수 있다)>은 바로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허월같이 이렇게 천 근의 신력을 신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운용할 수 있으면 장창을 들고 높이 솟구쳐 오르고 멀리 뛰면서 마치 수놓는 바늘을 움직이듯 마음먹은 대로 적을 찌를 수 있는 것이 다. 능조가 이 점을 지적하자 사람들은 모두가 매우 탄복해 마지 않았다. 운봉, 상영 두 사람은 하나는 의지가 굳고 마음이 섬세하여 무슨 놀라운 절기를 막론하고 알면 배우려고 했고, 배우면 치밀하게 터득을 했다. 하나는 방금 허초와 다투어 성이 나 있는 참에 자 기가 부탁하지 않았는데 허월이 스스로 시범을 보여주니 옆에서 보고 배워 허초의 입을 막아버리 려고 꽁한 마음을 도사려 먹었다. 이 두 사람은 정신을 곤두세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창법을 기억했다. 사람들이 각자 방으로 돌 아갔을 때 상영은 운봉을 데리고 아까 그곳으로 갔다. 허월이 사용했던 그 장창을 들고 그가 시 범을 보였던 대로 일초 일식을 따라 연습해 보았다. 운봉은 그녀의 의도를 알았다. 그녀는 처음 배우는 것이라 손발이 약간 어색하였고 가끔 멈추어 생각을 하기도 하였지만, 놀랍게도 거의 비슷하게 실연했다. 운봉은 이것을 보고 저절로 계속 칭 찬해 마지 않았다. 상영도 자랑스러운 듯 매우 신이 났다. 그녀는 삼십여 초를 실현해 나가다가 갑자기 두 동작이 생각나지 않았다. 연습을 멈추고 생각을 하였으나 끝내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 화가 나서 허초의 콧대를 꺾으려고 기를 쓰고 배운 것이라, 가서 물어보기도 거북하였고, 상영은 안달이 나 서 발을 동동 굴렀다. 운봉은 그녀가 그렇게 안달하는 것을 보자 속으로 매우 우스웠지만 그녀의 성격을 아는지라 바 로 지적하여 이야기하기가 거북하여 웃으면서 말했다. "방금 허협께서 시범을 보일 때 나도 옆에서 정신을 차려 몇 초식을 기억했어요. 다만 아가씨만 큼 기억력이 좋지 못해 그렇게 많이는 기억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 뒤의 절반인 질번구절은 비 교적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 한 사람이 연습하면 아무래도 잊어버릴 때가 있 을 테니 우리 두 사람이 그 창법에 맞추어 대전을 하는 것이 어떨는지 모르겠군요? 아가씨가 연 습할 때는 내가 적이 되고, 내가 연습할 때는 아가씨가 적이 되는 거예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가씨가 가르쳐 준다면 아마도 거의 모든 초식을 궤어맞힐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내가 아버지께 부탁하여 허협께 물어보면 돼요. 아가씨 생각은 어때요?" 상영은 마침 골머리를 썩히고 있을 때라 운봉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시간을 끌면 기억이 더 안날까 봐 즉시 운봉과 같이 시험해 보았다. 피차 서로 교정을 하니 대 체로 맞는 것 같았다. 운봉은 허월이 하루이틀 후에는 마을을 떠날 것을 알고 마음이 조급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 를 모시고 와서 관람하게 한 다음 또 한 번 시범을 보였다. 이번에는 비교적 익숙하게 해낼 수 있었다. 능조는 두 사람의 선천적인 자질이 이렇게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은 것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 다. "너희 두 사람이 이렇게 총명한데 때를 잘못 만나 아깝구나. 네 증조고모가 살아 계시다면 이런 무예는 둘째치고 비행절적(飛行絶跡)의 검술도 배울 수 있었을 덴데....." 운봉이 대답했다. "일전에 모두 바쁘고 아버지의 병도 아직 낫지 않아 몇 마디 말씀을 드릴 것이 있어도 말씀드리 지 못했어요. 제가 듣기에 황도인과 조세형(趙世兄)께서 검술에 익숙하다고 하는데, 아버님께서 저희 대신 두 분께 말씀을 드려, 저희가 그분들 문하로 들어가 검술을 배울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란다. 그 두 사람은 검술을 할 줄 알지만, 조형의 말에 의하면 그 는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일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황도인은 동해삼선 현진자의 문 인으로 검술이 고명하겠지만, 그는 죄를 짓고 사부께 쫓겨나서 현재 수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현 진자에게 용서를 빌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중인 사람이 사부의 명령도 없이 어찌 감히 제자를 받 아들일 수가 있겠느냐? 그리고 아미 문하는 이미 비승한 장미조사 어르신과 지금 장교조(掌敎祖) 인 건곤정기 묘일진인 외에는 모두 남자는 남자 제자만, 여자는 여자 제자만 받는단다. 지금껏 그 예는 깬 적이 없으니, 지금은 더더욱 너희를 받아들일 수가 없겠지. 그리고 비검을 깨우쳐 익히려 면 심산유곡에서 기를 연마하고 정신을 모아 먼저 내공을 수련해야 한단다. 시일이 길면 보통 십 년에서 수십 년까지 수련을 해야 한다. 옛날 오대파 태을혼원조사가 도심이 깨끗치 못한 제자 몇 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었고 패가망신하였다. 황, 조 두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 도 이렇게 쉽게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단다. 하늘이 기회를 주시어 아미, 곤륜, 황산 이 세 개의 정파 여검선을 만나, 그들이 너희를 보고 자질이 있고 선골로 생겼다고 마음에 들어한다면 너희 가 청하지 않아도 그들이 오히려 너희를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네 증조고모가 살아 계실 때 내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다. 네 조부께서 나를 숭산으로 데리고 가서 네 증조고모부에게 검술을 배 우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을 했었으나, 그분은 내가 선도에 들어갈 사람이 아니라고 거절하 였지. 후에 조부께서 오대파의 탈탈대사(脫脫大師)에게 십 년 전에 한 팔을 짤린 복수를 위해 계 속 부탁을 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나를 데리고 숭산이로인 추운수 백곡일을 만났지. 네 증조고모부는 내가 천부적인 자질이 나쁘다고 말씀하시고는 검술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단다. 처 음 삼 년은 나에게 밤에는 면벽을, 낮에는 산 아래 십 리 밖에서부터 물을 길어오게 하셨다. 그 물통은 작은통에서 점차 큰통으로 바뀌어 갔지. 사 년이 되자 나는 이미 삼백 근의 물을 짊어지 고 산을 평지와 같이 오를 수 있었다. 그 후로 또 나에게 낮에는 면벽을, 밤에는 물을 긷게 하셨 다. 나는 갈수록 지겹게 느껴졌지. 특히 면벽을 하면서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단다. 산중의 생활을 견디지 못해 몰래 도망쳐서 집으로 돌아가려고만 했다. 뜻밖에도 산 아래까지 갔으나 네 증조고모부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난 얼굴도 아니고 빙그레 웃으시면서 내 어린 시절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셨단다. '우리는 네가 선도에 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었다. 네 부친이 억지를 부려 네가 이 산 속에서 몇 년이나 고생하게 하였구나. 그러나 검술을 배울 인연 은 없지만 삼사 년의 근기가 있기 때문에 너에게 약간의 내공을 전수해 주면 인간세상에서 충분 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나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 매일 내공과 외공 그리고 각종 병기와 암기 쓰는 법을 전수해 주셨다. 석달을 배웠을 때, 그만하면 충분하다며 네 증조고모를 시켜 집으로 돌려보내 주셨다. 또 네 조부에게 당부하시기를, 탈탈대사의 기수(氣數) 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억지로 복수하려다 아까운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 리고 내가 검술과 인연이 없어서 다른 무예를 가르쳤고, 머지않아 그 증조고모는 곧 화해(火解 : 몸을 불태워 해탈함)할 것이란 말을 하시고는 돌아가셨다. 내가 집으로 돌아간 그 다음 해에 네 증조고모는 과연 개원사(開元寺)에서 원적하셨다. 너희 두 사람의 천부적 자질은 모두 나를 능가 한다. 하지만 이런 인연은 우연하게 생기는 것이지, 억지로 구할 수 없는 것이란다. 황, 조 두 사 람이 너희를 문하에 받아들여 검술을 가르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니 그리 알아라." 운봉은 당초 황, 조 두 사람의 검술이 입신(入神)의 경지로 비행절적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들 에게 검술을 배울 큰 기대를 했었는데, 오늘 아버지의 말을 듣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온몸이 싸 늘해졌다. 사실은 능조가 한 말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또다른 꿍꿍이속이 있었다. 능씨 집안이 대 대로 독자로 대를 이어왔고 자기는 딸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좋은 사위를 얻어 아들을 한두 명 더 낳아 능씨의 대를 이으려고 생각했었다. 황, 조 두 사람이 운봉을 제자로 받아들일 리도 없지만, 만약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스스로 찬성해야 할지 말려야 할는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상영과 운봉은 능조가 간 후에 또 한 번 창법을 연습했다. 두 사람은 날마다 남몰래 이화창을 익혔다. 자고로 <정성소지 금석위개(精誠所至 金石爲開 :정성이 닿는 곳에 금석도 갈라진다)>라 하였고, 두 사람은 모두 기초가 단단하였기 때문에 며칠 만에 이화창을 마음먹은 대로 시전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창 연습을 시작한 다음날 백기가 돌아왔다. 나신도 선화에 없어 며칠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 자세한 이유를 설명하고 꼭 도와달라는 편지를 남겨 놓고 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허월도 꼭 가야 한다고 고집하니 백기와 대형옥 등은 미리 약속을 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잡을 수 없었다. 허월은 사람이 필요로 할때 떠나는 것은 약간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주매가 떠날 때 한 말을 기억하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자기의 고충을 설명하고, 또 허초에게 '일이 끝나면 고향에 가서 부모를 꼭 만나보라'고 당부했다. 말을 마치자 그는 작별을 고하고 떠 나갔다. 상영은 허초를 만나면 고개를 숙이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허초가 몇 번이나 그녀와 이야기를 하 려고 시도하였으나, 그녀는 허초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냥 가버리곤 하여 마음이 매우 안 타까왔다. 어느 날, 상영과 운봉 두 사람은 또 뒤뜰에서 허가의 이화창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화창법이 본 래 신묘하였고 게다가 두 사람이 총명한 자질로 며칠 동안 계속 고된 연습을 한 데다가 능조도 옆에서 지적해 주었기에 두 사람은 비단 이화창에 매우 능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동시 에 대련을 하였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많은 새로운 절초를 만들어 내었다. 두 사람이 한창 연습하고 있을 때였다. 백기는 싸울 날이 며칠 안 남았는 데도 도와줄 사람들이 한 명도 도착하지 않는 것을 보자, 사람들을 소집하여 적과 싸울 때의 직무를 분배하려고 생각하 였다. 좌중을 둘러보니 어신동을 지키는 대형옥 외에 상영, 운봉 두 사람만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찾으려고 하자 능조가 말했다. "운봉은 대소저와 함께 뒤뜰에서 무술을 연습하고 있는 듯합니다. 내가 가서 불러오지요." 허초는 연일 상영과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 걱정하던 차라 이 말을 듣고 황급히 나섰다. "어떻게 노선배님께서 직접 수고하실 수 있으십니까? 제가 가서 불러오겠습니다." 그는 대답도 듣지도 않고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뜰 가까이 가자 병기가 마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가까이 가니 상영이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며칠 동안 연습하는 중에 깨달았지만 그 질번구절은 어렵지 않은데,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칠보회신추혼탈명연환창>이군요. 위험을 당했을 때 변화하는 초식만 보더라도 초식 안에서 변 초가 생기며, 벼랑 끝에서 말을 멈추는 듯 위기일발인 그 힘을 내고 뽑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군 요. 지금 이 일초를 사용해 볼 테니 다른 방법으로 막아보세요." 허초는 어린 시절에 이화창법을 몰래 배운 적이 있었다. 어렸고 또 몰래 훔쳐보고 연습하였기 때문에 육칠 할 정도밖에는 배우지 못하고 집을 도망쳐 나왔다. 집을 나온 후에 전승(顚僧) 마굉 (馬宏)을 스승으로 모시고 장검과 암기를 배웠다. 이번에 우연히 사촌형 허월이 왔을 때 이화창을 가르침 받으려고 생각했으나 워낙 마을을 방어 하는 일이 바빴고, 모두가 창황 중이라 부탁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상영이 그에게 이화창을 가르 쳐 달라고 하였을 때도 허월에게 배우라고 하였던 것인데, 허월은 그가 다 배워 익숙한 줄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절초 몇 수만 설명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런 허초인지라 오늘 상영이 말하는 것을 듣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여 그녀들을 부르지 않고 가만히 다가갔다. 한쪽 구석에서 그녀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두 사 람의 창술이 오묘하고 몸과 창이 하나가 되어 민첩하기가 비조(飛鳥)와 같고 토끼처럼 뛰 었다가 비둘기처럼 앉고, 그 행동이 자유자재로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어느 것이 사람이고 어 느 것이 창인지 분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단지 두 붉은 그림자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 당초 허월의 창술을 본 것과 완연히 같았다. 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상영과 운봉은 누군가가 감탄하는 소리를 듣자 각기 초식을 거두어들였다. 허초가 온 것을 보자 상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을 병기받침대에 던지고 몸을 돌려 가려고 하였다. 운봉은 허초가 어색해 할까 봐 허초에게 몇 마디 말을 하려고 하였다. 허초는 급히 상영을 가로막았다. "큰형님께서 사람들을 대청에 모아놓고 대전시의 직무를 분배하고 있다오. 나더러 누이와 능소 저를 모셔오라고 하셨소." 상영은 냉소를 지었다. "그런 일은 심부름꾼을 시키면 되지 직접 이렇게 납실 필요가 있나요? 알았으니 먼저 가보시지 요." 허초는 그녀가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며, 얼굴을 운봉 에게 돌리며 눈은 상영을 쳐다보며 칭찬했다. "두 분 여영웅의 이화창은 매우 훌륭하군요." 운봉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상영이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처럼 멍청한 사람이 어떻게 당신네 허가 독전의 이화창을 배울 수 있나요? 그저 심심해서 막대기로 장난한 것뿐이에요." "누이는 너무 그렇게 겸손하실 필요가 없소. 이 이화창법은 변화가 너무 많아 배우려면 상당히 힘들다오. 나도 겨우 두 분의 절반도 익히지 못했다오. 그날 누이가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 때 내 가 다행히도 대답을 안했기 망정이지, 아니면 선생이 학생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여 웃음거리가 될 뻔했소이다. 이 창법은 쓸 줄 아는 사람이 매우 적은데, 두 분은 어느 선생님께 배우셨는지 말 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이 세상에 당신만 이화창을 쓸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이화창을 쓰면 안 된다는 법도 있나요? 선 생님을 물어보신다면, 능언니가 나의 선생님이고 나도 그녀의 선생님이 되지요. 우리들은 서로 가 르치고 배웠어요. 우리가 이화창을 쓰는 것을 보시니 승복하실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누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나는 정말로 억울하군요. 전에 누이의 말을 듣고 내가 이화창법을 몰랐기 때문에 몰래 형님에게 절초 몇 수를 여쭈어 보았소. 누이에게 가르쳐 주려고 벼르고 있었 으나 계속 기회가 없었다오. 지금 누이가 그토록 익숙하게 할 줄 아는 것을 보았으니 내가 기뻐 해도 모자랄 텐데 승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소?" 상영이 또 말을 하려고 했으나, 운봉은 상영이 허초를 몇 번이나 쏘아붙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안쓰러워 먼저 말을 꺼냈다. "상영아가씨가 이 일의 발단을 말하지 않았으니 당신이 알 수 없었을 거예요. 그날 아가씨는 당 신 형님께서 이화창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자, 당신도 익숙하게 할 줄 아시는 줄로만 알았답니다. 당신 형님과는 잘 알지 못하는 사이인지라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하기 거북하여 당신에게 부탁했 던 것인데 당신은 형님에게로 미루었던 것입니다. 후에 당신이 어신동으로 가셨을 때 형님께서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여기서 창법을 한 번 시범을 보여주셨답니다. 아가씨는 워낙 총명하여 한 번 보고 기억하였고, 저도 곁에서 몇 초를 기억하였다가 날마다 여기에 와서 연습한 것입니다. 형 님께서 이미 떠나셨기에 우리는 가르침을 받을 곳이 없어 근심하던 중입니다. 당신은 이화창의 고수이시고 또 가전(家傳)되어 온 것이니, 만약 틀린 곳이 있다면 가르침을 바랍니다." "두 분의 자질이 이렇듯 훌륭하시니 정말 감탄할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다 배우지 못했고, 두 분께서는 이미 그 안의 오묘함을 모두 얻으셨으니 설혹 못 미치는 곳이 있다 하더라도 제가 어찌 고쳐줄 재주가 있겠습니까?" 상영은 원래 허초와 매우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창법을 배우려고 부탁했던 일로 몇십 일 동안 화를 내고 허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허초는 그 냉대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그 녀를 잘 대했기에 속으로 약간 미안해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운봉 앞에서 이미 온갖 불평을 다 털어놓았기 때문에 운봉이 그녀를 비웃을 것이 겁이나 그에게 좋게 대해 줄 수가 없었다. 오늘도 계속 그를 빈정대었지만 허초는 여전히 조금도 성내지 않고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 꼬부러졌던 마음이 점점 풀어졌다. 상영은 성격이 비록 오만하였지만 무예를 배우려는 마음은 매우 허심탄회하여, 완전하게 배우지 못했을까 매우 염려하였다. 본래 허월이 시범을 보였을 때 몇 수를 감추어 두었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있었다. 그녀는 허초가 완전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다시 물어보기가 쑥스러 워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운봉이 허초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데도 허초가 전과 마찬가지로 회피하는 것을 보자 다 시 울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니는 쓸데없는 말을 왜 자꾸 하는 거예요. 그에게 물어봤자 그가 자기 집안의 비결을 남에게 말할 것 같아요? 우리는 그저 그날 본 것을 심심풀이로 연습하면 돼요. 언니가 정말로 배우려는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허씨댁 사람도 남에게 잡혀 포로가 되 는데, 거기에 또 뭐 좋은 점이 있겠어요?" 허초는 상영이 하는 말끝마다 가시가 박혀 있어도 자기는 계속 개의치 않고 행동했는데, 이제 그녀는 자기가 어신동에서 잡혔던 일마저 빈정대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욱하는 기질과 호승지심을 다스리지 못한다. 운봉의 면전에서 이런 창피를 당하자 허초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색 이 붉어졌다. "사람 밖에 사람이 있고,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 事)라오. 나는 평소에 내가 무슨 천하의 고수라고 자부하는 말을 한 적도 없으려니와, 심야에 어 신동에서 괴인의 요법에 걸려 잡혔으니 내가 무예를 잘못 배웠기 때문에 잡힌 것이 아니었소. 아 마도 진정한 검선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를 막론하고 요법을 만나면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오. 누 이는 내가 그날 이화창법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내가 그 창법을 익숙히 알면서 고의로 안 가 르쳐 줬다고 생각했고, 내가 재삼 설명을 해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소. 오늘 또 누차 비꼬는 말을 하니 나도 더 이상 여기 있을 면목이 없소. 여촌을 쳐부수고 진, 나 두 도적놈과 사생결단한 후에도 내 목숨이 살아 있으면 이 마을을 떠나가면 그만이오." 그는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가버렸다. 허초는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다가 대가장으로 왔다. 대형옥의 아버지 대곤(戴昆)은 그를 거두어 들여 무예를 전해 주었고, 상영과는 어릴 때부터의 동무로 몇 년을 친오누이처럼 지내었다. 후에 대곤은 임종시에 허초를 전승 마굉의 문하에 입문시켜 주었다. 허초는 오 년 동안 무예를 배운 후에 원래는 형옥 오누이를 만나보고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보 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여가장과의 분쟁 때문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상 영은 이미 다 큰 처녀가 되었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전 어린 시절처럼 허물없이 지낼 수는 없었지만 속마음은 도리어 더욱 가까워졌다. 허초는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었고, 또 누이동생이나 매한가지였으므로 무슨 일이 있으면 계속 양보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날 이전에는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 허초가 간 후에 상영은 자기가 말을 심하게 한 것은 반성하지 않고 도리어 생각할수록 더욱 화 가 나서 대청으로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운봉이 겨우 달래어 같이 대청으로 가니 허초가 문앞에 서 배회하다가 그녀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서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운봉은 허초가 상영이 올는지 안 올는지 알 수 없어서 들어가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몰라 문에 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상영이 성이 나서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고는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냥 같이 들어가는데, 앞서서 허초가 백기에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이와 능소저가 뒤뜰에서 창법을 연습하다가 지금 들어오고 있습니다." 운봉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매우 우스웠다. 두 사람이 앞으로 다가가자 능조를 제외한 모든 사 람이 일어났다. 백기는 사람들에게 앉으라고 권한 후 말했다. "며칠 있으면 진, 나 두 도적놈과 약속한 날짜가 됩니다. 이번 분쟁에서 갑자기 중간에 여촌 사 람들이 끼어들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일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날짜는 거의 다가왔는 데 여촌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방비를 더 철저히 해야 하는 것 이외도, 또 기간 안에 한 사람이 적진으로 가서 진, 나 두 사람에게 서신을 전하며 이 월 초사흗날 우리가 진우로 가겠다 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갈 필요없이 자기네가 오겠다면 그들 마음대로 하라 고 해야겠지요. 이 기회에 약간의 동정을 살펴 준비를 할 수 있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진우로 쳐들어 가게 되면 여촌이 어신동으로 와서 우리의 후로를 차단하게 될 테니, 우리는 양쪽 으로 적을 맞아 곤경에 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일 좋은 대적방법은 타뢰대(打雷台 :싸우는 단)를 사용하는 방안입니다. 앞 광장에 주연을 차려놓고 또 높은 단을 만듭니다. 그들이 오면 먼 저 연회석에 앉게 하고 한 사람씩 단으로 올라가 싸워, 많이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마구잡이로 싸우면 많은 사상자가 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지 진, 나 두 사 람만 상대하면 되었기 때문에 진우로 가겠다고 약속했던 것이지만 지금 여촌이 가세하였고 게다 가 우리도 검술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 둘이나 되니 이런 방법이 기장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입니 다. 하지만 애당초 우리가 진우로 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지금 그들을 이곳으로 오라고 예정 을 바꾸면 그들은 틀림없이 우리가 패가장 산곡(山谷)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할 것을 두려워할 것 입니다. 이번에 가야 할 사람은 필히 담이 크고 세심하며 또 언변이 좋아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 는 진, 나 두 사람이 모두 여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촌은 저번에 우리가 그들의 동태 를 살피러 갔었으나 그 후에 그들이 시비를 걸어오지는 않았으니, 아직은 정식으로 적이 되지 않 은 셈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스스로 적의를 나타내기 전에는 우리는 모르는 척해야 합니다. 곧장 진우로 서신을 가지고 가면 주인이 진우에 없다고 진우의 사람이 여촌으로 인도할 터인즉, 이때 여촌으로 따라가서 말을 전하고 초청장을 주면 되겠습니다. 어느 분이 수고를 해주시겠습니까?" 백기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황, 조 두 사람이 강호의 경험도 많고 또 검술 또한 일가견이 있 으므로 가장 적임자로 꼽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가 가도 무방하였지만 멀리서 온 손님 인 데다 서로 안 지가 얼마 안 돼 직접 부탁하기가 미안했었다. 이때 허초는 상영과 말다툼을 한 후에 상영이 다른 사람의 면전에서 자기가 무능하다고 비웃은 것으로 생각하여 억지로 분을 참고 있던 중이었다. 게다가 백기의 말을 들으며 상영을 쳐다보니 그녀는 계속 그를 향해 냉소를 짓고 있어서 더욱 자기를 깔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초는 혼자 궁리했다. '어쩐지. 내가 어신동에서 돌아온 후부터 누이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더군. 그녀는 내가 쓸모없 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내가 사람들이 놀랄 만한 두 가지 일을 해보이리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허초는 웅심(雄心)이 불현듯 치솟았다. 백기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허초가 재빨리 일어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소제가 무능하여 일전에 좋은 기회를 잃었지만, 큰형님과 여러분께서 책망하지 않아 매우 부끄 러웠습니다. 제가 가서 말로 진, 나 두 도적놈을 자극하여 타뢰대로 오도록 유인하겠습니다. 형님 께서 소제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 염려스럽군요." 그러면서 그는 상영을 돌아보고 싱긋 웃었다. 백기는 허초가 용감하게 나서는 것을 보고 그가 재주가 있고 총 명하니 갈 수는 있지만, 이미 여촌에서 잡힌 적이 있고 또 검술을 배운 바가 없으니 아무래도 황, 조 두 사람보다 적합하지 못 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허초가 이미 말을 꺼냈는데 다시 황, 조 두 사람에게 부탁한다면 친구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황, 조 두 사람도 백기의 말을 듣고 그의 의도를 알았었다. 본 래 자기가 가겠다고 말하려고 했 었으나 뜻밖에 허초가 나선 것이다. 자기가 다시 나선다면 허초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기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심원은 이 며칠 동안 허초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가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계속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백기는 다른 사람이 아무도 나서지 압고 허초가 자꾸 서신을 달라고 재촉하자 할 수 없이 편지 를 썼다. 편지를 건네주면서, 재삼 형편을 살펴 조심스레 행동하라고 당부하였다. 허초는 편지를 받자 다시 상영을 쳐다보며 한번 웃고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병기를 들고 성큼성큼 나갔다. 허초가 간 후에 운봉은 상영이 즐겁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뒤뜰로 산보 나 가자고 말했다. 상영이 갑자기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봐요, 그가 얼마나 사람을 깔보는지.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편지 전하는 것이 뭐가 대단하다 고 나를 쳐다보며 냉소를 보내잖아요? 오빠와 손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만 있었지, 그렇지 않았 다면 그에게 따졌을 거예요." 운봉은 이때 더 이상 참지 못하여 상영을 나무랐다. "동생은 너무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군요. 허협은 아가씨랑어려서부터 같이 지냈고 춘부장 께서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오빠도 친형제처럼 대했어요. 설령 약간 잘못하는 점이 있다고 해도 아가씨는 평소의 정을 생각해야 되는 법이에요. 오늘 아가씨가 몇 차례나 그를 비꼬았지만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이야기했어요. 그런데도 아가씨는 끝까지 그의 심사를 건드렸고, 결국에는 사 람의 아픈 곳까지 들추어 내었어요. 우리 젊은 사람들 중에 놀림받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 어요? 아마도 그는 아가씨가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기가 올라 이 위험한 일을 맡았 을 거예요. 백오빠가 황, 조 두 사람이 가도록 말을 돌려서 했는데 허협이 나서니 백오빠도 한참 망설이다가 겨우 승락하는 것도 못 보았어요?" "그러면 그냥 가면 되는 거지, 왜 사람을 보고 웃는 거예요." "허협이 아가씨를 보며 웃는 것은 결국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아가씨에게 죄를 지 어 만회할 방법이 없었고, 또 아가씨가 그를 깔본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단신으로 호 랑이굴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을 아가씨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이에요. 아니면 그가 백오빠의 의 도를 몰라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세요? 편지 전하는 것이 그렇게 쉽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가 여촌 사람들의 요법에 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것을 알아야 해요. 이번에 그곳에 가면 어떻게 될는 지 생각이나 해보았어요? 잘못하면 다치는 것은 고사하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떠날 때 백오빠가 몇 번이나 당부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어요?" 상영은 처음에 운봉의 말을 듣고 대꾸하기는 곤란하지만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허 초가 생명의 위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세히 생각해 보니 운봉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고 느껴졌다. 허초가 자기를 깔보았든 아니든 간에 이번에 백기의 의도는 분명히 황, 조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가길 원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만약 자기가 그를 빈정대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무릅쓰지 않아도 될 위험을 무릅쓰려고 했겠 는가? 만약에 일이 잘못된다면 자기가 죽인 것은 아니지만 자기 때문에 죽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 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상영은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전혀 내색하지 않 고 도리어 운봉에게 억지를 부렸다. "두 나라가 싸우더라도 그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에요. 나는 그렇게 위험하다고 성각하지 않 아요. 만약 언니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여촌으로 가서 살펴보고 와서 결과를 말 해 주겠어요." 운봉은 그녀의 성격이 말을 하면 꼭 실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말리려고 한다면 더더욱 외고집을 부리려 할까 봐 충고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른 말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었다. "본래 위험이 꼭 있다는 게 아니고, 내가 이 기회를 빌어 아가씨한테 선의의 충고를 하려고 한 것뿐이에요. 화를 풀고, 이전처럼 서로 좋게 지내면 좋지 않겠어요?" 상영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도리어 매우 우스웠다. 두 사람은 각기 생각하는 바가 있어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 상영은 머리가 약간 아파서 일찌감치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자매처 럼 친하여, 평상시 같으면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을 자곤 했던 것이다. 운봉이 그녀의 이마를 만져 보니 과연 열이 조금 있었다. 그러나 운봉은 그녀가 방금 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또 터놓고 그녀를 충고한다면 그녀를 더욱 부추기는 결 과를 빚겠기 때문에 그녀와 같이 그냥 자는 수밖에 없었다. 초경(初更)이 막 지났을 때 운봉은 갑자기 깨어났다. 유윤중에게 약을 먹여야 하겠기 때문이었 다. 그 두 사람은 비록 상세는 완쾌되었지만 그래도 그 보신을 위해 제조한 약은 계속 먹어야 했 다. 그래서 매일 밤 그녀 자신이 약을 달여 갖다주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이 약은 사십구 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먹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약과 약탕관들이 모두 방안에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나 상영을 건드려 보았다. 매 우 단잠을 자고 있는 듯하였다. 이마에 땀이 솟아 있는 것이 열이 아직 다 가라앉지 않았고 콧소 리가 희미하며 호흡이 매우 고르다. 등불을 옮겨 얼굴을 비춰보니 얼굴이 발그스레한 것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녀의 백설 같은 팔 하나가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가만가만 약을 달였다. 약을 다 달여 아버지의 방으로 가지고 가려다가, 아무래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하녀를 시키려고 부르러 갔으나 그 하녀는 죽은 듯이 자고 있어서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기에 할 수 없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이때 돌연 상영이 잠꼬대를 했다. "아, 이 칠보회신추혼탈명창은 정말 기가 막히군." 그리고 상영은 또 몇 마디 중얼거렸다. 운봉은 그녀가 꿈속에서도 무술을 연습하는 것을 보자 매우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더욱 곤하게 자는 것을 보고서 마음이 놓였다. 즉시 가만가만히 약을 들고 방을 나와 발꿈치를 들고 어둠 속에서 계단을 내려갔다. 평지로 내 려가서 다시 귀를 기울여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았지만 이 층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서야 운봉은 비로소 앞쪽 행랑채로 향해 걸어갔다. <제5권으로 계속> 촉산기협(1부) 5 공연장과 괴도인 觀社戱 巨眼識眞人 窺幽林 驚心聞畺耗 능운봉(凌雲鳳)이 하늘을 쳐다보니 별빛, 달빛 한 점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 그러나 멀리 아버지 의 방에는 촛불이 반짝이고 바둑돌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유윤중(兪允中)을 상대로 판을 벌 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운봉도 바둑에 관한 한 고수인지라 저절로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그녀가 아버지의 방으로 걸어 가고 있을 때, 홀연 한 검은 그림자가 날렵하게 길 옆집 지붕으로 숨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차려 자세히 보니 한 마리의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찬 겨울 바람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야옹, 야옹!' 하고 두어 번 울고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천천히 뒤쪽으로 걸어가 뛰어내렸다. 운봉은 아버지 방의 창문 밑에 다다랐다. 조용한 밤인지라 바둑돌 놓는 소리가 더욱 맑고 선명 하게 들렸다. 운봉이 방으로 들어서니 아버지와 윤중은 바둑판 앞에 마주앉아 있었다. 판의 한쪽 귀에서 한창 싸움이 벌어진 중이라 두 사람은 운봉이 들어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였다. 운봉은 약사발을 내려놓으며 말을 건넸다. "아버님, 약 드세요." 능조(凌操)는 운봉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대답했다. "유서방더러 먼저 들라고 하렴." 한쪽이 완전히 포위를 당하자 운봉이 들어온 것도 모른 체 바둑판에만 골몰해 있던 윤중은 능조 가 자기에게 이야기한 줄로 잘못 알고는 빗나간 대답을 하였다. "장인께서는 기력(氣力)이 과연 보통이 아니십니다. 제가 이쪽을 다 먹는다고 해도 이삼십 집을 졌군요." 운봉은 그러는 그의 모습을 보자 매우 우스웠다. "두었다 하면 이삼십 집이나 지면서 무슨 재미로 날마다 아버님과 바둑을 둬요?" 윤중은 그제사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 운봉이 와서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제딴엔 자리를 양보하려는 것이었는데, 일어나면서 잘못하여 소맷자락으로 바둑알을 쓰는 바람에 판이 헝클어져 버렸다. 능조는 바둑돌을 거두며 웃었다. "유서방이 졌다고 인정하니, 그럼 이야기나 함세!" 윤중은 어려서부터 경험이 풍부하고 세상물정에 밝았다. 요즘 운봉과 같이 환난을 겪는 동안 사 랑의 뿌리가 아주 깊게 내렸는데, 다만 아직 결혼식을 올린 처지가 아니므로 사람들 앞에서는 피 차간에 서먹서먹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밤에 약을 가져오는 시간에는 바깥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으므로 다소 자유로웠다. 운봉이 들어온 것을 보고는 바둑 생각은 싹 달아나 버리고 그녀와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그런 데 판이 어지러워졌으므로 그는 울고 싶자 뺨 맞은 격이었다. "제 실력으로는 다시 둔다고 해도 추태만 보일 뿐이니, 두 분이 한 판 두시죠. 저는 옆에서 보면 서 한두 수 배우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바둑돌을 챙긴 다음 운봉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운봉이 말했다. "우선 약부터 드시라니까요." 이때 능조는 자기 몫의 약을 다 마시고 사발을 놓았다. 오늘밤의 약은 운봉이 너무 달였기 때문 에 약간 썼다. 윤중은 한 모금 마시고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다시 마시려고 할때 운봉이 주머 니에서 대추를 예닐곱 개 꺼내어 내밀었다. 윤중이 손으로 받으려고 했으나, 운봉은 얼른 탁자 위 에다 놓았다. 윤중이 어이없어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운봉은 피식 웃고 나서 아무 일도 없는 듯 아버지를 향 했다. "아버님, 다른 일이 없으면 저는 그만 물러가겠어요." 윤중은 그녀가 오자마자 가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급히 약사발을 놓으며 말했다. "아직 별로 야심하지도 않았는데 뭘 그렇게 일찍 가려고 합니까? 아버님과 한 판 두고 가시지 요." "당신은 바둑 둘 여가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또 할 일이 있어요." 능조는 두 사람이 약간 다투는 듯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 옆에서 수염만 쓰다듬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윤중이 운봉을 은근히 붙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자, 윤중을 도와 한 마디 했다. "유서방이 바둑을 두고 싶은가 본데, 나는 한 판 두었으니 네가 유서방과 대적해 보렴." 윤중은 장인이 자기를 도와 약혼녀를 붙잡는 것을 보자 내심 매우 흐뭇했다. 운봉이 말했다. "당신 너무 좋아하지 말아요. 아버님이 그러신다고 제가 당신과 바둑을 둘 줄 알아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당신 정도의 실력은 한 판이 아니라 열 판을 둔다고 해도 제 앞에서는 추풍낙엽이 에요." "내가 고수가 아닌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서투르다고 배우지 않으면 끝내 잘할 수 없지 않겠 소?" 운봉은 그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모양을 보자 그냥 거절하기가 미안했다.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실은 당신과 바둑을 두기 싫어서가 아니에요. 낮에 제가 말을 잘못하는 바람에 오해를 불러 일으켰으므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만에 하나라도 잘못 일이 벌어지면 이곳 주인을 볼 면목이 없어지잖아요? 일찍 돌아가려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에요." 능조는 딸이 총명하고 신중하여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깜짝 놀란 얼굴로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운봉은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고, 방금 대상영(戴湘英)이 깊이 잠든 것을 보고 왔지만 안심이 안 된다고 말했다. 능조는 이 말을 듣자 즉시 대답했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방심할 수 없구나. 그 애가 자는 척한 게 너를 속이려는 것이 아니었으 면 좋을 텐데, 빨리 돌아가 보아라!" 운봉은 아버지가 염려하는 투로 말하자 제풀에 더럭 의심이 생겨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녀는 미 처 대답도 하지 않고 얼른 밖으로 나와 상영의 처소로 달려갔다. 휘장이 늘어쳐진 침상 앞에 상영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아까와 다름없어서 방금 자신 의 지나친 소심이 매우 우스웠으나, 침대 앞으로 다가가서 휘장을 젖혀본 그녀는 소스라치듯 놀 라고 말았다. 비단 이불만 펴져 있을 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잖는가! 운봉은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며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급히 뒷방으로 가보니 계집종은 곤히 자 고 있었으나, 상영이 평소에 사용하던 보검과 칠성연주노(七星連珠弩)는 항상 걸려 있던 벽에도 없었다. 다시 침상으로 돌아온 운봉은 베개를 만져보았다. 온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아직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 여겨졌다. 운봉은 창문을 열고 지붕으로 훌쩍 뛰어올라 가서 살펴보았 다. 그러나 사방은 찬바람만 불고 아무런 종적이 눈에 띄지 않았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말고 그녀는 지붕에서 뛰어내려 와서 이 사태를 상의하기 위해 아버지의 처소로 달려갔다. 서신을 가지고 산을 내려와 진우를 향하던 허초(許超)는 황혼이 질 무렵에 어느 큰 마을 앞에 도달했다. 행인에게 물어보니, 그곳이 바로 <추혼태세(追魂太歲)> 진장태(陳長泰)의 마을이라고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앞쪽은 상수(湘水)와 인접했고, 뒤쪽은 숭산(崇山)을 등지고 있었다. 마을 앞은 너비 일 장이 넘는 해자를 파서 상수의 물을 끌어들여 주위를 둘러쌌으므로 더욱 만만찮고 당당해 보였다. 허초가 사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를 지키던 사나이가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다리를 들어올리다가 허초 를 발견하고는 멀리서 소리를 쳤다. "너는 뭐하는 놈인데 여기 와서 어슬렁거리느냐? 빨리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활을 쏘겠다." 아니나 다를까, 몇 사람이 활을 집어들고 살을 매겨 허초를 겨누며 곧 쏠 듯한 기세였다. 허초는 하찮은 부류들이 엄포를 놓자 매우 가소로웠다. 그 자리에 진장태, 나구(羅丘) 두 사람이 없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사나이들을 상대로 장난이나 쳐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이미 그들에 의해 쳐들려졌으므로 허초는 큰소리로 외쳤다. "먼저 다리를 내려라. 그러면 내가 온 목적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사나이들은 허초의 태도가 오만한 것을 보고 성이 나서 일제히 외쳤다. "우리 장주님께서 명령하시길, 이 며칠 동안 잡인은 일체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다. 오고 싶으 면 어디 헤엄쳐 건너와 봐!" 허초는 이 말을 듣자 껄껄 웃었다. 다음 순간 발을 한 번 구르자 그의 몸은 이미 해자를 넘어 건너와 있었다. 사나이들은 허초의 몸놀림이 이처럼 민첩함을 보자 비로소 겁을 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 두머리인 듯한 하나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그대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묻는 데 대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요? 이곳에서 함부로 날뛰 면 우리 장주님과 나구 어르신께서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 "내가 바로 진장태와 나구를 만나러 온 사람이네. 빨리 나를 그 사람들한테로 안내하게나." 사나이들은 허초가 진, 나 두 사람의 이름을 마구 부르자 마침내 벌컥 화를 내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어디 감히 장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거냐! 너 오늘 성해서 돌아가기는 그른 줄 알아라." 말을 마치자마자 한 사나이가 대나무 몽둥이를 들고 허초의 뒤 쪽에서 기습하려고 했다. 허초는 이미 눈치를 채었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사나이의 몽둥이가 정수리로 날아오자마자 몸을 돌리지도 않은 체 왼쪽으로 다만 살짝 비켰다. 이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오른쪽 팔 꿈치로 사나이의 가슴을 올려쳤다. "아이쿠!" 비명과 함께 사나이는 비틀거렸다. 허초는 사나이가 바로 설 틈을 주지 않은 채 가슴을 가격한 팔 꿈치의 힘을 그대로 위로 뻗쳐올 리며 손등으로 사나이의 얼굴을 갈겼다. 이어서 몸을 핑그르르 돌려 오른손으로 볼을 잡아당기자 사나이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허초 쪽으로 고꾸라지려고 하였다. 허초가 그 틈을 이용하여 제기 를 차듯이 사나이를 올려차니 상대방은 땅에서 두 바퀴 재주를 넘고는 나가떨어졌다. 다른 사나이들은 허초의 반격이 의외로 거세자 각자 무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허초는 막 한 명 을 쓰러뜨리고 나자 그들이 뒤쪽에서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는 <탕지연환퇴(蕩地連環腿)> 수법 으로 드러눕듯이 자세를 낮추며 원을 그리듯 돌려차서 적들의 하반신을 휩쓸었다. 하찮은 사나이들이 어찌 이 묘수를 막아내겠는가? 이 한 수에 칠팔 명이 우르르 넘어졌고, 나머 지는 감히 덤벼들지 못한 채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촌락 문이 열리며 멀리서 한 청년이 뛰어나왔다. 허초 가 그 청년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청년이 멀리서 큰소리로 외쳤다. "장사(壯士)께서는 노여움을 푸십시오. 제가 그들을 처벌하겠습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어느덧 허초 앞에 도달해 있었다. 다리 지키던 사나이들은 다투어 고 해바쳤다. "둘째장주님 오셨습니까? 아, 글쎄 저놈이 강을 건너와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막 때려 여럿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빨리 저놈을 잡아서 큰장주님이 돌아오시면 처치하십시오!" 청년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누가 너희들을 때린단 말이냐?" 말을 마치고는 그들을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고 허초의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말 했다. "장사께서 무슨 까닭으로 저 아랫것들한테 성이 나셨는지요? 제 얇은 얼굴을 보시어 저들을 용 서해 주십시오." 허초는 상대방이 비록 새파란 나이지만 용모가 시원하게 생겼고 예를 갖추는 품이 정중함을 보 자 저절로 마음이 풀렸다. "저는 허초라고 합니다. 대가장 백기(白琦), 대형옥(戴衡玉) 두 분 형님의 분부를 받고 서신을 전 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들이 뒤에서 기습을 하여 싸움이 벌어졌지요. 저 역시 약간 경망 한 구석이 없잖았으니, 그대가 널리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청년은 가벼운 한숨을 지으며 대답했다. "형님은 일전에 그 나씨와 여촌에서 돌아오셨을 적에는 이곳에서 백, 대 두 분을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제 뜻밖에도 얼굴이 붉은 한 분 도인께서 나타나 그 나씨를 만나겠다고 하 지 뭡니까? 나씨는 감히 나가서 그를 만나지 못하는 고로 제 형님이 나가서 적당히 몇 마디 응대 로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일찍 제 형님과 나씨는 여기에서 기다리려던 생각을 바꾸어 여촌으로 가셨습니다. 장사께서 만약 서신을 여기 두시면 제가 사람을 시켜 전하겠습니 다." "아,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형님께서 여기에 계시지 않다니, 그럼 제가 여촌으로 가서 직 접 전하지요." 허초는 말을 마치고 다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작별인사를 하고는 몸을 솟구쳐 해자를 건너갔 다. 그러자 청년도 몸을 날려 허초를 따라 건너왔다. 허초는 그 청년의 신법이 자기에 못지 않음 을 보자 속으로 놀랬다. 이름을 물어보고서야 그가 진장태의 이복형제이며 재주가 뛰어나다는 진 장곡(陳長穀) 그 사람임을 알았다. 허초는 그에게 구태여 전송해 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곡은 끝까지 고집을 피워 일 리 정도나 따라오더니, 여촌 가는 방향을 가르쳐 주고서야 돌아갔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려고 하는데 여촌까지는 아직도 산길을 돌아 몇십 리를 가야 했다. 허초는 길을 떠날 때 백기가 당부한 말이 생각났다. 어떠한 경우라도 밤에 찾아가서 오해를 불 러일으키는 짓은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날이 어두워져 여촌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부근 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아침에 찾아가라고 했었다. 허초는 우선 여촌에서 멀지 않은 청수파(淸水坡)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여촌에 도착해야겠 다고 생각했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여 단숨에 육칠십 리를 주파했다. 이제 산모퉁이만 돌아가면 바로 청수파였다. 이때는 이미 초경이었는데, 멀리서 꽹과리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광장에 는 가설 무대가 세워져 있고, 무대에서는 한창 소란스런 무희(武戱)가 공연되고 있었다. 무대 앞 에는 두 개의 커다란 횃불이 있고, 따로 또 여러 개의 작은 횃불들이 밝혀져 있어서 마치 대낮처 럼 환했다. 무대 아래는 연극을 보려는 시골 사람들이 늙은이 어린애 할것없이 들어차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군데군데 먹을 것을 파는 장사꾼이 진치고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몰려서서 다투어 주전부리를 하고 있었다. 허초는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파는 음식을 보자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구운 닭 한 마리와 만두 네 개를 샀다. 또 당면을 넣은 고깃국 한 그릇을 사서 고춧가루를 한 숟갈 넣고는 노상에 선 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이윽고 배를 채운 그는 잠잘 곳을 찾기 위해 어슬렁어슬렁 자리를 뜨려다가 마침 재미난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무대로 자기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이내 고개를 돌리려던 그는 문득 저만치 오른 쪽에 웬 키가 큰 도인이 어떤 사람을 붙들고 뭔가 물어보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런데 문득 <나구 >라는 두 발음이 귀에 들어와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래서 무대 위를 보는 척하며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 도인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늙수그레한 시골 노인이었다. 허초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대답을 마친 노인이 자리를 떴고, 그 도인도 몸을 돌리고 있었다. 허초가 그 도인을 바라보니 마흔 살 정도의 연배인데 키는 일곱 자가 넘는 장신인 데다 기골이 장대하며 불빛에 비친 얼굴은 몹시 붉었다. 허초는 뭔가 짚히는 바가 있었지만 함부로 실례를 할 수 없었다. 마침 조금 전의 노인이 서북쪽 모퉁이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서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허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그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말을 걸려는 순간, 연극에 정신이 팔린 노인이 흥에 겨워 손을 휘젖다가 공교롭게도 팔꿈치로 허초의 가슴을 쥐어박았다. 노인은 곧 자기가 실수를 했음을 알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옷을 잘 차려 입 은 젊은 청년임을 보자 깜짝 놀라서 황급히 사과를 했다. 허초는 원래 자청하여 말을 붙이려던 참이었으므로 마침 잘되었구나 싶었다. 노인은 허초가 의 외로 겸허한 태도로 응대해 주자 흡족한 나머지 묻는 대로 대꾸를 다 해주었다. 두 사람은 연극 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갈수록 의기가 상통했다. 얼마 안 있어 연극이 끝나고, 무대 아래의 사람들은 썰물처럼 일제히 흩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노인은 연로한 몸으로 자칫하면 자빠질 뻔했으나, 허초가 부축하여 주었으므로 간신히 중심을 잃 지 않을 수 있었다. 매우 감격한 노인은 허초가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으로서 객점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자 그를 자기집으로 초대하였다. 허초는 불감청이지만 고소원이었으나, 그래도 겉으로는 사양하는 말을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노인이 말했다. "이곳은 외진 고장이라 객점이 없다우. 손님께서 유숙하려면 어차피 민박을 해야 할 거요. 내가 젊은이의 성품에 반해서 초대하는 바이니 사양할 필요가 없소이다." 허초는 그의 성의가 매우 은근함을 보고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승락했다. 노인의 집은 얼마 따라가지 않아서 있었다. 노인이 정중하게 대하면서 손님을 안으로 모시니, 하인 한 사람이 쪼르 르 달려와서 허초를 접대하였다. 허초는 자리에 앉은 후 천천히 노인에게 여촌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노인이 말했다. "이곳 여촌에 여헌명(呂憲命)이란 자가 돌아오고, 다시 곽운박(郭雲撲)이 코빼기를 보이면서 그 들의 옛 부하들도 모여들지 않았겠소. 여헌명의 셋째동생인 여마(呂馬)란 자는 나쁜 짓만 골라 하 는 놈이지요. 그젯밤에 이곳에서 신에게 감사하는 연극을 했는데 여촌 사람들은 세력을 믿고 날 뛰는 그들에게서는 돈을 한 푼도 걷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연극을 막 시작하려고 할때 여가네 셋 째가 부하들을 데리고 와서 따지고 시비를 걸지 않았겠소. 뭐 자기네한테 돈을 걷지 않은 것은 무시했기 때문이라며 무대를 박살내서 금년 한 해는 액이 들도록 만들겠다는 거였지요. 나중에 사람들이 의논하여 연극에 든 만큼의 돈을 거두어 주고 사죄를 한 다음에야 겨우 무마시켰답니 다. 나쁜놈들 같으니라구! 듣자하니 다음달 초사흗날 산너머 대가장과 싸움을 벌인다고 합디다. 산 속에 감옥을 만들어 놓고 대가장 사람들을 잡아 가둘 준비를 하고 있다고들 하더군요. 어제는 또 진우의 장주와 나구란 자를 청해 왔다고 하더구만요. 이렇게 좋은 태평세월에 뭐가 못마땅하 여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싸움질을 하는지 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듣기에는 대가장의 장주는 대단한 인물로서 인간됨됨이도 바르다고 하던데, 어떻게 해서 이 흉악한 놈들과 못 사귀게 되었는지, 이번 난리는 예삿일이 아닌 것 같소이다그려." 허초는 아까 연극 무대 옆에서 이야기를 나눈 얼굴이 붉은 도인은 이 마을 사람이냐, 어쩌면 그 렇게 체구가 크냐고 넌지시 물었다. 노인은 이 말을 듣자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손님은 젊어서 그런지 언사가 조심스럽지 못하군요. 아까 내가 연극을 한창 재미나게 보다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니 그 도인이 내 뒤에 서 있지 않겠소. 내가 돌아보는 것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더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의 모습이 괴이쩍고 얼 굴이 붉은 것을 보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지 뭐요. 우리 마을은 여촌과 불과 오 리 정도 떨어져 있고, 이곳은 또 상담으로 가는 길목이라 나는 두 마을의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아는데, 이 도인은 본 적이 없거든. 그의 두 눈빛은 특히 무섭습디다. 보다시피 나는 단신이지 않소? 그런데 무심결 에 위를 쳐다보다가 그의 눈과 마주쳤지 뭐요. 무슨 눈이 그렇게 빛나는지 시선이 마주치자 도무 지 눈을 뜨지 못하겠습디다. 그의 체구, 붉은 얼굴과 두 눈, 긴 수염이 볼수록 사당 안에 모신 용 왕(龍王)님을 닮았더란 말이오. 게다가 오늘은 또 용왕님에게 드리는 연극을 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용왕님이 현신(現身)한 것이 아니고 누구이겠소? 그러니 금년 농사는 틀림없이 작년보다 훨 씬 잘될 것이오. 그러나 이때 알아보는 척하면 안 되지요. 만약 아는 척했다가는 복은 고사하고 도리어 화를 입기 십상이지요. 용왕님을 화나게 하면, 어쩌면 몇 년 전 여촌이 용신(龍神)에게 죄 를 지어 큰 홍수가 나서 온 마을이 결딴날 뻔했던 때처럼 될는지 압니까? 때문에 나는 매우 공경 하게 대답을 하고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다른 곳으로 숨어버려 용왕님이 조용히 연극을 보게 했답니다. 과연 내가 몇 발짝도 안 가서 뒤를 돌아보았더니만 그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더구 만.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가 있겠소? 틀림없이 은신법을 써서 모습을 감춘 거란 말 이오. 그분이 용왕님이 아니라면 누구겠소? 다행히 손님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내일 행보에 큰 변을 당할 뻔했소이다." 허초는 그 도인이 여촌에서 청해 온 사람이 아닌가 해서 물었던 것인데 용왕이라니, 그것은 참 말로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이런 시골 사람들은 대체로 단순하고 우직하기 때문에 이해를 시키 려 해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허초는 다시 물었다. "어르신 말씀대로 용왕님이 현신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제가 언뜻 듣기에 나구가 어떻고 하 던데, 그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노인은 잠시 주저하더니 대답하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나구에 대해서 물었다면 나는 결코 대답하지 않았을 거요. 용왕님께서 물었 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겨도 용왕님께서 보호해 주실 줄로 믿었지요. 용왕님께서는 나구에 대해 서 매우 관심이 있는 듯이 물으셨습니다. 나구는 원래 선골로 생긴 인물이었는데, 나중에 본성이 비뚤어져 버렸지요. 아마도 용왕님께서는 그와 인연이 있으므로 그를 개과천선시키려는 모양입니 다." 허초는 노인의 말을 들을수록 우스웠다. 이때는 시간이 많이 흘러 밤이 깊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하인이 들어와서 잠자리 를 갖추어 놓고는 쉬라고 한 다음 물러갔다. 그러나 침상에 누워서도 허초는 그 도인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내력을 짐작해 보려고 아무리 머리를 굴렸으나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이윽고 잠이 들었다. 날이 밝자, 그 주인 노인이 직접 와서 허초를 깨웠다. 허초는 세수를 하고 아침을 얻어먹은 후에 노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어제는 상담으로 간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와서 말을 바꾸기가 멋쩍어 허초는 하는 수 없이 상담으로 가는 척하다가 배웅나온 노인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야 산길로 접어들어 지름길을 택하여 여촌으로 향했다. 이윽고 여촌 가까이에 이르자, 노상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눈여겨 보았다. 허초는 자기의 얼 굴이 낯설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심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산개울을 돌아서니 멀리 여촌 마을이 보였다. 계속하여 걸음을 떼놓는데 갑자기 숲 속에서 두 사 나이가 칼을 들고 뛰어나왔다. 그중 하나가 큰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오는 사람이오?" 허초는 사나이가 더 따따부따하기 전에 백, 대 두 사람과 자기의 명첩을 주면서 자기가 온 이유 를 설명하였다. 두 사람은 내방자가 대가장의 셋째 장주임을 알자 상부에 보고 하기 위하여 즉시 뛰어들어 갔 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돌아와서 안으로 들라고 하였다. 허초는 그 두 사람을 따라 산채 안으로 들어갔다. 여헌명이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영접하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허장주, 우리가 이별한 지 한 달이 다 돼가는구려." 그리고는 정중하게 대하며 안으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허초는 여헌명이 자기가 어신동에서 잡혔던 일을 가지고 비꼬는 것을 보자 속으로 화가 났으나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 허초는 백기가 시킨 대로 말을 전하였다. "우리가 피차 이웃해 있으면서 어신동이 막힌 후로 몇 년 동안이나 왕래를 하지 못했습니다. 작 년에 장주께서 화산으로부터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진작 와서 인사를 드리려고 했었지요. 그래 서 백, 대 두 형님께서 저더러 어신동을 살펴보라고 하셨는데, 뜻밖에 귀촌의 사람들과 오해가 생 겼던 것입니다. 제가 돌아가자 백, 대 두 분 형님께서는 저를 몹시 꾸짖으셨기 때문에 진작에 이 곳에 와서 사과를 드리려고 했었으나 새해맞이 준비로 바빠서 오지 못했습니다. 설날이 지나고 보니 진우와의 약속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바삐 저더러 서신을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진우로 갔더니 진, 나 두분께서 이미 귀촌으로 가셨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백, 대 두 분 형님께서 는 이 사실을 아시고 이렇게 저를 보내셨습니다. 첫째로 귀촌에 저번 일을 사과하고, 둘째로 진, 나 두 분께 이 월 초사흗날의 일에 관해서 한 마디 여쭈어 보자는 것이 제 방문의 목적입니다. 뭐냐 하면 원래는 저희 쪽에서 진우로 가기로 했었으나, 만약 괜찮으시다면 저희 마을에서 약간 의 음식을 준비하여 진, 나 두 분과 귀촌의 여러분을 초대하여 술을 나누며 서로의 화기를 돈독 히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서신을 꺼내어 여헌명에게 주며 진, 나 두 사람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 다. 여헌명은 편지를 받으며 말했다. "진, 나 두 분께서는 본래 이월 초사흗날 진우에서 당신네 세 사람을 기다리려고 했었소. 그런데 뜻하지 않게 진장주의 어머님께서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우시는 바람에 놀라게 해드릴 수가 없어 어찌 했으면 좋을지 상의를 하려고 왔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귀촌에 보내어 약속 장소를 바꾸려고 하던 참인데 허형께서 마침 잘 오셨소. 수고스럽지만 돌아가거든 우리가 이 월 초사흗 날 귀촌으로 가서 폐를 끼치겠다고 전해 주시오." 허초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여헌명은 대문 밖까지 그를 전송하고 돌아가 버렸다. 허초는 이번 일이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순조롭게 해결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기뻤다. 귀로에 오른 허초가 아까 지나온 입구의 산기슭을 돌아서는데, 문득 숲 속에서 누군가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허초는 본시 치밀한 사람인지라 얼른 몸을 바위 틈에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자네 말은 너무 황당무계하네. 나이도 어린 처녀가 어떻게 그런 재주가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아무래도 믿지 못하겠는 걸." "자네가 뭘 안다고 그래. 세상에는 괴상한 일도 많은 법이야. 자네는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자 세한 것을 모르겠지만 우리 장주님도 이전하고는 완전히 달라지셨다네. 언젠가 웬 화상에게 봉변 을 당한 후 화가 나서 화산에 들어가서는 불을 토하는 신선을 만나 여러 가지 법술을 배웠다더 군. 작년에 산을 내려와서는 옛날의 기업(基業)을 새로 세우고, 이름을 천하에 날리려고 생각하나 봐. 게다가 새로 온 그 곽진인이란 분은 더욱 재주가 놀랍다네. 누가 봤다는데, 그분이 입을 벌리 니 한 줄기 불이 나와서 사람을 산 채로 태워 죽이더라는 거야. 작년 섣달 그름날 밤, 그 대가장 첩자의 무공은 또 얼마나 대단하던가? 우리 쪽 사람을 몇 명이나 상하게 했는데, 나중에 우리 장 주님과 나구 어른께서 나타나 그를 사로잡지 않았나? 어젯밤에 잡힌 그 계집은 경신법과 암기를 쓸 줄 알고 무예가 제법이었어. 장주님은 너무 깔보다가 그만 화살을 맞았지. 마침내 사로잡아 내 역을 물었지만 계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지 뭐야. 그래서 장주는 계집을 생매장시켜 화살을 맞은 분풀이를 하려고 하였는데, 곽진인이 그 계집의 용모가 예쁘장한 것을 보고는 마누라로 삼으려고 했다네. 이 어린계집은 성깔이 제법이어서 잡혔을 때도 죽이려고 할 때도 말 한 마디 안하더니, 자기를 마누라로 삼겠다고 하니까 대뜸 욕을 퍼붓기 시작하잖아. 곽진인은 성이 나서 그 계집을 나사만의 돌 감옥에다 가두어 버렸지. 자네는 그 계집이 대단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그보다 앞에 온 두 계집은 더욱 대단했다네." 그 사나이는 계속하여 금모모(金姆姆)의 문하인 <여비웅(女飛雄)> 하매(何梅), <여대붕(女大 鵬)> 최기(崔綺)의 이야기까지 주워섬겼다. 허초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또 한 여인이 잡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의협심이 불끈 솟아올랐 다. 그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하, 최 두 협녀는 원래 산으로 돌아가서 사부인 금모모와 몇 명을 청하여 이 월 초사흗날까지 대가장으로 오겠다고 했지. 그런데 혹시 사부의 초빙이 여의치 않자 우리를 볼 면목이 없어 단독 으로 여, 곽을 찾아가 사생결단을 벌인 것이 아닐까? 하지만 자기들로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처럼 무모한 짓을 할 리는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역시 하, 최 두 협녀의 소행은 아닌 것 같았다. 성질대로라면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 두 사나이를 사로잡아 자세한 내막을 물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떠날 때 백기가 재삼 조 심하라고 당부했을 뿐 아니라, 여, 곽, 나 세 사람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그 자신 더 잘 알고 있었고, 또 대낮이라서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기 실력으로 여, 곽, 나 세 사람과 싸운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몰래 잠입해 사람을 구출하는 것은 어쩌면 위험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영웅협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 의협 (義俠)의 여인이 호랑이굴에 갇혀 정조와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는데 그것을 알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자 웅심이 솟아났다. 그가 몸을 숨긴 곳은 바로 여촌의 입구였고, 이때는 시각이 진시 말에서 사시 초쯤이라 호남 사 람들은 아침을 먹을 시간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일어서려던 그는 문득 방금까지 숲 속에서 한참 동안 지껄이던 사나이들의 말소리가 뚝 그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만히 목을 빼어 그쪽 형 편을 살펴본 허초는 깜짝 놀랬다. 방금 이야기하던 두 사나이가 이미 누군가에게 결박당해 땅에 엎어져 있는 게 아닌가! 급히 숲 속으로 들어가서 보니, 두 사나이는 모두 아혈(啞穴)을 찍혀 꼼 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몸이었다. 허초는 그중 한 사나이의 혈도를 풀어주고는 누구에게 봉변을 당했느냐고 물었다. 그 사나이는 허초가 자기를 구해 주자, 자기 편인 줄로 알고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언덕 아래에서 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 리지 뭡니까? 그래서 꽹과리를 쳐서 알리려고 하다가 알리기는커녕 누군지 제대로 얼굴을 보기도 전에 혈도를 찍혀 버렸답니다. 땅에 넘어지고 나서야 보니 푸른옷을 입은 어린 계집애지 뭡니까? 그녀는 보검을 제 목에다 들이대고 나사만으로 가는 길을 묻고는 우리를 묶어놓고 가버렸습니다. 손이 저려 죽겠으니 빨리 좀 풀어주시고 첩자를 잡으러 가십시오!" 허초가 나사만으로 가는 길과 잡혀 있는 여자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언덕 아래에서 또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 사나이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넷째형님, 빨리 오세요. 여기 첩자가 있습니다!" 허초는 사나이가 사실은 자기의 정체를 알아보았다고 생각하자 깜짝 놀라 급히 그자의 아혈을 찍고는 한쪽으로 몸을 숨겼다. 언덕 아래에서 두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는데, 각자 손에 병기를 들고 있었다. 한 사나이가 말했 다. "또 무슨 일로 그리 법석을 떨고 있느냐?" 가까이 다가온 그들은 두 사람이 묶여 있는 것을 모자 대경실색하였다. "너희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들은 뛰어와서 두 동료의 결박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허초는 이제 지체할 수 없었다. 까마귀가 땅을 스치는 자세로 두 사나이 앞으로 뛰어나가자마자 두 사나이의 아혈을 찍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까 이야기를 나눈 자의 혈도를 풀고 보검을 들이대어 위협하며 잡혀 있다는 여 인에 관해 물어보았다. 사나이의 대답을 듣고 보니 그 여인의 용모나 몸매가 상영과 매우 흡사하 다고 여겨 깜짝 놀랬다. 그는 생각해 보았다. '아무도 어신동으로 넘어올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자가 말하길 산채에서 잡혔다고 하니 당연히 다른 길로 왔을 테지. 그러나 어신동을 통하지 않으면 대가장에서 여촌까지는 험한 산봉우리를 열 몇 개나 넘어야 하는 백 리가 넘는 산길이다. 내가 떠날 때가 이미 오후였고 상영과 운봉은 꼭 붙어 있었으니, 그렇다면 밤에 몰래 떠났구나. 결코 아무도 그녀 혼자 보내지 않을 테니까 말 이다. 그러나 밤에 출발하여 이곳으로 왔다면 그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어떤 방법으로 왔든지 간 에 그녀가 이렇게 빨리 올 수가 없을 텐데. 애석하게도 이 자들이 방금 자기를 결박한 여인의 얼 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구나. 만약 그 여인이 운봉이라면 잡힌 사람은 상영이 틀림없어. 아 니, 그녀가 상영이든 아니든 우선 구해놓고 보자.' 그는 즉시 나중에 온 두 사람의 허리끈을 풀어 먼저 두 사람의 경우 같은 방법으로 결박하였다. 그리고는 으슥한 바위 틈에다가 사람을 끌어다 숨겨놓고 나사만을 향해 떠났다. 스승과 파문 제자 失掌珠 凌翁扮老命 援弱女 飛劍化長虹 때는 벌써 여촌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난 시각이라 산중에도 점점 행인이 늘어갔다. 허초는 사람들 눈에 띄이는 곳으로 갈 수가 없어 으슥한 곳으로 몸을 숨기며 나아갔다. 이윽고 나사만에 도달하여 살펴보니 삼면이 높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한 면은 밑도 보이 지 않는 깊은 못이었다. 서쪽 암벽에는 석 자 정도 크기의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 동굴 옆에 있는 바위 위에는 두 사나이가 병기와 꽹과리를 들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절벽 위에서 동 굴까지는 십 장 정도나 되었으므로 길을 돌아 내려가 다시 못 옆으로 해서 기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허초는 못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숨을 죽이고 한 걸음 한 걸음 기어서 그 동굴에서 일 장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두 보초는 한참 재미나게 이야기하느라고 뒤에서 기습하려는 것도 모르 고 있었다. 허초가 그들 뒤에서 숨을 고른 후에 덮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바위 옆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휙 나타났다. 다음 순간 '쨍그랑!' 하고 꽹과리가 땅에 떨어졌다. 허초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정 신을 차려보니까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능운봉이 아닌가?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또 놀랍기도 했다. 혈도를 찍혀 넘어진 사나이에게 재빨리 앞으로 다가간 운봉은 허초가 무슨 말을 걸기도 전에 땅 에 떨어진 꽹과리를 주워 그 사나이의 팔에다 걸쳐 놓았다. 이미 아혈을 찍힌 두 보초는 발도 움 직이지 못하였다. 운봉은 그들을 묶지 않은 채 방금 이야기하던 그 자세대로 앉혀 놓았다. 상영이 오지 않았느냐고 허초가 급히 묻자 운봉은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동굴 안에 갇혀 있어요.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빨리 구해야 해요." 숲 속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발견되면 도망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허초도 운봉도 알고 있었다. 우선은 상영을 구하는 일이 급하므로 두 사람은 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몇 발짝도 들여놓지 않아서 굴의 통로가 큰 바위로 막혀 있을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밀어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허초는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운봉이 밖으로 나가 보초 하나를 끌고 들어와 아혈을 풀어주고는 이유를 물었다. 사나이가 말했다. "이 동굴은 입구는 작지만 안은 상당히 넓답니다. 곽진인께서 신력을 발휘해 몇 천 근이나 되는 바위로 막아버리고 겨우 세 치 정도의 구멍만 남겨놓아 아침과 저녁 음식을 넣어줄 수 있게 했습 죠. 곽진인 이외는 누구도 이 바위를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요." 듣고 난 허초는 보초가 설명한 음식 넣어주는 구멍으로 몇 번이나 상영을 불러보았으나, 안에서 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성격이 강한 상영이 혹시 자결하지 않았나 싶자,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보초에게 상영의 손발이 묶여 있는지 어떤지를 물었다. "묶다마다요, 교근(蛟筋)으로 묶었는 걸요!" 허초가 소리를 쳤다. "손발이 묶였다면 너희가 밥을 들여넣어 주어도 어떻게 밥을 가져다 먹는단 말이냐?" 성이 난 허초는 보초를 두 번이나 걷어찼다. 보초는 아픔을 참으면서 말했다. "저희들이 밥을 갖다줄 때는 막대기를 그녀가 앉아 있는 곳까지 밀어넣어 준답니다. 그러면 그 녀가 땅에 엎드려 먹을 수 있으니까요." 운봉은 그 사나이에게서 별달리 도움될 만한 것을 알아내지 못하자 아혈을 찍고 다시 바위 위에 앉혀 놓았다. 허초와 운봉은 다시 돌아가서 그 구멍으로 상영을 몇 번이나 불러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있는 힘을 다 써서 바위를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초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고 운봉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 두 사람이 이처럼 속수무책일 때 갑자기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곳곳에서 꽹과리 소리 가 일어나며 산곡을 울렸다. 두 사람은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더욱 힘을 주어 그 바위를 밀었다. 그러자 바위가 겨우 약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매우 기뻐하며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었다. 꽹과리 소리가 점점 가까와질 때, 별안간 한 가닥 푸른빛이 동굴로 날아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적이 온 줄로 알고 얼른 맞아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자 상대방이 검광을 거두며 다급히 말했다. "두 분은 위험이 코앞에 닥쳐왔는데 뭘 꾸물거리십니까? 빨리 나를 따라 도망갑시다." 두 사람이 정신을 차려 그 사람을 보니 조심원(趙心源)이었다. 심원은 두 사람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할 틈이 없으니 빨리 떠나자고 재촉하였다. 막 동굴을 나 서는데, 산 위에서 한 사나이가 강차(鋼叉)를 들고 뛰어내려 오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어디로 도망가려고 하느냐?" 심원은 검을 뽑아들면서 운봉과 허초더러 빨리 가라고 재촉하였다. 그리고는 그 사나이와 가볍 게 한 합을 겨룬 후 곧장 몸을 돌려 두 동료의 뒤를 좇아 달렸다. 산모퉁이를 두 개나 돌아 그들 은 한 동굴 앞에 다다랐다. 사방을 둘러보고 사람이 없음을 안 심원은 급히 허초, 운봉을 불러세 웠다. 그때 그 사나이도 막 도착했다. 허초는 그 사나이가 끝까지 쫓아오는 것을 보고 암기를 던지려고 했다. 그러자 사나이가 큰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세 분은 아직도 들어가지 않고 뭘 꾸물거리는 거요?" 그러자 심원이 허초와 운봉에게 설명했다. "우리를 쫓아온 저 사람은 우리편이오." 세 사람은 급히 동굴로 몸을 숨겼다. 그러자 사나이는 온 길을 다시 되돌아 갔다. 심원, 허초, 운 봉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한 젊은 여인이 나타나더니 그들을 정중히 맞아서 뒷동굴로 안내했 다. 몇 번이나 방향을 꺾어돌더니 이윽고 한 돌절구 앞에 다다랐다. 그녀가 돌절구를 치우자 석벽에 몸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나타났다. 그들은 여인을 따라 구 멍으로 기어 들어갔다. 원래 안은 매우 넓은 곳이었다. 그 젊은 여인이 말했다. "세 분은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가서 차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가버렸다. 잠시 후에 아까 그들을 뒤쫓던 사나이가 돌아왔다. 심원은 허초와 운봉에게 그 사나이를 소개하 였다. 그는 바로 위청(魏靑)이었다. 허초가 심원에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어보고서야 모든 사실 이 납득되었다. 어제 허초가 서신을 전하러 가겠다고 나설 때 혹시 잘못될까 걱정한 심원은 그가 떠난 후에 백 기에게 설명을 하고 허락을 얻어 몰래 그의 뒤를 밟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허초가 바위 틈에 몸 을 숨기고 숲 속에 있는 두 사람의 말을 엿듣는 것을 보고는 이 사람이 쓸데없는 참견을 하려는 구나 하고 염려했다. 허초가 자신의 역량을 생각하지 않고 무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용감한 협의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인을 구하러 같이 가자고 허초를 부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바위 아래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와 숲 속에 있는 두 사람의 혈도를 찍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운봉이었다. 그때서야 심원도 갇힌 여인이 상영임을 알아차렸다. 나가서 두 사람과 만나려고 하다가 심원은 문득 다른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차라리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뒤에서 구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살금살금 뒤를 따라가는데 앞에서 한 덩치 큰 사나이가 오는 것이 보였다. 심원이 한쪽 으로 몸을 숨겨 가만히 보니 바로 <육지금룡(陸地金龍)> 위청이었다. '일전에 철사도인(鐵娑道人)을 찾으러 갔다가 그를 만났을 때 내가 대가장으로 가자고 하자, 그 때 그는 일이 있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혹시 저 자가 여, 곽의 편 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때 위청이 이미 그의 가까이 다가왔다. 심원은 앞으로 뛰어나가며 위청을 불렀다. 심원을 보자 깜짝 놀란 위청은 얼른 숲 속 으슥한 곳으로 끌고 들어가서 여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심원은 그가 매우 충직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했다. 다만 운봉과 허초가 온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위청이 말했다. "나는 성도에서 추운수(追雲搜) 노대선배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내 처가 여헌명과 동향 사람인 것을 알고는 나에게 한 가지 일을 분부하시더군요. 사실 여헌명이 어렸을 때 못된 짓을 많이 하 여 부모에게 쫓겨났을 때 내 장인이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어도 관계는 매 우 깊답니다. 추운수 어른은 어떤 곡절인지는 모르겠지만, 능씨성을 가진 자기의 먼 친척이 여가 에게 해를 입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더러 여헌명에게 가 있다가 후에 능씨 부 녀가 이곳에 와서 함정에 빠질 때 그들을 구해 주라고 하시더군요. 아울러 몰래 구해 주어야 하 며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답니다. 그날 그대가 대가장으로 같이 가자고 했 을 때 내가 완곡히 거절한 것은 그분과의 그런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가 이곳에 오자, 여헌 명은 장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으므로 잘 대해 주었습니다." 위청 부부는 처음 여헌명의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들이 나사만의 석동을 감옥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알고는 공사 감독을 시켜달라고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래서 감독 일을 하던 중, 위청은 석동 왼쪽에 또 한 석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굴은 안이 매우 넓어 열 몇 개나 되는 자연 석실이 있고, 불을 피우지 않아도 될 만큼 따뜻했다. 위청은 여헌명의 집에 그 잡동사니 졸개들과 같이 있는 것이 싫어 여헌명에게 그 석동으로 가서 머물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여, 곽 두 사람은 마침 감옥을 만든 후에 사람을 보내 지키려고 하 던 참이었으므로 사람됨이 충직한 위청이 자청해서 그 일을 맡겠다고 하자 즉시 승락했던 것이 다. "그 감옥은 대가장 사람들을 잡아 가두려고 지은 것이라 이십여 일이 넘도록 비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검술에 능할 뿐만 아니라 요법도 대단한 것을 보자 당신들 걱정을 무척 했지요. 그 런데 어젯밤 날이 새려고 할 때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한 여인이 곽운박의 <유황미혼사(琉 璜迷魂砂)>를 훔치려고 했답니다. 그 미혼사는 원래 요도의 도포 속에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저녁 식사를 할 때 도포를 갈아입고 나왔던 겁니다. 미혼사를 넣어둔 도포는 방에다 걸어두고 대청에 나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지요. 이야기 도중에 미혼사의 위력을 자랑삼아 말했는 데, 여인은 그 말을 엿듣고 요도의 방으로 훔치러 들어갔답니다. 그녀가 막 훔치려고 할때 마침 여헌명이 지나가다가 낌새를 알아채고 들어와 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답니다. 여헌명은 그녀의 미모가 뛰어난 것을 보자 곽에게 선사하려고 사로잡으려 했지요. 그러나 그녀의 재주도 보통이 아니어서 여헌명의 얼굴에다 칠성연주노를 한 방 먹였답니다. 나중에 요도가 달려와서 협공을 가 하여 겨우 그녀를 사로잡았답디다. 요도는 그녀를 자기 계집으로 삼으려고 우선 감옥에 가두어 두고는 그녀의 성이 풀릴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졸개들을 보내어 내 지휘를 받아가며 지 키게 했지요. 나는 그 여인이 추운수 노대선배님의 친척이 아닌가 싶어 그녀를 구하려고 해도, 그 굴을 막은 바위는 그 요도 이외는 누구도 옮길 수 없어 고민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심원은 이 말을 듣고서야 붙들려 있는 것이 상영이며, 허씨 성을 가진 친구와 능씨 성을 가진 아가씨가 상영을 구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위청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낮에는 경비가 엄할 뿐 아니라 밤이라 해도 그 바위는 요도가 법술을 써서 막아놓았기 때문에 그가 직접 오기 전에는 방법이 없어요. 우선 그 두 사람을 우리 집에 숨겨놓았다가, 밤에 다시 방법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요 도가 눈치챈다면 그 두 사람마저 잡히게 됩니다." 심원은 이 말을 듣자 위청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나사만에 도착해 보니 허초와 운봉은 이 미 경비하는 사람의 혈도를 찍고 바위를 움직이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는 참이었다. 심원과 위청은 맞은편 절벽에서 이러한 상황을 내려다보고는 소리를 쳐서 그들을 부르려고 했 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에서 꽹과리 소리가 일어났으므로 이미 발각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심원은 급히 위청의 거처인 동굴을 묻고는, 그에게 이렇게저렇게 대처하라고 계교를 일러주었다. 그리고는 급히 몸을 날려 동굴로 들어가 허초와 운봉을 불렀다. 위청은 세 사람이 자기가 사는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엉뚱한 쪽으로 첩자를 쫓는 척하 며 계속 소리를 질렀다. 얼마 안 있으니 여, 곽 두 사람이 소식을 듣고 쫓아왔다. 그들은 위청을 보자 어떻게 된 일이냐 고 물었다. 위청이 말했다. "저는 오늘이 첩자를 잡은 첫날인지라, 혹시 그녀가 도망이라도 할까 봐 아침을 서둘러 먹자마 자 동굴로 가보았습니다. 막 절벽 앞에 도착했을 때 꽹과리 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저는 깜짝 놀 랐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말든 동굴만 지키려고 생각했었지요. 마침 보초 두 사람이 동굴 앞에 그대로 앉아 있기에 마음을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굴 안에서 사내 두 놈과 계집 하 나가 뛰어나오길래 저는 급히 쫓아갔답니다. 그러나 그 세 사람이 모두 비검술을 할 줄 누가 생 각이나 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곽대인의 법술이 무서운 줄을 아는지, 저랑 싸우지 않고 곧장 검광을 타고 동남쪽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곽운박은 이 말을 듣자, 계집이 도망이라도 가지 않았나 싶어 급히 동굴로 갔다. 사람들을 데리 고 동굴 앞으로 가서야 보초를 서던 졸개들이 이미 아혈을 찍혔다는 것을 알았다. 혈도를 풀어주 고 경위를 물어보니 위청이 말한 것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동굴을 막아논 바위가 그대로였으므로 여자가 도망가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법술을 써서 바위를 밀어젖힌 다음 횃불을 들고 안으로 들 어갔다. 이때 별안간 동굴 안이 확 밝아졌다 싶자 한 가닥 빛이 동굴을 빠져나가 공중을 뚫고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렸다. 바닥을 보니 계집을 결박했던 교근끈만 남아 있을 뿐 정작 사람은 종적도 보이지 않았다. 곽, 여 두 사람은 요법과 검술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곽운박은 성이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감쪽같이 속았구나! 내가 법술을 써서 이 바위를 옮겨다 놓았고, 또 부적으로 막았기 때문에 태 산만큼이나 무거워 어떤 신력으로도 들어낼 수 없었는데, 그녀에게 밥을 주는 구멍을 남기지 않 았어야 했어. 계집을 구한 자는 검광을 운용하여 그 구멍으로 들어갔던 거였어. 그렇지만 그 계집 년이 신검합일을 하지 못하는지라 끌탕을 하다가 내가 바위를 옮기는 틈을 타서 계집을 꿰어차고 도망쳤군." 위청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통쾌함을 금치 못했다. 여, 곽 두 사람은 굴러들어 온 호박덩이가 또 도망쳐 버리자, 매우 애석해 하며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심원 일행은 상영이 어떤 사람에게 구출되었다는 말을 듣자 몹시 기뻤고, 또 한편으로 의아하기 도 했다. 대가장 사람들 중에는 그런 재주가 있는 사람이 없는데 누구란 말인가? 그중에서도 특 히 허초의 궁금증은 한결 더했다. 상영이 이미 구출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으므로 운봉은 일단 대가장으로 돌아가서 동정을 살펴보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또 꽹과리 소리가 멀리서 들 려왔다. 허초는 상영이 다시 독수에 걸려든 게 아닌가 싶어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위청이 잡아당기며 말했다. "여러분은 지금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우선 내가 나가서 동정을 살핀 뒤에 다시 작전을 세웁시다." 심원도 위청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허초와 운봉을 막으면서 위청더러 빨리 나가 알아보라고 했다. 위청은 그들이 아직 아침을 먹지 못한 사실을 문득 생각해냈다. 그래서 부인 여씨에게 서둘러 아침 준비를 하라고 당부하고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여씨는 재치가 있는 사람이어서, 심원 일행이 동굴에 들어오자마자 아침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잠시 후에는 조반상을 차려 내왔다. 일행은 마침 시장하던 터라 사양하지 않고 각자 배불리 먹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위청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상영에게 이런 불상사가 벌어진 원인이 자기에 게 있음을 안 허초는 마음이 몹시 조급하고 후회도 되었다. 비록 탈출했다고는 말하지만, 아무 탈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방금 또 꽹과리 소리가 났으니 길(吉)인지 흉(凶)인 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더 기다려도 위청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허초는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동굴 밖으로 나가 동정을 살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심원이 말렸다. 한쪽에 앉아서 여씨를 상대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던 운봉 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큰일났구나!" 그리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녀가 막 석벽 앞에 이르렀을 때 밖에서 돌절구를 치우며 사람이 기어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하 마터면 부딪힐 뻔하였다. 운봉이 자세히 보니 바로 위청이었다. 운봉과 허초는 방금 들은 꽹과리 소리는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물었다. 위청이 말했다. "대소저는 아무 일 없고, 도리어 능소저의 어르신네와 한 젊은이가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만약 공중에서 한 얼굴 붉은 도인이 내려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나구놈의 손에 크게 당했을 것 입니다. 지금 어르신네는 바로 그 도인이 구해서 떠났습니다. 그 얼굴 붉은 도인은 떠나면서 또 말하길, 대소저도 자기가 구해 갔다고 하더군요. 그 의미는 아마도 나더러 들으라고 한 것 같았습 니다. 대소저가 이미 위험을 벗어났으니, 여러분들도 오래 지체하지 마시고 오늘밤에 돌아가십시 오!" 방금 운봉이 갑자기 다급해서 소리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자기가 떠날 때 아버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자기가 떠난 것을 알면 틀림없이 쫓아올 아버지가 아닌가. 자기는 상영을 구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늙은 아버지의 위험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방금 꽹과리 소 리를 듣자, 문득 그 생각이 났다. 그녀는 대번에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은 느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기를 찾아왔다고 생 각하고는 생사를 돌볼 틈도 없이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했었던 것인데, 지금 위청의 말을 들으니 과연 자기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상영의 일이 누구보다도 궁금한 것은 허초였다. 그는 위청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위청은 성 질이 급한 사람인지라 운봉과 허초가 번갈아 가며 다그쳐 묻자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좋을지 몰 랐다. 위청의 성질을 아는 심원이 허초와 운봉을 가로막고는 위청에게 말했다. "이제 능노영웅과 대소저가 위험을 벗어났으니 급할 것이 없어요. 그러니 처음부터 천천히 이야 기해 보십시오." "그럼 처음부터 이야기하지요. 아까 내가 동굴을 나갔더니 산채 앞에서 네 사람이 한창 어울려 싸우고 있는 중이었소. 한 떼는 노인과 청년이고, 상대편은 나구와 진장태더란 말입니다. 가만히 보니 노인과 청년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는데, 노인 쪽이 한 단계 고수더군요. 싸움의 양상을 보 니 진장태가 상대인 청년을 당해내지 못하여 결정적으로 밀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구가 교활하 게도 그 청년의 어깨에 무슨 암기를 쏘았단 말입니다. 암기를 맞은 청년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 고 쓰러져 진장태에게 그만 잡히고 말았지요." 노인은 청년이 잡힌 것을 보자 더욱 성이 나서 평생의 힘을 써서 절기를 펼쳤다. 나구는 원래 극도로 음흉한 놈이어서 실실 웃으며 피해다니다가 갑자기 독수를 쓰곤 하였다. 노인은 온몸이 땀에 젖었고 숨을 헐떡거렸다. 그때서야 위청은 나구라는 놈이 노인을 지치게 만든 다음 결정적 인 순간에 살수를 쓸 작정이란 것을 알았다. 관전하던 위청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서라도 그 노인을 도 우려 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한 가닥 무지개가 내려오더니 곧이어 얼굴이 붉은 도인이 나타 났다. 그러자 나구는 깜짝 놀라며 땅에 엎드려 뜻밖에도 계속 절을 하는 것이었다. 도인은 나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노인과 청년을 꿰차더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도인은 떠날 때 큰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돌아가서 그들에게 말하게. 자네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소저도 내가 이미 구해 놓았 다고 말이야." 말하면서도 도인의 눈길은 위청에게 향해 있었다. 위청은 나구나 그 동아리들이 눈치를 챌까 봐 겁이나 얼른 한쪽으로 몸을 비켰다. 나중에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노인과 청년은 처음 나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 하더란 것이다. 경비병이 나구에게 통보하러 간 참에 공교롭게도 여삼(呂三)이 어떤 집 문 앞에서 부녀자를 희롱하는 광경이 두 사람의 눈에 띄었다. 그들은 그것을 말리려고 했다. 그래서 싸움이 벌어졌다. 여삼이 청년에게 맞아 쓰러지자 당항한 경비병들은 호각과 꽹과리를 울렸다. 이때 나구가 현장에 나타났다. 노인은 나구를 보자마자 즉각 자기 딸과 대소저를 돌려달라고 요 구했다. 만약 돌려주지 않는다면 사생 결단을 내겠다는 것이었고, 그러자 나구는 능소저는 여기에 없고 대소저도 이미 탈출했다는 말을 하지는 않고, 도리어 '오래 전부터 고명은 익히 들었소이다. 따님을 돌려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우선 나를 이겨야 할 것이오'라고 결투를 신청했다. 이에 대해 능조는 단독으로 싸우자고 했다. 자기가 지면 머리를 바위에 부딪혀 자결할 것이며, 만약 이긴다면 딸을 돌려받는다는 비장한 조건을 내걸었다. 두 사람이 바야흐로 대결을 벌이려고 하는데, 나구에게 몇 수 배운 바가 있는 진장태가 얕은 솜 씨를 믿고는 청년한테 말을 걸어 약을 올렸다. 그리하여 결국은 네 사람이 두 패로 나누어 싸우 게 되었던 것이다. 여, 곽은 그래도 강호의 규칙을 아는지라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능조가 얼굴 붉은 도인에게 구출되어 사라지자 뒤늦게 검을 방출하였지만, 그 도인은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여헌명이 곽운박에게 말하는 것은 들으니 그 도인은 아미파의 검선으로서 나구의 사부라고 합 디다. 또 그들은 그 도인이 능노영웅을 구출한 이상 틀림없이 대가장을 도울 것이라며, 자기네들 도 원군을 몇 명 더 청해 와야겠다고 했어요. 나는 이 말을 듣다가 그대들이 조급해 할 것 같아 서 급히 돌아온 것입니다." 운봉은 늙은 아버지가 나구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말을 듣자 매우 마음이 아팠다. 또 그 청년은 틀림없이 자기의 약혼자 유윤중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도인의 손에 구출되어 무사히 대가장 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자기가 와 있지 않은 것을 알면 여전히 걱정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즉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자기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위청이 몇 번이나 나가서 상황을 살펴보았지만, 어젯밤부터 계속 경비가 엄하여 밤에도 도망가 기가 어렵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만 심원이 몰래 뒷산으로 나가 검광을 타고 돌아가서 그들을 안심시키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심원의 비검술은 아직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있는 경지 에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허초와 운봉이 조급해 하였으니 하는 수 없었다. 심원은 위청에게 동굴 밖으로 나가 동태를 살펴봐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밖으로 나갔 다. 일단 산봉우리 둘을 넘어가서 높은 곳에 서서 살펴보았는데, 곳곳에 경계가 엄하여 아침에 들 어올 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래서 뒤쪽으로 돌아서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검광을 타고 솟아올라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갑자기 뒤쪽에서 파공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 니 한 가닥 푸른빛이 전광석화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심원이 그 검광을 보니 아미파 문하의 검광 같았다. 그러나 뭣 때문에 자기를 쫓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검광은 눈 깜빡할 사이에 다가왔다. 심원은 원래 신중한 사람이었다. 자기의 비검술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쫓아오는 사람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급히 검광을 아래로 숙였다. 그 사 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심원이 땅에 내려서자 그 사람도 따라 내 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은 심원을 힐끔 쳐다보고서 갑자기 흉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또 무슨 대단한 실력자인 줄 알았지. 몇 번이나 여촌에 와서 말썽을 핀 놈이 바로 네놈이 구나." 심원은 땅에 내려설 때 이미 그가 나구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로서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었다. "당신과 나는 전혀 안면이 없고, 나는 그냥 이곳을 지나가는 중인데,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구려. 내가 보기에 당신의 검광을 보니 아미파 문하인 것 같은데, 나랑 아무런 원한도 없으면서 이렇게 쫓아와 어떡하겠다는 것이오?" "내가 네놈의 정체를 모를 줄 아느냐? 그날 장사의 주점에서 네놈을 보고 수상하다고 여겼지만, 그때는 내가 일이 있어서 그냥 두었다. 그런데도 네놈이 스스로 여기에 나타나서 말썽을 피우다 니,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인 줄 알아라!" 말을 마치자 심원의 대답도 듣지 않고 검광을 발출하였다. 심원은 더 이상 변명해도 소용이 없 고, 도망갈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는 수 없이 마주 검광을 발출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 밖에 없었다. 나구는 스승인 <만리비홍(萬里飛虹)> 동원기(瞳元奇)의 진전(眞傳)을 제법 많이 터득하였다. 동 원기가 늦게사 그의 심성이 바르지 못함을 알고는 비검을 빼앗고 쫓아내었다. 그런데 나구는 매 우 후회하며 애걸복걸하고 또 많은 맹세를 함으로써 비검은 빼앗기지 않고 쫓겨날 수 있었던 것 이다. 나구는 장사로 돌아온 후 차츰 옛날의 못된 습성이 살아났고, 위홍(衛洪)을 찾아 복수한 후 에 진, 여, 곽 등과 한패가 되어 더욱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오늘 능조가 딸을 찾으러 와서 이전에 나구에게 베푼 은덕을 내세워 딸을 돌려달라고 했을 때도 나구는 양심의 가책은커녕 도리어 능조를 지치게 만들어 죽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의 스승인 <만리비홍> 동원기가 나타난 것이다. 순간 나구는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고 여 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동원기는 파문 제자에게 냉소만 한 번 보냈을 뿐 처벌하지 않고 능조와 윤중을 구해서 떠나버렸다. 나구는 동원기가 대가장을 도와주면 결코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을 알았다. 여, 곽 두 사람은 나구 처럼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강적이라고 느꼈다. 그때 마침 한 조력자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성 도에서 아미파와 싸웠던 <금신나한(金身羅漢)> 법원(法元)이었다. 여촌 사람들은 마치 만리장성 을 얻은 듯이 기뻐하였음은 물론이었다. 법원은 악당 나구를 보자 금방 죽이 맞았다. 그래서 나구에게 방금 있은 일을 물어보고는, 나구 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자청했다. 나구는 이렇게 대단한 스승을 얻자 즉시 또 간덩이가 부어 올라 동원기를 뒤로 제껴놓았다. 법원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우두머리로 추대하자 곧 책임을 분담하여 주는 한편, 나구와 여헌명 두 사람에게는 오늘부터 산채 옆에 있는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주위를 살피게 하였다. 대가 장 쪽에서 고수가 나타날 경우 당해낼 수 있으면 잡아버리고, 당해내지 못하겠으면 빨리 통보를 하여 도망가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법원이 왔을 때 위청은 마침 동굴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 같은 후속 사정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다. 따라서 지금 심원의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놓이게 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묘인 요개강 玉淸師託借神火針 追雲搜初試桃花腸 심원이 어떻게 나구의 적수가 될 수 있으랴! 서로 맞붙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구의 검광에 억눌린 그의 검광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심원은 숨을 몰아쉬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나구는 심원의 낭패한 모습을 보자 크게 웃으며 끊임없이 심원을 약올렸다. 나구가 마침내 독수를 펼쳐 심원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할 때였다. 돌연 두 가닥 붉은빛과 두 가 닥 푸른빛이 쏜살같이 공중을 가르며 다가왔다. 그중 한 여인이 소리쳤다. "바로 저 도둑놈이다!" 그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즉각 한 가닥 붉은빛이 나구를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적의 숫자가 많 을 뿐 아니라 검광도 사나운 것을 보자 사태가 불리함을 깨달은 나구는 곧장 검광을 타고 줄행랑 을 놓고 말았다. 겨우 숨을 가다듬은 심원은 방금 나타난 네 여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중 한 사람은 바로 <여비웅> 하매였다. 하매는 심원의 인사를 받자마자 곧장 일행인 세 여인과 함께 나구를 쫓아가 려고 서둘렀다. 그때 돌연 폭포와 같은 한 줄기 무지개가 공중에서 내려오며, 수염이 길고 얼굴이 붉은 도인이 나타났다. 심원 이외에 그 네 여인 중에서 두 여인이 그를 알아보았다. 바로 본문 선배인 <만리 비홍> 동원기였던 것이다. 그들은 급히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동원기가 말했다. "여촌에는 지금 금신나한 법원이란 자가 합세했으니, 너희들은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해라. 우선 대가장으로 돌아갔다가 사람들이 다 모이거든 다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는 빨리 돌아가라고 재촉하였다. 그를 아는 두 여인은 나머지 일행을 불러 노대선배에게 인사를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동 원기는 이미 공중을 차고 가버린 다음이었다. 하매는 그래도 여촌으로 가서 동정을 살펴보려고 했으나, 일행이 끝까지 말려 하는 수없이 대가 장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도착하자 백기가 능조, 윤중, 상영과 함께 문 앞에서 반갑게 맞아들였다. 모두가 인사를 한 후에야 네 여인의 신분이 밝혀쳤다. <여비웅> 하매와 <여대붕> 최기를 제외 한 두 여인은 바로 성도 벽사촌 옥청관에 머물고 있는 <여공공(女空空)> 오문기(吳文琪)와, 황산 (黃山) 찬하대사(餐霞大師)가 새로 받아들인 득의(得意)제자 주경운(周輕雲)이었던 것이다. 하매와 최기가 형산으로 돌아갔을 때 스승인 <금모모> 나자연(羅紫煙)은 친구를 방문하러 떠나 고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선화로 가서 사형인 나신(羅新)을 찾았는데, 그녀는 부재중이 었다. 다급해진 하매는 우선 산으로 돌아가서, 스승의 단약을 꺼내가지고 더럽혀진 최기의 보검을 담 금질하여 원상회복을 시켰다. 그리고는 사매인 향방숙(向方淑)에게, 스승이 돌아오면 경과를 이야 기하고 대가장으로 와 주십사 말씀드리라는 당부를 하였다. 자기는 최기와 함께 검광을 타고 황 산으로 가서 친구인 오문기를 찾아 도움을 청할 참이었다. 막상 황산에 도착해 보니 오문기와 주경운, 주문(朱文) 등 세 사람은 이파와 싸우러 성도로 갔다 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성도로 가서 옥청관을 찾아들어 마침내 오문기를 만나 찾아온 용건 을 설명했다. 오, 주 두 협녀는 마침 성도에서 할 일이 없어 심심하던 차였고, 게다가 오문기와 하매는 의자매였기 때문에 즉시 도와주겠다고 승락했다. 네 사람은 먼저 여촌에 가서 여, 곽 두 사람을 골탕먹인 후에 대가장으로 가서 사람들을 만날 작정이었다. 막 여촌에 도착한 그녀들은 심원과 나구의 결투장면을 목격하게 되었고, 하매는 심원 과 나구를 알고 있었으므로 즉각 내려가서 심원을 도와주었다. 만약 동원기가 법원이 여촌에 있 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여, 곽 두 사람과 결판을 내려고 달려갔을 것이다. 모두가 인사를 한 후에 심원은 능조, 윤중, 상영 등에게 운봉과 허초가 위청의 거처에 있음을 밝 혔다. 세 사람은 몹시 걱정이 되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백기가 말했다. "만약에 밤이 되어도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람을 청하여 구하러 가야겠소." 그러자 황현극(黃玄極)이 말했다. "빈도가 이곳에 온 후로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여촌에서는 공중까지 경비하고 있고, 능소저와 허아우는 모두 비검술을 못하니 밤이라 할지라도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빈도가 지금 가서 그들을 데리고 오지요. 만약 더 시간을 끌다보면 위청 부부마저 불리하게 될 것입니 다." 사람들은 현극의 말에 매우 경복하였으며, 하매와 경운 등 젊은 여인들이 함께 가겠다고 자청하 고 나섰다. 그러나 현극은 사람이 여럿이 가서 번거롭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기에게 눈짓 을 보냈다. 백기가 말했다. "네 분 협녀는 먼 길을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그러니 성의는 매우 감사하지만, 좀 쉬어야 할 것이외다. 황도장 혼자 가시되, 만약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네 분께서 수고를 해 주시오." 오문기도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고 느꼈다. 게다가 황현극은 현진자(玄眞 子)의 제자이니 실력이 대단할 것 이라 믿어 혼자 가는 것이 좋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백 기를 도와서 동료들을 말렸다. 하매와 경운도 오문기의 말을 듣자 자제를 하였다. 현극이 떠난 후에 상영은 네 여인을 내실로 데리고 가서 옷도 갈아입고 세면도 할 수 있게 했 다. 대가장에서는 네 여인이 합세하였고, 또 동원기가 암암리에 도와주는 터라 사기가 더욱 높아 졌다. 상영은 네 여인이 자기와 나이도 비슷한데 모두 비행절적의 재주를 가진 것을 보고는 매우 부러 워했다. 운봉이 돌아오면 상의하여 그녀들한테서 검술을 배울 수 있도록 소개를 부탁해야겠다고 속으로 벼르었다. 한편 현극은 위청이 살고 있는 동굴로 가서 찾아온 목적을 말하고는 운봉과 허초를 만났다. 날 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위청이 먼저 나가 상황을 살펴보니, 오늘밤의 공중 경계는 나구가 맡고 있었다. 그런데 나구란 자는 무예가 아무래도 여헌명보다 약간 못한지라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 다. 그래서 그는 후미진 길을 택하여 마을 입구까지 간 후에 산길을 돌아 두 사람을 배송하고는 대가장으로 돌아갔다. 허초와 운봉이 무사히 대가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경을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초조하게 기다리다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매우 기뻐했는데, 다만 상영은 허초에 대해서 여전히 담담 하게 한두 마디 건넨 후에는 돌아서 버렸다. 모두가 서로 마음이 맞아 즐겁게 이야기를 했지만, 유윤중과 허초만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 면서도 이야기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눈만 멀뚱멀뚱하였다. 그래도 유윤중은 가끔 운봉이 쳐다봐 주기라도 했지만, 허초는 상영에게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다. 허초는 한숨을 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상영은 그런 허초의 마음속을 꿰뚫어보고는 운봉을 쳐다보며 입을 삐쭉거리며 웃 었다. 그들은 모두 밤 늦도록 이야기를 했다. 시간은 빨리도 지나가 어느덧 이 월 초하루가 되었다. 백기는 사람을 시켜 광장에다 나무판자로 단을 세 개 만들었다. 하나는 빈객용이고, 하나는 주인 용이며, 중앙의 것은 타뢰대로 사용할 것이었다. 대가장 문 앞에서 광장에 있는 단까지 십 장 정도의 거리에는 날이 양쪽으로 선 단도와 매우 가 는 모래로 된 두 가닥의 길을 만들었다. 또 객청을 깨끗이 청소하여 상하로 주연석을 차릴 수 있 게 준비하였다. 그런 후에 황현극에게 열 장 정도의 초청장을 여촌에다 갖다주라고 지시했다. 여 촌의 주요 인물들에게 초사흗날 아침 이곳에 와서 술잔을 나누며 진, 유 두 집안의 화해를 도모 하자고 하였다. 여촌에 도착한 현극은 여, 곽 두 사람을 만나서 찾아온 이유를 말하였다. 그러자 여, 곽 두 사람 은 얼굴에 조금의 악의도 띠지 않고 오히려 정성껏 대해 주었을 뿐 아니라 시간에 맞추어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여, 곽 두 사람은 현극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동해삼선> 현진자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번 싸움에 또 아미파 사람이 개입되어 있을 줄 알고 속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현극이 돌아간 후에 <금신나한> 법원과 상의를 하였다. 법원은 성도 싸움에서 아미파에게 패한 후 원래는 허비랑(許飛娘)을 찾아가서 복수 계획을 상의 하려던 참이었는데, 도중에 여, 곽 두 사람이 화산에서 여촌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화산 열화조사(烈火祖師)가 이번 성도에 도우러 오지 않은 이유를 알고 싶었던 그는 우선 그들 두 사 람을 만나 그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리고 생각하였다. 여촌에 와서 두 사람을 만나보고서야 그는 그 이유를 알았다. 열화조사는 본래 도우려고 했었으 나 오랫동안 수련한 <열화뇌음검(烈火雷音劍)>이 완성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니 우담(神尼 優 曇)의 경고를 받았기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로소 사정을 이해한 법원은 작별을 고하고 황산의 허비랑을 찾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 곽 두 사람이 부탁하는 바람에 뿌리치지 못하여 대가장을 쳐부순 후에 떠나기로 계획을 바꾼 것이 다. 뿐만 아니라 법원은 그 두 사람을 이용하여 다음에 열화조사의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도 있었 다. 또 대가장 쪽에는 무예가 고강한 사람이라곤 손꼽을 정도고, 동원기를 비롯해서 검술을 할 줄 아는 이가 두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모두 그의 안중에 없었다.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을 보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아미파가 뭐 대단하다고 그러시오? 다만 백가 난쟁이 영감이 이 부근에 살고 있어 약간 꺼림직 하지만, 다행히 날짜가 촉박하니 그가 모를 수도 있을 거요. 그들은 동원기만 믿고, 소승이 여기 에 온 사실은 모르니, 그때 상황을 보고서 행동합시다. 소승은 최후에 나타나서 그들이 손을 쓸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만약 그들이 백가 난쟁이 영감을 청해 오면 우리는 그냥 화산으로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난쟁이 영감이 설마 이 시골 사람들을 괴롭히겠소? 그땐 그대의 사부께서 열화검을 연성한 후에 다시 그들을 찾아 복수하면 되는 거외다." 두 사람은 법원의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한동안 상의를 한 후에 대가장 으로 사람을 보내 서신을 전하게 하였다. 서신은 간단한 내용을 담았다. 즉 쌍방은 오랜 이웃이기 때문에 아무도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때문에 진, 나 두 사람과 함께 약속 시간에 귀촌으로 가 겠다. 연회를 가지기 전에 진우와 대가장이 화해를 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전한 사람이 돌아간 후에, 심원이 백기에게 말했다. "여촌이 이렇게 좋은 말로 나오는 것을 보니 이상하군요. 우리 쪽에 고강한 조력자가 있다는 사 실을 알고 있지 않다면 무슨 간계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더욱 조심해야 할 것 같습 니다." "지당한 이야기요. 그들이 겉으로 예를 갖추며 뒤로 무슨 꿍꿍잇속을 감추고 있는 듯합니다. 모 레 우리도 겉으로는 특별히 공손하게 대하면서도 암암리에 대비는 해야 할 것입니다." 밤이 되자, 문득 한 수하인이 들어와서 보고를 했다. 밖에 도인 행색의 웬 여인이 젊은 남녀 두 사람을 데리고 성도에서 온 오문기, 주경운 두 협녀를 만나러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때 그들은 후 원에서 운봉, 상영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백기는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녀들을 부르고, 한 편으로 직접 나가서 손님을 맞았다. 문기와 경운이 나와 보니 옥청대사(玉淸大師)가 장기(張琪) 오누이를 데리고 왔는지라 매우 기뻐 하며 사람들에게 소개를 했다. 자리에 앉은 후에 경운이 대사에게 어떻게 시간이 나서 도우러 왔느냐고 물었다. 옥청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소승이 대사옥봉에서 돌아오니 이 오누이가 말하길, 당신네 둘이서 하, 최 두 분 도우와 함께 이파와 싸우러 갔다며 대가장으로 자기들도 가고 싶다고 졸라대지 않겠어요. 소승은 그 성화에 배겨 날 수가 없는 데다, 또 곽운박이란 자는 열화조사의 득의제자로서 요법을 잘 쓴다기에 어디 어느 정도인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오누이한테 승락을 하자마자 별안간 소승의 은사께서 나타나셨지 뭐예요. 은사님은 이들 오누이가 자질이 좋다고 하시면서, 소승이 오랫동안 고된 수련을 했는 데도 아직 의발(衣鉢)을 계승할 사람이 없어서야 되겠느냐시며, 문하로 받아들 이라고 하셨소. 그래서 누이를 거두었더니, 오라비가 자기는 어떻게 하느냐고 애걸했어요. 은사의 문하에는 남자제자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으므로 승락하지 않으니 울기 시작합디다. 그러자 은사 께서 말씀하시더군요. '대가장과 여촌이 이 월 초사흗날 싸움을 벌이는데 <금신나한> 법원도 참 가한다. 괘상에 나타나길 이번 싸움은 단순한 시골 사람들의 싸움같지만 사실은 정, 사 두 파의 싸움이므로, 여촌 쪽의 법원은 별 대수롭지 않은 존재지만, 마지막 날에 운남에서 올 묘인(苗人) 은 요법이 매우 대단하여 보통 검선들은 상대가 안 되니 네가 두 오누이를 데리고 가거라' 그러 시지 않겠어요. 첫째로는 관전하다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둘째는 장기를 대신하여 인연이 닿는 사부를 찾아주라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은 옥청대사가 도와주러 온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하며, 급히 연회석을 마련하게 했다. 자리에 들어가 앉은 후에 주경운이 옥청대사에게 물었다. "제 기억에 <추운수> 백사백께서 형산 부근에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 코 아래 이파 사람들이 날뛰는 것을 보고도 그냥 두시는지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첫째, 닭을 잡는데 소를 잡는 칼을 쓰지는 않는 법이잖아요? 둘째로 는 그 묘인 요개강(姚開江)의 조사와 그분은 약간의 연원이 있기 때문에 참석하기 거북한 거예요. 또 어른이 후배들을 괴롭힌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기도 하니까요. 하, 최 두 분의 사부 < 금모모> 나자연만 해도 그렇지요. 그분도 결코 동굴에 안 계셨던 것이 아니었어요. 요개강이 있 기 때문에 그의 조사에게 죄를 짓기가 싫었던 거예요. 게다가 추운수의 부탁을 받고 후동에서 완 석대사(頑石大師)를 보호하고 있어 멀리 떠날 수도 없구요. 이번에 하, 최 두 분께서는 다급한 나 머지 앞쪽만 보고 후동으로 가보지 않았고, 사매의 말만 듣고 사부께서 정말로 동굴에 안 계시는 줄 알았던 것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사부님이 정말 안 계셨다면, 그분이 반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단약이 얼마나 귀중한데 그냥 밖에다 걸어두어 두 분이 사용하게 했겠어요?" 하매와 최기는 옥청대사의 말을 듣자 비로소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스승의 단약은 평소에 매 우 깊숙한 장소에 숨겨져 있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소에 있었는가 말이다. 속으로 '고 계집애' 하고 향방숙을 탓했다. 스승이 특별한 이유로 하산할 수 없으면 사실대로 이 야기를 할 것이지, 왜 거짓말을 하여 창피를 주었나 말이다. 한편으로는 후동으로 가보지 않고 그 냥 나온 자신의 무신경도 탓하였다. 조금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던들 스승에게 간청을 하여 원한을 갚아달라고 했을 텐데. 두 사람은 날짜를 계산해 보니, 산으로 돌아가서 스승에게 다시 간청을 해도 시간이 있을 것 같 았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형산으로 가서 스승을 청해 오겠다고 말했다. 옥청대사가 말했다. "당신 사부께서는 결코 오시지 않을 겁니다. 만약 오실 수 있으시면 두 분이 수고를 하지 않아 도 오실 텐데, 괜한 수고를 할 필요가 없잖아요?" 하매와 최기는 아무래도 체면이 서지 않아서 고집을 피웠다. 옥청대사가 말했다. "당신 사부께서 오시기 싫어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요. 백노선배님과 마찬가지로, 정말로 그 묘인 의 조사와 곤란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에요. 두 분이 정히 가시겠다면 가세요. 그 어르신네는 진산 (鎭山)의 보물을 한 가지 가지고 계신데, 바로 <오행신화침(五行神火針)>이란 것으로써 각종 독 물요술을 물리치는 데는 덮을 것이 없지요. 그거라도 빌어올 수 있으면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하매와 최기는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새기겠다고 다짐한 후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 경운은 옥청대사에게 그 묘인 요개강의 사조는 이름이 무엇이며, 그가 추운수, 금모모와 어떤 연 원이 있는데 그렇게 꺼리느냐고 물었다. 옥청대사가 말했다. "당시 백노선배님은 원래 부부가 함께 검술을 배웠지요. 그런데 한 번은 묘강으로 채약하러 갔 다가 난도산(爛桃山)에서 천 년 독장(毒腸)을 만났더랍니다. 백사백은 도력이 비교적 깊어서 급히 검광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부인인 능설홍(凌雪紅)은 장독(腸毒)에 중독되어 생명이 위독한 지경 에 이르렀어요. 백노선배님은 부인을 간신히 오운장(五雲腸)의 오하(五霞) 속에서 구해내었는데, 요개강의 조사 홍발노조(紅髮老祖)가 가지고 있는 고독장기(蠱毒腸氣) 전문 치료용인 <천년하화 (千年荷花)> 이외는 다른 약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하지만 상대방은 이파사교이기 때문에 가 서 부탁하기가 여간 거북했겠어요?" 그래서 추운수 백곡일(白谷逸)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구원의 손길이 뻗혀왔던 것이다. 이 천년독장의 원이름은 <오운장>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생긴 데에는 그럴 만한 곡절이 있었다. 난도산(爛桃山)이란 이름은 온 산이 모두 복숭아 나무로 가득차 있고 복숭아가 많이 열리기 때문 에 붙여진 것으로써, 험준하고 계곡도 깊어서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아 열매를 따는 사람이 없었 다. 세월이 오래 되면서 높은 곳의 복숭아가 떨어져 바람에 밀려 낮은 곳으로 모였다. 갈수록 많이 쌓여 나중에는 썩어서 즙이 되어 산중턱의 평원이 늪으로 변해 버렸다. 매년 삼사 월에서 팔구 월까지 늪 안의 복숭아즙이 태양열을 받으면 김이 피어올라 오색의 운무(雲霧)로 변하였다. 운무는 큰 바람이 불어도 흩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복숭아꽃과 복숭아 열매에서 생성된 것이다. 도화장(桃花腸)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실로 무서운 독기였다. 이 난도산 부근에 화산이 하나 있는데, 일 년에 한두 번 불을 뿜어내는데, 그 시기는 일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화산이 불을 뿜어내기만 하면 독장도 땅의 진동을 받아서 뭉실뭉실 피어올랐 다. 그 크기는 매우 크고 넓어서, 멀리서 보면 오색영롱한 기둥에 눈 이 부실 지경이었다. 비온 후의 무지개보다 열 배는 더 아름답지만, 그 독의 지독하기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그 독이 떠오르는 시간이 길지 않아서, 한 시진 정도 지나면 저절로 늪바닥으로 가라앉 아 버리곤 했다. 그런데 이러한 천지의 독기가 모인 늪 중간에는 여러 가지 영약이 자라고 있었 다. 백곡일은 늪 안에, 그토록 무서운 독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곳에 자라고 있는 영약은 매 우 진귀한 것으로써 수도하는 사람이 먹으면 수백 년의 공행과 맞먹는 효과가 있다는 것도 알았 다. 그래서 그는 입 안에 장독을 막아낼 수 있는 백초단(白草丹)을 머금고 위험을 무릅쓰고 약을 채취하러 들어갔던 것이다. 겨우 <자소매(紫蘇梅)>라는 약초를 하나 채취하였을 때 공교롭게도 옆에 있던 화산이 폭발하면 서 지하에 묻혀 있던 더 무서운 천년독장이 솟아올라 온 것이다. 능설홍이 서 있던 곳은 마침 천 년독장이 나오는 입구였다. 그래도 백곡일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구해 나왔으나 이미 온몸이 보랏빛으로 변하여 목숨이 조석에 달려 있었다. 다행히도 홍발노조가 그날 독장이 올라올 무렵 먼 산의 꼭대기에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호 로를 하나 만들어 법술을 써서 그 천년독장을 거두어들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세상을 위하여 앞으로 다가올 큰 재난을 제거하려 하였고, 둘째로는 또 그것을 이용하여 한 가지 보배를 연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늪 안의 독장은 늘 고여 있는 상태지만 지하에 모여 있는 천년독장은 좀처럼 나타나 지 않았다. 어쩐지 더 영험이 있을 것 같아서 홍발노조가 그것을 거두어들이려는데, 마음을 먹고 부터는 잘 나타나지 않고, 어떨 때 간혹 나타났지만 모두 홍발노조가 산에 없을 때였다. 홍발노조 가 소식을 듣고 달려오면 이미 늪 아래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여러 해를 기다려도 거두어들이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홍발노조는 이날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다가 웬 두 남녀가 늪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려 고 했다. 그때 별안간 지축이 진동하면서 오운독장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옳다구나 하면 서도, 늪 안의 두 사람은 전혀 요행을 바랄 수 없다고 여겼다. 급히 오운독장을 거두려고 내려가 는데 문득 한 가닥 금빛줄기가 오운독장 속에서부터 번개처럼 뚫고 나와 앞산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홍발노조가 법보를 들고 늪으로 들어가니 그 오색영롱한 기둥은 마치 영험이 있는 듯 '쭈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늪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 매우 실망한 그는 이번엔 방금 그 금빛이 날아간 방 향대로 앞산으로 가서 어떤 고인(高人)인지 또는 부상을 안 당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능설홍은 숨이 곧 끊어질 듯한 상태였다. 백곡일은 홍발노조를 만나자 도움을 청했다. 비록 파는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은 마음이 통했다. 그래서 홍발노조가 천년하화 를 주어 능설홍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것을 인연으로 친구가 되었다. 백곡일은 독장이 그처럼 지독하게 사람을 해치는 것을 알자 아내의 병이 나은 후에 홍발노조와 합력하여 그것을 제거하려고 의논하였다. 그럴 때 또 금모모가 비검을 담금질할 수 있는 단약을 만들기 위해 자소매를 채취하러 왔다가 그들을 만났다. 네 사람은 합력하여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후에 장미진인(長眉眞人)을 만난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늪 속의 오운장은 <상룡(象龍)>이라는 괴물이 조종하기 때문 에, 매우 큰 선연을 만나는 사람이 아니면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늪 안에 들어앉은 그 괴물은 천연적인 독장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거예 요. 그래서 백사백과 금모모는 방법이 없어 마침내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그러나 듣기에 홍발노조 는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 요개강은 바로 홍발노조의 득의도손(得意徒孫) 으로서, 사조의 명을 받들고 처음으로 하산하여 중토를 유력(遊歷)하는 중이랍니다. 어쩌다가 이 파의 유혹을 받아서 그들을 도우려는 것에 불과할 뿐 본심은 별로 악한 사람이 아니에요. 때문에 두 분 어르신께서는 그의 사조 얼굴을 보아서라도 야박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옥청대사의 이야기가 끝나자 경운이 말했다. "여기에서 탐문한 바에 의하면 여촌에는 그런 요가 성을 가진 묘인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대 사께서는 이렇게 자세히 아시니, 정말 선견지명이 있으십니다." "소승이 다소 견식이 있다고 하나 어찌 그처럼 자세히 알 수 있었겠어요. 모두 은사께서 말씀해 주신 덕분입니다. 은사께서는 사천 관현(灌縣) 이랑묘(二郎廟)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왜수> 주 노선배님을 만났더랍니다. 주노선배님은 자운사를 깨뜨린 후에 한 옛친구를 찾아갔는데 그 친구 가 그러더래요. 일전에 요개강이 법원의 제자 <다비웅(多臂熊)> 모태(毛太)와 함께 있었는데, 모 태가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 사부 법원이 여촌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요개강과 함께 법원을 찾아 갔다고 말이에요. 그 사정을 주노선배님으로부터 들은 은사께서는 점을 쳐 보시고는 괘상에 나타 난 것을 나한테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여촌으로 가면 요개강은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한 편 모태는 거기로 가는 길에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것인즉, 이번 싸움은 결코 어린애 장난이 아 니라구요." 사람들이 넋을 잃고 옥청대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밖에서 수하인이 들어와 보고하였다. "두 분 도장(道長)께서 황, 조 두 분을 뵙겠다고 밖에 와 계십니다." 조심원과 황현극은 자기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누가 찾아왔는지 알 수 없 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바로 아미파의 검선 <만리비홍> 동원기와 곡왕봉의 철사도인이 아닌가! 매우 기뻐하며 반겨 맞아들여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동원기는 옥청대사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성도에서 헤어질 때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나는 이번에 나구란 놈 때문에 왔소 이다. 지금 저쪽에는 많은 요인이 합세를 하여 마침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대사께서 이곳에 오셨 으니 정말 다행이오." 옥청대사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제자는 은사님의 명을 받들고 이곳에 왔습니다만, 두 분 노선배님께서 오셨으니 대가장 식구들 은 이제 걱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사께서는 그들을 얕보면 안 되오. 나는 처음에 나구란 놈이 나를 따른 지가 여러 해가 되기 때문에 차마 죽일 수가 없어 개사귀정시키려고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이놈의 소행이 죽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소. 그래서 요절을 낼 요량으로 여촌으로 달려갔는데, 능노영웅과 능, 대 두 아가씨가 곤경에 빠져 있길래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 미처 그놈을 죽이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그놈이 내가 나타난 것을 보고 법원의 문하로 들어가서 보호를 받으려고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그래서 초사흗날 대가장에 나타나면 제거할 참이지요. 방금 또 법원의 제자 모태라는 놈이 많은 이파의 원군을 데리고 온 모양이외다. 그까짓 거야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문제는 그 안에, 요씨 성을 가진 묘인 한 명이 있다는 점이외다. 그는 홍발노조의 문하로서 요법이 대단한 인물이오. 또 화산과의 공령자(孔靈子), 조비(曹飛), 욱차곡(郁次谷)도 예사 무리가 아니지요. 나는 혼자며 또 이곳 사람들의 능력도 한계가 있는지라 형산으로 가서 추운수를 찾으려고 했소. 그런 데 가던 도중에 철사도우를 만나지 않았겠소. 철사도우께서는 황, 조 두 사람의 부탁을 받고 곡왕 봉에서 오던 중이라나요. 그리고 또 말씀하시길 자기가 이미 추운수를 만났었는데, 추운수께서는 완석대사의 병세가 위급하여 떠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특수한 사정 때문에 더욱 올 수 없다 고 하더랍니다. 또 비록 이파에 사람이 많지만 때가 되면 고강한 분이 도와줄 것이라며, 다만 어 찌 되었던 간에 묘인 요개강의 목숨만은 살려주라고 당부하셨다 하오. 이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사께서 성도에서 이곳까지 오실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소?" 연화장과 타뢰대 一心向道 軟語勸檀郎 拔地移山 驅神通古洞 능조 부녀와 유윤중, 대상영 등은 동원기에게 감사를 드렸고, 백, 대 두 사람을 시켜 급히 방을 치우게 하여 먼길을 온 사람들을 쉴 수 있게 하였다. 상영과 운봉은 문기와 경운 두 사람에게 옥청대사 문하로 들어갈 수 있게 대신 간청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옥청대사는 웃으며 말했다. "그 두 아가씨는 자질이 뛰어나더군요. 그러나 소승은 장요청(張瑤靑)을 받아들이고도 은사님이 꾸짖을까 두려워 오랫동안 걱정했었고, 또 정식 승인을 하지도 않았었지요. 그러다가 다행히 은사 님의 승락이 있었기에 정식으로 받아들였답니다. 소승은 아직도 사부로서 문하제자를 어떻게 거 느려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무예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또 제자를 받으라니, 정말로 난감하군요. 지금 소승의 사형 소인(素因)과 사매 제하아(齊霞兒) 모두 제자가 없는데, 소 승이 먼저 제자를 거두어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 일이 끝난 후에 대소저를 사형의 문하에 소개하 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그녀의 인연이지요. 능소저는 본래가 선 인의 혈통으로 추운수 백노선배님의 증외손녀이며 또 자질도 매우 뛰어납니다. 내가 보기에 백노 선배님께서 돌아가신 사백모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녀를 위해 방법을 생각해 주실 것입니다." 문기와 경운은 운봉과 상영을 대신하여 몇 차례 간청했지만 옥청대사는 끝까지 사양했다. 하는 수 없이 상영과 운봉에게 그대로 전해 주었다. 상영은 옥청대사가 자기를 소인대사 문하로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가 소인대 사와 인연이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기쁘기도 했다. 그녀는 이번엔 직접 옥 청대사를 찾아가서 일이 끝난 후에 아무쪼록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녀의 속셈은 누가 스승이 되던 간에 상관없이 옥청대사에게 매달려 끝장을 보려고 했다. 가령 소인대사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옥청대사에게 매달려 죽어도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옥 청대사는 워낙 성품이 온화한지라 그녀의 간청에 못 이겨 승락하였다. 상영은 일단 마음을 놓았으나, 유독 운봉은 대사가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거절하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로 말하는 것을 보자, 자기가 자질이 부족하여 선연(仙緣)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하였다. 그래서 다시 몇 번이나 간청하였다. 대사는 부드러운 말로 거절하며, 그녀가 당장은 세속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지만 후에 선연을 만 나서 성취가 상영보다 더 클 것이라고 넌지시 장담했다. 운봉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아버지가 너무 일찍 혼인을 약속했다고 탓하였다. 만약 진작 세상 에 검선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시집은 가서 뭘 하겠느냐는 심정이었다. 생각할수록 더욱 후회 가 되었고, 그럴수록 윤중에게 대해서는 담담한 심정이었다. 그녀는 밤이 점점 깊어지자 조용히 향을 피우고 증조고모 능설홍에게 자기가 선연을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빌었다. 초이튿날 저녁이었다. 운봉은 후원으로 나갔다가 저만치서 유윤중이 오는 것을 보고는 그를 불 러세웠다. "저랑 조용한 곳으로 좀 가요. 제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중요한 말이 있으니까요." 윤중은 이 약혼녀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있었다. 초사흗날의 일이 지나면 어찌 되든 간에 날 을 택하여 식을 올릴 작정이다. 그러므로 지금 운봉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하자 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그래서 두 말없이 그녀를 따라 산으로 올라가 후미진 바위 뒤쪽으로 갔 다. 운봉은 바위를 하나 찾아 그 위에 걸터앉았고, 윤중은 옆에 서서 귀를 세웠다. 운봉이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지며 그를 향해 웃었다. "당신도 앉으세요." 그리고는 자기가 앉아 있는 바위 한켠을 가리켰다. 윤중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가까이 다가 앉자, 운봉은 몸을 약간 한쪽으로 비켰다. 윤중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앉으니 비록 평소에 온건하고 침착한 그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얼른 운봉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운봉은 손을 빼지 않고 그가 만지게 내버려 두었다. 윤중은 석양 아래서 옆에 앉아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니 그 자태의 눈부심과 뚝뚝 떨어지 는 교태에 정신이 황홀했다. 운봉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그녀의 옥수를 가볍게 쓰다듬을 뿐 입에서는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에 운봉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 보기에 제가 이쁜 것 같아요?" "사매, 당신처럼 예쁜 사람이 어디 있겠소!" "당신은 나를 사랑하세요? "더할나위 없이 사랑하고말고!" 그러자 운봉이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늙으면요?" "당신이 늙으면, 나는 안 늙소? 우리 두 사람이 세세무궁토록 영원히 부부가 되지 못함이 안타 까울 뿐이오. 우리의 감정은 날로 더불어 더해질 것이니 늙을수록 정이 두터워질 것이오. 늙지 않 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늙으면 또 어떻소?" 운봉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령 정말로 당신 말씀처럼 될 수 있다면, 당신과 나는 늙어서도 매우 사랑이 두터울 테니, 그 건 좋은 일이겠죠. 하지만 만일 중도에서 방해하는 자가 생기거나, 아니면 무슨 재난을 만나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면 어떡할래요?" "나와 사매는 살아서는 같은 방에서 살고, 죽어서도 같은 무덤에 묻힐 것이오. 가령 천재(天災) 를 만나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면 말할 필요가 없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무단히 우리를 괴 롭히더라도 우리 두 사람의 실력을 합한다면 뭐가 두려울 것이 있겠소?" "흥, 당신의 그 조그만 재주로는 말할 필요도 없고, 나도 어림 없는 일이에요! 이번에 진우와의 일만 해도 그렇지요. 만약 백, 대 등 여러 사람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찌 지금까지 목숨 을 부지할 수 있었겠어요? 더구나 지금은 여촌까지 합세했으니 승부를 가리기 힘든 상황이에요. 어쨌든 이번에는 여러 선배 검선께서 도와주어 이긴다고 쳐요. 그러나 일단 원한을 맺으면 피차 간에 돌아가면서 복수를 하려고 할 테니, 그렇게 되면 여러 검선들도 영원히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없는 일 아니에요? 어느날 좁은 길에서 원수를 만나 당해내지도 못하고 도망도 갈 수 없고 살 려고 해도 살 수 없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그때는 어떡하면 좋겠어요?" "만일 훗날 그런 일을 만난다면, 내가 사매를 위해 목숨을 걸고 그들과 사생결단을 내겠소. 그래 도 안 되면 죽음을 택하겠소."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세세무궁토록 영원한 부부가 됨은 말할 필요도 없 고 금생(今生)에서마저도 같이 늙을 때까지 지내기가 힘들겠군요." "당신 말대로라면,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러자 운봉은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저는 이전엔 스스로 재주가 고강하다고 자부해 왔어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불쌍하기 짝이 없는 존재지 뭐예요. 일전에 새로 온 몇몇 언니를 보고서야 사람 밖에 사람이 있고 하늘 밖에 하 늘이 있으며, 원래 검선도 사람이 되는 것임을 알았어요. 당신은 참 기개가 없군요. 눈앞에 허다 한 검선, 협객이 있는 것을 보고서도 어떻게든 배우려고 생각하지 않고 목전의 안일과 쾌락만 도 모하고 있잖아요.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원수를 만나 보복을 당할 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어요. 제가 오늘 당신을 찾아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이에요. 상영 아가 씨는 이미 옥청대사가 소인대사 문하로 소개해 주겠다고 허락을 했어요. 저도 몇 번이나 간청했 지만, 대사께서는 적당히 얼버무리기만 하시지 뭐예요. 하지만 만사는 사람 하기 나름이 아니겠어 요? 마음이 굳으면 돌도 뚫을 수 있다고 했어요. 저는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대사가 허락하든 말든 이번 일이 끝난 후에 죽자사자 대사를 따라갈 작정이에요. 부득불 당신과 잠시 떨어져 있어 야 하지만, 사실은 장구한 세월을 위한 것이에요. 당신도 동검선께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을 드 리세요. 만일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저 대신 늙으신 아버님을 봉양해 주세요. 제가 다 배 운 후에 돌아와 당신에게 전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그러면 훗날 누가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또 어쩌면 선연이 닿아 장생불로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되면 어 찌 속세에서 잠시 동안 즐기는 낙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사리를 아는 사람이니 제 성격 도 알 거예요. 제 생각은 이미 굳었으니, 사전에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마세요. 만약 아버지께 일 러바친다면 평생동안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일어서서 가버렸다. 윤중은 급히 불렀다. "사매, 잠깐 기다리시오. 아직 할 말이 남았소." 그러나 운봉은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사실은 윤중도 검술을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래서 동원기가 왔을 때 황, 조 두 사람에게 부탁해서 자기 대신 간청을 해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동원기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 젊은이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데, 무엇 하러 나를 찾을 필요가 있겠소?" 윤중의 집안이 부유하고, 또 아리따운 약혼녀가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두 차례나 간청하였다. 그런데도 모두 거절당하자 윤중은 '원앙이 신선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세속적인 인생의 낙을 택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운봉과 상영이 옥청대사를 스승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말을 장인에게서 듣고는 깜 짝 놀라서 적극 말려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는 자기도 시시자각 신경을 곤두세워 낌새를 알아보 았다. 다행히 옥청대사가 운봉에게는 아무것도 승락한 바가 없음을 알고 안심했다. 그러던 차에 오늘 운봉이 자기를 아무도 없는 곳으로 유인하는 것을 보고는 그녀가 결국 포기를 하고 자기와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걸로 지레 짐작했었다. 그런데 뜻밖에 운봉은 자기 와 몇 년 헤어져 옥청대사에게 도를 배우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갑자기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써서 차가움이 발바닥까지 스며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윤중은 운봉이 일단 그렇게 작정했다면 절대로 돌아서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장인 에게 일러바칠 수도 없어 바락바락 속만 태웠다. 그는 기가 죽어 고개를 떨구고 대청으로 돌아갔 다. 내일이 바로 초사흗날이라, 순시를 도는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대청에서 이야기를 하 고 있었다. 윤중은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운봉과 상영이 손님격인 네 협녀와 어울려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광경을 이따금 쳐다보았지만, 운봉은 한 번도 제대로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괴로왔다. 윤중은 옥청대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는데, 문득 옥청대사가 자기를 향해 미소를 지으 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윤중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걱정을 저 어른이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 저분에게 운봉을 데리고 가지 말라고 부탁하면 어 떨까? 검선들은 오고감이 종잡을 수가 없으니, 저분이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운봉이 암만 따라붙어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작정한 윤중은 내일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까 하고 궁리하기 시작했다. 돌연 옥청대사가 웃으며 동원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귀파가 크게 번성할 모양입니다. 요즘 제가 만난 젊은 남녀는 모두 근기가 매우 심후 한 사람들뿐이군요. 어떤 사람은 잠시 세상의 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다가도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오니,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하루 이틀 사이 이곳의 일을 마치고 대사께서는 또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신다고 들었는데, 정 말이오?" "후배는 도가 미천하고 덕이 없는 데도 은사께서 장요청을 제자로 받아들이게 허락하셔서 이미 과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또 제자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소승이 보기에 대, 능 두 소저는 근기가 매우 두터운 것 같습니다. 능소저는 백노선배님의 증외손녀이니 그녀의 선 연은 따로 있을 것입니다. 소승이 분수넘게 참견할 일이 아니지요. 대소저는 도를 향한 마음이 진 실하고 지행(志行)이 고결(高潔)하며 소승에게 몇 번이나 간청을 했답니다. 저희 소인대사형은 은 사님 좌하에 귀의한 지 오래 되어 도행이 소승보다 열 배나 뛰어나도 아직 제자가 없습니다. 이 번 일이 끝나면 대소저를 데리고 가서 대사형 문하에 귀의시키려고 합니다. 선배님 보시기에 어 떻습니까?" "나는 나구를 잘못 받아들여 문호를 더럽혔으니, 뒷날 장교사형께 문책을 받을 것이오. 때문에 본래 다시는 제자를 받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장기의 군기가 두텁고 또 우담대사께서 소개를 하 셨으니 안 받아들일 수 있어야지요. 하나, 이후로는 함부로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작정이외다." 윤중은 옥청대사가 운봉을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암시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약간 놓였다. 그러 나 옥청대사가 운봉은 선연이 따로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검선에게 소개할는지도 모른 다고 생각되었다. 아무튼 그것은 나중 일이니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즉시 장인어른을 재촉하여 식을 올리고, 그때 부부의 정이 생기고 또 아들딸 을 낳아 기르게 되면 그녀가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절로 근 심이 사라지고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운봉이 보통 총명한 사람인가? 옥청대사의 말을 듣자 자기의 뜻을 거절하는 의미라는 것을 알고 는 다시 초조해졌다. 조금 전에 윤중을 힐끗 보았을 때는 매우 걱정하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옥 청대사의 말을 듣더니 기쁜 기색이 완연하자, 그녀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흥, 당신은 내가 가지 않길 원하지만, 나는 더욱더 가고야 말 걸!' 그러나 옥청대사가 끝까지 승낙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검선은 비행절적하니 따라 가려고 해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창피를 당하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영영 검술을 배우 지 못하게 된다. 밤이 깊어지면 다시 옥청대사를 찾아가 목숨을 걸고 간청하리라고 벼르었다. 속 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여러 아가씨들과 웃으면서 이야 기를 했다. 백기는 내일저녁이면 쌍방의 생사가 걸린 중요한 고비인지라 일체를 매우 엄정하게 배치하고, 직접 광장으로 가서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만족하다고 느꼈다. 저녁을 먹은 후 그는 동원기, 옥청대사, 철사도인에게 제반사를 주관해 주십사고 청했다. 연배가 가장 높은 동원기가 사양하지 않고 중앙에 앉자, 옥청대사와 철사도인이 각기 양쪽에 앉 고 나머지 사람들도 순서에 따라 앉았다. 동원기가 말했다. "이번에 여촌도 많은 고수를 청해 왔소이다. 그들은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여 모두 떳떳한 태도 로 나올 모양이니, 우리도 감출 필요없이 공명정대하게 상대해야 할 것이오. 때가 되면 백, 대 두 분 장주께서 대표로 그들을 맞이하여 연회석으로 안내하고 주인의 예를 다하시오. 그런 다음에 빈도가 법원과 말로써 쌍방이 화해하도록 이야기를 붙이겠소이다. 말로 해결이 안 되면 내가 그 들에게 제의를 하지요. 쌍방이 광장으로 가서 양쪽으로 나누어 앉은 후에, 진우, 대가장 양방의 주최인이 먼저 단에 올라가 일 대 일로 대결하는 방법으로 두 집안의 곡직(曲直) 시비를 해결하 자고 말이오. 그리고 만약 쌍방의 초청인들이 그것에 승복할 수 없다면 다시 실력에 맞추어 대결 을 하자고 하겠소. 그리고는 따로 장정을 시켜 들것을 준비하였다가 부상자를 실어나르게 하시오. 아울러 반드시 적의 허실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 묘인 요개강은 옥청대사께서 맡아 주시고 나 는 법원을 맡고, 철사도인께서는 곽운박을 맡아 주시지요. 그 세 사람이 비교적 위험한 상대일 뿐 나머지는 후배 도우들이 맡아 주면 될 것이외다." 이처럼 각기 임무를 분배한 후에, 동원기는 철사도인더러 여촌으로 가서 허실을 염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자리를 떠난 철사도인은 약 한 시진 정도가 지나서 돌아왔다. 위청을 만나 그쪽의 자세 한 내막을 알아온 것이다. 그가 말했다. "요개강과 <다비웅> 모태가 이미 여촌에 도착하였고, 또 많은 패거리를 데리고 왔나 보오. 그중 에는 성도 자운사에서 도망친 <삼안홍예(三眼紅猊)> 설망(薛莽), <구미선호(九尾先狐)> 유연랑 (柳燕娘), <벽력수(霹歷手)> 울지원(蔚遲元) 등이 있고, 그 외에는 여헌명, 나구의 옛 강호 패거리 로서 무공이 높은 사람도 더러 있지만 모두가 검술을 할 줄 모른답니다. 그들은 법원 문하에서 검술을 배우려고 하나보오. 듣자니까 법원은 한꺼번에 받아들이기로 했다는군. 우리를 쳐부순 후 에 배사식(拜師式)을 거행할 준비를 한다나요. 그런 후에 모태가 그들을 오대산으로 데리고 가고, 법원은 다시 황산 오운보로 가서 허비랑을 찾아 복수할 계획을 상의할 작정이랍디다." 동원기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성도에서 투검(鬪劍)한 후에 장교사형께서 본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앞으로는 모두 외공수 련에 힘쓰라고 하셨소이다. 사람을 해치는 음적(淫賊)과 거도(巨盜)의 일당들을 소탕하려고 했어 도 찾지를 못했었는데, 지금 제 발로 걸어들어 왔으니 더할나위없이 좋은 기회요. 그러나 내일 싸 움에서는 틀림없이 사상자가 많을 것이오. 오랑캐의 꼭두각시인 관부에서 평소에는 백성들에게 권선(勸善)은커녕 두 마을이 패싸움을 하여도 모른 척하고 말리지 않다가도, 일단 소송이 벌어지 면 말리는 척하면서 재물을 탐내는 통에 많은 사람이 패가망신하곤 하였거든. 만약 우리가 이 점 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내일 이긴다고 해도 대가장은 여전히 피해를 볼 것이오.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여촌과 진우의 토박이들은 상하게 하지 말고 사로잡아서 훗날 소송이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외다. 싸움이 끝난 후에 한두 도우께서는 이곳에 잠시 남아 계시다가, 만일 소송 이 벌어지면 관부로 가서 경고를 하여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겠 소. 또 사전에 쌍방이 미리 절대로 고소를 않겠다고 약정을 해야 합니다. 다행히 이곳은 외딴 산 속이니 당사자가 고소하지 않으면 관부가 쉽게 알 수 없을 것이며, 가령 안다고 해도 고소하는 사람이 없으면 상관하지 않을 것 아니겠소?"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 모두 동원기의 빈틈없는 판단에 탄복하였다. 삼경이 거의 지나갈 무렵, 갑자기 앞쪽 전망대 위에서 호등이 흔들리며 꽹과리 소리가 진동하였 다. 백기는 깜짝 놀라며 여촌이 신의를 지키지 않고 밤에 습격해 온 걸로 의심하였다. 그러나 저 쪽에는 검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 어째서 공공연히 계곡 입구로 들어올까? 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 자기는 현극, 심원과 함께 나아가 동정을 살폈다. 그런데 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의 친구와 동문 사형제들이 아닌가? 그는 급히 맞아들여 사람들에게 소개를 했다. 일전에 백기가 선화로 갔을 때 나신은 없고 나신의 새 제자인 초명구(楚鳴球)만 있었다. 며칠을 기다려도 나신이 돌아오지 않자 초명구에게 나신이 돌아오면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대 가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백기가 간 후에 초명구는 매우 걱정이 되었다. 자기는 스승의 명을 받들고 있기 때문에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나, 백의 친한 친구이자 <상강오협(湘江五俠)> 중의 하나인 우순농(虞 舜農)이 찾아왔다. 초명구는 우순농에게 백기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우순농은 의분(義憤)하여 즉시 상담으로 돌아가서 <상강오협>인 황인유(黃人瑜), 황인룡 (黃人龍), 목계(木鷄), 임추수(林秋水)와 또 선화 관제묘(關帝廟)의 악대붕(岳大鵬) 등 모두 유명한 협사들을 청하여 밤을 새워 대가장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곡 입구를 지키던 부하들이 마치 날듯이 들이닥치는 사람들을 보자 행적이 의심스러워 호등을 흔들어 한바탕 소동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대가장은 또 몇 명의 협사가 합세하자 더욱 마음을 놓으며 조용히 내일 대전을 기다렸다. 드디어 초사흗날 아침, 사람들은 모두 대청으로 모였다. 이윽고 각자 동원기가 분배해 준 위치로 가고 다만 백기, 대형옥, 허초, 조심원, 황현극과 옥청대사, 철사도인, 동원기만 대청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상강오협>은 계곡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이상하 게 생각하고 있을 때 홀연 '와르릉!' 하는 큰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땅이 갈라지며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대청에서 대기하던 여덟 검협들은 급히 뛰 어나와 전방을 바라보았다. 어신동 저편에 수십 장 높이로 솟아오르는 먼지가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큰 재난이 닥쳐온 줄 알고 사색이 되었다. 백기는 급히 사람들에게 말을 전하되, 이 요법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모두들 당황 하지 말고 진정하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 모두 훈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세 장주가 적지 않은 검선, 협객들을 청해 온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방금 지진이 일어난 줄로 알고 당황했었지만, 방금 장주와 몇 명 검협들이 나오자 지진 이 멎는 것을 보고는 틀림없이 어느 검선이 쏜 법력의 효과라고 여겼다. 아울러 백기가 전하는 말을 듣고 모두 안심하여 함부로 망동하지 않았다. 옥청대사는 여촌에서 온 요인이 장난질을 친다고 여겨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문득 두 가닥의 검광이 보이며 문기와 경운 두 여인이 날아왔다. "제자들 넷은 명령대로 공중을 순시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어신동 쪽으로 가니 갑자기 산이 무 너지는 소리가 나면서 어신동 위를 누르고 있던 산봉우리가 스스로 일어나며 옛길이 다시 열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넘어오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하, 최 두 언니가 그곳을 계 속 지키고 있으며, 저희는 보고차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또 원래 방비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때 하매도 비검을 타고 날아와 보고했다. "여촌은 요법을 써서 어신동 옛길을 뚫더니, 지금은 긴 머리카락을 산발한 괴상하게 생긴 열두 명이 나타나 삽과 빗자루로 동굴 안의 돌과 모래를 치우고만 있습니다. 첫눈에도 그들은 힘이 여 간 센 것 같지 않았어요. 이쪽 사람이 말을 걸어봐도 그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척 천천히 길 만 고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지시하신 대로 경거망동하지 않고 가만히 사태만 주시하고 있습니다." 동원기가 말했다. "알았다. 너희들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우리도 뒤따라 가겠다." 하매는 명령을 받자 곧 돌아갔다. 동원기가 옥청대사에게 말했다. "적은 정면으로 오는 길이 너무 멀고 해서, 구태여 돌지 않고 <육정개산(六丁開山)> 법으로 어 신동 옛길을 뚫어 기선을 제압하려는 수단을 쓰는군요. 대사께서 무슨 고견이 있으신지요?" "소승이 짐작컨대 그 열두 명은 필시 여촌마을 사람으로서 요법에 힘입어 힘이 무궁무진하게 세 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들은 먼저 요법으로 길을 뚫은 후, 고의로 육정을 마을 사람들 몸에 집어넣어 길을 고르게 한 것이지요. 길을 다 고른 후에 그들은 또 한참 기다렸다가 건너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묘동(苗洞)의 요법으로서 사람의 이목을 속이려는 수단입니다. 우리는 그 냥 모른 척 앞으로 나아가 그들이 동굴을 건너올 때쯤 소승이 왕년에 쓰던 하찮은 요술로써 그들 을 훈계하겠습니다." 동원기가 말했다. "대사께서 옛날에 묘법에 신통하였다가, 다시 우담대사를 따라 정도를 탐구하여 불력(佛力)이 끝 이 없으니, 우리는 오늘 새로운 구경으로 견문을 넓힐 수 있겠구려." "대가장 사람들을 위해 부득불 방문좌도(旁門左道)를 다시 한 번 쓰는 것뿐입니다. 선배께서는 너무 과찬하시지 마십시오!" 모두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주경운이 또 날아와 보고했다. "그 열두 명의 괴인이 길을 다 고른 후에 이쪽 동굴 입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까지 왔다가 갑자기 모습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쪽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고, 다만 어신동 옆 산비탈 아래 다 떨어진 옷을 입은 걸인 한 사람이 햇빛 아래서 이를 잡고 있더군요. 저희는 산이 무너지며 돌 과 모래가 비오듯 하는 데도 그 사람이 건재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찾으러 갔더니 또 금세 보이지 않지 뭡니까?" 동원기는 여전히 경운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하고는 옥청대사에게 말했다. "상황을 보니 적들이 일부러 우리를 놀라게 하여 우리더러 어신동으로 가게 하려는 것 같군요. 그런 후에 그들은 천천히 나타나 우리를 기다리게 하려는 속셈이 분명하오." 옥청대사가 말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말했다. "오늘이 미일(未日)이라 묘인의 방향 천간생극(天干生剋)을 따져 보니, 오시(午時)가 되어야 출발 하겠군요. 어신동은 네 분 아가씨가 방비를 하고 또 거리도 가까우니 결코 잘못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우리가 너무 빨리 가면 도리어 그들은 우리가 당황한 줄 알고 경시할는지도 모릅니다. 우 리는 상관하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아가씨들을 불러들이고, 백장주 한 분이 나서서 그들을 맞아들이면 되겠습니다. 저는 몰래 따라가서....." 옥청대사는 동원기에게 자기는 이렇게저렇게 하겠다는 말을 했다. 두 사람이 상의를 마친 후, 백기는 몇몇 검선들을 데리고 광장으로 가서 배치를 점검해 보았다. 그 광장은 대가장의 대문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뒤쪽은 큰 산봉우리가 받쳐주고 그 산봉우 리 위에 또 두 개의 작은 산봉우리가 튀어나온 형상으로 이 광장을 포위하고 있었다. 두 개의 단 은 그 작은 산봉우리 기슭에 위치하여 중앙의 타뢰대를 비스듬히 쳐다보고 있었다. 동원기와 옥청대사는 현장 점검 후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배치를 많이 바꾸었다. 양쪽의 단 아 래에서부터 각 단의 스무 장 정도 앞에 연화장(蓮花樟)을 꽂았다. 이 연화장은 연목(蓮木)으로 만든 연꽃 모양인데, 땅에 꽂힌 한 개의 가는 꼬챙이가 밑을 받치고 있었다. 이 연화장 너댓 자 앞에는 미세한 모래로써 삼사 장 정도 끝이 뾰죽한 모래성을 쌓았다. 그 모래성 끝에서 일 장 정도 떨어진 곳에는 또 각기 하나하나의 연화장을 모래성 위에 꽂아두었 다. 여기서부터 비스듬히 돌아 타뢰대를 향하여 길이가 같지 않은 예리한 칼을 칼끝이 위로 향하게 꽂은 각종각양의 길을 만들었다. 그길이 타뢰대 앞까지 이른 지점에서 또 두 개의 연화장을 설치 하였다. 연화장은 아까 것보다 더 크고 밑을 받치는 꼬챙이는 더 가늘었다. 양쪽 두 대의 간격은 십여 장이나 되었고, 각 대와 타뢰대는 육칠 장 정도 떨어져 있었다. 백기는 자기네 상강과의 절정무공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이러한 배치를 한 것이다. 쌍방의 대표 가 각기 첫 번째 연화장 위로 뛰어올라가 상대방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그 칼로 깎은 듯한 모래 성 위를 <등평도수(登萍渡水)> 초상비(草上飛)의 무공을 써서 달려가 두 번째 연화장 위로 올라 간다. 이때 쌍방의 거리는 불과 일 장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서로 강호상의 대화를 몇 마 디 할 수 있다. 그런 후에 다시 그 몇 장 정도 길이의 칼길 위를 달려가 세 번째 연화장을 디딘 다음 다시 그곳 에서 사오 장 떨어진 타뢰대로 뛰어올라가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이 세 과정의 연화장은 각기 달랐다. 첫 번째 것은 땅에 꽂아서 여간 튼튼하지만, 두 번째 것은 모래 위에 꽂아놓은 것이다. 모래 위를 달릴 때 자칫하면 발자국을 낼 뿐 아니라, 또 모래성 위에 서 두 번째 연화장 위로 뛰어오르는 것은 더욱 어려운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의 칼길을 달리는 것은 또 그렇다손 치더라도 세 번째 연화장에서 타뢰대로 뛰어올라 가 는 것은 앞의 어느 과정보다도 월등 어려운 것이었다. 요컨대 절정의 경신술을 가진 사람이 아니 면 도저히 해낼 수가 없었다. 백기는 검선들과 한번 둘러보고 나서 적이 만족했다. 시간을 보니 이미 사시(巳時)를 지나고 있 었다. 비로소 백기는 옥청대사와 함께 어신동으로 향했다. 피를 부르는 연회 斷蛇移山 窮神出世 春미 盛饌一友延賓 백기는 여러 검선과 헤어져 의관을 가다듬고 혼자서 어신동으로 향했다. 어신동 가까이 갔을 때, 주경운과 오문기 두 사람이 공중에서 내려와 보고하였다. "저희 네 사람은 동사숙의 법지(法地)에 따라 어신동에는 들어가지 않고 공중에서 순찰만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아무런 동정이 없습니다. 방금 옥청대사께서 먼저 오셔서 형세를 살피 신 후에, 백장주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리라고 하시더군요. 잠시 후에 적이 건너오면 그들을 맞이 하되, 어신동에서 반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도달하면 옥청대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시라고 하셨습니다." 백기는 이 말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문기와 경운은 말을 마치자 아까 동원기가 시킨 대로 준비 를 하기 위해 떠나갔다. 백기가 어신동 입구 가까이 갔을 때는 이미 오시(午時)에 접어 들고 있었다. 적이 나타날 때까지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다가 겨우 그럴 듯한 바위를 하나 발견했다. 그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문 득 바위 위에 몹시 이상하게 생긴 걸인 하나가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다른 바위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그 걸인이 잠꼬대를 하는 것이었다. "간덩이가 부은 놈 같으니! 감히 혼자서 이곳으로 오다니, 내가 네놈을 잡아죽여야겠구나." 백기는 이 말을 듣자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방금 경운이 돌아와서 보고하길, 이곳에서 걸인 한 사람을 보았다고 했지. 최근 몇 년 동안 계 속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편안한데 웬 걸인이 이 심산으로 들어왔단 말인가? 거동이 수상하 니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닌 것 같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바라보는데, 문득 걸인이 잠꼬대를 하다 말고 갑자기 일어나 앉으며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 틈엔가 몸통이 팔뚝만큼 굵은 뱀 한 마리가 쥐어져 있었다. 대가리 가 큼직하며 두 눈이 진홍빛으로 번쩍이는 빛을 사방으로 쏘아대는 뱀은 일고여덟 치나 되는 혀 로 마치 불꽃처럼 그 걸인을 향해 날름거리며 독을 뿜어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뱀은 급소인 칠촌자(七寸子)를 그 걸인이 꽉 쥐는 바람에 꼼짝하지 못하고 있 었다. 몹시 화가 난 뱀은 거세게 상반신을 뒤틀었다. 그 순간, 돌연 그 걸인이 앉아 있는 바위의 뒤쪽에서 이삼 장이나 되는 뱀의 몸뚱이가 쑥 달려 올라왔다. 온몸이 오색으로 알록달록하게 빛 나는 그 뱀은 몸뚱이를 붓처럼 꼿꼿이 세워, 마치 채색한 기둥처럼 보였다. 백기가 깜짝 놀라는 순간에 그 뱀은 하반신을 꺼꾸로 세우며 바람처럼 잽싸게 달려들어 그 걸인 의 몸을 휘감았다. 걸인의 몸을 몇 겹이나 칭칭 감은 후에는 꼬리끝으로 걸인의 얼굴을 찌르려고 하였다. 백기는 상황이 위급한 것을 보고 칼을 뽑아 앞으로 내닫으려고 하였다. 그 순간 걸인이 '이놈!' 하고 소리를 질렀다. 뱀에게 감겼던 두 팔이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왼손은 여전히 뱀의 대가리를 잡고 있고, 오른손도 이미 뱀의 꼬리를 잡고 있었다. 비록 걸인의 몸을 감고 있긴 했지만 대가리 와 꼬리는 모두 효용을 잃어버린 그 뱀은 힘껏 그 걸인의 몸을 죄며 걸인의 얼굴에다 독을 뿜어 내고 있었다. 그 걸인과 그 뱀의 부릅뜬 눈싸움은 계속되었다. 이 걸인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느낀 백기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그 걸인은 두 눈을 부 릅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백기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뱀꼬리를 잡고 있는 오른손에 불 끈 힘을 주었다. 두 눈은 불똥이 튀기는 것 같았는데, 별안간 큰소리를 지르며 두 팔을 펼치니 뱀 이 여러 마디로 끊어지며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나서 걸인은 약간 피곤한 모습으로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입고 있던 옷은 원래 가 낡은 옷이었으므로 한 차례 뱀에게 조임을 당하는 바람에 넝마처럼 해져 가슴이 다 드러났다. 가슴은 무쇠처럼 새까맣고 번들거렸다. 그러나 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백기를 쳐다보지도 않 고 귀찮은 듯이 바위모퉁이로 돌아가 버렸다. 백기는 이름이라도 물어보려고 쫓아가려는데, 갑자기 폭죽 터지는 소리가 멀리 어신동 저쪽에서 부터 들려왔다. 그래서 주춤하는데, 하매가 날듯이 달려와 말했다. "적들이 이미 여촌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옥청대사께서 말씀하시길, 백장주님은 빨리 동굴 앞으로 가서 기다리시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마치자 곧장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백기와 하매가 잠깐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 걸인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백기도 더 이상 다른 데 신경쓸 틈이 없어 곧장 어신동을 향해 뛰어갔다. 어신동은 다행히 멀리 떨어지 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폭죽 소리만 나고 아무런 동정이 없더니, 잠시 후에 복장이 각기 다른 이십여 명의 사 나이들이 나타났다. 승복, 도복, 속가차림 등 각양각색이었는데,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 중에 하나 는 도인 차림이며, 또 하나는 매우 화려한 의복을 입었고, 마지막 하나는 차림새가 매우 특별하였 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 차림새가 특별한 사람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키가 일곱 자나 되며 머리카락을 양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머리에는 금테를 둘렀다. 상반신은 사슴가죽을 둘러서 팔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오른쪽 팔뚝에는 오독(五毒)의 무늬를 새긴 문신이 있었다. 허리에는 구리고리를 차고 칼집까지 있는 묘도(苗刀)를 차고 있으며 등에는 긴 활을 메고 있었 다. 허리부분에 또 무슨 짐승인지 알아볼 수 없는 가죽을 둘러 보랏빛의 두 다리를 내놓고 있었 다. 금보랏빛의 얼굴은 길쭉하며 머리가 뾰족하였다. 동그랗고 큰 두 눈은 검푸른 흉광(凶光)을 번쩍 였다. 콧구멍이 하늘을 향하도록 콧등이 오목 들어가고 광대뼈는 툭 튀어나왔다. 두 귀는 뾰족하 고도 납작하며, 입은 널찍하여 약 세 치 정도 찢어졌다. 회색 머리카락에 목이 길었고, 귀와 목 두 곳에는 금목걸이와 금귀걸이를 차고 있었다. 생김새가 흉악하고 난폭스러워서 여간 위풍이 당당하지 않았다. 백기는 이 사람이 바로 그 묘인 요개강임을 알았다. 그의 뒤에 또 그와 비슷한 모습을 한 두 사 람이 따라오고 있었으나 덩지나 위엄이 요개강에 미치지 못했다. 이 패거리들이 약 삼 장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오도록 백기는 앞으로 나가 맞이하지 않았는 데, 문득 몸집이 큰 한 사내가 일행에서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손에 초청장을 든 사나이는 백기 앞으로 뛰어와서는 높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육지금룡> 위청이라고 합니다. 여촌 촌주님과 나한, 진인 및 여러 영웅협사의 명을 받고, 먼저 와서 귀촌의 연회에 참석하려 하오. 초청장은 여기에 있습니다." 백기는 초청장을 받아들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 사람은 대가장의 장주 백기라고 하오. 귀촌의 촌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왕림해 주실 줄 알고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소이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위도우께서 먼저 이 뜻을 대신 받아주 시면 좋겠소이다." 위청은 영접 나온 사람이 백기인 것을 보자 눈짓을 보내곤 돌아갔다. 그리고는 백기가 한 말을 동행한 나머지 우두머리들에게 전했다. 백기도 뒤따라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어느 분이 여장주이십니까?"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앞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내가 여헌명이외다. 그대는 대가장의 대장주인 백영웅입니까?" "그렇소이다. 우리촌과 귀촌은 이웃해 있으면서도, 그 해에 홍수로 산이 무너져 어신동이 막혔 고, 또 내가 자주 외출을 하여 찾아뵙지 못했었지요. 오늘 약간의 주안을 차려놓고 여러분을 청한 것은, 오랫동안 앙모하던 여러 영웅들을 이 기회를 빌어 만나뵈려는 것이오. 여러분께서 장주님과 함께 왕림해 주시니 이야말로 큰 영광이외다. 하지만 내가 강호에 몸을 내민 지 얼마 되지 않고 나이가 어려 대부분의 영웅들과는 만난 적이 없으니, 장주께서 소개를 해주심이 어떨는지요?" 여헌명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랑 같이 오신 여러분은 대부분이 오래 전부터 이름을 날린 검협 영웅호걸들입니다! 백장주께 서 만난 적이 없으시다니, 그럼 제가 소개를 하지요." 그리고는 화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오대파의 검선 <금신나한> 법원 노사이십니다." 다시 그 묘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묘강에서 법술이 고강하기로 첫째인 요개강 노사이십니다." 백기는 소개받을 때마다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했으나, 법원과 요개강은 거만을 떨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진, 나 이외의 사람도 모두 소개를 받았 는데, 과연 그중의 몇 명은 대도와 채화음적들이었다. 백기는 하나하나 모두 기억에 새기면서 몇 마디 인사말을 하였다. 이윽고 소개가 끝나자 백기는 여헌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들을 안내하였다. 여신동을 빠져나와 약 반 리 정도 왔다고 생각될 때 백기는 짐짓 여헌명에게 말했다. "우리 두 촌은 이웃해 있지만 어신동이 막혀 왕래가 중단됐소이다. 일전에 장주께서 왕림해 주 시겠다고 승락하셨을 때만 해도 장주께서 길을 돌아 계곡으로 오실 줄로만 생각했지요. 어신동이 저절로 갈라질 줄은 미처 생각이나 했습니까? 그런데 이제 옛길이 이미 뚫려 이제부터 왕래가 편 리하게 되었으니, 차후로는 자주 찾아뵙겠소이다." 여헌명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손님된 입장에서 공중으로 날아 귀촌으로 간다면 큰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옛길이 막힌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다행히 요법사께서 육정개산의 법술로 뚫어 우리를 편하게 해주신 것이지요." 백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원래가 요법사의 법력이었군요. 정말로 신묘하십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촌과 진우 장주가 화해하기 위하여 장주님을 청한 것인데, 혹 촌민들이 그 진상을 알지 못하고 연회가 끝나기 전에 어신동 옛길로 들락거리다가 오해라도 생긴다면 제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그래서 내 의견으로는 차라리 어신동을 잠시 막아놓았다가 연회가 끝난 후에 다시 통하게 하여 여러분을 전송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말을 마치자 여헌명의 대답도 듣기 전에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문득 '구르릉!' 하는 우뢰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요개강이 요법을 써서 일으켜 세 운 산봉우리가 서서히 어신동 옛길을 향해 내려앉고 있었다. 요개강이 구사한 그 <육정개산>은 결코 대가의 수준에 이른 법술이 되지 못했다. 다만 요법으 로 산봉우리를 일으켜 세운 후 다시 사신(邪神)을 이용하여 옆에서 부축하게 함으로써 잠시 사람 눈을 속였을 뿐이지, 오래 지탱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미리 약속한 대로 옥청대사가 백기의 손이 올라가는 것을 기다려 정법을 써서 사신을 쫓아 요법을 깨뜨리고는 그 산봉우리를 서서히 내려앉게 하였던 것이다. 여촌쪽 사람들은 백기가 요개강의 요법을 깨뜨리는 것을 보자 속으로 깜짝 놀랬다. 더욱이 요개 강은 세상으로 나온 후에 여지껏 적수를 만나보지 못했으므로 대가장에 무슨 대단한 인물이 있겠 는가 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오늘아침 어신동 옛길을 뚫고 얼마 안 있어 정신이 흐리멍텅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일 융숭한 접대를 받느라고 수련을 게을리한 때문인가 싶어 즉시 조용한 방을 찾아 수련을 하였으 나, 어찌 된 영문인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점괘조차도 맞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 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자기의 법술이 고강함을 믿고 적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일간생극(日干生剋)을 계산해 내어 오시가 비교적 가장 좋음을 알고 오시가 되어서야 출 발하였던 것이다. 어신동 옛길을 건너 대가장에서 마중 나온 백기의 모습을 보았을 때도 별로 위풍이 당당하지 못 한 것을 보고는 더욱 업신여기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손을 꼽지 않고 주문도 외지 않 고 그저 손만 한 번 휘둘러 자기의 법술을 깨뜨리는 것을 보자, 창피스럽기도 하고 성도 났다. 즉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암암리에 요법을 써서 사신으로 하여금 다시 산봉우리를 부축하게 하였다. 그의 요법도 놀랄 만한 것이었다. 무너지던 산봉우리는 공중에서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하게 되고 만 것이다. 여헌명은 요개강이 다시 법술을 썼다는 것을 알고는 기쁜 얼굴로 백기에게 말했다. "백장주의 법술은 과연 신통하군요. 하지만 산봉우리가 공중에서 내려오지도 올라가지도 않으니, 촌민들이 이곳을 지나가다 오해가 생기는 것은 약과요, 만일 산이 무너져 내려서 많은 사람이 죽 는다면 어떻게 되겠소이까? 결코 촌민을 애호하는 백장주의 본심은 아니시겠지요?" 백기는 산봉우리가 무너져 내리다가 중간에 무슨 물건에 받힌 듯이 딱 멎는 것을 보자, 옥청대 사가 어쩌면 요개강의 적수가 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싶어 속으로 놀라면서 전전긍긍했다. 엉 겹결에 고개를 돌리다 보니 길 옆 숲 속의 바위 뒤에 아까 뱀을 잡아죽인 걸인이 서 있었다. 걸인은 멀리 산봉우리를 향해 손짓을 하며 입 속으로 무슨 주문을 외는 것 같았다. 그가 친구인 지 아니면 적인지를 알지 못하는 백기는 아까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 애석했다. 이처럼 곤란한 순간에, 갑자기 앞에서 한 줄기 빛이 번쩍이며 옥청대사가 쫓아왔다. "여러분 빨리 피하시오! 산봉우리가 무너지니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걸인이 숲 속에서 튀어나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미 늦었을 걸!" 사람들이 당황하는 순간에 그 걸인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별안간 하늘을 뒤흔드는 듯한 우뢰 같은 소리가 나며 이어서 산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은 어신동에서 일 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써 대가장의 광장과도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어신동 쪽에서는 모래와 돌멩이가 튀어오르며 먼지가 하늘을 가리어 햇빛도 어두웠다. 우귀사신 (牛鬼蛇神)의 괴상한 형상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다시 방금 그 걸인을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요개강은 예기(銳氣)가 크게 꺾였다. 법원은 옥청대사까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보자 지난날의 원한이 솟구치는 한편 다급하기도 했다. 아미파 사람들 중 또 누가 이곳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억지로라도 부딪 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광장에 다다르자, 형옥, 허초가 다가와서 몇 마디 인사말을 하고 그들을 맞아들였다. 동 원기는 사람들과 함께 이미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밖에 있던 검선들도 모두 안으로 들어왔 다. 법원은 아미파의 주요 인물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자 기쁨을 참지 못하여 만면에 웃음이 가 득하였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동원기, 옥청대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쌍방이 서로 모르는 사람들 은 백기, 대형옥, 여헌명, 곽운박이 소개를 한 후에 자기 주인과 손님의 자리로 나누어 앉았다. 주석(主席)의 첫째 탁자는 <만리비홍> 동원기, 철사도인, 옥청대사, 조심원, 황현극, 백기, 능조 이렇게 일곱 명. 둘째 탁자는 <상강오협> 가운데의 우순농, 황인유, 목계와 대형옥, 유윤중, 허초, 장기 등 일곱 명. 셋째 탁자는 하매, 최기, 오문기, 주경운, 장요청, 능운봉, 대상영 등 입곱 협녀 가 앉았다. 악대붕, 황인룡, 임추수 세 사람이 밖에서 일찍 돌아오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가장의 주요 인 물이 모두 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빈석(賓席)의 첫째 탁자에는 <금신나한> 법원, 묘인 요개강, 진장태, 나구, 여헌명, 곽운박과 화 산파의 <아도인> 공령자 등 일곱 명. 둘째 탁자는 화산파의 <화사자(火獅子)> 조비, <백호성(白 虎星)> 욱차곡, <다비웅> 모태, <벽력수> 울지원, <구미선호> 유연랑, <소방삭(小方朔)> 신오 소(神吳宵), <삼안홍예> 설망 등 일곱 명이었다. 셋째, 넷째 탁자에는 유연랑의 친척 분목단(粉牧丹) <천운연자(穿雲燕子)> 유웅비(柳雄飛), <오 화봉(五花蜂)> 최천수(崔天綏), <위진건곤일지화(威鎭乾坤一枝花)> 왕옥아(王玉兒) 등 복건(福建) 무이산(武彛山)의 유명한 세 음적해도(淫賊海盜) 외에 사천의 <이구오화(二寇五花)>인 허룡(許 龍), <화화도인(花花道人)> 요소수(姚素修), 가두타(假頭陀)> 요원(姚元), <풍상이협(風箱二峽)> <악장년(惡長年) 위칠(魏七), <수타(水陀)> 위팔(魏八), <독패천동(獨覇川東)> 이진천(李鎭川), < 혼원(混元)> 석장옥(石張玉), <팔수전(八手前)> 엄몽생(嚴夢生), <동두추명(同頭追命)> 소무(簫 武), <장강수호(長江水虎)> 사마수(司馬壽) 열세 명이 나뉘어 앉았다. 이들 모두가 강호상의 강양대도(江洋大盜)와 살인을 하고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마군(魔君) 들이었다. 백, 대 등 여러 사람들은 모두가 그중 한두 명은 알고 있었고,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만나보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대가장 쪽은 미리 여촌 쪽의 인원수를 파악했었기 때문에, 대청의 모든 장식품을 치우고 탁자 여덟 개를 양쪽으로 나누어 배치했다. 그런데 주빈이 한쪽씩 나누어 앉고 보니 일곱 탁자에 사람 이 차고 나머지 한 탁자는 남았다. 백기가 그 탁자를 치우라고 명령하려 하는데, 문득 악대붕, 황인룡, 임추수가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동행자는 아까 뱀을 잡아죽인 그 걸인이었는데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체면을 차리지 않고 마구 먹고 마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법원은 처음에 그 걸인을 보자 백기가 끌어들인 원군 중의 한 명 이겠거니 생각하고 별 대수롭 게 여기지 앉았고, 다른 사람들은 방금 밖에서 악, 황, 임과 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두 그들 세 사람이 데리고 온 동료로 여겼다. 무릇 검협들은 옷차림이나 생김새로 상대방을 평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과 대치하고 있는 긴 박한 상황인지라, 한 번 쳐다보고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이파 출신이지만, 개사귀정한 옥청대사는 견식이 매우 넓었다. 그가 어신동에서 요개강과 투법(鬪法)을 할 당시는 서로가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돌연 히 한 줄기 보랏빛 광채가 햇빛 아래 희미하게 번쩍이면서 적의 요법과 자기의 법술을 한꺼번에 깨뜨리는 것을 보자 사태가 좋지 않게 되어간다고 여겼다. 옥청대사는 산이 무너지며 사람을 다치게 할까 봐 급히 몸을 날리며 백기에게 피하라고 소리쳤 던 것이다. 그러나 좀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걸인이 사람들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이산축 지(移山縮地)>의 법을 써서 사람들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가! 마음 속에 크게 깨닫는 바 가 있어 그에게 몇 마디 물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없었다. 옥청대사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사람은 아마도 그 괴규화(醜揆花)라는 사람인 것 같다. 이미 오랫동안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 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을까? 이 사람은 원래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성격이라 사정(邪正)을 가리지 않고 자기 멋대로 신이 나서 참견하는 사람이다. 만약 여촌 쪽에서 청해 왔다면 오늘 승부는 알 수 없겠구나!'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였기 때문에 옥청대사는 동원기에게만 이 사실을 간단히 귀띔하였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서도 은근히 걱정이었다. 일부러 초청하려고 해도 그가 지금 악, 황, 임 세 사람과 같이 들어와서 자기네 쪽에 앉아서는 동원기에게 눈짓을 한 번 보내고는 아무 말하지 않으니 말이다. 워낙 성질이 괴팍한 사람이라, 만약 나아가서 아는 체 접대한다면 도리어 좋지 않 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하, 최, 오, 주 네 협녀는 아까 어신동에서 그를 본 적 이 있었다. 말하나마나 불청객이지만, 동원기나 옥청대사가 별로 동요하는 빛이 아니므로 그녀들 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유독 백기만은 그에 대해 오랫동안 주의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악, 황, 임 세 사람이 알 고 지내는 이인인 줄로 여겼으나, 적이 있는 앞에서 물어보기 거북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자기가 주인인데 초면에 성명조차 물어보지 않는다면 실례가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문득 귓가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이 막 시작되려고 하는데 나에게 신경쓸 것 없소이다. 나는 공짜로 먹지는 않을 테니 너무 그리 가슴 아파하지 마시오!" 매우 가느다린 소리지만 똑똑히 들렸다. 사방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모두 정연하게 앉아 있는데, 그 걸인만 자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가! 그때 마침 형옥, 허초 두 사람이 주객 양쪽에 술을 권하고 자리로 돌아왔고, 이어서 동원기가 일 어나 법원이 앉은 탁자를 향하여 말했다. "오늘 일은 원래 당초 백, 대, 허 세 분 장주께서 진, 나 두 분을 화해시키려다 일어난 일이외다. 두 분은 원래 사이가 원만했는데, 뜻밖의 오해로 말미암아 화기가 상하여 쌍방이 원한을 맺게 되 었지요. 원래는 오늘 백, 대, 허 세 분이 진우로 가서 화해를 청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백장주께서 약속한 시간에 가겠다고 서신을 보냈다가 진장주께서 여촌으로 오신 것을 알고는 이곳에서 만나 기로 약속을 바꾼 것이외다. 백, 대, 허 세 분은 모두 이웃간의 싸움을 원치 않고 있소이다. 설령 끝까지 진장주의 양해를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서너 사람으로 인해 두 마을이 패싸움을 벌여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이 어찌 바람직하겠소? 그래서 진장주께서 여장주와 여러 도우를 청하는 것을 보고 백장주께서는 빈도 등을 이곳으로 청한 것이외다. 그런데 빈도의 나이가 몇 살 많다고 해서 빈도로 하여금 쌍방의 화해를 중재하게 하는구려. 바라건대 모두가 이전처럼 사이좋게 지내 며 피차간에 원한을 맺지 않기 바라오. 내가 보기에 진장주와 세 분 장주는 본래 모두가 이곳이 고향인 사람인데 어째서 꼭 사소한 일로 인해 싸움을 하시려 하오? 만약 진장주께서 한 걸음 양 보하여 내 말대로 화해를 하신다면, 세 분을 대신하여 내가 벌을 받겠소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실력으로 대결하는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계신 분들은 모두 강호상에서 이름 을 드날린 터이지만, 각자가 배운 바가 다르며 실력도 차이가 있으니, 만약 실력의 차이를 따지지 않고 기합을 한다면 어찌 공평하다 할 수 있겠소." 그리고는 말을 끊고 좌중을 쓱 돌아본 다음 다시 이었다. "현재 백장주께서 앞 광장에 주인과 손님이 앉을 수 있는 단을 만들어 놓았소. 오늘 일은 어디 까지나 진, 대 두 마을이 주체이니, 주연이 끝난 후에 쌍방이 단으로 올라가 오늘의 곡직(曲直)을 결정하기로 합시다. 만약 쌍방에서 청해 온 손님 중에서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을 경우에는, 내외 무공이나 검술이나 도법으로 자기 평생에 배운 절기를 가지고 실력에 맞추어 한 사람씩 겨루도록 하지요. 빈도도 이 좋은 기회를 빌어 견식을 넓히려고 하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시오?" 법원이 이 말을 듣자 일어나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동도우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은 본래 강호상에 자주 있는 일입니다. 여촌과 대가장은 다만 어신동을 사이에 둔 가까운 이웃 마을로써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백장주 께서는 어째서 사람을 보내어 몇 차례나 염탐을 하였는지요? 이 때문에 여장주께서 이 일에 참견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말로써 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다행히 귀 촌께서 이미 빈틈없는 준비를 해 놓으셨으니, 두려워하는 사람은 오지 않을 것이며 온 사람은 두 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빈도는 원래 동도우와 마찬가지로 이 일과는 직접 상관이 없는 사람입 니다. 여, 진 두 분께서 동도우가 귀촌을 도와주시는 것을 알고 빈도를 청하여 임시 수령으로 삼 으려고 했습니다. 빈도는 귀파가 비록 도술이 고강하지만 자주 약자를 괴롭힌다고 느꼈기 때문에, 내 자신이 패군지장(敗軍之將)으로서 귀파의 적수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 매우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 이 일에 참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시간도 이르지 않고 더 이상 말해 봤 자 무익하니 동도우 의견대로 먼저 무예를 겨루고, 다시 검술을 겨루고, 후에 도법을 겨루기로 하 지요. 또다른 무슨 주객을 나눌 필요없이 무릇 빈도와 같이 온 사람은 모두 객이며, 귀촌 쪽은 모 두 주로 하여 자기의 능력도행에 맞추어 한 명씩 단 위로 올라가 겨루기로 합시다. 그렇게 하여 야만 검술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암수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동도우께서는 어떻 게 생각하시는지요?" 동원기는 법원의 말을 듣자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더 이상 다른 소리는 필요없고, 빈도와 이 마을 전체는 그대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주석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며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법원들도 모두 일어나서 광장으로 나갔다. 동, 법 두 사람은 검술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피해 를 당할 것을 똑같이 염려했던 터이므로, 지금 쌍방이 모두 이 조건에 동의하자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허허실실 打雷試登萍 有意藏奸 無心出醜 輕身行白刃 淫人喪命 蕩女揮拳 쌍방이 광장에 도착하자, 대가장의 사람들은 동원기가 인솔하여 동쪽 단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여촌 사람들은 백기의 인도로 법원과 요개강을 따라 서쪽 단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동서 두 단에 십여 명의 일꾼을 보내어 차를 대접하게 하였다. 모두들 겉으로는 매우 공손해서 잠시 후에 목숨 을 걸고 싸우려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모두가 밖으로 나갈 즈음, 그 괴규화라는 인물은 먼저 일어나서 이렇다 저렇다 말 한 마디 없이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단으로 올라와서 자리에 앉았을 때는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앉았다. 백기가 여촌 사람들을 안내하고 동쪽 단으로 돌아와 보니 임추수가 방금 데리고 온 두 손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소주(蘇州) 태호(太湖) 금정산(金庭山), 묘(金庭産) 옥 주동(玉柱洞)에 은거하는 <오중쌍협(吳中雙俠)> 강위어(姜渭魚)와 반소호(潘嘯虎)라는 것을 알고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하였다. 원래 악, 청, 임 세 사람이 계곡 입구를 지키고 있을 때, 문득 계곡 밖에서 호기(號旗)가 오르면 서 멀리 두 사람이 날듯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다가가보니 옛 친구인 오중쌍협이었다. 그 들도 선화로 나신을 찾아갔다가 초명구로부터 대가장의 일을 들었을 뿐 아니라 <상강오협>도 이 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히 도우러 온 것이었다. 피차간에 서로 안부를 묻고 있는데. 웬 걸인과 덩지 큰 사나이가 저만치서 오고 있었다. 황, 임 두 사람은 그 큰 사나이가 <육지금룡> 위청으로써 여촌에 첩자로 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 나, 그 걸인은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먼저 위청에게 무슨 일로 이곳으로 왔느냐고 물었다. 위청이 말했다. "저는 여, 곽 두 사람이 의심을 할까 봐 그들과 같이 대가장으로 떠났답니다. 떠날 때 남들이 모 르게 제 아내에게 대소저가 말한 그 지름길로 도망가라고 시켰지요. 아까 어신동 산봉우리가 무 너질 때 저는 산기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있다가 그 산봉우리가 저 위로 내려앉는 것을 보고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을 알고 눈을 감고 죽기를 기다렸지요. 그런데 뜻밖에 이 어른께서 날듯 뛰어와 저를 꿰어차고 백여 장 떨어진 먼 곳으로 도망쳐 나왔기에 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답니 다. 나중에사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다 보니, 대가장을 도우러 오신 분이며, 제가 한편 인 것을 미리 알고 구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분이 또 말씀하시길, 제 아내가 길을 잘 못들어 한 흰원숭이에게 잡혀갔으니 빨리 가서 구하라고 하시는군요. 만약 늦게 가면 강간을 당 할는지도 모른다지 뭡니까?" 말을 마치자 위청은 곧장 떠나려고 하였다. 악, 황, 임, 강, 반 다섯 사람은 자기들 중에서 두 사 람은 그를 도우러 같이 가자고 의논하였다. 그러자 그 걸인이 말했다. "그대들이 갈 필요는 없소. 그 흰원숭이는 약간의 도행을 지닌 짐승으로서 이 사람과 깊은 연원 이 있거든. 그러니 혼자 가는 것이 좋소. 그대들이 간다면 도리어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으니까." 악대붕은 걸인이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자 매우 불쾌했다. 그러나 임추수는 오협 가운데 가 장 견식이 넓었다. 그 걸인이 위청을 구했다는 말을 듣자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 다. 게다가 그의 기괴한 두 눈을 보고는 더욱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얼른 말했다. "노형께서 그러시니, 그럼 우리는 가지 않겠습니다." 위청은 본시 그 다섯 사람이 도와줬으면 했었지만, 이 말을 듣자 단념하고 급히 계곡 밖으로 달 려나갔다. 걸인이 말했다. "지금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안에는 아직 우리를 위해 주석을 한 탁자 남겨놓았소. 주인양반이 내 걸음 빠른 것을 보고 그대들을 불러오라고 한 거외다. 여촌에서 온 저 쥐새끼들은 한 놈도 도 망가지 못할 것이오. 잠시 후에 내 현질(賢姪) 장창(章彰)도 올 테니까, 지금 빨리 가지 않으면 탁 자를 치워버려 그대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질지도 모르겠소." 임, 황 두 사람은 그 걸인이 자기들의 스승인 <주사후(珠砂吼)> 장창을 현질이라고 부르는 바람 에 자기들은 그 걸인보다 두 연배나 낮아져 버렸다. 방금 노형이라고 불렀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또 스승은 멀리 대만섬에서 이미 오랫동안 은거하여 나오지 않고 있는데 오늘 어떻 게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그의 태도가 약간은 미치광이 같아서 하는 소리도 정말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선배께서 저희 사부님과 잘 아신다고 하시니, 방금 위형과 이야기할 때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여쭈어 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선배님을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존함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아, 원래 장창이 그대들의 사부였구만. 자네들이 내 이름을 물으려고 한다면, 다른 이름이 없으 니 궁신(窮神)이라고 부르게나. 나는 원래 연배 같은 것은 따지지 않으니, 자네들이 나를 궁신이 라고 부르던지 아니면 나의 별호인 괴규화라고 불러도 좋네." 황, 임 두 사람은 이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하였지만 <괴규화>라는 석 자는 매우 귀에 익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내력이 생각나지 않았다. 예사로운 인물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지라 더 자세히 들어보려고 하는데, 악대붕이 진작부터 참지 못하고 먼저 말했다. "궁대선배께서 적이 이미 도착했고 주인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니 그만 갑시다. 여쭐 것이 있 으면 나중에 해도 되잖소." 괴규화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네 말이 내 맘에 꼭 드네. 나도 아침부터 바쁘게 설치느라고 배가 고프니 빨리 가서 좀 먹자 구." 악대붕은 이 기회에 그 걸인의 재주를 시험해 볼 요량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날듯 뛰어갔다. 괴규화는 냉소를 한 번 짓고는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어이, 좀 천천히 가세. 내가 나이가 많아 따라가지 못하겠으니, 자네 사부의 얼굴을 봐서라도 좀 기다려 주게나!" 말을 마치자 짚신을 끌면서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황, 임 등 다섯 사람은 못 들은 체 앞으로 계속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걸인의 외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이미 멀리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는 속으로 성도 났고, 쓴웃음이 나오 기도 했다. 그러나 임추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그 사람이 경신술조차 하지 못한다면 주인이 그를 청해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위청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사람의 재주가 자기 재주를 능가한다고 했 는데, 어째서 우리를 따라오지 못할까? 틀림없이 일부러 그럴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미 대가장 문 앞에 다다랐다. 그런데 문득 안에서부터 뛰어나오는 괴 규화의 모습이 보였다. 괴규화가 말했다. "자네들이 빠르다고 해도 내가 지름길로 질러오는 것은 못 당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내 가 한 발 먼저 도착했구만." 악대붕 등은 이 길 말고 다른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고의로 이렇게 말 하는 것을 듣고 모두 깜짝 놀랬다. 모두들 깔보던 생각을 고쳐먹고 다소곳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걸인이 또 말했다. "주인이 자네 다섯 사람을 들어오라고 하니, 각자 잠자코 그냥 앉아 먹고 마시기만 하게나. 나는 자네들 뒤를 따라 들어갈 테니 절대로 나의 내력을 말하지 말게. 잘못하여 그 쥐새끼들이 놀래 도망가면 다시 잡기 힘들게 되니까." 황, 임 등 다섯 사람은 그의 지시를 마음에 새겨 안으로 들어간 후에 그대로 행동하였다. 그 걸인은 맨 윗자리에 앉아서 마구 먹고 마셔댔다. 아까 뱀을 잡아죽여 온몸에서 비린내가 진 동하고 손도 더러운데 그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만져대니 다른 사람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악대붕 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만 임추수를 바라보며 속으로 성을 낼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임추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도리어 그에게 음식을 권했다. 괴규화가 말했다. "자네들은 정말 재미난 사람들이구만. 내가 이곳에 와서 자네들을 구해 주는 것이 헛된 일이 아 니군." 임추수는 비록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이 싸움은 결코 보통 싸움이 아니 며 이 사람은 필히 매우 중요한 인물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음식을 먹은 후 광장으로 나올 때 그의 뒤를 바싹 따라가면서 몇 번이나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다 가 눈 깜빡할 사이에 그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백기를 만난 임추수는 그동안의 경과를 간단히 이야기했는데, 옥청대사가 그를 매우 중시한다는 것을 듣자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만 시간이 너무 급박하여 그와 스 승 장창의 관계를 물을 겨를이 없는 게 한이었다. 백기가 사람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자, 동원기는 그에게 첫 번째로 단에 올라가 시합을 하 라고 명령했다. 백기는 명을 받자 먼저 단 앞에서부터 몸을 솟구쳐 첫 번째 연화장으로 뛰어올라 가 숨을 죽이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금계독립(金鷄獨立)>의 자세를 취했다. 이때는 바로 삼 월 초순으로 봄색이 완연하였다. 산기슭에는 산꽃들이 만발하고 복숭아꽃은 붉 으며 버들이 푸르게 우거져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백기는 사람이 본래 생김새가 준수하고, 또 하얀 의관을 착용하여 한결 돋보였다. 그는 연화장 위에 서서 두 손을 모우고 서쪽 단을 향해 진장태를 불렀다. 그 늠름한 태도와 영웅의 기풍은 정 말로 당대의 일품이었다. 백기가 나오는 것을 본 법원이 동원기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방금 먼저 무예를 겨루기로 약속을 했지 않소? 백장주의 정통한 법술은 아까 어신동에서 이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소. 진장주가 비록 무공이 고강하다고 하지만 어찌 적수가 되겠소? 만약 법술을 먼저 겨루겠다면 빈도가 백장주와 길고 짧음을 겨루어 보리다!" 동원기는 이 말을 듣자, 법원이 아까 어신동에서의 일로 백기가 법술을 할 줄 안다고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백기가 당할 것이 두려워 법원이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큰소리로 대답했 다. "선사께서는 잠깐 기다리시오! 빈도는 백장주가 내외무공이 절정에 다다른 것만 알았을 뿐, 그가 도법에도 정통한 줄은 몰랐소. 선사께서 의심을 하시니 그를 불러들이고 다른 사람을 내보내면 되지 않겠소." 말을 마치자 곧 대형옥을 불러 백기 대신 나가게 했다. 그들이 자랑하는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일종인<답사비행(踏沙飛行)>의 신법은 원래 백, 대, 허 세 사람이 숙련한 것이었다. 명을 받은 형옥이 몸을 일으켜 단 위로 뛰어오르자, 동시에 백기 도 단에서 뛰어내려 왔다. 한 명은 뛰어내리고 한 명은 뛰어오르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공중에서 정면으로 부 딪칠 것 같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옆으로 돌리니 서로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 다. 형옥은 연화장 위에 서서 <어안권립(魚雁倦立)>의 자세를 취했다. 서쪽단의 진장태는 이런 경신술을 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본 적조차도 없었다. 나구는 스승이 었던 동원기의 면전이라 무안하기도 하고 겁도 나서 함부로 나서지를 못하고 있는데, 속도 모르 는 진장태는 형옥이 나서는 것을 보자, 계속 그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이었다. 내키지 않지만 자기 는 진장태의 녹을 먹는 사람인데 그의 뜻을 무시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구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났다. 단 앞을 쳐다보니 세 개의 연화장이 보였다. 한쪽은 모래를 쌓아놓은 길이고 한쪽 은 칼을 꽂아논 길이었다. 내, 외공이 절정에 다다른 사람이 아니면 지나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다행히 자기는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구는 비로소 용기를 내서 법원에게 말했다. "제자가 가서 저 자를 해치우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곧장 몸을 솟구쳐 동쪽단 아래의 첫 번째 연화장 위로 올라갔다. 형옥은 나구가 나오는 것을 보자 감히 방심할 수 없었다. 연화장 위에 서서 두 손을 모아 인사 를 한 후에 몸을 모래탑 위로 날렸다. 발끝이 모래탑에 닿자마자 두 손을 벌렸다가 몸을 위로 받 쳐올리듯 허리에다 걸고는 밑으로 가라앉는 힘을 받쳐올리면서 <등평도수>의 수법으로 날듯 달 려가 두 번째 연화장으로 올라갔다. 나구는 이 초상비(草上飛)의 무공은 구사할 줄 몰랐지만, 그래도 검술은 연마한 사람인지라 기공 의 기초는 잡혀 있었다. 그 눈처럼 보드라운 모래를 쌓아 뾰족하게 만든 모래탑을 보니,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고 나는 새라도 그 위를 지나가면 발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구 는 진기로 몸을 받쳐올려 모래를 밟지 않고 사뿐히 걸어가서 모래탑 끝에 있는 연화장으로 올라 갔다. 동원기가 백, 대 두 사람을 첫 번째로 내보낸 것은 백, 대, 허 세 사람이 주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에서는 진장태가 나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 나구가 나왔으니 문제였다. 형옥은 무공이 뛰어나지만 검술을 할 줄 모르니 결코 나구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나왔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있다가, 나구가 비검을 방해하지 않으면 그만 이지만, 만악 비검을 방해한다면 그때 그를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돌연 옥청대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능노선배님이 단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쪽이 승리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동원기가 옥청대사의 말을 듣고 앞을 내다보니 단의 기둥 아래 그 괴규화가 기대어 있었다. 그 가 기댄 기둥은 마침 서쪽단의 시선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는 이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 다. 이때 형옥은 이미 나구와 마주서서 강호상의 형식적인 인사말을 나눈 후에 각자 칼길 위로 몸을 날렸다. 나구는 칼길이 모래탑보다 지나가기가 훨씬 쉽겠구나 싶어 냉소를 지으며 뛰어올라 갔다. 두 사람은 모두 날듯 삽시간에 끝까지 달려갔다. 형옥이 연화장 위로 뛰어올라가 나구에게 타뢰대로 올라가자고 말하려고 할때였다. 돌연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나구가 딛고서 있던 그 연화장이 부러지며 나구는 땅에 나뒹굴었다. 나구가 억 지로 일어나려고 할때 동원기와 법원이 자기 동, 서쪽에서 날아왔다. 동원기는 대형옥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한 후에 법원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첫 번째 시합은 이미 승부가 났으니, 선사께서는 다른 사람을 내보내시지요!" 나구는 동원기가 온 것을 보자 더럭 겁이 났다. 찍 소리도 못하고 창피한 얼굴로 서쪽단으로 돌 아갔다. 법원은 나구가 갑자기 넘어졌을 때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원기가 움직이자마자 자기도 급히 뒤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는 동원기의 말에 우선 대답을 하지 않고 부러진 연화장을 재빨리 주워들고는 형옥이 섰던 연화장과 자세히 비교해 보았다. 두 연화장은 모두 땅에 살짝 꽂 혀 있었으며 다른 점이라곤 전혀 없었다. 분명히 나구는 힘을 너무 주는 바람에 부러진 것이라 판단되었다. 그는 다시 양쪽 칼길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같은 길이로 박혀 있었고, 다만 나구가 지나간 자리 는 완전히 처음과 같은 대신, 형옥이 발을 디뎠던 자리는 칼끝이 구부려져 가지런히 땅에 약간 더 들어가 있었다. 이러한 경신술은 정말 보기 드문 것이었다. 가령 연화장이 부러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구가 이미 한 수 지고 있는 셈이었다. 나구는 암암리에 검기(劍氣)를 운용하여 몸을 들어올려 걸어갔는데 어떻게 연화장이 부러질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다른 사람이 암수를 썼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증거를 찾을 수가 없으니 우선 진 것으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을 등장시켜 확실한 증거를 잡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법원은 동원기에게 말했다. "나구가 자칫 실수를 한 것 같군요. 빈도가 다른 사람을 내보내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소이다." 동원기가 말했다. "오늘 일은 원래 각자 무공에 맞추어 시합하기로 했던 바외다. 그래서 방금 빈도는 백장주가 주 최측인 까닭에 그를 먼저 내보냈던 것이오. 그런데 선사께서 그가 법술에 정통하다고 의심하시기 에 빈도는 대장주와 교체시킨 거외다. 원래는 백장주와 진장주가 대결을 하여 쌍방의 주체 인물 이 먼저 승부를 겨룬 후에, 다시 쌍방의 가빈(嘉賓)들이 겨루도록 할 참이었는데, 뜻밖에 선사께 서 나구를 내보내셨소. 나구는 본시 빈도가 내쫓아 버린 제자로서 제법 검술을 알고 있소이다. 빈 도는 대장주가 그의 적수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등장하였기 때문에 강호상 체면을 보아 그냥 있었소. 다만 나구가 검술을 써서 사람을 욕보이지만 않는다면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려 고 했소이다. 나구는 이전에 빈도의 문하에 있을 때 검술을 배우면 적수가 없을 것이라 믿고 무 공에는 전혀 힘을 쓰지 않았소. 방금 모래탑을 지나갈 때도 검기를 이용하여 비행하였고, 칼길을 갈 때도 마찬가지 수법을 사용하였소. 그래서 <등평도수>와 <행도절인(行刀折刃)>의 연경(軟硬) 공부가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겠소? 모래탑을 지날 때는 발자국이 남지 않아야 하며, 칼길을 지 나갈 때는 몸을 움직이지 않되 지나간 곳의 칼은 모두 구부려야 합격인 것을 알지 못한 거지요. 칼날을 구부리지 않았으니 이미 한 수 진 데다가, 또 연화장을 부러뜨렸으니 완전 패배요. 만약 빈도가 때맞춰 달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몰래 비검을 썼을 거외다. 선사께서 진 것을 인정하시니 족히 고명하다고 할 수 있겠소이다. 하지만 이번에 등장할 사람은 실력에 맞게 내보내어 강호의 규칙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구려." 말을 마치자 법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날려 단으로 돌아왔다. 법원은 정면으로 비웃음을 당하자 이를 악물며 괘씸하게 여겼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흥, 네놈이 이치를 따져서 사람을 비웃었겠다. 잠시 후에 우리가 어떤지를 보여주마.' 그는 단으로 돌아와서 나구에게 어째서 넘어졌느냐고 물었다. 나구는 말했다. "제자가 등장하자마자 검기를 이용하여 계속 발을 땅에 대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칼길 끝에서 변화장으로 뛰어올라 가려고 할때, 발이 연화장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제 발을 잡아당기는 것 같더니만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법원도 나구가 <등평도수>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화 장에 떨어져 넘어질 정도의 실수는 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적이 암암리에 술수를 써서 대중 앞 에서 추태를 보이게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나구더러 넘어질 때 무슨 수상한 행적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나구는 없었다고 대답했다. 따라서 법원은 단지 심증으로만 상대와 따질 수는 없었으므로 속으로만 괘씸하게 여길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서쪽단에서 먼저 사람을 내보낼 차례였다. 법원이 누가 먼저 나가겠는가를 묻자, 유연랑의 친척 분목단 <천운연자> 유웅비가 즉각 일어나 며 대답했다. "제자가 나가겠습니다!" 법원은 그의 경공이 절정에 달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구가 암수에 당했기 때문에 제 삼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동시에 자기도 법안(法眼)을 운용하여 자세히 살펴서 무슨 동정이 보이면 단단히 따지려고 벼르 었다. 이때 부러진 연화장은 이미 백기가 사람을 시켜 새것으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동원기는 법원이 유웅비를 내보내는 것을 보자,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자는 사천지방의 유명한 노상 음적인데, 누가 저 자를 상대하겠소?" <상강오협> 가운데 황인유가 나가겠다고 대답했다. 황, 유 두 사람은 각기 동, 서단에서부터 모래탑 길을 지나 연화장 위로 올라갔다. 유웅비는 성명을 물어보고서 상대가 <상강오협>이란 것을 알고는 감히 태만할 수가 없었다. 두 손을 모아 읍을 한번 하고 칼길을 달려 연화장에 올랐다. 연화장을 올라갈 때 특히 주의를 했었 으나 다행히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두 사람은 타뢰대로 올라가서 각기 병기를 빼어들고 싸우기 시작했다. 황인유는 <구절양천척(九截量天尺)을 사용하고, 유웅비는 <연자조(練子爪)>를 사용했다. 황인유 는 양천척을 뻗어 유웅비의 이마를 찔렀다. 유웅비는 황인유가 짧은 병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자 자기 연자조는 길어서 유리하다고 느꼈다. 황인유의 양천척이 찔러 들어오는 것을 보고 뒤로 물 러나는 척하며 왼손의 연자조를 후려쳤다. 황인유는 연자조가 머리를 향해 내려오는 것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양천척으로 연자조 끝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유웅비는 이번엔 오른손의 연자조를 뻗어왔다. 황인유는 유웅비가 한 쌍의 연자조를 필관(筆管)처럼 연속으로 사용하여 마치 폭풍우같이 공격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正)을 벗어났으니, 나의 양천척 아래 죽으리라!' <상강오협>의 무예는 <태극을자(太極乙字)> 무공을 수련한 것이었다. 각기 사용하는 병기는 모 두가 짧고 정(靜)으로 동(動)을 제압하는 것이어서, 상대방의 병기가 길면 길수록 이쪽이 유리했 다. 유웅비는 처음에 이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자기가 두 연자조를 함께 사용해도 황 인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짧고도 작은 양천척으로 모두 막아내지 않는가. 유웅비가 온갖 교묘 한 초식을 사용해도 황인유는 몸도 움직이지 않고 양천척의 두 끝으로 모두 떨쳐버렸다. 가끔 약 간 힘을 세게 줄 때면 유웅비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강적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더욱 조심하였다. 싸움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유웅비는 황인유가 조용히 자기를 쳐다보며 기다렸다가 연자조가 들어오면 자연스런 태도로 아무 힘들이지 않고 막아내는 것을 보자, 이렇게 싸우다가는 언제 끝 날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적은 틀림없이 자기가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려고 한 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마음이 급해지자 좋은 생각 이 떠올랐다. 고의로 힘이 빠진 척 초수를 산만하게 하였다. 황인유가 공격하게 유인하려고 하였 다. 황인유는 대적을 상대한 경험이 많았으니 어찌 이런 작전을 눈치채지 못하겠는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래도 네가 좀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해주려고 했더니만 네가 도리어 내 앞에서 장난질을 치려고 하는구나. 그렇다면 소원대로 끝장을 내주겠다.' 이때 유웅비는 왼쪽 연자조를 들어 허초를 만들며 오른쪽 연자조를 내리쳐 왔다. 동시에 왼쪽 연자조가 허초에서 실초로 바뀌며 <고수반근(枯樹盤根)>의 초식으로 공격해 왔다. 황인유는 '잘 왔다!'라고 외치며 잽싸게 뒤로 한 걸음 반을 물러나니 적의 두 연자조는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황인유가 양천척을 들어 두 연자조의 끝을 차니, 그 수법이 민첩함은 마치 번개 치는 듯하였다. 유웅비는 두 연자조가 헛치는 것을 보자 속으로 뜨끔했다. 그래서 급히 두 연자조를 거두어들여 다른 초식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황인 유의 양천척이 자기의 두 연자조를 정면으로 내리친 것이다. 순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 가 벌어지며 연자조를 놓칠 뻔했다. 속으로 '이거 좋지 않구나!'라고 외치며 몸을 뒤로 날려 두 장 정도 물러났다. 그리고는 <패중취승(敗中取勝>의 절초인 <회두망월(回頭望月)>을 쓰려고 할 때, 어찌 된 영문인지 허리와 허벅지에 엄청난 통증이 왔다. 그는 즉시 연자조를 떨어뜨리며 땅에 쓰러졌다.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저 앞에 서 있는 황인유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 순간, 미리 대기하 고 있던 일꾼들이 몰려와 유웅비를 들것에 싣고 서쪽단으로 달려갔다. 유웅비의 경신공부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절정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방금 뒤로 물 러난 솜씨는 매우 민첩하여 아무런 소리도 일어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황인유가 쫓아와 혈도를 찍었으니, 이것으로 <상강오협>의 솜씨를 가히 알 만한 것이다. 서쪽단 사람들은 모두 분해서 이를 갈았다. 일꾼들이 데리고 온 유웅비의 상세를 살펴보니, 얼핏 보면 그래도 구할 수가 있을 것 같으나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사혈(死穴)의 아래 위를 심하게 찍 혔기 때문에 칠 일 내에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유연랑은 이를 악물며 법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서쪽단에서부터 몸을 날려 바로 타뢰대로 올라 갔다. 그리고는 황인유를 가리키며 방금의 복수를 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귓가에 아리따운 목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탕한 년! 어디서 함부로 제멋대로 날뛰고 있느냐! 하매가 왔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쪽단에서 한 흑의여인이 몸을 솟구쳐 날아왔다. 유연랑은 상대방에 자기의 상극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단지 복수하겠다는 일념에 그 위험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타뢰대에 올라와서 한 차례 소리를 지른 후에서야 적 가운 데 오문기, 주경운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녀는 더럭 겁이 났으나, 이미 말을 꺼냈으니 취 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되쏘아 오는 한 계집의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랬으나, 이쪽으로 오 는 여자가 오, 주 두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는 약간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상대방은 고수가 너무 많아. 그러니 우리쪽 중에 법원, 요개강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적을 당 해내기 힘들 거야. 나는 이 여자를 해치워 위신을 세우고, 훗날 다시 <상강오협>을 찾아가 복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이렇게 생각하고는 침착하게 맞받아 외쳤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나 <구미선호> 유연랑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겠다." 하매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진작부터 네년이 나쁜 짓만 골라하는 음적인 것을 알고, 특별히 너의 개 같은 목숨을 거 두러 왔느니라!" 말을 마치자 두 손을 벌리고 <옥녀권(玉女拳)> 가운데의 독장경천(獨掌擎天)의 자세를 취했다. 이어서 오른손으로 유연랑의 얼굴을 향해 번쩍이더니 몸을 솟구치며 왼손으로 머리를 내려찍었 다. 유연랑은 하매의 보식(步式)이 날렵하며 장법이 정기(精奇)한 것을 보자 더욱 신경이 바짝 곤두 섰다. 하매의 일장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급히 <탁량추주(托樑抽柱)>의 초수를 써서 일장으로 위를 막으며, 이어서 <흑호투심(黑虎偸心)>으로 가슴을 막고 있던 일장을 뻗었다. 하매는 '잘 왔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왼손을 별안간 왼쪽으로 뒤집어 밑으로 뚫고 들어가며 연 랑의 맥문(脈門)을 향해 찔렀다. 동시에 손목 부위를 내리찍어 연랑의 쌍수가 동시에 벌어지면서 초수가 깨어지고 문호가 열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연랑이 반격할 여유를 주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선학서조(仙鶴舒爪)>로 몸을 기울이면서 연랑의 가슴을 걷어찼다. 연랑은 하매의 장법이 이처럼 변화무쌍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히 빨리 뒤로 물러났 기 때문에 허리만 하매의 발에 약간 스쳤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이 예사롭지 않 았다. 속으로 '독한 년'이라고 욕을 하며, 상대하기 힘든 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여러 해 동 안 쓴 적이 없는 <팔괘선인장(八掛仙人掌)>을 펼쳐 하매와 어우러져 싸웠다. 마침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난날 비검에 혼난 적이 있기 때문에 적의 허실을 알기 전에는 먼저 비검을 방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수십 합이 지나는 동안 유연랑은 너무나 많은 위기를 넘겼고, 이 싸움은 질 게 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처음에 하매가 몸에 병기를 지니지 않은 것을 필히 내력이 있는 계집이구나 싶어 감히 모험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 하매에게 몰리게 되자 이판사판이다 싶어 이를 악물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녀는 별안간 몸을 솟구치며 손으로 자기 몸을 한 번 치면서 비검을 방어하였다. 두 사람은 정 신을 운용하여 그 두 가닥의 검광이 한 덩어리로 꼬이도록 하였다. 연랑은 적의 비검이 약하지 않음을 보자 더욱 놀랬다. 바야흐로 유연랑의 위기였다. 서쪽단의 <삼안홍예> 설망은 자운사의 싸움에서 주문에게 한쪽 눈을 잃어 중간의 가짜눈과 오 른쪽눈이 서로 짝을 이룬 상태였다. 매우 상심되고 분하여 황산으로 돌아가 스승 허비랑에게 자 기를 대신하여 복수를 해달라고 호소할 작정으로 가던 도중에 유연랑을 만나 둘은 사통하여 임시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연랑이 지금 위급한 것을 보자, 설망은 앞뒤 가릴 것도 없었다. 그가 뒤통수를 한 번 치니 한 가닥 푸른빛이 쏘아져 나갔다. 동쪽 단의 황현극이 이것을 보고는 같이 비검을 방출하여 적을 맞았다. 무예 대결은 삽시간에 난전으로 변했다. 먼저 서쪽단에서 공령자, 조비, 욱차곡, 여헌명, 곽운박, 모태 여섯 명이 몸을 날려 앞으로 뛰어나가 검광을 방출하자, 동쪽단에서는 주경운, 오문기, 최기 세 협녀와 철사도인 그리고 <상강오협> 중의 우순농이 각자 비검을 날려 대적했다. 동원기는 적이 미리 약속한 규정을 지키지 않고 난전을 벌이는 것을 보자 급히 백기에 명령하여 능조, 윤중, 대형옥, 악대붕, 황인유, 황인룡, 허초, 장기 오누이, 능운봉, 대상영을 데리고 단 뒤로 내려가서 광장을 둘러싸라고 지시했다. 동원기와 옥청대사는 눈을 부릅뜨고 법원과 요개강을 지켜보았다. 혹 저쪽 일부의 군적(群賊)들 이 비검으로 싸우는 동안을 이용하여 대씨집안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을 해하지나 않을까 염려했 기 때문이었다. <상강오협> 중의 목계와 임추수가 검술을 할 줄 알기 때문에 그 두 사람에게 검광을 타고 백기 등을 보호하라고 명령하였다. 상대방 군적들 가운데 검술을 하는 자가 있으면 백기 등이 상대할 수 없음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백기 등이 광장 정면으로 돌아가서 막 분산을 하려고 하자, 과연 서쪽단의 군도들이 분분히 대 씨집 문 앞으로 쳐들어 오고 있었다. 동시에 법원이 비검을 방출하고 요개강도 비검을 방출하여 수십 가닥의 푸른빛과 세 가닥의 푸른빛이 동쪽단을 향하여 날아왔다. 동원기와 옥청대사도 태만하지 않고 즉시 검광을 날려 맞받아 쳤다. 따라서 공중은 온통 비검의 광채로 오색이 빈분(頻紛)하고 금빛이 번쩍이며 매우 소란스러웠다. 나구는 동원기 때문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동원기가 법원과 팽팽히 맞서는 것을 보자, 즉시 <화화도인> 요소수와 함께 검광을 날려 상대방 중 검술이 낮은 사람을 골라 덕 을 보려고 생각했다. 이때 쌍방은 세력이 서로 비슷하였다. 하매가 타뢰대에서 유연랑과 싸우고, 황현극은 설망과, 주 경운은 공령자와, 오문기는 조비와, 최기는 욱차곡과, 우순농은 여헌명과, 철사도인은 곽운박과 모 태 두 사람을 상대하였다. 나구는 최기가 욱차곡에게 약간 밀리는 듯한 것을 보자 요소수에게 우선 욱차곡을 도와 최기를 쓰러뜨리고 보자고 꼬드겼다. 욱차곡을 맞아 힘겹게 싸우고 있던 최기는 돌연 적진에서 또 두 가닥의 누런빛이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자 깜짝 놀랬다. 정신이 약간 흐트러지자 욱차곡의 검광은 더욱 세력이 강해졌 다. 동시에 모태, 요소수의 검광도 일제히 최기를 향해 날아왔다. 타뢰대의 피 急怒失元神 毒雲蔽日妖苗中計 傷心成慘敗 飛劍驚芒和尙逃生 옥청대사는 묘인 요개강을 맞아 싸우다가, 문득 최기가 적의 협공을 받아 위험에 빠진 것을 보 았다. 그래서 검광을 나누어 급히 구해 주려고 하는데, 한발 먼저 괴규화가 번개같이 법원의 등 뒤에 나타나더니 입을 후려갈기는 것이 아닌가! 괴규화는 욕을 퍼붓고 있었다. "모두가 일 대 일로 싸우기로 약속하고선 왜 부하들을 시켜 어린 여자애를 괴롭혀?" 말이 끝나자마자 두 발을 솟구치더니 비검보다 더 빠르게 날아 나구와 요소수의 검광을 뺏아갔 다. 그리고는 맨손으로 검광을 잡아 한 번 비비니까 금방 불똥으로 변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또 몸을 솟구쳐 검광이 덮혀 있는 가운데로 들어가서 곽운박의 검광을 잡으며 꾸짖었다. "합세하여 덤비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 대 일로 싸우느냐?" 그러더니 곽운박의 검광이 자기 손 안에서 계속 번쩍이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허, 이 검은 그래도 괜찮은데, 사기(邪氣)가 들어 있군." 그리고는 곽운박의 비검을 서북쪽 모퉁이로 집어던지면서 소리쳤다. "여보, 마누라! 당신인 가지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구려!" 서쪽단의 사람들은 이 걸인 중에서도 상걸인이, 얽혀 있는 검광 속을 무인지경으로 들어가 맨손 으로 세 자루의 비검을 잡는 것을 보자, 모두 놀라 간이 콩알만해져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몰랐 다. 다행히도 그 걸인은 세 자루의 비검을 거두어들인 후에 손을 멈추고 땅으로 내려와 큰소리로 이 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당신네들이 일 대 일로만 싸우지 못하게 할 따름이오!" 말을 마치자 몸을 한 번 번쩍이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법원이 놀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의 내력을 알고 있는 옥청대사와 동원기조차도 그의 솜 씨에 혀를 내둘렀다. 그가 '마누라' 를 찾은 것을 보면 부인도 와서 참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승패는 뻔한 것이라 더욱 마음을 놓고 적을 맞을 수 있었다. 모태의 검광은 본래 약했다. 게다가 전에 주경운이 그의 한쪽 팔을 잘라 중상을 입었다가 완쾌 된 지가 얼마 안 된 몸이라 곽운박을 도와 철사도인과 이 대 일로 싸웠지만 조금도 우세를 차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에 한 괴인이 나타나 곽운박의 검광을 거두어가는 것을 보고 는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정신이 흐트러진 순간, 철사도인의 한칼에 그의 비검은 결딴이 나버렸 다. '이크, 좋지 않구나' 싶어 도망가려고 했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철사도인의 비검이 지나가는 곳 에 그의 머리와 몸이 따로 분리되어 땅에 떨어졌다. 철사도인은 모태를 해친 후에 상황을 살펴보았다. 최기는 욱차곡을 당해내지 못하고 있고, 경운 은 공령자와 억지로 평수(平手)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즉시 경운의 곁으로 날아가 말했다. "내가 이놈을 맡을 테니, 너는 가서 최소저를 대신하도록 해라." 말을 마치자 곧 검광을 공령자에게로 날려보냈다. 경운은 급히 최기 쪽으로 날아가서 그녀와 함께 욱차곡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옥청대사는 오늘 나타난 걸인부부가 성질이 괴팍하다는 것을 알고는 서둘러 말했다. "최소저는 잠시 쉬도록 하세요. 우리가 아까 약속대로 일 대 일로만 싸워야 합니다." 최기는 사실 힘이 다 빠진 상태라 검광이 암담해져 물러나고 싶던 참이었으므로 경운이 적을 상 대하자 곧장 동쪽단으로 돌아왔다. 그 묘인 요개강은 성격이 불과 같았는데 어째서 가장 나중에 출전했으며, 또 요법을 펼치지 않 고 다만 비검만 사용하였는가? 원래 요개강은 어젯밤만 해도 매우 신바람이 났었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니 갑자기 신사(神思)가 멍해지며 마음 속에 까닭도 없이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법원 등이 고무격려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어 억지로 시진(時辰)을 맞추고 용기를 내어 대가장으로 왔던 것이다. 그러나 대가장으 로 온 후에도 여전히 피곤하고 졸음이 와서 말하기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법원이 뭐라고 말하든 그저 듣고만 있었다. 법원은 오늘 일은 평화롭게 끝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나구 등이 출전하여 두 차 례나 연패하자 더욱 화가 치밀어 이판사판 결판을 낼 각오를 한 그는 사람들이 약속을 어기고 혼 전을 벌이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가만히 <벽력수> 울지원에게 군도들을 데리고 단 을 몰래 내려가 대가의 식구들을 죽여버리라고 명령하였다. 명령을 내린 후에 요개강을 보니 뒤 쪽에 앉아 아무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자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이 사람은 도술이 신통한데 어째서 오늘 이처럼 딱하게 굴까? 다른 사람의 암수에 걸린 것은 아닐까?' 그는 즉시 호로병 안에서 세 알의 단약을 꺼내 요개강의 입에 넣어주고는 그의 등을 한 번 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요도우, 우리가 나설 차례가 왔소!" 요개강은 법원이 등을 한 번 치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자기가 오늘 이 싸움을 도우러 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래서 전장에 검광이 어지럽게 뒤섞인 것을 보고는 고함을 지르며 법원을 따 라 출전했던 것이다. 법원은 오늘의 싸움에서는 성도 자운사의 싸움처럼 적의 기세가 세지 않음을 보자, 비록 동원기 와 옥청대사가 모두 고수라곤 하지만 자기와 요개강 두 사람이면 족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기뻐했다. 그래서 의기양양할 때, 문득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아까 보았던 그 걸 인이 나타났고, 상대방을 자세히 볼 틈도 없이 그에게 입을 한 대 얻어맞았던 것이다. 법원도 검술에는 누구 못지 않게 뛰어난 고수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게 한 대 얻 어맞자, 정신을 차릴 수 없어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정신이 흩어지며 동원기의 검광에 눌려 그가 날려보낸 붉은빛이 두 가닥이나 흩어져 버렸다. 분통이 터지고 아깝기도 했지만 그 걸인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급히 정신을 차리고 운기를 하여 우선 동원기의 공격을 막으며 한편으로 그 걸인의 종적을 살폈 다. 그런데 걸인이 다시 나구, 요소수의 검광을 부수고 또 곽운박의 검광까지 거두어가는 것을 보 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걸인이 어쩌면 이렇게 대단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낯이 많이 익은 것 같은데 어째서 생 각이 나지 않는담?' 이때 동원기가 법원의 정신이 산만한 틈을 타서 검광을 더욱 밀어붙였다. 법원은 태만할 수가 없었다. 기를 모우고 정신을 차려 별안간 검광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즉 시 공중의 수십 가닥 붉은빛이 몇 배로 늘어나면서 동쪽단의 각 검선 머리 위로 쏟아졌다. 동원기와 옥청대사는 법원이 사생결단을 내려고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크 좋지 않구나!' 하 고 외쳤다. 바로 그때, 돌연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백발 노파가 타뢰대 위에 우뚝 서서 공중을 향 해 입을 벌리고 숨을 깊이 들이쉬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법원이 뿜은 백여 가닥의 붉은빛이 분 분히 그녀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법원은 오늘 싸움도 이길 수 없음을 보자, 기왕지사 적을 죽일 수 있는 데까지 죽일 작정으로 그런 독수를 쓸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오행진기를 운용하여 검광을 분산시켜 적을 향해 날려보 냈다. 본래 적어도 몇 명은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검광이 날아가다 가 타뢰대 쪽에 있는 어느 물체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급히 타뢰대를 쳐다보니 유연랑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파파백발에 얼굴이 붉은 늙은 노파가 괴장(拐杖)을 짚고 서서 그의 검 광을 입으로 빨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보아하니 매우 낯이 익은 것 같았다. 돌연 방금 나타났던 그 걸인이 바로 이 노파의 남편이란 생각이 떠오르자 깜짝 놀라 온몸에 식은땀이 솟았다. 속으로 자기가 멍청하게도 방금 그 걸인의 내력을 생각해내지 못했음을 탓했다. 그래도 법원은 상황판단이 빠른 편이었다. 급히 온 정신을 운용하여 검광을 거두어들이니 그가 오금지정(五金之精)으로 자기의 오행진기를 연합시켜 만든 백 팔 자루의 자모검(子母劍) 중에 이 미 태반이 손실된 후였다. 바로 이 순간, 동원기가 전력을 다해 검광을 갈라서 한 줄기 긴 무지개를 만들어 법원의 머리 위로 날렸다. 법원은 하마터면 큰일날 뻔하였으나 가까스로 동원기의 검광을 막아내면서 요개강 쪽을 보니, 요개강은 단지 세 자루 비도만을 사용하여 아직도 옥청대사와 겨루고 있었다. 법원은 속으로 원망하였다. '이 멍청한 도사 같으니라고, 이런 시기에 법술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니!'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늙은 노파가 법원이 검광을 거두자마자 타뢰대 아래에서 한 사람이 기 어나와 편지를 한 통 전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는 곧 백기가 싸우는 곳으로 날아가서 한 여자를 껴안고 공중을 뚫고 사라져 버렸다. 법원은 그녀가 끝까지 참견하지 않고 가버리는 것을 보자 한 가닥 희망이 생겨났다. 그는 동원기와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주춤주춤 요개강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요도우, 아직도 법술을 펼치지 않고 언제까지 기다릴 참이오?" 법원의 이 한 마디에 요개강은 정신을 차린 듯 손을 뻗어 가슴을 한 번 만지더니, 별안간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내 목숨이 끝났구나!" 법원도 그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알지 못했다. 그를 쳐다보니 얼굴이 부풀어 오르면서 붉은 보랏빛으로 변하고, 몸에는 퍼런 근육이 터질 듯 튀어나오며, 숨을 소처럼 몰아쉬는 것이 마치 생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별안간 또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좋다. 네놈들과 결판을 내겠다!" 말을 마치자 두 어깨를 한 번 흔들어 젖히니, 즉시 열두 개의 노전(弩箭)이 쏘아져 나갔다. 노전 은 땅에서 일 장 정도 높이에서 푸른 광채로 변하여, 주위를 허다한 오색 연기로 둘러싸면서 코 를 찌르는 비린내와 함께 동쪽단의 각 검선을 향해 곧바로 날아갔다. 이것은 요개강의 사조가 전수해 준 진산지보(鎭山之寶)로서 <백독연람연주비노(百毒煙嵐連珠飛 弩)>라고 하는 것이다. 각종 독을 흘리는 악초(惡草)와 독장(毒腸), 악고(惡蠱)를 오금지정에 화합 하여 만든 노전에다, 다시 본신(本身)의 오행진기로 만든 비검과 합하여 날릴 수도 있고 거두어들 일 수도 있는 지독한 독기였다. 이것을 쏘아 적의 비검과 만나게 되면 적의 비검은 광택을 잃고 땅에 떨어지며, 예사 사람이라 면 약간 닿기만 해도 즉각 독기가 심장을 찔러 죽게 된다. 정말로 묘강(苗疆) 중에서 가장 무서운 법보로 그 독의 지독함이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사조는 그것을 그에게 전수할 때 재삼 당부하였다. 생명이 위험할 때만 사용하되 도망갈 수만 있으면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득이 사용할 때에는 한두 개만 사용하여 적의 우두머리 한 명만 상하게 하라고 하였다. 요개강은 세상에 나와서 오늘 처음으로 그것을 사용하 려는 참이었다. 법원은 그 위력을 알고 놀랍기도 하고 매우 기뻤다. 옥청대사는 원래 요개강이 비록 요법에 정통하다고는 하지만, 능히 대적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적 어도 이기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홍발노조의 진산지보를 사용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위력이 매우 대단함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 가 막을 방법은 없었다. 두 눈을 멀쩡히 뜬 채 사람들이 참사를 당하게 될 판국이었다. 그녀는 우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다 싶어, 요개강이 화살을 쏘자마자 즉시 높은 소리로 외쳤다. "묘인의 요법이 대단하니, 여러 도우께서는 빨리 물러나시오!" 바로 이때 돌연히 그 괴규화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아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뜻밖에도 몸에 큰 뱀 한 마리를 휘감고 있었다. 그 뱀은 붉은 비취색 몸뚱이에 영롱한 오색 반점이 점점이 찍혀 매 우 아름다왔다. 괴규화는 멀리서 요개강을 바라보더니 큰소리로 꾸짖었다. "묘강의 강아지가 어디서 함부로 날뛰느냐? 네 원신(元身)이 여기에 있다!" 말을 마치자마자 발을 한 번 구르며 공중을 향해 날아올랐다. 요개강은 그 걸인이 몸에 큰 뱀을 감고 있는 것을 보자 고함을 지르며 마치 목숨도 필요없는 듯 공중의 비전(飛箭)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화살들은 즉각 방향을 바꿨다. 요개강도 같이 공 중으로 솟구치며 한 뭉치의 연기를 끼고 곧바로 그 걸인을 향해 번개가 치듯 쫓아갔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가 보이지 않았다. 옥청대사는 괴규화가 세 번째 나타나 요개강을 유인해가 버리자 세 자루의 비도가 여전히 공중 에서 자기의 비검과 맞서는 것을 보았다. 다만 통솔하는 힘이 없어 아까처럼 위력이 없을 뿐이었 다. 그녀는 급히 원신을 운용하여 몸을 솟구쳤다. 신검합일하여 날아간 그녀는 그 세 자루의 비도 를 거두어들였다. 세 자루의 묘도는 약 일곱 치 정도 길이로써 정광(精光)이 눈부실 지경이었다.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그것을 급히 전대 속에 넣었다. 이때 싸움터에서는 유연랑이 하매를 당해내지 못하여 몸을 날려 도망했고, 설망도 상황이 불리 한 것을 보자 더 싸울 마음이 없어져 틈을 보아 검광을 타고 도망하였다. 여헌명은 우순농과 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끝내 실력이 비슷하여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 데, 여헌명이 갑자기 요법을 사용하여 뇌화탄(雷火彈)을 쏘았다. 우순농은 미처 피하지 못하여 오 른팔에 맞고 중상을 입었다. 위험한 순간, 마침 주경운이 욱차곡의 비검을 깨뜨리고 그를 죽인 후에, 비호같이 달려와서 옥청 대사가 준 자금사(紫金梭)로 여헌명을 쓰러뜨렸다. 그녀는 비검으로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돌연 동원기와 옥청대사가 여촌 사람은 죽이지는 말라고 당부한 말이 기억났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곽운박은 비검을 잃었으나 아직 전신 요법이 남아 있었다. 그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그 걸인이 맨손으로 자기의 비검을 뺏아가는 것을 보자 적 쪽에 고수가 많아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요개강의 요법으로 이길 수 있을는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걸인 이 요개강을 유인해 가버렸고, 게다가 법원마저 비검을 절반이나 잃은 것을 보고는 모든 것이 절 대 불리함을 깨달았다. 그는 쓸데없는 희생을 하지 않고 다음에 복수하자고 생각하였으나 즉시 도망가기가 미안하였다. 그런데 이때 여헌명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당하는 것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급히 소리쳤다. "이 도둑년! 그를 죽일 생각 말고 내 법보를 받아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한 번 후리자 한 줄기 불빛이 경운을 향해 날아갔다. 경운은 그 위력이 대단함을 알고는 맞받아 치지 않고 급히 검광을 타고 공중으로 솟아올라가 요 법을 피했다. 곽운박은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여헌명을 껴안고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돌려 싸움터를 보 니 공령자와 조비가 철사도인과 오문기를 당해내지 못하여 각자 검광을 타고 도망가고, 법원도 도망갈 준비를 하는 듯하였으므로, 곽운박은 이를 악물며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여헌명을 부축 한 채 공중을 뚫고 도망치고 말았다. <화화도인> 요소수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그도 도망가려고 생각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곽운박을 피하던 경운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고 경운의 검광이 번득 지나가니 시체로 변해 땅에 떨어졌 다. 혼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제 서쪽단에는 나구와 진장태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진창태는 온 하늘에 비검이 어지럽게 날리고 나구가 두 번이나 패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자 이미 싸울 마음이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나구에게 자기를 호위하여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구는 첫째로 비검을 잃었을 뿐 아니라 적이 이미 광장을 포위하였기 때문에 진장태를 보호하면서 탈출 할 방법이 없었고, 둘째로는 법원과 요개강이 필히 이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도망갈까말까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보자 갑자기 당초 동원기에게 거짓 맹세한 일이 생각났다. 여촌에서 동원기를 두 차례 만났을 때는 새로 스승으로 모신 법원을 믿고 그를 마음에 두지 않았 는데, 지금 자기편을 보니 이렇게 참패할 수가 있을까 싶은 지경인 것이다. 만약 법원이 동원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간다면 자기는 결코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을 때에, 진장태는 그의 그런 심중은 알지도 못하고 계속 나구를 원망하고 있었다. 나구가 자기를 망쳤다고 하면서, 속히 자기를 데리고 도망가자는 재촉이었다. 나구는 '흙으로 만든 보살이 강을 건너면 자신도 보호하기 힘들다'는 속담과 같은 처지에 빠지 고 말았다. 게다가 진장태가 계속 자기한테 원망을 늘어놓으니 어쩔 수 없이 건달 기질이 나타났 다. 나구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옛말에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밥통이오? 이 나구가 눈이 멀어 서 어찌 당신같이 뼈다귀도 없는 작자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진장태는 평소 사람들에게 항상 떠받들려 살아온 신분이었으니 언제 이런 타박을 받아보았겠는 가? 그는 분한 나머지 혼신이 떨렸다. 진장태가 막 욕을 하려고 할 무렵, 싸움터의 법원은 동원기의 검법이 갈수록 매서워질 뿐 아니 라, 비록 대가장 쪽의 다른 검선들이 합세하지 않더라도 자기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았 다. 그 걸인이 요개강을 유인해 갔으니 더욱 흉(凶)은 많고 길(吉)이 적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기 회를 보아 도망갔다가 훗날 다시 복수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법원은 별안간 높은 소리로 말했다. "동도우는 괜히 힘쓰지 마시오. 빈도는 이만 실례하겠소." 말을 마치자 검광을 거두어들여 신검합일로 공중을 뚫고 올라갔다. 그러자 동원기도 검광을 타 고 그의 뒤를 쫓아갔다. 죽을 둥 살 둥도 모르고 날뛴 나구는 법원이 패하고 도망가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서 급히 소리 쳤다. "사부님, 제자를 데리고 가십시오!" 말을 마치자 진장태를 버리고 몸을 공중으로 솟구쳤다. 법원을 쫓아가려고 생각하였지만, 법원의 검광이 얼마나 빠른지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 그가 어찌 따라갈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몸을 솟구치는 순간 별안간 큰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지한 축생, 아직도 목숨을 내놓지 않으려고 하느냐?" 나구는 이 말을 듣고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니 동원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깜짝 놀라 간과 심장 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사부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순간, 동원기의 검광이 지나가면서 허리가 두 동강으로 잘려 땅에 떨어졌다. 법원은 공중에서 나구의 목소리를 듣고서 그를 구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싶어 이를 악물며 허비랑을 찾으러 황산을 향해 도망쳤다. 진장태는 나구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가려고 하다가 한 가닥 금빛 줄기에 몸뚱이가 두 동강이 나 는 것은 보자 놀라서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급히 단을 내려가 도망하려고 할때 조심원, 황현 극이 날아와 혈도를 찍어 쓰러뜨렸다. 심원이 그를 옆구리에 끼고 대가로 돌아가서 처분을 기다 리게 하였다. 한편 여촌에서 데리고 온 군도들은 <벽력수> 울지원의 통솔 아래 단 뒤로 빠져 광장을 돌아 대 가의 가족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가의 문 앞에 도달하기도 전에 백기, 대형옥, 허초, 장 기 오누이, 대상영, 능운봉, 황인유, 황인룡, 악대붕 등이 가로막고 나섰다. 울지원은 앞장서서 오는 백기를 보자 깜짝 놀랐다. 화살에 다친 적이 있는 새가 화살을 본 듯, 감히 앞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옆으로 비키며 <소방삭> 신오소더러 앞장서라고 하였다. 오소도 백기가 법술에 정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울지원이 약삭빠른 짓을 한다고는 생각 했지만 적이 이미 눈앞으로 다가왔으니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빈 철곤(賓鐵棍)을 쳐들어 백기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백기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무지한 음적들이 숨어서 양민을 해치려고 하다니, 오늘이 너희들 제삿날인 줄 알아라!" 말을 마치자 보검으로 오소의 빈철곤을 튕기며, 갑자기 <단봉조양(丹鳳朝陽)>의 자세를 취하여 왼손을 검결(劒訣)에 대고 오른손으로 오소의 심장을 향해 찔렀다. 오소도 솜씨가 만만치 않았지만 괜히 겁부터 더럭 났다. 백기의 보검을 보자 자기의 빈철곤을 나무토막처럼 잘라버릴 것같이 느껴져 감히 맞받아내지 못하고는 빈철곤의 끝을 위로 향하게 하 고 <장사파수(長蛇擺手)의 초식으로 상대방의 칼을 등지며 간격을 두었다. 백기의 검법은 신묘하기 짝이 없었다. 삼백육십 수 <팔괘현문검(八卦玄門劒)>의 진전을 받아 허 (虛) 안에 실(實)이 있고 실 안에 허가 있어 변화가 무쌍하였다. 방금 그 일검은 본래 허초로써 상대방이 빈철곤을 옆으로 뉘여 막아오자 별안간 칼을 거두어들여 긴 원을 그리며 몸을 일 장 정 도 솟구쳤다. 오소는 이것이 계략인 것을 알지 못하고 빈철곤을 돌려 백기의 하체를 향해 옆으로 후려쳤다. 백기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러나 백기는 빈철곤이 가까이 왔을 때 번개같이 <연자비운종(燕子飛雲縱)>의 경공술을 써서 두 다리를 뻗으며 다시 위로 두 자 정도 몸을 띄운 것이다. 오소는 자신이 헛친 것을 보자, 서둘러 구렁이가 몸뚱이를 뒤집듯 상체를 비틀며 빈철곤을 꺼꾸 로 세워 위를 향해 찍었다. 그러나 백기의 몸은 어떻게 돌았는지 볼 틈도 없이 화살보다도 더 빠르게 그의 뒤에 내려앉으면 서 왼손을 내뻗고 오른손으로는 오소의 뒤통수를 찔러왔다. 오소는 뒤쪽에서 바람이 이는 소리를 듣고는 좋지 않음을 알았다. 감히 몸을 돌려 검을 막을 엄 두를 내지 못하고 한쪽 발로 반대쪽 발등을 찍으며 앞으로 두 장 정도 뛰어나간 다음 발이 땅에 닿자마자 몸을 돌렸다. 그때 이미 백기와 그의 보검이 따라와서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오소는 당황하여 빈철곤을 눕혀 막으며 백기의 허리를 후려쳤다. 백기는 이때다 싶어 피하지 않고 손을 뻗어 빈철곤을 꽉 잡아버 렸다. 오소는 낭패임을 알고는 손에 힘을 주어 빈철곤을 잡아당겨서 도망가려고 생각하였다. 백기는 속으로 우스웠다. 그의 당기는 힘을 따라서 앞으로 한 걸음 나가며 칼로 빈철곤을 따라 훑었다. 오소가 빈철곤을 놓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백기의 칼날이 오소의 네 손가락과 다른 쪽 손목을 댕겅 자르고 만 것이다. 백기는 더욱 그가 도망갈 틈을 주지 않은 채 <어유순수(魚遊 順水)>로 오소의 가슴을 찔렀고, 오소는 가슴이 뚫리며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오화봉> 최천수는 악대붕이 다가오자 칼을 들어 그냥 내리찍었다. 그러나 악대붕은 그가 안중 에도 없다는 듯 왼손의 짧은 연자상문곤(練子喪門棍)을 쳐들어 칼을 막으며 오른손의 끝으로 그 의 허리를 찔렀다. 최천수는 급히 <엽저투도(葉底偸桃)>를 써서 곤을 피했다. 그러나 악대붕이 쓰는 이 한 쌍의 기 괴한 병기는 끝에 또 서너 자 길이의 긴사슬(長練子)이 달려 있는 줄은 미처 생각이나 했으랴! 오른손의 곤을 겨우 피했을 때 돌연 큰소리로 꾸짖는 말이 들렸다. "못된 음적아, 옛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악대붕의 상문곤이 마치 붓처럼 곧장 날아왔다. 최천수는 미처 피할 틈 이 없었다. 상문곤은 그대로 그의 아랫배에 꽂혔다. '아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순간 악 대붕의 오른쪽 곤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최천수는 머리가 깨어지며 비명에 숨지고 말았다. 백기와 악대붕 두 사람은 옥청대사의 분부를 받들어 앞으로 나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자 기 자신이 맡은 길을 지켰다. 장기는 <오화표> 허룡을 맞아 싸웠다. 허룡은 본시 <사천삼구(四川三寇)> 중의 우두머리로서 체구가 장대하고 흉악한 자인데, 이백 근 이 넘는 쌍도끼를 사용하였다. 그가 자기 앞으로 걸어오는 상대를 보니 맨손에다 용모가 수려한 아직 미성년인 어린아이인지라 적이 아니라고 여기고 큰소리로 외쳤다. "얘야, 빨리 비켜나라! 창칼은 눈이 없단다.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라고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냐?" 하지만 장기는 미리 그를 점찍어 놓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사부께서는 항상 산이 크면 재목이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 이놈은 덩지가 이렇게나 크니 기껏해야 힘이나 세었지, 상대하기엔 어려움이 없겠어.' 그가 흔드는 그 쌍도끼를 보니 여간 무거워 보이지 않았고 키가 얼마나 큰지 자기는 그의 허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장기는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 내고 일부로 맨손으로 다가간 것이 다. 과연 허룡은 그를 얕보고는 상대가 아닌 줄로 알아서 그더러 비켜나라고 하는 것이다. 장기는 생각해 보았다. '이놈이 나를 어린애 취급하여 조금도 방비를 하지 않는구나. 이 틈을 타서 암수를 쓴다면 광명 정대하지 못하니, 먼저 그를 놀리다가 천천히 그의 개목숨을 거두어들이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기는 곧 큰소리로 대답했다. "시꺼먼 도적놈아. 네놈 집안의 장할아버지를 얕잡아 보다니, 빨리 와서 목숨을 바쳐라!" 말을 마치자 칼도 뽑지 않고 두 손을 약간 비스듬히 하고는 대붕(大鵬)이 날개를 펼치는 자세를 취했다. 허룡은 어린아이가 큰소리를 치는 것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작은 체구에 또 얌전하게 생긴 모 습과 자기의 위풍당당한 체구를 비교해 보니 마치 사마귀가 수레에 달려드는 모양 같아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어린애가 함부로 까불고 있구나. 빨리 비켜나지 않으면 밟아 죽이겠다." 장기는 이 말을 듣자 웃으면서 그를 향해 귀신 얼굴을 만들면서 말했다. "시꺼먼 도둑놈아, 미친소리 작작해라. 네놈이 나를 잡아 죽일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이 어르신네가 보검을 쓰지 않고 네놈을 죽일 수 있으니 와서 시험해 보아라!"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별안간 백조가 구름을 뚫듯이 뛰어오르며 주먹으로 허룡의 얼굴을 때렸 다. 허룡은 장기에게 한 대 얻어맞자 두 눈에서 별똥이 튀었다. 허룡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한창 싸우고 있는데, 자기는 죽을 둥 살 둥도 모르는 어린애를 만나 말로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귀찮아졌다. 처음에는 도끼로 찍어 죽여버리려고 생각했었으나, 상대방의 생김새가 예쁘장하고 귀엽게 생겼 을 뿐 아니라, 그래도 자기는 이름이 있는 사나이인데 병기도 지니지 않은 어린애를 죽인다면 다 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손을 뻗어 움켜잡아 몇 마디 야단을 쳐주고는 다른 상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런데 뜻하지 않게 먼저 한 대를 얻어맞은 것이다. 만약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왼쪽 눈을 잃었 을 것이었다. 그는 화가 불끈 치밀었다. "이 꼬마녀석이 겁도 없구나. 내가 만약 병기를 써서 너를 잡는다면 영웅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쌍도끼를 허리에 차고는 두 팔을 뻗어 장기를 잡으려고 했다. 장기는 본래 훌륭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는 데다가 또 옥청대사의 지도를 받은 몸이다. 검술은 비록 아직 익히지 못했지만, 경공술은 이미 상승에 도달하였다. 허룡의 그렇게 성난 모습을 보자 그는 매우 우스웠다. 발을 한 번 찍어 몸을 솟구쳐 사오 장 정도 물러났다. 그런 다음 허룡이 쫓 아오자 이리저리 피하며 불시에 허룡의 급소를 때리고 차고 하였다. 얼마가 지나자 허룡은 온몸이 아프고 숨이 가쁘며 진땀이 솟았다. 그는 매우 창피하였다. 이젠 앞뒤 사정없이 도끼를 빼어들고 돌풍처럼 장기를 향해 내리찍었다. 그러나 장기는 아무렇 지도 않다는 듯 맨손으로 맞아 싸웠다. 또 몇 합을 싸웠다. 허룡의 왼쪽 도끼가 장기의 머리를 내리찍자, 장기는 몸을 솟구치며 피했다. 허룡은 오른쪽 도끼로 장기의 다리를 향해 휘둘렀다. 장기의 몸이 공중에 떠 있으니 피할 수 없 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장기는 별안간 공중에서 몸을 한 번 돌 리며 풍취낙화(風吹落花)식으로 허룡의 오른쪽 도끼를 피해 버렸다. 몸이 벌어지며 발이 허룡의 왼손 부근에 다다랐을 때였다. 허룡은 왼쪽 도끼를 뒤집어 엽저투도(葉底偸桃)의 자세로 장기의 가랑이를 찍으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장기의 발이 허룡의 왼쪽 도끼자루에 다다라 별안간 힘껏 밑으로 눌러서 허룡이 도끼를 위로 뒤집지 못하게 하였다. 동시에 오른쪽 발끝이 도끼 자루에 닿았다. 그리고는 도끼자 루의 탄력을 빌어 다시 위로 솟구쳐 허룡의 머리를 뛰어넘어 갔다. 허룡도 눈과 손이 빨랐다. 급히 오른쪽 도끼로 위를 향해 올려 쳤다. 바로 이 순간, 갑자기 눈앞 이 어두워졌다.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장기가 그의 머리를 뛰어넘어 갈 때, 두 발로 허룡의 두 눈을 차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허룡의 이마를 찍는 힘을 빌어 뒤편으로 뛰어넘어 갔다. "악!" 비명소리와 함께 허룡의 큰 몸뚱이가 땅에 고꾸라졌다. 장기가 급히 몸을 돌려보니, 허룡은 이미 두 눈이 상한 채 온 얼굴에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그는 상대방이 너무 간단하게 죽었다고 느꼈다. 그때 그의 누이 요청이 몸을 솟구쳐 날아왔다. 그녀가 허룡의 시체로 걸어가 한 자루의 자금사(紫金梭)를 뽑아들자, 곧 허룡의 배에서 한 줄기 피가 솟아났다. 원래 장요청은 <수타> 위팔을 맞아 싸웠는데, 위팔도 그녀가 어리다고 얕잡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단 두 수 만에 요청의 보검에 위팔의 분수월아자(分水月牙刺)가 잘려나갔고, 이어서 손목 을 뒤집으며 풀을 헤쳐 뱀을 찾는 발초심사(撥草尋蛇) 초식을 써서 가슴을 찔렀다. 위팔은 비명소 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요청은 위팔을 죽인 후에 옥청대사의 분부 해문에 다른 곳으로 도와주러 갈 수 없었다. 적들은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고, 아직 죽지 않은 적은 모두 상대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빠 장기가 맨손으로 한 덩지가 큰 사나이와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나이는 쌍도끼를 아래 위로 휘두르고 있는 것이 무공이 약하지 않은 것 같은데, 오빠는 오 로지 경신술에만 의지하여 싸우고 있었다. 오빠가 몇 차례나 급소를 때렸지만 그 사나이가 여전 히 공격을 멈추지 않자, 요청은 그가 경공(硬功)을 수련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녀는 오빠가 몇 차 례나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는 것을 보고 손에 땀을 쥐었다. 속으로 오빠가 너무 자신을 과신한다고 탓했다. 만에 하나라도 도끼에 맞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 가. 그렇다고 자기가 다가가서 도와주기도 거북하여 그녀는 옆에서 애만 태우고 있었다. 오빠가 그 사나이의 도끼자루 위로 뛰어오를 때, 사나이가 도끼로 장기를 찍으려 하는 것을 보 자 매우 위험하다고 느낀 요청은 다급한 나머지 옥청대사가 준 암기 자금사를 사나이의 가슴을 항해 날렸다. 그러면서도 그 사나이가 부상을 입지 않는다면 오빠도 무사하지 않겠구나 싶어 걱 정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오빠는 절초를 사용하여 그 사나이의 두 눈을 걷어참과 동시에 쌍도끼를 피했고, 게다가 자기의 자금사가 명중하여 그 사나이가 절명하고 말았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걸인 부부 小完殺劫 群凶授首 齊唱凱歌 巨寇成擒 오누이가 서로 만나자, 요청은 오빠에게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느냐고 원망하였다 장기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처음에 저놈이 힘만 센 줄로 알았지, 그가 이렇게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어." 두 오누이가 웃으면서 몇 마디를 나눈 다음 전장을 돌아보니 허초가 <위진건곤일지화> 왕옥아 를 맞아 싸우고 있었다. 한 사람은 장창을 쓰고, 한 사람은 쌍칼을 쓰고 있었다. 왕옥아는 본시 복건 무이산의 유명한 음적으로 유웅비나 최천수보다 더 사나웠고, 몇 가지 암기 를 사용할 줄 알았다. 허초는 온 기력을 다하여 겨우 맞서고 있었다. 몇십 합을 싸운 후에 왕옥아 가 별안간 파탄을 드러내며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허초가 그를 쫓아가려고 할때, 돌연 왕옥아 가 몸을 돌리며 세 자루의 표창을 상, 중, 하 방향으로 나누어 던졌다. 허초는 그가 불리하지도 않은데 물러나는 것을 보자 다른 꿍꿍잇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한 손으로 창대를 잡고 한 바퀴 돌려서 상, 하의 두 표창을 떨쳐버렸다. 바로 이 순간에 중앙의 표창이 가슴 앞으로 날아왔다. 그는 급히 오른쪽 어깨를 한쪽으로 비키면 서 <순수견양(順手牽羊)>의 자세로 표창을 움켜잡았다. 그가 붙잡은 표창을 되돌려 던지려고 생각하는 순간에, 왕옥아의 전문 암기인 <비황화탄(飛黃火 彈)>이 허초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 비황화탄은 속에 독화(毒火)와 철침(鐵針) 장치가 되어 있어 부딪치기만 하면 터져 상대를 태 워 죽이지 않으면 중상을 입히게 된다. 허초는 본시 그것의 위력을 알지 못했지만 적이 또 암기 를 던지는 것을 보고는 들고 있던 표창을 그대로 맞받아 던졌다. 표창과 비황화탄은 중간에서 맞 부딪치면서 폭발했다. 그러자 불꽃이 일어나며 비황화탄 속에 있던 철침이 사방으로 튀었다. 다행히 허초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폭발하는 소리를 듣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급히 뒤로 물 러나 부상을 입지 않았다. 왕옥아는 허초가 무심결에 자기의 표창을 던져 비황화탄을 깨는 것을 보자 더욱 화가 났다. 그 래서 허초가 똑바로 서기도 전에 아홉 개의 연주금환(連珠金丸)을 상, 중, 하로 나누어 던졌다. 그의 이 아홉 개 연주금환은 보통 사람들처럼 암기ㅋ주머니에 넣지 않고, 소가죽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오른쪽 소매 안에 감추고 있어서 유사시에 사용하기가 매우 간편했다. 약간 힘 을 주면서 소매를 떨치면 주머니가 열리면서 금환이 손 안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것을 <연주탄법 (連珠彈法)>으로 던지면 상대가 아무리 손과 눈이 빨라 세 표창과 비황화탄은 피할 수 있어도, 이 아홉 개의 금환은 피하지 못했다. 따라서 왕옥아는 반평생을 종횡하며 여지껏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그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도 모두 이 세 개의 표창과 비황화탄, 아홉 개의 금황 때문이었다. 허초가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 별안간 교태로운 목소리의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 퍅! 퍅! 퍅!' 하는 소리가 몇 번 나면서 왼쪽에서도 몇 개의 연주탄이 날아와 왕옥아의 금환과 어 지럽게 부딪쳤다. 이 사람의 탄법도 신묘하였지만 그래도 몇 개의 금환은 여전히 허초를 향해 날 아갔다. 다행히도 앞의 몇 개 금환은 이 사람의 연주에 부딪혀 효용을 잃어버렸고, 뒤의 몇 개는 허초의 하체를 향해 날아와 비교적 쉽게 피할 수가 있었다. 허초는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솟구쳐 나머지 금환을 모두 피했다. 적이 금환을 다 던져버리자, 좌측에서 한 여자가 날아와서 왕옥아에게 덤벼들었다. 허초가 쳐다보니 바로 대상영이었다. 속으 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앞으로 나가 같이 싸우기가 미안하여 그냥 옆에서 관전만 했다. 대상영은 원래 <악장년> 위칠과 싸웠었다. 그녀는 덩지가 큰 위칠이 매우 무거운 판도(板刀)를 사용하는 것을 보자 우둔한 녀석이란 것을 알았다. 상영은 <이화창법>을 배운 후부터 계속 시험 해 보고 싶던 참이라 잘되었구나 싶었다. 위칠은 자기의 상대가 아리따운 처녀인 것을 보자 사심이 일어나 사로잡아 데리고 갈 꿍심을 먹 었다. 그래서 몇 마디 수작을 걸어보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그녀가 몸을 솟구쳐 일 장 정도 뛰어 오르더니 한 손으로 잡은 창으로 공중에서 큰 창꽃을 만들며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 위칠은 속으로 매우 우스웠다. 이 계집애가 몸놀림은 제법 민첩하지만 창법은 신통하지 못하구 나 여겼다. 싸우기도 전에 그의 눈에는 벌써 여러 군데 허점이 보였다. '대가장은 마구잡이로 사 람들을 초청하여 약 파는 아낙네까지도 데려왔나 보군' 하고 코웃음을 치며, 상영의 창을 피하려 고도 하지 않고, 도리어 쉰일곱 근 무게의 판도로 그녀의 창을 쳐내며 그녀를 사로잡으려고 하였 다. 그처럼 위칠이 판도로 상영의 창을 쳐내려고 하자, 상영의 창이 떨면서 도리어 그의 판도를 튕 겼다. 위칠은 돌연 적의 창에 몇십 근의 힘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칼을 거두 어 적을 맞으려고 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한 자 정도의 눈빛 창끝이 싸늘한 광채를 뿜 으며 가슴을 찔렀다. 위칠은 황망히 판도를 거두어들였으나 창은 이미 그의 가슴을 꿰뚫은 후였다. 게다가 판도가 자 체 무게로 창을 누르는 바람에 옷까지 찢어지며 배가 한 자 정도 찢어졌다. 즉시 배가 갈라지며 창자가 튀어나왔다. 위칠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는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상영은 이 덩지 큰 사나이가 단 한 수에 죽어버리는 것을 보자 김이 샌 모양으로 땅에다 침을 뱉으며 말했다. "밥통 같은 녀석! 어떻게 이다지도 맥이 없을까!" 그녀는 몸을 돌려 검광이 어지럽게 날리는 광장을 보았다. '이번에 어찌 되었던 간에 옥청대사를 따라가서 비검을 배워야만 이 일생이 헛되지 않을 텐데!' 그때 문득 허초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아무 까닭도 없이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녀 는 침을 탁 뱉으며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해서 뭘 한담!" 마음은 비록 그렇게 먹으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허초가 백 의의 한 도적과 한창 신나게 싸우는 것이 보였다. 허초의 창법이 비록 신묘하긴 하였지만 한두 초는 자기보다 못함을 보고서야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가 오해를 하며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 음을 깨달았다. 이런 생각을 할때, 문득 적이 몸을 돌려 물러나면서 표창 세 자루를 던지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비황화탄이 터지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옆에서 허초를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녀가 전대 속에서 한 움큼의 연주를 꺼내 던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적이 손을 휘두르며 아홉 개의 금빛연주를 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허초가 위급한 것을 보고 우선 사람을 구해야 된다 고 여겨 수중의 연주를 적의 금환을 향해 날렸다. 상영의 탄법이 정확하다고는 하지만 급작스레 던졌기 때문에 맞추어 떨어뜨린 금환은 여섯 개 뿐이었다. 다행히 나머지 세 개의 금환은 허초가 피할 수가 있어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녀는 자 신도 모르게 적개심이 일어나 몸을 솟구쳐 적에게로 날아간 것이다. 왕옥아는 상대가 비록 여자지만 방금 자기의 금환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감히 함부 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쌍칼로 <풍우불투(風雨不透)>를 펼쳤다. 상영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 펼치는 이화창법이지만, 점점이 찬별(寒星)을 찍어내고 눈부신 해가 요동치듯 한 자루의 창으로 왕옥아를 빈틈없이 가두어 버렸다. 왕옥아는 상영이 이처럼 대단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자기는 이미 세 가지의 암기를 다 써버렸기 때문에 마음이 매우 조급 해졌다. 그래서 계략을 써서 이기려고 생각하는데, 지구전을 견디지 못하는 듯 문득 상영의 창법이 점점 산란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자 왕옥아는 기뻤다. 금방 기운이 나서 쌍칼을 휘두르며 칼춤으로 공격했다. 상영은 갈 수록 견디지 못하는 듯하더니 별안간 교활한 수법으로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왕옥아는 이것이 계략임을 알지 못하고 몸을 날려 쫓아갔다. 그녀가 혹시 암기를 날릴지도 모르 므로 암암리에 방비하며 상영의 뒤로 다가갔다. 그러자 상영이 돌연 몸을 돌리며 왼손으로 창을 찔러왔다. 왕옥아는 속으로 웃었다. '기껏 <패중취승(敗中取勝)>을 해보겠다는 수작이군. 몸을 돌려나를 찌르려고 하다니, 공자 앞에 서 문자 쓰는 거냐 뭐냐!' 왕옥아는 '받아랏!' 하고 소리를 지르며 왼쪽 칼로 창을 밀어젖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상영이 번개처럼 창을 거두어들이는 바람에 헛치고 말았다. 상영은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무슨 창법 인지는 몰라도 큰 창꽃을 만들며 그 안에 세 점의 찬별을 만들어 상, 중, 하로 나누어 찔러왔다. 왕옥아는 눈앞이 어지럽고 손발이 허둥거려져 어떻게 손을 써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덮어놓고 칼을 휘둘러 막으며 몸을 빼내려고 생각하였다. 그 순간, 손이 떨리고 두 팔이 저리면서 칼을 떨 구고 말았다. 상영이 창으로 두 자루의 칼을 쳐서 떨어뜨려 버린 것이다. 왕옥아의 입에서 '아뿔 싸!' 하는 탄식이 채 끝내기도 전에 '푹!' 하는 소리가 났다. 상영이 <추혼칠보탈명연환>으로 그 를 찔러죽인 것이다. 허초가 뛰어와서 상영에게 말했다. "사매가 며칠 사이에 이처럼 신묘한 창법을 연마한 줄 미처 몰랐소. 저 놈은 무공만 대단한 게 아니라, 암기도 매우 잘 쓰는 놈이오. 만약 사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 지 몰라. 어찌 되었던 간에 이젠 요 며칠 간의 억울한 누명은 밝혀진 셈이지?" 상영은 픽 웃으면서 약간 타박하는 투로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도 당신을 원망하고 있다구요." 허초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할때 상영이 문득 보니, 능운봉이 <가두타> 요원을 맞아 매우 위 급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허초와 말할 겨를이 없다 싶어 즉시 몸을 솟구쳐 앞으로 나가 도와주 려고 하였다. 능운봉은 이미 요원의 <온황미혼사(溫煌迷魂砂)>에 당해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져 있었다. 깜짝 놀란 상영이 전대를 만져보니 연주가 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 개를 집어들고 요원의 오른쪽 눈을 향해 날렸다. 동시에 상영은 이미 요원 앞에 도착하여 창을 들고 그를 찔렀다. 처음에 요원은 선장(禪杖)으로 능운봉을 맞아 싸웠다. 능운봉은 왼손에 칼을 들고 오른손에는 창을 들고서 <풍우불투>를 펼쳤다. 요원은 다른 군도들보다는 실력이 뛰어나서, 운봉이 허다한 절초를 다 썼는 데도 조금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했다. 요원이 연마한 것은 <동자공(童子功)>이므로 색계(色械)를 범한 적이 없는 그 는 힘이 왕성하여 병기도 무거운 것을 썼으며 싸울수록 더욱 용맹스 러웠다. 따라서 운봉은 전신 의 기력을 다 소모하면서도 겨우 버텨내기만 할 정도였다. 요원은 몸에 호로병을 하나 차고 있었다. 그 안에는 <온황미혼 사>가 들어 있는데, 그것을 쏟아 내면 한 줄기 노란 연기가 피어오른다. 누구든 이 연기를 맡으면 즉시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요원이 운봉을 보니 비록 여인이지만 매우 용맹하고 창법, 검법이 모두 매우 신묘하여 짧은 시 간 내에 이기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또 같이 온 사람들이 하나 하나 죽어가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한두 명은 죽여야 화풀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운봉의 두 가지 병기가 몰아붙이니 암기를 사용할 겨를이 없었다. 하필이면 이러한 때에, 승부에 조급한 운봉이 피해 달아나는 척하다가 <회신창절명삼검(回身槍 絶命三劒)>을 써서 단숨에 제압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허점을 보이며 몸을 솟구치며 물러났다. 그러나 이것은 요원이 원하는 바였다. 운봉이 물러나는 것을 보자 뒤쫓아 가면서 왼손으로 온황호로병의 마개를 열고, 오른손의 선장 으로 운봉의 등을 향해 내리쳤다. 그러자 별안간 운봉이 몸을 돌리며 왼손의 칼로는 <천운적성 (穿雲摘星)>을, 오른손의 창은 <회두망월(回頭望月)>로써 동시에 찔러왔다. 요원은 상대가 이렇게 신속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피하기가 늦었다는 것을 알고는 몸 을 뒤로 젖혀 넘어지면서 오른손으로 호로병을 털자 한 줄기 노란 연기가 솟아나왔다. 적이 넘어 지는 것을 보고 창으로 찌르려고 하던 운봉은 별안간 한 줄기 노란 연기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서 도망가려고 했으나 때가 늦었다. 코 안에서 비린내 같은 것이 나더니만 즉시 정신이 어찔해지며 땅에 쓰러진 것이다. 요원은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다가와서 선장을 들어 머리를 내려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 자기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상영의 연주를 맞아 오른쪽 눈을 다치고 말았다. 동시 에 왼팔에도 한 방 맞아 하마터면 뼈가 부러질 뻔하였다. 그 고통은 극심했다. 만약 요원의 무공 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이 두 개의 연주에 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쓰러졌을 것이다. 요원은 비틀거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온황호로병을 챙길 겨 를도 없이 이를 악물며 아픔을 참고 한쪽 눈으로 앞을 쳐다봤다. 문득 한 여자가 날아오더니만 창으로 가슴을 찌르려고 하지 않는가. 요원은 큰소리로 욕을 퍼부으며 선장을 들어 창을 막았다. 별안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한 백발 노파가 나타났다. 괴장을 받은 노파는 운봉을 부축하여 일으키더니 다시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추었다. 요원이 잠시 멍 하는 순간에 하마터면 상영의 창에 찔릴 뻔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으며 상영을 맞았다. 바로 이때 우뢰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에라, 이 도둑놈! 어디서 감히 함부로 날뛰는 게냐! 노부(老夫) 능조가 여기에 있다." 말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한 노인이 날아와 갈고리가 달린 지팡이를 들어 후려갈겼다. 요원은 중상을 입었는 데다가 두 강적을 만나 허둥거리기 시작하였다.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에 돌연히 두 줄기 검광이 날아왔다. 능조와 상영은 똑같이 ' 위험하다!'라고 외치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첫 번째 검광이 땅에 내려앉자마자 한 거구의 사나이 가 나타나 요원을 껴안고는 공중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 두 번째 검광으로 땅에 내려앉은 것은 십팔 세쯤의 청년이었다. 그는 한 가닥 푸른빛 검광을 조종하며 능조와 상영을 쫓아왔다. 거의 다 따라잡았을 때였다. 명령을 받들고 미리 방비하고 있던 목계와 임추수가 차례로 검광을 날려 적을 막았다. 청년은 새파란 나이지만 검광은 매우 대단하였다. 목계와 임추수가 당해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려고 하는 순간, 문득 아리따운 목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도평(司徒平), 어째서 도적과 한패가 되어 나타난 거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가닥 검광이 날아와 임추수를 대신하여 공세를 막았다. 이 소년은 바로 <고해아(苦孩兒)> 사도평이었다. 황산 허비랑의 명령을 받고 형산으로 가서 선 초(仙草)를 훔쳐 돌아가던 사도평은 중도에 설망이 한 장승같은 사나이와 또 한 여인과 길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 장승 같은 사나이는 바로 <사천삼구> 요원 등의 대사형이며 <독각령관(獨角靈官)> 약삼관 (藥三官)의 득의제자 왕삼(王三)이었다. 그는 <구미선호> 유연랑과 한때 정을 나눈 사이였다. 그는 <사천삼구>가 여촌을 도와주러 갔다는 말을 듣고 여헌명을 한번 만나볼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가던 도중에 유연랑이 한쪽 눈을 잃은 이상하게 생긴 청년과 길가 바위 위에 앉아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다. 불현듯 질투가 일어난 왕삼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불쑥 앞으로 다가갔다. 왕삼이 따지려고 하자, 그의 저의를 알아차린 유연랑이 먼저 대가장 싸움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오늘 만약 이 설망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저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또 우리가 도망칠 때, 당신의 세 사제 중 한 명은 이미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었어요. 지금 대 가장에는 아미파의 동원기와 옥청 요니(妖尼) 외에도 고수가 매우 많으니, 아무쪼록 당신이 그 복 수를 해주세요." 유연랑은 말을 마치자 울음을 터뜨렸다. 왕삼은 요원과 가장 막역한 사이였는지라 그가 위험하다는 말을 듣자 성도 나고 급하기도 했다. 그래서 곧 두 사람에게 같이 가서 그들을 구하자고 말했다. 설망이 말을 하려고 하자 유연랑이 그에게 눈짓을 보내며 먼저 왕삼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대가장 쪽에 고수가 많아 이기기는 힘들 것 같아요. 우리 세 사람이 같이 가서 당 신의 두 사제를 구한 후에, 훗날 다시 복수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말을 마치자 왕삼을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냈다. 왕삼은 색에 눈이 어두워 유연랑의 계락을 눈 치채지 못하고 한 마디로 승락하였다. 그들이 막 떠나려고 할때, 돌연 공중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앞에 미끈하게 생긴 청년이 내려 왔던 것이다. 설망은 그가 사도평이란 것을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사도평은 본래 이 산을 지나가다 산 아래의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와서 잠시 경치나 구경하려고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설망을 만났으니, 이건 좋지 않구나 싶었다. 숨으려고 해도 이 미 늦어,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다가가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설망은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사도평더러 같이 가자고 했다. 사도평은 싫었지만, 떠났을 때 스승 이 말한 것이 생각났다. '자운사의 싸움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 도중에 같은 파 사람이 아미파와 싸우는 것을 보면 꼭 도와주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설망이 허비랑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만약 거절한다면 그가 돌아가서 어떻게 모함할는 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승락하였다. 네 사람은 의논을 하였다. 왕삼은 사람을 구하고 사도평은 적을 막고 설망과 유연랑 두 사람은 뒤에서 응원하기로 정한 다음 대가장으로 날아갔다. 왕삼은 여촌 사람들이 여기저기 죽어가고 있으며, 온 하늘에는 검광이 번쩍이는 것을 보자 자기 는 결코 거기에 낄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올 때의 용기가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자세히 세 사제를 찾아보니 요원 한 사람만 건재하여 웬 늙은이와 소녀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는 데 방어하기에만 급급했지, 공격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사도평을 부른 다음 앞으로 날아가서 먼저 요원을 구해 달아난 것이다. 그는 원래 요원을 설망과 유연랑에게 넘겨 주고는 다시 돌아가서 나머지 두 사제를 구하려고 했 었다. 그런데 요원을 데리고 돌아와보니 두 사람의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급히 공중으로 올라가 서 주위를 살펴보니, 하늘 끝 저 멀리 두 개의 하얀 점이 동북 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유연랑이 설망과 결탁하여 자기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구하는 틈을 타서 도망갔다 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너무 멀리 가고 있었고, 요원이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쫓아 갈 수가 없었다. 요원에게 들어보니, 허룡도 요소수도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었다. 왕삼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우선 요원을 데리고 산으로 돌아간 후에 다시 복수를 꾀할 수밖에 없었다. 왕삼이 떠난 후에도 사도평은 설망이 뒤에 따라오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검광이 아직 땅에 내려앉기도 전에 갑자기 경운이 달려든 것이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설망, 왕삼, 유연 랑 세 사람이 모두 보이지 않았다. 그제사 사도평은 그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혼자는 결코 적수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한지라, 사도평은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 여겼다. 그래서 경운에게 말했다. "경운 사매, 용서하십시오. 소제는 실로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답니다. 다음에 만나 이야기하겠 소." 말을 마치자 검광을 거두어들여 신검합일하여 공중을 뚫고 달아나 버렸다. 원래 경운은 적을 깨뜨리고 나서 별 할 일이 없으므로 대가장 문 앞을 살피고 있었다. 여촌 쪽 에서 온 군도들은 이쪽 사람들에게 추풍낙엽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먼저 <벽력수> 울지원은 백기를 보자 그가 법술을 할 줄 알므로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는 악대 붕을 맞아 싸우다가, 악대붕이 검술을 못하는 것을 알고 비검으로 그를 죽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목계가 옆에서 미리 방비하고 있다가 같이 비검을 날렸다. 그래서 울지원은 오늘 싸움에서 이기 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공중을 뚫고 도망가 버렸다. 백기는 신오소를 찔러죽인 후에, 황인룡이 <독패천동> 이진천과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는 것 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서 그를 대신하였다. 황인룡은 다시 <혼원> 석장옥을 맞아 삼사 합 만에 끝장을 보았다. <팔수전> 엄몽생은 유윤중을 맞아 얼마간을 싸웠지만 이길 수가 없었다. 몰래 수전(袖箭)을 방 출하려고 할때, 마침 능조가 <장강수호> 사마수를 해치우고 유윤중을 대신하였다. 능조는 몇 합을 싸우는 동안 엄몽생의 화살 세 개를 받아내면서 동시에 화살을 되돌려 던졌다. 그리고는 엄몽생이 화살을 피하는 틈을 타서 몸을 솟구쳐 갈고리 달린 괴장으로 그를 때려 죽였 다. 동시에 <동두추명> 소무도 황인유 손에 죽고 다만 백기만 이진천과 고전을 하고 있었다. 능조는 백기를 대신하려고 하다가, 딸인 운봉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라 황망히 뛰어가 딸을 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능조가 도착하자마자 돌연 한 노파가 나타나 먼저 운봉을 껴안고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능조가 아연실색한 틈에 갑자기 또 한 가닥의 검광이 날아와 요원을 구 해 가버렸다. 동시에 또다른 한 줄기 검광이 자기를 향해 날아왔으나, 위급한 순간에 주경운이 비 검을 방해하여 적을 쫓아버린 것이다. 경운이 다가가서 능조를 보니, 사랑하는 딸을 잃어버린 노인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위로의 말을 하려고 하는데, 조심원이 달려와서 말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따님은 실종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녀의 증조모이신 백발용녀(白髮龍女) 께서 비검, 법술을 가르치려고 용조봉(龍爪峰) 조음애(潮音崖)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 자세한 사연은 일시에 다 말할 수 없으니, 잠시 후 적을 다 물리친 후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심원이 말하는 사이에 요개강이 독전을 방출하여 공중은 연기로 가득하였다. 옥청대사가 한 가닥 금빛으로 변하여 날아와서 외쳤다. "연기에 독이 있으니 빨리 물러나시오!" 모두들 이 말을 듣자 피해 달아났으나 다만 백기와 이진천 두 사람만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느라 고 미처 듣지 못했다. 별안간 바람이 불어오자 백, 이 두 사람은 동시에 비린내가 나는 것을 느끼 며 즉시 쓰러져 버렸다.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빠 그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옥청대사가 검광으로 요기(妖氣)를 몰아내고서야 백, 이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떠메고 들어갔으 나, 이미 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인사불성인 상태였다. 여촌 쪽 사람들은 진장태가 사로잡혔고 이진천이 중독되어 깨어나지 못하는 이외에, 화산파의 공령자와 여, 곽, 요원 세 사람이 도망을 가고 나머지들은 죽지 않았으면 중상을 입었다. 대가장 광장은 곳곳에 적의 시체가 즐비했다. 또 서쪽단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유웅비도 무사들이 잡 아가지고 들어왔다. 동원기는 옥청대사에게 우선 백, 이 두 사람을 구하라고 부탁한 다음 자기는 조심원, 황현극에게 <소골산(消骨酸)>을 나누어 주며 시체의 입 속에 털어넣으라고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시 체는 모두 누런물로 변하였다. 백기와 진천은 독장을 맡았을 뿐 독전에는 맞지 않았었다. 그래서 옥청대사가 두 사람의 입에다 두 알의 단약을 넣어주자 점점 깨어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온몸이 아프고 속이 메스꺼웠다. 이진천은 깨어나자 도망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위를 보니 모두가 대가장의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그는 긴 한숨을 쉬면서 일어나 자결을 하려고 하였다. 마침 동원기가 옆에 있다가 손가락으로 그의 혈도를 찍어 넘어뜨리며 말했다. "그대는 천동(川東)에서 비록 녹림에 몸을 담고 있지만 함부로 인명을 해치지 않았고 음탕한 짓 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번에 여, 곽의 꾐에 빠져 나쁜 짓을 했으니 본래 응당히 참 수에 처함이 마땅하나, 평소에 크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또 거느린 부하들이 많은데 그대가 죽으면 통솔할 사람이 없어 사방으로 흩어져 양민을 해칠 것인즉, 만약 그대가 새 사람이 되어 산으로 돌아가서 부하들에게 개사귀정하여 본분에 맞는 생업을 갖도록 권고하겠다면 지금 당장 용서해 주마. 그러나 다시 못된 짓을 하게 되면 언제라도 내가 비검으로 수급을 취할 테니, 지금 솔직하게 대답하여라!" 이진천은 비록 큰 도둑이긴 하나 평소 부자를 털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었고, 사람도 정직 하여 천동 일대에서는 제법 의명(義名)이 있었다. 방금 중독되어 잡혔을 때 옥청대사가 해독해 줄 뿐 아니라 동원기가 짐짓 타이르니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억지로 일어나 동원기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제자는 본시 괜찮은 집안의 자제였습니다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어쩌다 도적이 되었습니다. 오 늘 어르신께서 살려주시는 은혜를 주었으니, 이후로는 스스로 개과천선하겠습니다. 하지만 제자가 돌아가서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나면 쓸쓸한 이 한 몸은 갈 곳이 없습니다. 만약 어르신께서 불쌍 히 여기시어 산으로 데리고 가 주신다면 아침저녁으로 시중을 드는 도동(道童)이 되겠습니다. 감 히 도를 배울 욕심은 없으며 향 피우고 청소나 하겠으니,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말을 마치자 꿇어 엎드려 계속 절을 하였다. 동원기가 비로소 자세히 살펴보니 근기가 매우 두터웠다. 나이를 물어보니 겨우 스물네 살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동신(童身)이었다. 동원기는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대답했다. "나는 한때 마음이 약한 탓으로 나구란 놈을 잘못 받아들였었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곤란이 따 랐는지 모른다. 또 뒷날 장교 사형의 꾸지람을 받을는지도 모르는 형편이야. 네가 비록 지금 양심 을 발견하였다고 하지만, 정말로 참다운 각오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너는 더 이상 조 를 필요가 없다. 우선 산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해산시킨 후에 협서 태백산으로 와서 나를 찾거 라. 먼저 이삼 년 시험해 본 후에 만약 정말로 뉘우침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때 다시 받아들일지 의 여부를 결정하리라." 이진천은 매우 기뻐하며 다시 절을 하여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갖추었다. 사람들도 모두 나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백기는 벌써부터 그의 무예가 뛰어남에 탄복하던 차에 지금 한가족이 되었으며 서로가 서로를 아껴주는 사이가 되어, 그때부터 둘은 생사지교(生死之交)를 맺게 되었다. 능조는 조심원으로부터 딸이 실종된 연유를 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옥청대사는 능조와 유윤중이 모두 근심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했다. "노선생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따님은 원래 <추운수> 백노선배님의 외증손녀뻘이 아닙니 까? 당초 백노선배님의 부인인 능설홍께는 오빠가 한 분 계셨답니다. 능혼(凌魂)이란 분으로, 검 술과 도법이 굉장히 뛰어나신 분이지요. 그때 오누이 두 분은 망창산(莽蒼山)에 은거하고 계셨는 데, 백노선배님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가 선생의 증조고모님과 시비가 붙었더랍니다. 그런데 삼 일 동안 검술을 겨루었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는데, 후에 장미진인께서 지나가다가 두 사람 을 화해시키고는 결혼을 하게 주선했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한 후에 처남 매제 사이에 점점 의견 충돌이 일어났지 뭡니까. 다행히 백노선배의 처남댁이며 선생의 종조모인 <백발용녀> 최오고(崔 五姑)께서 잘 말렸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화기를 상할 뻔했답니다. 능혼대선배는 성격이 매우 별 나서 그 이후로 누이인 능설홍을 만나지 않았답니다. 오십 년 전에 당신의 종조고모이신 능설홍 께서 개원사에서 원적하실 때에도 오라비이면서 가보지 않았고, 다만 백노선배님과 선생의 종조 모이신 최오고께서만 곁에서 임종을 지켰다 합니다." 능설홍은 원적하기 전에 남편과 올케에게 재삼 부탁을 했다. 능씨 집안은 선근(仙根)이 매우 두 터우므로 오십 년 후에 필히 자손 중에서 득도하여 비승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때가 되면 유의해 달라는 것이었다. 백곡일과 최오고가 그 자리에서 승락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는 몰라도 <추운수> 백곡일은 능운봉을 아내가 말한 바로 그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전에 선생의 종조고모께서 부상을 당했을 때, 만약 오라비인 능혼대선배가 구해 주려고만 했으 면 병해(兵解)하지 않아도 되었답니다. 백노선배님은 너무나 무정한 처남을 원망한 나머지, 어느 날 처남의 원신(元神)이 밖으로 나간 틈을 타서 그의 껍질인 육체를 없애버렸지 뭡니까. 선생의 종조부께서 신유(神遊)하고 돌아오니 육체가 보이지 않는지라 어쩔 도리가 없이 죽어가고 있는 어느 거지의 몸으로 원신을 넣었답니다." 이리하여 원래 풍채가 뛰어난 선풍도골(仙風道骨)이던 사람이 졸지에 걸인 중에서도 상걸인이 되었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추운수> 백곡일은 처남 부부의 노여움이 대단함을 알 고 계속 피해다녔다. 처음에는 능혼과 최오고가 복수를 하기 위해 계속 찾으러 다녔는데, 후에 많 은 사람들이 중간에 나서 화해를 시켜 겨우 겉으로나마 참기로 했다. 하여튼 그때부터 능혼은 걸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고, 진짜 이름을 감추고 자칭 < 괴규화> 궁신으로 행세했다. 사파, 정파를 막론하고 그들 부부를 만나면 모두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옥청대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선생의 종조부 내외분께서는 여지껏 제자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는데, 근래에 와서 별안간 제자 룰 물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노선배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을 만나기가 거북했던지, 편지 한 통을 써서 조도우에게 주시면서 오늘 뜯어보라고 하더랍니다. 안에는 또 한 통의 편지가 있었는 데, 선생의 종조모이신 최오고님이 나타나면 전하라고 하셨대요. 모르긴 하지만 자기 부인인 능설 홍의 임종시에 한 약속을 이행하는 뜻에서 선생의 따님을 산으로 데리고 가라는 부탁 내용이겠지 요. 조도우는 편지를 뜯어본 후에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이 많아 빈도와 상의를 하였답니다. 빈도는 마침 요개강이 대단한 인물이라 내심 걱정을 하다가, 이 편지를 보자 그 두 분께서 왕림하시면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조도우께 편지에 쓰여 있는 대로 하라고 했답니다. 과 연 최오고 대선배님은 편지를 보자 곧장 선생의 따님을 구하여 갔으니, 아마도 산으로 데려다 도 법을 전수하여 줄 모양입니다. 이렇게 많은 선연을 만났으니 마땅히 따님을 위해 기뻐해야 하거 늘, 어째서 도리어 그렇게 걱정을 하십니까?" 스승을 찾아서 戎癡情 穿雲尋古洞 臨絶險 千里走靑螺 능조는 옥청대사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다만 유윤중은 얼마 안 있어 결혼할 약혼녀가 무단히 사라져 버린 것을 보자, 가령 훗날 도를 이루어 돌아온다고 해도 자기에게 시집을 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풀이 죽었다. 그 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동원기 앞으로 걸어가 꿇어앉으며 말했다. "이번에 여촌, 진우와 원한을 맺은 것은 모두가 이 못난 제자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비록 사(邪)가 정(正)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제자는 이 제사 세정(世情)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빈곤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에 노선배님을 따라 출가하고 싶습니다. 제자는 자질이 노둔(駑鈍)하여 도의 행렬에 끼이기가 힘 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르신께서 선을 향한 저의 마음을 봐서라도 받아주시면, 그 은혜 말로 다할 수 없을 겁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그 자리에 동석한 다른 사람들도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백기, 형옥, 허 초, 황인유, 황인룡, 악대붕 등 검술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일제히 다가와서 동원기, 철사도인, 옥청대사의 앞에 꿇어앉으며 제자로 받아주십사고 간청을 드렸다. 동원기는 그들더러 일어나라고 하면서 말했다. "그대들은 나와는 인연이 없지만, 두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각자의 선연이 있소. 허나 유 소협은 일시의 치정 때문에 자극을 받았으니 적합하지 않군. 우리더러 검선이라고 부르지만 극소 수의 선골도풍을 갖춘 자 이외에는 대부분 초범입성(超凡入聖)하지 못하고 전겁(轉劫)을 해야 함 으로 한 차례의 병해를 피할 수가 없소이다. 유소협과 능소저는 향후 오십 년 안에 부부로 상봉 할 것이며, 그대들은 또 각기 다른 인연이 있을 것인데, 어째서 스스로 자기의 인연을 어지럽게 만들려고 하시오? 내가 이진천을 선의 문으로 인도한 것은 그의 부모가 모두 전대 명(明)나라의 순절(殉節)한 충신이며, 그 본인도 매우 자애(自愛)하며 다른 도적처럼 양심이 없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오. 내가 아니면 다른 도우가 그를 인도한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잠시 그를 받아들 이는 것이오. 지금 본파는 제자를 받아들여 도통을 계승하려는 시기다. 도를 향한 진정한 성의와 두터운 마음만 있다면 이끌어 줄 사람이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소이다. 어째서 일시에 그렇게 조급할 필요가 있겠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도 계속 간구하였다. 동원기는 여전히 앞의 말만을 되풀이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단지 유윤중에게만 갈 길을 말해 주었다. "금년 단오절, 심원의 청라곡에서 팔마와 해결할 일이 있느니라. 그때 자연히 인연이 닿을 기회 가 올 것이다." 그는 또 사람들에게 분부하여 말했다. "여기 일은 이제 끝났소. 잡아온 음적 유웅비는 이미 내상을 입었으니 죽여 소골산(消骨酸)으로 처치해도 될 것이오. 다행히도 이번에 본바닥 사람들은 다치지 않았으니, 잠시 후에 백장주께서 진장태를 무마하여 그를 돌려보내면 두 촌의 원한은 풀릴 것이외다. 이 자는 본시 별 능력이 없 고, 모두가 나구가 선동한 짓이었소. 지금 나구가 죽었고, 또 그가 본촌의 세력이 큼을 알았으니 감히 일을 다시 만들지 않을 것이오. 만약 다시 못살게 군다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을 거외다. 여, 곽 두 도적은 기껏해야 화산으로 도망가서 자기 사부에게 복수를 부탁하면 했지, 결코 관가에 소송을 내지는 않을 테지요. 철사도우께서 며칠 더 머무르시면서 이곳의 만일에 대비하시다가 단 오절이 되면 조심원, 황현극을 도와주시기 바라오. 여러분들도 일이 있으신 분은 돌아가도 괜찮소 이다. 청라곡 팔마가 청한 고수가 매우 많으니, 검술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태여 갈 필요가 없 겠지요. 그리고 진천은 일을 마친 후 태백산으로 나를 찾아오너라. 그럼 나는 한 발 먼저 가겠소 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장기더러 옥청대사께 감사의 절을 드리라고 명령했다. 사람들과 작별을 한 후 에 그는 장기를 데리고 손을 한 번 흔들자 한 가닥 무지개가 되어 공중을 뚫고 사라져 버렸다. 경운이 옥청대사에게 물었다. "<괴규화> 궁신 노선배님께서 마지막에 뱀을 한 마리 가지고 나타났을 때, 요개강은 왜 그렇게 쫓아갔습니까?" 옥청대사가 말했다. "무릇 묘강과 홍발노조 문하의 가장 무서운 것은 낭독(狼毒)이니라. 도를 이루기 전에 먼저 허다 한 독충, 전갈, 지네, 독사 중에 그 한 가지를 택하여 자기의 원신으로 삼는다. 매일 그 독사 등을 향하여 주문을 외우고, 또 손가락으로 찔러 그 피를 먹이지. 이렇게 삼 년 육 개월이 지나면 그 독사를 불태워 그 재를 먹고, 다시 도가에서 영아(瓔兒)를 훈련하는 방법으로 그것을 복원하여 자 기의 원신과 합일시킨다. 이렇게 하면 후에 마음대로 사람을 해칠 수 있으며, 우리가 씹는 비검과 마찬가지로 나눌 수도 합칠 수도 있게 되는 거야. 그러나 우리는 강적을 만나 비검을 잃어도 다 시 연마할 수 있지만, 그 원신은 한 번 죽으면 반생명을 잃는 거와 다름없어, 비록 죽지는 않더라 도 일생동안의 공행이 물거품이 되며 또다시 연마할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요법 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어왔으므로 오늘 적을 대할 때, 그가 원신을 이용하여 사람을 해치지 않을 까 염려했다. 그런데 뜻밖에 능노선배께서 나타나 그의 원신을 잡아 이미 생기를 잃었으니, 만약 능노선배께서 이미 죽여버렸다면 요개강은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니라. 그가 원신을 잃고 서도 그렇게 대단했으니 은사께서 그가 강적이라고 말씀하실만 했구나." 백기는 옥청대사의 말이 끝나자 어신동에서 능혼이 뱀을 잡는 것을 본 사실과, 그가 임추수를 따라 들어와 주석에서 자기에게 귀엣말을 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옥청대사가 말했다. "백장주, 축하합니다. 만약 그의 특별한 관심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기우(奇遇)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노선배님은 성격이 괴이하여 항상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니까요. 그가 도와주 기 원하지 않을 때면 어떤 방법을 써서 애원해도 도움을 얻을 수 없답니다. 빈도가 일찍이 듣기 로는 그분의 공행이 거의 다 이루어져서 얼마 안 있어 비승하기 때문에 전인(傳人)을 물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 말이 정말이라면, 백장주는 그와 인연이 없다고 할 수 없군요." "제자는 공행도 전혀 없고 자질도 우둔합니다. 비록 도를 향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능노선배 님이 저를 거두어들이기는 힘들 것입니다." "빈도가 보기에는 전혀 뜻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닐 겁니다. 훗날 두고 보십시오. 아무튼 지금 모 든 일이 다 끝났으니, 진·유 두 사람은 백장주께서 동노선배의 말씀에 따라 처리하십시오. 저는 경운, 문기 등을 데리고 성도로 돌아가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상영에게 같이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상영은 옥청대사가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을까 봐 일이 끝난 후 부터 계속 옥청대사 옆에 붙어 있다가, 이 말을 듣자 오빠인 형옥에게 말도 하지 않고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가서 미리 꾸려 놓 았던 보따리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옥청대사에게 몇 번 절을 하였다. 옥청대사가 그녀더러 오빠와 여러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라고 시켰다. 그제서야 자기가 너무 기쁜 나머지 오빠마저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너무 기쁘고 흥분하여 그저 웃을 뿐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형옥이 먼저 옥청대사에게 절을 하면서 상영을 인도해 준 은혜에 감사했다. 그리고 나서 상영에 게 말했다. "너는 대사님의 인도를 받아 선연을 찾았구나. 오라비는 복이 없어 동행하지 못하니, 다 배운 후 에 꼭 한번 돌아와서 오라비를 만나보도록 해라." 상영은 그제서야 석별의 정이 솟구쳐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무심결에 허초를 쳐다보니, 그의 얼굴에 이별을 아쉬워하는 표정이 가득하였다. 그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려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옥청대사는 예닐곱 개의 단약을 백기에게 주면서 앞으로 부상을 입는 사람이 생기면 복용시키라 고 했다. 그리고 경운더러 요청의 손을 잡으라 하고, 자신은 상영의 손을 잡은 채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을 고한 다음, 갑자기 정원에 금빛이 가득해지며 그들은 공중을 뚫 고 날아가 버렸다. <상강오협>과 악대붕도 떠나겠다고 했으나, 백·대·허 세 사람이 제발 며칠 더 묵다가 가라고 붙잡아 겨우 삼사 일 더 있다가 가기로 약속했다. 백기는 옥청대사가 준 단약을 부상당한 사람에 게 먹인 후에 진, 유 두 사람을 처리했다. 며칠이 지났다. <상강오협>과 악대붕이 떠난 후에 유윤중은 또 철사도인과 황현극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래도 그들이 허락하지 않자, 다음날 일이 있다며 집으로 돌아가서는 열흘 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들 그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하루는 사람을 시켜 능조에게 편지와 함께 황금덩이를 보내왔다. 편지의 내용인즉 이러했다. 운봉이 도를 배우러 훌쩍 떠나버림으로써 인간사의 허무를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집으로 돌아간 그 다음날 집사를 시켜 땅과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몇 군데에 선당곡창(善 堂穀倉)을 세워 진휼(賑恤)케 하였다는 것, 자기는 도를 가르쳐 줄 스승을 찾아 여러 명산(名山) 으로 편력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 보내는 황금은 은 만 냥에 해당하니 장인의 양로대책에 쓰라 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작별을 고하지 못하여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능조는 편지를 받고 급히 달려가서 만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윤중은 집으로 돌아가자 모든 일을 집사에게 맡기고 자기는 벌써 떠나가 버린 후였다. 편지는 떠나기 사흘 전에 쓴 것이나 하인에게 시간을 맞추어 전하라고 분부했으니, 이제 어디 가서 그의 종적을 찾겠는가? 능조는 사랑하는 딸과 사위가 동시에 집을 버리고 입도하는 것을 보자, 비록 전연(前緣)이 정해 진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슴이 몹시 아팠다. 특히 윤중은 운봉 때문에 그렇게 되었고, 또 그가 독자로서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더욱 그가 측은하고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한 참 동안 슬픔에 젖어 있다가 그냥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허초도 윤중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자 심사가 편하지 못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표시를 내지 않고 다만 부모님을 뵈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떠난 후에 곧 편지를 보내왔는데 집에 도착 하니 부모님이 마침 병으로 신음하시다가 다음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장례를 지낸 후에 역시 윤중의 뒤를 이어 속세를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대가장은 떠날 사람들은 다 떠나고 다만 철사도인과 조심원, 황현극 그리고 능조 네 사람만 남 았다. 철사도인은 며칠 더 있어도 여촌에서 아무런 동정이 없고, 또 점괘를 보니 무슨 일이 생기 지 않는다고 나왔으므로 비로소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곡왕봉으로 돌아갔다. 형옥은 더 이상 만류할 수가 없었다. 철사도인이 떠나자 조심원과 황현극도 함께 떠났음은 물론이다. 백기는 여촌을 이긴 후, 어신동으로 산책나가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고, 어떤 때는 다른 사람과 같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무슨 곡절이 있다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철사도인이 떠난 그 다 음날, 백기는 또 어신동으로 산책하러 간다고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편지도 남겨 놓 지 않았다. 이제 능조 혼자 남아서 대형옥과 같이 쓸쓸하게 지내야 할 입장이 되고 말았다. 한편 윤중은 철사도인, 현극, 심원에게 몇 번이나 간청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속으로 생각 했었다. '검선은 사람이 아니냐? 모두들 나와는 인연이 없다고 말하니, 옥청대사가 청라곡에서 인연을 찾을 수 있다고 한 말도 진짠지 가짠지 알 수 없구나. 만약 운봉이 검술을 배워 돌아왔을 때 내 가 이전과 같다면 어찌 날 깔보지 않겠는가? 이렇게 질질 끌다가 끝내 배우지 못하면 어떡하지? 추운수는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검선으로 가까운 형산에 계시다. 그 어르신네가 외증손녀에게 이렇게 관심을 보였으니 설마 나에게 조금의 성의가 없지는 않겠지? 모든 검선이 나를 받아들이 지 않는 것은 내가 부잣집에서 태어나 한고(寒苦)를 견디지 못할 것으로 알고 그러는 것이다. 집 으로 돌아가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형산으로 가자. 추운수 어르신네를 찾아 검술을 배워야만이 훗날 운봉을 만나 면목이 선다.' 이렇게 생각한 윤중은 능조에게 집에 일이 있어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대가장을 떠났다. 집에 도 착하자 즉시 생각한 대로 실천에 옮겨 처리하고는 형산으로 훌훌 떠나고 말았다. 형산 산기슭에 도착한 윤중은 갑자기 짙은 안개에 가로막혀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었다. 윤중은 조급해졌다. 형산이란 곳은 본래 항상 운무(雲霧)가 가득하고 개이는 날이 매우 적다. 그러나 이 번의 안개는 말할 수 없이 짙어 산기슭에서 위를 쳐다보아도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길은 고사하고 산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윤중은 방법이 없었다.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끝내 용기를 내어 마른 양식을 몸에다 묶고 손발을 다 써서 기어 올라가야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형산은 호남성의 명산이므로 매년 산을 오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유독 추운수가 기거하는 곳 은 형산에서도 가장 높고 험준한 곳으로써 날씨가 좋은 때에도 안개가 사방에 가득하고 길도 없 는 곳이었다. 또 듣자하니 맹수와 독충이 많아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이곳은 지나가지 않아 인적 이 극히 드문 곳이었다. 윤중은 우선 산기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난한 농가에 묵었다. 그 농부는 오씨 성을 가진 자 로서 매우 친절하였다. 윤중이 부잣집 도련님이면서 하인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서 길도 없는 산 을 올라가려는 것을 보자, 매우 걱정하며 몇 차례나 만류하였다. 윤중은 자기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농부는 말려도 소용이 없는 것을 알자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은 길도 없고 안개가 많아 이렇게 올라가다가는 십중팔구는 죽기 십상입니다. 끝내 가신 다면 제가 당신의 팔꿈치, 발, 무릎, 머리, 등허리를 두터운 솜으로 감싸드리지요. 그리고 긴 줄과 갈고리를 준비하여야만 합니다. 만일 실족하여 굴러떨어지게 되면 두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싸 고 경사를 따라 굴러내려 오십시오. 그러면 혹시 죽지 않고 부상만 입을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깊 은 계곡으로 떨어지게 되어 죽지만 않는다면 이 줄과 갈고리를 사용하여 올라올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나 통할 방법이므로, 가장 좋은 것은 이런 모험을 하지 않고 다른 산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윤중이 어찌 그의 만류를 듣겠는가? 그는 즉시 농부가 말한 대로 준비해 달라고 했다. 그 농부는 말릴 방법이 없자 아내와 함께 밤을 새워 마른 양식과 모든 준비를 갖추어 주었다. 다음날 윤중은 그 농부의 말대로 두터운 솜을 곳곳에 대고 산으로 올라갔다. 농부는 산기슭까지 따라와서 올라가는 길을 가리켜 주었는데, 윤중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자 곧 모습이 보이지 않았 다. 처음에는 서로 소리를 지르다가, 나중에 윤중의 소리가 들리지 않자 한숨을 지으며 집으로 돌 아갔다. 그 농부는 산의 높은 곳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단지 날씨가 좋은 날 땔감을 주우러 삼사십 장 정도 올라가 보았을 뿐, 그 이상은 올라가려고 해도 길이 없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것도 일 년 에 겨우 몇 번 되지 않았다. 윤중은 농부가 가리켜 준 길을 따라 올라갔다. 하지만 이렇게 짙은 안개 속에서 어떻게 걸어갈 수 있겠는가? 두 손을 써서 엉금엉금 길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채 십 장도 못 가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윤중은 다행히 무공과 안력은 어느 정도 기초가 갖추어져 있었다. 산길이 비록 험하고 미끄럽고 안개가 가득했지만, 약간 쉬면서 정신을 차리니 한두 자 전방의 물체는 볼 수 있었다. 그는 기뻐 하며 더욱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형산은 높고 가파른 데다 몹시 추웠다. 안개가 돌에 맺혀 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적이 드물어 가시나무가 많았다. 그러니 두 손으로 축축한 돌과 흙 위를 기니 얼마나 손이 시 리겠으며, 사정없이 가시에 찔리겠는가! 가시에 찔린 상처가 크지는 않지만, 어떤 가시는 독을 가 지고 있었다. 따라서 얼마 안 가 두 손이 부어오르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서야 농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윤중은 기어오르기 불편하여 손에 낀 솜장갑을 벗어버렸다. 추운 것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십 분의 일도 못 올라왔는데 앞은 더욱 험하고 두 손은 부어올라 마비가 되어가 니, 이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너무나 암담하고 다급하여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는 억지로 손 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고 또 삼 장 정도 나아가니 정말로 더 나아갈 방법이 없었다. 비교적 평평한 곳을 더듬어 그 위에 앉았다. 다 뽑지 못한 작은 가시를 손톱으로 뽑아내었다. 이 때 손은 중독이 되어 시리지도 않을 뿐더러 도리어 열이 나서 뜨거울 정도였다. 고개를 들어 위 를 쳐다보니 안개가 너무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래를 쳐다보아도 자기의 몸뚱아리조차 희미하게 보였다. 생각할수록 낙심천만이었다. 그러나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가지는 않 겠다고 결심하였다. 윤중은 몸가짐을 다시 하고 솜장갑을 낀 다음 여전히 한 걸음 한 걸음 기어 올라갔다. 급기야는 정말로 두 손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두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짚어가며 걸어나갔다. 또 오륙 장 정도 올라가니 문득 발이 암벽에 딱 부딪혔다. 급히 두 손으로 앞을 더듬어 보니 모두가 암벽으로 어디에도 길이 없지 않은가? 이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여기저기 한참 더듬어 보았지만 올라가는 길은 끝내 없을 뿐만 아니라 방금 올라온 길마저 찾을 수가 없었다. 윤중은 다급한 나머지 어쩌면 좋을는지 몰랐다. 꿇어앉아 큰소리로 약혼녀의 외증조부를 부르며 목숨을 살려달라고 외쳤다. 목이 터지라고 부르며 애걸하기는 했지만,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들리 지 않았다. 한동안 상심하여 앉아 있을 때, 문득 멀지 않은 전방에서 두 줄기의 푸른빛이 움직이고 있는 것 이 보였다. 자기의 성심에 감동하여 추운수가 검광으로 자기를 인도한다고 생각한 윤중은 저 불 빛만 따라가면 필히 그의 동굴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매우 기뻤다. 손이 아픈 것도 잊고 기어서 그 두 줄기 푸른빛을 쫓아갔다. 그 푸른빛은 그 자리에서 번쩍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 마찬가지였 다. 무슨 법보가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는 바싹 다가가서 만져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미처 손이 닿기도 전에 씩씩거리는 매우 큰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깜짝 놀란 윤중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순간 손은 이미 그 물체에 닿았다. 손이 닿자마자 그 물 체에는 온통 긴 털이 나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또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름도 모를 괴상한 짐승을 만난 것을 안 윤중은 혼비백산하였다. 그 짐승도 원래 안개가 너무 짙어 앞을 볼 수 없자 그곳에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러다가 윤 중이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깨어나 사람 냄새를 따라 접근했던 것이다. 윤중이 물러날 때는 칼을 뽑아 몸을 보호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급한 나머지 솜장갑을 벗지 못 해 허둥대고 있을 때, 그 짐승의 머리가 가슴을 들이받았다. 그 바람에 윤중은 뒤로 넘어지며 굴 러떨어졌다. 생명이 위태롭다고 느낀 순간, 문득 농부가 가르쳐 준 방법이 생각났다. 그는 급히 두 팔로 머리 를 감싸고 두 다리를 오므려 몸을 둥그렇게 만들어 경사를 따라 굴러내려 갔다. 다행히 올라오던 길을 따라 굴러내려 갔고, 계곡 같은 곳에 떨어지지 않아서 목숨은 간신히 보전할 수 있었다. 눈이 팽팽 돌 정도로 한참 정신없이 굴러내려 가다가 가까스로 멈춘 윤중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갑자기 가슴과 등허리가 쑤셨다. 가슴은 그 짐승에게 받혔고 등어리는 굴러내려 오면서 돌멩이에 부딪쳤기 때문이리라. 고개를 숙여 보니 가슴팍의 옷이 찢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짐승은 머리에 뿔이 나 있었던 모양이다. 그 짐승에게 받혀 가슴이 저리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었다. 윤중은 이토록 고생끝에 죽을 뻔까지 했는 데도 추운수는 고사하고 그림자도 볼 수 없으니 기가 막혔다.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두 손은 퉁퉁 부어 그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애를 쓴 후에야 겨우 솜장갑을 벗을 수 있었다.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절망감이 통증 과 함께 밀려오자, 윤중은 '왁' 하는 소리와 함께 선혈을 토해내고는 그대로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을 흘렀을까! 윤중이 깨어나 보니 자기가 원래 쓰러져 있던 곳이 아니었다. 앞에는 한 풍채가 수려한 젊은이가 서 있었다. 젊은이는 윤중이 깨어나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상처는 괜찮아요?" 비로소 윤중은 방금 입은 부상이 생각났다. 이 젊은이가 자기를 이곳으로 구해 왔다고 짐작한 윤중은 침대에서 내려가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그러다가 별안간 온몸의 통증이 가신 것을 깨달 았다. 뿐만 아니라 두 손의 부종도 모두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면 아까의 일이 악몽을 꾼 것이란 말인가! 새삼스런 관심으로 실내를 살펴보니, 그곳은 동굴이었다. 자기가 누워 있는 곳은 석상(石 床)이고, 단약을 끓이는 화로 이외에 몇 권의 도서(道書)가 보였다. 윤중은 그 청년의 모습이 황현극이나 조심원 등이 말한 추운수 와는 다른 인물임을 알자, 이 사 람도 틀림없이 신선 이인(異人)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급히 앞으로 다가가 꿇어앉았다. "제자 유윤중은 일심으로 도를 쫓아, 안개 속에 목숨을 걸고 형산 주염동으로 가던 길이었습니 다. 제 약혼녀의 외증조부인 추운수 어른을 찾아 도를 배우려는 뜻에서지요. 그런데 뜻밖에 중도 에서 한 괴수에게 들이받혀 산 밑으로 굴러떨어져 내상을 입고는 피를 토하고 기절했었습니다. 그런데 선장(仙長)께서 이렇게 구해 주셨으니, 이 은혜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제자는 이미 세상 과 인연을 끊고 도를 배우려고 결심한 몸, 바라옵건대 선장께서 이 우둔한 놈을 문하로 받아주십 시오. 제자는 전력을 다해 수련하겠습니다. 결코 조금도 태만함이 없이 수련하여 선장께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 젊은이가 말했다. "그대를 구한 사람은 내가 아니니 나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어요. 그대는 이곳이 어딘 줄 아십니 까?" 윤중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 젊은이가 말했다. "여기가 바로 그대가 목숨을 걸고 찾으려고 했던 형산 후봉(後峰)의 주염동입니다. 하지만 그대 는 이곳에 머물 수 없군요." 윤중은 이 말을 듣자 희비가 엇갈렸다. 기쁜 것은 자기가 그렇게 찾던 곳을 바로 찾았으니 기쁘 기도 했지만, 젊은이가 자기더러 이곳에 머물 수 없다고 거부의 뜻을 보이니 마음이 다급하기도 했다. 윤중은 급히 젊은이에게 말했다. "선장께서 이곳이 제 약혼녀의 외증조부의 선부라고 하셨는데, 그럼 선장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그리고 추운수 어르신은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제자가 만나뵐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 요." "나는 악문(岳雯)이라고 합니다. 그대가 찾으시는 분은 바로 나의 사부님이시지요. 아까 그대가 이 동굴 가까이까지 왔을 때, 사부님께서는 나의 주순 사제를 데리고 건곤정기 묘일진인의 별부 인 구화산 서운동으로 가셨습니다." 윤중은 악문이 추운수의 제자라는 말을 듣자, 그도 틀림없이 고명한 검선이라고 생각하였다. 다 시 절을 하면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 아니면 추운수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서 죽 어도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악문이 그를 일으키며 웃었다. "사부께서 그대가 끈질기다고 말씀하시더니, 과연 명불허전이구려. 내 말을 잘 들으세요. 그대가 이곳에 오기 전에 사부님께서 벌써 그대의 다음을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사부께서는 주사 제를 받은 후에 다시는 제자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결심을 하셨다오. 때문에 짙은 안개로 산을 봉 한 것이오. 그런데도 뜻밖에 그대가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 올라오지 않았겠소. 그러나 이곳은 형 산의 뒤쪽, 지상에서 천 장 높이나 떨어진 곳이니 그대가 무슨 수를 쓰든 올라올 수가 없어요. 그 런데 그대는 아무도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육계(苦肉計)를 써서 사부님의 동정을 사려고 생 각하였소. 그런 사실을 안 사부님은 도리어 불쾌하게 여기시고 끝까지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답니 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대는 무심결에 백작동 금모모의 동굴을 지키는 신수(神獸)인 벽안(碧眼) 의 금후(金吼)의 새끼 소후(小吼)에게 받혀 산 밑으로 굴러떨어져 기절하였소. 나는 단약을 가지 고 그대를 구하려고 했는데, 그때 사부께서 그대 약혼녀의 증조부인 <괴규화> 궁신 능진인께서 그대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분과 우리 사부님은 계속 서로 대면을 피하 는 형편이라, 사부님께서는 진작부터 구화산으로 거처를 옮기시려고 했었지요. 그러니 능진인이 나타나매, 그대가 이젠 죽지 않을 것을 알고는 이 동굴을 내가 수련하게 물려주시고 사제 주순과 함께 구화산으로 가셨답니다." 추운수가 떠난 얼마 후에 <괴규화> 궁신이 윤중을 안고 이곳에 나타났다. 괴규화는 원래 추운 수에게 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도 구해 주지 않느냐고 따질 참이었다. 그런데 이미 추운수가 떠나버렸기 때문에 능진인은 허탕을 친 셈이었다. 악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분도 원래는 그대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그대에게 단약 두 알을 먹여 목숨을 구해 주시고는 떠날 때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이 젊은이는 부잣집에서 자 라났기 때문에 비록 근기는 좋지만 속기(俗氣)에 젖어 있다. 따라서 그는 진심으로 도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며 이번의 모험도 모두가 정욕 때문에 일어난 거야'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부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까닭으로 그대더러 청라산으로 가서 <육마> 여후의 목을 잘라 오면 제자로 받아주시마 하십디다.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내가 보건대 검술도 못하는 당신이 이파의 소굴로 들어가 그들의 우두머리격인 여후의 목을 자른다는 것이 어디 가능한 일이겠소? 하지만 능진인의 성격은 우리 사부님보다 더 괴팍하시니, 그대에게 그런 일을 시키실 때는 다른 생각이 있을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그대 스스로 잘 알아서 행동하시오. 만약 그대가 굳이 청라 산으로 가려고 한다면 그 고충을 봐서 내가 그곳으로 데려다 줄 수는 있습니다만." 윤중은 악문의 말을 듣자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능혼의 도법은 얼마 전에 직접 보았다. 운봉도 그의 부인 문하로 들어갔으니, 이 기회에 서로 만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다만 팔마가 대 단하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익히 들었으므로,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자기더러 <육마> 여후의 목을 잘라오라고 하다니, 이게 무슨 당치도 않은 지시란 말인가. 그러나 윤중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번에 집을 버리고 스승을 찾아나섰다. 원래 죽어도 그냥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동원기, 옥청대사 등 모든 검선이 나는 청라산에서 인연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능진인 이 남긴 말도 보아하니 괜히 한 소리가 아닌 것 같구나.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겪지 않고서 어떻 게 검술을 배울 수가 있겠는가? 방금 안개 속에서 죽은 셈치고 일단 청라산으로 가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정신이 들면서 용기가 솟아났다. 곧 악문에게 청라산까지 보내달라고 부 탁했다. 악문이 말했다. "여기서 청라산까지는 수천 리나 떨어져 있답니다. 그곳은 이파의 고수가 매우 많아 나도 두세 번 그곳을 지나간 적은 있지만 한 번도 내려가 본 적이 없답니다. 우선 여기서 하루를 쉰 후에 내일 함께 떠나도록 하지요. 그대를 청라산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번취자(番取子)까지 바래다 드 리고, 나는 돌아오겠습니다. 마을도 있고 절도 있으니 그곳에서 길을 물어보면 되지 않겠소?" 윤중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동굴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 악문은 그에게 몇 알의 단약을 주어 먹인 다음 그를 데리고 공중으로 솟아올라 비행하기 시작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서야 두 사람은 번취자에 도 착하였다. 이곳은 사천과 서장 사이의 첩경으로써 사람이 그리 많이 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악문 은 윤중을 데리고 외딴 곳을 찾아 내려왔다. 윤중은 몇 차례나 그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악문은 추운수를 따른 지 여러 해가 되다 보니 행동과 언사가 모두 추운수와 비슷하여 윤중의 부탁을 물 리치고는 매정하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버렸다. 윤중은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숙소를 찾으러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도착하니 집들이 몇십 가구 가 있었지만, 모두 문을 걸어 잠근 채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멀리 마을 밖에 절 하나가 보였다. 그곳으로 가보니 문은 닫혀 있고, 문 밖에는 흉악하게 생긴 화상 몇몇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윤중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며 말을 꾸며대었다. 서 장으로 활불(活佛)을 배알하러 가다가 길도 잃고 감기도 걸렸으니 절에서 며칠 묵어 갈 수 없겠 느냐는 것이었다. 그 화상들은 윤중을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자기네끼리 서장말을 몇 마디 주고받고는 윤중더러 절로 들어가라고 했다. 윤중은 그들의 태도가 미심쩍었지만 첫째로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 고, 둘째로 집을 떠난 경험이 적었기 해문에 이해(利害)의 경중(輕重)을 잘 몰랐다. 그래서 신중을 기하지 않고 따라 들어갔다. 문을 들어서니 대전 양 옆으로 쇠똥, 말똥이 수북한데, 뼈와 가죽만 남은 몇 명의 화상이 맨발로 우물에서 물을 뜨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한 덩지가 큰 화상이 채찍을 들고 있다가 윤중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안내역인 화 상과 몇 마디 서장말을 나누었다. 윤중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았다. 하지만 자기의 무공을 믿고 안으로 들어가 본 후에 상황을 살펴 행동하자고 생각했다. 대전을 돌아 이번에는 대원(大院)으로 들어갔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계단 위에 두 화상이 방석 을 깔고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은 키가 매우 크고 덩지도 크며, 나머지 한 화상은 키가 작고 땅딸 하였다. 모두가 노란 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옆에는 열 명 가량의 흉악하게 생긴 화상들이 시립해 있었다. 그들은 윤중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도 모두 못 본 체하였다. 먼저 길을 안내하던 화상이 갑자기 윤중에게 꿇어앉으라고 소리를 쳤다. 윤중은 이 화상들이 비단 생긴 것이 흉악할 뿐 아니라 모두가 번쩍이는 계도를 차고 있는 것을 보고 좋은 곳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꿇어앉으라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뒤를 향해 읍을 하며 말했다. "대화상께 부탁드립니다." 그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흉승이 소리를 질렀다. "큰어르신네라고 불러라!" 윤중은 그만 자칫하면 웃을 뻔했다. 그때 땅딸한 화상이 일어나 윤중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놈은 어디서 굴러온 놈이냐? 간덩이가 얼마나 크길래 큰어르신네와 둘째어르신네를 보고도 꿇어앉지 않는 거냐?" 윤중은 그가 사천 사투리를 쓰는 것을 듣고 불쾌감을 참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성이 유가요. 서장으로 활불을 배알하러 가던 도중에 길을 잃고 몸도 좋지 않아 여기서 하루 이틀 쉬어 가려던 참이오. 불문 제자라면 무릇 겸손하고 자비로운 게 상식이거늘, 무슨 어거 지로 낯선 시주에게 꿇어앉으라고 하는 거요? 당신들이 내가 멀리서 왔다고 깔보는 모양인데, 그 렇다면 그냥 가겠소." 말을 마친 윤중은 몸을 솟구쳐 절 담장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뛰어내리려고 하다 보니, 그 담 장 바깥도 마당으로써 몇십 명의 화상들이 모여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윤중이 담장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자, 일제히 '잡아라!' 하고 소리쳤다. 윤중은 그들의 숫자가 많은 것을 보자 감히 뛰어내려 가지 못하였다. 돌연 뒤에서 괴상한 웃음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보니 방금 그 땅딸막한 화상이 어느덧 뒤에 다가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 방에 수십 명의 흉승들이 각기 계도와 선장을 휘두르며 몰려오고 있었다. 상황이 불리함을 느낀 윤중은 땅딸막한 화상이 병기도 없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달려들 었다. 왼손으로 <오룡탐조(烏龍探 爪)>를 만들어 흉승의 얼굴을 향하고 오른손으로 칼을 뽑아들 었다. 순간 그 흉승은 중얼중얼 염불을 외며 뒤로 물러났는데, 그 신법이 매우 민첩하였다. 검을 뽑아들긴 했으나 윤중은 별안간 어지러웠다.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담장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밑에 있던 흉승들이 재빨리 달려들어 윤중을 꽁꽁 묶었다. 한참 만에 정신이 든 윤중은 자신이 불전 기둥에 묶여 있는 것을 알고는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욕 을 퍼부었다. 그 흉승들은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온 하루 밤낮을 그대로 두었다. 윤중을 묶은 끈은 노란 것이었는데, 무엇으로 만들었지는 모르겠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죄여들었다. 윤중은 성도 났고 다급했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올때 악문이 준 단약을 먹 었기 때문에 배는 고프지 않았다. 청라산으로 가는 길 十年薪膽 二番僧煉魔得眞傳 兩輩交期 三劒客中途逢舊雨 다음날 오후, 그 땅딸막한 흉승이 두 차례나 와서 윤중을 보았다. 윤중이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이 정정한 것을 보고는 놀란 기색으로 돌아가더니 잠시 후 체구가 큰 흉승을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상의하더니, 땅딸막한 흉승이 윤중에게 말했다. "네놈이 겉보기완 다르게 제법 강단이 있구나! 우리가 너와 한 가지 일을 상의하려고 한다. 만약 네가 승락을 한다면 살려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고집만 부린다면 네놈의 심장을 꺼내 술 안주로 하겠다. 어떻게 하겠느냐?" 윤중은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나는 이미 잡힌 몸이니 죽이려거든 마음대로 하시오. 당신네가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면 이 렇게 묶어놓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우선 나를 풀어준 다음 상의해야 도리 아니겠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몰라도 만약 강도질이나 음탕한 짓이라면 사양하겠소. 당신네가 설마 나를 죽인 다고 위협해서 눈 한번 깜짝한다면 내가 남자가 아니오." 땅딸막한 흉승이 체구가 큰 흉승에게 말했다. "이놈은 제법 사내대장부로군요. 이전의 그 작자들보다 훨씬 강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도망갈 염려가 없으니 우선 풀어주지요." 말을 마치자 윤중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윤중은 하루종일 묶여 있었기 때문에 온몸이 저렸다. 이 흉승들의 실력이 대단하며 또 요법(妖 法)을 구사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결코 쉽게 도망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윤중은 잠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기회를 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 흉승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시오." 땅딸막한 흉승은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윤중을 끌고 마당으로 나갔다. 햇빛 아래에서 윤중 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후에 다시 그를 끌고 옆 건물의 한 선방으로 갔다. "내 이름은 카잉사푸(喀音沙布)며 본사의 둘째어른이고, 저 키가 큰 분은 본사의 큰어르신네로서 존함이 반나가잉(梵拿伽音二)이시다. 우리는 모두 서장(西藏: 티베트) 사람인데, 활불(活佛)에게 죄 를 지어 부하들을 데리고 청라산에 와서 절을 짓고 수양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 십 년 전에 홀연 한 여자가 왔지 않겠나. <신수비구(神手比丘)> 위풍랑(魏風娘)이라고 했는데, 매우 예뻤다. 그런 데 그녀를 절에 머물게 한 것이 탈이었어. 그녀는 법술을 써서 비검으로 우리편 사람을 많이 죽 였을 뿐 아니라 우리 두 형제를 쫓아버리고 우리의 청라산을 차지해 버렸다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와서 이 소원사(昭遠寺)의 주지를 쫓아버리고 잠시 이곳에 머물고 있는 중일세. 첫째 는 활불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서장으로 돌아갈 수 없고, 둘째는 또 청라산의 천연적인 조건과 고생하여 만든 절을 버릴 수 없어서 고수를 청하여 청라사를 다시 뺏으려고 했지. 그러나 위풍랑 은 우리가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이곳에 찾아와서 우리더러 귀순하여 자기 앞잡이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겠나. 그녀한테는 여덟 명의 제자가 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사천팔마>로서 전문적으로 강도짓과 간음을 하는 무리들이다. 모두가 법술에 정통하여 실력이 고강하니, 우리는 그녀와 싸워도 이길 수가 없고 도망가려고 해도 갈 곳이 없어 승낙하고 말았다네." 카잉사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곳은 원래 사천과 서장의 길목이어서 평소 객상들과 부처를 배알하러 서장으로 가는 사람들 중에 가까운 길을 택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지나가곤 했다. 그들은 청라산에 있을 때만 해도 무턱대고 강도짓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기네 절에 와서 평안을 비는 사람들 중에 시주가 시원 찮은 사람들만 골라서 한두 차례 털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팔마>가 이곳에 온 후부터 그들은 부하들이 많아 마구잡이로 강도짓을 하고 부녀자들 을 만나면 강간하는 바람에 점점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팔마>는 또 소문이 커지자 이곳이 청라산으로 가는 길목임을 알고, 소원사의 반나가잉 일행에 게 앞잡이노릇을 강요하였다. 그래서 무예 고수나 검객이 그들을 찾는 경우 소원사에서 미리 연락을 해주어 준비를 할 수 있 게 하였다. 소원사에는 평소에 생산되는 것이 없어 모두 과객들의 시주에 의존해서 살아왔었는데, 그들이 마구잡이로 강도짓을 하여 사람들의 자취가 없어지고 보니 형편이 자연히 어려워질 수밖 에 없었다. 그래서 반가나잉 일행은 하는 수 없어 사천 경계 지방으로 가서 강도짓을 하였다. 그러나 <팔마>는 그것마저 못하게 하고 매달 약간의 먹을 것을 주며 그들의 앞잡이노릇만 하라 고 했다. 어쩌다가 큰 건수를 하나 잡아도 몽땅 그들에게 바쳐야 했다. 그래도 소원사 쪽에서는 분을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지 이미 몇 년이나 되었다. 다행히도 위풍랑이 성도에서 <묘일부인(妙一夫人)> 순란인(荀蘭因)에게 살해되자, 반나가잉 일 파는 다시 청라산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나 팔마는 위풍랑이 죽자 겁이 나서 서장의 독룡존자 (毒龍尊者) 문하로 들어가 많은 법술을 배우고, 또 많은 고수를 청하여 도움을 구했다. 그래서 반 나가잉 일파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또다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 팔마의 세력이 비록 대단하지만 <천마해체(天魔解體)>의 대법(大法)을 연마하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반나가잉은 본래 이 법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위풍랑이 소녀(素女)를 써서 반나가잉의 원진(元眞)을 깨뜨려 버리는 바람에 반나가잉은 순수한 양기(陽氣)를 잃어버려 이 대 법의 효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대법을 연마하려면 기초가 단단하고 원신(元神)이 안정되어 있으며 의지가 견고한 사람으로 반드시 동정이어야 한다. 조용하고 외딴 산꼭대기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며 삼십육 일씩 두 차례 연마하여야 성취할 수 있다. 다만 이 삼십육 일 동안 먼저 곡물을 피하고 참선을 배운 후에 그 곳에 앉아 법대로 수련하여야 한다. 마지막 성취를 이룰 때는 무슨 낌새가 느껴지거나 갖가지 요 마(妖魔)가 요란을 피우더라도 꼼짝하지 않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흐트리게 되면 앞의 공 이 모두 없어질 뿐만 아니라 생명도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카잉사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대사형께서는 우리 중에 동정인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을 알고 사람을 찾고 있었다네. 몇 년 동안이나 물색했지. 그래서 어쩌다가 한두 명을 만나 억지로나마 시키면 의지가 견고하지 못해 결국은 모두가 스스로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았지. 더구나 이런 법술은 필히 다른 검술이나 도술 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만이 연마할 수 있다네. 그렇지 않고 다른 분야를 연마한 적이 있었다면 그의 원기가 순수하지 못하므로 소용이 없게 되지. 그렇기 때문에 적격자를 찾기가 매우 힘들어. 어제 자네가 돈푼이나 있나 해서 손을 쓰려고 했는데, 우리 사형제가 자네를 보고서 동정의 몸인 것을 알았지. 그래도 처음에는 자네가 해낼 수 있을는지 몰랐지만, 하루종일 묶어 놓은 뒤에 살펴 보니, 자네가 비단 기초가 단단할 뿐 아니라 의지가 견고한 것을 알고 비로소 자네와 상의를 하 는 것이네. 만약 자네가 승락한다면 우리는 자네의 도움으로 청라산을 되찾을 뿐 아니라, 자네도 천재일우의 기회로 우리 모교 중의 비법를 배울 수 있으니 어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 겠는가? 그러나 이 대법을 연마할 때는 반드시 생사를 도외시하여야 한다. 눈앞에 어떤 무서운 현상이 나타나도 모두가 환상에 불과하니, 상관하지만 않으면 곧 없어질 거야. 만약 마음을 흐트 리게 되면 생명이 위험하게 된다. 이제 내가 모든 사실을 자네에게 설명하였으니, 만약 거절하는 경우 우리가 자네에게 독수를 쓴다고 탓하지 말게나." 윤중은 카잉사푸가 말을 하면서도 의심하는 빛이 농후한 것을 보고 결코 모면하기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자기는 이미 도마 위의 고기와 다름없는 처지라 도망갈 수도 없고, 또 자기도 마침 청라산의 <육마> 여후(勵吼)의 머리를 가져가야 하는지라, 만약 그의 말대로 그 법술을 배워 <팔마>를 죽일 수 있으면 어찌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마음 속으로 이 이해관계를 계산하여 보니 아무래도 우선 승락하고 다시 기회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카잉사푸는 그의 승락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를 지키는 사람을 두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한참 지난 후에 그의 사형 반나가잉과 함께 들어와 윤중에게 말했다. "자네는 신의가 있는 사나이다. 내가 일부러 자네를 감시하는 사람도 없이 한참 동안 나가 있었 으나 자네는 도망가려고 하지 않았네. 자네가 우리를 도와주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네." 말을 마치자 서장말로 자기네끼리 뭐라고 대화를 하였다. 잠시 후에 세 흉승이 좋은 음식을 가 지고 들어와 윤중을 대접했다. 윤중은 자기가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윤 중이 음식을 다 먹자 그들은 윤중을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후에 조용한 방으 로 데리고 갔다. 반나가잉은 며칠 동안 먼저 곡물을 피하며 참선하는 법을 전수해 주었다. 윤중은 본래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나서 한 번 배우면 따라할 줄 알았다. 두 흉승은 매우 기뻐했다. 마침내 모든 연법(煉 法) 구결과 비밀을 윤중에게 전수하여 외게 했으며, 환상을 보더라도 겁내지 말라고 재삼 당부하 였다. 이날 밤 자정이 되자 반나가잉은 윤중을 데리고 정원 가운데로 가서 입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윤중은 정신이 아찔하며 눈앞이 캄캄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자기는 이미 산꼭대기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머리 위에 달도 별도 보이지 않고, 밑을 내려다보니 완전히 칠흑 이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지 말아라. 내가 이미 네 명의 제자를 시켜 주위를 보호하고 있다. 매일 밤 자시(子時) 에 너를 보러 오겠다. 지금부터 가르쳐 준 대로 연마를 하거라." 윤중은 일이 이미 이렇게 된 것을 보자, 자기는 요법을 할 줄도 모르거니와 자기를 지키는 사람 마저 있으니 도망갈 수도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차라리 그가 말한 대로 정신을 진정시키고 그 천마해체의 법을 연마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조심원과 황현극은 백, 허, 유 세 사람이 잇달아 종적을 감추었을 뿐 아니라 적이 다시 오지 않 아 대가장에 별일이 없는 것을 보자, 철사도인과 함께 대형옥과 능조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곡왕 봉으로 와서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날 심원이 산봉우리에서 멀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산 기슭에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다가가서 보니 바로 <육지금룡> 위청이었다. 원래 그날 심원은 여촌 사람들과의 싸움이 끝났을 때 <상강오협>이 떠나면서 위청의 아내가 한 흰원숭이에게 잡혀 갔으며 위청은 혼자서 아내를 구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몹시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한두 사람과 같이 그를 도우러 가려고 했다. 그러자 옥청대사가 말했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형산 백상애(白象崖)에 바람처럼 빠른 흰원숭이가 한 마리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사람을 해쳤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괴규화> 능노선배께서 이 일을 아시고 위청에게 아 내를 구하러 가라고 하시면서도 자신은 수수방관했다면, 우리도 가서는 안 됩니다." 심원은 이 말을 듣고 옥청대사에게 점괘를 부탁했다. 그래서 점괘가 흉을 만나지만 길로 변하고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그와 위청은 사형과 사제 사이기도 하지만 좋은 친구이 기도 하였다. 그래서 위청을 만나지 못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장본 인을 만나니 매우 기뻤다. 그는 위청에게 그날의 일을 물었다. 위청이 말했다. "그날 능진인께서 아내가 흰원숭이에게 잡혀갔으며 그놈이 백상애에 살고 몸이 매우 빠르다고 하시지 뭡니까? 그리고는 내가 쫓아가지 못할까 봐 지름길을 가르쳐 주시며 등을 철썩 때려 더욱 빠르게 달리도록 해주시더군요. 계곡 입구에서 <상강오협>을 만났지만, 능진인께서는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고 빨리 가라고 재촉하셨습니다. 계곡을 빠져나가니 몸이 이상에게 가뿐해지며, 저절로 앞으로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만치 큰 강과 긴 골짜기가 보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언덕을 건너갔지요." 위청이 그렇게 얼마 동안 달려가니, 저만치 앞에 날아가듯 동부 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흰그림자 가 보였다. 점점 떠 가까이 쫓아가니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계속 쫓아가자 흰원숭이 는 큰 바위 앞으로 가서 굴로 들어가 버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굴은 이미 바윗덩이로 막혀 있었다. 위청은 허리에 차고 있던 강조로 그 바위를 밀었다. 겨우 그 바위를 밀어내자마자 흰원숭이가 뛰어나왔다.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지 만 나무몽둥이를 들고 위청과 한참 동안 싸웠는데 몸이 매우 민첩하여 한 번 뛰어오르면 몇 장이 나 솟구쳤다. 위청은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점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 흰원숭이에게 한 대 얻어맞 고는 넘어졌는데, 흰원숭이는 그를 등나무 덩굴로 손발을 묶어 굴로 끌고 들어갔다. 위청의 아내는 남편이 잡힌 것을 보자 껴안고 통곡하였다. 그러자 흰원숭이는 위청의 아내를 물 어당겼다. 위청의 아내는 죽자하고 남편의 옷을 잡고 놓지 않았다. 그래도 흰원숭이가 힘껏 끌어 당기니 위청의 옷이 찢어지며 팔뚝에 새긴 용의 문신이 드러났다. 그러자 흰원숭이는 위청의 아 내를 놓고 위청 앞으로 다가와 왼팔의 옷을 찢었다. 그러자 팔뚝이 드러났다. 위청이 '이놈이 자기 앞에서 아내를 겁탈하려는구나' 싶어 걱정하고 있다가, 자기 옷을 찢는 것 을 보고는 이번엔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줄 알았다. 그 등나무 덩굴은 찻잔 만큼이나 굵었고 또 매우 단단하게 묶여 도저히 풀 수가 없었다. 위청은 성이 나서 눈에 불똥이 튀었다.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내가 짐승에게 겁탈을 당하다니, 이게 될 법이나 한가! 그래서 큰소리로 아내에게 소리쳤다. "당신, 아직도 살려고 하는 거요?" 이 한 마디가 그녀를 각성시켰다. 그녀는 본시 성품이 곧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결을 하려고 석벽에다 머리를 부딪쳤다. 그 러나 그 짐승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위청이 말을 하자마자 그 짐승은 몸을 홱 돌려 그녀의 머리가 석벽에 부딪치기 전에 잽싸게 막아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흉 악한 표정이 바뀌며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손짓을 해대었다. 위청과 아내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흰원숭이는 위청의 앞으로 오려고 하였지만 또 그녀 가 자결을 시도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흰원숭이는 그녀를 끌고 위청의 앞으로 다가왔다. 찻잔 만큼이나 굵은 등나무 덩굴은 그 흰원숭이가 한 번 비틀자 곧 끊어졌다. 위청은 풀려났지만 손에 병기가 없었으므로 주먹으로 다짜고짜 흰원숭이를 후려갈겼다. 그놈은 덤벼들지도 않고 위청의 아내가 자결할까 두려워서 그녀만 보호하였다. 흰원숭이는 몸이 매우 빨 랐지만 위청의 아내를 보호하느라고 위청에게 몇십 대나 얻어맞았다.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계속 손짓만 하는 것이었다. 위청은 그놈이 자기에게 손짓하는 뜻을 알 수 없었고, 또 계속 아내의 앞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때릴수록 더 화가 치밀었다. 흰원숭이는 가죽과 뼈다귀가 여간 견고하지 않아서 위청이 힘껏 때 려 아프게는 하였지만 상하게는 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때리던 위청은 문득 자기가 쓰던 강조를 발견했다. 위청은 강조를 집어들어 <신룡창 주(神龍槍珠)>의 절묘한 초식을 써서 먼저 그놈의 두 눈을 못 쓰게 한 후 죽이려고 생각하였다. 그가 막 강조를 쓰려고 할때, 홀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괴규화> 능진인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위청의 강조를 빼앗았다. 흰원숭이는 그가 대단한 인물인 줄 아는지, 즉시 위청의 아내를 놓고 꿇어앉았다. 능진인은 먼저 그 흰원숭이에게 말했다. "너는 수련을 잘하더니, 왜 또 이런 엉큼한 마음을 먹었느냐? 이만큼 얻어맞아도 억울하지는 않 겠지?" 그러자 흰원숭이는 능진인의 시커먼 다리를 껴안고 크게 울부짖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위청이 그놈을 때려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능진인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공중에 무엇인가가 위청을 가로막아 앞으로 나갈 수 없게 하였다. 능진인이 위청에게 말했다. "저놈도 맞을 만큼 맞았으니 그만 때려라. 저놈이 일시 엉큼한 생각을 품어 네 아내를 업어온 것은 잘못한 일이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네 왼쪽 팔뚝에 새긴 용문신을 알아보지 않았느냐. 십오 년 전에 상담(湘潭) 왕가(王家)에서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했던 것이다. 네 실력으로는 저놈을 당할 수 없다. 저놈이 너를 죽이려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지 않겠느냐? 어찌 네가 한참 동안 때리도록 그냥 놓아두었겠느냐? 또 너만 해도 그렇지. 여헌명을 배신할 작정이면서 그들과 함께 싸우러 갈 적에 아내를 먼저 도망시키지 않았으니, 그게 될 법이나 한 노릇이냐. 다행히 흰 원숭이가 납치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여, 곽 그 작자들이 돌아가서 너의 행적을 알면 어찌 네 아내를 그냥 두었겠느냐? 흰원숭이가 나중에 네 아내를 보호한 것은 지난날 네가 그를 살려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뜻이다. 그놈은 네 아내가 자결할 것이 두렵고, 또 네가 자기를 상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계속 얻어맞으면서 네 아내를 보호한 것이다. 이젠 네 아내도 무사하 고, 이 짐승도 다시는 사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너의 친구 조심원은 곡왕봉 철사도인 거처에 있 는데, 머지않아 <팔마>를 수습하러 청라곡으로 갈 것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나를 만난 사람은 대 부분 인연이 있느니라. 내가 너에게 작은 물건 하나를 주겠으니, 너는 먼저 친지를 찾아 네 아내 를 맡긴 후에 곡왕봉으로 가서 그들과 같이 <팔마>를 처치하라. 때가 되면 자연히 네게 좋은 일 이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능진인은 위청에게 등나무로 만든 채찍을 하나 주었다. 위청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 랐으나,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하였다. 위청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것을 받았다. 그 원숭이는 그때까지도 꿇어앉은 채 계속 울고 있었다. 능진인이 말했다 "나 <괴규화> 능혼은 지금껏 제자를 받은 적이 없다. 지금 그 계율을 깨뜨리고, 짐승인 너를 제 자로 삼으리라. 네가 이렇게 애원하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구나!" 그 흰원숭이는 고개를 한 번 끄떡이고 마늘찧듯이 머리를 땅에 쾅쾅 부딪쳤다. 능진인은 손을 뻗어 기뻐하는 흰원숭이의 목구멍 속에 집어넣었다. 곧 뼈다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흰 원숭이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흰원숭이가 말을 할 줄 알게 되자, 능진인은 그에게 또 두 알의 단약을 주어 먹게 했다. 그리고 는 흰원숭이와 위청 부부를 데리고 굴을 나왔다. 고개를 넘어가니 웬 덩지 큰 사나이가 땅에 자빠져 기절해 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는 또 두 동 강이 난 죽은 뱀과 색실로 감은 쇠화살이 놓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로 <묘인> 요개강인지 라 그 원인을 물어보았다. 능진인이 말했다. "나는 그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독화살로 사람을 해치기 전에 그 원신(元神)을 빼앗은 다음 대가장에서 그를 제압해 버렸지. 원신이 이미 죽어버린 데다 내 신뢰(神雷)에 걸려들었으니 기절 할 수밖에. 그래서 인사불성이 된 것이네." 능진인은 원숭이에게 작은 소리로 지시를 내린 다음 단약 한 알을 꺼내 흰원숭이에게 주었다. 우리가 떠난 후에 단약으로 요개강을 구하여 그를 업고 가라는 분부였다. <괴규화>는 원숭이에 게 분부를 한 후 위청 부부더러 같이 가자고 했다. 그는 법술을 써서 위청 부부를 상담(湘潭)에 있는 한 친척집으로 보내주었다. 위청이 감사의 절을 올리려고 하자, 그는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 기고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 흰원숭이의 일이 생각나지 뭡니까? 내가 어려서 왕씨 성을 지 닌 첫 번째 사부댁에 있을 때인데, 사형인 <오지개산(五指開山)> 왕전신(王傳信)이 형산에서 늙 은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왔더군요. 쇠사슬로 묶어 방 안에 매달아두어 야성을 죽인 후 훈련시키 려고 하였지요. 나는 그때 나이가 어려서 몰랐고, 또 원숭이가 밤낮으로 우는 것이 애처로와 사형 이 없는 틈을 타서 몰래 원숭이를 풀어주었답니다. 그때 이미 나는 왼쪽 팔뚝에 이 용의 문신이 있었지요. 그런데 오 년이 지난 지금 보니 그 원숭이의 털이 하얗게 변했을 뿐 아니라 나의 용 문신을 보고 이전의 은혜를 생각하여 나에게 덤벼들지 않을 줄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아내를 맡겨놓고 사형을 찾아나섰지요. 그런데 나서자마자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날 대 가장에서 보니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검선들이 많았는데, 나에게 소개를 시켜 줄 수 없겠습니 까?" 조심원은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말해 주고, 그를 데리고 가서 철사도인과 황현극을 소 개했다. 위청은 잠시 곡왕봉에 머물다가, 단오절 전에 청라산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조심원, 황현극과 함 께 대가장으로 가서 대형옥과 능조를 만났다. 형옥과 그 누이 상영은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상영이 떠날 때 한양 백룡암에 가서 옥청대사의 소개로 소인대사 문하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비록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매우 소식이 궁 금하였다. 그러나 집안일이 바빠 가볼 수 없어 대형옥은 조심원에게 며칠 일찍 출발하여 한양 백 룡암에 들려 상영이 소인대사의 제자가 되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또 능조도 두 사람에게 검선들을 만나게 되면 윤중의 소식을 물어보고, 만약 청라산에서 윤중을 만나게 되면 돌아오도록 권고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조심원과 황현극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돌아가서 철사도인과도 상의하였다. 그들은 사월 상순 에 출발하여 먼저 한양에 가서 상영을 만나 오빠의 말을 전한 후에, 육로로 걸어 기서(夔西), 검 각(劒閣)을 지나 청라산으로 가서 <팔마>를 만나자고 계획을 세웠다. 또 위청이 동행하기 때문에 일찍 떠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예상보다 빨리 출발하여 경치도 감상하면서 가자고 의견을 모았 다. 사월 초하루가 되자, 철사도인은 조심원, 황현극, 위청과 함께 장사(長沙)를 출발하였다. 며칠을 걸어 한양에 도착한 그들은 가까스로 백룡암을 찾았으나, 옥청대사가 이미 다른 곳으로 가고 없 었다. 그들은 원원대사(元元大師)의 제자 <홍낭자> 여영고(余塋姑)를 만나 상영의 행방을 물었다. 여영고의 말은 이러했다. "옥청대사께서 오셨을 때 소인대사는 공교롭게도 그 전날 밤에 친구를 방문하러 떠나셨답니다. 옥청대사께서는 원래 대소저더러 여기에 남아 소인대사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지 만, 소저께서 옥청대사와 같이 가겠다고 굳이 고집하고 조르는 바람에 대사께서는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성도로 떠나셨지요." 네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작별을 고하고 나왔다. 조심원은 갑자기 옥청대사가 도균(陶鈞)이 지금 사천 청성산에서 검술을 배우고 있다고 말한 것 이 생각났다. 도균을 찾아보고, 또 그의 스승인 <왜수> 주매도 만나보고 싶었다. 그 늙은이는 득 도(得道)한 지 오래 된 선배검선으로 정의감이 강하고 불평하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보다 더 열정 적이니만큼, 만약 그가 청라산으로 가서 도와준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네 사람은 상의를 한 후 황현극은 위청을 데리고 예정대로 먼저 떠나고, 조심원은 철사도인과 의창 삼유동(三遊洞)으로 가서 스승 협승(俠僧) 질범(秩凡)에게 용서를 빌어 그의 도움을 청한 후 검광을 타고 황, 위 두 사람을 좇기로 하였다. 네 사람이 헤어진 후에 조심원과 철사도인은 검광을 타고 삼유동으로 갔다. 철사도인이 조심원 을 대신하여 용서를 빌려고 굴로 들어간 다음 조심원은 굴 밖에 꿇어앉아 있었다. 잠시 후에 철사도인이 나왔다. "자네 사부께서 굴 안에 안 계실 뿐 아니라 허월(許月)도 여기에 없네. 굴 안에는 늙은 벙어리 화상 한 명뿐인데, 물어보아도 대답을 못하는구만." 조심원은 곧 철사도인과 굴에 들어가서 <협승> 질범과 허월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필적도 남 아 있지 않았다. 그 벙어리 화상은 두 사람이 무언가를 찾는 것을 보자 떨어진 방석 밑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조심원에게 주었다. 조심원이 보니 바로 허월이 남겨 놓은 것이었다. 원래 허월은 주매의 주선대로 대가장을 떠나 집으로 가서 집안 일을 정리한 다음 스승을 찾아갔 다. 다행히 삼유동은 의창의 유명한 명승지로 사람들이 자주 놀러가는 곳이라 찾기가 쉬웠다. 아 마도 허월은 인연이 있었는지, 삼유동에 도착하자마자 <협승> 질범을 만날 수 있었다. 삼유동은 풍경이 좋은 반면 세속과 멀리 떨어지지 못한 결점이 있었다. 그는 뒷동굴에서 수양을 하며 앞동굴과는 왕래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 고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즉 삼유동 뒤쪽에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굴이 있는데, 그곳에는 굉장 히 뛰어난 고승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작년 겨울부터 때도 없이 질범을 찾아와서 그에게 불교의 이치를 배우 려고 하였다. 그래서 질범이 귀찮아서 이곳을 떠나려고 할때 허월이 도착한 것이다. 질범은 허월의 근골이 매우 두터울 뿐 아니라 오랜 친구인 주매가 소개하였기 때문에 즉각 승락 하였다. 허월이 제자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질범은 허월을 데리고 천변(川邊) 공래산(空來山)으로 친구를 찾아가게 되었다. 뒷동굴에는 많은 경전이 있는데, 잠시 동안의 떠남이라 가지고 갈 수도 없어서 그 벙어리 화상을 불러서 지키게 한 것이다. 허월은 대가장에 있을 때 조심원이 <팔마>와 원수를 맺었을 뿐 아니라 이전에 스승에게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스승의 성격이 특별하고 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어 감히 사형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심원이 찾아오면 자기들의 행방을 모를까 봐 편지를 써서 벙어리 화상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그 벙어리 화상은 누구인가? 그의 내력은 제삼차 아미투검 때 자세히 나올 것이므로 생략하거니 와, 간단히 말하면 자기 스승인 설산(雪山) 요료화상(了了和尙)의 계율을 범하여 삼십 년 동안 벙 어리가 되어 벌을 받은 인물이었다. 허월은 조심원에게 전할 편지뿐 아니라, 그에게 부탁하는 내용까지 다른 종이에 써서 보여주었 던 것이다. 그는 비록 귀도 먹고 말도 못하지만 재주와 총기는 여전했다. 다만 감추고 나타내지 않을 뿐이었다. 허월의 부탁을 받은 그는 마침내 장본인인 조심원이 오자, 곧 그 편지를 내놓은 것이다. 철사도인은 편지를 보고 이 벙어리 화상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 경전들은 인 도 진경(眞經)으로써 불문의 진기한 보물이었다. <협승> 질범이 그에게 보관을 맡겼다면 그의 내 력이 보통이 아닌데, 그러면서도 일부러 벙어리 흉내를 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철사도인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어 그에게 예를 갖추어 몇 번이고 물어보았다. 벙어리 화상은 어쩔 도리가 없는 듯이 붓을 꺼내 종이에다 <죄 많은 몸이라 말을 할 수 없습니 다.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쓰고는 방석 위에 앉아 입정에 들어가 버렸다. 철사도인은 그가 자기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를 시 험해 볼 요량으로 고의로 경전을 훔치는 척하며 화상의 뒤쪽 석벽으로 살그머니 걸어갔다. 그러 나 손을 뻗기도 전에 벙어리 화상은 눈치를 채고 손을 들어 자기 머리 위를 쳤다. 갑자기 굴 속 이 금빛으로 가득해졌다. 철사도인은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조심원을 잡고 신검합일하여 공중을 뚫고 도망갔다. 뒤 돌아 보니 금빛 붉은 구름 속에 키가 석 자 정도인 벌거벗은 어린 화상이 쫓아오고 있었다. 철사도인은 정말로 경전을 훔치려고 한 게 아니고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었으므로 검광을 재촉하여 도망갔다. 십 리 정도 가니 더 이상 쫓아오지 않으므로, 그는 검광을 거두고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심원에서 말했다. "그 화상이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네. 나는 그가 벙어리인 척 하는 줄 알고 일부러 시험해 본 것인데, 정말로 오해할 줄은 생각이나 했어야지. 그 화상의 내력을 짐작컨대 아마도 설산 요료화 상의 전수를 받은 불문 심검(心劒)의 정통파인 것 같군. 지금 자네의 사부는 공래산으로 갔으니 그곳과 청라산은 매우 가깝네. 어쩌면 자네를 위해 갔는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지금 다른 마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팔마>를 제거하 여 은사께서 지난 잘못을 용서하시고 다시 문하로 받아주신다면 머리를 깎고 영원히 참선하기만 을 바랄 뿐입니다." 철사도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검광을 타고 황, 위 두 사람을 좇아 사천으로 향했다. 다시 합류한 네 사람은 며칠이 안 되어 성도에 도착하였다. 일단 성 밖에 있는 네 군데의 유명한 사당과 절을 구경한 다음 그들은 옥청대사를 만나기 위해 벽사촌으로 갔다. 그러나 옥청대사는 상영을 데리고 소인대사를 찾아 떠났고, 주경운과 오문기는 오랫동안 스승인 찬하대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황산으로 가고 없었 다. 네 사람은 벽사촌에 남아 있던 장기 오누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작별인사를 하고 나왔다. 조심원은 도균을 만나고 싶어 관현(灌縣) 청성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청성산 금편애(金鞭 崖)에 도착하자, 도균과 기등(紀登) 두 사형제가 바둑을 두는 것이 보였다. 원래 도균은 청성으로 온 후부터 <왜수> 주매가 가르쳐 준 구결로 매일 검술을 연습하고, 또 기등이 옆에서 전력으로 가르쳐서 진보가 매우 빨랐다. 비록 신검합일은 할 수 없었지만, 비검을 연마하여 마음대로 지휘할 수 있었다. 기등은 사람됨이 스승보다도 더 까다로왔지만 도균과는 매 우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 두 사람은 매일 수련을 마친 후에 약초를 캐지 않으면 바위 앞에서 바둑을 두곤 했다. 이날은 날씨가 좋아서 두 사람은 또 바둑을 두었는데, 문득 벼랑 아래에 네 사람이 올라오는 것 이 보였다. 기등은 철사도인을 알고 있었으므로 급히 달려가 절을 하였다. 도균도 그중 한 사람이 예전의 스승인 조심원인 것을 알아보고 매우 기뻐서 앞으로 다가가 꿇어앉아 절을 하려고 했다. 조심원은 급히 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현제(賢弟), 이러지 마시오. 이전에도 내가 능력이 모자란 것을 알고도 계속 사부행세를 하지 않았소! 더군다나 현제는 지금 주노선배의 제자인데, 계속 이전처럼 칭호한다면 연배가 틀려질 뿐 아니라, 나도 몸둘 바를 모르겠구려. 지금부터는 호형호제하기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도균이 그래도 그럴 수 없다고 우기므로, 조심원은 잠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통성명과 상견례를 나눈 뒤, 기등은 그들을 관 안으로 안내하여 앉게 하였다. 자리에 앉은 후 서 로 헤어진 후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도균은 허월이 이미 <협승> 질범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기등이 말했다. "그 능노선배는 정말로 검선 중에서도 괴걸입니다. 그의 재능으로 말하자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직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답니다. 일전에 사부님 말씀을 들으니 그가 근래에 천상 (天象)과 인사(人事)를 깨달아 얼마 안 있어 귀진(歸眞) 하게 되었으므로 한두 명의 전인을 물색 하려고 한답니다. 두 번째 산을 나온 것은 틀림없이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에 그와 백 사백이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지금 화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위도 우께 세 분과 같이 청라산으로 가라고 명령했다면 틀림없이 이 일에 참여하실 것입니다. <팔마> 가 설혹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분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조도우께서 이번에 가시는 일은 모두가 잘 해결될 것입니다." 조심원은 기, 도 두 사람에게 주매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도균이 말했다. "사부님은 행방이 일정하지 않으시고 거의 관내에 계시지 않습니다." 네 사람은 주매가 관내에 없다는 말을 듣고 인연이 닿지 않는다고 느꼈다. 기등이 갑자기 도균에게 웃으며 말했다. "사제는 사부님께서 조도우를 도와주시길 바라고 있구만?" "바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전에 실행(失行)한 적이 있었다네. 지금 비록 행실을 바로 하긴 하였지만 사부님은 여전 히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내가 보기에 사부님께서 자네를 무척 좋아하시니, 자네가 조 도우와 함께 간다면 자네는 아직 <사천팔마>의 상대가 안 되므로 사부님께서 어찌 가만 있으시 겠나?" 도균은 나이도 젊은 데다가 막 비검을 배우고도 사용을 해보지 못했고, 또 심원은 스승 겸 친한 사이인지라 가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다만 자기는 아직 <사천팔마>의 상대가 못 되 고 또 스승의 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경솔하게 가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기등의 말을 듣자 마음이 동했다.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합니다. 하지만 첫째는 사부님의 명이 없었고, 둘째는 비검을 사용할 줄 은 알지만 신검합일을 할 줄 모르고 또 길이 멀어서 오히려 조사부님의 대사를 그르칠까 염려되 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네에게 가라고 했으니 당연히 이 문제의 책임은 내가 져야 하지 않겠나? 자네가 세 분 을 따라가도록 보내줄 뿐 아니라 이 위도우도 같이 따라가도록 보내주겠네. 다행히 시기가 아직 이르니 여러분께서는 여기에 며칠 머무르십시오. 때가 되면 저는 비록 이곳을 떠나가서 도울 수 가 없지만, 제 사제는 딸려 보내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조심원은 도균과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고, 또 그가 주매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뻤다. 그러나 자기가 당초 스승의 말을 듣지 않고 쥐꼬리만큼 배운 실력으로 경솔히 하산 을 하여 스승의 노여움을 샀던 경험 때문에 별로 도균을 데리고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 서 기등이 이렇게 말하자 시기가 아직은 이르니 며칠 이곳에서 회포를 풀며 상황을 보고서 결정 하자고 했다. 황, 위 두 사람은 조심원이 청한 사람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철사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숭산이로>나, <협승> 질범, 그리고 조심원, 기등 등 모두가 이전에 혹은 최근에 사귄 친구들이었다. 그의 검술은 처음에는 종남파(終南派)의 낙중(樂衆)에게 전수를 받았으나, 낙중이 도를 이룬 후에는 종남파를 떠나 스스로 일파를 이루었다. 기등과 조심원은 그 가 스승의 친구라 모두 후배의 예를 고집했으나, 그는 오히려 그런 행세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철사도인은 이번에 심원을 따라 사천을 거처 서장으로 오는 김에 두 친구를 찾아가 보려고 했었 다. 그런데 조심원 등이 잠시 청성산에 머물려는 것을 보고는, 단오절 전에 청라산으로 가겠다고 하면서 잠시 그들과 헤어지겠다고 하였다. 기등은 만류할 수 없어 정중하게 전송해 주었다. 철사도인이 떠난 후 조심원 등은 청성에 머물러 있었다. 사도평의 고민 幾番狹路 苦孩兒解圍文筆峯 一片機心 許飛娘傳信五雲步 청라산의 <사천팔마>는 그들의 스승인 <신수비구> 위풍랑이 성도에서 묘일부인에게 살해된 후 아미파가 정말 무섭다는 것을 알고는 상당히 위축되었다. 그런데 <신수청조(神手靑鳥)> 서악(徐 岳)이 돌아와서 작년 강서에서 <팔마>의 원수인 조심원을 찾았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팔마> 구령(邱鈴)은 사천에서 일침을 맞은 원한이 생각났다. 그 조심원이 단오절 오전에 이곳 으로 오겠다고 약속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었다. 이때는 <삼마> 전청선(錢靑選) 과 <육 마> 여후가 사천, 호남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구령은 즉시 서악에게 그 두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시켰다. 서악은 명령을 받고 호남성 일대로 갔다가, 우연히 이전에 청라산에서 청강검으로 <사마> 이홍 앵(伊紅櫻)의 네 손가락을 자르고 진운추를 써 <육마> 여후와 <칠마> 오인룡(伍人龍)을 상하게 한 <채약도인> 황현극을 보았던 것이다. <삼마>와 <육마>는 이 말을 듣고 즉시 서악을 보내 황현극을 감시하라고 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도 서악이 돌아오지 않자 두 사람은 악록(嶽麓)으로 원수를 찿아갔다가 그곳에서 <추운수> 를 만나 법술을 금지당하고는 한참 동안 얻어맞았다. 원수를 찾지도 못하고 또 비검법술이 부서졌으니 얼마나 성도 나고 원망스러웠겠는가. 그러나 장사에 <추운수>가 있는 이상 발디딜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객점에 있는 짐도 챙기지 않고 풀이 죽은 채 둔법으로 밤을 새워 청라로 줄행랑을 친 것이다. <팔마>들은 모두 이를 갈았다. <추운수>가 나타나 황현극을 도와준 것을 알고는, 조심원도 결 코 혼자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니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미리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계획을 의논하고 있을 때 마침 유덕(愈德)이 청라산을 지나가게 되었다. 유덕은 성도에서 참패를 당하고 독룡존자가 준 홍사도 잃어버린 채 벽사촌에서 도망나와 서장으로 돌아가서 스승 에게 복수를 부탁할 참이었다. 그런데 청라산을 지나가다 <사천팔마>와 만나 오해가 생겨 싸우 게 된 것이다. <사천팔마>는 유덕보다 뒤에 나타난 마교들로서 무공은 높았지만 각파의 유명한 검선들을 알지 못했다. 검술로 말하면 <팔마>는 원래 유덕의 적수가 안 되었다. 그러나 인원이 많은 데다 또 <번승> 부르잉가(布魯音加)가 합세하고 보니 유덕은 그들의 포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무심결에 스승의 기표를 꺼내들었다. 팔마는 독룡존자의 위명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또 자기네 스승 위풍랑과 독룡존자의 연원 (淵源)을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손을 멈추고는 유덕에게 사죄하였다. 그리고는 유덕을 마궁(魔宮) 으로 데리고 가서 독룡존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한쪽은 능력이 모자랐고, 한쪽은 또 정파와 원한이 있는 터라 그들은 즉시 의기투합하여 친해졌 다. 유덕은 그곳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 서장으로 돌아가 스승에게 울면서 모든 것을 말했다. 그 는 본래 독룡존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독룡존자는 근래에 도술이 많이 진보되었고, 또 몇 가지 법보를 만들었다. 진작부터 중토의 제자 들을 좀더 받아들여 문호를 광대시키고 세력을 넓히려고 하는 참인데 인원도 많고 세력도 있으며 청라산에 기반을 잡고 있는 <팔마>가 스스로 자기 문하로 들어온다고 하니, 장래에 파달납궁(巴 達拉宮)을 탈취할 때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즉각 위풍랑과의 연원을 생각하 고 <팔마>의 요구를 수락하여 제자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팔마는 독룡존자의 문하에 들어간 후 위세가 커저 더욱 악한 짓을 하기 시작하였다. <대마> 황 수(黃繡)는 반나가잉과 카잉사푸에게 명령하여 밤낮으로 경계를 펴서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신 속히 보고하게 했다. 또 <신수청조> 서악이 실종되었기 때문에 반나카잉에게 능력있는 제자 두 명을 달라고 하여 서 악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매번 출장을 보내면서도 여비조차 주지 않고 알아서 도둑질을 하 여 경비를 충당하라고 명령하였다. 두 번승은 한이 뼛속까지 맺혔으나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팔마가 계획을 꾸미고 있을 때, 유덕이 다른 쪽에서부터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즉 단오절 날 찾아올 조심원이 아미파의 많은 고수들을 대동하리라는 것이었다. 팔마는 이 말을 듣자, 비록 독룡존자가 그들을 보호한다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해졌다. 유덕은 유덕대로 한번 당한 적이 있는지라 겁도 났고, 또 지난번의 원한이 되살아나 곧 독룡존 자에게 호소하였다. 독룡존자는 크게 노하였다. "아미파가 해도 너무하는구나. 처음에는 우담노니와 화기를 상하기 싫어 내 제자가 욕을 당하고 또 진산의 법보가 망가졌어도 양보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까지도 업신여기려고 하다니. 나와 <숭산이로>, <동해삼선> 그리고 저들의 교주인 제수명은 모두가 삼차 아미투검을 대비하여 굴 안에서 심혈을 기울여 법보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오는 것들은 틀림없이 그들 문하의 조무라기들뿐일 것이다. 뭐 겁날 것이 있느냐?" "말씀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번에 성도 자운사에서도 다만 <동해삼선> 중의 한 사람인 고행두타(苦行頭陀)와 <숭산이로> 이렇게 세 사람이 왔고 나머지는 무명의 조무라기들이 었습니다만, 녹포노조(綠袍老祖)나 효월선사(曉月禪師)와 같이 대단한 사람과, 또 오 대 화산문하 의 허다한 명검선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패했습니다. 모두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겨우 도망한 사람들도 모두 비검이나 법보를 잃었습니다. 아미파의 늙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젖비린내나는 어린애들도 모두가 대단합니다. 저희는 절대로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네가 사정을 알 수가 없지! 당초에 내가 성도로 가지 않은 것은 우담노니의 존재가 대단한 데 다 그때는 아직 내 법보가 연성되지 않아서 잠시 참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법보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마진(魔陣)을 구상해 놓은 게야. 그 따위 젖비린내나는 아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교주 제수명이 온다 해도 나의 적수가 못된다. 올 수는 있어도 마음대로 갈 수는 없을 것이라, 이 말이야." 유덕은 스승의 도법이 신묘하고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팔마>들과 함께 청라산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상의를 하였다. 전에 목숨을 걸고 오대파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오대파와는 사이가 좋은지라, 황산 오운보로 가 서 허비랑(許飛娘)에게 사람이 필요하니 도와달라고 청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가는 길 에 만날지도 모를 몇 명의 고수를 더 청할 수만 있다면 위세가 더해질 것이 아니겠는가. 유덕은 곧 달려가서 자기 생각을 독룡존자에게 아뢰었다. 독룡존자는 원래 자신의 법술이 고강함을 믿고 있었고, 또 허비랑이 당분간은 나서지 않을 것이 며 나머지 사람들은 별 도움이 안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덕이 애절하게 간청하고, 또 오랫동 안 허비랑의 얼굴을 못 보았는지라 만나보고 싶기도 해서 승락을 하였다. 유덕에게 말했다. "허비랑과 열화조사 이외에, 만약 정말로 실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도움을 청하고 나머지 별 볼일이 없는 자들은 함부로 청하지 말거라. 괜히 데리고 오면 도리어 우리 체면만 손상된다." 유덕은 스승 독룡존자가 머지않아 해결할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럴 경우 자기가 스 승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팔마>를 받아들여 세력이 커지기는 했지만 자기는 입문한 지 가장 오래 되었고 또 사형뻘이 니, 스승을 제외하면 당연히 자기가 우두머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홍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팔마>와 처음 만났을 때는 하마터면 그들에게 잡힐 뻔했었다. 이런 판인데 만일 스승이 해탈하 게 되면 자기가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못내 걱정스러워진 유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이파 검선들을 찾을 수 있는 대로 다 참여시켜, 안으로는 자기의 세력이 크고 사람이 많음을 과시하고, 밖으로는 <팔마>를 빌 어 외관(外觀)을 훌륭하게 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독룡존자가 많은 사람을 청하지 말라고 한 말을 듣고 마음이 흡족하지 못했다. 그는 <팔마>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단지 스승이 승락했다고 말했다. 유덕은 편지를 써서 <이마> 설평(薛萍), <사파> 이홍앵 <오마> 공손무(公孫武), <칠마> 오인룡을 보내어 이파 중에 서 친한 친구들을 초청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허비랑을 청하기 위하여 직접 황산으로 갔다. 이것이 삼월 중순의 일이었다. 유덕이 황산에 거의 다 왔을 때, 대가장에서 패하여 도망온 <삼 안홍예> 설망과 <구미선호> 유연랑이 낭패한 모습으로 길옆 숲 속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유덕을 보자 그가 질투할 것이 두려워 깜짝 놀랬다. 유덕은 유연랑이 보통 음탕한 계집이 아니어서 여러 사람과 정을 통했을 뿐 아니라, 지금 설망 과 같이 있는 것만 보아도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복수가 더 급하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고, 도리어 좋은 말로 두 사람에게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고 물었다. 원래 사도평과 왕삼을 속여 내려가 사람을 구하라고 하고는 왕삼이 돌아와 질투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급히 도망친 설망과 유연랑은 도둑질을 해가며 며칠 동안 음락을 즐겼다. 그런데 설망이란 위인은 생김새가 엉망일 뿐 아니라 또 한쪽 눈마저 애꾸였다. 그런 그에게 유 연랑이 따라붙은 것은 갈 곳이 없기도 하거니와 또 그의 스승이 재주가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 만묘선고>의 문하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설망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승락하였다. 그리고는 스승에게 가면 아무래도 밀회가 곤란하다며, 검광을 거두고 걸어서 가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밤이 되면 객점을 찾아 음락 을 즐기느라고 하루에 고작 백 리 정도밖에 가지 못했던 것이다. 유연랑은 하루바삐 만묘선고를 만나고 싶어 날마다 재촉하였다. 그러나 설망은 스승이 자기의 승락도 받지 않고 이런 음녀를 계집으로 받아들인 데 대해 틀림없이 책망할 줄 알았지만 그렇다 고 차버리기도 아까웠다. 그럭저럭 가까스로 황산 근처까지 다다르자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말로 유연랑을 타일렀다. 스승은 매우 엄하기 때문에 지금 같이 가서 만날 수는 없으니, 몇 달만 기다 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기회를 보아 스승에게 잘 말씀드려 데려가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연랑은 성이 정수리까지 뻗쳤다. 자기 실력이 설망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사 실을 인정하지만 않는다면 벌써 비검을 날려 죽이려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는 그에게 한바탕 욕 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깨끗이 그와 헤어지려고 하였다. 설망도 성이 났다. 그녀를 아끼던 마음이 사라지자 비검을 방출하려고 하였다. 유연랑은 그를 이 길 수 없기 때문에 겉으로는 말을 듣는 척하다 설망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을 할 작정이었다. 어 쨌든 설망은 유연랑이 성질을 누그러뜨리자 자기도 고자누룩해지고 말았다. 유덕이 나타난 것은 설망과 유연랑이 그처럼 찌뿌둥한 분위기로 스승에게 허락을 받을 궁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유연랑은 유덕을 보자 그의 재주가 설망을 능가할 것 같아 그와 설망이 싸우게 만들려고 하였 다. 그러나 유덕은 벌써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리고는 그녀에게 건성으로 한두 마디 말을 한 후 오히려 설망에게 은근히 수작을 걸었다. 설망은 유덕이 자기와 사통한 유연랑의 옛 애인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덕의 적수가 되 지 못하므로 적당히 얼버무려서 이 곤란한 국면을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덕은 거 친 성격과는 달리 그녀한테 친밀하게 하지 않는가.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곧 그가 온 이유 를 물어보고서야 자기에게 부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설망으로선 산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던 차에 유덕이 동행하자고 자청하니 두루두루 좋은 일이었 다. 유연랑을 데리고 황산 오운보로 가서 <만묘선고>를 만나서는 유덕을 따라온 여자라고 거짓 말을 하고, 제자로 받아들이라고 권할 참이었다. 세 사람은 곧 검광을 타고 황산으로 출발하였다. 문필봉까지 날아간 후 유덕이 정중을 기해야 한다고 하여 땅에 내려서 세 사람은 도보로 올라가 기 시작했다. 돌연히 길 옆 소나무 숲 속에서 젊은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좋은 날씨를 우리들만 남아 감상하고 문사매가 없으니 애석하군." 한 여인이 말하자, 다른쪽이 받았다. "무슨 소리야!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문사매는 기초가 단단한데다 육지를 먹었고, <숭산이로> 인 주사백님을 사부로 모셨을 뿐 아니라 지금은 또 아미파 교주님의 따님인 제영운(齊靈雲) 언니 와 아미산 응벽애에서 수련을 하고 있으니 전도가 무궁하다고 하셨어. 우리가 무얼 가지고 그녀 와 견줄 수 있겠니?" "넌 부끄럽지도 않니? 언니가 되어가지고 문사매가 잘되는 것을 보고 샘을 내다니?" "누가 샘을 냈어? 나는 기뻐하는 거야! 각 사람 모두가 자기의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 걸. 응벽 애에 사는 이영경(李英瓊)을 보더라도 알 수 있어. 처음에는 기초가 단단한 어린 계집아이에 불과 했지. 그런데도 먼저 뜻밖에 백미화상의 금안신조를 얻었고, 후에 또 사조 장미진인의 자영검을 얻었지 뭐야. 그 후에 또 우연히 좋은 선과와 선약을 먹게 되어 몇십 년의 고된 수련과 맞먹는 결과를 얻게 되었거든. 어느 선인도 그녀처럼 이렇게 빨리 득도하지 못했어. 지금은 어린 나이에 입문한 지도 얼마 되지 않는데 이미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잖아? 선배 검선들도 혀를 차며 그녀가 아미파의 영광을 쟁취할 것이라고 칭찬한다는데 뭐." 두 젊은 여인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점점 더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설망은 이미 그녀들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녀들에게 자기가 혼이 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곧 유덕과 유연랑을 잡아당기면서 빨리 가자고 했다. 그러나 유덕은 영문을 몰라 더 들어 보려고 하였다. 세 사람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숲 속에서 말소리가 멈췄다. 잠시 후에 돌연 큰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운사의 잔당들이 죽으려고 또 왔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여인이 나타났다. 곧 팔을 흔드니 두 줄기 검광이 동시에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세 사람은 이 두 여인이 전에 성도에서 싸운 적이 있는 주경운과 오문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유덕이 성이 나서 욕을 퍼부었다. "대담한 계집년들! 저번에는 고행두타가 네년들을 구해 주었지만 오늘은 어림없다. 제 분수도 모 르는 년들 같으니!" 그는 욕을 하면서 검광을 내뻗었다. 주경운과 오문기는 옥청대사를 따른 지 벌써 여러 달이었는데, 이번에 인사차 성도에서 산으로 돌아와 스승은 뵈었던 것이다. 찬하대사는 그녀들이 근골이 두텁고 다른 길로 빠지지 않은 것을 알자 흡족하여 전력을 다하여 전수를 해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도행이 더욱 정진하여 이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설망과 유연랑은 두 번이나 혼이 난 적이 있으므로 겁이 났지만 유덕이 이미 앞으로 나가 싸우 는 것을 보자 도망갈 수도 없어서 이를 악물고 함께 싸우는 도리밖에 없었다. 비록 셋이 둘을 상 대하였지만 유덕만 그럭저럭 버티고 있을 뿐 설망과 유연랑 두 사람은 모두 겁을 먹고 있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각자의 비검이 공중에 서로 얽혀 있을 때 갑자기 공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사제를 해칠 생각을 말아라!" 동시에 한 줄기 검광이 날아 내려왔다. 바로 <고해아> 사도평이었다. 주경운과 오문기는 사도평 이 온 것을 보자 서로 눈짓을 하고는 별안간 검광을 거두어 공중을 뚫고 달아나 버렸다. 사도평은 근래에 열심히 노력 정진하여 비검이 상당히 향상되었으나, 유덕 등 세 사람은 그 안 의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적이 자기편에 응원군이 온 것을 보고 두려워서 도망간 줄로 여 기고 쫓아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설망은 그녀들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말렸다. "방금 그 두 계집은 모두 황산 찬하대사의 제자로 매우 괘씸한 년들이지요. 하지만 두 봉우리만 가면 그 계집년들의 사부 찬하대사가 있는 곳입니다. 찬하대사는 우리 사부님조차 두려워하는 처 지니 쫓아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사도평은 <만묘선고> 허비랑의 명을 받들어 그들을 도우러 왔던 것이다. 세 사람과 인사를 나 눈 사도평은 유연랑의 그 음탕한 모습을 보자 매우 불쾌하였지만, 스승의 명령이 있는지라 내색 할 수가 없었다. 사도평은 그들을 데리고 오운보로 가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세 사람이 찬하대사의 제자들과 싸우는 동안에 운남으로 떠났다고 말해 주었다. 원래 허비랑은 황산 오운보에서 몇 개의 법보 비검을 만들었다. 제삼차 아미투검 때는 아미파와 정식으로 안면을 바꾸고 오대파를 다시 일으켜 세워 각파의 우두머리가 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 다. 그녀가 와신상담하고 있는 동안 그녀의 옛 동문들이 아미파를 이기지 못해 누차 그녀를 끌어 내어 아미파와의 싸움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허비랑은 일시의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암암리에 많은 검선을 자운사로 초청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 설망을 성도로 보내 직접 참여시키는 정도에서 자제했다. 결과적으로 효월선사 등 많은 이파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을 뿐 아니라 우연히 만난 찬하대사로부터 몇 번 비꼬는 듯한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 허비랑은 침착하고 속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이 몇 번 동안 고심하였지만 자기가 찬하대사의 상 대가 될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모험을 하길 원하지 않았다. 비록 마음 속으로는 성이 났지만 조금 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저 자기는 비검전서로 법원 등을 초청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설망도 자 기의 제자지만 성도로 가라고 시킨 적이 없는데 자기를 속였다고 하면서, 그가 돌아오면 문책하 겠다는 등의 변명만 놀어놓았을 뿐이었다. 찬하대사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지 어떤지를 확실히는 몰랐고, 또 그녀의 재주가 고강하며 기 운(氣運)이 다하지 않은 줄 아는지라, 만일 싸우더라도 기껏해야 그녀를 잠시 황산에서 쫓아내는 효과밖에 거둘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그녀가 가까운 곳에 있게 그대로 두어 약간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도 괜찮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평은 마음이 이미 정파로 돌아섰기 때문에 몇 차례 자기 스승 몰래 중요한 소식을 찬하대사에게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주경운과 오문기는 대사의 지시를 따라 사도평을 만나 면 은근히 양보를 해주었던 것이다. 허비랑도 사도평이 자기를 배신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성이 음탕하고 교활한 그녀는 사실을 들추어 그를 죽이기는커녕 도리어 더 잘해 주었다. 자기의 비밀 을 제자가 알지 못하게 하고, 그의 입을 통해 거짓 정보를 흘려 보내게 하여 적에게 혼란을 야기 시켰다. 그러다가 정식으로 아미파와 싸우게 될 때에는 사도평을 죽일 작정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평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는 다만 허비랑이 정식으로 아미파와 적이 될 때를 기다려 사를 버 리고 정으로 돌아가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허비랑은 마침 황산 꼭대기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가 제자인 설망이 유연랑과 유덕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았다. 유덕이 또 자기를 귀찮게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기로선 법보를 다 완성하기 전에는 참 가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삼선이로> 등 아미파의 몇몇 늙은이들은 지금 모두 법보를 만드느라고 바빠 청라산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조무라기들은 비록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근기(根基)가 단단하다고 들었다. 장래에 이파의 우환덩어리가 될는지도 모른다. 몰래 가서 암암리에 몇 명을 제거하여 분 을 약간 푸는 것은 어떨까? 또 오랫동안 독룡존자와 헤어져 있었는데 만나서 회포도 풀고 싶구 나. 그렇지만 공공연히 갈 수는 없겠지.' 이렇게 생각한 후에 그녀는 급히 동굴로 돌아와 사도평을 등지고 편지를 한 장 섰다. 조금 있다 가 떠난 후에 비검전서로 설망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사도평에게 짐짓 말했다. "나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공기를 간파하고 있지만, 오직 한마음으로 수양만 할 뿐 다른 파의 분쟁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구나. 당초 너의 사제를 성도 싸움에 보내지 않았어야 하는데, 나는 단 지 그 애에게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려고 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 애가 한쪽 눈을 잃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또 괜히 찬하대사의 의심을 산 결과가 되었구나. 다행히 나는 단지 두문불출 수양만 하고 쓸데없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그들도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내 진심을 알 날이 있겠지. 나는 이제 다시는 아미파의 원한을 사지 않겠다. 그런데도 이전의 동 문들이 나의 고충도 모르고 여전히 나를 아미파와의 싸움에 끌어들이려 하는구나. 가게 되면 원 수가 갈수록 많아지고, 안 가면 그들은 또 내가 배은망덕한 사람이며 아미파를 무서워한다고 비 난할 터이니 정말 곤란한 입장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방금 점을 쳐보니 네 사제 설망이 서장 독룡존자의 대제자 <온신묘방> 유덕을 데리고 오는구나. 또 네 사제의 처인 유연랑도 나를 만나러 오고 있으며 아마도 또 무슨 부탁을 하려는 모양이다. 내 생각에 역시 그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마침 운남으로 홍발노조을 만 나러 가려던 참이었으니, 지금 즉시 떠나겠다. 너는 그들을 만나 동굴로 데리고 온 후에, 내가 그 들이 오는 것을 모르고 방금 운남으로 떠났다고 하거라. 유덕이 가면 네 사제 부부를 우선 뒤쪽 동굴에 살도록 해주어라. 내가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하자." 사도평은 명령을 받은 후 스승을 전송하러 굴을 나왔다. 마침 문필봉 아래에서 몇 가닥 검광이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허비랑은 자기가 직접 나서기가 곤란할 뿐 아니라 오문기나 주경운이 사도평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평에게 가서 도와주라고 명령하였다. 그 런 다음 사도평이 가서 그녀들을 쫓아버리는 것을 본 후에야 운남으로 떠났는데, 오문기와 주경 운이 사도평을 보자 즉시 달아나는 것을 보고는 더욱 사도평에 대한 의심을 굳히면서 이를 갈았 던 것이다. 유덕은 허비랑이 굴에 없을 뿐 아니라, 홍발노조를 만나러 운남으로 갔다는 말을 듣자, 운남에도 자기 친구들이 있고 하여 그녀를 뒤쫓아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허비랑을 만나면 더욱 좋고 못 만나도 운남에 가서 몇 명의 묘강(苗疆) 고수를 청할 수 있을 것이었다. 사도평을 상대로 수작할 빌미도 이유도 없으므로, 그는 즉시 가겠다는 한 마디를 남긴 다음 공중을 뚫고 날아갔다. 유연랑은 원래 진심으로 설망의 계집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만묘선고>가 없는 것을 보자 유덕을 따라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유덕은 복수가 급했고, 또 허비랑 문하와 원 한을 맺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훌쩍 떠나가 버렸다. 유연랑은 속으로 매 우 불쾌하였다. 돌연 사도평이 설망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께서 떠나실 때 말씀하셨다. 너희 부부는 뒷동굴에 거주하되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고 하 시더구나. 사부님께서 돌아오신 후 다시 말씀이 계실 것이다." 설망은 매우 기뻤다. 유연랑은 이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었다. '혼자서 돌아다니면 여러 사람과 즐길 수는 있지만, 대부분이 저녁에 만나 아침에 헤어지는 풋정 에 불과하다. 설망은 비록 못생겼지만 정력이 왕성하고, 또 가까스로 사부의 허락을 받았으니 우 선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좋겠군. 나중에 <만묘선고>에게 도법을 배우게 되면 남에게 당하는 일 이 적어지겠지. 더우기 <만묘선고>의 그 주안환소법(駐顔還少法)을 배울 수 있으면 더욱 좋지 않 은가!' 한편으로는 사도평이 잘 생기고 도행도 설망보다 강한 듯한 것을 보자 저절로 사념이 일어났다.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많아 설망과 부부가 된 척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만묘선고가 얼마나 계산이 빠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허비랑은 방금 숲 속에 서 그녀의 언행을 훔쳐보고 이 여자가 보통 음탕한 것이 아니어서 설망이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절 대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설망이 그녀를 좋아할 뿐 아니라 또 나중에 이 음녀는 자기의 대용품으로써 쓸모가 많다 고 생각하였다. 오대파는 본래 여색(女色)을 금하지 않으니 잠시 사랑하는 제자가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가 써 먹어야 할 때가 되면 써먹는 것이다 설망이든 연랑이든 이런 허비랑의 속셈을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기뻐하며 뒷동굴로 돌 아갔다. 가보니 모든 집기와 치장이 갖추어져 있는지라, 두 사람은 더욱 흡족해 하였다. 사도평은 이 개 같은 연놈이 서로 껴안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 눈에 거슬렸지만 어쩔 도리가 없 어서 한쪽에서 한숨만 쉴 뿐이었다. 설망은 사도평이 피하는 것을 보고 그가 못마땅해 한다는 것 을 알았지만 스승의 동의를 얻었기 때문에 꺼릴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연랑을 데리고 동굴을 나가 나란히 앉아서 희희닥거리고 있었다. 한창 재미있게 노는데, 돌연 앞에서 한 줄기 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연랑이 깜짝 놀라자, 설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빛을 손으로 받았다. 일순간에 그 빛은 온 길로 되돌아가 버려 보 이지 않았다. 연랑은 설망의 손에 한 통의 편지가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설망은 대답을 하지 않고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사방을 둘러보았다. 급히 연랑을 끌고 오운보 암석 뒤쪽 숲 속으로 갔다. 바위를 찾아 연랑과 함께 앉으며 말했다. "이것은 사부님의 비검전서요. 천 리를 떨어져 있어도 서신을 비검 위에 꿰어 보내면, 어디 있는 누구에게든지 정확히 도달되며, 다른 사람이 절대로 막거나 빼앗을 수 없지. 방금 사사형이 말하 길, 사부님이 우리가 오기 직전에 운남으로 가셨고 우리의 결합을 허락하셨다고 했소. 나는 사부 님께서 우리의 일과 유덕이 부탁하러 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어. 지금 또 나에게 비검전서를 보내셨으니 필히 사사형이 모르는 비밀 훈시가 있을 것이오. 원래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줄 수 없으나, 당신은 내 아내고, 또 사부님께서 편지를 보내는 상황을 보아 당신이 봐도 괜 찮겠지 뭐. 그러나 사사형에게는 절대로 말하면 안 되오. 비록 모두 같은 사부의 제자지만, 사부 님은 그를 좋아하지 않거든. 그런데도 그는 약삭빠른 데다 열심히 수련할 뿐 아니라, 또 온 지가 오래 되었고, 이전부터 찬하노니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검술이 나보다 강해. 사부님이 그를 미워하 는 것도 그가 외인에게 가르침을 구했기 때문이오. 그가 우리를 배신할까 봐 중요한 기밀은 그에 게 말하지 않지. 당신도 앞으로 그를 조심해요." 그리고는 편지를 펴서 유연랑과 같이 보았다. <너는 사부 몰래 유연랑을 아내로 맞았으니 본래는 징벌을 받아 마땅하리라. 하지만 이번에 부 상을 당하였으니 잠시 죄를 면해 주겠노라. 방금 숲 속에서 유연랑을 보니 매우 총명하고 검술도 기초가 잡혔구나. 다만 의지가 굳지 못한 것이 흠이다. 지금 너의 아내가 되었으니 마땅히 열심히 노력하여 도에 정진해야 하며 두 마음을 먹지 않아야 한다. 내가 돌아오면 다시 도법을 전수해 주겠다. 만약 중도에서 교(敎)와 너를 배신하면 어느 곳으로 도망가던지 비검이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유덕이 온 이유를 알고 있다. 네 사형이 교를 배반하고 적과 내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은 쓸모가 있어서 죽이지 않고 있다. 너는 항상 조심하되, 내색하지 않아서 그가 눈 치채지 못하도록 하라. 무슨 동정이 있어도 내가 돌아와서 처치할 것이니라. 그는 이미 아미의 진 전을 얻어 검술이 크게 진보하여 너희들은 상대가 되지 않으며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나는 독룡존자의 청을 받고 서장으로 갔다가 청라산으로 가 암암리에 <팔마>를 도와주려고 한 다. 네 사형이 진상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운남으로 간다고 했노라. 네가 모르기 때문에 특 별히 비검으로 알리는 바이다.> 설망은 다 본 후에 연랑에게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소? 사부님께서도 당신의 의지가 굳지 못하다고 나더러 당신을 격려하여 함께 열심히 도를 배우라고 하시잖아. 그렇지 않고 다른 마음을 먹고 도망한다면, 사부님께서는 틀림없 이 비검으로 당신을 죽일 거야!" 유연랑은 잠시 설망에게 몸을 맡겨 <만묘선고>에게서 주안환소법과 비검의 오묘함을 배울 생각 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설망의 진짜 계집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뿐 아니 라, 후에도 설망을 차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붙을 수도 없게 되지 않았는가! <만묘선고>의 고강한 실력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지라, 결과적으로 자기가 오히려 걸려든 셈 이었다. 방금 사도평을 유혹해 보겠다는 마음마저 쑥 들어가야 하니 매우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있다가 기회를 볼 수밖에 없었다. 설망은 연랑이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자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이 경고하시니 듣기 싫은가 보군. 당신은 정말로 멍청해. 사부님은 지금까지 쉽게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소. 여제자라고는 오직 염홍약(廉紅藥) 한 명만 받으셨지. 당초 사부님은 삼사 년이 지나 그녀가 도법을 좀 배우게 되면 내 아내로 주겠다고 했거든. 나는 그녀가 매우 아름다 운 것을 보고 속으로 매우 좋아했소. 그러나 그녀는 평소에 나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부님과 한 방에 기거하니 가까이 할 기회가 있어야지. 얼마 동안을 지냈어도 그녀는 여 전히 냉담하지 뭐야. 그러다가 내가 명령을 받고 성도로 가기 한 달 전이었지. 홀연히 한 백발 노 파가 지팡이를 짚고 또 한 계집아이를 데리고 찾아왔더군. 그 노파는 우리 사부님이 계략을 써서 그녀의 전가족을 해치고 염홍약을 강제로 납치해 와서 제자를 삼았다고 억지를 부리지 뭐요. 사 부님은 자기가 구해 줬다고 하면서 계속 다투더군. 그 늙은 할멈과 계집아이는 말로 해결이 되지 않자 강제로 염홍약을 데리고 가려고 했지. 옥신각신하는 참에 먼저 그 계집아이가 염홍약을 안 고는 날아가 버렸어." 설망은 지난날의 일이 새삼스러운 듯 분개한 표정이 되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 사부님은 중간에 앉아 계셨는데, 매우 성이 났으나 꾹 참는 듯하였소. 나와 사도평은 옆에 서 있었는데, 사형은 가만 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 어린 계집애를 쫓아가서 염 홍약을 빼앗아 오려고 했지. 마침 늙은이가 사부님을 향해 손을 휘두를 때 나는 비검을 날릴 작 정으로 사부님 앞으로 뛰어나갔던 것이오. 한데 그 늙은이가 무슨 법보를 방출하였는지, 한 가닥 싸늘한 기운이 얼굴에 부딪치면서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리더군. '몇십 년 덕본 줄 알아라!' 말을 마치자 그 늙은이와 어린 계집은 염홍약을 데리고 사라졌소. 동굴 밖으로 쫓아나갔지만 흔적도 볼 수 없었지. 돌아와 사부를 보니 굉장히 화난 표정으로 '오늘 네 신세를 졌구나!'라는 한 마디 만 하시더군. 나는 사부님께 몇 번이나 여쭤보았지만, 도를 이루기 전에는 그들의 내력을 모르는 것이 좋다고 하셨었지. 이 일이 있은 후 사부님은 여제자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오늘 그 맹 세를 깨고 당신을 받아들였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기회라 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도리어 속상한 표정이오?" 연랑은 감히 자기가 후회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고 다시 설망 을 보니 비록 못생겼어도 자기에게 매우 정성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즉시 웃으면서 몇 마디 아양을 떨었다. 설망은 유연랑을 껴안고 얼굴을 살짝 깨물었다. 둘은 희희닥거리다가 더 이 상 참을 수 없어 꼭 껴안은 채 뒤쪽 동굴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그 바위 뒤쪽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긴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앉았던 그 바위에 올라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민을 하였다. 바 로 사도평이었다. 그는 스승이 떠난 후 설망과 유연랑의 뻔뻔스런 행동이 꼴보기 싫어 밖으로 나왔다. 암석 뒤편 숲으로 가서 복숭아나 한두 개 따먹을 생각이었다. 복숭아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설망과 유연랑 이 굴 밖으로 나와 허리를 껴안고 희희닥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혼자말로 푸념을 하였다. "재수 더럽군. 가는 곳마다 눈이 더러워지는군."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 순간 홀연 한 줄기 빛이 서남쪽에서부터 날아와 설망의 손에 떨어지는 것 이 보였다. 그는 생각하였다. '사부님이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또 비검으로 편지를 보낼까?' 무슨 일인지 알고는 싶었지만, 평소에 설망과 사이가 좋지 않아 물어보기가 거북했다. 그는 홀로 외롭게 입산하여 도를 배우기 위해 스승을 찾다가 천신만고 끝에 들어온 거고 들어온 것이 하필이면 이파 문하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스승의 마음에 들었으나, 정파의 사람을 만나보고 는 정파가 광명정대하며 도법이나 검술이 이파보다 심오한 것을 보고 마음이 그쪽으로 쏠렸다. 스승이 이것을 알고는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감정이 나빠졌다. 게다가 스승이 설망을 총애하여 설망의 허튼소리를 귀담아 듣고 자기에게 도법을 전수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뭐든지 자기에게 는 숨기는 것이다. 사실 그는 대가장에서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우연히 찬하대사를 만났는데 그때 그녀는 그를 불쌍 히 여겨 아미파의 검결을 약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수롭잖은 말을 주고받는 것 외에 스승의 비밀을 누설한 것은 없었다. 평소 스승이 이야기할 때 자기를 매우 경계하는 것을 보고, 기밀을 많이 아는 것이 도리어 방해가 된다고 여겨 고의로 자리를 피해 왔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복숭아를 두 개를 따 가지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설망과 연 랑이 하필이면 자기 있는 쪽으로 올 게 뭔가. 뒤쪽에는 물러날 길이 없었고, 검광을 타고 돌아간 다면 두 사람에게 목격당할 판이라, 할수없이 바위 뒤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은 그의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편지를 펴보며 이야기를 했고, 사도평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난 후에 과연 자기의 짐작이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 게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사부께서는 이미 내가 배신할 거라고 의심하고 있구나.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좋은 일이 없겠다. 그러나 만약 지금 사부를 배신하고 도망한다면 사부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파 선배들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부의 비검은 대단하여 언제라도 나를 죽일 수 있으니, 지금 몸 을 숨긴다 해도 앞으로 어떻게 계속 은신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떨리고 한편으로는 슬펐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였다. 문필봉 쪽에서 갑자기 한 줄기 검광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뒤이어 또 다른 한 줄기 검광이 따라 올라와 서로 싸우 기 시작하였다. 그 형상은 마치 두 마리의 용이 춤을 추는 듯하였다. 잠시 후 또 한 줄기의 검광이 솟아 올라와 두 줄기 검광을 차단하였다. 그러자 두 줄기 검광은 검광이 자기들을 떼어놓은 것에 불복하듯이 계속 다시 붙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검광에 막혀 어디를 가더라도, 어떤 기교를 써도 끝내는 한덩이가 되지 못했다. 얼마가 지나자 세 줄기 검광이 돌연 한 데 꼬여서 종횡으로 부딪치고 상하로 꿈틀거리는데, 마 치 번개가 어지럽게 치는 듯, 금사(金蛇)가 어지럽게 달아나는 듯하였다. 사도평은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문필봉 아래에 한 중년의 도고(道姑)와 두 젊은 여인이 위를 응시하고 서 있었다. 찬하대사가 오문기와 주경운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광경이었다. 사도평은 부러운 나머지 조금 전의 고민을 모두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한참 동안 춤을 추던 세 가닥 검광은 아래의 세 사람이 손을 공중으로 내뻗자마자 금빛이 앞서고 푸른빛과 하얀빛은 그 뒤를 따라서 유성이 달을 좇는 것처럼 세 사람에게로 날아가서는 순식간에 보이지 않았다. 비경의 두 선녀 無意失霜鐸 雪浪峯前驚怪鳥 有心求故劒 紫玲谷裡見仙姑 세 사람이 문필봉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야 사도평은 다시 걱정스러운 자기 문제로 돌아왔 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당분간 근신하여 혐의를 벗는 수밖에 없었다. 행 동을 조심하고 말을 삼가하여 제삼차 아미투검까지만 견디면 스승의 의심이 풀어질 것이다. 설망 과 유연랑이 뒷동굴에서 음락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들어가고 싶지 않아, 그는 혼자 굴 앞에 앉아 넋을 잃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료한 때에 마침 숲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금 있으니 한 쌍의 토끼가 뛰어나왔 다. 온몸이 옥과 같이 희고 잡털이 하나도 없으며 눈은 주사(朱沙)처럼 빨간 그 토끼들은 바위 아 래 풀밭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사도평은 나중에 설망이 발견하면 틀림없이 잡아다 구워먹을 것이라 생각했다. 측은한 마음에 이 한 쌍의 토끼를 멀리 쫓아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토끼들은 사도평이 다가와 쫓으려는 것을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사자처럼 서서 소리를 지르며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으로 할퀴려고 하였다. 사마귀가 수레에게 덤비는 꼴이었다. 사도평은 이 토끼들이 보통 토끼보다 두세 배 정도 크며 또 사람도 겁내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 하다고 여겼다.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자, 그중 한 마리가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뛰어오르 면서 사도평의 얼굴을 할퀴려고 하였다. 사도평은 토끼가 온순한 동물이라 이렇게 덤빌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으며, 잠시 가지고 놀다가 멀리 쫓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토끼들은 매우 민첩하여 도망가지도 않고 사도 평의 주위를 돌며 팔짝팔짝 뛰었다. 사도평은 토끼를 잡기는커녕 도리어 팔만 몇 번 할퀴우자 자신도 모르게 성이 나서 비검을 날려 서 토끼를 포위한 후에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토끼들은 비검의 위력을 아는지, 사도평이 비검 을 날리려고 하자 뒤돌아 달아나 버렸다. 사도평은 불현듯 동심이 일어나 이 토끼들을 꼭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검을 조종하 며 쫓아갔다. 원래 비검의 속도로 말하자면 어찌 그것들을 잡지 못하겠는가만, 사도평은 그것들을 해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거의 다 쫓아갔을 때, 토끼들은 덤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도평이 허리를 숙여 찾고 있는데, 그 토끼들은 어느 굴로 빠져나갔는지 벌써 저만치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도평이 쫓아가자 다시 머리를 홱 틀어 쏜살같이 달아났다. 토끼들의 신 출귀몰한 행동은 마치 일부러 사도평을 약올리는 것 같았다. 그처럼 줄곧 쫓다보니 산봉우리를 두 개나 넘었다. 사도평은 마침내 일단 검광을 거둔 다음 신검합일하여 앞으로 쫓아갔다. 그 한 쌍의 흰토끼는 사도평이 빠르게 쫓아오는 것을 보자 쏜살보다 더 빠르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도평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무지한 짐승 같으니! 내가 꼭 잡으려고 한다면 네놈들이 암만 빨리 달려도 무슨 소용이 있겠느 냐?' 순식간에 따라잡은 사도평이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할 때였다. 토끼 두 마리가 갑자기 옆으로 몸 을 홱 틀어 길 옆의 절벽으로 떨어져 버리지 않는가. 사도평은 깜짝 놀라 몸을 멈추고 아래를 내 려다보았다. 그곳은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었고, 아래는 구름안개가 가득하여 얼마나 깊은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두 마리 흰토끼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속였을 뿐 아까처럼 어느 굴 속으로 들어갔겠거니 했다. 그러 니 조금 있으면 어디선가 나타나겠지 싶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까 이 절벽 아래는 미끈한 바위로써 한 포기 풀도 없었고, 윗 부분이 툭 튀어나왔다가 그 밑은 비스듬히 안으로 경사가 져 서 어느 종류의 동물을 막론하고 딛고 설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 흰토끼들은 급하고 어쩔 수 없으니까 무작정 밑으로 몸을 날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깊은 곳으로 떨어졌으니 뼈다귀도 추리지 못했을 게 아닌가. 잠시 장난을 하려다가 두 생명을 해 치게 되었구나 싶어 매우 후회스러웠다.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중간에 매우 두꺼운 구름이 차 있어서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가 없어 내려가 볼 수조차 없었다. 사도평이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 홀연 공중에서 학 울음소리보다 더 맑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쳐들어보니 한 조각 검은 그림자가 두 개의 은은한 금빛을 끌면서 번개처럼 빠르게 자기에게로 날아왔다. 그 빠르기는 놀라울 정도여서 순식간에 그의 머리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다다랐다. 너무 급작스런 일이라 무슨 물체인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오직 상황이 좋지 않다는 생각만 들었 다. 미처 피할 사이도 없어, 그는 급히 비검을 발출하여 머리를 보호하였다. 거센 바람이 불면서 눈앞이 컴컴해지는 것을 느낀 순간, 크고 시커먼 그림자 덩어리 속에서 강 조(鋼爪)가 나타나 자기의 비검을 채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물체가 몰 고 온 바람은 매우 거셌다. 만약 사도평이 최근에 도력이 정진하지 않았다면 그 바람에 밀려 절 벽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사도평은 황망히 정신을 차려 절벽 아래를 굽어보았다. 한 줄기 금빛이 그 검은 그림자를 따라 함께 절벽 아래의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렴풋이 오색이 뒤섞인 깃털 같은 것으로 짐작 컨대 그 물체는 아마도 무슨 기괴한 큰 새인 것 같았는데, 위세가 매우 대단하였다. 요행히 그의 발톱에 죽지는 않았지만, 그대신 비검을 잃어버렀으니 어떻게 하는가. 다년간의 심 혈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무슨 얼굴로 스승을 만날지 암담했다. 더구나 스승은 지금 나를 의심하 고 있다. 조심하여 근신하여도 위험을 면할까말까 모르는데, 지금은 비검을 잃어버렸으니 어찌 죽 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생각할수록 후회와 괴로움이 더해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던 사도평의 머리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찬하대사가 여기 서 가까운 황산에 있으니 그녀에게 괴상한 새를 제거하고 비검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겠 는가 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찬하대사를 찾아가려고 하다가, 그 역시 좋지 못하다고 느꼈다. '내가 동굴을 떠난 지 오래 되었구나. 설망과 유연랑 두 사람은 내가 없는 것을 보면 뒤따라 와 서 감시하려고 할 게다. 게다가 사부님은 내가 찬하대사와 내통한다고 의심하고 계시다. 내가 지 금 찬하대사에게 부탁하는 것을 안다면 정말로 내통하고 있다고 단정할 것이 아닌가.'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여전히 살아날 길이 없었다. 난감한 사도평이 절벽 옆 작은 나무에 기대 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너는 나이도 적지 않은 놈이 해가 서산에 지려고 하는데 돌아가진 않고 왜 질질 짜고 있 느냐? 키만 멀쑥하게 커가지고는 원." 사도평이 고개를 돌려보니, 다 떨어진 옷을 입은 꾀죄죄한 노인이었다. 사도평은 성격이 온순하 고 착하며, 평소에 잘 참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지금같이 살고 싶지 않는 기분상태일 때, 이 노인 이 늙었다는 핑계로 자기를 정면으로 비웃는 것을 보자 그만 성이 불끈 났다. 그렇지만 이내 다 시 생각을 고쳤다. '나는 곧 죽을 몸인데, 이 노인에게 성을 내면 뭐 하겠는가?' "할아버지는 왜 사람을 비웃습니까? 여기는 매우 위험한 곳이에요. 밑에 요괴가 있어 조금 있으 면 할아버지를 잡아먹으러 올 테니 빨리 가십시오!" "뭐라구? 여기는 설랑봉(雪浪峯) 자령곡(紫玲谷)으로써,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오는데 요괴 같은 것은 그림자도 못 봤다. 네녀석이 여기서 울면 요괴가 나타나느냐? 보아하니 네가 진(秦)가 자매를 좋아하는 모양인데, 그 애들이 안개 구름으로 계곡을 막아버렸으니 나와서 도와달라고 우 는 거냐?" 사도평은 그 노인의 말하는 품이 정신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여기는 황산의 지맥(支脈)이지만 매우 높고 험준하다. 방금 토끼를 쫓을 때 몇 곳은 검술로 비 행하지 않았으면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어. 그런데도 이 노인이 자기는 하루에 몇 번씩 오른다고 말하니, 혹시 이인(異人)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 마침 그 노인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 빛이 마주치자 사도평은 그 노인이 외양은 신통치 않지만 번쩍이는 두 눈동자만은 그의 진면목을 감추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는 자기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즉시 앞으로 다가가 꿇 어앉으면서 말했다. "제자 사도평은 한 쌍의 흰토끼를 쫓다가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한 마리의 큰 괴조 가 날아와 제자의 비검을 채갔기 때문에 사부님께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노 선배님께서 제자를 도와 괴조를 제거하고 비검을 되찾아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노인은 사도평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전에부터 이야기했었지. 좋은 사람들인데 늘 마주치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 고? 나처럼 늙은 영감도 아직도 죽은 마누라를 그리워하는 걸. 내가 쓸데없는 참견을 해서 귀찮 다, 그 말이지?" 사도평은 그 노인이 정작 자기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횡설수설하 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계속 간청을 했다. 노인은 그가 끈덕지게 달라붙자 못 당하겠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이놈은 정말 멍청하군. 그 계집애가 내려갔는데, 너는 왜 따라내려가지 못해! 이 늙은 것한테 매달리면 어떡하겠단 말이냐? 내가 그 애 대신 너에게 시집이라도 가 주랴!" 사도평은 노인의 말 끝마디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요컨대 자기더러 절벽을 뛰어내 려 가라고 부추긴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즉시 대답했다. "제자는 아직 도행이 부족하여 항상 비검으로 몸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비검은 절벽 아래 사라진 괴조에게 빼앗겨 버리고, 밑은 구름 안개로 꽉 덮혀 얼마나 깊은지를 모르니 어떻게 내려가면 좋겠습니까?" "진가 자매의 장안법(障眼法)을 말하는 거냐? 멍청한 놈! 그들이 너하고 장난치는 것인데, 뭐가 겁날 것이 있어? 용기를 내어 뛰어내리기만 하면 너한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사도평을 끌고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사도평은 평소 마음 속에 고민이 많았을 뿐 아니라 더욱이 무단히 비검을 잃어버려 스승 <만묘 선고>의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또 도망갈 수도 없는 형편이라 이미 생사를 도외시하 였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면서 노인을 따라 절벽 끝으로 갔다. 밑을 내려다보니 구름이 더욱 두터워져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밑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할때, 그 노인이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켰다. 그러자 손가락이 향한 방향에 한 가닥 금빛이 구름을 뚫고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금빛이 닿은 곳에는 구름이 갈라져 일 장 정도 크기의 큰 구멍이 뚫리며 밑의 정경이 보였다. 사도평이 자세히 내려다보니 넓은 평지가 있었고, 절벽 위에서 거기까지는 백여 장 정도의 공간 이 있었다. 동쪽에는 맑은 물줄기가 절벽을 타고 떨어지는 폭포가 있었으며, 서쪽 끝은 양쪽 절벽 의 한 곳으로 합쳐져 중간이 마치 사람인(人) 자 모양의 동굴 입구를 형성하고 있었다. 굴 위에는 세 글자가 암벽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등나무 줄기와 꽃에 가려져 곡(谷)자 하나밖에 알아 볼 수 없었다. 계곡 입구에는 드믄드믄 이름 모를 꽃나무들이 서 있고, 그 밑은 푸른 풀밭이어서 여러 가지 꽃 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한 것이 무척 아름다왔다. 아까의 괴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그 흰토끼 한 쌍만 귀를 쫑긋 세우고 편안히 풀을 뜯어먹는 것이 보였다. 사도평은 그 노인더러 같이 내려가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려고 했으나, 그 노인은 어느 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급히 높은 곳으로 가서 사방을 살폈지만 노인은 그림자도 없었다. 할수없이 다시 절벽 끝으로 다가가 내려다보니 그 구름 구멍은 점점 오므라들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또 구름으로 막히게 되고, 그러면 내려가려고 해도 내려갈 수 없게 된다. 노인은 이미 가 버렸고, 자기는 구름을 다시 가를 수 있는 재주가 없다. 아래는 신선의 동굴이 아니면 요물이 기거하는 곳이 분명한데, 자기는 도행이 약하니 어찌 함부 로 내려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려가기를 포기한다 해서 돌아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나쁜 영감쟁이 같으니!' 사도평은 속으로 그 노인이 끝까지 도와주지 않음을 탓하였다. 사도평이 망설이고 있는 동안, 그 구름 구멍은 두 자 가량 넓이로 줄어들었다. 잠시 후면 아까와 같이 막혀버릴 것이다. 도무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죽으나 사나 일단 뛰어내려 가서 기회를 보아 비검을 회수해야겠다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경신비약(輕身飛躍)>으로 백여 장 높 이의 절벽에서 구름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그 한 쌍의 흰토끼는 앞을 다투어 사도평의 발 앞으로 뛰어왔다. 아까와 전 혀 다르게 마치 고양이가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과 같았다. 운이 트이면 생각도 영험해진다고 했듯이, 사도평은 이미 이 토끼들은 예사 토끼가 아니라 틀림없이 내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자기 는 이미 용담호혈에 들어왔으니 길흉을 점칠 입장이 아니다. 그래서 쪼그려 앉이 손으로 그들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토끼들은 가만히 있었으며 매우 온순하였다. 사도평이 문득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구름은 원래대로 다시 덮여져 있었다. 날은 이미 저 물었으므로, 오늘밤은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비검으로 구름을 뚫고 나가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이다. 사도평은 그 흰토끼에게 말했다. "나 사도평은 두 분 백선(白仙)의 인도를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아까 그 비선(飛仙)께서 왔을 때는 내가 잘못 생각하여 비검으로 몸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결코 적으로 대할 마음은 없었으 나, 비선께서는 나의 비검을 채가 버렸습니다. 돌아가서 사부님을 뵐 면목이 없을 뿐 아니라 생명 마저 위태롭습니다. 백선께서는 이곳에 사시니, 필히 비선과 교분이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나를 데리고 비선에게 가서 비검을 돌려달라고 부탁해 주십시오. 후에 도를 이루게 되면 틀림없 이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백선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흰토끼들은 제각기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사도평의 말을 듣더니 앞발로 사도평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고는 계곡 안으로 뛰어갔다. 사도평은 무슨 위험이 있고 없고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 서 흰토끼의 뒤를 따라갔다. 그 한 쌍의 흰토끼는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자주 뒤를 돌아다보곤 했 다. 사도평은 마음을 졸이면서 흰토끼를 따라 계곡으로 들어갔다. 해는 이미 황혼으로 접어들어 계 곡 밖은 어두침침한데 놀랍게도 계곡 안은 매우 밝았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계곡 안은 양쪽 절벽이 안으로 휘어져 마치 백 장 높이의 동굴과 같았다. 동굴 꼭대기에는 여남은 개 남짓한 별 이 박혀 있었다. 모두 찻잔만한 크기로써 맑은 빛을 사방으로 비추어 굴 안의 모든 것을 비추었 다. 사도평과 흰토끼들은 점점 깊이 들어가서 서북쪽 모퉁이의 암벽 근방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매 우 높고 큰 석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언뜻 손등에 두 점의 푸른빛이 닿아 반짝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석문 안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위치에 두 개의 발광체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박혀 있었다. 그것들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는데, 다른 발광체보다 위치가 매우 낮았다. 그것은 매우 강 하여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빛이 나오는 곳의 주위는 시커먼 형체를 이루고 있어서 얼른 보아서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 다.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보니까 시커먼 물체 가운데에 난봉(鸞鳳)과 같은 긴 깃이 희미하게 보였 다. 두 발광체가 더욱 밝은 빛을 내었을 때야 사도평은 그 형태가 아까 본 괴조의 형상과 비슷함 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 두 푸른빛은 괴조의 눈이 틀림없었고, 자기는 이미 괴물이 살고 있는 곳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사도평이 앞으로 다가가서 예를 갖추어 사정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돌연 무엇인가가 자기 옷 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바로 그 토끼들이었다. 사도평더러 석문으로 들어가자는 뜻이 분명했다. 사도평은 이미 흰토끼들이 영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것을 보자 필히 무슨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어차피 자기는 이미 생사를 가리지 않고 있으니, 눈앞의 위험인들 고려할 여지도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그처럼 이상한 광경 에 직면하니 도리어 호기심이 생겨 저절로 담이 커졌다. 그는 괴조가 있는 곳을 향해 허리를 숙 여 예를 표하고, 흰토끼의 뒤를 따랐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앞쪽에 세 칸의 석실이 나타났다. 흰토끼는 그를 왼쪽 석실로 데리고 들어 갔다. 석벽은 옥처럼 하얗고 네 모퉁이에는 진주가 걸려 있어 온 방 안을 밝게 비추고 있는데, 옥 침상, 옥탁자, 비단 이불 등 치장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만묘선고>는 다른 검선과 달리 속세 의 물건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지만, 어려서 우환을 당해 일찍이 입산한 사도평인지라 이 렇듯 왕궁처럼 호화찬란한 곳은 본 적이 없었다. 그 흰토끼들은 사도평을 끌어당겨 비단 의자에 앉게 하더니, 그중 한 마리가 소리를 두 번 지르 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도평은 그 흰토끼가 이 굴의 주인을 부르러 갔다고 추측했다. 이렇게 이상한 곳에 살고 있는 주인이 사람인지 요인인지 알 수가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별 뾰족 한 생각이 나지 않아 남아 있는 흰토끼를 껴안고 몸을 어루만지고만 있었다. 몇 번이고 밖으로 나가 살펴보려고 하였지만 그때마다 흰토끼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운명을 하늘에 맡기 고 최후의 길흉을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한참 기다리고 있자니까, 문득 밖에서 젊은 여인의 낮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밉살스런 옥아(玉兒)와 설아(雪兒)가 그저께 백노선배님의 말을 기억했는가 봐. 오늘 그 사람을 데리고 왔으니, 어떡하면 좋아?" 그러자 또 한 여인이 말대답을 했는데, 목소리를 너무 낮추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잘 들리지 않 았다. 사도평이 의아해 하고 있는데, 방금 나갔던 흰토끼가 뛰어들어 왔다. 이어서 눈앞이 환해지며, 구름 같은 옷에 용모가 절세미인인 두 처녀가 들어왔다.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쪽은 대략 십팔구 세 정도며, 어리게 보이는 쪽은 십육칠 세 정도밖에 되지 않는 듯하였다. 모두 이목구비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왔다. 사도평은 그녀들이 이 동굴의 주인임을 알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황급히 일어나 허리를 숙여 절을 하며 말했다. "제자 사도평은 황산 오운보 <만묘선고>의 문하입니다. 오늘 우연히 산에서 이 백선들이 풀 속 에서 노니는 것을 보고는 제 사제가 보기라도 하면 죽일 것 같아 쫓아버리려고 했지요. 그래서 이 근처까지 쫓아왔을 때 한 비선이 공중에서 날아왔습니다. 마치 검은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으 며 그 기세가 매우 맹렬하더군요. 제자는 목숨을 보전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비검을 날려 몸을 보 호하려고만 하였지, 결코 적개심을 품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비선께서 오해를 하여 제자의 비검을 거두어가 버렸지요. 돌아가서 사부님을 만나면 필시 중벌을 받게 될 것인즉, 어쩔 줄을 모 르고 있을 때, 한 선인께서 구름을 젖혀주시어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오로지 비검을 돌려받으려는 마음뿐이고, 그래서 또 두 백선의 인도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바라 옵건대 두 선고(仙姑)께서는 제자의 노력이 미천함을 불쌍히 여기시어, 저를 대신하여 그 비선께 용서를 빌어 비검을 돌려주시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사도평은 말을 마치고 꿇어앉으려고 하였다. 나이가 어린 처녀는 사도평이 정중하게 이야기하는 동안 나이든 처녀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 러더니 사도평이 말을 마치고 꿇어앉으려고 하자 사뿐 앞으로 내달아 꿇어앉지 못하게 그를 잡아 일으켰다. 돌연 손에 보드랍고 매끈한 촉감과 함께 한 줄기 훈훈한 향기가 가슴에 와 닿자, 사도평은 자신 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해졌다. '아! 이러면 안 돼!' 그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는 머리를 숙인 채 쳐다보지 않았다. 나이든 처녀가 말했다. "우리 자매의 이름은 진자령(秦紫玲), 진한악(秦寒顎)으로서 보상부인(夫人)의 딸입니다. 돌아가 신 어버님께서는 이곳에 은거하신 지가 이미 백 년이 넘었는데, 처음에 저를 나으셨을 때 이 자 령곡의 이름을 따서 제 이름을 지었다고 하십니다. 육 년 전 어머님께서 병해(兵解)하시면서 한 마리 천 년 묵은 신취(神鷲: 수리)와 한 쌍의 흰토끼를 남겨 저희들 시중을 들게 하셨지요. 그래 서 저희는 두문불출하며 도만 닦았습니다. 가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신취 가 가서 가져온답니다. 저희 자매는 본성이 매우 조용하며 또 자령곡 내의 풍경이 수려하므로 가 끔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것 외에는 매 번 한 차례 신취를 타고 동해에 있는 어머님 산소에 가서 절을 올린 다음, 어머님의 친한 친구며 <동해삼선> 중의 한 분이신 현진자 노선배님을 배알하여 약간의 가르침을 받고 돌아와서 다시 수련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랍니다. 첫째는 문을 나가기 싫 어하며, 둘째는 저희 자매의 도력이 얕아 비록 신취의 도움이 있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 굴을 탐내게 할까 두려워, 일 년 내내 안개 구름으로 계곡 위를 막아놓는답니다. 그래도 혹 다른 사람 이 알까 봐 안개 구름 밑을 소법(小法)으로 막았습니다. 현진자와 몇 분 노선배처럼 저희의 근본 을 아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은 가령 안개 구름을 가른다 해도 내려올 수가 없답니다. 이처럼 저희 자매는 여지껏 바깥 사람들과 왕래를 하지 않으므로 이곳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 요." 일전에 그들 자매는 두 마리 흰토끼와 함께 절벽 위로 놀러갔다가 우연히 <추운수> 백곡일을 만났던 것이다. 그때 추운수가 말했다. '너희 자매는 세연(世緣)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더구나 어머니가 이전에 길을 잘못 들어 악한 인연을 너무 많이 뿌렸기 때문에 비록 <동해삼선>이 어머니의 병해(兵解)를 도와주어 잠시 재난 을 면하긴 하였지만, 어머니의 원신(元神)이 만들어낸 어린아이가 응고비승(凝固飛升)하기 전에는 여전히 전의 재난을 피할 수 없어 천 년의 공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리라.' 하는 것이었다. 추운수는 그러면서, '너희 어머니가 비록 개과천선했을망정 비참한 보복이 따르게 되었으니 차마 볼 수 없다.' 고 하면서, 훗날에 다만 사도평이란 인물만이 자매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 나 그 안에 또 한 가지 풀어야 할 인과(因果)가 있어 난처해 하던 그들 자매는 오늘아침 신취를 시켜 동해에 가서 현진자에게 여쭈어 보게 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신취가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현진자 자신은 시간이 없어 오지 못하므로 비검전서로 우담대사한테 청하여 이곳으로 가도록 하 겠다는 내용이었다. "저희 자매는 원래 우담대사께서 오시면 결정을 하려고 했습니다만, 뜻밖에도 흰토끼가 이것을 엿듣고는 옛 주인의 재난을 막겠다는 충정에서 저희 자매 몰래 도우를 모시고 온 거랍니다. 신취 는 저희 자매의 지시가 있기 전에는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다만 장난이 좀 심할 뿐이죠. 신취가 편지를 가지고 올때 비검 한 자루를 가지고 왔고, 동시에 흰토끼가 오더니 도우께서 이곳 에 오셨다고 하길래, 비로소 도우께 실례를 범한 줄 알았어요. 저희 자매는 도우와 만난 적이 없 기 때문에 즉시 가서 비검을 돌려드리기가 거북하여, 우담대사께서 오시기만 기다렸답니다. 도우 께서 이곳 동굴까지 오실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거죠. 방금 도우께서 계곡을 내려오실 때 한 선인께서 구름을 열어주셨다고 하셨는데, 저희의 근본을 아시는 선인은 매우 적은데, 어느 선인인 지 모르겠군요. 도우께서는 비검만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저희 어머님이 후에 당할 재난을 미리 알고 오신 것입니까?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사도평이 보기에 그 여인의 말투는 차분하고 음성은 더없이 고왔다. <신니> 우담과 <동해삼선 >은 비록 만난 적은 없지만 오래 전부터 정파의 가장 유명한 선배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 두 여인과 내왕을 하고 있다면, 이들이 결코 사마외도(邪魔外道)가 아니라는 것이 자명 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두려워하던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자, 사도평은 허리를 깊이 굽히며 대답 하였다. "제자는 무심결에 들어온 것이지, 결코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 구름을 열어주신 선인은 전혀 모 르는 분이었고, 당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성함도 여쭈어 보지 못했지요. 그분이 자령곡 진가 자매 가 어쨌다는 말은 하였지만, 자세한 사정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자는 우매하여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무단히 두 분 선고를 번거롭게 한 실례를 용서하시고, 비검 을 돌려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나이가 어린 한악이란 여인이 입을 뾰족 내밀며 웃더니 언니에게 살짝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이분은 좀 멍청한가 봐. 말끝마다 우리한테 비검을 달라고 그러잖아. 누가 그까짓 고철을 가지려고 하나?" 자령은 사도평이 들을까 질겁을 해서 동생을 흘겨봤다. 그리고는 얼른 사도평에게 말했다. "이 비검은 저희가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으니 당연히 돌려드리겠어요. 도우께서는 도우를 도 와주신 그 선인의 모습을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사도평은 아까부터 상대방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진한악이 언니에게 뭔가를 속삭이는 것을 듣고 약간 이상하여 자신도 모르게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 마침 자령이 타박하는 투로 한악을 흘겼으므로,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자령 자매의 미소며, 약간 찌푸린 눈매며, 하얀 옥 같은 이와 살짝 벌어진 입술, 가냘프 고 하늘거리는 몸매를 보자 속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매혹되기도 하여 얼굴이 저절로 빨개졌다. 이렇듯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홀연 자령이 물었으므로,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즉시 정신이 들며 지금의 자기 처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아까와는 달리 고개를 숙이지 않고 정색으로 대답하 였다. 자령 자매는 사도평이 꾀죄죄한 늙은이의 모습과 차림새를 말하자 서로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심각한 표정들을 지었다. 사도평은 아까 비검을 찾기에만 다급한 나머지 그 노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모 습과 차림새만을 말했다. 두 자매의 옥 같은 뺨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약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제자는 그 선인의 도움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두 분 선고께서는 그분의 성함을 아시리 라 믿습니다.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분은 <숭산이로> 중의 한 분인 <추운수> 백곡일 노선배님이십니다. 그분의 부인 능설홍은 저의 어머님과 두어 차례 싸운 적이 있으나, 나중에는 막역한 친구가 되었답니다. 그분이 도우께 저희 자매의 이름을 말씀하셨다고 하셨는데, 이곳으로 인도한 이유는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사도평은 그 노인이 유명한 추운수란 말을 듣자, 속으로 자기 눈이 삐여 비검을 찾는 데만 급급 했지, 정작 큰일인 고민에 대해서는 입도 떼어보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하였다. 그런데 자령 자매 와 추운수의 말을 앞뒤로 맞추어 보니 쌍방의 말에 무슨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도 같았으나, 내 용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추운수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중하게 말했다. "그 노선배님이 천하의 유명한 추운수어른이셨군요. 그분은 제자더러 내려가서 비검을 찾으란 말씀만 하셨고,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더 늦게 돌아가게 되면 제 사제가 또다른 오해를 할는지 모릅니다. 비검을 돌려주시어 제자가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자령이 이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저희 자매와 도우는 서로 같은 파도 아닌데 제자라고 자칭하지 마세요. 원래는 도우를 좀더 머 무르시게 하여 좋은 이야기를 나눌까 했는데, 첫째로 우담대사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셨으니 훗날 어머님이 재난을 피하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드리기가 거북하고, 둘째로 도우께서 그토록 돌아 가기를 원하시니 강제로 잡을 수가 없군요. 비검은 돌려드리겠습니다. 다만 도우께서 <만묘선고> 문하에 계신 것은 길을 잘못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결코 그들과 뜻을 합칠 수가 없음을 말씀드 리고 싶군요. 지금 도우께는 불길한 기운이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안에 광채가 들어 있어 흉을 만나도 길로 변하겠지만 한 번의 재난은 피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여기 제가 어렸 을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하나 있습니다. <미진기(彌塵旗)>라고 하는데, 이 기는 매우 신묘(神 妙)하므로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기를 가진 사람은 어떠한 위험을 당하더라도 기를 꺼내들고 주 문 같은 것을 외울 필요도 없이 이곳을 생각만 하면 즉각 여기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번에 필히 위험을 당하게 될 것이니 몸에 지녔다가 만약을 대비하십시오." 이렇게 말한 다음 자령은 오른손을 쳐들어 소매에서 사도평의 비검을 꺼내주었다. 사도평이 황 급히 받자, 이번에는 다시 그 <미진기>를 건네주었다. 받아보니 사방 한 치 정도의 네모진 작은 기였다. 중간에 사람 심장이 하나 그려져 있을 뿐인데 오색 빛을 은은히 뿜어내고 있었다. 자령이 신묘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진기한 보물임이 틀림없었다. 사도평은 머리를 숙여 감사하였다. "제가 무슨 덕이 있길래 두 분 선고께서 저의 실례를 탓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진기한 보물까지 주시는지, 이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군요. 방금 두 분 선고의 어머님께서 머지않아 큰 재난 을 당하게 되어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도행이 미천하여 원래는 감히 승 락을 할 수 없었지만, 두 분 선고의 이러한 은혜를 받았으니 훗날 제가 필요하시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어떠한 위험이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자령 자매는 이 말을 듣자 얼굴에 희색을 띠고 맞절을 하면서 말했다. "도우께서 이토록 후은(厚恩)을 베푸시니 뭐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도우께서 자신 의 도행이 미천하다고 하셨는데, 그 점은 어머님을 구하는 것과 무관합니다. 다만 도우께서 도와 주시려고만 하시면 필히 재난을 면할 수 있어요. 우담대사께서 머지않아 오실 텐테, 그때 저희 자 매가 대사님과 상의한 후 신취를 시켜 오운보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앞으로는 서로 자주 만날 기 회가 있을 텐데, 무슨 선고니 제자니 하는 호칭은 쓰지 않도록 하지요. 대사님이 오시기 전에 서 로 도우라는 칭호로 통일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사도평은 자령이 두 번이나 매우 정성껏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그리고는 즉시 자령 자매에게 작별을 고했다. 한악이 웃으면서 자령에게 말했다. "언니, 옥아를 시켜 바래다 드리도록 해. 길을 잘못 들어 떨어지시면 어떡해?" 자령은 한악에게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길도 멀지 않고, 옥아는 또 말썽피기를 좋아하니 도리어 도우를 귀찮게 해드릴 거야. 넌 빨리 뒷동굴로 가서 장치를 제거시키렴!" 그러자 한악은 사도평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뒷동굴로 가버렸다. 사도평은 자령을 따라 석실을 나왔다. 동굴 위의 별을 가리키며, 무슨 묘법을 썼길래 이 별들이 동굴을 대낮처럼 밝게 비추냐고 물었다. 자령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한테 어디 그런 큰 법력이 있겠어요? 이것은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이전에 사문(邪門)에서 도 를 닦으실 때 화려한 것을 좋아하시어 깊은 산 큰 늪에 있는 거대한 조개 뱃속의 명주(明珠)를 캐다가 오랫동안 수련하여 만든 것이에요. 어머님이 정(正)으로 돌아와 도를 이룬 후부터, 첫째로 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손때를 기억하라는 뜻으로, 둘째로는 자령곡 안에 햇빛이 들지 않으므로 밝게 하려고 이것들을 달았답니다." 사도평은 다시 신취가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신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한 덩이 깨끗한 바위만 툭 튀어나와 있었다. 계곡 안에 진기한 풍경이 매우 좋았으나 시간이 너무 늦어질 까 봐 하나하나 물어보지도 못하고 사도평은 자령을 따라 계곡을 나왔다. 바깥에는 별빛이 비치기는커녕 여전히 석양 때의 풍경 그대로였다. 자령에게 물어보고서야 여기 에나 있는 영초(靈草)의 일종인 <은하초(銀河草)>는 밤에 빛을 내는 반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천둥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머리를 들어 위를 쳐다보 니 흰구름이 사방으로 벌어져 중앙에 일 장 정도 크기의 큰 구멍이 생기며 달빛이 내리비쳤다. 자령이 말했다. "동생이 이미 장치를 제거시켜 안개 구름을 감아놓았으니, 제가 도우를 모시고 올라가겠어요." 그러더니 소매를 가볍게 쳐들었다. 그는 자령과 함께 사도평이 미처 검광을 타기도 전에 하늘로 치솟았다. 귓가에 바람소리만 들린다 싶자, 어느 새 절벽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한악은 이 미 그 위에서 웃음을 머금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산 위는 적적하기 이를 데 없으며 별과 달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사도평은 이 맑은 빛 이 내리비치는 신통광대한 산 위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운 두 처녀와 작별을 하려 고 하니, 웬 일인지 미련이 남아 헤어지기가 섭섭하였다. 그래서 머뭇거리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 었다. 그러다 설망이 의심할 것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소름이 끼쳤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전화위복 菱菲相乘 寃遭毒打 彩雲飛去 喜締仙姻 자령 자매와 작별을 한 사도평은 검광을 타고 오운보로 날아갔다. 동굴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검광을 거두고는 땅으로 내려왔다. 설망을 만나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개를 숙이고 곰 곰이 생각하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동굴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앞에서 한 사람이 뛰어오면 서 말했다. "사형, 도대체 어딜 갔었소? 우리가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시오?" 사도평이 보니 바로 <삼안홍예> 설망이었다. 그는 마음이 약간 찔렸지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까 굴 앞에 앉아 있으려니까 아주 살찐 흰토끼 두 마리가 보이길래 잡아서 자네 부부 술안주 로 주려고 했지. 그런데 산봉우리를 두 개나 쫓아갔는 데도 못 잡고 그냥 오는 길이야. 다른 곳엔 안 갔어." 설망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굴 속이려는 거요? 사형의 실력으로 토끼 두 마리를 못 잡아 산봉우리를 몇 개씩이나 쫓아갔 다니 말이 되오? 사형은 살생을 싫어하지 않소? 그런데 오늘은 무슨 마음으로 토끼를 잡아 우리 부부의 술안주로 주려고 했지요? 우리 부부가 굴에서 나올 때가 유시(酉時) 초도 안 되었는데, 지 금이 무슨 시각이오?" 사도평은 정직하여 평소에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그런 그가 자령곡에서 두 여자를 만난 사실 은 숨기고 흰토끼를 쫓은 것만으로 변명을 하려니 어찌 잘 될 수 있겠는가. 설망이 그렇게 묻자, 그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일생 동안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사부님도 안 계신데 밖으로 바람 좀 쐬러 가서 안 될 것은 없잖아?" "사형이 어디를 가든 내가 알 바 아니지요. 찬하노니한테 가서 아미검법을 배우고 왔다 해도 어 쩔 수 없지요. 사형은 재주도 많고, 사부도 많은데 누가 참견할 수 있겠소? 나는 동굴에서 누가 사형을 기다리기에 찾으러 다닌 것뿐이오.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사부님이 안 계신 틈을 타서 혹 시 찬하노니한테 검술을 배우러 갔나 했지. 그 사람이 사형이 돌아오길 기다리기에 할수없이 문 필봉으로 가서 물어보았지요. 사형이 정말 안 갔는지 아니면 갔는 데도 나를 안 만났는지는 몰라 도, 사람은 찾지도 못하고 주경운 그 도둑년한테 욕만 얻어먹고 돌아왔소. 그래서 동굴로 들어가 그 사람한테 말하려고 하는데, 사형이 어떻게 낌새를 챘는지 돌아왔지 뭐요." 사도평은 설망의 말 속에 은근히 비꼬는 가시가 들어 있는 것을 보자 화도 났고 또 다급하기도 했다. 자기는 비록 <만묘선고> 문하 이지만 본문(本門)에는 친구가 없고, 정파 중에 친구가 몇 명 있기는 있지만 사부가 의심할까 봐 내왕을 안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 해도 자기를 찾아온 사 람이 누군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성나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설망에게 물었다. "사제, 내가 찬하대사에게 갔다고 의심하지 말게나. 방금 한 이야기는 결코 거짓말이 아니야. 나 하고 농담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만약 사부님께서 돌아오셔서 곧이곧대로 여긴다면 내가 어떻게 되겠나? 그리고 나는 사제와 사부님 외에는 친구가 없는데 동굴에서 누가 나를 기다린다니, 누군 가 모르겠군. 누군지 말해 줘야 내가 준비를 하지 않겠나?" "동굴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누군가 알고 싶어요? 그 사람은 바로 사제의 오랜 친구예요. 지금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가서 만나보면 저절로 알 텐데 나한테 물어보면 뭘 해요?" 말을 마치자 곧 돌아서서 가버렸다. 사도평은 이미 설망이 자기를 단단히 오해하고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와 유연랑 두 사람쯤은 자기가 당해낼 수 있을 거다. 그들은 스승의 비검전서를 받고 나를 감시 하는 것이니, 스승이 없는 잠시 동안은 그들을 겁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동굴로 가서 누가 왔는 지를 보고 난 후에 다시 따지자고 생각했다. 설망과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고 즉시 그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설망이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사부님, 반역자 사도평을 데리고 왔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도평은 이미 바깥 석실 중앙에 <만묘선고>가 만면에 노기를 띠고 앉 아 있는 것을 보았다. 사도평은 놀래서 벌벌 떨었다. 앞으로 나가 꿇어앉으며 말했다. "제자 사도평은 사부님께서 오신 줄 모르고 바깥에 나가 있었으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땅에다 쿵쿵 찧었다. <만묘선고>는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도평, 이 천벌을 받을 놈아! 사부가 너한테 뭘 잘못 대한 것이 있느냐? 감히 사부를 배신하고 적과 내통하다니! 오늘 드디어 마각이 드러났으니,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사도평은 머리를 땅에 박은 채 말했다. "제자는 굴 앞에 서 있다가, 우연히 목격한 흰토끼를 장난삼아 쫓아갔습니다. 비록 동굴을 떠나 긴 했지만 결코 다른 곳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사부님을 배신하고 적과 내통했다는 말씀은 억울 하옵니다." <만묘선고>가 아직 대답하기 전에 설망이 다가가 귀엣말로 몇 마디 속삭였다. <만묘선고>는 발끈 성을 내며 말했다. "네놈이 그래도 사부를 배신하고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고 우기는구나. 너는 사부가 멀리 운남으 로 갔기 때문에 오래 있어야 올 줄 알고 적에게 정보를 주러 간 게 아니냐? 설망이 네가 문필봉 쪽에서 오는 것을 직접 봤다는 데도 아직 감히 거짓말을 꾸며대려고 하다니! 만약 정말로 흰토끼 를 쫓아갔다면 어째서 설망이 몇 시간 동안 너를 찾아도 찾지 못했느냐? 죽지 않으려면 빨리 바 른 대로 말해라!" 사도평은 <만묘선고>가 설망이 모함하는 말을 믿는 것을 보자 너무나 억울하였다. 스승이 엄하 기 때문에 만약 허실(虛失)을 증명할 수 없으면 생명을 보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엎 드린 채 울면서 호소하였다. "제자는 지금껏 남의 모함이 두려워 감히 외인과 내왕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부님께서 믿지 못하시겠으면 점괘로 제자가 사부님께서 떠나신 후에 문필봉 쪽으로 간 적이 있는가 없는가 점을 쳐보십시오. 만약 사제 말만 믿으시면 제자는 죽어 구천에 가도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만묘선고는 냉소를 지으며 설망에게 선천괘효(先天卦爻)를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다. 이윽고 괘상 (卦象)을 보니 사도평은 비록 찬하대사한테 가지 않았지만, 그러나 점괘에 결혼할 상이 나타났고, 그 중에 한 결합이 생겨나 자기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그녀는 성난 눈으로 사도평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천벌을 받을 놈! 아직도 변명을 하려고 하다니! 네놈이 문필봉으로는 가지 않았지만, 괘상에 는 음인(陰人)과 네놈이 나를 괴롭히려는 징조가 분명히 나타났다. 빨리 바른 말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긴 소매를 홱 쳐드니 그 속에서 한 가닥 색끈이 날아와 사도평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는 설망에 게 사도평을 달아매어 교근편(蛟筋鞭)으로 아프게 때리라고 명령하였다. 사도평은 스승의 성질을 알고 있었다. 또 설망이 옆에서 모함을 하여 스승의 가슴 속에 이미 노 여움의 불길이 일어났으니, 진가 자매를 만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진가 자매가 떠날 때 자기에게 그들의 내력과 위치를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고 보 면 아마도 <만묘선고>가 꽤 두려웠던 것 같았다. 자기는 어차피 죽음을 면치 못하니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 자 돌연 마음에 각오가 생겨났다. 설망이 악랄하게 때려도 신음소리 한 마디 내지 않았다. 그 교근편은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사도평이 어찌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몇십 대 때 리지 않아서 피부와 살이 떨어져 날렸다. 사도평의 몸은 공중에 매달린 채 설망의 채찍에 맞아 이리저리 흔들리고 그 고통이 심장과 폐부까지 스며들었다. <만묘선고>는 사도평이 신음소리 한 마디 내지 않는 것을 보자 더욱 화가 나서 설망에게 때려 서 죽이라고 소리쳤다. 설망은 그렇지 않아도 이 눈엣가시를 없애지 못해 안달하던 터라, <만묘선고>의 분부를 듣고는 머리고 얼굴이고 치명적인 곳도 가리지 않고 마구 후려갈겼다. 사도평이 아파서 정신이 희미해지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일 때, 갑자기 설망의 채찍이 사도평이 품고 있던 <미진기>에 와서 닿았다. 사도평은 굴에 들어오자마자 스승을 보고 놀랬고, 또 설망의 모함이 억울하고 분하여 계속 변명 만 하였지, 진씨 자매가 준 미진기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파서 정신이 혼미 한 가운데 설망의 채찍이 미진기를 건드리자 불현듯 진씨 자매가 그 보물을 줄때 한 말이 생각났 다. 색끈에 묶일 때는 틀림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다가, 겨우 이젠 살아날 수 있는 여지가 보였다. 그 러나 비록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생각이 났지만, 손과 발이 꽁꽁 묶여 공중에 매달려 있으니 기를 어떻게 꺼낸단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또 설망에게 폭풍우 몰아치듯한 매 몇십 대를 얻어맞았다. 만약 사도평이 최근에 도력이 정진하지 않았다면 이때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졌거나 그렇지 않으 면 죽었을 것이다. 사도평은 있는 힘을 다하여 겨우 말을 하였다. "사부님, 노여움을 푸십시오. 제자가 잘못을 알았으니 사실을 여쭙겠습니다. 때리는 것을 멈추고 숨을 좀 돌리게 해주십시오." 겨우 말을 마치자마자 머리에 또 채찍을 맞고는 기절해 버렸다. 이때 유연랑은 <만묘선고>의 왼쪽에 시립해 있었다. 사도평이 무지막지하게 얻어맞는 것을 보 고서야 <만묘석고>가 마음이 이다지도 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음악(淫惡)한 짓은 많이 했 지만 도대체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직 본 적도 없었다. 슬며시 측은한 마음이 생겼지만 <만묘선고>가 겁이 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 다가 사도평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했는 데도 또 설망이 때려서 혼절시키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만묘선고>에게 말했다. "대사형께서 사실대로 여쭙겠다고 했습니다." 만묘선고는 본시 사도평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사활(死活) 문제는 안중에 없었다. 오직 자기가 여러 해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몇 가지 대단한 법보가 있기 때문에 제삼차 아미투검 때는 오 직 승리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무단히 괘상에 사도평이 두 음인과 결탁하여 장래에 자기의 가장 큰 적이 된다는 점괘가 나왔던 것이다. 그녀는 적이 화가 치밀고 또 당황하기도 하 였다. 그래서 사도평을 고문하여 사실을 알아낸 후 다시 죽이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평은 벌써 <만묘선고>의 비검에 죽었을 것이다. <만묘선고>는 매우 성이 났으므로 계속 때리라는 말만 했고, 사도평이 무슨 말은 했는지 알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유연랑이 옆에서 귀띔을 했으므로 비로소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놈을 죽이는 것은 식은죽 먹기다. 이놈과 결탁한 자가 누군지 알아내어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겠지?' 그래서 급히 설망에게 그만 때리고 그를 내려놓으라고 분부했다. 설망은 사도평이 검광을 타고 도망갈까 봐 <만묘선고>에게 그의 비검을 회수하라고 청한 다음 <만묘선고>가 비검을 회수하자 그 제자 사도평을 내려놓았다. 사도평은 이미 온몸이 아프다 못해 지각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땅에 쓰러져 꼼짝도 할 수 없었 다. 그런데도 <만묘선고>는 그에게 빨리 이야기하라고 다그쳤다. 설망은 그가 죽은 척하는 것이 미워 척추를 또 한 번 내리쳤고, 사도평은 데굴데굴 한 바퀴 굴렀다. 사도평은 자기가 절대절명의 위험에 직면했음을 알았다. 미진기가 진씨 자매의 말대로 신묘한 효능을 보일지 안 보일지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는 왼손을 벌벌 떨면서 맞는 것이 겁나는 표 정을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제자가 다 털어놓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사제에게 때리지 말라고 해주십시오." 암암리에 정신을 가다듬고는 갑자기 오른손을 품 안에 넣어 미진기를 잡았다. 이를 악물고 고통 을 참으며 미진기를 꺼내어 손잡이 부분을 잡고 자령곡을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높은 소리로 외 쳤다. "사부님, 노여움을 푸십시오. 제자는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온 동굴 안이 모두 밝은 빛으로 가득차면서 사도평은 종적을 감추었다. <만묘선고>는 사도평이 법술을 써서 도망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비검을 방출하며 급히 몸을 날려 동굴 밖으로 나가보니 한 덩이의 채운(彩雲)이 번개보다도 더 빨리 서남쪽을 향하여 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황급히 신검합일하여 쫓아가 찾아보았지만 어디에 실오라기만한 단서 가 남아 있겠는가? 그녀는 훗날 화를 당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답답하고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동굴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만묘선고> 허비랑은 서장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래서 얼마 멀리 가지 않아 비검전서를 설망에게 보내어, 그더러 사도평을 잘 감시하라고 했다. 그래서 비검이 돌아오자마자 가려고 할때 유덕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마주치고 말았다. 허비랑은 양동작전을 쓰려고 하므로 잠시 얼굴을 나타내지 않겠다는 계획을 말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가려고 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 다. '내가 비밀을 지키려고 비검전서를 설망에게 전하긴 했지만, 그와 사도평은 계속 같이 있으니 사 도평이 알아챌 수 있을는지 모른다. 설망이 잘못하여 누설이라도 하는 날이면 사도평이 사실을 적에게 알릴 것이 아닌가.' 그녀는 다시 생각을 고쳐보았다. '사도평이 나를 따른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비록 설망만큼은 나에게 충성하지 않았지만 그 래도 아직까지 큰 잘못은 없었다. 당초 그가 적에게 가르침을 구한 것은 구도(求道)하는 마음이 간절하였기 때문이었고, 또 내 속셈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근래에 행동이 의심스러웠지만 실질적 인 증거는 하나도 없다. 다행히 단오절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지 않은가. 사도평이 만약 정말로 반 역하려고 한다면 내가 없을 때는 별 꺼리는 바가 없을 것이다. 그가 방심한 틈을 타서 돌아가 살 펴보면 어떨까? 설망에게 전서를 읽을 때 그가 옆에 있었는가를 물어본다든지 또 몰래 살펴보아 서 만약 정말 적과 내통하고 있다면 일찌감치 제거해 버리자. 내가 내 제자를 죽이는 데 대해서 다른 사람은 간섭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괜히 사도평을 이용하여 거짓 정보를 흘리는 짓을 할 필 요가 없겠지. 부질없이 후환을 남기는 결과가 될는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생각한 허비랑은 유덕에게 내일 서장으로 가겠으니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 라고 당부했다. 이번에 암암리에 힘을 쓰다가 적에게 발각되지 않으면 더욱 좋고, 만약 발각된다 해도 까짓것 황산에 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헤어진 후, <만묘선고>는 동굴로 돌아왔다. 마침 설망이 유연랑과 동굴 앞에서 어깨 를 나란히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먼저 몸을 숨기고 설망의 뒤로 돌아가서 천리전 음으로 설망에게 조용히 외딴 곳으로 오라고 명령했다. 설망은 스승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유연랑에게 말했다. "사부님이 나에게 대사형을 감시하라고 하셨소. 그가 어디 갔는지 모르니 당신이 여기서 그를 기다려요. 내가 가서 그의 동정을 살피고 곧 돌아올 테니까." <만묘선고>는 사도평이 과연 굴에 없다는 말을 듣고 더욱 의심이 생겼다. 설망과 유연랑에게는 꺼릴 것이 없으므로 당장 몸을 나타내었다. 두 사람이 황급히 꿇어 엎드리 자, <만묘선고>는 몇 마디 충고를 하고 나서 사도평의 종적을 물었다. 설망이 말했다. "사부님의 비검전서를 받을 때 그가 절벽 쪽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봤습니다. 그 후로 어디로 갔 는지 한참이나 찾았지만 보이지 않더군요. 그의 태도를 보니 매우 의심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설망은 본시 유연랑과 굴로 들어가 음락을 즐긴 후 나와 보니 사도평이 보이지 않는지라, 고의 로 자기들을 기피하는구나 싶어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런 참에 뜻밖에도 스승이 도중에 돌아온 것이다. 그는 사도평이 옆에 있는 것도 아닌지라 신이 나서 살을 붙여 거짓말로 모함을 했다. <만묘선고>는 듣고 나자 발끈 성을 내며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설망은 이렇게 되자 더럭 겁이 났다. 먼 데 가지 않고 이 근방에 있다면 거짓말이 탄로나는 것 이다. 그래서 짐짓 그를 찾아오겠다는 핑계를 대고선 사도평을 만나면 적당한 속임수로 시간을 끌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네다섯 시진이나 찾아도 찾지 못하자, 역시 이 작자가 또 검 술을 배우러 찬하대사에게 갔구나 싶었다. 그래서 문필봉으로 날아간 설망은 주경운에게 물어보 다가 한바탕 욕을 먹고 자칫하면 죽을 뻔한 봉변까지 당하였다. 그러고 보니 더욱 사도평이 문필 봉에 숨어 있다는 심증이 굳어버렸다. '내가 사부께 일러바칠까 봐 나오지 않고 숨어 있는가 본데,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현장에서 잡 아버려야지.' 이렇게 생각한 설망은 문필봉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설망이 한참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유연랑이 뛰어와서 <만묘선고>가 그만 돌아오라 했다 고 전했다. 그래서 그는 유연랑더러 사도평이 지금 문필봉 동굴에 숨어 있으니 자기는 그를 기다 려 함께 돌아가겠다고 하더라고 스승에게 전하게 했다. 얼마 있지 않아 갑자기 파공성이 들리기에 고개를 쳐드니 사도평이 다른 방향에서 나타나 비검 을 타고 돌아가고 있었다. 마음보가 비뚤어진 설망은 그가 속임수로 일부러 다른 곳에서부터 출 발하는 척하는 거라고 곡해했던 것이다. <만묘선고>는 원래 의심이 많았다. 유연랑이 돌아와 보고하는 것을 듣자, 만약 지금까지의 약간 꺼림직한 구석이 없었다면 당장 찬하대사를 찾아가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도 뭣해서 불그 락푸르락하고 있는데 마침 사도평이 돌아와서 따지다보니 괘상에 음인이 자기를 해치려는 것으로 나타나 정말 사도평을 죽이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도평이 도망갈 때 손에 작은 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비록 아미파의 법보 는 아니지만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도평이 도망간 것은 별것 아니라 해도 그 두 음인이 매우 무서운 존재라 자기 앞길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모양이었다. 이래저래 한동안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린 <만묘선고>는 일단 서장으로 가지 않고 먼저 사도 평과 두 음인의 내력을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괘상으로 여러 번 찾아보았지만, 두 음인이 모두가 지척에 있는 것 같은 데도 방향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느덧 단오절이 가까왔으므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괘상에는 잠시 동안은 음인의 방해가 없으리라고 나타났다. 또 설령 그들을 찾는다고 해도 방비나 좀더 할 수 있을 뿐, 그들을 어떻게 요리할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앞일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고 뾰족한 방법이 생 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서장으로 갔다가 나중에 다시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묘선고> 가 떠나려고 하자, 설망이 사도평의 비검을 갖고 싶다고 하였다. <만묘선고>가 말했다. "이 검은 원래 이름이 <취규(聚奎)>라고 한다. 본시 사도평의 조부인 대명현(大名縣)의 총진(總 鎭) 사도정(司徒定)의 가보였느니라. 그의 조부가 재임중에 순사하여 온 집안이 해를 당하게 되자, 집안의 한 계집종이 사도평의 아버지를 강보에 싸서 도망을 쳤지 않았겠느냐. 계집종은 진남(晋 南) 영하현(榮河縣)으로 도망가서 우연히 <추운수> 백곡일의 부인이 능설홍을 만났단다. 능설홍 은 두 사람을 데리고 숭산으로 가서 그 아이에게 사도흥명(司徒興明)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계집종이 바로 오십 년 전에 강호에 이름을 떨친 <애고랑(埃姑娘)> 우어빙(尤於氷)이다. 그런데 우리 오대파 혼원조사(混元祖師) 문하 제자인 <여효신(女梟神)> 장삼고(蔣三姑)에게 살해되었지. 그런데 사도흥명은 장삼고의 미색에 마음이 끌리어 우어빙의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그녀를 아 내로 맞아들였느니라." 능설홍은 성이 나서 사도흥명을 내쫓았고, 그 두 사람은 억지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사도흥명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아미파의 <이로>와 <삼선>이 더욱 분노할까 봐 오대산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신강(新疆) 바크산(博克山) 꼭대기에 있는 한곡(寒谷)으로 도망가서 수 련을 하였다. 장삼고도 혼원조사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도흥명과 운명을 같이했다. 몇 년이 지나 장삼고는 사도평을 낳았다. 그런데 사도평이 세 살이 채 안 되었을 때, 우어빙의 친한 친구인 형산 백록동의 <금모 모> 나자연이 복수를 하러 찾아와 장삼고를 죽여버린 것이다. 사도흥명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땅고 아내를 힘껏 보호하였지만 결국은 칼에 찔리고, 또 자신 이 연마한 비검마저 빼앗겨 버렸다. 사도흥명은 분을 이기지 못해 사도평을 데리고 신강에서 오대산으로 갔으나 혼원조사가 이미 원 적한 지도 여러 해가 되고 보니 만사가 물거품이었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금신나한> 법원을 만난 것이다. 법원은 출가하기 전의 이름이 하장(何章)이었다. 당초 장삼고를 아내로 삼으려고 백방으로 노력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혼원조사의 사랑을 얻어 혼원조사가 대신 결혼을 주선 해 주려고 했는데, 뜻밖에 장삼고가 사도흥명에게 시집가서는 스승을 배신하고 도망가 숨어버린 것이다. 법원은 분을 참지 못하여 출가해 버렸다. 그때부터 그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사도흥명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맺혔으나 장삼고의 실력이 대단했고 또 어디 숨었는지 알지 못하여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처럼 오랫동안 원한이 쌓이고 쌓인 원수가 어느날 아침에 불쑥 나타났으니 어 찌 그냥 놔두었겠는가. 사도흥명은 비록 비검을 잃었지만 다른 도법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본시 혼원조사를 만나 울면서 호소하여 이전의 잘못을 빌고는 복수를 간청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후에 조용한 곳을 찾아 그 취규검을 연마할 작정이었다. 장삼고는 생전에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조께는 하장이란 제자가 있는데, 단지 저한테 구혼한 일로 인하여 깊은 원한을 맺었으니, 다 음에 만나게 되면 조심하세요." 그러나 사도흥명은 법원이 출가한 후에 개명한 것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사실을 말하고, 죽은 처와 동문인 정을 생각하여 복수를 도와달라고 청했다. 법원은 그의 말을 듣자,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지라 분노가 불같이 치밀었다. 즉시 검광으로 그를 가두고는 우선 죽이지 않고 천천히 경과를 설명하였다. 설명을 다한 후 죽일 작정이었다. 사도흥명은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방비를 할 틈이 없어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지만, 사도 문 중에 향불 피울 사람은 남겨두어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다급하면 좋은 지혜가 떠오른다(急 中生智)란 말처럼, 그는 저항할 수 없는 척하며 법원이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그는 본래 능설홍에게서 <선천오둔(先天五遁)>을 배웠던 터이므로, 한쪽 팔을 포기하고 법원이 소홀한 틈을 타서 비검의 금둔(金遁)을 빌어 아이를 데리고 도망을 친 것이다. 법원은 그가 한쪽 팔이 잘린 채로 도망가는 것을 보고 급히 뒤쫓아 갔지만 잡지 못하였다. "그 사도흥명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도망하긴 했지만, 네 사백의 비검은 다른 비검과 다른지라 상처가 매우 깊어,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품에 있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니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는 형편 아니었겠느냐. 그런데 때마침 우연히 왕선 인(王善人)이 지나가다가 부자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요양을 시켰지. 사도흥명은 모든 것을 왕선인에게 설명하고, 또 비단에다 혈서를 써서 사도평에게 남겨 주었다. 그리고는 왕선인에 게 사도평이 성인이 되면 그 혈서와 취규검을 가지고 숭산으로 가서 추운수에게 검술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지.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는 죽었단다." 왕선인은 사도평을 매우 귀여워했다. 그러나 그를 맡은 지 일 년이 못 되어 화가 들이닥쳤다. 그 의 첩이 다른 사람과 간통을 하여 그를 독살한 것이다. 이 간악한 두 연놈은 왕선인의 아들과 사 도평마저 죽이려고 상의를 했는데, 그런 중에 악금빈(岳琴濱)이 그들의 악행을 보고 잡아다가 고 문을 하였다. 그러다 무심결에 사도평의 내력을 알게 되었고, 그 혈서와 취규검을 찾아내자 그 자 리에서 두 연놈을 죽이고는 집을 불살라 버렸다. 악금빈은 사도평이 사백인 법원의 원수이기 때문에 본래는 즉시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다 자세 히 보니까 그 두 아이의 자질이 모두 좋아 아까우므로, 화산으로 데리고 가서 신영검(神瓔劒)을 연마하려고 생각하였다. 연검할 때 처음 단(壇)은 먼저 왕선인의 아들을 올려 칼을 먹이고 다음 날에는 사도평을 쓸 작 정이었다. 그래서 막 단에 올라가 신을 청하는데, 홀연 한 가닥 검광이 날아오며 열두 세살 정도 의 소녀가 나타나지 않는가. 보아하니 나이는 어리디어리지만 검술은 매우 대단하였다. 소녀는 단 번에 먼저 악금빈의 <섭혼병(攝魂甁)>을 깨고 진단신(鎭壇神)을 쫓아버렸다. 악금빈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때마침 <만묘선고>가 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를 만나러 갔다가 가까스로 그의 위험을 풀어 주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소녀를 상대하였다. 결국 <만묘선고>의 두 가지 법보를 망가뜨리고 서야 겨우 그 소녀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왕선인의 아들은 그 소녀가 구해가 버린 것이다. 악금빈은 별안간 낙심하여 의기소침해졌다. 신영검공을 세 번이나 실패한 다음부터는 다시는 연 마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때 <만묘선고>에게 제자가 없었기 때문에, 악금빈은 사도평을 그녀 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법원에게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재삼 당부하였다. 당시 <만묘선고>는 일이 있어 자주 바깥 출입을 했기 때문에 돌볼 수가 없어 사양했다. 그래서 악금빈은 할 수 없이 한 농부 집에 맡기고는 화산을 떠나 형산으로 가서 은거하다가 사도평이 다 자란 다음에 그를 데려가려고 하였다. 이윽고 팔 년이 지난 후에 사도평을 보러 갔더니 그 농부의 전 가족이 모두 죽어버렸고, 탐문 해 보았으나 행방을 알 수도 없었다. 다행히 그를 발견했는데 그는 워낙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고, 혈서도 태워버렸기 때문에 이전의 일을 알 수가 없어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삼 년이 지나갔다. <만묘선고>는 각종 선약을 구했고, 법보, 비검 등을 다 수련하였으며, 몇 명의 선배와 친구들과도 연락을 취했다. <만묘선고>는 가끔 부득이 외출해야 할 때도 집을 지킬 사람이 없어 점점 불편을 느끼었으므로 자질이 좋은 제자를 한 명 구하려고 했으나 쉽게 이 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뒷산에 갔다가 사도평이 나무 밑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만묘선고>는 그를 깨워 이름을 물어보고서야 그가 십이 년 전에 악금빈이 왕선인의 집에서 구 해낸 사도평이란 것을 알았다. <만묘선고>는 법원과의 인과(因果)가 있으므로 자세히 물어보았으 나 사도평은 그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지 어려서 한 도인이 자기를 농가에 맡겼는데 사오 년이 지나서 마을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모두가 죽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전래의 보검을 가 지고 곳곳을 돌아다니던 사도평은 안휘성(安徽省) 어느 부잣집에서 소를 길러주고 있었다. 사도평은 역시 수도한 사람의 후손인지라 어려서부터 책을 읽거나 도를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어쩌다 그는 황산 구화(九華)에 선인이 내왕한다는 것을 알고는 고생고생하여 약간의 돈과 마른 양식을 마련하여 구화로 떠났다. 그래서 스승을 찾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이번에는 다시 황 산으로 와서 온 산을 뒤졌지만 한 사람의 이인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차 <만묘선고>의 모습 이 보통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곧 꿇어앉아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하였다. <만묘선고>는 그를 데리고 오운보로 가서 시험을 해보니 놀랍게도 매우 총명한지라 매우 흡족 하여 전력을 다하여 비급을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나 <만묘선고>는 또 설망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무심결에 두 제 자의 장래를 점쳐보니, 어찌 된 영문인지 괘상에 사도평이 자기와 상극(相剋)이지 않은가! 계속 몇 번을 점쳐 보았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그후부터 <만묘선고>는 사도평을 별로 좋아하지 않 았다. 그러나 그가 잘못한 일이 없기 때문에 괜히 그를 없애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만묘선고는 별로 대수롭잖은 생각에서 사도평을 데리고 찬하대사를 찾아가게 되 었다. 그런데 찬하대사가 사도평을 보더니 그의 자질을 퍽 칭찬했다. 그래서 <만묘선고>는 그냥 인사치례로 사도평을 잘 지도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사도평은 스승의 말을 진짜로 믿고, 몇 차례 찬하대사에게 가더니 어느 덧 아미파의 연검 비결을 배웠던 것이다. "그후 몇 년 동안 나는 더 이상 놈에게 도법을 전수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녀석은 고심 노력하여 이 취규검을 매우 신묘할 정도로 연마하였지 뭐냐. 다행히 그놈이 도망할 때 내가 이 검을 빼앗았으니 안심이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으면 괜찮지만 만약 네가 가지려면 특별히 주 의해야 하느니라. 내가 너에게 전수한 검법을 다시 사십구 일 동안 연마하면 그것을 너와 합일 (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이후 우연이라도 다시 그 천벌받을 놈을 만나게 되면 절대로 보이 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놈이 칼을 빼앗아 갈 것이며 또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른다. 내가 이 번에 서장으로 가면 빨라도 한 달이 걸릴 것이다. 내가 점으로 알아낸 그 천벌을 받을 놈과 한패 인 두 음인은 매우 대단하므로 너는 결코 적수가 되지 못하느니라. 내가 떠난 후 너희 부부는 동 굴 문을 꼭 닫고 검법만 연마하거라. 그들이 취규검도 찾고 복수도 하러 올는지 모르니 절대로 한 발짝도 나가선 안 된다. 너희들이 나가지만 않는다면, 내가 법술을 써서 동굴 입구를 봉쇄할 것이니, 그러면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라." <만묘선고>는 또 유연랑에게 약간의 도법을 전수해 주었다. 설망과 유연랑은 꿇어앉아 감사드 렸다. <만묘선고>는 두 사람에게 절대로 동굴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다시 한 번 분부하고는 소 매를 떨쳐 온 동굴에 광채를 퍼뜨리며 공중을 뚫고 사라져 버렸다. 설망은 <만묘선고>가 전수해 준 구결대로 그 취규검을 아침저녁으로 연마하였다. 사도평이 혼미한 가운데 미진기를 꺼내들고 자령곡을 생각했을 때, 갑자기 눈앞에는 금빛 채운 이 어지럽게 날리며 몸이 마치 구름을 탄 듯 공중에 올랐다가 순식간에 땅에 내려왔다. 귓가에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확실히 들리지는 않았다. 몸의 상처에 바람끝이 한 번 닿으니 온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깨어나 보니 자기가 누워 있는 곳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편안하기 이를 데 없었고, 코끝에는 달콤한 향기 마저 느껴졌다. 어머니 뱃속을 나오자마자 외톨박이가 된 사도 평, 어려서 스승의 밑에 들어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언제 이런 편안함을 느껴보기나 했던 가. 이것은 꿈이다. 인간세상에서 당한 고생을 꿈 속에서나마 보상받는 거다. 사도평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잠시라도 더 이 편안한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심정에서 눈을 뜨기 조차 싫었다. 홀연 옆에서 여인의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님이 남겨 놓으신 영단을 먹였으니 지금쯤은 깨어나야 하는데, 어째서 아직까지도 깨어나 지 않지?" 그러나 다른 여인이 말했다. "안색이 빨갛게 돌아왔으니 우선 가만히 놔둬. 좀더 자게 두면 저절로 깨어날 거야. 다행히 그가 기회를 빨리 잡았고 근기가 두터웠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늦었다면 설혹 영단이 있어도 폐인 이 되었을 거야." 그 다음 말은 속살거림처럼 낮아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가 매우 고운 것이 어쩐지 귀에 익었다. 사도평은 눈을 감고 조용히 그 두 여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방금 억울하 게 두들겨맞은 일이 생각나면서 금방 전신에 통증이 밀려옴을 느꼈다. 그는 숨이 탁 막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번쩍 눈을 떠 보니,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자 기가 부드러운 요 위에 누워 비단 이불을 덮고 있지 않은가. 석실은 옥과 같이 온통 환하고,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러 사람을 취하게 만들었다. 방 안의 갖은 치장은 화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하였다. 그리고 진자령, 진한악 자매가 자기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도평은 자기 몸의 상처를 만져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온몸에 나 있어야 할 상처가 깨끗하게 없어져 있었다. 조금 전의 일을 생각하니 흡사 한바탕의 악몽 같았다. 그때에야 그는 비로소 자기 가 미진기의 덕분에 살아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진씨 자매에게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하여 바닥에 내려가 절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자기가 벌거벗은 채 이불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불 속에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제자 사도평은 두 분 선고께서 주신 미진기로 죽음에서 살아났으니, 그 은혜가 말로 다 할 수 가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옷을 돌려 주시어 제자가 침상에서 내려가 절을 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한악이 웃으면서 언니에게 말했다. "봐요 언니, 저 사람은 자기가 입던 거지옷을 아까와 하잖아!" 자령은 동생을 한번 흘겨보고는 정색을 하면서 사도평에게 말했다. "당신이 어젯밤 자령곡을 떠나신 후 우담대사와 하고(霞姑)께서 오셔 가지고 당신이 매우 위급 하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동생은 당신이 왜 미진기를 사용하지 않는가 안타까워했지요. 당신을 구 하러 가려고 했으나, 대사께서 말씀하셨어요. 당신의 재난이 끝날 때가 됐으며 잠시 후면 스스로 올 것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곳으로 온 후 허비랑이 쫓아오면 우리의 두 가지 장 안법이 그녀를 속이지 못할까 봐 하고더러 그녀의 자운장(紫雲障)을 우리에게 빌려주라고 하셨습 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재삼 한 마디 분부를 하시고는 두 분은 산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자령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신취에게 명령하여 사도평을 구하러 가게 하려고 하는 참인데 사 도평이 미진기를 써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교근독이 얼마니 지독했든지, 사도평의 상처는 말이 아닐 지경이었다. 바람이 한번 불자 그는 곧바로 기절해 버렸다. 그의 옷은 채찍에 맞아 이미 너덜너덜한 넝마조각과 같았고, 온 몸은 피와 멍으로 엉망이었다. 자령이 영단을 먹이고 옥리고(玉鯉膏)를 바르지 않았다면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이미 인사불성이었어요. 우리 자매는 우담대사를 비롯해서 <숭산이로>와 <동해삼선>에 게 재삼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 구할 일이 급해서 하는 수 없이 당신을 안고 굴로 들어왔지 요. 그래서 영천(靈泉)으로 씻기고 영단을 먹이고 옥고를 바른 후에 방으로 옮겨 당신이 깨어나길 기다린 거랍니다. 당신은 머리에 채찍을 많이 맞았기 때문에 뇌진탕을 일으켰어요. 만약 당신이 도행의 근기가 단단하지 않았다면 회복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지금 비록 상세는 회복되었지만 진기가 흩어져 계속 며칠을 요양해야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매는 당신과 인연이 매우 깊 답니다. 이젠 이미 한집안 식구처럼 되었으니 은혜가 어떻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도록 해요. 침 상 곁에 아버님께서 남겨 두신 의관이 있으니 잠시 입도록 하세요. 여기에 우담대사께서 서신을 남겨 두셨으니 읽어보시면 전인후과(前因後果)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자매는 계속 입구로 가 서 자운장을 펼쳐 허비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겠으니, 당신은 우선 요양을 하고 계세요. 잠시 후 다시 와서 당신 이야기 상대가 되어 드리겠어요." 말을 마치자 자령은 편지 한 통을 꺼내 사도평에 주고 동생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사도평은 평소에 몸가짐이 매우 단정하여 여지껏 여색을 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진씨 자매를 만난 후부터 자신도 모르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한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의 매혹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돌이켜 보니 도행이 천박하고 자신이 너무 미천한지라,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높은 나무가 아닌가. 어젯밤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져 동굴로 돌아갔다가 죽도록 얻어맞고는, 그것 이 뜻밖의 사태로 전개되어 이 천국 같은 곳으로 와서 그녀들과 같이 지내게 될 줄이야! 사도평 은 자령의 말을 모두 듣고서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사도평은 숨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천천히 우담대사의 서신을 펴 들었다. 읽어나가는 동안 저 절로 마음이 요동치고 눈앞이 아른거렸다. 사실인지 꿈인지 자신도 감히 단정을 하지 못할 지경 이었다. 재빨리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처음부터 한 자 한 자 새기며 읽었다. 진씨 자매의 어머니 보상부인은 본시 천호(天狐)였는데, 나이를 오래 먹다 보니 영이 통했고 신 통광대해졌다. 그녀는 평소에 전적으로 채보(採補)로써 수련을 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근기가 두터운 젊은이들을 유혹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계화산(桂花山) 복선담(福仙潭)의 홍화모모(紅花姆 姆)와 가장 친했다. 홍화모모가 천서(天書)를 얻고 개사귀정(改邪歸正)하여 기회와 인연이 오기만 하면 즉시 겁(劫) 을 벗어나 비승할 거라는 말을 듣자, 자기의 향락도 잠시뿐이고 결국은 하늘의 책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홍화모모에게 개사귀정을 할 뜻을 피력했다. 이때 그녀는 한창 진씨 성을 가진 청년에게 빠져 있었다. 그 청년을 너무 사랑하였기에 두 번이나 진음(眞陰)을 잃어 자령 자매를 낳았던 것이다. 그 청년의 이름은 진어(秦魚)인데, 운남 웅사령(雄獅嶺) 장춘암(長春岩) 무우동(無憂洞)에 있는 당시 청성파의 사조 <극락진인>, 지금은 <극락동자>라고 불리며 이미 진선(眞仙)이 된 이정허 (李靜虛) 문하의 말대(末代) 제자였다. 그는 황산에 약초를 캐러 왔다가 천호의 마음에 들어 굴로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극락진인> 이정허는 교율이 매우 엄했다. 그는 제자가 도행이 견고하지 못해 스스로 욕을 당 한다고 탓하여 구해 주지도 않았다. 진어는 자령곡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천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진양(眞陽)을 소진해 버렸지 만, 천호도 진음을 잃어버렸다. 그 해 그의 차녀 한악이 두 살이었다. 천호는 진어를 만난 후부터 계속 그와 같이 편안한 복을 누리며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진어가 근행(根行)이 두터우며 도를 닦는 사람인 줄만 알았지 <극락진인>의 제자 인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어느날 그녀는 홍화모모에게서 천서를 빌어와 진어와 같이 정과(正果)를 수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녀가 떠난 지 이 틀 후였다. 진어는 그동안 채약하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천호의 법술에 홀려 있었는데, 그녀가 떠나고 나자 몹시 심심했다. 자기가 오랫동안 입정(入定)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나 곧 가부좌를 틀고 좌선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정신집중이 매우 어려웠다. 겨우 마음을 잡아 입정하여 신지(神智)가 맑아 지자, 별안간 자기가 스승의 명령을 받고 채약하러 왔는데 어떻게 이곳에서 여러 해를 머물었는 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게다가 진양을 잃어버려 겁(劫)을 벗어나 비승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노릇을 어쩐단 말인가! 그는 당황하고 또 후회가 되어 저절로 통곡을 하였다. 그때 마침 천호가 돌아왔다. 그녀는 그가 우는 것을 보고 이미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 았다. 게다가 홍화모모가 그녀에게 진어의 내력을 말해 주어 큰 화를 자초했음을 알고 온 참이다. 만일 <극락진인>이 알면 자기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 뻔하잖은가. 두 사람은 한참 상의를 한 후, 스스로 <극락진인>에게 가서 잘못을 빌고 벌을 받자고 결정하였다. 두 사람이 이렇게 결정을 내린 직후, 뜻밖에도 <극락진인>이 자령곡 안에 몸을 나타내어 진어 에게 말했다. "나는 함부로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 문하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른 파 검선 과 달리 근행이 매우 심후하니라. 내외공행이 원만하고 상승(上升)하여 선궐(仙闕)은 못되어도 모 두 산선(散仙)은 되었다. 그렇다가 제자들을 잘못 받아들인 후부터 다시는 제자를 받지 않으려고 했었다. 너는 근기가 보통 사람과 달라 나의 도통을 전할 수는 없지만, 정과(正果)는 이룰 수 있 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천호를 만나 근본을 잊어버릴 줄이야! 물론 너희 두 사람이 전생의 악한 인연도 없지 않았지만, 너의 도심이 견고하지 못하여 극욕하는 수련이 부족한 탓이 아니겠 느냐. 나는 너희들의 생각을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네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평소에 공이 좋았음 은 인정한다. 네 처 천호도 계속 채음(採陰)하여 보양(補陽)은 했을망정, 여지껏 생(生)을 상한 적 이 없고, 또 영약을 만들어 남에게 보충해 주어 그들이 천수를 누리게끔 하였다. 지금 그녀에게 큰 재난이 임박하였다. 그러나 너와의 악한 인연을 동시에 뉘우쳤고 또 그녀의 악행이 순전히 그 녀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특별히 와서 너희 두 사람의 살 길을 가르쳐 주는 것 이니라." 진어와 천호는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극락진인>이 말을 이었다. "네 처가 홍화모모에게 천서를 빌러 갔었다마는, 각자 선연(仙緣)이 있는데 어찌 함부로 빌려주 겠느냐? 가령 빌어왔다고 해도 수련하기에는 시기가 이미 늦었느니라. 그래도 다행히 아직 십 년 이란 세월의 여유가 있구나. 천호는 이전에 제갈경아(諸葛警我)에게 마음이 쏠린 적이 있을 것이 다. 그런데 그가 현진자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는 건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세 번이나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천년자하초(千年紫河草)>를 캐도록 도와주기까지 했었지. 이리하여 현 진자나 그 제자와 인연을 맺어 친구가 되었을 터이니, 만 십 년이 지났을 때 나의 서신을 가지고 현진자에게 가서 그녀의 병해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두 번째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니라. 그 러나 너는 법조를 어겼으니 절대로 나에게 돌아올 수 없다. 그러니 계속 자령곡에서 수련을 하거 라. 너희 부부는 각자의 배운 바를 전력을 다해 두 딸에게 전해 주어라. 훗날 내 벗인 장미진인 문하에서 그 애들이 크게 필요할 것이니라. 만 십 년이 지나면 너는 다시 운남으로 돌아와 내 암 전(岩前)에서 스스로 병해하라. 이때 내가 너를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겠노라. 그러나 네 처 는 병해를 빌어 두 번째 재난을 피할 수 있어도, 갓난아이가 되자마자 세 번째 재난이 또 닥치게 될 것이다. 임인(壬寅)년, 임인월, 임인일, 임인시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근행이 매우 심후한 인재 만이 네 처를 재난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다. 내가 현진자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미 설명을 하였다. 때가 되면 현진자가 스스로 알아서 그 사람을 물색하여 재난을 벗어나게 도와줄 것이다. 나의 말을 꼭 기억하도록 하라! 조금이라도 태만 소홀하게 되면 이전의 공행(功行)이 모두 물거품 이 되느니라." <극락진인>은 말을 마치자 서신을 한 통 남겨 놓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진어와 천호는 황망히 하늘을 향해 꿇어앉아 감사를 드렸다. 이때부터 부부는 각자 범심(凡心)을 씻고 전력을 다하여 두 딸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만 십 년이 되자, 부부 두 사람은 각자 병해하러 떠나야 했다. 이때 자령 자매는 이미 아버지 어머니의 능력을 모두 전수 받은 실력의 소유자였다. 천호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모든 법보를 물려주고, 또 계곡 입구를 안개 구름으로 봉쇄해 버렸다. 그리고 두 딸에게는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그녀는 또 천년신취에게 두 딸을 잘 보살피면 훗날 자기가 도를 이루고 와서 데리고 함께 비승하겠다고 했다. 그 천년신취는 지난날 제갈경아를 구해 주고 그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천년신취는 자신의 장래 를 알고 있었고 천호가 도와주지 않으면 탈태환골(脫胎換骨)할 수 없음도 알았으므로 고개를 끄 떡이며 작별하였다. 그래서 계곡 안에서는 신취가 보호하고 계속 밖은 법술을 써서 안개 구름으 로 봉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근본을 아는 선배 검선 몇을 제외하고는 한 발짝도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처럼 제반 단속을 끝낸 천호는 비록 근래에 정진하느라고 자식의 정을 멀리했을망정 그래도 헤어지는 것이 몹시 섭섭하였다. 더구나 남편인 진어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별의 눈물을 뿌린 후 각자 제 갈길로 떠났다. 이윽고 천호가 병해하자 현진자는 그녀의 신체를 화장한 다음, 작은 동굴을 물색하여 그녀가 그 안에서 수련하도록 해주었다. 밖은 풍뢰(風雷)로 봉쇄하여 사마들의 침입을 막았다. 몇 년이 지나 자 현진자는 그녀를 구할 사람이 사도평이란 것을 알았다. 또 사 도평이 두 딸과 인연이 있으며 지금 허비랑의 문하라는 것을 알고는 암암리에 준비를 하였다. 현진자는 <괴규화> 궁신 즉 능혼을 피하여 구화산에 살고 있는 추운수에게 비검전서를 보내어 사도평과 진씨 자매들이 서로 만날 수 있게 주선하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는 당사자인 두 자 매가 찾아왔을 때 자초지종을 설명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한악은 비록 도술은 신통하였지만 나이가 어려서 현진자의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하였 다. 그러나 자령은 부모가 모두 진원(眞元)을 잃어버려 정과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자 몹시 마음이 아팠다. 자기는 날 때부터 사람이었으니 어머니처럼 전겁(轉劫)을 할 필요가 없다. 또 부모가 모두 선인인 덕택으로 자기도 선골을 타고 났고 많은 도법을 배웠으니 부족할 게 없 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집을 가야 하다니! 자령은 상심한 나머지 현진자 앞에 꿇어앉아, 시집가 지 않고 어머니를 구할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울면서 애원하였다. 현진자가 웃으며 말했다. "도를 배워 비승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가 노력하며 수련하는 덕분이니라. 유(劉), 번(樊), 갈(葛), 포(鮑) 등 많은 선인들이 모두 부부가 함께 수련하여 같이 입적하여 장생하였다. 네가 알고 있는 아미파 교조 <건곤정기 묘일진인> 부부, <숭산이로> 중의 추운수 부부, 그리고 이미 산선이 된 <괴규화> 능혼 부부들도 모두 부부가 함께 수련하였느니라. 모든 것이 자기 하기에 달렸지. 결혼 하는 것이 도를 배우는 데 무슨 장애가 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사도평은 비록 이파 문하 지만, 그의 심행(心行)이 단정하고 근기가 매우 두텁다. 또 유명한 검선의 가르침을 받아 조석으 로 수련하니 머지않아 개사귀정할 것이다. 그가 바로 사인정명(四寅正命)이고 네 어머니와 상생상 극(相生相剋)이니, 이 세 번째 재난을 해결하는 데 그가 없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너희 자매는 그와 인연이 맺어진 것이 삼생(三生)이 넘었다. 너희가 정(正)을 향하여 착실히 수련만 한다면 훗 날 함께 정과를 얻으리라. 너희 어머니가 매우 어렵게 이천 년 동안 수련한 공의 성패가 너희 부 부 세 사람에게 달렸다. 태만으로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느니라." 자령 자매는 현진자를 가장 신임하고 있었다. 이 말을 듣고서야 이전에 인연이 이미 정해졌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또 어머니를 구하는 일이 중요하였으므로 고맙다는 인 사를 하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저희는 계속 자령곡에서 은거하여 진인과 백진인 그리고 몇 분의 어머님 친구 외에는 여지껏 낯선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사도평이란 분을 본 적도 없고, 또 경박하게 먼저 가서 만나기 도 거북합니다. 어쩌면 저희를 부끄러움도 없는 계집으로 생각할는지 모르니, 바라옵건대 진인께 서 주선을 해주십시오." "그것은 별로 어렵지 않느니라. 사도평은 최근 허비랑의 의심을 사서 날마다 걱정과 고민에 빠 져 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한 쌍의 흰토끼는 비록 짐승이지만 이미 영통(靈通)하였다. 네가 돌아가 그 토끼에게 연유를 말하면 알아서 그를 데리고 올 것이다. 추운수가 너희들과 가까운 구 화산에 있기에 내가 이미 비검전서로 그에게 부탁을 하였느니라. 너희들이 낯선 사람에게 혼인 이야기를 하기 거북하니, 내가 우담대사에게 자령곡으로 한 번 가도록 부탁하겠다. 나는 네 어머 니와 나이에 상관없이 오랜 친구처럼 지낸 처지고 너희 자매들도 머지않아 아미 문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니, 나는 너희를 조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다. 다음부터는 진인이라 부르지 말고 세백 (世伯: 아버지의 친구를 부르는 말)이라 부르도록 해라." 자령 자매는 다시 무릎을 꿇고 세백을 뵙는 예와 함께 감사를 올렸다. 두 자매는 그리고 나서 계곡으로 돌아왔는데, 이틀이 지나도록 차마 흰토끼에게 사도평을 데리고 오란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산란하고 거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벽 위로 올라가 바람을 쐬려고 했다. 흰토끼는 본래 매우 영리하고 사람의 뜻을 잘 알아차렸다. 두 자매가 집에 있을 때도 계속 따라 다녔고, 절벽 위에도 따라 올라가곤 했다. 이윽고 절벽 위에 올라섰을 때, 문득 저쪽에서 추운수 가 걸어왔다. 그는 이미 두 여자의 전인후과를 알고 있었다. 자령 자매가 인사를 하자, 추운수는 현진자가 무슨 소리를 하더냐고 물었다. 두 자매가 수줍어 하며 모두 이야기하자, 추운수는 껄껄 웃고 나서 말했다. "너희 젊은이들은 아무래도 부끄럽겠지. 너희들이 찾아가기 미안하다면, 내가 대신 그를 불러오 면 어떻겠느냐?" 그리고는 흰토끼의 몸과 발 위에 도부(道符)를 쓱쓱 그려 주더니 두 자매에게 한 마디 분부를 하고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흰토끼가 사도평을 교묘하게 데리고 왔을 때도 두 자매는 여전히 말을 꺼내기가 거북하였다. 우 담대사가 머지않아 올 것이라고 현진자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녀가 올 때만을 학수고대하고 있 었다. 사도평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과연 우담대사가 도착했다. 두 자매가 공손히 절을 하자, 우담대사가 말했다. "현진자의 비검전서를 받아 보았다. 사실은 내 제자 제하아가 안탕(雁蕩)에서 세 마리 못된 교룡 (蛟龍)과 싸우고 있어서 본래는 그 애를 도와 못된 교롱을 죽인 후에 다시 와서 너희 자매의 혼 사를 주선하려고 했으나, 뒤에 점괘를 보니 사도평이 지금 큰 난을 당하고 있지 않겠니. 그러나 잠시 후에 너희가 준 미진기를 써서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는 이미 몸에 중상을 입었으니 너희 자매가 영단을 먹이고 선약을 발라야 한다. 그러려면 발가벗은 몸을 대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너희들이 불쾌해 할 것 같아 특별히 미리 와서 몇 마디 부탁하는 것이다. 후에 부부가 될 것이고 또 환난 중에 있으니 더 이상 꺼릴 것이 없느니라." 바로 그 무렵, 교룡과 싸우던 제하아는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교룡을 쉽게 제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까운 황산에 달려가 찬하대사에게 연마신침(煉魔神針)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찬하대사가 말했다. "내 연마침은 교룡을 죽일 수 있지만, 안호(雁湖) 밑의 홍학(紅壑: 늙은 구렁이)에 잠복하고 있는 악곤(惡鯤: 못된 큰 물고기)은 죽일 수 없다. 네가 침으로 끝내 교룡을 죽이면 그 악곤이 나와서 너를 괴롭힐 것이다. 그 악곤이 너를 상하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바람에 홍수가 나서 부근 수 백 리는 물에 잠기게 되어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 방금 네 사부께서 자령곡 안으로 가는 것을 보 았다. 아마도 천호 보상부인의 두 딸 진자령 자매를 만나고 있을 터이니 가보도록 하여라. 사부와 같이 가서 그 악곤을 없애버려 백성들이 언젠가는 침몰당하게 되는 고통을 면케 해주어라." 제하아는 이 말을 듣자 즉시 찬하대사와 작별하고 동굴을 나왔다. 그리고는 자령곡으로 날아가 서 우담대사와 자령 자매를 만났다. 대사는 제하아에게 자운장을 자령자매에게 빌려주라고 하였 다. 그리고는 안탕의 상황을 물었다. 제하아는 땅 밑에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고 하면서, 악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으니 늦게 가면 큰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담대사는 사도평이 오기를 기다릴 수가 없어 서신 한 통만 남겨 두고 제하아와 같이 안탕으로 떠났던 것이다. 자령 자매는 꿇어앉아 대사를 전송하고 나서 자운장을 펴보았다. 마치 한 조각 극히 얇은 채사 (彩紗) 같은데, 오색이 알록달록하고 마음먹는 대로 변화할 수 있었다. 얇고 가벼운 안개나 연기 같이 공중에 펼쳐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여간 진기한 보물이 아니었다. 이처럼 두 자매가 자운장을 보고 있을 때 사도평이 미진기를 써서 돌아온 것이다. 오운보 주변 結同心 綠證三生石 急報仇 情深比翼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선골로 생긴 데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전수를 받았고 계곡에서 수련 에만 전념하였을 뿐 여지껏 속세의 생각이 조금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자령 자매인데, 현진자로 부터 전생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계곡에서 우연히 사도평을 만난 후부터는 그녀들의 마음 속에 미묘한 동요가 일어났던 것이다. 더구나 그의 이마에 부정한 기색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재난을 당할 것을 알자, 이젠 동요 정도가 아니라 적극 개입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래서 미진기를 주었던 것인데, 웬지 그를 보낸 뒤에도 계속 마치 무슨 물건을 잃어버린 듯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사도평을 다시 보았을 때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안색이 백지장 같을 뿐 아니라 두 눈이 꼭 감 겨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수려한 용모와는 딴판이었다. 너무나 참혹하고 가련하다는 생 각에 앞뒤를 재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두 자매는 급히 사도평을 부축하여 뒷동굴로 데리고 들어갔다. 다 헤어져 버린 옷을 조심스레 벗기고는 알몸을 영천으로 씻었다. 그리고는 자령의 침실로 들고 들어가 선단을 먹이고 상처에다 영약을 발랐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도평이 정신을 차리자 비로소 부끄러운 생각이 났던 것이다. 두 자매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가 자운장을 펼쳤다. 순간 한 줄기 오색 채운이 손을 벗어나 위로 뻗쳐 올라갔다. 자령은 그 자운장이 신묘한 효능을 지니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자매는 다시 뒷동굴로 들어와 사도평이 누워 있는 방 앞으로 왔다. 그러나 약속이나 한 듯이 머 뭇거리며 누구도 먼저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사도평은 우담대사의 서신을 두 번이나 읽고는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령 자매가 두고 간 의복을 입어보니 신통할 정도로 몸에 맞았다. 그래서 두 자매를 찾아서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감사하려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참이었다. 한악은 언니인 자령이 걸음을 멈추면서 도리어 자기더러 먼저 들어가라고 하자, 응하는 척 앞으 로 걸음을 내딛다가 갑자기 등을 힘껏 밀었다. 갑자기 떠밀린 자령은 앞으로 들어가면서 다급한 참에 한손으로 동생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한악도 동시에 실내로 들어오고 말았다. 자령은 고개를 돌려 동생을 꾸짖으려고 하려다 사도평이 이미 옷을 다 차려입고 자기들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을 보고는 급히 정색을 하고 답례를 하였다. 한악은 두 사람의 어색하고 허둥지둥하 는 모양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허리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다. 사도평이 두 자매를 보니 언니는 태도가 정숙하고 용모가 눈부시 며, 동생은 애교가 넘치고 명 랑한지라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비록 인연이 정해졌고 <삼선이로>가 주선을 하긴 하였지만, 자기는 어디까지나 수도하는 사람이며, 또 두 여인은 생명의 은인이 아닌 가. 그러나 상대방이 먼저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상 자기도 그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 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얼굴 마음을 가다듬고 정중한 얼굴로 말했다. "두 분 사매의 보살핌으로 죽음에서 살아났으니, 그 은혜가 하늘과 같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돌 아갈 집도 없어졌습니다. 만약 불쌍히 여겨 이곳에 머무르게 해주신다면 죽어서도 이 은혜를 잊 지 못할 것입니다." 자령은 사도평에게 앉으라고 권하고 대답하였다. "우리 자매는 어려서부터 여기에 살았어요. 부모님께서 병해한 후부터 매년 성묘하러 가는 길에 몇 분 노선배들을 배알하는 것 이외는 다른 사람과 내통을 한 적이 없답니다. 방금 우담대사의 서신을 읽어보셨을 줄로 생각합니다만, 우담대사께서는 교룡을 처치하는 일이 급해서 당신이 오 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답니다. 비록 우리 사이의 인연이 이미 정해졌다고 하지만, 지금 이 계곡 에는 우리 자매 둘뿐이니 아무래도 적절하지 못한 것 같군요. 아버님은 이미 <극락진인>의 도화 (渡化)를 받으셨지만 어머님은 재난이 아직 끝나지 않아 가엾게도 천 년 수련의 위업이 하루하침 에 달려 있으니 이 무거운 부담이 훗날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답니다. 그 일을 생각만 하면 마음 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아무튼 계곡 안에는 조용한 방이 적지 않으니, 우리 세 사람은 부부의 정 으로 같이 지내기로 해요. 다만 동침은 하지 않고 남녀의 사정(私情)을 버려 훗날 함께 정과를 이 루도록 하는 겁니다. 그게 어떻겠어요?" 사도평은 이 말을 듣고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두 분 사매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삼선이로>나 우담대사께서 인연을 말씀하셨지만, 여기 에 계속 머물 수만 있다면 하인노릇을 해도 과분하지요. 더군다나 두 분 사매께서 부부의 정으로 대해 준다니 더욱 감격스러워 목숨을 버려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감히 망녕 된 생각을 품어 사매의 도행을 망치고 나 자신을 타락하게 하겠습니까? 자령 사매는 마음을 놓으 십시오. 어머님의 일은 때가 되었을 때 만약 힘이 모자라면 목숨을 버려서라도 전연(前緣)을 끝나 게 해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만약 이 사도평이 말과 마음이 서로 다른 짓을 하면 천벌을 달게 받을 것입니다." 사도평은 계곡에 들어온 후부터 항상 자령 자매를 같이 호칭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시적으로 마음이 바빠 마지막 맹세를 할때 한악을 빼어버리고 자령한테만 이야기한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사도평의 입장에서 보면 무심결에 저지른 실수였다. 자령의 도행은 한악보다 더 정진되어 있어, 무슨 일이든 느낌으로 전인(前因)을 예측할 수 있었 다. 그녀는 사도평의 말이 마음에 약간 걸렸다. 그런 대로 사도평에게 어머니를 대신하여 감사를 하고는 동생을 돌아보았다. 한악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걸상에 앉아 있었 다. 자령은 몰래 한숨을 지었다. 한악은 두 사람의 의례적인 대화가 끝난 것을 보자 앞으로 나서서 사도평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사도평은 자기가 어렸을 대 당한 재난과 스승 밑에서 도를 배우며 고생한 일, 그 리고 친부모의 종적은커녕 자기의 근원조차 모르는 이유 등을 세세하게 말해 주었다. 한악은 대목대목에서 가슴이 아파 눈물까지 흘렸다. 또 찬하대사의 문하에는 여제자가 몇 명이 나 되는가, 다들 예쁜가 어떤가, 검술이 고강한가 어떤가 등등 꼬치꼬치 물었다. 그리고는 사도평 더러 얼마 있다가 자기를 데리고 가서 그녀들과 사귀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사도평은 비검을 <만묘선고>에게 빼앗긴 일을 이야기했다. 검술은 <만묘선고>가 전수해 주었 지만 그 보검은 어려서부터 가보로 전해 받은 거라고 하자, 한악은 발끈 성이 나서 언니를 보고 지금 당장 가서 탈취해 오자고 했다. 자령이 말했다. "너 정신 나갔구나. 우담대사께서 우리 세 사람은 당분간 나가면 안 된다고 하시는 말씀을 못 들었니? 그 보검을 허비랑이 뺏아 갔다면 틀림없이 그녀한테 있을 거야.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 닌데, 어떻게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다는 게냐. 그녀의 재주가 고강하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 왔어. 우리가 상대가 될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니. 좀더 두고 보자꾸나." 한악은 자령이 비검을 탈취하러 가지 못하게 하자 성이 나서 얼굴이 빨개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도평은 한악이 뾰로통해 있는 모습을 보니 천진난만하여 여간 사랑스럽지 않았다. 가엾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화제를 바꾸어 이번에는 대가장과 성도의 싸움 이야기를 하자, 자령조차 넋을 잃고 빨려들었고 한악은 금세 화를 풀고 재미있어 했다. 또 그녀는 사도평에게 신취를 보여 주겠으니 나가자고 성화를 댔다. 자령이 말했다. "좀 쉬게 하여 기운을 차리게 해드릴 수 없니? 이이는 가슴과 머리에 중상을 입었으니 며칠 쉬 셔야 할 거다." 그리고 두 알의 단약을 꺼내 주며 사도평에게 말했다. "약을 잡수신 후에 눈을 감고 조용히 마음을 편안하게 하세요. 운기조식을 하면 안 돼요. 도리어 더 나빠지니까. 칠 일이 지나면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우리 자매는 가서 수련을 한 뒤 다시 오겠 어요." 그리고는 한악과 함께 걸어나갔다. 사도평은 두 자매가 나가자 생각에 잠겼다. '이거야말로 화로 인해 복을 얻은 셈이 아닌가. 두 아가씨는 모두 도행이 높고 깊으며 천진순결 하다. 훗날 그녀의 힘을 빌어 정과를 이룰 수 있을 테지. 가령 정과를 이룰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두 선녀 같은 여자와 오랫동안 같이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다만 도행이 변변하 지 못한 내가, 보상부인의 그 재주에 또 <동해삼선>, <숭산이로>의 도움이 보태어졌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그러나 나는 이 두 자매의 은혜를 입었고, 또 혼인을 한 것과 다름없는 입장이 아닌가. 사위도 반 자식이며, 가령 그녀의 어머니를 구하다가 죽는다 해도 응당한 노릇이다. 하물며 꼭 죽는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잖는가. 이들 두 자매는 이토 록 효심이 갸륵한데 나는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사조차 알지 못하니, 어찌 사 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견딜 수 없이 비감이 들면서 저절로 온 몸에 식은땀이 났다. 문득 이전의 일이 기억났다. 스승을 섬기기 전에 <만묘선고>가, 자기에게 내력을 물은 적이 있 었다. 그녀의 말투로 보아 아마도 자기를 농가에 맡긴 도인을 아는 것 같은 눈치였다. 아직 스승 의 총애를 잃지 않았을 때 몇 번이나 물은 적이 있었지만, 만묘선고는 항상 어물어물 넘어가곤 했다. 그래서 사도평은 자기의 내력에 무슨 비밀이 감추어져 있어 말하기 싫어하는구나 하고 생 각했던 것이다. 후에도 끈질기게 물어보니까 마침내 만묘선고는 으름장으로 질문을 막으며, 한 번 만 더 캐묻는다면 쫓아내겠다고 위협했다. 그 후로는 겁이 나서 더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럴수록 의심은 더해 갔을 뿐이었다. 세상에 불 충불효한 신선은 없는데, 스승은 어째서 근본을 잊으라고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번은 스승의 명을 받아 바깥세상으로 나갔을 때, 원래 살던 곳으로 가서 알아보았지만 끝내 도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스승만이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듯하였다. 도를 이룬 후에 기회 를 보아 다시 눈물로 간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점점 스승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더욱 물어 볼 수 없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는 사제간의 관계마저 끊어졌으니, 다시 가서 물어본 다고 해도 어디 말해 줄 스승인가! 자령 자매는 신통력이 대단하고 또 <삼선이로>를 알고 있으니, 이들이 자기 대신 <동해삼선> 이나 <숭산이로>에게 부탁하여 전인(前因)을 알 수 있으면 부모를 찾기 쉬울 것이다. 아니면 원 래 살던 곳 근처에 있는 모든 절을 찾아가서 자기를 맡긴 도인을 찾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사도평은 이렇게 생각하다 말고 자기 손에 두 알의 단약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다. 약 먹는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탁자 위의 옥주전자에 담겨 있는 영천을 두어 모금 마시고 단약을 삼켰다. 그리고는 침상에 누워 정양을 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났다. 문득 한 줄기 훈훈한 향기가 코를 찌르며 누가 두 손으로 자기 눈을 가렸다. 손으로 더듬어 보 니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이 마치 솜과 같았다. 이어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이 설랜 사도평이 얼른 손을 밀어젖히고 눈을 뜨니 한악이 살금살금 들어와서 자기한테 장 난을 친 것이었다. 사도평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아리따운 모습을 보자 감정을 억제 할 수 없어 두 손을 잡아 그녀를 자기 옆에 앉히며 물었다. "언니는?" "어쩜 잠시도 언니를 잊지 못하는가 봐. 저는 어려서부터 장난 꾸러기지만 언니 손에 자랐고, 또 부모님의 유명(遺命)이 있어 언니 말을 안 들을 수 없어요. 그러나 언니는 참견이 너무 심해요. 한 번도 저 혼자 밖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는 걸요. 자기는 하루종일 수련만 하고 좀처럼 나들이를 하지 않지만, 저는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에요. 다행히 당신이 오셔서 우리와 같이 살면 언니보다 재미있어서 좋아요. 저한테 바깥세상의 사정과 각파 검선들의 이야기도 해주시고, 또 도 우도 몇 명 소개시켜 주어 심심치 않게 해주세요. 아까도 한창 재미있었는데 언니가 그만 수련하 러 가자고 방해를 놓았지 뭐야." 한악은 짐짓 눈살을 찌푸리고 나서 금방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자매는 같이 부모님께 전수를 받았어요. 그러나 언니는 나이도 많고, 또 저보다 더 열심이 라서 도행이 약간 더 깊어요. 평소에 수련을 할 때는 연기(煉氣)를 화신(化神)시켜 귀원입규(歸元 入竅)하였는데, 오늘은 어찌 된 영문인지 가부좌를 틀고 앉자마자 이 방으로 오고 싶어 더 이상 수련을 할 수가 없지 뭐예요. 당신이 약을 먹은 후 요양해야 된다고 언니가 말하지만 않았으면 벌써 왔을 거예요. 그래도 반나절이나 앉아 있었지만 끌내 입정하지 못하여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냥 뛰어왔어요. 와서 보니 주무시고 계시잖아! 살금살금 들어와 원래는 깨우지 않으 려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까 잠든 게 아니어서 장난을 쳤어요. 신취가 보고 싶지 않으세요? 언니 가 없을 때 제가 가서 불러올게요." 말을 마치자 사도평의 두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도평은 처음으로 한악과 단 둘이 만난지라, 선녀 같은 아름다움과 훈훈한 체취와 그 천진난만 한 웃음에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으며,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래서 그녀의 두 손을 꼭 쥐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언뜻 정신이 났다. 그는 속으로 '아뿔싸!' 하고 외쳤다. 앞으로 계속 이 두 선녀와 같이 지내야 하는데, 오늘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하 루아침에 실족하게 된다. 비단 도의 기본을 망칠 뿐 아니라, 아까의 맹세도 어기게 되니 어떻게 그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한악은 지금까지 언니 말고 다른 사람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도술이 높다고 하지만 아직 천진난 만한 나이라 꺼리는 것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사도평은 이런 사실을 미처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도평이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한악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은 채 들어오지도 않고 먼 저 소리부터 외쳤다. "손님이 오시니, 주인은 빨리 나와 접대하세요!" 사도평은 그 신취가 득도한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의 비검을 뺏아간 적이 있 고 재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떡 일어났다. 곧 한악이 신취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 다. 사도평은 황급히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며, 어제는 모르고 실례를 하였는데 해치지 않아서 고맙 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신취는 긴 울음소리를 내어 화답의 뜻을 표했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았 다. 어제 절벽 위에서 들었던 소리와는 달랐다. 사도평이 신취를 자세히 보니 땅에 서 있는 모습은 독수리와 비슷하였다. 머리에서 발까지 키가 일 장 정도고 머리에서 목까지는 약 넉 자 정도며 부리는 매부리처럼 둥글었다. 정수리에는 한 움큼의 긴 털이 나 있는데 바늘처럼 꼿꼿하였다. 두 날개는 굳게 오므리고 있었으나, 보아하니 펼 치면 삼사 장 정도나 될 것 같았다. 꼬리는 오색의 무늬가 있는 깃털로써 공작과 비슷하였지만 공작만큼 길지는 않았다. 꼬리 중간 에 두 개의 붉은 보랏빛 깃털이 길게 뻗어나와 있었는데, 길이가 약 이삼 장 정도 되었다. 다리는 길이가 다섯 자 정도, 굵기는 한 자가 채 못되었다. 발가락은 네 개인데, 세 개는 앞으로 한 개는 뒤로 뻗어 있었는데, 발가락 길이는 약 한 자 정도였다. 온몸의 깃털은 온통 오색으로 알록달록 매우 화려하여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으나, 오직 다리와 발만은 칠흑처럼 시커멓고 반짝반짝 빛 나고 있었다. 강철보다 더 단단할 것 같은 몸에는 위엄과 용맹을 갖추고 있어서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한악이 말했다. "어때요? 당신은 아직 그의 재주를 몰라서 그렇지, 얼마나 대단하다고요! 여기서 동해까지 몇천 리는 되잖아요? 그런데도 우리가 어머님 산소에 갔다가, 또 현진자 세백한테 가서 좀 앉아 있다 가 와도 모두 당일 왕복이 가능하답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어요." 한 번은 동해에 다녀오는 도중에 땅에 내려서 놀다가 우연히 한 도인을 만났다. 그런데 그 도인 이 신취를 빼앗으려고 하는 바람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자령이 그 도인더러 당신에게 주는 것 은 어렵지 않지만 당신이 먼저 신취를 제압해야 할 거라고 말했다. 그 도인은 제 주제도 모르고 뭔가 주문을 외면서 그물을 하나 꺼내어 신취의 머리에다 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신취가 그 도인이 뿌린 오색 안개 속에서 발로 한 번 잡아채니 그물이 찢어져 버렸다. 도인은 성이 나서 비검과 몇 가지 요술과 법보를 다 꺼내어 덤벼들었지만, 신취는 순식간에 그 법보마저 몽땅 뺏아버렸다. 자령 자매는 옆에 서서 손끝 하나 꼼짝할 필요가 없었다. 도인은 깜짝 놀라 도망하려고 했다. 신취는 주인의 명령이 없으면 절대로 사람을 해치지 않지만, 한악은 그 도 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건 것이 얄미워 신취더러 저 얄미운 도인를 잡아죽이라고 명령했 다. 신취는 이 말을 기다리고 있은 듯 잽싸게 도인에게 달려들었다. 자령이 뒤미처 멈추라고 외쳤기 에 왼쪽 어깨만 다치고 말았지, 그렇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었다. "도인은 도망갈 수 없음을 알고 우리를 향해 꿇어앉아 살려 달라고 애걸하더군요. 우리 자매는 마음이 약하여 그를 놓아주었죠. 거기다 빼앗았던 법보를 돌려주고 또 단약도 한 알 주며, 다음부 터는 이렇게 남을 괴롭히려 하지 말라고 충고를 했답니다. 언니는 그 도인의 재주가 나쁜 편이 아니라고 하며, 천하에는 고수가 매우 많으니 다음부터는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우리는 도중에 내려앉아 노는 일이 없었죠." 사도평은 이 말을 듣고 별안간 마음에 짚히는 것이 있어 그 도인의 이름을 물었다. 한악이 말했다. "아마도 성이 악(岳)씨인 것 같았어요. 언니가 기억할 거예요. 언니가 수련을 마치면 물어보세 요!" 사도평은 자기를 농가에 맡긴 도인의 성도 악씨였음이 기억났다. 급히 상세한 것을 물어보기 위 해 자령을 찾아가려고 하자 한악이 말했다. "언니에게 물어보려고요? 언니는 오늘 다른 때보다 특별한 것 같았어요. 해마다 한 번 있는 구 십오 현공(玄功)이 일어났으니, 이번에 입정하면 적어도 열흘이나 반 달은 걸릴 거예요. 가서 방 해하면 매우 불쾌하게 여길 거예요. 언니가 당신더러 당분간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만 안했어 도 좋을 텐데. 그럼 절벽 위로 올라가 산열매도 따먹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사도평이 심중에 두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꺼내자, 한악은 듣고서 고개 숙여 한참 생각 하더니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당연히 알아봐야지요. 언니도 틀림없이 도와줄 거예요. 당신을 맡긴 자 가 그 얄미운 도인과 성이 같고, 허비랑은 사실을 알면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단 말이죠? 언니가 그때 말하길, 그 도인의 비검이 아미파나 다른 정파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앞뒤로 맞 추어 보니 이미 단서를 찾은 것 같군요. 그 도인은 우리의 적수가 못되니 그를 찾아가는 것이 좋 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아직 회복이 안 됐고, 언니도 수련을 마치려면 한참 걸릴 테니, 그렇게 서 두를 필요는 없어요. 언니가 수련을 끝내고 당신도 회복이 되면, 먼저 언니 몰래 당신과 함께 비 검을 찾아오고, 후에 다시 상의하여 그 도인을 찾아가는 것이 어때요?" 사도평이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의 예를 차리자, 한악이 말했다. "당신은 다 좋은데 형식을 너무 차리는 것이 나빠요. 우리 세 사람은 앞으로 형제와 같이 지내 야 하고, 훗날 당신은 또 우리 어머니를 구해 주셔야 하니, 도리어 우리가 감사를 해야겠지요. 하 지만 현재로선 우리가 당신 목숨은 구해 주었으니, 당신은 그 고마움을 어떻게 갚으실래요?" 사도평은 그녀의 말이 대담 솔직하고 일리가 또한 있는지라 아무말도 못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한악은 그가 미안해 하는 것을 보자 다가가서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는 항상 나더러 말을 함부로 한다고 꾸짖어요. 당신도 나를 탓할 거예요?" "아니오. 나는 그저 당신이 천진하고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걸." 여기까지 말하자, 갑자기 실언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입을 다 물었다. 그러나 한악은 아무렇지 도 않은 듯 태연했다. 신취는 두 사람의 정다운 광경을 보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긴 울음소리를 한 번 내고는 몸을 돌 려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사도평이 급히 일어나 전송을 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손을 잡은 채 자리에 앉았다. 비록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은근하고 은밀한 통정 은 아니었지만, 그 즐거움은 그보다 한결 더했다. 한악은 진기한 과일로 담근 술을 몇 가지 가지 고 와서 사도평과 가위 바위 보를 하며 마셨다. 동굴은 밤낮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조금도 지 루함을 모르고 놀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문득 야간수련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에야 한악 은 서운해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악이 간 후 사도평은 자령의 지시대로 조용히 정양을 하였다. 그러다가 한악이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자 다시 손을 잡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이렇게 육칠 일이 지 났다. 사도평은 선단을 먹고 또 정양을 한 탓으로 하루하루 몸이 가볍고 민첩해지며 머리도 맑아졌다. 가부좌를 틀고 연기(煉氣)하여 보니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한악도 사도평이 이미 회복되었음을 알아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그를 데리고 계곡 안을 다니며 놀았다. 영곡선부(靈谷仙府)와 동굴의 어디 한 군데 안 가본 곳이 없었고, 그들은 그 한 쌍의 흰토끼와도 자주 어울려 놀았다. 자령이 여전히 입정에서 깨어나지 않자, 사도평은 추운수가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 는 줄 아는데 가본 적이 있느냐고 한악에게 물었다. 한악이 말했다. "언니가 말하길, 그분은 형산에서 구화산으로 옮겨와 <건곤정기묘일진인>의 별택을 빌어 살고 있다고 했어요. 그날 절벽 위에서만 몇 마디 한 후에는 만난 적이 없군요. 언니가 언제 한번 가서 찾아뵙고 그이를 만나게 해주신 데 대해 감사해야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나중에 언니와 함께 가면 되겠죠." 한악은 사도평더러 절벽 위로 놀러가자고 졸랐으나, 사도평은 자령한테 책망받을 일이 꺼림칙하 여 언니가 깨어나면 함께 가자고 한악을 달랬다. 한악이 말했다. "언니가 깨어나려면 아직도 며칠이나 더 있어야 될는지 모르잖아요?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저 자운장은 굉장한 보물인 것 같아요. 그날 자운장을 펼칠 때 우리는 밑에 있어서 한 가닥 연기 밖에 보지 못했는데, 어느 정도 신묘한지 모르잖아요? 듣자니까 계곡 안의 사람이 나갈 수는 있 어도 바깥 사람은 들어올 수 없대요. 올라가서 도대체 어떤 것인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요?" 사도평은 사랑스러운 여자의 흥을 깨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도 보고 싶기는 마찬가지이므 로 마침내 한악과 함께 계곡 입구로 갔다. 위를 쳐다보니 오색 비단의 채막(彩幕)인 양 현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 한 쌍의 흰토끼도 두 사 람의 발 옆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한악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도 올라갈려고 그러니?" 그리고는 한 손으로 사도평을 잡았다. 그러자 흰토끼들은 뛰어 올라와 주인의 옷을 물고 매달렸 다. 한악은 손가락으로 법술을 쓰며 '기(起)'라고 외쳤다. 그러자 사람과 토끼가 삽시간에 오색 구 름을 뚫고 비승하여 절벽 위로 사뿐 내려앉았다. 사도평은 한악이 어린 나이에 이처럼 신묘한 경신술을 펼치는 것을 보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한악이 교태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구름을 밟지 않고 하늘로 오르는 것은 기를 부리고 구름을 밀어젖히는 것의 초보예요. 모두 사 조께서 아버님께 전수해 주신 것인데, 아버님이 다시 우리에게 전수해 주셨어요. 우리 언니는 지 금 마음대로 푸른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어서 저보다 훨씬 강해요."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며 절벽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런데 한 쌍의 흰토끼들은 동쪽으로 뛰어가 고 있었다. 사도평은 놀라며 한악에게 말했다. "저쪽으로 돌아가면 바로 오운보인데, 설망이 흰토끼들을 보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빨리 돌아 오라고 불러!"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한악이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어마! 이를 어째!" 사도평은 그렇잖아도 은근히 겁을 먹고 있었으므로 깜짝 놀라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올라오는 것만 생각했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지 뭐예요. 어떻게 돌아갈지 막막하네 요!" 사도평이 얼른 보니 어느덧 구름의 형태가 변하여 아까와 많이 달라져 있었고, 방금 뚫고 올라 온 곳은 맑은 개울처럼 보였다. 물은 얕고 세차게 흐르며, 개울 바닥에는 자갈과 모래와 노니는 물고기까지 보였다. 사도평은 한악을 위로하며 말했다. "이것은 자운장의 환상작용일 거야. 바깥 사람들이 개울로 여겨 내려가지 않도록 말이지. 우리는 속사정을 알고 있으니, 올라올 때의 발걸음을 계산하여 개울로 뛰어내리면 돌아갈 수 있지 않겠 소?" "말은 쉽게 할 수 있지요." 한악은 이렇게 대꾸하며 작은 나무를 한 그루 뽑았다. 그리고는 올 때의 걸음 수를 암산해서 정 확한 지점을 알아내어 그 나무를 그곳에다 던졌다. 그러나 나무가 개울 밑바닥에 떨어지기도 전 에 밑에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더니 나무에 갑자기 불이 붙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 라져 버리지 않는가! 눈을 씻고 다시 밑을 내려다보니 방금의 개울물은 간데온데없고 바싹 말라 버린 도랑으로 변해 있었다. 한악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어떡하면 좋아요? 자운장이 이렇게 대단한 줄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언니는 언제쯤 깨어날까? 언니는 하필이면 이런 때 무슨 입정을 한다고 우리가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는 거야!" 사도평은 <만묘선고>가 살고 있는 곳이 지척에 있으므로 매우 다급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악을 위로하며 말했다. "언니가 머지않아 깨어날 거요. 깨어나서 우리가 보이지 않으면 자운장을 거두고 우리를 찾으러 올 텐데, 뭐가 그리 걱정이오!" 한악은 원래 약간 어린아이 심성이 있었다. 이 말을 듣자 과연 많이 위로가 되는지라. 사도평과 높은 곳에 앉아서 먼 곳을 바라보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했다. 이때는 단오절이 가까운 무렵이어서 초목이 무성하고 들꽃이 만발하였다. 두 사람은 산꼭대기 큰나무 아래 앉아서 멀리 자석(紫石), 천도(天都), 연화(蓮花), 문필(文筆), 신시(信始) 여러 봉우리 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느라고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날씨가 어둑어둑해지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니 정신이 상쾌해지며, 자령곡 안과는 또다른 맛이 있었다. 한악이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우리는 여기에서 밤을 지내야 할 것 같군요. 다행히 우리가 모두 도법을 배웠기에 망 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거센 바람을 어찌할 뻔했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전에 올라왔을 때 바위 옆에 한 과일나무가 있었는데, 언니가 말하길 그것은 <두송실(杜松實)>이라고 하며 맛이 아 주 좋고 보통사람이 많이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며 기(氣)에 도움이 된다고 했어요. 또 여러 가지 과일이 있는데 모두 참 맛있어요. 진작 이럴 줄 알았다면 술을 가지고 와서 과일과 함께 마시며 떠오르는 달을 맞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그리고는 사도평을 끌고 바위 옆으로 가서 문제의 과일을 땄다. 이때 갑자기 두 흰토끼가 쏜살같이 뛰어 돌아왔다. 한악이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이것들을 잊어버렸군요. 저봐요! 저렇게 급히 뛰어오는 것을 보아 틀림없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당한 것 같아요!" 흰토끼는 두 사람 앞으로 뛰어와서 소리들 두 번 지르더니 두 사람의 옷자락을 물고 온 길을 향 해 끌어당겼다. 한악이 그곳을 가리키며 뭐가 있는 곳인가를 물었다. "거기가 바로 오운보요. 방금 내가 이야기했잖소?" "토끼들이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본 것 같아요. 할 일도 없고 심심한데 함께 가보지 않을래요?" 사도평은 안색이 바뀌며 대답했다. "만묘선고는 매우 무서운 사람이오. 더구나 지금 나를 찾아 복수하려고 벼르는 중이야. 당신 언 니가 말했잖소. 우리는 당분간 근신하는 것이 좋다고. 그런데도 제발로 찾아가다니, 될 법이나 한 이야기요?" "뭐가 그렇게 겁이 나요? 제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 늙은이쯤은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제 가 당신 대신 비검을 찾아주겠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언니가 없을 때 찾아와야지요. 가지 않으려 면 여기서 기다리세요. 저 혼자 갔다올게요." 사도평은 한악의 성격으로 보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중에도 흰토끼는 계속 옷 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문득 지금은 단오절이 가깝기 때문에 어쩌면 만묘선고가 이미 서장으 로 떠났을 거란 생각이 났다. 그는 흰토끼가 영통하다는 것을 알고 곧 한 마리를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물었다. "네가 오운보에 갔을 때, 만약 한 남자와 한 여자 이렇게 두 사람만 있고 칠성관(七星冠)을 쓴 도고(道姑)가 없었다면 소리를 두 번 지르고, 만약 도고가 있었다면 소리를 세 번 질러봐." 그러자 흰토끼는 소리를 두 번 내었다. 한악이 말했다. "무슨 남자가 그렇게 담이 작아요! 다른 것은 장담할 수 없어도, 당신을 모시고 갔다가 고스란히 모시고 오는 것은 자신 있다잖아요. 뭐가 그리 겁나요!" 한악이 여전히 뾰로통해 있었으므로 사도평은 하는 수 없이 그러면 같이 가자고 말했다. 한악은 그제서야 화를 풀고 좋아했다. 두 마리의 흰토끼는 주인이 갈 뜻을 보이자 좋아하며 시위를 떠난 활처럼 오운보를 향해 날듯 뛰어갔다. 한악도 사도평을 잡고 '기!'라고 외치며 토끼 뒤를 따라갔다. 오운보에 거의 다다르자 흰토끼들은 갑자기 방향을 꺾어 동쪽 산비탈로 달려가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도 따라 내려와 바위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았다. 그러자 저만치 두 사나이와 한 여인이 어울려 자기 비검을 사용하여 한참 싸우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그중의 한 비검은 바로 사도평이 만묘선고에게 빼앗긴 그것이었다. 한악은 가만히 저 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사도평이 조용히 말했다. "저 한쪽 눈이 없는 놈이 바로 내 사제 설망이고, 저 여인은 유연랑이오. 나머지 한 사나이는 낯 이 매우 익은데, 아마도 대가장에서 봤던 그 왕아무개 같군. 저 사람과 설, 유 두 사람은 본래 친 구였는데, 어째서 여기서 싸우고 있을까? 상황을 보니 틀림없이 만묘선고가 없는 것 같군. 아마도 떠날 때 비검을 설망에게 주고 간 것 같소. 만묘선고만 없다면 지금 검을 다시 빼앗는 것쯤이야 식은죽 먹기지." 그때 설망은 또 자신의 비검마저 쏘아내어 세 개의 비검이 협공하니 왕삼은 점점 밀리기 시작하 였다. 한악이 사도평에게 말했다. "아직도 비검을 회수하지 않고 뭐해요? 조금 있다 제가 법보를 꺼내면 당신의 비검도 함께 못쓰 게 된단 말이에요." 사도평은 이 말을 듣고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즉시 평소의 구결에 따라 원기를 운동시켜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막상 비검을 불러들이려고 하니 몹시 힘이 들었다. 틀림없이 만묘선고가 설망에 게 진원(眞元)을 움직일 수 있는 무슨 구결을 전해 주어 검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악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손을 휘두르니 한 덩이 붉은빛이 폭음을 내며 비검들이 싸우고 있는 곳을 향하여 날아갔다. 왕삼은 상황이 불리하자 비검을 거두어들인 다음 다른 법보를 쓸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적 의 한 가닥 검광이 옆으로 비스듬히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쪽을 쳐다보니 바위 옆에 한 사나 이와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사나이는 바로 <고해아> 사도평이며, 여인은 모르는 사람이지만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사도평이 설망의 사형이며 설망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한테 원군이 왔구나 싶자 더 이상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어 붉은빛이 도달하기 전에 재빨리 비검을 회수해 가지고는 도망가 버렸다. 한데 왕삼이 점점 밀리는 것을 보고 내심 기뻐하던 설망은 갑자기 원기가 흩어지는 것을 느꼈 다. 그런데 스승에게 받은 사도평의 비검이 별안간 옆으로 날아가 버리지 않는가! 문득 돌아보니 사도평이 한 새파란 여인과 저만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라 유연랑을 부르며 비검을 회 수하여 동굴로 도망가려고 생각하였다. 그때 여인이 방출한 한덩이 붉은빛이 날아왔다. 그는 비검을 재빨리 회수하여 아슬아슬하게 붉은빛을 피했지만, 유연랑의 비검은 피하지 못하고 그만 붉은빛에 맞고 말았다. 우뢰같은 소리가 나면서 불꽃이 사방으로 튄다 싶자 유연랑의 비검 은 어느덧 땅에 떨어졌고 이미 고철로 변해버렸다. 설, 유 두 사람은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도망가려고 하였으나 어디 그냥 내버려 둘 한악인가! 그녀는 붉은빛을 거두어들인 다음 또 무지개 같은 오색폭포를 날려 설, 유 두 사람을 꼼짝 못하 게 묶어버렸다. 그리고는 웃으며 사도평에게 말했다. "당신 사부의 제자란 것들이 이렇게 모조리 밥통들인 줄은 생각 못했어요. 평소에 많이 당했으 니, 가서 복수를 하세요." 말을 마치자 사도평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 붉은빛은 원래 보상부인이 구전진원(九轉眞元)으로 연마한 금단(金丹)이었다. 그리고 폭포 같 은 무지개는 자령곡 진동(鎭洞)의 보물인데, 이름이 채예련(彩霓練)으로써 뜨거운 불을 낼 수 있 는 매우 대단한 보배였다. 그러니 설, 유 두 사람이 어떻게 견디어낼 수 있겠는가? 불에 덴 설망 은 고통을 못 이겨 계속 살려달라고 외쳤다. 사도평은 도가 두터운 사람인지라 설, 유 두 사람이 완곡하고도 슬프게 울부짖는 것을 보자 측 은한 마음이 생겼다. 먼저 설망에게서 칼집을 돌려받고는 한악더러 풀어주라고 했다. 한악이 말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불을 더 올려 이 두 짐승을 태워 죽여야 시원하겠어요. 당신이 지금 불쌍하 다고 살려주면 그들이 또 허비랑에게 무슨 소리를 할는지 알아요?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 잡힌다 면 그들이 당신을 용서해 줄 것 같아요?" "심보가 나쁘다 하더라도 그래도 오랫동안 같이 지낸 동문의 정이 있는데 어쩌겠소. 다음에 만 약 내가 저 사람들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운명이니 어쩔 수 없겠지." 그리고는 또 재삼 부탁을 하였다. 한악이 설, 유 두 사람에게 말했다. "만약 이분의 간곡한 부탁만 아니라면 너희 두 사람을 산 채로 태워 죽였을 것이다. 다음에 또 이분을 괴롭히다 내 손에 잡혀만 봐라. 태워서 죽이지 않으면 그땐 내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는 채예련을 거두어들였다. 설, 유 두 사람은 고통을 참지 못해 땅바닥에 뒹굴면서도 사도평의 거처를 알려고 하였다. 사도평이 대답하기 전에 한악이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알고 싶다, 이 말이지? 그래서 너희 지독한 사부를 보내 우리를 찾겠다 는 생각이구나. 당분간은 밝힐 수 없지만, 말해 준다고 해도 허비랑이 우리를 어떻게 하진 못할 거야. 때가 오면 너희들이 찾을 필요없이 우리가 찾아갈 것이니, 꿈 그만 꾸고 빨리들 꺼져! 아니 면 다시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 설, 유 두 사람이 어찌 감히 대꾸를 할 수 있겠는가? 창피스럽고 분하지만 서로 부축하며 동굴 로 돌아갔다. 왕삼은 유연랑이 자기를 버리고 설망을 따라 몰래 도망간 후부터 계속 두 연놈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하루는 스승 <독각령관> 약삼관을 따라 천서(川西)로 친구를 만나러 비검을 타고 날아가 던 중에 만묘선고를 만났다. 만묘선고는 서로 잘 아는 사이인지라 약삼관에게 청라산으로 가자고 부탁했다. 약삼관은 본시 아미파에 원한이 있었으므로 즉시 승락을 했다. 왕삼은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유연랑이 이미 설망에게 시집가서 오운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눈에 불이 튀었다. 그는 약삼관 몰래 황산 오운보로 가서 설, 유 두 사람을 찾아 복 수를 하려고 생각했다. 황산에 도착하여 오운보를 찾았으나 도무지 찾지 못해 답답한 심정으로 산기슭에 있는 절에서 며칠 묵으며 날마다 산으로 가서 헤매곤 했다. 이날도 문필봉을 지나가는데, 홀연 바위 뒤에서 두 여인이 주고받는 이야기소리가 들렸다. 그는 재빨리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한 여인이 말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진씨 자매를 만난 다음 서로(西路)를 따라서 성도로 가라고 하셨지만, 우 리가 가는 중도에 할 일이 좀 많아요? 며칠을 기다려도 보이지 않으니 정말 초조해 못 견디겠군 요." "뭐가 초조하니. 황산이 얼마나 좋아? 여기서 며칠 동안 경치나 감상하며 천천히 기다려서 좋고, 또 사부님께 가르침도 받을 수 있잖아?" "언니, 내가 이곳을 얼른 떠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빨리 사천으로 가서 아미파을 찾 아 이영경을 만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모두 같은 편이라 언젠가는 만나게 될 텐데, 뭐가 그리 바쁘니? 어제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오늘 <고해아>가 오운보로 설망을 찾아가서 칼을 돌려받으려 할 거라고 하셨는데, 좀 있으면 재 미난 구경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날 만약 <고해아>만 아니었다면, 설망과 그 음탕한 유씨년을 죽여버렸을 거야. <고해아>가 칼을 찾으려면 동굴로 들어가야 하는 데, 모르긴 하지만 만묘선고의 법술을 깨뜨리기가 어렵잖겠 어요?" "사부님께서 신시말 유시초라고 하셨으니, 아직 이르다. 우린 우선 굴로 돌아가서 바둑이나 두자 꾸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문필봉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왕삼은 찬하대사도 황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투를 보니 이 두 여인도 보통이 아 닌 것 같은데 자기는 설, 유를 찾으러 왔으니 괜히 건드려서 득될 게 없을 것 같았다. 한편 오운 보는 이미 만묘선고가 법술로 봉쇄했다니, 자기가 계속 찾지 못한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고해아>란 세 글자가 매우 귀에 익었다. '그런데 두 여인의 말에 의하면 <고해아> 란 작자는 설망을 찾아 칼을 되돌려 받으려고 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틀림없이 설, 유 두 사람의 적이겠군. 그러니까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며 기다리면 되겠구나. 설, 유 두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고해아>가 설, 유 두 연놈을 죽이면 내 대신 분을 풀어주는 것이 되며, 나는 또 만묘선고에게 죄를 짓지 않아도 되거든. 만약 그 사람이 당해내지 못하면 그때 내가 나타나서 복수를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작정을 하고 높은 봉우리를 찾아 올라갔다. 앞쪽에 외로운 절벽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중 간에는 밑도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형세가 매우 험준하였다. 그래서 왕삼은 검광을 타고 건너갔 다. 바위를 하나 찾아 바위 위에 앉아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삼이 한참 앉아 있으려니까 시각이 이미 신정(申正: 오후 네시 정도)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답답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문득 바위 아래쪽에서 두 마리 살찐 흰 토끼가 깡충 튀어나왔다. 생긴 것이 매우 토실토실하고 귀여운 토끼였는데, 왕삼이 앉아 있는 곳 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풀밭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조금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매우 재미 있게 놀고 있었다. 갑자기 요염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얼마 동안이나 사람을 이렇게 가두어 둘 거예요? 답답해서 죽겠어요. 아니, 저것은 제발 로 굴러 들어온 먹이구나. 빨리 가서 잡아요!" 이번엔 사나이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간이 작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가실 때 몇 번이나 분부하셨으므로 함부로 나갈 수가 없잖소. 하지만 다행히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어도 우리는 밖을 볼 수 있으니, 요렇게 제발로 굴러 들어온 고깃덩어리는 그냥 둘 수야 없지."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살찌고 하얀 토끼는 본 적이 없어요. 잡아서 우선 며칠 가지고 놀다가 재미가 없으면 잡아서 술안주나 해요." 왕삼은 이미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설망과 유연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뜻밖에도 무심결에 원수가 있는 곳을 찾아낸 것이다. 두 사람이 자기를 보면 다시 굴 안으로 도망칠 것이므로, 그는 급히 몸을 한쪽 구석으로 숨겼다. 두 사람이 나오면 그들의 뒤에서 돌아갈 길을 막고 분풀이를 할 생각이었다. 그때 한 쌍의 흰토끼는 마침 박자라도 맞추는 듯이 두 사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언덕 아래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왕삼은 이 토끼들이 좀더 멀리 가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과연 유연랑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도망가요, 도망가! 빨리 쫓아가요!" 설망과 유연랑은 굴에서 뛰어나와 그 토끼를 쫓느라고 주위에 사람이 있는가는 신경을 쓰지 않 았다. 토끼들은 네 다리를 쭉 뻗으며 화살보다 더 빨리 이삼 리를 뛰어갔다. 왕삼은 설망과 유연랑의 뒤를 따라갔지만 두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젠 굴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될 즈음에사 왕삼은 큰소리로 외쳤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이 개 같은 연놈들아! 일전에 대가장에서 감히 나를 희롱하고 도망가다니 오늘 나의 심판을 받아라!" 설망과 유연랑 두 사람도 흰토끼가 너무 빨라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검을 날리려고 하 는 순간, 별안간 뒤에서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왕삼의 손에서 떠난 비검 이 유연랑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유연랑은 왕삼의 성질을 알고 있었다. 자기가 본래 잘못했으니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라, 황급 히 비검을 날려 맞붙었다. 설망도 비검을 쏘아내어 왕삼을 공격하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설 망은 사도평이 그토록 아끼던 보검을 얻은 후 스승이 전해 준 구결로 열심히 연마하여 이미 마음 대로 지휘할 수 있었으므로 승부가 나지 않자 사도평의 칼까지 쏘아내었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 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사도평이 웬 계집과 함께 옆에서 툭 튀어나오지 않는가! 얻은 보검도 잃어 버리고, 또 온몸에 화상까지 입었으며, 거기다 유연랑의 비검까지 망가졌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 다. '그러고 보니 저 계집이 사부께서 말씀하시던 괘상에 나타난 <음인>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는 틈을 봐서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던 것인데 그 계집이 미리 이쪽 속셈을 알고 호통을 치니 질겁을 할 수밖에. 더 이상 있다가는 더 고생할 것이 뻔하므로 속으로 이를 악물며 돌아선 것이다. 사도평은 보검을 찾은 데다 한악의 고상한 재주를 확인하자 매우 기쁘고 자랑스러워서 계속 칭 찬을 했다. 그래도 한악은 방그레 웃기만 하였다. 두 사람은 석양이 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고 부드러운 빛이 울긋불긋한 나무들 틈 으로 뚫고 나와 갈색의 바위를 비추며 바위마저 빨갛게 변해버렸다. 둥지를 찾는 까마귀들이 어 떤 때는 모여서 원을 만들고 어떤 때는 대여섯 마리씩 짝을 지어 날개짓을 하며 머리 위를 지나 가서는 잠시 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끔 희미한 울음소리만 몇 번 들렸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이 명산의 저녁 풍경에 황홀해졌다. 검광을 타고 돌아가기가 섭섭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걸음을 떼 옮기기 시작했다. 막 산봉우리 하나를 넘었을 때였다. 홀연히 큰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대담한 사도평 이놈! 사부가 없는 틈을 타서 네 사제 설망을 상하게 하다니, 오늘 오기는 마음 대로 왔지만 돌아갈 수 없으리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산 위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삼각관계 推雲撥霧 同款佳賓 冷月寒星 獨殲惡道 사도평이 깜짝 놀라자, 한악이 재빨리 그의 앞을 막아서며 공격을 하려고 하였다. 사도평이 정신을 차려 보니 상대방은 적이 아닌지라 급히 한악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주사매!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요. 소제는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단 말이오." 그 여인은 이 말을 듣자 깔깔 웃으며 말했다. "오래 전부터 자령곡에 진씨 성 가진 아가씨가 계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분이 언닌지 동생인 지 모르겠군요. 누추하지만 저희 동부(洞府)로 가서 말씀을 나누시겠어요?" 한악이 그녀를 보니 나이는 자기보다 한두 살 정도밖에 많지 않은 것 같지만, 근골이 매우 뛰어 나고 자태가 산뜻하게 아름다왔다. 사도평이 그녀를 '주사매'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한악은 금방 그녀의 내력을 알아차렸다. 사도평이 소개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했다. "제가 바로 자령곡의 진한악이에요. 제 언니는 지금 계곡에서 입정(入定) 중에 있습니다. 당신은 찬하대사 문하의 주경운 언니가 아니신지요?" 경운은 한악의 말투가 매우 시원스럽고 명랑함을 보자 금방 마음에 들었다. "제가 바로 주경운입니다. 저 앞 바로 멀지 않은 곳이 문필봉이니, 저희 동부로 가시죠." "일전에 평 오빠께서 여러 언니들의 이야기를 해주시어 진작부터 찾아뵙고 싶었답니다. 뜻밖에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언니께서 싫어하지만 않으신다면 다음 에도 자주 찾아뵙겠어요."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 산꼭대기에서 또 하나의 흰그림자가 날아내려 왔다. 사도평이 자세 히 보니 바로 <여공공> 오문기였다. 곧 한악에게 소개했다. 모두가 인사를 나눈 뒤에, 문기가 웃으면서 경운에게 말했다. "너는 진소저와 이야기하느라고 신이 나서 나를 산꼭대기에 팽개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구나. 요 며칠 동안 달도 밝지 않은데, 이 캄캄한 곳에서 손님을 접대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언니는 참! 자기가 나랑 같이 오지 않으려고 하고서는, 지금 내가 손님을 동부로 청하려는 참에 뒤늦게 와서는 괜히 탓하고 야단이야. 언니라고 무조건 동생을 못살게 굴어도 괜찮아요?" "누가 감히 너를 못살게 굴 수 있겠니? 내가 잘못했다고 치고 우선 돌아가자꾸나." 말을 마치자 주경운과 오문기는 사도평과 한악을 데리고 문필봉 동굴로 돌아갔다. 한악이 동부 안의 석실을 보니 대낮과 같이 밝았다. 자령곡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깨끗 하고 아늑하여 조금도 속되지 않은 것이 정말 수도하는 곳 같았다. 또 동굴 안의 석실이 모두 매 우 정연하여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지 않아 속으로 몹시 의아해 했다. 문기가 말했다. "아가씨는 우리 동굴이 약간 이상하다고 느껴지는가 보죠? 당초 문필봉은 원래 우뚝 솟은 큰 바 위로써, 원래는 이 동굴이 없었답니다. 사부님께서 주사매를 받아들인 후에 우리 세 제자가 수련 하도록 특별히 이 동굴을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동부와는 다를 거예요.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큰 오공(蜈公: 지네)을 기른 적이 있었는데, 후에 백운대사(白雲大師)께서 요사(妖蛇)를 제거하기 위 하여 빌어 가셨지요. 결국에 요사는 제거하였지만 오공도 힘이 다 하여 죽고 말았답니다. 사부님 은 그 죽은 오공을 초도화화(超度火化)시켜 오공의 잔등이에서 서른여섯 개의 천오주(天蜈珠)를 빼내었지요. 우리 세 사람은 사부님한테서 천오주 열두 개를 얻어 석실 벽 틈에 여기저기 나누어 끼웠기 때문에 석실이 이렇게 밝아요. 이 동부의 이름이 뭐냐구요?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동굴 의 이름을 지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본래는 천오동(天蜈洞)이라고 지어, 도를 위해 죽은 그 오 공을 기념하려고 했었답니다. 그러나 이름이 듣기에 좋지 못하고, 또 방문좌도(旁門左道) 무리가 사는 동굴 이름 같아서 지금까지도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한악이 말했다. "지금 두 분 언니밖에 계시지 않는데 어째서 세 분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또 한 분이 계신다면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지금 만나볼 수 있을까요?" 경운이 대답했다. "나머지 한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두 사람보다 훨씬 강하답니다. 그녀는 성은 주(朱)며 이름은 매(梅)라고 했었는데, <숭산이로> 주사백님과 이름이 같아 주문(朱文)으로 개명하였답니 다. 나이는 별로 많지 않지만, 그녀의 인연은 괴이할 만큼 대단하답니다." 말을 하면서 손가락을 꼽아 날짜를 계산하더니, 이어서 또 말했다. "그녀는 지금 사천 아미산 응벽애에서 <건곤정기 묘일진인>의 자녀인 제영운 오누이와 또 이영 경, 신약란(申若蘭)이란 두 아가씨와 더불어 수도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루이틀 사이 천변(川 邊) 청라산으로 가서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을 도와 <사천팔마>와 싸울 거예요." 한악은 이 말을 듣자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그 신약란이란 아가씨는 계화산 복선담 홍화모모의 득의(得意) 제자가 아니던가요? 어떻게 아 미문하와 같이 있게 되었나요? 그녀의 사부님은 어떻게 되셨죠?" "이야기를 하자면 길답니다. 처음에 자운사의 싸움에선 내가 같이 있어서 잘 알지만, 그 후의 이 야기는 사부님과 옥청대사님께 들었지요....." 경운은 자운사의 이파들과 싸움에서 완석대사와 주문이 중상을 입은 일에서부터 오풍초를 구하 려다 신약란을 만났고, 홍화모모가 비승한 후에 신약란이 아미파에 들어온 경위,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묘일부인의 새 제자인 이영경을 만나 응벽애로 같이 돌아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끝으로 이영경이 뛰어난 선천적인 근기와 기막힌 선연으로 인하여, 처음엔 고생을 했지만, 백미 화상의 금안신조와 장미진인의 자영검을 얻게 된 경위와 그리고 그녀가 도를 배운 지 일 년도 채 안 되는데 선연이 좋아서 이제는 실력이 매우 고강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기도 머지않아 사천으 로 가서 그녀를 만날 것이란 말을 했다. 한악은 이런 이야기를 듣자 부럽기도 했고 신나기도 했다. 진작 경운을 만나지 못했음을 한스러 워했다. 경운이 머지않아 사천으로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자, 한악은 놀란 빛으로 물었다. "제가 어렵게 두 분 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렇게 빨리 헤어 져야 한다니요? 어찌 되었던 간 에 두 분 언니께서는 저희 계곡으로 가서 며칠 놀다 가셔야 해요." 경운이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두 분 아가씨와 사도평 사형은 앞으로 한 식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저희 두 사람더러 떠나기 전에 만나보라고 명하셨어요. 오늘 아직 언니 되시는 분을 만나보지 못했으 니 내일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부님 말씀이 자령곡은 운무법 보로 봉쇄되어 있고, 게다 가 지금은 제하아 언니의 진산지보마저 더 덮어놓았다 하시니, 두 분 아가씨의 인도가 없으면 우 리 두 사람이 내려갈 방법이 없겠군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을 때, 오문기는 문득 찬하대사가 천리전음으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 었다. 그녀가 즉각 한악과 사도평에게 작별을 고하고 밖으로 나갔다. 진한악은 주경운의 말을 듣고 나서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당초 제하아가 자운장 용법을 전해 줄 때 언니한테만 전해 주었지. 난 이이를 구하기에 바빠서 그 용법을 배우지 못했구나. 경솔하게 이이와 계곡을 빠져나와 돌아갈 방법이 없으니 어쩌면 좋 아! 언니는 아직 입정이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에 어떻게 손님을 접대할 수 있단 말인가? 경운 언니의 말투를 보니 오늘밤에 계곡으로 내려가서 자령 언니를 만나보고 싶 어하는 눈치잖아. 주인인 처지에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약 같이 간다고 해도 계곡으로 들 어갈 방법이 없으니, 손님을 청해 놓고 들어가지 못한다면 무슨 망신이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평소 자존심이 강한 데다 또 체면 차리 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실을 밝힐 수가 없어 급한 나머지 사도평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가 뭐라고 변명해 주리라는 생각에서였는데, 사도평은 자기를 향해 웃고만 있지 않은가. 한악은 더욱 수치감이 솟구쳤다. 주경운 앞에서 성을 낼 수도 없는지라 사도평을 한 번 흘겨보고는 머리를 숙이고 곰곰이 계곡으로 갈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경운은 한악의 천진난만함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고개를 숙 이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을 알고는 이상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보려고 할때 문기가 동굴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오문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방금 사부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말씀하시길, 아미 교조님의 비검전서를 받았다는군요. 이영경 과 신약란이 법지를 받지도 않고 멋대로 청라산으로 갔다고 하시면서 영경이 비록 장미진인께서 남겨 놓으신 자영검을 가지고 있고 신조 불노를 거느리고 있지만 아직은 도행이 얕은 데다가 청 라산에는 고수가 많아 위험하다며, 사부님께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부탁하셨답 니다. 사부님께서는 진소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두 사람에게 자령곡으로 가서 두 분 아가씨한테 미진기를 빌어 급히 청라산으로 가서 이영경, 신약란을 구하라고 하시는군요. 또 말씀하시길, 허비랑이 서장에서 독룡존자를 만나, 사도평 도형께서 도망갔다는 말을 했답니다. 그 러자 독룡존자가 수정구(水晶球)를 통해 약간의 사실을 알아냈을 뿐 아니라 그곳에 있던 한 번승 이 아가씨의 자당어른이신 보상부인의 내력과 자령곡의 위치를 말해 주었답니다. 허비랑은 괘상 에서 두 분 아가씨가 훗날 자기의 극성(剋星)임을 알았기 때문에, 청라산의 일을 끝낸 후에는 독 룡존자 등 몇 명 요인을 청하여 자령곡으로 가서 자기의 후환인 두 분을 제거하려고 생각하고 있 답니다. 그들은 모두 재주와 요법이 매우 비상해서, 자운장의 위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만 약 그들이 근본을 알아낸 후에 실제 방향을 계산하여 상극(上極)의 요법을 쓴다면 두 분은 자령 곡 안에 숨어 있기가 곤란할 거예요. 두 분이 실력으로써 그들을 꼭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아 니지만, 그래도 보상부인께서 탈겁성도(脫劫成道)하기 전에는 아무래도 이기기 힘들 것 같습니 다." 오문기는 말을 끊고 잠시 한악의 표정을 살핀 후에 말을 이었다. "당초 우담대사와 현진자께서 허비랑이 이 사실을 알까 두려워 두 분에게 계곡 안에 꼭꼭 숨어 지내라고 당부하셨지요. 그런데 지금 허비랑이 비밀을 알았고, 또 자령곡은 본시 진정한 수도인이 수도할 곳이 아니라고 하시며 아미 응벽애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머지않 아 교조인<건곤정기 묘일진인>께서 아미로 돌아오셔서 본파 검선문인을 모아놓고 현기(玄機)를 지시할 거예요. 이 기회를 타서 아미문하로 들어오시면 장래에 정과(正果)를 구하기가 쉬울 겁니 다. 응벽애는 동천복지로써 경물(景物)이 뛰어나고 아늑하여 세상과 격절(隔絶)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장미진인께서 남겨 두신 금부이보(金符異寶)가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도행이 많은 이파 사람이라 할지라도 발을 들여놓지 못해요. 또 그곳은 후배 검선들이 많아 재미가 있으 며, 조석으로 서로 절차(切磋)할 수 있어서 수도에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아가씨께선 어떻게 생 각하는지요." 한악은 매우 기뻐하며 대답했다. "저와 제 언니는 자령곡 안에서 자라나 몇 분 노선배님을 제외하고는 바깥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 세상을 전혀 모른답니다. 지금 평 오빠와 두 분 언니께서 아미문하에 근기가 두텁고 재주가 있는 언니들이 많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는 마음 속으로 부러워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대 사님께서 이렇게 밝은 길을 지시해 주셨으니, 그 은혜를 어떻게 다 표현하죠? 지금부터 정과(正 果)로 돌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많은 언니들을 사귈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군요. 지 금 곧장 돌아가서 자령 언니에게 말해야겠어요. 두 분 언니께서도 저와 함께 내려가시는 게 어떻 겠어요?" 오문기가 대답했다. "방금 돌아올 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두 분 아가씨께서 우리랑 청라산으로 가기를 원 한다면 같이 가도 무방하다고 하셨어요. 이번 청라산 싸움에는 실력이 매우 굉장한 이인(異人)께 서 우리를 도와주신답니다. 허비랑과 독룡존자가 대단하다고 해도 모두 그 이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영경과 신약란 두 사매는 적을 얕잡아 보고 또 제영운 언니와 같은 길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한 지경에 놓이게 된 거죠. 우리는 단지 조심스럽게만 행동한다면 별 탈이 없 을 거예요." 한악은 더욱 신이 나서 얼굴이 웃음으로 가득하였다. 경운이 문기에게 물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는 무슨 말씀이 없으셨나요? 가서 작별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사부님께서는 제사백님의 비검전서를 받으신 후에 우리더러 사천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을 모 두 취소하셨다. 또 말씀하시길, 친구가 사부님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으니 따로 인사를 하러 올 필 요없이 그냥 출발하라셨어. 청라산을 부순 후에 진씨 두 아가씨를 아미산으로 보내드리고 동문들 과 같이 수련을 하라고 하셨어. 늦으면 안 되니 떠날 준비를 하자꾸나!" 두 사람은 즉시 약간의 물건을 꾸렸고, 이래서 일행은 자령곡 입구로 날아갔다. 한악은 이때서야 내려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실토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줄기 오색광선이 번쩍 했다. 자운장에서 무슨 변화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삽시간에 자령이 날아 올라왔다. 두 자매는 서 로 상대방을 원망하려다가, 한쪽에 서 있는 오문기와 주경운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 자령이 미처 말을 꺼내기 전에 경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분은 진씨네 큰아가씬가요?" 말을 마치자 문기와 함께 예를 베풀었다. 자령도 황급히 답례를 하였다. 한악이 쌍방을 소개시켜 주자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고는 같이 계곡으로 내려가 석실로 들어갔다. 자령은 손님이 있는지라 한악을 탓하지 못하고 문기와 영운을 깍듯이 접대하였다. 그런데 한악이 먼저 걸고 넘어졌다. "언니는 일 년에 어쩌다 한 번 입정신유(入定神遊)하면서, 하필이면 평 오빠가 온 요 며칠 사이 에 용공(用功)을 할 게 뭐예요?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손님은 청해 놓 고 집으로 모시지 못하면 얼마나 웃음거리가 될 뻔했냐구요!"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나는 저분이 이곳에 오신 것이 우리의 일보다 어머님 일의 성 패(成敗)와 관계가 크다는 것을 알고, 계속 생각해 보았지만 뾰족한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동해로 신유(神遊)하여 어머님의 진령(眞靈)에게 가르침을 구한 것이다. 그런데 너는 그 며칠을 참지 못하여 저이를 꼬드겨 밖으로 나갔잖아. 적이 지척에 있으므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재삼 당부하였는데도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 만일 사고라도 생겼다면 어머님의 대사를 그르치는 것이 되는데, 도리어 나를 탓하다니 말이 되는 소리니?" "언니는 정말 사람 탓하길 좋아하네! 내가 이번에 밖으로 나가서 얻은 것을 말하면 언니도 좋아 서 어쩔 줄을 모를 걸?" 자령은 한악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한악은 입을 딱 다물고 말을 하지 않 고 있었다. 사도평은 자령이 화를 낼까 두려워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하였다. 그러자 자령은 매우 기뻐하며 오문기, 주경운에게 말했다. "제가 동해로 신유하여 어머님 진령에게 가르침을 받았답니다. 어머님 진령께서 말씀하시길, 제 가 정과를 이루려면 한시바삐 현진자 세백님께 부탁을 드려 아미문하로 들어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현진자 세백님을 찾았으나 만나뵙지 못하였답니다. 제 동생이 나이가 어려 경솔한 데다 저분도 오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걱정이 되어 급히 돌아왔답니다. 두 분 언니를 흠모한 지 오래 되었는데 먼저 이렇게 한곡(寒谷)을 찾아주셨으니,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군요. 게다가 뜻밖에 도 대사님께서 저희를 가엾게 여기시어 밝은 길을 지시해 주셨으니, 대사님의 법지를 받들어 즉 시 청라산으로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공중을 바라보며 찬하대사를 향하여 절을 하였다. 한악이 말했다. "이제 사실을 알았으니 나를 원망하지 못하겠지! 내가 아니면 언니가 어떻게 이 두 분 언니를 만날 수 있었으며, 또 우리가 어떻게 동천복지로 옮겨가서 살 수 있겠어?" 자령이 한악을 흘겨보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할때 경운이 먼저 말을 했다. "두 분 아가씨께서 이렇듯 정의를 좇고 대체(大體)를 잘 식별하시어 도와주시겠다니, 지금 곧장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자령이 말했다. "두 분이 오실 때에 대사님께서 이영경, 신약란 두 사매가 갇혀 있는 곳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 셨어요?" 문기가 말했다. "언니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잊을 뻔했네! 제 사백님의 비검전서에 의하면 이, 신 두 사매는 내 일아침에 출발한대요. 그들이 청라산 입구에 들어가면 <팔마>가 청해온 한 고수를 만나게 된답 니다. 이 고수는 사문공(師文恭)이란 자로서 <청해시달목하반(靑海柴達木河畔)> 장령자(藏靈子)의 득의제자며 또 독룡존자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이 자는 검술이 특별나며 또 허다한 법술을 사 용할 줄 안답니다. 평소에는 별 악행은 저지르지 않지만, 다만 선악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일을 감정으로 처리한다는군요. 이, 신 두 사매는 그의 적수가 못된답니다. 지금 비록 하룻밤이란 시간 이 있지만 이곳은 청라산과 수천 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만약 그녀들이 적에게 잡힌 후에 출발한 다면 그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저는 그 두 사람이 이미 적에게 잡힌 줄 알았어요. 그들이 내일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해도 아 미산에서 청라산까지는 몇 시진이 걸릴 것입니다. 이 계곡은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고심하여 만드 신 곳이라 그냥 버려두고 싶지 않아요. 지금 떠나면 당분간 돌아올 수 없으니, 약간의 조치를 해 놓은 후에 떠났으면 합니다만, 길이 멀어 시간이 모자라는 점에 있어서는 제가 이미 생각한 바가 있어요. 두 분 아가씨 앞에서 재주를 피우기 죄송스럽지만 이, 신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 가 먼저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문기와 경운은 자령의 말을 듣자 기뻐했다. 문기가 말했다. "제가 비록 가사님의 명을 받들긴 했지만 도행이 얕고 두 곳의 거리가 너무 멀어 제시간에 도착 하지 못할 것 같아 길을 재촉한 겁니다. 그런데 뜻밖에 아가씨께서 놀라운 도법을 구사할 줄 아 시니, 비단 이, 신 두 사매의 무사함뿐만 아니라 저희들도 이 기회를 빌어 견문을 넓힐 수 있게 되었군요." 자령은 몇 마디 겸손의 말을 한 후 한악과 함께 종종 뒤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더니 얼마가 지나자 한악 혼자 돌아왔다. 경운이 물었다. "언니는 아직 일을 다 못 마쳤나요?" "아직 멀었는 걸요! 언니는 지금 계곡을 빠져나가 구화산으로 갔어요. 추운수 백노세백님을 만나 작별인사를 드리고 장래의 인과(因果)를 여쭈어 보기 위해서죠. 돌아온 후에 다시 부모님께서 남 겨 두신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자령곡을 완전히 봉쇄할 거예요. 그런 다음에야 출발할 수 있을 거예요." 한악은 다시 사도평을 향해 말했다. "평소 언니는 항상 나더러 경솔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이, 신 두 사람의 일은 찬하대사님 도 빨리 가라고 재촉하셨는데 언니는 계속 꾸물거리다 내일아침에나 출발하려 하고 있어요. <천 리호정(千里戶庭)>, <낭중축영(囊中縮影)>의 법을 쓰려고 하는 모양인데, 만일 착오가 생긴다면 찬하대사님과 두 분 언니를 어떻게 대하려고 그러는지 원. 두 분 언니께서 여기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그냥 남아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신취를 타고 먼저 떠났을 거예요." 한악이 말을 마치자 마자 석실에 별안간 금빛이 가득해지더니, 곧 자령과 추운수가 나타났다. 문 기와 경운은 황망히 앞으로 달려가 절을 하였다. 한악과 사도평도 다가가서 극진한 예를 올렸다. 추운수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찾아온 뜻을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말할 필요가 없다. 너희 세 사람은 문기와 경운을 따라가서 아미파를 위해 작은 공을 세우거라. 그리하면 비단 너희들에게 뿐만 아니라 너희 어머 님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그런데 네가 꺼릴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느냐? 찬하대사는 아미교조의 비 검전서틀 받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분은 네가 신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필이 면 지금 귀찮은 사람이 찾아왔기 때문에 매우 불편한 가운데 있다. 그래서 특별히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더러 너희 자매에게 설명을 해주라고 하더구나. 네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어도 내가 왔 을 게야. 네가 품은 다른 걱정도 할 필요없다. 내일 내가 한 사람을 구해 줄 것인즉, 그가 앞으로 너의 고심을 풀어주어 네가 정과를 이룰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네 동생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그냥 두어라. 모두가 전인(前因)에 정해진 탓이니라!" 그리고도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이, 신 두 사람은 내일 아침에 청라로 떠날 것이다. 너는 그녀들의 검광이 느리고 너의 행법(行 法)이 빠르다고 자신하지 말아라. 백미화상의 신조는 빠르기가 너의 독각신취에 뒤지지 않느니라. 하지만 지금은 아직 이르다. 그들 두 사람은 한 차례 마난(魔難)을 당하게 되어 있으니, 너희들은 내일 아침 축시(丑時)에 출발하면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머지않아 아미산 응벽애에서 제도 우가 본문과 자파의 검선들을 소집할 텐데, 그때 너희 후배 동문들이 그를 배알할 수 있을 것이 다. 나도 그 성회에 참가할 것이니 그때 너희들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말을 마치자 석굴에 금빛이 가득해졌다. 모두들 황망히 꿇어앉아 절을 하려고 할때 이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자령은 보상부인의 유명(遺命)에 따라 모든 일을 현진자의 지시대로 하였다. 그래서 조용히 수련하며 기연(機緣)이 찾아오기를 기다렸고, 사도평이 자령곡에 나타나자 어머니를 구하고자 하 는 간절한 마음에서 현진자, 우담대사, 추운수 등의 명을 좇아 사도평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수련하며 자신이 바랐던 심원을 버릴 수는 없었다. 다행히 사도평의 마음이 순 수하고 밝으며 자기 앞에서 맹세까지 하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안심은 되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마음 속의 불안과 의혹을 털어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동해로 신유하여 어머니의 진령을 찾아갈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직 성 숙하지 못한 영아(瓔兒)의 몸으로 청명(靑冥)을 날아 만리(萬里)를 신유하였다. 보상부인이 장탈수 진(藏脫修眞)하는 산동(山洞)으로 들어간 자령은 어머니를 만났다. 이때 보상부인의 진령은 이미 형신(形神)이 견고해져서, 시기가 되어 최후의 천뢰지겁(天雷之劫) 을 피하게 되면 바로 비승할 수 있었다. 그녀는 딸이 온 것을 보자 놀라면서도 기쁜 빛이었다. 그동안의 상황을 물어보고, 두 딸이 현진 자, 우담대사, 추운수 등의 도움을 받아 이미 사도평과 명색만의 부부가 된 것을 알고는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정(正)에서 참오(參悟)하다가, 두 딸이 훗날 아미문하로 들 어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령이 찾아온 뜻을 밝히자 보상부인은 거듭 그녀를 달랬다. "전연(前緣)에 정해진 것이니 고집할 필요가 없다. 지선(地仙)이 되는 것 또한 정과가 아니겠느 냐. 천선(天仙)은 모든 사람이 다 될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한걸음 물러나서 생각해 보거라." 이렇게 달래니 자령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곳에 오래 있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그녀는 답답한 마음으로 절을 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비록 영아(瓔兒)의 형태를 갖추기는 했지만, 당시에 자령은 신유를 시험해 본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먼 길을 왕래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반신(返神)한 후에 한참 동안이나 연기조원(鍊氣調元)을 하고서야 뒤쪽으로 가서 한악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한악은 물론 사도평까지 모두 보이지 않자 깜짝 놀랬다. 필시 계곡 위로 바람을 쐬러 올라갔구나 싶어 그녀는 몸을 솟구쳤던 것이다. 때마침 한악과 사도평이 오문기와 주경운을 데리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두 여인이 온 이유가 어 머니의 말씀과 부합되므로 마음 속으로는 기뻤지만, 그래도 자기가 살던 곳을 버리고 가야 한다 고 생각하니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또 찬하대사가 <삼선이로>와 막역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 지만, 이렇게 갑자기 계곡을 떠나라는 것은 현진자의 지시와 어긋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상황이 급박했으므로 동해로 가서 현진자에게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별안간 추운수가 가까운 구화에 있다는 것이 생각나자,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령은 한악과 함께 계곡 안을 대강 정리한 다음 요긴한 보물을 챙겨 몸에 지니고 구화산으로 날아갔다. 얼마 안 가서 도중에서 추운수를 만났던 것이다. 자령은 추운수의 말 속에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처음에는 자기 가 여러 가지 법보를 가지고 있고 어머니가 전수해 준 천리호정, 낭중축영의 법을 사용할 줄 알 기 때문에 서둘러 출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추운수의 말을 듣고 보니 감히 태만할 수가 없었다. 즉시 뒤쪽으로 뛰어가 끝내지 못한 일들을 서둘러 처리하였다. 한악은 그동안을 참지 못하여, 오문기와 주경운, 사도평에게 말했다. "언니가 아직도 이렇게 꾸물거리니 저는 신취를 타고 먼저 갈까해요. 지금 떠나도 청라산에 도 착하면 새벽이 될 텐데, 언니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 없잖아요? 저와 먼저 가실 분이 계시면 말 씀해 주세요!" 말을 마치자 사도평을 쳐다보았다. 문기와 경운은 한악의 뜻을 알아차리고 입을 모아 말했다. "아가씨가 그토록 열성인 걸 보니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지요. 우리 두 사람은 도행이 얕 아 신취를 탈 수 없는 것 같으니, 아가씨는 사도도형과 먼저 가세요. 우리들은 언니랑 함께 갈 테 니까!" 한악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불자, 잠깐 사이에 석실 밖에 서 그 독각신취가 뒤뚱뒤뚱 걸어 들어왔다. 문기와 경운은 신취를 처음 보는지라 눈이 휘둥그레 졌다. 한악은 사도평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약간 타박을 주는 듯 한 소리로 말했다. "왜 아직도 안 타는 거예요?" 신취는 한악의 그 말이 떨어지자 몸을 낮추었다. 사도평은 한악의 성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고 여기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문기와 경운에게 작별을 하고 신취의 등에 올라탔 다. 한악은 그더러 신취 목덜미의 오색 깃털을 꼭 잡으라고 한 후에 사도평 옆에 올라탔다. 그리고 는 문기와 경운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가 한발 먼저 가겠어요. 잠시 후에 만나죠." 말을 마치자 손으로 신취의 등을 탁 때리며 '날아라!'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신취는 문짝보다도 더 큰 두 날개틀 천천히 펴면서 석실을 걸어나갔다. 석실을 나가자마자 꼬리를 세워 오색광채를 번쩍이며 곧장 계곡 밖으로 날아갔다. 문기가 경운에게 말했다. "저 신취가 이토록 신기하니, 영경이 데리고 있는 신조와 비교하면 어떨는지 모르겠군?" 경운이 말했다. "<고해아>가 허비랑 밑에서 오래 고생하다가 지금 이런 광세선연(曠世仙緣)을 만났네 뭐. 내가 보기에 자령은 담담한 반면에 한악은 그에게 매우 친밀힌 것 같아요. 아까 백사백님이 한악은 장 래에 속세의 그물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하신 것 같은데!" 문기가 대답을 하려고 할때, 마침 자령이 몸을 날려 들어왔다. "제 동생은 요즘 정말 버릇이 없어졌어요. 언니가 고의로 늑장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먼 길을 떠나기 때문에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데도 도와주기는커녕 두 분을 모시지도 않고 신취를 타고 먼저 가버리다니! 다행히 우리는 모두가 한집안 식구 같으니 망정이지, 만약에 외인이 여기 에 있었다면 무슨 망신이겠어요. 동생은 도의 기초가 잡히기도 전에 이렇게 경망하게 날뛰니 정 말로 걱정스러워요!" 문기가 말했다 "동생은 워낙 열성이니 탓할 수만도 없어요. 다행히, 언니께서 도법이 신묘하시니 따라잡지 못할 것도 없잖아요?" "저는 동생이 혹 도중에 사고라도 낼까 봐 걱정스러워서 그러는 겁니다. 저는 아직도 약간의 일 이 남아 있으니, 죄송하지만 두 분께서는 잠시만 더 앉아 계세요!" "사매, 우리는 이곳에 들어온 후에 아직 이곳의 전모를 구경하지 못했는데, 만약 별 방해가 안 된다면 언니랑 함께 가서 구경하면 안 될까요?" "그러면 더욱 좋겠군요. 제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할게요!" 곧 문기와 경운은 자령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걸어 들어가니 앞이 온통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운은 속으로 앞쪽은 밝은 데 이쪽은 칠흑처럼 어두우니 이게 무슨 조화일까 생각하였다. 자령이 그러한 눈치를 채고 웃으면서 문기에게 말했다.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곳은 일종의 통로 같은 곳으로써 양쪽은 모두가 석실입니다. 제가 야명 주(夜明珠)를 모두 제거했고, 또 어머님께서 전수해 주신 법술로 봉쇄를 했기 때문에 이렇게 칠흑 으로 변한 거예요. 이 자령곡은 당초에는 그저 계곡 아래의 황폐한 괴동(怪洞)으로 종유석이 늘어 져 사람이 걸어다닐 수 없고 박쥐들만이 살고 있었답니다. 그런 걸 어머님이 고심하여 이러한 인 간복지(人間福地)로 만드셨죠. 석실은 대부분이 투명하였지만 밝지가 못하여 좋은 야명주와 천년 묵은 박쥐의 눈을 박아 불야령곡(不夜靈谷)으로 만들었어요. 또 어머님은 우리 자매가 도력이 얕 아 계곡을 지키지 못할 것을 염려하시어 한 가지 법술을 전수해 주셨답니다. 만일 누군가가 침범 하여 사태가 위태로울 때 법술로 앞쪽을 봉쇄하고 뒤쪽으로 숨으면 즉시 산곡(山谷)의 위치가 바 뀌어 침입자가 더 이상 들어올 수가 없게 되죠. 그런데도 그가 이 현기(玄氣)를 간파하여 봉쇄한 곳으로 석 자 이상 들어온다면 즉각 수화풍뢰(水火風雷)가 쏟아져서 막을 도리가 없게 된답니다. 이 법명을 <천고회명둔(天高晦明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지성스럽게 오문기와 주경운에게 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 있어야 하는 데도 한두 가지 극히 중요한 유물은 가지고 갈 수가 없군 요. 때문에 혹 근본을 아는 적이 훔쳐갈까 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중요한 유물 을 숨겨 놓은 곳은 필히 세 겹으로 봉쇄해야 하므로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두 언니께서 이곳 의 경치를 보지 못하셨는데, 아깝게도 모든 석실은 이미 거의 봉쇄되었기 때문에 시간상 구경하 기가 곤란하군요. 하지만 실외 광경은 아직은 대략 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기회에 다시 오셔서 보시도록 하시지요!" 말을 마치고 나서 손을 한 번 쳐드니 즉시 한 가닥 극히 밝은 보랏빛이 쏟아져 왔다. 문기와 경 운은 그 빛을 따라가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과연 곳곳이 모두 금정옥주(金庭玉柱)로써 앞쪽보다 훨씬 아름다왔다. 다만 석실의 입구는 빛을 비춰도 여전히 칠흑으로 싸여 검은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한참 걸어가서야 뒤쪽에 검은 기운이 더욱 진해져 자령의 빛이 위를 비추어도 암담기만 하였다. 자령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앞쪽이 바로 어머님의 중요한 유물을 넣어둔 곳입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니 두 언니께서 는 잠시 기다려 주세요. 제가 법술을 행한 후에 떠나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자령은 꿇어앉아서 머리카락을 풀어헤치더니 눈에 눈물방울을 머금고 먼저 뭐라고 기 도를 하였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 입으로 계속 주문을 외며 쉬지 않고 맴을 돌았다. 잠시 후에는 다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물구나무를 서서 더 빠르게 맴을 돌았다.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하더니만 별안간 몸을 솟구치면서 두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손에서 두 가락의 보랏빛 광채가 뻗어나와 검은 기운 위를 비쳤다. 그런 후에 입을 크게 벌려 한 덩이 붉은빛을 앞 쪽 검은 기운 속으로 내뿜었다. 그러자 바람 소리, 불타는 소리, 우뢰 소리 그리고 파도치는 소리 가 한 데 뒤섞여 은은히 들려왔다. 자령은 다시 꿇어엎드려 절을 한 번 하고는 일어나 문기와 경운을 보면서 웃었다. "좌도(左道)의 작은 재주를 너무 비웃지 말아 주세요! 이제 거의 일이 다 끝났습니다. 다만 길을 따라 가면서 봉쇄되지 않은 곳만 봉쇄하면 동생을 좇아갈 수 있을 거예요." 자령은 문기와 경운과 함께 밖으로 걸어나오면서 한편으로 또 법술로 앞쪽을 봉쇄하였다. 이윽 고 동굴 안 광장으로 나온 자령은 팔을 벌렸다. 그러자 계곡 천정에 박혀 있던 수십 개의 별들이 마치 유성처럼 떨어지며 하나하나 자령의 긴소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다음 제하아의 자 운장을 거두어들였다. 이윽고 계곡 위로 올라갔을 때, 자령이 말했다. "한곡을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다시 제하아 언니의 자운장을 빌어야겠군요!" 그녀는 주문을 외어 먼저 법술로 계곡 입구를 봉쇄하고는 다시 자운장을 펼쳐 계곡을 휩싸게 하 였다. 그런 후에 긴 머리카락을 묶더니 문기와 경운에게 눈을 감고 바로 서라고 했다. 잠시 후에 자령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갑니다!" 문기와 경운은 눈을 감아 앞이 캄캄했지만 몸이 부드러운 솜 같은 물건 위에 올려져 공중으로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약 한 시진쯤 날아갔을 때 별안간 몸이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자기들은 이미 한 외딴 산봉우리 위에 서 있지 않은가. 하늘은 온통 별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아직 밝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문득 자령의 말소리가 들렸다. "동생이 또 일을 벌렸군요! 두 분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세요. 제 동생을 불러올 테니." 말을 마치자 몸을 날려 산봉우리 아래로 내려갔다. 문기와 경운은 자령이 가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원래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그 가운 데는 널따란 평원이었다. 희미하게 드러난 평원의 중앙에는 몇 개의 향불이 피워져 있고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이 여럿 보였다. 그곳에 도착하여 보랏빛을 방출하여 주위를 비추며 한악과 사도평 이 있는가 살펴보던 자령이 별안간 산봉우리에 있는 두 사람에게 내려오라고 크게 소리쳤다. 경운과 문기는 즉시 검광을 타고 화살처럼 밑으로 내려갔다. 평원 중앙에는 높은 축대가 세워져 있고 단 위에는 다시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위에는 각양각색의 긴 깃대를 꽂아놓았는데 이 미 태반이 쓰러져 있었다. 아이 팔뚝만한 촛대가 여덟 자루 꽂혀 있었으나 불은 모두 꺼졌고, 다 만 중앙의 향불만 약간 살아 남아 있었다. 단 앞에는 아홉 개의 나무 말뚝이 세워져 있었는데 말 뚝에는 아홉 구의 배가 터진 시체가 묶여 있었다. 한악도 사도평도 신취도 그곳에 서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한악 곁에는 열두세 살 정도의 소녀가 한악의 손을 잡은 채 울고 있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머리를 산발한 도인 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자령은 한악을 꾸짖는 듯했고, 한악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 꾸도 하지 않았다. 자령의 말소리가 들렸다. "너는 내가 늑장을 부린다고 먼저 가더니만 왜 중도에서 쓸데없는 일에 참견을 했니? 참견을 했 으면 끝을 제대로 맺어야지 이제 어떡할 작정이냐? 사람을 구하려면 끝까지 구해 주어야잖아. 이 애의 동생은 어디 있지. 시간이 촉박한데 빨리 찾아서 구해 주고 출발해야잖아. 네가 요도를 죽일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놈의 소굴을 찾아 어린애를 구해 주지는 못했니?" 자령이 여기까지 말하자, 한악은 사도평에게 그 계집아이를 안고 앞으로 가라고 시키며 자령에 게 말했다. "나와 평오빠는 요도를 죽인 후에 원래는 어린애를 구하러 가려고 했었어. 하지만 도중에 이미 시간이 이만큼 지체되었기 때문에 신취를 타고 간다면 늦을 것 같아 언니를 기다린 거야. 이 애 말에 의하면, 그 요도가 사는 곳은 저쪽 산봉우리 뒤에 있는 석동으로써 매우 은밀한 곳이래. 만 약 우리가 그 애를 구하러 가면 언니가 우리를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까 봐 망설이고 있는 참 에 언니가 온 거야. 내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줄 알아?" 문기와 경운은 그들 자매가 입씨름을 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는 그 세 사람 뒤를 따라갔다. 그 소녀는 원래 요도에게 잡혀 나무 말뚝에 묶여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한악과 사도 평에게 구출되었던 것이다. 겨우 열두 살 나이에 방금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하고도 조금도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 길을 안내하면서 사도평과 이야기를 하는데 묻는 대로 잘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총명하고 영리한 것 같았다. 한악은 그 소녀가 갈수록 귀여워져 사도평에게서 그 소녀 를 넘겨 받아 자기가 품에 안고 걸어갔다. 얼마를 걸어가니 문제의 석동에 다다랐다. 안에는 등불이 밝게 켜져 있고 허다한 깃대가 꽂혀 있었다. 자령이 깃대를 쓰러뜨리며 후동으로 들어가러 열일곱여덟 살 정도의 두 도동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방금 주등(主燈)이 갑자기 꺼졌는데, 사부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사부님도 정말 죄받을 짓을 너무 많이 하셔. 매년 단오절만 되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니, 우리가 비록 그의 제자인 데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데 사부님은 어떻게 죽일까?" "누가 아니래! 우리들만 해도 그렇지. 처음에 그분에게 잡혀 와서 죽을 뻔했잖아? 우연히 마음 좋은 사람이 부탁을 하는 바람에 살아 남았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자령 일행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키가 좀 큰 도동이 소리쳤다. "웬 사람들이냐!" 자령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큰소리로 말했다. "너희 사부는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하여 더 이상 나쁜 짓을 못하게 우리가 죽여버렸다. 지금 이 꼬마 아가씨의 동생이 여기에 갇혀 있다는데, 어느 곳에 있느냐? 빨리 데리고 오지 않으면 너희 들도 사부처럼 죽여버리겠다." 두 도동은 이 말을 듣자 황망히 꿇어앉으며 말했다. "저희는 모두 착한 집안의 자제입니다. 사부가 우리를 잡아와서 죽이려고 하다가 어떤 분이 말 리는 바람에 제자가 되었답니다. 평소에 그저 사부의 시중만 들 뿐이지 사람을 해치는 일은 모두 사부 혼자서 했습니다. 저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어린꼬마는 사부의 법술에 갇혀 저쪽 돌기둥 위에 있답니다. 저희는 있는 곳만 말씀드릴 수 있지 사부의 법술을 풀 수는 없습니 다. 바라옵건대 여러 대선(大仙)께서는 제발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육육진원효로 秦紫玲神遊東海 司徒平平救南姑 자령은 두 명의 도동(道童)이 모두 근골이 뛰어나고 또 얼굴에 요기(妖氣)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 자, 속으로 한악이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을 원망했다. 그러나 이미 일은 이렇게 되고 말았으므로 우선 그들 두 사람을 돌기둥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석주는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령이 웃으면서 '이건 눈 속임수야!'라고 말하고는 일지(一指)를 뻗어 자줏빛 광채를 내쏘니 그 빛이 닿는 곳에서 석주가 나타났다. 기둥에는 팔구 세쯤 되어 보이는 어린 동자가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이 묶여 울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갔을 때는 울다 지쳤는지 울음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 을 정도였다. 일행이 채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 소녀는 한악의 손을 뿌리치고는 앞으로 뛰어가 그 남자아이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자령은 울고 있는 그들을 떼어서 안고 살펴보고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한악 에게 말했다. "이제 사람은 구했다. 여기는 요괴들의 소굴로, 그들 일당들이 다시 나타나면 생명이 위태로워. 그렇다고 저들을 데리고 청라산까지 간다는 것도 무리한 일이야." 한악이 막 말을 하려 할때 경운이 끼어들었다. "아가씨는 동생을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들이 비록 해야 할 일이 있기는 하지만, 도중에 이런 일 이 일어났으니 못 본 척할 수는 없잖겠어요? 이 어린아이들은 자질이 매우 뛰어나니 그냥 내버려 두기는 아쉬운 일입니다. 저와 문사형은 도력에 한계가 있어 이번에 청라산에 간다고 해도 별로 힘이 되지 못할 것이니 허장성세(虛張聲勢)로는 큰일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와 문사 형이 한 명씩 데리고 청라에 가겠어요. 적과 싸울 때는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애들을 보호하겠습 니다. 이, 신 두 사람을 구한 후 제영운과 의논하여 다시 좋은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자령은 경운의 말을 듣고 무엇인가를 느낀 듯 즉시 승낙했다. 자령의 일행이 그 어린 동자를 구해 오길 기다리며 달아날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던 두 도동은 이때 일행들이 떠나려 하자 도리어 몹시 당황했다. 급히 뛰어와서는 그들 앞에 무릎 꿇고 애원했 다. "사부님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저의 사모님 <추혼낭자(追魂娘子)> 예란심(倪蘭心)은 사부님보다 도 더 흉악무도합니다. 우리 두 사람 이제 그분에게 잡히면 목숨을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평소 에도 그분들이 사람들을 해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기회가 없었습니 다. 그런데 천행으로 여러 대선(大仙)님 들을 만났으니, 제발 저희들의 생명을 구해 주십시오. 함 께 데려가 주십시오." 자령은 이번 걸음이 적과 싸우러 가는 것이고 승부를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계곡에 두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경운이 재삼 부탁하고 또 떠날 때 추운수가 한 말이 생각나 마음이 흔들렸다. '추운수 노선배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길, 내가 마도(魔道)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늘 구하는 사람에 게 달려 있다고 했지. 그런데 그것이 이, 신 두 사람인지 저 어린아이들인지 알 수가 없구나. 어 쨌든 오늘 사람을 구하면 기회를 놓치지는 않겠지!' 두 도동을 살펴보니 비록 요인(妖人)의 문하에 있었지만 전혀 물든 것 같지 않았다. 근골은 조금 전에 구해낸 굴 속의 남매보다는 못하지만 그런 대로 우수했다. 또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어린나이의 이들을 요괴의 소굴에 그냥 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일행과 의논하지도 않고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급박하여 이, 신 두 사람 일을 그르칠지도 몰랐기 때문에 네 아이들의 성명이나 내력을 물을 시간도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이들을 데리고 가면 부담이 너무 클걸." 한 마디 하고는 아이들에게 울지 말고 일어나라고 했다. 경운, 문기, 한악과 사도평에게 각각 이 들 한 명씩을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나갈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는 신취에게 먼저 청라로 날아가서 사람들을 찾아보라고 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자령은 법술을 펼쳐 소리를 지르며 서쪽으로 날아 갔다. 원래 한악은 나이가 어려서 조금 철부지 같은 점이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 아 자령과 함께 수년간을 수련하여 그의 도행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보상부인의 단점을 물려받아 천성이 경솔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도평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본 래의 동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그들 자매 두 사람과 사도평과의 인연을 이미 현진자가 확실하게 말해 주었거늘 어떻게 그가 정염에 빠져 큰 뜻을 저버리려 하겠는가? <건곤정기 묘일진인> 부부, <추운수> 부부는 모두 결혼하고서 출가(出家)했다. 그들은 힘든 수 행을 하고 현문(玄門)의 상승정종(上乘正宗)을 익혔으며, 또 많은 광세절연을 입고 오랜간의 수련 을 쌓아 지금처럼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선(天仙)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는지 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악 역시 내심은 자령과 같은 마음이었으나 도심이 자령만큼 굳지 못하여 사전에 예방하지 않 고 기분내키는 대로 생각하곤 했다. '그이를 내가 좋아하는 것은 형제나 친구간의 정 같은 것이야. 정욕에 휩싸이지만 않으면 아무 런 걱정이 없어.' 그래서 그녀는 자령처럼 사도평을 차갑게 대하지 않았다. 자령은 동생이 사도평에게 너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떠나 면서 특별히 당부했던 것도 주위를 의식하고 사도평과 너무 친밀한 모양을 보이지 말라는 것이었 다. 자기도 걱정이 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동해로 가서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다면서 이렇게 말했 다. "어머니는 진원(眞元)이 이미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앞날을 점 치실 수 있단다. 우리 두 사람과 그이의 인연은 이미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 하시면서 모든 일을 한발 물러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하라고 하셨어. 이 인연은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고 하셨다. 그이와의 인연이 운명이라면 그이를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니 미리부터 접근할 필요야 없지 않니? 어머니의 장래를 위하여 우리 두 사람은 당연히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후에 우리들이 그가 도를 이루는데 도움을 주어서 보답 해야만 하는 거야." 자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악이 말했다. "그이는 사람이 지극히 순정(純情)하고 또 이미 굳게 맹세했으니 우리들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 으면, 그는 결코 망념을 품지 않을 거야." 자령은 한악이 어리석게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모든 일에는 선기(先機)가 있으며 시작부터 신중해야만 대의를 그르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때 사도평과 맹세할 때 한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고 다만 자기 입장만을 말했던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이 난관을 어 떻게 풀어갈까 고민스러웠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다가는 한악을 격려하며 말했다. "네가 그이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냉정을 찾아야지. 만약 그렇지 않고 정욕에 빠진다면 바른 결 실을 맺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미에 도착하면 내가 나서서 너희 두 사람을 짝 지워 주마. 그러나 네가 성급하게 자신을 망치려고 나의 말을 듣지 않 는다면 나도 너를 도울 수 가 없어. 너의 생각은 어떠니?" 자령이 이렇게 그를 격려하는 것은 사실 핏줄을 나눈 혈육에 대한 관심과 호의에서 나온 것이었 지만, 한악이 부끄러워하리라는 것을 생각지 않아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자기와 의논도 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여쭈어 보았을 뿐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고의로 말을 돌리면서 자기 독단으로 처리하여 해결하려고 시도했구나 싶었다. 한악은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흥! 당신은 나의 언니로서 평소 나를 사랑했지만 일단 어려운 고비를 만나면 피할려고 했었지. 언니 말대로라면 자신은 그이와 결혼하지 않고 나와 짝지워 주겠다는 말이지. 하지만 나는 내 생 각대로 그이와 가까워져서 언니에게 보여줄 테야!' 그녀는 자기의 속마음은 감추고 자령에게 대답했다. "언니의 호의에 오직 감격할 뿐이야. 내가 언니처럼 수양을 쌓았으면 모르지만 아직은 그렇게 조급하지 않아. 그러나 나는 정욕에 빠진 다음에 언니의 말을 따라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 만일 내가 어머니와 언니의 관심 속에 평오빠의 짝이 된다면 끝내 이름뿐인 부부가 되고 말 것이니 무 슨 즐거움이 있겠어?" 말을 마치고는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몸을 돌려서 걸어갔다. 자령은 그를 붙들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게 되자 한숨을 쉬면서 추운수를 찾아갔던 것이다. 한악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러나 언니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도평을 불러내어 그를 한번 시험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가 우연히 추운수를 만났던 것이다. 추운수가 떠나면서 한 말은 정욕을 극복치 못하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한 자령의 말과 비슷했다. 또 화가 나고 두렵기도 하여 사도평과 깊이 의논하리라 생각했다. 문기와 경운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아무런 말도 없이 함께 나갔고, 그래서 일부러 자령이 우물 쭈물한다고 원망하면서 사도평과 함께 먼저 가려고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신취에 앉아 천여 리나 날아갔다. 밑으로는 높은 산봉우리가 은은히 솟아 있었다. 한악이 사도평에게 말했다. "청라가 서북쪽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와 본 적은 없었고, 또 급히 오느라 위치 를 물어보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앞쪽에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거기에 내려서 잠시 쉬어요. 그래 서 언니가 오길 기다렸다가 함께 가요." 한악은 그와 함께 땅에 내려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도평이 그것을 어 찌 알았겠는가? 대답도 하기 전에 신취는 이미 산봉우리에 이르러 땅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사도평이 말했다. "아가씨가 굳이 먼저 가겠다고 고집하여 언니를 불쾌하게 해놓고 이제 여기서 기다리다 같이 가 겠다니 무슨 심보요? 그러다가 만약 언니가 다른 길로 가서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언니보다 늦게 갈 수밖에 없지 않아?" 한악이 뾰로통해져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원망하는 거예요? 저를 어리석은 여자로 생각하고 있지요? 사실은 조금 전에 언니 와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있어요. 저는 성미가 급해서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 일부 러 여기에 온 것이에요. 언니가 출발하기까지는 한 시진은 걸릴 테니, 시간적으로 당신과 요긴한 말을 할 시간은 있어요. 그런데 청라로 오는 길을 묻는 것을 잊어버렸다구요? 저는 모른다고 해 도 신취는 천 년 동안 천지에 가보지 않은 곳이 없어요. 그런데 찾지 못할 리가 있어요? 언니가 사용한 법술은 천리호정, 낭중축영(千里戶庭 囊中縮影)으로써, 저의 외할아버님인 설설노인(雪雪 老人)이 낭환천부(瑯環天府)에서 천서비적(天書秘籍)을 관리할 때 훔친 것인데, 그것을 우리 어머 니에게 전수했던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또 그것을 홍화모모와 우리 자매에게 전수했지요. 언니 는 우리 둘이 가게 하고는 안심하지 못해 계속 신경쓰고 있을 거예요. 조금 있다가 다시 신취를 타고 가도 늦지 않아요. 이제 딴 이야기는 그만두고 진작부터 하려고 했던 말을 하겠어요." 사도평은 자령 자매가 자신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말을 듣고는 분명히 두 사람의 은밀한 이야기 이리라 여기고 매우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내막을 알고 싶은 마음에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 한악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언니가 오늘 저녁 저에게 뒤쪽으로 가자고 하더니....." 거기까지 말했을 때, 신취가 갑자기 나타나 부리로 한악의 옷소매를 물고 잡아당겨 몸을 뒤로 돌리게 했다. 한악이 막 몸을 돌려보니 음풍(陰風)이 세차게 몰아닥쳐 비린내가 코끝을 어지럽혔 다. 한악은 사도평에게 조심하라고 급히 소리쳤다. 사도평도 이미 상황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봉우리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웬지 모르는 두려움 에 휩싸였다. 원래 두 사람은 남쪽길을 통해 이 봉우리로 올라왔는데, 가파르고 험준하기 짝이 없었다. 올라와서는 이야기를 하느라 큰바위를 찾아 앉았을 뿐이었지 봉우리 아래를 신경써서 내려다보 지도 않았었다. 신취가 한악의 옷소매를 끌어당기자 동시에 비린 바람이 불어닥쳤고 그제서야 두 사람이 봉우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던 것이다. 그 아래에는 사면이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가 보였다. 평지 중간에는 별로 높지 않은 대 (臺)가 놓여 있었고, 대 위에는 향안(香案)이 있으며, 향안 위에는 호로병이 놓여 있었다. 향안 위 에는 한 쌍의 낡은 촛대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은은한 초롱빛이 나오고 있었다. 대(臺) 위 에는 크고작은 각양각색의 기가 꽂혀 있었다. 대 앞에는 크고작은 열 개의 말뚝이 박혀 있었는데, 거기에는 열 명의 남녀노소가 묶여 있었다. 대(臺) 위의 향안 앞에는 요사스러운 인물이 한 사람 앉아 있었는데 옷차림이 매우 이상했다. 머 리는 풀어 헤치고 맨발로 어둠침침한 촛불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은 볼수록 기이했다. 이때 비린 바람은 이미 멈추었는데, 그 사람은 오른손에 든 한 자루의 장검으로 사람의 심장을 찌르고는 입으로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점점 빨리 중얼거리더니 끝내는 대갈일성 을 질렀다. 그러자 대 위의 말뚝에 묶여 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말뚝에서 벗어나서 신대(神臺) 위로 날아가서는 두 손을 펼쳐 그 요사스러운 인물을 덮쳤는데, 그 위에는 매우 살벌했다. 그러자 요도는 급히 영패로 공격을 막고 칼을 뻗으니 칼끝에서 한 줄기 녹색 연기가 발출되어 그 사람을 에워쌌다. 순간, 그 사람은 검은 연기로 변하여 향안 위의 호로병 속으로 빨려 들어갔 다. 한악이 다시 한번 살펴보니 대 위의 말뚝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말뚝은 하 나도 빈 것이 없었다. 비로소 검은 연기로 변하여 호로병 속으로 들어간 것이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 다. 말뚝에 묶여 있는 것들이 시체라는 것을 알고는 화가 치솟았다. 이때 그 요도의 활끝에 꽂혀 있던 사람의 심장은 이미 간데 없었다. 요도가 또 한 번 향안 앞으로 가서 주문을 외고 칼을 앞을 향해 뻗으며 뇌성이 울리면서 한 줄 기 비린 바람이 몰아쳤다. 동시에 칼끝에서 한 줄기 녹색 연기가 뻗어나가다 앞의 작은 말뚝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한악은 선근혜안(仙根慧眼)으로 이미 그 작은 말뚝에 묶여 있는 사람은 매우 예쁘게 생긴 여자 애로서 거기에서 큰 욕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다음 순간, 녹색 연기는 갑자기 불꽃으로 변했 고 그 불꽃 속에는 한 자루의 작은 칼이 춤을 추듯이 그 어린아이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요도는 이미 불빛으로 그 소녀의 혈도를 짚은데다 또 검으로 베어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한악과 사도평은 모두 의기가 높고 담대한 인물인지라, 그 요도의 이런 악랄한 행동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이 비검을 펼치고 붉은 빛줄기를 발하며 그 요도를 향해 날 아갔다. 사도평이 선수를 날린지라 그의 검광이 앞서 날아갔고, 한악은 그 뒤를 따랐다. 그 요도의 이름은 주홍(朱洪)으로서 원래 오대파(五臺派) 혼원노조(混元老祖)의 득의제자였으나, 자신의 법술을 믿고 악행을 저지르다가 혼원노조의 천서(天書)와 호신지보(護身之寶)를 훔쳐서 서 문산(西門山)의 동굴로 도망쳐 숨었던 것이다. 혼원노조는 그의 행적을 찾아 그를 잡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있다가 아미파와 싸우게 되었다. 결국 혼원노조가 병해(兵解)하자 그는 예(倪)씨 성을 가진 요부와 함께 요법을 수련했다. 정파에 서는 그와 같은 악당을 용납할 리 없었고 오대, 화산파에서도 그가 혼원노조의 호신지보를 훔쳐 갔으며 이로 인해 혼원노조가 참패하여 죽게 되자 그 한이 골수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 무런 동아리도 없이 부부 둘이서 악행을 저지르고 있던 것이었다. 최근에 그는 천서에 전하는 요법으로 <육육진원호로(六六眞元葫蘆)>를 제련했다. 이 호로는 서른여섯 명 동남동녀의 음혼으로 만든 것이다. 서른여섯 명의 동남동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어려운 일은 이 서른여섯 명을 열두 명을 주(主)로 스물네 명을 빈(賓)으로 나누어 야 한다는 점이다. 주인 열두 명은 나이, 일(日), 월(月), 시(時)에 따라 장남(長男), 중남(中男), 소남(少男), 장녀(長 女), 중녀(中女), 소녀(少女)로 나누어야 한다. 제련하는 날도 그 열두 명의 생명이 팔자와 서로 어우러져야 한다. 더욱 어려운 것은 소남 소녀는 십이 세, 중남 중녀는 스물네 살, 장남 장녀는 서른여섯 살로 한 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이도 맞아야 하고 제련하는 날짜도 맞아야 하며 이중에서 한 가지만 틀 려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매년 한 번밖에 제련할 수 없으며 모두 세 쌍의 남녀를 사용하여야만 한다. 이 요도는 매우 악랄한 요법을 펼치는지라 매번 정(正), 부(副) 세 쌍의 남녀 외에 또 세 개의 생혼(生魂)을 취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근선남(仙根仙男)의 동남(童男)을 취하여 모든 영혼 을 주재케 함으로써 요도 자신과 신원합일을 이루려고 했다. 이 요법은 육육상생(六六相生)하고 선천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 마흔아홉 개의 음혼(陰魂)을 사용하고 있으며 본인의 진양(眞陽)과 합하여 쉰 개나 사용되는 곳은 마흔아홉 개이다. 각파의 요 법 중에 이처럼 악랄한 요법은 찾을 수도 없는 것이다. 당초 혼원조사는 이 요법을 연성하여 정파를 쓰러뜨리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악행을 회개하지 않고 문하에 제자들을 모아 많은 선남선녀들을 희생시켜 그 요법을 연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 시진이라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고, 설비가 완전하지 못하여 심려만 낭비하여 오랫동안 연성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미파에게 참패를 당하고는 화가 치 솟아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다시 그 요법을 연성하려고 했는데, 그때 주홍이 그의 호신지보 태 을오연라(太乙五煙羅)를 훔쳐서 달아나 버렸던 것이었다. 주홍은 이 요법이 매우 악랄하므로 그것을 연성하여 정파에서 그냥 둘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 년 동안 은거했었다. 혼원노조가 병해할 때까지 이곳의 동굴 밑에 숨어버려 쉽 게 다른 사람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잊어갈 때쯤 자기 계집에게 명하여 다른 요법을 연성하게 했다. 왜냐하면 이 호로는 일 년 중 하루만 하늘 아래 내놓고 제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산 에 석동(石洞)을 만들고는 우선 처음으로 동남동녀를 찾아나섰다. 매우 신중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그 요법을 연성했다. 두 번째는 두 사람의 동남이 남아서 그들을 죽여버리려고 했으나 우연히 만난 절친한 친구가 ' 자네는 이미 마흔아홉이라는 수를 채웠는데 너무 많이 죽이는 것은 도리어 좋지 않네. 어째서 근 골이 우수한 아이들을 기르지 않고 함부로 죽이려 하는가?'라는 충고를 듣고 그 두 동남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로 자령 등이 구했던 두 명의 도동이었다. 그러므로 이번이 세 번째였다. 제련해야 하는 날을 꼽아보니 며칠 남지 않았고 여덟 명의 동남 동녀밖에 찾지 못해서 한 명의 소녀가 부족하므로 연성이 성공할 수가 없었다. 만약 이번을 넘겨 버리면 이 여덟 명의 동남동녀뿐만 아니라 첫 번째의 연성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급히 사방을 찾아다녔다. 연성 날짜 사흘 전에 그는 성에 들어가서 자신의 재주를 이용하여 점을 봐준다고 떠벌이면서 동 녀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여러 집을 찾아다녀도 마땅한 동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시골로 통하는 관도를 왔다갔다 하다가 지나가는 마차 위에 매우 아름답고 총명해 보 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아이들이 곧 재난을 맞을 것 같다 면서 점을 봐주겠다고 하여 그 아이들을 꾀어갈 생각이었다. 장(章)씨 성을 가진 아이들이었는데, 동행하는 여자는 아이 아버지의 측실이었다. 주인이 임지에 서 병이 나자, 그녀는 정실 소생의 일남 일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녀자가 무슨 식견이 있겠는가? 게다가 따분한 중에 웬 도인이 돈도 받지 않고 점을 봐주겠다 고 하니 쉽게 승낙했다. 주홍은 이 두 아이들의 명을 점치는 척하면서, 여자아이는 금년에 사용하되 남자아이는 마지막 연성에 사용할 수 있나 살펴보려 했다. 새삼스레 이 남녀아이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이때까지 이 렇게 뛰어난 근골을 가진 아이들을 보지 못한지라 매우 기뻤다. 그래서 일부러 몇 마디 겁주는 말을 하여 이 두 아이들에게 조만간 재앙이 닥칠 것이니, 그 재앙을 면하는 길은 자기를 따라 출 가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더욱이 당사자인 아이들이 원하지 않으므로 그들 남 매를 출가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수행하던 하인도 요사스러운 말을 계속하면 관가에 넘기겠다고 그에게 욕을 해댔 다. 주홍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하고는 돌아서서 갔다. 그러나 몰래 그들의 마차를 따라서 이 삼십 리쯤 가다가 요법으로 음풍을 일으켜 그 두 아이들을 훔쳐서 산 속의 동굴로 도망쳤던 것이 다. 그 두 아이들은 매우 총명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는 몰래 도망 가려고 했다. 그러나 도망가지 못하고 다시 주홍에게 잡혀 동굴 안에 갇힌 아이들은 철저한 감시 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주홍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여덟 명의 남녀아이를 데리고 나와 저녁 때 연성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이 두 아이들은 여자아이가 누나로서 이름은 남고(南姑)였고, 남자아이는 아명을 호아(虎兒)라고 불렀다. 그 두 도동 역시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한 사람은 우건(于建), 한 사람은 양성지(楊成志) 라고 했다. 그들은 평소에 스승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자신도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다른 형제 들의 위험을 안타까와했다. 그는 다른 형제들에게 주홍이 얼마나 악독한지를 일깨워 주고, 이제 우리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다고 말하곤 했다. 어린 여자아이는 그 말을 듣고는 울면서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우건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호랑이 입 속에 들어와 있고, 또 그는 우리에게 법술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너희들을 구할 수 있겠느냐. 우리 형제가 살 수 있는 시간도 몇 시간 남지 않아 오늘 저 녁이면 죽는단다." 남고는 비록 어렸지만 매우 대담하고 똑똑했다. 그는 고개 숙이고 듣고 있다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왕, 이렇게 명이 정해진 바에야 그냥 있을 수는 없지요!" 그리고는 곧 울음을 그치고 다른 형제를 달랬다. 그녀는 우, 양 두 도동에게 요도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무서운 법보가 무엇인지 물었다. 두 도동은 주홍이 평소 자신의 법술이 뛰어나다고 자랑하며 호신지보를 가지고 다녀서 그 누구 도 두려워하지 않고 행적도 좀처럼 노출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주홍은 매번 호로를 제련할 때 항상 주문을 외우고 작은 기를 흔들어 즉시 두꺼운 운무를 일으켜 대 위를 덮어버렸다. 그래서 매번 연성할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었다. 우, 양 도동은 원래 기의 효력을 몰랐으나 평소에 무심 중에 주홍이 자기 계집에게 하는 이야기 를 들었던 것이다. 남고는 그 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우건이 말했다. "그 기는 원래 지하 석동의 사모가 있는 곳에 있었으나 오늘 저녁 연성을 해야 하기 때문에 탁 자 옆에 갖다놓았을 거야." 남고는 우건이 손끝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 탁자 위에 흰색 비단으로 된 두 자 길이의 작은 기가 세워져 있었다. 기에는 빨강과 초록의 많은 부록(符錄)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 는 고의로 두 도동과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그 탁자로 접근해 갔다. 아무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그 기를 냉큼 집어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는 것이다. 우, 양 두 도동은 장씨남매가 매우 총명수려한데 어쩌다 요도의 수중에 떨어져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한없는 동정심을 느꼈다. 자기들한테는 힘이 없으니 구해 줄 수 도 없고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다. 비록 스승 의 명으로 그들을 지키고 있고 동굴이 막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장씨남매는 자기들보다 훨 씬 연약하여 달아날 것은 걱정하지도 않았다. 서로 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들 남매의 기막힌 사연을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스승의 기를 집어서 찢어버리려 하는 것을 보고는 얼굴색이 하얗게 질리면 서 막으려고 했다. 한편은 흉악한 스승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책임을 다하려 하고, 한편은 어차피 죽을 것이 뻔 했기에 목숨을 걸더라도 원수의 법보를 파괴하려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 기는 얼마나 단단한지 어떻게 해도 찢어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땅에서 뒤엉켜 있었 다. 남자아이도 누나와 두 도동이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목숨을 걸고라도 기를 파괴하는 것을 도우려고 했다. 우, 양 도동은 비록 두 사람인 데다 남자아이였기 때문에 힘이 꽤 세었으나 한 사 람이 필사적으로 기를 부수려고 덤비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우, 양 두 도동과 장씨남매가 그처럼 기를 붙잡고 애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일진의 음풍이 불어 닥치더니 귓가에 일성대갈이 들려왔다. "이 겁없는 놈들아!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사람이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요도가 여덟 명의 동남동녀를 데리고 와 있었다. 주홍은 네 사람이 땅에서 뒤엉켜 구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장씨 남매가 도망가려는 것을 우, 양 두 사람이 붙잡아서 서로 다투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자기의 고함소리를 듣고서 두 도동 이 장씨남매를 일으켜 세우는데 보니까 그 계집아이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법보를 잡고 있는 것 이 아닌가. 기의 끝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러뜨리려 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 다. 그는 자기가 연일 겁주고 달랬기 때문에 장씨소녀가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 다. 그는 맹력(猛力)을 사용하여 천계(天揆)를 발동시켰다. 기 위에 동녀의 순음지기가 닿자 어느 사이에 주홍이 펼친 요법이 파해되어 버렸다. 오늘 저녁 요법을 연성하는 데 기로써 검은 연기를 일으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요법연성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라 주홍은 깜짝 놀랐다. 그는 두 도동에게 욕을 해댔다. "이 쓸모없는 놈들아!" 그리고는 앞으로 나가 기를 빼앗아 손에 꽉 쥐었다. 바야흐로 요법을 연성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 기는 몇 년 동안에 걸쳐 제련된 것이기 때문에 한두 소녀의 힘으로는 결코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시 몇 마디 욕을 내뱉고는 두 도 동에게 석동을 지키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남고를 묶어버리고 호아는 법술을 써서 돌기둥에 묶은 다음 여덟 명의 동남동녀를 데 리고 동굴 밖으로 나와 대 앞으로 갔다. 주홍이 보기에 남고는 선근선골(仙根仙骨)을 타고 났기 때문에 그녀의 혼령을 이용하려고 법술로써 그를 제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머지 여덟 사람은 모두 사술에 걸려 본성을 잃었으므로 흐느적거리며 주홍의 뒤를 따르고 있 었다. 법대에 이르자 모든 준비를 끝내고 아홉 명의 동남동녀를 대 앞의 말뚝에 묶었다. 그리고는 대 위에 부록을 태우고 기를 흔들며 주문을 외었다. 그제서야 그는 애지중지하던 법보가 효력을 잃었음을 알았다. 놀랍고 화가 나서 급히 기를 자세 히 살펴보니 기폭 끝에 담홍색 점이 세 개 묻어 있었다. 그때서야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까 저 계집애가 이 기를 파괴하려고 했을 때 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있었지. 그때 그 계집애 의 월경이 묻은 것이야. 저렇게 어린 계집아이가 이처럼 기지가 뛰어날 줄이야. 한순간의 실수로 수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것이 헛수고가 되었구나. 내가 연성하려 하는 호로는 천지귀신과 서로 영통할 수 있지만 저기에서 발출되는 검은 안개로 법대를 가려야만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데, 이 연성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엄호를 받지 못하면 매우 위험해. 그러나 시간이 없으니 지금 연성하지 않으면 정말 지금까지의 노력도 헛수고가 되고 말 게 아닌가. 계집아이야 어차피 죽을 것이니 말할 필요도 없지만, 저 두 놈의 새끼는 어린 남매도 잘 지키지 못하고 나의 법보를 훼손했으니 살려줄 수가 없어.' 주홍은 화가 치솟아 이빨을 갈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결국은 모험을 무릅쓰고라도 요법을 연성하고 그것이 끝난 다음에 두 도동을 죽여 화를 풀려고 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 앞으로 걸어가 삼원검(三元劒)으로 부록을 끌어올려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칼끝의 불꽃에서 한 자루의 소검이 날아 나와 차례로 장남, 장녀, 중남, 중 녀, 소남 이렇게 다섯의 심혼을 취해 호로에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소녀를 이용하여 원신(元神)을 이루고자 나머지 부(副)인 일남일녀의 심혼도 모두 취하 여 마지막으로 남고의 머리 위로 가져가야 했다. 남고는 원래 정신을 잃지 않은 채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쉬지 않고 욕을 해대고 있었다. 그녀는 석주에 꽁꽁 묶여 있어 버둥거리기만 할 수 있을 뿐 심맥은 쉬지 않고 뛰고 있었고, 원신은 또 점점 응고(凝固)되고 있었다. 주홍은 오늘 저녁 비록 법보인 기를 잃었지만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이 없이 일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자 흥이 올랐다. 마지막으로 두 계집아이의 심혼만 취하면 대공(大功)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마침내 행법을 시 행하려고 그 계집아이의 심장에 손을 겨누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번쩍이며 한 줄기 검광이 쏘아 져 왔으므로 방해자가 나타났음을 알았다. 그는 계집아이의 심혼을 취할 생각을 버리고 수중의 장검을 빼어들고 검광을 흘리며 막았다. 홀 연 일진 폭음이 들리면서 한무리 붉은빛이 섬전처럼 날아왔다. 깜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려도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조차 없어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적의 비검을 막으면서 몸을 피하고는 가슴 속에서 혼원노조의 호신진동지보(護身鎭洞 之寶)인 <태을오연라>를 꺼내어 펼치니 갑자기 오색 무지개가 일어났다. 그렇게 하여 자기의 몸 과 법대 모두를 보호하려고 생각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붉은빛이 비쳐지는 곳에 은은한 뇌성이 일어나며 대 위에 있던 십여 개의 주기(主旗)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쨍' 하는 소리와 함 께 호로가 반으로 쫙 갈라지니 그 속에 있던 음혼이 십여 줄기의 검은 연기로 변해 사방으로 흩 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태을오연라가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주홍의 몸 근처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주홍은 자기가 심혈을 기울인 천년백계(千年百計)가 이삼 년 만 있으면 완성될 위력적인 법보가 한순간에 파괴되어 버리자 애통하고 화가 치솟았다. 이때 한악과 사도평이 이미 주홍의 눈앞에 날아와 있었다. 한악은 요도의 단검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사도평의 비검이 그것을 막지 못할 뿐 아니라 어머니 보상부인의 진원으로 만들어진 금단(金丹)으로도 그 오색 무지개를 막지 못하자 마침내 자기의 오색 무지개를 발출했다. 그처럼 사도평을 도와주었는 데도 요도와 평수밖에 이루지 못하고 적의 단검을 일시에 제압치 못하자 한악은 적지 않게 놀랐다. 그래서 사도평에게 말했다. "저 요도를 이처럼 상대하기 힘들 줄 몰랐어요. 조심하세요!" 사도평은 한악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악이 나아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주홍은 적이 분명히 무서운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그해서 한 번 겨루고 난 뒤 적이 어디에서 나 타나나 무심히 살펴보니 맞은편의 산봉우리 위에서 두 줄기 검은 그림자가 내려왔다. 좀 가까이 오도록 기다려 살펴보니 새파란 젊은이가 검광을 휘두르고, 오색 무지개를 뿌리며 자기의 삼원검 (三元劒)에 맞서서 점점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욕을 해댔다. "어떤 놈이기에 나의 대법을 방해하느냐! 네놈을 당장 죽여버리겠다." 말을 끝내고는 주문을 외우니 사방에서 음풍이 불어닥쳤다. 사도평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것을 본 한악이 급히 몸을 날려 나서며 날카롭게 소리쳤 다. "좌도의 요법으로 누구를 능멸하려 하느냐?" 말을 마치고 손을 휘저으니 자줏빛 검광이 쏘아져 나왔다. 이윽고 음풍이 그치자 사도평도 정신 을 차렸다. 주홍은 갑자기 맞은편에저 또 한 여인이 날아와서는 자기의 요법을 파괴해 버리자 매우 놀랐다. 그는 원래 몇 가지 법보를 지니고 있었으나 호로를 연성하느라 모두 계집에게 주고 지금은 가지 고 있지 않는데 생각지도 않게 이런 강적이 나타나 자신의 요법을 파해해 버리자 해가 떠서 마누 라가 돌아올 때까지 버틸 여유도 없음을 알아차렸다. 적의 실세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삼원검을 보니 버 티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적의 붉은빛 검광에 휩싸여 사그러들고 있었다. 급히 검광을 회수하려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아끼던 보검이 적의 손에 부서지게 되었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잠시 후 그 여인이 다시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손을 휘저으니 다시 자줏빛 검광이 삼원검을 향해 쏘아져 나왔다. 그러자 자신의 삼원검이 조금씩 진동하더니 드디어 그 자줏빛 검광에 휩싸 여 화염을 발하며 타기 시작했다. 조금 후에는 검광이 사라지더니 고철덩어리로 변해 '쨍!' 하는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주홍은 이빨을 갈면서 노려보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적의 위력이 이렇고 보니 다른 법술을 펼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만 태을 오연라를 펼치며 몸을 보존하고 있다가 새벽이 되어 마누라가 돌아오면 복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 각했다. 적의 비검은 오색 무지개와 함께 삼원검을 파괴한 다음에는 주홍의 머리 위까지 날아왔 으나, 태을오연라로 인해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주홍이 자기 법보의 위력에 득의양양해 있을 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학의 울음소리 비슷한 것 이 들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비치면서 두 줄기 금빛이 머리 위로 눌러오는 것을 느꼈다. 얼른 쳐 다보니 머리 위 가까운 곳에서 몇 번이나 채연을 뚫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한악은 처음에 사도평이 앞에서 요도의 혼을 빼면 자기는 신취를 타고 요도의 뒤로 돌아가 신취 의 강조(鋼爪)로 공격하여 호신지보로 깨뜨리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 보니 신취는 눈을 꿈뻑꿈뻑하며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막 위에 타려고 하는데 갑자기 요도가 법술 을 전개했다. 사도평도 깜짝 놀라서 다시 산봉우리로 돌아왔다. 적의 비검을 파괴하고 여러 가지 법보를 훔쳐보아도 실효를 거둘 수 없자 한악은 마침내 신취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신취는 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곧장 요도의 머리 위로 내려와서 그를 공격했다. 그러나 몇 번을 공격해도 효과를 거둘 수 없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한악도 여러 가지 법보를 시전했고 사도평도 비검으로 상, 중, 하 세 방향으로 일제히 공격했다. 그러나 태을오연라는 정말 신묘하기 짝이 없어 한악은 물론 사도평의 공격도 모두 막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한악은 초조해 하고 있다가 한 가지 계책이 떠올라 사도평을 끌어당기며 소리 쳤다. "이 요사한 놈아! 너를 조금 더 살려 두마.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가지만 나중에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말겠다." 그리고는 법보와 비검을 회수하여 사도평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한악은 내심 가는 척하여 그가 호신지보를 풀면 다시 신취로 하여금 공격케 하여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공중으로 날아오를 때 한 줄기 금빛 줄기가 뒤에서 날아올 줄 주홍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요도가 허둥거리며 뒤를 돌아본 순간, 갑자기 금빛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왔는데, 금빛 가운데 넓이가 일 장이나 되는 큰 손이 요도의 머리를 찍으려 하고 있었다. 곧 그의 오색 구름은 금빛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고, 이어서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한 줄기 금빛은 마치 섬전처 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법대(法臺) 양쪽에 서 있던 촛대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별들이 온 하늘에 가득하고 고요한 밤에 나뭇잎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제1부 끝) 촉산기협(2부) 1 주화입마의 여도인 情重故人 王羅刹洩機玄氷谷 仇同敵愾 女殃神先探靑螺谷 사도평(司徒平)과 한악(寒顎)이 놀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귓가에 나이 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을오연라(太乙五煙羅)는 원래 혼원노조(混元老祖)의 법보인데, 요도(妖道)가 훔쳐서 악행을 저 질렀던 것이오. 그대들이 밤새 고생하여 요도를 물리친 것이니, 마땅히 그 법보는 그대들의 것입 니다. 그러나 이 늙은이가 부득불 이 법보를 사용해야만 할 일이 있군요. 요도는 이미 나의 비검 에 죽었으니, 이 법보를 잠시 빌립시다. 후일 동해(東海)에서 만나면 반드시 돌려드리리다. 저 아 래에는 두 분이 구하러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이 있으니 빨리 가보시구려." 이렇게 말하고는 곧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악은 암암리에 굉장한 고수가 지켜보고 있었구나 싶어 급히 자줏빛 검광을 쏘아내고는 몸을 공중으로 훌쩍 날려 사방을 살펴보았다. "어느 분이신지 존성대명이라도 알려주십시오!"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할수없이 땅으로 내려섰다. 백양나 무 말뚝으로 뛰어가 살펴보니 요도는 이미 몸뚱이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아홉 개의 말뚝 가운데 하나만 비었을 뿐 나머지에는 모두 사람이 묶여 있었는데 일곱 개의 말 뚝에 묶인 것은 시체들이고 나머지 하나에만 그 죽지 않은 여자아이가 묶여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여자아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정말이지 두 분의 은혜에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악이 가까이 다가가서 묶은 것을 풀어주자, 여자아이는 땅에 엎드려 다시금 구명지은(求命之 恩)에 감사하고는 울면서 그동안의 경위를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 호아(虎兒)가 아직도 요도의 동굴 안에 갇혀 있다고 말하는 품이 동생도 구해 주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한악은 남고(南姑)가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는 여간 총명한 아이가 아니구나 싶은 한편 가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한악은 동굴 안에 두 도동(道童) 말고는 요도의 잔당이 한 사람도 없음을 알자, 아무런 두려움 없이 동굴로 들어가 여자아이의 동생을 구했다. 그리고 언니 일행과 함께 가기 위해 그들이 도착 하기를 기다렸다. 한악이 여자아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을 때 자령(紫玲)과 문기(文璂)와 경운(輕雲)이 도착 했다. 그들은 한악과 사도평이 떠난 지 오래 되었는지라 훨씬 앞서 있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공중에서 신취(神鷲)가 배회하는 것을 보고는 그 뒤를 따라와서 가까스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청라산(靑螺山)으로 출발했다. 자령의 법술이 비록 뛰어나다고는 해도, 한악 이 사람을 구하느라고 도중에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날이 부옇게 밝을 무렵에야 겨우 천변 (川邊)에 도착했을 따름이었다. 비단목처럼 드러난 높고 낮은 산들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었고, 아직 눈도 녹지 않은 상 태였다. 위풍이 당당하고, 기후의 변화가 심한 그 산들은 남방의 명산들과 현저히 다름을 말해 주 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가 자령은 잠시 법술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오문기와 사도평에게 장씨 남매와 우건 (于建), 양성지(楊成志) 두 사람을 돌보게 한 다음 자기는 한악, 경운과 함께 먼저 가서 영경(英 瓊)과 약란(若蘭)을 구해야겠다며 서둘러 출발했다. 한참 가다가 경운이 무심결에 자령에게 물었다. "저 산이 청라산이에요?" 자령은 그 말을 듣고 눈이 둥그래지면서 대답했다. "저긴 대우라산(大烏拉山)의 옆봉우리예요. 그럼 경운 사매도 여기에 처음 와보는 것인가요. 오 사매는?" 경운이 말했다. "오언니도 알 까닭이 없죠. 다만 가사(家師)께서, 청라가 천변에 있다고 이야기하시던 것을 들었 을 뿐입니다. 떠나올 때도 길을 서두르느라고 자세히 여쭤보지 못했구요. 그때 끼어든 한악 사매 가 먼저 가겠다고 하길래 알고 있는 줄만 알았죠 뭐. 뜻밖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이제 어떡 하면 좋지요!" 자령이 말했다. "나는 비록 청라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옛날에 어머니를 따라 천변에 간 적은 있기 때문에, 청 라가 강정설산(康定雪山)에서 멀지 않은, 대우라산의 서북쪽 만산심곡(萬山深谷) 중에 있다는 것 은 알고 있어요. 나의 주법(走法)으로 대우라산까지 가도 날이 아직 저물지 않을 것이니, 그때 잠 시 멈춰서 의논한 다음에 두 사람은 이, 신 두 사람을 맞으러 가고, 한 사람은 나머지 두 사람과 함께 청라로 직행할까 생각했었지. 두 사매가 곤경에 처하기 전에 우리와 만난다면 얼마나 다행 스러운 일이겠어요! 그런데 내 동생이 도중에 일을 저질러 시간이 지체될 줄이야 생각지도 않았 지 뭐예요. 그래서 두 분 사매한테 길을 물어보지도 않고 직접 청라로 향한 거랍니다. 어쩌면 좋 죠!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적의 허실심천(虛實深淺)도 모를 뿐 아니라 어린아이 넷까지 데리고 대 우라산까지 왔으니, 일단 재정비를 하고 다시 떠나는 것이 그래도 안전할 거예요. 현재 모두 길도 모르고 시간도 이미 많이 지났으니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가씨는 네 동생을 먼저 데리고 떠나세요. 나도 곧 떠날 테니, 우리가 나뉘어서 서북방향으로 길을 찾아봅시다." 말을 마치자 세 사람은 이야기할 틈도 없이 떠났다. 경운과 한악이 짝을 지어 날아가자, 자령은 그들 두 사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땅을 박차더니 구름을 뚫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자령이 대우라산 서북쪽으로 날아가며 자세히 살펴보니 산과 산이 겹치고 이어져 있는 모양이 마치 용이 뒤엉킨 듯 지렁이떼가 기어가듯 멀리 천여 리 밖까지 뻗쳐 있었다. 비록 양기 무성한 초여름이라 할지라도 첩첩산중이라 기온이 매우 낮아서 산봉우리 위엔 아직도 녹지 않고 쌓여 있 는 눈만 보일 뿐 풀이라고는 돋아나지도 않았고, 사람은커녕 산짐승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자령은 영경과 약란을 구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에 촌각을 다투며 날아서 순식간에 삼백여 리를 날아갔다. 마음이 점점 초조해져서 애간장을 태우는데, 돌연 서북쪽에 높은 산이 나타났다. 산세 가 매우 험준한 게 청라인지도 몰랐다.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미 그녀는 그 근처의 높은 산봉우리에 다다랐다. 머리를 낮추고 아래를 살펴보니, 오른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약간의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한길가에는 큰 사당이 하나 있고 그 옆으로 나무와 집들이 보였지만 사람이라고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 다. 불현듯 저쪽 구름 아래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싶자, 돌연 한 마리의 커다란 괴조(怪鳥)가 나타 났다. 그 괴조는 온몸이 검은 깃털로 덮여 있었다. 한 쌍의 눈은 금빛 안광을 사방으로 쏘아내고 있었다. 대문보다도 큰 듯한 날개를 펼쳐 바람을 타고 구름을 가로질러 섬전처럼 빠르게 날아온 괴조는 자령의 발 아래를 지나 동남쪽 산봉우리 뒤로 내려앉았다. 괴조가 스쳐지나갈 때 그 풍력이 어찌 나 센지 자령의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자령은 마음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저 괴조는 보통 새가 아니구나! 신취에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겠는 걸.'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언젠가 이영경이 백미화상(白眉和尙)의 신취를 얻게 된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 괴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빨리 날아가는 것으로 보아 혹시 아래에 이, 신 두 사람 이 잡혀 있는 건 아닐까! 그래, 어쩌면 구원을 요청해야만 할 상황을 만났는지도 모르겠지.' 이렇게 생각하고는 우선 산 아래쪽으로 가서 동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 봉우리는 다른 여러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구름 위로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자령이 산봉 우리 위에 도착하여 즉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가지가지 야생꽃과 잡 목이 우거져 있었다. 깊은 계곡 안에는 누런 연기가 가득하고, 불그레한 안개가 오륙십 평 정도의 넓이로 피어올라 있었다. 붉은 안개 밑에서 한 무더기 자줏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는데, 마치 신룡(神龍)이 편안히 똬리를 틀고 앉아서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이때 태양이 점점 높이 떠올라 계곡의 광 경이 한결 분명하게 드러났다. 누런 연기 이외에는 온통 기화이초(奇花異草)들로 덮여 있는데, 새벽 안개에 젖고 미풍에 하늘거 리는 모습들이란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와서 분명히 누군가가 요법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 떻게 할까 하고 자령이 망설이며 궁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한 가닥 검광과 붉은 빛줄기가 자기가 서 있는 산봉우리의 중턱을 향해 날아오지 않는가! 깜짝 놀란 자령이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편 바위 위에 한악과 경운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악도 반대쪽 봉우리 위에 자령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언니! 발 밑에 요사한 중놈이 있으니까 조심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령이 서 있는 봉우리의 중턱에서 마치 용과도 비슷한 것이 쏘 아져 나와 한악과 경운이 발출한 붉은 빛줄기의 검광과 맞부딪쳤다. 자령은 마음 속으로 한악에게 욕을 퍼부었다. 지금 자기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이영경과 신약 란을 구하는 일인데, 경망한 계집애가 사리를 분별치 않고 성급하게 또 일을 벌렸으니 말이다. 만 약 아래의 붉은 안개와 누런 먼지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 이영경과 신약란이라면 이게 보통 잘못 된 일인가! 그러나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고 적은 어머니 보상부인(寶相夫人)이 제련한 금단(金丹)마 저도 막아낼 정도로 고강한 실력을 갖추었고 보니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한 노릇이었다. 자령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극락진인(極樂眞人)>의 <전도팔문진선기(顚倒八門鎭仙旗)>를 가만히 빼어들고 적이 도망갈 수 없게 했다. 그리고는 반대쪽으로 날아가서 이쪽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가 방금까지 서 있던 봉우리의 중간쯤에 직경이 사람 키 높이의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동굴 앞에는 평지가 조금 펼쳐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머리가 표범 같고, 눈이 둥글며, 코는 이리 같고, 입은 찢어진 듯 커다란 번승(番僧)이 서 있었다. 그 화상은 불타는 듯한 붉은 가사를 입고 있었고, 맨발이었으며, 손에는 자금발우(紫金鉢盂: 발우는 승려의 밥그릇, 여기서는 무기의 일종) 를 들고 있었다. 그 앞에는 향로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길이가 석 자나 되는 향이 세 개 꽂혀 있었다. 그 화상은 향로 앞에 단정하게 앉아서 합장을 하고 있었다. 자령이 입을 열어 무엇인가 물어보려고 하는데, 돌연 바람소리와 함께 괴조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조금 전에 보았던 그 금안(金眼)의 괴조가 돌아오고 있었다. 괴조의 등 위 에는 세 사람이 얌전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와 자령 일행이 서 있는 곳에 서 땅에 사뿐 내려앉았다. 괴조의 등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이미 몸을 날려 땅으로 내려서고 있었는데, 선풍도골을 갖춘 한 사나이와 두 여인이었다. 자령과 한악은 화상과 상대하느라고 그들 세 사람을 미처 자세히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그들 세 사람 가운데 비교적 나이가 많은 여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뜻밖에도 경운 동생이 이곳까지 왔군그래! 영경 동생이 저 아래에 잡혀 있다는 것은 조금 전에 강우가 나를 향해 슬프게 울어대길래 그때서야 알았어. 저 두 분도 알 만한 사람들인 것 같은데 우선 영경을 구한 다음에 다시 인사를 해야겠구나!" 그 말투를 보고 자령은 이 여자가 제영운(齊靈雲)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때 비교적 나이가 어린 여인이 품속에서 자그마한 거울을 하나 꺼냈다. 그러자 거울에서 쏟아 져 나온 금빛 줄기가 백여 장이나 뻗치면서, 아래의 누런 먼지와 붉은 안개를 비추었다. 그런데 그 요법은 상상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금빛 줄기에 누런 먼지는 소멸되었지만, 붉은 안개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증기 같은 것이 위로 솟아올라 왔다. 사태가 이렇게 긴박해지자, 자령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 요사한 안개는 매우 지독하니, 모두들 물러서세요! 두 사람은 제가 직접 들어가서 구하겠어 요." 그리고는 작은 기를 꺼내드는가 싶자, 이내 그녀의 종적은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 제영운 등은 <건곤정기 묘일진인(乾坤正氣 妙一眞人)> 제수명(齊漱溟)의 비검전서를 받고 수일 전에 청라부근의 산중에 와 있었던 것이다. 금선(金蟬)이 괴조를 돌려보내려고 했을 때 주문(朱文)이 이의를 달았다. "꼭 영경 동생만 타라는 법이 있어? 우리가 잠시 그것을 이용하면 좋잖아. 꼭 이렇게 서둘러 돌 려보낼 필요는 없지 않느냐구." 그러자 금선은 누나인 영운이 곁에 있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주문을 쏘아붙였다. "우리는 응벽애(凝碧崖)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거리낌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가 교조님의 명령 을 받고 여기로 온 거잖아. 누나는 맡은 바 임무가 중대하고 이, 신 두 사람은 아직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빨리 돌려보내야 해. 지금 우리가 연락을 취하지 않으면 응벽애에서는 얼마 나 걱정하겠어. 원래 이 강우는 우리 일행을 데려다 주고는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던 거야. 그러니 까 강우를 돌려보내야만 응벽애에 있는 다른 사람이 걱정을 하지 않을 게 아니냔 말이야." 주문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흥! 그렇게 말하니까 마치 나 혼자 욕심 많은 것처럼 되었네." 금선이 다시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영운이 막았다. "주동생과 금선은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단양(端陽)을 떠난 지 수일이 지나서 이젠 시간이 없단 말이야. 청라 그 요마들의 소굴은 우리 둘이 가본 적도 없고, 다만 만산심곡(萬山深 谷) 중에 들어앉아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으리란 말만 들었을 뿐이잖아. 설령 쉽사리 찾는다 해도 사방에 적이 깔려 있을 뿐 아니라 그 적들의 허실을 모르니 먼저 조사해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 겠어? 이곳은 만년설로 뒤섞여 있어 풀이라고는 싹도 트지 않았으니, 비록 우리가 추위 때문에 고생할 사람들은 아니지만, 눈 속을 헤맨다는 것은 역시 힘든 일이야. 내가 성도(成都)에서 옥청 대사(玉淸大師)께 들은 말이 있다. 옛날 그분의 동문이었던 여도인 중에 <여앙신(女殃神)> 등팔 고(鄧八姑)라는 분이 있는데, 지금은 개과천선하여 사도에서 정도로 귀의하셨다더군. 그분은 성품 이 오만하여 어떤 문파에도 귀속되기 싫어 혼자 이 산중턱에 있는 석동에 은거하고 있다는 거야. 그런데 그분은 옥청대사랑 골육처럼 정이 깊은 사이래. 그때 옥청대사께서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하셨으나, 나는 그때 그분이 계신 곳을 상세히 물어보았고 어떻게 하면 만나뵐 수 있는가를 물었 었지. 그런데 뜻밖에 오늘 그것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금선이 말했다. "그처럼 대단한 분이 여기에 계신다면 어서 찾아뵙고 인사를 올려야지, 여기서 뭘 하려고 머뭇 거리는 거야?" 그러자 영운이 핀잔을 주었다. "서두른다고 다 돼? 우선 방향을 잘 살펴본 다음에 가야지." 말을 마치고 먼저 산세의 위치를 살펴본 후에 금선, 주문을 데리고 서쪽의 깊은 계곡을 향해 나 아갔다. 영운 일행이 올랐던 이 산은 소장백산(小長白山)으로써 눈이 아주 두껍게 쌓여 여름에도 녹아 없어지지 않았고, 지세 또한 매우 험준하여 사람이 다닌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영운은 옥청대사에게 들었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금선과 주문을 데리고 아래로 찾아내려 갔다. 거의 계곡의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천둥 같은 굉장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다보 니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희끄무레한 것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세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하여 엄청 난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지나치는 곳에는 흰 티끌이 백여 장이나 사방 가득히 날아올 랐다. 영운은 그것이 신조가 날아오를 때의 날갯바람에 산봉우리에 쌓였던 눈이 무너지면서 일어난 눈 사태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녀는 비조처럼 몸을 날렸다. 세 사람은 모두 비검술에 능하였기 때문에 신속히 몸을 날려 그 위험에서 피할 수가 있었다. 뒤 를 돌아다보니 크기가 작은 산만한 눈덩이가 방금까지 세 사람이 서 있던 곳을 휩쓸고는 계곡의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워낙 딱딱한 눈더미들이라 백여 장 위에서 떨어지면서 울퉁불퉁한 바위에 부딪치며 굴러떨어져 내리고 보니 그 기세는 마치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했으며, '우르르 꽝!' 하는 굉음은 주위의 다른 봉우리에 쌓여 있던 눈더미에도 영향을 주었다. 온 산 위의 눈더미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깨어지고 흩날려 아침 햇살을 받아 오색찬란하게 빛나 는 환상적인 경치는 필설로 형언하기가 어려웠다. 세 사람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주문이 말했다. "이곳 산들은 정상은 하얗고 아래쪽은 희끄무레하면서도 누런 빛을 띠고 있을 뿐 풀이라고는 찾 아볼 수도 없는 추운 곳이군요. 응벽애의 동천복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지만, 내 평생 이렇게 기이한 경치를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 이번 여행이 헛된 일만은 아닌 듯싶군." 그러자 영운이 말했다. "동생은 여전하구나. 이 판국에 기이한 경치타령을 하다니. 다행히 우리들이 무예를 익히고 있었 기에 몸을 재빨리 피해 화를 면할 수가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꼴이 되었겠니? 저 작은 봉우리를 봐. 높이가 칠팔 장 정도는 낮아진 것 같잖아? 우리가 만약 보통사람들이었다면 뼛가루 도 못 찾고 눈더미 속에 파묻혔을 거야. 먼 곳에서 처음으로 여기 찾아온 신분이면서 데려온 새 한 마리 때문에 이런 소란을 일으켰으니, 이곳 주인께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잖아? 그런데 동생은 기이한 경치타령만 하다니, 한심하구나." 세 사람이 웃으면서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문득 계곡 아래에서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어떤 잡것들이 감히 이런 소란을 피우느냐? 할 말이 있으면 내려와서 나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 을, 이게 무슨 짓이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곡 아래에서 돌연 일진의 광풍이 불어 올라왔다. 아직 채 떨어지지 않 은 눈들은 이 바람에 날려 빙화와 눈의 파도를 연출했고 끓어오르는 물처럼 사방으로 솟구치며 확산되었다. 한참이나 지나서 나머지 눈들이 겨우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나자, 비로소 계곡의 바닥이 어렴풋 하게 드러나 보였다. 주문과 금선은 필경 계곡 아래에 부상당한 사람이 있는가 보다 싶어 급히 달려내려갔다. 그러나 신중한 영운은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질까 염려하여 잔뜩 경계심을 돋군 채 두 사람의 뒤를 따 랐다. 금선과 주문이 계곡 밑바닥에 내려서서 사방을 살펴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암벽의 한 모서리가 움푹 들어간 부분이 보였다. 온 산에 풀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인데, 놀랍게도 움푹 들어간 곳에는 기화이초가 가득하였으며, 그 향기가 사방에 가득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하였다 조금 전에 소리를 지른 자가 누군가 하여 둘레둘레 찾아보았으나,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움푹 들어간 부분이 비록 널찍하고 높으며 꽤 깊이 패여 있기는 하지만 동굴이라 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한가운데는 커다란 반석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옆으로 몇 개의 청석 (靑石)이 놓여져 있었다. 영운은 재빨리 주문과 금선에게 눈을 흘기고 나서 반석을 향하여 공손히 절을 했다. "저희 세 후배는 등팔고 선배님을 찾아왔다가 잘못하여 그만 눈사태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저 희는 스스로 우매함을 깊이 깨닫고 있으니 부디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청하옵건대 아무쪼록 법신(法身)을 나타내시어 저희가 예를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끝나자 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처음부터 여기에 앉아 있었는데 너희가 보지 못하고서 누구를 원망하려 드느냐?" 눈이 휘둥그래진 영운 일행이 앞을 쳐다보니, 반석 위에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 이 보였다.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였고 꼬챙이처럼 야위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두렵 게 했으며, 얼굴에는 핏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영운이 공손히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등팔고 선배님을 아실 줄 압니다만....." 그러자 그 여인이 대답했다. "멀리서 손님이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구나. 내 그대들을 보아하니 선골(仙骨)을 갖추고 있 고 얼굴에는 정기가 엿보이는지라 나를 성가시게 할 사람은 아닐 것 같군. 나는 지금 고선(枯禪) 을 수련하고 있는데 아직 행공이 끝나지 않아서 육신은 움직일 수가 없느니라. 헌데 그대들은 왜 팔고를 찾는고? 듣고 나서 그녀의 거처를 알려주리라." 영운이 대답했다 "제 이름은 제영운이고 <건곤정기 묘일진인>의 장녀이옵니다. 같이 온 사람은 동생인 금선과 사매 주문이온데, 아버님의 명을 받들고 청라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전에 성도(成都) 벽사촌(壁邪 村)의 옥청관(玉淸觀)에 들렀다가, 우담대사(優曇大師) 문하의 옥청대사 한테서 등팔고 선배님의 대명을 듣고는 늘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오늘 여기를 지나게 되어 찾아뵈려 하는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 여인은 대답을 듣더니 뼈만 앙상한 얼굴에 실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세 손님은 옥나찰(玉羅刹)이 청한 사람들이군. 내가 바로 팔고라오. 나는 폐인(廢 人)인지라 예를 차리지 못함을 용서하기 바래요. 좌우의 바위 위에 마음 편히 앉아서 얘기를 나누 도록 합시다." 세 사람은 그녀의 말에 모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좌정하고 나니 팔고가 말했다. "내가 지난날 우담대사한테서 수복(收服)을 받을 때 한때의 분기를 참지 못했던 것을 얼마나 후 회했는지 몰라요. 비록 다시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옥청도우께 애걸로 주선을 부탁하여 그분을 사부로 모시고는 방문좌도를 저버리고 정도를 익혀 우화등선하려고 했으나, 불행히도 중도에 주 화입마에 빠져 겨우 심혼만을 건지고는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지요. 그래서 여기서 고선을 수련하 며 상처를 치료하고 있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달리 도를 깨우친 것을 보니 애초의 내 생 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 수 있어요. 나는 청정(淸靜)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기처럼 춥 고 황량한 곳을 택하여 수련하고 있는 중이에요." 영운은 그 같은 혹독한 환경을 견뎌내며 수련하는 그녀의 의지에 감복하여 칭송해 마지 않았다. "내가 앉아 있는 석대 아래에 보배 하나가 있어요. 만년적설의 정화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써 <설혼주(雪魂珠)>라고 하는데, 내 수련에 큰 도움을 주는 물건이랍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 장(西藏)의 요승이 내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탈취하러 온 적이 있었지요. 그때 나는 심신을 지키며 석대에서 나를 밀어내지 못하도록 했으므로 그도 마침내 손을 들고 말았답니다. 우리는 두 차례나 싸웠지만 결국 내가 상승을 점유하자, 마화(魔火)로써 나를 태워버리려고 하지 않겠어요. 백여 일 간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데, 때마침 옥청이 와서는 나를 대신하여 그를 물리 쳤습니다. 만약 옥청이 며칠만 늦게 왔더라면 나는 설혼주와 함께 이미 마화에 타서 재가 되었을 거예요." 등팔고는 지난날의 그 어려웠던 때를 회상하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다시 말을 이었 다. "옥청은 나와의 옛정을 잊지 못해 며칠 머물다가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도 많은 기화(奇花)를 가 지고 와서 이곳 현빙굴(玄氷屈)에 심어주기도 했지요. 이 안에 있는 것은 돌이 아니라 천년현빙 (千年玄氷)의 결정이기 때문에 대단히 춥답니다. 일단 해가 서산으로 지고 나면 사방에서 찬바람 이 불어와 그 한기가 골수에 사무치지요. 일 년 중에서도 사월 중순에서 칠월 중순까지 겨우 볕 이 들어와서 조금 따뜻하기 때문에 풀이라고는 생장할 수가 없답니다. 여기에 있는 화초들은 그 아래의 영단(靈丹)이 뿌리를 보호하고 있어서 이렇게 항상 푸르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옥청이 그러더군요. 내가 탈겁비승(脫劫飛昇)하려면 운(雲) 자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을 기다려야만 한다고 우담대사께서 말씀하시더라고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여기서 꾸준히 참오(參悟)하며 오늘 에 이른 것입니다. 지은 죄가 너무나도 큰 까닭에 구원의 날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더니... 도우의 성함에 '운' 자가 들어 있는 모양인데, 또 한 사람 '운' 자 이름을 지닌 분이 있을 테죠? 내가 모르는 분인 듯하니 알려줄 수 있을까요?" "동문사형제 가운데 비교적 자질이 뛰어난 사람으로 황산(黃山) 찬하대사(餐霞大師) 문하의 주경 운 동생이 있습니다. 그녀를 불러 오는 것은 쉬운 일이에요. 도행(道行)의 정도를 논한다면 저와 마찬가지로 일천하지만, 선배님의 해탈에 도움이 된다면 진력을 다해 도와드릴 거예요. 그런데 전 에 옥청대사께서 말씀하신 해탈의 방법은 무엇인지요?" "도우는 너무도 겸손하군요. 옥청도우가 일찍이 나에게 말했어요. 그 두 분이 이곳에 오는 것은 명을 받들어 마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요. 나는 지난날 마궁(魔宮)에서 전대의 기인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하나의 지보(至寶)와 두 개의 영단을 얻어서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두 분의 법력이 높은 듯하니, 나는 곧 주화입마를 풀고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이미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일인 듯하군요. 미력한 힘이나마 성심을 다해 돕겠습니다. 저희 가 여기에 온 것은 청라를 파괴하고 선배님을 구하기 위해서니까요. 그러나 전에 여기에 와본 적 도없고 적의 허실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니 걱정입니다. 그래서 선배님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선배님께서는 이곳에 오신 동안 은거하고 계셨기 때문에 청라의 사정을 상세히 알고 계실 터이니 가능한한 상세히 알려주십시오." "청라의 형세에 대하여 말하자면 나는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팔마>란 자 들은 모두 나의 후배가 되지요. 그들의 사부인 <신수비구(神手比丘)> 위풍랑(魏楓娘)과 나는 원 래 잘 아는 사이였어요. 내가 세상과 단절하기로 결심하고 여기에 은거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녀 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답니다." 이전에 위풍랑은 여러 차례 등팔고를 찾아와서 함께 지내고자 졸랐다. 그러나 당시 아직 주화입 마의 상태에 빠져 있지 않았던 등팔고는 그녀의 뜻에 따르지 않고 조용히 수련이나 하면서 다른 일에 간여치 않겠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위풍랑은 단념하지 않았다. 위풍랑이 마지막으로 등팔고를 찾아온 것은 그녀가 <철지신침(徹地神針)>으로 이 산의 주봉인 옥경담(玉京潭)의 꼭대기를 뚫고 있을 때였다. 땅으로부터 칠천삼백 장 높이에 쌓여 있는 만년적설의 정화를 모아 설혼주를 응성(凝成)하여 보 배를 얻은 것을 안 위풍랑은 한편 부럽기도 하고, 한편 질투가 나기도 하여 결국 등팔고가 운공 중에 있을 때 요법을 이용하여 봉우리의 정상을 봉쇄하여 그녀를 설굴(雪窟)에 가두어 죽게 한 다음에 설혼주를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나 위풍랑은 등팔고가 미리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으리라 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등팔고는 상대방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충돌을 피하려고 하였지만, 봉우리의 정상을 봉쇄하려고 하는 것만은 그낭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얼음 위에 눈가루가 휘날리는 가운데 그녀는 자기의 <현허공(玄虛功)>이 깨뜨려지는 것을 보 고서야 비로소 망념을 버리더군요. 나는 모르는 척했지만, 어찌 그녀가 명백한 귀결을 모를 리가 있었겠어요? 잠시 앉아 있더니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갑자기 일어나며 '사람에게는 각자의 뜻이 다르니 서로 다툴 필요가 없겠지요. 이곳과 청라가 지척지간에 있고, 우리는 또 오랜 친구 아니겠 어요? 나의 많은 제자들도 당신을 선배로서 모시고 가르침 받기를 원하니, 당신은 나의 이런 생 각을 받아들일 줄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녀는 소인배인지라 나를 살해하려던 음모가 실 패하자 다시 음모를 꾸몄지요. 어떡하든 내 부근에서 머물며 나의 동태를 살피자는 거였어요. 나 는 그녀와의 관계를 분명히 해두어야 했음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히거나 침해하지 않는다면 나도 결코 그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뿐더러 이곳을 떠나지도 않을 거예요'라고 말해 주었답니 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리를 떴는데, 그 후로는 다시 찾아오지 않더군요." 그러나 위풍랑이 단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등팔고가 주화입마에 빠져 정신은 살 아 있으나 육신은 죽은 그런 상태가 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자주 그녀를 괴롭혔 던 것이다. "얼마 전에 옥청도우가 와서 말하기를, 묘일부인(妙一夫人)께서 위풍랑을 성도에서 참수했다지 뭡니까. 그 소식을 듣고는 마음 속의 병을 풀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전에 그녀와 약속한 바 가 있어서 설령 그녀가 죽었을망정 다른 사람을 도와 그녀의 제자들을 괴롭힐 수는 없는 입장인 데, 지난 번에 마화를 이용하여 나를 괴롭힌 번승(番僧)이 근자에 그들과 한패가 되었다고 하지 뭡니까. 그러니 그들은 정파의 공적이 된 셈이지요. 내가 설혼주를 지니고 있는 것을 번승은 알고 있으니 다시 강탈하려고 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 자의 마화 때문에 몇 년 간의 내 도행 이 헛수고가 되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들이 약속을 어길 것이 분명한데, 나 혼자 약속을 지킬 필 요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나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니 그쪽의 상황이나 자세히 알려드리지요." 영운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등팔고가 말을 이었다. "청라는 저 큰 산의 본래 이름인데 마궁은 저 산 정상의 깊은 골짜기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천여 리나 산줄기로 이어져 있지만, 마궁은 따뜻한 골짜기 안에 있어서 강풍을 잠재우고 기(氣)를 모을 수 있는 곳이지요. 주위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나무가 무성하여 일대의 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골짜기는 나선형이고, 입구는 소라 끝부분의 돌기처럼 되어 있는데 백 이십여 리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들어가야 비로소 입구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여 간해서 찾기가 힘든 것도 이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대들이 경신법을 이용하여 날아서 찾아간다면 마궁을 찾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지형을 이용하여 요법을 펼쳐 놓았을 것이니, 단단히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암수에 걸려들기 십상일 거예요. 여기 에 오시면서 그만한 준비는 했겠지요? 나는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만." 영운은 문득 오월 초닷샛날 조심원(趙心源)과 마궁으로 가자고 한 약속을 생각하고는 일행에게 말했다. "조도우는 분명히 먼저 가서 허실을 정탐하려고 할 터이니, 그를 기다렸다가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그러자 등팔고가 말했다. "세 분은 서북쪽에서 곧바로 오셨을 겁니다. 조도우가 이미 약속을 했다니 길을 알고 있겠지요. 아마 천장관도(川藏官道) 옆에 있는 지름길을 이용하리라 여겨지는군요. 내가 비록 여러 해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으나, 그 길에는 낡은 절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조도우가 단양(端陽)에 도착했다면 먼저 숙소를 찾을 것이니, 날이 밝거든 깃발과 북을 사용하여 약속을 지키도록 하세 요. 훗날 두 분 중에서 한 분이 동남쪽으로 찾아나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마궁의 허실에 대해서 이야기할까요. 지금 그들은 아미파와도 적이 되었으니 청해 놓은 고수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세 분 도우야말로 나를 돌보아 줄 사람들이니, 달리 보답할 것은 없고 원신둔화 (元神遁化)하여 친히 가서 그들의 허실이나 살펴보고 오지요. 그러니 세 분은 멀리 가지 말고 나 의 몸을 보호해 주세요. 옛적에 거닐었던 곳은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고, 또 요법을 만나더라도 탈신(脫身)의 상태이니 쉽게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도우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영운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 "저희들은 이번 일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선배님께서 이만치 저희들을 도와주시니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등팔고가 웃으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 후에 내가 많이 도움받아야 할 입장이니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시구려. 나는 이미 창공을 가르는 새와 같으니, 부득불 뼈만이 앙상한 내 육신을 감출 수밖에 없군요. 세 분 도우께 서 법력으로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자 반석 위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등팔고가 이미 마궁으로 떠난 것을 알아차리고는 속으로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반석을 둘러싸고 앉아 계 곡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하늘은 점점 황혼에 접어들고 주위의 산에 쌓인 눈들은 햇빛을 반사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조용히 운공을 하면서 등팔고의 소식을 기다렸 다. 그런데 한밤이 되었으나 등팔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주문이 말했다. "등선배는 신시에 떠났는데,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러자 금선이 투덜거렸다. "자기 한 몸 움직일 수조차도 없는 분이 그토록 큰 위험을 무릅쓰고 가다니, 누나가 말렸어야 옳았어." 영운이 동생을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너는 정말 쥐뿔도 모르는구나. 등선배는 옥청대사와 동문이고 무예나 술법으로 논하자면 옥청 대사보다도 한 수 위의 고수란 말이야. 게다가 여기서 수 년 동안 수련을 쌓았어. 자기 능력이 닿 지도 않는 일에 무작정 나설 그런 분으로 뵈던?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전혀 도움을 받지 않 았지만 지금은 우리의 도움을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니, 그런 자신의 처지를 매우 부끄럽게 느끼 고 계실지도 몰라. 어쨌든 우리보다 지리에 익숙한 그분이 친히 가셨으니 일은 반 정도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어. 옥청대사께서 그분은 성격이 매우 솔직담백하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그분의 호 의를 거절해 봐. 오히려 불쾌하게 여기실 게 아니겠니? 서로 돕자고 하셨으니, 우리도 장차 그분 을 도와드리면 되는 거지 뭐." 세 사람은 이야기에 열중하느라 날이 밝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영운 역시 걱정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서로 상의하여 청라로 가봐야 할 판이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반석 위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리더니 등팔고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녀의 안 색이 무척이나 피로해 보였으므로 세 사람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등팔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잠시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마궁은 정말 대단하더군. 옛날과 많이 달랐어요. 나도 실수할 뻔했지 뭐야. 이번 걸음에 내 그 들의 정세를 소상히 알아내었을 뿐 아니라 세 분을 대신해서 도움을 청해 두었어요. 조도우는 검 선 한 분과 큰 길 옆에 있는 라싸(喇麻) 사당에 머물고 계십니다. 세 분은 잠시 후에 찾아가서 상 의해 보도록 하세요." 그리고 나서 등팔고가 막 마궁의 자세한 정세에 대하여 설명하려 하는데, 갑자기 산 정상에서 신조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반신불수의 괴인 鬼風谷神鳥救主 玉影峯惡徒陷師 이미 신조와 친숙한 사이인 금선은 이내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게다가 영경과 약란 두 사람 이 곧 따라올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크게 놀라 영운에게 말했다. "누나, 들어봐! 불노(佛奴)가 어째서 돌아가지 않고 공중에서 울어대지? 혹시 응벽애에 무슨 일 이 생겨 우리들을 찾아나선 것은 아닐까?" 영운과 주문 또한 신조의 울음소리가 그전과 다름을 느꼈다. 영운은 주문더러 자기는 등팔고를 보살펴 드려야 하니까 금선과 함께 나가보라고 지시했다. 두 사람이 막 골짜기를 벗어나서 소리쳐 부르기도 전에 신조는 이미 공중에서 아래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신조는 울음소리를 한 차례 토해내더니, 두 날개를 접고서 한 점 검은 그림자로 변하여 쏜살같이 점차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며 곧장 아래쪽으로 날아내렸다. 그리고는 또 한 번 처량한 울음소리를 내며 두 사람 앞에 털썩 내려앉았다. 금선은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는지라 얼른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네가 이렇듯 처량하게 울어대는 것은 혹시 네 주인인 영경 동생이 이리로 오다가 도중에 무슨 사고라도 생긴 때문이 아니냐?" 신조는 머리를 끄떡이며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금빛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주루루 떨어졌다. 주문과 금선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금선은 골짜기 쪽을 돌아보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누나, 빨리 와! 영경 누이가 악도들에게 당한 모양이야. 그래서 강우가 구원을 청하러 왔나 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운은 이미 사태의 위급함을 알아챘다. 무릇 사람을 구하는 일이란 화급을 다투는 것인지라, 그녀는 등팔고에게 말했다. "저희 동문 한 사람이 중도에서 위험에 빠졌다 하니, 저희 세 사람은 급히 그녀를 구하러 가보 아야겠습니다. 사람을 구한 뒤에 돌아와 다시 포령아교(飽聆雅敎)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등팔고가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동문이 선금(仙禽)을 데리고 있으면서도 곤경에 빠졌다면 필시 귀풍곡(鬼風谷)에서 마화(魔 火)를 사용해 나와 싸우던 번승을 만난 것이 틀림없을 것이에요. 그 요물의 수법은 지독하기 그지 없는데, 바로 <서방야불(西方野佛)> 아각달(雅各達)이라 하지요. 서장(西藏)의 독룡존자(毒龍尊者) 와는 같은 사문(師門)이랍니다. 그러나 독룡존자는 문하에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어 그 위세 가 대단한 반면 그는 혼자이기 때문에, 그 자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문 형편이에요. 그에게는 <황사마화(黃沙魔火)> 이외에 하나의 <자금발우(紫金鉢盂)>와 한 자루 선장(禪杖)이 있는데, 모두 대단한 병기랍니다. 만약 그 동문이 마화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을 경우, 먼저 그의 마화를 깨뜨리고 나서야 사람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가는 그의 마화에 갇혀 탈 출할 수 없게 되고 말 겁니다. 절대로 주의해서 실수가 없도록 하십시오." 등팔고가 여기까지 말하는 동안 금선과 주문의 보챔은 숫제 아우성이었다. 등팔고 또한 이런 일 은 늦출 수 없는 것이라며, 영운더러 떠나라고 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등팔고에게 이별을 고하고 일제히 신조의 등에 올라탔다. 신조는 크게 한 번 울부짖고는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힘차게 날개를 휘저으며 구름을 뚫고 나는 기세가 얼마나 신속한지 순식간에 이미 귀 풍곡의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영운이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니, 누런 먼지와 붉은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영경의 자영검(紫暎 劍)이 그 속에서 섬전같이 번쩍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경은 자영검으로 자기 몸을 보호하 여 아직까지는 결정적인 위기에 몰리지 않은 것 같았다. 영운이 이 광경을 보고 급히 날아내리려 하는데, 홀연 맞은편 절벽 끝에서 푸르고 붉은 두 줄기 의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깜짝 놀라 주의하여 살펴보니 맞은편 절벽 끝에 세 사람이 서 있는데, 그 중의 낯익은 얼굴이 바로 주경운이었던 것이다. 영운은 이미 등팔고에게 마화의 무서움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는지라, 자령이 물러서라고 외 치자마자 즉시 금선을 잡아끌고 이십여 장 밖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작은 기를 꺼내들고 초식 (招式)을 전개하여 날아내려간 지령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영경과 약란 두 사람을 구해 절벽 위로 올라왔다. 금선과 주문은 두 사람이 요법에 당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크게 화가 치밀었 다. 그래서 그들은 비검을 쏘아내며 곧장 번승을 향해 쳐들어 갔다. <서방야불> 아각달은 원래부터 귀풍곡에 거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육마(六魔)> 여후(勵吼) 의 친구인 <소요신(逍遙神)> 방운비(方雲飛)가 무의식 중에 지껄인 말을 통해 등팔고가 소장백산 의 빙설굴 속에서 설혼주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그 보물에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소장백산 수백 리 사방을 어찌 샅 샅이 뒤질 수 있겠는가! 들은 풍월로 설혼주의 존재는 알았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니 끌탕 을 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문(玄門)의 <개산철지지법(開山徹地之法): 지세를 살펴 보물이나 영약 등의 위치를 알아내는 법술>을 익힌 것도 아니니 어찌하랴! 그러던 차에 한낱 계집이 자기가 그토록이나 원하던 설혼주를 발견했다고 하니 분통이 터져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귀에 전해진 소문이 <신수비구> 위풍랑의 입에서 비롯된 것임 을 알고는 곧장 방운비와 함께 마궁으로 찾아가서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려고 했다. 팔마를 만나 본 연후에야 비로소 위풍랑이 이미 죽고, 설혼주는 여전히 등팔고의 수중에 있음을 알았다. 팔마는 아미파의 많은 고수들이 단오절 전에 몰려올 것이 확실하자 설혼주의 무궁무진한 묘용을 이용하려 <서방야불>을 부추켜서 그것을 탈취하게 하면 자기네에게 유일한 후원자가 생긴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서방야불>은 자세히 지형과 위치를 물어서 확인한 다음 즉시 소장백산으로 날아왔다. 그런데 온 골짜기 안을 돌아다녀 봐도 시람의 모습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지라, 서방야불은 자기를 만나고 싶지 않아 등팔고가 이미 몸을 숨겼음을 알았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계속 골짜기를 쏘 다니며 욕지거리로 자극을 주자 그제서야 등팔고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등팔고가 주화입마에 빠져 이미 몸이 반신불수의 지경에 이른 것을 보고는 그녀가 몸을 움 직이지 못하는 이때가 절호의 기회다 싶어 설혼주를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등팔고라고 호락호락 응할 사람인가. 그래서 두 사람은 격렬한 말다툼 끝에 급기야는 서로 손을 쓰게 되었고 자기가 자랑하는 법보를 구사하여 전력으로 겨룬 끝에 똑같이 법보를 망가뜨리는 손해만 입고 말 았다. 서방야불은 설혼주를 손에 넣기는커녕 오히려 애지중지하던 두 개의 법보를 잃은 데다 요법 또 한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자 수치심과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마화를 사용하여 설혼주고 뭐고 간에 등팔고를 그대로 태워 죽여 분풀이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화를 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옥청대사에게 혼찌검이 나서 쫓기는 신세가 되 자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팔마를 찾아갈 수도 없는 입장인지라, 암암리에 귀풍곡으로 숨어들었다. 내심으로는 다시 지독한 법보를 하나 연성하여 등팔고와 최후의 승부를 겨루어 설혼 주를 수중에 넣을 때까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던 것이다. 그날 서방야불은 마침 골짜기 안에서 정좌를 한 채 법보를 연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멀 리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들어 살펴보니 금방 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두 눈이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검은 독 수리인데, 두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마치 태풍이 몰아치는 듯한 굉장한 소리가 났으며, 그 몸집은 엄청나게 컸다. 게다가 빠르기가 질풍 같아서 금방 골짜기 위로 날아왔던 것이다. 영물스런 금안의 검은 독수리를 본 서방야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때마침 이런 대단한 신조를 발견했으니, 법보 따위를 연성하여 애꿎은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저놈을 추격해 잡아 복종시킨 다음 몇 가지 훈련을 시켜놓으면, 등팔고란 년을 찾아가 다시 설혼주를 내놓으라고 공갈을 쳐도 충분할 것이다. 만일 그 계집년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나는 그저 법보를 사용해 그 년의 원신(元身)을 잡아두고 저 새로 하여금 암암리에 그년을 공격 하게 한다면 제년이 설혼주를 내놓지 않고 배겨날 재간이 있어.' 이렇게 궁리하며 혼자 낄낄거리는 사이에 그 새는 섬전보다도 빨리 날아서 눈 깜짝할 사이 사라 져 한 점 그림자만 남긴 채 이미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뿔싸!" 서방야불은 땅을 치며 애석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그 검은 그림자는 다시금 점차 확대되면서 다시 골짜기 위로 날아왔던 것이다. 서방야불은 희희낙락했다. 이번에는 결코 실수하 지 않으리라 하고 황급히 자금발우를 꺼내 입 속으로 주술을 뇌까리며 공중을 향해 들어올렸다. 그 발우는 <전륜발(轉輪鉢)>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한 번 휘두르면 흑백의 음양기(陰陽氣)가 곧 장 고공으로 솟구치는데, 사람이든 짐승이든 거기엔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흑백의 두 기운은 곧장 뻗어나가서 새의 발치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십여 장쯤 내려오던 그 새는 요사스런 기운이 올라오자 한 차례 크게 울부짖으면서 훌쩍 다시 몸을 솟구쳤다. 서방야불은 전륜발이 새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자 크게 놀라며 허둥지둥 법보를 거두어들 였다. 그가 달리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려고 머리를 짜는데, 그 새가 별안간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유성같이 빠른 속도로 곧장 골짜기 아래로 날아 내려왔다. 서방야불이 있는 곳에서 십여 장 높이 까지 이르자 별안간 날카로운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간덩어리가 부어도 더럽게 부은 돌중 같으니! 아무 이유도 없이 왜 시비를 거는 거야? 내 법보 로 너를 잡아서 혼줄을 낼 테니 각오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새는 이미 눈앞에 내려앉았다. 방금 까지는 그 새가 너무 높이 뜬 데 다, 새가 워낙 커서 등에 사람이 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바로 눈 앞에 내려앉은 새의 등에는 아리땁기 그지없는 두 처녀가 타고 있지 않은가! 그녀들이 비록 나이 는 어리나 능히 이같이 도통한 영물을 자유자재로 부려 하늘을 날고 있다면 필시 내력이 범상치 않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서방야불은 자기의 고강한 요법에 자신감이 강한지라 조금도 동요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 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발우가 이것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고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바치려 돌아오다니. 이 시건방진 것들을 내 어찌 놓아두랴!'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그는 크게 한소리 고함을 쳤다. "네까짓 년들이 무슨 그리 대단한 재주를 가졌다고 감히 이 노승의 머리 위로 왔다갔다 했느냐? 속히 그 짐승을 노승에게 바치고 스스로 손을 내밀어 항복한다면 매서운 손맛을 면할 수 있을 것 이니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처녀는 새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조금 더 나이들어 보이는 처녀 가 손을 휘두르자 한 줄기 푸른 빛 검광이 날아왔다. 서방야불은 홍소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천박한 것들이 감히 어른에게 장난을 치려고 하다니!" 그리고는 왼어깨를 한 번 움찔하자, 어깨에 걸쳐져 있던 선장이 한 마리 교룡(蛟龍)처럼 변하여 뛰어나가 푸른빛을 맞받아 쳤다. 서방야불은 이 계집들이 도대체 무슨 재주를 가졌나 살펴보려고 전륜발을 사용하여 비검을 끌어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선장을 날리는 순간 또다시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어린 처녀가 손을 한 번 휘젓자 차가운 무지개와 같은 한 가닥 자줏빛 검광이 자기 머리를 향해 곧장 날아올 줄이 야! '어마, 뜨거라' 싶어 급히 전륜발을 꺼내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막 발우를 위로 치켜올리는 순간,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적의 비검은 신룡(神龍)이 바다로 뛰어들듯 흑백의 음양기를 찢어내 고 발(鉢) 안쪽까지 쳐들어오는 게 아닌가! 오른손에 뼈가 시릴 정도의 통증이 느껴지자, 서방야 불은 좋지 않다고 느껴 급히 자신의 호신요법을 구사하여 겨자씨 속에 몸을 숨기듯 십여 장 밖으 로 물러났다. 수중의 발우를 살펴보니 이미 그 자줏빛에 구멍이 뻥 뚫려버렸고, 오른손의 손가락 도 세 개나 잘려나가고 없었다. 이곳에 나타난 두 여인은 바로 이영경과 신약란이었다. 구지선(具芷仙)과 헤어진 그녀들은 신조 의 빠른 비행력에 힘입어 먼저 마궁으로 쳐들어 가서 작은 공이라도 세운 뒤 다시 영운 등 세 사 람을 만나기로 작정한 터였다. 그런데 막상 신조를 타고 청라에 날아와 보니 팔마가 이미 여러 이파의 고수를 청해다가 요법을 베풀어 마궁을 은폐시켜 버린 뒤라,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운 일행을 만나 다시 상의해 보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가던 참인데, 어느 골짜기 위에 다다랐을 때 별안간 신조의 몸이 기우뚱하며 떨어져 내리다가 가까스로 다시 위로 치솟는 것이 아닌가! 약란이 영경에게 말했다. "아래에서 누군가 우리한테 암수를 쓰는 모양이야. 두 사람이 머리 밑을 내려다보니 과연 골짜 기 안에 웬 사나이가 서 있는데, 그 자가 하늘을 향해 손짓을 함에 따라 그 자의 손에서 뻗어나 온 흑백의 두 기류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 모양을 본 영경이 소리쳤다. "언니, 저 아래에 있는 놈은 필시 청라의 잔당일 거야. 저런 놈한테 손을 쓰지 않고 어디다 쓰겠 어요?" 재주 높고 대담하기로 말하면 누구 못지 않은 약란이 찬성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밑으 로 내려가서 상대방에게 공격을 퍼부으며 짐짓 말을 붙여본 다음 만일 청라의 잔당이 틀림없다면 암암리에 신조로 하여금 놈을 나꿔채게 하여 영운 일행에게 자랑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방야불 의 지껄이는 소리를 들으니 청라의 잔당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요승임에는 틀림없는지라 곧장 손을 써서 공세를 취한 것이다. 약란은 자기의 비검이 번승의 선장과 맞부딪쳤을 때 어쩐지 힘이 달리는 것을 느끼고는 섬찟했 다. 다행히 영경의 보검이 합세하므로써 상대를 제압하여 절벽 중턱으로 몰아넣긴 했으나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비검을 조종하여 계속 적과 맞서면서 한편으로는 암암리에 법술 을 외는 것과 동시에 홍화모모(紅花姆姆)에게 전수받은 <십삼립뇌화금환(十三粒雷火金丸)>을 번 승에게 홱 날렸다. 멋도 모르고 한순간 크게 적을 가볍게 여기다가 도리어 상처를 입고 법보만 못 쓰게 된 데다 하 마터면 목숨마저 보전하기 어려운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 도망친 서방야불은 그래도 적의 비검이 추호의 여유도 주지 않고 뒤를 쫓아 날아오자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판인데 갑자기 또 십여 개의 동글동글한 불덩이가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허겁지겁 피하고자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중의 하나가 사정없이 등을 때리며 활활 타오르 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자줏빛 검광도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서방야불은 세상에 나온 이래로 일찍이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지 못한 터였다. 그러던 차에 옥청 대사와 법술을 겨루다 패하여 도망치는 수모를 겪었고, 그것도 부족하여 오늘 또다시 이 어린 두 계집아이한테 이처럼 커다란 낭패를 당했으니 어찌 분을 참을 수 있으랴? 그러나 상황은 그의 뜻대로 되어 주지 않았다. 또다시 피하지 않으면 목숨만 위태로울 판인지라 서방야불은 불꽃에 살이 익는 통증을 어떻지 해볼 겨를도 없이 땅바닥을 뒹굴어 원래 있던 자리 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는 마화 호로병을 꺼내어 주술을 외며 마개를 열고는 작은 기를 꺼냈다. 기를 한 차례 휘두르자 즉시 백십여 장은 좋이 되는 누런 연기와 붉은 안개가 일면서 한 줄기로 뭉쳐 영경과 약란에게 날아갔다. 약란은 어려서부터 홍화모모를 따라다니며 들은 바가 있어 마화의 지독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 서 금환과 비검을 수습하며 급히 소리쳤다. "요법이 지독하니, 동생은 속히 보검을 거두어들여!" 영경은 본래 기지가 영민한지라, 그 말을 듣자마자 손을 휘둘러 자영검을 회수했다. 약란은 영정을 잡아끌고 공중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그 누런 구름과 불은 안 개가 마치 태풍이나 구름이 몰아치듯 삽시간에 주위를 덮어씌워 두 사람을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 다. 천만다행인 것은 영경의 자영검이 그녀의 손을 떠나 스스로 날아올라서는 한 줄기 자줏빛 무 지개로 변하여 상하좌우로 춤을 추면서 두 사람의 몸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단지 한 마디 신조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을 끝으로, 영경과 약란은 누런 구름이 휘몰아치는 소 리밖에 전혀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돌연 한 줄기 이상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 들면서 음에서는 열이 나고 머리가 혼미해졌다. 그러한 상태로 반 시진이나 지났을까, 돌연 앞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아가씨는 급히 보검을 거두도록 하세요. 내가 구해드리겠어요!" 약란은 어리둥절하여 급히 누구인가를 물었다. 자령은 미진기(彌塵旗)를 사용하는지라, 깃발이 그녀의 몸을 보호해서 아무리 마화라 할지라도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사람을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래에 내려와 보니 두 사람의 주위에는 한 줄기 무지개 같은 자줏빛 검광이 둘러싸서 지켜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화는 물론 자령조차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자령은 마음 속으로 은근히 탄복해 마지 않으며 아미 문하에는 과연 고수와 이보(異寶)가 많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자줏빛 검광이 거두어지지 않으면 그녀들을 구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와 두 사람은 평소 면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 같은 때 상대방으로 하여금 쉽사리 믿 게 하기가 어려움은 당연한 노릇이므로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침착하게 말했다. "신조인 불노(佛奴)가 제영운 아가씨에게 소식을 전했답니다. 그래서 두 분의 종적을 찾아 여기 까지 도착한 뒤에야 비로소 마화에 걸려들어 곤경에 처한 것을 확인하고는 특별히 저한테 도움을 요청한 거예요. 지금 제영운 주경운 두 분도 모두 저 위에 있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속히 법보를 거두고 저를 따라오도록 하세요!" 영경과 약란은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자영검을 거두어들인 뒤 자령을 따라 몸을 날렸다. 그런데 급한 경황에 자칫 실수를 하는 바람에 영경과 약란은 그만 작은 곤경에 빠져버린 것이다. 두 사람이 마화에서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자영검이 신변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그 사실을 깜박 잊고 만 것이다. 영경이 자영검을 거두어들이고 자령이 미진기로 그녀들을 보호하는 그 사이에 약간의 차가 있었 다. 즉 영경이 검을 거두는 시기가 조금 빨랐던 것이다. 그래서 자영검이 거두어지는 찰나 그 공 백을 붉은 안개가 침입하여 두 사람을 에워싸 버렸다. 비록 자령의 상승신법이 재빠르긴 했지만, 영경과 약란은 불행히도 마화의 독기에 약간 감염되 고 만 것이다. 감염 당시에는 그저 눈앞이 온통 붉어지면서 코끝에 한 가닥 기이한 냄새가 풍기 는 것을 느꼈을 뿐이나 자령이 두 사람을 구해 골짜기 위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정신을 잃고 인 사불성에 빠져 있었다. 영운, 주문, 금선은 비검을 차례로 방출하여 곧바로 서방야불을 공격해 갔다. 서방야불은 크게 놀랐다. 이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린 사내애와 계집애들이 어찌 이처럼 솜씨 가 대단하단 말인가! 그는 이미 상대방의 자줏빛 검광에 의해 한 차례 쓴맛을 본 터라, 날아오는 검광 중에 또다시 한 줄기 자줏빛이 끼어 있는 것을 보고는 간담이 서늘했다. 그는 마화를 미친 듯이 상대방의 머리 위로 날려보내는 한편, 손가락으로 앞의 향로를 가리켜 향로 안에 꽂혀 있는 세 개비의 향에 불이 당겨지게 했다. 그러면서 입 속으로 악랄하기 짝이 없 는 법술을 외며 혀끝을 깨물어 입 안 가득 피를 머금었다가는 확 뿜어내었다. 영운 일행은 서방야불의 손발놀림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자 자기네의 비검이 곧 적을 결딴낼 수 있으리라 싶어 신바람이 났다. 그런데 홀연 골짜기 아래의 붉은 안개가 곧장 위로 치솟으면서, 뒤이어 한 가닥 기이한 향기가 코끝을 스미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즉시 머리가 띵해지며 어질어 질하여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요법이 이토록 지독한 것이었나 싶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자령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여러분들께선 놀라실 것 없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덩이 오색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더니 그들을 에워쌌다. 그러자 그 기이한 향기도 더 이상 풍기지 않고 정신도 어느 정도 맑아지는 듯했다. 동시에 주문의 천둔경도 비록 마화를 깨뜨리지는 못했으나 솟구쳐 올라온 붉은 안개를 십 장 밖에서 차단하여 더 이상 근 접하지 못하도록 했다. 자령은 이것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분 사매의 보경만 있어도 능히 적의 마화를 막아낼 수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고는 한악의 손에 있던 채예련(彩霓練)을 넘겨 받은 다음 자기의 미진기를 건네주면서 일행 을 조심해서 호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현문의 <태을둔법(太乙遁法)>을 빌어 신형을 숨긴 채 요승의 뒤로 날아갔다. 왼 손으로 채예련을 말아쥔 채 오른손을 홱 내젓자, 다섯 손가락에서 가느다란 붉은빛이 쏘아져 나 와 곧장 서방야불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다. 그 붉은 빛줄기는 바로 어머니 보상부인이 전수해 준 것인데, 다섯 가지 귀한 금속을 써서 연성 한 홍운침(紅雲針)으로써 보통의 비검에 비해 훨씬 위력이 강한 것이었다. 서방야불은 바야흐로 목전에 승리를 앞두고 희희낙락하던 차에 돌연 상대방의 신변에서 한 겹의 심상찮은 오색구름이 일어나면서 마화 또한 그중 한 여인의 거울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에 가로막 혀 더 이상 상승하지 못하여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그런 판국인데, 돌연 뒤통수에 매서운 바람소 리가 들렸으므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감히 고개를 돌려 살펴보지 못하고 황급히 몸을 앞으로 쭉 빼면서 둔법(遁法)을 이용해 백 장쯤 달아났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한 줄기 무지개가 다섯 가닥의 붉은빛으로 나뉘어져 자기를 향해 날아오고 있지 않은가! 눈앞의 적들이 이처럼 고강한 것을 보자, 자신은 법보도 이미 다 사용해 버린 뒤라 더 이상 도 망치지 않고 버티다가는 필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정신을 바짝 차린 서방야불은 한 편으로는 둔법을 사용해 도주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법술을 외며 마화를 회수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일은 그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자령은 손을 쓰지도 않았건만 이미 <전도팔문쇄 선기(顚倒八門鎖仙旗)>는 오행상극(五行相剋)의 이치에 따라 발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방야불이 몸을 공중으로 솟구치자마자 곧바로 한 무더기 하얀 안개가 일어나더니 어느 곳으로 방향을 잡든 지 간에 그를 저지하였다. '이거 큰일났구나!' 서방야불은 탄식해 마지 않았다. 내가 이러다가 저 계집년의 법력(法力)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닐 까 하고 두려워졌다. 적은 밝은 곳에 있는지라 잠시만 정신을 흩뜨려도 화를 당할 것이 분명한 지경이었다. 그는 공연한 짓을 한 게 후회스럽고 한편으로는 몹시 두려웠다.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자, 그는 이를 악물고 몸에 차고 있던 패도(佩刀)를 뽑아 자기의 오른손목 을 찍어 잘라버렸다. 제천신마(諸天神魔)의 <화혈비신(化血飛身)>이란 것으로써, 그는 그 독랄한 수법으로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탈출하여 공중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막 요행히 목숨을 부지했다고 여긴 찰나에 마치 쇠갈쿠리에 찍힌 듯 등 뒤에 강렬한 통증이 왔 다. 적의 또다른 법보에 당했나 싶은 순간, 근처에서 다시 그 가공스런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 다. 서방야불은 감히 고개를 돌려 살펴보지도 못한 채 황급히 몸을 움직여 둔법을 이용해 죽자사자 달아났다. 단걸음에 수백 리 밖으로 도망쳐 겨우 땅에 발을 붙이고 자기 주제꼴을 살펴보니 왼쪽 어깨의 살점이 큰 덩어리로 떨어져 덜렁거리며, 가사는 물론이고 마화를 방출했던 호로병까지도 깨지고 망가졌다. 조금 전의 새 울음소리에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그놈의 밉살스런 짐승에게 입은 상처임을 깨달 았다. 설혼주를 한 개 얻으려다가 수년간 심혈을 기울려 연성한 법보가 망가지고 잃어버린 데다 자신도 중상을 입어 불구의 몸이 되었으니, 생각할수록 원통하기 그지없는 노릇인지라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회한과 비통에 잠겨 있을 때 홀연 참으로 귀에 거슬리는 괴이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서방야불 같은 흉악무도한 요승조차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듣기 거북한 울부짖음이었다. 그는 즉시 슬픔을 거두고 몸을 일으켜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거대한 설산 (雪山) 중의 한 따스한 골짜기 안이었는데, 사방의 풍경은 웅장하고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등 뒤로는 숭산(崇山)을 이고, 앞으로는 언덕 밑으로 움푹 들어간 맑은 계곡이 펼쳐져 있는데 물은 졸졸졸 흘러가며 소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와 더불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듯했다. 그 괴성 은 아마도 상류의 계곡 사이에서 들려온 듯했다.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필시 무슨 독사나 괴수 따위의 울음소리였어.' 자신의 능력이 아직은 그런 짐승들과 상대할 만하다고 생각한 서방야불은 계곡 아래로 내려가서 비검에 구멍이 난 자금발우를 꺼내 반 정도 물을 채우고는 법술을 외며 두 개의 부적을 그린 뒤 그 물로 상처를 씻고, 먼저 손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리고는 신조에게 찢기운 붉은 가사를 벗어서 잘게 찢어내 그것으로 상처를 싸매었다. 그는 선장을 짚고 문제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찾 아나섰다. 이때 그 괴성은 점점 더 급박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방야불이 계곡을 따라 이삼 리쯤 올라 가서 작은 웅덩이를 돌았을 때 돌연 그쳤다. 계곡은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졌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는데 홀연 청아한 물소리가 그의 의식을 끌어당겼다. 유심히 앞을 바 라보니, 맞은편에 엄청나게 거대한 암석이 벼랑 사이를 비집고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높이가 족히 천 장은 될 것 같았다. 암석꼭대기의 움푹 들어간 곳에서는 수십 가닥의 가느다란 폭포수가 쏟아 져 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는 호수인데, 어림잡아 넓이가 수천 평은 되어 보였다. 호수 중심에는 꼭대기가 펑퍼짐한 봉우리 한 개가 우뚝 솟아 있었다. 높이는 이십여 장, 넓이는 수백 평 되었는데, 꼭대기에는 영롱한 빛을 내는 괴상한 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봉우리의 중턱에는 직경이 일 장 남짓한 동굴이 하나 뚫려 있었고, 그 동굴 앞에는 그 동굴 입구에 들어맞 을 만한 크기의 바위가 놓여 있었다. 그 봉우리는 호수 가운데 외롭게 솟아 있는지라, 사면이 모두 푸른 물결에 둘러싸여서 그 경관 이 가히 예사롭지가 않았다. 서방야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처럼 낭패한 모습으로 체통을 잃었으니 어찌 사람을 대하랴. 마침 이 동굴 속은 어떨지 모르겠구나. 아무도 없는 빈 동굴 같은데, 마침 이런 곳을 발견했으니 잠시 여기 머무르면서 복수 할 방법을 서서히 강구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생각이 이에 미치자, 서방야불은 경신법을 이용해 그 작은 봉우리 위로 날아갔다. 다리가 막 땅에 닿으려는 순간, 다시 괴성이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 소리는 바로 동굴 속 에서 들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사람의 말소리도 같은데,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누구든지 나를 구해 주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나 나를 버려 두고 간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서방야불은 괴이함과 동시에 크게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수중에는 독룡선장(毒龍禪杖)과 비검 각 한 자루씩만 남아 있는 데다, 한쪽 손목을 짤린 상태라 감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조심조심 동 굴 입구로 다가가서 살펴보니 칠흑같이 새까만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초록빛 광채가 섬전같이 번 쩍이는 것이 무슨 괴물이 속에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조심해서 대비를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 서방야불이 여기 있다! 대체 무슨 괴물인지 모르나, 속히 동굴 밖으로 나서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굴 속에서 한 줄기 음산한 바람이 일며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구분하 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서방야불이 막 선장을 들어 공격하려고 할때 홀연 그 괴상한 말소리가 들렸다. "너는 두려워할 필요없다. 나는 결코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니라. 네 모습을 보아하니 병신이 되 었은즉, 필시 나의 이 원통한 마음에 비할 만큼 고통스러운 사연이 있는 듯하다. 네가 나한테 호 의를 가지고 대한다면, 나도 너를 도와 한을 풀어주리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는 오늘 이후로 살 생각은 말아야 할 것이다!" 서방야불은 조금 전에 참패를 당한 데다 다시 함정에 빠지자 분통이 터져서 큰소리로 욕을 해댔 다. "돼먹잖은 괴물이 감히 제멋대로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속히 네놈의 내력을 밝히지 않는다 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음풍이 그치며 원래대로 밝아졌다. 서방야불이 다시 동굴 속을 살펴보니 두 줄기의 초록빛 광채는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 다. 그놈의 괴물이 큰소리만 탕탕 치더니 몇 마디 말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구나 하고 그는 속 으로 생각했다. '네놈이 비록 동굴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봤자 내가 이미 이곳을 점찍었으니 도리가 있겠느냐. 내가 선장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너를 잡아 끌어내는 것쯤이야 문제도 아니지!' 그래서 선장을 꼬나쥐고는 번쩍 쳐들어 막 휘두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뒤통수에 한 줄기 음산한 바람이 불어와 닿았다. 서방야불은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오르며 돌아보았다. 그러나 등 뒤에는 사 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과민한 탓에 산바람 끝에 놀랐는가 싶어 기분을 돌리 며 다시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목 언저리에 다시 누군가의 입김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콧속으로 비릿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이크! 이놈의 괴물이 뒤에서 암수를 쓰려 하는구나.' 이렇게 재빨리 생각한 서방야불은 몸을 한쪽 벽으로 붙여 앞뒤에서 공격당하는 것에 대비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기이한 생각이 들었 다. 막 입을 열어 욕설을 퍼부으려 할때 홀연 캑캑거리는 괴상망측한 웃음소리와 함께 귀에 거슬리 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네놈에게 이미 해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뭘 그리 놀라느냐? 나는 여기 이 돌기둥 위에 있다네. 내가 너를 처치하고자 했다면 네 목숨이 여덟 개가 더 있다 해도 부지하 지 못했을 것이니라." 서방야불은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소리나는 방향을 좇아서 동굴 속에 솟아 있는 돌기둥 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반토막 몸뚱아리에 머리통이 커다란 괴물 같은 인간이 꽁꽁 묶여 있었다. 머리카락은 멋대로 자라나 온통 전신을 덮었으며, 마치 제멋대로 솟아난 풀더미 같았다. 두 눈동 자는 초록빛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머리 밑으로는 몸뚱아리가 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나 그나마도 자세히 보면 가련할 정도로 머 리통과 너무도 불균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왼팔은 어깨 근처에서 댕겅 잘려져 나갔고, 오 른손은 비록 완전하기는 했으나 새발같이 바싹 말라붙었다. 그러한 모습으로 입을 크게 벌린 채 서방야불을 향해 웃는지 우는지 미친 듯한 소리를 질러대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 다. 서방야불은 이미 그 괴물이 자기한테 그다지 악의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알았으므로 억지로 노 기를 참으며 물었다. "그대는 도대체 사람이요 귀신이오? 어쩌다 그 지경에 이르렀소? 그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슨 재 미가 있다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지 모르겠구려." 그 괴물은 이 말을 듣자 은근히 부화가 치미는 듯, 두 눈썹 사이가 불끈 솟아오르며, 산지사방 흐뜨러졌던 머리가 철사처럼 뻣뻣하게 곤두섰다. 동시에 두 눈이 크게 부릅떠지며 초록빛 광채가 형형히 빛을 내는데 실로 무섭기 짝이 없는 형상이었다. 그러다가 금세 노기를 거두고 한 차례 참담한 웃음을 지은 다음 말했다. "그대나 나나 따지고 보면 그렇고 그런 존재지. 그대 몰골을 보아하니 최근에 남에게 크게 당해 그 꼴이 된 것이 분명하구만. 지금은 시간이 아깝네. 나의 그 몹쓸 제자놈이 곧 돌아올 것이거든. 그대와 나는 동병상련의 신세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곧 자신을 돕는 일이오. 그대가 먼저 나 의 이 작은 어려움을 도와 해결해 주면 나중에 그대에게 무궁한 복이 있을 것이오. 그대 생각은 어떻소? 그대는 아마 아직도 나의 내력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한 마디만 하겠소. 만일 나 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 동굴에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을 것이오!" 서방야불은 괴물의 어투가 자신에 차 있는 데다 확실한 내력도 모르는지라 암암리에 정신을 바 짝 차려 방비를 하면서 대답했다. "내력을 밝히기만 하면 일이 어떻게 된 연유인지 들어본 후에 그대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지. 그러나 만일 그대의 뜻이 칠칠찮은 계략을 부리려는 데 있다면, 내 손속이 무정하다고 탓하지 말 기 바라오. 나 <서방야불> 아각달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뼈저리게 알도록 해 줄 테니까!" 괴물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란 듯이 소리쳤다. "그대가 바로 독룡존자의 사제인 서방야불이란 말이오? 그대와 나는 피차간에 이름을 알고는 있 었어도 서로 만난 적이 없으니 이처럼 티격태격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듣자하니 그대의 법술은 달통의 경지에 이르러 능히 마화를 천 장까지 발출할 수 있다고 하던데, 어찌하여 이러한 낭패를 당하게 되었소!" 그러자 서방야불이 불끈 노해서 말했다. "나에 대해서 물으려거든 네놈부터 도대체 어떤 개뼈다귀인지나 밝혀야 할 게 아니냐!" 그 괴물은 꾹 참는 투로 대꾸했다. "도우께선 다시 함부로 입을 놀려 사람을 화나게 하지 마시오. 나 역시 이름 없는 시러배는 아 니외다. 백만산(百蠻山) 음풍동(陰風洞)의 녹포노조(綠袍老祖)가 바로 이 사람이오." "아아니, 그대가?" 서방야불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렇소. 내가 틀림없는 녹포노조요. 옛날 서장에서 독룡존자와 법술을 겨룬 뒤로는 산으로 돌아 가 수련을 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세상에 나서지 않았지요. 그런데 작년에 독룡존자가 나한테 서 신을 보냈더란 말이외다. 나더러 성도(成都) 자운사(慈雲寺)로 가서 자기 도제(徒弟)인 유덕(兪德) 이 아미파와 벌이는 싸움에 가담하여 도와주라는 청이었소. 나는 그때 마침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묘인(苗人)들의 심장과 피만을 먹어왔기 때문에, 입맛을 바꿀 겸 해서 법보를 가지고 성도로 가서 둔법을 이용해 자운사로 들어갔지요." 녹포노조는 자기가 자랑하던 십만 마리의 <백독금잠고(百毒金蠶蠱)>를 풀어 야음을 이용해 아 미파 패거리들의 본거지인 벽균암(碧筠庵)을 습격했다가 누군지 모르는 고수의 독랄한 법보에 금 잠고가 전멸당한 일, 그러고 취도인(醉道人)의 유인책에 걸려들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인 끝에 이처럼 반동강이 병신이 된 사연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내가 이 정도의 참혹한 꼴에서 그나마 그친 것도 뇌 속에 있는 하나의 <현빈주(玄牝珠)> 때문 이오. 적에게 그것을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나중에 다시 수련하여 복수할 수가 있단 말이외다. 그 러나 놈들의 수법이 매우 지독하고 사정이 너무도 긴박했기 때문에 육신에서 탈출해 날아갈 수가 있어야지요. 바로 그 같은 위기일발의 순간에 마침내 문하의 큰제자인 <독비위호(獨臂韋護)> 신 진자(辛辰子)란 놈이 음풍동에서 내려왔다가 나를 구해 이곳에 데려다 놓았지요. 나는 매우 이상 하게 생각했소. 놈이 왜 나를 데리고 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로 끌어다 놓느냔 말이오. 그런데 후에야 비로소 명백해졌소. 본래 놈이 나를 구한 것은 내가 자기 사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내 현빈주를 탐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오. 본래 그 현빈주는 나의 둘째 원신(元身)으로서, < 신외화신지법(身外化身之法)>을 사용해 수련 끝에 만들어낸 것이지요. 내 비록 몸뚱아리의 반을 잃었지만 자질이 뛰어난 육신을 지닌 젊은놈 하나를 찾아내서 그와 합일(合一)한다면, 삼 년 육 개월 간의 도법을 이용한 수련을 통해 본래의 면목을 회복할 수가 있다오." 신진자는 계략을 부려 녹포노조를 이곳에 데려다 놓고는 먼저 좋은 말로 위로했다. 본산(本山)에 불의의 사고가 생겨서 돌아갈 수가 없으니, 이곳에서 먼저 요양을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녹포노조는 신진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네를 곤경에서 구출해내는 것을 뻔히 보았는지라 어찌 그가 딴 마음을 품고 있음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신진자는 녹포노조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에게서 전수받은 악독한 법술인 <음마망(陰魔網)>으로 이 산봉우리를 봉쇄해 버렸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살아서 들어올 수는 있지만 살아서 나갈 수는 없는 곳이 거기였다. 따라서 이곳에 일단 들어서면 돌아갈 생각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신진자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던 지, 다시 암벽 위에 <마천번(魔泉幡)>을 걸어 녹포노조가 원신을 운용해 도망치는 것까지 봉쇄해 버렸다. 아까 서방야불이 본 암벽 위의 수십 줄기 가느다란 폭포가 바로 마천번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누군가가 만일 이 봉우리를 깨부수고 탈출하려고 한다면 그 가느다란 폭포들이 즉시 하나 하나가 한 마리씩의 백룡(白龍)으로 변해 주위를 둘러싸서 결국 탈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체의 방비를 해 놓은 뒤에야 신진자는 비로소 본심을 드러내어, 당신은 이미 불구가 되었으니 그 현빈주를 나에게 넘겨 도를 이루게 해주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달랬다. 당신은 비 록 인간의 육체는 잃게 되지만 원신이 자신과 합치되니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신진자는 어떻게 하든지 현빈주를 손에 넣고 산으로 돌아가 열한 명의 동문사제들을 복종시켜 자신이 마조 (魔祖)가 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신진자의 심성이 그토록이나 지독한 걸 본 녹포노조는 기가 막 혔다. '내가 애초에 눈이 멀어 평생의 법술을 통틀어 전수해 주고 그것도 모자라 이놈을 도와 몇 가지 지독한 법보를 연성시켜 주었으니, 이 무슨 철천지 한이란 말인가!' 그러나 녹포노조는 자랑하던 금잠고를 잃었을 뿐 아니라 몸뚱이 마저 두 동강이 났으니 놈을 제 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놈의 손끝에서 놀아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놈의 간계를 알아챈 후로는 온갖 공갈협박과 감언이설에도 내 제이원신을 굳게 지켜 놈에게 내주지 않았소. 그놈의 핍박이 도저히 견딜 수 없도록 극심해지는 경우 나는 그놈과 동귀어진(同 歸於盡)을 해버릴 생각이오. 내가 비록 몸뚱아리가 반밖에 남지 않았고 팔도 한쪽밖에는 없지만 여전히 원신을 운용해 바람같이 움직일 수 있다오. 그러나 그놈의 방비가 주도면밀하고 사방이 모두 법술과 법보에 의해 봉쇄된 데다, 세상에는 나에게 원한을 지닌 자들이 너무 많아 그들을 만났다가는 더욱 큰일이기에 이곳에서 고통을 참고 견디는 중이지요. 더욱 분통 터질 노릇인 것 은 그놈이 나를 여기다 처박아 놓고서는 며칠마다 혼자서 밖으로 나가 간음을 하고 인혈(人血)을 먹고 돌아온다는 점이오. 실컷 즐기고 나면 돌아와서 온갖 궁리를 다해 나를 못 살게 군단 말입 니다. 내가 고통을 받다가 받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게 되면 현빈주를 건네주겠지 하는 속셈이지 요." 신진자는 현빈주에다가 다시 법술을 가해 자신의 신외화신(身外化身)으로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후로는 아무리 지독한 적을 만나더라도 자기가 아닌 녹포노조가 그 대신이 될 것 이니, 요컨대 남을 빌어 남의 법보를 막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녹포노조가 갇힌 그 산봉우리는 이름이 옥영봉(玉影峰)이었다. 동굴은 이름이 없었으나 호수의 중심이라서 차가운 바람이 뼈를 에일 듯이 몰아치는 고로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곳이었다. 신진자 는 동굴 안에 이처럼 평평한 돌기둥을 세워놓고, 볼 때마다 녹포노조를 거기다 묶고 고문을 가했 다. "일전에 그놈이 이곳에 와서 말하기를, 자기가 내 본산인 백만산(百蠻山)에 돌아가 보니, 내 제 자 열한 명이 모두 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더라는 겁니다. 복수를 하기 위해 도처에 수소문해 본 결과, 그날 저녁 나를 벤 자는 아미파 검객이 아니라 그들이 초청한 고수였다는구려. 지난날 청성파(靑城派) 비조(鼻祖)였던, 운남(雲南) 웅사령(雄獅嶺)에 있는 장춘암(長春巖) 무우동(無憂洞) 의 <극락동자(極樂童子)> 이정허(李靜虛)였답니다. 그 자의 도법은 달통한 경지에 이르러 이미 천선(天仙)에 못지 않다는데, 어찌 복수를 하겠소? 그래서 내 제자들은 사건의 배후를 따져, 그를 청해 온 것이 아미파 인물들이니 아미파 문하에게 복수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금년 봄 녹포노조의 제자들은 운남(雲南) 초웅부(楚雄府)에서 아미파 후배 두 사람을 붙잡았다.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실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사로잡은 두 사람을 데리고 산으로 돌아가 고 문을 가한 결과 그들의 입을 통해 녹포노조가 비록 이정허의 비검에 베어졌지만 시체의 상반신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음이 밝혀졌다. 녹포노조의 둘째 제자인 <자금강(紫金剛)> 용운(龍雲)은 스승에게는 제이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기왕 시체의 상반신이 보이지 않았다면 필시 둔법을 사용해 날아갔으리라 짐작 했다. 또 용운은 사형인 신진자가 스승이 출발한 뒤 곧이어 따라 자운사로 갔고 그 후로도 몇 차례나 산으로 돌아왔었으면서도 그 같은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주가 신진자에게 미치지 못하는지라 의혹을 가슴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신진자는 여러 동문들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자, 오래 끌다가는 마각이 드러날 것이고, 그랬다가는 중과부적이라 급히 옥영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녹포노조에게 열흘의 여유를 줄 테니까 현빈주를 속히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그는 이미 이 봉우리의 사방을 꼭꼭 봉쇄해 놓았으 므로 녹포노조가 도망칠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만약 기한이 다되도록 구슬을 내놓지 않으면 악랄하기 그지없는 음화(陰火)로써 녹포노조를 완 전히 태워버려 후환을 제거해 버리겠다고 을러대었다. 그런 다음 녹포노조의 상처에다 열몇 개의 마침(魔針)을 놓아 지독한 고통을 배가시켜 주고는 바쁘게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놈이 몹시 허둥지둥하는 꼬라지가 그놈 주위에 무슨 심각한 일이 발생한 모양입 디다. 이 산은 수많은 골짜기와 고개 중의 한 계곡이라, 옛적부터 사람의 발길이라고는 거의 디뎌 진 적이 없어 신선이나 범인(凡人)이나 모두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여기에 와서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있으리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만의 하나라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소. 그래서 나는 동굴 속에서 메아리를 이용해 소리친 것이오. 근 열흘 동안 계속해서 소리친 뒤에야 천만다행으로 도우를 불러들이게 되었구려. 생각컨대 그놈의 악운(惡運)이 다한 모 양이니, 내 필시 탈출하여 복수하라는 뜻인가 보오." 서방야불은 그의 말을 듣고 비로소 그가 틀림없는 남파마교(南派魔敎)의 조사(祖師)인 녹포노조 임을 확인하고는 크게 놀랐다. 오래 전부터 그가 비할 데없이 악독한 인물이며 헛소리를 하지 않 고 말한 대로 꼭 행동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몇 달 전에 누군기의 입을 통해 그가 이 미 성도에서 죽었다고 들었건만, 반토막의 몸뚱아리로 이곳에서 생존해 있었을 줄이야! 오늘 어쩌다 이 봉우리에까지 올라오게 됐으니, 그가 탈출하게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의 말대로 들어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게 될 게 뻔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법보를 모두 잃 고, 몸마저 병신이 된 신세다. <독비위호> 신진자의 지독함은 오래 전부터 들은 바 있거늘 결코 스승인 녹포노조에 못지 않다 고 하질 않던가. 만일 그를 상대해 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 계속해서 궁리를 하다가 도망갈 구멍을 챙긴 뒤 그제서야 대답했다. "도우께서 바로 녹포노조이신 줄 모르고 방금 전에는 많은 실례를 범했소이다. 도우의 높은 법 력으로도 영고도(令高徒: 남의 제자의 높임말)에게 당하셨소이다그려. 도우에게 빈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나는 일찍이 몇 가지 지독한 법보를 연성하여 평생토록 적수를 몇몇 만나보지 못 했소. 그런데 오늘 우연히 몇 명의 무명소배(無名小輩)들을 만나, 치욕적인 패배를 당해 이름을 더럽히고 법보도 모두 잃고 말았소이다. 만일 그대의 대제자와 싸우다가 당해내지 못하고 양패구 상(兩敗俱傷)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지요?" 그러자 녹포노조가 말했다. "도우께서 능히 둔법을 사용해 이 봉우리로 올라올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나를 구해 줄 수 있소이다. 만일 그대에게 다른 속셈이 없고 진실로 나를 위험에서 구해 줄 생각이라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외다. 방금 전 내가 한 말은 결코 고의로 겁을 주려는 허언(虛言)이 아니외다. 도우께서 믿지 못하겠다면 한 차례 시험해 보셔도 좋소. 능히 탈출할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오. 그래보면 내 말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오." 동석이몽 一息尙存 爲有元珠留半體 凶心弗改 又將長臂樹深仇 서방야불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신진자란 놈이 그처럼 대단하다고 하니, 내 이 자를 구해 주기 전에 필히 한 차례 시험을 해봐 야겠구나. 그렇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놈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노릇이 아닌가.' 서방야불은 마음을 다져먹은 다음 말했다. "도우께서 기왕에 내 재주로 가능하다고 하시니, 그렇다면 결코 사양하지 않겠소이다. 그러나 나 는 영도제의 법력을 한번 시험해 봐야겠소. 과연 탈출할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오." 말을 마치고는 둔법을 사용해 나아가려고 하는데, 녹포노조가 급히 만류했다. "도우는 잠시 기다리시오. 그대가 만일 진정으로 그 악도의 법력을 시험해 보고자 한다면 절대 조심해야 하오. 차라리 여기 있는 나무 하나를 뽑아 법술을 펼쳐 대신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 소? 그렇게 하는 것이 위험을 더는 길이 될 것이오." 서방야불은 녹포노조가 마치 활을 보고 놀라는 새처럼 이다지도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 자 선뜻 시험해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뽑아 입으 로 주술을 걸어 크게 기합을 넣으니, 그 나무는 마치 누군가 뒤에서 밀기라도 한 듯이 곧장 동굴 밖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가 봉우리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홀연 아래쪽에서 한바탕 괴성이 들려오더니 하늘과 땅이 온통 암흑으로 덮이면서 옥영봉 뒤의 암벽 위에서 수십 마리의 백룡(白龍)이 아가리 를 크게 벌린 채 발톱을 곤두세우고는 검은 구름을 휘몰며 이쪽으로 날아왔다. 순식간에 뜨거운 불길이 확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고, 드높은 물결이 넘실거리면서 산과 땅이 마구 요동을 치기 시 작하자, 서방야불은 신형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힘들어졌다. 그 수십 마리의 백룡이 막 봉우리 위로 올라오자, 갑자기 커다란 외침소리와 함께 한 무더기의 귀기서린 푸른빛의 물체가 돌기둥 쪽에서 날아왔다. 그것이 백룡과 한 차례 부딪치자, 삽시간에 수화광풍(水火狂風)이 전부 소멸되며 씻은 듯이 하늘이 맑아졌다. 서방야불이 정신을 가다듬고 그 나뭇가지를 찾아보니 이미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녹포노조는 반 토막의 몸뚱아리를 동굴의 돌기둥 위에서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었다. 서방야불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창피냐.' 요컨대 신진자가 베푼 법술은 필시 마교 중에서도 지독한 요법(妖法)으로 손꼽히는 <지수화풍 (地水火風)>임이 분명했다. 그 수십 마리의 백룡을 도무지 어떤 방법 어떤 초식으로 깨뜨려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만일 자금발우가 이미 부서지지만 않았다면 가까스로 막아낼 수는 있을 것인 데 말이다. 그는 크게 후회했다. 이거 잘못 함정 속으로 들어와 가지고 진짜로 탈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 서방야불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홀연 녹포노조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 아서 미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그는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도우는 이제 그 망할 놈의 지독함을 어느 정도 알았겠구려! 만일 도우께서 그 나무로 대신 시 전한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원신(元身)을 날려 막아내지 않았다면, 그 결과가 어찌 됐을지 짐작하 기 어렵지 않을 것이오." 서방야불은 자못 부끄러워하며 대꾸했다. "방금 전 도우의 법력을 보니 아직도 그렇게 대단한데 어째서 혼자서는 탈출하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지요." 그러자 녹포노조가 추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도우는 그놈의 법술이 지독한 것만 깨달았지 그 방비의 주도면밀함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구려. 그놈은 내가 둔법을 펼쳐 도망가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법술과 법보로 입구를 봉쇄해 놓은 것 외에도, 내 몸의 상처에다 앞뒤로 여덟 개의 마침(魔針)을 꽂아두지 않았겠소. 놈의 이 마침은 자모철(子母鐵)로 만든 것으로 <자모원양침(子母元陽針)>이라 부른다오. 여덟 개의 자침(子針)은 내 몸에다 꽂아놓고, 하나의 모침(母針)은 법술을 사용해 이 돌기둥 아래에 묻어두었단 말이외다. 따라서 먼저 모침을 제거하지 않고는 내 원신이 어디로 도망을 가든지 그놈에게 발각되고 마오. 놈이 모침에다 주술을 외기만 하면, 그 즉시로 내 온몸에는 불이 붙으면서 수천 마리의 독충에 물어뜯기는 듯한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지요. 이처럼 내 몸에 자침이 박혀 있기에, 모침을 어찌할 수가 없어 이곳에서 하루가 일 년 같은 고통을 받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누군가가 나 대신 모침을 꺼내 없애버리기만 하면, 여덟 개의 자침은 효험을 잃고 마오. 그렇게 되면 나는 원 신으로 그대를 호위하면서 함께 이곳을 탈출할 수가 있소. 내가 일단 백만산(百蠻山)으로 살아 돌 아가기만 한다면, 근골이 뛰어난 젊은놈을 잡아 그의 몸을 빌어 다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외다." 서방야불은 그의 말을 듣고 내심 곰곰이 생각했다. '일찍이 듣자하니 이들 사도(師徒)들도 누구 하나 마음이 독랄하지 않은 자가 없다지. 그러니까 나는 그의 암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기왕 자모침이 그처럼 지독하다면, 내가 모침을 꺼내들고 있는 한 그에게 당할 염려는 안해도 될 거구. 내 어찌 이 같은 점을 소홀히 하겠는가!' 서방야불은 자신에게 이처럼 단단히 주의를 준 다음 말했다. "그럼 그 모침은 어떻게 하면 취할 수 있소?" 녹포노조가 말했다. "그 침을 취하는 것은 어렵지 않소이다. 이것은 결코 내가 소인의 마음으로 그대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나 믿었던 제자놈에게 이 꼴을 당하고 만 셈이어서이오만... 도우와는 처음 만 나는 것인데, 어찌 죽을 병에 걸린 놈이 의원을 찾아 허겁지겁 헤매듯 하다가 또다시 남의 계략 에 당할 수야 있겠소? 내 도우께 기탄없이 말하건대, 그대가 진정으로 나를 구해 주려고 한다면, 그대와 나는 다같이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해서 피차간에 서로 의심하는 마음을 없애도록 합시다. 도우의 생각은 어떻소?" 서방야불은 그의 말을 듣고 내심 형편없이 욕을 퍼부었다. '천하에 지독스럽고 교활한 놈 같으니라구!' 그는 잠시 한 차례 숨을 가다듬은 다음 대답했다. "나는 진실로 서로를 구하고자 하나, 도우께서 이왕 이처럼 마음속에 한 가닥 의심을 지니고 계 시니, 만약에 딴 마음을 먹는다면 나 아각달은 남의 화살에 새가 꼬챙이 꿰듯 맞아죽을 것이오." 녹포노조는 그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자신도 맹세의 말을 했다. "내 만일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면, 다시 악도의 손에 떨어져 죽으리라!" 두 사람은 내심 각기 다른 꿍꿍이를 감춘 채 태연스럽게 맹세를 했다. 녹포노조는 그처럼 맹세를 하고 나자, 주술을 서방야불에게 불러주었다. 서방야불이 먼저 선장으 로 돌기둥을 치면 기둥 밑에서 한 개의 큰 깃발이 솟아오른다. 거기에는 부적이 적혀 있는데 그 깃발 밑에 한 치 아홉 푼짜리 철침(鐵針)이 묻혀 있다. 일단 깃발이 나오면 호신(護身) 주문을 외며 그 침을 천천히 끄집어내 침 끝을 녹포노조에게 향 하게 하고 그가 일러준 주술을 왼다. 그렇게 침을 회수한 후 녹포노조는 다시 서방야불에게 파침 지법(破針之法)을 일러주어 그 여덟 개의 나머지 침을 취하게 한다. 계획은 이런 것이지만, 서방야불이 어찌 그 말 속에 숨겨진 녹포노조의 꿍심을 알았으랴! 어쨌거 나 당장에는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서방야불은 선장으로 먼저 돌기둥을 '딱!' 때 렸다. 과연 아래에서 부적이 적힌 깃발 하나가 솟아오르며, 그 밑에는 눈을 멀게 할 듯 빛을 발하 는 철침이 하나 놓여 있었다. 첫눈에도 대단한 법보였다. 그는 급히 호신 주문을 외며 손을 뻗어 침의 대가리 쪽을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 침은 손에서 짐짓 미끄러지며 푸르스름한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는데, 손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서 도무지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침을 취하기 전에 녹포노조의 입술이 쉴새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나 그 침에서 일어난 불꽃이 그가 일으킨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으랴? 녹포노조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가 계속해서 그렇게 침 끝을 나에게 향하고 주문을 외지 않는다면, 그 불이 그대를 태워죽 이고 말 것이야!" 서방야불은 지독한 통증 때문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황급히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아내며, 침 끝을 녹포노조에게 향하게 한 뒤 입 안으로 그가 전해 준 주문을 외었다. 과연 주문 을 외기 시작하자 불길이 즉시 멈추었다. 그가 일러준 주문이 너무 길었으므로 잠시 생각을 간추 리느라고 주문을 멈추자, 침에서 다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한순간 에 주문을 다 외어버렸다. 그가 주문을 외는 동안 녹포노조도 새발 톱 같은 팔을 춤추듯 놀리며 앉은 자리에서 무슨 주술 을 외었는데, 얼굴에는 굉장히 고통스런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서방야불이 한 차례 주문을 다 외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녹포노조의 몸에서 여덟 줄기의 누런 연기가 솟아나왔다. 동시에 서방야불의 손에 있던 침도 한 줄기 초록빛 불꽃을 발출하며 손을 벗 어나 날아가 그 여덟 줄기의 가느다란 누런 연기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 순간 기이한 향기가 일어나면서 광채와 연기는 즉시 소멸해 버렸다. 녹포노조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홉 개의 자모원양침이 다 파괴되었으니 이제 그 얼간이 놈이 돌아온다 해도 도망치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군."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그 긴 팔을 휘둘러대다가 다시 한바탕 괴상한 웃음을 터뜨리는데, 그것은 마치 너무나 좋아서 미쳐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서방야불은 화가 치밀어 따졌다. "흥! 그대의 말대로라면 그 침은 이미 파괴되었다는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조금 전에 왜 거짓 말을 했소?" 녹포노조는 그의 말을 듣자 아직도 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좋은 말씀이야. 나는 이미 침을 파괴했소.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침은 대단히 지독해서 내 비록 파침지법을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자모(子母)를 볼 수가 없어 어쩌지 못했던 것이지. 자침은 내 몸에 박혀 있으니, 내가 만일 내 손으로 자침을 취했다간 침과 함께 죽었을 것이 아닌가. 방금 전 그대에게 상세히 알려주지 않았던 것은 그대가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될까 봐 염려되었기 때문이라 네. 내가 만일 진짜로 침을 취하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쳐 주었다면 이 침은 없어지지 않은 채 조 만간에 오히려 나를 해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지? 그래서 침을 취할 때 그대의 힘을 빌어 깨뜨려 버린 것이지. 먼저 그대로 하여금 모침을 가지게 한 다음 내가 자침을 취하여 아홉 개의 침을 서로 부딪치게 해서 자연스럽게 동시에 소멸시켜 버렸으니, 다시는 그 침 때문에 고민할 필 요가 없게 되지 않았겠나? 내가 자침 때문에 고통을 받은 것은 모침이 없이는 자침을 회수할 수 가 없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나 스스로는 모침을 취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 다려야 했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조심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대에게 꼼짝달싹도 못하고 괴로움 을 적잖이 받게 되었을 것이야." 서방야불은 녹포노조에게 크게 속았다는 사실을 안 데다, 그가 이처럼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자 분하고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와 맞서 싸워봐야 득이 될 것이 없었으므로 그저 억지로 꾹꾹 눌러 참으며 얼굴에 마지못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도우께선 실로 너무 의심이 많으시구려. 내겐 결코 다른 뜻이 없었소이다. 지금은 우리가 이곳 을 벗어나는 일이 시급하지 않겠소." 그러자 녹포노조는 치를 떨며 말했다. "그 망할 놈이 오늘은 필시 돌아올 것이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놈에게 어떤 괴로움을 주어도 분이 풀리지 않겠지만 지금은 하는 수 없군." 말을 마치고는 동굴 입구를 향해 한동안 주문을 외었다. 그리고는 긴 팔을 휘두르며 서방야불에 게 자신을 안아 들게 하고는 봉우리 아래로 날아내리게 했다. 서방야불은 어쩔 수 없이 녹포노조의 반쪽 몸뚱아리를 안아 들었다. 그의 입에서 '가자!' 하는 커다란 고함소리가 울리자마자 한 덩이 푸른 광채가 두 사람을 감싸며 즉시 몸이 구름을 탄 듯 두둥실 뜨더니 봉우리 아래로 내려갔다. 푸른 광채 속에서는 단지 '휙휙!' 하는 바람 소리만이 들 릴 뿐이었다. 백룡이 일제히 뭉쳐 몰려들기 시작했으나, 그 푸른 광채는 두 사람을 감싼 채 위아래로 몇 차례 기우뚱거리더니 이윽고 땅으로 내려왔다. 돌연, 귓가에 '쾅쾅!' 하는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암벽 위를 돌아보니 그 가느다란 폭포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길이가 몇십 장이나 되고 폭은 팔구십 장이나 됨직한 커다란 폭포가 마치 옥룡교(玉龍橋)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듯 걸려 있었다. 서방야불이 막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고 했을 때 녹포노조가 가로막았다. "그 죽일 놈의 법술과 법보는 이미 내 손에 모두 파괴되었네. 그러나 그놈의 성질이 오히려 나 보다도 급하기 그지없으니, 돌아와서 내가 도망친 것을 알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쳐서 날뛸 것 이야! 애석한 것은 아무래도 잠시 복수를 유예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인데... 하루만 여유가 있어 도 그놈을 잡아다 산 채로 씹어 삼키고 골수를 부숴 자근자근 밟아 분을 풀 거야!" 그리고는 피칠을 한 듯한 큰 입을 벌리며 크게 웃는데, 희번득거리는 괴이한 이빨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내노라 하는 서방야불도 소름이 끼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넙죽 땅에 엎드리며 산으로 돌아갈 거냐고 물었다. 녹포노조가 말했다. "사실은 산으로 돌아가서 먼저 근기(根氣)가 뛰어난 놈을 찾아 이 추악한 모습을 벗어버릴 참이 었지.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이러한 처지에 처하게 된 것은 따져보면 전부 그놈의 독룡존자 그 녀석 때문이란 말이야. 그 얼간이놈의 말을 빌자면, 독룡존자는 지금 홍귀곡(紅鬼谷) 에서 각 파의 여러 고수들을 불러 모아 단오절에 있을 아미파와의 일전에 대비하고 있다는군. 그 는 일종의 접골금단(接骨金丹)을 연성하고 있다니까, 내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야. 그대도 마음이 동하면 나와 함께 그를 찾아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번 오월 단오날 기회를 틈타 아미파 문하 중 근골이 뛰어난 놈 둘만 잡을 수 있으면, 그대 역시 불구의 몸을 벗어나 완전해질 수 있을 것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노릇 아니겠나!" 서방야불은 원래 독룡존자와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몸이었으나 재주가 독룡존자에 미치지 못했 다. 그러나 마화와 자금발우의 힘을 빌어 평생토록 적수를 별로 만나지 못해 한때는 주유(周瑜)나 제갈량(諸葛亮)만큼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었다. 그러나 서방야불은 심성이 몹시 시기심이 많아 독룡존자와 연합하기를 원치 않았다. 혼자 속셈 은 수년간 고생고생으로 연마하고 게다가 설혼주를 얻기만 하면 버젓이 따로 문호(門戶)를 열 생 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름도 모르는 어린 계집들을 만나 보물을 잃고 몸도 망치고 말았으니 상상이나 했던 일인가. 자기의 기개가 당당할 때에는 찾아가지 않았다가, 실의에 빠진 지금 독룡 존자를 찾아가자니 아무래도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녹포노조는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서방야불에게 의논조로 말투를 가 다듬은 것은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해서 십분 예의를 차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머뭇거리 며 대답하지 않자 마침내 불쾌함이 치밀었다. "내 평소의 기분대로라면 자네한테 물어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으나, 자네가 내 어려움을 구 해 준 것을 생각해서 한 가지 합당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어늘, 어찌 좋고 나쁨을 구별하지 못 하는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조금 전에 자네가 침을 취할 때 나는 자네에게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 음을 알아냈지. 만일 내 추측이 틀리지않았다면 자네가 맹세한 대로 해줄 수밖에. 따라서 내게 분 명한 의사표시를 하기 전에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네. 내가 이왕 말을 꺼냈으니 가고 싶어도 가야 하고,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한단 말이야. 그러지 못하겠다면 자네가 내 무서 움에 대해 알도록 해줄 수밖에 없지." 이토록 예의도 인정도 없는 무도한 언사에는 서방야불만한 인물이라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누가 듣더라도 크게 성을 낼 판이었다. 그러나 서방야불도 참패를 당한 직후인 데다 오래 전부터 녹포 노조의 흉명(凶名)을 들어온 터였다. 게다가 방금 전 친히 침을 깨뜨린 후, 원신을 운용해 공중을 누비면서 신진자가 설치해 놓은 법술과 법보를 모두 깨끗이 파괴해 버리는 것을 목도하지 않았던 가! 자신의 재주로 말하자면 그에게 대적하지는 못한다 해도, 도망하려고만 한다면 결코 불가능한 노릇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 또한 평소 고립무원인 신세인지라 몇몇 조력자를 청해 나중에 복 수할 기회를 엿보는 것도 마땅치 않고, 독룡존자를 찾아가 접골금단을 얻어 끊어진 팔을 잇고 싶 은 생각도 일어났기에,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결국은 잠시 치욕을 참고 견디는 것이 낫겠다는 결 론에 도달했다. 그는 억지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녹포노조에게 말했다. "내가 결코 도우를 따라가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독룡존자가 내 사형인 데다 평소에 감정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찾아갔다가 그에게 멸시를 당할까 두려워 망설였던 것입니 다. 기왕 도우께서 가시고자 한다면, 내가 의당 그 뜻을 좇아야지요." 녹포노조가 말했다. "무슨 생각이고 개나발이고 없다니까. 돌이켜 보면 당초 내가 그 자와 서령봉(西靈峰)에서 법술 을 겨룰 때 본래는 목숨을 걸고 사생결단을 내려 했었던 것이야. 그런데 망할놈의 백미화상이 두 마리의 짐승을 데리고 나타나 틈을 노려 이득을 얻으려 했단 말일세. 그것을 간파한 우리 두 사 람은 서로 합력해서 백미화상 그 영감쟁이를 쫓아버렸지. 그 바람에 원수가 친구로 변하게 된 셈 이야. 하지만 그의 재주로 본다면 어찌 감히 내 적수가 될 수 있겠나! 먼젓번 자운사의 일도 그에 게 재주가 없으니 자기는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나를 부추겨 이 꼴이 되게 한 것이야. 내 그를 찾아가 빚을 청산해야겠어. 자네가 나를 따라갔는데 그가 감히 싫다는 소리만 입 밖에 낸다 면, 나중에 필시 내게서 쓴맛을 보게 될 걸." 서방야불은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듣자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녹포노조가 막 서방야불을 시켜 자신을 안으라고 할때 홀연 '휙휙!'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흙먼 지가 크게 일어났다. 녹포노조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려죽일 놈이 돌아왔어! 자네, 빨리 나를 안아 들지 않고 뭘 하나?" 서방야불은 녹포노조의 얼굴에서 몹시 다급한 기색을 보자, 자신도 괜히 급해졌다. 막 녹포노조 를 안아 들었을 때, 동남쪽에서 한 덩이 검은 안개구름이 세찬 바람을 몰고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검은 구름은 마치 굶주린 매가 날개를 접고 날아내리듯 산봉우리 위로 떨어져 내렸 다. 녹포노조는 지금 둔법을 펼쳐 달아났다가는 필시 신진자에게 발각되어 추격당하리라는 것을 알 았다. 자신은 아직 자신의 몸을 대신할 근골 좋은 인물을 찾아내지 못한 반 토막의 몸뚱이인지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만 했으므로, 적을 상대할 때 불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의 서방야불 또한 신진자의 적수가 아니다. 사태가 이렇듯 급박해지자 녹포노조는 급히 긴 팔을 휘두르며 서방야불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입으로 중얼중얼 주문을 외며, 땅에다 한 줄기 획을 그어 자신과 서 방야불의 몸을 숨겼다. 서방야불은 녹포노조가 홀연 다시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법술을 사용해 신형을 감추자, 속으로 깜짝 놀랐다. 한편으로 자신만이라도 도망갈 계책을 궁리했다. 숨을 죽인 채 전면을 바라보고 있 을 때, 그 봉우리 위에는 바싹 마르고 키가 큰 사나이가 떨어져 내렸다. 중도 아니고 도인도 아닌 복장에 팔과 다리를 온통 드러낸 그런 행색이었다. 손에는 한 자루의 짧은 칼을 쥐고 있었는데, 칼에서는 붉은 광채가 번쩍거렸다. 아주 멀리서 살펴보는 데도 생김새가 간교해 보이는 것이 한 눈에도 흉악한 놈임을 알 것 같았다. 그 키다리는 땅에 발을 딛고서야 비로소 이상한 점을 느낀 듯했다. 눈을 씻고 자세히 살펴보니 까 가느다란 폭포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돌기둥은 부서져 있지 않은가! 그는 크게 화가 치미는 듯 하늘을 향해 한바탕 긴 휘파람을 불었다. 마치 까마귀의 울음소리같 이 듣기 역겨운 음성이 온 숲을 뒤흔들었다. 그는 그처럼 듣기 거북한 괴성을 지른 다음 녹포노 조가 몸을 숨긴 동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화근덩어리 녹포노조 紫暎化長虹 師道人隕身白眉針 晶球凝幻影 怪叫化驚魔靑螺谷 키다리가 이제 막 동굴 안으로 머리통을 들이밀려는 참이었다. 느닷없이 '쌔액!' 하는 파공음과 더불어 실처럼 가느다란 남빛 줄기 세 가닥이 맞받아 쏘아져 나왔다. "우와앗!" 키다리는 괴성을 지르면서 한 덩어리 녹화(綠火)로 변화하더니 번개같이 암습을 피해 버렸다. 뒤 미처 무엇인가 끄집어내어 남빛 실줄기를 향해 집어던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떠난 오색 불꽃은 당장 실줄기를 에위싸 버렸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오색 불꽃은 키다리의 손아귀로 거두어 지고, 실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신형을 감춘 <서방야불> 아각달은 한순간에 그 남빛 실줄기가 화살보다도 빠르게 키다 리의 면상에 부딪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전혀 방비할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에잇!" 키다리는 또 한번 사납게 폭갈을 터뜨리더니, 훌쩍 허공으로 날아올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암 습자의 종적을 찾아보았으나,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뜨이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키다리는 이쪽 언덕비탈로 뛰어내리더니, 이번에는 개처럼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점차 다가올수록 서방야불은 키다리의 모습을 확연하게 볼 수 있었다. 애꾸눈에 장대처럼 길고 비쩍 마른 몸집, 해골에다가 한 겁 가죽만 씌워 놓은 듯 광대뼈와 아래 턱 뼈들이 툭 불거져 나오고, 살점이라곤 전혀 붙지 않은 말대가리상이 온통 회백색으로 번뜩였 다. 혈색이라곤 아예 비치지도 않는 것이다. 왼팔은 오래 전에 잘려 나간 듯, 하나밖에 없는 옷소매 아래로 대나무 마디처럼 가느다란 팔이 절반쯤 드러나 보이는데, 그 손에는 자그만 <삼첨양인도 (三尖兩刃刀)> 한 자루와 깃발 한 폭이 들려 있고, 위 아래 할것없이 전신은 온통 녹색의 안개로 뿌옇게 뒤덮였다. 입으로는 웅얼 웅얼, 끊이지 않고 주문(呪文)을 외면서, 어쩌다가 한 차례씩 사방의 바윗돌이나 나무숲을 향하여 삼첨양인도를 마구 찔러대는 대로 돌이든 나무든 삽시간에 불덩어리로 화하는 것이었다. 녹포노조의 반 토막 몸뚱이를 안고서, 서방야불은 꽁무니가 저리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적의 거동을 보아하니, 벌써부터 녹포노조가 부린 둔형술법을 눈치채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크, 저놈이 냄새를 맡았구나!' 찔끔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하는데, 갑자기 어깻죽지 뼈가 부서질 듯이 아파왔다. 녹포노 조의 새발톱 같은 손아귀가 어깻죽지를 움켜쥐고 비틀어댄 것이다. 서방야불은 때가 때인지라 억지로 아픈 걸 참고서 녹포노조를 흘겨보았다. 손톱이 살에 박히도 록 꼬집고서도 녹포노조의 기색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기만 했다. 서방야불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의 병신을 죽이지도 못하고 내동댕이치지도 못하고, 어쩌면 좋단 말이냐?' 다시 흘낏 키다리놈을 바라보자니, 적은 어느 결에 자기 곁까지 다가와서는 손에 든 칼로 머리 통을 찍으려고 덤비지 않는가! '에쿠!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안고 있던 녹포노조의 몸뚱아리를 막 내동댕이치려는 판인데, 문득 산봉우리 정상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우우!' 하는 괴성이 울려왔다. 서방야불의 진신(眞身)에 칼질을 하려던 손이 딱 멎었다. 키다리는 괴성을 듣자마자 이빨을 '으 드득!' 갈아붙이더니 증오에 가득찬 얼굴로 후딱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 다음 순간, 키다 리의 몸뚱이는 연무(煙霧)에 휩싸인 채 심공으로 훌쩍 솟구치고서 산봉우리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가 미처 정상에 낙하하기도 전에, 동굴 속에서 초록색의 그림자 하나가 귀신같이 푸르르 솟아 오르더니 허공을 찢으면서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게 섰거랏!" 키다리가 벼락 같은 호통을 지르며 이번에는 초록빛 그림자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키다 리를 이끌고 동남쪽 하늘 구름 속으로 날아가더니만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 이때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한 서방야불의 귀청이 떨어져 나가도록 녹포노조가 소리쳤다. "어딜 가오?" 그러나 서방야불은 반문할 필요도 없었다. 몸뚱이가 어느 새 초록빛 광채에 휩싸여서 곧바로 홍 귀곡(紅鬼谷)을 향해 날고 있었던 것이다. 약 한 시간쯤 지나서, 녹포노조는 서방야불을 데리고 히말라야(喜馬拉雅) 산 홍귀곡 어구에 내려 섰다. "얼마 안 가서 홍귀곡일세. 이제는 안심해도 되네. 아까 내가 임시 변통으로 미리 동굴 속에다 매복을 해놓고 진신(眞身)까지 바꿔치기 하지 않았더라면, 그 개코처럼 냄새 잘 맡는 놈한테 꼼짝 없이 들킬 뻔했어. 화근덩어리를 죽이진 못했지만, 그래도 내 <벽혈침(碧血針)>에 눈 한 짝 찔리 고 애꾸가 됐으니까, 우선 분풀이는 좀 한 셈이지. 여기서 우리 잠시 쉬었다 가세. 뭘 좀 먹고 시 장기나 면해야 체면을 세우겠는 걸... 난 벌써 몇 달 동안이나 굶었단 말일세." 서방야불은 녹포노조의 입맛을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놈의 괴물은 사람의 심 장과 선지피만 전문적으로 즐겨 먹는다. 겨우 위험한 그물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그 버릇이 또 고개를 쳐든 것이다. '세상에 이런 놈의 먹성 좀 봤나! 홍귀곡은 설산(雪山) 수천 봉우리로 둘러싸여서 자고로 인적이 드문 곳이다. 어쩌다가 이곳에 오는 사람도 모두 내 사형 독룡존자하고 관계가 있는 자들이라 쉽 사리 넘볼 수 없을 터, 이 작자가 어떻게 손을 댄단 말인가?' 서방야불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그러지 말고 들어갑시다. 사형이 계신 곳에는 소도 많고 양도 숱하게 있소. 술이야 더 이를 말 도 없지. 기왕에 당신이나 나나 독룡존자한테 의지하러 온 몸이 아니오? 아무래도 말썽은 일으키 지 않는 게 좋을 듯싶소." "흠, 나도 여기를 왕래하는 작자들이 대부분 독룡존자의 친구라는 것쯤은 알고 있네. 허지만 내 몇 달 동안이나 고기맛을 못 본 처지란 말일세. 그러니 어쩌겠나, 먹기는 먹어야지! 특별히 그의 체면을 봐서 혼자 몸으로 지나가는 작자라면 내 손 대지 않겠네. 지금이라도 독룡존자가 사리분 별 좀 알고 날 영접해서 한턱 단단히 쓴다면 모르거니와 그까짓 몇 놈 목숨이 아까와서 나한테 박대를 한다면... 흐흐흐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산으로 돌아가겠네. 가서 다시 법보(法寶)를 연성 해 가지고 나와 원수를 갚으면 되지. 누가 독룡존자를 무서워할 줄 아는가?" 녹포노조의 냉소를 들으면서 서방야불은 그만 어이가 없었다. 독룡존자까지 무시하다니, 이건 미 쳐도 단단히 미친 게 아닌가. "녹포도우, 물론 당신의 신통력이 대단하고 법력도 하늘같은 줄은 나도 잘 아오만, 아까 그놈의 신진자가 나타났을 때는 어째서 죽이지 못하고 도리어 허신(虛身)으로 바꿔치기까지 해가면서 구 차스럽게 쫓아보냈소? 우리는 안 보이는 데 숨어 있었고, 그놈은 멀쩡하게 보이지 않았소? 설마 하니 그 따위 은혜도 모르는 반도(叛徒)에게 아직껏 인정을 베풀려는 건 아니겠지요?" "자네는 내 손으로 가르친 법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하는 소릴세. 아까 그놈은 나타나자 마자 나를 가두어 놓은 <보번법술(寶幡法術)>이 누구에겐가 파괴당한 걸 발견하고, 처음에는 내 가 일찌감치 달아난 줄 알았지. 헌데, 내가 허둥대느라고 좀 소홀했던 까닭에, 그놈은 내 체취를 냄새 맡고 그걸 쫓아왔단 말씀이야. 물론 그놈도 내가 반쪽짜리 몸뚱이만 남았으나 함부로 대할 처지는 아니란 것쯤 모를 리가 없지. 그래서 내 반격에 대비하여 술법으로 자기 몸부터 엄호했더 구만. 그놈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홍발노조(紅髮老祖)의 진산지보(鎭山之 寶)인 <천마혈도(天魔血刀)>였어. 그 지독스런 병기가 어떻게 그놈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알다가 도 모를 일이야. 그때 내가 복수를 하자면 그놈하고 동귀어진(同歸於盡)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어. 그러나 함께 죽어서야 아직은 내가 밑지는 장사거든. 어떤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산으로 돌아가서 법보부터 연성하고, 그놈의 원수를 산 채로 잡아다가 수십 년 동안 한 점 한 점씩 살점 을 도려내고 갖은 고통을 맛보인 다음에, 그놈의 육신과 영혼을 한꺼번에 잿더미로 만들어 날려 버릴 거야. 지금 그놈을 단숨에 죽여 없앤다면 너무 좋게 대해 주는 셈이지. 그래서 그놈이 우리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속으로 마주(魔呪)를 외웠거든. 동굴 안에는 벌써부터 만일의 사태 에 대비해서 내 허신을 하나 마련해 두고 있었지. 그 허깨비가 주문에 따라서 발동하고, 원수놈을 유인해 가지고 멀찌감치 사라진 것이지. 벌써 오래 전에 그놈은 내 진전(眞傳)을 거의 모두 전수 받고 있었다네. 다만 공력에서 차이가 좀 날 뿐이거든. 얼마 안 있으면 그놈도 내 허깨비를 쫓아 가 잡아챌 걸세. 허신이 발각당하면, 그놈은 반드시 내가 산으로 돌아갔으리라 여기겠지. 내 문하 에는 아직도 제자놈들이 많고, 또 하나같이 지독스런 법보를 연성해 가지고 있는 줄 알 테니까, 섣불리 그곳까지 찾아가는 모험이야 안할 걸세. 이제 나도 근골이 튼튼한 육신을 하나 찾아 가지 고 하체만 원상대로 복구된다면 그놈 하나쯤은 겁날 것 없다네." 바야흐로 두 노괴가 한창 이야기를 주고받는 참인데, 홀연듯 동편 하늘에 한 떨기 붉은 구름이 날 듯 다가오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에 홍귀곡 골짜기 안으로 사라졌다. 그걸 본 녹포노조가 혀를 내둘렀다. "독룡존자는 과연 오지랍도 넓구먼! 어떻게 수 년 동안이나 보이지 않던 친구까지 끌어들였을 까... 자네 누군지 알아봤는가? 바로 동방 <마귀조사(魔鬼祖師)> 오귀천왕(五鬼天王), 그 작자일 세. 그렇지, 독룡존자하고 오귀천왕의 조력만 얻는다면, 날 이 꼴로 만든 이정허 도사놈을 찾아서 원수 갚기는 문제도 안 되겠군!"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또다시 한바탕 파공음이 울리더니 구름 속에서 두 줄기 금빛 광채가 계곡 어구로 낙하했다. 서방야불이 미처 방문객의 진면목을 알아볼 틈도 없었다. 녹포노조가 '우후훗!' 괴성을 터뜨리자, 뒤미처 일진 음풍(陰風)이 휘몰아치면서 자욱하게 퍼진 암록색의 연무(煙霧) 속에서 일 장 가웃이 나 됨직한 손바닥이 불쑥 나타나더니, 인정사정도 없이 상대방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끼약!" 참혹스런 비명이 터지는 순간, 계곡 안에서 방금 사라졌던 그 붉은 구름덩어리가 쏜살같이 다시 나타났다. 이어서 우렁찬 호통소리가 울렸다. "그 사람 내려놓지 못할까? 나다, 상화양(尙和陽)이 왔다!" 붉은 구름덩이가 지면에 내려앉으면서 그 속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두 살도 못되어 보이 는 동자였다. 발그스레 혈색이 감도는 만월 같은 얼굴에 짙은 눈빛, 부리부리한 두 눈망울, 그 아 래로 주먹코가 불쑥 솟았고, 메기처럼 커다란 입이 딱 벌어졌다. 붉은 단삼(短衫) 한 벌에 맨종아리가 그대로 흙바닥을 딛고 섰는데, 목에는 지전(紙錢) 두 꾸러 미와 백골(白骨)의 염주를 감고, 한 손에는 금종(金鐘)을, 또 한 손에는 오로추(五老鎚)를 잡았다. 오로추 쇠몽치의 머리는 사람의 해골 다섯 개가 한 무더기로 꿰어져 있고, 몽치 자루까지의 길이 는 넉 자 남짓한데, 쇠몽치뿐만 아니라 동자의 전신이 온통 붉은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미 녹포노조의 말을 들은 터라, 서방야불은 이 홍운동자가 <오귀천왕> 상화양임을 알아채고 황급히 그 앞으로 나서서 굽신 예부터 올렸다. <오귀천왕> 상화양, 그 얼마나 무서운 이름인가! 그러나 상화양은 서방야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녹포노조와 얼굴을 맞대기가 무섭게 악부터 버 럭 질렀다. "이 늙어 죽지도 못할 병신 녀석아! 어디 사람 잡아먹을 데가 없어서 친구집 문턱까지 와 가지 고 지랄발광이냐? 게다가 우리 후배를 해치려 들다니. 내 만약 한 걸음이라도 늦었더라면, 훗날 구반파(鳩盤婆)를 만나 무슨 입으로 변명했을꼬? 어서 내려놓으라구! 날 따라 들어가면 네놈의 배 가 터지도록 먹고 마시게 해 주마. 그래도 내 말 안 듣겠나? 어디, 그럼 내 손속이 매정하다고 원 망은 말거라!" 녹포노조가 그 말을 듣더니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흥, 요 어린 녀석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발가숭이로 날아다니냐? 내 그동안 몇 년을 찾아다 녔어도 보이질 않길래 네 녀석이 벌써 거지 같은 우담 노파 손에서 저승행차를 한 줄만 알았지. 그랬더니 아직도 인간세상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구나! 염려 마라. 내 어디 먹이가 없어서 독룡 그놈의 집 문간에 와 가지고 사람을 잡아먹겠냐? 독룡이 못되게 날 속여 자운사로 보낸 바람에 하마터면 이정허란 도사놈한테 걸려서 죽을 뻔했거든. 그렇다면 독룡도 내가 상반신 몸뚱아리만 겨우 건져 가지고 도망친 걸 알았을 테고, 의당 내 종적을 찾아서 접골단(接骨丹)과 나머지 반동 강 육신 하나 구해 가지고 원상대로 환원시켜 줘야 친구된 도리가 아니겠느냐, 이 말씀이지. 독룡 그 작자가 나를 모른 척 내버려 둔 바람에 내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아냐? 몸뚱이도 절반밖에 남 지 않았는 데다 내 못된 제자 신진자란 놈의 손아귀에 걸려서 죽지 못할 고초를 숱하게 당했단 말씀이야. 내 오늘 마음 먹고 그 독룡한테 빚을 갚기로 했네. 우선 그 작자 문간에서 일 좀 벌여 서 체면부터 싹 깎아놓고 겸사겸사 점심 좀 먹기로 한 것이지. 허나, 기왕 자네를 만나고 보니 반 갑기도 하고, 또 보아하니 요 먹이감들도 아직 죽을 상들은 아니군그래... 좋아, 자넬 따라서 들어 가기로 하지. 독룡이 날 어떻게 대접하나 보기로 하겠네. 이봐, 어쩌자고 그렇게 기세등등, 사납게 쳐다보나? 내가 반 토막짜리 병신이라고 깔보는 거야? 누가 자네 무서워 벌벌 떨 줄 아나? 어림 도 없지!" 입으로야 뻗대면서도 녹포노조는 손은 들고 있던 먹이를 슬그머니 풀어놓았다. 방금 금빛 광채를 타고 내려온 두 여자는 여마(女魔) 구반파의 문하제자 금주(金珠)와 은주(銀 珠)였다. 그중 하나가 녹포노조의 손에 걸려 한 입 먹이로 물어뜯길 뻔했던 것이다. 구반파는 이번에 독룡존자로부터 청라곡(靑螺谷) 결전을 지원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으나, 원래 선천신수(先天神數)에 달통한 그녀는 각 이단문파들이 애당초 아미파 세력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는 걸 알아챘다. 그녀의 점괘로 보아 이단의 문파보다는 정파가 머지않아 크게 창성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구반파는 점괘와 독룡존자의 초청장을 앞에 놓고 번민했다. 자기 자신도 비록 적신교주(赤身敎 主)로서 마겁(魔劫)에 들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모면할 방도는 있다. 그런 판국에 결과가 빤한 싸움에 끼어들어 몸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독룡존자와 얼마나 절친한 벗이 냐? 일껏 초청장을 보내 도와달라는 걸 의리상 매정하게 뿌리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생각다 못해 그녀는 제자 금주와 은주를 파견하여, 정파 세력과 싸움이 벌어지거든 기회를 보아 서 재간껏 핑계대고 빠져나오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두 제자는 홍귀곡 어구에 도착하자 마자 그중 은주가 녹포노조의 손아귀에 걸려 뜯어먹힐 뻔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금주와 은주는 <오귀천왕> 상화양이 자기네 스승과 절친한 막역지우란 사실을 익히 아는 터라, 그가 함께 있는 이상 극악스런 녹포노조에게 해침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상화양이 녹포 노조와 입심 걸게 대화를 끝내자, 금주는 사매 은주를 데리고 상화양 앞으로 나아가서 구명(求命) 의 은혜를 사례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저희 사부께선 독룡존자님의 초청장을 받으셨으나 때마침 공교롭게도 중대한 일이 생겨서 오실 수 없게 되셨으므로, 특별히 저희 두 자매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희들은 독룡 존자님의 선부(仙府) 입구에서 어처구니없이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엄하신 독룡존자님의 문전에 다다른 이상 어느 누가 감히 범접하랴 싶어 마음을 놓았다가 하마터면 짐승 같은 자의 밥 이 될 뻔했습니다. 이런 판국이라면 도행(道行)도 천박한 저희 사도(師徒)가 여기 있어 봤자 제 구실도 못하고 남에게 업신여김이나 당하기 십상입니다. 제가 보건대, 다행히도 독룡존자님께서 청해 오신 고수 선배님들이 많은 듯하군요. 그렇다면 저희들 같은 무용지물이야 어디 끼어들 데 가 있겠습니까? 또 이토록 남에게 수모를 당한 몸으로 독룡존자님을 뵈오러 들어갈 면목도 없습 니다. 사백께서 저희들의 고충을 독룡존자님한테 대신 전해 주시고, 부디 양해를 바란다는 말씀을 드려 주십시오. 저희들은 이 길로 되돌아 가 사부님께 말씀드리고 오늘의 치욕을 씻기 전에는 다 시 찾아뵙지 않으렵니다. 사백님, 저희들의 방자스러움을 용서해 주십시오." 금주의 말투는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곁에서 듣던 녹포노조는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짐승 같은 자라니! 어딜 감히 치욕을 씻겠다고? 이년들이 이 녹포노조를 병신이라고 깔보는구 나!' 그는 말로써 시비곡직을 따져봐야 헛일인 줄 알았다. 대뜸 자기 원신(元身)을 커다란 손아귀로 변화시켜서 괘씸한 두 계집을 움켜잡으려 했다. 허지만 금주와 은주도 아까처럼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벌써부터 잔뜩 경계하고 있던 참이다. 그 녀들은 녹포노조의 손이 들이닥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고, 두 발로 지면을 박차더니 한 줄기 금빛 광채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상화양이 보다못해 박장대소를 했다. "으하하핫, 맹장(猛將) 밑에 약졸(弱卒)이 없다더니, 구반파는 과연 대단한 제자들을 두었구만! 이봐, 녹가놈아, 조만간에 구반파가 빚을 갚으려고 네 녀석을 찾아갈 거다! 그땐 어쩔 셈이냐?" 녹포노조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알고 보니 두 계집년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화풀이도 실패한 데다 공연히 구반파와 같은 강적만 하나 더 생겼으니 속이 편할 리 있겠는가? 상화양의 빈정거리는 소리를 듣자니까 가슴 속에서 무명업화(無名業火)가 삼천 장이나 치밀었다. 그리나 어 쩌랴! 자신은 현재 궁색한 처지에 남의 도움이나 구해야 할 판국인데, 어디서 내키는 대로 성질을 부린단 말인가? 녹포노조는 가슴 속 울화통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흥, 내가 이날 이때껏 이삼백 년간을 누비고 다녔지만 어떤 작자하고 원수진 걸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구! 거지 같은 구반파가 날 원망한다고 하더라도 제까짓 게 어쩔 테야?" 상화양은 녹포노조가 투덜대는 소리를 더 이상 귀담아 듣지 않았다. 독룡존자의 사제 서방야불 은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는 처지였다. 이제 보니까 서방야불도 한쪽 팔을 잘리우고 엉거주춤 거 북살스런 자세로 녹포노조의 반 동강 몸뚱이를 안고 있는 품이 여간 처량하지 않았다. "자네 어쩌다가 팔을 잃었나?" "예, 귀풍곡에서 느닷없이 아미파의 어린 놈들한테 협공을 받고....." 서방야불은 자기가 당한 일을 상화양에게 대충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싸움을 벌이게 된 원인이 <여앙신> 등팔고의 설혼주를 빼앗으려다가 일어났다는 사실만큼은 일체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 다. 아미파의 젊은이들이란 말에 상화양은 노발대발, 악을 버럭 질렀다. "요런,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놈들이 어딜 감히 예까지 와서 날뛴단 말이냐! 가만 있거라, 요 것들한테 우선 내 뜨거운 맛 좀 보여줘야겠다!" "지금은 안 됩니다. 먼저 독룡사형부터 만나뵈옵고....." 서방야불이 다급하게 말렸다. 상화양도 어인 일인지 순순히 성미를 누그러뜨렸다. "그렇군. 일에도 선후(先後)가 있으니까... 자, 어서들 들어가세." 상화양은 앞장서서 휘적휘적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르면서 서방야불이 또 물었다. "이번에 독룡존자께서 초빙한 분들은 어떤 고수인가요?" "들어가 보면 알게 되네!" 상화양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녹포노조가 또 말을 건넸다. "그동안 도대체 어디 있었는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군." "말도 말게. 나는 개원사(開元寺)에서 우담노니와 백곡일(白谷逸) 부부한테 참패를 당하고야 비 로소 세상 천지에 나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가 아직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네. <극락동자> 이 정허, 우담노니, 아미파 일당의 <동해삼선(東海三仙)>, <숭산이로(崇山二老)> 이런 작자들 말일 세. 모두가 나한텐 힘에 벅찬 적수들이지.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고 결심했네. 문하 제자들도, 처 자식도 모두 팽개치고 혼자서 알비쓰(阿爾卑斯) 고봉(高峰) 정상으로 올라갔지. 거기서 오랜 풍상 을 겪으면서 고심참담 노력한 끝에 <마화금종(魔火金鐘> 한 자루와 <백골쇄심추(白骨鎖心鎚)>를 연성해냈네... 내가 연성한 마화는 자네들 것하고 근본적으로 다르지. 어떤 검선이든, 범인(凡人)이 든 막론하고 이 불 속에 일단 갇혔다 하면 기껏 견뎌봐야 칠 주야(晝夜)뿐일세. 육신도 영혼도 가 차없이 잿더미로 변해 흩어지고 말 것이네. 이 세상에 오직 하나, 설혼주만이 내 마화를 파괴할 수 있는데, 그 구슬은 어디 있는지 아는가? 설산(雪山) 수천 봉우리 어딘가 천고의 빙하(氷河) 속 에 감추어져 있거든. 천지(天地)를 꿰뚫는 재간을 가진 자라도 먼저 수천 봉우리 가운데서 그 소 재를 찾기는 쉽지 않을 걸세. 어떻게 찾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몇 년 동안을 머물면서 매일같이 진화(眞火)로 빙하의 얼음층부터 녹여야 하고, 마지막에는 설혼주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해서 천여 장의 얼음층을 뚫고 들어가되,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아니면 전신을 보호할 수 없다네. 어디 그뿐인가? 천여 장 깊이에서 설혼주의 소재 위치를 낱알만큼이라도 어긋나지 말아야 그걸 손에 넣을 수 있단 말씀이야. 나는 이 두 가지 법보를 연성하기 전부터 상극이 되는 설혼주를 찾아내 어 없애버리기로 결심했지. 어떤 친구가 일러주더군. 설혼주의 위력이면 내 백골쇄심추와 마화금 종을 넉넉히 격파할 수 있다고 말이야. 현재 정(正), 사(邪)의 어느 문파를 막론하고 모두들 제삼 차 아미투검(峨嵋鬪劍)에 대비해서 법보를 연성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지. 그래서 이 구슬의 정체 나 내력을 아는 작자도 아주 드물다네... 이번에 알비쓰 산을 내려와서, 우선 내 큰 제자놈 호문옥 (胡文玉)한테 명령을 내렸네. 며칠 안에 그 녀석은 설혼주가 감춰진 곳으로 옮겨 가서 남이 알아 채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을 걸세. 뒤미처 나도 갈 예정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곳 독룡존자의 초 빙을 받았으니 안 올 수가 있어야지... 지난번 성도 자운사 결전에 비추어 보아서, 독룡존자는 병 력이 많다고 승산도 많은 게 아닌 줄 깨달았지. 그래서 이번 청라곡 싸움에서는 여럿을 초빙하지 않고, 나 이외에 <만묘선고(萬妙仙姑)> 허비랑(許飛娘)과 구반파 정도만 초청했다네. 만약 이번에 청라산으로 오는 놈들이 무명소배(無名少輩)면 우리도 나설 필요가 없지. 오면서 듣자니까 아미파 장교(掌敎)도 여기 올 모양인데, 그렇다면 준비를 착실히 안해 놓을 수 없거든." 상화양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홀연히 땅 속에서 황색 연기가 풀썩 솟구치더니, 이내 연기는 없어지고 라마승(喇麻僧)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귀한 손님들께서 왕림하셨으면 들어오시지 않고 어째 예서 한담을 나누고 계시오? 주인이 일찌 감치 마중나오지 않아서 탓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우람한 체구에 목소리도 절간의 홍종(洪鐘)을 치는 것처럼 우렁찼다. 바로 서장파(西藏派)의 장 교(掌敎) 독룡존자가 친히 나타난 것이다. 녹포노조는 그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심화(心火)가 치밀어 올랐다. "너, 이 얼빠진 용대가리녀석! 날 잘도 속여서 얼마나 큰 고초를 당하게 만들었는지 아느냐?" 그는 다짜고짜 큼지막한 손아귀를 펼쳐서 독룡존자의 면상을 움켜잡으려 했다. 상화양은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기가 무섭게 충돌하는 걸 보자, 황망히 왼손에 들린 백골추를 번쩍 쳐들고 맞바람을 휘둘러 쳤다. 그러자 백골추의 머리에서 참담한 연무(煙霧)가 뿌옇게 쏟아 져 나오더니, 다섯 개의 해골이 귀곡성(鬼哭聲)을 터뜨리면서 일제히 살아났다. 해골들은 제각기 귀 밑까지 찢어진 아가리를 쩍 벌리고 새하얀 이빨을 온통 드러낸 채 시커먼 연기를 확 뿜어내는 것이었다. 상화양은 백골부로 녹포노조를 가로막고서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녹가놈아! 걸핏하면 그 알량한 소갈머리부터 터뜨리다니, 네놈 눈깔에는 친구도 안 보이 고 흑백 시비도 못 가린단 말이냐? 어쩌자고 닥치는 대로 허세를 부리는가. 기왕에 아미파 놈들 이 지독한 줄 알았다면 당초부터 아예 가지 말 것이지, 저 잘났다고 가서 혼뜨검을 당한단 말이 냐? 네놈이 고 모양으로 당한 것도 모두 자기 실력이 변변치 못해서 그런 것인데, 제 탓은 안하 고 도리어 남을 탓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정신 좀 똑똑히 차려! 지금이 어느 때냐? 여기에 나 상화양도 있고, 독룡존자와 서방야불 도우도 함께 있다. 오늘부터 너와 우리, 이렇게 네 사람 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서로 도와가면서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지난날의 원수를 갚아야 한단 말이다. 너 혼자 힘으로, 나 혼자 힘으로 날뛰다가는 남에게 수모나 당하기 십상이 아니냐? 불구가 된 두 사람의 몸은 나하고 독룡존자가 책임지고 고쳐 주마. 분명코 약속하겠다. 어디서라 도 근기가 튼튼한 육신을 구해다가 법력으로 살과 뼈를 이어 환원시켜 주겠단 말이다. 더 이상 내 말을 못 믿고, 방금 구반파 문하제자들에게 하듯 성질 내키는 대로 날뛴다면 이 샹화양이 몰 인정하다고 원망이나 하지 말거라!" 녹포노조는 한바탕 상화양의 욕설을 뒤집어 쓰고 나자 불쾌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꾹 참았다. 우 선 상화양과 독룡존자의 교분은 자기보다 훨씬 깊고도 두텁다. 사실 말이지 자신도 독룡존자와 무슨 불구대천지 원수를 맺은 것도 아니다. 지난번 독룡의 꼬임수에 넘어가 요모양 요꼴이 된 게 분하고 원통해서 늘 한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은 도움을 받아야 할 입장이다. 그저 독룡존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울컥!' 목구멍에 치미는 것도 있고 또 처음부터 엄포나 때려서 억울한 심정이라도 보여야 저쪽이 미안감을 더욱 깊게 느 낄 듯싶어 한번 해본 것이지, 결코 죽기살기로 겨룰 심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상화양은 또 어떤가? 비록 자기한테 마구 욕설은 퍼붓고 있지만 앞으로 요긴하게 이용해야 할 인물이다. 게다가 상화양의 말이 모두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일리가 있다. 그 렇다면 이쯤에서 기꺼이 막을 내리기로 하자! 녹포노조는 상화양에게 변명 겸해서 생색을 냈다. "오가녀석, 그래도 입은 살았다고 남한테 인정 쓸 줄 아는구나. 이놈아, 내가 원수한테 호되게 당한 걸 가지고 친구 탓을 하는 줄 알았다면 큰 오해다. 독룡존자는 사후 처리를 그렇게 하면 안 되었단 말이야. 분명히 자운사에서 내 원신(元身)이 빠져 달아난 사실을 뻔히 알고서도 수소문 한 번 해서 찾지 않았기 때문에 내 못된 놈의 제자한테 <한풍열화독침(寒風烈火毒針)>의 모진 고초 를 당하게 만들었단 말야. 나는 그 처사가 원망스럽고 분했어. 허나, 이제 자네와 독룡 두 사람이 내 몸을 환원시켜 준다니까, 독룡의 입으로 분명 약속을 한다면 나도 용서를 하겠다." 당초 독룡존자는 녹포노조가 대뜸 욕설을 퍼붓고 덤벼들었을 때도 피하기만 했을 뿐 전혀 반격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현재 자기는 어떻든지 한 사람의 고수라도 더 필요하거니와, 또 주인된 입 장에서 찾아온 손님을 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녹포노조의 끝말을 듣자 껄껄 웃었다. "녹포도우, 자네 그동안 나한테 아주 원망이 많았군그래! 작년 자운사 건에 대해선 내가 솔직히 말해 주겠네. 그때는 사실 말이지 내 법보를 완성하지 못해서 내 실력 가지곤 도저히 우담노니의 적수가 못되었네. 그래서 녹포도우더러 내 제자 유덕을 지원해 달라고 간청했던 것일세. 당시 떠 나기 전에 적방(敵方)의 실정을 상세하게 말해 준 것은 녹포노조도 기억하겠지? 허나, 나 역시 여 지껏 강호상의 어떤 시비에도 참견을 않던 이정허란 놈이 아미파의 편에 서서 녹포도우를 상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물론 나도 녹포도우의 원신이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대로 모른 척한 건 아닐세. 제자 유덕 역시 자운사 결전이 끝난 후 현장으로 되돌아 가서 샅샅이 찾아보았 다네. 그러나 도우의 상반신을 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도중, 대가장(戴家場)에서 또 한 차례 낭패를 당하느라 시일이 늦었고, 얼마 전에야 겨우 당도해서 그 사실을 알렸네... 수천 리를 떨어져 있었지만, 결국 이 독룡존자는 체면이 말씀 아니게 된 셈이었지. 적에 대한 원한은 뼈에 사무쳤네. 나는 급히 문하제자들한테 영약을 캐다가 연단(煉丹)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또 한편으 로 함공노조(陷空老祖)에게 사람을 보내 만년속단(萬年續丹)을 얻어오도록 했네. 어차피 자네는 날 찾아올 테니까, 원래의 육신을 회복하도록 준비해 놓은 것이지.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자네 는 나타나지 않았어. 그래서 또 각처에 사람을 풀어 자네 행방을 수소문했지. 내 문하제자로 새로 들어온 왕동(汪銅)이란 녀석이 최근에 아미파 인물의 입을 통해서 자네가 어떤 외팔이에게 구출 되어 달아났다는 소식을 탐문해 가지고 돌아왔더군. 아미파 놈들의 수중에서 자네를 채뜨려 간 외팔이가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네. 그리고 결국은 추측해 내었지. 자네의 큰제 자인 신진자가 오래 전 죄를 짓고 자네한테 한쪽 팔을 뜯어먹혀서 외팔이 신세였단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거든. 그후로 자네는 신진자가 과오를 뉘우치고 충성스럽게 섬기는 게 기특해 온갖 비 전절기를 남김없이 전수해 주어, 마침내 자네 문파의 제일가는 인물이 되었단 것도 알았지. 나는 자네가 그 제자의 손에 구출되었다고 단정했다네. 그리고 무사히 산으로 돌아가서 법신(法身)을 회복할 방법에 몰두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지. 나는 어차피 자네한테 빚진 몸, 그 빚을 갚는다고 숱 한 영단을 만들어 놓았거든. 그래서 다시 제자를 시켜 자네가 있던 백만신 음풍동에 가서 탐문하 도록 했네. 그런데 뜻밖에도 문하제자 서른다섯 명은 다 있는데 자네와 신진자는 보이지 않더라 고 알려 왔네. 자네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부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하더라는 거야. 신 진자는 늘 외부로 들랑거리면서도 사부가 살아 있단 말은 한 마디 비치지도 않았더군. 그들은 벌 써부터 신진자가 무슨 꿍꿍이짓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던 터라, 내 제자의 입을 통해 자네가 신진자에게 구출되었단 소식을 듣더니, 펄쩍 뛰더라는 걸세. 신진자가 돌아오는 대로 추궁 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들 있는 모양일세. 여하튼 간에 나도 그 보고를 받고서야 비로소 자네한 데 무슨 변고가 생긴 걸 깨달았네. 분명 신진자 그놈은 자네의 법보가 자운사 결전에서 모조리 결딴났으니까 더 이상 자기를 어쩌지 못하리라 여기고서 지난날 자네한테 팔을 뜯어먹힌 앙갚음 을 하려고 마음먹은 게 틀림없으리라... 게다가 자네의 원신(元身)으로 단련해 낸 그 현빈주(玄牝 珠)에 눈독을 들였는지도 모르지. 좌우지간, 나는 이번 단오절 싸움만 끝나면 그 길로 몸소 신진 자를 찾아가서 자네 행방을 추궁할 작정이었다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자네가 여기 나타난 것 일세. 이래도 날더러 몰인정한 놈이라고 원망할 텐가?" 녹포노조가 막 응수를 하려는데, 어느 틈에 서방야불이 불쑥 앞으로 나와서 독룡존자에게 인사 를 드리더니, 다시 녹포노조를 돌아보고 말했다. "먼젓번 내가 녹포도우의 말씀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계시다고 생각 은 했소. 우리 독룡사형은 그렇게 박정한 분이 아닌 줄 내 벌써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이제 오늘 모든 게 녹포도우의 못된 제자녀석 신진자가 저지른 죄 탓이란 진상이 밝혀졌으니까, 애꿎 은 우리끼리 옳으니 그르니 시비를 따질 필요도 없을 것 같소. 여하튼 단오절만 넘기고 모든 일 이 다 마무리된 다음에 하늘 끝 땅 속까지 뒤져서라도 그놈을 찾아내어 죄를 밝히기로 합시다. 지금은 이쯤 하고 어서 들어가야지요. 녹포도우는 오래 전부터 혈식(血食)이 습관이신데 벌씨 몇 달 좋이 고기맛도 못 보셨을 테니, 우선 사형께서 푸짐하게 대접해 드리고 나서 모두들 다시 의 논하도록 합시다." 독룡존자가 홍귀곡으로 거처를 옮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서방야불도 홍귀곡은 초 행인 셈이다. 골짜기 안에 들어서고 보니, 하늘만 빼놓고 바위며 흙이 온통 붉은빛 일색이었다. 이십여 리쯤 들어가자, 문득 전면에서 누른 안개와 홍진(紅塵)이 자욱한 가운데 아렴풋이 동부(洞 府) 한 채가 나타났다. 동부의 어구 문전에는 네 명의 마사(魔士)가 우람한 체구를 우뚝 세우고 손에 양갈래진 창을 든 채 시립해 있다가 독룡 일행이 가까이 다가가자, 일제히 무릎꿇고 예를 올렸다. 땡그렁, 땡, 땡! 맑은 황금종 소리가 울렸다. 동부 안에서 열두 명의 아리따운 마녀들이 실 한 올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몸으로 영접을 나왔다. 손에손에 무우법기(舞羽法器)를 너울거리며 두 줄로 갈라서더니 바닥에 엎드려 장교(掌敎) 일행을 맞이했다. 그 동부는 원래 거대한 정옥(晶玉)의 결정체였는데, 여기에 독룡존자가 다시 술법을 이용하여 온 갖 장식으로 점철한 것이어서 눈길이 미치는 곳마다 금락(金珞), 화영(花瓔)에 보광이 어리고 있 었다. 사방은 수정(水晶)의 해말간 동벽으로 둘러쳐서 그 안에 들어가자 이내 유리세계를 찾아든 듯한 환상을 느낄 정도였다. 과연 독룡존자는 온갖 심혈을 남김없이 기울여 이 화려한 동부를 완 성한 것이었다. 서방야불은 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것 보아라, 아각달! 너는 독룡존자와 한 스승을 섬기면서 도행을 수련한 몸이 아니냐? 한때의 객기에 못 이겨 문하를 떠나고 제 고집대로 살아왔으니까 누굴 원망하겠는가마는, 그동안에도 독 룡존자는 또 천마진전(天魔眞傳)을 얻고 도력(道力)이 정진하여 마침내는 의젓하게도 서장마교(西 藏魔敎)의 교조가 되었구나. 헌데 아각달, 너는 도리어 몰락한 신세가 되고 처량하게도 불구의 몸 뚱이로 그에게 구걸하는 입장에 처하였다. 이 동부 안의 권세와 복록은 내 평생껏 단 하루도 누 려본 적이 없어, 애당초 독룡과 더불어 합심해서 마교를 창건하였더라면 내 어찌 오늘날 이 지경 에 이르렀을꼬?' 아무리 억눌러도 부끄러움과 후회가 견딜 수 없이 솟구쳐 나왔다. 녹포노조는 좌우에 시립한 벌거숭이 남녀 요마들을 눈여겨보면서 벌써부터 핏물 대야 같은 아가 리를 쩍 벌리고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독룡존자도 이놈의 병탈을 익히 아는지라 황급히 좌우에 분부하였다. "얘들아, 서둘러서 주안상을 차려 내오고 짐승 몇 마리도 끌어다 대령하거라. 그리고 둘째와 셋 째는 속히 밖으로 나가서 산 사람 몇 놈만 잡아와야겠다. 녹포어르신께서 오랫동안 시장하셨으니 까." 시립해 있던 요마들이 분부를 받고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푸짐한 주연석이 베풀어졌다. 그리고 대청 한가운데는 펄펄 뛰는 산 소와 양 몇 마리가 떠메어져 왔다. 독룡존자가 일지(一指)를 튕기 니, 소와 양들은 네 발굽이 바닥에 못박힌 듯 딱 들러붙어 옴쭉달싹도 하지 못했다. 좌중의 주객(主客)은 저마다 종파는 조금씩 다르지만 하나같이 마교를 신봉하고 혈식(血食)하는 습관은 마찬가지다. 독룡존자의 은근한 인도를 받고 좌정하자, 녹포노조는 더 이상 겸손을 떨 필요가 없어졌다. 두 눈은 진작부터 살이 투실투실 찐 티베트 산 소 한 마리를 점찍어 놓고 있던 참이었다. 반 토막 몸뚱이를 비단 방석 위에 턱 걸치고선 맹금(猛禽)의 발톱 같은 손아귀로 냅다 소뱃가죽 을 움켜잡아 찢어발겼다. 이 장 남짓 거리를 두고서도 녹포노조의 손은 익숙하게 황소의 심장과 간, 창자를 한꺼번에 끄집어 내더니 입으로 가져가 아귀처럼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시중드는 요마들은 재빠르게 옥반(玉盤)을 황소 아랫배에 받쳐 대고 철철 넘치도록 선지피를 받 아다가 녹포노조에게 올렸다. 녹포노조는 서슴지 않고 옥반을 집어들더니 냉수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렇듯 두 마리 황소와 양 한 마리의 심장을 연거푸 꺼내 먹고서야 반 토막의 괴물은 비로소 비단 방석에 엎드려 혼곤하게 잠이 들었다. 독룡존자와 상화양, 서방야불도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셋은 녹포노조와 먹는 방식이 달 랐다.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시중꾼이 날카로운 칼을 잡고서 황소의 척추 등가죽을 산 채로 벗 겨내더니 좌우 양쪽으로 젖혀놓고, 시뻘건 살덩이가 드러나자 그것을 한 덩어리씩 저며내어 옥반 에 담아놓았다. 그리고 양고기도 같은 방식으로 저며서 보기좋게 담았다. 한편에서는 소와 양 피를 뽑아가지고 술잔에 섞어 따랐다. 녹포노조에게 오장육부를 씹어먹힌 황소는 그래도 행복하게 즉사한 셈이지만, 나머지 생축(生畜)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우랴! 가엾게도 이 짐승들은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산 채로 요마의 칼날에 한 점 한 점씩 살덩이를 저 미우고, 더운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뽑혀가는 능지처참의 형벌을 애꿎게 받으면서 죽어야만 했 다. 마법의 금제(禁制)에 걸렸으므로 벌어진 입도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네 다리마저 움직일 수 가 없었다. 그저 사람이 선혈을 뽑고 살점을 저며내는 대로 몸뚱이를 맡긴 채 고통과 원한의 눈 을 까뒤집고 당하는 수밖에 어쩌겠는가! 아무리 짐승이라곤 하나 그 눈망울에선 당장 불덩이라도 토해낼 듯 시뻘겋게 충혈되어 피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교의 요물들은 주인이나 시중꾼이나 가릴 것없이 모두가 잔인하고 포악스런 성미를 지녔다. 짐승들의 고기와 피를 산 채로 저며서 씹으면서도 측은지심 따위는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서방야불이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느라고 벌어진 입가에 살점과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우하하핫, 독룡형님, 훗날에 우리 원수놈들을 잡거들랑 이 황소처럼 살을 저미고 피를 뽑아먹고 죽입시다! 그래야만 우리들 가슴속이 후련해지도록 분풀이가 되지 않겠소?" 그는 이어서 독룡존자에게 자신이 귀풍곡에서 정체 모를 젊은 남녀 몇 놈한테 걸려 법보도 잃고 한쪽 팔까지 잘리운 얘기를 들려 주었다. 과연 독룡존자도 으르렁거리면서 노발대발이었다. "자네 말대로라면, 고놈들은 분명코 유덕이 성도 자운사에서 맞닥뜨렸던 아미파의 신참 강아지 새끼들임에 틀림없어!" "헌데, 내가 보기에는 그것들 전부가 아미파 문하는 아닌 듯했습니다. 처음 마주친 것은 나이도 아주 어린 계집년 둘인데, 무지막지스런 독수리를 타고 있더군요. 그중 하나는 겨우 열서너 살밖 에 안 되는 것이 보검 한 자루를 차고 일단 출수하자마자 무지개 같은 자줏빛 광채를 쏘아냅디 다. 내 법보 전륜발우(轉輪鉢盂)가 여태 얼마나 많은 고수들의 비검과 법보를 깨뜨리고 빨아들였 는지 이루 셀 수도 없건만, 그것도 계집년의 자줏빛 검광에 걸리자마자 대번 꿰뚫려서 박살이 나 고 말았소. 그 다음에 겨우 마화를 일으켜 가지고 가두어 놓았는데, 그놈의 자줏빛 검광이 얼마나 사나운지 마화진(魔火陣) 속에서도 마구 날뜁디다. 결국 그 검광과 두 계집년을 가두어 놓기만 했 을 뿐,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소. 그러나 이것은 약과요. 형님... 마화진 속에 갇힌 년들을 구출 해 간 계집년은 더욱 지독했소. 거리낌없이 내 마화진 속으로 훌쩍 날아들더니만 선뜻 주머니 안 에서 제 물건 꺼내듯이 제 편을 구해 나가더라 이겁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시오? 도대체 무슨 법보를 사용했는지 내가 도망칠 퇴로마저 꽉 막아버렸소. 눈치 빠르게 내 스스르 한쪽 팔을 잘라 버리고 도망쳤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 계집년에게 사로잡힐 뻔했소. 날짐승도 여간내기가 아 닙디다. 무공실력이 어지간한 인물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그놈을 길들여서 타고 다닐 꿈도 못 꿀 정도였소. 정말 이상한 일이야! 아미파의 고수들 대부분은 우리가 뻔히 알고 있으니까 내 법보를 깨뜨리고 독수리쯤 부린다 해서 뭐 신기할 건 없지만, 새로 입문한 신참내기들이 어떻게 그 정도 수단을 지닐 수 있단 말인지? 그년들은 정말 햇병아리였단 말이오." "그건 자네가 모르는 소리야. 근년에 들어서 각 문파들이 모든 문호 세력을 확장하려고 쓸 만한 제자감을 널리 구하는 중일세. 그중에서 아미파가 제일 많이 물색했지. 유덕의 말을 따르자면, 아 미 문하에 스승보다 뛰어난 젊은 남녀 검선들이 여럿 있는데, 효월선사(曉月禪師)나 음양수(陰陽 搜) 같은 고수조차도 그것들을 어떻게 못했다니까, 그만하면 알조 아닌가?... 헌데 유덕도 그 젊은 것들 가운데 독수리를 탄 계집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었어. 아미 문하제자가 아니라면 분명코 그 놈들이 청라욕을 격파시키려고 어디선가 초빙해 온 응원군이겠지. 내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우리 가 이번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사태를 관망하는 게 좋을 듯싶네." 그러자 <오귀천왕> 싱화양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각 문파에서 날짐승을 길들여 타고 다니는 인물은 예전에도 몇 명 있었지. 보상부인이 동해에 서 해탈한 후, 그녀가 타던 독각신취(獨角神鷲)를 소곤륜산(小崑崙山)에서 목격한 사람이 있고, 오 십 년 전 백미화상이 타던 신조도 있었으니까. 그 독수리 두 마리는 백미화상을 따라서 아미산으 로 들어가 보광(寶光)을 참배한 모양인데, 입산한 뒤로 화상도 그 날짐승들도 간 데없이 사라졌 소.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백미화상을 만나려고 아미 전산, 후산을 샅샅이 찾아봤지만 끝내 종 적도 없었다더군. 아마 보광을 참배하고 불연(佛緣)이 닿아서 극락세계로 비승(飛昇)했으리라는 소문이 나돌고 끝났지. 보상부인의 독각신취나, 백미화상의 독수리 말고, 그토록 엄청난 위력을 지닌 날짐승은 현재 아미파의 <염선(髥仙)> 이원화(李元化)가 길들인 선학(仙鶴)과 최근에 <극락 동자> 이정허가 새로 길들여 타고 다니는 금시대붕(金翅大鵬)밖에 없소. 그 외에도 날짐승을 타 는 자가 몇몇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술법을 써서 부리고 재미로 타는 것이라 신기하게 여길 것도 없어요. 백미화상의 독수리는 흑조(黑鳥)와 백조(白鳥) 두 마리라더군. 아까 서방야불 도우가 말한 그 독수리의 형상을 추측하건대 아무래도 그중에 검은 놈이 아닌가 싶더군. 모두들 입씨름을 하 느라 정신이 팔려 자세히 묻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이제 다시 들어 보니 분명 그 흑조가 틀림없 어. 그 두 마리는 백미화상을 따라서 삼백여 년이나 지냈고 게다가 본래부터 천여 년의 도행을 쌓은 짐승들이라, 불법에도 정통하고 조화도 깊은 놈이거든. 아직까지 탈태환골(脫胎換骨)은 못했 으나, 일단 두 나래를 펼쳤다 하면 경각지간에 풍운 속을 천 리나 나는 것들이야. 그래서 어지간 한 법보나 비검술 따위로는 그 날짐승의 깃털 한 오리도 건드릴 생각을 말아야 해. 백조는 검은 놈보다 더 지독스럽지... 만약에 아미파 놈들이 백미화상을 여기까지 초빙해 왔다면 이번 청라욕 결전의 승부는 헤아리기 어려운데...." 상화양의 추리가 한창 펼쳐지고 있을 때였다. 한 줄기 광채가 신룡(神龍)처럼 화려하게 꿈틀거리 면서 동부 안으로 훌쩍 날아 들어왔다. 그것을 본 독룡존자가 황망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유덕의 말로는 선고(仙姑)께서 벌써 떠나셨다든데 어째서 오늘에야 도착하셨소?" 방문객이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오는 길에 사소한 일이 생각나서 제자분더러 먼저 가시라고 했죠. 일을 마무리짓고 다시 떠났 는데, 도중에서 전의 곤륜파(崑崙派) 여검선이던 음소당(陰素棠)과 마주쳐 한바탕 싸움을 벌였어 요. 싸운 게 도리어 잘되어서 좋은 친구 사이로 맺어졌지만요. 그녀가 곤륜파를 이탈하고 나서 크 게 성취하지 못한 내막을 전부터 알고 있던 참이라, 몇 마디 말로 탐색해 보다가 의기투합이 됐 죠. 그래서 음소당의 거처까지 따라가서 며칠 묵어서 오느라고 늦었어요." 그녀는 <만묘선고> 허비랑이었다. 상화양과 서방야불이 허비랑을 알아보고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누가 또 왔나?" 산 짐승의 선지피를 마시고 취해 잠자던 녹포노조도 부시시 깨어났다. 만묘선고는 그가 반 토막 몸뚱이로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녹포 노조의 괴팍스런 성깔을 익히 아는 터라,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했다. 허비랑을 맞아서 다섯이 된 사마(邪魔)의 거두들은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이때 독룡존자의 제자 유덕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좌중 어른들에게 예를 올리고 나서 그 는 조심스런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제자는 사부님의 분부를 받잡고 청해성(靑海省) 챠이다무 하반(柴達木河畔)으로 가서 사문공(師 文恭) 사숙을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말 못할 사정이 있으시다고 사부님을 뵈오려 하지 않습니다. 단오절까지 청라산 부근에 계시다가 그날 힘닿는 성심껏 도와주시고 그 길로 청해성으로 돌아가 시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제자더러 재삼 신신당부를 하시고, 사부님을 경동시키지 말라는 바람 에, 제자도 그분의 고집을 어길 수 없어 지금까지 사부님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숙께서는 어제 도착하시자 우선 청라산 일대에 술법을 써서 삼면을 봉쇄해 놓고 정면 홍귀곡 입구만 개방 하여 적을 유인토록 안배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들어오기는 쉽지만, 나가기는 어려울 것입 니다. 봉쇄망을 물샐 틈없이 설치해 놓으시고, 사숙께서는 다시 은밀한 곳으로 잠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정오쯤 되어서 제자는 사숙을 모시고 설산 정상에 올라갔습니다. 바람이나 쏘일 겸 해서 무료한 분을 위로해 드리려고 했습지요.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제자는 일전에 청라욕 여덟 사 제들한테서 들은 대로, 소장백산 현곡(玄谷) 안에서 은밀히 수행하던 <여앙신> 등팔고가 설혼주 를 얻었는데, 서방야불 사숙께서 그것을 빼앗으러 찾아갔다가 종무소식, 돌아오지 않으셨단 말씀 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그리로 안내하라는 분부를 내리시더군요. 등팔고와 한번 만나야겠 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가 사숙을 모시고 소장백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갓 당도했을 때 였습니다. 우연히도 거대한 검정 독수리 한 마리가 어린 계집아이 둘을 등에 태우고 귀풍곡 방면 고봉(高峰) 위에서 내려오는 걸 발견했습니다. 불덩어리처럼 시뻘건 눈에 금빛 눈동자가 번쩍거리 는 날짐승이 사람을 태운 채로 날지는 않고 걸어서 내려왔습니다. 독수리 뒤편에 또 한 계집이 신행으로 따르고 있었는데, 그년은 제자도 알 만했습니다. 바로 성도 자운사 결전장에서 마주쳤던 주경운이었지요. 제자는 즉시 사숙께 그 계집의 정체들 알려드렸습니다. 아니 말씀도 미처 못 다 드렸을 때였습니다. 어느 새 엿들었는지 독수리 등에 타고 있던 계집이 훌쩍 뛰어내리더니 다짜 고짜로 손을 휘둘렀습니다. 그러자, 난데없이 자줏빛 광채 한 줄기가 수십 장이나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주경운이란 년과 또다른 계집은 제각기 검광을 발출했습니다. 사 숙께서는 그 자색 광채의 내력을 전부터 아셨는지 대뜸 낯빛이 변하면서 연방 '아뿔싸, 큰일났다! 큰일났어!' 외치면서 황급히 둔형법(遁形法)을 일으켜 멀찌감치 피신하였습니다. 헌데 이 제자놈 을 함께 끌어가시느라 '아차!' 늦는 순간에 머리털을 절반 남짓이나 잘리우셨답니다. 노발대발하 신 사숙께서는 전세(戰勢)를 가다듬고 그 세 년과 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얼마쯤 있다가 사숙께 서 <흑살낙혼사(黑煞落魂砂)>로 그년들을 몽땅 덮쳐서 가두어 버리려는 참인데, 별안간 허공에서 또 어린 연놈 몇몇이 날아 내려왔습니다. 그중 두 계집은 전혀 낯설지만, 나머지는 모두 성도에서 보았던 연놈들이었습니다. 아미파 장교 제수명의 새끼들인 제영운, 금선 남매와, 찬하노니(餐霞老 尼)의 문하제자로서 자운사 결전 당시에 거울 한 개만 가지고 용비(龍飛)의 <구자모음혼검(九子 母陰魂劍)>을 박살낸 <여신동> 주문이었던 것입니다. 허나 그 정도라면 제자도 그리 놀라지 않 았을 텐데, 제일 이상한 일은 허선고(許仙姑)님의 문하제자인 <고해아> 사도평까지 한패가 되어 그들 중에 있더란 말씀입니다. 사숙과 제자는 당장에 산지사방으로 포위당하고 온갖 법보와 비검 들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졌습니다....." 유덕은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계속 말했다. "... 한참 동안 싸우다 보니 사숙께서도 집중력을 잃고 순식간에 방심하시다가 뒤늦게 온 연놈들 한테 <흑살낙혼사>를 격파당하고 일껏 가두어 놓았던 두 계집년도 빼앗기셨습니다. 게다가 또 화구(火球)에 맞아서 머리털과 수염까지 모조리 불타고 말았습니다. 제자는 너무도 엄청난 결과를 보고 놀란 나머지 먼저 둔신법으로 피신했습니다. 사숙께서도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적들과 차 츰 격차를 벌여 싸움판에서 탈출하려고 둔신법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때, 느닷없이 공중에서 '휙, 휙' 사나운 바람소리가 나더니, 새매와 비슷하게 생긴 괴조(怪鳥)가 나타나지 뭡니까? 머리통 에 외뿔이 한 개 달리고 채색 깃털로 뒤덮인 그놈은 검정 독수리와 함께 나란히 사숙을 노리고 덮쳐 내렸습니다. 전후 좌우, 상하로부터 일제히 협공을 당하자 아무리 사숙인들 당해낼 수 있었 겠습니까. 이윽고 둔신술법이 발동하려는 찰나 사숙의 두 팔은 동시에 날짐승의 발톱에 움켜잡히 고 말았습니다. 사숙께서는 도주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셨는지, 스스로 두 팔을 잘라버렸습니다. 제자는 결사적으로 되돌아 가 허공에서 떨어지는 사숙을 받아냈습니다. 그것을 구출하는 동안에 도 사숙은 또 적의 비침(飛針) 두 대를 맞고, 제자 역시 손가락 두 개를 잘리었습니다. 비록 목숨 은 건지셨지만 불구가 되신 사숙은 지금 분하고 원통해서 돌아가실 지경입니다... 사부님, 그리고 여러 사백, 사숙어르신들, 어서 가셔서 그분을 치료하고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유덕의 비분강개한 말이 끝났다. 좌중에 앉은 독룡존자 일행도 통분을 못 이겨서 저마다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그중에서도 상화양의 분노와 낙심은 이루 형언할 수도 없다. 설혼주, 그 화근덩어리가 적의 수중 에 들어갔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그는 서방야불을 흘겨 노려보았다. '서방야불, 이놈의 자식! 나한테 설혼주를 뺏으러 갔단 말은 쏙 빼고 안했구나. 내가 알면 또 빼 앗길까 봐 그랬겠지!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어디 보자. 요 앞뒤도 못 가리는 병신녀석! 내 손 에 혼날 것도 없이 조만간에 녹가놈한테 뜨거운 맛 좀 볼 거다!' 속으로는 저주를 퍼붓고 있지만, 겉으론 내색도 않았다. 독룡존자가 만묘선고에게 물었다. "사도평은 어떤 일로 배반했소?" "방금껏 다른 얘기에 정신이 팔려서 말씀을 못 드렸군요. 하지만 지금은 인명을 구하는 게 더 급해요. 제가 영단을 가지고 왔으니까, 끊어진 팔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다시 붙일 수 있어요. 나 머지 얘기는 청라산에 가서 또 계속하기로 하죠."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독룡존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연 옳은 말이다. 우선 사문공부터 살려 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좌중을 둘러보고 물었다. "여러분, 모두 저와 함께 가시겠소?" 서방야불은 외팔로 녹포노조를 부축한 채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 아도 현재 자기 실력은 다른 이들에게 훨씬 못 미친다. 가보았자 도움이 될 만한 자신이 없는 것 이다. 그러나 이때 녹포노조가 남의 눈치를 피해 가지고 슬그머니 서방야불의 옷자락을 툭툭 잡 아당겼다. 그리고 무슨 얘기가 나오기도 전에 녹포노조는 얼른 입을 열었다. "우리야 마땅히 모두 가야지요. 나는 서방야불 도우가 데려다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만묘 선고님, 방금 말씀하신 대로 영약을 정말 가져오셨습니까? 그 접골영단이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신통하단 얘기는 오래 전부터 들었지요. 헌데 어떤 술법으로 붙이는지 알려주시겠소?" 만묘선고는 저 극악스럽고 괴팍한 녹포노조의 입에서 이토록 겸손한 말투가 나오는 걸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감격한 나머지 다급하게 몸에 지닌 호로병을 풀었다. 그리고 단약 여러 알을 꺼내서 녹포노조와 서방야불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단약에는 함공노조께서 하사하신 만년속단을 가지고 백여덟 가지 선초(仙草) 영약(靈藥)과 문무화부주(文武火符呪)로 십삼 년 동안 제련하여 배합한 것입니다. 이 약이라면 부러진 뼈를 붙 이고 근육도 돋아나게 할 수 있지요. 너무 과장된 말씀 같지만 죽은 사람도 일으키고 백골에 살 을 붙일 수도 있답니다. 두 분처럼 심후한 공력을 지니신 도우께서 근골이 튼튼한 육신을 찾아 가지고 불구가 된 부분만 꼭 알맞게 베어서 이 단약을 바른다면 그 즉시 합체(合體)될 수 있을 겁니다. 이 단약과 독룡존자께서 연성하신 접골신단은 제각기 오묘한 효능이 있지요. 두 분께서 이것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다가 좋은 기회에 알맞는 육신을 얻게 된다면 옛 모습대로 법체를 완 벽하게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단약을 받아들고서 두 사람은 허비랑에게 혀가 닳도록 사례하여 마지 않았다. 상화양은 곁에서 두 병신이 기뻐하는 꼬락서니를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진 작부터 이들이 뱃속에 시커먼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러나 상화양은 전혀 모른 척했다. 녹포노조가 법신을 회복하려면 다른 인간의 몸뚱이가 필요하다. 그중에서 하반신을 잘라서 붙여야 한다. 누구의 몸뚱이를 점찍어 놓았을까? '사문공.....!' 사문공, 그는 오래 전부터 상화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험담을 퍼뜨린 작자였다. 그렇다고 상 화양의 실력으로 섣불리 덤벼들 만큼 호락호락한 위인도 아니다. 이런 원수녀석을 녹포노조가 점 찍어 놓았다면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다. 생각만 해도 가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이다. 평소부터 사문공과 깊은 교분을 맺고 있던 독룡존자는 애가 탔다. 자기의 초청을 받고 도와주러 온 친구가 중상을 입었다니, 통분과 미안스러운 마음에 치가 떨렸다. 청라욕까지 한달음에 날아가 치료해 주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그는 일행들의 출발을 재촉했다. "허선고님의 영약은 내가 제련한 것보다 열 배는 뛰어나오. 사제와 녹포도우께서 그 약을 얻으 셨으니, 이젠 법체가 환원되지 못할 걱정은 던 셈이오. 이번에 함께 가서 아미파의 젊은 것들을 몇 놈 잡기만 하면 우리 원수도 갚을 수 있거니와 또 두 분의 법체도 원상대로 고쳐질 테니, 이 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경우가 아니겠소? 자아, 늦지 않도록 모두들 속히 떠납시다!" 독룡존자는 즉시 유덕부터 먼저 청라산으로 떠나 보내고, 이어서 상화양과 녹포노조, 서방야불, 만묘선고를 인도하여 홍귀곡 동부를 나섰다. "내가 여러분을 모시고 가지!" 상화양이 선뜻 나섰다. 발을 한 차례 구르자, 한 줄기 붉은 구름이 네 사람을 공중으로 옹위해 올라가더니,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못되어 청라마궁(靑螺魔宮)에 당도했다. 마궁 안에는 <독각령관(獨角靈官)> 낙삼관(樂三官)을 비롯하여 마교의 이름깨나 알려진 인물들 이 모여 있었다. 독룡존자 일행은 워낙 사람부터 구할 일이 다급한지라, 피차간에 인사는 대충 설때리고 곧장 후 궁 단실로 걸음을 옮겼다. 사문공은 운상(雲床)에 누운 채로 인사불성이었다. 얼굴빛도 싯누렇게 변해 있었다. 운상 곁 탁 자 위에는 떨어진 두 팔이 덩그러니 놓였고, 환자의 몸뚱이는 팔을 붙이지 않은 미완성의 목각 인형처럼 어깻죽지부터 밋밋했다. 상화양이 다가서서 사문공의 상세(傷勢)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깜짝 놀랐다. "이것 보게. 이 친구가 맞은 건 <천호(天狐)> 보상부인의 백미침(白眉針)이로구만! 큰일났군. 그 가 겁난(劫難)을 초탈해서 이승에 나왔다니... 만약 보상부인 그녀마저 <동해삼선>의 꼬드김을 받 고 우리와 적대시한다면, 정말 큰일일세그려! 여간한 강적이라야 말이지! 이 백미침은 오금(五金) 의 정화(精華)로 만든 게 아니고 천호 자신이 눈썹을 뽑아 단련한 거야. 일단 사람의 몸뚱이에 들 어박히는 날엔 그 즉시 혈을 타고 올라가서 곧바로 심장에 꽂혀 즉사하고 말지. 이 친구 신색을 보더라도 백미침이 얼마나 지독스러운지 알 만하구먼. 별 수 없네. 우선 현공(玄功)을 운기시켜 혈맥부터 막아놓으면 잠시 동안 부지할 테지만, 기껏해야 이틀밖엔 못 살아." 사문공이 천호의 백미침을 맞았다는 말에 독룡존자는 아연실색, 얼굴에 핏기마저 싹 가셨다. 그 는 다급하게 상화양을 붙잡고 늘어졌다. "상도형, 이 백미침이 그토록 지독하단 내력을 아시니까, 해법(解法)도 모르실 리가 없겠구려. 그 방법 좀 일러주시오." "백미침은 신통력이 아주 깊어서 사람의 공혈(孔穴)만 전문으로 뚫고 들어가오. 오래 전에 나의 동문사제 채덕(蔡德)도 이 바늘한테 찔려 죽을 뻔했소. 천만다행으로 그 당시 선사(先師)이신 무 행존자(無行尊者)께서 원적을 하지 않았던 때라, 그분은 백미침의 내력과 북극(北極)의 한광도인 (寒光道人)이 자철(磁鐵)로 단련한 흡성구(吸星球)를 가져야만 치료 가능한 것임을 아셨소. 선사께 선 채덕의 전신 혈맥을 막고 현공진기로 바늘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조치하신 다음, 몸 소 한광도인을 찾아가 흡성구를 빌어오셨지. 그리고 바늘이 찌르고 들어간 상처에 흡성구를 대어 거꾸로 바늘을 빨아내셨소. 그리고 바늘이 뽑혀 나온 뒤에도 일 년 남짓을 단약으로 치료하고 나 서야 채덕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소. 그 후로 한광도인은 북극에서 해탈 승천하고, 문제의 흡성구는 그 마지막 제자였던 적성자(赤城子)의 수중에 떨어졌다더군. 적성자는 사부가 비승한 후 로 다시 곤륜파 문하제자가 되었는데 계율을 범한 까닭에 파문당하고 쫓겨났소. 사문공의 목숨도 적성자를 찾아서 불러와야만 구할 수 있겠는데, 그 위인이 어디 있는 지 오래 전부터 소식조차 끊겼으니 이거 원, 종적을 찾을 도리가 없군." 방법은 있는데 열쇠를 쥔 인물은 못 찾는다. 독룡존자는 더욱 다급해졌다. "상도우 말씀대로라면 이 친구는 전혀 가망이 없는 셈이 아니겠소?" "적성자를 찾아내면 되지!" "그 자를 찾아도 헛수고라오." "어째서?" "일도 참 기막히게 꼬였소. 두어 달 전에 내 사제인 사남계(史南溪)가 여길 찾아왔는데, 자기하 고 화산 열화조사(烈火祖師)하고 모두 적성자와 깊은 원수를 맺었다더군. 뿐만 아니라 둘이서 여 행 도중 망창산(莽蒼山)을 지나다가 또 원수 같은 적성자와 맞닥뜨려서 이 대 일로 싸움이 벌어 졌는데, 적성자는 두 사람에게 비검을 격파당하고 한쪽 팔까지 잘리운 데다, 또 사남계의 <추혼 오독사(追魂五毒砂)>를 맞고 구사일생, 겨우 목숨만 붙어서 달아났다는 것이었소. 나중에 듣자니, 그 자는 음소당과 함께 무산(巫山) 옥판협(玉版峽)으로 거처를 옮기고 앞뒤 동굴에 나누어 살면 서, 사남계와 열화조사에게 팔을 끊긴 복수를 하려고 절치부심, 단련을 거듭하는 중이라오. 열화 조사야 본래부터 우리와 한 통속이 아니니까 잡아떼면 그만이나, 사남계가 내 사제라는 걸 누가 모르겠소? 이런 판국에 적성자가 원수를 은혜로 갚을 리 있느냔 말이오?" 낙심천만, 독룡존자의 푸념이 끝나기도 전이다. 만묘선고가 그 말을 받았다. "적성자는 저하고 안면이 없지만, 음소당이야 이번에 새로 사귀어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된 사이 므로, 저도 그녀와 적성자 둘이서 부부처럼 지내고 있단 말은 들었죠. 제가 나서겠어요. 옥판협으 로 가서 이곳 얘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고 제가 필요한 것처럼 꾸며서 그 흡성구를 빌어 달라면 승락할지도 모르겠네요.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 아니 겠어요? 옥판협까지는 당일 거리밖에 안 되니까, 속수무책으로 죽기만 기다리기보다 훨씬 낫죠.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한바탕 두런두런 의견을 나누어 보았지만 그 방법 외에 무슨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녀 말대로 밑져야 본전 아닌가? 독룡 일행은 그녀더러 이편 실정은 내색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곁들여 서 속히 다녀오도록 서둘러 떠나보냈다. <만묘선고> 허비랑은 자신만만, 호기있게 마궁을 떠나 무산으로 향했다. 나머지 일행들은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환자를 위해 별로 할 일도 없었다. 웅기중기 둘러앉아서 강적 보상부인의 출현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는 게 고작이었다. <천호> 보상부인, 그녀는 여간한 상대가 아니다. 그녀는 수천 년을 수도한 여우의 화신으로서 진기이보(珍器異寶)를 무수하게 연성하여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독룡존자 일행들에게 제일 근심 거리는, 그녀가 참으로 탈겁하여 나오면서 불괴지신(不壞之身)을 이룩하여 자기네보다 먼저 불패 (不敗)의 자리에 서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렇게 되었다면 그녀를 무서워 피할 것까지는 없으 나 무시 못할 강적이 늘어난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셈이다. 한창 이런 수심 저런 근심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독룡존자가 별안간에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내일 모레면 단오절이다.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어째서 <수정조영지법(水晶照影之法)> 으로 적측의 허실을 탐지하지 않을소냐?' "유덕아, 수정구(水晶球)를 볼 테니까 그 준비를 해놓거라!" 독룡은 다시 일행에게 말했다. "여러분, 내일만 지나면 곧 적과 약속한 날짜가 됩니다. 그러나 아미파 측에서 도대체 어떤 고수 들이 얼마나 올지 우리는 아직도 모르고 있소. 이제 외전(外殿)에 신단(神壇)을 배설하고 내가 단 련한 수정구로 적측의 형세를 살펴볼까 하는데, 호법(護法)이 두 분 필요하오. 그래서 낙삼관, 상 화양 두 분 도우의 힘을 빌고 싶소. 어떠시오?" 낙삼관은 마교에 수정조영법이 있어 수정구 속으로부터 천만 리 바깥에서 일어난 사물을 관찰한 다는 소문을 들어온 지 오래였다. 비록 신통력이 지난 과거만을 알 뿐 미래는 모른다고 하지만, 그래도 현재의 일까지 두 눈으로 보듯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낙삼관으로선 식견을 넓힐 그 호기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상화양은 수정구 호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원래 사문공을 극도로 증오해 오던 그는 사문공 이 이렇듯 비참한 몰골로 어서 바삐 죽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독룡존자가 구태여 말하지 않았더라도 상화양은 벌써 진작부터 적성자가 서장파 인물들과 숙원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장파가 누구 좋게 흡성구를 호락호락 내어놓지는 않으리 란 사실도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문공의 치료가 불가능한 줄 뻔히 알면서 방금 천호 백미침 의 내력과 그 치료법을 떠벌인 의도는 순전히 자기 식견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한데 뜻밖에도 자랑삼아 입을 놀린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하필이면 만묘선고가 적성자의 내 연의 처 음소당과 죽고 못살 만큼 절친한 교우를 맺었다니! 만약에 적성자가 음소당의 간청을 거절 못하고 만묘선고에게 흡성구를 빌려주는 날이면, 상화양 으로서는 두 눈 멀거니 뜬 채 원수 같은 사문공이 몸 털고 일어나는 꼬락서니를 보아야만 한다. 상화양의 적수에게 그런 행운이 닥치다니, 어디 될 법이나 하냔 말이다. 그는 한 가닥 기대를 녹 포노조한테 걸어보았다. '그놈의 속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회를 준다면 없던 욕심이 솟구칠지도 모른다. 그렇 다, 여럿 앞에선 손을 쓰지 못하리라!' 상화양은 호법을 서 달라는 독룡존자의 요청이 마음에 들었다. "좋소. 나도 호법을 서 드리리다. 사문공 도우는 아직 이틀 동안은 살아 있게 되었으니까, 우선 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모레는 단오절 결전의 날인즉, 시기를 그르쳐서는 절대로 안 되지 요. 독룡도우께서 법력을 부려 적방의 형세를 미리 알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기막힌 대비는 없을 거외다." 상화양은 응락을 하면서 짐짓 녹포노조에게 뜻 있는 눈짓을 보냈다. 잠시 후 유덕이 들어왔다. "사부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음, 잘되었겠지? 그러면 너는 이 단실에 남아서 환자를 돌볼 겸 녹포도우와 서방사숙을 접대해 드려라." 독룡존자는 유덕에게 분부를 내리고 나서 상화양, 낙삼관과 <서천팔마>를 이끌고 외전으로 나 갔다. 결국 독룡존자와 같은 거물도 한때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행동이 부자유스럽다는 녹포노조 와 서방야불을 단실에 남겨두어 정양하도록 했다. 훗날 독룡존자가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당하게 된 원인이 그 부주의 한 번 때문일 줄이야 꿈에도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궁 앞뜰 외전에는 이미 법단이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법단 한가운데는 한 말(大斗)들이나 됨직한 수정구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독룡존자는 술법을 시작하기 전에 각 사람들한테 임무를 부여했다. 우선 <서천팔마>를 팔괘(八 卦) 방위에 세우고, 상화양과 낙삼관도 법단 좌우로 갈라 세운 다음, 자신은 바닥에 꿇어 엎드렸 다. 그리고 반 시진 남짓 마주(魔呪)를 외고 나서 자기의 가운데 손가락을 깨물어 법수(法水)에 피를 섞더니, 그것을 한 입 머금고 수정구를 향해 '푸우!' 뿜어냈다. 그러자 다음 순간, 전각 안이 온통 운무로 휩싸이면서 투명한 수정구 표면에도 흰빛 안개가 몽롱하게 뒤덮였다. 독룡존자는 상화양, 낙삼관 두 호법과 함께 미리 준비된 포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호흡 을 가다듬고 정신력을 집중시켜 수정구 표면을 바라보았다. 한참 있자니, 운무가 눈 녹듯 흩어지 면서 수정알 표면에는 어느 산동(山洞)이 나타났다. 동굴 속 중앙에 만묘선고 허비랑이 좌정해 있고, 그 옆에는 요염하게 생긴 여인이 시립했다. 젊 은이 하나는 단단히 결박당한 채 돌 서까래 위에 대룽대룽 매달려 있고, 또 한 명의 외꾸눈 청년 이 채찍을 휘둘러 매질하는 중이다..... 잠시 후, 결박당했던 청년이 풀려났다. 아차! 땅에 나뒹굴기가 무섭게 청년은 문득 조그만 깃발 을 하나 꺼내 휘두른다. 찰나지간, 한 뭉치 채색 구름이 '풀썩!' 일더니 천년을 휩쓸어 가지고 흔 적도 없이 사라진다. 수정구의 표면은 주마등(走馬燈)처럼 흐르더니 다시 한 번 장면이 바뀌었다. 어느 단애(斷崖), 골짜기는 채색 구름이 자욱하게 뒤덮여 밑바닥도 보이지 않는다. 채색 구름 속 으로부터 독수리와도 같은 거대한 괴조(怪鳥)가 한 쌍의 젊은 남녀를 등에 태우고 훌쩍 솟구쳐 오르더니 서편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간다. 한참 있다가는 또다시 젊은 처녀 셋이 날아오른다. 그 들도 역시 채운을 타고서 서편 하늘을 향해 사라진다. 장면은 계속 계속 바뀌었다. 자령 자매 일행이 출발하는 광경에서부터 도중에 요사스런 도인을 쳐 죽이는 광경, 소장백산에 당도하여 서방야불과 맞닥뜨리고 이어서 제영운 일행, 이영경 일행을 만나 합류하는 장면 등등, 이윽고 사문공, 유덕이 격전 끝에 참패당하여 중상을 입은 몸으로 달아 나는 장면까지 나타났다. 독룡존자는 본디 서장 마교의 개산조사(開山祖師)인 질리노조(叱利老祖)의 대제자였다. 질리노조는 원적할 무렵에 의발을 독룡존자에게 모두 전수했다. 그리고 수정구 한 개를 주면서 말했다. "훗날 어떤 위난(危難)이 닥치거든 법도에 따라 제단을 꾸미고 엎드려 축도하라. 그러면 나의 진 령(眞靈)이 효험을 보여 수정구 표면에 적측의 실제상황이 나타날 것이며, 이에 따라서 불리한 쪽 을 피할 수 있게 되리라." 그때 질리노조는 수정구의 법술이 사람의 정혈(精血)을 고갈시키는 것이므로 망녕되게 함부로 쓰지 말도록 거듭 당부하기까지 했다. 그런 까닭에, 독룡존자도 수정구의 술법을 되도록이면 삼가 고 스승의 진령과 자신의 정욕을 섣부르게 소모하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서방야불과 사문공처럼 막강한 실력자요, 마교의 명사가, 이름 도 모를 몇몇 어린것들한테 중상을 입다니 어처구니도 없거니와 또 한편으로는 정체 모를 적들에 대한 두려움마저 솟아나, 결코 가벼이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는 수정구를 꺼낼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물며 보상부인과 같은 강적까지 출현했으리라는 상화양의 언질에 경악을 한 참이 아니던가.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적측의 전모를 알아내야만 했다. 한데 지금껏 수정구 화면에는 이상스럽게 도 아미파의 이름난 고수들은 단 한 명도 비치지 않는 것이다. 독룡존자는 곤혹 속에 빠지고 말 았다. 장면은 또 바뀌고 있다. 다시 한 차례 운무가 자욱하게 일더니 이번에는 어느 설산 밑 움푹 패 인 암벽이다. 중앙부가 사발처럼 함몰된 암반(岩盤)에는 겨울철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몰골의 여도 인 한 사람이 앉았고, 그 둘레로 방금 보았던 광경처럼 사문공, 유덕을 상대하여 집중공격을 퍼붓 던 그 젊은이들이 둘러앉아 무슨 일인가 심각하게 상의를 하는 중이다. 독룡존자는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눈여겨보려고 수정구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바로 그때였다. 장면도 바뀌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수정구 앞면을 가로막는 인물이 나타났다. 걸 레쪽처럼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얼굴 가득히 조소를 띤 걸인 하나가 독룡존자와 눈길을 마주 한 채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다가올수록 몸집도 커지고 얼굴 모습도 또렷하게 드러났다. "엇? 이게 누구야?" 곁에 앉았던 상화양의 눈에는 아무래도 그 거렁뱅이 훼방꾼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걸인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수정구 화면에서 불쑥 뛰쳐라도 나올 듯 정면으로 바짝바짝 다가오는 것이다. 독룡존자는 그래도 처음엔 술법을 부리는 가운데 으레 있을 만한 현상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놀라기는 했으나 입을 열어 경고를 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순식간에 걸인의 너 덜거리는 누더기 자락과 몸뚱이가 수정구 표면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다음 순간, 독룡존자의 외침이 벼락치듯 전각 안을 울렸다. "모두 조심하라! 첩자다, 잡아라!" 외침소리와 더불어 그의 손이 번쩍 들리더니 석 자루의 비차가 연기 불꽃을 일으키면서 수정구 속의 걸인를 향해 날아갔다. 애초부터 의아심을 품고 있던 상화양도 이에 뒤질세라, 한 손의 마화 금종(魔火金鐘)을 번쩍 휘두르는 동시에 또 한 손으로 <백골쇄심추(白骨鎖心鎚)>까지 집어던졌 다. 쨍그렁! 눈 깜짝할 사이도 없었다. 마교도 두 고수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받은 수정구는 일대 폭발을 일 으켰다. "으하하핫!" 사람들의 귓전에 폭음보다도 더 큰 웃음소리가 울렸다. 허나 그 웃음도 잠시뿐, 정체불명의 적은 독룡과 상화양이 발사한 법보가 옷자락에 닿기도 전에 벌써 한 줄기 금빛 광채를 비단폭처럼 늘 어뜨리고선 창공을 꿰뚫고 날아가 버렸다. 독룡존자와 상화양, 낙삼관들은 적을 놓칠세라 허둥지둥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적의 금빛 광채는 구름 속에서 단 한 번 번뜩이더니 이내 추격자의 눈길을 벗어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추격자들 역시 천하를 주름잡는 고수였다. 상대방의 수단을 본 이상 무익한 추격을 단념하고는 그 즉시 약속이나 한 듯 법보부터 거두어들였다. 전각 안으로 들어와 보니 독룡존자의 비보(秘寶) 수정구는 이미 천 조각 만 조각으토 박살나고, 파편은 전각 안에 온통 깔려 있었다. 서천팔마 가운데 미처 방비를 못한 자는 수정유리 파편을 얻어맞고 머리통이 터져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독룡존자는 허무하게도 자기 손으로 둘도 없는 보배를 깨뜨리고 만 것이다. 적측의 형세는 눈꼽 만치 탐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는 후회와 괴로움에 가슴이 터져나갈 지경이 되었다. 한창 치를 떠는 판국에 문득 등 뒤에서 거북살스런 인기척이 느껴졌다. 독살맞은 눈초리로 후딱 돌아다 보았더니, 사랑하는 제자 유덕이 우물쭈물 굽신거리고 서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는 스승의 기색을 보고선 이내 입을 다문 것이다. "또 무슨 일이길래 쓸개 씹은 표정이냐?" 독룡이 벌컥 화를 내듯 묻자, 유덕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사부님께 아뢰오... 저어, 저... 서방사숙과 녹포노조가 떠나셨습니다." "흠! 녹포노조가 또 그 괴팍스런 성미를 부렸군. 내 법단에 와서 보란 말을 안했더니 자길 소홀 히 대우한다고 화가 난 모양이야. 헌데 두 사람 모두 바꿔치기할 몸뚱이도 못 구했을 텐데 어떻 게 홀홀히 떠났을꼬?" "사문공 사숙이... 참살을 당하셨습니다." "아니, 뭐라고? 사문공도 죽었단 말이냐!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어서 말하지 못할까!" 독룡존자는 대경실색,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자를 몰아붙였다. 유덕이 엄동설한 북풍에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면서 스승이 듣기에도 기막힌 사연을 털어놓 았다. "제자는 사부님의 분부를 받들어 단실에 남아서 그분들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헌데 사부님께서 나가신 지 얼마 안 되어, 녹포노조가 저더러 눈알을 부라리면서 '서방사숙하고 긴밀히 상의할 게 있으니 자넨 나가 있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부터 그 불 같은 성미를 익히 아는 터라서 제자 는 감히 어기지 못하고 단실에서 나왔습니다만, 아무래도 수상쩍어 두 분의 동정을 엿보기로 작 정했습지요. 단실 문 밖에서 듣자니까 '끙'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건 사문공 사숙의 음성이었 습니다. 창문 틈으로 들여다 보았더니, 별안간 사문공 사숙께서 정신을 차리고 침상에서 벌떡 일 어나 앉으시는 게 아닙니까? 그분은 이내 방바닥으로 내려서려고 두 다리를 뻗더군요. 이때, 녹포 노조의 반 토막 상반신에서 시퍼런 녹광(綠光) 한 뭉치가 날아오르더니 당장 그분을 덮어씌웠습 니다. 사문공 사숙께선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아뿔싸! 독룡이 나를 그르쳤어... 이 요괴놈한테 좋 은 일만 시키는구나!' 탄식을 하시더니, 그만 침상 위에 털썩 고꾸라지셨습니다. 녹포노조가 서방 사숙에게 재촉을 했습니다. '자, 어서 손을 쓰게!' 서방사숙은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지 우물쭈물하 기만 할 뿐, 움직이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녹포노조의 초록빛 광채 속에서 커다란 손아 귀가 불쑥 나타나 움켜잡을 듯 위협하니까, 서방사숙은 하는 수 없이 허리춤에서 계도(戒刀)를 뽑 아들더니 침상 앞으로 다가가서 사문공 사숙의 허리께를 단칼에 쌍둥 잘라버렸습니다. 제자는 그 제서야 녹포노조가 남의 부축을 받아야만 거동하는 게 아니라, 애당초부터 남의 손에 안긴 수작 이 위장술(僞裝術)임을 알았습니다... 서방사숙이 사문공 사숙의 몸뚱이를 반 토막으로 갈라놓자마 자, 녹포노조는 바람같이 자기 상반신을 끌어다가 사숙의 하반신에 철썩 붙여서 온전한 몸뚱이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서방사숙이 들고 있던 계도를 빼앗아 가지고 사문공 사숙의 좌우 어깻 죽지를 끊어내더니 탁자 위에 놓였던 두 팔에 연결시키고 한 개는 집어서 끊어진 부위에다 조심 스럽게 붙였습니다.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녹포노조는 '달아나세!' 하고 외치더니만 한 줄기 초록 빛 광채로 변해서 단실을 빠져나가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서방사숙도 물론 그의 뒤를 따라갔구요... 두 사람이 사문공 사숙을 작살낼 때 워낙 그 동작이 너무도 재빨라서, 제자가 뛰어 들어가 구하려고 했지만 그럴 틈도 없었거니와 또 그들의 실력에 미치지도 못한 터라, 사부님한 테 보고부터 드릴까 했습니다. 허나 이미 구출의 시기도 늦었고, 법단 사방은 술법으로 봉쇄되어 들어올 수조차 없었습니다. 제자는 다급한 중에 비검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비검은 녹포노조의 광 채에 접근하자마자 맥없이 지상으로 떨어져 버리는 게 아닙니까?... 사부님, 이 못난 제자는 두 눈 멀거니 뜬 채로 그들이 사숙을 해치고 달아나는 걸 놓쳤습니다. 어르신네의 목숨을 못 구한 죄,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세 가지 영약 구십육 斷臂續身 元凶推巨擘 追雲馳電 妙法散神砂 녹포노조와 서방야불의 기막힌 배신을 듣자, 독룡은 전신의 피가 정수리로 몰리고 머리터럭, 수 염까지 뻣뻣하게 곤두섰다. 유덕은 그 앞에 엎드린 채 천둥 번개치듯 길길이 날뛰는 스승의 눈치를 살피면서 와들와들 떨었 다. 독룡은 단오절 대책이고 아미파고 다 집어치우고서 그 길로 배신자들을 쫓아가 사문공의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었다. 진작부터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예측하고 있던 상화양은 시침을 뚝 떼고서 독룡존자의 분노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여보 독룡도우, 고정하시오. 나 역시 애당초 녹가놈의 원신이 멀쩡하면서도 어째 반 토막 몸뚱 이를 못 벗어나고 남한테 안겨 다니나 의심을 했소만, 이토록 못된 짓을 저지르려는 꿍꿍잇속이 었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소. 참말로 기가 막힐 지경이로군. 적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낭패스런 일만 연거푸 일어나다니!... 독룡도우, 그래도 그대는 서장파의 교조(敎祖)가 아니오? 강적이 코 앞 에 들이닥칠 마당에 어떻게 해서든 승부를 내고 단오절을 넘겨야 하오! 그래야만 다시 배신자들 을 찾아서 사형의 원수도 갚을 수 있단 말이오. 아무리 분해도 조급한 행동은 삼가야지, 한때의 분노로 대사를 그르쳐서 되겠소?" "자네, 사문공이 누군지 몰라서 그러나? 바로 장령자(藏靈子)의 제자란 말일세! 그 원수를 갚아 주지 않았다간 장령자가 날 그냥 둘 성싶은가? 어림도 없지! 날더러 그 수모를 어찌 감당하란 말 인가? 음... 안 되겠어. 허비랑이 돌아오거든 어서 의논해서 계획을 짜야겠어. 내 차라리 평생 쌓 은 공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두 놈의 배신자는 기어이 찾아내서 사생결단을 내 고야 말겠네! 그놈의 멱줄기를 끊어놓지 못한다면, 내 맹세코 사람이 아닐세!" 그래도 상화양은 속으로 마냥 즐겁기만 했다. 기막힌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로 원수 같 은 사문공을 처치했으니 얼마나 대견하냔 말이다. 그는 다시 독룡의 분노를 부채질할 셈으로 녹 포노조가 홍귀곡 어구에서 하마터면 구반파의 여제자를 잡아먹을 뻔했다는 말까지 들려주었다. 독룡존자는 더욱 분기탱천, 어금니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이러구러 한낮이 저물녘에야 고대하던 <만묘선고> 허비랑이 죽을 상을 해가지고 돌아왔다. "틀렸어요. 음소당은 날 보자마자 대뜸 눈치를 채고서 빌려줄 내색도 않는 걸요. 말이야 정분이 뚝뚝 떨어지게 하면서도 흡성구는 못 빌려주겠다 이거예요." "흡성구고 뭐고 이젠 다 필요없소! 사문공은 벌써 죽었으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틀은 너끈히 산다고 하더니만." 화들짝 놀라는 허비랑에게 독룡존자는 기운없이 낮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하나씩 알려주었다. 그 리고 수정구 속에 비친 장면도 일일이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나서 물었다. "수정술법에 비친 장면을 보니까, 허선고의 동굴에서 웬 청년을 묶어 달아놓고 매질을 하시던데 무슨 일이었소? 그리고 그 채색 구름이 뒤덮인 계곡은 도대체 어딘지 알 수가 없구만." 만묘선고는 채운이 덮였다는 절벽 아래 계곡의 형상을 듣고서 한참 동안 생각해 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있는 황산 부근인 듯싶군요. 점괘에도 제 극성(克星)이 오운보(五雲步)에서 멀지 않다고 나왔어요. 사도평 그놈은 저의 극성인 그 두 계집이 유혹해서 데려갔을 거예요. 용서 못 할 놈이죠. 사부를 배반하고 적과 내통해서 동문마저 해쳤으니까요. 그놈을 잡아죽이려 했는데, 도리어 그놈이 적당과 한 패거리가 되어서 예까지 오다니, 잘됐구만. 제가 여기 올때 생각은 본래 표면에 나타나기보다 암암리에 협조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아미파 측과 공공연히 적대시하는 작전 을 꾀하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기왕지사 그 못된 놈이 여기 온 바에야 저도 정면으로 나설 핑곗 거리가 생긴 셈이죠. 더군다나 그 계집 둘은 일찌감치 제거해 버리지 않았다간 장차 두고 두고 화근덩어리가 될 거예요. 그년들의 이름과 내력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하지만요... 상도우 말씀으로 는 그 백미침이 <천호> 보상부인의 물건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년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호> 보상부인 아닐까요?" 상화양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까 나도 수정법단에 서 보았소. 다른 장면이나 인물들은 잘 모르겠으나, 그 채운 덮인 계곡만 큼은 분명히 <천호> 보상부인이 수련하던 황산 자령곡의 동부였소. 그 계곡은 아는 사람도 거의 없거니와, 설혹 안다고 하더라도 들어갈 수 없는 없지요. 팔십여 년 전 나는 어느 친구와 언약을 맺고 그가 보상부인과 결투하는 걸 응원하러 간 적이 있었소. 양측의 싸움이 막 시작되는 판인데 때마침 우연히 그 부근을 지나던 함공노조가 나타나서 쌍방을 화해시켰소. 그 바람에 우리는 적 대감정을 풀고 보상부인과 벗이 되었지. 그녀는 우리 셋을 자령곡 동부로 청해서 정중한 대접을 해주었소. 그래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거요. 수정구 화면에 나타난 계곡에서 여자들이 몇몇 날아 오르던데, 그중 둘은 보상부인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기는 해도 절대로 그녀 본인은 아니었소. 그 건 내가 장담할 수 있지. 다시 말해서 그 두 계집이 보상부인의 백미침을 쏘아 사문공을 해쳤다 고 한다면 그녀의 문하제자이거나 딸년일 수도 있다는 거요. 보상부인은 해탈하기 이전 각처에서 근골이 뛰어난 청년들을 끌어다가 미치도록 사랑하고 채양보음지술을 익히느라 남자의 진양을 흡 수했었지. 그러니까 천호의 제자인지 딸년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간에 그 계집들도 당연히 사승일 맥(師承一脈)이라 채보술도 익혔을 테고, 기막힌 법보도 전수받았을 테니까, 사도평쯤은 누워서 떡먹기였을 거요. 또 그 반도놈도 그 계집들이 <천호> 보상부인의 위력을 이어받은 걸 보고 믿 는 바가 있어 겁도 없이 여기까지 어울려 왔겠지." 만묘선고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내가 그 애물덩어리를 잡아 문초하기 전에 벌써부터 그놈이 어떤 두 계집년과 결탁해서 화근을 만들리라는 걸 점괘로 알고는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찬하노니의 문하로 투신을 했느냐?'고 닥달을 했었지요. 그랬더니 이놈이 매질을 못 견뎠는지 거짓으로 불더군요. '결박을 풀어주면 사 실대로 말하겠다' 하길래 풀어주었죠. 내 참 기가 막혀서... 결박이 풀리자마자 이놈은 도대체 무 슨 술법을 썼는지 감쪽같이 내 손아귀에서 도망치고 말았어요.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내 비 검으로도 따라가 잡지 못했으니까... 허지만 제깐 놈이 달아나 봤자 어디까지 뛰었겠느냐 싶어 느 긋하게 수색을 벌였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황산 일대를 샅샅이 뒤져봐도 끝끝내 찾아내질 못했어요. 오늘에야 그 연놈들의 소굴하고 내력을 안 이상, 절대로 놓치지 않겠어요. 일 단 사도평 요 애물덩어리만 잡으면 그놈을 꼬여낸 두 계집까지 한 그물에 걸려들 테니까. 제 화 근을 제거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죠. 만약 고것들이 또 이번에 청라욕 그물을 빠져나간다면 도우 여러분의 막강하신 법력을 빌어서라도 황산 자령곡까지 쫓아가 어떻게 해서든 그 개년놈들 을 갈갈이 찢어죽이고야 말겠어요. 어떻습니까, 제 화근을 처치하는데 여러분께서도 도와주시겠지 요?" 독룡존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마땅히 그래야지!... 한데 사문공 도우가 내 집에서 처참하게 죽었으니 그 사부 장령자 문제도 큰일이야. 절대로 날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거든... 여러분, 이 문제는 어찌해야 좋겠소? 고견이 있으면 서슴지 마시고 말씀해 주시오." 낙삼관이 헛기침을 하더니 제일 먼저 운을 떼었다. "사실 말이지, 그 문제도 장령자가 독룡도우를 원망할 게 못되지요. 본래 친구끼리 서로 돕고 도 움을 받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고, 또 사문공 도우 역시 그 의리에 따라서 독룡도우를 응원하 기 위해 왔다가 자기 실력이 모자라서 적의 백미침에 맞은 것이었잖소? 그렇다고 우리들이 모른 척 뒷짐지고 죽게 내버려 둔 것은 아니거든. 비록 우리가 경계를 소홀히 해서 방심한 틈에 녹포 노조란 놈이 그 짓을 저질렀지만, 허선고께서 음소당이 있는 무산 옥판협까지 수천 리 길을 다녀 오시고도 흡성구를 빌어오지 못하게 된 걸 보면 아마도 사문공 도우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졌음이 분명하오. 사람의 겁수(劫數)가 그런 것을, 장령자라고 해서 억지르 바꿔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니 겠소? 그런 터에 그가 독룡도우를 붙잡고 무슨 야료나 행패를 부린단 말이오. 의리상 우리가 할 일은, 이번 단오절 싸움을 매듭짓는 대로 즉시 녹포노조와 서방야불 두 놈을 찾아내어 사문공 도 우의 원수를 갚아주는 것뿐이외다. 그러면 장령자도 더 이상 우리한테 어거지떼를 쓰지 못할 것 이오." 그러나 독룡존자는 얼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낙삼관의 말처럼 일이 그렇게 단순히 풀릴 리가 없는 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때 상화양이 화제를 다른 데로 바꾸었다. "여러분, 이제 눈 깜짝하면 단오절이외다. 만묘선고의 일이나 사문공 도우의 복수 문제는 잠시 덮어두기로 하고, 우선 당면한 일부터 상의합시다. 조금 전에야 비로소 생각했는데, 아까 독룡도 우의 수정구를 깨뜨린 놈은 바로 <괴규화(怪揆花)> 궁신(窮神) 능혼(凌魂)이었소. 예전에 얼마나 많은 우리 마교의 도우들이 그놈 손에 죽음을 당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정말 극악무도한 원수놈이외다. 나도 이제껏 그놈을 찾아 복수를 하려고 마음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소만, 미꾸 라지 같은 놈은 교활하게도 종적을 감추고 찍소리 한 마디도 없이 수십 년 동안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거요. 그래서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더니, 괘씸하게도 이제 또 여기까지 찾아와서 지분거리 는구만. 아까 처음에는 그놈의 거지가 무슨 꿍꿍이짓을 저지르는지 모르고 수정구 화면에 독룡 도우의 법술로 나타난 줄 착각하다가 뒤늦게서야 깨달았지. 그 통에 손이 좀 늦어서 놓치고 만 거요... 내 생각으로는 아미파 측에서 궁신 그놈까지 망라해서 몰려올 정도라면 그 쪽에도 적지 않은 고수가 참전한 듯싶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실력이야 걱정할 바 없지만, 여러분의 문하제 자들은 그날 가서 섣부르게 상대할 수 없을 것이외다." 독룡존자는 어이가 없는지 머리통을 절레절레 내둘렀다. "사실 말이지, 이번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데서 일어났소. 내가 새로 거두어들인 제자 여덟 놈 가운데 구령이란 녀석이 서천(西川) 지방 노상에서 웬 조가(趙哥) 성을 가진 놈과 싸움을 벌였 는데 구령은 그때 조가의 한패거리한테 암기를 얻어맞았소. 그래서 이제껏 흉수를 찾아다니던 끝 에 조가놈을 만나 도전장을 보내고 '단오절에 청라욕에서 만나 결판짓자'는 약속이 정해진 거였 소. 한데 그 조가란 놈은 아미파 인물도 아니고 무공 실력조차 별볼일 없는 데다, 기껏해야 그놈 의 사부 <협승(俠僧)> 질범(秩凡)이 아미파와 조금 연관을 맺고 있을 뿐이므로, 실은 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소. 그러나 유덕이 소문을 듣자니 아미 측에서 적지 않은 고수들이 조심원(趙心 源)을 응원하려고 청라욕으로 몰려온다는 거였소. 게다가 그 패거리의 우두머리 제수명까지 끼였 다는 소문이었소. 내 제자들은 당해낼 자신이 없으니까 나한테 구원을 요청하러 왔소. 여러분이나 나 독룡 같은 원로가 기껏 젖비린내나는 아미 문하의 젊은 것들과 술법이나 겨루고 비검을 맞댄 대서야 어디 될 성이나 싶겠소? 그것들을 제압해 봤자 천하 동도들에게 비웃음거리만 되겠지... 그런데 적측의 소문이 그토록 엄청나고, 또 평소 아미파의 하는 짓이 곧잘 위세를 부리면서 신의 는 헌 짚신짝 내던지듯 하는 놈들이라, 만약에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내 문하제자들은 꼼짝도 못 하고 그들의 독수에 당하지 않겠는가 말이외다. 그래서 나도 암암리에 대비책을 세울 수밖에 없 었고, 또 신통력이 광대한 친구분들을 몇몇 초빙하여 만일의 사태를 막아보기로 한 것이오. 아까 파괴된 그 수정구는 바로 선사께서 물려주신 비보(秘寶)였소. 술법의 계시를 통해서 적측의 가장 요긴한 허약점을 순서대로 화면에 보여 주는 기막힌 법보였소. 그러나 아까 낮에는 적측의 실상 을 미처 다 보기도 전에 가증스런 능혼의 암수에 걸려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소. 한데, 깨지기 직 전까지 나타난 인물들은 모두가 젖비린내나는 강아지 새끼들뿐, 아미파의 진정한 고수는 그 속에 하나도 없었소. 얼핏 보아선 이상스럽기 짝이 없지만, 내가 생각하건대 그것도 아미 측의 귀계(鬼 計)임이 분명하오. 주요 인물들은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강아지 새끼들만 내보내서 탐색전을 시켜 보아서 우리가 이겨도 체통이 서지 않고 패하면 웃음거리로 삼으려는 수작이지. 또 우리 측 원로들이 자기네처럼 체면불구하고 제자를 역성들어 나선다면 그쪽 강아지 새끼들이 당해낼 자신 이 없을까 봐서 일부러 아미파 통속도 아닌 거지놈을 충동질해 가지고 측면 지원을 하게 만들었 을 것이외다. 그러므로 내 계획은 이렇소. 적측에서 아직까지 진정한 고수를 내보내지 않은 바에 야 우리 측도 상황에 따라서 움직이되,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로 표면에 나타나지 않 도록 합시다. 그 거지놈만 하더라도 평생을 두고 실수 한 번 저지르지 않았다는 강적이오. 그 미 꾸라지 같은 놈은 여간한 인물 가지곤 섣불리 상대할 수 없으니까 상화양 도우께서 수고스럽지만 그놈을 맡아주시오. 또 백미침을 쓰는 계집년들은 허선고께서, 반도 사도평의 죄를 다스리는 명목 으로 맡아 한꺼번에 처치해 주시오. 낙삼관 도우와 나는 후비(後備)가 되어서 또다른 고수들이 공 격해 오기 전까지는 표면에 나서지 않고 예비대로 있겠소. 때마침 내 여덟 제자도 몇몇 고수들을 청해 와서 강호의 규율대로 지원할 테니까 아미파 놈들도 그 천라지망은 벗어나지 못할 거요. 여 러분, 내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이 있거든 말씀하시오." 좌중의 거마(巨魔)들은 모두 찬성이었다. 상화양으로 말하자면 본래부터 능혼을 깊이 증오하고 있는 터라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 새로 연성한 두 가지 법보의 위력을 시험해 보 기 위해선 막강한 상대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만묘선고> 허비랑도 이의가 없었다. 반도 사도평은 둘째치고 예언적인 자신의 극성(克星)을 제 거하는 일이므로 기꺼이 그 임무를 맡은 것이다. 그러나 <독각령관> 낙삼관은 처지가 달랐다. 본래부터 독룡존자와 깊은 교분도 없으면서 체면 상 초빙을 거절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서장파 교조에게 선심이나 베풀어 두자 하여 오기는 왔는데, 벌어지는 사건마다 하나같이 심사에 꺼림칙한 것뿐이라, 진작부터 꽁무니를 뺄 생각이 꿈틀거리 고 있었다. 그는 마지못해 뒷전에 남아서 바람부는 형편을 보아 가면서 돛을 올리기로 작정했다. 이때에 <서천팔마>는 그들 나름대로 초빙해 온 마승(魔僧) 요도(妖道) 몇몇을 데리고 들어와 독 룡 일행에게 참배시켰다. 수정구가 터지는 바람에 애꿎게도 파편 조각을 맞고 부상당했던 상처는 모두 단약과 술법을 써서 치료하기는 했지만 땅에 떨어진 사기(士氣)만큼은 감추지 못하고 자못 풀이 죽었다. 독룡은 그들에게 다시 대적방략(對敵方略)을 상세히 일러준 다음 물러가 지키도록 분부했다. 유덕이 들어왔다. 비명에 죽어간 사문공의 잔골(殘骨)을 수습해서 비단으로 싸고 옥반(玉盤)에 정중히 담아 가지고 온 것이다. 양 팔도 없이 상반신만 덩그러니 남은 시체를 굽어보면서, 독룡존자는 가슴 속이 말도 못하게 쓰라리고, 그의 스승 장령자에게 시달림을 당할 생각에 근심 걱정이 태산처럼 쌓였다. 어디 그뿐 이랴. 죽은 사문공의 얼굴에 가득 서린 분노와 원망, 감지도 못하고 부릅뜬 두 눈동자에는 너무나 억울하게 당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독룡은 눈을 감고서 두 번 세 번 묵도를 올렸다. 이제 청라욕 사건만 완결지으면 기어코 원수놈 들을 찾아 능지처참해서 그 맺힌 한을 씻어주리라! "유덕, 사숙의 법신을 잘 모셔 두거라. 훗날 원수놈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함께 장령자에게 보낼 테니까." 독룡일파는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는데, 아미 측의 젊은 표범 들은 그동안 어떻게 하고 있었 는가?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하자. 영운 남매와 주문, 주경운과 자령 자매 일행이 귀풍곡(鬼風谷)에서 이영경과 신약란을 구출하고, 요승 <서방야불> 아각달의 한쪽 팔까기 잘라서 쫓아보낸 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다. 싸움이 끝나자, 그들은 제각기 법보와 비검을 거두어들이고 나서 신약란, 이영경의 상세를 돌보 았다. 두 처녀는 모두 혼미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제영운은 황급히 금선을 시켜 샘물을 떠오게 한 다음, 묘일부인이 준 영단을 꺼내 두 사람의 입 을 벌리고 흘려넣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등팔고가 조언을 해주었다. "두 아가씨의 중독이 자못 깊으니, 강풍(强風)은 피해야겠네. 이제 이쪽 편도 많아지고 세력도 강해진만큼, 요사스런 무리들이 반격해 오더라도 겁날 것이 없지. 이 참에 차라리 서방야불 그놈 의 거처로 환자를 옮겨가서 일단 휴식을 취하고, 두 아가씨가 깨어나거든 다시 호송할 방도를 강 구하는 것이 좋을 듯싶은데, 어쩌시려오?" 제영운 일행은 선배의 말에 따라 귀풍곡 아래로 내려갔다. 어느 정도 숨을 돌리자, 그들은 새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제껏 겪었던 사연을 주고받았다. 제영운은 <여공공> 오문기도 이번 싸움에 참가하려고 따라왔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만묘선 고> 허비랑의 제자 사도평이 사문(邪門)을 벗어나 정도(正道)에 귀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령 자 매와 혼인을 맺고 또 현진자(玄眞子) <신니> 우담, 찬하대사, 추운수(追雲搜) 등 여러 선배들의 명을 받들어 셋이 모두 아미파 문하로 들어오게 되었단 소식을 듣자, 더할 나위없이 기꺼워하였 다. 묘일부인의 영단을 먹은 후, 두 처녀도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망창산에 있는 동안 워낙 적 지 않은 영약, 선과를 먹었던 영경이 먼저 얼굴에 황색 기운이 가시고 혈색을 되찾았다. 약란도 점차 회복되는 기색이었다. 그런 용태로 본다면 얼마 안 있어 깨어날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제영운은 다시 자령 자매에게 부탁을 했다. "두 분 아가씨, 수고스럽지만 대우라산(大鳥拉山)에 두고 온 <여공공> 오문기 사매와 <고해아> 사도평, 그리고 장남고와 호아 남매, 우건, 양성지 일행을 인도해서 현빙곡(玄氷谷)으로 데려와 주 시겠어요? 거기 모여 함께 청라욕을 격파할 계획에 대해서 상의하도록 하지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자령 자매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이영경과 신약란이 연거푸 의식을 되찾았다. 심신이 지칠 대 로 지치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안 쑤시는 데가 없으면서도 두 처녀는 자기네 곁에 영운 남매와 주 문이 서 있는 걸 발견하고 부끄러움과 분노가 겹쳐 몸둘 바를 몰랐다. 제영운은 몇 마디 좋은 말로 두 사람을 위로해 준 다음, 초면의 주경운과 인사시켰다. 그리고 또 새로 아미파에 들어온 자매가 있는데, 지금 오문기 사도평 일행을 인도하러 떠났노라고 귀띔해 주었다. 전부터 주경운과 오문기의 명성을 듣고서 늘 흠모해 오던 터라 이영경과 신약란은 전신을 짓쑤 시는 아픔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기뻐했다. 게다가 또 몇몇 고수급 언니들까지 새로 늘어났단 소 식에 부끄러움마저 기쁨으로 변했다. 아우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제영운이 문득 동생 금선을 흘겼다. "이게 모두 네 탓이야! 진작에 두 아우가 고집을 세우고 따라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 한 마디 없이 시치미를 떼었다니... 현빙곡에 있을 때 우리는 등팔고 선배와 얘기를 나누느라고 바깥 쪽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어. 암벽 정상은 분명히 등팔고 선배께서 쳐놓은 차안법술(遮眼法術)로 가 리워져 있었을 테고, 이것 때문 독수리는 우리 세 사람의 종적을 못 찾고 그냥 지나가 버릴 뻔했 지. 정말 하마터면... 금선, 어디 두고 봐! 돌아가서 어머니한테 말씀드려 호된 맛 좀 보게 할 거 야!" 이건 야단맞는 당사자 금선보다 영경과 약란이 더 불안할 지경이었다. 신약란은 큰일났다 싶어 얼른 금선 대신에 빌었다. "큰언니, 잘못했어요. 동생을 야단치지 마세요. 모두가 우리 둘이서 철부지라 적을 우습게 알고 덤벼든 탓이에요. 그놈의 요도(妖道) 독무(毒霧)가 너무도 지독해서 당했지만, 언니의 영단을 먹고 났더니 아직 현기증과 통증은 좀 있긴 해도 아마 곧 회복될 것 같네요." 제영운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 곰곰이 계산을 해보았다. 환자 두 사람은 이 상태론 어검 비행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차피 현빙곡까지는 가야 한다. 그녀는 주경운과 상의를 한 결과, 두 사람이 설산 상공의 강풍을 쐬지 않도록 독수리 등에 타고 저공 비행하게 하고, 모두들 그 머리 위로 날면서 보호하는 한편, 이제 돌아올 자령 일행과 길이 어긋나지 않게 사방 경계를 펼치기로 했다. 독수리는 요승에게 부상을 입힌 후부터 줄곧 허공을 날면서 사방 주변을 선회하고 있었다. 만일 의 사태에 경보를 발하기 위해서였다. 제영운이 손짓을 보내자 날짐승은 즉각 내려앉았다. 그녀는 영경과 약란을 독수리 등에 태우고 천천히 날아서 산봉우리 아래로 내려가게 하고, 자신은 금선, 주문과 함께 창공으로 솟구쳤다. 거 의 보행하다시피 내려가는 독수리 뒤에서 주경운이 바짝 따르면서 호송책임을 맡은 것이다. 독수리 일행이 산 아래 지상으로 거의 다 내려왔을 때였다. 주경운은 문득 길 반대편에서 마주 쳐 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키가 팔 척이나 되고 면상에는 흉악스런 빛이 가득한 데다 황금 귀 걸이를 늘어뜨린 홍의두타(紅衣頭陀)가 휘적휘적 걸어오고, 그 등 뒤로 보통 체구에 얼굴빛이 해 말간 도인 한 사람이 따라붙었다. 긴장을 한 주경운이 눈에 힘을 주어 자세히 바라보다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도인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 두타는 바로 성도 자운사 결전에서 그물을 빠져나갔던 온신묘(瘟神廟)의 방장 유 덕이었기 때문이다. 쌍방이 한 길을 오가며 스치지 않았으므로 유덕은 당초 주경운 일행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의 예민한 귀는 주경운이 영경과 약란에게 '맞은편에서 오는 요물(妖物) 두 놈을 주의해라'라고 속삭 이는 소리를 들었다. 주경운은 귀띔을 다 하기도 전에 유덕과 정체불명의 도인이 후딱 돌아보고 가던 길을 멈추는 걸 알아챘다. 그들은 주경운 일행을 주시하면서 무엇인가 귀엣말로 상의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이영경과 신약란이 훌쩍 독수리 등에서 뛰어내렸다. 가뜩이나 서방야불한테 호된 꼴을 당하고 수치감과 분노가 치밀어 분풀이할 데가 없나 하던 판이었는데, 주경운으로부터 '맞은 편에서 오는 놈들은 요물'이란 말을 듣고 보니 마침 잘됐구나 싶어 몸뚱이가 쑤셔대는 아픔마저 도 잊고 덤벼들 참이었다. 이 무렵쯤에서 쌍방간의 거리는 불과 수십 보, 이영경은 선수를 치는 게 상책이라 여겨 대뜸 오 른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자영검이 '번쩍!' 빛을 발하더니 수십 장의 자줏빛 무지개로 변하여 곧 장 유덕 일행을 노리고 날아갔다. 그 도인은 바로 청해성 챠이다무 하반에 근거지를 둔 장령자의 제자 사문공이었다. 그는 독룡존 자의 초빙을 받고서 조력자로 나설 판이었다. 유덕을 따라서 청라욕으로 가는 도중, 그는 독룡존 자가 자기 말고도 상화양을 또 초빙했단 말을 듣고서 크게 속이 상했다. 불쾌한 마음으로는 당장 챠이다무로 되돌아 가고 싶지만, 그래도 절친한 독룡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청라산에 당도하자, 그는 독룡존자 면대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독룡을 돕기 위해 은밀히 마진 (魔陣)을 설치해 놓았다. 단오절은 바야흐로 눈앞에 닥쳐왔는데, 적측에서는 아직껏 아무런 움직 임도 없는지라 한껏 무료해진 참에 그는 유덕에게서 등팔고가 설혼주를 얻었다는 말을 들었다. 사문공도 설혼주가 숙적 상화양의 법보와 상극이란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구슬이 욕심났 다. 그러나 성격이 워낙 강직한 그는 반신불수로 죽어가는 여인을 능멸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지 현빙곡으로 등팔고를 찾아가서 먼저 자기 수단껏 그녀의 몸부터 원상태로 회복시켜 준 다음 설혼주를 빼앗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유덕을 앞장세워 떠난 것이다. 여느때 같으면 둔광(遁光)을 타고 부리나케 달려갔을 테지만, 지금의 사문공으로서는 바쁘게 서 두를 아무런 건덕지도 없었다. 그래서 설산 일대의 경치나 볼 셈으로 유덕과 함께 걸어서 여유작 작하게 갔던 것이다. 유덕은 소장백산에 거의 다 이를 때까지 사숙 사문공을 모시고 성심성의껏 이야기 상대를 해주 면서 인도하였다. 그런데 산 아래 당도하기가 무섭게 극성패거리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주경운 일행이 산봉우리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유덕은 전혀 낌새를 채지 못하였다. 오히려 사문 공이 먼저 심상치 않은 일행을 발견했다. 그는 산비탈을 날 듯 뛰는 듯 내려오고 있던 금빛 눈알 의 검정 독수리 등에 두 여자가 타고 있는 것이 자못 수상쩍어 유덕을 불러 세웠다. "자네, 저걸 좀 보게." 그제서야 유덕도 날짐승 뒤를 따르는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아차, 저 계집은 주경운이 아닌가? 틀림없어. 지난 연초에 성도 자운사를 몇 번씩이나 뒤집어 놓던 그년이야! 그렇다면 저것들은 지금 어딜 가는 걸까? 이번에는 청라욕을 들쑤셔 뒤집으러 가 는 게 틀림없군! 이것들이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는구나!' "사숙님, 저것들은 아미파 문하의 화근덩어리입니다! 한 놈도 놓치지 마십쇼!" 사문공은 비록 이단(異端)의 문파였으나 그래도 자못 신의라는 걸 아는 인물이었다. 어느 누구와 싸우든지 우선 결투 날짜를 약속하고 그대로 지켜야 도리인 줄 아는 것이다. 그는 보일 듯 말 듯 도리질을 했다. "아미파 애송이들이로군. 그들을 뭣하러 잡나? 서두를 것 없네." "아닙니다. 꼭 잡아서 끌고 가야 합니다!" "여보게, 왜 이러나? 저 계집애들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그래? 재간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 겠나? 공연히 애들을 가지고 놀다가는 체통만 깎이지." "사숙님, 저 뒤에 따르는 년은....." "글쎄, 상대방이 우리한테 집적거리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세!" "사숙님....." 사숙과 사질이 한창 낮은 목소리로 옥신각신 입씨름을 하고 있는 참인데, 갑자기 독수리 등에서 두 여자가 뛰쳐내렸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그중 제일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손을 번쩍 쳐들었 다. 이때 자줏빛 무지개가 쏜살같이 덮쳐들어 왔다. 사문공은 대경실색,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뿔싸! 뛰자!" 자줏빛 검광의 내력을 익히 아는 사문공이다. 졸지에 미처 대적할 여유도 없거니와 방법도 떠오 르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유덕을 잡아끌면서 둔광(遁光)을 일으켜 타고 단번에 백여 장이나 솟구 쳐올랐다. 유덕을 끌어당기느라 멈칫하는 순간, '씽!' 하고 자줏빛 검광이 정수리를 휩쓰는 소리와 함께 써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상투를 덮어씌운 금관(金冠)은 말할 나위도 없이 머리터럭마저 한 뭉텅이나 잘라져 나간 것이다. "이크! 요 발칙한 것이....." 전신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자줏빛 검광은 인정사정도 없이 더욱 바짝 뒤쫓아 오고 있었다. 하마터면 머리카락 대신 모가지를 날릴 뻔했던 사문공, 아까처럼 만만한 여유가 어디 남았겠는 가? 지체없이 품속에서 강철구(鋼鐵球) 세 알을 끄집어내서 뒤쫓는 자줏빛 검광을 향해 후려갈겼 다. 강철의 구슬은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홍(紅), 황(黃), 남색(藍色) 세 줄기 광채로 변하여 자 줏빛 검광과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허나, 그와 동시에 주경운, 신약란이 발사한 비검도 날아오르더니 자영검을 도와서 협공을 가하 기 시작했다. 신약란은 총망 중에도 다시 열세 개의 뇌화금환(雷火金丸)을 꺼내 뒤로 물러섰다. 시뻘건 불덩이 가 열 셋, 천둥 벼락치듯 날아갔다. 사문공과 유덕은 손쓸 틈조차 없었다. 어느 새 금환을 한 개 씩 얻어맞고, 수염과 머리털, 옷자락에까지 불이 옮겨 붙어 지글지글 타올랐다. 사문공은 노발대발, 다급한 가운데 피화결(避火訣)을 맺어 불길부터 잡으면서 호통을 질렀다. "유덕, 뒤로 물러서랏! 내가 요년들의 멱통을 끊으리라!" 유덕도 사세가 재미없게 돌아가는 줄 아는 터라, 두말없이 비검을 거두어들이고 멀찌감치 달아 나 피했다. 어느 틈엔가 사문공은 손에 황구대(黃口袋)를 꺼내들고 중얼중얼, 주문(呪文)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깥쪽을 향해 훌쩍 털어붙였다. 황색 포대자루 속에서 사문공이 자랑하는 <흑살낙혼사(黑煞落魂 砂)>가 쏟아져 나왔다. 사방천지는 삽시간에 음산한 구름이 뒤덮이고, 자욱하게 퍼진 안개 속에서 비검도 그 빛을 잃고, 뇌화도 효력을 잃었다. 방원(方圓) 천 평이나 됨직한 검은 기운이 폭풍에 밀린 구름덩이처럼 용솟 음치면서 이영경 일행의 정수리부터 덮어씌웠다. 셋 가운데 가장 경험이 많은 주경운이 황급하게 소리쳤다. "두 분 조심해요! 지독한 거야!" 경고를 발하자마자 그녀는 앞서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영경은 자영신검이 사기(邪氣)에 오염되는 것쯤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호승벽(好勝癖)이 누구보 다 강한 그녀는 검광을 회수할 생각이 털끝만치도 없었다. 신약란 역시 일순간 멈칫거렸다. 이제 막 비검을 거두어들이는 참인데, 갑작스럽게 눈앞이 캄캄 해지면서 어찔어찔 현기증을 일으키더니 폭싹 고꾸라져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사문공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뜻 쫓아와 적들을 사로잡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건드리지 마랏!" 느닷없이 공중에서 야멸찬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비갠 뒤 무지개처럼 오색 찬란한 광채와 금빛이 한꺼번에 흑살낙혼사 위를 비추어 내렸다. 그러자 검정빛 기운은 당장 절반이나 무산되고, 그와 동시에 한 무더기 오색 채운이 뒤따라 흑기 속으로 번개치듯 날아들어 가서 마구 휘젓기 시작했 다. 채운이 두어 바퀴를 돌아왔을 때는 벌써 음산한 구름덩이와 검정 안개가 산지사방으로 흩어 져 모조리 녹아버렸다. 어처구니없게도 사문공이 다년간 고심참담 끝에 연성해낸 법보가 그 위력 을 잃고 깨끗이 휩쓸려 한 줄기 연기로 사라진 것이다. 사문공과 유덕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서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허공에서 여유만만한 자태로 내려서는 젊은 남녀들이 보였다. 그중 한 처녀가 거울을 들고 있는데, 거울 면에서는 오색 금빛이 백여 장이나 비쳐 나오고 있었다. 이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흑기를 무산시킨 오색 채운도 훌쩍 사라지더니 키가 훤칠한 처녀가 옥같이 아리따운 모습을 드러냈다. 앞장서서 지면에 내려선 동자녀석, 두 발이 땅을 딛자마자 자홍색 검광 두 줄기를 발사했다. 뒤 미처 내려온 일남 사녀도 앞을 다투어 검광을 쏘아낸다. 그 가운데서 한 처녀는 붉은빛을 방출하 는 것과 동시에 서슴없이 사문공과 유덕을 향해 날아들었다. 유덕 역시 이 무렵 상대방 일행을 대강 알아보았다. 자운사 결전의 숙적 제영운 남매와 <여신동 > 주문, 게다가 어쩐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만묘선고> 허비랑의 문하제자 <고해아> 사도평도 적과 한패거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나머지 두 처녀는 전혀 낯선 인물이었다. 사문공은 통분에 못 이겨 이를 갈아붙였다. 흑살낙혼사가 얼마나 아끼던 법보인가? 그것이 적과 단 한 번 맞부딪기 무섭게 격파당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손에 들린 황색 포대 자 루가 맥없이 떨어졌다. '좋다, 사생결판을 내자!' 그는 마음을 독하게 다져먹었다. 그 즉시로 머리를 풀어 헤쳤다. 지수(地水), 화풍(火風)을 일으 켜 가지고 적과 목숨을 건 일전으로 결판을 낼 작정이다. 그러나 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적의 숫자가 엄청난 것이다. 사문공은 술법을 전개할 여유조차 없었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무시 무시한 법보와 비검이 소나기의 빗줄기처럼 쏟아져 오는 것이다. 유덕은 이미 그것을 한 차례 맛본 경험자다. 뇌성벽력과도 같은 협공 속에 견뎌낼 재간은 없었 다. 형세는 이미 글렀다. 그는 소리쳐 사문공을 불렀다. "사숙님, 피하십쇼!" 그리고 자신부터 둔광을 펼쳐 타고 잽싸게 싸움터를 벗어나 피신했다. 사문공은 주문의 천둔보 경과 한악이 발출한 붉은빛 모두가 자신의 법보를 가지고선 상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이제 간 발의 차도 용납 못할 위기가 닥쳐왔다. 적은 술법을 구사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판이 다. 사문공은 어쩔 수 없어 낱개의 비환(飛丸) 셋을 쏘아 호신하면서 허공으로 둔주(遁走)했다. 우선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단오절 결전장에서 다시 <구유전륜대장 법술(九幽轉輪大藏法術)>로 일망 타진하여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의 몸뚱이가 막 지면을 떠오른 순간, 아미파 젊은 표범들의 법보, 비검들도 뒤따라 날아올랐 다. 상대방이 이제 전의(轉意)를 잃고 달아나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자령은 더 욱 눈치빠르게 앞서 허공으로 솟구쳐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적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체없이 두 개의 백미침을 쏘았다. 어머니 보상부인은 딸에게 삼천육백쉰아홉 개나 되는 백미침을 물려주었다. 이 바늘은 사람의 요혈만 뚫고 들어가 일단 피를 보았다 하면 그 즉시 혈맥을 타고 심장으로 곧장 치밀어 올라 박 히는 놈이다. 그토록 지독하기 짝이 없는 것이므로 원수와 사생결단을 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섣 부르게 쓸 수 없는 무기였다. 보상부인도 생전에 단 한 차례밖에 써보지 않았다. 또 그만큼 다루 기도 까다로운 것이다. 자령은 백미침을 전수받은 후로 평소에도 은밀히 전해진 주어(呪語)를 지키면서 더욱 연마에 연 마를 거듭한 결과, 몇 년도 안 되어서 그 까다로운 바늘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만큼 완벽 하게 단련해냈다.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맞닥뜨린 상대가 정수리에서 은은히 요광(妖光)을 뿜어내고 일신이 사기 (邪氣)로 뒤덮인 걸 보았다. 그리고 이 자의 술법이 절대로 여기에서 그치는 게 아님을 그녀는 직 감했다. '이런 요물을 놓쳤다가는 필경 훗날에 크나큰 우환거리가 될 게 분명하군. 게다가 둔광을 구사 하는 솜씨마저 얼마나 빠른가! 여간해서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쾌속하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백미침을 쓰는 수밖에.' 겨우 둔광을 일으켜 올라탄 사문공이 한숨을 돌리려 할때, 돌연 눈앞이 '번쩍!' 하더니 상대방의 손에서 극히 가느다란 붉은 실 두 가닥이 불꽃을 번득이면서 곧바로 자기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 지 않는가! '아이쿠, 난리났다!' 허겁지겁 둔광을 재촉해서 달아나려는 그때였다. 이제껏 허공에서 맴을 돌던 금안의 검정 독수 리가 바람을 가르며 쏜살같이 덮쳐내렸다. 조금 전 자기네 주인 이영경이 무서운 흑살낙혼사를 맞고 쓰러지는 걸 본 날짐승이다.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잡자 공격해 보려고 싸움터 위에서 맴돌던 참인데, 멀거니 달아나도록 놓아줄 리 가 없었다. 두 나래를 몸통에 접어 붙이고 살별처럼 급전직하, 원수를 덮치는 것이다. 사문공은 아직 백미신침도 피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검정 독수리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아래를 막자니 머리 위의 공격은 회피할 도리가 없다. 경황이 없으니까 응집력도 흩어진다. 순간 적으로 허둥거리다 허공에 뜬 몸이 기우뚱 가라앉았다. 그 덕분으로 독수리의 강철 발톱에 머리 통이 박살나는 참극은 모면했으나, 왼팔을 꼼짝없이 움켜잡히고 말았다. '이놈의 날짐승까지도 나를 깔보다니!' 그는 몸을 뒤채며 오른손으로 <독장개산법(獨掌開山法)>을 운기 해서 독수리를 쪼개 죽이려 했 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뿐, 귓결에 문득 '휘리릭!' 바람 찢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른팔 뼈까지 부 서져 나갈 듯한 아픔이 엄습해 왔다. 반사적으로 후딱 고개를 돌려보았다. 웬걸! 이건 또 언제 어 디서 날아왔는지, 외뿔 달린 독각신취(獨角神鷲) 한 마리가 오른팔을 단단히 움켜잡고 있지 않은 가. 바로 그 순간, 사문공은 백미신침을 고스란히 정통으로 얻어맞았던 것이다. '헉!' 가슴 속이 탁 막혀 숨조차 내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찌르르 하는 통증에 이어서 감각이 덤덤해졌다. 귓전에는 또 적의 고함소리가 '윙!' 하고 울렸다. "산채로 잡아라!" '달아나야지! 이까짓 고통은 참아야 한다... 이대로 잡혔다간 무슨 욕을 당하고 죽을지 모르는 일. 사문공, 달아나자, 달아나!' 그는 어금니를 악물고서 평생의 신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전신에 진기가 용솟음쳤다. 그는 지체 없이 양팔을 펼쳤다. 우지직!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사문공의 양쪽 팔목이 한꺼번에 부러져 나갔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날짐승 두 마리가 발톱에 대롱대롱 매달린 팔목을 떨궈버리고 훌쩍 날아오르더니 재차 덮쳐 내려 왔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사문공은 아래로 떨어졌다. 땅에 내리자마자 흙 속으로 파고들어 도주할 작 정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의 낙하지점은 유덕이 몸을 감추고 엎드려 있는 곳이었다. 사문공 의 절박한 위기를 뻔히 보면서도 구해낼 능력이 없어 가슴만 태우고 있던 유덕, 허공으로부터 내 리꽂히는 사문공을 발견했다. '이때다!' 그는 지체없이 모험을 걸었다. 둔광에 몸을 싣고서 돌진해 나아가더니 사문공의 몸뚱이와 떨어 지는 두 팔목까지 덥석 나꿔채었다. '성공이다!' 그러나 기뻐할 틈이 없었다. 순식간에 측면으로 둔광의 방향을 틀어가지고 쏜살같이 적의 눈길 에서 벗어나 달아났다. 제영운 일행은 아까 유덕이 싸움터를 벗어나 피신하는 걸 보았으나, 모두들 사문공 한 사람만 생각하는데 신경을 쏟느라고 그가 어디에 숨었는지 살펴보지도 않았다. 강적 사문공이 백미침 두 개를 연거푸 얻어맞고 날짐승들에게 양팔마저 움켜잡혀 빨래감처럼 공중에서 너울거리는 걸 보 자, 그들은 마음을 놓았다. 이 정도라면 적이 달아날 데라곤 그 어디에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공격자들의 방심은 실수였다. 적은 뜻밖에도 움켜잡힌 양 손을 스스로 끊고 사나운 날짐 승의 제압에서 벗어나 버렸다. 몸뚱이가 떨어져 내리는 걸 목격하고 재추격을 하려 했으나, '앗 차!' 하는 순간 유덕이 먼저 잠복처에서 뛰쳐나와 잽싸게 받아 안고 도주해 버린 것이다. "패를 갈라 뒤쫓아요!" 주문이 소리쳤다. 너무도 약이 올라 봉긋 솟은 가슴마저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그러나 자령은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만! 서두르지 말아요. 그놈은 이미 내 백미침을 맞고 또 두 팔이 떨어진 불구자가 되었어 요. 얼마 안 있으면 그 바늘이 혈맥을 타고 올라가서 심장에 직통으로 박힐 거예요. 까짓놈의 패 거리가 동분서주 날뛰어 봤자 죽는 건 틀림없죠. 내가 보기에 그 도인은 온몸이 사기(邪氣)로 뒤 덮여 있고, 술법 또한 심상치 않았어요. 방금껏 우리들이 다수로 밀어붙여 손쓸 여지도 주지 않았 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승부가 반대로 뒤집혔을지도 몰라요. 사매들, 지금은 무엇보다 영경, 약 란 아우부터 구해야 해요. 중독이 아주 심하거든. 또 청라욕 적측의 허실도 아직 등팔고 선배님한 테서 다 듣지 못한 상태잖아요. 옛말에도 '궁한 쥐가 고양 이를 문다'고 했으니까, 그 도인은 저 갈대로 내버려 둡시다." 제영운이 먼저 그 의견에 찬동했다. 맏언니답게 매사 신중한 그녀였다. "옳으신 말씀! 손자병법에 '궁지에 몰린 적을 압박하지 말라' 했거든... 그런데 오사매와 장남고 남매들은 어찌 됐어요?" 한악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모두들 벌써 현빙곡에 데려다 놓았죠." 이 무렵, 불운한 이영경과 신약란은 안색이 잿빛으로 변하고 온몸뚱이까지 마구 떨리고 있었다. 제영운은 우선 급한 대로 두 사람의 입에 단약 두 알씩 먹여 생명부터 잇도록 조치하고, 현빙곡 에 가서 대책을 강구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신조 불노와 독각신취가 나래를 퍼덕거리면서 날아 내려왔다. 그동안에 벌써 정이 들었는 지, '꾸우, 꾸르르!' 소리를 주고받으며 쌍쌍이 주인들 앞으로 뒤뚱뒤뚱 다가왔다. 제영운은 진작에 독각신취의 내력을 주경운에게서 들은 바 있었다. 이제 다시 보니, 과연 위엄이 당당하고 신통력도 대단한 영물이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허나, 지금은 한가로운 때가 아니다. 하루 동안 연거푸 중상을 입은 두 불운한 동생의 생사가 달렸기 때문에 지체할 수 가 없었다. "진씨 아가씨들은 약란 동생을 신취에 태우고 호송해 주시오. 나는 경운과 함께 막내를 독수리 에 태워서 함께 가겠어요." 주문이 천둔보경을 잡고 일행들 앞에서 선도(先導)했다. 금선과 사도평 두 청년은 후미를 따르면 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윽고 제영운 일행은 조심스럽게 천천히 날아서 현빙곡으로 갔다. 골짜기 밑에는 오문기가 장씨 남매와 우건, 양성지를 데리고 학수고대, 일행의 도착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 역시 자령이 빌려준 제운척(梯雲尺)을 써서 이곳에 당도한 지 얼마 안 되었다. 제영운과 오문기 일행은 마침내 합류했다. 그들은 이영경과 신약란을 떠메고서 계곡 안으로 들 어가 등팔고를 뵈었다. 그리고 이제껏 벌어졌던 일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했다. 등팔고는 이야기를 들으며 영경과 약란의 중독상태를 살피더니 그만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여러분, 아까 싸웠던 그 도인이 누구인 줄 아시오?" "모릅니다. 그저 <온신묘> 방장 유덕하고 한패라는 것밖에는." "그럼, 이 두 아가씨가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네, 모릅니다. 아주 짙은 흑기(黑氣)더군요." "허허 참... 그게 바로 흑살낙혼사였다오. 청해 지방 장령자만이 쓰는 법보라오. 장령자는 비록 사교도이긴 하지만 사람됨이 올바르고 강직해서 절대로 독룡존자와는 일당이 될 수 없소. 오늘 이 흑살낙혼사를 쓴 자는 분명 그 제자 사문공일 거요. 사문공도 수단이 비범한 고수라오. 어젯밤 에 내가 원신(元身)으로 화해 청라욕을 정탐할 때, 그 마궁 외부에 사문공이 설치한 요진(妖陣)을 발견했소. 다행히도 나는 법체가 아닌 원신에다 또 주도면밀하게 경각심을 높이고 대응한 덕분으 로 마진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거든. 그러나 사문공도 이 흑살낙혼사를 연성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여러분의 말씀을 듣자니, 그놈은 분명코 나를 건드리러 오는 길이었어.... 다행히 여러분 이 중도에서 우연히 마주쳤길래 망정이지, 실상 나로서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는 강적이라 우. 그 자의 흑살낙혼사 역시 요승 아각달이 쓰던 마화(魔火)만큼이나 지독스러운 법보거든. 두 아가씨가 본래 근골이 심후하지 않았더라면 그 마화를 맞고서 살아 남기 어려웠을 텐데. 하물며 낙혼사까지 맞다니... 현재 신단(神丹)의 효력으로 몸을 보호하고는 있으나, 그건 목숨만 겨우 이 어갈 뿐, 원상대로 회복하기는 불가능하오. 그것도 다음 단계에 들어가면 즉시 혼백이 흩어져서 저승을 헤매고 다닐 게요. 그것으로 끝장이지." 등팔고는 애처로운 눈길로 두 처녀를 내려다보았다. 제영운 일행은 이것 큰일났다 싶어, 다급하게 등팔고를 붙잡고 늘어졌다. "전혀 가망이 없습니까? 무슨 해독방법은 없나요? 제발, 제발....." 등팔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두 아가씨의 중독은 이미 깊어졌소. 이것을 풀자면 몹시 힘들지. 세 가지 보배 영약이 아니고 선... 그래, 좌우지간에 얘기는 해주겠소. 첫째, 천 년 묵은 육지(肉之)의 생혈(生血), 둘째로 이단 파 도우(道友)가 원신(元身)을 써서 단련해낸 금단(金丹), 셋째로 계화산 복선담에 있다는 오풍초 (烏風草), 이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하지. 먼저 금단으로 환자의 전신을 고루 마찰하여 독성부터 정 화시키고 난 후 오풍초를 복용하게 하여 체내의 사기(邪氣)를 몰아낸 다음, 마지막으로 육지의 생 혈을 먹여서 원신(元身)에 보익(補益)이 되도록 한다 이 말씀이야. 그리고도 여러 날 심신을 수양 하고 나서야 비로소 원상태로 회복될 거요. 방금 듣기로는 두 아가씨가 마화를 맞고서도 이내 깨 어나 도인과 또 싸웠다던데, 그것은 선단(仙丹)의 효력이 일시적으로 독성을 억제하고 있는 현상 일 뿐, 결코 체내의 독이 말끔히 가셔진 것이 아니오. 게다가 그 무서운 흑살낙혼사까지 맞았으니 성할 리가 없지. 치료하려면 그 셋 중 한 가지도 빠져선 안 되오. 이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지. 한 가지 영약도 얻기 어려운데 그 셋을 한꺼번에 갖추어야 하니, 천우신조(天佑神助), 기적이 일어나 기 전에는 전혀 바랄 수도 없지. 쯧쯧....."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작스레 금선이 펄쩍 뛰어 일어나면서 고함을 질렀다. "할머니! 방금 말씀하신 것들 중, 우리가 두 가지는 가지고 있어요!" "아니, 뭐라구?" 이번에는 등팔고가 놀라 기절할 뻔했다. 주문이 방글거리며 나서더니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모르고 계셨겠지만, 여기 누운 환자가 바로 신약란이에요. 계화산에서 복선담을 지키다 비승하 신 홍화모모의 제자입니다. 물론 오풍초도 얻을 수 있지만, 홍화모모가 원적 비승하고 약란 동생 이 계화산을 떠날 때 오풍주(烏風酒)를 가지고 나왔어요. 이 술은 오풍초보다도 효력면에서 월등 하죠. 또 금선 동생은 구화산(九華山)에서 육지 한 뿌리를 얻었어요. 동생은 그것이 수천 년의 도 행을 쌓은 공덕이 아까와 해치지 않고 도리어 보호해 주었죠. 지금은 구화산에서 응벽애로 옮겨 심어 기르는 중이랍니다." 등팔고는 어이가 없었다. 한동안 젊은이들을 돌아보더니 탄식 섞인 말을 쏟아냈다. "허허, 인간세상에서 귀한 보배는 모두 아미파에게 몰렸구나. 그러니 정교(正敎)가 세상을 밝혀 번창할 날도 멀지 않았군. 허나 여기서 응벽애까지는 수천 리 길, 의사도 못 찾은 환자가 어검비 행을 하긴 틀렸고, 더구나 강풍에 시달려서도 안 되는데, 어쩌면 좋을꼬? 게다가 이단의 원신으로 연성한 금단은 또 어디서 구하나? 애석한 일이지만 그 두 보배가 있더라도 역시 무용지물이로 군." 예까지 잠자코 듣던 한악이 더는 참지 못하고 언니 자령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령은 동생의 눈짓을 거들떠보지 않았으나, 그녀 역시 무슨 할 말은 있는 모양이다. 모두들 애 가 타서 잔뜩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혼자서 배시시 웃더니만 앞으로 선뜻 나섰다. "저희 자매가 떠나올 당시 찬하대사께서 저희더러 이영경, 신약란 두 분 사매의 위험을 구하라 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구하는지 방법도 모른 채 이제껏 있었고, 또 지금 세 가지 보배 가 운데 단 하나도 빠져신 안 된다 말씀하시길래 저희 자매의 능력으로는 힘에 부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풍초와 육지가 모두 아미산에 있다니, 이야말로 뜻밖입니다. 영경과 약란 두 사매의 선 연(仙緣)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쭙지 않은 말씀이오나, 저희 자매가 지닌 미진기(彌塵旗) 라면 사람을 데리고 경각지간 천 리쯤은 날 수가 있고, 또 채운(彩雲)으로 전신을 덮어씌우면 강 풍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원신으로 연성한 금단 그것 또한 이미 갖추어져 있구요. 언니들 빨리 서두르세요. 지금 바로 떠나야만 내일 모레 결전날에 청라욕을 격파할 수 있도록 때맞춰 돌아오 게 됩니다. 저희 자매들만 가도 어렵지 않으나, 응벽애를 부적(符籍)으로 봉쇄해 놓으셨다니 외부 인은 들어갈 수 없겠네요. 한 분만 저희와 함께 가시면 아주 좋으련만....." 제영운 일행은 뜻밖의 엄청난 희보(喜報)를 접하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영운은 당장 금선에게 자령 일행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금선이 육지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까 정혈(精血)을 얻기가 남보다 쉬우리라는 신중한 배려에서 였다. 이때 등팔고는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자령에게 물었다. "아까 듣자니, 사문공은 아가씨의 백미침에 맞았다고 했지요? 그리고 또 지금은 미진기를 써서 아미산까지 환자를 데려간다고 하셨는데, 그 두 가지는 모두 예전에 보상부인이 쓰시던 법보 아 닌가요? 처음 자매분을 면대했을 때는 총망 중이라 말씀도 나눌 틈이 없었는데, 두 자매분은 보 상부인과 어떤 관계인지 알려주시겠소?" 자령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보상부인은 바로 저희 어머님이십니다. 제가 나이어린 탓으로 당년에 어머님께서 사귀신 분이 어느 분들이셨는지 아는 바 적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저희 어머님과 어떻게 아셨는지요? 부디 말 씀을 내리셔서 어린 저희들이 존장을 몰라보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아하, 과연 보상부인의 따님들이셨군! 이건 너무도 놀라운 일이야. 그러니까 보상부인이 남기진 금단을 가지고 두 아가씨의 치료를 장담했군그래. 어쩌면 그리도 예절 바르고 겸손하실까? 하하 하, 이렇게 기쁠 수가 없구먼그래. 내가 어머님을 뵈온 것은 몇 차례 안 된다오. 게다가 나는 말 학 후배라서 어머님과 한 자리에 감히 맛댈 처지도 못되었거든. 당시 어머님께선 이 못난 등팔고 를 어리석다 버리지 않으시고 얼마나 돌봐주셨는지 모른다오. 그 은공은 아직도 잊지 못하지. 그 러니까 따지고 보면 두 자매분과 나는 평배(平輩)가 되는 셈이오. 너무 겸손해 하지 않아도 괜찮 은 사이거든. 정말 반갑소, 반가와!... 그동안 있었던 어머니와의 얘기는 한 마디로 다 하기 어렵 지. 두 분이 보상부인의 따님이라!... 앞으로 많은 도움을 부탁드리겠소. 나도 힘껏 도우리다. 자, 지금은 이 아가씨들의 상태가 위급하니 우선 모셔다 치료부터 해야겠구려. 내일 아미산에서 돌아 와 청라욕을 격파한 다음 우리 다시 회포를 풀기로 합시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자령은 공손히 읍례를 올렸다. 떠날 무렵, 자령은 일행을 등지고 서서 날짐승 독각신취를 손짓해 불러 남이 듣지 못하도록 귀엣말로 몇 마디 당부를 했다. 남는 일행 가운데 사도평의 무공실력이 제일 낮으므로, 독각신취더러 특별히 호위를 해주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한악과 함께 이영경, 신약란을 나누어 안고서 금선에게 방위를 지정해 준 다음, 미진기를 번쩍 휘두르며 소리쳤다. "떠라!" 자령 일행은 삽시간에 한 덩어리 오색 채운으로 변하더니 전광석화처럼 계곡을 빠져나갔다. 그 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창공의 구름 속으로 날아 들어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행이 떠난 후, 주경운과 오문기는 다시 등팔고에게 진자령 자매와 사도평이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귀 밝은 그 둘이서 아까 자령이 출발 직전 독각신취한테 당부하던 내 용을 엿듣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던 것이다. 등팔고 역시 희한한 인연에 탄성을 지르며 빙그레 웃고 말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보상부인은 득도(得道) 삼천 년에 신통력이 광대하고 변화무쌍한 분이지 요. 이단의 부류 산선(散仙) 중에서 제일가는 인물이외다. 그분의 가학(家學)을 진씨 자매가 이어 받고 또 숱한 법보까지 얻어서 귀파에 들어갔으니, 실로 아미 문하를 적지 않게 빛낼 것이오. 부 상하신 두 분도 이제 보상부인의 금단을 얻어 치료받게 되었으니까 며칠 내에 원상대로 회복할 수 있을 거요." 우선 다급한 일이 해결되자, 제영운은 청라욕 상황에 생각이 미쳤다. "등선배님, 어젯밤 청라욕 마궁을 탐색해 보신 결과는 어떻습니까?" "엊저녁에 가보았더니 청라마궁의 외부는 완전히 음운(陰雲)으로 빽빽하게 뒤덮였고 온갖 사기 (邪氣)가 몰려 있었소. 나는 마진의 생문(生門)으로 들어갔지. 원신(元神)이 출유(出遊)한 까닭에 좀처럼 남에게 발각당하지 않았거든. 마궁 안에 들어가서야 나는 <서천팔마>가 별도로 십여 명 의 승려와 도인들의 협조를 받기로 약속한 걸 알았어요. 그중에서 제일 막강한 인물이 바로 사문 공이었지. 나는 어둠 속에 숨어서 유덕과 팔마들이 주고받는 말을 엿들었답니다. 이번 싸움에서 독룡존자가 암암리에 지휘를 하고, 또 동방 <오귀천왕> 상화양과 <만묘선고> 허비랑, <적신교주 > 구반파 등 이단파의 무리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들이 초빙된 사실을 알아냈어요. 그들은 단오절 당일, 계곡에 설치한 마진의 일부를 개방하고 우리 측 공격자들이 사문(死門)을 통하여 들 어가도록 안배해 놓았구려. 일단 계곡 안에 진입한 다음에는 다시 계곡입구를 철통같이 봉쇄해 버리고, 그렇게 되면 공격자들은 날개가 돋혀도 빠져나가기 힘들지. 독룡존자 일당은 당초부터 귀 파에서 적지 않은 원로 고수가 참전하리라 예상하고 그처럼 어마어마한 대비책을 세워놓은 거지 요. 물론 지난번 자운사 결전에서 톡톡히 교훈을 얻고 지레 겁먹은 탓이겠지만. 독룡의 계획은 대 강 이러하오. 당일 쌍방간에 접전이 개시되면 제일 먼저 <서천팔마>의 여덟 명이 출전할 겁니다. 그리고 귀파에서 원로급 고수가 참전하지 않는 이상 독룡존자와 그가 초빙한 거물들도 일체 표면 적으로 노출하지 않을 예정이라오. 공격자들이 마진 속에 포위되면 실력 여하에 따라서 그들도 고수를 적절히 내보내어 일망타진한 다음, 그 가운데 아미파 문하인이 없으면 그저 죽여서 분풀 이나 하고 말겠지만, 실제로 귀파의 인물이 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의 원양음혼(元陽陰魂)을 뽑아 가지고 일종의 마기(魔旗)를 연성하여 장차 귀파와 대적하는 날 주무기로 쓸 것이라 했어요. 사실 독룡존자가 사문공을 초빙한 의도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마진을 최후의 팻감으로 쓸 태세만 갖추어 놓고 실제 사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더군. 한데 어찌 된 셈인지 사문공은 청라마궁에 당도하자마자 독룡존자와는 만나 상의하지도 않고 수선스럽게도 엄청난 위력을 지닌 마진부터 설 치해 버린 겁니다. 결국 독룡존자의 계략은 앞뒤가 뒤바뀌고 최후로 쓸 팻감만 노출시킨 셈이지. 다행히 히늘도 무심하지 않아서 그 자는 진자령 도우의 백미침에 다쳤지 뭐예요. 그 침은 여러분 도 아시다시피 적의 요혈만 뚫고 들어가 혈맥을 따라 심장에 들어박히는 것이라서 요행으로도 죽 음을 면하기가 어려울 게요. 그놈이 죽고나면 마진을 지휘할 인물도 바뀌게 될 것이고, 따라서 마 진의 위력도 큰 차이를 보이겠지." 등팔고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나는 어느 정도 적황(敵況)을 탐지하고 그쯤이면 큰 수확이라 싶어 마궁에서 빠져나오던 도중 사문공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뻔했답니다. 그놈의 눈썰미가 얼마나 예리한지 모를 거요. 내가 재빨 리 먼저 알아채고 몸을 날려 도망쳤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발각당하고 말았을 거야. 또 지금에 야 비로소 들었지만. 그놈의 사부 장령자의 독문절기 흑살낙혼사까지 보유하고 있는 줄 꿈에나 생각했어야지요. 본래 원신이란 육체보다 훨씬 연약한 것이라 만약 그놈에게 발각되어 흑살낙혼 사를 뒤집어 썼더라면 이영경, 신약란처럼 그나마 치료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그 즉시 도력(道 力)을 깡그리 상실당하고 혼백은 구유(九幽)에 떨어져서 만겁(萬劫)을 거듭해도 회복될 수 없단 말이오. 그걸 생각하니 지금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걸. 마궁을 벗어나서는 곧바로 부근의 산골짜 기 암벽 동굴을 뒤지면서 팔마와 결투를 약속한 장본인 조심원도우를 찾았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종적이 없더군. 나중에 어느 고봉(高峰)을 지나치다 보니, 그 봉우리가 자오(子午) 방위 에 있으면서 청라마궁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위치에 놓인 것을 깨달았지요. 그 봉우리 정상은 구 름과 안개로 덮이고 가리워져 있었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속아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다행스럽게 도 나는 과거에 홍교도(紅敎徒)들이 구사한 <천마해체대법(天魔解體大法)>을 본 적이 있었지. 고 봉의 정상에서 펼치고 있는 운무, 그것은 바로 천마해체의 무서운 법술이었답니다. 여느때 같으면 아무리 뛰어난 법력을 지닌 자라도 간파할 수 없었겠지만, 공교롭게도 어젯밤은 칠살(七煞)이 임 박한 날이요, 술법을 부리는 자가 직접 상대방의 제련(祭煉)을 진압하고 자오(子午) 정방위의 봉 쇄를 철거해야만 하거든. 나는 이 대법을 구사하려면 반드시 근골과 도행이 뛰어난 사람의 목숨 을 하나 희생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혹시나 조심원도우가 홀몸으로 적정(敵情)을 탐색하러 왔다가 적의 암산에 걸려 희생되는 게 아닌가 싶어, 정상으로 올라가려고 했다오. 하지만 원신이 출유하는 상태에서 아무런 호신책도 쓰지 못하는 처지라, 별 수 없이 그 술법을 부린 자가 내려 오기만 기다렸지요. 뒤를 추적해서 정체를 알아낸 다음, 재차 정상으로 올라가 과연 대법의 희생 물이 될 꼭두각시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탐색해 볼 작정이었지." 괴규화, 적극 나서다 入古刹, 五劍客巧結番僧 煮雪鷄, 衆仙娃同嘗異味 등팔고는 설명을 계속했다. "나는 그 산 밑에서 줄곧 상대방 술법을 부리는 자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렸지요. 한참을 기다려 도 나타나지 않아서 따분하고 조바심이 나던 참인데, 문득 맞은편 산모퉁이 아래 눈구덩이에서 몇 줄기 실낱 같은 푸른빛이 번뜩이는 게 보이더군. 보통 검기(劍氣)를 써서 실낱처럼 가늘게 단 련한 사람은 강호에 극히 드물고, 또 그 푸른빛이 아주 눈에 익길래 그리로 쫓아가 보았지요. 과 연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지. 게다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절친힌 벗이 아니겠소? 바로 종 남산(終南山) 갈천애(喝泉崖)에서 수행하던 <백수진인(白水眞人)> 유천(劉泉) 그 도사였단 말이외 다....." 등팔고는 반가움을 못 이겨 한달음에 친구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가서 보니 유천은 무슨 일 때문에 성이 났는지, 만면에 노기가 등등해 가지고 미친 사람 처럼 비검을 쏘아날리고 있었다. 어떤 목표를 겨누고 칼질을 하는 게 아니라, 상하좌우 가리지 않 고서 마구 찌르고 베고 후리치면서 정신없이 검무를 추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입으로는 쉴새없이 차마 도인으로선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퍼부어대고 있었다. "죽일 놈의 비렁뱅이, 육시처참을 해도 시원치 않아! 갈갈이 찢어죽이고야 말겠다, 이 거지놈아!" 아무리 둘러보아도 유천 주변에는 칼맞아 죽을 사람이나 욕설을 듣는 사람이라곤 고림자도 없었 다. 등팔고는 너무도 희한한 광경에 부닥쳐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셈이야? 이 친구가 미친 건 아닌가? 혼자서 달밤에 칼춤을 추며 주절주절 천박스럽게 욕설을 퍼붓다니.' 고녀는 유천 앞으로 썩 나섰다. "유도우, 나요! 등팔고가 왔어요. 아니 이 밤중에 혼자서 무슨 짓을 하는 거지요?" "등팔고? 아이쿠, 반갑소 반가와! 헌데 어쩌자고 원신으로 떠돌아다니는 거요?" 유천은 옛친구가 나타나자 그제서야 겨우 칼춤을 그치고 검광을 거두어들였다. 반가와하면서도 얼굴 가득히 서린 분노는 좀처럼 풀어지지 않은 채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그건 내 천천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나 먼저 물어봅시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또 이 머 나먼 서장까지는 웬일로 오셨구요?" "이야기하자면 길지. 또 정말 기막힌 꼴을 당했소. 등도우가 아시다시피, 내 당년에 아미 장교 제수명 진인한테 굴복당하고 감화를 받은 후부터 일체 세속 인연과 담을 쌓고 종남산에 은거하면 서 수도에만 전념해 왔잖소. 그동안 산 바깥으로는 단 한 발짝도 내딛지 않았단 말이외다. 그런데 두어 달 전, 내 문하제자가 서장에 와서 약초를 채집하려고 청라산을 지나치다가 우연히 <서천팔 마> 중의 오인룡(伍人龍)과 구령(邱鈴)이란 놈을 만났는데, 공연히 트집을 잡고 모욕을 주더니, 제자놈이 손에 넣은 성형영지(成形靈芝)마저 빼앗더라 이 말씀이오. 하마터면 비검까지 잃어버릴 뻔했다는 거였소. 제자놈은 종남산으로 도망쳐 와서 날더러 복수해 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하지 않 겠소? 그러니 나도 화가 치밀 수밖에. 내 그 길로 종남산을 떠나 청라욕으로 날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괘씸한 팔마들을 찾아내서 빚을 갚아야 했거든. 타전로(打箭爐)에 도착하고 보니, 문득 오 래 못 만난 옛친구가 두 분 머리에 떠오르기에 협력을 얻으려고 찾아나섰지. 그게 누군지 아시겠 소? 한 분은 당신 등도우고, 또 한 분은 공료화상(空了和尙)이라오. 헌데 결과는 헛걸음이었어. 공 료화상은 오래 전에 원적하셨고, 또 등도우마저 행방이 묘연하더라 이 말씀이야. 하는 수 없어서 혼자 힘으로 나서기로 작정하고 검광을 일으켜 청라산을 향해 떠났지. 얼마쯤 날아가자니까, 어떤 산비탈 아래 웬 늙은 걸인 하나가 벌러덩 자빠져 있는데,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품이 당장 죽 을 것만 같았소. 그 꼴을 보니까 문득 측은한 생각이 들더군. 그래 내려가서 단약 몇 알을 먹였 지. 그랬더니 웬걸, 병이 낫기는커녕 도리어 두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죽어버리는 게 아니겠소? 거 참, 이상하다 싶어 한동안 뒤적거리고 있는데, 이 번에는 중년 나이의 걸인이 술병하고 안주 찌꺼 기를 들고 뛰어오더군. 와서 보니까 늙은 걸인은 죽고 그 곁에 서 있는 건 나였고 하니 대뜸 내 멱살을 움켜잡더니 '형님을 살려내라!'고 아우성치지 않겠소? 나도 살리느라 단약을 먹였다고 변 명을 했지. 그랬더니 하는 말이 '형님은 술을 못 마셔서 탈이 난 것이지 병든 게 아니다. 약을 잘 못 써서 죽였으니까 목숨으로 보상해라!' 펄펄 뛰면서 막무가내, 멱살을 놓지 않는 거요. 사실 말 이지 예전 같았으면 내가 그 꼴을 당할 성미요? 허나 오래도록 잠수(潛修)한 터라 내 기질도 많 이 변했거든. 그리고 부끄럽지만 그 중년의 걸인이 나를 희롱하는 이인(異人)인 줄은 전혀 눈치채 지 못했지만 말이오. 여하간에 중년 걸인이 날 붙잡고 울고불고, 통사정을 하는 게 하도 애처로와 서 또 달랬소. '내가 먹인 단약은 기사회생(起死回生)하는 약이니까 절대로 죽을 리가 없다. 당신 형님은 주독(酒毒)이 너무 깊고 또 내 단약을 쓴 게 부족해서 잠시 기절한 모양이니, 약 몇 알만 더 먹이면 정신도 차리고 주독도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자 중년 걸인은 내 말을 믿는 둥 마는 둥, 좀처럼 승낙을 하지 않는 거였소. 얘기인즉, 자기네 두 형제는 본래 청라묘(靑螺廟)의 주지승인데 <서천팔마>한테 쫓겨나고 절간은 마궁으로 변했다더군. 그래서 수년 동안 거지꼴이 되어 떠돌아다니면서 형아, 아우야 하며 서로 의지하고 살아왔다는 것이었소. 그러더니 나중에는 승락을 합디다. 날더러 자기 형님한테 약을 먹여서 살려내면 더 좋겠지만, 만약에 살아나지 않거 든 목숨으로 변상할 필요는 없고 단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서천팔마>한테 빼앗긴 절간을 되 찾아 가지고 자기를 예전처럼 주지승이 되게 해달라는 조건을 붙입디다. 소원만 들어주면 두말않 고 나를 풀어주겠다는 것이었소. 나는 꼼짝없이 속임수에 넘어가고 말았지. 어차피 청라욕으로 < 서천팔마>를 찾아가는 판인데 초행길이라 여간 걱정되지 않았거든. 걸인이 그곳 토박이라면 지형 도 익숙할 테고 또 <서천팔마> 한데 쫓겨나면서 그쪽 형편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내 귀가 솔깃해 질밖에 더 있겠소? 결국 목표도 목적지도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지라, 당장 응락을 했지. 한 사람 몸뚱이를 더 메고 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약속대로 단약 두 알을 또 늙은 걸인의 입에 넣어 주었소. 웬걸! 이 노릇을 어쩌면 좋겠소?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못되어 가 지고 사람이 살아나기는커녕 도리어 흥건한 피고름으로 녹아버리고 만 것이오. 중년 걸인이 대성 통곡을 터드리면서 발광한 거야 말할 나위도 없지. 그러니 나는 도리없이 두 번째 약속을 이행해 주는 수밖에... 내가 겨우 달래 가지고 떠나자니까 대뜸 묻는 말이, '날 어떻게 데려가시려우?' 하 더군. 그래서 '염려 말아라. 비검술도 술법도 있으니 걷지 않게 데려다 주마!' 했지. 그러자 이 친 구는 설레설레 도리질을 하는 거였소. '난 그런 거 못 믿어. 날 또 속이고 장안술법(障眼術法)을 써서 도망칠 작정이지?' 아무리 내가 아니라고 변명해도 막무가내라, 끝내는 천지신명을 걸고 독 한 맹세까지 했단 말이오. 내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 떠날 무렵 가만 보니 거렁뱅이 꼬락서니가 하도 측은하길래 은자 몇 냥을 주면서 '두툼한 옷이나 한 벌 사 입어라' 했더니, 딱 잡아떼고 필 요없다는 거였소. 옷을 사러 간 사이에 내가 뺑소니칠 거라는 이유였지. 모처럼의 호의마저 어처 구니없게 거절당하니 나도 울화가 치밀대로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고서 그 자를 정방위에 세우고 비검술을 발동했소. 함께 어검비행으로 떠날 생각에서였거든. 그런데 뜻밖에도 뜨질 않는 것이 아 니겠소? 아무리 반복했으나 검광은 끝내 불통이라, 이번에는 술법을 쓰려고 주문을 외웠지. 그러 나 이것마저 도무지 안 들어먹혔소. 정말 큰일났구나 싶었소. 이 모양으로 청라욕에 쳐들어 간들 무슨 수로 <서천팔마>를 상대한단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술법과 비검이 어째서 신통력을 잃었는지 알 수가 없었소. 놀랍기도 하려니와 두렵기까지 했소. 다급한 나머지 다시 종남산으로 되돌아 가서 대책을 강구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걸인이 떼를 쓰기 시작하는 게 아니오? '약속 을 했으면 지켜야지 어딜 달아나려느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날 청라묘의 주지승 자리에 앉혀라' 이거였소. 나 역시 한 번 언약한 신의는 어기고 싶지도 않거니와 또 지독스런 맹세까지 한 몸, 게 다가 술법마저 잃었으니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는 처지라, 만약 그 걸인이 죽자고 매달려 말썽 을 일으키는 날엔 관청이 들썩거릴 테고, 그렇게 되면 내가 꼼짝없이 살인죄를 뒤집어 쓰고 말 테니, 어쩌겠소? 나는 그 원수 같은 작자를 따라서 터덜터덜 걸어갈 수밖에... 지금 생각해도 끔찍 스러워 이가 갈릴 정도로 지루한 도보여행이 시작된 거요. 게다가 그놈의 성미도 말씀 아니게 괴 팍스러워 일일이 대거리를 하다가는 나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지경이고 또 얼마나 지독스런 모주 꾼인지, 도중에 주막이 나타나기만 하면 눌러 앉아서 퍼마셔대는 거였소. 그러니 하루에 기껏 걸 어야 백여 리가 고작이었소. 몇 날 며칠이나 속을 썩일 대로 썩이면서도 마침내는 사천성 변경에 겨우 당도했소. 청라욕까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나도 비로소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지. 그런데 마음이 한갓지니까 불현듯 생각나는 게 있더군. 이 원수 같은 걸인이 뭐라고 했지? 늙은 걸인은 자기 친형님이라고 하면서도 어째서 떠날 때 피고름으로 변한 형님의 시체를 멀거니 보면서 땅에 묻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 한바탕 울고 법석을 떨기는 했지만, 그 짓도 가만 보니 나한테 얹 혀서 가기 위해 내숭을 떤 거야. 아무래도 친형제간에 정리가 이럴 수는 없지. 나는 그 자를 붙잡 고 물었소. 그랬더니 정말 어처구니없게 실토를 하지 않겠소? '그 늙은 걸인은 사실, 형도 아니고 당초부터 그런 사람은 아예 없었다우. 내가 일부러 장안법을 써서 당신이 날 청라묘까지 데려가 주도록 속임수를 부려본 거였지!' 그 끔찍한 대답에 나는 그만 기가 탁 막혔소. 다음 순간, 내 머 릿속에는 이날 이때껏 도중에서 원수 같은 걸인놈이 심술사납게 나를 골탕먹이던 생각이 떠올랐 소. 이 밉살맞은 놈은 목적지에 거반 당도하니까 나를 헌신짝 버리듯 차내려고 실토한 것이지. 도 대체 생명부지의 사람을 그토록 짓궂게 희롱하다니, 내 어찌 더 참을 수가 있단 말이오? 속에서 무명업화(無名業火)가 삼천 길이나 솟구쳤소. 당장에 때려 눕힐 생각으로 손을 뻗쳐 움켜잡았지. 그런데 이 걸인놈은 몸집도 왜소하고 꾀죄죄한 게 몸놀림 하나 만큼은 미꾸라지처럼 매끄러웠소. 움켜잡기는커녕 되레 그놈의 주먹질에 얻어터지고 발길질에 걷어채이고, 정신없이 호된 꼴을 당 하고 말았소. 걸인은 연방 나를 후려갈기면서 하는 말이 '요 얼간이, 그렇게도 멍청하냐? 늙은 걸 인도 가짜지만, 또 자네 비검술법도 내 장안술에 가리워졌을 뿐, 잃어버린 것이 아니란 말이다. 어때, 내 재간이? 좀 놀랐을 게다! 애석하게 내 장안술은 단 한 번밖에 못 쓰거든. 사십구 일이 지나기 전에는 다시 부려봐야 들어먹히지 않는단 말야' 그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소. 흠씬 얻어맞으면서도 속으로 날짜를 꼽아 보았더니 출발한 날부터 오늘까지 기가 막히게 딱 사십구 일 째 들어맞지 않겠소? 나는 걸인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생각할 것도없이 대뜸 비검부터 쏘아 봤소. 과연! 내 손에서 검광이 번쩍 솟구쳐 날았소. 걸인은 내 검광을 보더니 대경실색, 자기 주둥 이를 손으로 쥐어박더군. '요놈의 주둥아리, 어쩌자고 바른말을 쏟아내는 거냐?' 그러더니 후딱 돌아서서 머리통을 감싸쥐곤 다리야 날 살려라 내빼기 시작하는 것이었소. 그걸 내가 그냥 내버 려 둘 성싶소? 비검을 쏘아가면서 바짝 뒤쫓아 갈밖에. 헌데 이놈이 얼마나 재빠르게 달리는지 눈 깜빡할 사이에 그림자도 없이 도망치고 말았소. 하는 수 없이 쫓던 발길을 멈추었더니, 엉큼스 럽게 또 앞에 훌쩍 나타나는 것이었소. 쫓아가면 또 없어지고, 걸음을 멈추면 또 나타나고... 이렇 게 숨바꼭질을 해가면서 줄곧 여기까지 쫓아온 거였소. 바로 여기까지 말이외다. 조금 전, 나는 그 걸인이 또 도망칠까 봐서 앞에 나타났을 때도 모른 척하고 속으로 진언(眞言)을 외워, 마침내 는 그가 나타난 주위를 꼼짝 못하게 봉쇄해 버리는 데 성공했소. 그리곤 검광을 번쩍이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갔지. 이번만큼은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막 비검을 쏘아 날리려는 참인데, 느 닷없이 '철썩!' 하고 따귀를 얻어맞았지 뭡니까. 정말 눈에서 불이 번쩍 납디다. 뒤미처 귓결에 으 름짱을 놓는 소리가 들렸소. '이 녀석, 어서 술법을 풀어라! 나를 놓아주면 모르거니와, 안 그랬단 봐라. 당장 때려죽이고 말 테다!' 목소리는 분명 그 걸인인데,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더욱 분통이 터지더군. 그래도 어차피 내 법술에 꼼짝 못하고 걸려 있는 게 분명하니 제가 뛰어봤자 벼룩이지. 나는 검광을 날려서 전후좌우, 위 아래 가릴 것없이 마구 찌르고 베고 후려치기 시작했 어. 봉쇄된 곳은 그리 넓지 않으니까, 그놈의 걸인이 찔려 죽는 것도 시간 문제라, 이 말씀이야. 그러나 한바탕 흠씬 쑤시고 후리고 났는데 쥐죽은 듯 인기척도 없는 거요. 그래서 또 당했구나 싶어 울화통이 치미는 판인데, 등도우 당신이 나타나서 막은 거라우. 참,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지. 이러고도 내가 발광하지 않은 게 이상하지 않소?" 유천의 장황한 신세타령이 끝났다. 등팔고는 묵묵히 그 푸념을 다 들어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걸인은 분명 풍진 속세에서 자취를 감춘 선배 이인(異人)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무서운 유천의 비검과 술법을 장안술 따위만으로 가리워 효력을 잃게 만든다는 말인가? 정말 상 상조차 못할 일이야... 그 인물은 유천과 생명부지라, 아무런 원한도 맺은 게 없을 터인데, 어째서 그토록 농락했을꼬? 여기에는 필경 깊은 뜻이 담겼을 것이다.' 그녀는 유천에게 권유했다. "유도우, 심사야 분하고 속상하겠지만 이러지 마시오. 아무래도 그분은 범상한 인물이 아닌 것 같군요. 유도우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도 무슨 까닭이 있는 모양이구려." "나도 그 걸인이 범상하지 않은 인물인 줄은 알고 있었소. 여기까지 오면서도 하는 말이 '자네 실력 가지곤 내 막내제자나 겨우 될 거야' 또 '날 따라다니면서 몇 년 동냥질을 해야만 눈이 트 일 걸세' 하더군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도중에 한 말이나 행동거지가 미친 놈 같기도 하 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내력이 좀 있는 듯해서 꾹 참고 왔다오... 그건 그렇구, 등도우는 어째서 원신으도 출유하셨소?" 등팔고는 그와 헤어진 후 몇 년 동안 겪었던 사연을 간략하게나 마 설명해 주고 나서, 오늘 저 녁 청라마궁을 정탐한 일부터 조심원이란 인물을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천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펄쩍 놀랐다. "이크, 이것 봐라? 방금 뭐라셨소? 조심원이라고?... 어젯 저녁에 말이오, 그 걸인이 날 질질 끌 고 오다가 소원사(昭遠寺) 절간 문 앞을 지날 때, '조씨 성을 가진 녀석이 이 절간에 묵고 있다 네. 내일쯤 해서 누가 묻거든 잊지 말고 대답해 줘야 하네'라고 했소. 엊저녁에는 그 걸인이 하도 미친 소릴 곧잘 지껄이길래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등도우 말씀을 듣고 보니 모 두 다 까닭이 있었구려! 거 참, 공교롭기도 하구만. 여보 등도우, 그 소원사란 절은 청라욕에서 겨 우 이삼십 리밖에 안 된다오. 여기서는 더 가깝지." "그래요? 어디 한번 가서 알아봅시다. 만약 소원사에 있다는 조씨가 조심원이 아니라면, 다시 이 리로 와서 저 앞산 정상에서 마법을 단련하고 있는 요물의 뒤를 쫓아도 늦진 않을 거외다." "좋소, 내 함께 동행하리다! 우리는 결국 같은 적을 만나게 되었구려. 어디 한번 신나게 때려부 숩시다." "우리 둘뿐만 아니고 아미파의 젊은 도우들도 여럿 와 있다우. 정말 대단한 실력자들이 우리편 을 들고 있단 말이오." "그거 아주 잘되었소! <서천팔마>도 이젠 끝장나고 말겠군!" 두 사람은 그 길로 소원사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암암리에 살펴보니, 과연 걸인 말이 틀림없 었다. 절간 대청에서는 둘째 방장 카잉사푸(喀音沙布)가 몇몇 손님들과 함께 한담을 나누고 있는 데, 서로 부르는 호칭을 보아 그들 중 한 명이 조심원이었던 것이다 등팔고는 그 일행 가운데 장사(長沙) 곡왕봉(谷王峰)의 철사도인(鐵娑道人)까지 끼여 있는 걸 보 고 크게 놀랐다. 철사도인이라면 그녀와 구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사람들도 모두 청라욕 결전에 참가하러 온 것이다. 한데 어째서 정파의 도우들이 팔 마의 앞잡이인 번승(番僧)녀석들과 친숙하게 어울리고 있을꼬?' 등팔고는 의아스럽게 여기면서도 혹시나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 싶어, 섣부르게 나서지 않기로 했다. "유도우, 당신은 타향 사람이니까 저 중들도 몰라볼 겁니다. 어떻게 슬그머니 저 손님 좀 끌어내 올 수 없을까?" "그거야 쉽지! 잠시 기다리시오." 유천은 시원스럽게 대답하고선 휑하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유천에게 이끌려 나온 사람은 운좋게도 철사도인이었다. 인적이 없는 으슥한 곳으로 가서 모습을 드러내자, 어지간한 철사도인도 몹시 놀랐다. 등팔고는 그에게 현빙곡과 청라마궁의 실정을 자세히 말해 주고 나서 물었다. "철사도인께서는 청라마궁 패거리들과 적대관계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팔마의 앞잡이 와 어울리시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이곳 소원사는 마궁의 하원(下院)입니다. 번승들도 모두 독룡 이나 팔마의 정탐꾼이지요. 그걸 모르고 계셨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들의 암계에 빠지지 않도록 조 심하십시오." 철사도인도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 역시 여러 도우들과 팔 일 전에야 왔는데, 도중에서 어떤 선배께서 검광으로 길을 막고 불 러내리셨소. 그리고 우리 일행더러 '우선 소원사에 머물러 있거라. 그럼 자연 묘계가 나타날 것이 다'라고 분부하셨소. 우리 일행은 그 말씀을 따르기로 하고 이곳 소원사에 찾아들었소. 처음에는 이 절의 대방장 반나가잉(梵拿加音二)과 둘째 방장 카잉사푸의 공격을 받고서 한바탕 어우러져 싸우다가, 중도에 이 자들의 마음이 변했는지 휴전을 하자고 제의합디다. 그리고는 우리 일행이 <서천팔마>와 결투약속을 지키러 왔다니까, 두 방장들도 속마음을 털어놓았소. 이들이 팔마의 앞 잡이노릇을 하는 것은 부득이해서 그렇다는 거요. 또 이들은 단오절 결전에 대비해서 우리가 팔 마와 싸우는 틈을 타 <천마해체대법(天魔解體大法)>으로 팔마 일당에게 결정타를 가하고 마궁을 탈환할 계획도 세워놓았소. 실패하는 날엔 모두 끝장이라는 각오로 싸울 태세였소. 우리 일행 역 시 소원사 번승들과는 아무런 원혐도 없는 처지라, 결전 당일 소원사 측의 지원을 받아서 나쁠 게 없으리라 여기고, 피차 우호관계를 맺은 것이었소. 사실 우리도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겁먹는 기색을 보이기가 뭣해서 배짱좋게 승락을 한 거라오. 이래서 적대관 계를 풀고 한패가 되어 머물고 있었소." "그동안에 무슨 수상쩍은 짓은 없던가요?" "없었소. 매일같이 그들의 동정을 주시해 보았으나, 우리 일행 한테도 아주 대접이 은근하고 융 숭합디다. 한 가지, 대방장 반나가잉이 사흘에 한 번씩 외출하길래 물었더니, 천마해체대법을 연 성하러 간다고 합디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슬그머니 뒤쫓아 가보았소. 혹시나 딴 꿍꿍이짓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반나가잉은 곧장 어느 고봉(孤峰)의 정상으로 올라가더니 운무 속에 들어갔소. 과연 그의 말대로 대법을 연성하는 게 분명하더군요. 어느 정도 안심은 되었지만, 끝까 지 경계심을 풀지 않고 일행이 모두 시시각각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가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 기로 했소. 나중에 알았지만, 중도에서 우리를 끌어내린 그 선배는 바로 수십 년 전 천하에 명성 을 떨쳤던 <괴규화> 궁신 능혼, 그분이었소." "아니, 그 선배가 아직도 살아 계시단 말인가요? 철사도인, 그분의 모습은 어떻습디까? 이후에 만나뵙더라도 알아 모셔야지요." "그분 별명대로 아예 상거지 차림이었소. 몸집도 작달막하고 꾀죄죄한 게....." "앗!" 곁에서 듣고만 있던 유천이 갑작스레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바로 그 걸인이야! 이런... 이런... 그분이 능진인이라니, 이 노릇을 어쩌누? 내가 미쳤어. 그 선배님한테 욕설을 퍼붓고 칼질을 하다니!" 유천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유명한 능진인이 자기를 입문시키려고 나타났는데 제 발로 복을 차버린 것이다. 이제사 후회해 보았자, 이미 흘러가 버린 물이라 어쩌겠는가? 날짜를 꼽아 보니, 철사도우가 만난 날하고 자신이 산비탈 언덕에 누워 있는 걸인을 발견한 날짜와 꼭 맞아떨어진 다. 결국 능진인은 신유분신술(神遊分身術)을 써서 늙은 거지 몸으로는 자기를 만나고 중년의 몸 으로는 철사도인 일행을 만나고 되돌아 왔던 것이다. 등팔고, 유천은 철사도인과 작별하고 다시 처음 만났던 장소로 돌아왔다. 도중에 그들은 일진광 풍이 싯누런 먼지구름을 일으키 면서 소원사 쪽으로 불어가는 걸 목격했다. 홍교(紅敎)의 번승(番 僧)이 지나간 것이다. 등팔고와 유천은 고봉 정상으로 올라갔다. 몽우리는 자욱하게 안개로 뒤덮여 있을 뿐, 사방천지 가 괴괴한 정적에 싸인 채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술법을 주재하는 자는 이미 가버 린 것이다. 요법의 봉쇄가 무서워, 두 사람은 섣불리 안개 속으로 들어설 엄두를 못 내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왔다. 유천은 <궁신> 능혼이 자기를 청라욕까지 이끌어 온 데 대해 확고한 신념을 품었다. 반드시 깊 은 배려가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분의 뜻에 따라야 한다. 그는 등팔고와 굳게 약속했다. 우선 능진인을 만나고 나서 제자의 복수를 겸하여 청라마궁 공격 대에 참가하겠다는 것이다. 아울 러 지금부터 이 자리에 꿇어 엎드려 능진인이 감동하여서 나타 날 그 시각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 바쳐 빌고 있겠다는 것이다. "... 유천도우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빌고 있을 거요. 내가 친구와 작별하고 돌아와 봤더니, 바로 그때 이영경과 신약란 두 아가씨가 서방야불의 마화에 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소... 내가 보건 대 여러분은 모두가 천품과 자질이 비범하고, 심후한 아미진전을 깊이 터득하였소. 또 진자령 자 매까지 가세를 했으니 막강한 전력(戰力)을 갖춘 셈이요. 만약 다시 능진인의 도움마저 얻을 수만 있다면, 청라욕을 깨뜨리고 요마패거리쯤 소탕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을 것이외다." 등팔고의 얘기는 끝났다. 그러자 <여공공> 오문기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방그레 웃는다. "저 같은 사람이야 본래 재주가 없는 줄 스스로 아니까 시종 아 이들만 돌보아 주고 이제껏 한 번도 언니나 동생들을 따라서 모험해 본 적이 없었어요. 아까 진씨 자매가 띠날 때 영경, 약란 두 아우를 구하는 데만 바빠서 여기 이 아이들 넷을 함께 데려가는 것도 잊었네요. 이제 모레면 단 오절인데, 그 싸움판에 걸리적거리지 않을까 몰라." 그 한 마디가 제영운을 일깨웠다. 과연 생사를 건 일전이 코 앞에 닥쳤는데 어린 장남고 남매와 도동 둘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살핀다는 말인가? 정말 골칫덩어리다. 그녀의 이맛살이 저도 모르 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아무리 철부지들이라곤 하지만 네 아이는 모두 여간 영 리하고 깜찍한 것들이 아니다. 제영운 이하 여러 사람에게 대례(大禮)를 올린 후부터 벌써 제자나 된 것처럼 곁에 시립해 있으 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어른들 말하는 걸 한 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이제 화제가 자기들 신변문제로 비약하고, 또 모두들 난처한 기색으로 얼굴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더니, 넷이서 약속이나 한 듯 쌍쌍이 일행 앞으로 쪼르르 나와서 무릎꿇고 이마를 조아리기 시 작했다. 그제서야 영운도 어린것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뜯어보았다. 넷 모두가 평범한 자질은 아니다. 하 나같이 빼어나고 영악스럽게 생긴 것을 보고서 마음 속으로 자못 기꺼워했다. 그러나 걱정은 여 전하다. 누구한테 이것들을 떠맡겨야 하나? 좌중의 사람을 둘러보았다. 등팔고는 자신의 역겁(歷劫)도 다 마치지 못한 처지라 제자를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 나 머지는 모두 아미 문하의 신진 후배들이다. 스승의 명령도 없이 어딜 감히 제자를 둘 꿈이나 꾸 겠는가? 아무리 궁리해 봐도 신통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생각다못해 본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앞으로 어떻게 할래? 만약 집에 돌아갈 생각이 있거든 말하려므나. 청라욕 싸움만 끝나 면 각자 데려다 줄게." 우건과 양성지 두 도동이 얼른 대꾸를 했다. "저희 둘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천애고아가 되었어요. 게다가 저는 집안도 가난한데 부모님 이 돌아가시자 못된 삼촌의 손에 종으로 팔려 이 년 동안 모진 고생을 겪고, 또다시 요사스런 도 인한테 납치를 당했던 것입니다. 저희는 모두 돌아갈 집도 없어요. 철없이 어린 나이에 도인의 소 굴에서 이 년을 살면서도 단 하루 마음 편한 날이 없이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것처럼 떨면서 지내 왔습니다. 천행으로 신선님들의 구함을 받았사온즉, 청라마궁 일이 끝나시거든 저희들을 데려가셔 서 도동으로나 부려주신다면 평생토록 그 크신 은혜 잊지 않겠어요." 애절한 탄원이었다. 그들은 쉴새없이 이마로 흙바닥을 짓찧는 것이다. 장남고, 호아 남매 역시 이에 뒤질세라 발버둥을 치다시피 떼를 썼다. "우리도 집에 안 돌아갈래요! 제발 좀 데려가 줘요. 이 서러운 세상 떠나 도술이나 배울래요. 저 희 남매를 제자로 받아주세요!" 제영운은 아이들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드럽게 달랬다. 산중생 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어려운 줄 아느냐, 여러 친구들을 사귀어서 오손도손 한평생 재미있게 사는 게 더 낫다. 그러니 이번 일을 끝내면 집이 있는 장씨 남매일랑 집으로 데려다 줄 것이고, 두 고아들 역시 좋은 방도를 생각해 서 편하게 살게 해 주겠으니 그 다음부터는 제각기 재간껏 살아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타일렀 다. 영악스런 것들이 그 꼬임에 넘어갈 리가 없다. 흙바닥에 꿇어 엎드려서 울며불며 이마를 짓찧었 다. 머리가 터져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데도 막무가내였다. 주경운과 주문이 보다못해 제영운에게 권유했다. "큰언니, 이러지 말고 잠시 거두어 두세요. 언니는 장교 어르신의 신임도 두터우시고, 또 우리 젊은 제자들 중에서 연령도 제일 많으신 데다 도행까지 가장 일찍이 터득하셨으니까, 교조님께서 도 그리 책망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정 어려우시다면 우선 아미산까지만 데리고 가서 교조님이나 묘일부인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보살피다가 그 어르신들의 처분에 맡기도록 하죠. 그때 가서 허락 을 안하시거든 다시 돌려보내도 늦지 않아요. 그렇게 하면 언니가 사부님의 분부도 듣지 않고 마 음대로 제자를 얻었다는 책망이야 받을 리 있겠어요? 그래도 걱정이세요?" 제영운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말이야 뻔지르르하게 잘도 주워섬기는구나. 이것 봐요, 아우님들, 우리 문파는 장미진인께서 개 창하신 후로 문하제자 가운데 적지 않은 패류가 나왔어. 그런 까닭에 함부로 제자를 거두어들이 지 않았던 거야. 지금 내가 사부의 명령도 없이 대뜸 제자 넷을 받아들여봐요! 우리처럼 도행도 약한 것들이 무슨 수로 이 애들의 미래를 살펴 알겠어? 공연히 낭패스런 일만 당하기 십상이지. 아우님들 말씀대로 아미산까지만 데려다 놓고 문하에 거두어들이지 않는다고 칩시다. 우리 응벽 애는 바로 동천복지란 말이에요. 그런데 어찌 범부속자(凡夫俗子)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있겠어 요? 하물며 지금도 안 떨어지려는 아이들이 다른 날이라고 순순히 떠나겠어요? 이 일은 섣불리 주장할 수 없는 것, 적어도 어느 선배사숙, 사백님의 분부시라면 그저 아미산까지 데려갈 수는 있 어요. 원래 이 아이들은 진씨 자매가 구출했으니까, 두 사람이 돌아오거든 다시 방도를 강구해 보 기로 해요." 그러자 주경운이 도리질했다. "진씨 자매는 비록 도력(道力)이야 막강하다지만, 본문(本門)에 갓 들어와서 아직 사부님조차 뵙 지도 못했으니까, 매사 큰언니의 말씀에 따라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언니가 주장을 못하신다 면 역시 헛일이죠." 제영운은 다시 아이들쪽을 흘낏 바라보았다. 넷이 모두 울다 지쳐서 눈까지 퉁퉁 부었다. 등팔고도 보기에 딱했는지 한 마디 거들었다. "아이들 정성이 지극하구려. 만약 얘들한테 인연이 없었다면 여러분하고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 소? 그러니 잠정적으로나마 거두어들여서 아미산까지라도 데리고 가시구려. 교조 어르신께서 이 애들의 바탕이 괜찮은 걸 보시면 절대로 책망은 안하시리다." 그래도 제영운은 결심을 못 내렸다. 등팔고 같은 선배의 권유라할지라도 못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장남고 남매와 두 도동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서 가망이 없음을 알았다. 일행들이 극력 권해도 우두머리가 시종 들어주지 않는 걸 어쩌랴? 갑자기 장남고가 벌떡 일어나더니 주경운파 사도평, 오문기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저희 남매는 범아가리에 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사오나, 다섯 은인을 우연히 뵙고 목 숨을 구해 받았습니다. 진씨 자매 두 분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으니, 저 대신 세 분께서 구명지 은(救命之恩)의 사례를 전해 주세요. 그리고 여러 신선님들, 저희 남매는 비록 돌아갈 집은 있사 오나, 가서 계모의 학대를 못 이겨 죽고 말 겁니다. 부디 제 동생 호아만이라도 시동으로 거두어 주세요. 그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어린 남고의 부리부리한 눈에서 두 줄기 주르르 흘러내렸다. 읍소를 마치자 다시 벌떡 일어나더 니, 곁의 암벽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앗, 누나, 안 돼!" 함께 울던 동생이 비명을 터뜨렸다. 누나가 죽으려는 걸 보고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뛰어가다 가는 돌뿌리에 걸려 고꾸라졌다. 뺨과 콧마루를 긁히고 피가 흐르는 데도 다시 일어나려다 숨통 이 막혀 기절하고 말았다. 좌중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수들이다. 바위에 머리통을 들이받고 자결하려는 아이를 그냥 둘 리가 있으랴! 제일 가까이 있던 주문이 냉큼 나꿔채 막아버렸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번쩍 쳐들 린 남고는 기절해 쓰러진 동생을 바라보더니 가슴을 두드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호아야!" 남고의 손을 잡은 주문도 그 애절한 울부짖음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영운이 다가서더니 호아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약을 꺼내 상처에 발라주었다. 이때 갑자기 등팔고의 몸이 번뜩 반석 아래로 날아내렸다. 일행은 깜짝 놀라 뒤돌아 보았다. 이 런! 이번에는 우건과 양성지 두 녀석의 머리통이 돌을 향해 부딪쳐 가고 있지 않는가! 둘은 절망 한 가운데 또 장남고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참상을 목격하자, 비통스러운 마음에 자기들도 죽을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등팔고는 반석 위에 높직이 앉아서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남고 남매의 소동에 일행들이 정 신 팔린 틈을 타서 두 녀석이 슬그머니 일어나 암벽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고서, 그녀는 무슨 짓 을 저지르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즉시 원신으로 변해 뛰어내렸던 것이다. 등팔고의 원신이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문득 바위 모서리 뒤편에서 난데없이 길다란 팔뚝이 뻗 어나오더니 두 녀석의 앞을 썩 가로막았다. 뒤미처 웬 걸인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대뜸 호통을 질렀다. "여기서 안 받아주면 다른 사람이 받아주겠지! 세상에 어디선들 도행을 닦을 데가 없어 계집아 이한테만 죽자고 배우려 드는 거냐?" 계집아이라니! 제영운은 눈꼬리가 곤두서면서 걸인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낯이 익다. 어디서 만났더라? '앗, 그분이다! 동해에서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뵌 적이 있어!' 걸인의 내력을 알아본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당초의 적의(敵意)는 어느 결에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반가움이 온몸으로 찌르르하니 솟구쳤다. "얘들아, 이리 와! 능사백님이시다!" 그녀는 호들갑스럽게 사매, 사제들을 불러모았다. <괴규화> 궁 신 능혼, 얼마 전, 대가장(戴家 場) 싸움터에 참가했던 주경운과 오 문기에게는 더구나 구면의 대선배였다. 제영운을 비롯하여 아미의 젊은 표범들은 능혼 앞에 무릎꿇고 예를 올렸다. "제자 제영운, 아우들과 함께 능사백님을 뵈옵니다." "일어나거라!" 여느때의 익살스러운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능혼은 엄숙한 태도로 젊은 후배들을 대하는 것 이다. "어린것들이 수고하는구나. 내 방금 마귀녀석 몇몇이서 수정구를 가지고 너희들의 내력과 동태 를 살피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너희들이 혹시 모르고 암산을 당할까 싶어 도와주러 온 게야. 한 데 영운아, 이 애들 넷은 어쩔 셈이냐? 보아하니 결심도 굳은 모양인데, 네가 고집을 부려 모두 죽일 작정이로구나. 그게 어디 차마 할 짓이냐? 물론 네 본심이 몰인정해서 그러는 게 아닌 줄은 나도 안다. 너한테 나름대로 고충이야 있겠지. 벌써 오려고는 했지만, 독룡이란 놈이 수정구를 비 치기 시작하길래 무슨 짓을 하는가 알아보느라고 늦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 넷은 너희 문 하에 들어갈만큼 바탕은 훌륭하다. 양성지 이놈만은 아직도 마장(魔障)에 가리워져 있기는 하나, 기왕지사 내가 나섰으니 이후 무슨 잘못이라도 생긴다면 내가 책임지고 적절히 감화시켜 주마. 그러니 내 말을 듣고 너희 아버님 대신 잠정적으로 거두어 두거라. 여기는 어린 아이들이 머물 데가 못된다. 잠시 후 내가 네 대신 이놈들을 먼저 응벽애로 보내주도록 하마. 너희들이 여기 일 을 완결짓고 돌아가면 머지 않아서 너희 아버님과 아미파 여러도우들께서도 아미산에 모이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만약 제도우가 너희들을 책망하거든 그 책임을 모두 나한테로 밀어붙이거라. 그러면 되겠지?"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제영운은 송구스러워 그 즉시 무릎꿇고 엎드려 능혼의 분부를 받들었다. 그리고 네 아이들을 불 러다 능혼 앞에 꿇린 다음 이끌어 주신 은덕에 감사드리도록 했다. 그녀는 일단 난처한 문제가 해결되자 다시 능혼에게 간청했다. "능사백님, 이번 저희들의 청라산 공격전을 도와주십시오. 경험도 없고 연약하여 어떻게 그 요마 들을 섬멸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물론 도와주지. 사실 나는 이번 일에 우연히도 끼어들었다. 내 이제껏 수십 년 동안 광서성(廣 西省) 백상봉(白象峰)에 은거하면서 속세를 밟지 않았는데, 이태 전 <극락진인> 이정허가 지나치 던 길에 들렸더군. 그때 하는 말이 '근년에 들어서자 문파가 경쟁이나 하듯 문도(門徒)를 받아들 이고 있어 겁운(劫運)이 크게 열릴 듯싶네. 그러니 자네도 <추운수> 백곡일과의 묵은 감정일랑 풀어버리고 옛날처럼 친구가 되게. 또 이번 기회에 다시 세상으로 나와서 정교 아미파의 창성을 도와주게나. 그리고 바탕이 좋은 제자 두엇쯤 거두어들여서 자네의 의발전인(衣鉢傳人)을 삼아야 지.' 생각해 보면 당초 내가 그 백가 난쟁이와 감정을 품고 원혐이 생긴 것은 나한테도 잘못이 있거든. 내 죽은 누이동생 능설홍(凌雪鴻)의 낯을 보아서라도 처남 매부지간에 그럴 수가 없지. 게다가 이정허까지 극력 권유하는 걸 듣고 보니, 그 즉시 대답은 안했으나 마음이 크게 움직였던 건 사실이야. 그런데 극락진인이 떠난 후 얼마 안 있어 사고가 벌어졌어. 철부지 같은 마귀새끼 <육마(六魔)> 여후란 놈이 백상봉으로 약초를 캐러 왔다가 우리 부부가 동부(洞府)를 비운 틈에 숨어들어 와서 내가 기르고 있던 선초(仙草)를 한 무더기나 훔쳐 가지고 달아난 거야. 기가 찰 노 릇이지만 그렇다고 좀도둑질에 내가 직접 찾아나서기도 뭣하길래, 제자나 한 놈 얻어서 그놈더러 빚을 갚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나중에 알았지만 그 마귀새끼들은 저희들 사부였던 <신수비구 > 위풍랑이 죽어버리자 또다시 독룡 존자의 문하로 들어가서 온갖 못된 짓을 마구 저지르며 날 뛴다더군. 나는 형산(衡山)에서 제자감 한 녀석을 점찍어 놓았지. 유윤중(兪允中)이라는 젊은인데, 바로 내 아내 최오고(崔五姑)가 새로이 거둔 제자 능운봉(凌雲鳳)의 남편이기도 했어. 처음에 이 녀석은 백가 난쟁이한테 투신하려고 찾아갔는데, 백가 난쟁이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제자로 받아들이기는커녕 되레 술법까지 부려서 놀라게 만들었어. 이 녀석, 천신만고 모진 고생을 당하고 도 사부를 만나기는커녕 산벼랑에서 굴러떨어져 하마터면 그 알량한 목숨까지 잃어버릴 뻔했지. 나는 이 녀석을 구해놓고 산 아래로 내려보냈네. 그리곤 백가 난쟁이를 닥달해서 제자로 삼게 하 려 했더니. 이 응큼맞은 늙은이가 먼저 눈치채고 뺑소니를 치고 말았지 뭔가. 울화통이 치밀더군. 백가 늙은이는 유윤중의 자질이 모자란 게 싫어서 받아들이지 않은 거야. 그래서 결심했지. 이 녀 석을 내가 거두어 가지고 평생 절기를 몽땅 전해 주어서 그놈의 늙은이 앞에 여보란 듯 떳떳하게 세워놓고야 말리라! 그러나 내 제자가 되려면 우선 심지부터 굳어야 하거든. 그래서 이 녀석의 담 력과 지혜를 시험해 보기로 했지. 먼저 백가 난쟁이의 대제자 악문(岳雯)한테 귀띔을 해놓았어. 유윤중이 깨어나거든 '청라욕 마궁에 들어가서 <육마> 여후의 모가기를 잘라오너라. 그럼 내 제 자로 삼겠다'라고 전갈해 주도록 했지. 과연 이 녀석은 성실한 인물이었어. 악문에게서 내 말을 전해 듣더니 만난(萬難)을 무릅쓰고라도 해내겠다는 거야. 악문은 그 즉시 사천성 변경까지 데려 다 주었지. 내가 미리 부탁을 해놓았거든. 악문이 돌아가고 낯선 땅에 혼자 떨어지자, 그 녀석은 첫발부터 잘못 디뎌 소원사로 들어갔지. 들어서기가 무섭게 청라마궁과 원수진 요승한테 사로잡 혔어. 요승들은 그놈을 <천마해체대법>의 연성에 이용해 가지고 청라마궁 세력을 무너뜨릴 셈이 었지. 요승들은 유윤중을 청라산 맞은편 자오(子午) 정방위 고봉에 앉혀 놓고 술법을 걸었지. 이 녀석은 요승에게 항거할 힘도 없는 데다가 또 <육마>의 모가지를 베도록 해주겠노라고 꼬이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선 홀몸으로 정상에 앉아 매일 그 지독스런 강풍과 추위를 겪고 있는 거야. 너무도 애처로와 구해 주려 했지만,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이 도술은 몰라도 요승에 게 <화력지곡단(火力避穀丹)을 얻어먹고, 또 타좌법(打坐法)까지 전해 받았는지라, 단오절이 되기 전에는 목숨을 빼앗길 걱정은 없거든. 또 천마해체대법 역시 위력이 대단한 것이라 추호라도 심 신이 흩어지는 날엔 당장 주화입마(走火入魔)로 빠져들게 되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제자감의 근기(根基)를 단련 좀 시켜도 좋겠다 싶어, 은밀히 보호하기만 하고 단오절 정오가 오기 전까지 요승들과 청라마궁 패거리들의 동태를 주시하기로 했단 말씀이야. 그동안에도 몇 차례나 정상으 로 올라가서 엿보았는데 이 녀석의 정력도 어지간하더군. 매일 자오시(子午時)만 되면 눈앞에 지 옥의 칼산이 펼쳐지고 온갖 유혹의 환상이 떠오르는 데도 전혀 동요당하지 않고 있어. 그걸 보니 내 안목도 괜찮구나 싶어서 매우 흐뭇하더군... 어제 오늘 내일밤이 요승의 대법에 가장 중요한 고비라, 환상 또한 더욱 무시무시해지고 그 속에서 진마(眞魔)까지 나타나 교란(攪亂)을 부리게 되거든. 그래서 제자감이 견뎌내지 못할 듯하기에 여느 때와는 달리 분신술로 원신을 나누어 돌 보아 주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웬 도인녀석한테 발목을 잡히고 시비가 벌어졌지. 유모(劉某)라든 가 하는 작자인데 찰거머리처럼 쫓아오더군. 이때 요승이 날아오길래 나도 그 뒤를 따라 정상으 로 올라갔어. 그리곤 요승이 돌아간 후에 제자감한테 몇 마디 당부를 해주고 다시 마궁의 형편을 살피러 갔지. 때마침 독룡의 제자 유덕이란 놈이 마두(魔頭)들을 끌어와서는 사문공의 복수를 하 겠다고 소란이 벌어졌어. 독룡, 그 화근덩어리는 즉시 수정구를 비춰 너희편 동정을 살피려고 준 비하더군. 이번에 독룡은 적신교주(赤身敎主) 구반파도 초빙했는데, 공교롭게도 파견한 제자들이 녹포노조란 놈에게 하마터면 산 채로 잡혀먹힐 뻔하다가 돌아갔단 말이야. 그런 관계로 구반파는 필경 장차 일어날 아미투검(峨嵋鬪劍) 때에 요마편을 들지 않게 되었어. 그만해도 너희 아버님은 적지 않게 힘을 덜 수 있을 거야." 입심 좋은 궁신 능혼이 후배들 앞에서 여기까지 털어놓았을 때였다. 뭇사람들은 갑자기 눈앞에 무엇인가 반짝 빛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능혼이 궁둥이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흠흠, 마두녀석들이 과연 솜씨 자랑을 해보일 참이로구나. 너희들은 그저 여기서 잡담이나 나누 고 있거라. 나는 가서 놈들한테 장난질 좀 쳐야겠다!" 말이 멀어지자마자 능혼의 몸뚱이가 번뜩 하더니, 장남고 남매와 두 도동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 졌다. "아까운 기회를 놓쳤어!" 문득 등팔고가 탄식을 내뱉았다. 진작부터 원신이 날아내려서 능혼을 뵙고 자신의 액겁(厄劫)을 모면해 달라는 간청을 드리려 했는데, 기나긴 사설이 끝날 때까지 입도 못 열다가, 이제 겨우 틈 이 나는가 싶었더니 '아차!' 하는 순간에 또 날아간 것이다. 그녀는 제영운에게 부탁을 했다. "여러분, 혹시라도 다음 기회에 능진인을 뵙거든 내 이 겁난을 벗겨 달라고 대신 간청을 드려 주어요." "능사백님은 도법이 현통하시고 조화가 깊으시니 어쩌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성격이 유별나셔서 자기와 연분이 닿는 사람은 굳이 간청을 안해도 이끌어 주시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에는 아무리 빌어도 헛일이에요. 이따가 그분께서 다시 오시거나 아니면 청라욕에 가서 뵙게 되 거든 저희들이 등선배님을 대신하여 힘껏 간청을 드려보겠습니다." "고맙소, 고마와!" 그러나 반나절을 기다려도 능혼은 다시 돌아올 기척이 없었다. 공중에선 독각신취와 신조 불노가 사이좋게 그림자처럼 붙어서 한가로이 떠돌고 있었다. '저 날짐승들은 아주 친숙해졌구나. 헌데 이 눈덮인 설산(雪山)에서 무얼 먹고 지낼꼬?' 능혼이 돌아오기만 무료하게 기다리면서 제영운은 창공에 선회하는 날짐승을 바라보다가, 문득 사도평을 불렀다. "저 독각신취는 자령곡에서 무얼 먹고 살았어요?" "혈식(血食)이죠. 고기를 먹이더군요." "아, 그랬군요!" 제영운은 휘파람을 길게 불어 두 마리 날짐승을 불러내렸다. 그리고 독각신취에게 말했다. "어디 가서 먹을 것 좀 찾아와야지 않겠어요? 온통 눈밖에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있을 거야." 그러자 독각신취란 놈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자령의 분 부대로 사도평 곁에서 잠시도 떨 어지지 않으려는 분명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제영운은 이번엔 독수리를 돌아다보았다. 불타는 듯 붉은 눈에 황금빛 동자를 데룩거리며 불노 는 그녀의 심중이라도 궤뚫어 본 것처럼 동반자 독각신취를 흘겨보더니 '꾸우, 꾸르르!' 우짖고 나서 푸드득! 창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러자 독각신취도 마지못한 듯 뒤따라서 날아올랐다. 얼마 안 있어, 독각신취는 다시 날아내리더니 높직한 암벽 위에 우뚝 서서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독수리가 돌아온 것은 반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사나운 날짐승의 두 발톱은 어디서 후려 왔는 지 엄청난 노획물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윽고 제영운 일행의 눈앞에 팽개치듯 내려놓는데, 먹이는 아직도 살아서 퍼덕거렸다. 황소 두 마리, 그리고 오빌스(額非爾士) 산의 명물인 설계(雪鷄) 십여 마리였다. 일행들은 비록 모두가 벽곡(壁穀)을 하지만 그래도 육류나 화식(火食)을 가리지는 않는다. 제일 먼저 신바람이 난 사람은 주경운이었다. 그녀는 설계 네 마리를 집어들고서 사도평과 주문 을 소리쳐 불렀다. "이걸 봐, 얼마나 포동포동한가. 우리 맛있게 구워 먹자구." 제영운이 그 설쳐대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철부지들 같으니, 장난기는 여전하구먼! 이것 봐요, 여기는 얼음하고 눈밖에 아무것도 없어. 솥 이나 남비는커녕 불쏘시개할 나무토막 한 개도 없단 말이야! 설마 날고기를 뜯어먹을 셈은 아니 겠지?" 맏언니의 퉁박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다. 호들갑스레 수선을 떨 던 주경운, 손에 산 닭 두 마리 를 쳐든 채로 멍청하니 일행들을 돌아본다. 등팔고가 빙그레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 닭은 설산 지방에서도 제일 맛좋기로 이름난 설계라오. 아 주 기막히거든. 나도 예전에는 심 심치 않게 즐겨 잡아먹었지. 요 리 방법도 몇 가지 있는데, 어떻소? 여러분이 좋다고 한다면 내 옛날 방식대도 익혀 드리리다. 그리고 저쪽 얼음 속에다 수천 년 묵은 한벽송라주(寒碧松羅酒)를 몇 독 파묻어 두었는데, 그 술이면 아마 설계를 먹기에 흥취가 돋구어질 거요. 다만, 지금 내 형 편이 직접 꿈지럭거릴 처지가 못되는구먼. 어디 두 분께서 수고스럽지만 얼음덩어리를 깨뜨려 가 지고 그 닭들을 푹 싸서 내 곁 석 자 가까이 되는 바위 위에 놓아 주시겠소? 그럼 잠시 후에 술 안주감으로 기막힌 닭고기 요리를 드리리다." 그 말을 듣자마자, 주문이 먼저 암벽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얼음을 파내기 시작했다. 독수리도 제 몫을 단단히 받아야겠다는 듯이 노획물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 사양 말고 어서 가져다 먹어요!" 제영운의 허락이 떨어지자, 독수리는 암벽 위의 동료를 향해 '꺼억, 꺼억!' 우짖었다. 이윽고 독 각신취도 내려왔다. 두 날짐승은 제각기 황소 한 마리와 설계 세 마리씩을 움켜쥐고서 암벽 위로 나란히 올라갔다. 인간들처럼 번거롭게 지지고 볶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문과 주경운이 얼음을 파내는 동안 열 마리의 닭은 사도평의 손에 내장이 뽑혀서 말끔하니 닥 달을 당했다. 그리고 이내 얼음 부스러기와 눈덩이에 뭉쳐져 등팔고의 솜씨를 기다리게 되었다. 등팔고는 입 속으로 중얼중얼 주문을 외어 우선 큼지막한 평석(平石)을 옮겨다 놓더니 주경운더 러 장검으로 바위를 절구처럼 움푹하게 파내도록 했다. 그리고 얼음에 싸인 닭을 그 안에 놓고 다시 얼음 한 겹을 덧씌운 다음 바윗덩이로 단단히 눌러놓게 했다. 이윽고 준비가 끝났다. 등팔고는 절벽 아래 한 곳을 가리켰다. "술은 저 아래 얼음을 파내 보시오. 얼음층 깊숙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나서 일행을 쭈욱 돌아보더니 빙그레 웃는다. "자아, 그럼 서툴지만 솜씨 좀 보일까?" 문득 등팔고의 입에서 한 덩이 초록빛 화광이 쏟아져 나오더니 평석을 뒤덮어 버렸다. 그것도 잠시뿐, 바위 뚜껑 틈서리에서 뜨거운 열기가 무럭무럭 일기 시작했다. 김은 솟아나오는데 물은 한 방울도 넘치지 않는다. 일행의 코가 벌름거렸다. 향그러운 닭고기 냄새를 맡은 것이다. "이것 참 기막힌 냄새다! 군침이 도는 걸?" "와아, 목구멍에서 난리가 났네!" 주문과 주경운은 숫제 아우성을 쳤다. 군침이 도는 걸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제영운이 너무도 우스워 한 마더 던졌다. "아니, 도대체 며칠이나 고기맛을 못 보았다고 그렇게 걸신들이야? 남들 웃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 봐!" 주문의 눈꼬리가 샐쭉해지면서 대뜸 응수를 하려는데 오문기까지 가세를 한다. "이것 봐요, 등도우님은 여기 설산 얼음굴 속에서 다년간 참수(參修)하시느라 먼지 한 톨 묻지 않고 얼마나 청정하셔? 우리 가 들이닥쳐서 소란을 피운 것도 뭣한데, 거기다 아주 염치좋게 비 린내까지 풍기다니 얼마나 미안한 짓이야? 우리는 정말 못된 손님들이로군!" 주문이 입술을 뾰족 내밀고서 면박을 준다. "흠, 오언니나 큰언니는 하나같이 고린내 풍기는 도학군자(道學君子)들이지! 우리처럼 자연스럽 게 행동하고 거짓뿌렁을 안한다면 얼마나 좋을꼬? 언니들은 방금 등도우님 말씀도 못 들었어. 이 분도 예전에 심심치 않게 즐겨 잡수셨으니까 닭 삶는 방법까지 알고 계시잖아요? 지금 두 언니 말씀이야말로 이분의 모처럼 호의를 무시해 버린 거야!" 제영운은 말문이 꼭 막혔다. "어쩌자고 나까지 끌어넣는 거니? 잔소리 말고 어서 닭이나 익었는지 살펴봐라. 잘 익었거든 이 어르신네부터 맛 좀 봐야겠다!" "헤헤헤, 그럴 땐 큰언니 행세를 톡톡이 하시는구려!" 주문과 주경운 둘이서 쪼르르 달려가더니 바위 뚜껑을 덥석 들어 치웠다. 물씬 솟구치는 열기와 함께 맑고도 향긋한 닭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위 구덩이 속에 얼음 은 벌써 펄펄 끓는 물로 변하고, 살찐 닭 열 마리가 깃털 채 둥둥 떠 있었다. 두 다리를 번쩍 쳐 들고 흔들 때마다 백설같이 흰 깃떨이 푸수수 벗겨진다. 그 다음에는 연하고 포동포동한 살이 뽀 얗게 드러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화식(火食)을 끊은 등팔고를 빼고 인원수대로 나누 어 셈했더니 한 마리씩 차지하 고도 세 마리가 남았다. "꼭 맞췄네! 이 세 마리는 진씨 자매하고 금선 동생 차지야!" 일행은 저마다 단단한 얼음을 깨뜨려 가지고 얼음 표주박 몇 개를 깎아 만든 다음, 가슴속 까지 써늘해지는 미주(美酒)를 퍼서 닭고기에 곁들여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일행은 황막하고도 외진 서장의 설산 한귀퉁이에서 때 아닌 잔치놀음을 푸짐하게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밤 이슥해질 무렵, 채색 구름이 어두운 하늘에서 날아내리더 니 자령 자매와 금선 일행이 아 미산으로부터 돌아왔다. 금선은 응벽애에 당도한 후부터 환자들을 치료해 준 경과를 소상하게 보고했다. 등팔고가 일러 준 대로 우선 오풍주를 꺼내다 영경, 약란에게 마시게 한 다음, 한악이 보상부인의 금단으로 전신 을 안마하여 내독(內毒)이 가셔지자, 다시 육지의 생혈을 얻어 마시게 했더니 환자들은 한 시진도 못되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더라는 것이다. "... 정신이 들길래 나는 진씨 누이들과 함께 출발 준비를 했지. 그랬더니 갓 깨어난 환자들마저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지 않겠수? 자기들도 청라산 공격전에 꼭 참가해야겠다는 거야. 자령 누이 가 보아하니, 환자들 몰골이 말씀 아닌지라, 두 번 세 번 거듭 정양해야 한다고 달랬어. 약란 누 이와 영경 동생은 따라오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정작 데려와 줄 자령 누이가 거절하니 도리 있어 요? 꼼짝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독수리마저 여기에 남았고, 또 뒤쫓아 와 봤자 따라올 처지도 못 되는 줄 뻔히 알거든. 그리고 독수리 좀 빨리 보내 달래. 누나더러는 청라마궁을 깨뜨리거든 조속 히 누이들과 함께 돌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했어. 쓸쓸하고 심심해서 지레 죽겠다는 거야." 금선의 보고를 다 듣고 나서 제영운은 자령 자매에게 고마운 인사를 했다. "고생 많았어요! 두 분 도움이 없었더라면 큰일날 뻔했죠." "그까짓 작은 일 가지고... 언니도 너무 과찬해 주시네요." 자령도 겸사를 했다. 제영운은 다시 독수리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도 영경과 약란은 이리로 오지 못해서 안달이 났겠지. 만약 독수리를 보내면 죽어도 뒤쫓 아 올 거야. 그렇다면 청라마궁을 격파하고 나서 돌려보내기로 하자. 저 날짐승은 주인이 안 온 것을 눈치채고 제멋대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불노를 손짓해 불렀다. "이봐요. 강우사형, 우리하고 함께 있다가 마궁을 깨뜨려 버린 뒤에 같이 돌아가야 해요!" 허나 독수리는 진작부터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데다 금선의 말을 듣고 보니 자기더러 응벽애로 빨리 오라는 것이다. 이러니 제영운의 분부를 들어줄 까닭이 없었 다. 당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독수리란 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꽈아, 쿠르르!' 길게 우짖 고선 허공으로 치솟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뒤미처 독각신취마저 동료를 좇아 '푸드득!' 하고 날 아올랐다. 이번에는 제영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하는 수없이 포기하는 뜻에서였다. 그녀는 독수리 가 백미화상의 명을 받들어 평생토록 이영경을 보호하고 또 서로 목숨 바쳐 의지하는 처지인 줄 너무도 잘 안다. 자기네 일행과 함께 있지 않으려는 데야 뜻대로 내버려 둘밖에 막을 도리가 없 었다. 한참을 있자니 독각신취만 돌아왔다. 자령 앞에 내려앉은 날짐승이 쉬지 않고 우짖는다. 자령은 그 우짖는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제영운에게 설명해 주었다. "언니, 그 독수리는 정말 신통해요. 떠나면서 우리 신취한테 하는 말이, 영경 동생은 아직도 재 난 액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는 백미화상님의 분부대로 그녀의 곁에서 한 걸음도 떨어질 수가 없대요. 그러니 이 사정을 영운 언니에게 전하고 원망하지 말아 달라는 거예요. 저도 낮에 ' 다미산에서 치료할 때 보니까 영경 동생은 화개혈(華蓋穴)까지 살기(殺氣)가 곧바로 뻗쳐올랐더군 요. 아마도 그 살겁이 목전에 닥쳤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말을 들으니 제영운 일행은 자못 근심이 쌓였다. 하지만 지금 형편으론 패를 갈라서 구원할 처지도 못된다. 어쨌거나 제영운은 단안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당면한 우선 목표는 청라마궁을 격파하는 일이다. 조속히 일을 마무리짓고 돌아가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주문은 남겨 두었던 설계와 한벽송라주를 꺼내다가 수천 리 길을 고생한 세 사람에게 주었다. 때 아닌 성찬을 받고서 금선과 한악은 한 입 가지고 먹고 마시고 재갈거리느라 도무지 정신이 없 었다. 일행은 다시 한 번 청라산 공격계획을 의논하고 나서 제각기 바위에 올라앉아 운공을 마쳤다. 이튿날 정오 무렵, 등팔고가 말했던 옛친구 <백수진인> 유천이 찾아왔다. 등팔고는 일행들에게 소개를 시킨 다음 본론부터 물었다. "유도우, 어찌 되었소? 능진인은 만나뵈오셨는지?" "뵙기는 했는데, 말씀도 말구려! 얼마나 혼이 났는지... 등도우가 떠난 직후부터 이튿날 밤중까지 줄창 그 숲 속에서 꿇어 엎드려 빌었다오. 지치고 힘도 빠지고 맥도 풀리고 도무지 안 쑤시는 데 가 없을 정도였소.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떻게 해서든 그 어르신을 감동시키느라 추호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소. 쑤시고 아플수록 더 경건하게 빌었지. 어젯밤 삼경도 거의 다 지날 때까 지 줄곧 엎드려 있었더니 그제서야 능진인께서 훌쩍 나타나시더군. 웬 아이들을 넷씩이나 데리고 말씀이야. 그분은 나를 제자로 거두어 주셨다오. 얼마나 기쁜지 대례(大禮)를 올리고는 덩실덩실 춤출 정도였으니까... 사부님은 나한테 축지부(縮地符)를 주시면서 네 아이를 아미산 응벽애로 데 려다가 이영경, 신약란 도우에게 인계하라고 분부하셨소. 그리고 호송이 끝나거든 다시 현빙곡으 로 돌아가서 아미파의 젊은 도우들께 이런 말씀을 전하라 하셨소. 그래서 부랴부랴 아이들을 보 내놓고 이리로 달려온 거요....." 유천은 능혼의 전갈을 제영운 일행에게 차근차근히 옮겨 설명했다. <아미 후해들에게 분부하노라. 내일이면 바로 단오절이다. 마궁 안에는 번승(番僧)들의 마진이 설치되었지만 나 능혼이 대응할 것인즉, 너무 염려하지 마라. 내일 아침 인시(寅時)가 지나면 오시 경에 조심원이 먼저 강호상의 규칙대로 방문첩(訪問帖)을 지니고 단신 마궁에 들어갈 것이다. 금선에게 명하노니, 너는 자령의 미진기를 빌어 가지고 유천 의 안내를 받아서 조심원에게 가거라. 그리고 조심원의 방문첩을 지참한 도동(道童)으로 가장하고 따라가되, 단단히 조심원의 신변을 지켜주어야 한다. 아울러 검술실력이 조금 뒤떨어진 사람들도 따르게 될 것인즉 힘닿는 껏' 이들 역시 지켜주되, 위급한 상황이 닥치거든 신속하게 미진기를 써 서 탈출시키도록 하라. 나머지 철사도인 일행도 각자 공격대를 짜서 앞서 간 조심원을 뒤따라 출 발할 것이다. 접전이 벌어지면 <오귀천왕> 상화양이 서전(序戰)에서 패하고 우리 측의 허점을 틈타 현빙곡으 로 달아나 등팔고의 설혼주를 빼앗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 설혼주는 정사(正邪) 양 파의 흥망성 쇠가 달린 것이다. 사도평은 출전해 봐야 <만묘선고> 허비랑과 맞설 수 없을 터이니 현빙곡 안에 피신해 있어야 하고, 또 사도평 이외에 제영운, 오문기, 자령 자매 등 여섯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이 더 남아서 등팔고를 도와 설혼주를 지키되 절대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그 나머지는 모두 진시(辰時) 초 무렵에 청라산으로 출발하여 협공을 가하도록 하거라. 그때쯤이 면 마진도 내 손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또한 마진이 격파당하는 시각에 독룡존자와 허비랑, 그리 고 몇몇 솜씨가 뛰어난 번승들까지 일제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너희들은 절대로 적을 가벼이 상대해선 안 된다. 이길 가능성이 없거든 오로지 주문의 천둔보경 과 각자 지닌 법보를 가지고 호신한 채 정오 무렵까지 버텨내기만 해야 할 것이다. 정오가 가까 와지면 내 신호에 따라서 소원사의 요승 반나가잉이 천마해체대법을 발동할 것이고, 이때에는 지 진과 홍수, 폭풍과 불길이 한꺼번에 솟구쳐 일어나리라. 너희들은 내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즉시 신속하게 금선이 지닌 미진기를 받아서 현빙곡으로 탈출하여야 한다. 거기서도 등팔고와 상화양이 대결하고 있을 테니까, 등팔고를 도와 협공을 펼치 고 상화양을 쫓아내도록 하여라. 싸움이 끝나면 나와 유윤중, 유천 셋이서 뒤처리를 맡겠다. 그때쯤이면 아미산에서도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너희들은 현빙곡 일을 마무리짓는 대로 조속한 시간 내에 응벽애로 돌아가야 한다. 도착해 보면 무슨 일인지 자연 알게 될 것이니라.....> 제영운은 능혼의 분부를 전해 듣자, 그 즉시 자령에게 부탁하여 금선한테 미진기를 빌려주고 그 용법을 가르쳐 주도록 했다. 유천과 금선이 떠난 후, 제영운은 일행을 돌아보고 물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어느 동생이 여기 남아서 등도우님과 함께 설혼주를 지키려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입을 꼭 봉한 채 자원하는 이가 없었다. 일행은 모두 청라마궁의 결전에 참 가해서 승부를 내고 싶은 것이다. 서로들 눈치만 보고 나서지 않자, 마지못해서 자령이 자원을 했 다. "제가 남지요." 허나 제영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능사백님의 분부를 못 들었어요? 내일 최후 결전장에서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전적으 로 자령 아가씨의 미진기에 의존해야 하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어요?" 자령이 미처 대꾸를 하기도 전에 오문기가 피식 웃더니 선뜻 나섰다. "진씨 자매님은 능사백의 분부대로 반드시 가야 하고, 주문 동생도 천둔보경을 써서 정오까지 군마(群魔)들의 공격으로부터 일행을 지켜야 하고, 사도평 도우는 당초부터 갈 처지가 못되니 말 할 것도 없고, 큰언니는 삼군의 총수(總帥)이니 빠질래야 빠질 도리가 있을꼬? 그럼 남는 것은 나 하고 경운 동생인데 내 실력은 아무래도 경운보다 훨씬 뒤떨어진단 말씀이야. 어차피 예까지 오 는 도중에 나는 아이들 뒷바라지나 하고, 허드렛일만 맡아 하느라고 적의 낯짝도 한 번 못 본 처 지니까, 아예 게으름이나 끝까지 부려보기로 하죠. 큰언니, 내가 남아서 집이나 볼래요!" 요승 부르잉가의 최후 銀光照眼, 奇寶騰輝 黑看遮天, 妖僧授首 오문기의 뼈 있는 말을 듣고서 제영운은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요 동생, 잘못 생각하셨어! 여기를 지키는 임무가 허드렛일이라니, 너무 가볍게 보아서는 천만에 말씀이야. <오귀천왕> 상화양이란 자는 마교 중에서도 첫째 둘째로 꼽히는 인물이라구! 보통으로 얕잡아 보았다가는 큰코 다쳐요. 등팔고님의 설혼주, 이 보물은 정사 양파간에 흥망성쇠 가 걸린 중대한 것이라고 안 그랬어? 동생이 지는 책임은 우리들보다 더 크고 중요하단 말이야!" 그렁저렁 사형제들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오문기는 현빙곡 수비 책임을 맡고 말았다. 공수(攻守)의 부서가 확정되자, 등팔고는 다시 제영운 일행에게 거듭 부탁을 했다. "나를 구해 주실 분은 오로지 능진인 한 분밖에 없소. 그분의 법보와 단약을 써야만이 내 이 액 겁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이외다. 그러니 여러분께서 마궁에 들어가시거든 부디 그 법보를 찾는데 신경 좀 써 주시고, 능진인께 내가 액겁을 초탈하여 귀진(歸眞)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간청을 드려 주오." "마음놓고 기다리십시오. 분부하신 말씀, 저희들이 성심껏 여쭤올리겠습니다." "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내 얼마나 기쁘겠소? 아무쪼록 여러분만 믿으리다!" 등팔고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몹시도 좋았다. 이번에는 제영운이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내일, 그 <오귀천왕> 상화양이 설혼주를 빼앗으러 온다면 아무래도 오문기와 사도평 두 사람의 힘으로는 상대가 못될 듯싶은데, 팔고님께선 무슨 묘수로 대적하시겠습니까?" "현재 내 육신은 고목처럼 굳어져 있고 기껏해야 원신(元身)밖에 쓸 형편이 못된다오. 이런 상태 로 상화양과 같은 마교 중의 최고 인물을 상대한다는 것부터가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러나 적을 물리치기는 어렵지만 한두 시진 정도쯤은 굳게 지켜내면서 여러분의 원병(援兵)이 당도할 때까지 버틸 힘은 있다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내가 은밀히 설혼주를 도우에게 넘겨서 피신시킬 것 이외다. 기왕에 내 자신 액겁을 당할 바에야 맹세코 그 보물은 원수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 겠소. 설혼주는 내 평생 온갖 고초를 겪고 구사일생 목숨을 걸어서 얻은 보물인데, 그것을 호락호 락 적의 손아귀에 넘겨줄 성싶어요? 어림도 없지. 이따가 나하고 도우 둘이서 적절한 계획을 짜 놓을 테니까, 여러분은 안심하셔도 되오." 제영운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등팔고 역시 약자는 아니다. 또 궁신 능혼이 예측하고 유천을 시 켜 그렇게 안배할 정도라면 이 현빙곡의 수호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저녁이 되자, 등팔고는 제영운 일행 가운데 오문기 한 사람만 남겨놓고 나머지 인원을 지정된 방위에 세워서 각각 검광을 펼쳐 현빙곡 일대를 완전 봉쇠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등팔고 자신도 방어진을 설치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해놓고 나서 육신의 껍질에서 원신이 빠져나와 반석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제영운에게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 현빙곡 방어계 획에 착수한 것이다. 몇 마디 주문(呪文)을 외자 홀연듯 이제껏 그녀가 앉았던 반석이 스스로 움 직여 측방으로 옮겨갔다. 오문기의 눈앞에 그 아래로 뻥하니 뚫린 동굴이 드러났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는 희미하게나 마 오색 광채와 금사(金蛇)와도 같은 빛줄기가 어지러이 날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동굴 가장자리에 선 등팔고는 먼저 진언으로 입구의 봉쇄를 철 거했다. 동굴 속의 오색 광채가 바로 그 봉쇄망이었던 것이다. "오도우, 수고스럽지만 주도우에게서 천둔보경을 빌어오시지요." 오문기가 보경을 빌어오자, 등팔고는 그녀더러 가슴 앞에 비치도록 들게 하고선 앞장서서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따라오시오!" 오문기 역시 몸을 날렸다. 동굴 속 암흑천지는 보경의 광채가 비치자마자 그 즉시 찬란한 선궁요지(仙宮瑤地)로 변하고 말 았다. 원래 반석 아래 지하는 동부(洞府)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금정옥주 (金庭玉柱)에 은우요계(銀宇瑤階)가 으리으리하게 장관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뼛속 까지 에이는 냉기는 오문기처럼 오랜 세월 수도한 사람조차 견뎌내기 힘들만큼 극심했다. 등팔고는 실내 한가운데 놓인 백옥영상(白玉靈床)을 한쪽으로 치웠다. 석굴이 나타나고 그 안에 는 옥갑(玉匣)이 하나 놓여 있었다. 문제의 설혼주는 옥갑 속에 담겨 있었다. "보경을 거두시오." 등팔고가 말했다. 오문기가 천둔보경을 품에 넣자, 또다시 주변은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등팔고의 진언이 들리 더니, 뒤따라 야무진 기합소리가 울렸다. "열려랏!" 그 즉시 옥갑 속에서 한 줄기 은빛 광채가 솟구쳐 올라 동굴 전체를 환하게 밝혀 주었다. 등팔고는 설혼주를 꺼내 들었다. 직경이 겨우 한 치 남짓, 타원형의 구슬이 사방으로 수정과도 같이 투명한 광채를 쏘아낸다. 제대로 마주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광채였다. 등팔고의 음성이 조용하게 울렸다. "이게 바로 내가 천신만고, 구사일생 끝에 겨우 얻은 만년지보(萬年至寶)라오. 평범한 사람은 설 혼주를 보기만 해도 이 강렬한 광채에 못 견디고 그 즉시 장님이 되어 버리지. 나도 이 구슬을 얻고 나서 미처 세련(洗煉)을 하지 못한 까닭에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고 몸까지 굳어버릴 정 도로 망쳐버렸다오. 손에 넣자마자 구슬의 광망(光芒)을 자유자재로 거두어들일 수 있게 단련해야 하는 것인데 말이외다. 이 수정빛 투명광채는 일단 비쳤다 하면 창천까지 뚫고 오르므로 사마외 도(邪魔外道)의 무리들을 끌어들이기 십상이지. 이것을 본 요마들이 빼앗으려고 우글우글 몰려오 리란 것쯤은 두 번 생각하지 않아도 넉넉히 알 만하거든. 다행히도 나는 미리부터 온옥갑(溫玉匣) 을 준비해 놓았으므로 투명광채가 비치기 직전에 겨우 이것을 거두어 넣을 수 있었소. 그리고 술 법으로 동굴 일대를 봉쇄해 놓았다오. 그것도 모자라서 나 자신이 사시사철 휘몰아 닥치는 폭풍 한설을 달게 받으면서까지 동굴 정상의 반석 위에 앉아 이제껏 수호한 거요. 그 뼈를 찌르는 추 위마저 견뎌가며 지킨 덕분에 외부인들의 손에서 설혼주가 무사했지, 아니었다면 벌써 탈취당해 도 여러 차례였을 것이외다. 이 구슬은 <서방야불> 아각달과 싸울 적에 단 한 번 사용해 보았소. 그때 만약 이것이 없었더리면 내 벌써 마화(魔火)에 불타 한 줌의 잿더미로 날아가 버렸을 거요. <오귀천왕> 상화양은 그 요승놈보다 더욱 지독스런 인물이라, 그래서 여기 들어오기 전에 발각 당할까 보아 여러분더러 위를 수호하도록 배치한 것이지. 그리고도 흑무(黑霧)의 방어망을 한 겹 더 설치해서 현빙곡 일대를 봉쇄한 다음에 이것을 꺼내 보여드리는 중이라오... 자아, 그럼 내일 해야 할 일을 말해 주겠소. 이 설혼주는 내 오래 전에 심혈을 기울여서 점화(點化)시켜 놓았으므 로 옥갑에 부적으로 봉쇄만 하지 않는다면 자유자재로 부릴 수가 있다오. 내일 오도우는 적이 나 타나더라도 상대하지 말고, 이 동굴 속에 잠입하여 오로지 내 대신 이 옥갑만 지켜 주시오. 그 전 에 미리 은형술(隱形術)을 일러드릴 테니까, 만약 내일 이 설혼주가 스스로 옥갑 속에 날아들거든 재빨리 몸에 단단히 지니고 동굴 위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더리도 상관한 것 없이 곧장 검광을 일으켜 탈출하고 은형술을 써서 아미산으로 사라져야 합니다.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적을 막아내 지 못하고 원신만 빠져나왔을 거요. 내 육신의 껍질이 파괴당했을지도 혹 모르지. 사도평 도우는 내 별도로 은신처를 마련해 드릴 테니까 적에게 당할 염려는 없을 것이오. 내 원신이 빠져나가고 육신의 껍진이 파괴당했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로 참패한 것은 아니오. 이 계획은 최후의 결정적 실패에 대비해서 이미 마련한 것이니까, 적의 위력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기 때문에 부득 불 이런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쓰기로 했소. 만일 내 육신의 껍질이 파괴당하거든 사후에 여러분 들이 능진인과 아미장교 묘일진인한테 간청을 드려 내 몸을 구해 주시고, 평생토록 고심참담 쌓 아올린 공력을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 해주시오. 그럼 이제 나는 원신과 설혼주를 하나로 합치고 내 앞장서서 인도할 테니 위로 올라갑시다." 말을 마치자 등팔고의 신형이 번쩍 하더니 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투명한 은빛 광채가 반짝이면서 위로 솟구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문기도 그 빛을 따라 동굴 위로 몸을 날렸다. 은빛 투명광채는 반석 위에 이르러 등팔고의 법신 가까이 날아가더니 그 즉시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반석도 원위치로 돌아가고, 그 위에 앉은 등팔고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수고 많으셨소. 모두 검광을 거두시오. 방금 보였던 은빛 광채는 바로 내 원신이 설혼주 와 하나로 뭉쳐진 것입니다. 이 구슬을 가지고 조용히 기다렸다가 내일 그 마귀놈괴 존망을 걸고 일전(一戰)의 승부를 겨룰 작정입니다. 그것으로 또한 액겁에서 벗어나 본신이 환원될 수 있을 것 입니다." 등팔고의 말이 끝나자, 오문기는 또 제영운 일행에게 자신이 본 대로 설혼주의 신비를 설명해 주었다. 시간은 흘러서 어느덧 묘시(卯時)가 되었다. 제영운은 진자령 자 매와 주경운, 주문을 이끌고 청 라마궁으로 떠났다. 등팔고와 오문기, 사도평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일행을 전송했다. 한편 청라욕 결전의 장본인 <연중신악> 조심원은 그동안에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는가? 대가장(戴家場) 싸움이 끝난 후 그는 <육지금룡(陸地金龍)> 위청(魏靑)과 황현극(黃玄極), 철사 도인을 따라서 청성산(靑城山) 금편애(金鞭崖)로 갔다. 그곳에서 <왜수(矮手) 주매(朱梅)의 큰제자 기등(紀登)을 만나고 의기투합하여 절친한 교우를 맺게 되었다. 기등은 조심원 일행에게 며칠이라도 금편애에서 머물기를 권했다. 단오절이 임박하면 자신이 몸 소 사제 도균(陶鈞)을 청라산으로 보내 주어 조력(助力)하게 하겠노라고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강구해서 자기 스승인 <왜수> 주매도 일행을 지원하도록 노력해 보겠노라고 장담했다. 기등의 호의에 조심원 일행이 기뻐하고 감격한 것은 말한 나위도 없다. 철사도인은 그 나름대로 두어 군데 유력한 친구를 생각해내고 그들마저 이끌어들이기 위해 먼저 금편애를 떠났다. 나머지 세 사람은 금편애 주매의 도관(道觀)에 머물면서 철사도인이 돌아오면 재합류하여 청라욕으로 출발하기로 약속을 했다. 사월 하순도 거의 다 지났을 무렵, 갑자기 <왜수> 주매가 산으로 돌아왔다. 조심원은 공경을 다 하여 뵈옵고 주매의 협조를 간청했다. 기등과 도균도 스승에게 무릎을 꿇고 도와주십사 빌었다. 주매는 후배와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번 청라욕 싸움은 그 원인이야 비록 사소한 데서 비롯되었으나 실상 정사(正邪) 양대 세력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런 만큼 당초에는 아미파의 장교(掌敎) 제수명 도우도 나에게 참가할 것을 권유했고, 거기다 <협승> 질범을 비롯해서 아미 측의 몇몇 원로까지 초빙을 했지. 그런데 너희들도 알다시피 대가장 싸움터에 <괴규화) 능혼이 불쑥 나타나지 않았느냐. 그로서는 두 번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 <신니> 우담대사는 우연히 그의 부인 <백발용녀(白髮龍女)> 최오 고를 만났는데, 그녀의 입을 통해서 능도우가 천서(天書) 한 권을 얻었다는 사실과, 이번 각 파에 서 제자를 거두어들이고 정사 양파 세력이 격돌하여 겁운(劫運)을 일으키는 기회를 타서 그 역시 문도(門徒)를 받아들이고 별도로 새로운 문파를 세우려는 웅대한 계획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되었 단 말이야. 능혼 도우는 서장(西藏)의 군마(群魔)들이 막강한 성세(聲勢)로 날뛰면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고 있는 걸 깨닫고, 일부러 자기 목표를 서장으로 세웠어. 그 일대의 마교 세력을 낱낱이 뽑아 없앤 다음, 그 자리에다 새로운 교종(敎宗)을 창립한다는 것이다. 능혼도우의 성품은 괴벽스 럽기 이를 데 없어, 그들 부부는 오로지 단독 행동을 취할 뿐, 여지껏 남의 협조를 구하거나 협조 해 본 적도 없다. 그러면서 무슨 일에든 실패하거나 감히 그들 부부를 격파할 만한 적수도 만나 본 적이 없었지. 우리 역시 그의 성미가 괴팍스러운 것을 익히 아는 터라서 이번 청라욕 싸움에 청하려다가 공연히 덧뜨릴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던 것이야. 청라욕 싸움을 비록 원로 고수들이 주재한다고는 하나, 그래도 싸움의 발단은 조심원에게 있으니까, 장본인이 안 갈 수야 없다. 또 능혼 도우는 과거 추운수와의 해묵은 감정을 아직도 씻어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청라산에 기반을 세우면서 남의 일에는 전혀 참견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독단으로 청라마궁을 상대한다는 말이 지. 또 <협승> 질범은 아미일파는 아니다. 어차피 내년이면 원적비승할 몸이다. 그럼 조심원은 머지 않아서 아미 문하로 귀의하게 될 것이고, 자연 추운수의 도움을 받게 되겠지. 추운수도 그 점에 대해선 이미 수락을 했으니까... <협승> 질범은 아미장교 제도우와 매우 두터운 교분을 맺 은 처지거든. 서장 마교의 무리들은 현재 공공연하게 아미파를 원수로 단정하고 이번 청라욕 결 투를 빙자해서 아미파 세력을 끌어들여 일망타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판국에 아미장교나 동 도(同徒)들이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공교롭게도 능혼 도우가 관련되었기 때 문에 원로급 선배들이 친히 나서기가 어렵게 되었어. 그래서 생각끝에 제도우는 문하제자들 가운 데서 몇 명을 뽑아서 조심원 일행을 돕도록 파견한 것이야. 아마도 지금쯤 비검전서가 응벽애에 당도했을 것이고, 지명받은 후배들이 청라욕으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라, 현진자의 말 에 의하면 <천호> 보상부인의 두 딸도 참전할 예정이다. 보상부인은 조만간에 탈겁(脫劫)을 하게 되었는데, 그 두 딸은 근골과 자질이 극히 뛰어나고, 또 사악한 <만묘선고> 허비랑의 문하를 버 린 사도평과 혼인관계를 맺은 처녀들이다. 그러므로 제도우는 보상부인을 타일러서 그녀의 탈겁 후에 딸들이 잘못 좌도방문(左道旁門)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아미 문하에 받아들이게 조처한 것이 다. 보상부인은 미진기라고 하는 기막힌 법보를 가지고 있었단다. 그것이 청라마궁 격파에 요긴하 게 쓰일 것을 알고서 제도우는 다시 비검전서로 찬하대사의 협조를 구했지. 찬하대사는 보상부인 을 만나 제도우의 뜻을 전했고, 마침내 자기 딸에게 미진기를 주어 아미파 젊은 후배들을 따라 출진시켰다. 그러니까 이번에 너희들은 청라욕 결전을 맞이하더라도 결코 위험한 난관은 겪지 않 을 것이다. 아미파 후배들과는 거의 당도할 무렵이면 만날 수 있게 되겠지. 이제 날짜도 얼마 남 지 않았다. 청라산까지는 기등이 너희들을 보내줄 것이다. 안심하고 떠나거라." <왜수> 주매의 말을 듣고서 조심원 일행은 크게 마음이 놓였다. 아미파 측에서 그 정도로 대비 책을 세웠다면 더 이상 스승에게 번거롭게 간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청라욕 싸움은 이미 조심 원과 <서천팔마> 개인적인 대결차원을 넘어서 아미정파와 서장 마교의 결전으로 확산되어 버렸 다. 즉 조심원 자신은 그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역할만 맡은 셈이었다. 이튿날, 조심원 일행은 <왜수> 주매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청성산을 출발했다. 스승의 분부를 받은 기등이 그 일행 몇 사람을 타전로(打箭爐)까지 날라다 준 다음 곧바로 되돌아 갔다. 조심원은 날짜를 꼽아보았다. 아직 단오절까지는 열흘 정도가 남아 있다. 일행 가운데 황현극을 제외하고는 조심원이나 위청, 도균 셋이 모두 화식을 끊지 못한 범태육골(凡胎肉骨)들이라. 앞으 로 넘어야 할 설산(雪山)의 준령(峻嶺), 인적도 없는 황무지에서 살아나려면 사전 준비부터 해야 만 한다. 그들은 타전로 부근 마을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마른 음식과 일용품을 장만했다. 그리고 다시 하루를 더 머물면서 티베트 라마교(喇麻敎) 참배객들이 왕래하는 지름길을 상세히 알아낸 다음, 비로소 청라산을 향해 진발(進發)하였다. 비록 길 따라서 걷는 보행이지만 위청의 걸음걸이가 워낙 빠른지라, 일행은 사흘도 못되어 마침 내 청라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그들은 관도(官道)를 따라 걷다가 소로와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러 잠시 길섶에 앉아 휴식을 취 하였다. 낯선 지방의 경치는 나그네들에게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맛이 있었다. 한참을 쉬고 있노라니 참배객의 무리가 떼를 지어서 뒤따라 당도했다. 도균은 갈 길을 확인할 겸해서 참배객 일행 가운데 나이가 지긋한 나그네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장,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여기서 청라욕까지 가려면 얼마나 멀지요? 지름길은 없습니까?" "청라욕이라니?" 노인은 도균의 질문에 대뜸 안색이 변하더니 사뭇 두려운 표정을 짓고서 위 아래를 훑어보는 것 이었다. 그리고 대꾸는커녕 도리어 반문을 했다. "그럼 젊은이들은 라싸(拉薩)로 활불(活佛)을 참배하러 가는 길이 아니란 말요? 청라욕에는 뭣하 러 가시우?" "예, 저희 부친께서 오래 전 청라욕 사원을 참배하기를 원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자 식된 도리로 대신 찾아가는 길입니다. 맹세를 했으니 아니 갈 수 없습지요." "청라욕 사원에?" "예, 그렇습니다. 길을 아시거든 가르쳐 주십시오." "하필이면 청라욕엘.....?" "어째 그러십니까?" "난 그 길 모르오!" 노인의 표정은 분명 아는 모양인데, 입으로는 딱 잡아뗀다. 도균은 그게 수상쩍어서 재삼 겸손하게 물었다. "아시는 대로만 일러주십시오. 저희 젊은것들은 초행길이라 몹시 난감하군요. 부디 인정을 베풀 어 주십시오." 그러자 노인은 내키지 않는 듯, 억지로 말문을 열었다. "이치로 따지자면 우리 같은 나그네가 아무 일에나 참견해서는 안 되겠지만, 젊은이를 보아 하 니 악한 같지는 않아서 바른 대로 말해 주는 거요. 청라산에는 지금 아무도 갈 수 없다오." "어째서 못 갑니까?" "글쎄, 가선 안 된다니까!"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부친의 임종에 드린 맹세를 지키느라 천신만고, 불원천리 예까지 왔는데, 문턱에서 되돌아 갈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는 수 없군. 그럼 말해 주지! 나도 어렸을 적에 들은 얘기라오. 수십 년 전만 해도 청라산은 불문(佛門)의 선지(善地)이며, 산중에는 소원사란 큰 절이 있었다오. 또 그 절간에는 활불 두 분이 계셨는데 모두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해내며, 평지에서 연꽃이 피어나게 하는 법력까지 가진 분이 었다더군.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마왕 여덟 놈이 그리로 쳐들어 가서 두 활불님을 번취자(番嘴 子)에 있는 소원사 하원(下院)으로 쫓아낸 다음, 본사찰을 뜯어내고 마궁 한 채를 세워버렸단 말 씀이오. 그 여덟 마왕은 숱한 마신들을 거느리고 사방천지를 휩쓸면서 부녀자와 동남동녀(童男童 女), 금은보화를 닥치는 대로 노략질해 갔소. 그 일대는 서역(西域)과 티베트, 중국으로 통하는 무 역 상인들의 주요 통로였거든. 대상(隊商)들만 습격을 당하는 게 아니었소. 라싸 포달라궁에 계신 활불 달라이라마를 참배하러 가던 향객(香客)들도 여지없이 당했소. 아무리 떼를 지어서 떠나도 한 번 가면 종무소식,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오. 그래서 모두들 활불님께서 제도(濟度)시켜서 극 락의 성지에 머물러 있으리란 소문이 나돌았지. 한데 몇 년 전인가, 마궁에서 도망쳐 나온 자가 하나 있었다오.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내막이 밝혀졌소. 마궁 안에는 술법과 신통력이 무시무시 한 마왕들로 우글거린다는 거요. 그중에서도 위(魏) 뭣이라고 부르는 여마왕이 더욱 지독스럽다더 군. 마왕들은 남녀노소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강간을 하고 또 싫증이 나면 그들의 생혼(生魂)까지 뽑아내어 법보를 만드는 데 쓴다는 것이었소. 산 채로 넋을 뽑다니, 정말 끔찍한 노릇이지! 그 소 문이 퍼져나가자, 활불 참배객들은 모두 청라욕으로 통하는 길을 꺼려 다니지 않았소. 우리처럼 믿음이 굳센 사람들도 미리 활불님의 제자가 나누어 주신 영부(靈符)를 몸에 지니고, 또 대로상으 로만 걸어서 가는 길이라오. 청라욕 지름길은 아예 돌아볼 생각조차 못하지... 그래서 청라욕 통로 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의 발길이 끊겼다오. 더구나 소원사 참배라니 꿈에도 생각 못할 짓이거 든. 여보 젊은이, 아직 꽃다운 청춘 나이에 목숨 버릴 짓일랑 말고 여기서 되돌아 가든지, 아니면 우리를 따라 라싸에 계신 달라이라마 활불님이나 참배하러 갑시다. 그래도 정녕 죽고 싶다면 청 라욕 길을 일러주겠지만, 우리와 동행합시다. 어때요?" "그래도 한번 가 보는 게....." "에잇, 하는 수 없구만! 이젠 나도 모르겠소. 후에 원망일랑 마시우! 저 앞 설산을 넘어서 이백여 리쯤 가면 바로 번취자요. 그곳에 소원사의 하원이 있고, 또 마왕들한테 쫓겨난 활불 두 분이 아 직도 거기 계시단 말을 들었소. 번취자에 가시거든 될 수 있는 한 빨리 소원을 이루고 뒤도 돌아 볼 것 없이 집으로 돌아가시오. 청라산은 그 번취자에서 백여 리밖에 안 떨어졌으니까. 절대로 더 나아가면 안 되오. 내 말 아시겠소?" "고마우신 말씀,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도균은 노인에게 정중히 사례하고 일행한테 돌아와 그대로 전했다. 조심원 일행은 그 말을 듣고 서 마주 눈웃음을 주고받았다. 길은 익히 알면서도 도균이 심심풀이로 노인을 붙잡고 실랑이를 벌였던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는 눈덮인 산맥이 중첩첩 면면히 잇대어져 있었다. 도중에 마을이라곤 하 나도 없다고 들었다. 그들은 마른 음식과 술병을 꺼내놓고 배를 두둑히 채웠다. 얼마 멀리 못 가서 평탄한 관도는 끊어지고, 설산으로 오르는 험로가 시작되었다. 산길은 과연 숨가쁘게 비탈지고 미끄러웠다. 눈부신 설광(雪光)의 반사 때문에 일행은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 다. 절기는 사오월 초여름인데도 엄청나게 쌓인 적설(積雪)은 녹을 줄 모른다. 산마루에 올라서자, 황현극은 검광을 일으켜 타고 앞길을 정찰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말했다. "백여 리 남짓한 곳에 마을이 보이고 붉은빛 담장을 둘러친 건물이 있는데, 그곳이 번취자의 소 원사 하원인 듯하오." 일행은 쉴 겸해서 앞길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그럴 쯤에 문득 파공성이 울리더니, 가까이 내려오는 사람은 바로 철사도인이었다. 모처럼 기억해낸 조력자를 찾으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청성산으로 귀환하여 보니 일행은 이미 출발한 뒤라, 그 길로 예까지 쫓아온 것이다. <왜수> 주 매도 벌써 하산하고 없어 만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심원은 철사도인에게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떠난 사유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주매의 말도 거 듭해서 전했다. 철사도인은 그 말을 듣더니 껄껄 웃었다. "왜수가 공연스런 말로 여러분을 놀렸구먼! 내가 알기로는 능진인 그분의 도량이 그처럼 얕은 분은 절대로 아니외다.여하간에 조도우, 축하하오! 이번 싸움은 걱정할 것 하나도 없으니까. 하 하!" 철사도인이 합류함으로써 일행은 더 이상 걸어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어검비행을 못하는 단 한 사람, <육지금룡> 위청은 철사도인이 데리고 앞서 번취자로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행은 제자기 검광을 일으켜 타고 눈 덮인 설산 봉우리를 굽어보면서 번취자 쪽으로 한갓지게 날아갔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앞서서 날아가던 철사도인이 경악성을 질렀다. "앗, 이상하다!" 뒤미처 그의 몸뚱이는 위청을 옆구리에 낀 채 곧바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나머지 세 사람 역 시 놀랄 틈도 없었다. 무슨 흡인력(吸人力)에나 끌리는 것처럼 꼼짝없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래쪽 산비탈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손짓으로 일행을 부르는 게 보였다. "아, 능선배님!" 지상에 내려선 일행은 도균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가 반가움에 겨워 소리쳤다. 대가장에서 뵈 었던 <괴규화> 궁신 능혼을 알아본 것이다. 그들은 일제히 능혼에게 예를 올리고 니서 도균을 소개했다. 능혼은 일행에게 지시를 내렸다. "머지 않아 번취자에 이를 것이다. 도착하는 즉시 소원사 하원으로 찾아 들어가서 이렇게 저렇 게 하라. 그곳에 묵으면서 내가 수시로 지시할 테니까, 그대로만 따르라. 섣부르게 청라마궁을 탐 색하러 가거나 행적이 드러나면 절대로 아니 된다." "분부하시는 바를 따르겠습니다." 일행이 응답하자, 능혼은 다시 훌쩍 사라져 버렸다. 철사도인과 조심원, 황현극, 도균, 위청 일행 다섯은 능혼이 당부한 대로 검광에 몸을 싣고서 용 약 번취자를 향해 다시 떠났다. 번취자는 실로 황량하기 짝이 없는 촌락이었다. 몇십 채의 토담 초가집이 있기는 하나, 모조리 허물어지고 기울어져, 성한 곳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아마도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된 듯싶었다. 마을 안팎을 돌아보던 조심원은 앞쪽 큰길 가에 커다란 절간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거 진 숲 속 그늘 아래로 대문이 보이고 문앞까지 뻗은 도로변 좌우에는 석등(石橙)이 두 줄로 나란 히 세워져 있었다. 그 절간은 예상했던 대로 소원사였다. 대문 추녀 밑에 걸린 편액(扁額)이 묵묵 히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대명흠사칙건 소원사(大明欽賜勅建昭遠寺) 만력연간(萬曆年間)> 대문은 굳게 잠겼는데, 담장 밖까지 은은하게 범패(梵唄)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도 저녁식사 전 독경을 올리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일행 가운데서도 인상이 제일 온화한 도균을 앞장세워 문을 두드리게 했다. 참배 겸해서 투숙하 려 찾아온 나그네들이라고 둘러댈 심산이었다. 딱딱딱! 딱딱딱! 문고리를 한참이나 두드리고 나서야 겨우 대문 한쪽이 '삐거덕!' 열리더니 중년의 라마승 하나가 머리를 내밀었다. "웬일로 오셨소!" 도균을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묻는다. 도균도 공손하게 대꾸했다. "활불님을 참배하러 찾아왔습니다." "뭐라고, 활불님을? 아니, 여기로 참배하러 왔다고? 으헤헤헷!" 소름끼치게 웃던 라마승이 막 호통을 치려고 입을 열다가는 문득 손님 뒤쪽 일행들에게 눈길이 미치자 그 즉시 입을 다물고서 온화한 안색으로 바뀌었다. 철사도인과 조심원, 황현극, 위청의 행 색을 보아 하니 차림새도 색다르거니와 영웅호걸의 풍모가 뚜렷한 것이 보통 심상한 참배객은 아 닌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중년 라마승은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정중하게 응답했다. "저희 큰방장 어르신과 둘째방장님께서는 지금 승도(僧徒)들을 모두 거느리시고 오재(午齋)를 올 리는 중입니다. 우선 내당으로 드시지요." 말씨는 부드럽고 정중해졌으나 흉악스런 쌍통과 희번덕이는 두 눈빛만큼은 감출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절에 찾아온 손님을 거만하게 대하려다 태도를 일변하는 품이 사뭇 수상쩍기까지 했다. 그것을 일별한 조심원이 철사도인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철사도인 역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일행에게 경계를 발하는 신호였다. 순간적으로 일행 모두가 경각심을 높이고 라 마승의 뒤를 쫓아 절간 안으로 들어섰다. 내전(內殿) 선당(禪堂)에 좌정하자, 안내를 하던 라마승은 그 즉시 바깥으로 나가고, 한참 있더니 지객승(知客僧)이 라마승을 데리고 들어왔다. 뒤미처 어린 동자승이 유차(乳茶)를 바쳤다. 염소 아 니면 말젖으로 발효시킨 유차는 빛깔도 거무뒤뒤한 데다 역겨운 비린내까지 풍겨서 도무지 입에 댈 수조차 없었다. 지객승의 이름은 카센로(喀什羅), 우람하고도 건장한 체구에 아까 그 라마승녀석보다 더 흉악스 런 상판을 지녔다. 피차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나서 카센로는 일행에게 방문한 목적을 물었다. "거사(居士)님들, 무슨 연고로 저희 절을 찾아오셨습니까?" 이번에도 도균이 대표격으로 나섰다. "저희 다섯 사람은 소원사 활불님을 참배드리고 며칠 묵어갈 셈으로 찾아왔습니다. 잘 부탁합니 다." 그러자 지객승 카센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우리 불제자는 거짓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여러 거사님의 행색을 보아 소승은 벌써 대충 짐작 하고 있는데, 진인(眞人)의 면전에서 거짓말일랑 그만 하시지요. 어쩌자고 활불님을 참배하러 왔 다는 거짓말로 끝까지 뻗대시는 거요?" 일행 다섯 가운데 제일 성미 급한 사람이 위청이다. 그는 지객승녀석이 미주알고주알 꼬치꼬치 캐묻는 태도에 진작부터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터라, 대뜸 거칠게 나섰다. "너 이 중녀석, 사리분별도 못하는 놈이로구나! 네놈들은 절간을 열었고, 우리는 참배하러 왔단 말이다. 절에 신도가 투숙하는 건 당연지사요, 하루 묵고 하루치 향촉대(香燭袋)를 바친다는 데 어째서 진짜니 가짜니 따지고 드는 거냔 말이야!" 욕을 먹고서도 카센로는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능글맞게 웃었다. "이치로 따진다면야 소승이 자꾸 묻는 건 실례입지요. 이제 단오절도 멀지 않았으니 누구든지 청라산 소원사로 참배를 드리러 올 것이고, 또 그래서 우리 역시 이곳 소원사 하원에 머물며 왕 림하시는 손님을 영접하기로 되어 있습죠. 헌데 여러분은... 아무리 잘 봐줘도 참배 오신 손님들이 아니거든. 입으로야 그럴 듯하게 꾸며대지만 어느 분도 향화대(香火袋) 한 자루 가진 게 없고, 또 여행하는 짐보따리도 없지 않소? 기껏해야 잡동사니 두어 개뿐이니. 그걸 가지고 어떻게 설산 천 리길을 가겠소? 그런 차림새로 부처님 참배를 나섰다면 강아지도 믿어주지 않을 거요. 여러분, 그 러지 마시고 일찌감치 바른 대로 말씀해 주시구려. 만약에 팔마주께서 초빙하신 손님들이라면 우 리가 실례를 범하지 않게 해주시오." 위청이 그 말을 듣고 재차 호통을 쳤다. "그래, 네놈이 말한 대로다. 우리는 그 여덟 요마의 잔당이 아니라, 그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주러 온 분들이시다. 자, 어쩔 테냐?" "흐흐흐, 팔마주님의 친구가 아니라 적수라면... 우리도 실례 좀 범해야 되겠군! 어디 이름이나 들어봅시다." 어느 틈엔가 안내를 맡았던 라마승녀석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위청은 지객승 카센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벌써 몸을 날려 덮쳤다. 곁에 있던 조심원이 미 처 말릴 틈도 없었다. 훌쩍 카센로의 면전으로 덮쳐 들어간 위청이 막 손을 뻗어 움켜쥐려는 찰 나, 상대방은 교묘하게 몸을 비틀어 그 일격을 선뜻 피해내더니 다음 순간 일지(一指)를 툭 건드 리듯 튕겼다. "헉!" 위청은 삽시간에 혈도를 찍히고 맥없이 고목처럼 털썩 고꾸라졌다. "네놈들, 감히!" 카센로가 위청을 거꾸러뜨리고 입을 벌려 욕설을 퍼부으려는데 도균의 손이 번쩍 쳐들리면서 검 광 한 줄기가 날아갔다. "우왓, 비검이다!" 대경실색을 한 카센로가 아우성치면서 황급히 바깥쪽으로 뛰쳐 달아났다. 비검술에는 도저히 상 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뒤를 검광이 바짝 쫓아갔다. "멈춰랏!" 갑자기 선당 바깥으로부터 붉은 연꽃 한 송이가 날아 들어와 도균의 검광을 가로막아 버렸다. 이 무렵 조심원은 위청에게로 달려가 막힌 혈도를 쳐서 깨어나게 했다. 그리고 일행은 분분히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방문 밖에서 엄한 호통이 울렸다. "네놈들 순순히 나오너라! 어디 이 부처님과 겨뤄보자!" 호통소리와 함께 그 붉은 연꽃이 훌쩍 되돌아 나갔다. 도균이 앞장서서 비검을 휘두르면서 뒤쫓아 나갔다. 나머지 일행도 와르르 뒤를 따랐다. 후원 광장에는 수십 명의 라마승이 버티었다. 선두에는 키가 작달막하고 비대한 화상 한 명이 이제 막 연꽃을 거두어들이다가 추격해 나오는 일행을 보고 재차 호통을 쳤다. "네놈들 어디서 굴러들어 온 개뼉다귀냐? 감히 본사에서 까탈을 부리다니! 어서 정체를 밝혀라. 그래야 이름 없는 귀신이 되는 걸 면할 테니까!" 조심천이 맞받아 호통을 쳤다. "이 요망한 돌중놈들, 발광떨지 마라! 나는 바로 단오절 청라마궁 결투약속을 지키러 온 조심원 이다. 어디 네놈들도 재간이 있거든 부려 봐라!" 방금 연꽃을 쏘아날렸던 땅딸보 화상은 이 소원사의 둘째방장 카잉사푸였다. 그는 불청객이 단 오절 결투약속을 지키러 온 조심원 일행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대경실색을 했다. 그악스런 <사천 팔마>들도 두려워한다던 상대인데 하물며 자기 솜씨로 어림이나 있겠는가? 순간적으로 생각에 잠기는 사이, 자신의 붉은 연꽃은 미처 회수하지도 못하고 추격해 온 도균의 검광에 찍어 눌리더니 삽시간에 연무(煙霧)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 홍련(紅蓮)은 원래 마법 의 환술(幻術)로써 비검에는 상대도 못할 수단이었던 것이다. 철사도인 이하 세 사람도 그들을 에워싼 라마승들이 다수의 힘으로 덤벼들지 않는 이상 소매를 떨치고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그러나 도균은 상대방의 홍련을 격파하자 그 여세를 몰아 번승의 정수리를 노리고 검광을 쏘아 날렸다. "앗, 안 되오!" 철사도인이 기급을 해서 소리쳤다. 오는 도중에 능혼이 신신당부하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느닷없이 천지가 캄캄해지더니 음산한 바람이 사방에서 이는 가운데 후전(後 殿)쪽으로부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 한 개가 '우르르!' 소리를 내면서 날아왔다. 시뻘건 불길 속에선 야차(夜叉)와 맹수, 독룡, 대망(大莽)들이 무수하게 꿈틀거리며 덮쳐들고 있었다. 철사도인은 번승의 요법을 알아챘다. 그는 황급히 도균에게 소리쳤다. "비검을 거두시오!" 고함소리와 동시에 활짝 펼쳐진 그의 손에서 '번쩍!' 하고 한 줄기 흰색 광채가 무지개를 그리면 서 날아오르더니 불덩이와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불길 속의 독룡과 야차, 맹수들은 철사도인 이 발출한 검광에 스치기가 무섭게 소멸되었으나, 불덩어리만큼은 여전히 꺼질 줄을 모른다. 쌍방 은 한참 동안이나 어우러져 싸웠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조심원 일행 중에는 철사도인이 가장 막강한 실력자다. 그럼에도 하찮은 번승의 술법과 막 겨루 어 백중지세(伯仲之勢)를 유지한다면 이거야말로 심상치 않은 사태가 아닌가. 불청객들은 가슴을 조이며 관전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 대갈일성, 호통을 질렀다. "여러분, 손을 멈추시오! 할 말이 있소!" 그것은 번승의 목소리였다. 철사도인 역시 능혼의 당부대로 일을 추진해 나가려면 소원사 패거리와 휴전을 해야만 했다. 그 러기에 번승이 고함치자마자 옳다구나 싶어 비검을 거두어들였다. 검광을 회수하면서도 만약의 간계에 대비해서 자기 일행 앞면을 가로막아 선 채 상대측의 동정을 관망했다. 철사도인의 검광이 철수하자, 그 불덩어리도 과연 뒤쫓지 않고 훌쩍 떨어져 내렸다. 화광이 거두 어진 자리에는 몸집도 거대한 황의(黃衣) 번승이 합장한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나타났다. "여러 시주께서 의심하지 않으신다면 소승의 방으로 드십시오. 긴밀히 상의드릴 말씀이 있습니 다." 철사도인은 능혼의 예언이 맞아떨어지는구나 싶어 얼른 대답하였다. "우리 역시 귀사에 난동을 부리러 온 것은 아니외다. 대화상님과 원수 맺을 일도 없는데, 의심은 무슨 의심을 하겠소?" 땅딸보 번승이 걸어나오더니 일행을 방장실로 인도하여 자리를 잡아 주었다. 이윽고 피차간에 인사를 나누었다. 일행은 그제서야 비로소 두 번승이 소원사의 두 방장 반나가잉과 카잉사푸라는 것을 알았다. 원래 반나가잉은 서천팔마에게 소원본사 절터를 강제로 빼앗긴 데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 래서 <천마해체대법>을 단련하여 오는 단오절 팔마들과 생사결판을 내기로 결심했다. 이런 가운데 며칠 전 팔마에게서 불쑥 전갈이 왔던 것이다. <독각령관 낙삼관 이하 몇몇 강호의 친구들을 청라마궁에 초빙하였다. 이분들의 대부분은 번취 자를 지나올지도 모르니까, 너희는 손님들을 뵙는 대로 정성을 다해 접대하고 마궁까지 인도하라. 그리고 우리의 원수 조심원도 아미파 일당과 함께 그곳을 통과할 것이다. 만약 행색이 수상한 놈 들이 당도하거든 수단껏 처치해 버리되, 손을 쓰기 어려운 상대라면 그 즉시 마궁으로 보고해 주 어야 한다.> 반나가잉은 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역부족인 상황에서 거절할 도리가 없어, 분부대로 번취자 일 대에 파수꾼을 깔아놓기로 응락했다. 팔마의 전령(傳令)이 돌아간 후, 반나가잉과 카잉사푸는 은밀히 상의했다. "여보게 들었나? 이번에 팔마들은 조심원이란 아미파 인물과 큰 싸움판을 벌일 모양이네. 우리 도 이 기회에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써 보기로 하세!" "남의 칼로 사람을 잡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방문객이 만약 팔마의 친구거든 명령대로 접대해서 마궁에 인도해 주고, 팔마의 적수가 온다면 그때 형편을 보아가며 일 좀 꾸며 보자는 걸세. 팔마의 적수라도 별것이 아닐 경우에는 즉각 처 치해서 마궁 녀석들의 신임이나 얻기로 하고, 만일 수단이 막강한 인물일 때에는 아예 그 자와 손을 잡아서 마궁 측의 기밀을 알려준다 이거야. 그리고 쌍방이 격돌하는 날, 우리는 그 틈에 천 마해체대법을 구사해 가지고 그들 쌍방의 누구를 가릴 것도 없이 옥석구분(玉石俱焚) 몰살시켜 버리잔 말일세. 그렇게 되면 우리야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어 잃어버린 옛 기업도 되찾고 부처 님의 향화(香火)를 다시 이을 수 있지 않겠나?" "그거 참 기막힌 계략이요, 형님!" 이렇듯 소원사패거리의 간계가 세워진 후 며칠이 지났다. 그러나 정작 와야 할 낙삼관은 나타나 지 않고 팔마의 초빙을 받은 몇몇 친구들만 연거푸 들이닥쳤다. 반나가잉과 카잉사푸 두 방장의 지시대로 환대해서 마궁까지 인도한 것은 물론이다. 더구나 반 나가잉은 번거로움을 무릅써 가며 몇 차례나 손수 안내하기까지 했다. 겉으로는 팔마에게 충성심 을 돋보이고, 또 마궁 내부와 기밀을 하나라도 더 탐지해 내기 위한 속셈에서였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반나가잉과 카잉사푸는 전체 승도들을 모두 법당에 모아놓고 오재(午齋)를 드리고 있는 참인데 문득 행색이 사뭇 수상쩍은 나그네들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아무리 살펴도 팔마의 일당은 아니고 적수 같아 보이더라는 것이다. 반나가잉은 즉각 둘째방장 카잉사푸더러 나가서 은밀히 탐색해 보라는 분부를 내렸다. 전에 결 정한 대로 형편에 따라 조치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카잉사푸가 뛰쳐나간 지 잠시 후 또 보고가 들어왔다. "방장스님께 아뢰오! 방문자들은 벌써 지객승 카센로와 말다툼 끝에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습니 다. 패거리 중 한 놈은 카센로의 점혈법에 걸려 거꾸러졌으나, 젊은 놈 하나가 검광을 냅다 쏘아 날렸습니다. 그때 마침 다행히도 둘째방장님께서 당도하시어 홍련을 토해 적의 비검을 막아내시 고 카센로를 구출하셨습니다. 침입자들은 하나같이 고수인 듯하여 저희 제자들은 덤벼들지 못하 고 관전만 하고 있습니다." 이때 또 한 라마승이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방장스님께 아뢰오! 침입한 놈들 가운데 한 놈이 단오절 결투의 장본인 조심원이랍니다. 제 입 으로 분명히 말했습니다. 팔마와는 원수지간이라고....." 더 이상 뒷말은 듣지도 않은 채, 대화상 반나가잉은 이미 법당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현장으로 날아가고 보니 바야흐로 도균의 검광이 카잉사푸의 홍련을 격파하는 중이다. 반나가잉은 즉각 써 오던 <마가추혼팔면용귀(摩伽追魂八面龍鬼>의 마법을 펼치는 한편, 또 그것 만으로도 이길 듯싶지 않아 자기 원신(元身)을 불덩어리로 변화시켜 마법을 에워싸고 덮쳐들었다. 우선 카잉사푸의 실수를 엄호하면서 상대방의 실력도 시험해 본 연후에 적을 삼든지 우군으로 삼 든지 결정할 속셈이었다. 그는 한눈에 도균의 비검술이 막강한 고수에게 전수받은 것임을 간파하고 마가대법으로 응수한 것이었다. 뜻밖에도 청년은 마가대법에 맞닥뜨리기가 무섭게 비검을 회수하면서 퇴각하더니, 그 대신 맞은 편에서 도인 한 명이 번뜻 나타나 손을 휘둘렀다. 뒤이어 무지개와도 같은 백색 검광이 길게 쏘 아져 와서 자신의 마가대법을 순식간에 격파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대로 나갔다가는 원신마저 좋은 꼴을 보기 힘들리라고 직감한 나머지 반나가잉은 그 즉시 고함쳐 휴전을 요청한 것이다. 방장실 안에 좌정하고 나서 반나가잉과 카잉사푸는 방문객의 내력을 소개받자 속으로 뛸 듯이 기뻤다. 과연 기대할 만한 협력자가 다섯씩이나 온 것이다. 두 번승은 속에 품고 있었던 팔마 대 응책을 기탄없이 털어놓았다. 그리고 청라욕 본사를 탈환하고 기반을 되찾는 데 도와주신다면 무 겁게 보답하리라고 약속했다. 철사도인 역시 나름대로 속셈이 있는지라 즉석에서 흔쾌히 응락했다. 반나가잉은 자기네 구체적인 복수계획으로 청라산 자오(子午) 방위상에 천마해체대법을 설치하 여 현재 단련중이라는 비밀까지도 조심원 일행에게 알려주었다. 단오절 그날 공격자들은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정오시(正午時)까지만 버텨 준다면 그 나머지는 소원사 측이 맡아서 처치할 것이라고 호언장담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천마해체대법의 비밀, 즉 당일에 옥석을 가리지 않고 몰살시킨다는 계획만큼은 숨기고 말이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린 라마승 하나가 총총걸음으로 들어왔다. "방장님, 팔마주의 심부름을 받고 부르잉가(布魯音加)대사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무슨 분부가 내 렸는지 급하게 오고 계십니다!" "뭐라고, 부르잉가대사가... 이거 큰일났군! 여보게 아우, 어서 손님들을 딴 데로 피해 모시게!" 반나가잉은 대경실색을 했다. 다급한 어조로 카잉사푸더러 조심원 일행을 피신시키도록 분부하 더니, 자신은 허둥지둥 영접하러 나갔다. 뒤에 남은 카잉사푸가 벽에 걸린 손잡이 고리를 잡아당겼다. 스르르 벽 한쪽이 움직이면서 궁륭 형(穹隆形)의 문이 열렸다. "자, 여러분, 이 안으로!" 카잉사푸는 서둘러 일행을 안으로 인도했다. 겨우 밀실의 문이 닫히고 나자 이내 발소리가 저벅저벅 들리더니 지객승 카센로의 안내를 받으 며 부르잉가란 화상이 들어서는 인기척이 울렸다. 부르잉가는 과연 누구인가? 서장(西藏) 마교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다. 오래 전 <신수비구> 위 풍랑이 제멋대로 스승 곁을 떠나 온갖 악행을 자행하며 날뛰자 광명사태(廣明師太)는 문호의 수 치를 씻고 계율에 따라 제자를 징벌하기 위해 천산(天山)으로부터 이곳 청라산까지 찾아왔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제자 위풍랑은 엄한 스승이 찾아오리라 예측하고 미리 대비책을 강구해 두고 있 었다. 그녀의 협력자가 바로 부르잉가였던 것이다. 그만큼이나 두 남녀는 흉금(胸襟)을 벗어붙인 막역 지우, 절친한 사이였다. 광명사태가 당도하던 날, 부르잉가는 위풍랑의 곁방에 잠복, 광명사태가 제자의 깜찍한 애걸읍소(哀乞泣訴)에 마음이 풀어진 틈을 타서 오짐자(烏斟刺)로 급습을 가하여 왼팔을 못 쓰게 만들었다. 그 결과 광명사태는 짐독(斟毒)의 고통을 못 이겨 스스로 팔을 자르고 마침내 한을 품은 채 세 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부르잉가는 아예 마궁에 눌러앉아 위풍랑과 서천팔마를 도와서 하늘 무서 운 줄도 모르고 날뛰면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풍랑이 성도에서 묘일부인과 찬하대사의 협공을 받고 참살당하자, 부르잉가는 그녀의 원수를 갚겠다고 굳게 맹세한 나머지 청라욕 부근 어느 산골짜기에 찾아 들어가 새로운 법보를 단련하기 시작했다. 그가 연성해낸 법보는 여든한 자루의 마도(魔刀)였다. 그것으로 아미파에 대한 복수는 충분하리 라 자신을 기지고 부르잉가는 어제 비로소 청라마궁으로 귀환했다. 서천팔마는 부르잉가에게 단오절 결투를 알려주고, 이 싸움에 적지 않은 아미파 무리들도 참전 할 것이라는 사실을 귀띔했다. 아울러 아미 측의 대거 참전에 대비해서 이쪽 역시 독룡존자가 주 동이 되어 <오귀천왕> 상화양, <적신교주> 구반파, <만묘선고> 허비랑 등 서장 마교의 원로 고 수들이 합류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덧붙여서 독각령관이 참가할 예정에 관해 설명했다. "푸르잉가 사숙님, 독각령관은 사실 우연한 기회에 얻은 응원군이었습니다. 먼젓번 저희 대사형 유덕이 독룡 사부님의 분부를 받들고 만묘선고님을 초빙하여 오던 도중에 그분과 마주쳤지요. 만 묘선고님이 청라결전에 참가하라고 권유했더니 그분은 즉석에서 쾌히 응락했습니다. 허지만 급히 만나야 할 친구가 있다면서 단오절 이전에 청라욕에 합류할 것을 언약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번취자의 소원사 하원에 당부해서 그분이 오시거든 정중하게 모셔 이리로 안내를 하도 록 수배해 놓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부르잉가는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번취자라... 그곳은 청라산으로 통하는 요로(要路)에 있지. 만약 적들이 사천(四川)에서 출발한다 면 반드시 번취자를 통과해야 할 거야. 소원사의 반나가잉패거리가 자네들 지시대로 우리 손님들 을 영접하기만 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허나, 가령 말일세. 그 녀석들이 적과 손을 잡는다면 어쩔 텐가? 자네들한테 이곳 본산(本山)을 빼앗겼으니 그놈이라고 배알이 뒤틀리지 않았겠나? 공연히 흑심을 품고 그리로 지나가는 아미파 놈들과 야합(野合)해서 배반할 음모라도 꾸민다면 큰일이 지!...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서 그 녀석들을 단단히 단속해 놓고 와야겠네. 만일에 적이 날짜 전 에 거기 도착해서 투숙하게 된다면 섣불리 상대하지 말고 내 오짐자의 독을 음식물에 타서 죽여 버리도록 조치하겠네." 부르잉가는 그래서 번취자의 소원사 하원을 찾아왔던 것이다. 대방장 반나가잉은 그를 방장실에서 영접하였다. 자리를 잡고 수인사가 끝나자 부르잉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근일에 팔마들이 초빙한 친구들 말고 딴 인물은 여기 온 적이 없는가?" "어떤 인물 말씀입니까?" "아미파 놈들 말일세!" "없었습니다. 만약 왔다면 저희들이 가만 둘 성싶습니까?" "아무렴, 그럴 테지." "그런데 대사님께선 어인 일로 행차하셨습니까?" 반나가잉의 반문에 부르잉가는 대답 대신 오짐자를 꺼내 주고, 그 사용법을 상세하게 일러주었 다. 그리고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표적까지 설명한 다음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단오절 아침이 되거든 이것을 내게 반환해야만 하네. 손수 가져올 것은 없고 그저 여기서 바늘 끝을 청라궁 쪽으로 향하고 내가 방금 일러준 주어(呪語)를 외우기만 하면, 바늘이 스스로 나한테 날아올 것이네." 부르잉가의 어조에는 반나가잉이 자기네 터전을 빼앗긴 원한을 품고 모반하리라고는 추호도 의 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또 오짐자야말로 자기 심장을 찔러 그 피를 가지고 단련해낸 법보인지라, 반나가잉 측에 무슨 조짐이 있으면 즉각 되날아서 돌아올 것이므로, 그들이 딴 마음을 품고 있더 라도 걱정되지 않았다. "또 달리 무슨 분부라도 계시온지?" 반나가잉이 묻자, 부르잉가는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없네. 그저 내가 당부한 데로 지켜주게. 그럼 난 가보겠네!" 반나가잉은 그를 대문까지 공손하게 배웅했다. 부르잉가가 떠나자, 그는 황망히 방장실로 돌아와서 밀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심원 일행에 게 방금 부르잉가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일일이 알려주었다. 철사도인은 반나가잉에게서 문제의 오짐자를 건네받았다. 길이가 세 치 여섯 푼쯤 되는 나뭇가 지 형상인데, 여느 바늘보다 굵고 투박스러워 보였다. 끝은 아홉 갈래로 갈라진 것이 바탕은 쇠도 돌도 아니고 더구나 나무 같지도 않은데 새까만 광채가 번뜩이면서 은은히 피비린내까지 풍기는 것이다. 이 법보가 광명사태를 해쳤단 소문은 철사도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이나 세밀히 살펴본 다음, 그것을 다시 반나가잉에게 돌려주었 다. "위험한 물건이니 조심해서 잘 간수해 두시오." 반나가잉은 오짐자를 거두어 넣고 나서 둘째방장 카잉사푸에게 분부했다. "어디 조용한 밀실을 준비해서 손님들을 편안하게 모시도록 하게나." 바로 그때였다. 문 밖 뜨락에서 느닷없이 대갈일성, 호통소리가 터졌다. "요 쥐새끼들, 간도 크게 원수놈들과 내통하다니! 이리 썩 나와서 목숨을 바쳐라!" 그 호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반나가잉이 품속에 간직했던 오짐자가 훌쩍 튕겨져 나오더니 제 물에 녹색 불덩어리로 변해 가지고 방장실 창문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 "앗!" 좌중의 사람들이 대경실색을 했다. 반나가잉은 허둥지둥 철사도인에게 간청했다. "저 대머리 중놈이 다시 돌아왔소! 분명 우리 냄새를 맡은 모양이오. 여러분, 저놈을 놓치면 큰 일납니다. 부디 협력해 주십시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반나가잉은 자기 먼저 불덩어리로 변하여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둘 째방장 카잉사푸도 철사도인, 조심원, 황현극, 도균, 위청과 함께 앞을 다투어 쫓아나갔다. 과연 방장실 뜰 앞에는 부르잉가의 우람한 모습이 우뚝 서 있었다. 소원사를 떠났다가 되돌아 온 것이다. 사실 부르잉가는 소원사 절간 문을 나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반나가잉 일파의 모반에 대해 선 낌새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는 갑자기 가슴에 뜨끔한 느낌을 받았다. '엇, 이상한데? 오짐자의 반응이다!' 뒤미처 그는 뇌리에 무엇인가 짚이는 게 있었다. '가만 있자. 이건 좀 수상한 걸... 여느 때 같으면 방장 두 녀석이 모두 나와서 영접을 하고 배웅 도 하고 극진하게 술 대접까지 해주었는데, 오늘은 어째서 둘째방장놈이 쌍통도 보이지 않았을 꼬? 대방장녀석 역시 거기에 대한 변명은 일언반구도 없었어... 이제 생각하니까 그놈의 표정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또 내가 간다는데 술 한 잔 접대는커녕 더 있다 가란 말 한 마디도 없었지! 아무래도 수상해. 어디 되돌아가 봐야겠다.' 그래서 부르잉가는 발길을 되돌렸다. 소원사에 당도하자 그는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방장실까지 잠입해서 반나가잉의 동정을 살폈다. 과연! 반나가잉은 물론이고 아까 자기한테 얼굴도 안 내밀었 던 카잉사푸마저 방안에 천연덕스레 앉아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낯선 패거리 몇몇 놈과 어울려 서 자기의 법보 오짐자를 꺼내 놓고 장난질까지 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두 마디씩 주고받는 대 화로 보아하니, 낯선 자들은 모두가 적들이다. 부르잉가의 속에선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그 래도 오짐자를 빼앗길까 무서워 우선 진기를 운기하여 법보를 회수하고 나서 냅다 호통을 질렀던 것이다. 이윽고 부르잉가와 그 적수들은 방장실 앞마당에 대치하고 섰다. 반나가잉은 자기네 무공이 대부분 마교의 참배제련지법(參拜祭煉之法)이라 갑자기 강적과 마주 치면 즉각 대응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안다. 그는 졸지에 맞닥뜨린 부르잉가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피신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다. 자기의 배반음모는 이미 부르잉가에게 발 각당한 처지다. 싸워서 패하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설혹 이긴다 하더라도 그를 살려서 놓치는 날엔 그 즉시 팔마에게 알려질 것이고, 따라서 이제껏 심혈을 기울여 쌓아온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꿈은 수포로 돌아갈 것은 물론, 소원사 전체 인명과 재산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반나가잉은 철사도인 일행의 힘을 빌어 부르잉가와 결사적으로 싸우리라 결심했다. 상대방의 실 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익히 아는 지라, 그는 감히 허투루 대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선공(禪功)의 위력으로 자신의 원신을 변화시켜 가지고 붉은 불덩어리가 되어 덮쳐들었다. 부르잉가는 반나가잉이 자기에게 감히 진신(眞身)으로 상대를 못하는 걸 보고서 겁을 먹었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상대 여섯 중에 그 하나만이 나서자, 그 나머지는 별 볼일도 없는 오합지졸(烏 合之卒)이라고 예측했다. 또 그는 반나가잉이 마교의 제련진전(祭煉眞傳)을 터득한 몸으로 청라마궁 정면 자오 방위에 천 마해체대법을 펼친다면 팔마의 생사존망이 어떻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대법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일 공력을 들여야 하는가? 그것조차도 안다. 부르잉가는 적을 가볍게 보았다. 즉석에서 독수(毒手)를 펼쳐 죽일 것이 아니라 반나가잉 이하 일당을 실컷 데리고 놀다가, 다시 사로잡아 가지고 청라궁으로 돌아가서 자랑해 보이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상대편에서 붉은빛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서 여유만만하게 일지(一指)를 튕겨냈다. 그 즉시 다섯 줄기의 누런빛 검광이 뻗어나가 붉은빛을 선뜻 저지시켜 버렸다. 부르잉가는 또 자기 위력에 적들이 겁을 먹고 지레 도망칠까 보아 사전 조치를 취하기로 마음먹 었다. 그는 가사(袈裟) 속에서 그물처럼 생긴 올가미를 끄집어 내어 주문을 외는 것괴 동시 허공 에다 흩뿌리듯 던져 펼쳤다. 그물은 요기(妖氣) 자욱한 안개로 변하여 피비린내 풍기는 바람을 타 고 솟구치더니 삽시간에 소원사 전체를 덮어씌우고야 말았다. 부르잉가의 적들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리가 없다. 장사(壯士)차 림을 한 두 사람이 먼저 요격 (邀擊)을 개시했다. 두 줄기 흰빛 검광이 부르잉가를 노리고 곧바로 쏘아져 갔다. 그러나 부르잉가는 그 정도쯤이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다섯 줄기 검광 중에서 두 줄기를 갈 라내어 상대편의 공격에 마주쳐 나아갔다. 뒤따라서 또다시 두 줄기 흰빛이 무지개를 그리면서 무서운 기세로 덮쳐들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부르잉가는 속으로 찔끔 놀랐다. 공격에 가세한 두 검광이 앞의 것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아하, 저놈들 중에도 만만치 않은 고수가 있었구나!'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법 위력을 단단히 믿고 있었다. 재차 반나가잉을 제압하고 있던 나머지 세 줄기 가운데 두 검광을 길라내어 맞받아치면서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이 철부지 놈들아! 그래도 항복하지 못하고 재롱을 떠는 게냐? 부처님께선 벌써 <나찰음풍망 (羅刹陰風網)>으로 이놈의 절간을 송두리째 덮어버렸단 말이다. 내 만약 너희들 중에 한 놈이라 도 놓아준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때였다. 느닷없는 음성이 부르잉가의 말꼬리를 이어서 호통을 쳤다. "대머리 도적놈! 기껏 구반노파의 월경 닦은 걸레조각을 훔쳐 가지고 큰소리를 치는 거냐? 정말 염치도 없는 놈이로구나! 행패 부리지 말고 잠깐만 있거라. 내가 너한테 좋은 구경 시켜줄 테니!" 부르잉가는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서 상대방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여섯 놈 가운데 넷은 바야흐로 비검을 움직이면서 자기와 상대하고 있다. 이놈들은 입도 뻥끗하 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놈은 싸움판 곁에 서서 눈이 휘둥그래진 채 관전하고 있는 소원 사 둘째방장 카잉사푸녀석과 또 하나 왁살스럽게 생겨먹은 사내놈뿐이다. 아무리 봐도 상승(上乘) 의 도행을 익힌 놈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나찰음풍망의 내력을 알고 있단 말인가? 참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안 되겠다. 내 우선 저 두 놈부터 처치해야겠구나!' 부르잉가는 속으로 구결을 외면서 허공에다 오짐자를 쏘아올렸다. 새파란 초록 불꽃이 쏜살같이 <육지금룡> 위청의 골통을 노리고 날아갔다. "위청, 빨리 피하시오!" 부르잉가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던 철사도인의 창급히 외쳤다. 그와 동시에 또 한 손을 휘저었다. 한 줄기 푸른빛 검광이 날아오르더니 오짐자의 초록빛을 향해 마주쳐 나아갔다. 두 법보가 정통으로 맞부딪는 그 순간이다. 갑자기 오짐자의 녹색 불덩어리는 무엇에 빨려들기 라도 하듯 훌쩍 선두 방향을 돌리고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방금 그 호통치던 목소리, 사뭇 귀에 익구나. 누군가가 응원을 하러 왔어!' 철사도인은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오짐자가 보이지 않는 우군의 손에 격파당했다고 확신이 서자, 그 즉시 푸른빛 검광마저 부르잉가의 협공에 정면으로 투입했다. 한편 부르잉가는 놀랍기보다도 미쳐서 환장할 지경이 되었다. 이제 가뜩이나 비검 셋을 가지고 철사도인과 황현극의 양면 공세를 막느라 애를 먹고 있는 판인데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법 보 오짐자마저 눈 깜짝할 사이에 빼앗겨 버린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도인놈은 또 한 줄기 검광 을 일으켜 가세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지막대한 협공을 무슨 수로 막아낸단 말이냐? 싸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 정신력이 흩어지면 그것으로 승부는 결판나는 법, 부르잉가는 당황한 나머지 비검을 조종하던 손끝이 떨렸다. 그 순간에 철사도인의 청백 두 줄기 검광은 마주쳐 오던 적의 황색 광채를 선뜻 휘감아 졸라서 두 동강내고 말았다. 철사도인이 승리를 거두자, 그것을 본 황현극도 원신까지 동원하여 정면의 적 검광을 찍어누르 기 시작했다. 뒤미처 철사도인의 청백색 비검이 날아들었다. 삼검이 협공을 가하는 기세를 부르잉 가의 일검이 당해낼 재간이 있단 말인가. 세 줄기 검광에 조이기가 무섭게 그악스럽던 누런빛 검 광도 맥을 잃고 대여섯 토막으로 쪼개지더니 유성처럼 푸스스 땅에 떨어졌다. 겨우 버텨내고 있던 선봉장 조심원과 도균은 뜻밖에 증원군이 셋씩이나 가세하자, 저도 모르게 없던 기운까지 부쩍 솟아나왔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부르잉가도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머지 비검 셋은 경각지간에 무참하게 격파당하고 폭풍에 휩쓸린 구름조각처럼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부르잉가는 한순간의 태만으로 인하여 엄청난 손실을 맛본 것이다. "쳐라!" 철사도인 일행은 기세등등하게 검광들을 휘몰아 돌진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면에 짙은 안개 가 풀썩 일더니 부르잉가의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적의 종적을 놓친 일행들은 잠시 공세를 늦 추면서 안개 속을 두리번거렸다. 자욱하게 퍼진 안개 속에서 번쩍번쩍 녹색 불꽃이 꿈틀거리는 일행의 비검들을 집중공격하기 시 작했다. 그러나 뻗어나간 검광은 제각기 무엇에 가로막힌 듯 그 자리에 딱 멎어버린 채 도무지 전진하는 기척이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셈이야?" "조심하시오!" 서로들 경계하고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일행 여섯은 갑자기 하늘과 땅이 뒤바 뀌는 듯한 환각 속에 빠졌다. 사방천지에서 귀곡성이 울리면서 역겨운 비린내가 바람결에 실려와 코를 찔렀다. <육지금룡> 위청과 둘째방장 카잉사푸가 제일 먼저 혼절해서 고꾸라졌다. 조심원과 도균 역시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두 분, 정신차리시오!" 철사도인이 두 사람을 일깨웠다. 그러나 황현극은 별로 두려움 같은 걸 느끼지 않았으나 요승이 도대체 무슨 술법을 부리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검막을 치기로 합시다!" 철사도인의 말이 떨어지자, 황현극과 조심원, 도균은 일제히 연합검진을 펼치고 쓰러진 두 사람 을 중심으로 사주경계(四周警戒)태 세를 형성했다. 그리고는 계속 무진(霧陣)의 동태를 주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안개 속에서 근 백 송이나 됨직한 금화(金花)가 솟구치더니 부르 잉가의 음성이 천둥치듯 울려나왔다. "내 이미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쳤으니까 너희놈들 날개가 돋쳤어도 못 빠져나간다. 그래도 항 복을 않겠다면 단숨에 이 수라마도(修羅魔刀) 여든한 자루로 네놈들을 모조리 고기떡으로 짓이겨 버릴 테다!" 마침내 부르잉가는 비장의 법보 수라도를 내놓은 것이다. 싸움이 시작된 이래 지금껏 적의 연속 공격에 얽매여 법보를 시전할 여유가 없었는 데다 오짐자마저 까닭도 모르게 실종되었으니 초조 감 속에서 통분한 마음까지 일어 이를 갈아붙였다. 그는 강적들을 상대로 이렇게 질질 끌려가다가는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다고 직감했다. 독심을 품고서 기회만 엿보는 가운데 자신의 계도(戒刀) 다섯 자루마저 격파당하자, 이제는 적을 산 채로 잡겠다는 생각도 버렸다. 도광(刀光)이 차례차례 부서지는 동안 그는 마법의 주문을 은밀히 외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가 무럭무럭 일어나자 그 속에 은신한 채 자기 원신을 여든한 자루 수라도와 결합시켜 놓고 적을 향 해 최후의 경고를 발한 것이다. "어쩔 테냐? 항복할 거냐, 아니면 수라도에 고기떡이 될 테냐?" 그는 의기양양, 또 한 번 으름장을 놓았다. 이제 넷밖에 안 남았다. 이때 누군가 코웃음을 쳤다. "흥!" 부르잉가는 어떤 놈인가 싶어 무진(霧陣)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정면의 네 놈은 여전히 그 자리 에 선 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호신검막을 치고 있을 뿐, 어디 코웃음칠 여유나 있겠는가! '이것 참 괴이하구나! 도대체 누가 또 있단 말이냐?' 문득 예감이 이상해졌다. 그는 후딱 고개를 쳐들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뿔싸!' 하늘에는 별빛만 총총하고, 자기가 쳐 놓았던 나찰음풍망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 닌가! 또 적의 손에 빼앗기고 만 것이다. 오짐자를 채뜨려 간 놈이 극성맞게도 이번에는 음풍망까 지 거두어 갔다. 부르잉가는 마치 벌거숭이나 된 것처럼 오한에 떨었다. 그렇다고 놀라 떨고만 있을 처지가 아니 다. 이젠 지체없이 생사결판을 내야만 한다. "우와아아!" 맹수의 포효가 터지더니 그의 손에서 여든한 자루 수라비도(修羅飛刀)가 일제히 안개 속을 뚫고 날아올랐다. 철사도인이 그것을 보았다. 적이 쳐 놓은 안개 속에서 금빛 꽃떨기들이 유성처럼 날아오고 있었 다. '이건 보통이 아니다!' "여러분, 비검을 거두시오!" 그는 대갈일성, 동료들의 검막을 풀게 한 다음, 자기 단독으로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그때 앞쪽에서 문득 제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철가도사! 공연히 덤벙대지 말고 자네 비검이나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라구. 멀찌감치 물리서서 내가 이독공독(以毒攻毒)으로 저놈을 요리하는 거나 봐두게!" 그 음성을 들은 것은 철사도인 혼자가 아니었다. 나머지 일행 다섯에 상대편 부르잉가마저도 들 었다. 그러나 발설한 장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초록빛의 빛덩어리는 백여 금 빛 꽃송이를 이끌고 눈앞에 닥쳐왔다. 씨잉! 휘리리! 위기일발의 찰나, 정면에서 피비린내 풍기는 일진광풍이 풀썩 일더니 뒤미처 짙은 안개가 음산 한 구름덩어리를 휘몰아 가지고 이제 갓 닥쳐오던 초록빛 불길과 금빛 꽃송이를 한꺼번에 에워싸 버렸다. 그 다음 순간, 온 천지가 캄캄해지고 귀곡성이 사면팔방 정신을 못 차리게 울부짖었다. 오로지 보이는 것이라곤 자욱하게 퍼진 운무(雲霧) 속에서 미친 듯이 마구 날뛰는 초록빛 불덩이와 금빛 꽃송이의 번쩍거림뿐이었다. 일행은 엄청난 광경에 넋을 잃고 숨조차 막혀 버렸다. 한참 있자니 누군가 암흑 속에서 냅다 호통을 지른다. "요사스런 중놈, 비도의 위력도 지독하구나! 이봐, 철가도사야, 어서 빨리 동료들을 데리고 물러 서지 못할까!" 철사도인 일행이 미처 그 말대로 움직이기도 전이었다. 찌이익, 쫘아!... 쿵! 비단폭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폭음이 크게 울리더니 자욱한 운무 속을 뚫고 초록빛 불덩어리 가 금빛 꽃송이를 휘몰고 '위잉!' 솟구쳐 나왔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번쩍, 몸집도 왜소한 늙은이 가 모습을 드러냈다. 늙은이의 손바닥이 번뜩이는 찰나, 비단폭과도 같은 금빛 광채가 길게 꼬리를 끌면서 곧바로 초 록빛 불덩어리와 금화(金花)의 빗살을 도매금으로 휘감아 버린다. 이어서 또 한 줄기 금빛이 눈부시도록 번쩍이면서 허공으로부터 폭포수 떨어지듯 내리꽂혔다. 두 번째 금빛 광채 속에서 일 장 가웃이나 됨직한 손아귀가 나타났다. 그것을 본 늙은이는 자신 의 금빛을 선뜻 거두어들이고 몸뚱이를 비틀더니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으나 철사도인 일행은 그 늙은이가 <왜수> 주매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 다. 거대한 손가락 끝에서 다섯 줄기의 채색 연기가 풀썩 일었다. 그 연기는 법당 안마당을 자욱하 게 뒤덮었다. "으아아!" 채색 연기 속에서 참혹스런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요승 부르잉가의 초록빛 불덩어리와 금화는 모조리 녹아버리고, 짙게 깔려 있던 운무도 연기를 뿜으며 타오르더니 이윽고 한 줌 잿더미로 변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금빛 광채 속에 나타났던 거대한 손아귀도 번개처럼 사라지고, 하늘에는 언제 풍운이 일었는가 싶게 밝고 맑은 별빛만 총총했다. 은하수 역시 천공(天空)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만뢰구적(萬 賴俱寂), 이따금씩 스치는 밤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모처럼의 정적을 깰 뿐이다. 요승 부르잉가는 허리께부터 싹둑 잘리워 두 토막이 난 채 흙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더러운 피 를 질펀하게 흘려 대지를 적시우면서 말없이 누운 시체가 되었다. 그 처참한 주검을 내려다보면서 반나가잉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 것이다. 철사도인은 품속에서 화골단(化骨丹)을 꺼냈다. 그리고 죽어 널브러진 부르잉가의 배꼽 위에 두 알을 얹어놓았다. 일행이 둘러서서 보고 있는 가운데 부르잉가의 시체는 서서히 녹아들더니 잠시 후에 시체가 있던 자리에는 누르끼리한 액체만 흥건하게 고였다. 그리고 물기마저도 어느덧 흙 속으로 스며들어 자취가 없어졌다. 일행은 그 자리를 떠나고 않고 한참 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왜수> 주매가 돌아오는 기척은 없 었다. <왜수> 주매를 떠나게 만들고 요승 부르잉가를 참살한 그 금빛 손아귀의 정체에 대해서 저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았으나 알아차린 사람은 끝내 하나도 없었다. "자, 모두 들어가시지요." 대방장 반나가잉의 은근한 재촉을 받아가면서 철사도인 일행은 다시 법당으로 들어갔다. 반나가잉은 그들의 도움으로 위기일발의 재난을 무사히 넘긴 것에 입이 닳도록 감사했다. 그리 고 청라마궁 측에서 또다시 염탐꾼을 보낼지도 모르므로 절간에서도 가장 으슥한 밀실 두 칸을 치워놓고 일행들이 머물게 했다. 아울러서 그는 소원사 전체 승도(僧徒)들을 집결시킨 다음, 청라 마궁에서 누가 와서 묻더라도 부르잉가는 절대로 여기에 온 적이 없었노라고 대답하게 했다. 오 늘 벌어졌던 사건이 외부로 누설되지 않도록 거듭 엄명을 내린 것이다. 며칠이 지났다. 소원사 측에선 극도로 긴장한 채 청라마궁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단오절이 박두함에 따라서 팔마들도 대응책을 세우고 안배하느라 눈코 뜰새없이 바빴다. 그들은 부르잉가가 소원사로 떠난 지 몇 날 며칠 함흥차사가 되었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필경 딴 일이 생겨서 제멋대로 떠난 것이리라 치부하고, 다시는 소원사에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다. 철사도인일행은 그대로 소원사의 밀실 안에서 편안하게 지냈다. 팔마 측에서 아무런 낌새도 없 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능혼의 당부가 있었는지라 섣불리 청라마궁을 탐색하러 갈 수도 없었다. 그저 때가 오면 능혼이 안배해 주리라 기대하면서 암암리에 반나가잉의 동태만을 주시했다. 반나가잉이 외출할 때 철시도인 역시 그 뒤를 추적해서 청라산 정면의 고봉 위까지 두 차례나 올다가 보았다. 반나가잉은 과연 자신이 말한 대로 천마해체대법을 단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봉 의 정상에 앉아서 연법(煉法) 중인 당사자가 유윤중이라는 내막은 까맣게 몰랐다. 철사도인은 반나가잉과 카잉사푸 두 번승이 절치부심(切齒腐心)팔마와의 일대 복수전을 계획하 고 있는 동안 일체 비밀이 지켜져야 함을 이해했다. 그들이 자기 일행에게 아무런 해꼬지를 하지 않는 이상, 구태여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전의 그 날이 올 때까지 피차가 편안하게 지내주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정(正), 사(邪) 양파간의 기묘한 관계가 유지되면서 날짜는 하루하루 흘러갔다. 단오절의 혈투 勇金禪單身戰八魔 怪揆花赤手戱天王 그날 반나가잉은 단오절도 가까와지고 해서 특별히 푸짐한 술좌석을 베풀어 철사도인 일행을 접 대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은 청라산으로 대법의 단련과정을 점검하기 위해 떠나갔다. 철사도인은 그동안 탐지한 결과로 반나가잉이 떠났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잔치가 끝난 후 그 들은 방장실에 앉아서 한담을 나누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뜻밖에도 오래 헤어졌던 등팔고와 유천이 찾아와서 그를 끌어냈다. 철사도인은 그제서야 현빙곡에 또다른 응원대가 집결해 있음을 알았다. 방장실로 돌아간 그는 카잉사푸를 따 돌린 가운데 그 기쁜 소식을 일행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 이튿날 밤, 금선이 소원사를 찾아왔다. <괴규화> 능혼의 분부대로 진자령에게서 피진기를 빌 어가지고 조심원과 합류하기 위해 날아든 것이다. 금선은 일행이 묵고 있는 밀실을 찾다못해 법당 뜨락에 내려서다가 둘째방장 카잉사푸와 맞닥뜨 렸다. "조심원이란 사람, 여기에 있소?" 금선이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나서자, 카잉사푸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는 되받아 물었다. "넌 웬놈이냐?" "그건 알 것 없소. 조심원이 어디 있는지 그것만 알려주오." "요녀석 봐라? 어린 놈이 예의도 모르고 발칙하게 굴다니!" "뭐라구?" 오가는 말투가 거칠어지니 자연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허지만 카잉사푸의 실력 가지고 어 떻게 금선의 상대가 될 수 있으랴? 카잉사푸가 쏘아낸 홍련(紅蓮) 송이는 금선의 원앙벽력검에 단박 썽둥 잘리우고, 눈치가 빨라서 줄행랑을 놓았으니 망정이지 카잉사푸는 하마터면 목줄기마 저 끊길 뻔했다. "아이쿠 형님, 적이 쳐들어 왔소!" 혼구멍이 난 카잉사푸가 방장실로 뛰쳐들어 갔다. "뭣이? 청라마궁의 적이 왔단 말인가? 자넨 어서 밀실에 있는 손님들한테 알리게!" 반나가잉은 기급을 해가지고 카잉사푸를 철사도인에게 보낸 다음, 황급히 뜨락으로 달려나왔다. 침입자를 보아하니 앳된 소년인데, 검광만큼은 첫눈에도 여간 지독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반나가잉과 금선, 두 사람 사이에 또 입씨름이 벌어졌다. "웬 녀석이냐? 정체를 밝혀라!" "조심원, 조심원은 어디 있나? 어서 이리 나오라고 해라!" "요놈, 누가 널 보냈느냐? 어서 바른 대로 대라!" "이런 답답한 작자들 좀 봤나. 허튼 수작일랑 말고 어서 조심원이나 데려오라구!" "요런 육시랄 놈, 어디다 대고 반말 짓거리냐?" 이윽고 싸움판은 벌어졌다. 반나가잉은 상대방이 어리나 그 병기가 엄청나게 위력적인 것임을 아는 터라, 섣부른 재간으로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초장(初場)부터 원신을 불덩어리로 변화시켜서 대적하기 시작했다. 금선은 이놈의 화상이 맞대면하기가 무섭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로 변해 가지고 굴러오 는 것을 보았다. '이것 봐라, 요사스런 중놈이 사술(邪術)을 부리는구나! 이 정도쯤은 누워서 떡 먹기지. 별꼴을 다 보겠군.' 금선의 원앙벽력검은 느긋하게 고양이가 쥐를 놀리듯 반나가잉의 불덩어리 원신을 가지고 논다. 밀실에 있다가 카잉사푸의 급보를 듣고서 철사도인 일행이 달려나왔다. 철사도인은 첫눈에 아미파의 비검술을 알아보았다. "멈추시오!" 그는 황급히 검광을 일으켜 쌍방간의 싸움부터 갈라막았다. "대방장, 물러서시오.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뒤미처 따라나온 조심원이 금선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조심원이 여기 있소!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시는가?" 금선 역시 원앙벽력검을 거두어들였다. 싸움판에 뛰어든 철사도인의 검광이 이단파의 것이 아님 을 알았던 것이다. "아, 바로 조심원 도우이신가요? 저는 아미 문하의 금선입니다. 능노선배님의 분부를 받잡고 조 도우와 함께 청라마궁으로 가기 위해 온 것입니다." 살벌하던 싸움터는 당장 인사판으로 변했다. 피차 소개가 끝나자, 금선은 능혼의 지시를 상세하 게 설명하고 아울러 자기 역할에 대해서도 일러주었다. 방장실로 자리를 옮겨 좌정한 후에도 대화상 반나가잉의 눈길은 금선에게서 좀처럼 떠날 줄을 몰랐다. 세상에 이토록 어리디어린 소년한테 엄청난 무공이 갖추어져 있다니, 도무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는 내색은 안했으나 금선의 솜씨에 사뭇 탄복을 했다. 자기도 모르게 아미 문하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밤 자시(子時) 경에 <백수진인> 유천이 친구 한 명을 데리고소원사에 당도했다. 본래 유천은 금선을 소원사까지 인도하기로 책임 맡고 함께 현빙곡을 떠났는데, 도중에서 뜻하 지 않은 인물을 만나게 되어 금선이 앞서 왔던 것이다. 그는 현빙곡에서 벗어난 후 얼마 안 가서 귀에 익은 파공성을 들었다. 상공을 응시하던 유천은 금선에게 기쁜 낯을 보였다. "금선 도우, 미안하지만 먼저 가시오. 잘하면 기막힌 응원군을 얻게 될 것 같소!" "그리 하시지요. 앞서 가 기다리겠습니다." 금선이 응락하자, 유천은 그 즉시 검광을 일으켜 타고 동북쪽으로 날아갔다. 그의 앞길에는 일곱 송이의 불티를 꼬리처럼 이끌며 비행중인 검광이 있었다. 그 뒤를 좇아가는 유천, 혹시라도 놓칠세라 쏜살같이 속력을 내었다. 그의 평생에 첫째 가는 친 구 <칠성진인(七星眞人)> 조광두(趙光斗)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벌써 몇 년 동안이나 상면하 지 못했던가! 앞서 날던 인물도 추격자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속도를 늦추고 돌아섰다. "조도우, 날세 나야! 유천이 왔소!" "이런! 유도우, 이게 얼마 만이오?" 옛벗과의 해후(邂逅)만큼이나 반가운 일이 세상천지 어디에 또 있을까? 두 사람은 지상으로 내 려서서 손에 손을 맞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그들은 서로 떨어진 동안 겪었던 사연을 주고받으며 회포를 풀었다. 이야기 끝에 유천이 묻었다. "자네 지금 어딜 가시는 길인가?" "대설산(大雪山)에 있다는 천년오삼(千年烏蔘)을 캐러 가는 중일세. 헌데 자네는 여기 웬일인 가?" 유천은 조광두에게 청라욕 결전에 관해서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아울러서 자기는 이미 <괴 규화> 궁신 능혼의 문하제자가 되었다는 것과, 또 내일 단오절에 능진인께서 아미파 젊은 후배들 을 거느리고 청라마궁을 격파하는 데 함께 참가하기로 되었노라 실토했다. 끝으로 그는 조광두를 부추겼다. "... 현재 내 처지는 그렇다네. 여보게, 내 부탁이 있네. 하루 만 여기 머물면서 힘을 좀 빌어줄 수 없겠나? 친구도 돕는 셈 치고 또 이번 기회에 몇몇 정파 고수들과 교분을 맺게 된다면 자네한 테도 해로운 일은 아닐 듯싶은데, 어떤가?" 조광두는 그 말을 듣더니 시원스럽게 응락했다. 유천과 그는 원래 동문 출신으로 생사지교(生死之交)를 맺은 사이였다. 서로 헤어져 만나지 못한 동안에야 운명이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시각에 친구의 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꿈 에도 생각지 못할 짓이다. 조광두의 의리는 그토록 깊고 충직했다. 조광두는 오령검(烏靈劍) 한 자루를 연성했다. 그래서 검광을 일으켜 타고 다닐 때마다 칼빛에서 는 반드시 일곱 방울의 불티가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그의 무공은 이제껏 상대할 만한 적수가 없 을 정도로 막강한 터였다. 그래서 조광두는 평생토록 남의 눈치를 보거나 자기 종적을 감추고 다 녀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좀처럼 남들과 원수를 맺는 일도 없었다. 이같이 당당하고도 신중한 처신 때문에 그는 자기의 숱한 동배(同輩)와 친구들, 즉 <마가선자 (摩伽仙子)> 옥청대사, <여앙신> 등팔고, <백수진인> 유천, <추마왕(醜魔王)> 형곤(形琨), <악아 파(惡啞巴)> 원달(元達), 척진노니(滌眞老尼)들처럼 정파 인물에게 교화되어 기사귀정(棄邪歸正)을 하거나 아니면 참혹한 심판의 칼날 아래 죽음을 당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그 하나만이..... 조광두는 귀주성(貴州省) 검령산(黔靈山)에 은거하며 안온한 생활을 즐겼다. 비록 이단(異端)의 부류에 속했으면서도 정(正)과 사(邪) 어느 파의 인물이든 그를 건드리는 일이 없어 유유자적 소 요(逍遙)하고 지내온 것이다. 그는 오래 전에 친한 벗 옥청대사가 <신니> 우담의 문하제자로 들어간 이후 이미 오난삼겁(五 難三劫)을 모두 거쳐 멸하고 머지않아 정과(正果)에 참입(參入)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은 조광두의 마음 속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언젠가는 자기도 좋은 기연(機緣)을 만나 서 정교(正敎)에 귀의하리라는 희망이었다. 이러한 판국에 오늘 유천이 <괴규화> 능혼의 문하제 자가 되었단 말까지 듣고 보니 여간 부럽고 안타깝지 않았다. "<여앙신> 등팔고는 어떻게 지내든가?" "지금 그녀는 현빙곡에 있네.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주화입마에 빠져 육신은 굳어지고 모진 풍상 을 겪으면서 근근히 연명해 온 모양이더군.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네. 뜻밖에도 많은 정파 인물들 과 교분을 맺어서 이제 머지않아 탈겁(脫劫)도 하고 아미 문하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거든." "아, 그녀마저도 행운을... 여보게 유도우, 내 자네를 있는 힘껏 도와줌세. 그까짓 천년오삼이야 어딜 가겠는가? 우선 청라마궁부터 격파하고 다시 캐러 가도 되겠지! 등팔고가 지금 어디 있다 구? 어디 가서 만나보세! 자네가 앞장서게나." 조광두는 한껏 등이 달아서 유천을 재촉했다. 어쩌면 이번 기회가 자기한테도 행운을 가져다 줄 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유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닐세. 등팔고를 만나는 일은 서두르지 말게. 난 지금 소원사로 가야 하네. 우선 나하고 같이 그리로 가서 사부 능진인의 분부를 전하고, 내일 새벽 공격대에 참가해서 청라마궁을 깨뜨리세. 그 일만 끝내면 다시 무슨 계획이 서겠지. 어떤가, 날 따르겠나?" "그렇게 함세!" 조광두는 선선히 유천의 뜻을 따랐다. 이윽고 소원사에 도착한 두 사람은 철사도인 일행에게 능혼의 서찰과 지시를 전달했다. 철사도인 황현극, 도균 세 사람은 조심원과 금선의 선발대가 떠난 후 다시 출발하되 청라욕 어 구에 당도해서 능진인의 편지를 뜯어 보고 거기에 적힌 지시대로 행동한다. 유천은 조광두와 함께 <육지금룡> 위청을 데리고 능진인의 별도 지시에 따라서 다른 곳으로 파 견될 것이라는 것들이었다. 패가 나뉘어지고 각자 임무를 부여받자, 일행은 축시(丑時) 새벽닭이 울 무렵까지 출동준비를 끝 마치고 환담을 나누었다. 마침내 숙명의 날 단오절이 밝아온 것이다. 새벽 인시(寅時) 말 묘시(卯時) 초, 동녁 하늘이 아슴 푸레하게 터오자, 선발대 조심원과 금선은 동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청라욕을 향해 출발했다. 번취자에서 청라산까지 거리는 백여 리 남짓, 그러나 두 사람의 검광은 빨라서 얼마 시간이 안 지나 그들은 청라욕 골짜기 어구에 내려섰다. 하늘에는 아직도 별빛이 총총했다. 잠시 계곡 안의 동정을 살폈으나 을씨년스러운 정적만 감돌고 있을 뿐, 터럭만한 인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육지(肉芝)가 핥아서 씻어준 이후로 금선의 신안(神眼)은 제아무리 두텁게 깔린 운무(雲霧)나 요 법의 장막도 거침없이 궤뚫어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것 봐라? 어젯밤 등팔고는 분명 청라마궁에 요승 도인들이 수두룩하고, 또 마진으로 계곡을 깡그리 뒤덮어 봉쇄했다던데... 이것들이 우리 공격대를 유인하려고 마진의 사문(死門)만 열어놓았 더라도 이토록 쥐죽은 듯 잠잠할 리가 없다. 흠흠, 그렇지! 능진인께서 이미 마진을 휩쓸어 부수 어 버렸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문전에서 거렁뱅이처럼 어물쩡거리고 있을 필요가 없지! 곧 바로 쳐들어 가는 거야!' 어쨌거나 금선은 초장부터 쳐들어 가서 한바탕 날뛰기로 작심했다. "조도우, 명함은 가져오셨죠? 그거 이리 주십시오." 조심원의 명함을 건네받자, 금선은 대뜸 계곡 안으로 몸을 날려 들어가더니 목청이 터져라고 냅 다 고함쳤다. "여봐 주인장! 나는 사부님이신 <연중신악> 조심원의 명을 받잡고 여덟 마왕과 결투 약속을 지 키기 위해 왔소. 여기 방문자의 명함이 있으니까 정식으로 받으시오! 만약 아무도 응대가 없으면 우리 사도(師徒) 둘이서 제 발로 걸어 들어갈 테니까 그쯤 양해들 하시구려!" 말 끝이 떨어지기도 전에 '땅땅땅!' 금종(金鐘) 소리가 울리더니 암벽 뒤편에서 도인 두 명이 훌 쩍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상판도 흉악스러운 데다 하나같이 온통 사기(邪氣)로 가득찬 몰골이 었다. "방문자는 당신네 둘뿐인가? 또다른 사람은?" 도인의 물음에 조심원이 앞으로 나섰다. "지난날 서천 지방 노상에서 본의 아니게 팔마왕을 건드렸소. 그 사건은 나 조심원 혼자서 저지 른 것이므로 오늘도 단신 찾아와 사과하려는 것이외다. 다른 사람이 왔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분 들 나름대로 해결할 문제가 있을 것이고, 나 조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소. 그대 두 사람이 이 계 곡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니 필시 팔마주 문하의 후배들인 듯한데, 수고스럽지만 들어가서 조 심원이 찾아왔노라고 통보를 해주시오." 그 말을 듣자, 두 도인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서로 마주보고 껄껄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은 팔마의 제자가 아니라 유덕의 초빙을 받고 지원하러 온 손님들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도화 도인(桃花道人)> 진냉(秦冷), 그리고 또 하나는 <천호자(天毫子)> 고명도(古明道)로서 모두 운남 성(雲南省) 죽산교(竹山敎)에서도 이름난 요도(妖道)들이었다. 독룡존자는 사문공이 참사를 당하고 나자 그가 설치해 놓은 마진(魔陣)을 지휘할 사람이 없어졌 으므로, 당초 마진의 위력에 의지하여 싸울 생각을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오귀천왕> 상 화양의 건의를 받아들여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아직 싸움도 시작되기 전부터 <괴규화> 능혼이 나타나 청라마궁 패거리들에게 지분거리고, 또 적방(敵方)에 아미파의 수뇌 인물은 아직 보이지 않으나 공격의 주축을 이룬 후배녀석들의 실력 이 모두 만만치 않은 것을 익히 들어 아는지라, 이번 기회에 차라리 사문공의 마법을 그대로 써 서 전승(全勝)은 거두지 못하더라도 가능한 한 아미파의 호랑이 새끼들을 하나라도 더 제거하여 훗날 우환거리를 줄여 보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독룡존자는 마진의 주재자인 사문공처럼 완벽하지는 못하나마 그 운용법은 대충 터득하고 있었 다. 그는 사전에 마진을 발동시켜 놓지 않았다. 적에게 이편의 방비책을 간파당하지 않으려는 배 려에서였다. 우선 초빙해 온 고수들 가운데 칠팔 명을 선발해서 마진의 운용방법을 전수해 준 다음, 암암리 에 잠복시켜 놓고 결진 당일 적의 주력(主力)이 계곡 안으로 모조리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귀천왕의 신호를 받아서 마진을 발동, 적을 일망타진해 버리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 장 중요한 곳이 계곡 입구였다. 독룡은 특별히 죽산교의 원로 고수 진냉과 고명도 두 사람을 지명하여 이곳의 수비임무를 부여 하고 은밀한 곳에 신형을 감추고 있다가 적이 쳐들어 오면 금종을 쳐서 신호하도록 배치시켰다. 금종의 신호가 울리는 즉시 독룡 측에서도 팔마주가 선봉대로 나아가 이끌어들이고 차례차례 맞 서기로 약속을 정해 놓았던 것이다. 적이 일단 마궁에 진입한 다음에는, 진냉과 고명도는 독룡존자가 제공한 <만마연홍사(萬魔軟紅 砂)>를 은밀히 계곡 입구 일대에 살포하고, 그와 동시에 마진의 일곱 개 방위에 매복시켰던 승도 (僧徒)들도 일제히 마진을 전개시킨다. 일단 마진이 발동할 때면 지상은 온통 화염과 홍수로 수라장을 이루게 될 것이고, 하늘에는 또 <오귀천왕> 상화양이 칠정망(七情網)을 살포하여 전갈과 지네, 독사, 거미, 금잠 등 무수한 독충 들이 햇빛을 가릴 정도로 날뛰게 될 것이므로, 마궁에 들어선 적들은 도망칠 꿈도 못 꾸고 일망 타진을 당하고 말 것이다. 진냉과 고명도 두 사람은 오늘이 결전 당일이라 처음부터 숱한 고수들이 쳐들어 올 것으로 예상 하고 긴장 속에 파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약속시간에 나타난 적을 보니, 웬걸, 엄청난 고 수들은커녕 결투 당사자인 조심원 혼자서 어린 시동 하나만 달랑 거느리고 찾아온 것이다. 예상 이 빗나가자 그들은 맥이 탁 풀리고 짜증마저 솟아올랐다. '겨우 두 사람이라니, 어린 놈은 제법 일신에 선골을 갖추고 도근(道根)도 사뭇 심후해 보이지 만, 이 스승이란 조가녀석은 어떤가? 아무리 눈여겨 훑어봐도 별것 아닌 인물이다. 아이녀석 솜씨 가 있다 한들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닌가? 도대체 어쩌자고 이 따위 것 때문에 독룡존자는 이토록 소란을 부려가며 뭇사람을 동원했느냐 말이다. 닭 모가지 비트는 데 소잡는 칼을 써도 유만부득 이지. 세상에 이런 호들갑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진냉과 고명도는 정말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보를 터뜨리고 있는데, 시동녀석이 툭 불거져 나왔다. "아니, 영사 팔마님께 통보를 해달라는데 어째서 웃고만 있소. 겨드랑이에 이라도 끼여 있는 모 양이로군!" 두 도인의 눈꼬리가 곤두섰다. 성질 같으면 당장 요절을 내고 싶지만 참았다. 어차피 안으로 들 어가면 살아나오지 못할 놈들인데 서두를 게 뭐 있는가 말이다. 진냉이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 두 사람은 팔마주의 문하제자가 아니라 초청을 받고 온 친구다. 우리들의 내력도 못 알아보는 놈이 무슨 재간을 가졌다고 와서 큰소리냐? 그래, 너희들 소원대로 팔마주는 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다. 어서 들어가 보려므나. 길이 복잡하니까 어린 놈은 조심하거라. 자칫하단 길을 잃고 헤맬지도 몰라." 그 말에 금선은 해죽 웃으면서 조심원을 올려다보았다. "사부님, 팔마는 우리가 무서워서 응원군까지 초청해 왔네요." 조심원이 짐짓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어린 게 뭘 안다고 나불거리느냐!" "아닙죠, 팔마는 분명 우리를 상대하지 못할까 봐....." 이때였다. 앞쪽에서 갑자기 '휘리리, 휘리리!'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인영이 날아왔다. 하나는 남자, 또 하나는 여자였다. "무슨 일이오?" "저 자가 바로 조심원이랍니다." 도인의 말을 듣고서 남녀는 제가끔씩 조심원과 금선을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그들은 <서천팔마 > 가운데 <삼마(三魔)> 전청선과 <사마(四魔)> 이홍영(伊紅纓)이었다. "흐음, 그대가 바로 지난날 서천 노상에서 우리 여덟째아우를 부상입힌 조심원이구려?" 조심원은 전청선을 알아챘으나 짐짓 모르는 체하고 대답했다. "이 사람이 그 조심원이외다. 작년에 서악을 통해 도전장 은표를 받기는 했으나, 그때 마침 개인 적인 볼일이 끝나지 않아서 올 겨를이 없길래, 단오절로 약속하고 돌려보냈소. 그리고 약속 대로 오늘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거요. 헌데 두 분은 뉘신지?" "나는 팔마주의 셋째 전청선, 그리고 이쪽은 넷째 이홍영이외다. 그런데 그대 혼자만 오셨소? 들 리는 소문에 따르면 당신은 아미파 잔당 여럿하고 함께 온다든데, 모두들 어디 있지요? 기왕에 불원천리 수고롭게 왔으면 안으로 같이 드셔서 솜씨나 겨루어 보는 게 좋지 않겠소?" "나 조심원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이제껏 다수의 힘을 믿고 날뛰어 본 적은 없소이다. 오늘 나 는 단신으로 서천 노상의 사건을 결판지으러 왔을 따름이오. 도중에 몇몇 아미 측 도우들과 만나 기는 했으나, 그들은 나름대로 이곳과 인과관계를 풀려는 의도에서 온 것이므로 이 조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소." 조심원이 홀몸으로 범의 소굴을 찾아들다니! 전청선과 이홍영도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자기 네 측은 그런 줄도 모르고 사방천지에서 고수들을 대거 초빙해다가 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이래 가지고야 이기거나 지거나 승부는 여하튼 간에 모두 우스운 노릇 아닌가? 허나 전청선은 조심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마디 수작을 더 걸어보면 서 상대방의 속셈이 과연 어떤지 탐색하기로 작정했다 "헌데 그 말씀은....." 이처럼 말을 붙이느라 조심원의 면모를 응시하던 그는 그 인상이 보면 볼수록 눈에 익다고 갑작 스레 생각했다. '가만 있거라. 어디서 본 듯한 낯짝인걸? 언제 어디서 만났을꼬? 아차! 그놈이로구나!' 이윽고 전청선은 작년 겨울 장사현의 악록산에 갔다가 <추운수> 백곡일한테 재수없이 걸려 온 밤을 지새도록 온줄나게 얻어터진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그 추운수의 제자놈이다!' 가슴 속에서 노기가 새삼 불덩이처럼 솟구쳤다. 전청선은 포악스런 표정에 미소를 얹어서 한 마디 건넸다. "흠흠, 난 또 조심원이 누군가 했더니만 바로 추운수 늙은 도적놈의 제자녀석이로군! 지난해 겨 울 악록산에서 그 늙은이가 알량한 술법을 가지고 까닭없이 사람을 너무 업신여겼어. 나도 마침 그놈의 사부와 제자를 찾아서 빚을 갚을까 하던 참이었는데, 제자녀석이 제발로 먼저 걸어 들어 왔구만! 어쨌든 잘 만났다. 자네 오늘 여덟째아우 문제로 오기는 온 모양이나, 어디 승천입지(昇 天立地)를 하는 재주가 있는지 두고 보자!" 말을 마치고 전청선은 이홍영을 향해 눈짓 신호를 보냈다. 기회를 틈타 처치해 버리자는 것이다. 금선이 분위기를 보아 하니 여간 험악해진 게 아니었다. 조심원의 무공실력은 보나마나 뻔한데, 마궁 입구에 발도 들여놓기 진에 얼러붙어 패배한대서야 도무지 체면이 서질 않는 짓이다. 그는 조심원 앞으로 선뜻 가리고 나섰다. "우리 사도 두 사람은 호의적으로 방문한 손님들이오. 왕년의 원한을 씻기 위해 결판을 내더라 도 주인의 입장에서 의당 손님을 안으로 모셔다 적절히 대접해 주고 나서 겨루는 게 도리이거늘 어째서 말씀이 그토록 불친절하시우? 주인된 사람이 찾아온 손님한테 너무들 무례하구만! 사부님, 이런 작자들하고 더는 실랑이질할 것도 없습니다. 먼저 우두머리 되는 사람부터 만나서 따져봅시 다!" 금선은 어느 틈에 미진기를 꺼내서 등 뒤에 감추고 있었다. 그는 저 할 말이 끝나자 상대방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미진기를 슬쩍 휘둘렀다. 금선과 조심원은 당장 한 덩이 채색 구름으로 변 해 가지고 계곡 안의 마궁을 향하여 훌쩍 날아가 버렸다. "아차!" 전청선과 이홍영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눈앞에서 채색 구름 한 덩어리가 풀썩 일더니만 두 사 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금선의 장난질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조심원이 과연 기막힌 도술을 지닌 고수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방금 이런 고수 앞에서 섣불리 경거망동을 하지 않은 게 실로 천만다행이다 여겼다. 두 마주는 이내 진냉과 고명도에게 정신 바짝 차리고 원위치를 굳게 지키라는 당부 한 마디 남 기고 황급히 마궁으로 뒤쫓아 갔다. 마궁 앞에 허겁지겁 당도하고 보니 조심원과 그 시동녀석은 벌써 <육마> 여후, <팔마>구령과 맞붙어 한바탕 어러우져 싸우고 있었다. 조심원을 데리고 전진하던 금선은 문득 계곡 중턱 아래 마궁인 드높은 거대한 궁전이 우뚝 세워 져 있는 걸 발견하고서 지상으로 내려섰다. 내려서기가 무섬게 맞닥뜨린 것이 바로 여후와 구령 이라 금선은 격식대로 조심원의 명함을 들이밀었다. 명함을 받아든 여후와 구령은 금선이 얼마나 지독스런 솜씨의 소유자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그 저 어린 시동녀석이라 업신여긴 나머지 냅다 욕설부터 퍼부었다. "요 강아지 새끼야, 어서 네 사부놈더러 나와서 모가지를 바치라고 일러라!" 그 욕설을 듣고 가만 있을 금선이 아니다. 세상천지 무서울 게 없는 천둥벌거숭이가 아니냐! "이제 보니 네놈의 마귀새끼들은 모두 한 구멍에서 태어나 가지고 걸핏하면 욕지거리부터 하기 가 일쑤로구나! 아까 두 놈도 그러더니 너희들도 아가리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야. 우리 사부님을 뵙겠다구? 그거 어렵지 않다만, 우선 네놈들 내 솜씨 맛 좀 봐야겠다!" 그동안에도 <팔마> 구령은 첫눈에 멀찌거니 서 있는 조심원을 발견했다. 원수녀석이 태연스레 나타난 걸 보았으니 구령은 눈알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어린 놈의 말은 귀담아 들을 것도 없이 어금니를 으드득 갈아붙이면서 다짜고짜 비검부터 쏘아보냈다. 번쩍 휘둘린 손아귀에서 누른빛 검광 한 줄기가 조심원의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육마> 여후 역시 깜찍한 어린 놈한테 욕바가지를 뒤집어 쓰고 속에서 노기가 솟구쳤다. "요 발칙한 놈이!" 여후의 손에서도 '번쩍!' 비검이 날아올랐다. 금선이 고함을 질렀다. "잘들 논다!" 이어서 두 팔목이 흔들거리더니 어느덧 뽑아든 원앙벽력검에서 '우르릉!' 뇌성이 울렸다. 원앙벽 력신검은 승천하는 용처럼 꿈틀거리며 솟구쳐 올라, 두 마주의 비검을 상대로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금선은 조심원이 서 있는 앞까지 물러서서 상황의 변동에 따라 대응할 태세를 갖추었 다. 여후와 구령 두 마주의 비검은 애당초부터 금선의 상대가 못되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싸움이었 다. 두 마주가 혼비백산을 해가지고 쩔쩔매기 시작했다. 어린 놈의 신검은 도대체 어떻게 손을 쓸 여지도 없이 제멋대로 마구 날뛰는 판이라, 자기들의 비검마저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그 통에 놀아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상황은 절박해졌다. 얼마나 다급한지 구원을 요청하려 해도 입을 벌릴 시간적 여유마저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그 절박한 순간에 전청선과 이홍영 두 사형이 날아왔다. 이홍영은 막내 구령의 처지가 절대절명 위기에 몰린 것을 보고 앙칼진 고함을 지르면서 싸움판 에 뛰어들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도 황금빛 검광이 번쩍 날았다. 바야흐로 삼 대 일의 싸움으로 바뀐 것이다. 헌데 <삼마> 전청선은 싸움판에 끼어들 입장이 못되었다. 악록산에서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비 검을 추운수의 손에 격파당하고 빈손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청라마궁에 돌아온 뒤 함께 혼줄이 났던 여후와 더불어 제법 쓸 만한 장검 두 자루를 구해 가지고 열심히 단련하기는 했지만 시일이 촉박했던 탓으로 비검을 만들어 놓고 보니 전의 것보다 크게 손색이 있었다. 그는 지금 허공에서 뇌성벽력을 일으키며 하늘이 좁다고 마구 날뛰는 금선의 자홍색 검광 두 줄 기를 바라보던 끝에 아예 두 눈마저 질끈 감아버렸다. 지지리 못난 자기 비검을 가지고 저 싸움 판에 끼어들어 봤자 눈 깜짝할 사이에 고철덩어리나 되고 말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길어도 적수 는 못되리라. 그래도 형님 체면에 아우들이 궁지에 몰린 참경을 어찌 보고만 있을소냐? '안 되겠다. 눈치 못 채게 술법이라도 써서 기습을 해야겠구나.' 그러나 전청선은 궁여지책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궁 안에서 급보를 받고 <대마(大魔)> 황 수(黃繡), <이마(二魔)> 설평(薛萍), <오마(五魔)> 공손무(公孫武), <칠마(七魔=)> 오인룡(伍人龍) 들이 떼거리로 와르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원래 <대마> 황수는 신중하고 음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초부터 적이 조심원 한 사람만 오리 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더구나 결전 날이 박두하면서 숱한 사고가 잇달아 터졌으므로 더욱 각별 한 주의를 기울여서 준비하고 있었다. 새로 모신 스승 독룡존자와 상화양을 부추겨 마진도 펼쳐놓게 하고 초빙해 온 고수들을 전체 동 원하여 칠면 매복을 시켰다. 그리고 <독각령관>낙삼관을 남겨 공중에서 경계와 연락임무를 수행 하도록 안배해 놓은 것이다. 이들은 일단 적이 쳐들어 오면 강호상의 규칙을 지킨다는 구실로 계곡 입구 진냉, 고명도의 금 종소리를 신호삼아 우선 <삼마> 전청선과 <사마> 이홍영 둘이서 접객을 맡아 마궁 깊숙이 적을 유인해 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육마> 여후와 <팔마> 구령은 마궁 밖의 순찰 경계를 담당하다가, 적의 도착이 임박하 면 즉시 마궁 안에 대기중인 <대마> 황수 일행과 합류, 적을 영접하고 피차 강호상의 규칙에 따 라 사리를 따진 다음 무력을 행사하기로 했다. 적과 접전이 벌어지면 잠시 맞아 싸우다가 못 견디는 척 후퇴하면서 적을 마진의 사지(死地)까 지 유인해 간다. 사지에서 쌍방이 재접전을 벌이는 동안 공중감시를 맡은 낙삼관이 요법으로 흑 색 연기를 창공에 쏘아올리고, 그것을 신호로 청라산 절정봉에 자리잡은 <오귀천왕> 상화양이 칠면 매복대를 발동함과 아울러 칠정망(七情網), 연홍사(軟紅砂)를 살포한다. 이렇게 되면 마진은 위력을 나타내게 되고 사면팔방에서 중앙의 마궁을 목표하여 조여들게 됨으 로써 적의 탈출은 천만 불가능하도록 안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전 당일 마궁 측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치밀한 계략은 초장부터 예상 밖으로 빗나가기 시작했다. 계곡 어구에서 종소리 가 울리고 이에 따라서 접대역을 맡은 전청선과 이홍영이 달려나간 것까지는 좋았다. 허나 적은 대병력이 아니라 어린 시동 하나만을 거느린 조심원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지난해 악록산에서 추운수의 제자랍시고 전청선을 공갈때려 쫓아낸 장본인인 데에서 사태 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원한에 사무친 전청선에게 접대역이고 강호상의 규칙이고 따질 생각은 천만리 하늘 밖으로 날아 가 버렸다. 당장에 요절을 낼 참으로 덤벼들었는데 원수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마궁 안까지 들어가고 만 것이다. 접대를 하든 요절을 내든 여하간에 상대를 놓쳐 버리자, 전청선과 이홍영은 허겁지겁 뒤쫓느라 마궁 안의 대마 일행한테 미처 예상을 뒤엎은 급보도 전하지 못했다. 또 한편 <팔마> 여후와 함께 마궁의 외곽을 순찰경계하던 <팔마> 구령도 문제였다. 이들 두 사람은 난데없이 눈앞에 채운 한 덩어리가 번뜩하면서 침입자가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 게 놀라고 말았다. 의당 <삼마>와 <사마>의 접대를 받고 들어와야 할 손님들이 감쪽같이 사형 을 따돌리고 잠입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침입자는 단 둘, 자기네 원수 조심원과 시동이 전부였다. 더구나 기막힌 사연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어린 시동녀석이 사뭇 오만무례한 태도로 명함을 들이댄 것이다. 조심원이 응 원군도 거느리지 않고 단신으로 찾아온 것은 분명 자기네 패거리를 얕잡아 보고 취한 행위임에 틀림없었다. 놀란 것은 <팔마> 구령만이 아니었다. <육마> 여후도 지난 겨울 악록산에서 이가 갈리게 혼뜨 검이 난 작자라, 첫눈에 대뜸 추운수의 제자 조심원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팔마 중에서도 가장 성미가 불 같은 놈이 여후와 구령이다. 공동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서 전략 전술 따위가 생각날 리 없다 당장 속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데야 어쩌겠는가? 선 례후병(先禮後兵)이고 뭐고 다짜고짜로 원수놈에게 덤벼들어 육시처참을 낼 판이었다. 한데 뜻밖 에도 맹랑하기 짝이 었는 시동녀석이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자홍색 검광에 당하는 순간 '아차!' 후회를 했으나 벌써 때는 늦었다. 두 마주의 비검은 빼도 박도 못할 곤경에 몰리고 말았다. 그 참담한 몰골을 보다못해 현장에 시립하고 있던 마동(魔童)녀석이 잽싸게 궁 안으로 뛰쳐들어가 <대마> 황수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황수는 적이 골짜기 입구를 통과하지 않고 공중에서 날아 내려왔다는 보고를 듣고서 아연실색을 했다. 그렇다면 적은 초장부터 의표를 찔러온 것이다. 전청선과 이홍영은 어째서 경보도 발하지 않았을까? 황수는 당초 계획이 틀어져 버린 것이 짜증스러웠다. 게다가 여후와 구령조차도 적을 발견하는 즉시 합류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제멋대로 싸움판을 벌였다는 말까지 듣자 벌컥 역정이 났다. 모 처럼 주도면밀하게 짜놓은 계략을 개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우들이 사나운 적에게 몰려 곤경에 처해 있단 달을 듣고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었 다. 황수는 다급하게 <이마> 설평, <사마> 공손무, <칠마> 오인룡을 거느리고 현장으로 날아갔 다. 싸움터에 당도하고 보니 적이라는 게 겨우 중년의 사나이 한 명과 그리고 <사마> 이홍영, <육 마> 여후, <팔마> 구령을 상대로 한창 신바람나게 싸우고 있는 시동녀석이 그 전부였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멍청해진 황수 앞으로 넷째아우 전청선이 쭈빗쭈빗 다가와서 그간의 경위를 설 명해 주었으나 그것마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마궁에 침입한 적이 단 두 명이라는 사실, 황수는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도시 믿어지지 않았 다. 당초 예상이 빗나가도 크게 빗나간 것이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놈들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짓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당혹감 속에서도 황수는 냉정을 되찾으며 싸움판을 주시했다. 두 명의 적 가운데 주체가 되는 것은 조심원이다. 그러나 아무리 눈여겨 보아도 조심원의 검광 은 별반 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어린 시동이 구사하고 있는 자홍색 두 줄기 검광은 위력이 엄청난 것이었다. 맹랑 하게도 그 검광은 '우르르, 우르릉!' 뇌성벽력까지 일으키면서 이홍영, 여후, 구령의 여섯 자루 비 검을 한꺼번에 제압하고 있지 않은가! 세 아우의 검광은 차츰 그 빛을 잃어가며 광망(光芒)이 흩 어지고 있었다. 협공은커녕 제각기 앞가림도 못하고 찍어눌리는 중이었다. 황수는 아우들에게 절대절명의 위기가 닥쳤음을 느꼈다. "아차, 큰일났다!" 그는 대갈일성을 터뜨리고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뒤미처 설평, 공손무, 오인룡까지 일제히 검광 을 날리면서 달려갔다. 바로 그 순간 직전, <팔마> 구령의 검광이 적의 자홍빛 검광에 옭혀 뎅겅 부러지고 말았다. "우왓!" 구령의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사마> 이홍영은 막내의 위기를 구하려고 그쪽으로 검광을 날려 막았으나 그것도 마음뿐, 금선의 원앙벽력검이 호락호락 놓아 보낼 리가 있겠는가? 우르릉! 번개치듯 한 줄기 붉은빛이 그 뒤를 쫓아 덮쳤다. 그녀의 누런빛 비검은 단숨에 광망이 절반으 로 줄어들었다. "이야압!" 금선은 그녀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대갈일성, 한 모금의 진기를 벽력검에 뿜어냈다. 이홍영은 비검을 회수할 여지도 없었다. 쨍그렁! 벽력검광에 휘감긴 그녀의 한 쌍 비검은 '풀썩!' 연기를 일으키더니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육마> 여후는 형제들 중에서도 비교적 비검술이 약한지라 진작부터 구령과 상대를 바꾸어서 조심원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홍영과 구령의 비검이 연달이 격파당하고, 시동은 여 세를 몰아서 자홍색 벽력검으로 그들 두 남녀의 정수리마저 쪼개버리려고 덮쳐드는 광경을 목격 했다. 대경실색을 한 여후는 황급히 조심원을 떨쳐버리고 그쪽으로 비검을 날려 막으려 했다. 거기에 때맞추어 황수, 설경, 공손무, 오인룡의 비검까지 가세하여 벽력검광을 가로막아 준 덕분에 이홍 영과 구령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한편 조심원은 맞싸우던 <육마> 여후가 훌쩍 비검을 회수하여 금선쪽으로 공세를 전환하자, 그 즉시 상대를 뒤쫓아 갔다. 금선의 실력에 비하면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협승> 질범의 제자인 조심원이다. 여후는 뒤를 추적해 온 조심원의 비검을 미처 맞아 싸울 태세도 갖추지 못했다. 정신이 아찔해 지는 찰나 <칠마> 오인룡의 비검이 먼저 날아와 조심원을 중도에서 차단해 주었다. 패거리 중에서도 제일 교활한 자는 전청선이었다. 그는 자기가 새로 단련한 비검의 위 력이 너 무 약하다는 실정도 알거니와 또 악록산에서 혼뜨검이 난 까닭에 추운수의 제자 조심원의 실력 또한 범상치 않으리라고 지레 겁먹은 나머지 시종 전단(戰團)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런 판국에 이 홍영과 구령이 연거푸 비검을 잃고 우거지상판이 되어 쫓겨나왔다. 전청선은 두 사람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말을 건넸다. "내가 보건대 저놈이 어린것 하나만 데리고 홀몸으로 쳐들어 온 바에야 필시 경천동지(驚天動 地)할 만한 재간을 지닌 게 분명하네. 형님들도 나섰지만 아직껏 못 이기고 있지 않는가? 아무래 도 낙삼관 도인께 신호를 발하도록 통보하고 저것들을 사문(死門)까지 유인해 처치하는 것이 좋 을 듯싶다. 어떤가?" 그러자 이홍영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셋째오빠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예요. 독롱 교조님과 상화양 천왕께서 일껏 대 마진을 펼쳐놓으신 당초 의도는 이번 기회에 적의 주력(主力)을 끌어들여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라 는 것쯤 아시지 않아요? 헌데 겨우 두 놈의 적, 그것도 젖비린내나는 어린것을 우리 여덟 형제가 못 당해내고 전체 병력까지 동원하는 소동을 부려서야 어디다 낯을 들고 다니겠어요? 차라리 잠 시만 더 버텨내면서 정말 적당들이 더 쳐들어 오지 않는 게 확인되거든 그때 가서 우리 여덟 형 제의 법보를 일제히 사용하는 게 좋을 듯해요. 그래 가지고도 못 이기면 다시 독룡 교조님과 상 천왕을 움직여서 처치해도 늦지 않아요." 이 무렵 <대마> 황수는 금선의 검광이 엄청나게 위력적인 것을 보고서 자신과 아우들도 이홍 영, 구령의 전철을 밟을까 봐 두려워졌다. 삐익! 대마가 휘파람 신호를 보내고 앞장서서 물러나자, 설평과 공손무, 여후, 오인룡도 각각 제 방위 에서 뒤로 물러났다. 맏형은 전술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들은 비검으로 금선의 공세를 저지하는 한편 저마다 품속에서 작은 깃발 하나씩을 꺼내들었 다. 전청선과 이홍영, 구령도 일제히 깃발을 꺼냈다. 마침내 <서천팔마>는 술법으로 결판을 내기 로 작정한 것이다. "사부님, 조심하십쇼! 섣불리 덤비면 안 됩니다!" 금선도 그것을 눈치채고 황급히 조심원에게 경보를 발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마> 황 수는 손(巽) 방위를 차지하고 서서 작은 깃발을 흔들었다. 핏빛처럼 시뻘건 얼굴, 가슴까지 내리 덮은 수염, 표독스런 눈동자, 매부리코를 지닌 팔마의 우두머리다. 그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나머지 칠마들도 따라서 주문을 외며 일제히 비검을 회수 하더니 손에 잡은 깃발을 펼쳤다. 금선과 조심원은 적들이 물러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찰나지간에 음산 한 바람이 사방을 뒤덮고 귀곡성이 무시무시하게 울려나왔다. 사나운 음풍에 조심원은 눈을 뜨지 도 못하고 팔마의 종적마저 놓치고 말았다. 천지가 온통 암흑 속에 잠겨 캄캄한데 짙고 독한 연기까지 코를 찔렀다. 사면팔방 어디를 돌아 보아도 괴수와 독사떼, 흉신, 악귀들이 녹색의 불길, 누른 먼지 속에서 와글와글 몰려나오고 있었 다. 그러나 금선의 혜안은 벌써부터 팔마들이 녹색 불길과 먼지 구름 속에서 자기들을 포위공격하고 있는 걸 꿰뚫어 보았다. 그 요법이 무서운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금선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황급히 조심원더러 비검을 거두게 한 다음, 일단 수비태세로 돌아서서 두 줄기 자홍색 검광을 휘둘러 가며 조심원과 자신에게 바람 한 점, 빗방울 한 개 뚫고 들어오지 못할 만큼 보호했다. 그 리고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미진기까지 꺼내들고 당해내기 어려울 때는 그 즉시 뺑소니칠 준 비를 해놓았다. 팔마들은 불길과 먼지 구름 속에서 성큼성큼 두 사람 앞으로 밀려들었다. 허나 금선의 벽력검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아는 터라, 검광의 범위 밖까지 다가와서는 더 이상 범접을 못 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쌍방이 대치한 채로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만큼 시간이 흘렀다. 금선은 팔마들이 진공해 오다가 도로 물러서서 머리를 맞대고 쑤군거리는 걸 보았다. 아무래도 다른 계략을 꾸미는가 싶어, 짐짓 벽력검광을 허투로 비켜서 허점이 드러나도록 해보였다. 팔마의 맏형 황수는 여간 신중한 인물이 아니다. 비록 술법으로 협공을 가하고는 있으나 적의 자홍색 비검의 내력을 전혀 모르는 형편이라, 만에 하나라도 적의 비검이 자기네 술법에 오염되 지 않는 것이라면 섣불리 공격했다가 도리어 법보들만 결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우들 에게 우격다짐으로 쳐들어가지 말고 기회가 올 때까지 임기응변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금선 역시 최근에 숱한 경험을 쌓은 결과로 자못 신중해졌다. 그는 조심원을 온전히 보호하지 못하여 나중에라도 동료들의 비웃음이나 사지 않을까 무서워, 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실책을 저 질러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검광으로 호신만 할 뿐 섣부르게 덤벼들지 않고 있는 것 이다. 팔마들은 도무지 좀이 쑤셔 견딜 도리가 없었다. 이판사판 양단간에 결판을 내야만 죽더라도 속 이 후련할 텐데, 마냥 서로 버티고 있으면서 시간만 질질 끄니 속에서 그만 열화통이 치밀어 올 랐다. 바로 그 무렵에 금선의 검광이 허술하게 늦춰지고 수비 허점을 드러냈다. 교활한 <삼마> 전청선이 제일 먼저 간파했다. '바로 이때다!' 그는 <음풍팔괘번(陰風八卦幡)>으로 신형을 은폐한 채 질풍같이 덮쳐 들어가 깃발을 펼쳤다. 깃 발 머리 끝에는 여덟 자루의 <삼첨양인비도(三尖兩刃飛刀)>가 감추어져 있는데, 칼날은 녹색 연 기를 뿜으며 곧바로 금선과 조심원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러나 금선의 혜안은 진작부터 전청선의 동작을 읽고 있었다. 여덟 자루 비도가 눈앞에 거의 들이닥친 순간 그는 한 모금 진기를 원앙벽력검에 '푸우!' 하고 쏟아 부었다. 두 줄기 자홍색 검광이 갈라지더니 먼저 붉은빛 한 줄기가 불을 뿜는 용신(龍身)처럼 꿈틀거리 면서 전청선과 여덟 자루 비도를 통째로 휘감아 묶어버리고, 자줏빛 검광은 그대로 조심원과 금 선의 전신을 에워싼 채 상하로 끊임없이 맴돌면서 보호했다. 검광은 한 가닥으로 줄었으나 선회 속도는 두 배로 늘어나, 적들은 여전히 단 일보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저런! 간계에 빠졌구나!" <삼마> 전청선이 적의 검광 속에 갇히고 상황이 위급해지자, <대마> 황수와 <이마> 설평이 질 겁을 해서 아우를 구출하려 뛰쳐들려고 했다. 바로 그때, 느닷없이 계곡 어구로부터 경보를 알리 는 종소리가 연달아 울려왔다. 땡땡땡!... 땡땡땡! "아뿔싸, 적이 또 쳐들어 왔구나! 이 노릇을 어쩐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아우를 구하려던 <대마>와 <이마>는 발걸음을 멈추고 아연실색,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허공에서 누군가의 대갈일성, 벼락치는 듯한 호통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속히 물러가거라! 내가 저 두 놈의 목숨을 끊어주마!" 그 외침은 금선의 귀에도 들렸다. 소스라쳐서 바라보니, 허공으로부터 붉은 옷에 맨발인 동자가 날아 내려왔다. 기껏해야 열한두 살도 못되어 보이는데, 목덜미에는 두 꾸러미 지전(紙錢)과 사람 의 뼈로 깎아 만든 염주를 걸고 있었다. 축 늘어뜨린 두 팔은 제 키보다도 길었다. 한 손에는 황 금종을, 또 한 손에는 해골바가지 다섯 개를 꿰어 만든 오로추(五老鎚)를 잡고 있는데, 전신이 온 통 홍운(紅雲)과 연무(煙霧)로 휩싸여져 있었다. 동자가 땅에 내려서자, 금선의 검광 속에 갇혀 죽어라고 몸부림치는 전청선을 제외한 나머지 칠 마들은 법술을 거두어들이고서 분분히 뒤쪽으로 물러섰다. 금선에게는 초면이지만 진작에 등팔고로부터 들은 말이 있었다. <오귀천왕> 상화양! 청라마궁 측에서 초빙해 온 지원병력 가운데 제일 위험한 인물이 이제 눈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당찬 금선이라도 슬그머니 뒤가 좀 켕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조심원을 데리고 꺼져 버릴까?... 아니야, 제가 아무려면 날 어쩔려구. 조금만 더 날뛰어 보자꾸나! 강적이 나타났다고 꽁무니를 빼서야 어디 금선 나으리가 체면이 서겠니. 좌우지간 그물 속에서 펄떡거리는 생선부터 요리해 놓고 봐야지!' 그는 뭣보다도 붉은빛의 올가미 속에서 버둥거리는 전청선부터 베어 없애고 다시 대응하기로 결 심했다. 하지만 금선이 머뭇거리는 순간에도 상화양은 가만 있지 않았다. 마화금종(魔火金鐘)이 흔들리는 가 싶더니 당장에 홍운에 채색 연기가 금선의 붉은빛을 노리고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단 한 번 스치자마자 전청선을 에워싸고 있던 벽력검의 광염(光焰)이 풀썩 줄어들었다. '에쿠! 큰일났다. 지독한 놈인 걸?' 금선은 혼비백산, 허둥지둥 전청선을 풀어주면서 검광을 거두어들였다. 허나 그물은 이미 상채기 가 나고 말았다. 자줏빛 비검을 쏘아내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를 지경이었다. 금선은 안도의 한숨을 돌릴 새도 없다. 상화양이 또 <백골쇄심추(白骨鎖心鎚)>에 마저 술법을 걸었던 것이다. 한 무더기 녹색 불길과 붉은 구름 속에서 거대한 악귀의 대가리 다섯 개가 피를 머금은 듯 시뻘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전광석화와도 같이 금선과 조심원을 향해 덮쳐왔다. 가뜩이나 마화금종의 홍운 하나만도 감당해내기 어려운 판인데 게다가 엄청난 오로추 공격까지 가세를 했으니 견뎌낼 재주가 있으랴! '안 되겠다. 뛰자!' 앙큼맞은 금선이 조심원의 손을 잡아끌면서 동시에 미진기를 펼쳤다. "이얍!" 삽시간에 채색 구름이 풀썩 일더니 두 사람은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청선을 위기에서 건져낸 상화양, 이제 백골쇄심추가 적의 면전으로 들이닥치는 것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까지 지었다. '제깐 놈이 도력을 지녔대야 기껏 비검 몇 자루가 전부겠지! 어디 해골바가지한테 물어뜯겨 봐 라. 그걸로 요행은 끝장이다.' 그런데 상화양의 미소는 일순간 싹 가셔 버렸다. 어린 놈의 손에서 깃발 한 개가 펄럭이는 찰나 적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상화양은 입을 딱 벌린 채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아니, 저것은 보상부인의 미진기가 아닌가? 그 보물이 어떻게 저놈의 수중에 들어갔을꼬?' 그는 원로 고수답게 체념이 빨랐다. 추격해 봐야 미진기의 위력을 어찌 따라잡겠는가? 공연한 헛수고일 뿐이다. 그는 맥없이 마화금 종과 백골쇄심추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묵묵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미진기... 그 법보가 도대체 어떤 연유로 저 어리디어린 도동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을까? 저놈 의 정체는 무엇일까?' 갑자기 사면팔방에서 경종(警鐘)이 일제히 울렸다. 뒤미처 한 가닥 검은 연기가 허공으로 살같이 쏘아져 올라갔다. <독각령관> 낙삼관의 신호였다. "적들이 몰려왔구나! 에이, 발칙한 놈들... 하마터면 속을 뻔했어!" 상화양은 이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황급히 품속에서 작은 깃발 수십 개를 꺼내 가지고 팔마들에 게 나누어 주었다. "너희들은 검광을 타고 공중에 올라가서 각자 팔괘(八卦) 방위를 정하고 서 있거라. 잠시 후 내 가 칠정망을 살포할 테니까, 만약 도망치는 적이 그물에서 떨어지거든 즉시 그 위치에 이 <니리 기(泥犁旗)>를 꽂아라. 그럼 적은 당장에 지각(知覺)이 마비될 것이다. 그때 사로잡아 가지고 돌 아와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팔마들은 상화양의 니리기를 나누어 받은 후 지시대로 떠났다. 마화금종과 백골쇄심추를 허리춤에 꽂고 나서 상화양은 머리털을 모두 풀어헤친 다음 쌍수를 합 쳐 몇 차례 비벼대더니 사면팔방을 향해 흩뿌렸다. 우르르! 은은하게 뇌성이 일었다. 마진을 발동시킨 것이다. 상화양은 천둥소리를 귀담아 들으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진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헌데 사면에서 일어난 뇌성은 모두 메아리쳐 들리 기는 하는데 오직 정면, 계곡 어구의 사문(死門)에서만은 메아리가 울리지 않았다. '이것 봐라, 어째서 반응이 없지?' 그는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황망스럽게 칠정망을 꺼내 쳐들고 수결(手訣)을 맺었다. 우선 상공에다 천라지망을 펼쳐 봉쇄해 놓고 나서 친히 계곡 어구 사문쪽 형편을 알아보러 갈 심산이 었다. 상화양의 입에서 중얼중얼 주문이 막 쏟아져 나올 때였다. 문득 칠정망을 펼쳐든 두 손이 냅다 잡아당겨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물이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채뜨려 간 것이다. "앗, 누구냐!" 대경실색을 한 상화양, 그러나 날치기해 간 놈의 정체도 살펴볼 여지가 없었다. 그 즉시 입을 쩍 벌리고 마화(魔火)부터 '푸우!' 하고 수십 장이나 되게 뿜어 보냈다. 과연 불덩어리 가운데 적의 모습이 드러났다. 누더기를 걸친 걸인 하나가 불길 속에서 번뜩하더니 창공으로 솟구쳐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저놈이로구나! 내가 놓칠 듯싶으냐?" 법보 칠정망을 멀쩡하게 잃고도 그냥 있을 상화양이 아니었다. 그는 어금니를 으드득 갈아붙이 며 홍운을 휘몰아 추격하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서 이글이글 불덩어리가 마구 솟아올랐다. '날치기 거지놈!' 바로 독룡존자의 수정구 화면에 나타났던 거렁뱅이, <괴규화> 궁신 능혼 그였다. 상화양은 노기등등, 무시무시한 기세로 능혼을 추격했다. 계곡 어구까지 거의 따라잡을 무렵, 날 치기 거렁뱅이는 훌쩍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상화양도 뒤따라 내려섰다. 그런데 내리고 보니 상대 방은 어느 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 봐라! 어디로 숨었을까?'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상화양, 얼핏 지나치는 눈길에 잡힌 것은 두 구의 시체였다. '이건 또 웬놈들인가?' 마진의 사문(死門)에 가로 널브러진 시체는 바포 죽산교의 <도화도인> 진냉과 <천호자> 고명 도였다. 사문은 벌써 능혼에게 격파당한 것이다. 상화양은 놀라움보다 분노가 정수리까지 치밀었다. 우르르... 쏴아! 갑자기 사방에서 폭풍노도가 휘몰아치는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뒤미처 화광이 충천하면서 거 센 돌개바람까지 불어닥쳤다. '아뿔싸! 미진을 발동시켰지. 이거 큰일났구나!' 청라욕 일대 각처에서 지진과 홍수, 화재, 폭풍이 마법을 따라 벌써 발동한 것이다. 사문이 격파 당한 상황에서... 이대로 두었다간 낭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날려 청라산 주봉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독룡존자와 유덕은 낙삼관의 연기 신호를 받고 또 사방에서 뇌성이 울리자. 그 즉시 상 화양을 돕기 위해 주봉으로 날아와서 마진의 칠 개 매복대를 발동시켰다. 효력은 당장 어김없이 나타났다. 마진의 생(生), 함(陷), 약(弱), 타(墮), 멸(滅), 포(怖) 각문에서 일제히 지(地), 화(火), 수 (水), 풍(風)이 발동된 것이다. "이젠 됐다. 놈들은 모조리 천라지망에 걸려들었어! 흐흐흐!" 득의만면해 가지고 방위(方位)를 점검하던 독룡존자는 감자기 입을 다물었다. 도처에서 지진과 홍수와 돌개바람과 불길이 치솟고 무시무시한 굉음이 메아리치는데, 오직 한 곳, 사문(死門) 방면 은 잠잠한 것이 하늘빛조차 청명했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 된 거야? 유덕, 네가 사문 방면을 가보고 오너라." 그러나 유덕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상화양이 악을 고래고래 지르면서 날아왔다. "독룡! 내 칠정망을 그 거지놈한테 빼앗겼어! 사문 방면도 격파되고, 죽산교에서 온 진냉, 고명도 두 친구마저 죽음을 당했단 말야. 천만다행으로 일곱 군데 중에서 하나만 깨졌으니까 아직은 손 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랴부랴 돌아왔어. 이렇게 된 바에야 놈들과 생사결판을 내야지?" "어떻게 하려는가?" 독룡이 참담한 기색으로 물었다. 상화양은 열에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재 마진의 전체 명맥은 오직 하나 생문(生門)에 달려 있네. 그 진을 지키는 자가 많다고는 하 지만 빌어먹을 거지놈의 상대가 못될 듯싶어. 그래서 내 직접 가서 지킬까 하네. 지금 적들은 사 문(死門)을 격파하고 나서 퇴로가 생긴 줄 알고 필경 깊숙이 침입할 것이야. 진냉, 고명도가 죽고 없으니 그곳의 우리 수비병력은 없는 셈이지. 여보게 독룡, 누구 한 사람 고수를 뽑아 주게. 나의 이 법보 백골쇄심추와 자네 그 만마연홍사를 갖고 가서 도로 차단해 버린다면 방심한 적의 의표 를 찔러 도리어 우리가 승리할 승산이 있네." 이런 말을 할 즈음에 공중경계를 마친 <독각령관> 낙삼관이 내려왔다. "날보내 주시오. 내가 대신 사문을 차단하리다!" 사실 이 무렵 팔마가 초빙해 온 요승, 요도(妖道)들은 각문의 수비를 맡은 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생문에 집결해 있었다. 그리고 지휘부 격인 주봉에는 독룡존자와 유덕이 열두 시자(侍者)를 거느 리고 있을 뿐, 예비병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양이 손을 빌어서라도 격파당한 사문은 꼭 봉쇄해야만 했다. 두세 명의 적에게 우롱을 당한 상화양은 악에 받칠 대로 받친 나머지 조심성마저 잃어 버렸다. 그는 허리춤에 꽂았던 백골쇄심추를 선뜻 꺼내 낙삼관에게 건네주고 총총히 그 용법까지 일러주 었다. "알겠소? 위력이 대단하니까 조심해서 다루시오!" "분부대로 하리다. 염려 놓으시오!" 낙삼관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자신있게 응답했다. 그리곤 다시 독룡존자한테 손을 내밀었 다. 독룡도 만마연홍사 두 움큼을 꺼내 주고 용법 구결을 전수했다. 낙삼관이 그 길로 사문을 봉쇄하러 떠난 후, 상화양 역시 곧장 생문 쪽으로 날아갔다. 주봉에는 독룡과 유덕이 그대로 남아서 전국(戰局)을 주재했다. 한편 번취자 소원사에 머물던 철사도인과 황현극, 도균, 위청은 <백수진인> 유천, <칠성진인> 조광두와 함께 시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원과 금선이 떠난 후 그 뒤를 쫓아서 출발했다. 이들 여섯은 번취자에서 벗어난 다음 우선 청라산 계곡의 한 지점을 찾아 내려섰다. 그곳에서 일단 <괴규화> 능혼의 서찰을 뜯어 보고 다시 행동에 옮길 작정이었다. 편지의 지시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현재 상화양과 독룡존자가 설치한 마진은 모두 일곱 개 문호로 이루어져 있다. 즉 생문(生門), 사문(死門), 함문(陷門), 약문(弱門), 타문(墮門), 멸문(滅門), 포문(怖門)이 그것이다. 생, 사 양문은 전체 명맥이 된다. 또 사문은 청라마궁에 들어서는 입구이며 이곳을 수비하고 있 는 자는 운남성 죽산교 출신 중에서도 제일 유능한 도인 두 명이다. 한 명은 <천호자> 고명도, 또 한 명은 <도화도인> 진냉이라고 한다. 이 도인놈들은 본래 사법(邪法)으로 단련한 이보(異寶) 를 가져오기도 했거니와 또 별도로 독룡존자의 만마연홍사까지 받아 지니고 있다. 계곡 입구에 도착하면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을 취하라. 황현극, 도균 두 사람이 먼저 들어가 적을 유인한다. 진냉과 고명도 두 놈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 들을 삼십 장 밖까지 끌어낸 다음, 이 틈에 유천이 측방으로 돌아 적이 모습을 드러낸 위치에 접 근하여 그 지점에 꽂혀 있는 은형번(隱形幡)을 뽑아 가지고 탈출한다. 그로써 도인 두 놈은 은신 처를 잃을 것이다. 이때 모두가 협공을 가하여 처치하라. 두 놈을 참살하고 나면 그때쯤해서 마진의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발동할 것이니 절대 로 깊숙이 쳐들어가선 안 된다. 그곳에 내가 따로 부릴 위청 한 사람만 남겨놓고 나머지 일행은 고공비행술로 동북방을 향해 진출한다. 동북방 생문까지 당도하면 조심원과 금선, 그리고 현빙곡 에서 출동할 아미 제자들과 합류하게 될 것이다. 생문의 수비대를 지휘하는 인물은 <만묘선고> 허비랑이다. 그대들이 생문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상화양과 독룡존자는 필경 마진의 제이단계를 작동할 것이다. 진세(陣勢)가 오므라들고, 아울러서 각 문을 지키던 요물들도 저마다 방위에 따라서 생문으로 집결하게 되리다. 천공에 떨치려던 상화양의 칠정망은 미리 빼앗아 두기는 했으나 생문에 집결할 요물들도 모두 대단한 위력을 지닌 고수들이다. 그대들은 섣불리 대적하지 말고 오로지 주문의 천둔보경과 미진 기로 철통 같은 수비벽을 쌓도록 해라. 그 대치상태로 정오까지 버틴다면 반나가잉의 천마해체대 법이 발동하여 독룡의 마진처럼 지진과 홍수, 화재와 폭풍이 몰아닥칠 것이다. 이때 그대들은 잠시도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있다가 내 모습이 나타나거든 유천 한 명만 남겨 두고 그 즉시 진자령을 따라서 현빙곡으로 탈출하라. 그 뒷처리는 내가 맡을 것이다. 현빙곡에 도착한 후, 응벽애로 돌아가는 아미 제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유천이 귀환 할 때까지 기다려서 내 별도 지시를 받도록 하라.> 능혼의 서찰을 다 읽고 나자, 일행들은 그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봉대 황현극과 도 균이 마궁으로 통하는 계곡 입구에 들어섰다. 골짜기 안은 사뭇 괴괴하기만 할 뿐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들어가 봅시다! 두 사람이 계속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암벽 앞에서 왁살스럽 게 생긴 도인 둘이 번뜩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로 왔는가? 앞서 온 조가놈의 일당들이지? 성명을 밝혀라. 그럼 곱게 들여보내 주겠다!" 도균이 선뜻 나서서 응수했다. "우리는 사부님의 분부를 받들어 요마들을 처치하러 왔다. 조씨 이씨 성도 물을 것없이어서 그 팔마녀석들이나 목을 늘이고 이리 썩 나오라고 전해라! 그럼 너희 두 놈의 죽음만은 면할 것이 다!" 첫대면부터 대뜸 거칠게 나오자, 진냉과 고명도는 저도 모르게 분기가 왈칵 솟구쳤다. "철부지 같은 녀석들! 호의적으로 손님 접대를 해서 죽을 길까지 안내해 주려고 했더니, 감히 무 례하게 구는구나! 안 되겠다. 네놈들을 통과시켜야 옳겠지만 내 칼이 용서하지 않는다!" 도인 두 놈은 일제히 칼집을 두드렸다. 그 즉시 청백색이 뒤섞인 검광 두 줄기가 '휙!' 하고 날 아오르더니 도균을 노리고 곧장 쏘아왔다. 황현극은 황망히 도균에게 눈짓을 보냈다. 상대를 가볍게 보지 말라는 신호였다. 비록 사교(邪 敎)의 무리들이지만 칼빛을 보아 하니 그 수단이 보통 아닌 게 분명했다. 이윽고 황현극과 도균 두 사람도 비검으로 대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당초 이겨야 할 싸움은 아니었다. 한바탕 어우러져 싸우고 나서 두 사람은 짐짓 못 견 디는 척하고 슬금슬금 밀리다가 훌쩍 검광을 거두어들이고는 냅다 골짜기 밖으로 뛰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잔뜩 화가 뻗친 진냉과 고명도, 눈앞에서 도망치는 적을 그냥 놓아 보낼 리가 있으랴? 두 녀석 도 몸을 날려 도망꾼의 뒤를 바짝 쫓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숨에 이삼십 장 거리쯤 추격했다. 신바람나게 쫓아가다 흘낏 보니 맞은편에서 일곱 개의 불티를 이끌며 검광 한 줄기가 날아들더 니 도망꾼 두 사람을 통과시켜 놓고 자기네 앞길을 딱 가로막는다. 이어서 용모가 청수(淸秀)한 도인 한 사람이 나타나 붉은빛 검광을 휘둘러 가며 진냉과 고명도의 비검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 작했다. 난데없는 훼방꾼이 나서자 진냉과 고명도는 분기탱천 악귀 나찰처럼 무서운 기세로 훼방꾼을 베 어 쓰러뜨리고 돌파해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좀처럼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다. 그제서야 요물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훼방꾼을 눈여겨 보았다. 낯익은 얼굴이다. "아니, 당신은 칠성진인!" 진냉이 아연실색해서 외쳤다. <칠성진인> 조광두라면 그들도 한 수 접고 대면해야 할 고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네와 같은 사파의 인물인데, 어째서 끼어들어 적대시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이었다. 고명도가 호통을 쳤다. "조도우, 아미파 놈들은 우리 공동의 적이오! 어째서 그것들을 돕는 거요? 자고로 우물물은 강물 을 침범하지 않는다 했거늘 까닭없이 우리네 일을 방해하지 마시오! 일찌감치 그 칼 거두고 피차 의리를 상하지 맙시다." 그러자 조광두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껄껄껄 웃으면서 꾸짖었다. "죽산교 요물들아! 네놈들은 사람의 넋을 산 채로 뽑아 장난질치고 살인, 강도, 간음 못하는 짓 이 없다고 들었다! 진작에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들이 오늘까지 살아서 마귀들 패거리를 돕고 있 구나. 잔소리 말고 어서 어서 목숨이나 바쳐라!" 진냉은 그 말에 선불맞은 범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이놈의 애물덩어리, 간도 크게 어르신네 비위를 건드렸것다. 그래, 아미파 원수놈들이 네 애비 나 되느냐? 오늘 우리 두 어르신네 손맛 좀 봐랏!" 진냉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호로병을 꺼내들더니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며 마개를 뽑아 흔들었 다. 요법으로 상대할 작정이었다. 이때 거짓 도망질치던 황현극과 도균이 되돌아 와서 두말없이 진냉을 노리고 비검을 쏘아날렸 다. 진냉의 그 호로병 속에는 죽산교도들도 무서워 떨만큼 지독스런 법보 <황봉자(黃蜂刺)>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익히 아는 조광두가 선선히 놓고 보기만 할 리 있으랴? 진냉이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황급히 칠성비검 중에서 두 점을 갈라내어 쏘았다. 두 개의 불티 가 '쌩!' 하는 소리를 내면서 별똥별 날듯 곧바로 진냉을 향해 날아갔다. 양면에서 매서운 협공을 당하자, 진냉은 그만 정신이 산란해져 팔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 통에 제대로 주문을 외지 못하고 중도에서 끊기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느라 황봉자를 방출하기는커녕 비검조차 쏠 여지도 없었다. 칠성도인의 불티를 피하는가 싶자, 이번에는 옆구리 쪽으로 비스듬히 검광 한 줄기가 무지개를 그리면서 날아들었다. "에쿠, 야단났다!" 안 되겠다 싶어 그 즉시 둔형술을 부려 달아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쏴아! 바람을 가르며 검광이 지나갔다. "으악!"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진냉은 허리께를 끊기고 흙바닥에 시체가 되어 널브러졌다. 이번에는 고명도가 다급해졌다. 삼 대 일로 강적을 맞아 허둥거리던 진냉이 삽시간에 오장육부 를 '좌르르!' 쏟아내면서 죽어 넘어지자 허둥지둥 품속에서 비전(飛箭) 한 자루를 꺼내 쳐들었다. 구원요청 신호를 날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비전이 미처 손아귀를 벗어나기도 전에 적의 비검과 불티는 새로운 상대자를 노리고 유 성처럼 날아들었다. 중과부적, 맞받아 싸우기는 이미 글렀다고 명도는 사문(死門)의 원위치로 돌 아가 은형번(隱形幡) 속에 숨어버리기로 작정했다. 그 수밖에는 없다. 신형을 감추고 있다가 진문 (陣門)까지 추격해 오는 놈들에게 독룡존자의 법보 만마연홍사를 뿌려서 거꾸러뜨린 다음 진냉의 복수를 할 참이었다. 고명도는 잽싸게 검광을 타고 계곡 입구까지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상천외한 일이 벌 어졌다. 의당 사문의 정위치에 꽂혀 있어야 한 은형보신기(隱形保身旗) 두 폭이 온데간데없이 사 라진 것이다. 고명도는 놀라다못해 하늘마저 샛노랗게 보였다. 후딱 뒤를 돌아다보니 추격자들은 기세등등, 어 느 새 등 뒤까지 바싹 따라와 있었다. '오냐! 기왕지사, 이판사판 결판을 내야겠다!' 고명도는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은형 깃발도 없으니 호신하기는커녕, 독룡에게서 일껏 빌어온 만마연홍사조차 뿌릴 수가 없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석 자루 비전에 술법을 걸고 비검까지 합쳐 추격자들의 검광을 맞아 싸우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악밖에 없었다. 네가 죽든 내가 죽든 어느쪽이 거꾸러져야만 한다. 황현극 일행도 고명도가 목숨을 내걸고 악착같이 덤벼드는 통에 좀처럼 승세를 잡지 못했다. 한창 어우러져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갑자기 고명도의 등 뒤에서 대갈일성, 호통을 지르는 소리가 울렸다. "요사스런 도적놈, 아직껏 목을 바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는 거냐!" 뒤미처 뇌성벽력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우르르 콰당! 소스라쳐 돌아보니, 이건 또 웬 벼락이냐? 이글이글 불타는 빛덩어리가 뇌전(雷電)까지 동반하고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우왓, 뜨거워!" 고명도는 비명을 질렀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왼쪽 어깨에 뇌화(雷火)를 얻어맞고 만 것이다. 후르르, 후르르! 타오르는 옷자락 속에서 살덩어리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젠 틀렸구나! 튀자!' 살이 타들어 가는 아픔에 미친 듯이 날뛰던 광기마저 수그러들고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고명도는 비검을 거두어들이고 후딱 돌아서서 마궁쪽을 향해 탈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퇴로에도 적이 있었다. 유령과도 같이 나타난 <백수진인> 유천의 손에서 푸른 검광 한 줄기가 시퍼런 서슬을 번뜩이며 날아왔던 것이다. "아뿔싸!" 비전도 비검도 내팽개치고 땅을 박차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순간에도 뜨거운 아픔을 견디지 못 해 피화결(避火訣)을 외면서 둔광을 일으켰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수단이었다. 허지만 지 상에서 겨우 십 장 높이에 다다랐을 때, 철사도인의 비검이 무서운 기세로 쫓아 올라왔다. 자기 비검조차 내동댕이친 고명도에게 방어력이 있을 리 없다. 철썩! 인정사정도 없이 들이닥친 비검은 고명도의 두 다리를 싹둑 끊어버렸다. 고명도는 외마디 비명 을 지르면서 지상으로 추락했다. 연거푸 치명상을 입은 고명도, 이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이젠 목숨을 부지하기란 아예 틀렸다. 그는 품속에서 만마연홍사를 움켜 끄집어내더니 독룡존자가 일러준 마주를 외기 시작했다. 이판 사판, 적과 동귀어진하기로 독하게 마음먹은 것이다. 통제력을 잃고 아직도 땅바닥에 꿈틀거리고 있는 자신의 비검과 석 자루 비전을 주워들었다. 광망(光芒)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아직도 쓸 만은 했던 것이다. '자, 이제는 최후의 발악을 해보자!' <칠성진인> 조광두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챘다. 그 즉시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오르더니 검 광의 일곱 개 별을 하나로 뭉쳐서 집어던졌다. 겨우 주워들었던 고명도의 비검과 비전들이 그 바 람에 우수수 손아귀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 별들은 고명도를 가로 에워싸고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아악, 으아앗!" 맨살 속을 저미고 들어오는 아픔에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마침내 고명도는 최후의 발악도 시도해 보지 못하고 산 채로 몸뚱이를 잘리웠다. 조광두는 앞서 달려가 고명도의 몸을 뒤졌다. 연홍사와 호로병 비검, 비전... 고명도는 죽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법보를 남의 손에 넘겨준 셈이다. 마진의 사문은 이렇게 격파되었다. 철사도인 일행은 한 자리에 모여 몇 마디 상의를 마치고 나 서 다시 능혼의 지시대로 일제히 동북방 생문(生門) 쪽을 향해 날아갔다. 위청 한 사람만 남겨 놓 은 채..... 생문은 청라마궁 패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진지다. 마진의 일곱 방위 중에서도 명맥이 되느 니만큼, 청라마궁의 주력은 모두 여기 집결해 있었다. 철사도인 일행이 생문의 상공에 당도하고 보니, 아래쪽 높은 언덕비탈에는 요마의 승도(僧道)들 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그 한가운데는 여도인이 손에 불진(佛塵)을 들고서 우뚝 서 있었다. "자, 여러분 일제히 쳐내려 갑시다!" 철사도인의 공격명령이 갓 떨어졌을 때였다. 경종이 울림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진작에 선봉대로 떠났던 조심원과 금선이 도착했다. 마궁 앞 싸움터에서 상화양의 무서운 공격을 따돌리고 온 것이다. 갑자기 사방 도처에서 종소리가 연거푸 울렸다. 철사도인 일행과 합류하자, 금선이 먼저 경과를 보고했다. "저희 둘이서 적진을 교란시키는 데 일단 성공했습니다. 팔마녀석들과 한바탕 어우러져 거의 다 이긴 싸움판이었는데, 그놈의 오귀천왕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만 산통이 깨졌지요. 오귀천왕은 과 연 지독스런 놈입니다.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어 뺑소니쳐 왔어요. 오는 도중 능진인선배님과 맞 닥뜨렸는데, 우리 두 사람더러 적진을 몽땅 휘저어 놓으라고 분부하시길래 미진기로 다섯 방위의 진문을 차례차례 돌면서 건드려 놓았지요. 매복한 녀석들 제 방귀에 놀라서 지레 마진을 발동합 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생문을 휘저어 놓을까 해서 온 거예요. 어차피 능진인선배님의 분부 대로 여러분과 합작을 해야겠지만... 저 아래 서 있는 여도인 저 여자가 바로 <만묘선고> 허비랑 입니다. 요마의 괴수 중에서도 제일 지독한 고수니까 조심들 하셔야 해요. 모두 절 따라서 공격을 하되, 위급할 때는 이 미진기로 호신벽을 쌓겠어요. 그때 멀어져 있으면 큰일납니다." 금선이 한창 떠벌리고 있는데, 갑자기 지상으로부터 한 가닥 푸른 검광이 솟구쳐 올라왔다. 적들 도 눈치를 챈 것이 분명했다. "잘들 노는구나! 올 테면 와봐!" 금선은 호통을 지르더니 원앙벽력검 중에서 자줏빛 검광을 갈라 쏘아 요격했다. 푸른 검광은 벽 력검의 칼빛을 보고서 훌쩍 방향을 틀어 오던 길로 되내려가 버렸다. "조심하게, 적의 유인계략이니까." 철사도인이 금선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금선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이고 선두에 서서 지상으로 내려갔다. 일행들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施詐術 狂走鎖心鎚 奮神威 巧得霜角劍 그들 일행이 산비탈에 내려서자, 지상에서는 허비랑이 선두로 달려왔다. 그녀는 금선을 맞대면하기가 무섭게 꾸짖었다. "어린 녀석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너무도 모르는구나! 나이 몇 살 안 먹은 것이 무슨 재롱을 부린답시고 저 멍청한 놈들과 어울려 날뛴단 말이냐? 여기에는 독룡존자와 오귀천왕이 마진을 쳐 놓은 곳이란 말이다. 천라지망, 어디로 빠져나갈 구멍도 없어. 잠시 후 지진, 홍수, 화재, 폭풍이 발동되기만 하면 네가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가졌더라도 분골쇄신, 콩가루가 되고 만다. 내 너의 어머니 낯을 보고 또 어린 나이에 자질도 훌륭한 게 애석해서 타이르는 것이니, 좋은 말로 할때 어서 아미산으로 돌아가거라. 공연히 덤벙대다간 저 멍청이놈들과 같이 옥석구분을 당할 테 고,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늦을 것이다. 알아듣겠느냐?" 금선은 화를 내기는커녕 되려 낄낄거리면서 응수했다. "거 참 염치도 부끄럼도 모르는 할망구로구만! 내 구화산에 살 적에 당신이 뭐라고 그랬소? 우 리 어머니하고 찬하 사숙님을 만날 때마다 걸핏하면 '저는 혼원조사가 세상을 떠난 뒤로 이 속세 가 싫어졌어요. 인연이란 게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아요. 이제부턴 폐문참수(閉門參修)하고 정과 (正果)를 얻는 일에만 전념하겠어요...' 그리고 또 뭐랬더라?... 옳지, '앞으로는 영원히 바깥 일엔 간섭도 안할 거예요. 어쩌구 저쩌구...' 요렇게 입에 발린 말로 속여 넘겼었지! 헌데 속셈은 안 그 렇다 이 말씀이야. 지난번 자운사 결전 때, 자기 대신 법원(法元)이란 돌중을 시켜서 숱하게 많은 요승 도인들을 충동질해다가 참전하도록 꼬여놓고서 자기 자신은 끝내 낯짝도 내밀지 않았거든. 그 바람에 애꿎은 녀석들만 죽고 다치고... 어디 그뿐인가. 할망구가 애지중지하는 머저리 제자 설 망녀석조차 애꾸눈 신세가 되지 않았소? 그래도 할망구는 아직껏 깨닫지 못하고 또 여기까지 살 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나타나 마귀떼와 어울려 풍파를 일으키다니!... 어디 또 한번 그 입으로 날 꾸짖어 보시구려. 우리 어머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시오? 할망구 당신은 아직 겁수(劫數)가 다하 지 않았지만 삼차 아미투검(峨嵋鬪劍) 때가 되면 당신이 죽어 묻힐 데도 없이 만들어 놓겠다고 하셨소! 내 좋은 말로 타이를 때 곱게 황산으로 돌아가시오. 할망구가 그 정도까지 수행한 공력도 아까우려니와 또 우리 어머님과 사귄 교분을 생각해서 봐주는 거요. 속으로는 도깨비놀음을 했더 라도 우리 어머님한테 겉으로는 공순하게 대했으니까, 특별히 봐준단 말이오. 자아, 어떻소? 공연 히 날뛰다 마귀떼와 동귀어진일랑 하지 마시고, 내가 살 길을 열어줄 테니 목숨이나 부지해 가지 고 달아나시오." 사실 허비랑이 방금 금선을 타이른 말에는 비록 가시가 돋히긴 했어도 진정으로 금선의 재간을 아껴서 절반쯤 호의가 담긴 것이었다. 그런데 금선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한바탕 비웃음 섞인 욕설을 듣고 나자, 그녀는 노기가 불끈 치밀었다. "네놈들이 청라 측과 원수를 맺고 다수 세력을 빙자하여 억누르려 드는 거야 내 참견할 일은 아 니다. 허지만 너희네 아미파는 평소 문규(門規)가 제일 엄격하다고 자랑을 내세우면서도 어찌하여 내 못된 제자 사도평을 유혹해 배반하도록 만들었느냐? 내 여기 온 목적은 순전히 문호를 다스리 고 반도(叛徒)놈을 징벌하기 위해서이며, 또 약한 자를 억압하는 너희 못된 패거리들을 뿌리뽑기 위해서란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더런 놈이 감히 어른을 능멸하다니! 내 의당 비검으로 네놈의 목 을 쳐날릴 것이로되 어린 철부지란 점을 감안해서, 또 젖내도 가시지 않은 놈과 맞상대하기가 손 부끄러워 그냥 살려둔다. 네놈은 어서 썩 물러가고 패거리 가운데 우두머리 되는 작자나 이리 나 서거라! 나하고 어디 대면을 해보자!" 그래도 금선은 여전히 빙글거리면서 또 욕설을 퍼부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할망구! 당신이 누구한테 어른 행세를 하는 거야? 나나 우리 같이 온 여 러 선배, 동문 도우께서는 당신 따위와 겨루기에는 아까울 만큼 실력을 갖춘 분들이다. 공연스레 허튼 수작일랑 집어치우고 우선 내 솜씨부터 맛 좀 봐라!" 말을 마치자, 대뜸 왼팔을 흔들더니 곧장 허비랑에게 벽력검의 자줏빛 광채를 쏘아날렸다. 어린 녀석한테 한바탕 차마 듣지도 못할 욕설을 뒤집어 쓰자, 허비랑의 분노는 진작부터 주체하 기 어려울 정도로 치솟았다. 분노한 속에서도 그녀는 금선의 검광이 날아들자, 첫눈에 그 비검이 묘일부인의 원앙벽력검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또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줄도 익히 아는 터라, 허비랑은 황급히 손가락을 내찔러 검광을 토해냈다. 손톱 끝에선 한 가닥 푸른빛이 뻗어나가, 금선의 자줏빛 벽력검광을 요격하기 시작했다. 반격을 하면서도 분노가 치밀 대로 치민 그녀는 고래고래 마구 악을 썼다. "네 에미가 집안을 엄하게 단속하지 않고 망녕이 나서 어린 놈한테 보검을 내주고 지랄발광하게 만들었구나! 요놈, 어디 내 손에 죽어 봐라!" 허비랑은 단숨에 요절을 낼 참으로 손가락 끝에 진기를 모아 푸른빛 검광을 향해 흩뿌렸다. "날아랏!" 푸른빛 검광은 '쏴아!' 소리와 함께 바다 위에서 승천하는 청룡과도 같이 힘찬 기세로 금선의 자 홍빛 검광을 휘감아 옭았다. <백수진인> 유천이 그를 돕고자 다급하게 막 나설 즈음이다. 맞은편 언덕비탈에서 승려와 도인 이 번뜩 나타나더니 제각기 선장(禪杖)과 누런 검광을 휘두르며 쏜살같이 날아왔다. "뭣하는 놈들이냐!" 유천이 호통을 지르는 도인을 알아봤다. 역시 진냉, 고명도와 같이 온 운남성 죽산교의 요물 채 야호(蔡野虎)였다. 유천은 두말도 않고 검광을 날려 채야호와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황현극도 비검으로 또 하나의 적을 가로막고 외쳤다. "요승은 이름을 밝혀라!" "네놈이 모실 부처님, <성수뇌음(聖手雷音)> 낙남가(落楠伽) 어른이시다!" 두 사람도 더 이상 군말없이 검광과 선장을 휘두르며 맞붙었다. 황현극, 유천이 두 적수를 맞아 싸우는 동안, 철사도인은 줄곧 금선과 허비랑의 대결을 예리하게 눈여겨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금선의 실력이 달렸다. 이때에 적방에는 또다시 십여 명의 증원군이 도착했다. 생김새도 기괴한 데다 승려도 아니고 도 인의 차림새도 아닌 것들이 언덕 한쪽 깃발 아래 몰려서서 관전만 할 뿐, 당장에 덤벼들 기색은 없었다. 이들 역시 만만치 않은 적수임이 분명했다. 철사도인은 이대로 나가다간 금선에게 위기가 오리라 판단하고 그 즉시 몸을 날려 싸움판에 뛰 어들었다. "금선은 잠시 물러나게! 내가 허선고와 겨루어 보겠네." 이제껏 허비랑은 여유만만하게 금선을 옭아넣고 장난삼아 상대해주고 있었다. 일단 마진이 발동 하면 불청객들을 깡그리 생포해 버리고 그 가운데 금선은 아미산까지 끌고 가서 묘일부인 앞에 내동댕이치고 무안을 안겨줄 작정이었다. 그런 판국에 철사도인이 뛰어든 것이다. 그녀는 악착같이 덤벼드는 금선을 요리조리 놀려가며 철사도인에게 소리를 질렀다. "철사도우, 당신은 아무 종파(宗派)에도 끼지 않는 산선(散仙)이 아니오? 어쩌자고 겁수(劫數)를 사서 당하려는 거요? 내 좋은 말로 권할 때 들으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소. 잠시 후 마진이 발 동하면 소용없으리다!" 철수도인은 꿋꿋한 태도로 응수했다. "사마외도의 무리를 제거하는 것이 곧 수도하는 자의 본분이외다. 허도우께선 더 이상 군말 마 시고 금선을 풀어주시오. 그리고 빈도가 도우의 검법을 한 수 배워 봅시다!" "흥, 그토록 고집을 부리고 깨닫지 못하다니!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함께 사로잡힐 신세나 될 밖에! 요 어린 놈은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주둥이를 놀렸으니까 절대로 놓아 줄 수 없소. 그리고 철사도우께서 재주가 있으시다니 어서 덤벼보시오. 내 사양치 않으리다!" 말도 떨어지기 전에 허비랑의 손에서는 또 한 줄기 푸른빛이 솟구쳐 나와 곧바로 철사도인을 취 하려 들었다. 철사도인 역시 상대를 가볍게 여길 처지가 아니다. 황망히 비검을 쏘아날려 허비랑의 공세를 차 단하고 이어서 반격에 나섰다. 한창 어우러져 싸우는 동안, 홀연듯 사방에서 은은하게 뇌성이 울 렸다. 우르르르! 쿵! 언덕의 깃발 아래 서서 관전하던 무리 가운데 또다시 세 명의 화상이 뛰어내렸다. "아미파 떨거지들아, 머리 수 많다고 으시대지 마라! 여기 백상산(白象山) 금광사(金光寺)의 세 분 나한께서 납시었다!" 요승 셋은 제각기 들고 있던 계도(戒刀)를 허공에 던져 올렸다. 칼날이 햇빛 아래 '번쩍!' 하더니 세 줄기 새하얀 광채로 변해 가지고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진작부터 투지를 불태우고 있던 조심원과 도균, <칠성도인> 조광두가 선뜻 나서며 일제히 비검 을 날려 맞싸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허공으로부터 한 떨기 붉은 꽃송이가 훌쩍 떨어지더니 그 속에서 앳된 홍조(紅潮)를 띤 도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선과 철사도인이 그를 알아보고, 이구동성으로 외켰다. "앗, 오귀천왕이다! 여러분, 어서 이쪽으로 모이시오! 어서 빨리!" 나머지 일행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우르르 한쪽으로 집결했다. 그리고 비로소 금선과 철사도인 이 황급하게 불러들인 연유를 알았다. 상화양은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상대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우선 언덕 위로 올라가 그곳에서 꽂 혀 있던 깃발부터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입으로 마주(魔呪)를 외우면서 허공에다 춤추듯이 깃폭을 휘둘렀다. 그 즉시 깃폭에서는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음산한 돌개바람이 사면팔방을 뒤흔들 며 솟아오르는가 하면 안개가 불타듯 시뻘건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뇌성벽력까지 '와당탕 퉁탕!'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 산비탈에 모여 있던 요승과 도인들, 그리고 백상산의 조심원, 도균, 조광두까지 모두 안개 속에 파묻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오직 보이는 것이라곤 미친 듯 깃발을 휘두르고 있는 < 오귀천왕> 상화양 한 사람뿐이었다. 철사도인 일행은 대경실색, 저마다 검광으로 호신하기에 급급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뛰쳐나가 싸울 엄두도 못 낼 처지에 몰린 것이다. 금선의 혜안은 요승과 도인들이 안개구름 속에서 일제히 잡색 비검, 비도를 휘두르며 사면팔방 으로 떼지어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차, 큰일났다!" 금선은 위기가 박두했음을 직감했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황급히 미진기를 꺼내들었다. 상화양이 수중의 마화금종(魔火金鐘)에 술법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또 한 손으로는 여전히 커다란 깃폭을 흔들어댔다. 화염과 돌개바람, 안개는 더욱 기세 사납게 휘몰아치고 자욱하게 번져 나갔다. 절대절명의 순간, 느닷없이 공중으로부터 백여 장이나 되는 노을빛 광채가 비추어 내리더니, 그 빛줄기가 닿는 지점에서 처절을 극한 단말마의 비명이 연거푸 터졌다. "끼약! 으아아!" 비명이 사라지면서 이제껏 미친 듯 불어닥치던 돌개바람과 안개구름도 산산이 흩어지고, 뇌성벽 력마저 잦아들었다. 깃폭의 효력은 노을빛 광채 아래 스러져 버린 것이다. 이윽고 묘령의 처녀 다섯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영운과 주경운, 주문과 진자령 자매가 당도한 것 이다. 주문의 손에는 천둔보경이 광채를 발하면서 들려 있었다. 뒤미처 안개 속에서 조심원과 도균, 조광두가 낭패한 몰골로 뛰쳐나왔다. 능혼의 지시를 받고 현빙곡에서 출발한 제영운 일행은 시간을 맞추어 마궁 입구에 당도했으나 아무런 적의 동정이 보이지 않으므로 곧장 생문을 향해 날아온 것이다.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낯 선 동자 하나가 산비탈 위에 버텨선 채 거대한 깃발을 마구 휘두르고 있는데 아군은 한구석에 몰 려서 대항은커녕 호신하기에도 쩔쩔매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그래서 주문은 대뜸 천둔보경을 꺼내 비추어 마법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제영운과 주경운은 보경의 광채를 통하여 안개 속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 세 사람의 동도를 발 견했다. 너무도 위급한 상황이라,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비검부터 쏘아보냈다. 요승과 요도들은 상화양이 펼친 마법의 안개 속에 몸을 감춘 채 바야흐로 철사도인 일행을 급습 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머리 위쪽의 상황을 전혀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팔마가 초빙해 온 두 명의 번승(番僧), 신마곡(神馬谷) 바바묘(巴巴廟)의 종원(宗圓)과 소뇌음(小雷音)은 또다른 적을 목표로 접근하고 있었다. 금광사의 세 나한과 어우러져 싸우느라 안개 속에 갇혀버 린 조심원, 도균, <칠성도인> 조광두가 바로 그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조심원과 도균의 실력은 일행 중에서도 가장 약하다. 그러나 조광두의 칠성검광에 힘입어 그나 마도 서로 협력해 가면서 유별나게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바바묘의 종원과 소뇌음은 바로 그 점에 착안하고, 이들을 조광두에게서 떼어놓아 각개격파를 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종원과 소 뇌음은 저마다 상대를 정한 다음 안개 그림자 속에서 두 자루 비도를 자각 조심원, 도균에게 날 려보냈다. 금선의 혜안도 그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행 전체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도무지 구원할 도리가 없었다. 조심원과 도균은 안개 속에서 누군가 자기네들을 암습하는 줄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오직 당면 한 적을 상대하느라 급급해 있었다. 주문의 보경이 운무와 뇌화를 흩어버리고 적의 모습이 드러 날 즈음에는 이미 두 자루 비도가 들이닥치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그 순간 천균일발(千鈞一髮)의 차이로 제영운과 주경운의 비검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날아와서 적의 비도를 맞바로 휘감았다. 쨍! 하는 금속성이 울리면서 종원, 소뇌음의 비도는 삽시간에 고철덩어리로 변하여 맥없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일껏 노렸던 암습이 실패로 돌아간 데다 소중한 비검마저 격파당하자, 혼비 백산한 종원과 소뇌음은 그 즉시 요법을 써서 달아나려 했다. 허나 두 줄기 검광은 여세를 몰아 '씽!' 하고 추격해 오더니 허리에 감기듯 둘을 둘러싸고는 단숨에 조여들었다. 단말마의 비명이 터진 것도 그때였고, 종원과 소뇌음 두 요승이 허 리께부터 두 토막으로 잘리 워 고꾸라진 것도 그 순간, 또 조심원과 도균, 조광두 세 사람이 뛰쳐나온 것도 그와 거의 동시였 던 것이다. 마침내 제영운과 주문, 주경운, 진자령 자매는 지상에 내려서서 철사도인 일행과 합류했다. 이들 은 용기백배, 제각기 비검을 휘두르면서 적의 무리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오귀천왕> 상화양은 적측에 응원군이 가세한 데다 맞대면하기가 무섭게 <연무뇌화번(煙霧雷火 幡)>을 격파하고 또 자기네 패거리 둘마저 쳐죽이는 걸 보고서 가슴 속에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 랐다. 그는 두말도 않고 마화금종을 펼치고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만묘선고> 허비랑이 다급하게 상화양을 제지했다. 주문의 손에 들린 거울이 어지간한 마화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오귀천왕, 잠깐만 멈추시오! 여기 싸움은 빈도가 맡을 테니까 한시바삐 가셔서 진세(陣勢)부터 발동하십시오." 그녀는 상화양의 대답도 듣지 않고 어느 새 다섯 줄기 푸른 검광을 쏘아내어 제영운 일행의 공 격을 맞받아 싸우기 시작했다. 나머지 패거리도 뒤질세라 저마다 비도, 비검들을 가지고 전단에 뛰어들었다. 마침내 혼전이 벌어졌다. 제영운과 주경운은 허비랑을 맞아 이 대 일로 싸웠다. <칠성진인> 조광두와 <백수진인> 유천, 그리고 금선은 백상산 금광사의 세 나한, 낭주(朗珠), 혜주(慧珠), 현주(玄珠)를 상대로 골랐다. 철사도인은 <성수뇌음> 낙남가와 맞붙고, 황현극은 죽산교의 도인 채야호를 공격했다. <여신동> 주문의 상대는 무산(巫山) 우간협(牛肝峽)의 <천심동주(穿心洞主)> 오성(吳性)이었다. 도균과 조심원은 상호 지원태세를 갖추어 오성의 제자 <온황동자(瘟荒童子)> 금탁(金鐸)에게 덮 쳐들었다. 진자령 자매는 단 둘이서 신양산(神羊山) 와우동(蝸牛洞)의 <독각야차(獨角夜叉)> 하명(何明), < 쌍두야차(雙頭夜叉)> 하신(何新), <분면야차(粉面夜叉)> 하재(何載) 삼형제를 한꺼번에 몰아붙였 다. 마교에서 싸움판에 끼어들지 않은 자는 <오귀천왕> 상화양뿐이었다. 그는 산비탈에 주저앉은 채 양손으로 깃폭을 싸감은 자세로 땅을 짚고 맹렬한 속도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중얼중얼 입에 서는 끊임없이 주문이 쏟아져 나오고, 전신은 온통 요사스런 구름으로 뒤덮여졌다. 신체의 윤곽조 차 어렴풋하니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홍운 속에 감싸인 것이다. 제영운 일행 역시 상화양의 그 자세가 무슨 술법을 부리려는 것임을 뻔히 내다보았으나, 당면한 적을 상대하느라 도저히 그쪽까지 접근할 도리가 없었다. 진자령 자매의 맞상대는 와우동에서 온 야차 삼형제였으니, 한악은 <독각야차> 하명과 맞닥뜨 리자마자 하마터면 웃음보를 터뜨릴 뻔했다. 야차 삼형제 가운데서도 제일 추악스럽게 생겼기 때 문이다. '원, 세상에 이런 괴물도 사람구실을 하다니! 저것 좀 보게나. 대갈통은 보릿말 됫박처럼 커다란 게 볼따구니는 움푹 패이고 코쭝배기는 또 불쑥 솟아났어. 늑대처럼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오지 않나, 뺨따귀는 울긋불긋, 몸뚱아리도 대나무같이 호리호리한 게, 길기는 어쩌자구 저토록 멋없이 길담?... 어마, 저 다리 좀 봐! 떨어져 나간 자국도 없이 천생 외다리 아냐?' 가느다란 모가지 위에서 해파리처럼 흔들거리는 그 커다란 머리통을 보자니 차마 눈 뜨고 볼 수 가 없었다. 한악은 자기 몸매를 아래 위로 훑어보면서 다가오는 독각야차가 두렵다기보다는 차라 리 속이 상하고 측은한 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을 해쳤을까 생 각하니 불끈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팔마가 어디서 이런 산정(山精), 수괴(水怪)를 찾아다가 재간을 피우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일찌 감치 내 손으로 처치해 버려야겠다. 다시는 세상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해야지!' 실상 이렇듯 남의 관상이나 보고 한가롭게 생각할 틈도 없었다. 생긴 몰골은 악귀 같아도 <독각 야차> 하명이 후려쳐 오는 한 자루 비차(飛叉)만큼은 실로 여간 기세 사나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 다. 한악은 당초부터 언니 자령한테서 보상부인의 금단을 쓰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던 터라, 오로지 비검만으로 하명과 한바탕 싸웠으나 좀처럼 승세를 잡을 수가 없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산비탈 쪽에서는 <오귀천왕> 상화양이 미친 듯 외워대는 마주(魔呪) 소리가 더욱 커지 고 선회 속도마저 갈수록 빨라졌다. 이윽고 은은하게 홍수와 뇌성벽력이 울리면서 또다시 돌개바 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딛고 서 있는 대지까지 꿈틀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마진의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발동하게 될 것이다. 순간적으로 산비탈 쪽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한악은 추악스런 외다리 도인이 훌쩍 몸을 비틀면 서 연거푸 비차 여섯 자루를 쏘아 날리는 것이 눈에 띄였다. 여섯 자루의 비차는 녹색 화염을 이 글이글 덧씌운 채 곧바로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한악은 천생 호승심(好勝心)이 강한 처녀라, 언니의 당부 따위는 비차를 보는 순간 깡그리 잊고 다짜고짜 보상부인의 금단부터 발사해 버렸다. 이때쯤 해서 <쌍두야차> 하신, <분면야차> 하재 두 형제를 상대로 싸우던 자령은 일검에 적의 비차 두 자루를 몰아붙이고 있었으나 워낙 사나운 짐승들이라서 좀처럼 거꾸러뜨릴 기회는 얻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총망 중에 피아간의 전황을 돌아볼 여유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얼핏 눈에 들어온 것은 제영운 쪽이었다. 제영운과 주경운이 허비랑을 당적해내지 못하는 게 분 명했다. 당장에라도 뛰어가 지원해 주고는 싶으나 야차들이 걸리적거리는지라, 마침내 그녀는 독하게 마 음먹고 품속에 손을 넣었다. 뒤미처 손이 번뜩이더니 백미침 두 자루가 쏜살같이 야차들을 노리 고 날아갔다. 하신과 하재는 미처 피할 틈도 못 찾았다. 정통으로 백미침을 한 대씩 얻어맞자 가 슴이 뜨끔하더니 이내 감각마저 없어졌다. "우와앗!" 그들 둘은 야수처럼 울부짖으면서 비차를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깃발 이 꽂힌 언덕까지 오르기도전에 털썩털썩 맥없이 고꾸라지더니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야차 두 놈을 일거에 처치해 버리고 나서 제영운의 싸움터로 달려가던 그녀는 얼핏 한악을 눈여 겨 보았다. '이런!' 그토록이나 신신당부를 했는 데도 철부지 동생은 또 어머니의 금단을 가지고 적의 비차를 깨뜨 리려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자령은 큰일났구나 싶어 우선 동생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늘 이 싸움터에는 적의 고수들이 너무도 많다. 자칫 실수하는 날엔 무엇보다 소중한 금단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녀는 조준의 정확도를 높이느라 독각야차에게 바짝 접근해 가지고 비검 을 쏘아 날렸다. 하명은 측면으로부터 느닷없이 기습을 당하자 미처 피신할 틈도 없었다. '씨잉!' 하는 파공음을 울리며 들이닥친 검광은 여지없이 그의 외다리를 썽둥 베어버린 것이다. "우와앗!" 독각야차는 당장 <무각야차(無脚夜叉)>로 변했다.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를 지르면서 하명은 허 겁지겁 둔신법으로 남은 몸뚱이를 가린 채 쏜살같이 신양산 소굴로 달아나고 말았다. "얘, 어서 금단을 회수해라! 나하고 같이 가자." 자령은 동생을 재촉했다. 그리고 함께 제영운의 싸움터로 딜려가는 동안에도 동생의 경솔한 행 동을 쉴새없이 꾸짖었다. 제영운과 주경운의 검광은 어느덧 허비랑에게 눌려 광망(光芒)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자령 자 매는 야무진 기합성을 지르면서 전단(戰團)에 뛰어들었다. "이얍!" 한악이 앞장서서 허비랑을 노리고 한 줄기 푸른빛 검광을 쏘아 보냈다. 허비랑은 반사적으로 자기 비검을 갈라 한악의 야무진 공세를 선뜻 막아냈다. 뒤미처 자령의 검 광이 덮쳐들었다. 그제저야 허비랑은 적의 증원군을 눈여겨 살폈다. 두 계집이 모두 낯설다. 찬하대사의 제자라면 황산에서 본 적이 있을 텐데 전혀 처음 보는 계집이다. 쏘아내는 검광조차 아미파의 것이 아니다. '가만 있거라. 이년들이 혹시 사도평을 꼬여간 것들 아닐까?' 자령의 공세마저 차단하면서 허비랑은 크게 외쳐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어서 이름이나 밝히고 죽음을 받지 못할까!" 한악이 냉큼 응수했다. "우리 자매는 바로 보상부인의 따님, 황산 자령곡의 진자령과 진한악이시다. 그대는 그 악명 높 은 여도인 허비랑이 아닌가?" 허비랑은 그만 기가 탁 막혔다. 이어서 놀라움과 분노가 밀물처럼 밀어닥쳤다. '이년들이 과연 사도평을 꼬여낸 장본인이라니! 깜찍한 계집 같으니라구... 보상부인의 전수를 받 은 백미침으로 사문공까지 죽게 만들었던 원흉들이 아닌가!' 점괘에는 또 이것들이 훗날 자신의 화근덩어리라고 했다. 눈앞에 두고 보니 아리따운 자태가 더 욱 울화통을 치밀게 만들었다. 허비랑의 입에선 욕설이 터져나왔다. "요 음탕한 계집년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반도(叛徒) 사도평까지 유혹해다 간음한 것들이 어딜 감히 선고(仙姑)의 면전에서 발광을 하느냐! 오늘 내 너희 두 년을 죽여 묻힐 곳도 없게 만 들고야 말리라!" 그 말이 멀어지면서 자령 자매의 비검을 가로막은 검광이 더욱 팽팽해지고 새파란 서슬이 돋구 어졌다. 진자령 자매는 허비랑이 단신으로 네 적수를 상대하면서도 바다를 뒤덮는 청룡과도 같이 위풍당 당, 추호만큼도 늠름한 기세를 잃지 않는 걸 보고, 여간한 비검술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자령 자매가 눈짓을 교환하고 법보를 꺼내려 하자, 허비랑은 진작에 눈치채고 무시무시 한 공격을 퍼부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괘씸한 자매에게 도무지 손쓸 틈도 없이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이와 함께 허비랑은 품속에서 비성탄(飛星彈) 열여덟 개를 꺼내 던졌다. 이 기회에 아주 요절을 낼 작정이었다. 손아귀가 펼쳐지자, 열여덟 알의 은빛 별이 연광(煙光)을 뭉게뭉게 뿜으면 서 제영운과 주경운, 진자령 자매를 노리고 섬전과도 같이 날아왔다. 제영운은 가슴이 철렁했다. "큰일났다. 빨리들 피해요!" 악은 썼으나, 이걸 어쩌랴! 자신들의 비검은 모조리 허비랑이 검광으로 단단히 옭아잡고 놓아 주 지 않는다. 발버둥을 쳐봐도 뿌리칠 수 없을 뿐더러 눈앞에는 당장 무시무시한 은빛 불더미가 들 이닥치고 있다. 네 처녀는 투지를 잃은 채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렸다. 이때였다. 창공에서 해맑은 휘파람 소리가 길게 울리더니 누군가 한 사람이 곧바로 솟구쳐 날면 서 고함쳤다. "마진은 이미 발동했다! 너희들은 어서 속히 비검을 거두고 내가 분부한 대로 움직여라!" 외침과 동시에 도포의 소맷자락이 허공중으로 활짝 펼쳐지더니 허비랑의 비성탄은 열여덟 알 모 두가 그 소맷자락 속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곤 마치 바닷물에 잠긴 돌덩이처럼 잠잠해졌다. 네 처녀는 겨우 놀란 넋을 진정시키고 뜻밖에 나타난 구원자를 바라보았다. <괴규화> 능혼, 노 선배였다. 이 무렵, <여신동> 주문은 벌써 무산 우간협 <천심동주> 오성의 병기인 온황정(瘟荒釘)을 천둔 경으로 깨끗이 격파해 버리고 다시 비검마저 날려 적의 양팔마저 베어내어 목각인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죽산교의 요도인 채야호를 상대하던 황현극은 적수가 훔쳐낸 차녀기(侘女旗)에 휘말려 현기증을 일으키고 위기에 처했으나 때마침 오성을 폐인으로 만들어 쫓아낸 주문이 뒤쫓아 와서 보경을 한 번 비추자 형세는 일변했다.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우선 채야호의 차녀기를 격파한 후, 주문과 황 현극은 일제히 비검을 날려 적수공권(赤手空拳)이 되어 버린 채야호의 모가지를 단칼에 쳐 날려 보낸 것이다. 도균, 조심원과 이 대 일로 싸우던 <온황동자> 금탁은 겨우 백중지세를 이루면서 이때껏 버텨 왔으나, 문득 자기 스승 오성의 목이 뎅겅 잘리우는 참경을 목격하자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더구나 스승의 법보를 단숨에 박살낸 그 계집의 거울빛에서 백여 장이나 됨직한 오색 광채가 무 인지경으로 쏟아져 나와 자기에게까지 접근하는 것을 보고 간담이 써늘해져서 투지가 싹 떨어졌 다. 이대로 더 지체했다간 좋은 꼴 못 보리란 판단이 서자, 금탁은 조심원과 도균에게 허장성세로 맹공격을 가하는 척하다가 황망히 비검을 회수하여 올라타고는 그 길로 꽁지 빠지게 달아나 버렸 다. 이런 판국에 능혼이 나타난 것이다. 승세를 잡고 신나게 적을 몰아붙이던 일행은 능혼이 허비랑 의 비성탄을 터뜨리는 동시에 땅속으로부터 무시무시한 진동이 격심하게 일어나는 걸 느끼고 일 제히 수비태세로 전환하여 적을 막으면서 한 발 한 발 후퇴하여 주문과 금선 곁으로 집결하기 시 작했다. 머리 위에는 누른빛 안개와 붉은 구름덩이가 치닫는 말떼처럼 가속적으로 중심부를 향해 몰려들 고 있었다. 발 밑에선 지진의 진동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솟구치면서 돌개바람을 타고 휘몰아쳤 다. 홍수가 내리쏟아지는 굉음이 '우르르!' 사방 천지를 울렸다. 일행들은 마침내 보경과 미진기를 지닌 두 사람 곁에 차질없이 집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저마다 비검과 법보로 방어막을 형성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허비랑은 능혼과 맞닥뜨리자마자 다년간 온갖 심혈을 기울여 단련해낸 법보 비성탄을 어이없게 날치기 당하고 보니 속에서 무명업화(無明業火)가 삼천 길이나 치솟았다. 그녀는 이를 갈아붙이면 서 능혼과 생사결판을 낼 작정으로 법보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핏 눈길에 상화양의 모습이 비치자 그 즉시 중단하고 비검을 거두어들였다. 이제 상화 양은 언덕 위에서 예정된 마진을 발동할 것이다. 깃발이 휘둘러지는 가운데 방원 십여 묘나 됨직 한 홍운(紅雲)이 뭉게뭉게 일면서 적의 방어막을 뒤덮기 시작한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제영운 일행을 포위공격하던 요승 도인들도 신호에 따라서 각자 법보를 회수한 다음, 허비랑이 미리 정해 준 방위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일제히 작은 깃발을 한 개씩 꺼내 잡은 채 조 용히 상화양의 명령을 기다렸다. 제영운도 산비탈 주진(主陣)에서 붉은 구름덩이가 날아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을 신호로 적들 이 공격을 중단하고 분분히 병기를 거두어 물러가는 것도 보았다. 적들이 퇴각해도 사태는 급박 해진 게 분명하다. 붉은 구름덩이에 닿는 날이면 비검을 손상당할 것이다. "모두 비검을 거두세요! 저 구름에 스쳤다간 당장 오염되고 말 거예요." 일행들도 제각기 비검과 법보를 끌어들였다. 방어벽은 순식간에 없어지고 벌거숭이가 된 셈이다. 이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주문이 일행들 앞으로 선뜻 나섰다. 손에 들린 거울이 광채를 발하기 시작하자 오색도 찬란한 금빛 무지개가 날아오르더니 붉은 구름덩이의 진로를 딱 가로막아 버렸 다. 홍운의 공세가 차단당하고 효력을 잃어버리자, 그걸 본 상화양이 손가락으로 사방을 골고루 찍 어 보였다. 이어서 뇌성벽력이 '우르르!... 쿵, 쿵!' 울리더니, 청라산 주봉으로부터도 우뢰 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사방에서 역시 우뢰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주봉의 독룡존자와 나머지 함(陷), 약(弱), 타(墮), 멸(滅), 포(怖)의 다섯 개 진문(陣門)을 지키고 있던 잠복대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적은 이미 생문(生門)에 몰려 꼼짝달싹도 못하 는 상태다. 그렇다면 일제히 진세를 그쪽으로 몰아서 마짝 압축해 놓고 천라지망에 걸린 고기떼 를 낚아 올리는 일만 남았다. 마진의 그물은 서서히 생문을 중심으로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주문의 거울 광채 아래 모여 있는 제영운 일행들은 저마다 가슴을 조이면서 상황의 추이를 지켜 보았다. 적이 본격적으로 대공세를 개시한 것이 분명하다. 우르르르... 콰당! 쿵쾅! 갑자기 보경의 광채 바깥에서 천지개벽을 하듯 엄청난 괴성벽력이 터지더니 지하에서도 '쿵! 쿵! 쏴아!' 하는 굉음이 진동했다. 홍수와 화염, 폭풍이 지상으로 쏟아져 나오기 직전인 모양이었다. 얼마쯤 있다가 주봉에서 지휘하던 독룡존자까지 생문으로 쫓아왔다. 독룡은 잠시 중얼중얼 마주(魔呪)를 외고 나서 대갈일성, 호통을 쳤다. "펼쳐랏!" 각 진문의 요승 도인들은 생문을 사면으로 철통같이 에워싼 채 작은 깃발을 훌쩍 펼치더니 만마 연홍사에 주술(呪術)을 걸어 흩뿌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사방 천지는 수십 덩어리의 녹화(綠火), 황진(黃塵), 홍무(紅霧)로 자욱하게 뒤덮여 온 통 암적색으로 물들면서 제영운 일행의 머리 위로 덮어 씌워졌다. 그와 동시 딛고 선 땅바닥도 꿈틀꿈틀, 당장에 풀썩 꺼진 듯 진동하면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주문이 들고 있는 천둔보경은 오직 상화양의 홍운덩어리를 막아낼 수 있을 뿐, 더 이상은 돌아 볼 여유가 없었다. 형세가 위급해지자, 진자령은 급히 금선의 손에서 미진기를 빼앗다시피 받아 들고 진언을 외우며 활짝 펼쳤다. 순간 채색 구름이 풀썩 일어났다. 채운 속에 일행들이 막 떠오르자마자, 홀연듯 산악 전체가 무 너지는 굉음이 울리더니 대지마저 무섭게 요동쳤다. 지진이 시작된 것이다. 꽈당, 쿵꽝! 일행이 방금껏 서 있던 자리가 풀썩 꺼지며 크고 작은 구덩이가 무수히 생겨났다. 어느 것이든 깊이조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지옥의 입구였다. 이내 구덩이 속에서 황(黃), 녹(綠), 적(赤) 세 가지 짙은 연기가 무럭무럭 솟구치더니 지상에 나오기 무섭게 불길이 당겨지고, 불타는 화염과 광풍, 홍수로 변하여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한 일행을 휘말아 들었다. 진자령과 주문은 지체없이 머진기와 천둔보경으로 전원을 보호했다. 길길이 치솟는 불길, 돌개바 람 기둥, 천지를 휩쓸듯 밀어닥치는 홍수의 마법은 천둔보경의 무지개 광채를 꿰뚫지 못하고 그 밖에서 엄청난 위력을 보이면서 틈을 엿보고 있었다. 이렇듯 일행은 광풍노도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오직 보경의 광채에만 운명을 맡긴 채 두 시간이 나 버텨냈다. 그 순간순간은 한 해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마진의 지, 수, 화, 풍이 발동하고 게다가 독룡존자의 지휘 아래 만마연홍사까지 펼쳐지자, <오 귀천왕> 상화양은 적들이 결코 살아서 도망치기는 글렀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그를 경악시키고 말았다. 적은 먼저 거울 한 개로 자기의 마화 홍운을 차단해 놓고서 뒤이어 한 덩이 채색 구름으로 변하 여 홍수와 화염, 폭풍 속에서 조각배처럼 엎치락뒤치락 흔들리면서도 와해되지 않고 거뜬히 버티 고 있지 않는가! 마진은 적들을 가두어 놓았으나 터럭 끝 하나도 다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정타가 효력을 끝내 발휘하지 못하자 상화양은 초조감에 휩싸여 자기 손톱만 씹었다. 흘낏 뒤 돌아 보니 각 진문의 동료들은 지정된 방위에 정확하게 지켜 선 채 다음 명령이 내리기만 기다리 고 있었다. 방금 전 싸움에서 죽거나 부상당하고 도망친 자 말고는 모두 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진문(陣門)에 허술한 자리가 눈에 띄었다. 상화양 은 재차 진문의 숫자를 하나하나 세어갔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아뿔싸! 이게 어찌 된 셈인가? 없다. 한 군데가 비었어!' 그렇다. 과연 진문 하나가 없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사문(死門)을 지키러 간 <독각령관> 낙삼관이 빠지고 없었다. 마진이 발동하면 그물을 조여 이곳 생문까지 당도했어야 할 낙삼관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문호가 한 군데 비었으니, 만약 적측에 이를 간파당하는 날이면 그것으로 만사 끝장이었다. 지금 처럼 채운을 타고 사문 쪽으로 날아가 버리기만 하면 거뜬히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상화양은 놀랍기도 하려니와 어처구니가 없었다. 불끈 역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상화양은 아직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심보가 곱지 못한 낙삼관이 자기를 멋들어지게 감쪽같이 속이고 백골쇄심추를 손에 넣자마자 그대로 뺑소니친 사실을..... 겨우 그 귀중한 법보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낙삼관이 무슨 실수라도 저질러 적에게 빼앗기지나 않았는가 걱정이 되었다. 수년 동안 고심참담, 피와 땀으로 이룩한 그 소중한 백골쇄심추를 적의 손아귀에 넘기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노릇이었다. 상화양은 다급하게 독룡존자와 허비랑을 붙잡고 당부했다. 마진이고 뭐고, 당장에 자기 목숨 같 은 법보를 잃게 된 판이니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두 분 도우, 잠시만 이곳에서 지휘를 맡아 주시오. 나는 사문 쪽엘 한번 다녀와야겠소." 당부의 말도 끝내지 않은 채 그는 한 떨기 홍운으로 변화하여 사문을 향해서 질풍처럼 날아갔 다. 칭라욕 골짜기 어귀에 당도하고 보니, 태양은 이미 중천에 올라 정오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데, 사방은 괴괴하니 인기척 하나 없었다. "낙도우, 낙도우!" 미친 듯이 불러가며 구석구석을 뒤져보았으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낙삼관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 었다. '그거 참 이상하다! 산 사람도 없고 죽어 자빠진 시체도 보이지 않다니... 아뿔싸, 그렇다면 낙삼 관 그놈이?' 그제서야 상화양은 머리통에 쇠뭉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비로소 낙삼관이 백골쇄심추를 건네받으면서 짓던 미소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그 신비스런 미소를 상화양은 발 을 구르면서 노발대발 날뛰었으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곤 자기와 그림자뿐이었다. "내가... 이 오귀천왕 상화양이 속임수를 당하다니! 그 도적놈의 속임수에 넘어가 법보를 빼앗겼 어! 거기다 사용법까지 고스란히 일러주었단 말야. 어이구 원통해! 육시처참을 해서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어디 두고 보자. 내 기필코 설혼주를 손에 넣어 가지고 그 법보도 되찾고 원수를 갚고야 말 테다! 기다려라, 이 도둑놈아!" 혼자 날뛰 악을 고래고래 지르면서 화풀이하는 참인데, 문득 멀리서부터 어렴풋이 '우르릉!' 울 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를 북북 갈고 있던 상화양이 혹시나 해서 귀기울여 다시 들었다. 헌데 그 음향은 아무래도 생문 쪽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것 봐라? 웬 소리가 나는 것일까? 마진의 음향은 아닌 듯싶은데.' 놀랍고 이상해서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저것이다! 아앗!' 상화양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가슴 속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보라! 생문을 겨누고 정자오(正子午) 방위상에 거대한 산봉우리 하나가 둥실 허공에 뜬 채 생문 쪽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없어. 아무래도 내 눈이 잘못된 거야.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해!" 혼자 중얼거리면서 자위해 보았으나, 그 산봉우리는 그 순간에도 움직이고 있었다. 봉우리 정상 에서는 수천 줄기 짙은 연무가 무럭무럭 일었다. 마치 산악 전체를 대지 위에서 뿌리째 들어 뽑 으려는 듯이 '우르르!...' 굉음까지 울려가며 솟아오르는 것이다. 상화양은 한참 동안 그쪽을 노려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누군가 천마해체대법을 써서 우리 마진을 파괴하려 오고 있음이 분명하다. 시각도 자오 (子午), 방위도 자오 정면, 이제 천화(天火), 지뢰(地雷)가 발동하리라. 그 위력 아래 우리 마진은 여지없이 토붕와해(土崩瓦解)를 당하고, 그 속에 든 사람들도 여간한 실력이 없다면 결코 살아 남 지 못할 것이다. 적들도 마찬가지 역시 옥석구분(玉石俱焚)을 면치 못하겠지. 이게 어찌 된 셈인 가? 아미파 말고 제삼의 적수가 또 있었다니!'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 그 산봉우리는 과연 차츰 지면에서 떨어져 오르더니 마진의 생문 쪽을 바라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상화양은 햇빛을 치올려 보았다. 이제 뒤쫓아 가더라도 마진을 수습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틀렸어.'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는 게 있었다. 등팔고가 손에 넣었다는 설혼주! '그렇지, <여앙신> 등팔고는 현재 아미파의 일당이 되었다. 그녀의 몸뚱이는 주화입마에 빠져 기동을 못할 터, 오늘 청라욕 싸움터에 참전하지 않았으니까 분명 아직도 현빙곡 안에 남아 있으 렸다. 적들이 전 병력을 깡그리 동원하여 이리로 쳐들어 온 지금 현빙곡에는 그녀 혼자뿐이리다. 이 기회를 틈타 현빙곡으로 날아가서 설혼주나 빼앗자꾸나! 그것만 손에 넣으면 다시 낙삼관 그 도적놈을 찾아 백골쇄심추를 탈환할 수가 있지. 이거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 꿩 먹고 알 먹기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벌써 마진 속의 동료들이 죽거나 살거나 아무런 걱정도 되지 않았 다. 우선 자기 일만 머릿속에 꽉 찼을 뿐이었다. 상화양은 마진 쪽으로 유유히 날아가는 천마해체 대법의 산봉우리에 눈길을 한번 던져본 다음, 고함을 쳤다. "날아랏!" 홍운에 몸을 싣고서 그는 청라욕의 반대 방향인 현빙곡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상화양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계곡 어구 암벽 뒤편에서 우람한 체구의 한 사나이와 걸인 하 나가 돌아나왔다. 사나이는 결박당한 도인을 추켜들고서 걸인에게 말을 건넸다. "사부님, 요 걸레 같은 도인녀석일랑 깨끗이 죽여없애죠. 살려둬서 후에 쓰실랍니까?" "네깐 녀석이 뭘 안다구!" 걸인은 한 마디로 퉁박을 준 다음, 한참 동안 하늘을 지그시 노려보고 서서 아무말이 없었다. 그 러다가는 느닷없이 손을 뻗쳐 사나이의 손에 쳐들린 도인을 나꿔채더니 등에 털썩 메고서 계곡 쪽으로 냅다 뛰어나갔다. "엇, 사부님!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사나이는 고래교래 악을 쓰면서 허겁지겁 뒤쫓아 갔다. 그러나 걸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 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괴규화> 궁신 능혼과 새로 그의 제자가 된 <육지금룡> 위청이었 다. 위청은 원래 일행들이 번취자 소원사에서 출발할 때 함께 따라갈 생각이었으나, 일행 가운데 자 기 하나만이 비검술을 배우지 못했거니와 스승에게서 채찍 한 자루를 전수받기는 했어도 그 사용 방법을 모르는지라 여지껏 한 번 써먹어 본 적도 없는 데다 스승 능혼이 각별한 분부까지 내렸으 므로 하는 수없이 청라계곡 어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선봉대인 조심원과 금선이 앞서 들어가고, 뒤따라 철사도인 일행도 골짜기 입구 사문을 수비하 던 죽산교 도인 두 놈을 처치한 후 진입해 버리자, 그는 멀거니 바위 위에 앉아서 동료들이 사라 진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느덧 동북편 하늘에는 아렴풋이나마 수십 줄기 갖가지 빛깔의 광채가 어지러이 번뜩이는 게 보였다. 동료들이 적과 마주쳐 피아간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하염없이 싸움터 쪽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자기가 혼자라는 생각에 미쳤다. '나는 비검술도 못 쓰고 혈혈단신 홀몸인데, 여기는 바로 청라마궁 입구가 아닌가? 만약에 마궁 측 요물이라도 나오는 날엔 꼼짝도 못하고 당할 판이야. 멀거니 앉아서 '날잡아 잡수!' 할 필요가 어디 있어? 그랬다간 애꿎게 생목숨이나 끊기기 십상이지.' 위청은 소스라쳐 벌떡 일어났다. 요물이 나타나리란 생각을 하니 등골까지 오싹해졌다. 어디 으 슥하게 후미진 장소를 찾아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스승 능혼이 오거든 다시 상의해서 행동하기로 작심했다. 그는 능혼의 언약을 굳게 믿었다. 대가장(戴家場)에서 뭐랬던가? 청라산까지 당도하면 제자로 삼 아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얼씨구나 좋아라고 조심원 일행을 따라온 것이다. 청라산에 왔으니까 자 기는 이미 능혼의 제자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유천은 또 뭐라고 했던가? 스승 능혼이 자기를 별도로 쓸 데가 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럼 제자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말이다. 생각만 해도 덩실덩실 어깨춤이 나올 지경 이었다. 그는 암벽 뒤쪽에서 후미진 장소를 찾아내고 거기에 숨었다. 그러나 능혼이 언제 올지 모른다. 여기 와서 자기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큰일이 아닌가? 모처럼 잡은 천재일우의 기회가 수포로 돌아갈 판이다. 그래서야 안 된다. 그는 암벽 뒤에 숨어서도 일각을 못 참고 바깥쪽에 머리를 내밀어 두리번거렸다. 결국 위청은 숨으나마나였다. 혼자서 한창 머리통을 내밀었다 숨었다 도깨비 숨바꼭질하는 판에 기어코 문제가 생기고 말았 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스승은 아니 오고, 질색을 할 놈의 적이 나타난 것이다. 골짜기 안에서 두 눈을 잔뜩 부릅뜨고 달려나오는 도인이 한 사람 보였다. 시뻘건 얼굴, 이마빼 기에는 큼지막한 혹이 하나 달렸는데, 수화도포(水火道袍)를 걸친 등 뒤로 보검 한 자루와 호로병 을 메었다. 손에는 또 사람의 해골바가지를 꿰어 만든 병기 한 자루를 들었고, 온몸뚱이는 물론 그 주변으로 자욱하게 안개와 연기가 휩싸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사악한 기운이 그득한 것이 마궁 측 요물임에 틀림없었다. 위청은 단박 자라 모가지 움츠리듯 바위 뒤쪽으로 틀어박혔다. 그 순간에도 요도인은 점점 위청이 숨은 암벽을 행해 뛰어오고 있었다. 세상천지 동서남북 너르 디너른 곳을 마다하고 하필이면 이쪽으로 올 게 뭐란 말이냐? '맙소사, 큰탈났구나!' 속으로 아우성을 치면서도 여차직하면 뛰쳐나가 이판사판 끝장을 내리라고 단단히 각오를 해보 았다. 어느덧 도인은 암벽까지 바짝 다가왔다. 위청은 숨을 멈춘 채 두 손으로 가슴의 고동마저 멎으 라는 듯 꽉 눌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도인녀석은 위청을 못 본 듯, 그대로 암벽 곁으로 스쳐 지나갔다. 뭐가 그리 도 바쁜지 곧바로 계곡 바깥을 향해서 달음질치는 것이다. 위청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길게 숨을 토해냈다. '이젠 살았구나! 휴우.....' 그런데 또 사고가 생겼다. 위청이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던 것이다. 얼마 안 있어 그 빌어먹을 도인놈이 또다시 날듯 달음박질치며 되돌아 오는 게 아닌가! 그것도 이번에는 위청의 은신처로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어쩌랴? 위청은 암암리에 마음을 다잡고서 결판낼 태세를 취했다. 도인녀석은 거의 닿을 듯 스치고 지나쳤다. 숨소리마저 들렸다. 곁을 스치는 순간 자세히 보니, 이건 또 웬일인가? 도인은 얼마나 신나게 달음박질을 했는지 헐레벌떡,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이 마에서는 콩알만한 땀방울이 주룩주룩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불거진 두 눈알은 도대체 뭘 보려고 그러는지 앞쪽만 향한 채 고정되어 좌우로 눈동자 하나 움 직일 줄 모른다. 그토록 기세차게 뒤는 데도 발 밑에선 먼지 한 톨 일지 않았다. 도인은 죽어라고 달음박질치는 것밖에 제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도인은 그렇게 계곡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내 되돌아 나왔다. 바깥으로 나갔는가 싶으면 또 다시 나타났다. 이럭저럭 위청은 숨 한 모금 제대로 내쉬지 못한 채 자기 곁을 미친 듯이 달려 오락가락하는 도인녀석만 주시했다. 벌써 몇십 차례나 왕복을 했는지 셈하는 것조차 잊어먹었다. 위청은 이놈의 도인이 귀신한테 홀렸다고 단정을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려면 수십 번이 나 자기 곁을 지나치면서 끝끝내 발견 못했을 리가 있느냔 말이다. 그의 가슴 속에는 슬그머니 두려움이 사라지고 자신감마저 움트기 시작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이놈의 도인 몰골도 괴상망칙스럽고 차림새조차 요망스러운 데다 손에 잡고 있는 해골바가지 병기가 물씬물씬 안개 연기를 뿜어내고 있으므로 도저히 맞설 엄두도 못 내었 다. 헌데 이제 꼬락서니를 다시 보니 그게 아니다. 얼굴빛은 연시(軟枾)처럼 시뻘건 게 숨이 턱에까 지 차올라 헐레벌떡, 걸음걸이조차도 그토록 날쌔던 것이 비틀비틀 느려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위청의 귓결에는 어렴풋이 '우르르!...' 지진의 울림과 비바람 몰아치는 소리가 한 데 어울려 들리기 시작했다. 마궁으로 쳐들어 간 일행들의 안위(安危)는 어떠한지, 길(吉)인가 흉 (凶)인가? 이런 마당에 스승 능혼은 여전히 올 기척도 없었다. 몸을 숨긴 은신처는 자못 으슥해서 이놈의 도인이 곁을 스쳐 달리면서도 발각당하지 않을 정도니까 스승이 오더라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더욱 조바심이 들끓고 안달이 났다. '이놈의 도인녀석은 아무래도 귀신한테 홀렸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정신없이 뜀박질만 할 리가 있느냐 말이다. 안 되겠다. 여기서 멍청하게 저놈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간 하루 해 가 저물어도 모자라겠어. 차라리 바짝 접근했을 때 등 뒤로 덮쳐서 한칼 먹이고 끝장을 내볼까?' 위청은 용기를 냈다. 칼을 쓰윽 뽑아들고서 도인놈이 다시 뛰어올 순간에 요절을 낼 태세로 바 위 앞쪽까지 바짝 붙어섰다. 도인이 나타났다. 입에 게거품을 허옇게 물고선 비틀비틀 쓰러질 듯 휘청걸음으로 달려오고 있 었다. '이때다!' 위청은 두 손아귀로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잡고 머리 위까지 번쩍 추켜들었다. 한데 얼결에 맞은 편 산등성이 벼랑 꼭대기로 눈길이 갔다. 벼랑 위에는 걸인 하나가 천연덕스레 앉아서 발치 아래 쪽 도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보니 도인녀석은 걸인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을 따라 서 죽자고 뛰고 있었다. 마치 손가락 끝의 보이지 않는 무엇엔가 이끌린 듯 헐레벌떡 달리고 있 었던 것이다. '이런! 여지껏 어딜 가셨는가 했더니만 저기 앉아 계셨구나!' 걸인은 분명 자기 스승인 <괴규화> 능혼이었다. 위청은 반가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 르고 말았다. "사부님!" 그 고함소리에 도인은 문득 발길을 멈칫했다. 뭔가 조금 깨우치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달음박질 을 시작했다. 도인녀석 등줄기에 한칼을 먹이려던 생각도 내팽개치고 위청은 스승의 모습에 눈길을 박은 채 쏜살같이 맞은편 암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스승 앞까지 거의 닿았을 무렵, 능혼은 벌떡 일어서 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사부님, 사부님!" 기급을 한 위청이 마구 소리쳐 불렀지만 스승의 응답은 들리지 않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 다. 역시 능혼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제서야 위청은 도인이 이 반나절을 미친 놈처럼 뛰어다닌 게 스승의 장난질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걸 생각하니 새삼 자신의 우둔한 머리를 쥐어박고 싶도 록 밉고 후회스러웠다. 스승을 뻔히 눈앞에 두고서도 이제껏 눈치를 못 채 아까운 기회를 또 놓 친 것이다. 하릴없이 도인이 달려오던 쪽을 바라보았으나 그도 또한 보이지 않았다. 위청은 어슬렁어슬렁 도인이 사라진 방향을 뒤쫓기 시작했다. 일 리 가량 추적하고 보니 바위 위에 누군가가 벌렁 누 워 있다. '이크, 사부님은 여기 계셨구먼!' 또 놓칠세라 후다닥 뛰어가기는 했는데, 어렵쇼, 스승은커녕 그 도인녀석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게거품을 물고 엎어져 있지 않는가! 손에는 여전히 그 무시무시한 해골바가지 몽치를 쥐고 있었 는데, 뭉글뭉글 풍겨나오던 연기 구름은 어느덧 스러지고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놈!" 위청은 욕설이 터져나왔다. 애타게 찾아 헤매는 장본인 대신에 재수없는 꼴뚜기 도인녀석만 있 는 것이다. 침을 탁 뱉고 막 돌아서려다, 그는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저 도인놈은 요법이 대단한 모양이지만, 지금은 정신을 잃고 널브러져 있다. 손에 쥔 괴상한 몽 치도 위력 지독스런 법보인 게 틀림없고, 또 등에 메고 있는 저 보검도 내 칼보다 훨씬 좋은 것 같구나. 어디 단칼에 요절을 내고 이 어르신네가 저것들을 쓱싹 해버릴까 보다!' 위청은 터무니없게 엄청난 욕심을 품었다. 정신놓고 '날잡아 잡수!' 널브러진 도인녀석을 쳐죽일 수 있는 용기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다시 허리춤에서 단도(單刀)를 잡아뽑았다. 칼을 뽑기는 뽑았다. 한데 저놈의 괴상막칙한 몽치가 무슨 재간을 부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도인놈이 금종조(金鐘條) 무공을 익혔다면 칼질해 봤자 털끝 한 올 못 자르고 칼날만 빠질 게 분 명한 것이다. 공연히 자는 범 콧구멍 건드려서 깨울 필요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그렇다. 힘으로 할 게 아니라 꾀를 쓰자! 몽치든 보검이든 훔치면 되는 것이다. 슬쩍 가로챈 다 음에 옴쭉달싹도 못하게 결박지워 놓고 협박을 하면 제깐 녀석이 저 이상한 몽치 쓰는 용법을 불 지 않고 배겨낼 거냐?' 위청은 자기가 한다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한이 있다라도 하고야마는 우직한 성격의 소유자 였다.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서 그나마도 꾀를 냈다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스승 능혼이 술법으로 <독각령관> 낙삼관을 거꾸러뜨려 혼절시키지만 않았다면 자기 따위는 모가지가 열 개 있어도 낙 삼관의 비검 아래 모자랐을 터이건만 그는 이러한 내막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모처럼 꾀를 내고 결심했으니 이제는 실천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 위청은 잔뜩 쭈그려 앉은 자 세로 황새걸음을 해가면서 도인에게 접근했다. 그래도 상대방은 전혀 낌새를 못 채고 널브러져 있었다.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도인 등 뒤쪽으로 돌아가 업드린 채 보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숨 한 모금 꼴깍 삼키고 나서 살그머니 당겨 뽑았다. 쨍! 칼집에서 빠지는 소리가 위청의 귀에는 천둥벼락보다도 크게 들렸다. 한 줄기 푸른 서슬이 번쩍 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저도 모르는 사이 엉겁결에 펄쩍 개구리 뜀박질치듯 뒤쪽으로 솟구쳐 달 아났다. 그것도 한 발짝이 아니라 연거푸 이십여 장 밖까지 뜀질을 한 것이다. 그래도 바위 위에 엎어진 도인은 전혀 기척이 없었다. 위청은 겨우 마음을 놓고서 수중의 보검 을 내려다보았다. 가을날 호수처럼 해말간 빛, 그 푸르른 서슬에 눈이 부시고 싸느란 기운은 검신 (劍身)으로부터 삼엄하게 쏘아져 나와 탈취자를 위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칼자루에는 가느다란 청사(靑蛇) 한 마리가 또아리 틀듯 새겨졌고, 그 아래 전서체(篆書體)의 붉 은 글자도 보인다. 뜻밖에 희한한 보검을 얻자, 위청은 놀라움과 기꺼움에 못 이겨서 평생토록 자기 목숨을 지켜주 었던 단도를 헌신짝 버리듯 서슴없이 내동댕이쳤다. '이제는 저 괴상한 몽치를 훔쳐내야겠다. 칼도 이만큼 멋진데 몽치는 또 얼마나 기막힌 보물일 까?' 위청에게는 호박이 덩굴째로 굴러든 셈이다. 그는 방금처럼 몸뚱이를 잔뜩 웅크린 채 황새걸음 으로 살금살금 다시 다가갔다. 보검은 등 뒤에서 훔쳤지만 이번에는 도인의 앞쪽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을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바위에 엎어진 도인은 왼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있는데 괴상망칙한 몽치는 그 손아귀에 끼 어져 있는 것이다. 몽치 끝머리에 해골바가지 다섯 개가 매화 꽃잎처럼 꿰어져, 무시무시한 이빨 을 온통 드러낸 채 눈앞으로 다가오는 도둑을 위협하듯 노려보았다. 위청은 바위 아래쪽 움푹 패인 모서리에 몸뚱이를 쳐박고 해골바가지와 눈씨름을 시작했다. 퀭 하니 뚫린 구멍에선 인광(燐光)이 번쩍번쩍, 도둑을 당장 잡아먹을 기세다. 그러나 술법이 걸리지 않았으니 아직까지는 죽은 사람의 대가리에 불과했다. 숨을 가다듬고 무슨 기척이라도 없는지 귀 를 기울였으나 도인은 죽은 듯 잠잠할 뿐이었다. 고개를 길게 빼고 살폈어도 여전히 도인은 넋 빠진 시체나 다름없었다.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한참 동안 멈칫거리다 위청은 마침내 용기를 냈다. "에잇!" 몽치 손잡이를 거머쥔 도인의 팔이 멀어져 나갈 듯 팽팽해지더니 이내 축 늘어진다. 위청은 몽 치 중턱 자루를 두 손으로 잡아 젖먹던 힘까지 다 내어 잡아당겨 뽑고선 제 힘에 겨워 벌렁 나자 빠졌다. 생각지도 않게 허술한 도둑질이 성공한 것이다. 위청은 점점 대담해졌다. 벌떡 일어나 다시 바위 뒤로 돌아가서 도인의 등에 묶인 보검의 칼집 을 끌러내어 칼을 꽂은 다음, 마치 당초부터 제것인 양 떳떳하게 허리에 찼다. 그리고 나서 도인 의 허리띠마저 풀어가지곤 포졸(捕卒)이 오랏줄로 도둑을 결박지우듯 도인의 두 손 두 발목을 한 데 모아서 꽁꽁 묶어버렸다. 이윽고 도인의 몸뚱이는 네 발굽을 동여매이고 장대에 꿰어 달리기 직전의 멧돼지 같은 형국이 되고 말았다. 도인은 제 몸뚱이를 위청이 엎어치고 뒤채고 하는데도 죽은 듯 꼼짝을 하지 않았다. '자, 이젠 다 됐구나! 어디 이번에는 깨워서 몽치 쓰는 방법을 물어야겠다. 따귀나 몇 대 갈기면 제깐 놈이 안 깨어나고 배기랴?' 한데,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방금 뒤로 벌렁 자빠지면서 잡아뽑은 몽치가 보이지 않는 것이 다. 바위 앞쪽에 놓아둔 채 칼집 풀기며 오라질이며 하느라 정신을 파는 사이, 그놈의 해골바가지 몽치가 어디로인지 사라져 버렸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 이것 봐라. 어디로 굴러갔어? 방금 여기 있었는데....." 투덜투덜 중얼거리면서 바위 주변을 맴도는 참인데 또 문제가 생겼다. "으음... 끙!" 결박해 놓은 도인이 신음소리를 내고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에쿠, 큰일났다!' 기급을 한 위청, 몽치고 뭐고 다 팽개치고서 도인부터 제압할 요량으로 덮쳐들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도인이 두 눈을 번쩍 떴기 때문이다. 눈을 뜨자마자 온몸이 저리고 쑤시고 팔 다리 가 꽁꽁 묶인 것을 깨달은 도인은 대갈일성 호통을 지르면서 마구 요동질치기 시작했다. "우와앗!" "으악! 위청도 얼결에 마구 악을 썼다. 도인이 요법을 부리는 줄 뻔히 아는데, 오랏줄이라도 끊겼다간 그걸로 자기 목숨은 끝장나는 판이다. 이걸 그대로 둬서야 어디 될 법이나 하냔 말이다. 그는 호 랑이가 노루 덮치듯 손발 묶인 도인에게 달려들어 가로 올라타고서 두 손아귀로 도인의 멱줄기를 죽어라고 움켜 졸랐다. 손을 놓았다간 세상천지에 다시 없는 큰일이 벌어질 판이었다. 위청이 천생 신력(神力)을 지녔기는 해도 그 도인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허지만 오늘 해가 뜬 이래 반나절 동안을 죽어라고 뜀박질한 바람에 기진맥진한 데다, 손발을 묶은 오랏줄이 또 어 떤 것인가? 본래 도인 자신의 허리띠였다. 그게 보통 허리띠가 아니라 교룡(蛟龍)의 힘줄을 뽑아 말려서 엮 은 것이었다. 여간한 채색 실로 꼬아 만든 허리띠라도 위청의 힘가지고 오라를 지웠다면 끊기 어 려울 지경인데 하물며 용의 힘줄이니 오죽하랴? 이야말로 자승자박(自繩自縛), 도인이 아무리 버둥질을 쳐도 결박이 끊어지기는커녕 멀쩡했다. 거기에다 목줄기마저 위청의 쇠집게 같은 손아귀에 힘껏 움켜조여서 숨 한 모금도 통하지 않으니 견뎌낼 방법이 없었다. 도인은 하는 수 없이 원공(元功)을 운기하여 위청의 신력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결박 당한 쪽이나 묶은 쪽이나 막론하고 결사적인 싸움이었다. 도인은 어떻게 해서든 제압을 벗어나려 했고, 위청은 무슨 수단을 써서든 놓치지 않으려고 제각기 혼신의 힘을 기울여 싸웠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미친 듯이 마구 뒹굴었다. 그 도인 낙삼관으로선 다 쑨 죽에 코 빠뜨린 격이었다. 이제껏 얼마나 수월하게 척척 일이 돌아 갔느냐 말이다. <오귀천왕> 상화양은 입에 발린 말 한 마디에 선뜻 <오귀백골쇄심추>를 건네주 고, 또 그 용법까지 친절히 전수했다. 기쁜 마음 같아선 당장에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지만 행여 눈치챌까 내색도 않고 상화양과 독룡존자 앞을 물러나와 댓바람에 계곡 어구 사문까지 날았 다. 백골쇄심추, 이게 어떤 법보냐? 상화양이 설산에서 수십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다. 오 행(五行)의 상생상극에 맞추어 육양괴수(六陽魁首) 다섯 명의 두개골을 잘라다가 거기에 또 7×7 은 49, 마흔아홉 명의 근골이 좋은 사람의 생혼(生魂)을 뽑아 짓이겨서 이 보물을 단련해내었다. 이것만 가지면 아미파에 앙갚음하기에는 넉넉하리라고 호언장담, 으시대면서 하산을 했었다. 그러나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 오늘의 형세를 보아 하니 <괴규화> 능혼 하나만의 힘으로도 청라마궁은 쑥대밭이 되고도 남는다. 하물며 아미 측에선 또 적지 않은 고수들이 몰려왔다지 않 는가? 사문공, 그 작자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이냐? 그래도 결국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사문 공의 참사야말로 낙삼관에게 있어 다시 없는 본보기가 된 것이다. 마궁에 남아 있어 보았자 옥석 구분까지 당하지야 않겠지만 절대로 뒤끝이 좋을 리는 없을 게 분명하다. 낙삼관은 사실 상화양과 초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화양이 선뜻 목숨처럼 아끼는 법보 를 사용법까지 곁들여서 빌려주다니, 이런 기회는 천하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낙삼관 은 생각만 해도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백골쇄심추, 이 법보를 가지고 심산궁곡 인적도 없는 바윗 굴에 찾아들어가 숨어 버릴 참이었다. 어차피 상화양은 아미파와 세불양립(勢不兩立), 목숨을 걸 고 싸우기로 고집이 선 작자다. 그렇다면 조만간 적의 손에 죽어 나자빠질 것은 불 보듯이 뻔한 일, 그때가 지나서 다시 세상에 나타나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낙삼관은 마궁에서 벗어나자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 입구 사문까지 당도했다. 하지만 고지식하 게 내려설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 길로 곧장 동쪽을 향해 날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방향을 전 환하는 순간, 그는 갑작스레 발바닥이 무슨 흡인력 같은 것에 빨려들듯 지상으로 떨어져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엇, 이상하다! 이게 웬일이야?' 아래쪽을 굽어보니 바로 청라계곡 바깥에 어떤 자가 서서 자기한테 너울너울 손짓을 보내고 있 었다. 그 손짓에 따라서 몸뚱이가 추락하는 것이다. 검광에 아무리 진기를 쏟아부어도 몸뚱이는 내 것이 아닌 양 빨려 내려가기만 했다. '이크, 센놈의 고수하고 맞닥뜨렸구나!' 뜨끔 놀라기는 했으나 그래도 손에 들린 백골쇄심추가 있는지라 정녕 앞길에 걸리적거린다면 이 작자한테 백골쇄심추의 위력을 시험해 봐야겠다 생각하고 그는 끌리는 대로 내려갔다. 헌데 막상 땅에 내려서고 보니 상대방은 바로 전날밤 독룡존자의 수정구에 나타나 야료를 부렸 던 그 <괴규화> 궁신 거렁뱅이가 아닌가? 이쯤 되면 제아무리 백골쇄심추를 가졌더라도 아연실 색할 수밖에 없었다. 맞대면을 하자마자 거렁뱅이는 당나귀처럼 잇몸까지 몽땅 드러내면서 낄낄 웃었다. "힛힛힛, 도사나으리께선 어딜 가시오? 오늘 청라산에 기막힌 구경거리가 있는데, 이 거렁뱅이하 고 심심풀이 삼아 얘기나 좀 하다가 구경가지 않겠소?" 눈앞에 버텨선 거렁뱅이가 얼마나 지독스런 인물인지 벌써부터 잘 아는 터라, 낙삼관은 암암리 에 응전태세를 갖추면서 억지 웃음을 띠고 굽신 인사했다. "빈도는 청라욕 친구들의 초청을 받고 유람차 왔소이다만, 뜻밖에 양파가 또 맞붙어 잔혹스런 살륙전을 벌이는구려. 이거야 어디 수도자(修道者)로서 할 짓이겠소? 그래 빈도는 이 살겁에 끼어 들기가 싫어서 친구들과 작별하고 돌아가는 길이외다. 한데 도우께선 무슨 용건이 있으시기에 빈 도를 부르셨는지?" "하하, 내 도사나으리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외다. 왜 속담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소? '강도가 좀도적을 만나면 동업자의 의리상 한 몫쯤 떼어 준다' 그거요. 한데 도사나으리는 고 귀신 아이 놈에게서 해골바가지 몽둥이 한 개만 쓱싹 하셨구려. 두어 가지쯤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성한 몽둥이를 분질러 나눠 가질 수도없고 이걸 어쩐다?... 흠흠, 통째로 나한테 넘겨 준대서야 또 내가 미안스럽구. 이렇게 하십시다. 오늘 나는 어차피 이곳 청라산 마귀새끼들을 싹 쓸어버리기로 작정 했고, 또 도사나으리는 그동안에 그 몽둥이를 가지고 있어 봤자 써먹을 데가 없을 테니, 며칠 동 안만 나한테 빌어주면 어떠실까? 다 쓰고 내 다시 돌려드리리다. 그럼 동업자끼리 의리 상할 필 요가 없지 않겠소이까." 낙삼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놈의 걸인이 백골쇄심추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뻔 지르르, 그럴 듯하지만 여차직 하면 강제로라도 빼앗을 셈이다. 그 말마따나 도둑이 강도를 만난 셈이었다. '이 원수를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낙삼판은 속에서 고동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래도 내색은 못하고 태연자약하게 응수했다. "도우께서 이 백골추를 빌려 달라시는 거요? 빈도가 이걸 드리는 것쯤 대수로운 일은 아니오만, 사실 말이지 이 법보는 빈도의 것이 아니라 오귀천왕의 보물이외다. 빈도 역시 딴 데 쓸 일이 있 어서 빌어온 거요. 그러니 어쩌겠소? 상화양과 도우 쌍방은 서로 원수지간인데, 빈도가 친구의 병 기를 빌려서 그 적수한테 넘길 수야 없지 않소? 또 듣자니 도우께선 신통력이 대단하시다든데 그 런 분이 이런 따위를 어디다 쓰시려오? 농담일랑 그만둡시다. 빈도는 갈 길이 바빠서 이만 실례 하오!" 남의 법보를 속임수로 챙겨 달아나는 몸이라 낙삼관은 말도 못하게 뒤가 켕겼다. 이 따위 거렁 뱅이랑 실랑이질을 벌일 시간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성질 같아선 당장에 요절을 내고 싶지만 또 섣불리 건드릴 상대도 아니다. 속에서 불덩어리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걸 꾹 눌러 참고서 어 물쩡어물쩡 몸이나 빼내어 그저 도망질을 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능혼은 이미 그의 속을 불 보듯 뻔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낙삼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능혼은 그 면상에다 대고 가래침을 탁 뱉았다. "요사스런 놈, 낯짝도 두껍구나! 네녀석이 귀신 아이놈을 속이더니 재미가 붙었느냐? 어디서 내 눈도 속여보려구? 내가 장님인 줄 알았냐?" 뒤미처 엄파 같은 손바닥이 '철썩!' 하고 따귀를 올려붙인다. 낙삼관은 피하지도 못하고 엉겁결에 한 대 호되게 얻어맞았다. 볼따구니 절반이 당장 시뻘겋게 부어오르고 눈에서 별이 번쩍 튀었다. 이쯤 되어서야 공자님인들 참아내겠는가? "이놈의 거렁뱅이가!... 에잇!" 노기충천한 낙삼관이 대뜸 옆구리를 '철썩!' 두드리더니 능혼의 정면으로 비검을 쏘아날렸다. 싸 느란 푸른 검광 한 줄기가 번개처럼 날아갔다. "으핫핫핫! 내 제자녀석이 산꼭대기에서 폭풍한설을 맞아가며 모진 고초를 당하고 있는데 나라 고 편안히 있을 수야 있나? 뭘로 보답을 할까 걱정했더니 그래도 제발로 일감을 갖다 바치는 작 자가 나섰구만." 능혼은 연방 껄껄 웃으면서 성큼 손바닥을 내밀었다. 낙삼관의 검광이 손에 잡히자마자 슬쩍 비 벼 가지곤 국수가락 모양 입으로 '훅!' 빨아들이더니 꿀꺽 삼켜 버렸다. 그리고 나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두 손바닥을 또 내밀었다. "먹을 게 어디 또 있나? 남았거든 어서 마저 내놓게!" 낙삼관은 아연실색, 겁이 더럭 났다. 그가 단련한 비검은 원래 두 자루가 있었다. 하나는 상각검(霜角劍), 또 하나는 청명검(靑冥劍)이 다. 그중에서도 청명검은 이미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를 만큼 단련을 했고, 상각검은 손에 넣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껏 비검다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만치 청명검이야말도 낙 삼관의 주무기요, 그가 온갖 심혈을 기울여 단련한 것이라 어지간한 비검 가지곤 그 적수가 못될 정도였다. 그런 청명비검을 거렁뱅이는 국수가락을 만들어 쭈르륵 삼켜 버린 것이 아닌가? 낙삼관은 말도 못하게 다급해졌다. 상화양이 가르쳐 준 비결을 허겁지겁 외면서 손에 든 백골쇄 심추를 홱 휘둘렀다. 그 즉시 백골쇄심추는 효력을 나타냈다. 몽치 끝에서 홍운 녹화가 풀썩 일어 나더니 피비린내 풍기는 바람 속에 해골바가지 다섯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서 늑대 어금니를 드러 낸 채 곧바로 능혼을 향해 날아갔다. "이크, 지독스럽다!" 능혼은 아우성을 치면서 골짜기 안으로 달음박질쳐 도망하기 시작했다. "이 도둑놈아, 비검을 내놓고 가라! 돌려주면 죽이진 않으마!" 낙삼관도 목이 터져라 고함치며 뒤쫓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비검인데 놓친단 말인가? 능혼의 등 뒤로 해골바가지 다섯 개가 바람을 가르며 물어뜯을 듯 따르고, 이어서 낙삼관이 고래고래 악 을 쓰면서 쫓아갔다. "이 거렁뱅이 도둑놈, 내 비검을 내놓으란 말이다! 제발, 내 비검....." 계곡 입구에 갓 들어섰을 때였다. 능혼의 뒷모습이 훌쩍 사라지고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요놈 봐라, 어디로 뺑소니를 친 거야?' 독이 오른 눈초리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느닷없이 주먹 하나가 머리통을 '쾅!' 쥐어 박았다. "어이쿠!" 눈에서 별똥이 번쩍 날 정도로 어찔했다. 그러나 골통이 빠개지는 게 문제가 아니다. 뒤미처 상 화양의 악쓰는 목소리가 귀청을 때린 것이다. "요 발칙한 놈, 어딜 감히 내 법보를 얌생이질해 가지고 달아나다니! 간덩어리가 퉁퉁 부어터졌 구나. 오늘 네놈의 개모가지를 끊어 놓지 못하면 이 상화양, 사람이 아니다!" 낙삼관은 기절초풍을 해가지고 훌쩍 뒤돌아보았다. 이런! 보물 임자 상화양이 손에 마화금종을 휘두르면서 쫓아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시뻘건 구름덩이가 백 장이나 '쏴아, 쏴아!' 쏟아져 나오 는 마화금종, 그 김에 쏘였다가는 비검은커명 목숨마저 끝장이 날 판이었다. 간담이 철렁 내려앉은 도둑도인, 어마 뜨거라 하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판인데, 이건 또 웬 변 고냐? 아무리 술법을 걸어도 둔형술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비검을 잃었으니 검광으로 탈출하기 는 진작에 글렀고, 오직 믿을 것은 둔형가풍(遁形駕風) 하나뿐인데, 어찌 된 셈인지 도대체 바람 한 점 이는 기척도 없었다. 상 화양은 노기등등, 차츰 눈앞에 들이닥치고 술법은 효력을 잃었고, 참으로 큰일이었다. 낙삼관은 애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상화양이 어떤 인물이냐. 악독하고 잔혹스럽기로 이름난 놈이다. 그 손에 잡히는 날이면 죽어도 묻힐 데가 없을 판이다. "게 섰거라!" 상화양이 또 천둥벼락을 친다. '서다니? 이대로 잡혔다간 뼈도 못 추리는데... 에라, 모르겠다, 뛰자!' 낙삼관은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두 다리밖에 없다. 십여 리쯤 달렸을까, 뒤쫓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기미가 보였다. 천만다행이라 싶어 한숨을 내 몰아 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요놈, 어딜 달아나려구?" 앞길 쪽에서 난데없는 호통이 터졌다. 하느님 맙소사! 언제 앞질러 돌았는지 상화양은 맞은편으 로부터 쫓아오고 있었다. '야단났구나, 잡히면 죽는다!' 낙삼관은 그만 혼비백산을 해가지고 후딱 돌아서서 오던 길로 되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헐레벌떡 계곡 입구에 다다르고 보니 또 상화양의 모습이 나타나서 가로막는 것이다. 낙 삼관은 다시 되돌아 도망쳤다. 이렇듯 죽어라고 뜀박질하기를 반나절, 수십 차례나 거듭하느라고 기진맥진, 숨은 턱에 차오른 데다 뼈마디까지 녹신녹신해졌다. 마지막 달음질 때, 낙삼관은 앞쪽 길곁 암벽 위에 큼지막한 굴이 하나 뚫린 것을 발견했다. 흘끔 뒤돌아 보니 상화양은 쫓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도 못할 판인데 동굴 이 보이자 그는 제 집에나 온 것처럼 반갑고 정신이 번쩍 났다. '옳다, 저 위로 뛰쳐올라가 숨기로 하자! 당장은 제깐놈도 못 찾겠지.' 그는 평생의 기력을 다 모아서 암벽 위 동굴로 솟구쳐 올랐다. 몸뚱이가 허공에 뜬 순간, 이건 또 웬 벼락이냐? 누군가 암벽 위로부터 내려떨어지더니 그의 잔등에 털썩 올라탄 것이다. 상화양 이 나타난 후 여지껏 모습을 감추고 있던 그 거렁뱅이, 원수 같은 <괴규화> 능혼이 말 타듯 자 기 잔등에 걸터앉아 있었다. 피할래야 도무지 피할 여유가 없다. 일껏 용을 써서 솟구친다는 게 하필이면 거렁뱅이의 사타구 니로 들어간 셈이다. 세상에 공교롭기가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낙삼관은 등짐을 떨구려고 몸부림 쳤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뿐, 기수(騎手)의 두 다리가 준마(駿馬)의 옆구리를 호되게 걷어차면서 조여들었다. "헉!" 낙삼관은 숨이 탁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몸뚱아리가 지상으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낙삼관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온몸이 보리타작을 당한 것처럼 쑤시고 아팠다. 뿐만 아니라 손발 넷 은 돼지잡듯 한데 모아 결박지워져 있었다. 그 정도라면 참겠는데 누군가 억센 손아귀로 숨통을 바짝 조이고 있으니 견딜 도리가 없었다. 캑캑거리면서 발버둥을 쳐봤으나 그럴 때마다 쇠발톱 같은 손아귀는 더욱 거세게 목줄기를 조여 들었다. 이러다간 영낙없이 죽었구나 싶었다. 머리로 피가 몰려 정신이 어찔어찔했다. 비검은 진 작 거렁뱅이 놈의 아가리로 들어갔고 술법을 쓰려 해도 도무지 부릴 도리가 없었다. "쿨럭, 쿨럭!" 진기를 모아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찰나 겨우 한 모금 숨통이 터지더니 이내 꽉 막혀 버렸다. '다시 한 번 몸부림을 쳐서 숨통이 트이면 그 즉시 원신(元身)으로 빠져나가 결박진 오랏줄을 끊어버리리라!' 그러나 위청의 두 손 열 손가락은 낙삼관의 멱통을 뿌리박듯 움켜 조인 채 요지부동이었다. 그 는 손아귀가 풀리는 날이면 자기가 죽을 차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나 억세게 조였는지 숨통 이 막힌 적은 두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당장에라도 빠져나올 듯 툭 불거졌고, 이마에는 지렁 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힘줄이 시퍼렇 게 돋았다. 하지만 죽이지도 못하고 손을 풀 수도 없는 처 지였다. 만약 이런 판에 또다른 적의 패거리가 나타났다간 낭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 치자, 위청은 겁이 더럭 났다.누가 당장 뒷덜미를 나꿔챌 것만 같아서 뒤꼭지가 켕겼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한단 말이냐? 그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결판을 내야만 한다. "에잇, 얍!" 대갈일성, 기합을 지르면서 위청은 전신의 기력을 열 손가락에 한 데 모았다. <응조중수법(鷹爪 重手法)>을 써서라도 상대방을 산 채로 졸라 죽일 심산이었다. 그때 눈앞에 무엇인가 번뜩하더니 능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청은 반가움에 못 이겨 소리를 쳤다. "사부님!" 소리 지르는 바람에 손아귀의 힘이 조금 풀어지고 말았다. 당장 죽을 판이던 낙삼관이 그 순간을 놓칠 리가 있으랴. "캑, 쿨럭!... 우와앗!" 낙삼관은 순간도 지체없이 두 다리로 암벽을 힘껏 걷어찼다. 그와 동시에 <어약룡문(魚躍龍門)> 초식으로 위청의 손아귀를 벗어나더니 그 즉시 바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놈의 새끼!" 벌떡 몸을 일으킨 낙삼관, 속에서 무명업화(無明業火)가 삼 천 길이나 치솟았다. 당장에 요절을 내리라고 막 술법을 거는 찰나, 그는 찔끔하니 멈추고 말았다. 앙갚음하려던 생각도 싹 가셔버렸 다. 요절을 내야 할 놈 곁에 그 원수 같은 <괴규화> 능혼이 백골쇄심추를 들고 서 있지 않는가! 백골쇄심추, 그걸 상화양 손에서 날치기하느라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고? 한데 손에 넣기가 무 섭게 이 날강도가 채뜨려 가다니! 그는 아직도 상화양의 추격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났는지조차 모른다. 능혼이 술법으로 농간을 부렸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도 미칠 듯이 날뛰리라. 그는 전후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악착같이 쫓아오고 가로막던 상화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백골쇄심추는 능혼의 수중에 들어 있다. '그래, 맞았어!... 상화양이란 놈은 능혼에게 쫓겨 달아났거나 아니면 독수를 맞고 죽어버린 거야. 상화양도 못 당하는데 내가 무슨 재간으로 이 거렁뱅이를 거꾸러뜨린단 말이냐?' 생각을 해보니 더럭 겁이 나고 소름이 오싹 끼쳤다. 능혼은 여유작작, 백골쇄심추를 흔들거리면 서 자기한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크, 저 눈! 안 되겠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나 놓자!' 낙삼관은 두 번 생각할 여지도 없이 머리를 감싸안고 다리야 날 살려라!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 다. "게 섰거랏!" 도인이 달아나자, 위청은 호통을 치면서 뒤따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몇 발짝 안 가서 우뚝 멈춰 섰다. 스승이 또 사라지면 큰일이 아닌가? 잠시 저울질해 본 위청은 도인 쪽을 포기하고 다시 능혼 앞에 달려와 무릎꿇었다. 절만 하는 게 아니라 두 손으로 능혼의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잡고 매달렸다. 능혼이 물었다. "그놈 안 잡을 테냐?" "도망쳤습니다." "머저리 같은 놈! 도인놈이 달아나는데 안 따라가 잡을 거냐?" "제가 그놈을 쫓아가면 그동안에 사부님이 달아나실려구요? 저는 안 갈랍니다!" "이놈아! 내 제자가 되면 나한테 눈꼽만치라도 공을 세워줘야 할 게 아니냐? 네가 그 도인놈을 놓치면 나도 널 제자로 안 받아 줄 테다!" "그 도인은 술법을 부린단 말입니다. 아까도 잠이 든 사이에 겨우 잡았습니다. 지금은 두 눈 멀 쩡하니 뜨고 달아났는데, 제가 무슨 수로 쫓아가 잡습니까?" "그 도인놈은 낙삼관이라고 하는데, 내가 잡아다 따로 쓸 데가 있단 말이다. 알겠느냐? 내가 눈 독을 들인 바에야 절대로 못 달아날 테니 두고 봐라... 저것 좀 봐, 또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지 않 느냐?" "그럴 리가....." 위청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스승이 손가락질하는 대로 뒤돌아보았다. 과연 그 도인이 쏜살같이 뛰어오고 있었다. 누구한테 급히 쫓기는 듯 헐레벌떡 낭패스런 몰골로 달음박질쳐 온다. 그래도 위청은 스승이 뺑소니칠까 봐 옷자락을 부여잡은 채 도인를 잡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능혼은 끌끌 혀를 차더니, 손에 쥔 백골쇄심추를 쳐들었다. "이거 못 놓을 테냐? 저놈의 도인을 안 잡으러 가면 이 해골바가지로 널 물어뜯게 할 테다!" 그 소리와 함께 위청의 면전에서 백골추가 번뜩하더니만 해골바가지 다섯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날아올랐다.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듯이 어금니까지 몽땅 드러내고 덮쳐드는 기세에 위청은 그만 하얗게 질려버렸다. "사부님, 사부님... 고정하십시오! 제가 저놈을 잡으러 가겠습니다. 어이쿠, 역정내지 마시라구요!" 이때쯤 해서 낙삼관은 어느덧 위청 가까이까지 뛰어왔다. 위청도 어쩔 수 없어 낙삼관을 뒤쫓기 시작했다. 구사일생, 질식사를 면하고 달아났던 낙삼관이 또 어째서 화근덩어리들 앞으로 되돌아 왔는가? 능혼과 위청의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난 그는 수십 보쯤 뜀박질하다가 마침내 효력을 나타낸 둔형 가풍 술법으로 본격적인 도주를 시작했다. 한데 몸뚱이가 겨우 반 공중에 떠올랐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또다시 중력(重力)에 이끌려 추락하 고 말았다. 틀렸구나 싶어 도보행군으로 달아날 길을 찾아나선 것은 좋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 끔하더니, 앞쪽에서 악귀 같은 <오귀천왕> 상화양의 모습이 또 나타났다. 이 바람에 낙삼관은 그만 혼비백산, 정신을 못 차리고 뒤돌아 도망질치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어쩌자고 가는 곳마다 상화양이 나타난단 말이냐. 등 뒤까지 바짝 따라 붙어 씩씩거리는 숨소리조차 들리니 뒤돌아 볼 여지도 없었다. 그저 앞쪽만 바라본 채 죽어라고 뛰는 수밖에. 한참 달리다가 그는 문득 머릿속에 기막힌 꾀가 떠올랐다. '가만 있거라... 백골추는 능혼한테 빼앗기고 이미 내 수중에는 없지 않는가? 상화양이 저토록 기를 쓰고 쫓아오는 판이니 내 얼마 못 가 잡힐 건 뻔하다. 잡히는 날에는 뼈도 못 추리고 죽을 터, 그렇다면 차라리 이판사판 돌아서서 상화양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백골추 를 능혼한테 강제로 빼앗겼다고 실토하면 상화양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능혼한테 가서 자기 법보를 찾느라고 나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을지 모른다. 이거야말로 죽기살기 노름판이 아닌가? 잘만 되면 죽음 속에서 살아날 묘책일 법도 하구나.' 정신놓고 치닫던 그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쑥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에선 쫓는 사람의 숨소 리가 바짝 다가왔다. 낙삼관은 후딱 돌아서며 외쳤다. "상천왕, 노염일랑 푸시고 내 말 쫌 들어주시오!" 필사적으로 악을 쓰다시피 통사정 해놓고 보니 이건 또 웬일인가? 오귀천왕이고 상화양이고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헐레벌떡 씩씩거리면서 자기 뒤를 쫓는 자는 바로 아까 자기 멱통을 졸라 매어 죽이려던 그 시커먼 사내놈이었다. 하마터면 이놈의 손아귀에 송장이 될 뻔하지 않았는가? 사내녀석은 혼자였다. 그 뒤쪽에 능혼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므로 그는 마음을 놓았다. '내 오늘 어쩌다가 이 꼴로 낭패를 당했을꼬? 훔쳐낸 보물을 잃은 거야 두말할 나위도 없고, 게 다가 비검 한 자루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저놈은 도대체 누구길래 아무 원수도 진 일 없는 나를 찍어눌러 죽이려고 덤벼들었는가 말이다. 겨우 빠져나왔더니 저놈은 그래도 모자라서 기를 쓰고 쫓아오는구나! 오냐, 좋다! 그 거랭뱅이 도적놈이 안 보이는 사이에 네놈부터 요절내 주마. 그래야만 내 맺힌 분풀이도 되겠다. 어서 오너라, 이놈아.' 허겁지겁 쫓아오는 위청을 노려보면서 낙삼관은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청명검은 진작에 국수 가락이 되어 거지놈의 뱃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래도 아직 상각검 한 자루가 남아 있으려니 한 것 이다. 그런데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어렵쇼? 상각보검도 없어졌구나!' 마지막 남은 병기마저 잃어버린 걸 깨닫고 낙삼관은 복통을 일으켰다. 어느덧 시커먼 녀석이 면 전에까지 쫓아왔다. 한데 다시 자세히 보았더니 저놈의 손에 들린 보검이 바로 자기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칼집마저 허리춤에 제것인 양 당당하게 찔러 차고 있는 꼴이었다. '저런 도적놈!' 낙삼관은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몸을 떨었다. 그래도 상대방이 능혼더러 '사부 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터라, 무공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 감히 섣부르게 상대하지 못했다. 우선 상각보검부터 되찾기로 작정하고 암암리에 진기를 한 모금 끌어올려 적의 면상에다 뿜었다간 '훅!' 소리가 나도록 다시 빨아들였다. 상각검의 본임자는 낙삼관이다. 어검비행을 해낼 정도로 단련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주인의 마 음이야 헤아린다. 순간, 상각보검은 오행진기에 흡수되어 그 즉시 도둑의 손아귀를 벗어나 주인한 테 날아갔다. 낙삼관은 황급히 손을 뻗어 쉽사리 보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재간이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더욱 분통이 터졌다. 이 따위 바보녀석한테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서 천만다행 으로 생각했다니 도무지 약이 올라 못 견딜 노릇이었다. 그는 두말 않고 장검을 들어 위청에게 내찔렀다. 그와 동시에 왼손으로 검결(劍訣)을 맺으면서 주문을 걸었다. 썩 시원치 않은 비검술이긴 해도 이 따위 녀석 하나쯤 해치우긴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에 술법까지 동원했으니 이놈은 벌써 죽은 거나 매일반이었다. 위청은 모처럼 얻었던 보검이 갑작스레 손아귀를 벗어나 주인에게 건너가자, 대경실색을 했다. "맙소사, 큰일났다!" 그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앗을 보는 재미에 조강지처 내버리듯 자기 병기를 팽개쳤으 니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판국인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 이냐? 도인놈이 뭐라고 중얼중얼 몇 마디 들썩이자, 삽시간에 미친 바람이 크게 불면서 모래먼지 가 천지 가득히 몰아치더니, 됫박만한 돌덩이가 마구 날아와 팔, 다리, 얼굴, 가슴 할것없이 후려 갈기기 시작했다. "아이쿠, 아얏!... 아이쿠, 아야야!" 도저히 배겨낼 방법이 없는지라, 위청은 아우성을 치면서 되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부님, 빨리 좀 오십쇼!... 아이쿠, 아얏!... 제가... 제가 도인놈을 끌어왔습니다. 사부님, 아이구 등어리야!" 악에 받쳐 뒤쫓던 낙삼관은 위청이 스승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혹시나 능혼이 제자놈과 짜고 길섶 어딘가에 매복해 있지나 않는가 두려웠다. 그래서 뻔히 잡을 수 있는 놈도 나꿔채지 못하고 멀찌거니 거리를 둔 채 추격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능혼이 나타나는 기척은 없었다. 제자 녀석이 목터지게 불러댔으나 '사부님'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낙삼관은 다시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능혼만 나타나주지 않는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저놈의 허풍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되지. 어림도 없다!' 그는 재차 추격속도를 높였다. 잠시도 부근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바짝 따라붙었다. 우박 같은 돌덩이 찜질을 당하며 도망치는 위청, 아무리 고함질러도 스승 능혼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날 줄 모르자 애간장이 탈 대로 탔다. '야속한 사부님, 또 사라졌구나! 제자놈이 이 꼴을 당하는데 혼자만 뺑소니를 치다니! 야속하다, 야속해!' 마침내 위청은 스승 능혼이 나타났던 장소까지 뛰어갔다. 그러나 역시 능혼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뒤쫓는 적의 숨소리만 가쁘게 다가왔다. 예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돌덩이 찜찔을 당했 는지 온몸뚱아리가 저리고 쑤시고 말도 못하게 얼얼했다. 아픈만큼 뺑소니 스승한테 향하는 원망 도 짙어졌다. 이젠 어디로 도망쳐야 좋단 말이냐? 다리 힘도 나른하게 빠져 적에게 뒷덜미를 잡힐 시각도 머 지 않았다. 다급한 눈길이 문득 바위 모서리 움푹 파인 데 가서 멈추었다. 진흙투성이 두 다리가 보인 것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눈여겨보니 영낙없이 스승이었다. 능혼은 흙바닥에 벌렁 누워 그 괴상망칙한 몽치를 그러안은 채 드르렁드르렁 단잠이 들어 있었던 것이 다. 코고는 소리에 흙부스러기마저 우수수 떨어지는데, 몽치 끝의 해골바가지들이 위청을 발견하 고 또다시 아가리, 이빨을 딱 벌리더니 당장 물어뜯을 기세였다. "사부님, 사부님! 어서 일어나십쇼." 해골바가지가 물어뜯든 말든 그걸 두려워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스승은 제자가 외치는 소리 에도 깨어날 줄을 모르니 위청은 오금이 저리다못해 비틀릴 지경이었다. 그런 중에도 도인은 등 뒤에 바짝 따라왔다. 다급해지자 위청은 염치 불구하고 스승의 두 다리를 붙잡아 힘껏 끌어당겼다. 뼈다귀도 앙상한 진흙투성이 다리에 달려서 능혼의 몸뚱이가 함께 끌려나왔다. 위청은 미친 듯이 스승을 흔들었다. 그래도 능혼은 여전히 쿨쿨, 태평스러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별안간 몽치 끝의 해골바가지들이 번쩍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슈욱!' 소리를 내면서 다섯 개 모두가 위청한테 달려들었다. 기급을 한 위청이 재빠르게 피했길래 망정이지 하마터면 덥석 물어뜯길 뻔했다. 슈웅, 슉! 해골바가지는 붉은 구름과 초록 불덩이 속에 휩싸인 채 위 아래로 마구 날면서 위청의 곁을 스 쳐 지나가더니 곧바로 낙삼관의 면상으로 덮쳐들었다. 위청을 대여섯 자 가량 남기고 따라잡은 낙삼관, 갑작스레 도망질치던 위청이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구부리자마자 바위 아래서 능혼의 몸뚱이가 끌려나오는 걸 보았다. '이크! 저놈의 거렁뱅이가 있었구나!' 찔끔 놀라서 쫓던 발길을 멈추려는데, 느닷없이 백골쇄심추에 매달렸던 해골바가지가 덮쳐들었 다. '이것 봐라? 법보가 나한테 날아오다니!' 낙삼관은 그게 얼마나 지독스러운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대수냐? 나는 상화양에게서 거두어들이는 방법을 전수받았단 말이다. 내가 이 정도로 놀라서 도망치다니, 어림도 없다!' 한껏 마음이 부풀어오른 낙삼관, 겁도 없이 상화양이 가르쳐 준 대로 백골쇄심추를 회수하는 구 걸을 중얼중얼 외기 시작했다. 보검처럼 백골쇄심추도 다시 찾을 셈이었다. 그러나 구결을 미처 다 외기 전에 해골바가지 다섯 개가 먼저 들이닥쳤다. 이것은 정말 뜻밖이 었다. 낙삼관의 코 끝에 피비린내가 슬쩍 풍겨왔다. '아뿔싸!' 사태의 위험성을 깨달았을 때는 벌써 때가 늦었다. 머릿속이 어찔어찔, 눈앞도 가물가물해지더니 낙삼관은 그만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털썩 고꾸라지고 말았다. 새 제자의 인과 敗群魔, 莽漢盜天書 記前因, 藏靈憐故劍 위청은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다섯 개의 해골바가지들이 낙삼관에게 덮쳐들어 아가리 를 쩍 벌리고 굶주린 늑대처럼 물어뜯는 참경(慘景)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이때 등 뒤에서 언제 깨어났는지 능혼이 대갈일성, 호통치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왕장자(王長子), 어서 네 분 친구를 데리고 속히 돌아오시게! 그 도인녀석은 내 따로 살려서 쓸 데가 있다네." 어인 셈인지 그 소리를 듣자 해골바가지 다섯은 일제히 능혼을 향해 되돌아 날아갔다. 능혼이 벌떡 일어섰다. 날아오는 해골바가지들을 마중이라도 하듯 우뚝 서서 몸에 걸친 누더기 옷을 벗어 던졌다. 새하얀 살결, 맨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해골바가지 다섯은 능혼을 빙그르 에워 싸더니 흉칙스런 아가리를 한껏 벌리고 능혼의 몸뚱이를 덥석 물어뜯었다. 그리고는 놓지 않는다. "앗, 사부님!....." 위청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 해골바가지들이 위험스럽다는 사실도 잊고 황급히 달려들어 능혼의 앞가슴을 악문 채 놓지 않는 해골바가지부터 잡아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길도 미 처 닿기 전에 그는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듯 풍기는 걸 느꼈다. 비린 냄새를 맡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어찔어찔 현기증마저 일었다. 위청은 당장에 맥없이 쓰러졌다. 가물가물 정신을 잃으면서 귓결에 어렴풋이나마 뇌성벽력치는 소리와 스승 능혼의 음 성을 들었다. "왕장자, 그대는 삼십육 년 동안 겁난을 당하고서도 까닭없이 마귀 같은 놈을 도와 악행을 저질 러 왔다. 이제 내가 구원해 주려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날뛸 셈인가!" "으으... 으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해골바가지의 울음이었다. 잠시 후 위청이 깨어났을 때, 능혼은 그 곁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해골바가지 한 개 를 받쳐들고서 돌부처가 된 듯 지그시 노려보며 꼼짝달싹도 않는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던 연기 구름과 녹색 불꽃은 벌써 사라지고 없는데, 해골바가지의 입에선 여전히 애처로운 흐느낌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위청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 감히 스승을 건드리지는 못하고 하릴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 다. 멀찌감치 흙바닥에 낙삼관이 널브러져 있다. "앗, 내 보검이!" 위청은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달려가더니 정말로 제것이나 되찾듯이 낙삼관의 손에서 보검을 나 꿔챘다. 그의 손발목은 아직도 오랏줄이 너덜너덜 걸려 있다. 하지만 당사자가 도망칠 때 끊어버 렸는지 토막토막 동강이 나서 이미 쓸모없게 되었다. 이놈의 도인을 다시 옴쭉달싹 못하게 오라 를 지워야겠는데 끄나풀이 없다. 얼마 안 있어 정신을 차리면 또 도망칠 게 아닌가? 위청은 자기 허리띠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도리질을 했다. 튼튼하지도 못하거니와 스승 앞에서 홑바지가 훌러덩 벗겨질 판이다. '그래, 묶을 것도 없다. 아예 요절내 버리자꾸나!' 도인의 목을 겨누고 손에 들린 장검을 번쩍 치켜드는데 무엇인가 발 밑에 털썩 떨어진다. 스승 능혼이 던져준 것이다. 가만 보니, 아까 썼던 오랏줄하고 똑같은 허리띠였다. '어라, 이것 봐라? 끊어진 게 아니었구나!' 낙삼관의 손발목에서 너덜거리던 교룡삭(蛟龍索)은 어느 틈엔가 보이지 않았다. 위청은 멀뚱멀뚱 스승을 쳐다보았다. 능혼이 분부했다. "묶어라!" 위청은 낙삼관의 두 손 두 발을 왁살스럽게 등 뒤로 돌려 꺾어 다시는 힘도 쓸 수 없도록 단단 히 결박지웠다. 낙삼관은 마침내 등뼈가 활처럼 구부려진 채 만두를 빚어놓은 듯 묶이우고 말았 다. "능사부님, 이놈을 어쩌시렵니까?" 포로를 스승 앞에 져다가 내동댕이치면서 물었다. 능혼은 제자나 포로를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았다. 두 손바닥으로 해골바가지를 받들어 어루만 지면서 한참 동안 중얼중얼 주술(呪術)을 외더니, 이윽고 환약 한 개를 꺼내 해골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왕장자, 그대는 역시 나하고 인연이 맺어져 있네. 그러니 마땅히 절처봉생(絶處逢生), 죽은 목숨 을 살려주는 것일세. 이제 그대한테 걸린 마법의 금제를 푸는 영단을 먹였으니 안심하게. 좀 있다 가 다시 자네의 육신 있는 데까지 데려다 줌세. 육신을 얻게 되기 전에 우선 내가 부탁한 대로 가서 실행하게나! 자, 어서 떠나게." 능혼은 수중의 해골바가지를 허공에 힘껏 던져올리면서 소리쳤다. "가거라!" 손이 번쩍 쳐들리자, 한 줄기 금빛이 해골바가지를 에워싸고 까마득하게 솟구치더니 삽시간에 구름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위청은 스승 곁에 선 채 그 광경을 넋잃은 듯 바라보았다. 능혼이 벌떡 일어나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흙바닥에 나뒹구는 낙삼관을 손가락질했다. "위청, 이놈을 등에 업어라. 마귀새끼가 또 나타났구나. 낙삼관 이놈은 내 별도로 써야 할 데가 있으니까 다른 마귀놈의 눈에 뜨여선 곤란하다. 앞으로 몇 년쯤 더 살려 두자꾸나." 위청이 영문도 모르고 낙삼관을 번쩍 들어 등짐지듯 걸터메자 능혼은 진언을 외우면서 손가락으 로 사방에 무엇인가 몇 획 글씨를 그렸다. "사부님....." 위청은 도대체 무슨 도깨비놀음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한 마디 물으려다가 덥석 입을 다물고 말았다. 눈앞에 붉은 구름덩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질풍노도와 같이 두 사도의 정면으로 날아온 구름덩어리는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내려앉더니, 구름 속에서 얼굴이 붉은 동자 하나가 모습을 드 러냈다. 목덜미에는 해골바가지를 꿰어 만든 염주 한 꾸러미, 그리고 지전(紙錢) 두 꿰미를 걸었 다. 손에는 금종(金鐘)이 들렸는데, 전신이 온통 불타듯 시뻘건 연화(煙火)로 둘러싸여 있다. 동자는 지상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그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데룩거리며 무엇인가 찾으려는 듯 사 면팔방을 두리번거렸다. 아주 가까운 곳에 능혼이 서 있는 데도 그 동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 양으로 엉뚱한 바위쪽을 살피고만 있다. 위청은 몇 번씩이나 입을 열려다가 능혼에게 제지를 당하고 말았다. 한바탕 주변 일대를 뒤지고 다니던 동자놈이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앙증맞은 입에서 야수 와도 같은 폭갈이 터져나왔다. 그리곤 두 발을 마구 구르더니 길게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또다시 붉은 구름덩어리로 변했다. 이윽고 구름덩이의 동자는 파공음을 울리며 불화살처럼 동남쪽을 향 해 날아갔다. 뒤미처 지하 멀리서부터 '우르르!... 쏴아, 쏴아!' 하는 굉음과 함께 진동이 발 밑에 전해왔다. 마 진이 발동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위청에게 있어 마진이 터지든 갈라지든 그것은 관심 밖이다. 오직 등짐진 애물덩어리 도 인녀석이나 때려 죽였으면 속시원해질 터인데 스승은 도무지 응낙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사부님, 이 도인놈을 어디다 쓰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러나 능혼은 불쑥 딴청을 부렸다. "너무 늦었구나! 위청, 너는 마궁 소굴에 들어가서 날 기다리고 있거라. 그 짐일랑 내게 다오!" 달라고는 하면서도 능혼은 위청의 대답을 기다리기는커녕 그 등에서 낙삼관을 덥석 채뜨리더니 자기 등에 메고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사부님, 날 좀 데려가 줘요!" 위청이 악을 썼으나 능혼은 이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뺑소니치고 없다. 몇 걸음 허탕질을 치고 위청은 도리없이 멈춰 섰다. 높직한 둔덕으로 뛰어올라가 사면을 바라보니 이곳 계곡 어구만 하늘도 맑고 조용할 뿐, 청라욕 일대의 삼면이 온통 붉은 연기와 녹색 안개로 자욱하게 뒤덮여 침침한 것이 아무런 광경도 보이 지 않는다. 이 무렵 지하에서는 풍뢰수화(風雷水火)가 들끓어올라서, 그 진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긴박 하게 들리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위청은 스승이 시킨 대로 움직일 도리밖에 없다. 마궁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큰 길만 따라가 면 되리라 싶어, 계곡 안으로 곧장 뻗은 대로를 따라 경신술을 펼쳤다. 계곡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꽈광, 쿵! 우르르! 뇌성벽력이 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하한 진동이 크게 울리더니 수 화(水火), 풍뢰(風雷)의 소리가 한꺼번에 멎어버렸다. 어렴풋하게 암벽이 터져 갈라지는 폭음만 ' 쿵, 쿵!' 울리고 수십 가닥의 황색 녹색 광채가 어지러이 허공을 날아왔다. 위청은 놀랍고 다급해졌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곁에 같이 있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천지간에 보 이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그림자 하나뿐이다. 어쩔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는 판국에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더니 새하얀 광채가 땅에 떨어졌다. 그것은 봉두난발(蓬頭亂髮), 까마 귀 둥지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사나이였다. 도대체 몇 날 며칠을 머리 빗질도 안했는지, 게다가 걸 친 옷가지조차 걸레처럼 너덜너덜, 거렁뱅이도 상거렁뱅이 몰골이다. 위청은 기급을 해가지고 우뚝 멈춰 섰다. 손아귀는 어느 새 보검의 칼자루를 움켜잡고 상대방이 여차직하면 덤벼들 태세로 거렁뱅이 사내가 위청을 보고 먼저 말을 건넸다. "당신이 <육지금룡> 위형이오? 아우는 유윤중이외다. 사부 능진인의 분부를 받고 여기 서찰과 부적을 가져왔소. 사부님 말씀대로 예서 한참이나 기다렸다오. 수화풍뢰의 진동이 끝나면 함께 마 굴로 들어가란 분부가 계셨소. 마굴에서 기다리면 사부님이 오시기로 됐으니까, 그때 다시 명을 받아 행동합시다." 위청은 저승 문턱에서 은인을 만난 셈이라 말도 못하고 입이 딱 벌어졌다. 허겁지겁 유윤중과 첫상면의 인사를 나누면서 그 손을 잡고 놓을 줄 모른다. 유윤중은 소원사(昭遠寺)의 제일방장 반나가잉에게 온갖 강압과 회유의 술책을 당하고 그 대신 청라욕 맞은편 고봉(孤峰)에 올라가 천마해체대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눈덮인 산봉우리 모진 추위 를 맞아가며 낮과 밤을 지새는 동안 그는 몇 번이나 얼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는지 모른다. 그 래도 번승이 준 백신환양단(白信還陽丹)을 복용했으므로 그럭저럭 이 날까지 버텨낼 수가 있었는 데, 칠 일째가 되는 날부터는 유윤중의 눈앞에 숱한 환영(幻影)이 나타나면서부터 또 상황은 바뀌 었다. 처음 나타난 환영들은 독사와 맹수의 종류였다. 그들은 유윤중도 별반 두려운 줄 몰랐다.하지만 독사나 맹수들은 갈수록 사납게 떼를 지어 덤벼들기 시작했다. 두 손 말고 나머지 전신을 번승의 술법에 제압당하였으므로 움쩍도 못한 채 마구 기어오르는 독사떼를 보면서 공포에 질려 숨이 막 힐 지경이었으나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마음만 다급할 뿐 헛일이었다. 코 앞까지 달려들던 짐승들은 당장에 할퀴고 물어뜯을 듯하다간 마침내 귀청이 찢어져라 포효성 을 지르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윤중은 비로소 일체의 환상이 번승의 말대로 헛것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그는 본디 근골도 심후하거니와 구도심(求道心) 또한 간절하였으므로 자신의 생사를 아예 운명 에 맡겨버렸다. 그리고 심신을 안정시키고서 오로지 대법이 완성되기만 조용히 참을성 있게 기다 렸다. 이 대법만 완성되면 그가 <육마> 여후의 목을 얻을 수 있게 번승이 도와준다고 했다. 여후 의 모가지, 이것이 바로 능진인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다. 외로운 산봉우리에 홀로 앉아 하루를 지 내면 지낼수록 차츰 그 고요함 속에서 광명이 생겨났다. 비록 스승의 가르침은 없더라도 어느덧 깨달음이 저절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눈 앞의 환상 또한 점차 갈수록 흉악스럽고 공포적이었으나 끝끝내 유윤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는 못하였다. 십사 일째가 되던 밤중, 홀연듯 능혼이 나타났다. 유윤중은 대가장에서 본 적이 있는 그 괴상한 거렁뱅이를 보고서 크게 반가와 소리쳤다. "제자는 술법에 걸려 꼼짝달싹도 못하겠습니다. 사부님, 제발 저 좀 구해 주십쇼!" 능혼은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유윤중은 이제 살 판이 났다고 생각했다. 이분의 신통력 은 얼마나 광대하냐? 동원기(冬元奇)와 옥청대사와 같은 원로 선배 검선들조차 공경하고 두려움 을 보이는 존재다. 번승 반나가잉의 술법 따위야 손가락 한 개만 까딱해도 맥없이 풀리고 말 것 이다. 그러나 능혼은 손가락 하나 까딱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네 정성이 가긍한 데도 그놈의 백가 난쟁이가 매정하게 거절하길래 내 홧김에 널 제자로 거두 어들이긴 했다. 허지만 너는 출신이 부잣집에서 귀하게만 자랐으므로 훗날 도심(道心)이 깨끗지 못해 우리 문파의 교규(敎規)를 어긋나게 할까 보아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주고 널더러 <육마> 여후의 모가지를 끊어오라고 분부한 것이다. 소원사의 번승 반나가잉은 네 근골이 제법 심후하고 동신(童身)을 지닌 걸 보고 자기 대신 이 천마해체대법을 단련하도록 시킨 것이다. 이 대법의 완 성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게 된다. 네가 도술도 익히지 않은 몸으로 이 대법을 연성하면 반드시 탈출할 수가 없게 되리라. 필경은 대법이 효력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죽고 말 것이다. 아미파 사 람들은 제자를 가려 뽑는데 너무도 가혹한 조건을 앞세워 근행이 조금만 벌어지면 절대로 받아들 이려 하지 않거든. 내 그 꼬락서니가 볼썽사나와 특별히 이곳 청라산에 터전을 잡고 아미파 측이 마다한 인물만 거두어서 여보란 듯이 길러 내세우기로 작정했단 말이다. 네가 진정코 구도의 뜻 을 지니고 있는지 내 오늘 이때껏 암암리에 지켜보아 왔다. 과연 심지도 굳세고 또 자못 깨달음 의 경지에 든 것을 보니 실로 내 예상했던 정도를 훨씬 뛰어나 기쁘다. 그 번승이 준 단약은 속 에 신석(信石), 이 들어 있어 많이 먹으면 몸을 해칠 만큼 열독(熱毒)을 발휘한다. 비록 일시적으 로 한기(寒氣)의 침입을 막아주기는 해도 끝내 독성이 몸에 남아서 화근을 만들게 되니까 앞으로 는 다시 먹지 말도록 해라. 그 대신 내가 다른 환약을 몇 알 줄 테니 나머지 백신환양단은 날 주 고 그것을 복용하거라. 추위도 막을 뿐더러 보신(保身) 겸해서 네 오도견성(悟道見性)을 크게 도 와줄 것이다. 여기서 고생하는 너를 당장 구출해 가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만, 지금은 네 의지로 참고 견뎌야겠다. 며칠 후 청라마궁의 패거리가 마진을 펼칠 것이다. 그 마진은 지진과 홍수, 화 재, 폭풍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격파하려면 적어도 내 법보 두 가지가 못 쓰게 될 판이다. 허지만 소원사의 번승이 너한테 연성시키는 이 천마해체대법 역시 지진, 홍수, 화재, 폭풍을 일으키는 것 이고, 또 이 산봉우리도 청라마궁의 자오방위에 속하므로 청라마진보다 더욱 위력이 강한 홍교 (紅敎)의 적전비법(嫡傳秘法)이다. 결국 두 마진이 맞부딪게 되면 나는 법보를 손상시키지 않아도 될 테니 얼마나 번거로운 일을 덜 수 있겠느냐? 양측에서 지진, 홍수와 화재, 폭풍이 일어나서 천 뢰(天雷), 지화(地火)를 격발시킨다면 이 청라산 골짜기의 지형도 일변하여 새로운 선부(仙府)로 바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지금 겪는 고초가 장차 나를 돕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아울러서 너도 이번 고생을 경험삼아 장래에 도를 깨우쳐 진전을 이룩하는데 더욱 빨라질 테니까 이야말로 일거 양득의 효과를 얻는 셈이지. 그러나 이 대법은 반드시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켜야 위력이 나타 난다. 네가 그 시기에 탈출하지는 못할 터, 널 대신할 작자를 구해 와서 도울 것이니 안심하고 있 거라. 단오 전 며칠이 가장 어려운 고비다. 그때 네 앞에 나타나는 것들은 환상이 아닐지도 모른 다. 때가 되면 그 번승놈도 여기 와서 너를 진정시켜 주겠지만 나 역시 남모르게 숨어서 도와줄 테니까 결국 별 탈은 없을 것이다. 여하튼 마음 단단히 먹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도록 해라. 알겠 느냐?" 말을 마치고 능혼은 일곱 알의 단약을 꺼내 유윤중더러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번승이 남겨 둔 백신환양단을 달래 가지고 종적을 감추어 사라졌다. 능혼이 떠난 후, 유윤중은 놀랍고도 기뻐 그 즉시 능혼의 분부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정좌한 채 계속 천마해체대법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며칠이 안 되어, 과연 능혼이 말한 것처럼 번승 반나가잉이 올라왔다. 그는 유윤중이 추호도 일 을 그르치지 않고 견뎌낸 것을 보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기꺼워했다. 그로부터 반나 가잉은 사흘 건너 한 차례씩 찾아왔다. 그리고 두어 번 유윤중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악귀 야차 들을 발견하고 술법으로 쫓아버리기까지 했다. 마침내 단오절 전날밤이 되었다. 그날도 고봉에 올라온 반나가잉은 유윤중에게 특별히 신신당부 를 했다. "내일이 바로 대법의 공을 이룩하는 날이오! 나는 사원에서 아침 일찍부터 술법을 부려야만 하 오. 그래서 오시(午時) 정각이 되면 금강이산(金剛移山)을 써서 팔마들과 목숨 건 싸움이 펼어질 것이외다. 그 시각에 이 산봉우리가 이동하더라도 당신은 절대로 무서워하지 마시오. 그저 이대로 정상에 앉은 채 이 깃발만 단단히 잡고서 연속 마흔아홉 번을 펼쳐 휘두르시오. 그러면 스스로 기묘한 효력이 나타날 것이외다. 이번 일만 끝나고 나면 내가 당신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그동안 에 겪었던 고생에 후하게 보답하리다." 반나가잉은 유윤중에게 범주(梵呪)를 가르쳐 주고 작은 깃발 한 폭도 꺼내 건넨 다음, 재삼 당부 하고 내려갔다. 반나가잉이 떠나자 유윤중은 손에 잡힌 깃발을 펼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깃폭에는 주문(呪文) 과 부적(符籍)이 숱하게 쓰여져 있고 알몸의 고루(顧陋), 사십구 명이 거꾸로 선 모습이 그려졌 다. 장난삼아 펼쳐서 흔들고 있자니까 어디선가 능혼이 날아왔다. 유윤중은 반갑게 스승을 맞이하고 방금 번승이 남기고 간 말을 설명해 드렸다. 그리곤 마지막으 로 물었다. "... 사부님, 이 깃발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또 제자는 어느 때쯤 위기를 벗어날수 있을까요?" 능혼은 유윤중의 손에 들린 깃발을 훑어보더니 껄껄 웃었다. "그놈의 요승이 물정도 모르고 사람을 놀리다 죽일 셈이로구나. 정말 못된 놈이야! 내일이면 청 라측 마진에서도 지진과 홍수, 화재, 폭풍이 발동될 줄 뻔히 알면서... 하기야 제깐 놈도 감당하기 어려운 강적이니까 너한테 이 역대 교조의 전가지보(傳家至寶)를 맡겼겠지만 말이다... 내일 오시 에 이 산봉우리가 마진까지 날아가서 요승의 말처럼 네가 그 깃발을 마흔아홉 번 휘두른다고 치 자. 그렇게 되면 마진 속에 있는 사람들은 독룡존자와 또 무공실력이 제법 뛰어난 두서너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정파 사파 어느쪽이든 단 한 명도 살아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너 역시 천 뢰(天雷)에 맞아 잿더미로 변하고 말지. 허지만 걱정할 것 없다. 반나가잉, 그놈이 제아무리 꾀를 부려도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때가 되면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능혼은 품속에서 자그만 단검을 한 자루 꺼내 유윤중에게 주었다. "이 칼은 옥룡검(玉龍劍)이다. 내가 당년에 수도하면서 마물(魔物)을 단련하여 만든 것인데 이 단검으로 여지껏 적수를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다. 나는 천서(天書)를 얻은 이후로 이미 비검 따 위는 쓸 데가 없어졌다. 그래서 너한레 빌려주는 것이다. 내일이면 단오절, 시간이 촉박해서 네게 도법(道法)은 전수하지 못하겠구나. 이 칼은 나하고 심령이 서로 통해서 다른 비검과 다르다. 비 검이란 누구든지 스스로 수련해야 만이 부릴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네 정성이 갸륵해서 임시 로나마 네가 부릴 수 있도록 빌려줄 테니 훗날 너 스스로 비검을 연성하거든 그때 다시 내게 돌 려다오. 앞으로 네 노력과 진전에 따라서는 이 옥룡검도 마저 주어야 하겠지만 현재 형편으로서 는 거론할 단계가 아니다. 자, 여기 또 부적 석 장과 편지 한 통이 있다. 이것도 가지고 있거라. 너는 아직 만나지 못했으나 나한테는 너 말고 또 한 녀석 제자를 두었다. 이름은 위청이라고 하 지. 너희들 두 사람은 비록 초대면도 못했지만 오래 전부터 피차 서로 알 만한 사이니라. 내일 오 시, 이 산봉우리가 지상에서 떠오를 때, 내 취운법(吹雲法)으로 너를 마굴까지 날라다 줄 것이다. 도중에 위청과 만나거든 내 편지를 뜯어 보고 거기 쓰인 대로 함께 행동하면 된다." "사부님, 고맙습니다!" 유윤중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했다. 능혼은 옥룡비검술을 전수해 주고 총총히 떠나갔다. 옥룡검의 칼날은 겨우 세 치 여섯 푼밖에 안 되지만 싸느랗게 빛나는 한광(寒光)이 눈부시도록 쏟아져 나오고, 손바닥에서 당장에라도 날아가 버릴 것처럼 꿈틀거리는 품이 여간한 보물임에 틀 림없다. 유윤중은 가슴이 벅차 도록 환희를 느꼈다.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시간 가는 줄도 모 르고 옥룡검을 어루만졌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유윤중은 이제까지 번승의 금제(禁制)에 걸렸던 몸뚱이가 움직여지는 것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이게 도대체 며칠 만에 운신을 하는 것이냐? 그는 힘껏 기지개를 켜고 심 호흡을 해보았다. 오늘에야 비로소 반나가잉은 자기를 믿고 금제의 술법을 풀어준 것이다. 유윤중은 동녘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만 있거라... 사부님이 때가 되면 날 구출해 주신다고는 했으나, 그래도 내 스스로 먼저 탈출 할 만한 길을 찾아놓는 게 어떨까? 만약의 사태에 미리 대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그는 우선 산봉우리 아래로 내려가는 길부터 찾아나섰다. 한데 뜻밖에 장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는 곳이라곤 겨우 정상의 둘레 삼 장 면적뿐, 그 바깥으로 발을 내딛기 만 하면 발바닥에 마치 뿌리가 돋은 듯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에쿠, 잘못 걸렸구나! 이게 어찌 된 셈이냐?' 번승 반나가잉은 교활하고도 용의주도했다. 유윤중의 금제를 풀어주기는 했으나 정상 주변에 술 법으로 봉쇄망을 펼쳐 놓아 탈출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유윤중이 껑충 도약을 해 서 넘으려고 했지만 그 또한 헛일, 어느 방위에서든 지향하는 곳마다 허공에 번갯불이 번쩍 일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유윤중은 뇌지(雷池)에 갇혀 있었다. 탈출은 포기하고 얌전히 때가 오기까지 기다릴 도리밖에 아 무런 수단도 써볼 수가 없다. 그는 다리 운동을 하면서 스승이 구하러 오기만 기다렸다. 가슴을 조이는 초조감 속에서도 시각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어느 새 진시(辰時)도 지나고 사시 (巳時)가 될 무렵이다. 유윤중은 맞은편 청라산 골짜기 안에서 어렴풋이나마 숱하게 많은 광채가 번쩍이는 것을 목격했 다. 공수(攻守) 쌍방간에 벌써 격돌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얼마쯤 있자니까, 이번에는 은은하게 뇌성벽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진동은 폭풍우와 지진이 함께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시(巳時)도 거의 지나고 오시(午時)에 이르자, 갑작스럽게 산봉우리 위 아래서푸터 '우르릉!' 진동음이 울리더니 화광(火光)이 풀썩 일면서 자욱한 안개가 산봉우리를 온통 뒤덮고 끓는 가마 솥에서 증기가 솟구치듯 무럭무럭 창공으로 길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유윤중은 당황했다. 자욱한 안개구름 속에서 딛고선 산봉우리가 위로 떠오르려는 것처럼 요동질 을 친 것이다. 쏴아!... 쏴아! 봉우리 아래서 일진 광풍이 휘몰아쳐 올라왔다. 바람이 불고 지나가자, 이번에는 파도치는 소리 가 들렸다. 쏴아, 우르르!... 철썩!" 물과 바람, 광풍노도가 한꺼번에 몰아치는 소리, 하늘과 땅이 소용돌이에 휩쓸려 뒤집히는 소리, 그 위를 딛고 홀로 서 있는 유윤중이 몸뚱이를 가누지도 못한 채 천지와 함께 흔들렸다. 뒤이어 소원사 쪽에서도 은은하게 뇌성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산 밑에 이르러 '쿵!' 하는 폭음 이 울렸다. 그 폭음의 메아리가 울리자마자, 유윤중은 발 밑에서 지진과 홍수, 폭풍과 벽력이 일 제히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라, 바로 딛고 선 산봉우리가 차츰 위쪽으로 둥 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그는 이미 하늘의 햇빛조차 볼 수가 없었다. 지금이 바로 정오인지 아니면 때가 지났는지조차 판별해낼 도리가 없다. 그는 입 속이 바싹바싹 말랐다. 이 엄청난 마법의 위력 앞에서 자기가 무엇을 한단 말이냐?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 위에 선 개미 한 마리, 그것이 바로 자신의 처지다. 이토록 상황이 다급해졌는 데도 스승은 아직 나타 날 줄 모른다. 진동에 흔들려가며 쩔쩔매는 가운데 느닷없이 산봉우리가 허공에서 빙그르 선회하기 시작했다. 맴을 한 차례만 도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에는 더욱 속도를 높여 어지럽게 돌았다. 폭풍노도와 뇌성벽력 소리도 갈수록 점점 기세 사납게 울렸다. 쿵! 몇 바퀴를 돌았는지 정신도 못 차릴 지경인데, 이번에는 또다시 산악이 갈라져 터지는 듯한 굉 음이 울리더니 산봉우리는 유윤중을 태운 채로 곧장 앞쪽을 향하여 날아가는 게 아닌가! "우와앗, 사부님!" 콰다당, 꽝! 뇌성벽력이 그의 비명을 삼켜버렸다. 술에 취한 듯 비틀비틀, 눈앞이 어찔어찔해진 가운데서도 유윤중은 한 손에 번승의 깃발을, 또 한 손에 옥룡검을 죽어라 움켜쥐고 있었다. 오직 믿을 것은 그 두 가지 법보밖에 더 있겠는가? 쾅!... 쾅! 그는 고막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울렁거리는 가슴 속에서 오장육부가 당장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천지개벽을 해도 유만부득이지, 세상에 이런 변괴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이냐? 뿌지직! 문득 눈앞에 무엇인가 번쩍 빛났다. 한 줄기 금빛 광채가 스치더니 넋이 빠질 대로 빠진 유윤중 의 손에서 번승의 기를 채뜨려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순간, 유윤중의 몸뚱이는 어느덧 허공중 에 둥실 떠올랐다. 그 귓결에 능혼의 음성이 들렸다. "너를 대신할 희생물은 이미 잡아다 놓았다. 이제 취운법술로 마굴까지 데려다 주마. 도중에 위 청을 만나거든 함께 내 편지에 쓰인 대로 움직이거라!" 유윤중은 정신이 번쩍들었다. 빙글빙글 어지럽던 머리가 당장 개운해졌다. 두 눈을 번쩍 뜨고 보 니, 어느덧 자신의 몸뚱이는 산봉우리 위에 서 있지 않고 무엇엔가 떠받들린 듯 공중을 날고 있 는 것이다. "사부님!" 감격을 못 이겨 소리쳐 불렀으나 스승의 응답은 없다. 다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산봉우리가 백여 장 높이의 허공에 매달렸다. 정상의 평지, 이날 이때껏 그가 앉아서 온갖 환상에 시달리던 그곳에서 수백 길도 넘는 불기둥, 물기둥이 억수처럼 솟구치면서 뒤쪽으로 은룡(銀龍), 화룡(火龍)처럼 길게 뻗어나갔다. 산봉우리는 폭풍과 뇌성병력을 쏟아내며 두 마리의 용을 이끌고 똑바로 청라계곡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그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기세를 보면서 유윤중은 이때껏 자신이 해온 술법의 위력에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끝까지 보아 두고 싶은 욕심이었으나, 한눈을 팔다가 자칫 잘못하는 날엔 지상으로 곤두박질할 판이라,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아래편만 내려다보면서 날았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청라계곡 어구로 날아 들어갔다. 지상에 가까이 다가서자 능혼의 분부대로 아직껏 만난 적이 없는 미지의 동문사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누군가를 뒤쫓듯 미친 사 람처럼 치달리고 있는 사나이를 발견했다. 저 사람이 혹 위청일지도 모른다. 그는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 훌쩍 지상으로 뛰어내려 물었다. 과연 그 사나이는 위청이었다. 위청과 유윤중은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 들어가서 능혼의 서찰을 뜯어보았다. 편지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지금쯤이면 청라마궁의 마진은 이미 반나가잉의 천마해체대법에 격파당하고 요사스런 중놈들 과 도인녀석들도 적지 아니 죽었을 것이다. 마굴의 대전으로 들어가면 보좌(寶座) 아래 지하굴이 뚫렸고, 그 속에는 <신수비구> 위풍랑이 감춰 놓은 천서(天書)와 단약이 있느니라. 또 팔마들은 사세가 불리해지면 반드시 마굴로 도망쳐 가서 자기들의 옛스승이 비장한 그 천서를 꺼내갈 것이 틀림없다. 유윤중은 내가 준 석 장의 부적에 구결을 불어넣어 효력이 나타나거든 한 장을 위청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마굴로 들어가거라. 보좌 아래 지하굴은 요법으로 봉쇄되어 있으니 섣불리 뛰어들지 말고 먼저 팔마 중의 몇 놈이 돌아와서 지하굴 봉쇄를 철거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뒤를 쫓아서 들어가야 한다. 그 천서는 지하통로와 맞뚫린 석굴 속 옥갑(玉匣) 안에 놓여 있다. 석굴로 들어설 때는 마귀놈들 보다 앞질러 가서 천서를 채뜨리되, 위청에게 건네 주어 조심껏 받들도록 하여라. 나의 부적은 너 희들이 적에게 발각되지 않게 은신술의 영험을 발휘할 것이니, 적의 눈치 볼것없이 대담하게 움 직여도 괜찮다. 지하통로를 나올 때 너희들은 체구가 왜소한 도인 한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바로 서장 챠이다무 하반(柴達木河畔)에 근거지를 둔 장령자이니라. 그와 맞닥뜨렸을 경우에는 부디 조 심할 것이 있다. 내 부적의 은신법은 그를 속여 넘기지 못하니까 절대로 장령자와 대결하려고 덤 벼들어선 안 된다. 오로지 위청이 옥갑을 놓치지 않도록 받들고만 있으면 그도 역시 빼앗으려 들 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 이상스런 기미를 보이거든 위청이 나서서 '할머님 새비경(賽飛瓊)의 유언을 받고 천서를 훔치러 왔으니 그분 뜻을 존중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거라. 그러면 장령자도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천서를 얻은 후 너희 두 사람은 동굴 안에서 내가 당도할 때까지 기다려라. 그때 가서 내 다시 나누어 시킬 일이 있으리라.> 능혼의 서찰을 다 읽고 나서 유윤중과 위청은 즉각 분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 장의 부적 가운데 한 장만이 사뭇 틀려서 온통 붉은 글씨로 전자(篆字)가 쓰여 있고 번쩍번쩍 빛을 내었다. 그 나머지 두 장은 크기도 모양도 같으므로, 하나씩 나누어 가진 다음 유윤중이 색다른 첫장을 손에 들고 구결을 묵송했다. 그러자 눈앞에 금빛 광채가 번쩍 일더니 두 사람의 몸뚱이는 지상에 붕 떠올라 날기 시작했다. 귓전에 바람소리가 '씽씽!' 울리고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이 어릿어릿하는 사이에, 금빛 광채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좌우를 둘러보니 웬 궁궐 속인데, 여기 저기 십여 명의 괴상망칙한 승려와 도인들이 안팎으로 자리잡고 서서 귀엣말을 주고받고 있다. 그들은 방금 대청 안에 내려선 유윤중과 위청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고 있는 듯 거들떠볼 생각도 안했다. 위청, 유윤중 두 사람은 스승의 부적이 법력을 발휘하는 줄 깨달았다. 헌데 이들 십여 명의 승도 (僧道) 가운데 어느 작자가 팔마들인지 알 수 없으므로 바짝 접근해서 귀엣말이나마 엿들어 보려 고 했다. 그러나 막상 다가서려니 남의 말을 엿듣는 실례를 범하지 않아도 좋을 일이 생겼다. 갑자기 '씨잉!' 하는 파공음이 울리더니 마궁 앞 뜨락에 번쩍 하고 황색 광채가 스친 다음, 생김 새가 흉악스런 도인 두 놈이 나타났다. 차림새도 기괴망칙스런 도인 두 놈은 무엇에 쫓기기나 하 듯 허둥지둥 궁궐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서 지키고 있던 십여 명이 우르르 달려나와 도인들을 영접해 들였다. 그중 한 명이 도인에 게 아첨떠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산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두 분 마주(魔州)께서 이렇게 회궁(回宮) 하시는 걸 뵈오니 아마 대승리를 거두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도인은 대꾸도 않고 전각 위로 오르더니 여럿에게 분부를 내렸다. "너희들은 모두 다 문 앞에 나가서 기다려라. 만약 적이 쳐들어 오거든 맞서 싸우되 단 한 놈도 여기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예에, 알아 모시겠습니다!" 부하들은 시원스레 응답하고는 모두 궁궐 문 바깥으로 몰려나갔다. 이제 궁궐 안에는 도인 두 놈만 남았다. 한 놈의 키가 워낙 크고 보니 가뜩이나 왜소한 또 한 녀석은 어깻죽지 아래에도 못 미친다. 키다리 도인은 바로 <대마> 황수였고, 땅딸보는 <육마> 여후, 그 자였다. 부하들이 물러가는 것을 끝끼지 지켜보던 황수가 여후에게 말했다. "여보게 여섯째아우, 정말 기가 막히네그려. 오늘 결전이 요토록 참패를 당할 줄이야 누가 짐작 이나 했겠나? 둘째하고 여덟째는 마진에서 가장 가까이 서 있다가 뇌화(雷火)를 맞고 잿더미로 변해 날아갔지, 또 다섯째와 일곱째도 중상을 입고 달아나서 이때껏 나타나지 않는 걸 보니 살았 는지 죽었는지 생사조차 모르겠구만. 셋째는 또 어디로 달아났을까?... 다행히도 내 눈치가 빨라서 자네를 멀찌감치 떨어져 있게 했기에 망정이지 자네 역시 부상을 면치 못했을 거야. 어쨌든 간에 오늘의 대사는 이미 끝장났어. 이런 판에 독룡사부님과 허선고라고 무슨 뾰죽한 수가 있어 난국 을 만회하겠나? 어림도 없을 걸세. 두 분이 버텨내지 못하고 적의 추격이 시작된다면 여기 터전 도 지킬 수 없겠지... 아무래도 나는 이 아래 석굴 속에 감추어진 천서를 꺼내야 좋을 듯싶네. < 신수비구> 사부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섰지. 그 천서는 상, 중, 하 세 권으로 나누어져 있고, 또 별 도로 부권(副卷) 한 권이 있다고 말이야. 그 상, 중, 하권은 보통 수도하는 사람이면 내용을 이해 할 수 있지만 상권은 과두문자(科斗文字)로 주석이 달려서 해독하기가 어렵다더군. 사부님께서 얻 으신 것은 하권과 부권이고, 중권은 <숭산이로>가 차지해 버렸는데 그 상권만은 누구 손에 들어 가 있는지 아직껏 모르지. 숭산이로가 얻은 중권은 본래 상권이 없기 때문에 해독하기가 극히 어 려웠는데 아미파의 비조(鼻祖) 장미진인(長眉眞人)이 지도하고 깨우쳐서 절반쯤은 알아냈다더군. 하기야 그것도 소문이지만... 신수비구 사부님은 그 부권만 깨우치시고도 이미 평생에 적수가 없 을 정도가 되셨지. 그분은 천서에서 보광(寶光)이 비쳐서 가지고 다니기가 불편하므로 그것을 보 좌 아래 바닥 석굴 속에 감추어 놓으시고 부권의 겉면에다 주술(呪術)을 걸어 봉쇄해서 제아무리 날고 기는 도술을 가진 사람도 뜯어 볼 수 없게 만들었다네. 그런데 어느날 저녁, 사부님은 아주 기분이 좋으셔서 나한테만 그 천서를 개봉하는 방법을 일러주셨어. 게다가 '천서 세 권을 모조리 손에 넣는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하권 하나만 정통하게 되더라도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하권을 깊이 연구하려면 상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 지, 누가 손에 넣었는지 몰라서 익힐 방도가 없구나!' 하고 탄식하시더군... 이번에 우리 여덟 형 제가 독룡존자의 문하제자로 들어갔을 때, 내 본래 생각은 그것을 꺼내다 바치려고 했지. 한데 유 덕사형이 말 끝마다 제가 제일 잘났다고 꺼덕거리면서 우리 형제를 턱짓으로 부리는 게 아니꼬와 서 잠시 두고 보기로 결심했었지. 공연히 죽 쑤어서 개 좋은 일 시키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거 든... 우리 형제 여덟 가운데 자네 여섯째가 제일 우직해서 마음에 들었어. 셋째나 일곱째처럼 응 큼맞고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짓은 한 번도 안하는 걸 내가 눈여겨 두었지. 그래서 자네를 점 찍어 놓고 있었던 거야... 만약 이 궁전을 적에게 빼앗기는 날이면 그 천서를 꺼내지 못하게 되고 말지. 우리가 훗날 잠입해서 꺼내러 온다손 치더라도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걸세. 이 아래 석굴을 열려면 반드시 한 사 람이 도와줘야 하길래 자네만 살그머니 불러들이고 넷째 누이 동생더러는 바깥에서 망을 보라고 했네. 앞으로 전세(戰勢)가 어떨는지 몰라도 불리하게 돌아가거든 속히 알 려 달라고 했지. 그때 우리 둘이서 힘을 합쳐 그 천서를 꺼내 가지고 뺑소니치는 거야. 어디 깊은 산중, 동굴을 찾아서 근거지로 삼고 다시 그 상권의 행방을 찾아나서기로 하세. 잘만 하면 천서를 해독할 수 있는 고인 한 분을 만나고 문하제자로 들어가게 될 것일세. 거기서 천서의 술법을 완 전히 연마하여 다시 복수길에 나선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황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한 가닥 누른빛 광채가 대궐 안으로 날아들더니 빙그르 한 바퀴 맴을 돌고서는 이내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걸 본 황수는 대번 안색이 변했다. "넷째의 검광이다! 일이 잘못되었다는 경계신호야." 황수는 허둥거리면서 여후를 재촉해서 함께 전각 중앙에 놓인 보좌를 한곁으로 옮겨 치웠다. 그 리고 두 사람 모두 걸친 옷가지를 훌훌 벗어붙이곤 주문을 외우면서 알몸뚱이로 바닥을 짚고 물 구나무를 섰다. 거꾸로 치켜 선 두 마왕이 아홉 차례 맴을 돌자, 문득 보좌가 놓였던 밑바닥에서 '우르릉!' 하고 진동이 울리더니 푸른 연기가 풀썩 솟구치는 가운데 땅굴이 뻥하고 뚫렸다. 천서 가 비장된 석굴의 지하롱로가 나타난 것이다. 유윤중과 위청은 암암리에 서로 옷깃을 한 번 당기고는 대마와 육마의 뒤를 바짝 따라서 지하통 로로 들어섰다. 수십 장 가량 들어가자 과연 석굴이 나타났다. 석굴의 입구 윗면에는 뜻도 모를 부적이 그려져 있었다. 황수는 동굴 문에서 이 장 앞까지 다가가더니 급히 여후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먼젓번 처럼 물구나무서기로 아홉 번 맴을 돌면서 입 속으로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그치고 아홉 번째 맴돌기가 멈추어지자 바위 문 머리에서 불꽃이 번쩍 일더니 이윽고 ' 뿌지직, 뿌지직!' 돌쩌귀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석굴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이때다!' 알몸뚱이로 맴돌던 황수, 여후가 미처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유윤중은 지체없이 위청을 잡아끌 고서 측면으로 앞장서 들어가 버렸다. 석굴 안은 온통 금빛이 찬란하게 비쳤다.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돌탁자 위에는 길이 칠팔 치, 너 비 삼 척에 한 치 높이 가량 됨직한 옥갑이 놓여 있었다. '저것이로구나!' 위청은 성미대로 왁살스럽게 옥갑을 채뜨려 품에 안았다. 그리고 유윤중이 뒤따르든 말든 그 길 로 석굴 바깥을 향해 달려나갔다. 비좁은 석굴 문을 나서려던 찰나, 위청은 그제서야 뒤늦게 들어 오던 둘과 정통으로 딱 맞부딪고 말았다. 앞장서 들어오던 것은 여후였다. 그는 뜻하지 않게 호된 이마 부딪침을 당하고 나서 그만 혼비 백산을 했다. "아이쿠!" 다음 순간 여후는 사람의 몸뚱이가 부딪는 감촉과 함께 거친 숨결을 맡았다. 눈에는 아무 형체 도 보이지 않는데 사람이 있기는 있다. "형님, 조심하쇼! 간첩이....." 여후는 버럭 악을 썼다. 그때쯤 해서 여후와 어깨를 스치듯 빠져나가던 유윤중이 여후의 고함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 다. '아, 이 녀석이 바로 <육마> 여후가 아닌가? 좀 전에 저 키다리 놈이 이놈더러 여섯째아우라 불 렀으렸다! 그렇다, 사부님은 나보고 이놈의 모가지를 베어오라셨지! 이놈 때문리 내가 그동안 얼 마나 호되게 고생했느냐 말이다. 잘 만났구나. 여후 이놈!' 생각이 예까지 미치자 유윤중은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수중의 옥룡검에서 금빛 한 줄기가 번쩍하더니 여후의 모가지를 뎅겅 잘라 떨어뜨렸다. "으악!" 외마디 비명, <육마> 여후는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보이지 않는 적수에게 뜻모를 죽음을 당 하고 말았다. 영문을 몰라 휘둥그래 뜬 눈망울을 달고서 여후의 목은 바닥에 뒹굴었다. 뒤이어 몸 뚱이도 털썩 넘어갔다. 뜻밖의 사태에 기급을 한 <대마> 황수, 본능적으로 대뜸 비검을 일으켜 몸뚱이부터 가리우면서 호신신주(護身神呪)를 외운다. 그는 적이 어디에 잠복해 있는지조차 파악할 겨를도 없다. 방금 여 후의 경고성을 듣는가 싶자마자 한 줄기 금빛이 어깨를 스치고, 이어서 여후의 참혹한 비명, 그것 도 절반밖에 들리지 않고 피보라가 솟구치면서 사람의 목이 썽둥 끊겨 떨어진 것이다. '아뿔싸, 큰일났구나!' 하지만 아우가 죽은 게 문제가 아니다. 황급히 석동 안으로 뛰쳐 들어가 보니 금빛 찬란하던 보 광(寶光)은 이미 스러지고, 돌탁자 위의 옥갑천서도 흔적이 없다. 그는 재빠르게 몸을 솟구쳐 그 곳을 벗어나왔다. 여후를 쳐죽인 자가 암습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에서였다. 위청은 두 손으로 천서가 담긴 옥갑을 단단히 껴안고서 나가던 중 유윤중이 <육마> 여후의 목 을 베어 들고 있는 걸 보았다. '그렇다면 나도 한 놈 잡자!' 욕심이 굴뚝처럼 솟았으나 적도 눈치가 어지간히 빨라 도망친 후다. 아쉬운 마음으로 하는 수없 이 유윤중의 뒤를 따라 지하 통로에서 벗어났다. 대전으로 나온 두 사람은 몸집이 왜소한 도인이 우뚝 서서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 다. 위청이 놓친 <대마> 황수도 장승처럼 뻣뻣이 그 도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키다리와 난쟁이, 바로 그 형국이다. 도인의 키는 겨우 삼 척도 못되어 키다리 황수의 배꼽 아래 처져 가지고 더욱 꾀죄죄하니 초라해 보이는 것이었다. 유윤중은 첫눈에 이 도인이 스승의 서찰에 쓰인 그 장령자란 것을 알아챘다. 몸집과 생김새는 작고 초라하지만 사람의 폐부를 꿰뚫듯 날카로운 신채(神采)에, 얼굴 모습 또한 맑고도 기이했다. 가슴 앞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바람도 없는데 흩날리고, 등에는 장검 한 자루, 은행빛 누른 도포를 걸쳤는데, 맨발에 짚진을 꿰어 신고서 자기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다. "위형, 잠깐만! 유윤중은 무턱대고 나가려던 위청을 살그머니 잡아당겼다. 그리곤 도인의 곁으로 돌아서 가려 했다. 한데 이 무지막지스런 위청이 그 손길을 뿌리쳤다. 한시바삐 스승에게 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만 간절한 것이다. 게다가 능혼의 부적이 신통스런 것만 잔뜩 믿고 편지에 신신당부한 말은 벌써 까맣게 잊은 지 오래다. 위청은 눈앞에 장애물이 나타나자 한 손으로 옥갑을 단단히 감싸안은 채 아까 낙삼관에게서 빼 앗은 보검을 쓰윽 뽑아들더니 다짜고짜 두말도 않고 상대방을 향해 내찔렀다. 유윤중은 미처 위청을 말릴 틈도 없었다. 다급한 가운데 큰소리로 스승의 당부를 일깨워 준 것 이 전부였다. "위형! 조모님의 임종 때 유언을 잊지 마시오." 위청도 그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스승이 편지에 뭐라고 당부하셨던가? '그렇지, 도인을 맞닥뜨리면 무슨 말을 하라고 분부하셨어.' 내지른 장검을 황급히 회수하려고 했지만 벌써 때가 늦었다. 도인의 일지가 뻗어나오자마자 위청은 묵직한 쇠망치에나 얻어맞은 것처럼 호된 충격을 받았다. 챙그렁! 보검은 손아귀에서 벗어나 청석판 바닥 위로 금속성을 내면서 떨어졌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니 손아귀는 쩍 갈라져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한다. '에쿠, 이놈의 도인놈, 지독하구나!' 스승의 은신 부적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위청은 아픔을 참고 다시 두 손으로 옥갑을 껴안았다. 그 아까운 보검마저 주워 들 엄두도 못 내고 도인의 곁을 돌아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첫발을 내딛는 순간 도인이 두 손바닥을 한 두어 번 맞비비더니 유윤중과 위청을 향해 훌쩍 휘둘렀다. 우르릉! 삽시간에 엄청난 굉음이 터지면서 궁궐 안 사면팔방에는 기괴한 형상을 한 괴수 마귀들이 나타 나 갈 길을 가로막았다. 어디 그뿐이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이 두 사람을 당장 잿더미로 만들 려는 듯 '화르르!' 덮쳐오지 않는가! 다급해진 위청, 도다시 스승이 편지에 당부한 말을 잊어먹고 말았다. 유윤중은 물론 알고는 있으 나 도인의 면전에서 일러줄 도리가 없다. 어쩔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는 판인데, 갑자기 '씽!' 하는 파공성이 울리더니 한 가닥 푸른 서슬 이 무지개처럼 길게 뻗으며 대궐 안으로 날아들었다. 푸른 검광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몸집이 우람한 도동(道童)이었다. 그 엄청난 체구에 어울 리지도 않게 머리타래는 쌍갈래로 땋아 상투를 틀었다. 도동은 그 도인 앞으로 나아가 허리 굽혀 예를 올리고 공손히 말했다. "제자, 분부를 받자온 일을 마치고 왔습니다. 사부님께서 내려주신 홍욕대(紅慾袋)로 독룡존자를 잡아 가지고 챠이다무하(柴達木河)에 끌어다 가두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처치하시려는지 여 쭙고자 합니다." 도인은 그 말에 대꾸도 않고 위청을 향해서 손가락질만 해보였다. 그러자 도동이 선뜻 돌아서더니 위청에게 대갈일성 호통을 쳤다. "너 이 멍청한 녀석, 어서 그 옥갑천서를 바치지 못하겠느냐! 내 사부님께선 자비심이 많은 분이 라 너희 두 놈의 목숨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으신다. 하지만 좋은 말로 할때 듣지 않으려거든 나 웅혈아(熊血兒)가 매운 손을 쓰더라도 원망이나 말아라!" 웅혈아... 위청의 외할머니댁 성씨도 원래 웅씨(熊氏)다. 궁신 능혼이 다른 사람을 다 젖혀두고 위청에게 천서를 꺼내오라는 분부를 내린 것도 사실은 장령자와 위청의 외조모 사이에 깊은 인연 이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연은 잠시 뒤로 밀어두기로 하자. 이 무렵 불길은 이미 유윤중과 위청의 코끝까지 닥쳐와 옷자락을 태우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궁 지에 몰려 허둥거리던 판에 위청은 이 웅혈아라고 자칭한 도동녀석한테 공갈을 당한 것이다. 웅혈아, 그 한 마디는 위청을 깨우쳤다. 그로 하여금 거듭 서찰에 당부한 그 말을 상기시켜 주었 다. 자아, 일은 위급하게 되었다. 몸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위청은 허겁지겁 도인을 향해 허리를 구부리고 큰절부터 올렸다. "도인어르신네, 저 위청은 할머님 새비경의 유언을 받들어 이 천서를 가지러 갔습니다. 제발 저 의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셔서라도 이만 놓아주십쇼!" 어찌나 말이 술술 나오는지 자신도 모를 지경이다. 위청의 애걸을 듣자 그 도인은 찔끔 놀라 안색이 대번 변했다. 사뭇 의아스런 기색을 띠면서도 즉각 손을 휘둘러 술법을 거두어들였다. 이글거리던 불길과 연기는 삽시간에 스러져 버리고, 대궐 안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조용해졌다. 도인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은 채 제자를 향하여 눈짓을 보냈다. 웅혈아란 도동이 위청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우리 사부님께서 물으셨소. 그대의 조모님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 전일 터, 그대의 나이도 별 로 많지 않은 듯한데 돌아가실 때 유언을 어떻게 기억했단 말이오?" 유윤중은 곁에서 위풍이 이 도동녀석으로부터 힐문당하는 걸 듣고서 은근히 뒤가 켕겼다. 스승 의 편지에는 그런 것에 대하여 상세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거 큰탈났구나! 위형은 도대체 뭐라고 답변을 하지?' 그러나 뜻밖에도 위청은 신이 들린 듯 서슴지 않고 응답을 했다. "우리 할머님은 정호봉(鼎湖峯)에서 누군가와 검술대결을 하시다가 원수놈의 암기를 맞고 집으 로 도망쳐 오셨소. 몸은 비록 폐인이 되셨으나 어느 분이 선단(仙丹) 몇 알 보내주신 덕분에 당장 돌아가시지는 않고 그 후로 수십 년을 더 사셨소. 할머님께서 좌화(坐化)하실 무렵 내 나이는 네 살, 그만하면 다소나마 세상 일도 깨우쳐 알 나이였소. 할머님은 내 아버지더러 이곳에 와서 옥갑 천서를 훔쳐내라고 유언하시고, 만약 아버지의 힘으로도 끝내 손에 넣지 못하게 되거든 내가 자 라서 훌륭한 사부님의 문하로 들어가 실력을 쌓은 다음 다시 훔쳐내도록 분부하셨단 말이오. 내 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님도 역시 또다른 원수놈에게 죽음을 당하시는 바람에 천서는 끝내 얻 지 못하고 마셨소. 그 당시 나는 어린 나이에도 몇 해 동안 그 원수들의 정체를 찾아 헤매었으나 여지껏 알아내지 못한 채요. 정말 자손된 도리도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외다. 오늘 나는 이곳 마 귀놈들이 다른 패거리들과 결전을 벌인다길래 그 틈을 타서 옥갑천서를 훔쳐내려고 왔소. 어떻게 해서든지 이걸 연성한 다음에 다시 우리 가문 양대에 걸친 원수놈들을 찾아 복수할 작정이었소 만, 당신네가 힘으로 강탈해 가겠다니 나는 헛되이 피땀만 흘린 셈이오." 묵묵히 그 말을 듣던 장령자가 또다시 제자를 향해 입술을 몇 번 달싹거렸다. 도동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고 나서 또 위청에게 말했다. "우리 사부님께선 이제껏 남을 힘으로 억압하는 일은 저지르신 적이 없소. 당신이 바로 <괴규화 > 능혼의 제자인 줄도 알고 계시오. 또 당신의 말이 거짓이 아닌 줄도 물론 아시오. 당신의 조모 님 새비경을 살해한 원수는 바로 이곳 <서천팔마>의 스승인 <신수비 구> 위풍랑이었소. 사부님 께서도 그동안 몇 차례나 당신 조모님의 원수를 갚아드리려고 하셨으나, 어르신께서는 벌써 오십 여 년 전부터 살계(殺戒)를 여신 적이 없어 손수 그 계집을 처치하기가 민망스러우셨고, 또 그 음 탕한 계집도 교활하고 눈치빠르기 짝이 없어 끝내 기회를 주지 않아 왔소. 그러나 역시 위풍랑 그 계집도 운수가 다 되었는지, 이태 전 성도에서 남의 제자를 해꼬지하다가 아미파의 장교부인 묘일부인(妙一夫人)에게 걸려서 비검으로 요참(腰斬)을 당하고 죽었소. 그러니까 조모님의 원한은 이미 묘일부인의 손에 갚아진 셈이고, 당신은 더 이상 복수를 안해도 되오. 그 다음, 당신의 부친 을 살해한 자는 바로 화산파(華山派)의 열화조사(烈火祖師)요. 앞으로 그 천서를 가져다가 훌륭히 연성하고 나서 그 자한테 찾아가 피빚을 갚으시오. 우리 사부님께선 당신의 조모님을 생각해서 당신에게 그 천서를 맡기기로 하셨소. 겉들여 말하지만 그것은 상권이었고, 또 부권 속의 요법만 을 익힌다면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당하기 꼭 알맞게 되오. 다행히도 당신네 사부 <괴규화>가 오 래 전에 상권을 입수하고 계시오. 그 상권 안에는 중권, 하권의 과두문자(科斗文字)를 풀 수 있는 해석이 들었소. 사부님께선 당신더러 힘써 정진하라 분부하셨소. 어르신께서는 또 장차 당신을 도 와주실 때가 있을 것이오... 내 사형 사문공께서는 천호(千狐)의 두 딸에게 백미침을 맞고 부상당 했었소. 그 정도로는 본래 치명상이라 할 것도 없으나 또다시 독룡존자의 못된 친구 녹포노조(綠 袍老祖)란 놈에게 해를 당하여 육신이 참겁(慘劫)을 입고 말았소. 나는 이제 사부님을 모시고 챠 이다무하로 돌아가는 즉시 그 원수놈들을 찾아 복수할 예정이오. 떠나기 전에 부탁할 것이 있소. 당신 사부님을 만나뵙거든 이렇게 전해 주시오. 다른 날 우리 사부님께서 천호의 두 딸년을 찾아 복수하실 때에 피차간에 불편하지 않도록 더 이상 참견을 말아 달라고....." 도동 웅혈아는 예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손을 번쩍 휘두르자, 대궐 안에 그득하던 괴수 악귀 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그 대신에 온 전각 안이 눈부신 푸른빛으로 가득찼다. 유윤중과 위청이 넋을 잃고 두 눈을 비비는 사이에 어느덧 장령자와 웅혈아, 그리고 <대마> 황 수조차 모두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본래 위청은 <촉남협도(蜀南俠盜)> 위달(魏達)의 손자요, <선인장(仙人掌)> 위전(魏全)의 아들 이다. 위달의 아내는 <새비경> 웅만랑(熊曼娘)으로서, 바로 명나라 때의 유명한 여협(女俠) <민 산삼녀(岷山三女)>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웅만랑은 민산삼녀 중에서도 항렬이 둘째였고, 그 언니는 형산(衡山)의 <금모모(金姆姆)> 나자 연(羅紫煙)이며, 막내는 <보허선자(步虛仙子)> 소십구매(蕭十九妹)다. 당시 이들 세 처녀는 일생토록 시집을 가지 않기로 맹세하고 함께 민산(岷山) 천녀묘(天女廟)의 주지승 <칠지용모(七指龍母)> 인공사태(因空師太)의 문하제자로 들어가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인공사태의 계율은 무릇 어떤 제자를 받아들이든지 십 년이 차기 전에는 머리를 깎아 계(戒)를 받지 못하도록 정해 놓고 있었다. 나자연과 웅만랑, 소십구매 세 처녀는 수련을 시작한 지 사 년도 못되어서 검술의 수준이 어느 정도 요결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그녀들의 스승 인공사태는 불현듯 정중(靜中)에 천 기(天機)를 꿰뚫어 깨우치고 원적(圓寂)할 기일까지 정해 놓았다. 스승은 세 제자를 면전에 불러 모으고서, 나자연과 소십구매에게 도서(道書)를 한 권씩 내려주었 다. 나자연이 받은 것은 월녀경(越女經)이었고, 소십구매가 받은 것은 삼원비급(三元秘級)이었다. 그러나 웅만랑에게는 아무것도 전수해 주지 않았다. 웅만랑은 당연히 스승에게 항의를 했다. 그 무렵 동문 셋 가운데서 웅만랑이 가장 열심히 수련 을 했고, 또 자질과 오성(悟性)도 뛰어나 스승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것은 누구도 인정해 온 터인데 스승은 이별에 임박해서 다른 자매는 모두 주고 유독 그녀에게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 으려는 것이다. 나자연과 소십구매 역시 그녀와는 골육을 나눈 자매보다 더 깊은 정으로 맺어진 사이라 스승이 그녀를 너무 박대하는가 싶어서 모두 함께 무릎꿇고 간청을 드렸다. 그러나 스승 인공사태는 정작 좌선(坐禪)에 들어가 조용히 길시(吉時)에 이르러서 비승(飛昇)할 때만 기다릴 뿐, 제자들의 하소연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세 처녀는 꿇어 엎드린 채 반나절을 애걸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스승이 원적 비승할 진시 (辰時)가 되는 것이다. 너무도 억울함을 못 이겨 웅만랑은 눈물로 흠씬 목욕할 만큼 소리쳐 울고 또 울었다. 자기 혼자만이 스승에게 버림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한스러운 노릇인가? 눈을 감은 채 정좌하고 있던 인공사태가 홀연듯이 탄식을 내뱉았다. "네가 우리 문중에 들어온 이래 경소 자중자애(自重自愛)하고 아무런 실덕(失德)도 없었는데, 내 어찌 너한테만 각박하게 대하겠느냐? 사실 말한다면, 내 뜻에는 여러 가지 인과(因果)가 내포되어 있단다. 운명을 거슬러서 행하면 너를 아낀다는 것이 도리어 해를 끼치게 된다. 너희 동문 자매 셋 가운데 현재로 보아서는 만랑이 비교적 정진하고 있기는 하나, 유독 너의 업연(業緣)만이 아직 도 끊기지 않았으므로 내 도술을 전수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만랑은 장차 하산하여 기연(機緣)을 만나게 되고, 좋은 배필을 얻으리라. 비록 정과참수(正果參修)는 어렵더라도 부부가 함께 수명(壽 命)을 누리고 백년해로(百年偕老)할 운명이다. 그러나 운명이 빗나가면 중도에서 원통한 업(業)에 얽혀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전수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아, 십구 매야, 너희들이 그토록 애걸하는데도 내가 고집만 부린다면 내 진심이 편협하게 보이는 것 같구 나. 이제 우리가 모여 있는 시간도 별로 많이 남지 않았다. 나는 만랑에게 여덟 마디 게어(偈語) 를 남겨 주련다. 그리고 밀봉한 글월을 두 통 써서 주겠다. 겉봉에는 제각기 열어 볼 날짜를 적어 놓으리라. 그해 그날이 오면 첫봉을 뜯어 보아라. 날짜가 되기 전에 개봉하면 내용이 나타나지 않 을 것이니, 그때 가서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만약 첫봉에 쓰인 화근덩어리를 네가 피해내거든 즉 시 둘째 봉투를 뜯어 보고 거기에 쓰인 대로 실행하거라. 그렇게만 한다면 장차 너는 맏이와 막 내를 능가할 만한 성취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만약에... 불행히도 그 화근덩어리를 피하지 못한다 면 굳이 둘째 글월을 뜯어 볼 것 없다. 그래봐야 살신지화(殺身之禍)나 당하기 십상일 테니까. 알 겠느냐? 만랑아, 내 말 명심하거라!" 인공사태는 지필묵을 끌어당겼다. 이윽고 두 장의 글월을 써서 밀봉한 다음, 다시 비단 주머니에 넣어 만랑에게 내주었다. "잘 간직하거라." "예." 스승은 다시 여덟 마디 게어를 적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미처 읽을 틈도 없이 앉은 그대로 평안 히 좌화했다. 인공사태가 원적한 후 세 제자들은 애통 속에 장례를 마치고 나서 예전과 같이 천녀묘 절간에 머물렀다. 슬픔과 원망도 얼마만큼 가시고 심사가 피자, 웅만랑은 그제서야 스승이 남긴 게어를 펴보았다. 위(魏)를 만나거든 함께 돌아가고, 암(巖)을 만나거든 들어가지 말지니, 정호(鼎湖)의 용이 죽고, 석실에는 천록(天錄)이 있다. 단풍(丹楓)의 눈에 비치면, 마정(魔釘)이 뼈를 꿰뚫으리. 삼가고 또 삼가거라. 부디 조심하여 실족하지 말 것이니.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웅만랑은 그 뜻을 모르겠다. 맏언니와 막내까지 동원해서 머리를 짜내고 궁리해 보았으나 역시 까막눈은 매일반이라 하는 수없이 마음 속에 단단히 기억해 두기만 했다. 아무래도 범상한 인간이 천기(天機)를 미리 헤아리기란 어려운 법이다. 스승 인공사태가 세상을 뜬 이후로 다시 이 년이 지났다. 나자연과 소십구매는 스승이 전수한 도서에 따라서 열심히 수련을 거듭했다. 무공의 수준은 하 루가 다르게 정진했다. 오직 웅만랑 혼자서 외톨이가 되어 사형, 사매의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동안 벌써 몇 번이나 비단주머니를 만지작거렸는지도 모른다. 밀봉한 글월을 읽으려면 아직 도 삼 년이나 있어야 한다. 스승은 날짜가 되기 전에 뜯어 보면 글씨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당부 하셨다. 그러니 아무리 마음이 조금해도 감히 밀봉을 찢어 볼 엄두도 낼 수가 없다. 웅만랑은 무료하고 적적했다. 사형과 사매와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맞대고는 있으나 늘 수련에 만 온갖 시간과 정력을 다 쏟아 붓고 있으므로 좀처럼 그녀에게 말벗이 되어 줄 틈이 없었다. '산을 내려가서 한바탕 바람이나 쐬고 올까?' 공교롭게도 이때 나자연과 소십구매는 공력의 화후(火候)가 완성되려던 참이라 모두 입정(入定) 에 들어 있는 상태였다. 웅만랑은 두 사람에게 알리지도 않고 쪽지 한 줄만 적어 남겨 둔 채 홀로 천녀묘를 떠났다. 민산에서 내려간 그녀는 천하를 두루 유람하며 우연히 닥치는 대로 몇 가지 눈에 거슬리는 사건 도 해결해 주었다. 어느날 웅만랑은 사천으로부터 운남 귀주 일대를 섭렵하다가 곤명호(昆明湖) 부근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를 만났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그 친구는 절강성(浙江省) 진운현(縉雲縣) 선도산(仙都山) 부근에 정호봉 (鼎湖峯)이 있는데 그곳에 요즈음 악룡(惡龍) 한 마리가 나타나서 몹시 행패를 부린다는 소식을 귀띔해 주었다. 정호봉에 대해선 웅만랑도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선도산과 보허산(步虛山) 두 산악 사 이에 끼여서 붓끝처럼 솟은 봉우리가 높이 천 길을 헤아린다는데 사방이 모두 깎아지른 절벽이라 도술을 익힌 사람이 아니고는 감히 기어오를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그 봉우리 정상에는 호수가 하나 있다. 호수의 이름은 정호(鼎湖), 바로 그 옛날 황제(皇帝)께서 비승하신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그 호수 때문에 봉우리의 명칭도 정호봉이 된 셈이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웅만랑은 문득 호기심이 솟구쳤다. '가만 있거라... 나도 별로 할 일도 없는데 황제께서 승선하셨다는 고적이나 한번 가볼까? 그곳 의 행패 막심한 용이라도 처치해 버리면 공덕을 한 건 쌓게 될 테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즉시 친구와 작별하고 길을 바꾸어서 절강성으로 출발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웅만랑은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 접경에 있는 선하령(仙霞嶺)에 다다랐다. 선하령은 복건과 절강 접경을 가로질러 강서성(江西省)에 맞닿아 있는 산악인데, 고개와 영마루의 기복도 심하고 길이가 천 리에 뻗을 만큼 장대하다. 산악의 오 분지 사는 절강에 속해 있고, 나머 지 오 분의 일이 복건성 관할로 들었으며, 산중 계곡과 절벽도 기암괴석 천지요, 그윽하고도 깊어 서 여기저기 적지 않은 선령 굴택(仙靈窟宅)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웅만랑이 선하령을 넘을 때는 계절도 바야흐로 늦가을, 해 저물녘이라 온 산을 뒤덮은 단풍나무 숲이 울긋불긋, 서산에 가득한 놀빛과 그 화려함을 다투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은 오직 적막감만 감돌 뿐, 사방천지 어디에도 인적이 없었다. 때없이 흐르는 시냇물 소리, 저녁 무렵 둥지를 찾아 깃드는 새떼들의 지저귐이 서로 화창(和唱) 하는 가운데 가을빛은 나그네에게 더욱 높고 상쾌한 느낌을 주고, 풍경 또한 짙고 그윽했다. '진종일 걸었더니 목이 마르구나.' 웅만랑은 문득 갈증을 느끼고 시냇물이라도 마실 셈으로 두리번거렸다. '아, 물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물이 흐르는 소리를 어림잠아 산길에서 벗어났다. 큼직한 암벽 모퉁이를 두 차례 돌아가 며 시내를 찾는데, 정작 물줄기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물소리가 아니라 바람결에 나무숲이 흔들리는 소리였는지도 몰라.' 그러나 때때로 들리는 게 아니라 꾸준히 들려오는 걸 보아선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분명하다. 귀를 바짝 곤두세우고 조심스럽게 풀섶을 헤쳐나가자니 문득 우거진 수풀 속에서 무엇인가 부스 럭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건 또 뭐야?... 혹시 들짐승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그녀는 야수의 기습에 대비해서 장검을 뽑아들고 가만가만 풀섶을 헤쳐나갔다. 웅만랑의 검술 실력은 비록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자신의 보검을 자유자재로 쏘아내고 거두어들이면서 십 리 밖 사람의 머리를 잘라버릴 만큼 대단한 수준이라, 어지간한 야수라도 겁 낼 필요가 없었다. 과연 풀섶에는 짐승이 있기는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마리씩이나... 짐승을 발견한 순간, 웅만랑은 그만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보라, 눈앞에는 무지막지하게 길다란 뱀이 거대한 구 렁이와 한 데 뒤엉켜서 교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못된 짐승들 같으니라고! 어디서 부끄러운 짓을 하는 거야?' 불끈 역정이 치밀어 오른 웅만랑, 손에 들린 보검으로 화풀이하듯 내리쳐 버렸다. 아무리 몸통이 크기로소니 뱀이나 구렁이 따위가 어떻게 그녀의 매서운 칼질을 당해내겠는가? 한창 흥겹게 어우러져 일을 벌이던 뱀과 구렁이는 영문도 모른 채 칼날을 받고 두 모가지가 한 꺼번에 뎅겅 떨어졌다. 붉은 피보라가 무지개를 그리면서 뿜어나오는 가운데, 그녀는 지독스런 비 린내를 맡고 눈살을 찌푸렸다. 비린내를 풍긴 놈은 적홍색의 몸뚱이에 뿔까지 돋아난 뱀이었다. 생김새로 보건대 사나운 독사 임에 분명했다. 이런 독사가 날뛰었다면 애꿎은 생령을 여럿 해쳤으리라. 그녀는 비위가 상했지만 그래도 세상에 해로운 짐승을 처치했다는 자부감이 앞섰다. 웅만랑은 흥겨운 마음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다시 시냇물을 찾아나섰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몇 발짝도 못 가서 갑작스레 온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도 어찔어찔하고 자꾸만 졸음이 쏟아지는 데다 마음마저 편치가 못하다. 이상스럽게 가슴 속이 울렁거리고 열기가 솟구치 면서 흥분이 일었다. '암만 해도 내가 진종일 산경치를 즐기면서 걷느라고 힘드는 줄 몰랐나 보다. 때야 속일 수 있 나? 고단해지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지? 이상해, 정말 이상한 노 릇이야.' 나른하니 졸음은 자꾸만 쏟아진다. 눈꺼풀에 저울추라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겁게 내리감긴다. 어디 으슥한 곳이라도 찾아서 당장 한숨 푹 잤으면 좋으련만..... 이때였다. 웅만랑은 갑자기 앞쪽 나무 숲 속에서 무엇인가 푸른 서슬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보았더니 그 푸른 빛줄기는 구렁이처럼 꿈틀꿈틀 기어서 이 제 막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웅만랑도 놓칠세라 그 뒤를 쫓아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숲 속에 들어서자 그녀의 맞은편에 는 거대한 암벽의 동굴이 나타났다. 푸른 빛줄기가 동굴 앞에 우뚝 멈추더니 빛은 사라지고 거기 에 대신 키가 칠팔 치 남짓한 벌거숭이 어린애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거 봐라, 괴상한 녀석인걸?... 그래, 맞았어! 정령(精靈)이야. 깊은 산중에선 도술을 닦은 정령 이 금단(金丹)을 만든다던데 바로 그런 종류임에 틀림없어. 저걸 내가 놓쳐서야 어디 될 법이나 한가?' 그녀는 정령이 놀라서 도망갈까 봐 숨을 죽인 채 잔뜩 정신을 모아가지고 살그머니 동굴 곁으로 날렵하게 다가섰다. 고개만 빠끔 늘이고 안을 들여다보니, 바깥에서 그렇게 커 보이던 암벽의 동 굴 속은 겨우 일 장 가웃 넓이밖에 안 되었다. 깊이도 그 정도고, 또 뒤쪽으로 빠져나갈 길도 없 다. 동굴 한 가운데 반석이 놓였는데, 그 위에는 웬 도인이 한 사람 앉아 있다. 길다랗게 다섯 가닥 으로 땋아 늘인 수염에 미목이 청수한데, 키는 고작해야 석 자밖에 안 되어 보인다. 그 무렵 푸른 빛줄기 속에서 나타났던 그 어린애는 어느 새 도인의 정수리로 기어 올라가 있다. 그리고 나자 도인의 명문혈(命門穴)에서는 흰 연기가 물씬 피어 오르더니 그 어린 것을 뇌해(腦 海)로 쭈르륵 빨아들였다. 아무리 보아도 이 도인은 사람이긴 한 모양인데 체구가 너무도 작고 수척하다. 방금 도인의 머 릿속으로 들어간 그 어린 것도 여느 수도자(修道者)가 단련해낸 원신(元身)과는 전혀 다르다. 웅만랑은 이 도인이나 어린 것이 모두 무슨 도술을 익힌 정령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아깝게 도 한 발짝 늦어 그 어린 것이 제 소굴로 도망쳐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다시 도인 정령의 기색을 살폈다. 반석 위에 좌정한 그대로 꼼짝달싹도 않는다. 아직껏 입정(入定)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불쑥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가만 있거라... 저놈의 도인이 앉아 있는 반석 뒤로 돌아서 숨어 있다가, 정령의 원신이 다시 나 타나거든 그때 잽싸게 껍길을 옮겨 놓기로 하자꾸나. 제깐 놈이 돌아갈 껍데기가 없어지면 어디 로 도망칠 거냐? 꽉 움켜잡아서 보검으로 토막내겠다고 위협하는 데야 정체를 밝히지 않고서 못 배기렷다? 그렇게 된 다음에는 내 것이지!' 웅만랑의 결심은 금방 섰다. 도인은 바야흐로 두 눈을 내리감은 채 잠이라도 든 것처럼 정신을 어떤 것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래서는 곁에 호랑이가 오더라도 모를 것이다. 그녀는 때를 놓치 지 않고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반석을 감돌아 도인의 등 뒤로 가서 웅크려 앉았다. 다행히도 반석 위의 도인 정령은 전혀 눈치를 못 챈 듯하다. 웅만랑은 점차로 긴장이 풀렸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자니까 몸이 물 먹은 솜뭉치처럼 나른하 게 풀어지고 가슴 속에서는 후끈후끈 열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까 독사와 구렁이를 쳐죽였을 때의 증세가 다시 발작한 모양이다. 그녀는 기분이 나빠졌다. 한데 끈적끈적 뒤엉켜 교접하는 짐 승들의 광경이 떠올라 메슥거린다. 그 기분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펑! 갑자기 도인의 머리 끝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후딱 고개를들고 올려다보니 정수리에서 또 흰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다. 이어서 아까 그 어린 발가숭이가 도인의 명문혈에서 불쑥 나 타났다. '아, 네녀석이 또 나왔구나!' 그녀가 반가와할 틈도 없이 어린 놈은 다시 한 가닥 푸른빛으로 화해가지고 바깥으로 날아가 버 렸다. 웅만랑은 잠시 더 기다렸다. 이만 하면 멀찌거니 갔으리라 생각되자, 그녀는 비로소 몸을 일으켜 도인의 정면으로 걸어나갔다. 이제 껍데기를 치워버릴 판이다. 그녀는 손을 대려다가 흠칫 하고 멈추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 도인의 생김새와 거동이 사뭇 수 상쩍다. 너무나 조용하고 태연스레 앉아 있는 품이 도리어 불안감을 안겨 준 것이다. '내가 왜 이럴까? 실력도 제법 갖추고 담력도 남한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이 웅만랑 이 뭐가 무서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워낙 당차고 겁도 없는 이 처녀, 한 손에 장검을 쓰윽 뽑아 쥐고서 왼손을 뻗었다. 도인의 몸뚱 이를 번쩍 들어다가 어디 으슥한 곳에 감춰 놓을 작정이다. 이렇듯 체구가 왜소하다면 몸무게도 별것 아닐 터, 두 손 다 쓸 필요도 없고 한 손만으로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더라도 별반 힘들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웅만랑은 한 팔로 도인의 몸뚱이를 감아서 번쩍 쳐들었다. '에쿠, 쬐끄만 게 왜 이리 무겁냐?' 도인은 그 자리에 않은 채 뿌리가 박힌 듯 요지부동이다. 입술을 악물고 또 한 차례 '끙!' 소리 가 나도록 용을 써봤으나 역시 마찬가지, 도인의 자그만 몸집은 꼼짝달싹도 않는다. 그쯤 해서 위험을 느끼고 물러갔으면 좋으련만, 이 당찬 아가씨는 도리어 성미가 불쑥 치솟았다. 오른손의 장검을 칼집에 도로 꽂고서 이번에는 두 팔로 도인의 겨드랑이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젖먹던 힘까지 다 끌어내어 번쩍 추켜들었다. 이 정도 용을 썼는 데도 꿈쩍 안할 거냐 싶었지만, 웬걸! 이야말로 잠자리가 돌기둥 잡고 흔드는 격이다. 울화통이 뻗칠 대로 뻗친 웅만랑. 이판사판 승부를 내고야 말 듯 다시 한 번 전신의 기력을 다 끌어올린다. 또다시 도인의 옆구리에 두 팔을 푹 찔러 넣고 용을 쓰려는 참인데 문득 뒤통수에서 푸른빛 한 줄기가 번쩍인다. 도인을 감싸안은 자세로 후딱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이런! 방금 전에 날아갔던 그놈이 어느 새 돌아오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지, 저놈부터 잡자꾸나!' 웅만랑은 도인의 겨드랑이에서 두 손을 잡아 뗐다. 오른손으로 보검을 뽑아 들고서 이제 갓 동 굴 속으로 들어선 푸른빛을 향해 덮치며 달려갔다. 바윗덩이 같은 도인의 몸뚱이를 부여안고 실 랑이질치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수월하리라 싶었던 것이다. 어린애는 그녀가 칼을 휘두르면서 달려드는 걸 보고도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푸른 서슬을 길 게 끌며 맞바로 다가왔다. 그 빛이 웅만랑으로부터 일 장 밖까지 날아들자, 뼈를 에이는 듯한 싸 늘한 한기가 확 끼쳤다. '아뿔싸, 이것도 여간내기가 아니로구나!' 웅만랑은 황급히 진기를 한모금 들여 마시고 훌쩍 수중의 장검을 흰빛으로 변화시켜 마주 날려 보냈다. 그녀의 비검과 푸른 서슬이 한데 엉키는 순간 느닷없이 얼굴에 찬 기운이 확 끼치더니 어찔어찔 눈앞이 몽롱해진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온몸이 말을 듣 지 않는다. 그녀의 의식 속에 어렴풋하게나마 누군가 자기 허리를 껴안는 듯한 촉감을 받았다. '이게 누구야?.....안 돼!' 놀라운 비명도 마음뿐, 전신이 나른하게 풀어지더니 발바닥부터 감각을 잃고 점점 하반신, 상반 신으로 마비증세가 오르기 시작한다. 안 돼! 안 돼!...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의식을 잃었 다. 몸뚱이가 축 늘어졌다. 웅만랑이 다시 깨어났을 때 느낀 것은 온 몸뚱이가 말도 못하게 느른한 기분이었다. 술에 취한 듯 머릿속이 조금 어지럽고 무거울 뿐 의식은 말짱했다.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자신은 반석 위 에 반듯이 누워 있다. 그 곁에는 체구가 왜소한 도인 한 사람이 수심이 가득찬 모습으로 서서 멍 청하니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기급을 해서 벌떡 일어났다. 흘낏 동굴 밖 풍경이 눈길에 잡혔다. 온 산은 화창한 가을볕에 잠기고 하늘거리는 나뭇가지 위 로 산새들이 재잘재잘 날아다닌다. 날은 어느덧 이튿날 아침인 것이다. '아차, 날이 샜구나! 그럼 어젯밤 어떻게 지냈을꼬?... 아니... 아니야! 그건 꿈이 아니었어!' 다음 순간, 웅만랑은 자기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과연 그것은 꿈 속의 일이 아니 었다. 독사와 구렁이, 독사와 구렁이의 꿈을 꾼 게 아니라,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이 요사스런 도인놈, 이놈의 암산에 걸렸구나!' 천지가 빙그르 도는 듯한 어지러움, 그 다음에 밀려온 것은 수치심과 분노였다. 그녀는 두말없이 장검을 뽑아 잡고서 도인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제 한사코 이 도인놈과 결판을 낼 셈이다. 챙그렁! 도인의 손짓 한 번에 비검은 해말간 쇳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더니, 이내 상대방의 손아귀에 덥석 올라가 앉았다. 웅만랑은 자신이 도인의 적수가 못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제 또다시 몸을 더럽힐 지도 모른다. 섣부르게 덤벼들었다간 도인놈의 음욕만 자극해서 거듭 욕을 당할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통한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렇다, 죽자꾸나! 죽는 길밖에는 이 치욕을 씻을 길이 없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씰룩이면서 잔뜩 흐려진 눈길로 동굴의 암벽쪽을 훔쳐보았 다. 도인은 그녀의 비검을 들고서 여전히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자기를 응시하고 있다. "에잇!" 그녀는 암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머리통이 박살나서 모든 수치감도 잊어버리고 죽어야만 한다. 몸뚱이가 뜨는 순간, 무엇이 등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생의 기력을 다 뽑아 뿌리치려 했지만 그 흡인력은 엄청났다. 동굴 바깥으로 도망치려 해도 마찬가지, 단 한 걸음조차 떼어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마침내 악에 받쳤다. 죽고 싶어도, 살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원통하고 분한 마음에 울음과 함께 욕설이 터져나왔다. "이 육시처참을 할 놈, 요사스런 도인놈아! 어쩌자고 날 이 모양으로 만들었느냐? 음탕한 도둑 놈, 천벌이나 받아 죽어라! 내 죽어서도 네놈의 살을 저며 씹고야 말 테다! 아이고, 분해라. 엉엉 엉!" 그러나 도인은 대꾸 한 마디 없이 그녀가 기진맥진 목청이 쉬도록 욕설을 퍼붓고 울도록 내버려 두더니 마침내 제풀에 지쳐 수그러들자, 그제서야 천천히 다가왔다. "웅소저, 그만 고정하시오. 그대 사부님의 서찰을 뜯어 보면 오늘 이 일의 인과를 아시게 되리 다." 웅만랑은 또 한 번 소스라쳤다. "이 도둑놈아, 날 요꼴로 만들어 놓고, 또 내 사부님의 편지까지 훔쳐 봤구나! 이 못된 요괴놈!" "내가 진작에 그대 사부의 서찰을 보았더라면 그래도 나 자신과 남을 해칠 지경에 이르지는 않 았을 거요. 아아, 천년의 공덕이 단 한 번 실수로 물거품이 되다니!... 웅소저, 나 역시 일을 잘못 저지르고 후회막급이오. 그대에게 못할 짓 한 걸 어찌 속죄하면 좋겠소? 내가 그대의 방명과 내 력을 안 것은 훗날 속죄하기 위해서 투시법으로 금낭 속에 밀봉된 서찰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 오. 결코 악의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소." 웅만랑으로선 발작을 일으켜 봤자 아무 쓸모가 없는지라, 도인의 말은 귓결에 듣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비단 주머니를 풀어 첫 번째 밀봉 서찰을 꺼내들었다. 겉봉에 적힌 연월일,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손꼽아 날짜를 셈해 본다. '오늘이로구나!... 아아!' 언제 그토록 세월이 흘렀을까? 천지를 유람하면서 세월 가는 줄도 몰랐다. 벌써 이태가 지났다 니... 어서 빨리 날짜가 지나지 않는다고 조바심이 나서 안달하던 자기가 어째서 그 날이 박두한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단 말인가? 오늘이 바로 그날, 천만다행으로 지나쳐 보내지 않았구나! 그녀는 기쁨과 두려움에 못 이겨 스승의 편지를 뜯는 손이 덜덜 떨렸다. <너는 금세의 업연(業緣)이 다하지 않아 정과(正果)를 수련하기 어려운 몸이다. 그러나 네 간절 한 정성이 하늘의 뜻을 감동시킬 만하기에 미리 게어(偈語)를 남겨 훗날을 경계하도록 했다. 이 서찰이 공개되는 날, 너는 의당 선하령(仙霞嶺) 문턱에 가 있을 터, 그곳에서 그릇되이 청해성 챠 이다무 하반의 수사(修士) 장령자(藏靈子)를 만나서 오십 년 전의 사건을 매듭짓게 될 것이다. 네가 만약 그 겁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내년 중양절(重陽節)에 다시 두 번째 서찰을 뜯어 보도 록 해라. 그럼 너에게 광세(曠世)의 선연(仙緣)을 일러줄 것이다. 아니면 위씨(魏氏)라는 청년과 만나서 함께 숙연(宿緣)을 이루고 부부가 장수를 누리게 되리라. 그때 만약 정과를 얻고자 해도 일세(一世)를 겪어야만 한다. 불행히도 네가 장령자에게 원음(元陰)을 잃었다면 그 또한 업원(業寃)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령 자는 도를 이룩한 지 오랜 수사로서 일찍부터 진념(塵念)을 끊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너와 장령자 피차간에 모두 겁수(劫數)에 농락당한 셈이다. 네 전신(前身)은 바로 장령자가 거주하는 챠이다무 하반에서 빨래하던 번녀(番女)였으니까. 네가 금생(今生)에도 아직 이르지 못한 몸인데 어찌 내세(來世)를 꿈꾸랴만, 이제 앞으로 선을 위해 노력한다면 저 세상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디 망념(妄念)을 품어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단견(短見)인랑 갖지 않도록 해라. 이것이 사부의 당부이니까. 제자 웅만랑에게 스승 인공.> 서찰을 다 읽고 나서 웅만랑은 그제서야 스승이 남긴 게어 가운데 한 구절을 문득 떠올렸다. <... 암(巖)을 만나거든 들어가지 말지니(逢巖莫入).....> 그녀의 가슴 속에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이제 누구를 원망하랴? 죽도록 미운 것은 자기 자 신뿐이다. 어쩌자고 규수의 몸으로 조심성도 없이 공연한 짓을 저질렀느냔 말이다. 쓸데없이 남의 참수(參修)를 훼방하고 욕정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 아닌가? 그 결과 자신이나 남이나 모두 공덕을 망치고 몸마저 못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울음만 터져나온다. 그녀는 마침내 목놓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장령자 역시 탄식을 했다. "만랑, 너무 슬퍼 마시오. 여기 잠시 앉아서 내 말을 들어보도록 하오. 그러면 그대 전생의 인과 (因果)를 알게 되고, 또 인공사태님이 서찰에 남기신 업원(業寃)도 이해할 수 있을 게요. 옛날이야 기지만 내 어머님은 본디 감숙(甘肅) 지방에서도 이름난 부호의 딸이었소. 어머니는 처녀시절에 부모님, 그러니까 나한테 외조모부가 되시는 분을 따라서 여행을 떠나셨소.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서장(西藏)의 활불을 참배하시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나 여행 도중 뜻밖의 일이 생겨났소. 어머님 의 미모에 눈독을 들인 청년 하나가 기회를 노려 어머니를 납치해서 장령산(藏靈山) 깊은 산중으 로 끌고 들어가 협박한 끝에 강제로 부부의 인연을 맺었소. 그 청년이 곧 내 아버님이 되는 분이 라오." 장령자의 외조부모는 모두 무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객지에서 딸을 납치당하자 분노에 못 이 겨 그 길로 귀향하더니 숱한 고수들을 초빙해다가 습격대를 편성하고 재차 장령산으로 쳐들어갔 다. 장령산의 청년은 습격대를 맞아서 힘껏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이라 끝내 분노한 장인(?)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딸은 구출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거지 약탈결혼이기는 했으나, 두 젊은 남녀가 며칠 동안 밤낮을 함께 지냈으니 무사할 리가 없다. 처녀는 이미 임신을 한 몸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처녀는 버린 몸으로서 다시는 시집을 가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부친도 그 뜻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납치소동이 있은 지 얼마 아니 되어 처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전부터 두었던 첩을 정실로 맞아들였다. 심성이 곱지 못한 계모는 처녀를 무섭게 들볶고 학대했다. 처녀는 계모 시하에서 무진 고초를 겪으면서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뱃속의 아기가 딸이든 아 들이든 낳아 놓고 잘 길러, 장성한 다음에 여생을 의지하고 살리라는 조그만 소망이었다. 뜻밖에도 태중의 아기는 보통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어, 임신한 지 삼 년 육 개월이 되어서야 비 로소 세상에 나왔다. 뿐만 아니라 갓 태어난 아기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키가 겨우 대여섯 치에 온몸은 새하얗고 길다란 털로 뒤덮여 도무지 사람의 형상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몰골이었다. 산모는 아기를 보자마자 당장에 까무라치고 말았다. 게다가 산후 조섭도 제대로 못한 까닭에 얼 마 후 다시 깨어나기는 했으나 사흘째 되던 날 기어코 세상을 떠났다. 처녀의 아버지와 계모는 핏덩이를 보고서 아연실색, 요괴의 정혈(精血)이 태어났다고 아우성쳤 다. 그리고 산모가 죽던 그날로 하인 둘에게 핏덩이를 안아다 산 채로 파묻어 버리라고 분부했다. 그 핏덩이가 바로 지금의 장령자였다. 어린 장령자는 흙 속에 파묻혀 이레 낮 이레 밤을 지냈다. 그러나 천성이 장령산 청년의 뛰어난 정기를 이어받은 터라서 죽기는 고사하고 이레째 되던 날 도리어 땅 속을 뚫고 바깥 세상으로 나 왔다. 어린 것은 무덤 천지를 헤집고 기어다니면서 마구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새로운 선가(仙 家)의 인연을 가져다 주었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청해파(靑海派)의 비조(鼻祖)가 되는 강진인(姜眞人)이 그곳을 지나치다가 무 덤 사이에서 어린애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는 아기를 구해 가지고 챠이다무 하반으로 돌아갔다. 강진인은 어린 제자를 얻었다. 아들처럼 기르면서 자신이 필생 닦은 도학을 전수했다. 장령자에게 있어서 강진인은 생명의 은인이자 스승이요, 아버지였다. 그 무렵 청해파 문하제자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강진인의 도통(道統)을 능히 이어받을 만한 인 물은 하나도 없었다. 스승은 자신이 비승할 시기가 임박했음에도 의발(衣鉢)을 전수할 제자를 얻 지 못하자 청해파의 장래가 몹시 근심스러웠다. 이런 상황에 우연히도 어린 장령자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장령자의 근골이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하고 몹시 기꺼워 여행길도 포기하고 챠이다무 하반으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어린 것이 장 성할 때까지 자신의 비승 시기를 이십 년씩이나 그르쳐 가면서 기르고 가르쳤다. 그리고는 청년 장령자에게 의발을 전수했다. 강진인은 심원(心願)을 이루고 비승하기 직전 장령자를 따로 불러들여 당부했다. 비록 근골과 천 품은 뛰어나나 아깝게도 아비의 호색(好色)을 전해 받아서 업원(業寃)이 끊기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 때문에, 고심참담하여 이룩한 공덕을 망칠 것이니 부디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지 말고 매사에 신중하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장하고 있던 도법을 남김없이 전수해 준 다음 마침 내 원적에 들어갔다. 청해파의 도통을 계승한 장령자는 그로부터 스승이 남긴 말씀대로 일체의 언행을 삼가고 특히 여색에 대하여는 더욱 몸을 사렸다. 청해 문하제자들 역시 엄격한 계율 아래 장령자를 섬겼다. 이렇듯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장령자는 챠이다무 강변을 노닐다가 우연하게 어린 계 집아이를 발견했다. 집 안은 늘 끼닛거리도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모양인데, 어린 것은 찌들지 않 고 구김살없이 귀여웠다. 나이는 겨우 서너 살, 토번족(吐番族) 핏줄을 타고났으면서도 아주 곱다 란 색깔을 지닌 아이였다. 장령자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이끌려 계집아이와 친해졌다. 그로부터 틈틈이 그 집에 돈과 쌀, 양식거리를 대어 주고 찾아갔다. 물론 평소 어린애를 귀여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 계집아이는 장령자를 볼 때마다 안아 달라고 졸라댔다. 어린 것은 제딴엔 좋은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장령자 역시 마다 않고 티없이 맑은 소녀를 벗삼아 강변을 거니는 것이 한 가지 즐거 움이 되어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년이 흘러갔다. 어린 계집아이도 자랄 대로 자라서 '친구'와 거의 키가 맞먹을 만큼 숙성한 처녀가 되었다. 청해 지방에서 서장 일대의 주민들은 장령자를 신명(神明)처럼 받들고 우러렀다. 그곳 풍습은 불 교승, 도인을 막론하고 아내를 맞아들이는 것이 금기(禁忌)가 아니었다. 처녀의 부모는 당연히 자 기네 딸을 장령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처녀도 내색은 안해도 부모의 뜻을 속으로 은근히 바라 고 있었다. 챠이다무 강변에서 빨래하는 그녀의 노래 가락에 '친구'를 사모하는 정이 그득 담겼 다. 장령자는 고집스럽게 처녀의 청혼을 거절했다. 나중에는 처녀의 집에 찾아가지도, 만나주지도 않 았다. 챠이다무 강변에서 빨래하던 처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화창하게 울려퍼지던 사랑의 노래 소리도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처녀는 상사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 던 것이다. 그녀가 땅에 묻힌 지 사흘째 되던 날, 처녀의 무덤 앞에는 십칠팔 세쯤 되어 보이는 목동 하나 가 목에 칼을 꽂고 죽어 있었다. 그 무렵 장령자는 처녀와 그 집안의 끈덕진 구혼에 얽매이기가 싫어서 바깥 세상으로 나와 운유 (雲遊)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돌아와서 두 젊은 남녀의 죽음을 들었다. 처녀는 자기를 사모하 던 끝에 병들어 죽었고, 목동은 처녀를 짝사랑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두 남녀는 제각 기 다른 상대를 사랑하고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순애(殉愛)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장령자가 돌아왔을 때는 그들이 죽은 지 두 달도 넘었으므로 시신은 벌써 썩을 대로 썩었다. 장 령자는 두 남녀를 살려보고 싶었으나 육신이 부패했으니 반혼회생(返魂回生)을 써도 소용없는 짓 이었다. "... 나는 그 사건을 가슴 속에 묻은 채 수십 년 동안 애처로와했소. 처녀와 목동의 죽음은 내 마 음 속 깊이 응어리져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다오... 얼마 전, 나는 이곳 선하령에서 여러 가지 성형영약(成形靈藥)이 출현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걸 캐려고 일부러 찾아왔소. 그런데 그 영약들은 이미 신통력을 얻어 사람의 기척에도 여간 민감한 게 아니었소. 내 솜씨를 가지고도 쉽사리 발견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나도 손 털고 물러갈 수야 없는 일이라, 아예 이 석굴에 자리잡 고 앉아서 날마다 원신(元身)을 내보내 수색하는 중이었소. 그러던 어제 저녁, 뜻밖에도 그대가 여기까지 쫓아온 거요. 이 굴 속에 뛰어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대가 말썽없이 나가주 기를 바랐소만, 그대는 물정도 모르고 기어이 내 몸뚱이를 건드리고 원신까지 해치려 들었던 거 요. 그대의 검술 솜씨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소. 아마 세상에 위명을 떨치는 <삼선 이로(三仙二老)>, <일자칠진(一子七眞)>도 눈에 차지 않는 양 겁도 없이 소란을 부리더군. 그 < 일자>가 바로 나 장령자란 말이오. 하기야 이 장령자의 몰골이 하도 괴상망칙스럽게 생겨먹은 데 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난쟁이가 앉아 있었으니, 그대 역시 몰라보는 게 당연한 일이지... 처음에 그 대가 내 몸을 건드릴 때, 그쯤 해서 경고를 보내 깨우쳐 주려 했으나, 뜻밖에도 그대는 앞서 풀 속의 독사와 구렁이를 베어 죽였을 때 그 칼날에 천지교태(天地交泰)의 음기(淫氣)가 묻어 더럽혀 진 것을 몰랐소. 그대는 물론이고 내 원신이 비검을 빼앗던 그 순간에 나마저도 음기에 오염되고 말았던 것이오.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자제력을 잃었소. 그리고 이 엄청난 짓을 저지르게 된 거요.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기왕지사 엎질러진 물, 지금에 와서 그대가 자결한다고 해서 되돌이킬 수 도 없는 일, 공연한 짓일랑 하지 말기 바라오. 내 생각 같아선 인공사태의 서찰에 쓰인 대로 처신 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 내 힘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서슴지 말고 연락하시오. 내 반드시 힘껏 도와주겠소." 장령자의 간곡한 권유가 아니더라도 웅만랑은 벌써부터 죽을 생각이 없어졌다. 인위적으로 저지 른 게 아니라 야릇한 운명이 그렇게 주어진 것을 어쩌겠는가? 그녀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몸은 이미 잃어버렸다. 운명의 힘으로 엎질러진 물을 어찌 되담으랴?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 게 해야 좋을꼬?... 장령자, 이분은 도행이 높고 심후한 인물이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이분에게 시집이나 갈까? 처녀가 정조를 잃고 남들한테 업신여김을 당하기보다는 훨씬 낫지!' 생각이 예까지 미치자, 웅만랑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붉어졌다. 그렇다고 면전에서 염치좋 게 입벌려 말할 수도 없다. 어쩔줄 모르고 머뭇거리기만 하는데, 장령자 역시 허둥대기 시작했다. 벌써 그도 웅만랑의 속마 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거 큰탈났구나! 어쩌다가 실수는 저질렀는데 그렇다고 장령자가 이 처녀한테 일생을 얽매이 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가만 있거라... 어떻게 해서든 이 난관에서 빠져나가야겠다.' 장령자는 궁여지책으로 꾀를 하나 짜냈다. "웅소저, 이거 한 알 드시오." 웅만랑은 저도 모르게 장령자가 주는 단약을 받았다. 그것은 좌망단(坐忘丹)이었다. 웅만랑이 약 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장령자는 암암리에 주문을 외우고 술법을 걸었다. 웅만랑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자꾸만 졸음이 온다. 남자에게 마음을 주어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전과 같은 불안감마저 일지 않는다. 그녀는 잠들듯이 스르르 땅바닥에 누워 정신을 잃었다. 장령자는 그녀를 안아다 반석 위에 뉘고는 그 길로 떠나버렸다. 좌망단을 먹은 후, 웅만랑은 깊이 잠들었다. 온갖 풍파도 모두 잊고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편 안한 잠을 잤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오후가 훨씬 지나고 장령자 또한 천리 만리로 뺑소 니쳐서 흔적조차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것 봐라. 이상한걸? 내가 언제 이 동굴 속에 들어와 잠들었을까? 사부님의 서찰은 또 왜 꺼 내들고 있지? 정말 이상하구나.' 좌망단, 그것은 웅만랑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독사와 구렁이를 베어 죽인 이후부터 어제 오늘 사 이에 일어났던 일은 깡그리 망각의 바다로 빠뜨린 것이다. '... 그래, 아까 뱀을 죽이고 구렁이도 죽이고 나서 몹시도 졸리웠지? 한데 어느 틈에 이 동굴까 지 들어와서 잠든 거야?'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 없다. 몸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다. 반석 위에 걸터앉아 손 안의 서찰을 뒤적거렸다. 바로 오늘이 뜯어 보는 날이다. 반가운 마음에 펼쳐 읽었지만 스승의 글월 내 용은 요령부득,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장령자란 누굴까? 나하고 그 사람이 업원을 맺고 있다면 어째서 이 편지를 뜯어 보기 전에 만 나지 못했을까? 내가 그 겁난을 벌써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제 그 위씨(魏氏) 성을 가진 사람만 피하면 시집도 안 가고 도술을 익히게 되겠구나!' 웅만랑은 그걸 생각하니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자기 몸에 이미 남자의 손길이 스친 것도 전혀 모르고 바닥에 내려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리고는 동굴 밖으로 나와 이제부터 갈 길을 찾았다. 정호봉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볍고도 상쾌하다. 숲 속을 벗어나오자 그리 멀지 않은 풀섶에 구렁이와 독사를 죽인 곳이 보였다. 그녀는 아까 본 광경이 기억에 떠올라 새삼 눈살을 찌푸렸다. 문득 풀 속에서 또 무엇인가 번뜩이는 게 보였다. '웬 놈의 괴물이 또 숨어 있을까?' 장검을 빼들고 십여 보쯤 헤쳐나갔을 때였다. 갑자기 시커먼 놈이 펄쩍 뛰어나오더니 '우와앙!' 하고 괴성을 지른다. "이크!" 웅만랑도 놀랐다. 즉시 공격태세를 갖추고서 이제 갓 나타난 괴물을 노려보았다. 온몸이 칠흑처 럼 시커멓다.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는 했으나 키가 겨우 한 자 정도밖에 안 되고 양쪽 어깨에는 벽록색(碧綠色) 이파리 두 개가 너울거린다. 괴물은 그녀를 보자마자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했 다. '이것 봐라, 괴상한 놈인걸?' 웅만랑은 호기심에서 그 뒤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풀섶에서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렸 다. 발길을 멈추고 두리번거리자 부시럭 소리를 낸 것은 자기가 분명 목을 쳐 날린 구렁이였다. 그 거대한 구렁이는 목이 붙어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독사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진흙바닥에 길다 란 흔적만 뚜렷이 남기고 보이지 않는다. 구렁이는 아무리 커도 사람을 해치지 않으리라 싶어, 웅만랑은 독사의 종적을 찾기 시작했다. 그 런 놈은 절대로 살려 두어선 안 된다. 조심스럽게 풀섶을 뒤적거리다가 그녀는 문득 전에 스승이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 깊은 산중에는 늘 육지(肉芝)나 하수오(何首烏) 같은 선초가 자라고 있단다. 오래 해묵은 놈 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서 나다니기도 하지. 그것을 얻으면 장생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방금 달아난 놈이 바로 그 성형육지란 말인가? 목잘린 뱀과 구렁이도 그놈의 영기에 쐬여서 기사회생(起死回生)을 한 것이다. 그녀의 눈길이 얼른 바뀌었다. 시커먼 괴물의 도주방향 을 쫓는 것이다. 뱀이고 구렁이고 죽든 살든 이미 관심 밖에 있었다. '저기다!' 웅만랑의 입이 딱 벌어졌다. 다행히도 그놈은 잽싸기는 하지만 다리가 짧아서 아직껏 멀리 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버려 둘 수 없다. 웅만랑은 기세 사납게 뒤쫓기 시작했다. 산비탈을 두 개나 넘어서야 비로소 피차간에 간격이 바 짝 좁혀졌다. 시커먼 놈은 흘낏 뒤돌아 보고서 그녀가 쫓아오자 더욱 속력을 냈다. 입으로 '찌익, 찌익!' 비명 까지 질러가며 펄펄 나는 듯이 달렸다. 바위투성이의 비탈을 또 넘고 났더니 무성한 풀밭이 나타 났다. 허리까지 찰 정도로 우거진 수풀에 다다르자, 그놈은 수풀 속으로 파고들어가 자취를 감추 었다. 웅만랑도 뒤미처 뛰어들었다. 가만 보니 다른 데 풀밭은 모두 누렇게 시들었는데, 유난히도 이곳 은 늦가을답지 않게 새파랗고 무성하다. 절기도 모르는 듯, 풀잎 하나 하나 모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그렇다면 이 풀밭이 바로 영약들이 자라는 곳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시커먼 놈이 뛰어들어간 장소를 어림잡아 뒤져내기 시작했다. 싱그러운 풀내음을 맡으면 서 몇 군데 마구 헤치고 나자, 문득 풀밭 속에서 둘레 석 자 정도 됨직한 공터가 나타났다. 거기 에는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고 한 가운데 영지(靈芝)처럼 생긴 흑초(黑草) 한 그루가 우뚝 뿌리 박은 채 반들반들 검정빛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여기 있구나!" 웅만랑은 기쁨에 겨워서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고함을 지르자마자 바로 그 검정 빛 영지 곁에서 새파란 풀 한 포기가 스르르 땅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뒤늦게야 그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덮쳐 잡았으나 그녀의 손아귀에는 겨우 비취색 이파리 반쪽만 찢겨져 들렸을 뿐이다. 그 나머지 풀포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땅 속으로 형체를 감추고 말았다. 웅만랑은 아쉬운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손에 들린 반쪽 잎만 하릴없이 내려다보았다. 윤기가 반 들반들 흐르고 연꽃잎처럼 머리쪽이 커다란 게 아래로 뻗으면서 작아진 형상이 정말 볼수록 탐스 러운 비취 빛깔을 나타내고 있다. 이름도 모르지만 스스로 변화하여 자취를 감추는 것으로 보아 선초임에 틀림없다. '공연히 호들갑을 떨었어. 미쳤다구 혼자서 소리를 지르다니. 놀라게 하지만 않았어도 놓치지 않 았을 거 아냐?' 그녀는 잎새를 품속에 간직하다가 얼핏 시커먼 영지를 쳐다보았다. 반갑게도 그놈은 숨어버리지 않고 여전히 거기에 있다. 이번에도 놓칠세라 살금살금 다가가서 한 손으로 뿌리쪽 줄기를 덥석 움켜잡은 다음, 한손으로는 보검을 뽑았다. 예리한 칼날에 혹시 다칠까 보아 칼집을 가지고 뿌리 주변의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서너 자 남짓을 파들어 가니 조그만 사람의 머리통 같은 것이 점점 나타났다. 웅만랑의 손은 더 욱 조심스러워진다. 이윽고 한참만에야 전신이 드러났다. 과연 그 검정빛 영지의 뿌리에는 자그만 시람이 달려 있었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또렷한 것이 여느 사람의 형체와 조금도 다를 바 없 다. 그러나 빛깔이 초록색인 것을 보아 먼저 도망쳤던 시커먼 놈은 아닌 듯싶었다. '아냐, 내 눈이 빛깔을 잘못 보았을 거야. 얼결에 멀찌감치서 보았으니까.' 웅만랑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영약을 손에 넣었으니 좋아서 껑충껑충 뛰고 싶을 지 경인데 빛깔 따위가 무슨 대수랴? 영지(靈芝)의 길이는 다섯 자 가량, 윗줄기와 가지는 검정색이 고 둥치 아래 뿌리는 초록색이라 미끈한 것이 아주 멋지게 생겼다. 한창 정신을 팔고서 들여다보는 참이었다. 느닷없이 등 뒤에서 '휘리릭, 휘리릭!'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휘파람을 길게 부는 소리와 같았다. 무엇인가 싶어 흘낏 돌아보니 뒤편 풀 섶이 파도치듯 '쏴아!' 하고 일렁거린다. 무심결에 던졌던 그녀의 눈길이 한 군데 꽂혀서 딱 멎고 말았다. 가느다란 붉은 빛줄기, 그 빛줄 기는 머리 위에 새카만 물체를 태우고서 쏜살같이 풀섶 위로 미끄러지며 그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제1권 끝> 촉산기협(2부) 2 삼십 년 애증 生死故人情更堪早歲 恩仇忍見鴛鴦同幷命 蒼茫高世感爲了前因 魔障甘聯鯉鯖不羨仙 "아뿔싸!" 붉은 빛줄기와 그 머리에 올라탄 시커먼 물체, 그것을 보는 순간 웅만랑(熊曼娘)은 경악성을 지 르고 말았다. 다행히도 보검은 수중에 있는지라 황급하게 칼집을 뿌리치듯 뽑아냈다. 검신(劍身)이 번쩍하고 칼집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와 동시에 붉은 빛줄기도 웅만랑의 머리 위까지 닥쳐왔다. 그녀는 지체없이 용수철 튕기듯 몸을 솟구쳐 수평으로 뻗어나가면서 도약의 기세를 그대로 몰아 수중의 보검을 후려쳤다. 싸느란 칼빛이 가을 햇빛 아래 번뜩이며 그놈의 머리부분 일곱 치 되는 곳을 휘감아 지나쳤다. 철썩! 밥사발 만한 뱀의 머리통이 썽둥 끊겨 허공으로 이 장 가웃이나 솟구쳐 구른다. 쏴아 피보라와 함께 짙은 비린내 바람이 확 끼쳤다. 모가지 떨어진 몸뚱이에서 붉은 비늘이 햇빛 아 래 눈부시도록 번뜩이며 그놈은 화룡(火龍)처럼 웅만랑의 정수리 위를 스치고 수십 장 거리를 날 아가서야 비로소 땅에 떨어졌다. 애당초 만랑이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았을 때 뱀의 머리에 걸터타고 있던 놈은 바로 자신을 여기까지 추격해 오도록 만든 시커먼 괴물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제 모가지를 쳐날리고 다시 보았을 때는 어느 틈에 사라졌는지 그놈은 온데간데 없었다. 한숨을 돌리고 나서 그녀는 자기를 습격한 뱀의 시체를 차분히 살펴보았다. '바로 그놈이로구나!' 만랑은 몸서리를 쳤다. 이제 갓 잘리운 머리통의 상처 부위 아래 금이 그어지듯 새로 접속된 상 흔(傷痕)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바로 구렁이와 얼크러져 교접을 벌이다가 자신의 칼날에 동강났 던 그놈이었다. 머리에 뿔이 돋고 번들번들 붉은 비늘로 뒤 덮인 놈, 이런 독사 종류는 그 독이 비할 데 없이 무섭다. 언제 또 살아나서 뭇 생령을 해치게 될지 모른다. 먼젓번의 그놈이든 아니 든 따져볼 필요도 없다. 만랑은 칼을 들어 우선 머리와 몸통을 네 토막으로 쳐낸 다음, 다시 조각 조각 잘게 썰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 버리고서야 칼질을 멈추었다. '이젠 됐구나. 이 정도로 칼탕을 쳐놓았으니까 제깐 놈이 날고 기는 재주를 가졌더라도 다시는 붙지 못할 거다.' 문득 손바닥에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독사의 피라도 묻었는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 다. '이런, 잘못 다쳤구나!... 이걸 어째?' 그러나 끈적거리는 액체는 뱀의 피가 아니었다. 이제껏 한 손에 들고 있던 성형흑지(成形黑芝)가 언제 다쳤는지 한쪽 팔뚝이 부러져서 말간 벽록색(碧綠色)의 혈장(血奬)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다. 만랑은 영약을 버리는 게 아까와서 냉큼 흑지의 상처 끝에 입을 대고 빨아먹기 시작했다. 입 속 에 달콤하고도 톡 쏘는 듯한 향기가 그득 스몄다. 맛이 정말 기막히게 좋은지라 그녀는 계속 빨 아먹으려고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양쪽 귓속에서 '위잉' 하고 귀울음이 울리더니 머리 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너무 많이 마셨구나 싶어 입을 떼는 순간 속이 울컥 뒤집히면서 구역질이 났다. 두 눈에서는 번쩍번쩍 별똥이 날아다녔다. '내가 왜 그럴까? 으흑!' 만랑은 두 다리에 맥이 탁 풀렸다. 머릿속이 어찔어찔 천지가 빙그르 맴을 돌았다. 그녀는 더 이 상 버텨 서 있지 못하고 털썩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기 몸이 낯선 동굴 속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침상 위 포근한 이부자리 속에서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편안하게 누워 있는 것이다. 침상 곁 가까이에서 무언가 열심히 손놀림을 하는 사냥꾼 차림의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은 나이도 지긋한 노인인데, 흙으로 빚어 쌓은 화덕가에 앉아서 너댓 자 길이나 됨직한 담뱃대를 뻐끔거리며 이따금씩 마른 나뭇가지를 집어 화덕불 속에 넣고 있었다. 얼굴을 온통 뒤 덮다시피 무성하게 수염을 기르고 눈빛은 형형한 것이 여간 굳세어 보이는 인상이 아니었다. 체 구 또한 남다르게 우람했다. 그 곁의 젊은이도 마찬가지, 호랑이 등판에 곰처럼 억센 허리, 옷 차림새는 사냥꾼이기는 해도 일신에서는 발랄한 영기(英氣)가 넘쳐흘렀다. 쭈그려 앉은 그 앞에는 황정(黃精) 토란 따위 먹을 거리가 쌓였고, 젊은이는 그것을 집어서 작은 손칼로 쉴새없이 깎아내고 있었다. 사면 벽에는 호랑이, 포범, 늑대, 이리의 가죽과 창, 칼, 활, 쇠뇌 따위 병기들이 그득 걸려 있었 다. '내가 어떻게 이런 델 들어와 있을까? 오늘은 정말 이상한 일만 벌어지고 있네.' 낯선 남정네들 앞에서 퍼져 누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러나 몸을 일으킨다는 것은 마음뿐, 갑자기 전신이 찢겨져 나갈 듯한 아픔 때문에 그녀는 도로 까무러칠 뻔했다. 두 팔 두 다리에 힘이라곤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고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 할 지경이었다. 침상 위에서 내려서기는커녕 몸뚱이조차 추스를 기력도 없는 것이다. 그녀가 침상에서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젊은 사냥꾼이 흘깃 돌아다보았다. 늙은 사냥꾼이 손에 든 나뭇가지를 마저 불 속에 던져넣고서 부시시 일어나 침상 곁으로 다가왔 다. "아가씨, 움직이지 마시오. 아가씨는 중독을 당했소. 하늘이 도와서 그랬는가 모르지만, 당신 내 공력이 사뭇 튼튼해서 목숨을 건진 거요. 게다가 왕모초(王母草) 반 잎도 가지고 있더군. 때마침 내 아들이 사냥하러 그곳을 지나가다 발견하고 이리로 업어왔으니까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소. 내가 당신의 그 왕모초를 써서 겨우 목숨을 구해놓기는 했소만, 지금 당신 상태는 원기가 크게 상해 있소. 아마 적어도 서너 달은 좋이 정양해야 발을 땅에 디딜 수 있으리다. 완쾌되려면 아무래도 반 년 이상은 더 걸리겠지... 내 마누라더러 약초를 찾아보라고 내보냈으니까, 재수가 좋 아서 그 왕모초를 두어 잎 더 얻는다면 낫는 날짜도 좀더 빨라질 게요.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 말 고 안정해야만 하오. 며칠 지나면 목청이 트일 테니, 그때 가서 말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오." 젊은이 역시 다가와서 노인 곁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더니 한 마디 끼어들었다. "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가씨가 답답해서 되겠어요? 대충 우리집 내력이라도 밝혀줘야지 안심하고 쉴 수 있을 겁니다요. 아가씨, 아무 걱정 마시오. 우리는 본래 사천지방 사람인데 무슨 일이 좀 생겨서 나하고 부모님, 이렇게 세 식구가 타향으로 쫓겨나왔소. 아버님은 여러 가지 약초 를 배합해서 좋은 약을 만드시기 때문에 이곳 선하령에 영약이 많다는 걸 아시는지라 채집하러 여기까지 온 거요. 나야 워낙 사냥을 좋아하니까, 어제도 선하령 고개 앞까지 사냥감을 쫓아나갔 는데, 거기서 홍각사(紅角蛇) 대가리를 발견했소. 그 정도로 무서운 독사를 처치한 사람이라면 필 시 재주가 대단하리라 싶어 그 흔적을 따라갔더니 또 몸뚱이가 토막토막 짓이겨진 놈의 몸마저 보이더군요. 주변을 샅샅이 훑어봤지요. 얼마 안 가니 땅바닥에 아가씨가 쓰러져 있었소. 손에는 선인근(仙人菫) 한 뿌리하고 왕모초 반 잎을 들고서 죽어 있더란 말이오. 내 본래 약초에 대해선 일자무식이지만 아가씨의 보검은 알아보았소. 범상한 칼이 아닙디다. 그래서 그 뱀도 아가씨가 쳐 죽였고, 또 무서운 뱀독에 중독된 거라고 생각했지요. 어쩌면 연약한 여자가 그렇게 용감하고 재 간이 놀라운지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오. 내딴에는 이대로 짐승 밥을 만들어서야 어디 쓰겠는가 싶어, 어디 양지바른 곳에 매장이나 해줄 생각으로 아가씨의 몸을 뒤적이다 보니 가슴 에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지 않겠소? 그만하면 아버님의 영약으로 기사회생시킬 수 있으리란 판 단이 서길래 부랴부랴 들쳐업고 집에 온 거요. 아버님 말씀이, 아가씨는 독사의 독에 당한 게 아 니라 그 선인근을 영약인 줄로 잘못 알고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소. 선인근은 영약처럼 그럴 듯 하게 생졌지만 사실 말도 못하게 무서운 독초라오. 천만 다행히 워낙 아가씨의 내공 근기도 매우 튼튼하고 또 천 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왕모초 반 잎을 가지고 계신 덕분에 꼼짝없이 죽을 목숨 이 살아난 거요. 아버님은 우선 급한 대로 왕모초를 먹이고, 또 비장해 두셨던 영약으로 아가씨 숨길을 돌려놓으셨는데, 곁들여 쓸 약재가 모자라서 어머님더러 찾아보라고 보내셨소. 어머님은 뒷산 고개쪽으로 가셨는데 아직도 안 돌아오시는구먼... 우리 부자는 비록 약초나 캐고 사냥질이 나 하는 사람이지만 절대로 상놈 출신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아가씨 댁이 근처 가까운 곳 이라면 어머님이 돌아오셔서 조제되는 대로 두 번째 약을 드시고 며칠 푹 쉬었다가 차도가 있거 든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소. 댁이 아주 먼 곳에 있다면 하는 수 없이 우리집에서 완쾌될 때까지 계셔야 할 거요. 아가씨의 입장에선 창졸지간에 당한 일이고, 또 우리와 평생 초면이라서 우리집 내력을 궁금해 하실 것 같아 실례인 줄 알면서도 미리 말하는 겁니다. 아버님 말씀이 절대 안정 하라고 하셨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아직 위험한 고비를 넘기지 못한 상황에서 자칫하면 악화될지도 모릅니다. 삼가고 조심하는 만큼 회복도 빠를 것이오." 만랑은 그 말을 듣고서 비로소 자신이 겪었던 위험을 되새길 수가 있었다. 마음이 놓이니 자기 가 애지중지하는 보검의 행방에 또 신경이 쓰였다. 청년은 눈치빠르게 벽에 걸린 그녀의 보검을 떼어가지고 한 번 들어보인 다음 제자리에 다시 걸 었다. '그렇구나, 칼도 잃지 않았어!' 심신이 허약해진 환자가 너무 신경을 썼는지, 갑작스레 가슴 속이 울렁거리면서 눈에 별떨기가 어른거리고 머리통은 터져나갈 듯이 아파왔다. 그녀는 도로 눈을 감았다. 사냥꾼 부자의 말은 진 지하고도 성실로 가득찼다. 행동거지 또한 단정하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남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몇 마디나마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 었지만 숨결마저 실낱같이 가늘어져 목구멍에서 맴돌뿐 단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기 병 이 위중하다는 부자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이다. 잠시 눈 뜨고 겨우 고개만 보일 듯 말 듯 끄덕 여 감사의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는 다시 두 눈을 내리감은 채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 했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또 다시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나고 보니 누군가 자 기 몸뚱이를 부축해 안고 있었다. 바깥은 벌써 저물었는지 깜깜한데, 곁에는 아까 얘기를 들려주 던 그 젊은 사냥꾼이 횃불을 처든 채 또 한 손으로 옹기 단지를 들고 서있었다. 만랑의 눈길이 자신을 부축해 안은 사람에게 꽂혔다. 은빛으로 빛나는 백발의 노파가 자기 머리 통을 받치고서 나무숟가락으로 한 모금씩 약을 떠먹이는 중이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 노파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정말로 자상스럽고도 환한 웃음이었다. "아가씨, 이제 깨어나셨군! 세상에 몹쓸 짐승을 처치하다가 도리어 크게 다치고 말았어." 노파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이불 속으로 들어오더니 아랫배를 더듬었다. "이크, 일 좀 보셔야겠구만!" 그 말을 듣자 청년은 들고 섰던 횃불을 바위 틈서리에 꽂더니 뜨거운 물 한 대야를 떠다놓고서 황급히 바깥으로 물러나갔다. 청년이 나가자마자, 만랑은 갑자기 창자가 끊어질 듯한 복통을 일으켰다. 오장육부가 뒤틀려 엉 킨 것처럼 무섭게 아팠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일이 급하게 됐다. 이불을 들치고 땅에 내려 서야겠는데, 몸뚱이는 물먹은 솜처럼 나른하기만 한 게 천근만근이었다.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낭패 중에 낭패였다. "아가씨, 서두를 것 없소. 모두 이 늙은이한테 맡기시구려." 노파가 일어나서는 바람막이 문짝부터 닫고 돌아와 만랑의 이불을 들추었디. 그리고 속옷을 다 리 아래까지 걷어내리더니 한 손으로 뒷덜미를 받치고 또 한 손으로 두 다리를 한꺼번에 들어 껴 안았다. 나이도 어지간한 노파가 무슨 힘으로 자기 몸뚱이를 안아올릴까 걱정했더니, 이건 숫제 고양이 새끼처럼 가볍게 번쩍 쳐드는 것이다. 노파가 자기 몸을 옹기 항아리 위에 닿을 듯 내려놓기가 무섭게 그녀는 참지 못하고 오장육부를 깡그리 쏟아버릴 기세로 속을 비웠다. 쏴르르! 오줌 똥이 한꺼번에 소리도 요란하게 쏟아져 나와 옹기 항아리를 그득 채웠다. 엄청나게 역겨운 냄새가 코를 확 찔렀다. 정말 웅만랑 자신도 참기 어려울 만큼 지독스런 악취였다. 그러나 배설이 끝나자 몸뚱이는 삽시간에 얹었던 바윗덩이를 내려놓은 것처럼 거뜬해지고 속이 후련해졌다. 뒤처리를 끝내자, 노파는 그녀를 다시 침상에 눕힌 다음 옷도 입히지 않은 채 이불만 덮어주고 는 옹기 항아리를 들고 나갔다. 만랑은 전신이 깃털처럼 가뿐한 느낌을 받으면서 스로르 눈을 감았다. 다 자란 처녀가 남의 손 에 대소변을 받게 했으니 부끄러운 마음 그지없는 것이다. 잠시 후 바깥에서 노파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미처 젊은이의 음성도 들렸다. "어머니, 저는 상관 말아요. 좀 있다가 땅바닥에 돗자리라도 펴고 잘 테니까요. 사람의 한 목숨 을 구하는 게 칠층 부도(浮屠)탑을 쌓기보다 더 낫다지 않아요?" 노파가 혀를 끌끌 찼다. "이런 녀석! 내가 늘 소식(素食)만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매일같이 날더러 사냥질을 해 살생을 하라고 졸라대던 녀석이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자비심을 베푸는고? 환자는 처녀 의 몸인 데다가 중독이 그토록 깊어서 네 아버지하고 너하고 도와줬으면 좋으련만 가까이 올 수 가 없구나. 게다가 효자녀석 하는 짓이 늙은 에미만 고생시킬 궁리나 하고... 흠흠!" "아녜요, 어머니! 그게 아니래두....." "그래, 그래. 이 에미가 널 한번 놀려본 소리란다. 나야 하루 한날같이 선행을 쌓아서 내세의 복 을 닦으려는 몸인데, 오늘 하늘이 내리신 이 좋은 기회를 어찌 마다하고 게을리 하겠느냐. 염려 놓아라... 환자도 이제 갓 속이 풀렸을 테고 또 탕약도 너무 끓어서, 식힐 겸 환자 숨이나 돌린 다 음 목욕을 시켜야겠다. 네 아버지 말씀이 저 처녀를 아침저녁으로 몇 차례씩 약도 먹이고 대소변 도 받아내고 목욕도 시키고 해서 이렇게 십 여일을 지나야 독이 씻겨내린다더구나. 그게 여간 번 거롭겠지." "모두 어머니 손에 달렸어요. 어머니가 구해주셔야만 하거든요. 아가씨 목욕을 씻기고 나서도 저 는 아무래도 남자니까 좋은 일로 돕는다지만 그 아가씨한테 공연히 딴 생각이나 품은 것처럼 의 심을 사기 꼭 알맞죠. 전 안 들어갈래요." "넌 어째 사내녀석이 그렇게 뒤끝이 흐리멍텅하냐? 무슨 일이든 자기가 시작했으면 제 손으로 끝장을 보아야지. 어쩌자고 에미한테 떠맡기는 거지? 얘야, 사람이 죽고 사는 판에 체면은 뭐고 또 의심은 누가 한단 말이냐? 우리 마음만 깨끗하면 누가 뭐래도 부끄러울 게 없다. 무엇이 무서 우냐? 여인네 처지로야 이것저것 가리고 따지고 해서 너 같은 남정네를 곁에 부를 수는 없는 노 릇이지. 그러나 저 처녀가 이 십여 일 동안 약을 먹은 후 하루가 다르게 허약해져서 대낮은 말할 것도 없고 밤중에라도 부축을 받고서 약을 먹어야 할 텐데, 이 어미 혼자서 그 시중을 다 감당하 란 말이냐?" 그러자 청년은 대꾸가 없었다. 노파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커다란 나무통을 옮겨다 놓고서 이불 속 처녀를 반짝 안아다가 그 통 속에 넣었다. 만랑은 약내음을 맡았다. 통 속에 끓인 약물이 그득 담긴 것이다. 이윽고 노파는 흥건해진 약 지 게미를 움켜서 발가숭이 처녀의 몸뚱이를 골고루 문질러 약기운이 배도록 한 다음, 다시 목욕시 키듯 통 속의 약물을 끼얹어 주었다. 만랑은 온몸이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릴 뿐, 힘이라곤 단 한 방울도 없었다. 그저 노파가 부축하고 문지르고 씻겨주는 대로 맡길 따름이었다. 그 일이 끝나자, 노파는 깨끗한 베수건으로 처녀의 몸을 말끔하게 닦아준 다음 침상에 안아다 뉘고서 이내 속옷 한 벌을 꺼내왔다. "아가씨 옷은 이제 못 입소. 이건 늙은이 누더기인데 좀 거북스럽더라도 입고 계시오." 만랑은 이불 위에 놓인 속옷을 내려다보았다. 올새는 거칠지만 깔끔한 것이 여느 농사꾼 아낙네 의 누더기가 아니다. 그녀의 눈길은 다시 노파에게로 향했다. 자애스러운 이마, 서글서글한 눈매, 이토록 노년인 데도 티끌만치 역겨운 내색도 없이 친딸을 돌보듯 지저분한 시중을 마다 않고 자 기에게 정성껏 대해주는 것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 외로운 고아가 되어 이날 이때껏 부모 형제의 도타운 사랑이라 곤 받아본 적도 없이 그저 반평생 엄한 스승의 문하에서 수련하고 천하를 횡행하다가 끝내는 이 외지고 궁벽한 산간벽지에 들어와 구사일생 목숨을 건지고 낯모를 사람들의 동정을 받자 만랑은 문득 자기 신세가 처량해졌다. 그렇게 느낄수록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옷을 입혀주는 노파의 손길이 더욱 따뜻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가슴 속이 찡하게 울리고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고 했다. '아아, 너무 부럽다. 이 얼마나 따사로운 가정이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아들, 셋 모두가 인정 넘치는 분들이다. 이런 가난 속에서도 의리와 인정을 잃지 않았다니, 정말 티없이 맑구나. 좀전에 모자가 주고받은 말로 보건대 젊은이도 언행이 떳떳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잘것 없는 살림살이, 짐승의 소굴 같은 데다 안식처를 꾸미고서도 구김살 하나 없다. 이런 분들한테 괴로움 을 끼치다니, 생각할수록 죄스럽구나. 내 몸이 다 낫는 날, 반드시 결초보은해서라도 보답을 하고 야 말리라.....' 그녀의 눈빛은 반들반들 윤기가 났다. 마음 속 가득한 고마움을 표시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 만 안타깝게도 한 마디 말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다. 노파에게 그녀의 진심이 통했는가!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를 쓸어내린다. "아가씨, 괴로와하지 마시오! 당신이 말은 안해도, 그 마음 우리가 다 안다우. 몸이 다 낫거든 하 고 싶은 얘기 다 할 수 있으니까 마찬가지 아니겠수? 우리네 집안이 가난하다고 보지 마시우. 사 실 말이지, 우린 이때껏 먹고 입을 것 가지고 걱정해 본 적 없었거든. 그저 남의 이목을 피해 사 느라 겉으로 궁상을 떠는 거라우." 이때 바깥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여보, 아가씨 독상이 매우 중하니 너무 피로하게 하지 마오. 잔소리도 그만 좀 하고 나오구려." 노파는 그 말에 당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웅만랑더러 마음에 둘 것 없다는 듯이 싱긋 웃어 보였다. 바깥 목소리는 그 늙은 사냥꾼의 것이었다. 말투로 보건대 노파더러 공연한 수다를 떨지 말라는 경고인 듯했다. 노파가 무심결에라도 자기네 행적을 누설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모양이다. 그렇다 면 이들 일가 셋은 평범한 사냥꾼 가족이 아닌 게 틀림없다. 웅만랑은 그것이 궁금했지만 입을 열 수가 없으니 어쩌랴? 은인들의 내력도 성명도 모른 채 그 저 들은 내용만을 가슴 속 깊이 새겨 놓기만 할 따름이다. 얼마쯤 있으려니까 젊은 아들이 무엇을 한 그릇 받쳐 들고 들어왔다. 노파가 쭈볏거리는 아들을 침상 곁으로 손짓해 불렀다. "다른 음식은 아가씨가 아직 못 먹어요. 이건 황정으로 쑨 죽인데 어디 좀 먹어봐요." 한 마디 건네고서 노파는 웅만랑의 머리를 받쳐 안더니 아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청년이 조심스 레 숟가락을 들고는 한 모금 한 모금씩 떠먹여 주기 시작했다. 혓바닥이 마비된 만랑은 주는 대로 먹으면서도 무슨 맛인지를 알 수 없었다. 노파 역시 환자에 게 많이 먹이지 않고 대여섯 술을 뜨자 이내 그치게 했다. "됐다, 가지고 나가거라!" 한밤중이 되자 웅만랑은 또 몇 차례 변을 보았다. 그때마다 모두 노파가 손수 부축하고 목욕을 시켜주었다. 환자는 미안하고 수치스럽기 그지없으나 옴쭉달싹도 못하는 몸이라 어쩔 도리가 없 었다. 이렇듯 정성어린 간호를 받으면서 칠팔 일이 지나갔다. 하루에 몇 차례씩 설사를 하느라 만랑의 기력은 빠질 대로 빠지고 허탈증에 시달렸다. 그저 실낱 같은 숨결만 겨우 붙어 있는 게 살아 있 다는 증거였다. 그것을 보고 늙은 사냥꾼은 설사약을 써서 선인근의 독소를 계속 흘려 내보내는 한편, 효력이 뛰어난 보약으로 열심히 환자의 기력을 북돋아 주었다. 만약 그런 조치가 없었다면 제아무리 만 랑의 내공력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탈진증세를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흐레째 되던 날 밤, 마침내 만랑의 설사가 그쳤다. 늙은 사냥꾼이 벙싯벙싯 웃으면서 웅만랑에게로 들어왔다. "아가씨, 축하하오! 오늘에야 겨우 큰 고비를 벗어난 셈이오." 만랑은 독초 선인근에 중독당한 이래 사냥꾼 일가의 분부대로 만 따를 뿐 이제껏 한 마디도 말 을 못해 보았다. 그런데 약을 마신 지 며칠 동안 엄청나게 설사를 한 뒤부터 몸은 비록 나날이 허약해졌으나 속은 그와 반대로 하루가 다르게 편안해졌다. 그전처럼 불덩이를 집어삼킨 듯 화끈 거리지도 않았고, 창자가 끊기는 아픔도 가셨다. 설사가 멎은 그날로부터 환자는 황정죽과 미음을 들기 시작 했고 완연히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오륙 일이 지나자 마비되었던 혀와 목청도 트여서 오랜만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 다. 사냥꾼 일가족 셋이 그동안 불철주야로 죽을 목숨을 살려낸 것을 생각하면 어찌 입에 발린 몇 마디로 그 은혜를 이루 다 갚으랴? 더구나 젊은 아들의 정성은 그녀의 회복에 안 미친 데가 없을 정도로 극진했다. 웅만랑의 감격이란 아무리 혀가 닳도록 지껄여도 모자랐다. 청년은 도리어 인사를 받을 때마다 몸둘 바를 모르고 얼굴이 붉어진 채 피해 나갔다. 만랑은 금시라도 일어날 것처럼 보였으나 정작 땅을 딛고 내려 선 것은 그로부터 다시 두 달이 지나서였다. 이때 사냥꾼 일가족에게 뜻밖의 불행이 찾아들었다. 어느날 노파가 땔감을 주으러 나갔다가 절 벽 아래로 실족해서 떨어진 것이다. 성에 양식거리를 사러갔던 아들이 돌아와 구출했을 때는 이 미 심장과 폐를 다쳐 엄청나게 출혈을 하고 났을 때라, 어느덧 소생할 가망조차 없어진 상태였다. 놀라움과 비통은 사냥꾼 부자의 것만이 아니었다. 노구(老軀)를 이끌고 불철주야 온갖 정성으로 자기를 살려낸 구명(求命)의 은인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자 만랑의 상심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제 겨우 몸을 추슬러서 어떻게 보은할까 생각하는 참인데 하늘은 그 기회마저 빼앗 아 버리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심한 처사냐? 재난은 그것으로만 그친 게 아니었다. 노파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늙은 사냥꾼은 요행으로라 도 사랑하는 아내를 살려볼 생각에서 아들에게 간호를 하도록 당부한 다음 병기를 찾아들고서 뛰 쳐나갔다. 하늘이 도와서 기사회생의 영약이라도 발견할 수만 있다면 평생 반려자의 목숨을 구해 내겠다는 일념에서였다. 늙은 사냥꾼이 산으로 올라간 후 청년과 만랑은 노파의 침상 곁에 꿇어앉아서 온갖 정성을 다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보살폈다. 그들의 간절한 소망은 오로지 늙은 사냥꾼이 천행으로 영약 선초를 찾아가지고 한시바삐 돌아오는 것뿐이었다. 무릎꿇고 앉은 만랑은 끊임없이 심원(心願)을 바치면서 신불(神佛)에게 빌고 또 빌었다. '오오, 신불이시여! 이 선한 목숨을 구해주소서. 이 웅만랑, 은혜를 갚지 못하여 천추의 한이 되 지 않도록 은인을 살려주소서! 제가 어찌하면 되오리까?' 만랑의 표정에서 그 간절한 기원을 읽었는가 노파는 빙그레 미소를 띠더니 그녀를 가까이 손짓 해 불렀다. "아가씨, 정말 너무도 마음씨가 곱구려. 내 아가씨 같은....." 이 말까지 하고서 노파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길은 자기 아들에게 돌린 채 깊이깊이 탄식을 내뱉았다. 그러나 마음 속 근심이 태산 같은 웅만랑은 노파의 한 마디 깊은 뜻을 전혀 헤 아리지 못했다. 한밤중이 되어서도 늙은 사냥꾼은 돌아올 줄 몰랐다. 이제나 저제나 영약 선초를 가지고 돌아오 기만 학수고대하던 모자(母子)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아들더러 아비를 찾아 나가보라고 몇 차례나 재촉했으나, 아들은 또 어머니의 상태가 걱정되는지라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 그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난처한 지경에 빠져서 어쩔 줄을 모로고 있 는 것이다. 노파는 아들이 말을 듣지 않자, 마침내 크게 역정을 냈다.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 네가 어미한테만 효경을 다하고 아비는 모른 척할 거냐? 좋다, 네가 정 녕 찾아나서지 않는다면 내 당장 머리를 부딪쳐 죽고야 말리라!" 만랑은 몹시 당황했다. 치명상을 입은 노파가 무섭게 역정을 내는 것을 보고서 웅만랑은 청년한 테 말했다. "여기 걱정일랑 마시고 나가보세요. 당신 어머님은 곧 저의 어머니이시니까, 제가 정성을 다해 모실 거예요." 그래도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던 청년은 어머니의 부릅뜬 눈초리에 맞닥뜨리고서야 마지못해 고 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기를 챙겨들고서는 만랑에게 귀엣말로 신신당부했다. "곁에서 모시고만 계십시오. 절대로 어머님 곁을 떠나면 안 됩니다. 집 바깥으로 단 한 발짝도 나서지 마십시오. 부탁합니다." 만랑은 아들이 어머니 용태를 너무 걱정한 나머지 그토록 당부를 했으려니 싶어 마음에 깊이 새 겨 듣지 않았다. 당부가 없더라도 그녀는 성심성의로 그리할 작정이었으니까. 젊은 사냥꾼이 어두운 바깥으로 나갔다. 암흑 속에 사라지는 그 등 뒤를 말없이 배웅하고 있자 니까 노파가 부른다. 만랑은 침상 곁으로 돌아왔다. 노파의 눈 속에 이상스럽게도 환희의 광채가 번뜩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겁이 더럭 났다. '저것은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회광반조(廻光返照)의 빛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노파의 말은 또렷했다. 아니 그보다 놀라운 것은 노파가 말한 내용이었다. "얘야, 너 방금 내 아들한테 한 말이 진정이냐? 정말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으냐?" 만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비로소 조금 전 노파의 한 마디가 깊은 뜻을 담고 있 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아가씨, 정말 너무도 마음씨가 곱구려. 내 만약 아가씨와 같은 .....' 그 다음에 잇지 못한 말은 '며느리...'였을 것이다. 만랑은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어쩌랴? 은혜가 태산 같은 이 노인네는 바야흐로 명재경각(命在 頃刻), 이제라도 생명의 불꽃이 스러질지 모른다. 노파의 눈길은 간절한 애원을 담은 채 자기 입 술에 매달려 있다. 어떻게 답변을 해야만 좋으냐? 만랑은 할 말을 못 찾고 망설였다. 이윽고 노파의 안색이 변하더니 탄식성과 함께 그녀의 입술 에서 눈길이 떨어졌다. 노파는 고개를 뚝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랑의 기색을 보고 마 음에 원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던 것이다. 한참이 지나 만랑은 겨우 입을 떼었다. "이 계집아이는 두 분 은인을 부모님으로 섬기겠습니다. 저를 슬하에 양녀로 거두어 주십시오." 이 무렵, 노파는 더욱 엄청난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숨소리가 헐떡헐떡 거칠어지고 안색도 백 지장처럼 새하얗게 바랬다. 만랑의 말을 듣더니 노파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내저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만랑에게 부 탁을 했다. "나가서 샘물을 좀 떠다주시겠소?" 샘물은 동굴 앞에 흐르고 있다. 매일같이 걷는 운동을 하느라 만랑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없이 표주박을 집어들고 이제 막 문간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노파의 침상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낌새가 이상해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흘낏 돌아다보니, 과연 노파는 어느 새 바닥에 내려서 있었다. 그녀의 벌벌 떨리는 손이 벽에 걸린 엽도(獵刀), 한 자루를 떼어잡는 순간이었다. 칼날은 막 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결하려는 것이다. "앗, 안 돼요!" 만랑은 혼비백산, 자신이 병후 허약한 몸이라는 사실도 잊고 단걸음에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허 겁지겁 두 손을 내뻗어 노파의 팔을 부여잡고서 칼부터 빼앗은 다음 어거지 힘으로 침상에다 부 축해 누였다. 그래도 칼 끝에 스쳤는지, 노파의 목덜미에서는 주르르 피가 배어나와 흘렀다. 병약한 웅만랑, 큰일을 해치우고서 헐떡헐떡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 속 고동은 두근두근 줄곧 멈추지 않았 다. 그나마 숨결이 붙어 있던 노파는 더욱 호흡이 약해졌다. 부릅뜬 두 눈망울도 광망(光芒)이 부옇 게 흐려진 채 한 마디 말도 없이 웅만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서 만랑은 노파를 위로했다. "참으세요. 어쩔려고 이러십니까?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는데, 어째서 먼저 끊으시려는 거 예요?" 그래도 노파는 응답이 없었다. 두 여인은 이제 서로 말 한 마디조차도 주고받지 않았다.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만랑은 초조 와 불안감을 억누르며 노파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갑자기 방 안의 정적을 깨뜨리고 '와당탕!' 문짝이 열렸다. 온통 피투성이 된 아들이 등에 반죽 음이 된 늙은 사냥꾼을 업고서 뛰쳐 들어왔다. "어머니!" 노파는 아들의 등에 업힌 남편을 조용히 바라보더니 벌써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두 어 번 끄덕였다. 늙은 사냥꾼은 머리와 몸뚱이에 몇 군데나 암기와 칼날을 맞은 상처가 있었다. 노파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아들을 향해 물었다. "이제 곧 죽겠구나. 그 사람마저....." 아들은 통분의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그것도 좋겠지. 셋 모두 깨끗이 가버린다면... 다만 그가 내 마음을 아직도 몰라주고 있으니 안 타깝구나. 내 진심도 모르고." 만랑은 모자간의 대화 내용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늙은 사냥꾼의 상처를 싸매어 주느라 손도 마음도 한창 바빴기 때문이다. 그걸 본 노파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 벽 구멍 속에 우리가 조제한 치료약이 있소. 우선 내 아들 상처부터 보아주시오. 저 사람이 나 나나 모두 살기는 아예 틀렸으니까." 만랑은 몹시도 이상스럽게 여겼다. 노파에게는 남편, 청년에게는 아버지가 될 터인데 이들 모자 가 늙은 사냥꾼을 대하는 태도는 한결같이 냉담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신에 중상 을 입고서 이불 위에 누운 사냥꾼도 불평은커녕 단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는 것이 더욱 이해가 안 되었다. 만랑의 처지는 사뭇 난처해졌다. 은인 세 사람이 모두가 중상을 입었거나 치명상을 당해 조만간 운명할 지경이라 도대체 어느 곳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녀는 노파의 말을 듣자 하는 수 없이 젊은이의 상처부터 치료하기로 작정했다. 이 무렵 아들은 아버지를 팽개쳐 두고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웅만랑이 약 을 발라주려 하자 그 손을 가로막았다. "부탁입니다. 저분부터 치료해 주시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파가 버럭 악을 썼다. "불효막심한 놈, 어미의 말을 거스르다니! 이 사람은 진작에 살 가망이 없는 것을 모르느냐? 어 쩌자고 쓸데없는 짓을 시키는 거냐? 어미의 분부다. 네 상처를 싸매고 나서 그 사람을 찾아오너 라! 내가 꼭 만나보아야겠다." 노파는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너무나 힘을 쓴 것이다. 뻣뻣이 일으켜 세웠던 고개가 뒤로 털썩 넘어갔다. 아들의 눈에 목덜미를 그은 상처가 뜨였다. "어머니, 그새 또 역정을 내셨군요? 제가 꼭 갔다 올 테니 염려마세요. 아까도 이리 모셔오려고 했지만, 그분은 막무가내로 거절하셨어요. 그냥 저 앞쪽 산비탈에서 돌아가시겠다고... 아버님도 중상을 입으신 터라, 하는 수 없이 우선 업고 돌아온 겁니다." 청년은 만랑이 상처를 치료해 주는 동안에도 변명 비슷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일어나서 이를 악 물고 다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얼마 시각이 안 지나, 청년은 다시 돌아왔다. 그의 등에는 도인 차림의 노인 한 사람이 업혀 있었다. 처참하게도 이마에 강표(鋼標) 한 자루가 박혀, 아직껏 죽지 는 않았으나 실낱 같은 숨결만 겨우 붙어 있었다. 당초 문에 들어설 때 그 늙은 도인은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듯 청년의 등에서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첫눈길에 노파와 늙은 사냥꾼이 모두 죽음에 임박한 모습을 보고서 낯빛 이 대번 하얗게 질렸다. 사냥꾼부부를 노려보는 한 쌍의 눈망울이 한동안 이글이글 쏘는 듯한 정 광(精光)을 뿜어내더니 이윽고 폐부가 터겨나갈 듯이 고함을 쳤다. "내가 잘못했구나!" 도인은 젊은이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털썩 굴러떨어졌다. 꿈틀꿈틀 침상 앞까지 기어가서는 한 손에 노파를 또 한 손에 늙은 사냥꾼을 움켜잡아 당기며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모두가 내 잘못이오! 내가 우리 세 사람을 모조리 해쳤구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돌이킬 방법 도 없소. 두 분, 나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오!" 노파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중어(仲漁), 이 일은 원래 오해 때문에 벌어진 거라오. 농담이 현실로 된 셈이지. 그대가 우리 두 사람을 원망하고 복수하겠다면 그래도 좋소. 하지만 그대의 아들에게는 독수들 쓰지 마시오. 저 애는 진실로 그대의 핏줄을 타고 났다오. 나하고 노대(老大)는 수십 년 동안 거짓부부로 행세 했을 따름이외다. 내가 죽는 마당에 그대를 속일 리가 있겠소. 저 애의 가슴을 한번 보시구려. 그 대와 똑같은지, 아니면....." "우와아!" 도인의 입에서 야수와도 같은 포효가 터져나왔다. 죽어가던 사람이 어디서 그런 신력(神力)을 끌 어냈을까? 마치 노루를 덮치는 호랑이처럼 기세사납게 청년을 향해 몸을 날리더니 '북!' 하고 앞 가슴 옷자락을 찢어발긴다. 뒤미처 자기 옷자락마저도 '뿌드득' 찢어냈다. 도인과 청년, 두 사람의 가슴에는 저마다 큼직한 혹이 한 개, 그 위에는 또 핏빛의 붉은 점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도인의 눈에서 쉴새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느덧 품속을 뒤져 가루약 한 봉지를 꺼내 청년에게 건네고는 손가락으로 똑똑히 웅만랑을 가리켰다. "어서 네 아내더러 물을 갖다 달래가지고 그 약을 먹어라! 하늘이 도와서 내 손속에 인정을 남 겼구나. 그렇지 않았더라면 너는 살아 남지 못했을 게다." 한탄하듯 말을 마치고서 그는 노파를 향해 돌아서더니 엄한 소리로 꾸짖었다. "왜 진작에 말을 안했소?" 노파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때 불 같은 당신 성미에 어디 내가 변명할 여지나 주셨소? 당장에 칼로 쳐죽이려 들었지. 나 는 임신한 몸이라 도망치지 않고선 별 방도가 없었다오. 우리 모자의 목숨이 한꺼번에 끊겨서야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이오? 당신 곁을 떠난 후로 천신만고 모진 고초를 겪은 나머지 갓 분만하기 직전에는 또 병까지 겹쳐들었소. 나는 어쩔 도리없이 노대(老大)에게 의탁해야만 했다오. 그때 우 리 두 사람은 세 가지 맹세를 정하고 명목상의 부부가 되었소. 그래서 지금껏 삼십 년 동안을 함 께 동침해 본 적이 없었지... 어느날 노대는 당신이 구양조사(歐陽祖師)의 문하에 들어가서 독약을 먹인 암기를 숱하게 단련해 가지고 우리 일기족을 몰살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소. 우리는 또 피 신할 수밖에... 뜻밖에도 당신은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 데도 여전히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었 을 줄이야... 오늘아침 나는 앞산 절벽 위에서 멀찌감치 올라오는 낯선 도인을 보았다오. 첫눈에 당신인 줄 알아챘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소. 뒤 미처 아들에게 업혀서 집에 돌아오기는 했는데, 노대는 내 상처가 막중한 걸 보고 정신을 잃은 틈에 슬그머니 빠져나갔소. 어디 영약 선초라도 찾아내어 이 구차한 목숨을 구해볼 생각에서였지. 나는 깨어나자마자 당신들 두 사람이 맞닥뜨려 분명코 양패구상(兩敗俱傷)을 당하리라 짐작했소. 또 당신이 노대를 추격해 봐야 쓸데없는 짓인 줄도 알았소. 혹시나 내 아들마저 당신의 독수에 당할까 무서워서 달아(達兒)를 당신네 싸움터로 보내지 않았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서 달아를 보냈던 거요. 당신네 두 사람의 시신이라도 찾아오라고. 결국 당신이 노대에게 치명상을 입혔을 줄이야... 중어, 생각나시오? 당초 우리 세 사람은 굳게 맹세를 했지. '같은 날 태어나지는 못했을망정, 오로지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고. 오늘 과연 그 맹세가 꼭 들어맞는구려!" 그녀는 예서 말을 끊고 이번에는 만랑을 가까이 불렀다. "내 아들이 아가씨 마음에 들지 않는 줄은 내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저 녀석은 지금 부골독도(腐 骨毒刀)에 맞았소. 제 아비가 깨어나서 해독약을 지어준다고 하더라도 서너 달 안에 완쾌될 가능 성은 없는 형편이라오. 아가씨, 부탁이오. 우리 모자가 그대를 구해드린 정분을 생각하셔서 결과 야 잘되든 못 되든 간에 꺼림칙하게 여기지 마시고 도와주시오. 여기 있는 우리 늙은 것 세 사람 이 죽거든 시체나 온전하게 파묻어 주시고, 내 아들을 돌보아 완쾌되거든 떠나주구려. 내 죽어서 구천지하(九天地下)에 가더라도 그 은덕을 잊지 않으리다." 만랑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더는 군말없이 당장에 응답을 하려는데, 노파는 이미 버티지 못하고 '쿨럭쿨럭' 헐떡거리면서 땀을 비오듯 흘리더니 갑자기 뒤로 벌렁 쓰러졌다. "어머니, 염려 마세요! 저 웅만랑은 분부대로....." 다음 순간, 노파는 스스로 실낱같이 붙어 있던 심맥(心脈)을 끊어버리고 침상 위에서 죽었다. "숙매(淑妹), 기다려요. 나도 같이 가리다!" 뒤미처 늙은 사냥꾼과 도인이 이구동성 약속이나 한 듯 소리쳤다. 도인은 자기 이마에 박힌 강 표를 잡아뽑더니 다시 목젖에 힘껏 찔러넣고 고꾸라졌다. 늙은 사냥꾼이 그 광경을 보더니 뒤늦 을세라 '이얍' 하고 대갈일성, 동굴 암벽에 부딪쳐 갔다. 팟! 그것으로 끝이 났다. 늙은 사냥꾼과 도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파를 따라 비명에 간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미처 달려가 막지도 못했는데 뒤이어 그 두 사람마저 동시에 거꾸러지자 청년은 피를 토하듯 비통한 절규를 터뜨리고서 당장에 까무라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만랑 혼자뿐이다. 비장하고도 처절을 극한 죽음들을 목격하면서도 그녀는 허둥 거리기만 했지, 누구 한 사람 제지 할 시간도 기력도 없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목석처럼 서 있던 그녀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인가 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도대 체 두서(頭緖)가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 먼저 산 사람부터 구해 놓고 보자.' 결심이 서자, 그녀는 즉시 젊은 사냥꾼의 손아귀에서 해독약을 꺼내다 물과 함께 먹였다. 그리고 침상 위에 부축해 눕혔다. 이어서 그녀는 도인의 품속을 뒤져 아직도 적지 않게 남아 있던 약 꾸 러미를 찾아냈다. 약봉지마다 겉에는 용법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약꾸러미를 한쪽 곁에 잘 정돈해 놓았다. 다음으로 만랑은 노파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일가족 세 사람 가운데서도 그녀에게 유독 두터운 정성으로 보살펴준 분이므로, 젊은이가 깨어나기 전에 은인의 시신을 깨끗이 목욕시켜서 옷을 갈 아입히고 싶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젊은이와 상의해서 매장해 드릴 작정이었다. 숨결이 멎은 지 벌써 한참 되었는 데도 노파의 두 눈은 여전히 감기지 않고 있었다. 두 눈망울 속에 가득하니 눈물이 고인 채. 만랑은 손으로 눈꺼풀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두 눈은 감기 지 않았다. 마치 만랑이 자기 아들을 버리고 떠날까 보아 눈을 감지 않으려는 듯했다. 만랑은 그 앞에 꿇어앉아 속으로 축원을 올렸다. '못난 이 딸, 은혜로우신 부모님께 은덕을 받았사오니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아드님의 병환을 회 복기키고서야 떠나오리다. 그렇게 안한다면 이 웅만랑, 어찌 인간이라 하오리까.' 그러나 묵도를 드리고 나서도 노파의 눈은 여전히 부릅뜬 채 감기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다. 만랑은 정성스레 노파의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나서 피투성이 옷을 갈아입혔 다. 한창 정신없이 손질을 하고 있는 참인데 맞은편 침상 위에저 버럭 악쓰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 아버지! 소자 위달은 가슴이 아파 죽겠어요." 느닷없는 호통소리에 만랑이 기급을 했다. 후딱 돌아다보니 침상에 누워 있는 젊은이가 울부짖 고 있었다. 젊은 사냥꾼은 정신이 들기는 했어도 온몸뚱이가 화끈화끈 불덩어리였다. 열에 들뜬 나머지 줄 곧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었다. 만랑은 애처로운 눈길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 심정을 어찌 이해하지 못하랴? 중상을 입은 몸에 단 하루 사이 연거푸 부모를 잃는 참변까지 당했으니 그 심사가 오죽 비통하랴 싶었다. 육 신의 상처에 마음의 병마저 겹쳐서 덧씌웠으니 하루이틀 가지고 나을 리 만무였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을까?... 한 방에 시신이 셋, 중환자가 하나다. 젊은이는 하루이틀에 깨어날 것 같지 않은데, 나 혼자 힘으로 어떻게 처리하나?... 그래도 하는 수 없지. 세 분을 안장(安葬)하 는 일은 며칠 더 기다려보다가 정 안 되면 내 손으로 처리할밖에.....' 만랑은 두 침상의 이불을 걷어다가 환자에게 덮어주고서 노파의 곁으로 돌아왔다. 헛소리에 놀 란 나머지 미처 못다한 일을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파의 두 눈은 여전히 부릅뜬 채 눈물이 글썽글썽 고여 있다. 마주친 눈길 속에 간절한 애원이 담겼다. 만랑은 도저히 그 죽은 이의 눈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 '찡' 하고 와닿는 것 이 있었다. '내가 당초 재난을 당했을 때는 말문이 열리지 않아 이분들의 성명도 묻지 못했었다. 그 후 점 차로 회복되자 줄곧 이들더러 은부(恩父), 은모(恩母)님, 은형(恩兄)이라고만 불렀지. 그동안에도 몇 차례나 성함을 물었으나 끝내 들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정체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어. 오늘에 야 비로소 아들의 헛소리를 듣고 이분들의 성씨가 위씨(魏氏)란 사실을 알게 되엇다. 그런데 사부 님은 서찰 속에 내가 위씨와 전세의 인연을 맺고 있노라고 말씀하셨지. 어쩌면 바로 그 위씨 집 안에 깊은 은혜를 입다니... 이제 두 노친네는 모두 세상을 떠나고 한 시람만 남아 중상을 입은 몸에 병까지 겹쳐 누웠구나. 이를 버리고 간다면 살아날 가망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함께 기식 (起食)을 하면서 돌보자니 하루이틀에 회복될 기미가 아닌데 외로운 남녀가 늘 한 데 어울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정말 쑥스러운 노릇이 아닌가... 병상의 이분은 몇 날 며칠을 어머니와 함께 불철 주야로 나를 간호해 주었지. 그 온정은 아직도 내 몸에 뼛속 깊이 스며 있다. 그렇구나! 무릇 일 이란 당연히 한걸음 물러서서 생각해야지! 내 만약 이분의 구원을 받지 못했더라면 벌써 야수의 아가리에 장사지냈을 몸이다. 그런 처지에 어디 가서 정과(正果)를 구한단 말이냐? 지금 은모님께 서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시는 것은 아들의 장래가 마음에 걸려서이다. 네 어찌 한 몸 던져 혼사 를 응락하지 않으랴! 돌아가신 분의 눈을 감겨드리고, 또 훗날 이분을 간호하면서 남녀지간의 거 리낌마저 덜 수가 있겠지. 아아, 웅만랑! 비록 수도(修道)의 길은 막혔을망정 사부님의 유언과 서 찰에 진작부터 이 운명이 정해지고, 내 천생 박명(薄明)한 운을 타고난 바에야 어찌 더 이상 배은 망덕한 인간이 되겠느냐!' 예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쓰라렸다. '주어진 운명, 의당 받아야지! 남의 은혜를 저버리는 인간은 결코 되지 않으리라!' 웅만랑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노파에게 묵도를 올렸다. '어르신네, 평안히 눈을 감으소서. 생전에 하신 말씀, 제가 받아들이오리다!' 과연 그녀의 허원(許願)이 통했는지 죽은이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한 가닥 미소가 떠오르더니 스르르 두 눈이 감겼다. 만랑의 심사는 뒤얽힌 삼가닥처럼 어지러웠다. 그러나 기왕지사 남에게 허원을 바친 바에야 더 이상 망설일 것도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녀는 일단 결심한 이상 체념도 빠른 사람이었다. 노파에 게 새옷을 수의(壽衣)겸해서 갈아입히고 나서, 또다시 늙은 사냥꾼과 도인의 시신마저 가지런하게 모셔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매일 먹는 약부터 먹은 다음에 물을 한 솥 가득히 끓였다. 도인의 약낭(藥囊)에는 짐작했던 대로 독약과 창칼에 상한 데 치료하는 외상약(外傷藥)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만랑은 서슴없이 약을 꺼내 젊은 사냥꾼의 상처를 헤치고서 발라주었다. 청년은 때없이 깨어나서 울다가 또다시 혼수상태로 빠져들곤 했다. 이번에는 만랑이 밤도 낮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환자를 간호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중독된 몸으로 이 집에 업혀왔을 때는 늦가을도 한창 저물녘이었는데, 회복하기까지 거 의 석 달이 지나고 오늘날은 늦겨울 철이다. 황막한 산중에서 제 철 만난 추위 때문에 매장을 못 한 시신도 썩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청년은 비로소 정신이 들면서 의식을 회복했다. 깨어난 후에도 심화(心火)는 여 전히 들끓어 또 몇 차례나 울다가 혼절했는지 모른다. 만랑은 차분하게 그를 달랬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격앙된 슬픔이 가라앉자, 아직껏 세 분의 시신 도 안장하지 못한 실정을 일깨워 주었다. 이제는 슬퍼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지나친 애통은 돌 아가신 분들에게 불효가 될 뿐이다. 하물며 중상을 입은 몸에 해로운 영향만 끼치게 될 것이다. 어서 기력을 되찾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제서야 젊은이는 자기 눈앞에 선 만랑의 존재를 새삼 의식했다. '아, 그렇구나! 이 아가씨가 있었다. 그날이 언제였던가? 어제, 그제... 아니 몇 날이 지났을꼬?... 그 며칠 동안 이 처녀는 떠나지 않고 여기에 있었구나. 만약 이 처녀의 돌봄이 없었더라면 나 역 시 어머니 아버지의 시신 곁에 벌써 누웠으리라... 그래, 웅소저도 몸이 아직 온전치 못한데 나뿐 아니라 우리 일가족을 위해서 노심초사 애를 써온 것이다. 저버리지 않고.' 속에서 뭉클하니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그 다음 순간, 청년의 눈에는 핑그르 눈물이 감돌았다. 뿌옇게 흐려진 눈길에 또 잡힌 것이 있었다. 그는 만랑이 머리에 흰 깁 상장(喪章)을 달고 있는 걸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자기네 부모를 위하여 상복을 입은 것이다. "웅소저!" 청년은 목이 메었다. 생각할수록 안쓰럽고 감격에 복받쳤다. 만랑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는 청년을 붙들어 말렸다. "이러지 마세요. 당신이 날 처음 구했을 때도 언제 내가 사례하는 걸 본 적이 있나요? 지금은 피차 형편이 바뀌었으니까 내 말을 들으셔야 해요. 움직이면 안 됩니다. 나는 벌써 다 나았으니 마음쓰실 것 없어요. 모든 일은 모두 나한테 맡기세요. 내 주머니에 아직 몇십 냥 은자가 있으니 까, 우선 당신 부모님의 시신을 안장해 드리는 일부터 급히 해야겠어요. 어디 가서 어찌해야 하는 지 방법만 일러주시면 내가 대신 처리할게요." 청년 역시 자기가 정말로 움직일 처지에 있지 못하다는 걸 아는 터라, 만랑의 제안이 그렇게 반 갑고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미안함이야 그 나중의 일이었다. 그는 더듬더듬 자신의 뜻을 말해 주었다. "웅소저, 고맙소. 남쪽으로 하산해서 한 삼십여 리쯤 벗어나면 마을이 나타날 거요. 가지고 계신 은자는 필요없습니다. 저기 이불 밑에 넉넉히 있으니까 수고스럽지만 꺼내 가시오. 그 마을에서 상등품으로 관곽(棺槨) 셋을 사서 인편에 보내 달라고 하시면 될 것이오. 우선 급한 대로 세 노친 네를 염습(殮襲)시켜 입관시켜 놓고 다시 날을 잡아서 사천 고향으로 운구(運柩)하면 될 테니까." "당신 성이 위씨인가요?" 웅만랑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청년은 사뭇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어찌 아셨소?" "혼수상태에 빠져 계셨을 때 헛소리로 말씀하신 것을 들었어요." 청년은 잠시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기더니 마침내 자기 일가족의 내력을 말했다. "내 이름은 위달이오. 그리고 나의 친아버님은 위중어 바로 저 도인 어르신네입니다. 나의 의부 (義父)님의 성씨 역시 위씨 위대곤(魏大鯤)이라고 하시는데 바로 웅소저의 독상을 치료해 주신 늙 은 사냥꾼 바로 그분이시지요. 그동안에 일어난 참변을 보시면서 매우 놀라셨을 테니 우리 일가 족 사이에 응어리진 인과관계를 대충이나마 들려드리리다. 애당초 우리 어머님과 친아버님과 의 부님은 모두 철수노니(鐵手老尼)의 문하제자였지요. 게다가 친아버님은 그 철수노니의 친조카였 고, 의부님은 성씨가 동성이긴 하나 종파(宗派)가 다른 위씨였습니다." 청년은 옛날의 역사를 기억해 내려는 듯 두 눈을 감고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청년 위달의 어머니 숙매(淑妹)는 위대곤과 처음부터 사랑하는 사이였다. 두 남녀의 사랑은 공개 적인 비밀이었고, 장차 결혼하여 일생을 함께하리라는 것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스승 철수노니는 이들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자기 친조카 위중어에게 시집보내기 위해서였다. 스승의 지엄한 분부를 어기지 못한 그녀는 마침내 위대곤의 곁을 떠나 위중어와 결 혼하고 말았다. 삼사 년이 지나자 그녀는 임신을 했다. 그 남편 위중어는 원래 속이 편협하고 의심이 많은 인물 이었다. 아내가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위대곤과 왕래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되자, 그는 불만이 싹트고 불만은 자라고 자라서 마침내 병적인 의처증으로 변하고 말았다. 불 같은 성미가 당장에 라도 폭발할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세 사람은 소년 소녀시절부터 지극한 우정으로 맺어진 동문 사 이라, 공공연히 반목하지는 못하고 마음 속 깊이 앙심만 품은 채 나날을 보냈다. 아내 숙매는 남편이 어째서 때없이 자기한테 성미를 부리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여러 차례 구 박을 받았다. 그러나 워낙 성격이 소탈하고 활달한 그녀는 사형 위대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무 공을 배우기도 하고 남편이 집에 있든 없든 초청해다 맛좋은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기도 했다. 위대곤의 애정은 너무도 깊었다. 사매가 자기 곁을 떠나 위중어에게 시집가 버리자 그는 평생토 록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고 독신으로 일생을 마치겠다고 맹세했다. 그 맹세를 하고 나서 마음이 호수처럼 맑아진 위대곤은 그녀를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사매로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온갖 미망(迷妄)과 번민에서 벗어난 그는 심지가 철석같이 굳어져 아무 거리낌도 없이 위중어와 숙매부부를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역시 틈이 나는 대로 신혼부부의 집을 방문하여 사형 사 제들이 함께 웃고 즐기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를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이렇게 되자 위중어의 심중에도 그들의 진정이 스며들어 점점 의심이 희미하게 사라지기 시작했 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가짐도 한때, 마침내 이들 세 사람의 일생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기어 코 벌어지고 말았다. 어느날 위중어는 스승의 분부를 받고 먼 길을 떠나갔다. 그날 저녁 예년에 없던 큰 눈이 내려 천지를 온통 뒤덮을 정도로 쌓여 철수노니가 문하를 거느리고 은거하는 심산궁곡에도 비행절적 (飛行絶迹)의 검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통행하기 어려운 악천후가 몰아닥쳤다. 공교롭게도 위대곤은 낮에 위중어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갈 길이 막혀버 려 하는 수 없이 사매와 바둑을 두며 앉아서 그 밤을 밝혔다. 그 이튿날 동이 트고 폭설마저 개자, 위대곤은 그길로 돌아가려고 문 밖을 나섰다. 한데 숙매는 사형에게 조반 한 끼니도 못 먹이고 내보내기가 싫어 굳이 말렸다. 사매의 호의를 무시할 수가 없어 그는 아침을 대접받느라 반 시진 남짓 더 지체했다. 이윽고 대문을 다시 나섰을 때 위중어가 막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스승의 심부름을 마치고 밤을 도와 모진 폭풍한설까지 무릅써가며 이제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위중어는 자기집 대문 앞에서 위대곤의 모습을 보았다. 이른 아침 자기 아내는 다정한 미소를 띠면서 곰살갑게 위대곤을 배웅하고 있지 않는가! 그 꼴을 본 위중어는 이제껏 잠자고 있던 의처증이 다시 불끈 치솟았다. 그래도 신중하게 자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밤새껏 퍼붓고 쌓인 눈 위에는 자신의 발자국밖에 아무런 자취가 없다. 뒤 돌아 보아도 자기집 대문 앞을 바라보아도 자기 말고는 사람의 발자국이 하나도 찍혀 있지 않다. 그렇다면 위대곤은 어젯밤 돌아가지 않고 아내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위중어로서는 간밤에 둘이서 무슨 짓을 하고 지냈을까? 병적인 의처증은 당장에 질투와 분노,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위중어는 마침내 발광한 야수가 되 었다. 구차스런 변명은 들을 것도 없이 그 즉시 병기를 뽑아들고 두 사람에게 다짜고짜 덮쳐들어 살수를 쓰기 시작했다. 남편이 뜻밖의 시간에 나타나서 선불맞은 범처럼 날뛰자, 숙매는 그만 아연실색을 하고 말았다.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면서 인정사정도 두지 않고 마구 후려치는 남편에게 아무리 악을 쓰다시피 변명을 하고 애원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위대곤은 일이 야릇하게 꼬였음을 직감했다. 숙매와 자기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때가 어느 때인가.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믿어줄 사람은 없다. 황하(黃河)의 물을 다 뒤집어 써 도 씻지 못할 오명이 자신과 숙매에게 씌워지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억울하게 위중어의 미친 칼 날을 고스란히 받고 죽는다면 그 누명은 꼼짝없이 기정 사실로 될 것이 아닌가? 그럴 수야 없다. 천만의 말씀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억울한 오명을 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 있어 야 한다! 위대곤은 우선 목전에 당면한 위험부터 피해 보기로 작정했다. 나중에 위중어와 스승 앞에 나서 서 진실을 밝히면 되는 것이다. 그는 다급하게 병기를 뽑아잡고 위중어의 칼부림에 대항하기 시 작했다. 남편의 야속한 오해에 끝내 악이 받친 숙매도 홧김에 장검을 뽑아들었다. 경위야 어떻든 우선 자기 방위는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하물며 뱃속에는 남편과 자기 사이에 태어날 애정의 열매가 숨쉬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마침내 질투에 미친 위중어는 아내와 사형을 상대로 일 대 이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남 녀로부터 협공을 받게 되자 위중어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지고 마침내는 이 천지간에 간부(姦 夫), 간부(姦婦)를 자기 손으로 처치해야만 명예가 회복도리라 굳게 결심했다. 당시 세 사람의 무공실력으로 말하자면, 숙매 혼자서라도 남편 위중어를 능가하고도 남았다. 여 기에 또 위대곤까지 합세했으니 위중어로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 사태는 오해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 숙매나 위대곤 두 사람은 결코 위중어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죽이거나 부상을 입힌다면 그것으로 부부 사이는 파경(破鏡)이 되고 말 것이 다. 그러기에 두 사람은 훗날 화해의 여지를 남겨 놓고 일단 달아나서 사후 일을 도모하기로 결 심했다. 숙매와 위대곤은 이심전심, 눈짓 한 번을 신호삼아 미쳐 날뛰는 위중어의 칼부림을 뿌리치고 등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질투와 분노에 눈이 뒤집힌 위중어도 호락호락 놓아주지 않았다. 두 남녀가 싸움판에서 몸을 빼어 달아나자, 그는 죽어라고 뒤쫓았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더러 운 욕설, 증오에 찬 저주를 퍼부어 가면서 끈질기게 두 남녀를 추격했다. 도주자들의 최초 목적지는 스승 철수노니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스승의 암자에 거의 당도해 서 위대곤과 숙매는 동시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스승이 놀라 깨어서 삼자대면을 주재할 경우 스승은 팔이 안으로 굽듯 친조카 쪽으로 역성 을 들지도 모른다. 자기 두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결백한 몸이지만 외견상 행적으로 보아선 영낙없이 간통현장을 목격당한 죄인들이다. 이런 상황에 스승의 비호를 받겠다고 뛰어들어 가 보았자, 그 열화 같은 스승의 조급한 성미에 제대로 실상이 밝혀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한 것, 두 사람은 스승의 손에 살아 남기 어려우리라. 두 사람이 망설이는 동안 위중어가 따라잡아 왔다. 세 사람은 또다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숙매는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을 다치지 않으려고 줄곧 공세를 피하기만 할 뿐 반격은 하지 않았 다. 그러다 보니 남편의 매서운 칼바람은 더욱 거침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숙매는 정신도 못 차 리게 칼날을 피하다가 자칫 실수하여 남편의 일권(一拳)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위대곤은 그것을 보고서 숙매를 구하느라 급급한 나머지 이제껏 삼가왔던 암기를 쏘아 위중어를 거꾸러뜨리고 말았다. 불의에 암습을 당한 위중어는 맥없이 눈밭에 고꾸라졌다. 위대곤은 숙매를 들쳐업고 방향을 바꾸어 도주해 버렸다. 숙매가 그 사실을 안 것은 멀찌감치 완전 탈출에 성공하고 나서였다. 당시 그녀는 창황 중에 남 편이 위대곤의 암기를 맞고 쓰러지는 것을 눈에 발이 미끄러져서 그러려니 보아넘겼던 것이다. 그녀는 위대곤을 무섭게 힐책했다. 남편이 암습까지 당해 부상을 입었다면 오해는 더욱 깊어질 것이고 원한이 겹쳐서 자기네 두 사람을 용서치 않으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제 부 부의 화합이란 더 이상 바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부득이 저지른 행위였지 만 그녀는 위대곤에게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원망이 앞섰다. 기껏 잘했다는 짓이 무섭게 힐난을 당하자 위대곤도 성미가 뻗쳤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숙매의 심사를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제대로 대꾸 한 마디도 못하고 꼼짝없이 그녀의 포달 을 뒤집어 써야만 했다. 숙매는 반나절 좋이 시끄럽게 악을 쓰다가 제풀에 지쳤다. 그렇다고 위대곤에 대한 원망이 수그 러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위대곤과 결별하고 혼자 길을 떠났다. 이윽고 그녀는 외 딴 산중으로 들어가 거처할 만한 동굴 하나 찾아놓고 은신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연줄을 통해서 스승 철수노니에게 이 일을 해결해 주십시사 간청을 드렸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는 뜻밖의 조치가 전해져 왔다. 철수노니는 당초 숙매를 자기 친조카에게 시집보낼 때, 신부감이 마음 속 깊이 우러나서 혼약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 줄 알고 있었다. 그러 기에 결혼한 후에도 숙매가 분수를 지키지 않고 위대곤과 왕래하는 행적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 고, 또 그들 사이에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는 것이나 아닐까 의심을 해왔다. 철수노니는 자기 친조 카 위중어만큼이나 편협하고 성미가 조급한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런 판국에 두 남녀 제자는 도망치고 조카만이 허겁지겁 낭패스런 몰골로 뛰쳐들어 와서 하소 연을 했으니 숙매가 원하는 것처럼 일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무정한 스승 철수노니는 부부간의 화해를 주선하기는커녕 그와 반대로 숙매와 위대곤 두 제자를 당장 문호에서 축출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아내를 간통한 도적놈에게 암습을 당하고 부상까지 입은 위중어는 복수에 이를 갈며 독약 먹인 암기를 단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연놈의 목숨을 끊어 원한이 씻기기 전에는 결코 추적을 멈추지 않으리라 천지신명 앞에 맹세했다. 그리고 공공연히 복수의 길을 떠났다. 숙매의 입장에서 다행한 것이 있다면 위중어가 먼저 위대곤부터 처치하고 그 목을 끊어 그녀 앞에 보인 다음 다시 아내를 쳐죽이겠다고 맹세한 점이었다. 그 공공연한 맹세 한 마디로 그녀는 산 속 동굴에 숨어 살면서 남편의 원한에 찬 눈길 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몇 달이 지났다. 만삭이 된 그녀는 해산을 앞두고 중병에 걸려 그만 몸져 눕고 말았다. 처음에는 아기라도 태어나면 다시 남편한테 내려가 보이고 동정을 사서 원만한 부부생활로 돌아갈 수 있으 리란 생각에 남편의 의심을 부채질할 만한 소문이 날까 봐 그 후에도 몇 번씩 찾아온 위대곤을 문전축객해서 따돌려 보낸 터였다. 그 사건 이후로 동문 사형제들도 하나같이 위중어와 스승 철수노니의 악담을 들은 터라 그녀를 찾아 돌봐주기는커녕 한패거리가 되어 비방을 하고 소문만 내는 게 고작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억울한 심사를 알아주는 것은 당사자 위대곤 하나뿐이었다. 위대곤은 그녀가 만나주지도 않는 데도 불구하고 부근 산 속 으슥한 곳에 은신처를 마련해 두고 암암리에 가련한 사매를 보호하고 있었다. 자신은 여하튼 간에 위중어의 독수로부터 그녀만은 보 호해 주어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그날 먹을 음식을 장만해 다가 동굴 문 밖에 놓아 두고 갔다. 그 역시 사매의 뜻을 아는 터라 구태여 만나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숙매는 처음 음식물을 발견했을 때, 동문 형제들이 스승 모르게 자기를 도와주는가 생각하고 별 뜻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런 가운데 정말 큰 병이 들어 인사불성이 되고 만 것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음식을 갖다 놓던 위대곤은 연 이틀 동안 음식이 동굴 어구에 놓인 그대로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동굴 속에서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사매가 이틀 간 아무것도 손 대지 않았다면 무슨 변고를 당한 게 틀림없다. 그는 또 한 번 야단맞을 셈치고 용기를 내어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매는 병이 든 지 벌써 오래인 듯 만삭된 몸을 침상에 누인 채 인사불성이 아닌가! 그는 진작부터 위중어의 심사로 보아 그들 부부의 재결합 따위는 믿지도 않았다. 설혹 그럴 가 능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사람의 목숨부터 살려내고 볼 일이다. 그는 아예 거처를 사매의 동굴로 옮겼다. 남녀지간 구차스런 예절 같은 것도 던져버린 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의 간 호에 매달렸다. 실로 피나는 노력이요, 정성이었다. 그는 본문에 투신한 이래 스승으로부터 의학을 배우고 온갖 약초에 대한 지식을 넓혔었다. 그런 만치 남다르게 의학에 정통했다. 위대곤이 정성을 다해 치료하는 동안 일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숙매는 병중에 분만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바로 위달이었다. 병으로 쓰러진 지 보름쯤 되어서야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자기 곁에 사형 위대곤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놀라움과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다음, 전부터 매일같이 음식을 동굴 문턱에 가져다 놓은 당사자가 바로 그였음을 깨 달았을 때는 더욱 놀라고 감격스러웠다. 한 달 동안 병시중을 들고 치료해 준 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 그녀는 기왕지사 이리 된 바에야 잠정적으로나마 사형의 뜻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산후조리가 끝난 후, 그녀는 아기의 앞가슴에서 붉은 점이 찍힌 혹을 발견하고 사뭇 기뻐했다. 위중어의 혈육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증거였던 것이다. 위대곤 역시 그녀 못지 않게 기꺼워했다. 사형제 간의 오해를 씻고 화해할 수 있는 중재자가 태어난 것이다. 숙매의 병이 완쾌되자, 두 사람은 장차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의논했다. 그런 다음, 위대곤은 사 매와 갓난아기를 호송하여 위중어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자기 혈육을 보면 위중어도 맺힌 마 음이 풀릴 터, 그때 가서 부득이했던 사정을 설명하면 어떻게 부부 사이와 사형제간의 불화가 모 두 해소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위중어는 두 남녀를 보자마자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대뜸 공격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손에서는 살기 찬 노전(努箭)과 비도(飛刀), 금전표(金錢標)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때 혹시나 하고 위대곤이 미리 경각심을 높이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숙매는 물론 어린것마저 제 아버지 손에 참혹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위중어는 자기가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단련한 암기들을 단 한 개 놓치지 않고 위대곤이 받아내 는 걸 보았다. 그는 겁이 더럭 났다. 두 손 가지고 네 손을 당해내기는 어려운 법, 그 길로 철수 노니의 암자를 향해 달아나면서 여전히 악담을 퍼부었다. "너희 연놈들이 어디 승천입지(昇天立地)라도 하는가 두고 보자! 아내를 빼앗기고 철표(鐵標)에 맞은 이 원한, 세상천지 끝까지 뒤져서라도 갚고야 말 테다! 네놈들이 오늘 날 때려죽이지 못한다 면 삼 년 후에 다시 만나보자꾸나!" 위중어는 이미 복수귀(復讐鬼)의 화신(化身)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도망치는 그의 뒷모습을 보 면서 숙매와 위대곤은 그저 망연자실했다. 그렇다고 마냥 서 있을 수는 없다. 이제 곧 스승과 동 문 사형제들이 자기네를 잡으려고 우르르 쏟아져 나올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황급히 도피길에 올랐다. 먼저 있던 은신처까지 돌아온 숙매는 절망한 나머지 자결하 려고 했다. 그러나 사형이 혀가 닳도록 만류하는 바람에 자결마저도 단념했다. 이윽고 흥분이 가 라앉자, 그녀는 다시 남편을 원망했다. 너무도 박정한 남편이 아닌가 말이다. 그에 비해서 위대곤 은 또 어떤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끝내 터럭만한 사심(私心)조차 품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전과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들의 스승 철수노 니가 좌화(坐化)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때 숙매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사형 위대곤에게 재 가(再嫁)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녀로 하여금 나머지 일생을 위대곤에게 맡기도록 결심하게 만든 원인은 전적으로 위중어한테 있었다. 위중어는 스승이자 숙모였던 철수노니가 세상을 뜨자, 그 즉시 사문(師門)을 버리고 구양(歐陽) 이란 성을 가진 도사 문하로 투신해서 무시무시한극독 암기의 비법을 전수받고 이것들을 숱하게 단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복수, 복수만이 존재했다. 일평생을 바쳐서라도 자기를 버린 아내와 그 아내 를 빼앗아 간 사형에게 복수를 하고야 말리라는 일념으로 사문도 명예도 헌신짝처럼 내던진 것이 다. 그 소문이 숙매를 자포자기하게 만들었고, 위대곤의 손에 일생을 맡기도록 결심하게 한 것이 었다. 그들 두 사람은 삼십 년을 동거했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명목상일 뿐, 서로 존중하고 의지하여 살면서도 이제껏 단 한 차례 베개를 같이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 어느덧 아들 위달이 장성했다. 숙매와 위대곤은 그 부모노릇을 착실히 했다. 아들이 사물을 깨우 치고 인간의 도리를 알 만한 나이가 되자, 그들 부부는 이전에 있었던 비밀을 숨기지 않고 말해 주었다. 자기의 친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알자, 아들은 그 즉시 위중어를 찾아갔다. 자신의 내력을 밝히 고 불쌍한 어머니의 처지를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친아버지의 반응은 살수(殺手)였다. 위 달이 단념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찾아갔으나 마찬가지, 친아버지와 맞닥뜨릴 때마다 그는 번번이 맞아죽을 뻔하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해 가지고 도망쳐 돌아왔던 것이다. 후에 위중어의 무공은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좋아졌다. 그 소문이 전해지자, 위대곤부부 는 자기네 실력으로 당적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외나무 다리에서 맞닥뜨리는 날엔 산 목숨으로 그 손아귀를 벗어나기란 처음부터 아예 그른 것이다. 부부는 할 수 없이 가재도구를 추려 가지고 사천땅으로부터 멀찌감치 이곳 절강성 선하령까지 도피행 이사를 했다. 황막한 선하령을 택하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언제 당할지도 모르는 위중어의 극독 암기에 대비하여 해독 비방에 필요한 약초를 쉽사리 찾을 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날마다 약초를 채집하러 방원(方圓) 천여 리의 선하령 산맥을 쏘다녔다. 사냥은 부수 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남의 이목을 가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해를 거듭하면서 해독 약초는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완전한 비방을 만들기도 전에, 미처 약초가 구비되기도 전에 위달의 친아버지 위중어는 기어코 그들의 종적을 뒤밟아 선하령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내와 사형, 자기 자신마저 동귀어진(同歸於盡)함으로써 비극의 일생을 마치고 만 것이다. "... 그날 아침, 어머님은 바로 여기까지 쫓아와 모습을 나타낸 아버님 때문에 부상을 입으셨소. 아버님을 보는 순간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진 거요. 내가 업고 내려오는 동안 정신이 약간이나마 들어 있으셨기에 그 말씀을 해주셨소. 나는 큰일났구나 싶어 의부님한테 귀띔해 드리려고 했소. 하지만 때가 너무 늦어 의부님은 미처 내막도 모르고 약을 구 하러 나가셨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그분이 돌아오시지 않길래 진작부터 품었던 불길한 생각이 확 신으로 변했소. 어머님의 성화에 못 견뎌서 내가 그곳까지 달려갔을 때는 이미 거의 끝장난 상태 였소. 한 분은 독을 먹인 단도(單刀)에, 또 한 분은 독강표(毒鋼標)를 맞고 한창 부둥켜안은 채 필 사적으로 격투를 벌이던 중이었소. 나는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소. 도대체 누굴 먼저 구해야 좋을지... 한쪽은 친아버님, 한쪽은 나를 삼십 년씩이나 길러주신 의붓아버님... 내가 어느 편을 들 어야 옳았겠소? 나는 우선 뒤엉킨 두 분을 뜯어 말리고 보아야겠다 생각했지. 겨우 두 분 사이를 떼어놓는 순간, 내 친아버님은 땅에 나뒹굴던 독도(毒刀)를 집어들고 나한테 연거푸 두 칼을 먹였 소. 꼼짝없이 칼질을 당할 수밖에... 설사 반격할 기회가 있었더라도 내 어찌 친아버님에게 손을 쓸 수 있었겠소? 나는 방법이 없어서 우선 의부님부터 들쳐업고 돌아왔지... 어머니가 최후의 애 원처럼 날더러 친아버님을 모셔오라고 분부하였을 때, 내 몸은 이미 절반 가까이 마비된 상태였 소. 그렇다고 분부를 어길 수야 없는 일, 나는 반신을 질질 끌다시피 그곳으로 다시 갔소. 친아버 님도 이미 숨결이 끊어질 듯 절망적으로 죽음만 기다리시는 상태였소. 그래도 나를 보시자 또 싸 우려고 덤벼드셨소. 나는 그분의 칼이랑 암기를 모조리 빼앗아 던지고서 강제로 업었지. 마구 발 버둥치면서 안 가시려고 버티셨지만 어디 그 상태에서 내 힘을 당해내셨겠소?... 사실 그때 아버 님은 어머니의 분노가 두려운 나머지 몸부림치셨던 거요. 끌려가 보았댔자 좋은 결과는 없으리라 지레 짐작하신 것이지...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소. 어머님과 아버님, 그리고 의부님, 이렇게 세 분은 죽음에 임박해서야 맞대면을 하시고 마침내 삼십 년 동안 맺혔던 원한을 풀어버리셨으니까 요. 그러나 나는 지금도 한이 풀리지 않소. 아버님께서 반나절만 일찍 이 사실을 아셨더라면 어떻 게 그런 참변이 일어났겠소? 아버님의 독도(毒刀)는 그래도 해독약이 있어 내 목숨을 구할 수 있 었지만, 독전(毒箭)은 그분 자신도 해독약을 만들지 못한 것이었소. 의부님은 아버님한테 그 독전 을 연거푸 석 자루나 얻어맞으셨지. 그러데 어떻게 살아나실 수가 있단 말이오? 또 아버님 역시 의부님한테 독을 먹인 강표 두 대를 맞았소. 한 개는 가슴에 박혔으나 금방 뽑아내셨지. 그 독이 비록 출혈 상태에서 삼사 시진이 경과되면 죽지만 그때까지는 넉넉히 해독시켜 살려낼 수 있었 소. 하지만 앞이마에 정통으로 박힌 또 한 개는 뇌수(腦髓) 깊숙이 파고들었으니 어떻게 사시겠 소?... 어머님은 절벽에서 실족 추락하실 당시 아래 골짜기에 솟구친 날카로운 바위 뿌리에 들이 받쳐 심장이 진탕을 일으킨 것은 물론, 창자마저 쏟아져 나올 정도가 되셨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벌써 즉사할 만큼 치명상이셨다오... 나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여러 차례 꿈을 꾸었다오. 세 분 노친네를 성심성의껏 감동시켜서 우리 일가족 넷이 한평생을 화목하게 사는 꿈 말이오. 이 제는 다 끝났지만....." 위씨 가문의 불행스런 내력은 여기서 끝이 났다. 청년 위달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견딜 수 없 는 절망감에 몸을 떨면서 안색은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만랑이 부드러운 어조로 위로했다. "이제 세 분 노친네는 모두 저세상으로 가셨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대를 이을 후사(後嗣)도 얻지 못하였어요. 위씨 가문은 오로지 당신 어깨에 지워져 있죠. 그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요? 쓸데없 는 비탄에 잠겨서 몸을 해친대서야 무슨 보탬이 되겠어요. 도리어 세 분께 불효가 되기만 할 따 름이죠. 자, 이제부턴 제 말을 들으세요. 집에서 얌전히 계셔야 저도 마음을 놓고 세 분의 장례 준비를 하러 나갈 수 있어요. 그 마을이 여기서도 한참이나 멀고 또 가서 관목(棺木)이랑 수의(壽 衣)랑 이것저것 고르고 흥정하려면 적지 않게 신경이 쓰일 텐테, 내 한 몸뚱이 가지고 거기 일에 다 여기 계신 분을 어떻게 다 돌보겠어요? 제 말뜻 아시겠죠?" 만랑은 말 끝에 방긋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혼자 남겨 놓고 나갔다가는 위달이 비탄에 외로움 마저 겹쳐서 자결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미리 웃음으도 못박아 놓은 것이다. 정호봉의 요룡 斬孼龍 盜寶鼎湖峯 失天錄 腐心自水觀 위달은 본래 웅만랑을 구할 때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영웅을 자처해 온 그 는 그녀를 구해준 것을 구실삼아 그 뜻은 표시하길 원하지 않았다. 아들의 심정을 눈치챈 어머니 가 몇 차례나 물었어도 그때마다 부인한 위달이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지내게 되자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무르익어 이제는 도저히 그녀를 단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만랑의 병이 다 나았으므로 머지 않아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질 것 같았다. 그 런데 만랑이 조금도 스스럼없이 자기 병을 돌봐줄 뿐 아니라 세 노인의 죽음에 대해 수시로 위로 의 말을 해주니 더욱 감격스럽고 경애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만랑이 한 말은 곰곰 생각해 볼수록 일리가 있었다. 위달은 만랑의 권고를 좇아 억지로 슬픔을 억제하였다. 이날 오후, 만랑은 세 노인의 관을 산기슭까지 날랐다. 만랑은 관을 운반하는 일꾼들이 나중에 시신의 상처를 보고 관가에 알릴까 봐서 거짓말을 했다. 자기는 타향사람인데, 아버지 어머니와 삼촌 모두 이곳에서 객사했기 때문에 시신을 고향으로 모시려고 한다는 것, 자기와 같이 온 사람 들은 아마도 산 속으로 시신을 찾으러 들어간 것 같다고 말하였다. 끝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 다. "이곳까지 운반하는 것으로 당신들 일은 끝났어요. 우리 사람들이 오면 직접 입관시키겠어요. 괜 히 관을 들고 산을 올라갔가 내려올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일꾼들이 관을 땅에 내려놓자, 그녀는 일부러 관을 번쩍 쳐들어 세 개를 쌓아올렸다. 그 관의 목 재는 모두가 상등품으로써 매우 무거운 것이며, 게다가 안에는 석회를 깔아놓았으니 무게가 적어 도 이삼백 근은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천 근의 신력(神力)이 없다면 어떻게 그 무거운 물건 을 번쩍 들어올릴 수 있겠는가! 게다가 만랑은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강호의 말투인지라 관을 운 반한 일꾼들은 그녀가 몹시 수상쩍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하고 말하는 품이 매 우 자연스러우며, 게다가 선불로 받은 수고료 외에 술값을 두둑히 얹어주자 쓸데없이 참견하기 싫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모두 돌아가 버렸다. 그곳은 위달이 사는 암동(巖洞)에서 반 리 정도 떨어진 매우 외진 곳이라 거의 사람의 왕래가 없었다. 높은 곳에 올라간 만랑은 일꾼들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턱 놓고 내려왔다. 그녀는 먼저 관 하나를 들어 암동으로 옮긴 후에 다시 와서 둘째 관을 옮겼다. 이런 식으로 한 시진 정도 걸려 세 개의 관을 모두 옮겼다. 그런 후에 세 구의 시체를 하나하나 염하여 입관했다. 몸이 완쾌된 지 얼마 안 되어 이렇게 힘을 쓰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될 정도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세 구 시체 옆에 털석 드러누워 한동안 휴식을 취하였다. 만랑 혼자서 그처럼 수고하는 것을 보자 위달은 견딜 수가 없어 몇 차례나 일어나 도우려고 했 지만 그때마다 만랑에게 제지당했다. 위달은 몹시 미안하여,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는지 모르겠다 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그러다가 만랑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쓰러져 자는 것을 보자 더욱 걱정 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러다가 만랑이 깨어나서 이렇게 땀을 흘리고 나니 도리어 몸이 더욱 가뿐하다고 하자 어느 정 도 마음을 놓았다. 두 사람은 각자 약을 복용하고 간단한 요기를 하고 나서 따로 떨어져서 잠을 잤다. 육칠 일이 지나자 위달은 비로소 일어날 수 있었다. 만랑도 날이 갈수록 몸이 좋아졌다. 두 사람 은 두 번에 걸친 생과 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저절로 서로의 따뜻한 감정이 깊어졌다. 위달은 만 랑에게 구혼을 하려고 했었으나 아무래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섣달그믐까지 되 었으므로 두 사람은 세 노인의 영구를 사천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출발하려고 할 즈음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가 먼 여행을 함께한다는 것은 매우 거북한 노릇이므로, 위달은 몇 번이나 생각한 다음 만랑에게 자기의 진정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혹시 발 딱 화를 낼지도 모르므로 직설적으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은근하고 우회적으로 구혼을 했던 것이 다. 만랑은 이미 마음 속으로 허락을 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간단히 승락하였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영구를 고향으로 옮긴 후에 결혼하기로 언약을 한 다음 길을 떠났다. 사천으로 돌아온 후에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고, 만랑은 그 해 곧 임신을 하였다. 가을이 되어 스승이 준 두 번째 편지를 열어보니 전후의 인과(因果)를 상세히 적어놓았을 뿐 아 니라 또 이렇게 덧붙여져 있었다. <만약 장령자와의 전생의 인업(因業)을 피할 수만 있었다면, 삼 년 후에라야 위달을 만나 부부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정호봉에(鼎湖峰)으로 가서 천서(天書)를 취할 수 있으리라. 천서는 한 마리 요룡(妖龍)이 지키고 있다. 그 요룡은 용은 용이지만 보통 용과는 다르다. 삼십 년마다 한 번씩 허물을 벗고 동굴을 나온다. 동굴을 나오면 이 년 동안 동굴 밖에서 살며, 보통 때는 항상 산꼭대기의 정호(鼎湖) 안에 잠복하여 금전부록(金篆符錄)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 게 다가 그 요룡은 이미 수천 년의 도행이 있기 때문에 웬만한 검선은 호수 안에 발도 들여놓을 수 가 없느니라. 최근 육십 년 동안 와룡은 이전과는 달리 허물을 벗고 동굴을 나올 때마다 산을 내려와 사람을 해쳤다. 그 요룡의 겁수(劫數)가 바로 이 육십 년 안에 있으므로 이번에 너는 그 요룡이 껍질을 벗는 틈을 타서 천서를 빼앗을 수 있었다. 하지만 먼저 위달과 결혼을 하여 필히 임신을 하게 될 것이니, 섣불리 갈 입장이 아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기필코 간다면 설사 요룡을 이긴다고 하더라도 천서가 부정을 타서 글자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니 무슨 소용이랴. 금년이 지나면 그 요룡은 삼십 년 이후에야 다시 출현한다. 그러나 그때는 기연(機緣)이 지나갔기 때문에 가도 무익유손(無益有損)할 뿐이다.> 만랑은 반쯤 읽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서 스승은 자기가 이미 장령자라는 사람에게 몸을 더럽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는 위달과 결혼한 날 밤에 분명히 처녀였었다. 위달도 인공사태(因空師太)가 편지 속에 말한 것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여 겼다. 그러나 만랑이 임신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 정호봉은 높이가 천 장이나 되는 큰 산으로써, 위달도 전에 몇 번이나 올라가려고 생각하였 으나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다. 만랑은 임신한 몸으로 곧 분만할 처지라 움직일 수 없는 데다 또 편지 내용도 확실히 이해할 수가 없어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만랑이 위청의 아버지인 위전(魏筌)을 낳으면서 장령자의 법술이 풀림으로써 좌망단이 효력을 상실하자, 비로소 만랑은 희미하게 이전의 일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견딜 수 없이 수치 스럽고 화가 치밀었다. 원통한 나머지 벽에다 머리를 박고 죽고 싶으나 그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인지라 한스러웠다. 그녀는 차마 진실을 속일 수 없어 위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았다. 위달은 아내를 경멸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그녀가 괴로워할까 봐 위로하였다. 만랑은 그같 은 남편의 정과 어린 아들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정호의 천서에 대한 미 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듬해에 몸이 회복되자, 그녀는 정호봉으로 가서 천서를 훔칠 일 을 위달과 상의하였다. 위달은 인공사태가 편지에서 말한 것들이 사실과 모두 들어맞음을 보고는 쓸데없는 수고가 될 게 뻔한지라 여러 차례 말렸다. 그래도 만랑은 끝까지 고집을 피웠다. 아내를 사랑하는 위달은 하 는 수 없이 유모를 고용하여 어린 아들을 친구집에다 맡겼다. 그래놓고 집을 떠난 두 사람은 고생고생 끝에 겨우 정호봉에 올라갔다. 사방을 살펴보니 풍경이 뛰어날 뿐 아니라 암곡이 매우 깊으면서도 면적이 넓었다. 서남쪽 모퉁이에 사방 백 묘(苗) 가량 크기의 큰 호수가 있었다. 물이 맑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산봉우리는 매우 높아서 바람끝이 여간 쌀쌀하고 세찬 게 아니었다. 마침 해가 중천에 높이 떠 있는 한낮이라 바람이 한 번 불면 호수에 물결이 일면서 그 물결이 햇빛을 반사하여 만 가닥의 금 비늘이 번쩍이는 듯 그 눈부심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다시 서쪽 밖을 바라보니 가까운 곳에 진운선도(縉雲仙都)가 있는데, 그 주위를 산봉우리들이 둘 러싸서 마치 절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갑자기 정호봉 중턱에 흰구름이 몰려들어 산허리를 끊어 버렸다. 동시에 많은 산봉우리들이 사라지고 단지 반쪽밖에 되지 않는 정호봉과 원근 몇 개의 산 봉우리만이 운해 속에서 마치 섬처럼 남아 있었다. 과연 교룡(蛟龍)이 살고 선령(仙靈)이 왕래하 는 곳이라 할 만한 절경이었다. 두 사람이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덧 호수가 잔잔해졌다. 그러나 아무런 동정 (動靜)도 보이지 않았다. 호수가 몹시 깊은지라 요룡(妖龍)이 어느 쪽에 숨어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스승의 편지에는 요룡이 껍질을 벗는 기간이 약 두 달이라고 했으므로, 둘이 며칠 전에 도착하 였으니 아직 나오지 않았을 것은 틀림없었다. 또 요룡은 껍질을 벗기 전에 호수를 벗어나서 햇빛 을 쐬고, 껍질을 벗은 후에는 매일 밤 자시(子時)가 되면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고 했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할 생각이었다. 그럴려면 우선 으슥한 곳을 찾아 숨어 있다가 요룡이 올라오면 기회를 봐서 손을 써야 했다. 두 사람은 상의를 한 후에 즉시 몸을 숨길 동굴을 찾았다. 몇 군데를 찾아보았지만 하나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눈여겨 본 곳은 앞쪽은 잎사귀가 빽빽한 키 작은 소나무숲이고 그 숲 뒤쪽으로는 작은 벼랑이 있는 곳이었다. 소나무숲을 지나가서 살펴보니 벼랑 앞에 두 개의 작은 동굴이 있는데, 하나는 동쪽으로 나머지 하나는 남쪽으로 뚫려 있었다. 두 굴 사이의 거리는 이십여 장밖에 안 되지만 은폐되기 용이한 지형이어서 동굴 앞에 서면 피차간에 서로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먼저 동쪽 동굴로 가보았다. 동굴 입구에 큼직한 전서체(篆書體) 글자 두 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바람에 침식당하여 알아볼 수가 없었다. 동굴에 들어가보니 안에는 놀랍게도 방석과 단약을 끓이는 아궁이 등의 물건이 있었다. 이전에 사람이 산 흔적이 분명했다. '이것 봐라!' 내심 놀라는 순간, 만랑의 발에 모래 같은 부드러운 것이 밟혔다. 무심코 고개를 숙여 발 밑을 내려다보다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애그머니!" 위달은 만랑의 놀란 외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의 발 밑으로 시선을 주었다. 과연 그곳 에는 도인 복장을 한 한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죽은 지 너무도 오래 된 듯, 뼈마저 이미 썩어 푸석푸석한 부토로 변해 있었다. 그것을 밟은 만랑이 부드러운 모래로 느낀 것도 무리가 아니었 다. 자세히 살펴보니 도인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고 다만 목부분에 큰 구멍이 하나 나 있었 다. 이 사람이 천서를 훔치러 왔다가 요룡에게 해를 당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곳 산꼭대기까지 와서 수도를 할 정도라면 틀림없이 보통 사람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어떻게 급사 를 했단 말인가. 거기에는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인의 죽음을 보고 이 동굴이 불길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돌연 동굴 벽 모서리에서 한 가닥 음침한 바람이 일어나며 귀신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만랑은 재빨리 방어태세를 갖추었으나 그뿐 별다른 동정이 없었다. 두 사람은 아무래도 이곳이 상서로운 곳이 못된다고 여겨 다른 곳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도인의 시체가 이 황막한 곳에 버려져 있는 것을 가련히 여긴 두 사람은 마침 동굴 속의 바닥이 흙인 것을 보고는 병기를 사용하여 구덩이를 파서 그 도인의 시체를 묻어주었다. 매장을 끝내고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은 이번엔 남쪽으로 나 있는 동굴로 가보았다. 비록 동쪽굴 보다는 좁고 작았지만 안에 아무것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으며 밝고 깨끗한 것이 동쪽굴처럼 음 산하지 않았다. 그래서 즉시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어 굴 안의 큰 바위 위에 깔아놓고는 마른 양 식을 꺼내는 한편 샘물을 길어와서 배불리 먹었다. 그런 다음 다시 호숫가로 나가서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변화의 기미도 없었다. 두 사람은 바람을 맞으며 그곳의 절경을 해가 지도록 감상한 후에 동굴로 돌아와서 자리에 누웠다. 한밤중이 되어 만랑이 반쯤 잠이 들었을 때였다. 별안간 웬 도인이 나타나서 그녀를 향해 몇 번 이고 꾸벅꾸벅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깨어나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남편을 깨워 꿈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위달도 꿈 속에서 똑같은 현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한숨을 돌리다가, 문득 이곳이 요룡의 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데, 어쩌자고 이 렇듯이 태평스럽게 같이 잠을 잘 수 있느냐는 데에 문득 생각이 미쳤다. 즉시 상의를 하고는, 부 부 두 사람이 교대로 동글 입구에 서서 망을 보아 만일에 대비키로 했다. 이렇게 하여 이틀밤을 잤으나, 역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밤, 두 사람은 내일이 바로 요룡이 호수를 나오는 날이므로 더욱 신중을 기하기로 하였다. 위달이 먼저 망을 보았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만랑이 일어나서 남 편과 교대하여 동굴을 지킬 차례였다. 그녀는 혼자서 동굴 앞을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거닐었다. 하늘에는 반쪽이 떨어져 나간 밝 은 달이 떠서 동굴 앞의 커다란 소나무 위를 비추니, 소나무 가지 그림자가 땅에 가득한데, 한 가 닥 바람이 불어오니 그 그림자의 출렁임이란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하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호수 의 잔물결 소리와 소나무숲의 바람소리가 한 데 어울리니 눈앞의 경물은 더욱 황홀하게 돋보였 다. 내일 정오가 바로 요룡이 호수를 나오는 시각이라 생각하니 온갖 사념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솟 구쳐 올랐다. 자기는 어언 오십 세가 넘었지만 남편 집안의 비약인 주안영약(駐顔靈藥)의 힘을 빌 어 평소 거울을 비쳐보면 삼십 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청춘을 지 탱하는 것에 불과했을 뿐이지 장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번에 요행히 요룡을 처치하고 천서를 얻을 수 있다면 명산고동(名山古洞)을 찾아 천서의 수도하는 법에 따라 정진하여 정과에 동참(同參)할 수만 있다면 한평생의 고생이 헛되지 않을 것 이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홀연 선도봉(仙都峰) 정상에서부터 한 가닥 청황색의 빛이 번 개처럼 이쪽 정호봉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실력이 고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만랑은 깜 짝 놀라 급히 동굴로 들어갔다. 그녀는 남편을 불러 깨우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일어나세요. 적이 나타났어요!" 위달은 이 말을 듣고 급히 만랑을 따라 동굴을 나가 으슥한 곳에 숨어서 동정을 살펴보았다. 그 청황색은 정호봉 위에 맴돌더니 갑자기 다른 곳으로 향해 날아다니는 것을 보아 아마도 몸을 숨 길 만한 장소를 찾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날아다니더니 급기야는 동쪽 동굴 안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가 앞쪽에 있는 소나무숲으로 날아올 때 약속이나 한 듯 손에 땀을 쥐었었다. 그러 다가 그 청황빛이 자기들을 발견하지 못한 채 동쪽 굴로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서 는 약간 마음을 놓았다. 만랑이 말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사부님을 따라 검술을 배워 검광의 사정(邪正)을 구별할 수가 있어요. 이 자의 검광은 푸른빛에 노란빛을 띠고 있으니 절대로 정파는 아니에요. 게다가 그의 공부(功夫)가 매우 깊어 보통 무뢰배가 아닌 것 같으니, 이번에 천서를 훔치기가 곤란하게 되었군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몹시 상심이 깊었다. 위달은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가 저 사람을 찾아가서 상의를 합시다. 우리가 서로 협력하여 천서를 손에 넣은 후에 모두가 같이 볼 수 있다면 좋지 않겠소?" "그건 절대로 안 돼요! 저 자는 실력이 우리 두 사람보다 위에 있어 우리와 협력하지 않을 뿐더 러, 또 이파 문하이기 때문에 도리를 따지지 않고 우리를 해칠는지도 모를 일이에요. 상황을 보니 각기 선연이 어떠한가가 중요한 것 같군요. 다행히도 우리가 이곳에 숨어 있고 저 자는 정호쪽을 주시하고 있으니 잠시 동안은 발각될 염려가 없군요. 어쩌면 저 자로 인해 우리가 덕을 볼는지도 모를 일이에요." 위달은 평소 만랑의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감히 잠을 자지 못하고 다음날까지 뜬눈으로 기다렸으나, 그 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른 양 식으로 요기를 하고 나서 동굴 옆 으슥한 곳에 엎드려 조용히 동정을 살폈다. 오시(午時)가 거의 다 되었을 때, 돌연 바람이 크게 일면서 호수 쪽에서 물소리가 났다. 멀리 바 라보니 파도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기회를 놓칠까 봐 목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위 뒤쪽으로 숲을 돌아서 호수 옆의 산으로 올라갔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몸을 막 숨겼을 때, 돌연 공중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며 그 청황색 빛이 동쪽 동굴에서부터 호수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검광을 타고 나타난 것은 도인차림의 요 염한 여자였다. 이때 호수 안은 물이 끓는 듯이 파도가 크게 일며 호수 전체가 커다란 물거품으로 용솟음치고 있었다. 별안간 '쏵, 쏵!' 하는 소리가 나며 호수 중앙에 십여 장 굵기의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노 란 연기가 일어나며 물기둥이 공중으로 치솟다가 별안간 멈추더니 갑자기 밑으로 떨어지면서 마 치 눈사태가 난 것처럼 산지사방으로 튀었다. 잠시 후 또 호수 밑바닥에서 소리가 나더니, 방금과 같은 물기둥이 또 솟아올랐다가 다시 떨어 졌다. 이렇게 세 번 솟아올랐다가 세 번 떨어졌는데, 한 번 떨어질 때마다 호수 중앙은 일이 장 정도 낮아졌다. 마지막에는 놀랍게도 호수 중앙의 물이 말라버렸다. 돌연 그 도고(道姑)의 기합소 리가 들리더니, 한 가닥 청황빛이 호수 가운데로 곧장 쏟아져 내려갔다. 만랑과 위달이 그 청황빛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니 호수 가운데에는 금빛이 번쩍이는 커다란 굴 이 있었다. 굴 입구의 널찍한 반석 위에는 소대가리에 악어의 몸을 가진 용 같기도 하고 용이 아 닌 것 같기도 한 괴물 한 마리가 버티고 앉아 있었다. 길이는 십여 장 정도 되었는데, 몸뚱이는 검은 비늘로 덮여 있었다. 요룡은 청황빛이 내려오는 것을 보더니 입을 벌려 한 덩이의 불덩이를 뿜어내었다. 도고는 요룡이 불을 뿜는 것을 보자마자 검광을 거두고 곧장 뺑소니를 쳤다. 요룡이 그냥 방관 만 할 리가 만무였다. 몸뚱이를 한 번 구부렸다 펴더니 네 발을 공중으로 치켜들며 그 도고를 쫓 아갔다. 요룡이 호수를 나와 약 반 리 정도 쫓아갔을 때, 그 도고가 별안간 큰소리로 외쳤다. "천벌을 받을 짐승아, 어서 빨리 천서를 내놓지 못하겠느냐? 네놈은 이미 돌아갈 길이 없느니 라!" 말을 마치자 또 검광을 운용하여 요룡과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한동안 싸우다 그 요룡은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몸을 돌려 호수 안으로 도망가려고 하였다. 도고는 쫓아가지도 않고 머리를 한 번 흔들어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그런 후에 중얼중얼 주문을 외며 손을 뻗어 앞을 가리키니, 즉시 호수의 사방 주변에서 노란 연기가 일어나며 요룡을 향해 밀려들었다. 요룡은 아마도 노란연기가 검광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아는지 다시 몸을 돌려 그 도고를 향해 덤벼들어 검광과 어우러져 싸웠다. 오시(午時)부터 시작한 싸움이 유시(酉時) 초까지 계속되자 요 룡은 점점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요룡이 갑자기 땅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는 불덩이를 즉시 만 가닥 불꽃으로 변화시 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불꽃 속에서 한동안 몸뚱이를 비비꼬던 요룡이 돌연 괴상한 소리를 한 번 지르자 별안간 요룡의 몸에서 '뻐뻐벅!' 하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불꽃과 연기가 어우러지는 곳에 비늘껍데기가 땅에 털썩 떨어짐과 동시에 비늘도 없는 매끈한 백룡(白龍) 한 마 리가 공중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 도고는 요룡이 껍질을 벗고 도망가는 것을 보자 지체없이 오른손을 뻗어 두 가닥의 초록빛을 요룡의 머리를 향해 날려보냈다. 뒤이어 왼손을 번쩍 내밀어 가리키니 청황의 빛줄기가 별똥처럼 요룡에게 날아갔다. 앞에 날려보낸 두 가닥 초록빛이 요룡을 휘감자마자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리 며 요룡의 두 눈이 멀어버렸다. 뒤미처 청황빛 검광이 요룡을 휘감자 즉시 허리가 두 동강이 나 면서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이 일련의 처절한 결투를 목격한 만랑부부는 너무나 놀라서 천서를 넘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도고는 요룡을 처치한 후에 신검합일(身劍合一)하여 정호의 중심으로 날아 내려갔다. 한참 후 에 다시 날아 올라온 그녀는 손을 한 번 펼쳐 호수 위의 노란연기를 거두어들이고는 매우 성난 표정으로 요룡을 노려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돌연 머리를 숙이고 한동안 무엇을 생각하더니 갑자기 요룡의 시체로 다가가서 마구 검 광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검광이 요룡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니 피가 튀고 살덩이가 주위에 어지럽게 널려져 뒹굴었다. 도고는 차고 있던 검집으로 요룡의 살덩이를 이리저리 헤집었는데 무 언가를 찾고 있는 듯하였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수색이 계속되었으나 끝내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도고는 분을 이기지 못해 발을 한 번 구르고는 공중을 뚫고 떠나가 버렸다. 만랑은 도고가 이토록 악랄한 것을 보자 속으로 그녀에게 발각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 여 겼다. 그리고 천서는 이미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갔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도고가 사라진 후에야 두 사람은 풀이 죽은 채 걸어나왔다. 남쪽 동굴로 돌아가서 보따리를 챙겨 산을 내려갈 참인 것이다. 도고가 이미 가버렸으므로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어서 그들은 요룡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갔다. 요룡을 내려다보니 도고에게 찢겨 살덩이가 어지럽게 흩어졌는데, 단지 벗어버린 껍데 기만은 마치 아직 살아 있는 듯 그 옆에 엎드려 있었다. 만랑은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요룡의 대가리는 크기가 마치 큼직한 바구니 같 았고, 그의 기다란 몸뚱아리와 네 발은 모두 검은 비늘로 뒤덮였으며 생긴 것이 매우 흉악하였다. '방금 상황을 보니, 만약 도고가 없었다고 해도 내 실력으론 결코 이 요룡의 적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문득 달빛 아래 한 점 붉은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빛은 바로 요룡의 입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위달을 불러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용의 몸뚱아리를 들어올리니 한 가닥 붉은 광채가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위달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곳에다 손을 들이밀었다. 과연 무엇인가가 손에 잡혔다. 들어내고 보 니 세 치 폭에 길이 일곱 치쯤 되는 옥갑(玉匣)이었다. 윗면에는 전서(篆書)로 부적이 적혀 있었 는데, 바로 스승이 편지에서 말하던 그 옥갑천서였다. 아마도 방금 요룡이 그 도고를 당해내지 못하겠구나 싶자 껍질을 벗으며 천서를 껍질 속에 버려 두고 도망하여 적이 끝까지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도고는 이런 사실 을 알지 못한 채 호수 가운데의 굴과 요룡의 몸뚱아리에서만 천서를 찾았던 것이다. 괜히 쓸데없 이 기력만 낭비하여 요룡을 죽이고는 천서도 찾지 못하고, 도리어 만랑부부한테만 횡재를 시켜준 것이다. 만랑은 뜻밖에 천서를 얻게 되자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옥갑 위에 있는 부적을 조 심스럽게 벗기자 부적은 즉각 한 가닥 붉은빛으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옥갑을 암만 열 려고 해도 도저히 열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자 문득 호수 안에서 돌소리가 들려왔다. 웬일인가 싶어 호숫가로 달려가 들 여다보니 바닥의 돌이 점점 솟아오르면서 원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만랑은 옥갑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금빛이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서 더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급 히 남쪽 동굴로 돌아와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는 급히 길을 찾아 산을 내려갔다. 그 산은 산세가 너무나 가파라서 도저히 오르내릴 형편이 아니었고, 단지 서쪽만이 등나무가 밀 생해 있었기 때문에 붙잡고 올라가기가 쉬웠다. 그러나 내려가기는 도리어 어려웠다. 다행히 두 사람은 미리 내려갈 준비를 해놓았던 것이다. 미리 준비한 오동나무 기름을 먹인 보 자기를 펼쳐놓고 몇 개의 쇠막대기를 얽어 끈으로 단단히 묶어 대가 없는 우산을 만들었다. 그리 고는 각자 병기와 의복을 몸에다 묶고 천서는 만랑이 품속에다 감춘 다음 두 손으로 쇠막대기를 꽉 움켜쥔 채 튀어나온 바위 위에 올라서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대가 없는 우산은 바람을 맞아 팽팽하게 부풀어오르며 두 사람의 몸은 마치 뜬구름처럼 이리 저리 한들거리며 밑으로 떨어졌다. 땅에서 이삼 장 정도 높이까지 이르자 그들은 서로 이름을 부 르며 쇠막대기를 놓고 사뿐히 착지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친 곳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밤이 깊었으므로 선도 부근에서 쉴 만한 암동 을 찾아 피로를 푼 후에 아침 일찍 사천으로 출발할 작정이었다. 무사히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두 사람은 매우 즐거워하며 천도봉 기슭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만랑이 갑자기 다급하고 낮은 소리로 남편에게 주의를 주었다. 위달이 뒤를 돌아보니, 진운봉 아 래로 어젯밤에 보았던 청황색 광채가 마치 유성이 달을 쫓아가듯 또 정호봉으로 날아가고 있었 다. 만랑이 급히 남편에게 말했다. "저 도고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은 틀림없이 요룡의 껍데기를 수색하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생 각했기 때문일 거예요. 저 여자가 다시 돌아가거나 말거나 상관할 바 아니지만, 단지 우리가 어제 너무 급히 오느라고 요룡의 껍데기를 원상태로 해놓지 않은 것이 큰 잘못인 것 같아요. 또 남은 마른 양식과 필요없는 물건들을 산에다 남겨 놓지 않았어야 하는데, 저 여자가 그것들을 발견하 면 틀림없이 사태를 짐작하고 우릴 쫓아올 것이에요. 상황이 긴박하니 우선 후미진 곳을 찾아 숨 어 있다가 저 여자가 지나간 후에 다시 떠나도록 합시다." 두 사람이 몸을 숨길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을 때, 그 청황색 광채가 정호봉에서부터 날아 내려왔다. 만랑부부가 비록 재주가 상당하다고 하지만 상대가 워낙 고강한 적수인지라 맞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적의 배후 공격에 대비하면서 길을 찾으려 하니 자연히 허둥지둥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두 사람은 도망가면서 계속 힐끔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청황색 광채는 계속 공중을 맴도는 것이 아마도 적을 찾고 있는 듯하였다. 다행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수풀이 우거져 있었기 때문 에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 청황색 광채는 공중에서 한 동안 맴돌다가 갑자기 진운봉 서북 쪽으로 날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만랑부부는 큰 짐을 벗어버린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얼마 동안 기다렸지만 아무런 동 정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곳은 아무래도 좋지 못한 곳 같으니 속히 벗어나는 것이 좋겠 다고 결정하였다. 이때 산 위에서 홀연 짙은 안개가 일어나며 바람에 실려 퍼져 크고 작은 산들이 모두 가려져 보 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어지며 온 산의 나무들이 마치 물결이 밀려오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잠깐 사이에 달이 형체를 감추며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해졌다. 두 사람은 날씨가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몸을 피할 곳을 찾았다. 문득 앞쪽의 숲이 금빛으로 희부윰하게 빛나며 길이 비추어졌다. 만랑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 금빛은 바로 자기 품속에 있는 옥갑에서 뿜어내는 것이었다. 처음에 는 급히 도망치느라고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으나, 지금 달이 숨어버려 사방이 캄캄해지니 광채가 더욱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만랑은 깜짝 놀랐다. 강적이 아직 멀리 가지 않았는데 보광(寶光)이 밖 으로 새어나간다면 그 도고가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올 것이 아닌가. 그녀는 두려웠다. 입고 있는 옷으로는 도저히 발산되는 빛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보따리 를 풀고 옥갑을 꺼내어 좀더 두텁게 싸려고 했다. 그러나 옥갑이 품속에서 나오자마자 금빛은 하 늘로 치솟으며 주위의 나뭇잎들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바람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만랑은 황급히 가지고 있던 의복으로 둘둘 말고는 그것도 부족하여 남편의 보따리도 풀어 의복 등을 꺼내 엄밀히 열몇 겹이나 쌌다. 한참 정신없이 소동을 치른 다음에야 자세히 살펴보니 보광 이 새어나오지 않는지라 그제사 마음을 놓았다. 끈으로 단단히 묶고 나서 숨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아까 그 청황색 광채가 다시 진운산 쪽에서 부터 솟아오르더니 이번에는 공중에서 맴돌지도 않고 곧바로 그네 부부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지 않는가. 만랑은 이번만은 쉽게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몹시 다급해졌다. 문득 방금 옥갑을 꺼낼 때 사방을 비추던 금빛으로 길 옆에 동굴이 하나 있는 것을 본 생각이 났다. 그래서 허둥지둥 위달의 손을 잡고 그 동굴이 있는 쪽을 향해 뛰어갔다. 다행히 동굴 가까 이 갔을 때 번개가 치며 길을 환히 밝혀주었으므로 머뭇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만랑이 그 동굴을 보니 사방 직경이 삼사 자 정도인데 입구 쪽에 풀과 흙이 어지럽게 뒤섞여 널 려서 매우 더러운 것이 여우나 산돼지 같은 짐승의 굴 같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깨끗하고 더 러운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므로 우선 들어가고 볼 일이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차례로 기어 들어갔다. 다시 번개가 쳤을 때 두 사람은 그 빛을 빌어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동굴은 별로 깊지는 않았 지만 다행히 안은 높아서 서 있을 수 있었다. 동굴 안쪽에 무슨 짐승 같은 거무튀튀한 물체가 엎 드려 있었는데, 만랑은 밖에 있는 적이 눈치를 챌 것이 두려워 비검을 사용하지 못하고 남편과 등을 맞댄 채 경계만 하며 서 있었다. 별안간 하늘까지 울릴 정도의 큰 벼락소리가 나자 그 검은 물체가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는 소리 가 들렸다. 위달은 그 검은 물체가 어느 정도 깊이에 엎드려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어림잡 아 칼을 빠르게 휘둘렀다. 칼끝이 그 검은 물체에 닿은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괴상한 울음소리 가 귀청을 찢을 듯이 일어나며 그 검은 그림자가 동굴 밖으로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그 물체가 막 동굴을 나가자마자 밖에서 여자의 고함소리가 들렀다. "이 뒈질 놈의 짐승 같으니!" 그와 동시에 동굴 밖에 한 가닥 청황색 광채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 여자가 바 로 자기들을 쫓는 도고임을 알고는 모두 손에 땀을 쥐었다. 이때 동굴 밖에서는 천둥소리가 크게 나고 번갯불이 금사(金蛇)처럼 어지럽게 비쳤다. 얼마 동안 을 기다려도 아무런 동정이 없어 조심조심 동굴 밖을 살펴본 만랑은 기뻐하며 위달에게 말했다. "그 여자가 갔어요!" 위달도 만랑을 따라 동굴을 나왔다. 밖은 벌써부터 큰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청황색 광채는 이 미 동굴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도고가 이곳에서 머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이상 빨리 이곳 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서 비가 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길을 찾아 걸음을 재촉했 다. 얼마 안 가자 앞에 큼직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번갯불을 빌어 살펴보니 암소만큼이나 큰 흑 곰이 이미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죽어 있었다. 방금 숲 속에 비치는 보광을 발견하고 이곳까지 쫓아왔다가 작은 동굴을 의심했던 도고는 공교 롭게도 흑곰이 뛰쳐나오는 것을 보자 동굴도 작은 데다 또 야수가 그 안에 있었으니 사람이 숨을 수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날도 캄캄하고 비도 심하게 내려 쫓아갈 도리가 없는지라, 이 흑곰을 죽여 분을 풀고는 떠나간 것이다. 만약 이 흑곰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길흉을 점칠 수가 없는 형 편이 아니었던가! 두 사람은 정말 다행이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계속 앞으로 걸어나갔다. 비가 오는지라 산길이 매 우 미끄러웠다. 겨우 선도봉 서쪽을 넘자 비바람이 뚝 멈추며 짙은 안개도 사라졌다. 푸른 하늘에 는 밝은 반달이 높이 걸려 맑은 빛을 자아내니, 온 산의 나무들이 방금 씻어낸 듯 깨끗하게 빛나 고 있었다. 빗물은 곳곳에서 시냇물을 이루어 흘러내렸다. 바위 틈에서 나는 물소리와 숲 속에서 나는 풀벌레 소리가 어우러져, 야색(夜色)이 더욱더 아취(雅趣)가 있어 보였다. 먼동이 훤히 틀 때까지 산길을 걷고서야 이윽고 평지와 만났다. 두 사람은 그래도 계속 걸음을 멈추지 않고 또 삼백여 리를 걸었다. 어느덧 오시를 넘길 무렵, 앞쪽 산비탈 아래에 있는 웬 사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어젯밤 온몸이 비에 젖었지만, 가지고 있던 모든 옷가지는 천서를 싸는데 사용했으므 로 옷을 갈아입을 처지가 못되었다. 젖은 옷을 입고 몇백 리 산길을 질주하면서 거센 바람을 맞 고 게다가 햇볕을 쐬었기 때문에 비록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몸이 약간 좋지 않았다. 설상가 상으로 어젯밤 급히 떠나느라고 마른 양식을 모두 정호봉 위에다 버렸기 때문에 배도 매우 고팠 다. 그래서 사당에 들어가 약간의 요기를 하려고 하였다. 사당 앞으로 당도해 보니 문 위에 <백수관(白水觀)>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비록 담장 은 많이 허물어졌지만 그 규모는 매우 웅장하였다. 두 사람은 이 사당이 인가와 멀리 떨어진 산 기슭에 위치한 것이 매우 미심쩍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믿는 데다 통성명을 하면 강호에 이 름이 드높은 자기들을 몰라주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사당의 대문에 달려 있는 구리 고리를 가 볍게 두어 번 두들겼다. 잠시 후에 삐꺼덕! 하는 소리와 함께 사당문이 열리고 어린 도동이 얼굴을 내밀었다. 위달이 찾 아온 이유를 설명하니까 그 어린 도동은 두 사람의 아래위를 쓱 훑어보고는 몸을 돌려 들어가 버 렸다. 얼마 안 있어 대전 안에서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긴 도인이 나와 두 사람에게 예를 베풀고 운방 (雲房)으로 데려갔다. 두 사람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 뒤 곧 도동에게 차와 음식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위달이 그 도인을 보니 비록 행동이 민첩하고 용모가 특출나게 생겼지만 별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자리에 앉은 후에 위달이 통성명을 하니, 그 도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시주께서 바로 촉동대협(蜀東大俠) 위영웅이신군요. 그렇다면 이 여시주께서는 왕년 민산삼녀 (岷山三女) 중의 한 사람인 새비경 웅만랑이시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위달은 그 도인이 자기의 내력을 알고 있는 것을 보자 더럭 의심이 솟구쳤다. "저희 부부는 이미 이름을 감추고 지낸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선장(仙長)께서는 어떻게 저희들 의 비천한 이름을 알고 계신지요? 또 선장의 법호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두 분 시주는 그 이름이 강호에 가득한데 누가 몰라보겠습니까? 빈도도 이전에는 두 분 시주와 마찬가지로 악을 제거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았었습니다만, 삼 년 전에 우연히 <감리진인(坎離眞 人)> 허원통(許元通) 사부님을 만나 이곳에 와서 수도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빈도의 성은 뇌(雷) 였습니다만 이름은 밝히고 싶지 않군요. 지금은 은사께서 내려주신 <거악(去惡: 악을 제거함)>이 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빈도가 보기에 두 분 시주께서는 어젯밤 비를 맞으며 밤새 길을 달려오신 것 같습니다. 두 분 시주께서는 모두 놀라운 실력을 가지고 계신데, 설마 무슨 위험에 봉착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위달부부는 뇌거악이 비록 아미문하의 사람인 듯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측량하기 어려운 지라 사실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산에서 비를 만났는데, 급한 일 때문에 비를 무릅쓰고 왔다는 등의 말로 얼버무렸다. 도인은 두 사람이 사실을 밝히길 꺼려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더 이 상 캐묻지 않았다. 잠시 후에 술과 밥이 들어왔으므로 두 사람은 배불리 먹었다. 피차 모두가 강호상의 친구이므로 돈을 주고받기가 거북하여 고맙다는 말로 사례를 대신하고는 작별을 고했다. 떠나려고 할때 도인이 위달에게 말했다. "부인께선 안색이 과히 좋지 않으신데 밤길에 무리한 것 같습니다. 만약 길을 가시다 위험한 일 을 당하시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쉬었다가 가십시오." 위달과 만랑은 이 말을 듣고서 도인의 호의에 감사하며 길을 떠났다. 약 십 리 정도 갔을 때, 만랑은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위달더러 망을 보게 하고 으슥한 곳을 찾 아 소변을 보았다. 막 일어나려고 할때, 길 옆 숲 속에서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무심결에 귀를 기 울 여 보니 한 쌍의 남녀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가 말했다. "당신 말에 의하면 천서를 얻었다가 다시 잃어버리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는다고 했지요. 어제 두 연놈에게 천서를 도둑맞았으니 지금은 마땅히 찾아야 하는데, 당신이 가진 정구(晶球)의 상 (象)을 따라 쫓아왔어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은 어째서 매사에 그렇게 급하기만 하오! 내 정구에 나타나는 현상이 언제 틀린 적이 있었 소? 아침 일찍 내가 당신과 함께 어젯밤 보광이 빛났던 곳으로 가서 토굴 속에 난 남녀의 발자국 을 분명히 보지 않았소? 어젯밤 당신이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기회를 두 번이나 놓쳤는데, 또 그 렇게 급하게 굴면 천서는 영영 얻지 못할 것이오. 당신이 내 말대로 해서 천서를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나를 상대하지 않아도 좋소." 만랑은 처음에 그 여자의 목소리가 매우 귀에 익다고 느꼈다. 뒤에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깜짝 놀라 간이 콩알만해졌다. 급히 숨을 죽이고 가만가만히 길을 돌아서 위달이 있는 곳으로 돌 아왔다. "적이 또 왔어요. 빨리 도망갑시다." 위달은 만랑이 만면에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자세한 상황을 물어보지도 못하고 즉각 경신술을 펼쳐 만랑을 따라 도망쳤다. 반 리도 채 못 갔을 때, 공중을 뚫는 소리가 들리며 앞쪽에 두 가닥의 청황색 광채가 번쩍이더니 한 도고와 붉은 옷을 입은 번승이 나타났다. 도고가 큰소리로 외쳤다. "개 같은 연놈이 간도 크구나! 감히 내 천서를 훔치다니. 빨리 천서를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 겠다." 설혼주의 신력 乘危放妖氣 氷窟雪魂疑異影 銳身急友難 靈藥異寶返仙魂 웅만랑은 이 도고가 얼마나 악랄한지를 모르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막무가내로 사람에게 욕을 하는 거예요. 나와 당신은 생면부지의 처지인데, 천서 가 도대체 어떻게 되었다는 거죠? 나 새비경 웅만랑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무언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화기(和氣)를 상하지 않도록 합시다." 도고는 만랑의 말을 듣자 화를 벌컥 내며 욕을 해대었다. "무지한 더러운 계집년이 조동아리만 살았구나. <신수비구(神手比丘)> 위풍랑(魏楓娘)이 어떤 사람인가 보여주겠다!" 말을 마치자 손을 쳐들어 한 가닥 청황색 광채를 날려보냈다. 미리 방비를 하고 있던 만랑은 위달에게 살그머니 말했다. "절대로 나서면 안 돼요. 도리어 불리하게 되니까." 그리고는 적의 검광이 날아오자 검집을 한 번 치며 진기를 운용하여 한 가닥 흰빛을 날려 위풍 랑의 검광을 맞아 싸우기 시작했다. 위풍랑이 웃으면서 욕을 했다. "어쩐지 네년이 정신을 못 차린다고 했더니 검술을 훔쳐 배웠구나. 누구 앞에서 감히 재주를 피 우려고 하느냐?" 만랑이 비록 정파의 전수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공행이 낮으니 어찌 위풍랑의 적수가 되겠는가! 그녀는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그 번승이 들고 있던 수정구(水晶球)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별안간 안색이 바뀌며 위풍랑에 게 뭐라고 빠르게 말을 했다. 그러자 위풍랑도 깜짝 놀라며, 손을 뻗어 검광을 거두어들였다. 만랑이 검광을 내뻗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가려고 하자, 위풍랑이 갑자기 손을 쳐들며 한 줄기 노란 연기를 날렸다. 만랑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몸을 돌려 도망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 어버렸다. 왼팔과 오른쪽 다리에 위풍랑의 황운독정(黃雲毒釘)을 맞고는 비명을 지르며 땅에 쓰러 지고 말았다. 위달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보자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가 아내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홍 의번승이 주문을 외면서 손을 쳐드니 별안간 눈앞이 아찔해져서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위풍랑이 앞으로 나서며 독수를 쓰려고 하는데, 홍의번승이 만랑의 손에서 보따리를 뺏아 펼쳐 보고는 위풍랑에게 말했다. "천서가 여기에 있소. 놈이 곧 도착할 텐데 빨리 가지 않고 뭘 기다리는 거요?" 말을 마치자 위풍랑의 손을 잡아당기며 소매를 한 번 떨치니, 한가닥 노란빛과 함께 하늘로 치 솟으며 떠나가 버렸다. 얼마 후에 위달이 깨어나 보니 그의 앞에 키가 작은 도인이 서 있었다. "내가 한 발 늦게 오는 바람에 천서도 빼앗기고 그대의 아내도 중상을 입고 말았소. 비록 내가 영약을 썼지만은 그대의 아내는 불구를 면하지 못할 것이오. 그대는 아내가 깨어나면 이렇게 말 하시오. 천서는 <신수비구> 위풍랑이 가지고 갔으며, 그녀는 허다한 요인들과 사천과 서장의 경 계인 청라산에 살고 있다고. 그녀가 천서를 가지고 가긴 했지만, 옥갑 위에 적힌 문자를 해석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소. 그 책은 아직 세상에 나올 시기가 되지 않았던 거요. 당신 아내가 만약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청라산으로 가서 천서를 훔쳐온다고 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오. 내 가 그대의 아내에게 장향(藏香) 한 자루를 주겠으니, 만약 긴박한 상황을 만나게 될 때는 진기를 써서 이 향을 한 번 입으로 불라고 하시오. 그러면 향에 저절로 불이 붙고, 내가 향냄새를 맡고 달려와 구해드리리다. 위풍랑은 천서 이외도 많은 도서(道書)를 가지고 있어 요법이 상당하니 그 대 부부는 결코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오. 그래도 만약 끝까지 천서를 훔치러 가려고 한다면 내 가 도와드리겠소. 나는 지금 그대의 아내를 만나기 거북한 고로 먼저 가겠소. 두 분은 이 부근에 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휴식을 취한 후에 사천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도인은 말을 마치자 눈 깜박할 사이에 종적을 감추었다. 위달은 그 도인이 용모가 기이하게 생겼고 체구가 어린아이처럼 작은 것을 보니 언젠가 그 사람 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듯하였다. 하늘을 향하여 몇 번 절을 한 후에 만랑을 살펴보니 이미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팔다리의 상처는 살이 누렇게 익은 상태였다. 비록 신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반신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만랑이 깨어났다. 정신이 돌아오자 그녀는 천서를 뺏겼을 뿐 아니라 자기도 중상을 입었 는지라 분함과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비오듯 쏟았다. 위달은 좋은 말로 아내를 위로한 다음, '웬 도인이 나타나서 당신을 구해 주었소'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만랑은 눈이 둥그래져서 그 도인이 어떻게 생겼더냐고 물었다. 그래서 위달은 그 도인의 용모를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위달의 설명을 들은 만랑은 이를 악물더니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깜짝 놀란 위달은 한참 동안이나 아내를 부르며 흔들었다. 겨우 깨어난 만랑은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그놈이 바로 그 장령자(藏靈子)란 놈이에요. 제가 당신에게 시집가기 전에 만약 그 사람과 이런 인업(因業)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꼴을 당하게 되었겠어요? 사부님 말씀이 틀림없어요. 전생의 인 업이 그렇게 정해졌다면 속수무책이지요. 이제부터 다시는 천서니 초범입성(超凡入聖)이니, 그런 것은 거들떠보기도 싫습니다. 돌아가서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조용히 살다가 일생을 마치겠어 요." 말을 마치자 위달의 손에서 장향을 빼앗아 몇 동강이로 부숴버린 후에 땅에다 내동댕이쳐 버렸 다. 그제서야 위달은 그 도인이 바로 장령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말하길 만랑은 요양이 필요하 다고 했으므로, 위달은 문득 백수관 도인 뇌거악의 당부를 생각해 내었다. 그는 부드러운 말로 아 내를 위로하며 껴안다시피 부축하여 백수관으로 돌아갔다. 뇌거악은 두 사람이 낭패하여 돌아오 는 것을 보자 어떻게 된 영문인가를 물어보고는 자기 일처럼 안타까와했다. 위달과 만랑은 백수관에서 반 달 남짓 요양을 했다. 그래서 만랑의 상세는 많이 좋아졌지만, 왼 팔 오른다리는 신경을 많이 잃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처럼 원통하고 분한 노릇이 있을까 만 어쩔 도리가 없는지라, 두 사람은 뇌거악과 작별을 고하고 백수관을 떠났다. 이때부터 만랑은 자신의 선연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는 망상을 품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아들 <선인장(仙人掌)> 위전은 효성이 매우 지극했다. 그는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하 여 뇌거악 문하로 들어가 검술을 배웠는데, 뇌거악은 어쩌면 자기도 위풍랑의 적수가 되지 못할 지 모른다며, 위전에게 함부로 서두르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위전은 그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이 모자람을 알고는 성과 이 름을 바꾸고 위풍랑의 문하로 들어가서 기회를 보아 천서를 훔치고 원수를 갚을 작정을 한 것이 다. 위풍랑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위풍랑의 음락상대역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니 용모가 준수하고 건 장한 위전이 어찌 그녀의 호색에서 모면할 수 있겠는가. 위전은 천서를 손에 넣고 어머님의 복수 를 위해서 치욕을 참고 위풍랑의 음락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드디어 원수의 입에서부터 천서을 숨겨둔 장소를 알아내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스승을 해친 위풍랑이 사백, 사숙들의 보복을 염려하여 이교들과 손을 잡아 세력을 넓히려고 위전을 데리고 화산으로 열화조사(烈火祖師)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 다. 위전은 원수의 일당들이 없는 틈에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또 청라산으로 날아가서 위풍랑의 명령을 받은 척 거짓말로 꾸며 천서를 훔치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열화조사가 위전의 기미를 눈치챘다. 열화조사는 가만히 두 사람의 뒤를 밟다 가 위전이 행동을 개시하려는 찰나 단칼에 그의 두 다리를 잘라버렸던 것이다. 위전이 손을 쓰려고 했을 때 그는 위풍랑의 뒤에 있었다. 등 뒤에서 칼바람 이는 소리를 듣고 위풍랑이 힐끔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열화조사가 뒤에 서 있고 위전은 이미 칼을 맞고 땅에 쓰러져 있지 않은가! 위풍랑은 위전이 자기를 암습하려고 한 것을 알지 못하고, 열화조사가 자기와 위전의 간통을 눈 치채어 질투심에 위전을 찌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불같이 성을 내며 열화조사에 게 공격을 가했다. 위풍랑은 원래 열화조사의 적수가 아니었다. 다행히 열화조사는 그녀를 해칠 생각이 없었기 때 문에 검광으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위전의 음모를 설명하였다. 끝으로 그는 자기가 위전을 죽이지 않고 다리만 잘랐으니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 다음 훌쩍 공중을 뚫고 사라져 버렸다. 위풍랑은 열화조사의 말을 듣고서도 반신반의하었다. 땅에 쓰러진 채 인사불성이 된 위전을 보 자 그녀는 그래도 여자다운 마음에 가련한 느낌이 들어 우선 단약으로 그를 치료해 주었다. 그리 고는 위전이 깨어나자 위풍랑은 열화조사의 말이 사실인지 캐물었다. 위전은 자기가 살아났지만 불구가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는 글렀음을 알았다. 그 래서 그는 분통이 터진 나머지 울부짖고 갖은 욕을 퍼부으며 위풍랑이 묻기도 전에 사실을 다 불 어버렸다. 위풍랑은 원래 살인을 하고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는 여마왕(女魔王)이었지만, 이번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그를 죽이지 않고 도리어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위전은 집으로 돌아와서 얼마 후에 죽었다. 죽기 전에 그는 위청(魏靑)이 어리고 또 다른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 다음에 커서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라는 당부를 하였다. 자기 아들이 자기의 전 철을 밟아 위씨 문중의 향불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 대에 걸친 원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위청은 사연의 대강만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령자가 가버린 후에 사방을 살펴보니 마궁(魔宮) 사람들은 이미 몽땅 다 도망가 버리고 하나 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윤중(劉允中)과 위청은 대전 위에서 옥갑천서와 여후(勵吼)의 수급(首級)을 지키며 조용히 스 승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괴규화(怪揆花)> 능혼(凌魂)이 들어와 웃으면서 옥갑을 받 아들었다. 능혼이 입 속으로 진언(眞言)을 외며 손으로 쓰다듬으니 옥갑이 열렸다. 옥갑은 삼 층 으로 되어 있었다. 상층에는 천서와 부권(副卷)이 들어 있고, 중층에는 여섯 알의 단약과 한 자루 의 옥광(玉光)을 번쩍이며 들어 있었다. 능혼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내 일찍이 정호 옥갑 속에 세 가지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외로 요녀의 법력이 얕아 상 층밖에 열지 못해 천서 부권만을 배워 스스로 멸망하였구나. 중, 하 두 층은 여지껏 열려진 적이 없어 다행이다. <광성자구천원양척(廣成子九天元陽尺)>과 <취백연형단(聚魄鍊形丹)>은 건드리지 않았으니 통쾌한 일이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두 가닥의 광채가 대전으로 들어오더니 칼을 찬 두 젊은 여인이 나 타나며 능혼 앞에 꿇어앉았다. 유윤중과 위청은 그 중의 한 여인이 대형옥(戴衡玉)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 주경운(周輕雲)이 란 것을 알아차렸다. 또다른 여인은 제영운(齊靈雲)이었다. 능혼이 웃으면서 말했다. "빨리 일어나거라! 옥나찰(玉羅刹)의 말을 듣고 와서 나에게 구천원양척과 취백단을 얻어 등팔고 (鄧八姑)를 구하려는 수작이로구나!" 영운과 경운은 절을 하면서 말했다. "사백님께서는 자비심을 발휘하시어 선단 두 알만 내려주십시오. 구천원양척은 천부(天府)의 지 보(至寶)이니 어찌 감히 달라고 여쭙겠습니까? 다만 잠시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방금 옥청대사(玉 淸大師)께서 우담(憂曇)사백님의 말씀을 전해 주셨답니다. 이 구천원양척은 등팔고를 구할 뿐만 아니라, 지금 위험에 처해 있는 아미파의 인사 한 사람도 이 보물이 아니면 구할 수가 없다고 하 시며, 사백님께 빌려주십사 간청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 지금 겨우 손에 쥐게 되었는데, 바로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다는 것 은 정말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훗날 너희 두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담노니 가 알고 너희를 보내 나를 협박하게 시켰구나." "제자들이 어찌 감히 그런 무례한 짓을 하겠습니까? 훗날 사백님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끓는 가마솥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지금 상화양(尙和陽)은 제자들이 이미 쫓아버렸지만, 팔고는 여전 히 매우 위험합니다. 바라옵건대 사백님께서 홍은(鴻恩)을 베푸시어 그녀를 가엾게 여겨주시옵소 서." "너희 젊은 것들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나중에 내가 너희를 필요로 할때 발뺌할 생각은 말아라. 자, 어서 가져가거라!" 능혼은 취백단 두 알과 구천원양척을 두 사람에게 주었다. "이 원양척은 광성자(廣成子)가 수도연마(修道煉磨)한 보물로써, 천서의 상권에 사용법인 구자진 부(九字眞符)가 있다. 만약 이 부(符)가 없다면 이 보물을 얻어도 소용이 없느니라. 이걸 너희들에 게 전수하노니, 현빙곡으로 돌아가면 먼저 이 원양척으로 마화(魔火)를 소탕한 후에, 두 알의 취 백단을 팔고에게 먹이고 따로 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거라. 그리하면 삼 일 후에는 그녀의 행 동이 자유로와질 수 있을 것이다." 영운과 경운은 지시를 귀담아 듣고 다시 절을 하여 감사를 표한 후에 유윤중과 위청에게 목례를 보고는 허공으로 치솟아 날아가 버렸다. 원래 영운오누이, 자령(紫玲)자매, 그리고 주문(朱文), 이 다섯 사람은 철사도인(鐵娑道人), 황현 극(黃玄極), 조심원(趙心源), 도균(陶鈞), 조광두(趙光斗), 유천(劉泉) 등을 만나 합류했다. 생문에 있는 마진(魔陣)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발동하자 땅이 갈라지며 산이 무너지고, 홍수가 용솟 음치며, 열화(烈火)가 휘날리는 것을 보자 급히 능혼이 분부한 대로 모두가 한 곳으로 모였다. 자령이 미진기(彌塵旗)를 펼치고, 주문은 천둔경을 써서 만 가닥의 하광(霞光)을 마진 위로 쏘아 보냈다. 그러자 뜨거운 불길과 강풍홍수(强風洪水)와 독운(毒雲)이 가득하고 요무(妖霧)가 가득하 여도 하나도 사람들의 몸에 와닿지 못했다. 사람들은 요법에 법보가 더러워질까 봐 오로지 몸만 보호하고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자령의 백미침만 부정을 타지 않으므로 바쁘게 쏘아 대었다. 그 바람에 마진의 요인들 가운데 근행이 비교적 낮은 자들은 백미침을 맞고 줄줄이 쓰러 졌다. <만묘선고(萬妙仙姑)> 허비랑(許飛娘)은 자기편 사람들이 추풍에 낙엽처럼 쓰러지는 것을 보자 대노하였다. 곧 독룡존자(毒龍尊者)와 함께 검광을 쏘아내어 사람들의 몸을 보호하며 다른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렇게 오시(午時)까지 버티던 독룡존자는 별안간 성을 발끈 내며 독사(毒砂)를 있는 대로 쏘아 보냈다. 마진에서는 '구르릉!' 하는 굉음과 함께 하늘과 땅이 한덩어리로 흔들리고, 소원사 쪽에서 는 이미 자오풍뢰(子午風雷)를 발동하여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일으켜 산을 뽑아 옮기고 바다를 뒤집어 엎었다. 독룡존자와 허비랑은 여기서 적을 깡그리 소탕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그런데 누가 천마 해체대법(天魔解體大法)을 구사할 줄이야 꿈에나 생각했는가. 영운일행은 정오가 되자 물러날 준비를 하였다. 홀연 한 가닥 금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그 금빛 속에서 <괴규화> 능혼이 나타나더니 영운 일행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자령은 때가 되었음을 알고 신호를 보내고는 한덩이 채운(彩雲)으로 사람들을 보호하며 공중으 로 떠올랐다. 죽을 둥 살 둥도 모르는 사천팔마(四川八魔)는 공중에서 관망하고 있다가, 계곡 밖에서 높은 산 봉우리가 움직이고 밑에서는 수화풍뢰(水火風雷)가 떼지어 몰려오는 걸 보자 독룡존자가 또 법술 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마(五魔)> 공손무(公孫武), <칠마(七魔)> 오인룡(伍人龍)은 마진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 다가 앞에서 한 뭉치의 채운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조금 전에 한 소동(小童)이 이 법술을 사용 하여 원수인 조심원(趙心源)을 데리고 달아나는 것을 보았던 까닭에, 앞뒤 가리지 않고 그 채운을 향해 검광을 날려보냈다. 사실 그 두 사람의 검광은 결코 채운 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문이나 금선(金禪)은 모두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앞에서 두 가닥 누런빛이 날아오는 것 을 보자, 곧장 채운 속에서 맞받아 검광을 쏘아보냈다. 네 가닥의 검광이 서로 맞부딪치자 오마와 칠마의 검광은 즉시 두 동강이가 나버렸다. 오마와 칠마는 채운 속에서 날아온 두 가닥의 검광이 자기네 검광을 여지없이 두 동강이 내는 것을 보자 사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급히 도망가려고 했으나 한발 늦어버렸다. 채운에서 마 치 번개처럼 빠르게 날아온 두 가닥 검광은 오마와 칠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빨리 몸을 피했고, 또 영운일행도 한시바삐 현빙곡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끝까지 쫓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땅바닥에 동댕이쳐지자마자 곧 대지가 갈라지고 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어 서 마진 위에 강풍(强風)이 크게 일고 뜨거운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공중에는 머리와 다리가 잘린 무수한 시체가 모래와 뒤섞여 날리고 있었다. 오마와 칠마는 이미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머지 않은 전방에 두 덩이의 육괴가 떨 어져 있기에 아픔을 참고 다가가서 살펴보니, 한 덩이는 한쪽 팔인데, 적의 것인지 아군의 것인지 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나머지 한 덩이를 살펴보니 바로 <이마(二 魔)> 설평(薛萍)의 머리통이 아닌가! 깜짝 놀라 몸둘 바를 모를 때였다. 문득 머리 위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길래 후딱 쳐 다보니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도동(道童) 차림인 사람이 독룡존자를 옆구리에 끼고 서쪽으로 날 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보자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넋을 잃었다. 다음 순간 사태가 이미 글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황급히 요법을 빌어 꽁지빠지게 달아나고 말았다. 당시 능혼이 두 번째 나타났을 때만 해도 독룡존자나 허비랑은 별로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그 러나 적들이 모두 한 덩이 채운에 둘러싸여 도망가자 화가 머리끝지 치민 독룡존자는 먼저 손을 깨물어 선혈을 한 모금 머금고는, 진기를 모아 확 뿜어내었다. 그러자 이백여 장의 홍사가 뜨겁고 세찬 불꽃으로 변하여 채운을 향해 쫓아갔다. 그러나 능혼은 불꽃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급히 몸 을 숨겨버렸다. 마화(魔火)가 솟아오로는 순간의 시간은 정오를 지나고 있어서, 소원사 두 번승의 천마해체대법 은 이미 지, 수, 화, 풍을 발동하여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독룡존자는 화산이 뜨거운 불길과 광풍을 뿜어내며 천여 장 높이의 물이 용솟음치며 들이닥치는 것을 보자 비로소 다른 사람의 암산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 수, 화, 풍이 한 데 뒤섞이자 산이 무너지며 땅이 갈라졌다. 이어서 벼락치는 소리가 나면서 홍수가 일며 뜨거운 불꽃이 하늘을 찔렀다. 허비랑을 비롯해 비교적 실력이 높은 몇 사람은 재빨리 도망쳤지 만, 나머지는 모두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 지경에 이르러 요법으로 몸을 보호하며 이판사판으로 사생결단을 내려고 작정한 독룡존자는 문득 화산 위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한 도인이 손에 작은 기를 들고는 쉬지 않고 흔들어대는 광경 을 목격했다. 기가 가리키는 쪽으로는 한 덩이 오색 불빛이 튀어나가는데, 그 불빛에 맞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부상을 입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도인을 자세히 보니 방금 상화양을 대신하여 사문(死門)을 지키던 <독각령관(獨 角靈官)> 낙삼관(樂三官)인지라 분하고도 원통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자 기편 사람들은 이미 죽거나 부상을 입어 모두 도망가 버리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악이 치받친 독룡존자는 이것저것 생각지 않고, 입 속으로 주문을 외면서 혀 끝을 깨물어 한 줄 기 혈관을 낙삼관을 향해 뿜어내었다. 뻗어나간 혈관에 명중된 낙삼관은 작은 산봉우리에서부터 떨어져 내려 불바다 속으로 떨어져서 죽어버렸다. 그 산봉우리는 지휘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열화 와 홍수 위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독룡존자가 또다시 요법을 펼치려고 할 때였다. 별안간 한 가닥 푸른빛이 공중에서 내려오더니 빛 속에서 키가 큰 도동이 나타나 큰소리로 외쳤 다. "독룡, 이 천벌을 받을 놈! 우리 사문공(師文恭)사형의 목숨을 살려내지 못하겠느냐!" 말을 마치자 손을 펼치며 한 가닥 검붉은 광채를 독룡존자를 향하여 날려보냈다. 독룡존자가 힐끗 보니 바로 장령자의 득의제자 웅혈아(熊血兒)였다. 사정이 좋지 않게 돌아감을 알고 둔형법을 써서 슬그머니 도망가려고 하였지만, 이미 때가 늦어 혈관에 감겨버리고 말았다. 웅혈아는 독룡존자를 홍욕대(紅慾袋)에 무슨 물건처럼 담아가지고는 곧바로 챠이다무(紫達木河) 로 날아가 버렸다. 웅혈아가 가버린 후에 <괴규화> 능혼이 다시 그곳에 나타났다. 능혼이 어수선한 현장의 뒤처리를 하려고 할때, 별안간 또 한 가닥 금빛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오 며 한 백발노니가 나타났다. "능도우께서 계획하신 모든 일이 그대로 성사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빈니가 도우를 위해 마화를 제거해 드리겠습니다." 능혼이 보니 바로 <신니> 우담인지라 속으로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천서에 연마(煉魔)의 법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적지 않게 고생해야만 할 뻔했소이다. 지금 새 로 거두어들인 제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대사께서 불법을 펼쳐 도와주시겠다니 뭐라 감사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사실 도우의 법력이야 빈니의 열 배도 넘습지요. 하지만, 이교의 법보들은 앞으로 쓸데가 있으 므로 빈니가 거두어 보관하려고 합니다. 현빙곡에는 또 빈니의 한 제자가 위험에 처해 있고 아미 파도 훗날 몇 명의 후배가 조난을 당할 것인즉 모두 도우의 법보만이 그들을 구출할 수 있답니 다. 빈니는 아직 다른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군요." 말을 미치자 품속에서 두 개의 옥명을 꺼내니, 옥명 주둥이에서 금빛이 쏟아져 나와 수화풍뢰를 말아올렸다. 능혼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가 정말로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줄 알았더니 원래 다른 의도가 있었군. 좋소이다, 당 신 뜻대로 되게 해주겠소!" 말을 마치자, 발을 한 번 굴러 긴 무지개 같은 금빛으로 변하더니 그 수화풍뢰를 말아올렸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은 말아올리고 한 사람은 거두어들이니, 얼마 안 있어 그 엄청난 수화풍뢰가 거짓 말같이 옥명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우담대사는 수화풍뢰를 모두 거두어들이자 능혼에게 말했다. "도우께서 새로 선부를 개척하셨는데 이 작은 산봉우리는 이곳에 매우 어울리지 않으니 빈도가 돌려보내겠습니다. 훗날 다시 뵙도록 하지요." 그런 다음 입 속으로 진언을 외며 손을 번쩍 쳐들어 가리키니 그 산봉우리는 마치 무슨 거대한 힘에 이끌린 듯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러자 우담대사는 그 산봉우리로 날아 올라가서 능혼을 내려다보고 합장을 했다. 우담대사가 떠나자 능혼도 마궁으로 돌아갔다. 팔마 중에서도 <이마> 설평과 <팔마> 구령은 마진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으므로 풍뢰에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박살이 나버렸다. <삼마> 전청선(錢靑選)은 그중에서도 가장 교활하여 사태가 불리하자 먼저 도망을 쳤고, <사마> 이홍영(伊紅瓔)도 마진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대마> 황 수(黃繡), <육마> 여후에게 경고를 준 다음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그 여후는 윤중의 칼날 아래 죽었고, 황수는 장령자에 잡혀 청해 챠이다무로 끌려갔으며 <오마>와 <칠마> 두 놈은 검광에 부상을 입은 몸으로 허겁지겁 도망을 쳤던 것이다. 철통 같은 청라마궁은 수많은 요인들이 도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나절 내에 이렇듯 풍지박산 이 나버렸다. 이때부터 청라산은 <괴규화> 능혼이 주관하여 마궁을 새로 개조하여 따로 설산파(雪山派)를 개 설하게 된 것이다. 등팔고는 영운일행이 가고 얼마 안 있어 마음이 불안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즉각 겁수(劫數)가 빨리 닥쳐온 것을 알았다. 오문기(吳文琪), 사도평(司徒平) 두 사람은 <오귀천왕> 상화양의 적수 가 될 수가 없었다. 그 점을 잘 아는 등팔고는 문기에게 말했다. "빈도가 지금 마음이 별로 안정되어 있지 않으니, 생사존망이 이 일거(一擧)에 달려 있는 거나 같소. 상화양은 여간 무서운 인물이 아니랍니다. 사도 도우는 필경 허비랑이 죽이려고 할 것이므 로 우선 숨을 곳을 찾아놓아야 해요. 나의 설혼주는 내 개인의 존망과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훗 날 정사(正邪) 두 교(敎)의 흥쇠와도 관계가 있다오. 잠시 후에 적이 오더라도 도우는 오로지 동 굴 밑에서 옥갑만 지키고 있어야 하오. 내가 적에게 무슨 모욕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만약 이 구슬이 날아 돌아오면 나의 원신(元身)은 이미 구슬과 합일(合一)된 것이니까, 도 우는 절대로 나의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말고 이 구슬만 지켜야 하오. 동굴 밖에는 내가 미리 법술을 써놓았으니, 적은 단시간 내에 문을 찾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지킬 수 없다고 느껴지면 이 구슬을 머리 위에 받쳐든 다음 검광을 타고 아미산으로 달아나시오. 이 구슬은 자체 내에 교묘한 작용이 있으므로 창졸지간(倉卒之間)에 적이 탈취하기는 어렵답니다. 하지만 이 방법 은 정 어쩔 도리가 없을 때만 사용해야 해요. 이 구슬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빈도의 한 몸은 아 무것도 아닙니다." 문기는 말했다. "이 구슬이 이처럼 중요하고, 상화양이 그토록 대단하다면 도우께서는 왜 잠시 다른 곳으로 피 신하지 않으시죠? 오시만 넘길 수 있다면 여러 도우가 돌아올 텐데요. 그때 힘을 합쳐서 물리치 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도우가 모르는 말씀이오. 첫째는 겁수가 눈앞에 있으므로 도망갈 수 없답니다. 둘째로 빈 도는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상태라 신체가 반쯤 죽어 혈기가 모두 얼어 붙지 않았겠소. 더구나 이 미 이 지경이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가령 천부의 영단이 있다고 해도 본래로 돌아가기 어 렵답니다. 적의 마화는 심장이 다시 따뜻하게 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가 있어요. 그 마화는 매우 지독한 고로, 시간이 지체되면 몸이 잿더미로 변하게 된답니다. 내가 입구에 법술을 펼친 것은 모 두가 단지 시간을 끌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오. 사실 상화양의 마화금종(魔火金鐘) 하나쯤이야 설 혼주로써 깨뜨릴 수 없진 않아요. 하지만 듣건대 그가 또 백골쇄심추(白骨鎖心鎚)를 연마하였는데 매우 대단하다고 합니다. 나는 그의 마화를 이용하여 몸의 혈기를 되살리기 위해 잠시 설혼주를 이용하지 않을 작정인 거요. 그러나 시간이 되면 설혼주를 쓸 것이며, 그때 그는 필히 백골쇄심추 를 사용할 것이니, 그러면 나는 겁수를 피할 수 없게 되는 거라오." 등팔고는 재삼 당부를 하고 나서, 먼저 사도평을 계곡 위 작은 굴 안에 숨기고는 은형부(隱形符) 로 신형(身形)을 감추어 버렸다. 오시가 가까와지자 급히 문기에게 동굴 밑으로 숨으라고 한 등팔고는 혼자 반석 위에 앉아 법술 을 펼쳤다. 그러자 안개가 뭉게뭉게 일어나 위쪽을 빈틈없이 가려버렸다. 막 설치를 마쳤을 때, 갑자기 위쪽 짙은 안개 속에서 열몇 가닥의 붉고 푸른 광채가 번쩍였다. 자기의 법술로는 도저히 적이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가능한 한 잠시라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만약 정오까지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구원병이 도착할 때쯤에 적의 마화를 몸 가까이 오게 하여 겁수를 벗어날 작정이었다. 그러나 <오귀천왕> 상화양은 생각보다 더욱 강한 적이었다. 그는 밑에 짙은 안개가 마화를 막 는 것을 보자 입 속으로 진언을 외며 오행진기를 뽑아올렸다. 이어서 마화금종을 뿜어내니, 다섯 가닥의 빛깔 있는 불꽃이 안개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러자 마치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불꽃 이 닿는 부위의 안개는 점점 줄어들었다. 등팔고도 결코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적의 마화가 대단함을 보자 주문을 더욱 급하게 외었다. 그 짙은 안개는 마치 증기처럼 반석 위에서부터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위에 있는 안개 를 없애고 나니 밑에서 또 안개가 솟아오르자, 상화양은 발끈 화를 내었다. 마화금종이 번쩍하자 마자 괴상한 소리를 한 번 지르고는 몸을 한 덩이 붉은 구름으로 변화시켜 안개 속으로 곧장 날 아 들어갔다. 그렇게 안개 속을 두 번 뒤집고 돌아다니자 자욱하던 안개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등팔고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급히 안개를 진하게 엉기게 하여 자기가 깔고 앉은 석대를 감싸 보호하였다. 그때 상화양이 몸을 나타내며 안개 속에 있는 등팔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등팔고! 좋은 말로 할때 설혼주를 내놓아라. 그러면 마화에 잿더미가 되어 영원히 전겁(轉劫)을 하지 못하는 것은 면하게 해주리라!" 등팔고는 그가 악랄하기 그지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설혼주를 끝까지 지킨다면 아미 이운 (二雲)의 힘을 빌어 탈겁(脫劫)할 희망이 있고, 가령 사세 부득하여 설혼주를 탈취당한다 하더라 도 누군가가 자기를 대신하여 복수를 해줄 것이다. 설령 설혼주를 고분고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어디 온전히 자기를 살려줄 상화양인가. 등팔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꾸짖었다 "상화양, 그대는 명색 마교의 종주(宗主)라고 하면서 남이 위험한 틈을 이용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나 등팔고는 비록 몸은 이미 반이 죽었지만 아직은 그대에게 꿇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설혼주가 내 손에 있으니, 만일 내가 그대의 독수에 당한다고 해도 그대는 가져갈 수 없으리라." "닥쳐라. 이 더러운 계집년!" 호통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상화양은 팔고를 향해 마화금종을 곧장 날렸다. 팔고를 둘러싸고 있던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화가 '확!' 끼쳐오자 등팔고는 불현듯 몸에서 열이 나는 듯하였다. 마화는 삽시간에 팔고의 온 몸을 둘러쌌다. 등팔고는 비록 설혼주에 의지하여 호신을 하고 있으니 목숨을 잃을 지경에는 도달하지 않았지 만, 이미 전신에 불이 붙는 듯 뼈마디마다 통증이 왔다. 마음 속으로 기쁘기도 하고 겁도 났다. 육신이 이미 통증을 느낄 수 있으니 몸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기뻤고, 상화양의 마화는 귀풍곡의 홍의번승이 사용했던 마화보다 열 배나 더 독하여 시간이 약간만 지연되어도 몸 이 잿더미로 변할지 몰라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는 잠시 설혼주를 사용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상화양이 교활한 도둑놈이 설혼 주가 마화금종의 극성(剋星: 상극인 물건)인 줄을 알면서도 이 법보를 사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 아 필시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설혼주 사용을 단념해 버렸다. 그렇지만 영운 일행이 아직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견뎌낸단 말인가, 육신을 포 기한 채 원신만 동굴 밑으로 날려보낼까 생각해 보았지만, 모처럼 지독한 고생을 하고서 잠시 동 안의 핍박을 못 참아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덜미를 잡혔다. 이래저래 그녀는 망설이 고 또 망설였다. 상화양은 원래 자기의 마화금종이 설혼주와 만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감히 심하게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등팔고가 만일 견디지 못하고 설혼주를 꺼내기만 하면 금종을 포기하고 몸을 홍운(紅雲)으로 변화시켜 재빨리 설혼주만 빼앗아 달아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등팔고가 도저히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서도 설혼주를 꺼내지 않자, 아미파 사람이 이미 설혼주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럭 일어났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 없이 분노가 치밀었다. 상화양은 한번 몸을 떨어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버렸다. 그리고는 마화 금종을 위로 밀어젖히더니 두 손을 땅에 짚고 물구나무를 섰다. 이 광경을 본 등팔고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뿔싸! 좋지 않구나!" 그녀가 외치자마자, 상화양은 이미 몸에서 시퍼런 불꽃을 뿜어내며 그녀에게 덮쳐들었다. 등팔고는 성화양이 최근에 마화를 이토록 무서운 경지까지 연마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 다. 상황이 이토록 긴박함을 보자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설혼주를 꺼냈다. 설혼주는 밝은 등불처럼 금빛을 번쩍이며 등팔고의 몸 위로 둥실 솟아올랐다. "이크!" 상화양은 설혼주가 나타나자 놀라면서도 입이 찢어지게 기뻤다. 그는 신형을 훌쩍 변화시켜 앞 으로 달려들면서 잽싸게 설혼주를 나꿔채려고 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갑자기 공중에서 귀청 떨어지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지한 요괴 같으니! 어디서 감히 날뛰고 있느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뢰소리가 세 번 울리며 수십 가닥의 금빛이 곧바로 상화양을 향해 쏟 아져 내렸다. 동시에 묘령의 비구니 하나가 손에 두 개의 금발(金拔)을 들고 날아 내려오고 있었 다. 우뢰소리를 동반한 금사(金蛇)가 어지럽게 마화 속으로 쳐들어갔다. 설혼주가 등팔고의 다년간 수련에 의해 이미 그녀의 심신(心身)과 서로 합쳐진 줄 상화양이 알 았을 까닭이 없다. 게다가 그는 빼앗아 달아날 궁리만 했지 구원병이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언뜻 내려치는 금빛 번갯불을 보니 이 법보가 바로 <신니> 우담의 <복마뢰음발 (伏魔雷音拔)>인지라 가슴이 뜨끔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상대를 눈여겨보니 바로 옥청사태 그녀였다. '망할 계집년! 하필 이런 때에.....' 몹시 원망스러웠고 겁도 더럭 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다년간 고련(苦煉)한 법보를 믿고 사생 결단을 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벌거벗은 몸을 땅에 한 번 굴린 다음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과연 상화양의 마화는 대단했다. 우뢰소리와 번갯불이 쏟아져 내려와 그를 겹겹이 둘러쌌지만, 마화홍운을 흩뜨리지는 못했다. 그는 마화홍운 속에서 옥청대사를 가리키며 입에 담지 못할 소리 로 욕을 퍼부었다. 옥청대사가 상화양을 제압할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영운일행이 채운을 타고 돌아 왔다. 영운이 보아하니 등팔고는 다만 육체만 남아 석대 위에서 두 눈을 감은 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옥청대사는 상화양과 싸우고 있었다. 주문은 재빨리 보경을 꺼내들고 광채를 홍운 속으로 쏘아보냈다. 자령이 급히 외쳤다. "모두들 마화에 비검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우리 자매가 요마의 목숨을 거두어들일 테니까." 자령자매는 미진기를 번쩍이면서 마화홍운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먼저 한악(寒顎)이 손을 쳐 드니 한 덩이 홍광(紅光)이 상화양을 향해 날아갔고, 이어서 자령도 백미침을 날렸다. 상화양은 마화홍운 속에서 기고만장하여 날뛰다가, 별안간 채운이 흩어지는 곳에 아까 보았던 젊은 남녀 애물단지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자 마진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크! 이거 큰일났구나!" 어물거려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한 상화양이 도망갈 방법을 미처 생각하기 전에 두 여인이 작은 기를 번쩍이더니 한 덩이 채운으로 변하여 들이닥쳤다. 마화홍운이 이들을 막아내지 못하는 것을 보자 상화양은 이를 악물고 몸을 굴려 한 덩이 불덩이로 변하여 하늘을 뚫고 도망쳤 다. 실로 눈 깜짝할 순간의 잽싼 몸놀림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화양도 어쩔 수 없이 자령의 백 미침 한 방을 맞고 말았다. 이처럼 상화양을 물리쳐 쫓아버린 영운은 옥청대사에게로 다가갔다. 영운은 옥청대사에게 등팔 고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옥청대사가 말했다. "은사께서는 그녀가 겁(劫)을 만날 것을 알고 계셨다오. 그녀가 열심히 수련한 것을 가련히 여기 신 은사께서는 특별히 소승에게 뇌음발을 가지고 가라고 명령하셨답니다. 하지만 약간 늦고 말았 군요. 팔고는 상화양의 마화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몰랐던 거예요. 몸으로 마화를 시험하지 말고 진작에 설혼주를 꺼내 막아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어요. 지금 그녀는 한 조 각 심장만 설혼주의 보호를 받아 부상을 입지 않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마화에 당했으니 걱정 이에요. 삼 시진 안에 온몸의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할 것입니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끝까지 버틴 마화에 원신도 거의 다 소모되었습니다. 방금 소승이 도착했을 때 몸을 설혼주와 합일시켜 동굴 안으로 피했으니 보주(寶珠)의 도움으로 아직은 큰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급박하게 되었어요. 어물거리다가는 원상회복이 불가능해집니다. 은사께서는 말씀하셨지요. 그녀를 구하려면 능진인이 새로 얻은 구천원양척과 취백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능진인은 비록 이파는 아니지만, 우리 후 배들은 그분과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고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훗날 문호를 창설할 때, <아미 이운>의 도움이 꼭 필요하므로 영운, 경운 두 도우께서 신속히 달려가서 사정하면 보물을 빌려줄 거예요. 가서 능진인께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선단은 두 알만 달라고 하고, 원양척은 또 곤경에 빠진 아미파 사람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잠시 동안 돌려드리지 못한다고 말이죠. 공손하 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영운과 경운은 아미파 사람이 또 곤경에 빠졌다는 말을 듣자 매우 놀랬다. 상황이 긴박한지라 머뭇거릴 수가 없어, 즉시 검광을 타고 청라로 날아갔다. 그래서 얼마 후 두 사람은 구천원양척과 취백단을 얻어 돌아왔던 것이다. 옥청대사는 먼저 법술을 써서 반석을 옮겨 놓은 다음 주문더러 보경을 가지고 길을 인도하라고 지시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이윽고 혼자서 두 손으로 옥갑을 받쳐들고 있는 문기가 보였다. 문기는 옥청대사가 온 것을 보자 매우 기뻐하며 다가왔다. 옥청대사는 문기로부터 옥갑을 받아 들고 동굴을 나왔다. 문득 문기는 한악의 표정이 매우 안절부절인 것을 보고는 사도평이 보이지 않는 까닭임을 알아차렸다. 옥청대사는 영운에게 구천원양척의 사용법을 물어보고는 영운에게 당부하였다. "원양척을 들고 반석을 똑바로 보고 있으세요. 만약 설혼주가 날아나오면, 원양척으로 설혼주 밑 에 있는 검은 그림자를 기리켜 팔고의 진령(眞靈)이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경운에게 옥갑을 주면서 들고 있으라고 했다. 두 알의 취백단을 가지고 반석 앞으로 걸어간 옥청대사는 먼저 영단을 하나씩 양손에 갈라진 다음 손바닥을 등팔고의 용천혈(湧泉穴)에 다 대고 가볍게 눌렀다. 눈을 감고 정신을 모아 진기를 두 손바닥으로 보내여 등팔고의 용천혈로 영단이 빨려 들어가게 했다. 사람들이 보니 옥청대사의 두 손이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나 손을 떼자 영단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금히 몸을 돌린 옥청대사는 경운에게서 옥갑을 받아들더니, 나머지 사 람들에게 각자 검광을 뻗쳐올려 비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계곡 입구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그런 후에 영운에게 주의를 주고는 자기는 가부좌를 틀고 영운 앞에 앉았다. 옥갑을 들고 낮은 소리로 축언을 왼 뒤에 진언을 소리내어 읽자, 잠시 후 옥갑 안에서 깎은 등불 같은 광채가 날아 나왔다. 그 밑에는 동그란 검은 그림자가 매우 천천히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고 있었다. 영운은 지체하지 않고 구천원양척으로 검은 그림자를 가리키며 입 속으로 아홉 자의 영부(靈符) 를 외었다. 그러자 원양척 위에 아홉 개의 금화(金花)와 한 가닥 보랏빛 기운이 날아오르며 그 검 은 그림자를 둘러쌌다. 그러더니 영운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등팔고의 육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등팔고의 몸에서 열기가 솟아오르며 안색이 점점 불그스름해졌다. 그제서야 옥청대사는 영운에게 원양척을 거두어들이라고 하고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등팔고는 영단법보도 갱생(更生)을 하였지만, 아직은 잠시 동안 복원을 할 수 없으니 누군가가 지켜야 할 것입니다. 지금 아미파에 일이 생겼으니, 조, 도, 유, 조 여러 도우께서는 청라로 가시 고 철사진인과 황도우께서는 동해로 가십시오. 그외 나머지 도우들도 즉시 떠나시기 바랍니다. 팔 고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아미파에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부터 즉시 돌아가지 못해 내심 안달하던 영운은 자령에게 미 진기를 써서 빨리 돌아가자고 부탁하였다. 그때 문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분들은 집에 돌아갈 생각만 했지, 빠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신경도 안 쓰는군요."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서야 사도평이 없는 것을 알았다. 영운이 문기를 보고 말했다. "허비랑이 와서 사도도우를 괴롭힐까 봐 어제 팔고에게 은신법을써서 그를 숨겨 달라고 부탁했 었지. 지금 팔고께서 아직 복원이 안 되었고, 네가 이곳에 남아 있었으니 있는 곳을 알 것 아니 냐? 빨리 가자꾸나!" 문기가 대답을 하려고 하자, 옥청대사가 급히 다가와 말했다. "소승이 팔고를 구하기에 바빠 사도평도우의 행방을 말하지 않았군요. 소승이 도착하기 전에 팔 고는 사도도우를 언덕 위에 숨겨 놓고 은형법를 써서 봉쇄해 놓았어요. 본래는 매우 안전했는데, 정파도 사파도 아닌 대단한 인물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밑에 짙은 안개가 가득한 것을 보고는 누 군가가 법술을 써놓았다는 것을 알고 내려와 살펴보았지 뭡니까. 은형법도 그를 속일 수는 없었 어요. 상화양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입니다. 그 인물은 평소에 다른 사람이 자기한테 집 적거리지만 않으면 자기도 건드리지 않는 성미라 상화양에게 상관하지 않았답니다. 그는 사도도 우의 뛰어난 자질이 매우 마음에 든 거예요. 상화양의 마화가 너무나 대단하여 밑에 있는 사람이 결코 적수가 되지 못하리란 것을 알자, 그는 사도도우를 무산(巫山) 영양봉(靈羊峰)의 구선동(九 仙洞)으로 데려갔답니다. 삼월 이내에 돌아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 사람이 팔고 의 은형법을 풀고 사도도우를 데리고 가려고 할때 진도우의 선금(仙禽)이 청라산에서 돌아오다가 보고 주인을 구하려 덤벼들었지 뭡니까. 다행히도 그때 사부님과 내가 도착하였지요. 사부님은 진 도우의 선금이 그 사람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금이 부상을 입을 염려가 있고, 또 얼마 후 데려다 써야 할 곳이 있었으므로, 사부님은 선금을 데리고 가서 영단으로 횡골화(橫骨化) 시키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선금에게 오룡전(烏龍箭)을 날려 매우 위급한 순간 이었지요. 사부님께서는 암암리에 법력을 펼쳐 선금을 구하고 또 그 오룡전까지 거두어들였답니 다. 그런 후에 소승의 동문인 제하아(齊霞兒)에게 선금을 타고 산으로 돌아가라고 분부하셨어요. 아무리 길어도 일 년 안에는 돌려드릴 것입니다. 그때는 선금이 이미 횡골화 되었기 때문에 지금 보다 훨씬 영통(靈通)할 거예요. 두 분 도우께서는 언짢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요." 자령자매는 옥청대사의 말을 듣자 비로소 마음을 놓고,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했다. 모두들 즉시 옥청대사 등과 작별을 한 후 자령의 미진기를 사용하여 한악, 영운오누이, 경운, 문기 등은 한 덩이 채운으로 변하여 곧장 아미로 날아갔다. 그러면 구지선은 응벽애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영운일행, 이어서 이영경(李英瓊), 신약란(申若蘭)이 신조를 타고 뒤따라 청라로 가버리자 구지선 은 혼자 남았다. 지선은 응벽애가 비록 동천복지며 법술로 봉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는 검술을 배운 지 얼마 안 되는데 혹시라도 사고가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다. 때문에 이영경과 신약 란에게 가지 말라고 애걸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들뜬 두 사람에게 먹혀들어 가지 않는지라, 하는 수 없이 신약란으로부터 목석 잠종은영법(木石潛踪隱影法)을 전수받고, 또 운무기(雲霧旗)를 받아 만일에 대비하였다. 영경, 약 란이 신바람이 나서 신조를 타고 가는 것을 멀리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서글퍼졌다. 그녀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스스로 자기를 위로했다. '만약 그 요사스던 놈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기껏해야 아무 남자와 결혼하여 살다가 늙어 죽 고 말겠지. 어떻게 이런 선산복지에서 신선들과 같이 검술을 배울 수가 있었겠는가? 나는 이미 요인에게 몸을 더럽혔고 자질이 좋지 않은 데도 아무도 나를 경멸한 적이 없었어. 게다가 영경과 약란이 떠날 때 법술을 전수해 주었고 법보도 주었으니, 마땅히 흡족해 해야지 궁상을 떨다니 될 법이나 한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비로소 마음이 밝아졌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검술을 연마하였다. 또 약란이 전해준 법술을 한 차례 연습한 후에 안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기를 연마하였다. 비록 약간 고독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런 대로 견딜만하였다. 단오절은 아직도 며칠이나 남아 있었다. 모두가 함께 있을 때는 온 산을 마음대로 돌아다녔지만, 지금 혼자 남아 있으니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응벽애 앞에서 검술을 연습하는 것 이외에는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성성이인 원성이 과일을 따러 갈 때도 혹시나 사고가 생길까 봐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라고 거듭 당부할 정도였다. 원공의 세 자루 보검 麗雪噴珠 臨流照影 飛芒拏電 古洞藏珍 어느날, 연습을 마치자 문득 무료하다고 느낀 구지선은 원성을 불러 같이 응벽애 뒤쪽 우뚝솟은 높은 산봉우리 밑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 작은 산은 홀로 우뚝솟은 단봉(單峯)인데, 비천(飛泉)이 폭포를 이루어 그 소리가 마치 선악 (仙樂)같이 들렸다. 태원동 맞은편에 작은 산봉우리와 함께 모두들 상의를 하여 이름을 지었는데, 하나는 선뢰정(仙賴頂)으로, 하나는 옥향석(玉響石)이라고 불렀다. 여자들은 심심할 때면 금선을 떨쳐버리고 선뢰정으로 가서 목욕을 하곤 하였다. 시절은 마침 여름이 가까운 무렵이라 동천복지의 풍광이 더욱 돋보였다. 지선은 평소 동료들이 날아서 오르락내리락하며 목욕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부러워했었다. 자기는 재주도 없고 또 여 러 가지 고민도 많아, 평소 다른 사람처럼 활발하게 웃지도 못했었다. 항상 동료들이 응벽애에서 검술을 연마하는 틈을 타서 원성을 가만히 불러 그녀 대신 망을 보게 하고는 혼자 태원동 맞은편 에 있는 옥향석 뒤쪽 으슥한 곳으로 가서 옷을 벗고 홀로 목욕을 하곤 하였다. 때문에 선뢰정에 는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봉우리 밑에 다다랐을 때 원성이 지선에게 말했다. "구아가씨, 아가씨? 여기에서 놀고 계세요. 나는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위로 올라가 목욕을 좀 할까 해요." 원성은 원래가 암성성이였다. 사람의 말을 할 줄 알고 난 후부터 사람의 행동을 배워 부끄러워 할 줄도 알았다. 지선은 일이 없을 때 그녀의 옷을 몇 벌 고쳐 원성에게 입혀주었다. 원성은 좋아 서 어쩔 줄 몰랐고, 그래서 주인인 이영경을 제외하고는 지선에게 가장 충실하게 대했다. 지선도 원성을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은 자기 주인과 동료들이 모두 선뢰정으로 가서 목욕하는 것을 본 원성이 자기도 따라서 첨벙 물에 뛰어들었다. 이 꼴을 본 영경이 벌컥 성을 내면서 '온몸이 털이 북실북실 돋은 게 물 을 더럽힌다'고 욕을 하며 때리려고 하였다. 다행히 지선이 동료들과 함께 웃으면서 말리는 바람 에 원성은 얻어맞지는 않았다. 그런 원성이 오늘따라 또 목욕을 할 낌새를 보이자 지선은 웃으면서 말했다. "너 벌써 저번 일을 잊었니? 너의 주인이 돌아와서 너를 때려도 나는 말려주지 않을 거야!" "아가씨는 마음씨가 좋아 일러바치지 않을 거예요. 사실은 목욕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답니다. 목욕이야 어디선들 할 수 없나요 뭐. 내가 비록 짐승이지만 가본 곳은 매우 많고 기이한 경치를 적지 않게 보아왔어요. 그렇지만 여지껏 우리 응벽애 이 작은 산봉우리외 태원동 앞쪽 골짜기 속 에 있는 바윗돌처럼 괴이한 것을 본 적이 없어요. 특히 선뢰정이 봉우리는 평원에 홀로 우뚝 솟 아 있으면서 시냇물 폭포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잖아요. 이 물이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지 아 직 아무도 모르지요? 저번에 내가 올라가보니 꼭대기에 사방 너비가 삼사 장쯤 되는 웅덩이가 있 습디다. 깊이는 겨우 서너 자 정도밖에 안 되는데, 빙 돌아가며 또 두 자 정도 높이의 가장자리가 있어서 마치 천연으로 만들어진 욕탕 같더라니까요. 그 물은 달고도 시원했어요. 나는 손발로 밑 바닥을 더듬어 보았지만 구멍이라고는 없었어요. 그 물은 본시 언덕 옆에 툭 튀어나온 용석(龍石) 위에서 흘러 내려와 그 웅덩이에서 다시 수십 갈래로 갈라져 폭포처럼 밑으로 흘러내리는 거예 요. 이번에는 용석 위로 뛰어올라 가서 살펴보니 더욱 괴상하더군요. 그 용석은 밑에서 보면 마치 응벽애와 붙은 것처럼 보이지만, 위에 올라가서 보면 서로 붙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돌 색깔도 같지 않아요. 응벽애는 회백색과 붉은색이 섞여 있지만, 용석은 아래위가 모두 거무스름하거든요. 그곳도 아래의 웅덩이와 흡사한데, 동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물이 그쪽 모서리로 흘러내려 이 삼 장 굵기의 폭포로 변하여 아래쪽 웅덩이로 떨어지는 거죠. 내가 수원(水源)을 찾고 있을 때 불 노가 보고는 주인님에게 고해 바치는 바람에 욕을 한바탕 얻어먹었지요. 나는 처음에 불노가 왜 주인님께 고해 바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며칠 후에 점점 불노의 말을 알아듣게 되자 불노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답니다. 불노는 처음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가 몇 번이나 캐묻자 비로소 대 답을 해주었습니다. 이 산봉우리와 태원동 맞은편의 옥향석은 여러 가지 비밀이 있으나 지금은 주인님에게도 말을 할 수 없으며, 앞으로 기연(奇緣)이 닿으면 저절로 알게 될 거라고 하지 않겠 습니까. 불노는 백미선사(白眉禪師)를 따라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자세히 알고 있는가 봅디다. 불노는 또 자기는 백미선사의 법지를 받들어 첫째로 주인님을 보호하고, 둘째로는 이 봉 우리를 지킨다고 하면서, 만일 내가 다시 또 몰래 올라간다면 주인님에게 고하지 않고 자기의 발 톱으로 나를 잡아죽이겠다지 않아요. 나는 불노를 당해내지 못하는 데다가 불노의 감시가 심하여 그 이후로는 감히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답니다. 나는 밤마다 그 용석이 있는 선뢰정 꼭대기에 서 보광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빛과 달빛이 서로 비치는 것이라 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결코 물빛이나 달빛이 아니라 보광이 틀림없어요. 나는 본시 이 사실을 주인님에게 말하려고 했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직접 보배가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아 가씨를 통해 주인님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구나 싶더군요. 그러면 불노의 체면도 깎이지 않고, 주 인님과 다른 선고들도 모두 좋아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올라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가씨는 내가 보배를 찾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지선은 원성의 말을 듣자 호기심이 생겨 같이 올라가 보고 싶어졌다. 원성은 높은 곳을 잘 올라 가니 말할 필요도 없고, 지선도 여러 사람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아직은 기를 타고 날아다닐 수는 없지만 경신술은 이미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선뢰정은 열몇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용석은 그보다 더 높긴 하지만 원성이 도와주면 오르기에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 되었다. 그래서 즉시 원성과 함께 겉옷을 벗었다. 지선은 속옷차림인 채 폭포 밑을 통과하여 선뢰정 봉우리 아래로 갔다. 원성의 부축을 받으며 꼭대기로 올라가 보니 과연 원성이 말한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처음에는 선뢰정의 욕탕처 럼 생긴 웅덩이가 용석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의해 패인 걸로 여겼다. 그러나 다시 그 가장자리를 살펴보니 폭이 균일하여 마치 인공으로 만든 것 같았다. 웅덩이 안 으로 들어가 속옷마저 벗어버리고 물이 떨어지는 곳으로 가서 목욕을 했다. 입을 벌려 물을 한 모금 마셔보니 여간 달고 시원하지 않았다. 원성은 목욕에는 관심이 없는지라 몸을 구부려 손으로 이곳저곳을 더듬더니, 얼마가 지나자 일 어서면서 지선에게 말했다. "여기에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군요. 물의 근원인 용석 위로 올라가 봅시다." 지선은 이때 머리를 들고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용석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폭포는 마치 옥룡이 나르는 듯, 은하가 쏟아져 내리는 듯하였다. 자신은 근력이 약하므로 폭포 바 로 밑에서 물을 맞지 않고 이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었지만, 그래도 무수한 옥구슬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목욕을 하면서 사방의 선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귓가에는 폭포소리와 수십 갈래의 가는 폭포가 산봉우리 아래 바위 위로 떨어져 나는 소리가 어울려 마치 선악(仙樂)을 연주하는 듯하였 다. 그때 원성의 목소리가 폭포소리에 섞여 들려왔지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원성이 다가와 서 손짓 발짓까지 보태어 떠들었을 때에야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있었다. 올라가자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그 용석은 응벽애와 붙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떨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 다. 위로 올라가 보고서야 두 곳은 약 칠팔 장 정도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폭포의 근원 인 용석만 마치 용대가리처럼 선뢰정 꼭대기 위에 툭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 용석은 사면이 칼로 자른 듯 만듯하고 이끼가 덮여 있어서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다. 지선 은 처음과는 달리 약간 겁이 나면서 용기가 절반으로 꺾였다. 원성은 지선의 표정을 보고서 말했다. "이곳은 아가씨는 고사하고 나도 올라갈 수가 없어요. 나는 그저 아가씨를 이 선뢰정 위까지만 모시려고 했던 겁니다. 아가씨가 정 올라가 보고 싶으시면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내가 다시 내 려가서 응벽애로 올라가, 그곳에서 이곳으도 뛰어넘은 후에 등나무 덩굴을 내려서 올라오게 해드 릴 테니까요." 지선은 그 말을 듣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성은 곧 선뢰정을 내려가 먼저 긴 등나무 덩굴을 구한 뒤에 응벽애 꼭대기로 올라갔다. 두 곳은 육칠 장 정도 떨어져 있고, 또 등나무 덩굴 마저 가지고 있었는 데도 원성은 가볍게 뛰어넘어 갔다. 폭포 왼쪽 근방에서 적당한 곳을 골라잡은 원성은 등나무 덩굴을 내려보냈다. 지선은 몸을 솟구 치며 등나무 덩굴을 잡고 힘겹게 기어 올라갔다. 이윽고 위에 올라가 보니 물이 나오는 곳은 마 치 호로병을 절반으로 잘 빚어놓은 듯하였고, 물은 호로의 손잡이가 되는 부분으로 흘러내려 밑 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래쪽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우뢰소리 같았으나 왼쪽의 물흐름은 도리어 조용했다. 만약 물 이 떨어지는 부분의 물흐름이 다른 부분보다 조금 빠르지만 않다면, 이곳이 수원(水源)이란 것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수원의 면적은 선뢰정의 웅덩이만큼 크지는 못했지만 수심은 약간 더 깊었 고, 수온은 뼈가 시리도록 차가왔다. 원성은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지선이 무얼 찾느냐고 물었다. "아가씨는 조금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세요? 보세요, 이렇게 굵은 폭포의 근원인 곳의 물이 이렇게 조용히 흐르고 밑바닥에도 마치 벽옥처럼 물구멍도 없으니 이상하지 않아요? 만약 이곳에 숨겨 놓은 보배가 없다면 아가씨는 제 눈을 뽑아버리세요." 지선이 웃으면서 말했다. "설사 보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 석봉(石峰)이 선뢰정보다도 더 크고 보배는 깊숙이 안에 있을 텐데 어떻게 꺼낼 수가 있겠니? 이 봉우리는 이곳의 선경이니 가령 깨뜨릴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 도 감히 깨뜨릴 수가 없는 거야. 선경을 망치면 언니들은 물론이고 교조님의 벌을 받게 될걸." "그런 것이 아니에요. 무릇 동천복지 안에 남겨 놓은 선불(仙佛)의 보배는 얼른 생각하기에는 얻 기가 매우 어렵지만, 정말 선연이 있으면 의외로 쉽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조만간에 보배의 근 거들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만약 한두 가지의 보배를 찾으면 주인님과 아가씨에게 나누어 바쳐 지금껏 따라다니며 받은 은혜에 보답하겠어요." 말을 마치자 또 물 속으로 들어가 더듬어 찾았다. 그러나 해가 저물 때까지 열심히 찾았어도 아 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지선도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찾아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발 바닥이 너무나 차가와서 원성더러 내려가자고 재촉하였다. 내려갈 때는 올라올 때보다 쉬웠다. 올 라올 때의 길로 갈 필요없이 그냥 용석에서 응벽애로 뛰어건너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원성이 먼저 뛰어 건너간 후에 지선은 등나무 덩굴을 꽉 잡고 맞은편으로 몸을 날려 건너갔다. 지선은 원성더러 선뢰정으로 가서 옷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지선은 동굴로 들어가서 마른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동굴을 나와 동굴 앞에 앉아 있었다. 원성이 가더니 과일을 따가지고 왔다. 둘이 과일을 먹으며 재잘재잘 재미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 는데, 별안간 한 덩이의 채운이 공중에서 날아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지선은 이런 채운을 본 적 이 없었는지라 황망히 입으로 진언을 외웠다. 목석잠종법을 써서 숨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채 숨기도 전에 채운이 흩어지며 네 사람의 아리따운 젊은 여인과 한 젊은이가 나타났 다. 젊은이는 바로 금선이었고, 네 여인 중에 두 사람은 이영경과 신약란이었으며 나머지 두 여인 은 전혀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불상사인가! 영경과 약란은 이미 인사불성의 상태인 것이다. 지선이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금선이 그녀에게 말했다. "약란, 영경 두 사매는 요법의 독에 중독되었어요! 이 두 분은 새로 입문한 진자령, 진한악사저 입니다. 빨리 원성과 같이 두 사저를 도와주세요. 나는 또 육지(肉芝)를 찾아 피를 얻어야 하니 까." 그리고 나서 금선은 황급히 응벽애 뒤쪽으로 뛰어가 버렸다. 지선이 큰소리로 외쳤다. "금선사제, 돌아와! 육지는 그곳에 없단 말이야. 방금 옥향석 위에서 배월(拜月)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가봐!" 금선은 지선의 말을 듣자 몸을 돌려 태원동 쪽으로 달려갔다. 원성은 주인이 부상을 당한 것을 보자 어쩔 줄을 몰라 눈물을 글썽이며 진씨자매와 지선의 뒤를 따라 굴로 들어갔다. 영경과 약란은 입을 꽉 다물고 있었고, 얼굴은 검보라빛으로 물들었으나,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했다. 자령은 상황이 긴급하였으므로 두 환자를 석상(石床)에다 눕히고는 바로 지선에게 물었다. "아가씨가 바로 영운언니가 말하던 구사저로군요? 이 두 분은 너무 심하게 중독되어, 오풍주가 없으면 구할 수가 없어요. 그들은 지금 말을 할 수 없답니다. 아가씨는 오풍주가 있는 곳을 아시 죠?" 지선이 대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원성은 오풍주란 말을 듣자마자 번개같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곧 오풍주 병을 가지고 나왔 다. 자령은 오풍주 병을 받아들더니 한악더러 문 밖에 가 금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망을 보라고 시켰다. "왜 하필 나만 가라는 거지?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지선이 원성더러 나가라고 하자, 원성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가씨가 좀 나가주세요! 나는 주인님이 어떤가를 봐야겠어요!" 지선은 그가 주인을 몹시 걱정하는 것을 보자 하는 수 없이 대신 나갔다. 자령은 즉시 두 환자의 옷을 홀랑 벗겼다. 그리고는 오풍주가 담긴 병 뚜껑을 열자 금세 온 방 안에 이상한 냄새가 가득찼다. 한악이 말했다. "이 선주(仙酒)는 어째서 이토록 냄새가 지독하지?" "이것은 원래가 이독공독(異毒攻毒: 독으로써 독을 제압한다)이니 손에 묻지 않도록 조심해라. 무슨 헝겊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원성이 이 말을 듣고는 급히 자기 옷을 찢어 자령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날듯이 밖으로 뛰어나 가더니 잠시 후에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왔다. 자령이 옷조각을 나뭇가지에다 칭칭 동이자, 원성은 곧장 뛰어가서 영경을 들어올리려고 하였다 자령은 그가 영경을 먼저 구해 달라는 뜻임을 알고는 짐승의 주제에 기특하다고 여겼다. 그녀는 원성에게 말했다. "빨리 아가씨를 내려놓아라. 내가 너의 주인을 먼저 구해주마." 자령은 영경 앞으로 걸어가서 나뭇가지에 달린 옷자락에 오풍주를 묻혀 영경의 심장 부분 앞뒤 를 제외한 온몸에 골고루 칠했다. 그 오풍주가 영경의 피부에 닿자 푸른 연기가 솟아나오며 독기 운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자령은 동생에게 빨리 단약을 사용하라고 외쳤다 한악은 어머니 보상부인에게서 물려받은 단약을 꺼낸 다음 진기를 운용하여 영경의 전후 심장부 분에 대고 살살 문질렀다. 잠시 후에 푸른 연기가 사라지며 검보랏빛 피부가 점점 불그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영경이 큰소리를 질렀다. "뜨거워 죽겠어!" 이어서 방귀소리와 함께 똥과 오줌을 '좍' 배설해 내었다. 그 지독한 냄새는 도저히 맡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때 금선은 벌써부터 육지의 피를 가지고 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령은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육지의 피를 가지고 와서는 반을 영경에게 먹인 후에 원성더러 곁에서 잘 지켜보라고 분부했다. 그리고는 한악과 같이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약란을 치료했다. 한참 지나자 영경과 약 란은 차례로 깨어났다. 이때쯤은 지선도 들어와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정신은 비록 피곤한 것 같았지만 얼굴색은 많이 좋아졌다. 자령이 지선에게 말했다. "두 아가씨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얼마 동안은 요양을 해야 원상 회복이 될 거예요. 아까 밖 에 폭포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두 아가씨한테 목욕을 시켜주는 것이 좋겠군요. 우선 물을 길어와 서 이 방부터 청소를 해야겠군요." 밖에서 이 말을 들은 금선은 자기가 또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안쪽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절벽 위에 가 있을 테니까, 두 분 누님은 떠날 때 잊지 마시고 나를 불러주십시오." "그럴게요." 자령이 대답하자, 금선은 몸을 날려 절벽 위로 올라가 버렸다. 영경이 깨어나 보니 자기와 약란이 지독한 오물 속에 누워 있지 않은가! 큰언니의 말을 듣지 않 고 떠났다가 망신만 톡톡히 당하고 돌아왔구나 생각하니 창피하기도 하고 까닭없이 화도 치밀었 다. 그런데 문득 자기 침상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 서 있는 원성이 눈에 들어왔으므로 발칵 화를 내었다. "빨리 물 길어와서 방이나 청소하지 않고, 뭐가 좋아서 히죽거리는 거야! 내가 망신당한 것이 그 리도 즐거워?" 그녀는 욕을 퍼부으면서 손을 뻗어 때리려고 했다. 한악이 급히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애꿎은 상대한테 화풀이를 하려고 하는군요. 방금 우리가 여기 도착했을 때, 원성은 아가씨의 위급을 보고는 그만 눈물을 글썽이며 어쩔 줄 몰랐어요. 그랬다가 지금 아가씨가 깨어 난 것을 보자 기쁜 나머지 웃은 거라구요. 원성의 얼굴을 보세요. 눈물이 아직 다 마르지도 않았 잖아요." 영경은 한악의 조용한 타이름을 듣자 원성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격이 부드러운 약란은 깨어나 보니 자기가 이미 응벽애로 돌아와 있는지라 마음 속으로 자신 의 행운을 가만히 기뻐했다. 자기는 비록 영경보다 오랫동안 수도를 하였지만 근기니 선연이 그 녀에 비해 두텁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눈을 감고 조용히 정양(靜養)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경 이 애꿎은 원성을 상대도 욕을 퍼붓자 더 이상 참지 못해 눈을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영경아우는 성질이 그렇게 급하니까 아무것이나 모두 겁수(劫數)로 알지. 진씨 두 분 아가씨가 이곳에 처음 오셨고, 또 우리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아무런 대접도 못하고 있잖아. 동천복지가 우 리 두 사람 때문에 엉망이 되어 온 방안이 냄새로 가득하고 말이야. 지선언니에게 부탁해서 두 분을 다른 방으로 모시게 하든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서 선산의 풍경을 감상하게 하지는 않고 도 리어 어린애처럼 짜증을 내면 어떡하느냐." 자령자매는 일찍부터 응벽애의 선경이 훌륭하다는 말을 들어온 터였다. 더구나 앞으로 자기들이 수도할 장소가 아닌가. 아까는 사람을 구하는 일이 바빠 얼핏 보아넘겼지만 지금까지 본 어떤 선 산 명악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곳이구나 하는 감탄을 안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참인데 약란 이 그런 말을 하고 보니 새삼스레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자령자매는 지선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 자령은 말했다. "우리 자매도 앞으로는 이곳에서 수도를 하게 되었으니까 그리 서두를 필요야 없겠죠. 다만 두 분 아가씨가 어차피 목욕을 해야 하니, 그럼 우리도 함께 앞쪽 폭포나 구경하기로 할까요?" 영경과 약란은 자령의 말을 듣자 침상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자령이 급히 말리면서, 지금은 과로하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자령과 한악이 영경과 약란을 부축 하고 지선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여 일행은 동굴에서 나와 선뢰정 아래로 갔다. 자령은 지선으로부터 선천(仙泉)이 여간 근사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내심 가보고 싶은 마 음이 굴뚝 같았다. 그들은 지선을 밑에 남겨둔 채 각자 옷을 벗고는 영경과 약란을 부축하고 날 아 올라갔다. 목욕을 하면서 자령이 사방을 살펴보니 과연 동천복지로써 선경이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지라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즐겁게 목욕을 마치고 나자 이미 시각은 인시(寅時)에서 묘시(苗時)로 접어드는 무렵이었다. 그즈음 원성은 어느 새 영경과 약란 두 사람의 옷가지를 가져다 놓았다. 영경과 약란은 아직도 청라로 가고 싶은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자령자매와 함께 검광을 타 보았으나 힘만 들 뿐 도저히 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령이 몇 번이나 간곡한 말로 타일렀으므 로 하는 수 없이 산에 남아 요양하겠다고 대답했다. 자령자매로 서는 응벽애가 처음일 뿐 아니라 또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원성으로 하 여금 금선을 불러오게 하여 같이 산을 구경하였다. 자령은 마음 속으로만 기쁨을 삭였지만, 한악 은 손뼉을 치면서 희희낙락이었다. 한시바삐 청라를 쳐부수고 돌아와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들은 한동안 구경을 한 후에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영경은 문득 원성이 곁에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약란에게 말했다. "지선언니가 원성을 너무 귀여워하는 바람에 그 몹쓸 짐승이 버릇이 없어졌어요. 내가 돌아왔는 데도 내 곁에 있지 않고 어디로 가서 무슨 말썽을 피우는 거지?" 그러는 동안에 일행은 동굴 안으로 들어섰고, 곧 영경의 거실 앞에 도달했다. 영경은 냄새를 피하려고 지레 손으로 코를 쥐며 자령을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러 다 문득 손에 나무통을 들고 나오는 원성과 마주쳤다. 영경은 대뜸 욕을 퍼부으려고 하였다. 그때 약란이 먼저 방안을 들여다보니 이상하게 향긋한 냄새가 나는지라 얼른 고개를 돌리며 영경에게 말했다. "동생은 남을 잘못 탓하는데 소질이 있나 봐. 원성이 어디 말썽피러간 게 아니라 방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았단 말야. 자, 모두 안으로 들어가 앉죠." 한악은 향기가 코를 찌르자 '아, 근사한 냄새' 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모두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약란이 새삼스레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별안간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얄미운 짐승 좀 봐, 내가 복선담 계옥(桂屋)에서 가지고 온 천 년 묵은 계실(桂實)로 만든 냉염향(冷琰香)을 훔쳐다 썼지 뭐야." 이 바람에 모두들 자리에 앉다 말고 한바탕 웃었다. 자령은 자세히 두 사람의 거소를 살펴보았다. 석실은 매우 널찍할 뿐 아니라 사방의 벽은 옥처 럼 광택이 났다. 안에는 석상(石 床), 석궤(石机), 석탁(石卓), 석돈(石墩) 등이 늘어놓여 있었다. 게다가 약란의 동굴 밖에는 진기한 꽃과 돌들을 적지 않게 옮겨다 심었으므로 아취가 더욱 돋보 였다. 이 태원동 안에는 수많은 석실이 있었고, 가는 곳마다 금정옥주(金庭玉柱)로 이루어져 규모 가 광대하고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한참 동안 둘러보고 난 후 금선이 거듭 청라로 떠나자고 졸라대었다. 자령의 생각에도 그쪽에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임박했구나 하고 생각되었으므로 머지 않아 다시 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영 경, 약란, 지선과 작별을 하고 동굴을 나왔다. 세 사람은 응벽애 앞까지 전송을 나와주었다. 영경은 만약 신조 불노가 별 필요가 없으면 영운 큰언니에게 부탁하여 먼저 돌려보내 달라고 재삼 당부하였다. 자령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다 음 한악과 금선을 데리고 미진기를 펼쳐 한 덩이 채운으로 변해 청라를 향해 날아갔다. 자령일행이 막 떠나고 얼마 안 있어, 별안간 한 줄기 금빛이 번쩍이며 웬 도인이 남녀 어린아이 넷을 데리고 날아 내려왔다. 약란은 산봉우리를 법술로 봉쇄했기 때문에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다고 알고 있었으므로, 이건 무엇이 잘못되었구나 싶어 즉시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러자 그 도인이 멀리서 외쳤다. "빈도 유천(劉泉)은 스승 능진인의 명을 받들어, 진자령도우가 도중에서 구한 우건(于建), 양성지 (楊成志), 장남고(章南姑), 장호아(章虎兒) 네 사람을 선산으로 데리고 왔소이다. 도우께서 잠시 데 리고 있으면 제영운도우가 돌아와서 처리할 거외다. 빈도는 또 다른 일이 있어 떠나겠소. 훗날 다 시 봅시다." 말을 마치고 손에 들고 있는 부록(符錄)을 한 번 흔들자 즉시 한 가닥 금빛으로 변하여 하늘을 뚫고 사라져 버렸다 . 우건과 양성지와 장씨오누이는 약란과 영경 앞으로 뛰어와서 꿇어엎드려 제발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약란과 영경 두 사람은 당황하여 빨리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들 네 아이한테 경과를 물 어본 다음 원성더러 그들을 데리고 태원동으로 가서 우선 거취할 곳을 마련해 주라고 지시했다. 우건과 양성지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남고와 호아는 원성의 흉악한 모습에 더럭 겁을 집어먹었 다. 이를 본 지선이 남고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서워할 것이 없단다. 저놈은 생긴 건 저래도 마음씨만은 더없이 착해. 하지만 너희들은 처음 이라 아무래도 무서울 테니, 내가 함께 가마." 지선은 원성을 앞장서게 하고 자기는 네 아이를 거느리고 뒤를 따라갔다. 지선은 남고의 신세타령을 듣고서 처지가 자기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남고가 매우 영 리하고 총명하여 말을 시원스럽게 잘하는 것을 보고는 금방 정이 들었다. 그래서 남고는 자기랑 같이 있게 하고 우건, 양성지, 장호아는 금선의 방에 있게 하였다. "아미산은 몹시 높고 춥단다. 이곳은 비록 사시사철이 모두 봄이지만, 위로 올라가면 추워기 살 을 에는 듯하여 견디기가 어려워. 지금은 여름이라 별 걱정은 없지만, 너희들은 모두 옷가지 등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큰언니가 돌아오면 대책을 생각해 보자꾸나." 그런 다음 다시 네 사람을 데리고 동굴을 나와 영경과 약란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영경이 웃으며 말했다. "몸이 아직도 약간 불편하여 같이 동굴로 가주지 못해 미안해요. 구언니, 이 네 사람의 거소를 어떻게 정해 주었죠?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당한 남고가 가엾어 죽겠어. 하지만 사내동생과 같 은 방에 있을 수도 없고, 다른 방은 무서워할 것 같아서 우선 내방에 함께 있기로 했지. 나머지 세 사람은 우선 금선의 방을 같이 쓰도록 했어요." 영경과 약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절벽 앞에 둘러앉아 한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영경과 약란은 각기 방으로 돌아가 요양을 했다. 지선은 네 아이를 데리고 원성과 함께 계곡 안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구경시켜 주었다. 그리 고 자기가 당한 구구절절한 사연도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들은 자기가 이런 동천복지에 살 수 있 게 된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선은 평소 남과 같이 있으면 부끄러워 감히 앞에 나서지 못하고 항상 뒤만 따라다니는 안존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이들 네 사람은 모두 새로 입문한 처지인 데다 영경과 약란 두 사람이 병 후 몸조리로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그들 중에서는 자기가 가장 고참인 셈이다. 그래서 네 사람 을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설명을 하노라니 자신도 모르게 신바람이 나서 부지불식간에 응벽애 에서 태원동 서쪽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그곳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벼랑이었는데, 벼랑의 벽면은 온통 진귀한 꽃과 풀로 가득하여 올라갈 수 있는 길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지선은 일행더러 이젠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문득 보니 원성이란 놈이 나무뿌리와 칡덩굴 등을 잡고 날렵하게 벼랑을 올라가지 않는가. 손발을 모두 이용하여 마치 나르는 새처럼 올라가 이미 십여 장 높이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남고 등 어린 네 사람은 이런 진기한 광경을 본 적이 없는지라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지선이 고함을 질렀다. "빨리 내려와!" "아가씨, 빨리 올라와 봐요! 바로 여기에요!" 원성이 밑을 향해 소리치며 연신 손짓을 했다. 지선은 경신공부를 배운 지 얼마 안 되어 그렇잖아도 써먹고 싶던 참이었다. 높이라야 십여 장 밖에 안 되는 것을 보고는 어린 네 사람을 남겨둔 채 몸을 솟구쳤다. 숨을 가다듬고 <벽호유행 (壁虎遊行)>의 경신술을 펼쳐 별로 힘들이지 않고 원성이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원성이 서 있는 곳은 마치 옥처럼 희고 매끈하게 생긴 칠팔 자 크기의 반석이었다. 이 벼랑은 깊이가 수십 장이 넘는 데다 일년 내내 구름에 가리어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밑에서 보면 정상쪽이 가까울수록 가파르기 짝이 없고, 항상 진기한 꽃과 향초들이 밀생해 있어서 이 백 석(白石)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밑에서 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왜 불렀니?" "아가씨, 이것이 무엇인가 보세요." 지선은 원성이 가리키는 곳을 눈여겨보았다. 그 백석단 앞쪽에는 쑥들이 더부룩하게 우거져 있 었는데, 그 속으로 희미하게 동굴이 보이며 동굴 입구에는 글씨 자국도 있었다. 이때 원성은 이미 손발을 써서 쑥과 잡초를 헤치고 있었다. 지선이 가까이 가서 보니 그 동굴은 벼랑의 돌비알 위턱에 위치해 있는 데다 일년 내내 쑥과 풀 들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눈에 띌 리가 없었다. 그런데 원성이 올라가다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입구 위의 글씨를 보니 전서로 <비뢰비경(飛雷秘徑)>이란 네 자가 붉은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동굴은 사람키 정도의 높이에 넓이는 삼사 자 정도였다. 깊은 속에서는 약간의 빛이 은은히 비쳐 나오고 있었고, '우르릉!' 하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새나오고 있었다. 지선은 이곳이 동천복지의 땅이므로 동굴 안에 결코 무슨 맹수라든지 괴이한 것이 있을 수가 없 음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원성이 이미 안으로 들어갔으므로, 그녀는 마음놓고 그 뒤를 따라 몇십 걸음을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에는 한기가 차서 몸이 으스스 떨릴 지경이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가 귀를 따갑게 했다. 주위는 모두가 매끈매끈한 백옥 같은 석벽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굴의 거의 끝까지 걸어 들어갔어도 원성이 보이지 않아서 어떻게 된 건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 하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밑에서 원성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빨리 내려오세요! 난 여기 있어요!" 지선이 고개를 숙여 밑을 내려다보니 동굴벽 서쪽 모퉁이에 석 자 정도 넓이의 깊은 도랑이 있 었다. 도랑 아래는 석 자 높이의 계단이 두세 개 있는데, 그 아래는 은빛 물결이 용솟음치고 있었 다. 우레 같은 소리는 바로 거기서 나고 있었다. 지선은 조심조심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또 하나의 돌다리가 서남쪽으 로 놓여져 있고 그 뒤쪽에 대여섯 자 높이의 작은 굴이 뚫려 있었다. 굴 속으로 들어가니 한 줄 기 싸늘한 한기가 얼굴을 때리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옥룡 같은 큰 폭포가 맞은편의 석벽 틈 사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아래의 용소는 도대체 얼마나 깊은지를 헤아릴 길이 없었다.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는 엄청난 파동이 일며 물보라가 산지사방으로 흘날려 은빛 장관을 이루었 다. 게다가 산곡에서 메아리치는 소리는 마치 만마(萬馬)가 질주하는 듯, 용호가 울부짖는 듯하여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지선이 정신을 가다듬고 자기가 서 있는 곳을 새삼스럽게 살펴보니 겨우 폭이 한 자 정도 넓이 의 돌다리였고, 아래에는 끝도 보이지 않는 골짜기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여 실족 이라도 하는 날이면 결과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두려움에 가슴을 두근거리고 서 있는데, 앞에서 원성이 또 오라고 불렀다. 지선은 황망중에도 슬 며시 호기심이 발동하여 숨을 죽이고 조심스레 다리를 건너갔다. 그런데 앞으르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주위는 점점 밝아졌다. 십여 장 길이의 돌다리를 다 건너가자 남쪽으로 제법 넓은 돌바닥 평지기 나타났다. 평지의 정면 벽에는 두 칸의 석실이 있었다. 지선은 이끌린 듯이 석실쪽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태원동 안의 석실과 똑같이 석상, 단두(丹枓) 등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석벽 위에서 번쩍하는 광채가 지선의 안구를 때렸다. 어느 틈에 다가온 원성이 급히 지선에게 말했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석벽 안에 틀림없이 보배가 들어 있을 거예요. 나는 짐승인 데다 조사님의 전수도 받지 않았으니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아가씨는 어째서 아직도 꿇어앉아 기도를 드 리지 않고 있어요?" 지선은 이 말을 든자 즉시 깨닫는 바가 있어 꿇어앉아 기도를 드렸다. "제자 구지선은 요인에게 잡혀갔다가 교조 묘일부인의 도움을 받아 아미문하로 들어왔사오나 선 연이 얕고 자질이 평범하여 장래에 정과를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방금 원성이 석벽 속에 보물이 있다고 하오나 제자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전 본 동굴의 선사(仙師)께 서 남겨 놓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약 선사께서 도를 깨치고자 하는 제자의 성심을 가련히 여기 신다면 보물을 이 불쌍한 제자에게 하사해 주십시오. 제자는 더욱 노력하여 도를 닦고 성심으로 선을 행하여 선은(仙恩)에 보답하겠나이다." 기도를 마친 지선이 몸을 일으켜 석벽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별안간 '쩌억!' 하는 소리가 나면서 석벽이 갈라졌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장검 두 자루와 단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지선은 기쁨을 억누를 수 없어 한달음에 뛰어가 살펴보았다. 칼 아래에는 한 장의 편지가 놓여 져 있었다. 그녀는 편지를 펼쳐보았다. <단검은 상교(霜蛟), 장검은 옥호(玉虎)라 한다. 인연이 있는 자에게 주어서 천고(千古)에 남기리 라. 대한(大漢) 광무(光武) 삼 년 사월 경신(庚辰)에 원공(袁公)이 귀선(歸仙)하면서 천부신부(天府 神符)로 이 삼 검을 봉하여 인연이 있는 자에게 증정하노라. 지금부터 삼십이 갑자(甲子) 지난 후 동년 동월에 돌이 갈라지며 검이 나올 것이니, 사람과 짐승이 각각 얻을 것이로다. 이것으로 악을 행하면 하늘이 용서치 않으리라.> 지선은 비록 그 원공의 내력을 알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한나라 때 득도한 선인이라고 추측했다. 그녀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어 다시 꿇어앉아 정성껏 기도를 하면서 절을 했다. 일어나 다시 일기(日期)를 계산해 보니 오늘이 바로 편지에서 말한 그 날이었다. 또 '사람과 짐 승이 각각 얻을 것'이라고 했으니 '인연이 있는 자'란 바로 자기와 원성을 가리킴이 틀림없지 않 은가. 그러나 사람과 짐승이 각각 하나씩 얻는다고 했는데, 칼은 석 자루인 것이다. 또 편지에 누가 장 검을 가지고 누가 단검을 가지란 말은 없었다. 장검과 단검 모두가 보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중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세 자루의 칼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어느 것이 좋은지 도대체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문득 고개를 돌려 원성을 보니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손에 들려진 보검을 쳐다보고 있는 품 이 속으로 얼마나 침을 흘리고 있는지 알 만했다.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어선 안 되지. 오늘 만약에 원성이 이 동굴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편지에는 그의 몫이 있다고 분명 히 적혀 있어. 내가 너무 기쁜 나머지 보검의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았구나. 보검을 빼어 자세히 살펴본 후에 운배하는 것이 좋겠어.' 그녀는 두 자루의 장검을 원성더러 가지고 있으라고 하고는 먼저 단검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자 세히 살펴보았다. 길이가 두 자 아홉 치쯤 될까? 칼집은 쇠도 아니고 옥도 아닌데 푸르스름한 보 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손잡이에는 붉은 글씨로 <상교(霜蛟)라고 새겨져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서 서서히 뽑으니 한 가닥 싸늘한 빛이 지나가며 검이 칼집에서 나왔다. 은빛이 사방으로 뻗치며 으 스스한 냉기는 절로 소름이 돋게 했다. 지선은 석실에서 빠져나와 넓은 곳에서 영운이 전수해 준 검법을 연습해 보았다. 출수(出手)하자 마자 칼날에서 이삼 장 길이의 흰 빛이 뻗어나가는데 굴 천장의 큼직한 바윗덩이를 살짝 건드리 자마자 마치 썩은 흙덩이처럼 싹둑 베어져 '쿵!' 하고 땅에 떨어졌다. 지선은 장소가 너무 협소하여 굴속의 선경(仙景)을 파손시킬까 봐 황급히 보검을 칼집에 집어 넣었다. 단검을 원성에게 주고 이번에는 장검 한 자루를 집어들었다. 장검은 길이가 일곱 자 정도 였는데, 손잡이에 호랑이 반쪽이 새겨져 있었다. 다시 원성의 손에 있는 나머지 한 자루와 비교해 보니 그 장검의 손잡이에도 역시 호랑이의 반 쪽이 그려져 있는지라 이 두 자루는 한 쌍의 장검임을 알 수 있었다. 지선은 장검이 너무 길어서 원성더러 칼집을 잡고 있으라 하고는 서서히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한 가닥 푸른빛이 그녀의 손길을 따라 뻗어나왔다. 처음에는 그다지 무겁다는 느낌이 들 지 않았으나 검무를 약간 추니 매우 힘이 들었다. 그 장검은 너무 무거워 몸에 차기도 불편한지 라, 이 장검은 자기와 인연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평소에 영운이 말한 감정법을 상기해 내었다. 어느 파든 비검은 금빛을 최고로 삼고 흰 빛을 다음으로 삼고, 푸른빛을 그 다음으로 여기며 누런빛은 푸른빛 다음으로 여긴다고 했던 것 이다. 이번에는 또 한 자루의 장검을 받아 뽑아보니까 칼날에서는 누런빛이 발산되었다. '아무래도 두 자루의 장검은 한 자루의 단검만 못하구나.' 이렇게 생각한 지선이 원성에게 보검의 내력을 설명하려고 할때 원성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 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축하드립니다. 한꺼번에 보검을 세 자루나 얻었군요. 그런데 이상해요. 이 세 자루의 보 검은 내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드니 말예요." 지선은 이 말을 듣자 별안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 보검을 남긴 선인의 이름은 원공이고, 이놈의 이름은 원성이다. 본시 성원(猩猿: 성성이와 원 숭이)은 한 족속이 아닌가. 옛날에 월녀(越女)가 원공과 비검(比劍)한 적이 있다며, 영운언니가 월 녀검법과 원공검법의 다른 점을 설명한 적이 있었지. 원성이 이 보검을 본 적이 있다고 하는 걸 보면, 혹시 원공이 원성의 조상이 아닐까? 원성은 덩지가 크니 이 장검이 어울리고, 나는 아무래 도 이 단검이 어울려 편지 내용으로 본다면 나와 원성이 틀림없는 '인연이 있는 자'이지만 나는 아직 정식으로 사부님의 전수를 받지 않았으니 모르는 일은 큰언니의 처분을 받아야 마땅해. 원 성에게 보검의 내력을 설명해 주고, 이 장검은 그의 것이지만 영운언니가 돌아온 후에 허락을 받 아야 한다고 일깨워 줘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지선은 원성에게 말했다. "너는 성성이 주제에 복도 많구나. 이 두 자루의 장검은 네 차지야." 그리고는 편지 안에 쓰여진 내용을 설명해 주고, 영운이 돌아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까지 찬찬히 일러주었다. 원성은 너무나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나도 이제 사람이 되는 법을 터득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가씨, 이 보검을 남긴 원공이 누군지 아세요? 우리 조상들이 말한 적이 있어요. 그분은 바로 우리 선조래요. 상주(商周)시대의 검선인 데 열국(列國)시대에 월녀와 비검을 하여 톡톡히 당했다는 겁니다. 후에 심산에 은거하여 수도만 하고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아가씨가 말씀하신 편지 내용으로 볼때 한나라 때에 신선이 된 것이 틀림없어요. 방금 아가씨께서 세 자루의 보검을 얻은 것을 보고 매우 기뻤지만, 나중에 내 것도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영운아가씨만 돌아오면 정식으로 내 것이 된다니, 이제부 터 불노가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겁나지 않아요. 이 동굴은 원공이 수도했던 곳이니 어쩌면 아직 도 다른 보물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네요. 아가씨는 어차피 다른 일이 없잖아요? 또다른 선연이 있 는지 모르니, 끝까지 들어가 보는 것이 어때요?" 지선은 원성의 말을 듣자 그도 그럴 듯한 말이라고 여겨졌다.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단검을 허리에 차며 원성더러 앞장서라고 지시했다. 원성은 두 자루의 장검을 껴안고는 신이 나서 앞으로 나아갔다. 비뢰동의 여도둑 力闢仙源 欣逢舊雨 眷言倫好 情切友聲 구지선과 원성은 눈앞에 나타난 석실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보았다. 양쪽으로 갈라진 석문 (石門)은 대략 반 정도밖에 열리지 않아서, 몸을 모로 세워야 겨우 들어갈 수가 있었다. 얼핏 보 기엔 통로가 연결되어 있는 듯했으나, 워낙 어두운 탓에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었다. 지선은 상교검(霜蛟劍)을 발출시켜 보기로 마음먹고, 천천히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보검은 출수 하자마자, 마치 섬전처럼 한 줄기 검광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 검광이 번쩍이자 어느 정도 사방을 살필 수가 있어 내심 기뻤다. 검광에 의지하여 길을 더듬어가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가면 갈수록 길은 점점더 꼬불꼬불 하고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참 동안 걸어가자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자세히 살 펴보니, 집채만한 바위가 가로놓여 있었다. 이리저리 구멍을 살폈지만, 도무지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선이 낙심천만하자, 원성이 후회의 탄식소리를 내뱉았다. "제기랄! 모두가 나 때문이야. 그렇게 훌륭한 보검을 얻었는 데도 뭐가 부족해서 미친 듯이 여기 까지 달려왔지? 밖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아가씨, 어서 빨리 돌 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자신이 생각해도 지당한 말이었다. 그래서 곧 둘이 걸음을 돌려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가느다 란 한 줄기 푸른빛이 앞에 가로막혀 있는 바위틈에서 번쩍하고 빛났다. 지선은 자기의 검광은 흰 빛이라는 것을 얼른 상기했다. 행동은 그녀보다 원성이 민첩했다. 원성은 벌써 보검을 꼬나들고 방어자세를 취한 채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이상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바윗덩이였으므로 그 들의 의혹은 더욱더 짙어만 갔다. 이때 실낱 같은 푸른빛은 바위틈으로 여러 차례 연이어 번쩍거 렸다. 지선은 원성과 함께 빛이 번쩍이는 부분을 세심하게 점검했으나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원성 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조화인지 너는 아니?" 원성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내가 보기에 우리는 아직 이 동굴 끝까지 다 온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여기를 틀어막은 이 바위는 동굴 중간의 바위와 지질도 빛깔도 전혀 다르니, 이건 분명 누군가가 통로를 막아버리 기 위해 굴려 들여온 것일 거예요. 방금 본 푸른빛은 정말 괴이하기 짝이 없군요. 우리가 이 바위 를 치워버린다면 분명히 알 수가 있을 텐데, 혹시라도 이 안에 또다른 보물이라도 있는 게 아닐 까요?" 지선은 그 말을 듣자, 또다시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비록 이 막다른 곳이 이 동굴의 출로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커다란 바위를 어떻게 해볼 수가 없 잖아? 너나 나나 법술을 사용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뚫을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생 각은 하지도 마!" 그러나 원성이 자못 못마땅한 듯 말했다. "이래뵈도 나한테는 보잘것 없는 것이긴 하지만 상당한 힘이 있어요. 만일 이 바위가 누가 법술 로 봉쇄해 놓은 물건만 아니라면 내 힘으로 뚫지 못할 이유도 없다구요. 만일 뚫지 못하면 그때 가서 돌아가도 그렇게 늦진 않잖아요." 원성도 이렇게 말한 뒤 들고 있던 장검을 지선에게 건네주고는 두 어깨를 바위에 밀착시키고, 신력(神力)을 끌어올려 '끙끙' 용을 쓰며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원성이 몇 차례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바윗덩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선은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듯이 장검을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내가 뭐랬어? 쓸데없이 힘만 낭비했잖아. 이렇게 큰 바위를 어떻게 움직일 수가 있겠어? 이제 그만 돌아가자구!" 원성이 말했다. "아가씨,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내가 마지막 힘을 썼을 때 이 바위가 약간 움직이는 것을 느꼈 단 말이에요. 그건 바로 법술로 봉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보기엔 이 바위는 대충 둘레가 이삼 장쯤 되는 방원형 같아요. 밀어도 꼼짝 않는 이유는 동굴 입구가 너무 좁아 바위가 꽉 끼었기 때문인 겁니다. 이 바위를 치울 방도를 생각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의논해 볼까요?" 지선은 아무리 골머리를 싸매봤자 헛수고임이 명백하다고 여겨 서슴없이 장검을 원성에게 내밀 었다. 이때 지선의 수중에서 번쩍이는 검광을 본 원성의 뇌리에 번뜩이는 영감이 있었다. 원성은 벌떡 일어나 기쁜 환성을 내지르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 우리에겐 이렇게 훌륭한 개산이기(開山利器)가 있는데, 어째서 이걸 사용할 생각 을 못했을까?" 원성이 곧바로 장검을 받아들자, 푸르고 누른 두 가닥의 검광이 동시에 뻗어나왔다. 원성은 칼을 치켜들고 서슴없이 바위를 내리쳤다. '짜악!'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광이 바윗덩이로 파고 들자 돌의 파편과 먼지가 산지사방으로 튀었다. 기쁨에 넘친 원성은 점점 진력을 끌어올려 장검을 상하좌우로 마구 난도질하듯 휘두르기 시작했 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바위에는 서너 자에 달하는 둥근 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선은 원성이 보검을 사용하여 바위를 깨뜨리는 것을 보고는 곧장 소매를 걷어붙이고, 돌덩이 를 나르기 시작했다. 원성은 어쩌다 어지간하게 큰 돌덩이가 튀어 자기 몸에 부딪쳐도 전혀 개의 치 않고, 여전히 신명난 듯이 맹렬히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돌덩이가 온 동굴 안을 산지사방으로 날고 아무 데나 수북이 쌓였다. 지선은 다가가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날아오는 돌덩이에 부딪칠까 두려워 감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밥 한 그릇 먹어치울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원성이 환호성을 질렀다. 지선 이 가까이 가서 바라보니, 바위는 이미 이삼 장이나 되는 깊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 저쪽 으로부터 동굴 밖의 햇빛이 곧바로 새어 들어왔다. 원성이 계속 몇 차례 보검을 휘둘러대자, 마침 내 사람 하나 빠져나갈 만한 구멍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원성의 득의양양한 꼴은 가관이었지만, 지선도 덩달아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성을 따 라, 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기껏 밖에 나와서 보니, 이게 웬일인가! 보물은커녕 자신은 절벽의 쑥 튀어나온 턱바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앞쪽에는 외딴 봉우리가 구름을 꿰뚫을 것처럼 치솟아 흰구름이 산허리를 가로질러 양단하고 있었다. 지금은 무더운 여름인 데도 불구하고 산정상엔 흰눈이 쌓여 있어 햇볕에 반사되어 마치 은빛 노 을을 방불케 했다. 흰구름 아래쪽엔 이와 정반대로 푸른 숲에 붉은꽃이 만발하여 온 산을 비단으 로 수놓은 것만 같았다. 눈을 한쪽으로 돌리니 넓은 언덕과 높은 산이 있었다. 산 위에는 눈이 쌓여 있었는데, 눈은 따뜻한 햇볕을 받아 녹아내리고 있었다. 녹아내리던 눈은 차츰 사태(沙汰)를 일으켜 맹렬한 기세로 돌변하여 얼음조각을 튕기며 사라지니, 마치 만마(萬馬) 가 내닫는 형세였다. 산중턱께의 울퉁불퉁한 곳에 부딪치자, 순식간에 수십 장을 치솟아 오르며 백화(白花)가 흩날렸다. 절벽 끝에서 은백빛을 뿌리며 한 무더기 물안개로 변한 눈사태는 곧장 수백 길 낭떠러지로 떨어 져 내리며, 천둥 같은 굉장한 진동음을 끊임없이 내었다. 마주 보이는 절벽에는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쪽도 역시 쐬기처럼 낭떠러지 위의 널찍한 빈터인데, 그 주변의 경치 또한 실로 보기 드문 절경이었다. 동부(洞府)의 입구 석벽에는 크기가 일 장 남짓한 붉은 글씨로 <비뢰(飛雷)> 두 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비뢰동(飛 雷洞)의 정경은 영운에게 들은 것과 흡사했다. 한동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학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들어 하늘을 쳐다 보니 선학 한 마리가 석양을 등지고 민첩하게 은빛날개를 휘저으며 마치 구름처럼 하늘을 가리며 내려왔다. 선학은 눈 깜짝할 사이에 건너편 동부 앞에 내려앉았는 데, 얼핏 보니 선학의 등에는 한 백의소년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십오륙 세쯤 되어 보였는데 한 손으로 선학의 목을, 다른 한 손은 왼쪽 날갯죽지를 꽉 붙들고 있어서, 선학이 땅에 내려올 때의 진동에도 불구하고 떨어지 지 않았다. 잠시 후 동굴 속에서 한 청의소년이 황급히 달려나왔다. 백의 소년과 비슷한 또래였다. 청의소년은 백의소년에게 급히 다가가서 말했다. "사형,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얼른 백의소년을 학 등에서 부축하여 내려 곧장 동굴로 데리고 들어갔다. 지선은 순간 자기 등 뒤에서 나는 교태로운 목소리를 들었다. "연아사제! 기다려! 내가 곧 내려갈게."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선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올라 건너편 언덕으로 날아갔다. 지선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바로 이영경 그녀가 아닌가! 그렇 다면 신약란도 곧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고 뒤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약란 그녀도 뒤에 서 있었 다. 지선이 원성과 함께 동굴로 들어간 뒤 한참 지나도 종내 무소식이라, 남고 등 네 사람은 언덕 앞에서 마음을 졸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끝내는 양성지와 우건 두 사람이 그들의 종적을 찾자고 하므로 남고가 말했다. "이처럼 높고 험한 곳을 어떻게 올라간다는 거니? 다행히 찾아낸다 해도, 구선고(具仙姑)가 결코 우리더러 함께 가자고 하진 않을 거야. 그렇다고 우리가 그분을 탓할 수 있어? 그러니까 여기서 그냥 기다리고 있는 것만 못하단 말이야." 네 사람 사이에 이처럼 의논이 분분한 때, 영경과 약란은 본래 중독이 되어 있는 몸이라 전신이 나른하여, 곧바로 동굴로 들어가서 원기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아미진전에 따라 내공을 한 차례 운용시켜 보았으나 운행이 그다지 온전하지가 않았다. 약란은 기가 원(元)에 돌아가지 않아 매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영경은 다행히 상세가 가벼웠지만, 그녀 역시 하루가 지났어도 좀처럼 운기 가 자연스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약란이 영경에게 말했다. "이번에 만약 진씨자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우리 두 사람은 정말 큰일날 뻔했어!" 그러자 영경이 금방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처럼 극악무도한 요승, 요도는 정말 처음 봤다니까. 이번처럼 곤욕을 치러보기는 난생 처음이 야. 앞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그 이파요인(異派妖人)들의 씨도 남기지 않고 모두 피살시켜 버리겠 어. 단 한 놈이라도 남기면 나 이영경 사람이 아니야." 약란이 웃으며 말했다. "부끄럽지도 않니? 난생 어쩌구라니. 도대체 동생의 나이가 올해 몇인데 그래? 동생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숱한 선연(仙緣)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신선이 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야? 내공을 닦고, 외공을 쌓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어. 앞으로 얼마 나 많은 재난이 닥칠지 알아? 하지만 우리가 고생하는 줄 알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해주고 우리를 대신해서 복수해 줄 테니 결국 이 얼마나 편한 일이냐구." 영경이 웃으며 말했다. "그만해, 그만해. 그처럼 얼굴 두텁게 편안함을 바란다면, 언니 한텐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가 있 겠지 뭐. 하지만 난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약란이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이런 곤경에 처한 것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자신의 무공을 너무 믿고 큰언니 의 분부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어? 큰언니가 우리에게 재삼재사 당부한 것은 우리가 차후 로도 사명(師命)을 받들지 않고 경거망동할까 봐 우려됐기 때문이야. 하긴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보았자 소용이 없겠지. 너랑 나랑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공력을 쓸 수도 없고, 정말 난처하구나! 조섭에만 신경쓰자니 멀리서 온 손님은 돌볼 수도 없고 말이야. 신기(神氣)를 보니까 그 네 사람은 우리와 같지 않더라. 그렇지만 우리는 주인의 입장이니까 대접에 소홀할 수 가 없잖아. 그래야만 그들이 우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 영경이 말했다. "나도 그들이 뛰어나다고 여기지는 않아. 그렇다고 깔볼 것도 없지 뭐. 우리야 어려서부터 줄곧 남자를 대수롭지 않게 대해왔잖아? 그들을 잘 알지도 못하고, 게다가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않았으 니... 하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다행히 지선언니도 주인의 입장이니 우리를 대신하 여 대접해도 괜찮지 않겠어?" 약란이 말했다. "지선언니는 정말 불쌍해! 자질은 극히 뛰어난데 무공실력이 너무 모자라. 큰언니가 그녀에게 초 입문(初入門) 무공을 가르쳐 주지만 배우기 힘든 대목에 이르러 마다할 수 없게 되면, 등을 돌리 고 울며 달아나 버리잖아. 그래가지곤 더더욱 성취가 힘들지. 우리 동문 사형제 가운데서도 지선 언니는 누구한테나 상냥하고 성심성의껏 대하며 추호의 사심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절대 자질이 우리만 못하다고 깔보지 마. 내가 보기엔 언젠가는 우리보다 더 뛰어난 무공을 지니 게 될 테니까. 이번에 청라에 가는 것만 해도 그래. 모두들 공명심에 불타서 제각기 날뛰고 설쳐 댔잖아? 하지만 불쌍한 지선언니는 너한테조차도 감히 말을 붙일 수 없어 나한테만 몇 번 간청을 하더라." 영경은 그녀의 말을 듣자 눈살을 찌푸리며 약란을 살짝 밀어붙였다. "실없는 소리 그만해! 언니 말대로라면 마치 내가 사기꾼 같잖아. 청라에 가는 것은 언니 혼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면서 뭘 그래? 지선언니가 자기하고만 의논한 것을 마치 모두 내 잘못이라는 투로 뒤집어 씌우지 말란 말이야. 난 마음에 없는 소리는 못해. 다만 지선언니와 진실성 있는 얘 기만 주고받았을 뿐이라구. 지선언니도 그렇지. 우리 동문자매 모두 의기투합하다 골육지간보다 더욱 친밀한 정을 나누고 있는데, 무슨 못할 말이라도 있다고 쭈뼛거리는 거지? 마음 속에 떠오 르는 생각은 서슴없이 털어놓고,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면 하고 못할 일이면 하지 않는 거야. 공 손하고 진실한 게 나쁠 건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탁 터놓는 친밀감이라구. 친밀감이 결여되어 있으면 앞으로 같이 지내기가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어?" 두 사람이 웃어가며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갑자기 육지가 마치 불처럼 빨간 풀잎 두 개를 들 고 밖에서 들어왔다. 구화로부터 옮겨 심은 후로는 영경, 약란, 금선 세 사람은 틈만 나면 그것을 껴안고 놀았다. 영 운은 그러는 것이 육지의 도행(道行)에 방해가 된다고 말렸지만, 이들 세 사람은 도무지 듣질 않 았다. 육지도 이들 세 사람이 껴안아 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는데, 이때도 흥이 나서 달려 들어온 참이었다. 약란이 먼저 그에게 피를 뽑아서 그네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하자 영경은 벌써 육지 를 냉큼 껴안아 무릎 위에 앉혔다. 채 뭐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육지가 빨간 풀을 곧장 영경의 입에 갖다대고는, '이이야야!' 뭐라고 계속 중얼대었다. 영경이 자세히 보니 그 붉은 풀은 아주 투명하며 마치 불타는 듯 빨갛게, 잎사귀 하나에 가지는 셋인데, 가지 끝에는 진주만한 붉은 열매가 달려 있었고 청아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영경은 대뜸 그것이 진귀한 선초(仙草)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계속 자기 입에다 풀을 갖 다대고 있는 육지에게 물었다. "이건 보아하니 선초 같은데, 나더러 먹으라는 거니?" "아아!" 육지는 두 마디를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경은 먼저 가지 끝에 붙어 있는 붉은 열매를 입 속에 넣고 깨물었다. 상큼달콤한 향기에 자신 도 모르는 사이에 잎사귀마저 씹어먹으니 입 안 전체가 달콤한 향기로 가득찼다. 향기는 온 전신 을 뒤덮으면서 순식간에 정신이 상쾌하게 맑아왔다. 육지는 어느덧 영경의 품에서 빠져나와 약란에게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그녀에게도 약초를 내밀 었다. 약란은 약초를 먹은 영경의 입가장자리가 온통 새빨갛게 물든 것을 보고 깔깔 웃었다. 그런데 육지가 이번에는 자기한테도 먹으라고 하므로, 그녀는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영경동생한테나 줘! 약초를 먹은 입술이 원숭이 똥구멍처럼 빨개지도록 말이지. 차암,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영경이 웃으며 반발했다. "육지의 호의를 거절할 셈이야? 이게 무슨 선초인지는 몰라도 먹어보니 정신이 상쾌해지고, 몸 도 거뜬하게 나아진 것 같은데." 약란도 이미 선초의 향기를 맡은 데다, 다시 영경의 부추김을 듣고 보니 마음이 동했다. 그래서 영경이 하던 대로 선초를 받아 먹으니, 과연 그 향기란 이가 시릴 정도로 맑고 차가왔다. 영경은 그녀 역시 입가에 온통 붉은 칠을 하고 있는 것은 보고 깔깔 웃었다. 이때 육지는 땅에 내려서더 니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돌아와!" 영경이 소리치자, 육지는 두 사람을 향해 작은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손짓해 부르고는 곧장 밖을 향해 달려갔다. 약란이 말했다. "육지가 우리더러 손짓하는 것은, 아마 함께 선초를 찾으러 가자는 뜻일 거야." 영경은 이 말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두 사람은 육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육지는 작 은 다리로 나는 듯이 달리는데, 곧장 태원동(太元洞)을 벗어나 서쪽 언덕으로 치달았다. 장남고, 장호아, 우건, 양성지 이 네 사람은 절벽 앞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초조하게 지선을 기다리다가 문득 멀리서 한 자 남짓한 소인(小人)이 날듯이 달려오고, 그 뒤를 영경과 약란이 쫓 아오는 것을 보았다. 양성지는 심심하던 참이라 잘되었다 싶어, 몸을 기울이며 육지를 잡으려 손 을 내밀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곳은 좁은 길인 데다, 육지가 워낙 빠른 속력으로 달려왔기 때 문에, 앞에 누가 가로막는다고 걸음을 멈출 형편이 아니었다. "야야!" 앙징맞은 소리를 지르며 맹렬한 기세로 달려가는 육지는 금방이라도 양성지의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영경과 약란은 다소 즐기는 기분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선을 쫓고 있었는데, 누 군가가 불쑥 튀어나와 육지를 가로막고 잡으려는 것을 목도하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 영경이 곧장 고함을 쳤다. "썩 물러나지 못해? 붙잡지 마!" 동시에 발끝에 힘을 주고 땅을 박차며 신형을 날렸다. 이때의 빠름은 실로 놀랍기 짝이 없어서 목소리가 오히려 몸보다 늦게 당도할 정도였다. 그 순간이었다. 육지가 몇 장 높이나 되게 훌쩍 허공으로 뛰어올라 양성지의 머리 위를 뛰어넘 더니 곧장 언덕 위로 올라가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이와 동시에 양성지 앞에 내려선 영경은 원한이 담긴 소리로 쏘아붙였다. "당신이란 사람은 왜 그리 경망스럽죠? 좀전의 그것은 바로 우리 육지란 말예요. 큰언니가 얼마 나 많은 시간 동안 갖은 말로 구워 삶아서 겨우 구화에서 이곳으로 옮겨 심어 가지고 동문의 여 러 생명을 구한 우리들의 은인이란 말이에요. 당신이 여기 처음 왔다고 설마 몰랐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요? 큰언니를 비롯한 모든 동문들이 육지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줄 알기나 해요? 비록 그 것을 가지고 놀기는 해도 감히 털끝 하나 다치지 못하는데, 당신이 함부로 붙잡으려고 하다니! 그 는 사람을 제일 두려워하는데 당신이 놀라게 했으니, 금선오빠가 돌아오면 당신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영경은 얼굴에 온통 붉은 칠을 한 모습으로 양성지한테 삿대질을 하며 마구 나무라고 있었고, 양성지는 그녀의 꾸지람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일언반구도 못한 채 듣고만 있었다. 약란은 조금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 영경을 말렸다. "이번 일은 그가 처음 이곳에 와서 미처 영문을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거야. 다행히 육지가 요 즘은 사람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만해 둬. 자! 그만두고 지선언니나 찾으 러 가자." 그제사 영경이 심사를 누그러뜨리고 시무룩히 말했다. "이상하군. 지선언니는 이 네 분 손님들과 함께 놀러나갔잖아. 그런데 언니는 어디로 갔지? 이거 정말 큰일났구나." 이때 남고 등 신참 세 사람도 시비 현장에 다가왔으나, 같이 온 사람이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 는 것을 보고는 덩달아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못했다. 약란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 이것이 다 지선언니가 원성과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그러니까 서로 신경이 날카로와져서 그런 거야. 그건 그렇고 지선언니와 원성은 어디서 놀고 있는 걸까? 이 절벽은 우리가 이미 지나왔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어. 도대체 어 디로 사라진 거야?" 남고가 뒤를 이어 말했다. "구선고는 그 짐승과 함께 꼭대기까지는 가지 않았어요. 먼저 짐승이 반쯤 올라가서 구선고를 부르니까 그녀도 곧 올라가던데요. 짐승이 위에서 풀더미를 헤치고 있었던 걸로 보아 분명 무슨 동굴 같은 것을 발견하고, 같이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걸 거예요." 영경과 약란은 이 말을 듣고 슬며시 호기심이 발동했다. 영경이 네 사람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여기를 떠나지 말고 그냥 있어요. 만약 다시 육지가 나타나면 절대 그를 놀라게 해서 는 안 돼요. 우리는 지선언니와 원성을 찾으러 가겠으니, 내 말 명심하세요." 네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지시를 받들겠다고 약속했다. 영경과 약란은 다시 한 번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물어 확인하고는 각기 두 발로 지면을 박차고 몸을 위로 솟구쳤다. 동굴 입구의 덩굴은 이미 원성에 의해 파헤처져 있어, 그곳으로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이 분명하 였다. 폭포를 지나 석실 한가운데에 이르기까지는 텅 비어 있어서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 었다. 석실을 나와 다시 출로를 찾아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갔다. 두 사람은 검광에 의지하여 동굴 속을 비행하는 한편, 샅샅이 흔적을 찾았지만 역시 아무런 자취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비뢰동(飛雷洞)의 통로에까지 다다랐다. 그때 돌연 물소리가 마치 우레처럼 귀를 울리는 바람에 그들은 얼른 동굴을 벗어났다. 바깥은 천하의 기경층을 이루고 있는데, 바로 앞에는 그렇게도 찾아헤맨 지선과 원성이 절벽을 마주보고 멍하니 서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한 청의소년이 동굴 속에서 뛰어나와 학 위에 엎어져 있는 백의소년을 부축하는 모습이 보였다. 영경이 보니 바로 아는 사람이라 너무나 기뻐 부끄러움도 잊고 소리치며 급히 몸을 날려 그 소 년 앞에 내려섰다. 그 소년도 영경을 알아보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소저는 어떻게 여길 왔소? 사백님께선? 우리 사부님은 지금 안 계셔요. 사형이 며칠 전에 웬 여적(女賊)과 싸우길래 나도 달려가서 도와 여도둑을 쫓아보냈었지요. 그런데 오늘 사형이 혼자 동굴 밖으로 놀러나가더니 한참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지 뭡니까? 그런데 방금 학소리를 듣고 달 려나와 보았더니, 이미 부상을 당했더란 말입니다. 다행히 사부님께서 남겨 놓으신 단약이 있으니 나랑같이 부축하고 들어가면서 천천히 이야기나 합시다." 영경은 그의 말이 끝나자 약란과 지선과 원성을 불러, 청의소년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분은 내가 전에 말한 주사숙의 문인(門人)인 조연아(趙燕兒)님이야. 그런데 조아우는 어떤 연 유로 선인의 제자가 되었지? 그러고 보니까 우린 할 얘기가 많군. 가만 있자, 나랑 약란언니는 천 천히 돌아갈 테니까 지선언니는 원성과 함께 먼저 돌아가요. 어서 가서 새로온 네 얼뜨기가 또다 시 육지를 놀라게 하지 않도록 단속하세요." 지선과 원성은 급히 발길을 돌렸다. 이때 약란은 지선의 얼굴에서 뭐가 심상찮은 기미를 발견하 고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영경 역시 지선과 원성이 각각 보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연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조연아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 급선무인지라 자세한 얘기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간단한 수인사 끝에 지선과 원성을 돌려보낸 것이다. 지선은 영경의 말을 듣고서야 자기가 떠나버리는 바람에 새로 온 네 사람이 얼마니 생소하고 당 황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걱정이 된 그녀는 원성을 데리고 총총히 돌아갔다. 지선이 가고 나자, 조연아는 곧 부상 당한 벡의소년을 부축한 채 영경과 약란을 이끌어서 동굴 로 들어갔다. 영경과 약란이 보기에도 이 비뢰동은 다른 동굴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동굴 입구는 마치 사람 이 만든 듯한 두 개의 석문으로 되어 있는데, 들어서자마자 앞에 수십 개의 계단이 보였다. 계단 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서 동굴바닥에 당도하자, 눈앞에 여덟 개의 종유(鐘乳)로 이루어진 기둥이 곧장 솟아 천정을 받치고 있었는데, 두 갈래 여덟 방향으로 배열되어 수정기둥마냥 투명한 광채 를 발하고 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여덟 기둥의 크기가 똑같아서 전혀 별개처럼 보이지 않고 잘 정렬되어 있다는 점이다. 방 한가운데에는 화로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둘레에는 방석 다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 다. 아마도 연아가 수련하는 곳인 듯했다. 수정기둥을 지나 몇 걸음 걸어가자, 크고 작은 종유석 수 천 개가 천정으로부터 아래로 몇 장이나 드리워져 마치 수정병풍을 보는 듯했다. 종유석은 앞쪽과 뒤쪽을 차단하는 형상이었는데, 단지 두 군데에 크기가 같은 대략 넓이 석 자, 높이 여덟 자의 종유가 있어 문구실을 했다. 다시 그 문을 지나자, 셀 수 없이 많은 종유석이 수정 칸막이를 이루면서 십여 개의 방을 형성 하고 있었는데, 천장에서 바닥까지는 대략 삼십여 장에 이르렀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치솟는 광채인지 수정칸막이, 수정병풍, 수정기둥 위를 비추어, 마치 동굴 속이 환한 대낮마냥 사방에다 환상적인 빙화(氷火)를 뿌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동굴 가운데에는 돌침상, 돌책상 등이 옥인지 수 정인지 모르게 윤기를 발하며 놓여 있었다. 그것은 깨끗하기 그지없는 순백의 세계였다. 조연아는 도동을 부축하여, 석실 가운데 놓여 있는 침상 위에다 누이고 영경, 약란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급히 단약을 찾기 시작했다. 영경과 약란이 보니 그 도동은 몸에 전혀 피흘린 흔적이 없고 다만 이를 꽉 다물고 있었는데, 얼굴빛은 금빛이었다. 두 눈은 부릅뜨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고, 마치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냥 그대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듯이 보였다. 잠시 후, 조연아가 단약과 함께 연잎 비슷한 풀잎을 가지고 왔다. 약란은 그 약초가 바로 복선담(福仙潭)의 오풍초(烏風草)라는 것을 알고 참지 못해 물었다. "조도우가 가지고 있는 오풍초는 바로 선사이신 홍화모모(紅花姆姆)의 복선담에 있던 보물이군 요. 지난날 제영운언니가 이 약초를 채취해 가지고 형산으로 오라는 존명을 받들고 나랑 함께 가 던 도중에 우연히 학을 탄 한 분 선배사숙님을 뵈었는데, 그 선배께서 이 약초를 가지고 가셨답 니다. 제영운언니가 말하길, 그분이 바로 아미문중의 <염선(髥仙)> 이원화(李元化)사숙님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그 약초를 보게 되다니, 그럼 여기가 바로 이사숙님의 동부(洞府)가 분명한가요?" 조연아는 도동을 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답을 했다. "저희 가사께서 바로 <염선> 이진인(李眞人)이십니다. 전에 이 약초는 형산에서 백곡일(白谷逸) 사백을 거쳐 금모모(金姆姆)에게 넘겨져 완석대사(頑石大師)의 생명을 구했지요. 백사백께서 말씀 하시길, 이 약초는 세상에서 구하기 힘든 영약으로써, 근래 각파가 결전을 앞둔 마당에 이파의 요 사한 술법을 대항하는 데 여러 모로 쓸 데가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복선담 외에는 지화(地火)가 없어서 옮겨 심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중 겨우 옮겨 심을 수 있는 곳 세 군데를 발견하였는데, 동해(東海) 천풍굴(天風窟)과 구화(九華) 장교진인(掌敎眞人)의 별부(別府), 그리고 바로 여기 비뢰동입니다. 그리하여 오풍초 수십 뿌리를 똑같이 나눠 반은 <동해삼선(東海 三仙)>께서 가져가시고, 나머지 반은 백사백께서 친히 구화로 가져오셔서 심었답니다. 그중 두 뿌 리를 사부님께서 겨우 얻어낼 수 있었던 거지요. 사부님이 이 영약을 구하신 뒤 적지 않은 사람 을 구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그 사용법을 대강은 알고 있지요." 도동은 이미 조연아가 준 선단(仙丹)을 복용한 데다가, 다시 오풍초를 몸에 칠하자, 얼굴색이 차 츰 좋아지기 시작했다. 조연아는 환자의 회복에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우리 사형이 무슨 요법에 당했는지는 몰라도, 학을 타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분명 심 한 중독은 아닐 거예요. 사부님께서 여기 계실 때 항상 분부하신 말씀이 이 약초는 독으로써 독 을 제압하므로 매우 위험하니까 정말 위급한 일이 아니면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이 약초는 바로 신사저의 선산(仙山)에서 자라던 것이니, 누구보다도 효능을 잘 알 거라고 생각됩 니다. 우리 사형께 도움이 될지 어떨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약란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당신 사형은 선단을 복용하고 나자 얼굴색이 차츰 좋아지는 것 같은데, 아직도 정 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이마 중독당한 것이 아니라 혹시 무슨 요법에 걸린 것이 아닐까요? 전 에 우리 선사께서 각파의 요법에 두루 정통하셨으므로 조긍은 배울 기회가 있었지요. 이분의 신 기(神氣)를 볼때, 아마 여적의 향무미혼사(香霧迷魂砂) 같은 것에 당한 것 같네요. 나 역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어요. 좀더 두고 봅시다. 그래도 별 진전이 없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하구 요. 그렇더라도 조도우는 나를 비웃지 마세요." 영경이 말했다. "언니는 어쩜 이렇게 중요한 때에도 부끄러움을 타지? 조사제는 외인(外人)이 아니야. 이분 사형 이 요법에 부상당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당장에라도 손을 써야지, 쓸데없이 사람 마음만 초조하게 만들다니? 에간장 타는 소린 그만해 두고 빨리 구해." 약란이 말했다. "얘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네. 각 이파(異派) 가운데 요법이 어디 한두 가지니? 나는 학 문이 낮아서 당장 알아낼 수가 없어. 오풍초를 몸에 묻혔을 때, 한 줄기 사악한 향기가 코 끝에 스미길래, 향무미혼사가 아닐까 추측해 봤을 뿐이야. 맞는지 아닌지는 깨어나야 알 수 있을 테지. 동생은 덮어놓고 사람을 들볶아대니 내가 죽을 지경이야." 영경이 다시 뭐라고 말하려고 할때, 약란이 별안간 머리를 풀어헤치더니, 몸에서 조그만 백옥병 을 꺼내들었다. "조도우, 비꼬지 말아요." 약란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 병을 환자를 겨냥하며 입 속으로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웬지 모 를 기이한 향기가 실내에 진동하며 환자의 얼굴 위에 여러 가닥의 실안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했 다. 조연아는 그 향기를 맡자 웬지 잠이 쏟아지려고 했다. 이것 참 신기하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약란이 들고 있는 병주둥이에서 다섯 가지 빛깔의 불꽃이 두 줄기나 쏟아져 나오더니, 곧장 환자 의 얼굴쪽으로 뻗어갔다. 그러자 금세 도동의 얼굴 위에 드리워져 있던 여러 갈래의 실안개가 소 롯이 옥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 도동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아, 좋은 향기로구나." 그러더니 부스스 깨어났다. 눈을 뜬 도동은 자기 앞에 천하절색의 두 아가씨가 서 있는 것을 보 고 대갈일성을 질렀다. "천한 계집들이 감히 여기까지 침범하다니! 살려두지 않겠다." 그러면서 곧장 손을 치켜들었다. 조연아는 그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급히 소리쳤다. "사형, 손을 멈추시오! 이 두 아가씨는 우리 동문으로서 사형을 구해준 분들입니다." 그러고는 얼른 두 사람을 소개하고 그간의 내력을 소상히 얘기 해 주었다. 도동의 이름은 석기(石奇), <염선> 이원화가 어려서 고아가 되어 떠도는 것을 산중에서 발견해 가지고 제자로 거둔 젊은이였다. 그의 자질로 보건대 결코 조연아보다 떨어지지는 않는 듯했다. 석기는 영경과 약란이 묘일부인의 문하로서 동문임이 확인되자, 좀전에 자기가 성급하게 취한 무 례한 행동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영경은 조연아와 더불어 그동안에 일어난 일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영경은 원래 전부터 <염선> 이원화의 명성을 들어왔던지라, 조연아에게 물었다. "사숙님은 어딜 가셨지?" 조연아가 대답했다. "사부님은 구화산에 가셨는데, 일 년쯤 걸릴 거라고 하셨어요. 아직 채 일 년이 못되었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학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연아는 그제사 생각이 떠오른 듯 석기에게 물었다. "제가 그만 영경사형이랑 지난 일을 얘기하느라, 사형께 물어보는 것을 잊었군요. 사부께서 아직 돌아오시지도 않으셨는데, 사형은 여적(女賊)에게 당하고 나서 어떻게 학(鶴) 사형의 도움을 받게 되었나요?" 석기가 말했다. "말하기조차 부끄럽군. 내 며칠 전 동굴 앞에서 그 여도둑이 비뢰동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고 기를 훔치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상대가 여자인 데다가, 수천 장에 이르는 물줄기 속 에서 고기를 잡길래 상대하기가 어렵더군. 그런데 갑자기 그녀와 눈빛이 마주쳤단 말이야. 나는 그만 얼굴이 빨개져서 동굴 속으로 얼른 숨어버렸지. 다음 날도 그 여도적은 이번에는 웬 소녀를 데리고 나타나서 간도 크게 또 고기를 훔치고 있었어. 그래도 난 나무라지 않았지. 그런데 그 소 녀가 여도적이 비락한담(飛落寒潭)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틈을 타서 갑자기 나한테 다가올 줄이 야 누가 알았겠어? 그러더니 내게 묻더군. '오빠는 여기 아미산 뒤에 사시는가 보군요. 혹시 아주 크고 몸이 시커멓고 금빛 눈을 가진 독수리를 보신 적 없어요?' 그런데 말을 하면서도 얼굴에 곤 혹한 빛을 띠는 것이 마치 그 여도적이 들을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어. 내가 뭐라고 말도 하기 전 에 벌써 몇 마리의 금안세린어(金眼細鱗魚)를 잡아올린 여도적이 소녀가 나와 얘기하고 있는 것 을 눈치 챘나봐. 급히 다가오더군.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와 두 눈이 마주치자, 생긋 미소를 짓더 니 소녀를 꾸짖지 않더란 말이야. 아마도 내 앞이라 체면을 차리지 않나 싶었지. 여도적은 한 손 으로 소녀의 등을 떠밀면서, 한 줄기 푸른빛 검광을 타고 날아가 버리더군. 그래서 나도 별다른 주의를 하지 않았지.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그 여도적이 혼자 나타나 다짜고짜 내게 덤벼들지 뭐야. 난 그녀와 겨루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곤란한 지경에 빠졌는데, 다행히 연아사제가 와서 도와주는 바람에 그녀를 쫓아버렸지. 그런데 오늘 아침에 나는 또 동굴 앞에서 폭포를 감상 하며, 금안역어(金眼逆魚)가 힘껏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지. 그순 간 맹렬히 떨어지는 폭포 위로 취조(翠鳥)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이 보이지 뭐야. 수도(修道)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저 새처럼 마음껏 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지. 그렇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기이한 향기가 나길래 후딱 뒤를 돌 아봤더니, 바로 그 여도적이 킬킬 웃으며 뒤에 서 있지 않겠나. 나는 미처 칼을 뽑을 사이도 없이 그만 기절해 버렸는데, 내 몸이 누군가에 의해 안겨 공중을 날고 있다는 것을 알겠더군. 한참 날 아 가다가 겨우 땅에 내려졌는데 마치 누군가가 나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것 같았어. 얼마 되지 않아 학사형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두 번이나 들리기에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몸은 마치 불덩 이 같고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서 전혀 움직일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나서는 한참 지나 학사 형이 나를 업은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더군. 그런데 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의식이 희미해지더란 말야. 그래서 두려운 맘에 손에 잡히는 것을 죽을 둥 살 둥 꽉 붙잡았지. 깨어보니 까 이미 동부에 돌아와 있지 뭐야. 그 밖에는 아무것도 기억하는 것이 없어." 영경은 석기가 말하는 도중에 웬 소녀가 금안의 큰 독수리에 대해서 물어봤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전의 일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언젠가 망창산(莽蒼山)에서 보검을 얻어 돌아와 여영남(余英男)의 서신을 받았는데, 여영남은 광 혜사태(廣慧師太)가 원적(圓寂)한 뒤에 집을 옮긴 후 영경과 함께 지내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 데 생각지도 않게 곤륜파의 여검선 음소당(陰素棠)을 만나 그녀를 따라가는 바람에 그만 합류하 지 못했던 것이다. 여영남은 본래 삼영(三英)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후일 아미문하를 빛낼 인재로 알려졌었다. 그런 데 아깝게도 악인의 손에 결국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음소당은 비록 불의를 일삼았지만, 검술은 곤륜의 진전을 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그녀는 여영남을 보고 그녀의 자질이 남달리 우수한 것을 탐내 집요하게 강요하여 마침내 자신의 제자로 삼았는데, 악의는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무공을 전수하여 주었다. 어쨌든 영경은 여러 동문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동천복지에서 매일 검술을 연마하고 지내다 보 니, 그만 날이 갈수록 점점 그 일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석기의 말을 들어보니 그 소 녀의 용모가 영남과 흡사한지라 지난날의 일이 황급히 떠오르며 영남에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영경은 이미 그때의 영경이 아니다. 이제 영남이 여도적에게 얽매여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았으니, 어찌 그냥 내 버려 둘 수 있겠는가? 하지만 조화애(棗花崖)라는 곳을 가본 적이 없으니 낭패였다. 석기가 그 여도적의 마수에 걸렸을 때는 정신이 혼미한 중이다. 그 길을 정확히 알 수도 없고, 또한 거기가 꼭 조화애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석기는 영경으로선 초면일 뿐 아니라 적의 암산에 걸려 부상까지 당한 몸이니 번거롭게 수고를 끼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연 아만 해도 비록 그녀와는 오랜 인연으로 연결된 몸이지만, 무공 실력이 아직은 자기한테도 미치 지 못하는 것이다. 영경 자기도 청라에서 곤욕을 치렀기 때문에 도무지 온전한 몸이 아니다. '지난날 금선사형이 주언니랑 신조랑 함께 영남언니를 찾으러 갔던 곳이 혹시 조화애가 아닐까? 지금 석기, 조연아 두 사람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니, 우선 동굴로 돌아가서 지선, 약란 등 두 언니와 의논한 다음, 신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기회를 봐서 그때 일을 도모해 봐야지.' 영경은 벌떡 일어나 연아에게 말했다. "우린 먼저 돌아가겠어요. 생각 같아서는 두 사람과 함께 더 어울리고 싶지만, 할 일이 있어서 약란언니랑 가며 의논을 좀 해야겠어요. 다행히 오늘 비뢰동의 지름길을 뚫어놨으니, 서로 왕래하 기가 아주 쉬울 거예요. 하루나 이틀 후, 두 분을 뵈러 다시 올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그런 다음 갈 길을 재촉했다. 약란도 석기의 말을 듣고는 그 소녀가 여영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경의 생 각을 타진해 볼까도 싶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 앞이라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영경이 한참 동안 골똘히 뭔가 생각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서는 것으로 봐서 아마 자기랑 뭔가 상의할 일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막 입을 열어 물어보려는 순간, 영경이 그녀를 향해 눈짓을 보내는 것이 딴 사람 앞에서 얘기를 꺼내기를 원치 않는 것 같아, 끝내 묻지 않았다. 석기, 조연아 두 사람이 간곡히 말리는 것도 뿌 리치고 훗날을 기약하며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참 가다가 약란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영경에게 물었다. "석도형이 말한 그 소녀가 여영남이 맞지? 그런데 거기서는 왜 아뭇소리도 하지 않았니?" 영경은 자기의 의도를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듣고 나서 약란이 말했다. "정말 생각이 깊구나! 영경동생은 총명하기가 그저 그만이야! 나는 말이야, 조화애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신조가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같이 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하지만 영경동생은 눈 앞에 놓인 길을 놓쳐버린 꼴이 되지 않았을까?" "이 사숙님의 선학이 석사형을 업고 돌아오지 않았니? 저번 영남의 편지에 자기는 조화애에 있 다고 말했지만,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잖아? 신조가 정말 바로 찾아갔다는 보장 은 없어. 이전에 세 번씩이나 갔었지만 찾지 못한 걸 보면 이번도 오십 보 백 보일 거라고 나는 예상해. 내 생각에 영남은 이파(異派)의 손아귀에 들어 있어서 구해내기가 힘들 거야. 그 음소당 이란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돌아가신 사부님의 말씀에 의하면 모두가 여간 고강한 인물들이 아 니래. 석사형이 적수가 되지 못한 것을 보면 우리도 섣불리 대할 수 없다구. 그러니까 상책은 날 을 잡아서 조금씩 음소당의 뒤를 밟아 결정적인 순간에 추궁하는 거야. 그래도 음소당이 여전히 발뺌하면 찾아가서 따져야지 뭐. 그때는 이미 단오절이 지났을 때니까 우리 문파 사람들이 모두 돌아올 테고, 그렇게 되면 그녀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순 없을 거 아냐." 영경은 그 말을 듣고 기쁨에 들떠 말했다. "정말 맞는 말이야! 큰언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도, 그렇게 되면 우리 힘으로 구해낼 수 있겠 구나." 약란이 말했다. "그건 안 돼. 큰언니는 진작부터 음소당의 행실을 알고, 영남에게 외인(外人)의 무공을 배우도록 한 거란 말이야. 석사형의 말에 의하면, 영남은 그 여도적에게 꾸지람을 듣지도 않았는데 아주 두 려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하니, 아마 평소에 학대가 심했나 봐. 아무튼 큰언니와 영남이 우연히 마 주치는 것은 좋지 않아. 서로 맞붙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겠니? 넌 설마 아직 도 너희들의 칭호가 <삼영이운(三英二雲)>이란 것을 모르지 않지? 너희들이야말로 우리 아미파 의 번성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라구." 영경도 비록 약란의 말이 이치에 맞는 말이긴 하지만, 당장이라도 가서 그녀를 구해내야만 직성 이 풀릴 것 같았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비뢰동으로 되돌아가려고 몸을 돌 렸다. 조연아에게 부탁하여 염선의 선학을 빌어타고 가서 먼저 영남이 있는 곳을 안 뒤에 다시 계책을 강구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막 동굴 문을 나서는 순간 한 줄기 푸른빛과 두 줄기 흰빛이 어지러이 한 데 어우러져 혈전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자세히 보니 흰빛 검광은 석기와 조연아 두 사람이 발출하는 것이고, 푸른빛 검광을 뿌리고 있 는 사람은 웬 여인이었다. 여인의 복장은 매우 선정적이어서 자태가 요염하기 짝이 없었고 미간 에는 음탕한 기운이 가득하였는데, 매서운 기합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세 가닥 검광을 토하면서 서로간에 별 차이는 없었으나, 단지 둘이 하나를 공격하는 꼴이라서 약간의 우세를 점할 뿐이었 다. 그 여인은 자기가 쉽사리 상대방을 제압할 수 없음을 알고는 보검을 휘둘러 상대방을 막으면서 한편으론 긴 머리칼을 풀어헤치더니 등 뒤에서 한 자 남짓한 불진(佛塵)을 꺼내들고, 입 속으로 주문을 외면서 요법을 시전하려 했다. 이때 마침 영경, 약란 두 사람이 도착한 것이었다. 영경은 이 광경을 보자마자 분기탱천하여 곧 검광을 출수하려 했다. 그러자 약란이 다급히 말했다. "조금 더 기다려 봐. 저 여도적은 또다시 요법을 써서 사람을 홀리려고 하는 거야. 너는 그냥 가 만히 있어. 비록 정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내가 어느 순간 틈을 타서 저 불진을 빼앗아 버릴게." 그래서 영경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약란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약란은 벌써 백옥병 을 꺼내들고 아까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 여인은 그때까지도 자기 등 뒤에 두 사람의 강적이 나타난 줄을 몰랐다. 막 불진을 펼치며, 한 덩이 채무(彩霧)를 날리며 달려들려고 하는데, 별안간 뒤에서 큰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 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천한 것! 감히 요술로 사람을 미혹시키려 하다니?" 여도적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십삼사 세나 되었을까. 재질이나 용모가 자기 사매인 여영남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아리따운 소녀가 서 있는지라 깜짝 놀랐다. 다만 영남보다는 좀더 총명해 보였는데, 장검을 차고 자기를 가리키며 마구 욕을 퍼부어 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채 뭐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자기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어 서 한 줄기 푸른빛이 번쩍이기에 보니, 그 소녀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또 한 소녀가 손에 백옥병을 들고는 병주둥이로 오색 화화(花火)를 발출시켜 자기가 발출시킨 향무(香霧)를 거두어버 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찰나, 다른 한 손이 쭉 뻗어나와 자기의 불진을 잽싸게 빼앗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상대방이 어떤 법술로 신형을 숨겼는지, 자기 코앞까지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데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손에서 보물을 빼앗아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지만 속수 무책이자, 그녀는 머리 끝이 쭈뼛 일어서는 한편 불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곧바로 요법을 사정없이 시전하여 원한을 갚으려고 하는 순간, 또다시 처음에 본 소녀가 소리쳤다. "석, 조 두 분은 검을 거두고 물러나서 내가 이 파렴치한 도적을 제압하는 것을 구경이나 하세 요." 그녀는 상대가 너무 많아서 두 손, 두 다리로 감당한다 해도 힘들거라고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젊은 사내들이 무기를 거두고 물러나자 의아해 하면서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급히 비검을 날려 약란을 덮치려는 순간, 갑자기 싸늘한 자줏빛 검광이 마치 신룡(神龍)마냥 자기를 향해 덮쳐 오지 않는가! 그때 자기의 보물을 빼앗아간 조금 더 나이 많은 소녀는 슬그머니 검광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그녀 앞에 마주선 채 빼앗은 불진을 들고 깔깔거렸다. 기구한 신세, 여영남 萬里孤征 余英男殺賊棗花崖 一心溺愛 金聖母傳針姑婆嶺 안목이 뛰어난 여도적은 이 자줏빛 검광을 보자 곧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자줏빛 검광을 사용하는 고수가 있다는 소리는 몇 년 전에 사부님께 들은 적은 있지만 아직 본 적이 없었는데, 뜻밖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 두 계집아이의 내력이 대체 뭘까? 어린 쪽이 이처럼 대단하다면, 나이든 쪽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군.'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가운데 약간의 두려움이 여도적의 가슴에 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호승심이 대단한 여자인 데다, 법보도 넉넉한지라 달아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처럼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상대방의 자줏빛 검광이 이쪽 푸른빛 검광에 부딪쳤다. 순 간 그녀는 그 엄청난 위력을 맞아 지탱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사태가 불리함을 깨 닫고 급히 검광을 거두려 했다. 그러나 이영경의 자영검(紫暎劍)은 아미의 진전을 이어 연마한 것으로써 날로 기세가 웅대해지 는데, 어찌 상대가 쉽사리 검광을 회수할 수 있단 말인가! 두 검광이 어울려 맞부딪치기 두세 차 례도 되지 않아 여도적의 푸른빛 검광은 격파되며 수만 마리의 푸른 반딧불모양 가루로 변해 산 산이 흩어졌다. 이어서 영경의 손짓에 따라 자줏빛 검광은 뱀과 같이 곧장 그녀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여도적은 자기 비검이 상대방에게 여지없이 부서지자 뼈저린 아픔을 느꼈지만, 사태가 매우 위 험함을 느꼈다. 자줏빛 검광이 다시 자기에게 날아오자, 여도적은 너무 급박한 순간이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감히 머뭇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어, 급히 손을 품속에 집어넣어 뭔가 물건 하나를 꺼내들었다. 다음 순간 한 줄기 바람이 일렁이며 불꽃이 번쩍하더니 주위가 온통 안 개로 뒤덮여 버렸다. 영경이 막 제압하려는 순간, 그녀의 신형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여도적이 달아나자 네 사람은 서로 마주보았다. 신약란이 말했다. "저 여도적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그녀가 적시에 도망치면서 사용한 수법은 바로 삼원일체(三元一體), <감리화신지법(坎離化身之法)>이거든. 전에 우리 선사(先師)께서도 이 법(法) 을 사용하셨는데, 안타깝게도 난 아직 배우질 못했구나. 만약 이파(異派)의 진전을 사용하지 않았 다면, 내 무공 실력으로 그 여도적을 제압하긴 힘들었을 거야. 하지만 이름도 내력도 알아내지 못 하고 쫓아버린 것이 못내 아쉽군." 영경이 말했다. "우리 말만 하느라 연아사제에게 물어보는 것을 잊었네. 이사숙의 선학이 석사형을 업고 돌아왔 으니, 여간 영통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그 여도적이 달아난 곳을 알 게 아니겠어? 지금 나랑 신언니가 선학을 빌어 길을 찾아가서 그 여도적에게 붙들려 있는 한 사람을 구해내고 싶은데, 가 능할까요" 조연아가 말했다. "그럴 생각이라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요. 학사형은 원래 사부님의 명에 따라 움직이므로 언제든 지 데리고 다닐 수가 있어요. 하지만 아미산 응벽애의 태원동(太元洞)이 얼마 안 있어 문호를 펼 친다는 것을 이미 각 이파가 알고 있으니 조만간 침범해 올 거요. 비뢰동은 아주 중요한 곳으로 써, 응벽애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나랑 석사형은 틈나는 대로 응벽애와 통하는 길을 마련 하려고 여간 고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행히 사저들이 이미 지름길을 뚫어놓았으니, 얼마나 반 가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사부님께 이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편지 한 통을 써서 학사형한테 주 어 돌려보내 버렸지요. 사저가 조금만 빨리 왔어도 됐을 걸." 그리고는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영경에게 물었다. 영경은 자기가 선학을 빌어 타고 가서 여영남을 구하려고 하는 생각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그러자 석기와 조연아는 자기들이 그 일을 도와주면 어떠냐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영경이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두 분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것이 너무 번거로와요. 선학은 이미 떠나버렸고 우리 는 길을 모르니, 선학이 돌아오면 그때 다시 의논하기로 합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지금 청 라에 있는 여러 동문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다시 얘기해요." 이처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다음, 영경과 약란은 석기와 연아 두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고 귀 로에 올랐다. 막 태원동 앞에 당도해 보니, 구지선이 신참 네 사람과 함께 신조에게 사슴고기를 주면서 놀고 있었다. 영경은 너무 기뻐 한달음에 달려가 신조의 목을 껴안고 등에 올라탔다. 신조도 주인을 보자 아주 기쁜 듯이 '꾸르르!' 하고 울부짖으며 부리를 영경의 몸에다 비벼댔다. 신조는 큰 문짝만한 은빛 날개를 퍼득이며 땅에서 대략 서너 자 높이로 낮게 떠 날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네 사람은 하나같이 놀라는 빛을 띠었다. 한참 그렇게 날다가, 신조는 영경의 호령에 따라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일행이 이윽고 동굴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 지선은 세 자루의 보검을 얻은 경과를 자세히 얘 기했다. 원성이 들고 있던 보검을 옆에 내려놓자, 영경과 약란은 세 자루의 보검을 각각 뽑아서 세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물건으로써 차디찬 기운이 검신을 감싸고 있는 것이 아마도 선배 검선이 사용하던 지보(至寶)임에 틀림없었다. 영경과 약란은 자신들이 얻은 것처럼 아주 기뻐했다. 영경은 곧 약란과 지선에게 영남을 구하러 당장 떠나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 약란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너무 일러. 바깥은 아직 밝아서 별로 상황이 좋지 않아. 오늘밤은 달도 없기 때문에 날 이 새기 전에 행동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곳에 도착하면 날이 밝을 테니 찾기에는 안성맞춤일 거 아냐?" 영경과 약란은 한동안 상의한 후, 지선더러 돌아가 신참 네 사람을 먼저 쉬게 하라고 일러주었 다. 영경과 약란은 한동안 무공을 연습했다. 그런 다음 원성에게 나가서 신조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신조가 들어오자 영경이 물었다. "강우(鋼羽)야! 너는 전에 주언니, 금선오빠 두 사람을 업고서 우리 영남언니를 찾으러 갔었지? 그 뒤 두 사람이 돌아와서 말하길, 네가 어떤 곳에 이르러 땅에 내려앉았다고 하더구나. 음소당이 란 여도적이 영남언니를 데리고 가서 숨겨 놓은 동굴이 있는 곳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 신조는 그녀의 말을 듣고, '꾸우!' 하고 긴 울음소리를 지르며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 경은 내심 손뼉이라도 치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축시(丑時)에서 인시(寅時)로 넘어갈 무렵이 되자, 지선이 달려오더니 두 사람에게 정말 떠날 작 정이냐고 물었다. 영경이 대답했다. "우리는 반드시 영남언니를 데리고 올 거예요. 아마 하루면 족할 거야. 동부에서 일어나는 잡다 한 일은 지선언니가 알아서 처리해 줘요. 그리고 아무리 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저 신참내기 네 사람이 언니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세요." 그러자 약란이 영경을 핀잔했다. "동생은 걱정도 팔자야. 자기만 철이 들고 믿음직하다는 거야 뭐야. 말끝마다 다른 사람을 어린 애 취급하는구나! 그 사람들은 처음 왔기 때문에 물정을 통 몰랐을 뿐이야. 우리가 육지를 잡는 것을 보고는 정말 잡으려고 그러는 줄 알고, 좋은 뜻에서 우릴 위해 가로막았던 거야. 그런데 동 생은 대놓고 마구 욕을 해댔으니, 그만하면 충분했잖니? 남고사저가 불쌍해. 방금 동생이 신조를 타고 놀 때 그녀가 그러더라. 아까 조심성이 부족했던 점을 너한테 그네 대신 사과해 달라고 말 이야. 그리고 자기들 네 사람을 너무 탓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 그녀는 자기 입장을 똑바로 해명 하지도 못했어. 자기랑 같이 온 사람들의 실수가 자기한테도 허물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 런데도 동생은 감정을 풀지 않으니, 남고사저가 알면 속으로 얼마나 불편해 하겠니?" 영경이 뾰로통해서 말했다. "누가 아직 그들을 탓하는 줄 알아? 난 단지 그들이 처음 왔기 때문에 사정을 잘 모를 것 같아 지선언니더러 신경 좀 써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야. 지선언니가 보검을 얻은 일과, 영남언니를 데려 오는 일로 정신이 없어서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은 거라구. 하긴 말이 났으니 이야긴데, 남고오누 이와 우, 양 두 사람을 보면 웬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그 까닭을 나도 잘 모르겠어." 약란은 영경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린 마음에 두서없이 지껄였겠 거니 생각하고,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체된 것 같아서 영경과 약란은 여영남 구출작전에 나설 준비를 했다. 두 사람이 막 태원동을 나왔을 때, 문득 약란의 뇌리에 어제 조연아가 한 말이 떠올랐다. <염선 > 이원화의 선학이 주인에게로 날아갔다는 것 말이다. 그녀는 영경에게 물었다. "얘, 어제 석, 조 두 사람이 우리를 도와주고 싶다고 했지? 이번 일은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한 데, 그들이 알아버렸으니 어쩌지? 게다가 비뢰동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발견한 사실을 <염선> 이 사숙께 벌써 알려버렸으니 법술로 봉쇄해 버려야 될까 봐. 큰언니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으니 우리의 책임이 막중해. 이런 때 우리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여러 모로 불리하다구. 하 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금 떠나야만 하니까, 뒷동굴로 가서 석, 조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해서 경각심을 높이고 원성으로 하여금 입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해야겠어. 어제 보니까 원성이 새로 구한 장검 두 자루는 내 비검보다 훨씬 훌륭한 것 같더라. 아직 수련은 덜 되어 있지만, 출 수만 능숙하게 하면 쉽사리 이파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거야. 거기다 석, 조 두 사람까지 도와주 고, 내가 다시 긴급할 때를 대비하여 법술로 동굴입구를 봉쇄해 두면 아마 안전할 거야." 영경은 약란의 말을 듣자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곧 신조를 데리고 뒷동굴로 왔다. 마침 먼동이 뿌옇게 밝아오는 때라, 석기와 연아가 무공을 연마할 시간이었다. 막 동굴을 벗어난 영경은, 동굴 앞 바위 위에 서 있는 석기와 그옆의 봉우리 중턱에 서 있는 조 연아를 발견했다. 각자 검광을 사용하여 겨루고 있었는데, 공 수의 입장을 바꿔가며 한 차례씩 주 고받았다. 현란한 별빛 아래 어떤 때는 백룡이 꿈틀거리며 하강하듯, 어떤 때는 번개가 번쩍이듯, 서로 공수 연결이 딱 들어맞아서 보는이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인기척을 느낀 석기와 조연아가 돌아보며 두 동문사저가 와 있으므로 그들은 곧 검광을 거두고 인사를 나누었다. 영경과 약란은 자기들이 찾아온 뜻을 밝혔다. 신조와 원성을 처음 본 연아는 어 제 영경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는지라 짐짓 말을 붙이며 신기한 듯 관심을 나타냈다. 영경이 웃으며 말했다. "연사제, 우리가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합시다. 지금은 바빠서 안 되겠네." 석기와 연아는 자기들의 책임이 막중하므로 섣불리 같이 가서 도와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약란도 웃으며 말했다. "사실 두 분의 무공실력은 누가 침범해 와도 별로 두려울 게 없을 정도예요. 다만 엄명을 좇아 근신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내가 장안법(障眼法)을 좀 펼칠 줄 아는데, 선사께서 내가 심산수 도 할때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말라고 전수해 주신 거예요. 그걸 두 분께 가르쳐 드리고 싶은데 어때요, 도와주실래요?" 그리고는 품속에서 조그만 깃발을 하나 꺼내들었다. 아주 작은 기였지반, 겉에는 수많은 번갯불 과 비바람과 기이한 형상들을 가득 그려놓아서 마치 음흉한 부적 같았다. 약란은 모두가 보는 가운데, 구궁(九宮) 방위에 따라 주문을 외고 동굴 앞 바위 위에 세웠다. 그 러자 아홉 가닥의 홍광(紅光)이 뻗어나와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약란이 말했다. "이것은 <건곤전변잠형기(乾坤轉變潛形旗)>예요. 강적이 나타나면 진언(眞言)을 외며 진(眞) 안 으로 얼른 피하세요. 그러면 상당한 효험이 있을 거예요. 이 법술은 아주 신기하여, 우리 선사께 서는 이걸로 많은 고수를 제압했지요. 다만 아미교주였던 장미진인만이 한 차례 뚫었을 뿐, 그분 외에는 아무도 파해한 사람이 없어요. 이 기(旗)는 방어를 위한 것으로, 절대 뽑아서 사용해서는 안 돼요. 이제 사용방법을 두 분께 알려드릴 테니 만일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면 즉각 펴세요. 다 만 원성도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시고." 약란은 석기와 연아에게 주문을 자세히 알려주고, 영경과 함께 신조에 올라탔다. "날아랏!" 영경이 소리치자, 신조는 푸드득 나래를 펼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신조는 두 사람을 태우고 조화애를 향해 신속히 날아갔다. 아직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 밝았고, 굽어본 아래에는 두터운 구름이 창랑대해를 연상케 했다. 높고 낮은 수많은 봉우리들이 그들 발 밑을 스칠 듯이 지나갔다. 한참 날아가자, 동쪽에서 두세 가닥의 밝은 빛이 구름을 뚫고 쏘아져 왔다. 그러더니 점점 그 빛 이 굵고 강렬해져서 구름을 태울 듯 온 세상을 밝게 물들일 듯 강렬한 기세로 번져갔다. 두 사람 은 이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렇게 자연의 경관을 마음껏 즐기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뿌연 기운은 점점 짙어지더니 마 침내 세상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눈부심을 안고 태양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하늘에서 바라본 일출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영경이 약란에게 웃으며 말했다. "산에서 해뜨는 광경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오늘 같은 일출 광경은 처음이야. 정말 아름답군." 약란이 뭐라고 대꾸하려고 할 때였다. 신조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긴 울음소리를 내더니 앞날 개를 움츠리고 곧장 구름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름 속을 뚫고 지나가자 얼굴에 축축한 촉감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어느덧 목적지에 당도한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한담을 나눌 처지가 아닌 것 이다. 그들은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준비를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신 조는 두 사람을 싣고 구름을 통과하여 어느 산 위에 사뿐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신조의 등에서 내려서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 산은 온통 대추나무 숲으로 덮여 있었는데, 때는 오월이다. 황금색 꽃이 만발하였으며, 사방에 이름 모를 자홍(紫紅)색의 들꽃이 피어 있어 흡사 온 산이 오 색 비단같이 눈부셨다. 위에서는 폭포가 떨어져 내렸고, 아래엔 맑은 계곡이 흘렀다. 폭포소리와 개울소리의 협주는 정말 아름다왔다. 그늘진 으슥한 곳에서 이름 모를 새 울음소리도 들려오는 것이, 정말 뛰어난 경관이었다. 영경은 영남을 구하는 데 바빠 경치를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다. 금선의 말에 의하면 이곳 어딘 가에 동굴이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주의를 집중시켜 가만히 동굴을 찾기 시작했다. 절대 성급히 굴어서는 안 된다고 약 란이 누누이 주장했으므로, 신조는 부를 때까지 딴 곳에서 기다리고, 약란과 영경은 동굴을 찾고 는 일단 몸을 숨긴 다음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영남이 이곳에 있다면 반드시 나타날 테니, 나타 나면 조용히 데려가고, 만약 못 만나게 된다면 그때 가서 다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두 사람은 상의를 한 뒤 언덕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또 다른 대추나무숲을 지나자, 과연 눈앞 에 하나의 석굴이 나타났다. 동문(洞門) 위엔 전서체(篆書體)로 <옥녀동(玉女洞)>이라고 새겨져 있었고, 석문은 꽉 닫혀져 있어서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동굴 옆 바위 뒤에 잠복하여, 누군가가 나오길 조용히 기다리며 기회를 노렸다. 그런 데 대략 한 시진 정도 지났지만 도대체 아무런 기미도 없었다. 성격이 급한 영경은 그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안절부절 못했으나, 오래 전부터 스승인 홍화모모의 입을 통해 음소당의 위력을 알고 있는 약란이 재삼 간곡하게 타일러서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했다. 영경도 어쩔 도리가 없어, 다시 약 한 시진 정도 더 기다렸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동요가 없자, 마침내 약란에게 말했다. "동굴은 꽉 닫혀 있고 아무도 나오지 않잖아? 영남언니는 물론이고 도대체 누가 들어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이렇게 마냥 기다릴 바에야 뭣하러 왔어? 내가 보기엔, 일이 결코 순탄하게 처리될 것 같지는 않아. 그리니까 차라리 저기 들어가서 알아보는 게 낫겠어. 만약 영남언니가 여 기 있으면, 우리는 친구인데 특별한 일이 있어서 만나러 왔다고 둘러댄 뒤, 언니를 만나게 되면 그때 다시 계획을 세우기로 해. 그래서 만약 없다고 하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지 뭐. 그냥 이렇게 죽치고 있다고 뭐가 달라지기라도 할까?" 약란은 영경을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 내 생각엔 영남이 반드시 이 산에 있을 거야. 하지만 결코 밖으로 나올 수가 없겠지. 만 약 이 동굴에 아무도 없다면 우린 쓸데없이 기다린 꼴이 되니, 내가 가서 살펴보기로 하지." 이렇게 말한 뒤, 약란은 영경더러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녀는 훌쩍 몸을 날려 동 굴 옆으로 다가가더니 대충 훑어보고 곧 돌아와서 말했다. "정말 이상해. 대추꽃이 이처럼 무성하고, 신조도 이미 와 봤을뿐 아니라 금선사제가 이야기한 곳과 들어맞으니, 여긴 분명 조화애가 틀림없어. 방금 내가 동굴문을 살펴보니 굳게 닫혔을 뿐 아 니라, 밖에서 누가 법술을 써서 봉쇄를 해놓았어. 이런 상황을 보건대, 동굴 주인은 벌써 떠나버 렸어. 그러나 법술로 문을 봉쇄한 걸로 보아 결코 이곳을 버리고 가진 않은 거야. 그러니 반드시 돌아올 테지. 다만 언제 어느 순간에 올 지 모를 따름이야." 영경은 그녀의 말을 듣고 펄쩍 뛰며 말했다. "만약 동굴 임자가 입구를 막아버리고 갔다면 영남언니가 저곳에 갇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가 없잖아." "무슨 이유로?" "언니가 본대로를 짐작컨대 동굴의 임자가 분명 음소당 본인이 아니라, 필시 그 여도적이 총애 하는 제자나 동도의 친구일 거야. 석, 조 두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여자는 영남언니에게 잘 대 해 주지 않았다잖아. 영남언니는 그 여자를 두려워하면서, 나를 만나고 싶은 생각에 밑도 끝도 없 이 신조를 본 적이 없었느냐고 물어본 거라구. 이런 정황으로 보아 시간도 꽤 지났는데, 어찌 그 여도적이 간파하지 못했겠어? 당연히 그녀는 삼엄한 방비를 했을 거라고. 전후 정황으로 보아 음 소당은 이곳에 없을 것이고, 그 여도적과 영남언니만이 이곳에서 수련하고 있을 것 같애. 그 여도 적은 우리에게 낭패를 당한 뒤, 자기 실력으로 우릴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다른 곳에 도움 을 청하든가, 아니면 음소당에게 직접 부탁하려고 떠나지 않았을까? 영남언니를 두고 가자니 도 망갈까 두렵고, 그렇다고 같이 데려가기도 성가셔서 이처럼 법술로 봉쇄를 해서 영남언니를 동굴 속에 가둬놓았을 거야. 그러니 우리가 이 문을 부숴버리면 간단히 그녀를 구해낼 수가 있어. 내 생각이 어때?" 약란은 영경의 말이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정말 영남이 이곳에 있다면, 일은 아주 수월하지. 그 여도적이 쓴 봉쇄법술이 대단한 위력 을 지녔다면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갔다간 낭패를 당하겠지만, 먼저 간파하고 난 뒤에 들어간다 면 파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아무튼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쉬워. 하지만 주인도 없는 빈 동굴을 부숴버린다면 정파, 사파를 막론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기다려 보아 날이 저문 뒤에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들어가자구나. 어때 내 생각이?" 그러자 영경은 펄쩍 뛰며 반발했다. "온갖 악을 일삼는 저런 사마외도에게 도리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도리야?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영남언니를 구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어. 그러니까 당장 들어가서 언니를 데리고 나올 테야." 말을 끝낸 다음 약란이 말릴 틈도 없이 공장 동굴 앞으로 날아갔다. 약란은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급히 뒤따라가 소리쳤다. "영경동생, 서두르지 말라니까!" 그러나 영경의 자영검은 벌써 자줏빛으로 화해, 섬전처럼 석문을 향해 뻗쳐가고 있었다. 검광이 단 한 번 부딪치자, 석문은 힘없이 두 동강나 버렸다. 그 순간, 난데없이 연기가 풀썩 일어나더니 수십 가닥의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영경은 지체없이 검광을 날리며 소리쳤다. "쳐부숴라!" 자줏빛 검광이 한 바퀴 빙그르르 선회하자 그녀를 항해 날아오던 화전(火箭)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약란은 영경의 자영검이 선전지보(仙傳至寶)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처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요법이 이미 파해된 것을 보고 급히 영경의 손을 멈추게 한 뒤, 약란은 먼저 동굴로 들어서며 자세히 살폈다. 문득 땅에 떨어진 삼면삼각(三面三角)의 작은 깃발이 눈에 들어 왔다. 약란은 그 깃발을 주워 들었다. "그 여자가 동굴에 연운부록(煙雲符錄)을 암암리에 매복해 놓았을 줄은 알았지만, 삼면화성기(三 面火星旗)도 묻어놓았을 줄은 몰랐어. 영경동생의 자영검은 정말 대단한 보물이야." 영경은 벌써 동굴 속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었다. 그 동굴은 밖에서 볼 때보다 의외 로 상당히 커서 일고여덟 개의 석실이 있었다. 내부의 장식은 호화롭기 짝이 없어 출가인이 수도 하는 곳이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약란이 말했다. "이 꼬락서니를 보니까 이곳 주인이 방문좌도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겠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문득 한쪽 석실에서 얼핏 스쳐가는 한 소녀의 그림자가 목 격되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그녀를 쫓아갔다. 이때 땅에 떨어져 있는 웬 종이쪽지가 영경의 눈에 얼핏 띄었다. 종이에 <영남>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영경은 얼른 허리를 구부려 주웠다. 먼저 몸을 앞으로 날린 영경은 금세 소녀를 붙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영경이 보아하니 대략 십삼사 세 정도 되어 보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신에 교태가 흐르고 미간에는 음탕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낯선 사람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뒤틀 면서 물었다. "당신들은 여기에 뭣하러 왔죠? 우리 대사저를 찾으시나요?" 영경이 뭐라고 쏘아붙이기 전에, 약란이 소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상냥하게 물었다. "우리는 너의 대사저와 같이 있는 여영남을 찾는단다. 너는 그들 두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겠지?" 소녀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 고약한 계집년이 친구라고요? 당신들은 왜 그년을 찾는 거죠?" 영경은 그 소녀가 여영남을 욕하는 것을 보고는 화가 치밀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왈칵 움켜잡으 며 소리쳤다. "그래, 내가 바로 여영남의 친구다. 네년이 감히 내 앞에서 그녀를 욕하는 걸로 보아 평소에도 얼마나 그녀를 학대했는지 알 수 있겠구나. 어서 그녀가 있는 곳을 사실대로 알리지 못하겠느 냐?"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소녀는 냉소를 짓고 재빨리 손을 비틀어 영경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발 옆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자마자 사라지려고 했다. 약란이 이 광경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따위 장안법 정도로 나를 우롱할 셈이냐." 그리고는 벌써 신형을 앞으로 날려, 다시 그 소녀를 붙잡아 가지고 영경 앞으로 끌고 왔다. "여기는 출구고, 나는 영남을 잘 모르니까 동생이 먼저 다른 방을 수색해 봐. 난 이 계집애를 감 시하고 있겠어. 데리고 있는 동안 이 계집애가 사실대로 실토하게 만들 방법이 있어." 영경은 그녀의 말대로 동굴 안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사람의 그림자 하나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단지 한 곳에서 영남이 전에 입었던 옷 몇 벌을 찾을 수 있었다. 소녀는 약란의 법술에 제압당하자 기가 죽어 두 눈에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벌써 사실대로 실토 하고 있었다. 원래 음소당은 곤륜 교규(敎規)를 어겨 정파에서 쫓겨난 뒤로는 앙심은 품고 일파를 세워 곤륜 에 대항할 생각을 했었다. 그녀는 적성자(赤城子)와 함께 온갖 악행을 일삼으며, 도처에서 문도 (門徒)를 물색하고 다녔다. 남녀를 불문하고 마구 거둬들여서는 몇 군데에 동부(洞府)를 찾아내어 이들의 수련장으로 삼았다. 그들 수하에는 원래 삼남일녀(三男一女)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각기 새로 거둬들인 문도를 거느리고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수시로 자질이 뛰어난 어린아이들을 물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조화애도 음소당의 별부(別府)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는 한동안 이곳에서 지냈으나, 최근에 무산 (巫山) 십이봉(十二峰)에서 훌륭한 동부(洞府)를 찾아내어, 두 명의 뛰어난 제자를 데리고 그곳으 로 옮겼다. 이곳에는 가장 총애하는 제삼문도(弟三門徒)인 <도화선자(桃花仙子)> 손능파(孫凌波) 와 여영남만을 남겨두고, 여영남더러 손능파(孫凌波)와 검술을 배우라고 했던 것이다. 음소당은 영경을 수하에 거두고 싶어서 그녀를 죽이지 않았으며, 영남을 거두어간 것은 영남과 영경의 교분을 이용하여 영경도 장차 제자로 삼을 작정에서였다. 그런데 뒤에 들으니까 영경이 망창산에서 자영검을 얻어 이미 아미문하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각 이파에서 영경이 우연히 만난 수많은 선연 기적을 일컬어 금상첨화라고 부러워할 뿐 아니라 더구나 장미진인이 일컬은 <삼영이운(三英二雲)>이란 예언대로 각 이파에 화를 불러일으킬 존재 로 부각되자 음소당은 몹시 후회가 되어 적성자가 너무 조심하지 않아 영경을 망창산에서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원망했다. 그녀는 영남을 지성으로 대하는 한편 자기가 배운 곤륜진전을 열심히 전수해 주었다. 그러나 영 남은 어려서부터 깨끗함을 좋아하고 천부의 영특한 자질을 지녔는지라 음소당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을 보고는 영 마땅치 않게 여겼다. 또한 선사(先師)의 말씀과 영경과의 절친한 우정을 쉽사리 버릴 수가 없어 매일 검술을 익히는 외에는 항상 우울한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영남의 가슴 속에 다른 생각이 감춰져 있어서 사부나 동문과 끝내 친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고 난 음소당은 내심 불쾌하게 생각했다. 또다시 누군가가 장미진인의 말을 상기시켰을 뿐 아니 라, 점을 쳐보아도 영남이 자기에게 매우 불길한 존재라는 괘가 나왔지만, 워낙 그녀의 자질이 뛰 어나 그냥 버리기엔 아까워서 음소당은 영남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때까지 줄곧 음소당의 총애를 받아오던 손능파는 스스이 영남의 자질이 뛰어나서 여러 문도 가운데 으뜸이라고 입의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자, 혹시라도 영남이 장래에 총애를 독차지하여 스승의 진전을 이어받을까 두려워 질투심이 대단했다. 그리하여 틈만 나면 온갖 거짓말로 그녀를 모함하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남은 점점 음소당의 총애 를 잃어 찬밥이 되었고 항상 손능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총명한 영남은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전개됨을 간파하고 더욱 언행을 조심하였지만, 끝내 스승이나 동문들의 환심을 사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세상을 떠난 스승과 좋은 친구를 그리워하며, 날이면 날마다 남 몰래 눈물 흘리며 상심에 젖어 있었다. 다행히 아직 동굴 밖에 나가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검(煉劍)을 핑계로 매일 동굴 밖 에 나가 서서는, 혹시라도 신조가 나타나 자기를 영경에게 데려다주지 않을까 하고 허공만 쳐다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신조는 결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경이 망창산에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었지만, 가는 길도 모르거니와 더구나 하산할 구실이 없어 마음만 더욱 쓰라렸다. 음소당이 무산으로 옮겨간 뒤로 손능파의 손아귀에 든 영남은 마치 도마 위의 고기마냥 신세가 처량하게 되었다. 비록 독살당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욕지거리가 쏟아지는 형편이라 더욱 견디기 가 힘들었다. 게다가 손능파는 어느 몰락한 집안의 계집아이 하나를 찾아내어 음소당문하로 끌어들여 소사매 로 삼았는데, 손능파는 그 아이를 총애하였다. 그 아이가 바로 약란과 영경에게 붙잡힌 아이로서 이름은 당채진(唐采珍)이라고 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세상물정에 밝고 교활하며 우스갯소리를 곧 잘 하여 사람 마음에 파고드는 재능이 있으므로, 손능파는 당채진이 입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 았는데, 자기가 데려왔다는 이유로 자기의 요법을 벌써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당채진은 손능파가 영남을 학대하는 데 편승하여 자기도 더욱 그녀를 괴롭혔다. 한 번은 손능파가 산을 내려가서 한(韓)씨 성을 가진 청년을 꾀어가지고 돌아와 동굴 속에서 음 락(淫樂)을 즐긴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영남은 깜짝 놀라 이처럼 불결한 곳에서는 더욱 견뎌 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손능파의 질투심은 대단하여 한씨 청년이 영남은 물론이고 당채진과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자신과 접촉할 기회가 없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맘이 놓였으나 청년 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은 절실했다. 얼마 전 손능파는 아미 뒷산 비뢰동 연못에 사는 역어(逆魚)의 맛이 훌륭하다는 말을 누구한테 선지 듣고는, 비록 그곳이 아미파 검선이 살고 있는 곳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요법검술 을 믿고는 대담하게도 두 차례나 가서 고기를 잡아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자, 단맛을 들인 그녀는 세 번째 또 찾아갔다가 우연히 석기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한청년보다 더욱 강한 남성임을 보고는 내심 음탕한 꿍심을 떠올렸다. 손능파가 동굴로 돌아왔을 때, 마침 한청년과 영남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 꼴을 본 손능파는 영남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래도 질투심이 가라앉지 않은 그녀는 한청년에 게도 한바탕 화풀이를 해대었다. 사실은 영남이 잘못한 게 아니라 한청년이 그녀에게 괜히 지분 덕거린 것을 공교롭게도 그 장면을 목격한 손능파가 크게 오해를 했던 것이다. 손능파는 석기를 유혹할 생각으로 다음날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가면서 한가가 동굴에서 수상한 짓을 할까 염려한 나머지 영남을 데리고 떠났다. 영남은 손능파가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나면 한청년이 또 자기를 귀찮게 굴까 두려웠는데, 저더 러 같이 가자고 하자 내심 뛸 듯이 기뻤다. 게다가 목적지가 다른 것도 아닌 아미산이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순순히 비뢰동으로 따라갔던 것이 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서 그녀는 석기의 영준한 모습을 발견했는데,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원래는 영경의 행방을 물어볼 작정이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그가 그녀를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신조는 덩지가 크고 기이한 형상인지라 사람의 이목을 쉽사리 끌기 때문에, 신조 의 행방을 물어서 영경의 종적을 우회적으로 알아내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래서 그녀는 손능파가 폭포 속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는 틈을 타 살그머니 석기에게 다가가서 신 조를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막 묻고 있는 순간, 공교롭게도 손능파가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손능파는 석기의 안색이 정 기(正氣)로 똘똘 뭉쳐 있고 이런 선령(仙靈)한 곳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대단한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를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손을 내밀지 못하고 다음 기회에 빈틈없이 준비를 하여 다시 그를 꾀어갈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남이 감히 그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는 것을 보고는 그만 질투심이 불같이 일었다. 당 장 달려가서 그녀를 호되게 나무랄 작정이었는데, 막상 석기를 대면하는 순간 그가 정말 예사로 운 인물이 아닌 데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그 앞에서 미친 듯이 화내는 추한 모습 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영남을 곁눈질로 노려본 뒤, 다음날 다시 올 작정으로 영남을 데리고 말없이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그녀는 영남과 한청년의 접근만 경계했지, 오히려 당채진의 본성이 음탕한 것을 잊고 있 었다. 당채진은 평소에 손능파가 한청년과 육욕을 불태우는 광경을 훔쳐보고는 진작부터 음심이 발동해 있었다. 그래서 그날도 손능파가 나간 틈을 타서 한청년을 유혹하여 운우지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손능파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두 사람이 태연히 있었기 때문에, 애꿎은 영 남만 욕을 먹었다. 영남은 이처럼 온갖 굴욕을 당하자 더욱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더 이상 머물다가는 길보 다 흉이 많을 것은 자명한 노릇이었다. 신조를 본 적이 없다는 석기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영경 은 아직 망창산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앙이었다. 그러니 자기가 남겨둔 편지를 발견했을 턱도 없 지 않은가. 설령 이곳에서 스스로 빠져나간다 해도 길을 모르거니와 영경을 찾아 만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모험을 겪어야 할 것인가. 음소당의 말에 의하면 망창산은 이곳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수천 리 떨 어져 있다는 것이다. 비록 길은 모르지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곳 을 빠져나가 떠나야겠다고 그녀는 결심했다. 영남의 마음이 이처럼 편치 못할 때 손능파는 단지 석기에 대한 욕정에만 집착한 나머지 영남을 놔두고 다녀와도 되지 않겠느냐고 제풀에 마음이 헐그러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고기를 잡 는다는 핑계로 비뢰동에 날아간 손능파는 오히려 석기와 연아에게 협공을 당해 낭패한 꼴로 돌아 오고 말았다. 그녀는 어제 석기가 영남에게 부드럽게 얘기하는 걸로 미루어 쉽사리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고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급히 도망치느라 비검 외의 모든 법보를 가져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낭패를 당하고 나자, 그제야 상대가 생각만큼 그리 쉽사리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았다. 돌아와서 괜히 영남에게 화풀이를 하였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냥 포기하기 아까운 남성이란 생 각이 들었다. 다음날, 손능파는 다시 스승이 남겨둔 비장의 법보를 몸에 지니고 비뢰동으로 날아갔다. 마침 석 기가 뒷짐을 지고 넋없이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지라, 그를 제압하기에는 안성맞춤의 기회였다. 살 금살금 다가간 그녀는 암암리에 미혼향무(迷魂香霧)를 뿌려 석기를 혼절시킨 다음 희희낙락하여 끼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동굴 앞에 돌아오자, 당채진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와서 조용히 말했다. "사부님께서 손님 한 분과 함께 와 계세요. 다행히 제가 한대가(韓大哥)와 밖에서 노느라고 동굴 밖에 있었기 때문에 사부님께 들키지 않았어요. 지금 한대가는 언덕 옆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답니 다. 저는 대사저께서 돌아오시기만 노심초사 기다렸어요." 손능파는 스승도 음락에서는 자기랑 막상막하인 존재인 줄은 알지만, 어떤 문하를 막론하고 동 굴 속에다 상대를 숨겨 놓고 음탕한 짓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하여 석기를 당채진에게 넘겨 은밀한 곳에 숨겨 두라고 이르고는 태연하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 다. 그 손님이란 사람은 바로 적성자였다. 손능파가 급히 다가가 배알하자, 음소당은 지금 어디 갔다 오는 길인가를 물었다. 손능파는 아미에서의 일을 입에 비치지도 않고 대충 얼버무렸다. 음소당이 말했다. "내가 이번에 운남(雲南)에 가는 것은 이씨 성을 가진 계집아이를 거두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그 냥 두었기 때문이다. 너희 이사형이 최근에 한 여자 때문에 소적화상에게 낭패를 당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소적화상은 소화상(笑和尙)란 놈인데, 고행두타(苦行頭陀)의 멍청한 제자 로,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대단한 무공 실력을 지녔다. 너희 대사형이 서신을 받고 구하러 갔지 만, 수일이 지나도록 신향(信香)을 써서 연락을 하지 않으니 내가 가봐야겠구나. 이처럼 아미파가 수많은 어린놈들을 새로이 배출해 내니 정말 놀랄 일이다. 본파의 기반은 아직 채 정돈되지 않은 상태이니, 잠시 굳게 문을 닫고 그들과 다투지 않는 게 상책일 것 같다. 나와 적사숙은 이곳을 지 나다 너희에게 분부하려고 들른 것이다. 영남의 자질은 비록 뛰어나지만, 나를 믿는 맘이 아직 부 족하니, 네가 수시로 타일러서 잘 이끌도록 해라. 채진도 자질이 부족하지는 않지만, 조금 음탕한 구석이 있으니 잘 다스려라. 시간이 넉넉치 않아 오래 머물지 못하니 아무쪼록 더욱 유의유념하 도록 해라.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신향(信香)을 피워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구하러 오리 라." 음소당은 그렇게 말한 뒤, 가져온 두 가지 법보의 용도를 설명하고 손능파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적성자와 함께 운남(雲南)의 옛 거처로 돌아가 버렸다. 음소당을 전송한 후 손능파는 황급히 당채진에게 석기를 어디다 숨겼느냐고 물었다. 당채진이 가리키는 곳을 가보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쓰러져 있어야 할 석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아마 그의 동료가 뒤쫓아 와서 구해갔겠구나 싶자, 아까왔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쉬운 대로 한가를 불러 욕정을 채웠다. 다음날 손능파가 다시 비뢰동으로 날아간 뒤, 한가와 당채진은 이때다 하고 당장 서로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하기야 그들이 절호의 기회를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는가? 두 남녀는 곧장 별실로 달음질쳐 서로의 몸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영남은 그때 동굴 입구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다가 검술연습을 할 요량으로 칼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만 그 불륜의 현장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너무나 추한 꼴을 본 영남은 자지 러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한가는 순간 그녀가 손능파에게 고해바칠까 봐 흠칫했으나, 곧 유치한 음심이 발동했다. 저 계집 년도 함께 끌어들여 뒤엉켜 즐기면 더욱 희열이 기막히지 않을까 하여 재빨리 그녀를 덮쳤다. 영남의 무공은 본래 상당한 수준인 데다 음소당이 가르쳐 주는 검술은 비록 열심히 익히지는 않 았다 하더라도 여간 고강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가 같은 음탕한 좀도둑이 어찌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있는가? 개같이 어울려 있는 남녀의 추한 모습을 보고 이미 분기탱천해 있는 터에, 이번에 그 가 자기마저 범하려고 하자, 영남은 앞뒤 생각없이 칼을 빼어 사정없이 휘둘렀다. 한가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허리부터 두 동강이 나서 나뒹굴고 말았다. 영남은 순간적인 분노로 칼을 휘두르긴 했지만, 손능파가 애지중지하는 사내를 베어버렸으니 앞 으로 닥쳐올 화를 감당키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손을 들어 당채진을 가리 키며 말했다. "네년의 더러운 목숨은 살려두겠다. 천한 네 대사저가 돌아와서 묻더라도 절대 내가 떠난 방향 을 말하지 마라. 만약 네년이 곧이곧대로 고해바쳐 그녀가 날 쫓아온다면, 나도 너희 두 연놈의 작태를 낱낱이 불어버릴 테니 알아서 해." 그리고는 급히 종이와 붓을 꺼내어 자기가 한가를 죽인 이유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 을 쓴 뒤, 총총히 그곳을 떠났다. 손능파는 석기를 손아귀에 넣으러 갔다가 두 차례나 낭패를 본 뒤 돌아와 보니, 이건 또 무슨 꼴인가. 그나마 애인인 한가가 두 토막 시체로 변해 있는지라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근래 이미 한 가로부터 마음이 멀어져 있었던 까닭에 별 마음의 쓰라림도 없이, 그녀는 화골산(化骨散)을 꺼내 시체를 녹여 없애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영남이 도망친 줄을 스승이 알면 이상하게 여길 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자기의 비 행이 탄로날 테니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남을 쫓아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 릴 작정을 하였다. 특히 이번 일로 아미문하의 잠을 깨워 괜히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될 노릇이므 로, 그녀는 십분 조심하여 감쪽같이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손능파는 당채진에게 영남이 도망간 방향을 물었다. 그리고는 그녀더러 절대 밖으로 나다니지 말라고 당부한 다음 동굴입구에 법보를 파묻고 법술로 봉쇄한 뒤, 비검을 타고 영남을 쫓기 시작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손능파의 추격은 애초부터 헛수고였다. 당채진은 나이가 어려 소견이 좁은 데다가, 과연 손능파가 영남을 찾아내면 전후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러면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어 영남 이 서남쪽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북쪽으로 달아났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손능파가 아무리 뒤를 쫓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영남을 찾아낼 수가 있겠는가? 약란과 영경은 억지로 당채진의 입을 열어 전후 사정을 듣고 영남이 도망간 것은 알았지만, 그 녀가 영경을 찾으러 망창산에 간 것까지는 몰랐다. 너무 늦게 왔기 때문에 영남을 만나지 못한 것만 안타까와했을 뿐이다. 그녀가 남긴 종이쪽지에도 간 곳은 밝히지 않았으니, 도대체 세상 어디서 그녀를 찾아낸단 말인 가? 게다가 혼자 몸으로 달아났으니, 혹시라도 이파의 악인에게 붙들리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었 다. 어쨌든 영남이 여기에 없는 이상 머뭇머뭇할 필요가 전혀 없으므로, 두 사람은 곧장 손능파의 동굴을 나왔다. 이때까지 신조는 여전히 공중을 휙휙 날며 감시하고 있다가, 주인들이 나오는 것 을 보고 긴 울음을 울며 곧장 내려왔다. 영경은 문득 영남이 아직 어기비행(御氣飛行)을 펼치지 못하니 비록 시간이 꽤 지났다고는 하지 만,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로서는 그녀를 찾을 방도가 없겠지만, 신 조의 금안은 구름 위에서라도 지상에 떨어진 바늘 하나 놓치지 않을 정도이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신조는 또한 영성(靈性)이 뛰어나서 웬만한 검객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는 짐승인지라 신조에게 영남의 수색을 부탁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의 요행이지만, 신조가 그녀를 발견하여 데려오기만 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경은 급히 신조에게 말했다. "네가 전에 아미에 있을 때 해탈암까지 데려다주곤 하던 영남언니는 나와 골육지간의 정을 나눈 분이다. 그런데 오늘 그분이 악인의 핍박에 못 이겨 도망갔으니, 서남쪽으로 잘 살펴보며 가거라. 나와 약란언니는 천천히 따라가겠다. 혹시 찾지 못할까 걱정되니, 너는 앞서 가서 앞에서부터 찾 고, 우리는 뒤쪽에서 따라가며 찾아보도록 하자. 그녀를 찾아서 돌아오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야." 영경의 말을 재빨리 알아들은 신조는 '꾸르르!' 하고 소리를 지르며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먼저 서남쪽으로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 약란과 영경도 막 비검을 타고 서남쪽으로 찾으러 떠나려는 순간 '째앵!' 하고 파공음이 들려왔 다. 문득 동북쪽에서 화살처럼 두 줄기 푸른빛이 섬전처럼 날아와 바로 눈앞에 떨어지며 두 여인 의 모습이 나타났다. 땅에 내려선 두 여인 중의 하나가 소리쳤다. "바로 저 두 년이에요!" 그와 동시에 두 줄기 푸른빛 검광이 영경과 약란을 향해 날아왔다. 영경은 이들 중의 하나가 바로 비뢰동에서 달아난 <도화선자> 손능파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챘 다. 칼집을 툭 치자, 자영검이 한 마리 붉은 용으로 변해 푸른빛 검광을 향해 돌진했다. 약란도 역시 검광을 날려 대적을 하고 있었다. 붉은옷을 걸친 여인은 자줏빛 검광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재빨리 자기의 검광을 거두어들었다. 영남을 쫓아갔던 손능파는 한나절이 되도록 그녀가 눈에 띄지 않자, 그녀가 교활하게도 당채진 에게는 동쪽으로 간다고 말하고 서쪽으로 달아났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아직도 당채진이 자 신의 비행이 밝혀져 곤욕을 당할까 봐 두려워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의 추격을 단념한 채 되돌아가서 당채진에게 자세히 물어 영남이 어디로 갔는지 분명히 방향을 안 다음, 이번에는 꼭 붙잡아서 살인멸구 해야겠다고 이를 갈았던 것이다. 제까짓게 어검비행을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한 아무리 빨리 도망쳐도 내 손 아귀를 벗어나랴 하는 자부심에서였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무심 중에 아래를 내려다본 손능파는 어느덧 자기가 아미산에서 별로 떨어지 지 않은 곳까지 다다른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며칠 전 석기를 만났던 일이 떠오르고, 공연히 가슴이 설레이며 또다시 음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막 되돌아서려는 순간, 동남쪽 아래의 울퉁불퉁한 산 가운데서 푸른빛 검광이 자기를 향해 날아 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바로 고파령(姑婆嶺) 황사동(黃獅洞) 금침성모(金針聖母)의 딸이자, 친한 친구인 <천수낭자(千手娘子)> 시용고(施龍姑)였다. 두 사람은 반갑게 만났고, 시용고는 자기 동굴로 손능파를 청해 잠시 얘길 나누었다. 손능파와 시용고는 원래 몇 년 전 고파령에서 약을 캐다가 한바탕 싸움질을 한 끝에 친해진 사 이였다. 옛날 금침성모는 아직 액운을 당하지 않아, 비록 몸은 방문좌도에 있었지만 개과천선한 지는 오 래 되었다. 그녀는 딸인 용고가 방탕하게 구는 것을 보고 장래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할 거라고 걱 정이 태산 같았다. 하지만 자기에게는 이 계집아이밖에 다른 문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그래서 용고에게 말했었다. "옛부터 수도하는 사람이라면 남자는 검을 연마하여 몸을 방어하고, 여자는 침을 연마하여 몸을 지켰느니라. 그런데 이 두 가지 다 극성으로 연마하면 종적을 찾기 힘들만큼 쾌속히 날고, 수천 리 밖의 목숨도 취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침술은 전승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 되어 한(漢), 당(唐) 이후로는 여자도 검을 익히고 침을 익히지 않았다. 내가 아주 옛날 아직 너를 낳기 전에 일시 잘못 발을 디뎌 방문좌도에 빠져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구나. 지금은 비록 개과천선하 여 두문불출하지만 아마 앞으로도 곧 성과를 이루긴 힘들 것 같다. 오십 년 전에는 나도 검을 연 마했지, 비침을 연마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동문 한 시람이 비검(比劍)을 하다가 부 상을 당했지 뭐냐. 그래서 울분을 삼키며, 밤낮으로 원한을 갚을 궁리만 골똘히 했지. 그러던 차 에 무심코 광서(廣西) 구아산(句牙山) 묘동(苗洞)에 갔다가 우연히 오래 된 무공비급을 얻었는데, 바로 연침법(煉針法)이 적혀 있더구나. 나는 불철주야 수련하여 구 년 뒤에야 비로소 <구천구백 팔십일 근 현녀침(九九八一根玄女針)을 연성하게 되었고, 그래서 원수를 찾아 복수를 했단다. 그 뒤 다시 십여 년이 지나 네가 채 세 살이 되기도 전에 네 아버님이 천겁(天劫)을 만나 운명하셨 다. 나는 그때 몸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산에 은거하여 수련을 쌓으며 더 이상 세상시비에 말려들지 않았다. 근년에 이르러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내 생애를 통해 악행을 너무 많이 해 아무에게도 빚을 갚을 도리가 없구나. 비록 늦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다행 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내 검법은 특이한 점은 없지만, 현녀침만은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요즘 각 파에서 비침을 연성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나, 자기 눈썹을 사용하여 펼치는 <천호(天狐)> 보상부 인(寶相夫人)의 백미침(白眉針) 외에 모두 이 비침술이 상대가 되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내 이제 너한테 평생의 본령을 전해 주어야겠구나. 더욱이 너는 너희 아버님의 유언을 받들어 훌륭 한 사람이 되거라. 그런데 만일 네가 이 침으로 도리어 악을 도와준다면, 이 어미한테 돌이킬 수 없는 누를 끼치는 셈이 되니 명심하기 바란다. 마음 같아서는 전해 주고 싶지 않지만, 내게 달리 전인이 없으니 어쩔 수 없구나. 나에게는 아직 몇 년은 더 살 수 있는 기력이 있으므로 너한테 현녀침법을 전수해 주겠다. 이제 두 가지 길이 있는데, 너는 어떤 길을 택하겠느냐?" 용고는 무작정 비침을 배우고 싶은 나머지 이 말을 듣고 급히 물었다. "두 가지 길이란 게 뭔데요?" 금침성모는 딸의 관심이 침법에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제발 자기 전철을 밟지 않기를 속으로 염 원하며,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한 가지는 네가 침법을 배우고 난 뒤 결코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여야 한다. 어떤 상 황에 처해도 결코 생사의 관건에 이르지 않는 한 절대 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전수받기 전에 먼저 아무런 잡념없이 벽을 향하고 앉아 일 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용고는 이 말을 듣자, 두 번째 방법은 묻지도 않고 곧장 그러겠다고 맹세했다. 금침성모가 말했다. "면벽 일 년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말한 뒤 벽곡단(碧穀丹) 아홉 알을 꺼내어 용고에게 먹였다. 그리고는 우선 면벽 일 년 수도를 하고 난 뒤 그때 가서 다시 침법을 전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금침성모의 천겁 霞煮雲蒸, 傷心完宿劫 郞情忘意, 刻骨說相思 시용고는 단약(丹藥)을 먹고 곧 후동(後洞)으로 갔다. 수도(修道)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면벽(面 壁)쯤이야, 하는 마음이었다. 하루는 그런 대로 괜찮았으나, 삼 일이 지나자 온갖 환상과 망념(妄念)이 떠올라 마음을 바로잡 을 수 없었다. 사심(私心)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으나, 어머니는 마음 속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 지, 일 년만 지나면 행공(行功)이 끝난다고 여기는 듯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환상은 마치 현실인 듯 갈수록 심해졌다. 어떤 때는 마치 물과 불 속에 있는 듯이 몸이 뜨거웠다 식었다 하여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오래 지 않아 지칠 대로 지쳐 몸을 지탱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도 억지로 참고 있는데, 어머 니인 금침성모가 이미 나타나서 웃으며 말했다. "이 어리석은 아이야! 네가 면벽수행을 견디지 못하니 다른 묘법을 찾아야만 하겠구나." 용고는 환영(幻影) 중의 추태가 떠올라 말문이 막혀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금침성모가 말했다. "이것은 검술을 연마할 때 앉아서 내공을 수련하는 것과는 비할 수도 없단다. 그건 매일 일정시 간 동안만 수련하면 되니까 그래도 쉽지만 이 면벽수련은 정말 힘든 수련이야. 가령 네가 비침 (飛針)을 배우려는 생각이 이미 떠올랐다고 하면, 그뿐만 아니라 연이어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오를 것이니 어찌 망상과 환영이 어른거리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정말 일 년 면벽동안 한 가 지 잡념도 떠올리지 않았다면 이미 도를 깨우친 것이니,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비록 너는 악질 (惡質)을 타고 태어났지만 천부적 자질을 가지고 있다. 너에게 이렇게 힘든 수련을 시킨 것은 너 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만일 네가 처음 잡념이 생겼을 때 그것을 가라앉히고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너는 자만심에 가득 차서 좌법(坐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수련을 시작하려 하더구나. 그 런 조급한 마음으로는 이 면벽수행을 해낼 수가 없다. 이것은 모두 부모들의 나쁜 기질이 너에게 물려진 것이니 너를 탓할 수만은 없구나.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속세와 인연을 끊고 나를 따라 폐문수도(閉門修道)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안 될 일이야. 수도를 끝마친 후에 분수를 지키면서 은거할 수 없기 때문이야. 배우고서도 쓸 데가 없다면 배워서 뭐 하겠느 냐? 또 그렇게 고생하며 배울 필요도 없고.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네가 이미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니, 좋은 신랑감을 찾는 것이다. 네가 비록 선정적인 기질을 타고 나기는 했지만 만약 신랑 감이 재모(才貌)를 모두 갖추어 네 마음에 꼭 들어 너희 부부의 사랑이 깊다면, 너도 도리에 어긋 나고 후회할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용고는 어머니가 마치 자기가 장래에 음탕한 여인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투로 말하자, 내심 은근히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면벽 도중에 겪은 갖가지 환상이 머리에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귓볼이 붉어져 얼른 대답했다. "어쨌든 비침(飛針)을 저한테 가르쳐 주세요." 이날 이후로 금침성모는 뛰어난 신랑감을 찾기 위해 딸을 데리고 몇 번이나 산을 내려갔다. 범 부(凡夫) 속자(俗子)는 자기 딸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고, 각 정파의 문하제자들도 인연이 닿으면 짝을 맺지 못할 것은 없지만 교규(敎規)가 엄하기에 자기 딸 같은 아이와의 혼인은 허락치 않으 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자기가 방문(旁門)에 몸담게 된 것을 깊이 후회해 온 터라 그쪽에서 신랑감을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마침내 장령자가 새로 세운 청해파(靑海派)를 생각해내게 되었다. 그는 비 록 정파(正派)는 아니지만, 방문도 아니어서 정사(正邪) 중간적 인물이었고, 교규(敎規)도 악하지 않았다. 금침성모는 곧 딸아이를 데리고 청해파를 방문하여 먼저 장령자와 친교를 맺었다. 그리고는 그 의 제자들을 살펴보니 웅혈아(熊血兒)라는 제자가 재질도 뛰어나고 인물도 준수하며, 게다가 아직 동신(童身)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용고의 의견을 물어보고는, 장령자에게 딸아 이와 웅혈아를 혼인시키고 싶다고 청했다. 장령자는 웅혈아에게 속세 인연의 끈이 이어져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군말없이 승낙했다. 그러 나 웅혈아는 아직 수련을 완전히 쌓지 않았기 때문에 삼 년이 지난 후에야 용고와 정식 부부가 될 수 있었다. 결혼한 후에도 부부가 함께 지내려면 챠이다무(紫達木河) 강가에서 살아야만 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웅혈아는 일 년에 두 달 동안만 용고와 함께 있을 수 있을 뿐 나머지 몇 달은 챠이다무에서 무공을 수련해야만 했다. 금침성모는 비록 도법은 고강했지만 장령자에게 다른 흑심이 있다는 것은 낌새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이 나중에 변수로 작용하여 결국에는 변고가 닥칠 줄이야 그녀가 어찌 상상이나 했 으랴! 게다가 용고가 웅혈아를 보고는 마음이 쏠렸기 때문에, 둘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조건도 수락할 입장이었다. 두 번 약혼을 한 상태라면 결혼을 한 것이니 마찬가지다. 금침성모는 용고를 데리고 만면에 미 소를 머금은 채 고파령(姑婆嶺)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전심전력을 다하여 용고에게 구 천구백팔십일 근 현녀침(玄女針)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용고는 본래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일이 년도 지나지 않아, 이미 비침을 신출귀몰하게 부릴 수 있었다. 삼 년이 지나자 금침성모는 딸아이를 챠이다무로 보내어 웅혈아와 결혼시켰다. 용고는 워낙 색정에 민감한 기질을 타고 났기에 결혼 후의 즐거움이란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 나 삼 일 후에 궁(宮)으로 들어가 수련을 하고 저녁에 돌아온 웅혈아는 갑자기 돌부처라도 된 듯 이 용고와의 육체적 접촉을 피했다. 며칠이 지나자 용고는 더 이상 성욕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서 남편에게 무엇 때문에 자기를 멀리 하느냐고 캐물었다. 웅혈아가 말했다. "우리 사부님은 오백 년 동안이나 동신을 지키면서 수도를 쌓아 육신이 화신(化身)의 경지에 이 르기를 원하셨소. 그러나 몇 년 전에 선하령(仙霞靈)에서 약초를 캐다가 무심결에 동신을 깨뜨리 게 될 줄이야 누가 일았겠소? 그래서 아무리 수행을 쌓았더라도 유혹을 모두 뿌리칠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되셨나 보오. 그래서 교규(敎規)를 고쳐 문하제자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하셨지. 나와 당 신은 본래 전생의 인연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장모님이 나랑 당신의 혼사문제를 제의하셨을 때, 그 자리에서 승락했던 것이오. 부부의 사랑을 내가 모를 리가 있겠소? 하지만 나는 사문공(師文 恭)사형과 함께 사부님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을 사람이라오. 게다가 사형은 고집이 세어서 많은 이교(異敎)의 사람들과 친교를 맺고 있으므로 무심중에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거든. 그래서 사부 님께서는 사형의 전도(前途)가 매우 험난하리라 말씀하시면서, 나에게 더 큰 기대를 걸고 계시단 말이오. 본문(本門)의 도통(道統)은 연성하기가 매우 힘들어서, 정통하려면 수십 년이 걸려도 어렵 지 않을까 싶소. 나는 입문한 지 겨우 십여 년밖에 되지 않아, 도통을 깨우치려면 아직도 수십 년 을 더 수련해야 하며, 사부님께서 병해(兵解)하실 때를 기다려야 해. 사부님께서는 병해하시기 전 에 도법(道法)을 모두 나에게 전수시려고 하고 있소. 매년 팔월 말부터 시월 초까지는 귀장(歸藏) 시기이기 때문에 수도를 할 수 없고, 나머지 시간 동안 매일 열심히 수련해야만 하오. 지금은 삼 월이니 그래도 괜찮지만, 오월이 되면 당신과 사랑을 나눌 수도 없소.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당 신과 함께 있더라도 얼굴도 마주보아서는 안 되오. 나는 사부님과 마찬가지로 색계를 범했기 때 문에 병해를 거쳐야만 비로소 진정한 수도를 할 수 있어요. 다시 연법(煉法) 기간 중에 정욕이 일 어나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서 사부님의 도통을 이어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 몸은 재 가 되어 버릴 것이오. 당초 사부님과 장모님은 일 년에 두 달 동안만 당신과 함께 고파령(姑婆嶺) 에서 지내라고 말씀하시었소. 인생이란 아침 이슬처럼 짧은 것이지만, 당신이 잠시만 참아주고 내 가 도법을 이룰 때까지 기다려 준다면, 장구한 세월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순간적인 즐 거움만을 추구하겠소." 용고는 그의 말이 구구절절 옳은지라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으나, 내심은 언짢았다. 사실 웅 혈아도 용고를 매우 사랑했지만 스승의 명이 엄한지라 감히 그 명령 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용고도 비록 후에는 음탕무도한 음적이 됐지만, 당시에는 아직 신혼(新婚)이었고 또 남편을 매우 사랑하였기 때문에 어머니를 원망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도 못하고 가슴만 태울 뿐이었다. 금침성모는 사랑하는 딸과 사위가 서로 매우 사랑할 뿐 아니라 장령자의 보호 아래 챠이다무에 서 함께 지내니 아무런 근심이 없었고, 또 딸이 사위로부터 도법을 배우게 되니 더욱 안심이 되 었다. 이미 자기의 앞날을 헤아려 보아 곧 액운이 닥쳐 도저히 피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아는지라, 금침성모는 딸을 결혼시킨 지 열흘 만에 산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하여 장령자는 한 가지 요령을 말해 주었다. 금침성모는 매 우 기뻐하며 몇 번이나 감사를 표하고 돌아갔다. 고명한 장령자의 충고가 간곡하기도 했으므로 금침성모는 떠나면서 딸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했 다. "이후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절대로 산으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적어도 삼 년 칠 개월이 지난 다음이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도 큰 화를 당할 줄 알아라." 용고는 어머니가 떠나가면서 그렇게 슬퍼하는 것이 단지 자기와의 헤어짐이 아쉬워 그러는 것인 줄만 알았지, 다른 이유가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용고는 풍광이 수려한 산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남편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처럼 황폐한 챠이다무도 마다하지 않고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갈수록 챠이다무가 싫어졌고, 또 남편이란 위인도 뜨거운 육체적 사랑은 거부할 뿐 단지 부드러운 말뿐이라 불만이 컸다. 게다가 장령자의 엄격한 교규와 심한 구속이 갈수록 참을 수가 없어지자, 웅혈아에 대한 사랑이 점점 미움으로 변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고파령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떠 나면서 당부한 말이 떠올라 그러지도 못했다. 더욱이 아직 신혼 초인지라 남편을 두고 훌쩍 가기 는 웬지 켕겼다. 비록 어떤 때는 남편이 몹시 미웠지만 부부의 정은 그런 게 아니어서 시간이 지 나다 보면 혼자 마음으로 시부적이 풀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매일 눈을 반짝이며 어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서 귀장(歸藏)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렸 다. 어느날 싱글벙글 하며 집으로 돌아온 웅혈아는 스승이 두 달 동안 휴가를 주더라고 말했다. 그 러니 여기에서 함께 지내는 것보다는 신혼 초에도 즐겁지 못했으니 다소 불편하더라도 둘이 어디 아름다운 산 속으로 가서 두 달 동안 즐겁게 보내자고 말했다. 용고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매우 기뻤지만 일부러 시큰둥하게 말했다. "누가 당신과 여기서 지내는 걸 싫다고 했나요. 몇 달을 생과부로 지냈으니 이젠 충분하죠 뭐. 이왕 사부님이 휴가를 주셨으니 그럼 우리집으로 가서 지내요." 웅혈아는 그 말을 듣자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사부님은 장모님한테 큰 화가 닥친다고 하셨소. 우리가 장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은 화를 더할 뿐이니 절대로 가면 안 된다고 그러시던걸." 용고도 어머니가 떠나면서 한 말이 있는지라, 그 이유를 캐물었다. 혈아는 다만 스승이 그렇게 말하더라고만 할 뿐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용고는 매우 눈치가 빨라 혈아가 알면서도 말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몇 번이나 캐물었다. 그래도 혈아는 끝내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어쨌든 용고로선 남편과 같이 지내는 즐거움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더 이상 물어보지 않 고, 그렇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혈아가 말했다. "벌써 날씨가 쌀쌀해졌어. 우리야 추운 것은 괜찮지만, 나뭇잎도 다 떨어진 황량한 곳으로 가서 야 무슨 재미가 있겠소. 사형 말이, 운변(雲邊)의 망창산(莽蒼山)은 일천일백 리에 걸쳐 있는데, 기기묘묘한 산봉우리가 수없이 늘어서 있고, 또 산중에 온옥(溫玉)이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계곡 안은 경치가 절경일 뿐 아니라 사시사철 봄날씨여서 기화방초(奇花芳草)가 사방에 깔려 있고 온 천이 폭포처럼 쏟아진대. 그 좋은 곳이 겨우 오십 년 전에야 알려졌기 때문에 그저 은거하여 도 를 닦는 사람들뿐,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이라고 들었소. 내 생각에는 당신과 함께 망창산에 가서 경치 좋고 온천이 솟고 인적이 끊어진 계곡에서 암동(巖洞)을 찾아 두 달을 지내고 왔으면 좋겠 구려. 그런 곳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니 즐겁지 않소?" 용고는 그 말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두 사람은 당장 함께 장령자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는 길을 떠났다. 장령자는 혈아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다. 두 사람은 망창산에 도착하여 따뜻한 계곡에서 머물며 즐겁게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어갔다. 웅혈아는 이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단이 부족한 용고가 쉽게 털고 일어날 것 같지 않 아 은근히 걱정되었다. 여기에서 맛본 성희의 즐거움이란 신혼 때보다 훨씬 큰 것이어서 내일이 면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면 용고는 울어버릴지도 모를 것이다. 웅혈아는 비록 아내를 매우 사랑하지만 그는 의지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스승의 명을 어길 리가 없었다. 그래서 끝내 용고에게 휴가기간이 다 되었음을 상기시켰고, 한참 동안 부드러운 말로 달 래서야 용고를 설득하여 돌아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십 개월 동안 용고는 또 생과부가 되었다. 혈아는 심지가 굳어 절대 스승의 명을 어기 지 않으니, 용고는 참아야 할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날마다 무료한 시간이면 비검과 비 침을 연습하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다시 두 번째 휴가기간이 돌아와 남편과 즐겁게 보낼 날만 기 다리며 지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는 사랑이 미움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이 같은 감정의 뜨겁 고 차거움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용고는 혈아가 집으로 오기만을,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고 기다리다가 그가 돌아오면 교태를 부 리곤 했다. 때로는 남편의 소홀함이 섭섭하여 신경질을 부려보기도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저절로 풀어지곤 했다. 혈아는 의지가 매우 굳은 사람이어서 절대 아내의 분위기에 놀아나지 않았다. 용고의 기분이 정상일 때는 함께 나가서 무예를 수련하고 용고의 기분이 굳어져 있으면 침묵으 로 일관했다. 이들 부부의 평상 생활은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거나 서로 무예를 수련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 휴가기간이 되면 즐겁게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휴가가 끝나면 또 원래대 로 돌아가곤 했다. 그들 부부는 누구도 서로의 무예를 배우지 않았다. 혈아는 원래 다른 파의 무공을 배우기 싫어 했고, 용고는 환락적 즐거움만이 중요했을 뿐 아니라 청해파의 무공은 상당히 오랜 기간의 고된 수련을 겪어야만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았 다. 또 그녀로서는 그렇게 손꼽아 기다려온 이 소중한 휴가기간을 그까짓 무예연습으로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시간은 빨리 흘러가 어느덧 삼 년 칠 개월이 지났다. 용고는 남편의 휴가기간이 되려면 아직 멀 었고, 지루함을 달랠 수 없자, 이 틈을 타 산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한번 만나보려는 생각을 했 다. 결혼한 후 여러 번 장령자를 찾아갔지만 번번이 장령자가 만나주지 않았으므로 성질이 나서 이 후로는 찾아가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산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장령자가 만나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혈아에게 대신 승낙을 받아오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예상치도 못할 일로 번질 줄이야 누 가 알았으랴! 혈아가 돌아와서 말했다. "굳이 산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사부님께서 당신한테 꼭 할 말이 있으시다니까 한번 만나뵙고 가구려." 용고는 이 말을 듣고 급히 달려가서 장령자를 배알했다. 장령자가 처량하게 말했다. "너희 어머니는 대겁(大劫)을 피했기 때문에 천겁(天劫)이 닥치기 전에 병해(兵解)로써 막아보려 하신다. 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 너희 어머니 앞에 불쑥 나타나는 것은 도리어 일을 그르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지금까지 막았던 것이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천겁이 닥칠 것이야. 너희 어머니는 전에 이미 곤륜파(崑崙派)의 검선(劍仙) 반변노니(半邊老尼)와 고파령에서 싸우기로 했었느니라. 네가 지금 출발한다면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희 어머니 는 평소에 비록 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나, 곤륜파와는 아무런 은원관계가 없었다는데, 이번 비검 (比劍)은 삼 년 동안 고의로 반변노니의 문하를 건드려서 자기를 추적하도록 한 다음, 이 병해(兵 解)로써 천겁을 막아보려는 생각을 하신 거다. 그 의도는 나쁜 것이 아니야. 그전에 도우(道友) 한 사람도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너희 어머니가 병해할 상대를 찾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병해의 상대는 본문제자나 친지가 아니라면 꽤 무예가 높은 사람이라야 한다. 그래야 만 그를 통해 병해할 수가 있어. 너의 어머니는 일찍이 많은 원한을 사서 원수들이 매우 많다. 일 세의 영명(英名)을 자부하더라도 재주를 팔지 않아야 하며, 상대방에게 비검을 펼치더라도 완벽하 게 터득하여 절대로 생물을 해치지 않아야만 비로소 자신의 도행(道行)에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다. 이처럼 완벽함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심혈을 기울이던 너의 어머니는 반변노니가 새로이 < 칠구청우검(七口靑牛劍)>을 만들어 장래 문하의 일곱 수제자인 <곤륜칠자매(崑崙七姉妹)>에게 전해줄 것이며,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고는, 일부러 그 칠자매를 찾아가서 그 성질을 건드렸던 것이다. 너의 어머니는 칠자매 중의 <조담벽(照膽碧)> 장금문(張錦雯), <고사선(姑射 仙)> 임녹화(林綠華), <마운익(摩雲翼)> 공능소(孔凌宵) 세 사람이 반변노니의 명을 받들어, 새로 입문한 <표묘아(票妙兒)> 석명주(石明珠), <여곤륜(女崑崙> 석옥주(石玉珠) 자매를 데리고 장금 문이 수도하던 광서(廣西) 와사산(臥獅山) 정상의 천지(天池)에 가서 만경한담(萬頃寒潭) 밑의 샘 에서 근골(筋骨)을 단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거기로 달려가 그들에게 도전하여 현녀침 (玄女針)으로 임녹화와 공능소를 해치고, 또 평생 제일의 법보(法寶)인 <오화적분기(五火赤雰旗)> 를 펼쳐서 음화(陰火)로 석명주 자매의 기혈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네 어머니가 떠나면서 장금문 에게 말했지. '나는 다만 너희들에게 경고하는 것일 뿐이지 너희들과 싸울 이유는 없다. 나의 현 녀침은 비검과는 비교할 수도 없어 삼 일 만에 생명을 잃을 것이다. 내가 오화적분기를 펼친 것 은 다만 음화만을 쓴 것뿐이야. 그 두 사람이 비록 기혈은 막혔어도 별일 없을 거다. 여기 해약을 남기고 떠나니, 이것을 먹여 즉시 회복시키도록 하여라. 만약 승복할 수 없다면, 너희 사부더러 내년 오늘 고파령으로 나를 찾아오라고 전해라' 그리고 금침성모는 마음에도 없는 몇 마디를 더 빈정대고는 떠났던 것이다. 장금문은 네 사매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걸려 있는 것을 보자 기가 막혔지. 너희 어머니가 남기고 간 단약을 먹이면 그들의 생명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주저할 수밖 에 없었다. 스승에게 데리고 가자니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네 자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을 차마 볼 수가 없고, 그 단약을 먹이자니 반변노니의 성질로 미루어 원수가 준 해약을 먹인다 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거든. 그러나 현녀침은 매우 악랄하여, 만일 스승이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지 않으면 동문들이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단약을 복용시킨다면 자 기가 한 일이긴 해도 스승의 명예를 해칠 것이 뻔한 일이고 말이야. 그러나 어쩔 수가 없어 결국 단약을 먹였지. 그래서 네 자매는 즉시 회복되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 급하긴 했지만, 반변노니 의 입장으로는 이것은 제자들이 죽는 것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단 말야. 반변노니가 그 고통을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장금문은 스승에게 큰 벌을 받고, 기필코 원수를 갚 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들리더군. 반변노니는 성미가 고약할 뿐더러 원수에게는 인정사정이 없어 서 손속도 매우 악랄하다네. 나는 그때 그 도우가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할때, 네 어머니가 일부러 반변노니를 충동질한 것이지만 도리어 병해를 이루지도 못하고 화만 당할까 걱정했지. 나는 표면 에 나설 수 없지만, 몰래 동정을 살피다가 형세가 위급해지면 비검을 써서 네 어머니의 병해를 몰래 도울 수는 있다. 네 어머니는 원래 반변노니와 동문(同門)이었으나, 도(道)를 이룬 후 문규를 위반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결코 원만한 사이일 수가 없지. 네 어머니의 비검은 비록 많은 살상을 하긴 했지만, 만일 정신이 집중되지 않고 약간이라도 흐트러지면 그렇게 고강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더라도 반변노니는 생김새가 기괴하여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으리라. 이 번에 돌아가서 네 어머니와 반변노니의 싸움을 목격할지 모르나, 어머니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더 라도 절대로 앞에 나서서는 안 된다. 네 어머니가 상대방의 검에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이 제일 잘된 일이야. 네 어머니가 그렇게 되도록 일부러 꾸미기 위해 원수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니, 절대 로 그를 원수로 여기지 말아라. 만약 두 사람이 서로 싸우지 않으면 그것은 반변노니가 이미 사 건의 진상을 알아차리고 일부러 네 모친에게 겁(劫)이 닥치는 것을 보려 함이다. 다음 날 오시(午 時) 서쪽에서 홍운(紅雲)이 밀려올 때가 네 어머니에게 겁이 닥치는 시기이다. 그때는 젊은 도고 (道姑) 하나가 홍운이 닥치기 전에 비검으로 네 어머니를 죽일 것이다. 그 도고 이름는 음소당이 라고 하는데, 내가 만일에 대비하여 부탁한 것이니 착각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지 않도록 해라. 홍 운이 닥치면 급히 피했다가 재빨리 어머니의 유해와 법보(法寶)를 수습하여라. 이후로는 네가 여 기로 올 필요없이 매년 혈아가 고파령으로 가서, 너희 부부가 두 달 간을 함께 지내게 될 것이다. 나는 따로 볼일이 있으니, 아무쪼록 자중자애하고 빨리 떠나거라." 용고는 이 말을 듣고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니 가슴이 쪼개지는 듯 아팠다. 그녀는 인사를 마 치자마자 정신없이 고파령으로 날아갔다. 도착하니까 이미 날은 어두웠고, 또 그믐이라 하늘에는 별만 반짝일 뿐, 사방은 캄캄하기만 했다. 막 동굴 앞을 돌아서려는데 반 리쯤 앞에 갑자기 푸르고 붉은 두 가닥 검광이 나타나더니 동굴 앞 빈터에서 어우러져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좀더 앞으로 다가가서 동정을 살피려 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깜짝 놀란 용고가 막 공격하려는데, 그 검은 그림자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시용고지요?" 용고는 이내 그 도인 복장의 여인이 장령자가 말한 음소당인 줄 알아차리고 얼른 대답했다. "예, 소녀가 바로 시용고입니다. 혹시 음선장이 아니신지요?" 도고는 그렇다는 눈짓을 하더니, 용고의 손을 잡고 절벽 옆 후미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내 이름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장령자에게 전후 사정을 들었겠구려. 저 반변노니는 나의 동문사저인데, 매우 위험스러운 인물이지. 지금 당신 어머니와 싸우고 있으니 절대로 앞에 나서서 는 안 되오. 나는 이미 온 지 반나절이나 되었는데, 저 두 사람은 그때부터 겨루기 시작하여 지금 까지 싸워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는구려. 아마도 반변노니는 당신 어머니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한 듯해. 반나절의 대결로 저 두 사람은 모두 몇 가지 법보를 잃었는 데도 지금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다오. 당신 어머니는 반변노니와 거의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반변노니가 새로 연성한 청우검을 사용해야만 그것으로 병해를 이룰 수 있을지 어쩔지 모르겠군." 용고는 줄곧 어머니를 보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그러나 음소당이 계속 말리므로 절대로 끼어들 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좀더 앞으로 다가갔다. 음소당은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조심하라는 당 부만으로 그녀가 앞으로 다가가도록 묵인해 주었다. 용고는 측면으로 해서 동굴 위로 돌아 마침 내 동굴 앞으로 다가가 사오 장 떨어진 곳에서 땅에 엎드렸다. 돌아보니 음소당은 따라오지 않았다. 용고는 마음이 매우 산란하여 아무것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결투 현장과는 거리가 너무 가까 왔기 때문에 그녀는 가능한 한 정신을 바짝 차렸다. 반변노니를 보니 정말 기괴하게 생긴 모습이었다. 나이는 오십 여 세쯤 되어 보이는데, 머리 정 수리의 반은 평평하고 반은 찌그러져 있었으나, 아래쪽은 한 쌍의 백족(白足)이 붉게 물들어 있었 다. 마치 후건(候乾)처럼 바싹 말랐는데, 긴 팔은 옷소매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한 손에는 청광이 반짝이는 물건을 들고 있었으며, 거기서 쏘아져 나오는 푸른빛 검광이 금침성 모의 붉은빛과 엉키어 있었다. 등에는 화조(花組)를 걸치고 있었는데, 위에는 호로병이 걸려 있었 으며 자색 연기가 서려 있고, 오색찬란한 것으로 보아 매우 무서운 법보(法寶)인 것 같았다. 그 찰나, 갑자기 금침성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변도우, 어디 내 공격을 받아보시지." 그러자 반변노니가 욕을 퍼부었다. "이 부끄러움도 모로는 더러운 년 같으니! 세상 천지에 어느 누가 너처럼 뻔뻔스럽게 그런 요법 (妖法)을 펼치겠느냐? 어서 공격해 보아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침성모의 몸이 조금 움찔하더니, 온몸이 빠알간 정광(精光)으로 싸이며 땅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양쪽 팔꿈치를 땅에 대고 합장하여 주문을 외면서 손을 휘저으며 상대 방을 향해 뻗었다. 그랬더니 초록빛 음화가 섬전처럼 반변노니를 향해 날아갔다. 용고는 어머니가 마교(魔敎)의 <마습대법(摩拾大法)>을 펼치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매우 무서 운 법술이었다. 다시 반변노니를 바라보니 그녀는 마치 방비가 되어 있던 것처럼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있었 다. 음화가 자신을 에워싸자, 먼저 검광을 회수한 반변노니는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 에서 영롱한 푸른빛이 뻗어나와 온몸을 보호하여 어떤 음화가 에워싸더라도 몸을 해칠 수 없게 했다. 금침성모는 선제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다급해져 얼굴에는 수심이 드리워졌다. 계속 해서 대법(大法)을 펼치니 음화는 더욱 짙어져, 반변노니의 모습은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녹화(綠火) 가운데 푸른빛이 반짝이며 움직이는 것만이 보였다. 이렇게 한동안 서로 대치하다가, 돌연 금침성모가 손을 휘저으니 앞쪽이 밝아지며 녹화가 점점 흩어졌으나, 적의 동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금침성모는 공력이 다했는지, 이마에 땀이 송송 솟아 있었다. 땅에서 몸을 일으켜 의복을 매만지니 자연히 법술(法術)이 걷히었다. 그녀는 반변노 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반변도우, 그대와의 원한은 그렇게 깊지 않소이다. 나는 원래 그대의 신통한 무공과 새로 만든 <칠구청우검>의 가르침을 받고자 여기에서 검을 겨루기로 약속했던 것이오. 그런데 그대는 어찌 방어만 하고 공격은 하지 않지요?" 반변노니는 이 말을 듣고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년 같으니! 나의 청우검을 통해 병해할 생각이렷다? 사실 네년이 지금까 지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다. 전에 아미장교(娥嵋掌敎) 제(齊)도우한테서 네 년이 여기 은거하며 반성의 날을 보내고 있다고 이야기 들었고, 또 저지른 죄악으로 인해 머지 않아 천겁이 닥칠 것이므로 내 너를 찾아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네년이 계속해서 나를 화나게 하 지 않았다면, 이렇게 악랄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러나 오늘 나는 여기에 와서 네년이 천겁 을 당하는 꼴을 꼭 보아야겠다. 네년이 또 계교를 부려 천겁을 넘긴 후 세상을 어지럽힐 작정이 냐? 하지만 네년에게는 이제 겨우 몇 시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 이것은 네년이 자초한 일이 니 결코 피할 수 없으리라. 나와 싸워서 내가 연성한 청우검으로 병해를 하겠다는 생각인가 본데, 그것은 꿈도 꾸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면서 반변노니는 자줏빛 검광을 앞으로 뻗어 금침성모의 붉은빛 검광을 상대로 격돌 하기 시작했다. 금침성모는 이 말을 듣고는 이빨을 갈면서 말했다. "세상에 죄없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더냐? 나는 지은 죄를 삼십 년 동안 속죄하며 보냈다. 내가 너의 제자를 위험에 빠지게 한 것은 천겁을 피하고자 했음이지 아무런 사심이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들에게 털끝 하나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네년이 다른 사람의 위기를 악용하는 이런 악적인 줄은 미처 생각 못했구나. 네년이 알면서도 나를 속이고 있었다니! 이제까지는 내 일부러 손을 쓰지 않고 밀리는 듯했으나, 이제 네년이 모든 걸 알았으니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나의 원수다. 내가 네년을 무서워하는 줄 알았더냐?" 말을 마치고 손을 휘저으니, <구근현녀침(九根玄女針)>이 오색 광화를 발하며 반변노니를 향해 날아갔다. 반변노니가 깔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무지막지한 년! 곱게 죽을 것이지, 그까짓 재주로 누굴 속이려 하느냐!" 그녀가 이렇게 소리치면서 등의 화조(花組) 위에 메어져 있던 호로병을 벗겨들고 주문을 왼 다 음 '질(疾)!' 하는 일성을 지르니, 별안간 호로병 주둥이에서 오색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이어서 누런 구름이 뿜어나와 현녀침과 맞부딪쳤다. 금침성모는 오색채연(五色彩煙) 중의 황운(黃雲)을 보고는, 그것이 바로 <괴규화> 능혼의 부인 인 <백발용녀(白髮龍女)> 최오고(崔五姑)가 오악(五岳)의 운무를 모아 연성시킨 <금운두(錦雲 兜)>임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극히 위험한 비검, 비침을 막을 수 있을 뿐더러, 그 기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운정화(五雲精華)>로 인해 진기(眞氣)가 증대하고, 적이 그 안에 싸이면 기혈이 막혀 뼈가 녹아서 죽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최오고의 <칠보자정병(七寶紫晶甁)>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니, 어찌 엉뚱하게 반변노니의 호로병에서 나올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처음 그 호로병 위에 오 색의 연무(煙霧)가 끼여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후회될 뿐이었다. <구근현녀침>은 이미 채운(彩雲)으로 빨려 들어갔고, 다른 법보도 없으니 그 무기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뻔히 알면서도 어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만약 도망가지 않는다면 오색연무에 갇혀 꼼짝 없이 가만히 앉아서 천겁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금침성모는 성미를 다스리지 못해 눈에서 불 길이 펄펄 솟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반변노니는 이미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뼉을 치자, 즉시 금침성모의 앞뒤 좌우 에서 네 사람의 계집아이가 튀어나왔다. 그들 네 계집아이는 손에 작은 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들 이 나타나자마자 온 산이 전부 오색 연풍(煙風)으로 포위되어 금침성모는 그 중간에 갇히고 말았 다. 용고는 멀지 않은 곳에서 난데없는 채무(彩霧)가 날아오더니 어머니가 실종되고 말자, 위험하다 는 것을 직시하고 사활을 돌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채무는 보통 운무와는 달라 거기에 닿으면, 마치 비단 그물같이 부드러운 망이 몸을 감싸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다만 오색 운무 안에서 한 줄기 홍영(紅影)이 좌충우돌하는 것만 보일 뿐 마치 겨울에 파리가 종 이창을 뚫으려 하듯이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용고는 화가 불같이 치솟아 적이 보이기만 하면 독수(毒手)를 펼치리라 하고 두리번두리번 반변 노니와 네 어린 계집아이를 찾았으나 운무 속에서 그들의 종적은 찾을 방법이 없었다. 용고는 성질을 참지 못해 적들이 있을 만한 곳 같으면 아무 곳이나 사방으로 현녀침과 비검을 날려보냈다. 비검과 비침이 우수수 운무 중으로 사라지는 모양이란 마치 대해(大海)에 돌멩이가 풍덩풍덩 빠지는 것과 같았다. 성미가 급한 용고는 원한에 사무친 소리를 지르며 운무 속을 이리 저리 휘젓고 다녔다. 분기가 너무 탱천한 나머지 용고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귀에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므로써 그녀는 비로소 깨어났다. 온 산 을 에워싸고 있던 채운은 어느 새 전부 걷혔고, 자신도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 음소당의 팔에 안겨져 있었다. 멀리 싸움이 벌어지던 곳을 바라보니 어머니 금침성모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용고는 앞뒤 생각 없이 급히 몸을 일으켜 금침성모 앞으로 달려가 껴안았다. "어머니!"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목에서 외침소리가 튀어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자기가 모래를 쓸어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금침성모의 몸이 한 줌 재가 되어 스르르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무슨 법보에 당했는지 알 수 없지만, 금침성모의 전신은 이미 삼매진화(三昧眞火)에 의해 재가 되어 있었던 것 이다. 눈을 돌려 적들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용고는 '으 와왕!' 울음을 터트리자마자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음소당이 단약을 먹여 정신을 차리게 해주자, 그녀는 다시 서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음소당은 그러는 그녀를 부드럽게 타일러 주었다. 당신 어머니는 비록 몸은 화를 입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천겁(天劫)이 닥치기 전에 병해(兵解)하신 거예요.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실 수 있으니 이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어?" 용고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훌쩍이며, 어떻게 된 것인지 그 연유를 물었다. 음소당이 말했다. "어찌 세상만사가 인간들의 뜻대로 될 수 있겠어. 원래 나는 천겁(天劫)이 미치기 전에 비검으로 당신 어머니를 병해시키려고 했으나, 반변노니가 그처럼 악랄하게 네 명의 제자를 몰래 매복시켜 사면에서 그 연무(煙霧)로 봉쇄할 줄이야 알았어야지. 내가 무작정 나서지 않은 것을 당신은 욕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그대 어머니가 운무에 갇히는 것을 보고 당신이 뛰쳐나가는 걸 보았지. 하지만 구름 밖에서 급하게 이리저리 설치기만 할 뿐,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헛되 이 많은 법보, 비검을 낭비만 하더군. 나아가 봐야 어머니를 구하지도 못하면서 법보, 비검을 낭 비하는 것이 얼마나 애처럽고 안타까왔던지 당신 어머니도 그것을 알고는 몇 번이나 반변노니에 게 무릎꿇고 용서를 빌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 그 오색 채운은 정말 무시무시하여 그 속에 갇히면 절대로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뚫고 들어가려다가는 도리어 운 무에 갇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지. 그런데도 당신은 한참 동안이나 뚫고 들어가려고 애쓰더군. 그 런데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운무에 갇히지 않는 것이 정말 이상하더란 말이오. 그때 돌연 반대편 산봉우리에서 한 줄기 찬란한 금빛 줄기가 운무 속으로 쏟아집디다. 그 빛이 닿는 곳은 마치 고래가 물을 뿜듯이 오색 운무가 뭉실뭉실 산봉우리로 빨려 들어가지 뭐요. 나는 당신 어머니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날 줄 알고 반대편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더니, 바로 그 법보의 주인인 <백발용녀> 최오고가 칠보자정병으로 그 운무를 빨아들이고 있습디다. 최오고는 반대편 봉우리의 반변노니에게 큰소리로 말하더군. '반변도우, 이제 그만 하시오. 그 사람은 오랫동안 속 죄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소. 저 딸아이의 효심이 저렇게 지극한 것을 보니 부모의 나쁜 기질이 전 해지지는 않은 것 같소. 도우는 이제 그만 손을 거두시오.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오' 말을 마치고 나서 먼저 최오고가 날아가자 반변노니도 제자를 데리고 그 뒤를 따라 사라졌지. 그때 당신 어머 니는 땅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가만히 다가가 보니 태양혈(太陽穴)에 작은 구멍이 나 있는 것 이 이미 병해하신 거였어요. 비검을 사용한 사람이 도의를 아는 사람이니 당신에게는 해를 입히 지 않았으니, 어머니로서는 더 이상 다행스러운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겨졌어. 이때의 시간은 이미 오시(午時)에 가까왔지. 막 내가 그대를 깨우려고 하는데, 서쪽 하늘에서 한 덩이 홍운(紅雲)이 빠 르게 다가오더군. 바로 현도(玄都)의 음뢰(陰雷)로서 당신 어머니에게 천겁을 내릴 극성(剋星)이었 지. 나는 당신에게 해가 미칠까 봐 급히 당신을 안고 멀찌감치 피신을 했던 거였지. 그 홍운은 순 식간에 질풍처럼 다가왔고, 다음 순간 뇌성(雷聲)이 울리더니 그 홍운은 당신 어머니에게 한 줄기 빛을 내리쬐고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디다. 그랬더니 당신 어머니의 몸은 이미 재가 되어 있었 다오." 용고는 음소당의 말을 듣고 나서 다시 어머니의 유해 앞에 엎드려 큰소리로 통곡했다. 음소당은 그녀대로 자기 볼일이 있는지라, 재가 되어버린 금침성모의 유해를 옥함에 담아서 매장하고는 용 고에게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그 자리를 떠났다. 용고는 이것이 어머니의 운명인 줄은 알지만, 너무나 기막힌 사별(死別)인 데다 여러 가지 귀중 한 법보를 모두 잃어버렸으므로 몹시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병해이건 무엇이건 간에 반변노니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음소당을 배웅하고는 곧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어머니 가 남긴 유물들을 살펴보았다. 들어가자 곧 석탁(石卓) 위에 어머니가 남긴 유서가 눈에 띄었으로 급히 펼쳐보았다. 유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나는 이전에 지은 악업이 매우 많아 회개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제 네가 짝을 얻 었으니 비로소 안심하고 천겁을 대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겠구나.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 른 방법은 없고, 다만 병해를 통해서 지선(地仙)이 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일부러 곤 륜파의 반변노니에게 도전하여 천겁이 닥치기 하루 전날 검을 겨루기로 약속했다. 시작은 이렇다 하더라도 다음에는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아, 기쁜 마음 금할 수가 없구나. 내가 너한테 간곡히 당부하노니,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고 필요없이 다른 사람과 원한을 맺지 말며 사 람을 죽이지 말아야 앞날의 업보를 면하리라. 또 이번 일은 병해를 위한 것이어서 처음부터 내가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법보도 지니지 않고 앞날을 도모하기 위한 계기로 삼으려 하는 것이니, 비침 <구근현녀침>과 몇 가지 법보만을 가지 고 비검(比劍)에 임하련다. 나머지 한 권의 도서(道書)도 두 가지 법보만한 위력이 있는 것인데, 도서(道書)와 <칠십이근현 녀침>은 동굴 밑의 옥함 속에 들어 있다. 옥함은 잠겨져 있는데, 유서를 끼우면 열릴 것이다. 이 법보들은 매우 신중한 것이니라. 특히 이 현녀침은 그 위력이 굉장하여 너의 현녀침보다 위 력이 열 배나 더한 것이다. 내가 천겁을 맞이할 때쯤 네가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당부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녀는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병해한 이후에 보게 되더라도 절대로 슬퍼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들을 원수로 여기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들은 나에게 은덕을 베푼 것이기 때문이니라. 사전에 변고가 발생하여 비검 외의 법보, 비침이 현도의 음뢰에 훼손될까 봐 내가 병해하기 전에 이미 숨겨놓았단다. 반변노니 는 이것을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다. 봉우리 앞쪽 남북방향을 자세히 살펴보면 찾을 수 있다. 지금 이별하면 적어도 백 년이 지나야만 다시 연성할 수 있을 것이야. 아무쪼록 배운 도법을 열 심히 수련하여라. 언제 다시 만나게 될는지는 뭐라 말할 수가 없구나. 이제 내가 가야 할 곳은 동 천복지(洞天福地)인데 수년 전에 이미 준비해 두어 엄밀하게 꾸며져 있다. 내가 어린아이로 되어 돌아오면 동굴을 막아 밖과 단절시켜라. 그러면 시일이 되지 않고서는 나 올 수가 없단다. 나를 찾으려 해도 안으로 들어와서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위치는 설명치 않 겠다.> 용고는 유서를 다 잃고 나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게다가 어머니가 자기에게 몇 가지 법보, 비침 을 남겨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욱 눈물이 솟았다. 막 법보가 들어 있는 옥함을 시골(尸骨)과 함께 매장하려 할때, 한 줄기 푸른빛이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용고는 비록 대부분의 법보를 잃었지만, 일찍이 여러 가지 놀랄 만한 법술(法術)을 배운 몸이었 다. 그녀는 푸른빛이 동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마자 법술을 펼쳐 방어하려고 했다. 그러자 카랑카랑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명을 받들어 법보를 돌려주려 왔으니 오해하지 마시오!" 푸른빛 속에서 나타난 것은 눈썹이 짙고 눈매가 매서운 여인이었는데, 키고 훌쩍 크고 푸른옷을 입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장금문이라고 해요. 가사(家師)이신 반변대사님의 명을 받들고 왔어요. 사부님께서는 당신 의 효심을 어여삐 여기셔서 가져간 당신 모친의 법보 중에서 구근현녀침을 제외한 나머지를 돌려 주라 하시므로 가져왔으니 받도록 해요." 말을 마치자마자 땅을 박차더니, 다시 푸른빛에 휩싸여 눈 깜짝할 사이 동굴을 빠져나가 버렸다. 용고는 그에게 몇 마디 물어볼 것이 있어 급히 몸을 날려 동굴 밖으로 따라나갔으나 점점 멀어 져 가는 파공음만 들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동굴 안으로 돌아왔다. 들어와 보니 석탁 위에는 단검 한 자루, 천온구(天瘟球) 하나, 용전(龍箭) 한 쌍, 깃발 세 개, 그리 고 한 장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 깃발은 처음 보는 것이지만 나머지는 어머니가 평소 사용하던 것이다. 다시 쪽지의 글을 읽어보니 반변노니의 편지였다. 자기는 용고의 효심에 감동했을 뿐 아니라 < 백발용녀>의 권유도 있고 해서 <칠구청우검>으로 금침성모를 병해시켰다는 것이다. 그때 비검, 법보를 모두 돌려주려 했으나 용고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또 음소당이 옆에 있었 기에 그에게 이 물건들이 돌아간다면 큰일이다 싶어 그냥 가지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대제자 장금문을 보내 물건들을 돌려주는 바이니, 이후로 열심히 수련하며 선을 행하면 좋 은 결과가 있을 것이며, 어머니의 음악한 성질을 본받지 말 것을 간곡히 충고한다는 내용이었다. 용고는 이 편지에서 어머니가 치른 병해의 과정을 비로소 알게 되자 새삼 가슴이 쓰라렸다. 게다가 자기가 천성적으로 나쁜 자질을 타고났다니 두렵기만 했다. 반변노니가 아직도 가장 위 력 있는 현녀침과 또 하나의 위력 있는 법보인 구전륜(九轉輪)을 돌려주지 않았고, 아까 만난 장 금문의 건방진 꼴을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그녀는 구전륜을 다른 사람이 몰래 훔쳐갔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는 당장 후동(後洞)으로 가서 법보를 가져온 다음 어머니의 유해가 담긴 옥함 속에 넣었다. 그 리고 고파령의 아름다운 계곡에 매장하고 법술을 펼쳐 돌로 막았다. 무덤 앞에서 또 한바탕 통곡 을 한 용고는 즉시 어머니가 가르쳐 준 법술, 법보와 그 도서(道書)를 익히기 시작했다. 직접 반 변노니 그 원수를 찾아가 원한을 풀고 나머지 법보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고파령의 두 음녀 難遺春愁, 班荊聯治伴 先知魔孼, 袒臂試玄針 시용고는 산으로 돌아오자마자 큰 변고를 입자 머릿속이 비통함에 가득차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십여 일이 지나자 마음 속에 어지러운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챠이다무는 비록 경치야 볼 것이 없다 하더라도 매일 남편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데 이제 남편 곁을 떠나 외롭게 홀로 동굴에서 지내니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떠나올 때도 웅혈아는 스승의 명에 따라 무공을 수련하느라고 배웅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용고가 익힌 무공은 모두 방문(旁門)의 무공이어서 정파의 무공과 같이 충허담박(沖虛淡泊) 유정 생명(由靜生命)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연성하여 마음이 물과 같이 수양되지 않으면 파탄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루하다보니 자연히 남편과 휴가기간에 즐겁게 지내던 것을 생 각하게 되고, 그러면 뜨겁게 몸이 달아올라서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머니인 금침성모가 생전에도 간곡히 당부하고, 유서에서도 당부한 대로 다른 잡념을 억제하고 오직 휴가기간이 되면 찾아올 남편과 함께 보낼 즐거운 시간만을 기다리면서 참으려 하나, 천성 적으로 색기를 타고난 용고인지라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가을색도 깊은 시절이 돌아오자, 약속한 대로 남편 혈아가 그녀를 찾아왔다. 용고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혈아는 먼저 금침성모의 무덤을 찾아가 예를 올렸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 인하면서 뜨겁고 달콤한 두 달을 보냈다. 휴가기간은 무섭게 빨리 지나가고 혈아는 돌아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 용고는 남편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쉽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남편을 배웅했다. 그 후로도 이들은 해마다 두 달을 그렇게 함께 지냈는데, 웅혈아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새파랗게 젊은 부부가 이처럼 떨어져서 생활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용고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용고가 산으로 돌아오고 삼 년째 되는 해 봄이었다. 어느날 용고는 홀로 동굴 밖 산봉우리에 앉 아서 남편이 찾아올 날을 꼽아보고 있었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용고는 문득 고파령 동 쪽 절벽 중턱쯤에 웬 여자가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위쪽에 온갖 아름다운 화초들이 자라고 있는 그 절벽은 매우 가파른 데다 이끼들이 밀생해 있어 매우 미끄러웠기 때문에 원숭이라고 해도 올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정말 벽호(壁 虎)처럼 아래위로 좌우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화초를 뜯어 바구니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그렇게 화초를 뜯어 담더니 갑자기 땅을 박차고 한 줄기 푸른빛으로 변하여 허공을 가르며 날아 가 버렸다. 용고가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다 '몸놀림이 저렇게 민첩한 것을 보면 아마도 비검(飛劍)을 상당히 익힌 사람인 것 같구나. 산에는 우두머리가 있고 땅에는 주인이 있는 법이거늘, 어머니와 내가 이 산에서 살아온 지가 얼마나 오 래 되었는데 함부로 침범한담. 이 산에 주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 하지만 방금 비검술 을 펼치는 것으로 보아 조심해야 되겠어. 아까 얼굴을 알았어야 하는 건데.' 막 이렇게 생각하다가, 그녀는 조금 전에 본 그 비검술이 매우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빛 중에 잡색이 섞여 있는 것이 법보를 돌려주러 왔던 장금문이라는 여자와 비슷한데, 혹시 곤륜문하의 제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원수가 아닌가.' 어쩌면 원수를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긴 그녀는 내일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나면 한바탕 겨루어 보리라고 다짐을 했다. 만약에 원수의 문하가 아니라면 혼을 낸 뒤 쫓아보낼 것이고 정말 반변노니의 제자라면 그냥 두 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음날 용고는 아침 일찍 몸에다 여러 가지 법보를 지니고 바위 옆에 숨어서 어제 그 여자가 나 타나기를 기다렸다. 오후가 되자 과연 그 여자가 다시 푸른빛을 타고 나타났다. 길이 매우 익숙한 지 곧바로 절벽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용고는 그쪽 절벽에는 귀중한 약초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 여자가 무엇 때문에 저 렇게 힘들여가며 여기를 찾아올까 궁금했다. 먼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나서 손을 쓰려 고, 용고는 그 여자의 뒤를 따라 절벽 위로 날아갔다. 이삼 장까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여자 가 캐고 있는 약초는 원향련(瑗香蓮)이라는 들꽃이었다. 고파령에만 자라는 약초로써 기열성(奇熱 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겁없는 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약초를 훔쳐가려고 하는 거냐!" 용고는 소리치면서 다짜고짜 비검을 날려보냈다. 그 여자는 용고가 따라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암암리에 방어를 하고 있었다. 용고의 검광이 미처 접근하기도 전에 급히 몸을 날려 먼저 검광을 이용하여 산꼭대기까지 날아 올라가는 것이었다. 용고도 그녀를 추격하여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절벽에서 싸우면 아까운 약초가 짓밟혀서 쑥밭이 될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녀는 용고가 추격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검광을 뿌리며 달려들었다. 이래서 맹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서로의 실력이 엇비슷해서, 한참을 겨루어도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쉽사리 적을 제압할 수 없을 것 같자, 용고는 이름과 경력을 물어 보아 상대방이 대꾸하느라고 약간 방 심하는 틈을 타서 독수(毒手)를 펼칠 궁리를 했다. 그런데 통성명을 해보니, 그 여자는 바로 음소 당의 제자인 <도화선자> 손능파였다. 두 사람은 서로 알 만한 처지였기 때문에 즉시 싸움을 멈추었다. 용고는 그녀를 친구로 사귀어 고민을 하소연해도 괜찮겠다 싶자, 정중하게 동굴로 초대했다.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의기투합하여 의자매를 맺었다. 원래 음소당은 용고에게 한 가지 미안한 일이 있었고, 또 반변노니 앞에 나설 수도 없었기 때문 에 그때 돌아간 후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용고가 이때까지의 사연을 시시콜콜히 털어놓자 손능파는 비로소 마음 속에 짚히는 것이 있었 다. 스승인 음소당이 몇 년 전에 얻은 구전륜은 알고 보니 원래 용고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 지 음소당은 거기에 대해서 한 마디도 거론한 적이 없었다. 용고도 손능파의 입을 통해 반변노니 의 소재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손능파가 말했다. "이봐요 동생, 동생의 원한은 현재로선 매우 풀기가 어렵게 되었어! 그 반변노니는 곤륜파 중에 서도 제일인자로 꼽히는 거물이거든. 옛날 무당파의 심명신니(心明神尼)에게는 두 수제자가 있었 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오추문(伍秋雯)은 길을 잘못 들어 병해를 입었고, 나머지 한 사람인 소 옥형(蘇玉衡)은 결혼을 했어. 그 밖에도 문하에는 제자들이 많지만, 그 두 사람처럼 뛰어난 제자 는 없었지. 당초 초대 교조인 장삼뢰(張三牢)가 세상을 떠나면서 도통을 계승할 후계자를 지정하 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 무당파 고수들은 각기 멋대로 제자를 받아들이고 문규를 세워 마치 우 후죽순과 같았고, 그러면서도 서로 간섭하지는 않았어. 함부로 받아들인 남녀제자들이 악행을 저 질러도 문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거지. 그렇지만 하나의 문파가 여러 개의 작은 문파로 나뉘어지면, 마치 물이나 불처럼 계속 분열하여 결국에는 서로 싸우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는 건 정해진 이치 아니겠어? 심명신니는 사제 영령자(靈靈子)와 상의를 했지. 그래서 이대로 두면 결국에는 무당파가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두 사람은 그 대책을 강구했어. 하지 만 각 장로(長老)들 간의 원한이 이미 깊어서 서로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 그러다 공교롭게 도 교조의 무덤 석실 밑에서 마검결(魔劍訣)을 발견할 수 있었지. 두 사람은 함께 귀주(貴州) 금 령산(金靈山)에 숨어서 <구병태을분광검(九柄太乙分光劍)>을 연마한 다음 동문 장로들과 무당취 회를 열었지. 그리고 교조의 법좌 앞에서 문하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꾸짖었지. 그때까지 비 교적 정파를 고수하던 인물들은 먼저 교조의 비위(碑位) 앞에서 자기 잘못을 사죄하고는 문하제 자들을 데리고 북해(北海)에 은거하며 삼십 년 간을 참회할 것을 맹세했지만, 다섯 장로 중의 임 망(林莽)과 마령자(魔聆子)와 이금생(李琴生)은 속죄는커녕 대뜸 심명신니와 영령자에게 대항하여 싸웠지. 이 무당파의 내분으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해 임망, 이금생 두 장로와 그들 문하의 많 은 패거리들이 모두 <구병태을분광검> 아래 목숨을 잃었지. 비록 세 장로들은 문규를 위반했기 때문에 응분의 대가를 치른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스승이 사전에 이런 일을 예견치 못한 점을 원 망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래서 장래를 생각하여 대책을 마련키 위해 인재를 키우기로 했지. 가만 히 보니 새로 입문한 저육매(緖六妹)의 자질이 가장 뛰어나긴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고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무공의 성취가 늦는 고로,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기에는 아직 부족했지. 그래 서 영령자는 어쩔 수 없이 절친한 친구인 곤륜파의 반변노니를 청하여 오랫동안 의논을 했어. 그 리고는 교조의 자리 앞에서 반변노니를 사숙(師叔)으로 모시고, 자기는 사제(師弟)가 되었단 말야. 영령자는 지니고 있던 법보와 마검결을 모두 바쳤으며 다들 반변노니의 문하가 되었어. 그래서 장래에 반변노니의 문하에서 누구든지 뛰어난 자가 도통을 계승하게 된다는 것이었지. 비록 무당 파의 도통을 단절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한 일이지만, 곤륜본파(崑崙本派)의 여러 장로들은 여기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지. 제일 먼저 <유룡자(遊龍子)> 위소소(韋少少)가 반 변노니가 문규를 어겼다고 비난하고 나왔어. 그는 남천(南川) 금불사(金佛寺)로 종선생(鍾先生), 천지상인(天地上人), 지비선사(知非禪師) 같은 곤륜파의 명숙(名宿)들을 초청하고 반변노니를 호위 하여 그 잘못을 따졌지. 곤륜파에서는 종선생, 천지상인, 지비선사가 사형(師兄) 신분으로서 문파 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세 사람 누구나 사장(師長)의 지위에 오르지 못해 평소에는 서로 자중하며 문규를 지키고 또한 서로를 존중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견제하기도 했지. 위소소가 세 사형을 끌어들인 것은 겉으로야 그 같은 명분론 때문이지만, 위소소는 평소 반변노니와 사이가 좋지 않 았기 때문에 그냥 덮어두지 않았던 거야. 성미가 고약한 반변노니는 여러 동문 장로들이 자기가 방문(旁門)의 마검결을 몰래 익힘으로써 사조를 저버렸다고 비난하자 화가 치솟았어. 결국 동문들 의 비난을 더 이상 참지 못한 반변노니는 자기 심증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함께 일할 수 없으므로 곤륜파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단 말이야. 그리고는 곧 문하의 일곱 제자들을 데리고 무당 파로 옮겨 와서 영령자와 함께 무당문하의 남녀 문하인을 관장하게 된 거야. 이로 인해 무당문하 는 강성하게 되었지. 그녀는 원래 곤륜파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었는데, 마검결을 익힌 데다 또 무당파의 비기를 익혔으니, 어찌 동생이 그녀를 상대할 수 있겠어?" 용고는 이 말을 듣자 화를 삭히지 못해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어머니가 병해하시기 전에 내 눈으로 그 원수 년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는데 어찌 그냥 둘 수 있겠어. 군자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십 년 세월도 참는다고 했어. 내 그 두 가지 법보를 되찾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야." 그런 용고를 손능파는 옆에서 정성스런 말로 달래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매우 친해졌고, 서 로 내왕하면서 이것저것 고민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점점 손능파의 꾐에 넘어가 그녀에게 물이 든 용고는 법술로써 젊은 남자를 납치하여 산에서 음 락을 즐겼다. 처음에는 웅혈아나 장령자에게 들킬까 조심조심 몰래 그 짓을 하느라 겁도 났지만, 나중에는 점점 대담해졌다. 남편이 찾아오기 한 달 전부터 몸가짐을 얌전히 할 뿐, 나머지 기간 동안은 손능파와 손뼉이 맞아 얼마나 많은 건장한 남자들을 끌어들여 희생시켰는지 모를 지경이 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이렇게 하여 몇 년이 지났는 데도 장령자는 여전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전혀 내색이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꺼릴 것 없이 음락을 실컷 즐겼다. 손능파는 원래 스승인 음소당처럼 잔꾀가 뛰어났기 때문에 이처럼 한적한 동굴에서 혼자 지내는 용고를 꾀여 이곳을 임시 행락지로 이용하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였다. 그래서 용고의 남편 웅혈 아가 휴가를 내어 산으로 찾아오는 두 달 동안만 얼씬거리지 않았을 뿐 평시에는 스승의 미약(媚 藥) 재료인 원향련을 캔다는 구실로 거의 고파령에서 살다시피 했다. 스승인 음소당이 산중에 있지 않을 때는 동굴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음소당이 여러 문 인(門人)들에게 각자 머물 장소를 지정해 주었으므로 더욱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음녀는 이때까지 각각 한 남자씩 상대를 골라서 성희를 즐기곤 했는데, 너무나 과도한 행위 에 견디다 못한 사내들이 죽어버리자 급히 산을 내려가 붙잡아 데리고 온 것이 바로 한씨(韓氏) 성을 가진 젊은이였다. 한가는 녹림(綠林) 출신으로 무공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두 여자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아 무래도 짝이 맞지 않기에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서 사내 하나를 더 잡아와야 할 판이었다. 그런 데 생각지도 않게 아직 가을이 되지 않았는데 웅혈아가 전례를 깨고 산으로 용고를 찾아왔던 것 이다. 손능파는 웅혈아의 성격이 불 같다는 소리를 들었는지라, 자기와 용고가 한 짓을 눈치챌까 봐 근심에 찬 마음으로 서 있었다. 다행히도 용고가 기지를 발휘하여 웅혈아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손능파는 새로 사귄 친구이 며 한가는 그녀의 남편이라고 소개했다. 남편이 갑자기 나타나 마음 속으로는 매우 놀랐으면서도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혈아는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참았다. 서로 인사가 끝났을 때, 용고가 몰래 손능파에 게 눈짓을 했다. 손능파는 용고의 눈짓을 보고는 한씨 청년을 데리고 어서 떠나라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지금은 스승 음소당도 조화애(棗花崖)에 있고, 자기의 동굴에는 두 여자아이가 있지만 하나는 자기 심복 이고, 또 하나인 여영남은 자기한테 꽉 쥐여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존재라서 거리낄 것이라 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갑자기 기분이 유쾌해졌다. '이 남자를 데리고 가서 혼자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고맙지 뭐야.' 손능파는 한가의 손을 잡아끌며 몸을 일으켜 용고부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두 분께서 일 년에 겨우 두 달 만을 함께하시니 얼마나 그리웁겠습니까? 서로 헤어져 그리던 정(情)을 오늘 실컷 푸시기 바랍니다. 우리 두 사람은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용고는 짐짓 좀더 머물다가 가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몇 마디 입에 담으며 혈아와 함께 동 굴 밖까지 나와 배웅했다. 한가와 손능파가 반쯤 부둥켜안고 검광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 정말 다정스런 부부같이 보여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하기야 원래 자기는 고 독을 달래기 위한 일시적 쾌락 추구로 사내를 끌어들인 것에 불과하므로, 그런 사내들에 대해서 깊은 정 같은 것은 없었다. 사실 몇 년 동안 무수히 많은 남자를 껴안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남편 웅혈아에 비할 수는 없었 다. 게다가 이번에는 남편이 이렇게 일찍 찾아왔을 뿐 아니라 자기의 비행이 들통나지도 않았으 니 그 기쁨이란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자기가 손능파를 배웅할 때 남편이 뒤에서 냉소하며 자기를 쏘아본 사실을 그녀가 어찌 눈치챌 수 있었으랴! 용고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고서 그전처럼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와락 남편의 품에 뛰 어들었다. 그러나 혈아는 가만히 그녀를 안아주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 다.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는 데도 혈아는 육체관계는커녕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있는 것 이었다. 용고는 답답하여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손능파는 어떤 사람이고 무예가 얼마나 고 강하며, 한씨라는 사람은 원래 세가(世家)의 자제인데 무공이 뛰어나다는 등의 이야기를 주워섬겼 다. 또 손능파는 스승의 명으로 그 사람과 인연을 맺어 부부가 되었는데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모른 다고 하고, 또 손능파는 자기와 의자매를 맺었다고 조잘거렸다. 그리고 남편이 올 날만을 기다리 며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외롭게 산중에 머물러 있는 자기를 위해 수시로 그녀가 찾아와 친구가 되어 주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혈아가 궁금해 할 것 같은 부분은 말하지 않아서 혈아가 입을 열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용고가 이렇게 애를 써도 혈아는 묵묵부답 한 마디의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전 같으면 남편은 오자마자 그동안 홀로 독수공방을 한 용고를 가엾게 생각하여 지극한 정을 베풀곤 했었는 데, 이번에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내가 한 행동을 알고 있다면 불 같은 성질에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이이고 보면 아마 모르나 봐.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럴까?' 그녀의 마음 속에는 걱정이 태산같이 쌓였다. 십여 일이 지나자 용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노골적으로 교태를 부렸다. 그러나 혈 아는 역시 목석같이 굴었다. 자기는 남편을 위해 일 년에 열 달을 생과부로 지내는데 이렇게 남 편이 무정하니 너무나 슬펐다. 혈아는 용고가 옆에서 아무리 말을 걸고 유혹을 해도 미소만 띨 뿐 끝까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더니, 마침내 귀찮다는 듯이 갑자기 양쪽 눈꼬리를 치켜세워 화난 표정을 짓고 '너...'라고 무슨 말을 할 듯 한 마디 뱉았다. 그러나 이내 얼굴색을 펴면서 아까처럼 미소띤 얼굴로 돌아갔다. 그 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내가 여기 온 것은 당신이 홀로 적적하게 날짜만 꼽으며 지내는 것이 애처로와서요. 나 는 지금 도(道)에 뜻을 두고 새로 한 가지 법술을 익히느라 삼여 년간 매우 바빴던 것이오. 게다 가 사부님의 명으로 처리해야만 하는 일도 있소. 이번에도 사부님이 허락을 해주시어 당신과 함 께 지낼 수 있게 된 것이오. 항상 당신이 걱정되었는데, 이제 좋은 친구가 생겼으니 전처럼 그렇 게 외롭지는 않겠군. 우리 부부는 이미 몇 년 동안 의좋게 지내왔으니, 서로 속이는 일이 있어서 는 안 될 것이오!" 혈아의 말은 구절구절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어, 용고는 들을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혈아는 말하 는 동안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었다. 비록 완전히 단정을 할 수는 없더라도, 그의 온화한 표정을 보아 약간 마음을 놓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화내고 있는 것 같이도 보여 정말 종 잡을 수가 없었다. 용고가 캐묻자, 혈아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다만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 는 말뿐이었다. 용고는 스승이 어떤 법술을 익히라고 했으며, 무슨 일을 해야만 하고, 또 언제 돌아올 것이냐고 계속해서 물었지만, 혈아는 아직까지 잘 몰라 뭐라고 분명히 말해줄 수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 러니 용고의 마음 속에는 의혹만 쌓여갈 뿐이었다. 한 달도 머물지 않고 혈아는 스승을 대신해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떠나야 되겠다고 말했다. 그러 면서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르겠다는 것이었다. 용고는 그가 떠나겠다고 말하면 절대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볼 수밖 에 없었다. 그래서 언제 돌아오는 지, 함께 머무를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또 이미 휴가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처럼 돌아와서 두 달 동안 함께 지낼 수 있는지도 물었다. 혈아가 말했다. "올해가 작년과 같을 수만은 없고, 모든 일을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오. 휴가기간에 올 수도 있 고, 못 올 수도 있소. 모든 것이 사부님의 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청해(靑海)에 돌아가 서 휴가기간이 되면 반드시 돌아오리다." 용고는 비록 음탕한 여인이었지만 혈아에 대한 사랑은 진정이었다. 그래서 혈아의 말을 듣고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혈아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더니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과연 사부님 말씀대로 나에 대한 정이 정말 깊구나." 용고가 그 말을 듣고 뭔가 물어보려 하자, 혈아는 말을 막으려는 듯이 그녀를 품에 껴안아 두어 번 토닥거렸다. 그리고는 훌쩍 몸을 솟구쳐 허공을 가르며 떠나가 버렸다. 용고는 남편의 말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했다. 그래서 애인인 한가조차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혼자 동굴 속에서 며칠을 생각한 끝에 손, 한 두 사람과 상의해 보 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남편이 자기의 마각(魔脚)을 눈치챘다면 몰래 와서 감 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역시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몸을 움직 이는 것이 상책이다 싶었다. 용고는 웅혈아가 다녀간 뒤로 심사가 어지러워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 이 흐를수록 점점 욕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침내 앞뒤 생각없이 손, 한 두 사람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우연히 허공을 날아가는 손능파를 발견했다. 용고는 즉시 따라잡아 동굴로 데리고 와서는 서로의 경과를 이야기했다. 손능파는 애인인 한가가 여영남에 의 해 죽었고,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우?" "우선 도망간 여영남 고년을 찾아서 잡아죽여야지. 그래야 사부님에게 의심받지 않을 게 아냐." 그리고는 조금 후에 아미파의 비뢰동으로 가서 소년들을 잡아와 즐길 것이라고 했다. 용고는 손능파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남편은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는데 돌아오지 않고 있지 않은가. 손능파는 몇 번이나 그녀를 꾀었다. "남편은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니 괜히 걱정하지 마. 그러나 만일을 위해서 이번에는 애 들을 조화대로 데리고 가자구. 사부님도 계시지 않고, 여영남은 이미 도망갔고, 당채진은 나의 심 복이니 아무런 걱정이 없어. 만일 남편이 돌아와서 동생이 없는 것을 알고 조화애까지 찾아온다 고 해도 괜찮아." 용고와 손능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의논한 끝에 검광을 타고 조화애로 날아갔다. 당채진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다음 여영남을 찾으러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조화애 가까이 갔을 무렵, 손 능파는 자기 동굴 앞에 웬 여자가 둘이나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녀는 급히 용고에게 주의를 주고는 검광을 뿌리며 유성처럼 날아갔다. 거 의 얼굴을 알아볼 만한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야 손능파는 상대방이 비뢰동 앞에서 자기의 비검, 법보를 파해했던 그 원수들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 죽일년들! 오늘은 맛좀 봐라. 내 아직 앙갚음을 못해 잠이 안 오던 터에 여기서 네년들을 만 날 줄이야.' 너무나 화가 치솟는 데다 자기한테는 두 가지의 법보가 있는지라, 또 용고가 옆에서 도와준다는 생각에 손능파는 적들의 자줏빛 검광이 얼마나 무서운 줄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앞뒤 가 리지 않고 먼저 검광을 뿌리며 공격해 갔다. 용고도 손능파의 경고를 듣고 이미 준비를 하고 있다가, 그녀의 검광이 속도를 더하는 것을 보 고는 자기도 검광을 발하며 날아갔다. 두 줄기 검광이 마치 유성이 달을 쫓아가듯 날아가서 채 적의 머리 가까이 도달하기도 전에 나이어린 소녀가 손을 한 번 탁 쳤다. 그러자 한 줄기 자줏빛 무지개가 마치 용이 바다에서 승천하듯이 떠올랐다. 용고는 비록 고강한 재주를 익히기는 했어도 이때까지 어머니인 금침성모의 보호를 받으며 고파 령에서 활개친 게 고작이었다. 손능파와 함께 장난을 치거나 소년들을 납치할 때 법술을 펼치기 는 했지만 상대방은 거의 무능한 사람들이어서 약간의 재주만 펼쳐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었 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처음으로 정식 대결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제까짓 것들쯤이야 하고 적을 경시했으며 그들의 검광이 매우 날카로움을 보고는 생각 이 달라졌다. 각파의 검광 중에서는 금빛 검광이 가장 무섭다고 생전에 어머니가 말했었는데, 이 자줏빛 검광은 금빛 검광보다 더한 것같이 느껴졌다. 이 자줏빛 검광이 바로 아미파의 개산조사 (開山祖師)인 장미진인이 처음으로 연성한 무공으로써 그 위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용고가 어떻 게 안단 말인가. 더군더나 이 보검은 장미진인이 삼세(三世)를 살면서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고 가지고 다녀 수 백 년 동안 단련된 것이라 그 변화 위력이란 실로 신묘막측(神妙莫測)이었다. 장미진인이 영겁(永劫)에 들면서 그의 모든 무공법보를 제자에게 전수하지 않고 깊은 산에 감춘 다음 법술로써 봉쇄해 버렸다. 훗날 이 보검이 다시 세상에 나오는 날 아미파는 힘이 강성해질 것이며 동시에 각 이파(異派)는 공전의 활겁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이 보검을 얻는 사람은 분명히 하늘이 정한 사람이라고도 했던 것이다. 자줏빛 검광이 쏟아지자 그 싸늘한 빛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하고 백 걸음 안에서는 그 한기 에 머리털까지 곤두설 지경이었다. 두어 번 그 검광과 부딪쳐 보고 용고는 자기가 그녀의 적수가 아님을 깨달았다. 나이가 조금 많은 여자는 푸른빛 검광을 내쏘면서 맹렬히 공격해 왔다. 손능파의 검광은 이미 자줏빛 검광에 의해 차단되었다. 처음 법보를 잃을 때를 생각하니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자기의 두 자루 비검(飛劍) 중 지금은 하나만이 남아 있으니 이제 어 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화가 나지만 다급해져서 검광을 회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검광을 거두어들일 수조차 없자 부득이 진기를 무섭게 끌어올려 검광을 뿌리며 버텨 용고의 검광에 의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경은 손능파 같은 음적이 가장 싫었다. 지난 번에는 어쩌다 놓쳤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영남한 테 해꼬지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라 절대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먼저 이 계집의 비검을 파해하고 나서 더러운 목숨을 끊어버려야지.' 영정은 이렇게 작정했다. 또다른 적은 무예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나 약란에게 맡겨, 그녀 나름대로 영남의 복수를 할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 용고의 실력은 금침성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용고가 보기에도 자줏빛 검 광은 과연 위력이 상당했다. 푸른빛 검광도 이에 못지 않았는데, 더욱 기이한 것은 자기의 검광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 검광과 비슷한 것이라곤 계화산(桂花山) 복선담(福仙潭)의 홍화모모밖에 없는데, 어찌 된 노릇일까? 저 자줏빛 검광을 운용하는 계집애는 아미파가 분명한데, 그렇다면 이처럼 서로 다 른 문파의 사람끼리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불쑥 소리를 질렀다. "네년은 어느 문파의 제자냐? 즉시 밝히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약란이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신약란이고 이쪽은 나의 사매 이영경으로서 아미파의 장교인 <건곤정기묘일진인(乾坤正氣 妙一眞人)>의 제자다. 네년들이야 말로 이름은 무엇이며 어느 파의 제자냐? 왜 자신부터 밝히지 못하지." 용고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자기와 손능파의 이름을 밝힐 뻔했다. 사정을 보아하니 법보를 펼치 지 않고는 이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옆을 보니 손능파의 푸른빛 검광은 적의 자줏 빛 검광에 차단되어 빛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다급한 나머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능파에게는 원래 두 자루의 비검이 있었다. 하나는 자기가 오금(五金)의 정화(精華)를 채취하 여 수년 간 공을 들여 만든 것인데, 지난번 처음으로 영경과 비뢰동 앞에서 싸우다가 잃어버렸다. 지금 가지고 있는 하나는 음소당이 옛날 곤륜파에 있을 때 가지고 있던 것으로써 손능파를 매우 총애하여 그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영경과 마주쳤을 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 것도 이 보검을 믿기 때문이었고, 또한 용고가 옆에 서 도와주리라는 은근한 믿음에서였다. 그래서 앞뒤를 고려하지도 않고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줏빛 검광에 갇히고 나서야 그녀는 그 엄청난 위력을 깨달았다. 이 보검을 마저 잃어버리면 다시 만들기도 쉽지 않으려니와 설령 다시 만든다고 해도 대단찮을 테니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진기를 끌어올리려고만 했지, 다른 법보를 사용하는 임기응변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영경은 이 음적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사무치던 터라, 푸른빛 검광이 수그러드는 것을 보고 매 우 신이 났다. 아미파의 심법(心法)을 구사하여 몰래 <태을선천진기(太乙先天眞氣)>를 뿌리며 기 합소리를 지르자 그 자줏빛 검광이 갑자기 무한히 넓어지며 적의 푸른빛 검광을 겹겹이 포위해 버렸다. 작은 청사(靑蛇) 같은 것이 자줏빛 운무 중에서 반짝반짝 움직이자 푸른빛 검광은 점점 엷어져 갔다. 손능파는 절대로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불 안감이 없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단전의 오혈도(五穴道) 진기를 집중 운용하여 목숨을 걸 고 보검을 회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어떤 운기(運氣)가 맹렬하게 진행되면서 자기 몸까지도 그 진기를 따라 흡수되는 것처럼 앞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놀라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어서 '쨍그랑!' 하는 소 리가 들리더니 하나는 짧고 하나는 긴 두 개의 푸른빛 검광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음소당이 백 년간 공들여 만든 비검이 쇠조각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손능파가 조금만 늦었더 라면 그의 몸도 자줏빛에 흡수되어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 섬전처럼 빠른 공격에는 손능파의 어떤 무공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손능파는 아직 법보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을 시전해 볼 겨를도 없었다. 용고는 이미 일이 글렀다 싶자 손능파의 검광이 파해되기 전부터 미리 현녀침을 준비하여 만일 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사태는 매우 위급했다. 이때 용고는 어머니가 아무리 위험에 처하더라도 현녀침은 함부로 사용 하지 말라고 당부하던 유언이 생각났다. 손능파는 이미 비검도 믿을 수 없게 되자,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 자줏빛 검광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손능파의 검광을 파해하고 반 드시 계속해서 밀려올 텐데, 그때는 정말 속수무책인 것이다. 용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자줏빛 검광 속에서 푸른빛 검광이 더욱 엷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도망가기가 힘들 것이 분명하여 결국은 현녀침을 사용하기로 했다. 조금 일찍 현녀침을 사용했더라면 손능파의 비검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왕 결심한 바에 야 주저할 것이 없었다. 용고는 즉시 두 개의 현녀침을 꺼내어 일성을 지르며 던졌다. 그 현녀침은 약란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약란은 상대방이 금침성모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는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많은 법보 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그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현녀침이었는데, 일단 날아 가면 사람의 피를 보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무공으로 침을 파괴해야지, 그렇지 않으 면 어떤 방법으로 도망가더라도 끝까지 따라오는 무서운 무기였다. 금침성모는 생전에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을 해쳤는지 모른다. 그로 인해 결국은 비참한 최 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작년에 스승 홍화모모의 명에 따라 무당산으로 반변노니에게 자연조(紫煙組)와 우잠유리(于潛琉 璃)를 빌리러 갔을 때 석명주와 이야기를 하다가, 현녀침이 이미 반변노니의 수중에 있다는 소리 를 들었다. 그 침이 자기에게는 없지만 다른 법보는 모두 그전에 스승으로부터 파해법을 들어 알 고 있다는 말도 했었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출수하지 않고 그의 공격을 가만히 살펴보니 어쩌면 막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검광으로 적의 공격을 막으며 정신을 쏟아 변화를 살폈다. 옆을 돌아보니까 영경의 검광이 매우 위력적인지라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 대갈일성과 함께 연이어 아홉 개의 오색채성(五色彩星)이 날아왔다. 막을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는 지경이 되자 약란도 급히 소리쳤다 "동생, 조심해! 적의 요침(妖針)은 매우 날카로와."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왼쪽어깨의 진기를 막았다. 기왕 대할 수도 없다면 어깨가 부숴지더라도 맞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동생, 빨리 피해!" 갑자기 머리 위에서 청사(靑絲)가 흩어지면서 왼쪽어깨에 심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진기가 한 줌 도 혈도에 모이지 않았다. 그때 이영경 쪽은 상대방의 비검을 파해하고는 막 베어 죽이려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때 약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으므로 힐끔 돌아다보니, 약란은 이미 적의 법보에 일격을 당한 상태라 깜짝 놀랐다. 용고는 두 번째 현녀침을 이번엔 영경에게 날려보냈다. 영경은 적이 지닌 법보의 내력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막 약란의 경고도 있고 했으므로 검광 으로 손능파를 죽이려던 생각을 일단 거두었다. 자영검(紫暎劍)은 원래 영경과 심령이 통하고 있 으므로 마음만 움직여도 즉시 돌아왔다. 용고의 비침이 여간 빠르지 않았지만 자영검 역시 빠르기가 그에 못지 않아서 재빨리 돌아와서 는 현녀침과 맞부딪쳤다. 그 자영검의 위력은 실로 대단해서 현녀침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용고는 두 가지 법보가 부딪치는 것을 보고는 진언(眞言)을 외어 첫 번째 현녀침을 다시 날려보 냈다. 한 줄기 채성(彩星)이 십팔 근(十八根) 현녀침으로 분산되어 날아가자 영경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자줏빛 검광이 현녀침과 닿자마자 자장(紫障)으로 변하여 현녀침을 에워 싸 막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아홉 개의 채성은 자줏빛 검광에 둘러싸여 어쩔 줄을 몰랐다. 용고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비로소 그녀는 자영검의 위력을 깨닫고 손능파와 같은 꼴이 되지 않 을까 두려웠다. '검광이 저렇게 날카로운 것으로 보아 그는 아미파 인물 중에서도 고수임이 분명해, 어처구니없 구나! 어린 것이.....' 신약란의 검광은 여전히 자기의 검광과 얽혀 있었고,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쓰러지기는커녕 도리 어 세 개의 금환(金環)을 꺼내어 막 공격하려는 참이었다. 그 금환이 홍화모모의 진산지보(鎭山至寶)인 <삼재화운환(三才火雲環)>인 것을 알자 간이 서늘 했다. 용고는 현녀침과 비검으로 혼자 두 적을 상대하면서 급히 손능파 앞으로 날아갔다. "적이 매우 악랄하니 빨리 달아나야겠어." 그리고는 손능파의 대답도 있기 전에 재빨리 한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어 휘저었다. 곧 그녀는 푸른 연기로 변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러자 현녀침과 비검도 그녀를 따라 순식간에 사라 져 버렸다. 약란은 화운환을 펼쳤으나 적이 이미 도망해 버린 후라, 법보를 회수하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았 다. 영경은 적을 추격할 생각을 버리고 약란을 살펴보았다. 약란이 영경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그 악적의 현녀침에 의해 부상을 당했어. 그 현녀침의 위력은 굉장하여 일단 발출되 면 사람의 피를 보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아. 그 침을 파해하지 않고는 생명을 부지하기가 힘들지. 다행히도 나는 왼쪽 팔을 하나 버림으로 생명을 건진 거야. 그 악적은 시용고라고 하는데, 금침성 모의 딸이지. 그들은 최근에 고파령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우리 아미파와는 별다른 은원관계가 없 어. 그런데 자기 어머니가 천겁을 당하자,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으므로 함부로 악행을 저지르 며 다니는구나. 나는 지금 왼쪽팔의 기혈이 막혀 움직일 수가 없다. 이레가 지나면 팔을 쓸 수 없 을지도 몰라. 큰언니가 돌아와야 치료할 방도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영추봉의 비밀 允雪臂 靈物示仙藏 窺碧岺 虎兒遭愚弄 이영경은 여영남을 찾는 데 도와달라고 신약란을 끌고 나왔다가 그녀가 이처럼 중상을 입었으므 로 애가 타고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약란은 온갖 어려움이 있을 줄 알면서도 스스로 가담한 일이기 때문에 비록 적의 비기에 부상을 당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왼쪽 어깨의 혈맥이 점차 굳어져 아프기가 불로 지지는 듯하여 실로 참아내기 어려운 지경인 것이 문 제였다. 그래서 그녀는 영경에게 말했다. "적이 물러갔다고는 하지만 결코 패해서 도망친 것은 아냐. 이곳은 그들의 소굴인데 다른 곳으 로 달아났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거기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거야. 그 러니까 우리는 방심해선 안 돼. 내가 상처를 입고 보니 동생 혼자잖아. 속히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말에 영경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황망히 대답했다. "언니가 이처럼 재난을 당한 것은 내 탓이야. 정말 미안해. 우선 언니를 보호하여 산으로 무사히 돌아가서 한동안 정양을 취한 뒤에 다시 복수할 방법을 강구해야겠어. 그렇지 않고 여기 그대로 남아 있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약란을 부축하여 일어났다. 약란이 말했다. "영남사저가 비록 용담(龍潭)에서는 빠져나왔다 하지만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냐. 우리 가 그냥 돌아가 버리면 그녀는 필경 아까 그 요녀들에게 붙들리고 말 걸. 그렇다고 여기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으니 내 생각으로는 이랬으면 좋겠어. 아직까지는 억지로라도 얼마간 더 지탱할 수 있으니, 신조(神鳥)로 하여금 영남사저가 간 방향을 따라 찾아보도록 하잔 말이야. 요행히 찾 아내는 경우 함께 돌아가면 될 것이고, 찾아내지 못해도 할 수 없지만, 신조도 찾지 못하는데 우 리로서 달리 방법이 없잖아? 어쩌면 영남사저는 그리 위험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큰언니가 돌 아온 뒤 상의해 보고 다시 함께 찾아나서기로 해. 음소당이 영남 사저를 보물같이 여기는 터이니, 손능파가 붙잡았다 하더라도 자기 사부가 돌아와서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야. 그렇게 되 면 비록 상처를 입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거야." 그때 홀연 멀리 창공에서 새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신조가 돌아온 것임을 알았다. 눈을 들어 살펴보니 과연 신조가 구름을 뚫고 쏜살같이 내려오고 있었다. 영경은 신조의 등에 영남이 타고 있지 않은 것을 보자 몹시 실망했다. 그러면서도 신조에게 영남을 보았는지 물었다. 신조는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어, 영경은 약란을 부축하여 신조의 등에 올라타고 아미산으로 향했다. 태원동에 도착하자 영경은 신조더러 다시 영남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조화애(棗花崖) 주위를 좀더 세밀히 조사해 보고 만일 적의 수중에 붙잡힌 영남을 발견했 을 경우 가능하다면 내려가서 그녀를 등에 태워 돌아오길 바라지만 내려갈 수 없는 형편이면 속 히 돌아와 소식을 전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런데 신조의 태도가 이상했다. 지시를 받았으면 떠나야 마땅 하거늘, 고개를 저으며 날아오르 려는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영경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급히 물었다. "왜 그러지? 네가 가지 않으려는 것이 설마 영남언니가 벌써 다른 사람에게 붙잡혔기 때문은 아 니겠지? 아니면 적이 너무 지독해서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이냐?" 신조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길게 울어댈 뿐이어서 영경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약란은 동굴로 돌아온 후 몇 마디 말을 마치고는 곧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공력을 운용하기 시작 했다. 얼굴이 온통 붉으락푸르락한 것으로 보아 비록 말은 안해도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영경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다시 신조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고개를 돌리자, 신조는 그 사이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 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약란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상처에 대해 위로해 줄 말을 머릿속으로 찾아보았다. 그런데 영경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육지가 '갹갹!' 하고 웃으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영경은 모두 마음 속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벌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육지가 약 란의 몸 위로 팔딱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육지는 약란의 왼손 소맷자락을 붙들고 쉴새없이 흔들 어대며, 입으로 '갹갹!'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영경이 말했다. "신언니가 상처를 입어 빨리 손 쓰지 않으면 큰일나게 되었어. 육지야, 너는 언니를 구해줄 수 있겠지?" 육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는 자기의 작은 손을 약란의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약 란은 왼팔이 크게 부어올라 소맷자락을 걷을 수도 없을 지경으로 심한 압박감을 느끼던 중인데 육지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보고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영경더러 대신 자신의 소매를 찢어 달 라고 부탁했다. 영경이 약란의 소매를 찢어내고 보니, 그녀의 상처 부위는 마치 피와 살이 범벅된 고깃덩이 같 았다. 평소 옥같이 맑고 깨끗하던 피부요, 얇게 분칠을 한 듯 희디희던 팔이 지금은 고름과 피로 얼룩져 붉고 푸르죽죽한 종양이 여기저기 돋아 있었다. 종양 여러 개는 이미 터져서 시커멓게 죽 은 피가 뭉클뭉클 솟아나왔다. 그런 약란의 딱한 모습을 보자니 영경은 가슴 속이 말할 수 없이 아파서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육지는 약란의 무릎 위로 올라가 그녀의 상처입은 팔을 끌어안더니 자기의 작은 입을 상처에다 대고는 열심히 빨기 시작했다. 약란은 상처를 입은 이래 시간이 흐를수록 열이 오르고 쿡쿡 쑤셔서 그 통증이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현녀침이 결코 해독할 수 없는 독성을 지니고 있으며, 제영운이 돌아 오더라도 반드시 자기를 구해낸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억지로 지탱을 해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침내는 내 운명이 그런가 보다 하는 체념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긴 고통보다는 차라리 순간의 고통이 낫지 않을까? 아예 왼팔을 스스로 잘라버리고 긴 고통에 서 벗어나고 싶어.' 그러나 옆에서 지키고 있는 영경이 필시 막으려 할 것이므로 손을 쓰지 못하고 그저 억지로 고 통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육지가 나타난 것이다. 육지가 자기의 상처를 핥아주자, 상처가 이상야릇한 청량감이 느껴지면서 비록 상처가 나은 것 은 아니나, 고통이 훨씬 감소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막 육지에게 감사의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원성과 지선이 동굴로 들어왔다. 지선은 약란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위로했다. 알고 보니 신조가 원성에게 찾아가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원성은 신조로 하여금 자기 대신 경계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는 지선에게 사정을 전 달해 주었던 것이다. 원성은 자기가 평소부터 신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음을 실토했다. 신조는 자기 주인이 영남 의 안전에 대해 조급해 하는 것을 보자, 오늘 일을 분명히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싶 었다. 그러나 자기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는 할망정 대화가 불가능하므로 원성을 찾아가 그에게 대신 말을 전해 달라 부탁한 것이다. 영경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 인가를 물었다. 원성이 말했다. "강우가 말하더군요. 명을 반들어 여선고(余仙姑)를 찾으러 나선 그는 여선고가 그리 멀리 가지 않았으리라 보고 지나간 길 주위 수백 리를 낮게 날면서 샅샅이 뒤졌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종 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는군요. 마지막 세 번째로 찾아나섰을 때는 조화애(棗花崖)에서 그리 멀 지 않은 한 어두운 계곡에 도착했대요. 그래서 신안(神眼)을 부릅뜨고 계곡 안을 살펴보다가 우연 히 괴기한 도인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새들의 말이 능통한 그 도인은 강우를 내려오라고 부르 더니, 자기는 <백금도인(百禽道人)> 공야황(公冶黃)인데, 여선고는 망창산(莽蒼山)에서 너의 주인 을 찾아헤매다가 잘못 실수하여 유사(流沙)에 빠져 흑곡으로 떨어졌다고 하더랍니다. 백금도인은 여선고가 자기와 인연이 있음을 알고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 그녀에게 흑곡에 서 망창산으로 통하는 밀도(密道)를 가르쳐 주었답니다. 그 밀도는 보통보다 훨씬 가까울 뿐 아니 라 적의 추적도 피할 수 있는 길이라는군요. 도인은 다시 강우에게 말하더랍니다. '아미가 오래지 않아 크게 문호를 빛낼 것이며, <삼영(三英)>이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요. 도인은 본래부터 주인님들께서 아미에서 수도하고 계신 줄 아는 데다가 여선고가 망창산에 도착하면 수많은 선연 (仙緣)과 기우(奇遇)를 만나게 될 것이므로 그저 여선고에게 길을 알려주기만 했을 뿐 주인께서 어디에 계신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답니다. 그리고는 강우더러 '이제부터는 더 이상 그녀를 찾아 다니지 말고 네 주인 앞에 돌아가서 축일(丑日)에나 거동하라고 전하라'고 했답니다. 그 전에 움 직이는 것은 피차 아무 이익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손해만 있을 뿐이라면서요. 강우는 그 도인의 내력에 대해 대강 짐작이 가므로 그냥 돌아왔답니다." 신조는 원래 영통한 새였으므로 원성이 전해 준 말에는 거의 오차가 없었다. 영경은 그제서야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조금 있자 장남고, 장호아, 우건, 양성지 등 네 사람이 위문차 찾아왔다. 약란은 팔을 온통 드러 낸 몸이라 쑥스러워서, 남고 한 사람만 동굴에 들어와 보도록 했다. 남고는 그녀의 상세를 살펴보 고 나가서 나머지 세 사람들에게 얘기하였다. 영경은 <염선> 이원화가 사전에 경고한 말이 떠올라 즉시 원성과 신조에게 명해 후동(後洞)으 로 가서 교대로 지키라 하였다. 그리고는 지선을 동굴에 머물게 하여 둘이서 같이 약란을 돌보았 다. 약란은 육지가 한 차례 핥아준 뒤로 종양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나, 통증은 거의 사라져 팔 을 자르려던 생각을 철회하게 되었다. 약란이 이처럼 부상을 당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풀이 죽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경은 새로 입문한 네 사람을 진심으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이곳에 온 시기가 마침 자기랑 약란이 번갈아서 곤경에 처한 것과 공교롭게도 일치했기 때문에 그리 흥이 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육지를 놀라게 한 것이 그녀의 성미를 건드렸고, 영남을 찾느라고 바삐 돌아 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형편이 못되었다. 네 사람은 이곳에 도착한 후로 구지선 한 사람하고만 비교적 친숙할 뿐, 지난번 영경에게 냉대 를 받은 적도 있고 해서 주눅이 들어 모두들 감히 영경이나 약란에게는 친근스럽게 접근하지 못 했다. 그러나 남고는 본래 총명한 아이여서 동생인 호아와 더불어 이 같은 선부(仙府)에서 열심히 도 를 닦고 검법을 수련하며 오래 기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했다. 우건은 성품이 호방하고 가슴에 달리 품은 생각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온갖 고생을 겪으며 성장 해 왔는지라, 이것이 다시 만나기 어려운 광세기연(曠世奇緣)이라 생각하여 그저 지금은 청라(靑 螺)에 가 있는 여러 인물들이 돌아오면 스승으로 모시고 도를 배우려는 마음뿐이었다. 양성지는 봉변을 당한 경험이 있는지라 지선의 명이 없이는 한 발짝도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양성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돌보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비록 천품은 남보다 뛰 어났지만 성품이 비뚤어져 사사로운 욕심을 중히 여기고 너무 많은 일들에 집착했다. 처음 응벽애(凝碧崖)에 와서 기막힌 선경을 접하자 원대한 꿈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게다가 영경이나 약란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본신(本身)의 법술(法術)이 탁월할 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태도 아름답기가 하늘의 선녀 같아서 남고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지라 마음 속으 로 몹시 기뻐하며, 그녀들과 진작부터 친해 놓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였다. 그런데 막상 영경과 약란은 그네를 본 척도 하지 않으니 그로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 구나 육지가 놀라 도망치게 한 일 때문에 영경과 여러 사람들에게 한 차례 꾸지람을 듣고 보니 그로서는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영경이 나중에 자기의 사장(師長)이 될 분들에게 자기가 심성이 경박하여 결코 큰그릇이 될 수 없다고 고해바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후회스럽고 짜증이 나기까지 하였다. 이 산의 인물들이 육지를 그처럼 중시하는 것을 보자 언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깊은 산 큰 연못 속에는 왕왕 영지(靈芝)나 하수오(何首烏)와 같은 영약들이 자라는데 오랫동안 수련을 쌓다 보면 작은 사람이나 말로 변해 나다닌다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잡아먹으면 곧바로 신선이 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 소인이 바로 그것이로구나!' 양성지로서는 참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의문점이 있었다. 자기가 요도(妖道)의 손에서 벗어난 이 후 여러 남녀 검선(劍仙)을 만났는데, 몸에다 꽃을 더덕더덕 붙인 능도인(凌道人)이나 자기들 네 사람을 응벽애로 보내준 유진인(劉眞人)을 제외하면 모조리 나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이름이 선(禪)이라는 소선동(小仙童)이나, 저 이씨 성의 소선고(小仙姑)는 자기보다 나이 가 어린 듯한 데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높은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필시 육지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양성지는 생각했다. 기회가 오면 자세히 알아보리라. 남고는 지선과 한 방에 기거하면서 그녀로부터 육지에 대해서 들었다. 육지의 피가 굉장히 귀한 보물이며 산중의 모든 사람들이 그 육지를 아낀다는 말을 듣고 남고는 이를 호아에게도 그대로 알려주었다. 원래 남고가 호아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 것은 그가 육지를 보고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 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다. 우건, 양성지와 한 방을 쓰는 호아는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끝에 육지에 대해서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기고 말았다. 말하는 사람은 무심코 얘기한 것이나 듣는 사람으로서는 그렇지 않았으니 문제다.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하자, 영리한 양성지는 모든 사람들이 육지를 그토록 신주모시듯 하는 데는 필시 무슨 비밀스런 까닭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회를 보아 꼭 알아내고 말리라.' 게다가 약란의 상처를 육지가 한 번 핥아주자 상세가 호전되는 것을 보고는 암암리에 좋지 않은 욕심을 일으켰다. 그러니 이것은 육지에게 재난이 닥칠 징조였다. 육지는 약란의 상처를 핥아주어 점차 통증이 가시는 듯한 모습을 보자, 입을 다물고 약란의 몸 위에 앉은 채 영경이나 지선과 장 난을 치고 있었다. 영경이 육지에게 말했다. "그때 너는 우리를 이끌고 선초(仙草)를 찾으러 가려다 새로운 사람들 때문에 놀라 도망쳤었지. 그후 계속해서 일이 터지는 바람에 너를 찾을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도 그 선초가 남아 있니?" 육지는 그 말을 듣자 작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고개를 젓더니, 땅에 내려서서 곧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영경은 육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지선더러 쫓아나가 육지가 선초 있는 곳으로 안 내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그 말을 듣고 지선은 곧 육지 뒤를 따랐다. 육지는 지선이 따라 나오는 것을 보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흡사 그녀의 동행을 기다리는 듯했다. 지선은 육지에게 앞서서 길은 안내할 것을 부탁 했다. 태원동(太元洞)을 막 나서는데 양성지를 필두로 우건과 남고남매가 들어오고 있었다. 육지는 양성지를 보자마자 '갹!' 하는 비명과 함께 고개를 올려 지선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지선은 육지를 꽉 껴안으면서 말했다. "무서워할 필요없어. 저 사람들은 모두 본문의 문인이 될 사람들이야. 지난번에는 처음이라 너를 알지 못해서 실수로 놀라게 한 것뿐이지, 너를 해치려는 뜻은 아니었단다." 그래도 육지는 여전히 지선의 품속으로 파고들기만 했다. 양성지를 비롯한 네 사람은 이 광경을 보자 저도 모르게 일제히 우뚝 멈추어 섰고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지선은 열심히 육지에게 설명했다. 앞으로 이들 네 사람은 이곳에 상주할 것이며, 그러니 네가 매일 나갈 때마다 그들과 마주칠 것인데, 그때마다 놀라서는 어쩌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들 네 사람을 불러 일일이 소개하고 육지더러 조금도 겁낼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다. 네 사람이 육지를 자세히 보니 키는 한 자밖에 안 되는데 아주 하얗고 연약하게 생겼으며, 가까 이 접근하니까 한 줄기 청량한 향기가 풍겼다. 그들은 모두 육지가 여간 사랑스럽지 않았다. 당장 앞으로 나가서 한번 꼭 안아주고 싶었다. 지선이 그러고도 다시 서너 번이나 더 설명을 해준 뒤에야 비로소 육지는 영롱하게 푸른 눈을 들어 네 사람을 쳐다보며 '갹갹!' 하고 한 차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호아는 아직 어린아이의 마 음이라 육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육지의 옥 같이 작은 손을 어루만져 보았다.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란 남고는 동생을 말리려 했다. 그런데 정작 육지는 호아와 무슨 인연이라 도 있는 듯, 숨어버리기는커녕 오히려 손을 더 내밀어 맞장난을 치며 호아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 는 것이 아닌가. 이 모습을 보고는 남고뿐 아니라 지선마저도 신기해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남고는 육지 가 결코 호아를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더라도 큰소리로 그를 놀라게 할까 봐 조마조마하여 쉴새없이 호아에게 눈짓을 보내 물러날 것을 종용하였다. 우건과 양성지 두 사람도 부쩍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다가가 호아처럼 해보려고 했다. 그러 나 육지는 이미 지선의 품에서 벗어나 땅으로 홀짝 뛰어내리더니 앞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지선은 허겁지겁 육지의 뒤를 따랐다. 양성지는 이것을 보자 내심 크게 기뻤다. 그러면서도 짐짓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구선고와 함께 가보자구." 양성지가 지선의 뒤를 쫓아 달려가자, 우건과 호아와 남고도 모두 동심이 남아 있는지라 일제히 그 뒤를 따라갔다. 지선은 사람됨이 남을 의심할 줄을 모르므로 이를 물리치지 않았다. 육지는 깡충깡충 뛰면서 곧장 산을 가로지르고 계곡을 건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도 이따 금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가지가 붉고 껍질은 푸른 나무에 달린 마치 금귤(金橘)과 같은 과일을 따 먹곤 하였다. 양성지는 육지가 이 같은 과일을 즐겨 먹는 것을 보자 자신도 하나 따먹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 으나, 온 산에 기화이과(奇花異果)가 천지로 널려 있으되, 유독 육지가 먹은 그 과일 만은 아주 드물어 눈에 띄지 않았다. 지선은 남고에게 육지가 먹은 과일을 설명했다. "육지가 먹은 저 과일은 취실(翠實)이라고 해. 먹으면 눈이 밝아지는 일종의 선과(仙果)지. 한 그 루에 다섯닢의 이파리가 달리는 데 잎모양은 마치 뽕나무 잎과 비슷해. 한 그루에 하나씩 꼭대기 에 취실이 열린단다. 이곳은 사계절이 모두 봄과 같아서, 한 달에 한번 꽃이 피고, 그 다음달에는 열매를 맺지. 열매를 맺을 때마다 육지는 온 산골짜기를 누비며 이것을 찾아내어 먹어치우지. 우 리는 육지가 그것을 좋아하는 줄 알기 때문에 아무도 먹지 않고 육지가 혼자 먹을 수 있게 남겨 둔단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들은 움푹 꺼진 골짜기 아래를 지나는 중이었다. 절벽에는 온통 화려한 풀과 덩굴이 어우러져 있는 데다, 온갖 기화이초가 웃는 듯 바람에 하늘거리며 청량한 향기를 사 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암벽 아래에는 한 줄기 개울물이 흘러내리는데, 물결은 시리도록 푸른빛이었고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맑은 물결은 명경(明鏡)과 같아 산그림자가 푸르게 물결치는데 몇 덩이 흰구름이 가끔씩 물 위의 꽃그림자를 뚫고 지나갔다. 이곳이 바로 자화암(紫花巖) 수운동(繡雲洞)이라는 곳으로써, 응벽애의 선경 가운데서도 가장 청 려(淸麗)하고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지역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와보았으면도 볼수록 새로운 경이와 감탄사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걸 어가면서 계속 지껄여댔다. 왕현애(往懸崖)에 다다르자 갑자기 육지가 몸을 솟구쳐 몇 장 높이의 붉은 등나무 줄기를 한 손 으로 쥐고는 몸을 발딱 뒤집으며 높은 곳으로 올라섰다. 지선이 따라 뛰어오르려고 하자, 육지는 어느 새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손 안에는 예닐곱 개의 취실이 쥐어져 있었다. 육지는 그중 다섯 개를 지선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네 사람을 손으로 가리 키는 것이 지선더러 각기 하나씩 나누어 주라고 하는 듯했다. 지선은 웃으며 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맛을 보게 했다. 입에 넣으니 씁쓸하기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으나, 깨물어 씹으니까 그윽한 단맛이 감돌면서 맑은 향기가 입 안 가득해지며 가슴 속 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육지에게 고맙다고 치하한 다음 다시 그 뒤를 따라 나 아갔다. 봉우리를 돌아서자 작은 언덕이 앞을 가로막았다. 언덕 위에는 취죽(翠竹)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운 빛깔은 하늘빛으로 푸르렀고,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뒤채며 소리를 내는데 마치 옥구슬이 부딪치는 듯했다. 기암괴석들 사이로는 햇살이 가득히 비추며 모두가 영롱한 빛을 발하는 듯했다. 바위들은 구멍 이 많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들을 통해 마치 선음(仙音)이 들려오는 듯했다. 게다가 대나무 소리, 계곡의 물소리가 서로 어우러져서 기이한 음악을 연주하였다. 새로 온 네 사람은 이곳까지는 와본 적이 없었으므로 모두들 무척이나 신기해 했다. 지선이 말했다. "여기는 선음판(仙音板)이라고 해. 육지가 달구경을 하며 노는 곳이지. 비록 여기에다 생근(生根) 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매일 저녁 이곳에 와서 별을 보고 참배를 드린단다." 깊은 죽림(竹林) 속으로 들어가자 하나의 둘레가 일 장 정도 되는 천연 반석이 나타났다. 반석 위에는 옥으로 만든 두 개의 단로(丹爐)가 놓여 있고, 단로 앞에는 네 개의 돌의자가 설치되어 있 었다. 반석의 돌은 짙은 초록빛을 띠고 있는데 맑고 깨끗하기가 옥과 같았다. 이때 육지가 석대 뒤로 사라졌다. 모두들 따라가 보니까 정면에 한 덩어리의 거대한 비취가 나 타났다. 높이는 삼십 장 정도 굵기는 십 장 정도인데, 위는 넓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가늘어져 마 치 뛰어난 석공이 공들여 조각해 놓은 것 같았다. 모양이 지극히 빼어난 데다, 군데군데 여러 개 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작은 손으로 지선을 잡아끌면서 취석(翠石) 앞으로 다가간 육지는 비교적 커다란 한 구멍을 가 리키며 지선더러 살펴보라는 시늉을 하였다. 남고 일행 역시 지선을 따라 그 취석 중간의 구멍을 살펴보았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곧바로 한 가닥 청량한 향기가 코를 찌르면서 머리가 환히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육지가 가리킨 구멍은 비교적 큰 편이었는데, 그 안에는 몇 무더기의 붉고 푸른 화초가 자라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기이한 향기에 만취했을 뿐, 그것이 무엇인지는 미처 알아낼 수 없었다. 지선이 육지에게 물었다. "이게 어떤 신초이기에 이 영취봉(靈翠峰)의 돌 속에서 자라고 있지? 두 달 전에 큰언니가 말했 어. 이 앞의 반석은 태사조(太師祖)께서 단약을 제련하던 곳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영취봉은 본래 부터 이곳에서 생겨난 영석(靈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며, 아래에는 필시 굉장한 보 물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더군. 여러 사람들이 이 영취봉을 옮기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았으 나 실패했지. 그로부터 시일이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 너는 일전에 어떻게 선초를 꺼내왔지?" 육지는 이 말을 듣자, 앙징맞게 작은 돌을 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손을 꼼지락거리더 니 연꽃처럼 생긴 비취 한 개를 끄집어내었다. 이 취옥연화(翠玉蓮花)가 바로 영취봉을 여는 열쇠 였던 것이다. 지선은 취옥연화를 육지한테서 받아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뒷면에는 몇 줄의 글귀가 붉은 전 서체(篆書體)로 적혀 있었는데 바로 아미교조 장미진인의 유시였다. 그 뜻을 자세히 풀어보니, 당 초 장미진인이 응벽십팔선경(凝碧十八仙景)을 만든 이후 전면의 옥대(玉臺)에서 두 개의 단로에다 단약을 연단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장미진인은 연단을 끝내고 승천하게 되면서 두 개의 단로 안에 있는 단약이 필요없게 되자 문하 제자들에게 전해주려 하였다. 그런데 제자들 하나하나를 전부 사랑하는 데다 그들의 도행(道行)이 깊고 낮음이 서로 제가끔인지라 연단의 진전(眞傳)을 얻게 되면 그들이 스승의 공을 탐내어 노력 하지 않고 얻으려 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본문을 크게 빛낼 때를 계산해 보고 <삼영(三英)>과 < 이운(二雲)>이 등장할 때를 기다려 세상에 나타나게 하였다. 그때는 바로 정사(正邪) 각파가 공전에 없는 커다란 겁란(劫亂)을 겪게 되는데 이때의 제자들은 모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는 데도 오로지 자기들의 뛰어난 근골(筋骨)만을 무기로 삼아 사마외 도(邪魔外道)들과 존망(存亡)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니, 그들이 받을 험난함과 고통은 전대제자들 의 백 배가 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영취봉 아래가 바로 아미산 전체의 맥이 되는 지점이었다. 그래서 장미진인은 두 개의 단로 에 담긴 단약을 그 아래에 묻고 백팔 일 동안 선법(仙法)을 사용해 다시 연단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자 단약은 천지의 영기를 받아 일종의 선초로 변했다. 그 선초의 이름을 <단주초(丹 珠草)>라 하는데, 푸른 줄기에 붉은 잎을 지녔다. 잎은 그 붉기가 마치 불꽃 같았고 줄기는 투명 한 벽옥(碧玉) 같았다. 한 개의 잎은 세 가닥으로 갈라진 모양인데, 가운데가 가장 뾰죽하고 길었 고, 하나의 붉은 열매가 맺혔다. 그것을 복용하면 비단 수명을 연장시킬 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 마외도의 도법(道法)에도 해독을 입지 않을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의 잎을 취해 조금만 복용하더라도 당장 기사회생의 효험이 있었다. 이 선초가 숙성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외인(外人)에게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성숙해(星宿海) 밑바 닥에서 만년 묵은 벽산호(碧珊瑚)로 이루어진 영취봉을 캐내어 바깥의 영부(靈符: 열쇠)로써 눌러 놓은 것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 선초는 천지의 영기를 받아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이 때를 맞춰 선초의 내 부를 보호하고 있는 영부는 물론 바깥의 영부도 자연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 선초는 모두 아홉 뿌리였고, 뿌리마다 음양의 각기 다른 두 잎이 있었다. 잎을 채취한 후에는 삼십육 년이 지나야 비로소 두 번째 열매를 맺는다. 이 안에는 오묘한 이치가 숨겨져 있어, 선연 (仙緣)이 닿지 않는 자는 함부로 취할 수 없었고, 취했다가는 필시 재앙을 입게 마련이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안배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지선은 마음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녀는 평소 신중하기 이를 데 없어서 어떠한 일에 도 경거망동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일행을 급히 돌아보며, 영경과 약란에게 이 사실을 알 리고 어찌할까를 상의해 보아야겠다고 말했다. 이윽고 태원동 앞에 이르른 지선은 남고 등 네 사람더러 잠시 그 근처에서 쉬고 있으라고 지시 하고는 혼자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기쁜 소식을 전했다. 영경은 취옥연화에 새겨진 장미진인의 유시를 보자마자 흥분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보통 사 안(事案)이 아닌지라 장교사존(掌敎師尊)에게 보고하여 그 지시에 따라야지 그 전에는 함부로 행 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약란의 통증은 비록 조금씩 가라앉았으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만일 영운일행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서 장교사존에게 보고하는 절차를 밟으려고 하다가는 약란의 목숨을 건질 기 회를 놓치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망설임 속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기만 하였다. 약란 또한 일이 너무나 중대한 데다가, 스승인 홍화모모를 수년간 따라다니며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을 몸소 체득한 터였다. 섣불리 행동하여 큰 죄를 입거나, 감히 조사의 유지를 위배 할 수는 없었다. 영경은 혼자 영취봉으로 달려가서 한참을 살펴보았다. 선초는 취석 구멍 안에 자라고 있었는데, 보이기는 하나 손이 닿지 않아 채취할 생각을 한다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동굴로 돌 아와서 지선과 약란과 의논을 하였다. 그러나 암만 머리를 짜내어도 영운일행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어 그저 한마디씩 건네보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선부(仙府)는 밤낮없이 밝았고, 새로 온 넷은 지선의 지시에 따라 생활규칙을 익혔다. 영경과 약 란은 이미 능히 벽곡(壁穀: 곡기를 끊음)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므로 먹고 안 먹고는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결정했다. 단지 지선만이 아직 완전히 익힌 음식을 금하지 못한 상태였다. 평시에는 원성이 일용할 쌀과 채소 따위를 깨끗이 씻어 응벽애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곳은 옛 날 백미선사(白嵋仙師)가 두 마리의 신조를 기를 때 곡식을 저장하던 석동이었다. 그러면 지선이 그 동굴에 가서 그 재료로 조리를 했다. 지선은 일이 없을 때면 선부의 각종 기화이초나 과일 등 을 따다가 술을 빚어 놓고는, 여러 동문형제들에게 즐거운 일이 생길 때면 앞에다 갖다놓고 한두 잔씩 마시게 하였다. 그 동굴은 본래 텅 빈 상태였으나, 지선이 여러 날 동안 치장을 해서 돌탁자, 석등, 화덕, 술독 및 일용품들로 제법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 모두는 그 동굴에다 선주(仙廚: 주방)라 이름을 붙였다. 새로 온 네 사람도 지선을 따라 선주에 와서 식사를 하곤 했다. 이날도 지선은 네 사람과 함께 영취봉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영경, 약란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 다. 마침 식사 때가 되었으므로 그녀는 네 사람의 식사를 돌보아주고 나서 약란의 방으로 되돌아 왔다. 지선은 남고의 총명한 자질에 대해서 입의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영경은 평소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는 성품인 데다, 또한 요 며칠간 계속해서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새로 온 네 사람 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음을 상기했다. 그래서 그녀는 지선을 시켜 남고를 불러오도 록 해서 약란과 함께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참 지나자 남고가 약간 졸음이 오는 기색을 보였으므로, 영경은 자기와 지선이 용공(用功)할 시간이 되었음을 상기했다. 돌침상이 매우 큰 데다 석실은 봄날씨같이 따뜻했기 때문에, 영경은 남고더러 약란의 침상에서 한참 눈을 붙여도 괜찮다고 전했다. 지선 역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고는 영경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남고는 영경이 솔직담백하면서도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는 줄을 알고는 그녀에게 함빡 마음이 쏠 렸다. 침상에 누운 남고는 영경과 약란과 지선이 차례로 입정(入定)에 드는 것을 보며 눈을 깜박 깜박하다가 어느 새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꿈결에 갑자기 영경과 지선의 다급한 말소리가 들려서 남고는 깜짝 놀 라 깨어났다. 그녀가 잠이 깬 것을 영경이 먼저 보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 "당신 동생과 양성지가 사고를 쳤어요!" "아니! 뭐라고요?" 남고는 소소라치듯 놀랐다. 그러나 영경은 그녀에게서 얼굴을 돌려 지선을 보고 말했다. "그 양가란 작자가 그때 육지를 붙잡으려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웬지 모르지만 그가 꼭 무슨 일 을 저지를 것만 같더니, 결국 이처럼 사고를 일으켰지 뭐야. 지금 그들 두 사람은 길흉을 점치기 어렵게 되었지만 자업자득의 업보를 받은 것이니 할 수 없지 뭐. 장교사존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그 선초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필시 재앙이 따를 것이라고 태사조께서 취옥연화 위에다 분명히 유시를 남겨놓았는 데도 그런 짓을 하다니, 우리도 감히 경거망동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판인데,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간덩이가 부었을까? 큰언니도 없을 때 선초가 훼손되었다가는 장교사존께 서 크게 죄를 물으실 텐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약란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일은 결코 호아를 탓할 게 아니야. 그는 아직 나이도 어린데 무얼 알겠어? 틀 림없이 양성지의 잘못이야. 그러나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 육지가 어디로 갔는지 행방 불명이라는 사실이야. 만일 함께 곤경에 처해 해를 입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야!" 남고가 가만히 그들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건데, 호아가 양성지의 꾀임에 넘어가 영취봉에서 크 게 일을 저질렀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호아의 생사 역시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했으나 세 사람이 모두 분노와 수심을 띠고 있어서 감히 입을 열어 물어볼 수 없었다. 남고는 슬픔과 걱정 때문에 눈물이 철철 흐르는 눈으로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 약란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연민이 솟구쳐 올라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 그 일은 그 일이고 너는 너니까 우리는 결코 너를 탓할 마음은 없어. 네 동생은 오늘 아침 아마 양성지의 꼬임에 넘어가 선초를 훔치러 갔나 봐. 그런데 어떻게 영취 봉 안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어. 지금 단대 부근은 온통 구름과 안개가 뒤덮였는데, 그 두 사람은 필시 안에서 곤란을 겪고 있을 거야. 조금 전에 나는 아픔을 무릅쓰고 단대에 도착해 배운 실력 을 다해 노력했으나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어. 큰언니가 돌아올 때를 기다려 해결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도 남고는 참지 못하고 어떻게 된 사건인지 캐물었다. 약란이 설명한 대강은 이런 것이었다. 어제 지선이 단주초를 발견하고도 장미진인의 유시 때문에 모두들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 을 보고 양성지는 몰래 생각했다. '육지의 피를 먹을 수만 있다면 간단히 득도를 하고 수명을 늘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곳 사 람들 모두가 그것을 몹시 아끼니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있어야지. 만약 건드렸다가 발각되는 날에 는 필시 살아 남지 못할 거야. 그런데 그놈의 선초가 또 사람 애간장을 녹이는군. 그게 그처럼 굉 장한 효험이 있어도 지금 청라(靑螺)에 가 있는 사람들이 돌아와 장교사존에게 품명한 뒤에 어찌 내 몫이 돌아오겠어? 그러니 차라리 지금의 기회를 틈타 잎사귀 몇 잎이라도 씹어먹어야겠어. 그 러면 장생불사(長生不死)의 경지에 도달하게 될 터이니 이 얼마나 근사한 일이냐구.' 그런데 그런 일을 꾸미려면 필경 협력자가 필요했다. 우건은 오래도록 함께 지내온 사이지만 그의 평소 성품과 언행을 보건대, 결코 이 같은 위험한 일에 자기를 돕겠다고 나설 위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양성지는 호아를 주목했다. 이 며칠 동안 그는 호아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남고가 지선에게서 들은 이 산의 제반상 황을 알아내려는 생각으로 호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호아 가 자기 누나인 남고의 충고를 새겨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성지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 지는 못하고 그럴 듯한 거짓말을 지어내었다. "고금을 통틀어 신선이 되고 도를 이룬 사람은 모두 선연(仙緣)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가령 사부 가 영약이나 선초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가 미처 복용하지 못하고 제자에게 그 기회를 뺏겨버리 면 제자가 그 자리에서 즉시 신선이 되고 사부는 승천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나 봐. 그건 제자를 나무랄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에게 선연이 없었기 때문이야. 지금 저 여자들이 선초 를 발견하고도 그걸 꺼내어 먹지 않는 것은, 자기네들한텐 선연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기회 를 주려는 것이야. 그러니까 호아 네가 나를 도와주기만 하면 우리가 먼저 훔쳐내 먹을 수 있어." 호아는 본시 총명한 데다 누이의 말을 명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양성지의 계획은 그를 이용하여 위험을 먼저 겪게 한 뒤 자신도 안전한 단계에 가서 선초를 취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아가 동행을 거절하자, 일의 성취여부는 고사하고, 이녀석이 제 누 나한테 일러바치면 큰일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되었다가는 낭패다. 양성지는 시치미를 떼고 호아에게 말했다. "너는 정말 멍청하구나! 생각해 봐! 그 영취봉의 구멍이 너도 뚫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선초는 그 안에 있는데 어떻게 꺼낼 수 있겠어? 내가 너더러 같이 가자고 하는 까닭은 신선고(申 仙姑)가 네 근골이 훌륭하다고 했기 때문이야. 그 취옥연화 뒷면에 인연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취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쓰여져 있지 않았어. 인연이 없는 사람이 취할 수가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 면 인연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냐구. 우리에게 인연이 없다면 그곳에 가 보았자 그저 구멍 앞에서 눈요기나 하고 향기나 맡다가 돌아와야겠지. 그러나 만일 인연이 있다 면 반드시 무슨 방법이 떠올라 줄 것이니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어. 만일 인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계속해 서 한걸음 한걸음 천신만고를 겪어야만 비로소 득도할 수 있을 거야. 그걸 어찌 선초를 복용하여 즉시 신선이 되는 것과 비교하겠니? 게다가 지금 그 안에 정확히 몇 포기의 선초가 있고, 이파리 가 몇 잎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훔쳐서 뱃속에 집어넣는다고 누 가 알아차리겠어? 나중에 그들이 몇 포기 모자라는 것을 안다 해도 육지가 몇 차례나 따먹은 적 이 있기 때문에 그놈의 짓이라 생각하지, 결코 우리에게까지 의심이 돌아오지는 않을 거야. 내가 지금 너더러 같이 가자는 것은 몇 가지 시도를 해봄으로 우리의 선연이 어떠한가를 알아보자는 뜻이니 결코 강요하지는 않겠다. 이루어진다면 기뻐할 일이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무슨 상관 이냐. 그래도 가볼 생각이 없니?" 그리고 나서도 양성지는 도를 쌓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장황히 떠벌리고, 그렇지만 도를 닦기 전에 영단이나 선초를 얻는다면 즉시 신선이 되어 허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다는 등 온갖 말을 보태어 호아를 설득했다. 호아는 의지가 굳고, 마음이 무거웠으나, 양성지의 몇 차례 유혹과 억지를 견디지 못하고 비록 반신반의하면서도 마침내 승낙하고 말았다. 겨우 한고비를 넘었다 싶자 양성지는 이젠 어떻게 손을 쓸 것인가를 궁리했다. 그는 동굴이 그 렇게 작은 데도 육지가 안으로 들어가 선초를 채취하는 것으로 미루어 달리 입구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육지가 평시에 어디에서 거취하는지는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육지의 뒤를 몰래 쫓아보 리라 작정했다. 청라에서 돌아온 제영운일행을 초조히 기다리며 영경과 지선이 약란의 간호에 여념이 없는 이틀 동안 양성지는 일부러 우건에게 횡설수설하면서 그에게서 벗어나 짐짓 태원동 부근을 구경하는 척했다. 호아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거닐다가 우건의 시선이 못 미치는 곳까지 다다르자, 즉시 호 아와 함께 방향을 바꾸어 먼저 선음(仙音)의 단대 부근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단대에 도착했을 때, 영취봉 앞에서 육지가 홀로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까지 접근했을 때는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영취봉에는 또다른 입구가 있어.' 양성지는 심증을 더욱 굳혔다. 그는 육지가 무척 영특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놀라게 할까 두려워 손을 쓸 수 없었다. 호아와 눈을 돌려 이리저리 살피다가, 짐짓 아무 일도 없는 척 영취봉 앞을 지나처 단대로 다시 돌아와 영취봉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을 택해 숨었다. 호아가 몇 차례 입을 열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양성지에게 제지당했다. 그런 상태로 눈만을 열심히 굴리어 봉우리 전면을 뚫어져라 살피면서 육지가 어디로부터 나타나는가를 직시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조금 있으면 휴식시간이라, 지선이나 남고가 그 들을 찾으러 올 것이므로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에 일찍 나오는 편이 낫겠구나 싶었다. 그들이 막 단대를 내려와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홀연 영취봉 근처에서 '끽끽!' 하고 아주 작 은 소리가 들려왔다. 양성지는 본래 오관(五官)이 뛰어난지라, 걸음을 멈추고 신경을 집중하며 급 히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영취봉 동북쪽 아래의 취석이 아주 경미하 나마 움찔거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속으로는 그곳에다 전신경을 쏟으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아 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는 척했다. 어디에서 소리가 나느냐고 호아가 물어왔다. 양성지는 고의로 대범하게 대답했다. "아마 육지란 놈이 나오는 소리겠지. 우리는 그녀석이 놀라지 않도록 빨리 돌아가자꾸나." 그리고는 호아를 붙들고 뛰어갔다. 태원동의 거실로 돌아와 보니 우건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선이 가르쳐 준 아미의 초보적인 입문(入門)공부를 익히고 있었다. 양성지는 냉소를 지으며 그를 본체만체했다. 잠시 후 우건은 몸을 추스리며 걸상에서 내려와 호흡을 조절했다. 그리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는데, 아까 양성지가 자기를 따돌린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투였 다. 양성지는 시무룩한 얼굴로 듣는둥만둥이었다. 그렇지만 천진한 호아는 아무 거리낌 없이 웃으 며 우건과 어울렸다. 우건이 호아에게 물었다. "아까 양형과 어디 갔었니? 혹시 가서는 안 될 곳에 간 것은 이니겠지?" 호아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자, 돌연 양성지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곳 규율이 얼마나 엄한데 우리가 감히 멋대로 돌아다녀. 단지 선뢰정에 올라가 폭포를 구경 했을 뿐이야." 우건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이 거짓말' 하고 웃었다. 양성지와 호아가 자기에게서 멀어져 갈 때 그는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길을 바꾸어 수운동 계곡 쪽으로 가는 것을 똑똑히 보 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캐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만 해도 우건은 두 사람에게 달리 무슨 꿍꿍잇속이 있는 줄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 사람은 비록 동료로서 함께 생활했으나 생각은 이처럼 제각각이었다. 양성지는 돌침상 위에 눕고 나서도 내심 내일 아침 어떻게 손을 쓸 것인가 하는 궁리에만 사로 잡혀 있었다. 그러니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일 아침 축시(丑時) 말에서 인시(寅時) 초에는 아무도 바깥에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건이 깊은 잠 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는 때맞추어 조심스럽게 호아를 깨워 함께 살금살금 동굴을 빠져나왔다. 일이 될려고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나 우연이 그들을 도왔다. 원성이 지금까지처럼 줄곧 태원동 입구에서 노숙하며 경계를 했더라면 그의 신통한 능력으로 보 아 어느 누구의 일거일동이라도 단번에 포착했을 것이다. 또 신조가 있었더라면 섬전보다도 빠른 눈빛과 날카롭기 그지없는 발톱에 두 사람은 산산조각으로 찢기지나 않을까 걱정했어야 할 판이 다. 그러나 이 두 짐승이 며칠 동안은 주인의 명령으로 후동(後洞)을 지키느라고 그들 중 어느 하 나도 동굴 앞쪽은 경계하지 않았다. 양성지는 호아를 데리고 귀신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하며 동굴을 빠져나왔다. 몰래 육지의 동 정을 살펴본 후이므로, 선음판에 이르러서는 발걸음을 조심했다. 호아로 하여금 선음판 죽림 바깥 을 따라, 영취봉 앞 동북쪽으로 가서 그 아래에 잠복해 있으라고 지시한 다음, 자신은 조심조심 사방을 주의하며 똑바른 길을 따라 걸어갔다. 살금살금 단대 위로 올라 살펴보니 육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호아를 보니 이미 봉우리 앞 조용한 곳에 몸을 숨기 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주시하며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육지가 나타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 다. 실망과 지루함으로 몸이 움찔거릴 만할 때 갑자기 코끝으로 한 줄기 청량한 향기가 스며들었 다. 정신을 바짝차려 주위를 살펴보니 단대의 측면 벽에 붉은 등나무 줄기가 어지럽게 뻗어 있고 어 제 보았던 취실이 십여 개 달려 있었다. 무척이나 큰 취실이었다. 그것을 보자 양성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양성지는 조심스럽게 단대를 내려갔다. 취실을 전부 따서는 손에 넣은 뒤 두 개는 먼저 먹어치우고, 나머지는 품속에 간직했다. 그리고는 막 다시 단대 위로 올라가려 할때 홀연 길섶의 풀더미가 스르륵 움직이는 듯싶더니, 하얀 물체가 하나 나타났다.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니 바로 육지가 아닌가! 육지는 마치 개구장이 아이처럼 수운계곡 근처에서 뛰어나오며 깡총깡총 단대쪽으로 다가왔다. 몇 발짝 걸어오다가 말고 육지는 머리를 숙여 땅 위를 살펴보는데 제딴엔 무엇인가 심상찮은 낌 새를 발견한 듯한 거동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폴짝폴짝 뛰며 앞으로 나아갔다. 양성지는 또 그가 놀라 달아날까 봐 숨소리도 감히 내지 못했다. 잠시 후, 육지는 단대 위로 올라와 창공을 바라보며 두어 마디 소리를 질렀다. 소리는 비록 크지 않았으나 그 음향은 맑기가 그지없어, 듣는 이의 귀를 아주 즐겁게 했다. 그런 뒤 동쪽을 향해 절 을 한 번 하고는 일어나서 하늘을 향해 백기(白氣)를 토해냈다. 그것은 마치 수십 가닥 실처럼 허 공에 어지럽게 날렸다. 그러더니 육지는 잠시 후 다시 그것을 흡입했다. 대략 반 시진 가량 이처럼 토해냈다 빨아들였다 하더니, 갑자기 단대를 폴짝 뛰어내려 영취봉 앞으로 뛰어갔다. 봉우리 동북쪽 아래에 이른 육지는 마치 근처에 누군가 매복해 있다는 것을 알 아차린 듯이, 쉴새없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찾기 시작했다. 양성지는 벌써부터 최대한으로 조심하며 더욱 숨소리를 낮추었다. 육지가 이곳으로 옮겨온 후 날마다 여러 선협들의 애호하에 비록 조심성을 얼마간 잊었다 하나 이목은 여전히 영민했다. 그는 봉우리 앞으로 다가갔다가 사람의 냄새를 맡고는 크게 놀라 즉시 찾아나선 것이다. 마침내 육지는 매복해 있는 호아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갹!' 하고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뛰어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보니 전에 보았던 그 악당이 두 손을 벌리고 자기를 잡으려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영취봉 부근은 일찍이 장미진인이 부적을 사용해 제련하던 곳이라 다른 곳과는 달라서, 아무리 육지라 해도 굴 속으로 제멋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급한 김에 몸을 날려 봉우리 동 북편의 약 반 자 정도 되는 취석을 들추고 그 속으로 숨어버렸다. 멋도 모르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아는 육지가 몸을 숨기려 하자 재빨리 그 하얗고 여린 다 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리고는 무작정 끌어내려고 잡아당겼다. 육지는 이미 지독한 독수(毒手) 에 빠졌음을 알자, 입을 크게 벌려 한 줄기의 백기를 뿜어내어 호아의 얼굴을 때렸다. 그것은 칼 에 베인 것과 마찬가지로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어서 호아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양사형! 육지란 놈이 지독한 수법을 썼어! 빨리 와서 도와줘.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단 말야." 양성지가 급히 소리쳤다. "호아, 절대로 손을 놔서는 안 돼!" 이렇게 소리치며 한달음에 달려간 양성지는 타래실을 꺼내어 지선을 꽁꽁 묶어버렸다. 그리고는 을러대었다. "네가 다시 기(氣)를 토해내거나 도망치려고 한다면 그 즉시 내가 너를 먹어치우고 말 테다." 육지는 커다란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되는지 '갹갹!' 하고 울었다. 앞뒤 생각없이 육지를 붙들기는 했으나 막상 이 지경이 되자, 호아는 문득 누나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게다가 육지가 쉴새없이 애처롭게 울부짖는 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걱정이 되었고 여린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양성지에게 부탁했다. "양사형! 이제 이미 영취봉의 입구를 알았으니 이녀석을 놓아주도록 해." 그러나 양성지는 눈을 크게 부라리면서 쏘아붙였다. "무슨 소리야. 얼마나 어렵게 이놈을 손에 넣었는데 놓아줘? 네까짓녀석이 뭘 안다고 그래!" 양성지는 무지막지한 손아귀로 육지를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호주머니에서 취실을 꺼내보이며 말했다. "우리에게 그 선초를 어떻게 채취하는지만 가르쳐 주면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선 과를 먹여주마." 육지는 핍박에 못 이겨 조금 전에 도망해 들어갔던 구멍을 가리켰다. 양성지가 보니 그 구멍은 몸이 작은 호아라면 족히 출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까지도 억지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도 있겠다 싶어 그만 득의의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 저 구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선초를 취할 수 있단 말이지?" 육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한편, 눈을 돌려 호아를 바라보았다. 구원을 바라 는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호아는 그 모습을 보자 육지가 몹시 가련하게 여겨져 양성지에게 다시 부탁했다. "우리가 원래 육지한테서 바란 것은 선초를 취할 수 있는 동굴만 알아보려는 것뿐이었잖아. 이 제 알 것을 알아냈고 육지는 말도 할 줄 모르니 가엾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양성지는 들은 척도 않고 육지에게 말했다. "도를 닦는 사람이 너를 만나는 것이 선연이라고 하는 말을 진작부터 들었었다. 네가 비록 네 피를 금쪽같이 아낀다 하나, 오늘 기꺼이 나한테 선연을 내려 이왕 내 손에 붙들렸으니 너를 살 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리고는 입을 크게 벌려 육지의 팔뚝을 깨물려 하였다. 혼비백산한 육지는 양성지의 수중에서 벗어나려고 죽을 둥 살둥 몸부림을 쳤다. 호아는 비로소 양성지에게 속아도 단단히 속은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에게 좋은 말로 타이른다고 될 일인가. 그는 즉시 몸을 일으키자마자 험악한 얼굴로 냉불방(冷不防)의 수법 을 써서 양성지의 얼굴을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손을 뻗쳐 재빨리 육지를 나꿔채가지고는 냅다 던져버렸다. 육지는 본시 영물인지라,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호아의 내던지는 힘을 빌어 멀찌감치 십 여 장 밖으로 벗어났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나, 한 바퀴 뒹구는 사이에 묶인 것을 말끔히 풀 어버린 육지는 '갹갹!' 하고 소리를 지르며 번개같이 달아나 버렸다. 양성지는 호아의 냉불방 일권을 맞자 이에 맞서 상대방의 태양(太陽), 금성(金星) 두 혈(穴)을 공 격했다. 호아는 그가 육지를 뒤쫓을까 두려워서 여유를 주지 않고 맞받아쳤고, 그래서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에게 얻어맞고 땅에 뒹굴었다. 그렇게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육지가 그림자 도 없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호아는 손을 멈추었다. 양성지는 호아를 떨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호아가 이처럼 천생(天生)의 신력(神力)을 지니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육지의 피를 먹기도 전에 이 같은 암격을 당했으니, 호아에 대한 한 이 골수에 사무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위인됨이 간교했으므로, 지금 만일 진짜로 안면을 바 꾸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고 자신의 처지만 더 난처해질 것을 알았다. 가슴 속에는 또다른 간계(奸計)가 떠올랐으나 짐짓 너그러운 표정을 지은 채 웃으며 호아에게 말했다. "호사제, 이게 무슨 꼴이야. 내가 설마 육지를 죽게 하겠어? 그게 아니라고. 그 굴 입구가 너무 작아서 속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지 못하므로 녀석을 좀 핍박해서 사정을 알아보려고 했을 따 름이야. 네가 때려서 내 꼴이 어떻게 됐는지 좀 봐! 이제는 육지가 도망쳐 버렸으니 달리 방법도 없고, 그냥 구멍으로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지 뭐. 만일 그 선초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우리 두 사람은 복이 없고 운명이 천박한 것을 탓할 도리밖에. 이왕지사 일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대책 을 강구해야지. 육지 그녀석이 비록 말은 하지 못해 떠벌이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사람을 끌고 올 것은 당연하잖아? 손을 쓰지 않고 머뭇거릴 때가 아니지 않느냐고." 호아는 역시 어린아이였다. 양성지가 자기에게 얻어맞아 코가 퍼렇게 멍이 들었고 얼굴이 퉁퉁 부었는 데도, 부드러운 말씨로 이야기하자 자기가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사형이 나를 탓하지 않는다면 내가 잘못 사형의 뜻을 오해한 것 같군. 어린 탓이니까 이해해 줘. 그리고 선초를 훔치는 일에 대해서는 어제 이미 약속을 했으므로 마땅히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고, 화가 있으면 함께 당해야겠지 뭐. 육지만 다치게 하지 않는다면 사형이 하라는 대로 따를 게." 양성지는 입구를 살펴보더니 호아더러 먼저 들어가서 그 안의 허실을 살펴보라고 했다. 호아는 그의 뜻에 따라 동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눈앞은 온통 칠흑같은 어둠인데, 그 속에 붉고 푸른 광채가 어지럽게 왔다갔다하고 있었으며, 콧속으로는 기이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그런데도 손을 더듬어보면 하나같이 허공이었다. 더럭 겁이 나서 감히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 나가야겠다고 양성지에게 말했다. 양성지는 가만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육지란 놈이 영경 그 계집년에게 이 사고를 알릴 것이 분명한 이상 여기서 지체하다가는 큰일 이다. 그러니까 기왕지사 직접 동굴로 들어가서 부딪쳐 봐야겠구나.' 이처럼 생각한 양성지는 굴 속으로 뱀처럼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호아가 먼저 선초를 손에 넣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호아더러 자기 뒤를 따라오며 살펴보라고 했다. 마음이 급한 양성지는 앞장서 열심히 손발을 놀려 어느덧 서남쪽에 도달했다. 호아는 그의 뒤를 따르며 손으로 어지럽게 난무하는 홍록색의 광채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통수를 작은 진흙덩이 하나가 날아와 딱! 때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 니, 육지가 동굴 입구에 서서 손을 흔들어 자기를 부르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양성지를 소리쳐 부르려 할때 육지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호아의 마음 속에 짚히는 것이 있었다. '양성지에게는 아마 선연이 없는 모양이다.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려고 나한테 선초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려는 것인가?' 그 사이에도 육지는 어서 빠져나오라고 그에게 손짓을 하는 한편 호아가 있는 곳에서 북쪽편을 가리켰다. '아하! 선초가 있는 곳은 저기란 뜻이구나.' 호아는 이렇게 생각하자 육지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막 그곳에 도착하자 또다시 육지의 '갹갹!' 하는 다급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까 육지 는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동굴 입구에서 얼씬거리더니 곧 자취를 감춰버렸다. 호아가 미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양성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호 아가 소리나는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리자 한 줄기 금빛이 번쩍하면서, 동굴 가득히 오색의 안개 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금빛 사이로 미친 사람마냥 손과 발을 어지럽게 허우적거리는 양성 지의 모습이 보였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안개 속으로 사라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호아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뜨거운 가슴을 가졌다. 담대하여 위험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앞 으로 나가서 살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몸이 안개에 둘러싸이며, 눈앞에 온갖 것이 어 지럽게 왔다갔다하여 도무지 동서남북을 가릴 수가 없었다. 두어 번 큰소리로 '양사형!' 하고 불 러보았으나 메아리쳐 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런 중에도 안개는 점점 짙어저 마침내 호아를 완전히 에워싸버렸다. 기이한 냉기가 벽를 뚫고 들어오면서, 오관(五官)과 사지가 완전히 마비되었다. 호아는 머리가 어찔해지면서 곧장 쓰러져 버렸다 우건은 본래 잠귀가 밝은 편이었다. 낮에 양성지와 조금 다투기도 한 데다 밤에는 또 그한테 핀 잔을 받았으므로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자기는 어려서 고아가 되는 고통스러운 운명을 타고 났고, 어쩌다 능진인(凌眞人)의 온정을 입어 잠시 이와 같은 동천복지에 머물러 있을 뿐이지, 결코 정식 스승으로 모신 입장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의 선협들은 거의 전부 여자인지라 반드시 자기를 제자로 거두어준다고 믿 기도 어려운 실정이니 생각할수록 앞길이 막막하고 온갖 역경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런데 양성지란 자는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인가. 아직까지는 환란 중에 만난 생사지교(生死之 交)로 굳게 믿었기에 그의 위인됨이 그처럼 비겁하리라고는 추호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본 양성지는 완전히 양의 탈을 쓴 이리요, 여우가 아닌가. 만일 자기도 같은 동아리로 인식되다가 는 필경 여러 선협들의 눈 밖에 날 것이다. 이래저래 모든 일이 자꾸만 더 어렵게 꼬이는 것 같고 온갖 근심이 머리를 어지럽혀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한참 뒤에 다시 생각해 보니 무릇 모든 일이란 필시 운명에 따르는 법, 이미 선부에 들어온 몸이고 보면 이것 또한 결코 우연만은 아닐 터이니, 다른 사람이 어떻던 간에 상관할 바가 아니잖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스스로 모든 일에 성의성심을 기울이고, 수양을 닦는데 노력하며,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극복해 나가다보면, 하늘도 무심치 않아 종내에는 무슨 성취를 이룰 수 있을 테지. 그까짓 하찮은 일 따위를 무에 걱정하랴.' 우건은 비로소 마음을 진정시키고 곧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다 그는 꿈결에 무슨 발자국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살짝 눈을 뜨고 살펴보니, 양성지가 호 아를 데리고 살금살금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즉시 그는 그들 두 사람이 자기를 따돌 리고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그도 짐짓 모른 체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나간 후 생각하니까 비로소 양 성지가 평소에는 자기와 감정이 좋았었고 생사의 교류를 맺은 적이 있음이 상기되었다. '어제 별것도 아닌 일로 조금 얼굴을 붉혔다고 해서, 그래서 피차 화기를 상해 함께 있고 싶지 않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호아란 녀석도 그렇지, 나랑 비록 별달리 특별한 정 이 든 것은 아니더라도 그동안 많은 일들을 함께 겪었거늘.' 우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남고가 구선고에게 들었다며 전해 준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이곳은 비단 동천복지일 뿐 아니라, 도처에 온갖 기화이초와 선약선과((仙藥仙果)가 자라고 있으며, 여러 선협들도 바로 이곳 에 오래도록 거처했다고 하나 장교사존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 었다. 몇 가지 특별한 과일은 따먹어도 좋으나 이름 모를 수많은 선초들은 누구도 감히 함부로 손대서 는 안 되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늘이 내린 보배를 훼손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 온 네 사람에게도 재삼재사 당부했고, 마음대로 감상하는 것은 괜찮지만 절대로 함부로 꺾 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혹시 저 두 사람이 선초나 선약을 발견하고는 욕심이 나서 나를 따돌리고 몰래 훔쳐먹으려는 것이 아닐까? 저 두 사람에게 기우(奇遇)가 있다 한들 나 자신은 결코 시기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저들의 이 같은 행위는 절도나 마찬가지다. 이, 신 두 선고에게 알려진다면 가볍게 용서받을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들이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다. 역시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살며시 일어나 두 사람을 찾아나섰다. 그렇지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행동해야 했다. 명을 받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 것이 발각되면 무어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두 사람의 사고를 막아 모두에게 재앙이 초래하지 않게 해야 했다. 즉시 태원동을 빠져나와 우건은 어제 그들 두 사람이 수운계곡 쪽에서 머뭇거리는 것을 보았기 에 곧장 그쪽으로 뒤쫓아갔다. 한참 심사숙고하는 동안에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들을 포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이었다. 이윽고 수운계곡에 도착하여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두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눈 돌리는 곳마다 선경(仙景)이 펼쳐져 있는 데다 지역 또한 광대하니 어찌 쉽게 찾아낸 단 말인가. 그는 높은 곳에 올라가 살펴보리라 생각했다. 몸을 날려 꼭대기로 올라와 보니 선음판 단대 부 근에 백운(白雲)이 층층이 엉키면서 오색 안개가 겹겹이 둘렸는데, 마치 백수십 장 정도의 둥근 오색 비단을 두른 듯한 광경이었다. 구름과 노을이 어지럽게 번쩍이며 서기(瑞氣)가 휘황찬란하게 솟아나는 것이 실로 하늘의 기경(奇景)이라 할 만했다. '이처럼 두꺼운 오색 채무(彩霧)라면 영취봉조차 완전히 가려버렸으리라. 설마 그들 두 사람이 저 오색 안개 속에 갇히지는 않았을 테지.' 어쨌든 평생에 한번 목도하기 어려운 기이한 장관이고 보니, 필시 무슨 보물이 있어 빛을 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였다. 오색 구름에서 십 장 정도까지 접근하자 상서로운 광채가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려 도저히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다시 몇 걸음 더 나아가니까 비단 금광과 오색 구름이 눈을 아프도록 찌르 는 것뿐 아니라, 특이한 냉기가 뼈를 뚫는 듯 온몸을 몰아쳐 왔다. 그래서 감히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즉시 물러났다. 그리고는 그들 두 사람이 저 안에 들어갔을 리는 만무하다고 확신했다. 채무 속의 일이 몹시 궁금하면서도 감히 더 이상 욕심부릴 수는 없으므로, 우건은 다시 높은 곳 을 찾아 되돌아갔다. 한참 걸어 비운동(飛雲洞)의 넓은 봉우리 밑을 지날 무렵, 그는 갑자기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 았을 때 구선고와 원성이 우연히 봉우리 위에서 후동(後洞)을 발견하여 각기 한 자루씩의 선검 (仙劍)을 얻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양성지의 눈은 탐욕에 빠진 듯 이글거리고 있었지. 혹시 그 역시 과분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이 봉우리의 암벽은 높이가 근 천 장에 달하고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데, 양성지는 어려 서부터 무공을 익혔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나, 호아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해. 게다가 신조와 원성이 동굴을 지키고 있으니 그들 두 사람의 짓거리를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신의 추측은 기우임에 틀림없었다. 이처럼 도처를 헤매며 한참이나 두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미 시간은 두 시진이 넘었고, 조금 있으면 지 선이 아침을 먹으라고 부르러 올 것이다. 우건은 마지막으로 고차봉(姑且峰) 한 곳만 더 찾아보리 라 작정했다. 그런데 그 암벽은 바라볼 때는 온갖 덩굴과 화초로 뒤덮여 쉽게 올라갈 수 있으리라 여겼으나, 막상 오르려고 하니까 발 밑이 마치 기름을 칠해 놓은 듯 미끄러워서 발을 디디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산중턱의 동굴까지 불과 십여 장을 남겨놓았을 때는 이미 힘이 다 빠지고 피곤해서 그들 두 사 람도 결코 이 위까지 올라올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내려가려고 하였다. 잠시 마음을 놓는 찰나, 갑자기 한 손이 허공을 짚으면서 그의 몸뚱이는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 다. 아찔한 순간, 비록 죽지는 않는다 해도 필시 크게 중상을 입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닥에서 이삼 장 높이까지 떨어져 내렸을 때, 행인지 불행인지 중턱의 돌출부에 허리 와 등이 부딪쳤다. 그 바람에 일단 추락의 기세를 완화한 우건은 통증을 참으면서 자세를 가누어 머리를 위로 다리를 아래로 한 채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이젠 두 발이 땅에 닿더라도 크게 상처를 입지는 않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그 경황에도 기뻐하 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두 발바박이 커다란 바위 위에 부딪치면서 굉장한 통증이 왔다. 그것은 둘레가 사오백 자 정도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바윗덩이였는데, 마치 공중에 떠 있기라도 한 듯 암벽 측면에 살짝 들어얹혀 있어서, 우건의 작은 무게에도 견디지 못하고 지반(地盤)에서 빠져나 와 '쿠릉릉!' 하는 굉음과 함께 굴러떨어진 것이다. 비뢰동의 혈투 天驚石破 寶劒龍飛 霧散煙消 淫娃鼠遁 우건은 깜짝 놀랐다. 두 다리의 고통을 감싸려고 팔을 내리는데, 웬지 아래가 허전하며 몸이 계 속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살펴보니, 방금 바위가 떨 어져내린 곳에는 하나의 구멍이 있었는데, 자신은 흡사 그 구멍 안에 서 있는 듯한 형세로 지면 과는 일 장 하고도 일고여덟 자 정도 떠 있었다. 구멍 아래의 암벽은 공중에서 약간 들어와 있었는데, 위는 볼록하고 아래는 움푹 들어간 모양이 었다. 구멍 입구에 서 있지 않으려면 뛰어내리는 방법뿐이다. 한 바퀴 몸을 뒤집는다 해도 크게 다칠 것이 뻔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궁리해도 별달리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므로 다시 고개를 숙여 살펴보니, 구멍은 사면이 모두 청석(靑石)으로 이루어져 깨끗하기가 옥과 같았다. 발을 딛고 선 곳도 흙이 아니고 하나의 청석판이었는데, 그 위에는 온통 과두문(科斗文)이 새겨져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청석 판을 자세히 살펴보니 한쪽으로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고, 그 속에는 하나의 고리가 달려 있었다. 우건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몸을 구부려 왼쪽의 고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나 고리는 전혀 꿈쩍도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잡아당기자 이번에는 별로 힘도 주지 않았는 데도 마치 스스 로 열리는 듯 열렸다. 그 안을 살펴보니 뜻밖에도 금사(金蛇)와 쥐들이 우글우글했다. 깜짝 놀란 우건은 급히 석판을 다시 닫아버렸다. 경황 중에 자칫 잘못했으면 발이 구멍 밖으로 빠져 밑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는 가만히 귀 를 기울여 보았다. 구멍 속에서는 '짱그랑!' 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마치 칼이 서로 부딪 치는 듯한 소리였다. 우건은 감히 다시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내려간단 말인가.' 막막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산허리께의 동굴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내 려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원성인지라, 우건은 목이 터져라 소리쳐 불렀다. "원성사형, 나를 좀 구해주시오!" 원성은 우건의 외침소리를 듣자, 급히 몸을 날려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구멍을 들여다 보더 니,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물었다. 우건은 차마 양성지와 호아를 의심해서 뒤쫓아 나왔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이 안 보이기에 찾으러 나섰다가, 암벽 위에서 굴러떨어지다가 이 구멍에 들어얹혀서는 내려갈 방법이 없이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원성은 귀를 기울여 구멍 속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어 전 방을 바라보더니, 얼굴에 깜짝 놀란 빛을 띠었다. 그리고는 얼른 우건을 안아들고 민첩하게 아래 로 내려갔다. "지금 단대 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군요. 당신은 여기서 저 위의 구멍을 살펴보고 있어 요. 나는 급히 보고드리러 가야겠으니까." 원성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급히 몸을 날려 사라지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지선이 그곳에 나타났다. 그녀는 우건을 보자마자 호아와 양성지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우건이 말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두 사람이 자리에 없더군요. 그래서 급히 찾으러 나섰으나 어디로 갔 는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군요." 지선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원성이 불쑥 끼어들어 얘기 했다. "구선고께서는 단대 영취봉에 보물이 출현한 것을 아십니까?" "뭐라고? 보물이?" 지선이 깜짝 놀라서 자초지종을 묻자, 원성이 말했다. "저도 지금 막 알았습니다. 일이 다급하게 되었으니 함께 주인님을 뵈러 가시죠. 가면서 말씀드 리겠습니다." 지선과 원성은 태원동으로 돌아갔다. 약란은 육지가 상처를 핥아준 뒤로 상처가 비록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으나, 통증은 그럭저럭 가 셔버렸다. 손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고 아무 감각이 없는 것 외에는 전혀 고통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랜 만에 평온을 되찾아 영경과 한가로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선 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총총히 뛰어 들어오고, 뒤에는 또 원성이 급한 걸음으로 따라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원성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는 평소에 응벽애 앞의 비폭동(飛瀑洞)이 선원(仙源)이며 이 산에 필시 수많은 기진이보(奇珍 異寶)가 숨겨져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선고께도 일찍이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그러 나 그 선원이 다른 곳으로 통해 있음을 알았으나, 정확하게 입구가 어딘지를 알아내지 못해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강우와 함께 후동을 지키다가, 비뢰동 이진인(李眞人)의 문 하인 석, 조 두 분 대선(大仙)을 만났지 뭡니까. 그분들은 신선고께서 조화애에서 부상을 입었다 는 말을 듣고는 저더러 그 근처를 돌아보고 와서 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동굴 측면의 바 위 위로 올라가 보니 단대 근처에서 선운(仙雲)이 크게 일어나 영취봉의 자취를 완전히 가렸더군 요. 생각컨대 이는 보물이 나타났거나 무슨 사고가 발생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주인님과 두 분 선고께서는 속히 가서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약란은 견식이 풍부한 데다가, 예전에 홍화모모가 응벽애에는 장미진인의 법보(法寶)가 무수히 숨겨져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 후에도 영운이 이러한 말을 하곤 했 던 것이다. 그 같은 법보들은 모두 선부(仙符) 신선의 부적에 의해 봉쇄되어 있으며, 교조(敎祖)의 법유(法諭)가 없이는 누구도 감히 함부로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러한 말을 뒤집어 해석하면 교조께서 멀지 않은 시기에 산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도 되었다. 어 쨌든 영운일행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법보가 아무 까닭없이 출현할 리가 없어 놀라움과 의아 함을 금치 못했다. 영경이 지선에게 물었다. "새로 온 사람들은 모두 방에 있겠지요?" "반 시진 전쯤에 식사하라고 그들을 부르러 갔었지. 남고는 며칠 동안 신경을 너무 쓰느라고 하 룻밤도 편히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했을 것 같아서 세 남자를 부르러 갔지. 그들을 먼저 깨운 뒤에 다시 남고를 부를 요량이었거든. 그런데 그들 세 사람 모두 방안에 없지 않겠어. 그래서 허 둥지둥 찾아나섰다가 우건 한 사람만 발견하여 즉시 돌아온 참이라구." 약란은 심중에 짚히는 바가 있어 급히 지선에게 다시 말했다. "언니는 어서 나가서 양성지, 장호아 두 사람은 찾아보세요. 찾거든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단단 히 닦아세우시고요." 그리고 이번에는 원성에게 말했다. "너는 다시 후동으로 돌아가서 그곳을 지키고 석, 조 두 분 도우께는 내 상처가 이미 거의 아물 었으니 두 분께 수고를 끼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라. 내일은 단오(端午)이니 청라에 갔던 여러 어른들께서 돌아오실 것이므로 그때 다시 그분들의 명을 받들 것이라고. 따라서 오늘은 일을 크 게 벌리지 않고 관망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리란 말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약란은 영경을 잡아끌고 도광(道光)을 빌어 단대로 날아갔다. 원성이 급히 소리쳤다. "주인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직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동굴을 벗어난 뒤였다. 뒤처진 지선은 사건의 중대함을 새삼 느끼고 급히 동굴을 나서서 양성지와 장호아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자 원성이 부리나케 쫓아나와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구선고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일이 또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저는 이곳의 많은 지역을 둘러보았기 때문에 사정에 밝습니다. 그런데 매일 새벽 무렵이면 반 드시 보광(寶光)이 솟구치는 곳이 있어서 항상 유의하고 있었지요. 아까 우건도우가 바위에서 뛰 어내리다가 무의식 중에 바위를 하나 떨어뜨리는 바람에 구멍이 하나 발견되었지요. 그 안에서는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나왔는데, 그 소리가 몹시 큰 것으로 미루어 필시 보물이 들어 있 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구멍 뚜껑에는 부적이 있어서 저는 감히 열어볼 수가 없었어요. 그 래서 막 돌아와 알려드리려던 차에 단대에서 선운이 크게 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건이 너무 나 다급한 것 같으므로, 저는 이렇게 달려와 그 일을 먼저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 인님과 신선고는 성미가 급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려나가 버리셨지 뭡니까. 저도 단대가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 주인님들이 다른 곳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 다. 그러나 구멍이 발견되고, 보물이 그 안에서 소리를 내는데, 만일 무슨 사고가 발생한다면 제 가 알고도 말씀드리지 않았다고 책망을 듣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니까 새로 온 네 사람 중에 양 씨성을 가진 분이 제일 사악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건도우께서 일행을 찾다가 못 찾았다고 하 는데, 만일 그들이 사고를 일으켰다면 지금으로서는 구할 도리가 없는 일이지요. 저는 후동으로 가서 그곳을 지킬 테니까 선고께서는 꼭 그 구멍 앞으로 가셔서 지키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주인님과 신선고께서 돌아오시면 그때 다시 상의하는 것이 상책일 듯싶군요." 지선은 큰일 하나가 채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또 일이 생기자 막막해졌다. 그러나 새로 온 사람들이 평소에 매우 공손하고 신중한 처신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시끄러운 일은 벌리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녀가 암벽 앞으로 돌아가니 우건은 혼자 두 눈을 암벽의 구멍에 고정시킨 채 극도의 긴장감에 굳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지선이 오는 것을 보자 급히 달려와 말했다. "선고님, 원성사형! 얼른 가서 저 위의 구멍을 좀 살펴보세요." 왜 그러느냐고 지선이 묻자 우건이 대답했다. "두 분이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지요. 저는 이 밑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 쌔액!' 하는 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그래서 쳐다보니까 구멍 속에서 한 줄기 검은 빛과 함께 무지 개 같은 현란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빛은 섬전같이 빨랐으며 광채는 눈을 어지럽게 하 더군요. 그와 동시에 사람을 얼려죽일 듯한 냉기가 확 끼치며 한 덩이가 하늘로 날아가 버렸습니 다." 지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녀는 원성과 함께 보검을 뽑아들고 급히 봉우리 위로 올라 갔다. 구멍 앞에 도착해서 살펴보니 문양은 그대로고 두 쪽의 문도 여전히 단단하게 잠겨 있는 상태였다. 원성이 귀를 귀울여 들어보니, 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마치 용이 울부짖고 호랑이가 표효하 는 듯, 혹은 신선이 음악을 연주하는 듯했다. 단지 그 소리가 아까에 비해 훨씬 작아진 것만이 달 랐다. 우건이 이미 한 줄기 광채가 하늘로 날아갔다고 했으므로 그녀가 감히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선이 다시 우건에게 물었다. "이 구멍은 어떻게 해서 발견하게 되었지?" 그래서 우건은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돌려 단대 근처를 바라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층층이 둘러싼 선운과 피어오르는 오색 안개뿐, 영경과 약란 두 사람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원성에게 물어보고서 그녀는 그 안개구름이 전보다 더욱 짙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성은 자기가 맡은 후동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급히 돌아가 버렸다. 지선은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구멍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점차 구멍 안에서 들려 나오는 소리가 작아지더니 마침내 잠잠해지고 말았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저 멀리서 영경과 약란이 태원동 쪽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선 은 급히 두 사람을 소리쳐 불러 이 구멍을 발견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리고는 영취봉의 일 이 어찌 되었는지 자세히 묻지도 않은 채 급히 양성지와 호아를 찾아나서려고 했다. 그러자 영경이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그 두 멍청이 같은 녀석들은 아마 영취봉에서 죽었을 것이니 찾아나설 필요없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지선이 깜짝 놀라서 어찌 된 일인지 묻자 악란이 끼어들었다. "나는 보물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한 가지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쪽에서 또 일이 터 지는 꼴이군요. 하필이면 큰언니가 돌아오시기 바로 전날 이런 일이 동시에 발생하다니... 지금 한 가롭게 얘기나 나누고 있을 여가가 없으니 먼저 저 구멍부터 뜯어 막읍시다." 약란은 입으로 중얼중얼 진언(眞言)을 외면서 부적으로 구멍을 막아놓았다. 그녀가 이처럼 법술 (法術)을 시전하고 나자, 구멍에서는 갑자기 구름 같은 뿌연 김이 피어올랐다. 약란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 이곳은 아무 걱정없어.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여기엔 필시 선검(仙劍)을 비롯 해 적지 않은 법보들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너무 늦었나 봐. 조금 전 에 날아가 버렸다는 그 광채는 어떤 법보였을까? 큰언니랑 여러 동문들의 출타중에 계속해서 사 건이 터지니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이제 내려가서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지요." 약란은 이번엔 우건을 몰아세웠다. 그래서 우건은 감히 숨길 수가 없어 양성지와 호아의 의심스 러운 행동을 낱낱이 고해바쳤다. 세 여자는 구멍이 드러난 것이 우건의 고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고는 결코 그를 탓하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는 모든 일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라 부탁하고 동굴로 돌아갈 것을 일렀 다. 지선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호아는 어떻게 변을 당했지? 죽어버렸다는 게 사실이야?" 그러자 약란이 말했다. "단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 선운이 결코 우연히 발견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됐어요. 그것은 바 로 조사(祖師)께서 설치해 놓으신 선진(仙陳: 신선의 진법)이거든. 그것은 사심을 품은 사람이 들 어서지 않으면 결코 발동되지 않아요. 영취봉이 날아가 버렸음을 안 나는 역량은 부족하나 생문 (生門)으로 들어가서 법보가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려 했지요. 그런데 조사님의 선법(仙法)이 그처 럼 무궁한 묘용(妙用)이 있는 줄 누가 알았겠어요? 당초 우연히 우리 돌아가신 은사께서 조사님 과 복선담(福仙潭)에서 선법을 겨루었던 얘기를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큰일날 뻔 했지 뭐예요. 그때 은사께서는 신외지물(身外之物)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더군요. 그때는 은사의 말씀을 아무 생각없이 들었는데, 아까 내려오다가 나도 똑같은 경우에 직면하고 말았지요. 할수없이 나도 호신, 법보 하나를 진(陳) 안에 남겨놓고야 겨우 몸을 빼낼 수 있었지요. 나는 그 때 결코 진 속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고 그저 생문 앞에서 살펴보기만 했는데, 땅에 쓰러져 있는 호아가 어렴풋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여기저기 눈을 씻고 유심히 보았지만 양성지는 보이지 않지 뭐예요. 아마 진 속에 깊이 빠져든 모양이야. 호아가 들어간 곳은 생문인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어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양성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얘기하기가 어렵군요. 아까 우건의 말을 들어보건대, 두 사람은 어리석게도 선초를 훔치려고 했던 것 같아. 자업자득이니 할 수 없지 뭐. 다만 그곳이 육지의 수련 장소인 게 마음에 걸리네요. 육지까지 선초가 있는 곳에 갔다가 진 속에 빠졌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지. 호아는 근골도 훌륭하고 요절할 상(相)은 아니지만 선진(仙陳) 이 무척이나 지독하니, 혹시 모르죠. 정말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뭐야." 그들이 이런 말들을 주고받고 있을 때 남고가 깨어났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남고는 동 생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세 사람 앞 으로 기어가서는 호아를 구해줄 것을 애걸했다. 그게 어려우면 하다못해 자기를 영취봉 앞에까지 만이라도 데려가 주기를 애원했다. 약란이 장탄식을 하며 남고를 달랬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 데도 우리는 도력(道力)이 천박해서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 어쩌지? 지금 단대 근처에는 선운이 층층이 에워싸고 있어서 우리도 함부로 접근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큰언니 일행이 돌아오시면 새로 입문한 진씨자매의 법술이 심 후하니 혹시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큰언니가 동해(東海)로 가셔 서 장교사존께 가르침을 구하는 수밖에 없겠지." 남고는 이 말을 듣자 감히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가 없었다. 그 저 큰소리로 목을 놓아 울 뿐 이었다. 영경은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보자 가슴이 쓰라렸다. 그래서 약란을 한켠으로 불러 의사를 타진 하고는, 잠시 남고를 본인이 원하는 대로 단대로 데려다 주기로 작정했다. 약란은 아까 무리를 해서 선진에 들어간 데다 육지와 양성지의 종적을 찾느라고 열심히 돌아다 녀서 그런지 운기(運氣)를 하려고 하니까 상처가 뜨끔하게 울렸다. 그리고는 점점 다시 도지면서 통증이 심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별로 개의치않고 영경과 함께 남고를 데리고 다시 단대로 날아 갔다. 남고는 단대 근처에 이르자 땅에 엎드려, 사조 장미진인께 호아의 목숨을 가련히 여겨 구해 달 라고 간절히 빌었다. 한참 동안이나 소리쳐 기도하며 애간장이 끊어지도록 슬피 울었으나, 무심하 게도 선운은 전혀 걷히는 기미가 없었다. 약란과 영경은 그녀의 아픈 마음을 자기 속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지라 간곡한 위로와 격려로 달 래어 겨우 부축해 일으킬 수 있었다. 막 다시 동굴로 돌아오라고 할 때였다. 영경은 문득 약란의 소매가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 다. 급히 소리쳤다. "어마, 약란언니! 팔 좀 봐. 팔이 다시 어떻게 된 거 아냐?" 말은 안했지만 약란은 생살을 저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보니 상처가 다시 터져서 비록 처음처럼 지독한 정도는 아니지만 점점 참기 어려운 통증이 밀려왔다. 이럴 때 육지 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었으니, 어쩔 도리없이 그저 태원동으로 돌아가 서 방법을 생각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동굴에 돌아와서 자리에 앉은 약란은 상처가 이상하게 가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은 이미 만 신창이가 된 판이라 손으로 긁을 수도 없으니, 그저 이를 악물고 가려움을 참는 도리밖에 없었다. 영경과 지선은 비록 남의 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행이지만 마치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가슴이 천만갈래로 찢어졌다. 네 사람은 모두 초조와 불안과 수심에 가득찬 채 밤을 넘기고, 마침내 다음날을 맞았다. 영경은 약란이 상처를 입은 직후부터 신조를 청라에 보내 사정을 알리고 영운에게 먼저 치료법 이라도 알아볼까 했었다. 그러나 산을 지키는 임무가 더 중요하다고 약란이 재삼 만류하며 고집 을 부리는 바람에 단념했던 것이다. 가적애(可籍崖) 정상이 조사의 선부(仙符)로 봉해져 있는 한 적의 침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 지만, 그래도 <염선>은 필시 무슨 징조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게다가 영경 자신도 상처를 입었으니, 일단 무슨 일이 생기면 신조가 유력한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그러니 신조를 섣 불리 어디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영경은 오직 일이 무사히 잘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침 그날이 단오절이었다. 그들은 인시(寅時)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바깥으로 들락 날락하며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나 해가 설핏 기울도록 제영운일행이 돌아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영경이 알기에 청라를 깨뜨리는 격파전이 벌어지는 것은 오전 중이었다. 일단 격파전이 끝나면 진씨자매의 미진 기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날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태 나타나지 않는 것은 혹시나 다른 곳에 들렸다 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일찌감치 신조를 시켜 소식을 보내지 않은 것이 큰 실수구나 싶어 여간 후회 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약란을 간호하는 한편 남고의 상심을 달래고, 그런 한편으로 쉴새없이 밖으로 들락날락 하며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영경이 바깥에서 애타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홀연 원성이 바람 같이 뛰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주인님! 속히 가보세요. 비뢰동에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영경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를 자세히 물어볼 여유도 없었다. 상처가 도 진 약란은 몸을 움직여선 안 되므로 그녀의 귀에는 말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 었다. 왜냐하면 알았다가는 필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초조해서 들썩일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영경은 가만히 지선에게 동굴 안에서 약란과 남고를 잘 보호하라고 부탁한 다음 자기는 산꼭대 기로 올라가 영운일행을 기다리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태원동을 나서자마자 후동을 향 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때 석기와 조연아는 약란에게서 전해 받은 법보를 들고 동문(洞門)을 지키는 중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적을 맞아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영경은 법술을 펼친 진(陳)을 잠근 다음 원성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런 다음 정세를 살펴보니 까 측면의 높은 봉우리 위에 도고(道姑) 하나가 옷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서 있고, 일전에 대적하 다가 도망친 손능파와 시용고가 신조, 석기, 조연아 등과 한 데 어우러져 싸우고 있었다. 영경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못하고 급히 자영검(紫暎劍)을 빼들고 몸을 날렸다. 원성은 주인이 위로 치닫는 것을 보자, 자기도 하늘을 향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신조 가 원성의 휘파람소리를 알아듣고, 갑자기 검영(劍影) 속에서 뛰어나오더니, 쏜살같이 밑으로 내 려왔다. 원성이 그 등에 올라타자, 곧 두 마리 짐승은 한 덩어리로 맹렬한 공세를 펼치며 싸움 속으로 돌진했다. 원성은 손에 두 자루의 장검을 움켜쥐고 휘둘러댔는데, 싸늘한 검광이 십여 장까지 뻗 어나가며 살기가 등등했다. 영경과 약란이 신조를 타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흠모하고 탄복하여 마지 않았던 석기와 조연 아는 그녀들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서 비뢰동선부로 자기들을 찾아올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반 나절을 기다려도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지선이 영경의 부름을 받고 태원동에 갔다가 돌아왔어도 석기와 조연아는 여전히 약란의 부상을 알지 못했다. 지선이 태원동에서 떠날 때 영경이 그들 두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도록 미리 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지선 대신 신조와 원성이 동굴을 지키게 되므로써 두 사람은 더욱 소 식이 깜깜절벽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신조가 돌아왔으면 이영경, 신약란 두 사람도 돌아왔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선부에는 일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승부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짐승의 말을 알지 못하니 그들 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신조와 원성은 서로 짐승의 말로 대화했다. 어떤 때는 원성이 태원동으로 돌아가서 몇 개의 과 일을 가져다가 신조와 함께 나누어 먹는데 매우 정답고 재미있어 보였다. 이튿날, 조연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신조와 원성은 영성이 같은 짐승이니 말은 비록 통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시 키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는 곧장 후동으로 달려가서 원성에게 말했다. "나와 석사형은 두 분 선고의 출전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여 동부로 찾아가 만나보고 싶 다. 그러니 네가 먼저 가서 한 마디 전해 주지 않겠니?" 원성은 그제사 약란이 다친 사실을 털어놓았다. 마침 뒤따라 왔다가 그 말을 들은 석기는 크게 놀랐다. 두 사람은 서로 상의한 다음 태원동으로 찾아가 약란을 위문하기로 결정하고 원성더러 미리 가서 통보해 달라고 했다. 원성은 그들이 주인의 친구임을 알고 있으므로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즉시 알리러 갔다. 그러나 영경은 이에 대해 영운일행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데다 약란의 상처가 여전한 상태에서 손님맞이 는 난처하므로, 다음날 다시 초대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에 만족하는 수 밖에 없었다. 연아는 원성이 두 자루의 장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을 보자, 검법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원성은 보검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평소에 늘 주인과 여러 선고들이 검법을 연습할 때 눈 여겨 보아왔기에 조금은 기억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로이 보검을 얻었으니, 배운 바는 없지만 여러 선고들이 돌아오면 사실을 아뢴 뒤에 검법을 수련하겠다고 했다. 석기와 연아가 칼을 칼집에서 빼어 살펴보니 과연 상당한 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석기는 신조 도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원성이 가로막아 말했다. "저 같은 원후성성(猿侯猩猩)이는 본래 인간과 같은 종족에서 분리돼 나왔기 때문에 횡골(橫骨) 만 없어지면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답니다. 두 종류의 성성이는 태어나자마자 가르쳐 주면 곧바로 할 수 있구요. 그런데 새 중에는 앵무새만 능히 사람의 말을 배워 할 수 있을 뿐이고, 나머지들은 탈태환골(脫胎換骨)하지 못하면 사람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이 강우사형은 본래 도행(道 行)이 저보다는 백 배 정도나 높지만, 그런 이유로 해서 아직까지 사람의 말을 할 수 없지요." 신조는 이 말을 듣자 길게 두 차례 휘파람 소리를 냈는데, 마치 수치심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새와 원숭이가 모두 이처럼 영통한 것을 보고는 신바람이 났다. 그래서 때때로 신조 에게는 묻고 원성에게는 통역을 시키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했다. 날이 저물자 두 사람도 비뢰애(飛雷崖) 앞에서 비검(比劍)으로 한 차례 검법을 연습한 뒤, 원성 을 불러 함께 연습하자고 했다. 원성이 말했다. "그럼 두 분 대선(大仙)의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리고는 두 자루 장검을 들고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칼이 일단 칼집에서 빠져나오자 두 줄기 의 청황광(靑黃光)이 이십여 장이나 뻗쳤다. 달은 희미하고 뭇 별만이 반짝거리는데, 원성이 칼춤 을 추기 시작하자 보는 이의 눈앞에는 온통 현란한 빛이 어른거렸다. 원성이 비록 검광을 운용하는 방법은 모른다 하나, 출수라든가 검법 본질에 대해서는 오히려 두 사람보다도 뛰어났다. 두 사람은 마냥 좋아하며 연신 박수를 치며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원성은 과분한 찬사를 받자 더욱 신이 났다. 그래서 평소에 몰래 기억해 두었던 아미검법을 싸 늘한 검광 속에서 펼쳐내는데 그 빠르기는 섬전같았고, 평평한 봉우리를 두 갈래로 쪼개는 듯하 였다. 두 사람은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칼춤이 절정에 이르자, 신조도 몇 가지 재주를 뽐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꾸루루!' 하고 큰소리 로 울부짖으며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두 개의 화등잔 같은 눈을 금빛으로 부라리 며 야응척토식(野鷹拓兎式: 매가 토끼를 잡음)으로 원성의 검광을 희롱하며 공중에서 아래를 주시 하더니, 갑자기 두 날개를 거두고 물새가 고기를 잡을 때처럼 쏜살같이 내려꽂히면서 검광 속을 뚫고 들어갔다. "으왓!" 원성의 입에서 비명 같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시커먼 그림자는 두 줄기 금빛 광채를 내 쏘면서 날쌔게 싸늘한 빛무리를 잡아채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공중에서 그것을 휘둘렀 는데, 바로 자기의 강철 같은 발톱으로 원성의 손에서 나꾸어챈 두 자루 보검이었다. 신조는 천천히 공중에서 선회하다가, 때때로 아주 낮게 날아내려서 원성의 머리 불과 일 장 정 도 높이를 홱 지나가곤 했다. 그러다가도 원성이 몸을 솟구쳐 찌르려고 하면 활짝 높이 날아오르 는 것이었다. 마침내 성질을 못 이긴 원성이 봉우리가 떠내려 가라는 듯 발을 쿵쿵 구르고 괴성을 지르는 데 도 태연히 선회를 계속하더니, 마침내 참다못한 원성이 애원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제서야 천천히 날개를 접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원성은 냉큼 달려가 두 자루의 칼을 나꾸어채더니 칼집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사람의 말로 떠들어대었다. "나는 두 분 대선께 검법을 지도받으려 했을 뿐 결코 너를 희롱할 생각은 없었어. 네가 환골탈 태하지 못해 두 손도 없고 사람의 말도 못하는 거야 자기 탓이지 남을 원망할 노릇이 아니잖아? 누가 언제 네가 백미선사에게 경문을 듣고 도를 배운 지 오래 되어 능히 사람의 검을 빼앗을 줄 모른다고 했어? 하필이면 나를 그렇게 못 살게 굴 필요가 어디 있어." 원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조는 목을 길게 빼고 한바탕 크게 울부짖더니 노여운 빛을 띠 고 다시 날아오르려고 했다. 이에 깜짝 놀란 원성이 석기와 조연아의 등 뒤에 숨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신조는 그제서야 풀어졌다. 이 모양을 보고 두 사람은 파안대소를 금치 못했다. 원성은 짐승이지만 마음씨는 몹시 고결하여 이 보검을 얻은 후로는 마치 생명처럼 아꼈다. 그는 신조가 여전히 자기에게 장난을 치려고 하자, 혹시 잘못하다 목숨을 잃을까 두려운 나머지 신조 에게 몇 마디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 그러자 신조는 목을 늘이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때때로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싫지 않은 기 색을 보였다. 이 광경을 보면서 석기와 조연아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마침내 신조가 몇 마디 괴상한 소리를 지르자 원성이 희색이 만면하여 석기와 조연아에게 말했 다. "우리 강우사형이 저를 태우고 공중에서 검무를 추게 해주겠답니다." 그리고는 다시 쌍검을 꺼내들고 몸을 기울여 신조의 등 위에 올라탔다. 신조는 곧 땅을 박차 구 름을 뚫고 올라갔다. 석기와 조연아가 쳐다보니 신조의 등에 올라탄 원성이 두 줄기 검광을 일으키는데, 그 현란한 빛무리는 구름을 뚫고 번개를 무색케 할 지경이었다. 칼춤이 빨라질 때면 마치 천여 마리의 청황신룡(靑黃神龍)이 한덩이 검은 그림자를 엄밀히 감싸 고 있는 듯, 별빛 아래 어지러이 흔들렸다. 어떤 때는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다가, 어떤 때는 암곡 까지 내려오기도 했다. 광채가 창공을 수놓으면 온갖 변화를 일으켜 삽시간에 바람소리, 우레소리 가 일어나고 산천초목이 바르르 떨며, 봉우리 옆의 거대한 폭포마저도 그 소리를 멈추는 듯했다. 두 사람은 이러한 광경을 보자 저절로 흥취가 일어나 스스로 장검을 빼들고 이에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과 두 마리 짐승이 푸르고 흰 검광을 이리저리 내뿜으며 온 하늘을 누볐다. 한 시진 정도 지나자, 신조가 두 날개를 접고 별이 떨어져 내리듯 곧장 봉우리 옆의 만장폭포로 곤두박질했다. 원성이 괴상망칙한 소리로 울부짖는 것과 동시에 신조는 가볍게 뛰어올라 봉우리 위로 날아내렸다. 석기와 조연아가 칼을 거두며 살펴보니, 원성은 이미 신조의 등에서 내려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있었다. 다시 신조를 쳐다보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억센 발톱으로 땅바닥을 움켜쥐고 태산과 같이 위 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는데, 검은 깃털 위에는 수정 같은 구슬이 맺혀 반짝반짝 까맣게 빛나고, 두 눈엔 금빛 광채가 번쩍거리는 것이, 그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연아는 신조와 원성이 이처럼 신기를 발휘하는 것을 보자 영경에 대한 흠모의 정이 절로 솟았 다. 석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응벽선부의 금수마저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나머지 사람들이야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구나!' 두 사람은 웬지 동굴로 돌아가기가 싫어서 새벽 공과(功課) 때까지 계속 놀다가 비뢰동으로 돌 아갔다. 이튿날도 두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봉우리 위로 올라가서 원성과 어울려 놀았다. 그러다가 원성 이 태원동에서 가져온 한 아름이나 되는 복숭아, 앵두 등을 나누어 먹었다. 석기는 원성에게 물어보고 오늘이 단오(端午)라서 영운일행이 청라를 깨뜨리고 돌아오는 날임을 알자 몹시 기뻐했다. 잠시 공부를 하고 나자 정오가 다 되었다. 두 사람은 아직 화식(火食: 익힌 음식)을 완전히 끊지 못한 처지므로 동굴로 돌아가서 소식(素食)을 했다. 식사를 끝내고 막 동굴을 나서는데, 원성이 급히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방금 강우사형이 하늘을 날면서 사슴을 잡아가지고 돌아오다가, 고파령(姑婆嶺) 상공에서 이파 여자들과 도고 하나를 보았답니다. 그들은 검광을 타고 날아오는데, 바로 이곳으로 오는 듯하였다 는군요. 그런데 도중에 우연히 이파 도사 하나를 만나는 바람에 땅으로 내렸답니다. 제가 그 자들 의 형상을 물어본 결과, 전 날 두 분 대선과 싸우던 그 여적(女賊)과 비슷하더군요. 아마 그 여도 적이 다시 사람을 끌고 찾아오는 모양이니 두 분께선 단단히 주의하셔야겠습니다." 그러는 도중에, 홀연 잇달아 크게 울부짖는 신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원성과 두 사람은 재빨리 봉우리로 올라가 보았다. 바로 그때 돌연 두 줄기 푸르고 누른 검광이 번쩍이더니, 이웃 봉우리의 정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석기와 조연아가 보니 봉우리 꼭대기에 도고 하나와 두 여자가 서 있었는데, 여자 중의 하나는 바로 전날 도망쳤던 <도화선자> 손능파였다. 그녀는 꼼짝도 않고 버티고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 멍청한 놈들아! 아직도 손을 들고 항복하지 않는단 말이냐. 우리 선고님들께서 돌아왔으니 더 지체하다간 죽어 묻힐 곳도 찾지 못하리라."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쪽에서 원성이 신조의 등에 올라 쌍검을 휘두르며 하늘 높이 올라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손능파는 첫눈에 신조의 기세가 대단히 강하고 위태롭다는 것을 알았다. 신조 위에 올라탄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웬 괴물이 두 줄기 푸르고 흰 검광을 바람과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내뻗어 휘두르는데, 도대체 그의 조예가 얼마나 깊은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서 손능파는 음소당이 준 한 자루의 백골비차(白骨飛叉)로써, 회색 빛을 발하며 마주쳐 나갔다. 한켠에 버티고 선 그 도고는 견식이 넓은 듯, 신조의 내력을 알아채고는 깜짝 놀라 손능파에게 소리쳤다. "두 분 도우는 저들 두 멍청이를 잡으시고 이 짐승들은 나한테 맡겨 두시오." 그런 다음 입 속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별안간 가벼운 연기를 내뿜어 세 사람의 몸을 싸버 렸다. 손능파와 나머지 한 여자가 석기와 조연아를 맞아 싸우자, 도고 자신은 원성을 상대할 준비 를 갖추었다. 신조는 견문이 넓은지라 도고의 몸 주위에서 한 줄기 검은 연기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 '꾸루 루!' 긴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숙이고 땅으로 내려섰다. 원성은 바야흐로 큰 공을 세우려고 잔뜩 벼르고 있는데 갑자기 신조가 싸우지도 않고 물러나자 몹시 불만스러워서 고함을 질렀다. 그러다가 신조의 뜻을 알고는 얼른 등에서 뛰어내려 석기와 조연아 곁으로 뛰어가 말했다. "신조가 말하기를, 지금 온 요인(妖人)은 몹시 지독하니, 두 분은 가볍게 대적하지 말라고 하더 군요. 신선고님의 법보를 사용해서 동부(洞부府)를 지키고 계시면 제가 급히 돌아가 주인님을 청 해 오겠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동굴로 뛰어갔다. 신조는 원성을 내려놓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석기와 조연아는 지금 나타난 적에 비해서 자 기들의 힘이 달리는 것을 느꼈으나 나이가 어리고 패기가 높다보니 겁먹은 티를 보이고 싶지 않 았다. 어쨌거나 동부를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약란의 법보로 양쪽 동부 를 지키며 형세에 따라 능소 능대하게 실력껏 적과 승부를 해결볼 작정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손능파는 석기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 그녀의 일행인 시용고 역시 마찬 가지 심정이었다. 손능파로부터 미리 들은 까닭도 있지만, 연아를 보고 나니 그도 여간 뛰어난 선 골(仙骨)을 가지지 않았는지라, 이 두 도동(道童)을 산 채로 잡아다가 손능파와 각기 한 명씩 나 누어 거두게 되면 서로간에 불만이 없으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생각이라 쉽사리 독수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 도고는 본래 아미문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봉우리 아래로부터 한 마리의 불 같은 눈을 지닌 검정 독수리가 날아오르는데, 그 것은 바로 백미화상이 기르던 신금(神禽)이 아닌가! 도고는 소스라치듯 놀라고 말았다. 저 영악한 짐승이 이곳에 나타났고 보면, 백미화상도 필시 이 근처 어딘가에 있으리라. 만일 그를 만났다가는 결코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도고는 손능파와 시용고에게 사세가 이롭지 못하니 물러서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가볍 게 남의 말을 듣는 게 아닌데 그랬다고 후회했다. 아미산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동해로 보물을 제련하러 갔고, 몇몇 초보 입문 제자들만이 남아 있어 굳이 어렵게 손을 쓰지 않아도 성공을 거 둘 수 있다기에 따라왔지, 이처럼 난처한 국면을 당할 줄이야 생각이나 했던가! 그녀는 신조가 지독히도 영특한 짐승이며, 억세기 짝이 없는 발은 뛰어난 법보와 같아서 비검마 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신조의 등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인 지 짐승인지 모를 물건은, 두 자루의 장검을 번쩍번쩍 휘두르며 십여 장의 청백검광을 발출하는 데, 도무지 어느 집 구석의 검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섣불리 맞서지 못하고 먼저 흑생사(黑生砂)를 뿌려 한 무더기 검은 연막을 쳤다. 그래서 세 사람 의 몸을 보호하고 신조의 암산을 방비한 뒤 혼자서 그를 맞서 싸워보고자 하였다. 도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인데, 갑자기 신조가 공격을 거두고 날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신조의 등에 타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괴상한 물건은 자세히 보니 한 마리의 성성이였다. 조금 전에는 너무 빨리 날아다니는 데다, 검광이 어지럽게 주위를 감싸고 있는 통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성성이는 신조의 등에서 내리자마자, 두 도동에게 재빨리 몇 마디 건네고는, 즉시 몸을 날려 봉 우리 안의 한 동굴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저 원숭이가 이처럼 영물스러우니, 필시 저것도 또한 백미화상이 기르던 영물임이 분명했다. 생각컨대 찾아온 사람들이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러 가는 듯했다. '아무래도 오늘 일에는 흉(凶)이 많고 길(吉)은 적겠구나.' 도고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홀연 아래로부터 한 가닥 오색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 다. 적의 검광이 결코 위축되지 않았구나 하고 여기는데, 별안간 산중턱에 뚫려 있던 두 동굴은 물론이고 도동들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신조가 다시 하늘로 높이 치솟아 오르더니 검광을 뚫고 곧장 쳐들어왔다. 도고는 손능파, 시용고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당부하는 한편, 온 공력을 운용하여 회색빛 검광을 일으켜 적을 맞아갔다. 영민한 신조는 이미 적의 검광이 어느 정도 대단하다고 간파했다. 그러나 백미선사에 의해 금강 불괴(金鋼不壞: 전신이 강철같이 단단해 어느 창칼에도 상처입지 않는 신체)의 법력을 전신에 쌓 은 신조는 검광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허장성세(虛張聲勢)로 한 차례 부딪친 뒤 곧장 공중으로 치솟아 구름을 뚫고 올라가 버렸다. 도고는 신조가 도망가는 것을 보자, 저 짐승이 검광을 두려워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백미화상의 신조도 알고 보니 별 게 아니로군." 도고는 코웃음을 치고 나서 손능파와 시용고를 도와 두 남자의 검광을 먼저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조가 결코 멀리 도망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갑자기 구름을 뚫고 곧장 내려오면서 세 사 람의 머리를 낚아채려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도고는 밝은 햇빛 사이로, 한 점 검은 그림자가 섬전처럼 그들의 머리로 쏟아져 내리자 욕을 퍼 부었다. "저런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축생 좀 봐! 감히 암산으로 사람을 해치려들다니!" 손을 들어 한 번 휘젓자, 흑생사가 한 무더기 검은 연기로 화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신조는 얼른 손을 쓰기가 어렵자 세 사람을 내버려 둔 채 즉시 몸을 돌려 다시 검광 속으로 부 딪쳐갔다. 그리고는 높이 떴다 낮게 가라앉았다 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승기를 잡으려고 해보았지 만 도고의 방비가 워낙 튼튼하여 조금도 우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석기와 조연아는 처음부터 적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신조의 그 같은 도움에 근근히 의지하 여 억지로 평수(平手)를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도고는 석기와 조연아가 은형진법(隱形陳法)을 써서 몸을 감춘 것을 알고 상대방의 검광이 일어 나는 쪽을 향해 몇 차례나 흑생사를 뿌렸다. 그때마다 번번이 차단당할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대치하고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날카롭게 꾸짖는 소리와 함께 아래쪽 바위 위에 아리따운 소녀가 나타난 것이다. 소녀가 손을 휘젖자, 한 줄기 자줏빛 검광이 무서운 기세로 날아왔다. 시용고는 그 위력이 대단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급히 소리쳤다. "저 빌어먹을 년이 가진 게 자영검이에요! 두 분은 조심하세요." 이때쯤 이미 도고가 잿빛 검광을 일으켜 영경의 자영검에 맞섰다. 그러나 두 개의 검광이 부딪 치자마자 도고의 잿빛 검광은 간단히 잘려나가고 말았다. 도고는 내심 크게 놀랐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신조가 또다시 날아 내려왔다. 신조의 등에는 또 그 망할놈의 성성이가 올라타고 두 자루의 청황색 검광을 어지러이 내뻗는데, 그 기세는 보통 흉험한 것이 아니었다. 손능파는 독수를 쓰지 않고는 도저히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겠다고 깨달았다. 그녀는 시용 고에게 재빨리 독촉했다. "동생은 지금까지 손을 안 쓰고 어느 때를 기다리려는 거야?" 시용고가 이곳에 온 까닭은 순전히 손능파와 도고의 부추김 때문이었다. 그녀의 목적은 석기, 조 연아 두 사람을 생포해 돌아가는 것이었지, 현녀침(玄女針)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석기와 조연아가 진법을 사용해서 두 개의 동부를 감추고 산곡의 위치를 바꾸어놓자, 요 귀여운 놈들은 손쉽게 채어가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귀찮은 날짐승이 날 아오르고 일전에 조화애에서 만났을 때, 자영검을 휘두르던 그 계집애까지 상대방을 도우려고 나 타난 것이다. 이것이 아미산의 발원지(發源地)에서 너무 가깝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또 얼마나 많은 적이 잇 따라 나타날지 알 수가 없었다. 손능파는 계속 재촉하는데, 그래도 시용고는 머뭇거리며 얼른 결 정을 내리지 못했다. 도고는 자기 비검의 검광이 시들면서 힘이 없어지자 얼른 다시 회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영경의 자영검에 한 번 부딪치자 즉시 도고의 비검은 두 동강이 나서, 잿빛 광채는 마치 끊어진 횃불처럼 떨어져 버렸다. 자영검의 검광은 그처럼 잿빛 검광을 무찌르 고 나서도 그대로 도고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손능파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즉시 석기, 조연아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는 백골비차로 자줏빛 검 광에 맞섰다. 그렇게하여 한 차례 자영검의 공격을 막는 사이에 도고로 하여금 법술을 쓰도록 여 유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였다. 백골비차가 자영검의 자줏빛 검광에 한 번 부 딪치자, 산산조각이 나면서 한여름의 반딧불처럼 흩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시용고는 석기와 조연아를 맞아 싸우면서 아직은 넉넉히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원성이 옥호검 (玉虎劒)을 휘두르며 재차 날아 들자 사정이 달라졌다. 비록 원성이 비검을 제대로 구사할 줄은 모른다. 하지만 신조의 등에 올라타고 날아다니며 이리저리 공격해 들어오니, 그 자체가 능숙하고 위력적인 비검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두 줄기 검광은 굵고 길어서 마치 황룡(黃龍)이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듯, 푸른 무지개가 하늘 을 꿰뚫는 듯했다. 온통 정신을 빼놓으면서 추호도 방심할 여가를 주지 않는 터라, 응수하기가 여 간 곤란하지 않았다. 게다가 손능파가 도고의 위급함을 보고 백골비차를 날리며 그쪽에 붙는 바 람에 시용고 그네는 혼자서 적의 네 줄기 검광을 상대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도저히 견뎌낼 재간이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손능파의 백골비차가 자줏빛 검광에 부딪쳐 산산조각나는 것을 본 시용고는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정신이 산란해진 틈에 번개같이 날아든 원성의 두 줄기 검광이 그녀의 검광을 격파하여 더 이상 조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석기와 조연아는 영경이 한 마리의 독수리와 한 마리의 성성이를 거느리고 계속해서 승리하는 것을 보자, 말할 수 없이 기쁜 한편 자기들의 주제가 창피하기도 했다. 그래서 석기는 시용고의 비검이 원성의 두 줄기 검광에 절단당하는 것을 보자마자 암암리에 진원(眞元)을 운용하여 검광 을 휘둘러, 곧장 그녀의 몸뚱아리를 두 동강으로 끊으려고 했다. 도고는 비록 여러 가지 요사한 술법을 지니고 있었으나, 한 자루 비검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주 문에 따라 사용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온 정신을 비검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그것 을 버리고 다른 쪽으로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기 비검이 적에게 파괴당하는 것을 보고는 놀람과 분함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영경의 자영검이 얼마나 지독한지 미처 알지 못했고, 흑생사가 자기들 세 사람 의 몸을 보호해 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처럼 일종의 방심상태로 한 손 에는 흑사(黑蛇)를 집어들고, 한 손에는 낙혼기(落魂旗)를 움켜쥐고는 주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이때 영경의 자영검은 이미 손능파의 백골비차를 부숴버리고 세 사람이 서 있는 봉우리 위로 날 아들고 있었다. 손능파는 비검도 비차도 영경의 자영검에 격파당하자 원통함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으나, 감히 다시 법보를 사용하여 출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자영검의 검광이 이번에는 눈앞으 로 날아들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런데도 도고의 표정이 아무 일도 없는 듯 태연하자 손능파는 그러고 보면 흑생사가 적의 검광 을 막아낼 수 있는 굉장한 법보인가 보다 생각하고 어지간히 마음을 놓았다. 그렇게 잠시 주의를 소홀히 한 채 시용고더러 빨리 현녀침을 사용하라고 재촉하는 동안,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경 과 석기의 비검이 나란히 날아 들어왔다. 영경은 손능파를 보자 갈아마셔도 분이 풀리지 않을 원수를 만난 셈이라 눈에서 새파란 빛을 뿜 어냈다. 하지만 그 도고는 굳이 목숨을 빼앗아야 할 원한을 진 일이 없는지라, 살짝 손을 눌러 자 영검의 방향을 틀어 검광이 도고를 비치게 하고는 그대로 손능파를 내리쳤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자줏빛 검광이 지나간 자리에서 허연 물체 하나가 봉우리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 사이에 도고와 시용고는 자기 신형을 재빨리 날려 몸을 피했다. 산봉우리에는 음습한 바람이 '쏴아!' 일어나면서, 구름이 자욱히 끼기 시작하였다. 직경 한 장 정 도의 둥그런 검은 그림자 속에서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블쾌한 소리가 들리며, 영경이 서 있는 암벽 밑으로 아홉 줄기의 붉은 광채가 쏟아졌다. 신조는 연방 시끄럽게 울어대며 두 날개를 펼쳐 앞으로 돌진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등에 올 라탄 원성은 검광을 크게 일으키며 전신을 보호하고 마주쳐 나갔다. 몇 차례의 곤경을 겪으면서 신중함을 터득한 영경은 자기에게는 자영검밖에 없는데 적이 요법 (妖法)을 시전하는 것을 보자, 맞서 싸우지 않고 재빨리 검광을 회수하여 자기 몸을 싸버렸다. 바로 이 때였다. 하늘에서 찬란한 금빛이 쏟아져 내려오더니, 한 무더기 오색 구름이 시커먼 안 개를 여지없이 뭉개어 버렸다. 동시에 예닐곱 줄기의 가지각색 검광이 곧장 봉우리 위로 날아내 렸다. 어느덧 검은 구름은 걷히고 눈앞이 밝아졌다. 영경이 보니 제영운남매가 자령자매, 주문, 오문기, 주경운 등을 이끌고 날아 내려오는지라, 그녀 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곧 <건곤전변잠형기(乾坤轉變潛形旗)를 거두고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 었다. 또 석기, 조연아 두 사람을 불러 상견례를 나누게 했다. 석기는 수인사가 끝나자마자 곧장 봉우리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손능파의 시체가 땅 위에 널브러져 있을 뿐 도고나 시용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은 요법이 깨지는 순간 혼비백산해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시용고는 손능파가 소리쳐 비침을 날리라고 재촉했을 때, 돌연 자줏빛과 흰빛의 검광이 동시에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검광을 휘둘러 막 막으려고 하는데, 흰빛의 검광이 바로 앞까지 날 아왔다가 푹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하, 흑생사의 위력이 그러고 보니 굉장하구나.' 그녀가 막 입을 열어 도고를 칭찬하려고 하는데, 자영검이 어느 새 요법을 깨뜨리고 연기 속으 로 뚫고 들어왔다. 너무도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손능파의 목이 땅에 엎어지는 순간, 시용고는 새파랗게 질려서 훌쩍 뛰어 몸을 피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래도 일찍 위급을 직감한 덕분에 머리 카락만 약간 베어져나간 것에 그쳤다는 점이다. 그 검광이 조금만 밑 으로 내려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라 시용고는 혼비백산하여 저만치 피해버렸다. 놀란 가슴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나자, 분노가 다시 치밀어올랐다. 도고를 돌아보니 이미 낙혼 기를 전개하고, 흑생사를 뿌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현녀침을 꺼내어 원수를 갚을 채비를 했다. 영운일행은 청라에서 돌아오면서 이러한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미후산 이 가까와질 무렵 자령이 갑자기 한바탕 요란하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이건 심상찮구나 싶어 둔법(遁法)을 더욱 빨리 전개했다. 멀지 않은 곳까지 다다르자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으므로, 주문이 재빨리 천둔경(天遁鏡)을 방출했다. 자령은 그 아홉 줄기의 홍광을 보자, 그것이 곧 금침성모의 현녀침임을 간파하고는 깜짝 놀랐다. 까딱하다가는 아래쪽에 있는 사람이 다칠지도 모른다. 현녀침을 막아낼 무기라곤 미진기밖에 없 으므로 그녀는 급히 날아내렸다. 시용고는 제법 견문이 넓은지라, 얼핏 보아도 새로 나타난 적의 성세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손능파의 시체마저도 내팽개쳐 둔 채 비침을 챙겨 급히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도고 역시 혼자서 그 많은 적을 당해낼 재간이 없으므로, 자기 요법이 천둔경에 의해 깨지자마 자 흑생사을 거두어 잽싸게 물러갔다. 결과적으로 손능파만 원수를 갚으러 왔다가 목숨을 잃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영운이 둘러보니, 약란이나 지선은 보이지 않고 영경 혼자만 신조와 원성과 더불어 비뢰동 봉우 리 위에서 적과 싸우는지라, 응벽애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녀가 다급하게 묻자 영경이 말했다. "언니, 말하자면 길어요! 후동이 이미 열렸으니, 속히 그 길로 통해 돌아가서 이야기합시다." <건곤전변잠형기>를 석기에게 주고 신조와 원성더러 후동을 지키라고 한 뒤, 일행은 총총히 석 기와 조연아 두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검광을 타고 달려가는 동안, 영운일행은 응벽애에 찾아온 변고 때문에 주위의 경치를 살필 겨를 도 없었다. 그들은 비뢰동의 지름길을 택해 급히 내달린 뒤 검광을 거두었다. 영경의 입을 통해 약란이 상처를 입게 된 경위와 그간의 사정을 듣고 나자, 영운은 다른 볼일은 모두 젖혀둔 채 일행을 이끌고 태원동으로 먼저 달려갔다. 동굴 가까이 이르러 보니, 지선이 만면에 걱정과 초조함을 담고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 다. 지선은 영운일행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기뻐서 펄쩍 뛰며 동굴로 뛰어 들어가면서 큰소 리로 외쳤다. "약란동생, 정신차려! 큰언니가 돌아오셨어." 그 무렵 약란은 영경이 밖으로 나간 후로, 상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원기는 자꾸만 요혈(要 穴)마다에서 막히고 독기는 어깨 근처까지 치밀어올라 견디기가 어려웠다. 영운일행이 오늘 돌아 오리라는 것을 몰랐다면 벌써 팔을 잘라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남고는 남고대로 동생인 호아를 걱정하느라고 너무나 울어서 눈물이 다 마를 지경이었다. 각각 몸과 마음이 상한 두 사람을 간호하는 동안 지선은 차라리 고통을 내가 대신 졌었으면 좋 겠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더구나 영경마저 혼자 적과 싸우러 가더니 한참이 지났는 데도 돌아 오지 않자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슴을 바작바작 태우는데 때마침 영운일행이 돌아온 것이다. 실내에 들어오자마자 약란의 팔을 살펴본 영운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금선은 들어오지 마!" 그리고는 자령을 침상 가까이 불러들여 약란의 상처를 살펴보게 했다. 약란은 독혈(毒血)의 영향을 받아 운기가 자꾸 막히는 바람에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간신히 눈을 깜박깜박하고 이리저리 굴려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영운이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자령이 약란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이 상처가 금침 성모의 현녀침에 격중된 것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자령은 영경에게 물었다. "신사매가 상처를 입은 지 얼마나 되었나요?" "사흘이 되었습니다." "사흘이나 되었어요?" 자령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녀침을 맞은 곳이 급소가 아니라 해도 그 부위를 잘라내 버리지 않으면 길어야 한 시진 안에 독기가 심장에 뻗쳐 죽고 말아요. 그런데 신사매가 이처럼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니, 공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족히 알 수 있겠군요." 영운은 자령이 그처럼 침의 내력을 알아보자 제발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령은 능혼에게 받은 단약을 꺼내어 반은 약란의 상처에 으깨어 바르고 반은 복용시켰다. "이 같은 비침은 다섯 가지 금속의 정수와 백 가지 벌레, 백 가지 새의 독을 취해 천 번을 담그 고 백 번을 제련해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게다가 다시 몇 년을 더 갈고 닦으면 더할 나위없이 무 서운 독이 되죠. 당초 저희 어머니도 이것을 만들 수 있었으나, 지나치게 독성이 강하다는 것이 싫으셔서 만들지 않고, 홍운침(紅雲針)과 백미침(白眉針) 두 종류만을 만드셨죠. 백미침은 만부득 이 한 경우에만 호신용으로 사용하는 것이에요. 홍운침은 맞아도 결코 독성이 없어서 상처나 입 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지요. 듣자니까 금침성모는 이미 천겁병해(天劫兵解)를 만났다고 하던데 그 같은 독침을 누구에겐가 전수해 준 모양이지요. 아까 신조는 아마도 이 침이 지독하다는 것을 알고는 주인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두 날개를 활짝 펼친 채 공격해 나갔던 것 같아요. 우리가 만일 한 발짝만 더 늦었으면, 이사매는 비록 검광으로 전신을 감싸 혹시 다치지 않았을지 모르나, 신조는 틀림없이 크게 다쳤을 겁니다. 이 침의 독성은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달라요. 우리 자매가 요행히 독성을 해독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나, 의사가 상처를 치료하려 해도 해약(解藥)이 없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런데 마침 능진인께서 전해 주신 선단(仙丹)이 있고, 신사매의 도력이 매우 고심한 까닭에 능히 며칠이나 버틸 수 있었으니 큰 다행이지 뭐예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비록 목 숨을 잃지는 않는다 해도 필시 폐인이 되는 것은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에요." 장미진인의 영부 兩界等微塵, 幻滅死生洞泡影 靈岳多異寶, 金精霞彩耀雲衢 신약란의 상처에다 신단(神丹)을 바르자, 신통하게도 자혈(紫血)이 그치고 통증도 가셨다. 팔뚝 위로 허연 연기 같은 것이 무럭무럭 일어나면서 비록 완전한 회복은 아니지만 부기가 점점 빠지 고 피부색도 자흑(紫黑)에서 분홍으로 변하면서 움직임도 자유로와졌다. 약란은 침상에서 일어나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하는 것을 제영운과 진자령이 급히 말렸다. 모두들 둘러앉아서 지난 이야기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비로소 약란 은 육지가 자기의 팔을 핥아 위급에서 구해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장남고는 청라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모두 약란의 치료에만 정신이 빠져 있었으므로 감히 동생의 일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조급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모두 들 자리에 앉아 별로 시급하지 않은 이야기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앞으로 나아가 그들 앞에 꿇어앉았다. 그러나 남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영경이 양 성지와 호아의 일에 대해 먼저 말해 버렸다. 영운은 남고를 위로해서 일으키는 한편 영경의 말을 귀담아 듣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취봉 아래에는 사실 사조(師祖)의 선약(仙藥)이 숨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오봉(五峰) 구 천(九泉) 십이 동(十二洞), 도처에 보급(寶及), 영약, 기진이보(奇珍異寶)가 숨겨져 있단다. 다만 내 아우 금선을 위시해서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장교사존(掌敎師尊)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는데 함부로 설칠까 봐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 거야. 그러나 이미 식구 중에 큰 화를 입은 사람 이 있다면, 먼저 사람을 구해야지 하는 수 없잖아?" 남고는 영운의 말을 듣고서야 적이 안심이 되어 머리를 조아리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하 여 구지선만 남아서 약란을 돌보게 하고는 남고까지 합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출작업에 출동했다. 영운일행이 단대 부근에 도착해 보니 오색 찬란하고 변화막측한 선운(仙雲)이 눈을 어지럽게 하 면서 짙게 엉켜 있었는데, 그 신묘함에는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영운이 먼저 허공으로 날아올라 선진(仙陳)의 입구를 살펴보고는 내려와서 일행에게 말했다. "이 진은 사조께서 선천(先天)의 일기신부(一氣神符)로 펼쳐놓으신 양의미진진(兩儀微塵陳)이야. 우리 어머니가 하신 말씀에 의하면 이 진은 생(生), 사(死), 회(晦), 명(明), 환(幻), 멸(滅)의 육 문 (六門)으로 되어 있는데, 일단 이 진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환상에 현혹되지 말고 두 개의 문을 파해해야만 살아날 수가 있는 거야. 또 이 진으로 들어가는 경우 꼭 사문(死門)으로 들어가야 해. 어쨌든 이 진을 꼭 깨뜨려야 하는데, 우리의 미천한 도력(道力)을 가지고 능히 해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 이때 가만히 듣고 있던 한악이 자기의 실력을 과시할 기회가 왔다는 듯 선뜻 나섰다. 그녀가 입 을 열어 뭐라고 의견을 제시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언니 자령이 재빨리 눈짓을 보내는 것이었다. 영운은 재빨리 이것을 눈치채고 일행들에게 물었다. "누가 나랑 함께 가서 갇혀 있는 사람을 구출할래?" 그러자 재빨리 한악이 맨 먼저 대답했다. "제가 대사저를 따라가겠어요." 자령은 동생이 그 위험한 곳에 가지 않기를 바랬지만, 이미 말을 토해버렸으니 이젠 말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운의 속마음을 눈치챈 나머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격려의 말을 했다. "두 분이 가신다면야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요. 우리는 아직 입문(入門)한 지 얼마 되지도 않고 도력(道力)이 얕아서 같이 따라가 봐야 폐만 끼칠 뿐일 텐데요 뭘." 영운이 자령에게 짐짓 권했다. "진사매는 함께 가지 않겠어요?" 그러나 자령은 저 역시 폐만 끼칠 뿐이라면서 사양했다. 이번에는 금선이 좀이 쑤셔 견디지 못 하겠는 듯 뭐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곁에 있던 주문이 입을 막았다. 영운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문에게서 천둔경을 빌어가지고는 한악에게 주며 말했 다. "사조님의 선법(仙法)은 오묘하기 그지없어, 방문(旁門)의 법보(法寶)로는 감당할 수가 없단다. 그러니까 이 보경을 지니고 있다가 위험에 처하면 적절히 사용해. 알았지?" 한악은 속으로 앙앙불락해서 혼자 생각했다. '미진기는 우리 어머니께서 수십 년 동안이나 연공하셔서 완성한 지보(至寶)인데, 대사저가 방문 의 법보라고 이렇게 무시하다니! 이럴 수는 없어. 그까짓 진법(眞法)이 무에 그리 대단하길래 그 러지? 이번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법을 깨뜨려서 내 실력을 보여줘야지.' 한악은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웃으 면서 주문의 보경을 받아 품속에 넣고는 언니인 자령에게서는 미진기를 건네받았다. 자령은 동생더러 제발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대사저의 말을 충실히 따르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 다. 그러나 한악은 그저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그리고는 영운에게 다가가서, 어느 쪽에서 진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물었다. 영운이 말했다. "이 진은 사문(死門)은 동북쪽에, 생문(生門)은 서남쪽에, 환문(幻門)은 중앙에, 멸문(滅門)은 극 동(極東)에, 회문(晦門)은 극남(極南)에, 명문(明門)은 서북쪽에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안에 갇힌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어. 사문은 들어가기는 힘들지만,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살 길을 찾기는 쉽고, 생문은 들어가기는 쉽지만 위험에 빠지기 쉽단 말야. 그리고 멸문이 이 진 을 깨뜨리는 열쇠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환문은 변화무쌍하여 길을 잃기가 쉽거든. 회문은 칠흑같이 캄캄하여 역시 어렵기가 여간 아냐. 다만 돌파하기가 쉬운 쪽은 서북쪽의 명문이야. 사 매는 처음이라서 아직 아미파의 현묘한 진법을 잘 모르니 서북쪽의 명문으로 들어가고, 나는 동 북쪽의 사문으로 들어가서 중앙에서 함께 만나자꾸나. 필경 환경(幻境) 속을 헤매게 되겠지만, 나 의 <원양척(元陽尺)>과 너의 천둔경을 사용하면 그 안에 갇힌 사람을 찾을 수가 있을 거야." 한악은 영운의 말에 내심 승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진의 원리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 에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한악과 영운은 외마디 기합소리를 지르며 법보로 몸 을 보호하면서 선운채무(仙雲彩霧)를 향해 날아갔다. 그런 중에 한악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운대사저의 말대로 극동(極東)의 멸문이 이 진법의 중심부라면, 이 문을 깨뜨리는 것만으로 진 전체를 깨뜨릴 수 있지 않을까 모르겠구나. 그러니까 서북쪽의 명문으로 들어가서 중앙으로 가지 않고, 곧장 멸문으로 가서 멸문을 깨뜨리려고 시도해 봐야겠어. 내가 가진 법보를 사용하여 이 진을 깨뜨리기만 하면 그야말로 얼마나 큰 영광인가? 설령 실패한다 하더라도 진 속에 들어와 서 법력(法力)이 얕아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말하면 누가 의심하겠어. 미진기로 몸을 보호하면 이 까짓 진쯤이야 벗어날 수 있겠지 뭐.' 이렇게 결심한 한악은 곧장 서북쪽의 명문으로 날아갔다. 이 진이 얼마나 현묘한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녀인지라 대담하게도 그런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처음 진 속으로 들어갈 때는 미진기도 사용하지 않고 다만 검광만을 타고 운무 속을 돌파해 들 어갔다. 그런데 진하고 짙은 채운(彩雲)이 몸을 에워싸며 살갗에 달라붙는 느낌뿐 별다른 이상이 없자, 그녀는 시건방지고 담대해졌다. 약란이 이 진을 살필 때 진문(陳門) 앞에서 조심하느라고 했는 데도 법보를 잃어버리고 겨우 몸을 피했다는 영경의 말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진이 각 문마다 변화가 다르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한악이 들어간 문은 생 문이었는데, 처음부터 발을 잘못 디딘 셈이었다. 영운은 비록 한악이 재질은 뛰어나지만 수도인(修道人)답지 않게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하고 약 간 경망함을 딱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뜨거운 경험을 시켜 깨우쳐 주겠다는 생 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사조의 진법은 매우 오묘하기 때문에 혹시 위험에 처할까 봐 명문으로 들어가게 했고, 천둔경으로 몸을 보호하도록 했으며, 위험에 처하는 경우 곧 대피하라고 몇 번이 고 일렀던 것이다. 한악은 애당초 진의 원리에 대해서는 백지인지라 덮어놓고 운무 속을 헤집고 나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의를 기울였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변고도 발생하지 않았고, 짙은 운무가 내쏘는 눈부시게 현란한 채광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악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한참을 날아왔는데 어쩐 노릇일까?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이 채운이 넓어야 직경이 십 무 (十畝)밖에 되지 않을 텐데, 검광을 타고 그렇게 빨리 날아왔으면 적어도 백여 리는 날아왔을 거 아냐. 그런데 어째서 아무리 가도 끝이 안 보이지?'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한 손으로 미진기를 꺼내들고, 다른 손으로는 어머니 보상부인의 절기인 금단(金丹)을 던졌다. 평소에 이 두 가지 법보를 펼치면 하나는 오색 채운(五色彩雲)으로 변하고, 하나는 둥근 붉은 빛 으로 변했다. 적의 법보가 아무리 무섭더라도, 이 두 가지 법보로 몸을 지키면 채운홍광 속에 숨 어서 진퇴(進退)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적의 법술, 법보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법보를 시전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한악이 미진기와 금단으로 시전하자마자 홍광이 쏟아져 나가고, 그 주위를 채운이 뭉클뭉클 둘 러싸며 사방으로 밀려나갔다. 곧 운무(雲霧)가 사라지고 앞에는 공터가 펼쳐졌다. 법보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판단한 한악은 영운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저 채운 역시 보통 운무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하면 되는구나.' 명문이 이미 깨뜨려진 것으로 생각하고는 막 동쪽의 멸문으로 날아가려다가 사방을 둘러본 그 는, 순간 까닭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채운과 함께 운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앞에 드러난 평지는 사방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천정 역시 하얗게 펼쳐져 매우 낮게 걸려 있었다. 위아래 오두 하 얗게 한 가지 색으로 어우러져 있을 뿐 아무리 둘러봐도 영운은 물론이고 진 속에 갇혀 있던 사 람도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다보아도 동문자매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계곡도 산림도 모두 조금 전과 같지 않 았고, 마치 하늘의 별 세계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검광을 타고 매우 빠른 속도로 진 속으로 뚫고 들어왔으니 응벽선부(凝碧仙府)에서 멀어도 꽤나 멀리까지 날아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넓게 펼쳐진 평지만이 보일 뿐 끝이 보이지 않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아니야. 나는 서북쪽에서 바로 동쪽으로 날아왔으니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진짜 천지가 아니 고, 멸문에 이미 도착한 것일지도 몰라.' 그녀는 진 중의 환경에 미혹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런 생각을 하노라니 걱정이 점점 부풀어났다. 그녀는 무작정 미진기를 꺼내들고 동쪽으로 날 아가려고 했다. 갈 데까지 가다가 수틀리면 다시 돌아와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 서 그녀는 곧 미진기를 펼치며 동쪽으로 날아갔다. 백설처럼 하얀 대지가 빠른 속도로 몸 아래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한참을 날아가도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고, 하늘은 더 낮게 내려와 있었 다. 한악은 마침내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갈수록 상황이 위급해졌지만, 그녀는 굴복하지 않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미진기는 순식간에 천 리를 날 수 있는데, 어째서 아직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진 속에서 헤매고 있을까? 내가 이미 진 밖으로 벗어났다면 이 진도 별로 오묘한 것이 아니고, 만약 아직 진 속에 있다면 상황을 좀더 살피고 신중히 행동해야지.' 여기서 꼭 돌아가겠다고만 작정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마음 속으로 응벽애를 생각하 기만 하면 미진기는 자기를 그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은 더 낮 게 내려와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미진기와 금단을 살펴보았더니 모두 원상복구되었고 채운과 홍광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제서야 한악은 이 진의 오묘함을 깨닫고 내심 초조해졌다. '아참! 그렇지.' 그때야 한악은 영운의 당부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천둔경을 꺼냈다. 그때는 이미 머리 위의 하늘이 은색 막처럼 자기를 덮어싸고 있었는데, 천둔경을 꺼내는 순간 삽시간에 천지가 어 지럽게 흔들려 돌아가고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며 머리가 어질어질해져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러 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한악 자기는 태원동 약란의 방 침상에 누워 있었고, 동문들은 침상 앞에 서서 걱정 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쪽에 남고가 동생인 호아를 안고 있었는데, 호아는 막 잠에서 깨어난 듯이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금선 역시 한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아이는 뭐라고 홍알홍알 지껄이고 있었다. 아이의 몸은 백설처럼 희었다. 하얗고 통통한 작은 두 손으로 금선의 목을 껴안고, 뒤에 서 있는 주문에게 말 을 배우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실내에 앉아 있거나 혹은 서 있었다. 한악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일어나려고 했으나 온몸에 힘이 빠져 다시 쓰러져 버렸다. 그녀 는 기억을 되살려 보면서 생각했다. '야단났어. 진 속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으면 어떡하지? 진 속에서 실신한 것이야 수치로 여길 것도 아니지만, 어머니의 미진기와 금단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백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실수야!' 그녀는 언니인 자령이 자기에게 말을 붙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급하게 물었다. "누구 내 미진기를 보지 못했어요?" 그러자 자령이 참지 못하고 따끔하게 쏘아붙였다. "너는 그렇게 수도를 쌓았으면서 감히 사조님의 선진을 능멸했어. 대사저께서 너의 시건방지고 어리석음을 알아차렸지만 말릴 수가 없어, 특별히 주사매의 천둔경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만약 네 가 사조님의 심오한 도법을 우러러봤다면,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 곧 물러났을 것인데, 너는 자만 심으로 가득차 함부로 설쳤지 뭐냐. 대사저께서 너를 염려하여 특별히 명문으로 들어가게 했는 데도 너는 함부로 회문, 멸문으로 다시 들어가서 어머니께서 수백 년 고행과 수련을 통해 이루신 금단지보(金丹至寶)를 잃어버렸으니 이게 될 말이냐?" 양성지도 잘못하여 생문으로 들어가 선초(仙草)를 보고서는 함부로 <선천일기영부(先天一氣靈 符)>를 움직여 진 내에 사흘 동안이나 갇혀 있었다. 비록 대사저가 구하여 선단(仙丹)으로 생명을 건지려 했지만, 현재 위독한 상태다. 호아는 육지의 가르침대로 조심조심 명문으로 들어갔고, 또 너처럼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흘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선단을 복용하고 는 완전히 회복된 거야." 육지는 호아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영부(靈符)를 발동시켜 역시 그 진 속에 갇혀버렸 다. 그런데 호아는 워낙 영리한 아이여서 그 진의 오묘함을 깨닫고는 사태가 불리하자 깊숙이 들 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명문 가까운 곳에 갇혀 있었고, 천만다행으로 상처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으니 다행이지만, 양성지는 이미 잘못을 저지른 데다 육지에게 해 를 입혔으니 그 죄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영운은 구천원양척(九天元陽尺)을 이용하여 먼저 육지와 양성지와 호아를 구출했다. 진의 변화가 너무나 무궁무진하여 구천원양척도 그녀 혼자만을 보호해 줄 수 있을 뿐이었다. 구천원양척에서 발하는 광화(光華)가 겨우 몇 장 앞까지밖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운은 몇 번을 왔다갔다했지만 한악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명문을 통해 진 속으로 들어간 영운은 천둔경의 금광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재빨리 추적해 갔었다. 그래서 한악이 신기(神氣) 아래에 한 손에는 미진기와 금단을, 또 한 손에는 천둔경을 쥔 채 쓰 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모든 경과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구천원양척을 사용하여 한 악과 법보를 구해서 진 밖으로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두 가지 법보는 비록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양성지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지만, 너는 단약과 구천원양척 덕분으로 이렇게 깨어난 거야. 이후 로는 잠시도 게을리하지 말고 수도를 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라." 한악은 언니의 꾸짖음을 듣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한 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경운과 문기 등 이 한악의 심기를 눈치채고는 좋은 말로 달랬다. 한악은 비록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영운은 그녀더러 약란, 호아 와 함께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장미진인의 법술은 아무도 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에 장교사존(掌敎師尊)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연이어 사고가 생기고, 또 <염선> 이원화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감히 방심할 수 없어 서 영운은 즉시 금선, 주문, 주경운, 오문기 네 사람으로 조를 짜서 신조와 원성을 데리고 나가 후동(後洞)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자기는 자령, 영경, 지선과 함께 태원동 옆 절벽으로 올 라가서 약란이 봉쇄해 버린 동굴을 조사했다. 동굴에 도착해서 귀를 기울여보니 동굴 안에서는 여전히 쇳소리가 들려왔다. 영경과 지선은 약 란이 동굴을 봉쇄할 때도 동굴에서 쇳소리가 작게 들렸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전에 비해 훨씬 크다고 했다. 영운은 그 말을 듣고 동굴 안에 어떤 비검 같은 법보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추측 했다. 일찌감치 예방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변고를 입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안전을 위해 동굴을 다시 틀어막고는 태원동으로 돌아왔다. 영운은 일행들에게 석실을 각각 정해 주었다. 경운은 문기와 함께 지내고, 자령은 한악과, 남고 는 약란, 영경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새로 온 말썽꾸러기들이 다시 사고를 저지를까 봐 금선이 호아, 우건, 양성지를 데리고 함께 지내도록 했다. 이렇게 정하고 나서 영운과 자령이 양성지의 병태를 살펴보니, 위험한 고비는 넘겼고 다만 온몸 의 피로가 극도에 달해 있었다. 그래서 다시 단약을 먹이고 쉬게 했다. 영운이 자령과 함께 약란의 방으로 돌아와 보니, 호아는 이미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병세가 호 전되어 있었다. 남고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호아를 돌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지극한 우애 를 담고 있었다. 남고는 영운과 자령이 들어서자 동생 대신 급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영운은 이리 지나간 일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고 몸조리나 잘 시키라고 당부했다. 남고는 다시 한 번 사죄한 후에 옆에 가서 섰다. 오문기가 후동(後洞)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금선이 새로 입문한 동문들에게 대접하려고 선 과(仙果)를 따러간 외에는 모두 각 방에서 둘러앉아 쉬고 있었다. 한악은 연거푸 단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이미 몸이 거의 회복되었고, 약란의 상처도 거의 아물었다. 영운이 남고남매를 불러서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데, 지선이 원성과 함께 삼구보검(三口寶劒) 을 꺼내어 가지고 와서 영운에게 바쳤다. 영운이 말했다. "응벽애의 여러 동문들 가운데 지선아우가 재능이 조금 뒤처져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많은 일을 누구보다도 잘해왔어요. 아직 교조님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지 못하고 겨우 우리를 따라다 니며 수련을 쌓았기 때문에 아직 조지(造誌)가 깊지 않아, 여러 동문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비검, 법보들은 모두 스승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므로 마음대 로 줄 수도 없고, 설령 준다고 해도 지선동생이 사용할 수도 없어. 그런데 이 비검의 경우를 보면 기연은 누구도 얻기 힘든 것인 데다 원공(猿公)의 유언도 있고 하니까 당연히 지선동생이 사용하 는 것이 정당할 것 같아. 원성은 다른 동물과는 비할 수 없이 수천 년 간의 도행을 쌓았고, 강우 는 백미선사의 불법을 전수받아서 우리들이 본문의 광영을 위해 일하는 데 그들의 공헌도 적지 않아. 원성은 원래 망창산(莽蒼山)의 성성이였으나 여러 번의 선연(仙緣)을 얻었고, 또 영경동생을 만나서 이곳에 와서 청복(淸福)을 누렸으니 이미 과분한 복을 누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은 또 우 연히 두 자루의 옥호검(玉虎劍)을 얻었으니 정말 기연이 겹치는구나. 조금 전 비뢰동 상공에서 그 가 강우의 등 위에서 쌍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더니 비록 탈수비행(脫水飛行)의 경지에 이르지 는 못했지만, 이미 아미파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어. 아마도 평소 우리들이 연습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익힌 것 같은데, 만약 이것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아미파 문하의, 금수들도 모두 재주가 있 는 것을 어찌 감탄하지 않겠어? 다만 아직 야성(野性)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양성지처럼 무 지몽매하게 설치다 화를 불러오면 영경동생이나 나라도 감당할 수가 없어. 보검은 그가 얻은 것 이면 당연히 그가 가져야겠지. 지금부터 우리는 그를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봐야 하고, 영경동생 도 그를 훈계하여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야 할 거야." 영경은 이 말을 듣고는 얼른 원성을 대신해서 감사를 표하며 명을 받들었다. 지선은 영운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속이 뜨끔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원성과 자 기가 선뢰정 선원(仙源)을 살펴본 일을 입에 올릴까봐서였다. 영경이 밖으로 나가더니 원성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는 영운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도록 했다. 원 성이 그 보검을 받는 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영운이 정색하며 원성에 게 당무를 내렸다. "이 두 자루 옥호검은 너의 선조 원공(袁公)이 동한(東漢)이 일어설 무렵에 남기신 기보로써 매 우 귀중한 것이다. 너는 절세 선연을 얻었으니 앞으로 매사에 유의하고 충성하며 문규를 어기지 않고 열심히 수련하여야 한다. 후에 교조님이 오시면 우리들이 간청하여 너를 환골탈태(換骨脫退) 시켜 줄 테니까 매사 주의하도록 해라. 만약 본분을 어기고 큰 잘못을 저지른다면, 너도 잘 알다 시피 아미파의 문규는 매우 엄해서 비검을 빼앗기는 것으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너의 생명도 보전치 못할 것이니,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느니라. 이제 이 보검은 네 것이다. 너의 주인 이선 고(李仙姑)가 시간이 나면 너에게 신검합일법(身劍合一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이제 후동으로 가 서 정신차려서 지키도록 해라." 원성은 이 말을 듣자 두려움에 떨며 두 손을 머리 위까지 치켜 들어 보검을 받아들고는 영경과 방 안의 여러 사람에게 예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자령자매와 남고남매는 영운의 말이 매우 합당하고 이치에 맞자 내심 가슴으로부터 존경심이 솟 아올랐다. 영운이 말했다. "이제 의논해야 할 것은 새로 입문한 네 사람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야. 처음에 우리들은 그들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또 사존의 명을 받지도 않아서 함부로 그들을 데리고 올 수 없었 으나, 능진인(凌眞人)께서 그들을 가련하게 여겨 직접 나타나 사정을 이야기했던 거야. 능진인은 소문에 의하면 새로 청해파(靑海派)를 열어 지금 문하제자들을 구하고 있대. 그들 네 사람은 자질 이 보통 이상인데 어째서 자기 문하에 거두지 않고 우리 아미파로 보낸 것일까? 우리는 지금 절 대로 그들을 함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은 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아 그런 화를 불 러들였으니, 모르긴 몰라도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애들이야. 호아의 말에 의하면 양성지의 심 술(心術)은 가장 감당하기 힘들다고 해서, 장교사존께서 돌아오시기 전에는 여기 머물게 할 수 없 어. 하지만 지금 능진인이 중간에 끼어들어 있으니 골치야. 만약에 그들을 보낸다면 고약한 성질 의 능진인이 그냥 있을 리 없거든. 이 응벽애에는 많은 기보가 숨겨져 있으므로, 그들이 여기에 머무른다면 머지 않아 또 분명히 잔꾀를 부릴 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장교사존께서 돌아오 시길 기다려서 다시 조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당초에 능진인은 나중에 장교사존께서 오셔가 지고 제자로 거두지 않겠다면 자기가 데리고 가겠다고 했으니까... 내 생각에는 그들 네 사람을 잠시 동안 동배(同輩)도우로 대우하되 검법은 전수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만약 그들 네 사 람이 이상한 기미를 보인다면, 장교사존께서 돌아오셔서 처리한다 해도 능진인과의 관계 때문에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니 차라리 내가 빌어온 구천원양척을 되돌려준다는 구실 아래 데리고 청라 (靑螺)에 가서 능진인에게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한 다음 그분의 조치를 따를 작정이야. 다행히 능 진인부부는 도술이 고심하여 일개문파를 세웠으니, 그들 문하에 들어간다 해도 다만 문파만 다를 뿐 아무런 차이가 없거든. 여러 도우들의 의견은 어때?" 여러 사람들은 영운의 말을 듣고는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그때 누구보다 불안한 사람은 남고였 다. 처음에 호아가 양성지에게 이용당해 실수를 저질렀을 때부터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좌불안 석이었는데, 지금 영운의 말을 들으니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약란, 지선, 영경 세 사람에게 몇 번이나 간청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운이 가장 우두머리인지라 그가 지시 를 하면 따라야 했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남고는 동생인 호아가 여간 밉살스럽지 않았다. 호아가 잘못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며칠 동안 자기에게 보여준 호의로 미루어 보면, 자기 혼자를 거두어 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은 혹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린 동생은 어떻 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지금부터 호아와 함께 매사에 조심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돈독한 정을 맺 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남고가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을, 나머지 사람들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알아차렸다. 영경 은 그녀가 새삼스레 가엾어져서 뭐라고 말을 붙이려 했으나, 영운이 재빨리 눈짓으로 말리는 바 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참 동안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령은 영운에게 몇 수 가르침을 받았으면 고맙겠 다고 청했다. 그러나 영운은 겸손을 보이며 정중히 사양했다. 아미파의 요결을 전수받은 자기로서 정, 사의 다른 점을 조목조목 알고 지적하면 자령자매로서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 문이다. 영운은 신조로 하여금 후동을 지키되 한 치도 허점을 보이지 않게 하고, 경운에게는 동문들을 데리고 무공연습을 하도록 했으며, 원성에게는 이상이 생기면 자기한테 급히 알리도록 지시했다. 자정이 되기 전에는 조를 나누어 보초를 서는 사람 이외에는 모두 방으로 돌아와서 수련을 쌓았 다. 그러다가 축시(丑時)가 되자 모두들 동굴 밖으로 나갔다. 연습대련을 하는 시간인 것이다. 영운은 여러 동문들을 데리고 응벽애 앞으로 갔다. 어떤 사람은 나뭇가지나 돌 위에 서고, 또 어 떤 사람은 땅을 딛고 섰다. 각자 자기 편한 대로 자리를 잡고는 영운의 지시에 따라 검광을 뿌리며 중앙의 영운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돌진했다. 한바탕 진짜 격전을 방불케하는 부딪침 속에 자줏빛, 푸른빛, 흰빛, 붉은빛 등 십여 개의 검광이 지상 십여 장 높이에서 변화무쌍하게 뒤엉키며 허공을 수놓았다. 그것은 마 치 수백 마리의 용이 뒤엉켜 싸우는 것 같았다. 영경은 비뢰경동(飛雷經洞) 입구의 약간 고지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휘두르 는 한 줄기 자줏빛 검광은 영운, 금선 두 사람의 검광과 공중에서 뒤엉켜 마치 세 마리의 용이 맹렬히 싸우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금속성의 충돌음이 발 밑에서 들려왔다. 영경이 주의를 집중해 들으니, 그 소리는 아래의 동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영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동굴은 이미 약란과 영운 두 언니가 각기 법술로써 봉쇄했는데, 어떻게 수십 장 멀리까지 저 렇게 큰소리가 들릴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녀는 손을 휘저어 검광을 회수한 다음 그 동굴로 가서 살펴볼 생각을 했다. 영운남매는 영경의 검광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자 그녀가 또 무슨 수단을 부리려는구나 하고 짐 작했다. 그래서 그들도 손을 휘저어 두 줄기 검광을 뿌리며 그녀를 따라붙었다. 약란과 주문은 검 광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다가 영경의 검광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그 뒤를 영운남매가 따라가는 것 을 보자, 그녀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그 뒤를 쫓아갔다. 이래서 다섯 갈래의 검광이 공중에서 뒤 엉켰다. 약란의 검광은 비교적 약하여 여러 비검의 혼전을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금선은 붉은빛, 자 줏빛 두 가닥의 검광을 뿌리며 한편으로 약란에 맞서면서, 한편으로는 주문을 도와 영운을 향해 공격해 갔다. 영운은 미소를 짓더니 '야압!' 하고 기합소리를 지르면서 검광을 뿌렸다. 세 사람의 비검과 맞상대해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기세였다. 주문은 몹시 재미가 났다. 그녀는 웃으면서 약란에게 소리쳤다. "내가 금선사제를 좀 재미있게 해줄게." 그리고는 약란을 도와 맹렬히 금선을 협공하기 시작했다. 영운도 상대하기 힘든데 게다가 주문까지 가세했으니 금선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금선은 마침 내 참지 못하고는 소리쳤다. "문누이는 예의도 없어? 나는 누이를 도우려고 했는데, 도리어 나를 협공하니 무슨 짓이야!" 자령과 한악은 그들 동문들의 연습대련이 매우 재미있어서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나중에는 경운과 문기를 제하고는 모두 금선을 둘러싸 버렸다. 그 바람에 금선은 쩔쩔매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사람의 검광이 이처럼 한창 어우러졌을 때, 돌연 암벽 위에서 영경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영경이 서 있는 곳에서 약 일곱 자 길이 되는 데 한 줄기 푸른빛이 막 공중으로 솟아오르 는 것이 보였다. 영운이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큰일났구나! 사매들은 빨리 저 푸른빛을 추적해라!"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모두들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 푸른빛은 남쪽으로 날아가다가 슬쩍 방향을 바꾸더니 영운의 검광을 향해 날아왔다. 두 검광 이 막 충돌하려는 찰나, 푸른빛은 마치 청룡이 바다에서 노닐듯이 홱 방향을 바꾸어 섬전과도 같 이 빨리 날아갔다. 영운은 아미파의 비기인 <착광량영법(捉光凉影法)>을 이용하여 그 청광을 추격했다. 동시에 나 머지 사람들도 좌, 우, 중 사면으로 나뉘어 추격했다. 이 바람에 비뢰경동 입구를 막는 사람이 없 어져 버렸다. 그 청광은 퇴로를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비뢰경동 쪽으로 섬전처럼 날아가 동굴 속 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청광은 빠르기도 했지만 맞서려하지 않고 달아나기만 하니 쉽게 쫓아갈 수가 없었다. 영운이 급히 소리쳤다. "진사매! 잠깐 기다려요!" 자령은 막 미진기를 사용하려다 영운의 말을 듣고는 멈칫멈칫 하는데, 비뢰경동 입구에 검은 그 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갑자기 맨발의 어린 화상 하나가 나타나 그 청광을 회수하고 있었다. 그 청광은 소화상의 손에서 마치 다시 날아갈 듯한 청사(靑蛇)처럼 꿈틀거리더니 소화상이 다른 손 으로 때리자 곧 한 자 남짓한 한 자루의 작은 칼로 변했다. 돌연 동굴 안에서 두 줄기 청황색 검광이 쏘아져 나와 그 소화상을 무찔러 가는데, 얼른 보니 바로 원성이었다. 소화상이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었다. 원성은 어떻게 당했 는지도 모르게 일검을 맞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소화상의 출현 長笑落飛禽, 惡嶺無端逢壯士 遠鄕聯美眷, 倚閭宰可慰慈親 이영경은 동굴 속에서 소리가 들리자 앞으로 가서 유심히 들어보았다. 그 동굴은 전에 영운이 이미 봉쇄했기 때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곳이다. 막 사람들을 부르려는 순간 동굴 안에서 한 줄기 금빛이 번쩍이더니 곧이어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오르며, 그 연기 속에서 청사(靑蛇)와도 같은 광화(光華)가 찌르듯이 뻗어나왔다. 영경은 동굴 안에 비검이 숨겨져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비검을 회수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창졸지간에 일어난 뜻밖의 상황에 온몸이 마비된 듯 놀라서 멍하니 보기만 할 뿐, 그것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동료들이 그 비검을 막으려고 우루루 몰려오는 것을 보고도 도울 생각 을 못하고 있는데, 그 푸른빛이 공교롭게도 그녀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영경은 그제사 정신이 번쩍들어 급히 자줏빛 검광을 뿌리며 쫓기 시작했다. 그 청광과 몇 장 거 리를 두고 쫓아가고 있을 때, 비뢰경동 입구에서 돌연 소화상이 나타나더니 그 청광을 회수하는 것이 아닌가. 영경은 머잖아 어떤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는 <염선>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화 상은 처음 보는 얼굴일 뿐 아니라, 파수꾼들의 경보도 없이 갑자기 후동에 나타났으니, 그녀로서 는 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원성이 그 소화상의 일장에 절벽 아래로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갈일성, 자영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들 가운데 태반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정신없이 청광을 쫓아가기만 했는데, 그런 찰나 에 이런 기이한 사건이 벌어져 원성이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목격했으니, 너무나 깜짝 놀라서 미처 영운의 외침소리를 듣지 못했다. 앞장서서 쫓아가던 사람들 가운데 영운을 제외하고는 약란이 가장 빨리 날아와서 거리가 가장 가까왔다. 동시에 연이은 외침소리와 함께 검광법보가 뿌려지며 우루루 몰려들었다. 금선이 급히 쫓아와서는 큰소리로 외쳤다. "저분은 소사형(笑師兄)입니다. 여러 사자매들은 무례를 범하면 안 돼요!" 소화상도 신룡과 같은 검광이 채운홍광(彩雲紅光)과 어울려 섬전처럼 맹렬하게 날아오는 것을 보았으나 그들이 적이 아님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의 반들반들한 대머리가 번쩍한 순간 어느 새 종적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고, 네 사람이 영운과 금선의 고함소리를 들었을 때쯤은 경운, 문기 주 문이 현장에 도달했으나, 아무도 소화상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이때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던 원성이 일행들 앞으로 기어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선고(吳仙姑)께서 저와 강우를 상대로 비검(比劍)을 한 다음 갔다가 온다고 가시면서 동굴을 잘 지키라고 하시기에 명을 받들어 후동을 지키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그 어린 도둑놈의 화 상이 공중에서 빙글 돌면서 내려오지 않겠습니까. 막상 그에게 얻어맞아 나가떨어졌지만 그가 누 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생명부지의 상대에게 얻어맞고 나니 화를 삭일 수 있어야죠. 그러니 어린 도둑놈의 화상이라는 욕이 튀어나올 밖에요." 금선은 원성이 거친 말을 함부로 해대자 벌컥 화가 치솟아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갑자기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원성의 왼쪽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금선이 짓궂게 웃으며 쏘아붙였다. "맞아도 싸다. 누가 네놈더러 사람을 해치라고 하더냐?" 영경은 원성이 계속해서 얻어맞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아팠으나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성더러 공손한 말씨를 쓰라고 호통을 쳤다. 금선은 그런 눈치도 모르고 계속해서 원성에게 을러대었다. "만일 소사형이 빨리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네놈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그리고는 목이 터져라고 소화상을 불렀다. 몇 번이나 소리쳤으나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원성은 금선이 '소사형'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 소화상이 같은 문파 사람임을 깨달았 다. 자기가 실수를 저지른 게 분명해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추궁에 따라 원성은 머뭇머뭇하면서 입을 열었다. "공중에서 소화상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저는 어떤 사람이 공중에서 정신을 잃고 떨어지는 것 으로 여겼지요. 그래서 다칠까 봐 강우더러 그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강우는 어쩌면 그가 적일지도 모르니 저절로 내려오기를 기다리자고 우겼습니다. 저는 평소에 강우의 고집에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순간 '이놈의 날짐승 골탕 한번 먹어봐라' 하는 생각이 불쑥 치밀대요. 그 래서 그를 구하려 하기는커녕 도리어 칼을 빼들고 찌르려고 준비했지요. 그 소화상은 곤두박히듯 빠르게 아래로 떨어져 내리더니, 어느 순간 그림자도 보이지 않지 뭡니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흘 끔 뒤를 돌아다보니, 그 소화상이 '아미파는 근본이 얼마나 중한지 모르는구나. 오래 지 않아 한 무리의 남녀들이 우루루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런 쓸모없는 성성이에게 지키게 하다니, 정말 웃기는군' 하면서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내력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저를 빈정거리니 참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강우가 동굴 앞 바위 위에 서 있다는 것마저 잊어버리고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그를 추격했습니다. 처음에는 적인지 친구인지 확인할 셈으로 칼로 그를 막으며 어디서 왔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 대꾸없이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너를 보아하니 정파 문하에서 기르는 짐승인 것 같은데, 아직 야성을 버리 지 못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고명한 어른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구나'라고 빈정거리더 군요. 저는 그래도 참으면서 그의 내력을 물었지요. 그러자 그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서 '네가 나의 내력을 묻는 것을 보니, 아마도 누가 네놈더러 이곳을 지키라고 한 모양이구나. 이곳 방어임 무를 맡았으면 적과는 반드시 싸워야지, 적이 왔는데 내력만을 계속 물어봤지 입만 아플 뿐 무슨 소용이지? 나와 싸우면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뒤에 내력을 말해도 늦지 않겠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었지만, 주인의 친구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코 먼저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 겨룰 거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맨손으로 상대할 테니까 저더러는 칼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다가는 잘못하여 그를 죽일 것 같아 공격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공격하라고 자꾸 재촉하길래 할수 없이 검으로 몇 번 내리쳤습니다. 그 사람은 몸집은 작아도 몸은 강철보다 더 단단하여, 제가 몇 번을 내리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더군요. 게다가 오히려 반격으로 나왔습니다. 사실 말이지, 검을 사용한다는 것이 도리어 불편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일단 검을 출수하고 나니까 너무나 빨리 움직이는 검광을 감당할 수가 있어야지요. 결국 그에게 여남은 대나 두들겨맞고 나니 온몸이 저 리고 아팠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더러 쓸모없는 폐물이라고 욕을 퍼붓고는 휑하니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버립디다. 강우는 그때까지 시종 방관하면서 도와주지 않더니, 막상 소화상이 사라지려고 하니까 그제사 저를 재촉하며 그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죠. 암만해도 주인 님과 그 소화상은 서로 모르는 사이 같아서 적으로 여기고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답니다. 이 두 자루의 보검이면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호되게 얻어맞고 아래로 나가떨어졌으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원성의 말을 듣고 보니까 잘못은 원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화상인지 작은 도적놈인지 하 는 자 쪽에 있었다. 더구나 그가 몰래 속임수로 원성을 쳤다는 것을 알고는 영경은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금선은 소리쳐 소화상을 부르다가, 문득 손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금선은 성도(成 都)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가 은형법(隱形法)을 이용하여 장난을 쳤던 것을 기억하고는, 손에 잡히는 물건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를 발견하려고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귓가에 난데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금선아우, 두리번거릴 필요없어. 너를 만나러 왔는데 내가 그냥 갈 것 같니? 단지 이곳에는 치 마두른 사람들이 여럿이고 게다가 돼먹잖은 성성이놈의 오만함이 꼴보기 싫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야. 저 성성이는 나한테 호되게 당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전처럼 방자하게 설치지는 않겠지. 나는 사부님의 명으로 해야 할 일이 매우 많은데, 나와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할 까?" 금선은 그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였다. 손 안의 물건은 두 개의 붉은 열매였다. 그는 미처 기미도 못 채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뜸 말했다. "소사형이 여자 동문들하고는 만나기 싫대. 그러니까 다들 연습이나 하고 있어요. 나 혼자 가서 만나고 오겠으니." 그리고는 훌쩍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영경은 금선의 손에 들어 있는 붉은 열매가 필경 망창산(莽蒼山)에서 딴 것이라 추측했다. 그래 서 약란에게 뭔가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 금선은 이미 날듯이 뛰어가 버린 것이다. 영운은 그 동굴 안에 뭔가 보물이 들어 있는 줄 알고 법술로써 막아버렸던 것인데, 혹시 내가 잘못 추측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쨌든 후에 다시 한번 조사해 보기로 결정하고는 더 이 상 언급하지 않았다. 금선이 소운간을 지나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렀을 때 소화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싸늘하 게 빛을 발하는 한 자루 짧은 칼과 편지 한 통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 고는 한참 동안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자운사(慈雲寺)의 일이 끝난 후 여러 제자들은 외공(外功)을 쌓기 위해 각지로 흩어졌다. 금선과 유난히 친한 소화상은 <흑해아(黑海兒)> 위지화(尉遲火)와 함께 운남성(雲南省) 일대를 구경하고 계화산(桂花山) 복선담(福仙潭)에서 오풍초(烏風草)를 캐고 있을 금선과 만나려 했던 것이다. 그런 데 금선일행이 도중에 <염선>과 묘일부인(妙一夫人)을 만나는 바람에 아미를 지나서 구화(九華) 로 돌아가지 않고 응벽애의 선부(仙府)를 열게 된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금선이 계화산으로 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고, 위지화와 의논한 다음 홍화모 모에게 들키지 않도록 은형검법을 펼치며 계화산 복선담으로 숨어들어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만 약 흥화모모에게 발각되면 선초(仙草)를 주거나, 아니면 금선 일행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복선담에 도착해 보니 그 연못은 이미 겁화(劫火)를 당해 돌조차도 까맣게 타버렸고, 사 람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금선일행이 이미 이곳을 다녀서 산으로 돌아간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며칠간 궁리하다가 위지화와 함께 다시 구화(九 華)로 돌아온 소화상은 민가를 돌아다니며 적선행(積善行)을 쌓았다. 두 사람은 생김새부터 매우 대조적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크고 얼굴이 넓적하며 얼굴색은 온 옥(溫玉) 같은지라 그 우습게 생긴 모습은 보는 사람마다 웃음을 참지 못하게 했고, 한 사람은 머 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쇠처럼 새까만 데다 목소리는 마치 종이 울리는 것처럼 우렁차서 차가운 기운이 돌았다. 둘 다 나이가 열네다섯 살밖에 안 되는데, 한 사람은 중의 차림새고, 또 한 사람은 도인 복장이 어서 절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데도 함께 다니니, 그들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 나온 소 도동(小道童)이려니 여겼다. 소화상은 사람들이 자기 두 사람을 기이하게 여기자 그것이 재미있어서 더욱 이상한 행동을 저 지르곤 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소화상은 마음씨가 어질어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도 살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흑해아> 위지화는 심성이 강직하여 악을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일반 세상의 악당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십중팔구 죽음을 당했다. 너무 그렇게 심하게 처리하지 말고 회개시켜 서 새사람이 되게 해주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으나 그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곤명부(昆明附) 곽만산(郭萬山)에 이르렀을 때였다. 하늘을 쳐다보니 해는 이미 서산으로 기울어 지는데, 때는 늦은 춘삼월인지라 자색 산빛에 버드나뭇잎은 금빛을 발하며 나풀거려, 그 경치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왔다. 위지화기 갑자기 소화상에게 말했다. "소(笑)사제, 내가 듣자니까 너의 일성장소(一聲長笑)는 산천초목이 진동할 뿐만 아니라, 온갖 새 들은 놀라서 날아가고 호랑이, 표범도 놀라게 하고 원숭이도 두려워한다고 하더군. 너는 어려서 불가에 입문한지라 소식(素食)에 습관이 들었고 또 벽곡(壁穀)의 경지에 올라 먹지 않아도 별 상 관이 없으나, 나는 비록 현문(玄門)에 있지만 사부님께서 육식을 금하지 않으셨어. 수중에 사부님 께서 주신 은자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이 근처야 어디 식사할 만한 곳이 있어야지. 요 며칠 동안 한 번도 배불리 먹지 못했으니 산 속의 호랑이, 표범 따위를 잡아서 구워먹으면 사람을 해치는 맹수도 줄이고 허기도 채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여기는 깊은 산골이어서 산세도 험하고 사방에 인적도 드무니 분명히 맹수들이 있을 것이야. 너는 한번 크게 웃어서 맹수들이 놀라 뛰어 나오게 하란 말이야. 그럼 나는 기다렸다가 때려잡을게." 소화상은 비록 무예가 고강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고행두타(苦行頭陀)의 손에서 성장한 데다 출 생 때부터 불심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고행두타의 계율은 매우 엄하여, 소화상도 십여 년이 넘게 고된 수련을 거쳐서야 문규를 어느 정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외공을 수련하면서 비록 사냥을 하고 싶은 마음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지 만, 장난이라면 몰라도 이유없이 동물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호랑이, 표범이 비록 사람도 잡아먹을 맹수이긴 하지만, 이렇게 깊은 산 속에 숨어 있으니 그들 이 악행을 저지를 리가 없잖아? 우리가 법술로써 그런 맹수들을 끌어내어 죽인다면 하늘의 도리 를 어기는 것이니, 그럴 수는 없소." "이런 얼간이! 세상에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맹수가 어디 있나? 지금 죽이지 않아 누군가가 해 를 입은 다음에는 그놈들을 죽인들 이미 늦은 거야. 정 못 믿겠다면 너는 웃기만 하여 그놈들을 불러모아 봐. 그것들이 우리를 보고도 덤벼들지 않으면 그들은 착한 맹수일 것이니 그때는 죽이 지 않으면 되지 않아, 어때?" 그래서 소화상온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먼저 바람이 안 부는 곳을 찾아서 돌을 쌓아 불피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는 높은 곳 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과연 그 일대는 나무숲이 울창하고 산세가 험하여 맹수들이 거 처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문득 멀리 동북쪽을 바라보니, 깊은 계곡에 안개가 자욱하고 봉우리 는 낙조가 비치어 자못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소화상은 이상함을 느꼈다. '지금 날씨가 청명(淸明)하여 비록 고산준봉에 수목이 울창하고 많은 나무와 꽃에 저녁 해가 비 치어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내는데, 어째 저 봉우리만이 저렇게 암울한 잿빛을 띠고 있을까? 나의 안력(眼力)으로 도저히 무엇인지 알아낼 수가 없구나. 운남(雲南)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독풍(毒風) 악장(惡腸)을 보았지만, 오늘 본 것과는 달랐어. 저기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있 다.'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흑해아>가 옆에서 재촉했다. 소화상이 웃으며 말했다. "흑사형! 그럼 귀를 막고 자세히 살펴봐." 이렇게 말하고는 큰 머리를 흔들며 목을 길게 빼고 단전(丹田)에 진기를 끌어모은 뒤 가볍게 입 을 열었다. 처음 그의 목구멍을 울리고 나오는 소리는 마치 생황(笙簧) 같은, 아름답고도 날카로 운 소리였다. 한참 동안 웃음소리를 질렀을 때, 문득 옆의 나무숲 속에서 '푸드득 푸드득!' 일대 소동이 일어 났다. 온갖 새들이 소화상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모두 날아올라 두 사람 머리 위를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산 속의 모든 새들이 날아왔는지 점점 많아져서 두 사람의 주위는 온통 새까맣게 새들로 가득했다. 위지화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소사형은 원래 여인강(女人腔)을 배웠나 보군. 이처럼 새들만 불러모아서야 언제 내 배를 채우 겠어. 그러면서 나보고 귀를 막으라니, 그만두시지." 그러나 위지화는 경솔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화상의 입에서 청천벽력처럼 거창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산봉우리가 흔들리고, 바람과 구름도 무색해지며, 하늘을 날던 새들은 깜 짝 놀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어떤 놈은 놀라서 날개짓으로 귀를 막다가 땅으로 떨어지고, 어 떤 놈은 머리를 돌려 무리를 벗어나는 등 새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위지화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소사제, 그만 멈춰! 장난이 아냐. 그놈의 웃음을 더 듣다가는 내 귀도 고막이 터지겠어." 소화상은 금방 웃음소리를 멈추더니 어두운 얼굴이 되어 말했다. "큰일이야, 야단났어. 순간의 즐거움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새들에게 해를 입혔으니, 사부님께서 이 일을 아시게 되면 가만두시지 않겠는 걸!" 이렇게 걱정하고는 또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사부님께 전수받은 선천일기(先天一氣)를 운용하여 장소성(長笑聲)을 지른 거야. 한 번 장소성을 지르면 어떤 맹수라도 두려움에 떠는데, 어째서 호랑이나 표범은커녕 원숭이 한 마 리도 나타나지 않지? 사방 백 리 안에 한 마리의 호랑이도 없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막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돌연 일성대갈(一聲大喝)이 들려왔다. 산기슭에서 머리털이 온 얼굴을 덮고 표범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으며 손에는 철간(鐵竿)을 든 작달막한 사나이가 걸어나오더니 가까이 다가와서 소리쳤다. "어디서 온 놈들이건대, 여기서 소란을 피워 나의 형을 놀라 죽게 했느냐?" 이렇게 말하고는 철간을 쳐들어 소화상에게 겨누었다. 소화상은 처음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이 일대에 거주하는 야인(野人)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 를 붙잡아 놀려줄 생각을 했는데, 말씨를 들으니까 한인(漢人)이었다. 어쨌든 방금 웃음소리를 내 질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니 잘못은 자기에게 있는지라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화상이 몸을 피하자, 그때까지 옆에서 꼴을 보고 있던 위지화가 대뜸 그 사람의 철간 을 맨손으로 움켜잡고는 호통쳤다. "이게 어디서 굴러온 들질승이길래 사람을 해치려 까불어? 너 오늘 나에게 맛 좀 봐야겠구나!" 그 사람은 소화상의 괴상한 웃음소리 때문에 병중에 있는 친구가 혼절하여 죽자 화풀이를 하려 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철간을 한번 휘두르기도 전에 앞에 있던 사람은 연기처럼 사라져 흔 적도 찾을 수 없고, 난데없이 얼굴이 시커먼 어린 도인이 달려들어 자기의 철간을 움켜잡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당기고 밀고 힘을 썼으나 어느 쪽도 철간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무술에는 백지여서, 위지화는 몸을 한쪽으로 틀며 동시에 날쌔게 상대방의 왼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그를 넘어뜨려서 내력을 추궁한 다음 아주 요절을 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 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그 사나이는 타고난 괴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비록 손목을 위지화에게 붙잡혔지만, 한번 힘을 쓰니 위지화의 몸 전체가 흔들렸다. 위지화는 깜짝 놀랐다. 일성대갈을 지르며 상대방의 두 손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가하여 가슴 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거칠게 왼팔을 비틀면서 오른발을 쳐들어 금나수법을 펼쳤다. 누가 보아도 사나이가 꼼짝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겉보기는 우매한 사나이는 실상 영리하 기 짝이 없어 위지화가 가까이 다가서기를 기다려 양 팔을 동시에 앞으로 뻗으니, 위지화는 하마 터면 상대방의 손을 놓칠 뻔했다. 위지화가 잇따라 여러 가지 수법을 펼쳐도 우매하게 보이는 사나이가 교묘하게 피해 버리자, 소 화상은 깜짝 놀랐다. 그가 한참 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사나이는 겉보기엔 어리숙하지만 사실은 뛰어난 자질과 비 범한 골격의 소유자였다. 소화상은 그가 결국은 위지화에게 변을 당할 것이므로 애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화상은 짐짓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이봐요. 나는 여기서 그저 단순한 웃음거리로 즐겼을 뿐인데 사람이 놀라서 죽었다니, 그게 무 슨 말이오? 우리 사형과 싸울 게 아니라 그 사정을 밝혀 어디 시비를 가려봅시다. 만약 정말 내 가 누군가를 놀라게 하여 죽게 했다면, 내가 도로 살려주면 되잖아요?" 사나이는 위지화에게 두 손목을 잡혀 용을 쓰는 동안에도 동굴 안에 혼절하여 죽어 있는 동료를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 새까맣고 작달막한 도인녀석하고는 암만 싸워도 승산이 없을 것이 확실한지라 털어내어 버리고는 얼른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몸을 꼼짝할 수 없으니 어쩌 랴. 사나이는 초조함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럴 때 소화상이 진정인지 놀리는 건지 모를 소리를 하므로, 위지화를 노려보며 욕을 퍼부었다. "모두 너희 두 놈 때문이야. 어머님이 생전에 나보고 '너는 힘이 무척 세니까 잘못 싸우면 사람 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과 싸운 적이 없었다. 조금 전에 네 놈의 웃음소리를 듣더니, 병중에 있는 우리 형이 뜻밖에도 봉황이 날아온다고 하지 뭐야. 나 참, 그래서 형을 부축하여 바깥에 나와 보니 바로 네놈의 고함소리였어. 처음에는 그런 대로 듣고 견 딜 만했고, 또 온갖 새들이 모여드니 형은 오히려 기뻐하기도 했어. 형은 네놈의 성이 손씨(孫氏) 인 줄 알고는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려 했는데, 그때 갑자기 네놈이 울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형 의 병이 호전될 듯하다가 네놈의 그 괴상망칙한 소리에 혼절하여 그대로 죽은 거란 말이야. 그래 서 나는 형을 동굴 안에 안아다 눕혀놓고는 호랑이 잡는 철간을 들고 나와 화풀이를 하려고 했더 니, 네놈은 꼼짝도 하지 않고 도리어 이 시커먼 귀신이 나를 막는구나. 좋아! 네 말대로 이 검은 귀신에게 내 손을 풀어주라고 해. 그래서 같이 나의 동굴로 가서 우리 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잔 말이다. 이미 죽은 지가 한참이나 되었는데 네녀석이 도로 살려낸다고? 흥! 만약 살려낸다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당부한 말씀대로 너희 두 놈과는 아무런 원한을 맺지 않겠다. 만약 네놈 들이 살려내지 못하면 네놈들은 이 철간에 세 대씩 맞아야 해. 아냐, 너희들이 나를 먼저 때려. 그런 다음 내가 너희들을 때리겠다. 누가 누구를 죽이든지 절대로 책임지지 않기로 하잔 말이야." 여기까지 듣고서야 위지화는 그 사나이가 나타난 곡절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니 자 기도 모르게 손의 힘이 빠져 사나이의 손을 풀어주었다. 일단 몸이 놓여나자, 사나이는 재빨리 몸을 돌려 새처럼 민첩하게 측면의 수십 장 높이 절벽 위 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여기저기로 벼룩처럼 튀며 경신술을 쓰더니, 어느덧 절벽 뒤쪽으로 사 라져 버렸다. 하도 기가 막혀서 위지화가 그 사나이를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소화상을 쳐다보니 소화상 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태연히 서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쳤더라도 은형검법을 쓰면서 추적하면 사나이가 숨은 곳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두 사람이 절벽 위로 날아올라 두리번두리번 하자 큰 바위 옆에 납작한 동굴이 보이고, 그 동굴 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동굴 안을 기웃이 들여다보니 속은 그리 넓지 않은데 불빛이라곤 한 점도 없었다. 문에서 가까운 널따란 청석(靑石) 위에는 웬 청년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방금 도망친 사나이 가 슬픈 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옷가지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사나이는 두 번 큰소리로 누워 있는 사람을 불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별안간 대갈일성을 지르며 철간을 잡 고 동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막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사람 그림자가 번쩍하는지라, 사나이는 일순간 멈칫했다. 그러 나 상대방이 소화상임을 알아보고는 곧 철간을 쥐고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소화상은 가볍게 몸 을 날려 사나이의 등 뒤에 내려섰다. 볼품없이 허공을 치고 만 사나이는 다시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소화상의 태도를 보니 만면에 미소를 띠고 여유만만하게 서 있는지라 불끈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다시 공격을 가했다. 이번에도 소화상은 여유있게 피해 버렸다. 사나이는 철간을 쥐고 춤을 추듯이 마구 휘둘렀지만 소화상의 몸에는 스치지도 않았고, 소화상 은 시종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사나이의 이마에 방울방울 맺힌 땀방울이 달빛에 드러났다. 위지화는 팔짱을 낀 채 한가히 구경을 하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나이는 위지화의 웃음소리를 듣자 더욱 화가 치미는지 철간을 더욱 맹렬히 휘둘러댔다. 그러 다가 끝내 자기 실력으로 어찌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는지, 철간을 땅에 내팽개치며 탄식했다. "나는 도저히 당신을 당할 수가 없으니, 맺힌 한을 풀 길이 없구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조금 전의 약속대로 당신이 나를 먼저 세 대 때리시오. 절대로 피하지 않겠소. 그 다음에 내가 당신을 때리겠소. 만약 이를 거부하면, 당신이 하늘 끝까지 도망간다 해도 내가 추적할 거요!" 소화상이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과 나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때려서 죽이고 죽고 한대서야 너무 심한 일이 아니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단련이 되어서 당신은 결코 나를 때려서 죽이진 못할 것이오. 당신은 매우 민첩하고 저 얼굴 검은 친구는 과히 좋지 않은 사람 같아서 그런 제의를 했지요. 당 신이 나를 때려서 죽이지 못하겠지만 나는 단 한 대에 당신을 죽일 수 있으므로, 간단히 원수를 갚을 수 있거든." "당신 속셈을 다 아는데 내가 미쳤다고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해요? 내가 당신을 때리지 않으면 당신도 나를 때릴 수 없을 것이니, 그러면 서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사나이는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내가 왜 당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는지 모르겠군. 당신이 나를 때리지 않는다고 내가 당신을 때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소. 정 당신이 때리지 않겠다면, 내가 먼저 때려주지." 소화상이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면서 말했다. "그거 좋겠군. 나는 천하의 악적이니, 살아 있어 봐야 세상에 해만 끼칠 뿐이거든. 자, 나를 어서 치시오." 사나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이었다. 그저 두 눈에 불을 켜고 소화상을 쏘아볼 따름이 었다. 이 어린 중놈을 산 채로 씹어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겠는데, 놈은 여유만만하고 해치울 실력 도 없으니 애가 탈 수밖에. 사나이는 소화상이 도망갈까 봐 그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재빨리 막아서곤 했다. 애가 타고 조급한 나머지 사나이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위지화는 웃음을 머금은 채 방관할 뿐 한 마디의 참견도 없이 서 있었다. 소화상은 사나이의 화가 조금 풀렸다고 판단되자, 비로소 진지하게 말을 붙였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나를 막을 수도 없소. 만약 내가 도망가려고만 한다 면 당신은 내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니 이제 내 말대로 당신 형님의 목숨을 살 릴 궁리를 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사나이는 소화상의 말을 듣더니 반신반의하면서 조금 풀어진 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그게 바로 죽은 것이 아니오.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도 여러 사 람과 의원를 찾아다녔으되 결국은 아무 효험도 못 보았소이다. 당신이 아까부터 형님을 살리느니 어쩌니 하는데, 그걸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도대체 이미 끊어진 목숨을 당신이 어떻게 살릴 수 있다는 거요? 정말 당신이 내 형님을 살려내기만 한다면, 앞으로 당신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리다." "좋소. 그러면 더 이상 설왕설래로 시간만 낭비하지 말고 어서 당신 형님을 보여주시오." 그제사 사나이는 얼굴에 희색을 띠며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이제 당신을 의심하지 않겠소. 비록 내가 당신을 잡아 묶을 수는 없지만, 저 동 굴에는 출로(出路)가 없소. 당신이 만약 전에 왔던 의원처럼 엉터리 시술을 할 경우 나는 당신을 동굴 안에다 가두어 버릴 것이오. 내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나중에 당신이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오." 소화상은 개의치 않고 동굴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사나이의 말은 진심이었다. 동굴 문을 막고서 소화상이 치료하는 것을 보다가 수틀리면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소화상은 청석 위에 누워 있는 청년을 들여다보다가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청년은 이 작달 막한 사나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선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화상은 생각했다. '이런 험한 산 속에 이렇게 뛰어난 자질을 갖춘 기재가 숨어 있었다니! 이번에 길을 떠날 때 사 부님께서, 아무리 천공(千功)을 쌓아도 천부적 자질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셨지. 사부님 문하에 는 오직 나밖에 없어, 혹시 내가 무슨 변고를 당한다면 도통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일인데, 혹시 이들은... 이 두 사람은 자질이 모두 보통 이상이야.' 소화상이 보니까 청년은 병으로 기가 쇠진해서 잠시 혼절했을 뿐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 심조심 청년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잠시 시간이 지나니 청년은 약하게나마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화상은 스승에게서 얻은 단약을 한 알 꺼내어 청년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입을 벌리고 원기(元氣)를 불어넣었다. 원진(元津)으로 변한 단약은 운기를 운행함에 따라 청년의 복부 로 흘러들어갔다. 한참 후, 갑자기 청년이 소리쳤다. "아아! 머리가 왜 이리 어지럽지?" 그리고 나서 청년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소화상은 일어나려고 애쓰는 청년을 가만히 제지했다. "당신은 큰 병을 앓았군요. 이제 겨우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니 휴식을 취해야 해요." 이렇게 말하면서 또 한 알의 단약을 그에게 먹였다. 청년은 단약이 입에 들어오자 향기로운 냄 새가 진동할 뿐 아니라 그 단약이 입에서 복부로 내려가니 한 줄기 원기(元氣)가 용솟음치는 것 을 느꼈다. 청년은 두 달 동안이나 병고에 시달리던 자기 몸이 갑자기 회복되고 기분이 상쾌해지 자,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커다란 은혜를 입었음을 알아차렸다. 작달막한 사나이는 청년이 정말로 살아난 것을 보자, 들고 있던 철간을 집어던지고 달려가 엎어 지며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아이구 형님, 정말 살아나셨군요!" 그리고는 소화상에게 연방 머리를 조아리며 그 덕을 칭찬했다. 청년이 말했다. "아우는 버릇없이 굴지 마라. 이 어리석은 형은 병이 이미 골수에 미쳐 아무리 네가 간호한다 하더라도 회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몸이 이토록 가볍고 병이 씻은 듯이 나았으니, 저분은 진정 기인(奇人)이심이 틀림없다. 나는 그분의 명을 받들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니, 대 신 네가 은인께 예를 갖추도록 하라." 작달막한 사나이는 청년의 이 말을 듣자 어찌할 바 몰라 우물쭈물 잠자코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마침 위지화가 들어왔다. 그제서야 사나이는 소화상, 위지화 두 사람을 향해 넙죽 엎드려서 절 을 했다. 소화상은 황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사나이는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공손한 말씨로 주워섬겼다. "당신은 정말 살아 있는 신선이십니다. 저의 형님을 이렇게 살려주시다니! 조금 전에 제가 지은 죄는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형님께서 살아나셨으니 당신이 뭐든 명령만 내리시면 제 목숨을 던 져서라도 따르겠습니다." 소화상이 말했다 "그 일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고, 우선 당신 두 사람의 내력과 성명부터 밝혀보시오." "그러지요. 저희 어머님은 성이 상씨(商氏)였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성을 따랐고, 이름은 풍자(風 子)입니다. 저희 형님의 성은 주씨(周氏)입니다." 소화상은 그제서야 작달막한 사나이와 소년은 동복형제가 아니라 의형제임을 알았다.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님에도 우애가 정말 두텁구나 싶어 의형제를 맺게 된 경위를 물으려는데, 청년이 말을 가로막았다. "두 분 은인들께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소화상은 청년을 만류했다. "비록 단약을 복용했지만, 당신은 원기를 너무 많이 잃었으므로 적어도 세 시진은 기다려야 비 로소 원상회복이 가능해요. 지금 말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움직여서는 안 돼요. 내일 아침쯤이면 침상에서 일어나도 무방할 것 같군. 우선 죽이라도 먹는 것이 좋겠소." 마침 청년도 시장기를 느끼는지, 상풍자를 보고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상풍자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아이쿠, 형님이 이젠 먹을 것을 다 찾으시니, 정말 잘되었네. 이젠 정말 살아난 겁니다, 형님. 며 칠 전에 형님의 옷을 팔아서 한 냥 닷 푼을 마련했지요. 그걸로 쌀을 사서 채소죽 한 솥을 끓였 는데, 형님이 그걸 통 드셔야 말이지. 그 죽이 남아 있으니 곧 따뜻하게 데워서 가져올게요." 상풍자는 이렇게 말하고, 즉시 죽솥 아궁이에다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마른 삭정이를 집어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우리 형님이야 괜찮지만, 저 두 분께는 뭘 대접하지? 어찌 된 일인지, 한 달 전부터 이놈의 천 잠령(天蠶嶺)에 짐승이라고는 씨도 보이지 않으니, 어찌 된 셈일까? 나야 며칠이든 굶어도 상관없 지만 형님을 구해주신 두 분께 대접할 것이 없어서야... 정말 큰일났구나." 귀 밝은 소화상이 이 소리를 들었다. 최근에 짐승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전에는 짐승이 많았다는 뜻이 된다. 문득 아까 괴성을 지른 자기 행동을 떠올리자 쓴웃음이 나왔다. 청년도 상풍자의 말을 듣고는 두 사람의 은인한테 대접할 방법이 없는지라 몹시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의 속마음을 짐작한 소화상은 좋은 말로 위로했다. "우리들의 끼니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먹지 않아도 견딜 수가 있고 우리 사형도 마찬가 지니까요. 우리 불가인은 열흘을 굶어도 상관없으니 신경쓰지 마세요. 내가 보기에 언행이며, 의 복이며 분명히 대가집 자제분 같은데, 어떡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소? 좀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 시면 좋겠구려. 어려움이 있다면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 않겠소?" 청년은 그 말을 듣더니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경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화상은 그 청년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취도인(醉道人)이 새로 거둔 제자 주운종(周雲從) 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제3권으로 계속> 촉산기협(2부) 3 자운사의 잔당들 張老實三更探盜窟 周雲徒千里走荒山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 온갖 위험끝에 자운사의 그 음험한 용담호혈(龍潭虎穴)을 빠져나온 주운 종(周雲從)은 다행히도 장노사(張老四) 부녀를 만나 그들의 도움으로 도망치다가 <신안(神眼)> 구림(邱林)의 집에서 우연히 아미파의 거물 취도인(醉道人)을 만나서 그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 던 것이다. 취도인은 장씨부녀가 운종에게 베푼 구명지은(救命之恩)을 들먹여 운종으로 하여금 장옥진(張玉 珍)소저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하고, 그에게 상담검(霜潭劍) 한 자루를 하사하여 신부에 대한 예물 로 삼게 했다. 취도인은 벽균암(碧筠庵)에서 여러 선협들과 만나 자운사의 일을 의논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 에 운종에게 검법입문 한 권을 주고는 총총히 떠나갔다. 운종과 장씨부부는 취도인을 배웅한 다음 운종의 시종까지 합쳐 네 사람이 운종의 가향(家鄕)을 향해 길을 떠났다. 장씨부녀의 호위를 받으며 계속되는 여행은 즐거운 일이었다. 이윽고 귀양(貴陽)에 이르자 장노사는 여관을 찾아서 자기네 부녀는 일단 그곳에 묵고 운종만 그의 집으로 보내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집으로 가는 도중에 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어서, 한동안 생각한 끝에 함께 가기로 작정했다. 운종은 편지를 써서 시종인 소삼아(小三兒)에게 주고는 빨리 말을 달려 먼저 가서 부모님께 알 리도록 했다. 내실의 방 하나를 깨끗이 치워 옥진이 거처할 수 있게 준비해 달라는 것이다. 운종의 아버지 자경(子敬)은 아들이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웬지 가슴이 뛰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들 노형제 아홉은 원래 우애가 돈독한 데다 자식이라고는 운종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모두 운 종의 안부가 걱정스러웠다. 그들 형제는 모두 상당히 재산을 모았고, 또 학식도 쌓았으나 자식복 이 없는지라 자손이라고는 오직 운종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집을 떠나 만리타향에 있는 운종에 게 혹시나 사고가 생기지 않았나, 병이라도 들지 않았나, 아홉 형제가 노심초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꿈자리까지 사나와서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운종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딸려보낸 왕복약(王福若)에게는 돈걱정말고 인편이 있을 때마다 수 시로 집으로 서신을 보내라고 일렀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끊이지 않고 소식이 오더니 요사이는 전혀 소식이 없는 것이다. 마침내 형제들이 모두 모여 운종의 일로 이 걱정 저 걱정을 하자 자경 이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이미 늦었고, 내일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사람을 보내볼랍니다. 만약 그 사 이에 운종이 돌아온다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없는 것이고, 설령 운종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 사람을 붙여 놓으면 안심이 되겠지요." 이 말을 듣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주씨형제들은 비록 분가를 했지만 모두들 인근에 살고 있고, 또 우애가 지극히 깊어 한 달에 몇 번씩은 모여서 회식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날은 모두들 심사가 불편하여 일찍 헤어졌다. 자경이 이처럼 운종에 대한 걱정으로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소삼아가 온 얼굴에 먼지가 뽀얗게 덮인 채로 말고삐를 쥐고 헉헉거리며 들어왔다. 자경부처는 중도에서 돌아오는 것이 뻔한 터라, 소삼아를 보자 전날의 여러 가지 불길한 일이 머리에 떠올라 간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삼아는 급히 뛰어오느라고 말도 못하고 숨만 가쁘게 몰 아쉬었다. 자경부처는 속이 바작바작 타지만, 누구도 아들의 안부를 먼저 묻지 못했다. 소삼아는 주인이 조급해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가쁜 소리로 말을 했다. "주인나으리, 주인마님, 걱정마십시오. 공자께서 돌아오십니다." "뭐라구? 돌아와?" "예." 자경부부는 본래 침착한 사람들이지만 운종이 돌아온다는 소리를 듣고는 마치 하늘에서 보석이 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기뻐서 연방 밖을 내다보며 운종이 어디에 오느냐고 캐물었다. 소삼아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이 그동안의 사정을 상세히 말했다. "공자께서는 그동안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위기를 겪으셨습죠. 그러나 장씨 성을 가진 영웅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지금 그 장씨부녀의 호위를 받으며 편안히 집으로 돌아오 시고 계십니다요. 그러느라고 소식이 뜸했던 것입니다요. 이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도 달하셨으므로 저더러 바삐 돌아가서 소식을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그 은인 장영웅에게는 따님이 계시므로 그분들이 도착 즉시 들 수 있도록 방 두 칸을 깨끗이 치워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요. 자세한 이야기는 공자께서 오시면 직접 들으시지요." 자경은 그 말을 듣자, 한편 기쁘고 한편 놀랍기도 하였다. 그는 하인들에게 빨리 방을 치우도록 지시하고, 또 여덟 형제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한편, 다그치듯이 소삼아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물었 다. 그러나 소삼아는 몹시 죄송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좋은 사연이 있었다는 것밖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요. 공자께서 직접 이야기하시겠다며 저 더러 자세한 이야기는 삼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요. 주인나으리, 그보다 우선 방을 준비하는 일이 중요하구먼입쇼." 자경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부인 양씨(楊氏)에게 사람을 시켜서 방을 정리하게 했다. 그리고 자 기는 소삼아를 데리고 문 밖으로 나가서 아들이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하고 기다렸다. 어느덧 황혼이 스러지고 하늘이 점점 어두워질 무렵, 비로소 웬 노인과 처녀를 대동하고 말을 타고 오는 운종의 모습이 보였다. 소삼아가 쪼루루 뛰어나가 운종을 맞이했다. 운종은 대문 앞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자, 이때까지 겪은 그 기막힌 고초가 주마등처럼 떠올라 가슴이 뭉클 했다. 그는 얼른 앞으로 달려가서 아버지앞에 넙죽 엎드려 절했 다. 자경은 소삼아에게 들어서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지라, 말없이 아들을 안아 일으켰다. 네 사람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나자 소삼아는 하인들을 데리고 집을 단단히 경계하기 시작했다. 자경부자는 장씨부녀를 대청으로 안내했다. 운종의 어머니도 뛰어나왔다. 그녀는 아들을 보자마 자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못하고는 오직 품안에 꼭 껴안고 기쁨의 눈물만 뿌렸다. 자경은 이미 장씨부녀가 자기 아들에게 어떻게 해주었는지를 알기 때문에 극진하고 정중하게 예 의를 차려 대했다. 운종은 새삼스레 아버지께 절을 올렸다. 그리고 나서 몸을 일으킨 운종은, 조금 머뭇머뭇하면서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도중의 풍상과 고역을 참아내지 못한 불효 소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 대한 백부님, 숙부님 들의 크나큰 기대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부득이 이렇게 중도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그만 큰 풍랑을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다 가 그만 빠지고 말았는데, 이 어른과 장소저가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어서는 엄청난 파도 속에 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장소저는 저를 구할 때 오직 사람을 살려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남 녀간의 예의도 차리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소저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제가 오늘 어찌 여기서 아버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돌아오는 도중에 선장(仙長) 한 분을 만나 그분의 지시로 장소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돌아온 터인즉, 아버님, 어머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소자 마음대로 결정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세한 사정은 이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경은 놀라움과 기쁨이 엇갈리는 심정으로 아들의 이야기에 머리를 끄덕이며 신중히 들었으나, 가만히 생각하니 아들의 말이 소삼아의 말과 아귀가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럴만한 무슨 연고가 있으리라 짐작하여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운종의 어머니는 아름답고 총명해 보이는 처녀를 보자마자 여자의 직감으로 이미 둘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이미 운종의 아내인 데다 생명의 은인이라니, 그녀에 대 한 사랑스러움이 더욱 가슴에 차올랐다. 더군다나 자기 아버지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태도는 몹시 겸손하고 얌전하여 그처럼 예절을 아는 행동거지가 더욱더 마음에 들였다. 그래서 그녀는 운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며느리를 자기 옆에 불러다 앉히고는, 아들을 어떻게 만났느냐, 어쩜 그렇게 여자답잖은 용감성으로 운종을 구할 수 있었느냐 하고 쉬지 않고 물어댔 다. 옥진은 운종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당부한 대로 매사에 남의 이목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갓 결혼한 새악시라 시어머니를 대하는 품이 어려웠기 때문에 '네', '아닙니 다' 라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아버지되는 자경이 아내의 수다를 만류하므로써 옥진은 비로소 질문공세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임자는 새아기에게 아직 궁금한 것이 남았소? 우리 가문의 은인이신 장영웅께 아직까지 인사도 올리지 않고 뭘 하는 거요?" 그제서야 운종의 어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옥진과의 이야기를 중단하고 남편과 함께 장노사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차렸다. 장노사도 사돈부부의 인사에 공손하게 답례했다. 자경이 말했다. "저희는 형제가 아홉이나 되지만, 자식이라고는 이 애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제 자식놈이 공명(功名)에 급급하여 과거를 보겠다고 하기에 먼 길을 떠나보내 놓고는 모두들 얼마나 걱정했 는지 모릅니다. 도중에 그런 위급한 국면을 당하여 자부(子婦)의 구함을 받았다니, 참으로 기연이 군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식놈은 벌써 고기밥이 되었을 것이니, 하마터면 집안 혈통이 끊어질 뻔했습니다. 우둔한 자식놈을 이처럼 구해 주시고 또 현숙한 따님과 혼인까지 시켜 집까지 보호 해 함께 와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장노사는 일찍부터 강호의 협객으로 명성을 얻은 전력의 소유자라 사람을 보는 눈이 밝았다. 자 경의 사람됨을 보니 청렴하고 예의를 알며 재산이 많음을 과시하지 않는지라, 딸아이를 맡기기에 는 더없이 좋은 자리라 여겨졌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새삼 인사를 차려 사의를 표했다. 운종의 어머니는 그래도 궁금증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좀더 상세한 사정을 알아낼 생각으로 짐짓 남편에게 말했다. "새아기가 먼 길을 왔으니 피곤할 거예요. 아까 소삼아의 말을 듣고 방을 치워놓긴 했는데 마음 에 들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운종에게 말했다. "너는 장인어른을 모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받들고 있거라. 어미는 새아기와 함께 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가보련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장노사에게 다시 인사를 차리고는 옥진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옥진은 생각지도 않게 마음에 꼭 드는 낭군을 만났을 뿐 아니라 시어머니되는 분도 이처럼 극진 하고 자애로운지라 마음이 더없이 푸근했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자 살며시 웃 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시어머니을 부축했다. 운종의 어머니는 며느리가 이처럼 영리하자 매우 기뻤다. 두 사람은 즐겁게 내실로 들어갔다. 자경과 운종은 장노사를 그가 거처할 방으로 안내했다. 그런 다음 시종들을 모두 내보내고 나서 운종은 비로소 눈물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 앞에 꿇어앉으며 울기 시작했다. 자운사에서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가 옥진에게 구출되었던 일, 그리고 취도인을 만나 제자가 되고 옥진과 혼례를 올 린 일 등을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자경은 아들의 말을 듣자 끝내 침착을 잃어버렸다. 가슴이 쪼개지는 듯한 아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장노사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하인들에게 술과 안주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자경은 날이 이미 어둑어둑해졌으니 형제들 모두 저녁식사를 했거나 하는 중이리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운종이 도착하자마자 백부, 숙부들께 일일이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너무 여러 집인 데다 위험을 겪고 겨우 돌아와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아들을 재촉하기가 안쓰러웠다. 모두들 우애가 깊은 형제들이라 운종을 친아들처럼 생각하니 너무 예의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리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연락을 해서 모이게 할 생각이었다. 이윽고 주안상을 내당에 마련한 운종의 어머니는 소삼아를 보내어 자경에게 장노사를 모시고 내 당으로 들도록 했다. 자경은 소삼아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장노사를 내당으로 청했다. 운종은 뒤에서 따라 들 어오다 어머니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아팠다. 옥진이 그간의 사정을 전부 말했던 것이다. 운종과 양씨부인은 다시 껴안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장씨부녀가 몇 번이나 달래자 그때서야 울음을 그쳤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그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운종이 무사히 돌아왔고, 게다가 아름다운 아내까지 얻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전화위복이라면 전화위복이랄 수 있지 않겠는가. 즐겁게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하다 보니 시간가는 줄도 몰라, 식사가 끝났을 때는 이미 자정 이 가까와져 있었다. 자경은 그제서야 웃고 떠들며 즐기느라고 여러 형제들에게 연락하는 것을 잊어 먹은 것을 깨달 았다. 지금 청한다고 해도 모두들 달려오기는 하겠지만 피로한 운종이 여러 사람들에게 예를 올 린다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고, 또 야심한 밤에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것 같아서 내일 아침 운종 이 직접 일일이 찾아가서 뵙게 하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결정하고는 아내의 의향을 물었다. 양씨부인도 혀를 차면서 말했다. "저도 이야기하느라고 그 일을 잊어먹었군요. 다른 분들은 상관없으나, 다만 둘째시아주머니만은 성격이 괄괄한 데다 또 요 근래 더욱 심기가 편치 않으시니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자경이 대답했다. "형수야 성미가 까다롭더라도 그 형님은 그렇지 않소. 우리 아홉형제는 모두 사리가 분명하오.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 운종을 혼자 보낼 수 없는 일이오. 내일 모든 분들에게 사정을 여쭙는다면 형수는 찜찜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형님은 그러시지 않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두 사람은 더 이상 이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자경은 또 장노사와 운종부부의 혼례식에 관하여 삼경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종의 어머니는 여종들에게 옥진의 시중을 들게 하면서 그날 저녁은 옥진과 함께 자기로 했고, 자경부자는 밖의 서방(書房)에서 역시 함께 자기로 했다. 부자(父子)는 부자대로 고부(姑婦)는 고 부대로 각기 함께 누워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운종이 백부, 숙부들에게 인사하러 가려고 막 세수를 끝냈을 때 친척들이 오 고 있다고 하인들이 달려와 여쭈었다. 자경부부도 그 연락을 받고 황급히 뛰어나가 그들을 맞았 다. 여러 형제들이 부인들을 대동한 채 만면에 웃음을 띠고 들어오고 있었다. 자경의 맏형을 위시하 여, 셋째, 다섯째, 여섯째 부부가 도착했고, 둘째, 넷째, 여덟째, 아홉째 부부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자경은 운종더러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올리게 하는 한편, 또 다른 형제들에게도 소식을 보내게 했다. 자경의 맏형이 웃으면서 말했다. "일곱째아우, 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없네. 우리도 운아가 돌아온 줄 몰랐었는데, 어젯밤 이경 쯤에 둘째가 사람을 보내서 운아가 왔다는 것을 전해 주더군. 그러니 구태여 소식 전하러 일일이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다네. 어제는 운아가 너무 늦게 돌아온 것 같아 일부러 부르지도 않았네. 내가 생각하기에는 먼 길에 힘들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돌아온 것은 분명히 까닭이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군. 그러니 한 집 한 집 찾아다니며 인사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내가 여기로 오면서 셋째, 다섯째, 여섯째 집에 들렸다 왔고, 또 둘째네 집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모두들 도착 할 걸세." 맏형인 자수(子修)는 사람됨이 매우 강직하여 여러 형제들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었고, 평소 운종을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매우 아꼈다. 운종은 백부의 말을 듣고 감격하여 그 앞에 꿇어앉아 예를 올렸다. 그러고는 막 일어서려 하는 데 자경의 둘째형 자화(子華), 넷째형 자범(子範), 바로 아랫동생인 여덟째 자집(子執), 아홉째 자 중(子中) 등이 연이어 도착했다. 자화만이 혼자 왔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부부가 함께였다. 모 두 서로 안부를 묻고 나서 자경부부가 둘째형수는 왜 오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자화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자네 형수는 어젯저녁에 해산 기미가 있어 몸이 불편하다는군. 그래서 오지 못했네." 운종의 어머니가 자경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그러면 운아를 보내어 인사를 올리게 해야겠지요?" 그리고는 자화에게 물었다. "의원은 다녀갔는지요?" 자화는 머뭇머뭇 입속말로 얼버무렸다. 운종은 온 집안 어른들이 함께 모이니 매우 기뻤다. 그는 여러 백부, 숙부들에게 인사를 올렸고, 운종의 어머니는 옥진을 소개했다. 자경은 사돈을 맺은 장노사를 여러 형제들에게 소개했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운종이 둘째백모에게 병문안을 가려고 하자 자화는 극구 말렸다. "운아야, 백모는 큰병이 아니니 다음날 가보아도 늦지 않다." 그래도 다녀오겠다고 운종이 몇 번이나 고집을 부렸지만 자화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아침에 시작된 연회는 즐겁게 이야기하느라고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모두들 길일을 택하여 운종과 옥 진의 혼례식을 올리기로 하고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운종은 둘째백부의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그러나 백부만 만날 수 있었을 뿐, 둘째백모 최씨는 끝내 만날 수 없었다. 막 문을 나서려고 하다가, 운종은 밖에 원숭이처럼 생긴 웬 사나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 굴에 분칠을 하고, 눈빛이 이상하게 번뜩이는 사내였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운종 이 나오는 것을 힐끗 쳐다보고는 잠자코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운종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다른 백부, 숙부의 집을 차례로 방문했다. 모두들 나이는 많았으나 자식이 없었으므로 한사코 붙잡고 이야기를 시키는 바람에 밤이 깊어서야 운종은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자화의 처는 재취였고 출신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점을 고려한 운종은 아버지, 어머니가 불 쾌하게 생각하실까 봐 둘째백모를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두 번이나 찾 아갔으나 운종은 끝내 최씨를 만날 수가 없었다. 운종의 혼례가 다가와도 최씨는 임신으로 몸이 무거워서인지 오지 않았다. 마침내 운종과 옥진은 정식으로 혼례를 올렸다. 참으로 다정하고 알뜰한 부부였다. 두 사람은 날 마다 아무도 모르게 취도인이 전해 준 검결을 연습했다. 운종의 부모나 집안 어른들은 지난번의 불상사에 질린 나머지 더 이상 공명(功名)에 집착하지 않고, 오든 것을 운종 자신의 뜻에 맡겼다. 한 달이 지나자 최씨는 과연 아들을 낳았다. 주씨 문중에 후손 하나가 더해졌으니 기쁘기 그지 없는 일이었고, 운종으로서도 동생이 생긴 셈이라 여간 기쁘지 않았다. 자화는 큰잔치를 열었다. 손님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운종의 혼례 때보다도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옥진은 혼례식을 올린 후 사흘 만에 운종을 따라서 집안 어른들을 찾아뵈었는데, 최씨만은 만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최씨는 아이를 분만하고 나서도 백일이 지나지 않았다는 핑계로 남편도 가 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시녀 둘과 유모만 자기 방에 출입시켰다. 그날도 최씨를 만나러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려고 막 가마에 오르던 옥진은, 문 득 운종이 전에 보았던 그 원숭이를 닮은 젊은이를 보았다. '아니?' 순간, 그녀는 웬지 간이 철렁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서 운종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제사 그 원숭이 같은 젊은이가 처음 보는 사람이며, 여태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옥진은 급히 운종을 시켜 자기 아버지를 모셔오게 하고는 그 이야기를 했다. 장노사는 듣고 나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네 말대로라면 그 자는 자운사 무리 중의 한 놈이라는 이야기 아니냐. 사대부 집안에 어째서 그런 놈이 와 있단 말인가." 주운종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황급히 연유를 물었다. 장노사가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 "내가 성도(成都)에 은거할 당시만 해도 나는 지통(智通)이란 화상이 계율을 철저히 지키며 수행 하는 고승인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그 뒤 약 이 년쯤 가까이서 보니 고승은커녕 무법무천(無法 無天)으로 악행을 자행하는 악당이 아닌가. 그걸 알고 나서는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왔지. 오 랫동안 손을 씻고 부지런히 일해 적지 않은 돈도 모아 이젠 좀 편안히 살겠구나 싶었는데 세상 일이란 것이 뜻대로 되지 않더구먼. 그래서 당장 그곳을 떠나버렸지. 하루는 딸애와 함께 무담산 (無擔山)에 가서 사냥을 하고 돌아 오는 길에 우연히 한떼의 강도를 만났었지. 날도 이미 저물고 해서 근처 사당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그곳에 그 사람이 있었지. 서로 인사치레를 나누는 중에도 유독 그놈만 우리 부녀를 똑바로 주시하더라구. 다음날 지통이 사람을 보내 나더러 자기 패거리 로 들어오라고 권하더구먼.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부름 온 사람이 나의 지난 과거를 손바닥 보듯 훤하게 아는 통에 그만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네. 그래도 나는 재삼 거절을 했지. 늙은이가 나 이도 나이려니와 무예도 잊은 지 오랜지라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거절했었지만, 그는 막무가내 로 나오더라구. 그래서 여기서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나를 그냥 내버려둬 달 라고 부탁하고 심부름꾼을 돌려보냈다네. 그 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들이 하는 것이 이해 가 가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네. 내가 젊었을 적에 비록 강호상에서 이름이 약간 알려져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무슨 일류 검협에 들 정도는 아니었고, 또 지통 자신은 말할 나위도 없고 휘하 패 거리에는 검술에 정통한 무인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들에게 내가 대체 무슨 소용이 되 겠는가 하는 점이었지. 내가 그의 비밀을 안다고 해도, 나처럼 걱정거리 많고 뒤가 켕기는 사람이 괜시리 호랑이 코털을 뽑아 일을 크게 벌리기야 하겠는가 말일세. 혹여 그가 만일에 대비한다면, 살인멸구해서 손쉽게 처리하면 될 일을 어쩌자고 수고스럽게스리 나를 패거리에 끌어들일려는지 그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네. 그러던 중에도 아직 그들 패거리에 끼여들지는 않았지만, 지객 승 요일(了一)과는 의기가 투합하여 자주 왕래하는 편이었지. 그래 조심스럽게 그들의 의도를 더 듬어보아 마침내 그 까닭을 알아냈었네. 그전부터 이상한 눈초리로 딸애를 힐끗거리던 녀석이 있 었는데 그놈의 이름은 <벽안향불(碧眼香拂)> 민소당(閔小棠)이라 하는 바로 지통의 외아들이었다 네. 나와 그의 사부 <남천대도(南川大盜)> 유위(遊威)와는 몇 차례 면식이 있었다네. 내가 그를 처음 봤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열네다섯 살에 불과했으니 내가 알아볼 수 없을밖에. 그런데 그 는 오히려 나에 대해서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지, 그들 패거리에 나를 끌어들일려는 목적이 나의 도움보다는 오히려 내 딸에 대한 욕심에 있었다네. 그놈은 지통에게 나의 내력을 얘기하고 같은 패거리로 끌어들인 다음, 지통의 중매로 내 딸을 차지하려는 속셈이었지만 내가 단호하게 거절했 지. 그래도 그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지. 그러나 그때 마침 일이 생겨서 그는 출문하게 됐었네. 게다가 지통도 밖에서는 덕망이 있는 고승으로 알려져 있었던 만큼, 성도 부근에서 괜시리 말썽 스러운 일을 벌리기를 원치 않았지. 마침 민가놈도 떠난 뒤라 그는 나를 떠나가게 해주었다네. 앞 뒤 따져볼 것도 없이 그곳은 결코 사람이 머물만한 곳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급히 떠났 지. 그렇지만 좀처럼 그놈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암암리에 은자를 나 누어 주어 가족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고, 조그만 채원(菜園)을 빌어서 근처에 십여 마지기의 땅을 사서 손수 가꾸며 그들의 의심을 피해볼 작정이었다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네를 만나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이라네. 처음에 민가놈이 떠났을 때는 이것으로 일이 잘되었구나 하 고 안심했었지만, 설마 그놈이 작당질할 곳이 바로 자네 집안일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그 놈은 한 쌍의 괴이한 눈(怪眼)을 지니고 있는데 참으로 흉물스럽게 생겼지. 만약 그놈이 온다면 이 집안은 반드시 화를 당하기 십상이라네. 그놈은 사부의 진전을 이어받은 데다가, 지통에게 검 술을 배웠으니 우리 부녀로서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네. 당장 마땅한 계책도 떠오르지 않으니 우 선 영존께 알리고, 또한 나도 먼저 가서 자네와 딸아이가 보았다는 작자가 그놈이 분명한지 확인 해 보겠네. 만약 그놈이 틀림없다면 곧장 자네 사부와 같은 일류 고수를 청해 오는 수밖에 없다 네." 운종은 부모가 이런 일들을 알게 되면 걱정할까 봐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우선 그 원숭이 같은 사내의 면모가 의심스러우니, 그와 둘째 백부와의 사이에 어떤 연고가 있는지만 물어보았다. 자경이 이 말을 듣고는 한숨을 내쉬며 지난 일을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이 일은 정말 내 입으로 말하기 거북하구나. 하지만 너도 이제 어엿한 장부가 되었으니 집안 사정을 알 때도 되었지. 몇 년 전 너희 둘째큰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너의 둘 째 백부는 답답하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고 장사(長沙)에 사는 친구를 찾으러 떠나셨다가, 돌아 오는 길에 사(謝)씨 성을 가진 한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이 필묵이나 놀리는 유생들이라, 어찌 세상의 험한 일을 알겠느냐. 온 가족이 다 모여서도 그 녀의 집안 내력을 알아낼 수가 없었으니, 그 또한 얼마나 답답한 일이었겠느냐. 아무튼 당시에는 방 두 개를 내주어 그녀가 거기서 머물도록 했었지. 한 반 년 남짓 지났을까. 그때쯤 되어서야 너 의 둘째백부가 정실로 맞아들였지. 그 후로 너의 둘째백부의 집에는 항상 낯모르는 사람들이 드 나들었지만, 집안 사람들은 단지 둘째백모의 친척들인 줄로만 알고 별로 괴이쩍게 생각하지 않았 다. 나도 네 둘째백부가 소원히 생각하실 것 같아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너의 큰백부께서도 수상 한 사람들이 자꾸 드나들자 몇 번 물어보았으나, 둘째백부는 그때마다 그냥 어물쩡 넘어가곤 하 셨어. 우리는 그냥 추측으로 너의 둘째백모가 우리와는 좀 다른 집안 출신인 것 같아서 그냥 묵 과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처음에 그녀는 행실도 단정하고 또 아이를 가졌기에 금세 정실로 맞아 들였던 것이지. 그러니 새로이 사돈간이 된 그쪽 사람들에게 잘 대하지 않으면 예절에 어긋날까 염려하여 여러 형제들에게 그들을 공손히 대하라고 일러주기까지 했었다. 너희 둘째백부께서는 그녀를 무척이나 총애하셨기에 우리들도 늘그막에 서로 얼굴 붉히기가 싫어서 웬만한 일은 그냥 넘어가곤 했었다." 아버지 자경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네가 이번에 집을 떠났을 때, 너의 둘째백모는 오랫동안 부려 왔던 집안의 여종을 내쫓았는데, 그 여종으로 말하자면 실은 우리 집안의 먼 친척뻘 되는 과부였었다. 외로운 신세가 측은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사람이 무던하다 싶어서 내가 집안의 허드렛일이라도 하도록 조처했었는데, 네 둘 째백모가 그녀의 행실을 이것 저것 트집잡고 나서서 걸핏하면 말다툼을 일삼았다. 그렇게 말썽이 일어나자 네 어미가 상황을 보아 그 여종에게 약간의 은자와 땅 얼마를 사주어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집에서 내보냈던 것이다. 그 여종의 말에 의하면, 네 둘째백모가 처음 우 리 집안에 들어올 때 처녀 둘을 데리고 왔었는데, 그녀들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는 무게가 꽤 나 가보이는 큰 상자가 전부였다고 하더구나. 하루는 우연히 그 상자 속에 소궁(小弓), 소전(小箭) 같 은 살벌한 병기가 가득찬 것을 보게 되었다고 했지. 그 여종이 나간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둘 째백모는 이전부터 써오던 그 집안의 심부름꾼은 모두 내보내고, 단지 올때 데려왔던 두 처녀만 남겨두었다. 네 둘째백부가 까닭을 묻자 백모는 단지 근검절약하는 뜻일 뿐으로 쓸데없이 많은 사람이 필요치 않다고 했었다. 그후 친정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도 좀처럼 그녀를 보기 힘들 지경 이었지. 이처럼 성격이 특별할 뿐 아니라, 차츰 안하무인이 되어서 동서간에도 오가는 정이 소원 해질 수밖에 없었다." 운종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곧 장노사에게 가서 들은 바를 얘기해 주었다. 장노사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옥진에게 몇 마디 당부를 했다. 운종이 비록 밤낮으로 열 심히 수련을 쌓아 무공실력이 어느 정도 성취를 보았지만, 수련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아 만에 하 나라도 강적과 겨룬다면 아직 상대가 될 수 없을 듯싶어서 딸에게 주의를 준 것이었다. 취선사가 내려준 보검은 깃털도 쪼갤 만큼 날카롭고, 보통의 비검 정도로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이기(利器)이기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음날 저녁이 되자, 장노사는 감쪽같이 야행복으로 변장하고, 면구까지 갖추어 쓰고 친히 자화 의 집에 잠입하여 동정을 살피기로 작정했다. 자정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는 데도 안방에는 아직 도 촛불이 어른거렸다. 장노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아기를 나은 아낙네가 이 늦은 야밤까지 무슨 할 일이 있다고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을 까?' 하지만 위험한 적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 장노사는 당년의 경신절기를 펼쳐 조심스럽게 지붕 위로 숨어들었다. 방 안에서 까르륵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장노사는 풍표낙엽(風飄落葉)의 신 법으로 민첩하게 마당으로 내려서서 숨소리를 죽이고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자화의 처 사씨 한 사람만이 침대 위에 앉아 농염한 자세로 한가로이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그런데 침대 앞에 놓여 있는 작은 탁자 위에는 술잔과 젖가락이 각각 두 쌍씩 놓여 있었 고, 술과 안주도 막 꺼내온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솟고 있었다. 장노사의 등줄기로 불길한 예감이 싸하고 지나갔다. '이거 좋지 않은데.....' 그가 막 몸을 돌리는 순간 머리 뒤에서 바람을 가르며 맹렬한 속도로 암기가 쏟아져 오는 것을 느꼈다. 장노사는 강적을 여러 번 만난 경험이 있었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종적을 알아냈다면 결 코 소홀히 대할 적수가 아니라 생각하고 즉시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구부린 채로, 봉황전시(鳳凰 展翅)의 수법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듯 삼사 장 밖으로 신형을 미끄러뜨리며 계속 태만하지 않고 황혹충천(黃酷沖天)으로 발등을 찍어누르며 한숨에 담장을 뛰어넘어 갔다. 이때 귓전에 '쉭쉭!' 하고 적이 발사한 암기가 스쳐 지나가자 조금의 빈틈도 없이 육지비등(陸地 飛騰)의 수법을 급히 시전하며 앞쪽을 향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달아났다. 뒤를 쫓는 인물이 별 기색없이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걸로 보아 상당한 무공의 소유자임이 틀림이 없었다. 장노사는 이대로 집으로 달아났다가는 적이 운종이 있는 곳을 알아버릴까 두려워하여 사람이 없 는 한적한 반대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쫓아오는 적의 경신술은 매우 빨라서 미처 뒤돌아볼 틈도 없이 죽자사자 앞만 보고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막 좁은 길을 꺾어져서 성벽 아래에 당도했을 때, 갑자기 더 이상 뒤를 쫓는 기척이 없어서 뒤 를 돌아본 장노사는 성벽 부근의 풀밭에 두 사람의 검은 형체가 막 서로 맞붙어 싸우려고 대치하 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둘 중 하나는 우연히도 자신과 흡사한 야행복을 입고 있는 데다 비슷한 면구까지 쓰고 있었 다. 대치하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은 워낙 빨리 움직이고 있어서 진면목을 분간하기가 어려웠지만, <벽안향불> 민소당의 스승 유위의 독문검법을 펼쳐 공격하는 자세로 보아 그가 민소당임이 틀림 없어 보였다. 장노사는 처음에 달려가서 느닷없이 나타난 야행복 입은 사나이를 도울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우선 만에 하나라도 사위에게 화가 미치면 안 되고, 또한 야행복 사나이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섣불리 도와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어쨌던 공교롭게도 급박한 순간에 저처럼 자신의 대용품(?)이 나타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실로 백중지세로 싸우고 있었는데, 숨어 보고 있는 동안에 또 하나의 날렵한 몸맵시의 흑영이 날듯이 달려와 민소당에 합세하여 야행복의 흑의인을 협공하기 시작했다. 장노사는 일이 점점 잘못 되어간다 싶어서 우선 암중에라도 흑의인을 도와야겠다고 작정하고 성 벽 아래로 내려갔다. 장노사가 막 풀밭에 다가설 즈음에 야행복차림 흑의인이 소리쳤다. "에라이 철부지한 연놈들 같으니라구, 너희 연놈들은 그래 어쩌자고 이 <암야유태세(庵夜遊太 歲)> 제등(齊登)어르신네를 공연히 집적거려서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버리려 한단 말이 냐?"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민소당이 급히 싸움권에서 벗어나며 큰소리로 서로 손을 멈추라고 소 리쳤다. "소생의 성명은 민소당이라 하며 <소방삭신투(小方朔神偸)> 오소(吳宵)와 <위진건곤일지화(威鎭 乾坤一枝花)> 옥왕아(玉王兒)와는 서로 절친한 사이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옥왕형(玉王兄)의 영 매(令妹)이신 <백낭자(白娘子)> 왕산산(王珊珊)이올시다. 만약 제형께서 성명을 먼저 밝히시지 않 으셨다면 자칫 잘못하여 같은 편끼리 강호의기를 깨뜨릴 뻔했습니다그려." 제등은 사람 됨됨이가 매우 음침하여 민소당이 말을 다 마칠 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비로 소 음험하게 얘길 꺼냈다. "본래 민형과 옥왕형의 영매이셨구려. 소제 이미 오래 전부터 두 분의 명성을 익히 들어 잘 알 고 있었지만 과연 명불허전이구려. 제때 알지 못했더라면 큰 죄를 저지를 뻔했소이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무슨 일로 이 지방에 오셨소이까?" "저와 산매(珊妹)는 최근 몇 년간 강호를 두루 유람하고 다니는 중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아미, 곤륜 등 인의(仁義)를 가장한 요승, 요도의 무리들이 강호인들을 겁난에 빠뜨리고 있지만, 소제의 의부(義父) 지통대사께서도 그들의 기세를 어쩌지 못하시니, 때가 올 때까지 힘을 기르려고 은거 할 곳을 찾던 중이었소이다. 그러던 중 산매가 우연히 돈 많은 늙은이 하나를 만나 이곳까지 따 라왔지요. 일이 제대로 풀리려니 그 사내가 마침 대단한 부자였어요. 당장 손을 써서 그 재산들을 가로채려 했는데 공교롭게도 산매가 그놈의 애를 배어버렸지요." 민소당은 파란 안광을 희번덕거리며 신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놈의 집안은 부신(副神)이 끼었는지 재물이 한량없이 많다오. 게다가 그놈들 아홉 형제가 모 두 자식이 귀해서 모두 합쳐야 아들이 하나밖에 없고 그에겐 아직 친자식도 없었소이다. 저번 달 에 산매가 아들을 낳았으니 요즘 그는 미칠 듯이 좋아한다오. 그래서 우리는 작전을 느긋하게 짜 서 한 이삼 년 기다리다가 그놈의 집안을 요절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지요. 우선은 우리의 피신 처로 안성맞춤이고, 또한 이렇게 거창한 부호의 집안을 통채로 삼키려니 자연 시간이 좀 걸리게 된 게지요. 하지만 요 며칠 사이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신경이 좀 곤두서 있소이다. 우연히 전부 터 알았던 부녀들이 돌연히 이 집안에 끼어들게 되어 바짝 긴장하고 있던 중에 제형께서 야밤에 이 마을을 기웃거리게 되셨으니 이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었구려. 그런데 이 집안의 모든 전답과 재산은 아홉 형제 각자에게 나누어져 있는 까닭에 그들 아홉 집안이 함께 모이는 날 한꺼 번에 손을 쓰고 산매의 자식놈에게 유산을 남긴다면 우리는 그냥 앉아서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 오는 게 되지 않겠소? 하하, 오늘 제형의 행색을 보아하니 마침 돈이 떨어진 모양이구려. 제형께 서 필요하신 만큼 말씀만 하신다면 나누어 드리는 일이 무에 어렵겠소."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민소당의 이야기를 듣고 제등은 음침하게 웃었다. "두 분께서 큰 건수를 올리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아미파 인물들이 마구 날뛴다지만, 소제는 홀로 강호를 누비고 다니며 그럴 듯한 상대를 만나지 못하다가 최근에 어린 녀석 둘에게 아주 망신을 당해서 여간 화가 치미는 게 아니라오. 그래서 모질게 마음먹고 화산에 들어가 열화조사(烈火祖 師) 문하에 투신하여 검술을 익히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소이다. 길을 나섰다가 우연히 장독(腸 毒)에 중독되어, 두 달 가량 앓다가 여기까지 다다른 것이지요. 두 분의 호의는 고맙소만, 단지 약 간의 여비만 있으면 족하오." 민소당과 왕산산은 이구동성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마땅히 제형을 집으로 모셔 대접을 해야 도리이겠으나, 마침 사소한 일이 생겨 사람들의 이목 을 조심해야 할 처지이오니, 제형께서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즉 여비를 넉넉 히 준비해 드릴 테니,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린 의기가 투합하여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인데 구차하게 무슨 예의를 그리 차리시오. 두 분 께선 아무 걱정 마시고 갔다 오십시오. 여비를 부탁하는 것만 해도 소제로서는 부끄럽기 그지없 는 일이외다." 민소당과 왕산산은 제등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돌아갔다. 잠시후, 민소당이 혼자 주머니를 들고 나타나 제등에게 주었는데, 보기에도 묵직한 것이 은자깨나 들어 있을 성싶었다. 제등은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하고 곧 떠나갔다. 제등은 원래 안순(安順), 동인(銅人) 일대에서 악명을 날리며 못된 짓을 일삼고 다니던 물건이었 는데, 우연히 관삭령(關索嶺)에서 채약을 하고 돌아오던 제갈경아(諸葛警我)와 맞닥뜨려서 혼뜨검 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을 했었다. 어린 사람에게 당한 곤욕을 생각한 그는 복수를 하지 않고는 앞으로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엄 청난(?) 맹서까지 했었다. 그런데 노상에게 병을 얻고 귀양(貴陽)에 와서 돈까지 떨어져 상거지꼴 이 되었으니, 얼마 전에 자신이 한 맹세를 금세 깨뜨려야 할 판이 되었던 것이다. 호주머니를 훌 훌 털어서 술 한 병을 사서 마시고 술김에 야행복을 갈아입고, 면구를 뒤집어쓰고 칠흑같은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성 안으로 잠입했던 것이다. 마땅한 부잣집을 골라 한탕 털기로 작정하고 막 골목을 꺾어 지날 때, 미풍이 휙 불며 흑영이 번쩍 지나갔는데, 채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이번에는 골목에서 한 사람이 검을 빼들고 다짜 고짜 공격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한참 싸우다 통성명을 해보니 서로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같은 패거리인지라, 피차간의 착오도 잊어버린 채 의기투합하여 자신들의 작당질을 자 랑삼아 떠벌리는 통에 진짜 자객은 소리 소문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장노사는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자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이로군. 하마터면 혼자서 세 사람을 상대할 뻔했으니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될 뻔했군.' 떠나온 지도 꽤 되었고 곧 새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오자 장노사는 딸아이 걱정이 앞서서 서 둘러 돌아갔다. 과연 옥진은 운종으로부터 아버지가 적을 염탐하러 갔다는 사실을 듣고 막 찾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장노사가 돌아오자 부부는 마음을 놓고 어찌 되었는지 경과를 물어보 았다. 장노사는 위험했던 순간을 소상히 얘기해 주고 운종더러 잠시 동안 그들의 계략을 모른 체하고 둘째백부집을 내왕하라고 일러주었다. "적의 낌새를 짐작해 보건대, 아직도 우리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는 것 같으니 지금 우리가 움직 이면 곤란할 일이 생길 것 같네. 내가 강호상에 원한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으니 자네집에 폐를 끼칠 염려가 있어 떠나야 한다고 영존께 전하고, 일부러 내게 냉정하게 대하시라고 일러주게. 그 리고 한 달 남짓 지난 후, 자네들과 말싸움을 일으켜 내가 홧김에 떠나는 걸로 꾸미세. 어젯밤 자 객사건으로 적들은 반드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테니 섣불리 일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내가 나가서 무슨 조처를 취할 때까지 결코 적과 맞서지 않도록 하게. 근래에는 그놈들도 아미파를 두 려워하니 감히 경거망동은 못할 걸세. 나는 성도로 가서 영사(令師)를 찾겠네. 만약 취도인을 뵙 지 못한다 하더라도, 구사숙을 찾아 유능한 검선을 모셔와서 그들을 처치한다면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을 걸로 생각되네." 이렇게 서로 상의한 뒤 계획대로 잘되기를 빌며 그들은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한편 민소당, 왕산산 두 악인들은 사흘을 두고 장노사 부녀의 동태를 지켜봤지만 별다른 기미가 없자, 자객은 우연히 들어온 제등이었다고 믿어버렸다. 자경은 비록 진상(眞相)을 잘 알지 못했지만 장노사가 집안의 은인이며, 요 며칠 같이 지내다 보 니 비록 강호인이라 언행이 거칠고 난폭한 점은 있었지만, 사람됨은 진실하고 중후하다는 것을 알고 서로 의기투합하여 흠모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장노사가 떠나겠다는 뜻을 말하자 자경이 간곡히 말렸다. "원수가 많다고 문 밖에도 나가지 않고 피신해 계시던 분이 어째서 갑자기 멀리 떠나시려 하 오?" 이에 장노사부녀와 운종은 재차 떠나야 할 이유를 말했지만, 운종의 어머니도 하나밖에 없는 아 들 때문에 이모저모로 걱정하다가 겨우 의지할 사람들을 만났는데 왜 떠나느냐고 막무가내로 말 렸다. 자경의 사람됨으로 보아 쉽사리 그냥 떠나보낼 것 같지 않고 적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그 들은 종전에 계획했던 대로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장노사와 사위 내외는 짐짓 정말 화 난 듯이 틈만 나면 서로 다투었다. 장노사는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마구잡이로 씨부렁거렸다. "계집이 시집을 가면 남보다 더하다더니 딸이나 사위나 모두가 한통속으로 늙은 애비를 괄시하 니 이게 불효가 아니고 뭐겠어. 내 비록 늙었지만 아직은 힘이 남았으니, 약초를 캐고 나무를 해 서 팔아도 한 몸 먹고 살 수는 있다구. 누가 저희들 눈치밥을 먹고 지낼 줄 알구?" 어떤 때는 술자리에서도 마구 사위와 딸자식에 대한 욕을 퍼부어대자, 차츰 사람들은 장노사와 운종부부가 참으로 사이가 나쁜 것으로 알게 되었다. 장노사는 마침내 화를 내고 자경이 준 물건 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냥 두고 처음 올때 가져온 보따리만 간단히 챙겨가지고 떠나버렸다. 그후 에 옥진은 방성통곡을 하며, 운종더러 사람을 시켜 각처의 사당과 절간을 뒤져 아버지를 찾아 달 라고 졸라대며 족히 며칠 동안 소란을 피웠다. 이렇게 유난을 떠는 통에 마침내 민소당 일당들도 속아넘어가서 장노사의 가출을 의심하지 않았 다. 운종부부는 그후 취도인이 전수해 준 검결에 따라 밤낮으로 무공을 수련했다. 그는 비록 부유한 집안 자식이라 곱게 자랐지만, 일찍이 큰 환난을 겪은 터라 의지는 의외로 굳건했다. 그는 일심으로 수련하는 동안 아미의 진전을 익혀 불과 세 달 남짓한 동안에 벌써 온몸의 근육 이 탄탄해지고, 골격이 변해 갔다. 상담검(霜潭劍)을 써서 아미초보검법을 숙련하는 동안에 옥진 도 적지 않은 진보가 있었다. 그들 부부는 검술을 익히고 수련하면서 오직 장노사가 빨리 성도에 도착하여 취도인을 모셔와 적을 제거하고 비검술을 배웠으면 하는 것만 생각했다. 그런데 장노사가 떠난 지 한 달이 지나도 록 종내 소식이 없었다. 옥진은 운종과 처음 화촉을 밝힌 날 밤 아이를 잉태하여,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껴 진맥 을 하니, 분명한 임신이라 온 집안 식구가 기뻐했다. 옥진이 임신하자 자경부부는 태아에 해를 끼 칠까 봐 무예연습을 그만두고 몸조리를 잘하라고 단속하는 바람에 그 후로 운종은 혼자 밤늦도록 검술을 익혔다. 운종은 하인으로두터 둘째백부네 집에 항상 낯선 사람들이 드나든다는 말을 들었다. 장노사로부 터 소식이 끊긴 지 오래 되었으니 도대체 취도인을 만난 건지 못 만난 건지 몹시 궁금했다. 어느날 저녁 부부가 방에서 한참 얘기꽂을 피우고 있는데, 홀연히 일진 미풍이 불며 붉은 그림 자가 창을 통해 뛰어들었다. 운종은 깜짝 놀라 즉시 검을 꺼내들었으나 옥진이 이미 그 사람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손을 멈추어요. 우리 고모예요." 운종이 살펴보니, 대략 삼십대 중반의 강건해 보이는 여인이 일신에 불타는 듯한 홍의를 걸치고 한 손엔 면구를 들었으며, 허리춤에 예리한 단도 한 쌍을 꽂고 등에 비스듬히 가죽부대를 걸머지 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표표하고 민첩했으며 눈빛은 서글서글하고 위맹스러웠다. 옥진이 그녀를 소개했다. "이분은 저의 고모님으로, 강호에 그 명성이 자자한 노처녀 <무정화(無情火)> 장삼고(張三姑) 그분이에요." 한 차례 인사를 나누고 세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자 옥진이 물었다. "팔 년 동안 못 뵙는 사이에 고모께서 한 분 여검선을 사부로 모셨다고 소식을 들었는데, 제가 여기 살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돌연히 오셨어요?" 삼고가 대답했다. "그 얘길 다하자면 내가 오늘밤에 돌아가지도 못한단다. 그러니 중요한 이야기만 간단히 하고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지. 내일 다시 가마를 빌어 정식으로 방문하여 집안 사람들을 놀라시지 않 게 할 작정이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옥진을 향해 웃으면서 삼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팔 년 전 무담산 부근에서 너희 부녀와 헤어진 후에도 나는 여전히 세상 넓은 줄 모르고 혼자 서 마구 싸돌아다녔단다. 하루는 상강(湘江) 어귀에서 우연히 형산 금모모(金姆姆)를 만나 하룻강 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들었다가 일초에 제압당했단다. 그분은 나의 행실이 비록 올바르 지 않았지만, 본성은 정직하다고 보셔서 날 문하제자로 받아주셨지. 동문으로 두 분 사저가 있었 는데, 후에 사부님이 최씨 성을 가진 사매를 하나 더 거두셨지. 사매는 매우 총명하고 자질도 좋 았는데, 너무 오만방자하여 사람을 골탕먹이는 일이 종종 있었단다. 나는 화를 참지 못하는 성미 여서 어느날 그녀에게 중한 상처를 입히고 말았지. 사부님께서는 웃사람이 아랫사람을 잘 다스리 지 못했다고 나를 탓하여, 벌로 사문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단다. 그때 사부님께서 조건 을 붙이시길, 오 년 내에 팔백외공(八百外功)을 실수없이 다 익힐 수 있으면 돌아와도 좋다고 하 셨단다. 그리하여 다시 이 혼탁한 강호를 떠돌아다니게 된 것이야. 내 비록 검선문하에 있었지만 사부님께서 내 성정(性情)이 침착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여 검법을 완전히 전수해 주시지 않아서 신검합일의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단다. 지난달 귀주(貴州) 경계 부근의 황야를 지나다가 네 아버지가 독화살에 맞아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단다. 난 그를 들쳐업 고 아는 집을 찾아들어 온갖 약을 구해 먹이고 보름 만에야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단다. 그래 서 네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단다. 나는 그가 잘못을 크게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사위가 부 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랐다지만, 취도인같이 유명한 검선이 제자로 삼았다는 것은 필히 장래에 큰 성취를 얻을 만하니까 그런 것인데, 어찌 취도인께서 그 집안이 요사인들의 손에 놀아 나게 그냥 버려두실 것 같으냐? 때가 되면 손수 찾아와서 악을 제거하실 텐데 왜 쓸데없이 찾아 나섰는가 말이다. 네 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강호를 횡행하며 수많은 적을 만들었는데, 그처럼 먼 거리를 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냐?" 삼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 아버지의 상처는 매우 위중해서 반 년 정도 요양을 해야만 겨우 완쾌될 정도였기에 내 친구 에게 부탁하여 성도 벽균암(碧筠庵)으로 모셔 머물도록 조치했다. 취사숙 문하의 송, 학 두 도동 을 만나 물어보니 자운사는 이미 파괴되었고, 취도인께서는 지금 외유중이시라 하더구나. 그리고 그곳은 별원(別院)으로 언제 돌아오실 지 잘 모른다고 하며 취사숙이 돌아오는 즉시 송, 학 두 도 동도 함께 아미산으로 떠날 예정이라는 말도 하더군. 내 생각으로는 자운사가 이미 와해되었으면 이곳에 민소당, 왕산산 두 음적만이 있을 터이니, 내 힘만으로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 했지. 그래서 한 이삼 일 더 기다려 몇 차례 더 벽균암을 찾아갔더니, 그 뒤에 취사숙이 한 번 들 렀는데 송, 학 두 도동이 네 아버지와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소상히 했더니 그저 웃기만 하시면 서 '너의 주사제는 부귀한 집안 자제라 도를 깨우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니 너는 장삼고에게 그냥 돌아가라고 일러라. 네 사제에게 비록 흉험한 일이 닥쳤지만, 부귀한 사람이 누구나 한 번쯤 격어야 할 겁난일 뿐, 궁하면 통하니 시일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거야'라고만 하셨다더구나. 두 도동은 자신의 동문에 대해 관심이 깊어 내게 그런 이야기를 소상히 전해 주더구나. 난 이 말을 듣고 아는 사람을 통해 네 아버지께 전하고 이곳으로 곧장 온 거야. 며칠을 검령산 수렴동(水簾 洞)에서 머물며 몇 차례에 걸쳐서 너의 둘째백부의 집을 살폈지. 원래 생각은 내 손으로 네 집안 의 해를 제거하고 난 뒤 너희 부부를 만날 작정이었지. 그런데 그곳에 민소당과 왕산산 두 음적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더구나. 자운사가 무너진 뒤 대부분의 잔당들은 흩어져 숨어 버렸는데, 그들 중 열서너 명 가량의 고수가 그 집에 버글거리고 있었다. 너희 백부는 왕산산에게 미혹되어 가사는 돌보지 않고 모든 일을 그들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있더구나. 말로는 그녀의 친 정 친척 두세 사람을 쓴다고 했지만, 그 자신조차도 그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잘 모르고 있는 눈 치야. 그놈들은 있던 하인들은 다 내쫓아 버리고, 자신들의 졸개들을 변장시켜 하인으로 삼아 그 집을 도둑소굴로 만들어 버렸더구나. 하지만 너희가 그들을 예의 주시한다는 사실을 아직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들은 아미파의 이목을 피해 집안의 금은 등 재물을 운남(雲南) 대죽자산(大竹子山)으로 옮겨 두고, 너희 둘째백부댁에 은신하여 때를 기다리 고 있는 게야. 그러나 결국에는 잔치를 크게 열어 너희 전가족을 불러서 한꺼번에 암살할 계획이 지. 너희 전 가족은 부지불식간에 까닭도 모르고 죽어가게 되는 거야. 둘째백부를 최후에 제거해 버리면, 왕산산 모자는 자연 수백만 냥에 이르는 이 집안의 전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차츰 돈 으로 바꿔 대죽자산으로 숨어버린다는 무시무시한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단다. 정말 천인공노 할 놈들이지! 내 보기엔 중과부적이니 조카사위 자네가 직접 취사숙을 찾아 뵙고 그분을 모셔와 야지 다른 사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로 판단되네. 그들이 비록 천천히 일을 꾸미고 있지만, 중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니 미리 방비해 두는 게 상책일 걸세. 내 한몸으로 자네 전가 족을 돌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자네 부모와 친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미리 위험에서 벗어나 는 게 마땅할 줄 아네. 만약 조카사위 자네가 친히 영사를 모시러 간다면, 내일 당장 내가 자네 집안을 방문하고 힘 닿는 데까지 지켜주겠네. 자네가 길을 떠날 때 아무런 꾸밈이 없이 연약한 일반 유생처럼 간다면 아무리 이파 검선들이 흉악하다 하지만 별다른 걱정은 없을 것일세. 시간 이 적지 아니 흘렀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네. 내일 다시 자네 집안 일에 대해서 얘기하기로 하세." 할 말을 마치자 삼고의 붉은 신형이 흐릿해지며, 곧 창문을 넘어 사라져 버렸다. 운종부부는 황 급히 전송하려 했지만 그녀는 벌써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장노사가 중도에 부상당했다는 사실을 듣고 부부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옥진은 애간장이 타기 시작했다. 삼고는 성질이 괴 팍하여 말을 마치자마자 한 마디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일이 이미 급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운종은 곧장 부모를 찾아가 소상히 아뢰고 밤새 의논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서동 소삼아가 와서 여자 손님 한 분이 작은 마님을 뵈러 왔다고 알리자, 더 물을 필요도 없이 어서 안으로 모시라고 분부했다. 옥진은 벌써 침실 하나를 손질해 놓고 있었는 데, 먼저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올리고 난 뒤 고모를 맞이하겠다고 했다. 조금 있자 과연 <무정화 > 장삼고가 중년부인 행색으로 예물을 가지고 가마를 타고 들어왔다. 운종이 황급히 마중나가 맞 아들이고 일변 부모께 알렸다. 가마꾼은 벌써 땅에 엎드려 장삼고가 내려서길 기다렸다. 자경부부는 며느리를 매우 사랑했으므로 멀리서 친척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극진히 대접했 다. 그리고 운종은 삼고와 더불어 자운사의 겁난과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해 부모님께 소상히 아뢰 고 성도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자경은 비록 유생이었지만 부부가 모두 성심껏 부처님을 공경하였다. 자경은 운종의 일로 고심 하다 잠이 들었는데 악몽을 꾸었다. 깨어나서 부인에게 꿈이야기를 하고 여러 차례 의논한 끝에 아무래도 신불(神拂)께서 운종의 이번 여행을 보우하실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겨 마침내 떠나도록 허락을 내렸다. 운종은 부모의 승낙을 얻자 이번 길에는 아무런 꾸밈도 없이 혼자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했 다. 자경부부가 금지옥엽의 아들을 혼자 보내는 일을 좀처럼 승낙을 하지 않자 운종은 자신의 무예 솜씨는 이미 장정 십여 명 정도는 능히 처치할 수 있을 정도인데, 괜시리 무공도 모르는 사람을 여럿 데려간다는 것은 도리어 번거로운 일이라고 재삼 설득했다. 그리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는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무예에 능한 몇 명의 사내들을 청해 후원 뜰에서 목곤으로 무술을 시 험해 보였다. 운종이 목곤을 마치 검처럼 휘두르며 신형을 민첩하게 움직여 한 번에 한 명씩 거꾸러뜨리는 것 을 보고 그의 부모는 매우 기뻐했다. 운종은 그들에게 은자 약간씩을 주고 결코 자기와 무술을 겨루었다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치 말 아 달라고 당부했다. 자경부부는 그래도 먼 길을 가는데 혼자서는 안 된다고 소삼아라도 데리고 가라고 하여 마지못 해 운종이 승락했다. 운종은 장삼고에게 부모님과 처를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하고, 부모님께 큰절을 올린 후 역도 (驛道)를 따라 떠나갔다. 처음에는 가마를 타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사람 눈에 띄일 것 같아서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사오 일 정도 걸어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어느날 운종은 전계(塡桂) 근처에서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빽빽한 숲으로 들어섰다. 길이 잘 못된 것을 알고 되돌아 나오려고 했지만, 서북쪽으로 가려면 오히려 동남쪽으로 가게 되고 가면 갈 수록 잘못되어, 마침내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 해가 막 서산을 기웃거릴 때, 사방에서 온갖 꽃향기가 난무하였고 나무가 너무 빽빽하여 하늘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원숭이 울음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괴성이 일기 시작했다. 소삼아의 간이 콩알만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예를 수련했다는 운종조차 이처럼 험악하고 음산스러운 숲 속에서는 목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운종과 소삼아는 각자 검과 나무몽둥이를 걸머지고 사방을 살폈다. 생전 사람이라고는 다닌 적 이 없는 듯 풀은 허리춤까지 자랐고, 가시덩굴이 사방에 깔려 있어서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었다. 하늘은 어느덧 거뭇거뭇해져서 달이 떠올랐지만, 나무에 가려 제대로 앞을 비춰주지도 못했고, 사 방에서 음산한 바람이 불어 풀을 쓰러눕히며 지나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마냥 가슴만 쓸어내리 고 있었다. 계속 앞을 헤쳐나갔지만 운종이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통에 마침내 소삼아는 땅 에 풀썩 주저앉아 다리가 아파 더 이상 못 걷겠다고 울상을 지었다. 마침 소삼아가 노상에서 건 포도 좀 사둔 것이 있어서 두 사람은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먹고 보자는 식으로 풀밭에 주저앉아 아구아구 먹어대기 시작했다. 소삼아는 갑자기 목 안이 타는 듯이 화끈거리며 갈증이 치밀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기가 가서 시냇물을 떠오고 싶었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니, 그렇다고 주인더러 물을 떠오라고 시킬 수도 없는 일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통만 참고 있었다. 운종도 마른 음식을 마구 삼킨 까닭에 목이 말라 소삼아와 물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의논했다. 소삼아는 더욱 목이 타는지 숫제 우는 소리를 질렀다. "소인도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요. 하지만 감히 도련님께서 손수 가시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제가 가자니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으니 이 일을 어떡한다지요!" 운종이 말했다. "괜히 아버님께서 널 달려보내셔서 이 고생을 시키는구나. 나는 몇 달 동안 검술을 익혀 이전과 는 근력이 다르단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요 며칠을 걸어보니 차라리 네가 없었더라면 훨씬 빨리 갔을 것이다. 오늘도 하루종일 걸었지만 나는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만 길을 잘 못들어 행여 빠져나가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는구나. 내가 물을 찾아볼 테니 넌 절대 아무 곳에 도 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 금방 돌아올게. 절대 딴 곳에 가면 안 된다." 이때 소삼아는 입 속에 불이 붙는 듯이 극심한 갈증에 시달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운종은 한 손에 검을 쥐고, 행낭 속에서 병을 끄집어내어 희미한 별빛을 더듬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채 얼마 가지 않아서 가까운 곳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앞을 가로막은 큰 바위를 돌아 서자 하늘에서 흰 빛이 쏟아졌다. 바위에서 일 장 남짓 떨어진 곳에 이르자 얼굴에 차가운 기운 이 뿌려와서 고개를 들어보니 자그마한 폭포가 시원스럽게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폭포 줄기에 옷과 신발을 적시고 있는데, 바로 다리 밑에 광채가 번뜩이며 물소 리가 들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다행히 덤벙대고 달려 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연못 속으로 떨어질 뻔했다. 우선 몇 모금 목을 축인 뒤, 병에 물을 가득 담아 소삼아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절벽 모서리를 돌자 곧 평지가 나왔다. 날듯이 원래 장소에 도착해 보니, 행낭은 그대로 있는데 소삼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운종은 소삼아가 갈증이 극심한 나머지 그 사이를 못 참고 물을 찾으러 가지 않았나 하고 걱정했다. 연속해서 소삼아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마 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땅바닥에 물병을 내려놓고, 사방을 샅샅이 뒤지며 소리쳐 불렀으나 결국 아무런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하늘빛이 변하면서 암운이 천지에 깔리자 다시 어둠이 밀려왔다. 어디선가 돌개바람이 불어와 나무를 뒤흔들고 사라지는 것이 한바탕 비라도 쏟아질 기세였다. 바람에 행낭이 날아가 버릴까 봐 등에 짊어지고, 암흑광풍 속을 휘적거리며 걸어가면서 소삼아의 이름을 외쳤다. 바람이 불어오 는 방향으로 마주서면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고, 등 뒤의 행낭은 바람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덜커덩거렸다. 상담검은 과연 이러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검광을 발했다. 검에서 발출되는 두세 척 가량 의 검화에 힘입어 천천히 소삼아를 찾아보기로 작정했으나 그 자신도 모르게 원래 있던 곳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버렸고 길마저 잃어버려 점점 초조해졌다. 봄이라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속에 삼백 냥 가량의 은자를 넣은 행낭을 짊어지고 있으니 금세 피로해졌다. 게다가 두 사람 분의 잡다한 필수품까지 모두 챙겨왔으니, 실로 상당한 무게였다. 아 무리 검결을 익혀 신력이 증대해졌다지만, 하룻밤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 다녔더니 온몸은 물 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다행히 바람을 피할 만한 곳을 찾아 눕자, 이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다. 해질 무렵에 괴성이 들리고, 이처럼 사납게 바람이 부는 걸로 봐서 소삼아는 필시 괴수에게 잡 혀먹혔거나 아니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시체도 찾지 못했으니,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한 번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운종은 행낭을 벗어놓고 그 위에 앉았다. 피곤하기도 하고 마음이 조급하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 에서 어찌 쉽사리 두 눈이 감기겠는가? 한 손에 상담검을 움켜쥐고 정신을 바짝차려 주위의 동정 을 살폈다. 산이 깊고 어둠도 짙어 나무 그림자라도 어른거리면 무슨 괴물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모든 초목이 다 괴물같이 보였으니, 제대로 맘놓고 잘 수도 없었다. 점점 동방이 밝아오며 붉은 기운이 사방에 스며들자 바람도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추 위와 배고픔이 엄습해 왔다. 손을 더듬어보니 사방에 운무가 짙게 깔려 축축한 냉기가 주위를 감 싸고 있었다. 운종은 우선 일어나 주위 경관부터 살폈다. 주위를 살펴본 순간 그는 그만 입이 벌 어져 닫히지 않고 망연자실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낭떠러지 위에 놓인 일 장 남짓한 바위 위였다. 위로는 바위투성이, 아래는 끝없는 절벽이었으며, 뒤쪽은 하늘을 받칠 듯이 우뚝 솟은 석벽이었으니, 삼면 모두가 꽉 막힌 위 험하기 그지없는 장소였다. 단지 오른쪽 불쑥 튀어나온 곳의 석벽과 석벽 사이에 겨우 이 척(二 尺) 가량의 틈새가 벌어져 있어 그곳으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운종이 서 있는 바위 주위를 둘러싼 산봉우리는 아무리 가까와도 수백 장은 될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래 호수를 내려다보니 운무가 자욱히 덮여 있었고 바람에 파도가 일렁거렸는데, 도대체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고 단지 물결치는 소리만 요란히 들려왔다. 소화상과 주운종의 조우 擧步失探淵 暮夜冥冥驚異嘯 揮金全孝子 風塵莽莽感知音 제일 높은 꼭대기에 서서 발밑을 내려다보니, 운해 위로 드문드문 섬 같은 산봉우리들이 빠져나 와 보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는 서 있는 암석이 기우뚱거리는 것만 같아서 눈앞이 아득하고 정신이 혼미해져 더 이상 마냥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주운종은 급히 꾸러미를 둘러메고 근처 바위 왼쪽으로 물러났다. 하룻밤 동안 곤욕을 치르고 생 전 처음 맞은 위험이었던지라, 평상시 수련할 때는 이삼 장(丈) 정도는 거뜬히 뛰었지만, 불과 삼 척 남짓한 넓이도 황하처럼 넓어만 보였다. 그는 조금도 방심하지 못하고 조심조심 건너편을 향해 다가가 낭떠러지 끝에 멈추고는 칼을 칼 집에 꽂아 넣은 뒤, 먼저 행낭을 건너편 바위에 던지고, 작은 꾸러미들도 마저 던졌다. 뒤로 두세 걸음 물러났다가 있는 힘껏 달려 훌쩍 건너서 바위 위로 내려섰다. 이제 겨우 위험에서 벗어난 운종은 뒤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어젯밤 검광만 믿고 아무렇게나 찾아다니다가 천하의 험지로 들어왔구나. 그때 피로하여 더 이 상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지경이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수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뼛가루도 못 찾을 뻔했군.' 이런 생각이 들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며 정신이 아찔해져 더 이상 아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시 소삼아를 찾으려 했지만 길조차 잃어버렸으니 어찌할 방도가 있겠는가? 큰소리로 몇 번 불 러봐도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젯밤 소삼아를 찾으려다 점점 길을 잘못 들어갔다는 생 각이 들어 이번에는 뒤돌아서 다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대체로 평탄한 길을 지나자, 곧 구절양장같이 구불구불하고 수목도 빽빽한 길을 소삼아를 부르 며 나아갔다. 한참이나 헤쳐나가다 앞에 두 갈래로 암석이 나뉘어져 서 있는 곳까지 다다랐는데, 문득 한 가닥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잠시 멈추어 서서 어느 쪽으로 갈까 고민하다 먼저 오른쪽 암석으로 다가가 주위를 살펴보기로 작정했다. 이 암석은 길쪽으로 반쯤 튀어나오고, 반대편은 오히려 움푹 들어가서는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운종이 막 암석을 돌아 뒤쪽으로 다가가자, 앞에 기화노송(奇花老松)이 무성하고, 온갖 향기를 내뿜는 갖가지 꽃들이 앞을 다투어 요염한 자태를 한껏 뽐내는 절경이 눈앞에 드러났다. 한쪽엔 수천 그루의 매화가 풀밭에 어지러이 피어 있었고, 꽃물결은 은은한 향기와 함께 비단처럼 출렁 이며, 간간이 아름다운 새소리도 어우러져 별유천지(別有天地)를 방불케 했다. 암석 위로부터 떨어지는 물줄기는 차츰 작은 시내를 이루며, 맑은 물 속에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흰 조약돌들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왔다. 시냇물 소리와 바람 소리가 멋진 협주곡을 이 루어 운종을 무아지경으로 끌어들었다.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절경에 도취되어 있던 운종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삼아의 안위가 걱정 스러워 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운종이 소삼아의 이름을 부르며 걸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거친 숨소리가 느껴졌다. 고개를 쳐들어보니, 머리 위로 두세 척 가량 떨어진 바위 위에 온통 황금 비단을 두른 듯 빛나는 털이 번쩍이는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엎드려, 흉맹스런 안광을 내뿜으며 운종을 노려보고 있 었다. 운종은 혼비백산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고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을 없는 꽁지까지 빠지라고 달아나던 운종은 호랑이가 쫓아오는 기색이 없자 멈춰섰 다. 매우 배가 고팠으나 지닌 음식이 얼마 되지 않았고, 만약 이를 먹어치웠다가 소삼아를 만나게 되면 줄 음식이 없어서야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행낭을 찾아 등에 지고 걸어 가기 시작했다. 소삼아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어젯밤 폭포가 있던 곳에서 그의 종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든 운종은 점점 초조해져서 경신술을 시전하며 대중없이 마구 달렸다. 산봉우리를 몇 개나 넘었는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넓은 지역을 찾아봤지만, 소삼아는커녕 쥐새끼 한 마리 찾 을 수가 없었다. 운종은 마침내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 처음 있던 곳에서 더욱 떨어진 셈이었다. 오후가 되자 전신에 피로가 겹치고 배가 고파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졌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 고 보자는 심산으로 어제 먹던 음식꾸러미를 풀러보니, 국수 일곱 뭉치와 한 근 가량의 말린 고 기가 있어 조금씩 떼어 대충 주린 창자를 달랬다. 시냇가에 엎드려 물을 한모금 마시며 갈증도 해소하고, 하늘을 쳐다보니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 려 있었다. 오늘밤 안으로 소삼아를 찾지 못하면 이 산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생각에 아무런 대책 없이 다시 마구 헤치며 여기저기 지향없이 돌아다녔다. 지친 운종이 하나의 석굴을 찾아내어 안에 들어가보니, 깨끗하게 잘 다듬어져 있어서 그런 대로 한몸을 눕힐 만한 곳이었다. 동굴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은 이미 황혼에 물들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 올라서서 한동안 주변을 바라보았으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동굴로 돌아가려고 내려오는데, 근처 숲 속에서 날쌔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운종은 잽싸게 검을 뽑아 적을 맞을 태세를 갖추고 자세히 살펴보니 금빛 털이 찬란한 원숭이와 흡사한 동물이었는데, 숲에서 튀어나와 눈 깜짝할 사이에 건너편 봉우리로 사라져 버렸다. 운종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동굴로 돌아가 쉴 작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때 발 아래로 푹 신한 비단 같은 감촉이 전해와 내려다보니, 바로 소삼아가 걸치고 있던 겉옷이 발에 걸려 있었는 데, 무엇에 찢겼는지 핏빛 선명한 발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까 마주쳤던 호랑이 따위에게 당했 음이 틀림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고 이번에도 먼길을 따라나선 충복을 생각하고 운종 은 찢긴 옷자락을 움켜들고 대성통곡하였다. 비록 시신은 없지만 운종은 혈의(血衣)만이라도 검으로 땅을 파고 묻어주려 했다. 적당한 구덩이 를 파고 혈의를 묻은 운종은 다시 검으로 바위에다 <의복소삼의총(義僕小三衣塚)> 여섯 자를 새 겨놓았다. 모든 일이 끝나자, 석양도 저물어 어둠이 주위에 짙게 깔렸다. 어젯밤 함부로 돌아다니다가 곤욕 을 치른 생각을 하니, 감히 밤에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동굴로 돌아와 쉬었다. 며칠째 피로가 겹친 데다 마음까지 괴로웠던 터라 운종은 눕자 마자 잠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었 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무엇인가 눈을 도려내듯이 따갑게 쏘아대자 눈을 떠보니 어느덧 아침 햇살 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동굴 입구에 쌓아둔 돌더미도 그대로 있었다. '이렇게 온전하게 잠에서 깨어난 걸 보면 어젯밤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군.' 운종은 눈을 부비며 검을 찾아 쥐고 동굴을 나섰다. 바로 동굴 앞에 어제 보았던 그 금빛털의 대호(大虎)가 땅에 엎드려 있었다. 기겁을 한 운종이 검을 겨누고 동정을 살폈지만, 호랑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걸음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주위는 온통 핏자국으로 어지러웠고, 오장육부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호 랑이의 뇌와 창자가 터져나와 있었다. 비록 죽어 있었지만 땅에 엎드려 있는 모습은 금세라도 와락 달려들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커 다란 맹수가 무참하게 죽어 있으니, 호랑이를 이렇게 만든 동물은 이보다 열 배 더 위험한 동물 임이 분명했다. 혼비백산한 운종은 배고픈 것도 잊고 우선 동굴로 돌아가 꾸러미를 꾸렸다. 소삼아는 죽은 것이 분명하니 꼭 필요한 물건들만 챙기고, 나머지는 버려두고 재차 동굴 밖으로 나왔다. 막 동굴을 벗어나는데 옆에 광주리가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광주리 속에는 온갖 과일 들이 소담스럽게 담겨 있었는데, 나무에서 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싱싱했다. 마침 먹을 음식이 가장 문제였는데, 삼사 일은 족히 먹을 만큼 많은 과일을 발견하자 운종은 기뻤다. 과일바구니를 들고 길을 찾아나선 운종이 아무리 돌아다녀도 제자리였고, 도저히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로 빽빽한 숲으로 둘러싸여 벗어날 가망이 도무지 없어 보였다. 집안 일을 떠올려 보면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는데, 자신은 여기서 헤매고 있으니 낭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밤이 되자 다시 그 동굴을 찾아 돌아와 돌더미를 헤치고 들어갔다. 편히 앉아 과일 등 먹을 것 을 먹고 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이 안 와 일어나서 무공연습을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걱정 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 마음을 굳게 먹고 하나 하나 난관을 헤쳐나가야겠다고 마음을 굳 혔다. 다음날도 동굴을 나선 운종은 한쪽 방향을 정해 놓고 철저히 출로를 찾아볼 심산으로 돌아다녔 지만, 정해진 방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온 산을 헤맨 지 십여 일 만에, 어느날 높은 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세심히 살펴보는데, 저 먼 곳에 촌락 같은 형태가 산봉우리 몇 개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다. 검결을 익히고 매일 산을 돌아다닌 경험 덕분에 안력이 눈에 띄게 높아져 웬만한 것은 쉽게 구 분할 수 있었다. 대략 어림잡아 하루를 꼬박 가면 다다를 수 있는 거리로 보였다. 인가가 있으니, 그곳에 가서 길을 물어 배라도 빌려 타고, 수로로 성도로 가서 어서 빨리 스승을 모시고 돌아가 부모와 처자를 안심시켜야겠다고 마음만 급했다. 광주리 속의 과일은 아직 이삼 일 먹을 양이 충분했다. 운종이 가만 생각해 보니 처음에 과일을 발견했을 때, 삼사 일 먹을 양밖에 안 되었는데 십여 일을 줄창 먹었는 데도 아직 이만큼이나 남 아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의 목숨을 보전시키기 위해 하늘이 보우하신 것만 같았다. 이튿날 하오 무렵, 멀리 산허리 부근에 논이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근처에 분명히 촌락이 있는 것이 보였다. 저녁 무렵, 가까스로 험난한 길을 헤쳐 산봉우리까지 다다랐으나, 촌락은 낭떠러지 밑으로 백여 장 가량 아래에 위치해 있어서 좀처럼 내려갈 방도가 없었다. 한참 지형을 살펴보자 다행히 등나무 덩굴이 무성하게 자생하고 있어서, 실팍한 줄기를 골라 힘 껏 당겨 튼튼한지 여부를 살펴보니 그런 대로 자신을 지탱해 줄 만했다. 검을 등에 단단히 메고, 십여 장쯤 되는 등나무 줄기를 이어서 내려뜨리고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벼랑밑 촌락에서는 이제까지 누구도 내려온 적이 없는 벼랑으로부터 낯선 사람이 내려오자 모두 들 놀라 수근대며 모여들었다. 운종은 벼랑을 절반 정도 내려왔을 때, 등나무 줄기에 손바닥이 모두 헤어져 피가 흐르며 극심 한 통증이 느껴지자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죽을 힘으로 내려와서 땅으로부터 대략 이삼 장 가량 거리가 남은 지점에 이르자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어 그만 손을 놓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경신술의 기초를 충실히 익혔고, 산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에 놀랍도록 몸이 단련되어 극심 한 통증이 밀려오는 가운데도 잽싸게 청정점수(鯖靖點水)의 수법으로 무사히 땅으로 내려설 수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운종이 두 장이나 되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자 깜짝 놀라, 저 사람이 죽지 않으면 필히 중상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운종이 아무런 상처없이 가볍게 지면에 내려서자 분 분히 다가와 인사를 했다. 이때 운종의 손아귀는 갈기갈기 찢어져서 그 통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마을 사람 가운데 요(姚)씨 성을 가진 늙은이가 있었는데 이 마을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어렸을 때 이미 진과(進科)에 급제했으나 성격이 강직하여 오랑캐가 나라를 점령한 후 이곳에 은거하여 삼십 년의 세월을 보낸 은사였다. 운종의 행동거지와 용모로 보아 귀한 집 자제라는 것을 간파하 고 그는 무리를 헤치고 나와 말했다. "이곳 북두암(北斗巖)은 인간세상과 격리되어 좀처럼 낯선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곳인데, 존형께 선 어떻게 이곳에 오시게 되었습니까?" 그가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들어보니 운종은 이를 악물고 얼굴에 진땀이 줄줄 흐르고, 양손은 피투성이였다. "이분 존형께서는 등나무 줄기의 독에 중독되어서 말을 못하신다. 어서 두 사람이 이분을 부축 하여 우리집으로 모셔 치료를 해드려라." 그가 뒤돌아보며 명하자, 곧 장정 두 명이 운종의 양팔을 부축하였다. 운종은 도무지 입이 벌어지지 않았고, 온몸에 냉기가 흐르며 손의 통증은 더욱 극심하여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로 표현 못하고, 단지 입가에 일그러진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만 끄덕이며 두 사람에게 자신을 맡겼다. 요노인 집에 도착했을 때 운종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이제 감각도 없어져 버렸다. 다행히 주 인이 착한 사람이었고, 마을에 등나무 독의 해약이 있어서 우선 침으로 독가시를 제거하고 그 위 에 해독약을 바르고 미음을 끓여 먹이고 이틀이 지나자 독이 거반 제거되었다. 하지만 십여 일 동안 산중에서 온갖 고초를 겪느라 쌓인 피로와 풍한(風寒)이 일시에 발작하여 운종의 병은 더욱 도져버렸다. 이틀 치료받고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하자, 이곳 지명을 물어보니 만송산(萬松山)이라 하였다. 사방 수백 리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벽지로써, 몇백 리 가량 되는 작은 오솔길만이 곤명성 (崑明省)으로 이르는 유일한 통로였다. 수로로 가려면 이 길을 따라 곤명 부근 대판교(大板橋)까 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가야만 했다. 노인에게 자신의 집안 내력과 지금 빠져 있는 어려운 지경을 얘기하다가 운종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노인에게 집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어 하루바삐 찾아야 될 사람이 있으 니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했다. 요노인은 운종의 병세가 엄중하여 수시로 발작하며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틀만 더 머무르라고 만류했다. 이틀이 지나자 운종은 한결 몸이 가뿐해져서 재삼 떠나겠다고 간청했다. 요노인도 그를 더 이상 만류할 방도가 없음을 알고 휘하의 두 사람을 딸려보내 그를 전송해 주 도록 배려했다. 요노인도 아들을 데리고 친히 마을 밖까지 전송나왔다. 서로 아쉬움을 남기며 헤어졌다. 수행인들은 매우 성실하였고, 산 속에서 오래 살아와서 걸음이 매우 빨랐다. 운종이 때로 정신이 혼미해지면 두 사람이 부축하여 주며 더욱 운종을 잘 보살폈다. 비록 병중에 떠나는 길이었지만 이번 산행은 그런 대로 순조로왔다. 어느덧 대판교에서 이십 리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는데, 곤명성의 불과 이십팔 리 밖에 있다 고 그곳의 지명도 이십팔구(二十八溝)라 했다. 운종 일행 세 사람은 주점에 들러 한껏 맛있는 음식과 술을 들고 나자, 이제 모든 일이 끝난 것 만 같았다. 포만감과 함께 기분도 느긋해 있을 때 밖이 소란스럽자 운종은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 겼나 싶어 나가보니 건너편 주막 앞 황각수(黃角樹) 기둥에 괴이한 몰골을 한 사나이가 묶여져 있었다. 점소이 두 명이 마구 욕지거리를 해대며 등나무 채찍과 곤봉을 각각 거머쥐고, 인정사정없이 묶 인 사나이를 후려치고 있었다. 묶인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않고 그들 이 때리는 대로 맞고만 있었다. 운종은 이상하게 여겨 수행인에게 가서 연유를 알아보라고 일렀다. 이때 옆에 서 있던 점소이가 말했다 "손님 괜한 일에 참견하지 마십시오. 저놈은 우리 마을에서 그 이름도 자자한 뇌철우(賴鐵牛)라 는 놈으로 작년에 왔었지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가족이나 친척도 없어요. 일을 해서 살 생각 은 하지 않고 산을 떠돌며 짐승이나 잡아먹고 지내지요. 짐승을 잡지 못하면 매일 이곳에 나타나 남의 음식을 훔쳐먹으니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래서 그가 한 번 음식을 훔칠 때마다 사람들은 그 를 때리지요. 놈은 맞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매일같이 훔쳐먹지요. 오늘도 그가 음식을 훔쳐먹 었으니 저 아이들이 한참 분풀이를 하고 난 뒤에야 풀어줄 겁니다. 저놈이 저희 상점에서도 몇 차례 음식을 훔쳤는데, 저의 주인어른께서는 그를 때리지 않으셨어요.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때리려고 하면 오히려 말리셨지요. 그 후로는 놈도 우리 상점 물건을 훔치지 않았어요. 저쪽 집주 인은 원래 속이 좁아서 놈을 보기만 하면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그렇게 되자 놈도 저집 물건만 전문적으로 훔칩니다. 그는 무작정 상점 안으로 들어와서, 돼지 뒷다리 하나를 움켜쥐고 뛰쳐나가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고 뜯어먹지요. 누가 그를 때린다 해도 가만히 얻어맞고 있지만, 만약 그가 먹는 음식을 뺏으려 한다면 아무리 이삼십 명의 사람이 달려들어도 그를 제압할 수가 없을 정도 로 난폭해지지요. 건너집에서도 화가 나니까 때릴 수밖에 더 있겠어요? 실컷 맞고 나면 제발로 사라지지요. 그러니 손님께서도 괜히 시끄러운 일에 끼여들지 마십시오." 점소이가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을 때 건너편 상점에서 디룩디룩 살찐 뚱보가 손에 시뻘겋게 달 군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면서 소리쳐 욕을 해댔다. "빌어먹을 놈의 뇌철우야! 네놈이 무슨 심보가 뒤틀려서 우리집 음식만 훔치느냐? 오늘은 네놈 을 아주 요절내고 말리라."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치켜뜬 뇌철우도 시뻘겋게 단 집게를 보자,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 싶었는지 몸에 묶인 밧줄을 끊으려고 요동을 쳤다. 그 바람에 황각수가 흔들리며 잎이 사 방으로 흩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좀처럼 밧줄을 끊을 수가 없었다. 뚱보가 잡은 불에 단 집게가 그의 어깨 근처까지 찔러가자 운종은 말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신형 을 쭉 뽑아올려 멈추라는 일갈과 함께 그의 손목을 나꿔챘다. 뚱보는 갑자기 공중에서 검을 든 젊은이가 내려와 가로막자, 깜짝 놀라 흉포한 기세가 사그러들 었다. "손님은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십시오. 이 뇌철우란 놈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 시오? 그런데 아무리 때려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작정하고 삼줄과 소창자를 말 려 섞은 밧줄로 단단히 붙들어매었으니 도망치지 못할 것이오. 이제야 이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 치려는데 방해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뚱보가 씨부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운종이 제안했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사람을 죽이려는데 말리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당신이 그를 풀어주면 내가 대신 은자를 드릴 테니, 이렇게 끝내는 것이 어떻겠소?" 뚱보는 이 말을 듣고, 운종을 아래 위로 훑어보고는 냉소했다. "우리가 어디 한두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시오. 당신 말만 믿고 이놈을 풀어주었다가 나중에 당신이 나 몰라라 하면 어쩌란 말이오." 뚱보는 되물으면서도 한편으로 두 점원더러 그만 놈을 풀어주라고 일렀다. 밧줄이 원래 튼튼한 데다가, 물까지 잔뜩 먹여 놓아 그가 끊을려고 몸부림치는 바람에 살속을 파고들어 좀처럼 풀어 지지가 않았다. 뇌철우는 계속 뚱보를 노려보며 입 속으로 으르릉거렸다. "착한 나으리, 더 이상 번거롭게 마음쓰실 필요없소이다. 나는 저 따위 뚱보놈이 두렵지 않아요." 뚱보는 자신을 욕하는 소리들 듣자 채찍을 나꿔채 가지고 우루루 달려가 그를 마구 후려쳤다. 운종이 말리려 했으나 뚱보는 벌써 휭휭 바람을 가르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뇌철우가 묶여 있던 황각수가 뿌리째 뽑혀나갔다. 참고 있던 뇌철우가 있는 힘 을 다해 흔들어대자 그만 그 큰 나무가 뿌리째 뽑혀버린 것이었다. 그는 나무를 등에 진 채 몇 걸음 옮겼으나, 뿌리가 달려 있는 나무라 땅에 걸려 고꾸라졌다. 뚱보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겼는지 잽싸게 가게로 뛰어들어가 부엌칼을 움켜쥐고 다시 나왔 다. 운종은 재빨리 보검을 뽑아들고 뚱보를 막아서자, 햇빛이 전신에 반사되어 찬란한 푸른빛을 쏘 아냈다. 운종이 우선 검을 움직여 밧줄을 끊어버리자, 뇌철우가 나무 뭉치를 옆으로 치우고 일어 섰다. 그러자 뚱보는 이제 큰일이다 싶어 먼저 소리를 빽 질렀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네놈들을 그냥 살려두지 않을 테다." 뚱보가 이판사판으로 부엌칼을 휘두르자, 운종이 검을 들어 막았다. 그러자 부엌칼은 무우마냥 잘려져 날아가 버렸다. 뚱보는 더욱 놀라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강도가 사람잡네. 동네 사람들은 어서 모이시오." 그가 소리치며 잽싸게 달아나고 뇌철우가 그를 쫓으려 하자 운종은 만류했다. 뇌철우는 우렁우렁한 소리로 외쳤다. "착한 나으리, 말리지 마시오. 지난 달에 저놈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를 욕했지만 저는 그냥 넘 어갔습니다. 오늘도 저는 소금에 절인 채소를 먹으며 여길 지나가는데, 저놈들이 날 쫓아와서 가 게에 금방 구운 돼지고기가 있는데 먹고 싶지 않냐고 꼬드겼소. 그가 때리지 않겠다고 했고, 또 저는 매우 시장하던 차에 맛있어 보이는 고기를 보고 그냥 갈 수가 없었소이다. 그런데 저놈은 나무에 묶어놓고 날 죽이려고 했으니 내가 저놈을 어떻게 그냥 둘 수 있겠소." 운종은 그를 막아서며 암암리에 생각했다. '소삼아가 이미 죽었는데 이 사람은 힘도 세고 듬직한 것 같으니 신분의 차이를 따져서 무얼 하 겠는가? 이 사람과 결교하여 친분을 맺어야겠다.' 마음을 정한 운종은 그를 달랬다. "여보시오, 그만 참으시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 줄 아시오? 또 만약 당신이 죄 를 얻는다면 누가 당신 어머니의 무덤을 보살펴 주겠소. 그만 두시고 나와 친분을 맺는게 어떻겠 소? 내 당신이 평생 동안 먹고 입는 것은 책임질 테니 의향이 어떠시오." 뇌철우는 이 말을 듣고 고개 숙여 한동안 곰곰히 생각하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나으리 말씀이 옳소. 우리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제게 누차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이르셨소. 지금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몸은 아직 땅 속에서 잠자고 있으니, 혹시 야수들이 해칠 우려도 있 지요. 오늘 이렇게 나으리처럼 좋은 분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통 먹어대 는 게 아닌데 괜찮을는지요? 만약 제가 미워지면 절 때리셔도 됩니다. 하지만 저희 어머니를 욕 하시면 저는 절대 참지 못해요." 운종은 그가 어머니를 못잊어 하는 천진난만한 성격을 지닌 것을 알고 무척 기뻤다. 이때 뚱보는 어디서 지방관리를 불러와서, 곤봉을 든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이를 본 운종은 일단 뇌철우에게 분부했다. "당신 말대로 할 테니 안심하고 그냥 이대로 가만 서 있으시오." 운종은 검을 뽑아들고 그들을 맞아 앞으로 나갔다. 이때 따라온 두 수행인은 운종이 검을 꺼내 휘두를 때부터 사람을 해칠까 걱정했는데, 방금 뇌 철우에게 한 말을 듣고 결코 사람을 해칠 사람이 아님을 알자 안심했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앞 장서서 오는 지방관리 두 사람은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 내심 기뻤다. 그래서 운종의 분부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나가 그들을 잡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두 관리 는 전부터 요노인의 은혜를 입었던 몸인 데다가, 운종이 요노인의 귀한 손님임을 알고 중간에서 잘 중재할 요량으로 뚱보를 타일렀다. 그러나 뚱보는 굴복하지 않고 씩씩거리며 말했다. "제가 비록 그를 속였지만, 저놈 때문에 평소에 입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요. 우선 저 황 각수만 하더라도 우리 할아버님께서 살아계실 때 애지중지하시던 나무인데 아무리 적게 쳐도 은 자 오륙 냥은 나갈 겁니다. 그런데 저놈이 뽑아버렸으니, 그것까지 계산해 주시겠어요?" 운종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나무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다시 살릴 길이 없겠지요. 그러하니 저 사람 이 먹은 고기값과 함께 쳐서 은자 두 냥이면 만족하시겠소?" 뚱보가 그래도 못마땅해 하자 관리가 버럭 화를 내었다. "네놈은 정말 분수를 모르는구나. 이분 어르신께서 네놈과 더 이상 다투기 싫으셔서 은자를 주 시는 것이거늘 너는 계속 어거지만 부릴 테냐? 이분처럼 경우가 밝고 점잖으신 분이 어디 있겠느 냐? 네놈이 더 이상 생떼를 쓴다면 뇌철우를 사형(私刑)한 죄로 곤장을 때리겠다." 뚱보는 관리가 화를 내고 주위 사람도 잘 타이르는 통에 비로소 은자를 받았다. 그러자 관리가 그를 붙잡고 말했다. "어르신께서 돈을 주고 저 나무도 사셨으니 이젠 네게 아니야." 뚱보는 관리가 저 나무가 탐이 나서 그런다는 것을 알고 승낙하지 않자, 운종이 이를 말려 나무 는 뚱보에게 주고 달리 관리에게 은자를 넉넉히 주어 보상해 주고 나서야 모든 계산이 끝이 났 다. 관리는 거듭 감사했다.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어르신의 큰 씀씀이 손길마다 은자가 넘치니, 저 파락호 뇌칠우에게 이런 행운이 굴러들어갈지 누가 알았겠는가! 죽을 고비도 면하고 어르신을 따라가다니, 정말 복이 트인 놈일세." 각자 수근대며 사람들은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운종이 뇌철우를 찾아보니, 혼자서 나무에 걸터앉아 멍하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운종이 가까 이 다가가 그의 손을 끌어 상점으로 들어갔다. 병중에 힘을 쓴 탓에 머리가 약간 혼미해졌지만, 개의치 않고 뇌철우와 함께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난 뒤 그의 이름과 고향 등을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그의 성은 뇌(賴)가 아니라 상(商)이었고 어릴 때 이름은 풍자(風子)였는데 원래 오룡 산(烏龍山) 묘촌(苗村)인이었다. 그의 모친이 시집가기 전, 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삼 년 만에 야 임신한 몸으로 돌아왔다. 집엔 원래 노모 한 분만 계셨는데, 딸이 죽은 줄 알았다가 나타나자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별로 나무라지 않았다. 그뒤 일 년 하고도 팔개월 뒤에야 풍자를 낳았다. 풍자는 서너 살때 벌써 십여 세 소년만큼 자랐고, 힘도 무척 세어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멧돼 지를 쫓아 잡고, 새도 돌로 맞춰 떨어뜨릴 정도로 자랐다. 누가 놀리기라도 하면 반쯤 죽을 정도 로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다행히 천성이 지극히 효순(孝順)하여 어머니의 말이라면 아무리 고통 스러운 일이라도 잘 참아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힘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들 모자를 놀리지 못하였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자 식이 힘만 믿고 날뛰다가 낭패를 당할 것 같아 항상 불안해 했다. 어느날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누구나 제 아버님이 짐승이라고 하는데 무슨 까닭입니까?"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통곡을 하며 다시는 그런 것을 묻지 말라고 하여 풍자는 지금까지도 제 어머니 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뒤 그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천령산(天靈山)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 어머니와 아 들 두 사람은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을 몰라 아무리 많은 고기와 가죽을 갖다주어도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다만 이 마을 사람들은 그전 마을 사람들 만큼 심보가 고약하지 않아 돈 대신 옷과 소금 같은 생필품을 바꿔주었다. 그의 모친이 오랜 세월 고생하여 병을 얻어 죽어가게 되자, 그는 이곳 저곳에 가서 어머니를 살 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가 의원을 등에 들쳐메고 달려갔지만 끝내 어머니는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죽을 때 '너의 아버지는 곰이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죽기 전에 그에게 일러두었다. "이곳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먼 곳에다 묻고 그들과 함께 살지 말아라." 그는 도끼를 가지고 큰 나무를 베어, 지난날 본관의 모양대로 잘 다듬어 시신을 넣고, 못도 치고 멋부릴 수 있는 장식은 모두 다 붙여 다른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혼자 관을 둘러메고 산 속으 로 들어갔다. 영서(嶺西)에서 영동(嶺東)까지 이틀이나 가서야 겨우 야수의 동굴을 발견하고, 그 속에 살고 있던 야수를 모두 때려죽이고 그 부근에 어머니의 시신을 잘 묻었다. 풍자는 매일 무덤 옆에서 울고 소리치며 어머니를 부르며 괴로워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그냥 산 속에서 머물렀다. 이렇게 약 두 달 가량 지나자 근처에 동물이라고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는 할수없이 마을로 가서 음식을 훔쳐먹은 것이다. 그는 우연히 운종을 만나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보니 새삼 세상에 좋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운종이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두 수행인과 함께 일행 넷이서 그 상점을 떠났다. 잠시 후 대판교에 다다라 운종은 상풍자에게 옷을 한 벌 사주었다. 좀전에 쓸데없이 시간을 보 내느라고 날이 이미 저물어서 다음날 아침에나 출발해야 했다. 두 수행인도 그만 산으로 돌아가 보아야겠다고 하여 거기서 헤어졌다. 운종은 각자에게 은자 두 냥씩을 주어 보냈다. 그런데 상풍자도 가야겠다고 하여 운종이 그 까닭을 물어보니 어머니를 돌보러 가야 한다는 것 이다. "사람이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사람이 살아나감에 있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 는데, 이미 먼지로 변해 버린 시신을 잡고 있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운종은 이치에 맞게 풍자를 설득했다. 그제야 상풍자가 크게 깨달았지만, 그래도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를 둘러보고 곧 뒤따라 가겠노 라고 했다. 운종도 그의 효성스런 마음을 막을 길이 없었지만, 그가 혹시라도 오지 않는다면 자신 이 낭패라 생각했다. 운종이 그에게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이 여기서 얼마나 먼가를 물어보았다. "얼마 멀지 않아요. 제 걸음으로 하루면 열 번은 왔다갔다 할 수 있을 정도예요." 운종이 그의 대답을 듣고 같이 가자고 하자 풍자는 기뻐했다. 운종은 진심으로 풍자와 결교(結交)하고 싶어, 우선 그가 말끝마다 '좋은 나으리'라고 하는 호칭 을 그만두고 서로 형제 칭호를 쓰자고 주장했다. 곧 계산을 끝내고 풍자에게 먹을 것을 좀더 사 라고 이르고 꾸러미를 꾸려 그들은 길을 떠났다.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 운종은 풍자의 걸음을 시험해 볼 심산으로 좀더 빨리 가자고 했다. "형, 아마 절 따라오지 못하실 걸요." 운종은 괜찮다고 달려보라고 했더니 풍자는 씩 웃더니 날듯이 앞을 향해 질주했다. 운종은 경신 술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병을 앓고 난 후라, 도저히 풍자만큼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일이십 리 가다가 그만 가자고 소리치며 그만 쓰러질 뻔했다. 그러자 풍자가 재빨리 돌아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형은 날 따라오지 못할 거라 말했잖아요." 운종도 그의 빠른 걸음을 칭찬하며 함께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이십여 리 가량 더 가자 산세는 더욱 험난해지고, 해도 저물어 사방을 구분하기 어려워져 아직도 멀었느냐고 물었다. "이제 산 하나만 넘으면 다 왔어요." 두 사람은 서로 얘길 나누며 좀더 빨리 달렸다. 막 골짜기를 건너자 풍자가 앞을 밝히기 위해 나무막대기에 불을 켰다. 이때 운종이 뒤에서 소리쳤다. "이봐, 이게 도대체 뭐야?" 풍자가 뒤를 돌아보니 붉은 기운이 가득한 채운이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다. 운종은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풍자는 황급이 운종을 부축하며 물었다. "형, 무슨 일이에요?" 운종은 단지 손가락으로 가슴 앞부분을 가리키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풍자는 깜짝 놀라 곧 장 운종을 안고 동굴 속으로 달려가 편히 뉘였다. 다음날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연유를 물으니, 골짜기를 지나다 흩날리는 채무가 다가오기 전에 이상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곧바로 정신을 잃어버렸는데, 지금은 사지(四肢)가 물 먹은 솜 처럼 축 늘어져 힘도 없고 머리는 깨어질 듯 아프다고 했다. 여기까지 말하고 운종은 다시 정신 을 잃어버렸다. 풍자는 의술을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옆에서 보고만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지나 가는 소화상(笑和尙)과 위지화(尉遲火)를 만나게 되어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소화상은 운종이 취도인이 새로이 거둬들인 제자임을 알고 자신의 내력을 얘기해 주었다. 운종 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 급히 사형의 예우를 취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안에 일어난 우한을 얘 기하고, 떠난 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자 소화상이 말했다. "사제, 너무 상심 말게. 나와 위지화 사형를 만났으니 이젠 걱정할 필요없네. 자넨 며칠 더 요양 을 해야 하지만, 내가 운기화행(運氣化行)법을 전수해 주면 금세 나을 것일세. 취사숙께서 줄곧 외지로 운유하시는데, 자네처럼 느린 걸음으론 만나뵙기 힘들 것이네. 하지만 그분은 벌써 자네 집안의 일을 다 알고 계시니, 아무려면 자신의 득의제자가 요인의 손에 당하는 것을 보고 그냥 계실 것 같은가? 그분 생각은 자네의 자질이 비록 뛰어나지만, 워낙 귀한 집안 출신이라 고생을 하지 않은 것이 걱정스러워 자네의 결심이 얼마나 공고한지 시험해 보신 것뿐이라네. 하지만 자 네 집안 사정이 워낙 급한지라 머뭇거릴 틈이 없을 것 같군. 우리 두 사람은 어검비행을 할 수 있으니 성도에 하루면 갔다올 수 있다네. 우선 우리 중 한 사람이 성도로 가서 취사숙을 뵙게 되 면 자네 집안 사정과 지금 자네가 중도에 길을 잃고 부상을 당했다고 전하겠네. 하지만 이곳 골 짜기를 지나다 우연히 요기가 충천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자네도 필시 그 독에 중독되었을 것이 며, 그 속에 어떤 요마가 잠복하여 있는 게 분명한데, 신기(神氣)로 보건대 그놈이 완성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으이. 다행히 요기를 완전히 이루기 전에 제거하여야만 후환을 없앨 수 있 네. 그렇지 않으면 근처 수백 리 안의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은 전부 중독되고 말 것일세." 운종은 소화상의 말을 듣고 적이 안심이 되어 재삼 감사했다. 곧 그들은 의논하여 위지화가 성 도로 가기로 하고 소화상은 운종을 돌보기로 하였다. 그들은 죽을 끓여먹고 마주 앉아 지난 일을 얘기했다. 풍자는 위지화가 불꽃을 일으키며 어검비행을 하고 소화상의 입에서 온갖 기적 같은 얘길 듣고 그만 넋이 나가, 소화상더러 자신에게도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자 소화상이 피 식 웃었다. "내 주제에 제자를 거느리라구? 네게 그런 맘이 있다면, 이번 일이 끝난 뒤에 자연 잘될 거야. 너처럼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는데 설마 거두어줄 사람이 없을려구. 그 일은 내일 위지화 사제가 돌아와서 요물을 제거한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자구." 삼경 무렵, 소화상이 요물의 동정을 살피러 동굴 밖으로 나가자 풍자도 따라 나섰다. 소화상은 운종에게 단약을 먹이고 잠을 자라 이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 였다. 높은 곳에 올라가 골짜기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동요없이 잠잠하자 풍자가 소화상에게 물었다. "소사형, 이렇게 먼 곳에서 뭘 볼 수 있어요. 좀더 앞으로 다가가요!" 소화상이 대답했다. "너처럼 평범한 눈을 가지고서야 잘 볼 수가 없지. 넌 내일 아침 날이 밝거든 자세히 보아라. 하 긴 내 안력으로도 저 요물의 내력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가 없구나. 여기서도 내가 약간 어지 러울 정도이니, 이삼십 장 이내의 어떤 생물도 살아 남지 못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독을 품고 있 다. 처음 생각엔 비검을 날려 처치할 작정이었지만, 저놈이 아직 완성되기 전에 도대체 어떤 요물 인지 분명히 보아야 식견을 넓힐 것 아니냐. 너는 절대 아무 소리 내지 말고 그냥 있거라. 만약 거동을 하면 쥐죽은 듯이 그냥 엎드려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소화상은 바위를 찾아 걸터앉아 한참을 기다렸지만 요물쪽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건천화령주 霧湧煙圍 共着千年邪火 香雪玉屑 喜得萬載空靑 풍자는 아무런 동정이 없자 막 입을 열어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소화상은 즉시 손가락을 놀려 그를 점혈(點穴)해 버렸고, 풍자는 온몸이 마비되면서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깜짝 놀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차에, 홀연 저 멀리서 한 줄기 날카로운 괴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 는 마치 운종이 그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외침 같았다. 다시 소화상을 쳐다보니 순식간에 그의 종 적이 사라져 버린 터라, 속으로 필시 운종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다 여겨졌다. 급히 동굴로 돌아가 살펴보고자 했으나 수족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으니 어쩌랴! 공연히 마음 만 급할 뿐이었다. 갑자기 골짜기 안에서 크고 작은 두 줄기의 녹화(綠火)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마치 달 속에 유성 이 흐르는 듯, 허공을 향해 한 차례 용트림을 하더니 땅을 뚫고 솟아나온 용이 동굴로 들어가듯 차례로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자신을 더듬는 것이 느껴지자 즉시 입을 열어 한 마디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귀신장난이오?" 그와 동시에 풍자는 수족도 놀릴 수 있게 되었다. 운종에게 생각이 미치자 그는 급히 동굴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막아서기에 고개 를 들어 살펴보니 바로 소화상이었다. 방금 전 무슨 까닭에 자신을 제압해 움직이지 못하게 했는 지 물어보려는데 소화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큰일날 뻔했다. 내가 한 순간만 늦었어도 너와 주동생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지금은 이미 날이 밝아오니 동굴로 돌아가 천천히 얘기하자." 풍자는 망연(茫然)해져서 급히 연유를 물으려는데 소화상은 이미 앞으로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 다. 동굴로 돌아와 보니 운종은 단꿈을 꾸며 잠이 든 채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풍자는 소화상에게 물었다. "방금 전 소사형은 어딜 갔다 온 겁니까? 나는 형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데 도대체 무 슨 일이 있었습니까?" 소화상이 말했다. "그것이 요괴의 소리였지, 어찌 너의 형이 너를 불렀겠나? 낮에 그 골짜기에 요기(妖氣)가 가득 찬 것을 보고, 그것이 보통 요기와는 다른지라 이미 무슨 지독한 괴물이 숨어 있으리라 의심을 품었다네. 내 어려서부터 사부님을 따라다니면서 늘 사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왔지. '심산대택(深山大澤)을 지나갈 때에 혹시라도 누군가 이상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더라도 결코 대답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기(氣)가 서로 감응해 괴물이 소리를 따라 쫓아와 독수를 펼치게 된다'라고. 또 그러시면서 내게 요물을 감별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을 일러주셨는데, 그런 까닭에 이 괴물의 지독함을 알아본 것이야. 내가 은사와 더불어 도처를 횡행하며 요괴를 물리쳐 보았으 나, 골짜기 안의 괴물처럼 지독한 물건은 은사께서도 내력만을 아실 뿐이지 직접 목격하시지 못 했다는 놈이야. 그 놈은 천백 년 묵은 늙은 전갈과 몸집이 극대한 일종의 불거미(火蜘蛛)가 교합 하여 생긴 것으로 문주(文蛛)라 부른다. 알은 모두 사백구십일 개를 까는데, 그 알들은 태어나자 마자 땅을 파고 들어가 한 차례 뇌성을 들을 때마다 한 치씩 더 밑으로 파고 들어간다네. 대략 삼백육십오 년 정도가 지나면 파고 들어간 땅에서 어둡고 침침한 기운을 빌어, 천지간의 음독한 기를 흡수하여 비로소 모양을 갖추게 되지. 이때의 몸길이는 약 일촌 이푼 정도인데, 먼저 지하에 서 자신의 동료들을 서로 잡아먹기 시작하지. 동료 하나를 잡아먹을 때마다 한 치씩 성장하는데 그 성장하는 부위는 일정치 않다고 하셨어. 머리를 먹으면 머리가, 다리를 먹으면 다리가 한 치씩 커가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최후의 한 마리까지 먹어치워야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지. 그리고는 다시 한 차례 뇌성을 들을 때마다 한 척씩 위로 키가 자라는데 세상에 나온 후에야 멈 춘다지. 그러나 이때는 이미 제맘대로 자신의 몸집을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게 된다네. 이 괴물 은 전갈과 거미의 잡종인지라 그 생김새도 그것들과 비슷해서 몸통은 두꺼비처럼 볼록하고 배밑 에는 총총히 무수한 짧은 다리가 솟아나 있고 꼬리는 없다네. 앞뒤로 각각 두 개씩의 칼같이 생 긴 두 개의 긴 더듬이가 있는데 하나의 더듬이마다 일 척여 되는 갈고리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어 시퍼런 빛을 내뿜는다네. 날카로운 주둥이에 뾰죽한 머리모양인데, 두 눈에는 시뻘건 광채가 부리부리하고 입에서는 오색채무(五色彩霧)의 불을 뿜어내지. 완전한 모습을 갖춘 때부터는 입 안 에서 내뿜는 채무도 점점 응고되고 마음먹은 방향으로 제멋대로 쏘아보낼 수 있게 된다네. 그것 에 스치기만 하면 사람이고 동물이고 간에 누구를 막론하고 즉사하고 말지. 그놈은 이처럼 채무 를 그물삼아 먹이를 낚아 제 뱃속에 처넣는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항문이 없는지라 집어넣기는 넣되 배설은 않는다는 것이야. 한 사람을 잡아먹을 때마다 또 한 차례씩 커지는 게야. 뱃속에는 하나의 화령주(火靈珠)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또 대단히 지독한 물건이라네. 세월이 흘러 그놈 이 그것을 완전히 연성해 내고 난 뒤에는 선불(仙佛)들이라도 놈을 제거하기 어렵게 될 정도이고, 또 그놈은 목소리로 시람을 유인해 낸단다. 그놈이 있는 곳에서 오륙 리 반경에 있는 사람은 놈 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누구라도 자신의 친인(親人)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네. 그래서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하면 즉시 기가 교응(交應)하여 놈의 독에 중독되고, 그놈은 먹 이를 찾아와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이지. 그 유인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멀리까지 효력을 미치게 되는데, 그놈이 마음대로 날아다닐 정도가 된 후에야 그치지. 그때는 놈이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 의 목숨은 남아나지 못하게 된다. 그놈의 형상이 몸을 평평하게 펼치면 마치 전서체(篆書體: 중국 고대 문자의 일종. 진시황때 李斯가 만들었다는 문자를 小篆이라 하고, 이전의 문자를 大篆이라 한다)의 문(文) 자와 생김새가 흡사한지라 문주(文蛛)라 부른다. 천지간의 아무리 지독한 음악지 기(陰惡之氣)를 받고 태어난 괴물일지라도 그놈처럼 지독한 것은 없다네. 먼젓번에 내가 안력을 돋구어 멀리까지 꿰둟어 보니, 두개의 긴 팔에 각기 한 줄기씩의 푸른빛 무리를 가지고 있는데 번개같이 움직이는 품이 아무래도 그 괴물이 바로 문주가 아닌가 의심스러웠지. 그러다가 사람을 홀리는 부르짖음과 상반신의 모양을 똑똑히 보고 나니 당년에 은사께서 말씀하시던 바와 그대로 일치하는지라 그놈이 바로 문주라는 괴물임을 확신하게 되었어. 그때 네가 한곁에 서 있다가 막 대답을 하려는 것을 보게 되었지. 비록 그놈이 몸 전체를 드러낼 정도는 아직 못돼 너를 쫓아와 잡아먹지는 못하겠지만, 그놈 같은 괴물은 이제껏 만나본 적이 없는 터라 똑똑히 알지도 못하는 데다, 기가 상통해서 중독되는 것도 작은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사정이 긴박한지라 급히 네 아혈(啞穴)을 봉쇄하고 법술을 이용해 이 동굴을 막아버린 것이지. 다시 가서 살펴보니 그놈은 이 미 땅 속으로 깊이 숨어들어 간 뒤더구나. 그놈이 전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햇빛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한번 땅 속으로 들어가면 그놈을 제압할 방법이 없어. 지금부터는 내가 달리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절대로 이 동굴을 떠나서는 안 된다. 주사제와 너, 두 사람은 먹은 것이 없어 배가 고플 테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내 곧 성내로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해 오리라. 두 사람이 먹기에 충분 할 만큼 구해 올 테니 먹고 나면 조금 정신이 들 것이고 위지화 사형이 돌아오면 그도 은전 몇 푼은 지니고 있을 테니 그리 큰 걱정은 안해도 될 것이다." 말을 마치자 잠시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운종이 깨어났다. 풍자가 멋도 모르면서 경거망동할 것 이 걱정되어 재삼 운종을 잘 돌보라고 당부한 후, 소화상은 운종의 상담검(霜潭劍)을 지니고 떠났 다. 몇 시진(時辰)이 지났을까, 그는 한 발(鉢) 가득히 뜨거운 밥에 갖가지 고기반찬까지 가지고 돌아왔다. 풍자는 음식을 보자 죽은 조상이 살아온 듯 반기며 앞으로 뛰어나가 낚아채듯 받아들고 먼저 운 종에게 가져갔다. 소화상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대가 술과 고기를 좋아함을 알았고, 이 며칠 동안 주사제를 돌보느라고 수고했는지라, 필시 매우 주려 있을 것을 생각해 구해 온 것이다. 너를 위해 파계를 하고 남은 은자를 열 냥 슬 쩍했다. 그 슬쩍한 은자를 가지고 고기반찬을 장만한 것이니, 이 사실을 만일 은사께서 알게 되시 더라도 크게 책망하지는 않으시리라." 그 말을 마치고 소화상은 품 속에서 몇 냥쯤 되는 은자 부스러기를 꺼내 풍자에게 건네주었다. 운종은 아무래도 소화상의 행동이 미심쩍어 급히 그 연유를 물었다. 소화상이 말했다. "내가 평소 위지화 사형 대신 보시를 다녀왔지만 그처럼 인심이 각박한 집은 처음 보았네. 나한 테 밥을 안 주는 것은 그렇다 치잔 말일세. 그런데 이치는 한술 더 떠서 내가 도망친 자기네 종 이라며 사람을 시켜 붙잡으려는 게 아닌가? 내 성질에 참을 수 있겠는가. 신형을 감추고 두어 차 례 귀싸대기를 갈겨준 후 은자 열 냥마저 슬쩍해 왔지. 그리고 나서는 중이 고기를 살 수 없는 입장인지라, 다시 몸을 숨기고 점포로 숨어들어 고기반찬을 몇 가지 빌었다네. 그 고기집 시주는 그래도 인심이 괜찮은 것 같아 은자 한 냥 만을 놔두고 나왔다네. 출가한 이래로 도적질을 해보 기는 이번이 처음일세." 풍자는 소화상이 인심 사나운 집주인을 골탕먹였다는 얘기를 듣자 참지 못하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소화상은 본래 능히 곡기를 끊을 수 있는지라, 밥이나 조금 먹을 뿐이고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운종은 병이 난후 배가 몹시 고팠고, 풍자 또한 며칠을 굶은 터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가져 온 음식을 전부 먹어치웠다. 밥을 먹고 나자 운종은 그제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배가 살살 아파오며 설사가 나자 소화상의 호위를 받아 밖으로 나가 일을 보고 나서는, 그제서야 소화상에게 거듭 위험에서 구해 준 것에 대해 감사했다. 소화상은 어쩔 수 없이 답례를 했다. 동굴 밖을 내다보니 아직 별다른 동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골짜기 안에서 다시 붉은 기운이 일어났고, 위지화가 마침 성도에서 돌아왔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 과연 취도인이 장삼고가 다녀간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송, 학 두 도동(道童)에게 일이 있어 형산(衡山)에 한 차례 갔다올 것이며, 돌아오는 길에 운종의 집에 들러 그를 대신해 해 악(害惡)을 없애 주겠노라는 말을 남겼음을 알려주었다. 취도인은 다시 그를 대신대 점괘를 한번 짚어보더니, 일신에 흉험함이 많으나 길인천상(吉人天 相)이라, 누군가가 운종을 집까지 호송해 돌려보낼 때를 기다려 집안 일을 대충 마무리 지어놓은 뒤, 다시 성도로 찾아올 필요없이 아미산 비뢰동(飛雷洞) 이사숙(李師叔)을 찾아가라는 말도 남겼 다 한다. 운종은 이 말을 전해듣자 그제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위지화는 다시 소화상에게 이 괴물의 내력을 알아냈느냐고 물었다. 소화상이 되물었다. "자네의 얼굴색을 보니 필시 전배(前輩)어른들의 가르침을 받은 모양이구만. 어디 먼저 들은 대 로 얘기해 보게나." 위지화가 말했다. "내가 별달리 존장어른을 만나뵌 것은 아니야. 그저 주사제 등이 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벽사촌 (壁邪村) 옥청사태(玉淸師太)께서 많은 시주들의 보시를 받아 여유가 있음을 알고 그리로 가서 몇 푼 얻어볼 생각에 찾아갔다가, 말끝에 사형과 내가 이곳에 있음을 얘기하게 됐지. 그러자 옥청사 태께서 오히려 먼저 이렇게 물으시더군. '무슨 요기 따위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나는 그분께 본 대로 말씀을 드렸지. 사태께서는 일전에 한 번 이곳을 지나며 천잠령(天蠶嶺)에 한 마 리 극히 지독한 요물이 웅크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더군. 그것은 문주라는 괴물인데, 시기가 되지 않아 손을 쓰실 수 없었는데, 놈은 금년 오월 단오날 두 차례의 큰 천둥 번개가 있은 후에야 비 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더군. 현재 여러 사존(師尊)들께선 제삼차 아미투검을 준비하느라 전 부들 해야 할 일로 틈을 낼 수 없으시다면서 옥청사태께서도 단오를 전후해 청라마궁(靑螺魔宮) 에 가서 그녀와 당년에 생사지교를 맺은 동문자매를 구해내야 하기 때문에 문주를 제거하는 일은 비록 커다란 공을 세우는 일이로되 시간이 없다고 합디다. 누군가 그 괴물을 제거하면 십만공덕 을 쌓을 뿐 아니라, 요물의 뱃속에 있는 건천화령주(乾天火靈珠)를 손에 넣을 경우, 후일 도를 이 루는 데도 큰 도움을 얻을 것이라 하시면서 사형과 내게 분부하시면서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 결 코 요물을 달아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분부하셨어. 그분의 계산에 따르면 요물은 아직까지 겁(劫) 을 만날 때가 아니고, 지금은 단지 두 개의 앞 더듬이만이 땅 위로 나올 뿐이어서 단오가 되기 전까지는 달리 수를 쓸 수 없다 하시며 가장 좋은 방법은 사형과 내가 먼저 주사제를 호위해 돌 려보낸 뒤, 단오날 하루 전에 다시 이곳에 도착해 손을 쓰는 것이라 하셨어. 괜히 그전에 놈을 건 드리는 것은 풀을 때려서 뱀을 놀라게 하는(打草驚蛇) 우를 범하는 것이라 하셨는데 사형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소화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청사태께서 말씀하신 것이 조금도 틀림이 없군. 기왕 그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니 먼저 손 을 쓰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이로구나. 지금으로서는 일단 주사제를 집으로 돌려보낸 뒤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옳겠군. 그러나 요물이 비록 아직까지 전신을 드러내 사람을 해칠 수는 없다지 만, 그 독기가 지독한 데다 능히 소리로써 사람을 유인할 수 있으니 살아 있는 물체가 근처에 접 근했다가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지. 우리가 떠난 뒤에 누군가 이곳에 잘못 들어왔다가는 목숨을 잃기 십상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방비를 해놓고 떠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어찌 죄를 짓는 것이 아니겠어?" 위지화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곳의 산세가 험난 괴이하기 그지없고, 근처 이삼십 리 안으로는 초부(樵夫)조 차 오지 않으니, 보통사람이라면 이곳에 올 리 없을 것 같으니, 몇몇 어리석은 친구들이나 이곳에 왔다갔다 할 뿐, 그 같은 우려는 오히려 지나친 감이 있는 것 같군." 풍자가 끼어들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아왔지만 인적이라고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짐승들이나 왔다갔다 할 뿐이지요. 지금와서 생각하니 골짜기 안에서 매일 오후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고부터는 짐승들의 자취도 점차 사라져갔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을 따라 함께 갔으면 좋겠지만 어머님을 이곳에 장사지낸 터이니 시신이 요물에게 훼손당할까 걱정입니다. 소화상께서 법덕을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군요." 소화상이 말했다. "돌아가신 분이 묻힌 곳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결코 무슨 해는 없을 것이오. 그리나 이곳을 그대로 떠나기엔 결코 마음이 놓이질 않는구만. 누군가 자칫 실수로 위난을 당할까 봐 말이야." 소화상은 즉시 몸을 위로 날려 지세를 자세히 살피고 내려왔다. 주위 이삼십 리 계곡 바위 위에 다 진언(眞言)을 묻고, 많은 영부(靈符)를 그려놓았다. 누군가 이곳에 들어오면 법술의 묘용에 의 해 생긴 무수한 괴수들에게 크게 놀라 도망칠 것이었다. 소화상은 요물이 그토록 지독한 문주임을 몰랐을 때는 그저 운종을 이곳에서 정양케 한 후 그에 게 운기지법(運氣之法)을 전수해 주고, 며칠 지나 자신이 요물을 제거하려 했었다. 지금 요물의 독기가 이처럼 지독한 데다, 또 옥청대사의 진언도 있었으므로,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먼저 운종 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다시 오는 수밖에 없었다. 법술을 다 베푼 후에 곧 출발하고자 했다. 풍자는 다시 어머니의 무덤으로 가 봉분 위로 몸을 내던지고 쉬지 않고 무언가 구시렁거렸다. 세 사람은 그가 비록 소리를 내어 대성통곡하지는 않으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모습에 그 상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좋은 말로 위로하며 눈물을 거둘 것을 권유했다. 운종을 위지화에게 넘겨준 뒤 소화상은 풍자를 업고 두 눈을 꼭 감으라고 말한 뒤 한 차례 기합 소리와 함께 허공을 깨치고 날아갔다. 풍자의 몸이 가벼운 것을 느끼자 그에 대해 아끼는 마음이 더욱 크게 일어났다. 검광은 매우 신속해서 귀양(貴陽) 운종의 집까지 날아간 것은 채 이경이 안 된 시각이었다. 이때 민소당 쪽에서는 한 명의 중상을 입은 동료가 보내온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그 자는 귀양 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우연히 장노사가 손남(孫南)이라는 아미문하의 어린 제자에게 취도인의 행적에 대해 묻는 것을 엿들었다는 것이다. 비록 상세히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그의 행적이 주운 종 집안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는 취도인이 형산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듣고는 장노사가 손남과 헤어져 혼자가 될 때 를 기다려 암기를 사용해 쓰러뜨렸다. 그리고 나서 돌아오려는데 어찌 알았는지 그 어린 손남이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장노사는 상처를 입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찰나에 다행히 손남의 구원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부지 하고 줄곧 정양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조심할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적들은 이 소식을 듣자 자신들의 종적이 이미 장씨부녀에게 간파되었음을 알았다. 다행스럽게도 장노사가 이미 독약암기에 당해 죽어가니 더 이상 방해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나,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이라 일단 운종부자에게 먼저 손을 쓰기로 했다. 수소문해 본 끝에 운종이 이미 수일 전에 집을 떠났음을 알았다. 필시 장노사가 돌아오지 않자 친히 성도나 아미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여, 그날로 두 패로 나뉘어 그를 추적해 보이는 대로 즉시 죽여버리도록 조치했다. 그와 동시에 며칠 사이에 계속 악랄한 수 법을 사용하여 암중에 꽤 많은 주씨형제들에게 상처입혔다. 장삼고는 고립무원에 빠진 데다 옥진이 임신중인지라,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반대로 적들의 주의 를 끌게 되어 오히려 더 빨리 화를 자초할 것이라 여겼다. 그저 꾹 참고 은인자중하며 취도인이 도착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운종의 부모는 자식이 또 멀리 떠난지라 사념(思念)이 간절할 터이니 자 세히 설명해 주는 편이 나으리라고 여겼기에 옥진에게 명하여 대강 진상을 일러주도록 했다. 운종의 부모는 집안에 새로이 번뇌와 변고가 일어난 데다, 며느리인 장옥진에게서 이야기를 듣 자 속으로 크게 놀랐다. 운종이 간 지가 오래 되었는 데도 귀주(貴州) 경내에 소식이 없자 사람을 시켜 두 통의 서신을 전하게 한 후로, 장노사마저도 소식이 끊긴 것에 생각이 미쳤다. 비록 장삼 고와 며느리가 아무 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나 도무지 마음을 놓지 못했다. 운종부처는 노인네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한 조각 효심으로 부득불 사건의 전말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태가 긴박한지라 그를 탓할 일은 아니나, 원수의 무리들이 이처럼 흉악하니 사 태가 발전되어 만일 관가에까지 알려지면 그들의 흉성을 더욱 자극하여 온 집안 식구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었기 때문이다. 장삼고와 옥진은 그저 자신의 목숨만 보전할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눈앞 에 골육형제들의 목숨이 경각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초조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자경은 오히려 적들의 세력이 대단한 것도 모른 채 운종이 집에 있지 않으니 섣불리 나서지 말 고 운종을 추살하러 갔던 무리들까지 돌아온 뒤에 한꺼번에 손을 쓰고자 했다. 그런 생각을 했으 니 망정이지, 자칫 생각 한번 잘못 먹었다가는 오히려 전집안이 재앙을 맞을 것이었다. 장삼고와 옥진이 어찌 사정을 모르랴만은 두 노인네의 근심이 지나칠 것을 염려해 부득이 되는 대로 받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누가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고 했던가! 첫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집에서 계속 일이 터져 아무 까닭없이 형제들이 병져 누우니, 운종부모만이 변고의 내용을 아는 외에 다른 사람들은 아 직도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변고가 생긴 것이다. 어느날 저녁, 운종부모가 중당(中堂)에서 장삼고, 옥진과 함께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나누 고 있을 때 홀연 일진의 미풍이 주렴을 뚫고 들어왔다. 장삼고는 적들이 자객을 보낸 것이라 여기고 대갈일성과 함께 몸을 날려 앞으로 쳐나갔다. 촛불 그림자 어림께로 붉은 호로를 등에 진 도인 한 명이 홀연 나타났다. 옥진은 그가 취도인임을 알아보고 하늘에서 구세주가 내려온 듯 즉시 땅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삼고도 검을 거두고 앞으로 나가서 운종부모를 불러 함께 예를 나눈 뒤, 다시 자식을 구해 준 은 혜에 감사드리도록 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운종이 함께 오지 않은 것을 보자 마음이 웬지 불 안했다. 취도인이 그 심정을 눈치채고 말했다. "영랑은 비록 가까운 시일에 많은 재난을 만날 것이나, 그때마다 화가 오히려 복이 되리니, 결코 염려하실 필요없소이다. 빈도가 일전에 점괘를 짚어보니 적들의 준동이 아직 멀었기로 형산에서 한 분 노우(老友)를 만나고 오는 길이오. 길에서 우연히 동문 사질(師姪)인 손남이 요법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데려다 안정을 취하게 한 뒤 곧장 이곳에 이른 것이오. 매일같이 존부(尊府) 의 각방을 순시하며 그들이 상처를 입은 경위를 들었소이다. 풀을 때려 뱀을 놀라게 하는 우를 범할까 저어하였기로, 혹시나 그놈의 요사스런 무리들이 다른 곳으로 도망치면 세상에 화근을 남 기게 되므로 그대의 식구들을 일일이 구해 준 후 짐짓 병이 낫지 않은 듯 가장하고 있으라 하였 소. 조용하게 두 분의 약속한 조력자들이 올 때를 기다려 일제히 손을 써 적들을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라오. 방금 전 조력자들께서 이미 도착했으니 일을 전부 끝낸 뒤엔 다 시 멀리 떠날 것이라오. 영랑은 이미 빈도의 문하로 들어왔으니 장래 전도가 심히 밝을 것이외다. 세속의 일을 떨쳐버리지 못하기에 대략 처를 취하고 자식을 낳는 따위의 인간사를 행했으니 이미 많은 공행을 그르친 격이외다. 오래지 않아 두 가지 기쁨이 찾아올 것이오. 이 집안은 선행을 많 이 쌓은 집안이라 앞으로 자손이 크게 번창할 것이오. 단지 영랑은 공명을 얻을 인물이 아니니, 자식을 낳은 후에 억지로 붙잡아 두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백해무익한 일이 되리다. 두 분의 자 식 사랑하는 마음이 깊은 것을 알기에 헤어짐을 몹시 서러워하실까 봐 특별히 사전에 알려드리는 것이오. 보름 뒤에 고인이 그를 돌려보내 줄 것이오. 아들을 낳고 나면 필시 입산하여 수도해야 합니다. 다시 삼 년이 지나면 그도 아무 때나 항시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들을 뵐 수 있을 것이니 결코 영원히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오. 그때가 되면 두 분께서는 그를 막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자 옥진, 삼고가 고개를 조아리며 자신들의 앞길에 대해 물으려는데, 취노인은 옷소매 를 떨쳐 한 줄기 빛으로 화해 허공을 헤치고 날아갔다. 운종의 부모는 크게 놀라며 급히 절을 했 다. 헤아려 보건대 이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며 종적을 감추는 선인(仙人)을 언제 보았으랴? 자신도 모르게 믿는 마음이 크게 일어났다. 사랑하는 아들이 오래지 않아 그를 따라간다는 것을 알자, 신 선이 되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나 못내 헤어질 일이 꿈만 같았다. 기왕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을 잡아두려 한들 어쩌랴! 운명이란 본시 거역할 수 없는 일 인 것을! 형제들에게 아무 일이 없고 운종 역시 보름 뒤에는 돌아온다고 하지 않던가. 선인의 말 이라 틀림이 없을 것이었다. 그제서야 겨우 마음을 놓고 모든 것을 시간에 맡기기로 하였다. 다음날 집안에 부리는 사람이 살그머니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어젯밤 삼경이 지난 뒤, 둘째어르신의 상방 뜨락에서 광채가 번쩍거렸습니다. 오늘 오전 둘째어 르신께서 친히 문을 여시며 옆의 셋째어르신댁에 소리를 쳐 몇 사람이 와서 청소를 하라고 하셨 습니다. 들어가서 보니 상방 뜨락에는 몇 점의 누런 물줄기만 있을 뿐, 둘째어르신과 그분 앞의 작은 아기씨를 빼고는 둘째마님을 비롯해 그 많았던 친척, 친구분들이 모두 보이지 않습니다. 둘 째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둘째마님과 크게 말다툼을 한 끝에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마님 께서 친정으로 돌아가셨답니다. 그 많은 하인들도 원래 모두가 그들 친지분들이 데려온 사람들이 라 부부가 다투며 서로 기분이 틀어지자, 마님께선 남아 있던 친척과 그 밑의 하인들까지 모두 데리고 가셨답니다. 둘째어르신께선 부릴 사람이 없어 몇 사람의 노복을 부르셨는데 예전에 일하 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자경은 그의 말을 전해 듣고 하인에게 분부했다. "둘째형님께서 심사가 불편하실 테니 너희들은 결코 함부로 이 일을 발설하지 말도록 해라." 그는 안으로 들어가 장삼고와 며느리를 불러 연유를 물었다. 옥진 한 사람만이 나타나 일의 전모를 물은 뒤 대답했다. "어젯밤 장삼고께서는 취선사를 쫓아갔다가 날이 밝기 전에 돌아오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취선 사께서 두 분 검선과 약속을 하셔서 공동으로 적들을 비검으로 처치하여 한 사람도 도망치지 못 하게 하셨답니다. 일이 끝난 후 화골산(化骨散)으로 시체를 모두 녹여버렸답니다. 둘째백부께서는 이미 전날 밤 적들의 간계를 알고 계셨기에 그리 놀라지는 않으셨으나 취선사께 그 아이만은 살 려 달라고 간곡히 청을 드렸답니다. 취선사께선 어린아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며 본래부터 죽일 생각이 없으셨다시며 즉시 떠나셨답니다. 삼고께서 자신의 일도 있으신지라 저더러 대신 부 모님께 말씀드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자경부처는 말을 전해 듣고 해연히 놀랐다. 잠시 후 구방(九房)의 형제들이 전부 모여 사건의 전모에 대해 말을 나누고, 특별히 집사람들에 게 분부하여 이 일이 외부로 새나가지 못하게 했다. 주씨집안은 대대로 선행을 쌓은 집안이며, 악인들이 모두 본래 이 고장 사람이 아닌지라 한 번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몇몇 사람이나 약간의 기이함을 느낄 뿐 남의 일인지라 오래지 않아 잊혀질 것이었다. 취도인이 미리 예언한 날 저녁이 되자 홀연 한 줄기 금광이 곧장 정원 한가운데로 떨어져내리며 네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운종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함께 온 사람들도 또한 검선들이라 여겨 급히 절을 하려 했다. 소화상이 이를 헤아리고 있다가 먼저 만류했다. 운종이 급히 그간의 내력을 간략히 설명하고 집안 일이 어찌 되겠는가를 물었다. 과연 이미 모 두 잘 끝났다는 소리를 듣자 얼마나 마음이 놓였겠는가! 모두가 외인이 아닌지라 옥진을 불러 소 화상 등과 예를 나누게 한 뒤 그제서야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그간의 일을 자못 세세하게 얘기 했다. 운종의 부모와 옥진은 운종의 얼굴이 몹시 초췌해진 것을 보고 그가 여정을 통해 몹시 고난을 겪었음을 짐작했으나 그간의 경위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왔음을 알게 되 었다. 소화상 등이 그를 구해 준 얘기에는 감격을 금치 못해 세 사람에게 한 차례 감사의 말을 다시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종은 자신의 행적이 기이하여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차근차근 마음 속의 생각을 집안식구들에게 전하리라 생각하고 장황히 말을 늘어놓으며 한편으로 손님들이 거주할 곳을 마련 하라 일렀다. 소화상과 위지화 두 사람은 운종, 풍자 두 사람에게 초보 입문공부를 가르쳐 주는 것 외에는 다 른 사람들을 일체 만나지 않았다. 늘 예전처럼 문 밖을 나서서는 외공을 단련했고, 운종의 재력이 풍부했으므로 배고픔과 추위 따위는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도 흘러 눈 깜짝할 새에 오일 후로 단오날이 다가왔다. 소화상은 이번에 요물을 처치하러 갈때 풍자를 데려가는 것이 불편하다고 여겨, 그에게 운종과 같이 행동할 것을 일렀다. 옥진이 분만한 후, 집안 일을 두루두루 끝내놓고 함께 아미산으로 스승을 찾아가면 후일 다시 만 날 수 있으리라 했다. 소화상, 위지화는 동행하여 길을 떠났다. 운종은 다시 적지 않은 황금과 백은을 건네주며 몸에 지니고 있다가 선행을 베풀 때 사용하라 일렀다. 두 사람은 운종의 집을 떠나 검광을 타고 곧장 천잠령으로 날아갔다. 운남과 귀주의 경계에 이 르렀을 때 그들은 우연히 <왜수(矮搜)> 주매(朱梅)를 만났다. 주매가 두 사람을 부르자 두 사람 은 공중에서 검광을 거두고 땅으로 내려와 예를 차렸다. 소화상이 뵙는 인사를 올린 뒤 앞으로의 일에 대해 방도를 알려주기를 청했다. 주매가 입을 뗐다. "네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 데도 이처럼 대단한 공을 세우게 되었구나. 요악(妖惡) 을 제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쌓는 일이나, 문주의 뱃속에 있는 건천화 령주를 취한다면 열심히 수련할 경우 본신(本身)과 서로 화합해 도를 이룰 때 천년의 공행(功行) 에 버금가는 힘이 될 것이다. 실로 광세에 만나기 어려운 기연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그 요물은 화령주를 제 생명처럼 아끼느니라. 요물을 먼저 베고 나면 구슬은 스스로 날아 도망가고 구슬을 먼저 취하면 요물을 처치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니 결코 쉽게 처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요물이 땅에서 나오기 전에는 구슬을 자기 머리 위 삼 장 이내까지만 뱉아낸다. 요물이 조금씩 지상으로 더 나옴에 따라 구슬도 높이 상승한다. 요물의 전신이 세상에 나오면 구 슬과 합해져 일체를 이루어 날아다닐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정오가 되기 전에는 손을 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요물이 지상으로 완전히 나오는 바로 그때 그것을 완전히 제거해야 하며 자칫 부주 의로 시기를 놓쳐 요물이 구슬과 합체를 이룬 뒤에는 네 능력으로는 결코 감당해낼 수 없다. 따 라서 손을 쓸 때는 반드시 한 사람이 앞에서 먼저 구슬을 빼앗아야 한다. 구슬을 취하고 나면 요 물이 필시 뱃속에 가득한 독기를 뿜어내며 추적해 올 것이다. 그 구슬은 본래 그의 내단(內丹)인 지라 요물과는 서로 감응하여 네가 어떻게 신형을 숨기더라도 너를 쫓아올 수 있다. 법력으로 그 놈을 베어버릴 때 요물의 독에 중독되면 달리 구할 방도가 없을 지경이다. 그때는 전적으로 뒤에 서 있는 사람이 후면에서 비검으로 그놈을 베어버려야 비로소 완전히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건천화령주는 천재지보(天材地寶)인지라, 정사(正邪) 각파의 인물들이 모두 귀히 여기는 것이나 누세(累世)의 복덕(福德)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방금 전 점괘를 짚어보니 요물을 참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으나, 오히려 사악한 자가 곁에서 암산을 할까 두렵구나. 너희 두 사람 또한 안색이 음울한 것이 필시 재난을 만나기 십상인 듯하다. 나와 여러 도우들은 모두 각기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거기까지 돌봐줄 여가가 없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너희 두 사람이 아직 여유 있을 때, 이 며칠 동안 검술이 비교적 높은 동문 사형제를 찾아 서로 도와 다른 요인의 암산을 방비하 는 것이다. 일이란 늦을수록 안 좋은 법이나 반드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한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로지 구슬을 얻는 데만 신경을 쓰다가 요물을 제거하는 공을 이루지 못하 게 되거나 공을 세우려는 생각에 구슬을 얻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일의 경중이 서로 엇비슷하니, 각기 한 가지 일을 맡아 탐욕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달리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주매는 말을 마치고 먼저 날아갔다. 두 사람은 그를 배웅한 뒤 위지화가 스스로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들어 일체 모든 것을 소화상이 주재하도록 일임했다. 소화상은 처음에 생각하기를 요물이 아무리 지독하다 한들 결국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는 풋나기 인 셈인데 자신의 능력으로 제압하지 못하랴 여겼다. <왜수> 주매의 신신당부를 듣자 감히 소홀 히 하지 못하고 동문형제들을 꼽아보았으나 자신은 평소 사자매(師姉妹)들과 별로 교분이 없는지 라 이런 일로 찾아가기가 난처했다. 서로 친숙한 사이라고는 그저 현진자(玄眞子) 문하의 제갈경아와 금선(金蟬), 위지화 세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금선은 도행이 비록 얕으나, 두 자루의 보검이 지보(至寶)라 사마(邪魔)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이미 위지화가 성도에서 들은 소식에 따르면, 금선은 단오절 전에 청라 로 가야 할 몸이고, 다른 동문들이 많다 하나 친숙하지 않으며 그 재간이 아직 부족했다. 생각을 거듭하다가 제갈경아를 찾아가기로 했다. 동해 삼선동부(三仙洞府)를 찾아가 수소문하니, 현진자의 도동 한 명이 삼선께선 모두 보검을 연성하기 위해 단로(丹爐)를 지키고 있고, 제갈경아 는 명을 받들어 안탕산(雁蕩山)으로 약초를 구하러 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소화상은 말을 전해 듣고 삼선을 경동시킬 수 없는 노릇이라 그대로 동해를 떠나왔다. 재주가 뛰어나고 담대한 데다 공을 탐하는 마음이 크게 일어 소화상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바꾸었다. '이만하면 내 실력도 대단하지. 신형을 숨기고 감쪽같이 다닐 수 있으며, 무공도 출신입화의 경 지에 이르렀겠다, 이파(異派)의 요인이 수작을 부린다 해도 자운사의 그 요사스런 무리들보다야 더 지독하겠어? 게다가 여러 전대 명숙들께서 모두들 요물의 출현을 알고 계시고, 또 그놈의 해 악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한 데도 직접 앞에 나서서 처치하지 않고 한쪽으로 밀어두는 이 유가 뭐겠어? 당연하게도 이 후배를 귀엽게 여겨 그처럼 큰 공을 남겨주시려는 뜻이 아니냔 말 야. 그런데도 그것 하나 혼자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야 되겠어. 입 에 넣어주는 떡도 제대로 못 받아 먹는 바보가 될 수는 없잖아? 게다가 그 화령주는 하나밖에 없 는데 어떻게 나눌 수 있겠어. 그저 내가 사전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별일이 없을 테 지.' 소화상은 제멋대로 마음을 정해 버렸다. <왜수> 주매의 '요인이 곁에서 암산을 할 것'이라는 말 에 생각이 미치자, 한 이틀 정도 미리 도착해서 자세히 주위를 수색한 후, 예방책을 세워 문주를 처치할 때 착오가 없도록만 하면 될 것이라 여겼다. 마음을 정하자 즉시 위지화를 대동하고 천잠 령으로 날아가 풍자가 기거하던 토혈(土穴)로 들어갔다. 도착해 보니 하늘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을 무렵이라 골짜기 안을 살펴보니 달리 무슨 심각한 변 동은 없었으나, 요기가 이미 아주 짙어져 있었다. 몸을 날려 자신이 일전에 법술을 베풀어 놓은 곳을 점검해 보니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보이지 않자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위지화에게 촌락에 가서 두 사람이 먹을 식량을 준비해 오도록 하였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법술을 펼쳐 산을 봉쇄하고 이파인들의 이목을 차단했다. 그래도 혹시 요인이 산 안에 미리 잠복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위지화가 가고 난 뒤, 혼자서 다시 사방 수십 리 안을 샅샅이 살피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으면 결코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오후 내내 살펴보았으나 골짜기 안의 요기가 비교적 전보다 짙어진 것 외에는 다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자신의 혜안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기에 결코 실수하지 않았다고 믿고 요인이 나타 난다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그때 위지화가 이미 돌아와 있어 두 사람은 다시 한 차례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때가 되면 소화상이 앞에서 구슬을 낚아채고 위지화가 후면에서 요물을 베어버리기로 했다. 요 물이 고개를 위로 올리면 소화상이 다시 앞에서 몸을 돌려 앙쪽에서 협공하여 놈을 처치하면 될 것이다. 이 같은 계획에는 비록 소화상 자신의 사심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나, 위지 화를 앞에 세운다면 사실 그의 능력으로 미루어 무리임에 틀림없었다. 계획을 정하고 나자 소화상은 하늘을 향해 묵도를 올렸다. 동해를 향해 한 차례 절을 하며 스승 의 법력이 자신의 성공을 도와주십사 기원한 것이다. 묵도가 끝나자 몸을 일으켜 골짜기 위의 바위로 올라섰다. 위지화에게 자신의 뒤에 서서 비검을 운용하여 호위해 줄 것을 부탁한 뒤, 자신은 가부좌를 틀고 입정(入定)하여 고행두타(苦行頭陀)가 전수해 준 양계십방금강대장(兩界十方金剛大藏)의 진언(眞言)을 펼쳤다. 그것은 불법으로 지형을 변하게 하여 이파인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고, 혹 요사스런 인물이 들어오려 해도 들어 올 입구를 찾지 못하게 하는 법술이었다. 술시 초에 시작하여 다음날 진시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대법이 끝났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위지화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이곳 요물의 지혈(止血)이 있는 바위 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법술을 행했는데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위지화가 대답했다. "소사형이 입정에 든 뒤에 잠시 있다 신형을 감추었으나, 나는 그래도 사형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급도 소홀함이 없이 사방을 경계했었지. 처음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나 자시가 조금 지나자 멀리 골짜기 안에서 한 줄기 붉은 광채가 보였는데 불빛보다도 훨씬 밝았어. 그것은 두 줄기의 푸른 별무리를 이끌고 있었는데, 골짜기 위로 십 장 정도 높이에서 마치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듯 온 하늘을 날아다녔었어. 그 같은 광채는 처음에는 매우 작았는데 시간이 흐 르자 푸른 별무리들과 함께 점점 크고 길어지더군. 그리고는 달이지고 하늘이 어슴두레 밝아올 무렵이 되자 붉은 광채 왼쪽 근처에서 한 줄기 누른 연기가 이는 듯했었지. 그 붉은 광채는 두 줄기의 푸른 별무리를 이끌고 급속히 누런 연기 속으로 들어가더니만, 그리고는 한 차례 꿈틀대 더니 유성이 떨어져내리듯 골짜기 안으로 쏜살같이 내려왔는데, 그러고 나더니 그 누런 연기도 사라져 버렸지. 아무래도 범상한 일로는 여겨지지 않았는 걸." 소화상이 말했다. "내가 연성한 이 <양계십방금강대장>은 결코 시시한 재간이 아니야. 펼칠때는 심신(心身)을 거 울처럼 맑게 가지고 추호의 잡념이 일어나서도 안 되는 것이야. 요물이 행여 눈치채고 다가와 방 해할까 봐 혹 사형더러 호법을 서 달랬던 것이고, 그리고도 만일을 대비해 신형을 감춘 것이지. 아직까지 요물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니 감히 이 법술을 펼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섣 불리 모험을 했겠어? 이 법술을 한번 펼쳐 놓으면 다른 요인은 이곳에서 기웃거릴 생각을 말아야 할 걸.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안심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어! 혹 사형이 목격한 광경은 아무 래도 그 요물이 혼자서 지랄발광을 한 것 같은데, 오늘밤 내 친히 살펴본 뒤에 다시 얘기해 보도 록 하자구." 단오가 아직 이틀이나 남았으므로 소화상은 남은 시간을 이용해 위지화와 함께 온 산을 수색했 다. 이제는 시간이 매우 늦었기 때문에, 독기가 너무 지독하므로 온산을 샅샅이 뒤졌으면서도 골 짜기 안의 요혈(妖穴)은 섣불리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위지화에게는 골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언덕 위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자신은 정오 가 되어 태양이 중천에 걸리자, 햇빛이 가장 밝을 때를 틈타 몸을 날려 골짜기로 들어가 요혈을 조사해 보았다. 골짜기에 들어서서 살펴보니 모두가 죽어 있는 사곡으로 마치 호로병의 주둥아리와 같은 구조였 다. 골짜기 밑은 그 위로 사면이 온통 바위로 가리워져 햇볕이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땅이 원래 음습한 데다가 바위 위의 야생나무들이 떨구어논 낙엽 따위가 깊숙이 쌓여 썩어 있어서 구역질이 저절로 나올만큼 악취가 지독했다. 요혈 근처로 접근해 보니 일 장 남짓한 둥근 지혈이 천장 남짓한 거대한 암석을 등에 이고 뚫려 있었다. 혜안으로 살펴본즉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그 안에서는 몽글몽글 검은 기운이 곧장 위로 치솟고 있었다. 가끔씩 오색 안개도 보였는데 귓가로는 '후욱후욱!' 하는 괴물이 숨을 쉬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화상은 영단을 복용하고 천장을 떨어져 내려다보고 있는 데도 이미 지독한 비린내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는 것을 느꼈다. 이처럼 험독하다면 요물을 제외하고는 이파 중의 아무리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결코 숨어 있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는 몸을 돌려 돌아왔다. 골짜기를 막 벗어나려는데 골짜기 안쪽으로 하나의 볼록 튀어나온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바 위 위에는 여러 더미의 돌들이 놓여 있는데, 팔괘의 형상을 따른 것이었다. 그 팔괘의 문호는 매 우 기이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돌무더기 옆으로 자라난 수많은 야생 잡풀과 나무로 미루어보아 전대 인물이 무엇인가를 진압하려고 만들어 놓은 듯했다. 골짜기의 형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필히 손을 써서 알아보아야 했으나 위지화와 상의할 일이 급해 십분 주의하지 않고 총총히 지나쳤다. 위지화가 지켜 서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흘낏 바라보니 위지화의 얼굴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아닌가! 소화상은 대체로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는 인물인지라 위지화에게 몸에 이상이 없는가 물었다. 위지화가 말했다. "아마 어젯밤 산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꼬박 서 있었던 데다, 방금 전 골짜기를 살피는 도중 바 람결에 흐릿한 비린내가 풍겨와 즉시 뒤로 물러났는데 그때 아마 요물의 독에 약간 스쳤기 때문 인가 봐. 지금은 그저 머리가 약간 어지러울 뿐 별다른 이상은 없는데." 소화상은 그에게 더욱 조심할 것을 당부하며, 함부로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지 말고 자신의 안내 에 따를 것을 주지시켰다. 즉시 그에게 단약 하나를 먹도록 건네주며 이 일을 그대로 지나쳤다. 소화상은 이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위지화가 비록 검술조예가 자신 만큼은 깊지 않다 하나, 스승을 모신 지 여러 해로 이미 능히 비검을 구사하고, 신검합일(身劍合一)에 이르렀 거늘 어찌 하룻밤의 찬바람과 독기 따위가 멋대로, 그를 상하게 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 한 차 례의 부주의가 자칫하면 위지화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것이다. 위지화는 약을 복용하자 어지러움이 조금씩 가시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손을 쓸 때의 계책을 상의했는데 고행두타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요물은 천생적으로 기이한 몸체를 타고 난 까닭에 전신이 바깥공기를 쐬기만 하면 곧바로 철린 강골(鐵鱗鋼骨)로 변해 버린다. 가슴 부위의 흰점이 그의 약점이며, 처음 세상에 나올 때는 두 개 의 뒷다리도 비교적 약하다. 이곳들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아무리 비전으로 베어도 그놈을 해칠 수 없다. 게다가 그놈은 무척이나 영악해서 한 번 상처를 입고 자신이 상대하지 못할 적이라 생 각되면 즉시 바람으로 변해 도망쳐 버리니 다시 쫓아갈 방도가 없게 된다.' 고행두타는 일찍이 요물의 몸에 대해 그렇게 말했었다. 요물이 지혈에서 세상으로 나오자면 필시 골짜기 입구 쪽으로 끌고 나와야 한다. 때가 되면 위 지화는 골짜기 아래 단애(斷崖) 위에 숨어 있다가 원신을 운용하여 비검을 조정하고, 소화상이 구 슬을 낚아채기를 기다려 먼저 비검으로 그 두 개의 뒷다리를 베어버린다. 요물이 고통으로 인해 고개를 돌릴 때 소화상이 다시 무형둔광(無形遁光)을 타고 앞쪽에서 비검 을 날린다. 놈이 뒷다리가 베어져 앞다리로 일어설 때를 틈타 가슴 부위의 흰점을 그대로 찔러버 린다는 계책이었다. 두 사람이 일제히 앞뒤에서 협공하여 놈이 구슬을 포기하고 땅 속으로 도망 치는 것을 방비한다. 그래야만 놈이 다시는 인간세상에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될 것이니까. 계획을 끝마쳤을 때는 어느 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번에는 어제와 달리 석양이 산허리에 걸리자 괴성이 일기 시작했다. 골짜기 안팎으로 커다란 암운이 걸리며 사악한 기운이 귀기스럽게 번쩍거렸다. 두 사람은 이러한 광경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조금 있자 괴성이 점차 커지며 흡사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듯 귓가를 윙윙거렸다. 두 사람은 비록 놈의 지독함을 미리 알고 있었으나, 급히 정신을 가다듬고 요물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기 위 해 애를 써야 했다. 소화상은 그런 대로 견딜 만했으나, 위지화는 이미 요물의 괴성이 가슴을 짓 누르는 것 같아 심기가 크게 흐뜨러졌다. 자정이 지나면서 하나의 새빨간 불덩어리 같은 것이 빠르게 채무 속에서 뛰쳐나오며 솟아올랐 다. 붉은 광채가 번쩍거리며 요물 왼쪽의 요사스런 안개를 비추었다. 요물의 독안개는 흡사 노을 이 번지듯, 오색이 찬연하게 아름다운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다. 귓가로 다시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이어서 두 가닥의 푸른 별무리가 하늘을 수놓았다. 각 가닥에는 약 이십여 개의 별 같은 것 이 있는데 섬전 같은 광채를 형형히 뿌리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앞서의 붉은 광채를 따라 새로 빛을 빌하며 오색 독연기 속을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정신없이 어 지럽게 춤추는 모양이 흡사 두 마리 청룡이 함께 어우러져 여의주를 희롱하는 듯했다. 갑자기 위 로 솟구쳐 서로 부딪치며 온 산을 붉고 파랗게 물들이는가 하면 갑자기 또 밑으로 내려와 수많은 별이 쏟아져 내리듯 명멸하며 보일 듯 말듯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위지화는 이처럼 기경(氣景)이 눈앞에 펼쳐지자 자신도 모르게 눈이 어지럽고 신지(神智)가 흔들 려 몇 차례나 요물의 부르짖음에 대답할 뻔했으나, 그때마다 소화상이 이를 제지했다. 동녘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자 붉고 푸른 불별(火星)들도 점차 아래로 내려오며 그 움직임이 느려졌다. 갑자기 하늘을 향해 세 차례 솟구쳐 올랐다가는 눈 깜짝할 새에 곤두박질해 요혈로 들 어가 버렸다. 햇빛이 밝아오는 데도 요물의 독안개는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오색찬연한 빛을 발 하며 암혈(巖穴) 위로 걸려 있었다. 위지화가 어제 새벽에 보았다는 요혈 부근의 누른 안개는 시종 출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 일을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오늘밤이 지나면 내일이 바로 단오, 요물이 세상에 나오는 날인 것이다. 두 사람은 요물을 경동 시킬까 저어하여 먼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각기 비검을 방출하며 한 차례 연습했다. 위지화는 어찌 된 영문인지 종내 기운이 없고 몸이 전같지 않아 억지로 연습을 끝냈다. 소화상 과 함께 단약 한 알을 복용하고 두 시진 가량 내공을 운용한 뒤 다시 천잠령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요혈 근처는 조사하지 않고 그 부근만을 살피며 만일 올지도 모를 이파인의 잠복에 대 비했다. 요 며칠간 계속되는 수색의 결과 발견된 것이라고는 새의 깃털 따위뿐 다른 것은 지푸라 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야생 짐승도 이미 요물의 독기 때문에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새의 깃 털은 필시 요물이 잡아먹고 토해낸 찌꺼기가 바람에 날려온 것일 터였다. 달리 이상한 점을 발견 하지 못하자 그들은 곧장 풍자의 토혈로 돌아왔다. 위지화는 혼자 돌침상에 앉아 식사를 하다가 돌연 소리쳤다. "소사형, 우리가 벌써 이 토혈에 수차례 드나들었는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 하지 못했어?" 소화상이 무엇이 이상하냐고 물었다. 위지화가 말했다. "나도 아까까지는 느끼지 못했었지. 이 몇 년 동안 사부님의 지도를 받아 이미 내 몸은 추위나 더위가 침범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잖아. 전날 밤 골짜기 입구에서부터 갑자기 몸에서 열이 나기 에 두 차례나 단약을 복용했어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 그런데 이 돌침상에 앉자마자 가슴이 상 쾌해지지 않겠어? 처음에는 그냥 우연인 줄만 알았었지.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요물의 괴성을 들 은 데다 또 소사형과 한 차례 비검을 연습하고 나니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고 열이 오르면서 신지 가 편치 않더란 말이야. 그런데 방금 전 들어와서 다시 이 침상에 앉으니 금세 심신이 편안해지 는 거야. 돌침상에 무슨 기이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소화상은 며칠 내내 요물을 제거하고 적을 수색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으므로 만사를 염 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위지화의 말을 듣고 호기심이 일어났다. 위지화를 일어서도록 한 후 자세 히 토혈과 그 돌침상의 형태를 살폈다. 토혈은 암벽에 붙은 채 진흙과 돌이 섞여 있는 평범한 모습으로 별다른 특별한 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오월의 날씨는 동굴 속이 바깥보다는 아무래도 시원한 편이니 사실 따지고 보면 위지화 가 상쾌함을 느낀 것도 별달리 기이할 것도 없다. 그 돌침상은 풍자가 잠을 자던 곳이다. 비록 하나의 장방형 청석(淸石)이지만, 그래도 한 덩어리 로 이루어졌고 사면이 반듯한 열여섯여 척의 암석이었다. 땅 위로는 세 척 정도가 솟아 있고 나 머지는 묻혀 있는 상태였다. 동굴 입구가 매우 작아 풍자에게 천생의 신력이 있다 해도 이것을 결코 외부로부터 운반해 오지 는 못했을 것이었다. 돌침대의 몸체 역시 사면과 마찬가지로 반들반들하고 깨끗했다. 동굴 안이 청량한 데도 돌침상을 만지면 오히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풍자의 말에 따르면 본래 여우 따위가 파놓은 굴이라는데 어찌 암벽 속에 이처럼 장방형의 반듯 한 바위가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보면 볼수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잠시 동 안은 별달리 할 일도 없으므로 의문점을 밝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생각끝에 바위를 움직이기 전에 먼저 두 사람이 힘을 합해 바위 옆의 진흙과 잡석 따위를 검으로 파냈다. 그 후에 풍자가 동굴에 남겨두고 간 쟁기로 파들어가 잠시 후 바위의 밑뿌리까지 들어낼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본즉, 상하 사방의 높이가 똑같아서 한 치의 어김도 없었다. 두 사람은 신력을 발휘해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바위를 들어냈다. 바위를 들어낸 자리에는 사람 의 팔뚝만한 황정(黃精)이 개미떼처럼 바글거렸다. 대충대충 묶어 계산해도 그 수가 얼마나 될지 모를 지경이었다. 소화상이 한 뿌리를 꺾어 입에 넣으니 입 속에 들어가는 순간 사르르 녹는 것이 예전에 먹어보 았던 것보다 열 배는 뛰어난 맛이었다. 마음 속에 많은 생각이 떠올라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요물을 참한 후 건천화령주를 나혼자 갖는데 미안함을 느끼던 참인데, 지금 이 바위의 형 상이 이처럼 기이하여 처음에는 무슨 보물이 밑에 숨겨져 있는 줄 알았지. 지금 보니 이처럼 훌 륭한 황정이 또 이렇게나 많이 바위 밑에 자라나 있고, 흑사형이 일찍이 청량감을 느꼈다 하니 필시 바위 속에 있는 보물의 영기에 감응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지네. 다시 말해 돌 속에 보물이 없다면 외형이 이처럼 인공으로 깎은 듯 반듯반듯할 리가 없다는 말이야. 아마 내일 요물 을 처치하는 일에 도움이 될 물건일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사부님께 들은 바에 따르면, 망창 산(莽蒼山) 만년미옥(萬年美玉)의 정영(晶英)이 온옥연화(溫玉蓮花)를 이루는 데 그것이 강호 아미 문호를 크게 빛내는 것과 유관하다 하셨네. 아직까지 그것이 출현할 때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 기에 나도 듣기만 했지 본 적은 없었어. 이 돌침상이 만지면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 아 그 안에 온옥(溫玉) 따위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왕 이렇게 된 것, 잠시 여유도 있으니 이대로 지나칠 순 없지. 우리 두 사람이 비검을 사용하면 이 바위를 흙덩어리로 만드는 것도 어 렵지 않을 것이야. 그러나 이 바위의 내력을 모르는지라 무심결에 그 안의 보물을 상하게라도 해 버리면 그 어찌 아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돌의 행태로 보아 보물은 필시 한 가운데 내장되어 있 는 듯하네. 내가 비교적 흑사형보다는 조심스러운 편이니 나 혼자 손을 써서 요행히 보물을 얻게 되면 자네에게 주도록 하겠네. 어떤가 내 생각이?" 위지화가 막 감사의 말을 하려 할때, 소화상은 이미 그를 한쪽으로 물러서도록 지시했다. 손가락 이 이르는 곳마다 한 줄기 금빛이 바위를 감쌌다. 사방이 마치 눈이 날리는 듯 서리가 끼는 듯 돌가루로 뒤덮이며 삽시간에 삼 분의 일 정도가 깎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별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석질(石質)은 안으로 파고 들어 갈수록 더욱 부드러워졌 고, 금광이 번쩍일 때마다 옥설(玉雪)이 분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 육 척여의 커다란 청석 이 한 척 남짓한 방원으로 변해 버렸다. 육 척 높이의 석주를 파는 동안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소화상은 손을 쓰는 한편, 자신이 쓸데없이 탐욕심을 가져 하늘이 내려준 기이한 바위를 덧없이 없애버린 것이 아닌가 후회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청석은 점점 줄어들어 이제 팔구 치밖에 는 남지 않았을 때 돌연 금광 속에서 은빛 노을 같은 것이 번뜩여 급히 손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 가 살펴보았다. 이 청석은 위 아래가 모두 일반 옥과 같은 모습이었건만, 유독 중심부위에서만은 은빛이 감돌았 다. 대략 눈대중을 해보니 예닐곱 치 어림께였다. 과연 추측이 틀리지 않아 보물을 발견한 것임을 알았다. 금광이 지나가며 먼저 청석의 윗부분을 잘랐다. 그것을 한곁에 밀어놓으며 다시 밑부분을 똑같이 잘라갔다. 천려일실 積慮深仇 劫妖天蠶嶺 傷心前路 求友釣鰲磯 소화상은 청석 중심을 집어들고 한쪽으로 가져다 세밀히 살펴보고자 했다. 위지화는 무심결에 고개를 숙여 청석의 잘려진 밑뿌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곳에서 한 줄기 맑은 샘물같은 것이 솟구쳐 나오지 않는가?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 굵기만 했는데 바로 잘려진 청석의 석근(石根)에서부터 곧장 위로 치솟고 있었다. 위지화는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그 중의 한 가닥이 얼굴에 튀기게 되었 다. 한 방울의 액체를 입에 적시고 보니 달큰하고 상쾌한 향기가 감돌며 심장이 다 시원해지는 듯하지 않는가? 그제서야 그것이 영천(靈泉)임을 알았다. 경황 중인 데다 목도 타는 김에 떨어져 내리면 아까운 생각이 들어 소화상을 부를 겨를도 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영천이 뿜어지는 근처로 다가가 받아 마셨다. 꿀꺽꿀꺽 두 차례쯤 삼켰을까, 심 신이 즉시 맑아짐과 동시에 머릿속이 환히 개이면서 갈증과 어지러움이 한꺼번에 씻은 듯이 가셨 다. 입에 가득 물을 담고 사람을 부를 수 없는 노릇인지라, 두 다리를 곧추세우고 손을 뒤로 돌려 소화상을 불렀다. 소화상이 다가와 무슨 일인가를 묻기를 기다려 위지화는 나머지를 삼키고 그에게 영천을 마시라 고 하려 했다. 그런데 막 입을 떼자마자 영천도 칼로 자른 듯이 끊기며 더 이상 솟아나지 않았다. 위지화가 자신이 마신 액체에 대해 설명하자, 소화상은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어 말했다. "자네가 마신 것은 틀림없이 영석선유(靈石仙乳)로 천지에 보기 드문 공청석유(空靑石乳: 據本草 網目載, 空靑石狀若楊梅, 色靑, 其腹中空有奬, 治盲立效: 본초강목의 기록에 따르면 공청석은 양매 와 같이 생긴 바위로 색은 푸르다. 그 가운데는 비어 있고 액체가 고여 있는데, 장님을 치료하는 데 직효약이라 한다)란 것이다. 나는 그저 어떻게 바위 속의 보물을 꺼낼까만 신경쓰다가 한 모금 도 마시지 못하고 말았군.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흑사형이 평소처럼 둔하게 굴지 않고 영기있 게 재빨리 행동했다는 점이야. 그렇지 못했으면 영천이 얼마 되지 않아 순식간에 없어지는 바람 에 누구도 마시지 못했을 게 아닌가! 누구는 마시고 누구는 돌이나 깎아내고, 이 모두가 이미 정 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선연(仙緣)이란 각각의 인과에 따르는 법이라네. 내 이처럼 신경을 쓰면 서도 일시 소홀하여 위 아래 두 조각인 것을 잊다니. 아래쪽 바위를 조금만 살펴보았던들 조금은 나누어 마실 수 있었을 텐데. 방금 전 석심을 집어들고는 손에 촉촉하고 따뜻한 감촉이 전해 오 기에 몸을 돌리는 것조차 잊고 말았지. 자네가 석근에 머리를 들이대고 손을 휘저으며 나를 불렀 을 땐 이미 때가 늦고 말았다네. 축하하네, 흑사형. 공청석유를 마시고 나면 비단 여러 해의 공행 (功行)이 증진될 뿐 아니라, 안력(眼力)도 대단히 증가한다네. 비록 구유(九幽)를 꿰뚫어볼 수는 없다 해도 내가 연성한 혜안보다는 몇 배나 뛰어날 것이네." 위지화가 웃으며 말했다. "소사형은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구. 이왕 이 돌의 아랫조각에 석유가 있었는데, 위쪽이라고 없 으란 법이 있어? 어째서 위쪽 석근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거야? 만일 있으면 돌의 아랫조각에 다시 선기(仙氣)를 얻게 되지 않겠어?" 소화상은 이 말을 듣고는 일리가 있다고 여겨 위쪽의 석근을 들고 검광으로 조금씩 파들어갔다. 아래쪽의 석근도 깎아내기 전까지야 어디 공청석유가 있는 줄 알았던가! 그래서 그들은 석심에 보물이 있다고 단정을 내리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 다시 검광을 이용해 세심하게 깎아내며, 돌 속의 은색에는 추호의 손상도 가지 않도록 주의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은색은 점점 선명해지며 마치 돌 속에서 뛰노는 것 같았다. 그것은 더욱 찬란 한 빛을 뿌리는 까닭에 한눈을 팔 수 없었다. 갑자기 한 가닥의 하얀 기운이 돌 속에서 '퍽!' 하 는 소리와 함께 솟아나오더니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다시 돌을 쳐다보니 일곱 개의 작은 구 멍이 뚫려 있었다. 두 사람은 돌 속이 이미 텅 비었으며 그 빈 공간에 무엇인가가 들어 있음을 보았다. 검광이 닿 는 곳마다 일곱 개의 작은 구멍은 점차 커졌다. 그제서야 안에 들은 물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 마리의 작은 소(牛)로, 몸 전체가 은색을 띤 채 돌 속에서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것이 도대체 무슨 보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꺼냈다간 어디로 도망칠까 봐 잠시 손 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은색의 작은 소가 바깥의 공기와 접하자 행동이 점점 느려지더니, 잠 시 후 돌 속에 누워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줄 누가 알았으랴! 위지화는 꺼내자고 주장했으나 소화상은 아직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먼저 금제를 가한 뒤 다시 금광을 사용해 돌 표면을 깎아냈다. 다 깎고 보니 석심은 둥글넓적한 쟁반 같은 모 양이었다. 그 작은 소는 돌도 아니고 옥도 아닌 것이 온몸이 은빛으로 번쩍거렸다. 푸른 눈에 하얀 이빨, 주홍빛의 네 발굽을 제외하면 뿔까지도 전부 은빛이었다.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모습으로 인공 으로 만들어진 흔적은 조금도 없는 천연 그대로의 자태였다. 하늘이 내린 영물(靈物)임은 분명하 건만 도무지 그 내력이나 쓰임새를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두 사람도 크게 기뻐했고 더욱이 위지 화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듯 손에서 놓으려 들지 않았다. 소화상은 승복에서 몇 가닥의 실을 뽑아내 은빛 소를 잘 묶은 뒤 위지화의 가슴 근처에 매달아 주었다. 달리 금법을 행해 도망치는 것을 방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물을 얻고 나니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위지화는 공청석유를 복용한 후, 몸과 마음이 더욱 활 달해져 한껏 흥을 내며 소화상과 함께 동굴 밖으로 나갔다. 앞면의 요물이 있는 골짜기엔 이미 요사스런 구름이 피어올랐다. 독무는 저녁 노을을 받아 물들이고 있었는데 어제 저녘보다도 훨씬 농후한 색채였다. 두 사람은 잠시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고 야색이 이미 짙은 시 각, 하늘엔 온통 별이 가득하고 한 점의 바람도 일지 않았다. 사방은 적막하기 그지없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골짜기의 요기뿐이었다. 그것은 쉴새없이 꿈틀거리며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간혹 그 사이로 청홍의 두 가지 빛이 번뜩였다. 단오가 되려면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았으니 아직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는 입장이었 다.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가부좌를 튼 채 공력을 가다듬었다. 삼경이 지나자 전에 보았던 붉고 푸른 광채들이 언뜻언뜻 비치기 시작했다. 별무리의 빛도 더욱 크고 밝아져 있었다. 능히 요물의 기다란 두 다리를 확연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요물은 이리저리 자신의 머리를 독무 속에서 움직거리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자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다. 붉은 광채는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두 가닥의 푸른 별무리를 이끌고 요혈이 있는 상 공에서 어지러이 춤추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요사한 구름과 독무는 마치 개똥벌레의 그것마냥 오 색빛깔이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었다. 갑자기 기이한 비린내가 코를 스치면서 요물의 신형이 점차 분명히 드러났다. 마치 땅을 뚫고 온몸을 드러낸 채 솟아오를 듯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옥청사태와 <왜수> 주매의 가르침이 없 었더라면 즉시 달려들어 손을 쓰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물에게 발각될까 봐 소화상은 이미 신형을 감춘 지 오래였고 위지화 역시 조용한 곳에 잠복했 다. 요물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온몸은 푸른빛깔을 띤 채 뾰족한 대가리에 날카로운 주둥이 를 갖고 있다. 온통 빽빽한 비늘로 덮여 있는 요물의 몸통도 전체적으로 보아 두꺼비의 그것과 흡사했다. 배밑으로는 두 갈래로 짧은 다리가 빽빽히 나와 있는데 마치 새의 발톱 같은 생김새였다. 두 개 의 앞 발톱은 길이가 약 삼 장 가량 되어 보였는데, 온통 새까만 빛을 띠고 있고, 그 끄트머리는 마치 게의 눈알같이 생겨 있었다. 몸통의 중간 마디쯤에 배열해 있는 수없이 많은 한 장 남짓한 갈고리들은 꽃받침같이 생겼는데, 푸른광채를 발산하는 것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두 개의 뒷발톱을 남겨 놓고 요물은 아직도 반 정 도밖에는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반쯤 드러낸 뒷발톱은 대체로 그 모양이 앞다리와 비슷한데 색 깔은 정반대로 하얀색이었다. 일찍이 옥청사태의 말에 따르면 요물은 다리 끝으로 홍망(紅網)을 내뿜는다 했는데 아직까지 그 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요물의 울부짖음은 기이한 애조를 띤 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그렇듯 살피고 있던 차에, 돌연 요물의 앞쪽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몇 개의 녹화(綠火)가 한 줄 기의 누른 연기를 끼고 요물의 머리 위로 곧장 부딪쳐 갔다. 이 찰나지간에 요사스러운 구름은 어지러이 휘돌고 독무도 일제히 걷히면서 유성이 쏟아지듯 분분히 떨어졌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요물의 모습은 자취 하나 남기지 않고 땅 속 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한 무더기의 독무만이 오색 비단마냥 암곡 위로 걸려 있을 뿐이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달리 어떠한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전날과는 다른 것을 보자 두 사람은 다같이 기이함을 느꼈다. 그러나 요물이 혼자서 멋대로 장 난질을 친 것이라 추측할 뿐 다른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다. 정오가 되자 태양이 하늘 가운데서 비치고 푸른 하늘은 만리를 뻗었다. 단오날은 초여름이라 바람은 부드럽고 날씨는 포근했다. 천둥 비바람은 고사하고 한오라기의 짙 은 구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위지화가 말했다. "옥청사태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오후 큰 천둥 비바람이 친 후에야 요물이 세상에 나올 것이 라 하셨었지? 그런데 히늘을 좀 봐. 어디에도 구름 한 점 보이질 않으니, 이래서야 어디 비가 오 겠어?" 위지화가 말하는 동안 소화상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서북방쪽으로 몇 가닥 가느다 란 구름이 오락가락할 뿐 과연 비가 올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동정이 다른 날과 달랐으므로 약간의 의구심이 일어났다. 시간이 다 되어가니 하늘 색이 어쨌든 간에 전에 상의한 대로 손을 써야만 했다. 즉시 위지화를 대동하여 공중을 날아 요물의 골짜기를 뛰어넘어 천장 남짓한 바위 위로 올라섰다. 아래쪽이 바 로 요물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모든 걸 미리 정한 대로 행하되 지금부터는 말을 삼가해야 했다. 아래쪽의 요물을 경동시킬까 봐 손짓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소화상은 먼저 위지화의 자리를 잡아주고 돌아왔다. 골짜기 입구의 평평한 바위 위로 날아가 요 물이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려 건천화령주를 빼앗아야 했다. 신형을 숨기고 있다가 위지화가 요 물의 뒷다리를 베어버리면 요물이 고통을 못 이겨 돌아볼 것이고, 그때 다시 되돌아가 둘이서 협 공을 가한다는 계획 그대로였다. 그러한 의도로 막 평애 위로 내려설 때 돌연 일진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 니 이제 막 오시가 지날 무렵인데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서북방에 먹구름이 층층이 몰려들고 있었 다. 눈 깜짝할 새에 맑은 하늘은 자취를 감추고 사면팔방에서 먹구름이 질풍같이 몰려들며 하늘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구름 속에서 번갯불이 콩볶듯 튀며 번쩍번쩍, 요란스런 굉음과 함께 뇌성벽력 이 치기 시작했다. 골짜기 위를 덮고 있던 요물의 독안개는 이 한 차례의 뇌성벽력과 동시에 가느다란 연기로 변하 며 바람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어서 요물이 있는 골짜기 위의 하늘로 번갯불이 번쩍하며 벼락소리가 크게 일었다. 벼락소리는 빨랐다 느렸다 하며 굉음을 발하는데 계곡의 메아리와 어우러져 천지가 개벽하는 듯 고막을 터뜨리는 듯했다. 산석(山石)을 어지럽게 휘날리게 하며 사방에서 폭풍이 불어왔다. 동시 에 술잔 크기만한 만한 빗방울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천둥은 쉬지 않고 계속됐지만 요혈 위 삼사 장 위로는 내리지 않았다. 요물의 골짜기에서는 한 참 동안 뇌성이 몰아치는 데도 별다른 동정이 보이지 않았다. 뇌성은 한 시진 반을 넘어서자 점점 더 기승을 부렸고 번개도 더욱 심해졌다. 번갯불이 요혈에 서 불과 일 장여 남짓한 곳에 떨어지자, 갑자기 한 줄기 붉은 광채가 유성같이 날아가며 허공으 로 곧장 치솟았다. 그 빛이 온 산을 환히 밝히는데 번갯불보다도 밝았다. 바로 이때 다시 한 줄기 벼락이 곧장 요혈을 향해 내려꽂히며 그 붉은 광채와 부딪쳐 공중에서 흩어졌다. 이어서 뇌성이 점차 크게 울리더니 붉은 광채는 요혈로 떨어져 내렸다. 붉은 광채가 수 그러들자 번갯불이 계속해서 밀고 내려오다가는 다시 붉은 광채가 기세를 올리며 번갯불과 맞부 딪쳤다. 이처럼 붉은 광채와 번갯불이 몇 차례 밀고 당기고 하는 중에 오시가 다 지나갈 무렵이 되자 요 혈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줄기 누런 연기가 일어났다. 동시에 뇌성이 씻은 듯이 그치며 구름 이 흩어지고 비가 멈추었다. 요혈 속에서 붉은 광채가 다시 몇 차례 번쩍이더니 예의 그 요사스런 구름이 요혈을 통해 기세 등등하게 솟아올랐다. 그것은 요혈 부근 허공을 덮은 비단더미 같았다. 조금 더 지나니 다시 채무 를 덮고 하나의 붉은 구슬이 솟아나와 땅에서 약 삼 장 높이의 허공에 멈춰 쉴새없이 회전을 시 작했다. 멀리서 보기에는 마치 하나의 불구슬(火珠) 같은 모양인데 예전같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 다. 광채도 안으로 응어리진 채 밖으로는 퍼지지 않는 것이 또 전과 같지 않았다. 비록 불꽃은 더 욱 커졌지만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요물이 이번의 뇌성벽력을 통해 이미 완전히 성숙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건천화령주 역시 정 순하게 연성되어 커졌다 작아졌다 할 수 있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요물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므로 구슬을 탈취하러 뛰쳐나갈 수 없었다. 막 궁리를 하는 중에, 갑자기 요혈 속에서 다시 수백 수천 줄기의 오색 독기가 피어나며 허공을 뒤덮었다. 곧이어 두 개의 열서너 장 가량의 앞다리가 먼저 땅 위로 나왔다. 다리 위의 푸른빛 무 리는 공중에서 보니 그렇게 밝게 빛을 내지는 않았다. 단지 놈이 내뿜는 독기는 특이한 비린내를 풍기며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요물이 곧 세상에 나올 것임이 분명해지자, 두 사람은 감히 소홀하지 못하고 정신을 더욱 가다 듬고 진기를 안으로 추스리며 즉시 손을 쓸 수 있도록 준비했다. 눈앞의 요물의 두 앞다리는 하 늘을 향해 곧게 펼쳐지며 몇 차례 춤을 추듯 까딱거렸다. 그에 따라 공중에 정지한 채 회전하던 건천화령주도 전후좌우로 움직였다. 긴 앞다리가 완전히 빠져나온 후 요물의 몸뚱이가 비릿한 독무 속에서 나타났다. 요물은 매우 피곤한 듯 천천히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백일하에 요물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형태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때때로 두 다리를 모을 때의 모습은 과연 고서체 문(文) 자와 흡사했다. 뾰죽한 머리 위로 한 쌍의 세모꼴 눈이 자리잡고 있는데, 반쯤 열린 두 눈을 통해 홍망이 번득였다. 한번 독무를 내뿜을 때마다 십여 장 되는 비단폭이 뿜어나오는 듯했다. 독무를 내뿜을 때마다 위로 한 차례씩 몸체가 올라오는데 무척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니 소화상은 저처럼 농염하게 뒤덮인 독무를 어떻게 뚫고 나갈 수 있을까 염려 가 될 지경이었다. 그놈의 건천화령주는 요물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으며, 그 주위는 온통 사방이 독무와 요사스런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커다란 모험을 하지 않으면 건천화령주를 탈취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와 보였다. 이때 요물의 두 뒷다리가 다시 위로 반쯤 올라왔다. 앞다리와 교차시키면서 뒷다리로 땅을 받치 고 일어서니 전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흉악하고 괴상망칙한 몰골로 미루어 요물의 독기도 대 단히 지독스러울 것이 틀림없었다. 영단을 입에 물고 있다 한들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여겨 막 손을 쓰려는데 갑자기 요물의 뒷다리가 반쯤 나오다가 멈추더니 땅 에 엎어져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울부짖음은 매우 날카로운 데다 처량한 기색마저 돌고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심신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전보다도 더욱 지독한 울부짖 음이었다. 약 사오십 차례 소리를 질러대더니 요물은 다시 고개를 쳐들고 일어섰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두 눈을 찌푸리며 주둥이를 쩍 벌리는데 보기에도 섬뜩한 이빨이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요물은 자 신이 뱉아낸 불꽃을 눈 깜짝할 새에 먹어치웠다. 뱃가죽이 쿨렁쿨렁 요동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무엇인가를 삼킨 듯했다. 요물은 이어서 자신이 내뿜었던 독무와 오색 채무까지 말끔히 거두어들였다. 그것들은 마치 뭇 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듯 그렇게 분분히 요물의 입으로 빨려들어 갔다. 경각지간에 요물 바 로 앞의 두세 개 불덩어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요기는 전부 거두어들여졌다. 동시에 요물은 사람 처럼 두 발을 딛고 일어섰는데 바야흐로 나머지 두 뒷다리도 완전히 밖으로 나오는 듯, 공중에 떠 있던 건천화령주도 요물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소화상은 이 같은 모습을 보자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손을 쓰랴 생각했다. 말로는 길지만 동작 은 빨랐다! 즉시 무형검둔(無形劍遁)을 타고 곧장 건천화령주를 잡아채갔다. 입으로는 독기를 피 하는 진언을 뇌까리며 손을 뻗어 나꿔챘다. 바야흐로 손쉽게 구슬을 손에 넣었다고 기뻐할 때, 어찌 된 영문인가? 이놈의 구슬이 마치 태산 이라고 된 듯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리려고 발버둥치는데, 몸을 돌려 구슬을 쥐고 움직이기가 무 척 힘이 들었다. 총망간에 아래쪽을 바라보니, 요물이 이미 눈치채고 한 쌍의 세모 눈알을 크게 희번덕거리며 입에서 불덩어리를 곧장 쏘아내더니 재차 독무까지 뿜어댔다. 소화상은 크게 놀랐다. 이 숨막히는 위기의 순간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라 한 손으로 구슬 을 내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손이 이르는 곳에 비검이 방출되며 건천화령주의 아래쪽을 한 차례 비켜가자 과연 얼떨결에 요물의 진기를 끊어버린 것이다. 구슬은 의지할 곳을 잃자 가볍게 손에 들어왔다. 앞서와 같은 무거움이나 밑으로 도망치려는 완강한 힘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소화상이 비검을 날리기 위해 신형을 드러내자 곧 요물에게 발각되었다. 요물은 뇌성벽력이 친 후, 막 세상에 나와 토납양신(吐納養神: 호흡을 통해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는 것)을 하던 중이라 기가 충만하지 못해 재빠르게 날아오를 수 없었다. 분노한 기색으로 연신 괴성을 터뜨리며 입으 로 일이십 장 되는 독기를 곧장 공중으로 쏘아보냈다. 동시에 두 뒷다리가 일제히 땅 위로 나오 며 날아오를 채비를 갖추었다. 소화상은 이미 물건을 손에 넣었으므로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검광을 회수하며 신형을 숨겼다. 이때 위지화는 바위 위에 숨어서 요물의 동정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뇌성벽력이 한 차례 몰아 친 뒤 과연 요물이 몸을 드러냈으나 건천화령주가 멈춰 있는 공중에는 좌우로 독기가 가득한지라 소화상을 대신해 걱정하던 참이었다. 곧이어 금광이 한 차례 번쩍이며 화령주가 보이지 않자 이 미 소화상이 손에 넣었음을 알았다..... 속으로 기뻐하는데, 채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요물이 땅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 닌가? 앞서의 동작은 비록 느릿했으나 갑자기 일진의 비린 바람이 일어나며 요물의 입을 통해 오 색독무가 어지러이 뿜어지며 온몸을 채무로 감싸는 것이었다. 네 다리를 크게 벌리며 마치 한 마 리의 칠팔 장쯤 되는 커다란 네 발 달린 거미같은 모습으로 앞을 향해 날아올랐다. 위지화는 그제서야 대갈일성, 검을 날려 요물의 두 뒷다리를 베어갔는데, 이때 요물은 땅에서 불 과 삼사 장 날아올랐을 뿐이었다. 막 요물을 향해 쳐들어가는데 돌연 골짜기의 불쑥 튀어나온 암 벽 윗면에서 그보다 앞서 한덩어리 녹화(綠火)가 위지화의 비검에 부딪쳐 왔다. 이어서 일진의 녹 연황무(綠煙黃霧)가 일며 백여 장 넓이의 누런 연기 그물을 만들었다. 연기 속에서 한 팔이 하나 없고 시체처럼 삐쩍 마른 데다 용모가 교활하게 생긴 한 사람의 산발 괴인이 나타났다. 그는 손에 하나의 종이 깃발을 든 채 연기와 함께 요물을 향해 부딪쳐 갔다. 이 때 앞서의 그 한덩어리 녹화는 이미 위지화의 비검과 맞부딪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각기 푸르 고 하얀 광채를 뿌리며 동시에 부서져 땅에 떨어졌다. 소화상의 원래 의도는 독무의 포위에서 벗어난 뒤 다시 몸을 돌려 비검으로 위지화와 더불어 앞 뒤에서 요물을 협공하는 것이었다. 막 지면 가까이로 몸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맹렬히 자세를 뒤 집으며 바야흐로 비검을 날리려는데 웬 팔이 하나밖에 없는 요사스런 괴인이 위지화의 비검을 깨 뜨리는 광경을 목도했다. 그 자는 한 무리의 황록연무를 이용해 요물의 온몸을 그물처럼 엮은 뒤 연기와 함께 요물을 감 싸안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소화상은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깬가 싶어 부지불식간에 크게 놀라 소리쳤다. "간덩어리가 부은 요물 같으니, 게 섯거라!" 하면서 손을 휘두르자 한 줄기 금빛이 섬전같이 괴인의 뒤를 쫓아 날아갔다. 그 외팔이 괴인은 금빛의 지독함을 익히 알고 있었는지 몸을 돌려 대적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일갈 괴성을 내지르며 바람처럼 재빠르게 곧장 위지화가 잠복해 있는 바위 위로 날아갔다. 소화상은 검광을 타고 젖먹던 힘까지 보태 급히 그 뒤를 추적했다. 막 바위 위로 내려서자 갑자 기 한 줄기 기이한 냄새가 코를 스치더니, 즉시 천지가 빙빙 돌면서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 닌가. 만일 평소의 수양이 정심하지 못했다면 소화상은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이 한 순간의 멈칫거림을 이용해 괴인은 이미 멀리 도망쳐 버렸다. 다시 위지화를 살펴보니 이미 땅에 쓰러진 채로 인사불성이었다. 소화상은 크게 놀라 다시 적을 추적할 여가가 없었다. 바위 위의 독기가 너무 지독하므로 감히 더 이상 머뭇거리지 못하고, 위급한 중에도 간신히 한 가닥 진기를 끌어올려 위지화를 끌어안고 먼저 험지를 벗어났다. 소화상 자신이 일시 부주의로 커다란 후환을 남기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토혈 왼쪽 부근에 도착해서 위지화를 땅 위로 눕혀놓았다. 그리고 나서 그의 상태를 살펴보니 위지화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슴 아래쪽의 살색이 아직 변화 가 없을 뿐, 목 위쪽으로는 이미 칠흑으로 물들어 있었다. 급히 단약 두 알을 꺼내 먹이고 옆에서 호위를 섰다. 두 시진이 지나도록 조금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화상은 그의 독상이 이미 너무 깊어 영단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함을 알고 더욱 애가 탔다. 이제 요물은 비록 도망갔지만 남은 독기는 여전히 골짜기 위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공중에서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시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것이니 이 또한 장래에 후환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달리 제거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발을 구르며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소화상은 위지화가 밤이 되도록 깨어나지 못하면 그를 안아들고 검광을 타고 동해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사존(師尊)들께 간구해 그의 목숨을 구해내야 했 다. 다른 일은 잠시간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점차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아직까지 뾰족한 치료방법을 강구해 내지 못해 초조해 있던 소화상 의 눈에 돌연 한 줄기 금빛이 섬전같이 날아내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것은 신룡과도 같이 요혈 부근을 감쌌다. 이어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대벽력소리와 함께 그 한 줄기 금빛은 골짜기 위로 접근하여 둘레를 한 바퀴 선회한 뒤 방향을 밑으로 하여 무지개가 땅에 걸리듯 요혈이 있던 곳으 로 쏘아져내렸다. 소화상은 금빛을 보자 곧 삼선(三仙) 일파의 누군가가 도착한 것을 알았다. 삼선 중에 어느 쪽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도 모르게 기쁨과 놀라움이 일었다. 온 사람이 노습을 드러내기 전 부터 소화상은 무릎을 꿇고 앉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귓가로는 또다시 벽력치는 듯한 소리 가 두어 차례 들려왔다. 소화상은 힐끗 곁눈질로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금빛이 멎은 곳에 한 사람 자애스러운 눈빛 의 조금 마른 듯한 인물이 천천히 공중에서 두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내려왔다. 소화상은 그 인물이 자신의 스승임을 확인하자, 그가 목전의 요기를 이미 제거해 버린 것과 위 지화의 상세가 비록 엄중하지만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이 여러 차 례에 걸쳐 실수를 연발했으므로, 비록 평소 스승이 자신을 극히 아껴주었다 하나 아무래도 책벌 을 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급히 땅에 엎드리며 감히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저 가끔씩 몰래 눈을 돌려 스승의 동태를 훔 쳐볼 뿐이었다. 고행두타는 소화상이 땅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마치 보지 못하기라도 한 듯, 곧장 위지화 곁으 로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한 차례 손을 내젓자 한 줄기 금빛이 곧장 위지화의 입을 뚫고 들어갔다. 그 금빛은 가늘기가 손가락만 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그 금빛은 입을 뚫고 코로 나 왔다. 이어서 그것은 위지화의 칠규(七竅: 얼굴의 일곱 구멍, 칠공이라고도 한다)를 차례로 쉴새없 이 들락거렸다.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고행두타는 금광을 거두고 두 손을 합장한 뒤 입으로 진언 을 외었다. 손을 두어 차례 부딪치자 번쩍하고 빛이 일더니 위지화의 상체를 한 차례 어루만졌다. 이어서 두 알의 맑고 투명한 광택을 띤 녹두알 크기의 단약을 꺼내 위지화의 입에 물려주었다. 다시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나자 위지화가 긴 한숨소리와 함께 천천히 깨어났다. 그는 고행두 타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자 급히 엎드려 절을 올렸다. 고행두타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사전에 조금만 더 방비를 잘해 요인이 잠복(潛伏)해 있는 것을 발견했더라면 틀림없이 요물의 목을 자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현진자 도우와 동해에서 연단 을 하고 있던 중이라, 그 일이 막 절정에 달해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 단약은 이번 아미 제삼 차 투검에 있어 후배 아미도우들의 생사존망에 관련된 것이고 우리들로서도 세 사람이 다년간 약 초를 수집한 끝에 비로소 채비가 갖추어진지라 잠시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걸음 늦 는 바람에 네가 비검을 잃고 요독(妖毒)에 당해 큰 위험을 겪게 하고 말았구나. 그 요물의 독기는 본래가 매우 지독한 데다, 네가 쐰 것은 바로 놈의 구명독염(救命毒焰: 숨이 위급한 때 비장의 무 기로 내뿜는 독)이었다. 너희들처럼 공력이 얕은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사 각파의 중요인물 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온전히 무사할 수 없는 독이다. 다행히 네가 우연히 천고에 드문 보물인 공청석유를 복용했고, 또 동방태을(東方太乙)의 원정(元精)이 변화된 석서(石犀: 돌 소)를 앞가슴 에 지니고 있었기에 근근히 칠규에만 독기가 퍼졌으니 천만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영단을 가지고도 네 중독을 치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요물의 구명독염은 종신토 록 한 차례밖에 발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놈에게 항문이 없기 때문에 먹어치우기만 할 뿐 나오 는 게 없다. 따라서 뱃속에는 천지간의 온갖 음독하고 탁한 기운이 가득차게 되는데 생사존망에 관계되는 다급한 경우가 아니면 그것을 내뿜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건천화령주를 빼앗김으로 해서 놈이 원양(元陽)을 잃고 순음(純陰)의 몸으로 변해 버린 데다, 다시 요인에게 붙잡히게 되자, 몸을 빼낼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어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 악독무비한 독기를 송두리째 뿜어버리고 만 것이다. 요기가 태반 빠져나왔으므로 요물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이후 로 놈을 제거하기란 땅 짚고 헤엄치기가 된 셈이지. 문제는 네가 비검을 잃고 크게 원기를 상한 것인데, 내 이 못난 제자놈을 돕다가 이리 된 것이니, 너는 시종 한 점의 사념이나 탐욕심도 가지 지 않았건만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지금 네가 다시 외공(外功)을 쌓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 나를 따라 동해로 돌아가자꾸나. 내가 연성한 비검을 네게 내려줌으로 이번 일에 수고한 대가로 삼으련다." 위지화는 이미 고행두타의 말투를 통해 이번 일에 소화상의 행위를 책망하는 뜻이 담겨 있음을 간파했다. 소화상 역시 스승의 어투가 좋지 않은 것을 알고 크게 놀라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는 듯 하여 전전긍긍 무릎걸음으로 스승 앞으로 나아갔다. 스승의 말씀이 끝나는 대로 백배사죄하여 용 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고행두타는 시종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이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승복를 펼쳐 위지화만을 안아올려 한 줄기 금빛을 타고 곧장 동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소화상은 스승의 심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급히 무형검둔을 빌어 뒤를 쫓았다. 동해로 돌아 와 보니 동문(洞門)은 굳게 잠겨 있었다. 스승의 검광이 신속하기 그지없는지라 벌써 도착한 지 오래였던 것이다. 예전 같으면야 문을 두드려 열고 들어가련만, 죄를 저지른 몸인 데다 스승의 책벌이 어떨지 몰 라 안절부절할 뿐 감히 들어서지 못하고, 동굴의 문 앞에 무릎꿇고 앉아 용서를 비는 말을 중얼 거렸다. 꿇어앉은 지 이틀이 되도록 스승으로부터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자 점점 더 불안해졌 다. 소화상은 생각했다. '내 한 몸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사부의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고 자라왔다. 사부께선 지극히 나를 사랑해 주셨고, 장래 사부의 의발(衣鉢)을 전수받는 것도 내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평소에 내가 전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부께선 그럴 때도 엄한 꾸중은 않으셨다. 이번 에 요물을 처치하는 데 실패한 것은 일시의 부주의로 인해 요인이 곁에 숨어 있음을 발견하지 못 했기에 그리된 것일 뿐이다. 오로지 실수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사부께선 어찌 이처럼 엄중한 문 책을 하신단 말인가? 필시 달리 무슨 곡절이 있음이 분명하다. 내가 이처럼 꼬박 이틀을 꿇어앉 아 용서를 청함에도 전혀 받아들이실 기색이 없으시니.....' 생각이 이에 미치자 더욱 가슴이 아파 자신도 모르게 소화상은 구슬프게 통곡하기 시작했다. 한바탕 울고 나니 용서를 비는 중에도 스승이 너무 박정하자 자신에게 중벌을 내린다는 원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밀었다. 잘 따져보면 이번 일을 얘기할 때 요괴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법력과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결코 자신이 있는 힘을 다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 다. 죄가 있다 한들 어찌 그것만을 가지고 이처럼 무겁게 책망하실까? 그 안에 필시 달리 무슨 연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곰곰이 지난 일을 돌이켜보니,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이 자운사(紫雲寺) 일에 참가한 이래 약간의 성공을 거두고, 뭇 동문들 중에 자신만큼 뛰어난 자가 극히 적음을 발견한 뒤부터 무언가 광망되 이 굴었음을 느꼈다. 그 후로 적지 않은 공을 세우기는 했으되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공 정함을 잃고 기분내키는 대로 해치운 것들이 태반이었다. 더욱이 그때 요물의 몸에 보주(寶珠)가 있다는 것을 알자 망녕되게 구슬에만 머리를 굴리고 있 지 않았던가. 요물을 제거하는 일은 저만큼 밀어내고 말이다. 만일 위지화와 역할을 바꾸었더라 면, 또 그렇지 않더라도 구슬을 나꿔챘을 때 미친 듯이 기뻐하며 필요 이상 멀찌감치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요인이 잠복해 있었다 한들 요물을 도망치게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스승의 계율이 평소 극히 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때 운종과 풍자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한 행위는 지나친 것이었다. 집주인이 아무리 악하게 군다 해도 어찌 그를 때리고 도적질을 했단 말인가! 그것 역시 자신의 기분에 따라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은자를 자신이 쓸 요량으로 취한 것은 아니나 결국 청규(淸規)를 어긴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왜수> 주매께서 그토록 신신당부하던 말씀을 잊고, 보물에 대한 탐욕심 을 버리지 못한 채, 제갈경아 한 사람만을 찾아보고 나서 다른 동문들을 더 이상 찾아나서지 않 은 것은 또 얼마나 방자한 짓이었던가! 그날의 형세로 비추어 볼 때 달리 한 사람의 조력자만 더 있었어도 과연 일을 그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구슬을 나꿔챈 뒤 그것을 조력자에게 건네주고 자신은 요물을 대적하러 나섰으면 어찌 그놈을 도망치게 내버려 두었겠는가? 이 일을 어찌 사심으로 전국(全局)을 그르친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일을 그르친 원인이 전부 자신에게 있었음을 알게 되자 스승의 박정을 탓할 생 각이 스러지고 말았다.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죄스럽기 그지없는 가운데 후회가 막급했다. 이런저런 후회와 자책에 싸여 있는 동안, 홀연 현진자와 <건곤정기 묘일진인(乾坤精氣妙一眞 人)> 두 사람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화상은 그들을 보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기뻤다. 즉시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대신 청해 줄 것을 부탁했다. 묘일진인이 말했다. "네 사부의 성품으로 말하자면 평소에는 우리들보다 온화하기 그지없지만 계율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분이시다. 너는 연속해서 탐욕, 거짓, 광망됨의 세 가지 계율을 범했다. 내가 보기엔 네 사 부가 너를 문하에서 내쫓으려는 마음이 있는 듯하다. 다행히 네게 전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기 색이 있는 듯하고, 나 또한 네가 능히 아미를 빛내게 할 인재라 생각하므로 네 현진사백과 함께 네 사부에게 너를 축출하는 것만은 만류하러 왔다. 비검을 회수하지 않는다 해도 사문에서 축출 하는 것은 너무 과한 책벌이 아닐 수 없지. 너는 이후로 각별히 근신하되 결코 멋대로 경거망동 하지 않도록 해라. 그러하면 조만간 회답이 있을 것이다." 소화상은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조아린 채 눈물로 죄송스러운 뜻을 표했다. 묘일진인과 현진자가 동부 앞으로 다가서자 석문은 저절로 열리며 두 사람은 천천히 들어갔다. 잠시 후 제갈경아가 다가와 소화상에게 잠깐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총총히 안으로 들어갔 다. 다시 두 시진 남짓 더 있으니, 제갈경아가 얼굴에 희색을 띠고 나와 소화상에게 말했다. "사제, 축하하네. 사백께서 용서하실 뜻을 비치셨네." 소화상은 크게 크게 기뻐하며 어찌 된 일인지를 물었다. 결국 스승께서 자신이 배알하고 사죄드 리는 것을 받아주시겠다고 했는지가 궁금했다. 제갈경아가 말했다. "어찌 그렇게야 쉽겠는가. 자네의 이번 일에는 내 책임이 크네. 내가 이삼 일 늦는 바람에 사제 자네에게 이 같은 고초를 끼치게 된 것이니, 방금 전 사부님과 묘일사숙께서 고행두타 사백께 몇 차례 청하신 끝에 결국 사문에서 축출하는 것은 면하게 했으나, 그래도 아직 몇 가지 조건이 있 다네. 여기서는 다 얘기할 수 없으니 나와 함께 조오기신벽(釣鰲磯新闢)의 동부(洞府)로 가며 얘 기를 나눔세!" 소화상은 제갈경아의 말에 기쁨과 걱정이 함께 생겼다. 동부로 가기 전 먼저 스승께서 관대한 용서를 베풀어 준 것에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런 후 제갈경아를 따라 선산(仙山)을 내려와 검광 을 빌어, 곧바로 해변의 조오별신후동(釣鰲鱉神吼洞)에 좌정(坐定)했다. 제갈경아의 상세한 경과설명을 듣고 과연 고행두타가 자신의 탐욕심과 남의 은자를 도적질한 것 때문에 화를 냈음을 알게 되었다. 온통 보물에만 눈이 어두워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기에 요인 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막대한 후환을 남겼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여 비단 장래 의발을 전수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비검을 뺏고 사문에서 축출하려 했으나, 그래도 자신의 자질이 아깝고, 또 처음으로 죄를 범한 데다 곧바로 잘못을 깨닫 고 동부 앞에 무릎꿇고 사죄를 한 점, 다시 현진자, 묘일진인이 수차 용서해 줄 것을 청한 것 등 등에 마음을 돌려 사문에서 축출할 것을 보류하고 스스로 속죄할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소화상이 문주를 처치할 때 숨어 있던 요인은 바로 백만산 음풍동(百蠻山陰風洞)의 녹포노조(綠 袍老祖)의 문하이자, 스승을 배신한 악도인 신진자(辛辰子)였다. 그는 녹포노조가 자운사에서 극락 진인(極樂眞人) 이정허(李靜虛)에게 허리를 잘리울 때, 그곳에 도착해서 완석대사(頑石大師)가 주 의하지 않는 틈을 이용해 녹포노조의 상반신을 훔쳐내는 모험을 감행했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스승을 구한 것은 결코 좋은 뜻에서 한 짓이 아니었다. 그는 진작부터 녹포노 조에게 제이 원신(第二元身)으로 연성한 현빈주(玄牝珠)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사교(邪敎) 의 지보(至寶)인지라 탐욕을 품은 것이었다. 그는 녹포노조의 상반신을 백만산으로 돌려보내지 않았고, 하체를 대신할 재질좋은 인물도 찾아 나서지 않았다. 대신 그는 녹포노조를 서장 대설산의 극히 은밀한 지점인 옥영봉(玉影峯)에 데려 다 놓았다. 그곳은 한천(寒泉)의 가운데에 위치한 절지(絶地)였다. 그런 뒤 그는 요법으로 옥영봉 을 봉쇄해 놓고, 매일같이 독침과 사악한 술법으로 녹포노조를 핍박, 현빈주를 얻으려 했다. 녹포노조는 그의 심성이 악독하여 자신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임을 알고, 죽는 한이 있어도 현 빈주를 넘겨주지 않겠다고 버텼다. 신진자는 그제서야 자신이 약은 꾀를 부리다 더 큰 봉변을 맞게 되었음을 알았다. 이왕 그리된 것, 자신의 법력으로 그에게 온갖 고통을 주고, 마침내 살인멸구할 것을 결심했으나, 그를 죽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백만산에 남아 있는 삼십여 명의 동문들이 수시로 녹포노조의 상반신이 사라 진 곳을 수소문하다가, 마침내 신진자 자신에게 의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신진자는 녹포노조를 죽이지 못하자, 점점 더 악랄하게 핍박했다. 현빈주를 손에 넣기만 하면 자 신의 동문 삼십여 명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현빈주를 얻지 못하고 이대로 시간만 끌었다가는 필시 그들에게 발각되어 큰 변을 맞을 판이었다. 게다가 자칫 잘못되어 녹포노조가 다른 사람에게 구출되기라도 하는 날엔, 녹포노 조의 잔인한 심성으로 미루어 그 보복이 얼마나 지독할지 상상이 되는 터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한 짓보다 수십 배 지독하게 보복할 것이 자명했다. 신진자는 생각할수록 겁이 났다. 호랑이를 잡기는 쉬워도 다시 놔주기는 어려운 법, 사태가 어찌 할 수 없이 긴박해지자 온갖 심력을 다해 홍발노조(紅髮老祖)의 천마화혈신도(天魔化血神刀)를 훔 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원래 녹포노조의 극성인지라, 현빈주를 내놓으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신도로 녹포노조의 남은 몸뚱아리와 원신까지 송두리째 베어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걸음 늦어 녹포노조가 이미 <서방야불(西方野佛)> 아각달(雅各達)에 의해 이미 구출되었을 줄 어찌 알았으랴. 녹포노조는 예의 독랄한 심성을 유감없이 발휘, 남의 위급함을 틈타 청라마궁에서 청해파(淸海 派) 교조 장령자(藏靈子)의 문도인 사문공(師文恭)>의 신체를 잘라냈다. 그것을 자신의 상반신에 붙인 뒤 백만산으로 돌아가 천하에다 대고 다시 백독금잠고(百毒金蠶蠱)를 연성하겠다고 공표했 다. 덧붙여 그는 신진자를 붙잡아 삼십 년 동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놓고 온갖 고통을 맛보여 준 후 원신(元身)을 베고 뼈마저 가루로 만들어 놓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리고 법술로 다시 개미로 만들어 매일 독충으로 물어죽인 뒤 다시 살리기를 반복하여 영원토록 생사의 윤회 속에 빠뜨리겠 다고 했다 한다. 신진자는 당시 녹포노조가 혈을 뽑아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놓은 채 속이고 달아나는 통에 그를 추격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에 녹포노조의 맹세가 어떠하다는 것을 듣자 놀라서 혼비백산, 어 찌 다시 언감생심 백만산으로 돌아갈 꿈이라도 꿀 것인가! 가는 곳마다 몸을 숨겨 녹포노조의 수 색에 걸리지 않게 노심초사하기 바빴다. 그러다 그는 숨어다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생각했다. 어느 요인의 말을 듣고 금잠고를 깨뜨리려면 운남 천잠령에 있는 천년 문주를 산 채로 포획하여 자신의 심혈(心血)로써 연성해 분신화체(分神化體)를 이루는 방법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천 년 묵은 문주를 이용해야만 금잠고를 일망타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이번에 녹포노 조가 독한 마음으로 다시 연성에 들어갔으므로 오래지 않아 금잠고와 합일(合一)을 이룰 것이었 다. 그때가 되면 금잠고와 존망을 같이하여, 제압할 방도가 없게 되는 것이다. 신진자는 요인의 이 같은 지적과 함께 문주를 제압할 비검을 전수받았다. 천 년 독전갈의 침을 천년 독교(毒鮫: 상어의 일종)의 독망(毒網)에 합해야 요물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요물이 있는 골짜기에 요법을 이용해 몸을 숨기고 잠복했다. 소화상이 위지화를 대동하고 나타났을 때, 그는 이미 그들을 발견했었다. 즉시 암산을 하려다가 요물이 건천화령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어 독망만으로 제압하기 어렵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에게 가르침을 베푼 요인도 자신이 다른 사람 때문에 덕을 볼 것이라 했으므로 은인자중, 그들이 구슬을 낚아챌 때를 기다려 손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이 악독한지라, 이처럼 계획을 세워두고도 참지 못하고 위지화가 골짜기 안으 로 조사하러 들어오자 몰래 그에게 음독화탄(陰毒火彈)을 던졌다. 화탄에 중독되면 칠 일을 넘기 지 못하고 갈증과 어지러움에 시달리다 죽고 마는 것이다. 요행히 위지화는 무심결에 공청석유를 복용했기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화상이 구슬을 손에 쥐고 멀리 피하는 때를 틈타 신진자는 독망으로 문주를 사로잡고 위지화의 비검을 깨뜨려 버린 뒤 요법을 이용해 도망쳤다. 소화상이 그를 추격해 올때, 그는 건천화령주로 인해 요물의 원기가 크게 상해 있음을 보고 더 이상 요물의 행동에 신경쓰지 않아도 좋으리라 여기고, 요법을 구사하여 아예 소화상과 끝장을 볼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체하다가 남에게 발각되면 이 일이 퍼져나가 녹포노조의 귀에 들어 갈까 걱정인 데다, 소화상의 비검도 그리 만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또 혹시나 문주가 다시 그 구명독염을 내뿜기라도 하는 날엔 자신이 비록 요법으로 몸을 보호하 고 있다 한들 견디기 어려울 것임을 자각하여, 이미 땅에 쓰러져 있는 위지화에게조차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하고 급히 내빼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그에게 문주를 잡으라고 가르쳐 준 그 요인이 신의를 져버리 고 녹포노조 문하의 당석(唐石)이란 자에게 얘기를 털어놓는 바람에 녹포노조의 귀에 소식이 들 어갔던 것이다. 당석은 그에게 맞상대가 되지 않는지라 십여 명의 문하제자와 함께 탐색에 나섰다. 신진자의 화 혈신도가 두렵기도 하거니와 그가 요물 문주를 잡을 때를 기다려 함께 손에 넣으려는 뜻에서 즉 시 손을 쓰지 않고 기다렸다. 신진자가 문주를 생포하자, 몰래 그의 뒤를 따르다가 그가 잠복해 있는 옥병암(玉屛巖)의 지혈 밑으로 요법을 이용해 은신 잠입했다. 신진자가 한 명의 요부와 성공을 자축하며 혈주(血酒)를 마실 때, 몰래 초혼산(硝魂散)을 타넣어 신진자와 요부를 쓰러뜨렸다. 다시 유골사(柔骨絲)로 그들을 꽁꽁 묶은 뒤, 교망(鮫網) 속의 문주 도 함께 짊어지고 백만산 음풍동을 향해 출발했다. 중간쯤 갔을까? 신진자에게서 화혈신도를 되찾으러 나선 홍발노조를 딱 하니 맞닥뜨렸다. 그들 중 한 명의 요인이 저 죽을 줄 모르고 겁없이 홍발노조의 비위를 건드려 그를 성나게 했다. 즉시 홍발노조는 요법을 펼쳐 그들을 붙잡고 유골사를 끊어 신진자를 깨어나게 한 뒤 화혈신도 의 행방을 추궁했다. 신진자는 깨어나는 즉시 형세를 판단, 원수와 맞부딪쳤음을 알았다. 만일 홍발노조가 신도를 찾 아나서지 않고, 자신이 이대로 동문들에게 붙잡혀 돌아갔더라면 그 뒤에 벌어질 참상이란 생각하 기조차 끔찍한 것이었다. 즉시 홍발노조 앞에 무릎꿇고 감사의 말을 전한 뒤 신도를 바쳤다. 그러 면서 녹포노조가 얼마나 지독하며, 그가 신도를 훔친 것은 그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궁여지 책이었다는 등 온갖 말을 꾸며대며 살려줄 것을 애걸했다. 홍발노조는 신도를 되찾자 그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곧장 산으로 돌아갔다. 신진자는 여러 사람들이 홍발노조가 두려워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홍발노조가 돌아가는 것을 보자 문주와 사랑하는 요부도 다 내팽개친 채 기회를 틈타 재빨리 줄행랑을 쳤다. 남은 무리들은 그를 추격하려 했으나 이미 미치지 못함을 알고 요부와 요물만을 데리고 산으로 돌아가 복명했다. 녹포노조는 신진자가 중도에서 내뺐다는 말을 듣자 길길이 날뛰면서 미친 듯이 화를 냈다. 홍발 노조를 맘속 깊이 원망함과 동시에 마침내 노기를 터뜨릴 상대를 찾지 못하자 당석이 일을 제대 로 처리 못했다는 죄를 들어 덥석 그의 한 팔을 물어뜯어 버렸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함께 갔던 제자들을 산 채로 씹어삼켜 분을 풀려 했다. 아각달이 나서서 수차례 만류하며, 그들이 홍발노조의 적수가 아니며, 문주를 손에 넣어 후환을 제거한 것 등을 들어 그들의 죄를 용서할 것을 청했다. 신진자가 문주와 화혈신도를 잃었으니 땅 속으로 도망치거나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는 이상 조만간에 필시 붙잡아들여 분을 풀 수 있을 텐 데 무에 그리 조급해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들 무리들은 그제서야 노마(老魔)의 입에 장사지내는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녹포노조는 몸을 이어붙이고 산으로 돌아온 이래 성질이 가면 갈수록 흉포해졌다. 매일 문하제 자들을 시켜 사람을 잡아오게 해 산 채로 뜯어먹었다. 그런 뒤 인혈(人血)을 마시고 몽롱히 취하 면 더욱 사리분별없이 누구를 막론하고 잡아 족치려 들었다. 전에는 비록 문하제자들에게 난폭하게 대하는 중에도 한 가닥 애정을 남겨두었던 터이나, 이제 는 그런 것도 없어졌다. 그는 신진자에게 배신을 당하자, 다른 제자들도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 이 없다고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법술을 전수하면 그것을 배워 익히고 난 뒤 스승인 자신을 해치 는 데 쓸 것이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비록 전에도 흉포하기 짝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여색은 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신진자 가 버리고 간 요부를 얻자 돌연 크게 음심이 동했다. 매일같이 피를 뽑아 금잠고를 기르는 법술 을 행하는 것 외에는 신혈을 마시고 음란한 행위에 빠져들었다. 문하의 삼십여 제자들 중 이미 그에게 산 채로 뜯어먹힌 자가 몇몇 되었으나 그의 악독한 금제 에 사로잡혀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도 없었다. 도망을 치려다 그에게 붙잡히면 더욱 참혹한 꼴을 당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도망치지 않고 그의 곁에 있으려니 더 이상 법술을 전수해 주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희노애락이 무쌍한지라 언제 참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전전긍 긍해야 했다. 그가 산으로 돌아온 지 며칠도 안 됐을 때부터 그들 문하제자들은 하나같이 간을 졸이며 바늘방 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번에 당석이 무리들을 이끌고 가서 문주를 탈취해 그의 후환을 제 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은 칭찬해 주지 못할망정 도리어 당석의 팔을 물어뜯어내 버린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다른 무리들을 산 채로 잡아먹으려다 아각달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당 석의 끊어진 팔을 보면 곧 옛날 신진자의 팔을 물어뜯은 것이 결국 원한을 샀던 것이 떠오르는 지, 당석에게 사사건건 신진자를 빗대어 험한 말을 내뱉았다. 당석은 비록 악독한 인물이나 그래도 어느 정도 인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진자를 추적해 녹포노 조를 위하려다 자신이 전심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결과를 가져와, 아침이면 저녁을 기약하지 못하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갈수록 문하제자들의 마음은 녹포노조에서 벗어나 오히려 애초에 신진자와 공모하여 그를 죽여 없애지 못한 것을 후회할 지경이 되었다. 그와 동조해 녹포노조를 제거해 버렸으면 오늘날 이처 럼 언제 죽을 지 몰라 전전긍긍해 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신진자는 자신이 조만간 설 땅을 잃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녹포노조가 문주를 이용해 요법을 연성하여, 아미파에 복수하고자 함을 탐지해 냈다. 그래서 그는 문주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두고 있다는 것이다. 금잠고가 아직 연성되지 않았으므로 마음을 놓을 수 없어 문주를 그대로 교 망에 가둔 채 음풍동 풍혈 속에 가두어 놓았다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악독한 스승과는 공존할 수 없는 처지, 다시 문주를 훔쳐 연성해 내는 것을 빼고는 달리 살아 남을 방도를 찾지 못할 것이다.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보름 이내에 모험을 강 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고행두타는 불법 좌선을 통해 정신을 맑게 하고 훗일을 비춰보고는 여러 가지 인과를 계산해 냈 다. 게다가 다시 현진자와 묘일진인이 간청해 오자, 요물을 처치하는 일을 전적으로 소화상에게 맡겨버리기로 했다. 제갈경아에게 말을 전하도록 분부를 내리며 녹포노조가 요물을 숨기고 있는 장소를 일러주도록 했다. 더불어 세 개의 밀봉한 서신을 건네주며, 겉봉에 날짜를 적어놓았으니 그날이 되면 뜯어 안에 지시한 대로 행할 것을 명했다. 요물을 처치하고 돌아오면 공으로 죄를 사해줄 뿐 아니라, 여전히 소화상으로 하여금 의발을 전수하게 하려는 것이 고행두타의 의도였다. 소화상은 제갈경아로부터 모든 사실을 전해 듣자 근심이 하나 가득 쌓여 급히 그에게 물었다. "요물을 처치해서 죄과를 속죄하는 것은 그렇다 치지만, 그놈의 녹포노조가 얼마나 지독한 인물 입니까, 글쎄! 문하에 거느린 많은 제자들도 만만한 자가 없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홀몸으로 재주에도 한계가 있으니 어떻게 요혈로 잠입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사형께선 옛 정을 생각하셔 서 제발 저를 좀 구해 주십시오." 제갈경아가 말했다. "자네는 다급한 일에 닥치니 평소에 그렇게 총명했던 머리를 어디다 까먹고 온 듯하군. 자네도 생각해 보게. 기왕 사백께서 자네를 전부 용서해 주기로 생각하셨다면, 미리 성공할 안배도 없이 미쳤다고 자네 혼자 덜렁 사지에 빠지게 하시겠는가? 그러나 자네가 이번 일에 탐욕심과 교만 때 문에 계율을 어겼으므로 이 기회를 빌어 그 같은 잘못을 바로잡으시려는 뜻은 있으신 모양이네. 녹포노조가 지독한 것은 사실이며, 우리들이 그의 상대가 못되는 것도 당연한 일일세. 이 일에는 필시 많은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사백께서 자네 한 사람더러 이 일을 처리하라고 한 것은 결코 아니며, 자네가 조력자를 청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는 점일세. 전배 의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 역시 삼차 아미투검의 일로 한 발자국도 움 직일 수 없는 몸일세. 사백, 사숙 어른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이고. 그러나 다른 동문형제들이 많고, 더욱이 청라마궁을 깨뜨린 이후 새로 들어온 동문 몇몇은 재간이 뛰어날 뿐 아니라, 또 많은 이 보(異寶)를 지니고 있다네. 사백께서 건네주신 첩지(帖紙)에 쓰인 첫 번째 날짜가 바로 자네가 일 을 시작해야 할 때인데, 오늘부터 쳐도 반 달이란 시간의 여유가 있는 셈이네. 이 기간을 이용해 좋은 조력자를 구해 함께 백만산으로 가서 일을 처리한다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소화상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평소 사자매들과 교분이 없었습니다. 사형을 제외하면 금선사제와 교분이 있을 뿐이나, 그 의 능력은 제게도 미치지 못합니다. 다른 동문들이 많다 하나 전부 저와는 친숙하지 않으니 누가 이보를 몸에 지니고 있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자신의 일로 남의 도움을 청하기도 내키지 않는 일 이고요. 이 일을 도대체 어쩌면 좋겠습니까?" 일곱 개의 보검 藏珍無分 寒夢怨偏私 敵愾同心 金蟬急友難 제갈경아가 말했다. "자네는 정말 어리석군. 요마를 제거하는 것은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일세. 사형제들의 입장 또 한 사부의 명을 받들어 요마를 제거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네. 우리와 아미는 일가수족(一家手 足)으로 모두 동문 사이인데 남녀를 따져서 무엇하며 사귐의 심천(深淺)을 따져서 무엇하겠는가? 나는 여러 동문들 중에서도 사제 금선이 제일복인(第一福人)이어서 일생 동안 아무런 환난을 입 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네. 게다가 그는 무공에 있어서도 자네만 못지 않으며, 또한 묘일부인(妙 一夫人)과 여러 동문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네. 자네는 우선 그와 서로 도울 것을 약속하는 것이 제일 타당한 길이 될 것이야. 자네가 만약 사자매(師姉妹)들과 협력하여 함께 간다면 그들은 자네 의 위험을 수수방관하지만은 않을 것일세. 만약 그들이 함께 갈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이 법보(法 寶)를 빌려주어서라도 자네가 성공하도록 도울 것일세." 제갈경아의 말은 계속되었다. "내가 듣기에도 그들이 가진 법보는 요마의 독기를 파해할 수 있는 주사백(朱師伯)의 천둔경(天 遁鏡)을 주문(朱文)이 가지고 있는것 이외에 이영경(李英瓊)의 자영검(紫暎劍), 진씨자매의 미진기 (彌塵旗)가 있고, 이 밖에도 신약란(申若蘭)이 반변노니(半邊老尼)의 자연서(紫煙鋤)를 빌어서 아 직 돌려주지 않고 있다네. 그들은 지금 아미산 응벽애 동천복지(洞天福地)에 모여 있다네. 앞쪽 문은 법술로 봉쇄되어 있어 처음에는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자네는 <염선(髥仙)> 이사숙(李 師叔)의 비뢰동(飛雷洞) 건너편 동굴로 들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일세. 금선사제와 서로 약 속을 하고 두 가지 법보를 빌어서, 몰래 백만산(百蠻山) 위로 올라가 은형법(隱形法)을 펼쳐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문주(文蛛)를 처치하는 것일세. 금선과 자네가 서로 협력한다면 성공까지 거둘 수 없을지 몰라도 요마에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네. 모든 일은 치밀해야 하는 것이니 절대로 경거 망동하지 말도록 하게. 사부님께서 나에게 주신 구전진원(九轉眞元)으로 신단(神丹)을 만들었는데, 자네에게 두 개를 줄 테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게. 이것으로 내가 자네를 직접 돕지 못 하는 죄를 사하고자 하네." 소화상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 선단(仙丹)은 삼선(三仙)께서 다년간 도법(道法)으로 연성한 것이다. 제갈사형이 몇 년 간 약 초를 캐느라 애쓴 노고를 생각해서 동문들 중 그만이 은총을 입어 일곱 개의 선단을 받은 것이 지.' 이제 그 선단이 자신의 품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위급한 생명을 구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 급히 무릎꿇고 가르침에 감사의 예를 표했다. 일을 지체할 수도 없었고, 아직 대공(大功)을 이루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부님을 뵈올 수 없었다. 또 제갈경아도 영약(靈藥)을 채취해야만 했기 때문에 오래 머무를 시간이 없었다. 그는 마음의 준 비가 갖추어졌기 때문에 몇 가지 다른 일을 의논하고는 제갈경아와 이별하고 아미산을 향해 날아 갔다. 비록 비뢰동이 아미후산(峨嵋後山)에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높고 험한 산봉우리와 절벽으 로 둘러싸인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제갈경아가 가르쳐 준 대로 공중을 날아다니며 한참 찾으니 비로소 작고 뾰죽한 산과 봉우리가 밀집되어 있는 아래에 작은 평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평지에는 하나의 동부(洞府)가 있었고, 뒤로는 높은 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한쪽으로는 높은 봉우리가 우뚝 구름을 뚫고 솟아 있었고, 한 쪽으로는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흰 포말을 날리며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낭떠러지 밑으로 흐르 는 급류는 은빛 포말을 만들고 우뢰와 같은 소리는 계곡을 울리는 듯했다. 동부의 맞은편에는 또 하나의 작은 동부가 있었는데 동굴의 문은 조금 작았고 옥(玉)과 같은 백 석(白石)이 햇빛을 받아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굴 앞에는 일 무(一畝) 넓이의 평평한 돌이 놓 여 있었고, 좌우로 백옥석주(白玉石柱)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양쪽 절벽은 중간에 끊어져 아래 로 백 장(百丈) 깊이의 호수에서 한기(寒氣)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두 동부 사이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고 도처에 기화이초(奇花異草)가 가득하고, 고목영석(古木 靈石)이 어우러져 가히 선경(仙境)이라 할 만했다. 소화상은 그 두 개의 동부는 반드시 응벽선부(凝碧仙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막 검을 거두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할때 돌연 독수리 울음소리가 들려 눈을 크게 뜨고 돌아다보니 동굴 안에서 금안(金眼)의 흑조(黑鳥)가 사방을 오시(傲視)하며 거만하게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동굴 안에서 사람보다 큰 성성이가 걸어나왔는데, 두 자루의 장검(長劍)을 들고 있었다. 동굴에서 나온 성성이는 검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검광(劍光)이 번쩍이며 걸음걸이가 나 는 듯하며 비록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아미파의 검법이었다. 소화상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응벽애에 선연(仙緣)이 아주 많은 이영경이라는 여사제가 백미선사(白嵋仙師)의 신조(神鳥) 불 노를 얻었는데 그 새가 매우 영통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아미파의 검법을 전수받은 저렇 게 큰 성성이가 또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제갈형의 말씀에 의하면 머지 않아 많은 요마가 이곳을 침범할 것이라고 했는데, 저 두 영물(靈物)이 동굴을 지킨다면 이교(異敎)들이 뇌지(雷地) 에 한 발자국도 들어서기가 힘들겠구나.' 그 성성이가 막 검법연습을 끝마치고는 다시 연습을 시작하려 할때 하늘에 한 무리 산비둘기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 성성이가 펼치는 검법은 극점(極點)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발을 가볍 게 구르자 성성이는 검과 함께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비둘기떼는 피하지 못했고 이미 성성이의 검광이 비둘기떼 속으로 뚫고 들어가 검광이 스치는 곳에 이미 몇 마리의 비둘기가 떨어지고 있 었다. 성성이는 땅으로 내려서서 쌍검을 거두고는 마치 사람이 말을 하듯이 흑조에게 비둘기를 먹으라 고 했다. 그 흑조는 계속 머리를 가로저으며 무엇이라고 구구거리는 것이 호의를 거절하는 것 같 았다. 그 성성이는 급히 몇 마리 비둘기를 들고 냇가로 가서 힘껏 내던지니 비둘기의 깃털이 사 방으로 흩어졌다. 심성이 매우 인자한 소화상은 그 광경을 보고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저 축생(畜生)은 몇 가지 재주를 배워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니 영통한 놈임에는 분명 하지만 행동이 저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전배(前輩) 사백숙(師伯叔)께서 저러한 동물을 문하로 거두실 리가 없고, 금선은 비교적 장난기가 많으니 그가 기르고 있는 영물인지도 모르겠구나. 저 놈은 이미 아미파의 검법을 배웠고, 또 두 자루의 좋은 검까지 갖고 있구나. 오늘 그의 잔인한 행 동을 보니 지금 훈계하지 않는다면 후일 많은 살생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며, 만약 야성을 없 애지 않고 방문(旁門)에 몸담게 된다면 이는 아미파의 수치가 될 것이고, 주인으로서도 그놈을 죽 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오늘 내가 놈을 혼내줘야겠구나. 주인도 나의 속마음을 안다면 탓하지 만은 않으렷다.' 이러한 생각으로 소화상은 고의로 무형검둔을 거두어 마치 줄이 끊어진 연처럼 허공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신조는 백미화상의 불법을 전수받은 터이라 자신이 무형검둔을 펼치면 당장에 아미일 파임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에 원성(猿猩)을 골탕먹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 니나 다를까, 원성은 혼비백산했다. 소화상은 원성을 한바탕 희롱하고는 이미 이곳이 응벽선부의 후동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막 앞 으로 걸어나가려 하는데 어디선가 기이한 향기가 나서 사방을 둘러보니 동굴 입구의 바위 위에 주홍색의 과일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과일을 집어 보니 청아한 향기가 코끝에 느껴지는 게 선과(仙果)임이 분명했다. 한 입 씹어먹어 보니 달콤하고 매우 맛있었다. 소화상은 곧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원성은 원래 심지가 굳어 자기의 주인이 여영남(余英南)으로 인해 망창산(莽蒼山)으로 도망간 일 을 목격한 후로는 매일 초조해 하며 신조와 함께 공을 세워 영남을 찾아서 주인의 환심을 얻으려 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일행들과 떨어져 신조와 의논했다. 신조도 일전에 영남을 찾아보았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또 사명을 띠고 있음을 깨달아서인 지 명을 받들어 후동을 지키느라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성이 옆에서 부추기자 그만 영남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사실 그는 어려서부터 망창산 에서 살아서 지리에 밝았고, 또 많은 다른 새들이 그를 도와줄 것이기 때문에 영남이 거기에 없 다면 몰라도 있다면 못 찾을 리가 없었다. 신조는 매우 빨리 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가까운 곳에 두 명의 대선(大仙)이 있으니 아무런 방해도 받을 것 같지 않았다. 만약에 영남을 찾아서 돌아온다면 그 공 또한 적지 않으니 주인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였 다. 원성은 뒷머리에서 머리털 몇 가닥을 뽑아서 신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망창에 있는 나의 무리들 중 비교적 나이가 든 자들이라면 모두 새의 말을 알아들을 것이니, 이 털을 갖고 가서 영남의 모습을 설명해 주게. 만약 네가 영남을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다고 해도 내일 다시 가면 그들이 반드시 찾아놓을 것이야. 나는 맞은편에 있는 두 명의 대선들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여 그들과 함께 있을게. 만약 적들이 침입한다고 해도 그들이 막을 수 있을 테니 일을 그르칠 염려는 전혀 없다네. 이렇게 하면 너는 공도 세울 수 있고, 또 네가 맡고 있는 임무도 다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신조는 원성의 뜻에 마음이 동하기도 했고, 또 영통한 영물인지라 앞날을 예측하여 보고는 아무 런 일이 없을 것 같자 그렇게 하기로 했다. 먼저 원성이 조연아(趙燕兒) 석기(石奇) 두 사람을 청해 검술을 배운다는 구실로 동부의 방어를 돕게 하자, 신조는 망창산으로 날아갔다. 망창산은 가히 천산만학(千山萬壑)인지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동굴을 다 뒤져볼 수는 없는 일이어서 다만 공중에서 아래를 살펴볼 수 있을 뿐이었다. 온 산을 다 살펴보아도 큰 말곰들만이 적잖이 보일 뿐, 그 외에는 성성이가 몇 마리 보였는데 비교적 나이가 어린 것이 전혀 영기(靈氣) 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신조가 날아오자 모두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그들이 어떻게 새의 말을 알아 듣겠는가? 원성의 머리털을 그 들에게 내보여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신조는 어린 성성이들을 떠나 다시 공중으로 올라가서 찾기 시작했다. 영남은 고사하고 조금 큰 성성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후동을 생각하니 더 이상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 다. 높은 산봉우리를 지나다 그 밑에 몇 개의 주과(朱果)가 있는 것을 보고는 아래로 내려가 그것 을 집었다. 사방을 살펴보니 십여 마리의 말곰들만이 거기서 풀을 뜯고 있을 뿐이어서 그는 급히 날아올랐다. 신조는 돌아와서 원성의 말이 맞지 않은 것에 대해 심하게 화를 냈다. 원성은 자기가 했던 말이 맞지 않은 터이라 그의 비난을 잠자코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 주과는 모두 다섯 개였는데 자기 마음대로 망창산에 갔다 왔고, 또 영남을 찾지도 못했기 때 문에 감히 주인에게는 바치지 못하고 원성과 나눠먹기로 했다. 신조는 그전에 주인으로부터 주과를 얻어먹은 적이 있어 자기는 두 개만 먹고 나머지는 원성에 게 주었다. 원성은 또 자기는 하나만 먹고 나머지 두 개는 검을 얻게 된 은혜에 보답키 위해 구지선(具芷 仙)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선과의 향기가 너무나 달콤하여 소화상이 향기를 맡고 선과를 빼앗아 갔으니 어찌 원 성이 그냥 있겠는가? 한소리 지르며 검을 빼어들고 필사적으로 쳐들어갔다. 소화상은 얼마나 재빠른지 원성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눈 깜짝할사이에 동굴 속의 길을 따라 응 벽애에 이르렀다. 금선을 몰래 혼자 불러내어 가지고는 자기가 온 이유를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 금선은 당장에 승낙했다. 소화상이 원성이 저지른 잔악한 행위를 이야기하자 금선은 그 말을 듣고는 크게 웃음 을 터뜨렸다. 소화상이 어리둥절해 하자 금선은 원성이 여사제 이영경이 기르는 신원(神猿)이라고 했다. 그 말 을 듣고 소화상은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조금 심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동문일가이지만 자기 는 처음 왔으니 손님인 것이다. 그런데 순간의 생각으로 함부로 행동했으니 여러 동문들을 대하 기가 민망스러웠다. 금선이 웃으며 말했다. "소사형은 너무 고지식하군! 우리들은 나이도 어리고 도력(道力)도 짧아서 본래 본문의 제자가 될 수 없었으나 어찌 이교도일 리야 있겠어요? 이사매는 선연이 매우 깊을 뿐 아니라 또 입문하 기 이전에 이미 장교부인의 가르침을 받았지. 큰누나도 역시 아직 원성이 야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 언젠가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원성은 우리들에게는 매우 공 경스럽고 조금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 우리들은 그를 꾸짖을 수 없었다우. 그러나 우리들 몰래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하다가 사형에게 훈계를 당했으니 그것은 도리어 잘된 일이지 뭐. 그리고 그 주과는 망창산에만 있고, 또 매년 열매를 맺지도 않는다고 들었어. 후동을 지키고 있으라고 했 는데 오히리 망창산에 갔다왔으니 문책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 금선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조금 전 우리가 왔을 때 이사매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았어요. 다 행히도 사형이 일찍 와서 우리가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전에 <염선> 이사숙께서 응벽애에 머 지 않아 요마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거든." 소화상은 금선이 이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태원동(太元洞) 안으로 들어가 여러 동 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얼굴을 붉히며 영경에게도 사죄했다. 영경은 원성이 마음대로 살상을 저질렀으니 그를 문책함은 그를 위해 한 일이기 때문에 상관없 는 일이라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남에 대한 걱정으로 말문을 막으며 끼어들어 물었다. "일개 축생인 원성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문책을 받아야지요. 그런데 소사형이 주과를 가 지고 계시던데, 그럼 망창산에서 오신 것 같은데 혹시 여자 한 명을 만나지 못했는지요?" 소화상은 평소 여동문들과 이야기해 본 적이 별로 없는지라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서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금선이 먼저 그 주과는 원성에게서 빼앗은 것이라고 말했다. 영경은 그 말을 듣고는 급히 원성을 불러들였다. 원성은 조금 전에 영경과 영운(靈雲) 등이 주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이미 동굴 밖에 서 기다리고 있다가 영경이 부르자마자 들어와 꿇어앉아서는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성의 이러한 행동은 영경의 마음에 꼭 들었기 때문에 영운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지선, 주문도 원성을 위해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영운이 말했다. "함부로 비둘기를 죽인 죄는 이미 소사형에게 문책을 받았으니 되었다. 그런데 후동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고 함부로 자리를 비웠단 말이냐! 강우도 역시 직무를 다하지 않 은 죄가 있으나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하기로 한다. 만약 다시 이런 죄를 저지른다면 가벼우면 보 검을 빼앗고 망창산으로 쫓아버리고 중하면 네 놈의 목을 칠 것이니, 앞으로는 절대로 후동을 지 키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라." 원성은 이 말을 듣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감사를 표하고는 동굴 밖으로 나 갔다. 금선이 소화상은 지금 사명을 받들어 백만산 음풍동(陰風洞)으로 요마를 제거하러 가야 하는데, 그 녹포노조는 매우 악랄하기 그지없고 무서운 자라, 여러 동문들의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이야 기했다. 여러 동문들 중에 영운, 진자령(秦紫玲), 오문기(吳文琪) 등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공을 세우 고자 하는 마음에 서로들 나서려고 했다. 소화상은 당연히 장황스레 감사를 표했고, 금선은 신이 나서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을 의논했다. 영운이 이것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금선아, 그렇게 서두르다가는 어떤 사고를 저지를지 몰라. 침착하게 우선 내 말을 들어봐!" 금선은 영운의 얼굴을 쳐다보며 불쾌한 듯이 입을 뾰로통 내밀며 말했다. "누나, 무슨 할 말이 있는지요? 우리들은 이미 검선(劍仙)의 명으로 요마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가지고 있고, 또 소사형도 고행사백의 명을 행하느라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요. 나와 사형간의 정 은 골육과도 마찬가지니, 그를 도울 수 없다면 저라도 돕게 놔두세요. 이렇게 의로운 일을 하느라 고 혹여 사부님의 명을 어긴다 해도 용서하실 거예요. 나는 다른 사람은 개의치 않을 테니 두려 운 사람은 가지 않아도 돼요. 방금 문누이, 이사매, 신누이, 두 분 진사저께서는 모두 가시겠다고 했으니 다른 생각할 필요없이 우리는....." 그가 막 말을 이으려 할때 영운이 화난 얼굴로 금선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금선아, 입을 닥치지 못해! 함부로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이 응벽선부는 본파 융성의 터전이야. 나는 재주가 보잘것 없지만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잠시 이곳을 관장하고 있다네. 후일 사람이 많 아졌을 때 만일 모두들 너처럼 마음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옛날에는 너 의 나이가 어리고 무지하여 여러 번 용서했었지만, 이제 그렇게 배우고 나이가 들었으면서도 그 렇게 경솔해서야 되겠느냐? 행동이 그렇게 경망스러워서야 수도인으로서의 체통이 서겠어? 매사 에 신중해야 하며 적을 맞아서는 더욱 신중해야 하거늘 그렇게 경솔해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 느냐?" 금선은 원래 영운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잠시 의분이 격발하여 영운이 소화상을 돕지 않으려 고 하는 줄로만 알고 함부로 말을 내뱉아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 영운의 꾸짖는 소리를 듣자 자 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영경, 주문 두 사람은 소화상이 온 의도를 듣고는 처음부터 나서겠다고 말했고, 한악(寒顎), 약란 도 계속 가겠다고 말했다. 영경은 원래 천진하여 여러 동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어 누 가 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으며, 주문과 영운은 생사환난(生死患難) 지경에 만난 사이라 허물이 없는 사이였다. 약란은 아미에 의탁하게 된 것을 매우 다행으로 여겨 평소 영운을 매우 존경해 온 터이라 실례를 범할까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 그 외에 여러 동문들 모두가 영운을 따르고 있었다. 소화상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한악 한 사람만은 자부심이 매우 강해 누구에게도 구속되려 하지 않았고, 자기가 왔을 때도 별로 흥미가 없는 듯했다. 영운이 그것을 알아차린 듯이 소화상에게 말했다. "이는 우리 모든 동문들이 힘을 합쳐야 할 일이야. 장교사존(掌敎師尊)께서 우리에게 비검요결을 전수하신 것은 우리들이 공을 세우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에요. 주사매를 호송했고 복선담에서 선 초를 채취했고, 돌아오면서 선부(仙府)를 열었고, 이어서 청라(靑螺)를 괴멸시켰지만, 우리는 아직 산을 내려가 경험을 쌓지 못했잖아. 이번에 기회를 만나 사제를 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다행히 성공하여 녹포노조를 처치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공을 세우는 것이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나 이번 기회를 앉아서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야." 영운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부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매우 많은 가을이어서 영약(靈藥)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단 다. 며칠 전에도 숨겨져 있는 보물이 나타났는 데도 보물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것은 한 줄기 광 화(光華)로 변해 허공을 가르며 사라져 버렸었지. 조금 전 두 자루의 비검도 또 사라져 버리려 하 는 것을 사제가 함광촬영법(含光撮影法)을 펼쳐서 겨우 얻을 수 있었지. 지금도 동굴 안에는 얼마 나 많은 보물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이틀 동안 보물이 날아가 버리는 것을 관찰해 보니 모두 일 정한 시간에 그런 일이 발생했으나 우리들의 법력에는 한계가 있어, 그것을 막으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 기왕 할 수 없다면 미리 준비하여 우리 모두가 보물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획득 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만약 보물이 더 있다면 보물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두 사람을 남겨두어 이곳을 지키게 해서 보물이 날아가서 이파(異派)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가 있지 않겠는가. 또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이사숙께서 전하셨듯이 머지 않아 요마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온다는 사실이야. 이곳은 옛날 사조(師祖)께서 많은 영약, 보물을 숨겨두신 귀중한 곳이야. 이사숙께서 다만 머지 않아 요마가 침입할 것이라고만 하시고 날짜를 말씀하시지 않은 것도 아마 우리들이 요마를 상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때문일 것이 야. 그런데 또 우리가 나누어진다면 힘이 더 약해질 건 뻔하지. 영경사매에게는 여씨 성을 가진 의자매가 있는데 후일 우리 문파에 들어올 사람인데 지금 혼자 망창산으로 갔다가 사고를 당해 요마에게 잡혀 있을지도 몰라. 이사매는 몇 번이나 그를 찾으러 가려고 했지만 그것 또한 위험한 일이어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처지야. 백만산에 가서 요마를 처치하는 일은 아직 기 일이 반 달이나 남았으니 그때까지는 요마가 이곳을 침입하더라도 소사제의 힘을 보태어 이곳을 방어할 수가 있어 참 다행이야. 이곳의 일이 끝난 후에 몇 명을 골라 선부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소사제와 함께 악적을 치는 공을 세운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그때까지 요마들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 금선이는 천복을 입어 절대 어려움에 처하지 않을 것 이라고 제갈사형께서 말씀하셨다니 함께 가도 별일이 없을 것이니 함께 가도록 하고, 나머지 동 문들은 이곳에서 떠나지 말고 요마들의 침입에 대비해야만 할 것이야." 영운의 말은 모두 진정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소화상은 스승이 그에게 중책을 맡길 때 이미 임 무가 쉽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했던 터이지만 생각했던 바로 그대로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 나 다행히도 금선의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바라던 바 목적은 이룬 셈이었다. 금선은 비록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부가 목전에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으므로 요마들 이 침입해 오면 일대 결판을 벌일 판이었다. 의논이 끝나자 소화상은 조금 전에 자기가 얻었던 그 비검을 영운에게 돌려주고, 또 동부 바깥 벽에 백만산으로 가야 하는 날짜를 적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했다. 영운이 그 검을 받아보니 그 검은 이상한 모양을 취하고 있었는데 손잡이가 일 척(一尺) 정도나 되었고, 검끝은 세 갈래로 갈라져 청광을 발하는 것이 한기(寒氣)가 머리털조차 곤두서게 만들었 다. 여러 사람들이 그 검을 돌려 보고 있을 때, 소화상은 무엇인가 머리에 스치는 듯이 갑자기 금선 에게 말했다. "그 검이 숨겨져 있던 동굴이 어디지요? 검이 발견된 이후 아직 그곳을 봉쇄하지 않았다면 여러 분들은 동굴 속을 조사해 보셨는지요?" 소화상의 말에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이 영운이 급히 대답했다. "요 며칠 동안 선부에 사소한 사고가 많이 일어났었고, 또 날아가는 법보의 형태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법력에 한계를 느끼고 감히 들어가 보지 못했어. 오늘 보검이 청사(靑蛇)로 변해서 날아가 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보물이 일정한 시간에 날아간다는 사실만을 감지할 수 있었을 뿐이지. 그 리고 소사제가 오늘 처음 와서 이야기하느라고 정신이 팔려 동굴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 도 못했군. 소사제가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겨우 생각이 나네. 우리들의 능력으로 말하자면 사조 께서 보물을 감추어 두신 동굴을 조사할 만한 능력이 없지만, 그러나 동굴 속의 보물이 계속 사 라져 버리려고 하고, 이미 하나가 없어졌으니 빨리 방비하지 않는다면 보물을 잃어버리고 말 것 이야.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테니, 위험을 무릅쓰고 동굴 안을 조사해야만 할 것 같아." 영운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동굴 속의 보물이 어떠한 상태로 있는지 알 수 없고, 수시로 안에서 쇳소리만 들리니 만일 우리가 보물들을 거둘 수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어. 만약 조금만 실수하면 목숨 을 잃을지도 모르니 경솔하게 행동할 수는 더더구나 없다구. 다행히 소사형의 무형검둔은 매우 현묘하고 주, 이, 진 세 사매가 지보(至寶)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들이 힘이 부친다 하더다도 별일 은 없을 거야.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이 필요가 없으니 나와 소사형 두 사람만 들어갈 게. 세 사매의 자영검, 천둔경, 미진기와 구천원양척(九天元陽尺) 네 가지 보물을 빌려주면 안으로 들어가 관찰할때 몸을 보호할 수 있고, 동굴 안의 보물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야. 나머지 사람들 은 동굴 밖에서 보물이 날아가 버리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군." 영운은 곧 세 사람에게 세 가지 보물을 받아 넣고, 또 새로 얻은 비검을 자기의 법보(法寶) 주머 니 안에 넣었다. 미진기는 소화상에게 주고, 원양척은 자기 소매 속에 숨기고, 한 손으로는 천둔 경을 한 손으로는 자영검을 쥐고 여러 동문들을 데리고 보혈(寶穴)의 앞 가파른 절벽 아래로 갔 다. 먼저 소화상이 비검술을 펼쳐 동굴 입구까지 올라가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니 안에서 쇳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먼젓번 하고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영운이 말했다. "먼젓번에도 보물이 날아가기 전에는 이런 소리가 특히 크게 울렸었어요. 보물이 일단 날아가 버리고 나니 소리가 멈추더군. 두 번 소리를 들으면서 관찰해 본 결과 동굴은 굉장히 깊고 넓음 이 틀림없는데, 지금 들어가려면 소사형은 어떤 고견이 있는지?" 소화상이 대답했다. "대사저의 도법은 매우 신통하여 모든 동문이 따르고 있는데 사저께서 먼저 들어가시지요." 영운이 손을 휘젓자, 이미 자영검을 영운에게 준 영경을 제외하고 또 두 동굴로 올라가기 시작 했다. 지선도 아직 신검함일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옆에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 두 검광을 발하며 함께 동굴로 올라갔다. 여러 줄기 검광이 동굴을 향해 쏘아져 갔다. 마치 신룡(神龍)처럼 오색광채를 내뿜으며 허공으로 치솟아 허공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모두 보혈 앞의 허공에 모였다. 한광보기(寒光寶氣)에 눈이 부셨고, 벼락 같은 소리가 뒤섞이며 천망(天網)을 이루어 보혈 위를 뒤덮었다. 영운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동굴 문을 열어젖히고 수중의 천둔경으로 안을 비추었다. 동굴은 깊이가 약 이십여 장(丈)쯤 되는 우물같이 생겼는데, 입구보다 세 배쯤 넓어 보였다. 안쪽벽의 한 쪽에는 돌문이 있었고, 나머지 삼면은 모두 매끄러운 옥과 같은 돌로 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보혈 은 원래 양층으로 되어 있고, 보물은 석벽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어 고개를 돌려 소화상을 부르니 그는 순식간에 동굴로 날 아왔다. 동굴에 다다라 석문 앞으로 걸어가 귀를 기울이니 과연 쇠 가는 소리가 매우 선명하게 들렸다. 석문을 살펴보니 마치 천연 그대로인 것 같아, 비록 약간의 윤곽이 보이기는 했지만 들어갈 방법 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의논하다가 먼저 소화상의 비검을 사용하여 석벽의 틈을 벌려보려 했으나 석벽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먼젓번의 보물이 어떻게 이 석벽을 뚫고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 석문에 선법 (仙法)이 펼쳐져 있으면 소화상의 비검으로도 석문을 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미진기를 사용해 보았다. 미진기는 쇠이건 돌이건 마음만 먹으면 뚫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석문을 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운(彩雲)만 자욱히 쌓였을 뿐 석문은 꿈쩍도 하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비로소 석문에 펼쳐져 있는 선법이 매우 무시무시함을 깨달았다. 급히 미진기는 거두어들이고 영경의 자영검을 꺼내들고 석문의 틈새를 찔러갔다. 먼저의 비검과 보기(寶旗)가 효과를 거두지 못 했으니 자영검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 분명했으나 어쨌든 일단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자줏빛이 비춰지자 돌연 흰색 연기가 일어나더니 석문이 사라져 버렸다. 석문 안쪽에서는 금빛이 눈부실 정도로 발출되고 있었고, 여러 가지 색깔의 연기 가 빠른 속도로 소용돌이치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깜짝놀라 이것이 보물인 줄 알았다. 그러나 금빛이 빛나는 곳 안쪽에서 쇠 가는 소리가 들리자 이것은 보물을 감추기 위해 선법을 펼쳐 놓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영운은 천둔경을 소화상에게 건네주고 자기는 미진기를 꺼내들었다. 소화상에게 천둔경으로 석 문 안쪽을 비추게 하고 자기는 기회를 틈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한손으로는 자영검을 끼고 미진기로 몸을 보호하며 신검합일을 이루어 금빛 속으로 뚫고 들어갔 다. 소화상이 밖에서 바라보니 한 줄기 자색 광채가 채운과 뒤엉키며 금광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경각지간에 영운이 한 줄기 푸른 광채를 뿌리며 다시 금광을 뚫고 나와서는 땅에 떨어져 있는 법 보, 비검을 주워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화상이 재차 경과를 물어대자 영운이 대답했다. "법보와 비검으로 몸을 방어하여 간신히 보혈(寶穴) 안에 들어갔더니 그곳은 매우 깊고 넓으며 옥기둥과 옥계단이 늘어서 있어 마치 선관(仙關)과 같았어. 머리 위에 다섯 갈래의 광화(光華)가 뒤엉켜서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 어떤 보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어. 내가 막 혼자만의 힘으로는 보 물을 획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바닥으로 내려서려 할때 방금 전에 소사형이 나에게 준 청사 (靑蛇) 모양의 비검이 보따리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꼈어. 아마도 청사로 변해서 보따리를 뚫고 날아가려는 것 같았어. 다행히도 재빨리 손을 써서 겨우 비검을 회수할 수 있었지. 백보낭(百寶 囊)이 이미 파괴되었으니 미진기와 함께 손에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이 청사가 다섯 줄기의 광화 가운데를 비추자 돌연 거기서 지네 같은 모양의 붉은 기운 한 줄기가 나의 손을 향해 날아 왔어. 또 손에 쥐고 있던 청사도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동시에 나머지 네 줄기 광화도 날아오 고 있었어. 나는 가까스로 그 광화를 피해 몸을 보호할 수 있었지. 그 다섯 줄기 광화는 정말 무 시무시했어. 그 붉은 기운이 나를 향해 쏘아져 왔을 때 만약 자영검으로 막지 않았다면 지금 어 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야. 이렇게 해서 나의 백보낭이 파괴되어 버렸어. 옥청사태께서 하사하신 오운신교망(烏雲神蛟網)과 내가 연성했던 두 가지 소법보(小法寶)도 함께 잃어버렸어." 영운은 숨가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행히도 구천원양척은 옷소매 속에 있었기 때문에 잃지 않았어요. 그 원양척은 진언(眞言)을 모르면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인데 만약 잃어버렸다면 능사백(凌師伯)께 책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 을 것이고, 이후 원양척이 필요할 때마다 그 손실을 아쉬워했을 것이야. 그러나 이제는 방법을 알 아냈으니 적어도 세 사람의 동문만 더 있으면 보물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두 사람만으 로는 아마 힘들 거야." 한참 말하고 있는 사이에 돌연 한 줄기 광화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나타난 사람은 경운(輕雲)이 었는데 손에는 두 통의 편지를 들고 있었다. 그 편지는 바로 묘일부인의 비검전서(飛劍傳書)였다. 이것은 처음에 금선이 받았는데 그의 벽력검은 자영검과 필적하니 방어를 도울 수 있으나 그 편 지 속에는 보물을 얻는 방법이 적혀 있어 경운을 시켜 영운에게 전한 것이다. 영운은 먼저 편지를 향해 절을 올리고 기쁜 마음으로 첫 번째 편지를 뜯어보았다. 영운은 무엇보다도 먼저 경운에게 청사형 비검을 가지고 가서 한악에게 주도록 했다. 그리고 진 자령, 주문 그리고 경운과 함께 내려가 보물을 얻는 데 힘을 합치고 나머지 사람들은 위에서 방 어하기로 했다. 얼마 후 경운이 주, 진 두 사람을 데리고 왔고, 영운은 보물을 취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 보물은 장미진인(長眉眞人)이 얻은 오행정영(五行精英)을 구구현공(九九玄功)으로 칠진 형상(七眞形相)에 따라 칠구비검(七口飛劍)으로 연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연성된 비검이 응벽애 옆의 절벽 중간쯤의 청정혈(靑井穴) 내의 원동(元洞) 벽에 감추어 져 있었던 것이다. 일곱 개의 옥석검낭(玉石劍囊) 안에는 용(龍), 사(蛇: 뱀) 섬(蟾: 두꺼비), 구(龜: 거북), 금계(金鷄: 금닭), 옥토(玉兎: 옥토끼), 오공(蜈蚣: 지네)의 일곱 개 비검이 들어 있는데, 모 두 이파의 오독(五毒)을 파해할 수 있는 아미파의 지보인 것이다. 장미진인은 세상을 떠나면서 법술로써 동혈을 봉쇄하여 입곱 개의 비검이 주야에 걸쳐 세 번씩 서로 부딪침으로써 동굴 안에서 비검이 완벽하게 만들어지도록 안배하고는 한 통의 첩지를 묘일 부인에게 남겼었다. 이제 묘일부인은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는 첩지를 열어보고 일곱 개의 비검의 내력과 얻을 수 있 는 방법을 알아냈던 것이다. 첩지에서는 보물이 세상에 나오는 때가 되어 동굴 밖의 법술이 풀린다 하더라도 동굴 안에 두 가지 법술이 더 펼쳐져 있다고 적혀 있었다. 하나는 그 석문이며, 또 하나는 일면육양결(一面六陽 結)이었다. 이 육양결은 오 년(五年) 오월(五月) 매일 오시(五時)에 양(陽)이 성하고 음(陰)이 쇠하 면 그 효능을 잃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일곱 자루의 비검은 동굴 내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어서 생극(生剋)의 관계에 있어 비 교적 약한 한 자루의 비검이 이때 뚫고 나오게 되는데 석문도 이를 막지 못하고 비검 본래의 성 질에 따라 날아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일곱 자루 비검 중에서 원구검(元龜劍)이 제일 먼저 형태가 변하면서 날아가게 되고, 다음으로는 뱀모양의 청령검(靑靈劍)이 계속해서 날아가게 되는데 비록 비검을 얻는다 해도 그 사용법을 모 르면 비검은 역시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먼저 날아가 버린 원구검은 아직 입문하지 않은 제자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나머지 여 섯 자루는 다음날 손을 쓰면 이파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묘일진인은 현진자, 고행두타와 함께 한 가지 순양지보(純陽至寶)를 연성하느라고 이쪽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도 묘일부인이 동해에 왔다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비검 으로 서신을 보내 영운에게 경운, 주문 등을 데리고 장미진인이 전해 준 검을 얻는 방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명했다. 검을 얻은 후에는 영운이 수장토록 하고 묘일진인이 돌아온 후에 뒷일 을 처리하도록 했다. 영운은 일행에게 주문(呪文)을 전한 다음에 원양척을 들고 주문을 외우며 동굴 내에서 회전하고 있는 광화를 가리켰다. 금빛을 발하던 곳에서 광화가 사라지더니 일면옥결(一面玉結)이 영운의 손 으로 날아들었다. 그들이 동굴 안을 들여다보니 동굴 안에서 다섯 줄기의 광화가 쉬지 않고 뒤엉켜서 부딪치고 있 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 밖에서 육양결을 회수하고 보물을 유심히 살펴보니 차례차례 나 뉘어져 날아가려 하고 있었다. 영운은 이미 준비한 대로 수중의 구천원양척을 위로 치켜드니 한 줄기 금홍(金虹)이 다섯 줄기 의 광화를 에워쌌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기 나뉘어져 보물을 수호하는 진언을 외우며 정한 대로 좌우사방의 벽을 가 리켰다. 그 다섯 갈래 광화는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쪽으로 돌더니 섬전처럼 벽을 향해 파고들어 순식간 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영운이 원양척을 거두고 나니 방금 전에 잃어버렸던 오운신교망 등의 보물이 땅에 떨어져 있었 다.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과 서로 부딪치지 않았기에 아무런 손상없이 다시 얻을 수가 있었 다. 일행과 함께 가까이 다가가보니 자연 일곱 개의 옥주머니가 우유색을 띠고 벽과 나란히 박혀 있 었는데, 그 윤곽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 형태는 검의 모습과 같았고, 전서(篆書)로 검명(劍名)이 적혀 있었다. 용(龍)에는 금타(金駝), 섬(蟾)에는 수모(水母), 계(鷄)는 천소(天嘯), 토(兎)에는 양백(陽魄), 오공(蜈蚣)에는 적소(赤蘇)라 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원구(元龜), 청령(靑靈) 두 자루의 검은 모두 주머니(囊) 속에 들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진기를 발출하며 일곱 개의 검낭을 뽑아냈다. 금빛이 발하던 곳을 살펴보니 벽에 있던 구멍은 모두 원상 그대로 아무런 흔적도 없어 모두들 선법의 교묘함에 경탄했다. 손에 쥐고 있는 옥낭을 보니 수정처럼 투명하고 낭 속의 검의 형태와 비슷하게 생겼고, 검의 명칭과도 유사 했다. 모두들 신이 나서 검낭을 들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검광을 타고 동굴의 정상까지 올라 가 나머지 사람들을 불러 태원동으로 들어갔다. 영운은 한악에게서 청령검을 받아 검낭 속에 넣 었다. 일곱 개의 검낭을 살펴보니 용, 사 두 자루의 검이 가장 커서 약 일 척(一尺)쯤 되었고, 작은 것 은 삼사 촌(寸) 정도였다. 영운에게서 검을 얻게 된 경과를 설명듣고는 모두들 그 묘용(妙用)에 감탄하며 서로 축하하며 즐거워했다. 영운은 천소검은 자기가 가지고 나머지 다섯 자루의 검 중 금타는 자령에게, 수모는 경운에게, 양백은 영경에게, 적소는 주문에게, 청령은 약란에게, 현구검의 빈 검낭은 지선에게 주어 잠시 보 관케 하고는 교조가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기로 했다. 영운의 생각은 이 검들은 이교의 오독(五毒)을 파해할 수 있는 아미파의 지보인데 수가 너무 많 아 자기 혼자로서는 가지고 다니면서 보관하기가 힘들었고, 실내에 두고 보관하려 해도 미심쩍어 동문들이 한 자루씩 나누어서 보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었다. 각자에게 실지로 나누어준 것은 아니고, 또 사용법도 전해 주지 않아 잠시 보관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악은 섭섭한 마음이 생겨났다. 자령은 영운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악의 성질로 보아 입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문 들에게 죄를 짓는다면 관계가 매우 불편해질 것 같아 다른 사람들 몰래 눈짓을 보냈다. 한악은 자령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자령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얼굴색을 펴고 약란과 웃으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령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이때 영운은 묘일부인의 두 번째 첩지를 뜯어서 동문들과 함께 보고 있었다. 원래 묘일부인은 동해에 오기 전에 우연히 길을 가다 제갈경아를 만난 것이었다. 제갈경아는 묘일부인의 도행(道行)이 매우 높고 사람됨이 더욱 인자하여 동배 선협들 중 부인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사를 올리고는 소화 상이 지은 죄에 대해 용서를 빌고 무서운 녹포노조를 제거하러 소화상 혼자 간다면 매우 위험하 니 그를 도와주십사고 청했던 것이다. 묘일부인이 말했다. "소사질(小師姪)은 자질도 뛰어나고 오랜 기간 고행수련을 쌓았다고 들었다. 머지 않아 고행도우 가 공행이 끝나면 그에게 법통을 잇게 할 작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소사질이 이번에 문규를 어 겼으니 이번에 그를 징계한다고 해도, 그것은 빨리 삼겁(三劫)을 거쳐 앞날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 기 위함이다. 이번에 그가 맡은 일이 비록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도리어 화로 인해 복을 얻게 될 것이다. 네가 동문들에게 관심이 있다면 내가 동해에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러 도우들을 만나 전후 사정을 들어보고 처리하도록 하라." 말을 마치고 묘일부인은 제갈경아와 헤어져 동해로 갔다. 거기에 가보니 삼선은 단방(丹房)에서 자신들의 삼매진화를 이용하여 순양지보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묘일진인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영운에게 장미진인의 유언대로 칠수검(七修劍)을 취하게 하고 또 소화상의 일을 의논 했던 것이다. 묘일진인이 부인에게 말했다. "당신 정말 때맞춰 왔소. 나는 지금 현진, 고행 두 도우와 이 순양지보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많 은 사교(邪敎)들이 우리들을 주시하고 있소. 요마들에게 당해 순양지보를 빼앗기리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들이 준비를 완벽히 했다면 경시할 수는 없는 일이오. 이 지보를 연성하는 동안 두 사 람은 단로(丹爐) 앞에서 진기를 운용하여 진화(眞火)를 발해야 하고, 한 사람은 휴식을 취하면서 보광을 은폐해야만 요마들에게 발각되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삼 일마다 교대하여 앞으로도 여덟 아홉 번 해야만 순양지보가 완성되는 것이오. 지금 문주(文蛛)뿐만 아니라 많은 요마들이 우리들 을 노리고 있으니 아미파로서는 꽤 골치아픈 일이라오. 당신은 영봉(靈峰)으로 날아가서 은사의 유언대로 선진(仙陣)으로 봉쇄하고, 우리들이 돌아가면 다시 영약을 채취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우리 문하제자 중에 세 명의 영(英)자 항렬 제자 가운데 여영남(余英男)이 망창산에 가서 이영경 을 찾다가 지금 흑상음매(黑霜陰埋)의 위기에 빠져 망창산의 한음정(寒陰晶) 내에서 몸이 얼어붙 어 있은 지 이미 수일이 지났소. 다행히도 영남이 위험한 지경에 빠지기 전에 허기를 느껴 큰 성 성이에게서 몇 개의 주과를 빼앗아 먹었는데, 그 선과의 효력으로 온몸의 기혈은 이미 동결되었 으나, 심장 부근만은 아직 동결되지 않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오. 그 망창산의 빙지(氷地) 는 만 장(萬丈)이나 되고 매우 춥지만, 또한 만년온옥(萬年溫玉)의 정영(精英)으로 인해 얼음도 얼 지 않고 언제나 봄 날씨 같은 곳도 있어요. 영남은 나이도 어리고 무지하니 요마들에게 이용당하 여 일신의 선골(仙骨)만을 믿고 절세의 음지(陰地)인 한혈현정(寒穴玄晶) 내의 빙잠(氷蠶)을 훔치 러 들어갔던 것이오. 영남이 동혈로 들어갔을 때는 한풍이 동굴로 돌아오던 때이어서 안으로 한 걸음만 들어가도 한풍에 쓰러지는 상황이었소. 지금 영남의 골수는 모두 한빙(寒氷)으로 변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영약으로 그를 다시 살려낸 후에도 만년온옥이 없으면 원래대로 회복할 수 없소 이다. 아미에는 머지 않아 많은 요마들이 육지(肉芝)의 정혈(精血)을 훔치러 올 것이기 때문에 여 러 제자들은 거기를 벗어날 수가 없소이다. 영경은 선연(仙緣)이 가장 깊고 좋은 영약을 복용하여 천기가 충만하고 게다가 신조(神鳥)와 원성의 도움까지 받고 있소. 신조는 경각지간에 천 리를 날 수 있고, 원성은 원래 망창산에서 살았으니 영경 한 사람만 가도 무방할 것이오. 한풍이 동굴에서 빠져나올 때를 틈타 동굴로 들어가서 영남을 구하고, 오요시(五妖尸)들이 지키고 있는 만년온옥을 훔쳐오면 된다오. 소화상이 백만산에 가서 요마를 제거하려면 요마들이 아미산을 침범했을 때가 가장 좋소이다. 힘으로 말하자면 여러 제자들이 요마들의 적수가 되지 않지만 임기응변으로 은밀 하게 방어한다면 숫자가 많다고 해도 능히 막을 수 있는 것이오. 금선은 주문의 천둔경을 가지고 소화상을 도울 수 있을 것이오." 묘일부인은 묘일진인의 말에 따라 두 장의 서첩에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것을 써서 비검으로 전 하여 영운일행에게 일의 처리방법을 전했던 것이다. 묘일부인의 서첩을 보고 누구보다도 영경은 희비가 엇갈리며 당장 신조와 원성을 데리고 망창산 으로 가서 영남을 구하려고 했다. 영운이 말했다. "아우, 그렇게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 이미 장교부인의 하명이 있었으니 너 혼자 가게 될 것이야. 그러나 비록 신조가 돕는다 하더라도 처음으로 혼자 가게 되는 것이니 매우 신중하게 처 신해야만 하겠지. 영남을 구하는 것은 다만 그가 있는 곳만 찾으면 되니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 러나 빙잠과 만년온옥은 하나는 요도(妖道)들이 노리고 있고, 하나는 요시(妖尸)가 지키고 있으니 얻기가 쉽지 않겠지. 그 요도는 빙잠을 차지하려고 매우 신경쓰고 있을 테니 분명히 계책을 부릴 것이야. 네가 영남사매를 구할 때 그 요도와 마주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물론 너의 검술은 비록 입문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천부적 자질과 고된 수련으로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지. 게다 가 자영검을 가지고 있으니 잘 사용한다면 정, 사의 어떠한 비검도 너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거야. 그러나 청라(靑螺)에서 네가 두 번 위험에 처한 것은 모두 네가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검술 의 위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어. 이번에 만약 요마들의 공격을 받게 되면 공을 세우겠다는 마음 만 앞서 적을 경시하고 덤벼들지 않도록 해야 해. 검광으로 몸을 보호한다면 적이 아무리 강하더 라도 이기지는 못해도 네 몸은 지킬 수 있을 것이야. 신조는 경각지간에 천 리를 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두르는가 말이야. 아까 서첩에서 말한 대로 한풍이 동혈에서 불어나오는 시각은 축시(丑時) 말에서 인시(寅時) 초 사이인데 지금은 진시(辰時)가 이미 지났으니 가도 아무 런 소용이 없어. 만일의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니 자령사매의 미진기를 빌려 가도록 해." 영경이 대답했다. "큰언니의 말씀은 명심하겠습니다. 영남언니와 저는 골육과도 같은 정을 나눈 사이입니다. 옛날 해탈암(解脫庵)에서 함정에 빠졌을 때는 저의 능력이 지금과 큰 차이가 있었고, 여러 사저들께서 도 다른 일에 신경쓰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 이후로 영남사저는 곤륜의 검술을 익혔습니다. 그런 데 지금 저를 찾으려고 애쓰며 다니시다가 불행히도 한혈 속에 얼어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비 록 선과를 먹어 목숨은 부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온몸이 얼어버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매일 살을 에이는 한풍에 시달리고 있으니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일입니다. 저는 은사의 서첩을 읽고 난 후 가슴이 저미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영남사저의 종적을 몰랐다고 해도 내일은 큰언니께 말 씀드리고 목숨을 걸고라도 찾으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이제 이미 영남언니가 있는 곳을 알았으니 주저할 까닭이 없습니다. 지금 신시(申時)가 지나 한풍이 매우 무섭다고 하더라도 요법보다 무섭 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들어갈 수 없다면 물러설 것 입니다. 그래도 영남사저를 한시라도 빨리 봐야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또한 원성은 비록 짐승이지만 저를 따라 고향을 떠난 지 이 미 오래 되었습니다. 아까 망창산의 상황을 이야기할 때 그의 자손 중 태반이 없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요물에게 당한 것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원성도 매우 조급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사전준비를 할까 합니다. 저는 큰언니의 분부를 받들어 요인을 만나면 절대로 모험하지 않겠습니다." 영운은 원래 영경이 영남을 구하기도 전에 요인을 만났을 때 공을 세우려는 마음에 실수를 할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경의 말과 표정에서 비장하고 조금의 동요도 없는 세찬 결심을 느 꼈다. 또 망창산은 매우 넓고, 서첩에서 풍혈(風穴)은 다만 산의 음지에 있다고 했을 뿐 상세한 위치를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조는 매우 빨리 날 수 있고, 또 안광(眼光)이 매우 예리 하여 풍혈을 찾는 일이 그렇게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이 당장 망창산으로 간다고 해도 경운, 문기 두 사람이 신조를 대신해서 동부를 잠시 지키 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자령이 미진기를 넘겨주자 영경은 감사하며, 그것을 받았다. 일행들과 헤어져 경운, 문기는 후동으로 갔고, 원성도 역시 신조를 타고 망창산으로 날아갔다. 백만동으로의 발길 彩穀撑空 萬頃金波飛惡蠶 陰風入洞 一團紅肉徒妖蠶 영경이 떠난 후 영운은 소화상에게 금선과 함께 가는 것이 어떠냐고 그의 의향을 들었다. 소화상이 대답했다. "이곳으로 올때 제갈사형께서 이미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 하셨습니다. 장교부인의 말씀대 로 머지 않아 요마들이 육지의 피를 훔치기 위해 침범할 것이니 여러분께서는 이곳을 떠나실 수 가 없는 상황입니다. 요마를 제거하는 일은 제가 해야 할 일이니 다른 사람에게 미룰 수 없는데 선사제와 함께 갈 수 있고, 주사저의 보경을 빌릴 수 있다면 저로서는 매우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입니다. 저의 일은 아직 기일이 십여 일이나 남아 있으니 그때까지는 여기 머무르다가 만약 요 마들의 침범이 있으면 옆에서 미력이나마 도울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서첩을 보니 백만산에서 요마를 제거해야 하는 바로 그날 이곳에 요마들이 침입한다고 하여 여기에 머물러야 아무런 쓸모 도 없고 해서 금선사제도 먼저 가는 것이 편할 것 같아 먼저 떠나려고 합니다. 일찍 떠나면 첫째 로 상황을 살필 수도 있고, 둘째로 십여 일 간의 기간에 성도의 옥청사태를 찾아뵙고 혹여 도움 을 얻을 수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분은 사람됨이 자애롭고 열정적이어서 동문들에게는 노고를 아끼지 않는 분입니다. 옛날 함께 자운(紫雲)을 파하고 벽사촌(壁邪村) 옥청관(玉淸觀)에서 그분은 제게 일이 년 내에 필히 재겁(災劫)을 당할 것이니 매사에 조심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때 제가 광망하여 충언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고 소란을 피워 문규를 어기게 된 것이 아쉬운 일 입니다. 지금은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이번에는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서 처신하려고 합 니다. 대사저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제 선제와 함께 떠날까 합니다." 영운은 재삼 며칠 더 머무를 것을 청했으나 소화상은 본래 여 동문들과 지내는 데 익숙하지 못 했고,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면서 한사코 떠나려고 했다. 영운은 소화 상에게 하루만 더 있다가 내일 떠나라고 했다. 여러 동문들에게 소화상과 함께 응벽애의 선경을 두루 구경하게 했다. 또 금선에게는 여러 가지 주의를 주고 주문에게 천둔경을 빌려 소화상에게 주고 그 용법도 설명해 주어 두 사람이 친해지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모두들 소화상과 헤어진 후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의논하였다. 다음날 아침 소화상은 여러 동문들과 인사를 나누고 금선과 함께 무형검둔을 펼치며 성도로 날 아갔다. 옥청관에 도착해 보니 옥청대사는 경내에 보이지 않았다. 소화상은 원래 이럴 것이라는 것을 알 고 있었던 터이라 담담히게 옥청관을 떠났다. 금선과 소화상은 길가에서 쉬면서 명승지를 구경하 면서 천천히 백만산을 향해 걸어갔다. 소화상이 금선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내가 문규를 어겨서 생긴 사단이니 나 혼자 감당해야 옳은데 도리어 사제는 나로 인 하여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되었네. 모래는 반드시 백만산으로 가야 하니, 녹포노조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니 이번에 가서 기지를 부려 기회를 틈타 해치워야만 하네. 만약 내가 당하게 되면 사제는 나보다 능력이 떨어지니 절대로 위험을 자초하지 말고 검광을 타고 동해로 가서 은사께 청하여 나의 원수를 갚아주게. 은사의 법력으로 나의 원신(元身)이 되살아난다면 겁을 지나 다시 살아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일세." 금선은 평소 소화상이 항상 즐거운 것처럼 보여 수심이 없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심중의 고민 을 토로하는 것을 듣고는 그를 위로했다. "어머님의 비검전서와 제갈사형의 말씀에 의하면 이번 일은 피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해요. 위 급한 상황에 빠진다고 해도 사제의 도력이 고강하고 내력이 심후하니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또 고행사백께서 사형을 평소 얼마나 총애하셨는데 요마들의 소굴에서 죽게 버려두겠습니까? 또 저 도 사형과의 정은 골육의 정과도 같고 요마와 악을 제거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더 이 상 고맙다는 말은 마세요. 사형께서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당장 성공은 못하더라도 절대로 요마 에게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화상이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사제의 호의에 감사할 뿐이야. 내 어찌 은사의 속마음을 모르겠나? 하지만 평소에 악행을 저지 르는 요마들을 원수처럼 대해왔던 내가 지금 비록 신중하게 행동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일단 그 들의 잔악한 악행을 목격한다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이해 득실은 따지지 않고 설치다가 독수 에 당할지도 모르니 그렇게 되면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일세. 아우는 내가 했던 말을 명심하고 있으면 아무런 탈이 없을 것일세." 금선은 다시 그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원래 성격이 활달한지라, 곧 그전처럼 밝은 얼 굴로 길을 재촉했다. 둘째 날 소화상은 길을 가면서 고행두타의 첫 번째 서첩을 펴보았다. 바깥에 서첩을 펴보라는 날짜가 적혀 있고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하는 설명 외에 안쪽에는 '봉석물추, 우혈막입, 면염금 잠, 이독공독(逢石勿追, 遇穴莫入, 血焰金蠶, 以毒攻毒)'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궁리하는 끝에 소화상이 입을 뗐다. "'봉석물추'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석(石) 자는 인명이 아니면 성(姓)일 거야. 제갈사형의 말에 의하면 녹포노조의 수하 중에 당석이라는 악도가 있는데 그는 일찍이 그의 요사(妖師)에 의해 팔 이 떨어져 나갔는데 신진자 못지 않은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네. 은사께서는 만약 그와 만나게 되면 맞서 싸우지 말고 피하라고 하셨지. 셋째, 넷째 구절은 어부지리(漁父之利)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네. 지금 확실히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게 야. 그런데 유독 둘째 구절 '우혈막입'은 무슨 뜻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네. 혈(穴)은 동굴을 말하 는 것이고 문주(文蛛)라는 요물은 녹포노조에 의해 음풍동 밑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를 없애라고 하시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네." 금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고행사백께서 선기(先機)를 예시하신 것이니 분명히 무슨 깊은 뜻이 있을 거예요. 우리들이 행 동하기 전에 그 뜻을 알아내야만 해요." 소화상이 말했다. "그전에도 은사의 말씀을 명심하지 않아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번엔 은사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 겨두어야 할 것일세. 지금 아직도 요마를 제거하라는 기간이 하루가 남았어. 은사의 서첩에 일찍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없었으니 나는 지금 먼저 가서 동태를 살펴보고 올 테니 사제는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나? 적들의 허실을 간파한 후 다시 사제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어?" 금선은 계속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소화상은 어쩔 수 없이 금선을 데리고 백만산을 향 해 나아갔다. 검광은 신속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백만산 근처 백여 리까지 날아갔다. 그 백만산은 묘강(苗疆)의 만산(萬山) 중에 홀로 치솟아 사방에는 궁산악수(窮山惡水)뿐이었다. 높이 빽빽하게 우거져 햇빛도 볼 수 없었고 독안개가 일 년 내내 산을 뒤덮고 있었다. 칠백 리 밖에는 묘강의 야생 원숭이들이 살고 있었는데 들판에서 혈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칠백 리 이내 에는 인적이 끊어졌고 많은 독충, 괴망(怪莽)들이 살고 있는 외에는 짐승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무형검둔을 펼치면서 아래를 살펴보니 아래에는 독연기가 뒤덮여 있었다. 계곡에는 때때로 기이한 벌레들과 큰 뱀 같은 것들이 눈에 띄였는데 비늘이 반짝이고 붉은 연기가 가득한 것이 백독(百毒)이 모여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백독이 모여 있는 지역은 절세의 요마라 할지라도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이며 멀리서 그 모습만을 바라본 두 사람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서첩 에서 지시하는 길을 따라 정신을 바짝차려 동태를 관찰했다. 그들이 막 백만산의 주봉(主峰)을 찾아 음풍동의 위치를 찾고 있을 때 돌연 아래쪽의 안개가 사 라지더니 사방을 에위싸고 있던 산들의 모습이 확연히 나타났고, 수천 무 넓이의 평지가 앞에 펼 쳐졌다. 그 중간에 봉우리 하나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솟아 있었는데 주위의 여러 봉우리들이 그 봉우리를 받들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애(萬崖)가 끊어지는 곳에 큰 폭포가 있었고, 많은 높고 낮은 산들에서 폭포로 모인 물들이 다시 무수한 시내를 이루어 흘러갔다. 공중에서 바라본 광경은 수백의 옥룡(玉龍)이 하늘 반쯤 되는 곳에 걸려 있었고, 지면에는 수백 갈래의 폭포가 평지와 뒤엉켜 있는 듯했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시내에서 물흐르는 소리 가 가락에 맞추듯 어울리고 있었다. 마치 응벽선부의 폭포의 광활함을 보는 듯하여 두 사람은 경 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점점 다가가보니 주봉은 비록 넓이가 오륙백 무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아래쪽은 날카롭고 정상부 분은 넓었고, 전체가 괴이한 소나무와 멋진 괴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돌틈 사이 사이로 온갖 화초 가 어우러져 영롱한 색깔을 자아내 마치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화상과 금선은 독연, 악무가 자욱한 곳을 거쳐 왔기에 이 묘만수역(苗蠻殊域) 요마들의 심처가 이렇게 선경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마음 속으로는 비록 경탄을 금치 못했지만 요인들이 있 을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봉우리 위쪽을 관찰했다. 서쪽으로 날아가던 소화상은 봉우리 서북쪽의 절벽 뒤에 몇 가닥의 채연(彩煙)이 뒤엉켜 있는 것을 보고 금선과 함 께 가서 관찰했다. 그 절벽 뒤에는 평평한 봉우리가 이어져 있었고 앞쪽에는 백여 경 정도의 산전(山田)이 있었는 데, 이름을 알 수 없는 화초가 가득 심어져 있었다. 그 암벽은 심홍색(深紅色)으로 옥처럼 매끄러 위 사방 백여 장에는 풀조차 자라지 않고 있었다. 절벽에는 세 개의 큰 동굴이 줄지어 있었고 상하좌우에는 삼사 촌 크기의 작은 동굴이 일 척도 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마치 벌집처럼 가지런히 뚫려 있었다. 많은 작은 동굴에서는 항상 몇 줄기의 채연이 뿜어져 나와 허공을 향해 피어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채연은 일정한 성질이 있어 바람에 따라 날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동굴에서 나와 허공을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천천히 동굴로 빨려들어 갔다. 좀 가까이 날아가니 이상한 비 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데, 이것이 요마들의 냄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시 자세히 암석 밑을 살펴보니 밭에 심어져 있는 화초는 꽃은 커다란 꽃받침과 비슷했고 잎은 솔잎과 흡사했다. 꽃색깔은 취옥(翠玉)과 같은 녹색이었고 잎사귀는 황금색이었다. 더욱이 꽃의 크키, 잎의 길이, 줄기의 높낮이에 따라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수많은 금침이 밀집되어 있는 것처럼 햇빛을 받아 반작거렸고, 또 넓디넓은 황금색 비단 위에 수많은 취화(翠花)를 수놓은 것 같았다. 소화상이 생각했다. '이곳의 요마들은 동물의 피를 마신다고 들었는데 기봉선경(奇峰仙景)은 천연적인 것이지만 저 많은 화초들은 분명히 인위적인 것이야. 그럼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물려서 요마들이 저 기화(奇 花)를 감상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돌연 괴소성이 암석 뒤편의 봉우리에서 들려왔다. 두 사람은 급히 검광을 타고 구름 속으로 숨어서 그 봉우리를 주시했다. 산봉우리 기슭 부근의 남쪽을 향하고 있는 한 동굴에서 크고 작은 이상한 모습의 사나이들이 나 오고 있었는데 모두 핏기라고는 전혀 없는 백지장 같은 얼굴이었다. 흉칙한 모습은 마치 강시(疆 尸)와 같았고, 모두들 목까지 올라오는 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금권(金圈)이 그려져 있었다. 양소매는 팔꿈치까지밖에 없어 팔뚝에는 누런 털이 뒤덮여 있었고, 깡마른 팔에는 비틀린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모두들 맨발이었고, 손에는 각기 하얀 마포로 만든 작은 기를 잡고 있었는데 깃발에는 혈인이 찍혀 있고, 붉은 몸의 남녀와 많은 부록(符錄)이 그러져 있었다.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는 몸차림이 전에 보았던 신진자와 비슷했는데 그만큼 크지도 않았고, 한 쪽 팔밖에 없는 한 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었고, 깃대는 등에 꽂혀 있었다. 길을 가면서 입으로는 쉬지 않고 무슨 소리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전신에 사악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고, 외 팔의 요인(妖人)을 선두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시신들이 걸어가는 것과 다를 바 가 없었다. 점점 바윗덩이 안에 다가가서 그 외팔이 요인이 먼저 주문(呪文)과 비슷한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괴이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요인들은 돌연 팔궤(八卦)의 방위에 따라 흩어져서 위치를 잡아놓 고 한쪽 발을 박차 허공으로 치솟아 봉우리 정상 높이까지 올라갔다. 우두머리인 듯한 요인이 갑자기 몸을 움직이더니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날듯이 질주하는데 때로 근육이 꿈틀거리면서 신묘한 솜씨로 몸을 회전했다. 입으로는 더욱 빠른 속도로 주문을 외웠다. 나머지 사람들은 수중의 기를 들어 흔들며 연운(煙雲)을 일으키고 춤을 추기 시작했고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는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멍하게 할 정도로 요사스러운 소리의 합창이었다. 이러는 동안 해가 이미 서산에 지고 있었다. 그 외팔이 요인이 수중의 검을 휘두르자 한 줄기 녹색 광채가 허공으로 치솟아 배회하다가 검집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등 뒤에서 깃발을 뽑아내 어 요인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가 괴소성을 지르자 허공의 깃발들이 어지럽게 흔들거렸다. 기에서 일진 음풍이 일어나더니 연운(煙雲)은 모두 사라졌다. 기가 가리키는 곳으로부터 한 가닥 채사(彩絲)가 뻗어나오더니 꽃밭을 향해 뻗어갔다. 갈수록 더욱 빨라져 스물네 개의 깃발이 흔들 리는 곳에서 수많은 가닥의 채사가 마치 봄누에에서 실을 뽑듯이 뻗어나와 경각지간에 광대한 천 막이 이루어져 꽃밭을 뒤덮었다. 천막은 마치 매미날개처럼 오색영롱했고 비단처럼 아름다왔다. 그 아래의 꽃밭을 투시해 보니 꽃과 금빛 잎새는 마치 만경금파(萬頃金波)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비릿한 바람이 불지 않고, 요인들의 괴이한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마치 서방 극락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그들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형검둔을 펼치며 허공에서 살펴보니 그 채사 (彩絲)에는 조금의 틈도 없었다. 기이하게 여기며 살펴보았더니 하늘을 덮은 천막은 그 외팔요인으로부터 이루어져 그가 서 있는 곳에는 반경 이 척 가량의 틈이 나 있었다. 외팔요인이 다시 장소성을 지르자 나머지 요인들은 모두 그 틈새로 모여들어 음풍을 타고 팔괘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모두들 자리를 잡자 외팔요인은 그 틈새로 몸을 날리며 내려가 바위 앞 약 십 장 높이까지 내려 갔고 여전히 한 손을 땅에 대고는 주문을 중얼거리고 손과 발을 휘저었다. 그러자 한 무리 연무(煙霧)가 일어나 그를 에워쌌고, 그는 여전히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손 을 휘젓자 세 개의 녹화(綠火)가 바위 위 세 개의 큰 동굴을 향해 날아갔고, 법술이 끝날 때까지 조금도 태만하지 않다가 몸을 위로 날렸다. 몸이 땅에서 위로 떠오르자 절벽 앞에서 광풍이 일어 나더니 바위 위 세 개의 동굴에서 세 명의 요인(妖人)이 나타났다. 그 중의 한 명은 머리가 바구니 모양이었고, 눈에서는 초록빛을 발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얼굴 을 뒤덮어 핏빛의 큰 입이 가리워져 있었고, 흉악스럽게 이빨이 드러나 있었다. 온몸을 연무(煙 霧)가 에워싸고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요인의 수뇌 녹포노조 같았다. 오른쪽 동굴의 요인은 조금 전에 보았던 요인과 형상과 장식이 비슷했다. 왼쪽 동굴의 요인은 홍의번승(紅衣番僧)으로 표범의 머리에 고리눈(豹頭環眼)을 가지고 있고, 너 구리 같은 코에 큰 입을 가지고 있었다. 금선은 그가 옛날 서장(西藏) 설산(雪山) 귀풍곡(鬼風谷)에서 보았던 요승 <서방야불(西方野佛)> 아각달(雅各達)임을 알아차렸다. 금선은 참지 못하고 소화상에게 그의 내력을 말하려고 하는데 소화상의 표정이 만류하는 듯하여 아래쪽만을 바라보았다. 금선은 아래를 바라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팔요인이 요법을 끝마치고 황급히 위로 올라가 녹포노조가 있던 동굴 앞에 나타났을 때 바윗 덩이 위의 수많은 작은 동굴에서 찍찍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더니 수많은 금색 꽃송이가 흩어 지듯이 무수한 금잠(金蠶)이 쏟아졌다. 길이는 일 촌 남짓 했고, 벌집 모양의 금잠이 화살보다 더 빨리 날아왔다. 녹포노조는 외팔요인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았으나 오색천막에서 이미 반쯤 벗어나 있었기 때 문에 매우 위험한 지경이었다. 그때 돌연 가늘고 긴 새발 같은 팔이 나와 허공을 찔렀다. 위쪽 스물 세 명의 요인들은 그때까지도 그 외팔요인의 생사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 수중의 기에서 뻗어나온 무수한 가닥의 채사가 오색천막에 나 있던 틈새를 막고 있었다. 외팔요인은 이미 자신이 위험에 처했단 것을 알고는 본래 매우 빨리 날았으나 그 틈새가 갑자기 채사에 의해 막혀 버렸다. 금선의 혜안에 외팔요인의 얼굴에 두려운 빛이 돌고 이빨을 갈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망연자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천막 한쪽의 일행들이 무엇인가를 눈짓으로 전하자 외팔요인은 길게 탄식하며 무겁게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동굴에서 날아나온 수천만 개의 금잠이 하늘의 별처럼 쏟아져 왔다. 천막 근처까지 날아와서는 마치 두려운 듯이 꽃밭 속으로 들어가 금빛 잎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외팔요인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자, 일부의 금잠들이 갑자기 날아와서 그를 에워싸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외팔요인은 녹포노조를 매우 두려워하는지 아직 완전히 제련되지 못한 독충들이 자 기를 물어뜯고 있는 데도 손으로 눈을 막고 있을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다만 땅바닥에 꿇어앉아 쉬지 않고 무서운 비명을 외칠 뿐이었다. "사부님, 살려주십시오." 순식간에 독충들의 몸은 온통 피로 얼룩졌고, 그는 뼈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허공의 요인들은 이러한 참상을 보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첫째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둘째는 녹포노 조가 너무나 잔악했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서방야불>만이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녹포노조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이 외팔요인을 대신해 은 정을 구하는 것 같았다. 녹포노조는 그제서야 얼굴에 험악한 웃음을 짓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석 이놈, 아직 완전히 제련되지 않은 금잠인 데도 얼마나 무서운지 분명히 기억해 두어라. 언 젠가 나를 배반한 너의 사형 신진자를 잡으면 그놈을 매일 금잠에게 물어뜯기게 하고 뼈가 보일 지경이 되면 다시 약을 먹여 회복시키고 이렇게 삼 년 동안 금잠에게 뜯기게 하여 뼈가 삭고 혼 백이 소멸되게 할 작정이다. 그전에 나를 화나게 하여 네 놈은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갔는데 오늘 조금 맛만 보아라. 너도 배신하면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이렇게 소리친 녹포노조가 손가락을 뻗으니 한 줄기 초록빛이 쏘아져 갔다. 금잠들은 영성이 있 는지 외팔요인을 떠나 꽃밭으로 날아갔다. 외팔요인은 고통을 참으면서 몸을 일으켰는데 이미 온몸이 물어뜯겨 혈인(血人)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솟구쳐 남쪽의 큰 동굴로 날아갔다. 다시 꽃밭의 금잠들을 보니 너무나도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귓가에는 금잠의 날개소리와 찍찍 하며 잎을 먹는 소리가 어우러져 들렸다. 꽃밭은 마치 황금파도와도 같았고, 수많은 취옥색 꽃이 흔들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순식간에 금잠들은 만마(萬馬)가 대평원을 질주하듯이 꽃밭을 떠나 허 공으로 날아갔다. 녹포노조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손으로 땅을 짚고 거꾸로 서서 주문을 외우고는 다시 바로 서서 몸을 돌렸다. 가늘고 긴 목 위에 바구니 모양의 커다란 머리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양손을 치켜들어 가늘고 긴 새발 같은 손으로 암벽위의 벌집같이 밀집되어 있는 작 은 동굴 안을 연이어서 가리켰다. 혈분(血盆) 같은 큰 입을 벌리더니 절벽 위로 한 줄기 녹연(綠 煙)을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작은 동굴 안에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채기(彩氣)가 활을 쏘듯이 섬전처럼 금잠의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많은 금잠들이 그 채기에 흡수되고 있었다. 두 줄기의 채기가 한 마리의 금잠을 흡수하니 금잠은 벗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괴이한 소리 를 낼 뿐이었다. 금잠들은 순식간에 채기에 의해 동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말았다. 이때 황금색 이 가득했던 꽃밭은 이미 그 독충들에 의해 금잠 잎사귀는 빛을 잃었고 취록색 꽃들만 이리저리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녹포녹조는 요법으로 금잠을 거두어들이고는 긴손을 양쪽의 큰 동굴을 향해 휘저었다. 오른쪽 동굴의 요인과 왼쪽 동굴의 아각달이 각기 네 명의 요인을 데리고 수중에 사람 크기만한 호로(葫 蘆)를 들고 걸어나왔다. 먼저 녹포노조에게 예를 올리고는 화전 위로 날아가 약 오 장 높이에서 각기 팔궤의 방위를 잡 고서 요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괴소를 지르면서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발은 위로 향하 자 호로도 뒤집어졌다. 손으로 호로를 감싸니 핏빛이 비치더니 붉은 빛줄기가 호로 속에서 뿜어 져 나왔다. 열 명의 요인이 허공에서 회전하면서 온 꽃밭을 두루두루 비추었다. 녹포노조가 괴소성을 내자 아각달과 여러 요인들은 요법을 멈추고 호로를 안고 동굴로 들어갔 다. 손을 쳐들자 당석이 마번(麻幡)을 쥐고 황급히 뛰어나와 위쪽의 요인들과 만나 각기 요법을 펼치며 기를 움직였다. 하늘을 쳐다보니 수많은 채사로 이루어진 천막이 점점 사라져가 결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러 요인들은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돌아 동굴로 들어갔다. 소화상, 금선 두 사람은 허공에서 몸을 숨기고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갑 자기 녹포노조가 긴 목을 내밀고 냄새를 맡더니 날카로운 괴소를 질렀다. 그리고는 입을 크게 벌 리니 녹색 불덩이가 허공을 가르며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왔다. 금선은 영문을 몰랐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았으나 소화상은 이미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녹 포노조의 신기(神氣)를 보고 상대가 될 수 없음을 느꼈다. 스승의 서첩에도 아직 시기가 되지 않 았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 좋을 성싶었다. 녹색 불덩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금 선에게 눈짓하여 무형검둔을 타고 달아났다. 소화상은 매우 세심하여 수십 장 날아간 뒤에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불덩이는 그들이 조금 전에 있던 곳으로 날아와서 섬전처럼 좌우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사 람의 종적을 찾아 그물을 치는 것 같았지만, 목표물은 이미 사라진 후라 추격할 수도 없었다. 녹포노조의 후각이 얼마나 신령스러운지 그들의 냄새를 맡고 녹화를 발출했던 것이다. 그들은 검둔에 의해 신형을 감추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약간은 방심하고 있 었 다. 그 녹화는 허공을 몇 바퀴 돌더니 사방으로 갑자기 폭발하여 거의 백여 장 넓이의 지역에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은 녹포노조의 무서움을 생생하게 목격했기에 은사의 서첩에 지시한 대로 내일 가서 일 을 처리하기로 했다. 곧 연무가 적은 계곡을 찾아내려가 내일의 일을 의논했다. 소화상이 금선에게 말했다. "그 요사스러운 깃대에서 발출하는 채사는 요인 자신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데, 아마도 어떤 독 충이나 뱀에서 추출한 것으로 독무(毒霧)나 악연(惡煙)을 연성하기 위한 요법인 것 같아. 그 수없 이 많은 금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 꽃밭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다니, 끔찍스럽구나. 꽃밭의 이상한 식물들도 비록 금엽취화로,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피비(血雨)를 먹고 자라니 분명히 없애야만 할 요물이 분명해. 오늘 정찰한 바에 의하면 음풍동은 그 우뚝 솟은 봉우리 아래에 있 는 것이 틀림없는데 그 절벽 위 세 개의 동굴 중 어느 것인지 단정할 수가 없구나. 사부님의 서 첩에도 독에는 독으로 공격하라는 말이 있으니 내 생각에는 내일 거기에 가서는 먼저 나 혼자 아 래로 내려가 문주(蚊蛛)가 있는 곳을 찾아낸 다음 함께 처리하도록 하자구. 제갈사형의 말에 의하 면 내일은 신진자가 올 것이라 하니 독에는 독으로 공격하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 야. 그때 우리는 몸을 숨기고 절대 먼저 공격해서는 안 돼. 신진자도 녹포노조의 적수가 되지 않 기 때문에 감히 먼저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야. 그가 여기에 온 목적은 요물 문주를 도망치게 하 고, 또 악충 금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 덮쳐서 없애 버리려는 것일 거야. 그는 전에 녹포노 조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곳의 지리에 밝을 터이지. 우리는 그의 뒤를 몰래 뒤따라가 그가 만약 성공하면 우리는 녹포노조를 놀라게 하여 그를 묶은 다음 문주를 죽이도록 하세나. 만약 그가 실 패한다 해도 우리는 이미 그들의 허실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일세. 신진자는 붙잡히거나 도망칠 테니 그렇게 되면 녹포노조도 의심하지 않고 우리들의 암산(暗算)에 대해서는 대비하지 않을 것 이니 그때 공격하도록 하세나." "우리 두 사람은 모두 녹포노조의 적수가 안 되니 그 요물만 처치하면 대공은 이미 성공한 것일 세. 그때의 진퇴는 사제 마음대로 하게나.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산으로 돌아가서 사부의 명을 기다리게. 비록 사부께서 주신 서첩이 두 통 있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나에게는 많은 마난(魔難)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그러나 모사(謀事)는 사람이 하지 만 성사(成事)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어. 적이 무서운 요마들이기는 하지만 나의 예상대로 될 것이 라 믿네. 만약 실수가 있다면 사제는 어제 내가 말한 대로 함부로 위험을 자초하지 말고 즉시 동 해로 돌아가게. 그렇지 않으면 사제까지도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될 걸세." 금선은 소화상이 며칠간 계속해서 자신이 없는 듯한 말을 하고 안색도 침울하자 어찌할 바를 몰 랐다. 한참 동안 소화상을 위로하고는 함께 정결한 동굴을 찾아다녔다. 막 앉아서 원공(元功)을 운용하여 내일 아침을 위해 힘을 비축하려는데 갑자기 일진 성풍(腥風)이 동굴 속으로 불어왔다. 소화상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바람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이 동굴은 출로가 따로 있기 때문에 나타난 요인과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급히 은형법을 이용하여 몸 을 숨기고 금선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눈짓했다. 두 사람이 막 신형을 숨기자 일진괴풍(一陣怪風)이 회오리치고 흙을 날리며 '쉬쉬!' 하는 소리를 내며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금선은 모래바람 가운데 검은 그림자가 동굴 안으로 들어와 한 바퀴 휘돌더니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금선이 막 추격하려 하자, 소화상이 그를 붙잡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선제, 언동에 조심해야 하네. 요인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과연 바람소리를 내며 아까의 그림자가 동굴 속으로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 그 그림자는 바람을 몰고 상하좌우의 사방으로 동굴을 휩쓸었다. 소화상은 미리 방비하 고 있었는지 금선을 데리고 괴풍 뒤를 따라 동굴 안을 구르고 뛰고 하여 발각되지 않으려고 했 다. 한동안 괴풍이 불어젖히더니 갑자기 바람이 사라지고 크고 깡말라 고목나무같이 생긴, 눈은 둘 이나 팔이 하나인 요인이 나타났다. 바로 단오날 천잠령에서 만났던 녹포노조의 제자 신진자였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고 큰소리로 말했다. "동굴 안의 도우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시오!" 몇 번이나 소리쳐도 대답이 없자 신진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처음에는 얼굴에 노기가 떠오르더니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는 참지 못하여 다시 소리쳤다. "도우께서 수련하고 계시는 이 동굴을 본인이 소란스럽게 할 생각은 없소이다. 그러나 급박한 일이 있어 동굴을 삼 일 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 겠소이다. 잠시 소란을 피운 점 용서하시기 바라오." 말을 마쳐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는 무릎을 굽히고 땅에 주저앉았다. 원래 신진자는 당석의 손에서 도망친 후 줄곧 녹포노조의 독수의 위협을 받아오다가 금잠이 완 성되기 전에 제거하여 목숨을 걸고라도 녹포노조와 싸우겠다고 결심하고 다른 곳에서 몇 가지 법 보를 빌어서 여기에 온 것이다. 이 동굴이 요법을 펼치기에 좋을 것 같아서 들어와서 보니 다른 사람의 흔적이 있는 데도 종적을 찾을 수가 없자 의심이 생겨 머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곳을 찾아보니 비록 많은 동굴이 있었지만 이곳만큼 적합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아 까 느낀 기미가 옛날 같은 무리였던 적들이 설치한 기관같지는 않았고, 다만 은거수련을 하는 사 람이 동정을 살피는 것으로 느꼈다. 만약 자기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안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던 차에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 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의 뜻을 말하면 해로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동굴로 들어 와서 요법을 펼쳐 동글 속 인적의 정체를 찾아보았던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기가 잘못 느낀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신진자의 후각은 매우 뛰어나 분명히 사람의 냄새를 맡았으나 찾을 수가 없자 요법을 거두고 다시 불러 찾았던 것이다. 아무리 불러도 찾을 수 없었지만 자기가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니라고 느꼈기에 그는 자기의 모습 을 그대로 드러냈다. 평소 같았으면 그는 이미 극악무도하게 악랄한 요법을 펼쳐 동굴 안의 사람 을 금제(禁制)하여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는 터이라 이렇 게 만만찮은 적과 원한을 맺어서 이로울 것이 없었으므로 참고 또 참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요법을 펼치기에 이보다 은밀하고 적합한 곳은 없었다. 또 이 동굴을 이용한다 고 해도 여기 있는 사람이 녹포노조의 일당만 아니라면 자기는 요법이보(妖法異寶)로 몸을 보호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자기가 요법을 펼치는데 다른 외인이 숨어서 몰래 관찰한다는 것은 결코 내키지 않았다. 한참을 주저하다 동굴 속에 있는 사람을 불러 조심하라고 주의하고는 요법을 펼치기로 결정했 다. 만약 그 사람이 은거수련하는 사람이어서 간섭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미 요법으로 동굴을 봉쇄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공격한다고 해도 그는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또 신진자는 성격이 매우 오만하여 녹포노조 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동해삼선(東海 三仙)의 은형검법(隱形劍法)과 금선의 두 자루 벽력검(霹靂劍)은 자신의 어떠한 요법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소화상, 금선 두 사람은 무심중에 그가 홍발노조의 문하에서 빌려온 오호혈두(五呼血 兜)를 파괴하여 음풍동 녹포노조의 손에 참사당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소화상과 금선은 신진자가 자기들을 찾지 못하는 것이 매우 재미있었다. 독으로써 독을 제어한 다(以毒攻毒)는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소화상은 몰래 신진자를 괴롭혔을 것이다. 뜻밖에도 신진 자는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서 칠면요번(七面妖幡)을 꺼내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일곱 줄 기 누른빛이 하나 하나 땅에 꽂혔다. 또 흑망두(黑網兜)를 꺼내어 칠면번의 끝에 걸고 주문을 외우고 일갈대성을 지르니 기와 망두가 돌연 땅에서 일어섰다. 뒤쪽 네 개의 기는 동굴과 같은 높이에, 앞쪽의 세 개는 동굴의 반쯤 되는 높이에 섰다. 또 망두를 세우니 마치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 그물을 친 형국 같았다. 망을 잘 펼치고 신진자는 일어서서 두 발을 흐트리고 옷이 벗겨 진 채로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주문을 외우며 기를 들고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경각지간에 깃대 아래에서 성풍(腥風)이 일 어났고 운무가 일어나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요인의 종적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약 세 시진 동안 계속하더니 또 괴소성이 들리며 한 점 녹색 불덩이가 동굴 밖으로 날아 갔다. 동굴 안을 뒤덮었던 운무도 사라졌으나 사람도 기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금선이 혜안을 이용하여 살펴보니 요인은 비록 없어졌지만 일곱개의 요법은 여전히 땅 위에 서 있었다. 기의 위에는 망두도 여전히 걸려 있어 요인이 부린 사술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백만산 음풍동까지는 적어도 삼사백 리나 되는 거리였다. 요인이 법보를 여기서 펼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두 사람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다가 금선이 동굴 밖을 보고는 급히 말했다. "사형, 날이 이미 밝았어요." 이 말에 소화상은 요인의 법술로 인해 자신들이 미처 날이 밝아진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을 알고 는 급히 금선을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날아갔다. 금선은 소화상이 매우 급히 날아가는 것을 보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 요인이 설치한 요번, 요망 이 있음을 잊어버렸다. 금선이 급히 양손을 휘저으니 벽력검이 붉은색과 자줏빛 두 줄기 검장으 로 변하여 자기와 소화상의 전신을 감싸고 번망 속에서 동굴 밖으로 날아나갔다. 귓가에 착착하 는 소리가 들렸으나 신경쓰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와 보니 과연 오월의 하늘이 이미 점점 밝아오 고 있었다. 금선은 허공을 날면서 소화상에게 말했다. "요인이 그렇게 공을 들여서 펼친 요법, 사술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소화상이 무슨 이야기인지 어리둥절해 하자 금선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원래 소화상은 안력이 금선만은 못했기 때문에 요인의 요번이 그대로 있는 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날이 밝았다는 소리를 듣고는 늦어서 일을 그르칠까 봐 급히 밖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만 약 금선이 아니었다면 요법의 암산에 걸려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화상이 웃으면서 금선에게 말했다. "처음에 나는 그 요인을 경시해 별로 뛰어난 재주가 없는 것으로 여겼네. 그런데 그 요인의 요 법이 그렇게 무서울 줄이야 미처 생각치 못했지. 시간이 아직 이르니 우리가 재빨리 날아간 다음 에 사제와 의논하려고 했었네. 그때 나는 날이 밝았다는 사제의 말을 듣고 급히 동굴 밖으로 나 왔는데 사제의 벽력검에 의해 요번을 파괴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네. 내 생각에 요인이 동굴 에 요법을 펼쳐놓은 것은 아마도 적을 유인하여 잡으려는 의도일 것일세. 그런데 사제의 벽력검 은 아미파의 지보이니 요인의 법보는 분명히 파괴되었을 것이네." 이렇게 말하는 중에 갑자기 금선이 요인을 보라고 말했다. 소화상은 금선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앞쪽의 구름 속에서 한 점 녹화가 반짝이며 앞으로 나아가 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이미 백만사의 주봉에 가까와졌는데 그 녹화가 갑자기 구름 속에서 유성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녹화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 보니 그곳은 바로 어제 보았던 꽃밭이었다. 하룻밤 사이 에 꽃밭의 금초(金草)는 다시 어제처럼 자라 아침햇살에 금빛 파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암벽 위 에서는 서서히 채연을 뿜어내고 있었고, 사방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신진자를 보니 이미 종적이 사라졌다.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암벽의 왼쪽 동굴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가까이 접근해서 보니 세 개의 동굴 안에는 각 한 사람씩의 요인이 앉아 있었다. 가운데 동굴의 요인은 바로 녹포노조였다. 두 눈을 감은 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꼭 입정한 것 같은 모습이었 다. 몸 주위에는 연무가 뒤엉켜 있었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소화상은 녹포노조가 입정하고 있는 지금이 문주를 제거하기에 꼭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 다. 서첩에는 문주가 음풍동 밑에 있다고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홀연 신진자가 왼쪽 동굴에서 나타났는데 수중에는 삼 척 가량의 번 당(幡幢)을 들고 암벽을 향해 휘저으니 큰 바람이 일어났다. 곧 '찍찍!'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 많은 금잠들이 날아와 그 번당 주위로 모여들었다. 신진자는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며 수중의 번당을 허공으로 던지니 십여 장 넓이의 운무가 생기 고 그 가운데에는 혈육(血肉)과 같이 붉은 것이 생겨나 섬전처럼 빨리 그가 왔던 방향으로 날아 갔다. 그 금잠들이 어찌 그냥 있겠는가? 찍찍 하는 소리를 내며 온 하늘을 뒤덮으며 그 운무를 향해 날아갔다. 금잠이 날아가고 얼마 있지 않아 왼쪽 동굴에서 괴소성이 들리더니 어제 보았던 외팔요인 당석 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들고 금잠이 전부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가운데 동굴 안 으로 들어갔으나 녹포노조는 아직 깨어나 있지 않아 급히 괴성을 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동굴 안에서 이삼십 명의 요인들이 뛰어나와 물었다. "사형,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히 부르셨습니까?" 당석이 소리쳤다. "큰일이 생겼다. 사부님의 금잠이 모두 날아가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으니 살아 남으려면 빨리 금잠을 추격해서 찾아와야 한다." 요인들은 이 말을 듣고 절벽 위를 쳐다보더니 약속이나 한 듯이모두 공중으로 치솟았다. 흙바람 이 날리고 운무가 뭉실거리고 일 진선풍이 일 듯 온 하늘에 가득한 녹화가 금잠을 추격했다. 신진자는 동굴 옆 암벽에 숨어서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 요인들이 금잠을 추격하기 위해 사라진 후 당석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에는 흉광을 발하며 가운데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고 동굴 입구까지 갔다가는 무엇이 의심스러운지 고개를 돌려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진자도 그를 뒤쫓아 가기 시작했다. 필사의 탈출 廻地妖氣 脫身悲失劍 濫天血雨 極惡鬪元凶 이때 동굴 속에서는 녹포노조와 <서방야불>이 입정한 채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금선은 이 기회를 틈타 두 놈의 악당을 처치하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그러나 어제 당석이 처참한 꼴을 당하는 걸 직접 목도한 소화상으로서는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 다. 틀림없이 마음 속에 한을 품었을 당석은 지금 모든 동문들을 향해 금잠을 쫓아가라고 명령하 고, 자신은 무슨 이유인지 홀로 남아 있지 않은가. 그는 금방 달려들어 갈 태세를 취하더니 흠칫 멈추어 섰다. 이들 요물들에게 사도의 정리가 남 아 있을 리는 없다. 악독한 비뚤린 심보만이 굽이굽이 서려 있으련만 쉬이 손을 못 쓰는 것은 상 대가 워낙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녹포노조가 따로 입정한 순간이라 해도 온몸에 연기와 안 개가 뭉게뭉게 휩싸고 있는 품이 뭔가 준비하고 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한편 신진자는 금잠을 꼬여내 멀리 보내고서도 도주하지 않고 있었다. 역시 이 요물은 문주까지 마저 훔쳐내려는 속셈인 모양이었다. 소화상은 스승이 서첩에서 암시한 글귀가 생각났다. <돌(石)을 만나면 쫓지 말고 독으로써 독을 공격하라.> 그는 신진자를 졸졸 따라가 문주의 행방을 알아내리라 마음먹었다. 소화상이 그러한 뜻을 금선 에게 알리려 하는데 당석이 어딘가로 휘적휘적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쥐도 새도 모르게 신 진자가 따라갔다. 뜻밖의 변화에 놀란 소화상은 금선에게 이야기할 사이도 없이 그들의 뒤를 쫓 았다. 신진자는 당석을 쫓고 소화상은 신진자를 쫓는 기이한 꼴이 되었다. 그들은 우뚝선 고봉(孤峰)을 날아 넘어갔다. 바로 그때 신진자가 앞서 가는 당석을 향해 일초를 쏘아냈다. 당석이 뒤를 홱 돌아다보았다. 그 는 신진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으며 뭔가를 잠시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가 손짓을 하더니 두 사람은 스르르 지상으로 낙하했다. 어느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자 당석이 입을 열었다. "금잠을 쫓아버린 게 당신인 걸 내 일찍 알았소. 우린 지금 동병상련인 입장이오. 나도 저 요물 한테 한쪽 팔을 뜯어먹혔고, 어제는 금잠한테 전신을 물리기까지 했다오. 당신을 사로잡아 함께 본때를 보여준다 합디다. 여러 사제들이 애써 말리지 않았다면 난 어제 이미 도망쳐 버렸을 것이 오. 더구나 업친 데 덮친 격이라고 이번엔 금잠을 몽땅 당신 때문에 날려버렸소. 그렇다고 새삼 당신을 원망하고 싶진 않소. 드디어 도주하는 방법밖에 없게 되었소." "나를 도와주면 되잖는가?" "흐응, 그런 소릴 할 줄 알았소. 하나 난 그렇게 담이 크질 못하다오. 먼저 실례하겠소. 구성암 (九星岩)쯤 도망가서 있을 테니 나중 그곳으로 오시오. 한데 그 문주를 숨겨놓은 데나 알려드리리 다. 아마 두 군데 은밀한 곳은 알겠고, 나머지 한 군데는 요물이 앉아 있는 돌 밑쪽이라오. 바로 풍혈(風穴)이란 곳인데 법보로 봉쇄돼 있어 들어갔다 도망쳐 나오지 못할는지 모르니 조심이나 하시오." "여보게 당석, 자네는 그렇게 사부한테 당하고도 복수할 생각은 않나? 사내대장부답지 않네그 려!" "누구는 복수하고 싶지 않겠소. 저 요물의 악랄한 심보와 행실을 생각하면 천갈래 만갈래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소. 사부라 부르지도 마시오!" "그런데 왜 복수를 안하려는 건가?" "그건 뻔히 잘 알면서 뭘 그러시오. 요물은 옥영봉서 당신한테 곤욕을 당한 뒤로부터 얼마나 조 심하는지 모른다오. 아니, 우리 제자들을 죄다 원수로 생각해 잠시도 감시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소. 더군다나 원신(元身)으로 수련을 오래한 끝에 현기(玄機)를 깨우쳐 종전보다 월등 고 강해지기까지 했다는구려. 각파의 최고수급 검선의 비검으로도 그를 상하게 하기 어려우리다." "뭐야, 그가 현기를 깊이 깨우쳤다는 건가? 그건 듣던 중 처음인걸. 난리났군." "그러나 약점은 있소. 저 악랄한 요물이 사문공(師文恭)을 해치고 그의 몸뚱이를 빌어 다시 온전 하게 되돌아갔지만 사문공이 천호의 백미침에 맞은 걸 깜빡 잊었다는 점이오. 그때 사문공은 백 미침에 살아날 수 없는 걸 알자 현공(玄功)을 운용해 두 개의 백미침을 두 다리 속으로 밀어넣은 모양이오. 지금 저 사부 요물은 하루에 한 번쯤 백미침의 통증에 죽을 둥 살 둥 시달리고 있소." "하루에 한 번이라니, 그럼 언제 그 통증이 발작하는가?" "매일 새벽 여섯시에서 열시까지 발작하는 모양이오. 그 순간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모양인지 그때만 되면 혈도를 봉쇄하고 진화(眞火)를 운용해 침을 서서히 불로 지지고 있다오. 흡성구가 없 으니 그 방법밖에 더 있겠소? 그러자니 진화에 자신의 원신까지 탈까 봐 그때는 몸체에서 빠져나 와 어딘가에 은밀히 숨어 있지요. 그 짓을 자그만치 백팔십 일 해야 백미침이 완전히 연소해 버 린다 합디다." "그놈의 영감탱이 고생은 직사하게 하겠구만." "당신이 그를 골탕먹인 이후로 요물은 얼마나 소심해졌는지 모르오. 입정할 때는 항상 법술로 전신을 보호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원신은 어디 은벽한 곳에 숨어 문인의 암산에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오. 그리고 <서방야불> 아각달이란 놈도 웬지 그 시간만 되면 괴증상이 발작하지요. 그도 역시 사문공의 팔을 붙여 병신을 면했는데, 팔에 백미침은 없어도 사문공이 무슨 수작을 써놓았 는지 시간만 되면 발작을 해서 똑같이 입정해야 하는가 봅디다. 한데 저들이 입정 때 방비를 약 간만 소홀히 하면 내가 수를 쓰련만, 그런 틈을 주질 않는구려. 지금 저들은 마치 죽은 것처럼 움 직이지 않고 있으나 건드리면 큰코 다칠 거요. 다만 문주를 훔쳐내기에는 지금이 좋은 기회지요." "그 풍혈이 요물의 좌대 밑에 있다면서 어떻게 문주를 꺼내온단 말인가?" "풍혈은 물론 좌대 밑에 있지만 어미금잠이 숨겨져 있는 동혈과는 서로 연결돼 있답니다. 그 동 혈은 요물 뒤에 있는 칠성대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금잠은 어떻게 해서 몽땅 유인해 내셨소?" 신진자가 비장한 목소리로 낮게 응답했다. "말을 하자면 기네. 내 이번에 온 것은 목숨을 걸고 한번 한바탕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해 볼 각오일세. 어제 자네가 고통받는 것도 다 보았지. 자네가 결국 내 신세가 되어 의기투합할 줄은 미처 몰랐지만 말이야. 그 악랄한 벌레는 내 쉽게 일망타진해 버렸네. 부탁이네만 내 일이 성공토 록 길을 좀 안내해 주게나. 대공이 이뤄지면 그 덕은 절대 잊지 않겠네." 당석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갑자기 고개를 들어 먼 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핼쓱히 변했다. "큰일났소. 저 악충(惡蟲)들이 죽지 않고 돌아오고 있습니다." "뭐야? 금잠들이 안 죽었다고? 이런 젠장! 홍발노조의 법보가 왜 효력이 없을까? 이걸 어쩌면 좋노!" 소화상은 그들의 말을 듣자 즉시 하늘을 살펴보았다. 멀리 구름 속에서 황색빛과 녹색 불빛이 번뜩이는 게 보였다. 소화상이 놀라 구름께를 지켜보는데 금선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소화 상이 쳐다보자 금선은 턱으로 신진자들이 있던 곳을 가리켰다. 소화상이 다시 눈을 돌렸을 때는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갔지?" "저게 신진자 아니오?" 신진자는 동굴 쪽을 향해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원래 신진자는 홍발노조한테 붙들려 화혈신도를 돌려주고 보니 더욱 녹포노조의 적수가 되질 못 했다. 그러나 그는 홍발노조 문하의 요개강(姚開江)과 꺽다리 홍장표(洪長豹)와는 아주 극진한 사 이였다. 화혈신도도 홍장표가 슬쩍 훔쳐다 빌려주었던 것이다. 이제 녹포노조와 목숨을 걸고 싸워 보고 싶다 한들 홍장표를 통해 홍발노조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신진자의 하소연을 들은 꺽다리 홍장표는 자기의 스승을 만나고 나와 이렇게 알려주었다. "홍발노조께선 아무 이유없이 다른 사람과 싸우고 또 원한을 맺고 싶지가 않다시더군. 화혈신도 로 해서 너무 많은 원망을 들은 터라 직접 하산해 도와줄 수 없다는 거야. 그러나 그분이 아끼시 는 천마취독번(天魔聚毒幡)과 오음호혈두(五淫呼血兜)를 특별히 빌려주실 테니 갖다 쓰라더군. 이 두 개의 법보는 정, 사 각파의 비검을 격파하는 데 쓰는 거라네. 그중에도 오음호혈도는 금잠고의 극성이라 사부가 애지중지하는 우리 진산의 보물일세. 보통으론 절대 빌려주는 물건이 아닌데 제 자의 절친한 친구라 해서 특별히 빌려주니 조심해서 쓰라하시더군. 그리고 사부만이 알고 계시는 잠형술법을 가르쳐 주며 두 법보를 숨겨두는 방법을 교시해 주시더군. 일이 여의치 않으면 이 술 법대로 법보를 은밀한 곳에 숨겨놓게나. 사부외에는 아무리 도력이 고강한 사람이라도 법보를 찾 아갈 수 없을 것일세." 신진자는 두 법보의 유용함과 무서움을 담박에 알아보고 더 이상 홍발노조한테 조르지 않고 법 보를 받아 그곳을 떠나왔다. 그는 어제 백만산 음풍동 상공에 도착해 사방을 살펴보았다. 녹포노 조가 바람소리만 듣고도 이상함을 알아채는 귀신이라, 음화(陰火)를 먼저 발출하지 않으면 안 되 는 입장이었다. 한데 다행인 것은 홍발노조가 가르쳐 준 잠형수법이 있어 발견될 염려는 없었다. 다만 홍장표의 당부대로 은벽한 곳을 찾아 술법을 펼쳐놓는 게 만사 튼튼히 하는 일인 것이었다. 한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소화상과 금선이 은신하고 있는 동굴로 들어왔던 것이다. 신진자 는 동굴에 누군가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워낙 복수심에 불타 있는 중이다. 그저 깊은 산골에 은거 해 수련하는 다른 문파의 인물이려니 치부해 버렸다. 자신은 또 무서운 법보를 갖고 있는 터라 누구라도 걱정할 것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금선의 혜안(慧眼)은 속일 수 없어 그의 행동은 소화상 등에게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더욱이 금선이 지닌 벽력검은 자영검만은 못하다 해도 옛날 장미진인이 극악한 마도를 제거하기 위해 제련한 진보인데, 다년간 수련으로 백사(百邪)가 불침하는 명검이요, 묘하게도 오음도에게는 희한한 극성이어서 동굴을 나올 때 슬쩍 스친 것만으로 홍발노조의 진보는 그만 파괴되고 말았 다. 그러한 사정을 신진자가 알 턱이 없었다. 녹포노조가 입정해 있을 때 요법으로 금잠을 몽땅 유인해 내고 또 몰래 문주를 훔쳐내서는 아까 의 동굴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그들 수많은 동문사제들은 당석 한 사람만 그와 대적할 수 있을 뿐 나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황차 그는 두 개의 신비한 법보까지 갖고 있지 않은가! 말로 설득해 순종하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한꺼번에 제거해 버리면 된다. 비록 녹포노조는 아직 제압해 죽이지 못했다 해도 이처럼 그의 우익을 모조리 제거해 버리면 일단은 대성공인 것이다. 그런데 마침맞게 당석이 녹포노조를 배반하는 참이요, 말 몇 마디면 쉽사리 설득이 될 듯싶었다. 그런 순간 없어졌으리라 믿었던 금잠이 되돌아 온 것이다. 금빛이 번쩍이는 금잠이 되돌아 온 걸 보면 오음도는 누군가에 의해 파괴된 게 분명했다. 신진자는 이를 바드득 갈며 우뢰같이 치솟는 분노를 참았다. 지금은 시간이 없다. 조금 있으면 동문들이 죄다 되돌아 올 것이고 녹포노조가 깨어남과 동시 금잠이 동굴로 들어가 버리면 다시는 동굴에 스며들 방도가 없어 문주를 앗을 기회는 영영 사그라지고 말 것이다. 당석이 외쳤다. "신진자, 잠시 피하시오. 일일랑은 신중히 해야 합니다. 나중에 다시 도모하도록 하오!" "기회는 다시 없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호랑이를 잡을 수 있겠나. 자, 건곤일척의 승부다!" 그는 홱 몸을 날려 동굴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당석은 같이 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징글맞게 한 번 웃더니 반대편 벼랑 쪽으로 날아갔다. 소화상과 금선은 짝을 지어 신진자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마악 몸을 솟구쳤을 때 처절한 외침 소리가 등쪽에서 났다. 금선이 뒤돌아보니 두 개의 초록빛이 고봉의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고 있 었다. 녹색 중 한 가닥은 당석이겠으나 또 하나는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금선은 의아한 생각이 들 었다. 소화상의 무형검은 신속하게 날아 신진자의 뒤를 바짝 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신진자는 두 사 람이 쫓아오고 있는 것을 추호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급히 동굴 속으로 날아들었다. 연무(煙霧)가 무럭무럭 휩싸고 있는 녹포노조를 보자 신진자는 이를 바드득 갈며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그러더니 총총히 연무를 돌아서 칠성동굴로 쏙 들어가 버렸다. 소화상과 금선도 부리나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발 아래쪽은 한없이 침침하고 비린내가 확 비윗장 사납게 풍겨왔다. 그들은 앞을 알 수 없는 호랑이굴에 들어온 처지라 뭉게뭉게 굴러오는 녹색불빛을 잽싸게 피하며 살살 앞으로 나아갔다. 둘은 어둠 속에서 여러 굽이를 뱅글뱅글 돌았 다. 그러자 꽤나 넓은 지하도가 나타났다. 갑자기 비린내가 코를 진동하며 가이 없는 벼랑이 앞에 나타났다. 깊은 벼랑 입구에는 무엇으로 짰는지 알 수 없는 요상한 그물이 쳐져 있었다. 그물은 채색 안개에 휩싸여 있었는데, 그 중간에 서 홍록색 불빛이 번뜩번뜩 계속해서 뿜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요물 문주가 발하는 광채 였다. 네 개의 긴 손과 배 아래에 난 무수한 작은 발이 그물을 꼬옥 부둥키고 있었고 마치 금방 이라도 그물을 찢고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이때 신진자가 서서히 그물 쪽으로 다가왔다. 불현듯 나타난 신진자는 어느 새 한바탕 격전을 치른 듯 의복이 깡그리 찢겨져 없어지고 알몸뚱이였다. 그는 동굴 입구 삼사 장 거리에 멈춰서서 뭐라 주문을 외웠다. 문주는 산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알자 흉악한 입을 쩍쩍 벌리고 징글맞은 이빨들을 드러내며 괴 상한 울음을 토해냈다. 목소리가 째지도록 날카롭고 귀를 거스르는 것이 이 세상의 울음소리 같 지 않았다. 금선은 이런 추악한 모습은 처음보는 터라 자신도 모르게 자지러질 것 같았다. 소화상은 저런 독사의 침 같은 것으로 만든 그물은 자칫 비검을 더럽히는 것을 알아 감히 휘두를 생각을 못하고 신진자의 하는 모습만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가 요망한 그물을 처치하면 암중에 손을 써서 두 요 물을 한꺼번에 처치하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신진자는 주문을 다 외우자 몸을 일으키더니 손가락으로 문주를 향해 일격을 가하듯 가리켰다. 손가락에서 한 가닥 녹색화염이 뿜어나와 그물을 태워갔다. 문주는 더욱 처절히 부르짖으며 울어 댔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을 쩍 벌리고 불을 토해냈다. 요물한테서 나온 불꽃은 신진자의 녹색화 염과 중도에서 부딪쳐 불꽃을 사방에 튕겼다. 두 불꽃은 서로 밀고 당기며 한참을 지탱했다. 그렇게 거의 반 시진이나 싸웠으나 두 화염은 막 상막하로 승부를 내지 못했다. 신진자는 온힘을 다하여 녹색화염을 쏟아내느라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땀이 얼굴 전체에 범벅이 되도록 힘을 내었지만 문주의 입에서 쏘아내는 불꽃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소화상은 잠형술법으로 몸을 숨기고 있어 신진자 등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으나 시간이 자꾸 흐 르자 마음이 다급했다. 어떠한 위험이 닥칠지, 녹포노조의 음험한 흉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선은 역시 어린 마음에 재미를 즐기는 소년이다. 두려움보다 구경이 재미났다. 그가 돌연 소화상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사형, 뭘 기다리는 거요? 빨리 손을 쓰지 않고 말이오." 이 말에 소화상은 불현듯 <왜수> 주매의 천둔보경이 생각났다. 왜 그 거울을 지금껏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소화상은 급히 천둔경을 끄집어냈다. 신진자는 백망중에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자 화다닥 놀라고 말았다. '아차! 녹포노조의 꾀에 빠져들었구나!' 그는 마음이 산란해져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어겼다. 길게 한 숨을 푹 쉬더니 녹색화염을 휘익 거두어들이고 혓바닥 끝을 자근 깨물어 피를 내어서는 후욱 뿜어냈다. 입에서 뿜어나는 피는 누 런 연기로 변하여 그의 전신을 에워쌌다. 신진자는 몸을 날려 앞 쪽의 그물을 손으로 부욱 찢어 갔다. 이와 동시에 소화상은 천둔보경을 금선한테 넘겨주고 조심하라 당부한 뒤 무형검둔(無形劍遁)에 서 빠져나와 검광을 후려칠 준비는 끝났다. 두 사람의 행동이 동시에 일어났다. 신진자는 그물을 찢으려 덤비고 금선은 천둔보경으로 오색금빛을 사방에 쏘아냈다. 무지개 같은 금빛이 비추자 동 굴에 가득했던 연무가 씻은 듯 사라지고 화염도 눈녹듯 없어졌다. 요물 문주는 오색금빛을 받자 마자 그물에 납작 엎드려 두 눈을 감은 채 꼼짝달짝하지 않았다. 아마도 오색금빛이 이 요물한테는 마침 크나큰 극성이었던 것이다. 신진자는 사람의 말소리를 듣자 함정에 빠진 줄 알고, 이젠 어차피 한번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고 마음을 다졌었다. 그동안은 녹포노조의 요법이 워낙 고강한 데다, 펼치고 거동이 능수능란한 그의 수법을 두려워해 녹색화염으로 그물을 태우려 했으나 이제는 앞뒤 따질 여가가 없다고 단정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번에 그물을 찢어 팽개치고 문주를 제압해서는 이곳을 빠져나가 볼 생 각이었다. 한데 홀연 금광이 번뜩이더니 소화상이 나타나고 오색금빛이 사방을 비추는 게 아닌가? 저 소화 상은 바로 천잠령에서 문주를 펼칠 때 만났던 소년으로 나이는 턱없이 어리나 검술만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 고강했다. 더욱 젊은 동자가 들고 있는 거울은 한번 비추기만 해도 동굴에 가득했던 연무와 불꽃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보통 놈들이 아니요, 또 자신에게 좋은 녀석도 아닌 성싶었다. 마음이 크게 뛰는 중에 신진자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지금이 바로 문주를 탈취할 절호의 기회 였던 것이다. 생각을 굳힌 순간, 신진자는 그물을 거의 반이나 뜯어내고 있었다. 문주는 죽은 듯 꼼짝하지 않 았다. 기분이 좋은 신진자는 덥석 문주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발밑에서 귀신 울음소리 가 들리고 벽록색 불빛이 솟아올라 왔다. '아이쿠, 적의 암산에 걸렸구나!' 신진자는 더 이상 문주를 돌아보지 못하고 몸을 빼기 위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벽록색 불꽃이 솟아올라 그의 몸을 에워싸는 동시 발 아래가 허전해지고 지하 로 끌리듯 빨려들어 갔다. 뻥 뚤린 구멍 속에는 무슨 큰 흡인력이라도 있는 양 그를 빨아들였다. 신진자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 한 채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때 소화상은 줄곧 신진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그물을 처치하고 문주를 거둬들이면 그 찰 나에 비검을 날려 두 동강이를 낼 생각이었다. 한데 홀연 이상한 소리가 지하에서 들리더니 불꽃 이 솟아오르며 신진자를 잡아 끌어들여 가는 것이었다. '이거, 안 좋구나! 빨리 피해야겠다.' 그가 금선을 불러 주의를 주려는데 눈앞에 사람 팔뚝 같은 게 대여섯 개 휙휙 어른거렸다. 마치 지렁이같이 꿈틀거렸다. 그것들은 꿈틀거리며 흐물흐물 춤추듯 다가왔다. 소화상은 몸을 날려 신 검합일할 태세를 취했다. 하나 웬일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고 당황하는 사이 다섯 가닥 지렁이 같 은 것이 그의 몸을 꽁꽁 동여왔다. 소화상은 너무 놀란 끝에 호통을 치며 검광을 뿜어내 적을 맞으려 했다. 그러나 한 무리 녹색 화염이 훅 끼쳐오며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비검은 효용을 잃고 그의 몸은 뱀과 같은 물건에 꽁 꽁 묶인 듯 조여버렸다. 이제 비검은 훼손되고 그 자신은 적에게 붙들리고 만 것이었다. 소화상이 큰소리로 외쳤다. "선사제, 난 이미 붙들리고 말았어! 어제 말한 대로 빨리 동해로 도망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빛 무지개가 동굴을 비췄다. 소화상은 땅굴 속에 쏘옥 나와 있는 봉 두난발한 대갈통을 알아볼 수 있었다. 큼지막한 대갈통은 비쩍 마르고 유별나게 큰 팔을 흐느적 거리며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녹포노조의 흉악한 몰골이었다. 소화상을 뱀처럼 조여온 것 은 다름아닌 그의 큰 손이었다. 금선의 천둔보경이 그의 얼굴에 금빛 무지개를 뿌리자 녹포노조 는 갑자기 눈을 감고 소화상을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소화상은 있는 힘껏 용을 쓰며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 징글맞게 큰 손도 거울의 빛이 무서운 듯 스르르 뒤로 물러났다. 소화상은 녹포노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어도 그동안 워낙 숨이 막히게 조여 있었던지 쿨룩쿨룩 기침을 해댔다. 금선이 번개처럼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지하에서는 다시 귀신의 곡소리가 발동했 다. 그동안 화염과 연무는 지하 동굴이 함몰할 때 문주와 함께 저 밑바닥으로 사라졌었다. 지금은 지상에 있는 물건이 깡그리 사라지고 적막만이 감돌았는데 갑자기 귀신 울음소리와 함께 사방의 벽까지 들썩들썩 움직이는 게 이젠 남아 있는 모든 것마저 갱 속으로 무너져 내릴 것 같 았다. 소화상이 소리쳤다. "선사제, 빨리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게. 나의 비검은 훼손돼서 공중을 날 수가 없다구!" 금선은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소화상을 부축해 공중으로 날았다. 그들이 날자마자 과연 모 든 것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들 발밑은 불꽃이 파도처럼 용솟음쳐 들끓고 있었다. 희미한 불 빛 속에 녹포노조의 모습이 은은히 보였다. 그는 입을 쩍 벌리고 괴물마냥 으르렁거렸다. 눈에서 는 흉측한 광망이 폭사돼 나왔고, 유달리 긴 팔은 마치 키를 까부르듯 휘둘러 새가 먹이를 채어 금방이라도 으적으적 먹을 듯한 인상을 주었다. 금선은 감히 태만할 수 없어 벽력쌍검으로 전신을 보호하며 손의 보경으로는 동굴 속을 비췄다. 구멍 속의 천 가지 만 가지 불꽃은 거울의 금빛에 쏘이자마자 금세 소멸됐다. 그러나 요법은 대 단히 매서워서 소멸되는 즉시 다시 피어났다. 아래쪽 오색안개는 천둔경에 의해 소멸되었지만 사 방에 어린 요화(妖火)는 점점 그들을 에워쌌다. 이제 어지러워진 동굴 속은 방위가 어수선히 바뀌어 어디가 출구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금만 지체했다가는 다시 무서운 요법에 휘말려 변이 날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을 에워싼 불꽃 과 연무는 갈수록 짙어지긴 했어도 그들 삼 장 이상은 접근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한 소화상이 금선에게 속삭였다. "불꽃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벽력검의 위력 때문일세. 자넨 컴컴한 저쪽까지 볼 수 있 는 혜안을 갖고 있지 않나. 자, 도망갈 길을 찾아보게. 죽음 속에서 삶을 찾아보세나." 사실 금선은 녹포노조의 일거일동만 주시하느라고 도망갈 길을 찾는 것은 깜빡 잊고 있었다. 자 신들이 허점을 보이는 사이 틈을 타 공격해 올 것을 너무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화상의 깨 우침을 듣자 그는 정신이 들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불꽃과 연무가 짙은 중에도 왼쪽 굽은 길이 올 때의 길과 같았다. 나머지 길은 모두 무너져 내렸고 불꽃의 바다요, 연무의 숲으로 길이란 일 절 없었다. 금선은 소화상을 옆에 끼고 신검합일이 돼 길을 뚫고 나갔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는 천둔보경으로 무지개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연무가 걷히며 길이 환히 보였다. 그들이 나가려는 순간 뒤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흡사 아이가 울며 쫓아오는 것 같았다. 소화상이 급히 소리쳤다. "빨리 가자!" 금선은 진기를 운용해 대갈일성을 터뜨리며 밖으로 쏘아나갔다. 날아나가는 순간 산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굉음이 뒤통수를 쳤다. 둘은 돌아갈 생각도 못하고 허둥대며 밖으로 나갔다. 그 들이 동굴입구에 닿았을 때 금선은 동굴 밖의 햇빛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음이 기뻐 둥둥대며 동굴을 나서려는데 홀연 수십 개의 누런 그림자가 양켠 벽쪽에서 우수수 쏟아졌다. 금선은 깜짝 놀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검을 휘둘러 이들을 막아냈다. 한 가닥 검광이 휩쓸고 지 나가자 수십 개의 황색불꽃은 치치칙하며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별다른 동정은 없었다. 소화상이 묻자 금선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약간 마음을 놓은 금선이 동굴을 나서려는데 이번엔 수십 개의 채색 실이 너울너울 동굴입구를 수놓고 있었다. 급히 거울을 비추자 그것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서둘러 동굴 밖으로 나와 보니 하늘에는 베틀의 북처럼 스물네 명 요인(妖人)이 온통 너울대서 도망칠 길이 없이 포위하고 있었 다.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당석이 아니라 홍의를 걸친 라마승 아각달이었다. 요인들은 모두가 요사스런 깃발을 들고 있었고, 깃발은 하늘에 펄펄 날려 총총한 천막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나오 는 것을 보자 스물네 개의 깃발은 붉은 태양의 빛을 받아 오색 빛을 발하며 선명히 너풀댔다. 요 법을 발동하여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덮어씌워 오는 것이었다. 둘은 이 요사스런 포위망이 극히 위험함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전날 생문(生門) 속에 틈 이 보이던 그 공간밖에는 도망칠 기회를 움켜쥘 방법이 없음을 직감했다. 금선은 꼼꼼히 사방을 살펴보았다. 과연 서쪽 방면에 막히지 않은 틈이 하나 보였다. 다만 거리가 약간 멀었다. 검광을 발동해 날아오르려는 순간 뒤쪽에서 괴이한 소리가 핍진해 왔 다. 녹포노조가 몇몇 수하 요인을 거느리고 동굴 속에서 쏘아나오고 있었다. 녹색 불꽃과 황색 연 무가 용솟음치듯 바람을 타고 회오리쳤다. 이십 장 거리쯤 떨어진 녹포노조는 긴 팔을 쓰윽 뻗어 수천 개의 녹색 불빛을 쏘아냈다. 이와 동시 천막처럼 하늘을 수놓은 오색 무늬가 이 장 가까이까지 덮쳐왔다. 금선은 천둔경을 상하좌우로 어지럽게 비췄다. 뒤쪽의 녹색 불꽃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머리 위로 덮쳐오는 오색 불빛은 거울의 금빛에 맞고도 아무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여전히 두 사람을 핍박해 왔다. 천막 같은 불꽃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 금방이라도 짓눌러 버릴 것 같았다. 그런 사 이 또 안개와 불꽃에 휩싸인 녹포노조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머지 한 손은 어지럽게 휘 둘러 대며 그들을 쥐어잡으려 했다. 사방의 요인(妖人)들도 때맞춰 포위망을 좁혔다. 두 사람은 천둔경으로 온몸을 가까스로 방어하며 전후좌우 위 아래를 번개같이 살폈다. 아차 틈 을 보이는 날에는 목숨이 위태로울 판이었다. 요인의 손이 한번 홰까닥 하는 찰나엔 요행은 없을 것이다. 바로 이때 녹포노조의 괴기한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의 요인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녹포노조는 세 가닥 회색, 황색 불빛을 쏘아내 두 사람을 한 데 모으려 했다. 하늘의 그물도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소화상은 이제 그물을 찢고 솟아나는 길밖에 없다고 직감했다. 그가 급히 소리쳤다. "선사제, 빨리 달아나자!" 그는 입속으로 호신주술을 중얼중얼 주워섬겼다. 바로 이때다 하는 순간, 금선은 대갈일성을 터 뜨리며 홍색, 자색 검광을 흩뿌리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원래 금선은 두 개의 비검이 그들에 닿 으면 훼손될까 봐 감히 휘두르지 못했었다. 그러나 존망이 경각에 달린 것을 보자 앞뒤 가릴 바 가 없어 진기를 단전에 모음과 동시 천둥같은 호통과 함께 하늘로 솟아오른 것이다. 검광이 그물에 닿자 '치지지지!' 하여 듣기 고약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 검광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고, 천라지망은 벽력검에 의해 한 장 넓이도 더 되게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찢겨진 그물은 조각난 비단처럼 사방으로 펄럭거렸다. 녹포노조는 이제 이 두 소년이 독 속의 쥐이겠거니 여기고 있었다. 조그만한 녀석들이 수많은 금잠을 죽인 걸 생각하면 괘씸했으나 선골로 생긴 이쁜 것들을 배불리 먹을 생각을 하면 외려 즐 겁기까지 했다. 더구나 부록으로 보물 거울도 새로 얻게 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 보송보송 어린 것들이 갑자기 천라지망을 뚫고 하늘로 내빼버리다니! 녹포노조는 뜻밖의 변화에 깜짝 놀라며 분통이 터져 길길이 날뛰었다. "어린 것들이 방자하구나! 내 끝까지 쫓아 너희들의 간을 질겅질겅 씹어주겠어!" 녹포노조는 우뢰처럼 호통을 내지르며 수하 요인들을 거느리고 하늘을 가르며 추격했다. 그들은 누런 연기와 요사스런 안개 속에서 녹색 불꽃을 흩뿌리며 온 하늘을 덮고 두 소년을 쫓았다. 소화상과 금선은 요물들이 바람처럼 쫓아오는 것을 보자 검광에 속도를 가해 재빨리 도주했다. 소화상은 비검이 훼손돼 은형술법을 펼치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벽력검은 비록 신속하긴 했으 나 구름과 하늘가에 홍색의 빛을 그리고 있어 적이 쫓아오기에 좋은 표적이 되고 있었다. 녹포노조는 원래가 흉포하고 악랄한 위인이라, 금잠을 잃은 뒤에 수모까지 당했으니 어지간해서 포기할 리가 없다. 그는 죽을 둥 살 둥 둘을 추격해 왔다. 그들은 이미 어제 갔던 동굴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벌써 수백 리를 날아온 것이다. 이때쯤 되자 다른 요인들은 멀리 뒤로 처지고 오로지 녹포노조만이 신속히 그들을 쫓고 있었다. 그의 속도는 오히려 금선의 검광보다 빨라 조금만 더 있으면 잡힐 것만 같았다. 쫓고 쫓기고 사 이가 좁아지자 녹포노조는 괴성을 연신 터뜨리며 긴 팔을 어지러이 휘저어댔다. 금방이라도 천만 위급한 순간이 닥칠 판이었다. 바로 이때 홀연 아래쪽에서 한 조각 붉은 구름이 소화상 등을 스쳐 뒤쪽으로 날아갔다. 불그스 레한 무엇이 노을에 비쳐서 무엇인가 미쳐 생각도 하기 전에 지나가는 순간 비린내가 휘익 두 사 람의 코를 찔렀다. 소화상과 금선이 검광을 재촉해 다시 백여 리를 날아가자 뒤쪽에서 들려오던 괴성과 바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소화상은 기괴한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금방 덮쳐올 것 같던 녹포노조의 모습은 간 곳 없고 저 멀리 하늘 속에서 붉은 노을이 녹색 불과 누런 연기를 에워싸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한 데 어지럽게 어울리고 있었는데 비치는 불빛과 흐뜨러지는 안개, 솟아오르는 연기 등이 신기 루마냥 아름다왔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천변만화했다. 아마도 녹포 요물이 무서운 적을 만난 모양 이었다. 워낙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어 두 사람을 스쳐갈 때 잘 살피지는 못했으나 붉은 노을같이 현란한 것과 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사악한 문파의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그가 어째서 두 사람을 도와주는지 그것만은 이해가 쉽사리 가지 않았다. 금선은 호기심이 강해 되돌아가서 동정을 살피고 싶었다. "사형, 우리 되돌아가서 어찌 돌아가나 구경이나 합시다." "안 돼, 그건 너무 위험해!" 소화상은 비검을 훼손당해 마음이 살처럼 심란했다. 가슴이 아플 뿐더러 앞일이 걱정이어서 빨 리 은벽한 곳을 찾아 스승의 두 번째 서찰을 뜯어보고 싶은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그리고 저 붉 은 안개는 지금 그들을 도와주고 있지만 꼭 좋은 사람이라 장담할 수도 없고 그가 녹포노조를 감 당해내지 못한다면 의외의 변이 생길 것이다. 그는 즉시 금선을 재촉해 운남성과 귀주성 경계까지 날아갔다. 그곳은 절연령(絶緣嶺)으로 이제 쫓아오는 요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은벽한 곳을 찾아 스승의 서첩을 뜯어보았다. 서첩에 의하면 오늘의 경과는 예상과 몹시 어긋난 것이었다. 그것은 죄다 소화상 등의 느슨한 행실 탓이지만 또한 운명인지도 알 수 없었다. 원래 소화상은 삼겁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근본 행실이 심후하여 이를 꼭 피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우선 그는 백만산 음풍동에 도착해 스승의 지시대로 때를 맞아 행동했어야 했다. 헌데 예상치도 않게 정탐을 나갔고, 그 때문인지 동굴에서 신진자를 만나게 되었으며 금선 은 무의식중에 신진자의 오음도를 훼손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그 오음도는 다음날 신진자가 수백만 금잠을 유인해 일망타진 하는데 절대 필요한 법보였다. 이 법보를 훼손하지 않고 녹포노조가 금잠을 구하기 위해 동굴로 쫓아왔을 때 녹포노조의 밀실을 습 격했더라면 쉽게 대공을 이뤘을 것이었다. 금잠고(金蠶蠱)는 녹포노조가 정혈(精血)로 키우고 요법으로 수련시켜 아직 완전히 연성되진 않 았어도 주인과는 호흡을 같이 하고 있었다. 따라서 금잠이 날아나갔을 때 녹포노조가 모를 리 없 고 즉각 쫓아나오게 돼 있었다. 그러므로 이때를 틈타 소화상과 금선이 동굴에 스며들었으면 문 주를 쉬이 찾아냈을 터였고, 천둔경으로 봉쇄를 뚫고 비검을 날렸더라면 그 요물을 제거할 수 있 었다. 그러나 한때의 잘못으로 아귀가 나고 이어 때도 들어맞지 않게 되었다. 나중 그들은 또 신진자 와 당석을 쫓느라 공연히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사실 그들이 신진자와 당석을 쫓을 때 녹포노 조 역시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녹포노조의 거동이 워낙 은밀해 두 사람이 알아채지 못했으 나 다행인 것은 녹포노조 또한 소화상과 금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녹포노조는 신진자가 금잠을 유인해내 온 것을 알고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신진자가 홍발노조 의 오음도를 빌렸고, 그 법보가 금잠의 극성인 것을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간단한 법술로 금잠을 되돌려 올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고, 그때는 마침 백미침 때문에 몸체에 들어갈 수 없어 아차 잘못하다가는 공든 탑이 무너질 판이다. 원신으로 신진자와 당석의 뒤를 따르며 그들의 동태만을 살폈다. 워낙 몸조심을 하는 데다 신진자의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이가 갈려 소화상의 은신잠형수법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녹포노조는 신진자가 이곳을 뜨지 않는 게 필히 문주 때문일 것으로 믿고 그들이 동굴에 들어가기만 하면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 한데 당석은 신진자와 같이 스승을 배반하긴 했어도 담이 작아서 동굴로 가지 않고 훌훌 떠나버 리는 것이었다. 녹포노조는 떠나가는 당석을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진자가 동굴로 달려가고 소화상이 그 뒤를 따를 때 바위처럼 뒤따라가 그를 먼저 제압해 버렸다. 이때 부하 요 인들이 요사스런 깃발을 휘두르며 금잠을 데려왔다. 녹포노조는 금잠을 다시 거두자 뭇 부하들에게 일일이 지시해 신진자를 필히 잡을 포진을 해두 었다. 그런 뒤 동굴로 들어갔는데 신진자는 마침 문주를 넣어놓은 그물을 해치려 하고 있었다. 녹포노조는 분기가 탱천했으나 꾹 눌러참고 몰래 제이의 원신을 문주 곁으로 다가가게 해서 요 화(妖火)를 발출하여 신진자와 대결했다. 그는 이렇게 버티며 몸체가 백미침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를 기다렸다. 백미침의 통증이 가시자 녹포노조는 서둘러 신체합일을 이루어 의기당당히 동굴로 되돌아왔다. 이때는 소화상이 정체를 드러내고 거울의 오색 금빛으로 문주를 제압하고 있었다. 문주가 꼼짝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자 녹포노조는 발연대노하여 요법을 펼쳐냈다. 먼저 신진자를 붙든 녹 포노조는 가까이 있는 소화상한테 덮쳐갔다. 그는 현빈주(玄牝珠)로 원신을 운용해 환화대수법(幻 化大手法)을 써서 대번에 소화상을 쥐어잡으려 덤볐다. 소화상의 무형검은 동료 문인들 속에서는 내노라 하는 최고수였으나 역시 연륜이 얕고 공력이 순후하지 못해 현빈주의 적수는 아니었다. 큼지막한 손이 덮쳐오는 것을 본 소화상이 잽싸게 비 검으로 대항했지만 한번 부딪치자마자 비검은 요법에 훼손되고 말았다. 이 무형검은 본래 고행두타가 서방의 태을정금(太乙精金)을 천 번 두들기고 만 번 달궈서 만든 것이었다. 소화상은 순간적인 판단이 빨라 급히 검을 거두어들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그만 보도 를 훼손하고 말았다. 다행히 무형검은 소화상의 반응이 빨라 그의 손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녹포노조는 소화상을 생포하자 그를 땅 속에 가둬놓고 와서 다시금 금선을 잡을 작정을 했다. 한데 이 순간 금선의 수중에 있는 천둔보경이 광망을 흩뿌리며 그의 얼굴에 비춰왔고 소화상의 비검은 때를 맞춰 용을 썼다. 녹포노조는 대겁을 치른 뒤 옥영봉 풍혈의 한천에서 불괴(不壞)의 몸이 되었었다. 다만 그의 두 푸른 눈만은 아직 연성이 완전치 못한 터라 거울의 금빛이 사납게 비쳐오자 그만 당황해 했다. 녹포노조는 두 눈을 보호하기 위해 순간 눈을 감았고 소화상을 잡았던 손도 무의식결에 힘을 놓 았다. 그 사이 소화상은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금선이 구출해 갔다. 하나 녹포노조는 별로 걱정하 지 않았다. 요법이 워낙 엄밀하므로 적들은 이미 낭중지물이요, 잠시의 요행으로는 결코 자기의 천라지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녹포노조는 한 손으로 두 눈을 보호하며 한 손으로는 계속 환화수법으로 소화상 등을 붙잡으려 덤볐다. 그는 아직도 이들을 산 채로 잡아 입맛을 돋구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는 몇 차례 날아 올라 덤볐건만 번번이 금선의 천둔경과 벽력검의 제지를 받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화가 꼭두까지 오른 녹포노조는 원래의 생각을 고쳐먹고 이 두 놈을 지하 밑의 음산하며 무서운 바람으로 박살을 내리라 작심했다. 그러나 그의 이 생각은 또 한번의 오판이었 다. 금선이 천생의 혜안을 지녀 요사한 구름과 독이 그들먹한 변무 속을 뚫고 길을 찾아내리라고 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동굴을 나올 때 그나마 몇 남지 않은 금잠을 깡그리 벽 력검으로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이 금잠은 원래 묘강에서만 발견되는 천하의 독충으로 악충 중에 최고가는 벌레였다. 성질이 괴 이하고 흉험하기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독충이다. 그중 암컷은 수컷같이 무섭지는 못해도 번식 력만은 천하에 으뜸이랄 정도로 왕성하다. 한 마리의 암컷은 백 마리의 수컷과 교배하며 매번 천 마리의 알을 낳는데 바람만 불어주면 모두가 부화하게 된다. 녹포노조는 독룡존자(毒龍尊子)의 부탁으로 자운사로 갈때 그가 길러낸 십만 마리의 금잠고를 데리고 갔다. 몸이 쇠약한 마흔아홉 마리의 어미금잠만 음풍동 밑 은밀한 곳에 남겨두었었다. 그 때는 별로 크게 유의한 것도 아니었는데, <극락동자(極樂童子) 이정허(李靜虛)에 의해 금잠을 모 두 죽이고 보니 나머지 어미금잠이라도 애물단지가 아닐 수 없었다. 되돌아왔을 때 보니 다행히 금잠은 신진자가 발견하지 못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다만 오랫동 안 생혈(生血)로 사육하지 않은 탓에 모두 강시가 되어 있었다. 녹포노조는 부랴부랴 단약으로 생 혈시켜 살려내었다. 그러나 이 어미금잠은 원래 극렬한 음기로 사는 독충인 것을, 오랫동안 방치해 몸이 쇠잔할 대 로 쇠약한 끝에 이젠 근근히 새끼만 낳을 수 있을 뿐 다른 효능은 죄다 잃고 말았다. 빨리 새끼 라도 쳐서 뒤를 이으면 멸종을 면하련만, 한번 종자를 잃으면 영영 구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한데 수컷이 없었으므로 고민하던 녹포노조는 한 가지 묘책을 강구해 냈다. 백만산 서쪽에는 독 기와 습기로 우거진 천수곡(天愁谷)이 있는데, 이곳에 천갈(天蝎: 전갈의 일종)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는 천갈로 수컷 금잠을 대신시키려는 생각이었다. 천갈은 극히 음독한 독충으로 생김새는 보통 전갈과 같으나 날개가 있어 능히 날 수가 있다. 녹 포노조는 천갈을 찾아낸 뒤 우선 독약을 먹이고 주술을 불어넣었다. 그런 삼 일 후 그들 동료들 의 생혈을 먹이고 나서 교배를 위해 어미금잠과 함께 넣어주었다. 하루 밤낮이 지나자 천갈과 금잠은 교미를 끝냈고, 어미금잠은 교배가 끝나자마자 천갈을 모두 잡아먹어 버렸다. 금잠은 삼 일 뒤에 새끼금잠을 무수히 낳았다. 녹포노조는 이들이 혹 쇠약해지지 않을까 겁을 내 천갈이 천수곡서 먹던 음독이 강렬한 금사균 (金絲菌)을 계속 먹였다. 그리고 음풍동 벼랑가에 천 이랑도 넘는 꽃밭을 가꾸고 독균을 잔뜩 심 어 금잠에게 먹여왔다. 독균을 먹자 금잠은 과연 체력이 날로 증강되었다. 그러나 금잠은 먹는 양이 워낙 많아 한번 방출하면 천 이랑씩 밭이 누에에 먹힌 뽕잎처럼 처참 히 황폐해지곤 했다. 녹포노조는 문인한테 명해 독충과 독사의 생혈을 구해다 꽃밭에 뿌려주게 했다. 그런 한편 법술을 써서 꽃들이 생혈을 빨아들이고 신속히 성장하게 했다. 그래서 꽃들은 금잠한 테 먹혀도 그 다음날은 다시금 천 이랑의 꽃밭이 금빛이 너울대도록 커지곤 했다. 이렇게 커진 금잠은 어미금잠과 교배를 시킬 것이고 날로 수를 더해 무수히 될 것이었다. 사실 어미금잠이 숨겨져 있는 곳은 출입구가 극히 은비한 장소였다. 한데 금선은 무심결에 그곳 을 통해 도망나왔다. 금잠들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반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창황중 에 도주하던 금선은 벽력검을 휘익 한 차례 휘둘렀고 이 한칼에 어미금잠들은 모두 횡사했다. 이를 본 녹포노조는 살이 떨리고 간이 녹아날 정도로 분함이 사무쳤다. 그는 목숨을 걸고라도 원수를 갚으리라 부르짖으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런 도중에 그는 공교롭게도 홍발노조의 문인인 꺽다리 홍장표를 만났다. 홍장표는 신진자와 그렇게끔 친숙한 사이였으므로 함께 따라가 도와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 는 일이 있어 몸을 나눌 수가 없었다. 급기야 법보는 빌려주긴 했으나 나중 생각하니 후회스러웠 다. 법보를 혹 신진자가 잃기라도 한다면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걱정에 후회가 섞인 꺽다리는 스승 홍발노조 몰래 천마화혈도를 훔쳐설랑은 절연령으로 채약하 러 간다 핑계대고 백만산으로 찾아왔다. 신진자가 필히 백만산 부근에 있으리라 생각한 홍장표는 길을 오며 그의 종적을 살폈다. '이 녀석이 아마도 요진(妖陣)을 설치해 놓고 오음도를 운용해 금잠을 유인해 내겠지. 그렇게 해 서 금잠고를 일망타진하려 할 거야.' 홍장표는 바람이 스며들지 못하고 지세가 은비한 곳은 샅샅이 뒤졌다. 과연 백만산 주봉에서 이 백 리쯤 떨어진 곳에 적당한 장소가 눈에 띄었다. 틀림없이 신진자가 그곳에 진을 설치했으리라 짐작하고 검광을 멈추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오음도의 기운이 뻗어나왔다. 꺽다리는 급히 아 래로 내려와 신진자가 어젯밤 진을 베풀었던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속에 들어가보니 오음도는 이미 파괴돼 있었다. 꺽다리는 놀랍고 분하고 원통했다. 더구나 일곱 가닥 깃발마저 무슨 요물들이 씹었는지 산산이 찢겨져 있지 않은가. '이런 빌어먹을! 신진자란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이를 바드득 바드득 갈며 백만산 음풍동으로 달려갔다. 이때 홀연 뇌성소리 같은 게 은은 히 들려왔다. 이어 파공음이 들리더니 묽고 검붉은 검광이 저쪽에서 달려왔다. 검광은 전광석화처 럼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천하에 악랄한 녹포노조의 소굴인데 다른 파의 인물이 어찌 여기서 얼씬대고 있을까?' 홍장표는 검광을 맞이하려 생각했으나 검광은 그야말로 번개처럼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가 버렸 다. 깜짝 놀라 머리를 들어보니 녹포노조가 수만 개의 녹색불꽃을 흩뿌리며 쫓아오고 있었다. 요 물은 그 긴 팔과 큰 손을 허부적대면서 바람을 막고 구름을 깨치듯 달려갔다. 순간, 홍장표는 앞서 도망친 자가 신진자와 한패의 사람이라 직감했다. 녹포노조에 쫓겨 도망간 다치면 신진자는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생각이 제대로 뻗기도 전에 녹포노조가 그의 앞에 도 착했다. 홍장표로서는 앞서간 홍색, 자색 검광이 자기들과는 양립할 수 없는 정파 중 아미파의 제자들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오로지 법보가 훼손된 아픔에 노기만 충천해 있었다. 그 상대는 물론 눈앞에 다가오는 녹포노조였다. 상대는 무서운 사파의 천하고수였지만 자신도 실력에 자신이 있 었고, 신외화신(身外化身)을 익힌 몸, 더욱 녹포노조의 극성인 천마화변신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가. 그는 흑백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로 으르렁대며 소리쳤다. "신진자는 어디 있소? 나의 오음도는 당신이 훼손했소?" 녹포노조는 한창 구름을 재촉하며 꼬마를 쫓는 데 마음이 급해 있었다. 헌데 홀연 붉은 안개 같 은 게 불쑥 나타나더니 엄청난 인상의 고약한 사나이가 앞을 가로막아 십분 놀라고 화가 났다. 고약한 요화(妖火) 같은 것이 길을 막는 것 자체가 기분나빴다. 더구나 말을 하는 투세를 보니 신 진자의 막역친구라는 홍발노조의 문인 홍장표였다. 녹포노조는 발연대노하여 대답도 하지 않고 상대에 덮쳐갔다. 홍장표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어울려 싸웠다. 조금 지나자 녹포노조의 수하 요인들이 쫓아와 녹색 구름으로 홍장표를 에워쌌다. 주위는 바람 과 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해졌다. 홍장표는 중과부적으로 대적할 수 없자 장소를 터뜨리며 화혈신도를 휘둘렀다. 검붉은 으스스한 광채가 그의 손아귀를 쏟아져 나와 하늘에 가득한 불꽃을 쓸어버렸다. 운석 같은 돌멩이들이 분 분히 떨어지며 여러 명의 요인이 시체로 변해 지상으로 추락해 왔다. 녹포노조는 처음 홍장표가 소화상과 금선을 도망치게 했어도 독수를 쓸 생각은 없었다. 그의 사 부 홍발노조가 여하튼 기피할 만한 인물인지라 꺽다리를 죽인다든지 해서 원수를 만들기가 싫었 다. 그저 자신의 무서움을 깨우쳐 상대가 스스로 물러가면 계속해서 맛좋은 양들이나 쫓을 요량 이었다. 그런데 홍장표는 생각보다 실력이 대단했고 그가 펼친 한 조각 붉은 구름 속으로는 추호도 전진 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더욱 눈앞의 두 꼬마 원수가 이젠 멀리 멀리 도망가버려 이가 갈리는 판 인데, 홍장표는 급기야 천마화혈도까지 빼어들어 사오 명의 휘하 문인까지 죽이는 것이었다. 녹포 노조는 분노가 심장에서 끓어올라 악심이 생겨났다. 이때 녹포노조의 수하 요인들은 화혈신도에 놀라 분분히 패퇴하고 있었다. 녹포노조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괴소를 터뜨리며 천신을 운용해 긴 팔을 휘둘렀다. 그의 키를 연상케 하는 큰 손은 가까이 있는 문인 하나를 덥석 쥐어잡았다. 녹포노조는 붙든 제자를 무기처럼 휘둘러 꺽다리를 쳤다. 처참한 비명소리가 하늘을 메아리치며 그 문인은 꺽다리의 암적색 검광에 두 동강이가 났다. 녹 포노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일지를 튕겼다. 음산한 바람이 일며 문인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 가 녹색 연기가 되어 상대의 암적색 검광을 휩쌌다. 문인의 절단된 시체는 땅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계속 공중에서 춤추었다. 꺽다리의 칼이 지나갈 때마다 혈우(血雨)가 허공을 날았다. 잠깐사이 시체는 천만 갈래로 찢어지 고 짤라져 핏빛을 허공에 뿌렸다. 그럼에도 문인의 피가 변한 녹색연기는 여전히 꺽다리의 검광 에 찰거머리처럼 매어달렸다. 화혈신도가 휘둘릴 때마다 연기는 흩어지는 듯 다시 엉키었다. 그것 은 요인의 음혼(陰魂)이 녹포노조의 요법에 의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형국이었다. 음혼은 검광을 단단히 에워싸기 시작했고 이젠 칼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홍장표는 녹포노조가 이처럼 잔인무도하게 나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문인을 희생시키면 서까지 소장연혼(小藏煉魂) 수법으로 자기의 칼을 덮씌워 오리라곤 상상치 않은 것이다. 홍장표는 화혈도를 움직일 수 없자 다른 요법을 펼치려 했다. 바로 그 찰나, 눈앞이 아른거리더 니 녹포노조가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홍장표가 깜짝 놀라는 사이 음침한 녹색 불빛이 그의 머리를 휩싸버렸다. 홍장표가 피할 사이도 없이 녹포노조의 원신은 현빈주의 환화대수로 그를 단 단히 붙들었다. 뼈가 바스러지는 통증이 홍장표의 가슴을 찔렀다.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이제 몸 은 말을 듣지 않았다. 홍장표는 이를 바드득 갈며 사납게 부르짖었다. "이 원수의 요물놈아! 너와 나는 금생금세(今生今世)에 절대로 같이 살지 못살 것이다!" 말을 끝내자 홍장표는 원공(元功)을 몸 안으로 거둬들이며 괴성을 내질렀다. 괴소가 엄청컸던지 그의 천령개가 울려 깨지며 한 가닥 붉은빛이 번쩍 몸체에서 빠져나갔다. 홍장표의 몸은 끝내 녹 포노조의 손아귀에서 처참히 죽고 원신만 빠져 도망쳤다. 녹포노조는 백만산에 돌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으려니와 법보가 아직 연성이 안 된 터라 화혈신 도를 그냥은 깨칠 수가 없었다. 그는 문인 하나를 죽여 사귀(死鬼)로 만든 뒤 적의 검광을 상대케 하고 자신은 암중에 조공(爪功)으로 홍장표를 사로잡으려 했다. 계락이 들어맞자 그는 꺽다리를 잡아다가 두고두고 악랄한 수법으로 보복을 하리라 생각하며 희 희낙락하는 참인데 홀연 홍장표가 홍발노조의 신외화신의 수법으로 몸만 버리고 원신은 도망쳐 버렸다. 녹포노조로서는 의외의 날벼락이었다. 사람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고 꿉꿉한 홍발노조와 피맺힌 원수만 되었으니 분하고 답답할 노릇이었다. 헌데 화혈신도는 역시 영물이었다. 주인이 죽어 자기를 주지하지 못하는 데도 칼은 계속 주인을 따르고 있었다. 녹포노조가 술법을 풀지 않은 탓에 그 수천 갈래의 시체 조각들도 여전히 화혈신도를 에워싸며 벌떼처럼 허공을 날고 있었다. 녹포노조는 금잠을 모두 죽이고 허다한 법보와 문인을 잃자 아직 도 분이 덜 풀려 씩씩대다 돌연 홍장표의 목덜미를 덥석 물어 피를 줄줄 빨아먹었다. 두 어린 녀 석은 이제 쫓을 수 없다고 생각한 녹포노조는 피가 칠갑이 된 입술을 달싹이며 명령을 내렸다. "얘들아, 돌아가자. 죽은 놈들은 모두 찾아 동굴로 데려가라. 차근차근 내가 먹어치울 테니까 말 야." 녹포노조는 가까이 있는 시체 몇 개를 나꿔채더니 으적으적 씹어먹으며 검광을 타고 동굴로 돌 아갔다. "으흐흐, 분통이 터진다. 이놈, 신진자란 놈을 내 실컷 분풀이 하리라!" 이 일막의 참극은 요인들에게 혼비백산할 일이었다. 스승이 워낙 무서워 그가 보는 데서는 뭐라 말도 못하고 상의도 못했으나 동고의 처참한 죽음을 어찌 슬퍼하고 동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 들 모두 일찍이 죽음을 불사하겠노라 스승한테 맹서한 바 있어 위급할 때야 서로 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죽은 제자를 아싹아싹 잡아먹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자기 부하를 죽여 화 혈신도를 막기까지 하며 죽은 혼까지 참혹한 고통을 주니 세상에 이보다 더한 일은 없을 것이었 다. 제자들은 모두가 딴 마음이 생겨났다. 그러나 세상일이 다 그러하듯 겁많은 놈은 계속 눈치보며 굴복하고 용기 있는 자만이 제 길을 가는 법이다. 십여 명은 아직도 덜덜 떨며 죽은 동료들의 시 체를 떠메 동굴로 돌아갔고, 미적미적 기회를 보던 나머지 요인들은 뒤에 남았다가 분분히 도망 쳤다. 그들은 동료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도 서로 못 본 체했다. 이 하룻동안 녹포노조의 수하 요인들은 죽거나 도망쳐 반 이상 없어지고 겨우 십여 명만 남게 됐다. 홍장표는 공연히 신진자를 위해 싸우느라 육신을 잃고 서너 개의 법보까지 상실한 채 원신만 겨 우 살아 돌아와 사형 요개강에게 하소연했다. 세상엔 진실로 기이한 일도 많은 법이라, 이 두 사 람 중 하나는 법체를 잃고 하나는 원신을 잃었다. 둘은 서로 상심해 서로를 위로했다. 홍발노조는 두 사랑하는 의발전인이 함께 참혹한 꼴을 당한 걸 보자 분함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 었다. <괴규화(怪揆花)> 능혼(凌魂)은 일찍이 원수로 원한을 품고 있었지만, 녹포노조도 이젠 당 연히 가만 둘 수 없는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위인이 원래 진중한 사람이라 쉽사리 경거망 동하지 않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회는 언젠가 올 것이요, 그때는 애제자의 원수를 마땅히 갚을 터이었다. 망창산에서의 조우 窮搜巖澗 手揮劍愾晃銀河 直上蒼穹 足踏雲流行紫是 소화상은 고행두타의 두 번째 서찰을 보자 그동안 자신이 실패한 원인의 대략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만사가 다 끝난 것은 아니므로 앞으로 노력하면 결실을 맺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비검은 불행히 훼손됐지만 요물을 제거한 뒤 스승한테 돌아가 원상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고행두타는 서찰에서 금선의 쌍검 중의 한 자루를 빌려쓰라 지시했다. 물론 금선의 검을 쓰자면 아미파의 검결과 사용법을 임시로 배워야 했다. 검은 이렇게 해결된다 치더라도 무형검둔 수법을 펼칠 수 없는 게 한 걱정이었다. 몸을 숨기지 않고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니 이젠 처음 백만산에 올 때보다 열 배는 어려운 처지가 된 셈이다. 소화상은 편지를 펴든 채 물끄러미 자신의 비검을 바라보았다. 아무짝에도 쓸데없이 훼손됐다곤 해도 검은 여전히 날카롭게 번쩍이고 있었다. 영기가 아직 살아 있는 게 마냥 쇳덩어리만은 아니 었다. 소화상은 그러나 앞일을 생각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한 그를 금선이 위로했다. "사형, 힘을 내시오. 낙망할 건 없어요." "아니야. 난 도저히 자신이 없네." "사백께서 고의로 형님을 고생시키는 건 아닐 거예요. 형님을 대성시키기 위해 이런 시련을 주 는 걸 겁니다. 아무리 위태하고 흉험무쌍하다 해도 종내는 만사 좋게 해결되리다." 소화상은 씁쓸히 웃었다. "내 어찌 사부의 깊은 뜻을 모르겠나. 날 채찍질해 사람을 만들려는 거겠지. 하지만 내 비검은 정말 아까우이. 사부님께 검술을 전수받은 이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검과 함께 수련을 거듭해 왔네.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자넨 상상도 못할 거야. 사부께선 산에 돌아간 뒤 원상회복할 수 있다고 했지만 예전과 똑같이 될지 자신이 없어. 그리고 사제한테 터놓고 말하지만, 사실 난 선배 사숙, 사백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칭찬을 받아왔는지 모르네. 근골이 좋느니 공행이 빼어나느니 말 일세. 또 사부님께서도 고심해서 비법을 전수해 주셨고, 결과 우리 또래에서는 첫째니 둘째니 하 는 칭송을 들어왔지 않은가. 한데 오늘 이모양 요꼴로 일패도지하다니, 창피하기 짝이 없네. 그나 마 자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요물의 손에 몇 번 죽었을지 모를 판이었어. 참말 부끄럽네!" "승부는 병가지상사라 했소. 한 번 진 게 뭐 대수겠소. 사백의 서간 속에 먼저 한 십여 일 수련 을 쌓으라 했으니 그렇게 하고 봅시다. 때가 되면 기연도 이뤄질 것이고 만사형통도 될 겝니다. 지금 새삼스레 회한에 젖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자, 내 비검 한 자루를 빌려드릴 테니 빨리 숙련되도록 연습이나 하고 봅시다." 소화상도 이젠 분투노력밖엔 아무 길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떨쳐 스승이 말한 대로 시행해서 이번 일을 성공하기 전엔 자신은 물론 금선 역시 응벽애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하 지만 절연령은 풍경은 좋으나 머물기에 적당한 동굴이 없었다. 그들은 몇 군데를 휘돌아보다가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이때 소화상의 머릿속에 갑자기 망창산 생각이 났다. "여보게, 우리 망창산에 가면 어떻겠는가?" 그곳은 원래 장미진인의 두 자루 비검이 숨겨 있던 곳이다. 한 자루 자영검은 이미 이영경이 얻 어냈고 나머지 한 자루는 아직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 검들은 많은 선배 검선과 어느 비검 도 따르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특별히 수련을 하지 않아도 출수만 하면 신출귀몰하게 움직인 다고 했다. 더구나 망창산엔 기이하고 아늑한 동굴이 있다 하니 그곳에서 수련하며 나머지 한 자 루 비검을 찾아보는 것도 큰 보람일 것이다. 소화상의 말에 금선은 제깍 찬성했다. "맞았어요. 우리 망창산에 가서 수련토록 합시다." 두 사람은 마음을 정하자 즉시 절연령을 떠나 망창산으로 곧장 날아갔다. 금선으로선 망창산에 가는 게 여간 기쁜 게 아니었다. 이영경이 여영남을 찾으러 그곳에 간 게 내내 궁금하던 참이었 고 그녀는 워낙 사람이 좋으니 어쩌면 신조와 함께 소화상을 도와줄지도 몰랐다. 망창산에 도착한 건 깊은 밤중이었다. 그들은 한적한 수림 속에서 조용히 운기조식을 했다. 이윽고 먼동이 터왔다. 그들이 머문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소화상 등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사방을 유심히 관찰했다. 소화상은 일찍이 이곳을 지나친 적이 있었으나 산의 범위가 워낙 넓어 당시 눈에 익었던 길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한동안 여러 곳을 날았지만 특별한 조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산세가 워낙 웅장하고 넓어 장미진인의 비검을 찾는 따위는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이었다. 그들은 몸을 붙일 동굴 하나를 찾아 우선 소화상의 아미검술 수련에 들어갔다. 고행두타의 검술 은 아미검법과는 약간 다르지만 근본원리는 같은 것이어서 소화상은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다만 벽력검이 보통 칼이 아닌 탓에 처음 배워 자유자재로 휘두르기가 약간 어려웠다. 그러나 소 화상은 본래 정순한 기초를 닦은 터여서 약 오 일 내지 칠 일만 열심히 수련하면 능숙히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선이 소화상에게 말했다. "내가 가르쳐 드린 검결대로 오륙 일만 열심히 하면 쉬이 숙달될 겁니다. 그런 뒤에 우리, 장미 진인이 갈무리해 두었다는 비검을 한번 찾아봅시다. 그래서 찾으면 좋고 못 찾는다 해도 뭐 해로 울 건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세." 그러나 금선은 여러 가지 일이 궁금해 단 하루라도 참기가 고되었다. 이영경은 여영남을 구한 뒤 틀림없이 온옥(溫玉)을 탈취할 것이었다. 그는 소화상에게 검법을 가르쳐 준 뒤 소화상이 열심 히 수련하는 사이 살짝 동굴을 빠져나왔다. 혼자라도 한번 이영경을 찾아볼 심산이었다. 이영경이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는 말곰과 성성이들에 이끌려 큰 동굴에 들어갔고 그곳에 서 온옥을 보았다고 했다. 따라서 말곰이나 성성이들을 찾아내면 동굴을 찾는 건 손쉬울 성싶었 다. 더욱이나 어머니의 비검전서에 따르면 동굴에는 무서운 요인이 숨어 있다고 했잖은가. 그 요물 이 온옥을 독식하려 한들 자신의 형적을 한 치도 드러내지 않을 리도 없다. 금선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중에도 자신이 남쪽에 있고 이영경은 북쪽 계곡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줄곧 북쪽으로 날며 살폈다. 그러나 산은 넓고 컸고 깊었으며 밀림으로 꽉 차 있었다. 은 벽한 길은 굽이쳐 흐르듯 사방으로 뻗어 있어 검광을 타고 하늘에서 살피기엔 적합치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출중한 혜안을 지녔다손 치더라도 이 장대한 숲 속을 투시해서 볼 수는 없었다. 금선은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쉬임없이 찾아헤맸으나 아무러한 종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송과 등 과일과 호로에 물을 길어 소화상과 함께 저녁 배를 채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는 다시 산 속을 찾아헤맸다. 그러나 산은 다니면 다녀볼수록 웅대한 맛만 더할 뿐 무엇 하나 특출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나흘이 훌쩍 지나갔다. 성깔이 오른 금선의 머릿속에 갑자기 생각되어지는 게 있었다. '그렇지! 영경사매가 온옥을 슬쩍 하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 큰 성성이와 독수리가 있는 데다 상대는 무시무시한 요물일터, 그들이 맞붙어 싸운다면 어딘가에 작은 형적을 남기지 않겠어? 그녀도 온옥을 훔치기 위해선 하루이틀론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낮엔 잠복해 있다가 밤마다 손을 쓸지 모르고 말야.' 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금선은 낮에 수색하는 것을 그만두고 밤에 은밀히 찾아보리라 마음먹었 다. 이날 밤, 공교롭게 소화상의 벽력검 수련이 거의 끝났으므로 둘은 함께 수색키로 했다. 황혼이 지나 반야가 됐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서북방쪽에 한 줄기 은빛이 유성처럼 흐르며 북쪽 산록의 움푹 패인 산곡으토 날아 들어 가는 게 보였다. 소화상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저 검광이 단연 수상한데! 어느 파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교도의 검광은 아닌 것 같애. 자, 빨리 쫓아가 보게나!" 둘은 급히 검광을 타고 은빛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널찍한 벼랑이 있고 우뚝 솟은 바위들이 빙 둘러쳐져 있는 광활한 계곡이었다. 십여 그루의 상록, 활엽수가 하늘 높이 우뚝해 사 방이 그늘로 어둑어둑했다. 밝은 달이 물같이 맑게 비추어 그림자가 조용히 움직이는 가운데 서 너 마리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학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청아히 울리어 밤경치를 그윽하게 해주고 있었다. 아까 보였던 은빛의 종적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선사제, 우리 조용히 그 검광이 또 나타나는 걸 기다려 보세. 북새를 떠느니 그게 좋겠지?" "그래요. 조금 있으면 무슨 동정이 있겠지." 둘은 조용히 잠복해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동정이 없었다. 은빛 검광은 그들이 오는 사이 어딘가로 간 흔적이 없었으므로 틀림없이 이 부근 암혈 어딘가에 은신해 있을 터였다. 그 검광으로 보아서는 사파가 아닌 정파가 확실한데, 동문은 아니라 하더라도 동도의 인물일 것 이라 은근히 걱정이 됐다. 무서운 요인이 망창산에 웅거하고 있다 했으므로 혹 그와 만나 어려움을 겪지나 않을까 마음을 조리는 것이다. 요물을 만나면 세불양립(勢不兩立)이라 한바탕 일전이 있을 터인데 돕지 못할 게 은연중 걱정이 됐다. 소화상과 금선은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방황하다 둘은 동굴 하 나를 찾아냈다. 동굴은 넓고 깨끗했으며 경내 풍물이나 바깥 경치가 그동안 머물던 곳보다 월등 나아보였다. "선사제, 이곳 풍광이 멋들어지지?" "우리 거처를 이곳으로 옮깁시다그려." "나도 그 생각을 하던 참일세. 이곳에 머물면 아까의 은빛 검광을 수색하는 데도 훨씬 나을 것 이야." 두 사람은 의논을 끝내자 동굴 밖으로 나와 검광을 타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밤하늘이었으나 청 량한 달빛과 은은한 별빛이 삼라만상을 비추고 있어 숲 속의 이곳저곳을 관찰할 수가 있었다. 한동안 하늘을 나는 사이 동녘에서 누런 고기비늘 같은 햇살이 뻗쳐나왔다. 잠깐 새에 밝은 태 양은 하늘을 밝히고 산을 초록으로 물들였다. 저켠 멀리의 적설(積雪)에 아침햇살이 쏟아지자 붉 은 햇빛이 반짝이며 사방에 반사했다. 고요한 산은 더욱 적적했고 그들이 지나는 곳마다 죄다 소 슬한 게 마냥 마음이 쓸쓸해졌다. 소화상과 금선은 아침 내내 여러 곳을 찾아다녔건만 은빛 검광은 신룡(神龍)이 한 번 머리를 내 밀고 사라진 양 흔적이 없었다. 사실 금선은 요 며칠 동안 그렇게도 온 산을 쏘다녔어도 이영경 이 말한 풍경이 한 군데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게 이상했다. 호랑이, 늑대, 사슴, 양 등 온갖 동물 이 있었으나 유독 성성이와 말곰만은 보이지 않았다. 이날도 금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결국은 산과일을 따고 냇가로 물을 길러갔다. 물을 길어 동굴로 돌아오다가 그는 문득 동굴 밖 암벽의 이끼 속에 새겨진 글씨를 발견해 냈다. 글씨 위에 이끼가 잔뜩 끼어 언뜻 보아서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으나 천부의 혜안을 지닌 금 선은 무심결에 글씨를 알아채었다. 글씨는 옛 전서체로 오구선부(奧區仙部)라 새겨 있었다. 동굴에 이름이 붙어 있다면 보통 심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금선은 동굴을 들어와 사방을 유심 히 살펴보았다. 동굴은 서쪽을 향해 앉은 형세인데 들어가는 입구 이외에는 한 군데도 출로가 없 었다. 사방 벽의 종유석은 시원스레 아래로 뻗어 밑바닥과 닿아 있는 것이 마치 아름다운 주렴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풍경으로는 오구선부라 칭할 기묘함을 지닌 건 아니었다. 금선과 소화상은 마주 앉아 이 묘미스런 동굴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선이 먼저 말했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영경 사매는 이 산 속에 있을 겁니다. 한데 이 며칠을 계속 찾 았건만 뵈질 않는단 말예요. 거 참 이상하죠. 여하간 이렇게 된 바에야 우리 사조께서 남기셨다는 보검이나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그 검이야 어느 누가 안 찾고 싶겠나. 그 보검은 법술과 부적으로 봉쇄돼 있어 찾아지는 게 아 니라 우연히 만나지는 것일 게야. 우리가 공중에 있을 때 보니 이 산은 넓을 뿐만 아니라 참 기 이하고 은밀한 곳이 많더군. 동굴 속을 뒤지는 것같이 일목요연할 수가 없어서 검을 찾기는 어려 울 거야. 하긴 백만산에 갈 날도 며칠은 남았고 자네 비검으로의 수련도 어지간히 됐으니 오늘부 터 우리 같이 한번 찾아보세나. 특히 은밀하고 궁벽한 곳을 찻아야겠어. 그 온옥이 숨겨져 있다는 옛 동굴도 응벽애처럼 특출나게 숨어 있을 테니까 말야. 그러다가 보검이라도 무심결에 만나게 되면 오죽 좋겠나!" 금선은 뭔가 급히 생각난 듯 서둘러 입을 떼었다. "제가 처음 떠나올 때 저의 어머님이 편지를 보내 말씀한 게 있습니다. 여영남은 산 음지의 풍 혈(風穴) 속에 갇혀 있다 했어요. 이영경사매가 여영남을 찾았다면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았을 텐 데, 그렇지 않은 게 아직 찾지 못한 모양이 분명합니다. 여태껏 이 사매나 여영남 생각만 했지 그 풍혈 생각을 감히 하지 않았단 말씀이야." "망창산은 이사매가 옛날 노닐던 곳이라 해도 그때는 아직 득도하지 못했던 때 아니던가 말야. 성성이와 말곰에 끌려다녔고 우리를 만난 뒤에는 함께 아미로 돌아갔으니 그도 역시 제대로 길을 알고 있진 못할 거야. 다만 독수리와 성성이가 그녀와 함께 있으니 찾기는 하겠지만 말일세. 한데 우리는 옛날의 그 길만 찾았고 기껏해야 남쪽 일변도로 헤맸으니 이 천백 리에 뻗친 망창산을 어 찌 다 두루 볼 수 있으며 원하는 게 찾아지겠나. 또 그 보검만 해도 삼영(三英)이 머지 않아 만나 게 되리라 했으니 자네는 종내 못 찾을 물건일 것이야. 물론 그 보물은 곧 이 세상에 나타나겠지 만 말일세. 자, 우리는 산의 음지쪽을 두루 찾아보세나. 그 풍혈이란 곳을 찾아내면 뭔가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네." 두 사람은 동굴을 나와 우선 방향을 골라잡았다. 이제는 밝은 곳을 빼고 어두침침한 곳을 택해 가파르고 기울고 으슥한 곳을 찾아나섰다. 그들은 이영경이 보검을 얻은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 며 음침한 곳을 쏘다녔다. 한동안을 헤매다가 그들은 어젯밤 은빛 검광이 사리진 계곡으로 들어갔다. 금선의 날카로운 눈 매가 사방을 쓸어보는 중에 북쪽산의 숲이 어우러진 속에 한 자 정도로 틈이 난 큰 벼랑을 발견 해 냈다. 구멍이 난 벼랑 위에 기이한 꽃과 덩굴이 엉클어져 뭔지 은밀한 통로가 숨겨겨 있지 않 나 하는 의구심을 낳게 했다. 호기심에 부푼 금선은 소화상을 끌며 벼랑가로 다가갔다. 그곳은 험준한 높은 벼랑이었는데 가 까이 다가섰을 때는 무슨 틈새나 구멍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금선은 혼자말을 중얼거리며 한 바퀴 몸을 돌리다 홀연 놀란 듯 소리쳤다. "여기다!" 원래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가파른 벼랑이 칼날처럼 서 있는 곳으로 벼랑은 위에서 아래로 아래 에서 위로 험준히 뻗어 있었다. 그런 좌우를 고색이 창연한 밀림이 우뚝우뚝 하늘로 솟아 아차 하면 바로 옆의 풍경까지 숨겨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금선이 아래 쪽에서 본 틈새는 벼랑 사이에 난 길과 같은 통로로 조금 더 밑이거나 위에서 보면 총총한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벼랑길은 한 자 너비로 십여 장 길이 저켠까지 뻗어 있었다. 위 아래가 모두 등나무 덩굴로 잔솔가지 등과 얽혀 있어 소롯길보다도 비좁아 보였다. 벼랑길을 한참 따라가자 조그만한 바위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 속은 시꺼멓고 꾸불꾸불 굽어 있 었다. 바위 속을 뚫고 아래로 뻗은 길은 형세가 험하고 기이해 노련한 원숭이나 노루도 제대로 건너기가 힘들 정도였다. 구멍이 다한 곳에 햇빛이 부옇게 비쳐왔다. 뿌우연 햇빛 사이로 꽃그림 자들이 너불대 기이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을 수 없었으므로 검광을 타고 앞서고 뒤서며 경사진 아래쪽으로 날 아갔다. 햇빛이 비추는 곳에 다다라 보니 창문 같은 구멍이 암벽 끝을 통해 하늘 위로 나 있었다. 하늘에 뻥 뚫린 구멍 사이로 햇빛이 평상처럼 따사로이 뻗어올 뿐, 색다른 경치란 없었다. 둘은 실망한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소화상은 김이 새서 금선에게 돌아가자고 재촉하는데, 그래도 단념하기 싫은 금선은 고개를 살 래살래 저었다. "우리가 아미산에서 응벽애를 개통할 때도 동굴이 다 끝난 곳에 그저 뾰죽히 나온 외로운 벼랑 만 있었지요. 위로는 하늘이고 아래로는 컴컴한 계곡이어서 우린 그저 망연자실만 했습니다. 그때 이영경사매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고, 신조가 길을 열지 않았으면 선부의 그 멋진 풍경은 영원 히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여기도 그런 경우인지 어찌 알겠어요. 이 바위구멍은 아무리 봐도 고 괴하지 않습니까? 난 결과를 보지 않고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때, 왼쪽 약간 널찍한 공간에 뻗어 있는 등나무 새로 은빛 섬광이 번뜩였다. 소화상은 급 히 금선을 잡아채며 섬광이 뻗친 곳으로 몸을 날렸다. 금선도 은빛을 보았으므로 그는 잽싸게 손 을들어 등나무 덩굴을 뜯어냈다. 아주 작은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동굴에는 수려한 눈빛과 호랑이 눈을 한 풍채 좋은 백의 소년이 우뚝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 다. 영채가 발랄하고 서글서글한 모습이 온화한 인상을 풍겼다. 두 사람이 입을 떼기 전에 그 소년이 먼저 말을 걸었다. "두 분께서는 아미파 동도 아니신지요?" 소화상과 금선은 소년이 사파의 인물이 아니고 정기가 늠름한 정파의 사람인 것을 확신하자 누 군지 알아보진 못했으나 우선 마음이 흐뭇했다. 금선이 먼저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나는 이름이 제금선으로 아미파 장교는 나의 어른이시오. 그리고 이분은 동해 살던 고행선사의 문하이신 소화상이십니다. 도우께선 어떻게 해서 우리 두 사람의 내력을 아시었소?" 소년은 금선의 말을 듣자 황망히 절을 했다. "원래 두 분 사형이셨군요. 소제는 태호 서동정산(西洞庭山) 묘진관(妙眞觀) 방장이신 엄사파(嚴 師婆)의 조카손자로 이름이 엄인영이라 합니다. 최근에 아미파 취도인의 문하가 되었습죠. 저는 사부의 명을 듣고 여기에 와서 한 분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소년은 마지막 말을 하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그분은 내일 오실 텐데, 극비리 그녀를 도와 장미진인이 남기신 나머지 한 자루 청삭검(靑索劍) 을 얻을 계획입니다. 검을 얻은 뒤에 그녀와 함께 두 분 사형께서 말하신 이영경사저를 도와 함 께 온옥을 탈취하려는 것이죠. 제가 떠나올 때 사부 말씀이 요인은 워낙 무서운 존재라 두 분 사 저가 지닌 자영검과 청삭검이 아니면 그를 제거하긴커녕 쫓아버리지도 못할 거라 하시더군요. 소 제는 아직 무술이 천박합니다. 명령을 받들고 오긴 하였으나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이렇게 몰래 숨어 있는 중입니다. 어제 저녁 한번 용기를 내어 북산 일대를 정탐해 보았더니 과연 요인 은 엄밀한 조치를 해놓아 손을 쓸 수가 없더군요. 그때 달빛 아래에 일단의 붉은빛이 한 마리 큰 독수리를 보호하며 동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소제의 검광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데 다행히 요인은 그 붉은 검광을 쫓느라 저를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빨리 돌아왔었지요." 소화상은 엄인영의 말을 듣자 그가 장미진인과 동배 검선인 <벽문선자(碧雯仙子)> 엄사파의 조 카손자인 것을 알고 무척 기뻤다. 더구나 그는 취도인의 새 제자가 되어 동문이 하나 늘었으니 그 더욱 기쁠 일이었다. 소화상은 후배사제의 절에 급히 답례하며 말을 받았다. "어젯밤의 은빛 검광이 바로 자네였었군. 정말 명불허전이구만그래. 우리 둘은 자네를 찾기 위해 밤새도록 찾아헤매었다네. 이렇게 무심히 만나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하고 말일세. 정말 인연은 기이한 것이군!" 금선이 소화상의 말에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엄인영은 미안해 하며 말했다. "두 분 사형께선 너무 과찬의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일전에 여기 도착했는데 무심중에 이 동굴을 찾아왔지요. 이 안쪽은 기이한 경물이 많아 외인은 여간해서 발견하기 힘듭니다. 오늘 아 침에도 한 가닥 지하통로를 발견했는데 그 길은 요인이 사는 동굴 옆 고목나무 구멍으로 통하더 군요. 내일 온옥을 탈취하는데 아주 쓸모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동굴을 뚫어 나오 다가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보고 사형들께서 들어온 통로가 별도로 있는 것도 발견한 것입니 다." 소화상은 귀여운 듯 엄인영을 주시하고 엄인영은 마냥 부끄러운 듯 말을 이었다. "바로 마침 햇빛이 들어오는 입구를 찾고 있는데 두 분 사형의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원래 이 협착한 암벽 아래쪽에 오목한 동굴이 있고, 그곳에 수천 마리의 말곰이 살고 있어 그 사나운 기 세를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기인이사(奇人異士)를 제외하곤 여길 찾아올 분이 없는 터라, 어떤 분들인가 하고 조용히 숨어 엿들어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동문 사형되는 분들이더군요. 저는 즉시 덩굴을 검으로 쳐서 나아가 인사를 드리려는 참인데 먼저 사형들께서 발견하시고 말았습니다. 아 마도 두 분 사형께선 온옥을 탈취하러 오셨겠지요? 마침 때맞춰 오셨으니 힘을 합쳐 일을 하시지 요. 우선 이 안쪽으로 들어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음에 드신다면 함께 거처하며 일을 궁리하 시지요." 금선이 대답하려 하자 소화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하자면 말이 기네. 우리 자네 있는 곳에 들어가 이야기를 하세!" 엄인영은 소화상의 말을 듣자 정중히 읍을 하며 둘을 동굴로 맞아들였다. 동굴은 두 개의 큰 암벽 사이에 만들어진 천연적인 틈새였다. 서너 자가 넘는 암석도 너끈히 들 어섬직한 너비였는데 앞쪽은 깊고 그윽한 게 한없이 깊어 보였다. 엄인영은 검광을 타고 두 사람의 앞에 서서 길을 안내했다. 검광에 비친 양쪽 석벽엔 푸른 이끼 가 푸릇푸릇한 새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향초가 돋아 있었다. 모두가 푸른 향초 중에도 간혹 빼어나게 붉고 아릿다운 꽃과 풀이 눈에 띄었다. 무슨 기화이초(奇花異草)인지 알 수 없었으나 맑 고 짙은 향기는 많은 사람이 금방이라도 취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토록 어여쁘고 향기 그윽한 기화이초가 햇빛도 미치지 못하는 깊고 깊은 바위와 바위사이에 숨어 어둡고 어둔 세상에 묻혀 아무도 보고 즐길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자 웬지 서글픈 생각이 꾸역꾸역 일어났다. 검광의 속도는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석벽의 끝에 도착했다. 석벽 끝은 천길 낭떠러지의 벼랑 이고 그 벼랑에 널따란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그들은 동굴 속의 널찍한 석실로 들어갔다. 동굴의 석벽은 구슬처럼 아름다왔는데 석실엔 돌난 로와 침상 등 가구 일체가 구비돼 있었다. 석벽 감실에서 크고 밝은 은빛이 쏟아져 나와 사방에 드리워져 있는 종유석을 밝게 비춰 마치 불기둥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금빛 주렴과 금빛 병풍 같아 오색으로 석갈려 비추이는 불빛은 아름답고 장엄하기 가이없었다. 엄인영은 두 사람을 크고 작은 석실로 두루 안내해 보여주었다. 그곳엔 약 이십 여 칸의 석실이 있었다. 석실마다 처음의 큰 석실처럼 은빛이 감실서 뻗쳐나와 찬란히 사방을 비추었다. 동굴 끝에 오자 널찍한 정문이 나타났다. 모가 진 정문은 두 장 정도 높이였는데, 위쪽에 <청허 오구 인간제십칠동천(淸虛奧區 人間第十七洞天)>이라는 옛 전서체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동굴 의 문 밖엔 바위들이 질서있게 놓여 있는 중에 자연스레 입구를 가리워 주고 있었다. 입구에서 십여 장을 나아가자 홀연 푸른 물이 앞을 막아섰다. 분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구슬같은 물살은 비뢰동처럼 아래로 흘러내렸고, 저 아래는 만 길도 더 되는 낭떠러지였다. 파아란 물살 앞 엔 가이없는 하늘인데 저 멀리 태양이 보이는가 하면 구름이 앞을 가리며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말로 표현키 어려운 기묘한 풍경에 접하자 금선과 소화상은 칭송의 말을 연방 토해냈다. 원래 이 동굴은 깊은 계곡의 오목한 안쪽인 데다 등덩굴과 잡목 덩굴로 은폐돼 있어 쉽사리 눈 에 띄지 않을 뿐더러, 양쪽은 깎아지른 절벽이요, 구름으로 가리워지니 위로는 하늘이며 아래는 밑이 없어 신선도 알지 않고는 찾기가 힘든 곳이었다. 과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깊고 그윽한 복지(福地)가 아닐 수 없다. 세 사람은 한동안 풍광을 감상한 뒤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만사가 궁금한 금선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동굴은 새겨 있는 동굴 제호와 설비로 보아 옛날 신선들이 살던 곳이구려. 한데 석실의 밝 은 빛도 그 선인들이 남기신 기적일까요?" 엄인영은 두 사람을 정중히 석실 안에 좌정시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동굴이 정말로 옛날 고인이 머물던 곳일까요? 하긴 옛날 어느 고매하신 분들이 사시긴 하셨 겠지요. 그러나 정확히 전해 들은 것이 없으니 확실히는 알 수 없고, 다만 저 불빛은 소제가 설치 해 놓은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재미로 형화(螢火)를 연성해 동동정산(東洞庭山)에 있을 때, 스물 네 개의 형화를 채취한 바가 있습니다. 이 동굴은 무엇이든 다 훌륭한데 컴컴한 것 하나만은 큰 결함으로 생각되더군요. 한데 마침 석실이 스물네 칸이기에 제가 한때 재미로 스물네 개의 형화 를 하나씩 설치해 놓았습지요." 엄인영은 금선이 놀란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세를 설명해 나갔 다. "소제는 고모할머니가 나의 사저 강설군(姜雪君)과 함께 염홍약(簾紅藥)을 황산 오운보의 <만묘 선고(萬妙仙姑)> 허비랑(許飛娘)으로부터 구해온 후 한 일 년 동안 도법을 전수받아 그때서야 공 행이 겨우 원만해졌는데, 고모할머니는 곧 강사저한테 의발을 전하게 됐지요. 고모할머니는 강사 저에게 사매 염홍약과 함께 동정산 동쪽에서 계속 수련을 쌓다가 제삼차 아미파의 투검이 있을 때 도와주어 전생의 겁을 닦으라 했습니다. 한데 제가 문제였지요. 저의 어머니 천롱노녀(天聾老 女)는 일찍이 겁운에 걸려 병해하셨으나 아직도 그 원수를 갚지 못한 상태였거든요.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아무도 가르쳐 줄 사람이 없고 강사저와 같이 수련하자니 남녀유별이라 적들이 물의 를 자아낼까 저어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가사 취도인께서 동정산에 오신 것이었어요. 두 분은 수 많은 전후인과를 논하시다가 일찍이 장미진인께서 저를 가사의 문하에 보내라던 유언을 생각해 내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미파에 들어오게 된 것이죠. 고모할머니가 좌화하신 뒤 소제는 사저, 사매와 이별하고 성도의 벽균암으로 갔습니다. 무후사 입구에서 가사를 뵙고 스승으로 모시게 되 었는데 가사께선 즉시 망창산으로 가서 이영경사저를 도와 요인을 상대하여 온옥을 탈취해 오라 시더군요. 떠나올 때 사부님은 은밀한 이야기와 서찰 하나를 주시며 이사저를 만날 장소와 날짜 를 알려주셨습니다. 소제는 성질이 급한 데다 이 산이 또 워낙 크므로 요인이 어디에 숨어 있는 지 쉬이 알 수 없을 것 같아 그 녀석의 동정도 볼 겸 한 달 전에 미리 망창산에 왔습니다." 소화상은 엄인영의 의기에 감탄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엄인영은 숨을 한 차례 들이키고 나직이 말을 계속했다. "처음 온 며칠 동안 이곳 저곳으로 요인의 종적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높은 벼랑 위에서 짙은 안개와 구름이 가득 깔린 계곡 밑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홀연 번개 같은 빛살이 계곡 저 밑으로 쏘아나가는 게 보였습니다. 놀라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아 무도 어검비행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어떤 보물인 모양이었지요. 저는 급히 그 뒤를 쫓았습니다. 빛살은 구름을 뚫고 안개 속을 지나 바위의 오목한 속으로 들어가더군요. 바로 우리가 있는 이 동굴이었습니다. 소제는 동굴이 워낙 크고 오묘해 어떤 신선이나 영물이 잠복해 있겠거니 해서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신선이나 영물이 그 광선을 쏘아내고 거둬들이 며 조종하리라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함부로 마구 들어오진 않았어도 허실을 규명하고픈 생각은 뭉게뭉게 일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동굴의 문을 두드리며 반응을 엿보았습니다. 아무리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더군요. 종내는 슬그머니 침입해 들어왔지요. 살살 그리고 나중엔 대담히 동굴 전 부를 뒤졌으나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굴 안을 세밀히 조사한 저는 이곳이 주인이 없는 지가 오래 되었음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도 신중함을 떨칠 수 없어 조용히 반나절을 굴 안에서 서성여 보았습니다. 그 빛살은 끝내 간 곳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주인이 없다 하 면 내가 주인행세하며 머물리라 생각했지요. 각 방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형광을 배치했습니다. 매일 용공(用功)을 하는 외에는 줄곧 그 빛살을 찾아 온갖 곳을 뒤졌건만 지금껏 발견하지 못하 고 있었지요. 그러다 그저께 사부님의 서찰을 뜯어보게 되었습니다. 서찰에 의한즉 내일 이사저가 한 분 주사저를 데리고 이곳에 올 것이라더군요. 온옥을 탈취하는 거야 그분들과 함께 될 일이지 만 이 빛살에 대해서는 영 미련을 버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어찌 보면 이 동굴의 모든 돌이 그 보물스런 빛을 갈무리한 것 같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못 본 은벽한 곳에 그 보물이 숨겨 있는 것 같아 별의별 곳을 다 찾아보았건만 지금까지 발견치 못했습니다." 재미에 젖어 하염없이 귀를 기울이던 금선이 갑자기 질문했다. "아까도 그 빛을 찾아 헤매다가 우리와 만난 건가?" 엄인영이 고개를 외로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오늘 하오엔 그냥 심심파적으로 동굴을 나와 어슬렁거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 자기 괴수의 처참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였습니다. 비명소리는 산 북쪽 낮은 구릉에서 들려왔는 데 두 명의 도동이 요법으로 칠팔 마리의 큰 말곰을 몰아 북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 에 말곰이 좋지 않은 짐승이라 생각했기에 도와줄 생각이 나지 않아 돌아서려 했습니다. 근데 사 람도 없는 무인지경에 웬 도동이 둘씩이나 나타났는가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더구나 요기를 잔 뜩 띤 꼬락서니가 필히 요인의 주종자라 생각한 거죠. 저는 몰래 그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어느 굽은 산허리를 돌아서자 과연 사부님이 서첩에서 말씀하신 대로 큰 동굴이 나타나더군요. 그리고 그 도동들의 주절대는 말을 들으니 요인의 제자들인 게 분명했습니다. 그들 말에 의하면 일전에 한 여자가 온옥을 훔치러 왔는데 저들의 사부가 참패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인은 경계 심이 크게 일어 동굴 밖에 연무를 쫘악 깔고 극히 엄밀히 경계를 한다는 거였어요. 저는 그 사실 을 확인하자마자 무서운 요인한테 발각될까 겁이 나서 즉시 되돌아왔습니다. 그 뒤 동굴로 숨은 빛을 찾아 헤매다가 무의식중에 동굴 뒤쪽의 막힌 창구를 발견했습니다. 등나무 덩굴이 어우러진 작은 소로가 있기에 졸래졸래 쫓아가 본즉 통로는 점차 좁아지더니 끝내는 요인(妖人)이 거주하 는 동굴 바깥의 한 고목 속입디다. 만약 온옥을 탈취할 때 이 통로를 이용한다면 동굴 밖에 설치 한 사법(邪法)으로 고통받을 염려도 없고 아주 편리하겠더군요. 그곳을 발견하고 돌아오다가 두 분 사형을 만난 것입니다." 소화상과 금선은 엄인영의 이야기를 다 듣자 자신들의 처한 입장도 한바탕 들려주었다. 엄인영이 다시 말했다. "원래 두 분 사형께서 따로 명령받으신 일이 있었군요. 그러나 아직 날짜가 여유있는 게 다행입 니다. 내일모레까지 온옥을 훔치고 모든 일이 끝나면 저라도 공력은 천박하지만 형님들을 한번 돕고 싶습니다." 소화상은 엄인영의 말에 계속 고맙다고 칭사했다. "대단히 고맙네. 한데 사제의 말을 들으면 내일 누군가 한 분 도우를 도와 장미진인이 남긴 청 삭검을 찾는다 했는데 그 도우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일이 끝난 후 주, 이 두 사저와 함께 온옥을 탈취하니 어쩌니 말하는 것으로 본다면 바로 주사매를 일컫는 걸까? 어쩌면 동생한테 그 분을 도와주라 했다니, 취사숙께서는 검이 숨겨져 있는 곳과 방법을 미리 가르쳐 주셨겠지? 나와 선사제는 일전에 백만산에서 창피하게 패배를 당한 끝에 그 검을 얻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네. 한데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니 물건과 주인은 모두 정해진 셈이라, 검을 얻는 것은 안 될 일이 고 빌어야 할 판이니 그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이." 엄인영은 소화상의 말을 듣자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이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사저가 얻은 자영검과 대동소이하지만 얻는 방법은 자영검보다 훨 씬 어렵습니다. 검이 있는 곳은 이곳과 별로 멀지 않지요. 소제가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사실은 그중에 말씀드리기 곤란한 점이 있어서 이렇게 머뭇거리는 겁니다. 조금 있으 면 환히 잘 아시게 될 테니, 그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저는 오히려 아까 이야기한 그 빛살이 크게 마음에 걸립니다. 그 보물스런 빛은 아주 비범한 비검에서 뿜어져 나온 게 틀림없습 니다. 소제가 탐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왕 단서를 찾은 바에야 끝을 봐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 까? 우물우물 놓아 두었다가 훗날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얼마나 애석하겠습니까. 어떻습니 까? 지금 우리 셋이 한번 찾아볼까요?" 소화상은 엄인영이 뭔가 우물대긴 해도 그의 순진무구하고 흉금을 털어놓은 상쾌한 마음씨를 알 것 같았다. 아미문하가 되어도 하나도 부끄러울 것 없는 인물이라 마음 속으로 경애심이 일었다. 그가 두 번씩이나 검을 얻는 사람의 이름을 얼버무리며 그때마다 얼굴을 붉히는 것은 그만한 이 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는 금선이 뭔가 또 다그치려는 것을 보자 눈짓을 해서 말리며 입을 열었다. "엄사제 말이 지당하이. 우리 먼저 그 정체 모를 보물이나 한번 찾아보세!" 엄인영도 소화상이 자신의 입장을 알아주는 게 무척 기뻤다. 자신은 평소 얼마나 활달하고 깨끗 한 사람이었던가. 그러한 그가 말을 우물거리며 의심을 산다는 것은 스스로도 참기 힘든 일이었 다. 그러나 소화상이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 같자 잽싸게 그의 말을 받았다. "이 동굴의 문은 동굴 안쪽보다는 훨씬 작다 해도 빛이 스며들기는 충분할 텐데 비스듬히 안쪽 으로 들어갔거든요. 저는 동굴 밖에서 조심해서 주춤거리느라 빛의 종적을 놓쳤는데, 그때 모습으 로 보면 땅 속으로 스며든 것 같진 않았습니다. 동굴 안은 높고 지하통로가 많으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출입구도 허다할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열심히 찾아보았다 해도 빠뜨린 곳이 많을 거예요. 두 분 사형께서 예리한 안목으로 자세히 조사한다면 필히 찾아내실 겁니다." 이때 금선이 뭔가 영감이 도는 듯 소리쳐 물었다. "자네가 본 그 빛깔은 누렇고 거기에 검정빛이 약간 섞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하늘을 날 때는 번쩍번쩍 빛나며 변화가 무쌍하게 변하지 않던가?" 엄인영이 이상해 하며 되물었다. "그 빛살은 제사형이 말씀한 그대로였습니다. 한데 사형은 어떻게 그걸 아셨지요?" 용담호혈 萬蹄揚塵 鐵羽紅裳驅獸陣 孤身犯險 靈藥異寶返仙魂 금선은 엄인영의 기이한 모습을 보자 박수를 치며 깔깔 웃었다. "사형, 기뻐하십시오. 이 보검은 틀림없이 아미 응벽애의 청정혈에서 나온 일곱 개 비검 가운데 하나인 원구검(元龜劍)이올시다. 그리고 이 검은 사제가 거두어 쓰시게 될 것이라구요." "그게 무슨 말씀이오?" 엄인영이 계속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금선은 청정혈을 잘못 봉쇄해 비검 한 자루가 도망친 사실 을 알려주었다. "그 비검이 도망친 것을 구지선누이가 목격했었거든. 지선누나가 말해 준 바에 의하면, 그 검은 누런 색깔에 검정빛이 섞였고 번쩍번쩍 빛나더란 거야. 뭐라 형용할 수 없이 변화막측하게 변하 구 말야." 금선은 또 묘일부인이 서첩에서 일러준 말까지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소화상이 말했다. "나중 대사저와 내가 그 검들을 거두었는데 그 칠수검(七修劍) 중에 청사검(靑蛇劍)이 가장 거두 기 쉬웠었지. 그 검들을 거두는 데 무척 애를 먹었었어. 사라진 검 한 자루가 어디로 갔나 해서 무던히 걱정했었드랬지. 원래 이 칠수검은 아미파가 세 번째 요인들을 격파할 때 오독(五毒)을 막 기 위해 만든 것으로 한 자루도 모자라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그 검이 여기 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일부러라도 찾아야 할 판이니까, 우리 당장 찾아보세나." 엄인영은 자신이 보물에 애착을 가진 게 보람있는 일이 되었으므로 은근히 신이 났다. 그는 두 사람을 안내해 동굴의 은밀한 곳을 자세히 알려주고 셋이 각자 길을 나눠 수색했다. 이러한 일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혜안을 지닌 금선이 적격이었다. 그는 눈을 올곳이 뜨고 구석구 석을 뒤졌으나 아무 수확이 없었다. 칠수검 중에 한 자루가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안 그들 로서는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들은 밤을 도와 다음날 아침 새벽까지 내리 동굴을 훑었다. 그러나 새벽녘이 되니 영경 등이 왔다가 길이 엇갈려 되돌아갈 게 걱정되었다. 그들은 일단 수 색을 중지하고 이영경을 마중하기 위해 동굴을 나왔다. 소화상과 엄인영은 작은 폭포 앞에서 기다리고 금선이 두 사람을 맞으러 나갔다. 그는 몸을 날 려 하늘가에서 그녀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열시쯤 되자 과연 이영경이 주경운과 함께 신조를 타고 나타났다. 신조는 구름을 뚫고 하늘을 훨훨 날아왔다. 공중에서 기다리던 금선이 손짓해 부르자 이영경과 주경운은 알았다는 듯 말없이 그를 따라왔다. 동굴 앞에 내려 신조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두 여인은 소화상, 엄인영과 인사를 나눴다. 동굴에 좌정하자 금선은 원성이 이영경과 함께 있지 않은 게 이상해 물었다. "소사매, 원성은 데리고 오지 않았어? 그 녀석은 어떻게 됐지?" 영경이 대답했다. "그 짐승이 그렇게 궁금해요? 난 그동안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구요. 그 녀석은 지금 살았 는지 죽었는지 아직 몰라요!" 주경운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너희들 둘은 똑같이 성질이 급해 못 쓰겠다. 그런 식으로 거두절미하고 이야기해서야 누가 알 아듣겠니? 선사제, 당신은 우선 조용히 듣기나 해요. 영경이가 자세히 이야기해 줄 테니까 말야." 주경운은 말을 하는 도중 자기도 모르게 엄인영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똑같이 '짜르르!' 하는 전율을 느꼈다. 자신들의 이상한 감정흐름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묘한 행동 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영경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펼쳤다. 이영경은 그날 묘일부인의 비검전서를 받고 혼자 망창산에 가도록 허가를 받자 뛸 듯이 기뻤다. 피보다 진한 우정으로 맺은 친구를 구한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문하에 갓 들어온 풋나기에게 그러 한 중책을 맡기는 스승이 너무나도 고마왔던 것이다. 희망에 부푼 그녀는 총총히 응벽애의 동문 들과 작별하고 신조와 원성을 데리고 일로 망창산으로 떠났다. 이영경은 아미에 들어온 뒤로 줄곧 응벽애에서 동문들과 수련에만 몰두해 왔을 뿐 단신으로 여 행을 떠난 적이 없었다. 지난번 신약란과 함께 신조를 타고 청라산에 간 적은 있었다. 그때는 워 낙 마음이 들떠 있어 둘이 연방 재잘거리느라 지상의 풍경은 바라볼 여가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이나 패퇴하고 중독되어선 기가 팍 꺾인 채 돌아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자령의 미 진기에 의해 호송될 때는 그야말로 혼수상태에서 구경은커녕 대화도 나누지 못할 정도였다. 그 일로 해서 이영경은 내내 번민하고 있었는데 이번에야말로 기찬 기회를 낚은 셈이었다. 지금 은 공력도 월등 정진돼 있으니 한번 시험도 해볼 겸 심중의 우울함을 통쾌히 털어버릴 절호의 기 회였다. 이영경은 독수리 등에 우뚝 앉아 구름을 뚫고 바람을 가르며 인간세상을 굽어보았다. 발 아래엔 높은 산과 큰 강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기복이 심한 파도는 그 녀의 몸 뒤쪽으로 한없이 사라져 갔다. 어느 때 그녀는 두터운 구름 속에 파묻히곤 했다. 짙은 구름은 신조의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파 다닥파다닥 처음 듣는 싱숭한 소리를 냈다. 구름은 뭉게뭉게 그들의 주위를 스쳐가고 마치 솜털 처럼 가볍고 맑게 생긴 게 금세라도 쥐면 쥐어질 것 같았다. 손으로 꼭 쥐면 구름은 연기마냥 사 라지고 주먹은 펼치면 물기만이 촉촉히 손아귀를 흘렀다. 구름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다시 푸르고 밝았으며 아름다운 창공은 일망부제로 눈앞에 가이없었 다. 저 아래 성곽이 둘러쳐져 있고 산과 내가 굽이친 모습은 개미들이 오순도순 집을 짓는 것을 방불케 했다. 그녀는 이 순간, 자신이 신과 하늘에 벗해 함께 숨쉬고 있는 양 가슴이 후련했다. 마주쳐 오는 천공의 바람을 맞받아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상쾌함은 더욱 도를 더했다. 이영경이 곱고 힘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불노야, 너는 원성을 데리고 앞서 날아가라. 내 너를 쫓아가겠다!" 그녀는 말을 끝내자 독수리 등에서 뛰어내려 신검합일이 되어 마치 붉은 무지개가 해를 돌듯 바 람처럼 독수리를 쫓아갔다. 신조는 주인의 흥이 고조된 것을 보자 그 자신도 신이 나서 갑자기 두 날개를 펄럭이며 탄환처 럼 날아갔다. 그는 속도를 올리자 불현듯 지상으로 추락하듯 쏘아나갔다. 지상 수십 장 거리에 이 르자 불노는 다시 날개를 펄럭이며 상공으로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창공을 뚫고 하늘가로 날아가 버릴 기세였다. 독수리의 나는 기세는 마치 봉황이 춤추고 용이 꿈틀대듯 힘차고 웅장했다. 불노가 워낙 빠르게 날았으므로 영경은 아미파의 진전(眞傳)인 자영명검을 타고도 겨우 따라갈 수 있을 뿐이었다. 이들의 통쾌한 비상 속에 멍든 건 성성이 원성이었다. 불노가 두 날개를 요란 히 펄럭이며 나는 통에 원성은 새의 날갯죽지를 죽자사자 붙들었지만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만 같 았다. 원성은 신조를 꼭 붙들고 덜덜 떨며 괴상한 울음소리로 하소연했다. "주인님, 그만 좀 일루 올라오십시오. 이 원성이는 아차하면 떨어져 죽겠습니다!" 이영경은 신조가 일부러 날개짓을 사납게 해서 원성을 놀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엉큼한 불노와 불쌍한 원성이 대조되어 그녀는 웃음이 절로 났다. 이를 알아챈 불노는 더욱 몸을 흔들어 대며 날았고, 그 격렬함에 원성은 혼이 나간 나머지 눈을 질끈 감고 사시나무 떨듯 몸을 부들부 들 떨었다. 그러한 모습이 우습다 못해 꼴불견이라 이영경이 노한 듯 나무랐다. "바보같은 녀석아, 그렇게 담이 작아서야 엇다 쓰겠느냐!" 그녀는 한바탕 욕을 퍼붓고는 검광을 거둬들이고 다시 독수리 위에 올라탔다. 신조는 주인이 다시 타는 걸 보자 조용히 날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람도 없는 물 위를 매가 나 는 것처럼 고요했다. 발 아래 산과 강은 다시금 차근차근히 뒤로뒤로 스러져 갔다. 독수리 머리 위에 봉긋이 솟은 머리털이 살랑살랑 바람에 나부꼈다. 원성은 그제서야 한숨을 푹 쉬며 눈을 떴다. 이영경은 그의 용기 없음을 다시 한번 신랄히 꾸짖 었다. 사실 그렇게 담이 작아서야 뒷날 누구와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원성은 뭐라 한 마디 대꾸도 못한 채 죽을상이 돼서 눈치만 보았다. 그러다 높은 뫼와 깊은 강이 출렁이듯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보자 이영경에게 소리쳐 말했다. "망창산에 도착했습니다요!" 신조는 원성의 말을 듣자 순간 영경을 뒤돌아보았다. 이영경은 그에게 그들이 갈 길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요인을 먼저 경동시킬 필요는 없으니 산의 북쪽으로 살살 날아가자꾸나." 신조는 고개를 끄덕이고 십여 장을 더 올라가 높은 고도를 유지했다. 원성은 주인이 화낸 기색 이 아닌 걸 알자 다시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기가 옛날 놀던 곳이고, 자기가 산도깨비를 죽인 곳이며, 저기가 요인의 허리를 댕강 자른 곳이라고 슬슬 떠벌였다. 비행은 신속해서 담소하는 중에 망창산의 남쪽을 지나 북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소리가 산 뒤쪽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수만 마리의 수리가 일시에 노 해 부르짖는 것 같았다. 산 전면에는 검은 구름이 은은히 깔리고 있었다. 요기를 띤 안개도 표표히 무리져 떠올랐다. 바 람이 날카롭게 불 때마다 차가운 기운이 대지를 덮었다. 영경은 신조를 타고 검은 구름 속을 날며 자기와 신조의 날카로운 눈으로 한정동(寒晶洞)의 동 태를 살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검은 구름 속을 한 바퀴 비행했을 때, 신조가 갑자기 길게 부르짖으며 왼편 날개 를 축 늘어뜨리고 비스듬히 날기 시작했다. 영경은 가슴이 뜨끔해 아래쪽을 유심히 살폈다. 깜장 구름이 짙게 서린 속으로 하늘에 우뚝 솟 은 벼랑이 은은히 보였다. 그 벼랑 오목한 곳에 일진의 음풍(陰風)이 회오리처럼 말아오르고 있었 는데, 그 중간에 한 조각 검은 기운이 남비 속에 끓는 물처럼 보글보글 솟아올라 왔다. 온천물처 럼 끓어오른 검은 기운은 바로 독수리의 다리 아래까지 뻗치는 것이었다. 신조는 그 검은 기운이 무서운지 몸을 비틀며 옆으로 날았다. 회오리바람은 천만 개의 검은 그 림자를 말아올리며 하늘가로 급속히 솟아올랐다. 바람은 허공에 떠오르자 사르르 요동치다가 날 카로운 폭발음과 함께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정말 처절하고 괴이한 소리였다. 분산된 바람은 천백 개의 바람기둥이 되어 수만 개의 검은 점을 뿜어냈다. 작은 흑점은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독수리 등에 앉아 있던 영경은 미미한 미풍이 흑점을 동반하고 날아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 나가는 것을 느꼈다. 흑점이 얼굴에 닿자 뼛골에 스며들 듯 차가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흑점은 꽃잎처럼 생겼는데 매미 날개처럼 얇았고 새까만 수정 같았다. 언뜻 보면 눈 같았으나 눈은 아니었다. 손이 닿자 눈처럼 사르르 녹았지만 손끝엔 얼음보다 더 싸늘한 차가움이 엄습해 마비되는 듯했다. 바로 스승이 서첩에서 설명한 흑상(黑箱)이 바로 이것인 모양이었다. 이때 신조와 원성도 검은 서리가 몸에 닿자 차가움을 못 이겨 부르르 떨고 있었다. 원성이 차가움에 비명을 지르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신조마저도 몇 차례 길게 울며 날개를 떨었다. 이제 괴성은 점차 잦아들고 풍세도 가라앉았다. 아래쪽 풍광이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바위 뒤쪽은 북쪽을 향한 곳인데 색깔이 칠흑같이 까맣고 깊고 어두운 게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있었 다. 이 바위 뿌리에 둘린 백십여 장이나 되는 깊은 공동(空洞)은 아직 검은 연기를 뭉게뭉게 뿜어내 고 있었다. 괴수가 으르렁대고 사자가 입을 쩍 벌린 것 같은 공동은 마치 하늘의 태양이라도 삼 킬 성싶었다. 험악한 모습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영경이 아래로 내려가 상세히 살필까 마음먹을 때 돌연 동굴 속에서 괴성이 다시 울려왔다. 신조는 미리 방비하고 있었던 듯 회오리바람이 하늘로 뿜어오르기 전에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이번엔 워낙 높이 솟아 검은 서리는 그들의 바로 아래쪽까지 퍼져오다 그쳤다. 그러나 흑상은 더욱 멀리 넓게 사방으로 퍼졌고, 괴성도 만 마리의 괴물이 울부짖듯 천지를 진동했다. 아까보다 그 성세가 월등 세었다. 영경은 비록 회오리바람의 위쪽에 있었으나 독수리는 파도치듯 파급돼 오는 세찬 바람에 날개를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두 번째 회오리가 찾아들었어도 영경은 워낙 무서운 운무 속을 뚫고 동굴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겨우 동굴 입구에 다가갔을 때는 제삼차 회오리바람이 다시 일 기 시작했다. 이렇게 십여 차례를 거듭하자 영경과 신조는 지상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하고 지쳐 버렸다.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더욱 말할 여지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영경이 무조건 다급해 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을 유지했으나 신조는 광풍에 격탕될 때마다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원성은 이제 견뎌낼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 다. 망창산에 오기 전 신조의 등에 있을 때 영경으로부터 모진 꾸지람을 받은 원성은 두려운 기 색도 드러내지 않고 억지로 참고 있었다. 하나 위 아래 이가 부딪치는 덜덜 떨리는 소리만은 어 찌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영경은 마음 속으로 성성이가 은근히 측은했다. '사실 어쩔 수 없겠지.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한 주제에 아무리 영통했다 한들 별 수 없을 거야. 신조처럼 진전을 전수받은 바도 없고 도행이 깊은 것도 아니니 말야. 사부님의 서찰에 의하면 저 동굴은 차가운 바람이 뿜어나올 때만이 스며들어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했으렷다. 바람의 기 세가 갈수록 세어지는 게 지금은 들어갈 계제가 아닌가 보다. 차제에 원성을 신조와 함께 보내 그들의 동료나 자손을 찾고 말곰의 향방이나 알았다가 온옥을 탈취할 때 써먹어야겠다.' 그녀는 마음을 먹자 신조와 원성에게 내용을 설명해 떠나보냈다. "그 대신 너희들 쓸데없는 장난을 해서 말썽을 부리면 안 된다!" 그녀가 엄숙히 명령하자 원성은 살판났다는 듯이 신조를 타고 날아갔다. 영경은 하늘로 몸을 날려 정오가 되기를 기다렸다. 한낮이 되자 바람의 기세는 점점 숙지어갔다. 사람 구하는 마음이 급한 영경은 뼛골에 스며드는 냉기 따윈 생각지도 않고 미진기와 검광으로 몸을 보호하며 동굴로 부딪쳐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회오리와 검은 서리가 거의 사그라졌을 때도 동굴 입구는 새까만 연기가 서리어 있어 온천들이 계속 부글대는 것 같았다. 영경은 먼저 미진기를 쓰지 않고 신검합일이 되어 한 줄기 붉은 무지 개같이 동굴 속으로 쏘아 들어갔다. 그녀가 동굴 입구에 다다랐을 때, 검은 연무는 마치 천근 만근의 힘을 가진 양 진로를 막았다. 그녀가 힘찬 일갈을 터뜨리며 현공을 운용하자 자영검은 천겹같이 두텁던 검정 운무를 뚫어버렸 다. 동굴 안에 들어서니 오륙 척 너비의 돌바닥이었다. 그녀의 붉은 검광에 비친 동굴은 찬 서리와 모진 바람에 시달리고, 끊임없는 물과 벌레에 깎인 듯 돌이란 돌은 모두 칼날처럼 예리했다. 그러 한 돌바닥을 몇 자를 나아가는 데도 백여 자쯤의 깊은 굴을 들어가는 것만큼 힘들었다. 대기에는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일고 기이할 정도로 차디찬 공기는 매섭기가 한이 없어 모발이 뾰죽뾰죽 돋을 정도였다. 본래의 선골에다 그 많은 영약과 영단을 복용한 반 신선의 이영경으로 도 그 냉기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감히 태만히 할 수가 없어 미진기로 몸을 보호하고 여영남이 어디 있나 두리번두리번 살 폈다. '스승의 편지에는 요물에 붙들려 동굴 속에 있을 것이라 했다. 한데 여기에 있지 않고 만일 동 굴 저 깊숙이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구한다지?' 한창 마음이 조급할 때 구멍 저 밑바닥에서 괴이한 소리가 은은히 울려왔다. 동굴 밖의 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멀고 가까운 데서 서로 화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영경이 다급해 속으로 부르짖었다. '큰일났다! 만약 저 미칠 듯한 열풍이 동굴로 되돌아와 동굴 속의 검은 서리와 양쪽에서 협공한 다면 이 미진기로도 지탱키 어려워 나마저 이곳에 뼈를 묻겠구나!' 그러나 스승의 편지에는 오늘 동굴에 들어가 여영남을 구하라 했으니 오늘이 가면 기회는 없어 지는 것이다. 더구나 절친한 여영남을 버리고 갈 수도 없어서 영경은 사방을 배회하며 살피다가 여영남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보았다. 아무 응답이 없었다. 오히려 구멍 밑쪽에서 우뢰 같은 울음 소리가 가면 갈수록 긴박하게 들려왔다. 이영경은 자신의 붉은 검광을 통해 동굴 안의 검은 연무가 갈수록 짙어감을 볼 수 있었다. 냉기 가 매몰차게 스며들어 그녀는 혼신의 힘으로 버티며 위기를 극복할 생각에 몰두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여영남을 구출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면목이 없다. 아미산을 떠나 누차 실패만 거듭하고서 무슨 낯짝으로 응벽애의 동문들을 뵌단 말인가?'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를 악물며 위험을 불사하리라 생각했다. 검광을 타고 구멍 저 깊 숙이까지 죄다 찾아보리라 각오한 것이다. 그녀가 동굴 밑바닥으로 들어가는 구멍 입구에 다가가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 맞은편 동굴 벽 쪽에서 누런 빛이 번뜩 스쳐왔다. 영경은 몸을 바짝 세우고 그쪽을 응시했다. 검은 운무가 몽롱한 가운데 한 줄기 누런빛이 동굴 입구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동굴 입구 왼쪽 지상에 사오 척 길이 의 무슨 물건이 퍼뜩 눈에 띄었다. 몸 전체는 검은 운무에 휩싸여 자세히 볼 수 없었으나 머리 쪽 일부는 흰 것 같았다. 잠시 눈여겨 바라보던 이영경은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는 지상 최대의 보배라도 얻은 양 번개처 럼 날아가 일으켜 품에 안았다. 그것은 바로 여영남의 얼음장 같은 몸체였다. 영남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왔고 빳빳이 굳어 있었다. 이때 동굴 속에 이상한 굉음이 일며 검은 안개가 짙게 솟구쳐 올라왔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이영경은 조금도 방심할 수 없어 여영남을 품에 안자마자 검광을 일으켜 검은 연무가 자욱한 동굴 입구를 뚫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여영남 의 몸이 자신의 뼈를 에일 듯 차가운 것도 따질 겨를이 없다. 그녀의 몸이 지상으로 수십 장 솟아올랐을 즈음 홀연 한 줄기 누런빛이 정면으로 날아왔다. 영 경은 한 사람을 가슴에 안은 데다 혼신의 힘으로 냉기와 버티고 있는 중이어서 저항할 방법이 없 었다. 이때 돌연 일단의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영경이 자영검에 의 지해 겨우 날아가는 길만 열고 있을 때 처절한 비명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두 갈래 빛이 동시에 번쩍이자 황색 검광은 지상에 떨어지는 운석처럼 추락해 갔다. 이영경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 일단의 검은 그림자는 바로 신조였다. 신조의 등에는 원성이 두 자루 장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장검이 적을 격퇴한 것이었다. 영경은 사람을 구하는 게 긴요했으므로 비록 미진기로 호신하고 있어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혹 시 실수나 있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들을 불렀다. "강우야, 빨리 이쪽으로 오너라!" 신조가 날아오자 그녀는 독수리 등에 타고 구름을 가르며 하늘을 날았다. 영경은 산의 남쪽으로 날도록 지시했다. 그들이 멀리 가기 전에 광풍노도 같은 바람이 크게 일고 검은 연무가 하늘을 덮었다. 또다시 저 리도록 시린 한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그 사이 영경은 산의 북쪽으로 돌아 햇빛이 잘 비치는 곳 에 내렸다. 그녀의 몸은 녹아내린 물로 흠씬 젖어 있었고, 여영남은 아직도 강시마냥 굳어 있었다. 다만 코 끝에서는 미미하나마 숨결이 돌고 있었다. 처참한 친구의 몰골을 보자 이영경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서둘러 영남의 가슴 쪽 얼음들을 녹이고 체온이 제대로 있는가 살펴보았다. 다행히 양광 은 따사로이 비쳐 냉기를 서서히 열기로 바꾸어 주었다. 마침 때가 여름날인 덕을 단단히 보고 있었다. 드디어 여영남의 전신이 굳은 강시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얼굴도 산 사람같이 변했 으나 안색은 아직도 창백했고 두 눈은 꼭 감고 있었다. 입을 이때껏 악물고 있는 게 강시현상에 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옷을 벗기고 앞가슴에 손을 대어보았다. 다른 곳마냥 얼음장같이 차가웁진 않았다. '구할 수 있겠다. 천지신령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녀는 영단을 꺼내 영남의 입을 벌리고 흘려넣었다. 영단이 목구멍을 가까스로 넘어가자 이영 경은 겨우 원성에게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물을 여유를 회복했다. 원성의 자손들과 말곰들은 모두 빌어먹을 요물의 해침을 받고, 현재 두 군데 은밀한 암석의 협층 속에 숨어 산다는 것이었다. 이영경은 여영남을 독수리에 태워 가야 했으므로 원성에게 잠시 망창산에 남아 있도록 명령했 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그때 함께 온옥을 탈취하기로 약속했다. 그녀는 총총히 영남을 안고 신조 를 몰아 아미산으로 향했다. 응벽애에 도착하자 제영운 등은 그녀가 여영남을 쉽사리 구해 온 데 대해 무척 기뻐했다. 그들 은 이영경과 여영남을 부랴부랴 동굴 안으로 맞아들였다. 여영남은 단약을 복용한 데다 오는 도중 따뜻한 햇살과 바람을 쏘여 상체는 이제 그렇게 차가웁 지 않았다. 그러나 사지와 수족은 아직도 얼음처럼 냉랭했다. 제영운이 이영경에게 말했다. "영경사매가 이렇게 신속히 사람을 구해 올 줄은 몰랐어. 정말 축하해. 내가 보기엔 소생하는 건 걱정없으나 한정동에서 풍상을 너무 독하게 당해 현재로선 마비가 완전히 풀릴지 걱정이야. 영남 의 사지와 몸 속의 피까지 얼음처럼 굳었으니 고통도 대단할 거구. 완전히 회복하려면 바로 그 온옥이 있어야 할 것 같애." "온옥만 있으면 영남언니를 완쾌시킬 수 있나요?" "물론이지." "그럼 내가 다시 가서 온옥을 탈취해 오겠어요." "금방 전에 비뢰동의 조사제한테서 전신이 왔는데 영경사매가 떠난 직후 요인의 흔적을 발견했 다더군. 너무 늦으면 안 되니 조심해서 빨리 갔다오게나." 이영경은 총총히 젖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여러 동문들과 작별하고 신조와 함께 응벽애를 떠났 다. 신조를 타기 전, 두 눈을 꼭 감고 창백하게 누워 있는 여영남의 자태를 볼때 그녀는 그만 애 간장이 녹을 것만 같았다. 이영경이 망창산에 도착했을 때는 온 산이 깊은 밤에 파묻혀 있었다. 빈 산은 적적하고 사방은 인적없이 쓸쓸했다. 영경은 별빛과 달빛을 등불삼아 산곡들을 살펴보았다. 고요하고 허허한 사이 로 개울물소리와 바람이 나뭇잎에 살랑이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이영경이 속으로 생각했다. '여영남을 급히 구하느라 말곰과 성성이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 물어보질 못했구나. 요괴의 소굴 은 옛날 그 동부에 있을까!' 잠깐 생각하는 사이 신조는 전날 영남을 구하던 곳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영경은 독수리의 비 상을 멈추고 원성을 소리쳐 불렀다. 신조도 서너 차례 길게 울며 동료를 불렀다. 아무 응답이 없 었다. 영경은 속으로 은근히 욕을 퍼부었다. '이 멍텅구리가 어디 가고 없단 말인가. 내가 경황중에 자세히 명령을 못 내렸다손 치더라도 내 가 왔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영경은 그들이 헤어졌던 부근의 은밀한 곳을 찾아보았지만 아무 흔적도 없었다. 다시 신조를 타 고 그녀는 불노의 영민한 눈으로 사방을 자세히 둘러보게 했다. 역시 아무런 종적도 없었다. 하늘의 별은 점차 빛을 가리우고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부아가 치민 영경은 그들이 헤어졌던 곳에 다시 내렸다. 어쨌든 그곳을 떠나서는 원성을 만날 성싶지 않았다. 아침까지 그곳에서 기다 리고 있다가 다시 계획을 세우리라 생각한 것이다. 신조는 영경이 내리자 하늘로 솟아 어딘가로 사라졌다. 영경 홀로 암석 옆에 앉아 조식을 취했 다. 이때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슈수슉!' 낮고 예리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 차츰 가까이로 접근해 왔다. 그러나 온옥을 어떻게 탈취할까 골똘한 이영경의 뇌리는 그 소리를 대단 치 않게 여겼다. 한데 홀연 냉기가 그녀의 뺨을 때렸다. 영경은 깜짝 놀라 부르르 떨며 모발이 곤두서는 걸 느꼈 다.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앞을 노려봤다. 그녀의 석 자쯤 앞쪽에 하얀 괴물 하나가 우뚝 서 있었 다. 마치 나무귀신 같은 것이 키는 일 장 정도였는데, 사람 같아 뵈긴 했으나 사람은 결코 아니었 다. 온몸에 하얀 기운이 덮이고 있어 냉기가 으스스할 정도로 풍기며 주위를 매섭게 엄습하고 있었 다. 괴물은 서서히 그녀 가까이로 다가왔다. 이 컴컴한 밤, 아무도 없는 빈 산에 그야말로 괴기하고 요상한 괴물이 갑자기 나타나자 무공이 고강한 이영경도 화다닥 놀라 벌떡 일어났다. 가까스로 놀란 가슴을 가라앉힌 이영경은 괴물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괴물은 횟가루처럼 하얀 얼굴이었으나 이목구비는 모호하여 분간할 수 없었다. 괴물은 그녀를 향해 냉기를 뿜어내며 발도 움직이지 않은 채 흐물흐물 다가왔다. 영경은 그가 심산의 도깨비 따위지만 상당한 능력이 있으리라 판단해 암중으로 여차하면 하수할 준비를 했다. '도대체 요 괴물이 나하고 무슨 장난을 하잔단 말인가? 좋다, 저 녀석이 한 발 전진하면 나도 한 발 뒤로 물러서 주마.' 괴물은 이상스레 급히 전진하지 않아 영경도 천천히 물러났다. 이렇게 일진일퇴하며 이십여 보 를 후퇴했을 때 영경의 뇌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원성은 평소 극히 영민한데 어째서 오늘 여기서 기다리지 않았을까 보냐. 틀림없이 이놈의 요 물한테 암산을 받았구나! 하지만 원성이 차고 있는 쌍검은 보통 무기가 아닌데 이 따위 멍청이한 테 당한단 말인가. 그것도 이상하잖아.' 영경의 생각이 오락가락하는데 홀연 목 뒤에 찬 기운이 훅 끼쳐왔다. 그녀는 홱 머리를 돌려 살 펴보았다. 또 하나의 하얀 괴물이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앞에 있는 괴물과 똑같은 모습이었 다. 뒤쪽 녀석은 그녀와 겨우 두 자 거리밖에 되지 않아 팔만 뻗어도 재꺽 그녀를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앞의 괴물이 천천히 다가온 것은 원래 한 곳에 그녀를 가두어 협공하려는 요량이었던 모 양이다. 영경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건방진 요물이구나. 나를 협공하려 들다니! 그러나 네놈들이 내가 무서운 사람이란 것을 몰랐으 리라!' 바로 그때, 두 괴물은 '창그랑창그랑!' 쇳소리를 두 번 내더니 덮쳐왔다. 바람이 일고 구름이 날 며 천지가 한꺼번에 요동쳤다. 이영경은 일찍 방비가 돼 있었으므로 다리를 차자마자 하늘로 솟 아오르며 비검을 날리려 했다. 한데 두 괴물은 영경에게 달려들지 않고 자기들끼리 엉기어붙으며 뒹굴었다. 냉기가 사방으로 발산되면서 모래가 날고 돌멩이가 튀었다. 한덩어리가 된 괴물들이 부딪칠 때마다 나무들이 모두 우지끈우지끈 부러졌다. 그들은 마치 바로 곁에 있는 영경은 보지도 못한 양 저희들끼리 엉키어 떨어질 줄 몰랐다. 이영경은 호기심이 크게 일어 검을 거둬들이고 조용히 방관했다. 마음 속으로 기이한 생각이 들 었다. 도대체 이것들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똑같은 괴물이 어째서 죽자사자 싸우고 있단 말 인가. 동녘에선 벌써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영경은 오래 더 참지 못하고 자영검으로 붉은 무지개를 만들어 두 괴물을 냅다 후려쳤다. 붉은 검광이 번쩍하자 하얀 그림자들은 번개처럼 종적을 감춰버렸다.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하늘이 훤히 밝아왔는 데도 신조는 돌아오지 않았다. 불노는 어제 원성과 함께 성성이와 말곰 있는 곳에 갔었으므로 그곳에서 원성을 못 찾으면 어딘가라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한동안 을 기다렸건만 독수리와 성성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이영경은 허공으로 몸을 날려 주위를 멀리 내다보았다. 태양은 하늘가로 타고 올라 먼 산은 붉게 빛나고 가까운 산록은 푸르고 싱싱했다. 맑은 하늘은 위아래로 청명해 하루의 싱그러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한데 북쪽 산너머만은 유독 침침한 게 수십 장 둘레에 회색 구름이 드리운 것 같았다. 마치 안 개가 짙게 깔린 형세인데 그 속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이영경은 요즈음엔 공행이 진전된 터라 이상한 조짐을 판별할 줄 알았다. 원성이 실종되고 하얀 괴물이 두 마리나 나타난 데다 신조마저 한 번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흉험이 가로놓인 게 아 닐 수 없었다. 이 부근은 요인의 소굴은 아니더라도 좋은 곳은 아닐진대 회색 연무가 그득히 깔 린 저것은 필히 요물이 뭔가 희롱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영경은 급속히 북쪽 산록으로 날아갔다. 연무가 짙게 깔린 산록 아래를 굽어본 영경은 크게 놀 라고 말았다. 회색 연무 사이로 원성이 신조를 타고 두 자루 검을 마구 휘두르고 있는 게 은은히 보였다. 원 성의 두 갈래 검광은 검광 기운을 쫙쫙 쪼개 팽개치고 있었으나 그 검은 기운은 살아 있는 물체 인 양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여들었다. 검광에 쪼개져 나간 기운은 하늘로 솟았다가는 이내 한 가 닥 검은 필선(匹仙)이 되어 그들의 머리 위를 덮어씌워 갔다. 검은 기운을 뚫고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원래 이영경이 내려다본 아래쪽은 극히 은밀한 계곡으로 깊이가 백여 장도 더 돼보였다. 그 계 곡에 수십 장의 검은 기운이 융단처럼 쫙 깔려 춤추듯 사방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영경은 신조와 원성이 위급한 것을 보자 분기가 탱천했다. 그녀는 요인이 어디 숨어 있는지 무 슨 요술을 부리고 있는지 흑백도 가릴새없이 날카로운 호통을 내지르며 쫓아 내려갔다. "원성아, 겁내지 마라. 내 너를 구해 주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자영검이 검은 기운을 뚫고 들어갔다. 마도를 무찌르기 위해 제련된 장미진인의 명검은 역시 신출귀몰했다. 한 가닥 붉은 검광이 검은 기운 속을 한 바퀴 빙 선회하 자 귀신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한바탕 계곡을 울리고는 검정 기운은 온 하늘로 흩어져 버렸다. 모 두 검은 구름이 되어 하늘가로 둥둥 떠서 사라졌다. 원성은 신조의 등에 타고 거의 하룻밤을 싸우다시피 한 탓인지 힘이 고갈된 끝에 금방 혼절할 것만 같았다. 그는 주인이 나타나 요법을 파지한 것도 모르고 마냥 두 자루 검을 허둥지둥 휘두 르며 멈출 줄을 몰랐다. 신조가 주인을 보고서 기뻐 길게 울음울자 그때서야 원성은 칼을 멈추었 다. 워낙 지친 터라 기쁨도 표출치 못하고 멍하니 주인을 바라보았다. 영경이 신조의 등에 올라타며 물었다. "요인은 어디 있느냐?" 원성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대답했다. "두 꼬마 도깨비가 방금 전 저 암반 위에 있었걸랑요." 영경은 검광으로 몸을 보호하며 원성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큰 암석 위에 뾰죽이 튀어나 온 돌이 하나 보였다. 돌 위에는 호로 하나가 뒹굴고 있었는데, 별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소홀히 대할 수는 없는 터라 영경은 검광을 뿌려내 사납게 후려쳤다. 호로는 대번 박살이 났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으나 무슨 기이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원성이 적과 애써 싸우느라 신지가 맑지 않아 엉뚱한 소리를 하는가 싶어 이번엔 신조에게 물어보았다. 하나 신조도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했다. 영경은 아무 방법이 없자 혼자 생각했다. '요인이란 놈이 상대하기 힘든 줄 알고 잠시 피했구나. 필히 안 보이는 데서 뭔가 장난을 칠 것 이다. 나는 현재 밝은 데 있고 적은 어둔 데 있으니 조심해야겠다. 잠시 이곳을 피해 원성으로부 터 그동안의 경과를 들은 뒤 요인의 소굴을 치던지 어쩌던지 작정하자.' 그녀가 신조에게 하늘로 날아가라고 말하려는데 원성이 급히 하소연하듯 말했다. "주인님, 지금 가지 마십시오. 우리 애들이 지금 이 아래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 버리면 저들은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할 겁니다. 주인님, 제발 은혜를 베풀어 저들을 살려주십시 오!" 원성은 말을 끝내자 아래쪽을 향해 두 번 길다랗게 소리쳤다. 조금 있자 쿵광거리는 소리가 산 곡을 진동했다. 먼지가 뽀얗게 일며 크고 작고 뚱뚱하고 홀쭉한 삼백여 마리의 성성이들이 나타 났다. 그 뒤를 이어 사오백 마리쯤의 말곰이 아그작거리며 따라나왔다. 그들은 한 마리 한 마리 영경을 보는 족족 무릎을 꿇고 처량히 울부짖었다. 애통한 모습이 차마 형용키 어려웠다. 영경은 지난 옛정이 우러나 자신도 모르게 감동했다. 그녀가 원성에게 물었다. "옛날 망창산의 성성이와 말곰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니?" 원성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답했다. "웬걸입쇼. 그들 중 굉장히 많은 수가 요괴한테 잡혀먹히고 이제 겨우 이 애들만 남았는 걸요. 어제 제가 두 협층 속에 숨어 있는 요것들을 겨우 찾아냈습지요. 주인께서 오셔서 그들을 위해 요인을 제거할 거라 일러줬더니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제 주인께서 절 두고 가 시길래 저들과 같이 있을라구 이 협층 속으로 왔는데, 제가 조심하지 않는 사이 그 배라먹을 꼬 마도깨비가 두 놈이나 제 뒤를 따라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을 처치할 수 없었느냐?" "제가 그들을 이길 수는 없었으나 질 수도 없었습죠. 고것들이 바윗굴을 봉쇄했으나 이 원성이 가 두 자루 쌍검으로 그들을 꼼짝 못하게 했걸랑요. 그들은 한 발짝도 내 앞에 접근하질 못했는 데, 쌍것의 또 한 마리 꼬마귀신이 나타나 말곰을 자그만치 열여덟 마리나 잡아갔답니다. 이제 그 런 식이라면 이 원성의 자손은 모두 다 죽게 됐었지라요. 빌어먹을 꼬마귀신들이 검댕이 기운까 지 뿌려놔서 저는 한시라도 칼춤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이제 검댕이 기운에 씌우기만 하면 폭하 고 꼬꾸라져서 뒈질밖에 없으니께....." "말을 빨리빨리 해라!" 영경이 다그치자 원성은 일부러 눈물을 질끔거렸다. "마침 그렇게 위험할 때 멀리서 귀신부르는 소락대기가 납디다. 꼬마귀신들은 그 소릴 듣자 검 댕이 기운도 거두고는 동굴만 봉쇄해 놓고 싹 사라지더군요. 저와 애들이 힘을 모아 밀어봤으나 봉쇄된 입구는 끄떡이 없습디다요. 우리는 그저 꽥꽥 소리지르며 주인께서 듣고 찾아오길 바랐습 죠. 헌데 홀연 동굴 입구에서 돌덩이 빠숴지는 소리가 나고 저 강우(鋼羽 : 쇠깃털, 신조의 애칭) 란 녀석의 울음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리고 동굴의 돌멩이도 부서져서 활짝 열렸습니다. 그 빌어먹 을 돌멩이는 크지도 않았던 것이 왜 우리가 밀 때는 꿈쩍도 않았는지 알 수가 없구만요. 그 생각 을 하면 정말 창피하다구요." "쓸데없는 소린 작작해!" "그래유, 강우란 녀석은 나보다 나은가 보죠. 우리 애들은 강우를 보자 놀라서 물러났습니다. 내 가 그들에게 소개하고 빨랑 도망치자고 하는 판인데 쌍놈의 꼬마귀신이 또 날아오질 않았겠습니 까. 강우가 날아오르기도 전에 그것들은 검은 기운을 덮어씌웠지요. 강우의 말이 주인님이 벌써 오셨는데, 그 역시 이 검은 기운은 산 혼으로 연성해서 만든 요법이라 뚫고 탈출할 수가 없다 했 어요. 다행히 이 쌍검은 그 따윈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이 원성이가 춤을 추며 막았습니다. 주인 께서만 오시면 될 일이었으니까요. 한데 검댕이 연무는 정말 대단하더구만요. 별거 아닌 성싶은데 검으로 한번 짜개치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랐다구요. 한 번 짜르면 요 빌어먹을 것이 흩어지 는 게 아니고 또 찰싹 들러붙질 않겠습니까. 저는 한편으론 죽어라 싸우며 한편으로는 고함쳐 주 인님을 불렀습니다." "나는 한 번도 너의 외침소리를 듣지 못했구나." "그야 물론입죠. 강우의 말에 의하면 검댕이 기운 때문에 소리가 밖으로 퍼지질 않는다더군요. 그저 주인께서 아셔서 찾아오는 것만 기다릴밖에 없게 되었지요. 워낙 위급한 경지에 이르면 강 우는 일겁을 다시 돌 셈치고 자기 머리의 금단(金丹)을 불사를밖에 없다는 거였습니다. 나중 이 원성이 도저히 지탱할 수 없게 돼 그에게 불사르라고 하자, 정말 아깝던지 주인께서 꼭 오실 거 라고만 말하더군. 참말이지 모든 힘이 쏘옥 빠지고 아무 가망이 없을 때 주인께서 때마침 잘도 와 주셨구만요." 원성의 넋두리 같은 경과보고를 듣자 영경은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그는 청라산에서 두 번 난 리를 치른 뒤부터는 퍽으나 진중해져 있었다. 적이 싸우지 않고 물러갔다는 것은 필히 무슨 계책 이 있을 것이요, 위험이 더해진 셈이었다. 더구나 눈앞의 이 많은 성성이와 말곰들은 자기 한 사람한테 의지하고 있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빨리 도망치라 한다면 성성이는 몸이 비교적 가벼워 뛰고 날치며 쉽사리 숨을 곳을 찾 아 잠적할 것이다. 그러나 말곰은 모두가 덩지가 크고 둔해서 달릴 때 말굽소리가 산악을 진동할 터라 요물들이 추 적하는 데 좋은 목표물이 될 것이다. 이들과 같이 있다가는 저 무서운 요물의 절호의 표적이 되 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요물의 손에 그냥 넘겨주는 꼴이 된다. 이영경이 어찌할 줄 몰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성성이와 말곰들이 일제히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원성도 그들 못지 않게 슬피 울며 하소연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자 영경의 마음 속엔 측은한 동정심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부님의 편지에도 저들을 도우라는 말이 있으니 우선 되는 대로 저들을 살리고 보자.' 그녀는 원성에게 쌍검을 들고 앞서서 길을 열으라 명령하고 자신은 신조를 타고 뒤를 따라가기 로 했다. 계곡은 심히 깊고 그윽하며 굴절이 격심했다. 두 개의 바윗굴을 지나자 겨우 험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뒤에 쫓아오는 요물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성성이와 말곰들은 사람들한테 지지리도 놀란 듯 죄다 간이 오그라진 표정으로 허겁지겁 앞만 보고 달렸다. 뒤를 돌아보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계곡을 나온 뒤 성성이들은 밀림과 산등성이를 잘도 타고 넘었다. 그러나 둔중한 말곰들은 뒤뚱 거리며 따라가느라 너나없이 다투어 먼지가 뿌옇게 일고 말발굽소리는 계곡을 진동했다. 영경은 신조의 날개를 넓게 펴고 얕으막하게 천천히 날게 하면서 이 겁많고 도망치는데 용맹한 일단의 부대를 잘도 유도해 갔다. 그녀는 마치 부대를 독려하는 전쟁터의 장수 같았다. 수많은 높은 산등성이와 가파른 언덕을 넘자, 이번엔 한없이 깊은 계곡이 나왔다. 계곡의 끝이 다하는 곳에 밀림이 있었는데, 원성은 그들을 밀림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밀림의 저쪽엔 곧바로 깎아지른 높다란 벼랑이 있어 더 이상 갈 곳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앞에 홀립한 절벽은 높이가 만 장이요, 어디 짜개진 데도 없어 통로는 찾을 길이 없었다. 신조마저도 앞으로 날지 않고 되돌아 멈추었다. '이것 보아라. 원성이란 놈은 무슨 밥통 같은 짓을 한단 말이냐. 숨을 만한 곳은 죄다 그냥 지나 쳐 놓고는 숨을 데가 없어 그래 숲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간단 말인가? 그 누가 이런 곳을 못 찾 을까 보냐!' 영경이 원성을 부르려는데 밀림 속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듯 북새통이 일었다. 짐승들이 들어간 숲은 나뭇가지가 흔들흔들, 나뭇잎이 팔랑팔랑, 마치 푸른 파도가 일듯 출렁였다. 가랑잎 밟는 소리가 저벅저벅, 사사삭, 시끌벅적하게 들렸다. 썰물이 나가듯 한동안 법석을 떨던 숲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람이 자고 나무는 조용히 섰으 며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성성이와 말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영경은 기괴한 생각이 들어 소리쳐 성성이를 불렀다. "원성아, 너 어디 있니?" 그녀는 신조의 등에서 뛰어내려 밀림 속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밀림이 다한 곳에 아까 독수리 를 타고 보았던 가파른 절벽이 있었다. 아무 동굴도 없고 성성이와 말곰도 없었다. 그때, 원성이가 어느 등나무 굴 속에서 쏘옥 나타났다. 영경이 반가와 소리쳐 물었다. "여기가 어데지? 너의 부하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혹 요물들한테 당한 건 아니겠지? 요괴들이 이 부근에 있니?" "여기에 암굴로 통하는 구멍이 있습니다요. 안쪽에 오목한 벼랑이 있는데 아주아주 넓습지요. 예 전에 이 원성이가 과일을 발견했을 때 아무도 오지 않는 이곳에 숨겼더랬어요. 북쪽 산 속에 숨 을 데가 여러 곳 있긴 하지만 모두 그 귀신 같은 꼬맹이들한테는 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긴 박한 상황에선 여기밖에 숨을 데가 없걸랑요. 그리고 그 요괴의 소굴은 바로 옛날 주인님께서 산 도깨비를 멋지게 베죽이던 동부입니다. 어제 주인께서 떠나신 뒤 애들이 자세하게 알려주더군요. 옛날 주인님께서 보물을 잘 찾아보라 하셨는데, 그것도 요물한테 빼앗겼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 자면 아주 깁니다요. 그 요괴는 도통 동부를 뜨지 않지만 꼬마귀신들은 초랭낭이들이라 언제 쫓 아올지 모릅니다. 제가 강우에게 잘 좀 순시하라고 부탁하고 올 테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자세한 것은 암굴 속에 들어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영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원성은 번개처럼 밀림을 나갔다 왔다. 원성은 백수십 년은 됐음직한 등나무 덩굴을 들어올리고 영경에게 들어가게 했다. 등나무 안쪽에 둘레가 사오 장쯤 되는 동굴 이 있었다. 동굴은 컴컴한 중에도 이 장 사오 척 가량 저켠에서 끝나 있었다. 사방이 모두 이끼로 덮여 있었고, 마구 엉켜 있는 돌 때문에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등나 무 덩굴을 잘 덮어놓고 온 원성이 앞으로 나서 길을 인도했다. 한데 원성은 끝이 서너 자 남은 곳에서 홀연 몸을 돌려세우더니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는 되 돌아서서 두 걸음 정도 재차 돌아오는 듯하다가 아래쪽으로 가라앉듯 사라졌다. 영경은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살펴보았다. 원성이 사라진 곳을 보니 큰 돌이 하나 우뚝 솟아 있 는데 그곳 반대로 밑둥에 서너 자쯤 되는 구멍이 아래로 뚫려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았으니 망정 이지 멋모르고 들어온 사람은 도저히 발견하기 힘든 비밀통로였다. 구멍은 반듯이 뚫린 게 아니라 굽어 있기까지 해서 언뜻 본 사람도 그게 통로라고 알아차리기 힘들 것이었다. 영경은 동굴이 구불구불 뱀처럼 되어 있는 걸 보자 검광을 타고 뚫고 들어갔다. 처음 들어갈 때 구멍통로는 나선형이었다. 어느 곳은 돌이빨처럼 날카롭고, 어느 곳은 미끌미끌 한 돌투성이라 자칫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원성같이 날렵한 성성이도 데 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세 군데 굽이를 돌아가자 구멍은 차츰 넓어졌고, 원성도 서서 걸어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반 리 쯤을 내려가자 평지가 나타났다. 평지엔 극히 희미하나마 일 장 정도 넓이의 햇빛이 비추이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수백 장에 걸 쳐 있는 은백색의 발 같아 보였다. 하늘에서나 내려온 발이라고 할까. 그것은 암석 저 위쪽의 틈이 난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햇살 이었다. 그들이 선 곳은 바위와 바위 사이에 천연적으로 생긴 큰 공지였다. 넓이가 몇 이랑 가까이 될 것 같았다. 그 넓은 공간에 희끄무레한 그림자들이 우왕좌왕 움직이고 그들의 숨소리도 살아 있 는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영경을 보자 그들 짐승들은 우뢰같은 함성을 질러댔다. 그들은 다투어 쫓아와서는 영경의 몸 가까이에 분분히 엎드려 환성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영경은 요괴의 내막을 자세히 아는 게 급해 있었다. 그녀가 원성에게 명령했다. "떠들지 말고 물러나 있도록 해라.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해!" 원성이 명령을 받고 두 차례 사자후를 뿜어내자 짐승들은 자지러지듯 놀라 고개를 푹 숙이고 물 러났다. 그들은 조용히 한 곳에 몰려 앉았고 한바탕 소동이 끝나자 동굴은 고요해졌다. 원성은 영경을 안내해 측면에 있는 오목한 내실 같은 곳의 돌 위에 앉게 했다. 영경이 자리를 잡자 원성이 떠벌였다. "그 요괴가 있는 동부는 옛날 주인께서 거처했던 곳으로 제가 곤경을 치렀던 곳에서 겨우 이십 리 거리에 있습지요. 이번에 주인께선 다른 곳으로 오시느라 거길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생각 나시지 않습니까. 그 옛날 그 동부엔 두 마리 산도깨비가 살았지 않았습니까. 고것들을 주인께서 근사하게 제거하셨고, 그 덕에 이 산의 성성이와 말곰들이 일가를 이루며 살게 되었습지요. 동굴 은 정말 얼마나 컸습니까. 주인께서 떠나실 때 다시 오마고 분부하시길래 은덕을 잊을 수 없사와 무고한 살생 따윈 감히 하지 못하고 함께들 잘 지내었다 합니다." "잔소리는 빼고 본론만 빨리 해라!" 이영경이 매몰차게 책망하는 척해도 원성은 여전히 느물느물했다. "아, 알았습니다. 주인께선 그 주과를 얼마나 좋아하셨습니까. 그 때문에 애들도 매일 과일을 먹 고 살았답니다. 주과는 사방에 많았으므로 온 산을 뒤져 구했지요. 그러다 몇 달 전 주과를 발견 했던 암굴 속에 또 한 그루의 주과나무가 있는 걸 찾아냈습니다. 이 주과는 따내지 않으면 영원 히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 매일 수십 명의 성성이와 말곰들이 번갈아가며 지켰답니다. 한데 며칠 뒤 여자 둘이 홀연 하늘에서 나타나 주과나무 앞에 있는 큰 바위에 내려섰습니다. 그것 둘은 잔 인하게도 우리 말곰을 여럿이나 재꺽 죽였다는 게 아니겠습니까요. 말곰들은 부드득 이가 갈렸으 나 그들의 비검이 워낙 무서운지라 나서서 덤빌 수가 없었습니다. 애들은 그 사람들도 주과를 찾 아온 줄 알았으나 나중 보니 그건 아니었답니다. 바위를 뒤엎고 검광으로 땅을 파헤친 거라든지, 그녀들은 뭔가 찾고 있었지만 붉은 과일의 맛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하늘이 어둑할 때까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답니다. 그러나 돌연 옛날 주인이 보물을 찾는 것처럼 동부 안 으로 들어오더니 검광으로 사방을 수색하더랍니다. 동굴 안은 난장판이 되고 굴 안에 있던 애들 은 기절초풍할 지경이었으나 다행히 하나도 다치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녀들은 동굴에서 며칠 을 지냈답니다. 애들은 무척 궁금해 했는데 그중 담대한 몇이서 살금살금 다가가 살펴보았답니다. 두 여인은 벽을 향하고 앉아서 뭔가 손에 들고는 한 줄기 빛을 뿜어내는 것이었답니다. 처음에는 도대체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삼일 째 보니까 석벽이 빛살에 의해 구멍이 뻥 뚫렸더라잖습 니까. 석벽 저쪽에 석실이 수없이 많았고 널찍한 뜰까지 석실들 가운데에 있더랍니다. 두 여자는 다시 쑤석대며 수색을 벌였습니다. 최후엔 옛날 주인께서 앉곤 하던 돌을 끌어안고 손으로 계속 비비더랍니다. 마찰을 세게 일으켜 빛이 번쩍번쩍 빛나고 화염까지 오르더래요. 큰 돌은 '사사삭!' 하는 소리를 내며 눈처럼 돌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대요. 그러더니 돌은 기이하게도 황색과 청색빛 을 띠더래요. 처음의 청황색은 차츰 짙은 황색으로 바뀌더니 다음엔 진한 홍색으로 그리고는 짙 은 자색으로 변했답니다. 돌멩이는 그 크던 것이 작아지고 작아지더니 아주 밝은 색을 띠었답니 다. 그러더니 돌 위에 석 자 높이의 자색 불꽃이 일더랍니다. 두 여자는 좋아 어쩔 줄을 몰라하며 동시에 손을 뻗어 불꽃을 잡으려 하더래요. 바로 그 순간, 밤고양이 같은 울음소리가 들리고 허공 에서 사오 척밖에 안 되는 비쩍 마른 강시가 나타났답니다. 그 강시는 허물어진 코에 뾰죽한 입, 붉은 눈, 초록색 털이 덮인 뼈다귀만 남은 몰골인데 허연 이빨은 밖으로 뾰족이 내밀고 있더랍니 다. 두 여자는 자색빛에 너무나 정신이 쏠려 있어 처음엔 강시가 나타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답니 다. 돌연 그녀들 옆에 나타난 강시는 자기 품속의 물건을 취하듯 그 자색빛 나는 물건을 후딱 채 갔습니다. 여자들은 놀랍고 분한 끝에 손을 휙 저으며 푸른 빛살을 뿜어냈습니다. 그 빛살은 강시 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지요. 하지만 강시는 '히히히!' 하며 괴소를 날리고는 입을 쩍 벌리고 황 색 연기를 확 뿜어냈습니다. '탕탕!' 하는 쇳소리가 두 번 나고 자색 빛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 것은 두 자루 보검이었답니다. 여자들은 좋지 않은 걸 느끼자 그중 하나가 뭔가를 홱 끄집어냈고, 화염이 번쩍하고 이는 사이 동시에 달아나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강시의 목에는 쇠사슬이 매어 있고 두 다리에도 쇠고리가 걸려 있어 멀리 쫓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쫓아가지 않아 쇠사슬 이 다해 털커덕 떨어지더란 거죠. 강시는 두 손으로 쇠사슬을 부여잡고 고함을 빽빽 지르며 분통 을 터뜨렸으나 끝내 끊어버리지는 못하더랍디다. 한편 분통이 터진 강시가 어떻게 날아왔던지 애 들 있는 곳까지 와서 그 장작개비같이 비쩍 마른손으로 십여 마리나 되는 성성이와 말곰을 붙잡 아 목의 피를 죽죽 빨아먹었답니다. 모두 피가 빨려 죽었지요. 다만 그중 멀리 있던 두 성성이만 이 겨우 목숨을 부지해 도망쳤습니다. 그 애들 때문에 괴물이 나타난 걸 알게 됐죠. 그 요괴는 이 전의 산도깨비보다 조금 작았으나 무섭기는 월등하더래요. 하지만 동굴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아 이들은 그 동굴이 썩 좋지 않은 곳이 됐음에도 차마 버리고 떠나지 못했답니다. 그날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이틀 뒤쯤에야 강시가 잠잘 때 몰래 가서 복수를 하자 했더래요. 그래서 일차로 성성 이 셋과 말곰 둘이 동부 입구에 다가가 봤더랍니다. 그들은 대번 강시한테 들켜 쫓겼습니다. 그중 겨우 하나만 살아왔죠. 강시는 그 쇠사슬을 어떤 때는 길게 사용하는 듯했으나 역시 그게 극성이 었대요. 동굴에서 십 장 이내만 나다닐 수 있었거든요. 요괴는 사슬끝이 다하면 소리를 빽빽 지르 고 발버둥은 쳤으나 더 이상 나오지 못했습니다. 쇠사슬이 다하면 사슬에서 불꽃이 일어 강시의 초록색 털을 지글지글 태우는 것이었어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털이 타면 요괴도 펄쩍펄쩍 뛰 다가 돌아갔답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뿜어나오는 누런 연기는 몸에 닿기만 하면 죽는대요. 사 슬만 없었다면 우리 애들은 몽땅 죽었을 겁니다." 원성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분노에 두려움까지 깃들어 있었다. 영경은 측은하다못해 처량해 보이는 성성이의 등짝을 다정하게 두들겨 주었다. "이제 내가 그 요괴를 처치해 너의 애들을 편안케 해주마!" "물론 그러시겠지요. 감사합니다, 주인님!" 원성이는 죽어간 손자들을 생각하는지 눈물까지 주렁주렁 덧맺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뒤 동굴에 정탐하러 가는 애들은 가는 족족 붙잡혀 죽었습니다. 하나가 가면 하나가, 둘이 가면 둘 모두 죽었지요. 가까이 갈 도리도 없고 무서워서 다시는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 런데 얼마 후 동굴에는 꼬마 요물이 둘이나 늘어났습니다. 강시의 수하가 생긴 거예요. 크기나 생 김새가 사람 같은데 강시의 요술을 배운 탓인지 하는 짓이 괴악했습니다. 강시처럼 머리에 쇠사 슬도 없어서 온 산의 성성이와 말곰은 곧 재앙 속에 빠졌답니다. 무슨 법술을 어떻게 썼는지 모 르나 놈들은 손으로 검은 기운을 쏘아내 애들을 붙잡아 끌어가곤 했답니다. 처음엔 매일 두셋씩 만 잡아갔는데 나중엔 보는 족족 죄다 붙들어갔다지요. 강시는 애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지요. 다만 두 꼬마 요물이 애들을 잡아갈 때 항시 일정한 추적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즉 그들이 있는 곳에서 반 리밖에는 쫓아오지 않았고 그 이상 멀리 있으면 무사했죠. 가까이 갈 때만 붙잡아갔으 므로 접근하지 않으면 되었으니 멸종은 면했던 겁니다. 그래서 애들은 두 큰 암반 사이의 협층으 로 도망쳐 숨었습니다. 구차스럽게 목숨을 연장한 거죠. 반 달 간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 다. 그러다가 어제 주인께서 오셨는데, 마침 성성이 한 녀석이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의 말에 의 하면 붙들려간 애들 중 열에 일곱이 이미 죽었다더군요. 그리고 강시는 점차 살이 붙어 사람 꼴 을 갖춰가는데 동부 안은 온통 동물들의 해골로 그득하다고 했습니다. 요괴는 매일 동부에서 쇠 사슬을 끊기 위해 갈고 있고, 두 요물들을 시켜 우리 동료를 잡아오게 한답니다. 잡아가면 모두 먹는 건 아니고 매번 일곱 명씩 화염을 뿜어 태워서는 파란 연기로 만들어 호로 속에 집어넣는다 는 거예요. 두 꼬마 요괴는 강시의 수하이긴 해도 마음을 못 놓는지 동부를 나갈 때는 검은 연기 를 그들의 머리에 둘러씌우고 돌아오면 거둬준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일정한 거리가 있어서 아주 멀리는 못 가게 한답니다. 도망쳐온 애는 저번에 붙들려갔는데, 잡혀간 열다섯 명 중에 일곱은 그 날 당장 꺼슬려서 죽였고 나머지 일곱은 다음날 불태워 죽이더랍니다. 그는 검댕이 연기에 묶여 후동의 지하실에 갇혀 있었는데 처음부터 처량하게 울었더니 강시가 무슨 선심이 생겼던지 끝까 지 안 죽이더래요. 그러던 중 또다른 소년이 와서 검은빛이 번뜩번뜩하는 작은 검으로 흑연을 짤 라주더란 거죠. 도망나올 때 동굴 앞쪽을 지나오는데 마침 강시의 두 꼬마요괴는 동굴에 없었다 고 합니다. 동굴은 온통 성성이와 말곰의 뼈다귀로 그득하고 혈육이 낭자한 게 얼마나 많은 우리 애들이 살해당했는지 알 수 없더래요. 으흐흐흐!" 원성은 가락을 맞춰 흐느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원통하고 분한 모양이었다. 영경이 그를 위 로하자 마지막 이야기를 끝냈다. "주인께서 영남아가씨를 구하느라 경황이 없고 급히 아미에 돌아간 뒤 저는 기다리다못해 애들 한테 다시 갔었습죠. 한데 그 꼬마요물이 이 원성의 뒤를 따라올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지하에 들어가자마자 그 꼴을 당했는데 요행히 주인께서 돌아오셔서 이 구차한 목숨을 구했습니 다요. 고놈들은 주인님을 두려워하고 이곳은 자기들 동부와 무려 이백 리나 떨어져 있으니 강시 의 특명이 없는 한 결코 오진 않을 겁니다. 더구나 우리가 오는 도중 여러 개의 암굴을 들락날락 하여 뒤를 줄곧 따라오지 않는 한 우리의 행방을 모를 겁니다. 게다가 주인께서 보호까지 하고 계시니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이 산엔 백 년 전에 한 마리 산룡(山龍)이 살았습니다. 아주 흉악한 용으로 야수만을 잡아먹었지요. 이 암혈은 바로 신선이 그 용을 길들이던 곳입니다. 이 원성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낮에 용이 암벽을 뚫고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때는 이곳이 워낙 신비스럽고 용이 머물던 곳이기에 감히 와보질 못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용이 날 아다니는 게 보이지 않자 원성도 암벽 가까이 와서 과일을 따곤 했죠. 어느 해 봄, 복숭아를 따다 가 아차 실수해서 암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등나무 덩굴을 부여잡고 기어오르다가 이곳 입구를 발견했답니다. 호기심에 끌려 깊이 들어와서 이곳을 알게 됐습죠. 당시는 별로 유의하지 않았다가 주인님을 따라 내공을 학습할 무렵에야 이 암혈이 퍽으나 기묘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애들이 강시의 침해를 받아 갈 곳이 없기에 피하기 좋을 성싶어 데려왔습니다요. 이제 저들은 이곳 내막을 환히 알기 전엔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주인님, 어제 꼬마 요괴란 놈이 수 많은 성성이와 말곰을 잡아갔습니다. 얼마는 이미 죽었을 게고 나머지도 곧 태워죽일 것입니다. 제발 요물을 제거하셔서 저들을 구해 주십시오." 말을 끝내자 원성은 영경 앞에 꿇어엎드렸다. 영경은 원성의 이야기를 듣자 상대할 적은 강시와 세 명의 요동(妖童)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무서운 상대로 짐승들은 그림자만 보 고도 꽁무니를 뺄 정도이다. 스승의 서찰에 저들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 했는바 이는 원성을 통해 적의 내막을 소상히 알게 되는 것을 가리킨 것 같았다. 영경은 이왕 온옥을 탈취하러 왔으니 일차로 적들의 동정을 은밀히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부로 가는 길을 물어 떠나려고 하자 원성이 말했다. "주인께서 기왕 저와 같이 안 가실 바에야 이 암혈 후면에 있는 통로를 이용하십시오. 저쪽 측 로를 지나면 오목한 곳이 나오는데 그 밖은 넓고 허다한 산과일과 화초가 피어 있습니다. 그 끝 에 협층이 있고 두 벼랑이 마주서 있는데 높이가 백 장쯤 됩지요. 그 위 정상에 돌구멍이 나서 나갈 수가 있을 텐데 워낙이나 높고 가파라서 우리 같은 것들이야 기어올라 가기도 힘듭니다. 그 곳을 지나 밖으로 나갈 수가 있을 겁니다. 경치를 구경할 겸 겸사겸사 그곳으로 나가십시오." 영경은 원성을 따라 돌 틈새를 비집고 나아갔다. 과연 오묵한 대지가 나왔다. 어두운 속에서도 꽃 그림자가 하늘하늘 흔들리는 게 보였다. 기이한 꽃향내가 코끝을 스친다. 수십 장을 더 나아가 자 협층이 나왔다. 몇 자를 사이하고 깎아지른 벅랑이 높이 솟아 있는 품이 웬지 으스스해 보였 다. 갈수록 길은 옆으로 흘렀는데 홀연 석벽 위에 하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머리를 들어 위를 보니 벌써 홀구인 암창(岩窓) 아래였다. 창같이 생긴 암반의 출구는 풀잎 등이 어지러이 놓여 있는 듯 은은한 빛이 어우러져 보였다. 영경은 원성과 헤어져 검광을 타고 위로 날아올랐다. 올라갈수록 암창의 빛깔이 어두워졌다. 가 까이 다가가보니 그 암창엔 아무 출로가 없었다. 기이한 생각에 몸을 한 바퀴 돌리자 측방에 바 위의 틈새가 보였다. 아마 하얀 그림자도 이 틈을 통해 들어온 듯했다. 날아가 보니 과연 출구였다. 영경은 비검으로 등나무 줄기들을 자르며 나갈 길을 만들었다. 한데 그녀는 아까 보았던 암창이 아무래도 이상해 호기심이 당겼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암 창가에 가서는 검광을 비추며 살펴보았다. 무슨 동굴 입구 따윈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의 형태가 한 가닥 한 줄기 어지럽게 생긴 것이 멀리서 볼때 같은 나뭇잎은 아니었다. 색깔은 칠흑같이 검 었다. '아래서 쳐다볼 때는 확실히 무슨 잎 따위가 칙칙하게 엉켜 있는 것 같더니 왜 출구가 없을까?' 그녀는 요괴를 정탐하러 갈 생각에 오래 머뭇거리고 싶지 않았다. 영경이 몸을 돌리려는데 또다 시 머리 위에 미미한 광채가 번뜩였다. 암창의 문양 같은 곳에 불빛이 비치자 나무의 가지와 잎 이 생동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조금 전에 아래쪽서 보던 것과 똑같았다. 이상히 여긴 영경이 자세히 볼까 생각하는 중 또다시 번쩍하며 광채가 측면 틈새로 비쳐 들어왔 다. 그녀는 더 생각할 것 없이 검광을 조정해 틈새로 쏘아나갔다. 자색 무지개가 섬광처럼 스치자 틈새의 돌들이 '차랑차랑' 부서져 흩어졌다. 사람과 검이 동시에 밖으로 날아서 암반의 정상위에 우뚝섰다. 이때 검광이 허공에 부딪치는 소리와 동시에 검은빛이 번뜩이며 그녀 앞에 청의소년이 나타났 다. 어느 새인지 그 소년은 검광을 거두고 지그시 영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원숭이 같은 팔에 허리는 잘룩했고 얼굴은 관옥 같은 게 무척이나 빼어나 보였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경은 제영운으로부터 다른 문파의 검광 빛깔에 대해 자세히 듣고 있었다. 다른 파의 색깔은 여러 색이 섞여 순수하지 못하며 대체로 청, 황, 회, 녹, 홍색들로 돼 있다고 했다. 한데 소년의 검광은 새까만 속에 금빛을 띠고 있는 게 영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여하튼 좋은 사람 같지 는 않았다. 사실 이 암혈은 요괴의 암동으로부터 이삼백 리 떨어져 있다 해도 먼 것은 아니다. 성성이와 말 곰이 환히 보이는 데서 도망쳤으므로 요인들의 추적을 안 받았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소년은 겨우 십칠팔 세 가량이었고 맨발에 망혜를 걸친 게 도인보다는 차라리 중 같았다. 영경은 대뜸 이 소년을 원성이 말한 꼬마 요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급해진 영경 은 냅다 호통쳤다. "대담한 요물이 어디서 염탐하고 있느냐!" 그녀는 자색 무지개를 청의소년을 향해 비호같이 날려보냈다. 소년은 원래 가슴 가득히 짓눌린 심사를 달래기 위해 이곳에 와서 검법을 수련하고 있던 참이었 다. 한창 기분이 무르익는 판인데 갑자기 지하의 돌틈이 부서지며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아리따 운 홍의소녀가 튀어나갔다. 그는 깜짝 놀라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년이 보기에 그녀는 일전 선인(仙人)이 가르쳐 준 소녀였 다. 마음 속에 기쁨이 용솟음쳤으나 뭐라 말을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말을 못하는 소년은 뭐라 손짓을 하려 했다. 그때 소녀가 갑자기 자홍색 검광을 흩뿌려 온 것이었다. 위험을 느낀 소년은 며칠 전 선인이 가르쳐 준 검법을 펼쳐냈다. 그의 작은 검이 날자 검은빛이 허공을 날고 자줏빛 검광과 맞딪쳤다. 두 검광은 공중에서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이영경은 처음 자영검이 천하무적임을 믿고 자신있게 덤볐다. 그러나 소년도 두려움을 모르고 덤볐으며 약한 상대도 아니었다. 그의 검광은 까만 광채 속에 금빛이 번뜩번뜩해 영경의 자색 검 광과 잘 어울렸다. 한동안 고하를 가리지 못하자 영경은 마음이 다급했다. '요물 강시 수하에 있는 이 따위 녀석을 이처럼 이기기 어렵다면 장차 동부에 들어가서는 더욱 고전하겠구나.' 이영경은 다급한 마음이 분노로 바뀌어갔다. 더구나 소년이 아무 말도 없이 자기를 상대하는 걸 보자 혹 무슨 요법이라도 쓰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됐다. 얼마 전 쓴맛을 본 탓에 경각심이 크게 인 것이다. 그녀는 한쪽 발을 찍으며 공중으로 날아올라 아미파 진전인 신검합일을 펼쳤다. 소년은 자색 무지개와 자줏빛이 한 데 합쳐 신검합일을 이뤄 성세를 더하는 걸 보자 주춤 물러 섰다. 그도 일전에 신인한테 신검합일하는 수법을 배우긴 했으나 아직 수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섣불리 전개했다가 실수할까 겁이 났던 것이다. 적이 미처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황에서 공 연히 목숨을 잃었다가는 후회막급할 일이었다. 소년은 기회를 틈타 우선 도망칠 생각을 했다. 그러는 사이 소년의 검광은 점차 정채를 잃어갔다. 그나마 도주하지 않으면 위기가 경각에 닥칠 판이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고는 비검을 거둬들이며 번개처럼 도망쳤다. 그러나 영경은 줄곧 죽일 듯한 기세로 자영검을 휘둘렀다. 소년이 그토록 조심하며 물러섰지만 도주하는 순간 자색 검광이 그의 머리 위를 휘익 스쳐 지나 갔다. 머리가 갑자기 서늘해지자 소년은 도망치는 동시 머리꼭지를 더듬어 보았다. 뒤쪽 머리털이 몽땅 짤려져 나가 휑했다. 간담이 서늘해진 소년은 뒤돌아볼 여가도 없이 둔법(遁法)을 재촉해 줄 행랑을 놓았다. 마치 혜성이 떨어지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은 영경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재꺽 검광을 타고 부리 나케 쫓아갔다. 한 가닥 검은 연기가 검정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번개처럼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 었다. 두세 개의 계곡을 지나자 검정빛은 홀연 종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푸른 하늘엔 구름도 없이 청정하고 산등성이엔 구름이 지긴 했어도 숨을 데라곤 하나도 없었다. 검정빛이 낙하하는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무슨 은둔법을 썼단 말인가? 이영경은 사방을 한 차례 쓸어보았다. 낙조가 노을 사이로 은은히 비추이고 있고, 사방은 청명하 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북쪽 산등성이 후면은 안개가 깔린 듯 회색 기운이 이삼십 리 둘레로 쫙 퍼져 있었다. 가까이 날아가 보니 원성이 설명한 지형과 흡사했다. 그녀는 원성이 말한 석동의 옆길로 날아갔다. 길은 갈수록 낮아지고 몇 차례 굽이를 돌았다. 얼 마 가지 않아 옆길은 끝이 났다. 구멍난 바깥에 햇빛이 비치는 게 바로 출구였다. 그곳은 옛날 < 표묘아(票渺兒) 석명주(石明珠)를 만났던 큰 바위 밑이었다. 그녀가 옛날 노닐던 곳에 온 것이다. 강시가 머문다는 큰 동부는 그녀가 나온 구멍의 옆쪽 저켠에 있었다. 영경은 검광을 죽이고 차 근차근 동부 앞의 풍경을 훑어보았다. 거의가 예전과 똑같았다. '온옥을 훔쳐내는 것은 밤에 해야겠다. 온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고 지금은 아직 밝으 니까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자. 캄캄한 밤에 온옥의 소재를 알아내 손을 쓰는 게 월등 쉬우리라. 그래도 온옥을 못 얻으면 물러나가 다시 궁리해야지.' 이때 태양은 이미 높은 것에 가리워 하늘이 누렇게 물들고 있었다. 황혼이 되자 둥지로 돌아가 는 새들이 무리지어 날았다. 아까까지도 몽롱히 피어오르던 회색 기운은 어디로 갔는지 싹 걷히 고 없었다. 봉우리의 굽이친 곳에 구름이 걸려 있고 가파른 고당은 더욱 하늘로 솟는 것처럼 보였다. 산을 끼고 도는 강물은 밤이 되자 계곡과 함께 한층 그윽해졌다. 동굴 옆의 푸른 버들가지는 새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바람따라 너울너울 흔들렸다. 갈수록 청정한 산중은 또한 아름다움도 더했다. 그러나 이렇듯 아름다운 오구(奧區) 옛 동굴에 흉험 극악한 요물 강시가 잠복해 있어 위기에 싸여 있음을 그 뉘라 알 수 있겠는가. 벙어리소년과 청삭검 美仙娃 失機靈玉岩 啞少年 巧得玄龜劍 영경은 마음을 작정하자 입구 안쪽으로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일어나 움직 이려 할때 홀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영경은 살짝 밖을 내다보았다. 옆쪽 큰 동부에서 어린 동자 모습의 사람 둘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영경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은 표범 머리에 코는 움푹 들어갔고, 쥐같이 작은 귀에 독수리 턱을 가졌으며, 삼각형의 괴상한 눈에서는 광채가 번쩍번쩍 쏘아져 나왔다. 나이가 그렇게 들어뵈지는 않았다. 다른 한 사람은 장작개비처럼 비쩍 말랐는데 늑대 같은 머리통에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쥐같이 가는 눈에 매부리코를 지녔는데, 삼십 전후쯤으로 보였다. 둘다 아까 본 청의소년처럼 도포를 걸쳤으나 고쟁이는 유난히도 짧았다. 머리를 동자처럼 따올 린 거와 맨발에 망혜를 걸친 것까지 같았다. 영경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성이 말에 의하면 요물 강시 수하에 세 명의 요동이 있다 했는데, 이 두 녀석은 키는 비록 짝 달막하지만 어린 동자는 아니잖아. 그렇다면 요괴에겐 부하가 많은 걸까? 이것 참 단단히 주의를 해야겠는 걸.' 두 요인은 영경이 숨은 입구의 왼쪽 반반한 암석 위에 와서 앉았다. 그들은 가까이 앉아 뭔가 소근소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입구의 오른쪽에 숨어 있는 영경은 몰래 손을 써서 이 녀석 들을 처치할까 망설였다. 그러나 자칫 잘못해서 놓치는 날엔 줄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 꼴이 된다. 그럴바엔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기나 해서 허실을 탐지하는 게 훨씬 나을 성 싶었다. 그녀는 살살 두 걸음을 움직여 두 사람의 뒤로 다가갔다. 간격이 겨우 두 자 거리로 낮게 속삭 이는 소리도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비쩍 마른 사나이의 말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미도형(米道兄), 나는 당신이 알다시피 흑해(黑海)에서 천 년 된 산호를 채취하다 현천모모(玄天 姆姆)의 현손인 황장(黃璋)을 만나지 않았소. 황장은 나에게 현천모모의 칠금신술(七禽神術)을 가 르쳐 주었고, 그 뒤로 별무 실패한 일이 없었소. 당초 나는 온옥이 비록 갖고 싶은 보물이긴 해도 첫째 곤륜, 아미, 화산, 오대파 같이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없어 돌을 가루로 만들 수 없고, 둘째 후동이 뚫리지 않으면 보물이 어디 있는지 모를 뿐더러, 뚫린다 해도 상대하기 힘든 적수가 나타 날 거라 했소.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장미진인이 남긴 글에 의하면 온윽은 틀림없이 여기에 있고 다른 사람이 그 보물을 탈취한다 해도 임시 변화를 보며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 않았나 말야." 이때 미가란 자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그건 사실이지 않는가. 다만 임기응변에 우리가 능숙하지 못했을 뿐이지." "하지만 너무 조심하질 않았어. 나는 평소 그렇게 근신하는 사람인데 당신은 도통 듣질 않았다 구. 그리고 온옥을 얻으면 청삭검을 얻을 단서도 잡을 수 있을 테니 온옥과 검을 하나씩 얻는 셈 치고 오자고 그랬지? 꿈이야 좋았지. 여보게, 내가 뭐랬는가 말야. 내 말대로 당신이 먼저 정탐을 해보라니까, 그러질 않아서 이게 뭐야. 우리 둘 모두 이모양 이꼴이 되지 않았나 그 말일세. 젠장, 법보까지 싸그리 뺏기고 강시의 노예가 돼설랑 어른도 아니고 애도 아닌 이 꼬락서니라니! 우리 동도들이 보는 건 고사하고 나중 법보를 되찾아 도망친다손 치더라도 그 사실이 알려지면 우린 뭐야? 천하의 웃음거리지. 내참!" 미도우란 자는 벗의 장탄식을 듣자 자신도 한숨을 푹 쉬었다. "유도형(劉道兄), 이제와서 원성할 거야 없지 않수. 사실 양심껏 말한다면 우리 두 사람은 선량 한 축은 아니었어. 하긴 저 강시 양반한테 떨어지고 보니 세상에는 악인은 많고도 많은 거지만 말야. 한데 장미진인의 화운련(火雲璉)은 저 요괴도 끊질 못하고, 그의 원신(元身)도 자유자재로 놀고 있질 못하고 있어. 그가 아무리 전력을 다한들 동부에서 오 리 둘레를 떠나지 못하잖아.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성성이와 말곰을 천 마리도 더 죽였단 말일세. 지금은 산 혼을 채취해서 음마취 수화골쇄형대법(陰魔聚獸化骨鎖形大法)을 연마해야 하는데 그게 될 성싶냐구. 그리구 그 자가 하 는 꼬락서니를 보란 말일세. 우리보고 제자가 돼라 해놓고 우리가 어딜 나갈 일이 있으면 그가 천 년 동안 공을 들인 지살(地煞)의 기운으로 만든 흑살사(黑煞絲)를 머리에 씌워 방비하는 건 뭐 야. 그 사람은 도대체 우리가 천신만고 끝에 만든 법보도 우습게 알고 있잖아. 그 법보가 없이 우 리가 어딜 도망친단 말인가? 참, 세상 모를 소리지. 그리고 그 성성이와 말곰만 해도 그렇지 말일 세. 지금은 죽을 건 죽고 도망칠 건 죄다 도망쳤지 않은가. 그것들을 제때 잡아오지 않는다 해서 우릴보고 자기의 법보 만드는 일을 돕지 않는다고 핍박하니 그게 될 말인가?" "이제와서 우리가 뭘 원망하겠는가?" 유가 성을 가진 자가 체념적으로 말하자 미가 성을 지닌 사람이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그래놓고 그 자는 우릴보고 제자가 되라구. 흥, 하긴 그 꼬마녀석 말일세만 선풍도골에 할 일 없다고 강시의 제자가 된단 말인가? 강시가 아니라 우리가 보아도 그 녀석은 얼마나 귀엽게 생겼 느냐 말일세. 그 좋은 자질에 지금 한창 각파가 제자를 거두고 있는 판인데 어디 모실 스승이 없 다고 강시의 제자가 된단 말인가. 내가 보기에 그 녀석은 필히 좋지 않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으네. 물론 그 녀석이 사부와 어떤 소릴 하는지 모르지만 말일세. 하여간 녀석이 사부의 총애를 받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기분 나쁜 일이야. 득도한 지 오래 된 우리를 그 꼬마가 이래라 저래라 절제를 하다니 될 말인가. 성성이와 말곰이 어디 있는지 거리와 방향까지 알려주고, 그 빌어먹을 흑살사까지 덮어씌우고 보내니 말일세. 우린 그야말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한 마리 개가 되 고 말았어!" "당신 말이 맞긴 맞어. 오늘만 해도 그 성성이와 말곰을 백미화상의 신조와 그 무슨 늙은 신원 (神猿)과 함께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지 않은가. 한데 별것도 아닌 홍의 계집이 자줏빛 무지개를 뿌리며 흑살사를 짜르고 호로를 부수자 성성이와 말곰을 눈 빤히 뜨고 놓쳐버리고 말았잖은가. 내 애써 그것들의 향방을 끝까지 쫓으려 했는데 꼬마놈이 말리더구만. '성성이와 말곰의 향방은 조만간 알 수 있을 테니 당신들은 이 기회를 틈타 도망갈 생각은 마시오'라고 말야. 이런 빌어먹 을!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우리가 그 여자아이의 적수가 못돼? 그 자가 우리를 그냥 동부로 되 돌려보낸 건 무슨 의도가 있을 것이야." "난 이미 말일세, 그 자의 심기가 불가촉이라고 셈하고 있네. 속셈이 보통 깊은 놈이 아니라구. 그 녀석 성질만 보게나, 어디 강시하고 같은가 말일세. 정말 의심스러워. 말곰과 성성이를 놓쳐놓 고 나서 강시한테 하는 소리 들었지? 참 잘도 지어내더군. 그동안 녀석의 행동이 의심스럽지 않 았다면 스승녀석이란 자가 가만히 안 있었을 것이야. 한데 강시는 계집의 검광이 자색이라니까 무척 놀라더군. 그래도 화를 우리한테 덮어씌우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어. 그리고 빌어먹을 녀석 은 그 온옥이란 걸 종일 손에 들고 다니니 참 환장할 일이야.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또 꼬마놈이 늘 옆에서 감시하고 있으니 말일세. 매일 황혼 전후해서 또 새벽쯤해서 강시양반이 회사(回死: 죽 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할 때도 꼬마녀석은 무슨 충성이라고 늘상 가까이서 지키니 미칠 지경 아 닌가. 여하간 온옥을 슬쩍할 생각은 이제 관둬야겠어. 조만간 강시의 원신이 제 모습을 찾고 도행 을 이루면 우리들은 죽어 묻힐 곳도 없을 것일세!" 유가 성을 가진 자가 위로하듯 말했다. "여보게, 너무 걱정일랑 말게나. 내가 점을 쳐보니 강시는 앞으로 상서롭지 못해. 누군가 길인이 나타나 그를 처치할 것이라구. 우리들도 호랑이굴에 몸을 두었으니 한번 당하겠지만 강시의 겁수 도 다한 것 같으이. 아마도 그 상대는 홍의소녀가 아닌지 모르겠어. 보통 여자가 아니야. 그리고 이상한 건 말일세. 어제 붙들어 온 성성이와 말곰들이 막대한 화근이 될 거란 점괘가 나와 있네. 여하간에 우리는 저 자가 곤욕을 당할 때 동부에 잠복해서 보물이나 훔쳐가지고 도망치면 되는 게야." 영경은 그들의 말을 듣자 은근히 기뻤다. 이 난쟁이들은 요괴의 일당이 아니라 힘에 눌려 복종 할 뿐 마음에서 우러나 따르는 건 아니었다. 또 소년이란 녀석도 이들의 말에 의한면 꿍꿍잇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적의 세력은 생각 밖으로 약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강시가 온옥을 몸 에 지니고 단 일각이라도 떨어뜨려 놓지 않는다니 그게 걱정거리였다. 그리고 이들 짤달막이들은 도행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나 말하는 투로 보아 약졸들은 아닌 성싶었다. 다만 강시한데 제재를 당해 행동을 자유자재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여튼 요물 강시의 재주만은 비상해서 온옥을 탈취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말에 따르면 강시는 황혼과 여명 두 차례에 걸쳐 두 시진씩 회사를 한다니 이것 이 해결의 실마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두 녀석은 수수방관하며 틈을 볼 게 확실하므로 강시가 신 임한다는 소년만 제압하면 일단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마침 강시가 회사하는 시간이어서 둘은 동부 앞에 주저 앉아버려서는 서로 지껄이고 있 었다. 영경은 아까 도망친 소년이 요괴의 부하라고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동부를 한번 정탐해 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는 은형수법을 모르므로 두 난쟁이한테 들키면 다소 불편하지 않을 까 걱정됐다.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는 데 갑자기 영감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저 두 사람을 충동하면 단박에 내응해서 나를 돕지 않을까? 그렇다! 망설일 것 없이 지금 나가 저들한테 이야기를 해보자. 온옥을 훔친다는 말은 하지 말고 장미진인의 유명을 받들어 요괴를 제거하러 왔다고만 말하자. 그들의 법보를 되찾게 도와준다면 얼씨구나 하고 따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이영경은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했다. 한데 바로 이때, 검은 검광이 돌연 공중 에서 날아 내려왔다. 바로 조금 전의 청의소년이었다. 소년은 땅에 내려서자 두 사나이를 향해 뭔가 손짓을 연신 해대며 입으로 중얼중얼 씨부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두 사나이들도 똑같이 시늉을 했다. 이윽고 둘 중 하나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가 입정해 계셔서 잠시 번뇌를 잊으려고 밖에 나와 한가로이 앉아 있는 참일세. 우리는 당 신이 사부를 수호하고 있는 줄 알았었네. 그리고 멀리 나가지 않고 있잖은가." 그러나 소년은 계속 손짓발짓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영경은 두 사람이 말한 아이가 바로 청의소년인 것이 확인되자 대번에 배짱이 생겼다. 소년은 그녀의 적수가 되지 않으니 요괴도 한 번쯤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한번 옹골게 작심 하자 이번엔 청의소년이 가련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사내대장부처럼 번듯하게 생긴 것이 할 일이 없어서 요괴의 끄나풀이 된단 말인가! 차제에 저 녀석을 제거해 버릴까? 요괴의 앞잡이를 없애고 동부에 들어가 애물도 깨끗이 없애고, 온옥도 차 지해 버리자!' 그녀는 생각을 굳히자 장검을 휘익 빼어들었다. 한 줄기 자색 무지개가 소년의 정수리를 향해 바람처럼 날아갔다. 소년은 화다닥 놀라 재꺽 방비를 가졌다. 상대가 무시무시함을 안 소년은 검은 검광으로 적을 맞으며 한편으로는 동부로 슬슬 물러났다. 그는 두 손으로 영경을 향해 뭔가 신호하듯 연신 흔들 어댔다. 두 땅딸이들은 미리 검은 연기로 변해 동부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영경은 소년의 손짓이 웬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요괴가 깨어나기 전이라 일을 서둘러야 했으 므로 소년을 악착스레 밀어붙였다. 소년은 영경이 동부 안으로 들어오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발을 허둥댔다. 그러한 소년을 영경은 본 체 만 체 계속 밀어붙이며 동굴을 살펴보았다. 동부 안은 예전과 똑같 았으나 안쪽 깊숙한 곳의 모습은 영판 바뀌어 있었다. 옛날 그녀가 누워 자던 큰 돌은 간데없이 없어지고, 석벽은 일 장 넓이의 문이 생겨났으며, 동굴 전체는 혈육이 낭자했다. 성성이와 말곰의 뼈가 도처에 널려 있었고, 배리착지근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소년이 돌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영경은 계속 쫓아 들어갔다. 문 안을 들어서자 수십 장 방 원의 뜰이 있었다. 뜰 한가운데에는 열 사람이 안아야 됨직한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고목 은 오랜 풍상 속에 이미 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뜰 좌우로는 석실이 나란히 있었고 옥으로 다 듬은 기둥과 보석이 주렁주렁한 발 등 휘황찬란한 장식은 아름답기가 궁전 같았다. 뜰에 들어가자 소년은 더욱 다급해 했다. 그는 원공(元功)을 힘껏 끌어올려 영경의 비검을 막으 면서 손으로는 계속 무슨 신호를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자 황망해 하는 중에, 이제는 더 이상 한 발도 뒤로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영경은 조금 전의 생각을 더욱 굳혔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호랑이를 잡을 수 있을소냐. 이 벙어리소년은 나의 적수가 아니고 이미 내부의 정황도 토로한 셈이다. 이 부근 어딘가에서 요괴가 회사에 들어가 있는 모양 이지. 요물이 깨어날 때, 그것을 제거해 버리면 일거양득이 되겠다!' 이때 소년의 얼굴이 갑작스레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와 함께 머리 뒤쪽에서 두 가닥 냉기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 들어오고 있었다. 소년은 돌연 검광을 휘두르며 몸을 옆으로 날렸다. 영경은 소년의 급습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몸을 홱 돌렸다. 그녀는 자영검으로 온몸을 보호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곧바로 석 자 뒤에 해골 같은 괴인이 우뚝 서 있었다. 두 개골은 유난히 크고 얼굴엔 살 점이라곤 없었으며 코는 뻥 뚫렸고 눈언저리는 푹 함몰돼 있었다. 한 쌍의 눈은 붉은색과 녹색으 로 번갈아 바뀌며 번쩍번쩍 빛났다. 고목처럼 비쩍 마른 몸매엔 살점이 별로 붙어 있지 않았는데 가슴에 걸려 있는 자색 화염의 검 은 연기가 온몸을 휩싸고 있었다. 괴인은 천천히 영경에게 다가왔다. 괴인은 구름을 탄 것처럼 두 둥실 다가왔다. 다리가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았다. 괴물은 유별나게 큰 두 손을 쭉 뻗어 영경을 잡아쥐려 했다. 영경은 모발이 쭈뼛해지고 정신이 아득해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 르 떨었다. 강시가 이처럼 갑자기 나타난 건 그녀에게는 정말 예상 밖이었다. 회사에서 깨어나기 전에 해치우려던 영경의 계획은 이제 깡그리 무너진 것이다. 비검전서에 의하면 그녀는 강시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더구나 뒤쪽에는 보통내기가 아닌 청의 소년이 노리고 있다. 그녀는 허둥지둥 검광을 거두어 전신을 보호했다. 그런 경황이 없는 중에 영 경은 뒤쪽의 소년을 살폈다. 한데 소년은 웬일인지 검을 거둬들이고 옆에 조용히 물러나 서 있었다. 그는 얼굴에 근심이 잔 뜩 서린 표정을 짓고 그녀를 쳐다볼 뿐 싸울 기색은 아예 없었다. 이때 영경이 도망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이니었다. 그러나 평소 오만하고 공명심이 강한 그녀로서는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영검만 해도 모든 사악함이 침범할 수 없는 명기요, 지금 자신은 신검합일의 높은 경지까지 올라 있지 않은가. 한번 싸워봐서 이기지 못할 때 도주해도 늦지 않다. 하나 이런 안일한 생각은 아차 하는 사이 목숨을 이 요사스런 동굴에 묻을 위험도 있었다. 영경은 소년이 물러나 있자 비검을 뿌려 즉각 요괴에게 달려들었다. 자색 검광이 강시의 머리 위로 날자 요괴는 징글맞은 괴소를 터뜨리며 붉은 화염을 쏘아냈다. 덩그마니 큰 요괴의 대갈통 은 가느다란 모가지 위에서 대롱대롱 부단히 흔들거렸는데, 그 모양이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요 괴의 검붉은 화염은 마치 신룡처럼 능수능란히 움직이며 영경의 검광과 한데 엉켰다. 춤추듯 흔들거리는 요괴의 목에서도 이상스런 화염이 솟아올라 자신의 녹색 털을 태웠다. 냄새 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릿했다. 요괴는 허연 이를 바드득바드득 갈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자신의 법보를 운용하는데 왜 자기마저 저처럼 학대하고 있는지 영경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 다. 이렇게 약 한 시진이 지나갔다. 검붉은 요괴의 화염은 영경의 검광에 짓눌려 뿌지직뿌지직 불꽃 을 튕겼다. 요괴는 연신 괴소를 토해냈다. '원래 요괴란 게 겨우 요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대단한 재주가 있는 줄 알았더니 별 게 아닌 걸!' 영경은 속으로 기뻐 힘이 절로 솟았다. 한데 이때 어딘가로 사라졌던 땅딸이들의 속삭이는 소리 가 들렸다. "여보게, 사부 목에 걸려 있는 화운련을 좀 보게나. 여자의 자색 검광을 이용해 곧 절단되겠는 데." "글쎄 말이야. 사부는 이제 세상에 나가게 되겠어." 영경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뜨끔했다. 동부 밖에서 그들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화운련은 장미 진인이 강시를 제압하기 위해 예비했던 응징물 아닌가. 그러한 법보를 자기의 자영검으로 제거시 켜 주고 있다니 놀라 자지러질 일이었다. 어쩐지 자신의 몸까지 태우며 고통을 감내하던 괴인이 수상쩍었던 것이다. 영경은 괴인한테 속 았다 생각하자 이가 부드득 갈려 대번에 검광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 찰나 요괴는 희희낙락하며 괴성을 연속 내질렀다. 요물은 여전히 펄쩍펄적 뜀박질했 고, 그의 몸에 걸린 화염은 스르르 소멸됐다. 영경은 급한 나머지 허둥대며 검광을 거두었다. 그러나 요괴는 검광을 놓아주지 않고 붙들고 늘 어지며 입에서 검은 기운을 세차게 뿜어냈다. 검은 기운은 자영검의 검광을 온통 에워싸며 요동 했다. 영경의 검광은 쉽사리 거둬들여지지 않았고, 자색 섬광이 번뜩이더니 '쨍그렁!' 하고 두 차 례 쇳소리가 들려왔다. 화운련이 자영검에 의해 끊어진 것이었다. 이영경은 후회막급이었다. 화운련이 끊어져 나가자 요괴는 광소를 터뜨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 다. 영경은 강시 요물의 실력을 알 수 없어 망설이고 있었으나 그가 도망치려는 것 같자 온옥 생 각이 퍼뜩 나서 다급한 마음에 위험도 잊은 채 자색검광을 쏘아냈다. 그녀의 검광은 공중으로 이 삼십 장을 급속히 상승해 갔다. 검광이 날아가자 이영경도 공중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그 순간 허리 뒤쪽에서 찬 바람이 일고 모발이 곤두섰다.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렸다. 또 하나의 요물이 그녀 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금방 공중으로 솟아오른 요물과 똑같은 모양의 요괴였다. 검은 기운이 온몸에 서려 있었는데 맹렬한 기세로 그녀를 덮쳤다. 그 요괴가 그녀 몸 몇 자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 영경은 몸이 써늘해지고 즉시 혼절할 것만 같 았다. 그녀는 요인의 분신술 암산에 걸려든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검광을 거두어 몸을 보호할 시 간이 없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영경의 머릿속에 꾀가 하나 스쳐 지나갔다. 얼마 전 신약란과 함께 청라산에 갈때 응벽애에 홀로 남아 무서워하는 구지선을 위해 신약란이 목석잠종지법(木石潛踪之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당시 영경도 호기심에 그 수법을 배워두었 었다. 그뒤 지금까지 써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 위급해지자 그 수법을 써볼 생각이 난 것이다. 이영경은 옆으로 몸을 빼내며 진언(眞言)을 주워섬겼다. 그리고 한 바퀴 몸을 뒹굴자 그녀는 종 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녀가 몸을 던질 때 요괴는 검은 기운을 무섭게 분출했다. 검은 기운은 즉 각 영경을 에워쌌으나 천생 선골인 그녀를 어쩌지 못하고 흩어졌다. 검은 기운을 맞은 그녀는 몸 을 숨기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순간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요물은 원래부터 자영검의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화운 절단할 유일한 무기인 것을 안 그는 그 검광을 이용해 고통을 참아가며 굴레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적을 그냥 사로잡기는 힘들다 판단했 다. 요괴는 몸을 억누르던 굴레가 사라지자 원신을 빼어내 자영검을 유인하게 하고 자신은 뒤에서 영경을 급습한 것이다. 그러나 영경은 십분 예민해 암산을 당하지 않고 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요괴는 적이 은신술법을 써서 사라지긴 했어도 필히 자기 주변에 있으리라 확신했다. 적의 실력 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장미진인의 유명한 보검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은 틀림없이 아미문하의 적전제자일 것이었다. 이 여자의 공행을 따질 건 없다 해도 비검 자체는 저항하기 힘 든 무기였다. 마침 자기의 검은 기운에 검의 주인이 혼절한 것을 알자 요괴는 적이 기절해 있을 때에 손을 쓰 리라 생각했다. 먼저 법술을 써서 그녀를 붙들어 놓고 보검을 못 쓰게 한 뒤 냉염수형지법(冷焰 搜形之法)으로 적을 연화(煉化)시켜버리면 되었다. 영경이 가까스로 은신하고 있을 때, 요괴는 입으로 뭐라 중얼중얼대며 검은 기운을 계속 뿜어냈 다. 경각간에 땅이 구르릉구르릉 울리면서 전 동굴의 위치가 바뀌었다. 요괴는 자영검이 적의 손에 아직 돌아가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은 거둬들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 다. 그것은 신통스런 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의 현천이형대법(玄天移形大法)에 빠져 있어 땅 속으로 파고들기 전에는 탈출할 수가 없다. 이영경은 요괴의 검은 연기에 휩싸이자 하늘이 울렁거리고 한기에 오들오들 떨려 풀썩 쓰러졌 다. 뇌성소리가 연신 우르릉거리고 땅이 들썩들썩 흔들리자 그녀는 마치 바다에 뜬 일엽편주마냥 마구 출렁거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잠시 동안 땅 속으로 가라앉는 양 정신을 잃었던 영경은 천생의 근골 덕분에 정신을 완전히 빼 앗기지는 않아 이윽고 머리를 가다듬어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아미를 떠나올 때 제영운한테서 얻어온 단약 하나를 꺼내 씹어 넘겼다. 정신이 맑게 개 어왔다. 아직 자영검이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으나 괘념은 히지 않았다. 영통한 보물이라 자기 외에는 어느 누구도 부릴 수 없기에 급히 찾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영경은 아무래도 자영검이 걱정돼 원공(元功)을 토납하며 검을 불렀다. 몇 번이나 수검지법(收劍之法)을 펼쳤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혹 요인이 거두어 갔나 해서 영경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칠흑같이 어두운 게 지옥에 빠진 것만 같았다.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뇌성이 멈추었다. 이제 아까같이 천지가 빙빙 돌고 있지는 않은 듯싶었다. 어딘가로 빠 져나가야겠는데 방향을 분간하기 힘들 뿐더러 사방이 강철같이 단단한 벽이었다. 비검이라도 있 으면 어떻게 해보련만 속수무책이었다. 적의 요법에 빠진 것을 느끼자, 영경은 온몸에 땀이 흥건 히 고였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무 계책없이 망연히 있는데 홀연 귀신 울음소리가 처량히 들려왔다. 울음소리는 가까왔다 멀 어졌다 했고 한기가 피부를 바늘로 쑤시듯 애려왔다. 지하 어디선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몇 시진이 지나니 몸은 얼음처럼 굳어서 이가 딱딱거릴 정도로 떨렸다. 귀신의 울음소리 는 더욱 처절히 들려 금방이라도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영경은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몰렸으나 목석잠종지법으로 억지로 버텨볼 수밖에 없었다. 초 록 화염이 빽빽히 밀려오는 사이로 허다한 악귀들이 점점으로 보였다. 무언가 적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지하에서 울리는 소리는 만 마리의 말이 내닫는 양 굉굉히 핍진 해 왔다. 영경은 자기의 가슴이 놀라 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으스스한 한기를 이를 악문 채 억지로 참으며 어둠 속을 창황히 오가는 악귀들을 바라보 았다. 어느 때는 귀신들의 녹색 불꽃이 그녀 몸을 가까스로 스쳐가기도 했다. 악귀들이 정면으로 다가오면 그녀는 옆으로 슬쩍슬쩍 피했다. 이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홀연 멀리서 요괴의 괴성이 들리며 냉기가 화살처럼 그녀를 찌르듯 덮 쳐왔다. 마치 수많은 화살을 동시에 날리듯 총총했다. 아무리 천생의 밝은 눈을 지녔다 해도 피할 도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영경은 냉전(冷箭)을 맞자 날카로운 화살이 뼈를 뚫고, 예리한 얼음으로 얼굴을 찔리는 듯한 한 기와 통증을 느꼈다. 냉전은 동쪽으로 도망하면 동쪽으로 서쪽으로 피하면 서쪽으로 몰려왔다. 이영경은 사방으로 헤매며 냉전을 피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마귀의 불그림자가 도처에 횡행하고 있어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연속이었다. 사실 햇빛 하나 비추이지 않는 지옥 같은 흑암 속에서 사면으로 허둥지둥 헤맨다는 것은 아무리 법술을 써서 숨었다 해도 끝까지 적의 안목을 피하기에는 적합치 못한 일이었다. 한동안이 지나자 요괴의 괴성이 다시 메아리치며 이번엔 폭풍 같은 한풍이 밀려왔다. 영경으로 서는 이 폭풍마저 견디기 어려운데 지하는 지진이 난 듯 구르릉구르릉 흔들렸다. 도대체 요괴가 무슨 현허(玄虛)한 것을 하는지 영경에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억지로 버티는 사이 그녀는 차갑게 얼어붙어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 릴 즈음, 갑자기 산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굉음이 사방에서 일었다. 이제 목숨이 끝났나 하는 찰나, 어디서 생긴 훈풍인지 따사한 기운이 정면에서 엄습해 왔다. 영 경은 등에서 불어오는 폭풍 같은 냉기와 앞쪽의 훈풍에 밀려 꽈당 쓰러졌다. 하지만 영경은 혼미한 중에도 애써 정신을 차리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냉기는 사라지 고 훈풍만이 그득한데, 녹색 불꽃은 여전히 사방에 넘실대고 있었다. 훈풍을 씌자 백해가 사르르 녹는 듯 살 것만 같았다. 갑작스런 변화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영경은 녹색 귀화(鬼火)가 엄습해 오자 몸을 돌려 도망쳤다. 바로 그때 흑암 중에 쪽빛 섬광이 수없이 번뜩였다. 처음엔 귀신들의 불꽃인가 했으나 불꽃에 이 어 괴수들의 울부짖음소리가 웬지 익숙했다. 영경은 귀를 기울였다. 대지가 요동을 그치자 소란스런 짐승들의 발굽소리가 가까와졌다. 그것은 말곰들의 부르짖음과 발굽소리였다. 이와 동시 신조의 까욱대는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이영경은 묘일부인의 편지가 문득 생각났다. '사부님은 비검전서에서 말곰들이 나를 도와주리라 하셨다. 냉기가 사라지고 훈풍이 불어온 거 라든가 저 말굽소리는 그들이 나를 도우러 온 징조다. 이 동혈을 말곰들이 공격하고 있는 것이구 나.' 그녀는 쪽빛이 비치는 곳으로 뛰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말곰들의 헉헉대는 숨소리가 크게 들 렸다. 영경은 너무 기쁜 나머지 소리쳐 불렀다. "말곰들아, 너희들이니? 신조와 원성이도 같이 왔느냐?" 대답이 없자 그녀는 소리쳐 말했다. "말곰들아, 나 이영경이 지금 요법에 갇혀 있다. 너희들이 정말 말곰이라면 빨리 나를 도망치게 해다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남색 빛깔은 과연 분분히 뒤로 물러갔다. 제일 앞쪽에 있는 말곰이 몸을 돌 릴 때 긴 꼬리가 영경의 코앞까지 미쳤다. 그녀는 재빨리 그 꼬리를 두 손으로 꽉 쥐어잡았다. 말곰들이 앞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렁찬 말발굽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숨을 내쉬는 소리가 거칠게 사방에서 들렸다. 한데 제일 앞쪽의 남색빛들이 아래쪽으로 마구 떨어지며 쿵쾅거리는 추 락성이 들리는 것이었다. 영경은 뭔가 잘못됐나 싶어 몸을 앞으로 날려 아래쪽을 살폈다. 과연 그곳은 움푹 패인 함정이 었다. 남색 빛깔이 스며드는 위쪽에서 밝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때 뒤에서 몰려오던 말곰들이 우르르 함정에 떨어졌다. 말곰에 밀린 그녀도 함께 아래로 떨어 져 내렸다. 영경이 아직도 법술을 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말곰을 볼 수 있지만 말곰들은 그 녀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원래 요괴는 이영경이 자기의 동굴에 잠복해 있으리라 믿고 마귀를 써서 그녀를 사로잡으려 했 다. 그러나 한동안이 지나도 그녀는 요기(妖氣)에 걸려들지 않았고 은신술 때문에 사로잡을 수도 없었다. 요괴에게 있어 이영경은 후환이 무궁무진한 적이었다. 이 적이 있는 한 요괴는 즐거움을 향유할 수 없었다. 요물은 입정하여 현공으로 냉염수형지법을 썼다. 영경을 산 채로 얼려 죽일 생각이었 다. 그러나 이튿날 하룻밤이 지났건만 이영경은 이를 버텨냈다. 그녀가 일찍이 영단과 선과를 많이 복용해 이미 반절은 선인의 몸이 돼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끝내 말곰들이 지하벽을 공격해 뚫고 냉기를 파괴해 버렸다. 하지만 그들 마귀도 보통 무서운 게 아니었다. 영경을 붙잡지는 못했으나 마귀들은 숨소리를 쫓 아 계속 추적해 왔다. 영경이 말곰들한테 말을 하자 마귀들은 대뜸 그녀를 향해 몰려왔다. 다행히 영경은 몸은 피했으나 그녀 뒤쪽에서 달리던 말곰 칠팔 마리는 헛되이 목숨을 바쳐야 했다. 영경은 마귀들이 계속 쫓아오자 당황해 하며 밝은 빛이 스며드는 곳으로 도망쳤다. 그때 갑자기 위쪽에서 돌이 쪼개지는 소리가 나며 자색 무지개가 낙하해 왔다. 자줏빛이 덮치자, 돌틈 사이로 햇빛도 쏟아져 들어왔다. 이어 독수리 울음소리가 유난히 맑게 들렸다. 영경은 자기의 자영검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알고는 기뻐 펄쩍뛰며 검을 부여잡았다. 이때 공 중을 나르던 마귀의 불그림자들이 분분히 아래로 쏟아져 내려왔다. 놀란 말곰들은 마구 허둥대며 서로 부딪쳤으나 도망칠 길이 없었다. 자영검을 손에 쥔 영경은 자신이 솟구쳤지만 아직은 놀란 새의 입장이라 검으도 몸을 보호하며 피할 생각만을 했다. 그러나 자색 검광이 한 번 뻗치자 몸 가까이 접근했던 마화(魔火)들은 봄눈 녹듯 스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멀리서 들리던 요괴의 괴성과 위쪽의 마귀 그림자도 모두 썰물처 럼 멀어져 갔다. 이때 바깥쪽 신조의 울음소리가 무척 긴박하게 들렸다. 영통한 독수리의 울음소리에 영경은 빨 리 도망치라는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검광을 타고 위로 솟구쳐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요괴의 동굴 앞 큰 바위 곁이었다. 그녀가 갇혀 있던 석굴은 퍽으나 넓긴 했으나 높이는 일 장여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를 따르던 사오십 마리의 말곰들도 분주히 위로 올라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모습들이 뭔가 를 찾는 눈치였다. 그제서야 영경은 그들이 자기를 찾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법술을 풀었다. 자색 검광을 보고 이미 주인이 탈출한 것을 안 신조는 직접 눈으 로 확인하자 기뻐 펄럭펄럭 날아 강하하면서 길게 울음을 뽑았다. 지금 영경이 호구를 탈출했다 해도 아직은 험지였고, 그녀의 몸 또한 사방이 쑤시며 사지는 마 비되는 것 같았다. 신조는 영경의 옷소매를 부리로 잡아채며 빨리 이곳을 피하라는 시늉을 했다. 요괴를 아직은 상대할 수 없으니 잠시 피했다가 다시 오자는 뜻이었다. 그녀가 독수리를 타려 하자 말곰들이 일제히 다가와 빙 둘러쌌다. 그들은 땅에 엎드러 슬프게 울었다. 그들이 지하동굴을 공격한 것은 모두 그녀를 구하기 위한 일념이었다. 한데 겨우 몸을 빼 낸 그녀가 그들을 버리고 간다면 말곰들은 필연코 요괴의 손에 죽을 것이다. 갈 수도 그들을 구 해 줄 수도 없는 그녀의 입장이었다. 이렇게 망설이는 사이 검은 연기가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요괴가 날아나왔다. 신조 는 더욱 세차게 영경의 소매끈을 잡아챘다. 검은 연기는 급속히 그녀들 쪽으로 접근했다. 긴박한 중에도 영경은 쉬이 자영검을 쏘아내지 못했다. 전철을 밟을까 봐 감히 적을 상대하지 못하는 것 이었다. 자기를 구해 준 말곰들을 차마 떼칠 수도 없어서 검광으로 전신을 보호하며 임기응변하 리라 작심하고 있었다. 요괴는 영경이 자영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자 깜짝 놀랐다. 요괴는 주춤하더니 요법을 전개했다.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순식간에 천지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영경은 빨리 도주하지 않으면 또다시 곤욕을 치를 걸 환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휘익 독수리의 등으로 몸을 날렸다. 별안간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일고 수십 개의 금망(金芒)이 쏟아져 내렸다. 영경은 어쩐 영문인 지 모르고 당황해 하는데 돌연 눈 앞이 칠흑같이 어두워지며 휙휙 바람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몸 은 독수리 등에 타고 있건만 구름 위를 나는 듯했다. 이영경은 또다시 요법에 빠졌다 싶어 급히 현공을 운용하면서 두 손으로는 독수리 등을 꼭 껴안 았다. 얼마 만한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독수리 등에 타고 있고 주위의 경물은 완연히 바뀌어 있었다. 요괴는 간데온데없고 그녀는 큰 매화숲을 날고 있었 다. 그때는 마침 오뉴월이라 매화는 이미 진 시절이었다. 나무 등걸이나 가지 모두가 푸르른 녹음으 로 짙어가고 있었다. 새들은 나무 위 아래서 울고 온 산의 들꽃과 잡초는 더욱 붉어져가고 있었 다. 가까운 묏부리의 청청함은 심산의 그윽함을 되새기게 했다. 이영경은 갑자기 몸의 통증을 느끼며 꿈속에서 깨어났다. 지난 일들이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 다. 푸른 숲이 다한 곳에 담장이 무너지고 단청이 벗겨진 허물어진 절이 보였다. 사방에 구름이 드 리운 숲이 있고 기암괴석과 샘이 있는 풍경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내 금방 요괴와 싸우고 있었는데 날벼락과 동시 이곳에 와 있으니 도대체 어찌 된 셈일까? 또 요괴의 현허한 수법에 빠진 것일까. 길흉을 쉬이 점칠 수가 없네.' 의아스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홀연 독수리가 길게 울었다. 비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나고 한 줄기 검은 검광이 그녀 멀지 않은 곳에 내려섰다. 두 번이나 겪어 본 청의소년이었다. 한 손에 종이 두루마리를 들었는데 다른 손으로는 그녀에게 뭔가 손짓을 했다. 그는 멈칫멈칫 다가왔다. 영경은 요괴의 손발이 되는 소년이 자기를 쫓아왔다 생각하자 놀라는 한편 화도 났다. 그녀는 불문곡직하고 검광을 쏘아냈다. 소년은 미리 준비가 있었던 듯 저항은 하지 않고 두루마리를 휘익 던졌다. 그러더니 만면에 근 심어린 표정을 짓고는 발을 한 번 굴러 하늘로 날아 까만 점이 되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영경은 여러 차례 혼난 터라 굳이 보지 않고 종이쪽을 집어들었다. 던질 양으로 돌을 둘둘 만 종이엔 여러 가지 지난 사연들이 적혀 있었다. 내용을 읽은 영경은 천만뜻밖이었고 후회가 뭉클 가슴을 쳤다. 원래 그 청의소년은 이름이 장이(莊易)였다. 그는 홍화모모와 동배되는 다른 문파의 검선인 가일 자(可一子)의 유일한 문인이었다. 가일자는 일찍이 현기(玄機)를 깨우쳐 제자를 많이 거두지 않았다. 자신의 배운 바가 바르지 못 하고 정과(正果)를 얻지 못할 것을 알아 세상에 화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장이는 자 질이 아주 좋았으므로 가일자의 사랑을 받았다. 가일자는 제자를 아낀 대신 그를 잘못 인도할까 봐 그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법술만을 가르 쳐 주었다. 한데 장이는 스승이 병해하기 전 삽지(澁芝)를 잘못 복용해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죽 기 전 가일자는 두 통의 편지를 남겨 놓았다. 제자가 때에 맞춰 편지를 보고 행한다면 스스로 선 연(仙緣)을 만날 것이라 했다. 가일자가 병해한 뒤 장이는 첫 번째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는 그에게 어느날 망창산의 옥령암 으로 가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옥령암 앞에는 큰 동부가 있고, 안에는 요괴가 만년온옥을 갖고 있 는데, 그 요물은 이름이 곡진(谷辰)으로 일찍이 스승의 도서(道書)를 훔쳐간 자라는 것이었다. 그는 궁흉극악하기 짝이 없어 나중 장미진인의 칠구신검에 심장을 주륙당해 죽었다. 하나 그는 이미 도서를 섭렵해 유명(幽冥)을 바꿀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원신이 소멸돼 어쩔 수 없었으나 후에 흙 속에서 진기를 얻어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안 장미진인은 그의 목에 화운련을 채워놓고 현문선천묘술(玄門先天妙術)로 땅 속 깊숙이에 시수(屍首)와 원신을 가둔 뒤 입구를 봉쇄해 버렸다. 그 곡진은 천지의 극악한 기운을 갖고 태어나 백만산 음풍동의 녹포노조와 심보라든가 하는 수 단이 똑같이 독랄했다. 원칙으로 팔구현공(八九玄功)을 써서 그의 원신을 완전히 연화시켜야 했는 데, 그게 마침 진인이 비승(飛昇)하는 때라 현공을 쓰지 못하고 임시방편으로 봉쇄했던 것이다. 당시 진인은 두 자루 연마보검인 자영검과 청삭검을 예언과 함께 은밀한 곳에 남겨 놓았으므로 요물이 출토하면 때를 맞춰 검을 차지하는 주인이 그를 제거하리라 안배한 것이었다. 요괴는 화운련을 잘 달구어서 어느 범위 안에서는 자유자재로 행동했지만 역시 진인의 보물을 어쩌지 못해 완전히 탈출할 수는 없었다. 옥령암 밖으로는 단 일 보를 내디딜 수가 없었던 것이 다. 더욱 그는 땅 속에서 날마다 지풍(地風)을 쐬여 온몸은 해골만 남게 되었다. 만년온옥을 얻었다 해도 몸을 따뜻하게만 할 뿐 살이 돋게는 할 도리가 없었다. 살이 돋는 것은 장이 문파가 갖고 있는 백초양영고(百草陽靈膏)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스승은 장이에게 양영고를 갖고 곡진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는 척하라고 지시했다. 곡진은 워 낙 음흉한 자라 양영고 정도를 바치지 않으면 절대 믿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물의 신 임을 받으면 기회를 보아 만년온옥을 손에 넣은 뒤 아미파에 투신하라고 했다. 아미파와 인연을 맺으면 기연은 없다 해도 정과를 얻을 것이라 했다. 장이는 스승의 지시대로 따랐다. 요물은 그를 보자마자 산 채로 피를 빨아먹으려 했다. 그러나 장이가 찾아온 뜻을 밝히고 양영 고를 바치자 요괴는 대단히 좋아하며 굳게 신임했다. 하지만 요괴는 만년온옥을 늘상 가슴팍에 차고 다녀 탈취할 기회가 없었다. 요물이 비록 아침 저녁으로 회사하긴 해도 그때는 가까이 잘못 다가갔다간 요술에 걸려들게 돼 있었다. 그래서 장이는 조용히 기회를 보며 별일이 없을 때는 망 창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무심 중에 동부 앞 고목 밑에 은거한 도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날 장이는 동부 앞의 소롯길을 발견하고 한때 호기심으로 길을 따라 내려갔다. 소롯길은 처음 아주 협착했으나 갈수록 넓어졌다. 이윽고 지하도가 나타났는데 갑자기 검정빛이 그를 향해 덮치듯 날아왔다. 장이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후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는 스 승 가일자가 전수해 준 수검법을 펼쳐 대항했다. 검은 쉽사리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 검은 거북이 모양의 소검이었는데 깜장빛이 보석처럼 빛나 사람의 머리털도 비출 정도였다. 검자루 위쪽에 원구(元龜)라는 전서체의 글자가 새겨 있었다. 아주 훌륭한 한 자루 비검이었다. 장이는 의아해 검을 소상히 살폈다. 바로 그때 온 석벽에 붉은 검광이 어른거리며 노파 한 사람 이 나타났다. 백발을 표표히 날리는 노파는 큰 코에 귀는 어깨까지 드리웠고, 손에 은색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장이는 노파의 기개가 범상치 않은 것을 보자 검의 주인으로 생각했다. 자신으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노파인 것 같았다. 장이는 급히 몸을 숙여 예를 표하고는 검을 들어 바쳤다. 노파는 그가 벙 어리인 것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노파가 말했다. "물건엔 주인이 있다더니 그 말이 맞는구면! 검은 자네의 것일세. 나에게 돌려줄 건 없어. 나는 이곳에 은거한 지 오래 되었으나 그 아무도 알지 못하였지. 오늘 단실에 한가히 앉아 있는데 한 줄기 검광이 지나가더구만. 난 대번에 장미진인의 칠수검인 걸 알아보았다네. 한데 한발 늦어 자 네 손에 들어갔으니 그것도 인연인가 보이. 내 보기에 자네는 배운 게 바르지 못하다 해도 자질 이 무척 좋고 정기가 번뜩이고 있어. 그대가 벙어리라 해도 천생이 아니라 독초를 잘못 먹은 때 문인 것도 알 것 같으네. 이 후동의 입구는 원래 옥령암으로 통하고 있던 것을 장미진인이 요괴 곡진을 봉쇄할 때 산악이 이전하고 지각이 변해서 봉쇄된 지 오래 되었다네. 한데 그대가 여길 왔으니 요괴도 지하에서 나오겠구만. 자네는 말을 못할 테니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게. 내 잠깐 갔다 오겠네. 어쩌면 요괴로부터 만년온옥을 탈취하는 데 도움이 돼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 야." 노파는 한 줄기 홍색검광이 되어 장이가 왔던 길로 날아갔다. 밥 한 그릇 먹을 시간이 지나자 노파는 서찰 하나를 들고 되돌아 왔다. 노파가 말했다. "장미진인은 정말 섬세한 대목까지 미리 내다보셨더군. 일파의 개산조사로서 손색이 없구만. 그 분은 자네의 내력까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네. 이 서찰은 장미진인이 남기신 건데 자네가 스승의 명을 받아 개과천선하려는 것까지 언급하고 계시는군. 그 만년온옥은 그대가 탈취하지 못해도 다 른 능력있는 사람이 빼앗으리라 했네. 이후로는 온옥을 훔치려는 생각은 그만두게. 두루두루 요괴 의 신임을 얻어 기연이나 기다리도록 하게나. 온옥을 빼앗은 사람은 이영경이라는 소녀라 했어. 자색 비검을 쓰는 소녀인데 그녀를 도와 성공하기만 해도 자네는 아미파에 들어가게 될 것이야." 노파는 잠시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이 동굴은 이미 요괴의 동부와 통해 버렸으니 더 이상 머물 생각이 없네. 내 근래에 이 동굴이 너무 유현(幽玄)한 게 싫어 새로 동부 하나를 준비해 둔 바 있다네. 즉시 그곳으로 옮길 생각이 야. 그 원구검은 그대가 스승의 수검법으로 거두긴 했어도 운용은 할 수 없을 것이네. 옛날 장미 진인이 직접 제련한 명검이라 다른 문파 사람은 쉬이 다룰 수 없는 법이거든. 내 그대에게 구결 을 가르쳐 줄 테니 시간이 나는 대로 이 바깥 암반의 정상에 올라 연습하도록 하게. 또 다른 기 연이 생길 테니까 말일세." 장이는 고맙다는 표시로 허리를 굽신했다. "요괴도 그 검의 내력을 잘 알고 있을 것이야. 그대가 동부에 돌아가면 숨기지 말고 손짓으로 이렇게 말하게. 오늘 한가히 산의 남쪽 무너진 절터 옆 석동을 거니다가 부록이 붙어 있는 돌비 석을 발견했다. 무심결에 그 비석을 넘어뜨렸더니 아래쪽에 구멍이 생기고 석벽과 돌상에 일곱 개의 이상한 형태의 작은 검들이 진열돼 있었다. 그 거북이검을 들어내자 천지가 요동치며 뇌성 이 있더니 여섯 줄기의 오색빛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조금 후 조용해 동굴을 살펴보니 이 원 구검만 손에 쥐어 있을 뿐 여섯 개의 다른 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고의로 그 검의 내력을 자네 스승에게 묻게나. 그러면 요괴는 믿을 뿐만 아니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일세. 요괴는 또 그 대에게 그 검을 다룰 검법을 알려주겠지만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고 매일 이곳에 와서 내가 가르쳐 준 구결을 연습하게." 장이는 그 노파가 마치 신선같이 느껴졌다. 그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노파의 법호를 묻지 못하 는 자신이 안타까왔다. 노파는 말을 끝내자 한 줄기 붉은빛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사라진 미진기 猛獸報恩 神禽救主 眞人遺束 俠女尋珍 장이는 곧 동부로 돌아갔다. 산책을 나온 지는 오래 됐으나 돌아가는 길은 가까왔다. 그는 돌아 가자마자 요괴에게 한바탕 설명을 했다. 요괴는 과연 별로 의심하지 않고 두 땅딸이 동자들의 단 속만 더더욱 엄하게 했다. 그러나 장이에게 있어 그들 땅딸이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즐 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수시로 인심을 얻기 위해 그들을 스승 요물에게 변호해 주곤 했 다. 그날 한가로이 산길을 거닐다가 원성과 한 무리의 성성이와 말곰을 발견했을 때도 그는 홀로 이 렇게 생각했다. '요괴가 많은 생명을 해쳤어도 나는 직접 그를 도와 악을 행하게 한 적은 없다. 그러나 미가와 유가 두 사람은 요물이 백수(百獸)의 살아 있는 혼으로 제련(祭煉)하는데 필요한 성성이와 말곰을 못 찾아온다고 매일 죄를 받고 있다. 저들을 위해 이 짐승들이 있는 곳을 알려주자. 성성이는 그 렇다 치더라도 말곰은 얼마나 흉악한 동물인가 말이다. 이왕 많이 죽은 것, 조금 더 죽은들 어떻 겠나. 이폭제폭(以暴除暴)한 셈만 치면 되겠지.' 장이는 돌아와 유, 두 사람에게 짐승들이 있는 곳을 알려주고 흑살사로 잡아오도록 했다. 두 사 람이 백여 마리의 말곰을 잡아오자 요괴는 당장 죽인 몇 마리 외엔 모두 지하 동굴에 가두게 했 다. 두 번째로 말곰을 잡으러 갔을 때는 원성의 쌍검이 워낙 무서워 두 사람은 간 지 오래인 데도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장이는 스승의 명을 받고 그들을 감독하러 왔다가 그만 영경을 만나고 말 았다. 그녀는 대뜸 신조와 원성을 구하고 흑살사의 호로병까지 바숴버렸다. 자색 검광을 보자 장이는 그녀가 바로 노파가 알려준 소녀라는 걸 알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크 게 기뻤지만 두 땅딸이들의 눈총이 있어 나아가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다. 장이는 혹 미, 유 두 사 람이 영경을 곤경에 몰아넣지나 않을까 걱정이 돼서 그들에게 빨리 물러가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날 날이 밝을 무렵, 암산 정상에서 연검을 하다가 아래에서 바위를 뚫고 나타난 영 경과 처음 대면을 했다. 장이는 여러차례 마음 속을 나타내려 했으나 말을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하여 줄곧 핍박을 받았고 끝내는 원구검을 잃을 위험에 처하자 줄행랑을 놓았다. 간발의 차이로 자영검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는 요괴의 동부로 급히 도주했는데 홀연 무 슨 인력에 끌려 아래쪽으로 급속히 떨어졌다. 놀란 장이가 정신을 차려보니 전날 만난 노파가 앞에 서 있었다. 노파가 말했다. "저 소녀를 내 암중에 보았다. 장미진인은 과연 견식이 대단하구나. 대단한 인재를 고르긴 했으 나 가석하게도 산겁이 너무 중한 게 흠이다. 저 애는 경각간에 요괴의 동부에 쫓아 들어갈 게고, 거기서 큰 곤욕을 치를 게다. 저 애가 위험에 빠지면 자네는 말곰들이 갇혀 있는 동굴 위에 이 부적을 태우도록 하라. 삼 일 이내에 묘한 변화가 일어 그녀가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이가 허리를 굽신하고 부적을 받으려 하자, 노파는 또 두 개의 부적을 더 건네주며 말을 계속 했다. "그때 요괴는 행법(行法)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아 즉시 추격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다시 몸을 숨 기고 있다가 요괴가 동부를 나가거든 이 두 번째 부적을 불태워라. 요물은 진동되어 쓰러질 것이 니라. 나머지 한 개의 부적도 역시 태워서 여자아이의 남쪽켠에 던지도록 하라. 경각간에 이산역 악(移山易岳)수법이 펼쳐져 여자아이와 주변의 물건들이 동시에 험지를 벗어날 것이다. 그런 연후 에 이 두루마리를 그녀에게 갖다주거라. 검광을 타고 남방으로 가면 그녀가 있을 것이다. 두루마 리엔 너의 내력과 지금까지의 경과 그리고 그녀에게 속히 아미로 돌아가 성이 주(周)가인 동료와 함께 오라는 지시가 담겨 있다. 저 요괴는 나로서도 제압하기가 힘들다. 이 세 개의 영부는 장미 진인이 남기신 것으로 전날 너를 만났을 때 어느 동굴 속에서 찾아냈다. 불을 붙이는 진언을 때 에 따라 잘 외도록 하고 순서를 틀리면 아니 된다." 노파는 진언을 가르쳐 주고 두루마리도 넘겨주었다. 도포가 한 번 펄럭이자 한 줄기 홍광이 일 고 노파는 종적없이 사라졌다. 장이는 두 차례나 노파를 뵈었으나 성명을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묵념을 올리 며 사라진 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가 동부로 돌아오자마자 영경과 부딪쳤다. 그는 손짓으로 요괴가 깨어나기 전에 빨리 돌아가 라고 알렸지만 영경은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미, 유 두 사람의 말을 들어 이제 선입관이 강한 터라 급히 몰아쳐 왔다. 결국 요괴가 깨 어났고 요물은 자영검을 빌어 화운련을 절단했으며 요법으로 영경을 험지에 몰아넣었다. 장이는 말곰이 갇혀 있는 석혈을 찾았으나 문이 없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요괴가 행법할 때를 이용해 몰래 영부를 불사를 수가 있었다. 삼 일째 되는 날 지하에서 괴성이 크게 진동했으며 일전에 보았던 금안(金眼)의 큰 독수리가 자 색 검광을 휘두르며 지하 위쪽 돌을 쪼으기 시작했다. 지하가 꽈르릉꽈르릉 울리더니 급기야 여 자가 튀어나왔다. 요인도 동굴에서 날아와 여자를 추격할 태세였다. 장이는 급히 둘째, 셋째 부적 을 태웠다. 노파의 말대로 요괴는 진동되어 쓰러졌고 영경은 사라져 버렸다. 영경은 두루마리를 다 읽자 그제서야 벙어리소년이 요괴의 일당이 아님을 알게 됐다. 만약 조금 만 일찍 알았던들 그런 험경에 빠지지 않았고 손을 쓰기에도 쉬웠을 것이었다. 이게 요괴의 목에 채웠던 화운련이 절단돼 행동이 자유자재요, 방위도 단단히 하고 있어 설상가상이 된 셈이다. 노 파의 글대로라면 주경운의 도움이 없이는 일을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경운언니는 입문이 나보다 빠르다 해도 비검전력으로 논한다면 나보다 훨씬 못하다. 장차 응벽 애는 한창 일이 좋은 가을이다. 만약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묘일부인의 비검전서는 어째서 아무말도 없었단 말인가. 올때 자부심을 갖고 뽐내며 떠나와설랑 도움을 청하러 돌아갈 수도 없 다. 경운도 몸을 나눠 이곳에 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벙어리소년이 내응하고 있는 판이니 요괴 가 회사할 때를 이용해 한두 번 노력을 해보자. 도저히 만년온옥을 빼낼 수 없으면 그때 도움을 청해도 늦지 않겠지.' 마음을 정하자 그녀는 주위에 있는 말곰들이 숨을 곳을 찾아 잠복케 하고 자신은 신조와 함께 다시 동부로 돌아왔다. 동혈 속에 있는 성성이와 말곰들은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보자 환희작약하며 에워쌌다. 영경은 원성이 그들 중에 없는 것을 보자 무척 근심이 되었다. 그녀가 동혈에서 뛰쳐나와 신조에게 원성 을 찾아보라고 지시하려는 참에, 원성이 허겁지겁 낭패한 꼴로 달려왔다. "어디에 갔었느냐?" 영경이 묻자 원성이 길게 너스레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주인님, 정말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불노녀석이 와서 주인님이 동굴에 갇혔다는 말을 했을 때 얼 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동부에서 요기가 부옇게 오르고 주인님의 검광이 사라진 뒤 아무 동정 이 없을 때, 처음 우리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답니다. 허실을 몰라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그저 주인 께서는 무사하겠거니 했었습죠. 우리마저 몽땅 함정에 빠졌다간 아미산에 돌아가 구원을 청할 건 덕지마저도 없어질 테니 말입니다요. 하지만 마냥 멍하니 있었던 건 아닙니다요.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께서 아니 오시길래 이 원성은 강우란 놈을 타고 요혈에 살살 접근해 갔었습니다. 동부 근처 에 가자 저는 동굴로 들어가 정탐을 하고 강우는 공중에서 대응하기로 했었습지요. 어떻습니까, 우리가 주인님을 구하려 했던 수법이 말입니다." "그래 나를 구하려 동부에 들어갔었단 말이냐?" "그러문입쇼. 그 나선형 동굴을 들어갔었죠. 옛날 주인님이 머물 때 하고는 많이 변했더군요. 살 금살금 들어가다 재수없게 두 동자녀석을 만났지 뭡니까. 이 원성이 어찌 그 사람들을 당하겠습 니까! 부리나케 도망했습니다. 헌데 그 자들은 이상하게도 요법으로 비행하지 않고 걸어서 쫓아옵 디다. 동부에서 한창 멀리까지 도망쳤는데 결국엔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말이 주인께서 요괴 한테 붙들렸다며 자기들한테 두 가지 일을 승락하면 살려준다 하더이다." "무슨 조건을 내세우더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저를 보고 첫째 항복하고, 둘째 저의 두 자루 장검을 달라는 거였어요." "웃기는 녀석들이구나." "글쎄 말입니다. 이 원성이가 어찌 그런 요구를 들어주겠습니까? 장검을 빼어들고 전 용맹히 그 들과 싸웠습니다. 그 애들 같은 요귀들은 비검도 없었는데 무슨 요법을 썼는지 산이 흔들리고 땅 이 울리며 귀신딱지가 도처에서 출몰하질 않겠습니까?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판인데 홀연 자색 검광이 번뜩이며 강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색 검광이 비치자마자 요사스런 구름은 싹 걷히고 두 꼬마도 간데없이 사라지더군요. 정신을 차려 바라보니 강우가 주인님의 비검을 들고 날아옵디다요." "신조가 내 비검을 찾아냈었구나!" 영경이 기뻐서 묻자 원성은 불노를 흘깃 쳐다보며 힘없이 말을 계속했다. 그는 아마도 신조가 월등한 공로를 세운 때문에 약간은 기가 꺾인 모양이었다. "주인님의 검광은 바위 뒤켠에서 계속 돌며 수시로 땅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더랍니다. 주인께서 갇히실 때 검광은 홀로 비행하다가 돌아가지 못하자 자꾸 어딘가 틈을 비집고 주인께 돌아가려 했던가 봅니다. 강우는 자영검이 혹 적의 수중에 들어갈까 봐 백미선사가 가르쳐 준 수검법을 써 서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칼은 쉽사리 잡히지 않고 산봉우리를 몇 개나 넘어 도망갔답니다. 한 번은 거의 잡았는데 그만 튕겨나가 제 아까운 흰깃만 여러 개 뽑혔다나요. 나중 힘없이 공중을 날때 겨우 붙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영경은 신조의 애쓴 것이 신기해서 그의 목덜미를 뚜덕뚜덕 두드려 주었다. "검을 간수한 신조는 검광이 계속 부딪쳐 간 곳이 바로 주인이 갇힌 곳이라 생각했다는 것이었 어요. 주인께선 선골에 기연이 많은 분이니까 살아 계시리라 믿고 신조는 주인을 구하려 검광이 헤매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던 도중 강우는 꼬마들한테 곤욕을 치르고 있는 이 원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강우는 마침 자영검을 쥐고 있느라 갈고리 발톱을 쓰지 못해 놈들을 놓치고 말 았습지요. 그러나 지금은 꼬마녀석들이 뭐 중합니까요. 우리 주인님을 구하는 것 이상 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저희들은 주인님을 구하러 동부로 다시 찾아갔습니다. 바윗돌 따위는 신조의 쇠갈고리 발톱으로 쪼을 생각이었으나 어디 입구를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들어갈 만한 곳은 요 기가 무럭무럭 서려 있어 검광으로 아무리 부딪쳐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틀이 지 났습니다. 아미산으로 돌아가 구원을 청할까도 생각했으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동굴 속에는 귀신대갈통 같은 녀석 셋이 있었는데, 푸른옷을 입은 키 큰 소년은 우릴 보면 슬금슬금 피했고, 땅딸보 둘은 만날 때마다 강우의 갈고리 발톱에 찍소리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삼 일째 되는 날 강우가 홀연 검을 갖고 어딘가로 가버리는 것이었어요. 웬일인가 하고 기다리고 있 는데 두 꼬마동자가 나타나질 않겠습니까. 강우가 없는 이 원성이는 후다닥 은밀한 곳에 숨었습 니다. 그 후 강우가 돌아와서 검광으로 한 곳을 마구 쪼고 지진이 났나 했더니 주인께서 애들과 함께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내가 나왔는데 너는 어째 빨리 나타나지 않았느냐" 영경이 책망하는 투로 묻자 원성은 오히려 펄쩍 뛰며 원망스런 듯이 대답했다. "이 원성이야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주인을 뵙고 뛰쳐나가려는데 돌연 동부에서 괴성이 크게 일 고 강시가 날아나오며 검댕이 기운을 주인께 확 뿌리는 게 아니더이까. 청천 하늘에 우뢰가 울고 무수한 금빛이 쏟아질 때 그 요괴는 웬일인지 폴싹 거꾸러지더군요. 그것 참 신납디다. 요괴는 엉 금엉금 일어나 동부로 허둥지둥 도망치더군요. 그런데 그 순간 무슨 채색 구름 같은 게 번개보다 빠르게 남쪽으로 날아갑디다요. 어벙하고 있다가 다시 보니까는 오메, 이게 웬일이유? 주인님과 강우와 애들이 싸그리 사라졌습디다. 놀라서 제 간담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아십니까. 저는 그때 마침 주인 계신 곳으로 쫓아가던 판인데 주인님 등은 사라지고 그 빌어먹을 꼬마동자 둘이 엉금 엉금 기어왔습니다요. 저는 검광을 흩뿌려 그들을 막은 뒤 줄행랑을 놓았지요. 그런데 재수없게도 산허리 하나 돌아가설랑 그 요물단지들한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정신없이 한바탕 싸우고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됐을 때, 시꺼먼 검광을 뿌리며 청의소년이 나타났습니다. 소년은 두 요물단지를 불러 뭔가 한창 의논을 하더군요. 벙어리 소년과 요물단지들은 땅에 글을 써가며 쟁론을 벌였는데, 요물단지들이 처음엔 소년의 말을 듣지 않다가 나중에는 승복한 모양이어요. 그 들이 저한테 말했습니다. 자기들은 우리와 적이 아니다. 주인님을 위해 지금 내응할 생각이다. 서 로 다치지 말자. 그리고 장미진인의 영부에 원기가 진상(震傷)돼서 정양을 해야 한다 하더군요. 그 요상스런 요물단지 동자들은 뭐 성이 미가고 유가라던가. 생김새는 참 굼벵이 같지만 아주 나 쁜 놈은 아닌가 보죠. 그들을 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더구만입쇼. 주인님, 어떻습니까? 지금 빨리 요괴를 없애야 하는 거 아닙니까요?" "알았다. 그들과는 곧 헤어졌느냐?" "웬걸입쇼. 참 생각하면 어이없지. 아니 그 요물단지들이 뭐라 한지 아십니까. 그들은 저를 보구 요, 우리 애들을 매일 열세 명씩이나 넘겨달래요. 저희 요괴가 법보를 제련하는데 매일 생혈(生 血)을 마시기 위해 그만큼이 필요하답니다. 주인님이 아미에 갔다가 오는 동안만 그렇게 해달라나 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은 요괴한데 핍박을 당하고 의심을 사게 되며 최악으로는 요물이 직접 법술로 애들 전부를 죽이려 덤빌지 모른다는 거였습니다. 제가 말을 듣지 않자 나중엔 청의소년 까지 그렇게 하여 달라고 두 놈은 날 놓아주지 않겠다고 얼렀습니다. 저는 세에 몰려 알았다고만 하고 슬금슬금 거길 떠나왔죠. 녀석들은 쫓아오진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한데 주인님, 일전에 산의 남쪽에서 옛날 잘 아는 검선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은거한 선배신데 다른 파의 검선으로는 첫째 둘째가는 분입지요. 성함이 <청낭선자(靑囊仙子)> 화요숭(華瑤崧)으로 일찍이 백미선사한테 그분 이야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이라도 만 난 양 저희들을 도와달라 애걸했습니다. 선고(仙姑)도 장미진인의 유탁을 받아 주인을 돕는 중인 데, 저 요괴가 아직 겁수가 다 안 돼 자신은 몸을 드러내 원수를 맺는 게 싫어서 뒤에서 살짝 도 와주신다 하셨어요. 그분은 요괴가 역악이산 수법을 써서 주인이 갇혀 있는 것도 이야기하고 곧 탈출하시리라 위로의 말도 주시더군요. 삼 일째 틀림없이 험지에서 나오실 터이나 주인님은 꼭 아미에 돌아가 주소저를 데려와 일을 끝내야 한다고 합니다." 영경은 원성의 말을 듣자 약간 망설였다. 요괴는 진기가 진상된 데다 수하인물은 모두 그녀의 한통속이 되어 있어 주경운 하나가 더 있는 정도는 아무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 같았다. 문득 청 의소년 생각이 났다. 암굴 정상에서 만났던 그 소년을 만나 상세한 사정을 답문한 뒤 앞뒤 일을 작정하는 게 좋을 성싶었다. 그녀는 원성에게 잠시 암굴에 가서 쉬고 신조는 요혈 부근을 탐색하라 이른 뒤 단신으로 바위 소롯길 위쪽으로 갔다. 암굴의 정상에 올라보니 과연 벙어리 소년 장이가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 거리고 있었다. 그는 영경을 보자 황망히 쫓아와 손짓을 시작했다. 그가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두 군데 가리키 는 것으로 보아 무척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지난 번엔 정말 미안했어요. 저를 도와주어 고맙습니다." 이영경이 다소곳이 사과하고 앉으라고 권하자 장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뭇가지를 꺾어 지상 에 글을 썼다. "요괴는 장미진인의 영부에 진상돼 삼십육 일은 수련을 해야 회복됩니다. 화운련을 떨쳤으므로 복원되면 다른 곳으로 갈 것입니다. 현재 그는 유와 미 두 땅딸이를 시켜 맹수를 잡아 요법을 제 신할 다른 곳을 찾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요괴와 싸울 때 돕지 않은 탓으로 의심을 받아 예전처럼 신임을 못 받고 있습니다. 당신이 다시 쳐들어 올 것에 대비해 요괴는 신외화신지법(身 外化身之法)으로 원신을 분화해서 요법을 펼쳐놓고 있답니다. 전 동굴에 그물망을 포진해 놓았고 새벽과 저녁 회사할 때는 원신이 동굴에 들어가 수호하고 있어요. 외인이 들어갔다가는 사로잡히 고 말 겁니다. 회사했을 때라도 그의 몸체가 있는 지하동혈은 물론 입구도 들어가기 힘듭니다. 나 는 틈을 내서 당신께 이런 사정을 알리러 왔답니다." 영경은 요괴의 기거동작에 대해서도 자세히 물어보았다. 요물의 방어는 치밀하기 짝이 없었다. 요괴의 가슴팍에 메고 다니는 온옥을 탈취하기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장이는 호랑이 굴에 몸을 담은 입장이다. 목에 채워 있던 속박이 풀린 요괴는 행동이 신 비막측하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표일해서 자칫 언제 들통이 날지 모를 판이라는 것이다. 그는 요괴가 회사에서 돌아오기 전 빨리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급해 있었다. 영경은 그를 전송하기 위해 일어나다가 무심코 진자령이 빌려준 미진기 생각이 났다. 그동안 그 처럼 격전을 치르며 곤경에 처했을 때 왜 미진기를 사용하지 않았단 말인가. 처음 말곰들을 구할 때는 그렇다 해도 요괴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를 때 왜 미진기를 쓸 생각을 못했을까? 그녀는 갑자기 그 생각이 나자 손을 품속에 넣어 미진기가 제대로 있나 확인했다. 없었다. 영경 의 온몸에 찬 땀이 와락 배어났다. 그녀의 얼굴은 당장 빨개지고 숨결이 가빠졌다. 장이가 웬일이냐는 듯 응시했다. 영경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녀는 곰곰 생각했다. 그러 다가 조금 진정이 되자 장이에게 그 사실을 설명했다. 장이는 천천히 생각해 보라는 손짓을 해주 었다. 미진기는 그녀의 자영검 못지 않게 자신의 일체가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함 부도 사용하지 못할 것이었다. 한데 어떻게 언제 사라졌던 말인가! 요괴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 지하 동혈 속에 떨어뜨렸을 것이다. 워낙이나 몸을 이리저리 뒹굴렸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많았다. 그러나 이 미진기를 잃고서 어떻게 응벽애에 돌아간단 말인가. 주경운을 데려오는 것은 고사하 고 진씨자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녀는 장이에게 매달렸다. "장이, 제발 부탁이야. 난 꼭 미진기를 찾아야 해. 돌아가거든 지하 동혈을 자세히 좀 살펴봐 줘. 어딘가 떨어져 있을 거야. 아니면 요괴가 가져갔는지 알아봐 주고." 장이는 총총히 땅에다 글을 썼다. "그 깃발을 요괴가 가져가지 않고 다른 곳에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동혈에 남아 있겠지요. 동혈 은 당신과 짐승들이 떠난 뒤 그대로 놔두었으니 가서 살펴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영경은 일말의 희망이라도 찾은 듯 그에게 감사했다. "찾는 즉시 바람처럼 날아와 알려줘야 해, 응?" 장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별을 고했다. 그는 갈 때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영경의 생각으로 그 동혈 외에는 깃발을 떨어뜨릴 곳이 없었다. 장이 역시 화선고의 말대로 주 경운을 데려와 도움을 받으라 했지만 이젠 돌아가려 해도 미진기 때문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무슨 낯짝으로 응벽애엘 간단 말인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마음을 결정치 못하는 사이에 황혼도 지고 깊은 밤으로 접어들었다. 지금 은 요물이 깨어나 있을 시간이다. 쳐들어가려 해도 새벽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우울과 절망에 싸여 새벽까지 서성이며 밤을 꼬박 새웠다. 여명이 비칠 때쯤 장이가 날 아왔다. 미진기는 없고 요괴가 무척 의심을 해서 겨우 얼버무렸노라는 것이다. 장이는 글을 써서 영경에게 물었다. "도울 사람을 데리러 가지 않을 겁니까?" 영경이 망설이다가 당장은 안 갈 것이라 말하자 장이가 다시 글을 썼다. "만약 당신 혼자 온옥을 훔치려면 아까 요괴가 말하는 품으로 보아 이번이 좋은 기회입니다. 오 늘밤 황혼 요괴가 회사할 때 한번 시도해 보세요." 한데 장이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요괴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영경이 되묻자 그는 나 뭇가지를 쥔 채 얼굴만 붉혔다. 영경은 미진기를 잃은 고뇌 때문에 마음이 워낙 산란해 구태여 그를 입장 곤란케 하면서까지 캐 묻지는 않았다. 장이가 다시 영경에게 알려주었다. "지금 동굴 앞쪽은 외인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돼 있습니다. 당신은 이 암벽 샛길로 해서 오 십시오. 이 길은 위층 동굴로 연결 돼 고목 구멍으로 나갈 수가 있어 요괴의 봉쇄를 뚫는 고생을 덜 것입니다. 만일 잘못돼서 붙잡히면 황급해 하지 말고 하자는 대로 따르는 척하십시오. 그리고 그가 없을 때 저를 만나더라도 마음으로 통할 뿐 말은 하지 마세요. 요괴는 심령이 천하에 영민 해서 회사했을 때 외에는 오륙십 장 이내의 사람 입이 움직이는 것까지 알아낸답니다. 저에게 욕 하는 것은 괜찮으나 그 외는 절대로 아무 말을 마십시오. 우리의 행적이 드러나면 우리들은 동시 에 재앙을 당할 겁니다." 장이는 한바탕 설명이 끝나자 작별하고 떠났다. 영경은 장이가 무슨 꿍꿍잇속이 있는지 모를 일이나 일단은 실망이 앞섰다. 그러나 일이야 한번 작정한 것, 부딪치고 볼밖에 없었다. 시간이 남은 영경은 얼마 전 백색 괴물이 나타났던 언덕이 생각났다. 원성을 기다리며 돌에 걸터앉아 있던 영경은 괴물의 한기에 놀라 벌떡 일어났었다. 혹 시 거기에서 깃발을 떨어뜨리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난 것이다. 그녀는 신조를 불러타고 산의 남쪽 그들이 처음 내려앉았던 곳으로 갔다. 아침 산은 맑고 조용 했다. 그녀가 앉았던 곳을 소상히 살펴보았으나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실망한 영경은 백 색 괴물이 싸우던 정경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숲을 나왔다. 이때 멀리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 다. 영경은 소리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숲의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서쪽 산봉우리 아래 동 굴에서 흰 연무가 흘러나오더니 한바탕 선풍에 말려 하늘로 날아 숲 밖의 평지에 뿌옇게 퍼졌다. 연무 사이로 두 개의 하얀 물체가 떨어져 내렸다. 머리에 하얀 망을 드리웠는데 생김새가 영낙없이 똑같은 게 일란성 쌍동이 같았다. 영경은 흠칫 몸을 사렸다. 이 요인들은 바로 전날 보았던 괴물들이었다. 사람인 주제에 현허한 수법을 써서 괴 물로 분장했던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미진기는 틀림없이 저들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었다. 영경은 급히 몸을 날려 숲 밖으로 나갔다. 두 백의인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경은 그들의 말이 들리는 곳까지 조심조심 접근했다. 그녀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그 들의 말은 낮기도 했지만 사람의 말이 아닌 듯 요상해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영경은 분하고 급한 나머지 몇 걸음 더 다가갔다. 앞으로 몸을 움직이는 순간 그녀의 그림자가 지상에서 길쭉이 따라 움직였다. 그림자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가까이까지 뻗쳐 있었다. 영경은 이상한 예감에 의심이 부쩍 났다. '저 법술에 도통한 사람들이 내 그림자를 못 봤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데 왜 본 체 만 체하며 돌아보지 않는다지? 도대체 이건 어떻게 된 거야?'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독수리의 까욱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이어 시키먼 그림자가 그 녀의 정수리를 향해 질풍처럼 날아왔다. 그녀의 등 뒤에서는 바람소리가 휙휙 일며 수목이 절단 되는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얼굴이 쇳덩어리같이 새까만 도인이 작은 목궁(木弓)으로 하늘을 향 해 마구 활을 쏘고 있었다. 목궁엔 수십 개의 화살이 배열돼 있어 연발로 화살이 날아갔다. 도인 은 다른 한 손으로 불진을 들었으며, 머리를 마구 흔들자 하얀 안개가 망망히 퍼져나와 그의 온 몸을 에워쌌다. 작은 화살은 황색 불별처럼 꼬리를 날리며 공중의 신조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신조는 두 발 톱으로 불별들을 잡아 꺼버렸다. 그러나 불별은 수없이 날아갔고, 신조는 연신 두 발톱을 휘젓느라 허둥댔다. 원래 이 도인은 여영남을 이용해 빙잠을 훔치려던 <무영도사(無影道師)> 위거(韋居)였다. 빙잠 을 도둑질해 내지 못하고 오히려 풍혈에서 사랑하는 제자 위종을 영경한테 참살당한 그는 그 원 한이 뼈에 사무쳐 있었다. 당시 위거는 영경의 검광이 워낙 매섭고 백미화상의 신성한 독수리까지 있는 것을 보자 감히 복 수하려 덤비지 못했었다. 그래서 영경이 여영남을 구해 달아나는데도 아무 방책이 없이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다름 아닌 다년간의 친구인 복건성 무이 산의 <설굴쌍마(雪窟雙魔)> 여성(黎成)과 여서(黎緖)였다. 악인은 악인끼리 모이는 법이라 그들은 오랜만에 만나자 아주 기뻐하며 그동안의 사정을 서로 물었다. 그때 여씨형제는 <괴규화> 능혼한테 쫓겨 망창산 남쪽 토끼바위의 현상동(玄霜洞)에 몸을 숨기 고 있었다. 위거도 그동안의 경과를 간략히 들려주었다. 의기가 투합한 그들은 함께 빙잠을 훔쳐 일가를 이루자고 약정했으며 여씨형제도 위거와 함께 머물기로 했다. 다음날 이영경이 응벽애에서 돌아올 때 그들은 몰래 그녀의 행동을 훔쳐보고 있었다. 여씨형제 는 영경의 몸에 보물이 있는 것을 알아채자 계책을 세워 훔쳐내기로 했다. 그들은 우선 마무(魔 霧)를 써서 영경을 쓰러뜨릴 계략을 세웠다. 그러나 영경은 영약을 많이 먹은 데다 워낙 선골이라 그들이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들키고 말 것이었다. 여씨형씨는 이전에 허다한 고생을 해본 늙다리들이라 영경의 몸 주위 뻗친 으스스한 검기를 보 자 마무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생각을 바꾸어 자신들을 환영(幻影)으로 탈바 꿈시켰다. 그들의 괴이한 모습으로 영경의 마음을 흩뜨려놓고 위거가 은신술을 써서 몸 뒤로 다 가가서는 요법으로 미진기를 꺼내자는 것이었다. 그때 영경은 온통 땅에서 뒹굴고 있는 괴물을 살피느라 위거의 접근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뒤, 그녀가 검광을 일으키자 괴물은 사라졌고 그때는 미진기도 위거의 손에 들어간 후였다. 그 전에도 이들 셋은 계속 영경의 뒤를 쫓았다. 그들은 영경이 일검에 계곡에 가득한 흑살사를 깨치는 것도 보았고, 백미화상의 신조를 타고 쌍검을 휘두르는 놀라운 성성이도 보았다. 바다를 누비는 신룡처럼 하늘에 긴 무지개를 긋는 영경의 검광에는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사실 그들은 흑살사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흑살사도 그녀의 자색 검광에 한 번 쏘이자 즉시 파괴돼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이영경이 자신들보다 월등 고명한 것을 알아 감히 얼굴을 내밀 생각을 못했다. 세 요인은 영경의 위엄에 눌려 아뭇소리 하지 못하고 토끼바위로 돌아가서는 도둑질한 보물을 꺼내보았다. 보물은 비단으로 수놓은 작은 깃발에 불과했다. 위쪽에 연무와 구름이 그려 있는데 저녁놀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두 요인은 천호(天弧)를 본 적이 없으므로 이 보물의 진가를 알 리 없었다. 내력과 사용법을 몰 라 잠시 상의한 뒤 일단 위거가 보관하기로 했다. 이들이 의논을 거의 끝냈을 때 홀연 깃발의 채색 노을이 아름답게 바뀌더니 갑자기 구름이 뭉게 뭉게 일었다. 세 사람은 의아해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깃발을 예의 주시했다. 이때 굉음이 꽈릉 울리며 마치 불꽃이 손아귀에서 터지듯 한 줄기 채색구름이 하늘로 날랐다. 순식간에 깃발은 어딘가로 날아서 사라져 버렸다. 깃발을 쥐었던 위거의 왼손은 폭발에 터진 듯 만신창이가 됐고, 네 손가락이 짤려나가고 없었다. 여씨형제는 원래부터 정파의 법보를 외부 사람이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이상한 보물을 쉽사리 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어떨지도 몰라 인심쓰는 척하고 위거한테 맡긴 것인데, 그들의 우려가 그대로 들어맞은 격이었다. 두 악한은 속으로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 영경을 절대 경시할 인물이 아니라고 새 삼 다짐했다. 그럼에도 세상 물정이 약한 위거는 죽음이 임박한 것도 모른 채 단약을 입으로 씹어 상처에 바 르면서 더욱 영경을 원망했고 절치부심했다. 자신의 능력을 너무나도 모르는 악한의 한(恨)이었 다. 한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요괴의 동부에 있는 땅딸보 동자들도 이들과 똑같은 사파 중의 유 수한 인물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하나가 미타(米駝), 다른 한 사람은 유유안(劉裕安)이었다. 그들은 온옥을 훔치기도 전에 요물 강시 곡진에게 붙들려 노복이 됐는데, 항상 배신할 생각만 품고 있었다. 영경이 지하동혈에 갇혀 있고 요괴가 요법을 행하기 위해 꼼짝하지 않을 때 그들은 장이가 없는 틈을 타서 몰래 위거와 여씨형제한테 놀러오곤 했다. 원래부터 두 난쟁이 여씨형제와 아는 사이였다. 다섯이 모이자 무슨 힘이나 생긴 양 그들은 매 일 쑥덕쑥덕 음모를 꾸미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무슨 근사한 수단이 생긴 건 아니었는데, 여하튼 호기만은 크게 부풀고 있었다. 특히 영경의 법보가 무섭기는 해도 그것 외에는 별다른 도 행이 없는 것 같다는 여서의 말에 위거는 마음 속으로 후회까지 이는 것이었다. '그까짓 별것 아닌 계집한테 괜히 기가 죽어서 요법 한번 못 써보다니, 우리가 만났을 때 동부에 서 열나게 도망치고 있는 걸 모르고 그처럼 겁을 먹을 건거야!' 그들은 미타와 유유안이 눈 깜짝할 사이 법보를 빼앗기고 노예가 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중 세 요인은 이날따라 어떻게 해야 빙잠을 훔쳐낼 수 있나 열심히 토론을 벌였 다. 바로 그때 영경이 독수리를 타고 나타났다. 그들은 놀라 몰래 쳐다보았는데 영경은 내리고 독수 리는 다시 날아갔다. 영경이 호랑이굴에서 빠져나온 걸 본 여씨형제는 그녀의 재주가 보통이 아 니므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위거만은 사랑하던 제자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는 못 배길 심정이었다. 그는 영경이 틀림 없이 자기들에게 복수하러 왔으니 우리들이 먼저 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도 위거는 여씨형제를 고의로 영경이 보는 데서 날아내리게 하고 자신은 위에서 급습하기 로 했다. 여씨형제가 영경의 관심을 끄는 사이 그는 냉전(冷箭)을 쏘아 협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조가 멀리서 하늘을 날고 있음을 깜빡했다. 신조의 밝은 눈은 영경과 주변의 움직임을 환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요인이 연무를 타고 날아내리고 영경이 다가가며 손을 쓰지 않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홀연 요 인 하나가 주인의 뒤쪽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몰래 독수를 쓰려는 풍경이었다. 다급해진 신조는 양 날개를 다반처럼 접고 탄환같이 쏘아 내려왔다. 지상 가까이 날아오자 길게 울부짖어 주인에게 경고를 발했다. 그리고 계속 적을 향해 돌진했다. 숲 속으로 돌아오자 날개에 나뭇가지가 걸려 우지직우지직 꺾여나갔다. 큰 나무가 분분히 절단 되니 돌과 모래까지 공중으로 날았다. 위거는 수십 개의 화살을 쟁인 천심노(穿心弩)를 잡고 주술을 외며 발사할 찰나에 있었다. 그 순 간 태풍이 일듯 나무가 꺾이며 시꺼먼 그림자가 덮쳐오자 '아차!' 하고 몸을 옆으로 날렸다. 시커먼 그림자는 다름아니라 전날 본 백미화상의 신성한 독수리였다. 벌써 근접히 다가와 위기 일발이었다. 그는 급히 요법을 쓰며 불진을 흔들었다. 짙은 연무가 피어올라 그의 몸을 에워쌌다. 신조는 대번에 연무의 무서움을 알고 하늘로 재차 날아올랐다. 이제 주인이 자기의 경고를 받았 으므로 임무는 달성한 셈이다. 요도의 괴이한 연무로 몸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영경의 습격에 실패한 요도는 분한 김에 천심노를 독수리를 향해 쏘았다. 신조는 강철 같은 발 톱으로 대적, 화살을 잡아버렸다. 다음 화살도 역시 잡아채냈다. 당황한 요도는 수십 개의 누런 불별을 연주탄처럼 연방 쏘아냈다. 요도는 마음 속으로 마구 욕 을 퍼부었다. '요놈의 날짐승놈야, 네 발톱이 제아무리 강철 같다 해도 한 대만 맞기만 해봐라! 차가움에 덜덜 덜 떨고 당장 꼬꾸라질 것이다!' 신조는 원래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누런 불별이 계속 날아오자 성질에 못 이겨 허둥대다 왼쪽 날개에 화살 두 대를 맞고 말았다. 화살이 적중되자 신조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당했다 하는 생각 에 노기가 충천했다. 신조는 두 날개를 좌악 펴고 수십 개의 날아오는 불화살을 향해 덮쳤다가 화살이 날개 안으로 모두 들어오자 벼락같이 오므렸다. 그러나 신조 자신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숲 밖으로 떨어져 내 렸다. 신조의 날개에 두 대의 화살이 적중될 때 영경은 이미 자영검을 빼어들고 고성을 내지르며 요괴 의 연무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위거는 적의 비검이 대단히 사나웁더라도 연무로 자신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 다. 그 요사스런 연무는 천지지간의 지극히 더러운 기운을 모아 연성한 것이어서 어지간한 법보 를 훼손할 뿐 아니라 비검까지도 충분히 막아내는 호신 법보였다. 그는 또 자신의 힘으로 적을 제압하지 못하면 여씨형제와 요법으로 협격해 무찌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위거는 자영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색 검광이 연무에 부딪치자 추락은커녕 쑤욱 쏟아져 들어와 댕겅 그의 허리를 잘라버렸다. 위거는 '악!' 하는 비명소리도 미처 내지르지 못하고 영경의 검에 짤려 두 동강이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여씨형제 중에서는 그중 여서가 더 간교했다. 그는 늘씬한 영경의 자태를 보자 일찍이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영경이 홀로 위거와 대결하여 뒤를 돌아볼 틈이 없는 것을 보자 그는 발을 굴러 그녀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여서는 요망(妖網)을 꺼내들었다. 그는 요무를 한 입 가득 뿜어내면서 그물을 던지려 했다. 한데 이때 영경은 공교롭게도 몸을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요도를 처치하자 그녀는 그의 몸 속에 미진기가 있나 뒤져보려 했던 것이다. 순간 비린내가 진하게 풍겨왔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순간 영경은 백의요인이 그녀 뒤에 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아이쿠, 괴물들을 아직 처치하지 않았지!' 그녀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검과 함께 펄쩍 뛰어 일어났다. 뒤쪽 가까이에 백의요인이 누런 연 기를 뿜어내며 손엔 오색 그물을 들고 서 있었다. 영경은 불문곡직하고 검광을 후려쳤다. 자색 검 광은 빨리듯이 요인을 향해 날아갔다. 여서가 요기를 뿜으며 그물을 던지려는 찰나, 뒤쪽에서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여서는 멈칫했고 그 순간 위거의 두 쪽난 시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요기로서는 적을 넘어뜨릴 수 없다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여서의 뇌리를 쳤으며, 그는 요망을 던질 생각마저 포 기한 채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러나 그가 미처 몸을 다 돌리기도 전에 영경의 검이 날아들었다. 자색 검광이 지나간 여서의 몸은 깨끗하게 두 쪽이 났다. 여성은 비교적 담이 적어 처음부터 영경과 상대할 마음이 없었다. 위거가 영경과 대치하자 그는 구경이나 할 요량이었다. 한데 여서가 대적하려는 것을 보자 골육의 정 때문에 '잠깐만' 하고 그 를 소리쳐 부른 것이다. 그는 외침과 함께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영경은 위거와 여서를 연속 베었으나 신조가 퍼덕이며 떨어지는 것을 보자 놀라 숲 밖으로 날아 나왔다. 그녀는 숲으로 형제를 찾아 쫓아드는 여성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둘은 말 한 마디 없이 검을 휘둘렀다. 자영검은 적의 검광을 타고 들어갔고, 여성은 '으악!' 하는 고함과 함께 일직선으 로 장이 터져 죽었다. 삼흉을 연속으로 벤 영경은 미진기를 찾을 생념도 하지 못하고 신조가 울음우는 숲 밖으로 날아 나왔다. 신조는 숲 밖의 큰 바위 위에 버티고 서 있었다. 두 발로는 바위를 힘껏 움켜잡았고, 날개는 양 쪽으로 쫘악 펼친 게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언뜻 보기에 신조는 위엄을 보이고 있었지만 사실은 날 수도 없을 뿐더러 한기에 온몸을 떨고 있었다. 신조의 곁 멀지 않은 곳엔 수많은 화살이 널려 있었다. 누런 불꽃은 거의 사그라들었으나 아직 도 미미하게 빛을 발했다. 영경은 처음 신조가 중상을 입은 걸 알지 못하고 그의 준엄한 모습에 그냥 마음을 놓았다. 그녀 는 요인의 법보가 있는 곳으로 빌길은 돌렸다. 가련한 신조는 날지 못하며 부들부들 떨다가 주인 이 등을 돌리자 길게 부르짖으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돌아선 영경과 부딪친 신조는 일 장 저켠 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때서야 영경은 신조가 이상한 걸 느끼고 급히 독수리를 손으로 껴안았다. 독수리의 몸은 차디 찼고 그녀의 손은 한기에 마비될 것 같았다. 영경은 놀라 급히 물었다. "어머나, 너 다쳤구나! 요인한테 당한 거니?" 신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리를 영경의 팔에 계속 부벼댔다. 아픈 새는 마냥 주인에게 의지했다. 영경은 서둘러 단약을 꺼내 신조에게 먹였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물 어볼 수도 없고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몰라 영경은 안절부절 못했다. 신조는 날고 싶은 듯 날개를 펄럭였지만 날 수는 없었다. 영경은 자기의 검광에 신조를 태워 암혈까지 데려갈까 생각했다. 하 지만 독수리는 계속 고개만 내저었다. 영경이 어찌할 바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신조가 부리로 땅바닥에 뭔가 글씨를 썼다. 영경은 신 조의 부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신조는 원성의 원자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영경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원성을 데려오련?" 신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통한 새임에 틀림없었다. 신조는 아마도 원성을 불러다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까운 요인의 동굴에 혹 잔당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부상당한 새를 놓고 떠났다 가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어쩌란 말인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동굴을 쳐다보았 다가 신조를 바라보는 등 결단을 못 내렸다. 그녀가 속삭이듯 독수리에게 당부했다. "불노야, 소리지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 가서 원성을 데려올게. 알았지?" 독수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영경은 부랴부랴 검광을 타고 암혈로 날아갔다. 원성은 다행히 외출하지 않고 있었다. "원성아, 빨리 나와라, 빨랑 나와!" 원성은 헐레벌떡 영경에게 끌려나왔다. 그들은 한 시진도 채 안 돼서 신조가 있는 곳으로 돌아 왔다. 독수리는 아무 이상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조는 주인이 원성을 데리고 날아오자 낮게 울음소리를 내놓았다. 정이 깊은 원성은 진둥한둥 달려가서 친구를 꼬옥 껴안았다. 그들은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 주절대던 원성이 영경에게 설명했다. "신조란 녀석은요, 요인과 대적할 때 냉전을 너무 많이 맞았답니다. 요해(要害)를 격중당해 공행 (功行)을 다쳤다는 거에요. 그래서 불법에 따라 진기를 운용해 앞가슴을 보호하고 있다는군요. 신 조는 두 날개로 요인의 냉전을 몽땅 수거하느라 요법에 걸렸다고 해요. 지금은 몸이 떨려 날 수 없지만 주인님이 먹여주신 영단 덕분에 별일은 없을 거랍니다. 어디 부근 은밀한 곳에 가서 자기 의 현공으로 음한한 기운을 몰아내기만 하면 며칠 내에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답니다. 자기의 운명 속에 이번 겁수가 정해져 있었는데, 주인님 덕택으로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오히려 이득을 볼 거 라나요. 걱정할 것 없을 것 같습니다요." 영경은 원성의 말을 듣자 약간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신조가 몸을 치료할 조용한 곳으로 요인 들의 동굴을 생각해 냈다. 멀리서 보아도 좁지 않은 동부로 몸을 숨기기에 아주 십상인 성싶었다. 그녀는 원성에게 신조를 보호하라고 명한 뒤 동굴로 날아갔다. 동굴은 과연 높고 컸다. 그녀는 혹시나 요인의 잔당이 있을까 샅샅이 수색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영경은 흡족해서 신조와 원성에 게로 돌아왔다. 신조는 날 수가 없었으므로 원성이 독수리와 두 다리를 들고 동굴로 옮겼다. 신조 가 안전하게 거처를 정한 것을 보고서야 영경은 미진기를 찾기 위해 세 요인의 시체를 수색하러 들어갔다. 동굴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보고 원성이 쫓아나오며 말했다. "금방 강우(鋼羽)가 말하는뎁쇼, 요인의 냉전은 북해의 음한한 정기를 연성해 만든 것이랍니다. 요인이 죽어 그 효용을 잃긴 했어도 여전히 보통 물건이 아니라더군요. 누군가가 집어가면 후환 이 될 테니 주인께서 자영검으로 아주 깨부숴 버리랍니다." 영경은 이제와서야 신조가 그녀에게 부딪쳐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원성에게 독수리를 잘 수호하라 이르고 숲 속으로 나왔다. 요인의 시체엔 벌써 파리떼들이 몰려들었고 주변은 피투성이로 범벅이 돼 있었다. 한데 유독 두 번째 죽은 백의요인 시체엔 파리가 달라붙지 않았다. 무슨 보물이라도 주머니에 들었나 싶어 영경은 검으로 시신의 의복을 파헤쳐 보았다. 별다른 보 물 따윈 없었다. 이상하다 싶은데 손에 쥐어 있는 오색그물이 눈에 띄었다. 그물은 은은한 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들고 보니 비단실로 짠 그물로 매미 날개처럼 얇고 색깔이 선명한 게 실 같으면서 실은 아니었다. 영경으로선 내력을 알 수 없어 주머니에 넣으며 돌아가 동료들한테 물어보리라 생각했다. 다른 시체로 가려는데 요인의 왼손 아래쪽에 보석을 넣는 염낭이 희끗 보였다. 영경은 염낭을 들고 끌러보았다. 주머니 안에 수정 같으면서 수정이 아니요, 옥이냐 하면 옥도 아닌 빨간 보석이 하나 들어 있었다. 손에 쥐자 서늘할 정도로 찼다. 또 염낭에는 단검 한 자루와 도서(道書) 한 권 이 있었다. 도서는 부적같이 전서체로 쓰여 있는 게 영경으로서는 하나도 읽을 수가 없었다. 영경은 나머지 두 시체도 세밀히 뒤져보았다. 최후에 죽은 요인에게 작은 검이 나온 외에는 이 렇다 할 물건은 없었다. 여러 번 세밀히 조사해도 미진기가 보이지 않자 영경은 적이 마음 답답 했다. '이 요인들이 미진기를 훔쳐간 게 아니란 말인가? 깃발을 도대체 어디서 잃어버렸을까? 아, 진 씨자매를 무슨 낯짝으로 뵌다지!' 벌써 어스름이 대지에 깔리기 시작했다. 장이와의 약속시간은 어김없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 다. 영경은 요인들한테 얻어쥔 물건을 자신의 보물주머니에 간수하고 동굴로 날아왔다. 신조와 원 성이 주인을 신주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원성에게 절대 신조를 떠나지 말라고 당부한 뒤 황혼이 비끼는 동굴을 나섰다. 황혼이 가까와질 무렵, 이영경은 장이가 다시 올 리가 없다고 지레 짐작하고서 그가 가르쳐 준 지름길을 따라 옥영암의 요시(妖尸) 동굴 속으로 날아갔다. 그녀가 솟구쳐 날 즈음해서 신변 아래쪽 어디에선가 은빛의 실 가닥 같은 것이 반짝 빛나는 듯 했으나, 미진기(彌塵旗)를 잃어버리고 경황이 없는 데다가 그 무서운 요시의 동굴로 찾아들어 간 다는 긴장감 때문에 이영경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화석(化石)이 된 고목 줄기의 동굴은 암흑천지였다. 그녀는 검광으로 어두컴컴한 통로를 비추면 서 고목 속을 뚫고 내려갔다. 막상 내려서고 보니 사방 천지는 괴괴하기만 할 뿐, 사람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없다. 천공(天空) 에 자욱하게 어린 안개가 머리를 짓누를 듯 나지막이 깔려 있다. 둘째 층 동굴 어구에도 흑기(黑 氣)가 가득 뒤덮여서 여간 눈여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출입구인지조차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였 다. 이영경은 배에다 잔뜩 힘을 주고 신검합일(身劍合一), 용약 둘째 문으로 뚫고 들어갔다. 초장에 요시 곡진한테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서 도망친 그녀로서는 실로 대단한 모험을 감행한 것이었 다. 동굴 속은 제법 환하게 밝아 있었다. 문호(門戶)를 봉쇄한 검은 안개만이 두세 자 남짓 두터웁게 깔려서 시야를 가리웠을 뿐이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는 했으나 그밖에 별다른 이상은 없 었다. 그녀는 발끝부터 머리터럭 끝까지 잔뜩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천연의 석실 다섯 칸이 가지런하게 나타났다. 매 칸마다 탁자와 침상, 단로(丹爐) 따위로 빠듯하게 들어차 있었다. 돌벽은 옥처럼 반들반들 빛이 났다. 장이가 가르쳐 준 대로라면 다섯 칸 중에서 가운데 석실의 종유석(鐘乳石) 돌병풍 뒷면 통로를 곧바로 따라 들어가야 한다. 그 통로가 끝나는 곳에 깊은 수직굴이 뚫렸고, 그 굴 속 아래가 바로 요시의 소굴인 것이다. 이영경은 검광을 거두고서 살그머니 종유석 병풍 뒤로 돌아 길을 더듬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통 로의 끝이 미처 다하기도 전에 먼저 지독스런 비린내가 코를 콱 찌르면서 축축한 습기가 전신을 엄습하여 휩쌌다. 선뜻 검광을 비춰보니, 과연 장이의 말대로 깊숙한 수직 동굴이 휑덩그레 아가 리를 벌리고 있지 않는가. 굴 속은 흑색의 기류로 뒤덮여 밑바닥조차 보이지 않았다. 온 신경을 한껏 두 눈, 두 귀에 모아 가지고 아래쪽 동정을 살폈으나 자욱한 검정 안개 속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도대체 요시는 어디쯤 있는가?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일, 기왕지사 모험을 걸었다면 끝간 데까지 가보기로 하자! 그녀는 경계심을 드높이고 여전히 검광으로 호신자세를 갖춘 다음 밑도끝도 알 수 없는 지옥의 아가리로 훌쩍 몸을 던졌다. 그녀는 암흑 속을 날아서 내려갔다. 한 치 앞도 내려다 보이지 않는 지옥, 가면 갈수록 숨이 막 힐 듯 흑색 기류의 농도는 짙어졌다. 꾸불텅꾸불텅한 만곡부(彎曲部)를 몇 번이나 꺾고 감돌았는 지도 모른다. 기류의 흐름에 따라서 내려가느라 암벽에 충돌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정확 한 깊이는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림잡아 근 일백 장은 강하했으리라. 두 발은 마침내 지 옥의 밑바닥에 닿았다. 이영경은 다시 검정빛 짙은 안개를 헤집고 앞으로 전진했다. 십여 장쯤 나아갔을까, 문득 정면에 서 희미한 광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불빛이다!' 그녀의 몸을 휩싸고 있던 짙은 안개도 점점 뒤쪽으로 사라져 갔다. 검광 아래 두 쪽 암벽이 서 로 기대듯 받쳐 있는 가운데 사람의 키 높이 만큼 틈서리가 벌어진 것이 보였다. 그 희미한 불빛 은 바로 그 틈서리에서 비쳐오고 있었다. 발길은 그 불빛에 이끌리듯 움직였다. 눈앞에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오장육부가 쏟아져 나올 정도로 구역질을 했다. 이슬비에라도 젖은 듯 축축한 습기 속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역겨운 비린내가 풍 겼던 것이다. '여기가 요시의 소굴이로구나!' 역겨운 비린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요시의 소굴에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그녀는 새삼 투지가 솟구쳤다. 섣불리 요시를 놀라 깨울까 보아 검광을 거두어들이고서 마주 보이는 동굴 입구로 발 걸음을 옮겼다. '씨익, 씩!... 씨익, 씩!' 짐승 같은 숨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영경은 동굴 입구 바깥 벽에 몸을 찰싹 붙 이고서 고개만 내밀어 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뜻밖에도 굴 속은 엄청났다. 백여 장을 넘는 넓이에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득하게 끝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면 둘레는 온통 기암괴석들이 총총하게 늘어서서 벽을 이루고, 그 너르디너른 바닥에는 수십 폭의 깃발이 너울너울 꽂혀 있다. 깃폭에는 온통 벌거숭이 마귀들의 형체가 울긋불긋 그려졌다. 깃대 아래마다 사나운 몰골로 목이 잘리운 말곰 세 마리, 성성이 세 마리의 두개골이 가지런하게 둘러쌓여 있다. 짐승들은 하나같이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당장에라도 울부짖을 듯 이빨을 갈아붙이며 혓바닥을 내뽑은 채로 목줄기를 끊기운 것이다. 동굴 한가운데 세 척 높이의 돌기둥 위에는 한 자 두어 치 가량 작은 깃발이 우뚝 세위져 있고, 깃대 밑에 등잔 한 개가 놓였다, 등잔에서 사발만한 녹색의 불덩이가 사방으로 빛을 흩뿌리며 동 굴 안의 깃폭과 짐승들의 두개골을 놓치지 않고 낱낱이 비추고 있다. 그 불빛이 동굴 전체를 온통 녹색으로 음산하게 물들여 공포의 분위기를 더욱 자아내는 것이다. 이곳이 정녕 지옥의 변상(變相)이 아니고 또 어디란 말인가? 제아무리 당차고 담대무쌍한 이영경, 참혹스런 광경을 바라보자니 저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끼쳐 몸서리를 쳤다. '요시란 놈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이를 악물고 두리번두리번, 악귀의 종적을 찾으려는 참이었다. "후후후!" 느닷없이 중앙의 돌기둥 위에 꽂힌 깃폭 뒤편에서 괴성이 터져나왔다. 뒤미처 동굴 사방 천지에 서 '슈우, 슉슉!.....' 귀곡성이 울리더니, '쏴아, 휘리릭!' 하고 음산한 돌개바람이 불어닥치는 게 아 닌가! 바닥에 가득 꽂힌 수십 폭의 깃발 일제히 펄럭이면서 짐승들의 처참스런 대가리가 입을 쩍 벌리고 당장 날아덮칠 듯 꿈틀거린다. '이것 봐라, 그놈이 먼저 낌새를 알아챘구나!' 이영경은 본능적으로 검광을 발출해서 호신태세부터 갖추었다. 그와 동시에 괴성이 뚝 그치더니 음풍마저 잦아들었다. 그녀는 흘낏 돌기둥 뒤쪽으로 돌아보았다. 과연! 괴성을 지른 주인공은 거기에 있었다. 녹색의 옷을 걸친 괴물, 바로 전날 자기와 무섭게 싸웠던 요시가 땅바닥에 벌렁 누운 채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온몸뚱이 전후좌우, 상하로 녹색 의 불꽃을 내뿜어 전신을 감싸고서 매일같이 주어진 죽음의 잠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맨 발의 괴물은 잠자는 중에도 입으로 검은 연기를 무럭무럭 토해내고 있다. 이영경의 눈길은 괴물의 가슴팍에 가서 딱 멎었다. 주발만한 자홍색 광채가 거기서 번쩍번쩍 빛 을 발한다. 바로 그녀가 애타게 찾던 온옥(溫玉)이다. '저거야!.....' 그녀는 이제 온옥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다. 그녀는 다짜고짜 몸을 날려 동굴 속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갓 들어서기가 무섭게 난데없이 뺨을 후려치듯 날아오는 물체가 있다. 잽싸게 검광을 휘 둘러 땅에 떨어뜨리는 순간, 돌기둥 이쪽으로부터 번뜩 움직임이 보이면서 이번에는 한 줄기 오 금색(烏金色) 광채가 맞바로 날아왔다. '적이다!' 그녀는 즉각 응전태세로 자영검을 곧추세웠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적의 검광은 파공음도 일 으키지 않고 아주 완만하게 날아왔다. 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 바라보니, 이제껏 동굴 중앙에 우뚝 서 있던 돌기둥이 간데없다. 어디 그뿐이랴? 그 자리에는 돌기둥대신 벙어리 청년 장이가 서 있 는 게 아닌가! 그는 암록색의 줄무늬 옷을 입고서 머리 위에 등잔을 얹은 채 깎아놓은 돌비석처럼 그 자리에서 움쩍달싹도 않는다. 음침한 동굴 속, 초록빛 일색의 분위기에 눈이 어려 이영경은 사람을 돌기둥 으로 잘못 본 것이다. 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벙어리 소년의 검광은 소리도 내지 않고 완만한 속도로 날아왔 다. 적대시하는 의사가 아니라 자기더러 물러가라는 경고를 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거 참 이상한 사람일세... 아까 낮에 분명히 내가 정탐하러 온다고 말했지 않았든가? 자기는 날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으면 멀찌감치 피해서 안 보일 것이지 어쩌자고 요물의 등잔받침대 노릇을 하고 있는 거야? 요굴 속에 이런 상황도 미리 알려주지 않고 그저 요물이 여느 때처럼 잠 들었단 말만 하다니! 지난 번 내 자영검과 맞닥뜨렸을 때는 두 차례 모두 자기 검광이 상할까 봐 슬금슬금 싸우면서 물러나더니, 이번에는 결사적으로 내 비검의 길을 가로막고 나서는 이유는 또 뭘까? 날더러 온옥을 훔쳐가지 말라는 수작이 틀림없어!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군.....' 이영경은 생각을 굴리면서 장이의 비검을 밀어붙였다. 발걸음은 거침없이 요시(妖尸)가 누운 장 소로 뻗어나갔다. 마침내 요시의 곁으로 육박한 그녀는 선뜻 자영검을 쳐들었다. 단칼에 요절을 내버리고 온옥을 채뜨릴 셈이다. 이때였다. 동굴 천정 꼭대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어린 년이 담도 크구나! 감히 예까지 들어와서 목숨을 바치겠다니!" 후딱 머리 위를 쳐다보는 순간, '땡땡땡!' 꽹과리 소리가 울렸다. 몇 번 안 되는 소리였으나, 동 굴 사면 벽에 메아리쳐서 쩌렁쩌렁 진동하는 것이 듣는 사람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든다. 어기찬 그녀의 눈길이 고함소리를 쫓아 동굴 천정 한 군데에 가서 멎었다. 까마득히 솟구친 꼭 대기 바위 위에 두 사람의 모습이 아렴풋하게 보였다. 낯이 익다. 일전에 보았던 땅딸보 도사 미 타, 유유안 그 난쟁이놈들임에 분명하다. 두 놈은 베옷에 베 헝겁 관을 쓰고서 얼굴이 온통 죽은 잿빛이 된 채 각각 북 하나, 꽹과리 하 나씩을 들고 서 있다. 두 놈은 이영경과 눈길이 마주치자 연신 바깥으로 달아나라고 손짓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벙어리 청년이나 두 도사의 손짓이 모두 자기더러 요시를 덧들이지 말고 물러가라는 암 시인 줄 알아챘다. 그러나 기왕지사 예까지 잠입한 마당에 이대로 손털고 물러날 수는 없다고 생 각했다. 요시란 놈은 죽음이 잠 속에 빠져 있고 온옥도 눈앞에 있지 않는가 말이다. 어차피 벌인 춤판이니 끝날 데까지 가보기로 결심을 굳혔다. "이놈의 요물들, 날뛰지 마라! 아직 그래도 모가지를 바치지 않을 거냐?" 이영경은 야멸차게 호통을 지르면서 성큼 요시 앞으로 다가섰다. 장이의 검광이 자신을 해치지 는 않으리라 여기고 짐짓 앞을 가로막은 비검의 장벽을 무시한 채, 선뜻 손을 뻗었다. 온옥은 거 기에 있는 것이다. 꽹과리의 메아리가 겨우 멎을 무렵쯤 되자, 이번에는 북소리, 종소리가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두 난쟁이도사는 영경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경보를 발한 것이다. 둥둥둥!... 둥둥둥! 땡그렁!... 땡그렁! 동굴 속은 북과 종소리에 어지러이 진동했다. 그러자 땅바닥에 누워 있던 요시가 꿈틀거리더니 슬금슬금 일어나 앉았다. 처음에는 넋빠진 듯 멍청하게 돌부처가 되어 앉았다가 두 눈이 번쩍 뜨이면서 아가리를 쩍 벌렸다. 늑대같은 송곳니 사이로 웃음소리도 울음소리도 아닌 괴성이 터져나왔다. "우후훗... 으흐흐흐!....." 뒤미처 요시의 손이 번뜩 휘둘리자, 동굴 속 온갖 깃발들이 한꺼번에 펄럭펄럭 나부끼기 시작하 는 게 아닌가! 음산한 바람이 '쏴아, 우르릉!' 하고 동굴 속에 휘몰아치면서, '쑤우, 쑤우!' 귀곡성 이 사방천지를 울렸다. 씩씩거리는 야수들의 숨소리와 함께 암흑색빛 그림자 속에서 번쩍번쩍 덮 쳐 날아오는 것이 있었다. 사면발방, 전후좌우, 수십 개나 되는 짐승의 대가리가 검은 안개를 자욱하게 일으키면서 그녀를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요시의 몸뚱아리에서도 수천 수만 개의 암록색 불덩이가 벌떼처럼 솟구쳐 올라 소나기 쏟아지듯 내리덮치고 있다. 역겨운 비린내에 못 이겨 그녀는 속이 뒤집혔다. 어찔어찔 현기증마저 일어났다. 딛고 선 발밑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차, 틀렸구나!' 이영경은 지난 번 함정에 빠졌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났다. 발밑이 요동질치는 것이 그때와 꼭같 은 현상이다. 이대로 밑바닥이 푹 꺼지면 끝장이다! 황소 같은 미물도 한 번 빠진 웅덩이에 두 번 빠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한데 내 어찌 또 당할소냐? "이얍!" 그녀는 야무지게 기합을 넣으면서 지체없이 자영검에 몸을 붙였다. 그 다음 순간 한 모금 진기 를 뿜어내었다. 신검합일, 그녀의 몸뚱이는 빛줄기로 변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 자영검은 역시 장미진인의 지극한 법보였다. 또한 그것을 부리는 이영경도 목숨까지 바쳐가며 공을 이루고 싶은 뜻은 없는지라 단 한 순간도 보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으므로 경황중에 진기를 뿜기가 무섭 게 검광은 제갈길을 찾아 솟구쳤다. 자줏빛 광채는 무지개처럼 뻗어오르더니 곧바로 날아갔다. 우르르!... 쿵! 귓전에서 지동(地動) 치는 굉음이 울렸다. 검광이 빠져나오자마자 바위굴의 입구가 맞부딪쳐 닫 히는 소리였다. 그녀는 등골이 써늘해지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놀란 가슴에 감히 뒤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삽시간에 검은 기류의 자욱한 지하통로를 빠져나온 이영경은 제 이 동굴 석실을 벗어나서 허겁 지겁 고목 화석 줄기로 쑤시고 들어갔다. 마침내 무사히 안전지대까지 탈출한 것이다. 암벽의 겹층 동굴로 되돌아와 보니 말곰과 성성이떼는 서너 마리씩 무리를 짓고 굴 속 분지(盆 地)에 여기저기 흩어져 칡뿌리, 풋과일 따위를 씹고 있다. 짐승들은 자줏빛 검광이 날아드는 걸 발견하고 좋아라 울부짖으면서 펄쩍펄쩍 날뛰었다. 이영경은 짐승들의 머리 위를 한 바퀴 선회했다. '누가 짐승들더러 무지스럽다고 했을까? 원숭이나 성성이는 천생 소식(素食)을 하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말곰은 흉악하고 사납기 이를 데 없는 야수들이다. 태어나서부터 혈식(血食)이 입에 붙 어 호랑이나 표범, 늑대, 이리조차 걸렸다간 요행을 바라지 못할 만큼 무서운 이 말곰들이 당초 내 말 한 마디에 식성을 고치고 풀뿌리, 풋과일로 요기를 할망정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다니 정 말 기특한 것들이로구나!' 그녀는 색다른 감동을 느끼면서 짐승들이 무사한 걸 확인하자 그 길로 토아암(兎兒巖) 현상동 (玄霜洞)을 향해 날아갔다. 방금 요시의 소굴에서 구사일생 탈출하기에는 성공했지만 자영검의 호 신에도 불구하고 얼마쯤이나마 요기(妖氣)를 들이마신 탓으로 아직껏 현기증이 나고 구토증이 가 시지 않고 있었다. 현상동에 당도하자, 원성(猿星)이 제일 먼저 주인을 발견하고 뛰어 내려와 반갑게 맞아들였다. 신조는 아직도 버둥거리며 떨고 있다. 적진에서 패해 돌아온 영경은 그것을 보고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원성한테 물었다. "강우(鋼羽)는 좀 어때? 아까보다 나아진 듯하드냐?" "강우는 저런 식으로 일곱 밤 일곱 낮 동안 계속 현공(玄功)을 운기해야만 음독을 말끔히 몰아 낼 수 있답니다. 바깥에 있던 요물 세 놈의 시체는 벌써 흔적도 없게 되어 버렸습지요. 아까 산 북쪽에서 지진소리가 나길래 이 원성하고 강우형은 혹시나 주인님께서 또 함정에 빠진 줄 알고 몹시 걱정했죠. 강우형은 한 시진만 더 기다려 봐서 주인님이 그래도 안 돌아오시면 절더러 먼젓 번 구해 주신 그분을 찾아나서라고 했는데....." 영경은 그 말을 듣고 또다시 부끄러움과 감동을 느꼈다. 자기의 경솔한 행동에도 짐승들은 이토 록 여전히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독수리의 목을 끌어안고서 깃털을 쓰다듬어 주었 다. 한독의 써늘한 냉기는 여전히 자심했으나 아까처껌 손끝이 마비될 정도는 아니어서 마음이 놓였다. 떠날 때보다 훨씬 차도가 있는 것이다. 어느덧 밤도 다했는지 달빛은 점차 동굴 밖으로 옮겨가고, 어두컴컴한 암흑 속에 독수리의 한 쌍 화안금정(火眼金睛)만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다. 영경은 초조감이 들끓었다. 미진기(彌塵旗)를 잃어버리다니! 이걸 어디서 되찾는단 말이냐? 독수 리까지 사독(邪毒)에 중독된 마당에 멀리 떠날 수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부글부 글 상했다. 어둠 속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답답해서 그녀는 바깥으로 나와 정상 위로 날아 올라 갔다. 반 조각 명월이 천공 높다랗게 매달린 채 밝은 빛을 흩뿌리고, 벽공만리(碧空萬里)에는 새 털구름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발 아래 망창산 일대에는 사면이 망망하게 운무로 뒤덮여 숱한 봉우리들만 멀리서 가까이서 뾰 족하니 구름 속에 끝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영경은 문득 말 못할 고독감에 젖어들었다. 망망대해, 외로운 조각배를 타고 홀로 노저어 나가 는 듯한 환각이 구름바다 속에 섬처럼 여기저기 돌출한 산봉우리를 보는 순간 느껴진 것이다. 이런 기분은 지난 날 처음으로 망창산에 왔을 때 밤중 매화나무 숲을 방황하면서도 느꼈지만 지 금처럼 탁 트인 장관은 처음 맛본다. 그러나 이영경은 이렇듯 기이한 정경에도 마음은 시종 무겁 기만 하다. 잃어버린 법보, 부상당한 독수리..... 게다가 요시의 동굴에서 독기를 마신 몸이 좀처럼 풀어지지 않아, 천지간의 기막힌 장관을 눈앞 에 두고서도 흥취가 일지 않는다. 참기 어려운 고적감만 더해질 뿐이었다. 마치 아버지 이령(李 寧)과 헤어지던 첫날 밤 느꼈던 것처럼..... 지금 그녀가 서 있는 토아암 정상은 본래 이 망창산에서도 제일 높은 곳이다. 동굴은 절벽 뿌리 에 뚫려 있고, 정상의 한쪽은 펑퍼짐한 바위 등성이, 또 한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의 계곡이 펼쳐 져 있다. 새벽의 짙은 안개가 솜덩이처럼 뭉게뭉게 발치 아래를 흐른다. 한참 시름에 잠겨 있던 그녀는 문득 바위 등성이 아래쪽에서 은빛 광채가 반짝하고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뭘까?' 아래편을 굽어 보자니까 발치 밑에서 한 조각 구름이 둥실 솟구쳐 오른다. 처음에는 투명한 비 단장막처럼 눈앞을 가리우더니 이내 뿌옇게 흐리면서 자욱한 덩어리로 뭉쳐지고 시야를 차단했 다. 아래 산의 구름층은 차츰 높이 떠오르고 그녀의 몸뚱이도 은빛 바다 속에 온통 잠겨 손가락 끝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망망하기만 하다. 이영경은 구름안개에 탁 트였던 시야마저 가리워지자 더 이상 그곳에 서 있을 흥취를 잃었다. 가슴 속이 또다시 미슥거리고 구역질이 났다. 몸을 돌이켜 동굴 속으로 내려가 어둠침침한 구석 바위 머리에 걸터앉았다. '아아, 정말 답답하구나! 장차 이 일을 어찌해야만 좋을까. 으음.' 머릿속이 지끈지끈, 견딜 수 없도록 어지럽다. 요기에 쐬인 두통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하릴없이 시름에 잠겼던 그녀는 문득 아까 낮에 요물 도사녀석들의 시체에서 찾아내었던 물건을 생각했다. 동굴 어구는 그런데로 구름층이 얇아 희미하게나마 달빛을 받을 만하다. 낮에도 총망중 이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법보낭(法寶囊) 속에 쑤셔 넣었는데, 도대체 어떤 것들인지 살펴보 기나 해야겠다. 무심결에 손을 집어넣고 더듬자니 맨 처음 손길에 닿는 것은 수정도 아니고 옥돌도 아닌 듯한 원석(圓石)이다. 그것을 꺼내자마자 번쩍하는 황색 광채가 동굴 속을 환하게 비추어준다. 그리 강 렬한 빛은 아니지만 돌멩이에서 발출하는 그 빛줄기는 주변 둘레 삼 장 넓이 안의 물체를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밝았다. '이것도 진귀한 옥돌이로구나!' 손아귀 속의 돌을 만지작거리자니 또다시 잃어버린 미진기 생각이 미쳤다. 아까 돌아올 때는 날 이 저물어 요물의 동굴 속을 수색해 볼 엄두도 못 내었지만, 지금은 한 차례 뒤져볼 여유가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녀는 천근같이 무거운 마음을 채찍질해 일으키고서 그 신비한 옥돌의 광채를 비추어가며 동굴 속을 샅샅이 살펴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자령언니의 미진기는 꼭 되찾아서 돌 려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그녀는 두 눈에 불을 켜고 한걸음 한걸음씩 동굴 속을 이잡듯 샅샅이 뒤져나갔다. 후미진 굴 속까지 다가가니 돌벽이 앞을 딱 가로막았지만 그래도 단렴하지 않고 바 위를 더듬어내렸다. 돌벽 모퉁이에는 또 하나의 굴이 뚫려 있었다. 이영경은 서슴지 않고 몸뚱이를 구부려 그 속으 로 파고들어 갔다. 거기에도 석실이 한 칸 있었다. 돌침대 두 개, 돌탁자가 한 개가 놓이고, 왼편 구석에는 술통과 고기, 말린 식량, 그리고 신선한 과일이 제법 푸짐하게 쌓여 있다. 돌탁자 위의 호로병 속에는 아직껏 단약이 절반 남짓 들어 있기까지 했다. 모두가 요물들이 먹다 남긴 것임에 틀림없다. 이영경은 때마침 조갈증도 나고 가슴 속도 답답하던 참이라 손에 짚이는 대로 살구 두어 개를 집어먹으며 석실 안을 계속해서 뒤져나갔다. 그러나 더 이상 별다른 것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렇지, 나만 먹을 게 아니라, 원성이더러 과일이랑 고기랑 가져다가 독수리와 함께 나누어 먹 도록 해야겠구나!' 그녀는 석실 입구로 다가가서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원성아, 여기.....!" 막 입을 열어 첫 마디를 내려는 순간 그녀는 갑작스레 머릿골이 뻐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윙!' 하고 귀울음이 울리면서 눈앞이 아찔아찔해지더니 전신에 신열이 후끈 치밀어 올랐다. '내가...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쓰러져선 큰일이다!' 마음만 다급할 뿐, 두통과 현기증, 매슥거리는 가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열기가 발가락 끝에서 부터 머리터럭까지 솟구쳐서 도무지 몸뚱이를 가눌 수가 없다. 그녀는 물먹은 솜뭉치처럼 나른해 진 몸뚱이를 겨우 돌침상에 걸터놓았다. 그러나 걸터앉기가 무섭게 이내 까무라치고 말았다. "주인님!... 주인님!" 귓결에 어렴풋이 원성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대꾸도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 버렸다. "주인님! 주인님!" 그녀는 귓가에 맴도는 원성이의 부름을 들으면서 다시 의식을 되찾았다. 어느 결에 자신은 돌침 상에 누워서 이불까지 덮고 있는 신세였다. 벌떡 일어나 앉으려 했으나 정신을 차리자마자 와르 르 조수처럼 밀려드는 오한(惡寒)과 저릿저릿 쑤셔오는 아픔이 전신을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도 무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녀의 입에선 저도 모르게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돌침상 곁에는 원성이가 호로병을 들고 서 있었다. "샘물입니다요. 주인님, 좀 드시지 않겠습니까?" "아직껏 날이 새지 않았느냐?" "벌써 환해졌습죠. 강우가 '주인님은 요기에 쏘여서 쓰러지셨지만, 한 반나절 요양하시면 도로 나으실 테니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마음쓰실 것없이 그대로 누워 계십쇼. 움직이지 마 시고 어서 속히 요기를 몰아내기나 하세요." 이영경은 그 말을 듣고서 기가 탁 막혔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낭패란 말인가? 외지고 거칠은 황 산(荒山)에 병들어 쓰러지다니! 더구나 무서운 요물의 소굴을 바로 지척지간에 두고서 말이다. 독 수리와 원성이가 곁에서 보호해 준다고는 하지만 가장 믿을 만한 독수리조차 자기와 같이 병들어 고통을 겪고 있지 않는가? 설혹 성한 몸이라 하더라도 영남언니의 생사가 걸린 온옥은 손에 넣지 못한 채 도리어 미진기마 저 잃어버렸으니 무슨 낯으로 아미산에 돌아가 언니들을 본단 말이냐?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녀는 속에서 '욱!' 하고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머릿골은 당장에라 도 터져나갈 것만 같다. "아아!" 이영경은 들끓는 심신을 가누지 못하고 또다시 혼절해 버렸다. 의식을 잃은 채로 얼마마한 시간이 흘렀는지, 그녀는 아렴풋한 미망 속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불 러 깨우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주인님!... 주인님!" 원성이가 외쳐 부르는 소리다. 하지만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녀는 만사가 다 귀찮아 못 들은 척하고 감긴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그래도 원성이는 또 크게 불러 깨운다. "주인님, 진씨(秦氏) 선고께서 오셨습니다요!" 이영경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과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진자령의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눈 앞에 가득 들어왔다. "언니!" 그녀는 돌침상 곁에 앉아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진자령을 확인하자 왈칵 울음이 터졌다. 그 러나 다음 순간 생각이 잃어버린 미진기에 미치자 반가움의 울음소리는 이내 저도 모르게 탄식소 리로 바뀌고 말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끄러워 죽고만 싶어지는 것이다. "언니... 미진번을....." 진자령의 손길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내리는 걸 느끼면서 그녀는 소중한 법보를 잃어버린 내력을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진자령의 손길에 힘이 주어지면서 몸을 일으키려는 영경을 그대로 눌러 뉘였다. "일어나지 말아요. 아우님의 중독이 가벼운 게 아니니까 말야. 지금도 회복되려면 안정을 더 해 야 하거든. 할 말이 있거든 나중에 천천히 해도 돼요. 그동안 고생이 얼마나 많았어? 우리들도 너 무 바빠서 영경아우 생각을 미처 못했지 뭐야. 아미산 쪽에도 일이 크게 벌어졌다우. 흉악스런 요 물들이 떼거리로 쳐들어와서 응벽애 후동을 마구 두들겨 부수고, 우리는 그걸 막느라 정신이 없 었거든. 그런데 느닷없이 독수리가 혼자서 돌아오지 않았겠어? 아우님은 여러 날이 지나도록 돌 아올 기척도 없는 데다 독수리만 왔길래 아무래도 아우님이 곤경에 빠지지 않았는가 걱정들을 하 기 시작했어. 그래서 영운대사형이 나를 지명해서 망창산의 동정을 살펴보고 오라고 보낸 거야. 응벽애 후동은 요마들에게 포위당해서 물 한방울 새나갈 틈도 없어. 대사형은 앞동굴 쪽 교조님 의 봉쇄를 몰래 열고 나를 내보내 주셨지. 이리로 오는 도중에 문득 이상한 육감이 들었어. 그런 예감은 우리 진씨 육친에게서만 통하는 것이거든. 영경아우가 빌어간 미진기를 혹시나 잃어버린 게 아닐까? 막연하지만 그런 예감이었어. 그 깃발은 우리 어머니와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단련해 낸 것이라 이미 신합(身合)의 경지에 들었거든. 우리 모녀가 손수 빌려주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은 절대로 쓸 도리가 없는 보물이지. 하지만 그놈의 요시 곡진은 신통력이 무서우니까 혹시라도, 사 술(邪術)을 써서 못 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육감이 심상치 않으니까 마음도 다급해지길래, 잠시 갈 길을 멈추고서 수보법(收寶法)을 써 보았지. 그랬더니 동남방 쪽에서 미진 번이 날아오지 않겠나? 게다가 깃발 끄트머리에 어머님의 서찰까지 달려 있는 거야. 어머님은 < 동해삼선>의 도움을 받으시면서 공력이 크게 개전되셨대. 한창 원비(元秘)를 꿰뚫어 깨달으시며 비승(飛昇)의 날만 기다리는 중이지. 그날도 마침 풍뢰(風雷)의 고초를 다 겪어내시고 참선에 드 시려는데 난데없이 미진번이 날아 돌아오기에 어머님은 우리 자매가 위기에 처한 줄 알고 대경실 색을 하실 수밖에. 그래서 급히 머리칼 한 개를 뽑아 삼매진화(三昧眞火)로 태워 가지고 신향(信 香)을 살랐지. 그 신향은 현진자(玄眞子) 사백님께 보내는 긴급신호거든. 현진자사백님은 어머니 의 애걸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즉시 현기(玄氣)를 점쳐서 우리쪽 사정을 알아내셨지. 그리고 어머 님한테 우리 자매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어. 어머님은 그분에게서 '이영경은 아직도 팔난 (八難)을 모두 채우지 않았으므로 장교사존(掌敎師尊)님의 특별한 배려에 따라 숱한 난관을 겪도 록 운명지워져 있다'는 말씀도 들으셨다는군. 미진번이 돌아온 것도 아우님의 손에서 떠났기 때 문이고, 요시 곡진의 소굴에 들어갔다가 낭패를 당한 일까지 소상히 적어보내셨어. 아우님의 중독 은 바로 <만년지살음매지독(萬年地煞陰每之毒)>에 씌인 것인데, 워낙 근골이 뛰어났으므로 그리 큰 지장은 받지 않고 며칠 간만 휴양하면 나을 거래. 또 그때쯤이면 겁난도 차서 없어진다고 하 셨어. 우리 어머님은 이제 갓 영원(靈元)이 회복되시는 참이라 진기를 많이 소모하실 수가 없어 당신한테 날아간 미진번을 곧바로 나에게 돌려보내셨어. 머지 않아 내가 수보법을 써서 거두어들 일 줄 알고 계신 거야. 또 그분의 초겁(超劫)이 목전에 박두한지라 날더러 아미파 측의 큰일을 마 무리짓는 대로 사도평(司徒平)사형과 한악아우를 데리고 대겁난이 닥치기 전에 그리로 오라고 당 부하셨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초행길이라 무척 걱정을 했지만 독수리가 인도해 주는 바람에 안 심하고 따라왔지. 응벽애 선부(仙府)는 현재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우. 이단의 요마들이 떼거리를 짓고 쳐들어와서 포위했기 때문에 벌써 오랜 시일 동안 공방전을 벌이는 참이거든. 어차피 그 싸 움은 영경아우님이 온옥을 훔쳐가지고 돌아가서 <영(英)>, 운(雲)>이 합력하여야만 그놈들의 요 진(妖塵)을 격파하고 물리칠 수 있게 되어 있어. 다행히도 응벽애 동굴 앞쪽은 절벽이 하늘에 닿 을 정도로 험준한 데다 만년빙(萬年氷)으로 봉쇄되어 밖에서는 아무리 침입하려 해도 내딛을 땅 이 없는 지형이지. 또 장미교조님의 영부(靈符)가 장안술법을 펼치고 있으므로 적에게 발각되지 않았어. 그 덕분에 출입구가 끊기지 않고 또 나도 아우님을 데리러 올 수가 있었지. 영운대사형은 아우님더러 잠시 이곳 일을 접어두고 돌아와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다음 재차 요시란 놈에게 도 전하라고 하셨어. 돌아가는 때는 미진번이 있으니까 적들이 아무리 물샐틈없이 에워쌌더라도 드 나드는 것쯤은 문제가 안 돼요. 그러니까 우선은 아미산으로 돌아가서 쉬도록 해. 독수리하고 원 성이는 아직 여기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돌아갈 필요는 없어요. 또 적의 포위망을 드나 드는 데도 불편할 테고." 진자령의 자상스런 설명을 듣고 잃어버린 미진번의 행방을 알게 되자, 이영경은 가슴을 짓누르 던 천근 바윗덩어리가 굴러내린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너무도 감격해서, 또 부끄러움에 겨워서 말문까지 막혀버렸다. 이제는 일단 아미산 응벽애로 돌아가야만 한다. 성치 못한 몸으로 요시 곡 진과 대결해 봤자 결과는 뻔하다. 진자령이 권한 대로 우선 중독된 몸부터 회복시켜 놓고 보자! 그녀는 진자령의 부축을 받아가며 동굴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눈부신 햇살 아래 독수리가 우람 한 나래를 펄럭이며 목을 길게 늘이고서 '꾸우, 꾸르르!' 반가운 소리를 지른다. 한독을 맞고 비척 거리던 날질승은 어느 새 회복되었는지 예전의 신태(神態)를 되찾고 있었다. 독수리 곁에는 원성 이가 나란히 서 있다. 영경은 원성이에게 물었다. "내가 며칠이나 누워 있었지?" "주인님은 스무사흘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계셨습지요." "아니, 스무사흘씩이나?" 이영경은 새삼 소스라쳤다.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토록 오래 인사불성이었다니, 이 십삼 일이 되도록 아무런 변고도 일어나지 않은 게 이 얼마나 다행이냐? 그녀는 요시의 <만년지살음매지독>에 거꾸러졌던 그날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쳤다. 이후부턴 정 말 경거망동일랑 하지 말아야지! 하마터면 이 외로운 황산궁곡(荒山窮谷)에 그대로 몸을 파묻을 뻔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녀는 독수리와 성성이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금안사형, 그리고 원성아, 내 돌아올 때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어 줘요. 조심을 해서 숨어 있기 만 하고 요괴란 놈의 동태를 살펴두도록 해라. 절대로 그놈의 가까이 가거나 상대하지는 말고 내 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려." "꾸우, 꾸우!" "주인님, 이곳은 염려 마시고 어서 다녀오십쇼." 이영경은 짐승들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선뜻 떠날 수가 없다. 진자령이 망설 이는 그녀를 덥석 안아들더니 미진번을 펼쳤다. 두 처녀는 한 덩어리 채운으로 화해 아미산을 향 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이윽고 아미산 상공에 다다랐다. 진자령의 품에 안긴 이영경은 하계(下界)를 굽어보았다. 요기 가득찬 구름이 산악 전체를 빽빽하 게 뒤덮고 드문드문 산봉우리만 삐죽 내밀었을 뿐, 골짜기는 운무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이따 금씩 번쩍거리는 광채가 여기저기서 어지러이 솟구쳤다간 스러지고, 또 번쩍하는가 싶으면 이내 잦아든다. 도대체 아래 세상이 어딘지 전혀 알아볼 수조차 없다. 낯익은 아미산의 정경은 어느 곳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그 사이에 천지개벽이라도 벌어진 모양이로구나! 어쩌면.' 그녀가 잠깐 생각에 잠긴 동안, 미진번의 채운은 하강을 시작했다. 몸뚱이가 운무 속에 푹 잠기 는가 했더니 이내 눈앞이 환하게 밝아온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선경이 활짝 펼쳐졌다. 응벽애 앞 에 내려선 것이다. 때마침 장남고(章南姑)가 태원동(太元洞) 동굴 앞에 어슬렁거리며 서 있다가 채운이 날아내리면 서 자령, 영경이 나타나는 걸 발견하고 반색을 한다. "언니들 돌아오셨군요! 지금 막 적이 또 풍뢰(風雷)로 비뢰후동(飛雷後洞)을 공격하기 시작했어 요. 그래서 언니들은 모두 그리로 갔어요." 진자령은 적의 공격이 또 시작되었다는 말을 듣자, 황급히 이영경에게 당부했다. "아우님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절대로 나서선 안 돼요. 남고를 따라 들어가서 우선 요 양부터 해야지. 나는 대사형한테 가서 무사히 도착했단 소식을 전할게." 그렇지 않아도 이영경은 말도 못하게 몸뚱이가 노근한지라 싸움판에 끼여들 욕심은 태산같지만 그럴 처지가 못된다. 눈앞에서 자령이 미진번을 번듯 휘둘러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따라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진자령이 비뢰첩경으로 날아가자, 그녀는 장남고의 부축을 받으면서 태원동 석실 안으로 들어갔 다. 석실에는 장남고의 말썽꾸러기 동생 호아(虎兒)녀석이 혼자 있을 뿐이다. 석탑(石榻), 위에 앉아 서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하는 중이다. "얘, 영경언니가 오셨어! 일어나 인사를 드려야지?" 장남고가 동생더러 악쓰듯이 불러 일깨운다. 이영경은 황급히 말렸다. "안 돼, 좌선 용공(用功)을 할 때는 중도에서 일어나면 안 돼요? 다 끝나거던 인사해도 늦지 않 아." 그러자 남고는 뭐가 우스운지 낄낄거린다. "헤헤헤, 언니, 저런 망나니 같은 녀석이 무슨 복으로 면벽좌공을 할 만큼 술법을 전수받았겠어 요? 저 같은 것도 이제 겨우 인문구결(入門口訣)하고 좌공을 초보단계만 익혔을 뿐인데... 저 녀석 한테는 기껏해야 타좌(打坐)하고 심성수양밖에는 안 가르쳤거든요. 본문의 진전(眞傳)은 저도 수 박 겉핥기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죠. 하기야 겉보기만이라도 익혔다손 치더라도 언니들 분부가 안 계신데 어떻게 망나니녀석한테 함부로 전수하겠어요? 저 녀석이 면벽을 하고 있는 건 지금 응벽 애 전체가 정신 못 차리게 소동을 벌이고 있는 참에 먼젓번처럼 장난질을 쳐서 일을 저지를까 봐 억지로 돌벽을 향해 앉혀 놓고 꼼짝 못하게 수양이나 하라는 거죠. 그러니까 한 마디로 벌 받고 있는 셈이에요. 헤헤헤!" 남고가 한창 조잘거리는 참인데 호아녀석이 훌쩍 와탑(臥榻)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녀를 향해 주 먹질을 휘둘러 보인다. "누나, 너무 그러지 마우! 동생 벌 받는 게 그리도 깨소금 맛이야?... 영경누님, 어서 오십쇼! 그 간 편안하셨습니까?" "그래, 그래. 호아도 잘 지냈어? 나 없는 동안 많이 숙성해졌구나. 벌이든 공부든 면벽좌공은 훌 륭한 수양법이다. 벌 받는다고 생각지 말고 열심히 수련하거라. 너희 누나는 샘이 나서 놀리는 거 야. 그렇지?" 영경은 몇 마디로 호아녀석의 심사를 도닥거려 준 다음, 남고를 향해 요물들이 응벽애를 침공해 온 내막을 물으려 했다. 그러나 바깥에서 몇 가닥 빛줄기가 번쩍이더니 대사형 제영운과 주경운, 그리고 진자령, 한악자 매, 구지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언니들!" "돌아왔구나! 혼자서 고생 많았지?" 동문자매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제영운이 그동안 응벽애 선부에서 일어난 일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이단의 요물들은 우리 선배 몇 분이 법보를 단련하시느라 다른 데 신경쓰실 틈이 없는 걸 알아 채고 여길 습격해 왔어. 우리들 나이가 어리고 솜씨도 변변치 못하다고 얕잡아 봤는지 숱한 패거 리와 작당해 가지고 말야. 저놈들이 노리는 것은 육지(肉芝)와 조사님의 비검 일곱 자루를 강탈해 갈 셈이지. 초전에 <염선> 이원화 사숙님의 제자 석기(石奇)와 조연아(趙燕兒) 두 사제가 비뢰전 동(飛雷前洞)에서 포위당해 지금껏 몇 날 며칠이 지났어. 그렇지만 장교사존님의 영부(靈符)로 호 신하고 있으니까 크게 다치지는 않은 상태야... 지금 온 산악이 적의 요법에 봉쇄당하고 매일 세 차례씩 풍뢰공격을 받고 있기는 하나, 우리들이 착실하게 버티고 있으니 아직은 끄덕도 않고 있 지... 여영남사매는 진작에 장교부인께서 비검전서를 보내 아미문하 제자로 거두어들이셨어. 온옥 을 손에 넣으려면 아직도 시일이 걸려야 하고 전신이 얼어붙은 영남아우의 고통은 날이면 날마다 더욱 심해지고 해서 차마 볼 수가 있어야지. 장교부인께서도 너무 가련하게 느끼시고 특별히 은 혜를 배푸실 정도였으니까. 어머님은 봉쇄된 응벽애 온천을 열어주었어. 그래서 영남아우는 허리 아래 하반신을 온천샘물 천안(泉眼)에 잠긴 상태로 양화지기(陽和之氣)를 받아 몸을 덥히고 있는 중이야. 지금은 벌써 평상 때처럼 말도 하고 웃기까지 하는 걸? 아직 마음대로 걷지만 못할 뿐이 지. 앞으로 온옥이 입수되는 대로 이내 회복될 거야... 여기 응벽애의 일은 너무나 복잡해서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구나. 영경아우가 중독당한 사실은 우리도 진작에 알고 있어. 하지만 영단을 먹 고 반나절 가량 정양하면 완쾌될 테니까 염려하지 말아요. 해독이 되거든 그 길로 주경운사매와 함께 망창산으로 가라. 망창산에 돌아가거든 먼저 장미조사님께서 남겨 놓으신 청삭검(靑索劍)부 터 찾아내고 다시 온옥을 탈취하도록... 이곳 응벽애의 싸움은 아무래도 두 아우님이 자영, 청삭 (靑索) 쌍검으로 합쳐져서 미진번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 그놈의 <도천신뢰열화기(都天神雷烈火 旗)>를 베어 쓰러뜨려야만 포위망이 풀리고 전승(全勝)을 거둘 수 있거든. 그래서 우선 청삭검부 터 찾으라는 거야." 이영경은 여영남이 소생했단 말이 제일 반갑다. 그 즉시 달려가 보려 했으나 또 제영운이 또 만류했다. "아니야, 잠시만 참아요. 이제 모두 동기지간이 되었으니까 앞으로는 아침저녁으로 실컷 만날 수 있을 텐데 뭘 그리 서둘러? 영남아우는 온천 속에서 나올 처지도 아니고 또 아우님도 중독부터 치료해야 하지 않겠어? 며칠만 더 견디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니까 조급하게 굴지 말아요. 지난 번 영경아우가 망창산으로 떠난 후 얼마쯤 있다 장교어르신의 분부가 전해져 왔어. 망창산에 있 는 요시 그놈은 영경아우의 자영검 덕분으로 화운련이 끊기고 사조님의 굴레에서 벗어났지. 그놈 이 살아 있는 한 우리 정교 문파는 크게 환란을 당할 거야. 요시놈은 반드시 아우님의 손으로 처 치해야 하니까 속히 가봐야 해요. 그놈은 <취수요법(聚獸妖法)>을 미처 완성시키지 못한 상태라 그걸 중도에서 포기하고 도망칠 계재가 못되는 데다가, 장미사조님께 제압당한 걸 분하게 여기고 앙심을 품어 우리 아미파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거든. 그래서 자기가 요법을 단련하는 동안 근처에 얼씬거리는 아미제자들을 처치하려고 악독한 계략을 꾸미고 있어. 누구든지 쳐들어가면 망창산의 산맥을 되돌려놓아 지폐(地肺)의 함정 속에 빠뜨려 죽일 셈이지. 예전에 자기가 당했던 것처럼 말야." "요시의 동굴에 저를 도와주려는 자가 있는데 어쩌면 될까요?" "그것도 알고 있어. 아우를 도와준 장이와 미타, 유유안 두 난쟁이 도사가 있다는 것도 말야... 그들 중 장이는 진작부터 사부의 명령을 받들어 본문에 귀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그리고 두 왜 도사는 원래 이단파의 요인(妖人)이긴 하지만 요시란 놈에게 잡혀 온갖 시달림을 받고 난 터라 진작부터 은근히 개사귀정(改邪歸正)할 마음을 품은 상태야. 아우가 중독되던 날도 홀몸으로 험지 에 뛰어들어 위급한 처지가 되는 걸 보고서 미타와 유유안은 아우를 일깨워 주느라고 일부러 경 종을 늦게 울린 거야. 그 덕분에 아우가 위기일발의 순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던 거지. 그때 조금 만이라도 늦었더라면 지폐(地肺)가 뒤집혀 갈라져서, 아우가 아무리 자영보검으로 호신을 한다손 쳤더라도 빠져나오기 어려웠을 거야. 여하튼 간에 아우는 무사히 탈출했지만, 그들 세 사람은 모 조리 요시란 놈에게 꿍꿍잇속을 눈치채이고 말았어. 요시는 그 당장에 세 사람을 쳐죽이려 했으 나 마지막 찰나에 생각을 바꾸었지. 그래도 아직은 쓸모가 있으리라 여기고 겉으로는 전혀 모른 척 시침을 떼고 있는 거야. 하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배반에 이를 부드득 갈고 있어... 장이는 화요 숭 선고님으로부터 도법을 전수받았으니까 언제든 때가 되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어. 문제는 미 타와 유유안 두 도사야. 영경아우, 잘 들어두어요. 그 두 도사는 예전에 비록 의롭지 못한 짓을 저질렀으나 근자에는 손을 씻고 또 선한 길로 들어설 마음을 품은 상황이야. 그런 만큼 영경아우 가 그들의 뜻을 박정히 저버릴 수가 없어. 장교부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이영경은 장차 우리 문호를 크게 빛낼 인물인즉, 우리 동문 형제들과는 달라서 두고두고 부려야 할 인재가 많이 필요 하다. 그런 고로 특별히 필요할 때에는 제자와 문도를 거느릴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한다. 그러나 아직 나이도 어리고 도력(道力)도 얕으니 매사에 모름지기 조심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여야 할 것 이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알아? 어머님은 영경아우더러 개심한 두 도사를 부하로 거두어들이 라고 허락하신 거야." 사존이 자신을 그토록 높이 평가했다는 말을 듣자, 이영경은 가슴이 막히도록 감격해서 어쩔 바 를 모른다. 제영운은 할 말을 마치고 나서 묘일부인의 비검전서에 동봉해 보낸 단약을 꺼내 영경에게 먹인 다음 재차 당부했다. "마음놓고 정양을 하도록 해요. 오늘밤 자시(子時)가 지날 무렵 두어 차례 현공(玄功)을 운기하 면 이내 완쾌될 거야." 그리고 여러 동문형제와 몇 마디 작전계획을 의논하고 나서 영경만 남겨둔 채 또다시 싸움터로 달려나갔다. 격렬한 응벽애 전투에 관해서는 뒤에 상세히 서술하기로 하고, 우선 이영경과 망창산 요시 곡진 의 싸움부터 결말을 짓기로 하자. 제영운을 비롯한 동문 사형들이 싸움터로 나간 후, 이영경은 어린 장남고남매와 함께 석실에 남 았다. 묘일부인의 단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점점 신기(神氣)가 맑아지고 나른하던 몸 에 힘이 붙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단약의 효력이 신통하게 나타난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나흘째 되던 아침에 요시에 <만년지살음매지독>을 완전히 몰아내고 원상대로 회복되었다. 몸은 깨끗이 회복되었지만 대사형의 분부가 없으니 함부로 싸움터에 끼여들지도 못하고 따분하 게 시간을 보내자니 좀이 쑤셨다. 그래서 한가한 틈을 타서 여영남이나 만나러 가볼까 궁리하는 참인데 느닷없이 주경운이 미진번을 손에 들고 불쑥 들어왔다. "경운언니, 웬일이세요? 바깥 싸움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어요." 반색을 하며 묻자 주경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말도 말아. 좀전에 한악언니가 적을 우습게 보고 정문 바깥으로 올라갔어. 비뢰애(飛雷崖)에 몰 려 있는 적진을 우회해서 적진 배후의 요진주기(妖陣主旗)를 파괴해 버리러 간 모양인데 성공하 기는커녕 이 미진번이 아니었더라면 꼼짝없이 잡힐 뻔했지 뭐야. 겨우 빠져나오는 길에 독수리를 만났는데 이 응벽애 전체가 봉쇄되어 있으니 들어올 길이 없거든. 그래서 혼자 맴돌고 있는 모양 이라, 한악언니는 적의 요술에 걸리지 않도록 더 높직이 날면서 기다리라 당부해 놓고 돌아왔어. 그 소식을 듣고 자영언니가 수점(袖占)을 쳐봤더니 아무래도 망창산에 두고 온 원성이한테 점괘 가 떨어지더구만. 당초 대사형은 영경아우의 몸이 회복되었으니까 일단 함께 적을 격파하고 나서 나와 같이 망창산으로 보낼 심산이었는데 갑작스레 독수리가 돌아온 것이 심상치 않아 계획을 바 꾸었어. 망창산에 분명 사고가 터진 모양이니 지체 말고 날더러 영경아우와 함께 떠나라는 거야. 어때, 금방이라도 출발할 수 있지?" "네, 언제든지!" "그래 좋아요. 지금 바깥쪽은 그놈의 요물들과 공방전이 한창이니까 우리는 앞 동굴 통천절학(通 天絶壑)으로 빠져나가기로 해요." 이영경은 황망히 자영검을 꺼내 차고 주경운과 함께 미진번에 술법을 걸었다. 한 무더기 채운이 두 처녀를 휩싼 채로 통천절학을 날아올라 곧바로 고공까지 솟구쳐 올랐다. 벌써 오래 전부터 창공에서 기다리고 있던 독수리가 빙그르 선회하면서 영경일행 앞으로 날아왔 다. 이영경과 주경운은 즉시 독수리의 등에 바꿔 타고서 일로 망창산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요시에게 중독당하고 인사불성 신음하던 동굴에 당도하자, 영경은 우선 원성이의 종적부터 찾았 으나 과연 진자령의 점괘(占卦)처럼 그 짐승은 그림자도 없다. 그녀는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면서 재차 토아암 현상동으로 갔다. 그곳에도 원성이는 없었다. 이영경은 독수리에게 물었다. "금안사형, 어떻게 된 거야? 원성이가 요시한테 잡혀갔어?" 독수리는 맥없이 긴 모가지를 끄덕였다. "요시란 놈이 여기저기 손을 뻗쳤구나!" 영경은 이를 악물었다. 그 즉시 요시의 소굴로 쳐들어갈 태세다. 주경운이 얼른 그녀를 만류했다. "안 돼, 서둘지 마라. 어차피 요시의 소굴에는 우리편 내응자가 셋씩이나 있고, 또 요시란 놈은 해질녁이면 으레 죽은 듯이 잠들어버릴 테니까 그 시각에 정탐을 해보자구. 조급하게 굴면 도리 어 일을 망칠 수 있어." "해질녘이라... 그럼 언니 말대로 기다리죠 뭐." 속으로는 안달이 났지만 그래도 이영경은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암굴 속이 너무나 어둡고 습한 걸 꺼려서 잠시 동안이라도 현상동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암굴에 숨어 있 는 성성이와 말곰떼는 여지껏 요시의 눈에 발각되지 않은 걸로 보아 그대로 두어도 안심이 될 만 했다. "경운언니, 이러고 해질 때까지 있을 게 아니라 먼저 그 청삭검부터 찾아보는 게 어때요? 그리 고 저녁이 되거든 요시의 소굴로 잠입하기로....." 영경의 말에, 주경운은 그제서야 묘일부인이 보내 온 비검전서를 꺼냈다. 응벽애를 떠날 무렵 제 영운한테서 건네받은 이래 자신도 아직껏 내용도 모르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묘일부인의 사연은 대략 이러했다. <... 자영검과 청삭검은 처음부터 합벽(合璧)하여 위력을 나타내는 무쌍의 보검이다. 자영검은 양 강(陽剛)에 속하고, 청삭검은 음유(陰柔)에 속하는 것이다. 청삭검은 원래 요시의 동굴 부근, 바로 지난 날 영경이 주과(朱果)의 목괴(木魁)를 베어 죽였던 계곡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파묻혀 있 었다. 그러나 요시가 산계곡을 전도(轉倒)시키던 날 지기(地氣)까지 누설되어 그 보검을 봉쇄해 놓은 영부(靈符)의 효력마저 잃어버렸다. 청삭검은 본래 스스로 신통력을 지닌 칼이라, 그때부터 저절로 땅 속을 파고 나가 지금쯤은 오 구선부(奧區仙府)에서 가까운 지점으로 이동했으리라. 아마도 사흘 안에 지각(地殼)을 뚫고 스스 로 북해(北海)를 향해서 날아갈 것이다. 그 시각이 되기 전까지는 청삭검을 캐어낼 방도가 없다. 또한 칼이 뚫고 나오는 순간 추호라도 방심하는 날이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각을 벗어나 사라져 버릴 테니까. 일단 놓치면 북해에 가서 그것을 찾아내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칼이 묻혀 있는 오구신부는 현재 성성이와 말곰떼가 잠복한 암굴 부근인데, 이미 취도인(醉道人) 이 보낸 제자가 거기서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취도인의 제자는 바로 경운과 삼세(三世)의 숙연 (宿緣)을 맺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경운은 모레 아침 그곳에 당도해서 협 력해야만이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영경은 원성이의 신변이 걱정되는지라 편지 내용을 대충 훑어넘겼으나, 주경운만큼은 달랐다. 지난 날 황산에 있을 적에 스승 찬하대사(餐霞大師)가 비검술을 전수하면서 뭐라고 말씀하셨던 가? <... 경운아, 너는 장차 삼세의 숙연을 맺을 자가 나타나서 그 인연에 얽매여야 하느니라. 그 때 문에 비승(飛昇)이 장애를 받을 것이니라.....> 스승의 말이 문득 뇌리에 떠오르자, 청삭보검을 얻게 된다는 기쁨도 일순간, 그녀는 얼음물을 뒤 집어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기쁨보다는 수치감이 솟구쳐 올라 얼굴까지 화끈 달았다. 주경운의 신색이 야릇하게 변하는 걸 눈치빠른 영경이 놓칠 리가 없다. "언니,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주경운은 다급하게 부인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매한테 설명해 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말 이다. 공연한 놀림감만 되기 십상이지... 다행히도 영경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윽고 해질 무렵, 주경운은 영경을 따라서 독수리의 등에 올라 요시 곡진의 소굴이 있는 옥영 암으로 날아갔다. 옥영암 부근에 내려앉자, 이영경은 아직도 적의 소굴에 잠복중인 세 사람의 내통자를 통해 적정 (敵情)을 탐지할 수 있거니 싶어, 지난 번처럼 원성이가 가르쳐 준 비밀통로를 거쳐 적의 소굴로 잠입했다. 그 비경(秘徑)은 워낙 비좁고 꾸불꾸불한 지름길인 데다가 요시의 술법에 진동을 겪고 난 후로는 여기저기 막히고 끊겨 있었으므로, 두 처녀는 검광을 쏘아 뚫고 나가면서도 적지 않게 애를 먹고서야 겨우 목적지의 입구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지름길을 벗어날 순간, 이영경은 탁 트인 앞쪽 광장 동굴의 어구에서 자못 해괴한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몸을 도사렸다. 들리는 것은 사람의 웃음소리와 야수의 비명이 뒤섞인 것이었다. 살 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살펴보던 그녀는 실망감과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제4권으로 계속> 촉산기협(2부) 4 영경, 제자를 받아들이다 重返仙山 靈泉初孕暖氷肌 三探妖窟 毒看齊飛裂地肺 웃음소리의 주인공들은 장이(莊易)도 아니요, 미타(米駝), 유유안(劉裕安) 두 난쟁이 도사도 아니 었다. 처음 보는 도동(道童) 두 녀석이 땅바닥에 모닥불을 활활 피워놓고 앉아 있는 것이다. 모닥 불 곁에는 요법에 제압당한 멧돼지 한 마리가 옴짝달싹도 못한 채로 '꽤액, 꽥!' 마구 비명을 지 르고 있었다. 도동 한 놈은 손에 단검 한 자루를 잡고, 또 한 놈은 깨어진 호로병을 들었다. 호로병에 담긴 것 은 술도 아닌 듯한 액체가 붉은 빛을 진하게 띠고 있었다. 손에 들린 단검이 산 멧돼지의 가죽을 찢어 헤치고 쉴새없이 움직였다. 생고기를 저며내어 모닥불에 익혀 먹는 것이다. 칼날이 살 속으 로 파고들 때마다 멧돼지는 하늘이 무너져라 슬픈 비명을 질러댔다. 도동 두 놈은 짐승을 죽여 놓고 잡아먹는 게 아니라 악착스럽게도 산 채로 고기를 뜯어먹으면서 짐승의 비명소리를 즐기고 있다. 일렁일렁 춤추는 불꽃 그림자 아래 두 놈의 표정이 사뭇 흉악하게 드러났다. 나이는 고작 십육 칠 세밖에 안 되어 보이지만 실로 표독하고도 잔인한 성품을 가진 놈들이다. 생김새도 그렇거니와 하는 짓이 잔악스러운 걸 보자니 이영경(李英瓊)은 그만 속에서 울화가 치 밀었다. 정체나 신분이야 어쨌든 간에 그런 잔혹성을 지닌 놈들이라면 용서해 줄 수가 없다. 그녀 는 주경운(周輕雲)을 잡아끌면서 냅다 앞뜨락으로 뛰쳐나갔다. "게 섯거랏! 요 벼락을 맞을 놈들! 아무리 미물이지만 생령을 산 채로 저며서 먹다니!" 이영경의 호통소리와 함께 두 놈도 잽싸게 반응했다. 적이 침입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동시에 벌 떡 일어나면서 쥐고 있던 단검을 내던졌다. 칼날은 번쩍 한 줄기 누런빛 광채로 화해 침입자를 향하여 날아갔다. 주경운이 그 광경을 보고서 그만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새끼 요마들도 제법 한 가닥씩 할 줄 아는구나." 어느 새 주경운의 손에서 검광이 쏘아져 나가 두 놈의 누런빛 광채를 옭아잡는가 싶더니 뒤이어 서 날렵한 솜씨로 한 손에 한 놈씩 뒷덜미를 나꿔채 가지고 바짝 조였다. 옥청사태(玉淸師太)가 전수해 준 <금신금나법(禁身擒拿法)>을 쓴 것이다. 쨍! 두 줄기 누런빛 광채는 맥없이 부서져 쇳가루로 화해 떨어졌다. 주경운과 이영경은 두 놈의 포로를 잡아 숲 속까지 끌고 갔다. "네놈들은 누구냐? 대답을 안하면 우선 혓바닥부터 잘라 진짜 벙어리라도 만들어줄 테다!" 포로들은 꼼짝도 못하고 엄포에 놀란 나머지 묻는 대로 순순히 자백했다. "우리는 운남성(雲南省) 변방 석연욕(石燕浴) 삼성동(三星洞)에서 왔소." "누구의 문하냐!" "청양노조(靑羊老祖)의 문인이오." "저 동굴 속 요시 곡진(谷辰)을 알지?" "물론 아오." "그 안에 또 벙어리 청년과 난쟁이 도사들이 있지?" "있소." "그 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냐?" "그놈들은 모두 반심(叛心)을 품은 게 탄로나서 모조리 잡혀 갇혔소." 영경은 그만 혀를 찼다. 역시 일은 잘못 꼬여갔던 것이다. 주경운이 계속 심문했다. "너희 사부 청양노조도 여기 와 있느냐?" "그렇소." "성성이 한 마리도 잡혀 있을 텐데?" "그렇소. 우리 사부님한테 잡혔소." 두 처녀는 맥이 풀렸다. 포로들의 자백을 종합해 보니 요시는 또 하나의 만만치 않은 악당을 끌 여들여 놓았던 것이다. 원성이 사로잡힌 경과는 대충 이러하다. 청양노조는 두 제자놈을 거느리고 망창산 상공을 지나던 중 우연히 산 속에서 원성이 한 마리가 칼춤을 추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 검법은 틀림없이 아미파 적전(嫡傳)의 솜씨였다. 청양노조는 그 신통한 짐승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요법으로 손쉽게 성성이를 사로잡았다. 뜻밖에도 그 짐승은 칼부림뿐만 아니라 사람의 말까지 통하는 놈이었다. 그래서 손에 들고 있던 그 희귀한 쌍검의 출처를 추궁했더니, 우연하게 땅 속에서 캐낸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예 전에 다른 사람이 칼춤 추는 걸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그대로 흉내냈을 뿐이라고 했다. 청양노조는 당초 성성이를 죽여 없애고 쌍검만 빼앗으려 했으나 짐승이 '목숨만 살려주면 스승 으로 모시겠다'고 애걸복걸하므로 생각을 돌렸다. 뿐만 아니라 '이 산 중에 보검 한 자루가 또 파 묻혀 있는데 도무지 꺼낼 수 없더이다'는 말에 청양노조는 불쑥 그 보검까지 손에 넣을 욕심이 생겼다. 그는 성성이를 앞세워 보검이 묻혔다는 장소로 안내하게 했다. 청양노조가 어느 산모퉁이 절벽에까지 이끌려 갔을 때였다. 갑자기 공중으로부터 시커먼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덮쳐내렸다. 성성이도 그놈의 날짐승을 아는지 마구 고함을 질러댔다. 거대한 날짐승은 당장 무서운 기세로 청양노조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청양노조는 첫눈에 그 날짐승이 백미화상(白眉和尙)의 신조(神鳥)임을 알아채고 그제서야 성성이 의 꼬임에 빠져 유인당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날짐승의 무시무시한 공격에 대항해서 싸 움을 벌였다. 바로 그때 동굴 속에서 요시가 나오다가 그 싸움판을 목격하고 청양노조를 도와 독 수리를 쫓아버린 것이다. 청양노조는 뜻밖의 도움을 받아 독수리를 격퇴시킨 후, 성성이를 단단히 제압해 가지고 요시와 함께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도움을 받은 대가로 그들 사도(邪道)는 며칠 간 머물면서 요시가 <취수요법(聚獸妖法)>을 완성할 때까지 힘을 빌어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사로잡힌 성성이는 여간 교활한 놈이 아니어서, 그동안 몇 차례나 달아나려 했으나 번번이 요시 에게 발각당해 되잡히곤 했다. 짐승한테 놀림감이 되었던 청양노조가 그놈을 쳐죽여서 분풀이를 하려고 했지만 이 역시 요시에게 제지를 당했다. 요시 곡진은 그놈을 <취수요법> 단련에 쓸 심산으로 지혈(地穴) 속 깊숙이 끌어다가 단단히 매 달아 놓고 감시까지 붙여놓았다. 이런 상태로 벌써 며칠을 보낸 것이다. "언니, 요런 놈들은 살려둘 필요가 없겠어요. 온통 요사스런 기운에 흠씬 절어서 구제불능인 듯 싶은 걸?" 이영경은 포로들의 말을 듣고서 약이 뻗칠 대로 뻗쳤다. 그러나 주경운은 묵묵부답, 결심을 하지 못했다. 어린 놈들이 너무도 포악스럽고 잔인한 것은 틀림없다. 영경 말마따나 세상에 남겨둘 필 요조차 없는 패류(悖類)들이다. 하지만 너무도 어리다. 차마 이것들의 목에 칼날을 댈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처분해야 좋을지 당장 결심이 서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우후!... 이것들이 어딜 갔나?" 갑자기 숲 밖에서 괴성이 울려왔다. 그와 동시에 주경운 앞에 꿇어앉았던 포로 두 놈이 악을 고 래고래 질렀다. "사부님, 우리 좀 살려주십시오!" "아뿔싸!" 기급을 한 주경운이 재빨리 두 놈의 목덜미를 조였으나 때는 벌써 늦었다. 반항은커녕 순순히 자백을 하면서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잠시나마 방심했던 게 잘못된 것이다. "우후훗!" 숲 바깥에서 또 한 차례 괴성이 터져 그쪽으로 신경을 집중하는 바람에 주경운은 또다시 손아귀 힘이 늦추어졌다. "에잇!" 악동 두 녀석은 일순간 힘껏 몸부림치더니 땅바닥을 박차고 미꾸라지처럼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 어났다. 이어서 한 줄기 검은 연기로 화해 숲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차!" "뒤쫓아 잡아요!" 야멸찬 고함을 지르면서 두 처녀가 뒤쫓아 나갔을 때, 그녀들은 맞은편에서 시퍼런 안색으로 날 아오는 도사와 마주칠 뻔했다. 더부룩한 수염에 얼굴빛처럼 시퍼런 옷을 걸치고 한 자루 죽장(竹杖)을 손에 들었는데, 머리통이 길쭉하게 생긴 것이 염소와 다를 바 없었다. 도사의 등 뒤로 돌아간 흑연(黑煙)은 땅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악동 본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재 빠른 발걸음으로 요시의 동굴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도사의 수중에서 죽장이 번뜩하더니 한 무리 청사(靑蛇)로 변해 영경을 향하여 날아왔다. '저놈들의 사부란 작자로구나!' 이영경도 두말없이 자영검을 뽑아 날렸다. 자줏빛 광채가 번쩍 솟구쳐 무지개를 그렸다. "에쿠, 저것은!" 자줏빛 검광을 보는 순간 그 도사는 아연실색, 허둥지둥 쏘아보낸 법보를 회수하려 했다. 하지만 벌써 때는 늦었다. 자줏빛 무지개가 '씽!' 소리를 내고 스치는 듯하더니 청사는 그만 썽둥 베어져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자영검의 서슬은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청사를 동강낸 여세를 그대 로 몰아 빙그르 선회하더니 이번에는 곧장 도사의 정수리를 노리고서 숨쉴 틈도 없이 들이덮쳐 내리는 것이었다. 형세가 위급해지자 그 도사는 달리 손 써볼 틈도 없어 당장에 흑색 연무를 일으켜 뒤집어쓰고서 다리야 날 살려라, 곧바로 요시의 동굴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그 길밖에는 아 무 궁리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딜 뺑소니치는 거야? 에잇!" 영경이 교성을 지르면서 추격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전후좌우 사방에서 검은빛 운무가 자 욱하게 일더니 땅바닥과 주변 산악이 한꺼번에 흔들흔들 요동치면서 피비린내 풍기는 안개가 시 야를 가리웠다. 이어서 '쑤우, 쑤우!' 하는 귀곡성이 처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꽈아, 꽈아! 쿠르릉!" 자욱한 운무 속에서 아렴풋이 독수리가 경고를 발하는 소리가 들리자 이영경은 추격의 발길을 멈추었다. '아차, 요시란 놈이 발광했구나!' 영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꼼짝없이 먼저 같은 꼴을 당할 판이다. "언니!... 언니!" 어둠 속에서 당황한 음성으로 주경운을 불러 손을 맞잡자마자, 검광과 미진번을 펼쳤다. 사방은 어느덧 암흑천지다. 퇴로의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다. 이럴 때 도망칠 길은 오직 하나, 고공(高空) 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뿐이다. 미진기의 채운 속에서도 두 처녀는 물샐 틈없이 검막을 쳐서 호신 하고, 있는 힘껏 허공으로 솟구쳤다. 상공에는 독수리가 대기하고 있었다. 날짐승의 우람한 등에 올라타자 그녀는 일부러 현상동(玄 霜洞) 토아암(兎兒巖)의 반대편 방향인 동쪽으로 날았다. 지상에서 갓 떠오를 때까지도 들리던 귀 곡성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어스름한 저녁 노을을 등진 채 탈주자들은 마음이 놓일 때까지 한껏 날았다. 겨우겨우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다시 토아암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영경은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의 신수를 보아하니 지난 번 당했던 낭패와 다 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요시란 놈은 제시각이 되어서도 죽음의 잠 속에 들어가기는커녕 더욱 극악 스럽게 흉포해졌다. 자, 이제는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원성이도 사로잡힌 데다가 세 명의 내통자마저 요시의 눈 에 발각당해서 생사조차 모르는 판국이다. 그 악동 두 놈을 닥달해서 세 사람이 어느 곳에 갇혀 있는지 알아냈어야 하는데 미처 알아내지도 못한 채 놓치고 쫓겨온 것이다. 장차 이 일을 어쩌 랴? 요시란 놈이 그들을 고이 모셔놓았을 리는 천만에 말씀이다. 영경이 안절부절하는 사이에 주경운은 또 그나름대로 풀이 죽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달리 걱정 거리가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근심 덩어리가 처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삼 세의 숙연으로 맺어질 남자... 비승 탈겁을 방해할 인물이 이곳 망창산 어딘가에 와 있다니! 두 처녀는 아뭇소리도 없이 침묵으로 그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이튿날 아침, 영경은 요시의 소 굴을 공격할 궁리가 막연하자 경운에게 색다른 제의를 했다. "언니, 우리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먼저 <오구선부>로 가서 비검부터 손에 넣기로 해요. 청삭 검을 얻으면 내 자영검하고 협력해서 요시란 놈을 쉽사리 처치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주경운은 얼굴빛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사존께서 뭐라고 분부했어? 그 날짜가 되기 전에는 가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잖어? 공 연히 일만 그르칠지도 모르지." "그건 그래요. 하지만 언니, 우리를 돕기로 한 동문이 하나 있다는데... 도대체 어디서 기다리고 있을까? 만약 이 망창산에 있었다면 분명 내 눈에 띄었을 텐데,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에요. 언 니, 우리가 청삭검은 찾지 못한다 치더라도 먼저 그 동문부터 만나보는 게 어때요? 미리 청삭검 을 찾아낼 일에 대해 의논도 나눌 겸해서 말예요." "안 돼! 그건 정말 안 돼!" 속이 찔끔해진 나머지 주경운은 엉겁곁에 악을 쓰다시피 거부했다. 제소리에 자기도 놀랐는지, 그녀는 눈이 휘둥그래진 영경에게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이고 얼버무렸다. 왜 경운언니가 느닷없이 버럭 악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안 된다니 할 수 없다. 영경의 심 사는 또다시 동굴 속에 갇히워 생사 안위를 알 수 없는 원성이와 세 명의 동조자 쪽으로 돌려졌 다. 그래서 또 경운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오구선부> 쪽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니 안 가는 게 좋을 거고, 그럼 언니, 이러면 어때요? 어 차피 오늘 한나절 동안 할 일도 없는 바에야 차라리 대낮에 적의 소굴을 정탐해 보기로 하죠. 미 진번이 있으니까 여차직하면 뺑소니칠 때 호신하는 것쯤 문제가 안 되겠죠?" 뾰족한 수는 아니지만 주경운은 그 제의마저 거절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녀는 영경의 불 같은 성미에 한나절 동안 죽치고 앉아 있을 리 만무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 함께 가보자꾸나." 두 처녀는 마침내 대낮에 적의 소굴을 기습공격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이번 공격에는 독수리를 데리고 가지 말자! 적이 낌새를 채기 전에 기습적으로 직공(直 攻)을 펴고, 소동이 일어난 와중에 온옥(溫玉)을 깨뜨리거나 아니면 원성이라도 구출해 가지고 즉 시 철수하기로 하자. 적의 소굴에 들어가서는 시종 미진기를 단단히 잡고 서로 그림자처럼 붙어 서 자영검으로 겹쳐 호신한다면 최소한 성공은 거두지 못하더라도 실수야 피할 수 있을 것이 아 니겠어." 주경운의 말이 끝나자, 그녀들은 즉시 미진번의 채운을 일으켜 타고서 곧장 요시의 동굴 이층으 로 날았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를 무렵, 주경운과 이영경은 상공에서 하계(下界)를 굽어보고 자못 실망했다. 상황은 어젯저녁보다 더욱 나빠진 것이다. 지상으로부터 수십 장 상공까지 온통 검은 안개가 무 겁게 뒤덮여 있고, 동굴 주변 산악 일대를 완전히 가리우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그렇다고 냉큼 단념할 이영경은 아니다. 삽시간에 채색 구름 덩어리는 두 처녀의 전신을 감싼 채 어느덧 검은 기류층을 꿰뚫고 동굴 이층 뜨락에 내려앉았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사면을 둘러보니 뜻밖에도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아직 적의 눈길에는 발각되지 않은 게 틀림없다. 주경운은 조심스레 미진번을 거두어 손아귀에 감추었다. 영경은 앞장서서 익숙하게 통로에 들어섰다. 일전에 한번 드나든 적이 있기에 그녀로서는 전혀 낯선 길이 아니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죽여 초행길인 경운에게 화석(化石)의 고목을 가리키면서 소근소근 일러주었다. "저 고목 속에 아래로 곧장 구멍이 뚫려 있어요. 요시의 소굴에서 만약의 경우 바깥으로 탈출해 나오는 비밀통로예요." 두 처녀는 발소리를 죽이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적의 소굴로 침투해 들어갔다 석실 다섯 칸은 전과 다름이 없다. 그 가운데 석실을 통과하여 돌병풍 뒤쪽으로 돌아서려는데 문득 옆칸 석실에 서 탄식소리가 들렸다. 영경은 석벽에 바짝 붙어 귀룰 기울였다. 사뭇 귀에 익은 음성이다. "아아, 이젠 꼼짝없이 죽는 판이로구나! 여보게, 자넨 왜 말이 없지? 꼭 온다던 구원자는 어째서 오지 않는 거야? 자네가 장담했지 않은가?" "글쎄... 나도 모르겠네." "때가 늦으면 끝장일세. 난 이대로 죽긴 싫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이영경은 훌쩍 출입구 쪽으로 달려가서 고개를 갸웃 내밀어 보았다.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둘 다 나란히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두 다리는 무엇에 묶였는지 밧줄은 보이지 않는데 머리통을 아래쪽으로 떨군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들은 미타 와 유유안 두 난쟁이 도사였다. 영경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을 구출하려고 옆칸 석실로 뛰쳐들었다. 그러나 꿈쩍하기가 무섭 게 주경운의 제지를 받았다. 경운은 나지막이 외쳤다. "안 돼, 함부로 들어가지 마라!" "왜요? 저 사람들은 우리편인데....." "아니야, 미끼야. 우리를 잡으려고 일부러 낚시밥을 던져놓은 거야." 주경운은 성도(成都) 벽사촌(壁邪村)에 머무는 동안 흑도 출신의 옥청대사로부터 좌도방문(左道 旁門)의 무리들이 곧잘 쓰는 함정이나 요법에 대해서 적지 않은 지식을 얻어들은 터라, 첫눈에 난 쟁이 도사들이 어째서 소굴 초입에 매달려 있는지 그 까닭을 간파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벌써 그 석실 안에 들어서고 있는 상태라, 두 난쟁이 도사의 눈에도 간 단히 뜨이고 말았다. 미타가 먼저 영경을 발견하고 대뜸 동료에게 소리쳤다. "이것 봐라, 저 분 아니냐? 내 뭐라고 했어? 꼭 오신다고 안 그랬냐?" 유유안도 영경과 또 한 사람 낯선 처녀가 석실 입구에 서 있는 걸 보았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버둥 거리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선고님, 어서 좀 살려주십쇼! 우리는 흑살사(黑煞絲)에 묶여 있습니다. 요시놈이 우리 주변에다 함정을 깔아놓았지만 이선고님의 자영검이라면 문제가 안 됩니다. 그 검광으로 우리 발치와 머리 쪽을 한 번만 휘감으면 파괴됩니다. 저희들은 벌써부터 장이와 마음을 고쳐먹기로 약속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선고님께서 요시를 베어 죽이고 온옥을 얻도록 도와드릴 테니 빨리 구해주십 쇼!" 이영경은 군소리를 다 들어줄 여가도 없다. 어느 새 자영검을 쓰윽 뽑아잡더니 대뜸 검광부터 쏘아날렸다. 자줏빛 광채가 힘차게 '씽!' 하고 날아오르면서 두 포로의 신변을 겹겹이 휘감았다. 무지개 광선이 번쩍이는 속에 과연 수백 가닥의 검정빛 실줄기가 토막토막 끊겨서 석실 허공을 맥없이 떠도는 게 보였다. 쿵! 두 도사의 몸뚱이가 동시에 둔중한 소리를 내면서 석실 바닥에 떨어졌다. 그들은 아픈 것도 잊 고 허겁지겁 영경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이선고님, 어서 달아나야 합니다! 그 요시놈은 여간 눈치빠른 게 아닙니다. 저희들을 결박했던 흑살사는 그놈이 직접 술법을 걸어놓은 것이라, 끊어지자마자 그놈한테 곧장 감응이 됩니다. 여기 에 무슨 이상이 생기면 즉각 <이형환악대법(移形換岳大法)>이 발동해서 우리들을 가두어놓고 다 시 <음표지화(陰飇地火)>를 일으켜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겁니다. 거기에 걸렸다간 끝장입니다!" 미타가 악을 쓰듯 적정(敵情)을 일러주었다. 그러나 영경의 관심은 또 다른 데 쏠려 있는지라,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성성이 한 마리가 잡혀왔을 텐데 지금 어디 있느냐? 그리고 또 벙어리 청년은?" 갑자기 영경은 말도 다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발 밑이 문득 허전해지는 느낌을 받은 것 이다. "엇, 이것 봐라?" 딛고 있던 석실 바닥이 늪처럼 물렁물렁해지더니 곧장 푹 꺼져 들어갔다. "조심해!" 주경운이 고함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음산한 바람이 '쏴아!' 하고 사방에서 일었다. '쑤우, 쑤 우!' 하는 귀곡성과 함께 황록색의 연무(煙霧)가 풀썩 퍼지고 매캐한 냄새를 풍긴다. 뒤미처 '우르 르!... 쿵!'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 속에 주먹만큼씩한 불덩어리가 폭죽 터지듯 솟구쳐 나와 사면팔방으로 어지럽게 날았다. 처음부터 단단히 경계하고 있던 주경운은 발 밑이 흔들리기가 무섭게 경고를 발하고 영경을 끌 어당기는 한편, 잽싸게 미진번을 펼쳤다. 두 처녀의 몸뚱이가 솟구쳐 오르는 것과 동시에 발 밑이 풀썩 꺼지고, 자욱한 연무와 불덩어리 아래로 끝도 모를 무저화갱(無底火坑)의 불구덩이 지옥이 아가리를 떡 벌리고 나타났다. "으앗!" "아악! 선고님들 살려주십쇼!" 졸지에 딛고 있던 바닥이 없어졌으니, 버텨낼 재간이 어디 있겠는가? 미타와 유유안은 비명을 지르면서 탄환처럼 불구덩이 지옥 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진번의 채운을 타고서 갓 떠오르던 두 처녀가 비명소리를 들었다. 일껏 구해낸 두 도사가 화 갱(火坑)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걸 보자, 그녀들은 자신의 위험보다 앞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울 컥 치밀었다. 그대로 두면 경각지간에 끝장나고 만다. 이영경과 주경운은 눈짓 한번 나누지 않고 약속이나 한 듯 미진번의 구결을 맺었다. 솟구치던 채운의 덩어리가 방향을 바꾸어 쏜살같이 지옥의 아가리 속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화끈하게 불기 운이 전신을 덮쳤다. 자영검과 미진번으로 호신한 가운데서도 악마의 불길은 위력을 보이는 것이 다. 불구덩이 입구에서 이십여 장을 못 미쳐 내려간 두 사람은 마침내 저마다 한 명씩 뒷덜미를 나꿔채는데 성공했다. "이얍!" "간다!" 두 처녀는 동시에 고함을 질렀다. 줄창 떨어지던 채운이 섬전(閃電)과도 같이 허공을 뚫고 솟구 쳐 올랐다. 경황이 없는 속에서도 영경은 발치 아래를 굽어보았다. 불꽃 한 떨기가 번쩍하더니 곧바로 쏘아 오르고 있다. 귓전에 '우후훗!' 하는 괴성이 울린다. 지혈(地穴)을 꿰뚫고 모습을 드러낸 괴물, 쩍 벌어진 아가리에 늑대의 송곳니가 허옇게 빛나고 황록색 눈동자를 두리번두리번 부릅뜬 요시 곡 진이 추격해 오고 있다. 한 손에 요번(妖幡)의 깃발 한 폭을 잡은 채, 또 한 손으로는 쉴새없이 법결(法訣)을 맺어 오색찬 란한 화염덩어리를 밀어붙였다. 천만다행히도 기세등등하게 치솟아오르던 화염은 미진번의 채운 가까이 접근하기가 무섭게 번번 이 소멸당하곤 흩어졌다. "앗, 저것 좀 봐!" 이제 지면에 거의 다 올라왔으려니 하고 위쪽을 치켜다보던 주경운이 대경실색을 하고 외쳤다. 보라! 지옥의 천정, 이제껏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석실의 찢겨진 바닥이 돌연 사방에서 조여들면 서 바야흐로 닫히는 중이 아닌가! 겨우 남은 틈바구니는 이 척 넓이 정도뿐, 그 아래는 끝도 모를 화염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차, 큰일났다!" 이영경의 입에서도 실성(失聲)이 터져나왔다. 둘이서 사람을 구해내는 데만 급급하느라 사면 도 처에 깔린 적의 매복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채운을 타고서 급강하한 시작이 분초(分 秒)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는데, 적은 어느 사이 함정의 뚜껑을 닫고 있었다니!..... 두 처녀는 다급해졌다. 남은 틈바구니 이 척 너비의 공간을 통과해야만 살아날 수가 있다. 영경 은 마지막 수단으로 자영비검을 던져 돌파할 각오를 세웠다. 차르륵, 차르르.....! 이빨이 맞물리듯 석실 바닥이 합쳐지는 소리가 지겹게 울린다. 그런 찰나, 채운에 휩싸인 몸둥아리가 찢겨진 지면을 스치듯 솟구치더니 뒤미처 무시무시한 굉 음이 울려퍼지면서 먼지 폭풍을 일으켰다. 콰당! 우르르.....! 발 밑에서 돌덩이가 밀가루처럼 부서지더니, 화염지옥의 아가리는 조개와 같이 닫혀버렸다. 실로 위기일발의 순간을 넘긴 것이다. 영경과 경운은 저들도 모르게 식은땀이 부쩍 돋았다. 위험천만한 곡예를 아슬아슬 간발의 차이로 겪어냈으니 제정신이 아니다. 그 무렵 석실은 요법에 기우뚱 흔들리고 여기저기 갈라져 원모습마저 잃은 상태다. 더 지체할 여지가 없다. "가자!" 두 처녀는 즉시 채운을 탄 채 제각기 미타와 유유안의 몸뚱아리를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면서 검 정빛 기류의 벽을 뚫고 나가자마자 곧장 상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원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수확은 거둔 셈이다. 그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토아암까 지 직행해서 내려앉았다. 미타와 유유안은 땅에 이마를 조아리고 혓바닥이 닳도록 칭사했다. 영경은 그들의 입을 통해서 비로소 원성이의 소식을 대충이나마 들었다. 원성이는 청양노조에게 사로잡힌 뒤 몇 차례나 탈출하려 했지만 자기가 목숨처럼 아끼는 그 보검 두 자루를 버리고 갈 수가 없어 망설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장이와 두 난쟁이 도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그 쌍검을 훔쳐내는 데 성공은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다시 염소 대가리 도사놈의 눈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도로 잡혀 끌려간 것이다. 청양노조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성이를 석연욕으로 끌고 가서 문지기로 삼을 속셈일 뿐,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단단히 가두어두고 제자를 시켜 감시만 하게 했는데, 이번에는 요시 가 눈독을 들여 강제로 빼앗았다. 요시는 성성이의 성품이 완강하고 길들여지지 앉자, 그 짐승을 <취수요법>의 주기원신(主旗元神)으로 희생시킬 작정이라는 것이다. 원성이와 장이는 현재 지혈(地穴) 속에 갇혀 옴쭉달싹도 못하고있다. 장이와 난쟁이 도사들이 아 직 요시란 놈에게 행적을 간파당하지 않았을 때, 요시는 이런 말을 했었다. "이 달 경진일(庚辰日)을 요법 완성시기로 잡으면 내 목덜미에 남은 이 화운련(火雲璉)의 반동강 사슬도 깨끗이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영경이 소굴로 칩입한 뒤로 요시는 적의 수단이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걸 깨닫고, 일 상적인 죽음의 잠마저 잊은 채 주야불문, <취수요법>의 단련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또 최근에 는 몇 시간 동안 굴 속에서 죽음의 잠 대신 운기 현공으로 술법을 증진시키고 있다고 했다. 끝으로 미타는 이렇게 말했다. "... 사흘 후가 되는 날이 바로 경진일입니다. 그놈의 대법 제련날짜를 바꾸지 않았다면, 장이와 원성이의 목숨은 그날까지 무사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청양노조의 제자 두 놈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극악무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악동녀석한테 저희 두 사람이 얼 마나 지독스런 곤욕을 당했는지 말도 못할 지경이었습지요. 그런데 어제 새벽 그놈들이 바깥에서 주고받는 말을 얼핏 듣자니, 아무래도 요시가 변덕을 부려 날짜를 당길 기색이 있는 듯하더군요. 정말 그렇다면 장이와 원성이의 목숨은 알 수 없게 됩니다." "날짜를 당기다니... 그렇게 해도 요법 제련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까?" "요법의 효력이 크게 떨어집니다. 하지만 그놈이 초조해서 앞당길 공산은 충분히 있습니다요." "으음, 큰일났군!" 이영경과 주경운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요시가 경진일을 대법 완성 기일로 지킨 다면 그 안에 청삭검을 찾아 밀어붙일 수가 있지만, 날짜를 앞당겨 손을 쓴다면 정말 난감해진다. 또 당기는 날짜와 시각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적의 소굴 주변을 진종일 어슬렁거릴 수도 없는 처 지 아닌가? "이선고님!" 갑작스레 미타와 유유안이 영경의 발치 아래 무릎을 꿇었다. 혹시나 무슨 좋은 꾀라도 생겼는가 해서 기대를 품고 내려다보았더니, 웬걸! 두 왜도사는 뜻밖의 말을 늘어놓았다. "이선고님, 저희 두 사람은 비록 이단의 출신이오나 벌써 오래 전부터 손을 씻었습니다. 이번에 우연히 한때의 욕심을 품고 잘못 발을 내디뎠다가 악독스런 요시놈에게 걸려 말 못할 고초를 겪 었습니다. 이 모두가 자업자득이지요. 오늘 선고님들의 은혜로 또다시 요행히 죽을 운명에서 벗어 나기는 했지만 과거에 저지른 업보가 너무나 무거워, 정교(正敎)의 문하로 들어가서 널리 공덕을 쌓지 않고서는 그 마겁을 모면할 길이 없음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선고님께서는 선골이 뛰어난 분입니다. 장차 큰일을 해내실 운명을 타고나셨습니다. 아미문하에서는 남녀제자를 함부로 거두어들이지 않으시는 것도 잘 압니다. 더구나 이단의 문파출신은 넘불 수 없는 줄도 알 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단의 개라도 선을 지향하는 마음을 품고, 마겁에서 벗어나려는 뜻이 건전하다면 이를 어찌 외면하시겠습니까? 저희 두 사람은 보잘것 없사오나 그래도 방문(旁 門)의 도술을 제법 익혀 은형잠종(隱形潛踪)에 능통하고 두더지처럼 땅 속을 파고 나가는 재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비법전수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옵고, 단지 이선고님께서 하인으로나 마 부려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저희 재간이라면 땅 속에서 이선고님을 호위해 드릴 수도 있거 니와, 요시를 처치할 때 온옥을 찾도록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그저 그놈을 죽여 없앤 다음, 저희 들이 빼앗긴 몇 가지 법보와 호명원단(護命元丹)을 되찾게만 해주십시오. 제발 이렇게 빕니다." 두 왜도사는 애걸복걸, 연신 이마를 조아리며 일어설 줄 모른다. 너무도 뜻밖의 간청에 이영경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자기를 뭘 로 알고 하인이 되겠다는 거냐? 언제 무슨 인연을 맺었다고 일평생 자기 문하로 투신하려는지 알 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기야 전혀 인연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난 번 요시의 소굴에 잠입했을 때 이들 두 사람은 두 차례씩이나 위험을 일깨워 준 공이 있 다. 그래서 불지옥에 떨어져 참혹하게 죽는 걸 구해낸 것이다. 물론 적방의 허실을 알아보기 위해 서도 모험을 걸었지만, 속마음 한구석에 일말의 감사지심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좋으냐? 차라리 칼을 뽑아들고 후련하게 맞싸움질이나 한다면 모르거니와, 자기보다 수 십 살 위의 영감들이 무릎꿇고 애걸복걸 간청하는 꼬락서니는 차마 눈 뜨고 못 보겠다. 그렇다고 선뜻 손을 내밀어 일으키자니 이건 또 무슨 추태냐? 이러한 사파의 무리를 부하로 받아들이겠다 고 승락하는 꼴이 되고 말 테니까. 그녀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만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당신네 두 사람,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 아미문하의 막내둥이, 배운 것도 별로 없는 날더러 스승노릇을 하라니? 나보다 훨씬 일찍이 입문해서 공덕을 깊이 쌓으신 동문언니들도 아직 제자 한 사람 거두어들이지 않았는데, 나 같은 꼴찌가 어떻게 문규(門規)를 어기고 당신네 주인노릇, 사부노릇을 하라는 거야? 정녕 당신네들이 착한 길로 돌아왔다면 이번 일을 끝내고 나서 우리 대 사형한테 돌아가 주선해 줄 테니까 딴 생각일랑 말아요. 대사형이 무슨 방도를 써서 당신네를 선 처하겠지. 그때까지는 아예 딴 소리 마시오!" 이영경은 엄포 반 구슬림 반을 섞어 두 사람을 달래면서 그들의 정면을 피해 곁으로 물러났다. 혹시나 급작스럽게 대례(大禮)라도 받는 날이면 큰탈이니까. 그러나 미타, 유유안 두 사람도 끈질겼다. 이영경이 피하는 대로 방향을 바꾸어가며 이마를 조아 리고 애원한다. "이선고님의 내력이 비범하시단 것은 저희들도 벌써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또 저희 검 괘에 주인님께서 거두어주시지 않으면 조만간에 비명횡사를 당하리라고 나왔습니다. 저희가 그렇 지 않고서야 곁에 계신 주선고님도 심후한 선근을 지니신 분인데 어찌 저분께 간청드리지 않았겠 습니까? 저희는 주선고님과 주종(主從)간의 연분이 없어 청을 올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미파의 문 규가 엄격해서 이단을 용납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신다면 저희 두 사람은 벌써 전에도 결심을 한 바 있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거듭 천지신명을 우러러 맹세하겠습니다. 이 미타와 유유안은 영원 히 정교에 귀의하여 오로지 이선고님만을 충심으로 섬기고 아미 문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오리다. 문하에 들어가서도 주인님의 선부(仙府)에는 단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을 것이오며, 그저 그 부근 에 잠수(潛修)할 거처를 골라 머물면서 주인님의 부르심이 없는 한 절대로 망녕되이 뵙지 않겠습 니다. 또 언제든지 부르실 만한 일이 생기시거던 지체 마시고 저희 두 사람을 써주십시오. 그렇게 만 해주신다면 평생 여한이 없겠습니다." "내 방금 뭐라 했소? 지금 당장 거론 말라지 않든가?" "이선고님, 독수리나 성성이 같은 미물도 거두어들이셨는데 하물며 사람의 소원을 못 들어주십 니까?" "안 돼요!" 아무리 애원을 해도 이영경은 고집불통 끝내 큰절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미타와 유유안이 문득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어서 한바탕 돌개바람이 일어나더니 영경을 꼼짝 못하게 에워쌌다. 어느 쪽으로 피하든 돌개바람은 그녀의 전후좌우에서 둘러싸고 통곡을 해가며 애걸복걸이다. 곁에서 줄곧 바라보던 주경운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난쟁이 도사의 생김새도 기이하거니와 하는 짓거리가 너무나 당돌하고 어거지를 부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경은 궁지에 몰려 쩔쩔매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봐, 영경아우....." 주경운이 한 마디 거들어주려고 막 입을 떼는 참에 견디다 못한 이영경이 쌍심지를 돋구며 바락 소리를 지른다. "내 걱정이 태산 같은 몸인데 당신네들 정말 이러기야? 어쩌자고 이런 애물덩어리들을 구해줬 지? 일어나요! 정 안 일어나려면 내 손속이 매정하다고 원망일랑 말라구!" 고함소리가 울리자마자 그녀의 손에서 번쩍 검광이 날았다. 빛줄기는 곧바로 미타와 유유안을 노리고 덮쳐갔다. "아이쿠!" "으앗!" 자줏빛 광채가 휘황찬란하게 비추는 속에서 외마디 비명이 연거푸 터졌다. "이런!....." 영경의 입에서도 놀라운 탄식성이 터져나왔다. 위험을 가해 물러서게 하려 했더니 뜻밖에도 손 속이 너무 빨랐나 보다. 황망히 검광을 회수했으나 두 사람은 어느덧 땅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셈이야?" 주경운도 미처 그녀의 검광을 막지 못하고 뒤늦게 들었던 손을 내렸다. "다쳤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영경은 맥없이 탄식했다. 하나는 손목이 절반 남짓 베어져 덜렁거라고, 또 하나는 머리카락에 살갗까지 뭉텅 잘려나갔다. 미타와 유유안은 엉겁결에 당하고 그만 혼비백산, 기절한 것이다. "이걸 어쩌면 좋아? 내가 어쩌자고 칼부림을 했지? 미쳤나 봐, 미쳤어!" 영경은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른다. 그래도 이내 허겁지겁 영단을 꺼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두 사 람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상처가 그리 무겁지 않은 것을 벌써부터 주경운은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밉살스럽다기보다 도리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쯧쯧, 어쩌자고 환술(幻術)로 영경아우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려 했노? 남자들이란 할 수 없어. 여자의 마음이 작은 재간 따위에 흔들릴 줄 알았던 모양이야.....' 그녀는 응벽애를 떠나기 전 제영운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 미타와 유유안 두 난쟁이 도사는 원래 이단의 요인(妖人)이긴 하지만, 진작부터 은근히 개사 귀정할 마음을 품은 상태야. 또 장교부인 말씀에 '이영경은 장차 우리 문호를 크게 빛낼 인물인 즉, 두고두고 부려야 할 인재가 많이 필요하다. 그런 고로 특별히 제자와 문도를 거느릴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한다...' 하셨어." '대사형 말대로 지금이 그 재량권을 행사할 때다. 미타와 유유안은 비록 이단의 무리이긴 해도 오랜 세월 도행을 쌓은 인물이 아닌가. 그 수준이라면 사파에서도 손꼽힐 만하다. 이런 인물들이 오로지 마겁을 벗어나기 위해 한낱 어린 처녀의 몸종이 되겠다고 자원했으니 그 간절한 마음 받 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실로 그만큼 수행을 쌓기도 쉽지 않은 노릇인데.' 그녀는 영경을 흘낏 쳐다보았다. 치료가 끝나고 나서도 안절부절이다. 바로 이때가 설득하기에 안성맞춤의 시기이다. "영경아우, 우리가 떠날 때 대사형의 말씀 잊지 않았겠지? 장교부인께서 내리신 분부 말이야. 우 리 <삼영이운(三英二雲)> 가운데 영경아우의 근기가 유달리 심후하단 말씀이야. 훗날 우리 문호 를 크게 빛내려면 장차 험난한 일이 얼마나 닥칠지 모르거든. 그러니만치 아우님은 다른 사형들 과 달라서 수하에 몇몇 조력자를 두어야 해요. 독수리와 성성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선연(仙緣) 으로 진작에 정해 놓은 미물을 얻었을 뿐, 역시 말이 상통하는 인간과 다르지. 여기 있는 이 두 사람도 이토록 간절하게 아우님을 따르겠다니 역시 우연은 아니야. 어때요? 기껏 아우님의 문하 로 들어오겠다는 사람을 다쳐놓고도 응락하지 않을래?" 주경운이 도사의 역성을 들자, 영경은 그만 뾰로통해졌다. "아니, 어째서 언니마저 이 사람들 편을 드는 거예요? 저 생김새하고 지난날 해 온 짓거리를 좀 생각해 봐요. 그런 말이 나오겠나? 우리 문규에 어긋나는 건 둘째로 치고 내 힘 가지곤 그런 책 임 따위 못 지겠어요. 저 사람들이 날 도와서 온옥을 손에 넣게 된다면야 나도 기회 닿는 대로 힘껏 주선해 주면 그것으로 성의는 베푸는 셈이 아닌가요? 왜 하필 내 종노릇, 제자노릇을 해야 만 직성이 풀릴 게 뭐예요? 그래 봤자 나한테 이로울 것도 없고 또 저들 체면만 깎이지 않겠어 요?" "아니야, 전세의 인연이 정해져 있다면 아우님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지. 장교부인께서 왜 다른 동문한테는 제자를 거느릴 재량권을 주지 않으셨는지 모르겠나? 정녕 그리 결심하기가 난처하다면 이렇게 해요. 우선 저 사람들에게 여기 일을 마치고 나서 돌아가 대사형한테 알린 다 음, 여러 동문들의 의견을 물어서 가부간에 결정한다고 반승락만 해주면 어떨까? 만약 대사형과 동문들이 찬성하면 제자가 되든 종노릇을 하든 저들 소원대로 들어주고, 응벽애 근처 다른 곳에 거처를 정하여 도행을 닦도록 하지. 여느 때는 아우님이 마음대로 일을 시킬 수 있고, 또 저 사람 들이 마겁에서 벗어날 때 힘써 도와주면 어때? 지금 두 사람 모두 사파(邪派)에서 길들여진 터라 아우님의 선검(仙劍)을 맞은 상처가 쉽사리 낫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지난 번 옥청사태님한테 서 사파의 술법을 조금 배운 게 있지. 만약 아우님이 내 말대로 따르겠다면 나도 정성껏 저 사람 들의 상처를 완치시켜 주겠어. 그렇지 않으면 병신이 되고 말 거야. 남을 두 사람씩이나 평생 불 구자로 만들어 놓고도 내버려 둔다면, 흠흠... 그 업보는 아우님 자신이 져야 해. 난 절대로 참견 안할 테니까." "그게 정말이우?" "사실이라니까." "그럼... 그럼... 내 언니 말씀대로 할게." 영경은 마침내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이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응낙하고 말았다. 주경운이 빙긋 웃는다. 품속에서 영단 두 알을 꺼내 부상자들의 상처에 각자 한 알씩 올려놓더 니 입 속으로 중얼중얼 몇 마디 외운 다음, 냅다 소리쳤다. "엽! 일어서라!" 미타와 유유안이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눈이 휘둥그래진 영경에게 미처 피할 틈도 주지 않고 털썩 엎드려 대례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어서 주경운을 향해 사례했다. "주선고님의 은공, 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이영경, 넋빠진 기색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본다. 핏자국은 분명 있지만 두 사람 의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아물었다. 세상에! 아무리 영험스런 선약이라도 이렇게 빨리 치료되는 법 이 어디 있단 말이냐? "언니, 날 속였어!" 영경은 그제서야 주경운의 술수에 꼬박 넘어간 걸 깨달았다. 그러나 어쩌랴? 기왕지사 엎질러진 물이다. 대례를 받아놓고 되물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래뵈도 천하에 신의 높기로 자부심이 대단한 이영경이다. 자기 입으로 응낙한 이상 안면을 바꿀 위인은 아니다. 그저 분통 터지고 약이 올라 주경운에게 원망의 말 몇 마디를 툴툴 뱉아낸 것이 고작일 뿐. 주경운은 미소를 머금은 채 느긋한 표정으로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뗐다. 미타와 유유안은 사뭇 공경스런 태도로 손모아 영경 곁에 시립해 있었다. 이영경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원성이가 지하굴 속에 갇혀 있다는걸 알았으니 구출해 낼 방도나 강구해야겠다. 요시 곡진을 제압하기 전에는 그 속에 들어가 구해내기란 꿈도 못 꿀 일이다. 영경과 경운, 그리고 난쟁이 도사 두 사람은 우선 청삭검부터 찾아낼 계획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청삭검의 순화 合群力 同收靑索劍 從衆請 初試火靈珠 청삭검(靑索劍)을 어떤 방법으로 찾아내어 손에 넣는가? 그리고 취도인(醉道人)이 파견하였다는 그 협력자의 정체는 과연 누구일까? 주경운과 이영경은 머리를 맞대고 미지의 보검과 협력자에 대해서 의논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창 의견을 나누다가 이영경은 흘낏 동굴 문쪽에 눈길을 던졌다. 거기 에는 미타와 유유안 두 난쟁이 늙은 제자(?)가 서서 귀엣말로 무엇인가 쑤군거리고 있다. 독수리 역시 동굴 밖에서 '꾸우, 꾸우, 쿠르르!' 쉬지 않고 울부짖었다. 날짐승의 울음이 아무래도 심상치 가 않다. '저것들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짓을 속삭이고 있는 거야?' 이영경의 눈살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저 애물덩어리 난쟁이도사들은 사실 그녀의 본심으로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 잠시 동안만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사부(?)노릇도 마지 못해 하 는만큼, 제자(?)들에 대해서도 그 속셈을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이것들은 하나같이 좌도방문 출신 의 요물 아닌가 말이다. 그녀는 독수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부쩍 의심이 솟구쳤다. 가만히 눈길을 동굴 문쪽에 던진 채 귀를 기울여 엿들어본다. 저녁 노을이 서편 하늘을 불태우고 솔 숲은 석양 아래 어느덧 낙조(落 照)를 받으며 어둠 속에 잠기기 직전 그날의 마지막으로 산뜻한 윤곽을 보이고 있다. 이따금씩 둥 지를 찾아드는 산새들의 울음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사방 천지는 고요하다. 그 가운데 두 왜도사 는 여전히 목소리를 낮추어 무엇인가 쉴새없이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뭘 쑥덕거리고 있는 거야?" 이영경은 괜히 심술이 뻗쳐서 버럭 악을 썼다. 찔끔 놀란 두 제자(?)는 얼른 그녀 앞으로 다가와 굽신거린다. 그리고 미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부님, 고정하십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사부님의 각별하신 은덕을 입고 제자로 받아들여져 훗날 피할 수 없는 마겁에서 벗어날 가망이 생겼습니다만, 아직껏 사부님을 위해서 촌철(寸鐵)의 공로도 세우지 못한 터라, 장차는 주인님과 여러 선장(仙長) 어르신들의 신임을 받 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어떻게 해서든 보답할 궁리를 짜내 미력하나마 두 분의 일을 돕기로 의논했습니다. 사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저희들은 원래 북해(北海)에 숨어 살던 중 오래 전부터 이 망창산에 진귀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만년양화(萬年陽和)의 정수가 엉겨서 이루어진 온옥(溫玉)이고, 또 하나 는 장미진인께서 남기신 청삭검이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그것을 얻으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장 미진인께서 남기신 보검은 당초 자웅쌍검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두 칼이 서로 합벽해서 이용되 면 실로 무궁무진한 변화를 나타내고, 초현(超玄)의 신비를 보인다 합니다. 가령 그 쌍검이 합벽 을 이루지 않더라도 그 중 한 자루만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단의 문파 누구든 당적해 낼 수 있다고 하기에, 저희 두 사람은 한때 잘못 욕심을 품고 그것을 훔치러 왔던 것입니다. 그리 고 요시의 무서운 겁난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신물(神物)에는 저마다 주인이 있음을 깨달았습니 다. 저희들처럼 박복하고 도력(道力)이 얕은 자들은 섣불리 넘볼 게 아니라는 것을....." 미타와 유유안 쌍왜(雙矮)는 번갈아가며 이영경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쌍왜는 이영경을 처음 만나는 순간 그녀가 진작에 자영웅검(紫暎雄劍)을 가진 걸 보고서 거기에 청삭자검(靑索雌劍) 마저 손에 넣는 날 반드시 일대 종주(一代宗主)가 되리라고 확신을 품었다. 그래서 쌍왜는 이내 요시의 굴레에서 벗어나 청삭검을 찾아가지고 이영경한테 바치기로 결심했 다. 한데 그 칼은 원래 요시의 동굴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 깊숙한 계곡 안에 감추어져 있는 데다 처음에는 파묻힌 지점도 모르고 이곳 저곳 사방으로 찾아 헤매기만 했다. 그리고 시종 헛걸음질 을 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드디어 청삭검의 종적을 찾아낼 만한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이영경이 첫 번째로 요시와 맞닥뜨려 싸우던 날, 요시는 그녀를 함정에 몰아넣을 계략으로 지진을 일으켜 땅을 잘라 내어 지폐(地肺)의 함정을 만들었는데 그때 무심결에 지기(地氣)가 누출되면서 엉뚱한 결과를 빚 었던 것이다. 즉 장미진인의 봉쇄술법에 걸려 움쩍도 못하고 파묻혀 있던 청삭보검이 지기가 흘러나간 틈서리 공백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그 즉시 비상(飛翔)할 정도로 신통력을 발휘하지는 못 했으나 지맥의 공백을 따라서 차츰차츰 땅 속을 파고 탈출할 만한 지점까지 상승 이동하게 되었 던 것이다. 그 결과 보검의 기운은 지층에 가까와질수록 저녁이면 천공(天空)을 꿰뚫을 만큼 강렬하게 뿜어 져 나왔다. 쌍왜가 그 보검의 기운을 발견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미타와 유유안이 청삭검의 종적을 발견하고서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그들은 요시 곡진 의 눈길에 배반행위가 발각당하고 말았다. 요시는 쌍왜를 흑살사(黑煞絲)로 단단히 결박지워 석실 에 매달아 놓고 이영경을 낚는 미끼로 삼았던 것이다. 쌍왜는 이제 귓결에 영경과 주경운이 무슨 칼인가를 찾는 일에 대해서 의논하는 걸 듣고서 '혹 시나 청삭검을 두고 상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두 처녀가 찾는 것이 그 보검이라면 제아무리 영경과 경운의 검술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 도 쉽사리 손에 넣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당초 장미진인이 그 칼을 단련할 때 미처 순수 한 화후(火候)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강한 야성이 그대로 남아 어기(馭氣)하기가 극 히 어려워, 장미진인은 비승할 무렵 할수없이 그것을 지폐(地肺) 깊숙이 넣어 봉쇄해 버렸다. 그리하여 청삭검은 땅 속에서 수화(水火), 풍뢰(風雷)를 받아 주야로 단련되는 과정에 야성을 순 화시켰으며, 일단 지상으로 나타나는 날에는 천장(千丈) 길이의 정광(精光)이 하늘 끝을 비출 만 큼 영감을 보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천만다행이랄까, 망창산의 바윗돌은 그 석질(石質)이 몹시나 두텁고 단단해서 비록 영감과 신통 력을 지닌 청삭검도 이제까지 좀처럼 그 암석층을 뚫고 날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쌍왜는 여기서 다시 청삭검을 손에 넣는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청삭검을 제압하려면 우선 누군가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가서 칼집부터 찾아낸 다음, 다시 그 칼 이 뚫고 나간 길을 따라 곧바로 출토지점까지 추격해야 한다. 그 출토지점의 지상에는 또 검술에 정통한 인물이 너댓 명 포위망을 형성하고 극도로 뛰어난 비검을 가지고 사면에서 청삭검의 탈출 로를 가로막고 있어야만 한다. 청삭검은 신통력이 여간 대단한 놈이 아니라서, 스스로 탈출할 길이 차단된 것을 보면 그 즉시 뚫고 나온 지하 통로로 되돌아가 숨어버릴 게 분명하다. 이때에 지하로 그 뒤를 추격해 간 사람 이 칼집을 겨누고 대기하였다가 검신을 딱 들어맞추어 넣는다. 이와 동시에 지상에서는 한 사람 이 아미파 본문의 수검구결(收劍口訣)을 외우고, 그 놈이 일단 칼집에 들어간 직후 그 칼을 소유 한 당사자가 아미파 진전(眞傳)의 정통술법으로 제압하여야 하는 것이다. 술법을 부린 다음에는 다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재차 물샐틈 없는 포위망을 구축하고 그 놈 이 비둔(飛遁)하지 못하게끔 단속한 뒤, 소유자가 그 보검을 뽑아서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르도록 순화시켜야 한다. 이리하여 청삭검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어 승복할 것이고, 그로부터 주인은 그 보 검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쌍왜는 당초 보검의 정기가 발산되는 근원을 찾아다니던 중 우연찮게도 장미진인이 남긴 게문 (偈文)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청삭검을 손에 넣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신들의 능 력으로서는 도저히 어림없는 작업인 바에야 공을 추구하다가 반대로 욕이나 당할지도 모르는지라 섣부르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싶어, 그들은 더 이상의 수색작업을 포기했다. 게문에 적힌 대로라면 청삭검의 칼집은 아직도 그 깊은 골짜기 땅 속 바위틈에 있는 게 분명하 다. 물론 쌍왜의 능력으로 땅 속을 뚫고 들어가는 것쯤 그리 어려울 것은 없다. 하지만 칼집이 있 는 곳에는 장미진인이 설치해 놓은 봉쇄의 부적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 봉쇄는 아미본문의 해법(解法)이 아니고선 범접도 못할 만큼 엄중하다. 요시 곡진과 청양노조 역시 그 보검의 내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청삭검이 자기와 상극 이라는 점, 또한 자기 수단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점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쌍왜가 본 보검의 정기가 창공에 치솟는 걸 못 보았을 리 없다. 자신의 극성(克星)이 이 세상에 출현하는 날 이 머지 않은 것이다. 요시는 수 차례에 걸쳐 이영경의 도전을 받고 티격태격 드잡이질하는 가운데, 그녀가 자영검을 가지고 있는 걸 보자 더욱 놀랍고 당황했다. 상대방이 숙적 장미진인의 명을 받고 온 게 분명하 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연 기급을 한 요시는 서둘러서 요법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그런 만큼 소굴에서 떠나 적을 찾 아나설 여유가 없어졌다. 만약 그 청삭검까지 정교 문파 인물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그에 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요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련(祭煉)하기에 급급했다. 한시바삐 성공해 가지고 뺑소니를 쳐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요시란 놈은 쌍왜가 발견한 장미진인의 수검게문(收劍偈文)을 모르고 있었다. 또한 패 거리도 너무 적은 데다 오로지 요법 제련에만 온갖 정신을 쏟느라고 다른 것은 돌아볼 여지가 없 어, 칼집의 소재가 자기 소굴의 지척지간이면서도 전혀 방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내막을 잘 알고 있던 쌍왜는 끝으로 주인 이영경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 오늘 저녁, 요시란 놈이 입정에 들어간 틈을 타서 저희 둘을 보내주십시오. 제자들이 우선 그 칼집부터 찾아낸 다음 방금 말씀드린 장미진인의 게문대로 일을 밀고 나간다면 틀림없이 성공 할 것입니다. 이곳 망창산 일대의 지맥과 음양 향배(向背)는 물론, 지층의 두께에 대해서도 저희 들이 지난날 보검의 종적을 수색하는 동안 샅샅이 조사해서 손바닥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 무렵, 우선 청삭검이 지하에서 이동한 지점을 어림잡아 칼집부터 찾아냅니다. 지금을 시점으로 해서 그 보검의 출토시각을 셈해 보았더니 앞으로 길어야 이틀이면 그놈이 지층을 깨뜨 리고 출현할 것입니다. 청삭검의 예리한 칼날이라면 산맥도 여지없이 뚫고 나올 수 있으리라 생 각됩니다. 주인님과 주경운 선고께서는 미리 그 지점에 대기하고 계시다가 저희들과 협동해서 그 보검을 제압하십시오. 청삭검만 얻으신다면 자웅쌍검이 합쳐질 것이고, 요시란 놈이 그 날짜 전에 뺑소니를 치지 않는다면 쌍검합벽의 공격에서 절대로 요행을 바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아 까도 말씀드렸듯이 탈출지점 사면에 포위망을 형성하려면 아무래도 선검을 지니시고 검술에 정통 하신 두어 분이 더 필요한데, 그래야만 만일의 실패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요." 이영경은 쌍왜의 설명이 끝나도 묵묵부답, 쓰다 달다 말이 없다. 속으로는 반갑고도 기쁘지만 여 전히 어거지로 얻은 제자들이라 그들의 제안에 선뜻 찬동하기가 웬지 싫었던 것이다. 누가 뭐래 도 쌍왜는 좌도방문 출신이 아닌가? 이런 작자들의 말을 어떻게 선뜻 믿으라는 것인가 말이다. 그러나 주경운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쌍왜가 사파의 무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범한 인물임 에 틀림없는 것이다. 또 지금껏 한 말을 들어보니 거짓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다. 간절하고도 정성 이 어린 말투다. 그녀는 기꺼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이영경 대신에 얼른 응낙했다. "당신네 두 사람이 그토록 성심을 품었다니 훗날 반드시 교조님께 칭찬받을 거예요. 그 청삭검 을 회수하는 문제에 대해선 이전에 벌써 장교부인의 분부가 내려졌으니까 때가 되면 자연 알게 될 거예요. 보검의 탈출지점은 물론 사면 차단계획을 세워놓았죠. 문제는 그대들이 말한 칼집인 데, 그건 정말 중요해요. 두 사람 모두 땅 속에서 자유자재로 다니는 재간이 있다니 천만다행이로 군요. 오늘저녁 해가 지고 요시란 놈이 입정에 들때 청삭검의 소재를 어림잡아 지하로 뚫고 들어 가세요. 우리들이 몸소 엄호해 줄 테니까 염려 말고 시작하도록. 장미조사어른의 봉쇄는 우리가 풀어놓겠어요. 만약 이번 일이 제대로 성공한다면 그것은 모두 그대들의 아미파 입문에 바치는 첫 번째 큰 공적이 될 것인즉, 그동안 요시란 놈에게 모진 고초를 받았을 테니까 각별히 몸조심 하고 시종 경계를 풀지 마세요. 자, 여기 영단 몇 알이 있어요. 이걸 복용하면 지기(地氣)에 중독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주경운은 시원스레 말을 끝내더니 단약 네 알을 꺼내 쌍왜에게 나누어 주었다. 쌍왜는 허겁지겁 굽신거리면서 약을 받았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주선고님! 사실 말씀드리자면 저희들은 좌도방문의 술법을 익혀서 지하로 잠적하고 자취를 감추는 데는 남이 따르지 못할 재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 어지간한 습 기나 음한지독쯤은 넉넉히 견뎌내고도 남음이 있지요. 그런데 이놈의 망창산 바윗돌은 유별나게 두텁고 단단하기가 금강석보다 못지 않습니다. 그 보검이 뚫고 나가는 곳도 애를 좀 먹어야 될 듯싶군요. 허나 절대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단지 칼이 매장된 세월이 오랜 지라, 동공(洞孔) 속에 공기가 없어 질식할까 봐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선고님께서 주신 이 영단이라면 안심해도 되겠습니다요." 주종간의 네 사람이 이런저런 상의를 하는 동안에 시간은 쉽사리 흘러 어느덧 해질녘이 되었다 동굴 바깥으로 나가 보니 독수리는 언제 어디로 갔는지 자취가 없다. 음력 유월, 여름철의 한낮 은 길기는 해도 석양은 벌써 저물고 어스름하게 땅거미가 깔리는데 먼 하늘가에는 아직도 붉은 잔홍(殘紅)이 남아 푸르른 창공을 덮듯 비추고 있다. 주변의 능선과 계곡 일대에는 자욱한 저녁 안개로 뒤덮이고 숲 속까지 수증기의 장막이 드리워져 윤곽이 아렴풋하다. 그저 영마루턱을 넘나 드는 구름만이 한가롭게 노닐 뿐, 독수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보름이 지난 지도 어언 칠구 일이 되었는가. 하현(下弦)의 반달이 암벽 곁 산허리에 걸린 채 운 무가 떠오르는 대로 때없는 숨바꼭질을 하면서 명멸한다. 어쩌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대나무숲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어우러진다. 실로 그림처럼 맑고 도 그윽한 경치가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줄 듯도 싶은데 오히려 네 사람의 마음은 무겁기 만 하다. 보검의 정기는 어디서 비치려는가? 땅 속 깊숙이 감추어진 청삭검, 저 옛날 상고(上古)의 영검 간장(干將), 막야(莫耶)와도 비길 만하다는 청삭보검은 종적을 숨기고 있다. 검기가 천공으로 뻗치 기 전에는 그 방향조차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창 넋놓고 보노라니 갑작스레 일진광풍이 파도처럼 구름을 휘돌아치면서 온 산을 뒤덮어 버렸 다. 달빛이 교교하게 내리비치는 아래, 구름은 은빛 물결을 이루고 자연의 무한을 한껏 펼친다. 망창산 일대에 구름층이 이렇게 뒤덮여서야 보검의 검기는 더욱 찾기 어렵게 됐다. 시작은 닥쳐 왔는데 정작 목표가 보이지 않으므로 네 사람은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좌불안석, 당항하기 시작 했다. '쌍왜가 어떤 빛줄기를 청삭검의 정기로 잘못 본 게 아닐까?' 이영경과 주경운은 슬그머니 쌍왜를 불신하는 마음이 싹텄다. 그러나 그녀들만 당황한 게 아니라 발설한 당사자인 미타와 유유안도 사뭇 야릇한 기색을 띠었 다. "거 참, 이상하네요. 그 칼빛이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엄청난 정기를 하늘 꼭대기까지 뻗쳤거 든요. 보통 사람 눈에도 쉽사리 보일 정도로 찬란했는데. 둘째 날에는 서남쪽에서 번쩍이다가 이 내 구름에 가리어졌습지요. 이 망창산은 늘상 구름과 안개가 끼어 있으니까 보일 때도 있고 간혹 안 보일 때도 있지만, 방금 전처럼 맑은 날씨에 나타나지 않은 적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청삭검이 벌써 요시란 놈의 수중에 들어갔을 리도 없을 텐데, 저희들이 그놈한테 감금당해 있는 동안 누군가 찾아내어 갔는지도 혹 모르지만, 그 칼이 그렇게 어수룩한 수단으로 제압당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겁니다. 혹이 그 신통스런 놈이 우리 생각 밖의 변화를 부려서 진작에 땅 속에서 뚫고 나와 용으로 화해 날아갔다면 모르지만... 정말 그랬 다면 너무 아까운 노릇인데....." 주경운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묘일부인의 서찰을 보아서라도 그 칼이 남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리는 천만의 말인 줄 알지만, 쌍왜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 칼이 용신(龍神)으로 화해 날아가는 듯한 환상까지 떠오르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면 얼마나 애석한 노릇인가? 천재일우의 비보를 허망하게도 날려보내다니!' 여하튼 간에 그 파묻혔던 곳에 칼이 없더라도 칼집만은 남아 있을 게 아닌가? 그것이라도 찾아 내야 직성이 풀리리라 싶어, 그녀는 쌍왜에게 분부를 내리려고 입을 열었다. "그 칼집 말이에요. 당신네 두 사람이 들어가서 찾아보도록 하세요." 이때였다. 갑자기 '꾸우, 쿠르르!' 하는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산허리 중턱 구름 속을 뚫고 우람한 날짐승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딜 갔다오는 거야?" 영경이 묻자, 독수리는 푸드득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억센 부리 끝에는 편지 한 장이 물려 있 다. 얼른 펼쳐보았더니 글쓴이의 서명은 없지만 사뭇 눈에 익은 필적이다. <청삭검은 내일 정오, 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요시는 내일 밤 자시에 요법을 완성할 것 이오. 그놈은 자기 공력만 믿고 어떻게 해서든지 맺힌 원한을 풀기 위해 비둔(飛遁)을 서두르느라 경진일까지 기다릴 뜻이 없는 듯하오. 그 행위는 상생(相生)을 깨뜨리고 상극(相剋)을 범하는 것 이므로, 요시에게는 꾀를 부리다가 도리어 졸속(拙速)을 빚는 결과가 될 것이 분명하오. 주경운과 이영경 두 분은 전에 계획했던 대로 일을 추진하되, 내일 오전 오구선부(奧區仙府)로 가면 유력한 협조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외다. 청삭보검을 입수한 다음에 조금 연습해서 익숙해 지거든 일행 모두가 요시의 소굴 깊숙이 침투하시오. 그 쌍검이 합벽하기만 하면 호신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소. 그대들이 목적하는 온옥(溫玉)은 요시의 가슴에 매달려 있으니 그놈을 참살하는 즉시 때를 놓치 지 말고 미진번으로 요시의 시체를 덮어씌운 다음 온옥을 재빨리 나꿔채도록 하시오. 순간적인 때를 놓치면 그놈이 원신(元身)으로 변화하여 그것을 채뜨려 달아날 것이오. 이제 보검의 광채가 하늘로 솟구치기에 혹시라도 적의 눈에 뜨일까 보아서 내 이미 술법으로 가리워 놓았지요. 잠시 후면 다시 나타날 것이니 기다리고 계시오.> 이영경과 주경운은 서찰을 다 읽고 나서 말없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서명은 없으나 필적으로 보 아 화요숭(華瑤崧)이 보낸 것임이 분명했다. "화선고님께 다녀왔어?" 영경은 그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독수리에게 물었다. 과연 날짐승은 그 길쭉한 모가지를 끄덕였다. 두 처녀는 마음이 놓였다. 내일, 내일이다! 청삭보검을 얻고, 요시를 죽여 세상의 화근을 제거하 고 여영남을 소생시킬 비보 온옥을 탈취하는 온갖 일들이 내일이면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들은 텅빈 하늘에 공손히 절을 올린다. 잠시나마 방황하던 마음에 갈 길을 열어주신 화요숭 선배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그래도 깊이 사례하는 것이다. 문득 쌍왜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크, 저것 보게! 보검의 정기가 솟구쳤어! 주인님, 저 광채 좀 보십쇼. 저기! 바로 저것입니다!" 주경운과 이영경의 눈길이 바쁘게 쌍왜의 손가락 끝을 쫓는다. 과연 서남쪽 수십 리쯤 떨어진 하늘가에 짙은 구름 안개 속을 뚫고 한 줄기 청색 기운이 솟구치는 게 아닌가! 그 빛줄기는 천천 히 앞으로 움직이더니 삽시간에 가라앉듯 사라져 버렸다. "거 참 이상한데? 지난 번 보았을 적에는 지금 것보다 훨씬 밝았는데, 웬일로 저렇게 흐릿하지?" 쌍왜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두 사람은 화요숭이 검기를 술법으로 가리워서 겨우 한 끝만 내보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처녀들은 또 한번 서로 마주보면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쌍 왜에게 서찰 내용을 일러주었다. 그러나 유유안이 서둘렀다. "보검이 내일 정오에 나타나면 일찌감치 서두르기로 하지요. 중도에 또 무슨 일이 생겨 늦을지 도 모르니까." 지당한 말씀이다. 칼집을 찾는 것은 빠르다고 해서 일이 잘못되는 건 아니니까. 네 사람은 즉시 출발준비를 갖추었다. 동굴에는 독수리를 남겨 지키도록 한 다음, 영경은 미진번 을 펼쳤다. 목적지는 지난날 그녀가 성성이를 거느리고 주과(朱果)를 따러갔던 그 깊은 계곡이다. 그녀에겐 목괴(木魁)와 싸웠던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미진번의 채색 구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행을 골짜기 아래로 인도했다. 그곳은 쌍왜에게도 낯 익은 장소다.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두 사람은 앞장서서 익숙하게 길을 찾아 걸어나갔다. 제일 먼 저 당도한 곳은 장미진인이 게어를 새겨놓은 암벽이다. 영경과 경운은 잠시 묵도를 올리고 게어를 차근차근 읽어내려 갔다. 쌍왜가 말한 바와 조금도 틀림이 없다. "자, 됐어요. 그대들은 여기서부터 착수하세요. 우리가 엄호해 줄 테니까." "예, 잠시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쌍왜는 암벽 아래로 걸어가 땅에 앉더니 구결을 맺고 무엇인가 그녀들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주문을 외었다. 그것도 잠시뿐, 쌍왜의 모습은 이내 시야에서 벗어나 지하로 잠적해 버렸다. "자, 우리도 이만 떠나지. 여기는 요시의 소굴에서 너무 가까와 공연히 서성거리다간 그놈을 놀 래어 깨울지도 모르거든." "그래요, 주언니." 두 처녀는 다시 토아암 동굴로 날아갔다. 오늘밤에는 요시의 소굴 근처에 얼씬도 안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 오구선부로 가서 그곳에 와 있을 협력자들과 합류한 다음, 그 청삭검부터 손에 넣어야 한다. 보검이 입수된 후에야 요시란 놈 한테 볼 일이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조용히 신기를 모아 체내의 기운을 돋구면서 내일의 격전 에 대비하여 휴식을 취했다.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시간도 빨리 흐르게 마련이다. 동이 트고 해가 떠오른 지 얼마 안 되었는가 싶었는데 어느 새 아침도 한참 기운 사시(巳時)가 되었다. "주언니, 이제 떠나요. 우리 미진번은 쓰지 말고 강우를 타고 갑시다." "그건 어째서?" "미진번이 빠르기는 하지만 우리와 만날 사람과 지나칠 우려가 있어요." "흐음, 그것도 좋겠지." 두 처녀는 독수리를 타고 떠났다. 과연 이영경의 예상은 옳았다. 오구선부 근처에 이를 무렵, 구 름 아래로 낮게 나는 독수리를 발견하고 뒤쫓아 올라와 마중하는 사람이 있었다. 벌써부터 중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금선이었다. "어서들 와요. 진작에 기다리던 참이야." 암혈(巖穴) 어구에서 또다시 일행을 맞은 것은 엄인영과 소화상이다. 두 처녀는 금선일행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금선 말고 소화상의 내력은 익히 들어 알거나 주경운과는 구면인 사이인데, 엄인영만큼은 초면이다. 더구나 주경운으로선 적지 않게 거북스러운 상면 인사였다. '바로 엄인영 이 청년이.....' 그렇다. 이전에 찬하대사(餐霞大師)로부터 삼세의 숙연을 맺은 인물이 나타나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저 막연하게나마 속이 상했었는데, 또 묘일부인의 비검전서를 통해서 그 인물이 불원간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적지 않게 당혹스러웠던 터였다. 그런데 그 청년이 현실 로 나타나서 지금 자기 앞에 우뚝 서 있다니! 그것은 엄인영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전에 취도인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는지라 주경운과 첫 대면을 하는 순간에 그 자신도 자못 거북한 기색이 앞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일행과 섞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대화 끝에 청삭검이 주경운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을 알고 수줍은 자시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첫마디를 건네었다. "제가 떠날 때 사부님께서 전하라는 서찰을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누이를 뵙거든 전하라는 말 씀이셨습니다. 아마도 보검을 얻는 방법에 관해서 쓰신 줄로 압니다만, 사부님은 반드시 누이 혼 자서 읽으시라고 했습니다. 자, 여기에 있습니다." 말을 마치자 엄인영은 정색을 하고 공손하게 편지를 꺼내더니 직접 건네는 대신 주경운의 곁엣 바위 위에 놓았다. 진작부터 가슴 속에 찔리는 바가 있던 참이라, 주경운은 남이 가로챌세라 얼른 취도인의 서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일행들과 떨어져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서찰을 뜯고 읽는다. 그녀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발그레 홍조가 깃들었다. 이윽고 주경운은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엄인영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취사숙님의 서신에는 엄사형께서 그 칼을 찾아낼 방법을 알고 계시다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되 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예, 말씀드리다마다요. 그 보검의 주인이신데 물론 직접 나서야죠. 하지만 현재 인원수를 세어 보니 협력자가 한 사람 부족하군요. 혹시 무슨 차질이라도 난 게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시각도 다 되었는데. 우리 우선 그 지점으로 자리를 옮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상의하면 어떻겠습니 까?" 엄인영이 우물쭈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금선은 답답해서 못견디겠다는 듯이 윽박지른다. "아니, 엄사형! 먼젓번 내가 어떻게 칼을 찾을 거냐고 물었더니 그때도 딴청을 부리더니 어째서 또 주누님하고 수수께끼를 하는 거야? 뭐, 협력할 사람이 부족하다구? 그럼 우리 다섯 사람 실력 가지고도 안 된단 말이오?" 퉁박을 주기는 하면서도 일행은 역시 엄인영의 말대로 청삭검이 출현할 예상 지점을 향해서 움 직이고 있었다. 암혈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문득 앞 길쪽에서 한 가닥 검정빛 광채가 번뜻하고 지 나쳐갔다. 그걸 보자 엄인영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 왔어요! 저 칼빛의 임자....." 일행들은 엄인영의 경악성을 듣자마자 일제히 검광을 일으켜 타고서 날아올랐다. 그 외침을 청 삭검이 출현했다는 소리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일행 뒤편에 처져 가던 이영경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덩달아서 허공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내려다보니 검정 광채가 거두어지면서 그 자리에는 푸른옷을 걸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장형!" 이영경은 환호성을 지르고 얼른 일행들을 불러모았다.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요시한 테 감금당해 있을 장이(莊易),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서로 대충 소개가 끝나자 벙어리 장이는 황급한 기색으로 나뭇가지 한 개를 주어들고선 땅바닥 에 글씨를 써 보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속히 편지에 쓰인 분부대로 일을 시작하십시오!> 주경운은 지체없이 엄인영을 이끌고 지난 번 금선과 소화상이 처음 발견했던 동굴로 갔다. "여기가 바로 보검의 출현지점이에요. 때맞추어 장이도우까지 왔으니 인원수는 딱 들어맞는 셈 이죠? 이제부터 각자 임무를 분담하겠어요. 먼저 장이도우, 소사형, 엄사형, 금선아우 네 분은 이 동굴 안 동서남북 사방 귀퉁이에 나누어 지켜서십시오. 그리고 신검이 뚫고 나오거든 발견하는 즉시 재빠르게 사면을 차단하셔야 합니다. 더구나 영경아우는 자영검으로 신검을 몰아붙여 되돌 아 날도록하세요. 그때쯤이면 나도 쌍왜에게서 칼집을 인수해 가지고 대기할 테니까. 도로 쫓겨온 신검이 갈 데라고는 그 칼집밖에 없을 거예요." 그 동굴 속은 워낙 엄청나게 넓었다. 일행들이 주어진 방위에 따라 산지사방으로 배치되고 보니 사람의 모습은커녕 그림자조차 얼씬거리지 않는다. 이윽고 시작되었다. 동굴 속 지하에서 은은하게나마 색다른 울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금속성도 아니고, 짐승의 포효성 같은 소리였다.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일행 모두 긴장한 분위기가 너른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분명 그들은 저 마다 온 신경을 집중시킨 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동굴의 중심, 운명으로 정해진 신검의 출현 지점을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우우!... 우우! 땅 속에서 울리는 포효성이 점차 거세어지고 가까와졌다. 어느 새 그 울림은 귀청을 찢을 듯 엄 청난 소리로 변했다. "지금이닷!" 주경운의 당찬 외침이 들렸다. 그와 동시, 영경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이 각각 검광을 일으켰 다. 장이의 검정빛 광채가 먼저였는가, 아니면 엄인영의 은빛 검광이었는가? 그보다 어느 새 금선 과 소화상이 벽력 쌍검을 펼쳐 붉은빛 자줏빛 광채를 쏘아날렸다. 네 줄기 휘황찬란한 칼빛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둥그런 검막을 형성하고 눈부시게 빛나면서 동굴 지면을 덮어씌웠다. 얼마 안 있어 지표(地表)가 갈라지듯 들썩거리기 시작하더니 '툭, 탁!' 소리를 내며 돌부스러기가 이리저리 튀어날았다. 이영경도 자영검과 한 몸이 되어 찬란한 자줏빛 무지개로 화해 동굴의 천정으로 날아 올라가서 찰싹 붙었다. 여섯 쌍의 눈길이 지표에 모아져 땅 속으로 맞뚫고 들어갈 듯 날카롭게 빛난다. 마침내 지표의 암벽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동굴 바닥 전체가 거북등처럼 '쩍,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가 싶더니, 그것도 순간, 돌연히 바닥 중앙의 바윗돌이 '꽈당!' 하고 산산조각 부서져 버렸다. "앗!" 매복자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외마디 소리가 터졌다. 우르르!... 우르르! 동굴 전체가 허물어지듯 진동하는 가운데 엄청난 굉음이 사면에 메아리치며 고막이 터져나갈 듯 울렸다. 그와 동시에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정월 대보름날 불꽃놀 이패가 휘두르듯 불기둥이 허공으로 던져져 나는 것처럼 수천 수만 개나 되는 불무리를 이루고 있다. 쿵! 지면이 돌연 푹 꺼지더니 큼지막한 구멍 하나가 뻥 뚫리고 그 속에서 바닷뱀처럼 생긴 푸른 빛 줄기가 솟구쳐 나왔다. 우우! 우우! 야수의 포효성이 동굴 속을 쩌렁쩌렁 메아리쳐 울린다. 푸른빛 줄기는 휘황찬란한 광채를 발산 하며 지하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거침없이 동굴 밖으로 곧장 날아갔다. 그 빛줄기가 첫 번째로 맞부딪친 것은 장이와 엄인영의 검광이었다. 번들번들 검정빛을 뿜어내 는 흑망 한 마리, 은빛 찬란한 백룡(白龍) 한 마리가 서로 옭혀 거대한 그물을 이루고서 동굴의 출입구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우우!... 우훗! "아이쿠!" 엄인영이 비명을 질렀다. 푸른 빛줄기의 무시무시한 충격에 반응을 보이는 소리다. 그것은 한 차 례뿐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연거푸 부딪쳐 들어가자 엄인영, 장이의 차단망은 그만 그 엄청난 충 돌력을 이기지 못하고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놓치지 마라!" "큰일이다!" 금선과 소화상이 일제히 원앙벽력검을 돌려 출입구 쪽으로 날아왔다. 찢겨나갈 뻔하던 그물은 다시 겹겹으로 강화되어 그제서야 겨우 청색 돌기둥의 돌파를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세 줄기 검광이 그것을 사랑으로 에워싸며 조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난데없는 기습매복에 걸려 탈출구가 막히자 그 청색 불기둥은 네 자루의 선검과 한 데 얼크러져 발광하듯 무서운 기세로 몸부림을 쳤다. 그것은 실로 기막힌 장관이었다. 젊은 검선들의 야무진 기합소리와 야수의 사나운 포효성이 엇 갈려 터지는 가운데 너르디너른 동굴 광장을 비좁다고 다섯 뭉치의 빗덩이가 뒤엉켜 마구 드잡이 질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푸른 불기둥은 갈수록 점점 순청(純靑)의 빛으로 변화했다. 이제는 천방지축 마구 날뛰고 부딪고 하는 게 아니라 적의 포위망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도망치려고 몸을 도사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공격에서 수비로, 그리고 다시 수비에서 회피자세로 바뀌어 적의 포위망에서 허점을 찾아보려고 미꾸라지처럼 검막과 검광사이를 헤엄쳐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때 벌써 주경운 역시 뻥 뚫린 땅굴 속으로 들어가 진작부터 뒤쫓아 온 쌍왜에게서 칼집을 건 네받은 상태였다. 그녀는 동굴 천정을 우러러보았다. 까마득한 천정의 궁륭(穹隆)에는 자줏빛 광 채가 한 점 반짝이고 있다. 청색 불기둥은 이제 바짝바짝 죄어든 검막에 몰려 뒷걸음질치면서 차 츰 구덩이 쪽으로 오고 있다. "바로 이 때다!" 그녀는 천정을 향해 고함쳤다. "영경! 뭘 기다려?" 벌써부터 좀이 쑤시고 손이 근질근질하던 이영경, 그녀의 고함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자영검을 이끌고 무지개를 그리며 쏘아져 내려왔다. 찬연한 자줏빛 광채와 맞닥뜨리자마자 청색 불기둥은 대뜸 그 정체를 알아챘는지 허공에서 훌쩍 공중제비를 넘더니 전신으로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었다. 그리고 사나운 기세로 요동질쳐서 젊은 검선들의 비검을 뿌리치고는 '휙!' 머리를 돌려 원래 빠져나왔던 땅굴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때맞추어 주경운은 자신의 비검으로 전신을 완전 엄호한 채 아미본문의 수검비법을 외우며 기다 리고 있었다. 그녀는 청색 불기둥이 벼락치듯 굴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황급히 칼집 을 쳐들어 꿰맞추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길이 탁 막히고 머리카락까지 곤두설 만큼 써늘한 기 운이 폐부 속 깊숙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한기는 여지없이 그녀의 호신검광마 저 튕겨내 버렸다. "아악!"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찰나, 엄인영의 검광이 뒤쫓아 날아왔다. 엄인영은 그녀가 위기일발, 급박 한 상황에 몰린 것을 보자, 자신의 위험도 잊고 그대로 신검합일의 자세를 취해 푸른 불기둥 속 을 곧장 꿰뚫고 들어갔다. 뒤미처 이영경이 당도했다. 쩡! 맑은 금속성과 함께 자영검과 엄인영의 은검이 동시에 청색 불기둥을 찍어눌렀다. 하마터면 가 슴이 꼬치산적처럼 꿰뚫릴 뻔했던 주경운은 그제서야 몸을 겨우 가누고 놀란 넋이 진정되었다. 이윽고 여섯 남녀가 펼친 다섯 줄기 검광이 아직도 무섭게 몸부림치는 청색 불기둥을 단단히 조 여들었다. 시각이 흐를수록 불기둥의 요동질은 기세를 잃어갔다. 그것은 서서히 칼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야 물샐틈 없는 검막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 신검은 마침내 젊 은 검선들에게 제압당하고 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휴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섯 젊은이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서슬 푸른 신검의 빛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고 화려한 오색의 검광만 어둠 속을 밝히고 있다. 그들은 손을 멈추 었다. 비검이 거두어지자 비좁은 굴 속에 암흑이 가득찼다. 일은 성공리에 끝났다. 동굴광장으로 올라서서 일행들은 한결같이 주경운을 주시했다. 신검을 손에 들고 그녀 역시 벅찬 환희와 감격에 못 이겨 어쩔 줄을 모른다. "자, 이제는 서둘러야 해요. 두 번째 일도 지금처럼 멋지게 해 치워야 하니까." 그렇다. 여기서 마냥 기꺼워할 때가 아니다. 한시바삐 신검으로 요시란 놈을 베어 거꾸러뜨리고 온옥을 차지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사명감이 전체에게 작용했는지, 젊은 남녀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엄인영의 동굴로 돌아갔다. 주경운은 석실 한 칸을 골라잡고 동료들에게 부탁을 했다. "제가 여기서 신검을 익숙하게 다뤄볼 테니까 여러분은 밖에서 지켜주세요." 그녀는 혼자 남게 되자 아미심법으로 연기조원(鍊氣調元)을 시작했다. 이제 자신과 보검이 합쳐 져 익숙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요시를 베어넘길 수 있는 것이다. 청삭검은 정말 기괴한 놈이었다.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그토록 신묘막측하게 야수 와 같이 기승을 부리더니 일단 아미본문의 심법으로 제 집 속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그 즉시 길들 인 망아지처럼 고분고분해졌다. 그러나 동문들 중에서도 비교적 입문한 지 오래 된 주경운은 공 력 또한 자못 심후하지만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청삭검이 어떤 칼인가? 장미조사도 그 야성을 끝내 다스리지 못해 지하 깊숙이 파묻어 놓았던 놈이다. 그녀는 이영경이 또 하나의 신검 자영검을 손에 넣기까지 얼마나 죽을 고생을 겪고 혼뜨검이 났 는지 그 경험담을 익히 들어서 아는 터라 이제 자영검과 쌍벽을 이룰 이놈도 여간내기가 아니리 라 예측했다. 그녀는 칼자루를 쓰다듬으며 고요히 눈을 내리감았다. 우선 체내의 진기부터 순화시켜 조절해야 한다. 칼의 마음과 자신이 일치되기까지 아무리 귀한 비보라도 내것은 아니다. 본문의 심법구결을 끝까지 외우고 나자, 그녀는 다시 두 눈을 뜨고 온 신경을 모아 칼자루를 응시하면서 조심스럽게 운기토납(運氣吐納)을 반복했다. 한 차례... 두 차례... 회수가 거듭될수록 그녀는 차츰 몰아지경으 로 빠져들었다. 일곱 차례, 여덟 차례... 칼자루를 잡은 손에 미미하게나마 진동이 느껴졌다. 그녀 는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스무 차례, 서른 차례. 스르릉! 신검이 그녀의 호흡을 따라서 칼집을 벗어나오더니 다시 들이쉬는 숨결에 따라 들어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검신(劍身)이 집을 벗어날 때마다 투명한 청광이 눈썹 터럭까지 비추도록 찬 연하게 빛을 발한다. '됐구나!' 주경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야생마와도 같이 날뛰던 신검은 이제 더 이상 야료를 부릴 생 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대담하게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쩡! 석실 전체가 그득 울리도록 힘차고도 해말간 금속성이 퍼졌다. 청삭검은 드디어 그 주인의 손에 의해 뽑혀나온 것이다. 푸르른 서광이 방 안을 온통 물들였다. "푸웃!" 주경운은 체내에 응집시켰던 선천일살(先天一煞)을 칼날에 대고 뿜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조심스 럽게 휘둘러 보았다. 한 시간도 못 되어 청삭보검은 그녀의 마음대로 부려졌다. 아직 신검합일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 했을망정 뜻밖에도 야성의 신검은 이미 순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기뻐하는 모습을 누군가 엿보았더라면 아마도 미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황혼 무렵, 쉴새없이 연마에 연마를 거듭한 주경운은 마침내 청삭검으로 어검비행을 해냈다. 실 로 대단한 집념으로 이룩한 진전이었다. "이것 봐요. 됐어요!" 검광을 일으켜 타고 석실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환호성을 질렀다. "야, 멋지다!" "근사한걸?" "언니, 축하해요!" 동굴 안 허공을 빙그르 누비면서 날아가는 그녀에게 찬탄과 축하의 말이 퍼부어졌다. 어수선하게 축하비행을 끝내고서 주경운은 동문 일행 앞에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일행들도 청삭 보검을 직접 돌아가면서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젊은이들의 들뜬 기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영경은 비로소 장이로부터 전해 들은 요시의 동정 을 말해 주었다. "이분 장이도우는 그동안 며칠을 요시의 소굴에 감금되어 있었어요. 당초 그 요시란 놈은 이분 과 원성이를 잡자 둘 중 하나를 요법 제련하는 데 희생물로 삼을 작정이었대요. 그런데 한패거리 가 된 청양노조(靑羊老祖)가 처음부터 원성이의 뛰어난 자질에 눈독을 들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제 소굴 석연욕(石燕浴)으로 끌어다가 문지기로 만들려고 했으므로, 요시의 의견에 반대를 했어 요. 하지만 요시란 놈도 고집이 여간 아니어서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막무가내였대요. 한참 다투 다 보니 그래도 요시는 일껏 얻은 조력자를 놓치기 싫었는지 슬그머니 양보를 했다는 겁니다. 제 눈에는 청양노조의 실력이 대단치 않다고 여기면서도 훗날 언젠가는 쓸모가 있으리라는 속셈을 품은 데다가, 또 이번 요법 제련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라 끝내 청양노조의 뜻을 꺾지 못한 거죠. 그래서 궁리하던 끝에 마지막으로 원성이 대신 장이도우의 생혼(生魂)을 뽑아 요 번(妖幡)에 불어넣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우리들의 공격을 눈치채고 시일이 급박해지자 요법 제련의 최적기인 경진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날짜마저 앞당기기로 했다는 거예요. 공교롭 게도 오늘 시진에 경진시가 끼어 있는 걸 알고서 오늘 아침 진시(辰時)를 요번 완성시각으로 정 한 것입니다." 영경은 장이를 대신해서 그가 어떻게 죽음의 소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그 경위를 이렇게 설 명했다. 요시는 진시 정각에 때를 맞추느라 서둘러서 요법 제련준비를 빈틈없이 갖추어 놓았다. 만약 그 당시 요시가 지하굴 속에서 그냥 일을 벌였더라면 장이는 꼼짝없이 생혼을 뽑히우고 죽 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시의 악운이 다했는지 그놈은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제련법단을 차릴 장소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애송이 계집 아이의 공격이 무서워서 두더지처럼 숨어 일을 꾸미기에는 요시의 자존심도 용납하 지 않았거니와,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지난 번 이영경과 두어 차례 공방전을 벌였을 때 함정을 만 드느라고 애써 지형과 방위를 뒤집어 놓는 바람에 귀중한 지하의 동방태을진기(東方太乙眞氣)가 모조리 새어나가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땅굴 속의 지기(地氣)는 막혀서 제련일시와 오행상극이 어긋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요시는 지하에 차려놓았던 법단(法壇)을 이 층 석골 앞으로 당겨서 거행하기로 했는데 그 장소는 사면으로 탁 트여, 어디서나 적의 공격을 받기에 알맞는 곳이라, 요시는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해 이중 삼중으로 봉쇄해 놓았다. 그 봉쇄망은 요법제련 도중 그것을 방해할 어떠한 적의 침투도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엄밀하고 지독한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사전에 요시의 기미를 탐지한 사람이 있었다. <청낭선자(靑囊仙子)> 화요숭은 진작부터 요시가 법단을 그리로 옮기리라 예측하고 둘째 동굴 앞 화석이 된 고목줄기의 구멍 속에 잠복하 고 있었던 것이다. 진시가 가까와 오자, 요시는 제단 앞에 꿇어앉아 눈을 감고 입정(入定)에 들어갔다. 자신과 이제 새로 단련한 요번(妖幡)을 일치시킬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요시는 자기 대신 청양노조더러 장이 의 생혼을 뽑아 달라고 부탁했다. 생혼을 뽑으면 장이가 쓰던 원구검(元龜劍)과 함께 주번(主幡) 에 옭아넣도록 한 것이다. 이윽고 진시가 되자, 청양노조는 결박지은 장이를 법단 위에 눕혀놓았다. 이제 희생양의 가슴을 뻐개고 생혼이 들어 있는 심장을 꺼내 술법에 걸어서 불태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장이는 이제 절대절명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 광경을 줄곧 지켜보고 있던 화요숭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 돌연 요시의 법단으로 뛰어들 었다. 요법 제련의 절정, 그 허점을 노리고 기습을 감행한 것이었으나 실로 위험천만한 행동이었 다. 화요숭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청양노조의 칼날 아래 놓인 장이를 낚아챘다. 뜻밖의 사태에 놀란 청양노조가 멈칫하는 사이, 그녀는 다시 고목 속으로 사라졌다. 요시로서는 정말 상상 밖의 기습이었다.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봉쇄망을 쳐놓았는데, 적은 그 먼저부터 천라지망 속에 잠입해 있었을 줄이야 꿈에나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요법 완성에 쓸 귀 중한 희생물을 빼앗긴 요시도 그냥 있지 않았다. 요시와 청양노조는 즉각 추격을 개시했다. 장이를 탈취하는 데 성공한 청낭선자는 고목 속의 비도(秘道)를 타고 달아나면서 적의 추격이 곧 시작되리라는 걸 예상했다. 희생물을 채뜨리는 순간 요시의 동태를 살펴보지는 못했으나 희생 물이 그놈의 요법에 금제(禁制)당하여 인사불성인 상태로 있는 이상, 술법을 건 자와 희생물 사이 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조종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추격자는 그 보이지 않는 끈을 따라서 뒤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디로 달아나야 되겠는가? 화요숭은 앞으로 갈 길이 막연해졌다. 아직 정오가 되려면 한참 있어야 된다. 지금쯤 주경운 일행은 오구선부에서 청삭검이 출현할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터, 그쪽으로 달아나면 젊은 검선들의 응원은 받게 되겠지만, 혼전의 와 중에서 청삭보검을 얻기는 아예 그른 일이 된다. 그렇다. 늑대를 방 안으로 끌어들이는 짓일랑 생 각도 하지 말자. 청삭검을 얻지 못하는 이상 요시를 제거할 방법은 없지 않는가 말이다. 그럼 어 디로 달아나야 하나? 지상과 천공은 요시의 술법으로 천라지망이 둘러쳐 있다. 고목 속 비도를 빠져나온 청낭선자는 일순 망설였다. 이제 적이 추격해 오는 기척도 완연하게 느껴졌다. 화요숭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장이의 몸뚱이를 들쳐업은 채 앞에 보이는 암벽의 틈서 리로 뚫고 들어갔다. 은둔책을 써서 상공으로 날아보았자, 적의 봉쇄망을 돌파하기 전에 추격자들 이 따라붙을 것은 뻔한 이치다. 암벽 틈서리로 쑤시고 들어간 그녀는 즉시 입지둔행법(入地遁行 法)을 써서 땅 속 깊숙이 잠적했다. 땅 속은 온통 바위투성이였다. 마침내 요시가 청양노조를 이끌고 암벽 앞에 당도했다. 요시는 도망자가 그 틈서리로 들어간 흔 적을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적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다. '이걸 어떻게 끌어낸다?' 요시는 문득 옛날에 자주 쓰던 꾀가 떠올랐다. '이산환악(移山換岳) 술법이다!' 지난 번 이영경에게 써먹어 본 술법으로 적이 쑤시고 들어간 암벽 일대의 지맥을 뒤집어 놓아, 그 속에서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들 작정이다. 그는 즉시 이산환악 술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중얼중얼 몇 마디 주문을 외우고 손에 들린 요번 으로 동서남북, 건곤(乾坤), 감리(坎里)방위를 짚자, 사면 팔방 요사스런 기운이 감도는 안개가 무 럭무럭 일었다. 자욱한 운무 속에서 '우르르!' 지동(地動)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딛고 선 바닥이 마 구 흔들리면서 이곳 저곳 균열을 일으켰다. 뒤미처 지상에 감돌던 안개가 소리없이 갈라진 땅 속 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망중에 여유를 가지고 펼친 그 이산환악 술법이 요시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실책일 줄 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요시는 쥐 잡으려다 장독을 깨뜨리고 쥐 놓치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술법에 걸린 지맥이 뒤집혀 돌아앉는 순간, 뜻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적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가 두어 놓으려던 것이 도리어 적에게 활로(活路)를 열어주고 만 것이다. 지하 암벽에 부딪쳐 기를 쓰고 입지둔행술을 쓰던 <청낭선자> 화요숭은 갑자기 땅 속 전체가 진동을 일으키는 걸 느끼고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다. '아뿔싸, 그놈이 지맥을 뒤엎어 버리는구나! 큰일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제껏 뚫고 나가려던 바위 장벽이 '쩍!' 갈라지며 큼지막한 틈서리가 아가리 를 벌리는 게 아닌가! 화요숭은 흘낏 뒤쪽을 돌아다보았다. 요기 가득한 운무가 조수처럼 밀려들 어 오고 있다. 되돌아나갈 길은 이미 차단당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앞으로 전진하는 길밖에 없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칼을 뽑아들었다. 속수무책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검광으로 갈라진 암벽 틈서리를 헤집고 나가리라 마음먹 은 것이다.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다 죽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암벽의 지층이 두텁지 않기만을 빌면서 암벽 틈서리에 힘껏 비검을 쏘아날렸다. 그녀 일생의 필사적 모험이었다. 뜻밖에도 쏘아날린 비검에 반응이 컸다. 요지부동, 완강하게 버티며 애를 먹이던 바윗덩어리는 적의 술법에 맥이 끊겼는지 검광이 부딪치자마자 틈서리를 더욱 크게 벌리고 다음 칼날을 기다렸 다. '됐구나! 바위 뒤쪽이 흙더미 층이라면 오죽 좋으랴?' 화요숭은 용기를 내어 힘차게 비검을 날렸다. 바위 결이 '푸수수, 푸수수!' 부서져 내리면서 길을 터주는 대로 그녀는 장이의 몸뚱이를 이끌고 한 발짝 한 발짝씩 전진했다. 마침내 <청낭선자> 화요숭의 기원은 하늘에 통했다. 얼마를 파고 나갔는지, 그녀의 비검은 끝내 그 거대한 암벽을 갈라내고 토사층(土砂層)에 닿은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토사층이 거의 끝날 즈음, 또다시 가로막은 바위벽을 깨뜨리고 나가자,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은 비좁기는 해도 제법 곧 바르게 뚫린 천연의 통로였다. 화요숭 자신이야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그 천연 통로는 공교롭게도 청삭검이 뚫고 지나간 길 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통로를 따라 나갔다. 자신과 장이의 운명을 일체 하늘에 맡긴 채. <청낭선자>가 마침내 당도한 곳은 바로 주경운 일행이 전날 비검의 정기를 발견한 장소, 청삭 검이 파묻혀 있던 지점이었다. 그곳에는 칼집을 찾으려고 지상으로부터 뚫고 들어간 쌍왜가 파놓 은 그대로 입구가 있었다. 화요숭은 힘들이지 않고 안전하게 지상으로 나왔다. 실로 위기일발, 지 옥에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청낭선자>는 장이를 데리고 그 즉시 둔형술을 일으켜 요시가 전혀 알지 못할 딴 곳으로 달아 났다. 결국 요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다 잡았던 두 토끼를 한꺼번에 모조리 놓쳐 버린 것이다. 더욱 공교로운 일은 요시의 술법에 걸려 지층이 변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요시의 소굴에서 오구 선부로 통하는 지름길마저 꽉 막혀버렸다는 사실이다. 요시는 자기도 모르게 적정을 탐색할 통로 까지 봉쇄한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도대체 몇 명인지 파악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장이를 잃어버리고 나자, 요시는 추격을 단념하고 청양노조와 함께 허둥지둥 자기 소굴로 되돌 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성성이 하나뿐이다. 그 짐승마저 빼앗기는 날엔 요법제련이고 뭐고 다 틀 어지는 판이다. 요시가 중도에서 추격을 포기한 것은 화요숭뿐만 아니라 주경운 일행에게도 천만다행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시각에 주경운 일행은 요시가 되돌아간 지점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동굴 속에서 한창 청삭보검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요시가 흥분한 상태에 있지 않았더라면 지척지간(咫尺之間)에서 벌어진 그 소란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으리라. 주 경운 일행이 요시한테 발각당하고서야 어디 그리 온전히 신검을 차지했겠는가 말이다. 제 소굴로 돌아간 요시는 손꼽아 간지(干支)를 짚었다. 법단이야 차려졌지만 가장 중요한 시각, 진시(辰時)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한 번 놓친 시간을 어떻게 되돌려 놓으랴? 그는 아쉬운 대로 다음 적당한 시각을 점쳐보았다. 오늘밤 자시(子時), 오늘밤 자시가 미흡하나마 그저 쓸 만 한 시각이다. 자시마저 넘겼다가는 꼬박 경진일(庚辰日)까지 기다려야 한다. 경진일이 최후의 기회다. 그 날을 놓치면 어떻게 되는가? 천지교태(天地交泰)의 기(氣)를 얻지 못하여 요번(妖幡)의 신통력이 뚝 떨어진다. 그러나 경진일까지 기다릴만큼 여유가 있는 몸이 아 니다. 요번의 효력이 반감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전에 서둘러 완성해야만 한다. 그 시각이 바로 오늘밤 자시인 것이다. 생혼을 뽑아 쓰려던 장이를 놓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성성이 하나뿐이다. 그는 성성이의 생혼으로 요번을 단련하기로 작정했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자 청양노조도 더 이상 억지떼를 쓸 도리가 없어졌다. 희생물이 둘이었을 때는 그럴 만했지만 하나밖에 남지 않은 마당에야 남의 중대사를 망쳐가면서 고집을 피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성성이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던져버렸다. "화선고님은 장이도우를 이리로 보내시면서 이런 말씀을 전하셨어요. '요시는 지난 몇 차례 실패 를 거울삼아, 이번만큼은 더욱 엄밀하게 방비를 쌓아놓았다. 자신이 지닌 온갖 술법과 법보를 모 두 써가지고 법단 주변 일대에 천라지망을, 그것도 겹겹이 쳐놓았다. 그러므로 자영, 청삭 쌍검을 가지고 적의 방어막을 돌파하기 전에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설령 미진번을 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청삭검을 찾아내어 완전히 익숙해진 다음에 공격하여라.' 주언니, 화 선고님 말씀대로 그 청삭검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겠죠? 아까 날뛰는 걸 보니 너무 야성이 강하 고 신통력도 대단하던데. 그걸 제압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어요? 만약 그놈과 맞닥뜨려서 주언 니가 신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가는 모처럼의 기회도 잃고, 온옥도 못 얻고, 도리어 원성이 목 숨마저 잃게 될 판이니, 어쩌면 좋을까 하고 지금껏 속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어요. 그랬는데 뜻밖 에도 주언니의 공력이 이 정도로 순후할 줄이야! 반 나절 만에 어검비행의 경지에까지 이르리라 곤 생각조차 못했었어요. 정말 어려운 일인데." 주경운은 사매로부터 칭찬을 받자, 공연스레 겸연쩍어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날더러 공력이 순후하다구? 너무 추켜세우지 말아라. 이 모든 게 여러 사형들, 아우님들이 도와 주신 덕분에 낭패를 겨우 면했다는 걸 모르나? 게다가 장미교조님의 선검이야말로 원래 우리 본 문의 신물이니까 순순히 굴복한 거지, 내 힘으로 된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아우도 그 자영검을 얻었을 때 나보다 쉽게 된 건 아니었잖아?" "그래도 언니는....." 영경이 말문을 또 열기도 전에 금선이 딱 가로막고 나섰다. "잠깐만! 이제 자영, 청삭 쌍검이 짝을 이루어서 본문의 명예를 빛내고, 요시가 목을 바칠 때도 목전에 닥친 마당에 웬 입씨름만 할 수 있수? 영경사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빨리 가지 못해 안달을 떨더니 어째 그리 느긋해졌노? 어서 요시란 놈의 소굴로 쳐들어가서 그놈의 목을 썽 둥 베어버리고 온옥도 빼앗아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원성이의 죽을 고생도 덜어주게 되고 말 야." 그러자 영경의 입술이 뾰로통해졌다. "흠흠, 모두들 절더러 성미가 급하다고 흉보지만, 금선사형 성미는 아마 나보다 몇 배는 더 급할 걸? 금선사형, 방금 장이도우가 써보인 걸 못 봤어요? 화선고님은 우리더러 요시란 놈이 술법을 제련하느라 입정에 들어갈 때를 노려서 기습하라고 했어요. 지금 가봤자 헛일이란 걸 모르나요. 아마도 사형은 그 원앙벽력검 실력만 믿고 으시대는 모양인데, 어디 우리 쌍검하고 시합해 볼래 요? 누가 먼저 온옥을 빼앗는지 말예요." 금선은 자라목처럼 움츠러들었다. 애당초 여자하고 입씨름해서 이겨본 적이 없는 그인지라, 일찌 감치 입닥치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게 그나마 상수다. 의기양양해진 영경이 소화상을 돌아보았다. 장난꾸러기 어린 화상은 어쩐 일인지 말 한 마디 끼 어들 줄 모른 채 우울한 기색이다. 영경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소화상한테 말을 걸었다. "소사형, 듣자니 사형께선 귀한 보주(寶珠)를 얻으셨다든데, 그게 정말이에요? 지금 당장 할 일 도 없고 심심한 판인데 어디 그거 한번 보여주지 않으실래요?" 하지만 소화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놈의 구슬 얘기일랑 아예 꺼내지도 말아요. 내가 한때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도 이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게다가 수 년 동안 피땀 흘려가면서 겨우 만든 무형검까지 고철덩어리가 되고 말았다우. 영경사매, 모처럼 한번 청한 것이지만 이 구슬은 못 보여드리겠소. 이놈의 요시를 처치하고 사부님께 가서 바쳐야 하니까. 그분이 다시 내려주시면 그 때는 두말 않고 보여드리리 다. 사실 나도 이 구슬의 용법조차 모른다우. 또 이것 때문에 화근이 생긴 걸 생각하면 지금도 울 화통이 울컥 치밀고 속상한데 다시 꺼냈다간 당장 팽개쳐 버리고 싶을걸. 내 심정 이해하겠소? 지난 번에도 금선아우가 어거지를 쓰면서 보여달라기에 마지못해 보여줬소만, 정말 꺼내기가 싫 소." "소사형,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영경은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었다. 그래도 소화상은 끝내 도리질이다. "아니, 사매도 금선처럼 강짜를 부릴 셈이오? 볼 것도 없소!" "내가 언제 강짜를 부렸어요?" "보나마나요." 영경으로선 심심풀이 삼아 집적거리는 것이지만 소화상은 난처해 하는 기색도 없이 정색을 하고 딱 부러지게 거절한다. "정말 안 돼요?" "안 돼!"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다못해 주경운까지 합세했다. "소사제, 너무 상심 마세요. 그 무형검이 어떤 비보인데 쉽사리 깨진단 말이오? 어디 내가 아는 대로 주어섬겨 볼까나? 그 무형선검은 고행두타(苦行頭陀)사백님의 독문병기라서 보통 비검과는 다르죠. 맞죠? 오금(五金)의 정화를 응집시켜 거기다 삼천육백 가지 영약을 배합하고, 또 일월의 정기까지 흡수해서 순양지화(純陽之火), 순음지기(純陰之氣)로 번갈아 씻어내어 선검의 형체를 만 들고, 마지막에는 사백님 본신의 진원(眞元)을 운용하여 그 양문 영기를 하나로 합쳐 만든 것이 아녜요? 다만 그 선검을 전수받은 소사제의 공후(功候)가 아직 절정에 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기(邪氣)을 받고 오염된 거죠. 그러나 어떤 영물이든 반드시 재겁(災劫)을 한 번 겪고 나야만 비로소 정과(正果)를 이룩할 수 있는 법이에요. 하물며 그 무형선검은 영기도 잃지 않고 본원마저 그대로 지니고 있는데 무얼 걱정하세요? 본산에 돌아가셔서 어느 정도 공력만 기울여 넣는다면 전보다 더 신통해질 텐데. 소사제, 그 보주는 확실히 비범한 거예요. 훗날 고행사백님께서 단련하 시는 날엔 사보(邪寶)가 영물로 화해서 천지를 환하게 비출 거예요. 지난 번 응벽애에서도 미처 감상할 틈이 없었는데, 어때요? 지금 여기서 잠깐 보여주지 않을래요? 우리들도 두 눈 크게 뜨고 식견 좀 넓혀보자구." 소화상은 원래 여자하고 좀처럼 얘기를 안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영경과 주경운이 번갈아가며 졸라대니 속으로는 내키지 않지만 더 이상 매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볼멘소리로 겨 우 응답했다. "이놈의 구슬은 나 역시 아직 어떻게 부리는지 방법을 몰라요. 그래도 오래 전 사부님을 따라다 니면서 장광회영(藏光晦影)이란 장안술(障眼術)을 조금 배웠지요. 사실 이 구슬의 정광(精光)은 한 번 뻗쳤다 하면 구천(九天)에까지 비칠 정도로 강렬해서 나처럼 섣부른 재간 가지고 잘못 다루었 다가는 남의 눈길에 당장 들통이 나겠기에, 특수한 주머니에 넣어서 다시 그 광채를 장광회영술 로 폐쇄시켜 놓았지요. 겉모양으로 보아선 오리알만한 붉은 구슬이고 별다르게 신기한 것은 없어 요. 하지만 그 원형을 드러내 보이자면 여간 애를 먹이는 게 아니죠. 정 그렇게 보시고 싶다면 겉 모양이나 보여드리겠어요."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승포자락을 들추더니 실로 짠 듯한 법보낭을 열고 문제의 건천화령주(乾 天火靈珠)를 꺼내 보였다. 잔뜩 호기심에 안달이 나 있던 일행들이 꿀단지에 파리 괴듯 우르르 소화상을 에워쌌다. 과연 그 말대로 오리알만큼이나 굵직한 구슬이다. 동그스름한 형체에다 불꽃처럼 시뻘건 놈이 소화상 의 손바닥 위에서 멈추지 않고 수은방울처럼 데굴데굴 구른다. 크기는 제법 커도 마치 살아 있듯 이 여간 날렵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 밖에는 별다른 점도 없는지라, 일행들은 이내 호기심 이 스러졌다. 하지만 일껏 말품을 팔아서 겨우 꺼내도록 보챈 당사자는 아무래도 성이 차지 않았다. 영경은 다시 소화상을 졸라댔다. "소사형, 누가 수박 겉만 핥겠다고 그랬어요? 어서 술법을 풀고 이 구슬 광채 좀 보여줘요. 그건 또 얼마나 근사할까?" 이번에도 소화상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요. 이 구슬은 동해에서 우리 제갈(諸葛)사형이 보광을 봉쇄한 뒤로 금선아우만 이렇게 겉 모양을 한 번 보았을 뿐, 여지껏 광채를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소. 지금 요시의 소굴도 엎드리면 코닿을 데 있는데, 공연히 그놈을 놀라 깨울 필요가 어디 있소. 일도 시작되기 전에 요시를 경동 시켰다가는 큰일나지. 아무렴, 안 되구 말구!" "그런 억지 핑계가 어디 있담. 여기는 동굴 속, 그것도 계곡 밑바닥 깊숙하게 감춰져 있는 곳인 데, 아무려면 그 구슬의 광채가 신통방통하기로소니 설마 이 엄청난 산악을 꿰뚫고 하늘까지 뻗 친단 말이에요?" "정말 그렇대두 그러네!" "피잇,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해도 안 돼!" 두 고집장이의 입씨름이 또 시작됐다. 그러고 보니 정작 궁금해진 사람은 금선이다. 소화상이 두 번씩이나 애꿎은 자기 이름을 들먹였는데, 사실 말이지 자신도 지금처럼 겉모양만 보았을 뿐 그 신령한 정화(精華)는 끝내 못 보았다. 그렇다면 이름만 팔리고 손해를 보아서야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어떻게 해서든지 밑천은 건져야지! "이봐 소사형, 너무 그러지 말라구. 나한테도 안 보여주고 어째 내 이름은 들먹거려? 모처럼 다 들 보고 싶어 안달이 나서 간청하는데 이거 너무 뻐기는 게 아냐? 한번 속시원하게 풀어보구려!" 사태가 이쯤 되니 소화상도 어쩔 도리없다. 요구대로 보여줄밖에. 이 떼거지를 어찌 막는단 말이 냐? "알았어, 알았다구! 여러분이 정녕 보고 싶다면 보여드려야지. 한데 지금 때가 어슬녘이라서 조 심해야겠어. 이 법보낭 주머니는 사부님께서 동해교사(東海鮫絲)를 채집해 여기 엄인영사제의 할 머님 손을 빌어서 만든 것이지요. 엄사제의 할머님은 바로 태호(太湖) 서동정산(西洞庭山)의 묘진 관(妙眞觀)방장이신 엄사파(嚴師婆)님이시지. 그분은 신녀사(神女梭)로 이걸 짜주셨어. 생김새는 비록 투박해 보이지만 이래뵈도 진기한 이보(移寶)를 전문으로 담아 보호하는 주머니야. 이걸 교 사척(鮫絲滌)이란 끈으로 주둥이를 묶어서 목에 걸게 되어 있지. 그래서 어떤 보물이든 일단 주머 니 속에 들어갔다 하면 잃어버릴 염려는 고사하고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간을 가진 놈이라도 이 속에 든 구슬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 말씀이야. 기왕에 여러 동문들이 보겠다고 극성을 부리니 잠깐만 꺼내보도록 하지. 요시의 소굴로 습격하려면 아직도 두어 시진은 남았으니까. 어차피 그놈 을 처치하고 나서도 여러분 성화에 그냥 넘기지 않을 테니까, 지금 보여주나 나중에 보여주나 마 찬가지겠군. 허허 참." 소화상은 먼저 화령주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고 나서 주머니째로 손에 받쳐들더니 가부좌를 틀 고 앉아 중얼중얼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밥 한 끼 먹을 시간쯤 되었을까. 주머니에서 점점 붉은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주머니 와 그것을 받쳐든 손바닥이 시뻘개지다가, 이윽고 동굴 속까지 온통 벌겋게 물들어, 그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불덩어리 인간으로 만들었다. 소화상의 몸뚱아리도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완전히 불타는 듯 이글거렸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 는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얄팎하고 투명한 주머니 속에서 데굴거리던 화령주는 차츰 넓은 안개 층에 감싸여 어렴풋하게나마 윤곽만 보이더니 잠시 후에는 불덩어리로 화해 엄청난 광채를 뿜어 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머니조차도 보이지 않고 소화상의 팔에 안긴 것은 숫제 바구니만큼이나 커다란 불더미 였다. 그 광채는 얼마나 강렬한지 혜안을 지닌 금선을 빼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눈이 부셔서 도저 히 그것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와아, 멋지다!" "이것, 정말 대단하군?" "아이쿠, 눈이 부셔 죽겠네!" "지독한 보물이야. 저걸 단련해서 쓰는 날에는 더 엄청나겠지?" 저마다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한 마디씩 탄성을 지른다. "이만하면 됐지? 그럼 슬슬 거두어볼까?" 소화상도 일행들의 칭찬이 싫지 않은 듯, 빙그레 웃으면서 술법으로 화령주의 광채를 거두어들 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이영경은 동굴 바깥에서 독수리가 연거푸 우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분명 경보를 알리는 소리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영경은 두말 않고 즉시 검광을 일으켰다. 동굴 밖으로 나와서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아연실색, 저도 모르게 그만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건천화령주의 위력이 저 정도라니! 구슬의 광채는 동굴 속뿐만 아니라, 암벽의 천정을 꿰뚫고 산 꼭대기까지 뻗어나와 천공으로 치솟아오른 것이 아닌가? 하늘 절반이 온통 붉게 물들고 별빛 달 빛마저 청회색으로 변해 제 빛을 잃고 있는 것이다. 쿠르르, 쿠르륵! 독수리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산 북편에서 번쩍하고 황색 빛 줄기 한 가닥이 별똥처럼 날아간다. 바야흐로 독수리는 두 나래를 활짝 펼치고서 그 뒤를 쫓고 있었다. '요런 놈의 쥐새끼, 그 새 염탐하러 왔었구나!' 영경의 눈에 뜨인 바에야 그냥 보내줄 리가 없다. 그녀는 자영검광을 일으켜 타고서 즉각 추격 에 나섰다. '씽' 하는 칼바람 속에 자줏빛 광채가 무지개를 그리며 날아간다. 그러나 목표에 당도 하기 전, 독수리가 먼저 목표물을 덮쳤다. 황색 검광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훌쩍 방향을 바꾸어 반대로 독수리에게 역습을 시도했다. '청양노조가 왔었구나!' 그 황색 빛줄기는 지난 번 요시의 소굴 앞마당에서 두 도동 녀석이 쓰던 것과 같았다. 아니, 그 놈들 것보다 광채가 훨씬 강렬했다. 영경은 혹시나 독수리에게 실수라도 있을까 걱정되어, 다짜고짜로 자영검부터 쏘아날렸다. 뒤미 처 따라온 일행들도 시합이나 하듯 일제히 비검을 날렸다. 그러나 역시 자영검이 빠르다. 일행들 의 검광이 당도하기 전에 황색 빛줄기는 벌써 자줏빛 무지개에 옭혀 있었다. 쩡! 샛된 금속성과 함께 허공에는 수십 개의 불똥이 산지사방 흩어졌다. 적의 검광은 순식간에 여지 없이 쇳조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녀의 눈길이 비검을 쓰던 적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적은 어느 새 자취도 없이 사라졌 다. 요시 곡진의 최후 斬妖尸 得寶返仙山 逢巨惡 無心留隱患 이리저리 사방으로 적의 종적을 찾고 있는 참인데, 멀찌거니 '푸드득!' 하고 독수리가 내려앉았 다. 사나운 울음소리는 여전히 '쿠르르, 쿠르르!' 그칠 줄 모른다. "금안사형, 어떻게 된 거야?" 영경은 그리로 달려갔다. 과연! 그 강철 같은 발톱에 콱 움켜잡힌 전리품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는 요물 한 녀석이 병아리처럼 달랑 발톱 사이에 채여 있는 것이다. "요것 봐라? 염소 대가리 도사놈의 제자녀석이로구나! 뭘 염탐하러 왔지?" 영경이 포로를 독수리 발톱에서 끌어내리려 하자, 곁 따라온 장이가 후딱 나꿔채더니 입으로 금 제(禁制)의 주문을 외우면서 밧줄로 꽁꽁 잡아묶은 다음 그대로 번쩍 추켜들었다. 일행에게 손발 짓하는 폼이 포로를 절대로 땅에 내려딛게 해선 안 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눈치빠른 주경운이 대뜸 그걸 알아챘다. "아하, 그렇군! 지난 번 저녀석을 잡았다가 놓쳤을 때도 흙바닥에 닿자마자 미꾸라지처럼 없어졌 었지. 그땐 정말 멍청하게 당했어. 저놈이 그래도 제법 토둔법(土遁法)을 쓰는 줄이야 까맣게 몰 랐거든. 이봐, 죽은 척하고 있을 거 없어. 누가 속아 넘어갈 듯싶으냐? 어서 눈을 뜨라구!" 멱줄기를 잡힌 채 죽은 듯 눈을 까뒤집고 있던 도동녀석, 연극이 탄로나자 주경운 일행한테 마 구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래 저래 살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다. "이 햇병아리 갈은 놈들, 감히 누구를 잡아 묶는 거냐? 어서 날 풀지 못하겠어? 육시처참을 할 놈들, 갈갈이 찢어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년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날뛰는 게냐? 너, 이 벙어리 놈아! 사부를 배반하고 계집년들한테 달라붙다니! 네놈은 죽여서도 혼백 한 점 안 남기고 산산조각 흩날려 버릴 테다. 이 배신자, 더러운 연놈들아, 빨리 날 죽여라!" 문초를 하려 해도 대꾸는커녕 악다구니 욕설만 퍼부어댔다. 나중에는 하늘에다 대고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했다. "사부님, 날 좀 살려주십시오! 사부님, 사부님!" "시끄러워, 이놈아!" 진작부터 울화통이 뻗친 금선이 호통을 치면서 '철썩!' 하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얼마나 호되게 때렸는지 앞니 몇 대가 부러져 나왔는 데도, 포로는 여전히 욕설에 고함을 번갈아가며 발악을 해 댔다. 이때, 화령주의 보광을 거두어넣느라 뒤처졌던 소화상이 당도했다. 그는 포로가 자백을 않은 채 죽어라고 욕설만 퍼붓는 걸 보더니 빙글빙글 그 특유의 장난끼어린 웃음을 머금었다. "이봐, 사실대로 자백하는 게 몸에 이로울 거야. 안 그랬다간 네녀석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 들어줄 테니까 말야. 어디 맛 좀 볼래?" "요 새끼 중놈은 또 어디서 굴러와 허풍을 떠는 거냐?" <새끼 중>이란 말을 듣자마자 소화상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걷혔다. 그는 손가락을 번쩍 들어 포로의 가슴에 찍었다. "어이쿠!" 도동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무섭게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뚱이가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이제껏 부리던 허세는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새끼줄 꼬이듯 전신을 비틀어대는 것이다. 소화상이 쓴 고문이야말로 불가(佛家)의 <항마쇄골축신법(降魔鎖骨縮身法)>이다. 전신의 뼈마디 가 모조리 어긋나고 골수까지 치미는 아픔을 견뎌낼 장사는 없다. 쑤시고 저리고 가렵고, 숨까지 턱턱 막힐 정도로 무서운 고통이 연달아 엄습하는데, 도무지 배겨낼 수 없는 것이다. 마침내 악다 구리로 버티던 포로의 입에서 다급한 항복의 외침이 터졌다. "멈춰! 빨리 멈춰요. 내 실토할 테니, 제발!" "진작에 고분고분 말 들을 것이지! 그래, 네놈의 이름이 뭐냐?" "두원(杜遠)이오." "너하고 같이 멧돼지를 뜯어먹던 놈은?" "사형 견박(甄拍)이었소. 우리 두 사람 모두가 청양노조의 문도요."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염탐하러 왔지?" "그건 이렇소. 요시가 성성이를 끌어내다 법당을 차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곳 남산에서 붉은 광 채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는 걸 목격했소. 요시는 천 년 묵은 희세의 영물이 세상에 나타났다 고 믿고서 그걸 찾아오라는 분부를 내렸소. 자기가 몸소 오고 싶었으나 제련할 진시도 박두했고, 또 법단 준비 때문에 거길 떠날 수 없어서 요시하고 우리 사부 청양노조는 그대로 남기로 하고 우리 두 사람만 보낸 거요. 그런데 우리들의 비검은 두 자루 모두가 저기 서 있는 두 계집한테 깨뜨려져 무용지물이 되었는지라 호신술 병기가 없었소. 그러자니 맨손으로 올 수도 없고 해서 사부님의 비검을 빌어 타고 온 것이지. 성성이가 쓰던 쌍검이 있기는 한데 우리 재간 가지고는 어검비행을 하기가 어려워서 단념했소." "요시란 놈은 장차 어떻게 할 모양이더냐!" "오늘 밤 자시에 요번(妖幡)제련을 완성한 다음, 우리가 찾아오는 보물을 가지고 사부님과 함께 운남성 변경에 있는 우리 석연욕 삼성동으로 갈 작정이라 하오. 거기서 각파 이단의 무리들과 결 탁해 가지고 아미파에 도전해 원한을 씻겠다고 하더군." "너하고 같이 온 놈은 어디 갔지?" "사형은 먼저 내뺐소. 둘이서 오기는 같이 왔는데 저 앞쪽에서 그만 독수리란 놈과 맞닥뜨리고 말았지 뭐요. 저 날짐승이 공중에서 감시하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던 것이오. 저놈은 가차없이 나부터 움켜잡았소. 정말 재수에 옴붙었지. 젠장! 사형은 독수리를 보자마자, 사세가 글렀다고 여 겼는지 눈치도 빠르게 혼자 뺑소니쳤소. 날 구해줄 생각은 않고 의리없게 자기 혼자만 도망치다 니!" "한 놈이 달아났다? 그거 참 야단났군. 놓친 그놈이 돌아가서 보고하는 날엔 요시도 경계를 단 단히 강화할 텐데, 쯧쯧." 금선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정말 아쉬운 노릇이다. "금선사형, 기왕에 들통났으니까 그놈이 놀라 달아나기 전에 아예 지금 쳐들어 갑시다!" "내 생각도 그래요." "나두....." 영경의 제안에 주경운과 엄인영이 찬동했다. 그러나 소화상만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지 즉시 출동을 반대했다. "아냐, 요시는 제 실력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한 놈이야. 모처럼 요번을 제련할 호기를 버리고 쉽 사리 달아나지는 않을 게 분명해. 아마 그 반대로 우리들을 찾아나설지도 몰라. 기왕지사 들통은 났고, 또 화선고님의 지시도 있고 하니, 그냥 예정 시각대로 진행하는 것이 옳을 듯싶구만. 어차 피 그 시각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동안 마음이 놓이지 않거든 여럿이서 요시 소굴이 있는 상 공에 분산해 가지고 적의 움직임을 보아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 어떨까!" "아니야, 그럴 필요없어. 지금 그냥 쳐들어 가자구!" "그래요. 일찌감치 손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요시란 놈이 방어망을 더 강화하기 전에 칩시다!" 금선이 팔뚝을 걷어붙이자, 영경과 경운도 동조했다. 소화상은 다수의 주장을 꺾기가 뭣해서 순 순히 자기 의견을 철회했다. "그래, 그대로 하자구. 한데 이녀석은 어떻게 처리하지? 요물이긴 해도 나이 어린 놈인데....." "그래요. 기왕 바른대로 자백까지 했으니 단단히 혼뜨검이나 좀 내주고 목숨만은 살려주기로 해 요." 엄인영이 소화상을 따라 정상론을 폈다. 그러나 이영경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정말 안 돼요! 주언니도 봤지? 저놈은 그 어린 나이에 멧돼지를 산 채로 살을 저며 먹고 피까지 뽑아 마실만큼 천성이 잔악한 놈이에요. 그 흉악스런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 는 판인데, 저런 종자를 살려둬서 어디다 써요? 요물의 종자가 착한 걸 봤어요? 일찌감치 화근덩 어리는 제거하는 게 좋아요." 곁에 시립해 있던 미타, 유유안 쌍왜도 영경의 말을 거들었다. "주인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저희들도 겪어봤지만 저런 놈은 절대로 이 세상에 남겨두어선 안 됩니다. 살려두면 두고두고 악행만 저지를 화근덩어리이니까요." 두원이란 놈, 듣자 하니 꼼짝없이 죽을 판이다. 그는 장이에게 멱살을 쳐들린 채 발버둥치면서 애걸하기 시작했다. "다신 안 그럽니다! 맹세할게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쇼! 아이고 제발." 그러나 금선은 벌써부터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적의 소굴로 쳐들어갈 시각이 박두한 판국에 웬 왈가왈부냐 말이다. "이 따위 것 가지고 뭘 따지는 거야? 이렇게 하면 간단할걸!" 금선의 손이 번쩍 쳐들렸다. 검광 한 줄기 스쳐간 자리에 두원의 몸뚱이는 두 동강이 나서 떨어 졌다. "자, 떠나자구!" 일행은 쌍왜가 선두에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 검광을 일으켜 타고 일제히 적의 소굴로 직행했다. 요시의 동굴이 있는 옥령암(玉靈巖) 일대는 온통 검정빛 연기와 요기어린 안개장막으로 뒤덮여 산천경개는커녕 동굴의 소재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암흑세계로 변해 있었다. "어이구, 이거 지독한뎁쇼. 도대체 방향조차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앞장섰던 쌍왜가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 모두 뒤쪽을 맡아요!" 주경운은 쌍왜를 후미로 돌리고 이영경에게 손짓을 보냈다. 이번에는 두 처녀가 기억을 더듬어 지형 방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적의 소굴이 가까와지 자 금선은 미진번을 펼쳐서 일행들의 호위막을 형성해 주었다. 마침내 주경운과 이영경은 지상으로 내려섰다. 그곳은 요시의 소굴 앞 광장이었다. 이 일대의 정 경도 완전히 변해 있었다. 음산한 구름 속, 검정빛 기류가 자욱하게 뒤덮인 광장 뜨락은 형형색색 의 깃발이 여기저기 펼쳐 펄럭이고 깃대 아래 수북이 잘린 짐승들의 머리통에서 처참한 울부짖음 이 흘러나왔다. 수십 폭의 크고 작은 깃발에서는 끊임없이 황록색 연기와 광채가 발출되면서 지 독스런 비린내가 일행들의 코를 찔렀다. 그 광경은 바로 이영경이 두 번째 요시의 지하 굴 속에 내려갔을 때 보았던 지옥도(地獄圖)를 그대로 떠다 옮긴 것이었다. 자영검과 청삭검이 번쩍하고 뽑혀졌다. 두 처녀는 검광으로 운무의 장막을 헤치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갔다. 칼빛이 닿는 곳마다 검은 기류는 베어지듯 갈라졌다가 일행이 통과하기가 무섭 게 도로 합쳐졌다. 과연 적의 요법은 지독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비록 그 요법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정작 찾아내야 할 요시의 법단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안 보였다. 요시와 그를 돕고 있 는 <청양노조> 그리고 희생제물이 될 원성이 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 속에 자꾸만 초조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이영경과 주경운은 눈앞에서 요사스럽게 빛을 발 하는 깃폭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쓰러뜨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안개장막을 뚫고 금선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누님! 저기 서편 고목 앞에 원성이가 있어. 빨리 가서 구해줘야잖아!" 경운보다 영경이 먼저 그쪽으로 움직였다. 뒤미처 경운도 검광을 타고 서편으로 날아갔다. 푸른 빛, 자줏빛 광채가 엇갈려 비추는 곳에 과연 원성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커다란 깃폭 아래 꽁꽁 묶인 채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얍!" 야무진 기얍소리와 함께 자영검이 '씽!' 하고 칼빛을 뿌려냈다. 원성이를 묶어놓았던 수십 가닥 흑살사(黑煞絲)가 연기로 화해 맥없이 산지사방 흩어져 날아갔다. 결박이 풀린 원성이는 검정빛 안개 속에 솟구쳐 나는 자주색 무지개를 발견하자 환호성을 지르 면서 그쪽으로 쫓아갔다. 그러나 몇 발짝도 못 갔을 때였다. 갑자기 운무를 헤치고 밀랍처럼 말라 비틀어진 손 하나가 쑥 뻗어나오더니 원성이를 덥석 움켜잡아 가지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여 기저기 꽂혀 펄럭이던 깃발까지도 일제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막막한 검정빛 기류의 장막 속에서 원성이가 지르는 비명소리 요시의 웃음소리가 한 데 뒤섞여 들려왔다. "우와앗!" "우후후, 흐흐!" 얼결에 원성이를 덮친 이영경은 소리나는 곳을 어림잡아 추격했다. 그 괴상한 밀랍의 손아귀는 안개 속으로 눈녹듯이 사라졌다. 어느 새, 한쪽에서는 엄인영과 장이, 소화상, 금선, 쌍왜 여섯 명이 청양노조를 포착하고 전후좌 우로 에워싸고 있다. 청양노조는 금선의 혜안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미진번이 토해낸 채운덩어 리가 그의 정수리를 덮어씌운 가운데 여섯 사람의 검광이 기세 사납게 협공을 퍼붓고 있다. 검은 연기는 점점 갈수록 짙어졌다. 요시가 어디로 모습을 감추었는지 또 원성이는 어디로 끌려 갔는지 전혀 종잡을 수 없게 되자, 영경은 애가 탔다. 악마의 손아귀에 다시 잡힌 이상 원성이의 목숨은 절대절명이다. '요시란 놈이 여길 빠져 달아났으면 어쩌나? 그렇다면 정말 큰일인데.' 쩡그렁! 한참 만에 청양노조가 비검을 엄인영의 검광에 격파당하고 빈 손이 되고 말았다. 청양노조는 젊 은이들의 매서운 협공에 몰리자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드디어 그는 주춤주춤 뒷걸 음치던 끝에 검은 안개장막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져 버렸다. 결국 영경 쪽이나 금선 쪽이나 모두 상대할 적과 찾아야 할 목표를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어지 러운 기류 속에서 아무리 헤매어도 소득이 없는지라, 주경운은 생각다못해 우선 적의 탈출로부터 막아놓기로 결심했다. "엄사형, 금선, 장이도우, 소사형, 그리고 쌍왜까지 합세하셔서 공중에 차단망을 치시오. 적이 빠 져나갈지도 모르니까. 우선 그 길을 끊어버려야겠어요." 여섯 줄기 검광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가로 세로 얽혀 짜였다. 이렇게 해서 퇴로는 차단했지만, 그 다음에 할 일이 없어졌다. 이대로 적이 나타날 때까지 마냥 버티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 가? 이때 상공의 일각을 맡고 있던 유유안이 불쑥 무얼 생각했는지 소화상에게 제안을 했다. "보십쇼. 천지에 온통 흑살사가 뒤덮여 있습니다. 요시란 놈이 온옥의 광채를 가리우고 숨어 있 는 이상, 우리가 신령한 법보로 호신을 하고는 있으나 막상 그놈을 찾아내 처치하기는 아주 어려 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시간만 끌다가는 그 귀신 같은 놈의 술수에 당하기 십상입니다. 제 좁은 소견입니다만 대선(大仙)께서 가지고 계신 그 건천화령주를 꺼내 비춰 보시면 어떻겠는지요? 그 구슬은 광채가 천공을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순양지보(純陽之寶)이니까,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 를 가졌더라도 그놈의 정광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말에 소화상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화령주를 얻기는 했지만 그놈이 요물의 몸 속에서 꺼낸 것이고, 또 아직 스승 고행두타에게 아뢰지도 못한 데다, 용법은커녕 내력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 이다. '그래, 쌍왜의 말에 일리가 있다. 쓰는 법이야 모르지만, 손에 들고 그 빛으로 요시의 종적을 비 춰 볼 수는 있겠구나. 혹시 뜻밖에 좋은 결과가 나타날지도 몰라.' 그는 한번 결심했다 하면 즉시 행동에 옮기는 성미다. "이봐, 금선사제, 모두 이리로 모이게! 그 미진번을 가지고 날 엄호해 줘." 일행 다섯이 우르르 달려왔다. 지상에 내려앉자 소화상은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진언을 외기 시 작했다. 화령주의 엄법(掩法)을 해제하는 것이다. 화령주가 법보낭에서 꺼내져 두 손으로 받들렸다. 우르릉! 갑자기 지진이라도 일어나듯 땅이 진동하더니, 화령주에서 한 뭉치 붉은 빛덩어리가 뻗어나왔다. 그 빛덩이는 삽시간에 온 천지를 꿰뚫고 눈부시게 비쳤다. 요기어린 안개가 말끔하니 스러졌다. 마치 화로 불에 눈녹듯이 요시가 쳐놓았던 독무(毒霧)의 장막은 화령주의 광채 속에 소리없이 녹아들었다. 동굴 앞 광장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제서야 경운일행은 적 측의 상황을 똑똑하게 볼 수가 있었다. 광장에 그득히 꽂혀 있던 깃발은 영경의 칼날을 피해서 모조리 한 쪽 구석으로 옮겨지고 원성이 는 먼젓번처럼 깃대 아래 결박당한 채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 곁에서 싸늘한 눈초리로 지켜보는 청양노조... 요시는 두 눈을 내리감은 채 포단 위에 정좌하 고 있다. 입에서 중얼중얼, 알아듣지 못할 주술(呪術)이 소리도 없이 흘러나오고, 흔들리는 다섯 손가락, 그 끝에서 다섯 줄기의 흑색 기류가 쏘아져 나와 원성이를 찌르고 있다. 표적의 왼쪽 가 슴에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앗, 원성이가 큰일났다!" "안 돼!" 영경과 경운이 동시에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비검을 날렸다. 한 줄기는 요시를, 또 한 줄기는 청양노조를 노리고 쏜살같이 덮쳐들었다. "으아악!" 자줏빛 무지개가 '쌩!' 소리를 내면서 지나간 자리에 청양노조의 단말마적 비명이 메아리쳤다. 청양노조를 단칼에 두 토막을 내고 난 영경이 경운과 합세하여 요시에게 협공을 퍼부으려고 할 때 느닷없이 발 밑바닥에서 '쿵!' 하고 굉음이 울리더니 삽시간에 천지가 빙그르 뒤집혔다. 이제 갓 딛고 선 땅바닥이 풀썩 꺼지면서 끝도 모를 거대한 무저(無底) 함갱(陷坑)이 뚫리고 화염기둥 을 동반한 돌풍이 성난 파도처럼 '쏴아!' 솟구쳐 오른다. "아앗, 함정이다!" "조심해, 지옥이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두 처녀, 저마다 경악성을 지르는 사이에 요시란 놈은 훌쩍 몸을 뒤집고 한 덩어리 흑색 기류로 변하더니 번개보다도 빠르게 영경을 노리고 부딪쳐왔다. "이크!" 지난 날 혼뜨검을 당한 경험이 있는지라, 영경은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그 틈을 타고 요시는 재 빠른 솜씨로 다시 원성이를 나꿔채더니 슬쩍 영경의 예봉을 피해버렸다. "이것 봐라?" 영경은 재차 공격을 퍼부으려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지껏 적을 눈앞에 두고 용서해 본 적이 없던 요시가 어쩐 영문인지 이제와서 자기와의 맞대결을 회피하는 게 아닌가? 과연 요시는 싸움을 피하고 있었다. 새로 연성해 낸 흑살비검(黑煞飛劍)과 신검합일, 한 무더기 검광으로 화해 광장을 온통 누비면서 미친 듯이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아미의 젊은 검선들과 맞닥뜨려서도 싸우기는커녕 도리어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삼십육계 줄행랑칠 기미도 보 이지 않았다. 요시가 목표로 삼은 것은 오직 하나, 지상에 꽂혀 있는 수십 폭의 깃발을 닥치는 대로 잡아뽑는 것이 전부였다. 깃발 수도 많았지만 그것들을 뽑아 챙기는 요시의 몸놀림 역시 전광석화처럼 민 첩했다. 일행들은 모두 영문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도대체 이놈은 무슨 꿍꿍이짓을 벌이려는 거 냐? 생사를 걸고 피투성이 싸움을 할 각오로 쳐들어왔는데, 겨우 청양노조 한 놈을 죽이고 났더 니 이제는 싱겁게 적의 비행곡예만 구경하는 처지가 될 줄이야! 그러나 산전수전을 다 겪고 경험이 많은 쌍왜는 달랐다. 두 사람은 대뜸 요시의 의도를 알아차 렸다. 그 깃발들이 요시에게 있어 목숨처럼 귀중하다는 사실도 진작부터 아는 터였다. 이제 요시 는 깃발을 거둔 다음 원성이를 끌고 뺑소니칠 심산인 것이다. "여러분, 저놈은 깃발만 다 챙겨 가지고 달아날 겁니다! 어서 막으십쇼. 온옥은 저놈의 가슴팎에 매달린 주머니 속에 있습니다. 주머니는 흑살사로 짠 것이라 생혈(生血)을 뿌리지 않으면 깨뜨릴 수 없습니다. 어서들 처치하십쇼! 어서요!" 쌍왜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대자, 일행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잡아라!" "놓치지 마랏!" 젊은이들은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너나 할것없이 일제히 비검을 날려보냈다. 광장 주변은 어느덧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지옥으로부터 솟구쳐 나온 화염 기둥이 강풍을 타 고 당장에 일행을 숯덩어리로 만들려는 듯이 불의 혓바닥을 널름거렸지만 시종 헛일이었다. 미진 번의 채운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요시는 역시 지독한 놈이었다. 한 가닥 검정빛 기류로 변화한 그놈은 바다를 박차고 승천하는 흑룡과도 같이 위세당당했다. 젊은 검선들의 칼숲을 요리조리 교묘하게 빠져나가면서 여지껏 터 럭 한 개 다치지 않고 있다. 몸뚱이를 틀 때마다 음산한 귀곡성이 울렸다. 속이 왈칵 뒤집힐 만큼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그놈은 상대방의 공격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런 가운데서 도 깃폭을 하나씩 하나씩 뽑아 챙기고 있는 것이다. 잠깐 사이에 그 숱한 깃발이 거의 뽑혀나가 고 이제 남은 것은 겨우 십여 폭이다. 이영경은 악에 받쳐 발광이라도 하듯 마구 자영검을 휘둘렀다. 원성이의 목숨도 걱정되려니와 요시가 온옥을 지닌 채 그대로 뺑소니친다면 여영남의 운명도 끝장나는 판이다. 그걸 눈 뜨고 어 떻게 보랴? 이때 한창 공격을 퍼붓던 소화상은 문득 공세를 늦추더니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쌍왜가 악쓰던 소리에서 짚히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요시 놈이 저 깃발들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다니... 이런 지경에 몰리고서도 기를 쓰고 챙겨 달 아나려는 걸 보면 제 목숨만큼이나 아끼는 모양이다. 그걸 몰랐어, 이 멍텅구리야! 좋다, 그렇다면 저놈의 깃발부터 베어넘겨야지. 어디 요시란 놈, 어떻게 나오나 보자!'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소화상은 두말 않고 나머지 깃발을 표적으로 검광을 쏘아날렸다. 원래 그 요번(妖幡)은 모두 팔십 폭이 전부였다. 깃발 한 폭 한 폭마다 요시가 땅 속에 갇혀 있 던 그 오랜 세월 고심참담해서 수련해 내고 여기에 다시 화운련(火雲璉) 사슬에 얽매인 채 가까 스로 수백 수천 마리의 성성이와 말곰을 잡아서 생혈을 뽑고 그것을 기폭에 불어넣어 완성한 것 이다. 이렇듯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법보를 어떻게 내버리고 간단 말인가? 요시는 한 개라도 더 많이 거두어 챙기다가 상황이 정 위급해지면 그때 뺑소니칠 작정을 했다. 더구나 아미의 하룻강아지들은 무턱대고 자기 뒤만 쫓을 뿐, 그 소중한 깃발에 대해선 전혀 눈치 도 못 채는 걸 보자 더욱 자신만만해졌다. 그가 만든 흑살비검은 이단파의 법보 중에서도 가장 위력이 뛰어난 것이라, 조심해서 자영검과 청삭검만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나머지 적의 비검 따위는 상대도 안 된다. 그래서 요시는 줄곧 자 영, 청삭 쌍검을 피해가며 여유있게 깃발 수집에만 전념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아미측 젊은이들 은 시종 요시를 궁지에 몰아넣지 못했던 것이다. 요시에게 있어 아쉬운 게 있다면 한 가지, 당초 법단을 설치할 때 너무 정성을 들여 깃발들을 배치하느라 방위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려한 데 있다. 비록 적들의 검광 속을 자유자재로 헤엄 쳐 다닐 수 있다곤 하더라도 단 시간에 일일이 방위를 쫓아 순차적으로 거두어들이자니 그 또한 마음먹은 것처럼 쉽지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사세는 글렀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깃발은 회수해 가야 훗날 재기를 도모할 수가 있기 때문에 요시는 여기저기서 무시무시한 칼바람을 일으키며 덮쳐드는 자영, 청삭검의 공세를 무릅쓰고 이제 또 하나의 깃발이 꽂힌 지점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나머지 검광은 그 안중에도 두 지 않고서 말이다. 영경과 경운은 애가 탔다. 식칼 들고 미꾸라지 잡듯 시종 헛수고다. 이들은 다급한 마음에 쌍검 을 합벽해야만 요시를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저 눈앞을 종횡무진 누 비고 다니는 적을 저 나름대로 잡아보겠다고 헛칼질만 서두르는 것이다. "아, 저것 봐, 언니!" 영경은 마침내 소화상이 적의 깃발을 베어 넘어뜨리는 걸 목격했다. 뒤미처 주경운도 그 광경을 보고서 대뜸 상황을 짐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요시의 급소가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이어서 뇌리를 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쌍검합벽! "영경, 빨리 남쪽 방위를 잡아!" 두 처녀는 이심전심, 순간적으로 마음이 통했다. 청삭검이 동쪽을, 자영검이 남쪽을 차지하기가 무섭게 약속이나 한 듯 양쪽 방위로부터 일제히 눈부신 검광을 쏘아보냈다. 목표는 이제 몇 폭 안 남은 요시의 깃발이었다. 요시는 결국 겁난을 면치 못할 운수였다. 자신의 흑살비검 신통력만 잔뜩 믿고 여지껏 뺑소니를 치지 않고 깃발 챙기기에만 급급했던 것이 그에게 있어 치명적인 실수였다. 끝까지 깃발 회수가 가능하리라는 판단 착오 때문에 그는 어처구니없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영경이 쓰는 자영검은 그 칼빛이 금선의 벽력검과 똑같이 자줏빛이다. 단지 그 광채와 위력에 있어 조금 차이가 날 뿐이다. 그녀는 요시란 놈이 시종 자영검만 피해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기억 해냈다. 그래서 꾀를 냈다. 영경은 자영검광을 금선의 벽력검 뒤에 바짝 따라붙여 가지고 요시를 추격했다. 이 무렵, 소화상은 연달아서 적의 깃발 두 폭을 찍어 넘어뜨렸다. 그걸 목격하자 요시는 대경실 색을 했다. 구·구는 팔십일, 그 숫자가 온전히 갖추어져야 요번(妖幡)은 완벽하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팔·구는 칠십이, 그 수까지 모자라면 훗날 복수는 꿈도 못 꾸게 된다. 요시란 놈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서 하나라도 더 건져야 한다. 적어도 칠십이 폭은 챙겨 달아나 자! 그는 소화상과 경쟁이라도 하듯 나머지 깃발이 꽂힌 곳으로 날아갔다. 등 뒤에서 '쌩!' 하는 칼 바람이 들렸다. 흘낏 돌아다보니 자줏빛 검광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런데 다음 순간, 아 무래도 칼빛이 자영검보다 약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칼바람 소리도 훨씬 멀어졌다. '흠흠, 자영검 말고 또 한 녀석의 검이 자줏빛을 지녔겠다?' 그래도 맞닥뜨리면 귀찮다. 시간이 없다. 요시는 추격자의 검광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약간 틀어 여유만만하게 상승했다. 그는 끝내 벽력검 뒤를 바짝 따라붙어 온 자줏빛 무지개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영경은 적이 용틀임하듯 기세좋게 상승하는 찰나 그것을 노리고 후려때리는 자세로 손을 휘둘렀 다. 벽력검광 뒤에서 자줏빛 무지개가 '쌩!' 하고 앞질러서 번개같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또 하나의 깃발 앞에 당도한 요시는 뒤편 상황 은 생각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구결을 외우며 깃발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이때 벼락치듯 주경운의 청삭검이 정면으로 들이닥쳤다. 그걸 본 요시는 순간적으로 발걸음이 흐트러지고 몸을 가눌 틈조차 잃어버렸다. 저 푸른 서슬은 도무지 피해낼 재간이 없다. 요행수를 바라고 흑살비검을 맞쏘아보냈다. 일단 공세를 저지해 보고 안 되면 적이 주춤하는 사이에 줄행 랑칠 심산이다. 하지만 요시에게 있어 불운이 겹쳤다. 정면의 청삭검뿐이 아니라 등 뒤편에서 영경의 자영검까 지 동시에 들이닥친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노리고 전후 양면으로 덮쳐든 신검 두 자루가 무심결에 마주쳤다. 쩡 우르르! 뇌성벽력과 함께 청색 광채와 자줏빛 무지개가 어우러지는 순간,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의 덩 어리를 사면팔방으로 토해내더니 환상처럼 전혀 색다른 광채로 변해버렸다. 마침내 쌍검은 무의 식 중에 최초의 합벽을 이룬 것이다. 환상의 광채가 물 속처럼 투명한 빛줄기를 그리며 '휙!' 하고 요시의 흑색 기류 덩어리를 옭아매 듯 휘감아왔다. "우와앗... 끼약!" 처참한 외마디 소리가 연거푸 두 번 귀청을 때렸다. 검정빛 기류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황색 별떨기 하나 불쑥 솟구치더니 전광석화와 같이 어둠의 창공 속을 꿰뚫고 사라졌다. 그것은 요시의 최후였다. 옥령암 일대 상공에는 아직도 요기어린 안개가 흩어지지 않고 있다. 휑하니 뚫린 지하 함갱 속 에서도 뜨거운 불기둥이 활활 치솟는다. "이크, 저것 봐라!" 눈치빠른 금선이 소리쳤다. 일렁거리는 검정빛 기류의 장막에 가리워져 어렴풋이 보이기는 하나 시커먼 그림자 둘이 바야흐로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원성이로구나!' 금선은 황급히 미진번을 펼쳤다. 채운 덩어리로 전신을 감싼 그는 두말없이 함갱 속으로 뛰어들 었다. 그것도 순간, 일행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금선의 모습은 다시 지상으로 솟구쳐 나왔다. 한 손에 하나씩, 우람한 전리품이 두 개나 들려 있다. "어떻게 된 거야?" 소화상이 물으려는데, 이번에는 엄인영이 소리친다. "여기 지진이 나고 있어요! 어서 빠져나갑시다! 얘기는 나중에....." 과연 땅 밑이 흔들린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진동하고 있다. 일행은 허겁지겁 서둘러 검광을 일으켜 타고 참새떼처럼 분분히 날아올랐다. 그들이 다시 내려선 곳은 옥령암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산봉우리 정상이었다. 그제서야 일행 은 아직도 금선의 손에 들려 있는 노획물을 보았다. "아, 요시의 시체다!" "그래, 그 악마의 몸뚱아리야." "원성이도 구출됐구나! 헌데 무슨 광채가 저렇게 번쩍거리지." "온옥이다. 아하, 온옥도 찾았구나!" 요시는 정수리의 천령개(天靈蓋)가 박살났다. 뻥 뚫린 두개골에서 하얀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나 오고 있었다. 원성이의 입가는 온통 피투성이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두 손아귀를 겹쳐 온옥을 단단히 움켜 잡고서 바윗돌처럼 굳어져 움직일 줄 모른다. 벌써 죽은 것이다. "으와아, 원성아!....." 영경은 복받쳐오르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원성이의 시체를 부여잡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곁에서 쌍왜가 지켜보고 있더니 너무나 보기에 측은했든지 젊은 주인을 위로했다. "주인님, 상심 마십쇼. 아주 가망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 원성도우는 아까 저희들이 주인님들께 한 말을 듣고서 자기 나름대로 목숨을 내던져 온옥을 탈취한 게 분명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온옥은 흑살사로 짠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서 그 광채를 감추고 있는지라 생혈을 뿌리지 않으면 그 주머니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원성도우는 요시가 자기를 옆구리에 끼고 날아다니면서 깃발을 챙기느라 방비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자기 혀 끝을 깨물고 주머니에다 피를 뿜었습죠. 그래서 요법이 깨지자 대뜸 온옥을 수중에 나꿔챘습니다. 때마침 요시란 놈은 주인님과 주선고님의 신검 아래 천겁을 당하던 순간이라, 온옥을 빼앗긴 사실을 깨달았으나 자기 원신(元身)부터 빠져 달아 나는 게 더 다급했으므로 미처 원성도우를 죽일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망중에 한 모금 요기 를 뿜어 질식시켰습지요." "예, 미타의 말이 맞습니다. 이제 원성도우를 선부(仙府)로 데리고 가시면 틀림없이 기사회생시 킬 방도가 있을 겁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측이 한걸음 빨랐고, 또 요시란 놈도 원성도우를 산 채 로 두었다가 요번 제련에 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놈이 정말 독심을 품었더라면 아무리 다급했기로서니 손가락 하나 튕길 틈이 없었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원성도 우는 몸이 가루가 되었을 겁니다. 제아무리 신령한 기사영단(起死靈丹)이 있더라도 살려내기 어려 웠겠지요." "시끄러워!" 악을 버럭 지르기는 했지만 원성이의 시체를 만져보니 과연 쌍왜가 말한 대로 산 것처럼 따뜻하 다. 내색은 않았으나 영경은 속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가져온 영단을 써보면 어떨까? 혹 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금선이 제안을 했다. 일행들도 그럴싸싶어 저마다 주머니를 뒤진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단약을 먹여봐도 원성이는 깨어날 줄 모른다. 역시 효력이 없는 것이다. 기대가 어긋나자 일행들은 모두 의기소침해서 시무룩해졌다. 모처럼 온옥을 손에 넣기는 했으나 손실 또한 적지 않은 것이다. 원성이를 희생시켰고 게다가 이 짐승이 쓰던 쌍검마저 잃어버렸다. 그 칼은 응벽애 선부에서 기이한 인연으로 나타난 비보였다. 북새통에 소재조차 알아보지 못했으니 어디 가서 되찾는단 말인가? 영경과 경운이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는지 발딱 일어섰다. "에잇, 원수놈아!" 두 처녀는 약속이나 한 듯, 비검을 쏘았다. 고목의 가지처럼 비쩍 마른 요시의 주검이 청자색 검 광에 겹겹이 덮혔다. 우지직, 우지직! 뼈다귀가 꺾이고 바스러지는 소리에 일행들은 눈살을 찌푸렸고 요시의 몸뚱이는 삽시간에 뼈와 살 한 점 남지 않고 가루가 되어버렸다. "자, 여기 일은 다 끝났으니 이제 떠나야지? 원성이는 어떻게 옮겨갈까?" 금선이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애써 명랑하게 일행을 돌아본다. "강우 등에다 태워가죠, 뭐." 이때였다. 갑자기 '우르르, 쿵!' 하고 산악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울렸다. 뒤미처 일행들 이 딛고 선 봉우리 정상까지 와르르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지진이다!" "아닐세, 저쪽을 보게." 소화상이 손가락질하는 곳은 요시의 소굴이 있던 옥령암 쪽이었다. 과연 옥령암 일대는 천길 먼 지구름 속에 돌과 모래가 엄청나게 치솟고 있었다. 끝내 영산(靈山)의 선경(仙境) 하나가 황폐한 지옥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기암괴석이 즐비하던 그 자리에는 끝도 모를 깊은 함갱이 파여 아가 리를 벌리고 있으리라. "아, 저것 봐!" 역시 금선은 눈이 빨랐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모래먼지 속에서 두 가닥 빛나는 광채가 부러진 나뭇가지 속에 뒤섞여서 솟 구쳤다가는 이제 막 떨어져 내리고 있다. "내 갔다 오지!" 그들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금선은 미진번을 펼쳤다. 한 덩어리 채운이 풀썩 일더니 곧바로 모래먼지 구름 속을 향해 날아갔다. 일행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호기심과 불안감을 억누르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 다. 이윽고 이마에 손을 얹은 채 그쪽을 주시하던 일행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저기 온다!" 채운 속에 금선의 모습이 나타났다. 무사히 돌아오고 있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땅에 내려선 그는 한 아름 품고 있던 전리품을 풀어놓았다. 그 가운데 원성 이의 보검 두 자루가 있지 않은가! "금선사형, 찾았군요!" 영경이 반색을 했다. 쌍검은 칼집을 몽땅 잃어버리고 시퍼런 검신만 그대로 드러낸 상태다. "어이쿠, 이게 웬일이냐?" 이번에는 쌍왜가 반가움에 겨워 소리를 지른다. 원성이의 보검 말고도 금선이 건져온 것은 불진 (拂塵) 한 자루, 쇠방울 두 개, 오금(烏金)으로 만든 단검 한 자루였다. 두 사람은 얼마나 좋은지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여보게 미타, 우린 소굴의 지맥이 뒤집혀 무너지는 순간 아예 이것들을 되찾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지 않았나? 그저 사태가 가라앉은 뒤 한 두엇 건져내면 천만다행이라 싶었거든. 한데 뜻밖에도 제대선께서 묘법을 부리셔서 우리 대신에 꺼내오시다니!" "아무렴, 이렇게 고마우실 데가 또 어디 있겠노? 이것 말고 남은 몇 가지일랑, 여러 대선님들을 모시고 영산 선부에 돌아가 인사나 마친 다음 다시 와서 찾기로 하세!" 미타와 유유안은 주거니 받거니 수작을 걸면서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지 흘끔흘끔 주경운의 눈치 를 살폈다. 혹시라도 귀중한 자기네 법보를 그냥 몰수하고 또다시 여기로 보내주지 않으면 어쩌 나 싶어 걱정스러운 기색이다. 그들의 말투나 기색을 보고 주경운은 빙긋 웃었다. 두 사람이 목숨처럼 아끼는 법보를 되찾으려 고 자기네 허락을 구하는 뜻을 알 만하다. 그러나 이들이 아미산에 돌아가서 딴 생각이라도 품지 않을까?... 그런 인물한테 법보를 돌려준다면 범에게 날개를 달아주기나 매일반이다. 어떻게 대답 해야 할까?..... 그렇다. 이들 두 사람은 진작에 개심을 했고 선을 지향한 인물이다. 짧기는 하지만 그동안 얼마 나 성심성의로 영경을 섬겼는가? 이들의 정성에 실망을 안겨줘서야 어디 되겠는가 말이다. "그대 두 사람이 기왕지사 허물을 뉘우치고 우리 아미정교에 입문하기로 결심한 이상 우리도 그 대들을 믿어주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를 따라서 함께 떠나든, 나중에 뒤쫓아오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또 아미산에 돌아가서 우리 역시 그대들을 위해 힘껏 도와줄 것을 약속하죠. 만약 인 연이 있으면 이르거나 늦거나 모두 정과를 이루리라 생각해요. 아무튼 그대 두 사람의 출발은 어 느 때나 마찬가지예요. 정 원한다면 여기 남아서 잃어버린 법보를 마저 찾고 또 아울러서 원성이 의 칼집 두 개도 찾아주었으면 좋겠군요. 만에 하나,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곤란하니까." 금선은 주경운의 의사를 따라 불진과 쇠방울, 단검을 선선히 쌍왜에게 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제대선!" 쌍왜는 금선에게 굽신 치사를 하고서 이영경을 향해 거듭 자기들의 충정을 밝히며 허락해 주기 를 간청했다. "저희들의 보잘것 없는 마음을 주선고님께서 헤아려 주셨습니다. 주인님, 은혜를 베푸시와 법보 를 찾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만약 원성도우를 영산에 데려가서도 소생시키기 어렵다면, 저희 두 사람이 북해 깊숙이 감춰져 있는 반혼향(返魂香)을 훔쳐다가 기어이 살려내고야 말겠습니다. 그래 야만 주인님의 너르신 아량과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영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제자들의 충심을 그녀라고 모를 리가 없다. 그녀는 문득 독수리의 행방에 생각이 미쳤다. 진작부터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강우가 어딜 갔을까? 사형들 못 보셨어요?" "글쎄, 안 보이든걸?... 정말 어디로 간 거야?" 그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멀리서 독수리의 '꾸르르, 꾸룩!' 하고 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온다!" 서남방 하늘가에 구름층을 꿰뚫고 독수리의 억센 날개짓이 나타났다. 상공을 한 바퀴 빙그르 선 회하더니, 독수리는 나래를 훌쩍 접고서 곤두박질치듯 내려왔다. 일행의 머리 위까지 날아 내려온 독수리가 강철 같은 발톱을 펼쳤다. 그리고 이제껏 움켜잡고 있던 서찰 한 봉을 팽개치듯 던지더니 잠시도 머물지 않고 재차 나래를 펼쳐 쏜살같이 날아갔다. 날짐승은 지진으로 함몰된 요시의 동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경은 서찰을 뜯었다. 역시 <청낭선자> 화요숭이 보내온 것이다. <여러분의 공격은 한발 늦었소. 그 덕분에 요시는 말겁(末劫)을 모면하고 악운이 끝나지 않게 되었소. 하지만 그놈은 구사일생으로 겨우 병해(兵解)를 이루고 육신의 껍질 속에서 벗어나 허둥 지둥 달아나는 바람에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사보(邪寶)를 모조리 잃어버렸소. 그런만큼 훗날 아미측에 원한을 갚겠다고 벼르던 투지도 적지 않게 사그러들었소. 소화상이 얻은 화령주는 온옥과 마찬가지로 순양지보(純陽之寶)에 속하는 것이오. 이후엘랑 사부 님의 분부가 없는 한, 절대로 경솔하게 꺼내 쓰지 마시오. 원성이는 요시의 사기(邪氣)에 중독당했소. 죽은 게 아니라 심혼(心魂)을 잃은 상태요. 응벽애에 돌아가거든 구천원양척(九天元陽尺)으로 독기를 몰아내고 다시 영단을 써서 치료하면 즉시 살아 날 것이오. 원성이가 쓰던 칼집은 미타, 유유안이 잃어버린 법보와 함께 요시의 동굴 함갱 속으로 떨어졌소. 그것들은 내 벌써 신조(神鳥)에게 일러두었으니까 알아서 찾아올 것이오. 또 한 가지 일러둘 말이 있소. 요시가 남긴 깃발, 취수요번(聚獸妖幡) 수십 폭도 현재 땅 속에 묻혀 있는데, 그놈이 비록 원신으로 빠져 도망치기는 했으나 자기 심혈을 다 기울여 만든 것을 그리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으리라 추측되오. 장차 원신을 응축시켜 형체를 이룩하거나 아니면 남 의 육신을 빌어서 형체를 갖추고 난 후에는 기어코 그것들을 되찾으려 발악을 할 것이오. 취수요번은 이미 요시놈과 심령이 상통하는 깃발이라, 어디다 감춰놓든 간에 금방 종적을 찾을 거요. 그러므로 그 깃발만큼은 내게 맡기시오. 기폭에는 무고하게 죽은 성성이와 말곰의 생혼이 적잖이 들어 있다오. 비록 짐승이긴 하나 그것들의 넋이 요시의 금제에서 영영 헤어나오지 못한 다면 그 또한 가련하지 않겠소? 나는 그 깃발을 거두어다가 짐승들의 억울한 넋을 풀고 전륜화생(轉輪化生)시켜 위로해 줄 생각 이오. 도술에 깊고 뛰어난 동배(同輩) 한 분을 찾아서 함께 법단을 차리고 깃발에 걸린 요법을 깨 뜨리면 성성이와 곰의 생혼도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요. 이제 신조가 깃발을 모조리 파내어 올 것이오. 그것을 한 데 모아놓으시오. 그러면 내가 거두어 가리다. 아무도 그것을 가져서는 안 되오. 백해무익한 물건이니까. 그리고 장이에게 당부하노니, 너는 소화상과 금선을 따라서 백만산(百蠻山)으로 가거라. 네 두 선배와 함께 그곳에서 외공(外功)을 세울 수만 있다면 좋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나머지 분들은 서둘러 아미산으로 돌아가시오. 자영, 청삭 쌍검이 합벽을 이루어 적을 격퇴할 때 도 머지 않았소. 응벽애의 포위가 풀린 후, 얼마 안 있으면 <묘일진인> 내외분이 그리로 당도하 실 것이오. 그 때가 오면 아미오부(峨嵋五府)도 열리게 되고, 뭇 제자들은 희대의 법보를 나누어 받아, 마침내는 세상 인간을 제도(濟度)할 시기까지 진전(眞傳)을 수련하게 될 것이오.> 아미의 젊은이들은 화요숭의 서찰을 읽고 나자 모두 하늘을 향해 절했다. 그중에서도 벙어리 청 년 장이의 심사는 더욱 감격에 벅찼다. 화요숭으로부터 받은 은공이 깊고도 무거운데 이제 그녀 앞에 무릎꿇고 큰절이나마 올렸으면 오죽 좋으랴? 뵙지도 못하고 떠나는 심사가 자못 서운하다. 다시 뵈올 날이 또 언제 오려는가? 그분의 서찰에는 기약도 없다. '아아, 그분은 날 만나주시지 않으려나 보다!' 가슴이 쓰라리고 '찡!' 하니 코끝이 시렸다. 곁에서 금선이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봐! 소사형! 우리 이번 백만산 공격길에 또 멋진 협력자를 얻었구만그래! 하하하! 아주 잘됐 어." 장이는 황망히 손을 내저으며 겸손해 마지 않았다. 이윽고 독수리가 돌아왔다. 뒤미처 따라갔던 미타와 유유안 두 도사도 오기는 왔는데 웬일인지 얄궂은 기색에다 잔뜩 풀이 죽었다. 당초 화요숭의 서찰을 이영경 앞에 던지고 옥령암 요시의 동굴로 날아갔던 독수리는 함갱 속에 뛰어들어 화요숭이 귀띔해 준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날짐승은 대뜸 그 억센 강철 발톱으로 바 윗돌과 모래더미를 마구 파헤쳐 내더니, 삽시간에 삼십여 장 깊이나 되는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 다. 이어서 뒤쫓아간 쌍왜가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쌍왜는 철지현공(徹地玄功)을 써가며 독수리의 탐색작업을 도왔다. 얼마 안 있어 독수리와 쌍왜는 취수요번 칠십여 폭과 칼집 두 벌, 그리고 미 타와 유유안이 잃어버렸던 보물까지도 전부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쌍왜 중에서도 유유안은 유독 욕심이 많았다. 그는 진작부터 요시의 깃발 가운데 주기(主旗)가 아홉 벌, 또 별도로 요시란 놈이 술법을 부릴 때 손에 잡고 쓰던 작은 깃발 두 벌을 눈여겨보아 두었었다. 일곱 치 길이밖에 안 되는 그 깃발은 가장 위력이 대단하리라 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수색작업 도중에 문제의 깃발이 눈에 뜨이자 그만 욕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슬그 머니 집어다가 자기 법보낭 속에 감춰 넣었다. 그러나 유유안의 도둑질은 단박 신통한 날짐승의 눈길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설령 보지는 못하 였다손 치더라도 이리로 오기 직전 청낭선자로부터 깃발의 숫자가 몇 개며, 또 어떤 형태, 얼마만 한 크기라는 것까지 들어 알고 왔던 참이라, 숫자가 부족하면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 독수리였다. 유유안은 뒤통수가 켕겨 저도 모르게 흘낏 돌아다보았다. 불덩어리처럼 이글거리는 날짐승의 눈 길과 마주쳤다. 가슴이 뜨끔했지만 제깐 놈이 설마 눈치챘으랴 싶어 고개를 외로 꼬고 그 날카로 운 화안금정(火眼金睛)을 피했다. 요시의 깃발은 쓰지 않을 때 보면 그저 평범한 헝겁이나 다름없다. 황색 마포(麻布) 바탕에 벌거 벗은 나체의 남녀 마귀와 기괴망칙스런 부적을 그려넣은 데 불과하다. 광채를 발하기는커녕 냄새 조차 없다. 다시 말해서 희귀한 법보다운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깃발이다. 그것을 제일 먼저 발견 하고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잽싸게 쓱싹했는데 어느 놈이라 눈치를 챘는가 말이다. 하지만 독수리는 분명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얼 냄새 맡았을까?... 곰곰이 생각을 굴리던 유 유안, 마침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거야! 이런... 기폭에 아직껏 요기가 감돌고 있었구나!' 유유안의 모가지가 자라목처럼 쑥 움츠러든다. 쿠르르, 푸륵! 일이 끝나고 옥령암을 출발하기가 무섭게 독수리는 그의 머리 위를 끊임없이 맴돌면서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주인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산봉우리가 점점 가까와질수록 밉살맞은 날짐승은 더 욱 왁살스럽게 기승을 부렸다. 유유안은 슬그머니 불안해졌다. 독수리의 눈매가 놀랍기도 하려니와 공연한 욕심 때문에 사서 액운을 자초하는 게 아닌가 하는 후회마저 있었다. 자아, 어떻게 하면 좋을꼬? 이미 훔쳐 넣은 걸 따로 뭇사람 앞에 꺼내놓기도 이치가 안 맞는다. 그렇다고 꿀떡 삼키자니 독수리란 놈이 눈감아 줄 리가 없을 게다. 그는 생각다못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소근소근 독수리에게 사정해 보았다. "독수리형님, 제발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쇼. 다시는 안 그러리다!" 쿠르르, 쿠르르! 날짐승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정수리 위로 더욱 바짝 다가와선 사납게 울부짖는다. 이윽고 정상에 내려선 쌍왜는 일행 앞에 깃발과 칼집을 바쳤다. 금선의 지시대로 칠십여 폭의 깃발을 가지런히 포개 쌓아놓으면서도 유유안은 끓는 남비 속에나 빠진 개미처럼 안절부절, 머리 위 상공을 선회하는 독수리 눈치만 살피기에 급급하다. 이윽고 청낭선자의 분부대로 요시가 목숨처럼 아끼던 깃발 칠십여 폭이 모두 한 군데 쌓여졌다. 젊은이들은 망창산에서의 일을 성공리에 끝마쳤는지라, 흡족한 마음으로 떠날 채비를 갖추기 시 작했다. 그 가운데 오직 불안한 것은 유유안뿐이다. 이때다, 갑작스레 '씽!' 하는 파공성이 울리더니 동편 하늘에서 황색 빛줄기가 날아왔다. 이윽고 땅에 내려선 빛 속에 황관을 쓴 도사가 나타났다. 육중한 몸집이 사뭇 위엄을 떨치고 사나운 생 김새를 지닌 데다 더부룩한 수염을 흩날리며 눈앞에 늘어선 젊은이들을 꼬나보았다. "흠흠!" 비웃음이 섞인 코웃음을 한번 치고 나서 정체불명의 도사는 여유만만하게 짚신 신은 두 발로 휘 적휘적 깃발 무더기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느긋한 손길로 주섬주섬 요시의 법보를 말아가 지고 챙겨 넣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제것인 양 한 폭 한 폭씩 깃발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금선일행도 처음에는 그저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청낭선자가 서찰에 말 했듯이 누군가를 보내어 깃발을 회수해 가려는 것이려니 싶어 아무도 제지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 다. 그래도 신원이나 알아두자고 금선이 그 도사 앞에 다가섰다. "실례올시다만, 뉘신지?" 첫마디도 꺼내기 전에 장이가 도사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다급한 손짓에 금선은 이 정체불명의 도사가 적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 즉시 싸울 태세를 취하려는 순간, 또 한 줄기의 광채가 번쩍이더니 번개처럼 떨어져 내려왔 다. 광채가 거두어지자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나이도 지긋한 여도사였다. "화선고님!" 희열에 찬 장이의 기색을 보고 눈치빠른 주경운이 먼저 외쳤다. 과연 그 여도사는 <청낭선자> 화요숭이었다. 젊은이들이 미처 예를 올리기도 전에 그녀는 벌써 황관도사 앞으로 달려가 눈 깜빡할 사이도 없 이 깃발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리고 나서 한 마디 건넸다. "오립(吳立)도우, 이제 비승하실 때도 목전에 다다랐을 텐데 이런 물건을 또 어디 쓰시려오? 빈 도에게 양보해서 이 속에 빠져 있는 원통한 넋들이나 풀어줍시다!" 장이가 경고했던 것처럼 황관을 쓴 텁석부리 도사는 역시 이단파의 고수였다. 그는 우연히 망창 산 부근을 지나치던 길에 묘한 놈과 마주쳐 이곳에 희귀한 법보가 많이 있단 말을 듣고 어슬렁어 슬렁 찾아온 것이다. 와서 보니 과연 조무라기 어린 녀석들 곁에 숱한 요번이 무더기로 쌓여 있 는지라, 두말도 않고 챙겨 달아날 배짱이었다. 한데 세상만사 어디 그렇게 손쉬운 일이 있으랴? 그는 <청낭선자>가 진작부터 부근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일껏 생긴 소득을 되뺏기고 보니 남은 것은 '도둑도사' 누명밖에 없다. 부끄러운 건 고사하고 되 레 분통이 슬그머니 치밀어오른다. 속담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든가 입을 벌리고 보니 악다구니 욕설만 터져나왔다. "이 늙은 거지 할망구! 청성(靑城) 사건 이후로 안 보이길래 진작 뒈진 줄 알았더니만 아직도 살 아서 요괴놀음을 하고 있구나.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도우들이 원수를 갚겠다고 몇 년을 찾아서 돌 아다녔는지 알기나 하느냐? 못된 계집년, 이형환악(移形換岳) 술법으로 옥령암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고 영산 선경을 파괴한 짓도 분명 거지 할망구와 저 무지몽매한 애물덩어리들이 저질렀으렷다? 그래도 네년이 낯짝을 드러내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용서해 줄 수 있었다만, 어딜 감히 간도 크게 나타났느냐 이 말이다! 기왕지사 내 눈에 뜨였으니 어쩔 수 없구나. 어서 그 깃발하고 옥령암의 온옥을 갖다 바쳐라. 만약 그렇지 않았다가는 내 기어코 청성산에서 진 빚을 갚고야 말겠다. 이 늙은 거지 할망구, 오늘 내 손아귀를 고분고분 벗어날 듯싶으냐?" 개숫물을 뒤집어 놓듯, 온갖 욕설에 악담까지 듣고서도 <청낭선자>는 성을 내기는커녕 도리어 미소띤 얼굴로 차분하게 응수했다. "우리가 헤어진 지도 여러 해 지났는데 오도우는 여전히 그 불 같은 성미를 못 버리는구려. 당 년에 오도우가 금편애(金鞭崖)를 왜수(矮搜) 주(朱)도우한테 빼앗긴 것이 누구 탓이었소? 바로 오 도우 자신 아니오? 당신네 그 못된 제자놈의 꼬임에 넘어가 부질없는 싸움을 걸지만 않았더라면 왜 금편애를 빼앗기고 쫓겨났겠소? 사실 말이지, 그때 귀문파 제자들의 악행은 하늘도 용납치 못 할 지경이었으나 스승인 오도우 자신은 그래도 적으나마 염치와 부끄러움을 깨닫는가 싶길래, 빈 도는 오도우를 대신해서 두 번 세 번 용서를 빌어드렸소. 그래서 겨우 오도우가 그분의 비검 아 래 꼼짝없이 죽을 목숨을 건진 거요. 그 사실을 빤히 알고 계시면서도 어쩌자고 주매(朱梅) 도우 를 찾아가 복수전을 할 생각은 않고 도리어 빈도만 책망하시오? 또 한 가지 이곳 옥령암의 지층 을 뒤엎어서 영산 선경을 파괴했다고 비난하셨는데, 그것은 나나 여기 젊은이들이 아니라 바로 요시 곡진이 저지른 것이외다. 빈도는 단지 여기 계신 아미제자들을 도와서 요시를 처치하고 온 옥을 찾아가도록 몇 마디 귀띔만 해주었을 따름이오. 요시가 버리고 간 이 기폭에는 수백 수천 마리나 되는 야수들의 생혼이 붙잡혀 있소. 빈도는 그 짐승들의 원통한 넋을 풀어주려고 아미 제 자분들게 넘겨 달라고 한 거요. 그걸 중간에 오도우가 가로채 가려고 하니 나도 부득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소. 듣자 하니 오도우께서는 머지 않아 공업(功業)을 원만히 이루실 때가 되셨 다든데 그렇다면 의당 어느 명산이라도 찾아 들어가 조용히 수양이나 하시면서 선연을 기다리실 일이지 어쩌자고 산에서 내려와 남의 일에 참견을 하고 부질없는 욕을 당하시려는 거요? 설마하 니 <극락진인>의 예언을 벌써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텁석부리 도사는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젊은 남녀들을 돌아다보았다. 이 하룻강아지들이 아미문 하 제자라니?... 초면의 그로서는 이름도 모르겠지만, 이영경과 주경운, 금선, 소화상, 장이, 엄인영 들은 하나같이 선풍도골에 비범한 기상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자기 신변을 에워싼 채 잔뜩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가슴이 뜨끔했다. 슬그머니 <청낭선자>가 얄미워졌다. 진작부터 미리 함정을 파놓 고 자기를 유인해 들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부쩍 솟았다. "흐흠, 이제 보니 거지 할망구가 아미측 조무라기들의 숫자만 믿고서 큰소리를 탕탕 쳤구만그래! 하지만 똑똑히 알아두라구. 나 오립은 입 밖에 말을 낸 이상 반드시 그대로 해치우는 사람이야! 네년이 여기 나타난 걸 보면 그 온옥을 훔친 것도 필경은 네년의 짓임에 틀림없어. 저 따위 조무 라기들이 무슨 재간으로 요시를 처치하고 보물을 빼앗았겠나 말이야?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수작 이지!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그 깃발이랑 온옥이랑 갖다 바쳐라. 그래야만 내 손에서 죽음을 모 면할 게다!" "오도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소?" "시끄럽다, 어서 그것들이나 내놓아라!" "오도우!....." 이때 금선이 곁에 선 소화상의 옷자락을 툭툭 건드리더니 벼락치듯 호통을 질렀다. "이 물정도 모르는 요도사놈, 어디 뉘 앞에서 감히 발광을 떠는 거냐?" 말 끝에 뒤미처 벽력쌍검이 손아귀를 벗어났다. 여지껏 이 정체불명의 도사가 <청낭선자>와 주 고받는 승강이질을 꾹 참고 지켜보다가 자기네더러 말 끝마다 <조무라기 녀석들...>이라고 얕잡 아보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물며 이단의 적임에 분명해진 이상 그냥 두고 넘 어갈 수도 없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 텁석부리 도사가 상대방을 얕잡아본 것도 그만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젊은 남녀들을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첫눈에 비범한 준재라는 점은 인정해 주었다. 게다가 <청낭선자 >로부터 이들이 아미정교의 제자들이라는 말을 듣고 다소 놀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조무 라기>들은 기껏해야 아미측에서 새로 거두어들인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말았다. 아무리 위세당당한 아미파라고 하더라도 갓 입문해서 몇 년쯤 공부했다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재간을 익혔을 리 만무하다. 설혹 조무라기들이 몇 수 재간을 지니고 한꺼번에 덤벼든다손 치더 라도 자기 솜씨로 본다면 하룻강아지 떼가 범한테 덤비는 격이라, 식은 죽 먹기로 어렵지 않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한 사람 <청낭선자> 화요숭에게만 쏠렸다. 그녀만이 자신의 진정한 강적이라 고 알고 있었다. 그는 끝끝내 자신이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꿈 에도 알지 못했다. 불쌍하게도 그는 이 아미의 조무라기들이 <햇병아리>나 <하룻강아지>가 아 니라 실로 경천동지할 만한 재간의 소유자들이었음을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는 금선의 호통소리를 듣고 흘낏 돌아보았다. 관옥처럼 고운 얼굴, 어깨까지 치렁치렁 늘어뜨 린 긴 머리칼, 목에는 황금 테를 걸고서 자기를 노려보는 녀석이 있다. 젊은 것들 중에서도 제일 어린 놈이 당돌하게 비검을 날려 도전해 오는 것이다. "흐흠!" 그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자기도 비검을 날려 맞상대하기엔 너무 속좁은 짓이다. 그저 요법이나 좀 부려 제압해 놓고서 혼뜨검을 내주면 되겠거니 했다. 이럴 즈음, 반대편에서 또 한 줄기 검광이 닥쳐들었다. '이건 또 뭐야?' 눈살을 찌푸리고 그쪽을 바라보니 이번에는 어리디어린 아기중 녀석이다. 귀찮게 구는구나 싶어 술법을 부리려고 입을 딱 벌리던 그는 다음 순간에 그만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크, 저게 뭐냐? 이럴 수가.' 도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린 두 놈이 펼쳐낸 검광은 자홍색 광채를 뿜으며 댓바람에 천 둥 번개치듯 정면으로 덮쳐들고 있지 않는가! "아뿔싸, 벽력쌍검이다!" 옳은 말씀이다. 눈앞에 닥치는 것은 바로 지난날 아미장교 제수명이 쓰던 원앙벽력검이었다. 그 제서야 비로소 이 어린놈들의 내력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텁석부리 도사는 허둥지둥 두 줄 기 황색 검광을 각각 쏘아날려 덮쳐드는 공세를 막아냈다. 그런 총망중에도 어째서 아미정교 우두머리의 비보가 이런 어린 것들 수중에 들렸는지, 또 어떻 게 이곳까지 나타났는지 영문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생각은 온통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 고 등줄기는 흥건하게 식은땀에 젖었다. 이영경 역시 진작부터 손이 근질거리는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청낭선자>가 도사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으면서도 시종 맞싸우지 않고 가만 있는 걸 보아하니 상대는 분명 고수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못 참아 궁둥이를 들썩거릴 때마다 번번이 주경운에게 제지를 당한 것이다. "언니, 나섭시다!" "안 돼, 조금만 기다려 봐." 한바탕 날뛰어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주경운이 신중을 기해서 끝내 말리는 바람에 그녀는 참고 또 참아왔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동문 일행 가운데 선두로 금선과 소화상 이 뛰쳐나가고 뒤따라 장이, 엄인영까지도 비검을 쏘아날리면서 싸움판에 뛰어드는 걸 보았으니 더 이상 어떻게 참는단 말이냐? 드디어 야무진 기합소리와 함께 영경의 손에서도 자영검이 번쩍 무지개를 그리며 떠났다. "이얍!" 이제껏 신중에 신중을 기하던 주경운도 매서운 호통을 치면서 청삭검을 뽑아들었다. 전단(戰端) 은 이미 열렸다. 도사의 실력 또한 녹녹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 서자, 그녀는 인정사정 두지 말아 야겠다고 작정했다. 서슬 푸른 신검의 칼빛이 기세등등하게 날아갔다. 두 가닥 황색 검광으로 금선과 소화상의 공세를 막아내고 나서 텁석부리 도사 오립은 슬쩍 <청 낭선자> 쪽을 곁눈질해 보았다. 강적은 아직 움직일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오냐. 네년이 끼여들지만 않는다면 승산은 나한테 있다!' 오립은 청낭선자가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요 당돌하기 짝이 없는 하룻강아지 두 마리를 처치해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체없이 또다른 술법을 써서 비검에 배합시키려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 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마디 운을 떼기가 무섭게 또다시 측면으로부터 날아드는 두 줄기 검광을 발견했다. 은 빛, 검정빛 광채가 번쩍번쩍, 오묘한 흑백의 조화를 이루면서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잘들 오는구나! 어디 요 애물덩어리놈들, 무더기로 어르신네의 호된 맛 좀 봐라!" 버럭 호통을 치면서 오립은 또다시 손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칠, 구 줄기의 황색 검광이 한꺼번 에 쏘아져 나갔다. 절반 가지고 적의 공세를 차단하는 한편, 나머지 절반은 허점을 뚫고 들어가 놈들이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요절낼 판이다. 그리고 또 한 자루 주검(主劍)은 강적 <청낭선자> 를 상대하기 위해 예비로 남겨 두기로 했다. 이만하면 애송이들이나 청낭선자를 거꾸러 뜨리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제깐 연놈들이 어떻게 이 대 일로 내 막강한 비검을 상대할소냐? 오립은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러나 오립의 여유만만하던 예측은 그만 빗나가고 말았다. 뜻밖에도 이 애송이들의 비검은 하 나같이 그 어리디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노련했다. 사면을 에워싸고 용틀임하듯 마구 날뛰는 넉 줄기 검광은 실로 신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의 비검은 어떤가? 수적으로는 절대 열세였 고 적의 허점을 뚫고 들어가 요절내기는커녕 사방의 철벽 같은 광채에 가로막혀서 단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말았다. 오립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요놈들이 어디서 저런 비검을 얻었을꼬? 정말 기막히게 훌륭한 칼인걸. 그건 그렇다 치 고, 이제는 어찌해야 좋으냐? 내 체면에 아이놈들한테 비장의 법보를 써가며 죽기 살기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천방지축 마구 날뛰는 것들을 마냥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는가? 하물며 <청낭선자> 같은 강적을 눈앞에 두고서 말이다. 이거야말로 사나운 곰이 사냥개들한테 몰린 격이로구나!' 오립은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하기야 자기 실력을 있는 대로 발 휘한다면 이까짓 비검 몇 자루쯤은 단박에 고철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자신이 있다. 한데 <청낭선 자> 앞에서 꼭 그 법보를 노출시켜야만 되는가, 망설여지는 것이다. 오립이 진퇴양난, 속으로 망설이고 있는 순간이다. 갑작스레 야무진 소녀의 기합소리가 연달아 울리더니 맞은편에 섰던 두 처녀가 또 비검을 일제히 쏘아날렸다. "어라? 이건 또 웬년들이냐!" 욕설을 퍼붓고 자시고 할 틈도 없다. 자주색, 청색의 검광이 섬전(閃電)보다도 빠르게 자신의 칼 빛 무더기 속으로 돌입했다. '아차, 이건 보통나기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사이, 그 두 줄기 자청색 광채는 어느 틈엔가 오립의 검광과 맞부딪쳐 샛 된 금속성을 울렸다. '저것... 큰일났구나! 저런!' 적의 검광은 오립의 황색 비검을 단 한 차례 찾아드는가 싶더니 이내 훌쩍 잘라지고서 또다시 손뼉치듯 오므라들었다. 그 속에 꽁꽁 얽혀 있는 것은 오립이 오랜 세월을 고심참담, 피땀 흘려가 며 연성해 낸 비검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석 자루, 넉 자루가 한꺼번에 갇힌 채 독사처럼 얼크러져 필사적으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게 아닌가! 오립은 도무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저 청색, 자주색 검광이 도대체 어떤 신물이길래 자기가 그토록 자부하던 비검을, 그것도 한 자루도 아니고 서너 자루를 한꺼번에 옭아버린단 말이냐! 그 순간에도 자줏빛 광채가 조금 꿈틀거리자 그 속에서 몸부림치던 황색 빛줄기는 이내 움츠러들었 다. '큰일이다. 저걸 거둬야 하는데.'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적의 검광이 단 한 번 바짝 조여지더니 오립의 비검 석 자루는 '쩡!' 하는 쇳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부서져 지상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황색 불똥이 마지막 광채를 튕기면서 사방으로 날았다. 마치 보름날 계수나무 가지에 흩뿌려진 달빛의 은가루처럼 화려하 게..... 이제 나머지는 여섯 자루, 그 중 하나는 적의 은빛 검광에, 또 하나는 검정빛 검광에 휘감겨 있 고, 최초로 쏘아날렸던 두 자루는 그 무시무시한 원앙벽력검에 휘감긴 채, 방금 목격했던 엄청난 결과에 다급한 나머지 단 한 자루도 회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또 두 자루마저 뒤 쫓아온 자청색 검광이 옭아넣고서 바짝바짝 조여들고 있다. 광채가 점점 제 빛을 잃으면서 오그 라드는 품을 보니 방금의 그 참담한 전철(前轍)을 또 밟고 있음이 틀림없다. 오립은 다시 <청낭선자>를 흘낏 쳐다보았다. 늙은 거지 할망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미소 만 머금은 채 시종 움직일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제기랄... 이게 무슨 꼴이냐?'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전신에 후줄근하니 땀이 솟구쳤다. 그는 비로소 적을 어리 다고 얕잡아보다가 호된 꼴을 당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후회와 아쉬움, 분노와 허탈감이 뒤섞여 가슴 속을 마구 휘저어 놓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비검술로 승부내기란 아예 틀린 노릇이다. 승부는커녕 도리어 자기 눈앞 에서 그 소중한 법보들의 광채가 스러져가고 있다. 그 참경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오립은 정말 수십 년 동안 온갖 심혈을 몽땅 기울여 완성한 비검들을 차마 고철덩어리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침내 마음을 독하게 다잡고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심했다. 손바닥이 철썩하고 정수리를 내려치자, 여지껏 근엄하게 얹혀 있던 황관이 털썩 벗겨지면서 치 렁치렁한 장발이 어깨로 드리워졌다.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그는 입 속으로 중얼중얼 요법의 구결을 외었다. 이어서 혀 끝을 깨물어 적의 면상에다 뿜으려는 찰나, 그는 또다시 얼어붙은 듯 행동을 멈추었다. 쨍그렁, 쨍!... 쏴아! 난데없이 온 하늘에 황색 별똥의 소낙비가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상공에서 적의 포위공격을 받 고 버둥버둥 몸부림치던 여섯 자루의 비검 가운데 또 넉자루가 박살난 것이다. 나머지 두 줄기 검광도 명재경각(命在頃刻), 보나마나 끝장날 것은 뻔하다. 한꺼번에 넉 자루 비검을 격파한 적들 은 유성처럼 거칠 것 없이 곧바로 덮쳐들어온다. 오립은 요법을 쓸 생각도 잊은 채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청낭선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미정교 젊은 도우들은 비록 나이 어리나 모두 본문의 심법을 전수받은 분이라오. 게다가 자 영검, 청삭검마저 부리고 있는 것을 못 보셨소? 오도우, 더 이상 고집을 부리고 깨닫지 못하시겠 다면 죽음밖에 없소. 설마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립은 얼음덩어리를 통째로 삼킨 것처럼 가슴 속이 써늘해지고 말았다. 자 영검과 청삭검! 그 옛날 장미진인이 요마를 제압하던 비장의 쌍검! 오래 전부터 그 명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으면서도 실감을 못하던 그였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오립은 눈을 번쩍 뜨고 정면을 쏘아보았다. 자줏빛 무지개가 눈부시도록 찬란한 광채를 뿜었다. 또 한 마리 사나운 청룡이 꿈틀꿈틀 용틀임을 하면서 두 자루 남은 자기의 비검을 여지없이 물어 뜯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참담한 패배가 아니라 죽음의 앙화(殃禍)다. 위기는 절박했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간 목숨과 명성이 한꺼번에 결딴나고 말리라! 청낭선자의 말처럼, 지금 <왜수> 주매가 근거지로 삼고 있는 청성산(靑城山) 금편애(金鞭崖)는 본래 텁석부리 도사 오립의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 전 그는 <왜수> 주매에게 도전하고 검술로 맞겨룬 끝에 참패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금편애마저 빼앗기고 혈혈단신 쫓겨났던 것이다. 그후부터 오립은 패전의 원한을 가슴 속 깊이 새겨두고 자나깨나 이를 갈며 복수를 꿈꾸어왔다. 그의 무서운 집념은 마침내 스물일곱 자루 황정검(黃精劍)을 단련해 내는 데 성공했다. 재도전의 준비가 갖추어지자, 오립은 첫 번째로 마관도인(麻冠道人) 사태허(司太虛)를 찾아갔다. 사태허는 당년에 청성산 결투를 함께 겪고 패배한 동료였던 것이다. 그는 노산(勞山)에 당도하자마자 어렵지 않게 사태허를 만났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금편애로 원 수 주매를 찾아가 설욕을 하고 잃었던 근거지를 탈환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사태허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본심을 추궁했더니 지난날에 혈기방장했던 투지는 간 데 없고 은원 (恩怨)을 초월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제서야 오립은 비로소 사태허가 청성산 일전에 패한 이래 종적을 감춘 까닭을 짐작했다. 사태 허는 강호상의 피비린내나는 삶을 벗어나서 깊이 참선한 끝에 이미 정과(正果)를 깨우친 몸이었 다. 그는 오립의 권유를 냉정하게 뿌리치고 협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오립에게 설득까 지 할 정도로 완강했다. "여보게 오도우, 자네나 나나 이제 초겁(超劫)해야 할 날이 목전에 다다랐네. 지난날의 패전은 우리가 자초해서 당한 일 아닌가? 자기 잘못을 가지고 남을 탓해서는 안 되네. 그때 목숨을 건진 것만도 천만다행인데 또 어쩌자고 명분도 없는 싸움을 저지르려 하나? 그래 봐야 마장(魔障)에 얽혀 비승(飛昇)할 기회만 그르치는 게 아닌가? 자네도 깨달아야 하네." 사태허가 이를 만큼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립은 끝끝내 가슴 속 깊이 맺힌 원한을 그냥 풀 수가 없었다. 친구의 뜻이 자기와 같지 못하다면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는지라, 오립 은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렸다. 산을 내려와 혈혈단신 홀몸으로 적진을 찾아가는 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울적하고 무거 웠다. 지난날 청성산 결투 당시 목숨바쳐 함께 싸워주던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한 이 마당에 자기 에게는 더 이상 협력자가 없는 셈이다. 천지간에 믿을 것은 자신의 실력뿐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어떤가? 청성산 결투장소에 주매의 응원군으로 나타난 인물은 <추운수> 백곡 일과 <청낭선자> 화요숭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싸움이 있은 후 <왜수> 주매는 아미파 수뇌인 물들과 더욱 밀접한 교분을 맺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으므로 복수의 칼날을 품고 원수를 찾아가 는 오립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이래 가지고야 아무리 지독스런 황정비검을 스물일곱 자루씩이나 가졌더라도 상대편에 비해 중 과부적인 것은 뻔하다. 이리저리 생각다못해 그는 마침내 중도에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면식이 있는 이단의 고수 몇 사람을 찾아내어 동조세력을 형성한 다음, 그 연줄로 더욱 많은 좌도방문의 무리 와 합세하여 일거에 청성산 금편애를 공략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왜 수> 주매에게 앙갚음을 하고야 말리라는 그의 집념이 자신을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릴 줄 오립은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그가 망창산을 지나갈 때였다. 문득 어두운 상공에서 한 떨기 누런 별똥이 자기 정면으로 날아 오는 것을 목격하고 오립은 즉시 경계태세를 취했다. 파공성까지 일으키면서 번개처럼 빠르게 나 는 품을 보아 하니 이단파 인물의 원신(元身)임에 틀림없다. '누굴까?... 아닌 밤중에 소란을 떨면서 나돌아다니는 녀석도 있구나. 어디 저 녀석이나 붙잡아서 심심풀이로 데리고 놀아볼까?' 호기심에 장난기마저 동한 오립은 그 즉시 현문(玄門)의 <선천일살 대금나법(先天一煞大擒拿法) 을 일으켜 단숨에 그 별떨기를 제압하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편 원신도 오립의 심중을 간파했는가, 별로 피하는 기색도 없이 눈앞까지 바싹 다가 와서는 싯누린 광채를 한 번 번쩍 빛내더니 제풀에 오립의 도포 소맷자락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 다. 너무나 당돌한 짓이라, 오립은 적지 않게 놀랐다. 그는 얼른 금나수법을 풀면서 상대방에게 수작 을 건넸다. "내 방금 딴 생각을 하느라고 미처 못 알아봤는데 누구신가? 날 호의적으로 대하는 품으로 보아 내 친구분이신 듯도 싶고....." 그러자 소매 속에서도 째진 목소리로 응수를 한다. "오도우, 나는 자넬 잘 알지만, 자네 쪽에서는 나를 모를 걸세. 어쨌든 지금 형편이 급박해서 긴 얘기할 처지가 못되니 양해하게. 나는 방금 전에 원수놈들한테 해를 당하고 육신의 껍데기마저 잃어버렸네. 그래서 잠시나마 자네의 법체를 빌어 숨어 있으려고 하는 걸세. 훗날 내 달리 은신처 를 찾아가지고 힘을 기른 다음 내 원수도 갚고, 또 자네 원수도 갚을 수 있게 도와줌세. 이건 내 분명히 약속하네. 오도우, 부탁할 것이 있네. 오래 전부터 나는 지폐(地肺) 속에서 만년현음지기 (萬年玄陰之氣)를 뽑아가지고 그것을 흑살사(黑煞絲)로 단련해서 현음취수번(玄陰聚獸幡) 수십 폭 을 완성해 냈다네. 그러나 그것마저 잃어버린 걸세. 하지만 일이 터지기 직전에 내 미리 깃발의 영기를 은폐시켜 놈들이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네. 내가 도망친 후에 그 아까운 비보를 놈 들이 멋도 모르고 찢어발기지나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네. 그 법보가 허망하게 없어질 바에야 내 차라리 자네한테 주어서 값있게 쓰이길 바라는 바일세. 오도우, 어떤가? 그게 마음에 있거든 어서 속히 옥령암으로 가보게나. 아마도 지금쯤 그곳은 이미 폭싹 꺼져서 밑바닥도 없는 함갱으로 변 해 있을 걸세. 거기 가서 만약 아무도 없거든 더 이상 찾을 것 없이 단념하게. 깃발들도 없어졌을 테니까. 그러나 누구든지 여전히 그곳에서 얼씬거리고 있다면 가망이 있는 걸세. 놈들도 그 법보 를 아직 찾는 중이니까 말일세. 만약 놈들이 찾아놓았거든 숨 돌릴 틈도 주지 말고 기습을 해서 단숨에 채뜨려 가지고 도망치게나. 그래야만 내 소중한 법보를 원수놈한테 선사하지 않게 되고 내 울분도 풀릴 것 같네. 오도우, 어떻게 생각하나? 내 심정 이해하겠지?" 오립은 곰곰이 계산을 해본다. '오래 전부터 그 소문은 익히 들었다. 지금은 어디에 죽어 자빠져 있는지 모르지만, 그 옛날 현 음교조(玄陰敎祖) 곡진이라는 자가 장미진인의 손에 죽기 전까지 취수번(聚獸幡)을 기막히게 잘 부렸단 말이 항간에 퍼졌다. 그놈이야 죽었지만 법보는 남았을 터, 그렇다면 지금 이 친구가 잃어 버렸다는 현음번(玄陰幡)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만약 그 사보(邪寶)를 정말 손에 넣기만 한 다면 왜수란 놈을 거꾸러뜨리기는 식은죽 먹기다. 구차하게 남의 도움을 구걸하러 찾아다니기보 다 얼마나 손쉬우냐? 아아, 통쾌한 복수전! 생각만 해도 속이 후련하구나... 가자, 그 법보를 찾으 러 가자. 아무렴, 가야 하구 말구!' 그 사이에도 소매 속 정체를 알 수 없는 원신이 쉴새없이 재촉을 한다. "이봐 오도우, 뭘 망설이나?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단 말인세!" "암, 가야지! 내 결심이 섰네. 지금 떠나도 늦지 않겠나?" "아직은!" 마침내 오립은 옥령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속에서 욕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욕심에 눈이 어 두워져, 그는 소매 속 원신의 정체가 누구인지, 또 그 법보를 자기한테 선사한다는 그 약속이 진 짜인지 가짜인지, 결과가 자신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조차 헤아려 볼 이성마저 잃었다. 이성을 잃 었으니 시키는 대로 행동할 따름이다. 과연 옥령암 일대는 폭싹 뒤집혀진 채 거대한 땅굴이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지상 으로부터 상공까지 뽀얀 흙먼지만 자욱하게 솟구쳐 오를 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 는다. '없구나... 한 사람도 없어! 그렇다면 법보도 사라진 거야.' 사뭇 낙담을 하고 돌아서던 그는 멀찌거니 반대편 산봉우리 정상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실망 낙담은 당장에 환희로 뒤바뀌었다. '저거다! 있구나, 있어!' 산머리에서 요사스런 기운이 은은하게 비친다. 소매 속 원신이 말한 대로 과연 수십 폭의 검정 깃발이 한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깃발더미 부근에는 또 낯선 젊은이들이 몇 명 서성거리고 있는 게 보인다. 상공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한가롭게 빙빙 선회할 뿐, 별달리 수상쩍은 것도 없다. 오립은 두말할 여지없이 검광을 재촉해서 먹이를 덮치는 새떼처럼 기세차게 하강했다. 그저 깃 발더미에만 정신이 쏠린 나머지 그는 상공에서 떠도는 날짐승이 백미화상(白嵋和尙)의 신조(神鳥) 였다는 사실조차도 미처 헤아려 보지 않았다. 정상의 목표물에 접근하는 동안 오립은 순간적으로나마 행동방침을 세웠다. 어떤 고수인지는 모 르나 상대방이 옥령암 일대를 이형환악 술법으로 뒤엎어버리고 소매 속 인물을 베어버릴 정도라 면 필경 심상한 재간의 소유자는 아닐 것이다. 공연히 그런 고수를 덧들이지는 말고 법보만 잽싸 게 채뜨려 가지고 줄행랑치는 게 상수이겠다. 한데 그 고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린 연놈들은 정체가 뭐냐?... 아마 깃발을 지키고 있는 모 양인데, 저까짓 녀석들이야 내 호통 한 번이면 오줌 똥 싸고 벌벌 기어 도망가겠지!... 흐흐, 저 법 보는 무더기째 몽땅 내꺼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으로 발전했다. 오립이 마지막 성공을 거두는 찰나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지 난날의 원수, 청성산 결투 때에 주매를 도와 자신을 격패시키고 금편애 보금자리마저 빼앗기도록 만들었던 <청낭선자> 화요숭이 아닌가! 그녀를 보는 순간, 오립은 옥령암을 뒤엎어 황무지로 만들고 소매 속 인물을 베어죽인 장본인이 그녀였다고 직감했다. 거의 손에 넣은 법보를 되빼앗겼다는 아쉬움보다도 지난날의 원한이 불끈 솟구쳐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불문곡직, <청낭선자>에게 덮쳐들려 했더니, 뜻밖에도 어린놈들이 싸움을 가로막고 나섰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나머지 쉽게 상대하던 그가 뒤늦게 깨닫고 각오를 달리했을 때는 이미 황정 검 몇 자루를 연거푸 격파당하고 난 뒤였다. 게다가 꿈에도 보지 못한 장미진인의 비보 자영, 청 삭 한 쌍까지 나타난 마당에 어떤 술법을 부리더라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알자, 갑자기 공 포가 조수처럼 엄습했다. 그는 창황중에도 세밀히 계산해 보았다. 이제 살아날 길은 오직 하나, 적의 검광에 휘감겨 있는 두 자루 황정검 말고 또 석 자루를 미끼로 희생시켜야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오립이 탈출할 궁리를 짜내는 동안에도 적의 비검은 산지사방 벌떼처럼 자기를 노리고 거침없이 날아들었다. 오립의 비검 십여 자루는 모조리 소멸당한 것이다. 그는 어금니를 부드득 갈아붙이고 또다시 황정검 넉 자루를 한꺼번에 쏘아날렸다. 그 넉 자루가 적의 공세를 주춤하게 만든 순간, 또 두 자루를 쏘아 금선, 소화상의 벽력쌍검에 맞부딪쳤다. '이 때다. 더 이상 버텨봤자 그만큼 목숨이 줄어들 뿐이다!' 한데 그 위기 속에서 웬일인가? 생각이 엉뚱하게도 소맷자락으로 쏠렸다. 오립은 그 무렵에서야 비로소 자기 소매 속의 원신이 바로 그 흉악스런 마왕 요시 곡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지독한 요물녀석, 나를 꾀어서 제 법보를 챙기려고 했구나! 공연히 욕심부리다가 내 이놈의 술수에 넘어갔어. 도대체 이 원수놈을 멋모르고 받았으니 어쩌면 좋으랴! 지금 털어낸다면 또 무 슨 심술을 부릴지 모르는데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구나! 아, 내 신세가 어째 요모양이 됐을꼬!' 품속에 독벌이 뛰어든 셈이다. 오립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궁지에 몰려, 심사가 난마(亂麻) 처럼 얼크러진다. 그가 주저하는 순간 두 번째 방패막이로 쏘아날렸던 여섯 자루 비검들이 또 빛을 잃기 시작했 다. 오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뿔싸, 내 무슨 망령을 떠는 거야? 튀자!'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친 오립, 그 아까운 황정검 여섯 자루는 회수할 엄두도 못낸 채 그 길로 검광을 일으켜 타고서 허둥지둥 달아났다. 파공음이 세차게 울렸다. 갓 산봉우리를 벗어났을 때였다. 느닷없이 머리 위에서 사나운 날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흘 낏 치올려다 보니 웬걸! 시커먼 독수리 한 마리가 불덩어리 같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구름 속을 뚫고 곤두박질치듯 덮쳐내린다. '아이쿠, 저놈은.....' 그제서야 백미화상의 신조를 알아본 오립은 그만 혼비백산을 하고 말았다. 창황중에 은둔술을 일으켜 자기 딴엔 잽싸게 피하려고는 했으나, 한발 늦었다. '휙!' 하고 돌개바람을 일으키면서 독 수리의 강철 발톱이 등줄기를 후비고 지나갔다. '부드득!' 소리와 함께 저릿저릿한 통증이 몰아쳐 왔다. 무정한 날짐승이 옷자락은 물론, 살덩어리를 뭉텅 움켜 뜯어낸 것이다. 오립은 넋이 빠져 아픈 것도 잊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목숨만이라도 부지해 달아나야만 한다. 천 만다행이랄까, 살덩이를 뜯기는 것과 동시에 은신술이 신통력을 나타냈다. 그 무서운 독수리 발톱 도 더 이상 덮치는 기색이 없다. 그는 겨우 살아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쫓아랏!" "저쪽을 막아요!" 뒤쫓아 날아오른 아미의 젊은이들이 고함쳤다. <청낭선자>가 젊은이들을 만류한다. "잠깐 멈춰요. 궁한 쥐는 쫓지 말라고 했지요? 그냥 달아나게 내 버려 두세요. 내 그대신 약소하 나마 선물을 드릴 테니까." <청낭선자>의 손가락이 상공을 가리켰다. 한 가닥 광채가 번쩍 솟구치더니 아직도 허공에서 몸 부림치는 오립의 비검 여섯 자루를 휘감아 끌어내렸다. <청낭선자>는 그것을 잡아들고 잠시 현 공(玄功)을 주입한 다음 빙그레 웃으면서 일행 여섯에게 한 자루씩 나누어 주었다. "자, 받으세요." "어마, 예뻐라! 아주 멋진걸?" 제일 먼저 받아든 이영경의 찬탄이었다. 짤막한 황색 단검은 황금도 쇠도 아닌 것이 어느 새 떠 오른 햇볕을 받으면서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났다. 은빛 검광의 정체 絶峰立天風 朗月疎星白雲入抱 幽巖尋劍氣 攀蘿們葛銀兩流天 청낭선자가 이영경 등에게 말했다. "오립은 비록 사파의 교도지만 성정이 강직하고 고집센 이외에는 별로 큰 과오는 없다. 그는 마 음 속으로 이미 정과를 사모해 황금의 정기를 뽑아 검을 제련하기까지 했단다. 심혈을 기울여 단 련시킨 지 벌써 오래 되었지. 그는 처음엔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나 저번에 아미파의 두 도우를 물리친 뒤 자신을 얻은 모양이야. 그때 두 도우는 오립의 이십여 개나 되는 비검 때문에 중과부 적으로 패배했지. 의기양양해진 그는 몇몇 동료의 도움을 청해 <왜수> 주매한테 복수할 일념이 라더군. 금편애를 되찾고 싶은 게지. 한데 그대들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비 상한 비검을 갖고 있고 더구나 자영검과 청삭검이 있으리리곤 어찌 생각했겠느냐. 하긴 아미파 어느 검선이라도 그대들을 쉽게 당할 사람이 있을까?" 이영경 등은 처음엔 우쭐했다가 선배 검선까지 들먹이자 약간은 서먹서먹했다. 이영경과 주경운 은 얼굴이 살짝 상기되고 소화상, 금선 등은 멈칫멈칫했다. 청낭선자가 말을 계속했다. "그 오립은 공행(功行)이 다해 머지 않아 우화비승(羽化飛昇)할 게다. 내가 줄곧 나서지 않은 것 은 그가 그대들 손에 패배해 복수할 마음을 포기하게 만들고 싶어서였지. 너희들 같은 후배한테 지고 어찌 주매 선배한테 복수하려 덤비겠느냐. 그런데 나중 자세히 관찰해 본즉 그는 요기(妖氣) 를 몸에 띠고 있더구나. 전엔 그런 적이 없고 비검도 사악한 기운은 일절 갖고 있지 않았거든. 더 구나 그는 멀리서 온 게 분명한 데도 미리 예정이나 한 듯 저 요사스런 깃발을 탈취하려 했다. 내가 일찍 은밀히 방비하지 않았다면 깃발은 모두 빼앗기고 큰 화를 남길 뻔했어." "그럼 그 요기는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주경운이 묻자 청낭선자는 고개를 들어 멀리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요괴 곡진이겠지." "뭐요, 곡진요?" "그렇다. 오립이 이곳을 지나다 무심코 요괴의 원신을 만나 그의 지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요괴의 원신이 오립의 몸 속에 깃들었다면 이득이야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것처럼 크겠지만 오립 본인은 언젠가 큰 참화를 받을 것이다. 죽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럼 오립을 구해줘야겠네요?" 마음이 여린 주경운이 놀란 듯 묻자 청낭선자는 여전히 아무 표정없이 살짝 미소지을 뿐이었다. "원성은 지금 혼수상태지만 아미산에 돌아간 뒤 원양척으로 사악한 독을 제거하면 자연히 깨어 날 것이다. 그대들은 이곳 일을 빨리 끝내고 속히 아미로 돌아가 그곳의 포위된 상태를 풀어줘야 한다." 이영경과 장이는 청낭선자 앞에 나아가 구해준 은덕에 대해 감사했다. 미타와 유유안도 뒤따라 쫓아나와 계도해 준 고마움을 기리고 자기들의 입장을 여럿에게 설명해 주길 간청했다. 청낭선자가 이영경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보기에 다른 사람과 달리 겁운을 갖고 태어났으나 아미문호를 크게 빛낼 것이다. < 삼영이운>이라 해도 그중 네가 유독 걸출한데 살겁이 무거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일 게다. 머 지 않아 제수명도우가 아미에 돌아와 너 한 사람한테 특별한 배려를 내릴 것이다. 저들 두 사람 은 비록 사파 출신이지만 이제 크게 후회하여 마음을 돌렸고 도를 향한 마음이 진실하다. 네가 그들을 거두어 주어도 큰 문책은 없을 게야. 오립이 떠날 때 백미 선사의 독수리를 멈추게 한 건 내가 그에게 창피를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은 마음이 약간 편협하여 대패했다 생각하면 뼈저리게 악심을 먹을 것이다. 그는 실력있는 친구가 많아 개과천선하지 않으면 불미스런 일이 많을 거거든. 그리고 이들 미타와 유유안은 이영경 너에게도 앞으로 유용할 거야. 이들의 비검이 방문좌도이나 옳은 일에 쓴다면 정과를 얻을 수도 있지. 암 있구말구." 그녀는 말을 끝내자 유유안을 슬쩍 눈여겨봤다. 유유안은 마음에 찔린 데가 있으므로 아까 청낭선자에게 감사인사를 드릴 때도 말이 껄끄럽던 판이었다. 청낭선자가 혹 요괴의 깃발을 내놓으랄까 봐 오금이 저렸던 것이다. 그는 한창 일희일 비(一喜一悲)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눈총을 주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맹서를 했다. "제자가 만일 그 보물로 나쁜 일을 한다면 필히 참화를 당해 영원히 저승에 빠질 겁니다." 청낭선자는 그의 맹세에 빙긋이 미소지었다. "너희 두 사람은 앞으로 힘써 수련해도 쉬이 정과를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일이 이쯤 됐으니 내 너희들을 도와주겠다. 나는 원래 머지 않아 겁운을 끝낼 몸이라 이번 겁수에는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암중에 도와줄 뿐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요괴가 눈치채지 못하게 했지. 그러나 일이 꼬이느라 갑자기 몸을 드러내게 됐고, 결국엔 악연을 맺어 이번 일에서도 빠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깃발들은 처음엔 한 도우를 찾아가 함께 제거시킬 생각이었으나 이젠 마음을 바꾸었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고 이들 깃발로 제삼차 아미투검 때 마도들을 물리칠 생각이야. 그러자니 내 청명(淸名)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들 두 사람을 가르치겠네. 그대들은 아미에 돌아가 교조를 뵌 뒤 이곳에 다시 와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게. 오구선부(奧區仙府)에서 그대들에 게 깃발 쓰는 법을 가르쳐 주어 요괴에 대비토록 하겠네." 미, 유 두 난쟁이는 청낭선자의 말에 놀랍고 기뻤다. 그중에서도 유유안이 더욱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런 모습을 본 청낭선자는 웬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소 화상만은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청낭선자가 다시 말했다. "장이는 백만산에 따라가 문주를 제거하도록 도운 뒤 머지 않아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 재 털보 이원화도우의 비뢰동이 화재를 입어 요인들을 물리친 후엔 문하제자들이 응벽애로 옮기 게 될 것이라 인영은 당분간의 적막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청낭선자는 각자에게 한 마디씩 말을 끝내자 모두에게 진중하라 당부한 뒤 작별을 고했다. 섬광 이 한 번 번뜩이자 그녀는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일행 중 이영경과 주경운은 엄인영, 미타, 유유안 등과 함께 미진번을 타고 응벽애로 돌아 가고 소화상, 금선, 장이 셋은 계속 오구선부에 남아 백만산에 갈 일을 의논했다. 소화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보게 선사제, 너는 성질이 급한 게 큰 문제야. 미, 유 두 난쟁이가 나한테 건천화령주를 꺼내 라고 말했으니 망정이지 자칫했다간 큰일날 뻔했지 뭐야. 이번 백만산에 가설랑은 그렇게 급히 서둘지 말라구." "걱정 마시오. 나는 좋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까 봐 서둘렀을 뿐이랍니다. 우라질, 요괴가 그 렇게 대단할 줄을 뉘라 알았겠소. 검광과 미진번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저켠을 나 외엔 누가 볼 수 있었겠냔 말예요. 그래서 덤빈 거지 뭐."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하다못해 미진번을 쓰기라도 했어야 하지 않는가 말일세." 소화상이 계속 나무라자 금선은 고개만 끄덕였다. "하기야 한 손엔 미진번을 한 손엔 벽력검을 휘둘러야 했지만 어디 그것들이 보통 보물입니까. 미진깃발만 해도 현공을 운용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고, 벽력검은 연검한 지 얼마 안 돼 아직은 자유자재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나중 천둔경을 꺼낼 생각을 했는데 그때 마침 형님이 화령주를 바칩디다. 그 화령주는 정말 신령스런 보물이더군요. 한번 빛을 발하자 사방이 환히 밝히는 게 천 둔경보다 월등 낫습디다. 그동안 고생은 했어도 그런 보물을 얻었으니 고생값 빼고도 남았수. 무 형비검이 훼손된 걸 봉창하고도 남은 셈이지 뭐." 소화상이 화를 벌컥 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 비검을 어떻게 연성한 줄이나 알아! 사부님께서 수시로 가르쳐 주셨 고 그 오랫동안 얼마나 쓰라린 수련을 거듭한 건데, 그까짓 화령주에 비하겠어. 그리고 화령주는 한 번 시험해 본 것에 불과하지, 어디 우리가 제대로 용법이나 안단 말인가." "지나간 일은 후회할 필요없어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수. 한데 소사형, 이사매가 나한테 부탁한 게 있습니다." "그 짐승들 말이냐?" "그래요. 짐승이라 해도 이사매한테는 은혜가 있고 의리도 있는 부하지요. 그녀가 총망중에 그냥 떠나니까 우릴보고 암굴에 찾아가 잘 타이르고 이젠 염려하지 말고 밖에 나와 살게 일러주랍디 다. 아직도 요괴가 무서워 동굴 속에서 벌벌 떨고 있을 거랍니다. 암굴 옆의 분지에 풀들이 무성 히 나 있긴 해도 먹을 만한 건 못된다더군요." "그럼 한번 가보세." 소화상 등 셋은 암굴 정상에 나 있는 암창을 통해 동굴로 들어갔다. 성성이와 말곰들은 자색과 홍색 검광이 번득이는 것을 보자 이영경이 돌아온 줄 알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한데 지상에 내려서는 사람을 보니 세 사나이 모두 모르는 얼굴들이다. 그 중에서도 장이는 얼 마 전까지 자기들을 잡아가고 죽이던 악마 아닌가. 성질이 급한 몇몇 말곰들은 우르르 세 사람한 테 덤벼들었다. 장이 등은 놀라 펄쩍 날아서 높은 바위로 올라섰다. 성성이와 말곰들은 계속 포효 하며 으르렁거렸다. 금선이 말했다. "요것들은 호랑이나 승냥이보다 더 사납지 않소. 사람만 보면 즉시 덤벼드는구만. 이런 것들을 놔두면 나중 무슨 짓을 벌일지 알게 뭐요?" 소화상이 대답했다. "그게 아닐세. 저것들은 우리를 보고 덤비는 게지 사람만 보면 덤비는 건 아니라구. 자네가 한번 말을 걸어보게. 말로 해서도 아니 들으면 이사매의 체면이고 자시고 한번 혼내줄밖에." "알았습니다. 이사매 말이 이 짐승들은 순치돼서 함부로 사람을 상하지 않는다 했거든요. 정말로 순화됐는지 알아봅시다그려." 금선은 짐승들을 향해 큰소리로 호통쳤다. "너희들은 잠시 조용하라. 너희들의 은인인 이사매는 우리들과 합력해서 요괴를 제거했다. 그녀 는 급히 돌아가느라 너희들에게 와보지 못했고 그 사실을 우리들이 알려주러 온 것이다. 이제 너 희들은 동굴에서 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알았느냐? 알았거든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라. 그러 면 동굴에서 나가게 해줄 것이고 계속 흉포히 굴면 우리들의 비검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라." 금선은 비검을 한 차례 철커덕거리며 위엄을 보였다. 반수가 넘는 짐승들이 순하게 엎드려 그들 을 응시했다. 금선이 다시 한번 호통치자 앞서 덤비던 말곰들도 한번 소란을 떨며 부복했오나 웬 지 으르렁거리는 것은 그치지 않았다. "저들이 뭔가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선동생, 네가 한번 내려가 시험을 해보게나." 금선이 소화상 말대로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짐승들은 계속 으르렁거리면서도 설설 기어와서 금선을 에워쌀 뿐 다른 나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금선의 손과 발등을 핥고 냄새 맡으 며 아주 친근한 표정들이었다. 금선이 기뻐 위쪽을 보고 소리쳤다. "두 분도 이쪽으로 내려오시오. 아무렇지도 않소이다." 두 사람이 내려오자 짐승들은 또 한 차례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소화상한테는 금선과 마찬가지 로 친근히 접근했으나 장이에게는 이빨을 드러내고 노한 눈초리로 마구 짖어댔다. 원한과 두려움 이 함께하는 무서운 표정이다. 금선과 소화상은 그때서야 짐승들이 포효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금선이 장이를 대신해서 짐승들에게 말했다. "이분 장대협은 이제 사악함을 버리고 정파인물이 되셨다. 지금은 우리들 사람이 되었으니 너희 들은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 마라. 알았느냐? 동굴 밖엔 아무 적도 없으니 여기에 머물던 나가 살던 마음대로 하거니와 사람은 절대 상하지 않도록 하라." 금선은 말을 끝내자 장이를 불러 짐승들 앞에 세웠다. 말곰들은 뒤로 지칫지칫 물러나 그의 곁 에는 가까이 오지 않고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앞뒤를 관망하는 태도였다. 소화상과 금선은 그들이 그래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게 대견해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짐승들의 등과 목 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밥 한 그릇을 먹을 시간이 되었을까. 홀연 성성이와 말곰들의 울음소리가 암굴 밖에서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가까와지자 암굴 속의 짐승들도 점차 요란히 짖어대며 화답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백여 마리의 성성이와 말곰들이 암굴벽의 틈새를 뚫고 '우!' 하니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요괴에 잡혔다가 살아난 짐승들이었다. 양측이 만나자 암굴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아우성쳤 다. 동물들의 귀환환영치고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한동안이 지나자 짐승들은 점차 조용해졌고 갑자기 그들은 세 사람을 향해 넙죽넙죽 절들을 했 다. 모두 무릎을 꿇고는 감사하다는 고함을 지르는 듯하더니 이번엔 와르르 일어나 동굴 밖으로 몰려나갔다. 이제야말로 해방감에 들떠 자유천지로 나가는 것이었다. 소화상 등도 그들의 뒤를 따 라 나갔다. 성성이와 말곰들은 동굴 뒤쪽으로 나오자 동굴을 향해 재차 엎드려 흥흥대며 차마 동굴을 떠나 기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소화상이 그들에게 말했다. "요괴가 이미 제거됐으므로 이젠 아무 걱정이 없게 됐다. 이 동혈은 나중에라도 오고 싶으면 와 서 머물러도 좋다. 앞으로 선과를 얻으려면 절대 생령을 해치거나 살륙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여기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날 것이어니와 너희들도 너무 연연해 하지 말고 살던 곳으로 돌아가 라." 소화상이 떠나란 듯 손짓으로 앞을 가리자 짐승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그곳을 떠났다. 이러한 모습을 보자 셋은 은연중 감동하는 마음이 일었다. 소화상이 중얼대듯 말했다. "이렇게 많은 맹수를 이사매가 덕으로 감화시켰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생 령이 상했을까? 많은 선배들이 그녀를 보고 문호를 빛내고 군영의 영수가 되리란 말도 틀림없는 일이로군. 선연(仙緣)은 정해져 있다 해도 때를 못 타면 이룩하지 못할 터인데 이사매는 좋은 일 마다 다 맺어지니, 거참 이상한 일일세." 금선이 말했다. "이 며칠 동안은 연검을 하는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잖습니까? 한데 이 산은 기적 같은 게 많 은 곳이니 어떻습니까? 장도형, 우리보다 먼저 와 계셨으니 어디 좋은 곳을 구경시켜 주지 않을 래요?" 소화상도 좋다고 맞장구치자 일행은 오구선부를 떠나 토끼바위 쪽으로 갔다. 토끼바위에 있는 동굴은 무척 그윽하고 아늑했다. 밝고 넓은 동굴을 보자 마음에 든 금선이 소화상한테 제의했다. "형님, 우리 이곳으로 옮겨 머뭅시다요. 오구선부도 좋긴 하지만 인영이 갈때 형화도 거두어가 버려 어두운 게 싫지 않소. 청낭선자도 미, 유 이 왜를 이곳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 때까지 빌어 쓰는 셈 칩시다." "그렇게 하세나." 셋은 단번에 의견을 맞추고 이 현상동(玄霜洞)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들은 몸뚱아리 외에는 지닌 게 없었으므로 그냥 그곳에 머물면 되었다. 셋은 몇 군데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고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다. 소화상은 현공을 운용해 진기를 삼관에 불어넣으며 두 차례 운기조식을 끝냈다. 몸이 여느 때보다 날 듯 가벼웠다. 이럴 때 연검을 하면 마침 좋으리라는 생각이 났다. 금선한테 빌린 보검은 아직 숙련되지 않았으나 쓸 만큼 손에 익어 있었다. 하지만 자기의 무형검 만큼은 정밀하지 못해 출신입화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는 동굴 밖의 달빛이 밝고 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자 암반 위에서 연습할 마음이 생겼다. 금선 과 장이는 마침 한창 입정 중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경동시키기 싫어 몸을 빼내 슬그머니 밖으 로 나갔다. 달은 완전히 둥글지 않았으나 마침 가장 높은 하늘 끝에 떠 있었다. 운무는 소화상의 발 아래 쫙 깔렸고 하늘은 씻은 듯이 맑았다. 그와 가까운 숲에 어둠이 짙게 깔려 있고 바람이 그 어둠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멀고 가까운 봉우리들은 굽이쳐 흐르는 듯 구름 위에 자태를 드러내고 있 었다. 뫼뿌리들의 몸체와 발을 온통 뒤덮은 하얀 구름은 띠를 두른 듯 산과 산 사이를 휘감았다. 달빛이 구름에 닿아 은색 노을을 더욱 뿌옇게 만들었다. 하얀 바다의 외로운 배처럼 두둥실 떠 있는 산봉우리들은 구름이 넘실댈 때마다 요동치는 듯 보 였으나 사실은 꼼짝 않고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홀연 한바탕 바람이 세차게 불자 산허리에 걸린 흰구름은 쪼각쪼각이 돼서 하얀 솜처럼 흩어져 날았다. 바람이 멎자 구름은 다시 뭉실뭉실 뭉쳤다. 소화상은 산의 절정에 올라 바람을 맞으며 발 아래 풍광을 내려다보다 불현듯 가이없는 세상의 기이함에 마음이 울적해졌다. '아, 세상은 넓은데 나는 가이없이 작은 하나의 미물이구나! 이 넓은 천지에 태어난 나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세상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내가 아닌가!' 그는 망연히 발 아래를 내려다보며 연검하러 온 자체도 잊고 있었다. 그때 또 하나 엉뚱한 생각 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 기이하고 멋진 풍광의 영산에 어찌 이인이 아니 살까? 틀림없이 많은 신선이 여기서 살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난 청낭선자와 새로 만난 엄인영과 장이는 별로 신선급도 아니요, 요괴 만이 이 절경 속에 숨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며칠 여유가 있으니 내일부터는 금선과 장이와 함께 한번 자세히 찾아봐야겠다. 혹시 기연을 만날는지도 모르니.' 그가 이렇게 생각을 다지고 있을 때 산 아래 생긴 구름 사이 극히 작은 하얀빛이 번쩍였다. 은 색 꽃처럼 하얀 눈을 뿜어내는 듯 두 차례 밝게 반짝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달빛이 하 얀 구름에 비쳤나 하고 그냥 넘기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명사를 모시고 좋은 수련과 견문을 익힌 그로서는 단번에 이상함을 느꼈다. 소화상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낮에 검광을 타고 왕래는 했으나 산 아래는 지나다니지를 않았지. 저건 틀림없이 무슨 보물이 뿜어내는 빛일 거야. 뭔가 확실히 알아내야지. 이 절호의 기회를 어찌 놓칠손가!' 그는 급히 검광을 타고 구름 아래로 뚫고 내려갔다. 산 아래엔 백여 장도 넘게 물이 말라 바닥 이 드러난 못이 있었다. 위쪽에 구름이 빽빽이 가려 위에서 본 밝음이라곤 하나도 없고 어쩌다 달빛이 희끗희끗 비칠 뿐이었다. 풍경이 무척 어둡고 고요했다. 바위에는 온통 잡풀이 덮여 등나무와 덩굴들이 사방에 뻗어 있었다. 코 끝에 수시로 이채로운 향내가 풍겨오곤 했다. 거기에 키가 작달막한 괴이한 소나무 한 그루가 왼쪽 틈새에 돌출해 나온 게 전부였다. 달빛에 비친 암벽은 푸르고 물기가 물씬물씬한 게 별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소화상은 은색 빛 이 보이던 곳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무슨 이적 같은 것은 일절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잠복을 해 한동안 기다려보았다. 시종 아무것도 나타나는 게 없다. '좀더 기다려보자. 보물이나 신선을 어찌 쉽사리 만날 수 있을 까 보냐. 참고 노력하고 그리고 운을 기다리는 거야.' 구름은 더욱 빽빽이 머리 위에 들어차고 서리가 촉촉히 몸에 내릴 뿐 아무 동정이 없었다. 구름 이 많아지는만큼 더욱 어두워졌다. 소화상은 자신이 잘못 보았나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좀더 기다려보자고 다짐했다. 갑 자기 후두둑거리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초라한 마음이 공연히 쓸쓸해질 때 금선이 부르는 소리 가 들렸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릴 마음이 사라져 검광을 타고 날아올랐다. 산의 허리쯤에 다다르자 광풍과 함께 세찬 비가 후려쳐 내렸다. 다행히 그는 신검합일한 때문에 비에 젖지는 않았다. 산 위에 오르니 의연히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았으며 별빛은 깨끗하였다. "어딜 갔다 오셨소? 어디 좋은 경치라도 있소?" 금선은 무척 궁금한 듯 큰 눈을 유달리 크게 떴다. "경치는 무슨 경친가! 뭔가 보긴 봤는데 그게 도통 뭣인지 모르겠단 말씀이야." 소화상은 그가 본 은빛에 대해 설명했다. 금선이 말했다. "사형 말씀이 옳았어. 이렇게 근사한 명산에 이인과 보물이 없겠어. 어디엔가 잔뜩 숨겨져 있을 걸. 우리 내일 잘 찾아봅시다." 장이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나뭇가지를 꺾어 땅바닥에 글을 썼다. <내가 요괴를 만난 얼마 후 야밤에 옥령암에서 한가히 노닐다가 은색 빛이 구름바다를 나는 걸 보았습니다. 한 순간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집디다. 이인이 부근에 있는 것 같아 여러 번 뒤따라 가보았으나 끝내 쫓지를 못했지요. 나중 엄도형의 비검이 은색인 걸 알고 그분이었나 했습니다. 시간이 총총해서 제대로 물어보질 못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내가 본 거나 소도형이 보신 것 이나 모두 엄도형의 검광 빛깔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엄형의 은빛은 길게 선을 긋는데 이 은색 빛 은 점이었거든요.> "맞았어! 내가 본 은색빛도 반짝하다 사라졌거든." 소화상이 맞장구치자 장이는 계속 글을 썼다. <우리들이 너무 대들어서 요란하게 수색하면 보물은 놀래서 도망칠 겁니다. 소도형이 그 장소를 확실히 아신다면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조용히 보내고 내일 아침 자세히 찾아보십시다. 이상한 곳을 살피고 있다가 저녁 때 보물이 나올 때쯤 위아래로 나눠 매복해서 잡도록 하시죠. 아무려면 그 보물이 청삭검만큼이야 하겠습니까?> 소화상과 금선은 좋은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보물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 들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하늘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동쪽 하늘이 붕어의 등처럼 누렇게 익어왔다. 붉은 해가 하늘로 불쑥 솟자 셋은 탄성을 질렀고 천지는 환히 밝아졌다. 빠알간 해가 차디찬 대지를 비추고 그 밝던 달은 하늘 저끝에 대 롱대롱 걸린 듯하다가 스르르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온 산에 늘펀했던 구름과 연무도 점차 흩어 지는 듯 사라지고 대지에 떨어지던 비도 멎었다. 산과 계곡의 자연풍경에 진력이 난 세 사람은 해가 두둥실 떠오른 걸 보자 얼씨구나 몸을 날려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쪽은 간밤의 비가 아직 마르지 않았고 새벽안개도 여직 짙었다. 세 사람은 지하에 도착하자 검광을 거두고 지세들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와 잎 그리고 덩굴 등이 빗물에 축축 해 그들의 얼굴과 몸도 모두 물기로 촉촉히 젖었다. 아침해가 못 밑을 비껴 비추자 암석과 잔나 무 사이의 매미와 풀벌레 우는 소리가 어울려 들렸다. '찌르르, 찌르르!' '치치, 치치!' 숲은 벌레 들의 세상이요, 그들의 천국이었다. 소화상이 은색 빛을 본 곳은 가파른 절벽의 중간쯤으로 이끼가 비단처럼 곱게 덮였는데 이날 따 라 간밤의 비에 물기를 흠뻑 머금어 짙푸르게 보였다. 이끼 사이사이에는 잡초꽃이 검붉게 피어 나 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 절벽 중간쯤에 앞쪽으로 툭 불거져나온 둥근 반석이 있었다. 이끼 사이사이 온갖 꽃이 서 로 잘난 양 흐드러지게 경염이라도 하듯 피어난 가운데에 눈썹처럼 둥글게 나와 있고 반석은 마 치 입정한 비쩍 마른 중 같은 모양이었다. 소화상은 어젯밤엔 이 반석을 보지 못했었다. 총망히 아래쪽 못으로 내려가느라 구름이 잔뜩 덮 인 그 곳을 눈여겨볼 사이가 없었다. 세 사람은 반석을 발견하자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날아올 라 돌 위에 내렸다. 절벽에서 묘하게 삐져나온 반석은 작은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는 데 열 사람쯤 앉을 수 있는 평 평한 형태로 약간은 기울어 있었다. 반석 위에는 괴이한 기암처럼 생긴 두 아름드리 정도의 노송 이 바위 틈새에서 삐져나와 둥근 곳집처럼 하늘을 향해 굽어 있었다. 노송의 솔잎은 덮개가 된 양 반석에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위로는 하늘이요, 아래로는 깎아지른 기암절벽이라, 보통사람은 도저히 이 반석 위에 오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한데 자세히 본즉, 반석의 돌 색깔이 절벽의 암반과는 다른 듯했다. 소화상은 절벽의 이끼를 떼어내 보았다. 과연 절벽 돌의 색상은 반석과는 판이했다. 식견이 높은 소화상이 말했다. "이 반석은 원래부터 석벽에 붙어 있거나 딸려 있던 게 아닐세. 어디 딴 데서 옮겨온 것 같네." 금선과 장이도 뭔가 기이함을 일찍이 느끼고 있었다. 금선이 말했다. "그렇다면 보물은 이 암반 속에 있을까요? 암반을 뜯어내거나 짤라내야 하겠습니까?" "그건 안 될 일일세. 이 아름다운 경치를 버릴 염려도 있고 아래로 추락하면 보물이 훼손되지 않겠어?" 세 사람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버성기고 있는데 금선이 돌뿌리쪽의 이끼를 벗겨 노송이 삐져 나온 암반 틈까지 다가갔다. 소화상이 우습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동생, 자네는 확실히 장난꾸러길세. 이끼테는 박박 긁어서 무엇하나. 뭐 보기라도 좋으면 괜 찮겠지만 뭐하는 짓인가. 이 반석과 석벽은 같은 출신이 아니란 걸 확실히 알았으면 됐지. 뭘 또 부숴버리고 싶은 거냐구?" 소화상이 한창 조잘거리고 있는데 갑작스레 금선이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요놈, 여기 있었구나 여기 있었어! 냉큼 나오지 못할까?" 그의 호통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노송 뿌리 쪽에서 은색 빛이 번쩍했다. 은은한 은색 빛 안쪽에 알몸뚱이 나체가 보였다. 나체에다 삼 척이 넘을락말락하는 영아로 소화상 등이 사람인가 확인하 는 순간, 하얀 빛을 꼬리에 남긴 채 바위 밑으로 날아가 버렸다. 세 사람은 이를 보자 급히 검광을 일으켜 뒤를 쫓았다. 그러나 어느결엔지 꼬마 나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금선은 펄쩍펄쩍 뛰면서 소화상을 책망했다. "사형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요? 저 꼬맹이가 도망치도록 가만히 보고 있단 말이오? 장이 자 네도 그래 등신처럼 뭘 했나? 도망가지 못하게 차단하고 있어야 했잖은가?" 소화상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보기에 저 영아(瓔兒)가 벌써 어검비행을 하는 것으로 보아 여간 대단하지 않을 것 같애. 그 은빛은 사악하지 않은 품새가 고녀석의 법보일 테고 말이야.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 은 데다 왜소한 몰골은 사람이 아닌 것 같어. 아마도 육지(肉芝)같이 나무나 돌의 정령(精靈)이 변한 걸 거야. 여하튼 놈의 뿌리를 우리가 발견했으니까 우리가 굳세게 지키고 있는 데야 제가 언젠가 안 돌아오고 배기겠어. 단단히 지키고 있으면 잡는 건 아무 걱정 없다구." 소화상은 한바탕 떠벌이고는 금선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제는 어떻게 해서 그녀석이 저 속에 숨어 있는 걸 알아냈지?" "돌의 색깔이 틀린 것에 착안한 거였어요. 아무리 봐도 수상한 것은 반석보다 노송과 바위 틈새 였어요.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뭔가 희끗하며 소년의 그림자 같은 게 보이질 않겠어요. 나는 옳다구나 뭔가 있구나 생각했죠. 그러나 나는 저 영물이 알아챌까 봐 일부러 형님과 함께 반석 속에 보물이 숨겨 있으니 짤라내자거니 짤라내다가 추락하면 보물이 훼손된다는 등의 말을 늘어 놓았어요. 두 분께 미리 당부를 못한 건 영물이 알아들을까 봐 조심하느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중 이끼를 벗기는 척하며 가까이 다가가 몸을 '휙' 돌리고 쳐다보니 영물은 두 손을 가슴에 안 고 나무 밑둥에 숨어 있었습니다. 고것은 새까만 눈을 또롱또롱 뜨고 밖을 노려보고 있더군요. 나 를 보자 그는 아주 부끄러운 표정을 짓습디다. 내가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는 순간 은색 빛을 수없이 발하며 내 머리 위로 날아가 버렸지요. 머리 위를 지나갈 때 냉기가 으스스 하고 차가우 며 강인한 무엇인가를 느꼈습니다." "진작 손짓이라도 하지 그랬어. 손짓을 조금만 했으면 장이가 재꺽 눈치채지 않았겠냔 말야." "그럴 새가 없었어요. 사형은 육지와 같은 영물이 아니겠느냐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합니 다. 응벽애의 육지와는 내가 평소 얼마나 친숙합니까. 그녀석은 천지간의 영물로 초목의 정령이 변한 거지만 변화도 막측할 뿐더러 온몸이 물렁물렁하며 아주 보들보들합니다. 우리는 녀석을 귀 여워해서 본문의 토납공부도 가르쳐 주었으나 진보가 없었어요. 또 칼과 검 따위를 어찌나 두려 워하는지 연검 따윈 할 수조차 없었지요. 하나 아까 본 꼬마는 나이는 어려뵈나 능숙한 어검비행 에다 육체가 탄탄하고 몸 속에 숨어 있는 정기도 강인해 보였습니다. 사람이 다년간 수련하지 않 고는, 그것도 정파로 수련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경지입니다. 어때요, 그녀석 하는 행동이 우 리와 비슷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어디가 초목의 영물 같은가 말예요." "그게 그런가. 내 선사제가 이렇게까지 관찰력과 추리력이 훌륭한 줄은 미처 몰랐네그려. 미안하 구만 미안해. 장이는 그래 내 생각이 어떤가?" 장이는 소화상의 농기 짙은 칭찬에 입을 짝 벌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선은 소화상의 칭찬은 들은 척 만 척 자기의 추리를 계속해 나갔다. "어제 그녀석이 빛을 반짝인 것은 우리에게 자기의 존재를 일부러 알려준 것이었어요. 틀림없을 겁니다. 우연히 은색 빛을 발한 것은 절대 아닐 거예요. 그리고 오늘 나를 볼때, 눈이 마주쳤을 때 희희낙락한 표정은 또 뭡니까. 약간 수줍어하긴 했으나 웃는 표정이었다구요. 만일 그가 우리 들을 적대시했다면 그 어검비행하는 수법으로 보아 추호도 방비가 없는 우리를 상하게 하는 것은 여반장이었을 거예요."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는다면 왜 도망갔지?" "그게 나를 아리송하게 하는 의문점이죠. 여하튼 번개같이 그를 막아서서 좋은 말로 수작을 걸 어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입니다!" 소화상이 걱정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자네 말대로 그가 내력이 있는 고인이라 한다면 그의 스승도 여기 있을 것 아닌가. 내가 그분 을 한번 불러봄세." 소화상은 절벽쪽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도술이 현통하신 도우어른, 저희들과 같은 길을 가는 분이시라면 한번 나타나시어 인사라도 받 아주십시오! 저희들은 결코 악의는 없으며 지나다가 계신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두어 차례 소리쳐 불렀건만 대답이 없다. 세 사람은 반석 위로 날아올라 똑같이 소리쳤다. 역시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들은 도망친 아이가 있던 곳을 살펴보았다. 밖은 등나무 덩굴이 얼크러져 가리고 있었으나 노 송의 뿌리가 문같이 돼 있는 안쪽은 꽤 깊어보였다. 등나무 줄기를 걷어치우니 제법 깨끗해 보이 기도 했다. 솔잎은 요처럼 깔개 삼아 포근하게 장식돼 있었다. 이때 석벽에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얼씬댔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검광을 발출했다. 검광 에 그림자는 더욱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은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금선이 계속 좋은 말로 불러보았지만 별 동정이 없다. 금선이 말했다. "여기 이러고 있어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장이는 아래를 지키고 사형은 석벽 정상을 지키십시오. 내가 이 앞에 매복해 있으리다. 뭔가 동정이 있으면 셋이 한 데 모여 요물인지 보물 인지를 함께 공격하십시다." 안배가 끝나자 셋은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도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그 들은 소화상과 장이가 목격할 때의 시간이 밤늦을 때였으므로 그 무렵까지는 지켜보리라 마음먹 고 계속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한밤중이 훌떡 지났건만 돌이 바닷속에 빠지기라도 한 양 아 무 반응이 없었다. 드디어 하늘은 다시 밝아왔다. 이날 밤은 전날 밤같이 청명하지 않아 바람과 안개가 무척 심했다. 정상에 있는 소화상은 위치 가 워낙 높아 밤은 달과 별을 볼 수 있었지만 제일 밑에 있는 장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금선은 가장 고약한 데서 하룻밤을 보냈다. 구름과 안개가 짙게 깔린 반석 위 는 밤이 이슥하기 전에 이미 옷이 빗물에 젖듯 촉촉히 젖어버렸다. 수도한 사람이라 추위나 한기 는 타지 않았고 농밀한 안개 속에서도 앞을 내다보는 데에 고충은 없었으나 고생스러웠던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해가 환히 떠도 요물단지인지 소년인지가 나타나지 않자 금선은 소화상과 장이를 불러모았다. 비에 장닭처럼 젖고 야바위꾼처럼 덕지덕지 이끼가 얼굴에 묻은 금선이 투덜댔다. "이 배라먹을 녀석이 완전히 우릴 피해 도망친 모양이오. 두 분은 여기서 뜨지 말고 좀 기다리 시구려. 나는 잠깐 개울에 가서 세수도 하고 옷도 빨고 오겠소. 옷에 오만 잡것이 다 묻어 이게 무슨 꼴이람. 빨아서 짜설랑 잠시 햇빛에 말리면 마르겠지 뭐. 그리고 오늘밤도 악착같이 지켜보 십시다레. 기어코 안 나타나면 요놈의 소굴을 왕창 다 때려부술 테니까!" 소화상과 장이는 금선이 흠씬 젖은 데다 이끼 따위가 덕지덕지 묻어가지고 투덜투덜대는 것을 보자 재미있다는 듯 벙긋벙긋 웃었다. 금선이 내려가자 소화상이 장이에게 눈짓을 하고는 말했다. "선사제는 어려서부터 장교부인한테 그렇게 수련을 했건만 나이탓인지 아직도 애티가 있단 말이 야. 이 동굴 속의 도우는 정양을 즐기느라 우리 따위는 만나보기 싫은가 보네. 우리도 그를 따라 그만 가보세. 만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만날 건 없으니까. 한데 조금 있다가 선사제가 돌아와 한바탕 시끄럽게 굴지 걱정이군. 하지만 알게 뭐람. 우릴 하루낮 하룻밤을 꼬박 세워두었으면 그 만이지. 그만 가서 동굴에서 쉬기나 하세." 장이는 소화상의 속셈을 이미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반석에서 날아올라 동굴로 돌아가는 척하다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아래쪽을 계속 주시했다. 차 반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작은 사람 그림자가 소나무 뒤 바위 틈새에서 나타났다. 언 뜻 보아 어젯밤 본 어린 소년이었다.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는데 불그스레한 몸매는 옥으로 쪼아 만든 듯 아름다왔다. 새 까만 머리는 양 어깨에 드리웠고 손에 든 넓적한 나뭇잎으로 하반신을 가리고 있었다. 소년은 상 하좌우를 둘러보다가 돌연 발을 한 번 굴러 하늘로 날아갔다. 소년은 햇빛 아래 한방울 은빛 빗 방울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소화상은 소년을 쫓지 않고 장이에게 속삭였다. "과연 금선사제의 추리가 딱 들어맞는군그래. 저 소년은 대단한 친구인데. 저렇게 어린 나이에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으니 말일세. 저 애의 스승은 보통 인물이 아니겠어. 한데 사파의 인물도 아닌 성싶은데 어째서 옷과 신발을 신지 않았을까? 그것 참 이상하단 말이야. 어젯밤 선사제가 동굴 앞에서 지키고 있을 때 어떻게 도루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껏 얼굴을 내밀지 않 은 건 아마도 스승이 함께 있지 않기 때문일까?" 장이가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소화상은 말을 계속했다. "맞아. 스승은 지금 없다구. 저녀석은 그리고 무슨 어려운 일이 있다 해도 법술로 우릴 속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세. 하여간 녀석의 하는 짓을 대충 알았으니 놈이 돌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 저 동굴에 들어가서 잠복해 있지. 그가 나타나면 턱 하니 앞을 막아서서 원수가 되던 친구가 되 던 결판을 짓구 말야. 재주가 보통 비상한 놈이 아니니까 다른 파에서 끌어가기 전에 우리 문파 로 끌어가야겠어." 두 사람은 바람처럼 날아 노송 뒤쪽 동굴도 들어갔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깊이 숨어 앞굴에 경 계를 단단히 했다. 어젯밤 금선처럼 놓치지 않을 각오였던 것이다. 약 반 시진쯤, 지나자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소화상이 살짝 내다보니 금선 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혹 금선이 소년을 경동시켜 자신들의 잠복한 게 들통날까 봐 금선이 반석에 내려설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가 반석에 내려 동굴을 들여다보면 손짓으로 경계심을 일궈줄 생각이었다. 한데 검광을 거두고 반석에 내려선 금선은 웬지 노기가 충천해 있었다. 그는 동굴 구멍 사이로 소화상을 보자 대뜸 고함을 치며 으르렁댔다. "소사형, 내 꼴 좀 보십시오. 재수가 더럽게 없을라다보니 목욕하다 옷을 잃어버렸다니까요." 석생의 출생인과 滌垢汗 失衣逢異士 遭寃孼 闢石孕靈胎 소화상이 보니 금선은 요동이 입었던 반쪽짜리 해진 옷을 걸치고 있었다. 뚱뚱하고 넓적한 게 영판 볼썽 사나왔다. 과연 그는 자기의 옷은 어디에 잃어버리고 남의 옷을 주워입고 있었던 것이 다. 소화상이 놀라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꼴불견이로군." 금선이 대답했다. "미치고 환장하겠수다. 내 이 꼴이 뭐요?" "누가 동생의 옷을 훔쳐간 거야?" "글쎄, 내 말 좀 차근히 들어보십시오. 나는 목욕을 하러 옥령암 부근엘 가지 않았겠습니까? 마 침 그곳에 말곰과 원숭이들이 있습디다. 녀석들은 사람의 시체를 발기발기 찢고 있대요. 전날 무 고한 생명을 해치지 말랬는데 생각하니 괘씸합디다. 화가 난 나는 몇 마리를 죽여 일벌백계를 할 요량으로 지상으로 내려갔습니다. 나를 본 성성이와 말곰은 환호성을 지르며 모여들더라구요. 너 무나 반기는 모습에 그만 맘이 약해져서 죽이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그게 참말 다행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살인하는 짐승들을 가만 놔두었다 이거야?" "사실 그들이 찢은 시체는 새삼 죽인 게 아니라 일전에 참했던 요동이었거든요. 짐승들은 그 시 체를 먹지도 않았습니다. 하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 입장이라면 얼마나 이가 갈렸겠습니까? 나는 그들을 책망할 수 없어 몇 마디 타이른 뒤 시체를 묻어주게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요동의 옷이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지요. 짐승들이 시체를 찢을 때 미리 벗긴 모양인데 그렇게 더럽지도 않았습니다. 또 그때 작은 성성이 한 녀석이 아장아장 걸어오는데 보니까 요동의 고쟁이를 꿰어 차고 있질 않겠어요. 순간 나는 빨가벗고 있던 어린애가 생각났습니다. 아직 쓸만큼 옷들이 성하 니까 가져다 그에게 주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잘한 일이네. 사제가 남을 그렇게 알뜰히 생각할 줄은 몰랐는걸." "옥령암에 도착하자 개울을 찾아 우선 옷들을 깨끗이 빨았습니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말리고 목욕을 하려다 약간 걱정이 있었지요. 저 장난꾸러기가 성성이 놈들이 내가 목욕하는 틈을 타서 옷들을 가져가면 어쩌나 하고요. 그래서 똘똘하게 생긴 성성이 몇 녀석을 데려다 망을 보게 했습 니다. 도둑질하려는 놈이 있으면 절대 못 가져가게 하고 한 녀석이 재빨리 와서 보고하라고 엄중 히 일러놨어요. 참, 목욕을 오랜 만에 신나게 했습니다. 어떻게나 물이 깨끗하고 시원한지 빨리 나오기가 싫더군요. 한동안 느긋하게 즐겼죠. 한데 조금 있자 성성이와 말곰들이 어지러이 포효하 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난 녀석들 몇이 어울려 장난을 하나 하고 괘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급기 야 두 놈이 헐레벌떡 달려와 뭐라 연신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쫓아가 보았더니 내 옷은 어 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어요. 도동의 짤달막한 옷은, 바로 이 옷은 잘도 말라 있었지만 말입니 다. 나는 화가 천둥같이 나서 된통 호통을 쳤습니다. 혹 지키던 놈들이 훔쳐가지 않았나 하고 의 심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성성이들이 손가락질 하는 곳을 보니 바위 위켠 하늘의 구름 속에 은색 별빛이 보였습니다. 그 별빛은 반짝하다 순간 사라졌지만 어제의 그 소년이 틀림없었습니다. 내가 어젯밤 자기 소굴을 지켜 돌아가지 못하게 했더니 화가 나서 앙심을 먹고 옷을 훔쳐간 거였어요. 사실 성성이들이 무슨 배짱으로 내 옷을 훔치겠소. 빌어먹을 꼬마놈이 내가 한 번 고통을 주었기 로소니 이 어르신네를 자기처럼 빨가벗겨서야 쓰겠습니까?" 소화상과 장이는 그의 말을 다 듣자 웃음이 나서 연신 입을 벙긋거렸다. 소화상이 금선에게 한 마디 했다. "이건 모두 사제가 평소 너무 장난을 즐긴 탓일세. 자기가 뿌린 씨앗은 자기가 거둬야 하는 것 이야. 사제가 간 뒤에 우리는 이 석벽 속의 양반과 한 번 만나볼까 하는 중이었는데 금방 돌아왔 구만그래. 저 어린 양반은 우리를 피하는 품이 나타날 것 같질 않아 자네 옷을 저 양반한테 기증 한 셈 치라구. 그러다가 친구가 되는 법이니 그것도 그럴싸하지 않은가 말야. 네가 입은 이 옷이 맘에 맞지 않걸랑 내 말미를 줄 테니 응벽애엘 다녀오라구. 새옷으로 갈아입은 뒤 백만산에 가면 될 테니까. 자, 우리가 여기서 기다려봤자 아무 소용없을 테니 저 위에 올라가서 이야기하세!" 소화상은 일부러 이렇게 얼렁뚱땅 둘러대어 꼬마 소년이 의심하지 않도록 신경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한창 분기탱천한 금선은 그런 내막을 알 리도 없고 우선 화만 버럭버럭 냈다. "누가 옷 따위에 신경쓰는 줄 아쇼. 내 두 자루 비검 외에는 뭐든 줄 수가 있수다. 하지만 몰래 가져가서 꼼짝 못하고 주는 것과 스스로 주는 것과 같을 수가 있냐 이 말이오. 동문들이 알면 이 무슨 창핍니까! 요녀석이 옷을 돌려주지 않으면 내 평생 절대 상종하지 않을랍니다. 허 참, 내 더 러워서!" "알았어 알았어. 옷이야 찾으면 되는 거 아닌가. 자, 우리 동굴로 돌아가세." 소화상은 적당히 금선을 구슬리고는 그를 잡아끌다시피 해서 산장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반석을 뜨기 전 소화상은 장이에게 뭐라 한창 속닥인 뒤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장도형, 자네가 화선고와 제일 친하니까 오구선부에 가서 그분이 돌아오셨나 알아보고 오게나." 장이가 떠나자 소화상은 금선을 떠밀다시피 하여 동굴로 데리고 들어갔다. 금선이 짜증을 내며 물었다. "사형은 지금 뭣 하는 거요. 무슨 꿍꿍이 수작을 하는 거요?" 소화상이 대답했다. "이보게 금선이, 우리가 그 돌 위에서 의논해야 무슨 소용인가? 녀석이 죄다 듣고 있을 텐데 말 이야. 놈은 내가 보기에 보통녀석이 아닐세. 도대체 어느 문파인지는 모르나 재주와 자질은 비상 한 것 같으이. 저런 녀석을 다른 파에서 난짝 데려가 버리면 큰일이라구. 아까 놈을 망보다 건너 편 벼랑에 암창(岩窓)이 하나 나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지. 그래서 장이에게 화선고를 만나러 가 는 척하며 그곳에 가서 매복하라고 일렀네." "그가 지금 그 노송 뒤 동굴 속에 있을까요?" "자네가 간 뒤 우리가 일부러 자릴 비켜주었더니 녀석이 나타나 사제 뒤를 쫓아가더군. 녀석은 어젯밤 내내 그 동굴 속에 있었어. 어떻게 몰래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야. 그가 지금 없다 고 해도 필연코 돌아오지 않겠나. 우린 방비하고 있지 않는 척하다가 그가 나타나면 벼락같이 덮 치는 거야. 장이와 함께 삼 면에서 말일세." 금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방책이라고 찬동했다. 그들은 한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끝내는 참을성을 잃고 어슬렁어슬렁 바위 위쪽으로 나갔다. 반석에는 소년의 그림자도 없었다. 건너편 벼 랑의 장이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주 엄밀히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여하간 소년은 밤쯤 되어야 나타날 것 같아 둘은 동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 금선이 소화상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요녀석이 영 나오질 않고 그냥 백만산에 가야 할 입장이 되면 어쩌시려우. 그것 참 신경 써지 는데." 소화상은 그럴 리가 없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려다 동굴입구를 보고 갑자기 고함쳤다. "저것 보게. 빨리 가보자!" 그는 검광을 일으켜 동굴로 번개처럼 날아갔다. 금선도 부랴부랴 뒤를 쫓았다. 동굴 석문 앞에 방금 전 금선이 잃어버린 옷이 걸려 있었다. 다만 고쟁이만 없었다. 사방을 휘둘 러봐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소화상이 잠깐 생각하다 금선에게 말했다. "인제 알겠구만. 이 사람은 조만간 우리들의 친구가 될 게 분명해. 그는 빨가벗은 몸 때문에 우 리와 만나지 않는 것일세. 창피해서 몸을 가리려고 옷을 훔쳐갔는데 사제가 냅다 욕을 퍼부으니 까 원한을 살까 두려워 옷을 돌려준 거라구." "그렇게 이치가 빤한 녀석이 왜 여태 빨가벗은 몸으로 옷 한 벌이 없을까요?" "그건 알 수 없네. 하여튼 어린애인 주제에 저렇게 신통하니 그의 사부는 대단한 사람일 거야. 생각해 보라구. 우리 셋이 온갖 방법을 다해 그의 종적을 찾았으나 놈을 붙잡지도 못하고 녀석은 외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있잖은가 말야. 요녀석과 사귀는 일이 용이하 지는 않지만, 좋았어, 어디 이렇게 한번 해보세. 사제는 빨리 옷을 갈아입고 그 반쪽짜리 도동 옷 을 나에게 주게." 소화상은 금선이 반쪽짜리 옷을 건네주자 그걸 들고 반석으로 내려갔다. 그가 동혈을 향해 은근 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도우의 근골과 재주에 우리 모두 그만 탄복했소이다. 나의 사제 옷을 가져간 것은 아마 쓸모 가 있어서였겠지요. 그래서 우리도 이왕 기증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한데 다시 돌려주시니 이 건 우리가 쩨쩨한 놈이 돼 부끄러울 뿐이오. 그래서 여기 조금 작으나마 옷이 한 벌 있기에 가져 왔습니다. 예의에 닿지는 못하지만 우선 급한 대로 받아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와 교우 를 허락하신다면 오늘밤 황혼 때 동굴 앞에서 기다리리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 오래 머물 입장이 못돼 곧 떠나야 합니다. 만나지 못하고 간다면 우리가 일을 끝낸 뒤 도우에게 드릴 새옷 을 지어가지고 다시 만나도록 하십시다." 소화상은 옷을 소나무 위에 걸어놓고 동굴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장이가 들어왔다. 금선이 급히 물었다. "그 꼬마녀석을 보았소?" 장이는 지상에 글을 썼다. <앞서는 그를 보지 못했는데 두 분이 옷을 걸어놓고 간 뒤 공중에서 돌연 몸을 드러냅디다. 도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건 알 수 없었어요. 그는 제형의 고쟁이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반쪽 짜리 옷을 입어보더군요. 소년은 원래 왜소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그 요동의 옷을 입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습니까. 정말 모양이 못 봐주겠더군요. 그는 이리저리 옷매무새를 고쳐보다가 영판 맘에 들지 않는지 금방 울상이 돼서는 옷을 가지고 동혈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나는 더 이상 거 기 잠복해 있을 필요가 없어 돌아왔죠.> 말이 끝나자마자 금선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화상은 금선이 공연히 나갔거니 생각해 별로 마 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장이와 함께 어떻게 하면 소년을 잡을까 의논을 계속했다. 소화상은 말로 하고 장이는 글로 썼다. 이렇게 밥 한 그릇 먹을 시간이 지났을 때 홀연 금선이 누군가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가 벼랑 쪽에서 들려왔다. 두 사람은 급히 동굴을 나가보았다. 이미 자기의 고쟁이로 완전히 바꿔입은 금선이 키가 작은 동자와 웃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동 자는 나삼(羅杉)에 망혜를 걸치고 금권(金圈)을 목에 걸고 있었다. 금선보다 한 자 가량 키가 작 은 동자는 바로 동혈 속의 소년이었다. 얼굴이 관옥 같고 눈이 차랑차랑하며 곱게 뻗은 두 눈빛 이 머리까지 땋은 모습은 마치 신선 같았다. 소화상과 장이는 그들이 오는 것을 보자 기뻐서 맞이하러 나갔다. 금선이 빙글거리며 두 사람에게 동자를 소개했다. "내가 새로 사귄 석형제입니다. 이름이 석생(石生)이죠. 우리 석동생에 대해선 아직 제대로 다 듣질 못했습니다. 자, 같이 동굴로 들어가서 그의 신세 내력을 듣도록 하죠. 석동생은 우리와 함 께 백만산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석생은 단번에 세 사람과 친숙해졌다. 특히 금선에 대해선 정이 깊어 형님, 형님하며 깊이 따랐 다. 동굴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 석생은 자기의 내력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석생의 모친은 <육지금선(陸地金仙)>이라 불리는 구화산(九華山) 쾌활촌(快活邨) 육민(陸敏)의 딸 육용파(陸蓉波)다. 육민은 원래 <극락진인(極樂眞人)> 이정허(李靜虛)의 제자였으나 입문만은 허용받지 못한 속세인이었다. 육민이 살던 구화촌은 육씨 집안이 그중 제일가는 부자였다. 한데 육민의 대에 이르러 손이 다 끊어지고 오로지 그만이 육씨의 대를 잇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턱없이 좋아하여 이 인과의 교우를 그렇게 좋아하곤 했다. 결혼하여 집안을 이룬 뒤 부모와 백부, 숙부들이 차례로 세 상을 떠서 그는 졸지에 백만금을 지닌 거부가 되었다. 재물이 많아지자 더욱 좋은 일에 희사를 많이해 그의 의로운 이름이 멀리 퍼졌다. 그러나 아직 자식이 없고 집안 일에 얽매여 멀리 친구를 찾아나서지는 못했다. 그래서 금품을 많이 보내 도처 의 유능한 사람을 쾌활촌에 초청, 재주를 배웠다. 자고로 유명한 사람은 찾아가야지, 초청해도 오지 않는 법. 이인기사가 구차히 몇 푼 돈냥에 그 를 찾아올 리는 없었다.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 무식한 작자들이었다. 그러나 육민은 실망하지 않 고 재주가 있던 없던 찾아오는 자는 후히 예로써 대접했다. 이렇게 수 년 동안 <죽은 명마를 천냥에 사는> 수법을 썼건만 명사는커녕 근사해 뵈는 인물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원래 기지가 있는 사람이라 경영에 뛰어나 식객이 많았음에도 가 산이 기울지는 않았다. 어느 해엔가 그는 창산에 선니(仙尼)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도봉에 띠집을 짓고 은거하 는데 과거와 미래를 잘 안다는 것이었다. 황산과 그가 사는 쾌활촌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육민은 한번 찾아가기로 마음먹었 다. 처음엔 찾아가 자신의 됨됨이와 선연이 있을까만 한번 물어보리라 생각했다. 며칠 먹을 식량 을 싸가지고 황산에 들어간 그는 천도봉까지 두루 찾아헤맸건만 신니는 종적도 찾을 수가 없었 다. 며칠을 허탕친 육민은 헛소문을 들은 거라 여기고 섭섭하지만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오어배(熬 魚背)를 지날 즈음 아차 발을 잘못 디뎌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이때 그는 도술을 알지 못했으나 무공은 이미 대단한 경지였다. 그는 떨어져 내리다가 벼랑 중간쯤에서 봄철을 맞아 무성히 뻗은 등나무를 거머쥐어 깊은 계곡에 몸을 묻는 불행만은 겨우 면할 수 있었다. 한데 그가 실족해서 떨어질 때 한 줄기 빛이 측면의 봉우리에서 번개처럼 날아왔다. 빛은 그가 벽에 걸린 등나무를 쥐는 순간 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육민은 등나무를 타고 올라 가까스로 벼랑에 앉자 그 빛에 대해 곰곰 생각했다. '신니가 있다는 말은 틀림이 없다. 그것은 강호에서 전해오는 비검일 것이다. 이인이 지척에 있 는데 어찌 그냥 돌아갈까 보냐!' 그는 돌아갈 마음을 싹둑 베어버리고 문필봉 위아래를 샅샅이 뒤졌다. 드디어 그는 문필봉 정상 의 바윗가에서 돌로 된 단로(丹爐)와 방석 하나를 발견했다. 일전에 그곳을 지날 때는 못 보던 물 건이었다. 분명 선니가 이곳에 머무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봉우리 정상에서 며칠을 기다렸다. 가져온 식량도 이제 다 먹고 동이 났다. 그랬건만 검선 은 종내 무소식, 나타나주지 않았다. 육민은 이 정도 기다리는 따위로는 결코 효과가 없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고의로 혼자 중얼 거렸다. "젠장, 식량이 다 떨어졌으니 기다릴 수가 있나. 아무리 훌륭한 검선이라도 이렇게 안 나타나는 건 정말 너무하는군. 에라, 그만 돌아가 버리자!" 그는 마음 속으로 돌아갈 마음이 추호도 없으면서 슬슬 산을 내려왔다. 그 때는 한창 산에 녹음 이 무르익는 사월이었다. 육민은 과일을 따서 주린 배를 채우며 뒤는 일체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내려갔다. 문필봉은 천길이나 우뚝 솟아 있는 산이다. 가파르기가 천하에 둘도 없어 걷기조차 힘든 곳이었 다. 그는 산과일을 따며 계속 늑장을 부렸으므로 한참 내려갔지만 산정에서 그리 멀리 오지 않고 있었다. 두 장쯤 되는 바위 아래로 내려올 때 육민은 돌연 요자번신(繇子飜身) 수법을 써서 재빨리 산정 으로 다시 올라갔다. 과연 중년의 도고(道姑)가 단로를 향해 방석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도고는 그를 보자마자 한무리 빛을 뿜어내 몸과 단로를 에워쌌다. 몇 자 가까이 다가가니 어리어리해지고 냉기가 으스스하게 침투해 와 모발이 삐쭉 섰다. 육민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낮게 묵축(默祝)을 외었다. 도고는 자리를 뜨지도 않고 빛을 거두지도 않았다. 단로에서는 불꽃이 일고 있었는데 색깔이 처 음엔 붉었다가 황색으로 다음엔 하얀색으로 변했다. 육민은 하루낮 하룻밤을 무릎꿇고 기다렸다. 이틀째가 되자 몸이 고되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그러나 이제 더는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단로에서 푸른 화염이 무섭게 치솟으며 오색 연꽃무늬를 수놓았다. 이와 동시에 빛살이 사 라지고 도고(道姑)가 몸을 드러냈다. 그녀는 단로에서 단약 한 줌을 꺼냈다. 맑은 향기가 코를 예 리하게 찔렀다. 단로 속의 화염과 연꽃무늬도 이젠 사라지고 없었다. 도고가 천천히 다가와 육민에게 말했다. "거사는 일어나시어 말씀을 하시지요." 육민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으나 일어날 생각은 없었다. 이제 신니가 말을 걸었으니 사세가 유 망해지지 않았는가.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계속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말했다. "신니께선 이 제자를 불쌍히 여겨 거두어주시기 바라옵니다." 도고가 대답했다. "거사의 의협은 익히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빈도는 문하에 거사를 거둘 수 없는 입장이오. 일어 나서 나와 이야기하시지 않겠소이까?" 육민은 더 이상 우길 수 없어 일어났다. 워낙 오래 무릎을 꿇은 탓에 다리와 허리가 시어서 가 까스로 몸을 가누었다. 도고가 말했다. "거사는 부유한 집에서 성장했으면서 이렇게 지성스러우니 정말 훌륭하시오. 이 단약 한 알을 들어보시오. 고통이 많이 덜하리다. 거사의 근골로 말한다면 원래 상품에 속하나 애석하게도 순양 (純陽)의 바탕을 잃었소이다. 기연이 있다 한들 정과를 얻기 어렵습니다. 거사께선 이번에 그냥 돌아가시도록 하십시오. 일 개월 이내에 이인이 그대를 찾아 제자로 거둘 것입니다. 선불(仙佛)은 되지 않는다 해도 장래 이 풍진을 해탈하게 되리다." 육민은 공경스레 단약을 받아 복용했다. 조금 있자 과연 정신이 상쾌해지고 몸이 거뜬해졌다. 그 는 정신이 나자 다시 꿇어엎드려 애절하게 제자로 거둬줄 것을 빌었다. 도고가 다시 말했다. "빈도는 법호가 찬하(餐霞)라오. 일전에 영약을 채취해 여기서 단약을 제련하고 있었는데 한 사 람이 실족해 벼랑에 떨어지기에 구하러 갔었지요. 한데 당신께선 무공을 익히고 있어 도중 등나 무를 잡았더이다. 그 때문에 거사한테 나의 행적이 노출되고 말았지요. 나는 원래 거사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지라 구태여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성의가 워낙 돈독하고 약간의 시간예측 착오가 있어 만날 수밖에 없었지요. 거사가 돌아올 것은 분명 알았지만 그 때가 마침 단약이 발화한 때여서 피할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거사가 밤을 새며 허다한 고초롤 겪 은 것도 단약 때문이었답니다. 아까 내가 말씀드린 대로 거사한테 훌륭한 분이 방문할 것입니다. 그분은 빈도의 선배로 이미 정과를 얻었으며 저보다는 백 배나 도가 높고 거사와는 일종의 인과 관계도 있답니다. 빨리 돌아가서 정실(靜室)을 마련하여 그분을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육민은 선인이 그를 속이지 않음을 믿고 있었다. 재차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을 게 분명했으므로 그는 칭사하고 그곳을 떴다. 집에 돌아오자 육민은 식객으로 있는 강호의 빈객들을 금품을 많이 주어 모두 돌려보냈다. 정실 을 하나 도로 마련한 그는 매일 마을 앞에 나아가 공손히 고인을 기다렸다. 반 달이 지나자 홀연 키가 큰 선풍도골의 도인 한 사람이 나타났다. 육민은 기이한 도인을 보자 황당히 달려가 절을 꾸벅했다. 도인은 아무 사양도 하지 않고 육민이 안내하는 대로 정실까지 극 진한 안내를 받았다. 부리는 사람을 다 내보낸 육민은 도인 앞에 납작 엎드려 절을 했다. "도인께선 법호가 어찌 되시옵니까?" 도인은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극락진인> 이정허니라." 그때 <극락진인>은 도를 이루기 바로 직전으로 오방오행(五方五行)의 정기로 영아(瓔兒)를 응련 (凝練)하고 있었다. 마침 <동방태을> 정기의 지맥이 구화산 쾌활촌 육민의 후원 바위 아래에 뻗 어 있으므로 그 발원점을 찾아 육민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한 달여 전 시간이 남은 탓에 창산 에 들러 노닐다가 우연히 찬하대사를 만났으며 육민의 진실됨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었다. 그 때 극락진인은 찬하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문호는 극히 근엄해 문도가 몇 되지 않아도 마겁이 늘상 많단 말이야. 나의 의발을 승계 하기가 보통 지난한 일이 아니지. 육모(陸某)는 비록 자질이 좋다 해도 순양의 몸도 아니잖은가. 여하간 태을정기를 채취하러 그의 집에 들러야 하니 그때 내 그의 심지가 어떤가를 알아보고 생 각을 해봄세. 하기야 내가 정기를 채취하려면 그와 만날 수밖에 없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까?" 찬하대사는 <극락진인>의 후배로 그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진인이 별로 강력히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망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녀는 육민의 성실함이 기특한 차에 슬쩍 그런 사실을 퉁기어 주었던 것이다. 이로 해서 육민은 <극락진인>한테서 일신의 도법을 배우게 되었다. 또한 기기묘묘한 검술도 전 수받았다. 그러나 정식으로 입문은 허락받지 못해 비공식 제자가 된 셈이었다. 육민은 선인의 전수를 받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을 생각을 했다. 집을 등지고 도술만을 수련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를 안 <극락진인>이 그에게 말했다. "세상에 불효한 신선은 없는 법이다. 너는 아직 대를 이을 아들을 두지 못했다. 더구나 일찍이 순양의 몸이 아니니 초겁(超劫)하기 전에는 나처럼 평지를 날 수도 없다. 출가해서 조용히 수양한 다 해도 산선(散仙: 제일 격이 낮은 신선)의 공과밖에는 이루지 못한다. 물론 이것도 사속(嗣續)을 정한 뒤에야 가능한 것이다." 육민은 스승의 훈교를 저버릴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그가 황산에 갈 무렵 아내는 잉태하고 있었 다. 해산하고 보니 공교롭게도 일남일녀의 쌍동이었다. 육민은 한꺼번에 자식을 둘씩이나 얻자 무 척 기뻐했다. 이때 <극락진인>은 이미 법련(法煉)을 끝내고 떠난 뒤라 육민은 아이들 가리키는 것을 아내에 게 맡기고 자신은 정실에 처박혀 용공에만 전력했다. 그의 쌍동이 가운데 사내는 외자 이름으로 달(達)이고, 계집애는 용파라 불렀다. 둘 다 구슬 같 고 눈처럼 고왔으며 총명이 비범했다. 그 중 용파는 근골도 좋은 데다 성품도 깨끗해 어려서부터 더러운 것은 가까이 하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았다. 커서 십여 세가 되자 그녀는 매일 육민의 방 에 문안을 꼬박꼬박 드리며 도술 배우기를 간청했다. 육민은 이때 아주 크게 정진되어 집안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게 하면서 널리 선행 을 펼치게 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멀리 외지에 나간 양 두문불출했고 처자들조차 만나지 않 았다. 한데 딸아이 용파가 어린 나이에 근골도 아주 좋을 뿐더러 도에 대한 마음이 성실한 것을 보자, 자연 마음이 끌렸다. 신선도 제자를 거두는데 하물며 친자식을 못 거둘 게 뭐 있겠는가. 차츰 용 파는 정실에 들어가게 되었고 입문공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 비상하게 머리가 좋아 한 번 배우면 잊지를 않았다. 육민은 그러한 딸을 보는 재미가 말할 수 없이 컸다. 몇 년이 지났다. 이제 집안의 대를 잇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집안도 여전히 번창했으므 로 육민은 용파만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는 외공을 쌓기 위해 딸을 데리고 검선이인과 교류를 쌓았다. 육칠 년에 한 번쯤 집에 돌아와 돌아가는 모양을 살피곤 했다. 육민은 유달리 망창산을 좋아하여 토끼바위 현상동에 주거를 정했다. 그는 자신이 순양의 몸이 아니어서 온갖 세상의 선연을 맺지도 정과를 얻지 못하는 것을 늘 한탄했다. 그것은 종신토록 헤 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그래서 그는 용파에게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육민은 <극락진인>을 만날 때마다 그녀의 장래를 부탁했다. 그러니 매번 원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화가 난 용파는 <극락진인> 앞에서 만일 정에 얽히면 천벌을 받겠노라 굳게 맹서했다. 그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극락진인>이 용파에게 말했다. "너의 뜻은 크다만은 힘이 박한 게 문제요, 얼장은 무거운데 선연이 얕은 게 근심이다. 가련한 너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내 영부를 한 장 줄 터이니 몸을 보호하는 데 긴요히 쓰거라." 용파는 무릎꿇고 영부를 받아 고이 간직했다. 그로부터 <극락진인>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육민은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부녀 둘이서 현상동에 은거 했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수련만 쌓았고 밖에 나갈 때도 공행을 닦는 데만 전심했다. 그러던 어느 때 해남 취평도(聚萍島), 백석동(白石洞)의 <능허자(凌虛子)> 최해객(崔海客)이 우 중(虞重)과 양리(楊鯉) 두 제자를 거느리고 명산을 찾아 유람차 망창산에 들러 육민부녀를 만났 다. 능허자도 원래 산선이었다. 그는 육민이 옛날 용파를 데리고 남해에 채약하러 갔을 때 사귄 사 람이었다. 오래 보지 못하던 사람끼리 갑자기 만나자 기쁘기도 하려니와 육민은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 손님이 온 격이어서 그들 사도를 머물러 놀다 가라고 권유했다. 능허자도 본래 망창산을 몹시 좋아하던 참이라 육민이 은근하게 머물 것을 권하자 현상동에 머 물기로 했다. 능허자는 바둑을 좋아했고 이 또한 육민의 기호에 딱 들어맞았다. 그들은 매일 대국 에 몰두했다. 능허자의 제자 가운데 우중은 성격이 괴벽하고 말이 없으며 혼자 있기를 즐겨해서 비록 객지에 나와 있어도 매일의 용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리는 능허자가 새로 거둔 열여섯밖에 안 된 애송이 제자로 온화하고 잘생긴 값을 하느 라 말하기 전에 웃음을 먼저 짓고 사람과 친숙하게 대하는 천부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아직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애티가 온몸에 배어 있었고 용파와의 대화도 스스럼이 없었다. 선가(仙家)는 또 남녀를 기탄하지 않는 터여서 양리가 용파에 친근하게 구는 것을 누구 하나 신 경쓰지 않았다. 양리는 놀러다니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으므로 망창산에 오래 산 용파를 졸라 각 처의 경관 좋은 곳을 두루 구경하며 다녔다. 그날 두 사람은 동굴 앞에서 한가로이 산 밑을 내려다보다가 운무가 짙은 앞쪽을 바라보며 양리 가 말했다. "이 바위산은 삼면의 경치가 다 좋은데 유독 문필봉 쪽만은 천길이나 되는 벼랑으로 별다른 경 관이 없단 말이야." 그는 무심코 이렇게 내뱉았고 용파는 그저 그런가 하며 크게 유념하지 않았다. 그뒤 남산 일대 에서 유람하던 두 사람은 큰 개울에 뒤뚱하게 생긴 넓적한 바위를 발견했다. 옥처럼 반들반들한 게 정감이 갔다. 용파는 바위를 보자 불현듯 생각이 나서 양리에게 말했다. "당신 우리 동굴 앞이 아무 풍치도 없이 가파르기만 하다고 했지? 내가 이 바위를 가져다가 절 벽을 장식해 놓으면 어떨까? 사람이 쉬 볼 수 없는 기이한 경관이 되지 않을까?" 양리는 나이가 어려 일 저지르기를 좋아하니 십분 찬동했다. 그 당시 암벽 아래에는 폭포와 깊은 못이 있었다. 두 사람은 지형에 대해 한참 의논을 하고 바 위를 옮겨다 놓을 장소를 결정했다. 바위는 폭포의 바로 아래쪽 암벽의 틈에 끼워 놓기로 합의했 고 옮기는 것은 용파가 법술로 해냈다. 멋을 더 내기 위해 덮개 구실을 할 고송 한 그루를 옮겨 심었다. 바위는 가파른 암벽 중간쯤에서 툭 튀어나와 절벽 아래는 깊은 못이요, 위쪽은 폭포가 은으로 만든 발 마냥 하얀 실처럼 뻗어내렸다. 이제 멋들어진 풍경이 없다는 말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쏟 아지는 폭포를 보는 정취와 낚시를 할 수 있는 재미가 같이 어우러져 있는 멋진 관망대였다. 두 사람은 바위와 노송을 잘 설치해 놓자 동굴에 돌아와 각자 스승에게 이 사실을 알려드렸다. 그러나 스승들은 똑같이 빙그레 웃을 뿐 유념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용파는 일과를 끝내자 양리를 찾았으나 동부에는 없었다. 그녀는 바위 주변에 예쁜 꽃들이나 심을까 하는 생각이 나서 절벽으로 갔다. 바위 위에 가보니 양리가 취한 사람처럼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허다한 기화요초가 널려 있었다. 남산에서 늘상 보는 꽃과 풀이었다. 양리도 아마 그녀처럼 꽃으로 바위 주변을 장식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한데 수도하는 사람이 무단히 혼수상 태에 빠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용파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양리에게 다가가 불러 깨웠다. 양리는 쉬이 깨어나지 않았다. 그때 화초 중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묘한 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붉은 난초처럼 생겼으나 난초는 아니었고 유별나 게 컸다. 꽃판이 한 자도 더 되었는데 한 줄기에 가지가 두 개로 갈라져 두 송이의 꽃이 되어 있 었다. 꽃은 붉고 잎은 초록인데 아름답기가 형언키 어려웠다. 더욱 기이한 것은 두 송이 꽃이 서 로 등지어 피어난 것이었다. 꽃을 좋아하는 용파는 기이한 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집어들어 냄 새를 맡았다. 기묘한 향내가 머릿속까지 침투해 사람을 취하게 했다. '금방 취할 것 같네. 별스러운 꽃도 다 있군.' 그녀는 꽃을 놓고 양리를 다시 불러 깨웠다. 한데 홀연 머리가 띵하고 눈이 어지러워지며 이명 이 윙하고 귀를 울렸다. 한 가닥 후끈한 열기가 다리 아래에서 몸 위로 솟구쳤다. 온몸이 솜처럼 나른해지며 쓰러질 것 같았다. 꽃의 독에 중독된 것이었다. 그녀는 꽃을 놓자 날아오르려 했다. 허나 되지 않았다. 두 다리의 힘이 쑥 빠지며 그녀는 혼절했 다. 해가 서산에 질때 양리가 먼저 깨어났다. 그는 아침 일찍 할 일이 없자 기화이초를 석벽에 옮겨 심을 생각을 했다. 꽃을 채집할 때 그는 향기까지 맡을 사이가 없어 기이해 보이는 꽃을 몽땅 뿌리째 뽑았다. 바위 있는 곳에 와서 두 그 루를 심었을 때 양리는 그 독특한 꽃에 눈이 갔다. 그는 이상한 생각이 나서 꽃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묘한 향내가 코를 찔렀다. 용파는 뒤늦게 와서 양리의 전철을 밟은 것이다. 이 꽃의 이름은 합환련(合歡蓮)이었다. 천지간의 음기가 모여 생성되는 희한한 꽃으로 향내만 맡 기만 하면 술에 취한 듯 쓰러져 여섯 시간이 지나야 깨어난다. 보통으론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희 귀한 꽃이어서 이파의 사교도들은 지극한 보물로 쳤다. 어쩌다 우연히 발견할 수는 있어도 구해 서 찾아지는 꽃은 아니다. 한데 이 천하에 희귀한 꽃이 우연히 양리의 눈에 띄어 큰 화를 불러 일으켰고 용파의 공행과 생 명을 해치게끔 됐다. 그러나 이 살신지화(殺身之禍)도 다소의 고통과 곡절을 거치긴 했어도 용파 에겐 화를 복으로 바꾸는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양리는 깨어난 뒤 자기 옆에 용파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그녀를 소리쳐 깨웠다. 뭔가 이상히 여겼더라면 능허자와 육민을 불렀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무 혐의를 받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파와 워낙 친근한 데다 그녀도 자신처럼 중독된 것을 알자 다급한 마음에 계속 소리쳐 불 렀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용파는 깨어났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아까의 기이한 꽃을 찾았 다. 하나 용파가 손을 놓을 때 벼랑 아래 연못으로 굴러떨어져 꽃이 그곳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이때 육민의 성난 듯한 부름소리가 벼랑 위에서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굴 쪽으로 날아 올라갔 다. 동굴에는 남해에서 온 심부름꾼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섬에 일이 생겨 능허자 사도들의 귀환 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능허자는 급속히 돌아가야 했기에 양리를 찾고 있었다. 그동안 오랫동안 함께 있다 헤어지자니 아쉬움이 컸다. 피차 석별의 정을 나누며 안타까와할 뿐 이었다. 한데 육민은 능허자 일행을 떠나보낼 때 시종 노한 표정을 지었다. 용파는 당시 뭔가 이 상했으나 그리 괘념은 하지 않았다. 또 꽃에 중독됐었다는 이야기도 할 짬이 없어서 그렁저렁 지 나가고 말았다. 그로부터 용파는 몸이 부자유스럽고 정신마저도 상쾌하지 못해 늘 황홀했다. 심신이 불편한만큼 그녀는 매일의 공과(功果)를 더욱 열심히 했다. 그러나 육민은 매일 화난 얼굴에 오만 인상을 쓰며 딸의 언행과 거동만을 예의 주시했다. 뭔가 이해되지 않은 용파는 여러 번 왜 그러느냐고 아버지에게 물었으나 아버지는 함구한 채 대답이 없었다. 그런 어느날 용파는 반석 위에 앉아 나른한 속에 풍경을 보다 문득 생각했다. '내가 꽃에 중독됐어도 몇 시진 혼미하다 깨어났으면 완전히 나을 텐데. 왜 이다지도 병든 양 이상할까? 매일 나른해지는 것은 도대체 웬일일까.'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하다 지친 용파는 늘 편하게 반석 위에 누 워 폭포소리를 들었다. 바로 이때 벼랑에서 분노에 찬 호통소리가 들렸다. "수치도 모르는 이 천한 년아! 그래 나를 속터져 죽게 할 셈이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색 검광이 번개처럼 날아왔다. 용파는 부친의 호갈소리가 들리자 놀라 자지러졌다. '아버지는 근년 한 번도 나를 책망한 적이 없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화를 내실까? 독수까지 쓰 려고 하시잖아!' 그러나 그녀의 생각도 순간, 위기일발의 위험이 그녀를 핍박해 왔다. 용파는 자신의 비검으로 부친의 검광을 막으며 소리쳐 물었다. "아버님, 소녀가 무슨 잘못이 있어 이렇게 죽이려 하십니까? 소녀가 수도를 게을리한 적이라도 있습니까?" 은빛 검광이 눈부시게 역습해 오는 사이로 육민의 사나운 호통 소리가 들렸다. "버르장머리 없는 년, 어디서 말대답이냐! 옛날 은사 <극락진인>이 너를 보고 얼장이 무겁고 선 연이 얕아 정과를 얻지 못하리라던 말을 기억하고 있느냐. 내 그때 네 년 보고 시집이나 가라고 그렇게 권했건만, 뭣이 어째, 정에 얽히면 천벌을 받어? 그래서 수도하여 백세의 공적을 이룬 년 이 젖내나는 놈팽이한테 반했느냐? 이 애비 앞에서 공공연히 추태를 부리다니. 좋다, 네 말대로 천벌을 받아라! 너를 남겨뒀다가는 내 일세 영명(英名)이 천하에 추하게 되겠다!" 육민이 일지를 뿌리자 천만 개의 은빛 꽃이 질풍노도처럼 용파를 향해 밀려갔다. 그날 육민과 능허자는 바둑을 두다가 남해로부터의 급보를 접했다. 섬에 변고가 있어 능허자는 급히 돌아가야 했다. 그때 마침 용파와 양리는 곁에 있지 않아 능허자는 우중과 함께 돌아갈 일 을 의논했다. 그들이 큰 화를 당해 경황이 없는 것을 보자 육민은 친히 양리를 찾으러 나갔다. 양 리는 딸 용파와 함께 벼랑가 바위 위에 있을 게 분명했다. 그가 바위 가까이 갔을 때 아래쪽에서 양리의 애틋한 말소리가 들렸다. "사저, 드디어 깨어났구려" 목소리가 농밀한 게 육민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순간 옛날 <극락진인>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딸아이가 평소 장중한 편이지만 아차 정마(情魔)에 빠지면 다년간의 고뇌어린 공적이 순 식간에 헛될 판이다. 자신의 영명마저도 물거품이 될 게 아닌가. 육민은 두 사람의 작태를 머리에 그리며 급히 벼랑 밑을 내려다보았다. 용파가 바위에 누워 게 슴츠레한 눈을 뜨고 있었고 양리가 무릎꿇고 다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혹이 훅, 그의 가슴 을 후려쳤다. 노한 육민은 사납게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사람이 올라오자 그는 유심히 그들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양리는 외면상으로 영기가 발랄했 고 안으로도 정기가 넘쳐흐르는 게 여전히 순양의 몸이었다. 약간 마음을 놓은 육민은 그러나 딸 아이의 안정되지 않은 모습에 완전히 맘을 놓지 못했다. 능허자 사도가 떠나갈 때는 그들을 다정히 보내느라 딸에게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다. 손님을 보낸 뒤 용파를 자세히 관찰한 육민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원기를 상실한 것 같 진 않았으나 신기와 행동거지가 하루하루 달라졌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자 육민은 딸아이가 황홀경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허리가 퉁퉁해져 아기를 가진 게 틀림없음을 확신했다. 딸은 이미 진음(眞陰)을 상실한 것이다. '아, 이 무슨 마귀의 조화속인가. 능허자와 한번 만나 막역하게 지낸 게 이런 결과를 가져오다 니! 그 자의 수행 경력 등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것이 크나큰 실수였도다. 산선은 채보를 많이 한다더니 그의 제자도 역시 그런 인물이란 말인가? 양리, 이 짐승만도 못한 놈이 사법으로 내 딸 의 정기를 앗아가다니!'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 같았고 한이 맺혔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 야 딸에게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고 그녀를 죽이든 능허자를 찾아 그들 사도에게 복수를 하든, 결 단을 내리라 작심했다. 그때 용파는 또 몹시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바위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육민은 이를 바드득 갈 며 뒤를 따라갔다.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니 용파는 묘한 몸매를 지으며 앉았다 일어났다 안절부 절 못하고 혼자 뭐라 연신 씨부렁거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허리를 하늘거리면서 바위에 누웠다. 그 모습이 그날 양리를 바라볼 때와 똑같았다. 연정이 솟구쳐 춘흥이 발동하는 인상을 주었다. 화가 불같이 인 육민은 끝내 참지 못하고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비검을 날렸다. 무조건 찔러 죽이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용파는 부친을 따라 명산에서 오래 도술을 배워 자신의 비검도 지니고 있었다. 하나 육 민의 태백분광검(太白分光劍)에는 미칠 수가 없었다. 이 검은 <극락진인>이 제련하여 물려준 명 검이었다. 거기에 불같이 화난 육민이니 용파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추호의 사정도 두지 않고 몰아쳐 오는 검광 앞에서 용파는 계속 읍소했으나 부친의 검은 무정할 뿐이었다. 완전히 정과 의리를 끊은 독검이 돼 그녀를 핍박했다. 이제 용파의 비검은 점차 광망을 잃어갔다. 바위는 위아래로 흔들리고 은빛은 사방을 에워싸 위 기는 시시각각 다가왔다. 용파는 마지막으로 애원했다. "아버님, 손을 멈추고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절대 도망치진 않겠어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당장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부녀의 정으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육민은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욕을 퍼부었다 "이제와서 무슨 애비라느냐. 도망갈 생각은 마라! 문호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고서는 은사 <극락 진인>을 뵐 면목이 없다!" 육민이 또다시 <극락진인>을 들먹이자 용파는 문득 깨우치는 게 있었다. 옛날 <극락진인>이 자기에게 영부 하나를 주었지 않은가. 그때 조사는 그녀에게 목숨이 위태로울 때 그 부적을 쓰라 고 했다. 지금 쓰지 않고 언제 쓰란 말인가. 그녀는 품속에서 영부를 꺼냈다. 이때 그녀의 비검은 광망이 다 사라지고 추락하기 직전이었다. 아버지의 비검이 날아가는 순간 그녀의 몸과 머리는 따로따로가 될 것이다. 천만 위급한 순간 그녀는 선천진기로 영부를 후욱 뿜 었다. '쨍그렁!' 용파의 비검이 분쇄되고 은빛이 번개처럼 뻗쳐와 그녀는 비명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갔 다. 바로 이때 누런빛이 그녀의 뒤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금빛이 비치자 암벽이 돌연 두 쪽이 나 서 쩍 벌어졌다. 용파는 황급히 그 안으로 도망쳤다. 그녀의 몸이 들어가자마자 암벽은 다시 합쳐 버렸다. 육민의 검광이 그녀의 뒤를 바람처럼 쫓아왔으나 기진맥진한 용파는 암벽 속에서 이내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동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깜깜한 속에 번쩍번쩍하는 은빛이 그녀 앞에서 어른거렸다. 그것은 평소 부친이 애지중지하던 비검이었다. 용파가 손을 뻗어 한번 운용해 보니 부친과 연습할 때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녀는 놀란 마음이 진정되자 지난 일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영부가 자기를 이 동혈 속에 숨겨준 것 같았다. 그녀는 부친의 비검으로 석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암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놀랍고 걱정스러워 방황하고 있는데 홀연 석벽 밖에서 육민의 말소리가 들렸다. "용아야, 깨어났느냐? 내 정말 잘못했구나. 이 애비가 공연히 의심해 큰 참변이 날 뻔했다. 다행 히 사조의 영부 덕택에 화가 복으로 변했단다. 스승이 남긴 영부 속의 글을 보고서야 너의 한 많 은 전생의 인연관계를 알았구나. 용아야, 너는 이 동혈에서 삼십육 년을 참수해야 전세의 얼장을 끝내고 정과를 얻을 수가 있다. 물론 본문의 심법으로 면벽고행을 해야 한다." 용파는 완연히 달라진 부친의 다정한 목소리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녀는 석벽 을 사이하여 부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지금 잉태를 하고 있다. 사람 때문에 아기를 가진 건 아니고 전생의 업보로 정해진 것이 다. 네가 아차 잘못하여 독화(毒花)인 합환련을 맡지 않았느냐. 그로 해서 영석(靈石)의 정기에 감 응되어 애기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아이는 앞으로 우리 부녀보다 월등한 성취를 이룰 것이야. 낳 은 뒤에 잘 길러야 한다. 때가 되기 전까지 이 석벽은 열리지 않는다. 너의 사조 영부로 봉쇄돼 있기 때문이다. 동혈 속에 있는 선검(仙劍)은 사조가 나에게 하사해 준 법보이다. 그 법보를 너에 게 줄 터이니 도를 이룬 뒤에 너의 아들에게 주도록 하라. 나는 사조의 명을 따라 북해로 간다. 스승은 내가 다년간 수도했어도 공과를 얻지 못하는 것을 가련히 여겨 북해의 한빙(寒氷)으로 해 탈토록 해주셨다. 겁수를 바꾸어 너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든 단약과 법보는 현상동에 남겨놓을 테니 후에 너의 아들에게 주도록 해라!" 용파는 부친의 말을 듣자 방성통곡을 했다. 육민은 성벽 밖에서 계속 달래고 위로했다. "얘야, 슬퍼하지 마라. 이생에서 다 못한 정은 저생에서 나누자꾸나. 이번 일은 화가 복이 되었 고 우리 부녀는 잠시 헤어질 뿐이다." 그러나 용파는 아픈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사실 육민으로서도 견디기 어려운 이별이었다. 부녀 두 사람은 이렇게 암벽을 사이하여 지척이 하늘끝인 양 애끓는 간장을 녹였다. 육민은 스승의 명 을 어길 수 없어 오래 지체치 못하고 떠나갔다. 이로부터 용파는 암혈 속에서 고된 수련을 쌓았다. 이십일 년이 지나자 공행이 정진되어 대충 미래를 알게 되었다. 때에 맞추어 산기가 있자 비검으로 몸을 갈라 아기를 낳았다. 영석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석생이라 지었다. 모자 두 사람은 암혈에서 수련을 계속해 다시 십오 년이 지났다. 석생은 특출난 성품을 지녀 무 엇이든 한 번 가르치면 이내 깨우쳤다. 다만 옷이 없어 내내 발가벗은 채로 지냈다. 용파는 자기의 옷에서 실을 뽑고 비검을 바늘 삼아 어린아이 옷을 한 벌 만들었다. 그녀의 어머 니가 집을 떠날 때 준 비녀로는 법술을 써서 금권 하나를 제련했다. 그러나 용파는 이것들을 아 들에게 주지 않고 법술로 은밀한 곳에 봉쇄해 놓았다. 그녀는 좌화할 때가 되자 아들에게 그동안 의 지난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 뒤 이렇게 당부했다. "나는 면벽 삼십육 년에 사조 <극락진인>의 진전으로 깨우침을 얻어 상승의 정과를 얻었다. 이 번에 원신이 연성하여 참모습을 얻으면 곧 비승하게 된다. 내가 떠나면 암벽도 열릴 것이다. 이로 부터 너도 푸른 하늘과 구름 사이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다. 그러나 수도하는 사람이 어찌 옷 도 걸치지 않고 밖을 나다닐 수 있겠느냐. 내가 너에게 옷을 주지 않는 것은 함부로 놀러다니다 가 사악한 마도한테 꼬임을 받을까 저어해서이다. 옷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본문의 가법을 어기 면서까지 남의 물건은 훔치지 마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석생이 대답하자 용파는 그의 장래에 대해 알려주었다. "너는 이제 어머니가 없는 아이란다. 너 혼자란 걸 명심하고 만사에 조심을 해야 한다. 남에게 잘해야 하지만 마도의 꾀에도 빠지지 않게 일층 조심해라. 암석 밖의 폭포가 끊기고 못의 물이 마를 때가 바로 네가 여기를 떠날 날이니라. 너를 데려갈 사람은 아미파 장교의 전세의 아들인 제금선이다. 그도 너처럼 어린 동자같이 생겼다. 이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도 만나지 말거라. 그 는 너를 아미파에 데려다 입문시킬 것이고 정과도 얻게 될 것이다." 석생은 인자한 모친이 곧 비승하여 멀리 떠나간다는 말을 듣자 슬픔에 빠져버렸다. 다음날 한밤중이 되자 용파는 다시 석생에게 조심하라 당부하고 비검을 전수해 주었다. "이 비검은 나의 사조 <극락진인>께서 너의 조부에게 하사했던 것인데 조부는 또 에미에게 주 었느니라. 태백분광검이라는 명검이니 잘 연마하여 긴히 쓰도록 하여라." 그녀는 현상동의 법보 등이 숨겨 있는 곳도 알려주었다. 모든 안 배가 끝나자 용파는 두 손으로 암벽을 한 차례 가리켰다. 일진의 은은한 뇌성이 들리고 홀연 암벽이 개벽했다. 그녀는 석생을 데 리고 나가 여러 지세와 경물을 가르쳐 주고 동혈 밖의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게 등나무 덩굴 을 옮겨다 심어주었다. 석생은 천기의 넓음과 별과 달, 해 그리고 풍경의 아름다움에 그만 매료되어 버렸다. 그런 중에 도 어머니를 잃는다는 슬픔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머니를 따라 다시 동혈로 돌아갔다. 용파는 마음을 다져먹고 몇 마디 당부를 하자 암혈의 뒷벽을 일지로 가리켰다. 그녀의 몸이 날 아오르고 눈 깜짝할 사이 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위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은은히 새겨졌다. 석생이 주르르 눈물을 쏟고 있을 때 한 송이 채석 구름이 바위의 사람 그림자 속에서 두둥실 나 타났다. 구름 위에는 조그만한 여자아이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석생이 놀라 바라보니 얼굴이 자 기의 어머니와 똑같았다. "어머니!" 석생이 외쳐부르는 찰나, 구름은 둥실둥실 날아가 버렸다. 그는 상심하여 한동안 석상처럼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망연히 하늘을 응시하던 석생은 이내 통곡하지 시작했다. 얼마나 통곡하였을 까! 울음에 지친 석생은 동혈에 들어와 눕는 즉시 잠이 들었다. 석생은 비록 놀랄 만한 재주를 몸에 지니고 있었으나 처음 이 세상을 보는 데다 어머니의 경고 가 워낙 강렬하여 함부로 나다니지 않았다. 그는 모친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모습이 새겨진 벽을 향해 부단히 수련했다. 한동안이 지나 슬기가 생긴 석생은 솔가지와 나뭇잎을 따다가 동혈 바닥에 깔았다. 그러면서 매 일 폭포가 끊기고 샘이 바닥나기를 기다렸다. 못이 마르면 자기를 데리러 올 사람이 나타난다니 그것만 기다려졌다. 그런 어느날 검광이 번뜩이는 것을 본 석생은 암혈 밖으로 나가 보았다. 한 여자가 요망스럽게 생긴 세 남자와 싸우고 있었다. 여자의 자색검광은 정말로 무서웠다. 금안(金眼)의 검은 독수리를 타고 온 여자는 눈 깜짝할 사 이에 세 괴신을 썽둥썽둥 짤라버렸다. 그러더니 그 여자는 자기의 동굴이나 마찬가지인 현상동에 머무는 것이었다. 석생은 마음 속에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무척 번민했다. 모친이 가르쳐 준 바에 따르 면 저 여자의 검법도 아미파였다. 한데 왜 동자 같은 사내는 아니 나타난단 말인가. '저 여자와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지만 이 발가벗은 몸으로 어떻게 여자와 만난단 말야. 내 참!' 연일 지진이 나기 시작했다. '그르릉 그르릉!' 하며 암반이 들썩들썩하더니 폭포의 물줄기가 작 아졌다. 못의 물도 차츰 줄어들어 바닥이 나타날 것 같았다. 그는 여러 차례 산 북쪽을 밤에 놀러 나가 보았다. 그럴 때마다 검은빛을 타고 날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석생은 그 사람을 줄줄 따라가 보았다. 저 사람과 한번 이야기해 볼까 하고 몇 번 망설었지만 그만두었다. 모친이 떠날 때 간곡히 당부하던 말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가기 전까지는 사람들과 만나지 말라 하셨지. 하지만 텅빈 산에 이렇게 홀로 살자니 적막해 죽을 지경이군. 기연이고 나를 데리러 올 동자고 간에 영영 못 만나면 어쩐다지?' 그날 밤 밤놀이에서 돌아오다가 석생은 동굴의 여자에게 들켰다. 삼 일 뒤 그는 살그머니 동굴 을 염탐하러 갔다. 여자의 동료가 혹 있나 알아볼 생각이었다. 한데 동굴에 접근하기도 전에 그 새까만 독수리가 덮쳐왔다. 마음 속으로야 이까짓 짐승은 가소로왔다. 한번 시험삼아 손을 썼는 데, 웬걸 검정 독수리의 터럭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 말대로 세상은 넓구나. 한 마리 독수리가 이렇게 대단하니 그 여자는 어느 정도란 말인 가. 세상에 유능한 사람이 많다던 어머니 말씀이 옳았어.' 그는 동굴 속의 여자가 알고 쫓아올까 봐 급히 돌아와 버렸다. 독수리도 끝까지 쫓아오진 않았 다. 사제간의 원한 兩仙童 風穴盜氷蠶 四劍俠 蠻山驚醜怪 석생이 눈이 빠져라 기다리며 며칠이 지났다. 두 차례 지진에 산이 흔들리더니 폭포가 완전히 멎어버렸다. 폭포가 끊기니 연못의 물도 자연 바닥이 났다. 한데 온다던 동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석생이 난생 처음 실망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홀연 세 줄기 검광이 벼랑 위에 나타났다. 그중 검광 하나는 전날에 보았던 여자의 것과 흡사했다. 혹시 자기를 데리러 올 사람이 그들 중에 있 나 하여 석생은 염탐하러 몰래 벼랑가로 가보았다. 그러나 검광들은 번개같이 나타나 소리도 없 이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여가가 없었다. 그날 밤 석생은 냇가에 나가 목욕을 하고 돌아왔다. 이때 검광이 비쳤던지 벼랑 위에 나와 있던 사람한테 그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검광을 타고 내려와 바위 아래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소화상이었는데 석생에게는 그 역시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행히 그날 밤 따라 운무가 워낙 짙어서 소화상은 석생이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소화상은 아래쪽에서 하늘이 거의 밝을 때까지 두리번거리며 수색했다. 벼랑에서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중에는 과연 젊은 동자가 있었다. 모친이 말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석 생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뛰어나가 그를 만나려던 석생은 주춤 멈추어섰다. 잠깐 생각해 보니 자신은 발가벗은 몸이었다.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 아닌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석생은 한동안 망설였다.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 금선일행이 반석 위 에 나타났고 급기야 그를 발견하고는 대번에 잡으려 덤볐다. 당황한 석생은 꼭 만나야 할 사람임 을 뻔히 알면서도 번개같이 도망쳐 버렸다. 그는 은형수법이 능란해 셋이 자기를 쫓아나서자 슬쩍 몸을 숨겼다가 다시 동혈로 돌아왔다. 금 선 등이 각기 지킬 곳을 정해 잠복하는 것을 보고 그는 웃음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금선이 반석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여러 차례 말을 걸까 했으나 도시 부끄러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옷을 어디에 두었는지 물어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옷이란 이 럴 때 쓰자고 만든 게 아닌가. 여러 곳을 뒤져봤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차츰 마음이 다급해졌다. 날이 밝자 금선은 목욕하러 갔고, 소화상은 동료와 함께 동굴로 가버렸다. 그 소화상은 자기에겐 도통 관심도 없고 곧 망창산을 뜰 태세였다. 석생은 마음이 더욱 조급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 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게 뻔했다. '옳지, 저 동자가 목욕하러 간다고 했지. 목욕을 한다면 나같이 발가벗을 게 아닌가. 그가 옷을 벗었을 때 나가서 만나자. 똑같이 벗었을 때야 부끄러울 것 없지 뭐. 그때 모든 걸 설명하고 옷도 하나 얻어달래서 입어야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석생은 반석으로 나와 사방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엿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검광을 타고 뒤를 쫓았다. 금선의 검광이 날아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금선은 얼마 날아가지 않아 성성이와 말곰들을 발견했었다. 그는 짐승들이 사람의 시체 를 찢는 걸 나무라기 위해 지상에 내렸고, 그 때문에 처음 가던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의 개울에 가서 목욕을 했다. 석생은 한참을 비행했는 데도 금선을 발견하지 못하자 도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그는 찬찬히 주위를 살폈는데 바위 위에 옷이 널려 있는 게 보였다. 그 한켠에서는 성성이와 말곰들이 법석을 떨고 있었다. '오호, 주인 없는 옷이 있다! 짐승들이 사람은 잡아먹고 옷만 남은 게구나. 주인 없는 옷이라면 내가 갖다 입어주자!' 그는 검광을 낮춰 바위 위로 내려갔다. 성성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발가숭이가 옷을 도둑질해 가 자 아우성을 치며 덤벼들었다. 석생의 재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따위 성성이나 말곰은 일격에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 에 처음 나와 살생을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널린 옷 가운데 좋아뵈는 한 벌을 집어들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공중에 날아 올라간 석생은 뒤를 돌아보았다. 짐승들이 버글대는 옆 개울에서 한 사람이 목욕하 며 느긋이 즐기고 있는 게 보였다. 바로 자기가 찾으려던 동자였다. 그때서야 그는 목욕하고 있는 금선의 옷을 슬쩍한 것을 알았다. '이게 저 동자의 옷일까?' 석생은 멈칫하는 마음 속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의아해 하는 중에도 검광은 빨라서 경각간에 동혈로 돌아왔다. 그는 우선 옷을 입고 보았다. 금선은 옷을 그에게 걸맞게 짧게 입었으므로 단번 에 쩍 들어맞았다. 석생 자신이 생각해도 처음 입는 옷치고 썩 마음에 맞는 것이었다. 이제 동굴로 찾아가 그들을 만나기만 하면 되었다. 석생은 동혈을 나서려다 문득 어머니의 교훈 이 생각났다. 우리 집안의 가법은 극히 엄해 남의 물건은 절대 훔치지 않는다고 했다. 한데 자신 은 어떤가. 더구나 훔친 옷은 지금 자기가 만나야 할 사람의 것이 아닌가. 석생은 갑자기 난관에 부딪쳤다. 이제와서 옷을 돌려주자니 그것도 막연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당황하고 있을 때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바로 금선과 소화상이 옷을 잃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만약 옷을 돌려주지 않으면 상종을 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석생에겐 이 거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창피하고 미안해진 석생은 두 사람 몰래 옷을 돌려주기로 했다. 그는 동혈 의 안쪽으로 나 있는 자기만 아는 비밀출구로 나와 현상동으로 날아갔다. 동부 입구에 웃도리를 벗어놓고 부랴부랴 돌아왔다. 조금 있자 소화상과 금선이 반석에 내려와 옷은 이미 기증한 건데 왜 돌려주었느냐니, 아니면 이 헌옷이라도 주겠다거니, 친구로 사귀게 저녁에 올라오라거니 한바탕 떠벌리다 돌아갔다. 두 사람이 떠나자 석생은 비밀출구를 통해 반석 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고 엿보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들은 악의가 없이 자기와 친구가 되려는 게 분명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이 준 옷을 입어보았다. 한데 이 도포는 짧고 통통해서 도시 마음에 들 지 않았다. 금선의 옷처럼 조금도 멋들어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이 시큰둥해진 석생은 요 렇게 저렇게 옷매무새를 고쳐보았으나 허탕이었다. 차마 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젠장, 이게 뭐람. 세상에 처음 나가는 마당에 옷 한 벌이 없으니 이런 처량한 신세가 세상에 어 디 있을까!' 그는 상심한 끝에 옷을 다 벗어버리고 동혈로 뛰쳐 들어갔다.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는 석 벽에 새겨진 모친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어머니, 내 옷을 어디에 두셨습니까? 이 불쌍한 자식은 옷 하나 없는 처량한 고아올시다. 어머 님의 깊은 말씀을 저버릴 수 없어 저 동자를 만나러 가야 할 텐데 이 꼴로 어떻게 나갑니까요? 저들이 가버리면 이 넓은 세상 천지에서 다시는 못 만나겠지요?' 그가 한창 서럽게 울때 금선이 동혈 밖에 나타났다. 어제 본 꼬마 소년이 웃통을 완전히 벗은 채 석벽을 향해 구슬피 울고 있었다. 금선은 혹 소년을 경동시킬까 겁이 나서 동혈 밖 멀찌감치 서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여보게, 무슨 일로 그리 슬퍼하고 있는가? 내가 도와줄 수는 없을까?" 그의 다정한 말을 들었으련만 소년은 계속 울었다. 금선은 조금씩 조금씩 다가갔다. 소년은 계속 울었으나 금선이 다가오는 것은 괘념하지 않았다. 드디어 금선은 소년의 손을 살짝 쥐었다. 소년은 뿌리치지 않았다. "여봐,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는가. 우리 같이 의논이라도 해보세." 석생은 대꾸를 하지 않고 있었으나 동자와 사귈 생각이었다. 사귀는 정도가 아니라 그를 따라가 야 할 입장이었다. 다만 옷을 훔친 게 내내 미안했고 인자한 어머니의 그림자와도 영영 멀어진다 생각해서 옷 한 벌 없는 처량한 신세와 함께 마냥 서글플 뿐이었다. 한데 금선이 손을 잡고 다정 히 위로해 주자 스산했던 마음이 한결 놓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면목이 없어 입을 열 수가 없었 다. 석생은 계속 두 손을 금선에게 내맡긴 채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이때 사방의 암벽에서 은은히 뇌성이 울려나왔다. 동굴 입구는 부르르 떨며 금세라도 무너져 내 릴 것 같았다. 석생은 그동안 동혈의 입구가 여러 번 열렸다 닫힌 사실을 알므로 소스라쳐 놀라 눈물을 뚝 그쳤다. 석벽엔 <극락진인>의 영부가 있으니 한 번 닫히면 영원이 태양을 못 볼지 모 를 일이었다. 석생은 금선의 손을 잡고 동굴 밖으로 날아나왔다. 한 줄기 빛이 반짝하며 뒤켠 석벽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석생과 금선이 뛰쳐나온 동혈 입구 에 무너진 석벽은 일 장 방원의 작은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그 위에 도고 한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석생은 도고를 잠시 응시하다가 돌연 달려가서는 부등켜안으며 방성통곡을 했다. "어머니!" 금선도 달려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도고의 얼굴은 산 사람처럼 영롱했지만 좌화한 지 오래였다. 소년이 어머니라 외치는 걸 보면 그의 모친이 틀림없었다. 금선은 친구가 될 사람의 어머니 유체 임을 확인하자 넙죽 절을 했다. 도고의 몸체 옆에 누렇게 번쩍번쩍 빛나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금선이 살짝 들어보니 비단으로 짠 아름다운 소년의 옷과 금항권(金項圈)이었다. 도고가 아들에게 남긴 유물인 것이다. 금선이 급히 말했다. "석도우, 이제 그만 슬퍼하게. 여기 자네 어머님이 남기신 좋은 유물이 있으니 한번 살펴보게나." 그는 말을 하며 나삼을 들어올려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의상 속에서 서찰 하나가 팔랑 떨 어졌다. 석생은 이미 보고 있었던지 울면서 편지를 거두었다. 금선도 서찰 앞면에 쓴 예쁜 글씨를 잠깐 볼 수 있었다. 이 순간 그르렁 그르렁 하며 석벽이 좌우상하로 흔들렸다. 금선이 석생을 껴안으며 소리쳤다. "석벽이 합치고 있다. 빨리 나가자!" 그들은 번개같이 쏘아나왔다. 섬광이 번쩍이더니 석벽은 한 데 합쳐졌다. 큰 암석이 합친 선과 작은 틈새 외에는 동혈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석생은 어머니의 시체가 암벽 속으로 사라져 버리자 다시 한 번 비통에 젖었다. 이제 모친과는 하늘과 이 세상을 사이하여 영원히 헤어졌으니 언제 또 만날 기약을 할 수 있겠는가. 금선이 애 써 위로하자 석생은 겨우 눈물을 거두고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 겉에는 <옷을 보거든 어머니와 작별하고 빨리 나가라. 곧 석벽이 합쳐 동혈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 다. 편지 내용은 석생의 어머니가 육용파이며 그녀가 오랜 면벽고행 뒤에 천지조화를 깨닫고 정과를 완성하여 해탈, 비승한 사실 등을 자세히 적고 있었다. 그녀는 석생의 태어난 날짜를 기준해 세상 에 나갈 날과 현공을 설치해 아들이 떠날 때 자신의 유체를 보도록 안배해 놓았다고 했다. 석생을 데려갈 사람은 아미파 금선이요, 그의 인도로 정파에 들어가 수련을 쌓으면 모자가 만날 날이 있으리라고도 했다. 그녀는 일찍 아들의 옷과 금항권을 제련해 놓았으나 미리 옷을 주면 암 혈을 멀리 떠나 자칫 실수할까 염려돼 떠날 때 주도록 배려했다는 것이었다. 석생은 편지를 다 읽자 또 한번 상심하여 울적해 했다. 그런 그를 금선이 다정스레 위로했다. "이보게 석생, 어머님은 정과를 얻어 해탈하신 거지 영원히 죽은 건 아니라네. 이런 비승은 어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 세상 최고의 복인 거라구. 슬퍼할 게 아니라 외려 기뻐할 일인 게지. 그리고 자네도 도를 성취하도독 노력하여 어머니를 뵈어야 할 게 아닌가." 금선은 말로 다독거리면서 위아래 옷을 입혀주었다. 금항권은 그의 목에 잘 걸어주었다. 새옷으로 갈아입자 석생은 옥처럼 아름다와졌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금동 같아 보였다. 금선은 석생의 옷입은 모습을 보자 입을 쩍 벌리고 탄성을 질렀다. "야, 자넨 정말 멋들어지군. 이렇게 잘 생긴 동자는 내 평생 처음일세!" 사실 금선은 이처럼 재주있는 친구를 얻은 것만도 대단히 기뻤다. 한데 새옷을 입혀놓고 보니 이건 천생의 신선이었다. 그는 그칠 줄 모르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동안 계속 찔금거리 던 석생도 칭찬에는 기분이 좋았던지 눈물자국이 선연한 얼굴로 환히 웃었다. 석생으로선 모친이 돌아간 뒤 사람과 대화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처음 만난 사람이 생각보다 다정하고 자상하고 칭찬까지 해주니 그만 마음이 툭 터졌던 것이다. 어린 소년인 그는 사실 쓸쓸히 암혈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왔다. 모친이 돌아간 뒤 동굴은 냉 랭했고, 텅빈 산은 적막했으며, 소슬한 바람은 마음을 쓸쓸하게 했다. 그러던 차에 자기와 생김새도 비슷한, 마음이 상통하는 친구를 만났으니 오죽 반가우랴. 더욱 금 선은 인정도 철철 넘쳐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지기가 되었다. 그들은 저절로 '형님, 아우' 하는 호칭으로 불렀고 친숙해졌다. 그들은 간략하게 지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금선은 처음엔 그와 그저 교우나 맺으려 했던 것인데 자기들을 아예 따라가겠다는 말을 듣자 환희작약했다. 이젠 소화상과 장이에게 이 기쁨을 빨리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총총히 현상동으로 달려갔다. 여기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자 모두 좋아했고, 소화상 등은 이번 망창산에 온 일이 보람이 있었노라고 기꺼워했다. 일행은 석생의 법보를 찾으러 현상동 뒤쪽 석실로 갔다. 이 석실은 옛날 이영경이 병을 요양하 기 위해 머물던 곳이었다. 석생은 법술을 써서 석벽을 개벽시켰다. 이 법술은 그의 어머니 육용파가 전수해 준 비전의 술 법이었다. 그는 석벽이 열리자 육민이 남겨준 세 개의 법보를 찾아냈다. 법보를 얻자 이번엔 소화상이 궁금하다 해서 반석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어떻게 동혈이 봉쇄 됐는지 직접 보고 싶었던 때문이다. 동혈은 생각 밖으로 흔적도 없이 합쳐져 있었는데 석생이 가 끔 이용하던 비밀 통로까지도 깨끗하게 봉쇄돼 있었다. 특히 석생으로서는 이파의 인물이 동혈에 스며들어 유체를 훼손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일행은 다시 현상동으로 돌아와 이야기에 열중했다. 금선이 웃으며 석생에게 물었다. "전날 어떻게 우리도 모르게 동굴로 돌아갔었지? 우리들은 자네 때문에 추운 밤을 헛되이 새웠 단 말일세." 석생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어머님이 좌화하신 뒤 저는 가끔 놀러 나갔습니다. 그러다 여러 번 누군가 제 뒤를 쫓아오는 걸 보았지요. 당시는 추적자를 떨구어 버렸지만 조만간 자신도 모르게 들킬 때가 있을 것 같더군 요. 그래서 총망중에 은형수법을 펼치지 못할 때를 대비해 비밀 통로를 뚫어놓은 겁니다. 원래 암 벽은 <극락진인>의 영부로 작동되기 때문에 함부로 출구를 낼 수 없습니다. 저는 <질석개산지법 (叱石開山之 法)>을 배운 덕택에 구불구불 굽은 돌의 맥을 따라 구멍을 냈죠. 이 구멍은 뚫어지 기는 했어도 사용할 때는 매번 질석개산지법을 써야 통행할 수가 있답니다. 그리고 입구는 등나 무로 교묘히 가려놓아 외부인은 절대 발견할 수 없지요." 소화상이 한 마디 했다. "그 날 내가 보니 선사제가 자넬 쫓을 때 은빛이 번쩍하고 떨어지는 순간 보이질 않더군. 나중 자네가 동혈 속에 있는 걸 알았을 땐 아래쪽에 필히 통로가 있으리라 생각했었네. 그래서 뒤에 부근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 틈 같은 건 없더군. 자네가 질석개산이라는 현문의 수법을 익히고 있는 줄은 몰랐네. 아하하, 선사제, 자네 하룻밤 동안 생고생만 했으니 그 참 재미있군!" 석생은 얼굴이 발개져서 금선에게 사과했다.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한데 왜 자넬 만날 사람을 앞에 두고 만나주질 않았는가?" "누가 만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도 흉악하게 잡으려 덤비니까 우선 겁이 났던 거죠." 세 사람은 동시에 박장대소했다. 석생의 천진난만함이 너무나도 귀여웠던 것이다. 금선은 석생이 사람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약간 걱정스러웠다. 그가 말했다. "여보게, 자넨 너무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애. 지금은 이파가 흉흉히 일어나고 있는 중일세. 겁운이 닥친 거지. 요물이나 악인을 만나면 즉시 소멸시켜서 세상 사람들의 해로움을 제 거시켜 줘야 한다네. 그것이 바로 우리 같은 검선이 할 일인 게야." 석생이 대답했다. "형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사람을 멀리한 것은 어머님의 훈계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직 때가 안 됐기 때문에 두려운 듯 피한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오시기 전에 옥령암의 요마들을 모조리 처치했을 거예요." 금선은 석생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그들은 육민이 남긴 석생의 보물을 구경했 다. 보물은 모두 세 개였는데 그 중 두 개는 은형하는 법보였다. 첫 번째 양계패(兩界牌)는 요법으로 곤경을 치를 때 탈출하는 번기였다. <극락진인>이 전해 준 진언을 염송하여 본신의 선천진기를 운용해 양계패를 한 번 흔들면 몸은 하늘과 땅 저켠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구종(離垢鍾)으로 교룡의 털로 짜서 만들었다는데 마치 실로 짠 그물 같았다. 이를 운용하면 온몸에 채색구름이 덮여서 물, 불, 바람, 번개 어느 것도 침범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석생의 모친 육용파가 삼십육 년의 고된 공적을 쌓아 오금(五金: 금 , 은, 구리, 주석, 철)의 정기를 제련해서 만든 <자모삼재항마침(子母三才降魔針)>이었다. 이 항마침은 모두 아홉 개의 침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그 중 침 하나가 연성이 덜 돼 공효가 많이 줄어든다고 했다. 보물을 감상하며 세 사람은 연신 찬탄을 터뜨렸다. 사실 드물게 보는 법보요, 보물들이었다. 석생은 천부적인 이상체질인 데다 선인의 교련을 받아 어려서부터 벽곡을 능히 할 수 있었다. 그 외 세 사람 가운데 소화상은 말할 것도 없고 금선과 장이도 복기(服氣)할 줄 알아 별다른 음 식을 먹지 않아도 버티었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는 금선은 신과일을 가득 따다가 멋 진 연회를 열자고 소화상을 졸랐다. 그 말을 듣자 석생이 끼어들었다. "형님,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소화상이 말했다. "본파에 동문이 하 많아도 선사제가 나의 극진한 지기라네. 여기에 석동생이 생겨서 선사제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됐으니 우리 한번 축하연을 열 만하지. 자기네들만 갈 게 아니라 우리 모 두 과일 따러 가세. 첫째 놀 겸 둘째 이 산의 맛좋은 과일도 좀 볼 겸이니까 과일은 종류마다 몽 땅 따오도록 하자구!" 이때 금선이 뭔가 생각난 듯 급히 대꾸했다. "전에 응벽애에서 사형을 뵐때 주과가 두 개 있었는데 이 산에서 땄다고 그랬죠." "그랬지, 신조가 따온 거였다구." "그 주과는 먹으면 장생한다는 희한한 과일 아니오? 빌어먹을 요물단지들을 죽이느라 경황이 없 어 그 명과를 잊고 있었다니! 자, 우리 과일을 따러 갑시다." 소화상은 네 사람이 두 사람씩 짝지어 과일을 따자고 제의했다. 금선과 석생은 산의 남쪽으로 가고 소화상과 장이는 산의 북쪽을 맡기로 했다. 선과는 모두 따오되 특히 주과가 있나 눈여겨보 기로 약정했다. 금선과 석생은 사이좋게 남쪽으로 날아갔다. 이곳 저곳 사방을 두루 찾아헤맸으나 특이한 과일 은 없었다. 기껏해야 유난히 큰 복숭아, 살구, 양매(楊梅) 그리고 앵조(櫻棗) 정도였다. 길에서 만 난 성성이와 말곰들을 불러 물어보았어도 별로 신통히 아는 게 없었다. 소화상과 장이가 주과를 찾아 북쪽으로 간다 했으므로 금선과 석생도 북으로 그들을 찾아나섰 다. 산의 북쪽으로 가는 길이 상당히 멀었는데 그들은 무심히 날며 어느 높은 봉우리를 지나갔다. 한데 이 높은산 음지쪽에 검은 구름이 막막하게 끼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시꺼먼 구름에 음 풍이 노호처럼 불어닥쳤다 '휭휭!' 하는 굉음이 멀리까지 진동했다. 얼마 전 이영경이 들려준 말 이 순간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빙잠을 대신 훔쳐주겠다고 여영남을 속인 묘인한테서 여사제를 데려내오다 동혈에 빠질 뻔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곳이 바로 동혈이란 말인가. 금선은 호기심이 솟구쳐 한번 정탐할 생각이 났다. 빙잠이 아직도 그곳에 있다면 얻어낼 좋은 기회였다. 그는 석생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해 주고 검광을 몰아 산 아래로 내려갔다. 동혈까지는 생각 밖으로 멀어 가까이 가는데 한동안이 걸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광풍 같은 회오 리바람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어두컴컴한 황사현상을 일으켰다. 이윽고 검은 바람은 바람기둥을 만들어 대지를 휩쓸었다. 천천히 앞으로 전진하던 두 개의 기둥 바람은 접근하자마자 '꽈당!' 하 며 천지가 동강나듯 폭발했다. 대지는 지진이 난 양 요동했다. 충돌과 함께 흩어진 연무는 둥글둥글 검은 방원을 이루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이들 연무 속으 로 들어가자 두 사람은 검광을 타고 미행하고 있는 데도 찬기운이 뼛속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두 개의 바람기둥이 흩어지자 아래쪽 검은 연기는 또다시 무수한 바람기둥을 만들어 재차 터질 듯 팽창했다. 바람기둥이 격탕될 때마다 계곡이 울리고 산이 흔들리며 모래가 구름처럼 날고 돌 이 비처럼 쏟아졌다. 금선은 시험삼아 그들에 부딪쳐 보았다. 닿자마자 검광은 격탕되어 튕겨나갔다. 다행히 신검합일 이 돼 있어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 석생이 다급하게 이구종을 꺼냈다. 둘은 재빨리 이구종을 덮어썼다. 채색 구름이 그들을 에워쌌다. 금선은 천둔경을 꺼내 백 장도 더 되는 괴이한 빛을 발해 질풍노 도의 바람기둥을 비추었다. 한데 이 천지간의 극히 극악한 기운이 뭉친 강풍(强風)의 발원지는 어떠한 요법보다도 무서웠다. 두 사람이 비록 두 개의 보물로 몸을 보호하며 바람기둥에 억지로 부딪쳐가도 그것들을 완전히 물리쳐 흩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금선이 비치는 곳 외에는 성세가 오히려 굉굉히 부풀어 더욱 거세게 팽창했다. 그러나 두 소년 은 그칠 줄 모르는 용맹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무서운 바람도 아랑곳 않고 혜안을 운용해 풍 혈의 소재를 찾았다. 이때 비쩍 마른 흑의도인이 두 소년의 눈에 띄었다. 그 도인은 아래쪽 벼랑에 있는 괴이한 동혈 옆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두 손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하얀 물건을 꽉 껴안고 있었는데 광풍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금선은 천둔경의 금광으로 흑의도인을 가까이 비춰보았다. 일견해서 요인이거나 사파의 인물이 었다. 그는 금광이 똑바로 비추는데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금선은 다짜고짜 손을 뻗어 검광을 날려보냈다. 석생도 금선을 따라 검광을 날렸다. 도인은 두 검광이 가까이 올 때쯤 해서 시꺼먼 빛을 발해 전신을 보호했다. 피하지도 맞받아 공격하지도 않 았다 두 사람이 구멍 입구 가까이 날아가자 도인은 홀연 큰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미파의 꼬마들아, 그만큼 거기에서 멈추거라. 너희들도 빙잠 때문에 온 모양이다만, 이 빙잠 은 이미 내가 손에 넣었느니라. 다만 조금 늦게 탈취해서 강풍을 맞는 바람에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다. 이 물건을 너희들이 훗날 제삼차 아미투검 때 크게 유용하겠지. 그건 나도 너희들을 속일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걸 쓸 곳이 있단 말씀이다. 만약 너희들이 호신법보로 나 를 도와 하늘로 날아오르게 해준다면 얼마 뒤 이걸 아미에 보내주겠다. 어떠냐, 내 말을 못 믿겠 느냐? 오늘은 강풍의 순환이 그치지 않는 날이다. 지금은 강풍이 시작하는 때라 그래도 버틸 수 있지만 조금만 있으면 현빙(玄氷)과 검은 서리가 계속 뿜어나오고 되돌아가는 광풍이 충돌하여 너희들도 몸을 뺄 수가 없을 것이야." 금선은 도인이 자기를 꼬마라 부르는 게 불쾌했는데 더구나 말 하는 투가 은근히 협박조여서 기 분이 나빴다. 또 이왕 내려오기까지 했음에 올라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도인의 고괴하고 귀기가 서린 생김새로 보아 사마외도인 것도 분명해서 그에게 이용당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 입을 열려는 참에 도인이 다시 사납게 호통쳤다. "적당히 관망할 생각은 말아라. 너희들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구. 저번에 너희들 동문인 이영경 이가 여가 계집애를 구한 건 재수가 아주 좋아서였느니라. 첫째는 시일이 딱 들어맞았고 강풍이 크지 않았으며 둘째로 선검과 신조의 도움으로 요행을 얻은 것이다. 오늘은 동굴 안의 검은 서리 가 내가 빙잠을 탈취할 때 법술을 써서 금제해 놓아 발호하지 않고 있는 것이야. 조금 있다가 지 하의 현음이 발동하면 내 법술도 오래 버티지 못하지. 그 때는 풍혈로 나오는 현빙과 검은 서리 가 몇 배 맹렬해져 너희들 법보로도 버티기가 힘들 거야. 아차 실수했다 하면 동혈로 돌아오는 회오리바람에 말려 저 지하 속 깊이 빨려갈 게야. 그땐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풍혈 안쪽에서 땅이 무너지는 듯한 뇌성벽력이 들렸다. 이윽고 무수한 바람 무리가 뭉게뭉게 풍혈 밖으로 날아나왔다. 바람의 무리는 하늘을 온통 말며 솟아올랐다. 풍혈의 입구는 연속적으로 파열하여 수백 장의 너비로 커졌다. 도인이 놀란 듯 고함쳤다. "이크 큰일났구나! 너희들은 그래도 이쪽으로 안 올 거냐? 강풍에 말려 지하 깊숙이 말려 들어 가 죽고 싶으냐구?" 금선과 석생은 아직도 의심스러움이 남아 있어 쭈삣쭈삣했다. 그 순간 연속적으로 지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꺼 지는 것 같다. '쉬쉬쉬!' 하는 예리한 소리가 귀를 찔러 당장 머리가 파열하는 듯했다. 작은 언덕 만한 검은 그림자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금선은 '아이쿠!' 비명을 지르며 천둔보경을 위쪽으로 돌렸다. 금광이 비추자 검은 그림자는 사 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보경에는 천근 만근의 무게가 내리누르는 듯했다. 금선이 이를 악물고 붙들고 있건만 금세라도 주저물러앉을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채색구름 속에서 강풍에 격탕돼 좌우로 흔들리고 위아래로 허둥댔다. 그들은 점차 태 풍에 말려 풍혈 쪽으로 밀려갔다. 본신의 진기로 용을 써도 버틸 수가 없다. 천둔보경은 겨우 양 쪽만을 비출 뿐이었다. 이제 현빙과 검은 서리는 수없이 몰려 아무리 흐트러뜨려도 흩어지지 않았으며 강풍은 검은 서 리를 풍혈로 몰아쳤다. 풍혈은 또 천근 만근의 힘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위기일발의 순간, 도인이 홀연 장소를 터뜨리더니 입을 짝 벌리고 수백 개의 붉은 불을 뿜어냈 다. 동시에 두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자 빨간 불꽃은 검은 서리와 열풍 속으로 쏘아 들어갔다. 일 순간 두 사람이 서 있는 주변 수십 장의 바람은 죽고 서리는 흩어졌다. 도인이 다시 사납게 호통쳤다. "야 이놈들아, 빨랑 이쪽으로 안 오고 무엇을 기다리느냐?" 이때 금선, 석생 두 사람은 마음이 격탕되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사지가 흐트러져 있었다. 호통 소리를 듣자 자신들도 모르게 도인의 곁으로 날아가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도인이 내뿜은 수백 개의 빨간 불꽃은 이미 강풍과 검은 서리 속으로 사라져 없어졌다. 그러나 바람과 서리는 다시 세력이 엄청 커졌고 풍혈 입구에서 '꼬르륵, 꼬르륵!' 하며 검정불 같은 흑연 이 분분히 솟아올랐다. 금선과 석생은 이제 경거망동할 수 없어 천둔보경을 꼭 쥔 채 앞쪽을 응 시했다. 금선이 도인에게 물었다. "도인께선 존함이 어찌 되며 어디서 오셨나이까?" 도인이 대답했다. "지금 인사를 나눌 여가가 어디 있느냐. 나는 너희들의 벗이면 벗이지 적은 아니다. 너희들이 갖 고 있는 왜수의 천둔경은 많은 도움이 되겠는걸. 검은 서리를 맞는 고통은 덜어주겠지. 지금 우리 는 흩어지면 죽고 합치면 사는 게야. 내가 서 있는 십 장 주위엔 금강호신지법을 설치해 한풍은 어지간히 버틸 수 있다. 오래는 못 가겠지만 말야. 다만 이 빙잠이 손상을 입을까 봐 그게 걱정이 라구." "그럼 지금 당장 여길 떠나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은 아직 때가 일러. 조금 기다렸다가 광풍이 잦아들면 우리 함께 이구종을 덮어쓰고 움직 이세. 자넨 천둔경으로 길을 열고 나는 본신의 삼매진화로 검은 서리를 녹이고 광풍을 피해서 공 중으로 뚫고 올라가 보자구. 자네들은 법보가 있지만 능수능란히 운용을 못하는군. 하긴 난 그런 법보도 없어서 바람과 서리가 그칠 때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말일세. 우리 서로 돕게 돼서 천만다 행이야." 금선은 도인이 이교 인물이고 아직 완전히 믿을 만하지는 않았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몇 번 이나 위로 뚫고 올라가려 했으나 매번 비바람과 서리에 눌려 되돌아왔던 터였다. 도인은 말씨가 성실하고 위급한 순간 도와주기까지 했으니 우선은 믿어볼밖에 없었다. 두 시진이 지나자 돌연 뇌성벽력이 일고 수십 개의 바람기둥이 무수한 검정 서리를 동반해 풍혈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도인이 소리쳤다. "지금이다, 가자!" 그는 두 손을 비벼 한 무더기의 빨간 불꽃을 쏟아냈다. 채색구름 속의 세 사람은 동시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금선은 천둔경을 들고 앞에서 길을 열었다. 무수한 큰 검정 서리가 광풍을 타고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거울의 금광에 부딪칠 때마다 산산 이 부서져 흩어졌지만 서리는 계속해서 밀어닥쳤다. 금선이 쥔 천둔보경에 천근의 힘이 내리눌러 왔다. 그는 추호도 태만히 할 수 없어 있는 힘껏 거울에 힘을 쏟았다. 그의 몸 좌우와 뒤쪽으로 얼음과 바람기둥이 몰려왔으나 다행히 세력은 약했다. 석생과 도인은 아주 치밀하게 방비하고 있었다. 채색구름에 다가왔던 불꽃들은 즉시즉시 흩어져 사라졌다. 내려올 때보다 올라가는 것은 월등히 힘들었다. 이렇게 밥 한 그릇 먹을 시간을 버티며 악전고투한 끝에 그들은 험지를 벗어났다. 환한 창공으로 벗어나니 이젠 천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셋은 산의 그늘을 피해 햇빛이 비치는 양지에 내려섰다. 대지엔 벌써 황혼이 찾아들고 있었다. 도인은 뼈가 앙상하고 얼굴이 칠흑같이 검었으나 두 눈은 형형히 타올라 한광이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그는 아직도 두 자쯤 되는 빙잠을 손에 쥐고 있었다. 보통 빙잠과 다를 바 없었지 만 몸체가 하얀 게 은빛이 찬란하다. 석생이 살짝 만져보니 차갑기가 얼음보다 더했다. 금선이 도인의 내력에 대해 물으려는데 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나를 모르겠지. 나는 <백금도인(百禽道人)>이라 불리는 공야황(公冶黃)이다. 십칠 년 전 조화애(棗花崖) 부근 흑곡(黑谷)에서 수련을 하다가 주화입마하여 몸과 돌이 한 데 합치고 말 았다. 다행히 원신은 상하지 않았고 진령(眞靈)도 다치지 않아 수십 년의 고련 끝에 초겁하여 원 상으로 돌아왔다. 이젠 원신이 우주를 유영할 수 있게 되었지. 내가 사는 흑곡은 고목이 하늘에 뻗어 태양이 보이지 않고 지세도 깊고 은벽하여 옛부터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새똥은 해와 바람에 삭아 모래가 돼서는 온 천지를 날아다니는 그런 험악한 곳이다. 그 시꺼먼 모래는 깊이가 수 장이나 되고 사람은커녕 짐승도 그 위를 걸어다닐 수 없다. 나의 옛 날 몸뚱이는 그 모래 위에 있는 동굴에 숨겨 놓았지." 세상에 나온 지 며칠 안 되는 석생은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으스스한 이야기를 듣자 눈만 또랑 또랑 굴렸다. "어느날 창공을 날며 놀다 돌아와 보니 여자애 하나가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더군. 꺼내서 물어보 았더니 바로 여영남이란 애겠지 뭐냐. 음소당의 제자인데 동문의 학대가 심해서 망창산으로 친구 인 이영경을 찾아 도망치는 중이라더만. 계집애는 생김새가 선풍도골로 근골이 아주 빼어났어. 나 도 얼마 전 아미문하에 <삼영이운>이 있어 문파를 크게 빛낼 것이며, 그중 하나인 이영경이 백 미화상의 신조를 얻은 데다 망창산에서 장미진인의 자영검을 찾아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때 나는 법체를 수련하여 돌의 겁수에서 벗어나는 중이라 멀리 전송해 줄 입장이 못되었거든. 그녀 에게 망창산으로 가는 지름길만 가르쳐 주었지. 그 애가 간 뒤 며칠이 지나 나의 공력이 거의 원 만하게 되었다네. 한데 바로 그 무렵 다년간 보지 못했던 동문 사질 옥청사태가 후곡을 지나다 나를 찾아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지. 그녀를 통해 이영경이 이미 망창산을 떠나 아미문하 에 들어갔고 여영남은 지름길로 가다가 요인을 만나 빙잠을 훔치러 갔다가 빙굴에 빠진 걸 알게 되었다네. 다행히 여영남은 즉각 이 사실을 안 이영경이 구해내리라 하더구만. 그런데 이 빙잠은 만 년이나 된 지보(至寶)로 내가 도를 닦는 데도 유용한 물건 아니겠나. 공행이 원만해지자 빙잠 을 손에 넣으러 이곳에 왔다가 저놈의 바람기둥과 운무에 갇혔었다네. 금강호신지법으로 겨우 몸 만 보전하고 있었지. 만일 자네들 둘이 안 왔으면 칠일 낮 칠일 밤 동안 바람과 운무한테 고통을 받을 뻔했어. 나는 자신에게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 어느 파에건 은원관계는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돌 때문에 재앙을 입고 쓰라림을 견딘 후엔 더욱 인과관계를 알게 돼 누구든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네. 내 도만 이루면 즉시 비승할 생각이었지. 그땐 이 빙잠도 아무 소용이 없어." 공야황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금선과 석생을 향해 진중히 말했다. "옥청사태가 지재지삼 말을 하더구만. 자네들 둘의 도움을 받아 함께 험지를 탈출한 덕을 보아 서라도 나중 이 빙잠을 아미에 보내서 긴히 쓸 수 있게 해주라구 말일세." 공야황은 말을 끝내자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했다. "다시 보세나, 젊은이들!" 그는 번개처럼 일어나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석생이 말했다. "저분 선장(仙長)은 우리들이 말할 기회도 주지 않는군. 벌써 가버리고 말았어!" 금선이 말했다. "저분이 옥청사태와 잘 안다면 이파라 해도 적은 아니고 말한 것도 진실일 거야. 여하튼 우린 생고생만 했군. 빙잠도 못 얻고 이게 뭔가. 억울하다 억울해!" "저 선장이 약속을 지킬까요? 나중 정말 빙잠을 보낼지도 모르잖아요." "글쎄 약속을 지킬는지... 자, 시간이 너무 늦었다. 빨리 가자. 소형님이 코빠지게 기다리겠어!" 두 사람이 따온 과일은 이미 바람기둥에 날려버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젠 날도 어두어 져 맨손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검광을 타고 급히 돌아왔다. 둘이 현상동 앞에 내리자마자 소화상과 장이도 따라 내렸다. "오, 형님도 인제 오는 거요?" 금선이 묻자 소화상이 불끈 화를 냈다. "무슨 소리야. 하도 안 오길래 얼마나 걱정했는데!" 소화상과 장이는 원성의 말을 되살려 신조가 옛날 주과를 얻었다는 곳을 찾아헤맸다. 아무리 찾 아도 흔적도 없었다. 주과가 있는 곳은 원래 옥령애(玉靈崖) 부근인데 요괴 곡진의 요법에 의해 땅이 뒤집힐 때 땅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공연히 헛수고만 하고 여러 가지 산 과일을 따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와 한동안을 기다렸건만 금선과 석생은 돌아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소화상은 은근 히 걱정이 됐다. 이 망창산은 워낙 큰 데다 깊고 그윽한 데가 많아서 신선과 신령스런 요물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신선이야 괜찮지만 고약한 요물을 만나 혹 일이라도 났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소화상과 장이는 그들이 간 남쪽으로 찾아나섰다. 공중 높이 올라가 이곳저곳을 살폈으나 아무 종적이 없었다. 사실 금선의 검광은 풍뢰(風雷) 소리를 요란히 내고 석생의 검광은 은빛을 점점이 내기 때문에 식별하기가 쉬웠다. 한동안 기다린 끝에 구름 위에 올라 관망하던 장이의 눈에 금선과 선생의 검광이 비쳐왔다. 그 들은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서 날아왔고 완전히 맨손으로 과일 하나 들고 있지 않았다. 금선한테 경과를 들은 소화상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금선을 나무랐다. "자네들 둘은 정말 분별이 없구만그래.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함부로 검광을 쏘아대는 법이 어디 있나? 사부의 말씀을 잊었나! 각파엔 고수가 드글드글하고 그중엔 그 <백금도인> 공야황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야. 더구나 그 사람은 괴벽하긴 해도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아니라구. 공야황은 새 의 말에 아주 정통하여 일찍이 낙가산(落伽山)의 선금(仙禽)인 흰 앵무새의 울음소리를 알아들었 다는 거야. 앵무새는 바다밑 산호초의 옥갑(玉匣)에 도술책 한 권이 있다고 했다나. 공야황은 바 다 속의 독룡을 시켜 그 도서를 쉽게 손에 넣자 흑곡에 은거해 수련을 했다더군. 한데 주화입마 하여 다년간 고된 수련을 쌓느라 세상에 나오질 못했어." "그 얘긴 공야황이 직접 합디다, 우린 겉으로 봐서 악인 같아 뵈기에 손을 쓴 거죠. 말하는 것으 로 봐서 아주 악질 같지는 않았으나 호감도 아니 갑디다." 금선이 대꾸하자 소화상이 맡을 받았다. "물론 생김새야 고약하게 생겼겠지. 그러나 모든 사람을 생김새로 판단해서는 안 되네. 그 사람 의 재주는 아주 대단하다고 하더군. 옥청사태도 당할 수 없는 분이라니까 우리 따윈 상대가 되질 않겠지. 원래 그 사람은 감정을 중시해서 좋아함과 미워함에 따라 도와주는가 하면 증오하기도 한다는 거야. 지금이야 인과를 터득했고 곧 비승할 몸이라니까 우릴 도와줄 마음이 있었을 거라 구. 그렇지 않았으면 자네들 둘은 큰코 다쳤을 걸세. 앞으로 사람을 만나면 조심해서 행동하게 나." 네 사람은 이야기가 끝나자 소화상 등이 따온 과일을 먹으며 밤경치를 감상했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 흥이 나서 왁자지껄하며 한 순간을 지난 듯한데 벌써 동방이 밝아왔다. 앞으로 이틀이 지나면 백만산에 갈 날이었다. 그들은 녹포노조를 칠 계획을 했다. 그동안 스승의 지시대로 시간을 맞추지 않았다가 수많은 착오를 저질렀으므로 이번엔 고행두타의 편지가 지시한 시간에 맞춰 손을 쓰기로 했다. 이틀 뒤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검광을 타고 백만산으로 떠났다. 묘강에 들어서자 높은 산과 번잡한 논밭이 발 아래 펼쳐졌다. 기암절벽으로 이어진 산과 뫼와 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뒤로 뒤로 사라졌다. 이곳 특유의 남기(嵐氣)와 장기(腸氣)가 아지랑 이처럼 피어올랐다. 석생은 처음 보는 세상 풍경이라 모두가 희귀하고 재미가 있었다. 그는 이것도 묻고 저것도 물 었으며 만사가 궁금했다. 검광은 빨라 어느덧 그들은 저번에 신진자의 오음도를 무심코 훼손시켰던 동굴 위를 날고 있었 다. 스승의 서찰에 의하면 심야 자정에 출발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지금은 시간이 일렀고 음풍동 과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어디 몸을 숨겨둘 곳이 필요했다. 더구나 장이와 석생은 이곳이 처음이라 단단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신진자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 동굴로 들어갔 다. 동굴엔 영기(靈氣)를 잃은 홍발노조의 깃발이 여러 개 널려 있었다. 아마도 그 날 그 일이 있은 뒤 아무도 찾아온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쓰기에는 적합한 장소였다. 그들은 동굴을 정하자 다시 요괴를 습격할 계획을 논의했다. 소화상이 말했다. "사부의 편지에서 지정한 시각에 우리 네 사람이 쳐들어가세. 금선과 내가 먼저 적굴에 들어갈 테니 둘씩 짝지어 장이와 석생은 뒤에서 접응하게나." 금선이 반대했다. "장이와 석생은 모두 이곳 형세가 생소합니다. 요인이 얼마나 무서운 존잽니까. 우리가 아무리 만날 장소를 정확히 정한다 해도 한번 변화가 있으면 앞뒤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함 께 들어갑시다." 장이는 말하는 게 불편해 만사 따라가는 편이지만 석생은 세상에 처음 나온 하룻강아지라 호랑 이 무서운 줄을 알 리 없었다. 석생이 말했다. "맞았어요. 우리 함께 가요. 난 금선형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더구나 우리 어머니가 알려준 은둔법술과 이구종, 양계패로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잖습니까." 두 사람이 강력히 주장하자 소화상은 마지못해 승락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석생이 경험이 없어 실수할까 봐 무던히 걱정이 됐다. 그는 석생과 장이에게 적들의 상황과 음풍동의 형세를 두 번 세 번 자세히 설명하며 조심하라 당부했다. 문주(文蛛)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가 있었다. 한 곳은 녹포노조가 앉아 있는 지혈(地穴)이고 다른 한 곳은 주봉 뒤편 연못에 있는 풍혈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역시 풍혈을 통해 들어가는 녹포녹조의 침궁(寢宮)으로 이곳은 요인이 <추혼낭자 (追魂娘子)> 예란심(倪蘭心)과 음탕을 즐기는 침실이다. 이 중 지혈은 소화상과 금선이 처음 백만산에 있을 때 들어간 곳이다. 당시 녹포노조는 혼땀이 나서 지금은 요법으로 지형을 변경,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 공격하기 부적합하다. 적이 권토중래할 것을 기다려 악독하기 한이 없는 요법을 매복해 함정에 빠지기만 기다리고 있는지 뻔했다. 그리 고 문주는 전에 있던 곳에 지금은 있지도 않았다. 나머지 두 곳, 즉 침궁으로 통하는 풍혈과 못 위의 샘이 나오는 구멍도 배반자 신진자와 당석을 벌주는 장소로 무척 경비가 삼엄하다. 평소에는 엄히 봉쇄돼 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요인들 이 감시하고 있었다. 편지에 의하면 지혈은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 봐야 요행이 없을 것이라 했으며 나 머지 두 곳은 틈입해 들어갈 수는 있으나 어느 쪽으로 가라고 지시하지는 않았다. 소화상은 녹포노조에게 뜨거운 맛을 보았으므로 만사가 조심스러웠다. 아마도 음탕을 즐기는 요 물이 침실의 방비를 소홀히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샘물이 나오는 동혈이 그들 문하가 지키고 있다 해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되자 출발할 준비를 했다. 소화상은 각자 적굴에 도착한 직후 몸을 긴밀히 보호하고 만 약 조금이라도 섣불리 하면 즉각 몸을 숨겨 퇴각하라고 지시했다. 석생은 세상 처음의 출진이라 얼굴이 상기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러 나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엉뚱한 얘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해(亥)시가 되자 모든 사람은 현공을 운기해 장이의 현구검에 매달렸다. 금선의 벽력검은 '치지 직!' 하고 풍뢰소리가 요란하고 석생의 태백분광검은 은가루를 뿌리므로 적의 눈에 띌 염려가 있 다. 그들은 하늘 높이 솟아 백만산의 주봉으로 날아갔다. 이날따라 달빛이 뽀얗게 천지를 비추고 있 었다. 백만산은 산의 사방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큰 죽순을 그릇 위에 담아놓은 것 같았다. 백만 산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의 하얀 물살이 흰 분말을 흩뿌려 기이한 풍광을 이루었다. 폭포의 물소리는 하늘 높이 솟은 소화상 일행의 귀에도 은은히 들려왔다. 그들은 금선의 혜안을 이용해 사방을 살펴보았다. 주봉 전면에 홍록색 빛이 번뜩인 것 외에 삼 면은 아무 동정이 없었다. 그들은 워낙 높이 있어 검광을 발해도 알아낼 사람은 없을 것만 같았 다. 그들은 손짓해 서로 뜻을 전달하고는 주봉과 거리가 떨어진 인적 없는 곳으로 낙하해 주봉 뒤쪽에 있는 풍혈을 정탐하기 위해 낮게 비행했다. 백만산은 평지에 우뚝 선 돌산이라 그들은 주봉에서 십 리쯤 떨어진 언덕에 내려섰다. 금선이 눈을 들어 자세히 관찰했다. 과연 앞쪽엔 공중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들은 즉각 검광을 일으켜 조심스레 가까이 날아갔다. 역시 고요하고 적막했다. 주봉을 옆으로 끼고 돌아 뒤쪽으로 가자 산 아래 흐르는 세 줄기 물살의 근원지가 보였다. 주봉의 뒷면은 가파른 절벽이 천길이나 우뚝하고 그 밑에 깊은 못이 있었다. 못가 바위 위쪽에 깊숙해 보이는 동혈이 보였다. 넓이가 일 장쯤 되어 보였다. '꾸르르 꾸르르!' 하며 검은 기운이 뿜어나오고 있었다. 연못에서는 수시로 세 아름씩 되는 물기둥이 수면으로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달빛에 비친 물기 둥은 마치 은으로 점철한 기둥 같았다. 물기둥은 무려 십여 장까지 솟았다가 포말을 흩뿌리며 쏟 아져 내렸다. 포말은 흡사 겨울의 눈이 날리는 듯 보였다. 물기둥이 쏟아져 내리면 연못은 소용돌이가 생겨 급류처럼 맴돌곤 했다. 소화상 등 네 사람이 응시하고 있는 건 이런 소용돌이는 아니었다. 그들은 암혈 앞에서 요사스 런 깃대를 들고 요법을 펼치고 있는 흑의 사나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곱 흑의 요인 주변에는 검은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어 신형이 보였다 안 보였다 수시로 변했다. 그들은 입으로 계속 중얼중얼 주문을 외고 있었다. 그들의 깃발이 한 번 섬광을 번쩍 발할 때마다 연못의 물기둥은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암혈 입 구의 검은 기운은 음풍에 따라 동굴 안으로 들락날락했다. 네 사람은 몸을 숨기고 이런 정황을 눈여겨 살피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이 궁리 저 궁리를 짜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괴성이 울려나왔다. 그와 동시 암혈 속에서도 기괴한 울부짖음이 들렸 다. 동굴의 울부짖음은 소화상과 금선에게는 무척 귀에 익은 소리였다. 둘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것은 그 날 지혈의 동굴 속에서 몸서리를 치며 들은 신진자의 울부짖음이 아닌가! 두 기괴한 울부짖음은 서로 호응하는 것 같았다. 괴성이 들리자 암혈 양켠에 서 있던 요인들은 급히 주문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을 쓰러뜨렸다 일어섰다 하며 상하로 날면서 수중의 깃발을 미친 듯 흔들어댔다. 수중의 깃발이 하늘을 가리킬 때마다 녹색 불과 황색 불이 하늘에 가득해져 암혈과 연못 주변을 단단히 에워쌌다. 요인들 가운데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작은 깃발을 한 번은 암혈을, 또 한번은 연못 속을 가리켰 다. 그러자 암혈 속에서 음풍이 '휙' 하고 쏟아져 나오며 일단의 검은 기운이 영패 하나를 옹위해 나왔다. 길쭉한 영패는 연못가에 닿자 멈추어섰다. 영패 위에는 팔이 하나 없는 요인이 한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혀 걸려 있었다. 온몸은 피로 범벅 돼 있고 도처에 뼈가 드러나 보였는데 아랫도리는 살가죽만 남은 듯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바로 신진자였다. 형벌의 잔악함이 이루 형언할 수 없었으나 신진자는 죽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 쌍의 괴상한 눈 을 희번덕거리면서 흰 이빨을 드러내 연방 괴성을 터뜨렸다. 이어 일진의 음풍이 연못 속에서 솟구치자 또 하나의 영패가 물 위로 솟아나왔다. 거기엔 당석 이 못에 박혀 있었다. 몸에 핏자국은 별로 없었으나 무슨 잔학한 요법으로 고통을 받았는지 덩그 마니 볼썽사나운 대갈통 외에는 하얀 뼈다귀만 남아 있었다. 당석을 못에 박은 영패는 신진자와 일 장 거리에서 멈추어섰다. 요인을 지휘하던 우두머리 요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한 시진만 있으면 사부가 깨어나실 게고 당신들은 처형될 것이오! 당신들의 원신과 몸뚱 이가 대법에 금제를 받아 매일 금잠에 피를 빨리고 악충한테 가슴을 뚫리며 살풍(煞風)에 몸을 씌는 악형을 당하는 걸 보니 정말 가슴이 아프오.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으니 차라리 고통을 적게 받고 죽는 게 나으리다. 한데 당신들은 계속 사부님을 욕해 죄를 덤태기 쓰고 더욱 죽을 수도 없으니 이 무슨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오? 우리는 이전에 동문이오. 깊은 원한도 없으면서 별수없이 독수를 쓰니 얼마나 가슴아픈지 모른다오. 동료들이 도주한 뒤로 어찌나 금제가 심한지 행동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답니다. 듣자니 사부는 대법을 연성한 후 에 먼저 도망친 동문을 잡아다 당신들처럼 처치하신답니다. 갈수록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지요. 우리들은 매일 하는 수 없이 당신들을 괴롭히지만 우리라고 어찌 마음이 괴롭지 않겠소." 요인의 우두머리는 진실로 미안한 듯 신진자와 당석을 번갈아 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늘은 마침 사부가 백미침 때문에 몇 시진 고통을 받는 날이라오. 그리고 지난 번 신사형이 금잠을 모두 없애서 사부는 주야로 고련하며 금잠을 길러내고 있소이다. 아직 연성이 다 되지 않 아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오. 그 생각을 하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아각달 사숙이 사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잉태한 부인을 여럿 잡아 오늘밤 생혈을 마실 거랍니다. 그 음부 예란심과 한바탕 즐기겠죠. 본성이 또 한번 발동하면 음부와 원정(元精)을 교접할 것이외다. 그러면 한두 시진은 혼수상태에 빠질 것이오. 그러나 그는 침궁에 법술을 써서 엄히 봉쇄했을 뿐 만 아니라 도대체 외출을 하지 않는다오. 당신들을 보니 정말 안 되었소. 조금 있다 깨어나면 우 릴 부를 거고 당신들을 데려가면 능지처참을 할 것이오!" 당석은 그 말을 듣자 입 속으로 괴성을 뱉아내며 계속 신진자를 원망했다. "에이 빌어먹을 녀석, 그때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안했으면 다른 동료들처럼 멀리 도망갔을 게 아녀? 내 권하는 대로 기선을 잡아 도주했다면 이런 처참한 꼴은 안 당할 텐데... 으으흐흐." 신진자는 천생이 흉악해서 요인 우두머리 말에 우뢰처럼 화를 냈다. "이 아무 쓸모없는 개 같은 놈들아, 기껏 해준다는 소리가 그런 쥐새끼 같은 헛소리냐? 저 늙은 귀신망태 같은 놈한테 그렇게 학대를 받으면서 더럽게 사는 거냐, 요 병신들아! 나는 내 영기가 한 푼이라도 남는 한, 조만간 이 철천지 원수를 갚을 거다! 나의 가슴에 박힌 일곱 개의 독침만 뽑아주고 놈이 입정했을 때 합심협력해서 금잠을 해치고 문주를 훔쳐 홍발노조한테 가자니까 그 걸 못해? 나는 몸뚱이가 필요없고 너희들 몸에 붙어가면 된단 말이다. 홍발노조는 제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얼마나 절치부심하고 있는 줄 아느냐, 이 등신들아. 그가 나의 원수를 갚아주면 조석으 로 운명을 몰라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은 네놈들도 해방시켜 줄 것이야, 이것들아!" 신진자는 과연 천하에 악독한 녹포노조의 수제자다왔다. 뼈만 앙상히 남아 있는 데도 기개는 쇳 덩어리처럼 쩌렁쩌렁했다. 그는 이번에는 요인들을 더욱 매섭게 매도했다. "흥, 담이 쥐새끼같이 작은 놈들이 외려 나를 보고 참으라고 권해? 놈한테 죄를 덜 지고 일찍 죽어? 허허허, 우스운 놈들이로고. 인석들아, 너희들 요즘 고통받는 맛이 어떠냐. 그 도망친 아미 파의 꼬마들이 영영 가만히 있을 성싶으냐, 요놈들아! 외인이 쳐들어와 기회만 오면 그들은 나를 금제에서 풀어줄 거고, 나는 그들을 도와 원수를 시원히 갚을 것이다. 하루라도 내 원신이 소멸하 지 않으면 하루만큼 희망이 있단 말이다. 그래서 내 일부러 노귀를 격노시키고 고통을 받아가며 기회를 보고 있는 중이야. 너희들 같은 폐물들의 더러운 주둥일랑 찢어버려. 그렇지 않고 이 노부 의 성깔을 건드리면 노귀를 만났을 때 네놈들이 배반하려 하더라고 일러바칠 거다. 내가 받는 고 통을 네놈들도 한번 맛보고 싶으냐!" 이들 요인은 원래 궁흉극악하여 아무 양심도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 자신도 호랑이 굴에 몸을 담아 언제 죽을지 모를 위험한 지경에서 시시각각 간담을 조이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따라서 신진자와 당석의 참혹한 정상을 대하자 토끼는 토끼를 불쌍히 여긴다고 정이랄 것도 없는 얄팍한 정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한데 신진자가 이를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한술 더 떠서 자기들을 모함하겠노라 을러대자 요인들 은 발연대노했다. 물론 알량한 동정심를 싹 거두어버렸다. 우두머리 되는 요인이 욕을 퍼부었다. "야, 이 빌어먹을 외눈깔 병신아, 못 뒈져서 환장을 했느냐? 우리가 일껏 호의를 보였건만 외려 우리를 모함하겠다고! 사부가 우리를 보고 뭐라 했는지 아느냐? 심심할 때는 너를 작신작신 고문 하며 즐기라고 했다. 그렇지만 마음씨 고운 우리들은 육신(肉身)이 금제되고 독침이 가슴에 관통 돼 있는 네가 금잠한테 피를 빨리고 음풍에 몸을 쏘이며 살을 갈리고 뼈를 긁히는 고통을 받는 게 하도 불쌍하여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너그럽게 봐주어 왔거늘, 그런데도 거꾸로 악하게 나온다 면 우리도 독한 맛을 안 보여줄 수 없지!" 우두머리의 호통이 끝나자 요인들은 각자 깃발을 들어 신진자를 가리켰다. 깃발을 한 번 흔들자 황색 불과 녹색 연무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신진자는 요행을 기대하지 않고 화를 버럭버럭 내며 욕을 퍼부었다. 화광이 활활 타오르는 중에 도 험악한 신진자의 애꾸눈은 칙칙한 녹색 섬광을 발사했다. 불빛이 신진자의 머리에 날아들 때 홀연 탕 밑에서 일진의 처절한 괴성이 울려왔다. 요괴들은 괴성을 듣자 놀라 허둥대며 요화(妖火)를 거둬들이며 투덜댔다. "애꾸눈 반적놈아, 사부님이 널 끝내주러 오실 거다. 그 때도 흉포하게 굴 수 있나 보자, 이놈!" 일곱 요인은 일곱 개의 깃발을 사용하는 요법을 전개해 음풍을 일으켰다. 으스스한 음풍이 일자 네 요인은 요화와 요운으로 두 영패를 에워싸고 봉우리 옆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소화상 등은 적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자 무척 신이 나 있었다. 요인들이 사라지고 암혈에 파수꾼이 없자 그들은 풍혈에 잠입해 문주를 벨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 잡아당겨 끌며 조용조용히 암혈로 다가갔다. 한데 아무리 찾아도 무슨 동굴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움푹 들어간 암벽이 있을 뿐이었다. 요사스런 기운만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 었다. 금선이 혜안을 발동해 투시해서 살폈지만 아무런 형적도 발견할 수 없었고 들어갈 만한 문 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한발 늦어 동혈은 요법으로 봉폐된 뒤였던 것이다. 장이는 자신의 용맹을 자랑할 셈으로 법술을 펼치며 비검을 날려 신진자가 나타난 곳으로 부딪 쳐갔다. 몇 번이나 부딪쳐 보았건만 그는 매번 장력에 튕겨나왔다. "이놈의 요법이 생각보다 대단한걸!" 장이가 의사를 손짓으로 표시하자 금선이 제의했다. "내가 천둔경으로 한번 비춰 볼까나?" "안 돼, 자칫 실수했다간 저들에게 들킬 염려가 있어. 그렇지, 사부님의 편지에는 침궁도 들어갈 수 있다고 했잖아. 지금 요인들은 침궁으로 녹포노조에게 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도 저들을 따라 가자구. 호랑이 굴에 안 들어가고야 어떻게 호랑이를 잡겠어!" 소화상이 외치듯 마지막 말을 끝내고 산쪽으로 몸을 날리자 셋도 급히 뒤를 따랐다. 달빛이 부 옇게 비치는 중에 요인들은 영패를 양쪽에서 옹위해 산허리를 돌아가고 있었다. 요인들은 유난히 사람의 냄새를 잘 맡았으므로 비록 바람이 위에서 밑으로 불고 해도 소화상 등은 요인들을 멀리 서 따라갔다. 그러나 양쪽 모두 신속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봉우리 가까이에 도 착했다. 정면 산벽에 갑자기 큰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동굴의 높이가 무려 십여 장이나 되었다. 소화상 은 이미 이곳을 여러 차례 지나쳤으나 당시는 이 동굴을 본 적이 없었다. 동굴 앞은 불빛과 채색 연기가 모막모락 피어오르며 휘황찬란했다. 요인들은 요운과 영패를 옹 위해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소화상 등은 속도를 내어 안으로 쫓아 들어갔다. 요인들이 들어간 뒤 동굴 입구에 채색 연무는 안으로 몰아쳐 뭉치며 금방 입구를 닫을 듯이 쏟 아져 들어왔다. 아차 하면 요법으로 문이 다시 닫힐 것만 같았다. 소화상은 '뒷일은 뒤에!'라고 외 치며 현공을 운용해 연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비린내가 훅 코를 찌르며 머리가 띵하니 혼절할 것 같았다. 비린내가 코끝을 스친 순간 그들은 동굴 안에 있었다. 동굴 안은 상상 외로 컸다. 요법에 의해 동굴입구는 닫혔어도 안은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앞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맨 위층 석대였다. 석대에서 아래쪽으로 백수십 개의 층계가 나 있었고 요 인들은 벌써 층계를 거의 다 내려가고 있었다. 동굴 안은 큰 원통형으로 돼 있는데 삼 층으로 된 매 층마다 수십 개의 석실이 나 있었다. 동굴 정중앙에는 곳집 같은 궁륭형의 집이 동굴 가운데 높이까지 솟아 있었다. 마치 응고한 종유석처 럼 생긴 데다 유리로 사방이 장식된 듯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다만 한 군데도 들어갈 수 있는 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동굴의 벽에는 횃불 같은 불이 타오 르고 있어 동굴 안을 환히 비쳐주고 있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불빛은 더욱 밝았다. 유리 궁륭의 꼭대기에 초록 불빛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곱 요 인은 동굴 밑바닥에 닿자 땅바닥에 엎드렸다. 영패에 못박혀 있는 신진자는 괴성을 내지르며 뭔 가 욕을 퍼붓는 모양이었다. 소화상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석대 밑으로 몸을 옹송거리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소화상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은신이 잘 안 돼 요인들한테 발각 되기 쉬울 것 같아 사방을 살펴 보았다. 그들 가까이 있는 석혈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불빛이 비치지 않아 어두컴컴한 것이 숨 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이때 석생이 먼저 그 석실로 날아갔다. 그도 비록 경험은 일천 했지만 소화상과 똑같은 생각을 해 염탐하기 위해 먼저 날아간 것이었다. 이윽고 석생이 돌아왔다. 그는 세 사람에게 손짓했다. 손짓 하나로 피차 서로의 뜻을 알아차린 소화상 일행은 은형수법을 써서 일 층에 있는 석실로 날 아갔다. 금선은 혜안을 발동해 급히 석실을 살폈다. 석실은 인공으로 만든 동굴 속의 동편인데 깊이가 칠팔 장쯤 되었다. 돌침상과 돌책상이 있는 외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이곳에 숨어 바깥쪽을 내다 보기에는 안전하여 소화상의 마음에 쏙 들었다. 네 사람이 틈입한 이 동굴은 바로 녹포노조 수하 요인들이 거처하는 처소였고, 정중앙의 유리 궁륭은 녹포노조의 침상이었다. 유리 궁륭은 녹포노조가 종유석을 제련해서 심혈을 기울인 걸작품이었다. 요인들의 거실은 이 침궁에서 환히 내다볼 수 있게 사방에 돌아가며 배치돼 있었다. 녹포노조는 옥영봉에서 화를 당해 청라계곡에서 겨우 하체를 얻은 뒤로는 포학이 날로 심했다. 문하요인들은 그의 학대에 못 이겨 일대 제자와 이대 제자 삼십육 명 가운데 태반이 도망치고 지금은 겨우 열한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남아 있는 제자들마저도 모두 노물이 무서워 항시 덜덜 떨며 눈마저 제대로 못 마주치는 형편이었다. 노조는 그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자 더욱 악랄해졌고 자신도 문인들을 증오하기까지 했다. 만약 그들이 쓸모가 없었거나 아각달이 애써 말리지 않았다면 모두 잡아죽였을 것이었다. 이들 열한 명의 문인들을 살려두긴 했어도 줄곧 그들을 감시감독하며 도망치지 못하게 엄밀히 방비했 다. 따라서 녹포노조는 요부와 행음을 할 때나 입정할 때는 침궁을 요법으로 엄밀히 봉쇄해 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했다. 외부의 침입만이 아니라 내부의 반란까지 예방한 것이다. 그 덕분에 이들은 사람이 동굴에 스며들었어도 녹포노조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산 사람의 냄새를 못 맡을 녹포노조가 아니었을 뿐더러, 소화상들이 숨은 석실은 이미 죽은 요인의 방이어서 이중으로 행운이 겹쳤다. 네 사람이 석실에 몸을 숨기고 밖을 내다볼 때 지하에서 은은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그 찰나 유 리 궁륭에 높이 걸려 있던 형형한 녹색 불꽃이 갑자기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빛을 튕겼다. 투명한 종유석 윗면에 수백 수천의 괴이한 채광이 현란하게 흔들렸다. 녹색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들자 궁륭 안쪽의 경물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모난 옥석 위에 흉악하기가 고금에 없는 요물 녹포노조가 앉아 있었다. 머리는 대문짝만하고 목은 새처럼 가늘었 으며 봉두난발에 허연 이를 드러낸 몰골인데 눈에서는 녹색 섬광이 쏟아져 나왔다. 녹포를 걸친 웃도리가 반쯤은 드러나서 우툴우툴한 갈비뼈와 움푹 들어간 배의 초록색 털이 엉숭덜숭했다. 그는 오른발은 돌 위에 걸쳤으나 왼쪽다리는 여자의 넓적다리에 얹고 한 손으로 여자의 큼지막 한 젖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손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여자 시체의 장딴지 를 쥐고 으적으적 씹어먹고 있었다. 요물의 주변에는 찢어진 시체의 조각들이 널려 있어 하얀 바 닥이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시체 조각 옆에는 아직 덜 죽은 여자들이 발버둥치는 게 보였다. 요물에게 몸을 내맡긴 요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추파와 미태를 계속 뿜어내고 있었다. 궁륭 밖에서는 영패에 못박힌 신진자가 사자후를 터뜨리며 끊임없이 욕을 내뱉고 있었다. 처음 녹포노조는 술에서 갓 깨어난 사람처럼 거슴츠레한 표정에 신진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차 반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녹포노조는 돌연 괴이한 눈을 부라리며 입을 쩍 벌리고 뭐라 소리 를 질렀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소리가 땅을 뒤흔들며 땅이 위로 솟는 듯하더니 일곱 요인 은 이미 영패와 함께 궁륭 안에 들어가 있었다. 소화상 등은 그들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요염을 떠는 발가벗은 여자는 신진자가 빼앗긴 요부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신진자의 처연한 참상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녹포노조한테 뭐라 속삭이더니 신진자와 당석 앞에 나와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궁륭의 유리 칸막이에 막혀 그녀의 노래와 웃음소리는 들을 수 없으나 하얀 살이 뱀처럼 남실거 리는 요태는 환히 볼 수 있었다. 그녀가 펄쩍펄쩍 거꾸로 날 때마다 시커멓고 불그족족한 부분까 지 불꽃 속에서 나풀댔다. 그녀는 꽃이 날고 오색이 어른거리듯 그림같이 아름답게 춤추었으나 그것은 선녀가 아닌 요마의 춤이었다. 신진자는 요염한 춤을 보고 더욱 분기가 탱천하는지 눈을 부릅뜨고 날카로운 이발을 부드득 갈 며 피를 토해내듯 욕을 퍼부었다. 영패에 못박힌 몸을 금방이라도 빼내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덤 볐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웃어댔다. 일곱 요인들은 모두 눈을 꼭 감고 입술을 꽉 깨문 채 땅에 납짝 엎드려 있었다. 요부는 춤을 추 며 왔다갔다할 때마다 요인들의 등이나 엉덩이를 툭툭 쳤으나 그들은 감히 머리를 들어 바라볼 수 없었다. 보고 싶은데 보지를 못하니 몸이 근질근질 마냥 가려운 듯 몸둘 바를 몰라 어쩔 줄을 몰랐다. 득의양양한 요부는 한창 신이 난 끝에 아차 실수하여 신진자 눈 앞까지 다가갔다. 입을 짝 벌린 신진자를 보자 그녀는 놀라 펄쩍 뒤로 몸을 빼려 했다. 그 순간 무슨 수를 썼는지 신진자의 머리 가 목에서 쑥 삐져나와 요부의 한쪽 다리를 덥석 베어물었다. "으아악!" 요부가 비명을 질렀을 때는 한쪽 다리가 싹뚝 짤려나간 뒤였다. 원래 신진자는 요부의 춤추는 꼴을 보자 분노가 꼭두까지 올라 씩씩대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요 법에 금제돼 있어 어쩌지 못하고 있는 판인데 그녀가 눈앞에 다가오자 그 기회를 놓칠 신진자가 아니었다. 그는 장사출동(長蛇出洞) 수법으로 목을 쭉 뽑아 요부의 허연 허벅지를 콱 깨물어버린 것이다. 녹포노조는 그녀가 신진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극히 위험해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 다. 신진자가 아무리 운신이 금제 받고 있다 해도 자기의 진전을 전수받은 천하고수요, 본신의 법 술도 아직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신진자가 덥석 요부의 장딴지를 무는 순간 바람처럼 날아갔다. 그러나 한발 늦어 녹포노조 가 신진자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었을 때는 계집의 다리가 썩둑 짤린 뒤였다. 피가 튀고 계집은 저켠으로 나가떨어졌다. 녹포노조가 목을 비틀자 신진자는 고통에 일그러지며 입에 물고 있던 짤라진 요부의 다리를 뱉 어냈다. 녹포노조는 화가 벽력같이 나서 짙은 채색 연무를 쏘아냈다. 연무는 신진자의 머리를 감싸버렸 다. 그는 뭐라 중얼중얼대더니 요부를 안아 일으키며 한 손으로 짤라진 다리를 들었다.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다시 요부의 몸체에 철썩 갖다붙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채색 연무를 쏘아내 상처부위를 감쌌다. 이윽고 다리는 원상대로 붙어버렸다. 요부는 다리가 짤라질 때 기절했다가 서서히 깨어났다. 그녀는 녹포노조의 품에 안겨 신진자를 한독이 서린 듯 표독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손짓하며 입술을 달짝이는 게 욕을 퍼붓고 있 는 듯했다. 녹포노조는 요부가 깨어나자 무척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빨간 피로 범벅이 된 입을 쩍 벌리 더니 녹색 화염을 신진자의 머리를 에워싼 채색 연무 속으로 쏘았다. 녹색 화염은 채색 연무 속 으로 파고들자 수많은 꽃불을 수놓으며 폭발했다. 채색 연무가 흩어지니 일곱 줄기 녹색 화염은 마치 일곱 마리 뱀처럼 신진자의 칠공으로 뚫고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화염은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영패에 묶여 있는 신진자는 고통을 못 이겨 온몸을 비틀며 처절을 극한 괴소를 터뜨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좌우상하로 몸부림치던 몸뚱이도 스르르 동작을 멈추었다. 녹포노조가 시전한 술법은 사교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독형인 <쇄골천심소수라법(鎖骨穿心小修 羅法)>이었다. 본신을 제련해서 만드는 요법으로 적의 칠공으로 공격해 들어간 화염은 혈도와 골 맥(骨脈)을 따라 전신을 돌며 골수를 용해시켜 고통을 준다. 적을 직접 태워죽이지 않고 사람의 심폐를 녹이면서 고통만 주는 악랄한 독형인 것이다. 이 수법에 말려든 사람은 처음 졸음이 오듯 나른했다가 서서히 심장 부위와 온 뼈가 가려워진 다. 가려움증은 이윽고 수십 수백 개의 칼로 도리는 듯한 아픔으로 바뀌고 온갖 뼈의 마디마디가 짤리는 통증을 느끼다 기절한다. 그 사이 온몸은 고목처럼 바싹바싹 말라비틀어져 신선이라 해도 끝내는 도술을 망치고 몸을 버리게 된다. 이 수법은 당하는 사람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펼치는 사람도 원정(元精)을 소모시키게 되므로 철천지 원수 외에는 가벼이 쓰지 않는 요법이다. 그러나 녹포노조는 그러한 거리낌 따위는 상관 하지 않는 악마였다. 남의 몸으로 겨우 정상을 회복한 그는 이미 포학할 대로 포학해 있었는 데 다, 지금 한창 요부를 애지중지하는 판이었다. 그런 여인을 입으로 콱 물어 장딴지를 절단내 놓았 으니 분이 솟아도 하늘끝까지 솟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요부 예란심은 녹포노조가 그녀를 아끼는 만큼 상대를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 는 처음 이 추악한 녹포노조를 보자 으적으적 사람을 처먹는 꼬락서니만 보고도 기절초풍할 일이 었다. 천하에 음탕함을 좋아하는 그녀도 사람 피를 빨아먹는 몰골을 보면 음심이 싹 사라지는 것 이었다. 요부는 천하에 유명한 <천음낭자(天淫娘子)>의 수제자다. 스승의 진전을 받은 그녀는 방중술이 뛰어나 하루에 백 번을 해도 지칠 줄을 몰랐다. 거기에 잔인하고 악랄한 심사는 어느 누구도 따 를 수 없어 사람 피를 빨아먹지 못하는 것 외에는 녹포노조와 천생 배필이었다. 따라서 녹포노조 는 그녀를 생명처럼 아꼈다. 예란심은 스승 <천음낭자>가 <건곤정기묘일진인>에 의해 원신을 모두 연화당했을 때 그 수하 에서 떠나 독자적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녀는 우연히 주홍(朱洪)을 만났고 둘은 의기투합해 함께 요법을 연마했다. 요법이 완성되면 아미파에 복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홍은 요법을 연성하기도 전에 진한악(秦寒顎)을 만나 참사당했다. 세력이 약해 성세를 자랑하는 적 앞에서 경거망동은 하지 않았으나 천부적인 음심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을 다독 거릴 능력이 없는 그녀는 수시로 산에서 나와 건장하고 잘 생긴 남자를 찾아 음탕을 즐기곤 했 다. 그런 어느날 공교롭게도 산에 돌아가는 도중 신진자를 만났다. 신진자는 그녀의 미모를 보자 대 번 음심이 끓어올랐다. 또 알고 보니 음부의 거처하는 동굴이 자기가 머물기 적당한 은밀한 곳이 기도 했다. 그러나 요부 예란심에게 있어 신진자는 구역질이 나는 존재였다. 눈깔은 하나요, 팔은 한쪽밖에 없고 얼굴도 흉칙해서 수려했던 주홍과는 비할 수가 없었다. 하긴 주홍과 같이 산 것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 해도, 이번엔 족쇄까지 채우려 하니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은 싸움을 벌였다. 요부는 사실 그렇게 약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신진자의 적수는 아니었다. 반 나절을 싸운 끝에 허다한 법보는 죄다 파괴되고 끝내 사로잡히고 말았다. 신진자는 처음 그녀의 동부에 머물며 요부를 즐길 생각이었다. 한데 화냥년이 자기 같은 사람은 싫다 하며 바락바락 대들고 자신의 귀중한 법보까지 두 개나 망가뜨리게 되자 악심이 생겨났다. 예쁜 얼굴이건 뭣이건 찢어죽이리라 생각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요부는 급히 <천음낭자>의 진전인 <화금강탕혼사법(化金鋼蕩魂邪法)>을 펼쳤다. 어여쁜 미소와 요염한 눈길을 흘리며 신진 자의 음심을 불러일으켰다. 역시 스승의 사법은 효험이 있어 신진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렸고 둘은 부부가 되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같이 살게 되었어도 원한은 그녀의 심보 저 밑바닥에 깊이 가라앉아 있었 다. 만일 신진자가 그 동부에 틀어박혀 살기만 했다면 이 원한도 발동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신진자의 녹포노조에 대한 복수심은 도저히 멈출 수 없는 불덩어리였다. 오매불망 복수 만 부르짖던 신진자는 화혈신도와 문주를 훔치게 되었고 급기야 녹포노조가 보낸 당석 일당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다행히 신진자는 화혈신도를 찾으러 온 홍발노조 덕택에 목숨만은 살았으나 그 때문에 요부는 무진 고생을 하게 되었다. 백만산 음풍동으로 끌려온 요부는 녹포노조의 추악한 모습과 악독함에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였다. 문하제자마저 꺼떡하면 으적으적 씹어먹는 판이라 제자들은 하루살이 에 불과했고 그로 해서 요마는 봉폐를 엄밀히 해 도주를 방지했다. 도망칠 기회마저 무망한 요부는 기지를 발휘해 사도를 이간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서로 의심하고 원망하여 피차 죽인다면 요마도 언젠가는 고림무원이 될 테고 원한을 갚을 기회가 있을 것이었 다. 이런 흉계는 서서히 도모해야 했으므로 그녀는 매일 함박웃음 속에 비수를 숨긴 채 무척 조심했 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 지금의 불행은 신진자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그 못지 않게 당석도 원한 이 서리는 존재였다. 그가 신진자와 자기를 잡으러 왔을 때 요법으로 유혹했지만 녹포노조의 두 려움에 휩싸여 있던 당석은 요법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지금의 처참한 생각을 하 고 있는 게 아닌가! 당석과 신진자가 동시에 잡혀와 모진 형벌을 당하는 것을 보자 요부는 마음 속으로 무척 고소했 다. 외려 옆에서 요마를 쏘삭거려 더욱 고통을 주었다. 당석은 자신의 마겁이겠거니 해서 일체를 단념하고 있었지만, 흉포한 신진자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저항할 대로 저항할 뿐만 아 니라 기회를 보며 온갖 욕을 퍼붓는 등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녹포노조는 원래 신진자를 서서히 고통을 주며 오만 능욕을 다하여 죽이려 했다. 한데 사랑하는 계집의 통통한 장딴지를 짤라버리자 노기가 꼭두까지 솟아 본신의 요화를 뿜어냈다. 신진자가 혹 예비하고 있을 것까지 감안해 먼저 요무로 그의 온몸을 감싼 뒤 쇄골천심소수라법을 전개했던 것 이다. 그는 신진자의 정수가 깡그리 쇠진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요법을 거둬들였다. 녹포노조는 신진자가 다시 깨어나자 뭐라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곱 요인은 각자 위치를 잡아 나눠서서 깃발을 흔들었다. 일종의 채색 그물 같은 연무가 신진자와 당석을 에워쌌다. 그물 에는 한 자 정도의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당석은 채색 그물을 보자 놀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두 다리 를 버둥기며 녹포노조와 요인들에게 하소연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신진자는 더욱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녹포노조는 징그러운 웃음을 한번 쏟고는 품에 안겨 있는 요부에게 뭔가 말을 했다. 요부는 즉 석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디뚱디뚱 옆쪽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채색 그물 속의 두 사 람을 손가락질하면서 욕을 퍼부었다. 녹포노조가 소매를 한 번 펼치자 황금색 연기가 선을 그으며 채색 그물로 쏘아나갔다. 그물 안 에서 윙윙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수백 수천의 금잠 벌레가 신진자와 당석에게 달라붙었다. 금잠을 잃은 지 겨우 반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녹포노조는 벌써 찻잔만한 크기의 금잠을 키워 낸 것이었다. 독충은 금빛 날개를 요란히 펄럭이며 그물 속의 신진자와 당석을 쪼았다. 금잠이 온 몸을 에워싸니 두 사람은 금물을 들인 금인(金人) 같았다. 밥 한 그릇 먹을 시간이 지나자 녹포노조는 휘파람을 '휙!' 불어 금잠을 회수했다. 요인들이 연 무를 제거했을 때 영패 위의 두 사람을 보니, 그들은 마치 허연 백골 같았다. 핏자국은 한 군데도 없고 사방에 흰 뼈만 불쑥불쑥한데 얼굴의 뼈대가 유난히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백골이 삐죽삐 죽 솟은 게 영낙없는 해골이었다. 녹포노조는 이제야 성에 차는지 큰 입을 더욱 크게 희벌죽하게 벌리고 앙천대소했다. 요부는 금 잠의 독형이 끝나자 녹포노조의 무릎에 걸터앉아 다시 미태를 뿜어내며 뭔가 속살거리기 시작했 다. 요인들은 연무를 거둔 뒤 영패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한데 이 때 심악한 신진자는 무슨 수단을 썼는지 끊어진 팔끝으로 금잠 한 마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자기를 갉아먹은 금잠에게의 복수심이 불탄 끝에 단 한 마리라도 잡아 누르며 원한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잠은 녹포노조가 요법으로 심혈을 기울여 제련한 독충인 데다 신진자는 원신이 금제돼 있어 죽어라 짓누르고 있긴 했어도 죽지는 않았다. 금잠은 그 통에 날개를 퍼득이며 계속 신진자 를 물어뜯고 있었다. 바로 이때 신진자는 요부가 뭐라 녹포노조에게 속닥이며 자신을 괴롭히려 하고 있고 요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우선 금잠을 누르던 어깻죽지를 살짝 흔들었다. 금잠은 압박에서 해방되자 쌩 하고 녹포노조 쪽으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도중 요인 하나가 앞에 나타나는 걸 본 금잠은 재꺽 요인의 콧잔등에 달라붙었다. 그 요인은 아까 신진자와 척을 진 우두머리 사나이였다. 그는 금잠이 콧등에 붙어 물어뜯자 기 겁을 하며 허둥대다 스승 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생각 같아서야 법술로 금잠을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금잠은 스승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이다. 이 악충을 자칫 다쳤다간 그 화를 어떻게 받을 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통증에 아우성을 쓰며 녹포노조에게 쫓아가 하소연할 생각이었다. 이때 신진자의 험구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더러운 녹포노조놈아, 너는 조만간 너의 제자란 놈들한테 죽음을 당할 것이다. 저놈들이 아까 나한테 뭐라 했는지 아느냐! 그들은 나를 도와 너를 죽이고 싶다 했다! 네 간을 잘근잘근 씹어도 한이 안 풀린다고 했지. 으흐흐! 너도 저것들이 심복하지 않는 줄은 잘 알 것이다. 지금 저놈만 해도 금잠 때문에 너한테 다가가는 게 아니라 기회를 보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야. 으하하 하!" 녹포노조는 금잠 한 마리가 신진자에게 잡혀 있는 것을 보자 구해주려 하던 판에 제자를 물어뜯 는 걸 보자 급히 손을 쓰려 했다. 한데 바로 이때 신진자의 이간질하는 험담이 쏟아져 나왔다. 녹포노조는 섬칫 망설이는 마음이 생겼다. '요놈들이 나를 배반해? 하긴 하나도 나를 존경하거나 따르지는 않는단 말이야. 신진자란 놈이 아무리 악독해도 씨 없는 말을 하진 않을 거다.' 마침 나머지 요인들도 악충이 '윙!' 하고 나는 순간 무서움에 사방으로 몸을 피하고 있었다. 여 섯 놈은 몸을 피해 우왕좌왕하고 한 놈은 비명을 지르며 녹포노조한데 달려드니 뭔가 마음이 좋 을 리 없었다. 그의 눈에서는 퍼런 독기가 철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스승한테 구원을 청하려 다가가던 요인은 녹포노조의 눈에서 흉광이 번득이고 입이 저절로 벌어 지며 하얀 이빨이 드러나는 걸 보자 퍼뜩 발걸음을 멈췄다. 침이 자르르 흐르는 입은 뭔가 먹고 싶을 때의 모습이었고, 긴 팔은 새처럼 훌쩍 날아 그를 잡으러 오고 있었다. '신진자의 반간계에 걸렸구나! 이크, 안 되겠다!' 우두머리 요인은 급히 몸을 날려 달아났다. 그러나 녹포노조의 새 같은 팔이 한발 빨라 요인의 어깻죽지 하나를 덥석 잡아뽑았다. 팔뚝이 빠져나온 몸체의 구멍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 다. 녹포노조는 그 구멍에 입을 떡 대고는 꿀꺽꿀꺽 피를 빨아먹었다. 서너 사발 족히 마신 녹포노조는 콧등의 금잠을 펄럭하며 소매 속에 갈무리한 뒤 사나이는 부러 진 팔과 함께 한쪽으로 동댕이쳤다. 요인은 땅에 떨어지자 그만 기절했다. 나머지 여섯 요인은 동문 제자가 악마 같은 스승한테 당하는 것을 보자 공포에 질려 전전긍긍하 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녹포노조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천천히 영괘 앞으로 다가가 신진자의 영패를 들어올려 잠시 들 여다보다가 '훅!' 하고 황색 연기를 뿜어냈다. 황색 연기에 쐬인 영패는 갑자기 작게 오그라들었다. 한 장도 넘는 영패가 몇 자 크기로 줄어들 자 영패에 못박힌 신진자의 몸은 비비적거리며 오그라들었다. 영패는 작아져도 신진자의 몸은 축 소되지 않아 그 고통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큰 덩지가 작은 영패에 못박혀 비틀리자 더욱 하 얀 뼈가 옹긋종긋 삐져나오면서 괴상한 소리를 냈다. 아직도 기가 살아 녹포노조에게 욕을 퍼대는 신진자로서도 이 악행은 감당키 어려웠다. 그의 뼈 만 남은 몸이 뒤틀리자 그나마 남은 살 속에서 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누리끼리한 수액이 줄 줄 흘러나왔다. 두 자 정도로 즐어들었던 영패는 다시 원상태로 커졌다. 커졌던 영패는 이윽고 또 작아지는 것 이었다. 이렇게 서너 차례 커졌다 작아졌다 되풀이하자 한다 하는 신진자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이내 기절했고 욕을 천지로 내뱉던 입도 멈추었다. 신진자가 완전히 탈진해 눈을 감은 걸 본 녹포노조는 그의 가슴팍과 손발에 박혀 있던 다섯 개 의 독침을 뽑아냈다. 독침을 빼자 다섯 줄기 녹색 빛이 신신자의 몸에서 빠져나와 녹포노조의 소 매 속으로 사라졌다. 신진자는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유유히 깨어났다. 하나밖에 없는 괴안을 뜬 신진자는 가슴팍 과 손발에 박힌 독침이 뽑힌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천추의 원수인 녹포노조가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이것 저것 가릴 것 없이 벌떡 몸을 날려 녹포노조의 왼손을 콱 입으로 물어버렸다. 백만동의 대접전 雙深穹頂 毒火焚文昧 同入巖窩 飛光誅惡蠶 녹포노조는 요부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친히 신진자에게 손을 썼었다. 그리하여 천하에 둘도 없 는 독형을 가했고 이제 그의 몸은 뼈마디만 절단됐을 뿐 아니라 근육은 파열됐고 살점은 물기 하 나 없이 비틀렸다. 이제는 조금의 반항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마구 뱉아내는 욕설이 듣기 싫어 신진자를 뒤쪽으로 영패에 못박기 위해 독침을 잠시 빼냈던 것이다. 설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녹포노조의 큰 착각이었고, 실수라면 실수였다. 벌레도 죽기 전 꿈틀거리며 벌도 죽음을 불사하면서 침을 쏘는 법 아닌가. 하물며 원한이 가득찬 신진자임에랴. 신진자가 문 곳은 녹포노조 왼손의 관절이었다. 그의 원신이 금제되지 않았고 진기가 그처럼 고 갈되지만 않았다면 아마 녹포노조의 손은 싹둑 짤라졌을 것이었다. 관절을 물린 녹포노조는 놀람과 분노에 부르르 떨며 손을 뿌리쳤으나 악착스레 물고 늘어지는 통에 신진자를 떼칠 수가 없었다. 홧김에 그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신진 자를 도와주는 꼴이다. 녹포노조는 고통을 참고는 강기(剛氣)를 한숨 들이마셔 혈로를 봉쇄했다. 독기가 몸으로 스며들 지 못하게 방비한 녹포노조는 오른손으로 신진자의 턱 위를 잡아당겼다. 그의 괴성이 한 번 터짐 과 동시 신진자의 코 부위 위쪽이 쭈욱 찢겨나갔다. 신진자의 이빨과 위아래 턱은 아직도 노조의 손목을 문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녹포노조는 노기가 충천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코뼈 윗부분부터 뜯겨져 나온 신진자를 영패에 패대기치듯 엎어 못질했다. 독침으로 다섯 군데 혈도를 못질했건만 턱과 입이 찢겨나간 신진자의 머리는 계속 덜렁거렸다. 신진자의 못질이 끝나자 녹포노조는 왼손에 물려 있는 이빨을 벌려서 떼어냈다. 화가 덜 삭은 녹포노조는 성난 눈초리로 당석을 노려보며 서서히 다가갔다. 분풀이할 상대를 꼬나보는 그런 음 흉스런 눈초리였다. 이때 요부가 황망히 달려들며 위안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요사스런 미태와 웃음 그리고 위 로의 말에 녹은 녹포노조는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그는 사랑하는 요부의 달콤한 말에 기 분이 좋아 당석을 혼내주리라던 애초의 마음도 잊은 채 껄껄거리며 통쾌히 웃더니 낭창낭창한 계 집의 허리를 껴안아 연신 입맞추었다. 예쁜 볼에 더러운 입을 한창 문지른 녹포노조는 자기 자리 에 돌아가 앉았다. 이 덕에 당석은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뭉개지는 고통을 간신히 면했다. 자리에 앉은 요마는 여섯 요인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요인들은 깃발을 급히 흔들어 요무를 일으켜 당석을 에워쌌다. 그러더니 신진자와 마찬가지로 반대쪽으로 못박아 얼굴이 영패를 향하게 만들었다. 일이 끝나자 요인들은 요마 앞을 향해 공손 히 섰다. 녹포노조는 요부와 몇 마디 의견을 나누고 세 요인에게 신진자를 풍혈로 데려가라는 지시를 내 렸다. 세 요인은 당석을 남겨놓은 채 신진자만을 데리고 궁륭 밖으로 나왔다. 오색 연무가 번뜩이 며 지하에서 괴소가 들리는 순간 세 요인은 궁륭 밖으로 나왔고 금세 계단 위로 올라가 동부의 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세 요인도 조금 전 상처를 입은 요인을 이끌고 궁륭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 기 전 녹포노조가 손짓해 부르더니 뭐라 말을 일렀다. 그러자 상처를 입은 우두머리 요인은 허리 를 굽신거리며 감사하는 모습을 지었다. 궁륭 밖으로 나오자 우두머리 요인은 검광을 타고 동굴 밖으로 사라졌고, 세 요인은 소화상 등이 있는 앞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갔다. 세 요인은 모서리를 돌려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들은 서로 눈길이 마 주치자 순간 소화상 등이 있는 암혈을 응시했다. 소화상은 가슴이 철렁했다. 저자들이 우리들의 냄새를 맡았구나. 그는 어둠 속에서 급히 금선과 석생을 잡아당겼다. 정신을 차리라는 신호였다. 네 사람이 경계심을 돋구고 어둠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세 요인은 다시 눈길을 마주 치고는 이내 아무 일 없었던 양 그냥 궁륭 뒤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소화상 등은 궁륭 안쪽의 녹포노조 등 요인들의 일거일동을 환히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지하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 외에는 말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궁륭이 완전히 외부와 차단돼 있는 증거여서 그들이 들릴 염려도 없어 안심이 됐었다. 그들은 거의 반 나절 동안 수 없는 처참 한 광경을 목도했지만 문주가 있는 곳은 알아낼 길이 없었다. 또한 들어올 때는 수월했다 해도 나가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그들 중에서도 우두머리격인 소화상은 책임이 중함을 느껴 마음이 심히 초조해 있었다. 나이 어 리고 견식 부족한 동문 동생들을 안전히 지켜야 한다는 명제가 가슴을 짓눌러왔던 것이다. 궁륭 밖엔 사면에 동혈이 나열해 있을 뿐 별다른 동정은 없었으나 궁륭 뒤쪽의 동벽이 약간 수 상했다. 칠팔 장 높인데 사오 장 너비의 동력엔 하얀 서리가 끼어 있을 뿐 동혈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이 감실 같아 뵈는 석벽이 아무래도 수상한 게 수시로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암혈이 있을 텐데 요법을 써서 봉폐해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석벽은 요인들과 너무 가까운 곳이라 손쓸 수도 없고 요법을 푸는 방법도 알 수 없었 으므로 조급한 가운데 조용히 시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세 요인에게 발각되고 말았으니 소화상으로선 간이 녹을 일이었다. 요마 문하의 후 각이 저렇게 민감하니 만일 노회한 요마가 직접 궁륭 밖으로 나온다면 어찌 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또 세 요인은 자기들을 발견하고도 손을 쓰지 않으니 이 무슨 사연일까. 고의로 모른 체하다가 암산하려는 속셈일까. 그들은 불안에 휩싸여 자기 도망칠 때 쓸 법보를 움켜쥔 채 그들 세 요인 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세 요인은 널찍한 백옥으로 만든 석벽으로 다가갔다. 역시 수상한만큼 사연이 없는 석벽이었다. 그들은 석벽 앞에 도착하자 몸을 빙글방글 돌리고 거꾸로 서서 주문을 외었다. 이윽고 석벽 안쪽에서 예리하고 처량한 괴성이 퍼져나왔다. 괴성은 차츰 가까와졌는데 네 사람 중 소화상에겐 귀에 익은 소리였다. 그는 기쁘고도 놀라와 금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놈이 드디어 나타났군!" 금선 등은 소화상의 경고를 듣자 가일층 정신을 차려 눈여겨보았다. 괴성이 가까와지자 세 요인은 손발을 허둥대면서도 계속 몸을 놀렸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 서서 석벽을 향해 일지씩 날렸다. 이어 몸을 날려 피하더니 깃발을 휘둘러 연무를 방출하여 자신 들의 몸을 감싸 보호했다. '치지직, 치지직!' 하는 괴이한 소리가 들리고 석벽이 번쩍하며 누런 연무가 쏟아져 나왔다. 백옥 으로 만들어진 석벽은 홀연 사라지고 한 장 방원의 큰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저켠에서 녹색 불이 춤을 추듯 날아나왔다. 소화상이 천잠령에서 보았던 요물 문주였다. 장 이와 석생은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으나 말로 들어 대충 생김새를 알고 있었다. 듣던 대로 문주 는 기이하고 추악했으며 위풍이 여전했다. 문주는 사람들이 앞에 있는 걸 보자 '치치!' 울부짖으며 이빨과 흉칙한 다리를 춤추듯 움직여 덮 쳐갔다. 문주는 다리를 휘저어 두 줄기 녹색 불꽃을 뿜어댔다. 세 요인은 깃발로 몸을 보호하는 동시 검광을 타고 사방으로 뿔뿔이 도망쳤다. 원래 요인들은 녹포노조의 명령을 따라 석벽의 봉쇄를 풀고 요물 문주를 불러다 궁륭 안에 준비 한 시체를 먹일 계획이었다. 한데 그들이 요법으로 문주를 부르는 사이 녹포노조는 요부와 색을 즐기기 시작했다. 색을 즐기 는 한 요마는 제자가 죽건 쫓기건 상관할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이 행음도 요사스런 탕녀 예란 심의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녹포노조를 색으로 꼬여 제자를 돌보지 않게 해서 그들을 이간시킬 요량이었다. 궁륭은 밖에서 안이 환히 들여다보였지만 녹포노조가 법술로 들이지 않는 한 금성철벽이요, 천 라지망이었다. 요인들은 스승이 행음하는 도중엔 자기들을 문주의 공격에서 구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검광을 타고 정신없이 도망을 치며 두 음부 음녀의 색탐이 끝나 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얼굴엔 당황과 분노, 원한이 서려 있었다. 소화상 등에게도 이런 상황은 정말 천만뜻밖이었다. 요인 일당은 대단한 재주를 지녀 몹시 날래게 도망쳤으나 문주는 더욱 빠르게 그들을 쫓았다. 다행히 궁륭은 동굴 중앙에 솟아 있어 사방으로 방향을 틀며 도주할 수 있었고 요인들의 실력 또 한 약하지는 않았다. 세 요인이 도망치고 문주가 쫓는 경주가 한동안 계속되자 연무가 사방으로 번지며 동굴을 수놓 았고 투명한 궁륭과 함께 이채로운 빛을 발산해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었다. 소화상은 여러 번이나 문주를 처치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도망칠 출로가 자신없었고 세 후배 동 료가 영 마음에 걸렸다. 녹포노조의 흉악한 행실이 후배들의 여린 모습과 자꾸만 겹쳐서 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의 요물이 행음하고 있긴 해도 지척에 있어 감히 경거망동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승도 서찰에서 밤중에 손을 쓰라고 지시하지 않았던가. 겁없이 행동했다간 저번처럼 큰 위험에 빠질 염려가 있다.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후배들이 망동하지 못하게 감시를 단단히 했다. 장이와 금선은 배짱만은 자신 있었으나 여러 차례의 훈시를 무시할 수 없어 우두머리인 소화상 만을 바라보았다. 오로지 석생은 세상 모르는 천방지축이라 몇 번이나 불뚝불뚝 덤비려 나서는 것을 소화상이 붙들어 앉혔다. 녀석은 제지당할 때마다 광앙불락하여 입이 삐죽이 나왔다. 이제 세 요인은 거의 요물의 추격에 붙들릴 지경이 되었다. 두 줄기 녹색 불꽃이 별똥처렁 날아 깃발로 에워쌀 연무를 접촉할 순간이었다. 세 요인이 어쩔 방법이 없어 위급한 찰나, 지하에서 일 진의 괴성이 울려왔다. 세 요인에게 있어 그 소리는 특별사면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황망히 궁 륭 앞쪽으로 달려갔고 빛이 번쩍하는 동시 궁륭 안으로 들어갔다. 요물도 그들을 따라 궁륭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주는 이내 녹포노조를 향해 날아갔다. 녹포노조 는 요물이 가까이 접근하자 자기 머리 위에 있던 녹색 불꽃을 쏘아냈다. 녹색 불꽃은 무슨 흡인 력이라도 있는 양 요물을 빨아들여 공중에 머물게 했다. 문주는 '치지직!' 소리를 요란히 내며 공 중에서 바둥거렸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했다. 문주가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자 요부는 재미있는 듯 주변에 있는 여인들의 시체를 던져주었다. 시체는 문주를 에워쌀 녹광에 부딪치자 물건에 튕겨나듯 떨어져 내렸다. 요물은 사람의 시체를 먹고 싶어 정신이 없었는데 먹을 수가 없자 마구 몸부림쳤다. "으핫하하!" 녹포노조는 한바탕 통쾌히 웃고는 입으로 뭐라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녹색빛을 가리켰다. 녹색 빛은 금방 사방으로 흩어져 수백 수천의 불꽃을 튕겼다. 불꽃은 멀리서 문주를 에워싸며 계속 빙 글빙글 돌았다. 불꽃의 포위범위가 넓어지자 요부는 다시 시체를 던져주었다. 이번엔 튕겨나오지 않고 요물 가 까이 굴러갔다. 먹을 것을 보자 문주는 보통 거미처럼 긴 발로 끌어다 아삭아삭 먹기 시작했다. 흉물스런 이빨은 여자의 시체를 씹을 때마다 빨간 피를 뚝뚝 흘렸다. 뼈까지 깡그리 다 먹은 요 물은 다시 요부가 던져주는 시체를 냉큼냉큼 받아먹었다. 요물은 이내 바닥에 널려 있던 시체를 모두 먹어치웠다. 그러나 요물은 그 많은 사람고기를 먹고도 양이 안 찬 듯 녹포노조와 요부를 바라보며 발버둥을 쳤다. 요부도 요물이 사람을 먹는 게 재미있었던지 녹포노조에게 더 먹을 것을 주자고 응석을 부 렸다. 녹포노조는 요부의 응석을 듣자 입을 쩍 벌리고 고함을 쳤다. 지하의 괴성이 은은히 들리고 조 금 있자, 아까 사라졌던 여섯 명의 요인이 동굴입구에 나타났다. 그들은 궁륭 안으로 들어가려 하 다가 녹포노조의 수상한 모습을 보고는 이내 번개처럼 도망쳤다. 그들은 동굴 밖으로 사라졌다. 제자들이 도망치는 것을 본 녹포노조는 긴 두팔을 휘두르며 시근덕거렸으나 한번 사라진 제자들 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소화상 등에 있어 이들 사제지간의 행동은 도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자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소화상 등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녹포노조는 수하 요인들이 자기의 지시를 듣지 않자 화가 벼락같이 나서 대번 쫓아갈 태세 를 갖췄다. 그는 우선 현빈주로 요물을 비춰 꼼짝 못하게 한 뒤 원신을 운용해 제자들을 쫓아가 려 했다. 바로 그때, 영패에 못박혀 있는 당석이 눈에 띄었다. 그는 징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두 팔을 너울거리면서 천천히 당석에게 다가갔다. 당석은 이미 혼백이 날아갈 정도의 처참한 꼴들을 겪고 있었다. 이제 마음은 초라해지고 간담은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들었다. 언젠가 닥칠 참화를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살가죽을 실룩이며 영패 뒤에서 허둥거렸다. 녹포노조는 요부의 유혹에 빠져 요물에게 뭔가 산 것을 먹이로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문하요인 을 불렀던 것인데 그들은 스승의 악랄한 심보를 대번 알아채고는 바람처럼 도망가 버렸다. 때문 에 공교롭게도 아직 한천에 데려가지 않은 당석이 요마의 눈에 띄어 참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녹포노조에게 있어 당석 하나쯤 요물의 먹이로 삼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또 요부에게 있 어서는 더더구나 좋은 일이었다. 사도간을 이간질시키며 자기들의 우익을 없애는 일거양득이었다. 당석은 추호도 저항하지 못하고 녹포노조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녹포노조는 독침을 뽑아 그를 쥐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뒤 문주를 제압한 녹색 불 빛을 제거하여 자기와 요부만을 감싸게 한 후 당석을 놓아주었다. 요물은 많은 사람의 시체를 먹었지만 법술에 금제돼 있는 게 영판 맘에 들지 않았다. 한데 갑자 기 자유롭게 되자 신이 난 문주는 먼저 녹포노조를 향해 무섭게 날아갔다. 그러나 그는 녹포노조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녹색 빛에 막혀 멈추어섰다. 화가 난 요물은 씩씩 독기를 뿜어내며 분을 터뜨렸다. 그때 당석이 녹포노조의 손에 풀려 날아왔다. 요물로선 버릴 수 없는 맛좋은 먹이였다. 요물은 급히 당석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어느 사람도 죽기 전에는 일말의 희망을 갖게 마련이다. 당석은 악랄한 스승이 자기를 요물의 먹이로 내동댕이쳤지만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는 아무 데고 마구 도망치며 마지막 저항을 했다. 그는 한동안 도망치며 노귀(老鬼)를 원망했다. "아, 더러운 스승놈이로다! 내가 아무리 망덕한 제자라도 이렇게 죽일 수가 있는가! 당석아, 당석 아 너는 죽어도 싸다. 저런 개 같은 놈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원망할까 보냐!" 그는 처음 녹포노조한테 반항하지 않고 죽음을 달게 받는 태도를 취했었다. 스승의 마음을 일말 의 동정으로 유도하면 좋고 영 죽더라도 극악한 형벌은 면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한데 스승이 란 자는 자기를 저 더러운 요물의 아귀 속으로 몰아넣는 게 아닌가. 궁륭은 봉폐가 엄밀하여 도망갈 구멍이 없다. 이제 참혹한 길은 면할 길 없는데 이놈의 요물을 어떻게 해서건 처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노귀의 위세도 꺾고 죽지만 소원풀이로 한이 없을 것 같았다. 생각을 굴리는 사이 요물은 바람처럼 날아와 채색 독무를 뿜어냈다. 원신의 금제를 받은 당석은 요물의 독수를 피하지 못하고 금세 혼수상태에 빠졌다.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생각뿐 움직이지 않았고 요물의 긴 발이 그를 깍지끼듯 찝어버렸다. 당석은 혼미한 중에도 요물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흉광이 번뜩번뜩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 몸은 이 요물에 붙들려 참변을 당할 순간이었다. 그러한 순간 당석은 자신도 모르게 혀끝을 질끈 씹어 선혈을 만들어 다년간 고련한 진기와 함께 요물의 머리를 향해 뿜어냈다. 이러한 혈전(血箭)은 사교의 인물들이 목숨이 위태로울 때 적과 동귀어진하기 위해 쓰는 사법이 다. 원수를 만나 극히 위험할 때 외에는 가벼이 쓰지 않는 수법인 것이다. 녹포노조는 당석이 독 안에 든 쥐요, 요물 문주가 대단히 무서운 독물이며 자신이 옆에서 감시 하고 있어 아무 걱정없이 구경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석은 원신마저 잃고 있는 처지니 요물의 적 수가 되지 못했다. 한데 당석은 마지막 곤경에 당해서도 최후의 악랄한 독수를 펼친 것이었다. 녹 포노조의 안심은 큰 실수요, 소홀함이었다. 요물은 혈전이 쏘아오자 순간적으로 피하려 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늦고 말았다. 혈전은 요물의 두 눈에 적중됐다. 통증에 놀란 문주는 두 눈을 감고 머리를 마구 흔들며 동시 집게발에 힘을 주 어 당석의 몸뚱이를 두 동강냈다. 화가 난 요물은 당석의 반쪽 시신을 버석버석 베어먹었다. 시체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요물은 소 리를 '꽥꽥!' 지르며 난동을 피우는 품이 중상을 입은 듯했다. 흉광이 쏟아지던 두 눈은 어둡고 흐릿한 것이 앞이 잘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때 녹광이 어른거리는 요물 가까이에 소인 하나가 나타났다. 생김새가 영낙없는 당석인데 무 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그는 땅에 내려서자 숨을 곳을 찾아 마구 도망쳤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녹포노조의 녹색 불세례를 받고 말았다. 노마가 뿜어낸 녹색 화염은 소인을 사방에서 에워 싸버렸다. 소인은 불길에 휩싸였다. 처음 소인은 불구덩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어지러이 빠져나가려 했으나 화염은 쉽사리 틈을 내주 지 않았다. 화염은 소인이 가는 곳마다 쫓아가며 타올랐다. 불길에 싸인 소인의 모습은 점차 흐려 지더니 이내 종적없이 사라졌다. 한편 눈을 다친 문주는 마구 날뛰며 궁륭의 유리벽에 겨울철의 파리마냥 부딪치면서 발광하고 있었다. 소인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녹포노조는 두 차례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궁륭 뒤쪽 석벽의 동굴 을 통해 요물 하나가 날쌔게 날아와 익숙한 몸짓으로 궁륭에 쑥 들어갔다. 소화상은 그 요물을 보자 소스라쳐 놀랐다. 요물은 생김새가 문주와 똑같았던 것이다. 다만 녹색 별종 빛으로 온몸을 휩싸고 있는 게 달랐다. 소화상이 놀라 입속으로 외쳤다. '뭐야. 저 요물은 세상에 단 하나 있는 게 아니었던가? 어디서 저렇게 똑같은 또 하나의 문주가 나타났을까?' 요물은 녹포노조 앞에 오자 몸을 비틀며 바둥거렸다. 녹포노조는 징글맞게 한번 웃고는 손을 뻗 어 일지를 날렸다. 요물의 몸을 덮었던 연무가 돌연 흩어지고 홍의 라마승 하나가 내려왔다. 금선은 혜안으로 요물이 나올 때 무슨 홍의인을 품에 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요법 으로 연무를 흩고 보니 요물은 간데없고 역시 홍의의 라마승이 툭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무슨 꿍꿍잇속인지 몰라도 라마승이 요물로 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의 라마승 아각달은 몸을 드러내자 녹포노조한테 다가가 무언가 의논을 했다. 이때 요부는 녹 포노조의 무릎에 누워 가까이 서 있는 아각달을 유혹했다. 그녀는 허연 다리를 들어 아각달의 코 앞에 들이댔다. 아각달은 미녀의 예쁜 속살이 눈앞에 다가오자 황홀해 그만 미칠 지경이었다. 그 러나 녹포노조의 존전이라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숨만 씨근벌떡 들이쉬고 내쉬었다. 녹포노조는 뒤늦게 요부의 몰골을 보고 그녀를 옆으로 내동댕이 쳐 버렸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 나 긴 팔을 휘저으며 아래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아각달은 물론이고 요부마저도 돌연한 녹포노 조의 광포한 행동에 기가 질렸다. 그들은 주춤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동혈에 숨어 궁륭 속을 엿보던 소화상 등은 또 한 차례의 참상이 벌어지나 해서 바짝 긴장했다. 녹포노조는 여지껏 발광하고 있는 문주를 향해 일지를 날렸다. 일단의 연무가 독충을 에워싸자 번쩍하는 순간 궁륭 밖으로 나왔고 요물은 '찌르륵 찌르륵!' 듣기 고약한 소리를 내며 나는 화살 같이 빠르게 동벽 속으로 사라졌다. 문주가 사라지는 것을 보자 석생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법보를 날리려 했다. 그때 눈이 잰 금선이, 궁륭을 바라보고 있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급히 석생을 제지 했다. "잠깐 기다려, 뭔가 이상하다구!" 바로 그 순간, 녹포노조가 궁륭 천장에 구멍을 내더니 불쑥 머리를 내밀고 사람 냄새를 맡았다. 그는 이내 소화상 등이 있는 동혈 쪽을 노려보았다. 두 눈에서 흉광이 불같이 쏟아져 나왔다. 악마의 눈에 기가 순간 꺾인 소화상이 낮게 소근댔다. "요물에게 들켰다! 빨리 도망가야겠어!" 소화상이 금선 등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다급해 하자 석생이 꼬마답지 않게 씩씩하게 말했다. "형님들, 걱정하지 마십쇼. 함께 손이나 잡으세요. 내가 길을 열겠습니다." 석생은 후다닥 양계패를 꺼내들고 중얼중얼 진언을 외었다. 양계패가 번쩍하고 한 번 흔들리더 니 소화상 등은 동혈 위쪽 석벽을 뚫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눈앞이 컴컴해지자 놀라 검광으 로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어둠도 한 순간, 그들은 이미 돌을 뚫고 상승해 파아란 하늘 위에 놓여 있었다. 정신이 퍼뜩 나갔다가 주위를 살펴본 소화상이 놀라 소리쳤다. "아이쿠, 우리가 하늘에 둥둥 떠 있잖아!" 금선이 소화상의 말을 받았다. "우리 밑에 있는 저 산이 백만산 아니오?" "맞았어, 우린 눈 깜짝할 사이에 마굴을 빠져나온 거야." "양계패는 대단한 법보로군. 석사제, 그 법보는 잘 갈무리해야겠어. 엄청나게 쓸모가 있는 보물 이야!" 원래 아각달은 녹포노조의 호령을 받자 문주처럼 가장하여 석벽을 뚫고 나오다가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 산 사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은 적이 동굴에 틈입해 궁륭 밖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는 증 거였다. 그는 슬쩍 사방을 훔쳐보았으나 적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동혈이 워낙 많은 데다 소화상 등이 신형을 숨겨 찾을 길이 없었다. 아각달은 궁륭에 들어가자 녹포노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 호혈에 들어왔다는 자체도 그렇지만 자기가 발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적은 자신이 감당 하기 힘든 강자일 터였다. 아각달의 보고를 받자 녹포노조는 대번 화를 벼락같이 냈다. 녹포노조가 아각달을 문주처럼 환화(幻化)시킨 것은 따로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를 부 른 것은 도망친 문인들을 잡기 위해서였다. 현재 제자들은 종전과 달리 모두 금제를 당하고 있어 멀리 도망갈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요법을 써서 추적해 가면 하나하나 죄다 찾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금잠과 일부 법보가 아직 연성이 덜 된 상태라 사오 명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더욱 금잠을 지키는 몇 명의 문인은 필요했고, 백미침 때문에 여독을 풀기 위해 행법할 때 지켜줄 제 자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녹포노조는 아각달에게 동굴 안에 있는 몇 명 요인을 잘 지키라 명령 한 뒤 자신이 요법을 발동해 도망친 놈들을 잡아다 참혹히 죽일 생각이었다. 한데 간세배가 동굴에 들어온 것 같다는 아각달의 보고를 들은 녹포노조는 화가 천둥같이 나서 아각달과 요부마저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문주를 석벽 안으로 돌려보낸 녹포노조는 궁륭 벽면에 구멍을 뚫고 머리를 쑥 내밀고 냄새를 킁 킁 맡았다. 그는 처절한 괴성을 내지르며 소화상이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큼지막한 손 을 휘둘러 연무를 온 동굴에 흩뿌렸다. 그와 동시 손을 쓰윽 뻗어 소화상 등이 있는 동혈 속을 뒤졌다. 그러나 악마의 손아귀가 동혈을 뒤질 때 소화상 등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만일 녹포노조가 손을 쓰기 전에 요무로 동혈을 봉쇄했더라면 석생의 양계패로도 탈출할 수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녹포노조에게 있어 적이 산을 가르고 돌을 뚫는 재주가 있으며 양계패로 호 신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무리 동혈을 휘저어도 사람이 없자 녹포노조는 이를 바드득 가는 중에, 놈들이 동굴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는 출구를 연무로 단단히 봉쇄한 뒤 한동안 적이 몸을 드러내기를 기 다렸다. 한데 고대하는 적은 아무 소식이 없고 사람 냄새는 차츰 사라졌다. 적이 벌써 도망갔나 망설이던 녹포노조는 그래도 믿을 수 없어 출구를 재삼 단단히 봉쇄한 뒤 동굴 밖으로 나와 사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수상한 구석이 하나 도 없었다. 자신의 요법이 고강하고 원신이 오묘하다 자부하는 녹포노조로서는 정말로 분통이 터질 일이었 다. 냄새로 보아 필히 적이 침입해 있었던 것을 눈 깜짝할 사이 놓쳐버렸으니 보통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극락진인> 이정허 한 사람 외에는 무서운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정허는 도를 이 룬 뒤 세상일을 관여하지 않고 있어 걱정할 바가 없었다. <극락진인>만 아니라면 정사 어느 파 의 고수라도 자신을 해치지 못할 터라 큰 걱정은 없고 간세배도 조만간 잡히리라 자신했다. 녹포노조는 요법으로 각처에 매복을 만들어 적이 걸려들게 만들어둔 뒤 아각달과 함께 문주가 숨겨져 있는 석벽 안으로 날아갔다. 한편 소화상, 금선, 석생, 장이 네 사람은 그들이 머물던 동굴로 돌아와 고행두타의 서찰을 또 하나 뜯어보았다. 이번 편지에는 네 사람이 손을 쓸 시기와 방법이 적혀 있었고, 별도로 네 장의 영부도 첨부돼 있었다. 이제 대공(大功)이 머지 않은 것을 확인한 소화상 등은 기쁨과 놀람에 휩 싸였다. 고행두타의 영부를 하나씩 나눠 가진 그들은 서첩의 지시대로 둘씩 나눠 일을 벌이기로 했다. 장이와 금선은 요승 아각달을 죽이고 금잠을 공격하여 녹포노조를 유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사이 소화상과 석생은 빠져나온 돌틈을 통해 다시 동굴에 들어가 문주를 죽이는 책무를 지시 받았다. 백옥으로 만들어진 석벽의 봉쇄를 파괴해 문주가 날아나올 때 처치하면 되었다. 요물은 당석의 혈전에 눈을 다쳤으므로 아차 잘못하여 녹포노조가 설치한 요화에 빠질 가능성이 많았다. 만일 두 독이 한 데 합치면 불이 나서 요물은 타죽을 것이었다. 그때 벽력검으로 문주의 몸체를 꿰뚫어 죽이라고 고행두타는 지시하고 있었다. 석생을 제외한 세 사람은 섬세한 사람들이다. 여러 차례 적을 처치할 방법을 숙의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자 대공을 성취하는 중요한 한판이었으므로 그들은 밤이 새도록 의논을 계속했다. 동이 트자 소화상은 석생과 함께 먼저 서첩에서 지시한 암곡(岩谷)으로 가기 위해 떠났고, 금선과 장이 는 반 시진 뒤 동굴을 나섰다. 소화상과 석생은 은형술법을 펼치며 백만산의 주봉 남쪽으로 날아갔다. 서첩에서 지시한 암곡은 밀짚이 우거지고 형세가 가파른 계곡 속에 있었다. 도처에 독기와 장기가 솟아올랐으며 악취와 더러움이 진흙탕 속에서 부글거렸다. 온갖 괴이한 벌레와 잡충이 우글거리는 사이로 크고 작은 뱀들이 꿈틀꿈틀 몸을 사렸다.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덩지 큰 동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소화상과 석생은 시간이 촉박해 뱀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깊숙이 들어갔다. 계곡은 나선 형으로 생긴 기암절벽의 연속이었고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들은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계곡은 어두워졌다. 계곡은 이내 물이 나왔으나 무슨 요인 따위의 흔적은 보이지 않 았다. 소화상과 석생이 의아한 눈초리를 마주치고 있을 때 홀연 괴이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사람의 부르짖음 같았다. 둘은 소리를 따라 암벽의 틈새로 나아갔다. 등나무 덩굴이 무성한 곳을 들치고 나아가니 두 자 정도의 좁은 통로가 있었다. 푸른 이끼가 길 을 온통 덮고 있고 원시의 풀 냄새가 유난히 코끝에 짙게 풍겼다. 반 리쯤 걸어가니 물소리가 졸졸 귀를 간지럽혔다. 홀연 앞이 환해지고 푸른 나무와 들꽃이 흐 드러지게 어울려 있었다. 산은 그윽하고 물은 차가왔으며 꽃들은 요염을 자랑했다. 개울 건너편 산벽 아래에 동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괴성은 바로 그 동굴 속에서 들려왔다. 소리는 간헐적으로 들렸으나 예리한 듯 처량한 듯 듣는 사람의 마음이 섬뜻해지는 것이었다. 소화상은 혹 요귀라도 있을까, 걱정돼 석생과 함께 영부로 몸을 감추고 동굴로 날아 들어갔다. 동굴 안쪽에는 붉은 화염이 번득번득 비치고 있었다. 동굴은 여러 장이 넘는 빈터가 있었는데 그 중간 동녘에 요인 하나가 못박혀 있었다. 녹포노조의 반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요인 앞에는 네 개의 깃발이 세워 있고 요화(妖火)가 활활 타오르며 요인을 태우는 중이었다. 요인은 요화에 연소되고 있다 해도 상처난 데가 없었는데 계속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소화상은 스승의 서첩에서 말한 요인이 이 사람이구나 하고 확신해 말을 걸려고 앞으로 나아갔 다. 이때 요인이 먼저 사람의 냄새를 맡았는지 비명을 멈추었다. 요인은 앞을 노려보며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녹포노조를 제거하기 위해 오시었소? 그대의 은신술법이 꽤나 근사하군. 하지만 노귀의 법술이 매서워 그 앞에서는 당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는 못 배길 거요. 만일 당신이 나의 부 탁 하나를 들어준다면 나도 당신을 도와줄 생각이 있소." 소화상은 그 자가 자기를 알아보자 썩 기분이 나빠 큰소리로 호통쳤다. "녹포노조는 흉악한 악인이오. 당신은 그의 문하로서 역시 좋지않은 사람이라 이런 극형을 당하 고 있는 것 아니겠소? 지금쯤 잘못을 뉘우치고 있을 테니, 우리에게 기밀을 알려주어 성공하도록 도와주시오. 그러면 내 당신을 구해드리리다." 사나이는 소화상의 말을 듣자 껄껄 냉소를 쳤다. "당신이 무슨 재주를 지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귀를 처치할 수는 없을 것이오. <극락동자> 외에는 그를 제압할 수 없고 나를 구하지도 못할 게요. 내가 당신한테 부탁하는 건 목숨이 아니 라 고통만을 덜기 위한 것이니 그 점 오해하지 마시오." "그를 제압할 수 없다면 나를 도와 뭣 한단 말이오?" "얼마 전 중대가리 한 녀석과 꼬마 하나가 문주를 훔치러 왔었소. 아마 고인의 지도를 받고 있 는 자들인가 본데 언젠가 노귀를 처치하러 올 것이오. 하지만 노귀는 자기의 재주만 믿고 여색에 빠져 있소. 그 자들이 왔을 때 마침 공교롭게 우리들의 대사형 신진자도 복수하러 왔었으나 성공 하지 못하였지요. 그 두 사람은 이곳 지리에 어두워 문주도 훔치지 못하고 아차 목숨까지 날릴 뻔했다오. 그 때문에 우리들만 곤욕을 치렀고 일층 노귀의 의심만 받게 됐소. 더구나 금제까지 당 해 도망가는 동문들은 매번 붙들려 이런 독형을 당하게 되었지요. 어제만 해도 노귀는 음부의 유 혹에 빠져 우리를 문주에게 먹이려 했소. 당시 침궁에 들어가기만 했으면 틀림없이 죽었을 거요. 우리는 잠시 그곳을 피해 나중 스승의 온정을 기대하였었지. 그러나 노귀는 정말 악독해서 누구 하나 용서해 주지 않습디다. 원신이 이미 금제당하고 있는 터라 우린 모두 법술에 걸렸고 이렇게 못박혀 악형을 당하고 있는 중이오. 머지 않아 그는 우리들의 혼과 원신을 제련해 법보를 만드는 데 쓸 것이오. 지금 이 음화(陰火)는 파괴 못할 것도 없소. 하지만 이 불을 끄기만 하면 노귀가 즉각 나타날 게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도 도망갈 수 없을 것이오. 그래 당신들이 나를 구할 수 있 을 것 같소? 나는 그저 일찍 죽기만을 고대하고 있다오. 누군가 유능한 사람이 노귀의 침궁 뒤켠 에 있는 음풍동에 들어가 요물 문주를 죽여 노귀의 기만 꺾어줘도 한이 없겠소. 그 요물만 죽으 면 노귀의 악독한 요법은 연성이 안 되게 되어 있소.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될 게고 즉각 죽여버릴 터이니 후련하게 되지 않겠소?" "당신은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는 거요? 그렇다면 뭘 부탁한다는 거요?" 소화상이 의아한 듯 묻자 사나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 음풍동은 요술로 봉쇄돼 있어 자칫 잘못 들어갔다가는 음풍동 뒤쪽에 있는 호봉애(戶峰崖) 로 갈 염려가 있습니다. 그곳은 라마승 아각달이 가짜 문주로 환화해 있는 데다 극히 무서운 요 법이 매복돼 있다오. 한번 매복에 빠지면 땅, 물, 불, 바람이 동시에 발동해 사람을 횟가루로 만들 어 버리지요. 음풍동을 들어가려면 법문의 법술과 우리들이 쓰는 육양정풍번(六陽定風幡)이 있어 야 합니다. 어제 노귀는 우리를 처치할 때 웬일인지 우리들이 쓰던 법보를 꽤 거두어가질 않았소. 문주가 숨겨진 지하 석벽 윗면에 석갑 하나가 있는데 그 안에 삼 촌 육 푼쯤 되는 작은 바늘 십 여 개가 들어 있습니다. 매 바늘 끝마다 혈육(血肉)이 묻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원신인 것이오.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바늘이 나의 것이니 당신은 그것을 뽑아버려 주시오. 그러면 내 몸 뚱이는 음화에 의해 처참히 타버려도 원신만은 풀려나 전겁할 수가 있답니다." "그건 내가 꼭 해드리겠소. 생각보다 쉬운 일이구려." "꼭 그렇지만도 않소. 어쩌면 문주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 침을 한 번 빼기만 하면 노귀가 당장 나타날 테니 말이오. 그때 현빈주에 쐬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한번 쐬면 탈출할 수 없으니 극히 조심해야 하오. 나는 죄가 많아 마땅히 업보를 받고 죽어야 할 몸이지만 내 원신 을 구하다가 당신이 당하는 건 바라지 않소. 당신이 감히 가서 문주를 죽이고 침을 빼어준다고 약속하면 당신한테 해법과 육양정풍번을 줄 뿐 아니라 요행히 탈겁하여 훗날 만나게 되면 그 은 혜를 내 크게 갚으리다." "나는 은혜 같은 건 바라지 않소." "하하하, 당신은 그렇게 말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정사가 달라 약속을 어길 수는 없소. 만일 승락한다면 지금 가도록 하시오. 지금이 바로 노귀가 행법하여 입정하는 때니까 말이오. 그의 침 궁에 들어가면 그가 단정히 앉아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는 아무 의식이 없소. 노귀는 자기의 몸 뚱이를 누가 침해할까 봐 단단히 법술로 봉쇄할 뿐만 아니라 원신은 금봉애(金峰崖)로 악충을 지 키는 나의 동문들을 감시하러 간다오. 따라서 입정한 그 노귀를 두려워할 것도 없고 함부로 그를 공격하지도 마시오. 궁륭 뒤켠의 백옥으로 된 석벽 아래에 가서 내가 가르쳐 준 법술을 외고 깃 발을 한 번 가리키면 옥석은 금세 없어지고 동굴이 나타날 겁니다. 동굴을 한창 가다보면 왼켠에 굽은 길이 나올 테니 그쪽으로 돌아가십시오. 바로 그 지하에 문주가 잠복해 있으니 요물을 처치 하시오. 요물을 제대로 처치하고 못하고는 당신의 능력에 달렸지만 말입니다." 소화상은 사나이의 말을 듣자 마음이 들떠 즉각 대답했다. "좋소, 당신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소. 한데 사실 나는 이전에는 물론 어제도 동굴에 들어가 친히 문주를 보았었소. 문주는 동혈이 열리는 즉시 튀어나옵디다. 아마 지하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소?" 요인은 소화상의 말을 듣자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져서 사납게 으르렁댔다. "원래 당신은 허실을 탐지하러 왔었고, 동벽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를 이용하려 했던 거야! 요물이 날아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나의 원신을 구할 수 없을 것 아니오? 흥, 내 하 마터면 당신한테 속을 뻔했소. 당신의 심보를 스스로 말해주어 그 점은 고맙구려!" 소화상은 요인이 화를 벌컥 내자 무척 당황했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상대의 오해를 사고 만 게 아닌가. 그의 해법을 모른다면 이번 일은 만사휴의다. 소화상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 없어 황급히 변명했다. "당신은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그저 문주가 그렇게 날아나오지 않겠느냔 말이지 바늘을 뽑으러 가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나는 <동해삼선> 고행두타의 문하제자인 소화상이란 사람이오. 녹포노조의 무서움은 익히 알고 있으나 사부의 특명을 받고 문주를 제거하 러 온 참이라오. 당신이 해법을 알려주면 문주를 제거하기가 월등 용이하겠지요. 문주를 어디서 제거하든 꼭 안에 들어가서 당신의 원신을 구출해 주겠소. 덕을 입지 못하면 갚을 것도 없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남의 위태로울 때를 틈타 득을 보려는 게 어디 우리 같은 수도하는 사람이 취 할 행동이겠소?" 요인은 소화상의 간곡한 말을 듣자 한동안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소. 문주는 날아나온 뒤에 처치하는 게 원칙이겠지요. 다만 내 두려워하는 것은 침 궁 내에 있는 요부가 놀란 끝에 노귀를 경동시킬까 하는 점이오. 그땐 당신은 성공해도 나는 아 무 가망이 없게 되지요. 그렇다 해도 당신한테 해법을 건네주고 일우의 희망이라도 걸어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소." "내 절대 당신과의 약속을 저버리진 않을 것이오." "내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 업보는 스스로 만든 것이니 후회할 것도 없고 누구에게 떠맡길 일도 아니잖겠소. 내 이름은 수인(隨引)이라 하오. 노귀의 여덟째 제자요. 요물을 처치할 기회 닿는 대로 구해주면 언젠가 필히 은혜을 갚으리다. 노귀가 나에게 전수해 준 깃발은 내가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 제련한 법보라오. 어제 노귀한테 뺏길 때 동굴 밖 고목의 구멍에 깊이 숨 겨놓았소. 물론 법술로 은폐해서 외인은 쉽사리 찾아낼 수가 없을 것이오. 깃발과 동굴의 석벽을 여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 지금 빨리 가보시오." 소화상은 수인한테서 법술을 배우자 석생과 함께 백만산 주봉으로 날아갔다. 동굴 주변엔 요무 가 짙게 깔려 있었으나 영부를 부착한 그들은 독무에 침투당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 은 어제 뚫고 나온 바위 틈새를 통해 침궁까지 틈입해 들어갔다. 궁륭 안에 녹포노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요부만이 옷을 홀랑 벗고 석좌에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은 신형을 감추고 궁륭 뒤쪽 석벽으로 갔다. 요인이 알려준 해법을 펼치며 깃발을 한 번 휘둘렀다. 갑자기 연무가 일고 요물의 울음소리가 지하에서 들리더니, 소리는 차츰 가까와졌다. 둘은 즉시 옆쪽으로 피해 동태를 보았다. 독연과 요무를 뚫고 두 줄기 녹색불이 춤추며 날아나왔 다. 요물은 동굴을 나오자 대번 소화상과 석생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이크, 요물이 우리 냄새를 맡은 게로군." 소화상은 동굴벽을 타고 빙빙 돌며 도망쳤다. 자칫 잘못하여 녹포노조가 설치한 매복을 건드렸 다간 자칫 위험에 빠질 것이었다. 요물은 악착같이 그들을 쫓아왔다. 공중을 나는 데는 요물이 한 수 위였던지 그들 간격은 점차 좁아졌다. 요물이 접근하자 당황한 소화상은 갑자기 아래쪽으로 급격히 떨어져 버렸다. 요물의 뒤 쪽으로 돌아 거꾸로 문주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홀연 이때, 머리 위쪽에서 수백 수천 개의 암적색 불꽃이 퍼졌다. 불꽃은 채색을 온 동굴에 퍼뜨 리며 뜨거운 김까지 뭉게뭉게 피워올렸다. 깜짝 놀란 소화상은 석생과 함께 옆에 있는 동혈로 뛰 어들었다. 수백 수천의 불꽃은 이미 요물을 포위해 맹렬히 타고 있었다. 사방의 채색은 모두 요물을 향해 몰려들었다. 요물이 가는 곳마다 불꽃은 쫓아다녔다. 채색 연무 속에 홍록색의 불꽃이 유난히 아 름답게 버썩버썩 타고 있었다. 허둥대는 요물은 궁륭 위쪽으로 도망쳤는데 무슨 요법을 또 건드렸는지 '꽈르릉!' 하는 폭발음이 동굴에 메아리쳤다. 요물을 쫓던 수천 개의 암적색 불꽃도 이와 동시에 다시 폭발하기 시작했다. 연방 터지는 불꽃 속에 갇혀 요물은 운신을 못한 채 '지르륵, 지르륵!' 구슬픈 울음을 내놓았다. 소화상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렁차게 외치며 벽력검을 날려보냈다. "가라!" 벽력검은 한 줄기 홍색 검광이 되어 요물의 입 속으로 날아 들어 갔다. "크앙!" 처참한 울부짖음과 동시 검광은 요물의 몸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되돌아나왔다. 요물은 영기를 한번 잃자 힘없이 궁륭 위켠에 떨어져 내렸다. 문주는 불길에 휩싸였다. 소화상은 문주가 불타 대공이 이뤄지는 것을 보자 석생을 이끌고 석벽의 동굴로 날아갔다. 요인 수인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궁륭 안의 요부는 처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한데 느닷없이 요물이 동혈서 날아나오는 것이었 다. 그녀는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문주만 날아나오는 것을 보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러나 녹포노조는 괴이한 짓을 잘하는 사람이라 별로 괘념치 않고 구경만 했다. 급기야 요물이 매복을 건드리고 수많은 불꽃이 폭발하자 요부는 기겁을 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요물이 미쳤나. 아니면 적이라도 나타났단 말인가?' 놀라 눈을 휘둥그리고 있을 때 홍색 검광이 번개같이 측면에서 날아와 요물의 입 속으로 날아들 었다. 검광은 전광석화로 요물의 몸통을 후비고 사라져 버렸다. "오마나, 저건 정파의 검광이잖아! 큰일났네!" 그녀가 급히 요법을 발동해 녹포노조에게 경고를 하려 할때 요물은 이미 궁륭 지붕에 떨어져 내 렸고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녹포노조 몸 속의 백미침은 아직 여독이 깨끗이 없어진 건 아니라도 이제 큰 해는 끼치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그는 침궁에서 행법으로 백미침의 여독을 몰아내고 있었는데 후동의 아각달한테 서 경고보고가 들어왔다. 녹포노조는 부랴부랴 후동으로 쫓아갔다. 한데 아각달은 벌써 머리와 몸이 두 동강이 나서 따로따로 뒹굴고 있었다. "이런, 어떤 놈의 소행이야!" 화가 난 녹포노조는 주위를 살폈으나 매복은 하나도 건드린 흔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적은 고수 임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네놈이 벌써 멀리 도망가진 못했을 것이다. 흥, 이 부근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겠지!" 그는 급히 요법으로 입구를 엄밀히 봉쇄하는 한편 원신을 운용해 동굴을 샅샅이 수색했다. 현빈 주의 불빛에 쏘이기만 해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었다. 한창 수색에 열중하 고 있을 때 뭔가 이상한 낌새가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이윽고 금봉애쪽의 문하제자한테서 경보 가 들어왔다. 분통이 터진 녹포노조는 급속히 금봉애로 날아갔다. 새까만 검광과 바람소리를 요란스레 내는 자색 검광이 한참 신나게 날고 있었다. 이 동벽에는 세 명의 요인이 문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둘 은 벌써 죽고 하나만 남아 요번을 허둥지둥 펄럭이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 깃발 을 휘두르며 보고를 했으나 감히 나아가 적을 상대하지는 않았다. 벼랑가에 봉쇄돼 있던 금잠의 채색 연무는 이미 적에 의해 반이나 파괴돼 수많은 금잠이 공중을 어지러이 날고 있었다. 아직 연성이 안 된 독충은 현문의 지보인 새까만 검광과 자색 검광에 맞을 때마다 '차르륵 차르 륵!' 수없이 죽어 떨어졌다. 마치 누런 비가 쏟아지는 듯했다. 검광에 쫓기는 금잠은 무리를 이뤄 사방으로 어지러이 날아 도망쳤다. 아끼고 아끼던 금잠이 무참히 죽거나 흩어지는 것을 본 녹포노조는 통한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 었다. 그는 괴성을 내지르더니 대번 두 줄기 검광을 향해 덮쳐갔다. 한데 녹포노조의 검광이 한번 번쩍이자마자 두 개의 검광은 하늘을 가르며 사라져 버렸다. 순식 간에 형적도 없이 도망쳤다. 녹포녹조는 재빨리 현빈주를 비쳤으나 검광은 깨끗이 사라지고 보이 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인 금잠을 잔뜩 잃은 녹포노조는 분통이 터져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는 적을 쫓을 생각을 않고 우선 흩어진 금잠을 일일이 회수했다. 이들 악충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제련했건만 원래 야성이 강한 벌들인지라 적의 검광에 한번 놀라 흩어지니 불러모으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한동안 금잠을 모아들인 녹포노조는 이번에 온 적이 얼마 전의 그 꼬마놈들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자기를 보기만 해도 줄행랑을 놓은 것으로 보아 놀란 새처럼 멀리 도망갔겠거니 치부했다. 그러나 이왕 적이 금잠의 위치를 알았고 수호하던 문인도 둘이나 죽임을 당했으므로 장소를 옮 겨 보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금잠을 거두어 옛날 문주를 숨겨놓았던 지하동혈에 보관시켰 다. 녹포노조로서 특이한 건 혼자 남은 문인을 문책하지 않은 점이었다. 두 동료가 죽고 금잠을 한 뭉텅이 잃은 문인은 벌벌 떨며 녹포노조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요마는 별스럽게 두 번 징그럽게 웃고 뭐라 나무라진 않았다. 두 번씩이나 침입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은 녹포노조는 동굴 곳곳에 물, 불, 바람, 뇌성으로 매복 을 보강했다. 오밀조밀 함정을 설치한 요마가 걸걸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놈들, 다시 한 번 와봐라. 이번엔 이 어르신네의 요법에 골탕을 먹으리라. 흐흐흐!" 그가 배치를 완료했을 즈음 요부의 급한 경보가 석규전음(石竅傳音) 수법으로 전해왔다. "뭐야, 이놈들이 앞동굴로 갔단 말인가?" 노귀는 허둥지둥, 침궁 쪽으로 달려가면서도 마음 속으론 자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이놈들아, 앞동굴은 뒤쪽과는 매복의 무서움이 영판 다르다 달라! 흥, 궁륭에 가까이 접 근만 했단 봐라. 틀림없이 내 함정에 빠졌을 테니 그땐 신진자나 당석놈같이 통쾌히 혼내주리라!" 하나 눈앞의 현실은 생각과 같지 않았다. 녹포노조가 침궁에 도착했을 때 문주는 이미 음화에 훨훨 불타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요마는 급히 요법을 발동했으나 문주는 벌써 재로 화하고 말았 다. 화가 꼭두까지 치솟은 녹포노조는 요부에게 벽력같이 대들며 이유를 물었다. 예란심의 설명을 들은 요마는 분을 삭일 길 없어 계집을 집어 내동댕이치고 석벽이 뚫린 동굴로 날아갔다. 그는 검광을 타고 날며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이 개 같은 놈들아, 어르신네 앞에 썩 나서지 못할까! 네놈들을 자근자근 씹어먹지 않으면 내 녹포노조님이 아니니라!" 녹포노조는 정말로 화가 하늘까지 솟아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놈들 맹랑한 꼬마들이 고인 의 전수를 받았는지 몰래 나타나 번개처럼 손을 쓰고 자기를 슬쩍슬쩍 피해 달아나니 그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흥, 네놈들이 아무리 숨어도 언젠가는 이 어르신을 만날 날이 있으리라. 그땐 절대 용서하지 않 는다!" 그가 지금 동혈로 날아가는 것은 소화상이 그곳에 잠복해 들어갔을 것을 기대한 게 아니라 문도 들이 둘이나 죽었으므로 석갑의 원신을 챙기러 가는 길이었다. 한데 동굴입구에 들어서자 녹포노 조는 대번 수상함을 느꼈다. 비상한 그의 감각으로 보아 적이 반도들의 원신을 구하려 동굴에 침 입한 게 틀림없다고 느낀 것이었다. 분노가 불같이 인 녹포노조는 번개처럼 지하로 날아갔다. 이 때에 소화상과 석생은 불의의 재난 을 면했다. 만일 요마가 조금만 침착해서 요법으로 동혈입구를 봉쇄하고 땅, 물, 불, 바람을 일으 켜 요법을 펼쳤다면 꼼짝없이 잡힐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복수가 급한 녹포노조는 적을 잡을 마 음이 앞서 앞뒤 생각없이 동굴 속으로 짓쪄가는 게 급했다. 소화상과 석생은 수인이 알려준 대로 석갑을 찾아 여섯 번째 바늘을 뽑아냈다. 바늘 끝에는 혈 육이 한 점 묻혀 있었는데 뽑자마자 작은 불꽃이 되어 번쩍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석생은 그것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에 다른 바늘 하나를 뽑았다. 이를 본 소화상이 급히 그를 말리며 속닥였다. "아무거나 뽑으면 어떻게 해. 빨리 여길 빠져나가기나 하자구!" 이때 녹색 불꽃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큰일났다!" 소화상은 질겁을 하고 석생과 함께 은신술법을 써서 동굴 옆으로 비켜섰다. 녹광이 지나가면 밖 으로 도망칠 심산이었다. 녹포노조가 그들 옆을 스치자 소화상 등은 번개같이 밖으로 쏘아나갔다. 그러나 요마는 사람 냄새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대번 알아차렸다. 그는 벽력같이 미친 듯 소리 를 내지르며 뒤를 쫓아왔다. 소화상과 석생은 자신들이 내놓은 암반의 틈새로 도망치려 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갑자기 동굴 전체가 녹색 불빛으로 환해지자 영부로 은신해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그만 환히 드러나고 말았다. 영부가 현빈주의 불빛에 파괴된 것이다. 놀란 소화상은 재빨리 벽력검으로 몸을 보호했다. 녹색 불빛을 뚫고 십여 장도 더 되는 큼지막 한 손이 그들을 잡으려 덮쳐왔다. 다행히 석생이 재빨리 석벽을 뚫어 둘은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호구를 벗어난 소화상과 석생 은 검광아 우릴 살려라 도망쳤고 성난 녹포노조는 녹색 불꽃을 흩뿌리며 벼락같이 쫓아왔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한 소화상이 돌아서서 적과 맞붙으려는 순간, 한 줄기 오색 금빛이 허공을 날아왔다. 금선이 장이와 함께 천둔경을 비추며 정면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소화상과 석생은 젖혀두고 녹포노조를 맞바로 비춰갔다. 소화상과 석생은 대공이 성공한 다음 금선과 장이까지 무사한 것을 보자 용기백배하여 정신이 번쩍났다. 네 사람은 한 데 모이자 경황중에도 경과를 간략히 이야기하며 요마를 맞아 싸울 준비 를 했다. 그들의 장검은 모두 요기(妖氣)에 손상되지 않는 법보였으므로 빼어들어 적을 맞고, 금 선과 장이는 영부를 깊이 보관해 현빈주에 훼손되지 않게 했다. 녹포노조는 전면의 적들이 과연 예상대로 지난 번 온 꼬마들인지라 화가 바글바글 끓어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요것들한테 몇 차례 곤욕을 당해 일세를 종횡할 명예를 추락시켰는데 더더군다나 피도 안 마른 석생 같은 애송이까지 끼어든 것을 보니 화도 화려니와 어이까지 없었다. 요마는 이를 으드득 갈며 혼자 웅얼거렸다. "네 이놈들, 저번에는 내 한발 늦어 놓쳤다만 오늘은 결단코 놓아주지 않으리라!" 꼬마들의 검광은 비록 많다 해도 자기를 해칠 수 없었다. 다만 천둔경만은 대단히 무서운 존재 라 독무(毒霧)가 쏘아나갈 수 없었다. 요마는 징글맞은 웃음을 터뜨리며 긴팔을 휘저었다. 연무가 갑자기 농밀해져 큰 덩지를 이루더니 네 사람을 향해 돌진해 왔다. 녹포노조의 요무는 천둔경에 비쳐 없어지는 즉시 다시 생겨났다. 거울은 광망을 흩뿌리며 연무 를 없애 겨우 전진을 막을 수 있을 뿐이었다. 네 사람이 쏟아낸 검광은 요마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번쩍번쩍하는 녹광을 어쩌지는 못해 털끝만치도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지부진하다가는 단연 흉이 많고 길이 적 을 것이었다. 그들은 금선이 천둔보경으로 앞쪽의 요무를 막는 사이 각자 검광을 거두어 몸을 보 호하며 도망치기로 했다. 그러나 녹조노조는 이미 적이 허둥대는 꼴을 보자 재빨리 손을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연 무 속에서 신외화신 수법을 펼쳐 수십 장이 넘는 큰 손으로 변하였다. 큼지막한 손은 번쩍번꺽 빛나는 녹광을 띠며 소화상 등을 덮쳐갔다. 시퍼런 손이 하늘을 덮으며 그들을 향해 날아오자 석 생이 제일 먼저 자모항마침을 날렸다. 한데 자모항마침은 바닷속에 바늘이 하나 떨어진 양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소화상과 금선은 벽력 쌍검을 동시에 내둘러 녹색 손에 대항했다. 그러나 손은 벽력검 따위엔 아랑곳없이 훨훨 네 사람 을 쥐어잡을 듯 휩싸왔다. 위기일발의 순간, 세 가닥 실 같은 금광이 긴 무지개를 이루며 공중에서 쏘아내렸다. 이어 천지 를 진동하는 벼락이 터졌다. 벼락소리가 천지를 울리자 네 사람의 몸은 마치 무슨 큰 힘에 빨린 듯 휘익 옆으로 날아 무려 반 리쯤 저쪽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이미 독수가 어른거리는 험지를 벗어나 있었다. 천지를 진동한 우레소리는 그들의 귀를 멍하게 하고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정신까지 얼얼하여 한동안 분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누군가 우리들을 구하러 왔나?" 겨우 정신을 차린 소화상 등은 앞쪽을 바라보았다. 독무는 이제 번개와 벼락에 모두 흩어졌고 금빛이 너울대는 속에 선풍도골의 두 신선과 청수히 마른 도인 하나가 외연히 서 있는 게 보였 다. 바로 <동해삼선>인 현진자, 고행두타, <건곤정기묘일진인>이었다. 녹포노조의 최후 晶鍋幻彩邪霧烝輝 徹地分身消魔首 仙陣微塵神刀化血 先天正煞煉妙靈 소화상과 금선은 기쁨도 솟구치고 담기도 솟아올랐다. 그들은 장이와 석생에게 <동해삼선>에 대해 간략히 알려주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삼선의 세 줄기 금광은 녹포노조의 녹색 불빛과 어 울려 싸우고 있었다. 마치 세 마리 금빛 용이 푸른 구슬을 물고 엉킨 형국이었다. 온갖 기이한 빛 살이 뻗치고 춤을 추어 천공(天空)을 비치는 게 정말 장관이었다. 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자 고행두타는 손을 내저으며 접근하지 말라고 신호를 했다. 그들이 발 걸음을 멈췄을 때 하늘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세 줄기 빛살이 날아왔다. 두 줄기는 북쪽에서 한 줄기는 서쪽에서 동시에 날아왔는데 그들 모두 키가 작았다. 그중에서도 서쪽에서 온 제일 키 작은 사람이 으르릉거리며 소리쳤다. "세 분 도우께서는 잠깐 손을 멈추시오. 나는 저 요마와 제자를 죽인 원한을 갖고 있소이다. 내 가 저 악마를 죽여 한을 풀게 해주시오!" 이때 북쪽에서 나타난 두 작은 노인이 함께 거들었다. "그렇소. 세 분 도우는 저분의 말을 들어주시구려. 장왜자의 도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구경이 나 하십시다. 그가 처치하지 못하면 그때 우리가 손을 써도 늦지 않으리다." 두 사람은 바로 <숭산이로>인 <추운수(追雲搜)> 백곡일(白谷逸)과 <왜수(矮搜)> 주매였다. 삼 선은 이로의 말을 듣자 장령자(藏靈子)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명령대로 따르리다." 그들은 검광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장령자는 손을 휙 휘둘러 마흔아홉 개의 천신비검(天辛飛劍)을 뿌렸다. 비검은 유성처럼 날아가 녹색 빛을 포위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녹포노조가 음흉스레 웃으며 말했다. "으흐흐, 세상천지 모르는 난쟁이 괴물놈아, 너도 저들 악마를 도우려는 거냐! 오늘은 참말로 이 어르신의 무서운 맛을 보고 싶은 게로군!" 녹포노조는 긴팔을 요상히 흔들더니 몸을 뻗쳐 백만산 주봉 꼭대기로 날아 올라갔다. 장령자는 이를 보자 큰소리로 욕을 했다. "이 더러운 요물아, 나를 유인해 끌어들이고 싶으냐? 아하하, 좋다, 네가 무슨 재주가 있나 내 보아주겠다!" 장령자는 일지를 날려 공중의 검광을 거두더니 번개처럼 녹광을 추적했다. 그러나 <삼선이로> 는 그들을 쫓지 않고 한 데 모여 의논을 했다. 이미파 장교 <건곤정기> 제수명이 의논을 하다 법보를 넣는 주머니에서 여섯 개의 찻잔만한 구 슬과 열두 개의 기문(旗門)을 꺼냈다. "자, 이것들을 각기 나눠 가지십시다. 장미진인이 저 요마를 없애기 위해 남긴 유물이올시다." 그는 구슬 하나와 기문 두 개씩을 현진자, 고행두타, 숭산이로에게 각기 나눠주었다. 그는 자신 도 구슬 하나와 기문 두 장을 갖고 나머지는 소화상을 불러 건네주었다. "이것을 갖고 너는 금선 등과 함께 동남쪽을 지켜라. 백만산 주봉에서 십 리쯤 떨어지면 되느니 라. 서북쪽에서 뇌성이 일면 구슬과 깃발을 운용하면 되느니라." 제수명은 소화상에게 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소화상이 명을 받고 가자 제수명은 네 고수들에게 말했다. "이번 요물을 제거하는 데는 보통 심혈을 쏟지 않아서는 어려울 것이외다. 우리가 행법할 때 혹 원신이 환화해서 도망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마침 장령자가 나타나 천만다행이오. 저들이 싸울 때 매복을 할 수 있게 됐으니 저 요마도 겁수가 다 된 모양입니다. 한데 장령자는 이파이긴 해도 제마음대로 행동한 것 외에는 큰 악을 저지르지 않았잖습니까? 이 <생사회명환멸미진진(生死晦 明幻滅微塵陣)>은 은사의 정전(正傳)인 데다 우리들 셋이 다년간 고련한 순양지보로 행하는 것이 어서 장령자가 제때에 물러나지 않으면 그도 함께 옥석구분될 것이오. 어떻습니까, 현진사형과 내 가 교대해 가며 생문에 지켜 서 있다가 그가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말입니다?" <왜수> 주매가 말했다. "그 말은 좋긴 하지만 장령자가 때를 못 맞추면 곤란하지 않소. 또 제때에 물러난다손 치더라도 녹포노조 놈이 모를 리 있겠소. 만약 그 요마까지 따라서 도망친다면 항아리가 아까워 쥐를 못 잡는 꼴이 될 거요." 고행두타가 한 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제도우 말이 하늘의 이치에는 닿는 게요. 하늘의 호생 지덕도 있고 장령자의 수백 년 쌓은 고행도 쉬운 게 아니지요. 만약 우리의 순양진화(純陽眞火)에 타버리면 몸과 영혼이 함께 없 어질 테니 함부로 할 일이 아닙니다. 장미진인께서 요물의 목숨이 오늘 끝난다 했으면 착오는 없 을 겁니다. 혹 요물이 도망칠 위험이 있더라도 장령자의 목숨까지 해쳐서는 안 됩니다. 수도하는 사람의 할 짓이 아니지요." 중인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묘일진인과 현진자가 돌아가며 생문을 지키고 다른 사람은 각자 맡은 위치를 수호하기로 했다. 한편 주봉 상공에서는 장령자와 녹포노조가 죽자사자 싸우고 있었다. 장령자가 백철로 제련한 아흔아홉 개의 천신검은 무더기로 뭉쳐 있는 녹색불꽃을 어지러이 찌르 고 뚫는 등 무섭게 날뛰었으나 적은 마치 아무 지장이 없는 양 반응이 없었다. <삼선이로> 면전 에서 큰소리를 치며 월권행사를 하다시피 나섰던 장령자는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다른 법보로 승리를 나꾸기 위해 골똘하고 있었지만 녹포노조야말로 꿍꿍잇속이 깊었다. 노마귀는 장령자를 주봉의 정상으로 유인한 후 매복을 작동해 일거에 적을 함몰시킬 작정이었다. 과연 장령자가 천신검의 효용을 못 보고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자 녹포노조는 공중에 일지를 날 리며 현빈주를 작동시켰다. 현빈주의 녹광이 십 배로 더 빛나며 천지를 푸르게 비췄다. 장령자는 법보를 꺼내려다 혼연 녹광이 세게 비추자 수많은 비검으로도 막아내지 못하고 주춤주 춤 물러났다. 녹포노조의 현빈주는 정말 무서운 무기였다. 장령자가 허공에 일지를 날리며 전신을 방어하려 할 즈음 지하에서 괴성이 일고 귀신의 울음소리가 처량히 들렸다. 귀신의 곡성과 함께 음풍이 싸늘히 불어와 '꽈당!' 하고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모래와 돌이 하 늘을 날더니 갑자기 봉우리 정상이 훌러덩 벗겨지며 오색 연무와 함께 발가벗은 미녀가 하늘로 솟구쳤다. 장령자는 눈을 휘둥그래 떴으나 이내 침착을 찾았다. 발가벗은 요녀 뒤에는 유리 궁륭이 솟아 올라왔다. 번쩍번쩍 빛나는 유리 궁륭은 허공에 올라오 자 이내 거꾸로 한 바퀴 빙 돌아 위가 아래가 되고 아래가 위쪽이 되었다. 궁륭은 이제 오색이 투명한 유리그릇 같았다. 유리그릇같이 변신한 궁륭은 장령자의 발을 감쌀 듯이 솟아 올라왔다. 위쪽으로 녹포노조의 비 검을 겨우 막아내고 있는 장령자는 이번엔 유리 궁륭에 빨려 들어가는 위기일발에 처했다. 장령자는 처음 산봉우리가 벗겨지고 연무가 그득한 사이로 홀랑벗은 여자가 나타날 때만 해도 무슨 차녀음마(侘女陰魔) 따위의 미인계를 쓰나부다 하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 따위 요부의 유혹에는 고혹당할 리 없는 장령자였다. 한데 유리 궁륭이 느닷없이 나타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위 아래가 거꾸로 바뀌어 그를 말아먹 을 듯이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그는 재빨리 궁리를 하여 작전을 짰다. 장령자는 놀란 눈치를 보이지 않고 질끈 혓바닥 끝을 물 어 한 덩어리 정혈(精血)을 만든 뒤 궁륭이 가까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유리 궁륭이 발아래 바 싹 죄어들자 장령자는 홀연 소스라쳐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검광과 함께 연무 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녹포노조는 적이 함정에 빠지자 희희낙락하며 급히 녹광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적이 도 망하지 못하게 궁륭 위쪽을 녹광으로 봉쇄한 뒤 궁륭을 작게 오므라뜨리기 시작했다. 요법으로 궁륭을 축소시켜 연화해 버린 뒤 <삼선이로>를 상대할 생각이었다. 한데 궁륭 안쪽에서 누런빛이 번쩍번쩍 비치며 오색 무지개가 일더니 두 개의 대들보 같은 빛살 이 떠올랐다. 두 빛살은 십자를 만들어 궁륭이 오그라들지 않게 버티었다. 그와 동시 '치치지치!'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연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녹포노조가 퍼런 눈을 번뜩이며 쳐다보아도 장령자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었다. 그리고 궁 륭 저 밑바닥엔 구멍이 뻥 뚫려 있어 파란 허공이 내다보였다. 적을 처치하기는커녕 외려 상대의 술책에 빠진 셈이고,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 연성한 법보인 궁륭은 이제 아무 쓸모없이 부서지고 만 것이었다. 녹포노조가 놀람과 분노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홀연 한 줄기 빛이 몸 뒤에서 뻗쳐왔다. 녹포노 조는 놀란 토끼마냥 화다닥 돌아섰다. 누런 구름 한 뭉치가 치닫는 말처럼 힘차게 몰려와 그를 휩싸려고 했다. "이크!" 놀란 녹포노조는 은신요법을 써서 지하로 숨어 들어갔다. 그가 보기에 이 누런 구름은 장령자의 원신이 환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형세는 보통 법보로서는 결판이 날 수가 없었다. 그렇 지만 호랑이 등에 이미 올라탄 몸, 죽기 전에는 그만둘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녹포노조는 적이 원신을 환화시켜 쳐들어온다면 자기도 정령(精靈)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땅 속으로 파고들자 정신과 혼령을 몸체에서 빼어내 원신과 합한 뒤 누런 구름 속으로 돌진했다. 두 괴이한 물체가 한번 부딪쳤는 데도 이상스럽게도 아무런 격동이 없었다. 황운(黃雲)은 의외로 무력해 저항 따윈 하지도 않았다. 녹포노조는 속으로 비웃었다. '뭐 이 따위가 있어. 장령자는 쓰잘데 없이 허명만 얻은 놈 아냐? 이런 것이 어떻게 감히 나와 싸우겠다고 덤빈 거지?' 녹포노조는 싱겁게 코웃음을 치며 현공으로 적을 소멸시키려 했다. 그때 땅 밑바닥이 '크르릉!' 하며 크게 진동했다. 황운이 누렁이 뱀처럼 땅 속으로 스며듬과 동시 장령자가 연무 속을 뚫고 공중으로 뛰쳐올랐다. 그의 수중에는 녹포노조의 두 쪽이 난 두개골이 들려 있었다. 그가 사납게 외쳤다. "녹포노조놈아, 너는 마땅히 뒈져야 할 요물이다! 이래도 네가 큰소리 칠 것이냐? 너의 몸뚱아리 는 이미 이 어르신네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으핫하하!" 원래 장령자는 궁륭에 들어감과 동시 법보로 궁륭의 위쪽을 버팅기게 해놓고 선혈을 한 모금 뿜 어 현공과 함께 적의 요법을 분쇄해 버렸다. 워낙 적이 위험하고 교활한지라 자기의 재주만으로 는 상대를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한 장령자는 험지를 탈출하자마자 잠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뒤 적혈분신(滴血分身) 수법으로 자기의 원신이 환화한 양 꾸며 녹포노조를 습격했다. 황운이 녹포노조를 엄습한 때에도 장령자는 몸을 숨기고 요마의 은신처를 찾았다. 요귀는 틀림 없이 구각을 땅 속 깊숙이 숨겼을 것이므로 그는 땅 밑 깊이 파고들며 수색했다. 그러나 구각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장령자는 할수없이 열지수신지법(裂地搜神之法)으로 녹포노조의 구각을 진동시켜 분쇄해 버렸다. 녹포노조는 장령자가 자기의 구각을 훼손한 것을 보자 분하고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 이 너무 심려가 깊은 탓에 적에게 두 번이나 속았고 끝내 몸뚱이까지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어떻 게 해야 원상으로 회복된단 말인가. 얼마나 천신만고 끝에 얻었던 것인가 말이다. 분노와 회한으 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장령자는 더욱 악독한 짓을 자행했다. 장령자는 녹포노조의 두 조각난 두개골을 손에 들고 중얼중얼 진언을 외더니 손으로 한 번 툭 쳤다. 두개골은 대번 가루가 되었고 장령자의 장풍에 날려 황색 연무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편 장령자의 누런 구름은 점차 녹장에 의해 소멸돼 어지간한 법보로는 상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장령자는 갑자기 몸을 아래로 떨어뜨려 산 위에 내려서자 아흔아홉 개의 비검을 방출 해 전신을 보호했다. 그런 뒤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그의 원신이 명문을 통해 몸 밖으로 날아나왔다. 원신이 구각에서 튀어나오자 황색 구름이 몰려들었다. 황색 구름은 단검을 든 한 자쯤 되는 작 은 도사를 보호하여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때 현빈주는 원래의 황색 구름을 모두 잃어버리고 소도사 정면으로 비쳐왔다. 장령자는 원신 을 운용해 다년간 심법을 연마했으므로 녹포노조의 원신을 자신의 원신으로 베어죽일 요량이었 다. 한편 녹포노조는 기회를 틈타 아직 남은 금잠으로 장령자의 구각을 훼손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둘은 온갖 심기를 다해 한바탕 극악한 싸움을 벌였다. 녹광과 황운은 위아래로 덮치고 몰리는 등 변화막측했다. 이렇게 한 시진 넘게 싸웠건만 도대체 승부가 나지 않았다. 장령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인물인지라 그동안의 싸움을 통해 현빈주의 능력을 훤히 알 수 있었다. 현빈주가 비록 자기를 상할 수는 없다 해도 자신도 도저히 이길 수는 없었다. 만일 적 이 지탱하지 못하는 듯한 작태를 보인다면 그것은 도망가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 어서일 것이었다. 장령자는 이렇게 상대를 소홀히 보지 않고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녹광 속에서 괴성 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 같았다. 한데 상대는 계속 별다른 동향이 없었 다. 다시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갔다. 돌연 상대방 녹광이 별똥별처럼 빛을 그으며 아래로 떨어 졌다. 미리 방비하고 있던 장령자는 급히 뒤를 추적했다. 주봉 정상에 도착해 보니 녹광은 바위 위에 멈추어 있었다. 장령자는 적이 무슨 수를 쓰나 싶어 예의주시했다. 녹색검광 속에서 붉은 빛이 번 뜩이고 일진의 혈단(血團)과 흑연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적이 무슨 매복을 발동하나 싶어 장령 자는 즉각 접근하지 않고 멈추어섰다. 그가 잠깐 멈칫하는 사이 녹색 검광이 혈단을 따라 날아나 왔다. 장령자는 진령(眞靈)을 운용하여 혈단을 응시했다. 혈단 속에는 한 무리의 음혼이 흉흉히 움직이 고 있었다. 이 혈단은 녹포노조 수하제자들의 산 혼과 혈육을 환화시킨 것으로 감히 섣부르게 손쓸 수 없는 존재였다. 워낙 조심스런 장령자는 비장의 법보인 심령검(心靈劍)을 뽑아들었다. 심령검으로 적의 혈단을 상대케 하고 자신의 원신은 녹포노조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장령자의 심령검과 녹포노조의 혈단이 부딪치는 순간 '치지지 치!' '사사삭!' 하는 괴이한 소리 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윙!' 하는 묵직한 울림과 동시 벼랑 뒤쪽에서 금빛 무리가 온 하 늘을 덮었다. 요인 하나가 긴 깃발을 들고 수십 수백 장이나 되는 요운과 독무를 뿜어내며 금잠의 무리를 뒤 쪽에서 몰아오고 있었다. "이크, 저건 뭐야?" 장령자가 놀라는 사이 요인은 금잠을 몰아 벼랑 쪽으로 달려갔다. 벼랑가엔 장령자의 구각이 있 었다. 알고 보니 녹포노조는 혈단으로 장령자의 원신과 심령검을 묶어놓고 암암리 독충을 방출해 그의 몸뚱이를 없애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장령자는 놀라 펄쩍 뛰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심령검은 비록 신묘한 법보였지만 혈단의 요 인들의 정혈도 대단한 위세를 발휘하고 있어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검광으로 정혈을 갈라 도 그것들은 잘게 짤라질 뿐 소멸되지 않고 계속 검광에 매달려왔다. 아래쪽 장령자의 구각은 아흔아홉 개의 천신검으로 보호하고 있어 약간은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금잠이 나타나자 상황이 확 달라졌다. 금잠은 요법으로 훈련된 신령스런 악충이요, 수가 한없이 많아 일부만이라도 검광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면 어떤 법보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금잠 들은 산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자 피를 본 파리떼처럼 맹렬히 날아갔다. 이쯤 되자 장령자는 후회가 막심했다. '내 공행도 다 이루기 전에 이 무슨 재변이냐. 쓸데없이 공을 탐하다가 육신마저 잃고 원신만으 로 앞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장령자여, 장령자여, 수백 년의 공적이 이토록 허무탄 말인가!' 장령자가 자신을 처절히 질책하고 있는데 금잠을 뒤에서 몰던 요인이 비행을 갑자기 멈추었다. 요인이 공중에 멈춰서니 요번의 지휘를 받던 금잠들도 멈추어섰다. 악충들은 요번에서 뿜어나오 는 요무 속을 어지러이 날고 있었다. 이때 산허리 저쪽에서 두 줄기 요광(妖光)이 번갯불처럼 나타났다. 그것은 어깻죽지가 하나씩 절 단된 요인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요번을 하나씩 들고 연무를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금잠을 모는 요인 에게 소리쳐 말했다. "여보게, 노귀의 겁운은 이제 다 끝났다! 청해교조와 <삼선이로>가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하려고 하는 중이야. 그리고 우리들의 원신은 한 분 은인의 구함을 받아 이렇게 풀려났다네. 생각해 보라 구, 저 양반이 우릴 얼마나 포악하고 처참하게 대했는지 말일세. 우리 동문의 정혼과 혈육마저 적 을 막는 데 서슴없이 희생시키고 있는 걸 직접 보았잖은가. 우리들이 동굴 속의 금법을 파괴해 저 화혈분혼지법(化血分魂之法)도 곧 분해될 걸세. 자, 빨리 악충들을 끌고 우리를 따라오게. 이젠 우리들의 삶을 도모해야 할때 아니겠나?" 그의 말이 끝나자 금잠을 몰던 요인은 당장 동료와 함께 요번을 흔들어댔다. 연무가 일며 그들 은 금잠을 몰고 동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녹포노조는 제자가 배반하여 천신만고 끝에 연성한 금잠을 잃자 분노가 하늘을 뚫을 듯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장령자에 매여 손을 뗄 수도 없고 원래 정신감응으로 금잠을 조정할 수 있 었지만 요인들이 금잠을 모는 수법도 자기가 가르쳐 준 것이라 효능이 없었다. 더구나 저들의 금 제된 원신이 풀려 명령을 듣지 않으니 분노만 부글부글 끓었다. 화난 녹포노조는 괴이한 울부짖 음만을 연신 토해냈다. 장령자로서는 천만뜻밖의 변화였다. 자기의 구각이 악충의 먹이로 훼손될 줄 알았는데 적의 내 분으로 깨끗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화혈분신지법도 요인들이 원신을 회복해 뿔뿔이 도망 쳐 버려 점차 영효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혈단과 요운은 순식간에 소멸돼 갔다. 이렇게 되니 녹포노조는 분노와 당황으로 범벅이 되고 반대로 장령자는 힘이 솟구쳤다. 장령자가 득의한 모습으로 용기백배할 때 홀연 서북방에서 하늘을 찢을 듯한 뇌성벽력이 일었 다. 뇌성이 한번 터지자 사방에서 똑같은 벼락치는 소리가 연이으며 예닐곱 개의 무지개 금빛이 백만산 주봉을 비추었다. 금빛은 피륙을 짜듯 엇갈리어 교차하며 백만산을 뒤덮었다. 금빛 검광이 비출 때쯤 세 요인과 수천 수만의 금잠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런 금광에 놀라 의아해 하는 장령자의 귓가에 가느다란 말소리가 들렸다. "저 요물은 보통 흉악한 게 아니오. 일시에 주멸할 수 없을 것이외다. 빈도들은 장미진인의 유명 을 받들어 <생사환멸회명미진진>을 설치해 요굴을 완전히 덮어버렸소. 도우께선 그와 쓸데없이 애써 싸울 것이 없습니다. 빨리 서북쪽 생문으로 물러나시오. 우리가 그를 처치하겠소이다." 장령자는 삼선의 천리전음(千里傳音)을 통한 경고를 듣고서야 무서운 <생사환멸회명미진진>이 펼쳐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진법은 장미진인이 옛날 요마를 제거하기 위해 창출한 법술이다. 천하에 무서운 진법으로 장령자도 그 위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만일 제때에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도 요마와 함께 소멸될 것이다. 장령자는 재빨리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과연 금광이 뻗친 뒤로 부터 위기가 경각간에 접근하고 있었다. 아흔아홉 개의 천심검이 보호하고 있는 자기의 구각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고 단정히 바 위 위에 앉아 있었다. <삼선이로>가 자기의 출로를 준비해 준 외에도 구각 역시 진법 속에 넣어 없애지 않은 것이었다. 심중 고마우면서 부끄럽기까지 한 장령자는 그러나 마냥 때를 늦출 수는 없었다. 그는 심령검에 일지를 가리켜 적의 공세를 완화시키자 원신을 운용해 번개처럼 아래로 날아갔다. 그는 구각에 쑥 들어가자 벌떡 뛰어 일어났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심령검은 현빈주에 밀려 벌써 장령자 몸 가까이 와 있었다. 그는 후다닥 심 령검을 거둠과 동시 둔법을 사용해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화가 날 대로 난 녹포노조도 <삼선이로>가 뭔가 움직이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오묘한 원공을 믿고 있는 요마는 어떻게 되든 적이 자기를 해치지 못하리라 자부하고 있었다. 장령자가 도망치는 것을 보자 녹포노조는 즉각 뒤를 쫓아갔다. 두 개의 검광은 빛살처럼 날아갔 다. 그들의 간격은 겨우 십 장 정도에 불과했다. 워낙 접근해 날고 있었으므로 장령자가 생문을 통과하고 즉시 녹포노조도 따라나올 게 거의 분명했다. 장령자의 퇴출을 권고한 <삼선이로>에게 있어서는 처치곤란한 순간이었다. 그냥 생문을 열어놓 자니 녹포노조까지 도망칠 가능성이 높고 진을 발동하자니 장령자마저 옥석구분될 게 아닌가. 만 일 이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일후 다시 요마를 소멸시키기란 극히 어려울 것이었다. 정세가 급박해지자 <건곤정기묘일진인>이 앞쪽으로 날아갔다. 노조를 막아 밖으로 못 나가게 할 심산이었다. 장령자는 이미 생문에 다다르고 있었다. 녹색 검광의 녹포노조도 장령자의 꼬리에 바싹 붙어 있었다. 녹포노조까지 생문을 통과하려는 순간, 홍색노을 같은 빛살이 돌연 옆쪽에서 나타나 요마를 향해 날아갔다. "으아악!" 처참한 절규는 녹포노조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이었다. 요마는 벼락같이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도 망쳤다. 홍색 검광을 뿜어낸 사람은 다름아닌 홍발노조였다. 그는 화혈 신도로 녹포노조의 원신에 일격 을 가한 것이었다. 녹포노조가 도망치는 것을 보자 홍발노조는 급히 그 뒤를 쫓으려 했다. 이를 본 <묘일진인>이 소매를 날리며 홍발노조를 막아섰다. "뭐하는 거요?! 당신도 녹포노조와 한패요?" 홍발노조가 성난 듯 으르렁거리자 묘일진인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요마를 쫓아갈 건 없소이다. 곧 진법이 발동하니 생문 밖으로 나가십시다." 그때서야 상대의 호의를 안 홍발노조는 묘일진인을 따라 진 밖으로 나왔다. 한편 물때가 좋지 않은 것을 느낀 장령자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재미가 없어졌다. 그는 서둘러 인사말을 하나 던지고는 검광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도우께서 도와주셔서 고맙소이다. 언제 다시 만납시다!" 장령자가 토라진 사람처럼 휑하니 사라지자 홍발노조는 <삼선이로>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제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 두 개의 법보를 제련했는데 그것이 연성되자 부랴부랴 화혈신도를 갖고 백만산으로 쫓아왔던 참이었다. 마침 도망치는 장령자를 급히 모는 녹포노조를 본 홍발노조는 화혈신도를 날려 일격에 요마를 혼내주었다. 그는 진세가 발동하는 것을 보자 자신도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 <추 운수>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넨 뒤 총종히 떠나가 버렸다. 녹포노조는 처음 <삼선이로>가 진세를 발동할 움직임을 보일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 러나 장령자를 쫓아 진문으로 다가가면서 전면의 구름 속에 은은한 기운과 보주의 번쩍번쩍하는 빛을 보고서야 깜짝 놀랐다. "아이쿠, 이것 보통 일이 아닌걸. 장령자를 따라 우선 이곳을 피하고 봐야겠다!" 그러나 진문을 나서기도 전에 그는 그만 극성인 화혈신도의 일격을 맞고 말았다. 홍발노조가 친 히 나타난 것이었다. 이건 꺽다리 홍장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적이었다. 물론 화혈신도를 맞받 아칠 법보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총망중에 빼어들 시간이 없었다. 그는 허둥지둥 되돌아 줄행랑을 놓았다. 하지만 퇴로라고 해서 험난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진세 가 한번 발동하니 백만산 주변 수십 리 상공엔 구름과 놀빛이 짙게 깔리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요마는 한 무리 녹광으로 좌충우돌했지만 제대로 움지일 수가 없었다. <삼선이로>는 각각 본문의 방위에 무릎을 깍지끼고 앉아 현공을 운용해서 순양진화(純陽眞火) 를 내뿜었다. 그들이 손을 뿌리칠 때마다 하늘을 진동시키는 벽력을 대동한 화운(火雲)이 녹색 검 광을 향해 돌진했다. 사방의 뇌성은 번갈아가며 터지고 산과 땅은 무너지고 가라앉을 듯 굉음을 내면서 흔들렸다. 이렇게 열아흐레만 지나면 요마의 원신은 완전 소멸될 것이다. 한편 소화상 등 넷이 지키고 있는 멸문(滅門)은 적이 쳐들어왔자 죽음밖에 없는 곳이므로 뇌성 에 따라 법술만 거행하면 되었다. 한데 진법이 발동하려는 순간 소화상은 문주를 죽이는데 도움 을 준 한수인 생각이 문득 났다. 비록 요인이긴 해도 대오각성한 사람이라면 이럴 때 그를 도와 줘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자칫 기회를 놓쳐 진이 발동하면 그도 요마도 함께 옥석구분될 게 명 약관화했다. 또 신진자에 대한 염려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음풍동에서 석생이 바늘 하나를 뽑아내 요인 의 원신을 해방시켜 주었는데 그게 혹 신진자라면 어쩐단 말인가. 신진자는 녹포노조 못지 않은 궁흉극악한 악마로 소화상의 무형검을 못 쓰게 만든 원수이기도 했다. 만일 그를 훨훨 놓쳐보낸 다면 큰 화근이 될 것이었다. 소화상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녹포노조와 장령자는 아직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 기회에 빨리 허실을 탐지해 내리라 생각했다. 소화상은 자신의 영부가 요법에 훼손됐으 므로 장이의 것을 빌고 세 사람한테 진문을 잘 지키라 단단히 당부했다. 금선과 석생은 소화상이 정탐하러 간다는 말을 듣자 자기들도 따라가겠노라 달라붙었다. 이들이 다 따라간다면 진문을 장이 혼자 지키는 게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선사제는 장이와 함께 진문을 지켜야 하네. 석사제만 나를 따라 가보세." 소화상의 말에 금선은 입이 삐죽이 나왔고 석생은 좋아라 했다. 그와 석생의 영부는 현빈주에 훼손됐으므로 장이와 금선이 사용한 영부를 빌어쓰기로 했다. 그 들은 긴급시에 뇌성으로 연락키로 약속하고 소화상과 석생은 수인이 있던 곳으로 날아갔다. 그들이 주봉 뒤쪽 풍혈 상공에 다다랐을 때 멀리 아직도 영패에 못박혀 있는 신진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지금껏 영패에 매달려 허우적대고 있는 모양이 아직 원신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여보게 석사제, 자네가 놓아준 원신이 신진자의 것은 아니었던가 보네. 여지껏 영패에 매달려 발버둥치고 있는 꼴이 말일세." 소화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녹색 검광이 풍혈 입구에서 번쩍하며 나타났다. 그는 다름아닌 풍 혈을 간수하던 요인들 중의 우두머리요, 녹포노조한테 어깻죽지 하나를 뜯어먹힌 사나이였다. 그는 신진자를 손가락질하며 험악한 욕을 퍼부었다. "이 악귀 같은 놈아, 죽을라거든 고이 죽지 사람을 모함할 수 있느냐! 어제 내가 너한테 전한 것 도 기실 다 호의에서 나온 건데 그걸 원수로 몰아? 노귀를 속여 내 팔뚝을 하나 끊어놓으니 속시 원하냐? 좋다, 나도 너같이 한번 분풀이를 해주지!" 그 사나이는 부아를 삭이는 듯 숨을 씨근대며 들이쉬었다. "이놈아, 이래뵈도 이 어른은 스스로 원신이 도망나와 금제에서 싹 풀렸느니라. 옛날 같으면 널 도와줄 수도 있지만 이젠 복수 좀 해야겠어. 저 노귀놈은 적과 싸우고 있는 중이라 아무 거리낄 일이 없다구. 네놈한테 보복하려고 특별히 먼저 이곳으로 달려오는 참이다, 인석아!" 사나이는 요번을 등짝에 탁 꽂더니 품속에서 삼첨양인도 하나를 꺼내들었다. 칼은 흑연을 내뿜 으며 이내 신진자를 향해 날아갔다. 신진자는 원신이 금제됐고 몸도 온통 망가져 곧 죽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한데 녹포노조가 아닌 후배한테 죽는 건 좋다 치더라도 듣기 더러운 욕을 한바가지 덮어쓰니 화가 은근히 솟아났다. 하 지만 얼굴이 영패를 향해 못박힌 데다 아구창까지 날아간 판이라 뭐라 응수하지도 못하고 몸만 발버둥쳤다. 소화상은 사나이가 신진자를 죽이려는 것을 보자 이독공독(以毒攻毒)이란 생각이 나서 가만히 귀추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흑연의 비도가 신진자의 후심 요혈에 닿으려는 순간 돌연 한 줄 기 파공음이 일며 녹화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왔다. 녹색 불꽃은 아슬아슬한 찰나에 비도를 떨어 뜨렸고 이어 사나이 하나가 날렵하게 신진자 앞에 내려섰다. 전날 소화상에게 요번을 빌려준 수 인이었다. 수인이 사나이에게 점잖게 말했다. "신진자가 좋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다년간 우리의 동문 아니었소? 그리고 우리도 노귀를 따른 뒤 금제를 받아가면서 많은 죄얼을 지었잖습니까. 나는 암석에 못박혀 온갖 형벌을 받으며 목숨 이 경각일 때 이 모든 죄과를 깊이 뉘우쳤소이다. 뉘우친들 과거의 잘못이 깨끗이 없어질 리 없 지만 불현듯 은인이 한 분 나타나 나를 구해주었다오. 당신의 원신도 그 은인이 금제에서 풀어준 것이오. 나는 원래 금제에서 풀리자마자 멀리 떠나갈 요량이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청해교조 장령자와 <동해삼선>, <숭산이로>가 모두 이 백만산에 온 걸 보았소. 노귀는 저들을 이길 수 없 을 뿐더러 도망칠 때도 우리를 처치할 여가도 없을 것이오. 그래서 나는 다년간의 정리를 생각해 음풍동으로 가서 동료들의 금제를 모두 풀어줄 생각이오. 토끼가 죽어도 여우가 슬퍼하거늘 사람 인 우리가 동료를 잊어서야 되겠소?" "그게 정말인가? 나의 원신이 어떻게 풀렸나 나도 이상히 여기던 참일세. 하지만 노귀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건 걱정 마시오. 문주는 이미 죽었고 노귀는 원신으로 적과 싸우느라 몸을 뺄 여가가 없다오.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 후회막급이리다. 당신이 신진자를 미워하는 줄은 알지만 그는 구각도 거 덜이 나고 원신만 겨우 남아 있소. 실력도 우리와 별차 없어 뒤에 걱정할 염려 없는 사람 아닙니 까. 더구나 그는 녹포노조의 현빈주뿐만 아니라 아미파의 순양으로 다져진 선검(仙劍)은 당해낼 수 없소. 그간 동문이었던 사람을 죽이려고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어디 있겠소이까?" 그는 또 신진자에 대해서도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신사형, 당신은 평소 너무 악한 짓을 많이 하시었소. 그래 이런 처참한 응보를 받는 것이라오. 우리들 둘이 음풍동에 가서 동료들의 원신을 풀어줄 때 당신 것도 방출해 주겠소. 시간이 촉박하 니 영패의 못은 당신이 현공으로 풀어보십시오. 우리는 다시 돌아와 도와줄 수 없으니 그 점 양 해하시오." 팔이 절단된 사나이는 아직도 한이 맺힌 듯 씩씩대고 있었는데 말을 끝낸 수인이 잡아채듯 끌고 음풍동 쪽으로 사라졌다. 수인이 탈출한 데다 과거를 확실히 뉘우친 걸 확인한 소화상은 무척 마음이 기뻤다. 이제 문제 는 신진자였다. 지금 당장 신진자의 몸체를 요절내는 것은 쉬운 것이었으나 그러다가는 중요한 원신을 놓치게 된다. 워낙 고약한 신진자라 원신이 살아 어딘가로 도망친다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다. 수인의 말에 의하면 아미파 순양선검에 신진자의 원신이 당할 수가 없다고 했으니 차제에 한번 시험해 볼 생각이 났다. 소화상은 석생을 끌고 살살 신진자 가까이 다가갔다. 수인이 신진자의 원 신을 풀어주고 돌아와서 그의 몸체로 들어가려는 순간 냅다 들이닥칠 생각이었다. 소화상과 석생이 오래 기다리지 않아 혈색이 희끄무레한 요화가 주봉 저켠에서 날아오는 게 보 였다. 무척 피곤한 듯 나는 품이 느릿느릿했다. 소화상은 성질이 급한 석생이 일을 그르칠까 봐 꼼짝 못하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힘이 없는 녹색 요화가 너울너울 날아와 신진자의 몸 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소화상은 현공을 운용해 신검합일로 번개같이 들이쳤다. 신진자는 얼굴이 영패를 접해 못박힌 데다 소화상 등이 영부로 은신하고 있어 추호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은은한 풍뢰소리가 귓전을 스치자 신진자는 마음 속으로 '아이쿠!' 비명을 질렀다. 아뿔싸 늦었구나, 생각하는 사이 힘없던 원신이 펄떡 공중 위로 날아올랐다. 역시 대악당 신진자의 원신답게 녹색요화는 생각보다는 월등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아갔다. 소화상의 벽력검은 그보다도 더 빠르게 쫓아갔다. 순식간에 요화를 따라잡은 벽력검은 녹색 불 꽃 정중앙을 풍뢰소리도 요란하게 푹 찔러 들어갔다. 아무리 영활한 신진자의 원신이라 해도 오 랫동안 녹포노조한테 금제되었고 날마다 현빈주에 쐬어 원기가 크게 상해 있어 아미파의 보검을 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벽력검이 화심(火心)을 뚫자 영패의 신진자는 '카악!' 하는 비명을 내질렀고 원신은 '쩍!' 두 쪽 이 났다. 두 동강난 요화는 계속 공중을 날았다. 그러나 석생의 비검이 앞을 막고 소화상의 벽력 검이 뒤에서 감싸며 요화를 완전 휩싸버렸다. 두 검광 속에 갇힌 요화는 짙은 녹색이 점차 짙어 지더니 결국엔 완전 소멸되고 말았다. 신진자의 원신은 드디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영패의 신진자는 아직도 '치지치!' 하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화상은 검광 을 서너 번 흩뿌려 휘둘러쳤다. 영패에 서려 있던 요무가 흩어지며 신진자의 몸뚱이는 영패와 함 께 몇 동강이 나서 땅 위에 굴렀다. 조각조각이 난 신진자의 몸은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이제야 신진자를 이 세상에서 깨끗이 없애버렸군." 소화상은 회한이 어린 독백처럼 말을 뱉았다. 이때 홀연 수인이 검광을 타고 날아오며 소리쳤다. "은인께선 잠깐 기다리십시오! 노귀가 지금 악충을 방출해 장령자의 구각을 해치려 하고 있소이 다. 내가 드렸던 깃발을 돌려주시겠소? 내가 저 악충을 끌어내어 깡그리 없애버리겠습니다." 소화상은 깃발을 꺼내 수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금 선이 진문 쪽에서 날아오며 외쳤다. "사형, 조금 전 고행사백께서 각 진문을 순시하다 우리에게 오셨는데 곧 금잠이 나타날 거라는 구려. 사백은 영부 하나를 주시며 금잠이 나타나거든 없애라 합디다. 금잠이 오기 전에 빨리 돌아 가십시다요!" 소화상은 금선의 말을 듣자 더 이상 수인과 늘적댈 수 없어 간단히 당부했다. "몸조심하시오. 될 수 있는 한 빨리 피해서 옥석구분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는 석생과 함께 금선을 따라 진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진문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과연 수인과 두 요인이 요번을 흔들며 금잠들을 유인해 끌고 왔다. 소화상은 급히 진화(眞火)를 이용해 영부를 불태웠다. 천막처럼 하늘을 덮은 금잠이 금빛과 세 요인 머리 위를 휩싸며 내려깔 렸다. 소화상으로서는 수인이 금잠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악충과 함께 일망타진되는 게 가슴아팠 다. 그가 안타까이 발을 동동 구를 때 수인이 요인 하나와 함께 금잠 속을 뚫고 빠져나왔다. 금빛 그물 속에서 빠져나온 수인이 소화상에게 말했다. "나는 음풍동에 가서 여러 동문의 원신을 해방시켜 주었지요. 한데 그들은 요마를 충동질해 우 리를 괴롭힌 요부를 꼭 찾아 복수해야겠다는 거였어요. 나는 그들에게 권했지요. 지금은 그럴 게 제가 아니니 빨리 빠져나가자고요. 하지만 동료들은 끝끝내 요부를 찾아 눈을 까집고 뒤집디다. 그러다 노귀가 홀연 나타나 거지 반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는 노귀가 악충을 발출하려는 것 을 알고 은인께 깃발을 구하러 왔었고, 그 결과 금잠들을 몰고와 간신히 전멸시킬 수가 있었습니 다. 조금 전 나 자신도 금빛 그물 속에 갇혀 있는데 홀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빨리 요 번을 버리고 개사귀정(改邪歸正)을 서약하라. 그러면 죽음을 면하리라' 우리들은 서둘러 굳게 맹 서했습니다. 그러자 금빛 속에 번쩍하고 출로가 트이더군요. 팔이 짤린 친구는 이름이 교수(喬搜) 인데 평소 죄악이 워낙 커서 용서받지 못한 탓인지 탈출을 못했습니다. 그는 붉은 구름 사이에서 두어 차례 발버둥치다 종적없이 사라졌답니다. 이 동료는 매록자(梅鹿子)라 불리우는 친구로 마음 이 충후하고 입문한 지 얼마 안 되는 착한둥이어서 함께 덕을 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결단 코 사악함을 버리고 올바름 속에 머물 것입니다. 지금 여러 신선 같은 분네께 거두어 달라고 부 탁을 올리고 싶으나 전과가 워낙 큰지라 감히 말을 드릴 수도 허락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먼저 은벽한 곳을 찾아 깊이 뉘우치며 수련하여 덕을 닦은 뒤에 훗날에야 어른들께 정리를 돌보아 달 라 간구할 생각입니다. 그 때에는 문하에 거두어주시길 간청하겠습니다." 소화상은 그의 간곡한 말을 듣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인과 매록자는 소화상 등 아미파 은인에게 예를 갖춘 뒤 뇌성이 일며 진세가 발동할 때 백만산을 떠나갔다. 소화상, 금선, 장이, 석생은 고행두타의 분부에 따라 열아흐레날 정오가 될 때까지 진문을 지켰 다. 마지막날 한낮이 되자 사방에서 북이 울리듯 뇌성이 일고 뇌성은 한가운데로 밀집되듯 뭉쳐 들었다. 갑자기 주봉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벽력소리가 나고 푸르른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상서 로운 빛살이 후련히 걷히고 빨간 구름이 사르르 흩어졌다. <삼선이로>는 동시에 주봉 상공에 모여 소화상 등 네 사람을 불러보았다. "수고들 하였다. 이제 요마의 신령은 진화에 연화되어 완전 소멸하였느니라." 소화상 등은 벅찬 가슴을 부둥키고 사면을 휘둘러보았다. 백만산 사면에 흘뿌리던 폭포는 간 데 없고 주봉 주위 수십 리 주변은 땅 속으로 함몰돼 큰 호 수가 되어 있었다. 맑은 샘이 청초로이 돌아 흐르고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눈같이 흰 포말이 곤 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주봉은 호수가 가운데에 덩그마니 솟아 있었으며 호수에 솟은 높이가 겨우 수 장에 불과했다. 호수 중간쯤에는 온천이 있어 백 장도 넘게 열기가 서린 물기둥을 쏘아올렸다. 그 주변에 뜨거운 서리가 뭉게뭉게 어리어 마치 수정처럼 빛을 발산했다. 네 젊은 제자들은 <삼선이로> 앞에 나아가 대공을 이룬 데 대해 치하하며 소화상은 새삼 고행 두타에게 사죄를 청했다. 소화상이 고행두타 앞에 무릎을 꿇자 현진자가 말했다. "그동안 계속 요마를 처치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스승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은 공로로 너의 사 부는 이미 지난 죄를 사하여 주셨느니라. 일후 아미파를 빛내기 위해 네가 할 일이 있다. 그 사이 화령보주를 얻었지만 무형검을 잃어 손실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녹포노조는 제거했다 해도 곡진 의 겁운이 아직 남아 있으므로 그대들 젊은이들은 수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진실로 구도할 생각이라면 먼저 산에 돌아간 뒤 보상부인의 탈겁에 맞춰 풍뢰동에서 면벽 십구 년의 참 수를 하도록 하라. 그때 무형선검을 다시 연성할 수 있을 것이다. 선검의 연성이 끝나면 하산하여 외공을 닦아 정과를 얻도록 하거라. 너의 사부는 공행이 이루어져 머지 않아 비승할 것이다. 따라 서 한 번 풍뢰동에 들어가면 정과를 얻을 때까지 다시 볼 수 없을 게야." 스승이 곧 비승한다는 말을 듣자 소화상은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평소 자 기를 가르쳐 준 은혜가 산 같은데 보답도 하기 전에 헤어진다 생각하니 비창함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현진자가 계속 말했다. "너의 사부 문하엔 오직 너 한 사람뿐이다. 스승의 검법은 마도를 제압하는 최상의 초수를 지녀 우리들과도 썩 차이가 있으시다. 궁극적인 길은 하나이겠으나 독특한 현묘함은 도저히 다른 데가 있느니라. 너의 사부는 이미 불가의 정제(正諸)를 얻어 그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지만 묘일사숙과 나는 너의 사부의 검법이 실전되는 걸 아주 염려하고 있다. 네가 사부 검법의 의발을 계승하여 아미문하에 들어오는 게 좋겠다. 그대 사도들이 만난 지가 일천하여 단기간에 진전을 모두 배울지 걱정이 된다. 이번 동해로 돌아가거든 조금도 게으름피지 말고 더욱더 정진하길 바 란다." 소화상이 현진자의 말을 귀담으면서도 계속 눈물을 뚝뚝 떨구자 고행두타가 나무라듯 말했다. "인석아, 그동안 수년이나 나를 따라다녀 놓고도 아직 속세의 천박함을 떨치지 못했단 말이냐? 일층 노력하여 참수나 잘할 생각을 해야지! 네가 두 차례 계행을 범하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불 문제자는 틀린 것 같아 네놈을 쫓아낼려고 했다만, 별로 큰 잘못도 아니고, 자칫 버려두었다가는 그동안 가르쳐 준 진전을 버리는 것은 물론이요, 중도변절할까 걱정했다. 다행히 사백과 사숙이 너를 보살펴 주시겠다 하고 묘일사숙은 특히 제자로 받아준다 하니 일후 방종치 않게 조심해라. 너는 사실 근골이 깊고 심후하니 이런 선연을 맺은 것이다. 한데 인석, 빨랑 네 사부님께 절을 안 하고 무슨 눈물을 질질 짜고 있는 거냐?" 소화상은 쌓인 회포가 가슴 속에 그들먹했지만 감히 말도 못한 채 <묘일진인> 앞에 공경히 나 아가 스승으로 받드는 예를 드렸다. 절을 받은 <묘일진인>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비범한 자질과 공행을 아껴 내 문하에 받기로 했느니라. 본래 총명하고 근골이 뛰어나 노 력하여 수련한다면 큰 공덕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곧 아미로 돌아가 본파 삼대 동문이 다 모이 는 모임을 갖는데 이는 장미조사가 비승한 이래의 대성진이라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다 참석해야 한다. 그러나 너의 사부의 현공은 오묘하기 짝이 없고 비승이 곧이라 하니 시간을 버려가며 아미 에 올 것은 없다. 동해에서 깨우침을 받거든 그 즉시 풍뢰동에 가서 면벽참수에 들어가도록 하라. 사부의 비승까지 사부의 의발을 제대로 전수받고 못 받고는 모두 너 자신에게 달렸을 뿐이다." 소화상이 새 스승의 훈시를 받고 나자 현진자가 말했다. "이번에 저 요물은 깨끗이 소멸시켰다만 몇몇 도당과 예가 요부를 놓치고 말았다. 하나 그것들 이야 능력이 별 건 없겠지만 일후 풍파를 일으킬 염려가 있다. 자칫 인간들에게 화를 입힐 우려 가 있으니 묘일사제는 산에 돌아가거든 제자들에게 그들을 적시에 소탕케 지시하는 게 좋을 듯하 이. 과거를 뉘우친 자들은 용서하되 그렇지 않은 것들은 속히 제거해 곡진의 문하가 되는 따위는 없게 해야겠네. 나는 백곡일, 주매 두 분과 함께 북해에 갈 일이 있으니 먼저 떠나겠네." 말을 끝내자 현진자는 <추운수> 백곡일, <왜수> 주매와 함께 바람처럼 떠나갔다. 고행두타도 <묘일진인>에게 손을 들며 작별했다. "빈승이 산에 돌아가거든 위지화(尉遲火)를 선부에 보내 교훈을 얻도록 하겠소이다. 응벽애의 모 임엔 이 빈승이 인연이 없을 것 같소. 도우께서 구화에 가시거든 부인께 인사나 올려주시오. 빈도 의 인간 세상사의 인연이 이것으로 그치는가 보오. 자, 먼 후일 다시 만나도록 하십시다." 소화상은 금선, 석생, 장이와 이별하면서 내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스승의 말이 끝나자 그는 급히 <묘일진인>에게 무릎 꿇으며 작별했다. <묘일진인>은 소화상에게 몇 마디 당부의 말을 건 넨 뒤 두 사도를 떠나보냈다. 고행두타와 소화상이 연기처럼 사라지자, <묘일진인>은 금선 등 세 사람을 불러 말했다. "금선아, 너는 근년에 들어 많은 정진이 있었으나 아직도 동심이 남아 있고 언행에 근엄함이 결 여돼 수도인의 풍모가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이후 산에 늘 있지 못할 터인즉, 너는 수시로 외출 하여 외공을 닦으며 선배 누님들의 교시를 잘 따르도록 해라. 내 말을 깊이 명심할 것은 아차 잘 못하여 세 번 태어나는 역겁(歷劫)은 하지 말란 뜻이다. 육지(肉芝)는 선연이 너와 가장 깊으니 네가 유의해 보호해 주어라. 언젠가 너희들이 크게 쓸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구화와 황산에 가 서 찬하대사와 너의 어머니를 만나 의논할 일이 있다. 너는 석생과 장이를 데리고 먼저 응벽애로 가거라. 응벽애의 포위는 이미 풀려 있을 것이다." 금선이 훈시를 받자 석생과 장이가 앞으로 나아가 제자로 받아주기를 간청했다. <묘일진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즉각 절을 하여 스승의 예를 갖추었다. <묘일진인>이 석생에게 먼저 말했다. "너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고된 수련을 쌓았지만 묵은 얼장 때문에 영석의 정기에 감응돼 남편없 이 너를 낳았다. 한데 외조부의 불찰로 벌책을 당하게 됐고 다행히 <극락진인>의 영부로 참화는 면하게 되었다. 너는 빼어난 영기를 타고 태어났으나 우리 문하는 교규가 심히 엄하니 이에 어긋 남이 없이 근신 노력하도록 하라. 그러면 언젠가 <삼영이운>에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아미에 가면 사저와 사형한테 우선 배우고 내가 도착하면 공과를 전수해 주겠다." 석생이 훈시를 받고 일어나자 <묘일진인>은 장이를 불렀다. "장이, 너도 특이한 품성을 타고났으나 전세의 업보로 삽지를 마시게 된 것이다. 스승 가일자는 비록 방문이지만 심법과 품행이 극히 바른 사람이었다. 그의 능력으로 너의 목청을 환원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너의 자질이 좋고 혹 진전을 전수받은 뒤 길을 잘못 들 을까 봐 그 작업을 해주지 않은 것이다." <묘일진인>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 말을 계속했다. "본래는 내가 산에 돌아간 뒤 너를 치료하려 했으나 너의 심성이 워낙 고운 데다 동문형제들과 처음 만날 때 언어가 통하지 않아 손짓발짓할 게 보기 싫어 지금 당장 고쳐주겠다. 차후 본문에 들어오면 굳고 충실히 내외공을 쌓고 힘껏 정진하기 바란다." 장이는 스승의 말을 듣자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감사했다. <묘일진인>은 단약 하나를 꺼내 복 용시킨 연후, 장이에게 무릎을 깍지끼고 앉아 운기조식하라 일렀다. 이윽고 장이의 몸은 각 부위 가 청정 속에 빨려 들어가며 심신이 고요해졌다. 이때 <묘일진인>이 일지를 들어 가리켰다. 한 줄기 금빛이 실처럼 가느다랗게 뻗어 장이의 왼 켠 콧구멍을 뚫고 들어갔다. 금광은 잠깐 사이 오른쪽 콧구멍으로 빠져나왔다. 이 금광은 다시 왼 쪽귀로 들어가 칠공을 휘돌다 최후에는 단전으로 들어갔다. 이어 용천(湧泉), 천궐(天闕), 화개(華 蓋) 등 칠십이 관 역행하여 거친 뒤 종내는 입으로 빠져나왔다. 장이는 갑자기 시원함을 느꼈다. 온 몸은 날아갈 듯 가쁜하고 마음이 후련해졌다. <묘일진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됐다. 이제 일어나거라!" 장이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은사님, 감사하옵니다!" 그는 예전처럼 말을 한 것이었다. 자신의 말소리에 놀란 장이는 당장 납죽 엎드려 절을 드렸다. <묘일진인>은 절을 받는 즉시 소매를 펄럭였다. 금빛이 한 줄기 하늘로 솟구치더니 채색 무지 개가 하늘을 가르듯 창공을 누볐다. 무지개는 밤하늘의 번개같이 빠르게 하늘 위를 꿰뚫고는 눈 깜짝할 사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얽히고 설킨 인연들 惡計燒仙山 巧語花言謨蕩女 對枰凌絶獻 玄機妙用警淫娃 악의 소굴, 피비린내로 가득찼던 백만산이 무너지고, 만고에 둘도 없는 악마 녹포노조와 그 제자 신진자도 허망하게 소멸되었다. 오직 남은 것이라곤 둘레 수십 리에 걸쳐 출렁이는 호수의 물결, 그 한가운데 중둥이 부러져나간 백만산의 주봉(主峰)에서 뜨거운 수증기를 뿜으며 솟구치는 온천 수의 물기둥이 장관을 이루고 있을 따름이다. <삼선이로>가 사라진 후에도 금선과 석생은 그 자리에 꿇어엎드린 채 한동안 일어설 줄 몰랐 다. "금선사형, 이제 그만 일어나요. 묘일사조님은 그림자도 없는데,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테요?" 금선은 귀에 낯선 목소리를 듣고서 새삼 놀랐다. 그제서야 벙어리였던 장이가 목청이 터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벌떡 일어섰다. 석생도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렇구나, 장이아우가 말을 다 했어! 야아, 이것 정말 신통한데?" "장형, 축하하오!" 금선과 석생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들은 장이의 두 손을 갈라 잡고 마구 흔들면서 축하를 해주었다. "고맙소, 고마와. 이 모두 형님들께서 애써 주신 덕분이오." 장이도 감개무량, 가슴이 벅차 올라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세 사람은 이제껏 겪었던 녹포노조 일당과의 악전고투를 되새기면서 한 순간에 호수로 일변한 경치를 내려다보았다. "자, 이제 떠나세!" 금선의 재촉을 받고서야 장이와 석생은 꿈에서나 깨어난 듯 정신을 가다듬고 검광을 일으켰다. 금선일행은 그 길로 아미산 응벽애를 향해 날아갔다. 길은 비록 머나먼 천리길이지만 날아가는 속도가 워낙 빠르니, 몇 시진 안 걸려서 아미산에 가 까이 다다를 수가 있었다. 아렴풋이 아미절경을 눈여겨보며 동문사형제들과 만나 기막혔던 싸움 자랑을 할 생각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서 길 재촉을 하노라니, 문득 서켠 하늘가에서 두 줄기 푸른색 검광이 동남방 천공을 향해 번쩍 빛나고는 사라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금선사형, 저게 누굴까?" 석생도 그 빛줄기를 보았는지 금선을 돌아보고 물었다. "글쎄... 이단파의 검광이긴 한데 쓰는 법은 우리 아미진전을 익힌 것이야. 아미산 쪽에서 날아오 른 걸 보니 우리가 없는 사이 응벽애에 새로 입문한 동문이 아닌가 싶어. 한데 무슨 급한 일이 있길래 저토록 빠르게 날아가지?" "우리 뒤쫓아가 봅시다!" "아니야, 너무 멀어. 그냥 가세." 금선일행은 추격할 생각을 떨쳐버리고 계속 응벽애를 향해 날아갔다. 응벽애 상공에 갓 이르렀을 때였다. 이번에는 자줏빛 검광이 창공으로 용솟음쳐 오르는 걸 발견 했다. 뒤미처 서슬푸른 청색 검광도 수직선을 그으면서 솟구친다. "아, 영경 동생이로구나!" 눈치 빠른 금선은 이영경과 신약란을 대뜸 알아보았다. 그는 황망히 일행 둘을 이끌고 마주 날 아갔다. 인사를 나눌 여지도 없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영경이 먼저 질문부터 던졌다. "금선오빠! 오시는 길에 한악(寒顎)하고 사도평(司徒平) 두 사람 못 보셨어요?" "못 만났는걸? 우리 문파 사람 같은 청색 검광 두 줄기가 동남 쪽으로 날아가는 것만 봤어. 무 척이나 빠르던데, 혹시 응벽애에서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니겠지?" 그러자 영경은 그 말에 대꾸는 안하고 신약란을 돌아다보았다. "언니 말이 맞았나 봐. 그 두 사람은 자령곡(紫玲谷)으로 돌아간 게 분명해. 우리 빨리 쫓아가자 구!" "이봐 영경,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났어?" 영문을 모르는 금선이 되묻자, 영경은 바쁘게 대답한다. "여긴 별일 없어요. 자령, 한악자매가 좀 다투고 말썽을 일으켜서 그래요. 우리 뒤쫓아갔다가 금 방 올 테니 오빠는 먼저 가세요.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구." 영경은 금선의 대꾸도 듣지 않고 약란을 잡아끌더니 허겁지겁 자영검광을 일으켜 타고는 댓바람 에 창공으로 솟구쳐 사라졌다. 영문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해진 금선, 두 처녀가 사라진 하늘 쪽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정 신을 차리고 석생과 장이를 재촉했다. "뭐가 뭔지 통 모르겠군. 자, 우리도 내려가자구." 그들이 지상에 막 내려서자, 독수리 불노가 앞장서서 뒤뚱뒤뚱 마중을 나온다. 그 뒤로 진자령이 독각신취를 타고 바쁘게 다가왔다. "아니, 어떻게 우리 올 줄 알고....." 이게 웬 영접이냐 싶어 금선이 물으려는데, 불노와 독각신취가 훌쩍 나래를 펼치더니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등에 탄 진자령은 금선일행을 향해 미소만 던지고 고개를 까딱해 보이는 게 전부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창공으로 날아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도깨비놀음을 하는지 원." 연거푸 뒷벽만 치자, 금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응벽애 계곡 앞은 조용하기만 하다. 비폭 아랫길을 돌아드니 원성이 혼자서 물장난을 하고 있을 뿐이다. 원성이는 금선일행을 보자, 훌쩍 뛰어와서 무릎꿇고 반갑게 인사를 올렸다. "어서 돌아오십쇼. 금대선님!" "너희 주인하고 자령자매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 "저도 모릅지요. 다른 분들은 모두 태원동에 계십니다. 선고님들 하고 새로 오신 대선 몇 분이서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신데, 저야 뭐 알 도리가 있습니까요?" 금선은 바삐 석생과 장이를 데리고 태원동으로 달려갔다. 금선에게 이끌려 가면서 장이와 석생 두 소년은 응벽애의 좌우 경치를 넋빠진 듯 둘러보느라 바쁘다. 과연 이곳 응벽애야말로 세상천 지 둘도 없는 동천복지가 아닌가? 아무리 보고 또 둘러보아도 눈길 닿는 곳마다 선경은 끝이 없 게 펼쳐졌다. 두 사람의 기쁨과 놀라움은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뭘 두리번거리는 거야? 어서 가자구. 나중에 눈이 짓무를 정도로 볼 텐데." 인정머리도 없는 금선, 장날의 촌닭처럼 넋빠진 두 소년이 발길을 주춤거릴 적마다 가차없이 몰 아붙인다. 이거야 정말 치닫는 말잔등에서 산경치 보는 격이라, 어느 것 하나 눈여겨서 자세히 볼 틈도 없다. 이윽고 금선은 태원동에 당도했다. 석실 안으로 들어서니 낯익은 얼굴들이 반겨맞는다. 금선에게 모두 그리운 얼굴들이다. 누이 제영운을 비롯해서 주경운, 엄인영, 오문기, 구지선 그리고 주문도 싱긋 웃음을 보낸다. 이밖에도 적지 않은 남녀 동문들도 앉아 있다. 알 만한 사람도 있지만 낯선 초면도 몇몇 보였다. 우건, 양성지 두 동자녀석과 장남고의 남동생 호아(虎兒)란 놈은 어디를 갔 는지 없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일은 잘 끝마쳤겠지?" "잘됐어, 누나!" 금선남매는 짤막하게나마 정겨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어서 동문들과 첫대면하는 석생과 장이를 소개했다. 분분한 인사가 끝나자, 금선은 백만산에서의 싸움을 대략 보고했다. 그리고는 망창산에서 헤어진 이후 이영경이 온옥을 가지고 돌아와 여영남을 원상태로 회복시켰다는 사실, 또 어머니 묘일부인 이 며칠 전에 들려서 장남고(章南姑)를 문하제자로 거두어들이고 어제야 구화산(九華山)으로 돌아 갔다는 사실도 알았다. 금선에게 낯선 얼굴들은 모두 중양절 응벽애의 개창(開創) 대회가 박두하여 초대받은 동문들이 날짜 전에 찾아온 것이었다. 아직도 적지 않은 인물이 있지만 머지 않아 모두 참석할 것이라는 제영운의 설명이 있었다. 금선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동문들이다. 응벽애 뒤쪽 비뢰동(飛雷洞) <염선(髥仙)> 이원화(李元化)의 두 제자 석기(石奇), 조연아(趙燕兒) 는 요기(妖氣)에 파괴된 동부(洞府)를 버리고 아예 응벽애로 합류해 살고 있다. 그밖에 멀리는 민산(岷山) 만송령(萬松嶺) 조천관(朝天觀), 수경도인(水鏡道人)의 문하제자 <신안 (神眼)> 구림(邱林), 청성산(靑城山) 금편애(金鞭崖)에서 온 <왜수> 주매의 제자 기등(紀登)과 도 균(陶鈞), 그리고 곤명(昆明) 개원사(開元寺) 합합승(哈哈僧) 원각선사(元覺禪師)의 제자 <철사미 (鐵沙彌)> 오수(悟修), 또 성도 자운사(慈雲寺) 결전 당시 전사한 풍화도인 오원지의 문하제자였 던 <칠성수(七星手)> 시림(施林)과 <영화거사(靈和居士)> 서상아(徐祥鵝)도 추운수(追雲搜)의 문 도 자격을 갖추고 찾아왔다. 모두가 선풍도골에 비범한 기풍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금선은 묻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으나 제영운이 먼저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 다. "여러분, 모두 사존어르신을 뵈올 준비중인 석실로 갑시다. 거기서 의논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응벽애의 젊은이들은 두말 않고 일어섰다. 지금 여기서 우두머리는 제영운이다. 아무리 남매지간 이라 하더라도 금선조차 그 분부를 거역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그들은 자리를 옮겼다. 금선의 눈길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문을 찾는다. 그녀는 문간 가까이 놓인 돌의자에 앉아서 아무 소리도 않고 있다. 금선은 슬금슬금 다가가서 그녀 곁 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쭈삣쭈삣 수작을 걸었다. "주누이, 어떻게 지냈수? 한동안 보고 싶었는데....." 일행을 향해 말문을 열려던 우두머리가 흘낏 동생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금선은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주문한테 계속 말을 붙였다. "요물들의 포위는 언제 격파했소? 주누이, 얘기 좀 해주구려. 자령자매는 왜 심술이 났지? 영경 하고 약란도 싸웠나? 사도평은 언제 돌아왔어? 그 친구는 어째서 한악하고 떠난 거야?" 숨돌릴 틈도 없이 되는 대로 질문을 던지자, 주문은 입술을 비쭉 내밀어 제영운 쪽만 가리킬 뿐, 일언반구 대꾸도 않는다. "왜 그래? 누이가 뭐란다구 대답을 않는 거유? 허참!" 아무리 수작을 부려도 끝내 주문이 대꾸를 안하자 금선은 또 머슥해졌다. 부아가 슬그머니 끓어 올라 주문을 바라보던 눈길을 반대로 홱 돌렸더니 그쪽에 석생이 엉거주춤 서 있다. "이봐, 석아우! 이리 와서 앉아." 금선은 돌의자 한 곁을 비켜주면서 손짓해 불러 앉혔다. 석생이 좌정하자마자, 우두머리의 입에 서 엄숙한 말씀이 쏟아져 나왔다. "사형, 사제, 사매 여러분, 어제 장교부인께서 떠나시기 직전 '진씨자매가 바야흐로 재난을 당하 리라'고 말씀하시고 서찰 한 통을 남겨두셨습니다. 절더러 때가 이르거든 개봉하라 하셨는데 생 각지도 않게 오늘 아침 그 자매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다투다가 철없는 한악사매가 계 율을 어기고서 사도평 사제를 데리고 제멋대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경, 약란 두 동생 의 대난이 끝난 줄 아는 터라 그들을 쫓아가 잡으라고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진자령사매도 자신 이 직접 잡아다가 처벌하겠노라고 간청을 하길래 뒤따라 보낸 것입니다. 떠날 즈음해서, '이번 우 리 개산대회는 여간 중대한 행사가 아니니 그 날짜 전에 되돌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습니 다. 본파의 어느 누구든지 장교사존의 허락없이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중 양절이 임박한 이 마당에 대회라도 그르친다면, 한악사매가 중죄를 모면치 못하는 건 둘째로 치 고, 이 어리석은 저까지도 단속을 잘못한 책임을 지고 벌받게 됩니다. 하물며 청라욕 싸움에서 일 껏 전공을 세운 진씨자매가 재난을 당하는데 제가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으므로, 이제 방금 장교부인의 서찰을 뜯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진씨자매가 당면한 재난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지난번 진씨자매는 청라욕 싸움 과정에서 백미침으로 장령자(藏靈子)의 수제자 사문 공(師文恭)을 쏘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황산 자령곡으로 돌아가는 도중, 우연히도 장 령자와 맞딱뜨리게 되어 열엿새 동안 위험한 재난을 당하리란 장교부인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만 약 구원의 때를 못 맞추었다간 참화를 당할 것이며, 더구나 팔월 십오일, 중추절은 그녀들의 어머 니 보상부인(寶相夫人)이 겁난에서 벗어나는 날인데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자칫 그르칠 우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진씨자매와 장령자의 일은 <괴규화(怪揆花)> 능진인(凌眞人)이 아니고선 풀 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교부인의 분부 말씀대로 능진인께 구천원양척(九天元陽尺)을 돌려 드린다는 명분으로 그분을 뵙고 진씨자매를 구원해 주십사 부탁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울러서 우건과 양성지 두 사형도 함께 보내 능진인의 문하생이 되도록 조치했습니다. 저는 곧 떠나야 합 니 다. 지체하다간 중도에 사고라도 생길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곳 응벽애인데 지금 여기는 장교 사존을 비롯하여 선배사숙은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장교사존께서는 예전에 계시던 아미산 단운장 (丹雲章) 전진동(全眞洞)의 옛 친구분 간빙여(簡氷如) 사백님이 초겁(超劫)을 목전에 두시고 계시 므로, 그분이 원만하게 비승하시도록 전진동을 풍뢰(風雷)로 봉쇄하시고, 면벽참선을 돕느라 여기 일에 정신을 쏟을 틈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절더러 응벽애를 잠정적으로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곳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단파의 무리들은 전혀 낌새조차 못 채고 있었고, 또 응 벽애 정상 위쪽으로는 장미사조님의 영부(靈符)가 봉쇄망을 형성해 놓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침 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뢰동으로 통하는 첩경이 발각되면서부터 이단의 요물들에게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음소당(陰素棠)의 제자 손능파(孫凌波)가 몇 번 찾아와서 찌분 거리더니 뒤따라 시용고(施龍姑)의 무리가 화산문하 패거리를 이끌어들여 본산을 포위하고 공격 을 퍼부었습니다. 이제 요물들은 거의 다 물리쳤으나, 몇몇 그물을 벗어난 잔당들이 앞으로 그냥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 놈들은 장교진인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기회를 틈타 재공격을 시도할 것 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만큼 이곳 응벽애의 선부(仙府)를 지키는 책임도 막중합니다. 천만다행이 랄까, 여러 동문들께서 조만간 모두 당도하실 테니 지난 번처럼 고립당할 염려는 없으리라 믿습 니다. 그러나 제가 없는 동안 저 대신 이곳을 책임맡아 통솔하실 분이 필요합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응벽애를 통솔하실 분은 도력(道力)으로 보나 입문 경력으로 보나 기등 사형이 으뜸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고로 저는 기사형께 일체 통솔권을 맡아주십사 간청을 드립니다. 여러분도 이의없이 따르시리라 믿습니다." 아미파는 선후배간의 서열이 십분 엄격하다. 제영운이 비록 동문 가운데 최고 연장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부의 명을 받들어 응벽애를 총지휘하는 이상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곧 사부의 분부 그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그녀가 잠시나마 응벽애를 비우게 되면 서열로 따져 기등이 최연장자가 되는 셈이라, 남녀 동문들도 자연 이의를 제기할 건덕지도 없거니와 기등 자신도 지휘권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다. 그는 제영운에게 몇 마디 겸사를 하고 수락했다. 제영운은 다시 장남고더러 우건과 양성지를 불러오게 한 다음 엄한 말씨로 일렀다. "이제 너희 둘은 나를 따라서 청라욕으로 떠나야겠다. 무슨 말 인지 알아듣겠느냐?" "예....." 도동 두 녀석은 맥없이 응대를 했다. 하지만 마음 속은 각각이다. 양성지는 먼저 동문들이 제 몸 처럼 위하는 육지(肉芝)를 잡아먹겠다고 설쳐댔고 또 연거푸 사고를 저질러 이미 뭇 사람의 눈 밖에 난 몸이라, 언감생심 말은 못했지만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서 선배들의 따가운 눈총을 벗어 나고 싶던 참이었다. 그러나 우건의 처지는 다르다. 그는 여기 온 이래 말썽 한번 부려 본 적도 없고 충직스럽게 선 배들의 분부를 따르면서 근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양성지가 저지른 잘못을 함께 뒤집어쓰고 도 매금으로 이 선부를 쫓겨나야 한다니,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제영운의 지엄한 분부를 어길 수도 없는 처지라, 곁에 꿇어엎드린 양성지를 원망스럽 게 쏘아보다가 이내 눈길을 장남고 쪽으로 돌려서 무언의 간청을 했다. 그 눈망울에는 장남고더 러 자기 대신 변명을 해 달라는 애걸이 그득 담겨 있었다. 우건의 눈길을 받으면서 장남고는 짐짓 모른 척 무시했다. 영리한 그녀는 제영운이 우건을 달리 쓰기 위해서 데리고 간다는 속셈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도 아슬아슬하게 겨우 막내둥이로 입문한 처지인데 어딜 감히 남의 입장을 두둔하고 나선다는 말인가? 그녀는 우 건의 심증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참견할 수가 없다. 속으로는 가슴아프지만 매정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장남고가 외면을 하자, 우건은 단념하지 않고 좌중의 선배들을 하나씩 둘러보면서 말 못할 애원 을 던졌다. 선배들도 그의 입장이 억울한 줄 뻔히 알고 있다. 하지만 제영운이 일단 입 밖에 낸 말을 어찌하겠는가? 그들도 슬그머니 우건의 눈길을 피하는 게 고작이다. "큰 언니, 우건은....." "잔말 마라!" 평소에도 인정 많은 주문이 보다못해 역성을 들려고 했으나, 제영운은 눈짓을 보내며 한 마디로 막아버렸다. "주문과 금선 두 사람은 기사형의 분부에 절대 복종하고, 내가 올 때까지 응벽애를 떠나지 말도 록 해요." 그녀는 특별히 두 사람을 지목해서 무겁게 당부하고 나서 나머지 일행들에게도 자잘한 임무를 부여한 다음, 그 길로 우건, 양성지를 데리고 청라욕으로 떠나갔다. 꼬장꼬장한 우두머리가 떠나고 나자 남은 동문들의 입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홀가분 한 심정으로 왁자지껄 수선을 떨면서 바깥으로 몰려나왔다. 금선은 석생을 이끌고 주문과 주경운의 뒤를 쫓아갔다. "주누이, 아까는 대답을 못 들었는데, 그동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소? 말 좀 해주구려. 이거 원 답답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 주문과 주경운은 서로 마주 보고 빙긋 웃었다. 워낙 끈덕진 금선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얘기를 안해 주고서는 배겨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두 처녀는 차근차근 금선이 응벽애를 떠난 이후 벌 어졌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원래 시용고는 음소당의 제자 손능파와 뜻이 맞아 함께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 두 음녀는 우연 히 석기의 헌걸찬 모습을 보고 홀딱 반해서 그로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석기를 납치해다가 곤죽이 되도록 즐겨볼 요량으로 비뢰동에 찾아가 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막힌 고기맛을 보기도 전에 손능파 자신이 먼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시용고 자신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이후로 시용고는 음욕 대신에 무서운 독심이 움텄다. 어떤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죽은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고야 말겠다는 원한이 오뉴월 서릿발 맺히듯 그녀의 가슴 속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쯤 해서 음소당 역시 기막힌 꼴을 당하고 있었다. 운변(雲邊)의 옛 거처를 찾 아 들렸던 그녀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제자 두 명이 아미 문하의 <철사미> 오수와 <칠성수> 시림, <영화거사> 서상아 일행과 싸우던 끝에 죽음을 당한 사실을 알고 불같이 노했다. 더구나 가해자들은 여유만만 자기 거처를 뒤엎어 늑대소굴로 만들고서 사라진 지 오래 되었으므 로, 그녀는 하릴없이 조화애(棗花崖)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와서 보니 이번에는 손능파와 여영남 둘이 모두 없다. 그녀는 당채진(唐采珍)을 꿇려놓고 물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당채진은 손능파가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그저 손능파가 외출한 틈에 여영남이 달아났다는 말만 했다. 그 리고 손능파는 그 뒤를 쫓아갔는데 아직 잡지 못한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발칙한 년 같으니! 내가 없는 사이에 도망을 쳐? 잡는 날엔 발기발기 찢어죽이고야 말 테다. 그 래, 능파는 혼자서 쫓아갔느냐?" "아닙니다, 사형은 아주 친한 친구가 있어요. 시용고라구... 그 친구와 함께 떠났습니다." "언제 갔느냐?" "그저께....." "어느 쪽으로 간다드냐?" "아미산 비뢰동으로 간다고 했어요." "뭣이, 아미산 비뢰동이라구?" 음소당은 그만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다. 아미산 비뢰봉이려니, 그 곳은 아미파의 원로 <염선> 이원화의 동부가 있는 곳이 아닌가? 도대체 이것들이 어쩌자고 호랑이굴 속을 찾아 들어갔단 말 이냐? 음소당은 아무래도 제자 손능파와 그 친구라는 시용고의 의도가 수상쩍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 망친 여영남이 그 험악한 지형을 알고 찾아갔을 리는 만무하다. 정말 달아났다면 그 반대편 남쪽 이나 동쪽이라야 숨기에 편리한 밀림지대를 택했을 것이다. 그녀는 거듭 엄하게 당채진을 다그쳤다. "영남이란 년이 분명 그쪽으로 달아났다드냐? 그걸 알고 쫓아갔단 말이지?" "아닙니다, 약초도 캘 겸해서 간다고 했습니다." "약초라?... 으흠... 그리고 또?" "거기 사는 친구도 만난다고..." "비뢰동에 친구라?... 흐흠....." 음소당은 거기서 질문을 멈추고 깊이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너무 터무니 없는 소리다. 아미파의 소굴 비뢰동에 친구를 찾아가다니, 천부당만부당한 말씀 아닌가? '이것들이 무슨 꿍궁이짓을 저지르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영남이란 년을 뒤쫓는다는 것도 약초 를 캔다는 것도 말짱 둘러대는 수작이야. 도대체 거기는 뭘 찾아 먹으러 갔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음소당의 눈길이 문득 당채진의 앞가슴에 가서 딱 멎었다. '이것 봐라? 요 어린 년이....." 나이 기껏해야 열댓밖에 안 되는 당채진, 두 젖무덤이 봉긋하니 솟아나오고 양미간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데다, 사내놈을 녹일듯한 추파가 넘실거린다. 양볼 가득히 발그스레하게 피어오른 홍조(紅潮)는 결코 수줍음타는 소녀의 것이 아니라, 남자를 겪어본 계집의 그것이었다. 기가 막히 게도 이 어린 계집아이는 이미 처녀가 아닌 게 틀림없다. 음소당은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요년! 바른대로 실토하지 못할까? 내 벌써 다 알고 있는 데도 앙큼스럽게 거짓말을 나부랑대다 니!" "무슨 말씀을 저는....." "그래도 시치미 뗄 게냐? 어디 호되게 혼 좀 나봐야 바른 말을 하겠구나! 이년, 앙큼스러운 년 같으니." "아이구, 사부님 잘못했어요! 바른 대로 말씀드릴게요." 음소당이 엄포를 때리자, 당채진은 그만 혼비백산을 해 가지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교활하 고 앙큼스런 계집이기는 하지만 역시 어리디어린 철부지라, 스승의 매는 무서운 것이다. 당채진은 울음 섞어가며 그동안 스승 몰래 손능파가 저질렀던 짓을 모조리 불었다. 언제 어디서 한가라는 젊은 사내놈을 끌어다가 동굴 속에 감추어놓고 그짓을 벌였는지. 또 한 놈 가지고도 성 이 안 차서 비뢰동에 사는 어떤 도동한테 눈독을 들이고 간계를 꾸며 낚아채 오기는 했는데 그때 마침 사부님이 돌아오셨으므로 잠깐 당황한 바람에 도로 도망쳐 버렸다는 말까지 했다. "요 발칙한 년들이 어딜 감히 내 동부에서 그 따위 짓을 저지르다니!... 그래, 그 한가란 놈은 지 금 어디 숨었느냐?" "지금은 없습니다." "없다니. 그놈도 달아났단 말이냐?" "아닙니다. 사부님께서 다시 외유를 나가신 뒤, 손사형은 그래도 그 비뢰동의 도동을 못 잊어서 또 잡으러 갔습니다. 손사형이 동굴을 비우자, 그 한가란 놈은 저한데 욕심을 품고... 그만 저를 강제로....." "흐흠, 너도 그짓을 당했단 말이지?" "네... 강제로." "허튼 수작, 앙큼 떨지 마라!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다음엔 어찌 됐느냐?" "한가란 놈은 제 몸을 버려놓고 또 욕심이 모자랐는지 이번에는 영남언니한테 덮쳐들었어요. 그 러다가 언니의 칼에 두 토막이 나서 죽었어요. 그 놈을 죽여놓고 언니는 손사형이 돌아와서 자기 를 그냥두지 않을 걸 알고 그 길로 도망쳤어요. 손사형은 돌아와서 이 일을 알고 뒤쫓았지만 허 탕이었죠. 또 그러고 보니 사내없이는 하루도 못 견디는 성미라 비뢰동에 사는 그 도동이 더욱 간절해진 모양이었어요. 그래서 엊그제는 친구 시용고까지 불러다가 함께 비뢰동으로 날아갔어요. 한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 "괘씸한 것들, 감히 사부인 나를 속이고 그 따위 짓들을 벌여? 요년, 너도 한패거리지. 어디 능 파란 년이 돌아오거든 두고 보자!" "아이구 사부님, 저는 억울합니다. 저야 강제로 당했는데....." "시끄럽다, 잔말 마랏! 네년 속을 내 모를 줄 아느냐? 여우 같은것!" "사부님....." 한바탕 어린 것을 꾸짖고 나니 음소당은 그만 허탈해졌다. 손능파가 이틀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 는 것은 불길한 징조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예감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분명 손능파는 이번 길에 거기서 아미측 고수한테 걸린 게 틀림없다. 어쩌면 적의 손에 이미 목 숨을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비록 스승인 자기를 속이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른 행위야 괘씸하 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사제지간의 정이 들 대로 든 제자였다. 더구나 재질도 뛰어나서 장차 의발(衣鉢)을 전수할 요량으로 심혈 기울여서 키운 녀석을 잃었다 면 그 더욱 안타까운 노릇이 아닌가? '아미파 놈들, 사람을 너무 깔보는구나. 정파가 아니면 아무나 마구 죽이고 다치게 하다니!' 그녀의 뇌리에는 또다시 운변 옛 거처에서 <철사미> 오수 일행한테 죽음을 당한 두 제자의 모 습이 떠올랐다. 게다가 여기서도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던 손능파마저 잃었을지도 모른다니,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천만다행으로 손능파가 죽지 않고 살아온다면, 그 때에나 가서 천천히 복수를 도모할 수 있겠지 만 만약 적의 손아귀에 희생당했다면 이대로 넘긴대서야 어디 음소당의 체면이 서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적의 세력은 너무도 엄청나서 뜻대로 복수가 이루어질지 모를 일이다. 생각이 예까지 미치자, 그녀는 우선 시용고부터 찾아가서 손능파의 생사를 확인한 다음 복수 계 획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즉시 당채진을 남겨둔 채 조화애의 동부를 봉쇄해 놓고서 고파령(姑婆嶺)으로 직행했다. 음소당이 시용고의 동굴어구에 당도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파공음이 날카롭게 울리더 니 청색도 백색도 아닌 광채 두 줄기가 유성처럼 하늘을 가르고 곧장 동굴 속으로 뚫고 들어갔 다. '아니, 저것은.....?" 지금은 비록 길을 잘못 들어 사마외도(邪魔外道)에 빠진 몸이나 그래도 음소당은 곤륜 정파 출 신이다. 악한 짓을 숱하게 저지르고는 있어도 각대 문파의 정사(正邪)를 분별할 만한 안목도 제법 갖추고 있다. 그녀는 첫눈에 방금 그 광채가 화산파의 고수임을 알아차렸다. '이상한 일이다. 시용고는 분명 웅혈아(熊血兒)에게 시집간 몸일 터인데, 어쩌자고 외간 남자와 밀통을 한단 말인가? 그 무서운 장령자 사도(師徒) 두 사람의 눈을 속여가며 사내를 끌어들이는 짓만도 뭣한데, 그 색마가 화산파의 출신이니, 일은 크게 터진 셈이다. 장령자는 나하고 교분도 자못 두터운 사이다. 저 시용고가 제 몸단속을 못한 것도 어쩌면 손능파란 년의 꼬임수에 넘어가 저질러진 일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면 내 처지가 난처하게 된다. 또 화산파의 사남계(史南溪) 는 내 오빠이자 애인인 적성자(赤城子)를 해쳐서 외팔이로 만든 원수가 아니냐? 만약 그놈과 여 기서 맞닥뜨렸다가는 좋은 꼴을 볼 리가 만무하다. 이제 방금 들어간 검광 가운데 하나는 분명 사남계의 것이었어... 자, 어떻게 할까? 시용고를 만나기는 해야 할 텐데....' 음소당이 결심을 못 내리고 한동안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 동굴 안에서 왁자지껄 남녀의 웃음소 리가 뒤섞여 들려나왔다. 음소당은 재빨리 동부어귀 후미진 곳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러나 완전히 은신하기도 전에 상대방은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동굴 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여자 두 사람, 남자가 셋이었다. 여자는 동부의 주인 시용고와 마 교(魔敎) 문하에서 이름난 <구혼차녀(勾魂侘女)> 이사고(李四姑) 그리고 남정네들은 어처구니없 게도 화산파의 애물덩어리, 사남계 본인과 <음양염자(陰陽殮子)> 오봉(吳鳳), <토아신(兎兒神)> 예균(倪均)이었다. 제일 먼저 그녀를 알아본 시용고가 황급히 다가와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뒤따라 나머지 사람들 도 그녀의 명성을 익히 아는 터라 제각기 문안을 했다. 음소당은 사남계와 마주 대하고 보니 속에서 불덩어리가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사남계 자신은 그녀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능글맞게 빙글거리면서 은근한 수작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러 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격으로 음소당으로서도 발작을 일으킬 처지가 될 수 없다. 그녀는 하릴없이 일행의 등 뒤쪽을 두리번거렸다. 기대했던 손능파의 모습은 결국 보이지 않았 다. 역시 제자의 신상에 불길한 일이 닥쳤음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시용고를 향하여 돌아섰다. "혹시 내 제자 능파를 보지 못하셨소? 함께 나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음선배님, 자세한 말씀은 안에 드셔서 드리지요. 자, 이리로....." 시용고는 공손히 동굴 안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이쯤 되고 보니 음소당도 더 이상 거절할 이유 가 없는지라 일행 뒤를 따라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정하고 앉자마자, 시용고는 눈물까지 글썽거려 가면서 손능파가 어떻게 비뢰동을 습격하 게 되었는지, 또 누구와 싸우다가 끝내 참혹한 죽음을 당했는지 그 일말의 사연을 자초지종 말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과 이사고도 눈치빠르게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손능파처럼 처참 한 꼴을 당할 뻔했노라고 덧붙였다. 시용고는 비뢰동의 포위망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서 도망쳐 오던 도중 <구혼차녀> 이사고가 전 부터 절친하게 사귀어 오던 옛 벗 <음양염자> 오봉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오봉으로부터 복수 전에 한팔을 빌어주겠노라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세 남녀는 이야기 끝에 독룡존자(毒龍尊者)의 사제 사남계가 근년에 들어서 의지할 데 없는 떠 돌이 신세가 되어 자기 나름대로 문파를 세울 궁리를 모색하던 중 우연히 막역지우(莫逆之友) 열 화조사(烈火祖師)와 합류하게 되었고, 또 열화조사의 권유를 받아 화산파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주 고받았다. 열화조사는 사남계를 자기쪽 문파에 끌어들임으로써 화산파의 세력을 강화하였고, 사남계는 또 화산파에 가입함으로써 배후에 막강한 힘을 등에 업고 더욱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날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남계라면 이사고와도 구면인 사이였다. 만난 지는 몇해 좋이 흘렀으나 두 남녀간에는 애당초 서로 잊어버릴 수 없는 끈적끈적한 사연으로 맺어져 있었던 터였다. 이사고는 그 즉시 오봉에게 사남계를 찾아 데려와 달라고 요청했다. 사남계가 와준다면 또 그를 연줄로 해서 몇몇 고수를 끌 어들여 아미파에 대한 복수전도 한결 수월해지리라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오봉이 떠난 지 며칠도 안 되어 과연 사남계를 데리고 돌아왔다. 사남계는 본래부터 여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색중아귀(色中餓鬼)인 데다 채음보양지술(採陰補陽之術)의 명수인지라 회대의 탕 녀 이사고가 찾는다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오봉을 따라왔던 것이다. 사남계와 이사고 두 남녀가 만나자마자 아교처럼 어우러져 붙어 회포를 풀었음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이사고는 자기 혼자서만 그짓을 즐기기가 겸연쩍었다. 더구나 한 몸으로 사남계와 오봉 두 사내 를 번갈아 상대하자니 그 노릇도 벅차는지라, 시용고마저 그 판에 끌어넣었다. 그래서 짝을 맞춘 두 계집, 두 사내는 번갈아 상대를 바꾸어 가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탕하 게 열락(悅樂)에 빠졌다. 몇 날 며칠을 좋이 흐드러진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끝에 이윽고 네 남 녀가 비로소 아미파 복수전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시용고에게서 전후 사정을 모두 듣고 난 사남계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자신의 의견 을 꺼내놓았다. "아미파 허실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추측해 보면 대강 이럴 듯싶소. 현재 아미산에는 몇몇 애송이들만 지키고 있다고 하나, 그 앞쪽 응벽애 정상에는 장미진인의 봉 쇄망이 펼쳐져 있어서 쉽사리 공격해 들어갈 수 없을 거요. 만약 시선고 말씀대로 전후동(前後洞) 이 맞뚫려 있는 게 사실이라면 제깐놈의 강아지 새끼들이 아무리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상 대는 못될 것이오. 그 길을 택합시다. 복수는 둘째치고라도 그 동부 안에는 장미진인이 감추어 놓 은 영약과 비보가 숱하게 남아 있다고 하오. 더구나 구화산에서 옮겨 심은 육지도 있다는 거요. 우리가 만약 뚫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복수는 복수대로 할 것이고, 또 그 많은 비보들을 손에 넣 어 우리들의 도력(道力) 증진에 큰 도움을 받게 될 테니, 그 또한 기막힌 일이 아니겠소? 일전에 소문을 듣건대 아미파는 중양절(重陽節)을 전후해서 응벽애 태원동에 남녀노소 선후배 동문들이 모두 모여 개산대회(開山大會)를 연다고 하오. 그 때가 되면 아미파의 실력 있는 고수들이 구름처 럼 몰려들 것은 뻔한 노릇이고, 우리가 쳐들어 가봤자 계란으로 바윗돌 치는 격이 되고 말 거요. 그런 만큼 공격기회는 오직 지금, 아미파의 원로 고수들이 동해(東海)에서 약초를 채취하느라 신 경쓰지 못하고 이쪽을 지원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쳐들어가야 하는 거요. 다만 우리편 인원이 모 자라는 게 흠이오. 현재 응벽애를 지키고 있는 어린 연놈들은 도력이야 별것 아니지만 그들이 지 닌 비검 몇 자루는 위력이 보통 아니오. 지난번 손능파가 낭패를 당한 것도 그 검을 염두에 두지 않고 경거망동하다가 참상을 면치 못한 거요. 내가 몸담고 있는 화산파의 열화도형과 그 사제 < 토아신> 예균은 현재 도천열화선진(都天烈火仙陣)을 단련해 내었소. 그 진법은 위력이 지독하기 비할 데 없어서 보통 사람은 물론, 제아무리 날고 기는 검선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 진 속에 들어 갔다 하는 날이면 그 즉시 풍뢰(風雷)에 가루가 되어버린단 말이오. 천하에 으뜸가는 선인(仙人) 이라도 그 풍뢰를 맞고서는 며칠 못 가 잿더미로 화해 날아간단 말이외다. 나는 그 두 사람을 참 전시키기로 결심했소. 햇병아리 몇몇을 상대하기에는 닭잡는 데 도끼쓰는 격일 테지만, 사실 그 도천열화선진을 만든 의도가 아미파를 상대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이번 기회에 먼저 그들의 근거 지를 깡그리 부숴 없애는 것도 미상불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하오." 시용고의 패거리가 기꺼이 찬동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남계는 그 즉시 고파령을 떠나 화산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당도하고 보니 열화조사는 무슨 일 때문에 북극 함공도(陷空島)로 가서 없고, 연말에나 돌아온다는 걸 알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 토아신> 예균과 도천열화선진의 진도가 모두 산중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남계는 예균을 붙잡고 협조를 요청했다. 예균은 당장에 승락했다. 그까짓 애송이들 몇 놈을 처 치하는 데 열화사형까지 동원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 진도와 법보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마당에 자기 혼자서리도 충분히 쓸 수 있다고 장담했다. 사실 말이지 예균은 그토록 떠벌일 만큼 실력도 대단하고 도천열화진의 운용에도 능숙했기 때문이다. 사남계는 예균에게서 응락을 받아낸 다음, 다시 편지 십여 통을 써서 사방으로 보냈다. 그래도 적의 중지(重地)를 모처럼 공격하는 마당에 다섯 명의 병력 가지곤 부족할 듯싶어 응원군을 청하 는 편지였다. 그리고 나서 자신은 예균과 함께 고파령으로 날아간 것이다. 그는 고파령 시용고의 동부에 당도하기 직전 그 예민한 눈길로 동부입구에 서성거리고 있던 음 소당을 알아보았다. 음소당의 정체를 알아챈 것과 동시에 그는 지난날 망창산 싸움에서 적성자를 격패시키고 외팔이로 만들어 쫓아보낸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만치 음소당 면전에 모습을 드러내기가 거북살스러워 사남계는 짐짓 모른 척하고 그대로 예균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그의 심중에는 또다시 음소당을 이용할 계략이 움트고 있었다. 사남계는 시용고와 이사고, 오봉에게 예균을 소개한 다음, 바깥에 음소당이 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음소당의 애인 적성자와 자기 사이에 벌어졌던 망창산 결투 얘기도 솔직히 털어 놓고, 모처럼 제발로 걸어 들어온 실력자를 이번 싸움에 끌어들일 방법이 없겠는가를 물었다. 다섯 남녀는 머리를 맞대고 쑥덕공론하던 끝에 계획을 정한 다음, 일제히 동굴 밖으로 나가서 음소당을 만났다. 그리고 시용고가 은근히 그녀를 동굴로 인도하고 손능파를 구실삼아 도움을 요 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음소당으로서도 제자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참전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가슴 속 깊이 앙금처럼 깔려 있는 사남계에 대한 원한을 지울 수가 없어 가타부타 결정을 못 내리고 건성으로 응대만 할 따름이었다. 그 대신 화제를 돌려 남 듣지 않게 시용고의 처신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 했다. "능파의 복수는 어차피 내 손으로 해결할 문제이니까, 굳이 여러분의 힘을 빌지 않아도 될 듯싶 어요. 그건 그렇고... 용고현질은 웅혈아와 혼인한 몸인데 공연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처신을 해서 야 어디 쓰겠소? 내가 보건대 여기 모이신 분들과는 여간 친숙한 사이가 아닌 듯하구만. 이러다 가 훗날 바깥분이나 그 사부 장령자의 추궁을 어찌 모면하시려오?" 그러나 진작부터 사남계를 비롯한 색마들의 사술에 깊숙이 맛들인 시용고는 그 남부끄러운 질책 을 당하고서도 후회하는 기색이 없다. 시용고는 억지 웃음을 띠며 한술 더 떴다. "웅혈아, 그 사람은 저를 잊어버린 지 오래예요. 이 쓸쓸하고 외진 산 구석에다 절 처박아 놓고 선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 걸요. 그 전에도 벌써 몇 번씩이나 그 사람 사부님의 문하제자로 들어 가려고 애원했지만 절더러 자질이 너무 낮아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예요. 제자가 되기는커녕 도리어 엄한 훈계만 실컷 듣고 이리로 쫓아보내기만 한 걸요. 음선고님, 저는 이번에 아미파놈들 한테 하마터면 죽을 뻔하다가 구사일생 도망쳐 살았어요. 가만 생각해 보니, 이 모두가 저한테 실 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었어요. 천만리 머나먼 곳에 있는 남편이 제 몸을 보호해 줄 수가 있나요? 어림도 없죠. 제 목숨은 제 힘으로 지킬 수밖에 또 어디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결심을 했어요. 저하고 이사고는 열화조사의 문하로 들어갈 겁니다. 함공도에서 열화조사님이 올라오시는 즉시 대례를 올리고 정식제자가 되어서 남편이나 그 사부한테 여보란 듯이 도력을 쌓아서 내 한 몸 지 켜내겠단 말입니다." 음소당은 이 말을 듣고 큰일났구나 싶었다. 이 젊은 계집은 사내 맛에 홀딱 빠져 후환이 두려우 니까 아예 남편을 배반하고 화산파의 문하로 투신할 생각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계집에게 좋은 결말이 나기는 진작부터 그른 일이다. 이 마당에 더 이상 타일러 봤자 헛수 고일 뿐이다. 음소당은 시용고의 처신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자작지화(自作之禍)는 맡아놓았을 터, 자꾸 말해야 제 혓바닥만 닳게 될 판이 아닌가? 그녀는 곰곰이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미파에 대한 복수전은 자기 체면과 직결된 문제다. 이제 여기 모인 이 색마들의 패거리가 공격을 한다고 치자. 그렇게 해가지고 성공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힘은 크게 덜게 된다. 만약 이 작자들이 공격에 실패하고 쫓겨온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자 신은 따로 협력자를 멀리 찾아서 복수계획을 꾸미면 되는 것이다. 공연스레 이 따위 잡년 잡놈들 의 덕택을 입었다는 공치사도 듣지 않고 말이다. 지금은 가만히 앉아서 싸움질 구경이나 하는 게 좋을 듯싶다. 손능파야 기왕에 죽은 놈, 언제 복 수를 하든지 때는 늦지 않다. 하물며 자신의 실력도 아미파를 상대하기에 충분치 못한 터인데, 굳 이 잡것들과 어울려서 일껏 자는 범 코털을 건드릴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음소당은 시용고의 간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내 못난 제자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으니 그녀석을 위해서 복수는 해주어야겠소만, 아미파의 세 력이 워낙 강성해서 나 혼자 힘으로는 도무지 성공할 듯싶지가 않아 훗날을 기약하려 했소. 한데 반갑게도 여러 도우께서 용고현질과 뜻을 합쳐 원수를 갚아주신다 하시고, 또 <도천열화대진>까 지 동원하신다니 이번 거사가 실패하리리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아요. 나야 도력에 한계가 있는 몸이라 여러분한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겠소? 오묘막측한 진법을 가지신 도우 여러분께 공연한 짐만 지워드릴 뿐이지. 또 내 근자에 새로운 법보 한 가지를 연성하고 있 는데 그것도 원수갚는 데 쓰기 위해서라오. 그 법보를 아직 완성하지 못한 차제에 공연히 나서기 보다는 오늘 이만 물러갔다가, 다음 기회에 제 미력한 재주나마 꼭 필요하다고 부르신다면 그때 다시 오리다." 그러자 <토아신> 예균이 팔뚝을 걷어붙이면서 가로막고 나섰다. "음선고의 그 말씀 정말 이상하구려. 우리들이 시용고 도우의 초청을 받고 온 뜻은 바로 음선고 님의 제자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걸 복수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의당 음선고님 이 주체가 되셔야 할 처지인데 어째서 몸을 사리시는 거요? 정말 이해 못하겠소?" "예균도우의 말씀이 맞아요. 선고님이 제자 원수를 갖는데 앞장서셔야죠." "법보를 따로 연성하지 않으시더라도 우리 힘만 합쳐도 꾸준히 응벽애의 하룻강아지들쯤은 요리 할 수 있습니다." "자아, 그러지 마시고 생각을 바꾸도록 하십쇼. 우리가 지금 누구 때문에 모였습니까?" 좌중의 요물들도 한 마디씩 거들어 음소당을 완곡하게 만류했다. 음소당은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 이 작자들의 속셈이야 어쨌든 간에 자기 제자 손능파의 원수 를 갚아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니 거기다 무슨 말로 이의를 달겠는가 말이다.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내키지 않는 응낙을 하고야 말았다. "좋습니다. 여러 도우분께서 제 못난 제자녀석을 위해 그리 애써 주신다니 저로서도 오로지 감 격할 따름입니다. 미력하나마 이번 싸움에 저도 참전하기로 하겠어요. 다만, 지금 제 수중에는 법 보 하나 변변한 걸 지니지 못했고, 또 산중에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으므로, 오늘은 이만 돌 아가기로 하고, 여러분이 날짜를 정해 알려주신다면 그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달려오겠습니다." 음소당은 사남계 패거리와 작별하고 고파령 동부를 나섰다. 조화애로 돌아가는 그녀의 마음은 착잡하기 짝이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남계의 언동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사남계, 저놈의 악도는 성깔이 불 같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도대체 어쩐 일로 그처럼 신중하고 은근하단 말이냐? 나한테 대하는 태도가 너무도 온화하고 다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들어온 소문이 허튼 것이었을까?... 아니면 과거에 적성자를 불구자로 만든 행위가 미안해서 나한테 사죄 하는 뜻으로 그러는지도 모르겠구나... 어차피 내 입으로 응낙했으니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자! 손능 파, 그 아이가 나를 얼마나 따르고 하늘같이 섬겨왔느냐? 그 정분을 생각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우선 원수부터 갚아주고 보자꾸나!' 결심이 서자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홀가분하게 조화애 동부를 향해 날아갔다. 음소당은 본디 곤륜파 문인 중에서도 촉망받는 실력자였다. 그저 한때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적 성자와 밀통을 한 것이 발각되어 사문에서 쫓겨나 외톨이 신세가 된 것이다. 그녀는 내친 김에 적성자와 또 하나의 문파를 새로 창립해서 자기들을 축출한 곤륜파 문중에 여보란 듯이 나설 계 획을 세웠다. 그러나 몇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그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근년에 들어서는 적성자가 불구의 몸이 되고 일껏 거둔 제자들 또한 차례차례 죽음을 당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 다. 그녀는 실의에 빠졌다. 사실 그쯤해서 음소당이 자기 주제를 깨닫고 물러서기만 했더라면 평소 저지른 음행(淫行) 말고 는 그리 큰 악업을 쌓지 않은 그녀로서 천벌을 받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 도 사남계와 시용고 따위의 색남 음녀들을 만나게 되어 아미산 공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만 것은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사남계는 분명 그녀에게 있어 원수나 마찬가지다. 그 원수와 함께 어울려 일을 꾸민다는 자체부 터 그른 짓인 줄 뻔히 알았으면서도 그 패거리에 휩쓸린 것은 음소당이 그 길밖에 걸어야 할 길 이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음흉한 사남계가 자신을 곱게 보아준 것도 흉중에 깊은 뜻을 감 추고 한 행위인 줄 그녀는 끝내 깨닫지 못하였다. 아미산 침공으로 말미암아 음소당은 악연(惡緣)을 뿌려놓게 되고, 그 결과 육신의 참화를 입고 명예가 찢겨나가는 만겁불복(萬劫不服)의 업화(業火)에 떨어질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모두 훗날의 이야기다. 한편 음소당을 떠나보낸 사남계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음소당은 대단한 고수다. 이런 인물을 패거리에 끌어넣게 되다니. 실로 생각 밖의 수확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내키지 않는 마음 으로 아미산 공격대의 참가를 수락한 것도 이미 꿰뚫어 알고 있다. 자기가 그녀의 애인 적성자를 병신으로 만들었다는 원한이 그녀 마음 속 깊이 잠재하고 있는 줄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굳이 조화애로 돌아가겠다고 우겼을 때, 동료들의 눈짓을 뿌리치고 곱게 돌려보내 주었던 것이다. 대어(大魚)를 낚으려면 낚싯줄을 무턱대고 당기기만 해서는 안 되는 법, 풀어줄 때와 당길 때가 따로 있는 것을 그는 숱한 계집들을 다루어보면서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 다. 껄끄러운 음소당이 떠나자 시용고는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어졌다. 제 집 안에 갓 잡은 생선처럼 싱싱한 사내들이 셋씩이나 있으니 얼마나 신바람나는 일이냐? 훗날 남편 웅혈아한테 발각당하지 않는다면 그 더욱 좋은 일이고, 만약에 탄로나더라도 무서울 게 없다. 화산파에 투신해서 그 세력을 방패막이로 삼는다면 제까짓 놈의 장령자가 온다 하기로 소니 자기 몸에 손가락 한 개 까딱도 못할 것이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웅혈아와 깨끗이 갈라져 서 독수공방 생과부 신세나 면하는 게 천만번 낫겠다. 음소당 그 멍청이는 뭐랬던가? 남편하고 장령자가 추궁하면 어찌 모면하겠느냐고? 화산파가 있 지! 열화조사의 실력이라면 웅혈아도 장령자도 무섭지 않으리라. 고파령 석굴 속은 뜨거운 열기와 교성으로 달아올랐다. 삼남 이녀, 이들 벌거숭이 다섯 색마 음 녀들은 가릴 것 없이 터놓고 마음 내키는 대로 상대를 바꾸어가면서 뒹굴고 또 엉겨붙었다. 사흘이 못되어 사남계가 초빙했던 인물들이 속속 고파령에 당도하였다. 화산파 문하의 <백령녀 (百靈女)> 주봉선(朱鳳仙), <귀영아(鬼影兒)> 소룡자(蕭龍子), <철배두타(鐵背頭陀)> 오록(伍綠) 은 물론이고, 지난날 북해(北海) 무정도(無定島)에서 함공노조의 문하제자로 있었던 <장비신마(長 臂神魔)> 정원규(鄭元規)까지 나타났다. 이 정원규란 자는 함공노조의 계율을 범하여 비검과 법보를 박탈당하고 능지처참의 극형을 받게 될 처지였는데, 그의 대사형 영위수(靈威搜)가 스승에게 극력 애원하여 죽음을 모면하고 또 대사 형이 스승 몰래 소식을 전하는 바람에 겨우 도망쳐 나간 반도(叛徒)였다. 정원규는 평소 스승의 규율이 지엄한 데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서 달아나더라도 조만간에 스 승 함공노조의 손길을 벗어나기 어려운 줄 아는 터라, 그 길로 백만산 적선동 <오독천왕(五毒天 王)> 열패다(列覇多)의 문하로 투신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도망칠 무렵 스승이 심혈을 기울 여 조제한 비장의 영단과 선약을 숱하게 훔쳐갔다. 그 덕분에 사제를 변호해 준 대사형 영위수는 스승의 노염을 사서 애꿎게도 삼 년 동안 면벽벌 궤의 형을 받았으나, 정원규 자신은 죄책감은커녕 남의 일처럼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독천왕> 열패다는 원래 남만족 출신이다. 그는 태어날 적부터 온몸에 비늘이 뒤덮이고 이빨 은 하나같이 늑대의 어금니를 닮아, 얼핏 보아서는 상어를 연상케 하는 괴물의 형상을 지녔다. 생 김새가 그런 만큼, 성격도 포악스럽고 닥치는 대로 온갖 악행이란 악행은 서슴없이 저지르면서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는 정원규가 자신의 휘하로 도망쳐 들어오자 이내 배짱이 맞았다. 그들 두 요물은 각대 문파 에서 제자들을 거두어 문호를 크게 빛내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적신사교(赤身邪敎)의 세력을 중 원 땅에 일으켜 세워볼 욕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첫 단계로 정원규에게 명령을 내려서 공동산(空洞山)에 적신교를 창립하게 하였다. 정 원규는 열패다의 분부대로 실천했다. 적신사교가 중원에 발붙일 거점을 확보한 것이었다. 정원규는 사남계와 같은 사파의 무리들과 교분을 맺었다. 특히 사남계와는 서로 극악무도로 보 나 음욕을 즐기기로 보나 누구한테 뒤지지 않을 만큼 의기가 상통했으므로 평소에도 밀접한 관계 를 유지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러한 판국에 그는 사남계로부터 아미산 공격대에 참가해 달라는 초청을 받은 것이다. 정원규 역시 아미산 응벽애 안에 숱한 미녀들과 보물이 그득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진 작부터 회가 동해 있었다. 더구나 천년 묵은 육지도 거기 있단 말을 들었으니 군침이 줄줄 흘러 나올 정도가 될 수밖에. 그는 사남계의 서찰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고파령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일당들과 약간 상의를 거쳐서 사남계를 아미산 공격대의 우두머리로 추대시켰다. 응벽애 공격을 총책임 맡은 사남계는 아직도 초빙한 지원 병력이 덜 도착하였으므로 닷새째 되 는 날 자정을 기해 아미후산 비뢰동을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가능한한 기습적으로 심장부 깊숙이 침투해서 한 방에 결정타를 먹이기로 하되, 만약 적의 대비 가 있어서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도천열화대진으로 응벽애 일대를 철통같이 포위해 놓고 위압적 인 강공책을 써서 적으로 하여금, 자진해서 육지와 보물을 받쳐들고 나와 항복하게 만들자는 것 이 작전의 개요였다. 만약 기습침투도 포위공격으로도 적이 굴복하지 않을 경우에는 응벽애의 전체를 강타해서 잿더 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최후의 방법까지도 세워놓았다. 사남계는 작전계획이 수립되자, 즉각 시용고를 조화애로 보냈다. 약속한 대로 음소당에게 출전하 기를 요구하는 내용의 서신을 띄운 것이다. 시용고가 출발한 다음, 그는 공격대 전원을 이끌고 고 파령 마루턱에 올라가 도천열화대진의 진법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신바람이 난 요물들은 저마 다 방위부서를 지정받고 연습에 들어갔다. 이 무시무시한 대진의 위력이 발동되는 날엔 응벽애는 송두리째 박살나고 말리라. 한편 시용고는 조화애에 당도해서 음소당을 만나 사남계의 서찰을 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 파령에 집결한 사마외도의 고수들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가를 침이 마르도록 설명 해 주었다. 그 실력(?)이란 게 아마 시용고에게 있어서는 무공이라기보다 차라리 계집을 주물러 녹여버리는 색술(色術)임에 틀림없으리라. 음소당도 시용고의 표정에서 그러한 것쯤은 능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련하게도 이 철딱서 니없는 계집은 색에 미쳐서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깨우쳐 주어도 발 정한 암캐를 진정시킬 도리가 없다. 음소당은 그저 속으로 측은하게만 여길 뿐,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시용고는 애가 탔다. 어서 돌아가기는 해야겠는데 음소당이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음소당이 아직도 가슴 속 깊이 사남계에 대한 원한을 감추고 있는 줄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어째서 음소당이 그 흐드러진 잔치판에 선뜻 끼어들기를 망설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용고는 온갖 말재주를 다 써서 음소당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썼다. 하도 성화를 부리니 음소당도 마침내 두 손 들고 말았다. "좋소. 그럼 사도우한테 가서 이렇게 말하시오. 앞으로 사나흘 이면 내 법보도 완성될 테니까 여 러분의 공격기일에 늦지 않게 고파령으로 가겠다고 말이오." 시용고는 재삼 날짜를 어기지 말도록 신신당부한 다음 음소당과 작별했다. 고파령에서 그리 멀 지 않은 곳에 다다를 무렵, 그녀는 자기 동부 앞쪽의 상공에 살기등등한 암적색(暗赤色) 광채가 그득 깔리고 수백 줄기나 되는 화선(火線)이 붉은 독사떼를 이룬 채 어지럽게 마구 날뛰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아, 사남계 일행들이 벌써 도천열화대진을 연습하기 시작했구하! 나도 빨리 가서 끼어들어야 지.....' 시용고는 검광을 재촉해서 속력을 높였다. 그런데 고파령에서 한 삼십여 리쯤 떨어진 지점을 통 과하면서 그녀는 색다른 인물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높다란 산봉우리 정상 위에 두 사 람이 마주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봉우리는 시용고 자신도 평소 눈여겨볼 정도로 기이하게 생긴 산이었다. 마치 석순(石筍)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처럼 아래쪽은 가늘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펑퍼짐하게 넓어지는 것이 주변에 숱한 연봉(連峰)을 압도하면서 허공으로 높다랗게 곧추서 있는 것이다. 산 위에는 드문드문 기암괴석과 교송(喬松)이 엉크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을 뿐, 사랑은커녕 새나 들짐승조차도 날아오르지 못할 정도로 깎아지른 사각(死角)을 이루었다. 산허리 위로는 일 년 사 시사철 안개구름이 둘러쳐서 그 자태를 온전히 드러내 보인 적도 없었다. 오늘처럼 청명한 날씨에 바람까지 사뭇 세차게 부는 날이라면 구름이 흩어질 만도 한데, 그것도 고작 정상의 윤곽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리는 게 전부였다. 이토록 강풍이 몰아치는 날씨라면 여간 하게 수행한 도력의 소유자라도 정상에 올라가 얼씬거린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인데 지금 두 사람씩이나 그곳에 태연스럽게 마주앉아 있다면 이들의 내력은 필경 심상치 않음이 분명하다. 시용고는 잔뜩 긴장했다. 이들은 무슨 일로 저 봉우리에 올라가 있는가? 지금 그들이 굽어보는 아래쪽 영마루에선 자기네 패거리가 한창 진법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을 터, 그 기밀을 탐지하러 온 첩자들인지도 혹 모른다. 그렇다면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방향을 바꾸어 그 봉우리 쪽으로 날아갔다. 이전에 약초를 캐려고 두어 차례 가본 기억 도 있거니와 또 산허리 중턱까지 곧바로 통하는 동굴 하나를 무심결에 찾아낸 적도 있으므로, 그 녀에게는 전혀 낯선 길은 아니었다. 동굴 속은 아주 깊고도 굴곡이 심한 데다 그 밑은 끝도 모를 깊은 연못이 자리잡고 있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동굴이라, 시용고는 한 번 들어간 이후 다시 는 찾지 않았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바깥쪽으로는 상대방의 눈에 뜨이기 쉬우므로 정상까지 접근하려 면 이 굴 속을 통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아미파의 적수들이라면 기꺼이 자기 들 패거리에 끌어들이고, 그 반대라면 상황을 보아서 임기응변으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기 혼자 실력 가지고 이들을 처치할 수만 있다면 더 좋겠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서 고파령의 패거리를 불러다가 요리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시용고는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우회하면서 속도를 늦추었다. 봉우리는 고파령에서 정면으로 서 남방에 있다. 그러므로 남쪽 방향에서 접근하는 것이 빠르고 가깝지만 상대방의 이목을 고파령 쪽으로 집중시키게 될까 보아 일부러 동쪽 길로 우회한 것이다. 봉우리에서 약 삼사 리쯤 되는 곳까지 날아가자 이내 그녀는 안개 구름 속으로 들어섰다. 이 정 도 짙은 안개 층이라면 정상 위의 두 사람도 자신을 알아볼 수 없으리라. 설혹 눈치를 챘더라도 날짐승이나 지나가는 과객쯤으로 여길 것이다. 구름층 속에서 그녀는 검광의 속도를 더욱 낮추고 진로를 이리 저리 갈지(之)자로 꺾어 돌면서 산록(山麓)에 바짝 붙어 날았다. 그리고 마침내 산 밑 눈익은 길을 찾아 내려섰다. 운좋게도 산허 리에는 띠를 두르듯 자욱한 구름층으로 휩싸여 있어, 위에서 내려다본다 하더라도 온통 흰구름만 한가롭게 보일 뿐이리라. 시용고는 잽싼 동작으로 전에 보아 두었던 동굴을 찾았다. 산하고 어둠컴컴한 굴 속에 뛰어들자 마자 칼빛 그림자 속에서 무엇인가 '휙!'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를 냈다. "앗!"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수레바퀴만한 시커먼 물체가 얼굴 정면으로 덮쳐들었다. 그 녀는 엉겁결에 반사적로 비검을 휘둘러쳤다. 그러나 칼질은 허탕, 어느 새 그 시커먼 놈은 시용고 의 몸을 스치고 전광석화처럼 동굴 바깥으로 빠져 날아갔다. 그녀는 등줄기가 후줄근하게 젖었다. 하마터면 그 고운 얼굴이 쇠갈고리처럼 억센 괴물의 발톱에 묵사발이 될 뻔했던 것이다. '이놈의 박쥐새끼,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나! 어디 봐라, 나중에 다시 와서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야 말 테다.' 시용고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산이 깊고 물이 깊으면 으레 용이나 구렁이 같은 괴물이 살게 마 련이다. 이 동굴 속에도 오래 해묵은 박쥐가 요정으로 변해서, 검광도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에게 덤벼들만한 놈이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용고는 왼쪽 귓부리가 따끔따끔 아픈 것을 느꼈다. 하지만 위쪽 정상에 올라갈 일이 우선 다 급한지라 꾹 참고 길을 더듬어 나아갔다. 조금 다친 것이 대수로운 게 아니라 낯선 인물들의 정 체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굴 속은 갈수록 암흑천지였다. 전에 왔을 때보다도 더욱 어두워 보였다. 길조차도 기억에 뚜렷하 지 않다. 음산한 습기, 구역질이 날 만큼 메슥거리는 곰팡이 썩는 냄새가 전신을 휩쌌다. 그녀는 한 손으로 코를 쥐어막고 더듬더듬 걸어나아갔다. 검광은 아무리 현공(玄功)을 운기해도 고작 삼 척 남짓 둘레밖에 밝혀주지 않는다. 길은 소라껍질처럼 이리 맴돌고 저리 맴돌아 끝도 모르게 쉴새없이 꺾여지는데, 그녀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마를 하는 것만 같다. 위로 오르는 길은 끝난 데가 없이 암흑 속에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칼빛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나서 드디어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전에 와 있던 길임을 확인 했다. 어둡기는 지난 번보다 더 심했지만 틀림없이 제 길로 찾아든 것이다. '그렇다. 여기서 십여 장 거리만 더 들어가면 바위 틈서리로 갈라진 창이 있을 게다. 그것이 바 깥으로 통하는 길이.....!' 이윽고 그녀의 눈앞에 희부옇게나마 광명이 비춰들기 시작했다. '저기다!' 시용고는 어서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고만 싶어 그 즉시 검광에 몸을 싣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 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었다. 딱! 으지끈! 골통이 뻐개져 나가는 듯 무지무지한 아픔에 그녀는 온몸의 기력이 몽땅 빠지고 넋이 날아가 버 렸다. "으앗!" 두 눈에서 불똥이 사방으로 튕겨나가더니 이내 깜깜절벽이 된다. '와수수!' 돌멩이나 소낙비 쏟 아지듯 전신을 마구 두드려 패는 데도 그녀는 그 아픔마저도 잊었다. 손아귀에 잡고 있던 비검이 '휙!' 하고 빠져나간다. 무슨 거대한 흡인력에 빨려가듯 거세게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이다. 외마디 소리를 지른 시용고, 거의 까무라친 상태에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일껏 빠져나왔던 암 흑의 나락으로 바윗덩어리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풍덩! 그녀의 몸뚱이는 마침내 동굴 밑바닥 연못 속으로 떨어졌다. '쏴아!' 하는 물보라 소리가 동굴 벽 사면을 때리고는 메아리쳐 울렸다. 그 다음 순간 물속에 잠겨들었던 몸뚱이가 물의 반탄력을 받고서 되솟구쳐 둥실 떠오른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정신이 번쩍 난 시용고, 눈을 뜨자마 자 위로부터 불화살처럼 내리꽂혀 오는 자기 비검을 발견했다. "이얍!" 경황중에서도 두 번 생각할 여지가 없다. 황급히 진기를 한 모금 운기하고 야무진 기합소리와 함께 검광을 끌어당겨 올라타더니 재차 상공으로 솟구쳤다. 코에서 역겨운 썩은내가 가실 줄 모 른다. 흠뻑 젖은 옷섶을 들추고 호신법보를 끄집어냈다. 전신에서 악취가 풍기고 온통 미끈거리는 것이 아마도 방금 빠진 연못은 썩은 물이 고여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다. 입 속의 오물을 황급히 뱉아내면서 허겁지겁 호신 주(護身呪)를 외우고 머리 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골통만 뻐개질 듯 지끈지 끈 쑤셔댈 뿐, 다른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거 참 괴이한 노릇이다. 귀신도 없고 요괴가 장난질을 친 것도 아닌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 인가? 적이 암습을 가했다면 분명 후속공격이 뒤따랐어야 할 텐데, 그것도 없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구나.' 시용고는 마음을 독하게 다잡고 재차 바위 틈서리 빛줄기가 비치는 곳까지 날아 올라갔다. '이런!' 천연의 바위 창문 주변을 살펴보고 나서 그녀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이런 멍청한 것 같으니, 이걸 못 보고 박치기를 했구나!' 어둠 속에서 광선 한 줄기가 희미하게 비쳐드는 그 바로 아래 엄청난 바윗덩이 하나가 돌출해 있는 걸 미처 못 보고 사람과 칼이 한꺼번에 부딪쳐 간 것이다. 날아오르는 속도가 암흑의 지옥 을 벗어나려는 욕심에 한껏 오른 만큼 그 강한 기세로 그 무지막대한 바윗덩이를 받아버렸으니 이 노릇을 어쩌란 말인가? 천만 다행으로 비검이 한 순간 앞장서서 바위를 쪼개내어 충격을 덜었 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골통이 묵사발처럼 박살날 뻔했던 것이다. 일장 가량이나 됨직한 그 바 윗덩어리도 검광에 쪼개져 제 형태를 잃고 형편없게 부서졌다. '이 멍텅구리 같은 것, 어쩌자고 허둥대다가 이 꼬락서니를 한단 말이냐? 비검만 없었더라면 누 구 원망도 못하고 깨끗이 비명횡사를 당할 뻔하지 않았어? 에이구, 이 냄새 좀 봐!' 비명횡사는 모면했으나 찐득거리는 전신에서 지독한 냄새가 역겹게 풍겨나오는 거야 어쩔 도리 가 없다. 그녀는 맥이 탁 풀렸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동부로 가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싶지만 '어째서 이런 낭패를 당했느 냐?'는 패거리들의 물음에 답변하기도 부끄럽거니와 그 사이에 정상 위의 두 괴한이 떠나버릴지 도 모른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적이든 아군이든 이렇게 추접스러운 꼴로 사람 앞에 나설 수 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올라갈까, 아니면 그냥 돌아갈까?' 시용고는 결국 그 길로 계속 오르기로 작정했다. 이들의 정면에 나서지는 말고 어느 정도 근접 한 상태에서 몸을 숨긴 채 상대방의 정체와 의도를 탐지한 다음 슬그머니 그 자리를 뜨기로 한 것이다. 마음이 정해지자 그녀는 젖은 옷을 벗어서 흠씬 쥐어 짜가지고 급한 대로 물기를 걷어낸 뒤 다 시 걸쳐 입었다. 그리고 아직껏 후줄근한 얼굴을 쓰다듬어 내렸다. 아직도 골통이 뻐개져 나가는 듯한 통증이 저릿저릿하게 느껴진다. 손바닥을 검광에 비춰보았더니 온통 피투성이다. 목숨이 위 태로울만큼 중상은 아니지만 머리가 터진 것은 틀림없었다. 자기 피를 보고 있노라니 속에서 부글부글 울화가 끓어올랐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이래 벌써 몇 차례나 이런 고초를 당했는가 말이다.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한 생각까지 겹쳐 한꺼번에 머리 끝으로 치밀었다. '이게 모두 저 산봉우리 위에 앉아 있는 놈들 때문이야. 저것들만 아니었다면 내가 어째 이런 꼬락서니로 낭패를 당했겠는가 말이다. 아아, 이판시판 어찌 됐든 간에 저것들의 정체는 기어코 밝혀내고야 말 거야! 도대체 적이냐, 우군이냐? 어디 보자!' 사람이 한번 미로에 잘못 발을 디뎌 놓으면 죽을 때까지 가서야 멈추는 법이다. 중도에 뒤를 돌 아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알 만도 할 텐데, 그런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시용고, 그녀도 예외없이 전자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비록 이단의 출신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 는 다년간 수련을 쌓아 공력의 기초가 자못 튼튼하게 쌓여진 몸이다. 결코 약자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생각하는 면은 턱없이 부족하다. 어째서 박쥐 같은 미물이 비행절적(飛行絶跡)의 검선을 감히 건드릴 수가 있었는지, 또 아무리 다급하게 서둘렀다고는 하지만 어째서 바윗덩어리가 느닷없이 돌출해서 검선의 머리통을 터뜨리 고 진수렁 연못 속에다 밀어뜨렸으며 목숨과도 같은 비검마저 손아귀를 벗어나게 만들었는지 그 까닭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언의 경고가 주는 의미를 전혀 모른다. 시용고는 조심스레 계속 위로 상승했다. 이제껏 당한 낭패를 염두에 두고 더 이상 방심은 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고집스럽게 정체불명의 목표를 향해서 발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녀가 조심 스럽게 행동한 탓인지 그 다음부터는 길도 순조로왔고 동굴 속의 어둠도 먼저처럼 유별나게 캄캄 한 것 같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녀는 천연의 바위 창문 어구, 정상에서 일이 장쯤 되는 거리까지 바짝 접근했다. 거 기서부터는 상대방한테 들킬까 보아 비검을 거두어들이고 두 발 두 손으로 바위 모서리를 잡고 버티면서 기어 올라갔다. 마침내 그녀는 동굴의 천창, 그 입구에 다다랐다. 머리를 빠꼼히 내밀고 바깥을 살펴보니, 과연 그리 멀지 않은 곳 펑퍼짐한 바위 위에 두 남자가 마주앉아서 느긋한 표정으로 바둑을 두고 있 다. 그 곁에는 검고 큼지막한 호로병 한 개가 놓여 있다. 그 두 사람은 하나같이 시용고의 눈앞에 측면으로 마주앉아 있었다. 이들을 세심히 바라보던 시 용고는 그만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휘둥그래졌다. 왼쪽의 사내는 그녀가 평생 처음 보는 미청년이었던 것이다. 바른쪽의 인물은 세수대야만큼이나 커다란 면상, 그것도 시커먼 낯판을 가진 꼽추였다. 하늘로 쳐들린 들창 코 위에 움푹 패인 두 눈 이 부리부리하게 신광을 번뜩이고 있는데, 얼굴과 볼따구니에는 세 치 남짓 무성한 구레나룻 수 염으로 뒤덮였고, 까치 둥지처럼 더부룩하게 헝크러진 머리카락에 잇닿아 살갗이라곤 좀처럼 보 기가 드물다. 그래도 형색이나마 도사의 상투를 틀어올리기는 했는데 뒤통수 아래로 흘러내린 봉 두난발은 양 어깨까지 치렁치렁 뒤덮고 있었다. 그 큼지막한 입, 둥그스럼하게 늘어선 양 귓부리 만 그나마 붉은 혈색을 띠고 윤기가 감도는 것이 자못 아름답게 보일 따름이다. 몸에 걸친 옷은 신꽃처럼 시뻘건 도복인데 자락이 몹시 짧아서 새하얀 맨발에 짚신 걸친 두 다 리를 한자 반 가웃이나 드러내었다. 인상과는 어울리지도 않게 백옥처럼 고운 손에 귀티가 넘치 지만 그 팔은 길고도 우람 하기 짝이 없고, 손가락마다 대여섯 치나 됨직한 손톱이 길게 뻗어 반 들반들 깔끔한 윤기를 빛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추(美醜)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균형 이 잡히지 않은 인상이 바로 그 꼽추의 외모였다. 꼽추는 바야흐로 왼손에 바둑돌을 쥔 채 연방 신음성을 내면서 또 한손으로는 검정 호로병을 끌 어당겨 입 속에 술을 부어넣고 있다. 꼽추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앉은키는 맞은편 청년보다도 머 리 두 개 높이나 커 보였다. 만약에 꾸부정한 허리라도 펴는 날이면 키가 두 배는 차이가 날 정 도라, 실로 보기 드문 기괴망칙스런 몸집이었던 것이다. 시용고의 눈길은 다시 미청년에게로 옮겨졌다. 훤칠하고도 시원스런 이마는 양쪽 관자노리 머리 속으로 퍼져 들어가고, 별처럼 빛나는 두 눈에 옥돌과도 같이 내리뻗은 콧마루며, 주단(朱丹)처럼 붉은 입술이 웃음 속에 벌어질 때마다 조개껍질을 늘어놓은 듯 가지런하게 박힌 치열(齒列)이 곱 기만 하다. 원숭이 등처럼 훤칠한 등판에 허리는 날렵하게도 잘룩하다. 그 시원스럽고 영준한 풍채를 보고 있노라니, 사용고는 마치 그 청년의 정인(情人)이나 된 듯, 사랑을 나누고 싶은 충동에 미칠 지경이 됐다. 마주앉은 꼽추의 기괴한 생김새와 비교하여 보면 더구나 그 일신의 선풍도골이 돋보여서 시용고는 넋이 빠지도록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이들이 대좌하고 있는 산봉우리는 극히 높고도 우뚝 솟았는지라 잡목 한 그루 자랄 여지도 없이 온통 기암괴석의 바위투성이로 이루어졌다. 그저 드문드문 바위 틈새에 뿌리박은 왜송(矮松) 몇 그루만이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기괴한 모습으로 줄기와 가지가 비틀린 채 근근히 자라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뿌리가 재대로 깊숙이 박히지 못하여 바위 표면을 뱀 기어간 자국처럼 이리저리 감돌고 뒤얽혀 묘한 무늬를 이루고 있다. 비바람에 시달리느라 그랬는지, 솔잎은 강철 바늘처럼 억세고 날카로운 데다, 쇠기죽과도 같이 굳은 비늘껍질로 몸을 감싼 줄기가 저마다 당장에라도 땅을 박차고 승천하려는 신룡(神龍)처럼 도도한 자세를 드리내고 있는 것이다. 꼽추와 미청년이 바둑을 두고 있는 자리 뒤로 그 봉우리 정상에 오직 한 그루 고고한 자태를 지 닌 고송(古松)이 일 장 가웃 높이로 우뚝 솟은 채 너르디너른 나무 그늘을 펼쳐덮었다. 바둑판은 천연석에 종횡으로 선을 그어 새긴 것이고, 검정빛 바리때 두 개에 직경 한 치 남짓한 철제 바둑돌이 그득 담겼다. 돌의 빛깔은 흑백의 구분도 없이 검정빛 일색인데, 바둑판에 놓여질 때마다 '쨍그렁, 쨍그렁!' 기묘한 소리를 낸다. 그 바둑돌 때리는 소리는 산바람 솔숲이 파도치는 소리와 어우러져서 맑고도 상쾌한 조화를 이루고 듣는이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시용고가 머리통을 내밀고 있는 굴 입구도 빽빽하게 들어찬 솔잎 가지 뒤에 가리워져 있었다. 굴 곁에는 또 하나 높이 이 장 가웃은 실히 됨직한 괴석이 웅크리고 있는데, 그 표면에 사람의 주먹 한 개 들어갈 만한 구멍이 반대편으로 맞뚫려 사람이 그 바위 위에 서서 들여다보면 곧바로 반석 위에 앉은 두 남자의 몸가짐을 엿볼 수가 있었다. 물론 바깥쪽 사람은 이편을 볼 도리가 없 다. 절호의 은신처를 찾아낸 시용고는 그 즉시 굴 밖으로 기어나와 고양이처럼 호흡을 멈추고 살금 살금 바위 뒤로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구멍을 통하여 두 사람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가 몸을 곧추세우자마자 미청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배는 이제 스승님의 분부를 받들어서 숭악(崇岳)으로 가야만 합니다. 노선배님의 바둑 솜씨는 천하 무적이라 도무지 상대할 수가 없군요. 이것 좀 보십쇼. 제가 또 반 집이나 졌지 않습니까? 여기서 더 두어봤자 별수없는 노릇인데 굳이 조르시는 것은 후배가 지는 꼴을 남한테 꼭 보이셔 야만 직성이 풀리실 모양이로군요." 그러자 꼽추가 대답 대신에 그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는 호탕하지 껄껄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용음(龍吟)처럼 쩌렁쩌렁 허공을 울렸다. '이것 봐라, 저 웃음소리는 귀에 익은 습성인데?' 바위 뒤편의 시용고가 찔끔 놀라서 의아스럽게 여길 때였다. 그 꼽추는 별안간 고개를 휙 돌려 여전히 껄껄 웃는 얼굴을 시용고의 정면으로 향했다. 그 얼굴 역시 아주 낯익은 인상이다. 뿐만 아니라, 꼽추의 그 표정은 벌써부터 그녀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듯 바위 구멍을 통해서 눈 길까지 맞추었으므로 시용고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에쿠, 큰일났다! 저놈의 꼽추가 내가 숨어 엿듣는 걸 알아챘나. 어디서 보았더라? 아주 낯익은 얼굴이야... 그것도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음직한데 어째서 이렇게도 생각이 안 나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녀는 좀처럼 꼽추의 정체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분명 과거에 만난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은 꽉 막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쥐 죽은 듯 숨길까지 멈추고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꼽추는 어느 틈엔가 시선을 되돌려 청년 쪽 으로 향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방금 시용고에게 보냈던 웃음과 눈길은 아마도 무심결에 그 랬던 것이라는 기색이다. 한결 마음이 놓인 시용고는 온 신경을 두 귀에 모으고 두 사람의 대화를 계속 엿듣기 시작했다. 청년의 말에 대꾸도 않고 한참이나 껄껄 웃던 꼽추가 그제서야 말문을 열었다. "자네 급할 게 뭐 있나? 지금쯤 백가난쟁이는 주가난쟁이를 찾아 가지고 진작에 동해삼선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백만산에 가 있을 게야. 이제 자네가 숭산으로 쫓아가 봤자 헛물만 켜고 말 텐 데? 그리 서두르나? 어차피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는 예나 숭산이나 마찬가질세. 그럴 바에야 여기서 나하고 한두어 판 더 두고, 좀 있다가 도깨비 싸움질 구경이나 하러 가세." "사부님께서 숭악에 안 계시다니. 그럼 제자도 지금 가봐야 소용없겠군요. 노선배님의 통찰력은 삼라만상을 꿰뚫어 훤히 보고 계시니 여쭙는 말씀입니다만, 이번에 삼선이로(三仙二老)께서 모두 백만산으로 가셨다면 그놈의 요물도 그물을 벗어나기는 어렵겠지요?" 청년은 여유있게 바둑알을 들어 우각(右角) 상귀에 한 점 놓고서 물었다. 꼽추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대답했다. "그놈의 요물도 악업이 꼭 찼으니까 운수도 이제 다했겠지. 그러나 그놈은 너무 흉악스럽고 교 활하기 짝이 없단 말씀이야. 만약 마한(魔限)이 끝나지 않았다면 동해삼선이 단련한 <생사회명환 멸육문양의미진진(生死晦明幻滅六門兩儀微塵陣)>이나 순양지보(純陽至寶)가 엄청난 위력을 지녔 다손 치더라도 그놈의 오묘한 현공 앞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걸세. 기습적으로 일격에 성공 하지 못하고 낌새를 놈에게 눈치채이는 날이면 고작해야 그놈의 육신 껍데기나 떼어없앨까, 원신 (元身)은 소멸시키지 못할 걸세." "그거 참 어려운 노릇이군요." "아무렴, 백만산의 요마도 삼선이로에 뒤지지 않을 만큼 도력이 대단한 놈이니까... 헌데 내 어저 께 우연히 청해파(靑海派)의 장가(藏哥) 난쟁이를 만났지 뭔가? 그 친구, 자기 제자 원수를 갚는 답시고 천호(天狐)의 두 딸년을 어쩔 모양이더군. 그래서 내가 충동질을 좀 해줬지. '이봐 장형, 누구나 적수가 생기면 싸워 이기는 쪽이 장땡 아닌가? 진 쪽이야 의당 자기 사부한테 배운 실력 이 신통치 못해서 패한 것이니 그걸 원망해야지, 상대방의 모진 손속만 탓해서야 어디 쓰겠나? 장형의 그 못난 제자도 비록 백미침에 얻어맞기는 했어도 그놈의 요마가 육신을 베어 달아나지만 않았더라면 전혀 구해낼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니었네. 장형도 그 점은 알고 있겠지? 자네 제자는 저희들 패거리끼리 치고받고 싸우다가 죽은 걸세. 그렇다면 진정한 적은 누구이겠나? 그 따위 도 력도 변변치 못하고 눈알도 제대로 박히지 못해 하류 잡배들과 좋아라고 어울려 다니면서 제 스 승 낯짝이나 깎는 제자녀석이라면 일찌감치 잘 뒈졌네. 그런 놈한데 무슨 얼어죽을 복수를 해준 단 말인가? 공연히 남의 다리일랑 긁적거리지 말고 그놈을 해친 패거리나 찾아가서 빚을 받도록 하게. 연약한 계집애들을 붙잡고 심통을 부려봐야 어디 일문의 교조님께서 체면이 서겠는가?' 그 랬더니만 장가 난쟁이 친구 노발대발 펄펄 뛰면서 나한테 덤벼들더군. 그래서 내친 김에 더 약을 올렸지. '이봐 자네, 나하고 싸우기는 아직 이르네. 자네가 우선 할 일은 이 길로 백만산에 가서 그 못난 제자녀석 원수부터 갚는 걸세. 정 원수갚을 자신이 없거든 내가 오룡전(烏龍剪)을 빌려줄 테니 그걸 써 보게나. 그리고 일이 끝나면 내 반드시 명년 단오 절에 청해로 자넬 찾아가서 가르 침을 받도록 함세! 어떤가?' 사실 말이지만 나는 그때 장가 난쟁이하고 싸울 마음이 없었거든. 갈 길이 바빴기 때문이야. 왕년에 나는 아미파 도우한테 크게 도움을 받은 처지라 오래도록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었어. 그런데 이번 백만산 건으로 기회가 생긴 걸세. 내가 돕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 려우리라 싶어서 급히 가던 도중에 그놈의 애물덩어리와 딱 마주쳤지 뭔가? 장가녀석은 고집도 나한테 뒤지지 않는 데다 또 분신화련현공(分身化煉玄功)까지 익히고 있는지라, 이 작자를 충동질 해 가지고 백만산으로 보낼 생각이 들었단 말씀이야. 장가 난쟁이는 제자녀석의 복수도 복수려니 와 천생 호승벽(好勝癖)이 강한 위인이라서 일단 거기 보내기만 하면 제풀에 앞장서서 물불 가리 지 않고 설쳐댈 게 뻔하거든. 그렇게 되면 동해 삼선 친구들도 마음놓고 그 틈에 기습공격을 할 수가 있지. 과연 그 작자는 내 술수에 홀딱 넘어가서 당장 백만산으로 달려가려고 하더군. 그래 나는 아주 못을 박았지. '나도 자네의 우환거리가 뭔지 잘 알고 있다네. 어쩌면 계집아이 하나를 이용해 가지고 겁난을 모면해 볼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네만, 그래서야 자네 자신도 시러배 잡놈 이 된 것은 물론이고 알량한 그 제자녀석, 또 제자놈의 아들 손자 대대로 잡종 화냥년소리를 듣 게 될 걸세. 어떤가, 내 말이 틀렸나? 그렇게 불끈거리지 말게나. 내 평생 극락동자(極樂童子)만 빼놓고 어느 누가 내 면전에서 감히 주먹질하는 걸 그냥 두고 본 적이 없네. 정 싸우고 싶거든 좀 기다리게. 조만간에 자네한테 내 호된 맛을 못 보인다면 이 꼽추 성명을 갈아치울 테니까!' 그 랬더니 잠잠해지더군. 사실 말이지, 그 친구도 내가 그 형편없는 갈보년의 어미와 오래 전부터 친 한 친구 사이인 줄 뻔히 알거든. 나한테 불끈거려 봤자 공연히 자기네 문중의 수치만 드러낼 뿐 이지. 그 친구 당장 풀이 죽어가지고 궁색하게 변명을 하더구먼. 자신은 남한테 올가미를 씌워 자 기 겁난을 모면한다든가 무슨 이득을 볼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는 거야. 실은 그 갈보 계 집년의 어미가 자기를 찾아와서 혼사문제를 꺼냈을 때만 하더다도 그 계집년의 자질이 괜찮아 보 였다더군. 다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악의 근성이 너무 깊어서 필경은 음욕의 수렁텅이에 빠져 형 신(形神)을 깡그리 녹여 없애고 말 인상이라 자기 제자녀석의 배필감은 못되겠구나 싶어 선뜻 응 낙을 안했다는 거야. 하지만 그 계집의 어미가 끈덕지게 졸라대고, 또 옛날의 우정을 생각해서라 도 차마 끝까지 뻗댈 수가 없었던 모양이네. 그 어미로 말 하자면 수백 년 동안이나 고심참담 수 행을 쌓은 몸이고, 또 슬하에 혈육이라곤 그 갈보 같은 딸년 하나밖에 없거든. 그걸 생각해서라도 장가 난쟁이는 일언지하 거절할 수 없었지. 목전에 박두한 천겁(千劫)을 그녀가 모면할 것인지 아 닌지도 확실히 모르는 터라 장가 늙은이는 궁지에 몰린 나머지 자포자기로 에라 모르겠다 그만 수락해 버린 것이네. 그래도 처음 생각에는 몇 년쯤 지나면서 심성을 살펴 그 딸년을 자기 문하 로 거두어들일 셈이었지. 한데 뜻밖에도 그 계집아이의 천생 타고난 근성이 도저히 뽑아낼 정도 를 넘어선 것을 깨달았다네. 자기 남편을 배반하고 어미의 막중한 뜻까지 어길 만큼 그 음욕의 뿌리가 깊이깊이 박혀 있었단 말일세. 그 화근덩어리한테 장가든 제자의 마음도 그렇거니와 문중 의 규율로 보아서도 의당 참혼주체(斬魂誅體)의 극형을 내려야겠지만 그래도 그 걸 혈육이라고 맡겨놓고 죽은 친구가 측은해서 차마 손을 쓰지 못하였다네. 또 장가 자신도 과거에 밝히기 어려 운 사연을 겪은 터라 여자의 목숨을 선뜻 끊기도 꺼림칙했지. 생각다못해 장가는 문중 계율에 헌 신속죄(獻身贖罪)하는 조문을 적용해서 그 계집을 잠정적으로 이곳에 방치해 두고 훗날 참회하는 정도를 살펴 조치하기로 했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대뜸 면박을 주었지. '예끼 이 친구, 그 계집아이가 아무리 장래성이 없다고는 하더라도 자네가 그 부부를 항상 붙어 살게 허락해서 엄중 히 단속을 했다면 어떻게 그것이 제멋대로 방탕해져 가망없는 지경에 빠졌겠는가 말일세? 자네는 분명코 남을 악한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해 두었다가 장차 자네가 필요할 때 희생물로 삼으려는 수작이 틀림없어! 자네 그 응큼한 속셈을 내 모를 줄 아나?' 그랬더니 이 작자 코웃음을 치면서 이렇게 응수하더군. '내 제자놈은 훗날 내 도통(道統)을 이어받아야 할 몸이네. 그걸 여색에 미치 게 해서 공력수련을 그르치도록 만들 수 있겠나? 그것도 둘째치고 사내 계집이 늘상 붙어 살게 내버려 둔다 하더라도 그 계집의 근성은 마찬가질세. 절대로 못 고친단 말이야. 어디 내 말이 미 덥지 않은가? 그럼 자네가 직접 고파령으로 가서 두 눈 똑똑히 뜨고 보게나. 그래야만 내 말이 옳은지 그른지 알 것 아닌가?' 그 친구 속셈도 지금 생각해 보면 제법 깊은 뜻은 있더군. 옛 친 구와의 정분을 보아서라도 당장 처벌하고 잊어버리기보다는 그 계집의 악업이 꽉 차서 몸은 죽더 라도 혼백을 잃지 않았을 때가 되면 겁난을 되돌려서 새 인간으로 부활시킬 수도 있으니까. 그 방법을 염두에 두고 시침을 떼는지도 모르거든. 만약 이대로 나갔다간 그 계집의 음탕한 근성이 너무 깊어져서 천지도 두려워할 죄업을 마구 쌓을 것이고, 마침내는 제 어미의 비참한 말로를 밟 게 되고야 말 거야. 하물며 도력도 제 어미만 훨씬 못한 처지에 어미처럼 겨우 겁난을 면하기란 천만에 말씀이지. 요행 겁난을 모면했다손 치더라도 형체와 혼백이 한 줌 잿더미로 변해 사라질 터이니 그 얼마나 처참한 노릇인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우리 둘은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네. 그 친구가 내 말대로 백만산을 향해서 떠났으니 나는 굳이 갈 필요가 없어졌지. 그래서 여기로 온 것일세. 그 계집년의 어미와 나하고는 옛 정분은 두터웠지. 그 우정을 생각해서 혹시나 가망이 라도 있는가 살펴보았네. 결국 장가 늙은이의 말은 거짓이 아니더군.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그 계집의 좋은 면을 찾으려 애써 봤지. 만에 하나, 그 음욕의 뿌리를 뽑아낼 길이 있다면 옳은 인간 으로 참회시켜 가지고 장가 늙은이가 두 말도 못 하게 주둥이를 틀어막을 심산이었거든. 그러나 이제껏 보아온 결과는 실망뿐이네. 그 계집의 병은 고칠 약방문이 없었어. 그러니 저 갈대로 가게 내버려 둘밖에....." 꼽추의 기나긴 얘기를 듣고서 청년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동문 사백, 사숙님들은 모두가 노선배님과 적지 않게 인연을 맺고 계십니다. 이곳의 일도 방금 노선배님이 말씀해 주셔서 그 인과관계를 알게 되었지요. 하지만 노선배님의 공력이라면 일거에 저희 동문들이 당할 위험을 깨끗하게 무산시킬 수 있으실 텐데, 어째서 방관만 하시려는지요?" "자네가 뭘 알겠나? 첫째 이번 일은 겁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네. 둘째로 내 성미는 다른 사람과 틀려서 남이 날 건드리지 않는 이상 남의 일에 군참견하지 않는 게 평소 주장일세. 자네 말대로 했다간 좌도방문 이단의 무리 중에도 내 친구가 적지 않게 있는데 우정만 따져서 아미파 하고 적수가 되어버리면 어쩌겠나? 어림 반푼도 없는 짓이지!" 청년은 더 이상 대꾸를 않는다. 그저 열심히 바둑만 두기 시작한다. 꼽추도 한바탕 긴 사설을 늘어놓고서 이제는 지쳤는지 두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한참 늘어지 게 잘 기색이다. 처음 이들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하였을 때에 시용고는 비록 주의력을 기울여 듣긴 했어도 한편 으로 마음이 그 미청년의 탐스러운 몸매에 빠져 있었으므로 겨우 짐작한 것이 꼽추가 아미파 출 신은 아니지만 또 자기네 부류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한데 꼽추의 이야기가 막판으로 접어들면서 전개되는 내용이 갈수록 점점 그녀의 가슴을 찌르기 시작하자 그 때부터는 미청년의 자태는 보이지 않고 온통 신경을 꼽추에게 집중시켜 들었다. 꼽추가 말하는 장가 난쟁이란 아무래도 청해성 챠이다무 하반의 장령자를 두고 일컫는 게 분명 했다. 장령자와 옥신각신 주고받았다는 입씨름 내용도 시용고 자신과 웅혈아의 결혼 당시 경과에 관한 것임이 틀림없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늘 끝이 되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이었다. '이 꼽추의 말대로라면 내가 이제껏 저질러 온 방탕한 행위를 장령자 사도(師徒)가 진작부터 모 조리 알고 있다는 셈이 된다. 지난번 웅혈아가 돌아왔을 때 어쩐지 기색이 그토록 시무룩하고 차 디찬가 했더니 바로 내 행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로구나... 이 노릇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꼬? 난 또 전혀 모르는 줄 알고 찰싹 달라붙어 아양을 부렸지. 웅혈아는 속으로 날 얼마나 비웃었을 까? 한데 이상해. 평소 그 불 같은 성미에 어떻게 꾹 참고 모른 척했지? 더구나 그 사부 장령자 는 문하인의 잘못에 대해선 눈꼽만치도 인정사정 두지 않고 벌을 내리는 위인인데 어째서 날 그 냥 내버려 두었을꼬? 꼽추 말대로 장령자한테 훗날 내가 쓰일 데가 있어서 그랬다면 웅혈아도 내 색을 할 리가 없겠지. 장령자는 오묘막측한 현공을 지닌 사람이다. 도력도 심오하다. 그런 만큼 훗날 천겁을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풀어내고도 남을 텐데, 구태여 날 이 용할 필요가 어디 있을꼬? 정말 모를 일이로구나. 아아, 괴로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 어. 도대체 무슨 일들을 꾸미고 있는 거야?' 놀라움에 두려움에 온갖 의혹까지 뒤범벅이 된 그녀의 머릿속은 바윗돌을 들이받고 생긴 상처의 아픔에 겹쳐서 지끈지끈 마구 쑤셔대기 시작했다. 만약 일 년 반 전의 시용고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 당시 그 녀는 오로지 산중에 은거하면서 비록 손능파와 같은 탕녀와 어울려 남모르게 사내 사냥이나 하며 음탕한 놀음을 즐기기는 했어도 시종 어머니의 유훈(遺訓)을 지키고 대담한 짓은 공공연히 저지 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방금 꼽추가 한 말을 그 때에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지금처럼 혼비백산을 해가지고 과거 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지는 않더라도 일시적으로나마 방탕해진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근신하면 서 감히 대담한 짓은 벌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이 꼽추는 그녀의 어머니 생전에 교분을 맺은 옛 벗이라니, 당장 그 앞에 나아가 무릎꿇 고 살 길을 빌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시용고 그녀가 훗날 어찌 그 참혹한 겁난을 당하기에 이 르렀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처지가 다르다. 뭇 색마들에게 둘러싸여 음욕의 늪수렁에 깊이깊이 빠져 들어간 그녀는 악업을 너무 무겁게 쌓아놓았다. 이제 되돌이킬 수 없는 미망(迷妄)의 노상에서 헤매고 있 는 것이다. 시용고는 경악과 당혹감에 시달리면서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았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 해 보아도 남편 웅혈아의 그림자는 자꾸자꾸 멀어져만 갔다. 장령자와 웅혈아, 그들 두 사도는 이 미 자기 행적을 훤하게 꿰뚫어 알고 있을 터, 이제 회개해서 외간 남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 더라도 지난날 남편의 애틋한 사랑을 되돌이켜 차지하기란 애당초 그른 노릇이다. 설령 남편이 바다처럼 너르게 이해를 해주어서 신혼초와 같이 꿀맛 같은 생활로 돌아간다 치자. 그러나 일 년 열두 달, 그 가운데서 몇 달 며칠이나 그 즐거움을 누린단 말이냐? 고작해야 두세 달, 나머지 기나긴 세월은 생과부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독수공방 생과부 노릇이 지긋지긋해졌다. 아예 신물이 나도록 지겹고 지루해서 더 이상은 참아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화산파 열화조사의 문하에는 기술 좋은 사내도 숱하게 많고 또 문파의 세력도 막강하다. 더구나 열화조사는 장령자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무서운 실력을 가진 원로 고수가 아닌가? 이런 문파를 등에 업는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기왕지사 엎질러진 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바에야 차라리 선수를 쳐서 당장에 남편 웅혈아와 의 부부관계를 청산하고 공공연히 화산파 문하로 투신하는 것이 상책이리라. 거기에 들어가서 마 음내키는 대로 일평생 온갖 음락을 맛보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좋으냐? 그 마당에 장령자나 웅혈 아 따위가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간을 가지고 발버둥 치기로서니 자기를 어떻게 건드리겠는가 말 이다. 궁리가 여기까지 미치자 시용고는 혼자서 신바람이 났다. 저도 모르게 몸뚱아리가 후끈 달아오 르고 두 뺨에 발그레 하니 홍조가 깃든다. 색심이 동하면 그녀는 두 눈썹부터 꿈틀꿈틀 춤추는 것이 습관이다. 시용고의 귀에는 이제 더 이상 꼽추가 한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놀라움도 두려움도, 어찌할 바 를 모르던 당혹감조차도 순식간에 눈녹듯이 사라졌다. 그 고운 두 눈길은 바위 구멍을 통해서 오 직 하나의 표적 기막히게 아름다운 청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정말로 보면 볼수록 주물러 터뜨리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몸매다. 색욕에 넋이 빠질대로 빠진 그녀의 눈에는 상대방이 무공이나 도력에는 별 재간을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생김새만 멀 쩡할 뿐이지 수단은 자기보다 훨씬 못할 것으로 비쳐졌다. 문제는 꼽추다. 이놈의 늙은이는 솜씨가 비범해 보인다. 장령자의 도전을 느긋하게 받아넘길 정 도라면 섣불리 건드릴 상대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하지? 저것을 기어이 홀려가지고, 데려다가 흠씬 놀아 줬으면 좋겠는데... 곁에 앉아 있 는 늙은이가 문제야. 저놈의 꼽추를 처치하고 나야만 일이 되겠는걸... 아이쿠 이 썩은 냄새! 어 쩌자고 정신 팔다가 수렁 속에 빠졌냔 말이다. 이래 가지곤 꼽추를 처치하고도 저 사내 앞에 나 타날 수가 있겠나? 이거 참 얄궂게 됐어!' 시용고는 여자답게 그 다급한 가운데서도 몸매와 치장을 생각했다. 머리통이 터저 선혈이 낭자 하게 흐르고 온몸은 지저분하게 진흙과 피투성이로 얼룩졌다. 이 꼴을 해 가지고 사내 앞에 나갔 다가는 귀신이 나타난 줄 알고 기절초풍을 하고야 말 거다. 차림새만 그럴 듯했더라면 진작에 사 내를 홀려가지고 원을 풀었으련만... 그러나 저 원수 같은 꼽추 늙은이가 잠시도 눈을 팔고 있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 아닌가. 그녀는 불현듯 상대방의 어투로 보아서 자신에게 별로 이득이 되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 았다. 그렇다, 이 작자들은 어차피 고파령 자기네 본거지에 접근해 와서 허실을 탐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저 이목이 수려한 젊은이는 아미문하가 분명할 터, 만약 꼽추의 충동질을 받고 응벽애로 달려가 적을 돕는다면 낭패도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런 화근덩어리들을 그냥 보내주어서야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불의에 암습을 가해서 거꾸러뜨려야 하겠지! 비침(飛針) 몇 대 정도면 둘 다 끝장이다. 요행으로 꼽추부터 죽여놓을 수만 있다면 강적이 한 놈 줄어드는 셈이고, 그 다음에 변변치 못 한 젊은 녀석일랑 죽인다고 위협을 가해서 기를 꺾어놓은 다음, 술법으로 홀려 가지고 동굴까지 채뜨려 가기만 하면 그걸로 끝장이란 말이다. 저만큼 싱싱한 체력을 지녔다면 지금껏 고파령에서 함께 뒹굴던 사내녀석들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나을 것이다. 시용고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면서 슬금슬금 바위 모서리를 돌아 상대쪽을 내다보았다. 그녀 의 손은 어느 틈엔가 법보낭을 뒤지고 있다. 꼽추 늙은이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또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판이라, 그녀는 단 한 대만으로 실패할까 두려워서 현녀침(玄女針)을 한 움큼 듬 뿍 끄집어냈다. 공연히 자는 범 콧수염을 건드릴 게 아니라 일격에 요절을 내버려서 반격당할 위 험성을 처음부터 제거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손아귀에는 그 무시무시한 현녀비침 아홉 자루가 한꺼번에 들린 채 시퍼런 광망을 감추 고 있다. 이윽고 시용고는 신중하게 꼽추의 오른쪽 태양혈을 겨누고 힘껏 비침을 쏘아갔다. <제5권으로 계속> 촉산기협(2부) 5 곱추도사의 천려일실 迷本性 縱情色界天 識靈物 言訪肉芝馬 시용고(施龍姑)의 현공(玄功)이 그득 담긴 비침(飛針)은 아홉 가닥 채색 수실처럼 빛을 발하면서 번개보다도 빠르게 날아갔다. 그것도 모르고 바둑판에 열중한 꼽추의 기색은 마냥 태연자약 하기만 했다. 이제 아홉 자루 현 녀비침 가운데 한 개라도 얻어맞는 날에는 목숨을 부지하기란 아예 그른 노릇이다. 시용고는 바 야흐로 분명한 결과를 눈앞에 두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절대절명의 순간, 꼽추와 마주 앉아 바둑을 두던 청년이 휘딱 고개를 돌리더니 시용고를 뚫 어지게 노려보았다. 그와 동시에 손이 번쩍 쳐들리고 무슨 금빛 같은 것이 번뜩였다. 하지만 이보 다 먼저 꼽추의 오른손이 청년을 제지했다. 금빛 광채는 끝내 날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에 꼽추의 왼손이 바른쪽 어깨로 슬쩍 올라갔다. 어깨에는 어느 새 바둑돌을 담은 검정 바리때가 얹혀졌다. 꼽추의 동작은 한순간 잽싸게 이루어졌으면서도 얼핏 보기엔 무척 둔중하고 느리게 보였다. 그 는 시종 암습자를 향해서 눈길 한 번 돌리지도 않았다. 천연덕스레 어깨에 올라앉은 검정빛 바리 때는 쇠로 만든 것도, 돌로 깎아 만든 것도 아닌 듯 별다르게 이상한 점이라곤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꼽추의 태양혈을 가리고 방패막이 되어 있다. 순식간에 암습자의 현녀비침 아홉 자루가 유성처럼 표적에 들이닥쳤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는 당장 바리때를 산산조각 박살내고 꼽추의 태양혈 뇌수(腦髓)를 깊숙이 꿰뚫어버릴 참이다. 쨍쨍쨍.....! 한 가닥 검정빛 광채가 현녀비침의 오색 무지개를 휩쓸듯 감싸는가 싶더니 호금(胡琴)의 높은 음자리 줄을 연달아 퉁기는 듯한 금속성이 가느다랗게 울렸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기세사납게 들 이닥친 아홉 자루의 현녀비침은 망망대해에 돌멩이를 던져넣은 것처럼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고 자취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차!" 시용고는 혼이 빠져 달아났다. 필살의 일격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호랑이 수염을 건드렸 으니 이제 꼽추도 그냥 있을 리 만무하다. 그녀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허둥지둥 법보낭을 뒤져 비 검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서둘러 방어태세를 취하려는 그 때, 꼽추는 곁눈질도 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법보 한 개를 어깨 너머로 집어던졌다. 꼽추의 그 큼지막한 손아귀가 활짝 펼쳐지자마자, 한덩어리 검은 구름이 풀썩 일더니 쏴아! 하는 파도소리를 내면서 회오리바람처럼 시용고의 정수 리부터 덮어씌워 내렸다. 구름 속에서 번뜩이는 용의 비늘과 억센 발톱을 보는 순간, 그녀도 지체없이 비검을 들어 마주 후려쳤다. 하지만 검광에는 아무런 감촉이 와 닿지를 않았다. 허공만 가르고 빙그르 되돌아왔을 뿐이다. "아뿔싸, 이거 큰일났다!" 그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이 허둥지둥 둔광(遁光)을 일으켜 타고 몸을 빼내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온몸 구석구석에 저릿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그 촉감은 이내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으로 변했다. 전신의 살덩어리를 칼로 조각조각 저며내는 듯, 뼈마디를 깎아 내는 듯한 통증이 머리터럭부터 발끝까지 동시에 엄습한 것이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으아악.....!" 정신이 가물가물 흐려진다. 의식을 잃어가는 속에서도 그 저릿저릿한 통증은 조금도 가실 줄을 모른다. "날 좀... 살려... 줘요!" 혓바닥도 굳었는가, 비명조차 크게 나오지 않는다. "아, 이게 죽는 거로구나... 난 이제 죽고 있어!" 아렴풋이 죽음을 의식하면서 그녀는 털썩 꼬꾸라졌다. 마침내 기절해 버린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용고는 자기 몸뚱이가 웬 남자 품에 안겨 있는 걸 느꼈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어깨에서 등줄기를 거쳐 둔부로 내려가고 있다. '아아, 저승에도 이렇게 평안한 데가 있다니! 아아... 따사롭구나, 간지러워.....' 부드러운 손길이 허벅지를 더듬다가는 허리께로 올라오더니 이윽고 풍만한 젖무덤에 와서 멈춘 다. 문득 코 끝에 달콤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아아, 향그러워라. 이게 무슨 냄새일까!...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봐.' 그러나 향기는 코 끝에서 가시지 않았다. 아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야! 시용고는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가느다랗게 뜨이던 그녀의 실눈이 그만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아니... 당신은.....?" 목이 잠겨 놀라움의 외침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첫눈에 보인 것은 낯선 남자의 얼굴이었다.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청년도사가 정이 담뿍 담 긴 눈으로 자신을 애처롭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두 남녀의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시용고는 전신이 그 청년의 눈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감긴 눈 속에서도 청년도사의 인상이 선하게 떠오른다. 시원스레 탁 트인 이마 와 짙고 검은 두 눈썹이 가로지른 그 아래, 물기가 촉촉하게 배인 눈망울이 사람을 통째로 끌어 당기는 마력을 지녔다. 그것은 사내의 힘차고 부리부리한 눈매가 아니라 여인네처럼 교태를 담뿍 머금은 것이었다. 해 말간 얼굴에는 연지라도 바른 듯 발그스레 홍조가 피어오르는 품이 남자는 고사하고 여인 중에서 도 보기 드문 절색이었다. 하지만 차림새는 분명 우의성관(羽衣星冠)의 남자도사가 틀림없다. 시용고는 꿈속을 헤메듯 영문 모를 황홀경에 빠졌다. 이런 남자는 세상 어디를 찾아보아도 평생 본 적이 없다. 불현듯 이제 방금까지 꼽추와 바둑을 두던 미청년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 영민하고 도 준수한 풍채는 이 청년도사보다 월등하게 뛰어나지만, 화사한 용모와 부드럽고 따듯한 느낌으 로 따지자면 훨씬 뒤떨어진다. 더구나 몸뚱이를 찰싹 달라붙이고 있는 가운데, 무슨 향료인지 모르나 물결치듯 가슴 속을 울렁 거리게 만드는 향기에 담뿍 취한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춘심(春心)이 동하고 색욕까지 되살 아나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시용고는 여전히 두 눈을 내리감은 채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었다. 사내의 억센 두 팔이 가는 허 리를 더욱 조여왔다. 귓부리에 간질간질 그녀를 일깨워 부르는 음성이 닿는다. 기왕에 한번 눈길 을 마주쳤으니 더 이상 죽은 척 '나 몰라라!' 하고 있을 수도 없다. 시용고는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무안스러워 고개를 돌린 채 눈을 떴다. 곁에는 물을 담은 표주박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자기한테 먹이려고 떠다놓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사내는 악의를 품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녀의 눈길이 또다시 상대방의 화사한 얼굴 쪽으로 향한다. "당신은.....?" "아, 깨어나셨구려." 청년도사가 먼저 가로채듯 말을 건네었다. 음성조차도 여인네처럼 부드럽고 간드러진 것이 듣기 좋았다. 시용고는 몸을 일으키려고 부시럭부시럭 몸을 뒤챘다. 마음 속으로야 이대로 따뜻한 사내품에 안겨서 오래오래 있고 싶었지만 시용고가 제아무리 낯가죽 두꺼운 갈보 계집이기로소니 이미 정 신을 차린 이 마당에 내력도 모를 낯선 사내 품속에서 마냥 몸을 내맡기고 있을 수야 없는 노릇 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한술 더떴다. 시용고가 일어나려고 꿈지럭거리자 청년도사는 그녀를 풀어주기 는커녕 도리어 두 손까지 당겨다가 품에 꼬옥 끌어안더니 얼굴을 그녀의 뺨에 바짝 붙이고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시용고는 숨이 턱 막히도록 진한 향기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처음에는 일어나려고 사내의 팔을 뿌리쳐 보았지만 그것도 시늉뿐, 더 이상 버둥거릴 기력조차 없어졌다. 온몸뚱아리에서 힘이 쭉 빠져버리고 그 대신 화끈화끈 열기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뼈마디가 통째로 녹아버린 듯 하반신이 나른해져, 벌어진 두 다리마저 모아붙일 수가 없다. 그녀는 술에 담뿍 취한 듯,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체면도 수치감도 깡그리 잊어버리고 사내의 손길이 더듬는 대로 몸을 맡긴 채 더 이상 보채지도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역시 상대방의 내 력은 궁금했는지라 코먹은 음성으로 수줍게 물었다. "방금... 이제 방금... 웬 꼽추 늙은이한테 당했어요. 지금쯤 몸뚱아리가 두 동강나서 죽은 줄 알 았는데... 아이!... 아이 도우... 도우께서 절 구해주셨군요?... 아아!... 어디를? 아니, 어디 사시나 요?... 흠흠... 도사님... 도사님 그 손... 아니 도사님의 존함은, 훗날 제가 보답을... 갚아드려야....." 시용고의 묻는 목소리는 열에 들떠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몸뚱이가 솜털 같은 구름 속을 둥실 둥실 떠서 나는 것만 같다. 청년도사는 빙그레 웃고 열기에 들뜰 대로 들뜬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나하고 그대는 이미 한집안 식구요. 훗날 오래도록 함께 지낼 처지이니 내 내력 같은 것은 물 을 것도 없겠지. 아까 보았을 때는 피투성이에 진흙탕을 뒤집어쓰고 있더군요. 그래서 냇가로 안 아다가 목욕을 시켰지. 단약 몇 알을 먹였더니 이제야 깨어난 거요. 도대체 무슨 일로 그 낭패를 당하셨소?" 대답에 반문까지 하면서도 사내의 더듬는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소맷자락이 들썩일 때마다 숨 막힐 듯 짙은 향내가 더욱 풍겨나왔다. 시용고는 이 무렵 복받치는 정욕의 불덩어리로 화한 데다가 또 청년도사가 자신을 구해준 은인 이라는 말까지 듣고 보니 감격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릴 지경이다. 그녀는 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즉시 대답을 했다. "저는... 시용고... 아으으... 바로 저 앞쪽 고파령에... 살고 있어요. 이 산을 지나다가 우연히... 아 아... 여기서 두 사람이 바둑을... 바둑을 두고 있길래... 아앗 그 손... 적인가 해서 정탐을 하러... 그 손 좀... 왔어요. 그런데 두 놈 가운데 꼽추도사가... 있었어요... 아아, 내가 현녀금침을 한 움큼 던졌더니... 그 손이 ...아니, 그 꼽추는 모조리 받아내고선 요법으로 날 꺼꾸러뜨렸어요... 천만다행 히... 아아, 도형께서는 도형 그 손... 이 나를 구해주셨군요... 아앗... 그놈의 꼽추는 어디로 갔을 까?" 문득 청년도사의 손길이 멎었다. "꼽추 늙은이라고?" "네에....." 전신을 주무르던 손길이 멎자 시용고 역시 어느 정도 진정을 하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 했다. "어떻게 생겼습디까? 또 어쩌다가 그놈과 맞닥뜨렸는지 말해보시오!" 청년도사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시용고가 자초지종 경과를 설명하는 동안 그는 얼굴에 놀라움과 당혹감이 떠돌았으나 짜릿짜릿한 촉감에 해파리처럼 풀어질 대로 풀어진 시용고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으므로 미처 그 표정을 읽어볼 여지도 없었다. 이윽고 토막토막 끊기는 시용고의 설명이 끝나자, 청년도사는 뼈가 녹은 듯 흐늘거리는 그녀의 풍만한 몸뚱이를 자기 가슴쪽으로 돌려가지고 으스러져라 꼬윽 끼어안더니 생색낼 겸해서 으름장 을 놓았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소! 내가 지나치는 길에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정말 그냥 못 보고 지나쳤 더라면 아가씨의 목숨은 물론 아미파 공격전마저도 물거품이 될 뻔했구려." "그 계획은 또 어떻게 아세요?" 시용고가 뜨악해서 반문했다. 청년도사는 헛기침 한번 하더니 자못 엄숙한 기색으로 자기 신분을 밝혔다. "나는 바로 무산(巫山) 우간협(牛肝峽) 철피동(鐵皮洞)에 사는 온향교주(溫香敎主)요. <분해아향 무진인(粉孩兒香霧眞人)> 풍오(馮吾)가 내 이름이지. 그대는 모를 테지만 열화조사(烈火祖師)와 독룡존자(毒龍尊者), 사남계(史南溪)들도 모두 나하고는 막역한 친구라오. 몇 달 전 독룡존자가 문 하제자 유덕(兪德)을 나한테 보내 청라욕(靑螺欲)전투에 참가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때 마침 공 교롭게도 나는 우간협 도관을 떠나고 없었단 말이거든. 복건성(福建省) 선하령(仙霞嶺)으로 음양 초(陰陽草)를 채집하러 갔었으니까. 돌아와서 듣자니 아미파의 하룻강아지들이 <괴규화(怪揆花)> 궁신(窮神) 능혼(凌魂)을 끌어들여 독룡존자의 수화풍뢰마진(水火風雷魔陣)을 깨뜨려 부수고 청라 욕마저 강제로 차지했다는 거였소. 그 싸움에서 죽거나 다친 우리 도우들도 숱하게 되고 독룡존 자조차 장령자(藏靈子)한테 사로잡혀서 청해(靑海)로 끌려갔다더군.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지. 그 소식을 듣고서 나는 노발대발, 그 즉석에서 희생당한 도우 여러분의 원수를 갚아주리라 맹세하고 산을 내려왔소. 무산을 벗어나자마자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이 날 찾아오던 <만묘선고(萬妙仙姑)> 허비랑(許飛娘)이었는데, 그녀는 날더러 '아미파의 기세가 지금은 너무 강력하니까 복수의 시기를 늦추라' 이거였소. 아미파를 상대로 싸우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는 것이지.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완강히 고집을 부렸소. <만묘선고>는 차근차근 현재 정세를 설명해 주더군. 그리고 이렇게 귀띔 해 주었소. '아미파 놈들은 새로 응벽애 태원동에다 중요한 근거지를 개척하고 있는데, 그 동부 안에는 희귀한 보물이 적지 않게 감춰져 있고, 또 구화산(九華山)에서 옮겨다 심은 육지(肉芝) 한 그루도 있소. 누구든지 그걸 잡아먹으면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에 이르게 되오. 게다가 지금 아미측의 원로 고수들은 모두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서 제각기 법보와 단약을 제련해 가지고 장 차 겁난에 대응할 준비를 갖추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외다. 그러니까 응벽애에는 기껏해야 배내 털도 갈지 않은 아이녀석들 몇 놈만이 지키고 있소. 공연히 세상 천하를 헤매고 다닐 게 아니라 바로 그놈들의 근거지를 노려보면 어떨지?' 나는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싶어 노기를 누르고 다 시 도관으로 올라갔지. 그런데 허비랑이 떠나기 직전 화산파에서 사남계가 보낸 전령이 당도했소. 가지고 온 편지를 보니 사남계는 고파령에 동도들을 규합해 가지고 아미파의 무방비 상태를 틈타 응벽애 습격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었소. 날더러 함께 참전해서 육지도 훔쳐내고 청라욕 전 투에서 희생당한 도우들의 한풀이라도 해보자는 내용이었지. 나는 당연히 허비랑에게 동행하자고 요청했지. 그러나 그녀는 지금 따로 추진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서 사양하더구먼. 그래서 전령한테 나 혼자만이라도 참전하겠다고 승락해 보냈소. 원래 내 성격이 한 군데 차분하니 붙어 있지 못해 서 우간협 철지동에 동부를 마련해 놓고도 늘 세상천지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니는 게 습관이 되었거든. 또 사남계의 편지를 보고 응벽애의 육지나 원수갚는 일 말고도 마음이 동하는 것이 있 었소. 그 친구 편지 내용 중에 함께 거사할 동도들을 자세히 소개했는데, 바로 그대 시선고(施仙 姑)에 관해서는 이름뿐만 아니라 뛰어난 절색이라고 붓끝이 닳아빠지도록 칭찬해 놓았지 않았겠 소. 그러니 불쑥 사모의 정이 솟구칠밖에. 허비랑과 작별한 다음, 나는 그 즉시 고파령을 향해 떠 났소. 한참 바삐 오다가 하계를 내려다보니, 문득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소. 산골짜기 아래 난생 보기 드문 괴수 한 마리가 꿈틀거리는 걸 목격한 거요. 호랑이 대가리에 쪽빛 비늘로 뒤덮인 놈 인데 용 같으면서도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더군. 그래서 호기심에 자세히 살펴보려고 검광을 늦추 어 하강했더니, 왠걸! 괴수처럼 보였던 놈은 내 원수 한 녀석과 방금 시선고가 말한 꼽추 늙은이 둘이 아니겠소? 그 두 놈이 막 그대를 죽이려고 할 때였지. 나는 즉시 법보와 비검을 한꺼번에 쏘아날려서 그놈의 원수와 꼽추를 당장 쫓아버렸소. 그러나 그 작자의 패거리가 몰려올까 두려워 그대를 나꿔채 가지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거요. 이제야 알 만하오? 다음에는 아까 말한 것처럼 냇가로 데려다 씻기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먹이고 해서 살려냈지. 나야 엉겁결에 한 사람을 구 해냈지만, 그 여자가 바로 고파령의 시선고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구려. 정말 인연치고는 너무나 기이하구먼. 살려낸 사람이 바로 내가 노심초사 찾아가던 그대였다니!....." 청년도사, <향무진인> 풍오의 기나긴 얘기가 끝났다. 그제서야 시용고는 자신이 누워 있는 장소가 처음 거꾸러졌던 곳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구나 자신을 구해준 당사자가 바로 사남계를 비롯한 패거리들이 늘 떠벌여대던 무림계 제일의 미 남자, 선천적으로 남녀 음양 두 몸을 고루 갖춘 무산 우간협의 <분해아향무진인> 풍오 그 사람 이라는 사실을 듣자, 그녀는 놀라움과 기쁨에 전신이 덜덜 떨렸다. 너무도 격한 감정이 복받쳐 풍 오의 말이 참말인지 거짓인지조차 판별할 능력마저 잃었다. 시용고는 발딱 몸을 일으켜 가지고 풍오를 향해 날아갈 듯 사뿐 절을 올렸다. "저를 구해주신 선장(仙長)께서 바로 향무진인이라니... 제자 시용고, 목숨을 살려준 은혜, 이 몸 가루가 되더라도 갚기 어렵겠사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풍오는 어느 새 그녀를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풍오의 손길은 다시 그녀 를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대와 나는 숙연(宿緣)으로 맺어진 몸, 서로 오빠 누이하고 불러야 할 처지 아니겠나? 객적은 예절일랑 걷어치우게!" 말을 마치자, 풍오는 스르르 몸을 구부리더니 발갛게 달아오른 시용고의 볼을 지긋이 깨물었다. 이쯤 되면 시용고가 참을 수 없다. 사내의 따사로운 체온이 와 닿으면서 짜릿한 이빨의 감촉마 저 느껴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터뜨렸다.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누비는 사내의 손가 락, 화끈 달아오른 입술 사이로 강철 같은 이빨이 뺨을 물어뜯더니 뜨거운 혀가 상처를 핥으면서 지나간다. 시용고는 걸치고 있는 옷이 모두 거추장스러워졌다. 사내 품속에 꼭 끼였던 손을 잡아빼고서는 물기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눈빛과 마주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자유스러워진 두 손으로 허리띠를 끌렀다. 옷자락이 속박에서 풀려나 좌르 르 펼쳐졌다. 풍오는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 한가운데 머리를 파묻었다. 이윽고 시용고와 풍오 두 음부탕녀는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열락(悅落)으로 빠져들어 갔다. 풍오야말로 요마 음양수(陰陽搜)의 사제였다. 음양수는 비록 동남동녀들을 잡아다가 진양(眞陽) 과 진음(眞陰)을 섭취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직껏 인명을 해쳐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풍오는 달랐다. 극악무도하고 음흉(淫凶)하기 짝이 없는 이 자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남녀의 음양이체(陰陽二體)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해마다 천 명을 헤아리는 처녀총각의 동정을 빼앗고 기력이 고갈될 때까지 농락하다가 말려 죽이곤 했다. 그런 행위는 사형 음양수조차도 눈 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두 사람은 마침내 십여 년 전 사이가 틀어져 사형제간의 의리를 끊고 말았다. 그로부터 풍오는 우간협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스스로 온향교(溫香敎)라는 교파를 세우더니 온갖 사술(邪術)과 요법 (妖法)을 제련하여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가 몸에 지닌 것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마향(魔香)의 일종이었다. 그 향기야말로 남정네나 여자 의 넋을 단번에 빼앗을 만큼 강렬하고도 지독스러운 것이었다. 풍오는 그 향주머니를 몸뚱이에 고루 붙이고 세상천지 구석구석 누비면서 눈독들일 만한 선남선 녀를 만나면 닥치는 대로 유혹해 가지고 선행(?)을 베푸는 도사가 되었던 것이다. 온향교는 십 년 만에 숱한 요마들과 발 넓게 교분을 맺어 날로 세력이 증강되었다. 그리고 온향교주 풍오의 실력 또한 음양수에 비해 훨씬 강력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면 시용고를 기절시켰던 꼽추는 누구인가? 그 꼽추는 정(正) 사(邪) 양파를 통틀어 각 교 (敎)의 제일대 고수 서른한 명 가운데서도 첫째 둘째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내력에 대해서 는 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자. 시용고가 군침을 흘릴만큼 준수하게 생긴 미청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추운수(追雲搜)> 백곡 일(白谷逸)의 수제자 악문(岳雯)이었다. 꼽추와 악문 이들 두 사람은 모두 바둑이라면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게 좋아했다. 그래서 나이 차이가 엄청난 선후배지간이면서도 바둑 때문에 망년지 교(忘年之交)를 맺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꼽추는 세 치 혓바닥으로 장령자(藏靈子)를 격동시켜 백만산(百蠻山) 싸움터로 자기 대신에 보내 놓은 다음, 과거 금침성모(金針聖母)와의 우정을 생각해서 일부러 고파령까지 와 시용고를 감화시 키기로 했다. 그는 시용고가 쏘아보낸 현녀비침을 모두 받아내어 무기력하게 한 후 정신이 번쩍들만큼 혼뜨검 을 먹였다. 그리고 나서 기절한 시용고를 데리고 낙봉산(落鳳山)으로 갔다. 낙봉산에는 도룡사태 (屠龍師太) 선법대사(善法大師)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꼽추는 그녀를 도룡사태에게 넘겨서 우선 아미산 전투를 피하도록 한 뒤, 도룡사태의 법력으로 천천히 깨우쳐 정도(正道)에 귀의시킬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시용고의 마겁(魔劫)은 너무도 깊고 무거웠다. 꼽추가 낙봉산에 당도했을 무렵 정작 만나 야 할 도룡사태는 운유(雲遊)를 나가고 암자를 지키고 있는 것은 그녀의 제자 묘고(渺姑)와 신수 (神獸) 호면장표(虎面藏彪)뿐이었다. 묘고는 애꾸눈의 비구니였고, 신수는 범의 얼굴에 표범처럼 얼룩무늬를 지닌 짐승이다. 도룡사태를 만나지 못하게 되자 꼽추는 하는 수 없이 시용고를 묘고한테 넘겨주고, '사부님이 돌 아오거든 이리이리 하라' 신신당부를 한 다음 악문과 함께 낙봉산을 떠났다. 시용고를 인계받은 묘고는 부담스러운 짐을 떠맡아 적지 않게 당황했다. 스승이 없는 마당에 무 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서성거렸다. 그러나 시용고의 전신이 온통 진흙과 피투성이로 뒤 범벅이 된 걸 보고 우선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 목욕이나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시용고는 꼽추가 해법(解法)을 걸어놓고 갔으나 너무 호되게 당한 끝이라 아 직껏 혼수상태에서 께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묘고는 정신없이 축 늘어진 시용고를 암자 곁 시냇가에 옮겨다 놓고 단약을 물에 개어 먹일 참 으로 약실에 잠깐 들어갔다. 그녀가 암자로 되들어간 사이에 공교롭게도 이곳을 지나치던 요마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바로 사남계의 편지를 받고 무산을 떠나 고파령으로 가던 풍오였다. 풍오는 일찍이 안탕산(雁蕩山)에서 도룡사태한테 크게 혼줄이 난 적이 있는 작자였다. 그때 겨우 목숨을 부지해 도망친 후로 도룡사태와 다시 맞닥뜨릴까 보아 늘 전전긍긍하면서 피해다니곤 했 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무서운 상대가 이곳 낙봉산으로 옮겨와 살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있 었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멀찌감치 다른 길로 돌아서라도 피해갔을 것이다. 풍오는 낙봉산을 멋모르고 지나치다가 무심결에 암자 곁 시냇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신 수(神獸)를 발견했다. 희한한 짐승이로구나 싶어 그는 자세히 볼 요량으로 검광을 거두고 지상에 내려섰다. 내리고 다시 보니 짐승 곁에는 피투성이가 된 여자 한 명이 누워 있는데 아름답기 짝 이 없다. '이게 웬 떡이냐!' 색심이 불끈 동한 풍오는 살금살금 여자가 누워 있는 곳까지 접근했다. 슬쩍 나꿔채 가지고 으 슥한 데로 옮겨다가 흠씬 주물러 볼 참이었다. 그런데 좋은 일에 액운이 덮치는 격으로 느닷없이 훼방꾼이 나타났다. 이제 막 여자를 나꿔채려 는 찰나, 풍오는 문득 귓결에 뇌성벽력처럼 울리는 파공음을 들었다. 그 소리야말로 풍오가 전전 긍긍 피해다니던 도룡사태의 비검이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아뿔싸, 이게 웬일이냐! 하필이면 그 원수 같은 할망구가 여기 나타나다니, 큰일났다!' 혼비백산을 한 풍오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은신술의 구결을 맺었다. 천만다행으로 눈치 빠르고 손이 잽싼 그는 도룡사태가 당도하기 직전 겨우 형체를 감출 수 있었다. 도룡사태는 사마외도의 인물과 마주쳤다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손을 쓰는 인물이다. 그런만큼 어지간한 요마들에게 있어 그녀는 항상 공포의 대상이 되어왔다. 하지만 근년에 들어 도룡사태 역시 불 같은 성미를 누그러뜨리고 웬만한 일에는 참견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암자 근처에 이단의 요물이 대담하게 숨어서 엿보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 런만치 유유자적 암자 뜨락에 내려서서 주변도 살펴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 없는 동안에 별일 없었느냐?" 암자 뜨락에 몸을 감춘 풍오의 귓전에 그 지긋지긋한 늙은이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사부님. 별 일은 없었습니다만, 손님 두 분이 다녀가셨습니다....." 아마 대답하는 것은 도룡사태의 제자인가 보다. 풍오는 전전긍긍 손에 땀을 쥐고 긴장했다. 묘고는 스승에게 꼽추와 악문이 찾아왔던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시용고란 여인을 맡겨놓았다 는 것, 또 도룡사태에게 전하라는 말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스승과 제자가 묻고 대답하는 사이 여 지껏 잠들어 있던 신수가 낯선 사람의 냄새를 맡고 깨어났다. 으르렁!..... 산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용음(龍吟)을 토해낸 신수는 그 무지막지하게 뻥 뚫린 코를 벌름 거리면서 어슬렁어슬렁 낯선 침입자를 찾기 시작했다. 풍오는 그만 간이 콩알만해졌다. 짐승 한 마리쯤이야 제아무리 사나운 놈이기로소니 어떻게 처 치할 수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암자 안에 있는 강적이다. 만약 도룡사태가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를 듣고 쫓아나오는 날엔 상상하기도 싫은 지겨운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달아나자!...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풍오는 어슬렁어슬렁 자기쪽으로 다가오는 짐승을 바라보면서 황급히 둔법을 일으켰다. 한데 일 이 잘될려고 그랬는지 공교롭게도 풍오가 은신술을 부렸을 때 너무 서두른 끝에 시용고마저 감싸 가지고 형체를 감추고 있었다. 그 덕분에 둔광을 일으키자마자 풍오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하나 얻게 된 것이다.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진 시용고가 자기 둔광을 타고 함께 떠오르자, 다급하던 풍오는 처음에는 질색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고 그대로 날아갔다. 그는 시용고를 도룡사태가 바로 거두어들인 제자인 줄로만 알았다. '오냐, 좋다! 요것이 그 원수 같은 할망구의 제자년이라면 마침 잘 걸렸다. 내 요것을 끌어다가 흠씬 주물러 터뜨려서 걸레쪽을 만들고야 말리라. 그럼 지난날에 당한 분풀이도 되겠지! 흐흐.....' 풍오는 음흉맞게 웃으면서 하계를 굽어보았다. 으르렁! 이제 갓 자기가 은신하고 있던 장소에 당도한 짐승이 울부짖는 게 위에서 보니 손가락만하게 보 였다. 그는 시용고를 품은 채 쏜살같이 낙봉산을 벗어났다. 신수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놀란 도룡사태와 묘고가 뛰쳐나왔을 때는 암자 곁 시냇가에 눕혀 놓았던 시용고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분명 여기에 눕혀놓았는데!... 이상합니다." "아마 저절로 깨어나서 달아난 모양이로구나....." 성미는 불 같지만 생각이 단순한 도룡사태, 모처럼 부탁받은 사람을 잃어버려 내심 꺼림칙하면 서도 한편으로는 귀찮은 두통거리가 없어져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는지라 더 이상 찾을 생각도 않 고 그냥 암자로 들어가 버렸다. 위기를 벗어난 풍오는 혼자서 낄낄 껄껄 시시덕거리며 신바람나게 치달렸다. 도중에도 간간이 계집의 포동포동한 살결을 쓰다듬어보면서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 아닌가? 도룡사태의 제자년이라면 곰보 째보라도 갈기 갈기 짓밟아버릴 터인데, 요것은 게다가 상판도 절색에 몸매마저 기막히다. 그는 마구 치달렸다. 이윽고 한 군데 으슥한 계곡을 발견하자, 풍오는 소리없이 내려앉았다. '이만큼 후미진 골짜기라면 도룡사태가 아니라 옥황상제도 찾아오기 어렵겠지. 여기서 한바탕 흐드러지게 일 좀 치르고 보자꾸나! 어디서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이토록 피투성일까? 우선 쌍판 부터 씻어줘야겠다. 그래야 깨끗하게 손을 대지! 흐흐흐.' 차고 있던 표주박을 냉큼 끌러 들고 샘물을 떠다가 계집의 얼굴 핏자국을 쓱쓱 닦아놓고 보니, 웬걸! 이건 아예 천상의 선녀가 아닌가? 두 눈이 화등잔만해진 풍오, 저도 모르게 군침을 꼴깍 삼키고는 찬찬히 계집의 몸매까지 구석구 석 옷지락을 들쳐가며 쓰다듬어 보았다. 풍만하고도 매끈매끈 윤기도는 살결에 손끝이 미끄러질 지경이라, 그는 불끈불끈 솟구쳐 오르는 욕정에 겨워서 환장할 것만 같았다. '요걸 어떻게 요리한다? 깨워 가지고 펄펄 뛰는 재미를 보는 것도 괜찮을 텐데... 아니야, 제 정 신을 차리면 죽어라고 앙탈을 부릴 거야. 발악하는 년을 주무르려면 얼마나 애를 먹겠나? 혀라도 깨물고 죽는다면 큰일이지. 옳다, 우선 미혼향(迷魂香)으로 죽지 않을 만큼 기력부터 뽑아내고 다 시 미약(迷藥)을 써서 최음(催淫)을 걸어놓기로 하자. 제깐년이 그 지경에 맛을 보았다간 발악은 커녕 좋아라고 미쳐 날뛸 게다!' 그러나 풍오의 기대는 어긋났다. 아니, 미혼향을 쓸 것도 미약을 먹일 필요조차도 없었다. 제풀 에 깨어난 계집은 앙탈은커녕 스스로 발정한 암캐모양 몸을 던져오는 희대의 색녀였던 것이다. 시용고로부터 전후 사정 시말을 듣고 나서 풍오는 거침없이 덮쳐들어 갔다. 계집의 몸뚱이는 실로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두 남녀가 한데 어우러져 뒹굴던 골짜기는 감미로운 교성, 신음소리, 환희에 벅차 부르짖는 고함소리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기운이 다 빠질 정도로 한바탕 흐물흐물 놀아난 계집과 사내는 물에 풀린 아교처럼 서로 찰싹 달라붙은 채 여전히 떨어질 줄 몰랐다. "어때?" "좋아요, 세상에 처음 교주님 같은 분을 만났어요. 정말 난생 처음 겪어본....." "그래, 우리는 동문 사형제간이나 마찬가지야. 언제든지 어울릴 수 있어." "제발 저를 떼놓지 마세요." "아무렴!" "해가 저무네요....." "이제는 슬슬 떠나야지?" "아녜요. 우리 어디 동굴을 하나 찾아서 오늘밤을 지새도록 해요." "그것도 좋겠군!" 두 사람은 골짜기를 더듬어 밤새울 만한 동굴 하나 찾아가지고 함께 들었다. 날이 훤하게 밝아 오도록 사내와 계집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낮에 미처 못 다 푼 여흥을 흠씬 즐긴 것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튿날 새벽, 동굴을 벗어나온 시용고는 주변의 경치가 사뭇 눈에 선 것을 느끼고 풍오에게 고 파령으로 갈 길을 물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엄청 나게 먼 곳까지 끌려온 사실을 알고 적지 아니 놀랐다. 두 남녀는 정겹게 검광을 일으켜 탔다. 이제 손에 손을 맞잡고서 고파령으로 가는 것이다. 시용고의 동부 앞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풍오는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시용고의 귓전에 소 근소근 몇 마디 당부를 했다. "이봐요, 우리가 동굴에 들어가거든 사남계나 다른 사람한테 그 꼽추 얘길랑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요. 따라서 내가 도중에 그대를 구해주었단 말도 해선 안 되겠지. 그저 오다가다 우연히 운로 (雲路) 상에서 만났다고만 하면 되겠는걸." "알았어요." 시용고도 선뜻 응락했다. 그녀로서는 풍오가 도룡사태를 보고 혼비백산이 되어 줄행랑친 줄이야 까맣게 모른다. 그런만큼 그가 언간생심 꼽추노인과 맞상대거리도 못된다는 사실조차 알 까닭이 없다. 사내의 기막힌 방술(房術)에 홀딱 미쳐버린 그녀는 풍오가 처음 만났을 때 '... 법보와 비검을 한 꺼번에 쏘아날려서 그놈의 원수와 꼽추를 당장 쫓아버렸다...'는 허풍을 참말인 줄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하물며 만나자마자 댓바람에 눈이 맞아 살을 섞고 분탕질을 쳤으니 남한테 제 입으로 어 찌 발설하겠는가 말이다. 그녀는 사내가 자기와 정을 통한 사실이 온향교주 체면을 깎는 짓이라 생각해서 말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풍오는 한술 더 떠서 그녀한테 자기와 고파령 동부에 먼저 와 있다는 사남계(史南溪), <음양렴 자(陰陽殮子)> 오봉(吳鳳), <토아신(兎兒神)> 예균(倪均) 따위 패거리들과 전부터 기탄없는 사이 임을 설명해 주고, 이들과도 너나 할 것 없이 마음내키는 대로 즐길 것을 권유해 보려 했다. 그래 야만 훗날 그녀가 두고두고 자기한테만 미쳐서 매달리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그러나 동부어구에까지 당도하고 보니 차마 혼음동숙(混淫同宿)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아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조금만 주물러 주면 열 마디 백 마디 자기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순종할 것을 구태여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을 알았다면 풍오가 그토록 세심하게 우려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여하튼 시용고와 풍오는 서로 정겨운 눈짓을 주고받으며 무언의 약속이나 하듯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동부 문에 들어섰다. 안에는 원래부터 있던 패거리 말고 또 새로운 화산파 인물이 당도해 있었다. 화산 문하에서도 실력 높은 고수로 손꼽히는 <옥저진인(玉杵眞人)> 금침자(金沈子)가 합류한 것이다. 금침자 역시 옥처럼 고운 상판에 주칠한 듯 붉은 입술로 여러 계집을 녹여본 색도(色徒)였다. 좌중의 인물 가운데 <장비신마(長臂神魔)> 정원규(鄭元規)만이 풍오와 초대면 인사를 나누었을 뿐, 나머지 패거리들은 하나같이 구면인 데다 또 풍오의 기막힌 실력을 익히 아는 터라, 뜻밖의 응원군에 박수갈채와 환호성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대충 인사가 끝나고 자리를 정하자, 요마의 패거리들은 의기투합, 본색을 드러내고 매일같이 벌 거숭이로 춤추고 노래하고 번갈아 계집들을 바꾸어 가면서 질탕하게 열락(悅樂)에 빠졌음은 굳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풍오의 생각이 한갓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사남계가 증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한 전령들은 당초 동쪽, 서쪽 양로(兩路)로 갔었고, 또 초 빙을 받은 인물도 거의 모여들었다. 다만 남쪽 방면으로 떠난 전령만이 아직껏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전령은 초빙대 <신행두타(神行頭陀)> 법승(法勝)이란 돌중인데, 사실 이 자는 특출한 장기도 별로 없거니와 비검술 역시 변변치 못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남한테 뒤떨어지지 않는 게 있었다. 법승은 승려생활을 하던 중 우연치않게도 <일월분린경(日月奔璘經)>이란 도서(道書) 를 손에 넣고 자기 나름대로 <칠성둔법(七星遁法)>을 익혔는데 그 절기가 자못 볼 만한 것이었 다. 즉 그는 일월(日月)이나 오성(五星)의 광채를 빌어 타고 순식간에 천리길을 내달릴 수 있는, 비 둔(飛遁)능력을 지니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날아다니는 재간덩어리였다. 사남계가 그를 지목하고 자기 패거리를 끌어들인 의도는 칠성둔광의 절기를 써서 육지(肉芝)를 훔쳐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길 만했기 때문이었다. 법승은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하는 그 비행 절적의 신기(神技) 하나만으로 특별히 사마외도의 고수에 끼여들었다. 그는 사남계한테서 남쪽 지 방 해역(海域)으로 가서 지명한 두 인물을 설득시켜 직접 데려오라는 특명을 받고 떠났는데 아직 껏 소식이 없는 것이다. 당초 사남계의 계산은 법승이 떠난 목적지가 비록 멀기는 해도 누구보다 제일 먼저 돌아오리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동쪽과 서쪽으로 파견했던 전령들이 모두 다 돌아오도록 초빙한 사람은커녕 일껏 보낸 법승조차도 꿩 구어먹은 소식인지라 사뭇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법승은 나흘 밤낮이 지나도록 좀처럼 돌아올 줄 몰랐다. 사남계는 법승이 비록 겁많고 담작은 위인인 줄 알지만 그래도 은형둔적(隱形遁跡)에 뛰어난 재 간을 가졌으니까 도중에서 쉽사리 적한테 사로잡히거나 죽음을 당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더구나 그가 초빙하러 간 인물은 남해(南海) 복우도(伏牛島) 산호와(珊瑚窩)의 산선(散仙) <남해 쌍동(南海雙童)> 진간(秦艮)과 진태(秦兌) 두 형제인데 이들 실력 또한 그리 녹녹하지 않으므로, 오는 도중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났을 리는 천부당만부당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변고일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법승이 돌아오지 않는 까닭 을 알 수가 없었다. 음탕한 요마들은 거반 악업이 꽉 들어차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깊이 뒤 돌아 반성할 생각이 없다. 이들은 탐색대조차도 내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미파의 하룻강아지들 제법 얄팍한 실력은 갖추고 있지만 그래봤자 산토기가 사자한테 덤벼드는 격이다. 이런 조무라기들을 가지고 우리들 이 전력을 몽땅 기울여야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 에라 좋다! 남해쌍동은 와도 좋고 안 와 도 그만이다. 우리끼리 너끈히 해치우자! 기왕에 출동날짜까지 정했으니까 증원군이 모두 모이지 않더라도 그 냥 습격을 하는 거다. 시간은 쉽사리 지나갔다. 어느덧 닷새째가 되는 날 자정이 왔다. 음소당(陰素當)도 자기 약속대 로 날짜, 시간 맞추어 고파령에 당도했다. 사실 말이지, 그녀 자신도 고파령 패거리들처럼 색계(色 戒)는 범하고 정욕을 끊지 못한 처지이기는 하나, 이 잡것들과 같이 혼음동숙, 마구 붙어 뒹구는 부류가 아니다. 그녀는 냉정한 눈으로, 끝까지 보아도 모른 척 방관하는 입장에 섰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얼빠 진 요마들의 최후를 어림하면서 자기 처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냐, 너희 잡것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거리낄 것 없이 온갖 추잡을 다 떨어봐라! 그 따위 난잡 스런 정신을 가지고 아미파를 습격했자, 한때 승리야 거두겠지만 결국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 으키고 아귀다툼하다가 적의 협공에 걸려 좋은 결과는 결코 못 보고 말 것이다. 이런 판에 내 어 쩌다가 끼어들었을꼬? 일찌감치 기회를 봐서 뺑소니칠 궁리나 해놓아야겠다. 이 잡년놈들의 최후 가 어떨는지는 불 속 들여다보듯 뻔하지 않는가 말이다?' 속으로는 딴 궁리를 하면서도 음소당의 겉표정은 천연덕스럽기만 하다. 그녀는 사남계 패거리와 은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끈덕지게 유혹을 해도 끝끝내 뿌리치고 아귀같 이 어우러지는 음연(淫宴)에는 발도 디밀지 않았다. 드디어 출발시각이 닥쳐왔다. 수괴(首怪) 사남계를 앞세운 요마들은 용기백배, 기고만장해 가지 고 왁자지껄 시용고의 동부를 나섰다. 그리고 저마다 검광을 일으켜 타고서 일제히 아미산 비뢰 동을 향해 기세사납게 날아갔다. 가는 도중에도 습격대의 요마들은 제자기 팔뚝을 걷어붙이고 호언장담을 주고받았다. "아미파 조무라기들이 얼마나 혼비백산을 할까? 어쩌면 우리를 보자마자 까무라치는 놈도 있을 거야." "그렇구 말구! 제깐놈들 몇몇 자질이 괜찮다고 해서 고참한테 진전(眞傳)을 받았기로소니 어디 우리 상대야 될 법이나 한 노릇인가? 달걀로 바위돌 치는 격이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엄벙덤벙 대드는 놈도 있으렷다?" "고것들이라고 대비가 없을 리야 없겠지... 제발 울고불고 비는 연놈이나 없었으면 좋겠어. 난 찔 찔 우는 놈은 딱 질색이거든. 닥치는 대로 마구 쳐죽여야 속이 확 풀린단 말씀이야." "제깐놈들 대비책을 세워봤자 별 볼일 없을 걸세. 우리는 정면 공격이 아니라 야간 기습을 할 테니까." "아무렴, 쿨쿨 코박고 자는 녀석들 깨워 일으키기만 하면 되겠구만." "이번 습격은 누워서 떡 먹기일세. 육지(肉芝)는 물론이고 반반하게 생긴 년들 몇몇 살려다가 재 미 좀 흠씬 보여주어야겠어!" "그렇게 싫도록 놀고도 모자라나?" "아무렴, 새 맛이란 게 있지 않는가? 자네도 마다하지는 않으렷다?" "헷헷헷! 능구렁이 같은 녀석!" 그들은 고파령 동부를 떠나기 이전부터 상대방이 일찌감치 만반의 방어계획을 세워놓고 느긋하 게 기다릴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편 응벽애에서는 제영운(齊靈雲)을 비롯한 젊은 검선들이 주야로 경계태세를 강화시키고 있었 다. 이들은 <염선(髥仙)> 이원화(李元化)의 선학(仙鶴)을 통해 경보를 전해받은 직후, 또다시 장 교부인(掌敎夫人)의 비검전서까지 받음으로써 응벽애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진작부터 깊이 알 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응벽애 쪽에도 충분한 전력이 확보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일 믿음직스러운 금선(金 禪)과 이영경(李英瓊)은 저마다 사명을 띠고 하산하여 망창산과 백만산에서 활약중이라 도저히 응원요청을 할 형편이 못되었다. 이 정도라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진자령(秦紫玲)이 기르는 독각신취(獨角神鷲)도 현재 신니 (神尼) 우담대사(優曇大師)에게 보내져 선법(仙法)으로 날짐승의 횡골(橫骨)을 제거하는 중이다. 신조(神鳥) 강우(鋼羽)와 원성(袁星)이도 이영경을 따라서 떠나가고 없다. 이 세 마리는 비록 인간보다 못한 털짐승이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도행을 닦고 영기(靈氣)가 깊 이 트인 놈들이라, 적정(敵情)을 탐지하거나 동부를 경계하는 파수꾼으로서 어떤 때는 사람보다 더욱 쓸모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응벽애 측은 적지 않게 유능한 조력자를 외지에 내보내놓고 있는 셈이었다. 이제 습격해 올 적의 세력은 막강하다. 그러니만치 이들과 맞서 싸워 응벽애를 지켜야 하는 제영운의 책임도 중대했다. 그녀는 추호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제영운은 비뢰동(飛雷洞)에 기거하던 염선의 두 제자 석기(石奇)와 조연아(趙燕兒)를 청해다 놓 고 다시 전체 동문까지 불러 모은 다음, 신중하게 장차 대응해 나가야 할 작전계획을 의논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각각 수행해야 할 임무를 주어 수비태세를 갖춘 후 별도로 구지선(具芷仙)을 시 켜 육지(肉芝)를 데려오게 했다. 그녀는 육지에게 엄한 분부를 내렸다. "이 응벽애 선부는 머지 않아 이단의 무리에게 침범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너와 여기 감추어져 있는 진귀한 보물들을 탈취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진작부터 장교진인의 분부를 받 들어 방비벽을 더욱 강화시켰으니까 별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너는 구화산에서 이곳 응벽 애로 옮겨지기는 했으나 그전부터 천 년의 오랜 세월 도를 닦았으므로 여간해서 남의 손에 잡히 지 않는 줄은 잘 알고 있다. 더구나 너는 그 귀중한 피로 여러 차례 우리 동문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너를 동문이나 친구처럼 대해주었던 것이다. 기왕에 너를 남다르게 대해왔던 만큼, 네가 지닌 선체영질(仙體靈質)을 탐내지 않고 오히려 너를 도와서 성도(成道)하도 록 만들 계획이었다. 한데 너는 우리들의 사랑을 빙자하여 때때로 본분을 망각한 행동을 저질렀 다. 지난 번에는 경솔하게 미진진(微塵陣) 앞으로 나가 놀다가 양성지(楊成志)란 놈한테 잡혀 먹 힐 뻔했다. 그 때는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으리라. 어쩌면 그 재난도 기쁨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치듯, 하늘에서 너한테 경계(警戒)하라는 예시(預示)를 내린 것인지 모르겠다 만... 뒤에 우리가 돌아와 양성지란 놈과 장호아(章虎兒)녀석을 혼내주었더니, 너는 그 때부터 아 무도 널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 자만해 가지고 옛날 버릇이 또 싹트기 시작했단 말이다. 이 너른 응벽애 천지에 어딜 가나 기막힌 경치가 수두룩한데 무엇이 또 부족해서 그런단 말이냐? 내가 왜 그러는지 이제 말하겠다. 어제 주문동생이 여영남의 옷가지를 가지러 해탈암에 다녀오는 도중 우 연하게 너 혼자서 전동(前洞) 문 밖에서 산토끼를 쫓으면서 노는 걸 보았다더구나. 이 말은 틀림 없는 사실이렷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공행(功行)을 닦은 선초(仙草)가 아직도 장난꾸러기라니, 내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구나. 만약 어쩌다가 바깥에서 사마이단(邪魔異端)의 무리와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당장 너를 와작와작 씹어먹고 말 것이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흔 적도 없이 요마의 뱃속으로 녹아 들어간단 말이다. 그 때야 후회해도 별 수 없지!... 이제 앞으로 적의 공격은 더욱 치열해질 터, 너를 안전하게 보호할 계획을 짜놓았다. 지금 네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은 비록 이 응벽애에서도 제일 아름답고, 또 먹을 선과(仙果)도 넉넉한 장소이기는 하나, 그래도 적의 습격에서 완전히 보호되는 안심할 만한 곳은 못된다. 이번 응벽애를 쳐들어오는 요 마들은 하나같이 비상한 재간을 지닌 놈들이다. 어쩌면 환형은신술(幻形隱身術)에 뛰어난 놈이 잠 입해 가지고 너를 훔쳐갈지도 모른다. 그 장소는 놈들한테 쉽사리 눈에 뜨일 게 분명하다. 내 방 금 자령 아우와 의논해 본 결과, 너는 매일같이 응벽애 구석구석 쏘다닐 대로 다닌 만큼 우리들 보다 지리를 더 잘 알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네 스스로 몸을 숨길 만한 비밀장소를 하나 찾아 낸다면 우리가 네 뿌리를 그리로 옮겨다 심어줄 것이다. 그리고 자령아우님이 다시 술법으로 적 의 눈길을 가리워 준다면 별 탈은 없으리라. 그 술법은 적을 격퇴시킨 후에야 풀릴 것이므로, 너 는 함부로 뿌리를 벗어나 돌아다닐 수 없게 될 것이다. 너는 영성(靈性)이 깊이 통달한 놈이니까 충분히 예측하고도 남을 것이다. 만약 너 스스로 사고를 저지르지 않고 좀더 조심해서 동부를 벗 어나지만 않는다면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겠다만, 네가 정녕 자신이 없다면 순순히 우리 말대로 따라서 큰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주어야겠어." 육지는 제영운이 하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사뭇 놀랍고 의아스런 기색을 띠더니, 나중에 자신을 가두어두어야겠단 말이 끝나자 좋다 싫다 의사표시도 하지 않고서 대뜸 신약란에게로 쪼르르 달 려갔다. 그리고는 약란의 옷자락을 잡고 바깥으로 나가자는 듯 끌어당겼다. 사람들은 육지란 놈이 진작부터 자신을 숨길 만한 장소를 보아놓고 있다가 이제 신약란더러 그 리로 가자고 보채는 줄만 알았다. 하기야 육지는 금선을 빼놓고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신약란과 이영경, 구지선 셋뿐이니까, 이들이 없는 마당에 신약란을 지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큰언니, 어떻게 할까요?" 약란이 물었다. "끄는 대로 가봐. 우리도 뒤따라갈 테니까." 그런데 약란을 잡아끌던 육지란 놈, 다른 사람들이 덩달아 일어서는 걸 보더니, 약란의 옷깃을 잡고서 두 손으로 안 된다는 듯이 마구 내뛰는 게 아닌가? 더구나 한 사람 한 사람 앞으로 돌아 가며 다가가서는 뒤쫓지 말라는 것처럼 떠밀어 막기까지 한다. "어쩌자는 거야? 왜 그래?" 젊은이들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 앙증맞은 놈이 떠다미는 게 재미있어 일부러 밀리는 시늉 까지 하면서 낄낄거렸다. 육지의 행동을 잠자코 주시하던 제영운이 그놈한테 물었다. "네가 이러는 것은 약란동생하고만 가겠단 뜻이지? 우리는 따라가지 말고?" 육지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제영운은 육지에게 무슨 딴 생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토록 다급하게 설친다면 무엇인가 약란하고 서둘러 할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제지한 채 약 란에게만 혼자서 따라가 보도록 분부를 내렸다. 그제서야 육지란 놈은 좋아라고 입을 딱 벌리더니 희디희고 매끄러운 두 손을 활짝 펼치고선 약 란의 품속으로 팔딱 뛰어올라 갔다. "이야, 이야!" 약란이 품에 안아들자, 육지는 그 앙증스런 손가락으로 바깥쪽을 연달아 가리키면서 나가자고 보챘다. 신약란은 사형들에게 눈길을 한 번 던지고 나서 육지를 안은 채 석실 밖으로 나갔다. 육 지란 놈한테 동행을 거절당한 나머지 젊은이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한담이나 나눌밖에. 진자령은 방금 제영운이 한 말을 곰곰 되새겨보더니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주문한테 말을 걸 었다. "주아우, 어제 해탈암에 다녀오실 때 어디쯤에서 육지를 보았지? 정말 그놈이 산토끼를 쫓고 있 던가? 토끼는 어떻게 생겼습디까?" 산토끼가 어떻게 생겼다니, 세상에 그런 멍청한 질문도 다하는 구나 싶어 주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때 저는 검광이 내려가는 속도가 몹시 빨라서 얼결에 곁눈질로 흘낏 보았을 뿐이에요. 육지 란 놈이 쫓던 짐승은 온몸뚱아리가 눈처럼 새하얗더군요. 몸집 크기도 토끼만 했고... 그놈은 자세 히 볼 새도 없이 번쩍하더니 풀속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나는 산토끼가 문제가 아니라 육지란 놈 이 걱정되길래 뒤따라 풀 속에 뛰어드는 걸 냉큼 잡아서 안고 돌아왔지 뭐. 그놈이 잘못되면 큰 일나거든요. 지금 정(正), 사(邪) 어느 문파치고 이런 영물을 잡기 위해 산지사방 사람을 풀어놓지 않는 곳이 없는데, 그 가운데 누구 눈이라도 뜨여 봐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잡아먹으려고 덤벼들 게 아녜요? 그놈이 무슨 재간으로 막아내겠어? 꼼짝 못하고 사람 손에 잡히기 십상이지요. 한데 육지란 놈, 정말 웃기더군요. 예전에 금선동생이 구화산에서 그놈을 잡았을 때 말야, 내가 동생더 러 그놈을 산 채로 씹어먹으면 도행닦는데 크게 보신이 될 거라고 귀띔을 해준 적이 있었거든요. 물론 금선동생은 거절했지만. 그런데 육지란 놈은 내 말이 몹시나 분했는지 꽁 하고 비틀어져서 영영 풀지를 않는 거예요. 지금도 날 원수처럼 미워하고 끝내 친해지지 않잖아요. 그래서 어제도 그놈을 안고 돌아오는데 옛날처럼 땅 속으로 뚫고 들어가지는 않을 정도였던지 내 손만을 마구 뿌리치면서 발버둥을 쳐댔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지만 '이약, 이약!' 악을 쓰고 뒤쪽으로 손을 마 구마구 휘젓는 거야. 무슨 말인지, 어쩌자는 것인지는 모르겠기에 나도 모른 척 무시하고 그냥 안 고 돌아왔지요. 와서는 큰언니를 보자마자 또 몇 마디 지껄이더니 땅바닥에 놓아주자마자 그냥 뺑소니를 치지 뭐야." 진자령은 주문이 말한 대목 가운데 후반부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듯 말이 끝나기가 무 섭게 거푸 물었다. "그 짐승은 아우도 뚜렷하게 못 보신 모양인데 어떻게 산토끼라고 단언할 수 있었지?" 또 산토끼 얘기다. 주문은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내 오늘 자령언니한테 뚱딴지 같은 산토끼 가지고 입씨름하게 생겼네. 그게 뭐 그리 중요 하지요? 방금 내가 말했잖아요. 그놈은 새하얀 털을 가진 토끼란 말예요. 풀들이 너무 길게 자라 서 몸뚱아리 전체는 다 보지 못했지만 집토끼보다는 훨씬 큰 데다가 새빨간 눈알을 가졌단 말씀 이야. 하얀 털에 빨간 눈알, 집토끼보다 큰 놈이라면 산토끼가 아니고 뭐겠수?" 진자령이 미처 대꾸도 하기 전, 제영운은 곁에서 듣다가 무슨 의도가 있으리라 여겼던지 자령한 테 물었다. "주문아우님은 비록 공력면에선 자못 정진하고는 있지만 세상 경험이나 견문지식으로 치자면 자 령아우님보다 훨씬 뒤떨어져요. 방금 아우님 말씀을 듣자니 이 응벽애 동부 밖에 또 무슨 영물이 라도 하나 나타난 듯싶은데, 그런 생각 때문에 묻는 거야?" "큰언니 말씀대로예요. 여러 사매들, 생각 좀 해보세요. 저 육지야말로 천지간의 빼어나고 맑은 영기를 타고난 선초가 아니겠어요? 게다가 천년 도행까지 쌓은 놈입니다. 그런만치 아주 그윽하 고 깨끗한 곳이 아니면 발도 들여밀지 않거든요. 천성이 조용하고 깨끗한 걸 좋아하는 놈인데 어 떻게 지저분한 들짐승 따위와 어울리겠어요? 더군다나 영특하기는 하면서도 담이 작아 겁먹기 잘 하는 놈이라서 별것 아닌 풀벌레 한 마리만 보아도 놀라 쩔쩔매는 판인데 하물며 펄펄 날뛰는 산 토끼를 어찌 감히 쫓았단 말입니까? 방금 그놈이 약란사매를 끌고 나간 기색이나 또 어제 주문한 테 잡혀올 때 설명을 들어보건대, 그 짐승은 절대로 무슨 산토끼 따위가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는 소우(小牛)나 백마(白馬) 같은 영물이라야 맞습니다. 그러니까 육지와 동류(同類)가 아니라면 천지 간에 새로 나타난 영물이보(靈物異寶)임에 틀림없다는 거죠. 큰언니께선 그놈이 담대하게 제멋대 로 놀러다닌다고 꾸짖으셨지만, 제가 보건대 그놈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간 것은 절대로 아무 까 닭없이 한 짓은 아닙니다. 또 우리들이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막은 것도 필경 까닭이 있을 겁니다. 잠시 후면 약란사매도 올 테니까 그때 분명한 사실이 밝혀지겠지만, 육지가 지금 사매를 데리고 숨을 장소를 찾으러 나갔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진자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약란이 육지를 안은 채 돌아왔다. "이야... 이야!... 이야!" 육지는 그 조그만 두 손으로 약란의 목덜미를 당기면서 쉴새없이 무슨 말인가 주절주절 지껄여 댔다. 말 뜻이야 알 수는 없지만 사뭇 실망한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사람도 선초도 손에는 아무 것도 들린 게 없이 텅 비었다. 주문이 제일 먼저 물었다. "난매, 방금 육지가 정말 동생을 데리고 작은 백마를 찾으러 갑디까?" "아니, 언니들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약란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서 반문했다. 주문이 자령의 말을 되풀이해서 들려주자, 그녀는 사 뭇 낙심천만,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거 비슷하기는 한데 아깝게도 한발 늦었지 뭐예요? 게다가 내가 멍청이 같은 짓을 해서 그놈 을 놀라 달아나게 만들고 말았죠. 선사(仙師)께서 가르쳐 주신 술법으로 막아보려고 했지만 놓쳤 어요. 방금 자령언니가 하셨단 말씀을 듣고 보니, 그 백마는 틀림없이 육지하고 동류였어요." "어떻게 생겼는데 그래? 자세히 말 좀 해봐." "저도 처음에는 육지가 절 데리고 은신처를 찾으러 가자는 줄만 알았죠. 그래서 이놈을 안고서 바깥으로 나갔더니 웬걸, 응벽애 밖으로 통하는 길을 가리키지 뭐예요. 그래도 무슨 연유가 있겠 지 싶어 그 길을 따라갔죠. 거기 가서는 또 절벽 꼭대기를 손가락길하길래 검광을 일으켜 타고 올라갔어요. 동부(洞府) 밖을 벗어나더니 곧장 옛날에 영경아우가 아버님의 병환을 고치겠다고 살 을 베어내려던 암석 밑으로 안내하더군요. 암석 아래 당도하자 육지는 갑자기 버둥거리더니 땅으 로 내려서서는 제 손을 잡고 엎드려 숨으라는 시늉을 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엉거주춤 하는 사이에 육지는 벌써 깊숙한 풀섶 속으로 뛰어들지 않겠어요? 물론 저도 뒤쫓아갔죠. 더듬더 듬 풀섶을 헤치고 나가다 보니 웬 토끼만한 놈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랐어요. 그래도 얼른 소수라둔법(小修羅遁法)을 써가지고 육지까지 도매금으로 제압했지요. 이젠 꼼짝 못 하게 잡았구나 싶더군요. 제가 둔법을 부리는 찰나, 육지란 놈은 어느 틈에 그 짐승의 등에 올라 타면서 '이야, 이야!' 두어 번 부르짖더군요. 그러더니 그놈은 느닷없이 뒷발질로 연쌍비(燕雙飛) 흉내를 내더니 올라타던 육지를 땅바닥에 메다꽂는 게 아닙니까? 그리고는 휙 돌아서서 물어뜯으 려고까지 하더군요. 저는 육지가 다칠까 봐 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댓바람에 비검부터 쏘아 날렸죠. 사실 그놈을 해칠 뜻은 눈꼽만치도 없었고 그저 육지를 보호하겠단 생각에서 그랬던 거 예요. 한데 뜻밖에도 육지는 땅바닥에 굴러떨어지자마자 대뜸 그놈의 뒷다리 하나를 덥석 껴안더 니 죽어라고 놓지 않고 있었어요. 거기다 비검을 날렸으니 얼마나 기막힌 노릇이에요? 검광이 날 아들자 그 짐승은 '응아, 응아!' 하고 갓난애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하더군요. 육지가 그 울음을 듣 고 당황했는지 얼른 손을 풀기는 풀었는데, 그 짐승은 그래도 검망(劍芒)을 피하지 못하고 슬쩍 얻어맞았어요. 그놈은 '끼약!' 소리를 내더니만 곧장 흙 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렸어요. 너무 다급 한 중에나마 가까이서 자세히 좀 봐두었는데, 그 짐승은 온몸이 눈처럼 희고 옥보다도 더 반들반 들 광채가 났어요. 또 망아지처럼 길쭉한 머리통에 불꽃같이 붉은 눈이 길게 쭉 찢어져 있더군요. 지금 언니들 얘기를 듣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놈이 뒷발길질을 했을 때 말처럼 발굽은 있는데 발 톱은 없었어요. 발굽도 은빛이 번쩍번쩍하더군요. 틀림없이 망아지를 축소시켜 놓은 형상이었어 요. 육지란 놈은 그 짐승이 흙 속으로 사라져 버리자, 날 보고 마구 악을 쓰면서 펄펄 뛰지 뭡니 까? 하는 짓거리가 날더러 진작에 금법(禁法)을 부려 제압했더라면 절대로 놓치지 않았을 거라는 거죠. 또 어쩌면 제가 참견하지 않았더라도 자기 혼자 힘으로 너끈히 잡을 수 있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다시 찾아볼까 해서 두리번두리번 흙바닥을 뒤졌더니 육지란 놈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떡 가로막고선 그냥 끌고 오지 않겠어요? 아이 참, 속상해, 애당초 이 녀석이 막지만 않았더 라면 여러 언니들과 함께 가서 그놈을 잡고도 남았을 텐데, 안 그래요, 언니들?" 그 말을 듣자 육지란 놈은 심술이 뻗쳤는지 약란의 품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석실 바깥으로 나 가버렸다. "어딜 가니?" 구지선이 뒤쫓아 나갔지만 그놈은 어느 새 간데없이 사라졌다. 진자령은 다시 약란에게 그 작은 망아지 형상을 꼬치꼬치 묻고 나서 여러 동문들한테 자기 추측 을 설명해 주었다. "천지간의 생물은 모두 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미파가 번창하게 된 까닭도 온갖 영물이 귀 부해 왔기 때문이지요. 그 작은 망아지는 천년 묵은 성형영지(成形靈芝)가 아니면 하수오(何首烏) 에 속하는 영약일 겁니다. 이것들이 오랜 세월 수련을 쌓고 형체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제가 추측 하건대 육지는 그것과 동류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짝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에 그것이 외부 사람의 해침을 받을까 봐 우리 응벽애 선부 안으로 옮겨올 작정으로 찾아갔던 모양입니다. 그래 야 자기도 짝이 생기니까요. 이런 종류의 영물은 놀라는 일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그저 바라기는 그놈이 약란사매의 비검에 상처라도 입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만약 그놈이 손상을 당했다면 어지 간한 일에도 놀라서 자취를 감춰버리거나 또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아예 깊숙이 숨어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아무리 신통한 법력을 지녔더라도 그놈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지 않는 한 어쩔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건 둘째치고 우연하게 그것이 이단의 요마와 맞닥뜨리 는 날엔 죽거나 살거나 가릴 것없이 잡히고야 말겠지요. 우리들이 지키고는 있다손 치더라도 마 음만 먹으면 우리 눈을 피해 훔쳐내기란 여반장일 겁니다. 그래서야 너무 애석한 노릇 아닙니 까?" 제영운도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리고 사매들에게 대적할 계획을 하달했다. "기왕지사 틀린 걸 가지고 뭘 그래요? 아마 육지도 약란아우가 다시 찾으러 가지 못하게 할 거 예요. 어차피 영물이란 쉽사리 얻을 게 못되니까... 지금에 와서 육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밖에 나 돌아다닌 까닭을 알았고, 또 방금 단단히 그놈한테 일러둔 말이 있는 만큼, 그 깜찍한 것이 우리 한테 은신처를 알려주지 않고 혼자 슬그머니 숨어버릴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야 큰일이죠. 자령 아우님, 수고스럽지만 그놈을 안전하게 숨길 계획을 마련해 주세요. 내 생각에는 수운간(繡雲澗) 그쪽 부근의 단대(丹臺)가 어떨까 하는데, 거기는 장미사조님의 선진이 설치되어 있어서 적이 숨 어들어 온다손 치더다도 좀처럼 쉽사리 발을 디밀지 못할 겁니다. 약란아우하고 두 분이서 그곳 지형을 잘 살펴 적당한 장소를 정하고, 오늘밤 해시(亥時) 말, 자시(子時) 초 이기(二氣)가 교차하 는 시각에 육지의 뿌리를 그리로 옮겨다 심으세요. 그런 다음 술법으로 봉쇄해 놓도록. 적을 격파 한 후에 다시 제마음대로 나다니게 하면 될 테니까. 또 새로 나타난 영물 말인데, 우리가 현재 그 것까지 염두에 둘 형편은 못되지만 그래도 외부 사람이 채뜨려간다면 여간 아까운 게 아니고, 또 이단의 무리 손에 들어간다면 그들의 잔혹스런 성미로 그냥 살려둘 리가 없어요. 우리처럼 어쩌 다 그것의 정혈(精血)이 필요할 때 얻어쓰고 대신 다른 보탬을 주기를 바란다면 그야말로 몽상 (夢想)이죠. 처음 우리가 몰라서 그런 거야 할 수 없지만 기왕에 알고 난 이 마당에 천지간의 영 물이보를 사파 요마의 먹이가 되도록 수수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적의 공격을 막아 내야 할 긴박한 대사를 목전에 두고 다른 것까지 돌볼 여가는 없습니다. 마땅히 가벼운 것부터 버려야지요. 우리 전체가 그 영물의 귀추에 한눈 팔 틈이 없으니만치 여러 사제, 사매님들은 아까 결정한 대로 각자 부여받은 임무를 추진하시고, 약란·자령 두 아우님은 이 응벽애 전체를 순찰 경계하시면서 한두 가지 임무를 겸해주세요. 그 첫째가 요마의 내습이 있기 전에는 틈나는 대로 그 영물의 출현장소를 찾아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두 분 사매님은 하나같이 이단의 술법에 능 통하시니까 요행 그놈을 만나면 틀림없이 사로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 다시 근원마저 찾 아가지고 육지와 함께 심어놓으십시오. 날짜가 지나면 그것의 야성도 자연 순화되겠지요. 그렇게 만 된다면야 우리 선부에 또 하나 살아 있는 희대의 비보가 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말 약란아우의 비검에 다쳤을 경우, 사람을 보기가 무섭게 놀라 숨어버릴 테지만, 혹시 원정(元精)이 쇠진되었다면 형체를 변화시켜 떠돌아다니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뿌리가 감춰진 곳은 반드시 좀 색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테니까, 두 분의 예민한 안목과 도력으로 세밀하게 탐색해 보신다면 놓 칠 리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얻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 영물과는 인연이 없다는 결론이 되 겠지요. 장교사존께서 돌아오신 후에 말씀올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수밖에... 그것을 탐색하시더 라도 일단 경보가 울리거든 신속히 본연의 임무로 돌아와서 함께 난국을 대처하도록 거듭 당부드 립니다. 그것 때문에 대사를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예,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진자령과 신약란은 우두머리에게 공손히 응답했다. 응벽애의 젊은 검선들은 그 즉시 임무를 부여받은 대로 각자 지정된 부서로 배치되었다. 석기와 조연아 두 사람은 그 날부터 잠정적으로 내수좌공(內修坐功)을 중단하고 비뢰동 일대의 방어임무를 전담하는 한편 적정 탐지와 더불어서 유사시 응벽애 전동과 기각지세(琦角之勢)를 이 루고 협공하는 책임을 맡았다. 전동의 정상에는 장미진인(長眉眞人)이 설치한 봉쇄 영부가 있으므로 사실상 적이 잠입할 우려 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어제 육지란 놈이 동부 바깥으로 나돌아다닌 전례가 있는지라 거기에 대 한 대비책은 마련해 놓아야 했다. 육지가 제아무리 땅 속으로 뺑소니질을 잘하고 형적을 기막히게 감출 수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요마들의 상대가 될 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제영운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특별히 진자령 과 신약란을 지명해서 수시로 응벽에 전동을 순시하도록 조치했다. 동문 가운데 제일 실력이 뒤떨어진 사람은 역시 구지선이다. 제영운은 그녀를 태원동 안에 배치 하고 우건, 양성지 두 말썽꾸러기와 장남고, 호아(虎兒)남매를 단속하게 했다. 그 나머지 검선들은 모두 전투조(戰鬪組)를 편성하고 비뢰첩경(飛雷捷徑)과 후동 어구 각처에 분산, 배치되어 경계임 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누구든지 일단 적을 발견하면 그 즉시 석기, 조연아와 합류하여 적을 요격하는 한편 각 경계초소에 비검전서를 띄워 경보를 보내게 하였다. 제영운은 금명간에 적의 습적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동문사형제들의 실력도 믿었 다. 하지만 책임이 막중한 데 비해 전력(戰力)은 너무도 미비하다. 그러기에 사전 연습 훈련을 시 켜가지고 막상 실전에 돌입했을 때 당황하거나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했다. 그녀의 훈련은 강대한 적과 마주쳤을 때처럼 격렬하고도 집요하게 실시되었다. 처음부터 후동의 당직을 맡은 오문기 한 사람만 제외하고 나머지 젊은 검선들은 불철주야 제각기 배치된 거점에서 공격과 방어, 후퇴, 요격, 추격훈련에 맹렬하게 돌입한 것이다. 비뢰동의 틈입자들 困仙山 群魔驚失利 馬妙雲 二女建殊功 자령과 약란은 해시(亥時)에서 자시(子時)로 시각이 바뀌자 곧 바로 육지(肉芝)를 찾아나섰다. 육 지의 생근(生根)이 있는 곳에 가보았지만 그곳엔 없었다. 평소처럼 몇 차례 불러보았지만 결국 육 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약란은 우선 그의 원체를 소운간(紹雲澗) 부근으로 옮기자고 했다. 하지만 자령은 신중해야 한다 고 주장하며 육지가 옮겨심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에는 필시 어떤 곡절이 있을 거라며 일단은 육 지를 찾아 물어보고, 원한다면 그때 가서 옮겨도 늦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사방을 찾아보았다. 소운간의 단대(丹臺)도 전부 뒤졌건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약란이 갑자기 말했다. "혹시 위쪽으로 올라간 것이 아닐까요?" 자령은 그 말에도 일리가 있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며 곧 약란과 함께 신형을 번듯 날려 위쪽을 살폈다. 그곳엔 영운 혼자 서서 주위 형세를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자령이 육지를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영운이 대답했다. "해시(亥時)초부터 여기 쭉 있었는데 육지가 바위 옆 풀속에서 부르는 것을 보았지. 그래서 그를 불러 머지 않아 요인(妖人)들이 침범해 오면 이곳은 매우 위험해지니, 돌아가서 절대 나오지 말라 고 단단히 일렀거든. 그가 내 손을 끌며 풀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자기 뜻을 굽히지 않겠다 는 표시인 것 같았어. 그래서 옮기는 것이 싫으냐고 물어보았지만 육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 며 풀속으로 사라져 버렸어. 몇 차례 불러보았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더군. 그가 사라진 길을 찾으 려 했지만 지금까지도 찾지 못하고 이렇게 헤매고 있는 거야. 아마 그 길을 통해 벌써 돌아가 버 린 것이 분명해. 그래서 막 돌아서는데 너희 둘이 온 거야. 자령 사매는 보고 들은 것이 해박하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지 의견을 말해봐." 자령이 말했다. "육지의 신기(神氣)로 보아 아마도 자신의 원체를 옮기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는 변화에 능하고 영통하니 결코 잘못되지는 않을 거예요. 앞쪽 동부는 조사(祖師)의 영부에 의해 봉쇄되어 있는데도 그는 드나들 수가 있어요. 만일 이 비경(秘徑)이 육지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통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선은 그를 찾아 물어보아야겠어요." 세 사람은 사방을 주의깊게 살폈다. 그때 자령이 갑자기 무엇을 발견한 듯 풀섶을 향해 뛰어갔다. 달빛이 흐릿했지만 혜안을 이용하 여 풀섶을 이리저리 뒤졌다. 검광을 일으켜 풀을 쓸어버리듯 베더니 갑자기 깜짝 놀란 듯 소리쳤 다. "두 분께서는 빨리 와 보셔요! 바로 이곳이에요!" 영운과 약란도 옆에서 찾는 것을 도와주다 자령의 놀란 소리를 듣고 뛰어가 보았다. 자령의 검 광이 비추는 곳엔 풀이 아주 무성하고 한가운데의 흙부분은 자령이 무심코 일으킨 비검에 의해 파헤쳐져 삼 척 가량의 토혈(土穴)이 드러나 있었다. 한 가닥 기이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전신 에 청아한 기운이 돌았다. 자령이 깜짝 놀라며 탄식했다. "이리로 달아난 게 분명해요. 정말 아까운 일이에요!" 두 사람은 영문을 몰라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자령이 말했다. "두 분 사저는 이곳을 자세히 보셔요. 여기 이 흙더미에 소마(小馬)가 지나간 흔적이 분명히 남 아 있잖아요. 그래서 이러한 향기가 남아 있는 거라구요. 이전에 그 영물은 이곳에 생근을 두고 있었는데, 아깝게도 우리가 미처 발견치 못했어요. 게다가 신사매의 비검에 잘못 부상당해 놀라 도망친 거예요. 마침 큰언니께서 이곳에서 육지를 보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영영 모를 뻔했어요. 저런 영물은 흙 속에서 자란 덕에 땅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종적을 찾기가 매우 힘 들거든요." 한참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운이 동부에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손엔 한 통의 편지를 들 고 있었는데 영운을 발견하자 대뜸 소리쳤다. "태원동에서 나와 후동(後洞)에 있는 문기언니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어요. 갑자기 금빛이 번뜩이 는 것을 발견했는데, 바로 이 서신이었어요. 사존어른의 비검전서라는 것을 알았죠. 그런데 받자 마자 금광은 이미 사라져 버렸어요. 언니, 받아보셔요." 영운은 허공을 향해 절을 한 후 서신을 펼치자, 속에 영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서신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내일저녁 축시(丑時)가 되면, 요인들이 침범해 올 것이다. 앞 쪽 동부는 장미진인이 봉쇄해 둔 곳임을 알기 때문에 결코 앞쪽으로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뒤쪽 동부를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 하다. 여러 선배 사장(師長)들께서는 모두 할 일이 있어 돌아오시지 못할 거다. 요법이 비록 대단하지만, 영운은 구천원양척으로 여러 제자들과 힘을 합하면 별 일 없을 것이야. 자영, 청삭 두 검이 합벽하는 순간이 오면 곧 적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즉, 석기와 조연 아는 몸을 온전히 보전키 어려우며, 염선의 비뢰동도 적들의 공격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이 영부 둘은 두 도동에게 주어 각자 품속에 간직케 하라. 그러면 아무리 요법에 갇힌다 하여도 생 명에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을 것이다. 육지도 재겁(災劫)이 이미 다가왔으니 딴 곳으로 옮기지 마라. 육지를 탐하여 잠입하는 적은 스 스로 목숨을 잃는 꼴이 될 테니 큰 걱정은 하지 마라. 육지가 찾고 있는 영물도 바로 수년간 형 성된 육지로써 지마(芝馬)라고 부른다. 후에 육지가 이 지마를 데려와 선부로 옮겨 그 쓰임이 매 우 클 것이니, 이후로는 육지에 대한 걱정은 버리고 적을 맞는데 치중하여라. 육지가 출입하는 길은 오부(五府)를 통하는 지름길 중에 하나로 곳곳에 영부로 봉쇄되어 있다. 다만 초목지령(草木之靈)들만이 지기(地氣)를 빌어 땅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으므로 육지는 능히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적을 상대하는 시기에 대한 지시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영운은 서신을 다 읽고 난 후, 경운, 약란, 자령 등에게 말했다. 적이 침범해 올 시기가 이미 촉 박하였고 자기의 조치가 아직 미비한 곳을 지적했다. 서신에 내일 적이 침범해 올 시간까지 명시 되어 있는 걸로 보아, 그 전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준비를 철저히 점검할 시간이 있었다. 자령더러 육지의 뿌리가 있는 흙더미를 다시 잘 다듬어주라고 일렀다. 함께 동부로 돌아가 전체 동인(同人)을 모아두고, 다시 한 번 비검전서의 내용을 전하고 그대로 행하였다. 이 날 저녁엔 서 로들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위치만 지켰다. 다음 날이 되었지만 육지가 계속 보이질 않자, 비록 비검전서에는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했지 만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각자 정신을 바짝 차리고는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인원이 적 었지만 우건, 양성지 두 사나이와 호아남매를 방 안에 남겨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령이 법술로 봉쇄하였다. 지선은 다시 동부로 돌아가 영남을 돌봤다. 이 날 황혼 무렵이 되자, 오문기가 후동을 지켰다. 비검전서에 정한 시진이 다가오자 신약란에게 특명을 내려 오문기를 도와주라 이르고 나머지는 동부에서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약란이 명을 받들어 비뢰첩경을 가로질러 후동을 향해 날아갔다. 동굴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바위 부근에서 조그만 사람이 갑자기 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 니 바로 육지였다. 두어 차례 불러세웠지만, 멈추지 않고 후딱 가버렸다. 요인이 침범해 올 통로 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육지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 즉시 검광을 일으켜 몸을 숨기고 쫓아갔다. 오문기는 후동입구에 서서 건너편 비뢰동의 석기, 조연아 두 사람과 함께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때 뒤쪽에서 약란의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육지를 붙잡아요!" 뒤돌아보는 순간 육지는 쏜살처럼 달려와 바로 코 앞까지 당도했다. 손을 들어 붙잡으려는 순간, 육지는 미꾸라지마냥 가랑이 사이로 살짝 빠져 달아나 버렸다. 두 사람은 이미 술시(戌時)가 다 된 것을 알고 적이 곧 올 것이기 때문에 감히 태만치 않고 즉 시 몸을 날려 욱지를 쫓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따라 육지는 미친 듯이 온 산을 맴돌 며 바위 속을 헤집다가 풀섶을 파헤치기도 하며 온 산을 어지럽혔다. 두 사람의 검광은 매우 빨랐지만 육지를 다칠까 걱정돼 앞을 가로막지는 못하고 다만 길목만 차 단하였다. 눈으로 육지를 쫓으면 곧 흙 속으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주위를 세심히 살피면 곧 옆에 있는 바위 틈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이런 상태로 계속 뒤쫓았지만 쉽게 잡을 수 없었 다. 이러는 사이 시간은 점점 흘러만 갔다. 약란은 마침내 지혜를 짜내 문기와 암호를 짜고는 문기더러 앞쪽에서 육지를 몰면 자신은 암중 에 목석잠종지법(木石潛踪之法)을 운용하여 몸을 숨겨 잡기로 했다. 막 법술을 다 펼쳐 신형을 감춘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문기가 멀리서 육지를 몰아오는 것이 보 였다. 이때 옆 풀숲이 미세하게 흔들려 무슨 벌레이려니 생각하고 뒤돌아보니, 바로 어제 보았던 작은 지마였다. 바위 속에서 뚫고 나온 것이었다. 육지가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니 사방을 두리번 거리는 것이 마치 숨을 곳을 찾는 듯하였다. 약란은 이런 것을 보고 기쁨에 들떠 다가오기만 기다렸다. 약란은 지마가 쥐새끼처럼 가랑이 사 이를 빠져나갈까 싶어, 진작부터 손을 펼치고 있다가 잽싸게 앞다리를 붙잡아버렸다. 작은 말은 참담한 소리를 지르며 뒷다리를 차기 시작했다. 약란은 말의 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둔법을 펼칠 것을 알고 있어, 조심스레 단단히 붙잡았다. 이때 육지도 근처까지 다가왔다. 손을 뻗어 육지마저 잡으려는데, 육지는 마치 심상치 않은 기색 을 알아차린 듯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이때 마침 오문기가 달려와 육지를 붙잡았다. 약란은 급히 법술을 풀고 몸을 드러냈다. 육지는 약란이 백마를 붙잡은 것을 보자 기뻐하며 '야야!' 소리를 냈 다. 잠시후 조용해지며 하늘을 향해 몇 차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두 사람은 멀리 동굴 쪽에서 파공음이 미미하게 들려오자 육지를 붙잡느라 그만 동부를 지키는 책임을 소홀히 한 것을 생각했다. 순간 깜짝 놀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동부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막 봉우리를 넘어서자 아래쪽의 비뢰동이 한눈에 들어왔다. 요운독무(妖雲毒霧)에 휩싸여 석기, 조연아 두 사람의 향방은 이미 알 수 없었고 검광이 날아다 니는 것만 희미하게 보였다. 자기편 동부입구엔 영운, 경운, 자령, 한악, 주문 등이 서서 각자 비 검을 날리는 외에, 영운의 손엔 구천원양척이 들려 있었다. 구천원양척은 백십 장 가량의 금광이 채로 화해 여러 동문을 보호하는 한편, 비뢰동 상공에 있는 십여 인의 요인들과 대적하고 있었다. 원래 산봉우리가 하늘을 가릴 만큼 높고 험했지만 두 사람은 육지를 쫓느라 그만 너무 멀리까지 간 것이다. 요인들이 산봉우리 쪽으로 침입했지만, 기습을 노려 형적이 기괴한 통에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망중에 적이 아직 깊이 침투하지 않았음을 보고 다소 마음이 놓였다. 요기를 뚫고 영운 일행과 뭉치려고 비검으로 몸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신형이 요운독무에 부딪기도 전에, 비뢰동 상공에서 세차게 공격하고 있던 십여 인의 적 은 약란, 문기 두 사람이 봉우리 측면에서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귀영아(鬼影兒)> 소룡자(蕭龍子)와 <철배두타(鐵背頭陀)> 오록(伍祿) 두 사람은 이때 공격에 가담치 않고 한곁에 서 있었다. 그들은 상대가 천하 절색이자 냉큼 소리질렀다. "도우 여러분, 제가 사로잡겠소이다." 둘은 잽싸게 요운을 뚫고 날아왔다. 한 사람은 반은 붉고 반은 누른 광화를 방출하며 약란, 문기 를 향해 날아갔다. 두 사람은 이들의 공격을 급히 막아냈다. 이때 <장비신마(長臂神魔)> 정원규(鄭元規)와 <분해아 향무진인(粉孩兒香霧眞人)> 풍오(馮吾)는 각자 오색미인향무(五色迷人香霧)와 화염을 일으켜 적진 을 향해 날려보냈지만, 오히려 영운의 구천원양척의 광화에 제압당해 버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절색의 미녀를 코 앞에 두고도 손도 댈 수가 없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순간 뒤쪽에서 날아온 두 여자가 각자 소인(小人)과 소마(小馬)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보자 눈이 휘둥그래지며 기뻐했다. 다른 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둘이 약속한 듯이 상대에게 퍼붓 던 화염을 거두고 재빨리 두 여자를 향해 날아갔다. <장비신마> 정원규가 좀더 빨라 길게 휘파람을 불며 양어깨를 흔들자 신형이 번듯 사라져 버렸 다. 그의 신형은 마치 두 마리 교룡처럼 변하여 수십 장에 이르는 화염을 꼬리문 채 곧바로 오문 기를 덮쳐갔다. 이와 동시에 영운 등도 약란과 문기가 육지와 지마(芝馬)를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봉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자령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잠깐, 서두르지 말아요." 여러 동문을 향해 말했다. "약란, 문기 두 분께서 화염에 휩싸일지 모르니, 제가 구해올 때까지 대사저께서는 전심전력으로 적을 막아내도록 하세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에 있던 미진기가 펄럭이자 순간 오색채운으로 즉시 변하여 요운을 마치 파도마냥 뚫고 곧바로 약란과 문기 두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약란과 문기는 마주오는 적을 향해 비검을 날리는 순간, 날아오는 열화 가운데 긴팔뚝 둘이 춤 추듯 난무하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곧바로 한 폭의 오색채운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이 날아왔다. 요인의 위력이 대단하여 손에 있는 육지와 지마를 돌보느라 자신조차 지탱하기가 힘들 었다. 이때 자령의 채운이 날아왔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급히 각자의 검광을 거두고 자령의 미진기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규와 풍오는 두 여자를 막 손아귀에 넣었다 싶어 미소가 얼굴 가득 번지는 순간, 한쪽의 채 운이 섬전처럼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그 번뜩임 후에 재차 적을 쫓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흔적 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이 얼마나 원통했겠는가! 아쉬운 마음 한량없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 고 영운 등을 향해 비뢰동으로 날아갔다. 순간 비뢰동 아래에서 두 가닥 금광이 물밀듯 치솟아 올랐다. 연이어 두세 마디의 참혹한 단말 마가 온 계곡을 울렸다. 금광은 순식간에 모든 요무를 뒤덮어 버렸다. 사남계는 강적이 출현한 줄 알고, 급히 요인들을 데리고 위로 솟구쳐 올라 둔법으로 몸을 숨겼 다. 다시 적진을 내려다보았더니 응벽후동에 있던 적들은 모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려 자취 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수십 장에 이르는 금빛 찬란한 안개가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어디서 비명소리가 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남계 일행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원래 사남계는 적의 법보, 비검의 위력에 놀라 곧바로 요인들을 시켜 천열화진법(天烈火陣法)을 설치하였었다. 이때 금빛이 솟구쳐 오는 것을 보고 적의 위계매복(僞計埋伏)임을 알고 법술로 이를 막지 않고 급히 요인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하지만 이때 석기, 조연아 두 도동을 법술로 핍박하던 <토아신> 예균은 미처 피하지 못하여 금 광에 휩싸이고 말았다. 동시에 <귀영아> 소룡자, <철배두타> 오록 등도 급히 달아났지만 미처 걸음이 늦어 금광에 꿰뚫리고 휘말려버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버렸다. 음소당은 가까이에 있다가 이들을 구하려 했지만, 오록이 정신을 잃어 상공으로 도망치지 않고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음소당은 금광의 위력을 익히 아는 터라 감히 더 이상 모험을 하지 않고 오록이 금광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적은 털끝 하 나 건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편만 세 사람씩이나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요인들의 예기(銳氣)는 한풀 꺾여버렸다. 다만 사남계와 정원규만은 분노로 이를 갈았 다. 원래 석기와 조연아는 비뢰동 앞에서 오문기와 한담을 나누고 있다가 멀리서 약란이 육지를 쫓 아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문기도 즉시 육지를 쫓아 근처 산봉우리를 향해 가버리니 조연아는 아 직 나이 어려 신나는 일이라 생각하고 같이 가서 보자고 했지만 석기가 말렸다. 처음엔 두 사람이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었다. 눈앞 에 적이 침투할 시진이 다가오자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태원동에 가서 연락을 취 하기로 작정했는데, 이때 이미 멀리서 은은한 파공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석기는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과연 눈 깜짝할 사이에 공중에서 십여 명 의 기괴한 형상의 남녀 요인들이 떨어져 내렸다. 응벽후동을 지키는 사람이 없는 지금 요인들이 들이닥쳤으니, 자신들의 힘으론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요인들이 침입하여 선부를 마구 훼손시킬까 저어하여 석기가 급히 소리쳤다. "연사제, 어서 가서 이 사실을 알려주게!" 말을 마침과 동시에 두 발로 땅을 힘껏 박차며 신검합일하여 한 가닥 백광을 일으켜 앞으로 쏘 아져 나갔다. 선부가 다행히 겁난에 처하지 않음이 하늘의 뜻인지 새로이 응벽애로 뚫린 비뢰첩경은 시용고와 <추혼차녀(追魂侘女)> 이사고(李四姑) 두 사람만이 알고 있을 뿐, 나머지 요인들은 자세한 것을 몰랐다. 이리하여 시용고, 이사고 두 음녀가 앞장서서 무리를 이끌고 왔다. 이때 석기가 적을 맞 아 날아오자 시, 이 두 음녀는 그가 바로 지난날의 그 도동임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지난 옛정이 사뭇 되살아나자 자신들도 모르게 욕정에 사로잡혔다. 이심전심, 두 요녀는 석기를 사로잡아 데리고 갈 요량으로 각자 비검을 날려 석기를 포위하였다. 욕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른 요인들에게 비뢰첩경을 가르쳐 주는 것도 깜빡 잊고 말았다. 조연아는 비뢰첩경을 통해 급히 응벽애쪽으로 달려가다가, 사형 석기가 위급한 것을 보고 다시 되돌아와 비검을 날리며 싸움에 뛰어들었다. 일단의 요인들은 적의 방해가 전혀 없이 단지 나어 린 두 도동만이 자신들과 대적하자 둘에 개의치는 않았다. 처음 멀리서 봤을 때에는 <염선>의 비뢰동이 웅위기준(雄偉奇峻)한 절경이었고, 또한 석기, 조 연아 두 도동이 동부 앞에서 날아오고 있으니 당연히 이곳이 응벽애의 후동인 줄 알고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마구 비뢰동을 향해 날아갔다. 시용고, 이사고 두 음녀는 석기, 조연아 두 도동과 상대하였다. 처음엔 쉽사리 제압할 수 있으리 라 자신한 두 음녀는 자신만만하였으나 결판이 쉽게 나질 않았다. 한참 싸움에 열중하다가 자기편을 흘깃 보니 모두 비뢰동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 아이쿠!' 뭔가 착오가 생겼구나 생각하고 다급히 소리쳤다. "그곳이 아니라 저곳이란 말이에요." 이사고의 남편인 <토아신> 예균은 처음에 시용고, 이사고 두 여인이 두 도동과 싸우는 것을 보 고도 그냥 수수방관하였다. 적이 과히 센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중 두 음녀의 심산을 알아 차리자 예균은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두 분은 잠시 물러나시오. 내가 저놈들을 사로잡겠소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입 속으로 몇 마디 주문을 외자 양팔이 점점 길어졌다. 누런 연기와 붉은 안개 가 바람을 동반하여 석기, 조연아 두 사람을 향해 날아왔다. 시용고, 이사고 두 음녀는 그가 펼치는 무공이 바로 화산파 무공 가운데에서도 가장 악랄한 파 사특 미신사화(波斯慝迷神邪火)라는 것을 알자 급히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녀들은 하릴없이 비뢰 동을 마구 들쑤시고 있던 요인들을 데리고 응벽애 후동을 향해 날아갔다. 석기, 조연아 두 도동은 두 음녀의 검광과 엉켜 한창 싸우고 있을 때 요인들이 자신들의 동부로 난입하는 것을 보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바로 그때 토끼 귀에 매의 뺨 같은 형상을 한 요인이 나타나 창연홍무를 흩뿌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역시 상황은 좋지 않다. 그때 다행히 두 음녀가 검광을 거두고는 전장에서 이탈하였다. 석기와 조연아도 감히 적을 상대하지 못하고 급히 검광만 거둔 채 응벽후동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옴쭉달싹도 못하게 연무에 갇혀버렸다. 연무에 갇히는 순간, 비릿한 내음이 코를 찌르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몸이 서서히 떨어져 내리자 전신공력을 일으켜 검광으로 몸을 보호했다. 너무 창졸지간에 당한 일이라 그만 묘일진인이 하사 한 영부를 시전하는 것을 깜박 잊어버렸다. 석기, 조연아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태원동의 제영운일행은 이미 술시가 되었지만 후동에서 아 무런 전갈이 없자 아직 요인이 당도하지 않은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악, 주문 두 사람은 조바 심이 나서 먼저 가서 동정을 살피자고 주장했다. 영운 등도 동부의 매복설치가 이미 끝났기 때문 에 먼저 가서 적을 살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주문, 한악이 앞장서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뒤따라 갔다. 동부를 나서자마자 비뢰애 위로 연무 가 가득차 있었고 문기와 약란의 행방은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석기와 조연아가 위험에 처한 상 황을 발견하기도 전에 시용고가 오륙 명의 요인을 이끌고 다가왔다. 주문, 한악은 발연대로하여 손을 펼쳐 검광을 냅다 쏘았다. <귀영아> 소룡자, <철배두타> 오록, <추혼차녀> 이사고, 시용고 네 음적은 비검을 일으켜 다가 갔다. 그러자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광화가 번뜩이며 몇 명의 절색미녀가 몸을 드러내는 것이 아 닌가! 두 가닥 검광과 맞닥뜨리자 음녀들은 이것이 예사 검광이 아님을 대번에 알아챌 수가 있었 다. <분해아> 풍오와 <장비신마> 정원규, 사남계, 음소당 등의 고수들은 뒤에서 전세(戰勢)를 관망 하며 요인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적을 보니 한갓 나어린 계집애들인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계집애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들이 내쏟는 비검은 완약하기는 유룡(遊 龍)과 같고 변화가 신묘막측한 것이다. 그제서야 적이 결코 얕잡아볼 상대가 아님을 간파하고, 지 금과 같은 전법으론 승리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사남계가 암호를 외치자 같이 있던 두 요인이 진법을 설치하기 시작하였고, 나머지 요인들은 각 자 사법이보(邪法異寶)를 시전하였다. 영운, 자령 등은 요인들이 분분히 일으키는 법보연무가 대단함을 알고 영운, 경운, 주문 등 세 사람만 비검을 날렸다. 나머지 사람은 비검을 더럽힐까 두려워 즉시 거두어들였다. 요인들은 적들이 비검을 거두어들이자, 자신들의 사법을 과신하여 득의양양해졌다. 비교적 나이 가 들어뵈는 여자가 법보낭에서 자(尺)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물건을 꺼내는 것을 보았 지만 요인들은 자만에 빠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잣대를 연무를 향해 가리키자, 아홉 가닥 금화가 일며 일단의 자기(紫氣)가 꼬리를 연해 물었 다. 금광이채가 번뜩이는 순간, 모든 요법사보를 일제히 막아내며,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하게 단 단히 붙들어 버렸다. 요인들 중에 사남계와 <장비신마> 정원규만이 자신들의 본령이 뛰어남을 믿고 이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 나머지 대부분의 요인들은 이 진산지보의 묘용조차 몰랐다. 다만 음소당만은 곤륜문하 출신으로 곤륜진전을 이어받은 터라, 비록 길을 잘못 들었지만 보고 들은 것은 많았다. 처음 여러 요인들이 연합하여 공격할 땐 쉽사리 애송이들을 제압할 것만 같았 다. 하지만 막상 맞부딪쳐 보니, 어린 녀석들이 모두 선근이 심후하고, 검술도 아미진전을 이어받 아 얕잡아볼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워낙 적들은 중과부적이라 의기양양했고, 자신 들의 법보도 대단한 위력이 있음을 과신했기에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영운이 구천원양척을 꺼내드는 것을 보자, 아직까지 본 적은 없지만 그 내력과 쓰임새는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몇몇은 조금은 움찔했다. 적이 비록 약자는 아니었지만 이 법보 하나만으로 도 응벽애를 보호해 버렸으니 구천원양척의 위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잠시후 소룡자와 오록은 자신들이 불리함을 느껴 물러나다가 우연히 육지를 데리고 돌아오는 약 란과 문기와 맞닥뜨렸다. 그 요인들은 두 여인의 미색을 탐하여 더욱더 제압하려 덤벼드니, 넷은 싸우기 시작했다. 정원규와 풍오는 약란과 문기가 손에 육지와 지마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는 쉽 사리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사로잡으려는 찰나, 하지만 자령이 미진기로 약란과 문기를 감 싸서 구해가 버렸다. 둘이는 닭쫓던 개 꼴이 된 것이다. 이때 음소당도 멀리서 보니 자령이 사용하는 것이 보상부인의 미진기라는 것을 대번 알아차렸 다. 적들이 아직 나어린 데도 불구하고 어디서 저런 기진이보를 구했을까? 암암리에 생각했지만 좀처럼 한 가닥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석기와 조연아는 적의 검광에 눌려 차츰 빛을 잃기 시작하여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조연아는 아직 순후하지 못하여 더 이상 지탱치 못했다. 석기도 요무의 비릿한 냄새에 정신이 흐릿해졌다. 다행히 아직 조금 남아 있는 검광에 의지하여 몸을 보호한 채 한걸음 한걸음씩 동부를 향해 물러났다. 순간 힘이 다하여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동구(洞口)에 솟아 있던 석유(石乳)에 도포자락이 걸렸다. 뭔가 옆구리를 꾹 찌르는 듯하자, 석기는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순간 옆구리에 있던 그 무엇이 금광을 발하자, 이제서야 묘일부인이 남긴 영부에 생각이 미쳤다. 석기는 다급한 소리로 말했다. "연사제, 교조님의 영부가 우리에게 있었어. 어서 시전하지 않고 뭘 기다리고 있느냐!" 석기의 말에 조연아도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영부를 운용하는 진언을 외 고 심력을 다해 땅 위에 내려놓았다. 이와 동시에 영부는 두 가닥 금광으로 화해 하늘로 치솟아 온 산을 뒤덮어버렸다. 요무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도리어 요인 몇 사람이 그 금빛에 죽음을 당했 다. 이 광경을 목도한 음소당, 그 금빛 찬란한 영부를 보고 바로 아미 현문선법(玄門仙法)으로 장미 진인의 도력에 의해 연성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동부에 어떤 도력자(道力者)가 매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렇지 않다면 목숨이 위험하던 두 도동이 어떻게 갑자기 저런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겠는가? 화를 당한 자기편을 구하고 싶었지만 자신도 같은 꼴이 되기 십상인지라 목숨을 내건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사남계는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잠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편은 계속해서 낭패를 당하 는데 상대는 갈수록 거세어져만 가니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게다가 금광이 일고 난 뒤, 상 대편에서 아무도 나서지 않고 물러가 버리자 분명히 동부에 어떤 매복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금광의 위력이 대단하였지만, 더 이상 뻗지 않고 일정간격만 유지하자 요법을 펼쳐 공격하면 금광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욕심이 일었다. 이렇게 생각이 들자, 일단의 요인들에게 더 이상 비검, 법보를 훼손치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각 자 요기(妖氣)를 지니고 방위에 따라 위치를 정한 뒤, <장비신마> 정원규, <분해아> 풍오 등 세 사람의 지휘에 따라 진법을 발동하여 천열화진(天烈火陣)을 펼쳤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세 차 례 신뢰(神雷)로 연성한 선천악살지기(先天惡煞之氣)로 비뢰동과 응벽후동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음소당은 요인들 중에서도 본령이 뛰어난 축에 속했지만, 진법에는 그다지 밝은 편이 못되었다. 시용고와 더불어 공중을 순시하며 적의 공격을 방비하고 아군을 도와주는 임무를 맡았다. 이렇게 공격하고 있는 동안 요인들의 생각엔 적의 수뇌인물들이 당도하지 않는 한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영부가 당년의 장미진인이 비승(飛昇)할 때 남겨둔 아홉 영부 중의 하나로 그 효용이 무궁하고 변화가 신묘막측함을 미처 깨닫지 못한 소치였다. 어찌 그들의 요법마진만으로 단기간 내에 그 영부의 금광을 없애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이처럼 의기양양, 휘파람을 불고 있었지 만 암운은 도리어 요인들의 머리 위를 짓누르고 있을 줄이야? 이 문제는 잠시후에 다시 얘기하기 로 하자. 자령이 약란과 문기를 데리고 돌아와 영운일행과 합류하자 마침내 영부가 발동한 것이다. 일찍 이 묘일부인의 비검전서에서 예언했듯이 응벽애가 겁난을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석기, 조연아 두 사람이 비록 위험에 빠져 있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 다소 마 음이 놓였다. 하지만 일촉즉발의 순간이라 어떤 착오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인지라, 각자 비검, 법보를 거두고 동정을 살폈다. 과연 경각지간에 뇌성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며 금장이 위로 치솟자, 열염채무(烈焰 彩霧)가 흩날리며 요진이 이미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선 방어 외엔 달리 상책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영운일행은 비검전서의 또다른 지시에 따라 태원동으로 돌아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만일에 대비하여 자령자매와 경운, 주문 등에게 구천원양척을 맡겨 후동을 지키라고 명하고 자신 은 약란과 문기와 함께 동부로 돌아갔다. 육지와 지마는 약란과 문기가 적과 마주쳐 위험한 지경에 빠졌을 때 품속에서 소리치며 마구 발 버둥쳤었다. 후동에 당도하여 약란과 문기가 다시 적과 싸우러 가기 위해 품에서 내려놓았다. 그 런데 이상한 것은 종전엔 그처럼 날뛰던 지마가 갑자기 온순해진 것이다. 육지가 타고 동굴 속을 마구 몰고 다녀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육지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적과 싸우기 위해 그것에만 신경을 집중시켰다. 영운은 태원동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약란과 문기에게 왜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함부로 자리를 비 웠느냐고 추궁했다. 두 사람은 우물거리며 그간의 경과를 대강 얘기했다. 영운은 한바탕 그들 둘 을 꾸지람했다. 영운은 약란과 문기를 나무란 뒤, 비검전서에 안배된 대로 두 사람에게 임무를 맡 기고 다시 후동을 향해 나갔다. 영운은 비검전서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적의 침입이 다시 예상되므로 일행들과 다시 한번 의논 하였다. 요인들이 공격이 부진한 틈을 타 필시 몰래 잠입해 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동부 안에 서 그들이 함정에 걸릴 때까지 기다리자고 제의하였다. 괜히 모험을 감행하다 자칫 실수를 저지 를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자령과 경운은 영운의 말에 수긍하는 듯하였으나, 주문과 한악은 요인들이 저처럼 마구 날뛸 때 기회를 보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어린 검선들이기에 좀이 쑤셨던 것이다. 영운도 둘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더욱이 한악은 안 지 오래 되지도 않은 데다 매 사사건건 한악의 일에 간섭만 한 것 같아 이번만은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작정하였다. 영부로 인해 온 산이 금광으로 둘러싸여져 있지만 안에 있던 사람도 열화 때문에 밖으로 쉽사리 나갈 수 는 없었다. 영운은 구천원양척을 주문에게 건네주며, 부디 조심 또 조심하라고 일렀다. 만약 조금이라도 공 적을 세운다면 쓸데없이 욕심내지 말고 즉시 돌아오라고 재삼 당부하였다. 요진의 위력도 대단하 니 만만히 볼 수 없어 구천원양척으로 몸을 보호하며 요진 속으로 들어가서 적과 싸워야만 했다. 두 사람은 영운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이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구천원양 척을 요진의 금빛안개를 향해 긋자, 즉시 아홉 개의 금빛 꽃이 일단의 자기(紫氣)를 일으키며 두 사람을 감쌌다. 금화 자기가 지나가자 금빛 요무의 꼭대기 부분이 갈라졌다가 이들이 다시 지나 자 다시 합쳐졌다. 응벽애 밖에 있던 요인들은 벌써 오래 전에 요진(妖陣)을 설치해 두었다. 하지만 적이 영부에 의 해 은폐되어 있어 감히 출전치 못하고 있었다. 열화풍뢰가 일어나는 시진이 되길 기다려 맹렬한 공격을 퍼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화산파의 고수인 <옥저진인> 금침자는 그들의 진을 지키고 있다가 아래쪽에서 금광이 출렁이더 니 갑자기 수십 장씩이나 금빛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금빛 요무가 흩어지는 곳으로 아홉 송이 금꽃과 자기(紫氣)가 날아오며 두 명의 절색미녀가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여인의 용모는 마치 선녀인 양 아름다웠지만, 아홉 송이 금빛 꽃의 위력을 아는지라 섣불리 손댈 수 없었다. 풍뢰를 운용하여 그녀들을 저지하려는 순간, 적은 오히려 금빛 자기로 전신을 보 호하여 진을 뚫고 횡하니 가버렸다. 금침자는 두 여인이 자기들을 공격하려 함을 알았다. 더 이상 방치해 두었다간 위험도 위험이려 니와 어린 계집들한테 당하다니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았다. 급히 검광을 일으켜 뒤쫓기 시작했 다. 이때 음소당은 시용고, 이사고 두 음녀(淫女)를 데리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적방을 탐지하고 있었 다. 음소당도 순간 금빛 자기가 번뜩이며 두 여자가 그 무서운 요진을 뚫고 날아오는 것을 발견 하였다. 음소당의 생각에는 젊은 것들이 전세 불리하니 아미파의 수뇌인물들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해 급 히 떠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능진인의 구천원양척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자기와 사남계 등이 버티고 있는 한 쉽사리 패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지만 한편 이런 생각 도 들었다. '저 두 년을 보고도 붙잡지 못한다면 이 음소당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 아닌가?' 음소당이 신형을 번뜩 날려 적을 공격하려는 순간, 시용고는 두 여인 중 한 여인이 지난날 손능 파를 죽인 여자인 것을 대뜸 알아보았다. 친구를 죽인 원수를 보는 순간, 두 눈에서 불이 번쩍, 앞뒤 잴 것도 없이 다짜고짜 두 다발의 자모금침(子母金針)을 냅다 던졌다. 그러나 아홉 송이 금 꽃을 향해 날아가던 열여덟 개의 금침은 마치 바다에 떨어진 조약돌처럼 잠잠, 자취도 없이 사라 져 버렸다. 시용고가 법보를 통째로 잃어버려 원통해서 팔짝팔짝 울화가 치미는데 적은 오히려 금빛꽃 자기 를 거둬들이더니 신형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신형을 드러낸 적이 이번에는 대뜸 기도 안 차게 욕 을 해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시용고는 약이 오를대로 바짝 올랐다. "우리 두 사람은 무척 심심하던 차에 놀러 나온 것이니, 곧 선부로 돌아가야 한다. 한참 신나던 중에 너희 같은 더러운 음적들로 우리의 흥취가 모두 깨어져 버렸구나! 만약 우리가 현천지보를 사용하여 너희와 상대하면, 우리들이 선장(仙長)어른들의 법보덕에 이겼다는 소릴 들을 테니 이 얼마나 낯간지러운 일이겠느냐? 너희들의 본령이 어떻든지 상관 말고 전력을 다해 공격해 보아 라. 우린 그대들을 죽일 생각은 없고, 단지 한바탕 놀다 가고 싶은 생각뿐이니 부디 실망시키지 말기를 바란다. 한번 흥겹게 놀아보자구." 주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옥저진인> 금침자가 그녀들 뒤에 도착하였다. 동시에 시용고, 이 사고 두 음녀도 비검을 날렸다. 금침자는 자기의 비검으로 적을 제압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도 착하는 즉시 수중의 불진(拂 塵)을 한 차례 휘저었다. 거무튀튀한 서리가 한악과 주문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악과 주문 도 비검을 날려 시, 이 두 음녀를 상대하고 있었다. 이때 검은 서리가 뒤쪽에서 다가왔는데 벌써 전신에 한 차례 한기(寒氣)가 일었다. 주문의 천둔 경은 이미 금선, 소화상이 빌어갔으니 그녀의 수중에는 마땅한 법보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쓸데 없는 공명심에 사장(師長)들의 현천지보를 사용하지 않고 싸우겠다고 엄청난 약속을 해버린 마당 에 이제 와서 구천원양척을 쓸 수도 없는 노릇, 이거 참, 큰일이로구나! 이때 다행히 한악이 잽싸게 보상부인의 금단(金丹)을 꺼내 핏빛같이 붉은 광화를 일으켜 금침사 가 시전한 검은 서리를 향해 맞받아쳤다. 붉은 광화가 닿는 곳마다 온갖 극독과 요독으로 연성된 독상(毒霜)은 파해되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불방울로 화하여 아미산 아래로 우수수 우수수 비 처럼 떨어져 내렸다. 금침자는 원래 독상(毒霜)을 사용하여 두 여인을 혼절시킬 생각이었다. 오래도록 연성한 애지중 지하는 법보를 쉽게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과연, 적측의 계집애들의 금단이 대단한 위 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는 좋지 않음을 느껴 급히 법술을 써서 자신의 법보를 거둬들이려 하였 지만, 이미 금단에 의해 모두 자취도 없이 녹아 없어져 버렸다. 생명처럼 아끼던 독상이 사그리 없어진 것이다. 악에 받친 금침자는 미친 듯이 비검을 날리며 시용고, 이사고 두 음녀와 함께 주문과 한악을 난폭하게 공격했다. 시용고의 금침을 깨뜨린 후 적들이 구천원양척을 거두어버리자 음소당은 다소 마음이 놓였다. 현천지보를 사용하지 않고 어찌 자신을 이길 수 있겠는가 말이다. 속으로 득의만면, 두 멍청한 계 집들을 실컷 비웃었다. 그래서 주문, 한악이 시용고, 이사고 금침자 세 사람과 비검만으로 싸우고 있는 것을 곁에서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한 여인은 찬하대사(餐霞大師)의 적전(嫡傳)을 이어받았고 한 여인은 보상부인의 심법(心 法)을 전수받은 실력자인 것이다. 한악은 방문(旁門)의 무공에 아미파의 정종(正宗)을 전수받아 과연 변화가 무궁하고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기묘함을 가지고 있다. 두 여인은 아직 나어려 경험은 없지만 실력면에서는 자긍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음소당이 곁에서 지켜본 지 한참이 지났지만 시용고, 이사고, 금침자 세 사람이 승기를 잡기는커 녕 오히려 밀리는 듯한 것을 보고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런 간 큰 년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함부로 날뛰는 게냐." 음소당이 손을 한 차례 내젓자 한 가닥 청광이 신룡이 승천하듯 웅장한 기세로 곧장 주문과 한 악의 정수리를 향해 쏘아왔다. 두 사람은 시용고, 이사고 두 음녀와 대적할 때에는 약간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화산파의 고수 금침자가 가세하자 상황이 뒤바뀌어 겨우 평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음소당이 수년간 연성한 곤륜파의 오묘한 비검마저 가세하였으니 어찌 상대가 되겠는가? 한악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다행히 둘이는 오기 전에 미리 의논한 것이 있었다. 만약 중과부적에 붙이면 서로 암호를 주고받아 만약에 대비하기로 한 것이다. 한악은 급히 법보낭에서 법보 하나를 꺼내들었다. 진언을 외고는 곧바로 엉켜 싸우는 검광을 향 해 냅다 던졌다. 법보는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길이 수십 장에 폭은 삼 장 가량의 오색 비단으로 변해 음소당의 청백광화를 휘감아 버렸다. 음소당은 한악이 시전한 것이 왕년의 <천호> 보상부인이 자주 사용하던 <기인구충소진다보법 술(己寅九沖小辰多寶法術)임을 한눈에 알고 분명 보상부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아미문하에 들어갔는지 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적이 방문환술(旁門幻術)을 펼치는 것을 보고, 이제 두 계집의 실력이 바닥났음을 짐작하고 대뜸 욕을 했다. "감히 좌도요법(左道妖法)으로 누굴 놀릴 셈이냐?" 음소당이 청, 백 두 광화를 향해 손을 휘젓자 광화가 크게 일며, 두 마리 교룡이 서로 꼬리를 문 형상을 취했다. 두 법보가 부딪치는 순간 '싸!' 하는 소리와 함께 광화는 수많은 실오라기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지며 눈앞에 수많은 꽃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마치 회오리바람이 채운을 휘감아 올 리듯 순식간에 한악의 법보는 사라져 버렸다. 음소당이 내심 쾌재를 부르는 사이 검광이 엉켜 있는 가운데 처절한 경악성이 들렸다. 분명 그 계집의 소리가 아닌 자기편의 소리였다. 음소당이 소리쳤다. "안 돼!" 더 이상 소리칠 틈도 없이 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비검과 함께 신형을 번듯 날렸다. 청, 백 두 광화는 즉시 몇 배로 커져 시용고, 이사고 두 음녀를 보호하였다. 이때 요진 위에 있던 사남계도 두 여자가 침입하여 들어온 것을 발견하였다. 음소당과 시용고, 이사고, 금침자 등 네 사람이 좀처럼 적을 제압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뜨악해 하는 순간, 두 젊은 여인이 구천원양척을 사용하는 것을 알아보았다. 결코 쉽사리 사로잡기는 힘들다고 생각해 사남계는 암암리에 진중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적이 좀더 깊숙이 들어오는 순간, 다시 요진을 발동하여 진 속에 가둔 뒤 손을 쓸 독계(毒計)를 꾸몄 다. 사태를 예의 주시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갑자기 <옥저진인> 금침자가 적의 법보에 격중당 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음소당이 필생의 본령과 함께 현공을 운용하여 급히 시용고, 이 사고 두 음녀를 보호한 것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 몸을 날려 도우려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무지한 얼간이들! 잠시 너희들의 개 같은 목숨을 남겨두겠다. 우리가 손속에 정을 남김을 고맙 게 여겨야 할 것이야." 사남계는 생쥐 같은 적들이 도망갈 작정을 하는 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었다. 괴성을 내지르며 수중에 있던 천열화기로 앞을 가리키며 입 속으로 주문을 중얼중얼 외자 즉시 요진이 발동하였 다. 수천 장에 달하는 열화풍뢰가 흡사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은 진작부터 구천원양척으로 방비한 탓에 아홉 송이 금화와 자기를 일으켰다. 금화 자 기가 닿는 곳마다 열화풍뢰는 씻긴 듯이 사라져 버렸다. 적이 금빛 요무를 뚫고 응벽애로 돌아가 는 것을 두 눈을 멀거니 뜨고 보고 있어야만 했다.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었다. 금침자는 적의 법보에 당하자마자 아래쪽 금광 속으로 떨어져 버려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적 이 시전한 법보가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그처럼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단 말인가? 하지만 음소당만은 그것이 당년의 <천호> 보상부인이 연성한 백미침(白眉針)임을 알아차렸다. 금침자는 잠시 소홀하여 적의 백미침에 요혈을 격중당해 참담한 억겁의 세계로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적이 현천지보로 호신하고 있으면서도 도망을 친 이유였 다. 이기고 난 뒤에 오히려 도망치듯 물러나 버리다니, 음소당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계집들이 무슨 꿍꿍잇속일까?' 꼽추도사의 출현 涉險貪功 寒顎逢異搜 分光捉影 乙休激藏靈 원래부터 주문과 한악은 둘 다 성질이 급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파인지라 사악한 것 은 무척 싫어했다. 한악은 평소에도 무척이나 행동거지가 경망스러웠는데, 이번에 자령을 따라 아미문하에 투신한 이후, 동문들을 만나보니 모두 선풍도골을 갖춘 데다, 검법 또한 모두들 뛰어난지라 무척 감탄했 고 조금 질투도 났다. 그러나 응벽애 동천복지에서 함께 지내니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즐거움이 있었다. 제영운은 스승의 명을 받들어 여러 동문을 관장하며 선부를 지키는 임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사람들이 적었을 땐 여러 동문들이 대부분 친형제자매보다 더 친숙하였다. 더욱이 사장(師長)의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며 명령에 절대 복종하였기 때문에 다른 일은 별다른 조심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나 자령 등이 청라에서 돌아와 같이 지내게 되자, 비록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한악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이맛살을 찌푸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원래 영운은 모두의 앞날을 생각해 누구에게나 준엄했다. 특히 한악에 대해선 더욱 신경을 썼다. 이에 비해 한악의 언니 자령은 생각이 깊고 도력도 상당하여 동생의 행동에 대해 자신이 죄책감 을 느끼며 괴로와하였다. 이러한 자령의 모습을 본 영운도 그녀가 안쓰러워 자연 그녀에게 아주 친밀하게 대해주었다. 한악은 원래 뭐든지 제멋대로 하기를 좋아했었는데, 영운이 자기 자매를 대함에 차이가 있음을 알고 속으로 무척 꽁해 있었다. 사실 한악으로서도 잘하려고 했지만 하는 일마다 공교롭게도 퉁 그러져 나가니 그만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게다가 영운이 비록 뭐라고 꼬집어 얘기는 하 진 않았지만 완전히 용서하지 않고 역정을 내는 기색이 완연하자 한악으로선 더욱 틀어질밖에. 양의미진진(兩儀微塵陣)에 빠져 영운에 의해 구출되었을 땐 여러 동문들 앞에서 공공연히 자령 에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고, 또 영운은 새로 얻은 장미진인의 칠수검(七修劍)을 여러 동문에게 각 각 보관토록 맡기면서 유독 자기에겐 나눠주지 않자, 마치 자신을 못미더워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던 적도 있다. 겉으로는 아무런 말도 안했지만 마음 속 한구석엔 늘 응어리가 져 있었다. 기회를 보아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여 큰 공을 세울 작정이었다. 이런 와중에 요인들이 선부를 침입해 오자, 마침 자신의 실력도 보이고 공도 세우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영운은 스승의 명을 굳게 지키며 영부가 발동하여도 단지 방어만 하라고 명령하니 좀처 럼 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다. 한창 좀이 쑤시고 좌불안석 들락날락하던 중 마침 주문과 의기투합 하여 영운에게 졸라댔다. 주문은 비록 한악과 의기투합했지만 영운남매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고 또 오랫동안 사귀어 온 터라 오히려 다른 동문들보다 더욱 영운을 잘 따랐다. 한악은 주문을 자꾸자꾸 꼬였다. 주문도 한악의 전법을 듣고 승리가 분명하여 한번 시도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한악을 데리고 가서 영운에게 출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 다. 영운은 본래 이 일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으나 한악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 앞 에서 체면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두 사람이 아직 아무런 위험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허락해 주고야 말았다. 구천원양척을 주어 몸을 보호하고 적의 요진을 뚫고 나가 싸 우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요진에 들어선 뒤, 원양척을 거두어 적을 유인할 계략을 미리 짜두었다. 그런데 적의 기세가 대단한 데다가, 음소당의 비검은 상상 외로 너무 강했다. <옥저진인> 금침자의 음흉한 계 략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한편 한악은 <천호> 보상부인의 방문진전인 <기인구충소승다보법술(己寅九沖小乘多寶法術)>로 연성한 비단띠로 음소당의 검광을 잠시나마 묶어둘 수가 있었다. 동시에 주문은 구천원양척을 미 리 꺼내 후퇴할 준비를 해두었다. 한악은 백미침을 꺼내들고는 먼저 금침자의 칠공(七功)을 향해 던졌다. 금침자는 음소당의 비검이 대단한 것을 보고 이제 적들은 독 안에 든 쥐라 생각하고 한순간 안 심을 가졌다. 두 여인을 사로잡은 후, 그 뒤는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러나 이때 눈 앞에 실낱 같은 광화가 번뜩이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나고 말았다. 두 눈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짐 과 동시에 정신을 잃고 곧바로 금색 요무 위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악이 사용한 비단띠는 원래 방문(旁門)에서 속성으로 연성한 법보로, 어떤 물건이든 아홉 번의 기인(己寅)일이 지나면 연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보기에 수백 장에 이르는 오색광화를 눈부시게 내뿜지만, 오히려 작용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방문소승법술은 단시일 내에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정통한 법보, 비검과 만나면 한순간만 모면하는 것에 불과했다. 만약 적과 대치 중에 불리한 상황에서 수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연성한 법보를 희생시켜 훼손되 고 난 뒤에 이 틈을 타서 도망치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보상부인 이 만약 강적을 만났을 때, 순간만을 모면하면 될 때는 아낌없이 버릴 수 있게 하찮은 법보도 전 수한 것이다. 자령자매가 아미에 온 뒤에 주문 등은 이들 자매가 방문법술을 약란보다 더 많이 익힌 것을 알 고, 수시로 이를 전개하게 하여 안목을 넓히고자 하였다. 자령은 시종 겸손하게 사양하며, 훗날 기회가 닿으면 볼 수 있을 거라며 거절했다. 하지만 한악은 원래 자랑하기를 좋아하여 평소 한가할 때, 소승법술로 연성한 몇 가지 법보를 사용하여 다른 동문과 비검할 때 곧잘 펼치곤 하였다. 이번에 출전할 때도 문득 생각이 나 몸에 지니고 갔다가, 용케 적재적소에 사용한 것이다. 백미침으로 금침자를 격중시킨 뒤 재차 시용고, 이사고에게도 이 침을 펼치려는 순간, 음소당은 이미 그것이 바로 천하를 떨게 하는 백미침인 줄 간파하였다. 시용고, 이사고 두 사람이 위기일발 의 순간, 시용고의 모친인 금침성모와의 평소 교분 때문에 음소당은 위험을 무릅쓰고 끼어들었다. 급히 신검합일하며 현공(玄功)을 운용하여 이들을 구하러 날아갔다. 한악은 소승법보가 이미 적의 손에 파괴된 것을 보았다. 과연 음소당이 가진 검광의 위력은 대 단하여 백미침조차 막았다. 이젠 더 이상 적을 깨뜨리기 힘들다는 생각에 실컷 골려나 주자고 마 음먹었다. 한참 지껄여대는데, 멀리서 사남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요진이 발동하여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낭패라고 직감했기에 곧바로 주문과 함께 검광을 일으켜 구천원양척의 금 화 자기로 전신을 보호한 채 아래쪽 광채를 뚫고 동부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영운, 자령 등은 주문과 한악이 떠난 지 한참 지나자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때 두 사람이 만면에 희색을 가득 머금은 채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출진(出陣)하여 어떻게 싸웠는지 물어보니 둘이 의외로 적진을 교란시켰는지라 자신들도 무척 기뻐했다. 한악에게 몇 마디 칭찬을 해주자 한악은 매우 의기양양, 기뻐하며 요인들도 별 거 아니라는 생 각을 했다. 한악은 다시 한 번 출진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영운과 자령이 극구 만류하였지만, 주 문과 한악 그 나어린 친구들이 어디 쉽사리 수긍하겠는가? 그러나 영운의 말이 지엄한지라 마냥 보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첫날부터 요인들은 연속해서 낭패를 당하자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사남계는 팔딱팔딱 뛰며 분 을 삭히지 못하고 전력을 다해 요진을 발동시켰다. 비록 원양척의 금침 자기에 의해 동부는 보호 되었지만, 열화풍뢰의 엄청난 위력은 온 산을 뒤흔들어 놓았다. 귀를 찢을 듯한 뇌성이 울렸다. 여러 동문들은 감히 태만치 못하고, 약란, 문기 두 사람은 태원 동 왼쪽에 매복시켜 두고, 나머지는 모두 후동(後洞)에 모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한악과 주문은 틈만 나면 출전시켜 달리고 졸라댔지만 그 때마다 영운에 의해 저지당했다. 주문 은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한악은 매우 불만이었다. 구천원양척 없이 평생 본령만으로도 적을 제 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데, 영운은 자신을 막기만 하다니! 이튿날이 되었지만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닷새가 지나자 동부를 둘러싸고 있던 금빛 자기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적쪽에선 더욱더 기승을 부리며 매일 세 차례씩 열화 풍뢰를 일으켜 세차게 공격해 왔다. 점점 금빛 자기가 엷어짐에 따라 위쪽에 요인들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한악 과 주문은 말할 것도 없고, 영운조차도 위기를 느껴 구천원양척을 사용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 다. 한악은 더 이상 금하가 감소하였다가는 적들이 곧바로 뚫고 들어올 테니 금하가 없어지기 전에 나가서 적의 동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금하가 요법에 의해 다 흩어진 뒤에는 구천 원양척만으로 방어를 해야 하니 그때 가서는 달리 공격해 볼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영운도 한악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용단을 내려 주문에게 구천원양척을 건네 주고, 한악과 같이 가서 적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한악, 주문은 이번에도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두세 명의 목을 베어올 것을 장담하며, 신이 나서 서둘러 동부를 나와 구천원양척을 펼쳐 전신을 보호한 뒤 요진을 향해 출정했다. 이 때는 적측에서 열화풍뢰로 공격을 하고 있을 때인지라 위쪽엔 온통 열화와 독연(毒煙)으로 가득차 있었다. 금화 자기가 미치는 일여 장 이내엔 금하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일 장 밖엔 온 통 새빨갈 뿐 요인들의 모습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떠나올 때 영운이 재삼 당부한 말이 떠올랐다. '비록 구천원양척의 효용이 신묘하지만 요진도 대단한 위력을 지녀 변화무쌍하니 저번처럼 깊숙 이 침투하지 말아라.' 요진에 일단 부딪친 후 적이 쫓아오면 그때 손을 쓸 작정을 했다. 만약 요진이 더 가까이 다가 온다면 승부고 뭣이고 간에 우선 후퇴하자고 미리 의논했다. 혹시라도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현천지보로 몸을 보호하느라 매우 힘들었다. 적을 쫓아 한바탕 일전을 벌여 공을 세우고 싶었지만 적이라고는 쥐새끼 한 마리 얼찐거리지 않 았다. 아마 자기들이 며칠 사이에 다시 쳐들어 올 리는 만무하여 경계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구 천원양척으로 전신을 보호하고 퇴로를 신경쓰며 계속 요진 중앙을 향해 나아갔다. 어느 정도 앞으로 나아갔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조금은 뜨악해 하는 순간 갑자기 천지가 빙빙 돌며 열화풍뢰가 동시에 발동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예닐곱의 요승요도(妖僧妖道)들이 불 쑥 튀어나와 각기 요번요기(妖幡妖旗)를 손에 들고 요법을 시전했다.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 로 크고 작은 불덩어리를 마구 퍼부었다.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구천원양척은 정녕 신묘하여 적의 열화풍뢰가 커지면 커질수록 금화 자기 도 더욱 강해졌다. 근처까지 오기는커녕 십 장 이내의 모든 열화풍뢰는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사 방에서 화염이 일고 불꽃이 튀었지만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제야 다시 마음을 놓고 전과 같이 적을 유인하여 한판 벌일 궁리를 했다. 그렇지만 어느 방향을 막론하고 뚫고 나갈 마 땅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한악은 워낙 호승벽이 강한지라 그래도 공을 세울 심산으로 몇 차례 백미침을 날렸지만, 적 근 처에 가까이 가기만 하면 검은 연기가 일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괴상망측하게 생긴 대머리가 전신에 흑연(黑煙)을 두르고, 손엔 저울추 비슷한 물건을 들고서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악의 백미침이 적의 머리를 향해 날 아들 때마다, 그는 재빨리 저울추 같은 것으로 침을 거두어들였다. 한악은 깜짝 놀라 더 이상 백 미침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것으로 보아 적은 미리 백미침에 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한 데다 고수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번엔 쉽사리 공을 세우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 속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늘 날씨는 흐려요." 서로의 암호였다. 그 말을 주고받고 왔던 길로 되돌아나가려 했다. 사남계 일행은 며칠 전 크게 낭패를 당한 뒤라, 미리 요법을 엄밀하게 펼쳐놓아, 적을 깊숙이 끌 어들인 뒤 손을 쓸 작정을 하고 있었다. 적이 그물에 완전히 걸려들기 전까지 요진 내에 몸을 숨 기고 출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요 이틀 사이에 뛰어난 무공을 지닌 조력자 몇몇이 당도하였으니, 그 중 둘은 사남계가 <신행두타(神行頭陀)> 법승(法勝)을 남해(南海) 복우도(伏牛島) 산호와(珊瑚窩)로 보내 초청한 < 남해쌍동(南海雙童)> 진간(秦艮), 진태(秦兌) 형제였고, 또다른 한 명은 바로 한악의 백미침을 무 용지물로 만든 함공노조(陷空老祖)의 대제자 영위수(靈威搜)였다. 진간, 진태 남해쌍동은 원래 남해산선(南海散仙)으로 평소 악행을 몹시 싫어했다. 몇년 전 열화 조사와 사남계가 남해에 채약을 하러 갔다가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 진간, 진태는 사람 을 해치는 천년 묵은 사경(邪鯨)을 없애려 했다. 법술로 겨우 잡아놓기는 했지만 결정적으로 죽일 재간이 없었다. 진씨형제가 사경과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있을 때 사남계는 사경이 토해내는 원주(元珠)를 탐 하여 틈을 보고 있었다. 사남계는 사경이 입을 벌렸을 때 재빨리 입 속을 향해 비검을 날려, 사경 의 창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렸다. 비록 서로 동상이몽이었지만 이런 인연으로 인해 진씨형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 후 사남계는 그들 형제를 만날 때마다 아미문하가 얼마나 다른 문하를 핍박하고 멸시하는지를 누누 이 얘기했다. 진씨형제는 남해에 은거한 지 이미 오래, 중원에 나가본 적이 없어 각파의 정세에 대해 그다지 밝지 못했다. 세상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아 별로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사남계에게 감사의 말 로 후에 도울 일이 있거든 한편이 돼 주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사남계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법승을 보내 초청한 것이다. "사도우(史道友), 훗날 우리 힘이 필요한 때가 있으면 반드시 도와드리겠소이다." 진간이 이렇게 말했었다. 그 후 우연히 다른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 그제서야 자신들의 견문이 좁았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껏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아미파는 공명정대하며, 고강한 무 공을 지닌 자가 수두룩하다는 것도 알았다. 도리어 열화조사나 사남계 같은 무리들이 온갖 사악 한 일을 일삼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응벽애 싸움을 위해 일조를 해달라고 사남계가 보낸 법승이 찾아왔을 때 진씨형제는 진심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 식언(食言)을 하고 싶지 않았고, 또한 일찍이 들어온 아미의 위명(威名)을 직집 눈으로 확인하고 싶기도 하였다. 형제는 일단 가긴 가지만 상황을 봐서 행동하기로 미리 의논하였다. 아미문하의 한 사람도 다치 게 하지 않기로 주의하고 다만 자신들의 열석천운지능(裂石穿雲之能)을 펼쳐 보임으로 예전에 사 남계에게 한 약속을 이행한 것으로 하고, 곧바로 되돌아오기로 했다. 고파령(姑婆嶺)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꼽추등을 한 이인(異人)과 마주치 게 되었다. 진씨형제와 법승은 그를 깔보다 그만 낭패를 당했다. 온갖 조롱을 당하며 중원에 첫발 을 내딛는 순간부터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진간은 화가 나서 당장 남해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진태가 약속은 이행하여야 하니 그냥 은 돌아갈 수 없다며 만약 이번 일이 잘되어 돌아가면 뛰어난 스승을 찾아 도법(道法)을 익혀 꼽 추에게 복수를 하자고 회유했다. 사기는 땅에 떨어져 풀은 꺾였지만 사남계와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법승도 옆에서 계속 설득하여 마침내 세 사람은 계속 길을 떠났다. 고파령에 당도하여 보니 동부입구가 굳게 닫 혀 있는지라 법승은 아미산으로 남해쌍동을 인도하였다. 사남계는 <남해쌍동>이 오자 반갑게 맞아들였다. 사남계는 이번에 자신들이 응벽애를 공격하는 목적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그러나 둘의 귀에는 심드렁한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사남계가 응 벽애의 선초(仙草) 성형육지(性形肉芝)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그 말에는 귀가 솔깃해졌다. 사남계 가 법승에게 먼저 가서 육지를 훔쳐내 오라고 명령했다. 진씨형제는 이 말을 듣고 육지가 탐이 나는지라 대뜸 자신들의 무공도 자랑할 겸 법승과 함께 가길 자청했다. 진씨형제와 법승이 노상에서 꼽추를 만나 낭패를 당한 것과 육지를 훔치는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자. 함공노조의 대제자 영위수는 원래 사남계의 초청이 없었는데 합류하게 되었다. 당초의 원인은 < 장비신마> 정원규가 함공노조 문하에서 계조(戒條)를 어긴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위수는 정원규와의 동문지정(同門之情)도 있었고, 또한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은혜도 있어 그를 대신해 스승에게 용서를 빌어 큰 벌을 면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정원규가 파렴치한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정원규는 함공노조가 법보를 연성하느라 자신을 쫓아오지 못하는 틈을 타서 수많은 영단과 법보 를 훔쳐 달아나 버렸다. 정원규는 그 길로 <오독천왕(五毒天王)> 열패다(列覇多) 문하에 투신하 여 온갖 악행을 스스럼없이 자행하였다. 이 일로 인해 영위수는 스승으로부터 온갖 고난을 당하 여 혼줄이 났다. 그는 다시는 정원규와 상종치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뜻대로 되는 게 얼마나 있겠는가! 원래 영위수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가 아직 도를 이루기 전에 부잣집 딸과 밀통하여 사생아를 낳은 것이었다. 여자는 집에서 쫓겨 나고 영위수도 멀리 도망을 쳐 다른 곳에 맡겨 길렀다. 그 여인은 얼마 후 죽어버렸고 영위수도 함공노조의 제자가 되었다. 부자지정(父子之情)에 끌려 몇 차례 함공노조에게 하산을 청하였지만, 함공노조는 끝내 이를 허 락치 않았다. 영위수로선 당시 달리 방도가 없어 다만 어렵게 구한 영약을 아들에게 복용시켰다. 자신도 틈만 나면 잠시 하산하여 도법을 전수하였다. 아들 영기(靈奇)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으며 본령도 꽤 깊은 편이었다. 하지만 심성이 곱지 못하여 늘 문제를 일삼고 다녔다. 어느날 형산 근처를 방황하다 우연히 <금모모(金母母)> 나자연 (羅紫煙)의 문인(門人)인 최기(崔綺)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영기는 온몸이 얼어붙 는 듯한 격동된 감정을 느껴 대뜸 구혼하였다. 하지만 최기는 불한당의 집적거림이라 여겨 그에게 싸움을 걸었다. 최기는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최기의 동문인 오민(吳玟)과 <추운수>의 대제자인 악문 (岳雯)이 멀리서 놀고 있다 이 광경을 보고 달려와 삼 대 일로 싸우게 되었다. 오민, 최기 두 여인은 그런 대로 영기 정도의 공력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지만, 악문은 그의 재주 에 비해 월등 뛰어났다. 영기가 위험한 순간, 다행히 정원규가 근처를 지나다 영기를 발견하여 목 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추운수>, <금모모>의 동부 근처인지라 정원규는 영기를 구한 즉시 물러났다. 그후 영기의 사모의 정은 더욱더 깊어만 갔다. 여러 차례 형산에 몰래 숨어들어 가 최기의 모습 을 훔쳐보곤 하였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아는 체하고 싶었지만, 항상 곁에 고수가 있는지라 감히 나서지 못하고 애만 태운 것이다. 영위수는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금모모>가 대노할까 두려워, 아들을 진운봉(縉雲峰), 갈석애 (喝石崖) 선원동(仙源洞)으로 데리고 갔다. 법술로 동굴을 봉쇄하고 동굴 속에서 심신을 바로하고 도를 깨치도록 명령했다. 그후 이 년 뒤, 정원규가 교규를 어지럽힌 것을 방관한 영위수에게 함공 노조는 벌로 삼 년의 면벽을 명했다. 출산(出山)할 시한이 되기 전 몇 차례 아들을 찾아갔더니, 그때마다 금제를 풀어달라고 애걸했 다. 영위수는 냉정히 거절하였다. 이렇게 삼 년이 지나자, 영기가 과연 회개한 듯하여 비로소 마 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그후 영기는 몇 년 동안 형산 근처엔 발도 들여놓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선하령(仙霞嶺) 부근 에서 우연히 최기, 오민 두 여자와 맞닥뜨렸다. 영기와 최기와의 사이에는 원래 전세(前世)의 인연이 있는지라 그녀를 보는 순간 뭐라 말 못할 감정에 휩싸여 버렸다. 하지만 당장 불쑥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암암리에 두 여인이 채약하는 것을 미행하였다. 며칠을 따라다니다 겨우 오민과 최기가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영 기는 이 천재일우를 놓칠세라 허겁지겁 다가가 땅에 꿇어앉아 자신도 이제는 수도인(修道人)으로 결코 나쁜 뜻이 있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함께 살며 도행을 이루어 악겁에서 벗어나자고 간청히며 애소했다. "만약 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겠다면, 차라리 비검으로 저를 죽여주십시오." 최기는 그의 출현에 깜짝 놀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민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반변노니(半邊 老尼) 문하의 <표묘아(票渺兒)> 석명주(石明珠)와 <여곤륜(女崑崙)> 석옥주(石玉珠)와 함께 돌아 왔다. 오민은 영기를 보자 저 사람은 바로 이전에 형산에서 최기를 희롱하다가 그의 동료에 의해 간신히 살아난 요인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석씨자매는 이파(異派)에 곤욕을 치른 터라 악(惡)을 원수처럼 여겨 불문곡직하고 비검을 날려 그를 죽이려 했다. 영기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막았다. 그는 동굴에서 여러 해 수련을 쌓은 데다 영위수가 전심전력으로 무공을 전수한 덕분으로 공력이 전에 비해 월등히 고강해졌다. 석씨자매 가 악문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네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고도 평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최기는 석씨자매가 손을 쓰자 한편에서 방관하고 있었지만, 내심 그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 오 민도 <금모모>로부터 영기의 내력을 이미 들어 그가 결코 이파(異派) 중의 악한 인물은 아님을 알고 있어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석옥주는 상대를 쉽게 제압할 수 없자 스승으로부터 새롭게 전수받은 오정근(五丁芹)을 암중에 발출시켰다. 오색 실낱 같은 광화가 번쩍이자, 영기는 심상치 않음을 알고 급히 피했지만 왼쪽 팔뚝이 잘려 버렸다. 석씨자매가 재차 독수(毒手)를 펼치려 하자 최기, 오민 두 여자는 급히 석씨자매를 말리며 말했 다. "잠깐만요, 이 사람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지금은 회 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어요!" 이리하여 영기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네 여자가 사라져 버리자, 잘려져 나간 팔뚝을 주워들고 동굴로 돌아가 슬피 울었다. 스스로 원망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영위수에게는 이 사실 을 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공교롭게 영위수가 근처를 지나다 사랑하는 아들이 부상당한 것을 보고 연유를 물었지만 끝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영위수는 마음이 아팠다. 일단은 아들의 부상을 치료하는 게 급선무 인지라 스승 함공노조에게 부탁하여 만년속단(萬年續斷)과 영옥고(靈玉膏)를 구해 팔을 제자리에 붙였다. 치료 후 시일이 흘렀지만, 정혈(精血)을 워낙 많이 흘려버려 원상대로의 회복이 쉽게 되지 않았 다. 영위수는 다시 스승에게 가서 영단을 구했지만 함공노조의 영단을 대부분 정원규 놈이 훔쳐 가 버려 줄 게 없다는 것이다. 약초는 이미 모아두었지만 앞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제조해야 하고 자신의 겁수도 멀지 않아 도저히 도와줄 수가 없다는 기막힌 소리를 하는 것이다. 막막해 하던 영위수는 스승의 말 중 문득 정원규가 스승의 영단을 훔쳐간 사실을 떠올렸다. 지 난 몇 년 간 서로 왕래는 없었지만 자신과는 구명지은(救命之恩)이 있는 터라 그에게 부탁하면 청을 들어줄 성 싶었다. 급히 공동산(空洞山)에 가서 정원규를 수소문 해 보니 정원규는 이미 사 남계와의 약속에 의해 아미산으로 떠난 후였다. 그래서 곧바로 아미후산 비뢰애 상공(上空)에 당 도하여 정원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정원규는 평소 냉담하던 영위수가 찾아오자 의아해 했다. 일단 이곳 일이 급하니 우선 응벽애를 깨뜨린 후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정원규가 영위수에게 얘기했다. "대사형, 영기는 바로 아미문하에 의해 부상을 당한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평소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지 않는 녀석이 그토록 심한 상처를 입었겠어요. 이파(異派) 문인을 보면 다짜고짜 핍박하 는 놈들이 아미문하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영위수는 아들 영기가 최기를 우연히 만났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 처를 보고 진작부터 아미, 곤륜 양파의 소행임을 짐작하고 있었는데, 정원규의 말을 듣자 더욱 화 가 치밀어올랐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일념에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합력할 것을 수락하였다. 이날 적을 대적해 보니 과연 현천지보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웬 계집이 백미침을 발출하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는 것올 직감하고 즉시 북해(北海) 경연(鯨涎)을 연성하여 만든 경연추(鯨涎鎚)를 써서 백미침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주문과 한악은 사태가 불리함을 보고 되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사남계가 이미 두 여인이 요진을 들어선 순간, 암암리에 요법을 써서 요진의 방위를 바꾸어버린 것을 둘은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한참 날아갔지만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악도 급한 나머지 주문을 향해 말했다. "언니, 우린 이미 방향을 잃어버렸어. 공연히 사방을 헤매봤자 소용이 없어요. 요진을 어떻게 변 화시키던지 간에 구천원양척의 위력만 믿고 무조건 앞으로 향해 뚫고 나가면 벗어날 수 있을 거 야." 한악과 주문은 일제히 현공을 운용하여 전력을 다해 곧장 앞으로 날아갔다. 요진은 수시로 이동 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후퇴하면서도 아직 적 한둘쯤은 처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 다. 이미 후퇴할 것을 결심한 뒤라 전력으로 구천원양척을 시전하자 신묘한 효력이 발생하였다. 금 화 자기가 닿는 곳마다 연화(煙火)는 씻은 듯 사라지고, 요인들이 펼쳐내는 허다한 요술법보도 모 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무사히 적진을 탈출할 수 있었다. 요진을 벗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바로 전동(前 洞) 근처이니 후동으로 되돌아가기도 힘들었다. 또한 적에게 앞쪽 동굴의 위치가 발각될 노릇인지 라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며 계속 날아가고 있는데, 적들도 뒤에서 맹렬히 추적해 오고 있었다. 이 때 맞은편에서 기이한 광화와 함께 한 간닥 홍선(紅線)이 곧장 날아왔다. 광화는 두 사람을 둘러 싸 금화 자기를 막아내고, 홍선은 계속해서 뒤로 날아갔다. 이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사사숙(史師叔), 어서 돌아가십시오! 저 두 계집년은 청해교조(靑海敎祖)께서 직접 잡아들일 것 입니다." 일단의 요인들은 자신들을 향해 소리친 사람이 독룡존자 문하의 유덕(兪德)임을 알았다. 그의 말 에 의하면 장령자(藏靈子)가 도와주러 왔다는 이야기이니, 이젠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 얼굴 가득 희색을 띠었다. 장령자는 매우 고괴(古怪)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의 성미 를 건드릴까 두려워 일제히 물러났다. 한악과 주문은 누군가에 위해 금화 자기가 저지당하자 깜짝 놀랐다. 순간 정신이 흐릿해지며 주 문의 손에 있던 구천원양척은 허공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동시에 광화가 날아와 주문과 한악을 얽어매며 청기(淸奇)한 용모에 왜소한 체격을 지닌 도사 한 명이 넓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면서 신 형을 드러냈다. 그 도사는 두 사람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너희 둘 중 누가 천호의 여식이냐? 공연히 무고한 사람마저 해를 당하게 하지 말고, 어서 이름 을 대고 목숨을 내놓아라."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덕은 사남계 등을 저지시키고 영위수만을 데리고 도사 곁으로 다가왔 다. 그 도사는 장령자였다. 그가 두 여인을 사로잡은 것을 보고 내심 기뻐하며 천호의 딸을 가리키려는 순간, 홀연 붉은 구 름이 화살처럼 하늘에서 곧장 아래로 내려꽂히며 장령자의 광화 속으로 뚫고 들어왔다. 연이어 큰 종을 울리는 듯한 심후한 공력을 담은 목소리가 우렁우렁 모두에게 들렸다. "자신의 강함만을 믿고 약한 여인을 핍박하는 난쟁이 바보야! 그렇게 앞뒤 가릴 줄도 모르는 것 이 감히 일파의 종주라니! 네 어찌 부끄러운 줄을 모르느냐!" 유덕이 방원 속에 비친 빛을 뚫어보니, 홍하(紅霞)가 번뜩이는 가운데, 건장한 체격에 짚신을 신 은 기괴한 용모의 꼽추도인이 백옥처럼 흰 손을 앞으로 쭉 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법보 를 사용하였는지 몰라도 장령자의 광화가 흩어져 버렸다. 백옥 같은 손 부근의 광화는 아주 작게 축소되어 도인의 손아귀에 꽉 움켜져 바둥거렸지만 좀처럼 빠져나오진 못했다. 꼽추는 장령자에게 몇 마디 경계의 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한악을 바라보았다. "너희 둘은 어서 가거라. 노부가 저 난쟁이를 처리하마!" 주문, 한악은 구천원양척을 잃어버려 이미 혼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재차 적의 검광에 붙들려 위 기감을 느낀 나머지 검광을 발출시켜 목숨을 걸고 맞부딪칠 준비를 하는데, 홀연 홍하 가운데 구 원의 빛이 나타난 것이었다. 적의 검광을 옭아맨 것으로 보아 비록 그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도행이 심상치 않은 전배 고인임 에 틀림없었다. 실로 생명의 은인을 만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주문은 급히 고개숙여 절을 했다. "제자가 그만 방종하여 구천원양척을 요인에게 빼앗겼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선장(仙長)께서 이를 다시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사옵나이다." 꼽추는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있지 않느냐! 너희들은 저 난쟁이의 적수가 아니다. 천척은 내가 대신 찾아줄 테니 방해되지 않게 멀찌감치 물러나 있거라." 주문과 한악은 방금 적의 검광과 부딪쳐 보아 그 위력을 아는지라 감히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물 러났다. 전배고수가 나타난 마당에 자신들이 나설 자리가 아닌 것이다. 급히 둔광을 일으켜 도인 의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가 멀찌감치 떨어졌다. 꼽추도인은 두 사람을 물러나게 한 뒤 손을 놓아 적의 광화가 원상태로 돌아가게 했다. 동시에 난쟁이도사도 신형을 날려 검광을 거두고는 다른 법보를 꺼내 승부를 겨루려고 했다. 꼽추도인은 이런 모습을 지켜보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했다. "이 난쟁이귀신아, 잠시 손을 멈추고 내 말을 들어보게!" 주문과 한악을 놀라게 한 도사도 그의 말을 듣고 법술을 시전하려던 것을 멈추고 꼽추도인을 가 리키며 욕했다. "평생 죽어 없어지지 않을 꼽추귀신 같으니! 노부는 내 제자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니 너와는 상 관이 없는 일, 공연히 남의 일에 대추놔라 감놔라 참견하지 말고 썩 물렀거라. 다른 사람은 비록 너를 두려워할지 모르나, 노부는 네놈이 하나도 겁나지 않는다. 믿기지 않는다면 노부의 무서운 맛을 보여주마." 꼽추도인은 그 말을 듣고도 태연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장가난쟁이! 굳이 너의 약점을 들춰내고 싶지는 않다. 지난 달 구룡봉(九龍峰) 정상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내가 자네에게 뭐라고 말하더냐? 적과 대적할 땐 강자(强者)가 승자(勝者)인 것이야. 자네의 그 어리석은 제자놈은 바로 자신의 악행으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니 남을 탓할 것이 없어! 자네도 말하지 않았나! 원수의 요법이 대단하여 감히 얕볼 수 없으니, 녹포노조를 찾아 복수할 수 가 없다고 말야! <삼선도우(三仙道友)>와 자네와는 평소 아무런 원한도 없네. 그런데 지금 그들 이 일 때문에 몸을 뺄 수 없음을 이용해 얼간이 요인들이 이미 동부를 괴롭히고 있는 판에 일파 의 종주인 자네마저 이 틈을 타 도행이 낮은 후배들을 핍박해서 쓰겠나? 이 사실을 만약 각파의 도우들이 안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나? 그런데 내 앞에서까지도 함부로 날뛰다니! 이 무슨 몰염 치한 행위인가 말이야." 난쟁이도사는 이 말을 듣고 대로하여 말했다. "꼽추귀신아, 입만 가지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지난날 네 말을 듣고 녹포진인에게 따지러 갔 었지. 네놈이 날 꼬셔서 내가 홀딱 넘어간 것이다. 시일이 아직 이른 것 같아 옛 친구나 찾아볼 요량으로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온 것이지. 도중에 우연히 유덕을 만났는데, 자신의 얼간이 사부에 게서 해방시켜 달라고 하도 조르는 통에 할 수 없어 그를 데리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두 여인이 구천원양척을 들고 둔광을 일으켜 날아가는 것을 보더니, 둘 중 한 명이 천호의 딸이라고 일러주었지. 그 여인들을 공격하는 것은 손쉬운 일인지라 사문공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 것뿐, 난 함부로 살상치 않으려고 누가 원수인가 물어보았다. 천호의 딸을 잡아 막 복수하려는데 네놈이 쓸데없이 참견한 것이다. 전후 인과가 이리도 뚜렷한데 누가 약자를 핍박했고 틈을 타서 기회를 엿보았단 말인가?" 꼽추도인은 창연히 말했다. "자네의 어거지는 아직도 여전하구만! 우리 같은 배분의 인물은 마땅히 광명정대해야 하며 세속 하류배와 같은 짓거리는 해선 안 되지. 암, 안 되고 말고. 자네가 남이 어려운 틈을 타 이(利)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고 치세. 그렇더라도 진씨자매야 자네의 원수지만 찬하도우의 여제자인 주문 과 자네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는가? 그런데도 자네가 장안법(障眼法)을 써서 어린 그녀의 구천 원양척을 뺏아가다니? 내가 여러 말 하지 않겠네. 자네 같은 일파의 종주와 아직 도행도 미천한 천호의 두 딸이 싸워봐야 싸움이 되겠는가? 자네가 녹포노조를 죽인 뒤 그녀를 찾아가서 자네 마 음대로 처치하게. 다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자네가 아미파에 죄를 짓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말 일세. 자네의 도력이 <삼선이로>를 능가한다면 누가 자네가 하는 일을 만류하겠나? 만약 지금 자네가 경거망동한다면 크게 후회할 것이야. 아무리 좋은 말로 변명하더라도 그때 가서 누가 자 네 말을 믿어줄 텐가? 다시 말하지만 천호의 두 딸은 이미 아미문하에 들어갔고, 자네도 아미의 여러 도우들과는 끈끈한 정이 있지 않나? 그 <천호>의 딸년이 손속에 정을 남기지 않아 자네의 멍청한 제자의 생명에 손상을 입혔네. 물론 자네의 마음이 어떠리라는 것은 우리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네. 자네가 도력 본령으로 <삼선이로>를 이기면 일파의 종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 네. 혹여 패하더라도 견식을 넓혀 좋을 것이고, 다시 도력을 연성하여 재차 복수를 하면 결국 자 네에게 광명정대한 일이니 좋지 않겠나? 그러나 지금처럼 집안에 어른이 없는 틈을 타 자네가 오 히려 어린애들을 괴롭힌다면, 이겨도 무공 때문이 아니고, 지면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나? 자고로 정, 사 각파를 막론하고 수뇌인물치고 자네처럼 몰염치한 짓을 한 사람이 있었던가? <천호>의 두 딸은 도망치지 못할 테니 내 말대로 하게. 우선 시일이 되면 자네 스스로 녹포노조를 찾아가 빚을 청산하게. 자네가 먼저 그 악랄한 요물을 없애게. 그것은 모두가 자네의 도력에 달려 있네. 그후 노부는 자네가 <천호>의 두 딸을 어찌하든 그 일에 끼어들지 않겠네." 꼽추도사가 말을 모두 마치자 씩씩거리던 장령자는 마구 삿대질을 하며 욕을 했다. "꼽추 네 이놈! 터진 입으로 잘도 지껄이는군! 오늘은 노부가 졸장부가 되기 싫어 참겠다. 하지 만 녹포노조의 목을 베어버린 뒤 반드시 찾으러 다시 오겠다. 실패하면 천한 두 계집년이 오래 살아 비승을 한다 해도 상관치 않겠다. 구천원양척은 원래 청라욕(靑螺欲)에 천서와 같이 있던 것 이었는데, 능진인과 내가 구한 것이다. 누구의 손에 있든지 상관하지 않았지만, 그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빌려줘 아무 곳에나 나뒹굴게 만들었구나. 내가 가져갈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오늘에야 취했겠나? 원수를 처치하고 난 뒤 돌려주기로 하지. 자넨 정말 공연한 일에 참견을 많이 하는군. 난 자넬 믿지 못하니 저 여자더러 직접 와서 받아가라고 하게. 자네에게라면 절대 못 주겠네." 꼽추도인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 꽁지빼는데 귀신이구면. 자네 말대로 하지. 다만 한 가지 자네가 행여 녹포노조를 죽이더 라도 <삼선이로>와는 불편한 관계를 맺지 말게. 득(得)보다는 실(失)이 훨씬 많을 것이네. 내가 대신 <삼선이로>와 상의하여 중양절 전에 <천호>의 두 딸을 찾아 자령곡으로 데려가겠네. 자네 양파의 싸움의 승패는 공정해야겠기에 <삼선이로>에게 결코 이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나 역시도 끼어들지 않을 것이네. 그러면 되겠는가?" 꼽추노인은 손짓으로 주문을 부르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분은 청해파(靑海派) 교조(敎祖)이신 장령자 어른이시다. 조금 전에 가져간 너의 원양척을 되 돌려 주시겠다니, 어서 와서 가져가지 않고 뭐하는고?" 이 순간, 장령자는 벌써 소맷자락 속에서 구천원양척을 꺼내 주문을 향해 날렸다. 주문은 급히 원양척을 거둬들이고는 허리굽혀 예를 올렸다. 꼽추도인에게도 감사의 예를 올리려는 순간, 장령자는 벌써 유덕을 데리고 입 속으로 한 마디 내뱉았다. "꼽추귀신, 다시 보세! 모든 일을 처리한 후 자네와의 일도 청산해야겠네! 절대 이전의 우리 약 속을 잊지 말게!"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한 줄기 광화가 허공을 뚫고 사라졌다. 주문과 한악은 진작부터 그가 장령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도사가 말을 주고받을 때 장령 자가 비록 말은 함부로 하긴 했지만 상대하기 어려운 고인(高人)을 만난 듯한 기색은 역력했다. 장령자가 떠나가자 한악과 주문은 꼽추도인을 배알하였다. 꼽추 도인이 아무 말없이 손짓하자 영위수가 면전에 내려서며 허리굽혀 절했다. 원래 영위수는 장령자가 도와주러 온 것을 보고, 그가 스승의 친한 친구인지라 유덕과 함께 배 알하러 다가갔었다. 순간 홍하가 번뜩이며 꼽추도인이 현문분광착영지법(玄門分光捉影之法)을 사 용하며 장령자의 비검을 옭아매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지난 날 북해에서 스승 함공노조를 제압한 바 있는 분이었다. 그후 스승과는 친한 벗이 된 전배산선(前輩散仙) 가운데 제일고수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스승이 평소 자주 말씀하시길, 세상에 자신의 적이 없지만 이분만은 유일한 극성이라는 말을 하 였던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이 사람이 만약 아미를 도와준다면 순식간에 사남계 같은 시시한 요인들은 와해될 것이 분명하 군. 기회를 보아 빨리 여길 뜨는 편이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는 상책이로구나!' 꼽추도사의 손속이 매우 독랄하고 성품도 고괴한 것을 아는 영위수는 당장 떠나고 싶었다. 그런 데 꼽추도인의 안광이 이미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 가 엄습해 왔다. 지금 만약 나가서 배알하지 않는다면 훗날 화를 면치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순 간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분의 영단은 사부의 것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나 살과 피부를 되살리고 환골시킬 수도 있다.' 영위수는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은혜를 모르는 불한당 같은 정원규에게까지 영단을 구 하러 온 마당에 뭐가 두려워 부탁하지 못하겠는가 말이다. 장령자와 꼽추도인이 얘길 나누고 있 을 때 그는 허리굽혀 왼쪽에 시립해 있었다. 얘기가 끝나 장령자에게 예를 올리려는 순간, 장령자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이때 꼽추도인이 자 신을 부르는 것을 보고 급히 다가가 배알했다. 꼽추도인이 말했다. "너는 너희 사부의 의발(衣鉢)을 계승할 수제자이다! 어찌 이런 흐린 물에 와서 네 몸을 더럽히 려 하느냐? 난 진작부터 저런 얼간이 음적들이 설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 일이 아니고 또한 보잘것 없는 놈들과 다투기 싫어 상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장령자가 약한 후배를 괴롭히 는 것을 보고 관여하게 된 것이다. 너는 내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느냐?" 영위수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하자 꼽추도인은 단약 한 알을 꺼내 영위수에게 건네주며 말했 다. "이 단약이면 네 아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요인들에게는 겁난이 임박하였고, 너희 스승 도 멀지 않아 병해하실 것이야. 아미는 기운이 크게 일 것이니 요인들은 멀지 않아 와해될 것이 다. 이 따위 얼간이들은 네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너는 속히 북해로 돌아가도록 해라." 영위수는 연방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를 하고, 진중(陣中)의 사람들을 만나보지도 않고 곧바로 사 라져 버렸다. 꼽추도인은 주문과 한악도 불러 말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상일엔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 산에서 나온 것은 단오절 이전에 좀 한가하여 설산(雪山)을 유람하기 위해서였다. 무심코 현빙곡(玄氷谷)을 지나다 우연히 인연이 있 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지. 그때 그가 마화(魔火)에 빠질까 걱정돼 우선 데리고 산으로 돌아가서 자세한 것을 물어보니 바로 <천호>의 사위였어. 곰곰이 전세의 인연과 앞으로의 일을 점쳐 보니 그 사람이 아니고서는 <천호>가 말겁할 수가 없더란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를 산으로 데리고 가게 된 것도 나와의 전인후과(前因後果) 때문이었다. 지금은 나 대신에 어떤 일을 처리하러 갔지 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산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이미 제도우(齊道友) 문하에 들어갔기 때문 에, 나로선 제자로 거둬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 날 위해 무척 고생을 하고 있다. 나는 <천호> 두 딸의 앞날에 일어날 두 차례의 악업도 알고 있다. 지난날 <동해삼선>에 대한 은혜도 있어, 좀전 에 장령자를 부추켜 <삼선> 도우가 일을 처리함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곧 여기 와서 너희 두 사람을 어려움에서 구해줄 것이다." 주문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꼽추도인은 계속 말했다. "하지만 장령자는 결코 자신의 제자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을 것이다. 백만산(百蠻山) 일이 끝나 면 곧바로 자령곡으로 자령자매를 찾아가 복수를 할 것이다. 그 일에 대해선 <삼선이로>가 모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여기 서첩 하나와 단약 세 알이 있는데, 겉봉엔 시일(時日)이 상세 히 적혀 있으니, 기한이 되면 열어보고 곧 불태워 버려라. 응벽선부에 닥친 액난은 자연 시일이 되면 사라질 것이다. 너희 둘이 돌아가 동문자매들을 보더라도 자령곡의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아라. 또한 기한 전엔 절대 서첩을 열어보지 말아라. 시일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자연 묘용이 있을 것이다. 다만 제영운 한 사람만은 나의 내력을 알 것이다. 지금 동부엔 요인이 잠입하였을 것이다. 요진이 비록 잠잠해졌지만, 너희 둘로서는 중과부적이며, 곧바로 전동(前洞)으로 돌아가거 라." 주문과 한악은 꼽추도인의 말하는 품으로 보아 배분이 아주 높은 전대 고인임을 알았다. 그녀들 은 명령대로 충실히 따랐다. 말이 끝날 때를 기다려 법호라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으나, 꼽추도인은 소맷자락을 휘저으며 한편 홍하를 일으키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산 뒤쪽을 돌아다보니 요염이 온통 가득찼고 풍뢰가 크게 일고 있었다. 동문들이 걱정할까 봐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곧장 전동으로 가서 응벽애를 향해 날아갔다. 저 멀리 소운간 너머 단대(丹臺) 위로 난 길쪽에서 광화가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 일 어났나 싶어 급히 방향을 바꿔 광화가 이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근처에 가서 보니 약란, 문기 두 사람이 오랏줄로 <신행두타> 법승을 꽁꽁 묶고 있었다. 약란은 두타의 옷을 들고 얼굴엔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짓고 막 날아가려 했다. 약란은 주문과 한악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즉시 나가서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교조의 영부를 지니고 태원동 근방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도적화상과 두 소도적(小盜賊)이 어떤 요법을 써서 땅 속으로 숨어들어 육지를 훔쳐가려 했어요. 저희 둘은 땅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에 곧바로 영부를 시전하였지요. 그런데 먼저 온 두 소적은 요법 과 비검이 모두 엄청난 위력을 지녀, 만약 미리 방비를 하지 않았다면 낭패를 볼 뻔했어요. 그러 나 이미 교조의 영부가 발동하여 단대(丹臺)의 양의미진진(兩儀微塵陣)에 갇혀 교조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만 해요. 이 도적화상도 도망치려는 것을 오언니께서 그의 비검을 깨뜨려 버려 이렇게 사로잡은 거예요. 요도를 죽여 선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 큰언니께 데려가 처치를 부탁할 작정이에요." 말을 마치고 네 사람은 함께 두타를 잡아 비뢰첩경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여 보니 후동 주변은 영부의 금광에 의지하여 그런대로 견디고 있었지만 차츰 옅어져만 갔다. 다만 비뢰동 입구엔 아 직도 금광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적이 후동 쪽에만 신경써 열화풍뢰의 위력은 더욱 강성해져 온 산을 뒤흔드니 바위가 마구 구르 며 온통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한편 영운, 경운, 자령 세 사람은 영부가 파괴될 순간에 대비하여 각자 비검을 발출시키고 있었 다. 구천원양척은 주문, 한악 두 사람에게 주었는데 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자 무척 불안했다. 비록 묘일부인의 편지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쓰여 있었지만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 다. 초조해 하는 순간 네 여인이 비뢰첩경에 모습을 나타냈다. 영운은 놀랍기도 하고 한편 무척 기뻤다. 막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려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수십 장 크기의 열화가 위쪽에서 퍼부었다. 동부 입구의 광화가 흩어지며, 안개 처럼 변하여 건너편 절벽 쪽으로 날아갔다. 열화풍뢰를 방패삼아 그 뒤로 대여섯 명의 요인이 바 람을 일으키며 날아왔다. 모두들 깜짝 놀라 각자 법보, 비검을 분분히 날려 방어하기 시작했다. 영운은 그간 사정을 물을 틈도 없이 재빨리 주문의 손에 들려 있던 구천원양척을 받아쥐고 입 속으로 진언(眞言)을 외며 허공을 향해 긋자, 아홉 송이 금화와 함께 자기(紫氣)가 엄청난 기세로 일며 곧바로 상공으로 치 솟아 동부를 단단히 보호했다. 아홉 송이 금화는 하나가 마치 수레바퀴 크기만 했는데, 공중에 날아다니는 외에도 적의 열화풍 뢰를 뒤쫓듯 따라다녔다. 열화 덩어리 하나에 금화 송이가 하나씩 부딪쳐 갔다. 그러자 열화는 씻 은 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동문사저들은 처음엔 영운 혼자 힘으로는 막아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모두들 일제히 법보, 비검을 날렸다. 하지만 이런 구천원양척의 위력을 보고 쓸데없이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 각자 비검을 거둬들이고 한가로이 한악과 주문의 얘기를 들었다. 원래 주문과 한악이 출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위쪽의 뇌화가 점점 위축되어졌었다. 영운 등 은 주문과 한악이 적을 요진 밖으로 유인하여 구천원양척의 묘용을 이용하여 싸우기 때문에 열화 풍뢰가 수그러든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기로 한 시간이 지났지만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도리어 열화풍뢰만 해일처럼 엄청난 기세로 밀어닥치는 것이다. 동시에 동부를 보호하던 금하(金霞)도 차츰 엷어져 가자, 영운 은 구천원양척을 주문에게 준 것이 점점 후회스러웠다. 만일 요화(妖火)에 의해 금화가 다 흩어져 버린다면 무엇으로 막아낸단 말인가? 더구나 적이 열화풍뢰로 동부를 맹렬히 공격하는 한편, <남해쌍동> 진씨형제, <신행두타> 법승 과 함께 두 사람이 남해에서 다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연성한 천산지공(穿山之功)으로 아미의 심 장부로 침투해 올 줄을 몰랐다. 아미산 측면에서부터 천삼백 장 깊이로 파고 들어가, 산근천맥(山 根泉脈)을 따라 응벽복지로 숨어든 뒤, 태원동 왼쪽 지면을 뚫고 올라갔다. 여러 사람들이 뒤를 소홀히 하고 있는 틈을 엿보아 우선 육지와 지마를 훔치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안팎으로 양면 공격을 감행하려 한 것이었다. 다행히 비검전서에 미리 예언을 하여, 영운은 진작부터 엄밀한 조치를 해두었다. 약란과 문기 두 사람에게 명해 태원동, 소운간 일대를 교조가 하사한 영부를 지니고 순시토록 한 것이다. 천산파석의 파해 行地窺 仙府陷雙童 拜山環 幽宮投尺簡 약란은 태원동(太元洞) 왼쪽 근방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종내 그쪽에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약란은 좀이 쑤셨으나 영운이 절대 자리를 뜨지 말라는 지엄한 분부를 내렸기 때문에 후동(後洞) 의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도 움직일 수가 없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한참 이 생각 저 생각을 골똘히 하는데 길옆 기석(奇石) 뒤쪽의 풀더미가 흔들리며, 육지가 지마 (芝馬)를 타고 달려나와, 빠른 속도로 약란을 향해 다가왔다. 육지는 급히 말등에서 뛰어내리며, 입 속으로 '야야야!' 소리를 지르며 앞쪽을 향해 마구 손가락질을 해댔다. 약란은 이 지마를 매우 신기하게 여겼었다. 얼마 전 지마를 구해 동굴로 돌아왔지만, 사람만 보 면 도망가는 바람에 시종 육지만큼 친해지지 않았다. 마침 육지가 지마를 타고 오자 품에 안고 자세히 살펴볼 요량으로 지마를 잡으려 허리를 굽혔다. 이때 문기는 수운간(繡雲澗) 왼쪽부근을 순시하고 있다가 멀리 육지가 지마를 타고 뛰어오는 것 을 보고 이런 영물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라 급히 몸을 날려 다가왔다. 그런데 와보니 육지의 신태가 기이했으며, 육지는 황급히 약란을 불러대는 것 같았다. 문기가 땅에 내려서자 육지는 작은 손가락으로 두 사람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앞으로 달려갔 다. 관목더미 사이로 가더니 땅을 가리키며 몸을 엎드려 귀를 땅에 바싹 갖다붙이고는 마치 무슨 소리를 듣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에 당황한 기색을 지으며, '야야!' 소리를 내뱉고 는 지마가 달려간 방향을 향해 날듯이 달려가 버렸다. 문기가 말했다. "약란동생, 저것 좀 봐! 육지의 신색이 뭔가에 놀란 것 같지 않아? 게다가 우리 두 사람을 이곳 까지 데려온 걸로 보아 저곳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있는 것 같아." 문기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약란이 급히 손을 내저어 문기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선이 한 것처 럼 땅에다 귀를 갖다대고, 세심히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육지 가 괜시리 호들갑을 떨었을 리도 만무하니, 어디선가 사고가 난 듯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우선 당장은 적을 막을 방비를 하는 게 최상책이라 결정하고, 곧 바로 문기는 영부(靈符)를 운용하여 선법(仙法)을 시전하고 수운간 일대의 매복을 발동시켜 적을 유인할 구멍 한 군데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봉쇄해 버렸다. 약란은 본령이 뛰어난지라, 육지가 가리킨 관목더미 부근에서 주위를 살피며 지켜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기가 모든 법술을 다 펼친 후 사방을 예의주시하며 약란이 서 있는 곳에서 불과 삼십여 장 거리를 두고 내려서 방위를 정하자, 주위의 모든 동정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 왔다. 두 사람은 정신을 집중한 채 적을 잡을 준비를 했다. 잠시후 문기가 약란에게 무슨 변화가 없느 냐고 손짓으로 묻자, 약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란이 다시 한번 땅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마치 땅을 파는 듯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곧 나타날 적이 천산파석(穿山破石)이 전문인 것을 알자 내심 깜짝 놀랐다. 만약 조금이라도 태만하여 그를 놀라게 하면 다시 그를 잡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가 땅을 파헤치고 상승하여 지면에서 떨어졌을 때 영부를 사용해 귀로(歸路)를 차단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를 붙드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재빨리 문기를 부르는 한편, 암중에 정신을 집중하여 주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차 반잔 정도 마셨을 시간이 지나자 땅 속으로부터 비록 크진 않지만 아까보다는 분명하게 땅을 파헤치는 소리 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약란이 순간 급히 몸을 날리자, 문기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거의 동시에 몸을 숨겨 준비를 했다. '싸싸!' 몇 차례 소리와 함께 세 가닥 푸른색, 누런색 불꽃이 번뜩임과 동시에 관목더미에서 세 사람이 날아나왔다. 앞선 사람은 두타(頭陀: 걸인행락을 하는 화상)차림이었고, 위에 서 있는 둘은 도동(道童) 분장을 한 난쟁이었다. 이 세 사람이 출토(出土)할 때, 약란은 한눈에 두타의 본령은 그저 그렇지만 오히려 뒤에 있는 두 난쟁이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간파했다. 숨소리를 죽여 가만히 숨어 있다가 적이 땅을 헤치고 나온 곳에서 십여 장 정도 떨어질 때를 기다려, 입 속으로 진언(眞言)을 외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두 번째 영부를 끄집어내 허공에 펼치자, 순식간에 금광이 난무하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매 복이 발동하여 적의 퇴로를 이미 봉쇄하였으니 이제 결코 달아날 수 없음을 알자, 문기는 날카로 운 소리를 내질렀다. "대담한 놈들! 이미 그물에 갇혔으니, 순순히 결박을 받아라." 이들 세 사람은 바로 <남해쌍동(南海雙童)> 진씨형제(秦氏兄弟)와 <신행두타(神行頭陀)> 법승 (法勝)이었다. 사남계(史南溪) 앞에서 자신들의 재주를 자랑하며, 아무리 아미산이 영부로 봉쇄되 어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천산입지(穿山入地)의 신법엔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큰소리쳤었다. 처음 아미산 측면에서부터 법승이 시전하는 법술과 함께 아래로 뚫고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마 치 파도를 꿰뚫듯 아무런 저항도 없자 내심 기뻐했다. 곧장 아래로 천여 장(千餘丈) 정도 뚫고 내 려가, 산맥을 돌아 곧장 가로질러 나갔다. 그런데 아미산 영부가 매복되어 있는 곳이 가까워지자 주변의 바위와 흙이 다른 곳과는 전혀 달 랐다. 석사(石沙)가 이상하게도 너무 견고하여 쉽게 뚫을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법술을 펼쳐서 야 겨우 이삼십 장 정도밖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한참 마음이 초조하여 안절부절 못하는데, 왼쪽 근방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영(白影)이 번뜩 이는 것이 보였다. 법승의 지하천행(地下穿行)은 진씨형제보다 조금 뒤처졌기 때문에, 순간 급히 백영을 쫓아갔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진간(秦艮)이 마침 곁에 있었는데 자신의 검광에 의해 흙이 푸석푸 석한 곳이 보였다. 어떤 땅 속에 사는 영물의 출입로인 것 같았다. 아직 은은한 향기가 채 가시지 도 않았다. 아미선부의 지질(地質)이 이처럼 견고하여 쉽사리 뚫을 수도 없는데 설마 천생 영물이 아니고서 야 지면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아래까지 올 수도 없을 뿐더러, 지화(地火)가 단단하여 좀처럼 견디기도 힘들 터이니, 천생 영물임에 틀림없는 듯했다. 듣기에 육지(肉芝)란 놈은 영통하기 짝이 없어 웬만한 법술봉쇄 정도는 식은죽 먹기식으로 드나 들 수 있다고 하니, 방금 본 백영이 육지가 아니면 또 뭐란 말인가? 이 근방에서 발견했으니 생 근(生根)이 있는 곳이 결코 멀리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여기 흙이 이처럼 견고한데 어찌 그놈의 출로를 찾지 못하랴! 만약 손에 넣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벌일 수가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막 동생 진태(秦兌)의 손을 잡고 의논할 양으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법승도 이때 흙이 파헤쳐져 비교적 뚫기 쉬운 곳을 발견 하고 앞서 뚫고 나갔지만 설마 육지의 통로이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진씨형제는 한껏 육지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었다. 하지만 사남계가 <신행두타> 법승을 파견한 의도가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불쾌한 데다, 법승이 먼 저 공을 세울 심산으로 허겁지겁 앞으로 나가다 육지를 발견하여 먼저 취하게 되면 원통한 일이 었지만, 한편 이처럼 통로를 따라가다간 순식간에 적지에 당도할 터인데 그때 적의 내습을 받으 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법승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진씨형제는 두 손을 마주잡고, 대적(大敵)에 대비하여 주의를 태만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을 헤쳐나가는데 처음처럼 손쉬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법승은 희롱하듯, 마치 날아가듯이 땅을 뚫 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는 단지 백영이 다시 보이지 않자, 놀라 멀리 도망했겠거니 생각했다. 어서 빨리 아미복지에 다다를 작정으로 법승이 앞서고, 그 뒤를 두 형제가 따르며 엄청난 속도 로 뚫고 올라왔다. 대략 지면에서 이삼백 장 정도 떨어졌을 거리에 이르자 이번에는 토사층이 진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을 보자 이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움찔했다. 이건 해도 너무한다. 아무리 지하라지만 아미가 이처럼 허술하게 방비할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분명 저 위엔 적들이 준비를 단단히 하고 우릴 기다림이 틀림없다. 이들 세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바짝 긴장했다. 쉽사리 지면(地面)을 박차고 <신행두타> 법승이 먼저 날아올랐고 진씨형제도 곧바로 뒤를 이어 몸을 날려 적측의 복지 깊숙이 침입하였다. 아무리 고강해도 십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은 적을 맞을 준비를 하며 주위를 살폈다. 곳곳에 기화이초(奇花異草)가 만발하고 온갖 기이한 나무들이 아름다운 꽃과 열매로 가득하여 선경(仙景)이 펼쳐져 있는 것이 결코 선부(仙府)로써 손색이 없는 동천복지임에 틀림없었다. 그곳 은 꽤나 넓었지만 주위가 울창하여 그렇게 허술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 라고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적들이 달려와 한바탕 격전을 치를 것에 대비했다가 오히려 선부가 텅 비어 있는 것 을 보고, 적이 모두 밖에 나가 싸우느라 안을 소홀히 한 것이라 생각해 안심을 하였다. 진씨형세는 육지를 땅 속에서 보았으니 이 부근에 육지의 생근(生根)이 있을 것이라 여겨 찾아 볼 심산으로 기웃거리며 길 옆 한쪽에 동부(洞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막 살펴보려고 들어서는 순간, 뒤쪽에서 금빛이 번뜩이며 무엇인가 맹렬히 자신들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방비를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때 젊은 여인의 질타하는 소리가 들리며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천하절색의 소녀가 몸을 날리 는 것이 보였다. 청광이 날아오고 있었는데,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동정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 가 단신으로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이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태가 소리쳤다. "오냐, 올 테면 와라!" 곧장 청광을 마주 쏘아대며 적을 맞이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급히 한 손을 떨치며, 수십 가닥의 마치 북(베 짤때 쓰는 도구)처럼 생긴 붉은색 검광을 날렸다. 진간이 이를 보고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전에 사부께서 말씀하시길 각파의 비검 중 북처럼 생긴 것을 쓰는 이는 계화산 복선담의 홍 화모모(紅花姆姆) 한 사람뿐이거나 혹 독문 전수제자뿐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어찌 저 여자 는 아미문하의 사람으로서 이파의 위험한 법보를 사용하는 걸까?' 아우가 당할까 걱정이 된 진간은 급히 검광을 날려 도와주는 한편, 법보주머니에서 사부가 전해 준 천년호사쌍목(千年虎蛇雙目)으로 십여 년을 연성한 <어룡환광구(魚龍幻光球)>를 꺼내들었다. 그 구슬은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스물네 점의 은빛 광화로 점점이 변하여 거대한 유성 (流星)처럼 공중에서 비무(飛舞)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약란의 <병령사(丙靈梭)>와 맞부딪치자, 진간의 안색이 홱 변했다. 광화가 폭발하며 하늘을 수놓아 응벽애 앞에 또다른 풍경이 생겨났다. <어룡환광구>는 채하(彩霞)가 부서지듯 순식간에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더니, 눈부신 광화를 사 방으로 흩뿌렸다. 병령사는 원래 홍화모모가 손수 연성한 진산이보로 적의 법보를 능히 막아낼 수가 있었다. 하지 만 이때 적의 광화가 너무나도 강열하여 비록 약란이 혜안을 가졌지만 너무나 강력한 불빛에 눈 이 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정신이 아찔하여 잠깐 멈칫한 순간, 적의 비검이 벌써 약란 을 덮쳐왔다. 이때 문기는 두타와 한창 어우러져 싸우고 있는 중이라 약란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 다. 적의 내력이 대단한 것을 알자, 약란은 자신의 법보로 적들을 사로잡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란은 천천히 이를 악물고 신검합일하기 시작했다. 적의 법보의 위력이 대단한 데다 병령사를 회수할 수가 없어 약란은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 꼴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수운간 쪽으로 도주하 는 척하며 적을 진(陣) 속으로 유인할 생각을 했다. 진씨형제가 이처럼 지독한 법보를 가지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들은 약란이 도주하는 것을 보자, 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장 약란을 쫓아갔다. 한편 법승은 문기와 대적을 하는데, 검광이 이미 문기에 의해 억눌려 빛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위험한 지경이었다. 진씨형제는 법승의 형세가 매우 불리한 것을 보았지만, 좀 더 고생좀 해보란 듯이 못본 체 약란 을 쫓아갔다. 그들은 약란을 붙잡은 뒤에 돌아와 법승을 구해줄 심산이었다. 그들 형제는 신속히 날아 이미 수운간 입구에 들어섰다. 눈앞엔 선경이 펼쳐져 있었다. 적을 쫓는 황망한 중에도 심중으로 '경치 참 좋구나' 감탄을 하는 순간, 갑자기 금하(金霞)가 번 뜩이자 소녀뿐만 아니라 그녀가 사용하던 병령사와 주위의 온갖 경물마저도 씻은 듯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방을 훑어보았지만 온통 희끄무레한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하늘이 점점 아래로 내려눌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불리하다 느끼고 되돌아가려고 뒤로 돌아섰지만 어디나 마 찬가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이 아찔하며, 머리에 통증이 오더니 곧바로 혼절하여 땅에 쓰러졌다. 이렇 게 되어 진씨형제는 양의미진진(兩儀微盡辰)에 갇혀버렸다. 그들은 후에 <건곤정기묘일진인>이 산에 돌아와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신행두타> 법승은 원래 화산(華山) 문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문하에서 축출되어 떠돌다가 우연 히 도서(道書) 한 권을 얻어 천산행지(穿山行地)의 이술(異術)을 익혔다. 신법은 뛰어났지만 다른 본령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전에 사남계의 명령을 받아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다 자신의 행지(行地) 무공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남해쌍동>이 이 분야에선 독보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 고 그들에게 지도를 받을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진씨형제가 근년에 들어 이미 열화조사와 사남 계의 위인됨을 알아차려, 그들과 손을 잡은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법승은 몰랐던 것 이다. 진씨형제는 법승을 보자 그의 얼굴에 흉광이 가득하고 언행도 거친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들 세 사람이 고파령(姑婆嶺) 가까이에 있는 어떤 큰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모두 며칠 동안 고기맛을 못 봐 주점에 들러 술과 고기를 진탕 먹어치웠다. 그러던 중 주점에서 꼽추와 준미한 소년을 우연히 만났는데, 법승이 보기에 그 소년은 아미문하였다. 그는 진씨형제가 곁에 있는 것 만을 믿고 상대의 무공실력을 가늠해 보지도 않은 채 다짜고짜 덤볐다. 그러나 그들 셋은 꼽추에 의해 아무도 없는 산중으로 유인되어 세 사람 모두 자신들의 법보를 빼앗김은 물론 길이길이 남을 수치를 당하고 말았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세 사람은 며칠 동안이나, 진흙늪에 갇혀 죽을 고생을 한 후에야 겨우 비검을 돌려받고 풀려날 수 있었다. 진씨형제는 책임추궁을 하진 않았지만 맘속으론 법승을 저주하고 있는 판이었으니, 어디 그에게 법술을 가로쳐 줄 마음이 있었겠는가? 다행히 꼽추가 자신은 아미문하가 아니라고 밝혔기 때문에 뒤탈은 없을 것 같았다. 법승이 아미에 도착하여 두 형제와 함께 땅 속으로 들어갈 때 보았더니 과연 진씨형제의 도술은 깜짝 놀랄 만하여, 곧바로 땅 속 수천 장을 고기가 강을 헤엄쳐 들어가듯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헤쳐나갔다. 자기의 무공이 어떻게 그처럼 신묘할 수 있겠는가? 진씨형제는 고의로 그를 희롱하며 그와 수십 장 거리의 간격을 유지하며 이리저리 헤집고 들어 갔다. 그는 비록 두 사람이 뚫어 놓은 길 뒤를 따라갔지만, 도처에 바위와 흙더미가 무너지니 쉽 사리 따라가기도 힘들 뿐더러, 자칫 잘못하면 행방을 놓칠 것만 같아 죽을 힘을 다해 따라갔다. 힘이 빠져 이제 더 이상 따라가기 힘들자 차츰 둘과의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지 질이 너무 견고하여 앞선 두 사람도 주춤한 사이에 겨우 따라잡을 수가 있었는데, 그 순간 백영 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따라가다 무심결에 흙이 부드러운 곳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위를 향해 나아갔고, 뒤따르던 형제는 육지를 찾을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막 지면으로 튀어나온 지 얼마 후, 법승은 얼마 걸어가지 않아 뒤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외침을 듣고 돌아보려는데, 옆 바위 위에서 자의(紫衣) 소녀가 날아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청광이 날아오자, 적이 미리 자신들이 쳐들어올 것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고, 급히 검광을 발출 하여 적을 맞이했다. 처음엔 진씨형제의 도움으로 그렇게 상황이 급박하지는 않았는데, 경황 중에 옆을 보니 또다른 소녀가 엄청난 위력의 법보로 진씨형제와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진씨형제는 둘이서 하나를 상대하고 있었지만,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어 보였다. 앞에 있는 자 의소녀의 검광도 신묘막측하여 경각지간에 자신의 황광이 붙들려 버렸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승기를 잡기는커녕 비검을 회수하여 몸을 숨길 여유조차 없었다. 점점 비검이 빛을 잃기 시작하자, 이마에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며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흐르 기 시작하였다. 법승이 정신을 집중하려는 찰나, 약란이 이미 두 형제를 유인하기 위해서 도주하 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 문기는 어룡환광구의 위력이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에게도 눈이 멀듯한 강렬한 것임을 알고, 두 난쟁이의 검광이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고 약란이 뒤로 물러나기를 바랬는데, 어쩐 일인 지 그녀는 그냥 그들을 맞아 계속 버티고 있었다. 거리도 멀었고 적이 알아차릴까 걱정되어 큰소 리로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두타의 검술은 보통수준이라, 이런 치사한 도적을 데리고 더 이상 시간을 끈다는 게 무의미하므로, 당장 현공(玄功)을 운용하여 공중에서 검광을 일으키자 즉시 광화가 번뜩 일어났 다. 법승은 도저히 견뎌낼 재간이 없자 비검만이라도 건져낼 심산으로 회수하려 했지만 어찌 그게 마음대로 쉬운 일이겠는가? 이때 진씨형제는 이미 승기를 틈타 적을 쫓아가는 걸로 봐서 자신을 구해줄 맘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의소녀에 의해 붙들려 도망치기는커녕 제대로 소리칠 여유도 없이 급박한 상황에 몰리자, 목 숨이라도 부지해야겠다는 심산으로 암중에 이를 악물고 신법의 주문을 입으로 외며 땅 속으로 숨 어 달아나려고 했다. 잠시 다른 데 한눈을 파는 사이에 그의 검광은 자의소녀의 청광에 의해 빛을 더욱 잃어 급기야 는 '쨍그랑'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나서 땅에 나뒹굴었다. 흡사 폭약처럼 탕탕 소리를 내며 그만 고철덩어리로 변해 땅바닥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법승은 그만 아연실색하여 막 달아나려고 몸을 휙 돌렸다. 이때 약란이 적을 유인하여 진 속에 가두어두고 돌아오다 보니 두타가 문기에 의해 비검이 절단 당하여 도망치려고 하자, 어디 그냥 놔두겠는가? 법보주머니에서 허리띠 같은 끈을 끄집어내 금 법(禁法)을 사용하여 손을 떨치자 한 줄기 광화로 변하여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법승을 꽁꽁 결박 지웠다. 세 명의 적을 하나도 빠짐없이 붙들어 큰 공을 세운 것이었다. 그런 중에 주문, 한악이 오자, 모두 함께 후동에 가서 영운 등을 만나 지난 경과를 이야기했다. 이때 적의 요진(妖陣)은 더욱 죄어들어 열화풍뢰(烈火風雷)는 갈수록 높아지며, 동부를 보호하는 금빛 안개가 차츰 짙어져가는 것만 같았다. 단지 비뢰동 앞에 있는 석기, 조연아 위의 한 무(畝) 남짓한 광화는 어떤 뇌화의 공격에도 끄떡없이 여전히 밝은 빛을 내품고 있었다. 영운 등은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일제히 힘을 합해 방어하며 시기(時機)가 오길 기다렸다. 혹 긴 박한 때엔 영운이 구천원양척을 사용하는 외에도, 나머지 사람은 모두 각자 비검을 일으켜 만일 을 대비하였다. 이처럼 위급한 가운데, 다시 이틀이 지났을 때 신조가 갑자기 돌아왔다. 영운은 이영경이 여영남을 구해온 뒤 다시 재차 망창산으로 요마를 제거하고 온옥을 구하기 위 해 떠난 지 여러 날이 지났을 때 신조가 갑자기 돌아왔다. 영운은 이영경이 여영남을 구해온 뒤 다시 재차 망창산으로 요마를 제거하고 온옥을 구하기 위 해 떠난 지 여러 날이 지났건만 아무런 소식이 없어 불안하던 차에, 이처럼 강우가 혼자 돌아오 자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급히 자령더러 구천원양척을 손에 들고 대신 지키게 한 뒤 후동(後洞)으로 돌아가 신조에게 이 영경이 혹시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 구원을 청하러 왔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신조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슬픈 듯이 울어댔다. 영운은 그만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지금 적은 강하고 아군은 세불리하여 역량이 모자라는 판에, 어떻게 손을 나눠 영경을 도우러 보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좀 더 시간이 지체되면 영경의 생 명이 심히 걱정스럽다. 아직 온옥과 청삭검도 적 수중에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하나? 신조가 비록 영통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영경이 어떻게 위험에 처했는지 알 수가 있나! 또 상대의 법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또한 망창산의 정세가 어떠하든지 간에 도행이 비슷 비슷한 동문들이니 그들이 간다고 해도 도움이나 될는지 의심스러웠다. 영운은 깊이 생각하여, 자신은 전국(全局)을 주지하는 입장이니 몸을 뺄 수는 없고, 다만 자령만 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녀의 검술이 정종(正宗)은 아니지만, 오히려 몇 가지 법보를 가 지고 있고 도술은 동문 누구보다 훨씬 위라서 그녀라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지금 아무리 위급한 일이 많다 하더라도 영경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신조가 여전 히 슬픈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태가 매우 급박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이모저모 생각지 않고 급히 후동에서 나와 자령의 귀에다 대고 자초지종을 얘기하였다. 그녀는 자령에게 영단 두 알을 주고 신조를 타고 몰래 앞 동굴로 빠져나가 망창산으로 가서 기 회를 잘 타 일을 처리하라 이르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선 영경을 구하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 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약란, 문기는 자령을 대신하여 여러 동문들과 함께 적을 맞으러 나가, 이제 동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고는 비록 미력하나마 여러 사람을 따라다니며 운기법을 배운 덕분에 신체가 아주 건 실해졌다. 영운은 자령을 내보낼 때, 남고남매더러 영남을 돌보고 있는 지선을 도와주라고 명령했 다. 지선에게는 수시로 각지를 순시하다 적의 동정이 있으면 적을 맞아 싸우지는 말고 우선 비검을 날려 경고하여 다른 사람들이 달려와서 도와주도록 했다. 지선의 능력은 그처럼 뛰어나진 못했지 만 두 개의 보검은 선인(仙人)이 남긴 신물이라, 위급한 상황에선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던 것이 다. 자령이 명을 받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운은 묘일부인의 비검전서를 받았는데, 전서에 의 하면 교조께서 곧 응벽애로 돌아오셔서 여러 검선들을 모아 오부(五府)를 여실 것이라고 씌여 있 었다. <영경이 돌아와서 병이 낫거든 경운과 함께 가서 먼저 청삭검을 취한 후에 요시를 참살하라. 매 일 세 차례 열화풍뢰가 가장 강렬할 때에는 모두 정신차려 수비하고, 구천원양척으로 맞서야 하 며 그 외의 시간에도 밤낮으로 수비하며, 매일 훈련도 게을리하지 말아라.> 그 밖에도 몇 가지 사실을 적어놓았는데, 영운이 여러 동문에게 전하자 모두 기뻐하며 한편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지 경운만이 일전에 황산 찬하대사에게 들은 말이 떠올라 기쁜 중에도 마음이 답답했다. 찬하 대사의 말씀에 의하면 <삼영이운(三英二雲)> 가운데 오직 자기만이 아직 속세의 인연이 채 끊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장래에 성이 엄(嚴)인 사람과 혼인을 올릴 거라 했었다. 그동안 깜빡 잊고 있 었는데, 마침 묘일부인의 전서와 합치되는 부분이 있자 심중에 곤혹감이 들었다. 비검전서에 의하면 그는 엄인영(嚴人英)이란 사람으로, 자기가 검을 얻을 때 엄가의 도움을 받아 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찬하대사의 말을 떠올리니 부끄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스승의 명을 어길 수도 없고, 청삭검을 또한 버리기도 아까운 것 아닌가? 그녀는 영운과 심경의 얘길 나누려 했지만 여러 동문들이 적을 맞아 동분서주하는 마당에 한가 한 신세타령이나 할 수도 없고 해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이튿날 자령이 영경을 구하여 아미로 돌아와 휴양시켰다. 영경이 원상대로 회복되자 영운은 비 검전서에 적힌 대로 경운더러 일을 함께 처리하라고 일렀다. 영경은 곧 경운과 함께 세 번째로 망창산으로 갔다. 먼저 엄인영, 장이, 금선, 소화상 등을 만나 청삭검을 찾은 뒤 요시를 주살하고, 옥령암을 뒤집어 온옥을 가지고 아미로 돌아왔다. 동굴로 들어와 보니 영운 등 여러 동문이 한 사람도 태원동 안에 있지 않았다. 지선에게 물어보 니, <만묘선고> 허비랑이 불러들인 두 명의 요인이 더 참여하여 하루 밤낮을 싸워 이제 겨우 풍 뢰가 조금 가라앉았다고 일러주었다. 영운이 여영남을 매일 영천(靈泉)에 목욕시켜 이젠 허리 아래부터 차츰 피가 따뜻해져 온몸이 불그스레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간 안심이 되었다. 영운은 자령과 함께 밖으로 날아가 동굴 쪽을 돌아보았다. 위쪽에서 새로 온 두 요인이 아래쪽 을 향해 갑자기 열화풍뢰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주문은 적이 다시 요법을 시전하는 것을 알고 방심하지 않았다. 잠시 손을 멈추고 있자, 구천원 양척으로 적을 대항할 때 열화풍뢰로 가려진 가운데 붉은 얼굴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흉악한 몰골의 도인이 손에 작은 기를 들고 가리키는 곳마다 뇌화도 따라서 날아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 이 났다. 주문은 한악의 부추김을 받아 일시 공명심에 적을 방어하는 임무를 잊고, 요도의 손에 들린 것 이 요진(妖陣)의 주기(主旗)로 오인하여 그것을 깨뜨릴 생각으로 적을 향해 날아가며 구천원양척 으로 풍뢰를 향해 맞부딪쳤다. 순간 구천원양척에서 아홉 가닥 금화(金花)가 날아가자, 뇌화는 즉 시 사라져 버렸다. 그 요도는 마치 금빛에 휩쓸려 중상을 당한 듯 지상을 향해 떨어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왼쪽 으로 몸을 비스듬히 누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문은 큰 공을 세울 기회를 놓칠세라, 급히 한악 과 함께 쫓아갔다. 얼마 쫓지 않아 요도는 곧바로 금화(金花)와 자기(紫氣)에 갇혔다. 막 기뻐하려는데 약란의 날카 로운 외침이 들려 급히 뒤를 돌아보니 이삼 장 가량의 원을 그리며 열화가 질풍처럼 동굴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는데, 그 뒤에 너댓 명의 요인이 따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적의 유인책에 걸렸음을 간파했지만, 거리가 워낙 떨어져 있어 그녀를 구해줄 수가 없 었다. 약란은 바짝 정신차리고 비검과 법보를 날려 이를 막아냈다. 하지만 그 열화는 이미 그녀의 머 리 위를 내리누르고 있어 한눈으로 보기에도 약란의 생명은 보전키 어려울 것 같았다. 주문은 떨어지는 요도를 쫓을 생각은 단념하고, 황급히 구천원양척으로 그녀를 도우려 날아가는 데, 순간 눈앞에 검은빛이 쏜살같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얼핏 보기에 그 속엔 교룡같이 생긴 형 상이 번뜩였다. 요인이 약란을 핍박하며 더욱 열화가 맹렬해지자 주문, 한악도 그녀를 구하려 날 아갔다. 주문이 금화자기로 열화를 깨뜨리려는데 검은 구름은 이미 요인의 열화를 멈추게 했고, 붉은빛 이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며 약란 곁에 내려섰다. 자세히 보니 영준한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악은 나타난 소년이 바로 <고해아(苦孩兒)> 사도평(司徒平)인 것을 알아차렸다. 사도평이 설 산 현빙굴에서 실종된 뒤, 신타 을휴(神駝乙休)를 따라갔다는 것을 듣고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었다. 검은 구름이 사도평의 법보라는 것을 알자 혹시 구천원양척에 손상될까 두려워 급히 소 리쳤다. "주언니, 정신차리세요." 이때 주문도 적이 아니라 친구인 것을 알고 급히 진언을 외어 원양척을 휘둘렀다. 현천지보는 과연 명물허전이라 검은 구름은 그냥두고 곧장 열화를 향해 아홉 가닥의 금화 자기가 날아갔다. 적은 처음엔 매우 맹렬히 공격했지만 검은 구름에 의해 의외의 일격을 당한 데다, 이번엔 금화 자기에 부딪쳐 아래위로 짓눌린 꼴이라, 흡사 화산이 폭발하듯 하늘에 붉은 비를 뿌리며 순식간 에 연기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검은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두 마리 교룡 같은 것은 사도평의 지휘에 따라 태만하지 않고,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물어 둥근 원을 그리며, 열화 뒤에 숨어 있던 요인을 휘감아 버렸다. 순간 처절을 극한 참혹한 단말마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두 구의 두 토막난 시신과 함께 붉은 피가 떨어져 내 렸다. 한악, 약란이 승기를 틈타 나머지 요인도 쫓으려 하자 좀전에 동굴을 떠났다가 그만 큰일을 저 지를 뻔한 것을 생각하고 주문이 급히 이를 만류했다. 이와 동시에 적쪽에서 이미 요진을 발동하 여 열화풍뢰가 질풍노도처럼 밀려왔다. 영운과 자령도 동굴 속에서 나오다 사도평을 보고 모두 깜짝 놀라 기뻐했다. 구천원양척을 사용 해 뇌화를 막아내는 한편, 전후 사정을 물어 현빙곡 눈계곡에서 사도평을 데려간 사람이 바로 무 산(巫山) 영양봉(靈羊峰) 구선동(九仙洞)의 <대방진인(大方眞人)> 신타 을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는 오랫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은 정, 사 각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고인(高人)이었다. 청라로 가는 도중 설산 꼭대기에 이르러 우연히 아래쪽에 요무마화가 넘치는 것을 보았는데, 무 심중에 사도평의 자질이 출중함을 알고 그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기쁜 마음에 사 도평을 데리고 산으로 돌아가 여러 가지 도법을 전수해 주었다. 십여 일 정도 곁에 두고는 동굴 속에서 전수해 준 법술을 연습하라고 명하고는 혼자 어디론가 떠났다. 얼마 전 신타 을휴가 돌아와, 다시 오룡전(烏龍剪)과 두 가지 영부를 전해주며 서신 하나를 건네 주었다. 그리고 사도평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아미선부가 지금 요인에 의해 곤궁에 처해 있는데, 이를 벗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천호(天 狐)의 탈겁시기가 될 것이다. 너는 반드시 그 전에 돌아가서 천호의 두 딸을 보면 편지에 쓰여 있 는 대로 일을 처리해라. 그곳엔 요진이 뒤덮고 있을 테니 나의 영부가 아니면 없앨 수가 없을 것 이다. 만약 금화 자기를 보게 되면 그건 바로 아미문하가 가지고 있는 현천지보로써 구천원양척 이라는 것인데, 그때 아마 그녀들을 곧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네가 나 대신 할 일이 하나 있다. 민산(岷山) 백서담(白犀潭) 아래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나의 친구가 살고 있느니라. 네가 영부와 죽간(竹柬: 대나무 서찰)을 가지고 가서, 연못 앞에 도착하면 '한선자(韓仙子), 서신을 가 져왔습니다'라고 세 차례 소리를 쳐라. 말을 다한 뒤 곧바로 명부와 죽간을 연못 안으로 집어던 지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마라. 단지 내가 전해주는 진언을 외고 급히 일을 처리하면, 영부의 묘용(妙用)으로 말미암아 너를 아미로 돌아가게 해줄 것이다. 만에 하나 네가 가는 길이 험하다고, 비검을 타고 민산에 도달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중도에 필히 떨어질 것이다. 연못이 있는 산 뒤엔 사방이 암석으로 쌓여 있고, 음삼(陰森)으로 가득차 있어, 지나기가 아주 힘든 곳이다. 너는 반드시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한 번씩 절하며 연못까지 도달하여야 한다. 가는 동안 분명 수많은 위험과 고통을 당하겠지만 결코 마음을 약하게 먹어 나의 일을 망치지 말 기를 바란다. 너의 생명이 걱정스럽지만, 그리 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네가 이 일을 잘 해낸다면, 내가 후에 반드시 네가 도(道)를 이룰 수 있게 해주겠으니, 이 고통을 달게 감수해 라." 사도평이 이전에 <만묘선고> 허비랑의 문하에 있을 때 견문이 그리 넓진 않았지만, 신타 을휴 의 대명(大名)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신타의 무공이 엄청나게 고강한데 자신의 일을 대신 맡겼으니,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도평은 신타의 성격이 고괴하여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이나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 화를 당하기 십상인 데다, 더구나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하므로 불문곡 직하고 그의 명을 받들어 아주 공손하게 절하며 물러나려 했다. 이때 신타 을휴가 웃음을 띠며 사도평을 다시 앉히더니 단약 한 알을 복용시키며, 지금 즉시 떠 나라고 분부했다. 자기는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어 선부를 떠나야 하니 후에 아미에 들러 약간의 일을 봐주겠다고 했다. 사도평은 신타 을휴를 전송하자마자 곧바로 민산으로 떠났다. 산허리에 도착하여 검광을 거두고 신타 을휴가 지적한 길을 따라 성심성의껏 한 걸음에 한 번 절하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 음엔 비교적 쉬웠지만 조금 지나자 산길이 점점 험난해지기 시작했다. 하루 밤낮을 줄곧 쉬지도 않고 걸었지만 아직 채 반도 도달하지 못했다. 만약 보통사람이었다면 피곤해 쓰러져 죽지 않았으면, 목이라도 말라 죽었을 것이다. 사도평이 평소 수련을 깊이 쌓고, 또 영단으로 인해 체력이 증대되어 조금은 피곤함을 느꼈지만 그런 대로 견딜 만은 했다. 그는 위인됨이 원래 매우 충실하여 자신을 도와준 분의 부탁을 맡은 터이라, 조금도 소홀히 하 지 않고 힘든 길을 계속 나아갔다. 성심껏 절을 하며 걸어가면서 주위의 동정도 살폈다. 처음 이틀간은 아무 일도 없었으나, 삼 일째 되는 날 아침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중에, 양쪽 수천 장에 이르는 절벽엔 푸른 이끼가 가득 끼어 녹색 기름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앞쪽엔 폭이 불과 한 척 남짓한 천연 돌다리가 수백 장 높이의 산허리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 엔 밑이 안 보일 정도로 아득한 계곡이었는데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맑은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물이라기보다는 바위에 부딪쳐 아름다운 흰꽃을 피우며 안개를 피워내고 있었다. 단지 시끄러운 폭포 소리만 들려올 뿐, 다른 소린 아예 들려오지도 않았다. 사도평은 절을 하며 좁은 돌다리 위로 발을 내디뎠다. 여기부터가 중요한 관건이라 생각하니 앞 으로 얼마나 많은 위험이 있겠는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아연 긴장하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절을 하다못해 온몸을 땅에 바짝 붙이며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며 나아갔다. 돌다리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을 뿐더러 표면이 미끄러워 자칫 실수하는 날에는 수천길 낭떠러 지 밑으로 떨어져 뼈도 못 추릴 판이었다. 아무리 사도평이 평소 무공연습을 착실히 쌓았다 하더 라도 연신 절을 하며 걸어오는 통에 거의 기진맥진하여 불안했다. 하나 다행인 것은 비록 돌다리 가 울퉁불퉁하고 미끄러웠지만 끊어진 곳은 없어 무난히 건너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반 나절을 더 가자 길은 더욱 험난해졌다. 다리는 마치 물먹은 솜마냥 흐느적거리고 신경은 거 의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또렷해 있어 갈수록 더욱 경건하게 절을 하였 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동굴이 하나 있었고 바로 그 옆에 연못이 있었다. 이제 다 왔구나 싶어 내심 기뻐하는데 정신이 약간 혼미해졌다. 막 절을 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갑자기 한 덩이 구름이 쏜살처럼 일어나 사도평의 몸 주위 를 휘감아 버렸다. 어찌나 짙은 안개인지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시켜 주 위를 살폈지만, 도통 경물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사도평은 신타 을휴의 명에 따라 검광으로 길을 비추지 않고, 더더구나 비행도 하지 않고, 계속 길을 더듬으며 절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두세 보 가량 내디뎠을 때, 갑자기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깜짝 놀라 앞을 주시하니, 구름이 자욱한 가운데 커다란 금광이 빛나고 있었는데, 술잔만 한 새빨간 눈동자 같은 것이 그 사이에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의 괴안처럼 생겼는데 차츰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도평은 저 금홍광화(金紅光華)가 필시 어떤 흉악한 괴물의 두 눈일 거라 생각했다. 너무나 놀 라 급히 비검을 방출하려는 순간 신타 을휴가 일러준 말이 떠올라 손을 멈췄다. '네가 가는 도중엔 수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길이 험한 것 외에는 모두 환상일 뿐이니 정신만 차리고 성심껏 경배하면 아무 위험이 없을 것이니라.' 생각이 떠오르자 사도평은 안심이 되었다. 하물며 이것은 선령굴택(仙靈窟宅) 바로 근처인데 어 찌 요마가 설칠 수 있겠는가? 이건 아무래도 화(禍)가 아니라 복(福)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저게 환영인지 아닌지 한번 부딪쳐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순간 뇌리를 스 치는 것이, 만약 저게 진짜 괴물이라면 내 목숨은 고사하고, 천호의 천겁과 진씨자매도 허비랑의 손아래 처참히 당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되자 더욱 움츠러들어 두 눈을 꼭 감고 더욱 공손히 절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 음씩 다가가자 아직 괴물의 몸에 부딪치지는 않고, 다만 괴물의 다리만 점점 가까와지며, 코를 찌 를 듯한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려 해도 바로 코앞에 괴물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이대로 가다간 요물의 몸에 부딪치게 되고, 그때 가서는 어떻게 도망칠 방도도 없는 것이니, 죽든지 아니면 중상을 당할 게 분명했다. 순간 이 생각 저 생각이 어지러이 떠올랐 다. '에라, 이왕 죽을 거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지 쌍판이나 보고 죽어야 원이 없겠다.' 사도평은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어디선가 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눈앞 의 광화는 차츰 물러가기 시작했다. 금광홍화가 도대체 어떤 괴물인지 살피려 안력을 돋구어도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금광홍화는 차츰 빛을 잃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아래로 가라앉아 마 침내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와 동시에 구름도 차츰 엷어지며 주위경관이 희미하게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동굴을 향해 다시 두어 걸음 가다가 땅바닥에 축축한 기운이 느껴져 자세히 살펴보니, 뱀 같은 것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액체인지라, 방금 전 그 요물이 용의 일종인 것을 알았다. 요물이 이미 물러갔지만, 또다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라 정신을 바짝 차리며 경건하게 경배하며 앞으로 걸 어갔다. 절하며 걷기를 다시 이삼 리 가량 갔을 때, 바로 곁에서 폭포가 떨어져 내렸다. 주위 경관이 눈 에 들어와 살펴보니 아마도 현기(玄奇)가 가득한 고동(古洞)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좀더 다가 가자 앞에 석벽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아래쪽은 고개를 숙이면 지나갈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다. 사도평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 보니 바로 아래가 연못인지라 깜짝 놀라, 이젠 다 왔구나 하고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연못으로 다가갔다. 위엔 종유석이 매달려 있었고 바닥엔 돌가루가 반짝이며 빽빽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돌가루는 마치 칼날처럼 예리하여 발을 디디기 무척 힘들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벌써 살이 찢겨져 나가고 뼈가 부러졌겠지만, 사도평은 워낙 근골이 뛰어났기 때문에 비록 고통은 당했지만 이 곳까지 무사히 당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몸을 일으켜 주위 경관을 살펴보니, 연못의 넓이는 대략 십여 무(畝) 가량이었고 사면엔 온통 기 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바구니처럼 생겼다. 천정엔 사오 척 가량의 구멍이 뚫려 이 구멍 을 통해 햇빛이 연못 한가운데를 비추고 있어, 연못 수면은 마치 맑은 거울처럼 잔잔하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주위는 어두워 암벽에 박힌 옥(玉)이 반짝이는 불빛에 의지하여 겨우 주위를 살필 수 가 있었다. 사면의 기암괴석이 물에 비춰져 마치 용궁처럼 수면을 수놓았고, 물 속엔 고기가 유유 히 헤엄치고 있었다. 처음에 볼땐 자세히 못 보았지만, 천 장이나 되는 석벽들은 전부 고괴한 분위기를 풍겨 금방이 라도 뭔가 뛰쳐나올 듯이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연못 뒤쪽 절벽 아래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으 니, 이 곳의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사도평은 이곳이 선지(仙地)가 아니라 생각하고, 감히 더 이상 어물쩡거리지 못하고, 급히 법보 주머니에서 죽간을 꺼내 머리 위로 쳐들고 신타 을휴가 전해준 대로 진언을 외었다. 막 주문을 다 외었을 때 연못 한가운데서 일진 괴풍(怪風)이 일며, 즉시 사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며 사방벽에서 괴물, 요마, 용사(龍蛇) 같은 것들이 일제히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공포스런 소리는 더욱 극성스러워졌다. 사도평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급히 절을 하고 벌떡 일어나 두 손에 죽간을 들고 신타 을휴가 가 르쳐 준 대로 세 차례 소리치고 난 뒤 곧바로 연못 한가운데로 던져넣었다. 죽간이 막 손을 벗어 났을 때, 갑자기 아주 딱딱한 것이 옆구리에 부딪쳐 와 고통이 극심하였다. 감히 뒤돌아보지 못하 고 급히 현공(玄功)을 운용하여 검광을 일으켜 연못 위 천장에 뚫린 구멍을 향하여 몸을 솟구쳤 다. 막 날기 시작하자, 괴이한 소리가 더욱 커지며 요란스러워졌다. 괴풍이 밀려오며 해일이 덮치는 듯이 산곡(山谷)이 울렁이며 바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겨우 구멍을 빠져나와 보니 그곳은 바로 웬만한 고인(高人)도 쉽사리 찾을 수 없는 민산(岷山) 꼭대기였다. 비록 때는 여름이었지만 정상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사방이 온통 눈부신 은세계를 창출하고 있 었다. 이때 위에서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며 폭우라도 내려칠 듯한 기세로 밀려오자, 더 이상 머뭇 거리지 않고 비검을 타고 민산을 벗어났다. 차츰 뒤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정력이 이미 고갈된 데다가 이곳 저곳 상처를 입어 공중에서 찬바람을 들이키자, 온몸에 살을 에이는 듯한 통증이 밀 려왔다. 그 아픔은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열화풍뢰는 걷히우고 完使命 得寶返峨嵋 斬妙旗 衝煙入敵陣 사도평은 외진 골짜기에 내려서서 석동(石洞)을 찾아들어 단약을 복용하고 난 후 현공(玄功)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이틀간 줄곧 요양을 하자 병세는 약간 호전되었다. 그러나 아미선부(峨嵋仙 府)가 핍박받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곧 아미후산(峨嵋後山)을 향 해 비검을 타고 날아갔다. 아미산에 당도하여 보니 사남계(史南溪), 정원규(鄭元規) 등에게 수차례 공격을 받았지만 아직 건재하고 있었다. 사남계 일행은 승리를 얻지 못하자 한창 고심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 그 요인들을 도와주기로 약속한 두 사파의 요인이 당도하였는데, 바로 화산파(華山派) 본문(本門) 중 극히 음험한 인물 <적화신(赤火神)> 홍발(洪發)이었고, 다른 한 명은 <죽산칠자 (竹山七子)> 중의 한 명인 <금강조(金剛爪)> 척문화(戚文化)였다. 이들은 노상(路上)에서 우연히 황산(黃山) 오운보(五雲步)의 <만묘선고(萬妙仙姑)> 허비랑(許飛 娘)을 만났는데, 사남계 등이 아미침투를 감행한 사실을 전해듣고 그녀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참 가하게 된 것이었다. 홍, 척 두 사람은 곧바로 아미로 날아갔다. 사남계, 정원규 등은 비록 열화풍뢰(烈火風雷)로 적의 동부(洞府)를 계속 핍박했지만 승기를 잡기는커녕 오히려 수많은 조력자들만 부상을 당했다. 일전 엔 한 여인이 그 둘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신검합일하여 날아와서는 천열화신기(天烈火神旗) 를 깨뜨려 버렸다. 다행히 <분해아 향무진인(粉孩兒香霧眞人)> 풍오(馮吾)가 허술하게나마 방비하고 있다가 막 그 녀를 사로잡으려는 순간, 이번엔 또다른 아미파의 여인이 나타나 동도를 구해가 버렸다. 참으로 어이없이 당한 것이다. 후에 알고 보니 바로 <천호(天狐)> 보상부인(寶相夫人)의 두 딸 중 하나라는 것이다. 먼저 공격 한 여자는 진한악(秦寒顎)이었고, 나중 그녀를 구해간 여인은 주씨 성을 가진 여자로 이전에도 이 미 수차례 진내(陣內)를 드나들며 적진을 벌집 쑤시듯 들쑤셨던 여인이다. 조그만 여인에게 이렇 게 골탕을 먹었지만 요인 일행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처럼 주기(主旗)를 파해당한 데다 눈앞의 적은 신출귀몰, 게다가 금빛으로 동굴을 보호하고 있 었음에랴. 비록 열화풍뢰가 제아무리 대단한 위력을 지녔다 해도 적의 손에 있는 구천원양척이란 현천지보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했고, 게다가 <남해쌍동> 진씨형제와 <신행두타> 법승의 지하천행(地 下穿行) 지법이 좀 뛰어나기에, 적진에 침투하여 육지(肉芝)를 훔쳐오라 보냈더니, 한 번 가서는 꿩 구어먹은 소식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던 차에 사파의 조력자인 홍발, 척문화 두 사람이 당도했으니, 모두들 그 기쁨이야 오죽했으랴! 서로 상견례를 마치고 그간의 경과에 대해 소상히 얘기한 뒤, 앞으로 적에 대응할 작전을 숙의하기 시작했다. 홍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도우들께서는 어떻게 저런 애송이들 하나도 처치하지 못해 안달들이십니까? 적의 수뇌는 하나도 없고 털도 안 벗은 계집들만 있는 데도 오히려 고생만 진탕하고 그들에게 우롱만 당하다 니요? 게다가 수많은 도우들이 부상을 당했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만약 이대로 머뭇거 리다 저 반도들 수뇌라도 소식을 듣고 회산(回山)하면, 그땐 정말 세가 더욱더 불리해질 것이오. 제 생각에는 한쪽에서는 계속 열화풍뢰로 공격을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척도우의 뛰어난 신외화신 (身外化身) 법술로써 적을 유인하는 계책이 마땅할 듯하오. 구천원양척을 쓰는 계집을 한쪽으로 유인한 뒤, 우리들이 일제히 공격해 들어가 적의 중앙을 교란시켜 흐트러뜨리면, 쉽사리 이겨 승 리의 기쁨은 우리에게 있을 거요." 사남계, 정원규 등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뻤다. 그들은 즉시 계획대로 일을 시작하여, 척문화가 공중에서 원신환화체신을 운용하여 적을 유인하러 다가갔다. 주문, 한악은 과연 어린지라 쉽게 적의 간계에 빠져들어 적이 중상을 당한 줄 알고 다가갔다. 적들은 내심 좋아라 하고 그녀들을 사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홍발이 잘못 계산을 했으니 구천원 양척이 그처럼 대단한 위력을 지녔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척문화가 비록 위장하여 떨어졌지만 실제로 그의 원신(元身)은 이미 중상을 당한지라 열화를 일 으킬 수가 없었다. 이때 마침 <고해아> 사도평이 도착했는데, 아래를 굽어보니 요운(妖雲)이 충만하고 열화가 피어 오르는 것을 발견하자 급히 오룡전(五龍剪)을 꺼내 영부를 시전시켜 요기를 향해 부딪쳐갔다. 또 한편으로는 신약란의 위급함이 눈에 들어왔다. 사도평은 손을 펼쳐 오룡전을 날려 적의 요화(妖火)를 막았다. 이때 주문이 방향을 바꿔 구하러 오자, 금화 자기(金花紫氣)가 비춰지는 곳마다 열화가 사그러들었다. 그는 태만치 않고 손가락을 튕겨내 오룡전을 날려보내자, 마치 두 마리의 교룡이 불을 뿜듯 쏜살같이 날아가 홍발을 두 동강 내 버렸다. 사남계, 정원규 등은 다시 자신들의 우익(羽翼)이 잘려져 나가자 더욱 분해하면서 이를 갈았다. 하지만 적이 결코 업신여길 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고 공격을 삼가고 분노를 삼키며 사태를 관찰 할 수밖에 없었다. 할수없이 열화풍뢰로 공격을 계속하면서 열화조사(烈火祖師)가 와서 원수를 갚 아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영운도 구천원양척으로 동굴입구를 지키고 있었지만 함부로 뛰쳐나갈 수가 없어 방어만 하였으 니 쌍방간에 잠시나마 휴전이 유지되었다. 폭풍전야 같은 무서운 고요함이었다. 사도평은 여러 도우들과 인사를 나눈 후 그간의 경과를 대강 얘기한 뒤 동굴입구 방어를 도왔 다. 다음날이 되자 영경, 경운, 엄인영이 망창산에서 요시 곡진을 제거한 뒤 청삭검(靑索劒), 온옥(溫 玉)을 얻어 가지고 미타, 유유안 두 제자와 원성의 싸늘한 몸뚱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올 때 생각은 당장 자영, 청삭 이검(二劍)을 합벽하여 적의 중앙주기(中央主旗)를 파괴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간의 사정을 몰라 우선 태원동에 가서 지선(芷仙)을 만나 사정을 대충 전해들은 뒤, 원 성의 시체를 두고 모두 후동(後洞)으로 가 여러 동문들을 만났다. 영운은 세 사람과 함께 마지막 비검전서를 꺼내 살펴보니, 다행히도 적을 무너뜨릴 시기가 바로 내일 정오로 임박해 있음을 알았다. 하루라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으니 우선 당장 원성을 구하고 영남의 원체(原體)를 복구시킨 다음에 적진을 파해할 새 계획을 세우기로 작정했다. 구천원양척을 주문에게 건네주고 엄인영, 한악, 사도평, 약란, 문기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동부를 지키라고 분부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우선 영천(靈泉)으로 가서 영남을 꺼냈다. 영경과 영운이 그 녀를 안아들고 태원동 안으로 가서 석상(石床) 위에 뉘였다. 영남은 비록 회생(回生)을 했지만, 겨우 실낱 갈은 호흡만 할 뿐이었다. 요즘에는 영천에 들어가 양화지기(陽和之氣)를 흡수하였으므로 얼어붙은 뼈가 차츰 녹기 시작하여 겨우겨우 감각을 되찾 은 정도였다. 몸 전체가 아직 다 녹지 않아 엄청난 한기를 느끼는지 이를 악물고 고통스러워했다. 영운은 영경더러 급히 온옥을 가져오라 명하고 경운에게는 가서 육지를 찾아와 영혈을 얻도록 했다. 잠시후 영운이 옥비녀를 끄집어내 육지에게 어느 곳을 베었으면 좋겠냐고 묻자 육지는 슬픈 표 정으로 왼쪽 팔뚝을 가리켰다. 영운이 가볍게 비녀로 찔러 옥병을 갖다대고 십여 방울의 선액(仙液)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선단 (仙丹) 한 알을 꺼내 반쪽으로 나눠서는 반은 육지에게 먹이고, 나머지 반은 상처 부위에 살살 발 랐다. 이때 육지는 이전에 취혈(取血)할 때와는 달리 제법 의젓하게 선뜻 응했다. 이로 보아 그의 공행 (功行)이 이미 크게 진전한 것이 분명해 모두 기뻐했다. 몇 마디 감사의 말을 하고, 경운더러 그 의 생근(生根)이 있는 곳에 데려다주어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 분부했다. 영운은 모든 일이 준비되자, 여러 동문들에게 말했다. "영남사매가 빙굴에 갇혀 천지의 극음지기(極陰之氣)에 의해 기(氣)가 많이 손상되었다. 반선지 체(半仙之體)일지라도 흑상(黑霜)이 발동할 때 갇혔으면 살아나기 힘들었을 텐데, 하물며 평범한 몸이었으니 오죽했으랴! 다행히 그녀는 선근(仙根)이 심후하고 무심결에 영약, 선초를 복용하여 살아남을 수가 있었고, 비록 온몸이 얼어붙었지만 원기는 흩어지지 않아 무사했다. 구천원양척이 비록 순양(純陽)으로 이루어져 온갖 사독(邪毒)을 제거하지만 자기(紫氣)가 너무 강해 밖으로 쏘 아져 나간다면 그녀를 구하기는커녕 되려 목숨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차에 다행히 온옥(溫 玉)을 얻었기에 망정이지 조금 더 늦었다가는 일을 크게 그르칠 뻔했구나." 영운은 동도들과 상의하는 중에도 옥병을 영남의 입술에 갖다 대고, 입 속으로 선혈(仙血)을 흘 려넣었다. 그리고는 자령에게 명해 젖은 옷을 벗기고, 그녀를 일으켜 세워 앉힌 다음 가슴에 안으 라고 했다. 또한 영경에게 온옥을 꺼내 영남의 발바닥 가운데 올려놓으라고 했다. 양손으로 발을 붙들어 온 옥을 바짝 갖다 댔다. 온옥은 기러기알만한 크기였는데, 자줏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붉은 안개를 품어내 온 방을 가득 메워 마치 봄날의 햇볕마냥 점점 광채를 발하기 시 작했다. 영남은 지혈(芝血)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온옥을 발바 닥에 갖다 대자, 즉시 수천 가닥의 따뜻한 기운이 힘찬 속도로 모공(毛孔)을 뚫고 들어와 경맥을 통하여 순식간에 허벅지까지 퍼져오는 것을 느꼈다. 쓰라리도록 극심한 통증이 점점 사그러들며, 뼛속까지 사무치던 추위가 점점 달아났다. 지혈은 신령스럽게도 양화지기를 아래에서 위로 끌어 올리며 점점 한 가닥 기운으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대략 두 시진 가량 지나자 벌써 호흡소리부터가 달라졌다. 지선이 벌써 보리죽을 끓여 영단을 개어 섞어가지고 왔다. 영경은 옆에 서 있다가 급히 그릇을 받아들고는 한 숟갈 한 숟갈씩 떠먹이기 시작했다. 영남은 지선의 입을 통해 진작부터 영경이 자신을 구하느라 모험을 한 일에 대해 자세히 들은 터였다. 영남은 내심 감동과 설움이 함께 복받쳐 어쩔 줄 몰라했다. 영남은 당장 영경과 함께 지 난 일을 이야기하며 오래도록 있고 싶었지만 영경이 아직 스승의 명을 다 완수하지 않은 터라 안 타까왔다. 영경 또한 이제 막 요시를 죽이고 동부로 돌아온 터라 자신도 심신이 쇠약해진 것을 느껴 정양 에 들어가야만 했다. 영남은 여러 사저, 사매들이 자신을 위해 애써준 것에 대해 큰 고마움을 느 꼈고, 더욱이 영경의 따뜻한 정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 영남은 자신도 모르 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쁨의 눈물이며, 안도의 눈물이며, 감사의 눈물이었다. 영경은 영남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이곳 선부의 아름다움과 여러 동문들이 골육(骨肉)보다 더한 정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얘기해 주었다. 내일 적을 무너뜨리고 나면 대사저를 따라 검법을 배우 면서 함께 즐겁게 지내자며 마주보고 웃었다. 영남을 구하자 이번에는 모두 원성을 구하기 위해 그에게로 갔다. 구천원양척은 후동을 지키는 데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곧바로 이용할 수는 없어서, 원성을 생환시키는 데에는 약간 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미타, 유유안 두 난쟁이도사가 영경의 인도로 영운 등 여러 동문들과 첫 상면을 가졌다. 영경은 자신의 자질이나 도행으로 보아 아직 일천하기 짝이 없는데 제자를 거둔다는 것은 어불 성설이라, 동문 선배들을 볼 낯이 없어 전전긍긍하며 두 왜인도사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두 사람 에게 응벽애 앞에서 대기하며 명령을 받들라고 일렀다. 자시(子時)가 지나자, 영남의 신체는 차츰 원상으로 회복되어 며칠만 지나면 완전히 회복될 것 같았다. 시각을 보니 편지에 적힌 대로 적을 쳐부술 때가 임박하였다. 영운은 지선과 남고에게 영남을 간호하라 이르고 여러 동문들에게도 각자 직무를 맡겼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자령, 경운, 영경, 인영 네 사람은 앞동굴로 나아가 적의 열화풍뢰가 극성을 부리는 틈을 타 미 진기로 몸을 보호하고는 곧장 요진(妖陣)을 향해 공격, 영경·경운은 자영·청삭 두 검을 합벽하 여 적의 중앙주기를 완전히 격파시킬 계획이었다. 만약 이때 적이 자신들이 공격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아래쪽으로 되받아쳐 공격해 올 것임으로 영운 자신은 후동에서 여러 동문들과 더불어 구천원양척으로 요기를 격파하며 안팎으로 응전하기 로 작전을 세웠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역할이 분담되자 영경은 유유안, 미타 두 난쟁이도사에 대해 조금 걱정스 러웠다. 아무리 <청낭선자(靑囊仙子)> 화선고(華仙姑)의 부탁도 있었고, 그들이 개사귀정(改邪歸正)을 맹 세했다지만 그래도 방문좌도 출신들인지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선부엔 영양이보가 허다한 데 다 자신의 책임이 막대했다. 영운이 이들에게 직분을 분배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 둘을 동부 내에 그냥 남겨두자니 아무래도 불안했다. 영경은 영운에게 사실대로 얘기했다. 영운은 웃으며 말했다. "넌 평소엔 그처럼 천진난만하고 마음먹은 대로 고집을 부리더니, 어째서 이번의 일에 대해선 그처럼 노심초사 걱정을 많이 하지? 너도 알다시피 여긴 선부중지(仙府重地)이니 그들 두 사람에 게 선연이 없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그리고 <청낭선자>도 그들이 사파의 요도들이라면 너에게 맡겼을 리도 없잖아? 전에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듯이, 여러 동문들 가운데 오직 너만 이 장래에 위험이 많을 것이라 했으니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지. 그러나 어제 두 사람이 여기 처음 왔을 때 보니 그들은 이미 과오를 뉘우치는 빛이 역력했고, 성실해 보이더 구나. 비록 출신이 방문좌도라 하더라도 애당초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일 뿐이지 양성지(楊成志)에 비해서는 근본이 훨씬 선한 사람들이야. 네가 이처럼 의심하는 것은 도리어 그들이 선행의 길로 들어서는 데 방해가 될 뿐이란 걸 명심해라. 어젠 너무 바빠 그만 그들 두 사람의 본령에 대해 물어본다는 것을 잊었었다. 적진의 요인들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니, 그들에게 무엇을 시켜 야 할지 모르겠어. 공격을 시킬지 수비를 시킬지 그래서 분부를 내리지 못한 거야. 네가 잘 알 터 이니 그들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도록 해라." 영경은 그들 두 사람의 능력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영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음, 그래? 지금은 땅 속을 맘대로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이 매우 필요해. 네 곁에 데리고 있다 가 진을 깨뜨릴 때 공을 세우도록 해줘." 영경이 그 말을 듣고 두 사람을 불러 명령을 하려 하자 영운이 그들을 불러세워 말했다. "본문이 제자를 거둬들일 때는 사조이신 장미진인 이래로 각 사백, 사숙들께서 남녀로 나누어 거둬들이셨다. 너희들은 아직 정식으로 입문한 것의 아니니, 이 점 유의하여 각별히 조심스럽게 행동하기 바란다. 조금 지나면 남자동문들이 속속 돌아올 터이니, 잠시동안 양성지와 우건 두 사 람과 함께 지내도록 하고, 장교사존을 배알한 후 다시 너희들 문제를 의논드려 처리하겠다." 영운은 양성지와 한악에 대해선 약간 걱정이 되었다. 양성지는 육지를 핍박하여 양의미진진(兩儀微塵陣)에 잘못 갇혀 큰 화를 당할 뻔했기 때문에 자 신은 결코 아미파의 문하에 입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후회와 한스러움으로 고민했다. 자신이 처음 요굴에 빠져 있을 때 진씨자매가 구해준 일이 있는지라 급한 김에 진씨자매에게 도움을 청 했다. 자령은 그를 멀리하고 싫어했는데 이렇게 간청을 해오자 대뜸 거절하였다. 하지만 한악은 아직 철부지한 소녀라 양성지가 간곡히 부탁해 오자 거절을 못하고 대신 부탁해 보마고 대답했었다. 그리하여 영운을 찾아가 부탁을 하였더니 영운이 대답했다. "육지에 관한 일은 육지가 용서한 빛이 분명하니 아무 문제 없지만 선진(仙陣)을 잘못 건드려 교조께서 남기신 영단지보가 얼마나 많이 손상되었는지 알 수 없단다. 장교진인께서 돌아오셔서 무슨 말씀이 계시겠지만 그의 잘못은 아마 쉽게 용서받기 힘들 거야. 적을 깨뜨린 후 그 자를 청 라로 보내겠다. 그가 만약 잘못을 깊이 뉘우친다면 능진인께서도 못 본 척하시지는 않으실 걸. 그 분께서 잘 알아서 조치하시겠지. 본문의 교규는 매우 엄격하므로 그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 을 우리가 용서해 준다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며, 앞으로 또 어떤 잘못을 저지를지도 모르니 함부 로 어쩔 수도 없다." 한악은 영운의 말을 다 듣고 나자 처음엔 조목조목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슴 한구석 엔 무언가 응어리가 뭉쳐 있었다. 그후 하루하루가 지나자 영운이나 동문들이 자령에게는 잘 대 하나 자기에겐 사사건건 반대이고, 이상하게 섭섭히 대한다고 느꼈다. 전에 적의 세력이 침체되었을 때 방어에만 급급하지 말고 공격할 것을 주장했지만, 영운은 끝내 허락하질 않았었다. 그러나 한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급히 나서서 사로잡힐 뻔하다가 겨우 구출되었다. 그후 더욱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 때는 어린애 같은 치기가 발동하여 앞 쪽 동굴로 나가 적의 중앙주기(中央主旗)를 깨뜨리려 하다 그만 적의 진에 갇혀버렸다. 만약 자령이 소식을 듣고 급히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아마 적에게 잡혔을 것이었다. 돌아올 때 자령으로부터 한바탕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또 사도평이 돌아오던 날 주문을 부추겨 동굴을 떠 나 적을 잡으러 갔다가 그만 약란이 적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땐, 자령조차도 마구 화를 내 며 멀리하려는 것이었다. 영경은 여러 동문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선연(仙緣)은 가장 두터웠고 장교진인의 특별한 주목도 받고 있는 터였다. 더구나 자질과 공행을 따져보아도 상당한 데다 여러 동문의 과분한 사 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 한악으로선 더욱 질투가 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밖에서 두 명의 방문좌도를 거둬 돌아왔지만 영운은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사명 을 받들어 그들에게 골고루 직책을 나누어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한악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양성지는 비록 요굴에서 구출해 왔지만 요기(妖氣)에 물이 많이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미타, 유유안 두 난쟁이도사들은 어떠한가! 분명 이파의 극악한 요인들 과 더불어 악행을 수없이 일삼아 왔을 터인데 어떻게 그들은 믿고 양성지는 믿지 못하는가 말이 다. 사람을 대함에 공평하지 못하고 분명 경중(輕重)을 가리는지라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당시 엔 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 뭐라고 따질 수는 없었기에 사도평을 향해 냉소를 짓고는 휙 나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때가 정오를 가리킬 때쯤 되자 모두들 각자 맡은 곳으로 분주히 흩어졌다. 자 령은 맨 앞에서 영경, 경운, 인영 등 세 사람과 미타, 유유안 두 난쟁이도사를 데리고 미진기를 이용하여 앞동굴로 출발했다. 이때 사남계, 정원규 등 사파의 요인들은 사상자가 생겨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비록 며칠에 걸쳐 맹렬히 공격을 했지만 별 다른 소용이 없었다. 적의 수뇌인물이 동부(洞府)에 없고 다만 어 린 남녀들이 구천원양척에 의지하여 지키고 있었으니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여 전히 열화풍뢰로만 공격을 가했다. 이런 소용돌이 가운데에도 음소당은 사태를 직시하였다. 이처럼 여러 날에 걸쳐 공격을 하였지 만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은 필시 적의 수뇌가 사전에 이 일에 대한 안배를 해두었음이 틀림없다 고 생각했다. 여러 차례 논의하였지만 열화조사가 금세 오긴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별 변동없이 진법(陣 法)에 의존하여 적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 만약 적의 수뇌인물들이 도착하면 제아무리 열화조사가 온다 해도 세 불 리하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우선 급한 대로 잠깐 진법을 후퇴시켜 적을 유인하면 아무런 방어 법술 도 없이 단지 구천원양척에만 의존하여 방어하는 터이니, 어쩌면 쉽사리 적을 제압하여 치욕을 앙갚음할 수 있을 것이다. 사남계, 정원규 등은 계속 음소당의 의견을 소홀히 넘겼지만 뾰족한 수가 없자 결국 진세를 후 퇴시켜 고의로 그들에게 파탄을 보여 마침내 적을 유인해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선후사정을 꿰뚫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는가? 겨우 한 계집애를 붙잡으려는 순간 도리어 더한 치욕만 당했을 뿐, 더더욱 손쓸 방도도 없어졌 다. 이 날 사남계, 정원규는 초조한 나머지 모든 사람을 모아놓고 다시 의논을 했다. 열화풍뢰로 공 격하는 동시에 모든 법보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전원이 일시에 공격해 들어갈 것을 결정하였다. 음소당은 이 계획이 최상책이 아님을 알고 말렸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획에 동의하니 하는 수 없었다. 그들을 따르는 수밖에. 시용고는 계속 공중에서 경계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남계, 정원규 등을 따라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다. 모든 요인들이 분주히 자신들의 법보를 챙기고 있을 때 자령, 영경, 경운, 인영 네 사람은 벌써 미진기를 이용해 채운으로 변해 날아오고 있었다. 음소당과 시용고 두 사람은 은둔술법으로 공중을 순시하고 있다가, 산 저편에서 한 폭의 채운이 마치 쏜살처럼 빠른 속도로 자신들 앞으로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것은 보상부인의 미진기로써, 적이 재차 공격해 오는 것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시용고가 즉각 그들에 대응하려 하자 음소당이 이를 말렸다. 음소당은 미진기의 신묘한 능력을 아는지라, 만약 적이 미진기를 거두고 몸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채운으로 보호하고 있어 예사 법 보나 비검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적은 오히려 채운 안에서 법보 비검을 내쏟으며 응전할 것이므로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음소당이 혜안으로 채운을 꿰뚫어보니 광화가 번뜩이는 것이 적의 공세가 자못 대단한지라, 일 전의 공격과는 사뭇 다르고 느낌이 좋지 않으므로 그녀는 망설였다. 평소 사남계 등과는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고 지금의 형세로 보건대 확실히 세 불리하니 일단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사태를 관망하리라. 금침성모(金針聖母)에 대한 정분도 있고 해서 시용고가 큰 화를 당할까 싶어 언질을 줄 요량으 로 달콤한 말로 속삭이며 말했다. "지금 저들이 이쪽의 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공격해 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야. 우리 여기 그냥 숨어 있다가 그들이 지나간 뒤 그들의 퇴로를 차단해 버리면 그게 훨씬 유리한 공격이 될 테고 공을 세울 수도 있지 않겠어?" 음소당이 말을 마쳤을 때, 채운은 이미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슬쩍 진 속으로 사라지려 했다. 시용고는 음소당이 평소에도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이번에도 공격하려 하지 않자 내심 불만이었 다. 그래서 그를 반박하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붉은 빛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뒤로 돌아서려는 순간 대갈일성이 들려왔다. "이 요마들의 겁운이 다해 겁수가 눈앞에 다가왔는데 넌 아직도 그냥 죽기를 기다리는 거냐?"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붉은 구름은 이미 시용고의 머리 위를 덮쳐버렸다. 누군지 쳐다보기도 전 에 정신이 혼미해지며 자신의 법보를 누군가가 채뜨려 가버렸다. 음소당은 적이 암암리에 법보를 사용한 줄 의심하여 소리난 곳을 주시하니 붉은빛 가운데 커다 란 사람이 손에 홍욕대(紅慾袋)를 들고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음소당은 놀라 재빨리 절을 했다. 그러자 그는 곧 시용고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그때 길다란 붉은 그림자만이 하늘 저편에 길게 그어졌다. 시용고를 데려간 사람이 바로 청해(靑海) 장령자(藏靈子)의 득의제자인 웅혈아(熊血兒)라는 것을 알자 음소당은 사남계, 정원규 등에게 흉다길소(凶多吉少)라는 생각이 들어 금세 마음이 변해 도 망치려 했다. 아직 승부가 나지 않은 상황이라 조금은 망설였다. 다음에 서로 부딪치면 별로 좋지 않을 거라 는 생각이 들었다. 채운이 진(陣)에 다가오자 한 줄기 자줏빛과 찬란한 푸른빛이 뻗어나오며 마치 두 마리 신룡(神龍)이 한덩어리가 되듯 어울러져 진(陣) 속을 마구 들쑤시기 시작했다. 두 줄기 광화가 닿는 곳마다 요기는 모두 흩어져버렸다. 이런 모습을 본 음소당은 그만 대경실색했다. 적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는 아래로 가서 알려봐 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당장 몸을 빼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되어 급히 둔광을 일으켜 타고 조화애로 떠나갔다. 자령 등 일행 여섯이 요진 상공에 당도하였을 때, 왼쪽 근방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두 가닥 둔광 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검광은 자신들을 저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들을 유인하 려는 적의 계책인 줄로만 생각했다. 시간이 이미 임박하여 적진을 깨뜨리는 것이 급한 마당에 다 행히 적이 공격해 오지 않자 수월하게 손을 쓸 수가 있었던 것이다. 뜻밖에도 음소당에게 간사한 마음이 생겨났고, 더구나 시용고는 남편 웅혈아에 의해 돌아가 버 린 것이다. 이후에 생겨난 많은 일들은 뒤에 차차 얘기하기로 하겠다. 자령 등은 채운을 이용해 빠른 속력으로 순식간에 적진 깊숙이 침투하였다. 미진기가 비록 신묘 하다고는 하지만, 구천원양척과 같은 현천지보(玄天至寶)는 아닌지라 열화가 최고로 강할 때에는 비록 채운으로 보호하고 있지만 진동이 미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열화가 너무 강함을 느껴 바짝 정신차려 각자 비검을 일으켜 만일에 대비했다. 사방은 온통 검붉은 빛으로 휩싸여 광풍노도와 같이 화염이 이글거렸다. 엄청난 크기의 뇌화가 아래쪽에서 곧장 불어오자 산이 온통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와 모두들 깜짝 놀랐다. 여섯 사 람이 적진을 이리저리 헤집고 있을 때, 갑자기 앞쪽으로부터 열 개의 열화 덩어리를 동반한 벽뢰 가 섬전처럼 쏘아져 왔다. 미진기로 보호하고 있다고는 하나, 전신이 기우뚱거리며 정신이 혼미해 졌다. 자령은 적이 공격해 오는 것을 알고 진언을 외며 손짓을 하자 여섯 사람의 신형이 채운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각자 혜안으로 앞쪽을 주시하니, 뇌화가 지나간 뒤 앞쪽에서 요사한 도고(道 姑) 하나가 수많은 풍운(風雲)이 그려진 붉은 기를 손에 들고 날아오고 있었다. 깃발 모서리에선 화염이 연신 뿜어져 나와 유성처럼 허공으로 뻗어나갔다. 이 깃발을 한 번 흔들 때마다 엄청난 벽뢰열화가 쏟아져 나왔다. 이 여인은 바로 사남계가 새로 얻은 음녀인 이교사마의 <추혼차녀(追魂侘女)> 이사고(李四姑)였 다. 요인 등이 오늘 전력을 다해 출전하자, 전에 시용고와 더불어 비뢰동 앞에서 아미파에 곤욕을 당한 터라, 자신의 실력으론 어림없음을 알고 자신도 공을 세울 방도를 꾀했다. 적의 구천원양척 은 웬만한 요술마법으로 어쩔 방도가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사남계와 의논한 결과, 경송차사(輕松差使)를 대신해 천열화신기(天烈火神旗) 전부를 가 지고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뇌화를 발출시키기로 하였다. 이 기는 열화조사가 직접 오랜 세월 동 안 단련한 것으로 효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구천원양척 하나만을 의지하고 찧고 까부는 상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칫 진 내로 들어온다면, 그야말로 제 발로 호랑이 입 속으로 걸어가는 꼴이리라. 생각만 해도 신이 난 이사고는 득의양양하여 전력으로 뇌화를 시전하고 있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저편 진문(陣門) 위로 풍뢰가 걷히면서 연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한쪽의 채운이 화염 속을 마치 파도마냥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지난날 진 속에 갇 혔던 계집을 구해갔던 그 채운임을 알고는 내습자를 결코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되겠구나 싶어 정 신을 바짝 차렸다. 공교롭게도 사남계, 정원규 등은 적들이 성공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해 아래쪽에 전력을 쏟는 통에 오히려 진(陣) 위엔 사람을 파견해 두지 못하고 있었다. 천열화신기(天烈火神旗) 하나 정도 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줄 알고 그만 방비를 소홀히 한 것이다. 사남계는 이사고에게 이르기를, 만일 누가 진 속으로 들어오더라도 뇌화를 날려 공격하고, 정말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알릴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사고로서는 적이 아무리 대단하여도 알릴 수가 없었다. 열화풍뢰를 한 차례 퍼붓자, 자령 등의 모습이 채운 속에서 드러났다. 적이 의도적으로 채운을 거두어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은 추호도 모르고, 자신의 풍뢰가 효과를 거두어 채운이 산산히 흩 어진 줄 알고 내심 기뻐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재차 풍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령은 열화의 위력이 대단함을 알고 머뭇거리며 맞받아 공격을 하지 않고 말했다. "좀 더 두고 보다가 다시 공격해 오면 그때 손을 쓰기로 해요." 영경은 곁에서 이 말을 듣고는 혼자 생각했다. '그럼 저 여자가 들고 있는 것이 요진의 주기(主旗)가 아니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재차 적이 풍뢰를 일으키는 순간 동시에 경운을 향해 소리쳤다. "주언니,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거예요?" 영경의 말과 동시에 자영검이 허공을 가로질렀고, 뒤를 이어 경운의 청삭검도 꼬리를 물었다. 두 가닥 검광은 한 데 어우러져 마치 길다란 뱀마냥 허공을 그으며 맹렬한 속도로 날았다. 자줏빛, 푸른빛 두 가닥 광화는 한 데 어우러져 아주 색다른 영롱한 빛을 띠며 섬전처럼 어지럽게 하늘을 수 놓기 시작했다. 열화풍뢰와 두 차례 부딪치자 즉각 열화풍뢰가 흩어졌다. 아무리 지휘하여도 소용없이 열화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정세가 급박해지자 음란한 이사고는 눈앞이 흐릿해지며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도 힘들어졌다. 눈부신 자주와 푸른색 광화만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싶자 어느 순간 천열화신기조차 자주색, 푸른 색 광화에 휩싸여 버렸다. 그러자 이사고의 몸뚱이는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시뻘건 피와 살덩 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진의 주기를 깨뜨렸지만 진 속엔 아직 무수한 화염이 남아 있어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각자 자신의 법보와 비검을 운용하여 자영, 청삭 두 검광을 따라 요기를 쳐부수기 시작했다. 칼빛 이 스치는 곳마다 바람에 구름이 쓸려가듯 요기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사남계는 <장비신마(長臂神魔)> 정원규와 <분해아향무진인> 풍오, <음양렴자(陰陽殮子)> 오봉 (吳鳳), <백령녀(百靈女)> 주봉선(朱鳳仙) 등과 허비랑의 부탁을 받고 계속 합세한 <청신현녀(靑 身玄女)> 조청와(趙靑蛙), <호조천왕(虎爪天王)> 나패(拿敗), <천유나한(天遊羅漢)> 형제(邢題) 등 일당의 요인들과 함께 뇌화로 공격을 퍼붓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떨어져 내렸다. 앞쪽 금화 자기(金花紫氣)로 가려진 곳을 보니 <신행두타> 법승이 적의 법술에 걸려 후동입구 에 초라한 몰골로 곶감꿰이듯 매달려 있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사남계는 분에 찬 목소리로 정원규에게 말했다. "저런 개 같은 연놈들을 봤나! 사람을 잡았으면 고이 죽일 것이지, 오히려 동굴입구에다 매달아 놓고 우리를 모욕하는군. 법승을 빼앗으러 가면 필시 방해하며 우릴 골릴 작정이겠지. 우리 얼굴 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이거 환장할 노릇이군. 정도우의 현공은 오묘하고 변화가 무궁하지 않 소? 제가 뇌화로 저 연놈을 칠 테니, 여러 도우들께선 일제히 법력을 펼쳐 적을 깨끗이 쓸어버리 시오. 정도우께선 곁에 계시다가 틈을 봐서 법승을 탈취하여 우리들의 체면을 세워주시오." 여러 요인들은 그 말을 듣고 분을 못 참고 분분히 검광, 법보를 일으켰다. 영운은 자령이 떠나간 후, 파진극적(破陣克敵)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조바심이 나서 한층 주의를 기울였다. 벌써 주문, 한악, 문기, 약란, 사도평 등을 데리고 후동입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 던 중이었다. 이때 적이 열뢰풍화로 공격해 오자 구천원양척을 운용하여 금화 자기를 일으키니 사파의 불꽃이 흩어졌다. 하지만 열화풍뢰는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나 갈수록 극성스러워졌다. 적이 대대적으로 공격해 옴을 알고 자령 등이 요진주기를 깨뜨릴 때를 기다려 안팎으로 공격할 작정을 하고 조급히 굴지 않고 느긋한 마음으로 방어만 하면서 힘을 아꼈다. 뇌화가 한 차례 퍼붓더니 돌연 붉은 구름 안개 속에서 십여 명의 괴상망측한 요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열화를 뚫고 날아오기 시작했다. 영운은 요인의 기세가 매우 사나운 것을 보고 천척의 묘용만을 운용하며 공격하지 않았다. 마구 잡이로 공격해 오는 수많은 법보 요술은 전부 천척의 금화 자기에 억눌려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 다. 한악, 약란은 분기탱천하였지만 적의 정세가 파죽지세이니만큼 감히 나서지는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다가 손가락질을 해대며 욕을 퍼부었다. "무지한 요괴들, 어서 무릎꿇고 백배 사죄하지 않고 아직도 미쳐 날뛰고 있구나!" 욕이 채 끝나기 전에 건너편 적 가운데 있던 <백령녀> 주봉선은 한악, 약란의 욕을 듣고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 요인을 향해 말했다. "저 천한 잡것들이 저토록 극악한데 우리가 더 이상 체면차릴 게 뭐 있어요? 저 연놈들을 한번 골려주는 게 어때요?" 이 말을 듣고 여러 요인들은 깨우친 바 있어 여전히 뇌화로 공격하며 일제히 욕을 해대기 시작 했다. 별의별 음란한 소리와 더러운 욕들을 끊임없이 내뱉았다. <음양렴자> 오봉, <분해아향무진인> 풍오, <호조천왕> 나패와 <백령녀> 주봉선 등은 이교(異 敎) 가운데서도 하류의 천한 욕지거리와 함께 일제히 아래위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알몸을 드러 내며 온갖 추잡한 짓거리를 벌이기 시작했다. 한악 등은 처음엔 오늘의 운세로 보아 쉽사리 적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아 흥취가 도도하여 희희낙락하고 있었는데 웬걸, 영운은 구천원양척으로 방어만 한 채 좀처럼 공격할 채비를 갖추지 않자 호승심이 강한 그녀들은 매우 불만이었다. 그러던 중에 요인들이 눈으로 보기 힘들고 귀로 듣기 민망할 정도로 심한 욕설과 해괴한 짓거리 를 해대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영운은 그 해괴한 짓을 보다못해 생각했다. '저 따위 더러운 놈들을 이 세상에 그대로 남겨둔다면 사람들에게 크나큰 화가 될 것이다.' 대충 시간을 어림해 보니 지금쯤 자령 일행이 요진에 당도하였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공여부를 알 수 없으니 조금 더 참긴 참아야겠고 눈앞에는 차마 못 볼 꼴이라 울화가 더욱 치밀었다. 이때 바로 곁에서 주문이 불렀다. "큰언니, 오늘이 바로 적을 깨뜨리는 날 아니유? 요인들이 저처럼 극악한데 우리가 언제까지 손 을 놓고 멀뚱히 저 추잡한 몰골을 지켜봐야 하우?" 영운이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한악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왼손으로 주문을 오른손으로는 약란을 잡고는 세 사람이 동시에 날아갔다. 영운은 그들이 혹시 화라도 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급히 소리쳤다. "사매들은 잠시만 기다려! 내가 같이 갈 테니 절대 서두르지 말라구." 영운이 손에 들고 있던 구천원양척을 치켜들자 금화 자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뜻은 적을 향해 마구 공격해 들어가는 사매를 보호해 줄 심산이었다. 한악은 처음 욕을 퍼붓기 시작한 <백령녀> 주봉선을 향해 원한이 사무친 기합소리와 함께 날아 갔다. 약란, 주문은 요상한 생김새에 남자도 여자도 아닌 듯한 추태를 부리는 풍오를 공격의 목표로 삼고 약속한 듯이 일제히 비검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들은 영운의 염려와 마찬가지로 너무 노기 를 띤 나머지 각자의 공격에 긴밀치 못하여 허점을 드러냈다. 오히려 적의 계략에 빠져들어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적은 그녀들을 쉽사리 멀리까지 유인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영운은 세 사람이 비록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함께 연합공격하지 않아 공연히 힘만 소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요진 위에서 뇌화가 빠른 속력으로 쏘아져 왔다. 영운은 뇌화를 막아내면서도 불안한 듯이 계속 세 사람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적이 이처럼 세력이 강하고 사람이 많으니, 만약 영경, 경운이 자웅쌍벽으로 적진을 쳐부순 뒤 재빨리 돌아와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기기 힘들다는 생각 이 들었다. 적이 정면에서 뇌화를 시전하자 더욱 조심했다. 앞뒤로 주위를 살피며 조금씩 정면을 향해 다가 가며 만약에 대비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때 적을 깨뜨릴 시각이 이미 지난 후라 자령 등도 빠른 속력으로 동부로 돌아오고 있었다. 영운은 세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두 차례 그들을 불렀지만 세 사람은 모두 분노가 극에 달해 못 들은 척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천척을 운용하여 앞으 로 날아갔다. 영운이 몸을 날리자마자 마주섰던 풍오가 갑자기 오색 안개가루를 약란과 주문을 향해 냅다 뿌 리자 둘은 마치 혼절할 듯이 신형을 어지러이 흔들며 아래로 물러났다. 영운은 좋지 않다고 느껴 급히 날아가 금화 자기를 비추자 안개가루가 곧 스러지며 한악과 주문도 즉시 정신을 차렸다. 바로 이때 사도평이 연이어 대갈일성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영운이 사람을 구하려 동굴을 잠시 떠난 틈을 타 공중으로부터 무지막지하게 크고 털로 덮인 손이, 지난날 붙잡아 동굴 벽에다 매달아 둔 법승을 낚아채려 하고 있었다. 영운은 원래 후환을 없애려 법승을 즉각 참수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한악이 자꾸 그를 가지고 적을 유인하는 데 이용하자고 졸라댔다. 영운은 한악이 성질이 급하고 편협한 나머지 혹시라도 마음에 서운함이 맺힐까 봐 천천히 감화시킬 요량으로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약란이 법술로 금제하여 법승을 동굴 벽에다 매달아 놓고 적으로 하여금 화나게 하도록 만들었다. 여러 사람이 동굴을 떠나 싸우고 있을 때 오문기는 본래 심성이 깊어 적을 맞아 싸우지 않고 그 냥 남아 있었다. 영운이 침착하게 있는 것을 보고 비록 자신도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앞만 주시 하고 있었다. 사도평의 생각도 세 사람이 동굴을 떠난 뒤 영운이 쫓아가자 동굴에서 너무 떨어지면 동굴을 지 킬 사람이 없음을 알고 그냥 남아 있었다. 그런데 금화 자기가 막 영운을 따라 동굴에서 수 장 정도 벗어날 즈음, 갑자기 한 쌍의 솥뚜껑 같은 손이 공중에서 날아와 법승을 낚아채려는 것이 보였다. 사도평은 침착한 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를 발하며 먼저 비검을 날려보냈다. 비검이 커다 란 손을 둘러쌌지만 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법승을 낚아채려 할는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와 동시에 영운, 주문, 약란 등 세 사람은 동굴로부터의 경고를 듣고 곧바로 적을 추격하는 것 을 포기하고 돌아오려 하자 위에서 또다시 열화풍뢰가 퍼부었다. 문기의 비검도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겨우 구천원양척에 의해 방어할 수가 있었다. 그 큰 손은 결국 법승을 빼앗아 날아갔다. 사도평은 비검이 별 효력이 없음을 알고 순간 신타 을휴에게서 받은 오룡전을 아직 사용치 않았 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백망지중(百忙之中) 앞뒤 잴 것도 없이 황급히 법보주머니에서 오룡전 을 꺼내 날렸다. 오룡전은 손을 떠나자마자 두 마리 교룡으로 변해 섬전처럼 빠른 속도로 한 줄 기 검은 구름을 동반하여 추격해 갔다. 털난 큰 손은 오룡전의 위력을 아는 듯 법승을 내버려 둔 채 공중으로 어느 새 사라져 버렸다. 그 바람에 법승은 그만 독수리가 먹이를 떨어뜨린 꼴이라 지상을 향해 빠르게 떨어져 내렸는데, 오룡전이 이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아 법승을 휘감아 버리자 허리부터 두 동강이나 땅에 떨어졌 다. 사도평은 큰 손의 털보를 더 이상 쫓지 않고 급히 검광을 거두어들였다. 한악, 주문, 약란 세 사람이 각자 적을 맞아 싸우고 있을 때, 여러 요인들은 적을 동굴에서 멀리 떨어지게 유도하여, 구천원양척의 금화 자기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한꺼번에 그들을 공격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한악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백령녀> 주봉선과 맞닥뜨리자마자 비검을 날리는 동시에 왼손으로 백미침을 연속해서 발출했다. 명주실과 같은 가느다란 광화가 두 차례나 번뜩이자 주봉선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두 눈에 격중 당하여 도망쳤다. 하지만 백미침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한번 피를 보면 끝장을 내고마는 백미 침을 두 개나 맞았으니 주봉선은 얼마 도망가지 못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땅에 거꾸러졌다. <호조천왕> 나패는 주봉선이 참사당하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청신현녀> 조청와와 협공으로 비검을 날리며 공격했다. 막 법술을 펼치려는 찰나에 한악은 신속무비한 손놀림으로 비검을 날려 그들을 막는 동시에 백미침을 연속해서 발출시켰다. 나패는 호조(虎爪) 위로 백미침에 격중당했다. 조청와가 채 법술을 시전하기 전에 백미침의 위력을 아는 <음양렴자> 오봉이 급히 소리쳐 불렀 다. "조누이! 빨리 피신하시오. 저것은 바로 <천호>의 백미침이오." 조청와는 이 말을 듣고 그만 깜짝 놀라 급히 법보를 꺼내 요운을 펼쳐 전신을 보호했다. 한편 <분해아향무진인> 풍오는 두 여인의 미모에 반해 사로잡으려는 순간 영운에 의해 미인향 무(迷人香霧)가 깨어졌으니 닭 쫓던 개꼴로 그들의 사라진 방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운은 출전했던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돌아가 다시 구천원양척으로 동부를 보호했다. <장비신마> 정원규는 법승을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적의 손에 죽음을 당하게 하였다. 더욱 이 한악의 백미침에 의해 <백령녀> 주봉선이 즉사했고, <호조천왕> 나패조차도 부상을 입은 것 이다. 분노가 극에 달한 나머지 일제히 비검을 날리며 한악을 죽이려 달려들었다. 그가 막 한악의 앞에 당도하였을 즈음, 사남계는 위쪽에서 뇌화가 갑자기 그치는 소리를 들었다. 의아해 하는데 적의 동굴입구에서 젊은 여자 하나가 살기를 띠며 날아오고 있었다. 급한 가운데 에도 위를 쳐다보았더니 두 가닥 자줏빛과 푸른빛 광화가 물 속을 헤엄치는 용마냥 온 하늘을 수 놓고 있었다. 두 가닥 광화가 다가가는 곳마다 연화(煙火)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요진(妖陣) 한가운데로 햇빛이 비쳐지는 것으로 보아 요진은 이미 파해되어 주기(主旗)가 파손되 었음을 알자 그만 대경실색하는데, 이와 동시에 적의 자줏빛이 맹렬한 속도로 쏘아져 왔다. 사남계는 미친 듯이 분노했다.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남아 있던 요인들과 일제히 각자의 법보, 비 검을 꺼내들었다. 최후의 결전을 각오한 것이다. 제영운은 적의 요법이 대단함을 알고 제각기 흩어져 엄밀히 방비하다가 구천원양척이 공중에서 펼쳐질 때 일제히 합공하여 적을 전멸시키자고 했다. <호조천왕> 나패는 비록 호조 위로 백미침 한 방을 맞았지만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불행중 다행히 그는 태어난 때부터 기형아라 본래 손이 없었다. 그래서 호조(虎爪)를 요법으로 손 있는 자리에다 붙인 것이었다. 하지만 백미침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만다는 천호의 백미침임을 알고 있는 나패로서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어 스스로 두 팔을 잘라버리고 비검을 날려 결전에 임했 다. 필살지계를 써서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분해아향무진인> 풍오는 진작부터 오늘의 정세로 보아 길보단 흉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워 낙 여색을 밝히는 성미인지라 나긋나긋한 햇병아리들을 그냥 두곤 갈 수가 없었다. 한악이 단신 으로 공격하자 쉽게 제압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요진이 깨뜨려지는 것을 보고 여러 요인들이 한악 을 공격하는 것을 뒷전에 두고 다른 적들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그는 한악의 백미침의 위력을 알고 있는 터라 섣불리 덤빌 수도 없어 <천유나한> 형제를 남겨 두었다가 한악을 공격하게 했다. 겁수가 눈앞에 다가왔는 데도 사심(邪心)을 억누르지 못했다. 자기의 사법(邪法)의 위력을 믿고 둔법을 이용하여 신속히 다가갔다. 적 가운데 수많은 미녀 중 비교적 검술이 처지는 한 명을 골 라 몰래 요무(妖霧)를 펼쳐 사로잡아 갈 궁리를 했다. 전장(戰場)을 주의깊게 살펴보니 적이 비록 나이는 한참 어렸지만 본령은 대단한 것들임을 한눈 에 알 수 있었다. 다만 <청신현녀>와 대적하고 있는 청의(靑衣) 여자가 펼치는 검광은 아미파의 것이 아닌 듯했다. 바로 저년이다. 급히 둔광을 일으켜 그 여인이 온 신경을 비검에 쏟고 있을 때 손을 쓰기로 했다. 그 여자는 바로 <흑봉황(黑鳳凰)> 신약란이었다. 아까 자신과 대적하다가 요무를 펼쳐 자신을 혼미시켰던 요도가 공중에서 맴돌며 요법을 펼칠 궁리를 하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대적하고 있는 <청신현녀> 조청와만 해도 강적이라 쉽사리 승기를 잡을 수 없었지만 향무진인을 보자 자 신도 모르게 정신을 차리고 방비를 했다. 이때 그가 음험하게도 자신의 몸 뒤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좋지 않은 의도임을 알 수 있었다. 비검을 지휘하여 앞에 있는 적을 상대하며 암암리에 법보낭에서 병령사(丙靈梭)를 꺼냈다. 풍오가 미인향무(迷人香霧)를 시전치 못하게 홱 돌아서며 내젓자 곧장 수십 척 길이의 붉은빛이 풍오를 향해 쏘아져 갔다. 풍오는 신약란의 가까이 날아갔지만, 그녀가 기색이 없자 진작 알아차린 줄도 모르고 내심 기뻐 하며 손을 펼쳐 오색향무를 날렸다. 그런데 그 여자가 휙 돌며 손을 내젓자, 수십 가닥의 붉은빛 이 유성마냥 날아오는 것이다. 상대가 교활하게도 오히려 자신을 법보로 암산하려 함을 알아차렸 다. 급히 비검을 방출하여 쏘아져 오는 붉은빛을 막는 한편, 계속 향무를 펼쳐 적을 미혹시키려 했 다. 이제 막 다 잡은 고기를 바구니에 넣으려는 순간, 향무가 약란의 머리 위로 날아가고 풍오의 칼빛도 병령사와 맞부딪쳤다. 그때 갑자기 눈이 부시면서 아홉 줄기 금화가 번뜩이며 일단의 자 기(紫氣)가 섬전처럼 밀려왔다. 자기 광화(紫氣光華)가 비춰지는 곳마다 요무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알고 줄행랑칠 궁리를 하는데, 수십 장 밖에서 붉은 뱀 같은 가느다란 자줏빛이 쏘아 져 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그 뒤엔 한악이 차디찬 냉소를 짓고 있었다. 순간 위급함을 직감하고 곧바로 신형을 뽑으려 했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이랴? 사람뿐만 아니 라 비검조차도 자줏빛에 얽어매여 생명조차 위험하다. 급히 탈신지법(脫身之法)을 써 이를 악물고 왼쪽어깨를 쑥 잡아뺐다. 이때 자줏빛이 휩쓸고 지나가자, 어깻죽지부터 싹뚝 잘려져 나갔다. 이 와 동시에 풍오도 혈광(血光)을 이용하여 요법을 펴 도주해 버렸다. 풍오가 도망치자 그의 비검은 자광에 묶여 곧 훼손될 듯 보였다. 약란은 그 비검이 비록 사파가 사용하던 것이지만 본질은 좋은 것이라, 만약 훼손된다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운은 구천원양척을 지휘하며 다가와 요인향무를 없애려다 <청신현녀> 조청와의 양광(陽光)이 대단함을 보고 비검을 날려 신약란을 도와 싸웠다. 약란이 도망치는 적을 내버려두고 큰소리로 고함쳤다. "영경사매, 이 검을 훼손치 말아라! 내가 거두어들일 때까지 그냥 붙들고만 있어." 영경은 원래 자령, 경운 등과 함께 자영, 청삭 두 검을 합벽하여 주기가 있던 곳에서 요염(妖焰) 을 쓸듯이 없애버렸다. 경각지간에 모든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요기가 사라지자 아래쪽을 내려 다보니 누군가가 약란을 암살하려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경은 비검을 날려 급히 도우러 왔다. 자색검광은 곧바로 풍오를 가두어버렸다. 영경이 희색이 만면한 사이 혈광이 번뜩이는 순간 요인은 스스로 어깨를 잘라버리고 둔법을 이용하여 도망쳤다. 조금 늦게 손을 쓴 것이 굉장히 아쉬웠으나 그의 비검이라도 부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때 약란이 멈추라고 소리친 것이다. 검광을 지휘하는 사람도 없었고 또한 자줏빛에 묶여 있어 어떻게 달아날 수가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가닥의 붉은색이 둘러싸자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약란은 손을 내저어 병령 사와 함께 향무진인의 비검을 거두어 법보낭 속에 갈무리했다. 영경은 약란이 비검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보고는 뒤돌아서 전장의 정세를 살폈다. 아미파 쪽으 로 형세가 기울어 있었다. 원래 <호조천왕> 나패는 단독으로 <여공공(女空空)> 오문기와 싸우고 있었는데, 엄인영의 비검이 허공에서 은광을 흩뿌리자 즉사해 버렸다. <천유나한> 형제의 검광은 매우 영활하였고 백미침의 위력도 알고 있었다. 한악이 연속해서 비 침을 방출하자, 요법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관계로 백미침도 요령부득이었다. 한악은 급한 나머 지, 보상부인의 금단을 일으켜 큼지막한 붉은빛을 펼쳐 형제를 향해 곧바로 쏘았다. 형제는 적을 상대하기 힘들다고 느껴, 비검을 거두고 달아날 궁리를 했다. 이때 사도평이 <죽산칠자> 중의 하나인 <금강조> 척문화에게 부상을 입히고 날아왔다. 오룡전 을 휘젓자, 검은빛이 빛나는 가운데 두 마리 교룡이 나타나 서로 꼬리를 맞물고 날아왔다. 형제는 급히 칼을 회수하였지만 한발 늦어 양다리가 절단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의 현공은 오묘 하여 괴성을 지르며 고통을 참고 달아나 버렸다. 대부분의 요인이 죽거나 도망친 가운데에도 아직 <장비신마> 정원규, <음양렴자> 오봉, <청신 현녀> 조청와와 사남계 네 사람만은 아직 소금 뿌린 미꾸라지마냥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 중 사남계, 정원규 두 사람이 제일 강했다. 본령을 논하자면 아미파의 소동문(小同門)으로선 적수가 될 수가 없었다. 단지 겁수가 임박했고 공교롭게도 영(英)·운(雲)이 모이고, 자영·청삭 쌍검이 세상에 나온 데다가 구천원양척도 있었 기에 이만큼이나마 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음양렴자> 오봉은 원래 형제, 조청와 등과 함께 한악을 공격했는데 적이 분분히 출전하는 것 을 보고 적을 맞아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요진이 부서지자 공중에서 여섯 사람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 제일 나중에 내려온 두 사나이가 낯이 익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을 주시하기도 전에 건너편에서 <여신동> 주문이 날아와 오봉을 상대로 싸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일신에 뛰어난 무공을 지녀 검광이 서로 얽히자 좀처럼 상대를 제압할 수가 없었다. 이때 요기가 이미 흩어지고 양광(陽光)은 천지를 비추자 다시 청명한 정경으로 되돌아왔다. 오봉 은 귀계(鬼計)에 뛰어났다. 아래쪽 비뢰동 입구 광영(光影) 속에 지난날 처음 왔을 때 본 두 도동 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금광으로 몸을 보호한 지 이미 오래라 연일 열화풍뢰에 훼손되어 광 무가 희미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도동이 영부로 호신하고 있어 요법에도 죽지 않고 목숨만 부지하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 자기편엔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는데 적은 한 명도 부상조차 당하지 않은 것을 보고 암암리 에 길보다 흉이 많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사남계, 정원규 두 사람이 아직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도 혼자 도망칠 수는 없었 다. 하지만 조만간 패퇴할 것이 분명했다. 분신지법(分身之法)을 사용하여 두 도동을 호신하는 금 광이 흩어지는 틈을 타, 그들을 죽여 조금이라도 원을 풀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오봉은 현공을 암암리에 운용하였다가 일 초를 날리며 공중에서 신검합일하 여 다시 주문을 공격했다. 주문은 적이 신검합일하며 목숨을 걸고 공격해 오자 자신도 뒤질세라 신검합일하여 맞부딪쳤다. 하지만 오봉은 암암리에 분신지법을 펼쳐 이미 몸을 은신하여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막 두 도 동이 있는 곳까지 당도하여, 사법(邪法)으로 남아 있던 금광을 없애버리고 독수를 펼치려 했다. 두 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갑자기 괴상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자기를 붙잡았다. 대경실색하여 요 법을 펼치려 했으나 펼치기도 전에 흑연이 '훅!' 얼굴에 끼쳐 즉시 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주문은 적이 신검합일하여 공격하자 주위를 맴돌며 몇 번 부딪쳐 보았는데 어쩐지 적의 검광은 위력이 별로 없고 영활치 못한 것이 사람이 지휘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선은 적의 간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력으로 비검을 압박하였다. 이때 공교롭게 한악이 적을 거꾸러뜨리고 날아오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급히 소리쳤다. "언니, 적은 이미 도망갔는데 뭐가 두려워 그러는 거예요?" 이 말에 주문은 정신을 차리고 한악의 도움을 빌어 쉽게 비검을 회수할 수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 영경이 날아와서 보니 주문이 승기를 잡고 있었고 적은 이제 세 사람만 남아 있었 다. <청신현녀> 조청와는 단신으로 영운과 상대하여 온갖 사법이보(邪法異寶)를 시전하였지만, 구천 원양척에 모두 깨뜨려져 역부족임을 알고 날아가려 했다. 이걸 본 영경이 그냥 놔둘 리 있겠는가! 날카로운 기합성과 함께 자줏빛 비검을 발출했다. 조청 와가 막 둔광을 일으켜 도망치려는 순간 영경의 자줏빛이 휩쓸고 지나가자 피분수를 내뿜으며 머 리가 뎅그렁 잘려버렸다. 사남계와 정원규는 자령, 경운과 싸웠는데 하나는 미진기, 하나는 청삭검으로 대적하였다. 거기 에다 영운이 도와주자 요법뇌화가 전부 스러져버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원규는 이 광경을 보고 대로하여 황급히 현공을 운용하여 원신(元身)을 큰 손으로 변화시켜 공중에서 경운의 머리 를 움켜쥐려 했다. 경운의 비검은 아미지보이다. 정원규가 쓰는 비검 정도는 상대도 되질 않았다. 하지만 요인의 사 법(邪法)이 워낙 변화막측하고 그 묘용이 화려하니 경운은 적을 상대한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공을 세우기보다도 방어에만 급급했다. 한참 싸우는 중에 갑자기 적의 광화가 위축됨을 보고, 이제야 적을 제압하는가 하고 내심 기뻐 했다. 이 순간, 머리 위 흑운 속에서 큼지막한 손이 뻗어나와 자신을 향하자 대경실색하였다. 비검을 거두어 막아내려는 순간 다행히 엄인영이 나패를 죽이고 도와주러 날아왔다. 경운이 위 험함을 보고 은광을 섬전처럼 날려, 정원규의 원신이 화한 큰 손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때 조청와에 의해 곤란을 당하는 약란을 보고 영운은 몸을 날렸다. 사남계, 정원규 두 사람은 금화 자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자 지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 여겼다. 각자 전신 공력을 일 으켜 일제히 공격해 들어갔다. <장비신마> 정원규는 자기의 비검이 적의 비검에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곧바로 비검을 회수 하고 원신의 변화만으로 응전했다. 정원규도 강적인데 여기에다 사남계까지 가세하여 쌍수로 뇌화를 난폭하게 일으키자, 요법은 무 시무시한 위력을 발했다. 자령, 경운, 인영 등 세 사람은 사태가 불리함을 보고, 미진기로 호신하 며 적과 맞싸웠다. 경운의 비검도 대단하였지만 쉽게 적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양쪽 다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며 약 반 각(半刻) 가량 지났을 즈음 갑자기 사남계, 정원규 둘 다 일제히 꽁지빠지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모든 아미동문들이 일제히 앞뒤로 포위하여 각자 비검, 법보를 발출하자 온 하늘이 법보와 비검의 광화로 장관을 이루었다. 사남계, 정원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르는 가운데에도, 아군은 하나도 없고 적만 맹렬히 공격해 옴을 보자 순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원규는 금화 자기가 재차 날아오자, 더 이상 있다가 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달아날 방도를 찾았다. 자령은 채운 속에서 몸을 보호하며 싸우고 있다가 경운, 영경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소리 쳤다. "경운, 영경사매, 어서 쌍검을 합해 적을 무찌르도록 해요!" 영운은 미진기를 거두어들였다. 경운은 이 말을 듣고 청삭검을 날려 영경의 자줏빛과 하나로 합하여 적을 향하여 날려보냈다. 두 검이 합벽하자 위력은 엄청나게 커졌다. 정원규가 이 광경을 보고 둔법을 전개하려는 순간 이미 원신이 금광에 붙들려 버렸고, 다시 푸 른빛·자줏빛 광화에 휩싸여 버렸다. 정원규는 급히 비검을 날렸다. 그러자 일진의 검은 연기가 일며 한 줄기 녹색 불꽃이 자영, 청삭의 검화에 부딪쳤다. 녹광은 금세 가루로 변하여 하늘에 가 루를 흩뿌리며 떨어져 내렸다. 경운, 영경은 순간 이상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싶어 요인을 찾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사남계도 기회를 엿보다 정원규가 금광에 붙들려 비검을 날리는 것을 보자 이제 끝장이다 싶어 검을 버리고 달아날 궁리를 했다. 이처럼 참패를 당하고도 결국 적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니, 부끄럽기도 하고 분노가 이글이글 가슴에서 끓고 있었다. 이제 본산으로 돌아가서 열화조사가 오길 기다렸다가 재차 복수를 꾀하기로 작정하고 이를 악물 었다. 사남계는 여럿이 정원규를 둘러싸 공격하는 틈을 타 급히 두 손을 휘저어 수십 덩어리의 열화를 자령, 인영 등을 향해 퍼부었다. 자령이 막 미진기로 막아내려는 순간, 사남계는 벌써 뇌 화빛을 빌어 달아나 버렸다. 영운은 그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여러 동문들과 함께 석기(石奇), 조연아(趙燕兒) 두 사람을 구하러 갔다. 요운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져 밝은 햇살이 온 계곡에 아름답게 부서지고 있었다. 선산(仙山)의 풍물은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아 수려한 경관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땅에 널브러져 있는 요인의 시 체와 핏자국을 빼고는 언제 마겁이 지나갔느냐 싶게 모든 게 정돈되고 청아한 모습이었다. 비뢰동에 당도하여 보니 동부는 이미 요인의 뇌화에 수 차례 당해 엉망이었다. 금락주영(金絡珠 纓), 금정옥주(金庭玉柱) 등이 대부분 부서지거나 떨어져 땅에 뒹굴고 있었다. 석기, 조연아 두 사 람을 보호하고 있던 금광은 이미 흩어져 단지 영부의 보호에 의해 동굴입구에 쓰러진 채 겨우 실 낱 같은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영운은 비뢰동이 심한 겁수를 당한 것을 보고 짧은 시간에 이 모든 것을 정리할 수는 없다고 생 각했다. 또한 언제 적이 다시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우선 이들 두 사람을 태원동으로 데려가 치료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동(後洞)엔 여전히 누군가를 파견해 적을 방비해야만 했다. 그래서 여러 동문을 향해 물었다. "모두들 큰 싸움으로 피곤하겠지만 누가 제일 먼저 후동을 좀 지켜야 하겠는데.....?" 자령이 나서려고 하는 순간 한악이 가로채듯 앞서 나서며 눈으로 사도평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제일 먼저 지키겠어요. 하지만 저의 도력에 한계가 있으니 누군가가 도와주세요. 여러 언 니들은 이미 며칠 동안 싸우시느라 피로하실 테니... 평오빠가 마침 방금 당도하였으니 저를 도와 주세요. 평오빠는 을진인께서 하사하신 오룡전도 갖고 계시니 마음 든든해요. 소녀를 도와 후동을 방비함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데 큰언니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경운은 지금 할 일이 많은 데다, 석, 조 두 사람과 원성도 구해야 될 판에 두 사람이 자신들의 인연을 빙자하여 한악이 사도평과 노닥거리려 한다는 생각이 들자 내심 불쾌했다. 영운은 잠시 생각한 뒤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니 한악, 사도평은 후동 방비를 위해 남아 있었다. 그리고는 인영, 영경, 경운 등 세 사람에게 명하여 석기, 조연아를 부축하게 하고 모두 함께 태원 동으로 돌아갔다가 잠시 뒤 다시 돌아와서 나머지 일을 처리할 작정을 했다. 사도평은 한악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비록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하고 어리광을 부려 쑥스러웠 지만 겉으론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자령은 한악의 말을 듣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여러 동문들이 있는 가운데 사도평 을 평오빠라 부르며 친밀한 태도를 표하며 다른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자 불만스러웠다. 비록 여 러 동문이 지금은 기분이 좋아 들떠 있는 상태라 동생에게 싫은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내심 불안 했다. 게다가 두 사람간의 인연을 알고 있는 데다 한악의 심정이 너무나 신중치 못하고 덤벙거려 만일 에 하나 실수를 한다면 자기조차 난처한 입장이 아닌가 말이다. 만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 지만 영운이 이미 허락을 해버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행을 따라가며 한악을 몇 차례 흘겨보았 다. 한악은 자령의 뜻을 분명히 알고 화가 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짐짓 아무것도 모른 척 눈길을 딴 데로 돌려버렸다. 이로 인해 둘 사이의 오해는 더욱더 깊어져만 갔으니... 이 이야기 는 잠시 뒤에 다시 끄집어내기로 하자. 자매의 갈등 拿電飛龍 妖氣淨掃 滌汗掩穢 仙境長新 영운은 여러 동문들을 데리고 태원동으로 돌아왔다. 우선 석기와 조연아 두 사람을 침상 위에 누이고 치료를 시작했다. 묘일부인이 미리 예견하고 준비해 둔 금단(金丹)을 두 사람 입 속으로 흘려넣고 다시 구천원양척으로 사기(邪氣)를 몰아냈다. 두 사람은 비록 목숨은 붙어 있었지만, 요법뇌화 속에서 여러 날 동안 갇혀 있었으니 상세가 극 심하였다. 묘일부인의 금단과 구천원양척의 도움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정신을 차리기 시작 했다. 영운은 천천히 몸조리하며 당분간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말라고 분부했다. 두 사람은 거듭 구명 지은에 감사를 표했다. 영운은 두 사람을 구한 후 구천원양척으로 원성(袁星)도 구하려 했다. 영부를 입에 물게 하고 진 언을 외며 구천원양척을 내뻗자, 아홉 송이 금화와 자기(紫氣)가 원성의 주변을 휩싸버렸다. 이 상태로 한동안 지나자 괴성을 내지르며 원성이 벌떡 일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인을 비롯 한 여러 선고(仙姑)들이 자기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 않은가! 죽음의 문턱에서 빠져나왔음을 알고 급히 침상에서 내려서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의 말을 그치지 않았다. 영운이 말했다. "원성아, 이번에 정말 수고가 많았다. 잠시후 네게 시킬 일이 있으니, 나가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도록 하거라." 원성은 몇 차례 머리를 조아리더니 곧바로 일어나 나갔다. 이때 영경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후다닥 밖을 향해 나가려 했다. 영운이 무슨 연유냐고 물 었다. 영경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요진을 파해하고 난 뒤 오직 미타, 유유안 두 난쟁이도사만 보이질 않는군요. 불노(佛奴)도 돌 아왔을 텐데, 아직 보이질 않아요. 불노야 설마 무슨 일을 당했을까마는 미타, 유유안 두 사람의 안위가 걱정되어요. 그래서 후동으로 가서 한번 찾아볼 생각이에요." 영운이 말했다. "비뢰애에 널브러져 있는 요인들의 시체를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러나 먼저 원성을 구하 려고 오던 길이었어. 원성이 원기를 회복하고 나면 미타, 유유안 두 사내를 이끌고 비뢰애를 깨끗 이 청소시키려 했지. 도중에 두 사내와 마주쳐 일을 시켰지만 너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하기에 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했다." 자령이 말했다. "아까 한참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두 얼굴을 가진 요인이 주 동생과 대적하다가, 갑자기 현공 분신지법(玄功分身之法)펼쳐 몸을 숨긴 것을 보았어요. 그는 은신하고 있다가 석기, 조연아 두 분 사형을 해하려고 했었죠. 그때 미타, 유유안 두 사내가 비뢰동 앞에 나타나 그 요인과 마주 싸우 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세 사람 모두 사라져 버렸지요. 그땐 너무 바빠 그들을 구해줄 틈이 없었는데, 그 뒤 승패가 어찌 됐는지 무척 궁금했어요."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원성이 동굴 안으로 뛰어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미타, 유유안 두 사람은 요인을 추적하러 갔었답니다. 요인은 불노에 의해 죽었고, 시체의 수급 을 가지고 비뢰애로 돌아와 지금 태원동 밖에서 분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영운은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원성더러 말했다. "그들에게 따로 맡길 일이 있으니, 내가 나갈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해라." 엄인영(嚴人英)에게 석기, 조연아 두 사람을 돌보라고 이르고는 모두 함께 밖으로 나갔다. 미타, 유유안 두 사나이는 선고(仙姑)들이 일제히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앞으로 나가 깊 숙이 절했다. 영운은 요인과 결전을 벌인 경과를 소상히 물어보았다. 미타, 유유안 두 사람이 막 얘기하려는 순간 원성이 옆에서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너희 두 놈, 사실대로 고해야만 해. 만약 허튼소릴 했다간 저 불노가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두 사나이가 얼굴을 붉히자 영경은 급히 원성더러 입닥치라고 꾸짖었다. 두 사나이는 잔뜩 겁먹 은 표정을 지었다. 머뭇거리면서 유유안이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제자들이 요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그마한 공이라도 세우고 싶은 마음에 요진이 완전히 파해될 때를 기다려, 몸을 숨기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지요. 여러 선 고님들께서 적과 싸우시느라 바빠 비뢰애에 계신 두 분 대선(大仙)에게까지 신경을 쓰실 틈이 없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들은 호신금광(護身金光)이 흩어지고 나면 요인을 당해내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죠. 만약을 대비하여 자그만 공이라도 세울 심산으로 두 분 대선 옆에 몸을 숨 기고는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화는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 요.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한 요인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다가왔어요. 다짜고짜 호신금광을 없 애버리는 것을 보고, 저희 둘은 기다렸다가 방문(旁門) 금나마법(擒拿魔法)을 펼쳐 요인을 사로잡 았어요. 사로잡고 보니, 바로 지난날 저희들의 사숙(師叔)이었던 <음양렴자(陰陽殮子)> 오봉(吳 鳳)이었습니다. 그를 곧바로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갔어요. 원래 생각은 적의 허실을 탐지한 후 다시 붙잡아 오려고 했는데, 그 자가 간곡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지난날 사문(師門)의 대의(大義)도 있고 하여 그의 손속이 악랄하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금나법을 풀어주었습니다. 그 놈이 금나법에서 벗어나자마자, 도리어 저희를 공격할는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금나법은 원래 선사(仙師)께서 아직 병해하시기 전에 전수해 주신 것으로 오봉은 비록 이전엔 동문이었지만 이 를 배우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금나법은 미리 펼쳐두었다 적이 그물에 걸려들어야만 효용을 발휘하는 것이지 창졸지간에 펼칠 수 있는 술법은 아니었어요. 다행히 그놈의 두 가지 법보를 미 리 빼앗아 두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놈의 독수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저희들은 속았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손을 쓰려 했습니다. 겉으로는 동정을 구하며 암암리에 제압할 방법 을 모색했습니다. 막 술수를 쓰려는 순간 그에게 간파당하고 말았어요. 그는 우리가 둔형법을 펼 치는 것을 알고 악랄한 법술로 우릴 가두어두고 빼앗아간 법보를 다시 내놓으라고 다그쳤어요. 간계를 쓰지 않고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짐짓 투항하는 척하였다가, 그 가 방심하는 틈을 타 흑정(黑釘)을 날렸습니다. 다행히 그의 왼쪽 뺨을 꿰뚫었지만, 그다지 큰 부 상은 아니었지요. 그는 화가 나 더욱 공력을 끌어올려 핍박을 가해, 사방엔 온통 열화로 가득차 버렸습니다. 위기일발의 순간 하늘에서 하나는 검고 다른 하나는 흰 두 마리 화안금정대신조(火 眼金睛大神鳥)가 날아 왔습지요. 검은 신조는 바로 주인님께서 기르시는 선금불노(仙禽佛奴)였죠. 흰 신조는 더욱 고강한 것 같았는데 화염 속을 뚫고 들어와 은조(銀爪)에서 열 가닥의 광화를 방 출하여 요인의 화사(火蛇)를 움켜잡았어요. 뇌화가 요동을 쳤지만 신조의 깃털 하나도 상하게 하 진 못했어요. 오봉은 힘껏 요법을 운용했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음을 알고 도망치려는 순간, 불 노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의 가슴과 등을 꽉 붙잡았습니다. 불노의 발톱에서 벗어나려 요인이 바둥대자 이번에는 백조(白鳥) 가 날아와 양어깨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꿰뚫어 버렸습니다. 흑연 (黑煙)이 번뜩한 순간 이미 불노가 그의 목숨을 끊어놓았습니다요. 두 마리 신조가 서로 마주보며 몇 차례 길게 울더니, 백조는 훌쩍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불노는 오봉의 시신을 물고 비뢰 애로 돌아왔습니다. 마침 진선고(秦仙姑)를 만났는데 저희에게 동부 앞에서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 더군요. 제자들이 그만 방심하여 요인을 놓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신조에게 불미스런 일이 생길 뻔했습니다. 제자들의 부주의함을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영경은 두 사람이 사문의 도리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을 알고 측은한 마음이 생겼지만, 영운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영운은 두 사나이가 하나도 숨김없이 실토하는 것을 보고 마음 한편으론 흡족하여 말했다. "너희 둘의 일은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암암리에 석기와 조연아를 보호한 공도 있으니 이번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그들을 용서해 주고 자령에게 말했다. "진사매, 수고스럽지만 저 두 사람과 원성을 데리고 비뢰애로 가서 사매의 법력으로 계곡물을 끌어와 비뢰애를 깨끗이 씻도록 하세요. 저들에겐 시신을 멀리 떨어진 곳에 옮겨 묻도록 하세요." 자령은 이 기회에 비뢰애로 가서 한악을 만나 몇 마디 충고를 할 생각으로 흔쾌히 명령을 받아 들이고 셋을 데리고 떠났다. 영운은 장교진인이 산으로 돌아오는 시기가 목전에 임박했음을 알고 미진진(微塵陣)에 갇혀 있 는 <남해쌍동>의 상태를 살피러 여러 동문을 모두 데리고 갔다. 한악과 사도평은 비뢰애 후동(後洞) 문 밖 바위 위에 서로 어깨를 맞대고 앉아 얘길 나누고 있 었다. 두 사람은 전세(前世)의 인연이 있는 사이라 오랜 세월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나고 보니 각별한 정이 솟았다. 사도평은 본래 심사(心思)가 깊고 신중한 사람인지라, 한악의 경거망동함을 보고 교규(敎規)를 어지럽혀 중벌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내심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나타낼 수도 없었 다. 한악은 진작부터 그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다. 동문들을 대할 때에는 그리 따뜻하게 대하더니, 자신에겐 오히려 냉담하자 화가 치밀어 만면에 노기를 띠고 사도평에게 따졌다. "일단 응벽애에 온 이상 저도 동문일가(同門一家)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해요. 본령으로 따져도 우리 자매보다 뛰어난 동문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대부분 동문들이 저를 경시하고 있어요. 더욱이 제영운대사저는 잠시 동안 응벽애를 관장하고 있는 터이니 마땅히 공사(公私)가 분명해야 도리이거늘, 유독 제게만은 편견을 지닌 듯해요. 저의 언니에게는 잘 대해주면서 제 일은 사사건 건 못마땅해 해요. 단순히 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만약 제 잘못이 있으면 제게 분명히 얘기를 해야지 원, 속으로 꽁해 가지고... 저번 미진진(微塵陣)에 들어갔을 때 만 해도 진의 현묘함을 분명히 일깨워주어 절 말렸어야만 했어요. 그런데도 오히려 저를 데리고 가서 제가 진에 갇혀버려 곤란을 당하자 저를 구해내, 동문들 앞에서 제 낯을 깎아버렸어요. 그 후에도 몇 차례씩이나 핍박을 당했어요. 제딴엔 전심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 으면 언니가 여러 동문 앞에서 대놓고 나무랐어요. 게다가 저번에 칠수검(七修劍)을 얻었을 때만 해도 그래요.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면서 저만 쏙 빼놓지 뭐예요? 이건 분명 제가 이교 (異敎) 출신이라 선가보물(仙家寶物)을 나눠주지 않은 거라구요. 게다가 자령언니도 나와는 골육 지간인데 오히려 사사건건 딴사람처럼 절 대하니 제가 화가 안 나겠어요?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 려 그동안 고충을 전부 털어놓으려 했는데, 당신조차 절 냉대하시다니 너무해요! 제가 무슨 금선 정과(金仙正果)를 탐하는 것도 아닌데, 여기서 이 따위 수모를 당하고 있으란 말예요? 내일 당장 자령곡으로 돌아갈 거예요. 제가 성취가 있든 없든 모두 하늘의 뜻이에요." 동문들이 만약 한악을 이교(異敎)라고 경시했다면 어찌 자령에게는 그처럼 잘 대했겠는가! 사도 평은 모두 한악의 성격탓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은 방금 와서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지 라 더 이상 깊은 얘긴 할 수가 없었다. 단지 몇 마디 좋은 말로 달래며 살살 구슬렀다. 그러자 한 악은 진정하기는커녕 자신에게도 욕을 하기 시작했다. 한창 열을 올리며 말하고 있는데 신조(神鳥)가 요인의 시체를 움켜쥐고, 미타·유유안 두 난쟁이 와 함께 비뢰애 앞에 내려서는 모습이 보였다. 한악과 사도평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미타와 유유안 두 사나이는 급히 다가와 예를 올리며 그간 경과를 간략하게 얘기했다. 조금이라도 사실과 어긋나면 신조가 즉시 길게 울어 정정하게 했다. 한악은 그들의 말을 다 듣고는 신조에게는 시체를 지키고 있고, 두 사나이는 태원동에 가서 명 령을 기다리라고 일렀다. 그들이 가고 나자 한악은 다시 사도평에게 응석을 부리며 마구 투정하 기 시작했다. 사도평은 푸른 비단옷을 걸치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애교를 부리는 한악의 모습을 대하자, 지난 날 자령곡에서 자신을 구해냈을 때 느꼈던 수많은 정이 뭉클 솟아올랐다. 한악의 맑은 눈동자를 대하며 정이 듬뿍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사도평, 남은 평생 두 분의 은혜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오. 공행(功行)에 어떤 희생을 치르 더라도 당신과 함께 자령곡으로 돌아가겠소이다. 비록 진흙탕 속으로 떨어진다 해도 이를 달게 감수 할 것이오. 하지만 장모의 전겁(轉劫)이 임박하였으니, 그분은 우리 세 사람이 구해주길 눈 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실 것이오. 아미정교(峨嵋正敎)는 문인을 거둬들임에 매우 엄격하여, 일단 제자로 받아들여지면 정과를 얻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오. 장차 장모를 구함에 있어 본파(本派)의 도움을 청하면 아주 손쉬울 것이오. 장모의 신상을 조금이라도 걱정한다면 어떤 치욕이라도 감수 해야만 하오. 하물며 장래에는 정과(正果)를 얻어야 할 우리가 경거망동하면 되겠소? 동문형제, 자매들은 모두 광명(光明)한데 어떻게 당신을 대함에 차이가 있겠소? 아마 당신이 나이가 어려 고의로 당신의 예기(銳氣)를 다듬어주려는 생각일 게요. 만약 지금 우리가 화가 난다고 떠나버리 면 도리에 합당치 않을 뿐더러, 장모께서 겁수를 면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조차도 우리 두 사람 때문에 놓쳐버리는 꼴이 될 것이오." 한악은 사도평의 말을 다 듣고는 차갑게 말했다. "흥, 어쩌면 그렇게 언니와 꼭같은 얘길 하시죠? 마치 내가 체면도 모르는 음란한 여자같이 말 하는군요? 당신과 난 명목상의 부부 사이가 아니란 말예요. 정과는 말할 것도 없고 겁수에 빠진 다며, 우리의 이름 앞엔 항상 어머니의 일이 덧붙여졌어요. 게다가 전배선인(前輩仙人)들께서 하 시는 일도 너무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요. 부부가 둘다 정과(正果)를 얻기 힘들다고 얘기하지만, 신선(神仙)들 가운데 부부가 같이 정과에 든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장교 사존(掌敎師尊)만 하더라도 자식이 셋씩이나 있어요. 아무리 겁수가 닥쳤다고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친자식을 일교(一敎)의 종주(宗主)로 삼았어요. 그런데 우리만 하류(下流)로 떨어질 이유가 뭐예요? 옛부터 친밀한 사이였으면 여전히 친밀해야 해요. 부부 사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어디 있어요? 사장(師長)께서 덕행수련을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볼 수는 있겠지만, 그 딸이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거냔 말예요? 우리가 추잡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으니, 심 지만 굳게 갖고 있으면 뭐가 두려워요? 그녀가 계속 그런다면 당신과 함께 자령곡으로 돌아가서 공과(功果)를 수련하겠어요. 장교사존께서 회산개부(回山開府)하시는 날 다시 돌아와 참배하고 처 분에 따르면 돼요. 당신과 함께 열심히 노력한다면, 반드시 내외공행(內外功行)에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거예요. 장교사존께서 선인(仙人)이시니, 우릴 불쌍히 여기셔서 도법을 전수해 주실 거예 요. 더 이상 머릴 굴려봐야 골치만 아파요. 우리가 떳떳하고 교규를 어기지 않았는데, 우리가 장 교사존의 딸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고 설마 사문에서 쫓아내시기야 하시겠어요? 한 이틀 지켜보고 여전히 변화가 없으면 어떤 벌을 받더라도 자령곡으로 돌아가고야 말겠어요." 사도평은 그녀가 단호히 말하는 것을 보니 일시에 기분을 풀기 힘들다고 여겨 몇 마디 말로 달 랬다. 더 이상 그녀를 화나게 하지 말고, 나중에 자령을 만나 자세히 얘기한 뒤 다시 달랠 작정을 했다. 이때 자령이 명령에 따라 날아오다 두 사람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앉아 다정한 모습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악의 사도평에 대한 마음이 이미 깊었음을 보고 앞날에 걱정이 앞섰 다. 곧이어 미타, 유유안 두 난쟁이도사가 날아오자 한악도 이들을 발견했다. 한악이 웃으며 언니를 불렀지만 자령은 모른 척했다. 사도평은 불만에 가득찬 기색을 한 자령을 보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냉큼 그 자리에서 벌 떡 일어섰다. 뒤이어 미타, 유유안과 원성도 당도했다. 자령은 다른 사람들이 오자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자신들이 온 연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각자 에게 할 일을 분부하다가, 신조(神鳥)가 여전히 음양렴자의 시체를 놓지 않고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조는 자령과 눈이 마주치자 긴울음을 몇 차례 토해냈다. 이상한 생각이 들 어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 원성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연유를 안 뒤 급히 한악을 부르며 다가갔 다. "저 요인의 원신(元身)이 이미 달아난 것을 보지 못했느냐? 만약 옆에 숨어 있다가 틈을 타 복 원되면 어쩔 작정이냐? 신조는 그 걱정 때문에 가지 못하고 저러고 있었던 거야. 대사저께서 너 희에게 여기를 지키라고 했을 때에는 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를 알았어야지! 너희들이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만약 요인의 원신이 자신의 몸을 되찾는다면 그 죄를 어찌 감당할 작정이냐?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느냐?" 한악은 자령의 말을 듣고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언닌 괜히 알지도 못하고 사람을 나무래! 언니의 눈엔 요시(妖尸)의 가슴과 등이 신조의 발톱에 의해 뚫려 오장육부가 튀어나온 것이 안 보여요? 그의 원신이 신체로 되돌아온다 해도 저처럼 신 조가 붙들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어요? 저와 평오빤 여러 날 동안 보지 못했어요. 어머니의 겁수 가 닥치기 전에, 잠시 한적한 틈을 타 의논하는 것도 교규를 어긴 건가요? 요인이 아무리 현묘하 다 해도 저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요." 더 이상 한악과 지껄이다가는 미타, 유유안이 들으면 부끄러운 일이라 말을 끊었다. "그처럼 얘기하는 걸 보니 나뿐만 아니라 신조도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투로군." 자령은 신조를 향해 말했다. "이 시신은 우리 세 사람이 단약으로 없애 묻어버리겠다. 너의 이번 공로는 잠시 뒤 주인에게 소상히 전해주겠다. 비록 적이 참패하여 도망쳤지만, 혹시라도 남아 있는 자가 없는지 천공(天空) 을 비행하여 살펴보도록 하여라." 신조는 자령의 분부를 듣고 두 눈을 들어 자령을 응시하더니, 두 날개를 힘껏 펼치며 순식간에 허공을 향해 솟구쳤다. 핍박당하는 자령자매 臨難得奇珍 納芥藏身微塵護體 多情成孼累 傷心獨活氷誓雙樓 자령은 두 사나이와 원성에게 널브러져 있는 모든 시체를 부수어 오봉의 시체 옆에 쌓아두도록 했다. 한 데 모은 시체에 소골산을 뿌려 녹이게 하고 자기도 곁에서 거들었다. 한악은 계속 자령을 따라다니며 뭐라고 얘기했지만 시종 묵묵부답이자, 마침내 화를 내며 사도 평을 불러 동굴입구로 가서 얘길 나누기 시작했다. 사도평은 자매가 서로 앙앙불락하자 내심 불안해 했다. 그런 중에 한악이 자신을 불러세우자 이 건 정말 난감했다. 마지못해 몇 걸음 따라가며 난처해 하는데, 갑자기 자령이 뒤에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염치도 모르는 놈! 감히 여길 빠져 나갈 성싶었더냐?" 뒤이어 광화가 번뜩이며 곧바로 한 폭의 채운이 일기 시작했다. 한악과 사도평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뒤돌아서 보았다. 오봉의 시신이 이미 되살아나 일단의 흑 연(黑煙)을 일으키며 막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다행히 자령이 미리 방비하고 있다가 그의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미타, 유유안이 시체를 없애는 동안 계속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오봉의 원신이 되돌아오자 미진기를 펼쳐 그를 붙잡았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신조도 워낙 영통한 신물(神物)인지라 진작부터 자령의 심계를 간파하고 멀리 가지 않고 근처를 선회하고 있었다. 신조는 요인이 도망가려는 것을 보자마자 섬전처럼 쏘아져 내려왔다. 처음에 오봉은 두 마리 신조가 여간 영통하지 않아 쉽사리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급히 신체를 버리고 원신만 빼내 도망을 쳤다. 신조가 보지 못할 때를 이용하여 되돌아와서 육신과 함께 도망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육신이 신조의 날카로운 발톱에 찢겨지자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자신의 몸뿐만 아 니라 법보낭에 있는 많은 법보도 망가질 판이었다. 다행히 신조는 더 이상 시신을 망가뜨리질 않 았다. 그 정도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근처에 숨어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불노는 백조(白鳥)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시신을 더욱 꽉 움켜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미타와 유 유안은 명령을 받으러 떠나갔다. 오봉은 입 안이 바짝바짝 탔다. 저놈의 짐승이 왜 저리도 영통한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조 두 마리 다 저처럼 영통하니 원신(元身)으로 부딪쳐 봐야 상대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시신마저 꼼짝없이 신조에게 잡혀 있으니 날고 뛰는 재주를 가졌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법보나 비검도 쓸 데가 없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신조를 놀라게 하면 그 즉시 자신의 시 신은 갈기갈기 찢어질 판이었다.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근처에 숨어 기회를 보고 있다가, 신 조가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시신을 찢는 순간 재빨리 달아난 궁리를 했다. 하지만 원성도 영통하여 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으니 백조(白鳥)의 지시를 신조에게 전해주는 것이었다. 자령이 와서 보니 백조가 오봉의 원신을 유인해 후환을 없애려 함을 짐작하고 원성이 말하려는 것을 막고, 한악을 불러 짐짓 모른체하고 물었다. 한악을 꾸짖고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 원신 을 안심시키려 신조에게 시신을 놓아두고 가라고 일렀다. 오봉의 원신은 신조가 알아챌까 두려워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 원성이 백조의 뜻을 자령에게 말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다만 진씨자매가 큰소리로 주고받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자령이 하는 말을 듣고 기회가 왔구나 싶어 몹시 기뻤다. 두 사람이 다투며 떠나가자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 나 신조가 구름 속에 신령을 감추고 있었음에랴! 아미파 소골산(銷骨散)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만약 그녀들이 되돌아오면 더 이상 기회 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재빨리 자신의 몸 속으로 되돌아간 그 순간 미진기의 채운이 기다렸다 는 듯이 섬전처럼 날아왔다. 하지만 그녀들과는 삼십 걸음 정도 떨어져 있어 쉽사리 자신을 따라 잡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오봉의 원신이 몸과 합하여 막 둔광을 일으키려는 찰나, 채운이 이미 자신의 머리 위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때 오봉이 전처럼 몸을 버리고 원신만 탈취했다면, 살아날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봉은 이미 자신의 겁수(劫數)를 당하려니까 아까운 마음에 몸을 버리지 못하고 일시에 호승지심이 일 었다. 적의 공격을 힘껏 막아내고 재빨리 도망칠 망상을 한 것이었다. 왼손으로 뇌화를 발출하며 법보 낭에서 보물을 끄집어냈다. 이러는 사이에 신조는 벌써 오봉의 머리 위로 날아와 있었다. 자령과 원성, 두 난쟁이도사도 일제히 각자의 비검과 법보를 날렸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한악은 이런 광경을 목격하니, 만약 요인이 도망친다면 모든 원망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뻔했 다. 화가 치밀기도 하고 급하기도 하여 황급히 소리쳤다. "평오빠, 빨리 오룡전(烏龍剪)을 사용하지 않고 뭘하고 있어요?" 사도평은 벌써 오룡전을 꺼내들고 있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 곧바로 공중을 향해 날렸다. 오봉은 적들이 법보와 비검을 분분히 일으키자, 대충 싸우는 척하다가 도망가려 했다. 다행히 채 운이 자신의 뇌화에 의해 기세가 누그러지자, 이 기회다 싶어 둔광을 일으켰다. 이때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보았다. 검은 형체 속에 금빛 눈이 반짝이는 것 을 보고 신조임을 대뜸 알아채고 걸음아 날 살려라고 도망쳤다. 현공을 운용하여 만약의 경우 원신만 도망칠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사도평의 오룡전은 아래쪽 에서 사정없이 휘몰아쳐 왔다. 오룡전은 원래 신타(神駝) 을휴(乙休)가 수년간 수련한 이보(異寶) 로써, 수도인(修道人)의 원신(元身)을 전문적으로 참수시키는 법보였다. 막아내기는커녕 두 다리 교룡 같은 오광(烏光)에 붙들려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봉은 참혹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여러 사람의 비검에 의해 수십 토막으로 갈기갈기 찢겨지며 원신마저 오룡전에 의해 즉사해 버렸다. 자령은 오봉이 정수리 위로 흰 연기를 은은하게 내뿜는 것을 보고 그가 다시 원신으로만 도주하 려는 것임을 알았다. 그 순간 오룡전이 날아와 그를 꼼짝없이 옭아매자, 비검을 날려 죽여버렸다. 한악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다행히 적이 사도평의 손에 의해 죽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자령을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이 없자 자신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령도 더 이상 그녀를 나무라지 않고 미타, 유유안과 원성에게 명하여 수급과 몸뚱아리 조각을 모두 거둬들이도록 하였다. 원성더러 멀 리 가서 깨끗한 곳을 골라 구멍을 깊숙이 파 두라고 일렀다. 두 사나이는 자령에게 오봉의 법보주머니를 자신들에게 넘겨줄 수 없느냐고 간청하였다. 자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매우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자령더러 자신들에게 시체를 옮길 수 있 는 법술이 있음을 알리자 자령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나이는 주어(呪語)를 외며 방문(旁門)의 운반지법을 펼쳤다. 순식간에 모든 시체를 원성이 미리 파놓은 구멍 속으로 옮길 수 있었다. 영운이 준 화골단약(化骨丹藥)을 시신에 뿌리자, 눈 깜짝할 사이에 누런 물로 변하였다. 다시 원 성과 두 사람에게 흙으로 잘 묻으라고 명했다. 모든 일을 마치자 다시 비뢰애로 돌아와, 몸 속에서 작은 깃발을 네 개 꺼내 원성과 두 사나이 에게 각자 나누어주었다. 진언(眞言)을 전해주고, 자신도 깃발 하나를 들고 건너편 언덕을 향해 가리켰다. 불똥이 튀더니 뒤이어 가느다란 물줄기가 사방에서 뿜어졌다. 물줄기는 점검 굵어져 은룡(銀龍) 처럼 공중으로 내뿜었다. 깃발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물줄기는 비무(飛舞)하듯 쏟아졌다. 순식 간에 비뢰애에 널브러져 있던 온갖 찌꺼기와 핏자국이 말끔히 씻겨져 나갔다. 두 사나이뿐만 아니라 원성조차도 자령의 엄청난 솜씨를 보고 그민 입이 딱 벌어져 버렸다. 자 연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비록 마음속으로 성심껏 따랐지만, 아미문하가 이처럼 대단한 본령을 지 니고 있을 줄은 몰랐었다. 그동안 며칠 되진 않았지만, 나이어린 선고(仙姑)들이 펼쳐내는 법보, 비검의 신화무방(神化無方) 한 위력을 보았고, 좀전에 적과 대적할 땐 자령뿐만 아니라 신조와 원성조차도 영통한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자신들이 보잘것 없음을 부끄러이 여겼지만, 한편 이처럼 뛰어난 선고(仙 姑)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령이 선산(仙山)을 말끔히 씻고 나자 땅거미가 서서히 밀려왔다. 석양이 비추자 방금 씻어낸 나무와 돌에서 광채가 비쳤다. 주위가 눈부시게 깨끗해지자 마음마저도 산뜻해지는 것 같았다. 고개 돌려 한악을 찾아보니 여전히 사도평과 어깨를 맞대고 밀어를 속삭이고 있었다. 내심 한숨 을 푹 쉬고 눈길을 돌렸다. 신조는 이미 돌아갔고, 두 사나이와 원성을 데리고 태원동으로 돌아갔 다. 한악은 자령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다시 사도평과 얘길 나눴다. 자기와 주문이 구천원양척을 가 지고 요진(妖陣) 속을 뚫고 들어갔다가 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청해교조 장령자를 만난 일을 신나 게 설명했다. 원양척을 그만 빼앗겨 막 장령자의 제자를 죽인 복수를 당하려는 순간 다행히 신타 을휴가 나타 나 구해준 것도 소상히 말했다. 신타가 선단(仙丹)을 세 알씩이나 주며, 서신도 한 통 주었고 시 일이 되면 열어보라고 분부했음도 이에 덧붙여 말했다. "그분은 또한 당신과도 인연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정과(正果)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 하셨어요. 방금 당신 말을 듣고 보니, 그분께서 당신께도 서신을 남겼더군요. 시일을 따져보니 저 와 같은 날짜인데 바로 열흘 뒤예요. 대사저와 신약란 언니로부터 을진인(乙眞人)의 내력에 대해 노상 들었어요. 정말 신통광대(神通廣大)하며 도력을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더군요. 그분은 비록 성격이 괴팍하지만, 워낙 뛰어난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 계획한 일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 드시 이룰 수 있는 분이지요. 예를 든다면 능진인(凌眞人)만큼이나 성격이 고괴(古怪)하다더군요. 예전엔 신체가 건장하고 용모도 위엄이 서려 있었고 등도 굽지 않았다더군요. 그런데 여러 차례 하늘의 뜻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바람에 천겁(天劫)을 당했대요. 몇 명의 고수가 합력하여 암산 을 가해 그분을 사로잡아 사십구 년 동안이나 가두어 두었어요. 다행히 그분의 원공(元功)이 워낙 오묘하여 비록 사로잡을 수는 있었으되, 그분을 상하게는 할 수 없었지요. 도리어 그분은 조용한 곳에서 지내며 현공을 깨우쳐 천기(天機)를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칠칠공행(七七功行)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려 오행선천진화(五行先天眞火)로 봉쇄된 법술을 파해하고 세상에 다시 나올 수가 있었 다나요. 당초 그분을 해쳤던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대부분 두려워 모습을 감추었답니다. 하지 만 그분은 성격이 고괴하여 도리어 그 사람들을 찾아가 사의를 표했어요. 그들의 그런 도움이 없 었더라면 자신이 어떻게 이런 성취를 얻었겠느냐며 도리어 고마워했대요. 그 뒤 다시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이전 일은 모두 불문에 붙이셨대요. 그 중의 한 분이 바로 능진인이신데, 그 뒤 오히려 을진인과 친한 친구 사이가 되셨답니다. 제대사저께서는 장교부인(掌敎夫人)께서 일찍 이 그분께는 부인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어요. 그분의 본령도 을진인과 막 상막하였다나 봐요. 그런데 이미 백 년 전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서로 헤어져 지금껏 서로 만 나지 않고 있다는군요. 그분은 남녀가 혼인하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전에 당신과 나 사이의 일도 거론하시며 시일이 되어 서신을 읽어보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하셨어요." 사도평도 신타 을휴를 대신해 민산(岷山)에 절하러 갔던 일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한참 신나 게 얘길 주고받는데, 멀리서 약란과 주문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을 대신하여 후동을 지 키라는 명령을 받고 온 것이다. 한악은 자령이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낸 것으로 보아 자령에게 의심이 났 지만 딴 사람 앞이라 신경질을 낼 수가 없었다. 늦게 가면 공연히 또 무슨 흠이나 잡힐까 봐 서 둘러 태원동으로 돌아가는데 멀리서 독각신취(獨角神鷲)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악은 급히 신형을 뽑아올려 공중에서 신취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으며 채색 깃털 을 유유히 펄럭이며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과연 독각신취였는데, 발톱에는 서 신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는 기뻐하며 얼른 서신을 받아쥐었다. 한악이 뒤돌아 사도평을 불렀다. "평오빠, 태원동에서 만나기로 해요. 저는 신취를 타고 돌아갈게요." 말을 마치자 냉큼 신취의 등에 올라타고 응벽애 아래로 날아갔다. 도착하여 보니 동문들끼리 모 여서 비검을 연습하고 있었다. 자령은 한악이 독각신취를 타고 날아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날카로운 목 소리로 물었다. "대사저께서 오늘 한적한 틈을 타 주문, 신약란 두 사저를 너 대신에 후동을 지키게 하고 우리 에게 본문 심법을 전수해 주신단다. 그런데 왜 이제야 돌아오는 거니? 그리고 독각신취는 왜 돌 아온 거지?" 한악은 자령의 말을 듣고 좀전에 자신이 공연히 의심했음을 알았다. 돌아오려는데 문득 독각신 취가 공중에서 울길래 신취를 만나느라 늦었다고 변명했다. 우담(優曇)대사의 서신을 영운에게 전 해주고 물러났다. 영운이 서신을 펼쳐보니 대략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개부(開府) 시기가 곧 임박하여 정교(正敎)가 창문(昌門)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기쁜 일이며, 또한 축하할 일이다. 시기가 되면 전체 문인(門人)이 모두 모일 것이다. 지난날 빙암(氷巖) 위에서 신취를 구했다. 당시 오룡전에 의해 곤욕을 치르고 있길래 그것을 거 두어 두었지. 신타 을휴는 성격이 비록 고괴하지만 인품은 매우 정직하고 도력도 매우 고강하단 다. 아미의 친구로서 그에게 죄를 짓는 것을 원치 않아 곧바로 그에게 오룡전을 돌려주려 하였다. 도중에 우연히 만났는데 과연 그는 매우 화가 나 있었다. 나와 삼 일 밤낮을 겨루었지만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그때 다행히 <극락진인(極樂眞人)>이 공중에서 신유(神遊)하다가 우릴 발견하고 화해시켜 친구 가 되었단다. 이전에 오룡전은 자기가 정말 아끼는 법보였지만 이미 다른 사람이 거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치 않을 것이며, 이를 자신이 구한 사도평에게 주고 싶다고 했다. 이 법보는 옳은 일에 쓰게 되면 신묘한 효력을 발휘하여, 이파 요인의 원신(元身)을 전문적으로 베어버릴 수가 있다. 오룡전이 이미 사도평의 손에 있음을 알고 있다. 열심히 수련하여 큰 정진을 보길 바란다. 신취는 이미 횡골(橫骨) 이 뚫려 <신조> 불노의 공행과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진씨자매 에게 필요한 것이라, 옛 주인을 찾아가도록 명하였노라.> 서신 끝엔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각 동문들이 개부(開府)에 돌아와 개산(開山)의 성대한 잔치 를 미리 준비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영운에게 미리 준비해 둘 것을 당부해 두었다. 영운이 서신을 다 읽고 동문들에게 서신을 전하자, 일제히 허공을 향해 감사를 올렸다. 모두 함 께 한바탕 비검을 연마한 뒤 태원동으로 돌아왔다. 이튿낟 모든 석실은 영천(靈泉)을 끌어다 깨끗이 씻어냈다. 중앙에 있는 서른여섯 개의 석실은 장교사존과 여러 선배 사숙들의 거처로 정했다. 나머지 백여 칸의 석실은 우선 남자는 동쪽, 여자 는 서쪽 순으로 분배하여 수련을 쌓을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동문들 중에 도행의 깊고 낮음이 일치하지 않아 아직도 화식(火食)을 하는 동문이 더러 있었다. 영운은 신조와 신취를 시켜 맹수를 사냥하여 고기를 얻었다. 고기는 영경과 지선(芷仙), 약란 등 세 사람이 요리하도록 했다. 미타와 유유안은 전에 영경이 남겨둔 은자를 가지고 시장에 가서 식 량과 일상용품을 구해오도록 했다. 산중엔 황정(黃精), 하수오(何首烏), 이과(異果), 야채(野菜)가 잔뜩 있어 원성이 매일 돌아다니며 따왔다. 동굴 안엔 지선이 평소 기화이과(奇花異果)로 숙성시킨 미주(美酒)가 잔뜩 있었다. 장남고 남매 도 잔심부름을 도와주었고, 모두들 흥이 나서 동분서주하며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 후 칠팔 일이 지나 묘일부인이 연락도 없이 돌아와서 일의 진척을 살펴보았다. 이틀 동안 머 물고 영운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한 뒤 다시 떠나갔다. 이즈음 여러 동문들이 앞을 다투어 모이기 시작했다. 석기, 조연아 두 사람은 근처에서 살고 있 었으니 이들은 빼고라도 수많은 동문들이 모여들었다. 우선 민산(岷山) 만송령(萬松嶺) 조천관수 (朝天觀水)의 제자인 <신안(神眼)> 구림(邱林), 곤명(昆明) 개원사(開元寺)의 <합합승(哈哈僧)> 원각선사(元覺禪師)의 제자인 <철사미(鐵沙彌)> 오수(悟修)와 <풍화도인(風火道人)> 오원지(吳元 智)의 제자인 <칠성수(七星手)> 시림 (施林), <영화거사(靈和居士)> 서상아(徐祥鵝), 청성산(靑城 山) 금편애(金鞭崖)의 <왜수(矮搜)> 주매(朱梅)의 제자인 <장인(長人)> 기등(紀登), <소맹상(小孟 嘗)> 도균(陶鈞) 등이 왔다. 그 밖에도 백여 명의 동문이 스승의 명을 받들어 모여들었다. 어떤 자는 도중에 소식을 듣고, 오 부(五府)가 개벽(開闢)되기 전에 당도하였다. 모두 함께 모여 새로이 친구를 사귀자 날이 갈수록 시끌벅적해졌다. 매일같이 동문이 새로이 모여들자 혼잡을 피하기 위해, 영운과 기등(紀登)을 우두머리로 하여 검 법을 연습하기 시작하였다. 서로의 파탄을 지적해 주며 자신의 무공을 전수해 주자, 공행은 날이 갈수록 크게 진전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단지 한악과 사도평 둘만은 괴로운 나날이었다. 자령도 한악과 사도평을 보는 눈이 예전 같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매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두 사람이 서로 부부지간임은 모든 동문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한악이 아직 도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고 있어 내심 모두들 기이한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자령이 어찌 두 사람의 본심이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정에 이끌려 자칫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져 교규(敎規)를 어기고 여러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을까 하 는 어른으로서의 노심초사였다. 하지만 한악도 암암리에 자령을 미워하며 자매지간이 예전 같지만은 않았다. 이런 상태가 지속 되자 둘 사이의 오해는 더욱 깊어만 갔다. 사도평으로서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난처한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악에게 부부의 정으 로 이끌려듬을 어쩔 수가 없었다. 단지 신타 을휴가 두 사람에게 각기 남겨준 서신을 개봉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그 날이 되자 두 사람은 후동을 지킨다는 핑계로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서신을 펼쳐보았다. 두 사람의 인연과 앞으로의 과정을 설명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장령자가 백만산(百蠻山)에서 돌 아와 자령곡으로 가서 사문공의 복수를 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진씨자매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뿐더러 아미파의 뭇 장로(長老)들도 끼어들기 곤란하여, 대놓고 도와줄 수가 없노라 했다. 하지만 을휴는 진씨자매의 효성을 가엾게 여겼고, 또한 사도평이 자신을 위해 민산(岷山)에서 수 고한 일 때문에 미리 모종의 준비를 해두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그냥 일이 진행되는 대로 행하 면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서신을 다 읽고 나자 한편 놀랍기도 하고 무척 기뻤다. 급히 허공을 향해 절을 올렸 다. 본래 생각은 자령에게도 의논하려 했는데 공교롭게도 일이 꼬이느라고, 이 날 아침 일찍 두 사 람이 영운에게 부탁하여 다른 사람 대신에 후동을 지키려 하는 것을 보고 자령은 의심이 부쩍 생 겼다. 암암리에 몸을 숨기고 두 사람을 살펴보니 하늘을 향해 절을 하는지라 더욱 오해를 하였다. 곧 장 앞에 나타나 연유를 물었다. 자령이 말투가 매우 신경질적이자 화가 치민 한악은 사실을 얘기 하고는 사도평의 입을 막아버렸다. 곧바로 자령의 말을 되받아 몇 마디 티격태격 다투다가, 자기는 선인(仙人)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으며 사도평과 함께 자령곡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자령도 화가 치밀어 사리를 분명히 판별하지 못하고 그만 두 사람이 진작부터 서로 짰다고 생각 해 버렸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약도 없다는데 자령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한악은 한악대로 길길이 날뛰며 당장 자령곡으로 가겠다고 소리쳤다. 만약 자매끼리 다투다 동생이 자령곡으로 돌아간 일이 알려지면 동문들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 인가! 마음 속으로야 사도평더러 한악을 말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 지 않았다. 혼자라도 말려볼 생각으로 말을 꺼내려는데, 한악이 발작하듯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사도평더러 자기를 따라오려면 당장 여길 뜨고, 그렇지 않겠다면 자기 혼자서라도 가겠다며 그 자리에서 검광을 일으켜 훌쩍 사라져 버렸다. 사도평은 그녀의 성질을 익히 아는지라 쉽사리 말 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신타 을휴가 도와준다고 했으니, 이 일이 끝난 뒤 두 자매를 화해시킬 생 각을 했다. 즉시 자령과 작별을 고하고 한악이 날아간 방향으로 날아갔다. 자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보상부인의 전겁(轉劫)을 깜빡 잊고 말았다. 후동에 아무도 없자 자기가 대신 지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떠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제서야 어머니의 전겁이 떠올랐다. 이때 다행히 경운과 문기가 놀다가 돌아오는 길이어서 급히 자기 대신 후동을 지켜달라고 부탁 하고 태원동으로 돌아갔다. 영운, 영경, 약란, 영남 네 사람은 밖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다가 허겁 지겁 달려오는 자령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영운은 진작부터 그들 자매에게 어려움이 닥칠 것을 묘일부인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한악이 성질 이 괴팍한 것을 보고, 대체로 성격이 잘 맞았던 영경과 약란을 시켜 어서 가서 그녀를 달래 데려 오도록 일렀다. 두 사람이 떠나간 후, 자령은 아무래도 안심이 안 돼 자기도 가겠다고 우겼다. 영운은 그녀를 만 류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우담대사의 말도 있고 하여 신취를 데리고 가도록 일렀다. 한악은 사도평과 함께 신타 을휴의 서신을 보고 곧바로 자령에게 얘기하려 하였다. 그런데 일이 요상하게 꼬여 둘 사이에 화기만 더욱 상하고 말았다. 언니없이 자령곡에 가면 위험이 적지 않음 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령이 연일 자기에 대해 오해하자 내심 불쾌했다. 전에도 자령에게 그동안 쌓였던 울분 을 다 토한 것도 있지만, 한편 신타 을휴가 도와주기로 하였으니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성싶었다. 비록 혼자 몸이지만, 자신의 본령만으로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령에게 몇 마 디 툭 던지고는 사도평을 재촉하여 떠나버린 것이다. 동문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떠나와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당장은 화가 치밀어 앞뒤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사도평은 사실 진씨자매에 대해 각별한 정이 있었다. 다만 자령은 항상 광명정대하고 사리를 분 별할 수 있어, 항상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 자신도 속세의 인연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정과(正 果)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이리하여 비록 겉으로는 부부 사이였지만 서로 속으로 관심을 가지는 외에 늘 냉담했다. 하지만 한악은 너무나 천진난만한 순수한 동심(童心)을 지녀, 사도평의 이처럼 광명정대한 모습을 보고 자령보다 더욱 친하게 대하며 무척 따랐다. 두 사람을 볼때 전세의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라 마치 자석에 끌리듯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점 점 친숙해져 갔다. 하지만 동생을 생각하는 자령으로서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한둘이 아니었다. 몇 마디 나무라면 대뜸 반감을 가지니 좀처럼 전과 같이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사도평의 눈엔 두 자매가 하나는 봄날의 따뜻함과 비유됐고, 다른 하나는 가을의 청량함과 비교되었다. 이리하여 이번에 자령곡으로 갈 때도 한악의 애교섞인 웃음과 부추김에 못 이겨 그만 자령에게 사실을 설 명하지도 못하고 따라가 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검광을 신속히 일으켜 순식간에 자령곡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신타 을휴가 미리 시기를 점쳤기 때문에 감히 태만할 수가 없었다. 자령곡 근처에 당도하였지만, 섣불리 내려 서지 않고 검광에 의지하여 아래를 유심히 살폈다. 계곡 위엔 하장(霞障)으로 잘 봉쇄되어 있었다. 백운대(白雲臺) 근처의 풍광(風光)이 약간 흩어진 외에는 사방 어디에도 아무런 이인이 침범한 자취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악은 자기가 도착했는 데도 장령자가 나타나지 않자,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아래쪽 계곡 속에 남겨두었던 흰토끼 한 쌍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문득 다시 동심(童心)이 일어 사도 평과 함께 계곡 속으로 내려갔다. 한악은 제일 처음 사도평을 만났을 때 오운보(五雲步)로 경운과 문기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그 때는 하장(霞障)에 의해 봉쇄되어 있는 통에 계곡으로 돌아올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청라(靑螺)로 갈때 자령에게서 해법(解法)을 배웠다. 계곡을 향해 떨어져 내리며 암벽 앞에 당도하자 진언을 외어 하장을 거두어들였다. 이때 한 조각 홍하(紅霞)가 위쪽에서 번뜩이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좋지 않음을 느껴 돌아서려 는데 위에서 누군가의 대갈일성이 들려왔다. "세상 모르는 천한 것 같으니! 오늘이 네년이 제삿날인 줄이나 알아라!" 한악과 사도평이 소리나는 곳을 보니, 앞쪽에 고괴한 용모의 왜소한 도인이 서 있었다. 한악은 한눈에 그가 <청해교조> 장령자임을 알아차렸다. 전날 주문과 함께 구천원양척을 지니 고 사남계의 요진(妖陣)을 공격하다가 장령자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 비록 신타 을휴가 예고 는 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사도평을 보니 아직 장령자의 무서움을 모르 는 터라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색이었다. 이때 두 사람은 홍하(紅霞)의 강력한 빛에 의해 두 눈에 극심한 통증이 오자 눈을 가리며 말했 다. "<청해교조> 잠깐 손을 멈추세요! 당신과 내가 서로 싸운다면 강자는 살아 남고 약자는 죽을 거예요. 귀하의 제자 사문공은 극악무도하여 함부로 생령(生靈)을 살해하고 다니는 파렴치한이었 어요. 저의 자매가 사존의 명을 받들어 팔마(八魔)를 제거하러 가는 길에 귀하의 제자와 유덕(兪 德)을 만났어요. 서로 싸우다 저희자매가 사용한 백미침(白眉針)이 원인이 되어 목숨을 잃어버린 거예요. 당시 그의 친구가 구하려 했지만 실패하였지요. 그 따위 인간은 세상에 도움보다는 화근 덩어리라 여겨 즉시 주살시켜 버렸어요. 아마 어른의 제자는 저희 자매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손에 의해 분명 죽었을 거예요. 일파의 교조라는 분께서 시시비비를 가릴 줄 모르고 오히려 연약 한 계집 한둘을 핍박하시다니,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기에 족하군요. 처음엔 당신이 일파의 종주로 서 도력도 고심하고 행동도 광명정대한 줄 알고 성심껏 대적하려 했어요. 있는 힘껏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런데 교조라는 분이 우리 부부가 돌아오길 매복하고 기다 리고 있다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틈을 타 공격하려 하다니! 더구나 지금은 언니가 없으니 더욱 손 쉽겠지요.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세요. 아마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걸요?" 한참을 듣고 있던 장령자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대담한 계집 같으니! 죽음이 눈앞에 있는 데도 감히 노부를 희롱할 셈이냐? 나의 어리석은 제 자를 죽인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 하지만 너희 자매는 천호가 남겨준 독(毒)을 사용해 너무나 많은 인명을 살상하였다. 내가 너희 자매를 굳이 찾아 죽이려는 것도 바로 악을 제거하여 각파 동도들에게 해를 없애려 함이야. 전에 아미산에서 꼽추녀석을 만나는 통에 달콤한 말에 속아 잠 시나마 너희의 목숨을 연장해 두었구나. 이번에 내 친히 백만산에 가서 녹포노조를 제거하고 너 희 일을 청산하러 왔느니라. 너희가 방비하지 않았다고 어거지를 쓰니, 반 나절 동안의 여유를 주 겠다. 너희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젖먹던 힘을 다해 펼쳐보아라. 다행히 반 나절 동안에 너희 언니가 온다면 나도 수고스럽지 않게 되어 좋을 것이다. 만약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내 친히 찾 아가 죽이겠다." 장령자는 만면에 노기를 띠고 소맷자락을 휘저어 광화를 일으켜 타더니 순식간에 종적을 감춰버 렸다. 사도평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자 한악이 눈빛으로 이를 만류하고 함께 계곡 속으로 내려갔다. 두 마리 토끼는 나무 아래서 풀을 뜯어먹고 있다가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기뻐서 단숨에 달 려왔다. 한악은 이처럼 위급한 와중에도 소녀 같은 마음에 토끼를 껴안고 반가와하였다. 토끼를 품에 안 고 계곡 속으로 들어가다가 한악은 너무도 놀랐다. "아차!" 원래 자매가 청라로 갈때 자령이 나중에 떠나왔는데, 계곡 천정에 박혀 있던 야명주(夜明珠)를 모두 거둬가 버려, 계곡 속엔 칠흑 같은 어둠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화가 나서 오는 통에 자령에 게 야명주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신타 을휴의 말에 의하면 계곡 속에 어떤 조치를 해두었다고 했는데, 도무지 어두워서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할수없이 각자 검광을 일으켜 길을 밝혔다. 겨우 사물을 식별할 수 있게 되어 보물을 숨겨둔 곳으로 가 보았더니 그곳도 역시 자령이 법술 로 봉쇄해 두었다. 보상부인이 당년에 남겨두었던 적을 막아내는 데 유용한 두 가지 법보와 한 폭의 보명보산(保命保山)의 진도(陣圖)도 꺼낼 수가 없었다. 자령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고 함께 왔어야 할 것을... 화가 난다고 그냥 와버려 이런 난관에 부 딪치게 되었다. 한악은 후회막급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한 지금, 아미로 다시 돌아가 도움을 청하기엔 너무나 늦어버렸다. 한악의 표 정에 난감해 하는 품이 역력하자 품속에 있던 토끼가 주인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알고 구슬프게 울어댔다. 한악은 정신이 혼란한 가운데도 이를 악물었다. 복(福)이 아니면 화(禍)겠고, 화가 닥친다 하더라 도 한번 맞부딪쳐 보고 싶었다. 신타 을휴가 급박한 상황엔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결코 위험에 빠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후 두 마리 토끼를 일단 안전한 곳에 숨겨두기로 했다. 사도평과 함께 한 마리씩 안고 예전 에 사도평이 요양하던 석실에 내려놓고 토끼들에게 신신당부했다. "나는 지금 강적과 마주하고 있어, 잠시후 싸움이 벌어질 터이니, 너희들은 여기 남아 독수(毒 手)를 피해야만 한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꼼짝 말고 있어야 해." 한악은 석실 입구를 봉쇄하고 난 뒤 사도평에게 말했다. "당초 을진인의 서신을 받고, 어머니의 진도(陣圖)만 있으면 며칠은 거뜬히 견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당신과 함께 왔어요. 그런데 적을 막아내는 법보가 모두 언니의 법술에 의해 봉쇄되어 있 어 꺼내 쓸 수가 없군요. 시간은 촉박하여 앞으로 몇 시진이 지나면 장령자가 다시 쳐들어올 거 예요. 그땐 제선고(齊仙姑)의 하장(霞障)에만 우리 목숨을 맡겨야 합니다. 만약 적이 생각보다 강 해 보장(保障)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큰일이에요. 다행히 을진인께서 빨리 오시면 좋지만, 그 렇지 않고 늦게 오시면 우리 목숨은 그 길로 끝장이에요. 저 하나의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공연 히 당신마저 화를 당해 우리 어머니의 비승초겁(飛昇超劫)을 그르칠까 두려워요. 장령자와 당신은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당신이 응벽애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도 막지는 못할 거예요. 지금 당장 아미로 돌아가세요. 저는 제선고의 하장과 어머니의 선천금단지보(先天金丹至寶)를 가지고 장령자 와 사활(死活)을 걸고 싸우겠어요.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 부디 저희 어머니가 천겁에서 벗어 나게 도와주세요." 사도평이 말했다. "한매, 너무 상심하지 마시구려. 을진인의 서신은 결코 착오가 없을 것이오. 우리 두 사람에게 이곳으로 오게 했으니 반드시 어떤 안배를 해두셨을 게요. 서신에는 당신 언니와 함께 오라고 했 는데 당신이 그만 화를 내는 바람에 조금 문제가 생긴 것뿐이라오. 우리 두 사람은 선연(仙緣)으 로 맺어진 사이이니 생사고락을 같이해야 하지 않겠소. 지난날 민산에 가기 전 을진인께서 내겐 중겁대재(重劫大災)가 이미 지나갔다고 했으니, 오늘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결코 죽지는 않을 것이오. 한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곁에 있지 않소!" 한악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계속 사도평에게 떠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 음은 정반대였다. 사람이란 어려움에 빠지면 더욱 친해지는 법, 두 사람은 두 손을 꼭잡고 양 어 깨를 서로 기대고 이 얘기 저 얘길 주고받으며 애절한 정을 나누었다. 지난 며칠 사이 서로를 의 지하고 믿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법보를 넣어둔 장소는 자령에 의해 이미 봉쇄되어 있는지라, 잠시후면 격전을 벌이게 되었지만, 둘은 별다른 준비가 있을 수 없었다. 둘은 마음의 각오만 단단히 하면 되는 것이다. 사도평은 성격이 매우 침착하고 온유한 사람인지라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도 부부의 정을 내세 워, 한악의 돌아가라는 말을 한사코 거절하였다. 한 차례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어느덧 시간이 다 지나가 버렸다. 한악은 문득 이렇게 앉은 채 죽기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도평이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비치자 말했다. "평오빠, 당신이 이처럼 정이 많고 의기가 두터우신 분인 줄 미처 몰랐어요. 죽든 살든 함께 있 기로 해요. 그러나 장령자는 정말 강적이에요. 전에 주문언니가 가지고 있던 구천원양척과 같은 현천지보도 탈취해 간 적이 있을 정도지요. 그러니 보통의 법보, 비검 따위론 아무 소용없을 뿐더 러 공연히 법보만 훼손될 뿐이에요. 다행히 제선고의 하장이 있으니 구차하게라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예요. 만약 여기서 그를 기다리면 우리가 자기를 두려워한다고 여길 게 아녜요? 우리 어서 나가요!" 서로 손을 마주잡고 계곡 입구 쪽으로 나가보니 암벽 모퉁이에서 홍화와 채운이 한 데 뒤엉켜 있는 것이 보였다. 채운을 보고 자령이 이미 당도하여 장령자와 격전을 벌이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자령의 미진기는 적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언니가 곤욕을 치르고 있자 화가 머 리끝까지 치밀었다. 한악의 눈엔 승패(勝敗)는 치지도외, 이미 속으로 진언을 외며 하장을 전개시 켰다. 이때 머리 위에서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가년들아, 이제야 모두 모습을 드러냈구나. 자, 어서 네년들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보아라. 네 언니는 노부의 천라지망(天羅地網)에 갇혀 이미 주살되었으니, 도망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홍하가 머리 위로 덮여졌다. 다행히 한악의 방비가 신속하여 하장을 전개함 과 동시에 홍하와 마주쳐갔다. 제하아(齊霞兒)의 자운선장(紫雲仙障)은 본디 우담대사의 진산지보(鎭山至寶)로써 하아가 다년간 수련하여 효력이 신묘막측하였다. 처음엔 미세한 안개만 일어났지만, 곧이어 차디찬 환(紈)으로 화해 홍하를 막아냈다. 두 법보가 부딪치는 순간, 오색이 난무하여 채무가 백 장 가량이나 치솟았다. 하장은 곧바로 두 사람을 보호하였지만, 홍하의 위력에 눌려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꼼짝할 수 없자 둘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렸다. 원래 자령은 마음이 급해 미진기를 이용하여 자령곡으로 갈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자기가 자령곡에 먼저 당도하면 두 사람이 자신을 찾으러 응벽애로 되돌아가 버리면 큰일이다 싶 어 신취를 타고 왔다. 그 결과 너무 늦어버린 꼴이 된 것이다. 신취의 등에 올라타 날아가면서 혜안으로 아래를 살피던 중, 저 편 하늘 끝에 두세 점의 푸른빛 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급히 신취를 재촉하여 추격하였지만 그 빛의 비행속도가 너무 신속 하여 갈수록 거리는 멀어졌다. 한참 따라가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자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방향이 자령곡과 는 전혀 다른 쪽이었다. 그리고 영경과 약란의 검광은 자줏빛이지 않은가? 또한 한악의 검광이라 면 신취가 못 따라잡을 리가 없잖은가! 비록 비슷하긴 해도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검광인 것 같 았다. 하지만 자기가 뒤쫓는 것을 눈치챈 듯 더욱 빨리 날아가니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듯싶었다. 이 왕 여기까지 온 것, 급히 미진기를 품속에서 꺼내 채 운을 일으켜 신취와 함께 청광을 뒤쫓았다. 청광을 거의 다 따라잡고 보니 뭔가 잘못 짚었다는 생각에 자령곡 쪽으로 방향을 바꾸려는데, 앞쪽 청광 중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자령을 불러세웠다. 자령은 상대방의 청광이 자신과 비슷하긴 하나 자신보다 좀더 고강해 보였다. 선배 중의 한 분이 아닌가 하여 감히 태만치 못하고 멈추어섰다. 동시에 청광이 사라지며, 늙은 도고 한 분과 소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니 바로 형산(衡山) <금모모(金姆姆)> 나자연 (羅紫煙)과 문인(門人)인 오민과 최기였다. 원래 <금모모>는 동해로 삼선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민산의 친구를 찾아갔었다. 거기 서 우연히 오민과 최기를 만나 채약(採藥)하는 도중에 생긴 일을 들었다. 두 문인을 데리고 돌아가던 길에 아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뒤쪽 멀리서 아미 문하가 어검비행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계속 따라오니 무슨 일인가 궁금 하였는데, 그녀가 사용하는 것이 바로 보상부인의 미진기가 아닌가? 자령의 공행이 심후하고, 양 미간(眉間)에 선풍정기(仙風正氣)가 서려 있는 것을 보고 <금모모>는 칭찬을 하였다. 금모모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자령곡으로 가는 이유가 장령자와의 복수 때문이란 것을 <동해삼선>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단다. 나중에 고수가 도와줄 테니 별 걱정은 없으리라. 너희 모친의 초겁(初劫)이 성사된 뒤엔 너희 자매에게도 한 차례 겁수가 닥칠 것이야. 난 이번 일이 끝나면 아미산에서 있을 개산대회에 참석할 작정이었지. 오늘 너를 만난 것도 결국은 우리 사이에 인연이 있음이리라. 장령자가 홀로 이교(異敎)를 창건하였지만 법력으로는 너희 자매보다 한수 위란다. 그와 마주치면 법보, 비검은 일절 사용치 말고 단지 미진기로 몸을 보호하라. 나의 진산지보 중의 하나인 납개환(納芥環)을 잠 시 네게 빌려줄 테니, 위급한 순간 사용하면 반드시 어떤 묘용을 보이리라." 품속에서 크고 작은 푸른 수정이 박힌 팔찌를 건네주며 자령에게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자령은 거듭 사례를 하고 <금모모> 일행과 작별한 뒤 곧바로 자령곡을 향해 날아갔다. 혹시라 도 늦지 않았을까. 무척 걱정스러웠다. 미진기는 순식간에 그녀를 자령곡 상공으로 데려다주었다. 혜안으로 아래쪽을 살펴보니 백운(白 雲)이 흩어져 있고 제하아가 빌려준 자운선장이 누군가에 의해 거둬져 있자 자령은 깜짝 놀랐다. '설마 그 짧은 순간에 벌써 한악과 사도평이 독수를 당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강적을 맞이 하고 있는 지금, 계곡 속으로 들어가면서 설마 봉쇄를 하지 않았을까?' 자령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전전긍긍 발을 구르고 있는데, 아래에서 홍하가 번뜩이며 올라 왔다. 동시에 난쟁이도사가 땅을 박차고 일어나 손을 휘저으며 수십 장에 이르는 홍하를 일으켜 계곡 아래쪽을 덮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령은 그제서야 한악이 어떤 고인의 지시에 따라 자운선장을 미리 거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두 사람이 적의 암산에 걸려들까 걱정되어 채운을 일으켜 곧장 내려가면서 소리쳤다. "어느 파(派)에 계신 도장(道長)께서 왕림하셨소이까? 주인은 부르지 않고 암중에 엿보고 있는 걸로 보아 정대한 분은 아닐 터, 좀도둑이 틀림없구려!" 장령자는 충분히 승산이 있겠구나 싶었다. 진씨자매가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긴 힘들다고 여겼다. 신타 을휴만 해도 자기가 이미 녹포노조를 죽인 마당에 이 래라 저래라 참견할 건덕지도 없는 터, 만약 그가 진씨자매를 도와주러 나타난다면 도리어 스스 로 식언(食言)하는 꼴이니 도저히 참견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한악을 처치한 다음, 아미산으로 가서 자령마저 없애버리면 모든 일은 깨끗이 끝나는 것이다. 두 시진이 지났지만 한악이 아직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자, 아마 실력이 없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상각하니 내심 기쁘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했다. 자긴 그래도 일파의 종주인지라, 상대가 미처 준비하지 않고 있는데 기습할 수는 없었다. 일단 선천이합 신광(先天離合神光)을 연성하여 계곡 속으로 비쳐 적을 불러내 싸울 작정을 했다. 이때 갑자기 눈앞에 광화가 번뜩, 한 폭의 채운이 떨어져 내렸다. 채운으로 보호하고 있는 가운 데 자줏빛 옷을 입은 계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소녀였다. 비록 말에 가시가 있었지만 얼굴은 무척 상냥해 보였고 감히 함부로 대하기 힘든 자태를 지녔다. 한악과 생김새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의 언니인 자령이 분명 했다. 하지만 근처까지 오는 동 안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점이 무척 놀라웠다. 장령자는 암암리에 생각했다. '네년들이 함부로 날뛴다 싶더니, 과연 믿는 구석이 있긴 있었구나. 함께 온 걸로 보아 방비를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니,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는걸.' 노기를 띠고 자령을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네년이 바로 천호의 큰딸 자령이렷다? 너희 자매는 천호의 딸년으로서 독침(毒針)을 함부로 남 용하여 무고한 생명을 살상하였느니라. 본 교조가 하늘을 대신하여 너희를 응징하려 예까지 왔다. 네 동생 한악이 교묘한 말로 벗어나려 하기에 불쌍히 여겨 몇 시간이나마 더 살게 해주었다. 꼽 추귀신의 말은 믿을 게 못된다는 것을 잘 알 텐데. 감히 도망치지 않고 왔구나! 설마 너도 네 동 생처럼 잠시나마 목숨을 연장시켜 달라고 애걸하진 않겠지?" 자령은 원래 사람됨이 외유내강(外柔內剛)하여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허둥대지 않았다. 장령 자의 말을 듣고 한악과 사도평이 아직 독수에 당하지 않았음을 알고 마음이 다소 놓였다. 하지만 장령자가 직접 찾아온 이상 피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되었다. 창졸지간이었지만 한악이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어 함부로 손을 쓸 수도 없었 다. 자매가 서로 만나 의논을 한 뒤 싸움에 임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금모모>가 말하길 미 진기 외엔 법보, 비검을 일절 사용치 말라고 했지만, 보상부인이 남겨둔 진도(陣圖)가 있음을 떠 올렸다. 장령자의 말을 다 듣고 냉소치며 말했다. "도장(道長)께서 바로 제자의 복수를 위해 오신 <청해교조> 장령자 어른이시군요. 저희 자매가 일찍이 아미문하에 투신한 것은 각파의 선장(仙長)들께서도 다 알고 계실 터, 자령곡은 저희가 어 릴 때부터 살면서 수행한 곳으로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이에요. 아까 공중에서 교조 께서 저희 동부를 엿보는 것을 보고 어찌 말리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일단 이렇게 만났으니 도 망가진 않겠어요. 교조의 처분에 맡기겠어요." 장령자는 자령이 비록 태도는 공손하지만 속에 가시가 돋쳐 있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마구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무지한 계집 같으니! 나의 제자 사문공을 죽이고도 목숨이 붙어 있을 성싶었더냐? 너희 자매의 독침을 없애 세상의 화를 없애겠노라. 오늘 극악무도한 네년들을 단호히 처단하고야 말겠다. 너희 가 아무리 애걸하더라도 너희 둘뿐만 아니라, 네 사부에게도 빚을 청산하러 가겠다." 양손을 마주잡고 수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선천순양진화(先天純陽眞火)를 연성한 이합신광(離合 神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수십 장에 이르는 홍하가 뭉게뭉게 일어나 곧바로 자령의 정수리를 향해 덮쳤다. 자령은 미리 방비를 하여 미진기로 몸을 보호하는 한편, 암중에 진언을 외어 <금모모>가 준 납 개환(納芥紈)을 펼쳤다. 현문이보(玄門異寶)의 효용은 과연 대단하였다. 일촌(一寸) 크기의 작은 팔찌가 출수하자마자 청광이 형형하며 차디찬 한광(寒光)이 일었다. 채운과 더불어 자령의 전신을 감싸자 장령자가 운용하는 신광(神光)이 아무런 압박도 가해오지 못했다. 자령은 암중에 정신차려 주위를 살피며 한악과 사도평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만약 두 사람과 기 회를 보아 달아나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현공을 운용하여 날아가 두 사람을 함께 보호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적의 법보가 이처럼 대단하여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음을 어떻게 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령자가 손을 마구 휘저어 홍하를 일으켜 계곡 아래로 날려보내는 것이 보였다. 자령은 깜짝 놀라 급히 계곡 쪽으로 이동하려 하였지만, 마치 태산이 가로막고 있는 듯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이보(異寶)로 몸을 보호하여 부상을 당할 염려는 없었지만, 사방이 온통 적의 신 광에 가로막혀 손끝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홍하가 계곡 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계곡 속에서 채무운하가 솟구쳐 올랐다. 그제서야 제하아의 자운선장을 적이 거두어간 게 아니라, 한악과 사도 평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곡을 봉쇄한 것임을 알았다. 다소 마음이 놓였지만 쉽사리 홍하를 벗어날 수가 없어 만약을 대비하여 기력을 모아둘 심산으 로 그 자리에 앉아 현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자령자매와 사도평 세 사람은 둘로 나뉘어 각기 장령자의 신광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장령자가 처음 자령곡에 당도하였을 때 한악이 자운선장을 거두어가자 그녀에게 달리 특별한 이 보(異寶)가 있음을 간파했다. 그 뒤 자령이 날아왔을 땐 채운으로 보호하고 있자 그것이 바로 미 진기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천호>의 도행만 따진다면 자신의 적수가 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진씨자매가 아미문하 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그 어미가 남겨둔 법보를 사용한 댔자 별 수 없을 거라 여겼 다. 쌍방 일차 교전(交戰)만 보아도 우열을 쉽사리 가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 은 아무리 미진기가 대단한 위력을 지녔다 하지만, 자신의 신광을 막아낼 수는 없는데 지금은 막 아내고 있잖은가! 자세히 보니 채운 속에 광망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바로 <금모모>의 납개환이었다. 이 두 가 지 보물은 비록 구천원양척과 비교는 할 수 없지만, 각자의 심전수용지법(心傳收用之法)으로 연성 한 것이라 아무리 도행이 낮은 사람이 사용하더라도 쉽사리 탈취할 수가 없는 이보(異寶)인 것이 다. 적이 방어만 하고 공격을 하지 않자 필시 구원병이 뒤에 있을 거라 짐작되었다. 자신의 본령도 행으로 무명후배를 제압하지 못하자 장령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이때 공교롭게 한 악과 사도평이 나와 채연하무로 자신의 신광을 막아내는 것이 아닌가! 저건 또 뭔가 싶어 자세히 보니 바로 신니우담이 당년(當年)에 사용하던 진산지보인 자운선장임을 알고 그만 깜짝 놀랐다. 장령자는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번 일에 <동해삼선>이 관여하지 않는 것은 제삼차 아미겁수(峨嵋劫數) 때 강적을 만들길 원 치 않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노니(老尼)들이 쓸데없이 참견하여 일을 어렵게 만드는구나. 만약 이 번 일이 실패하면 반드시 제삼차 아미투검때 참여하여 모두들 얼굴을 못 들게 만들어 주겠어.' 두 차례나 신타 을휴의 말에 속아 제자의 복수를 늦춘 것도 억울하여 미칠 지경인데... 장령자가 있는 힘껏 현공을 운용하자 신광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며칠이 지났지만 구해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두 곳의 적을 보호하는 법보의 광화도 차츰 수 그러들자 장령자는 내심 기뻤다. 삼 일째 되는 날 아침, 자령은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채운이 차츰 감소됨을 완연히 느졌다. 하지 만 납개환은 여전히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악과 사도평 두 사람은 여전히 제하아의 자운선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처음엔 위쪽에 만 홍하가 압박을 가했지만, 지금은 사방에서 압박을 가해왔다. 채연하무는 이제 근처 이삼 장(丈)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되면 자연 벗어날 수 있다는 예언(?)에 그 와중에도 한악과 사도평은 평소처럼 웃으며 얘기했다. 하지만 삼 일째 되는 날 주변 에 있던 선장이 점점 사라져 버리자 그제야 걱정되기 시작했다. 처음에야 이번 겁수는 결코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별 걱정이 없었다. 또한 을 진인은 신통광대하여 사전에 모든 일을 안배하여 위급한 순간 반드시 구해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고 도리어 몸을 보호하고 있던 선장마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으니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적의 홍하신장은 오, 칠 척까지 다가와, 직접 피부로 그 신광의 위력이 느껴졌다. 뱃속에 사무치는 한기와 함께 살을 태울 듯한 열기가 동시에 밀려왔다. 두 사람은 재빨리 현공을 운용하여 추위와 열기를 막아내 보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자, 이번엔 검광을 일으켜 몸을 보호했다. 만약 그나마 남아 있는 자하선장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야말로 둘 은 여기서 끝장이었다. 손상된 진원진기 舌底飜潤 解紛憑片語 孝思不 將母急歸心 사도평과 한악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다시 이틀밤을 더 견뎠다. 몸을 보호하고 있는 자하선장 은 이미 적의 신광에 흩어져, 이제 겨우 두 척 남짓밖에 없었다. 둘의 목숨은 경각에 달해 이제 이 선운마저 없어지는 날이면 그 즉시 모든 게 끝장날 판이었다. 사도평은 두 여인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달게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신 타 을휴가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한악은 선운이 차츰 사라짐에 따라 기한(奇寒)이 뼈마디를 에이자 사도평의 품속으로 파고들었 다. 한 차례 냉기(冷氣)가 지나가자 사도평의 품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기색으로 사도평을 응시했다. 극심한 추위에 이를 악물고 고통에 떨던 한악이 처연하게 소리쳤다. "우리 부부는 이제 끝장이에요!" 사도평은 황급히 연유를 물었다. 한악은 계속 눈시울을 적시며 말했다. "우리가 을진인의 서신(書信) 속의 분부를 잊었기 때문에 우릴 구해주시지 않을 거예요. 원래 그 분은 당장은 바쁜 일 때문에 올 수가 없고 대략 칠 일 정도 지나면 틈이 나 우리의 겁수를 면하 게 해주신댔잖아요. 그래서 어머니의 선진(仙陣)을 펼쳐놓고, 제선고의 자하선장으로 몸을 보호하 면 십여 일을 거뜬히 견뎌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을진인께서 충분히 그 안에 오셔 서 우릴 구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만 제가 경솔하게 언니와 다투는 통에 언 니에게 사정을 설명치 않고 혼자 와버렸잖아요. 그러니 어떡해요? 언니 없인 선진(仙陣)을 꺼낼 수도 없으니, 선장이 사라지는 날에는 우린 뭘로 막아낸단 말예요? 흑흑... 아직도 칠 일이 지나려 면 멀었는데, 선장연하는 갈수록 빨리 없어지고 있어요. 이런 속도라면 앞으로 두 사진도 채 못되 어 깨끗이 없어지고 말 거예요. 비록 우리에게 오룡전(烏龍剪)과 같은 법보, 비검이 있지만 적의 신광(神光)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어요. 적의 신광이 아직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이처럼 견디기 힘드니, 선장이 파괴되는 날이면 어찌 살아날 수가 있겠어요? 제 한 목숨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 나, 당신은 공연히 나 때문에, 또한 어머니의 비승대사(飛昇大事)도 그르치게 됐으니... 언니는 비 록 미진기로 보호하고 있지만,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당신을 부추겨 여기 오지만 않았 어도 동귀어진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을... 모두가 제 탓이에요. 아!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여기까지 말하고, 양손을 사도평의 목에 휘감고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사도평은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애절하게 울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며 비통 한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한매, 너무 상심치 마오. 당신의 은정(恩情)을 생각하면, 이 몸 죽어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아깝 지 않을 것이오. 더구나 아직 죽지도 않았으니 좀더 기다려 봅시다. 겁수는 하늘이 정하는 것, 사 람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것이라오. 만약 우리 두 사람이 참겁(慘劫)을 당할 운명이었다면, 아미 교조께서 왜 우릴 문하(門下)로 받아들였겠소이까? 을진인은 또한 왜 공연히 우리 일에 관여하였 겠소이까? 이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 것 운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소? 차라리 정신차려 선장이 파 해되는 순간, 죽기살기로 싸워보는 게 그냥 앉아 죽는 것보다 백 배 낫지 않겠소?" 한악이 말했다. "평오빠는 잘 몰라서 그래요.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각파 중에서도 이합신광(離 合神光)을 사용하는 고수를 만나면 피하라고 하셨어요. 현문선천(玄門先天)을 연성한 것으로 기한 (奇寒)과 혹염(酷炎)을 동반하여, 사람의 마음에 따라 환상이 보인다고 했어요. 신광을 정통으로 맞으면 즉시 주화입마(走火入魔)해 버리는 악랄한 수법이래요. 아직 확실히는 단정하기 힘들지만, 지금 느껴지는 혹독한 추위를 보더라도 그 위력을 짐작하고도 남아요. 선장이 파괴되고 난 뒤, 신 광이 우릴 향하면 그땐 어떡하죠?"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선장은 더욱 엷어져 차디찬 냉기가 엄습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추위와 맞서 싸웠다. 한악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서 아예 사도평의 품속으로 안겨버렸다. 원래 원앙과 같은 정을 지니고 있던 사이에, 위기의 순간을 같이 맞이하게 되자 더욱 서로를 아 끼게 되어 남이 보든 말든 아랑곳없이 서로를 꼭 껴안았다. 그래도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 본신진기(本身眞氣)를 운용하는 한편, 두 손을 아예 사도평의 겨드 랑이 밑으로 넣어 허리를 꽉 껴안았다. 추위와 싸우고 있던 중 문득 신타 을휴가 자기에게 서첩 과 함께, 겉봉지에 날짜를 쓴 작은 꾸러미를 준 것이 생각났다. 당시 서첩과 법보주머니에 넣어두 고 그만 깜박 잊어버려 아직까지 풀어보지 않았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 황급히 오른손을 빼내 법보주머니 속을 뒤져 꾸러미를 찾아냈다. 겉봉투에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이미 이틀이 지나버렸다. 열어보니 단약(丹藥) 세 알과 함께 작은 쪽지가 있었다. <영단(靈丹)을 복용하면 백마(百魔)가 침범치 못하리라.> 급히 한 알을 집어 사도평의 입 속에 넣어주고 자기도 한 알 복용하였다. 자령에겐 전해줄 방도 가 없어 나머지 한 알을 잘 갈무리해 두었다. 단약이 입 속으로 흘러들어가자마자 즉시 한 가닥 따뜻한 기운이 일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골 고루 퍼져나갔다. 이제까지 느꼈던 극심한 혹한이 씻은 듯 사라지며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판 이었다. 한악은 신타 을휴가 단약을 준 것을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공연히 며칠 동안 고통을 받은 것을 생각하니 매우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악은 자기들의 입장이 한심했다. '잠시 뒤면 선장이 사라질 판인데, 당장 추위를 면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이 생각이 들자 다시 상심하기 시작했다. 사도평은 한악이 계속 울음을 그치지 않는 것을 보고 위로하느라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서로 애통해 하며 위로도 하면서 껴안았던 손을 풀지 않은 채 다시 하룻밤을 지샜다. 몸을 보호하고 있던 선장이 이젠 일 척 남짓밖에 남지 않았지만 사도평은 여전히 따뜻한 말로 한 악을 달래주었다. 한악은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그 자 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얼굴은 발갛게 상기된 채 이슬에 촉촉히 젖은 눈망울로 사도평을 지그시 응시하였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리려다 결국 말을 하지 못하고 더욱 바짝 사도평에게 다 가갔다. 두 사람은 지난 며칠 동안 속으론 사랑이 더욱 깊어만 갔지만, 위험한 순간이라 밝은 표정 대신 에 걱정스런 눈빛으로 서로를 대해왔다. 한악이 얼굴을 붉히고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며 사도평도 말을 잊어버렸다. 더욱 따뜻하게 껴안으며 지그시 그녀의 두 눈을 응시하였다. 서서히 고개숙여 뺨에 입맞춤을 한 뒤 부드러운 음성으로 한악에게 말했다. "한매, 할 말이 있으면 하구려!" 한악은 그의 말을 듣고 도리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평오빠, 당신을 그동안 오해했었어요." 백옥 같은 두 손을 뻗어 사도평의 목을 감싸며, 상반신을 살짝 들어 더욱 꽉 껴안았다. 두 사람 은 마치 한 쌍의 원앙새인 양 너무나 다정하게 서로 포옹하고 있었다. 영원히 이대로 마냥 있었 으면 하는 안타까움뿐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애무하며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는 순간, 신광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며, 남 아 있던 선운(仙雲)을 순식간에 없애버렸다. 자색채광이 번득이는 순간, 선장은 파괴되어 채색 실 로 화해 날아가 버렸다. 뒤이어 십 장 가량의 홍하가 두 사람을 향해 물밀듯 밀려왔다. 원래 장령자가 사용하는 이합신광(離合神光)은 현문법술(玄門法術)로써, 상대의 마음의 동요에 따라 환상이 보여 적의 칠정육욕(七情六慾)을 움직이게 하는 무서운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칠정 육욕이 발정을 하기 시작하면 원정(元貞)이 파괴되어 그 즉시 주화 입마에 빠지게 되어 육체뿐 아니라 혼백마저 없어져 버리는 무서운 법술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본래부터 사랑하는 사이인 데다가 위험한 순간에 정마(情魔)의 유혹을 받고 있던 터인지라 장령자의 이합신광에 꼼짝없이 당하게 되었다. 선장이 처음 파해되는 순간 사도평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일어나려 했지만, 한악이 꽉 부둥 켜안고 있는 바람에 대응이 늦어버렸다. 한악도 기미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두 사람의 머리 위는 신광이 뒤덮여내려 정신이 어지러웠다. 주위에 부드러운 기운이 깔리자, 두 사람은 갑자기 욕정(欲情)이 치솟아올라 전신의 피가 거꾸로 치밀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사람이 불에 녹듯 심신이 풀어지며 눈앞의 위험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의 몸을 마구 애무하며 탐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추태를 벌이고 있음을 까맣게 모르고 열정에 들떠 육체의 불을 태우는 동안, 자신들의 진원진기(眞元眞氣)는 차츰 고갈 되어 갔다. 육체의 희열을 느끼면 느낄수록 진기(眞氣)는 점점 사라져 버리니, 이합신광이란 얼마나 지독한 신공(神功)인가 말이다! 일순간 일단의 자기(紫氣)가 아홉 송이 금화(金花)와 함께 허공을 난무하며, 연이어 누군가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어렴풋 이 느껴졌다. 이와 동시에 차디찬 기운이 뇌리를 통해 들어와 전신을 휩싸자 마치 만년빙설(萬年氷雪)에 떨어 지는 듯한 착각을 하였다. 순간 정신이 맑아지며 차츰 정신이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들의 몸 이 허공에 떠 있었고 사방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만이 깔려 있었다. 그제서야 선장이 파해되어 적의 법술에 걸려들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급한 나머지 죽기살기로 검광법보를 날려 대항하려는 순간,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 려왔다. "너희 둘은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다. 곧 사람들 앞에 나타날 텐데 그 꼴이 도대체 뭐냐? 어서 옷을 입거라!" 매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비로소 두 사람은 좀전의 자신들의 행위가 떠올라 쥐구멍이 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앞이 캄캄한 가운데 대충 옷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앞이 밝아지며 몸이 땅에 내려섰다. 앞에 내려서는 사람은 바로 신타 을휴였다. 그에 의 해 이미 위험에서 구해진 것을 알고 황망히 몸을 굽혀 구명지은(求命之恩)에 대해 감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사도평과 한악은 좀전에 서로 육체를 탐하느라 이미 진원(眞元)을 잃어버려 몸이 예전 같지 않 음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그 생각만 하면 부끄러움이 앞서 신타 을휴를 감히 올려다볼 면목이 없었다. 신타 을휴가 말했다.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할 필요는 없다. 다른 일에 참견하느라 하루를 지체하여 공연히 너희들 의 진원(眞元)을 상하게 하였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만약 조금이라도 늦어 내가 준 단약을 복 용치 않았더라면, 너희는 아마 살아 남기 힘들었을 것이야. 난 평소 무슨 인연이니 겁수니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아마도 내가 실수한 것 같다. 여기 일이 끝나면 너희 부부와 자령 세 사람은 즉시 동해(東海)로 가라. 보상부인이 초겁(初劫)하는 것을 도와준 뒤 아미로 돌아가 개 산성전(開山盛典)을 참배토록 하자. 모든 일이 순조롭게 끝나고 나면 내가 수시로 찾아가 너희 부 부의 성도(成道)를 도와주겠다. 아마 하거비승(霞擧飛昇)은 못한다 하더라도 산선(散仙)은 될 수 있을 게다. 그만하면 너희도 부족함이 없겠지?" 한악과 사도평은 이 말을 듣고 선인(仙人)은 허황된 얘길 하지 않음을 알아 다소 마음이 놓였다. 재차 땅에 엎드려 사례를 하고, 덧붙여 자령의 안위를 물어보았다. 신타 을휴가 말했다. "이곳은 황산(黃山) 시신봉(始信峰)으로 자령곡과는 백십 리(里)나 떨어져 있어 너희의 안력으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자령은 근기(根基)가 비교적 순후하고, 도력이 깊어 이미 어느 정도 경지는 넘어선 아이다. 제 어미의 미진기와 <금모모>의 납개환을 지니고 있어 비록 너희처럼 칠 일 동 안이나 신광에 갇혀 있었지만, 별다른 부상은 당하지 않았단다. 지금은 제영운이 부탁해 청라(靑 螺)에서 <괴규화(怪揆花)> 능혼이 와서 위험에서 구해냈기 때문에 내가 구해줄 필요가 없다. 만 약 너희 자매가 다투지만 않았다면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느냐? 다행히 각파 도우(道友)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나로서도 그냥 지켜보면 되니 정말 잘된 일이야. 지금 능화자(凌化 子)가 구천원양척을 가지고 난쟁이 귀신과 싸우고 있으니, 둘 다 힘이 빠질 때쯤 해서, 너희 둘을 데리고 가서 화해를 시켜야겠다." 한악과 사도평은 그의 말을 듣고 사방을 살펴보니, 과연 황산 시신봉이었다. 다시 자령곡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온 산에 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어떻게라도 살펴볼 요량으로 안력을 집중시 켰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가득 메운 흰구름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본 신타 을휴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냐?" 한악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신타 을휴가 갑자기 입 속에서 훅하고 한 가닥 정기(精氣)를 쏘아 냈다. 이삼 장 가량의 푸르디푸른 청망(靑芒)이 화살처럼 앞쪽에 펼쳐진 구름 사이를 꿰뚫고 지나 갔다. 구름은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더니, 일순 일 장 남짓한 구멍이 뚫렸다. 한악과 사도평이 하늘에 난 구멍을 통해 바라보니, 과연 자령곡 상공에 광영(光影)이 어지러이 난무하는 모습만 겨우 보였다. 뭐가 뭔지 몰라 답답해 하는데, 신타 을휴가 진언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왼손을 뻗어 신결(神 訣)을 그리고는 거두었다 내뻗었다 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오른손 식지도 앞쪽을 가리키며 '가 라!' 하고 소리지르자, 눈앞에 자령곡의 경물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허공에 펼쳐졌다. 과연 거지형상을 한 사람과 장령자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 법술을 겨루고 있었다. 하늘엔 온통 금화 홍무(金花紅霧)로 뒤덮여 있었다. 자령의 주위엔 푸른 광화가 감싸고 있었는데, 손에 미진기 를 들고 거지 뒤쪽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한악과 사도평은 신타 을휴가 사용한 <축천투영(縮天透影)> 지법의 덕분으로 이처럼 분명하게 상황을 살필 수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장령자의 이합신광은 이미 금화 자기와 어우러져 십분 급해 보였다. 연신 거지를 향해 신광을 지휘하며 공격하고 있는 이가 보였다. 그 거지도 역시 손을 휘젓자 금화 자기가 일 어나 적을 향해 공격했다. 마침내 두 광화가 맞부딪치자 서로 부서지며 온 하늘에 별빛과 붉은 빛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쌍방 모두 비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서로 막상막하의 혈전을 벌이고 있을 때 홀연 거지의 뒤쪽에 서 한 폭의 채운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한악은 대뜸 자령이 미진기를 펼친 것임을 알았다. '아니, 언니가 설마 장령자와 맞상대할려구? 그럼 능진인이 언니를 구해낼 능력이 부족하단 말 인가?' 하지만 자령은 채운을 일으키기만 했을 뿐 원래 자리에서 이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떤 일 을 하려는 것은 아닌 듯하였다. 이때 사도평이 '익!' 하고 소리를 지르자, 다시 전장을 자세히 살 펴보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장령자와 능혼은 서로의 신형은 땅에 앉은 채 그대로 두고, 원신(元身)을 분리시켜 싸우기 시작했다. 사람의 모습과 흡사하였지만 삼 푼 정도 작은 듯하였다. 더욱이 장령 자의 원신(元身)은 아주 작은 갓난아이의 형상이었다. 각자 수정빛을 발하는 작은 칼을 거머쥐고 싸웠다. 능혼의 검끝에선 금하(金霞)가 발출되었고 장 령자의 원신은 홍광(紅光)을 발출시켰는데, 공중에서 서로 한 데 어우러져 어지럽게 싸우고 있었 다. 홍광과 채기(彩氣)는 정녕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빛을 발하여 마치 밤하늘에 불꽃이 수를 놓 는 것 같았다. 몇 시간을 싸웠을까? 하지만 둘은 아직도 누가 이길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막상막하의 대결 을 벌였다. 이 순간 정남(正南) 쪽 하늘가에서 짙은 붉은빛 그림자 같은 것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처음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순식간에 질풍처럼 날아와 차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전장 (戰場)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능혼의 신체가 앉아 있는 머리 위로 날아가 곧바로 떨어져 내렸다. 이때 능혼의 원신(元身)은 장령자의 원신과 결전을 벌이고 있어 자신의 신체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능혼의 신형 뒤에 서 있던 자령은 위급함을 보고 재빨리 채운을 이동시켜 능혼의 육신을 보호하였다. 이와 동시에 한 조각 홍하(紅霞)가 능혼의 육신 옆쪽에서 일어나서 쏘아져 오는 암적 광화(暗赤光華)를 막아냈다. 둘이 한 차례 교전을 벌이고는 각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는 홍발(紅髮)에 가사를 걸 친 묘승(苗僧)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바로 자신들을 구해준 신타 을휴였다. 황급히 뒤돌아보았지 만 뒤쪽에 있던 신타 을휴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하기야 지금 보고 있는 대로 자령곡 에 있는 신타 을휴가 어찌 이곳에 있겠는가? 한악과 사도평은 계속해서 전장을 주시했다. 신타 을휴가 묘승을 향해 손짓하며 뭐라고 얘기한 뒤 이번에는 자령에게 몇 마디 건넸다. 그러자 자령은 곧바로 전장을 떠나 채운을 일으켜 자신들 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이 사라지며 구름에 난 구 멍도 닫혀버려 다시 이전과 같이 온통 구름으로 가득찬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궁금하여 서로 말을 주고받는데, 자령이 채운을 타고 날아와 말했다. "한악, 그리고 평형(平兄), 을진인께서 부르시니 어서 나를 따라오도록 해요." 세 사람은 서로 상세한 얘긴 하지 않고 급히 미진기를 재촉하여 날아갔다. 순식간에 자령곡에 당도하여 내려서 보니, 신타 을휴와 장령자, <괴규화> 능혼 그리고 맨 나중에 온 홍발노조가 일 제히 무기를 거두고 싸움을 멈추고 있었다. 신타 을휴와 <괴규화> 능혼은 여전히 헤살픈 웃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홍발노조와 장령자는 불 만이 가득찬 기색으로 볼이 잔뜩 부어 뭔가 다투고 있었다. 세 사람이 당도하자 신타 을휴가 앞으로 오라고 손짓하여 부르고는, 먼저 홍발노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바로 묘강(苗彊)의 홍발노조(紅髮老祖)로서 <삼선이로>와는 아주 옛날부터 교분이 있는 사이이시다. 앞으로 이분을 뵈면 깍듯이 예의를 차려야 하느리라." 이번에는 한악과 사도평에게 <괴규화> 능혼에게 절하라 이르고, 다시 장령자를 향해 사죄하라 고 명한 뒤 말했다. "<청해교조>께선 너희 자매가 그분의 문인(門人)인 사문공을 죽였기 때문에 복수하러 오신 거 다. 난 이 일이 아주 불공평하다고 여겨 우선 녹포노조를 제거한 뒤 다시 찾아오라고 권했었지. 당시에 나의 생각으로 그의 도력이 비록 고강하지만 녹포노조를 쉽사리 제압하긴 힘들다고 생각 했었지. 만약 그가 성공한다면 너희 자매가 겁수를 당한다 하더라도 나로서도 할 말이 없게 될 판이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너희 두 자매에게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라도 복수를 단념 하라고 부탁하려 했지. 나란 사람은 결코 한쪽 편만을 들어주는 편협한 성격은 아니란다. 그 즉시 너희에게 서신을 보내 이곳에 와서 죄값을 달게 받으라고 했던 거다. 얼마 전 천상산(天相山)을 가는 도중 어떤 사람으로부터 비록 녹포노조가 죽긴 하였지만, 장령도우 자신의 힘으로 죽인 게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녹포노조는 <동해삼선>과 <숭산이로>와 아미파의 새 제자들이 함께 장 미진인이 남긴 양의미진진(兩儀微塵陣)으로 그를 없앴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사실을 알자, 장령 자가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서 오히려 어린 후배들을 속이고 복수만을 고집한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즉시 와서 부당함을 지적하고 싸움을 말렸어야 하는데 중요한 일이 있 어 시간이 조금 어긋나는 바람에 자령곡에서 미리 만나지 못한 것이다. 능도우께서 불공평한 것 을 보고 도와주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날 뻔하지 않았나 원. 자령은 미진기와 납개환으로 보호하여 내상을 입진 않았지만, 한악과 사도평은 나와 능도우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원기를 훼 손하였구나. 다행히 내가 준 단약을 미리 복용하여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앞으로 더욱 많은 공 행을 쌓아야만 성도(成道)할 수 있을 것이다. 장령도우는 말끝마다 <천호>의 백미침이 음독악랄 한 것이니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도가(道家)의 방신지보(防身之寶) 중 적을 막아내 고 마(魔)를 제거함에 있어 백미침만큼 뛰어난 것도 찾기 힘들다. 보통 사용하는 비검도 따지고 보면 살적방신지물(殺敵防身之物)이 아니더냐? 자기 자신이 연성한 이합신광(離合神光)이 아무리 오묘하고 선천양강지기(先天陽剛之氣)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매한가지. 더구나 방문의 비결을 사용하여 주화입마에 빠지게 하여 적을 제압하는 것은 수도인(修道人)의 공행(功 行)을 오히려 해치는 것이다. 음험악독(陰險惡毒)을 논하더라도 어찌 백미침과 비교가 되겠느냐? 나는 능진인이 이미 장령도우와 시비를 가리고 있기에, 중과부적으로 졌다는 누명을 쓰고 싶지 않아 옆에서 방관만 하고 있었지. 두 분이 승부를 가리고 나면 화해를 시킬 작정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홍발도우가 이전에 대가장(戴家長)에서 능진인이 자신의 제자를 죽인 일을 기억하고는 복수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무심결에 온 것이라 장령도우와 공모(共謀)한 것은 아 니라 하더라도,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불리한 틈을 타 복수하는 것은 광명(光明)에 흠이 되는 것 이지.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참견하여 세 분 도우를 화해시키려 한 것이다. 홍발도우와 장령도우 는 내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싸우려 했다. 그래서 내가 '우리들은 각기 현공을 연성하여 도력이 별 차이가 없소이다. 일시에 고하(高下)를 가리기 힘드니 공연히 힘만 낭비할 필요가 어디 있소이 까? 손을 멈추도록 하시오' 이리하여 겨우 이들을 말릴 수가 있었다. 너희 자매와 난 아무런 인 연이 없지만, 사도평은 나를 위해 고생한 까닭에 이미 마음 속으로 그를 기명제자(記名弟子)로 받 아들였지. 너희 부부는 원앙 같은 한 쌍이라, 함께 겁수를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 어서 장 령도우께 백배 사죄하고 너희 죄를 용서받거라. 세 분 도우께선 모두 일파의 종주(宗主)들이시니 아량이 넓으시리라 믿소이다. 장령도우, 저들 세 사람이 도우께 사죄하니, 이제 그만 용서해 주시 는 게 어떻겠소이까?" 신타 을휴가 이처럼 간섭하고 나서자, 홍발노조는 을휴와 능혼 두 사람을 당해내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괜히 강적을 원수로 삼았다기는 훗날 후회할 것이 뻔하니 일단은 체면만 세우기로 작 정하였다. 하지만 장령자는 오히려 신타 을휴의 말을 듣고 '흥!' 하며 비웃더니 욕을 해댔다. 속에서 울화 가 치밀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신타 을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도리에 합당하니, 자기로서도 더 이상 뻗댈 수만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진씨자매를 요절내고 싶었지만, 남의 이목도 있고 앞으로 닥쳐올 도가(道家) 의 사백구십 년 중겁(重劫)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 만약 이들과 원한을 맺게 되면 혹시라도 닥쳐 올 중겁에서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까 두려웠다. 더구나 당장 싸운다 하더라도 능혼과 신타 을휴를 이긴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또한 홍발노조 도 물러나겠다고 한 마당에 자기 혼자 힘으로야 어림도 없었다. 사백구십 년 중겁 시기까지는 아 직 삼십사 년이란 세월이 남았지만, 수도인(修道人)의 눈으로 볼땐 그다지 긴 세월도 아니었기 때 문에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울며 겨자 먹기라던가, 하지만 이 원한은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는 애초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 다. '꼽추귀신, 두고 보자. 네놈을 씹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겉으론 짐짓 화난 척했지만 내심 뒤도 조금은 켕겼다. 그러는데 신타 을휴가 진씨자매와 사도평 더러 자기에게 사죄하라고 말했다. 장령자는 짐짓 더 불같이 화를 내며 마구 소리쳤다. "이 꼽추귀신! 네놈도 언젠가는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다. 실력으로 이길 생각은 하지 않고, 세 치 혓바닥만 놀려대다니! 정말 가소로운 일이다. 네놈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중겁 (重劫) 때문에 더 이상 손을 쓰지 않는 것이다. 삼십 년 세월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닥쳐온다. 중 겁이 지나면 강자만 살아 남게 될 것이다. 너처럼 얼빠진 놈이 입만 살아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허송세월할 줄 아느냐? 이젠 네놈도 활개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고 소맷자락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다시 보게 될 날을 기다리겠다." 쨍쨍한 목소리와 함께 홍하(紅霞)가 하늘로 치솟아올라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 다. 장령자가 떠나가자 홍발노조도 신타 을휴에게 작별을 고했다. 신타 을휴가 웃으며 그를 저지하고 말했다. "홍발도우, 잠깐 내 말 좀 듣고 가도록 하시오. 좀전에 도우가 능도우와 다툴 때 끼어든 것은 결 코 빈도가 좋아서 한 것도 아니며, 어느 한쪽을 편든 것도 아니라오. 두 분 도우께선 잠시나마 앞 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중겁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라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많 은 세월 갖은 고초를 겪고 수련을 거친 덕분이오. 사구중겁(四九重劫)을 극복해야만 비로소 산선 정과(散仙正果)를 구할 수 있는 게 아니겠소? 이번 중겁에 대해 백방으로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 만 실로 감당키 어려운 일이라오. 빈도는 우리 중 누구 하나라도 잘못되어 공행을 잃게 되는 것 을 원치 않소이다. 장령도우는 홀로 오랜 세월 수련하여 저처럼 오만한 성품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 자신도 이번 중겁을 쉽사리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이번 중겁에 대해서 수년간 묵상을 하며 현기(玄期)를 점쳐보았더니, 바로 우리가 제일 문제였소이다. 중겁을 당하여 몸을 망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오. 이를 막아낼 방도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 사 람의 힘으론 한계가 있는 법이라, 만전을 기하기 어려웠소. 만약 우리 네 사람이 모두 친구가 된 다면 어찌 쉽게 극복하지 못하겠소이까? 장령도우도 화가 치밀어 빈도를 원수 대하듯 했지만 이 번에 느낀 점이 많을 것이오. 도우의 공행이 빈도와 같진 않지만, 함께 대처하면 결국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오. 지난날 대가장에서 비록 능도우의 손속이 매정하긴 했지만, 귀하의 제자 요 개강(姚開江)은 흉악무도할 뿐만 아니라 사문(師門)을 더럽힌 자이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오. 그런 불미스런 악도(惡徒)를 옹호해 봤자 뭐가 이익이겠소? 제 소견으론 이젠 능도우와 화해하시 고, 앞으로 닥쳐올 겁수에 우리 함께 대처하도록 합시다." 홍발노조는 비록 묘강이파(苗彊異派)에 속한 인물이었지만, 사람됨이 매우 정대(正大)하였다. 지 난날 오운도화장(五雲桃花腸)에 <추운수> 백곡일부부가 갇혔을 때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삼선이 로>와도 교분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무공은 더욱 고강해지고 다년간의 참오(參悟)로 인해 깊은 이치를 깨우쳤다. 평소에도 비록 무공이 고강했지만 요강에 은거하여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각파에서는 겁수를 맞이하여 근골이 좋은 제자를 거두어 종법(宗法)을 전수하려 서두르 고 있었다. 몇몇 문인(門人)이 이파검술을 중원(中源)에 전파시키자고 설득하는 바람에 마침내 법 통(法統)을 세우기에 이르른 것이다. 하지만 요개강이 야성을 버리지 못하고 출산(出山)한 뒤, 온 갖 나쁜 무리를 끌어들여 악행을 일삼다가 <괴규화> 능혼에 의해 그의 제이원신(弟二元身)을 상 하고 말았다. 괴규화는 홍발노조의 얼굴을 봐서라도 손속의 정을 두어 생명을 취하진 않았다. 요개강은 겨우 도망쳐 요강에 돌아갔지만, 도기(道基)를 이미 망쳐버린 몸이 되고 말았다. 그리 하여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다시 수련을 쌓아야만 했다. 그는 원래 홍발노조의 유일 한 애제자였기 때문에, 제자의 슬픔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 그렇지만 괴규화가 만만치 않은 인물 이라 복수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늘 우연히 황산을 지나다가 <괴규화>와 장령자가 싸우는 것을 목도하였다. 정면으 로 맞붙으면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 몸을 숨기고 있다가, 화혈신도(化血神刀)로 그의 육신 을 상하게 하여 체면이라도 세울 작정을 했다. 성공을 목전에 둔 순간 신타 을휴가 간섭하고 나서자, 당시 도행으론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그의 만류를 받아들였지만 내심 화가 치밀어올랐다. 한편 도가(道家)의 사구중겁(四九重劫)에 대해서 <추운수> 등으로부터 진작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정확히는 몰랐었다. 더구나 신타 을휴는 성격이 고괴하고 능혼보다 도 강한 상대인데, 혹시라도 원한을 사면 재미가 적을 것 같았다. 암중 홍발노조의 생각에 장령자는 결코 능혼과 신타 을휴보다 실력이 아래가 아니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자기쪽이 그렇게 불리하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장령자가 훌쩍 떠나 버리자 정말 난처하였다.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떠나려 하자 신타 을휴가 붙들고 만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었다. 자기 제자의 평소 소행을 보더라도 당연히 나쁜 짓을 일삼 았음이 분명했다. 또한 다년간 고초를 겪고 이룬 공행을 그들 때문에 희생시킨다는 것은 더더구 나 말이 안 됐다. 그 즉시 크게 깨우쳐 신타 을휴에게 말했다. "도우의 금옥양언(金玉良言)이 빈도의 눈을 뜨게 했구려. 능도우께서도 빈도를 이전처럼 생각지 마시고, 우리 서로 지난 일을 훌훌 털어버려 사구중겁(四九重劫)에 함께 대처해 나가도록 합시 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괴규화> 능혼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홍발노귀야! 이제야 너의 제자가 요인(妖人)과 결탁하여 무고한 생명을 함부로 살상한 것을 알 았느냐? 당초 대가장에서 그놈을 만났을 때 만약 자네의 얼굴을 생각지 않았다면 벌써 송장이 되 어 있었을 걸세. 그런데 자넨 내가 자네를 봐서 손속에 정을 둔 것을 고맙게 여기진 않고 도리어 흥분하여 날뛰며 날 괴롭히려 한 거야. 만약 을도우가 나서지 않았다면 자네의 화혈도(化血刀)에 암산당하지 않았겠는가? 을진인은 우리의 형님뻘이 되는 분시이지. 이분의 뜻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자네 같은 야만인과 아는 척하겠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장령자 그놈은 그래도 이파(異派) 중의 고수라 나 역시도 그놈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하도 내게 와서 사 정하는 통에 관여하게 된 것이라네.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이번 사구중겁(四九重劫)은 도가(道家) 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겁수라네. 만약 나와 을도우 없이 자네와 장령자만으로 아무리 애를 써 사전에 준비를 해봐도 편안하게 넘기기는 힘들 것이네. 그러니 응당 네 사람이 전심 합력하여 화 기(和氣)를 손상시켜서는 안 되네. 만약 서로가 원수로 대하며 각자의 본령만 믿고 날뛴다면 결과 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겠나? 지난날 자네가 도화오운장을 깨뜨려 내 동생을 구해준 은혜도 있고 하니, 우리 친구 사이로 지내기로 함세!" 세 사람은 곧바로 사심없이 미래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홍발노조는 선기(先機)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심 자신이 은인자중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 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시 신타 을휴에게 사례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작별을 고했 다. 능혼도 신타 을휴에게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신타 을휴가 말했다. "나야 뭐 무슨 일교의 종주니 뭐니 같은 건 관심도 없다네. 이 번에 세상에 나와 보니 옛 친구 중 초겁(初劫)한 자도 있고, 실패한 자도 적지 않더군. 그들은 모두 겁수 전에 얽매인 일이 있는 지라, 오직 나 한 사람만 한가하더군. 이번에 새로 사귄 후배 바둑 친구를 찾아가 바둑이나 두어 야겠네. 본래 너무 심심한 나머지 무심결에 이 일에 간섭하게 되었다네. 앞으로 비록 장령자가 용 납은 못하겠지만, 결코 진씨자매를 찾아와 복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네. 원래 생각엔 왕년에 돌아 다니던 명산(名山)을 두루 유람하려 했었지. 그런데 어제 오는 길에 우연히 후배도우를 만났다네. 그의 말이 망창산(莽蒼山) 요시(妖尸)의 원신(元神)이 최근에 장미진인의 화운(火雲)을 뚫고 탈출 하여 세상에 나타나, 지금은 지하에 숨어 악을 키우며 훗날을 대비하고 있다더군. 우선은 아미파 에 골칫거리가 생긴 거고, 둘째로 그런 물건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 무고한 생명을 너무 많이 죽 일 것이네. <동해삼선>과는 비록 깊은 교분은 없지만, 지난날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준 은덕도 있으니, 이 일을 처리해 주어야겠네. 욕심 같아서는 그것이 아직 성숙하기 전에 찾아내 제거하고 싶지만 어떨까 잘 모르겠군. 자넨 산으로 돌아갈 텐가?" 능혼이 말했다. "저야 원래 청라에서 제자에게 줄 비검을 연성하고 있었지요. 이번에 이곳으로 올때 제도우의 초청장을 받았어요. 아미개부(峨嵋開府) 성전(盛典)에 참석할 예정인데 을도우는 아직 약속하지 않았나요?" 신타 을휴가 말했다. "그도 내가 이미 출세(出世)한 것을 알고 있으니 초청이야 하겠지. 하지만 거처도 일정치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성전이라 날 찾기는 힘들 거야." 이때 멀리 공중에서 광화가 번뜩이며 검은 그림자가 차츰 가까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자령 등이 아직 자세히 분간하지 못하고 있자 신타 을휴가 말했다. "백미좌하(白眉坐下)의 신금(神禽)이 날아오는 걸로 보아 아미문인들이 너희를 도와주러 온 모양 이다. 들리기에 저 새는 이씨(李氏) 성을 가진 여자아이가 얻었다고 하던데. 장미진인이 일찍이 예언하길 그 애가 삼영(三英) 가운데 가장 뛰어날 거라 했지. 자! 자네와 난 잠시 그 애의 자질을 한번 감상해 볼 기회를 가져볼까?" 말이 끝나기 전에 공중에서 신조(神鳥)의 울음소리와 함께, 영경과 약란이 신조를 타고 내려왔 다. 자령자매를 보고 막 얘길 꺼내려 하자 급히 이를 가로막고 우선 신타 을휴와 능진인을 배알 하도록 했다. 영경은 상황을 짐작컨데 진씨자매가 이미 위험을 넘겼음을 알고 무척 기뻐했다. 자령의 말을 듣 고 급히 약란과 함께 앞으로 나가 삼배지례(參拜之禮)를 올리고 바로 섰다. 신타 을휴는 두 여인 모두 선풍도골(仙風道骨)을 지니고, 신의(神義)가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중 영경이 더욱 뛰어난 것을 보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미문하에 인재가 많다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 로구나! 이처럼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니! 우리 두 사람은 언제나 너희 같은 제자를 얻을 수 있을지 원." 능혼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경과 약란은 황급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자령자매와 사도평도 을진인과 능혼이 말을 마치길 기다려 다시 한번 구명지은(求命之恩)에 대 해 거듭 감사를 표했다. 신타 을휴가 말했다. "너희 어미의 겁수가 다가왔으니 너희 부부와 자령 세 사람에게 영부(靈府)를 주겠다. 하나는 잘 간직하였다가 너희 어미에게 주면 최후의 방신지용(防身之用)으로 묘용이 있을 것이다. 동해로 떠 나기 전에 아미로 돌아가 준비를 하면 너희 사장(師長)께서 필시 안배를 해주실 게다." 신타 을휴는 영부를 건네주고 능혼에게 함께 떠나고자 했다. 허공 중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소리와 함께 광화가 번뜩이는 순간 자취를 감춰버렸다. 자령은 황급히 이들을 전송하였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영경과 약란에게 물었다. "두 분께선 먼저 떠나셨는데 왜 이제야 당도하신 거예요?" 영경이 말했다. "말하자면 길어요 언니. 우리가 늦는 바람에 두 분 언니와 사도평사형께서 혹시라도 부상을 당 하시지 않았나요?" 한악, 사도평은 어느 새 얼굴이 빨개졌다. 자령이 말했다. "모두 할 말이 많을 테니, 돌아가서 함께 얘길 나누기로 해요." 한악이 황급히 말했다. "언니들 잠깐만요! 길게 말하진 않을 테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아직 일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 으니 서둘러 돌아가서는 안 돼요. 언니와 제가 공연히 다투는 통에 제선고의 자운선장이 장령자 의 요법에 의해 훼손되어 버렸어요. 나중에 제선고를 만나면 무슨 낯으로 대하죠? 게다가 저는 이번에 그만....." 말을 하다 말고 한악의 깊은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령은 좀전에 신타 을휴와 홍발노조의 대화를 듣고 사건의 대강을 알 수가 있었다. 아무리 이 전에 서로 오해가 있었다 해도 하나밖에 없는 혈육에 대한 사랑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영경이 말했다. "오는 길에 우연히 제하아선배를 만났는데, 그분은 이미 이곳의 일을 훤히 알고 계셨어요. 선장 이 훼손된 것은 겁수에 따른 것이니 아무 걱정 말래요. 그분은 지금 급히 회산(回山)해야 할 일이 생겨 이곳에 올 수가 없다셔요. 대신 두 분 언니께 그 법보가 비록 영광(靈光)은 잃었지만, 원질 (原質)은 아직 남아 있으니 다시 단련하면 원상태로 복원시킬 수 있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그러니 자기 대신에 잘 보존하고 있다가, 아미개부(峨嵋開府)때 돌려달라셨지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안심하셔요, 언니." 자령이 다시 말했다. "내가 공연히 서두르는 게 아니야. 우리에게 지금 어머니의 겁수 전에 대사저께 아뢰고 미리 준 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느냐?" 한악은 시큰둥하여 말을 하지 않으려 하다가 내뱉듯 말했다. "어머니의 초겁(初劫) 시기까진 아직 며칠 남아 있어요. 자령곡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거처하던 곳이라 비록 언니가 잘 봉쇄해 두었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어머니가 남기신 진도법보(陣圖法寶) 를 가져가 버린다면 어떡할래요? 또한 현진(玄眞)사백님의 토끼 한 쌍도 있는데 어떻게 그냥 갈 수가 있어요?" 자령이 말했다. "내가 빨리 이곳을 떠나자고 한 것은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서야. 피차 장황하게 그간 얘 길 하면 돌아가서 다시 얘길 해야 할 테니,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는 것 아니겠어?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어머니께서 남겨두신 법보진도는 원래 계곡 깊숙이 잘 감춰져 있고, 밖엔 다 시 법술로 봉쇄하였기 때문에 쉽사리 딴 곳으로 옮기지 말라고 어머니께서 재삼당부하셨다. 그러 나 지금은 선장도 이미 파손되었으니, 어머니가 친히 전수해 주신 천마해명둔법(天魔海明遁法)으 로 계곡을 봉쇄하기로 하자. 이 둔법은 어머니께서 여러 해 동안 어렵게 단련하셨을 뿐만 아니라 현진사백의 지시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만들어낸 것이다. 비록 선장만큼 묘용은 없지만, 외교 사마(外敎邪魔)가 쉽사리 침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토끼 한 쌍은 아미산으로 데려가기로 하자.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느냐? 자! 어서 서둘러 준비하자꾸나." 한악은 언니의 말을 듣고 자신에게 전수치 않았던 천마둔법을 사용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이 이 미 순음지기(純陰之氣)를 잃어버린 몸이라 진도(陣圖)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란 것을 알고 마음 이 쓰라렸다. 자령은 신조와 신취에게 명해 공중에서 선회하며 주위를 살피라고 하고, 나머지는 모두 함께 계 곡 쪽으로 내려갔다. 한악의 모습이 너무 측은해 보여 마치 자신이 당한 것만 같았다. 천마둔법을 준비하는 막간을 이용해 한악을 위로할 심산으로 달랬다. "모든 잘못이 을진인의 서신에 쓰여 있는 대로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오지 않고 너 혼자 떠나는 바람에 생긴 거야. 하지만 난 너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원래 네가 호승심(好勝心)이 강한 까닭도 있지만 강적과 대적하여 이긴다면 기쁜 일이고, 지더라도 혼자 액겁을 당해 나의 겁수를 면하게 해주려는 좋은 뜻에서 그랬다는 것을 알지. 당초 백미침에 사문공이 당한 것은 내가 먼저 발출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장령자는 우리 자매들 다를 원수로 여겼다. 그런데 너 혼자만 복수를 당하고 내가 살아 남는다면 도리가 아니지 않겠니?" 한악이 다시 뭐라고 말하려 할때, 자령은 이미 후동(後洞) 깊숙한 곳에 가서 행법(行法)을 시작 하려 했다. 한 쌍의 흰토끼는 원래 영성(靈性)이 통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선부(仙府)로 데려감을 알고 사람들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다니며 기뻐했다. 영경과 약란은 너무나 사랑스러워 한 마리씩 품에 안아들고 장난을 쳤다. 얼마후, 자령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서 모두를 데리고 계곡을 나왔다. 둔법으로 계곡의 위치를 이 동시키기 위해 입 속으로 진언을 외었다. '가라!' 하는 소리와 함께 풍뢰성이 울리며 연기가 자욱 히 일자 그 넓은 자령곡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원래 계곡이 있던 곳엔 조그만 시냇물만 졸졸 흘러내리고, 나머지 경물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 져 버렸다. 영경은 이 광경을 보고 찬사를 금치 못했다. 자령의 마음은 벌써 동해로 달리고 있었다. 어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영경과 약란은 흰 토끼를 안고 신조의 등에 올라탔고, 자령자매와 사도평 세 사람은 모두 함께 신취의 등에 올라탔 다. 미진기를 펼치자 한 폭 채운이 두 마리 선금을 감싸 하늘로 둥실 떠올라 질풍처럼 앞으로 내 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산에 당도하여 곧바로 응벽애로 내려갔다. 이때 선부(仙府)엔 더욱 많은 동문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영운도 청라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다 섯 사람이 아무 이상없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무척 가뻐했다. 급히 이들을 맞아 태원동 안으로 들어가 여러 동문들과 인사를 시켰다. 모두 화기애애하게 지난 얘길 했지만 정작 곤욕을 치른 한악과 사도평은 웬지 모를 수치심 때문 에 흥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자령을 제외하고는 영경과 약란뿐만 아니라, 영운조차도 상세한 것을 잘 모르는 눈치였 다. 영운은 단지 신타 을휴의 광명정대함과 각파에서 두 사람을 도와준 것만을 칭찬하였다. 한악은 그럴수록 마음이 아팠다. 자기가 멋대로 구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음을 깊이 후회하였다. 영운의 태도도 가만히 보니 자신을 잘 대하는 것 같자, 차츰 그녀에 대한 오해도 풀리는 것 같았 다. 영운은 따뜻한 말로 위로하며 선장이 파괴된 얘길 듣고 아주 안타까와하였다. 요곤의 처치 燦濤金光 雁山誅鯤怪 霙飛玉雪 微雨賞龍湫 자령이 곧 동해로 떠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영운이 만류했다. "자령, 한악아우,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백모(伯母)의 겁수에 대해선 청라(靑螺)에서 능진인께 들어 잘 알고 있어요. 백모께서 그동안 고련(苦練)을 쌓아 공행이 크게 증진하셔서, 재겁마장(災 劫魔障)에 맞춰 성공을 이루실 거예요. 비록 시기가 임박해 마음은 급하겠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 은 충분해요. 지금 떠나가면 아무리 늦게 당도한다 하더라도 하루하고도 반 나절은 시간이 남을 정도지요. 청라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우연히 옥청사태(玉淸師太)를 만났는데, 등팔고(鄧八姑)께서 회복하셔서 그분과 함께 오늘 중으로 이곳에 당도할 것이라는군요. 그 두 분 동문은 우리의 선배 이시고 도통하셨을 뿐만 아니라 백모님에 관한 얘기도 이미 익히 알고 계셔서 작으나마 힘이 되 어 주신댔어요. 만약 지금 두 분 사매와 사도평아우가 동해에 도착하면 <삼선> 어른들께선 폐문 (閉門)하고 법보를 연성하고 계시기 때문에, 시간이 되기 전엔 만나뵐 수도 없어요." 자령이 말했다. "저희가 서두르는 것은 단지 어머니에 대한 걱정에 한시라도 빨리 뵙고 싶을 뿐 다른 이유는 없 어요. 을진인께서도 아미산으로 가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이왕지사 옥청사태와 등팔 고께서 오늘 당도하신다니 만나뵙고 떠나가도록 하겠어요." 영운이 이번엔 영경과 약란에게 물었다. "너희는 도대체 무얼 하느라 늦게 당도하였느냐" 영경이 그간의 경과에 대하여 말을 시작하였다. 원래 영경은 약란과 함께 한악과 사도평을 달래 데려오려고 급히 뒤쫓아갔었다. 신조를 불렀지 만 나타나지 않아 검광을 일으켜 쫓아갔다. 이때 우연히도 돌아오던 금선(金禪), 소화상(笑和尙) 등 일행 네 사람과 마주쳤었다. 영경은 자령 곡에 가본 적이 없었고, 악란도 겨우 황산 근처를 한 차례 지나가 본 기억밖에 없으므로 한악과 사도평이 이미 멀리 사라져 버리자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금선 일행에게 물어보았 더니 자신들도 잘 모르겠다고 하며, 하지만 좀전에 두 가닥 청광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 혹시 그들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급한 김에 자세한 것은 묻지도 않고 우선 두 가닥 청광이 사라진 방향을 물어 뒤쫓아 갔으나 처 음부터 길을 잘못든 것이었다. 한악과 사도평은 후동(後洞) 비뢰애 위로 사라졌는데, 영경과 약란 은 오히려 전동(前洞)으로 해서 쫓아온 것이다. 게다가 금선도 도중에 우연히 멀리서 청광이 희미 하게 빛나는 것을 본 것이라 방향에도 약간의 착오가 있었다. 자령이 나중에 출발했지만, 그녀 역시 도중에 실수로 <금모모>를 추적하는 바람에 이들은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있는 힘껏 검광을 재촉하였지만 종내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약란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령곡은 황산에 있으니, 황산에 직접 가서 찾으면 못 찾을 리도 없겠지.' 단시간 내에 엄청나게 넓은 황산에서 자령곡을 찾는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줍는 격이 라,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황산에 당도하여 그 엄청난 산세를 보자 두 사람은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이때 갑자기 몸이 어떤 힘에 의해 끌려감을 느꼈다. 영경은 재빨리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아래쪽 엔 넓디넓은 운해(雲海)가 쫙 깔려 있었다. 다만 형체가 확실치 않은 고봉(高峰)만이 곧장 하늘로 치솟아 있는 게 보였다. 봉우리 아래쪽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위쪽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박혀 있는 석주(石柱)마냥 우뚝했다. 근처엔 구름이 움틀거리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때 꼭대기에서 불진(佛塵)을 손에 든 도고(道姑) 한 사람이 자신들을 향해 손짓하는 게 보였 다. 자신들의 뜻과 상관없이 몸뚱아리가 봉우리를 향해 빨려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중년의 나이로 장엄한 용모에 일신(一身)에 선기(仙氣)를 풍기는 도고였다.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전배(前輩) 선인 (仙人)이거니 생각하고 감히 태만치 않고 앞으로 나가 배알하였다. 법호(法號)를 여쭤보고서야 그 도고가 바로 <찬하대사(餐霞大師)>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급히 절하며 후배로서의 예(禮)를 올렸다. 찬하대사가 두 사람에게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진씨자매에게 닥칠 겁수에 대해선 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장령자는 이파(異派) 고수(高手) 라 너희들은 상대가 되지 못한다. 또한 너희가 지금 간다 해도 오히려 해만 될 뿐이다. 당초 우담 대사의 제자 제하아가 안암(雁岩)에서 교룡(蛟龍)을 제거하다가 그만 안호(雁湖) 밑의 홍학(紅壑) 에 잠복하고 있던 요곤(妖崑)을 건드려버렸었다. 다행히 우담대사께서 오셔서 불법으로 산봉우리 와 함께 안호(雁湖)도 봉쇄해 버려 홍수로 인해 생령(生靈)이 상하는 것을 막았다. 본면 생각은 당장 요곤(妖崑)을 제거하고 싶었지만, 그 요곤이란 놈은 수천 년 동안 도행을 쌓은 요물이라 장 미진인이 남긴 자영, 청삭 이검 중 하나가 아니면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담대사는 자신 이 연성한 아홉 가지의 천룡복마검(天龍伏魔劍)으로 백팔 일 동안이나 싸웠지만 겨우 요물을 가 두어두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요물의 겁수가 아직 멀었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이 너 무 많은지라 한시바삐 청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하아에게 명해 천룡검(天龍劍)을 지니고 요물이 도망치지 못하게 대신 지키라고 하였단다. 어제 우담대사의 비검전서를 받았는데 안호(雁 湖)의 요곤이 수일 내로 호수 밑에 있는 우정(禹鼎)을 가지고 도망치려 하는데 제하아 혼자 힘으 론 이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요곤이 도망치게 되면 백여 장에 달하는 곳에 엄청난 홍 수가 일어나 근처 일대가 전부 물바다로 변할 것이라고 하더구나. 요인이 바다로 숨어들고 나면 홍수도 가라앉겠지만, 이 일로 인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고 했어. 하지 만 대사께선 더 중요한 일 때문에 몸을 뺄 수가 없다고 하셨어. 다행히 망창산의 요시(妖尸)도 제 거되었고, 응벽선부의 액난도 풀렸으니, 여러 제자들이 앞을 다퉈 개부성전(開府盛典)에 참가하러 오느라 잠시 한가한 줄 안다. 조용히 생각해 보니 너희가 진씨자매를 도와주러 가봐야 도움은커 녕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제하아가 지금 혼자서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 며칠 남는 시간을 이 용해 안탕산(雁蕩山)으로 가서 제하아를 도와주는 게 어떻겠느냐? 함께 요물을 제거한다면 엄청 난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니 일거양득이 아니겠느냐?" 영경과 약란은 이 말을 듣고 이전에 경운과 문기가 한 말이 생각났다. 당시 자령곡의 진씨자매 와 청라로 가기로 약속했을 때 영운의 친동생인 제하아가 요곤을 제거하기 위해 찬하대사에게 신 침(神針)을 빌리러 갔었다고 했다. 그 뒤 스승 우담대사가 자령곡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하였었다. 본디 요곤이란 놈은 홍학 맨 밑바닥에 깊숙이 숨어 수천 년 동안 수련을 쌓아, 종적이 은밀하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런데 제하아가 안호의 악교(惡蛟)를 제거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섣불리 덤볐으면 큰일날 뻔했으나, 다행히 호숫가에 세워진 신비(神碑)를 보고 경거망동하지 않았 던 것이다. 그리하여 곧바로 스승을 찾아 함께 와서 요곤을 가두는 막대한 수훈을 세웠다. 제하아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담대사에게 맡겨져, 일찍이 상승의 경지에 이르러 전겁(轉劫)을 넘겨버렸다. 겉 보기엔 아직 앳된 소녀였지만 이미 오랜 세월 도행을 거쳤고, 게다가 이번의 공로로 인하여 정과 (正果)를 얻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만약 부모와 함께 제삼차 아미겁수에 참여하지 않는다 해 도 이미 이룬 공행만으로도 족히 비승(飛昇)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영경과 약란은 제하아에 대한 얘길 진작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지만 제하아 는 매일 내외공(內外功)을 수련하였고, 일 년에 한 차례 동해로 가서 부모를 배알하는 외엔, 언니 인 영운조차도 만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제껏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이번 아미개부 때 반드 시 올 것이란 생각에 모두들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안탕산(雁蕩山) 일로 먼저 만나게 되다니, 게다가 함께 공을 세울 수도 있으니 영경은 너무나도 기뻤다. 선뜻 찬하대사 의 말에 응락했다. "제자, 대사님의 분부대로 행하겠습니다. 어떻게 처신하면 될는지 가르침을 내려주시기 바라옵니 다." 찬하대사는 품에서 서신 한 통과 구구연마신침(九九鍊魔神針)을 꺼내 건네주며 두 사람에게 말 했다. "처음 하아가 내게 신침을 빌러 왔었지만 선검(仙劍)으로 요곤을 처단한 뒤에야 필요한 물건이 라 그땐 빌려주지 않았었다. 또한 우정(禹鼎)을 훼손할까 두려워 함부로 건네줄 수가 없었지. 이 번에 너희 둘이 제하아를 만나게 되더라도 그 요물이 영통(靈通)하여 사람의 말을 알아들으니, 절 대 얘길 주고받아선 안 된다. 서첩에 쓰여 있는 대로 행하면 자연 알게 될 것이니라. 꼭 하고픈 말이 있을 땐 손으로 땅바닥에 써서 서로 대화를 나누도록 하여라. 앞으로 오륙 일 뒤면 요곤이 도망치게 될 거다. 영경은 미리 나서지 말고, 요곤이 홍광(紅光)을 일으킬 때까지 가만 기다리고 있다가, 너의 자영검으로 우담대사의 비검광층(飛劍光層)을 뚫어 요물의 머리를 베어버려라. 요물 의 머릴 베고 나서 재빨리 이 신침을 일제히 발출하면 오색광화가 일어 요물의 머릴 에워쌀 것이 다. 요물의 원령(元靈)은 머릿속에 있으니 방심해선 아니 되느니라. 잽싸게 시신을 두 동강 내고 우정(禹鼎)을 잘 살펴야 한다. 약란은 제하아 대신에 우정을 취한 뒤, 손에 꼭 쥐든지 품에 안든 지 하여 곧바로 생사를 도외시하고 좌정(坐定)에 들어가야 한다. 아무리 위급한 일이 일어나도 절 대 경거망동하여서는 아니 되느니라. 세 시진이 지난 뒤 하아에게 주면 그 우정으로 홍수를 가라 앉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일만 잘되면 너흰 커다란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황급히 사례하며 서첩과 신침을 받아들었다. 이별을 고하려는 순간, 창공에서 신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릴 듣고 찬하대사가 말했다. "백미화상이 기르던 신금(神禽)도 이번 일에 필요할 테니 데려 가도록 하여라." 이때 신조 불노는 이미 땅에 사뿐히 내려았아 찬하대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길게 울어 예의를 표했다. 찬하대사는 영특한 신조의 행동을 알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주인이 멀지 않아 성도(成道)할 것인즉, 너도 빠른 시일 내에 정과(正果)를 얻을 것이다." 신조는 몇 차례 길게 울고 곧바로 영경 옆으로 뒤우뚱거리며 걸어갔다. 두 사람은 찬하대사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대사는 둔광을 일으켜 타고 떠났다. 뒤돌 아보니 봉우리 위로 하광(霞光)만 번쩍였고 대사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영경, 약란은 함 께 신조 등에 올라타 안탕산 안호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둘은 어느 덧 안탕산 기슭에 당도하였다. 안호에서 십여 리 가량 떨어진 곳에 도착하여 보니 호 수 위엔 온통 홍하무(紅霞霧)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묘강의 산풍장(山風腸)마냥 수시로 수십 가 닥의 금광이 난무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의 눈엔 산봉우리에 구름이 가득 끼어 번개가 번쩍번쩍쳤지만, 비도 내리지 않을 뿐더 러 뇌성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상한 광경으로 보였다. 두 사람은 더욱 가까이 접근하여 살폈다. 산 위쪽은 온통 짙은 구름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구름 으로 아래쪽과는 차단되어 마치 용이 곧바로 하늘로 승천할 듯 구름 속에 꽂혀 있었다. 구름층 아래쪽 경물은 모두 감춰져 잘 보이지 않았고, 안호 정상엔 수증기와 안개 그리고 무수 한 금광(金光)만이 난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신조 등에서 내려 둔광을 일으키고 허공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신조는 그들의 말을 알고 곧바로 날개짓하며 하늘 위로 치솟았다. 두 사람이 아래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래쪽 광무(光霧) 가운데 자의소녀가 암석 위에 앉아 손 으로 겹결을 그리며 연이어 초식(超拭)을 펼쳐내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제하아인 것이다. 영경과 약란이 곧바로 그녀를 향해 내려갔다. 땅에 내려서는 순간 땅을 뒤흔드는 괴성이 한 번 울리더니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자의소녀가 겹 결을 거두었다 풀었다 하는 사이, 엄청난 벽뢰가 광무를 향해 내려꽂혔다. 그 즉시 앞쪽의 광무가 씻은 듯 사라지며 호수 표면이 드러났다. 둘이는 이제서야 이곳이 바로 호숫가인 것을 알아보았 다. 호수의 높이는 상당한 편이었는데, 호수 한가운데서 파도가 일자 곧바로 백여 장 높이로 물기둥 이 치솟았다가 엄청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안개가 가득차 흐릿한 가운데 괴상하게 생긴 것이 표면에 나타났다가 급히 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수십 가닥의 금광은 한 겁의 광막을 이뤄 괴물이 사라진 수면 위를 더욱 세게 압박하였다. 한 차례 소동이 가라앉자 사방 산을 여전 히 봉쇄한 안개를 빼고는 주위 경물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자의소녀는 이미 법술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제하아라고 해요. 두 분 사저께선 혹시 저의 가사(家師)께서 보내서 오셨는지요?" 두 사람은 우담대사의 경고가 생각나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희는 이영경, 신약란입니다. 찬하대사의 명령을 받들어 이곳에 왔습니다. 언니께선 동문선배 이시니 저희에게 말씀을 낮추십시오." 약란은 품속에서 서첩을 몰래 꺼내 제하아에게 건네주었다. 하아는 서첩을 읽고 나자 이번엔 바닥에 글씨를 써서 말했다. <이 요곤은 정말 지독한 놈이에요. 사부의 연마선검(鍊魔仙劍)을 가지고도 백팔 일 동안이나 싸 웠어요. 하지만 법력이 부족한 탓에 비록 이놈을 잡아놓긴 했지만, 털끝 하나 상처를 입힐 수가 없었어요. 호수 바닥엔 현천지보가 하나 있는데, 바로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당년에 치수(治水) 하실 때 사용했던 열일곱 개의 보물 중의 하나로 우정(禹鼎)이라고 하지요. 요곤도 이 정(鼎) 때문에 쉽사리 달아나지 못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저 요물도 자신의 겁수 를 계산해 보고 정말 위급한 순간이 오면 우정을 내버리고 바다로 도망칠 거예요. 물론 수천 수백만 생령(生靈)의 목숨과도 관계가 있지만, 요물이 달아날 땐 반드시 우정으로 가 사(家師)의 선검(仙劍)에 대항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정(鼎)과 선검(仙劍) 둘 다 상하게 되고 저 괴물은 그 틈을 타 도망칠 거예요. 더욱이 저 괴물은 여간 영통비범(靈通非凡)하지 않아, 제가 이 곳에 왔을 때 아무런 기식(氣息) 도 없이 원신(元神)을 분리하여 공격했어요. 만약 평소의 고된 수행과 사부의 선법선검(仙法仙劒) 이 없었더라면 일찍이 저놈의 독수에 당했을 거예요. 방금도 저와 싸우고 있다가 두 분 사매가 오는 걸 보고 갑자기 호수 밑으로 숨어버린 거예요. 두 분이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간파하고, 홍학(紅壑)으로 돌아가 기운을 축적시킨 다음 다시 공격 하려는 게 분명해요. 저 괴물은 한번 문 밖으로 나올 때마다 수천 장에 이르는 홍수(洪水)를 일으 켜요. 다행히 저희 사부님께서 미리 방비를 해두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도 이처럼 오랫 동안 견디지도 못했을 뿐더러 수백 리의 생령과 논밭은 이미 깨끗이 사라져 버렸을 거예요.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까 두려워 매일 조심하며 지냈어요. 만약 성급하게 요물을 건드려 요물이 발광을 하면 큰일일 테니까 말예요. 마침 두 분 사매께서 오셨으니 정말 잘되었군요. 이 사매에 대해선 전에 사부님께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아미후배 가운데서도 일류급에 속하고, 게다가 장미진인의 자영검과 백미노선사(白眉老仙師)께서 기르던 신조도 얻었다니 정말 대단해요. 신사매도 이전엔 복선담(福仙潭) 홍화모모(紅花姆姆)의 문하로서 이미 현묘한 이치를 통달하셨 고, 지금은 아미문하로 들어가 공행이 더욱 정진하셨다죠? 오늘 이처럼 두 분 사매가 도와주러 왔고, 찬하대사께서 미리 선기(仙機)를 가르쳐 주셨으니 요물의 머리가 베어질 날도 멀지 않았군 요.> 이 글을 보고 두 사람도 역시 땅에다 글씨를 써서 말했다. <저희 같은 말학후진(末學後進)이 어떻게 사저의 참수정과(參修正果)와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저희의 보잘것 없는 실력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두렵군요. 사저께서 저희 둘을 잘 인도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하아가 필답했다. <방금 같이 읽어본 것처럼 모든 것은 찬하대사의 서첩에 적힌 지시대로 따르면 돼요. 요물이 도 망치려면 아직 오륙 일 정도 남았으니, 내 생각으론 이전처럼 공격하지 않고 방어만 하는 것이 좋겠어. 만약 정말 위급한 순간이 되면 신사매가 잠시 도와주고 이 사매의 자영검은 때가 될 때 까지 사용하지 말자구요. 두 분 사매는 요물의 형상을 자세히 살펴 견문을 넓히도록 하라구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중요한 얘길 모두 끝내고 나자 일상적인 얘기는 요물이 들어도 상관없는지라 소리내어 얘길했 다. 세 사람은 몇 마디 얘길 나누지 않고도 벌써 의기투합하여 진작에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했다. 영경과 약란은 제하아가 계속 자신들에게 경대를 하자 그러지 말라고 간곡히 청했다. 그러자 제 하아는 쑥스러운 듯 잠시 생각하더니 마침내 친숙하게 얘기를 건넸다. 영경과 약란은 제하아로부터 요물의 형상이 기괴하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 요물의 모습을 자세 히 살필 요량으로 수면을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하지만 요곤은 한번 잠복한 뒤 좀처럼 모습을 나 타내지 않았다. 삼 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자 제하아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전에도 요곤이 숨어들어 나오지 않은 적이 있었어. 하지만 삼 일 씩이나 나오지 않은 적은 없 었는데... 도망쳤다면 호수 맨 밑 속의 홍학(紅壑)으로 가는 길뿐인데, 그곳은 천연적으로 봉쇄된 요물의 석고(石庫)야. 찬하대사의 말씀에 의하면 태음지강(太陰之綱)으로 이루어져 요물이 뚫고 나갈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러니 자연 이 호수 외엔 출로가 따로 없다는 말이니, 아래로 도망 쳤을 리는 만무하지. 이렇게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필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 명하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걸. 아마도 이번에 나오면 전보다는 훨씬 위험할 거야."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문득 호수 밑바닥에서 음악 소리가 울려나왔다. 음악은 매우 애잔하 여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하아는 기이한 듯 말했다. "지금껏 이런 음악은 들어본 적이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 속에서 다시 음악이 들려왔다. 한참 연주되다 갑자기 고음(高音)으로 올 라가기도 하였다. 하아가 다가가서 살펴보니 수면을 덮고 있는 구름막이 마치 춤 추듯 움틀거렸다. 음악은 때로는 계속 연주되다 때로는 갑자기 뚝 그치기도 하며 변화무쌍하였다. 어떤 땐 팔음 (八音)이 모두 연주되며 피리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고, 어떤 때에는 황종(黃鐘)을 울리듯 엄청난 소리와 함께 용울음 소린지 호랑이 휘파람 소린지 분간이 안 갈 신비한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였 다. 마치 천국의 음악을 듣는 듯,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만약 지금 자신들이 요굴(妖窟) 근처에 있지 않았다면, 이 음악 소리가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선악(仙樂) 소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기이한 생각이 들어 의아해 하는데 이번엔 호수 밑에서 가느 다란 휘파람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약 반 시진 가량이 지나자 갑자기 뚝 모든 음악 소리가 그쳐버렸다. 곧이어 흡사 비단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더니, 호수가 갈라지며 물방울이 보글보글 떠올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이와 동시에 왼쪽에서 사오 척 굵기에 높이가 이 장이 훨씬 더 되어 보이는 물기둥이 불쑥 솟아 올라 수면 위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차 반잔을 먹을 시진이 지나자, 이번엔 오른편에서도 이와 흡사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이처럼 끊임없이 수십 개에 달하는 물기둥이 연이어 솟아올랐는데 굵기와 높이는 일정치 않았 다. 겉은 눈부시듯 밝고 붉은 기운을 띠었지만 투명하진 않았다. 호수 위를 덮고 있던 검광이 반 사되어 눈앞이 휘황찬란하였다. 마치 투명한 붉은 수정기둥을 물 위에 세워둔 것처럼 볼수록 장 관이었다. 하아는 괴물이 출몰하는 모습이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서 혹시 환상이 아닌가 의심했다. 비검광 막으로 호수 위를 더욱 단단히 옥죄고, 환상이든 무엇이든 그토록 황홀한 광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면만을 응시했다. 물기둥이 거의 솟아오른 듯 광막과 불과 수 척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 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갑자기 '확!' 하는 괴성과 함께 수십 개의 기둥이 마치 눈사태를 만난 듯 일 제히 무너지며 수면 속으로 사라졌다.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질주하듯 엄청난 폭음과 함께 물기둥 은 씻은 듯 사라지고, 곧바로 요무(妖霧)가 물 위를 가득 메워버렸다. 언제 여기가 호수였던가 싶 게 순식간에 수면 위엔 안개가 가득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는 요물의 출현이 다가왔음을 알고 급히 소리쳤다. "요물이 나타난다. 자, 모두 정신차려!" 이어 요무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더니 호숫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불끈 솟 아 전신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니 머리가 아홉에 몸은 뱀처럼 생겼고, 어깨엔 날개가 달려 있는 길이가 십여 장에 달하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하아는 요물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급히 비검광막을 아래쪽으로 덮어씌우자 다시 요운이 용솟음 치며 검은 그림자도 더불어 위로 치솟았다. 잠시후 완전히 몸을 드러냈는데, 이번엔 여자머리에 용의 몸을 하고 복부 아래엔 긴 다리가 열 여덟 개나 달린 괴물이었다. 한순간 공중으로 날아 광막에 부딪치며 서쪽으로 향했다. 제하아는 요물이 분신변화(分身變化)를 일으킬까 두려워 황급히 현공을 운용하여 일지(一指)를 날리자, 즉시 비검과 금광이 서로 얽히며 사방으로 흩어져서 호수 위를 더욱 단단히 봉쇄하였다. 이때 호수 밑의 요운사무(妖雲邪霧)가 움틀거리며 요물을 따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요무는 크 고 작은 수십 개의 덩어리로 변해 솟아올랐는데, 어떤 것은 몸 세 개에 머리가 둘이고 세 몸에 호랑이 머리를 한 것, 어떤 것은 머리 아홉에 꼬리는 둘이고 사자 형상에 용발톱을 가진 것도 있 었고, 또 어떤 것은 강시(彊屍) 형상에 외발로 서서 휘파람을 불고, 어떤 것은 뿔이 여덟 개씩이 나 달려, 정녕 기형괴상(奇形怪狀)한 모습의 괴물로 변했다. 다행히 비검광막이 가로막혀 요물들이 호숫가까지 날아왔지만 더 이상 다가오지는 못했다. 몸 주위에서 일어나는 요무는 입 속에서 요물이 내뱉는 독기였다. 호수 한가운데서 괴성이 또 한 번 울리자 요운이 일렁이며 거대한 물체를 가진 요물이 또 나타났다. 이 요물이 나타나자 이제까지 나타났던 각양각색의 괴상망측한 요물들은 일제히 길을 비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세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니 이 요물은 정녕 사람을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난 몸집을 지니고 있었 는데, 늑대 머리 형상에 코끼리 코를 지니고, 용의 눈에 매의 입을 지녔는 데다 멧돼지 이빨 같은 날카로운 이빨이 삼 장 남짓이나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입을 쩍 벌리자 십여 장씩이나 되는 화염을 뿜어냈다. 등엔 살아 움직일 듯한 긴 날개가 붙어 있었는데, 양날개는 적어도 칠팔 장씩은 족히 되어 보였다. 전체 길이는 생각보다 훨씬 길었고, 겉은 거무튀튀한 광채를 뿜어내는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요물이 호수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그 흉악한 모습만 봐도 가히 얼마나 악독한 놈인지 짐작이 갔다. 하아는 최후의 요물이 나타나자 이 싸움의 승패가 쉽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금껏 나타난 각 종 요물이 요곤의 잠형변화(潛形變化)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또한 기형괴상한 요물들은 지금껏 본 적도 없는지라, 혹시 환술이 아니라 호수 밑에 살고 있던 요곤의 무리들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요곤 하나만 해도 세 사람에겐 힘에 벅찬 상대인 데 무더기로 나타났으니 정말 난감했다. 영경, 약란에게는 뭐라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내심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다행히도 이 커다란 요 물도 다른 요물과 마찬가지로 광막 근처까지만 날아왔을 뿐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하아는 머리끝을 쭈삣 세우고 태만함이 없이 온 정신을 호수에 집중시키고는 우담대사의 <구구 천마복마검>의 묘용을 전력을 다해 시전하였다. 광하(光霞)가 뒤덮자 마치 천라망(天羅網)처럼 바늘 하나 빠져나갈 틈도 없게 완벽하게 봉쇄되었 다. 계속 호수의 동정을 살피며 쌍방이 이 상태로 한참 대치하고 있는데 영경이 갑자기 소리쳤다. "요괴의 눈을 좀 봐요. 크고 기이하게는 생겼지만 하지만 좀 멍청해 보이지 않아요?" 무심중에 한 영경의 말에 하아는 번뜩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요물의 눈을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요물들의 눈이 비록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모두 마치 보석을 박아 놓은 듯 움직이지 않았 다. 암암리에 이전에 스승이 한 말이 떠올랐다. 당초 우정(禹鼎)을 주조할 때 겉에 삼라만상(森羅萬 象)을 새겼다고 하셨다. 뇌우풍운(雷雨風雲), 산림소택(山林沼澤) 및 온갖 짐승과 괴물 등 새겨넣 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 기억이 났다. 이 요물들이 겉보기엔 흉악하지만 요법환술(妖法幻術)이 아 니고 무엇인가! 형태는 있으나 실체는 없는 허상임을 알았다. 안광이 멍해 보일 뿐만 아니라 행동도 하나같이 통일되어 있어 마치 누가 뒤에서 조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정에 새겨진 온갖 흉악 한 것들이 요곤의 운용에 의해 하나의 진(陣)을 형성하여 사람을 현혹시키는 건 아닐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할 즈음, 호수 밑에서 이상한 음악이 다시 울려퍼졌다. 잠깐 소리가 나고는 홀연 일진요풍이 휘몰아치자, 연무가 일제히 날아가 버렸다. 동시에 호수에 있던 수많은 요물들이 일제히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분분히 날아올라 <구천룡복 마비검>의 광막에 부딪쳐 왔다. 늑대 머리를 한 제일 큰 요물은 더욱 무서워, 입에서 연신 불을 토해내며 곧바로 한가운데를 향해 부딪쳤다. 하아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가, 제일 흉악한 요물이 부딪치는 곳에 좀더 강하게 현공을 주입시 켰다. 다행히 우담대사의 비검이 대단한 데다, 하아의 공력이 워낙 깊어 요물은 견뎌내지 못하고 한 가닥 진기를 토해내며 급히 물러났다. 검광은 요물의 머리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광막 아래에 마치 유성처럼 금빛 비가 흩 날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요물들은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양 계속해서 광막에 부딪쳐 왔다. 지난날 요물이 제하아와 싸울 때에는 요물이 수천 년에 걸쳐 연성한 원주(元珠)가 훼손될까 두 려워 감히 비검에 직접 맞부딪치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이 요물들은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쳐들 고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마구 덤벼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신묘한 비검으로 단 하나의 요물도 죽일 수가 없자 이는 분명 우정의 작용 때문 이라는 심증이 더욱 굳어졌다. 눈앞에 금빛이 번쩍였으나 <구구천룡복마검>엔 오히려 아무런 손 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다가는 우정을 상하게 할 것만 같아 매우 걱정스러웠 다. 그러나 비검을 거둬들일 수도 없는 노릇, 정통으로 맞부딪치지 않게 주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 래쪽에서 기이한 광채가 번뜩이며, 수천 개의 금빛 별이 요물들의 머리에서 튀어나와 광막을 뚫 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하아는 요물이 도망친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순간 호수 밑에서 다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짙은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요물들을 감싸자, 하나씩 호수 속으로 곤두박질쳐 사라지기 시 작했다. 한동안 물소리가 어지러이 들려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동시에 호수가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붉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수면을 덮어버리니 호수는 다시금 거울 같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아는 정신을 집중시키고 귀를 기울였다. 심연에서는 예전에 싸워서 패하고 돌아갔을 때처럼 요곤의 숨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자 요물이 아직 도망치지 않은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방금 하늘 로 날아가 버린 수천 개의 별이 도대체 길(吉)인지 흉(凶)인지 알 수가 없어 도무지 마음이 놓이 지가 않았다. 이렇게 다시 꼬박 이틀이 흘러 닷새째 정오가 되었다. 한동안 요곤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생각 에 영경과 약란을 불러 바위 위에 둘러앉아 서로의 의견을 물었다.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일천 여 개의 별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이날 저녁이 되어서도 호수엔 아무런 동정이 없 어 하아는 계속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하아가 갑자기 실성한 듯 '익!' 하는 소리를 질렀다. 영경과 약란은 동시에 놀 라 벌떡 일어나 그 연유를 물었다. 하아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글을 썼다. <금빛 별이 가사(家師)의 비검에 부딪쳤을 때 위력이 대단했어. 그때 요물이 도망치지 않은 것 도 이해하기가 힘들어. 좀전에 찬하대사의 서첩을 살펴보니 비록 금빛 별의 내력에 대해선 아무 런 언급이 없었지만, 우정(禹鼎) 위엔 대우신부(大禹神符)로 봉쇄되어 있다고 하였어. 이건 아마 요인에 의해 훼손된 게 분명해. 가지고 가려든가, 아니면 고의로 우정을 사용하여 도 망치려는 심산이었을 거야. 이것으로 볼때 금빛 별은 대우신부의 묘용이 틀림없어. 요곤은 비록 현기를 볼 줄은 알아서 우정의 형상을 발출시킬 수는 있었겠지만, 신부(神符)를 제 거할 만한 법력을 갖추지 못했어. 그래서 우리의 비검을 빌어 영부를 훼손시킨 거야. 만약 내 추측이 맞는다면 제일 크고 늑대 머리에 날개를 단 요물이 바로 우정의 축(軸)이 틀림 없어. 영부의 관건은 반드시 축에 있기 마련이니까, 내 계산에 의하면 요곤은 지금 우정을 운용하 여 다음 번 공격에 사용하려 들 거야. 오늘 나타나지 않으면 바로 내일이 찬하대사의 서첩에 예견된 시기야. 그 때야말로 가장 중요한 순간이며 승패는 한순간에 결정나겠지! 우리 세 사람은 신중히 일을 처리해야겠어. > 다시 한 번 서첩에 예시된 시기를 따져보고 여러 가지를 의논하였다. 과연 이 날 저녁은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보낼 수가 있었다. 이튿날 하오 신시(申時) 말에서 유시(酉時) 초, 세 사람이 주의깊게 호수를 관찰하고 있을 때 갑 자기 호수 밑에서 예의 그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팔음(八音)을 모두 연주하여 봉황이 화답하는 듯 귀를 즐겁게 하였다. 사태가 급박하여 곧 일전악투가 벌어질 것을 직감하였다. 하아가 급히 손을 휘젓자 세 사람은 일제히 기합성을 내지르며 각자 정한 위치로 가서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하아가 손을 쓰자 비검광층이 더욱 긴밀하게 죄어들었다. 영경은 황급히 광층 밖으로 나가 숨기 에 적당한 곳을 찾아 시기가 되면 움직일 준비를 했다. 약란은 오히려 제하아 뒤에 숨어 제하아 가 우정을 구해오길 기다렸다가 이를 품에 안고 있고 제하아가 다시 적을 상대하기로 하였다. 세 사람이 각자 위치를 정하고 준비를 막 끝냈을 때, 호수 밑에서 울리던 음악 소리도 점점 커 져 촉박해지기도 했다가 느슨해지기도 하며 변화를 일으켰다. 때로는 꾀꼬리가 노닐듯이, 때로는 용호(龍虎)가 울부짖듯 포효성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런 데 좀처럼 요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호수는 시종 평온을 유지하였다. 거의 해시(亥時)가 다 되었을 무렵, 갑자기 음악이 뚝 그치며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세 개의 물기둥이 순식간에 수면 위로 치솟아올랐다. 안개를 뚫고 광층 삼 척 가량 아래까지 솟아올라서야 겨우 멈추었다. 투명한 것은 기운이 도는 수정 같은 물기둥은 미 동도 않고 가만히 있다. 세 사람은 한껏 안력을 높여 요곤이 도망치는 것을 방비하였다. 시각은 흘러 자시(子時) 초가 되자 물기둥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빙빙 회전하며 사방에 눈부신 광채를 쏘아내는데 수면엔 오히려 조금의 파도도 일지 않았다. 호수 밑에서 다시 음악 소리가 울려나오는데, 이번에는 북치는 소리로 변하여 천군만마가 일제 히 치달리듯 엄청나게 큰소리가 되어 들려왔다. 음악소리가 점점 빨라지더니 갑자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뚝 그쳤다. 동시에 물기둥이 부서지 며 사방에 붉은 피를 흩뿌리자, 검광에 반사되어 오색찬란한 광화를 발하여 가관을 이루었다. 그러나 호수의 연무에 떨어진 물방울은 마치 눈이 떨어지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요무 가운데도 꽃잎이 흩날리듯 어지러운 속에 천천히 요물 한 마리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놈은 사람 머리에 사자 얼굴을 하고 물고기 등에 곰의 몸을 지녔는데, 나무둥지 같은 짧은 다 리가 세 개 있었지만, 그 중 두 개만 사용하여 마치 사람처럼 걸었다. 앞다리 한 개는 가슴팍에 붙어 있었고, 길이는 자신의 키보다 삼 장이나 더 길었다. 얼굴은 온통 머리칼이 덮여 있어 자세히 볼 수가 없었지만, 두 귀는 흡사 당나귀 같이 뾰죽했고, 붉은 혀를 낼 름거리며 실낱 같은 광화(光火)를 토해냈다. 모습을 나타내자마자 앞발로 제하아를 가리키며, 사람의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아 무튼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뭐라고 지껄여댔다. 하아는 요곤과 오랫동안 대적하였기 때문에 요물이 지껄이는 뜻을 짐작하고 대갈일성을 질렀다. "무지한 요물 같으니! 누가 네놈의 허황된 말을 믿겠느냐? 네가 이전처럼 홍학(紅壑) 깊숙이 숨 어 지낸다면 하늘도 너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런데 네놈은 은혜도 모르고, 이곳을 빠져나가 생 령을 해하려 하는구나! 네가 지금 한 사람도 해치지 않을 테니 바다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내게 부탁하지만, 누가 그 말을 믿겠느냐? 네가 우정을 고이 내놓고 너의 내단(內丹)을 맡긴다면 너를 바다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 과연 네가 한 사람도 상하게 하지 않고 바다로 들 어간다면 나 역시 너를 보내주겠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이곳에 천라지망을 펼쳐 놓았으니 도망 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이젠 이전처럼 깊숙이 숨어 지낸다 해도 허락할 수가 없다." 요곤은 하아의 말을 듣고 원한에 사무친 듯한 시뻘건 두 눈을 부릅뜨고 하아를 물어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새빨간 피가 뚝뚝 흐르는 입을 씰룩거리며 뭐라고 중얼거리다 다시 하아를 노려보았 다. 마치 분노가 치밀어 당장에 씹어 죽여버리고 싶지만, 머리 위의 비검광층이 두려워 감히 공격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아는 요곤이 이전과 다르게 자기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것을 보자 이놈이 고의로 불쌍하게 보 여 가지고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켜 우정도 함께 가지고 달아나려는 속셈을 품었음을 간파하였 다. 그래서 요곤에게 대답하는 한편, 암암리에 만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잠시후 요곤이 갑자기 난폭해지더니 하아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하아는 요곤이 다시 날뛰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도망갈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본령이 있다면 어디 덤벼보아라. 조금 전에도 네 놈이 내게 간청하는 척했지만 몸을 수면 위로 완전히 드러내놓지 않고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 는 줄 내 다 알고 있다. 오늘이 가기 전에 나의 비검에 의해 네놈은 갈갈이 찢겨져 영원히 이 세 상에 다시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요곤은 오늘도 하아가 공격을 안하고 방어만 할 것임을 호수 위에 엄밀하게 펼쳐져 있는 비검광 막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달아나기가 힘들자, 마침내 야성(野性)이 발작을 일 으켜 괴성을 질러대며 입을 쩍 벌렸다. 순간 일단의 채연(彩煙)과 함께 푸른 광채가 영롱한 구슬을 토해냈다. 구슬이 처음 밖으로 나왔 을 때에는 자그마했으나 순식간에 큰 수레바퀴만큼이나 커져, 사방에 광채를 쏘며 곧바로 광층을 향해 날아갔다. 하아는 요곤이 마침내 원주(元珠)를 발출시켜 최후의 일전을 불사하자 <구구천룡복마검>을 지 휘하였다. 광막 위로 무수한 하광성채(霞光星彩)가 쏟아지며 더욱 아래쪽을 꽉 죄어들어서 원주를 가두어버렸다. 갑자기 뒤에서 약란이 낮은 소리로 불렀다. "언니, 요물을 조심해요!" 하아는 다시 앞쪽을 보니 요곤은 이미 극도로 짙은 연무에 휩싸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경각 지간에 점점 커져 연기로 이루어진 산을 방불케 했다. 이와 함께 괴성이 들렸다. 하아는 즉시 혜 안을 운용하여 보니 연무 속에 산 만큼 큰 대가리와 큼지막한 녹광(綠光)이 보였다. 선혈을 뚝뚝 흘리며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황급히 대갈일성을 쳤다. "겁 없는 놈, 감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즉시 왼쪽어깨를 흔들자, 한 가닥 금광(金光)과 홍광(紅光), 두 비검이 발출되었다. 약란은 제하아 뒤에 숨어 있다가 두 개의 녹광이 바로 요곤의 두 눈인 것을 알아차렸다. 비검으 로 요곤을 상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암암리에 병령사(丙靈梭)를 꺼내들고, 현공결(玄功訣)을 운 용하여 광화를 감춘 뒤 요곤의 두 눈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하아는 요곤이 원주를 생명처럼 아끼기 때문에 결코 버리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 었다. 그래서 천룡검으로 원주를 가두어두는 데만 신경을 썼지, 요곤이 오히려 변화를 일으킬 줄 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요곤이 도대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르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걸로 보아 혹시라도 원 주를 되찾아 달아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아는 자신의 두 비검으로 요곤을 막는 한편, 천룡검도 주시하고 있었다. 만약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오면 영경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정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음은 말할 필요 도 없다. 요곤은 원래 하아가 공중의 비검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보고, 원형을 변화시켜 기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도 응수가 이처럼 신속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었다. 우선 두 가닥 금홍색(金紅色) 검광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위험하다 느껴 재빨리 피 했다. 이 순간, 갑자기 눈앞에 몇 가닥 홍광(紅光)이 번뜩이더니 두 눈이 병령사에 적중당해 괴성 을 지르며 바람을 일으켜 곧바로 호수 가운데로 물러나 버렸다. 하아와 약란은 홍광이 번쩍인 뒤 무시무시한 녹광이 보이지 않자, 요곤이 두 눈에 부상당한 것 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 급히 각자에게 법보, 비검을 거두라고 하고는 하아는 이 기회를 틈타, 입 속에서 진기를 운용하여 공중에 내뱉았다. 그때 막 원주를 거둬들이려는데, 호수 밑에서 한 가닥 백기(白氣)가 조금 빨리 쏘아져 나왔다. 원주는 마치 큰 별이 떨어지듯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뒤를 이어 호수 밑에서 음악 소리가 크게 일며 수천 가지의 괴성과 함께 휘파람 소리도 울려나 오기 시작했다. 어떤 소리는 갓난애 울음소리처럼 처량했고, 어떤 소리는 벼락이 치듯 온 산을 진 동시켰다. 호수 밑은 자정(子正)이 되자 음악소리가 뚝 그쳤다. 뒤이어 물이 들끓기 시작하며 무수한 물기 둥이 일어났다. 동시에 전에 보았던 각종 기형괴상(奇形怪狀)한 요물이 일제히 이빨을 세우고 덤 벼들었다. 하아는 지금이 바로 요곤이 도망치려는 순간인 줄 알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주의를 집중하여 수면을 응시하며 요곤과 함께 나왔던 늑대 대가리를 한 괴물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요물들은 일제히 호수 위로 날아올라 비검광층에 부딪쳤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호수 밑에서 경 천동지할 비통한 울음소리가 울려나왔다. 연운이 날리며 마침내 늑대 대가리에 양날개를 가진 요 물이 튀어나왔다. 광층의 무서움을 아는지라, 섣불리 부딪치지 않고 호수 위를 두 바퀴 선회했다. 이 요물이 나타나자, 먼저 나타났던 요물들은 모두 수면으로 떨어져 이 요물의 뒤를 따라 호수 주위를 맴돌았다. 어룡(魚龍)이 유유히 헤엄치듯 수천 마리가 일제히 선회하자 그 광경 역시 가히 장관이었다. 한 동안 주위를 맴돌자 호수 밑에서 가느다란 음악이 흘러나오며 마침내 요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가슴에 붙어 있는 발톱으로 정(鼎) 같은 물건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사방에 금빛이 비쳤다. 가느다란 음악 소리는 바로 우정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온갖 요물은 음악 소릴 듣자 일제히 요곤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요곤은 호수 위로 나와 제하아 를 향해 괴성을 내지르며 쥐고 있던 보정(寶鼎)을 비검광층을 향해 비췄다. 쥐고 있던 보정을 허공을 향해 치켜들자 즉시 보정에서 목소리와 새 소리가 어우러지며 살범지 음(殺凡之音)이 울려나왔다. 동시에 채운이 보정을 둘러싸며 광층을 향해 날아간 것이었다. 이에 뒤질세라 늑대 대가리의 요물을 비롯한 모든 요물들은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보정을 뒤따 라 날아갔다. 하아는 미리 방비를 하고 있다가 왼손으로 영결(靈訣)을 그리며 오른손으로는 법보낭에서 우담 대사가 미리 준비해 둔 영부를 꺼내들어 뒤에 있던 약란에게 건넸다. 입 속으로 진언을 외고 선 천오행진기(先天五行眞氣)를 내뱉았다. 진기는 순식간에 하광(霞光)으로 화해 백여 장의 광폭을 일으켜 약란의 전신을 감쌌다. 약란은 급히 광화(光火)로 둘러싸인 가운데 신검합일하여 섬전처럼 돌진했다. 보정이 비검광층에 부딪치기 바로 전, 우담대사의 영부의 묘용으로 손을 뻗쳐 보정을 손에 넣었다. 거기서 태만치 않고 황급히 뒤돌아서 원래 서 있던 바위 뒤로 돌아와 가슴 깊이 보정을 안아들 고 앉아 현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보정으로 광막을 꿰뚫으려는 순간, 적이 보정을 취해버리자 수천 마리의 요물들은 일제히 입을 쩍 벌리고 괴성을 내지르며 보정을 향해 날아왔다. 약란은 광 화로 호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물이 달려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현공을 운기하며 변 화를 기다렸다. 요곤은 잠시 방심으로 보정을 빼앗기자 분노하여 급히 원형(元形)을 변화시켜 뒤쫓아왔다. 이를 본 제하아가 앞을 가로막자 갑자기 홱 뒤돌아서 호수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아는 요곤이 필시 뭔가를 꾸미기 위해 잠시 후퇴한 것임을 알았다. 경거망동치 않고 천룡검으 로 광막을 더욱 단단히 봉쇄하고 요곤을 뒤쫓지 않았다. 약란이 있는 곳을 돌아다보니 광화로 몸 을 보호하고는 이미 좌정에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주변엔 요물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아직도 어 지러이 날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으로 보아 요물들이 광화를 건드리지 못하자 별 문제 없겠다 싶었다. 아무래도 관심 은 호수에 있어 둔광을 일으켜 몸을 숨기고 공중에서 아래를 감시하고 있었다. 최후의 시간이 오 면 영경도 불러 같이 공을 세우기로 하였다. 대략 두 시진 가량 지났을 무렵, 약란은 요물들이 광층에 저지 당해 다가오지 못하는 것을 보았 다. 요물의 기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되자 마음이 놓여 자세히 주위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지금껏 이처럼 각양자색의 많은 요물을 본 적이 없는지라 호기심이 일어 자세히 하나 하나 살펴보았다. 요물들은 신체를 자유자재로 줄였다 늘였다 하며 변화를 일으켰다. 멀리서 괴성이 들려오자, 보 정에서 나던 음악이 뚝 그쳤다. 동시에 주위에 있던 요물들도 잠시 조용해졌지만 물러가지는 않 았다. 순간 가슴팍으로 한 가닥 기이한 냉기가 느껴졌다. 냉기가 뼛속을 파고들자 주위에 전신이 덜덜 덜 떨려와 보정을 쥔 손에 힘이 쭉 빠졌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보고 급히 현공을 운용하자, 단전 (丹田)에서부터 한 가닥 따듯한 양기(陽氣)가 뻗어나와 전신에 골고루 퍼지기 시작했다. 겨우 한기를 이길 만하자 이번에는 보정에 불이 붙어 살을 태울 듯하였지만 감히 손을 놓을 수 가 없었다. 앞가슴에 금방이라도 불이 붙으려는 것을 보고 급히 찬하대사의 말을 떠올렸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생사를 도외시해야 하느니라." 열기가 물러가고 한기가 다시 밀려왔지만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모든 것이 환상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두 손으로 보정을 더욱 꽉 안아쥐고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순간 보정의 축부분에 새겨진 요물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늑대 대가리에 양날개를 가진 용 비슷한 흉악한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광하 밖에서 날뛰는 우두머리 요물의 모습과 똑같지 않 은가. 다시 보정의 전신(全身)을 살펴보니 재질은 금 같기도 하고 옥 같기도 한 광화(光火)가 번뜩이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보정 바깥엔 수많은 귀신요물과 어룡사귀(魚龍蛇鬼)들이 새겨져 있었 다. 밖에 있는 요물들과 하나하나 비교해 보니 보정에 새겨진 요물의 형상과 똑같았다. 그제야 저 요물들의 원체(原體)가 바로 이 보정이란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의 원체를 가지고 있 으니 요물들이 물러가지 않고 주위를 맴도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처럼 수천 년 전에 신우 (神禹)가 남긴 지보(至寶)를 어떻게 거두어들일 수 있을지가 난제(難題)였다. 약란이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광하 밖에서 홍광(紅光)이 치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호수 밑에서 마치 산이 무너지는 듯한 경천동지할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한 가닥 자홍(紫紅)이 하늘로 쏘아지며 수십 가닥의 길다란 금광(金光)이 번쩍이자, 괴성도 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닥 금광이 곧바로 날아오자 광하 밖에 있던 요물들이 어지러이 피하기 시작했다. 금광을 자 세히 보니 바로 제하아였다. 제하아는 약란을 향해 소리쳤다. "요곤을 이미 죽였으니 우정으로 요물들을 거둬들이고 홍수도 막아내게 줘!" 하아는 약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손에 있던 우정을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오른손에 들고 있 던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는 구슬을 우정의 덮개 부분의 구멍에 밀어넣자 뚜껑이 스르르 열렸다. 하아는 뚜껑을 열어 안을 살피다가 뭔가 크게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입 속으로 진 언을 외며 우선 명부의 광망(光網)을 거둬들이고 약란을 불렀다. 요곤이 죽자 요물들은 조종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보정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이 광하를 거두고 모습을 드러내자, 요물들은 입을 쩍 벌리고 하아의 손에 든 보정을 향해 부딪쳐왔다. 비록 찬하대사의 말이 생각났지만 요물들이 너무 많은 수인 데다, 형상 또한 흉악하여 하아로선 방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천룡검을 발출하여 전신을 보호하였다. 좀전에 보정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새겨진 고전(古 篆)문자의 뜻과 연일 요곤이 내뱉았던 괴성소리와 어떤 연관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곧바로 진언을 외고 우두머리 요물을 향해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늑대 대가리를 한 우두 머리 요물이 몸이 작아지며 보정의 축부분으로 달려들듯 다가와 순식간에 보정에 새겨진 형상 속 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시에 보정에서 한 가닥 광화가 일자 나머지 요물들도 앞을 다퉈 보정 속 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때 이미 호수 아래에서 일어난 소용돌이는 수면 위 수십 장까지 치솟아 기세가 늦춰지질 않았 다. 다행히 우담대사가 미리 봉쇄하여 산아래로 홍수가 넘치지는 않았다. 수위(水位)가 호수 주위 보다 십여 장 가량 높았지만 법술의 묘용으로 밖으로는 한 방울도 흘러가지 않았다. 이때 영경은 자영검을 백 장 가량의 자줏빛으로 변화시켜 홍수의 기세를 누르고 있었는데 두 사 람이 무사히 날아오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하아가 입 속으로 진언을 외며 우정을 한 차례 치자 겉에 새겨진 수천 마리의 요물의 입과 코에 서 수천 가닥의 광화가 쏟아져 나와 수면을 향해 날아갔다. 처음 쏘아졌을 때 가느다란 실처럼 보잘것 없었지만 점점 커져 수위가 순식간에 수 척 가량 낮 아졌다. 하아는 우정을 들고 안호(雁湖) 위를 돌았다. 우정에서 쏟아지는 수천 가닥의 광화에 의 해 마침내 엄청나게 불었던 수위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략 반 시진 가량 지나자 수위(水位)가 이전처럼 낮아졌다. 잠시 뒤 하아가 우정을 가지고 돌아와 영경과 약란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성공을 거둔 것은 모두가 두 사매 덕분이야. 홍수는 이제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없어. 하지만 저 아래엔 역시 우왕지보(禹王至寶) 중의 하나인 지강(地綱)이 있어. 그러나 사 명(師命)도 받지 않은 데다가 거두는 방법도 몰라 어쩔 수가 없구나. 이 우정을 거둔 것도 평소 요곤이 요물을 부릴 때 내지른 괴성에서 방법을 얻어 진언을 알아낼 수가 있었던 거지. 지강(地 綱)은 너무 크니 가지고 가기도 불편하다구. 지금 가사(家師)께선 공래산(工崍山)에 계시겠다고 하셨으니 가서 다시 지시 받아야겠다. 물론 요곤의 수급(首級)도 가지고 가야겠지. 사매들은 돌아 가서 나 대신에 여러 동문들에게 인사말을 전해줘. 개부(開府)할 시기가 되면 사부님을 따라 아미 로 참배하러 갈 예정이야. 진씨자매가 장령자와 대적하다가 자운선장(紫雲仙腸)을 훼손시켜 무척 걱정하고 있을 거야. 만약 만나게 되면 내 말을 꼭 좀 전해줘. 선장이 비록 영효(靈效)를 잃었지 만, 다시 복원시킬 수가 있으니, 잘 간직해 뒀다가 개부시기(開府時期)에 만날 때 돌려달라고 전 해줘." 하아는 이렇게 말하며 사방의 봉쇄를 거둬들이고 손을 치켜들자 한 가닥 금하(金霞)가 허공을 가로질러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은 하아의 본령이 영운보다도 더욱 뛰어난 것 을 보고 찬탄과 부러움이 함께 뒤섞였다. 요곤이 사라지자 하늘은 다시 맑아졌고, 주위 경관이 물에 씻은 듯 청아한 기운을 발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는 주위가 온통 요운에 휩싸여 자세히 살피지 못했으나 지금 보니 정말 아름다 운 경치였다. 호수는 거울처럼 잔잔해져 수면엔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먼저 보이는 황산의 웅장한 모습과 더불어 넓은 호수를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탁 트임을 느꼈다. 한동안 경치를 감상하던 두 사람은 문득 자령곡의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자령곡의 일이 끝나려 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지라, 미리 가보았자 자신들은 아무런 도움도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 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했다. 영경이 이왕 이렇게 된 것 산수나 구경하며 놀 다가자고 하자, 약란도 마침 같은 생각이라 동의하고 천천히 걸어서 구경하기로 하였다. 원래 어젯밤에 약란이 우정을 재빨리 취하였던 것은 격동성서(擊東聲西)의 계책으로 요곤을 곤 경에 빠뜨리려 함이었다. 뜻대로 요곤은 화가 나 뒤쫓아왔고, 기다리던 하아가 재빨리 검광을 날 리자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요곤은 본래 우정으로 광막을 뚫는 사이 원주(元珠)를 다시 거둬들여 달아나려 하였는데 설마 상대가 미리 방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아는 찬하대사의 서첩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검으로 원주를 단단히 묶어놓고 있 었다. 더구나 이번엔 요곤이 우정조차도 내팽개치고 달아나려 하자 진작부터 영경과 함께 공중에 서 몸을 숨기고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곤은 처음 수면을 나와 광막을 보니, 그전처럼 긴밀하지 않자 내심 기뻐했다. 그리하여 계책을 세우기 위해 급히 호수 밑으로 돌아갔다. 잠시 동정을 살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면을 박차고 나와 한 가닥 흰 기운을 토해내 원주를 거둬가려 했다. 하지만 엉성한 줄 알았던 광막이 그토록 단단한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아무리 전신기력을 다 쏟아도 원주를 취할 수가 없었다. 순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황급히 되돌아가려는 순간, 대갈일성이 들렸다. "무지한 요물 같으니, 아직도 목숨을 내놓지 않을 테냐?" 뒤이어 한 가닥 금광(金光)이 날았다. 요곤은 상황이 급박하자 앞가슴에 난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신의 몸을 두 차례 할퀴었다. 순간 경천동지할 괴성이 울리며 요곤의 몸이 갈라지며, 안에서 수천 년 고행수련한 원신(元神)이 사방 에 홍광(紅光)을 발하며 곧바로 비검광막을 향해 부딪쳐갔다. 요곤은 육체를 버리고 내단(內丹)으 로 홍수를 일으켜 그 틈에 도망치려는 속셈이었다. 하아는 요곤이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자 영경더러 빨리 손을 쓰라고 손짓하는 순간, 이미 한 가 닥 자줏빛이 광막을 뚫고 섬전처럼 날아와 요곤의 머리를 관통해 버렸다. 순간 엄청난 광화가 난 무하며 눈을 어지럽혔다. 뒤이어 수십 가닥의 홍광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아는 요곤이 이미 제거된 것을 알고 급히 날아가 일 초를 날려 원주를 거둬들인 것이다. 이때 요곤의 머리는 뎅겅 잘려져 나가떨어졌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조금 작긴 하지만 원래의 모습과 똑같았다. 공행이 아직 완전히 연성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요곤이 원신을 형 체가 없을 정도로 연성하였더라면, 아마 제압하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요곤의 머리를 자세히 살피니 비록 신침(神針)에 당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망가졌지만 두 눈은 여전히 흉광을 내뿜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형체가 사라질까 두려워 재빨리 수급을 거두 어 법보낭 속에 갈무리하고 겉엔 다시 신침으로 단단히 꿰맸다. 아래쪽 시신은 단약(丹藥)으로 녹 여버리자 한 줌 액체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영경과 약란은 제하아가 떠나가자 산수를 감상하며 돌아다녔다. 둘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여기 저기 구경하고 돌아다녔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신조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불노가 서서히 선회 하며 내려왔다. 영경은 웃으며 말했다. "며칠 동안 요곤을 처치하느라 불노가 공중에서 무얼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네. 지금 날아온 것은 반드시 무슨 연고가 있을 거예요. 이곳 경물도 훌륭하긴 하지만 선산(仙山)의 경치만은 못한 것 같군요. 전부터 자령곡의 풍경이 대단히 뛰어나단 말을 들었는데 오늘 오후면 바로 진씨자매가 위험에서 벗어나는 때예요. 미리 가는 것은 좋지 않지만, 어쨌든 그녀들과 함께 선부로 돌아가야 잖아요? 이 기회에 자령곡의 경치나 감상해 보는 게 어떻겠어요?" 약란은 어릴 적부터 홍화모모를 따라 수많은 선산영역(仙山靈域)을 두루 돌아다녀 보았기 때문 에 안탕산의 경치가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자령곡에 관한 얘긴 자신도 진작부터 들어왔고, 또한 처음 가보는 곳이라 선뜻 응했다. 비록 별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결과가 궁금하고 진씨자매의 안위가 걱정스러웠 던 판에 잘됐다 싶어 재빨리 신조 등에 올라타고 황산 자령곡을 향해 떠났다. 허공을 박차고 삼십 장 가량 솟아올랐을 때, 아래쪽에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약란이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바위 계곡과 숲 속에서 수많은 산민(山民)들이 뛰쳐나와 일제히 하늘을 향 해 쳐다보고 절을 하고 있었다. 이 산은 원래 산세가 수려하여 나무꾼과 약초 캐는 사람들이 많았고, 짐승들도 많이 살았다. 땅 도 비옥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던 중 어제 안호에서 홍수가 일어나려 함을 보 고 일제히 짐을 꾸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였던 것이다. 만약 홍수가 일어났다면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령을 고사하고 기껏 일구어 놓은 논과 밭도 순식 간에 물에 휩쓸려 갈 판이었다. 그런데 선인(仙人)들이 와서 요곤을 제거하고 신조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자 모두들 나와서 하늘 에 대고 감사한 것이었다. 영경과 약란은 흐뭇해 하며 신조의 굳센 날개를 움켜쥐고 황산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그 뒤 두 사람은 진씨자매를 만나 흰토끼를 안고 함께 응벽선부로 돌아왔던 것이 다. 이제까지의 자세한 경과를 영운에게 다 얘기하자, 원성이 날듯이 동부로 뛰어들어와 벽사촌(壁 邪村) 옥청사태가 또다른 선고(仙姑) 한 분을 뫼시고 막 도착하였음을 알렸다. 함께 온 사람이 등 팔고임을 알고 일제히 나가 태원동으로 맞아 들였다. 동문들 가운데 등팔고와는 초면인 사람이 많아 영운이 양쪽을 서로 소개하였다. 인사가 끝나고 자리에 앉은 다음 옥청사태가 웃으며 말했다. "도우 여러분, 축하하오! 모두들 공행이 정진하여 이미 경지를 넘어섰구려. 개산성회(開山盛會)가 끝나고 나면 각자 출문(出門)하여 밖으로 공을 세우리다." 그녀는 말하며 이번엔 영경과 약란에게 하아를 도와 요곤을 제거한 수고를 높이 치하하였다. 그 리고는 영운과 자령 두 사람에게 말했다. "빈도가 이번에 온 이유는 첫째, 가사의 분부를 받고 왔소이다. 개산성회가 시작하면 각파 군선 (群仙)의 우두머리뿐만 아니라 선, 후배 동문도우들께서 모두 이곳에 와서 대전(大典)에 참석할 것이네. 하지만 <삼선이로>와 여러 사백숙(師伯叔)께서 장미교조의 유칙(遺勅)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있어 기일 전에 당도하기 힘드니 빈도더러 이곳에 가서 접대할 준비를 하라는 특명을 받고 왔지. 두 번째 이유는, 이번 보상부인의 초겁(超劫)을 비교적 쉽게 넘어가게 하기 위함이네. 하지 만 천마(天魔)의 공세가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이야. 그간 진도우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고 <삼선> 사숙께서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으니 비록 처음엔 위험도 있고 어려움도 따르 겠지만 큰 일은 없을 것이라네. 빈도의 이전 선사(先師)께선 방문인(旁門人)이셨지. 예전에 천겁을 당하실 때 여기 계신 등팔고도우가 옆에서 도와주셔서 어려움을 넘긴 적이 있다네. 게다가 등도 우에게는 마화(魔火)를 제압하는 설혼주(雪魂珠)가 있으니 걱정 말게나. 다행히 등팔고께서는 법 체(法體)가 완전히 복원되어 이곳에 올 수가 있었지. 그러니 진도우자매와 사도평도우와 함께 동 해로 가서 보상부인이 천겁을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고 선부로 온다면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삼선>께서 폐문(閉門)하고 행법(行法)을 시전 중이시니 시일 전엔 배알할 수가 없네. 물론 이전의 신유지법(神遊之法)을 사용하여 동부로 들어가면 보상부인을 만날 수도 있겠 지. 그러나 모녀가 지금 상봉하는 것만은 결코 안 되네. 우선 보상부인은 시간이 급박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네. 그리고 <동해삼선>께서 그곳에 같이 계시기 때문에 이파사마(異派邪魔) 따윈 감히 엿볼 수도 없다네. <삼선>께서 장미진인의 유칙을 받드느라 폐문한 틈을 타 잠복하여 침해하려 생각을 한 적들도 있다네. 그래서 현진사숙께서 선천둔법(先天遁法)으로 봉쇄해 버려 바깥 사람은 문호를 발견할 수가 없도록 해두었네. 그런데 만약 어머니를 만날 작정으로 동부로 들어간다면 오히려 적에게 입구를 간파당해 침범할 수 있게 만드는 꼴이 되어버리지. 여러 도우들이 그곳에 당도하면 입구 바깥은 평상시대로 여전히 봉쇄되어 있을 것이야. 그곳을 등팔고사저께서 암중에 순시하며 지킬 것이네. 아무리 강적이 침범하더라도 입구를 찾지 못하면 별 탈이 없을 것이야. 방 비에 대해선 설산에서 이미 나와 팔고사저가 함께 의논해 두었으니 걱정할 것 없어. 도착해서 팔 고사저의 지시대로만 따르면 삼선께서 출동하시는 시일까지 아무 일없이 잘 방어할 수 있지. 그 러니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서둘러 만나게 되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니 조금 참아야 해. 사도우 가 신타 을진인으로부터 얻은 오룡전(烏龍剪)은 아주 유용할 것이네. 하지만 미진기와 백미침과 같은 보물은 적을 막아내는 데는 효용이 있지만 천마(天魔)가 공격해 올 땐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되네. 공연히 지보(至寶)를 훼손시켜 망가뜨릴 뿐이야. 현진사숙께서 사전에 지시를 할 것이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 일이 생길까 봐 빈도가 가사께 간곡히 부탁드려 현기(玄機)를 적은 서첩을 받았다네. 시기가 되어 열어 보면 자연 효용이 있을 것이네." 옥청사태는 말을 마치고 서첩 한 통을 건네주었다. 자령과 한악은 옥청사태의 말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사도평과 함께 세 사람은 땅에 엎드려 감사하단 말을 그치지 않았다. 옥청사태는 이들을 황급히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모두 한가족으로 당연한 일인데 왜 이러는 건가?" 자령이 말했다. "저희 자매는 어머니의 겁수만 생각하면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대사(大 師)께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선기(仙機)를 가르쳐 주시고, 게다가 등선고어른의 도움도 받을 수 있게 하신 점, 결코 잊지 않겠나이다. 이 사실을 아시면 어머니도 무척 감격해 하실 겁니다." 옥청사태가 말했다.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같은 집안 사람끼리 이런 격식을 차릴 필요가 어딨나? 다만 하루 빨리 보상부인께서 겁수를 면하시길 바랄 뿐이네." 잠시후 자령, 한악, 사도평과 등팔고 네 사람은 동문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동부를 떠났다. 응벽애 앞에 당도하여 자령은 신취(神鷲)가 이번 일엔 필요없다는 옥청사태의 말을 생각하고 아 미산에 남겨 두기로 하였다. 자령이 세 사람을 향해 손을 들어 미진기를 시전하자, 한 폭의 채운 이 즉시 일어 네 사람을 감싸고 허공을 뚫고 날아올랐다. 동해로 <천호> 보상부인의 천겁을 도 와주러 가는 것이다. 천호의 삼재천겁 運仙傳 發火震伏尸 破狡謀 分波擒異獺 진자령자매와 사도평, 등팔고 네 사람은 속력을 한껏 돋구어 그 날로 동해(東海)까지 날아갔다. 이제 얼마 안 가서 보상부인이 갇혀 있는 곳에 당도하게 될 것이었다. 일행이 지상으로 당도하려는 때였다. 문득 맞은편 해안 가까이 우뚝 선 조오기(釣鰲磯) 위에서 금빛 광채 한 줄기가 솟구치더니 곧바로 일행쪽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언니, 저것은.....?" "적이 아니야. 우리 동문의 검광이야. 내려가자꾸나!" 한악의 호들갑을 막고서 진자령은 이내 미진기를 거두어들인 다음 광채쪽으로 마주쳐 나아갔다. 이전에도 늘 삼선동(三仙洞)에 참배하러 온 적이 있었던 그녀는 영접나온 인물이 다름아닌 현진 자(玄眞子)의 수제자 제갈경아(諸葛警我)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 제갈경아가 직접 여기까지 마중 을 나왔다면 분명 어머니 보상부인의 초겁(超劫)과 관계가 있으리라 싶어, 그녀는 속으로 여간 반 갑지가 않았다. "어서들 오십시오!" 제갈경아가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셨어요? 제갈사형!" 자령자매도 깍듯이 답례를 올렸다. "등선배님께서도 오셨군요!" "안녕하시오? 사부님은 어디 계신가?" 피차간에 수인사가 끝나자 일행들은 둔광(遁光)을 거두고 함께 조오기 벼랑 위로 내려섰다. 제갈경아는 차분한 음성으로 스승이 지시한 것들을 차례차례 들려주었다. "백모(伯母) 보상부인께선 고행을 원만하게 이루시고 이제 겁난에서 벗어날 때가 박두하셨습니 다. 한데 저희 사부님은 공교롭게도 지금 장미사조님의 유칙(遺勅)을 받들어 폐관수법(閉關修法) 중이시라, 기약된 날짜가 와야만 출동(出洞)하셔서 백모님의 초겁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현재 우려되는 것은 백모님의 과거 원수들이 소문을 듣고 날짜 전에 쳐들어와서 방해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또 사부님은 두 분 사매님이 얼마 전 자령곡(紫鈴谷)에서 장령자와 싸웠던 일도 아시고 사뭇 걱정이 대단하셨지요. 이런저런 까닭에 사부님은 사전 대비를 계획하시고 절더러 오늘부터 이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말고 경계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여기를 지키며 강적이라도 나타나면 어쩌나 싶어 한창 걱정하던 참인데 반갑게도 네 분이 한꺼번에 오셨으니 마 음 든든합니다. 이제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핫핫!... 두 사매님은 모친을 몹시 뵙고 싶겠지 요. 그래도 좀 참으셔야겠습니다. 백모님께서 계신 동굴은 지금쯤 한창 풍뢰(風雷)가 세차게 휘몰 아치고 있을 겁니다. 가봤자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서 있는 이 조오기(釣鰲磯)는 해면 으로부터 수백 장 높이나 솟아오른 암벽입니다. 백모님이 계신 동굴에서 겨우 수십 리밖에 안 떨 어진 곳이라 사태를 관망하기도 아주 좋습니다. 또 무슨 변고가 일어나더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가서 응원하기에 안성맞춤이지요. 사부님 말씀을 듣건대, 날짜 전에 쳐들어올 사마외도(邪魔 外道)의 괴수들은 대부분이 걱정할 게 못되는 듯싶습니다만, 오직 하나 만만치 않은 적수가 있습 니다. 바로 대붕만(大鵬灣) 철적요(鐵笛拗)에 사는 <익도인(翼道人)> 경곤(耿鯤)이란 도사 말입니 다. 그 자는 도술도 높고 강력한 데다 심술마저 악독스럽기 짝이 없답니다. 자기 아우가 예전에 백모님한테 죽음을 당했으므로 그 원한을 갚으려고 올 것이 틀림없다는 저희 사부님의 말씀이 계 셨습니다. 더구나 이 인물은 정파, 사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혼자 살아가는 산선 (散仙)의 부류이지요. 다른 요마들이 대다수 이번 기회에 백모님의 본명원태(本命元胎)를 눈독들 이고 오는 반면, 이 경곤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백모님의 공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영영 파멸시 키기 위해 그 한 가지 목표만을 노리고 올 것입니다. 이 자의 실력은 막강합니다. 평소 그 실력을 자부하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해온 놈입니다. 더구나 겨드랑이에 쌍날개가 돋아 있어서 눈 깜짝 할 동안에 천리길을 날아가는 재간을 지녔지요. 비마대법(秘魔大法)에도 정통해서 출몰이 자유자 재인 데다 변화가 무궁무진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공지둔술(玄功地遁術)까지 능숙하게 익혔으므로 산이나 암벽도 깊숙이 뚫고 들어갈 수 있답니다. 마음만 내키면 지옥에라도 드나들 정도라니까 정말 여간 지독스런 위인이 아니지요. 그 자는 아마 저희 사부님이 나오시더라도 고분고분 물러 서기는커녕 서슴지 않고 덤벼들어 승부를 가릴 위인입니다. 그러니 우리들 몇몇이야 어디 안중에 나 들겠습니까? 그저 다행스러운 것은 이 자의 심성이 제법 공명정대한 편이라 여간해 가지곤 귀 신처럼 간계를 부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을 믿는 수밖에요. 그래서 저도 이 자가 여기 형편을 전혀 모르고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설령 저희 사부님이 폐관 중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더 라도 그 성격으로 미루어 비겁하게 사전에 기습공격 따위는 안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일은 그저 낙관만 할 것도 못됩니다. 경곤이 아니더라도 또 쳐들어올 요마들 역시 우리보다 실력이 약 한 놈들은 아니니까, 그놈들에 대응할 방법도 신중하게 세워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 나름 대로 이렇게 작전을 짜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렇게 다섯 사람 중 셋은 이곳 조오기 전망대에 서 경계 파수를 맡고, 나머지 두 분은 백모님의 동굴 앞으로 직접 나가셔서 전후 좌우로 순찰 경 계를 도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적이 공중으로부터 기습침투를 할 수도 없고, 동굴 정면에 나타 나 요법으로 암습을 시도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현재 저희 사부님을 비롯해서 여러 어르신네들은 모두 본산(本山)에 폐관 중이시고, 또 젊은 동문들은 제각기 스승의 분부를 받들어 아미산에 집결 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겁수(劫數)가 닥칠 이 열흘 동안에 우리를 도와줄 우군(友軍)은 하나 도 없는 셈입니다. 그밖에 여기에 다른 응원병력이 오지 않으리란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요. 형편이 이런만큼, 만약 순찰 경계를 도는 도중 바위나 모래, 나무숲이 수상쩍게 움직일 때에 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수상한 기미가 발견되는 즉시 검광 을 쏘아 경보를 내려야 합니다. 끝까지 단 한 순간이라도 경계심을 늦추거나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마치고 제갈경아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진자령이 먼저 응낙했다. "좋은 말씀입니다. 저희들은 사형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행동계획이 결정되자 일행은 두 패로 나누어졌다. 진자령과 등팔고 두 사람이 동굴 앞으로 진출 하여 사방 순찰경계를 맡기로 하고, 사도평과 진한악은 제갈경아를 따라서 천연의 전망대 조오기 에 머물러 파수경계를 맡기로 한 것이다. 계획은 즉각 실천에 옮겨졌다. 진자령은 등팔고와 함께 둔광을 일으켜 타고 보상부인이 원형(元 形)을 단련하고 있는 해안 동굴로 날아갔다. 당초 <천호> 보상부인이 병해(兵解)를 마쳤을 때, 현진자는 그녀가 진작부터 이미 개사귀정(改 邪歸正)한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여 방외(方外)의 교분을 맺었다. 더구나 천호는 그 이전에 수제자 제갈경아가 삼재(三災)를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은 혜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진자는 <극락진인(極樂眞人)> 이정허(李靜虛)의 부탁을 받아 병해를 마치고 난 보상부 인의 육신 껍질을 삼매진화(三昧眞火)로 불살라 매장한 다음, 이곳 삼선동 부근 해안에 은밀한 석 굴 하나를 찾아서 그녀의 원신(原身)을 인도하여 연형잠수(煉形潛修)를 하도록 안배했다. 그리고 석굴 외부에는 풍뢰(風雷)의 봉쇄망을 둘러쳐서 사마(邪魔)들이 침투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보상부인은 비록 이단의 출신이지만 원래부터 천 년의 도행을 쌓고, 또 <극락진인>으로부터 큰 감화를 받은 몸이라 현기(玄機)를 깊이 꿰뚫어 그로부터 현진자가 마련해 준 동굴 안에서 불철주 야 온갖 모진 고초를 달게 겪으며 참수(參修)에 노력했다. 그 결과 몇 년이 못되어 마침내는 형신 (形神)이 방울방울 응결되고 혼백(魂魄)도 모여 굳어지더니, 갓난아기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한 것 이다. 그녀는 초자연의 정적(靜寂)과 혼연일체가 되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삼세의 전후인과(前後因果) 를 묵연히 깨우쳤다. 그리고 동굴속의 모진 풍뢰를 달게 받아 죄업을 씻고 형신을 단련한 다음, 기왕에 정해진 세 차례의 천겁을 떳떳이 극복해 내고서 다시 저 세상에 나서리라 굳게 결심했다. 요행 천겁을 무난히 모면하고, 세상에 나가서 외공(外功)을 원만하게 이룸으로써 과거의 죄업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그녀는 곧바로 성도비승(成道飛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하루하루 견뎌내기 어려운 강풍과 벼락의 지옥 속에서 고심참담 잠수(潛修)하는 동안 그 녀의 도력은 크게 정진되고 갓난아기의 형체도 점점 자라났다. 그녀는 또 신외화신(身外化身)의 술법을 써서 오행감리(五行坎離)를 조화시켜 본명원단(本命元 丹)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하루바삐 영태(靈胎)를 길러내어 천겁을 피하고 정과(正果)에 참입(參入)하는 원동력을 삼을 생각이었다. 이런 가운데 어느날 갑자기 현진자가 찾아왔다. "장미사조께서 남기신 유칙을 보고 알았소만, 보상부인의 도력이 정진되는 만큼 천겁 또한 앞당 겨오고 있소. 그 천겁은 요행으로 모면할 것이 아닙니다. 부인의 영태가 처음 잉태되는 날이 바로 부인에게 천겁과 대난이 닥쳐올 시기가 됩니다. 내 당초 이 석굴을 풍뢰로 봉쇄한 의도는 부인의 원신이 미처 응고되기 전에 외마(外魔)들의 침투가 있지나 않을까 해서였고, 또 이 풍뢰의 힘을 빌어 부인이 심신을 단련함으로써 장차 닥쳐올 겁난에 어느 정도 쉽게 대응할 만한 인내력을 길 러드리기 위해서였소. 그래서 이 때쯤 되었으면 더 이상 필요치 않으리라 싶어 거두어들이려 했 는데, 뜻밖에도 부인의 과거 저지른 죄업이 너무나 무거워 그로 인해 맺은 원수도 적지 않게 몰 려들고 있는 걸 알았소. 이 적수들은 천겁이 닥치기 전에 먼저 침투해서 부인의 도심을 어지럽힐 것이오. 이들의 침투를 막으려면 방법은 현재로선 오직 하나, 풍뢰 봉쇄의 위력을 지금보다 더욱 증강시키는 길뿐이오. 나는 그 방법을 택하기로 했소. 풍뢰가 너무 치열해지면 필경 지각(地殼) 속의 진화(眞火)까지 건드려서 불타오르게 만들 것이외다. 이제 나는 선사님의 분부를 받들어 폐 관정수에 들어가야 하오. 부인도 아시다시피 일단 폐관에 들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정해진 날짜 전에는 나와서 도와드릴 수 없게 됩니다. 오로지 믿을 것은 풍뢰진화뿐인데 이것도 뜻밖에 막강 한 고수라면 막아낼 수 없을지도 모르므로 달리 묘일부인(妙一夫人)께서 비검전서를 띄워 응벽애 에 있는 두 따님과 사도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리로 달려와서 방어하도록 조치해 놓았습니 다. 이제 풍뢰가 치열해지고 진화까지 덧들인다면 부인도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고 초를 이겨내기에만 급급해 하다가 자칫 애써 이루어 놓은 공덕을 그르칠까 걱정이 되어 내 일부 러 알려드릴 셈으로 온 것이오. 아시겠습니까, 보상부인! 꿋꿋하게 버티셔야 합니다." 현진자는 신중하게 거듭 당부하고 나서 다시 <천호> 보상부인에게 호신용 법보 한 개를 빌어준 다음 석굴에서 나갔다. 보상부인의 감격이야 이루 형언할 길이 없었다. 주사위는 이제 던져졌다. 필생의 심원(心願)이 바로 며칠 안 남은 날짜에 달려 있는 것이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천겁의 세 관문을 돌파하느냐 못하느냐? 천겁이 닥치기 전에 그 틈을 노 리고 습격해 올 무수한 강적들을 무난히 격퇴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 자신의 주변에는 오직 풍 뢰의 장벽만이 보이지 않게 둘러쳐졌을 뿐이다. 두 딸애와 사위녀석이 온다고 했지만, 이 젊고 경험없는 것들이 무슨 수로 강적의 공세와 암습 을 막아낸단 말인가? 이 난관만 뚫고 나간다면 영겁(永劫)의 침륜(沈淪) 속에서 벗어나 팔표굉우(八表宏宇)를 한껏 날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든지 극복해야 한다. 필생의 업원(業願)이 바야흐로 이 며칠 안에 이루어지느냐 실패하느냐 결판날 것이다. 그녀는 막연한 기대감과 희열에 몸을 떨었다. 그 사이로 스며드는 두려움과 의혹을 떨쳐버리고 한층 분발하여 수련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진자령과 등팔고 일행이 해안에 다다랐을 때는 바야흐로 지각 속의 진화가 발동하고 강풍 벼락 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동궁은 아주 으슥한 암벽 아래 자리잡았는데, 사람이나 동물이 드나 들 만한 구멍이 여기저기 숱하게 뚫려 있었다. 하지만 현진자의 법술로 단단히 봉쇄되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침투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동 굴의 중심부는 땅 속 까마득히 수직으로 내리뚫렸고, 보상부인의 진신(眞神)은 그 속에 숨어서 불 철주야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로 떠나기 전 미리부터 옥청대사의 경고를 받은 진자령이라, 그녀는 섣불리 출입구 쪽으로 접근하지 않고 동굴이 뚫린 암벽의 측면에서도 멀찍하게 수십 장 거리나 떨어진 지점에 내려섰 다. 거기서부터 더 이상은 범접할 수가 없다. 미진기의 채광을 거두어들이고 나서 그녀는 우선 주변 상황부터 정탐하기 시작했다. 두 눈길은 저도 모르게 어머니가 계실 석동 출입구로 향했다. 내리깎아지른 듯한 암벽 아래 퀭하니 입을 벌 이고 있는 동굴 어구, 울퉁불퉁 기괴한 바윗돌만 그득하게 쌓였을 뿐, 별달리 수상쩍은 기척이 없 다. 분명 현진자가 위력이 막강한 봉쇄장벽을 설치해 놓았다고 했는데 무형의 장벽이라서 그런지 사 뭇 허술하게만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자령도우, 와서 들어봐요!" 등팔고가 손짓해 부른다. 진자령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엎드려서 땅바닥에 귀를 대고 들어보았다. 은은하게나마 진동음이 전해온다. 우르르...! 휘리리, 휘리릭!... 우르르, 쿵쿵! 땅 속에서는 물결치듯 진동하는 굉음이 제일파, 제이파, 차례로 들려왔다가는 사라졌다. 지상에 서 이 정도 크기로 들릴 정도라면 지하의 상황은 엄청날 것이 틀림없다. 진자령은 의아스런 눈초리로 등팔고를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몇 차례인가 어머니를 만나려고 드 나든 곳이지만 이렇게 엄청난 굉음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등팔고는 그녀의 심사를 짐작하고 안심시켰다. "이것은 분명 현진자사백께서 안배해 놓은 장벽 때문일 거야. 지난 번 여기 왔을 때는 어땠는 고?" "강풍과 벼락이 동굴 주변을 휩쓸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어요. 한데 지금은 바깥이 쥐죽은 듯 잠잠하고 안에서 굉장한 소리가 들리네요." "아마도 땅 속 깊숙한 곳에서 진화까지 솟구쳐 나오고 있는 모양이군요. 천둥 벼락에 화염마저 바깥으로 솟아오른다면 도리어 적의 눈길을 끌어들이기 십상일 겁니다. 그래서 현진자사백님은 술법으로 이것들의 소리와 불꽃을 가리워 놓았겠지요. 누구든지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그 오묘 한 위력을 실감하기 어려울 거예요. 우리들처럼 도력이 얕은 위인들이 여간해서 그것을 눈치채게 해놓으셨을 리가 만무하지!" 진자령은 빙그레 미소띤 그녀의 얼굴에서 겸손해 하는 기색을 읽었다. <여앙신(女殃神)> 등팔고(鄧八姑)가 어떤 인물인데 눈치를 못 챌리 있겠는가? 아마도 현진자의 방어장벽을 뚫고 잠입할 만한 실력마저 감추었으면서 짐짓 시침을 딱 떼는지도 혹시 모른다. 이 모두가 자기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인 줄 뻔히 안다. 그러기에 진자령은 등팔고의 겸손한 호 의가 더욱 뼛속 깊이 느껴졌다. "자, 이제 갑시다!" 등팔고는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쑥 한 마디 건네고는 앞장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이윽고 동굴을 중심으로 연거푸 두 바퀴나 순찰을 돌았다. 전신경을 눈과 귀에 모으고 샅샅이 수 색해 보았으나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전혀 수상쩍은 기미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조오기 파수대 정상에서 경계를 하던 한악은 벌써부터 무료감을 참지못해 언니의 순찰대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진자령과 등팔고 두 사람은 밤을 꼬박 새운 채 새벽에도 땅에 닿을 듯 낮게 비행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순찰경계를 하고 있었다. 한악은 물론이려니와 진자령 역시 등팔고가 자기네 모녀와는 그리 깊은 교분도 없으면서 그토록 성심성의껏 애써주는 것이 몹시나 안쓰러웠다. "언니, 내가 왔어!" "마침 잘 왔구나. 등도우님, 제가 동생하고 둘이서 계속 순찰할 테니, 그만 조오기로 건너가 쉬 십시오." "아니, 아직은 괜찮소." "아니에요, 제가 언니하고 있겠어요. 등선고님은 좀 쉬셔야 해요." "아직 교대할 만큼 지치지도 않았는데....." "저희 어머님 일인데 저만 편하게 있어서야 어디 되겠어요? 그럼 저희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 다." 등팔고는 자매의 어조의 사뭇 은근하고 반면에 미안스런 기색을 띠는 걸 보았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들 자매의 능력은 자기보다 훨씬 떨어진다. 하지만 이 젊은이들과 사귄 것은 그리 오래 지 않은 터라 피차간에 아직도 깍듯한 예의를 주고받고 있다. 이런 처지에 솔직하게 그 사실을 말해줌으로써 자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가 않았다. 더구 나 어머니를 자기네 힘으로 보호하겠다는 효성을 보아서라도 더욱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던 것이 다. 등팔고는 선뜻 내키지 않으면서도 순찰임무 교체를 수락했다. "그럼 좋소. 만약 적이 나타나거든 부디 조심하시오. 섣부르게 상대하지 말고 먼저 경보부터 발 해야 하오. 내 말뜻 아시겠소?" "예, 잘 알아들었습니다." 자매의 당찬 대답을 듣고서 그녀는 한악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천연의 전망대로 날아갔 다. 등팔고가 떠난 후, 한악은 언니와 사이좋게 순찰을 돌았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해가 서편 바다 로 기우는 줄도 몰랐다. 그 하룻동안에는 공중에서나 지상에서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서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한악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앞서 날던 언니의 옷자락을 잡 아당겼다. "언니, 우리가 이렇게 함께 날아가면서 순찰을 돌 게 아니라, 나누어 가지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면 어떨까? 어머님이 시신 석굴을 중심해서 반대로 돌아보면 혹시나 그냥 넘어갈 방향도 살피 게 될지 모르잖아." "그래,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자령의 생각에도 역시 그럴 듯싶어 순순히 응락했다. "언니는 왼쪽으로 도세요. 나는 오른쪽으로 돌 테니까." 한악은 언니가 대답도 하기 전에 벌써 앞질러 날아갔다. 혼자 뒤처진 자령도 이제껏 살펴왔던 길을 되돌아 날기 시작했다. 진자령이 반 바퀴 남짓 돌아갔을 때였다. 갑작스레 수평선 한 귀퉁이에서 돛쪽만한 먹구름이 뭉 게뭉게 일더니만 석양 노을빛 아래 점점 바닷가를 향해 옮겨오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구름의 시커먼 머리쪽은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면서 먹물통을 뒤집은 것처럼 붉은빛 가득한 천공(天空)을 물들이며 번져나갔다. 잿빛 구름의 끝자락은 마치 승천하는 해룡(海龍)이 꼬리치듯 펄떡거리면서 수직으로 해면에 닿은 채 쉴새없이 좌우전후로 마구 요동질치고 있다. '이상하다. 웬 먹구름이 몰려오는 거야? 폭풍우가 일려나?' 수평선 까마득한 곳에서 한 가닥 백선(白線)이 바다를 두 쪽으로 가르듯 은은하게 나타났다. '아냐, 바닷가에서 파도를 바라볼 때는 워낙 변화막측하게 보이는 법이거든. 저것 봐! 물빛도 금 방 달라졌지 않아?' 자령은 속으로 자신을 달래면서 빛나는 눈초리로 먹구름 속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그래, 다행히 요사스런 기운은 없구나. 아휴, 한숨 놨다. 괜한 걸 가지고 속을 태우다니!' 그러나 한참 있더니 그 먹국름장은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갔다. 회백색 구름 끝자락도 풀뿌리처럼 수없이 갈라져 내린다. 마치 천공에 한 폭의 검은 장막을 펼치고, 그 아래로 길고 짧은 잿빛 이삭 을 수도 없이 드리워 놓은 것 같았다. '저것 봐라, 뿌리 같은 물기둥이 빙글빙글 돌잖아? 팽이처럼 마구 돌잖아.' 더 이상 생각할 여지도 없다. 순식간에 폭풍이 휘몰아쳐 온 것이다. 슈우우우!... 콰당! 슈우우웅!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풍경은 돌변했다. 바닷물이 뒤집혀 길길이 날뛰는 가운데 광풍노도가 엄 청난 힘으로 해안 절벽에 밀어닥치더니 해면 위로 돌출한 암초를 들이박고서 천지개벽하는 듯이 진동한다. 꽈르르릉! 콰당! 수천 수만 개,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숱한 물줄기가 은빛 화살처럼 산지사방 허공으로 뻗쳐 올랐다. 암초에 부닥쳐 흩어진 물기둥은 백 장 높이나 솟아올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시각은 그곳에서 순간적으로 정지한 듯했다. 석양 노을 빛을 흩뿌리던 태양도 이미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천지는 캄캄한 암흑에 잠긴 채 귀청을 찢는 듯한 뇌성벽력만 가득하다. 천지 만물은 엄청난 자연의 위력 아래 벌거숭이 몸뚱 이를 온통 그대로 드러내고 모질게 밀어닥치는 비바람에 떨며 시달리는 것이다. 휘리릭, 휘리릭! 쏴아... 콰다당! 휘리릭... 쏴아... 콰다당! 세상에 종말을 알리는 소리가 있다면 아마 이 소리와 똑같으리라. 세상의 종말이라도 고하듯, 줄 기차게 휘몰아치는 광풍노도의 진동과 굉음은 그칠새 없이 계속되었다. 얼마 안 있어 해일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물의 장벽이었다. 투명한 초록빛 물벽은 소리없이 닥쳐 와서 해안 전체를 깡그리 휘말아 먹을 듯했다. 꽈당! 쿠다당! 평지조차 깊이 몇 길이나 되는 물바다를 이루면서 거칠 것 없이 밀어닥친 해일은 보상부인의 동 굴 앞 이삼 리 거리를 두고 무슨 보이지 않는 장벽에라도 막힌 듯 주춤거리더니 끝내 넘어가지 못하고 '쏴아!' 소리를 내며 썰리기 시작했다. 뒤미처 밀려든 파도가 썰물과 맞부딪쳐 다시 기세를 올리는 듯하더니, 해일은 거대한 소용돌이 를 이루고서 제이파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쓸려나갔다. 쏴아, 우르르 콰당! 거센 파도가 미친 듯이 멈출 줄 모르고 엄습해 왔다가는 무형의 장벽에 가로막혀 되쓸려 가기를 수십 수백 차례, 그 때마다 보상부인의 동굴 암벽은 당장에라도 삼켜질 듯 풍전등화격이면서도 용케도 아직 끄떡이 없다. 해일을 가로막은 무형의 장벽이 현진자어른이 설치한 법력의 작용인 줄 뻔히 알면서도 진자령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 흉흉하고 도도한 자연의 기세 앞에 자신의 힘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 으니 안타까움과 무력감만을 느끼면서 휘몰아 덮쳐오는 광풍노도의 맹렬한 공세가 한시바삐 물러 가기만을 기원하는 게 고작이었다. 폭풍우 속에서도 전전긍긍, 두 자매의 순찰비행은 그칠 줄 몰랐다. 풍세가 갈수록 거세지고 귀청 을 찢는 바다의 포효성도 일로 사나와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오직 들리는 것이라곤 천지를 진동하는 파도의 성난 포효성뿐이다. 반딧불 같은 두 자매의 검광이 때로는 파도를 타고 날았다. 산더미만한 파도의 머리가 밀어닥칠 적마다 칼빛 아래로 어룡(魚龍)과 괴물의 형상이 물결 따라서 꿈틀거리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환영(幻影)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녀들은 순간적으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조오기(釣鰲磯) 벼랑 위에서도 세 사람이 당장에라도 휩쓸려 날아갈 듯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잔 뜩 긴장한 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그들은 엄청난 폭풍우 속, 해면 수백 장 높이 치솟은 벼랑 끝을 딛고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악스럽게 기승을 부리던 폭풍은 그날 밤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멈추었다. 한껏 부풀어오 른 해면도 잠잠해지고 바닷가에 밀려왔던 해수도 남김없이 쓸려나갔다. 먹구름의 장막이 활짝 걷히고 천공에는 또다시 맑은 빛이 가득찼다. 허공에 덩실 매달린 반월은 외롭게도 그 너르디너른 하늘과 일망무제(一望無際)가 없는 수평선 끝까지 벽록(碧綠)의 짙푸른 바다를 비추었다. 쏴아, 우르르, 쏴아, 우르르! 넘실넘실 파도치는 소리가 장단 맞추듯 해맑고도 우렁차게 울렸다. 폭풍이 지나간 후의 바다 경 치는 한결 장엄하고 윤택해 보였다. '무사히 고비를 넘겼어. 정말 다행이로구나!' 진자령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여전히 순찰비행을 계속했다. 좀전에 엇갈려 지나간 아우도 자기와 같은 생각을 품었으리라. "누구냣? 야잇!" 갑자기 멀리서부터 한악의 야무진 외침이 들려왔다. 진자령은 본능적으로 검광의 속력을 돋구었 다. 유성처럼 벼랑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그녀는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다. "앗!" 놀라움도 한 순간, 진자령은 어느덧 둔광을 일으켜 타고서 현장으로 덮쳐들어 갔다. 그곳에서 진한악은 다섯 놈의 괴물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옷가지라곤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나체의 괴물, 눈처럼 희디흰 몸뚱아리를 온통 드러내고 이글이글 불타는 듯한 시뻘건 눈동자를 데룩거리면서 짐승 쫓는 몰이꾼과도 같이 한악을 슬금슬금 한가운데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초록빛 머리카락은 바닷바람이 스칠 때마다 마귀가 손가락 젓듯 너울너울 흩날렸다. 자령곡이나 응벽애에 있을 적부터 제멋대로 굴다가 몇 차례 혼뜨검이 났던 한악은 그래도 그 낭 패를 거울삼아 이젠 과거처럼 마구 날뛰는 말망아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천둥벌거숭이로 날뛴 값 을 톡톡히 치르고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름대로 경험을 제법 쌓은 그녀는 동해에 당도한 이래 그 이틀 동안 비록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래도 어머니를 위해 근심하는 효심에서 언니에 뒤지지 않게 추호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저녁나절부터 엄청나게 몰아닥친 폭풍우 속에서도 한껏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고집스럽게 발길 한번 잠시도 멈추지 않고 억센 비바람을 거슬러가며 돌고 또 돌았다. 그녀의 온신경은 벌써부터 긴장감에 팽팽하게 부풀어, 바람도 물결도 잠잠해지고 달빛 아래 기막힌 바다의 장관이 펼쳐졌는 데도 눈길 하나 던지지 않은 채 그저 동굴 주변을 경계하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한악이 그처럼 한참 순찰비행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앞쪽 모래톱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 여울목의 숲 속에서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한악은 대뜸 숲 속으로 뛰 어들어 갔다. 질퍽질퍽한 습지에 이름도 모를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찼을 뿐, 바닷바람조차 통하지 않는 듯 후덥지근하고 매캐한 공기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따금씩 나뭇가지 틈새로 달빛 이 비쳐 들어와 물기 머금은 잎사귀들만 번쩍거렸다. 한 바퀴를 돌면서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으나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이것 봐라. 내가 바람결에 나무 그림자 흔들리는 걸 잘못 봤나? 아무것도 없잖아? 너무 긴장해 서 헛것이 비친 모양이야.' 그녀가 막 숲을 벗어나올 때다. 무심결에 고개를 떨구다 보니, 저만치 앞쪽의 모래바닥이 부스럭 부스럭 붕긋하게 솟아오르고 있지 않는가? '저런, 바다거북이란 놈이 알을 까 놓았구나. 거북은 한밤중에야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모양이지? 흠흠, 신기해.' 갓 태어난 새끼 거북을 볼 양으로 지긋이 지켜보고 있노라니, 그 모래더미는 거의 세 척 높이까 지 치솟았다가는 풀썩 허물어져 내렸다. 그리고 여느 모래바닥처럼 평평해져서는 방금 솟구친 흔 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 참 이상하구나. 무슨 놈의 거북이가 세상에 나오다 도로 들어간담?' 고개를 갸우뚱하는 판에 이번에는 너댓 자 떨어진 모래바닥이 먼저처럼 붕긋하니 솟구쳤다가 풀 썩 가라앉았다. 뒤미처 또 한 군데서도 풀썩! '이놈의 모래 속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세상에 참 별놈도 다 있지. 답답하게 모래 속 을 헤집고 다녀야 직성이 풀린다니! 괜한 걸 가지고 놀랐잖아? 호들갑스레 경보라도 울렸더라면 또 언니한테 퉁박이나 먹기 십상이지. 한눈 팔지 말고 어서 떠나자.' 세 번째 모래무덤이 풀썩 꺼지는 걸 보면서 한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곤 이내 딴 곳으로 떠나려 했다. 스르륵, 스르륵! 그것은 파도소리가 아니었다. 뱀이 풀섶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였다. 발길을 멈추고 흘깃 돌아다 보니, 제일 처음 솟구쳤던 모래무덤이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 나 아까처럼 풀썩 솟아오르는 게 아니라 태엽이 감기듯 원을 그리며 한쪽 방향으로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사면팔방 모래를 흩뿌리는 것이다.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모래바닥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 모래 속에서 무엇인가 힘센 놈이 숨결을 뿜어내는 듯하더니 이내 그 자리에 넉 자 가웃 깊숙한 구멍이 큼지막하게 퀭하니 뚫렸다. '이것 봐라, 도대체 뭐가 나오느라고 이 수선을 떠는 거야?' 한악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구멍 앞으로 다가갔다. 꾸부정하게 허리를 굽혀서 들여다보았으나 밑바닥은 눈길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녀가 구멍 속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머지 모래무덤이 솟구쳤던 곳에서도 소용돌이를 일으키면 서 물보라치듯 모래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한악은 흘낏 주변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나서 다시 첫 번째 구멍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 무렵 쯤 되자 그녀의 온신경은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사태를 직감하고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과연 그 예감은 딱 들어맞았다. 한악이 그 첫 번째 구멍으로 눈길을 갖다대는 것과 동시에 구멍 속에서도 시퍼런 풀섶더미 같은 것이 슬금슬금 솟아나왔다. 초록빛 풀더미가 지면으로 불쑥 솟구치기가 무섭게 새하얀 머리통부 터 나타났다. "이크! 웬 놈이냐?" 한악이 미처 고함을 치기도 전에 괴물은 어느덧 구멍 속에서 빠져나와 전신을 드러냈다. 초록빛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채 콩알만한 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한악의 시선 과 막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기급을 해가지고 뒤로 벌렁 나가자빠질 뻔했다. 그놈의 형상은 사람 같으면서도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콧날도 없이 움푹 파인 콧구멍, 번들번들 광채를 뿜어내는 새빨 간 두 눈알, 혈색이라곤 단 한 방울도 비치지 않는 창백한 살갗, 원숭이처럼 불쑥 내밀어진 아가리에 핏빛 만큼이나 붉은 입술 이 쩍 벌어졌다. 그 속에는 날카로운 어금니가 갈고리를 늘어놓듯 가지런하게 널려 있었다. 자그만 머리통에 비해 분을 바른 것처럼 새하얀 몸통은 물돼지같이 엄청나게 큰 데다 손발은 모 두 새 발톱처럼 가늘고도 긴 놈이다. 그것은 물에 빠져 죽었던 귀신이 되 살아난 듯 퉁퉁 불어터 진 형상이었다. 일순간 기절초풍, 뒤로 나자빠질 뻔했던 한악은 정신을 가다듬고 야무지게 호통을 질렀다. "야잇!" 첫눈에 요괴인 줄 알아본 그녀의 손아귀에서 검광이 번뜩 날아갔다. 그러나 괴물은 어수룩하고 둔해 보이면서도 여간 지독스런 놈이 아니었다. 한악의 비검이 순간적으로 그놈의 몸통을 휘감아 조였지만 해파리를 벤 것처럼 감촉도 반응도 없다. 몸뚱이는 두 토막이 나기는커녕 피 한 방울, 칼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악이 칼질을 한 것과 동시에 그 곁 모래무덤 두 곳에서도 꼭 같은 괴물이 튀어나왔다. 흐느적흐느적, 동작은 사뭇 느리고 둔중하면서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후딱 뒤돌아보니 어 느 틈에 솟아났는가. 또다른 두 놈이 등 뒤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서고 있다. 결국 그녀는 전후좌 우, 사면에서 괴물한테 단단히 포위당한 것이다. 아무리 비검을 거푸 쏘아날려도 괴물들은 요지부동, 터럭 끝 한 개 건드리지 못하자, 한악은 그 만 자지러지게 놀라고 말았다. '원 세상에, 무서운 비검을 직접 얻어맞고도 움쩍달싹을 않는 놈이 있다니!' 그녀는 난생 처음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감에 휩싸였다. 아무리 욕설을 퍼붓고 발악해 보았자 귀 신한테는 통하지 않는다. 정신없이 당황한 가운데서도 그녀는 겁먹은 눈길로 사방에서 조여들고 있는 다섯 괴물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좋다, 네놈들이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허공으로 빠져나가야지! 우선 포위망부터 벗어나고 보 자!' 그러나 한악이 공중으로 날아 올라갈 것도 없었다. 동생의 놀란 외침을 듣고 언니가 달려온 것 이다. 용기를 얻은 동생과 함께 진자령은 일제히 비검을 쏘았다. 그러나 다섯 마리 요괴는 유형무 질(無形無質), 몸뚱아리 형태는 있어도 바탕이 없다. 두 자매의 검광은 한낱 허공만을 휘감아 옭 고선 마구 베고 자르고 있을 따름이다. 괴물들은 검광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두 처녀를 에워싸고는 조여들어 왔다. "이상하다! 웬놈들이 난도질을 해도 마찬가지냐?" "모르겠어, 아주 처치곤란한 놈이야. 모래 속에서 불쑥 나와가지고 다짜고짜 몰려왔는데, 말 한 마디 없으니 정체를 알 수 있어야지!" "안 되겠군! 얘야, 경보를 울려라." 자령은 동생더러 경보를 울리라고 하면서도 어느 새 자신이 먼저 손을 치켜들었다. 오색 빛줄기 가 창공으로 '씽!' 하더니 솟구쳤다. 조오기의 전망대에 있는 세 동료한테 경보를 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다. 분명 약속한 대로 경계령을 쏘아올렸는 데도 바다 쪽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 다. 해상의 전망대를 지키고 있을 동료가 하나도 아닌 셋이나 되는데 모두 눈감고 잠들었는가. 전 혀 응원하러 오는 기척도 없는 것이다. '아차, 거기도 무슨 일이 벌어졌구나!' 진자령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선 괴물들이 점점 가깝게 조여들고 있다. 등 뒤쪽에서도 거 의 비슷하게 접근했을 것이다. 얼핏 보아서는 요괴들에게 무슨 재간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 체를 모르니 방심해선 안 된다. "한악, 공중으로 날자!" 악을 쓰듯 동생에게 소리쳐 알리고 그녀는 선뜻 몸을 뽑아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한악도 뒤따랐 다. '옳거니, 네깐 녀석들 그같이 아둔해 빠져서야 어디 우리 뒤를 쫓으랴?' 그러나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괴물 다섯은 그녀들이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르자 뒤미처 날아 오르는 게 아닌가? 공중에서도 포위망은 풀어지지 않았다. 놈들은 두 자매의 신변으로부터 오 척 남짓 간격을 두고 에워싼 채 일제히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러자 늑대 어금니 같은 치열(齒列) 틈 사이로부터 수백 줄기 가느다란 백색 기류가 실처럼 뿜어져 나왔다. 미리부터 방비하고 있던 자령은 그 즉시 미진기를 펼쳐 들었다. 한 무더기 채색 구름이 풀썩 피 어오르더니 삽시간에 두 처녀의 전신을 감싸버렸다. 괴물들이 공중 다섯 방향으로 습격해 왔을 때 한악은 돌아서서 언니와 등을 마주대고 앞뒤로 방 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움직인 방위가 괴물 한 놈과 너무 가까왔는지 끝내 백색 기류 한 가닥에 닿고 말았다. "앗! 언니!" 슬쩍 닿기만 했는 데도 한악은 그 자리에서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얼음조 각이 심장을 꿰뚫는 듯, 숨 한 모금 토해낼 수 없도록 짜릿한 고통이 엄습했다. "언니, 헉! 헉!" 가슴을 부여안고 핼쓱해져서 휘청거리는 동생을 보자, 진자령은 그녀가 사독(邪毒)에 중독되었음 을 깨달았다. 쓰러지려는 동생의 몸뚱이를 가누어 안고서 황급히 아미산에서 가져온 영단 두 알 을 꺼내 입 속에 물려주었다. "얘, 정신차려! 한악아, 정신차려!" 진자령은 동생을 소리쳐 부르다 말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놈들은 분명 이단의 사마(邪魔) 부류 가운데 속하는 요괴다. 우리 자매야 미진기로 호신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 다섯 놈 말고 또 다른 패거리는 없을까? 다른 놈들이 틈타서 어머니를 습격 했을지도 모른다. 아아, 이 노릇을 어쩌면 좋으냐? 아무리 온갖 짓을 다 부려도 쫓아버릴 수가 없 으니.' 조오기 전망대 쪽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아, 큰일 났구나. 한악마저 부상을 당했으 니 어쩌면 좋으냐 말이다. 어머니 보상부인의 안위, 전망대 쪽 동료들의 형편을 알지 못한 데다 아우마저 중독을 당하자 그녀는 초조감과 당혹감에 한동안 어쩔 바를 모르고 허둥거렸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자기가 우선 해야 할 일부터 생각해 보았다. 동굴 속의 어머니! 그렇다. 어머니의 안위를 알 아보는 것이 첫째다! 진자령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서 미진기의 채운으로 자신과 동생을 엄호한 채 동굴 입구를 향해 움직여갔다. 괴물들도 역시 포위망을 그대로 유지하고서 따라 움직였다. "아, 저게 뭐냐?" 동굴 앞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번쩍이는 광채가 내려다보이자,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금빛 한 줄기, 청색 검광 두 줄기가 동시에 날아올랐다. "아아, 저분들도 오셨구나!" 그 빛줄기의 임자는 제갈경아와 등팔고, 사도평 세 사람이었다. 마음이 한결 놓인 그녀는 황급히 이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저분들도 내 채운을 보았겠지? 이젠 문제없다. 응원대가 왔으니까 넷이서 힘을 합쳐 이 괴물 녀석들부터 처치하고 보자!' 한데 뜻밖이었다. 제갈경아를 비롯한 세 응원자는 그녀 쪽으로 눈길 한번 던지지 않고 계속 둔 광(遁光)을 재촉하여 유성처럼 앞으로 앞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 봐라, 어쩔려구 저렇게 내빼기만 하는 거야? 이 괴물들이 지독하니까 상대 못할 듯싶어서 지레 겁먹고 달아나는 건 아니겠지? 다른 사람은 설령 그렇다 치고 어째서 사도평까지 나 몰라라 꽁무니를 뺀단 말인가? 자기하고 우리 자매하고 어디 오다가다 만난 처지인가? 명색이 남편인데 아내를 팽개치고 저 혼자만 달아나다니!' 진자령은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속에선 야속하단 생각이 무럭무럭 일었다. 황망중에 흘낏 뒤돌아 보니 괴물 다섯 놈은 바야흐로 추격 방향을 바꾸어 동굴입구 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아차, 큰일났구나!" 저놈들은 미진기 보당(寶幢)이 너무 빠르니까 뒤쫓지 못할 줄 미리 알고 자기네 자매를 내버려 둔 채 동굴 쪽으로 공격방향을 돌린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야속한 남편이고 뭐고 따질 여가도 없다. 이기든 지든 저것들과 싸워서 죽는 한이 있더 라도 어머니를 지켜야만 한다. 어느 덧 괴물 다섯 놈은 이제 막 지상으로 내려가고 있다. "이얏, 게 섯거라!" 발악하듯 목청이 터져라고 소리치면서 뒤쫓으려 할 때였다. 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우르르!' 하고 진동이 울렸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동굴 쪽을 바라보니, 지상 수십 길 높이나 됨직한 상공에서 거대한 폭죽을 터뜨린듯 불꽃이 확 솟구쳤다. 뒤미처 동굴 이 있는 암벽 전체가 전후좌우 상하 할것없이 온통 벼락불과 금빛 광채에 휩싸였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날아가던 요괴 다섯 놈은 어느덧 새하얀 기류에 휩쓸려 바둥바둥 몸부림 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괴물들은 한 줌 연기로 화해 산산히 흩어져 날아갔다. 진자령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 지긋지긋한 요괴들이 저토록 허무하게 스러질 줄이야!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을 때는 괴물도 벼락불도 금빛 찬란한 광채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물처 럼 맑은 달빛 아래 밤바다의 경치가 아까처럼 고요하게 펼쳐져 있을 따름이다. '그래, 맞았어! 괴물 같은 놈들은 현진자사백님이 쳐놓으신 그물에 걸린 거야. 아아, 무섭다. 건 드리자마자 연기처럼 녹아버리다니!' 진자령은 그래도 어머니가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앞으로 나가자니 괴물처럼 무형의 봉쇄망에 걸릴까 봐 무섭고 그냥 돌아서자니 마음이 꺼림칙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으려니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부른다. "자령도우!" 돌아보니 사도평과 등팔고가 검광을 타고 날아왔다. 진자령은 아까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불 쑥 야속한 감이 들었다. 그녀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등팔고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일이 터졌소. 아직 요물의 잔당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두 분 자매님은 속히 전망대로 가셔 서 제갈도우의 파수임무를 도와주시오. 여기는 나하고 사도평도우 둘이서 계속 순찰을 돌겠소." 속이 상할 대로 상했던 진자령, 야속한 사도평에게 한 마디 면박을 주려다가 등팔고의 말을 듣 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말투로 보건대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 있는 듯싶어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물으려던 생각마저 버렸 다.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진자령은 침착하게 인사를 건네고 그 즉시 동생 한악과 함께 조오기(釣鰲磯)로 날아갔다. 다행히도 한악은 영단을 삼키고 나서부터 오한이 멎고 숨통이 트였다. 구역질에 두통이 나고 좀 어지럽기는 하지만 큰 고비를 넘겨 별탈은 없는 듯했다. 전망대에 당도하기가 무섭게 진자령은 대뜸 제갈경아를 붙잡고 볼멘 소리로 다그쳐 물었다. "제갈사형, 이게 어찌 된 겁니까?" 제갈경아도 그녀의 야속한 심중을 짐작했는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다섯 괴물이 나타났을 적에 제일 먼저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본 분은 등팔고 였소. 그분은 요괴의 내력이 무엇인가 첫눈에 간파하고 아연실색을 합디다. 그래도 두 자매분이 미진기로 호신하는 걸 멀리서 보고 별탈은 없으리라 마음을 놓으시더군. 우리 셋은 잠시 의논을 하고 나서 즉각 행동에 옮겼소. 먼저 내가 동굴 주변에 설치한 방어진을 적이 모르게 발동시켜서 그것들을 깊숙이 끌어들인 다음, 등팔고·사도평 두 분이 방어진 속으로 들어가서 요마들을 처치 하기로 한 거요." 진자령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듣기만 했다. 그래도 겉표정은 여전히 뾰로통해 있었다. 모래 속에서 뚫고 나온 괴물 다섯은 바로 천 년 묵은 부시(腐屍)의 여귀(餘鬼)였다. 그것들은 땅 속 깊숙한 곳에서 응결된 음한 독기운을 뽑아가지고 유형무전(有形無質)의 형체로 융합시켜 그 안에 깃든 것이다. 그래서 비검으로도 터럭 한 개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제갈경아 일행이 목격한 것은 그 괴물 다섯뿐만이 아니었다. 진자령자매가 미진기의 운당(雲幢) 을 타고서 동굴 쪽으로 급히 날아 갈 무렵, 그들은 바야흐로 또 하나의 적을 그물 속에 몰아넣고 있었다. 진자령자매의 다급한 상황을 그들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칫 터뜨렸다가는 방어진 그물 밖의 다섯 괴물을 놀라게 만들어 되달아나게 할까 봐 일 부러 자령자매까지 한꺼번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괴물들도 자연스럽게 꼬리처럼 줄줄이 딸려갔음 은 물론이다. 그물 속의 적이 함정에 빠진 걸 깨닫고 그 괴물들을 소리쳐 불렀다. 그때서야 자령자매를 추격 했던 괴물들이 방향을 바꾸어 동굴 쪽으로 날아간 것이다. 그물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던 적은 허 겁지겁 이것들을 시켜 바깥쪽에서 무형의 포위망을 찢고 탈출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껏 놈들이 걸려들기만을 노리던 제갈경아가 지체없이 풍뢰를 발동시켰다. 그리고 그 물 속의 적과 바깥쪽의 괴물 다섯을 한꺼번에 일망타진, 마침내 한 줌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것이 다. 진자령의 입장에선 영문도 모르고 동료들을 원망할 만큼 혼뜨검이 나기는 했지만 실로 교묘 하기 이를 데 없는 유인섬멸 작전이었다. 진자령자매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제갈경아가 적의 정체를 설명해 주었을 때였다. <여앙신>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였더라면 동굴 속의 보상부인은 막상 천겁이 닥쳐오기도 전에 벌써 요행을 바랄 수 없는 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초 제갈경아의 함정에 걸렸던 요물은 바로 남해(南海) 금성협(金星峽) 천루동(天漏洞)의 동주 <백욕신마(百慾神魔)> 언습(焉拾)이다. 그 자는 채음보양(採陰補陽)을 전문으로 해서 사법(邪法) 을 단련하는 요도(妖道)였다. 젊은 시절에는 망창산(莽蒼山), 옥령암(玉靈巖)의 요시(妖尸) 곡진(谷辰)과 함께 천음교(天淫敎) 문하제자로 있었으나 천음교주가 천벌을 받아 죽은 후, 사형인 요시 곡진마저 장미진인에게 죽음 을 당하고 원신(元神)이 땅 속 깊숙한 곳에 갇혀버리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스승과 대사형, 수뇌부 인물들이 연거푸 참변을 당하자, 나머지 천음교 잔당들은 갈팡질팡 중심 을 잃고 맥없이 장미진인의 손에 하나하나 죽어갔다. 천음교도들은 마침내 이 세상에서 씨를 말 리우고 말았다. 그런데 섬멸당하는 그 북새통에서 운수좋게도 언습 한 사람만이 천라지망(天羅地網)의 도살장을 벗어나 구사일생 남해로 도망쳐 살아날 수가 있었다. 그는 궁벽한 남해 금성협에 깊숙이 자취를 감추고 숨도 크게 못 쉬면서 전전긍긍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세월이 흐르고 풍문에 그 무서운 장미진인도 원적비승(圓寂飛升)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문 하제자들 역시 하나같이 도술 높은 호랑이떼라는 말에 섣불리 중원 땅으로 들어가 전처럼 날뛰어 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은둔처에 살면서 바닷속을 뒤져 희귀한 생물들의 원정(元 精)이나 뽑아가지고 근근히 술법 단련을 계속하는 게 고작이었다. 언습의 은신처 천루동 밑바닥에는 그가 찾아들기 이전부터 귀마(鬼魔) 다섯 마리가 도사리고 있 었다. 이놈들은 걸핏하면 바다로 나아가 부근을 항행하는 선박을 습격하고 객상(客商)들을 잡아먹는 게 일이었다. 귀마라곤 하지만 천연적으로 생성된 요정이 아니라 오래 전 남에게 피살당한 사람 의 시체들이 해변 으슥한 동굴 속에 파묻힌 채로 원기(元氣)가 미처 끊기지 않은 놈들이었다. 이들이 매장된 장소는 본래 지기(地氣)도 왕성했거니와 게다가 하루 한시 거르지 않고 밀고 써 는 바닷물에 침식을 당한 나머지 산골짜기가 무너져 바다로 변하고 거기에 파묻힌 시체들도 점점 땅 속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해를 거듭하여 오랜 세월이 흐르자 바닷물은 다시 줄어들고 해저에 잠겼던 산악과 골짜기는 또 한 번 해변에 옛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귀마들은 비록 강시(彊屍)가 되었으나 해골은 엄청난 모래 속에 파묻혀서 지표(地表)로 뚫고 나 올 수가 없었다. 이렇듯 또 세월이 흘렀다. 해골들은 지저(地低)의 강풍과 열기(熱氣)를 견디지 못 하고 바스러져 버렸다. 뼈와 살은 썩어 없어졌는 데도 원기만큼은 도리어 극도로 밀폐된 땅 속에서 응축될 대로 응축되 어 지저의 음살지기(陰煞之氣)와 융합한 끝에 생명력을 얻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시련을 격고 나서야 비로소 형체가 이루어져 마침내는 지각(地殼)을 깨뜨리고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귀마들은 거리낄 것 없이 생명을 해치는 악귀가 되었다. <백욕신마> 언습은 무심결에 이 천루동을 발견하고 지세가 험악한 데다 외지고 으슥한 것이 은 거생할을 해 나가기에 썩 좋으리라 싶어 귀마들의 소굴을 차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두 주인이 맞닥뜨리게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드디어 언습과 귀마들은 천루동 소굴 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아귀다툼을 벌이면서 언습은 유심히 귀마들의 능력과 재간을 살펴보았 다. 그리고 만약 이놈들을 손아귀에 넣어가지고 실체(實體)까지 연성시킬 수만 있다면 세상천지 무서울 게 없이 누비고 다니게 되리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 정도로 귀마들은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언습은 갖은 요법을 깡그리 구사하면서 천신만고 격전 끝에 마침내는 귀마 다섯 놈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신의 피까지 방울방울 짜내어가며 온갖 심혈을 다 기울여서 다섯 개의 화 신(化身)을 만들어내었다. 이로부터 완전한 실체를 단련하느라 숱한 세월 동안 힘써 보았으나, 아깝게도 귀마들은 진양(眞 陽)이 부족한 탓으로 그 이상 단련되지 못하고 여전히 유형무질, 형체만 갖춘 채 알맹이가 없는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정도만 가지고도 어지간한 비검이나 법보의 공세쯤은 쉽사리 막아내고 적에게 제압당하 지 않을 수야 있지만, 아무래도 장미진인의 제자들과 같은 막강한 적을 상대로 통쾌하게 복수전 을 치르기에는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미파에 대한 복수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던 언습은 우연히 <천호> 보상부인의 소문을 들었다. 보상부인이 병해(兵解)하고 나서 <동해삼선(東海三仙)>의 도움에 힘입어 두 번째로 법신(法身)을 연성하고 있는데, 조만간에 그 공행(功行)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 이라는 소식이었다. 언습은 용기를 얻었다. 만약 천호가 단련해 낸 그 원단(元丹)을 손에 넣기만 한다면 요법으로 융 화시켜 가지고 귀마들의 형신(形身)을 완전하게 갖출 수가 있는 것이다. 용기를 얻었으면서도 그 는 즉각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망설였다. <동해삼선>이 어떤 인물인가? 그 원로 검선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꿈에나 생각해 볼 일이 다. 어딜 감히 <동해삼선>의 근거지를 어슬렁거린단 말이냐? 그는 일단 계획을 포기했다. 한데 얼마 후 그는 반가운 소식에 접했다. 그 사나운 <동해삼선>이 장미진인의 유칙을 받들고 현재 폐관수련중이라는 소식이었다. 폐관수련을 하고 있다면 기약된 날짜가 지나야만 공행(功行)을 이루고 나올 터, 그 때까지 보상부인은 동해삼선의 보호를 받지 못 한 채 벌거숭이 상태로 놓여 있을 것이다. 뜻밖의 희소식에 접한 언습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 다. 물론 그는 <동해삼선>이 폐관참수중이라 하더라도 보상부인 역시 약자가 아니란 사실을 뻔히 안다. 그녀가 그 나름대로 빈틈없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은 불 보듯 틀림없다. 언습은 그 정도로 겁이 나서 모처럼의 호기를 그냥 지나쳐 버릴 위인이 아니다. 그는 하루 이틀 날짜를 꼽아갔다. 은인자중,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날이 마침내는 닥쳐왔다. 운좋게도 그 날 저녁 바다에는 일을 꾸미기 알맞은 폭풍이 몰아 쳤다. 언습은 그 즉시 지행둔법 (地行遁法)을 써서 보상부인이 숨어 있을 삼선동 부근 암벽으로 접근했다. 과연 예상했던 바대로 그쪽에는 방호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두 여인이 검광을 타고서 저공비행으로 동굴 일대를 순찰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광은 분명 아미파의 정통 비검술이었다. 지난 과거 몇 차례나 아미측 인물에게 혼뜨검이 났던 터라 언습은 그 처녀들 뒤에 또다른 응원병력이 버티고 있을까 두려워서 섣불리 나설 엄두가 나 지 않았다. 그는 은밀히 귀마 다섯 놈을 시켜 두 처녀를 해치도록 종용한 다음, 자신은 암벽으로 접근하여 <천호>의 진원(眞元)이 감추어져 있을 동혈(洞穴)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습은 자신의 습격이 행동에 옮겨지자마자 멀찌감치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전망대 위에서 파수꾼이 지켜보고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동굴 입구에 갓 이르러서 두리번거릴 때 <여앙신> 등팔고는 즉각 침입자의 행적을 간파했 던 것이다. 등팔고는 동굴을 중심한 그 일대에 물샐틈 없이 풍뢰의 봉쇄망이 설치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침입자를 그물 속에 몰아넣지 않는다면 침입자 역시 현기(玄機)를 눈치채고 재빨리 달아나 버릴 게 분명했다. 그녀는 제갈경아를 설득해서 현진자가 쳐놓은 그물의 아가리를 벌려놓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언습은 힘들이지 않고 방어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가 있었다.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언습과 귀마들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범의 아가리에 제 발로 기어든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존재라곤 <동해삼선>뿐이다. <동해삼선>이 모두 폐관참수를 하고 나타나지 않는 이상, 설령 여기다 제갈공명의 십면매복 (十面埋伏)을 쳐놓았다손 치더라도 두려울 게 없다. 하늘을 꿰뚫고 땅 속을 제 집 앞마당처럼 헤집고 다니는 재주가 있단 말이다. 순찰 비행을 돌고 있는 두 계집이 꺼림칙하기는 하나 그것들도 벌써 귀마 다섯 놈한테 꼼짝 못하게 발목 잡혀 있을 테니까 아무 염려 없다. 이번 습격은 실패할 리 만무하다. 언습은 대담하게 암벽 정면으로 돌아 동굴의 출입구를 찾았다. 이제 쳐부수고 들어가서 <천호> 의 원단을 빼앗아 들고 뛰기만 하면 된다. 동굴 입구 쪽으로 첫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느닷없이 눈앞에서 금빛 찬란한 광채가 번쩍하더니 방금까지 있던 암벽이 송두리째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언습은 놀랄 틈도 없었다. 암벽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온 몸뚱아리는 숯불 위에 얹혀진 듯 화끈 달아오르더니 다음 순간부터 산 채로 통돼지구이가 되는 것처럼 지글지글 타오르기 시작 했다. 손가락 한 개만 데어도 화끈화끈 아픈데 전신이 몽땅 불붙은 듯 지끈지끈 쑤셔대니 견딜 재간이 없다. "우왓, 뜨거워!"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물러서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상하게도 불꽃 하나 연기 한 줄 기 보이지 않는데 몸뚱이는 분명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언습은 그 자리에서 펄펄 뛰다가 마침내 는 버티지 못하고 털썩 고꾸라져 버렸다. 팔, 다리, 등줄기, 척추까지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아앗, 사람 살려!" 자신이 침입자라는 사실도 잊고 체면도 저버렸다. 아무리 술법을 써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비명소리는 허망하게 울리고 메아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동서남북, 상하좌우, 사방천지가 모두 풍뢰의 봉쇄망으로 차단되어 있는 줄을, 자신의 몸이 진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사호(死戶)에 빠 져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귀마들만 온다면... 귀마들만 온다면, 이것들더러 지하행시법(地下行屍法)을 부리게 해서 연기로 변해 달아날 수 있으련만. 그렇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놈들을 불러와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다. 꼼짝없이 통돼지구이가 되고 말 거야!' 그는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바짝 오그라드는 손가락을 한 개 한 개씩 겨우 펴가 지고 오귀(五鬼)들이 있는 방위를 가리켰다. 해상의 전망대에서는 제갈경아가 진작부터 유심히 침입자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다 섯 괴물이 진자령자매를 버려둔 채 봉쇄망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귀마 다 섯 놈이 갇힌 놈과 합세하는 날이면 봉쇄망도 파괴될지 모른다. 이 지독스런 요물들을 놓쳤다간 두고두고 후환을 남길 게 분명했다. 제갈경아는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이 판국에 비장의 무기를 쓸 것인가, 아닌가! 하지만 이내 마 음을 굳히고 스승 현진자가 봉쇄망 안에 진작 매설해 놓았던 오화신뢰(五火神雷) 한 개를 터뜨렸 다. 그러자 언습과 다섯 귀마들은 한꺼번에 잿더미 연기로 화해 산지사방 흩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오화신뢰는 현진자가 심심풀이로 바다에서 폭풍우가 몰아칠 때 현문(玄門)의 묘법을 써가지고 공중에 떨어지는 벼락불을 잡아 응축시켜 만든 것이었다. 그것도 겨우 호로병 두 개밖에 채우지 못해서 현진자는 훗날 문하제자가 공행을 원만하게 이루고 비승할 때에 외마(外魔)들의 침입을 막는 데 쓰려고 비장해 두었었다. 그런데 보상부인의 마겁이 너무나도 무겁고 또 그녀를 해치러 오는 원수들이 어지간한 방어망으 로 저지하기 어려운 강적임을 짐작했다. 그래서 현진자는 그 두 병의 벼락불마저 꺼내다가 진중 에 매설하고 제갈경아에게 용법을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오화신뢰를 전수 받으면서 엄한 당부까지 들었다. '이 벼락불은 바로 오화(五火)의 정수(精髓)를 현문묘법으로 웅축시킨 것이다. 만약에 네가 감당 하기 어려운 강적들이 나타나거든 진화(眞火)를 써서 촉발시켜라. 이것이 터지면 제아무리 지독한 사마(邪魔)라 할지라도 여지없이 잿더미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명심하거라. 다른 법보처 럼 한 번 썼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단 터뜨리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그러니까 단 두 번밖에 못 쓴다는 말이다. 보상부인을 엄호하는 동안 네 힘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강적이 나타 나지 않는 이상 함부로 터뜨리지 말고 아껴야 한다.' 제갈경아가 일순 망설였던 것도 이러한 당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백욕신마 > 언습의 악명을 익히 들어온 데다, 또 등팔고가 귀마들의 무서운 정체를 알아보고 귀띔해 주는 바람에 오화신뢰를 촉발시킬 생각이 굳어졌던 것이다. 오화신뢰 말고 다른 묘수는 없을까 궁리해 보았지만 귀마들이 자령자매의 비검을 맞고 끄떡도 않거니와 언습이란 놈 역시 무형의 풍뢰 속에 갇혀 사경을 헤매면서도 여전히 사술(邪術)을 부리 려 드는 걸 보고 부득불 비장의 무기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요마들을 섬멸한 후에도 제갈경아는 뒷맛이 썼다. 앞으로 언습이나 귀마보다 더한 강적이 얼마 나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오화신뢰는 이제 한 번밖에 써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등팔고와 상의하고 작전을 바꾸었다. 우선 귀마들한테 에워싸여 악전고투를 겪은 진자령자 매부터 휴식시키고 그 대신 사도평과 등팔고 두 사람이 암벽 일대를 고공에서 순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 다섯 사람 가운데 주도적으로 일을 추진해 나갈 인물은 제갈경아였다. 그는 현진자가 어디 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뛰어난 수제자였다. 일찍부터 현문의 정종심법(正宗心法)을 터득한 데다 사전에 스승의 분부를 받으면서 마음 속으 로는 갖가지 상황에 대처할 계략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등팔고와 같은 박학다식한 모사(謀士)까지 합세했으므로 작전계획상 다소 차질이 생겼다 해서 그리 크게 당황할 것은 없다. 비록 이단 교파의 출신이기는 하나 등팔고는 도행과 술법도 고명할 뿐만 아니라 견문 지식이 넓기로도 옥청대사(玉靑大師)에게 뒤지지 않을 여걸이었다. 설산(雪山)에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빙설(氷雪) 천지 한가운데 모진 한풍(寒風)을 홀로 견 뎌내고 숱한 세월 고심참담 인내한 끝에 마침내는 설혼주(雪魂珠)를 얻었으며, 또 신니(神尼) 우 담(優曇)의 감화와 지도를 받아 공력이 놀랄만큼 정진되었던 인물이다. 사도평 역시 보상부인을 천겁에서 구출해 내는 데 있어 빼놓지 못할 주요인물이었다. 도행이나 검술면으로 따지자면 자령자매보다도 훨씬 뒤떨어지지만 그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보상 부인과 천겁 사이에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역할을 맡고 있다. 더구나 신타 을휴로부터 오룡전(烏 龍剪)까지 얻었으므로 어지간한 사마외도쯤은 적수가 안 된다. 이렇듯 자군(自軍)의 전력(戰力) 평가를 세심하게 비교한 다음, 제갈경아는 등팔고와 더불어 장 차 집중방어해야 할 적수에 대해서도 신중히 의견을 나누었다. "제갈도우, 앞으로 맞아야 할 상대들은 대강 실력들이 어떻습니까?" "다른 놈들은 날고 뛰어봤자 그리 염려할 게 없습니다. 단지 한 사람, <익도인> 경곤만은 무시 못할 강적입니다. 그 자야말로 귀신조차도 헤아리기 힘들만큼 변화무쌍한 도력을 지녔지요. 한 순 간이나마 자칫 경계를 소홀하게 했다가는 경곤에게 침투할 기회를 주어버리게 됩니다. 우리 눈을 속여 방어진 안으로 들어가서 독수라도 쓰는 날이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아마도 그 한 수에 끝 장날지 모릅니다. 우리 상대는 경곤 하나뿐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요." "이 늙은 것과 사도평도우의 실력을 합쳐도 안 될까요?" "아닙니다. 제가 두 분을 수고롭게 보내는 것도 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진씨자매는 보상부인과 골육지친이니까 더욱 세심히 경계할 듯도 싶은데, 굳이 저희와 교체시 키는 의도를 모르겠군요." "순찰경계는 세심하고도 냉정하게 돌아야 합니다. 더구나 진씨 자매는 상대할 적의 내력을 확실 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섣불리 대들었다간 상대방의 격장술 (激將術)에 쉽게 격노하거나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마치 달걀을 품은 암탉이 너구 리와 싸우는 격이지요." 등팔고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사도평과 함께 전망대를 떠났다. 암벽 동굴 에 당도해서 주변을 세밀하게 수색해 보았으나 별다른 적의 흔적은 없다. 진자령자매를 철수시킨 다음 등팔고와 사도평은 암벽 위 고공에서 경계순찰을 계속했다. 등팔고에게서 상황설명을 듣고 해상 전망대로 철수하는 동안 진한악은 사뭇 풀이 죽었다. 평소 부터 자신의 비범한 실력에 한껏 자부감을 품어왔는 데다 언니 자령과 더불어 부모님의 진전(眞 傳)을 이어받고 힘써 수련한 끝에 괄목할 만한 공력의 소유자가 되었으며, 더구나 비검술은 물론 이고 미진기와 백미침 같은 희대의 법보마저 지닌 터라 세상천지 무서울 게 없었다. 그래서 아미산 응벽애로 합류한 뒤에도 동문들 가운데 실력이 자기보다 훨씬 못한 사람이 많다 는 사실을 알고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면서도 일단 무슨 일에 부닥치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제 성미대로 고집을 부리고 날뛰었던 것이다. 동해에 갓 도착했을 때만 해도 제갈경아로부터 날개 달린 <익도인> 경곤이 무서운 상대라는 말 을 듣고 내심 경각심을 품기는 했지만 그렇게 놀랄 정도로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다가 첫 번째로 맞닥뜨린 적이 유형무질, 허깨비 같은 귀마 들이었다. 비검은 물론 미진기로 몸을 감싸고서도 그녀는 적을 베어 거꾸러뜨리기는커녕 도리어 적의 단 한 모금 입김에 중독을 당하고 만 것이다. 설혹 비장의 백미침을 쏘았다 치더라도 그 해파리 같은 놈들을 어쩌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만약 현진자가 사전에 풍뢰의 방어망을 쳐놓지 않았거나 제갈경아와 등팔고의 적시적절한 구원 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자기 몸뚱이는 마귀들의 손아귀에 농락당하고 어머니 보상부인 역시 무사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사가 울적하기는 언니 진자령도 마찬가지였다. 두 자매는 조오기 전망대에 당도했다. 그로부터 제갈경아의 지시에 따라 사방경계를 하기 시작 했다. 온 신경을 두 눈 두 귀에 모으고 잔뜩 긴장한 채 하늘의 뜬구름 한 조각 놓치지 않고 출렁 이는 파도머리, 세찬 바람결을 쫓아서 아득한 수평선 너머까지 경계의 눈길을 달렸다. 이따금씩 자매의 눈길은 약속이나 한 듯 해변가 암벽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창백하리만큼 새 하얀 광채와 푸른 검광이 한데 어우러져 유성처럼 치닫고 있다. 등팔고와 사도평은 자기네들과는 달리 헤어지지 않고 짝을 이룬 채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이다. 두 줄기 검광은 암벽을 에워싸고 흐르는 시냇물처럼 쉴새없이 돌고 돌았다. 때로는 지상에 닿을 듯 낮게 나는가 하면, 쏜살같이 반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굽어보기도 한다. 검광 두 줄기는 잠시도 멈추는 기색이 없다. 자령자매는 가슴 속에 뭉클한 감동을 느끼며 다시 바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튿날 동트기까지 뜬눈으로 전전긍긍 밤을 지새우고 경계했으나 더 이상 적이 침입해 오는 기 척은 발견되지 않았다. 불안과 초조, 긴장 속에 또 이틀이 지났다. 그래도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일행은 엿새째 밤을 맞았다. 이제 하룻밤만 무사히 지내면 일단 전면경계는 끝나게 될 것이다. 보상부인이 천겁(千劫)을 맞이할 시각은 바로 내일 정오다. 그리고 오시(午時) 초부터 자정(子正) 으로 넘어갈 무렵이 되면 <동해삼선>이 폐관참수를 마치고 나올 것이다. 내일, 내일 하루만 넘기 면 보상부인은 겁난에서 벗어날 수가 있으리라. 이때껏 잠시도 흐트러지지 않고 경계 순찰을 돌던 등팔고 역시 그동안에 한두 번쯤은 적의 습격 이 있으리라는 예상이 빗나가자 적지아니 당혹해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일 정오가 바로 결정적인 시각임을 염두에 두고 한층 경계심을 북돋았다. 그 때를 원만하게 넘기기 전까지는 단 한 순간 자리를 뜨거나 긴장이 풀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 등팔고는 사도평을 보내 진자령과 교대시켰다. 일행 중에서도 비검술이 가장 뒤떨어지는 사도평 이 엿새 밤낮 불철주야로 장모를 보호해 왔으나 이 중요한 시기에 이르러서 기진맥진하고 만 것 이다. 그녀는 진자령과 짝을 이루고 계속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나란히 어검비행을 하면서 그녀는 진 자령에게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예상을 설명해 주었다. "며칠 전 <백욕신마> 언습이란 놈이 천년 묵은 강시(彊屍) 다섯 마리를 이끌고 습격해 왔을 때, 천만다행으로 위기를 넘기고 섬멸하기는 했소만, 나나 제갈도우는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한 사이 에 이미 적의 침투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소. 현재까지 언습의 잔당은 몰려올 낌 새가 보이지 않으나 또다른 사마외도의 패거리는 줄지어 습격할 게 틀림없단 말이외다. 더구나 < 익도인> 경곤은 반드시 우리 앞에 나타나고야 말 것이오. 이 자는 <대소제천금제법(大小諸天禁制 法)>에 아주 능숙해서 마음만 먹었다면 우리가 아무리 철통같은 경계망을 펼친다 하더라도 진작 손쉽게 뚫고 들어와 손을 써놓았을 거요. 그 술법 가지곤 넉넉히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이것이 가정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천마(天魔)가 닥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그는 <체형나이대법(替形 那移大法)>으로 이 암벽주변 수십 리 일대를 삽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가 있소. 그때 가서는 현 진자사백의 풍뢰선진(風雷仙陣)이라도 그를 어쩌지 못할 거요... 하지만 너무 낙담할 것은 없소. 내 요행히 이전에 적의 암습 따위나 둔행술을 깨뜨리는 방법을 조금 익혀두었고, 또 설혼주도 지 녔으니까 그냥 앉아서 당하지 만은 않을 거요. 이 설혼주의 광채가 비치는 곳은 세상의 어느 물 체도 형적을 감추지 못하오. 경곤이 제천금제대법을 써서 침투하든, 체형나이대법으로 이 암벽을 풍비박산 소멸시키려 든다 하더라도 그 전에 나한테 간파당하고야 말 것이오. 단지 염려스러운 바는 이 설혼주가 적의 대법을 깨뜨릴 때 상대방의 또다른 법보를 동시에 막아낼 수 있는가 없는 가 하는 점이오. 나 혼자 힘으로 부칠 경우, 그 법보를 대신 막아줄 응원자가 필요한데, 자령도우 와 아우님의 비검으로는 도저히 적수가 못되고, 사도평도우의 오룡전(烏龍剪)이라면 쓸만하겠기에 당초 그분과 순찰조를 짜고서 오늘까지 경계해 왔던 거요. 아시다시피 오룡전은 신타 을진인이 애지중지하는 진산지보(鎭山之寶)라서 웬만한 적의 법보쯤은 쉽사리 격파해 내지 않겠소?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소. 결정적인 시기가 닥쳤는 데도 적들은 전혀 움직이는 기색이 없는 거요. 우담대 사나 현진자사백님의 예언이 어긋날 리는 만무한데 이날 이 때껏 적의 습격은 없었소. 그렇다면 무엇인가 적방에 일이 잘못 꼬였거나, 아니면 보상부인이 천겁을 맞이할 그 순간에 사마외도의 패거리도 한꺼번에 들이닥친다는 계산이 되지. 우리로선 후자가 제일 두렵소. 천검을 막는 그 시 각에 또 강적들과 상대해야 하는 만큼 성공의 확률도 승산도 함께 줄어들 테니까, 그것이 우리한 테 가장 큰 위기요. 하지만 이제 어쩌겠소?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또 짜내보아도 뾰족한 수는 없 었소. 사세가 기왕지사 이런 마당에 우리가 지닌 능력과 지혜를 다 써서 죽기 살기로 쌍겁(雙劫) 에 대항하는 것밖에 달리 선택할 길은 없는 거요. 내일 오시(午時) 초가 되기 전, 어머니 보상부 인께서 동굴을 나오시게 되오. 따라서 숙명의 천마(天魔)도 그 시기에 맞추어 연속해서 들이닥칠 거요. 이 간발(間髮)의 순간을 놓치면 안 되오. 먼저, 사도평도우가 외부 적의 습격이 개시되기 직 전에 보상부인의 원영(元瓔)을 힘껏 품어안고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로 운공합니다. 두 분 자매님은 그 좌우에 서서 호법(護法)이 되지요. 세 분이 천겁을 맞이할 곳에는 엄중한 보호막을 치겠지만 천겁은 그 나름대로 뚫고 들어갈 것이오. 나머지 제갈도우와 나는 <익 도인>을 비롯한 적수들을 막아내기로 했소. 현진자사백님의 분부에 따라 그 일대에 허진(虛陣)을 펼쳐놓고, 외부로부터 습격해 올 적들을 그리 유인해 들일 작정이오. 그렇게 해서 <동해삼선> 세 분이 나오실 때까지 버틴다면 될 테니까, 세 분은 오로지 천마에 대항하는 일에만 전념해야 합니 다." "지극하신 말씀, 고맙습니다." 다소곳이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도 진자령은 불길에 쫓기듯 마음이 다급하고 울적하기 만 하다. 이제 어머니와 자기네 부부 세 사람이 맞아야 할 엄청난 재앙은 박두했는데 이를 감당 해 낼 능력은 미약하다. 어떻게 해야만 하늘의 겁난을 벗어날 수 있으랴? 더구나 지금 등팔고의 말을 들어보면 형세도 옥청대사가 예시(豫示)한 것과 다르게 돌아가고 있 다. 몸은 검광을 타고 가볍게 날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불안과 초조, 온갖 근심이 천근만근 납 덩어리처럼 쌓였다. 시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어느덧 밤이 깊어 자정을 넘겼다. 중천에 덩그라니 걸린 만월이 교교하게 천지를 비추는 가운데 바람 한 점 없는 해상에 물결조차 잠잠해져 거울같이 매 끄럽다. 이따금씩 일렁일 때마다 달빛을 받아 황금 물결이 넘실거리는 풍요한 들판을 연상시킨다. 중추절도 가까와 달빛은 더욱 두드러지게 맑고 곱다. 천지간의 경관 역시 어제보다는 오늘, 하루 가 다르게 산뜻하니 돋보였다. 등팔고를 따라 날면서 진자령의 눈길은 천공에 높이 뜬 만월을 우러른다. '하느님, 저희 어미가 무사히 초겁(超劫)하게 도와주소서... 이 한 몸 어미 대신 바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소서. 조상님들이시여, 가련한 제 어미를 보우하사 천겁을 모면하게 해주소서. 천겁이 여, 이 몸에 떨어지소서.' 마음 속 간절한 기원이 얼굴에도 배었는지, 흘낏 그녀를 바라본 등팔고가 빙그레 웃었다. "내 처음 설산에서 자령도우와 만났을 때, 첫눈에 그대의 신명이 맑고 혜근(慧根) 또한 심후한 줄 알아보았소만, 효심까지 이토록 지극할 줄은 미처 몰랐구려. 자령도우, 너무 근심 마오. 그대 정성은 이미 천심을 감동시키고도 남았을 거요. 자, 보구려. 달빛도 맑은 데다 바다에는 바람 한 점, 물결 하나 일지 않고 잠잠하지 않소? 우리가 경계하기에 얼마나 좋은 환경이오? 재앙도 변괴 도 전혀 닥쳐오지 않을 것만 같소. 하하, 그저 바라기는 요마의 떼거리나 날짜 전에 습격하지 않 았으면 좋으련만... 그래야지 우리가 전심전력 천마를 대항하는 동안이라도 딴 데 신경을 안 써도 되겠는데." "고마우신 말씀.....!" 진자령이 대꾸할 순간이다. 문득 바다 끝 멀리서부터 하얀 선 같은 흔적이 반짝 비치더니 해안 쪽으로 용솟음치듯 밀려왔다. "앗, 저게 뭘까요?" 그녀는 대답하려던 말을 바꾸어 황급히 물었다. 등팔고 역시 날카로운 눈길로 하얀 빛줄기를 노려보았다. "가만 있자, 저놈은?" 그 무렵쯤 해서 흰 빛줄기는 해안으로부터 반 리 남짓 간격을 두고 문득 동작이 멎었다. 그 다 음 순간 앞쪽 머리 부분에서 함지박만한 은빛 광채가 날아오르더니 곧장 허공으로 솟구쳤다. 중천에는 때 아닌 만월이 하나 더 늘어난 듯싶게 사면팔방으로 반짝반짝 맑은 빛을 흩뿌리며 덩 실 떠 있는 것이다. 바다 물결도 금빛 은빛으로 물든 채 일덩일렁 묘한 조화를 이루고, 바위와 나 무숲의 윤곽까지 대낮처럼 환하게 비쳐보였다. "조심하시오. 저 광채가 둥실 뜨고 굳어지지 않는 걸 보니 바닷속에 신방(蜃蚌) 같은 해묵은 조 개 따위가 달빛을 타고 머금었던 광채를 토해내려고 나왔거나 아니면 요사스런 놈들이 침범하는 게 분명하오. 자세히 보시오!" 그러나 진자령이 눈여겨볼 틈도 없었다. 느닷없는 돌개바람이 해상 한가운데서 '우르르!' 솟구치 더니 명월처럼 중천에 찬란하게 떠 있던 은빛 광채는 유성(流星)과도 같이 파도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 몰려왔는지 먹장구름이 삽시간에 달빛마저 가리우고 산더미 같은 파도가 일 기 시작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청명 세계는 돌연 암흑천지로 뒤바뀌고 거울처럼 잠잠하던 바닷속에서 휘파람 소리와 괴물의 울 부짖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나왔다. "무언가 왔소. 조심하시오!" 등팔고는 나지막하게 외쳤다. 이제껏 조마조마 가슴 죄면서 우려하던 일이 닥쳐오는 걸 직감했 다. 두 사람은 긴장 속에 경각심을 한층 돋구었다. 해상의 전망대 쪽에서도 수상한 낌새를 알아챘는지, 이편에서 경보를 발하기도 전에 과수꾼 두 사람이 날쌔게 날아왔다. 매복진을 조종할 제갈경아 한 사람만 그대로 남고 사도평과 한악이 순 찰대에 응원차 합류해 온 것이다. "때맞춰서 잘들 오셨소? 너무 어두우니까 조심해 살펴보시오." 세심한 등팔고는 일행들의 혜안을 믿으면서도 주변 일대가 칠흑같이 어두웠으므로 만약의 돌발 사태에 대비해서 설혼주(雪魂珠)를 꺼내들었다. 과연 그녀의 예감은 적중했다. 설혼주가 '번쩍!' 하고 암흑 속을 비추는 것과 동시에 산더미 같 은 파도가 곧바로 해안을 강타했다. 우르르르, 꽈당! 찬란한 설혼주의 빛 그림자 아래 그들은 엄청난 물결더미 속에서 사람도 짐승도 아닌 괴물들의 흉악스런 형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앗, 요괴다!" "조심해!" 저마다 놀란 외침을 터뜨렸지만 제일 먼저 손을 쓴 것은 사도평이었다. "이얍!" 사도평의 손아귀에서 오룡전이 날아갔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문득 해안 쪽에서도 번쩍하고 붉 은빛 장막이 솟구치더니 곧바로 파도 속에 휘말리듯 들어갔다. 뒤미처 맑고도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면서 사도평의 오룡전은 광막(光幕)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산더미 같은 물결이 수그러지고 오룡전 또한 온데간데 없 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 그제서야 자령자매의 비검이 뒤따라 날아갔으나 파도 속의 붉은 빛 광막은 일순 번쩍 빛나더니 물결과 함께 사그러지고 말았다. "오룡전이! 내 오룡전을 빼앗겼어!" 사도평은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허겁지겁 수결(收訣)을 외치면서 두 손을 마구 휘저 었지만 파도 속에 휩쓸려 간 법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저런, 저런... 아까운 걸 잃었군!" 등팔고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지간한 그녀도 사도평이 첫 손질을 하자마자 귀중한 법보를 잃는 걸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덧 해상의 풍운은 말끔히 가시고 둥근 만월이 또다시 파도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은 삽 시간에 벌어졌다가 끝이 난 것이다. 사방 천지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아까처럼 잠잠,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놀란 가슴은 아직도 뛰고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셈이냐?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 다. 파도 속의 흉악스런 괴물들은 분명 적이다. 그럼 그 붉은 장막은 무엇일까? 우군이었다면 사 도평의 오룡전을 채뜨려 갈 리가 만무하다. 아군이 아니라 적이었다면 또 어째서 습격해 온 괴물 들을 쫓아버렸을까? 그 오룡전은 사도평이 목숨처럼 아끼고 몸의 한 부분이 다 된 법보였다. 스승인 신타 을휴가 친 히 구결을 전수해 준 이래로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발사할 수도 거두어들일 수도 있는 병기인 데, 이것을 단 한 수만에 남한테 빼앗겨 버리다니, 이야말로 정말 어처구니없는 노릇 아닌가? 사도평은 아직도 꿈속을 헤매듯 망연자실한 기색으로 바다 쪽에 눈길을 던지고 서 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등팔고는 당사자보다도 마음이 더 무겁다. 신타 을휴의 비보를 단숨에 채뜨려간 놈이 누구냐? 만일 적이 그 정도 실력을 가졌다면 이제 앞 일은 암담하기 그지없다. 고 립무원(孤立無援), 외로운 상황에서 젊은 후배 몇몇을 데리고 이 무서운 적수와 맞서 싸워야 하다 니, 도무지 승산이 없다. 어쩌면 좋으랴! 등팔고 일행이 당혹감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해변 가까운 바다 한가운데서 물 살이 갈라지더니 부글부글 거품이 용솟음쳐 오르기 시작했다. "앗! 등팔고님, 저것 보십쇼!" 이 때껏 넋을 잃고 바다 쪽만 바라보던 사도평이 깜짝 놀라 정신 번쩍나게 소리쳤다. 팔월 대보름 달빛을 반사하면서 은빛 물결이 조각조각 뒤집히는가 싶더니 잠깐 사이에 바다 한 가운데 너비 일 장 가웃이나 됨직한 틈서리가 쩍 갈라졌다. "아, 적이닷!" 이번에는 등팔고의 선수였다. 오른 손이 번쩍 쳐들리기가 무섭게 비보 설혼주가 싸늘한 빛을 뿌 리면서 갈라진 물살 틈서리로 날아간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등팔고는 저도 모르게 '앗!'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녀의 공격하던 손짓이 덜컥 멎더니 허둥지둥 설혼주를 거두어들였다. 물살을 가르고 허공 높이 날아 오른 도사가 싱긋 웃었다. 그 양겨드랑이에는 괴물이 한 마리씩 숨통을 바싹 조인 채 아직도 '꿱꿱!' 애처로운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끼여 있었다. "아, 사부님!" 사도평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을진인이시다!" "을진인님!" 놀란 등팔고와 자령자매들이 반가움에 못 이겨 외치는 사이, 도사는 벌써 바닷가 일행 앞에 내 려섰다. 신타 을휴, 바로 그 사람이다. 일행은 황망히 무릎꿇어 예를 올렸다. 뭍에 내려서자마자 신타는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괴물 두 마리 중 한 놈을 모래바닥에 냅다 팽 개치더니 손가락으로 찍었다. 두 가닥 검정 빛줄기가 손 끝에서 뻗쳐 날아가 괴물의 몸뚱이를 칭 칭 동여맸다. 아직도 손에 들린 또 한 놈은 사람의 머리에 칠 척 남짓한 바다거북 몸뚱이를 지닌 괴물이었다. 신타 을휴는 그를 움켜쥔 채 두말도 않고 성큼성큼 보상부인의 동굴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팔고 일행 역시 괴물의 형상을 눈여겨볼 틈도 없이 황급히 일어나서 그 뒤를 따랐다. 앞장 선 사람은 그냥 뚜벅뚜벅 걷기만 하는데 뒤따르는 일행은 둔광을 일으켜 타고서도 그 걸음 을 끝내 따라잡을 수가 없다. 신타는 모른 척, 눈 깜짝할 사이에 뇌진(雷陣) 속으로 후딱 들어가 버렸다. 해상 전망대에서 파수 보고 있던 제갈경아가 황망히 진세를 움직였다. 그는 붉은 광막이 해안에 비쳤을 때 이미 신타 을휴의 출현임을 짐작했고, 이제 방어진 속으로 들어가는 신타와 자기 일행 들에게 통로를 열어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뇌진을 이동시키던 그는 '앗!'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방어진에 매설한 풍뢰는 누구의 손 엔가 이미 박살나 버린 게 아닌가!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전후좌우, 암벽 일대에 물샐 틈없이 쳐 놓은 것이 모조리 무용지물로 화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제갈경아는 아연실색,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눈 멀거니 뜬 채 해안 쪽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등팔고와 사도평, 진자령자매가 줄줄이 신타를 따라서 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눈빛이 가물가물하다. 도대체 누가 다섯 사람의 눈을 속이고 침투했단 말이냐? <백욕신마> 언 습과 귀마들을 처치한 것이 바로 며칠 전, 그로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불철주야 경계를 해왔는데 그 어느 틈에 적이 뚫고 들어가 뇌진을 파괴했는지 제갈경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이대로 까마득히 모른 채 내일을 맞았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그는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 다. 그는 망연자실, 허탈감에 빠져서 해안 쪽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한편 풍뢰진 속에 들어선 등팔고는 또 그녀대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낯빛이 핼쓱해졌다. 길 맞은편 울창한 숲 곁에 사람의 힘으로 자그맣게 쌓아올린 동산이 우뚝 솟아 있었던 것이다. 동산 의 형태는 바로 보상부인이 숨은 암벽과 동굴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듯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 기, 바윗돌 하나 틀리지 않고 꼭같았다. '맙소사, 큰일날 뻔했구나!' 두 자매와 사도평은 등팔고의 안색이 대번 바뀌는 것을 보고 영문을 몰라 엉거주춤, 그 자리에 멈춰섰다. 신타 을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그 동산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움켜잡고 있던 괴물 을 땅바닥에 철썩 메다꽂더니 양손을 맞비벼 홍광(紅光) 한 무더기를 일으켜 가지고 동산을 뒤덮 어 버렸다. 휘익! 휘익! 신타의 입에서 날카로운 휘파람이 연거푸 두 차례 울렸다. 그러자 사람의 머리에 거북 몸뚱이를 가진 괴물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괴물의 양가슴이 쩍 벌어지더니 핏빛처럼 시뻘건 손바닥 하나가 불쑥 나왔다. 엄청나게 커다란 손가락이 흙바닥을 몇 번 휘젓기만 했는 데도 그 자리에는 당장 깊숙한 구덩이가 파였다. 괴물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감싸안은 채 엉금엉금 구덩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곤 이내 몸 뚱아리 전체가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뒤미처 사람의 키만한 동산이 움찔움찔거리더니 잠시 후에는 지면 위로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 다. 괴물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놈은 흙부스러기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동산을 통째로 등에 진 채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고 있다. 동산의 크기는 몇 척 둘레밖에 안 되어 보이지만 괴물은 무 척이나 무거운 듯 죽을 상이 되어 비틀거리는 것이다. 휘익! 신타 을휴가 또 한 번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손가락이 힘차게 바다 쪽을 가리켰다. 괴물은 무형 의 압력에 눌려 어쩔 도리가 없는 듯, 비척비척 걸음을 떼어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황소처럼 씨근벌떡 뜨거운 콧김이 뿜어나온다. 그리곤 연방 고개를 돌 려 애걸하는 눈빛으로 신타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무거워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 력했다. 신타 을휴가 호통을 쳤다. "예끼, 이 못난 놈! 죽을 목숨과 맞바꾸는 것인데 힘 좀 들기로소니 그걸 못 참겠단 말이냐? 그 럼 어디 편안하게 죽여주랴? "우워어!... 우워어!" 괴물은 신타의 호통에 찔끔 놀라 황급히 도리질을 하더니 다시 헐레벌떡 걷기 시작했다. 가면서 도 여전히 한 걸음에 한 번씩 뒤돌아보았다. 그리곤 신타의 냉엄한 눈초리에 부닥칠 때마다 모가 지를 움츠렸다. 이렇듯 산더미를 진 괴물은 소걸음질로 잠시 후에는 완전히 풍뢰진 밖으로 벗어 났다. 등팔고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잠자코 그 광경을 주시했다. 괴물의 소걸음질은 완만하게 보이면서 도 해안까지의 거리는 유별나게 앞당겨지고 있는 것이다. 신타가 <이산축지법(移山縮地法)>을 쓰 는 줄 눈치챈 사람은 등팔고 하나뿐이었다. '이제 저놈이 해변에 다다르기만 하면 우리도 위험에서 벗어나겠지.' 등팔고는 속으로 괴물의 걸음걸이를 셈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일순 그녀의 귀에 공 기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릴듯 말듯 아주 가느다랗게 울려왔다. 후딱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니, 달 빛 그림자 아래 흰 점 같은 것이 날아오고 있다. '적이다!' 등팔고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미처 경보를 발하기도 전에 해안까지 날아든 침입자는 어느 새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앗!' 소리 한번 지를 틈도 없이 수십 줄기나 되는 불빛이 일행 들의 머리 위로 한꺼번에 우박처럼 쏟아져 내린 것이다. "웬놈이냐!" "비겁하게 암습을 하다니!" 젊은이들이 요격태세를 취하면서 앳된 목청으로 야무지게 외쳤다. 그러나 신타 을휴는 여전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 한 번 쳐들지 않았다. "을진인님! 적이 쳐들어 왔어요! 이크, 불소나기가 마구 쏟아지네." 다급한 나머지 한악이 신타를 일깨웠다. 불비가 정수리 위 이삼 장까지 덮쳐내린다. "우와앗!" 돌연 신타가 용음(龍吟)을 토해내듯 부르짖더니 왼손으로 수결(手訣)을 맺으면서 그 길다란 손을 번쩍 쳐들었다. 백옥처럼 고운 손가락이 연거푸 다섯 번 퉁겨지자, 그 즉시 찻잔만큼씩이나 커다 란 불덩어리 수십 개가 유성과도 같이 쏘아져 날아갔다. 쿠다다당! 꽝, 우르르 청명한 밤하늘에 때 아닌 뇌성벽력이 진동했다. 그 다음 순간 침입자의 불덩이와 신타가 쏘아올 린 빛덩어리 한 개가 산산조각 부서져 날았다. 뒤미처 또 하나가 벼락치는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 다. 뇌성벽력이 연속 터지는 가운데 하늘은 온통 불꽃의 소낙비가 퍼붓듯 찬란한 빛으로 가득찼 다. 등팔고와 젊은이들은 그만 귀를 틀어막았다. 천지개벽을 하는 굉음에 산도 울리고 골짜기 골짜 기마다 메아리쳤다. 거울처럼 맑던 바닷물조차 놀랐는지 길길이 날뛰면서 해안으로 덮쳐들었다. 산더미를 등에 진 채 괴물은 혼비백산을 해 가지고 그 자리에 바윗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가랏!" 신타가 호통을 지르자, 괴물은 다시 해변 쪽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러나 온몸뚱아리가 와 들와들 떨려 도무지 진척이 없다. 자꾸만 떨리니 발도 말을 듣지 않아 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 는 것이다. "죽고 싶으냐?" 뇌성 벽력치는 속에서도 신타의 호통은 더욱 크게 울렸다. "우워어! 우워어!" 괴물이 휘청거리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팔고는 손에 땀을 쥐고 괴물의 걸음걸이를 뚫 어져라 주시했다. 이윽고 괴물은 동산을 지고서 바닷가에 다다랐다. "우워어!" 소울음 같은 부르짖음이 길게 울렸다. 신타 을휴가 왼쪽 다섯 손가락을 다시 한 번 퉁겨 올린다. 붉은 광채를 내뿜으면서 불덩어리 수십 개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중천에선 또다시 뇌성벽력과 함께 폭죽 터지듯 찬란한 불꽃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상대방 의 불소나기도 한층 강화되었다. "가랏!" 불덩어리를 퉁겨낸 손이 바닷속을 가리키자 그 방향의 바닷물이 좌우로 쩍 갈라진다. 괴물은 망 설이지 않고 산더미를 멘 채 그리로 들어갔다. 뜨거운 차 반 잔쯤 마실녘이 되었을 때 사나운 파 도를 헤치고 괴물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놈은 홀가분한 동작으로 해안에 오르더니 신타의 발 밑까지 달려가서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 고 머리를 조아린 채 길게 울부짖었다. "우워어어!" 신타 을휴는 공중의 불꽃싸움은 안중에도 없다. 이제껏 바다 쪽에만 전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다 가 괴물이 해안으로 뛰어나오자 그 즉시 쥐고 있던 오른 주먹을 펼쳤다. 꽈앙, 콰다당! 바닷속에서 마치 백자연주포(百子連珠包)를 터뜨리듯 둔중한 굉음이 연거푸 울렸다. 그 다음 순 간이었다. 우르르!... 쏴아! 해면 전체가 무시무시하게 요동치더니 갑자기 평지에 산이 불쑥 솟아나듯이 파도를 헤치고 백 장 높이나 됨직한 엄청난 물기둥이 솟구쳐 오르지 않는가! 허나 그것도 잠시뿐, 거대한 물기둥은 하늘을 언제까지 떠받들 것처럼 보이다가 이내 비단폭 찢듯 갈갈이 찢겨 무서운 기세로 사면팔방 허물어져 내린다. 쿵!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물보라 속에 수천 수만 마리 크고 작은 물고기들의 갈기갈기 찢긴 몸통 이며, 꼬리, 지느러미, 창자가 달빛을 받으면서 처참하게 흩어진다. 해중(海中) 진동에 여파(餘波)가 밀려왔다. 맑은 달빛 아래 바람도 한 점 없이 잠잠한데 해상에 는 엄청난 물결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빙글빙글 원을 그리면서 번져나갔다. 해안으로 밀 어닥치는 제일파, 제이파... 물결의 기세는 갈수록 사나와진다. 발 밑에 딛고 있는 대지가 당장 갈 라져 나갈 듯 물결의 진동을 받아 뒤흔들린다. 신타 을휴는 황망하게 한 모금 강기(剛氣)를 '푸우!' 하고 바다 한가운데로 뿜어보냈다. 오른쪽 손바닥이 가슴 앞으로 뻗어나가,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제서야 길길이 날뛰던 파도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왼손가락에서 또다시 붉은 빛덩어리들이 튕겨지듯 날아올랐다. 그리곤 적의 불꽃과 일제히 맞부딪쳐서 어마어마한 굉음을 울리고 산산조 각 흩뿌려졌다. 화염이 사그러들자 이윽고 적의 모습이 드러났다. 겨드랑이에 양 날개를 가득 펼치고서 일행들 은 자기네 쪽으로 쏜살같이 내려오는 도사 한 명을 보았다. 옥을 다듬어 빚은 것처럼 매끄럽고도 준수한 면모에 붉은 입술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정광 (晶光)을 뿜는다. 시원하게 탁 트인 이마를 가로질러 숯처럼 짙은 두 눈썹이 곧게 뻗었다. 등 뒤 로 활짝 펼쳐진 날갯죽지는 길이가 삼 척 남짓 되어 보였다. 문짝만한 두 날개가 접히면서 도사는 거칠 것 없는 기세로 일행 앞에 내려섰다. 키는 신타 을휴 와 거의 비슷한데, 상반신에 걸친 것이라곤 백색 운견도복(雲肩道服) 한 벌뿐이라 불덩이 같은 두 팔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아랫도리도 연화백엽도군(蓮花百葉道裙) 홑바지 차림에 시뻘건 다 리통이 곧추섰는데 종아리 아래쪽은 맹금(猛禽)의 억센 발톱을 닮았다. 도사가 나타나자, 이제껏 신타의 발치 끝에 꿇어 엎드리고 있던 괴물이 와들와들 전신을 떨면서 엉금엉금 기어 신타의 등 뒤로 돌아가 숨는다. 괴도사는 지상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신타를 향해 삿대질하면서 욕설부터 퍼부었다. "네 이놈 꼽추귀신아, 소문에 듣자니 네놈은 영영 궁산악수(窮山惡水) 밑바닥에 깔려서 만겁이 지나도 살아나오지 못하게 되었다던데 또 어떤 작자가 풀어준 게냐? 요행수로 세상에 다시 나왔 으면 얌전히 은거해서 수양이나 쌓을 일이지 어쩌자고 또 말썽만 부리고 다니는 거야? 남의 일에 홀딱 넘어가서 종노릇이나 하느라고 지난날 허풍마저 깡그리 잊어먹었구나. 아미측 패거리와 결 탁해서 장령자도우를 골탕먹인 걸 보더라도 네놈이 염치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줄은 내 벌써 알 만하다. 현진자야 그래도 요사스런 여우년이 자기 제자를 구해준 은혜를 생각해서 의리상 감싸고 도는 것이니 이해가 간다마는 꼽추귀신 네놈은 그 여우년과 붙어먹은 살붙이도 아닌데 어쩌자고 그년 일에 끼여드는 거냔 말이다. 어디 아가리 좀 벌려 봐라! 나하고 정면대결하기가 겁나지? 그 래서 나 없는 틈에 요법을 써서 내 제자녀석들이나 찍어 누르고 협박해서 <이형금제대법(移形禁 制大法)>을 훔쳐내다 부숴버린 게 아니냐? 어디 입이 있거든 변명이라도 한 마디 해보려므나! 혓 바닥이 옛날처럼 그럴 듯하게 구른다면 혹시 모르거니와, 어물쩡 딴 수작을 부리다가는 오늘 내 손아귀에 뼈도 못 추릴 줄 알아라." 한바탕 억수같이 욕설을 뒤집어쓰고도 신타 을휴는 성을 내기는커녕 도리어 낄낄대고 웃었다. "히히힛, 이 늙은 꼽추를 못 봐도 한참 잘못 봤네. 나는 평생 두고 누구한테 구걸해 본 적도 없 거니와 또 누가 날 부추긴다 해서 궁둥이 한 쪽 들썩여본 적도 없거든. 그저 심심하면 내 마음내 키는 대로 배짱 꼴리는 대로 해왔을 뿐이야. 이 터럭달린 박쥐 녀석아, 인정머리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고집 불통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서 주둥아리만 나불거리지 말거라! 그렇게 소견머리가 좁아서 어디에다 쓰냐? <천호>하고 나하고는 비록 오빠 동생 사이도 아니고 영감 마누라 할 처 지도 아니지. 그래 자네 말마따나 아무 관계도 없어. 하지만 요걸 알아두게! 천호는 내 젊은 친구 제갈경아를 살려준 은인인 데다 내 기명제자(記名弟子) 사도평의 장모님이라 이 말씀이야! 마누라 가 귀여우면 처가집 말뚝도 곱게 보인다는데, 내 어찌 참견을 안한단 말인가? 물론 자네가 <천호 >하고 견원지간이라는 것쯤 내 잘 알지. 그러나 자네는 때와 장소를 잘못 골랐네. 하물며 이 늙 은 꼽추까지 나선 판인데 복수계획이 성공할 듯싶은가? <천호>는 병해(兵解)한 요 몇 년 이래로 원신(元神)을 동해 암동에 감추고서 <삼선>도우들의 보호 아래 날마다 풍뢰의 시련을 겪으며 초 겁할 날짜만 고대해 왔지. 자네는 <삼선>도우의 성미를 건드리기가 무서워서 그동안 이 부근에 얼씬도 못하다가 이제 세 도우가 폐관참수를 하느라고 다른 데 신경쓸 틈이 없게 되자, 얼씨구나 하고 기어들어 왔겄다? 또 남한테 정면도전을 해봤자 승산이 없으니까 엉큼스럽게도 산요정(山妖 精)이나 바다괴물들을 모아가지고 자기 대신 추잡스런 계략을 꾸미게 했지? 하기야 자네 꼬락서 니도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요정 괴물 따위와 놀아나는 것도 어울리겠구먼. 그래서 변변치 못한 놈들을 시켜서 남의 동굴 봉쇄망을 못 쓰게 만들고 두더지처럼 바닷속 땅 밑구멍으로 파들어와서 <이형금제법>인가 뭔가 하는 수작을 부려 이 섬 전체를 깡그리 날려보낼 심산이었어. 내 말 어 떤가? 하지만 자네 모르고 있는 게 너무 많더구먼. 자기 제자녀석들 성미도 하나 변변이 파악하 지 못했으니 말이야. 자, 잘 들어보게! 자네의 그 멍청이 제자 두 놈은 고집도 여간 세고 욕심 또 한 미련하게 많더군. 이것들은 자네 명령대로 기어들어 와선 일도 미처 끝내지 않고 게으름을 부 리다가 때마침 천 년 묵은 진주 조개가 보름달빛을 쏘이려고 하늘로 솟구치자 예정에도 없는 풍 파를 일으켜 가지고 조개의 명주(明珠)를 강탈하려 들었다네. 그걸 내가 단숨에 사로잡았지 뭔가? 한 녀석은 내 오룡전에 짓눌려서 아직도 저기서 버둥거리고 있고, 또 한 녀석은 붙잡히자마자 나 한테 항복했네. 왜 그런지 아나? 자네 성미가 너무 독하고 모질어서 일의 매듭을 못 짓고 돌아가 봤자 자네 손에 살아나기는 아예 틀린 노릇인 줄 뻔히 알거든.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 하 는 게 얼마나 측은한지. 나도 사람인데 그낭 모른 척할 수야 있나? 용서해 주기로 했지! 나는 자 네와 다르다네. 자네야 제 수단만 믿고 약자를 짓밟거나 강자 앞에서 꼬리를 도사리는 게 특기 아닌가? 그런 위인이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와서 강짜를 부린단 말인가?" 능글맞은 대꾸에 괴도사는 그만 노발대발, 목청이 터져라고 악을 쓴다. "주둥아리 닥쳐, 이 꼽추놈아! 그래도 혓바닥은 여전히 매끄럽구나. 고 요망스런 여우년이 껍질 을 벗고 여기 와서 숨기 전이라면 내 손가락 한 개만 퉁겨도 끝장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우물 속에 빠뜨려 놓고 돌던지기 같아서 내가 참았다. 또 그 여우년이 저지른 음행의 업보가 너무 많 이 쌓였길래 당장 그년의 형신(形神)을 소멸시켜 준다면 너무 편하게 죽이는 셈이라 구차한 목숨 을 잠시나마 붙여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저지른 죄업을 뉘우치고 <삼선>의 비호 아래 고심참 담 수련하게 내버려 두었지. 더구나 그년이 요번 천겁마저 벗어나기만 하면 정파(正果)를 이룰 수 도 있단 말이거든. 이제야 말이지만 나는 그 여우년이 천겁도 모면하고 정과에 드는 그 순간, 의 기양양해진 그 순간에 <이형금제대법>으로 '쾅!' 요리해 줄 참이었다. 늙은 꼽추놈아, 생각 좀 해 봐라! 그 얼마나 통쾌한 복수냔 말이다. 그걸 네놈이 망쳐놓았어! 내 산중에 일이 생겨 한발짝 늦 었더니, 들고양이모양 살금살금 기어들어 와 내 대법을 박살내 버렸단 말이다! 저기 저것들이 내 제자라구? 흥, 잡았다고 뻐길 것 없다. 내 문하에 어디 한두 놈뿐이라드냐? 저 멍청이 짐승들은 스승의 분부를 거스르고 제멋대로 굴다가 남의 손에 잡혔으니 자작지화(自作之禍)를 당한 셈이야. 기왕 네놈 손에 떨어졌으니 죽이든 살리든 구워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하려므나. 다만 그 요망 스런 여우년은 안 된다. 그년이 천겁을 벗어나서 또다시 세상사람들을 홀리는 짓일랑 절대로 용 서 못해! 그년의 혼백을 벗겨서 잿더미로 만들기 전에는 내 원한이 안 풀어진단 말이다. 요 꼽추 놈아, 네가 자청해서 여우 꼬리노릇을 하는 모양이다만, 그래 어디 재주가 있거든 마음대로 부려 봐라! 내 곱게 상대해 주마!" 괴도사의 입심도 결코 신타에 뒤지지 않는다. 진씨자매와 사도평 세 젊은이들은 괴도사의 생김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벌써 이 자가 <익도인> 경곤임을 알아보았다. 동해에 온 이래 이들은 제갈경아와 등팔고의 입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를 들은 게 있 었으므로 처음에는 사뭇 두려움을 품고 주춤거렸으나, 나중에 경곤이 말끝마다 '요사스런 여우년, 요망한 여우년!' 하고 쉴새없이 욕설을 퍼붓자, 두려움 대신 불덩어리 같은 노기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자령자매는 <익도인>이 어머니한테 세상에 차마 듣지 못할 모욕과 저주를 마구 퍼붓 자 그를 불구대천지원수로 여길 만큼 악에 받쳤다. 결국 <익도인> 경곤은 너무 콧대 높게 자만심을 부리다가 적을 지나치게 깔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속으로 신타 을휴에 대해서만은 그래도 꺼림칙한 감을 느끼지만 나머지 을휴 곁에 서 있 는 이름 모를 젊은이들이야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 여우란 년은 꼽추 늙은이라도 마다 않고....." 경곤은 제딴에도 응구첩대(應口輒對)가 제법이라고 생각했는지 신바람나게 계속 지껄여댔다. 눈 앞에서 고조되고 있는 험악한 분위기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 입심에만 도취해 버 린 것이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진씨자매, 너무나 분하고 원통한 나머지 두 눈이 새파랗게 불꽃이 튄다. 목 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을 판국인데 상대가 무서운 강적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따지고 자시고 할 계제가 아니다. 두 자매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옷소매를 당기더니 두말 않고 대뜸 비검부터 냅다 쏘아날렸다. "이얏, 원수놈아!" 필살의 의지가 담뿍 담긴 비검이 광채를 번뜩이면서 경곤을 노리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한창 정신없이 주절대던 경곤은 자기 멱줄기를 노리고 비검 두 자루가 덮쳐오자, 일순 찔끔하여 내심 놀랐으나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헤헤, 그 따위 재간 가지고 어르신네 앞에서 재롱을 부려보겠다는 거냐?" 어깨 뒤 날갯죽지가 슬쩍 펼쳐지는가 싶더니, 죽지 끝에서 어느 틈에 두 줄기 불덩이처럼 이글 거리는 광채가 쏘아져 나오더니 덮쳐오던 비검을 중도에서 선뜻 막아버렸다. "흐흐흐, 맛이 어떠냐? 조무라기 같은 년들이 귀찮게 구는구나. 어디 혼줄 좀 나보련?" 검광이 불덩어리와 마주치는 순간, 진자령은 적의 기세가 너무 사나와 버텨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니, 그렇게 느낀 순간에도 자령의 비검은 맥없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아뿔싸, 너무 흥분했어! 홧김에 상대방이 어떤 작자라는 것도 잊어먹었구나!' 후회해 봐도 이미 때는 늦었다. 언니가 이런 판에 동생 한악이라고 뾰족할 리 없다. 그녀의 비검 역시 더 빠른 속도로 밀리고 있었다. "이얏, 기다려!" 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사도평도 대갈일성을 터뜨리면서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가진 것이 라곤 비검 한 자루밖에 없지만 진씨자매가 자기한테 어떤 존재인가 말이다. 맨 주먹으로라도 응 원해야 할 처지 아닌가? 곁에 선 신타 을휴가 싱글싱글 웃는다. "패싸움이라면 혹 몰라도 셋이서 하나를 치다니, 그런건 볼썽 사납구먼. 허지만 기왕지사 벌인 싸움판이니까 해보려므나. 얘야, 네 오룡전은 두었다가 뭣에 쓸 참이냐?" 스승의 일깨워주는 바람에 사도평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과연! '휙!' 소리를 내면 서 시커먼 빛줄기가 날아와 손아귀에 묵직하게 잡힌다. 이제껏 땅바닥에 고꾸라진 요괴의 몸뚱이 를 칭칭 감고 있던 오룡전이 임자한테 돌아간 것이다. 이 무렵 경곤의 날갯죽지에서도 또 한 줄기 불덩어리가 솟구쳐 나와 사도평의 비검을 덜컥 막아 버렸다. 세 남녀의 검광은 맥도 못추고 당장 수세에 몰려서 잔뜩 오그라들었다. <익도인> 경곤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여유만만하게 을휴를 보고 삿대질까지 한다. "꼽추야, 지금 나하고 겨룰 생각이 없거든 잠시만 기다려라. 내 요 하룻강아지들부터 시범삼아 처치하고 상대해 주마! 내 실력이 어떤지 봐야만 네놈도 생사결판을 낼 생각이 싹 달아날 테니 까." 자신의 현공변화와 법력이 막강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굳게 믿고 있는 경곤, 자기 앞을 가로막은 세 남녀한테 끝내 눈길 한번 돌리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경계할 대상은 오직 신타 을휴뿐인 것 이다. 경곤이 여유작작, 세 남녀를 상대하면서 떠벌이고 있을 때, 신타의 곁에선 등팔고와 제갈경아가 사뭇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전국(戰局)을 관망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기긴 힘들겠군요. 삼 대 일로 싸우지만 워낙 실력 차가 엄청나서....." 제갈경아가 혼자말하듯 속삭였다. 등팔고도 침통한 표정을 짓고 물었다. "을진인께서 도와주시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성미가 워낙 괴팍스런 분이라 지금은 나서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등팔고가 거듭 물었을 때였다. 경곤과 싸우는 셋 중에서 진자령의 검광이 세찬 불덩어리에 짓눌 려 당장에라도 파괴될 위기까지 몰리고 말았다. 그대로 고철덩어리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얍!" 제갈경아는 대답 대신 비검을 쏘아 날리면서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등팔고의 손에서도 설혼주 가 번쩍 날았다. 이제껏 노닥노닥 여유있게 세 사람을 몰아붙이던 경곤은 또 한 자루 검광이 덮쳐오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응원군이 심상치 않은 고수임을 직감했다. 그래도 마음 깊이 새기지는 않고서 자기 역시 또 하나의 불덩어리를 쏘아냈다. "제법인걸!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응원군의 비검에 뒤쫓듯 날아드는 광채를 보고서 경곤은 안색이 확 변했다. 서릿발처럼 싸늘한 은빛 광채가 중천에 뜬 보름달빛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철부지들의 검광은 둘째치고 자신이 쏘아낸 불덩이조차 화력(火力)을 잃고 숯덩어리처럼 맥없이 시들어지는 것이 아 닌가! '아차, 웬 놈이 선가(仙家)의 이보(異寶)를 가지고 있었구나!' 경곤은 속이 뜨끔했다. 이건 화구(火球)로 막아낼 게 아니라 정통 술법을 써야 한다. 그는 황급 히 양 날개를 활짝 펼쳤다. 막판에 몰려서도 악으로 버텨가던 자령자매는 등팔고의 설혼주가 은빛 광채를 눈부시게 쏘아날 리자 그것을 보는 순간 둘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원공(元功)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강렬하기 이를 데 없는 설혼주의 광채에 피차 쌍방간의 병기는 하나같이 위력을 잃고 가차없이 몰아붙이던 적의 집중력도 흩어졌다. 그틈을 노려 반격한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 <익도인>의 날갯죽지 끝에서 붉은 빛덩어리가 한꺼번에 수십 개나 쏟아져 나왔다.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들은 싸움판을 단번에 휩쓸어 버릴 듯 어마어마한 기세로 적을 향해 덮쳐갔다. 뒤이어 경곤의 몸뚱이가 푸드득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일단 불덩어리 세례로 적의 공세부터 저 지한 다음 다시 현공변화술법을 써가지고 깡그리 처치해 버릴 속셈이었다. 공중으로 솟구치면서 도 그의 눈길은 설혼주에서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얏, 받아라!" 귓결에 계집의 야무진 기합소리가 울렸어도 익도인은 무시해 버린 채 오로지 설혼주의 움직임만 을 경계했다. 그것이 결정적인 실수일 줄이야! 자령과 한악은 혼신의 힘을 다해 백미침(白眉針)을 쏘았다. 그것도 한두 대가 아니라 십여 대를 연거푸 발사한 것이다. 허공에 갓 떠오른 채 적의 괴상한 구슬빛만 주시하던 경곤은 문득 자기 몸쪽으로 날아드는 암기 를 발견했다. 실낱처럼 가느다란 은백색의 광채가 어느 결에 자기 전신 요혈을 구석구석 노리고 오륙 척 가까이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이다. '아뿔싸, 그걸 잊었구나!' <익도인> 경곤이 어떤 인물이든가? 오랜 세윌 숱한 공력을 쌓아올리고 세상이 다 알아주는 원 로 고수다. 그런만큼 안목 또한 예민하기 이를 데 없다. 날카로운 그 두 눈길이 먼지 한 톨 그냥 넘겨본 적이 없는데 어째서 지금 십여 개나 되는 암기가 몸으로 박혀오고 있는 걸 까맣게 몰랐단 말인가! 한밤중 설혼주의 은빛 광채는 태양보다도 강렬하다. 그 빛 아래 달도 별도, 비검의 광망(光芒)조 차도 가리워질 지경이다. 그 빛을 줄곧 노려보고 있었으니 제아무리 예민한 시력을 가진 경곤도 눈이 부시지 않을 리 만무하다. 그는 적이 언제 암기를 발사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은 실 같은 암기들이 코 앞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비로소 <천호>의 백미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경곤은 순간적으로 죽도록 후회스러웠다. 백미침! 그 얼마나 무섭고 지독스런 암기냐! 그걸 익히 알고 있었기에 복수심에 불탄 경곤은 <천호>의 법보를 격파하기 위해서 숱한 고생을 해왔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녀의 법보를 하나 하나 보기 좋게 파괴할 비장의 무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백미침도 문제없었다. 그 병기들이 지금 법보낭 속에서 위력을 발휘할 날만 기다리 면서 얌전히 들어 있다. '아아, 천호의 두 딸년이 아미파 문하로 들어갔다는 걸 어쩌다 잊고 있었을까? 그것들이 백미침 으로 이단의 고수를 벌써 몇 명이나 거꾸러뜨렸다는 소문도 뻔히 듣지 않았느냐 말이다. 어쩌자 고 딴짓에 정신이 팔려 그걸 있었단 말이냐?' 후회해 봤자 이미 소용없는 일, 그 찰나에도 무시무시한 백미침은 소리없이 닥쳐오고 있다. 실로 위기일발! 경곤의 두뇌는 번개처럼 회전했다. 이제 다른 법보나 술수를 써본들 때가 늦다. 백미침 에 대항할 병기가 법보낭 속에 들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꺼낼 여유가 없으니 이 얼마나 안타 까우냐! 그렇다고 피할 도리도 없게 되었다. 머리가 잠깐 돌아가느라 주춤한 사이 무시무시한 백미침은 어느덧 몸뚱아리에 들이닥치는 판이다. 요행수로 모면하기는 기왕에 틀린 일, 다급해진 경곤은 활 짝 펼쳤던 두 날개를 대문짝닫듯 몸 앞쪽으로 겹쳐 접었다. 날개에 손상을 입을 망정 그것을 방 패삼아 실체 요혈만큼은 다쳐선 안 된다. 바늘은 부리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자유자재로 적을 쫓는다. 악이 받칠 대로 받친 자령자매, 경 곤의 몸뚱이고 날갯죽지고 가릴 것 없이 마구 백미침을 몰아붙인다. 씨익! 따다다닥! 십여 대의 은빛 바늘이 마침내는 경곤의 날개에 온통 들이박혔다. 그 다음 순간, 경곤은 날개부 터 어깨죽지에 이르기까지 뜨끔한 아픔을 느꼈다. 쩌릿쩌릿하는 통증과 함께 마비증세가 뒤따라 감각을 잃어갔다. '아이쿠, 큰일났구나! 이놈의 바늘은 핏줄을 타고 심장까지 치민다던데, 그랬다간 끝장이다!' 그는 허겁지겁 현공부터 운기해서 체내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곤 전신의 모든 혈도를 한꺼 번에 봉쇄해 버렸다. 일단 바늘의 침투를 저지하고 보니 이제는 양 날개에 들어박힌 바늘을 뽑아 낼 차례다. 서둘러서 뽑지 않았다간 두 날개를 영영 못 쓰게 된다. 평생토록 물에 젖은 소금 가마 니를 등짐지듯 질질 끌고 다녀야 할 판이 다. 어디 그뿐인가? 신타 을휴와 같은 강적이 주먹을 쓰다듬으면서 기다리고 있다. 또 은빛 광채를 뿜는 구슬도 범상치 않을 뿐 아니라 사도평이란 놈의 오룡전도 신룡(神龍)처럼 꼬리를 엇갈린 채 가위날을 잔뜩 벌리고 한꺼번에 달려든다. 경곤은 적의 기세를 보고 싸울 마음이 싹 가셨다. 당초 을휴와 격전을 벌일 것은 예상했지만 뜻 밖에 이름도 없는 어린 것들한테 참패하리라곤 어디 상상이나 했으랴! 이야말로 개천에서 놀잇배 가 뒤집힌 격이 아닌가? 경곤은 통한(痛恨)과 후회, 치욕감에 못 이겨 이를 으드득 갈아붙였다. "우와아앗!"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회한(悔恨)의 울부짖음을 토해내면서 <익도인> 경곤은 둔광(遁光)을 빌어 타고 파공성과 함께 사라져갔다. "쫓아랏!" "잠깐만, 멈추시오!" 뒤쫓으려는 젊은이들을 등팔고가 황급히 제지했다. 그녀는 눈짓으로 신타를 가리켰다. 그제서야 흥분을 가라앉힌 젊은이들은 제각기 비검과 법보를 거두어 들이고서 신타 을휴 앞에 공손히 시립했다. 을휴의 등 뒤로 숨었던 괴물도 비로소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그놈은 모래바닥에 팽개쳐진 자기 동료의 주검을 보더니 질겁해서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신타가 당초 해안에 오를 때 내팽개친 괴물은 이놈과 반대로 물고기 머리에 사람의 몸뚱이를 가진 놈이다. 그러나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네 쪽, 두 다리는 생선 꼬리처럼 달라붙고 거기에 긴 발톱이 두 개 뻗쳐 있었디. 이놈은 사도평이 오룡전을 거둬들일 때 벌써 모가지가 잘리워서 죽은 지 오래였다. 기세등등, 눈에 보이는 게 없이 오만하던 <익도인> 경곤이 중상을 입고 허둥지둥 달아나 버리 자 신타 을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지 배를 끌어안고 껄껄 웃었다. 그리고 일행들을 하나 하 나씩 돌아보면서 말했다. "모두들 수고했네. 내가 여기에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놀랐겠지? 그럼 얘기해 주지! 자령하고 한 악, 사도평 세 아이들은 알겠지만 나는 자령곡(紫玲谷)에서 장령자녀석을 부추겨 가지고 백만산 (百蠻山) 녹포노조란 놈과 싸움을 붙여 보낸 뒤, 능가(凌哥) 거지한테 어거지로 청라욕(靑螺欲)에 끌려가서 한 이틀간 푹 쉬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밀려 있던 일 좀 처리했지. 그대들이 동해로 떠나기 전, 나 역시 보상부인의 처지가 사뭇 어렵게 된 걸 알고 있었다. <천호>는 과거 원수진 사람도 많거니와 마겁(魔劫) 또한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과거에 저지른 죄가 크기는 해도 선행을 베푼 일도 적지 않다. <극락진인>과 <삼선>도우의 감화력을 받아 병해(兵解)한 이후부터 마음 속 깊이 뉘우치고 개사귀정(改邪歸正)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지. 그리고 천겁(天 劫)의 난관 하나만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까왔다. 하물며 보상부인이 천겁을 맞이할 즈음 그녀한테 앙갚음하러 오는 자들이 적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마외도의 괴수들이지. 그래도 방금 쫓겨간 경곤은 좀 나은 편이고 그밖에 나머지 놈들은 평소 저지른 악행이 과거 <천호>보다 백 배나 더 심한데 이것들이 제법 명분이랍시고 의리를 내세우 고 불난 집에 칼 들고 강도질을 하려 든다니 그냥 봐 넘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동해삼선>이나 제갈친구, 그리고 내 기명제자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 설령 아무 관 계가 없다손 치더라도 남이 억울한 꼴을 당하는 걸 내 그냥 두는 성미가 아니거든. 그래서 그대 들이 오기 며칠 전 내가 먼저 이리로 와서 한바탕 청소를 해놓았지. 와서 봤더니 바닷속, 땅 속, 하늘 위에 요마 같은 놈들이 우글우글하더구만.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깡그리 쫓아버리거나 죽여 없앴지. 그리고 나서 잠복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상대할 습격자 중에서도 제일 악독스런 놈 은 <익도인> 경곤이었다. 이 자는 과거 <천호>와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이 섬 전체를 몽땅 날 려 보낼 어마어마한 계략을 꾸민 것이야. 물론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익도인> 경곤은 그 어미가 대붕(大鵬)과 교접해서 그 정(精)을 받고 태어난 작자다. 그러니까 날짐승과 인간의 중간 에 속하는 부류인 셈이지. 그 자는 평소 순수한 인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로 자기처럼 짐승과 사람 중간부류에 드는 놈만 골라서 제자로 삼았다. 그 세력을 가지고 일파를 세울 작정이었지... 한데 경곤은 천성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잔인한 데다 의심도 많아, 자기 제자놈들이 도술을 배우 고 나서 딴 짓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자기 말은 안 듣고 세상에 나가 함부로 날뛰다 남 의 손에 죽기라도 하는 날이면 결국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격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궁리끝 에 문파의 계율을 말도 못할 정도로 엄격하게 세워놓았다. 제자놈들이 눈꼽만치라도 수틀리면 가 치없이 참혹한 방법으로 죽여버리곤 했지. 그렇다고 아랫것들한테 자신의 진수(眞髓)를 열심히 가 르쳐 준 적도 없었다. 스승에게서 진전을 전수받은 놈은 아주 드물었지. 경곤은 제자들에게 무슨 일을 시켜 내보낼 때만 법보를 주고 술법 몇 가지 전수해 주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즉시 법보는 도로 회수하고, 실패한 놈은 죽여버리고....." 자령자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세상에 그렇게 잔인하고 인색한 스 승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미물(微物)이니까 그 제자노릇을 감수하지 사람이라면 어떻게 배겨날 수 있느냔 맡이다. 신타 을휴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일행들도 다소곳이 귀기울여 듣는다. <익도인> 경곤은 남해안(南海岸) 금궐동(金闕洞) 지하에서 아득한 옛날 치우씨가 중국인의 포상 황제(皇帝)와 싸울 때 썼던 삼반경(三盤經)을 우연히 얻게 되었다. 그 삼반경은 현공(玄功)을 연성 하는 법만 정통일 뿐, 나머지 술법이나 법보는 하나같이 악독스럽기 이를 데 없고 더러운 것이었 다. 경곤은 열심히 삼반경을 익혔다. 비경(秘經)의 내용이나 그것을 익히는 사람의 천성이 잔혹하고 악랄하기는 매일반이어서 그는 흠뻑 심취한 가운데 마침네 치우씨의 유법(遺法)을 완전히 터득할 수가 있었다. 성품은 비록 잔인했지만 경곤은 좀처럼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까닭없이 남한테 시비를 걸거나 능멸하는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만큼 자기 동부에 틀어박혀 여간해선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일 도 드물었지. 무슨 일이 생기면 제자를 내보내곤 했다. 내보낼 때마다 그는 제자에게 몇 가지 쓸 만한 술법을 전수해 주고 호신용 법보와 함께 자신의 날개 깃털 한 개를 뽑아주었다. 그 깃털은 <익도인>의 상징이었다. 외부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피해갔다. 경곤의 수단과 성미를 뻔히 아는 사람이면 그 제자를 함부로 건드리거나 시비에 말려들기를 자청할 리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원로 검선들이 보더라도 그냥 눈 감고 지나쳐 버릴 때도 있었다. 경곤이 제자한테 무 슨 일을 시켰더라도 그렇게 악한 게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아는 데다 공연스레 참견해서 경곤 같은 위인과 원수를 맺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곤은 삼반경을 깨우치고 성도(成道)한 이래 이제껏 상대할 만한 적수와 마주쳐 본 적 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눈 아래 깔고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오늘 아미파의 이름도 없는 몇몇 <하룻강아지>인 그들한테 무참하게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이 같은 치욕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이를 갈아붙이면서 북해 (北海)로 날아갔다. 북해의 함공노조(陷空老祖)와는 전부터 교분이 있으므로 그의 힘을 빌어 백미 침을 뽑아낼 작정이었다. 일단 이 빌어먹을 놈의 바늘만 뽑아버린다면 다시 동해를 쫓아가 신타 을휴와 동해삼선이 보는 자리에서 발칙한 연놈들을 끝장내 주고야 말 것이다. 하찮은 일에도 경곤처럼 복수의 집념을 불태우는 위인도 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물다. 하물며 자 신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얼굴에 먹칠하는 정도가 아니라 체면을 갈갈이 찢어 놓은 판이니, 그 원 수들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만무했다. 경곤이 보상부인을 해치려 파견했던 제자 두 놈 중 오룡전에 동강나서 죽은 것은 교인(鮫人), 즉 상어인간의 일종이었다. 이놈은 주로 바닷속에 실을 토해내어 그물처럼 얽어놓고 걸리는 것을 닥 치는 대로 잡아먹고 살아왔다. 경곤에게 사로잡혀 제자가 된 후에도 그 버릇은 고칠 줄을 몰랐다. 성미가 잔혹한 스승은 역시 흉포스런 제자를 사랑했다. 평소 제자들한테 엄하기 이를 데 없는 경곤도 이놈에게만은 여러 모로 눈감아 줄만큼 관대했다. 그래서 같은 동문 중에서도 이놈의 도력이 제일 높았고 또 스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서 동료들 이 부러워할 정도로 자주 바깥 세상으로 활개치며 나들이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을휴에게 귀순한 괴물은 인어(人魚)가 수달(水獺)과 교접해서 태어난 것으로 달인(獺人), 즉 수달인간이라고 부른다. 바다거북처럼 네 발이 달린 데다가 앞가슴에 외팔 한 개가 더 있어서 해저를 뚫고 땅굴을 파고 다닐 수 있는데, 죽은 상어인간보다는 악행이 덜 심한 편이었다. 결국 <익도인> 경곤은 한때 잘못 판단을 하고 이 두 괴물제자 놈만 보낸 셈이 되었다. <천호> 가 은신한 이곳에 철통 같은 풍뢰의 봉쇄망이 설치되어 있는 것만 계산하고 <동해삼선>이 폐관 참수중이라면 기껏해야 문하제자 두엇을 보내서 경계 방어를 시켰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 정도 야 경곤은 누워서 떡먹기로 처치할 수가 있다. 더구나 그는 얼마 전에 새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아내 <오녀아(烏女兒)> 소남이(蘇南怡)와 꿀맛 같은 신혼재미에 빠진 나머지 별것 아닌 조무라기들을 처치하느라 자신이 직접 나서고 싶지 않았 던 것이다. 그는 두 괴물 녀석을 자기 대신 삼선도(三仙島)로 보냈다. 수달인간이 해저통로를 뚫 고 뇌진까지 침투한 다음 상어인간이 자예음정(雌霓淫精)으로 풍뢰의 방어망을 오염시켜 무용지 물로 만들게 했다. 그리고 스승이 전수해 준 술법으로 모래섬을 쌓되 삼선도의 지형과 암벽, 동굴의 형태대로 꼭같 이 쌓아놓고, 그 표면에는 교사(鮫絲)를 뿜어서 단단히 굳혀 두었다. 경곤은 암암리에 이런 안배 를 해놓고 기다렸다가 <천호> 보상부인이 천겁을 맞이하기 위해 동굴에서 나오는 시각에 맞추어 나타나면 되는 것이다. 천호가 동굴을 벗어나는 순간, <이형금제대법>으로 모래동산을 찍기만 하면 천겁이 닥쳐올 때 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와 때를 같이해서 삼선도의 산천초목은 물론, 목숨이 붙은 생물이란 생물 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화해버리고 육지마저 통째로 바닷속 깊숙이 가라앉아 버릴 것이었다. 괴물 두 마리는 스승이 신신당부한 대로 일을 끝내자 그 즉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 바닷속 은밀 한 장소에 몸을 숨겼다. 침투한 흔적이라곤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 스승의 명령을 어김없 이 완수한 것이다. 진자령, 등팔고 일행은 방어진 바깥에만 잔뜩 주의를 기울였으니 그 안에서 벌 어진 일을 알 턱이 전혀 없다. 설령 등팔고가 설혼주의 광채로 간파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해저의 괴 물 두 놈이 먼저 낌새를 채고 그 즉시 금제대법을 발동시켜서 섬을 박살냈을 것이다. 이 또한 경 곤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괴물들에게 지시해 놓은 비상조치였다. 신타 을휴는 상황을 냉정하게 헤아려 보았다. 어떻게 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경곤의 무서운 간계를 깨뜨릴 수 있을까? 사태는 긴박하다. 술법이 걸린 모래동산을 허물어버리는 것쯤이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칫 괴물들한테 눈치채일 위험성이 다분하다. 눈치를 채였다 하면 그걸로 끝장나는 셈 이다. 그렇다고 동굴 속 <천호>에게 경보를 발해서 피신시킬 처지도 아니다. 온갖 심혈을 기울여 이 날 이 때껏 기다려 온 공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활의 시윗줄을 당기고 있 는 놈부터 잡아야 한다! 신타 을휴의 생각은 바닷속 깊숙이 잠복하고 있는 두 놈에게 미쳤다. 이형대법(移形大法)의 도화 선에 불을 당길 놈만 제압하면 그 다음이야 놈들의 사부가 쫓아온다 하더라도 속수무책일 것이 다. 그 때쯤이면 괴물들을 짓눌러 가지고 모래동산을 파괴한 다음이니까 제아무리 발버둥치고 발 악해 보았자 그 악랄한 대법은 찍을래야 찍을 표적이 없을 게 아닌가? 신타 을휴의 행동목표는 분명하게 세워졌다. 그러나 풀어야 할 문제가 또 있다. 바닷속 깊이 숨 은 괴물 두 놈에게 눈치채이지 않고 접근하려면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수상쩍은 낌새를 채었다가는 놈들이 즉각 대법을 작동시킬 게 분명하다. 어떻게 감쪽같이 접근할 방법은 없는가, 있는가? 그러나 신타 을휴의 우려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가 바닷속 깊숙이 들어가서 탐 색을 시작하였을 때 이제껏 숨소리도 죽이고 처박혀 있던 괴물 두 놈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먼 바다에서 노는 천 년 진주조개 한 마리가 그들 부근에서 하늘로 솟구쳐 날더니 승월토휘(乘月吐輝)를 즐기며 달의 태음정기(太陰精氣)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쥐죽은 듯 잠복해 있던 괴물 두 놈이 그걸 보고서 욕심이 불쑥 치밀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 이 두 놈은 해면을 박차고 뒤따라 올라갔다. 희귀한 조개의 명주(明珠)를 빼앗는 데만 정신이 팔 려서 스승의 지엄한 분부도 잊고 주변 경계마저 풀어졌다. 이쯤 되면 신타 을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든 것이다. 그는 어렵지 않게 두 놈을 덮쳤다. 우선 상어인간의 가슴 속에 감춰진 금법의 부적부터 빼앗은 다음, 여유만만하게 좌우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서 해안으로 올라가 등팔고 일행을 만난 것이다. 경곤은 원래 계획이 다음 날 미시(未時)와 사시(巳時)가 바뀌는 시각에 현장으로 올 작정이었다. 신타의 손에 사로잡힌 두 놈 가운데서도 상어인간은 동료보다 한결 교활하고 영리했다. 그놈은 신타가 자기 스승을 보면 혼비백산해 가지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 줄 알았다. 스승 경곤에 대한 자부심이 큰만큼 그 위세를 빌어서 살아날 승산도 있으려니 기대했던 것이다. 신타가 잠깐 몸을 뒤채는 틈을 타서 그놈은 재빨리 스승이 준 날개 깃털에 불을 뿜어 태웠다. 물론 그 깃털은 경곤이 해마다 날개 털갈이를 하면서 빠진 깃을 모아둔 것이라, 아무리 먼 데 떨 어졌더라도 태운 냄새는 어디서든지 금방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정보가 되어 전해졌다. 신타 을휴가 투항한 괴물을 시켜서 술법이 걸린 모래동산을 진 바깥으로 끌어낼 무렵, 경곤도 경보를 받고 달려왔다. 모래동산을 등진 괴물이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신타의 초조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모래동산이 경곤의 화구 (火球) 한 개라도 얻어맞기만 하는 날에는 섬 전체가 쑥대밭으로 변하고 갈갈이 찢겨 바닷속에 수장(水葬)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신타는 손에 땀을 쥐고서 일대 모험을 걸었다. 최악의 경우를 예상은 하고 있었던만치 겉으로는 태연자약했다. 괴물의 등에 업힌 모래동산을 전심전력 보호하면서도 전혀 무관심한 듯 천연덕스 레 경곤의 불덩어리에 대항해 나갔다. 그러나 적의 눈을 속이고 은밀히 축지성촌(縮地成寸)술법을 부려서 모래동산을 심해(深海) 밑바 닥까지 깊숙이 몰아넣는 한편 경곤의 체형나이대법(替形那移大法)이 작용할 생극(生克)방위마저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비로소 적으로부터 빼앗아 두었던 금제부적(禁制符籍)을 던져 수중 에서 파괴시킨 것이다. "... 그대들도 아까 수중에서 폭파하던 기세를 보았으니 경곤의 그 대법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알 만했으리라. 사실 이제야 말이지만 당초 그놈의 제자는 죽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저 경곤 한테 창피나 좀 안겨주어서 다음부터는 안하무인격으로 날뛰지 못하게 만들 셈이었지. 자기 자신 도 아둔한 머리는 아니니까 틀렸다 싶으면 곱게 물러가리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보자보자하니 점 점 갈수록 기고만장해 가지고 기승을 부리지 않느냐 말이야. 그대들과 맞싸우는 동안 경곤의 원 한은 벌써 누구도 풀지 못할 정도로 깊게 맺혀지고 말았어. 그 상어인간처럼 생겨 먹은 괴물도 평생 악업이 찰 대로 꽉 찬 놈이었다. 그놈은 제 사부가 나타나자 내가 꼼짝도 못하고 잡혀죽을 줄 알았지. 공연히 자기를 덧뜨려 혼구멍이 날 거라고 속으로 으쓱한 모양이더군. 그런데 하늘처 럼 알던 사부는 젊은이들에게 도리어 혼구멍이 나고, 또 나는 손끝 하나 까딱도 않으니까 이거야 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아닌가? 그놈은 악심을 품고 나를 어떻게 해볼까 궁리한 나머지 오룡전 가위날에 짓눌린 그 상태로 아가리를 쩍 벌리더구만. 자기 자랑거리 독실(毒絲)을 쏘아가지고 날 해치려는 수작이었지. 그래서 나도 이젠 용서해 줄 수 없다 하고 가위날에 힘을 넣어 '썽둥!' 해 버렸지. 남은 것은 수달인간처럼 생긴 놈인데, 이놈은 당초 나한테 붙잡히자마자 반항은커녕 되레 애걸복걸 빌면서 제발로 귀순해 왔거든. 그래서 나도 선뜻 받아주었구. 이놈은 목숨을 살려준 댓 가로 명이 다할 때까지 종노릇을 하겠다는 거야. 내 평생 제자녀석 거느리기는 싫어 해도 하인 하나쯤은 부려먹어도 괜찮을 듯싶길래 내 동부(洞府)의 문지기로 삼기로 했지!" 을휴의 발치 아래 쭈그려 있던 괴물이 그 말을 듣고서 털썩 엎드렸다. "우워어! 우워어!....." 아무리 미물이지만 자기를 받아준다는 말에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알아듣지 못할 환호성을 지 르는 것이다. 신타 을휴가 일행들에게 다시 말했다. "내 이 녀석을 거둬들였으나 여기서야 쓸모가 없지! 우선 이놈부터 산으로 보내놓고 보세. 잠시 후면 날이 밝을 테니까 서둘러서 천겁에 대응할 준비를 갖추어야겠어!" 신타는 괴물의 몸뚱이에 영부(靈符) 한 가닥을 그려놓고선 중얼중얼 진언을 외더니 손가락으로 탁 찍었다. 붉은 광막이 당장 뭉게뭉게 피어났다. 수달인간 괴물은 신타를 향해 끓어앉아 쉴새없 이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가거라!" 주인의 엄한 분부가 떨어지자, 괴물은 비로소 예를 멈추고 길게 울부짖는다. "우워어!" 이어서 괴물의 몸뚱이는 한 점 불티로 변하더니 붉은 광막에 떠받들린 채 허공을 가르며 사라져 갔다. 을휴는 수달인간을 산으로 보내고 나서 다섯 일행을 데리고 보상부인이 은거한 동굴어귀로 갔 다. "그거 참 아까운 노릇이로구나. 뇌진(雷陣)의 풍뢰가 요번에 깨졌으니 처음 계획은 거반 쓸모없 게 돼버렸어. 그래도 현진자도우가 땅 속에 매설해 놓은 오화신뢰(五火神雷)만큼은 말짱해서 천만 다행일세. 호로병에 감추어 가지고 현문묘법으로 둘러 막은 덕분에 경곤이란 놈의 자예음정(雌霓 淫精) 따위로 더럽히지 못한 거야. 정말 잘되었군! 여보게 제갈친구, 자네 이걸 꺼낼 수 있겠나?" "못합니다. 그 오화신뢰는 사부님이 손수 파묻어 두셨고 저한테는 그걸 작동시키는 방법만 일러 주셨습니다." "그럴 걸세. 자네가 건드리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 저건 좀 있다가 내 꺼내줄 테니 자네는 손에 단단히 잡고 내가 시키는 대로 쓰기만 하면 되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두들 잘 듣게나. 앞으로 오시(午時)가 지날 무렵이 되면 천겁(千劫)이 닥칠 걸세. 그대들도 아 다시피 천호(天狐)의 마겁은 너무나 무겁네. 우담대사나 현진자의 현기(玄機)예측이 신묘해서 사 전에 대비도 든든하리라고는 믿네만, 세상 일이란 그렇게 완벽한 것은 없는 법일세. 여기 있는 사 람 가운데 누구 하나 자칫 소홀했다가는 그 즉시 엄청난 결과를 빚게 되네. 물론 내가 그대들보 다 한걸음 먼저 와서 걸리적거리는 사마외도의 패거리를 깨끗이 쓸어버리긴 했지. <익도인> 경 곤 한 놈만 남겨 놓고 말이야. 그 작자마저도 자네들 손에 혼구멍이 나서 쫓겨갔으니까 당분간은 바깥 쪽에 신경쓸 일은 없을 게야. 또 천겁이 닥친다 해도 <삼선(三仙)>도우들이 출관(出關)할 때까지만 버틴다면 그 역시 무난하게 넘길 수 있네. 문제는 내가 할 일인데, 유감스럽지만 나는 천겁을 직접 건드릴 수 없다네. 나 역시 머지않아 천겁과 맞닥뜨릴 일이 따로 있으므로 지금 섣 불리 천지조화(天地造化)의 능력에 대항하는 짓은 금기(禁忌)를 범하는 것일세." "그럼 능진인께선 어디로 가실 겁니까? 저희들을 오직 능진인님만 의지하고 있는데... 큰일났군 요. 아주 막막합니다. 눈앞이 캄캄합니다." "천호가 동굴에서 나오는 즉시 나는 몸을 피할 걸세. 하지만 그 전에 안배를 해놓겠네. 이제부터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을 말해줄 테니 명심해 듣게. 때가 되면 내 우선 현문둔법(玄門遁法)을 써서 이곳 뇌진(雷陣)의 생문(生門)을 거꾸로 돌려놓겠네. 그 방법은 현진자도우가 미리 알려주었으니 까 여기에 천지음양이 상생상극하는 현기를 응용하여 천호의 암동(巖洞) 문턱까지 직통할 수가 있지. 그럼 먼저 사도평부터 듣거라!" "예, 사부님!" "너는 사문(死門) 위치에 자리잡고 앉아서 아미심법(峨嵋心法) 증려식기(烝慮息機)를 운용해야 할 것이다. 마음과 하늘이 일치되도록 모든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일체 떨쳐버리고 마음은 오로지 벌거숭이가 되어야 한다. 내 말뜻 알아듣겠느냐?" "예, 사부님!" "천겁에서 보상부인이 벗어나고 못 벗어나는 것은 오직 너와 진씨자매 세 사람한테 달려 있다. 알겠느냐?" "예, 사부님!" "명심하겠습니다. 을진인님!" 사도평은 진작에 무릎꿇고 스승의 분부를 받는다. 자령과 한악도 함께 무릎을 꿇었다. 을휴의 목 소리가 갈수록 엄해지자, 분위기도 숙연해졌다. 자매와 사도평은 형언하기 어려운 흥분감에 휩싸 여 온몸이 와들와들 떨린다. "내 너한테 호신부적을 하나 줄 것인즉, 진씨자매가 생문을 통해서 모친 보상부인을 모시고 나 오거든 곧바로 받아서 품속에 단단히 안고 있거라. 보상부인의 형체는 갓난아기 모습일 게다. 그 다음, 너는 지체 말고 본신의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켜서 내가 준 부적이 다 타도록 불살라야 한다. 그럼 너희들 세 사람의 천문혈(天門穴)이 스스로 열리고 각각 원신(元神)이 나타나서 신부 (神符)의 영기와 어울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너희들을 보호한다. 여기까지 알겠느냐?" "예, 사부님!" "... 오시가 되면 천겁이 닥친단다. 첫 번째로 오는 것은 분명 건천순양진화(乾天純陽眞火)일 터, 이 불은 평범한 것이 아니므로 세상인간의 법보 따위를 가지고는 전혀 막아낼 수가 없다. 오로지 너희들 세 사람이 성심성의껏 인내심을 가지고 달게 받아야만 한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다. 끝 까지 참고 견디면서 원신(元神)만으로 그 불을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건천진화는 도가(道家)의 성형영아(成形瓔兒)만을 주로 소멸시킨다. 보상부인처럼 영아의 형체가 이루어지기만 하면 그 즉 시 감응(感應)해서 자연적으로 따라다닌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해치지 못한다. 건천진화 속에는 음양생멸(陰陽生滅)을 누설시키지 않은 순수 현기가 숨겨져 있다. 만약 너희들 셋 중에 한 사람이 라도 불에 타는 고통을 견뎌내지 못할 때는 그 음양생멸의 현기가 침입할 것이니, 그 순간이 끝 장이다. 이제껏 공들여 쌓아올린 탑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거다. 어떠냐, 너희들 건천진화의 불을 참아낼 수 있겠느냐?" "참겠습니다. 사부님!" "저희 몸뚱이가 불타서 없어지더라도 참겠습니다! 견뎌내겠습니다!" 젊은이들은 격한 감정을 못내 못 이기고 오열(嗚咽)을 터뜨렸다. 신타 을휴는 그래도 냉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흥분할 것 없다. 아직도 갈 길은 멀었느니라. 마음 가라앉히고 잘 듣거라. 건천순양진화가 지나 가면 곧바로 이어서 손지풍뢰(巽地風雷)의 마겁이 닥칠 것이다. 그 위력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만 물과 뭇 생령을 쳐서 소멸시키고도 남는다. 명칭이 풍뢰라고는 하지만 도가(道家)의 술법으로 단 련해낸 여느 폭풍이나 벼락과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란 말이다. 그 엄청난 위력에서 너희들이 가 지고 있는 비검과 법보 따위는 전혀 쓸모가 없다. 그래서 나는 제갈경아한테 수고를 끼치기로 작 정했다. 그럼 제갈친구, 자네는 손지풍뢰가 닥쳐오거든 아까 말한 대로 오화신뢰를 담아놓은 호로 병을 들고 있다가 적시에 그것을 터뜨려야 하네. 그러니까 이치로 따지자면 제천신화(諸天神火)를 또 하나의 제천신화로 격파하는 셈이지. 그 두 세력이 서로 격돌하면 어느쪽 하나 기울지 않을 것이야. 결국 손지풍뢰 가운데서 뇌화(雷火)는 오화신뢰의 뇌화와 맞부딪쳐 결국 동귀어진(同歸於 盡)할 수밖에 없네. 이렇게 해서 뇌화가 소멸되면 남는 것은 강풍(剛風)일세. 하지만 그 바람의 세력도 크게 약화될 터, 이 때에 등팔고의 설혼주가 빛을 발하면 강풍 역시 사그러들고 마네. 두 분은 내 말 알아듣겠소이까?" "예, 어김 없이 말씀대로 시행하오리다." "을진인께서 분부하신 바에야 이 설혼주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등도우, 염려 놓으시오. 강풍이 제아무리 거세더라도 설혼주를 잃는 일은 전혀 없을 거요." "고마우신 말씀!" "그럼 다시 사도평과 진씨자매한테 말할 차례다. 손지풍뢰가 스러지면 최후로 세 번째 난관이 닥칠 것이다. 이것은 앞의 두 난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다. 그 이름은 <천마(天魔)>, 불이 나 바람, 벼락처럼 사람의 촉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 무형무질(無形無質)이다. 이 천마야 말로 수도자(修道者)에게 있어 최악의 상극이요, 특히 타도방문의 무리나 이단의 술법으로 성도 (成道)한 자에게는 더욱 혹독하게 감응하고 파멸시키는 존재이다. 언제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또 어디로 어떻게 사라지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천마의 형상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여 생겨나고, 마음을 끊으면 소멸한다. 천마는 사념(邪念)과 공포(恐怖)에서부터 나타나 순식간에 천 가지 만 가지로 변화한다. 그것을 받는 사람이 털끝만치라도 심상(心相)을 드러내는 순간, 천마는 그 즉시 스며들 것이다. 사념과 공포의 심상이 곧 허점이기 때문이다. 천마가 침투하면 그것으로 끝장난다. 그 순간이 인간에게 있어 치명적 재앙인 것이다. 천마는 유상(有相), 무상(無相), 만 가 지 악(惡)을 모두 갖추고 있으나, 그 형적은 찾아내기 어렵다. 불가(佛家)에서도 욕계(欲界)의 제 육천(弟六天) 파순(波旬)이라고 일컬어 수도승의 공력을 해치고 가로막는 극히 위험한 장애물로 손꼽는다. 모두들 잘 들어 두거라! 다시 말한다면 이 천마는 앞서 두 난관보다 백 배 천 배나 무 섭다. 오로지 심령을 담백하고 청정하게 지녀야만 한다. 신명(神明)을 하늘의 뜻과 융화시키고 무 념무상(無念無想),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동해삼선> 도우들이 나타나서 무형의 법보, 무량(無 量)의 법력(法力)으로 천마와 대항할 때까지 기다려라. 동해삼선의 능력이라면 천마를 거둬들이거 나 혹은 흩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밖에는 천마의 난관을 벗어날 길이 없다. 아까 쫓겨간 <익도인> 경곤은 단념하지 않고 다시 올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지독스런 위인일지라도 이 삼 중 천겁이 닥칠 때만큼은 자신의 위험을 무릅써 가면서 섣불리 끼여들지 못할 것이다. 경곤이 오 기는 분명 온다. 최초 건천진화가 닥치기 전에 먼저 와서 훼방을 놓지 않으면 최후의 천마가 물 러간 직후 기습공격을 시도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무 염려할 게 없다. 그 자가 천겁 보다 먼저 온다면 여기에는 내가 있다. 뒤늦게 왔을 때는 동해삼선들이 이미 나타나 있을 테니까 경곤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사마외도가 떼를 지어 침범하더라도 넉넉히 물리치고도 남을 것이다. 너희들은 오직 내가 말한 대로 삼가 잡념을 버리고 신중하게 일을 행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알 아듣겠느냐?" "예, 사부님!" "예, 을진인님!" 신타 을휴의 분부 말이 끝났는 데도 진씨자매와 사도평은 여전히 땅바닥에 부복한 채 머리를 들 지 못한다. 을휴는 더 이상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고 휘적휘적 뇌진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술법을 써서 천겁에 대항할 진형(陣形)을 조심 스럽게 설치하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손을 멈춘 그는 사도평을 불렀다. "얘야, 이리 오너라!" 사도평은 지체없이 스승 앞으로 달려갔다. 을휴는 제자에게 방금 자기가 설치해 놓은 진중(陣中)의 기밀을 하나씩 하나씩 일러주었다. 생문 (生門)과 사문(死門)의 쓰임새와 사문을 생문으로 뒤바꾸는 방법, 생문이 사문으로 변화하는 시기 와 그 과정, 또 어떻게 하면 사지(死地)에 처한 가운데 삶을 도모할 수 있는가..... 그 복잡한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기민하게 대응하여야 실패가 없을 것인가를 일일이 해설을 붙 여 설명해 준 다음, 사도평으로 하여금 잊지 않도록 단단히 기억시켰다. 시간은 사정없이 흘러갔다. 일행이 천겁을 맞이할 만반의 대비를 마쳤을 때는 벌써 진시(辰時)도 지나고 사시(巳時) 초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오시(午時)가 되면 일이 벌어지게 된다. 사도평은 자꾸만 격해지는 흥분을 억누르고 스승이 분부한 대로 진중(陣中) 사문(死門)위치에 자 리잡고 앉았다. 그 나머지 사람들도 서둘어 진 바깥으로 물러나 제각기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 기 위해 흩어져 갔다. 제갈경아는 전처럼 조오기(釣鰲磯)의 전방대로 날아갔다. 거기서 파수를 보 고 있다가 손지풍뢰를 맞아 싸울 것이다. 자령과 한악 두 자매는 어머니의 암동(巖洞) 좌우편에 갈라서서 검광부터 일으켜 놓고, 자령은 미진기를 한악은 채예련(彩霓鍊)을 각자 잡은 채 조용히 어머니를 맞이할 시간을 기다렸다. 등팔고는 바깥에 드러나지 않도록 설혼주를 감춰들고 벌써부터 허공에 솟구쳐 올라 공중감시를 돌고 있다. 운명의 시간, 오시(午時) 초에 이르렀다. 고맙게도 이때껏 외부의 적들이 침범하는 소동은 일어 나지 않았다. 신타 을휴가 훌쩍 전망대로 날아가더니 제갈경아와 몇 마디 주고받고선 한 뭉치 붉은 광채로 변 해 하늘 높이 까마득하게 사라졌다. 진 속에서, 바깥에서 사도평과 자매들은 더욱 긴장했다. 을휴가 자취를 감추었다면 이제 보상부 인이 나올 차례다. 그리고 때맞춰서 엄청난 겁난도 들이닥칠 것이다. 세 사람은 기대와 불안감에 몸이 떨렸다. 하지만 경계의 눈초리는 단 일순간도 풀어지는 기색이 없다. 뜨거운 차 반 잔 마실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우르릉! 느닷없이 진동치는 소리가 울리면서 암동의 출입구 쪽에 짙은 자줏빛 기류가 풀썩 일었다. 두 자매의 눈길이 쏜살같이 그리로 향한다. 진 속에서 사도평이 바싹 메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 았다. 속이 바작바작 타는 것이다. 자줏빛 기류에 보호를 받으며 일 척 남짓한 키의 갓난아기가 걸어나오고 있다. 벌거숭이 전신은 백색 안개로 온통 휩싸인 채 머리와 두 발만 바깥에 드러났을 뿐이다. 흰빛 안개는 마치 반투명 한 비단 옷자락처럼 갓난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정수리 위로 칠팔 척 높이에 콩알만한 벽록색, 형광체가 눈부시도록 휘황찬란하게 빛을 뿜어낸 다. 영아(瓔兒)의 몸뚱이는 안개 기류에 둘러싸인 그대로 반공중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날기 시 작했다. "엄마아!" 첫눈에 어머니를 알아본 자령자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통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천호> 보상부인은 초겁(超劫) 후 거듭 태어난 원신(元神)과 진체(眞體)를 이 세상에 드러낸 것 이다. 어느 사이 두 자매는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맞이하려고 암동 앞으로 날아갔다. 사문(死門)에 가부좌를 틀고 좌정한 사도평, 저 멀리서 진자령의 미진기가 활짝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뒤미처 채색 구름이 풀썩 일더니 세 모녀를 옹위하고 유성처럼 자기쪽을 향해 날아 온다. 사도평은 황급히 스승 을휴의 진전(眞傳)대로 진법(陣法)을 거꾸로 돌려놓았다. 눈 깜짝할 사이 에 채색 구름이 날아왔다. 사태가 긴박하니만치 문안 인사 한 마디 나눌 여가도 없다. 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령은 미진기를 거두어들이면서 크게 외쳤다. "평오빠, 보세요! 어머님이 오셨어요!" 그리고는 보상부인의 갓난 몸뚱이를 두 손으로 받쳐 건네었다. 사도평은 허겁지겁 떨리는 손으로 보상부인을 받아 가지고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호흡 을 고르면서 격앙된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무진 애를 썼다. 시간이 없다. 어서어서 평정을 되찾아 야 한다. 호수처럼 맑게, 평온하게... 이윽고 사도평은 현공(玄功)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자꾸만 초 조해지려는 심사를 억누르고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그는 이를 악물었다. 문득 품속에서 옹알거리는 갓난아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게 사위, 어서 입을 벌리게! 내 원신을 자네가 삼켜야 하네. 늦으면 큰일일세. 어서!" 음성은 가늘고 연약했지만 세 사람은 또렷이 들었다. 보상부인의 분부다. 지체해선 안 된다! 사도평이 막 입을 벌리자마자, 갓난아기의 정수리 위에서 떠돌던 벽록색 광채가 훌쩍 입 속으로 날아들어갔다. 혓바닥에 싸느란 감촉만 닿았을 뿐 달리 느낌은 없다. 입을 다물고 품속을 굽어 보 니 갓난아기는 어느덧 단정하게 두 손 두 다리를 엇갈려 모은 자세로 입정(入定)에 든 듯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천겁의 시간, 오시(午時)는 이미 닥쳤다. 그만큼 사태도 급박하다. 사도평의 좌우로 갈라서 있던 두 자매가 황급히 가부좌를 틀고 좌정했다. 네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운공하기 시작했다. 우르르! 우르르! 보상부인의 갓난 몸둥이가 동굴 밖으로 벗어날 무렵부터 서북편 천공(天空)에서는 어느덧 공기 를 찢는 듯한 괴성이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보상부인 모녀가 진 속으로 날아 들 어가고 사도평이 천호의 원단(元丹)을 삼킨 다음 본신의 삼매진화를 일으켜 호신 영부(靈符)를 불 사르기까지 점점 크게, 그리고 가깝게 들려왔다. 우르르!... 우르르! 쿵! 해상 전망대 위에서도 제갈경아가 그 소리를 들었다. 공중에서 경계하는 등팔고 역시 누구보다 도 먼저 들었다. 두 사람은 전 신경을 눈에 모아가지고 광막한 하늘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 르지 않았는가. 천공은 그 어디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두 사람의 불안한 눈길은 다시 해안 쪽으로 향했다. 암벽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신타 을휴가 설치해 놓은 방어진이 있다. 이제껏 사문(死門) 방 위에는 사도평과 두 자매가 좌정한 모습이 보였는데, 지금은 세 사람 모두 형체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앉았던 곳에는 자줏빛 노을만 뿌옇게 흐르고, 노을 속에 보일 듯 말 듯 별떨기 셋 이 푸르른 광망을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제갈경아의 눈에는 한가운데 놓인 별떨기가 한결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는 것이 비친다. '그렇구나, 세 사람은 호신영부를 불사르고 천문혈이 뚫려 원신(元神)을 나타낸 거야. 한데 어째 서 공력이 제일 약한 사도평의 것이 저토록 강한 빛을 뿜어낼꼬? 이상한 노릇이로고.' 시각은 바야흐로 정오로 접어들었다. 제갈경아는 천겁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 그저 긴 장하기만 할 따름이었으나 좌도방문 출신 등팔고로서는 웬일인지 겁이 나고 가슴살이 떨리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천겁은 닥쳤으나 <익도인> 경곤은 다행스럽게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또다른 외부 습격자도 올 기색이 없자, 등팔고는 더 이상 순찰경계를 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해상 전망대로 날아갔 다. 혼자 몸으로 천겁이 닥치는 걸 보기에 겁도 나거니와 두 번째의 천겁 손지풍뢰를 맞이할 준 비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타 을휴가 당부한 대로 제갈경아와 함께 한 사람은 오뢰신화를, 또 한 사람은 설혼주를 가지 고 동시에 손지풍뢰의 공격을 저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전망대 안벽 위에 막 내려설 때였다. 갑자기 제갈경아가 낮은 외침을 터뜨렸다. "엇, 저건?" 등팔고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서북편 하늘가에 붉은 빛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 때는 정오를 갓 넘긴 시각, 중천에는 시뻘건 태양이 이글거리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벽청(碧靑) 일색이다. 그 맑은 하늘가에 나타난 빛 그림자는 불덩어리보다도 붉고 선명하게 돋보 였다. '저것이로구나! 저게 천겁이야.' 등팔고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웬지 모르게 가슴이 자꾸만 떨려왔다. 처음에는 그것이 찻종지만한 크기로 보이더니 잠깐 지켜보는 사이에 됫박만큼이나 커졌다. "옵니다. 왔어요!" "등팔고님, 진정하십쇼!" 제갈경아도 속이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놀라움에 허둥거리는 등팔고를 진정시키느라 한 말은 실상 자신을 달래고 있는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다. 숨을 죽인 채 이제 눈앞으로 닥쳐오는 천겁을 응시할 따름이다. 우르르르!... 우르르르! 붉은 빛 장막은 뇌성벽력까지 동반하고 창공을 물들이면서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그 것은 눈 깜짝할 순간 바닷가 신타의 방어진 상공에 다다랐다. 빛의 덩어리는 그 둘레가 대략 육 백 척 남짓 되어 보이는데 일 장 크기의 핵심에선 투명한 광채가 사면팔방으로 시뻘건 빛줄기를 쏘아내고 있다. 슈욱, 슈욱!... 우르르르! 빛의 핵심은 뇌성벽력 속에 이가 갈리도록 지겨운 금속의 마찰 음까지 내면서 당장이라도 방어 진 아래 떨어져 내릴 기세다. 하지만 그것은 등팔고와 제갈경아의 간절하지만 그러나 헛된 소망 일 뿐이었다. 이윽고 빛의 덩어리는 엄청나게 무서운 속도로 곤두박질쳤다. 쏴아, 우르르르! 불덩어리가 진지 상공 칠팔 척 높이까지 추락했을 때였다. 느닷없이 진지 안에서도 오색 찬란한 연무(煙霧)가 풀썩 일더니 곤두박질쳐 내리는 불덩어리를 떠받들듯 중도에서 가로막았다. 그리고 는 서로 버티기 시작했다. 움직이던 모든 것들이 정지했다. 시각마저도 멈춘 것 같았다. 극성스럽게 귀청을 찌르던 뇌성벽 력조차 이제는 울리지 않았다. 해상의 전망대에서 두 사람이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았다. 등줄기는 후줄근하게 젖었으나, 목이 탔다. 입 안에는 침 한 방울 남지 않았는지 혓바닥까지 깔깔하게 메말랐다. 젖은 수건을 쥐어 짜 듯 주먹으로 진땀을 닦으면서 목타는 갈증도 잊은 채, 등팔고와 제갈경아 두 사람은 넋빠진 모습 으로 해안 쪽을 바라보고 있다. 거기서는 하늘과 인간의 무시무시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엄청난 광경을 바라보면 서 두 사람은 문득 가슴이 움츠러 들고 무기력한 허탈감을 느꼈다. 과연 인간이 자연의 위력 앞 에 버티고 서서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는가, 없는가? 빛의 덩어리는 마치 새벽 아침 태양이 수평선 위에 갓 떠오를 때처럼 망망한 바다를 온통 금빛 으로 물들였다. 휘황찬란한 황금빛 물결이 천 조각 만 조각 갈라져 끝도 없이 일렁거리며 눈부신 환영(幻影)을 그려내고 있다. 채색 연무에 가로막힌 빛덩어리가 수직으로 오르락내리락, 진지 상공을 춤추듯 맴돌고 있다. 이 따금씩 연무와 맞부딪칠 때마다 오광 십색(五光十色)의 노을진 구름이 천만겹 층층을 이루고서 곱디고운 그림자를 하계(下界)에 드리운다. 보는 사람에게는 한 폭의 절묘한 풍경화 같지만 그것은 실로 인간이 생사 운명을 걸고 자연의 위 력에 대항하는 살벌한 싸움터 광경이었다. 솟구쳤던 빛의 덩어리가 곤두박질칠 때마다 채색 연무 는 한 겹 한 겹씩 녹아들듯 스러지고 있다. 제갈경아와 등팔고는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채색 연무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안다. 그것 은 신타 을휴의 법력으로 진중에 쳐 놓은 방어막이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신타의 방어력은 길어봤자 한두 시진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인간의 능력은 자연을 거스르지 못 하고 한계에 부딪치고 마는가? 두 사람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과연 빛덩어리의 화광(火光)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치열해져서 내려떨어지는 충격력도 한층 사납고 무섭게 강해졌다. 채색 연무의 방어막은 그 화광 이 번쩍일 때마다 한 겹 한 가닥씩 토막토막 끊겨서 밝은 태양빛 아래 바람을 타고 맥없이 흩어 졌다. 경각지간에 무서운 건천순양진화는 어느덧 진지의 사문(死門) 바로 위까지 덮쳐 내려왔다. 그리 고 광채가 일순 눈부시도록 강렬해지더니 진중에 남아 있던 채색 연무는 눈 녹듯이 전부 소멸되 고 말았다. "아, 저런! 방어망이 뚫렸어요!" "큰일났습니다!" 등팔고와 제갈경아가 떨리는 목청으로 한 마디씩 주고받을 때였다. 쿵! 화산이 폭발하듯 엄청난 굉음이 해안 쪽에서 울리더니 삽시간에 해상 전망대까지 뒤흔드는 충격 파가 전해왔다. "앗!" "이크, 저런!" 두 사람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뜨고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보라! 해안 상공에는 돌연 수백 수천 개의 불덩어리가 쏴아 퍼지더니 이내 지상으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수십 리 떨어진 전망대 위에서도 사발만하게 보이는 불덩어리가 별무리 를 이루고 사도평 일행이 자리잡은 진지 속을 향해 수직으로 불비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건천 진화는 스스로 중심의 핵을 터뜨려 최후의 결정타를 가하고 있었다. 천겁의 불소나기는 세 남녀를 송두리째 잿더미로 만들려는 듯 거칠 것 없이 기세차게 덮쳐내렸 다. 불비가 사도평들의 머리 위 일 장 높이까지 거의 다다를 무렵, 여지껏 그들의 정수리 위에 반 짝이고 있던 청색 별떨기 셋이 한꺼번에 맞받아 날아올랐다. 별 떨기를 감싼 자줏빛 기류도 그 뒤를 따라 올랐다. 천겁의 결정타를 맞아서 사도평과 자령자매들은 마침내 자신의 호명원단(護命元丹)을 최후의 방 어수단으로 삼아 필사적인 저항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엄청난 기세로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던 불소나기는 목숨을 건 인간의 악착스런 저항에 부딪쳐 일순 주춤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기세를 회복해 가지고 무섭게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밀릴 듯하던 별떨기들이 자줏빛 기류의 떠받치는 힘을 업고서 또다시 치밀어 올라갔다. 저항은 실로 필사적이었다. 밀고 밀리고 떠받치고 치밀고 밀고 치밀고 천겁과 인간의 집요한 대 결은 시간을 넘기면서 계속되었으나 좀처럼 우열이 가려지지 않았다. 멀리 해상에서 안타깝게 관전하는 등팔고와 제갈경아, 그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애간장 이 끊어질 지경이다. 등팔고는 초조감을 못 이기고 연신 발을 동동 구른다. 그녀는 전에 청라욕 싸움의 경험으로 보아, 사도평이나 진자령자매의 공력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너무도 잘 안다. 비록 신타 을휴의 호신영부가 엄호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공력으로 건천진화에 대항한다 는 것은 마치 버마재비가 넘어지는 돌기둥을 잡고 떠받치는 격이나 다를 바 없다. 당장에라도 쫓 아가 돕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자기 힘을 보태봐야 역시 언 발에 오줌 누기라. 그녀는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다. "앗, 또 밀리네! 제갈도우님, 어쩌면 좋을까요?" "큰일입니다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저것 보십쇼. 다시 치밀지 않습니까?" "정말, 저 소나기 불은 어마어마하군. 어쩌면 저토록 엄청날까요?" "건천진화는 순양강기(純陽剛氣)로 뭉쳐진 불이라고 합니다. 그런만큼 인간 세상의 보통 불덩어 리와는 화력(火力)이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을진인께서 미리 지하 깊숙하게 파묻힌 순음지기(純 陰之氣)를 끌어내다 방어막으로 쓰셨기 때문에 그 순음지기를 파괴하느라고 지금은 화력이 크게 약해졌습니다." "얼마나 버티면 될까요?" "오시(午時)를 넘겨야지요." "그럼 미시(未時) 정각만 되면....." "그렇습니다." "아아, 제발!" 등팔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불끈 쥐고 오로지 세 젊은이들이 미 시 정각까지만 버텨주기를 애타게 기원할 따름이었다. 해안에서의 악전고투는 여전히 팽팽하게 밀고 밀리면서 계속되고 있다. 진지 속 세 사람이 등팔 고의 간절한 소망대로 일심동체 생사를 도외시하고 굳세게 불벼락을 참고 견뎌내어 그 시각을 넘 기기만 한다면, 천겁의 첫 번째 난관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때까지 세 사람은 살이 타고 뼈가 으스러질 고통을 견뎌내야만 한다. 그 고통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오직 당사자만이 죽기를 무릅쓰고 겪어내야 한다. 무심한 시각은 굼벵이처럼 느리기만 하다. 그래도 흘러갔다. "앗, 불비가 줄어듭니다!" 등팔고는 저도 모르게 악을 버럭 질렀다.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제갈도우님, 건천진화의 화력이 약해졌어요! 저것 좀 보시오!" 과연, 이제껏 엄청난 기세로 찍어누르던 소나기 불비는 갑작스레 위력이 크게 꺾어졌다. 그러나 제갈경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등팔고에게 그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건천진화의 압력이 크게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그와 동시에 방어축도 이상을 보이고 있 는 것이다. "아차, 그러면 안 돼! 힘을 내요. 조금만 더 힘을 내라구!" 들릴 턱이 없지만 그래도 등팔고는 마구 악을 쓰다시피 소리쳤다. 움켜쥔 열 손톱이 제 손바닥 살을 파고드는 것도 그녀는 아픈 줄조차 모른다. 그녀의 안타까운 외침은 망망대해, 광막한 천지 를 허망하게 울리고 있을 따름이다. 사도평과 자령자매의 호명원단, 세 낱의 푸른 별떨기는 아직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셋 가운데 중앙의 것만 광채가 한 결 강해진 반면 좌우측 두 개는 점차로 빛을 잃고 가물가물 어두 워지기 시작했다. "저런 저런! 큰일났네. 진씨자매가 모두 기진맥진이야!" "앗, 가운데 것도 떨어진다!" 이번에는 평소 침착하기로 이름난 제갈경아마저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지껏 홀로 강렬한 힘을 발하던 중앙의 별떨기가 훌쩍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제 갈경아의 예상을 뒤엎고 다시 솟구쳐 오르더니 곧장 천겁의 불더미 속으로 뛰쳐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앗, 안 돼!" 등팔고가 비통하게 외쳤다. 사도평의 원단(元丹)은 불더미 한가운데 주광(主光)의 핵심을 목표삼아 온몸으로 부딪쳐 들어갔 다. 그 행동은 실로 필사(必死) 필살(必殺)의 장렬한 의지였다. 하찮은 인간의 원신 하나가 또 달 리 무슨 힘으로 천겁의 핵에 항거할 수 있단 말인가! 쿵! 등팔고와 제갈경아는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차마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등팔고는 이내 또다른 의아심을 느꼈다. 방금 들린 그 굉음은 너무도 크다. 아무 리 필사의 집념을 품었기로서니 달빛 아래 반딧불처럼 보잘것 없는 인간의 원단 하나가 어쩌면 그토록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곁에 선 제갈경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느 새 해안 쪽을 넋 잃은 듯 바라보고 있다. 제갈경아의 눈길을 뒤쫓던 등팔고는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앗, 저것은.....!" "쉿!" 누가 들을 사람도 없는데 제갈경아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하라는 시늉을 한다. 그들의 눈앞에는 실로 상상을 초월한 광경이 연거푸 벌어지고 있었다. 건천순양진화 천겁의 불더미가 핵심의 주광부터 산산조각 부서져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불티를 수 없이 튕겨내면서 쏟아지고 있다. 그것도 한 순간 천겁의 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 고 말았다. 주광이 스러지자, 천공을 가득 메우고 미친 듯이 날뛰던 수천 수만의 불더미들은 마치 기름이 다한 등잔불처럼 시들시들, 하나씩 둘씩 꺼지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한꺼번에 눈 녹듯 소멸 되어 버렸다. 그 속도는 두 사람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리만치 빠르게 사라졌다. 연기 한 오리, 티 끌 한 점, 흔적도 자취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갔네요, 갔어요! 그 지긋지긋한 천겁이 사라졌어요!" "예, 하늘이 도왔습니다. 정말 천운이로군요! 저도 얼마나 놀랐는지....." "어쩌면 그렇게나 감쪽같이 없어졌을까요? 전 지금도 믿을 수가 없어요." "아마 그 건천진화의 핵은 바로 오화(五火)의 근원일 겝니다. 신령에 감응이 빠른 만큼 사라지는 속력도 전광석화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지겠지요. 사실 저도 너무나 뜻밖이라 제 눈을 믿기 어려웠 습니다. 사도평도우의 원신이 핵심 주광에 충돌하는 순간 충격음을 듣고 성공한 줄은 금방 알았 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끝장날 줄이야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것도 흔적도 없이....." 등팔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쳤다.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그들의 눈길은 계속 해안의 진지 상공을 더듬고 있었다. 신타 을휴가 땅속 음한지기(陰寒之氣)로 정성껏 설치해 놓았던 진지는 이미 건천진화에 깡그리 파괴되고 말았다. 사도평과 진씨자매들의 원신은 어디에 있는가?... 아직도 중천 상공을 떠돌고 있 다. 하지만 별떨기 셋 가운데 하나는 어느 결에 자줏빛 기류의 울타리 바깥으로 벗어나서 천등(天 燈)모양 허공에 매달린 채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흔들흔들 안정을 잃은 상태다. 셋 중 누군가 그 원신조차 끌어들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친 것이 분명하다. "갑시다!" 등팔고와 제갈경아는 황급히 둔광을 일으켜 타고 해안 쪽으로 날아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두 번째의 손지풍뢰(巽地風雷)의 겁난이 닥칠 신시(申時) 무렵까지 아직 은 반 시각 남짓 여유가 남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시간을 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파 괴당한 진지 상공에 거의 다다를 때부터 제각기 손을 쓰기 시작했다. 제갈경아가 귀혼주어(歸魂呪語)를 외자, 등팔고는 설혼주를 꺼내들었다. 은빛 찬란한 광채가 번 쩍 빛나더니 아직도 허공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흔들거리고 있는 별떨기를 위로부터 천천히 눌러 내렸다. 그 청색별은 은빛 광채에 눌려 자색 기류를 통과하고 사도평의 정수리 위까지 떨어져서 멎었다. 자줏빛 기류의 보호막 속에서 세 남녀는 하나같이 이를 악문 채 두 눈을 질끈 내리감고 있다. 안색은 싯누런 황토빛으로 변하고 전신이 옷을 입은 대로 물 속에 빠진 사람처럼 흠뻑 젖었다. 그러나 이들은 용하게도 처음 자리잡은 그 위치에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 아 있었다. 구원자 두 사람은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사방 주위가 철통 같은 자색 기류로 에 워싸였기 때문이다. 그 방어막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떻게 할까요? 손을 써야겠는데....." "좀 생각해 봅시다." "그럴 시간이 없어요. 이제 두 번째 천겁이 닥칠 때가 금방입니다." "이거 참 난처하군! 어쩌면 좋을꼬?" "이대로 떠날 수밖에 없어요. 두 번째 천겁은 우리 두 사람 손으로 당해내야 하나까, 어서 가 준 비를 해야죠!" "하는 수 없군요. 그렇게 합시다!" 두 사람이 아쉬운 표정으로 막 그 자리를 뜨려는 참인데, 문득 가느다란 말소리가 들렸다. "두 분 도우께선 잠시 제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등팔고와 제갈경아가 흠칫 놀라서 뒤돌아보니 사도평의 품속에 안긴 갓난아기가 눈을 뜨고 앳되 게 웃는다. "아, 보상부인!" "등도우, 오랜만이오! 허나 긴 인사를 나눌 시간이 없군요. 가지고 계신 그 설혼주의 위력이면 이리로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세 아이들은 이 못난 것을 구해주려다가 이미 건천진화에 크 게 다쳤습니다. 이 못난 것도 에미라고... 못난 것의 원단은 지금 사위 몸 속에 숨어 있었으나 조 금 전 사태가 너무도 위급하길래 사위의 원신과 합쳐서 만에 하나 요행을 바라고 천겁의 핵과 맞 부딪쳐 보았지요. 덕분에 겁난은 요행 모면했습니다만 기진맥진 하마터면 귀규(歸竅)도 못하고 중 천에 떠도는 원혼이 될 뻔했습니다. 고마우시게도 때맞추어 그 구슬빛을 비춰주신 덕분에 무사히 제 위치로 돌아오고, 또 화기(火氣)까지 뽑아버리게 되었지요. 지금 제 사위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는 않았어도 두 딸애는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목숨이야 건지겠지만 이제 남 은 두 겁난을 끝까지 당해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두 분의 법력으로 부디 이들을 구 해주십시오 먼저 그 설혼주를 이 세 사람의 명문혈(命門穴)과 앞뒤 심장부위에 고루 굴려 주시고, 제갈도우님이 영사(令師)께서 내리신 영단 한 알씩만 먹여주신다면 깨끗이 낫게 될 것입니다. 부 디 이 애들을 살려주십시오. 애걸합니다!" 자식을 위하는 어미의 애절한 목소리가 떨렸다. 두 사람은 그 즉시 설혼주를 앞세우고 자줏빛 광막 속으로 들어섰다. 제갈경아는 등팔고와 몸이 닿을 정도로 바짝 뒤따랐다. 과연 보상부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설혼주의 싸늘한 빛이 비추는 곳 마다 자줏빛 기류는 쩍 갈라져 길을 열어주고선 이내 도로 합쳐지곤 했다. 두 사람은 마침내 사도평 일행이 앉아 있는 지점에 당도했다. 등팔고가 먼저 진자령의 몸부터 쓰다듬어 보았다. 불에 덴 것처럼 뜨겁다. 설혼주를 내밀어 자령의 몸을 두 차례 거푸 문질러 주 자 그 즉시 펄펄 끓던 열기가 싹 가시고 안색도 전처럼 불그스레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뒤이어 제갈경아가 현진자에게서 받은 영단 한 알을 입 속에 틀어넣었다. 그들의 손길은 바쁘게 움직였다. 진자령이 효력을 보이자 더욱 용기를 얻어 진한악에게 손을 쓴 다. 그리고는 다시 민첩한 솜씨가 사도평에게 옮겨졌다. 얼마 안 있어 세 남녀는 한꺼번에 회복되었다. 정수리 위의 원신(元身)들도 처음과 같이 찬란한 광채를 되찾고 활력있게 감돌았다. 그제서야 두 구원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서둘러 그 자 리를 떠나갔다. 해상 전망대로 돌아가는 도중 제갈경아는 등팔고에게 찬탄섞인 치하를 건네었다. "그 건천순양진화가 지독하다는 것은 을진인이나 사부님께 말씀으로만 들었지 정말 이 정도일 줄이야 상상조차 못해 봤습니다. 만약 등도우님의 설혼주가 아니었더라면 그 세 분 모두 꼼짝없 이 죽었거나 중상을 면치 못했을 겝니다." 등팔고는 겸연쩍게 웃다가 이내 침중한 표정으로 변했다. "저도 지난날 선사님을 모시고 세상편력을 다니던 중 건천진화에 두들겨맞은 곳을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었지요. 그 불길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생물이 전멸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그 일대가 산천초목이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골짜기, 낭떠러지 암벽, 모래, 흙더미조차 불에 탄 흔적도 없는데 온통 잿더미로 변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날면서 총망중에 보았지 만 옛날 보았던 것보다도 더 극심하게 당했더군요. 정말 그 천겁은 무섭기 짝이 없어요!" 그 말을 듣고서 제갈경아는 어리둥절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옛날에 보았던 곳은 불탄 흔적도 없이 잿더미로 변했다고 하면서 지금 여기가 더 극심하게 당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곁눈질로 다시 한번 해안 쪽을 바라보았다. 푸른 숲도 누런 암벽도 여전히 제빛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 자리에 박혀 있을 뿐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 한 조각 한 조각 모두 새파랗게 살아 있다. '원, 별 말씀 다 듣겠구만. 나보다야 견문도 넓고 아는 것도 많은 분이지만 허풍까지 셀 줄은 몰 랐어! 멀쩡한 걸 두고 잿더미보다 더 지독하다니, 좀 지나친 말씀이 아닌가?' 속으로는 투덜거렸으나 침착하고 점잖은 그는 겉으로 내색도 않는다. 등팔고가 어느 새 기미를 챘는지 빙그레 웃는다. "이따가 두 번째 천겁이 닥치거든 보시오. 만약 아까 보상부인이 고심참담 쌓아 놓은 공력이 아 니었던들 지금쯤 무사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게요. 그 심후한 공력에다 사위의 원신까지 한 데 합쳐서 위험을 무릅쓰고 건천진화의 핵심에 정통으로 충돌했으니 망정이지, 주광이 그대로 있었 더라면 나머지 불더미도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을 게고 꺼졌다가도 되살아났을 것이외다. 진씨자 매 중 언니쪽은 그래도 버틸 만했지만 동생 한악은 최악의 위기에 몰려 있었지요. 그녀가 일단 중상을 입는 날에는 나머지 두 시람은 물론이고 보상부인까지도 그 겁난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도평도우 세 부부는 아예 영성(靈性)을 상실하고 진공(眞功)을 닦지 못하거나 적어 도 중화상을 입어 상당한 세윌 동안 치료해야 할 뻔했단 말입니다. 그 참화에서 용케도 벗어났으 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제갈경아는 그래도 불복하는지 더 이상 말도 안하고 전망대 쪽을 향해 날아갔다. 조오기(釣鰲磯) 정상에 당도하자 그들은 즉시 두 번째 천겁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렀다. 이제는 두 사람이 활약해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제갈경아는 등허리에서 조심스럽게 오화신뢰(五火神雷)의 진화(眞火)가 담긴 호로병을 풀었다. 그 호로병은 신타 을휴가 떠나기 전 뇌진 속에서 파내다가 준 것이다. 등팔고는 설혼주를 두 손으로 꼭 잡고서 조용히 신시(申時)가 올 때만 기다렸다. 손지풍뢰가 들 이닥치면 제일 먼저 제갈경아의 오화신뢰 벼락부터 터질 테고, 그 다음 열풍은 자신의 설혼주로 막아야 하는 것이다. 제갈경아가 조바심을 달래느라 한 마디 건네었다. "건천진화는 서북쪽에서 왔으니까 이번 손지풍뢰는 동남방에서 닥치겠습니다." "그래요. 이 전망대가 꼭 알맞게 서남쪽으로 틀어앉아서 동북방 해안을 마주 바라보기 좋군요. 세 사람 위치도 아주 또렷하게 보이는데....." 두 사람은 벼랑 꼭대기에서 동남쪽을 향해 섰다. 발치 밑 수백 길 아래에는 시퍼런 해면이 일렁 거리고 있다. 이제 두 번째 천겁이 닥칠 신시(神時) 초도 머지않다. 신타 을휴의 진법은 진작에 풍비박살이 났 고 껍데기뿐인 사문(死門) 방위 펑퍼짐한 바위 위에 세 남녀가 오로지 호신자기(護身紫氣) 한 겹 만을 의지한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그들에게는 수십 리 멀찌감치 떨어진 해상 전망대 상 의 등팔고, 제갈경아 두 사람만 없다면 완전한 벌거숭이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제갈경아가 또 조바심이라도 달래려는 듯 그답지 않게 등팔고한테 우스개 말을 던졌다. "<익도인> 경곤이 진작에 왔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백미침 몇 대 정도가 아니라 목숨 이 왔다갔다 했을 겁니다." "틀림없이 불벼락을 맞고 죽었을 게요. 허나 만약 그 자가 지금 같은 사각에 쳐들어 왔다면 우 리쪽이 되레 큰일날 뻔했겠지요?" 등팔고의 응수가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난데없는 광풍이 '쏴아!' 하고 몰아쳐 왔다. 해 안 쪽은 돌래바람 속에 들불 연기 솟구치듯 흙먼지로 자욱하게 뒤덮여 버렸다. "앗, 저건?" 제갈경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미친 바람이 한바탕 불어닥친 그 자리에 방금까지 보이 던 나무숲, 암벽들이 모두 횟가루 날리듯 우수수 허물어져 내리고 있다. 지면을 삽시간에 눈처럼 하얀 잿더미로 덮이더니, 이내 바람결을 따라서 뿌옇게 솟구치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푸르른 숲도 누런 암벽도, 이제껏 싱싱하게 보이던 나뭇잎조차도 온데간데없이 환 영처럼 사라져 버리고, 황막한 살풍경만 두 눈 가득차게 들어올 뿐이다. 현진자와 을휴의 방어진 덕분인지 보상부인의 동굴암벽 일대와 사도평 일행이 있는 백사장 주변이 그나마 소멸당하지 않 고 겨우 원형만 휑뎅그레하니 남아 있는 게 전부였다. '아아, 등팔고의 말씀이 맞았구나!... 건천진화가 저토록 무섭다니.' 제갈경아는 아까 내색은 않았지만 소견머리없게 등팔고를 비웃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새 삼 그녀의 안목에 찬탄해 마지 않았다. "등도우님, 아까는... 아니, 손지풍뢰가 들이닥칠 모양입니다. 서둘러 준비하시죠!" 사과를 하려다가 그는 멋쩍게 말꼬리를 돌리고 말았다. 어차피 시간도 거의 다 됐고, 또 광풍이 분 것은 제이의 천겁이 닥칠 전조(前兆)일 듯싶어 둘러댄 것이다. 그러나 등팔고는 짐짓 못들은 척 날카로운 눈매로 사면팔방을 두루 살피더니 설레설레 고개짓을 했다. "제갈도우, 잠깐만! 이 바람이 동남풍인 것이 분명하나, 풍세도 그다지 세차지 않고 또 벼락치는 소리도 없습니다. 신시가 되려면 아직 일 각 남짓 여유쯤은 있는데, 저쪽 해안 오른편에 요사스런 구름이 그득 깔린 게 자못 수상쩍군요. 아무래도 또다른 요마들이 기어들어 와서 틈을 엿보는 모 양인데... 제갈도우께선 여기 그대로 계시면서 천겁의 뇌화를 막아주시오. 미력하나마 제가 가서 놈들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오리다!" 등팔고는 말을 마치고 제갈경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해안 쪽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시 날아갔다. 전망대에는 제갈경아 혼자 남았다. 그는 이마에다 손을 얹고서 해안을 주시했다. 등팔고가 해안에서 삼 리 가까이 다다르자 손을 번쩍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청색 연기가 풀 썩 일더니 사도평 일행을 비롯해서 자줏빛 기류와 원신의 별떨기까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 신 그 자리에는 등팔고 혼자서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다. 그녀의 손발이 무엇을 그리는지 바쁘게 움직인다. 제갈경아는 그걸 보고 빙긋 웃었다. '흠흠, 저 양반이 마교의 은형장진법(隱形藏眞法)으로 세 사람을 숨겨놓으셨군!' 등팔고가 방어배치를 막 끝내고 났을 참이었다. 바람이 한결 거세지더니 희끄무레한 잿빛 구름 을 어디선가 휘몰고 와서 하오의 태양을 가리워 버린다. 이어서 안개구름이 자욱하게 해안 일대 를 뒤덮었다. 뿌연 안개구름 속에 기괴망칙한 생김새를 가진 괴물 야차(夜叉)들이 숱하게 나타났다. 하나같이 흉악스럽게 생긴 상판에 입으로는 검정빛 기운을 연방 뿜어내어 안개장막을 한층 두텁게 만들고 있다. 괴물 야차들의 선두에 선 자는 낯가죽이 대춧빛처럼 시뻘건 요도사였다. 전신은 흑색 기류로 휘 감겨 있고 한 자 가웃이나 기다란 수염을 위엄있게 펄럭였다. 왼손에 들린 것은 길이가 이 장 남 짓한 백마장번(白麻長幡) 깃발이고, 오른손에는 장검 한 자루가 들렸다. 칼날 끝에선 세모난 불꽃 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어찌 된 셈인지 요도사는 등팔고가 코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척도 않고서 괴물 야차 떼거리만 휘몰아 지나쳐 갔다.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벌떼같이 암벽 쪽을 향해 몰려갔다. 그 암벽은 오늘 까지 보상부인이 은거하던 동굴이 있는 곳이었다. 멀리 해상에서 관망하던 제갈경아가 혼자서 껄껄 웃는다. 처음 괴물 야차떼거리들이 나타났을 때 그 기세가 너무도 살기등등하고 사납길레 제갈경아는 사뭇 긴장했다. 등팔고 한 몸으로 당해 내기 어려울 경우 여차직하면 당장 뒤쫓아가서 도와줘야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판인데 저것들이 노는 꼬락서니를 보아 하니 승부는 이미 결판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는 뒤쫓을 생각을 버리고 여유만만하게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그거 참, 별놈들 다 보겠구나! 남한테 암습하러 오는 것들이 저렇게 수선을 떨고 난장판으로 쳐 들어 가다니, 저래 가지고야 상대방의 매복에 일망타진이나 당하기 십상이지. 네 녀석들, 꼼짝없 이 등도우의 그물에 걸린 고기떼 신세가 됐다!' 요도사는 아귀떼를 휘몰고 안개구름에 잿먼지까니 풀썩풀썩 날리면서 기세좋게 동굴 어구에 들 이닥쳤다. 그들이 막 동굴 안으로 들어섰을 때다. 돌연 등팔고의 손이 암벽을 가리키면서 귀청을 째는 듯한 휘파람 소리가 연거푸 두어 차례 울렸다. 삐익!... 삐익! 그러자 어마어마한 벼랑 암벽이 눈사태를 만난 것처럼 한꺼번에 '와르르, 퉁탕!'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꽈르릉, 콰당! 쏴아! 삽시간에 암벽 일대는 천지개벽을 하듯 엄청난 진동과 함께 밀가루 포대를 터뜨리듯 바위, 자갈, 모래먼지가 뿌옇게 뒤덮여 버리고 말았다. 먼지구름이 천 길 높이 하늘까지 자욱하게 치솟는 가 운데 돌비가 소나기 퍼붓듯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벼랑사태가 멎자 그 자리에는 엄청나게 부서져 내린 바윗더미가 황량한 무덤을 이루고,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먼지구름 속에서 단말마의 귀곡성만 애처롭게 들려나왔다. "우와아!" 한참만에 바윗더미 무덤 속에서 대갈일성 외치는 소리가 울리더니 생매장을 당했던 요도사가 솟 구쳐 나왔다.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모래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요도사, 때 아닌 산사태 날벼락을 맞고 산 채로 파묻혔다가 겨우 목숨을 건지고 기어나온 끝이라 몰골이며 체통이 말씀 아니다. 잿먼지를 머리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온통 뒤집어쓴 데다 대춧빛처럼 시뻘겋던 얼굴마저 분단장한 듯 새하얘졌다. 좀전에 살기등등 쳐들어가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는지 사뭇 낭패막심한 기색으로 툴툴거리면서 밀가루 포대자루 같은 옷자락을 풀썩풀썩 털어낸다. 그 뒤따라 괴물 야차들이 하얀 귀신 몰골로 기어나왔다. 태반은 생매장을 당해 죽고 그나마 운좋게 살아나온 놈들이다. "휘리릭!" 도사가 나타나자, 등팔고는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불더니 벌떡 일어나서는 도사 앞으로 걸어갔다. 뒷짐지고 어슬렁어슬렁 걷는 품이 여간 능글맞은 게 아니다. 방금 그 휘파람 소리도 상대방한테 일부러 자기 존재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요도사, 자기를 마중나오듯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작자를 발견 하자 그만 저도 모르게 노기가 치밀어올랐다. 자신을 골탕먹인 적이든 아니든 간에 우선 화풀이 부터 해야만 속이 좀 풀릴 것만 같았다. "웬 놈이냐? 에잇!" 다짜고짜 손에 잡은 깃발을 흔들어대자 시커먼 연기가 기폭에서 풀썩 일더니 수백 가닥 허리띠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가지고 쏜살같이 적을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죽다 살아 남은 괴물 야 차들도 일제히 등팔고를 에워쌌다. 등팔고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대뜸 요도사에게 욕설부터 퍼부었다. "이 멍청한 도사녀석, 어디 죽을 데가 없어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내 손장난 좀 해서 장안법 (障眼法)을 펼친 줄도 못 알아보는 주제에 어딜 감히 보상부인의 원단을 넘보는지 알다가도 모르 겠군. 너 따위 같은 쓰레기일랑 모래지옥 속에 깡그리 생매장시켜 버리려다가 불쌍해서 그만두었 다. 네놈도 그만큼 혼줄이 났으면 왕년에 <여앙신> 등팔고쯤은 알아볼 만도 할 텐데? 하하하!" 그녀의 손에서 욕설보다 먼저 청광이 번쩍 날더니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검정빛 기류와 악귀들 을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등팔고가 숨을 죽이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을 때 사실 장안법으로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니었다. 첫눈에 상당방의 내력을 꿰뚫어 보고 그만큼 자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녀의 생김새는 대꼬챙이처 럼 비쩍 마르고 키도 작은 데다 검정 도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으므로 멀찌감치서 얼핏 보면 작 달막한 말뚝이 박힌 걸로 오인하기 십상이었다. 요도사는 실상 다른 녀석의 충동질을 받고 순진하게 모험심이 발동해서 온 작자였다. 일단 쳐들 어가기만 하면 <동해삼선>도 없는 마당에 손쉽게 보상부인의 원단을 빼앗을 수 있을 거라는 말 에 솔깃해서 그대로 무작정 밀고 들어가기만 했지, 다른 데는 전혀 눈길 한 번 돌릴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우직하게도 보상부인을 거꾸러뜨려 놓고 으름장 한 마디로 원단을 나꿔챈 다음 그 즉시 뺑 소니칠 궁리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러나 동굴 안에 들어서자마자 원단을 손에 넣겠다던 궁리는 하늘 밖 천리 만리 날려보내고 말았다. 보상부인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텅 빈 자리만 덩그라니 비 어 있었던 것이다. '아뿔싸, 내 한 발 늦었구나! 이 년이 그 새 떠나버렸어. 그거 참 아까운 노릇이로다!' 한데 마냥 발만 동동, 애석해하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무렵 바깥에서는 등팔고가 손을 써 서 동굴 암벽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을 줄이야 꿈에나 생각했겠는가? 혹시나 또 무슨 법보 따위는 없을까 해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동굴 전체가 '우르릉, 우르릉!' 뒤흔들리더니 천정부터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크, 이게 웬 지진이냐?' 기급을 해가지고 머리통부터 감싸안은 채 뛰쳐나오다 보니 어깨며 등줄기에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바윗덩어리가 하나같이 푸석푸석한 것이 전혀 무게를 느낄 수 없다. '이것 봐라, 바윗돌이 모두 맹탕 화산석이로구나! 괜한 걸 가지고 놀랐어. 천천히 빠져나가도 될 텐데, 뭘!' 요도사는 암동 전체가 이미 건천진화에 불타서 돌가루 잿더미산으로 변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진짜 묵직한 바윗돌 몇십 개쯤 얻어맞는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할 위인이 아닌데 이까짓 푸석푸석한 화산암쯤이야 집채만한 것이 떨어지기로서니 대수랴 싶었다. 과연 집채만한 바윗덩어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라 한꺼번에 수십 수백 덩어리가 떨어졌다. 처음에는 떨어지자마자 박살이 나서 돌가루만 숨막히게 퍼짐으로 그저 그러 려니 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었다. 와르르! 쿵쾅, 철썩! 동굴 천정과 사면암벽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집채 하 나가 아니라 두 채, 세 채만한 바윗덩어리, 돌짝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쏟아져서 풀썩풀썩 박살나고 있는 것이다. 한두어 개 무게야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무너지고 떨어지는 기세야말로 엄청나게 무시무시하다. 요도사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허겁지겁 출구를 찾았다. 그러나 캄캄한 동굴 속, 돌가루 먼지로 가득찬 가운데 방향조차 가늠할 수가 없다. 설령 출구 쪽을 찾았다 하더라도 이미 꽉 막 혀버린 길만 발견했을 것이다. 소경 막대 두드리듯 여기저기 허둥지둥 헤매다보니 어느덧 돌가루 먼지가 무릎에까지 올라찼다. 찌익, 찍! 끼리릭, 끼익! 뒤따라 들어왔던 요괴 악귀 야차녀석들이 비명을 질러댄다. "시끄럽다!" 뒤쪽에다 대고 짜증스럽게 호통을 치다가 요도사는 그만 갓 떨어진 돌짝을 잘못 걷어차고 앞으 로 털썩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이쿠!" 엎어진 몸뚱이 위로 정말 집채만한 바윗덩어리가 덮쳤다. 그것을 흔들어 뿌리치고 다시 일어서 는 순간 또 엄청난 게 떨어진다. 하나, 둘, 셋, 넷... 열, 스물... 백, 천...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마구 떨어지고 있다. 마침내 요도사는 돌가루 잿더미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 위로 바윗더미는 멈추 지 않고 계속 떨어졌다. 동굴은 완전히 무너져서 공간이라고는 숨 한 모금 내쉴 틈조차 없다. 수천 수만 근 템이나 되는 잿더미 돌가루 무게가 요도사 일행의 몸뚱이를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제아무리 승천입지(昇天入地)하는 재간을 지닌 자라도 그 속에서 단숨에 빠져나오기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하물며 매캐한 잿가루, 돌가루가 눈, 코, 입, 귓구멍이 뚫린 곳은 모조리 틀어막았 으니 오관(五官)의 감각마저 잃어버린 데다 전신으로 그 엄청난 중량을 받고 있는 바에야 인간은 물론이고 신선이라 할지라도 배겨낼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요도사는 수단이 어지간했다. 더구나 이끌고 들어간 야차들은 유형무질, 형체만 있고 알 맹이는 없는 유령들이다. 그는 첫 번째 고꾸라졌다가 다시 일어나던 순간부터 위기의식을 느끼고 황급히 호신주결(護身呪 訣)을 외쳤다. 그 주문 덕택에 개구리 납짝 깔려 죽듯 압사(壓死)당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일단 목숨이 붙어 있게 되자, 그는 술법을 써서 엄청난 중압에 대항하면서 위로 위로 안간힘을 쏟아 치밀었다. 비범한 재간도 재간이려니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나가야겠다는 끈질긴 의욕이 무서운 투지로 작용한 것이다. 그는 숨도 못 쉴 지옥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다 끌어내다 썼다. 게다가 말로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고초를 숱하게 겪고 나서야 마침내 바깥 세상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지옥을 뚫고 나온 그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등팔고의 호통 소리였다. 보상부인이 초빙해 온 응원대라고 직감한 그는 즉시 요법으로 대결할 태세를 갖추었다. 계집 하나쯤이야 포위해 놓고 두들겨 버리면 쉽사리 보상부인의 행방을 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제 입으로 성명 내력을 밝히는 걸 듣고 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여앙신> 등팔고!' <여앙신> 등팔고, 바로 지난날의 적수요, 원수의 이름 아닌가? 요도사는 과거 패배의 치욕감, 분노,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맞닥뜨린 놀라움, 원한이 한꺼번에 뒤엉크러져 어찌할 바를 몰랐 다. 생전 만나고 싶지 않은 원수와 정면으로 마주쳤으니 피할래야 피할 도리가 없다. 그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욕바가지나 퍼부어대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더러운 갈보년, 너나 나나 똑같은 좌도방문 출신이면서 동도(同道)들과 적대시하다니, 부끄 럽지도 않으냐? 내 당초 우리 사부님께서 너한테 청혼하신 뜻을 생각해서 호의적으로 봐줄까 했 다만, 네년은 도리어 곤륜파(崑崙派)의 종(鍾)가 도사놈한테 정을 주고 미쳐서 따라다녔겠다? 네 년이 우리 사부님의 청혼을 끝내 거절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원수를 맺었느냐 말이다. 후에 네 년의 사부가 천겁을 당하고 <구검(九劍)> 곤방암(困方岩)과 <신화련(神火煉)> 냉염(冷焰)으로 하 여금 너와 옥나찰(玉那刹) 등 잡년 몇몇을 잡아다 가두었더니만 너하고 옥나찰 두 년은 교묘한 수작을 부려서 도망쳤지? 너는 우리 사파의 원수놈을 애비로 삼았으니 조만간에 그 벌을 면치 못 할 것이다. 흐흐흐! 안 됐구나. 그렇게 죽자사자 따르던 종가 도사놈하고 혼인도 못한 채 처녀 귀 신 할망구가 되다니! 진작 우리 사부의 청혼을 받아들였더라면 나한테 '사모님' 소리 들어가며 얼 마나 좋았겠느냐? 요즈음 듣자 하니 설산(雪山)으로 도망쳐 꽁지 감추고 있다가 주화입마(走火入 魔)에 빠져서 죽도 살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더니 언제 또 어떤 도둑놈을 꾀어가지고 풀려났단 말이냐? 더구나 힘겹게 살아났으면 곱게 은거해서 수양이나 쌓을 것이지 어째서 또 세상에 나타 나 자기네 동도들을 못 살게 구는가 말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천호가 없는 걸 보면 네년이 쳐죽 이고 그걸 슬쩍 가로챈 모양인데, 내 눈은 절대 못 속이느니라! 앙큼떨지 말고 일찌감치 고분고분 그 원단을 내놓으려므나. 그렇지 않았다간 죽어 묻힐 데도 없게 만들어줄 테다!" 등팔고의 힘줄이 불끈 솟았다. 비록 근년에 들어 도심(道心)이 자못 평정해진 그녀였으나 요도사 란 놈이 마구잡이로 욕설을 퍼붓고 게다가 자신의 명예까지 더럽히는 걸 듣고서야 그냥 참을 수 가 없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얼간이 녀석! 무슨 재간이 있다고 세상에 나와 얼씬거리는 게냐? 기껏해야 네 녀석의 멍청이 사부 일등노귀(一燈老鬼) 위세나 등에 지고 가는 곳마다 몹쓸 짓을 저지르는 게 고작이지! 흠흠, 네놈이 오늘 내 손에 걸린 바에야 지난 번처럼 놓아주리라곤 꿈도 꾸지 마라. 하지만 그냥 쉽게 죽이지는 않겠다. 우선 네놈을 모래 속에 산 채로 파묻어 맛 좀 보여주고 다음 에 천벌을 받도록 해주마! 그래야 내 손을 더럽히지 않을 테니까." 저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요도사를 향해 일지(一指)를 찍었다. 요도사는 문득 발 밑이 허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차, 안 되겠구나! 뺑소니쳐야겠다.' 황급히 지면을 박차고 중천으로 솟구치려는 순간 머리 위로부터 잿빛 광막이 몽롱하게 짓눌러 내렸다. 공중으로 내빼기는 틀렸구나 싶어 다시 지행둔법(地行遁法)을 쓰려고 했으나 그것마저도 신통력이 들어먹지 않는다. 등팔고의 법력으로 두 발바닥이 모래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것이다. "야잇, 얍! 이거." 가슴 속에선 심장고동이 두 방망이질친다. 아무리 술법을 걸어 보려고 몸부림, 발버둥을 쳐도 두 다리는 요지부동이다. 이마로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것 보통 일이 아니 다. 아까는 돌가루 잿더미 지옥에 갇혀서 죽을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혼자 힘으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허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무서운 강적이 눈앞에 버티고 서서 자기 탈출로를 요모조모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대항할래야 맞싸울 능력도 없고 도망칠래야 빠져나갈 길이 막혔다. 이야말 로 기막힐 노릇이 아닌가? 곁에는 망망대해를 두고 위로는 너르디너른 하늘, 딛고 선 땅은 허허벌판인데 꼼짝없이 사면초 가(四面楚歌) 신세라니, 어느 누가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요도사는 비지땀을 흘린다. 딛고 선 발치 밑 땅 속에서는 알지 못할 절대적인 흡인력이 몸뚱이 를 빨아들이고, 머리 위에선 수천 수백만 근의 압력이 찍어누르고 있다. 자유를 잃은 몸뚱이는 이 미 그의 것이 아니다. 요도사는 어쩔 수 없이 악귀 야차들과 함께 땅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천신만고, 죽을 힘을 다 해 겨우 빠져나온 지옥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만큼은 아까와 전혀 딴판이었다. 그가 퍼부은 악담 욕설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등팔고는 마교 금법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수법 을 골라가지고 부렸던 것이다. 일시적이나마 요도사의 목숨은 붙여놓은 채 땅 속 끝없는 모래지 옥을 헤매도록 만들어놓고 떠난 것이다. 요도사는 발광하듯 좌충우돌, 탈출구를 찾아 헤맸으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 발짝도 못 나가 고 제자리 걸음질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그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해상 전망대로 돌아가면서 등팔고는 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어느덧 신시(申時) 초에 들 어섰다. 그녀는 혼자말로 투덜투덜댔다. '빌어먹을 놈의 도사녀석, 주둥아리만 밉살스럽지 않았더라도 내 그 정도로 독심은 부리지 않았 을 게다! 그놈 때문에 공연히 시간만 뺏겼잖아? 어디 모래지옥 속에서 혼 좀 나다가 죽어봐라! 그것도 네 팔자니까.' 검광을 거두고 전망대 위에 내려서니 제갈경아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다. "거 참, 기막힌 수법입니다! 우리 같으면 꿈도 못 꿀 묘계(妙計)였어요. 동굴 암벽이 어째 남아 있는가 했더니만 등도우께서 요마들을 폭삭하는 데 쓰시도록 천겁이 남겨둔 모양입니다그려. 핫 핫!" "예서도 다 보신 모양이군요?" "물론입죠.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헌데 그 자는 어떤 인물입니까?" "사실 그 도사녀석은 오래 전 천벌을 받고 죽은 일등상인(一燈上人)의 문하제자였습니다. 세상천 지 몹쓸 짓이라곤 안 저질러본 것 없는 악도이지만 그렇다고 도력을 얕잡아볼 놈은 아닙니다. 게 다가 성형마귀(成形魔鬼)를 여러 마리 길러가지고 위급할 때에 부닥치면 그 중 한 마리를 골라서 몸뚱이를 바꿔 달아나기도 합니다. 이름은 풍오(風梧), 별명은 백마도장(百魔道長)이라고 부르지 요. 이렇기 때문에 저 정도의 재간으로는 그놈을 그저 쫓아버릴 수야 있습니다만, 죽여 없앤다는 것은 극히 어렵습니다. 한데 오늘 그놈의 악업도 하늘에 꽉 찼는지, 처치할 기회가 온 것이지요. 그놈이 오기 직전, 보상부인의 암동 부근은 일대가 모두 건천진화에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겉 으로 봐선 잠깐이나마 멀쩡한 데다 또 내 금법을 써서 더욱 분별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다음, 놈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내버려 두었다가 암벽을 송두리째 무너뜨려서 생매장당하는 맛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진작에 개사귀정(改邪歸正)한 몸이라 문득 그놈마저 정도(正 道)로 이끌어주고 싶은 생각이 나길래 죽이지는 않고 혼뜨검이나 한번 내주고 끌어낼 속셈이었지 요. 허나 그놈은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도리어 내게 몹쓸 악담만 퍼붓고 반항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어 금법을 발동했습니다. 제 금법이 <익도인> 경곤의 이형금제대법(移形禁制大法)처럼 다른 물체를 빌어 목표를 격파시키는 것보다야 못하지만 모래 속에 흡인력을 불어넣어 표적을 끌어당 기게 하고 잿더미 암벽을 옮겨다가 찍어누르게 할 수는 있습지요. 그놈도 술법에 정통하니까 어 떻게든 탈출이야 하겠지만 그 때까지 사뭇 죽어라고 발광을 해야만 빠져나올 겁니다. 그 시각이 문제입니다. 이런 악종(惡種)을 세상에 남겨두었다간 끝내 인간이나 해꼬지 하기 십상이라, 저는 이번 기회에 아예 처치해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놈뿐만 아니라 거느리고 있는 악귀 야차들까 지 말입니다. 지금 시각은 벌써 진시(辰時), 조금만 더 지나면 두 번째 천검 손지풍뢰(巽地風雷)가 닥쳐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갈도우님이 오화신뢰(五火神雷)를 터뜨리기 직전 때를 맞추어서 금법 을 풀어줄 것입니다. 그놈과 악귀 야차들이 좋아라고 뛰쳐나오는 찰나 손지풍뢰는 오화신뢰와 정 면충돌을 일으킬 테니 놈과 패거리는 한 줌 잿더미 연기로 스러지지 않고 배겨낼 도리가 있겠습 니까?" "그거 참 묘하십니다. 핫핫!" 익살맞게 웃던 제갈경아, 무심결에 동남방 하늘가를 흘낏 보더니 웃음기가 싹 걷혀버린다. "등팔고님, 저거 보십쇼!" 고함을 치면서 그는 재빨리 두 손에 들고 있던 호로병을 치켜들었다. "앗, 온다!" 등팔고도 소스라쳐 낮게 외쳤다. 시커먼 먹구름이 질풍 속에 야생마 달리듯 몰려오고 있다. 먹구 름장 아래로 실낱 같은 금빛 광채 수십 가닥이 뱀떼처럼 마구 번쩍 날뛰는 게 보였다. 제갈경아가 입 속으로 중얼중얼 진언(眞言)을 외우기 시작했다. 음성이 착 가라앉은 품이 사뭇 신중하게 손을 쓸 태세다. 두 번째 천겁이 오고 있다. 오는 속도가 너무도 빠르다. 우르르!... 쿵광! 우르릉! 구름 속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와질수록 천둥소리는 귀청을 찢을 듯 더욱 크게 울린 다. 천겁의 기세가 너무도 빠르고 급박하다. 등팔고는 잔뜩 긴장한 채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이제 해 변으로 달려갈 시간적 여유는 없다. 거기에는 요도사 풍오의 눈을 속이느라고 은형둔법으로 감춰 진 사도평 일행이 아직껏 그 상태로 있다. 모래지옥 속에 요마들도 여전히 금법에 묶여서 발버둥 치고 있을 것이다. '어쩌나? 달려가서 둔법과 금법을 풀어줘야 할 텐데... 오가는 동안에 저 천겁이 들이닥칠 것은 뻔하다. 시간을 놓쳤다간 끝장이다.' 그녀는 결심을 했다. 혼신의 공력을 모두 끌어올려 손가락 끝에 모았다. "이얍!" 목청이 터져라고 기합 소리를 지르면서 해안 쪽으로 일지를 찍었다. 그리고는 법력이 미치지 못 할까 불안한 눈길로 목표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아아, 됐구나!" 사도평과 진자령자매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녀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은 형둔법과 금법이 그런 대로 한꺼번에 풀린 것이다. 이윽고 요도사 풍오일당이 파묻힌 주변에서도 잿더미 연기가 중천 상공을 뒤덮을 듯 솟구쳐 날 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람의 모습이 꿈틀거리며 나타났다. 뿌연 잿빛 장막 속에서 하나 둘씩 악귀 들의 그림자도 어른거렸다. 때맞추어 그 상공에는 천겁의 강풍(强風) 질뢰(疾雷)가 동시에 들이닥쳤다. 그것들은 풍오일당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서 거칠것 없이 사도평과 자령자매를 향해 곧바로 떨어져 내렸다. 꽈르르릉! 콰당!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굉음이 울렸다. '푸지직!'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섬광에 하늘과 땅이 순간적 으로 제 빛을 잃었다. 황금색 기둥 줄기와 같은 벼락이 '슈욱!' 내리꽂혔다. 벼락 뒤에 온 세상을 휩쓸어 버릴 듯 엄청난 기세로 광풍이 휘몰아쳤다. 바다가 발칵 뒤집혔다. 길길이 솟구치는 바닷물이 노성(怒聲)을 지르면서 해안으로 밀려들기 시 작했다. 산더미처럼 거대한 물의 장벽이 한 겹, 두 겹, 세 겹... 층층벽을 이루고 밀어닥쳤다. "이얏!" 제갈경아의 입에서 짧은 기합성이 터졌다. 금빛 광채 한 줄기가 호로병을 떠받치고서 일직선으 로 천겁의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갔다. 호로병이 구름에 파묻히듯 할 순간, 그는 황급히 금빛 광채 를 손짓해 불러들였다. 꽈광! 천지개벽을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신뢰(神雷)가 맞부딪쳤다. 순식간에 온 하늘, 온 땅의 움직임이 정지하듯 어슴푸레 윤곽만을 남긴 채 빛깔이 없어졌다. 굉음이 터진 중천에서 눈도 뜨지 못할 만 큼 강렬한 벼락불이 덩어리를 이루고 사면팔방 살처럼 흩어져 가고 있다. 한편 지상에서는 모래지옥을 빠져나온 요도사 풍오가 자신을 골탕먹인 원수를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다간 바로 눈앞 상공에 푸른빛 별떨기 셋이 반짝이는 걸 목격했다. '이크, 저게 웬 떡이냐?' 욕심이 또 불끈 솟구쳐서 그리로 첫발을 막 내딛으려는 순간, 풍오는 머리 위 하늘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엇?" 흘낏 치켜올리고 보니 큰일났다! 난데없이 시커먼 먹구름 덩어리가 송두리째 내리덮치는 가운데 '푸지직! 푸지직!' 소리를 내면서 금빛 독사떼와도 같은 번갯줄기가 자신의 정수리를 노리고 쏟아 져 오는 게 아닌가! "아이쿠, 벼락이다! 큰일났구나!" 풍오는 그만 대경실색, 전신의 터럭이 곤두서 가지곤 허둥지둥 갓 빠져나온 모래지옥 속으로 다 시 파고들었다. 허나 때는 벌써 늦었다. 풍오의 머리 꼭대기 바로 위에서 두 개의 신뢰가 정면충 돌, 엄청난 굉음을 울리면서 폭발한 것이다. 풍오는 벼락소리에 고막이 터져버렸다. 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뚱아리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맛보는 저릿저릿한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벼락불 아래 요도사 풍오와 악귀 야차들은 순식간에 한 줌 연기로 화해 사면팔방 흩어져 버린 것이다. 두 신뢰의 폭발음은 해상 전방대까지 뒤흔들었다. 그 엄청난 충격파에 제갈경아와 등팔고는 가 슴이 답답할 정도로 숨막히고 머리가 어찔어찔 현기증을 일으켰다. 고막조차 터졌는지 순간적으 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이내 '윙!' 하고 귀울음부터 돌아왔다. 날벼락에 애꿎은 희생을 당한 건 풍오일당뿐이 아니었다. 천지를 진동시킨 충격파는 그 일대의 바다까지 송두리째 뒤엎어 놓았다. 짙푸른 해면이 다시 원상대로 잔잔해졌을 때 물빛은 푸른 것 이 아니라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갈갈이 찢긴 물고기들의 시체가 떠올라서 해면을 온통 뒤덮어 놓은 것이다. 수천, 수만... 수천만 마리의 크고 작은 주검이 처참하게 토막난 채로 물결따라 흔들 리고 있다. 벼락이 갓 지나치자 강풍(强風)이 또 밀어닥쳤다. 신타 을휴는 '신뢰가 파괴되고 나면 풍세(風 勢)도 반드시 크게 꺾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몰아치고 있는 폭풍이 그의 말처럼 약화된 것인지 아닌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이 바람결에 바닷물은 펄펄 끓는 죽솥과도 같이 수십 수백 장 높이나 부풀어올라 산더미 를 이루고 있었다. 태양도 구름도 보이지 않았다. 천지는 온통 잿빛 먼지구름에 가리워져 회백(灰 白) 일색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폭풍의 날개가 전망대를 스치고 지날 적마다 암벽의 몸뚱이는 통째로 바람에 날려갈 듯 기우뚱 거린다. 수백 길 높이나 되는 암벽의 턱 밑까지 부풀어오른 파도가 하얀 포말(泡沫)을 게거품처럼 물고서 미친 듯이 할퀴어댔다. 등팔고는 더 이상 지체하다간 순식간에 파멸이 닥치리라 직감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설혼주가 번쩍 광채를 발하며 날아올랐다. "이야앗!" 뒤미처 야무진 기합소리와 함께 구슬의 광채 속으로 몸을 던지듯 솟구쳐 오른 다음, 그녀의 모 습은 사라졌다. 설혼주와 일체를 이룬 찰나, 무시무시한 광풍노도의 천지간에 둘레가 일 무 가웃 이나 되는 거대한 광막이 펼쳐졌다. 빛의 장막은 지체없이 싸늘한 광채를 발하면서 해안 쪽으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그리고 사도평과 자령자매 세 사람의 머리 위를 일산(日傘)처럼 덮어버렸다. 이 만년빙설의 정화는 과연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위력을 나타냈다. 세상 천지를 남김없이 깡 그리 휩쓸어갈 듯 엄청난 풍압에 짓눌려서도 빛의 장막은 끝자락 하나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날 카로운 광채를 쏘아내고 있는 것이다. 광막에 가로막힌 폭풍은 더욱 극악스럽게 기세를 떨쳤다. 우르르르!... 우르르르! 목표를 차단당하자 폭풍의 세력은 갈수록 흉포해졌다. 이가 갈리도록 쇳된 노성을 지르면서 천 겁의 강풍은 소용돌이 기류(氣流)를 형성하고 설혼주의 광막을 에워쌌다. 뒤미처 그 주변 일대에 는 수십 개의 거대한 바람기둥이 하늘을 떠받치듯 세워졌다. 돌개바람 기둥은 한 군데 그냥 머물 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속력으로 회전 이동하면서 주변 수십 리 안팎의 물체란 물체는 모조 리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그 무서운 흡인력에 해면에는 물기둥이 솟구쳤다. 둘레 수십 길, 높이 백 장 가웃이나 됨직한 물 기둥, 돌개바람 기둥이 사면팔방으로 한꺼번에 은빛 광막을 표적삼아 소리소리치면서 부딪쳐갔다. 꽈다당! 콰당..... 경천동지할 충격음에 잿빛 일색의 하늘마저 찢겨나간다. 그 소리는 이내 성난 야수의 울부짖음 으로 변하고 기세사납게 부딪쳐 들어갔던 바람기둥, 물기둥은 저마다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산산조각 부서져 흩어지고 말았다. 제일파 공세가 수포로 돌아가자 천겁은 숨 한 모금 돌릴 여지도 없이 제이파, 제삼파 공격을 끈 질기게 시도했다. 산산조각 흩어졌던 기류는 공중에서 다시 뭉쳐 새로운 회오리바람 기둥으로 변 하고, 때 아닌 소나기가 되어 '쏴르르!' 해면에 떨어진 바닷물도 다시 솟구쳐 물기둥을 이루었다. 콰당! 꽈르릉..... 설혼주의 은빛 광막이 아수라(阿修羅)로 화한 중천에서 마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여전히 싸늘한 빛을 토해내고 있다. 전망대 위에 홀로 남은 제갈경아, 맞바람을 안은 채 우뚝 서서 가슴을 조인다. 산악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소리, 부풀대로 부풀어오른 바다가 노기등등, 용틀임을 하면서 뒤집히는 소리에 귀 청이 먹먹해지고 놀란 넋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른다. 오화신뢰로 천겁의 뇌화를 상쇄시킨 다음에 그로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 제갈경아는 속 수무책, 오로지 해안 쪽 등팔고의 격전장만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천겁과 대결한 지도 벌써 한 시간, 은빛 광막을 에워싼 회오리 바람 기둥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 이고, 합쳐질수록 그 숫자도 늘어났다. 시간이 오래도록 승부를 내지 못하자 천겁은 이대로 물러 설 수 없다는 듯이 돌연 공세를 한층 강화했다. 수백 수천 개의 잿빛 바람기둥이 일제히 창끝처럼 날카롭게 변화하더니 몰이꾼패가 맹수를 우리 안으로 몰아넣듯 사면팔방에서 은빛 광막을 겨누었다. 그 다음 순간, 거대한 회색빛 창대들은 하 늘에 반원을 그리면서 한꺼번에 짓쪄들었다. 쏴아아!..... 공기를 가르는 그 엄청난 파공일성 한가운데 은빛 광막이 먹물번지듯 열 배 크기로 부풀어오른 다. 천겁도 그럴 줄 알았는지, 회색빛 창 끝을 사면에서 한 군데로 집중시키고 찍어갔다. 그것은 은빛 광막의 핵심부였다. 허나 은빛 광막은 공격 측보다 한순간이 더 빨랐다. 창 끝이 거의 닿을 듯 한 데 모아지는 찰나 팽창할 대로 팽창한 광막은 눈 깜짝할 사이에 처음보다도 더욱 작게 오그라든 것이다. 둘레가 기껏해야 일 장 남짓만큼이나 작디작게 수축되자, 기세등등 아우성을 치면서 몰려든 수 천 자루 창 끝에서 일순 표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표적을 잃어버린 그것들은 기 세가 너무도 강하고 사나운 나머지 한 순간 제동을 걸 수가 없었다. 콰당! 지긋지긋한 굉음이 터지고 수천 갈래 잿빛 바람기둥은 한꺼번에 정면충돌을 일으켰다. 방원 수 십 리 일대가 엄청난 기류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형적조차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 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휘말아올린 채 하늘 끝까지 닿을 듯 거대한 풍주(風柱) 하나가 그 자리에 우뚝 세워졌다. 마침내 손지풍뢰(巽地風雷)의 남은 세력이 하나로 뭉쳐진 것이다. 바로 이 때다. 돌연 은빛 광막이 또 한번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여지껏 볼 수 없었던 강렬한 광채를 뿜으면서 곧바로 돌개바람기둥에 부딪쳐가는 게 아닌가! 마침네 등팔고의 설혼주가 역습 을 개시한 것이다. 콰당! 슈슈숫..... 귀청을 터뜨리는 굉음 한 차례, 그 뒤를 이어서 기류(氣流)가 비단폭 찢기듯 갈라지는 소리! 거 대한 바람기둥은 광막의 팽창력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천지간에 거칠것없이 광기(狂氣)를 부리 던 회색의 돌개바람은 단 한 순간 기습을 당하고 단 한 차례 응집된 절대압력을 못 견뎌낸 채 그 대로 폭발해 버렸다. 그것이 두 번째 천겁의 장렬한 최후였다. 허공에는 이제 실낱처럼 산산히 흩어진 잿빛 기류가 떠돌고 있을 뿐... 얼마 후 바람이 멎고 먹 구름이 걷혔다. 해면도 기세 사납게 날뛰던 물결이 잠잠해지더니 다시 모습을 드러내 태양볕 아 래 번쩍번쩍 금빛 은빛 무늬를 눈부시게 수 놓으면서 일렁거리고 있다. 동편 하늘가에 어느 새 무지개 한 쌍이 엇갈려 걸린 채 수평선 위로 영롱한 일곱색을 드리우고 있다. 맑고 곱고 장엄한 천지간의 조화가 비할 데없이 아름답다. 무너져 내린 암벽, 잿더미로 변 한 숲과 잔해, 퀭하니 함몰된 지면, 이리 몰리고 저리로 쌓인 모래의 퇴적층, 해면에 낭자하게 밀 려든 물고기떼의 처참한 주검만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 그 누구도 자신이 꿈 같은 황홀경에 빠져 있다고 착각했으리라. 방금까지 벌어졌던 폭풍과 벼락의 엄청난 발광을 이제 여기서 상상할 사람 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은빛 광채가 해상 전망대로 날아왔다. 제갈경아는 황망히 등팔고를 맞이했다. "등도우님,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기진맥진, 초주검이 된 그녀는 한 마디 응답조차 못하고 헐떡헐떡 가쁜 숨만 몰아쉴 뿐 이다. 한참 만에야 그녀는 여전히 잔기침을 내뱉으며 제갈경아에게 물었다. "쿨럭, 쿨럭...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세 번째 재앙은 언제 있습니까?" "천마(天魔)는 오늘밤 자시(子時)가 되어서야 닥칠 겁니다. 그동안 푹 쉬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저쪽편 세 사람이 직접 상대하는 길밖에는 마지막 천겁을 어느 누구도 막아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 그 천겁을 전혀 덜어줄 방법이 없단 말인가요?" "예, 천겁은 그대로 저들한테 맡겨두고 그 밖에 사마외도의 칩입이나 막아주어야겠지요." 등팔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방금 한 질문도 몰라서가 아니라 뻔한 사실이 안타까와서 해본 것이다. 이제 두 사람으로서는 할 일을 다 마쳤다. 천겁이 닥치는 틈을 타서 쳐들어올 요마들이나 경계하는 일 이외로 그저 <동해삼선> 세 원로가 한시바삐 폐관을 마치고 나타나기를 기원하는 것밖에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그녀는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폭풍과의 악전고투로 쇠진할 대로 쇠진해진 원기를 회 복시켜야만 한다. 제갈경아는 묵묵히 저물어가는 하늘과 바다 쪽에 눈길을 던지고 서 있다. 한편 해변 쪽의 당사자들은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고해아> 사도평과 자령자매는 보상부 인의 법체와 원신을 보호하면서 첫 번째 겁난 건천진화를 겪느라고 육신은 물론 원령(元靈)까지 모두 불에 데고 끄슬려, 그 화상의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사도평은 장모 보상부인의 원단(元丹)과 합쳐져서 천겁에 결정적인 역습을 가하던 순간 충격을 받아 원신이 적지 않게 다쳤다. 당시 그는 자신의 원신을 끌어내리지 못하고 떠돌이 원혼 (元魂)으로 변할 뻔했었다. 그래도 천만다행, 등팔고가 적시에 쫓아와서 설혼주로 떠돌이 원혼을 면하게 해준 데다 제갈경 아의 영단이 큰 효력을 나타내어 치명상에서 벗어나서 그럭저럭 첫 번째 중겁의 난관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원신이 미처 완전 회복되기도 전에 또다시 요마의 습격을 받았다. <백마도장> 풍오와 그 부하 악귀 야차들이었다. 그 위기도 등팔고의 활약 덕분에 더 이상 피해없이 무난하게 넘겼다. 한데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두 번째 천겁이 닥쳐왔을 때는 너무도 지치고 놀란 나머지 이젠 될 대로 돼라.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채 순순히 천운(天運)을 받아들일 마음자세가 되고 말았 다. 죽기로 작정하니 도리어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도 않고 남의 일처럼 냉 담하게 천겁을 맞이했다. 귀청을 찢는 듯한 뇌성벽력, 천지가 진동하는 광풍노도가 정신 못 차리게 휘몰아 닥치는 속에서 그들은 하잘것 없는 인간의 힘을 절실히 느꼈다. 어쩌면 그러한 무력감은 폭풍과 벼락이 닥치기 전, 첫 번째 불벼락에 송두리째로 재가 된 주변의 암벽과 나무숲들이 자기네들 보는 앞에서 눈사 태처럼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산산이 흩어져 버렸을 때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 다. 이러한 감정은 사도평부부처럼 나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보다 보상부인에게 있어 더 욱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천호 보상부인이 어떤 사람인가? 오랜 세월 현기(玄機)를 깊이 참오(參悟)하고 병해(兵解)의 겁 난에서 벗어나 거듭 태어난 몸이다. 그 후에도 온갖 시련과 고초를 겪으면서 세상만물과 조화, 흥 망성쇠의 진리를 자못 깊이 깨우친 그녀였지만, 자신에게 닥칠 숙명의 천겁을 맞는 순간 이제껏 품어왔던 막연한 관념이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도록 느꼈던 것이다. 정(正)과 사(邪), 검선(劍仙)과 범인(凡人), 그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이 엄청난 하늘의 위력 앞에서 그것들은 도대체 얼마 만한 값어치가 있단 말이냐? 죽이고 죽고, 해치고 다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순간적이다. 인간의 생명조차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런 것들 때문에 삶을 살아 오고 있다. 욕정은 또 무엇인가? 희대의 비보를 가졌다면 또 무엇하는가? 모두가 한 순간의 허망 (虛妄)이다. 인간에게 있어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녀는 천겁 아래 벌거숭이가 되었다. 마지막 한 가지 남은 망념(妄念)이 있다면 그것은 어미로 서의 본능이었다. 보잘것 없는 자기 육체와 원신 따위라면 의당 받아야 할 천벌 앞에 콩깻묵이 되도록 내던져도 좋다. 그러나 자신 하나를 위해서 감히 죽음에 도전한 사랑하는 딸들과 사위마 저 희생당하게 된다면 이 어찌 차마 눈 뜨고 볼 것이냐? 보상부인은 모성애의 미망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어쩌면 그것은 미망이 아니라 구원(久遠)의 진 리일지도 모르지만..... 두 번째 천겁을 맞은 네 사람이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필사적인 저항을 계속하 고 있을 때,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던져졌다. 해상 전망대에서 제갈경아가 스승 현진자의 오화신뢰로 천뢰(天雷)와 충돌시켜 동귀어진(同歸於 盡)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제천진양지화(諸天眞陽之火)가 서로 맞부딪쳐 어마어마한 대폭발을 일으키자, 바닷물이 들끓고 산악이 무너져 내렸다. 평지도 조각조각 균열을 일으키고 지옥의 아가 리를 여기저기 수없이 쩍쩍 벌렸다. 그래도 보상부인은 무심하게 보아 넘길 수 없었다. 뇌성벽력이 잦아들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엄 청난 폭풍이 몰아닥쳤다. 천군만마(千軍萬馬)의 발굽소리에, 수천 수만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이 슬피 울부짖는 소리가 한 데 섞여서 울려왔다. 보상부인은 당연히 그 소리를 들어 넘겼다. 한평생 살벌(殺伐) 속에 몸을 던지고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숱한 생명들이 자기 손에 원통한 죽음을 당했으랴! 아아! 그녀는 모진 바람을 맞으면서 바람결에 뭇 원혼들의 손톱이 자신의 몸뚱아리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한동안 망연자실, 뇌성벽력과 광풍노도의 몸부림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문득 꺼져가던 벼락의 잔 재 속에서 은빛 찬란한 광막이 불쑥 떠오르더니 대지를 투명하게 밝히면서 수천 수만의 돌개바람 기둥과 싸우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광막이 등팔고의 설혼주에서 뻗쳐나오는 줄 이내 알아차린 그녀는 한 가닥 모성애에서 우러 나온 마음에 기대를 걸어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자연끼리의 싸움이었다. 반 시진 남짓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은빛 광막은 두 번째 천겁마저 잿더미로 만들어 날려보냈다. 그 광경 을 처음부터 최후까지 지켜본 보상부인의 심경은 희열로 가득차 전신이 오스스 떨렸다. 폭풍을 제압하고 은빛 광막 역시 해상 전망대로 날아간 뒤, 해안에 남은 네 사람은 저마다 천운 (天運)을 축하하고 기뻐했다. 결국 이 두 번째 풍뢰(風雷)의 재앙도 앞서 불벼락보다 더욱 지독스 러운 것이었지만 당사자들에게 있어선 그저 겉놀라움만 주었을 뿐 무사히 그 난관을 넘긴 셈이 다. 이제 삼겁(三劫) 가운데 둘이 지나갔다. 앞으로 천마(天魔)의 겁난 하나만 버텨내면 그것으로 성 공하게 되리라. 천마는 도대체 어면 형태로 닥칠까? 처음과 두 번째의 겁난이 모두 강렬하고 사 나왔던 것으로 보아 이 최후의 난관은 필경 음유(陰柔)하고 험독할 것이 틀림없다. 단 한 순간이 라도 심신을 자칫 흐트렸다가는 그 즉시 사마에게 침해를 당한다. 신타 을휴는 이것을 유형무질(無形無質)이라고 했다. 천마를 맞는 사람의 심상에 따라서 마음이 멸(滅)하면 천마도 허상(虛想)이 되지만 마음이 생(生)하면 진상(眞想)이 되어 침투한다는 것이다. 모녀와 사위 네 사람은 그 말을 떠올리고 한층 더 외경심을 품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마지막 재 앙이 닥쳐올 때를 기다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