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토지1부2권 (2) 저자명: 박경리 출판사명: 솔출판사 제2편 추적과 음모 14장 추적 귀녀의 모습을 한번 쳐다보고 떠나려 했다. 집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강표수는 윤씨부인에게 인사를 올리고 중문을 나서는 치수 뒷모습을 보았 다. 실망에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강표수는 치수 뒤를 따라올 수 밖에 없었 다. 문전에는 하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상전을 전송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치수는 거들떠보지 않고 나귀 등에 오르고 말고삐를 잡은 수동은 엉성한 수염에 묻힌 작은 입술을 다물고 늘어선 하인들에게 일별을 던진다. 삼수가 묘하게 웃었다. 복이 삼수에게 곁눈질을 했다. 짐을 실은 다른 한 필의 나귀는 텁석부리 강포수를 경계했던지 말고삐를 잡자 코를 불었다. "나리마님, 안녕히 다녀오시오." 제가끔 인사했으나 최치수는 말안장에 앉아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의외로 단촐한 출발이었다. 하인들이 서너 명은 수행하리니, 김평산도 동 행하지 않을까 예상했었지만 기운 센 편도 아닌 수동이 한 사람만 데리고 강포수와 함께 출발한 것이다. 엉거주춤 서 있는 하인들은 언덕길을 내려 가는 두 필의 나귀를 멍청히 내려다본다. 일행은 강을 끼고, 나귀와 사람들 발자국에 다져진 길을 천천히 간다. 몇 번씩이나 돌아보고 하며 아쉬움에 가득 찼던 강포수는 최참판댁 지붕이 시 야에서 사라지자 눈을 내리깔았다. 고개가 차츰 숙어지면서 발끝으로 눈길 이 떨어진다. '머 영영 안 돌아올 기건데?' 나귀는 강포수에게 곁눈질을 하며 끝내 미덥지 못한가 코를 분다. 앞서가 는 나귀 등에는 최치수의 뒷모습이 짐짝같이 보이었다. '온 천지가 허퉁한 거맨치로 마음이 허퉁해서 갈 바를 못 잡겄다. 총도 싫 고 돈도 싫고...' 길섶에 뻗은 풀잎에 이슬이 남아 있어서 짚세기가 젖는다. 날씨는 변덕을 부릴는지, 흩어져 있는 구름은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으나 하 늘은 휑하니 높았고 푸른 빛은 차가웠다. 들판은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목동이 소를 몰고 들판을 질러가는데 송아지가 어미소 뒤를 졸래졸래 따라 간다. 십리 길을 거의 지나는 동안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이 중에서 앞장선 수동의 얼굴에는 간혹 긴장의 빛이 돌다간 생각에 잠기곤 했다. '서방님 속마음을 알 수가 있이야제. 하지마는 이분 길에는 무신사단이 있 기는 있을 기다. 무서 운 어른이니께.' 수동이는 지리산에 구천이가 있다는 뜬소문을 생각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머릿속에서 구천의 모습을 싹 지워버리고 싶 었다. 그러나 별당아씨와 구천이를 도장에 가두었던 무서운 그날 밤의 일 이 말고삐를 잡고 가는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미 모든 일을 각오한 듯 태연하게 반항 없이, 또 급히려 하지도 않던 구천의 얼굴은 더욱더 선 명하다. 그들의 죄 많은 애정을 젤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수동이었다. 다날 아침, 도장 문이 열려진 채 두 남녀가 도망친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기뻐 하며 그들이 손 닿지 못할 곳으로 달아날 것을 바란 사람도 수동이였다. 화심리 장암선생 문병에서 돌아온 치수는 윤씨부인한테서 그 경위를 들었 을 것이 틀림이 없겠는데 안방에서 나올 때 그는 싱긋이 웃었던 것이다. "이놈 길상아! 나뭇잎을 왜 안 쓸었느냐?" 사랑 뜰에서 그는 호통을 한번 쳤고 그러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성큼 사랑방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다음날, 또 그 다음날, 계속하여 그에게서 하 인들은 아무런 변화를 볼 수 없었다. 사람을 놔서 구천이의 수소문을 하고 있다는 말이 이따금 하인들을 긴장시키곤 했으나 그러나 하인들은 어느덧 그 사건에서 최치수를 도외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금실이 좋지 않던 내외 간이었으니까, 하며 일단락 지어진 일로 치부했었다. '아니지, 아니지. 서방님 성미가 우떻다고? 성미는 내가 잘 아누만.' 기우가, 총포 연습에서 기우에 그칠 일이 아님을 수동은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 단촐한 행장을 꾸려 산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사냥이 한갓 놀이에 불과했더라면 최치수는 결코 단촐한 인원으로 출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동이는 이미 구천의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것 같은 예감을 느낀다. '불쌍한 놈, 이리 될지 모르고 일을 저질렀나. 인륜을 짓밟아놓고 우찌 지 가 살기를 바랄 것꼬. 남으 여자도 유만부동이지. 하늘 겉은 상전의 아씨 를, 부치가 까꾸로 서지 않고서야. 환장했지. 빌어묵을 놈. 참말이제 이 노 릇을 우찌 하노.' 주막 앞에 이르러 잠시 쉬어가기 위해 최치수가 나귀에서 내렸을 때 수동 이는 재빨리 상전의 얼굴을 살핀다. 항상 날카롭게 다물려져 있던 입술이 헤벌어져 있었다. 나귀를 몰고 앞서가면서 최치수의 날카로운 푶정만을 상 상해온 수동이로서는 의외였다. 나귀에게 물을 먹이면서 다시 치수 쪽을 보았을 때 그는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아무 생각이 없는 듯했고 병신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강포수는 주막 앞에 쭈그리고 있었는 데 눈살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밤은 연곡사에서 묵는 게야. 알았느냐?" 강물을 바라본 채 치수가 말했다. "예." 떠나기 전에 한마디 한 말의 되풀이였다.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강포수가 일어섰다. 치수 뒷모습을 향해 비실비실 걸어가더니 "나으리!" 천천히 몸을 돌리고 최치수는 강포수를 쳐다본다. "나으리!" "..." "저어." "..." "하, 하기사...저어 아, 아입니다." "..." "요, 요다음에 말심디리겠십니다." 하는데 강포수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홍당무가 되는가 싶더니 낯빛은 어느덧 새파랗게 질리는 것이었다. 최치수는 종시일관 무언으로 강포수를 쳐다보기만 했다. 다시 출발하여 일행은 섬진강 강줄기와 작별하고 산과 산의 샛길로 들어 섰다. 그리하여 해 떨어지기 전에 연곡사에 당도하였다. 적막한 냉기를 실 은 산기운이 걸음을 멈춘 일행들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해묵은 소나무 전 나무 오리나무 사이로 저문 햇살이 한결 화사하게 비치고 있다. 절 밑 여 염집에 나귀를 맡기고 수동과 강포수를 거느린 최치수는 도보로 올라가서 일주문에 들어섰다. 절 식구가 많았을 터인데 경내는 정적 그것이었고 차 츰 엷어지기 시작한 밝음이 보랏빛 안개에 휩싸여드는 듯, 변화를 나타내 고 있다. 먹물 장삼을 입은 비구 하나가 양팔을 허위적거리며 내려온다. 장 삼자락이 줄레줄레 흔들린다. "스님." 비구를 본 수동이 치수를 앞서나가며 허리를 굽혔다. "아, 어인 일이시오?" 젊은 비구는 급히 합장으로 답례한다. "마님께서 오시었소?" "아, 아닙니다. 나리마님께서 지나시는 길에." "그, 그러시오!" 바구는 최치수를 향해 당황하며 합장하고 두려움을 머금은 눈빛으로 잠시 살피다가 "소승, 노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장삼을 펄럭이며 돌아서더니 내려올 때보다 더 급한 걸음걸이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까까머리의 뒤통수는 골이 패인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강포수는 큰 눈을 껌뻑이며 비구의 뒷모습을 바라본 채 서있었다. 비탈진 아래켠, 산 물이 흐르는 곳에 칠팔 세 남짓한 상좌가 둘, 해사한 얼굴을 들고 절을 찾 아온 손님들을 올려다본다. 텁석부리 산도둑같이 생긴 강포수의 눈과 마주 치자 자라같이 목을 움츠린다. "저 아이들은 부모가 없느냐?" 수동이에겐지 강포수에겐지 모르게 최치수는 물었다. "없는 에들도 있겄습니다마은 부모가 바친 애들도 있일 것입니다." 수동이 대답했다. "애들이 잘생겼고나." "예. 길상이놈도 생기기는 잘생겼지요." 치수 입가에 위태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수동이는 황급히 눈을 내리깐 다. "잘생겼다?" 하더니 깔깔 웃기 시작했다. 수동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손을 꼭 맞잡을 뿐이다. 웃음이 걷혀졌을 때 최치수의 눈썹 언저리는 물감을 들인 듯이 짙붉었다. 예까지 오는 동안 막연했으며 바보스럽게 보 이던 최치수의 얼굴은 악의에 차서 희번덕였다. "잘생기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놈들이지." 내뱉었다. 비구 혜관이 급히 달려왔다. 불거진 관골이 급히 뛰어오느라고 붉었다. "노스님께서 급히 모셔오라 하십니다." 혜관은 대웅전 옆을 지나 숲속 길로 접어들며 암자 쪽으로 치수를 인도해 갔다. 암자 앞에 육척 거구의 노승이 이켠을 보고 서 있었다. 치수가 그에 게 가까이 갔을 때 우관의 눈에서 번쩍 빛이 났다. "어인 일이시오?" 최치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지나는 길에 날도 저물고 해서 하룻밤 유하려고 왔소이다." "허허, 먼길에 수고가 많았겠소." 우관은 치수에게 권하여 암자 안에 들게 했다. 수동이는 물러가 있으라는 치수의 말에 혜 관을 따라 숲길로 내려간다. "오래간만이오. 그간 선사께서는 안녕하시었소?" 마주앉으며 치수가 먼저 인사를 했다. "예. 나이를 헛먹었는지 몸은 젊어지고 사바세계를 현념타보니 어찌 극락 왕생을 바라겠 소." 우관은 호방스럽게 웃었다. "한데 집안은 안녕들 하시오?" "별일 없소이다." "자당께서도?" "예." "지난 봄에 뵈었을 적에는 많이 수척해지신 듯싶었는데 요즘엔 어떠신 지." 이번에는 치수의 눈이 번쩍 빛났다. 십여 년 전 장암선생을 따라 전주에 갔다가 혼자 돌아오는 길에 치수는 천은사에 들러 당시 그곳에 있던 우관을 만난 적이 있다. 젊은 유생이던 최치수는 불교를 무격의 세계와 과히 다를 것이 없는 혹세무민의 종교로 모멸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은근히 우관을 조롱하는 언동을 취했던 것이다. 가사도 장삼도 걸치지 않고 동지저고릿바람으로 대하는 그의 무례함이 치 수의 비위를 거스르기도 했었고 장암선생의 영향을 겉으로만 받았던 나이 어린 방자함도 없지 않았으나 사실인즉 이조의 배불정책으로 교세가 땅에 떨어진 불교가 겨우 아녀자와 서민층의 신심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형편이 었으므로 왕시 지식의 상층을 구성했던 승려들의 신분이 천격으로 전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들의 타락과 비행은 서민 사회에서조차 권위의 몰락을 가져왔으므로 배불의 아성인 유가에서 괄시되는 것도 현실적인 면 에서 무리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치수의 언동에 개의치 않았었다. "날씨가 이리 가물어서야, 오는 해는 절 양식 대기가 난감하겠구먼. 이래 가지고는 중들의 거지 행각인들 수월하겠소?" 우관은 빙그레 웃었다. 싱거운 응수에 치수는 맥이 풀렀다. 조용한 산사에 서 말씨름이라도 붙여 심심풀이를 하려 했던 치수는 무안스럽고 멋쩍었다. 치수는 우관의 말을 땡땡이중의 그것으로 물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압도 해 오는 우관의 육척 거구와 이글거리는 안광이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늑대 같으니라구. 늙은 중놈이 무엇을 처먹었기에, 백팔번뇌를 물리치기 는커녕 야망의 덩어리 같구나.'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우관선사를 바라보는데 십여 년 전이나 지금 이나 도무지 변한 데가 없다고 치수는 생각했다. 우관은 늙지 않았으며 길 고 짙은 눈썹 밑의 굵은 눈망울에 정력이 넘쳐 있었으며 완강하고 곧은 뼈 대는 백전을 겪은 장수의 풍모를 방불케 했다.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치수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갈 곳이 정해 있는 것은 아니오. 사냥이나 하며 사람도 찾아볼겸 떠났소 이다. 우선 지리 산 쪽을 헤쳐볼 요량이오." 눈까풀을 덮은 우관의 눈썹이 아주 희미하게 흔들렸다. "오계의 하나를 범하시려구." "불도의 계율이 유생하고 무슨 상관이겠소." "절 지붕 밑에 사는 늙은이의 말이니 과히 언짢아 마시오." "언짢아할 것까지야 없지요. 헌데 오계의 하나를 범하여 지옥업력으로 삼 악도에 떨어지면 선사께서는 소생을 위해 무엇을 해주시렵니까." 치수는 빙그레 웃는다. "소승도 동행할지 뉘 알겠소." "칠십 년 법의가 공이었단 말씀이오?" 우관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허나 저승인들 인정사정없으란 법은 없겠지요. 아무래도 소승 생각에는 사람의 율법보다 부처의 율법이 너그러울 것 같소." 치수는 껄껄 웃었다. "한다면 죄인들을 위해 지옥을 없이했으면 좋겠소이다." "소승의 뜻도 같소이다." 우관이 껄껄 웃었다. 깨끗한 승방을 처소로 정한 뒤 저녁을 끝낸 치수는 오랫동안 절마당을 헤 매다가 다시 우 관이 있는 암자를 찾아갔다. "무료하여 다시 찾아왔소이다." 등잔불 밑에 단정히 앉아 있던 우관이 몸을 돌렸다. 호방스럽게 웃던 아 까 그 모습은 아 니었다. 불빛은 붉은데 얼굴은 청동으로 빚은 듯이 무겁고 어두웠다. 치수 는 무신경한 사내 처럼 우관의 그 딱딱해진 얼굴을 쳐다보며 마주앉는다. "이놈, 명신아!" 우관이 소리쳐 불렀다. "예에." "찻물을 끓여 오너라." "예." 상좌의 발소리가 멀어졌을 때 우관은 질그릇 주전자에 작설을 몇 줌 집어 넣고 주전자의 뚜껑을 닫더니 찻잔을 꺼내었다. 그러고 난 뒤 방안은 산속 의 정적이 덩어리져서 밀려들 듯 무거운 침묵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어느 쪽에서도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등잔불만 흔들리고 있었다. 침묵은 상좌 명신의 발소리가 들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관은 명신이 끓여 온 동관의 물을 질그릇 주전자에 붓고 작설이 알맞게 우러날 즈음 찻잔에다 따랐다. 역시 말을 잃은 채 두 사람은 찻잔을 들고 향긋한 다향을 느끼며 밤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앉아 있다. "상좌 아이들은 어디서 데려오시오?" 느닷없이 묻는다. "부처님이 보내주시었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우관이 대답했다. "누구의 자식들이오. 선사께서 보내주신 길상이놈은 누구의 자식이오?" "천지만물의 자식이오." "핏줄을 거역할 수 있다 생각하시오?" 우관스님은 말이 없었다. 치수는 머리털 하나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 는 듯 우관선사의 전신을 눈으로 핥았다. "거역할 수 없을 게요." 한참 만에 대답이 돌아왔다. 치수는 회심의 미소를 띤다. "그렇게 대답하실 줄 믿었소이다." "그러면은 참판댁 나리께서는 핏줄을 거역하실 수 있단 말씀이오?" "예, 그렇소이다. 피를 더럽힌 자에 대해서는," "옹졸하도다." 나직한 소리로 우관은 한탄했다. 그러나 치수는 희열에 넘쳐서 "대사!" 들뜬 목소리로 불렀다. "예, 말씀하시오." "사전이 얼마나 되지요?" "글쎄올시다." "한 백 석 보시할까 하오." "..." "비명에 가게 될 사내를 위해서 말이오. 불문에 계신 분으로서 객귀를 천 도할 의무도 있거니와 핏줄을 거역 못하시는 심정에서도 우관선사말고 달 리 그 불행한 사내의 혼백을 달랠 사람은 없을 듯 싶소." "사양하겠소. 소승이 천도해야 할, 그런 비명에 갈 사내는 없을 것 이외 다." 우관스님의 목소리는 힘차고 단호했다. "소승의 생전에는." 다짐두듯 덧붙여 말했다. "좋소." 치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밤이 깊은 숲길을 춤을 추듯 내 려간다. 그것은 정녕 미친 사람의 형상이었다. 이튿날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수동이 최치수 처소에 갔을 때 그는 방안 에 있지 않았다. "벌써 일어나싰나?" 수동이는 경내를 돌아다니며 최치수를 찾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디 가싰으까?" 불안해진 수동는 절문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우인 일입니까?" 수동이는 다시 절안으로 들어와 행여 그새 돌아와 있지 않나 싶어 처소로 달려갔으나 신발이 없었고 불러도 대답이 없다. 방문을 열어본다. 방안은 말끔했다. 자고 일어난 흔적이 없다. 수동의 얼굴이 질린다. 그는 숨을 헐 떡이며 경내를 다시 한 바퀴 돌고 암자 근처를 찾아보고, 다음 절문 밖으 로 또다시 달려나갔다. "아." 수동이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오는 치수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나으리 마님!" "..." "어디 가싰다가... 소인, 여태 찾아다닜십니다!" 기뻐서 소리쳤다. 치수는 얼굴을 들었다. 두 눈동자는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옷은 밤이슬에 흠씬 젖어 있었다. "나리마님!" 뒷걸음질치면서 수동이 불렀다. 그는 순간 최치수가 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 섬뜩해졌던 것이다. "지금 가서 한잠 잘 테니 부를 때까지 오지 마라."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오, 오늘 떠나시지 않십니까?" "바쁠 것 없느니라." 아침을 먹고 난 뒤 강포수를 우두커니 마라보고 있던 수동이는 "강포수, 말 좀 하소." "오늘 안 갈 긴가?" 그것이 강포수의 말이었다. "아즉 그거는 모르겄고... 꿀 묵은 버부리맨치로 답답해 살겄나." "나만 그렇건데? 매일반이제." "노성벡력이라도 쳤이믄 좋겄소. 이리 답답한 세상 처음이구마." 수동은 안절부절이었다. 말없이 지내는 일에도 이력이 난 평소의 수동이 뭔가 좋잖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 때문에 안절부절인 것이다. 구천이 와 상전인 최치수 두 사람이 함께 얽히어 무서운 형상으로 수동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절문 밖에서 만난 치수 얼굴이 수수께끼 같은가 하면 한편 당 연히 있을 일 같기도 했었다. "세상에 여자란 요물이라니." "머?" 강포수가 되묻는 바람에 수동은 입 밖에 낸 자신의 말에 당황한다. 강포 수는 "하모, 요, 요물이지러." "..." "사람으 애간장을 다 녹히는 기이 계집인께, 죽고 살고 명을 달아 매는 것도 계집인께." 얇삭한 눈을 크게 뜨고 수동이 강포수를 노려본다. "총포나 들고 짐승 잡아 사는 사램이 아는 것도 많소!" "짐승 잡아 사는 놈이라고 음양의 이치도 모리까." "강포수 상관할 일 아니라 말이요!" "...?" "남으 일 가지고 함부루 이렇고저렇고 하는 거 아니라 말이요." "머가 남으 일이라 말이고?" 어리둥절하는 강포수 마음에 의심의 구름이 뭉게뭉게 인다. '이놈으 자석이 와 이리 풀세게 나오노? 어지부터 시무룩해서 말 한마디 안 하더마는 이 눔이 귀녀를 맘에 두고 있단 말가?' 15장 무명번뇌 하룻밤을 묵고 떠날 줄 알았는데 최치수는 연곡사에서 사흘 밤을 보내었 다. 사흘 동안 우관은 외떨어진 암자에서, 최치수는 칠성당 가까운 처소에 서 좀체 밖으로 나오질 않았으며 서로 대면하는 일도 없었다. 홀로 앉은 우관은 상좌 명신이 끓여다 놓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바 깥 기척에 귀를 기울이더니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아도 최치수의 얼굴은 사 방에서 우관의 망막을 어지럽힌다. 실눈을 뜨고 웃던 얼굴이, 수백 수천의 얼굴이 암자 가득히 들어차 우관 을 향해 괴물체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흡사 지옥도를 보는 느낌이다. 우관 은 감았던 눈을 떴다. 문살이 뚜렷한 장지가 밝게 눈부시다.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마을보다 한걸음 앞서 산사의 가을은 도라지꽃에서부터 시작 된다.엷은 장지를 통하여 느껴지는 바깥 풍경, 우관은 하늘과 숲과 사찰의 여러 건물, 바위와 오솔길이 일시에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다. 그곳 그자리에 모든 것은 미동도 없이 거리를 굳게 지키며, 지렛대와도 같이 완강한 거리를 지키며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한치도 다가설 수 없는, 결코 접근을 용서치 않는 삼엄한 공간. 그것은 최치수와 자신과의 거 리이거니 생각해보는 것이다. 숲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바위틈을 굴러 흐르는 산믈 소리, 정적을 실어다 뿌리는 것 같은 독경 소리, 승려들 의 발소리, 기척 소리. 그 모든 스리까지 우관은 최치수와 자기 사이를 가 로막는 안개 같은 장막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안의 구심과 밖의 원심의 무 지무지한 힘의 대결. 우관은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는다. 우관은 치수에게 흉금을 터놓고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유혹을 수 없이 받았다. 업인에 의하여 그 과보를 받음은 당연한 일인 줄은 아오. 허 나 악업을 갚음은 다른 하나의 악업을 다시 남길 것인즉, 업감연기는 면면 그칠 날이 없을 것이오. 아귀도에서 도현의 고를 겪는 망모 구제를 위해 목련존자는 세존께 교시를 애원하였었다 하지 않소. 하물며 착한 한 여인 이 망부의 명복과 자손의 수명장수를 빌러 왔다가 뜻하지 않게 당한 횡액 으로 죄의 씨를 받았다면 그 여인에게 과연 죄가 있다 할 것이며 뉘라 그 여인에게 벌을 줄 수 있단 말씀이오? 스스로 죄인이 되어 모진 고초를 겪 은 정상을 생각한다면 그분 생전에 어찌 골육간의 피 뿌리는 참상을 보여 드릴 수 있단 말씀이오, 하며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싶은 감정을 우관 은 누르기가 어려웠다. 그는 자신의 이런 감정이 조카 환이에 대한 을래야 끊을 수 없는 애정에서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치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 음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것은 모험이요 위험인 것도 알고 있었다. 치수가 말하기로는 핏줄을 거역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나 그런다고 그가 모 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속단을 내릴 수는 없다만 사람이 아는 한이 있어도 치수만은 알아서 안되는 비밀이며 비밀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 다. 사건의 증인 바우할 아범과 간난할멈, 또 한 사람 월선네는 땅밑에 묻 혔고 죄의 씨를 뿌렸던 당사자 김개주 역시 이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폭풍 같고 불덩어리 같았던 사내, 그런가 하면 냉혹한 야망의 화신 같았던 사내, 동학의 무리를 이끌고 피에 주린 이리떼같이 양반에 대하여 추호의 용서가 없었던 사나이는 죽어 흙속에 썩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아들 환이와 문의원과 우관, 비밀을 쥐고 있는 사람은 이제 세 사람 이, 아니 윤씨부인과 네 사람이 남았을 뿐이다. 우관은 비밀이 누설되었을 리 없다고 믿고 싶었다. '불민한 놈!' 눈앞에 동생 김개주와 조카 환의 모습이 함께 얽혀져서 떠오르곤 사라진 다. 헌연장부가 된 환이, 준수하고 슬기를 띠었던 눈빛, 윤씨부인을 범했던 개주는 대노한 형에게 말했었다. "지아비 잃은 여인을 사모하였기로, 어찌 죄가 된다 하시오. 하늘이 육신 을 주었거늘, 어찌 육신을 거역하라 하시오." 창백하게 웃었던 사나이는 그러나 산을 떠날 때 원한의 눈물을 뿌렸던 것 이다. '아비 자식이 무슨 삼생연분이기.' 우관은 법의를 걸친 자기 자신으로서도 감내하지 못하였던 지난 날을 생 각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화개 장터에서 엄치 벗어난 길목, 오가는 길손이 목을 축이는 주막이 있었다. "스님, 더운디 쉬어 가시쇼." 장날이 아니어서 손님이 없은 주막 앞에서였다. 내놓은 평상에 걸터앉은 젊은 주모는 부채를 부치며 지나가던 우관에게 말을 걸었다. 오가는 길에 안면은 있는 여자였다. "예." 했으나 우관은 얼굴을 붉힌 채 평상에 앉지는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데 주모는 일어섰다. "에이구 땀 좀 보소. 장삼이 흠빡 젖었소잉." 주모의 상글한 눈매가 웃음을 머금었다. 여자 몸에서 소나기가 지나간 뒤 풀내음과도 같은 내음이 풍겨왔다. 우관은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으나 절로 돌아온 그날밤 그는 새벽녁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사미 시절의 그 화상같이 뜨겁고 쓰라린 괴로움은 세월이 흘러가도 좀체 가시질 않았 다. 법연에 앉아 불법을 설하면서 자줏빛 감댕기에 옥비녀를 꽂았던 여인, 흰 목덜미에 현기증을 느껶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으로 육욕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었다. 우관은 몇번인가, 파계한 자신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환락인가 꿈인가, 정 녕 그것은 헛것을 본 것이요 하루살이의 버러지나 풀꽃의 자태만큼이나 했 을까. 이제는 늙어서, 육척 거구의 정력이 넘쳐 보인다고는 하나 썩은 고목 으로밖에 느낄 수 없는 욱신과 마음은 지난 일들을 회상한다 헤서 가슴을 쥐어박을 만한 회오의 아픔도 없거니와 물같이 흘러간 세월에의 아쉬움도 없다. 그렇다고는 하나 무상무념의 경지로 들어선 것도 아니다. 형의 여자 를 업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설 자리 없는 길을 방황하고 있을 환이와 대역 의 죄목로 형장에 목이 굴렀던 개주, 그들 부자의 무명번뇌인 죄근을 위해 우관은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불자는 앞날을 위해 길을 닦아야 하거늘 우 관은 전생과 현세의 인연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의 말씀 곁에서 한 평생을 누리었건만 우관은 인간의 목소리로 하여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치수 역시 우관과 흡사하게 밖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충동과 그것을 거머잡는 분별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충동을 느꼈을 적에는 우관이 지척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둣깊었고, 분별로써 자신을 다스릴 적에는 우관의 모습은 아득한, 안개에 가려 허리가 꾾어진 높은 산봉우리 위에 앉 아 있는 듯싶었다. 안개에 가려 허리가 끊어진 산봉우리는 지상의 것이 아 니요 이미 공중의 것인 듯 멀고 멀었다. 우관이 최치수에게 흉금을 털어놓 고 한 사나이의 구명을 애걸한다 하여도 그가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치수 역시 암자로 달려가서 진상을 실토하라고 우관에게 다그치고 으름장을 놓는다 하더라도 그의 입에서 아무런 해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생모인 윤씨부인을 심판하는 것이 얼마 나 무모한 일인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비밀이 확실한 목소리가 되어 제 귀에 들어오고 마는 날 치수는 자신이 취할 행위가 어떻게 무너질 것이며 생각을 어떻게 모을 것이며, 그것은 혼란이요 제 자신의 목을 누르고 마는 짓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짓, 죄악의 씨라면 어떠냐? 내 계집을 채간 간부만으로 죄목은 충분하거늘, 그놈의 핏줄을 밝혀 어찌겠다는 게지? 핏줄, 핏줄? 핏줄이라 고? 무슨 핏줄! 누구의 핏줄!' 절방에 드러누워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최치수는 신음하다 뇌까리곤 했다. '덮어두자. 덮어두는 게야... 음, 음? 그래 덮어두어야 한다고? 무엇을? 어 떤 사실을?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도대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 이냐.' 하나의 사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였음에도 이미 최치수에게는 엄연한 사실로서 굳어버린 것이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자신의 추리를 확정지을 만한 일을 밝혀내지 못하였으 나 여전히 하나의 사실로서 굳어버린 일이었다. 그는 그것이 추리였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목마른 나그네가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는 이상으로 추리가 빚은 형태는 치수에게 있어 명명백백한 일이었다. 그러나 치수는 공상가는 아니다. 망상하는 것은 더윽더 아니었다. 그는 추리의 세 계에서 갈 수 있는 한의 가장 좁은 길을 헤치고 들어가보았으며 추리에 동 원된 지나간 일의 기억은 운명적이랄 수밖에 없을 만큼 선명하였었다. 땀 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미친 듯이 칼춤을 추던 월선네는 칼을 내동댕이치 고 할머니 앞으로 달려가서 무릎을 꿇었다. '마님... 아씬 절로 가시야겄십 니다. 영신의 심이 부족하와 원귀들이 떠날라 카지 않십니다.' '절로?' 할머니는 뇌었다. '예. 절로 피신하여 이 해를 넘기야겄십니다. 종적도 없이 절에 가시서 이 해를 넘기야겄십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이마빼기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새파랗게 질린 바우의 얼굴, 눈물을 찍어내던 바우의 아낙. '이눔으 기집애! 죽여버릴 테다.' 발길질을 하고 머리끄덩이를 잡아끌었을 때 월선이는 울었다. 울음 소리 도 크게 못 내고 울었다. '도련님, 잘못했십니다. 도련님, 잘못했십니다.' 월선어미는 우는 딸을 내버려두고 따라오면서 빌었다. '네가 우리 어머님을 절에 가시게 쫓았지!' '예, 예, 쇤네가 잘못했십니다. 잘못했십니다. 잘못했십니다. 영신을 속있이 니 벌을 받을 깁 니다.' 아아 그러니까 몸져눕게 되고 의원이 오게 된 그날 이전에 벌써 어머니는 이상했었다. 백일기도를 드리고 절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왜 자기를 피헸으 며 만나려 하시지 않았던가. 글공부를 하다가 등잔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 을 때 바우와 문의원은 쑤군쑤군 얘기를 나누었으며 바우는 왜 울었을까. 가마를 타고 돌아온 어머니의 백랍 같았던 모습, 험악했던 눈초리, 하늘을 우러러보는 얼굴에 소름이 돋아나고 울음 터질 것 같았던 몸짓, 그 몸짓을 담벽에 붙어 서서 숨어 보았다. 그러한 날들의 기억은 주술처럼 비밀스러 운 것이었으며 그러니만큼 색채는 강렬하였다. 집념 깊게 그 기억들을 조 각보처럼 모아보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형태도 이루질 못하 였다. 집념이 강해지면 질수록 있음직한 사건은 바닥 모를 한정 없는 심연 속으로 형태를 감추어서 수수께끼는 영구히 풀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동 학란이 일어난 그해, 그러니까 오 년 전의 일이었다. 성난 동학의 군사가 마을에 들이닥쳤고 최참판댁 행랑에도 그들 군사들이 진을 쳤다. 어떤 사 태가 야기될지 모르는 삼엄하고 피비린내 나는 그날 최참판댁 문중의 유일 한 남자이며 당주인 최치수는 독기 어린 눈을 부릅뜨고 사랑에 대기하고 있었다. 협상이 아니면 살육과 약탈이 있으리라는 것을 각오하고, 그러나 시간이 경과해가는데 그네들 쪽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오히려 조심 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밤이 되었을 때 치수는 자신의 처사가 어리석었 다는 것을 알면서, 그러나 겁쟁이지만 충직한 김서방을 별당 담벽에 세워 놓았고 자신도 뜰에 나와 안채에다 전신경을 쏟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모두들 잠들었을 성싶었는데 안채 쪽에서 희미한 인적지가 들려왔다. 처음 에는 계집종이 어머니의 시중을 드나보다 생각했으나 그래도 미심쩍어 치 수는 발소리를 죽이며 사랑의문을 넘었다. 윤씨부인이 거처하는 안방의 불 빛이 보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치수는 전신의 피가 역루하 는 것을 느꼈다. '무례 막심한!' 마루로 뛰어오르려다가 치수는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가만히 있자.' 어머니의 음성은 통 들러요지 않았다. 그러자 방문이 열렸으며 방안의 불 빛을 등진 사나이가 나왔다. 방금 불빛을 보고 나온 사나이 눈에는 처마밑 기둥에 멈을 바싹 붙이고 서 있는 치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는 곧은 자세로, 어떤 범치 못할 자세로 성큼성큼 걸어서 중문 밖으로 사 라졌다. 치수는 그가 행랑에 진을 친 동학 무리의 우두머리임을 직감했다. 그 순간까지 최치수는 모친의 순결에 관한 일을 연상하지 못했다. 이미 오 십 고개에 들어선 연령이 상상의 가능을 막았던 것이다. 감히 상놈의 신분 으로-이때 치수는 동학군을 백정들과 같은 타기할 무리로 혐오하고 멸시했 었다-내실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만으로 격노했었다. 그리고 사나이가 중문에서 사라졌을 때 그가 우두머리일 거라는 직감과 함께 어떤 협상이 어머니하고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비어 있는 것처럼 안방은 이상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등잔불이 흔들리는 데 따라 장지의 엷 은 명암만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안방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쥐죽은 듯하였 다. 난장판을 벌일 줄 알았던 행랑의 무리들도 행군에 지쳤음인지 기침 소 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으며 달이 없는 하늘에 빛 잃은 별들이 껌벅이고 있 었다. 동학군이 쫙 깔렸을 마을도 조용했다. 개 짖는 소리만 아따금 흉스럽 기 밤공기를 흔들곤 했었다. 치수의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추억에는 이날 밤의 일이 또하나의 수수께 끼로 보태어졌다. 그리고 그 일은 불쾌하고 어떤 둔중한 아픔 없이 생각할 수 없었다. 있음직한 사건, 여전히 그 형태는 깊이 모를 심연 속에서 나타 나지 않은 채, 어느 날이었다. 그 난이 지나간 뒤, 그러니까 칠월이었던가, 몹시 무더운 날이었었다. 강가에서는 바람 한점 불어오지 않았고 시원하다 고 하는 초당의 문을 활짝활짝 열어젖혔어도 치수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 다. 이때 능소화의 줄기가 얽혀 있는 돌층계를 밟으며 이동진이 찾아왔다. 하인도 나귀도 없이 나룻배 편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번 난리에 숙부와 재 종형이 변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으므로 치수는 긴장하며 이동진 을 대하였다. 몰골은 몹시 초췌해 보였으나 그의 의기가 줄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자네 심려가 밚았겠네." "흠." 이동진은 쓰디쓴 웃음을 흘리며 부채를 펴들었다. "웃으니 세월은 편하겠다만." "싸지, 싸." 내뱉는다. "뭐라고 했나?" "싸다고 했네." "잘되었다 그 말인가?" "잘되었다 할 수는 없지만 인과응보 아닌가." "허, 자네도 동학당이구먼." "에키 이 사람, 여하튼 망신일세." " " "포악한 동학놈들보다 더럽게 죽은 양반들이 더 밉더군. 개중에는 제법 뱃심 있는 사람이 있긴 있었던가. 정참봉 부자가," "역시 변을 당했는데 송림에서 정참봉이 말하기를 죽음에는 노유가 있는 법, 아비의 목을 먼저 쳐야 하지 않겠는냐, 유유히 목을 내밀었다는 게야. 창피스런 애기지 만... 우리 문중의 그 양반들, 파리손을 비볐다니 원." "자네는 그래 하늘에 부끄럽지 않아 사대육부가 멀쩡했었다 그 말인가." 치수는 비꼬았다. "장담은 못하지. 부끄러운 짓 할 자리에 있지 않았으니." "앙급자손이라 했네." 동학당을 두둔하는 것 같은 기미가 치수의 비위를 거슬렸던 것이다. "할 수 없지. 당해야만 한다면 당할 수 밖에. 허나 죽음만은 더럽게 치르 고 싶지 않으이." "그것도 장담 못하네." "앙급자손이란 말은 나보다 자네 형편을 두고 할 법한 말인데 이곳만은 무사태평했던 모양이니, 자네 어머님 신심 덕분인가?" 치수는 불쾌하게 낯을 찡그렸고 이동진은 평소에 볼 수 없는, 신경질의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그럴 법한 얘기군 그래. 자네 김개주란 자가 누군지 아아?" 치수의 눈길이 날카로워진다. "연곡사의 중 우관의 친동생이야." "뭐라구!" "문의원이 그자와 가깝다 하여 관에서 벼르고 있는 모양이나 그 늙은이 흠잡을 곳이 있어 야지. 자넨 그지기 누군지 몰랐었나?" "금시초문일세." "결국 연곡사 중에서 우관하고 문의원의 여덕을 본 셈이군. 놈이 읍내에 서는 여간 포악하 질 않았거든." 치수의 낯빛은 완연히 변해 있었다. "똑똑하고 인물도 헌칠했던 모양인데 소문에 의하면 그자가 달고 다니는 아들놈이 관옥과 같은 인물이라는 게야. 어디서 떨어졌는지 홀아비 손으로 길렀다는데." 이동진이 무심하게 하는 말이 치수 귀에 모깃소리만큼 앵앵거리는가 하면 천둥치는 것같이 크게 울려오곤 한다. 무엇 때문에 혼란이 이는지 그 순간 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치수가 서울로 올라가서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그 일이 있은 후이었다. 미색인가 하면 연분홍 빛깔로도 보이는 능소화가 한창 피어 있는 유월, 담장 밖이었다. 비가 걷힌 돌담장은 이끼 빛깔로 파아랗게 보이었다. 담장 을 기대고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능소화, 치수는 초당에서 내려오다가 구 천이를 보았다. 그는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치수가 가까이까지 갔을 때도 인적기를 모르는 듯 능호화 옆에 서 있었다. 아주 바싹 가까이 갔을 적에 느릿한 시선을 치수에게 돌리었다. 그럴 때마다 치수는 가슴이 떨리었다. "너 절에서 자랐느냐?" 치수는 나직이 물었다. 비로소 그는 치수의 얼굴을 깨달은 것 같았다. "예?" "어릴 적에 절에서 자랐지?" 구천이의 입술이 하얗게 변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얀 입술이 움직였던 것이다. "아비가 있느냐?" 이번에는 고래를 흔들었다. 대신 그의 눈알은 뚜렷하게 치수를 응시했다. 하인의 눈빛이 아니었으며 하인의 몸짓도 아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군. 누굴 닮았을꼬...?" 치수는 육박해 들어가듯 했다. 순간 구천의 눈은 사나운 짐승의 눈으로 변했다. 이빨만 드러낸다면 그는 여지없는 이리였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못하였다. 강하고 두꺼운 장막이 얼굴에 내리덮이면서 그는 완전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구천이 별당아씨와 달아난 후 치수는 사람을 시켜 좇으려면 좇을 수도 있 었다. 왜 좇지 않았는지, 치수는 그러한 자신을 이해하지못했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소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증오, 보 복, 그 어느것도 아니면서 사실을 구명하고자 하였고 또 구명하고자 하는 강렬한 옥망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치수는 절방에서 온종일 비몽사몽의 상태로 보내다가 야심하여 절간이 죽 음에 달한 것처럼 인적이 끊이면은 박쥐같이 절문 밖으로 빠져나가 절 밑 의 마을을 헤매었다. 새벽녘, 인경 소리가 울릴적에, 영혼의 깊이까지 스며 들어 찬미하는 노래 같기도 하고 지옥의 죄 많은 망자들이 울음 우는 소리 같기도 한 인경이 산과 수목과 새벽이 걷혀가는 하늘에 울려퍼질 때 방이 슬에 흠씬 젖어서 치수는 돌아오곤 했다. 사흘 밤을 지낸 뒤 끝내 우간과의 대면을 회피한 최치수는 수동에게 떠날 채비를 차리라고 일렀다. 떠날 때 비로소 치수는 우관을 찾아 하직인사를 했다. 우관은 묵묵히 일행을 따라 절문 밖까지 나왔다. 석장에 몸을 기댄 그는 떠나는 치수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법당 쪽에서 목탁 소리 독경 소리가 한가롭게 울려퍼진다. 16장 목기막에서 여남은 채의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기슭 마을에 나귀와 긴요치 않 은 물품, 필요할 때 가져다 쓸 요량으로 일부분의 식량, 화약 따위를 맡겨 놓고 산으로 들어간 일행은 화전민의 산막에서 하룻밤을 보내었다. 이튿날 다시 길을 떠나 일행은 깊은 곳을 헤치고 들어섰다. 치수는 서울서 구해온 엽총을 들었고 탄약대를 둘렀으며 강포수는 총과 탄약대 이외 불치주 머니를 옆구리에 차고 걷느다. 수동이는 화약고 산탄을 따로따로 넣은 마 포대와 식량 꾸러미를 짊어지고 뒤를 따랐다. 아름드리 산목련나무와 우묵 하게 철쭉으로 가려졌던 계곡을 지나 일행은 관목 지대를 계속 헤치고 간 다. 원시림인 데다 산죽이 밀생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곡사근방이었다. 나무숲을 거스르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다시 나타난 계곡의 물 떨어지는 소리, 앞장서 가는 강포수는 이따금 뒤따르는 사람에게 주의를 주곤 했는 데 고함을 치듯 하는 그의 목소리는 금방 산소리에 지워지고 만다. 얼마나 오랜 세울 나뭇잎은 쌓이고 쌓였던 것일까. 몸무게가 둥 뜨는 것 같은 부 엽토의 더미, 인적에 다져지질 못한 부엽토에 푹석푹석 발목이 묻히는데 모래밭과 달리 발바닥에 저항은 없다. 계곡에서, 바위마다 두껍게 늘어붙은 이끼에서, 썩은 나무 밑둥, 푸르름이 서로 반영되어 소나기 퍼붓는 곳에 번 개치는 순간의 밝음과도 같이 더러는 움직이고 더러는 정지한 나뭇잎, 발 밑에서 스치는 산죽에서, 사방에서 습한 기운이 기류를 타고 묻어오며 움 직인다. 날짐승은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여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앉으며 인 간들이 가까이 왔음을 경고하는 것인지 날카롭게 우짖는다. 작은 동물들은 덤불 속으로, 혹은 석벽 쪽으로 피해서 달아난다. 다시 계곡이 멀어지면서 물소리도 멀어져갔다. 강포수는 역시 사냥꾼이었다. 골수에서부터 사냥꾼이었다. 귀녀로 인하여 미망에 빠져 헤어날 것 같지 않았던 그가 마치 건드리면 흩어지는 수은이 다음 순간 다시 모여들어 본시대로 한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지러운 사념은 사냥꾼의 목적 의식에 집중되었으며 감미롭고 쓰라린 귀 녀의 환상은 어느덧 무산되고 말았다. 그의 온갖 지각은 짐승의 발자국, 짐 승의 냄새, 짐승이 비비적거려놓고 떠난 낙엽더미의 흔적에 쏠리었다. 노련 한 사냥꾼 강포수는 여느 때와 달리 다소 흥분된 상태였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심하게 튕기면서 어깨에 통증을 느끼곤 했던 화승총으로도 선불 맞 힌 일이 없는 명포수인 그가, 하기는 사정거리가 짧고 발사 속도가 형편없 이 느렸으므로 맹수인 경우 한 방에 급소를 뚫지 않는다면 포수 자신의 목 숨을 내놔야 할 경우가 있는 만큼 격 솜씨의 정확함이 포수의 첫째 자격이 긴 했었다. 하여튼 화승총으로 숱한 맹수를 사냥했던 강포수는 지금 마을 에 맡겨둔 짐짝 속에 화승총은 처박아두고 신식총을 들고 있었으니 흥분할 만도 했다. 그 동안 최치수와 함께 당산에서 사격 연습을 계속했기 때문에 총의 성능을 알고 손에 익기도 했으나 아직 엽총은 짐승의 피를 보지 못했 다. 석벽 근처를 지나올 때 치수는 고라니새끼 한 마리를 보고 시험삼아 쏘려 고 했었다. "그러지 마시이소!" 강포수의 어세가 강하여 치수는 힐끔 쳐다보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까짓 거, 고라니새끼 머하실라꼬 그랍니까." "..." "한 마리를 잡아도 듬직한 놈을 잡아야제요. 초지닉에 나온 호랭이는 고 분 각시나 처자나 하고 새북 호랭으는 쥐나 개나 한다 안캅니까. 아즉 우 리 사냥은 초지닉이니께요." 보일듯말 듯 웃음기를 머금으며 치수는 엽총을 거수었다. "총은 함부로 쏘는 기이 아입니다. 총 한 방을 쏠라 카믄 목심하고 바꾼 다 생각해야 하니께요. 짐승도 그렇심다. 살 만큼 살아야, 새끼를 직이는 거는 산신이 노하니께요." 제법 타이르는 투다. 산 밑에서는 최치수 위엄에 눌리어 말을 더듬거나 망상에 빠져서 묻는 말에 대답도 못하던 강포수가 산에 들어서면서 단연 달라진 것이다. 언동에 두려움이 없어졌다. '저, 저 뉘 앞이라고?' 두려움 없이 말하는 강포수가 수동에게는 괘씸했다. 그러나 짐승도 살 만 큼 살아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으며 우둔하고 버르장머리없는 그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낀다. 최치수  아무말 없이, 그러나 다음 수풀 속을 지나 가는고라니를 새끼도 아니었건만 쏘지않았다. 강포수는 앞장서 가면서 제 말을 들어주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지껄였다. 벌써 이태 동안이나 눈독을 들여온 곰에 관한 얘기였다. 별 소득 없이 해가 저물었다. 치수는 종시 무덤덤했다. 일행이 화전민의 집을 찾아가기에 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므로 강포수 제안에 따라 비어 잇는 목기막에 들 었다. 수동이 지어낸 저녁을 끝내자 별수없이 세 사람은 마주보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다. 강포수는 새삼스럽게 주눅이 들었는지 써보지도 못한 엽총을 꺼내어 공연히 총신을 닦아보고 들여다보곤 한다. 곤솔불 아래 텁석부리 강포수의 얼굴은 붉게 번들거렸다. 치수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짐꾸러미에 몸을 기대듯 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피로한 빛이 역력했으나 그것도 잊은 듯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수동이는 두 무릎을 모으고 단정하게 앉 아서 상전의 멀아 떨아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포수." 눈을 감은 채 치수가 불렀다. "예." "산속에 화전민이 얼마나 있는고?" "그러매요. 세세히야 우찌 소인이 알겄십니까." '산속의 일이라면 개미 기어가는 것도 알 거라고 김평산이 말하드데 어째 모르는고?" 산속의 냉기 탓인지 치숭의 입술 빛은 짙게 보였다. "노상 산에서 싸돌아댕기니께 빈말은 아닐 깁니다마는," "..." '하지마는 짐승이라믄 몰라도 사람으 일이사 눈여겨보지 않으니 께요." "..." "그라고 본시부텀 화전민이란 한곳에다가 자리를 박고 살지 않으니께요." "왜 자리를 박고 살지들 않나." "소인겉이 뜨내기 신세라서 그런개비요." 강포수의 눈은 잠시 관솔불에 가서 머문다. "불질러가지고 게우 한두 해, 좁쌀 강냉이 심어묵고 나믄 땅이 갈아서 못 해묵으니께, 그러니께 다른 자리를 찾아서." "그것는 알고 있네." 수동이는 두 무릎을 모으고 앉은 채 졸음이 오는 것을 떠밀어내려고 애를 쓴다. "땅도 땅이지마는 세상에 나가서 살 형편도 못 되는 사람들이니께 자연 남으 눈을 피해서 자리를 옯기기도 하나배요." "어떤 사람들이기?" "믑쓸 병이 들었거나, 아 이 산속에는 문둥이가 참 많을 깁니다. 그러니께 차라리 비어 있는 산막이 안심스럽고, 그라고 또 죄 지은 사람이 숨어 안 살겄십니까." "무슨 죄를 졌기?" 치수의 눈시울이 희미하게 움직인다. "여러 가지가 안 있겄십니까. 빚에 몰리서 관가 송사 난 사람도 있일 기 고 역적질한 가솔들도 있을 기고요, 족보에서 활적돼서 올데갈데 없는 양 반댁 자식들, 그라고 또오 동학당도 적잖이 숨어 있을 깁니다." "그렇겠지." "옛적에는 서학패들도 많이 숨어 있었다 카는데, 그렇거나 저렇거나 햇볕 바르게 못 사는 사람들 아니겄십니까. 도망친 노비들도 있일 기고 남으 계 집 업고 와서 사는 놈도 있일 기고요. 세상에는 별의별 죄인이 다 있이니 께, 첩첩산중 여기사 아무래도 법은 멀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수동이 눈을 떴다.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속에 강포 수의 나중 말이 귀에 흘러 들어왔던 것이다. 수동이는 강포수를 한 번 노 려본 다음 겁먹은 눈이 되어 치수의 기색을 훔쳐본다. 치수는 모호하게 웃 고 있었다. 옆모습, 날카로운 콧날에 관솔불빛이 미끄러진다. 치수는 나직 하게 불렀다. "강포수." "예." 대답을 하면서 강포수는 뒤늦게 아뿔싸! 하고 제 한 말의 실수를깨닫는다. 그도 수동이처럼 겁먹은 눈이 된다. 세상일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고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드물었으며, 설사 남의 말을 귓속에 바싹 디밀 어준다 하여도 한 귀로 흘려버리는 강포수였으나 최참판댁에서 일어난 사 건은, 얼마 동안 그댁 지붕 밑에 있었던 만큼 뒤늦게나마 기억이 살아났던 것이다. "다음부터 되도록이면 빈 막에서 잠자리 펴는 일이 없도록 해주게." "예, 예." 덮어놓고 대답하다가 "그렇지마는 짐승을 쫓다 보믄 자연히 그럴 수도," "서둘 것 없네. 짐승 잡아 장에 갈 것도 아니고... 수동아." "예." "나무를 넣어라." "예." 수동이는 불씨만 남은 모닥불 위에 마른 솔가지를 분질러놓고 꺼지려는 불을 살린다. 불 길이 솟으면서 관솔불은 희미하게 약해지고 거무죽죽했던 목기막 안이 훤 해졌다. "강포수." "예." "자네 호랑일 잡은 일이 있는가?" "하모요, 잡고말고요." "그래 몇 마리나?" "두어마리 잡았심다." "음, 옛적에 우리 대숲에서 포수가 호랑이를 잡은 일이 있었다더군." "대숲에서?" "음... 들은 얘기니 사실이 그러했던지... 노루를 쫓아서 내려왔던 모양이 야." 치수는 벌써 옛날에 죽은 늙은 종한테서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혼자 싱긋이 웃는다. 노루, 비극적인 사건에 저촉된 이야기였었는데 치수는 웃는 것이다. 그는 얼굴을 모르는 부친에 관한 사건에 대하여 실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사를 끝낸 뒤 노루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벌을 받아서 부친이 죽 었다는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대개 호랑이에 관한 대목 만은 빠뜨리고 전해져 내려왔으나, 치수는 어릴 적에,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늙은 종이 하던 말을 생각해낼 때마다 묘하게 웃음이 나는 것이었다. 개 두 마리가 미친듯이 울부짖던 날 밤, 사실은 노루를 쫓아서 호랑이가 대숲에 남아 있었던지, 이름난 포수를 초빙해서 호랑이를 잡았다는 것이다. 늙은 종의 얘기로는 총소리가 나고도 대숲에서 아무 소리가 없기에 엉금엉 금 기다시피하여 가보았더니 포수는 허공을 행해 노 젓는 시늉으로 총 대를 들고 허위적거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저만큼 덕채만한 호랑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고. '너무 놀래서 포수가 그만 정신이 나간 기라요. 사램이 가도 그냥 총대로 노를 젓고 안있겄십니까?' 늙은 종의 말이었다. "호랑이 사냥을 할려면 담력이 세야 할 거로?" "그렇십니다. 여간한 담력이 아니믄 호랭이 불덩이 겉은 눈만 봐 도 기절을 하니께요." "나는 아예 호랑이 사냥할 생각은 없으니, 강포수." "예." "자네는 언제든지 해 떨어지기 전에 화전민 집에 당도할 수 있도록 길을 잡아주게." "예." 하다가 "그라믄, 정히 잠자리가 편찮으시믄 소인이 자주 묵은 산막에다가 얘기해 서... 그라자믄 아무래도 멀리는 갈 수 없을 깁니다. 사냥이란 짐승을 보았 다 싶으믄 며칠이고 몇 밤이고 뒤따라가야 하는 법인데." "누가 그걸 모르나?" 어세가 강했고 엷은 입술이 파들파들 떨었다. "한 집에다 숙소를 정해놓고 그 변두리만 돌자고 누가 말했나!" "..." "사냥은 둘째고." "..." "사람을 찾는 게야!" "예, 그, 그라믄 그리 알아서 요량하겄십니다." 우둔한 강포수는 전혀 짐작을 못하고 치수 기상에 눌려 얼떨떨하여 대꾸 했다. 수동이는 저도 모르게 모닥불을 마구 헤집는다. 불티가 날리는 바람 에 멈칫하느데 치수의 눈길을 느낀다. 그러나 치수는 수동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우연... 우연을 기다리고 있는 겔까. 산막에서 우연히 그놈을 만나기를 기 다리고 있다...' 눈이 강포수에게로 옮겨진다. '흐흐흐...' 속으로 웃다가 "허허허..." 웃음이 밖으로 나왔다. 강포수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치수를 분다. "그, 그렇게 하겄십니다. 사람을 찾을라 카믄." 하다가 강포수는 엽총을 구석지에 세우고 이번에는 멍하니 치수를 바라본 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일도 없이 돌아가고 싶은 게지. 그러고 명년으로 미 룰 게야. 게으른 종놈같이 늑장을 부리면서... 흐흐흐...' 치수는 자기 권위에 대한 손상을 용서치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끝장을 보아야 했던 것이다. 방법이라면 다른 쉬운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사방에 풀어서 남녀를 잡아올 수도 있을 것이며 미리 손을 써서 행방을 안 뒤 떠나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치수는 막연하게 기약도 없이 산속을 헤매려 왔던가. 분노하고, 추상같이 마을이 떠들썩하게, 그게 싫었 던 것일까. 자기 혼자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자기 혼자서 손상된 권위를 찾았다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절대적인 권위 의식, 그러나 전부를 투신할 정열을 잃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우관 선사에게 사실을 규명치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은 결정적인 포기를 두려 워했기 때문이다. 끝장을 내기 전에는 그 문제는 괴로운 숙제다. 끝장을 낸 다는 것은 의무이기도 했었다. 싸움터에서 등을 돌릴 수 없는 것과마찬가 지로 나라를 사랑하는 정열도 없으면서 적병을 향해 치달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관념, 굳어져버린 관념이란 고질, 거의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된 윤 씨부인과 구천이, 우관선사와 김개주, 문의원과 월선네와 바우와 그의 아낙 을 엮어서 형태가 만들어진 있을 법한 사실, 그 사실로 인하여 지금 추적 하고 있는 구천이를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게 될지 그것은 치수 자도 알 수없는 자신의 감정이었다. 확증을 회피하고 연곡사를 떠나왔으나 확 증을 얻음으로써 구천에 대한 응징이 보다 가혹해질는지 응징을포기하게될 는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동이는 부대를 들고 목기막 밖으로 나왔다. 쇙하니 부딪쳐오는 차가운 산기운에 수동이 는 으스스 떤다. 지대가 높아서 그럴테지만 하늘의 별은 무척 가까운 곳서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이고 있다기보다 수동이처럼 오시시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 석벽 쪽에서 짐승이 운다. 혹 사나운 짐승에게 쫓겨온 산양의 울음이나 아닌지. 수동이는 구천이의 울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랑잎을 쓸어모아 부대에 쑤셔넣는다. '하필 나를 와 데리고 오싰으꼬? 구천이 그눔 아 죽은 거를 우예보노! 하나님 맙소사!' 부대에 가득 가랑잎을 채워놓고 난 뒤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다가 수동이는 목기막으로 돌아왔다. 치수는 아까 그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강포수는 이제 마음놓고 수를 멍하 니 바라보고 있었다. '휘안한 사람을 다 보겄다. 미치지도 않앗는데 와 헛웃음을 자꾸웃는 까?' "저리 비키소!" 수동이는 강포수를 떠밀어내고 가랑잎을 깔아 치수의 잠 자리를 마련한다. 목기막의 일꾼이 쓰다가 팽개치고 떠난 듯한 곳에 굴러 있는 목침을 들어다 가랑잎 자리에 옮겨놓고 자랑스럽게 목침 위를 가랑잎 으로 덮는다. 치수는 자리에 눕고 강포수는 짐짝에 기대듯 하더니 이내 잠 이 든 모양으로 숨소리가 거칠게 터져나왔다. 얼마 후 치수도 고른 길을 뿜는다. 잠이 든 것이다. 수동이는 관솔불을 거 뒤 땅바닥에서 뭉게뭉게 타 고 있는 모닥불 속에 집어던진다. 불꽃이 확 일다가 차츰 사그라진다. 모닥 불 옆에 웅크리고 앉은 수동이는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염치없이 달겨들던 잠은 다 달아나고 머릿속은 냉수를 끼얹은 듯이 맑아오는 것이었다. 밖에 서는 여전히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랑잎을 몰고 가는 람 소리도 쉴새없이 들려온다. '천지간이 죽은 듯이 적막하고나.' 별안간 수동이는 울음이 끼둑끼둑 치미 는 것을 느낀다. '참말이제 적막하고나.' 상전댁에서 짝지워준 분이가 돌림병에 죽은 지도 사오 년이 넘는다. '생가 하믄 서방님도 불쌍치. 여자 하나 들어서...' 그는 분이가 죽은 뒤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최참판댁 문저에 나타난 구천이를 동생같이 자식같이 사랑했다. 사랑했다기보다 상전을 대하듯이 숭배했던 것이다. '구천이는 남 다른 데가 있지. 우리네들하고 다르다 카이.' 그 생각은 상당히 뿌리 깊어 서 죄를 저지르고 달아난 후로도 변함이 없었다. 다만 용서할 수 없는 사 람은 별당아씨였던 것이다. 여자에 대한 생각은 가혹했다. '여자 하나 들어 서... 계집은 요물이라니. 어린 애기씨를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있는일가. 홀로 청상으로 늙으신 마님을 생각해서라도, 천하에 몹쓸 여자 아니가. 서 방님이 멀쩡히 기시는데... 꼬 리를 쳤으니께 구천이가 넘어갔지.' 여자 탓으로 구천이가 죽게 된다 생각 하니 더욱더 분개심을 느낀다. '천하에 몹쓸...' 밤이 깊어져서 바람은 가라앉는다. "바아우-- 바아우우--" 이튿날 치수는 강포수의 동의를 얻어 노루 한 마리를 잡았다. 강포수는노 루가 쓰러진 자 리에서 칼을 뽑아 노루의 염통을 찔렀다. 흐르는 선지피를 받아 세 사은 점심 요기를 대신한다. 노루를 수동이 짊어지고 가까운 화전민 막살이로 찾아들었을 때 해는 산 에 떨어지고 있었다. 마당가에서 강포수는 죽은 노루를 칼로 가르며 고기 포를 뜨고 수동이는 치수에게 세숫물을 떠다 바친다. 세수를 하고 일어선 치수는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큰 지네 한 마리가 발밑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수동이 쫓아와서 막대기 로 지네를 쳤다. 강포수는 본체만체 하던 일만 하고 있었다. 아무일도 아라 는 듯. "한 마리가 또 나올 깁니다." 화전민 아낙이 웃으며 말했다. "한 마리가 또 나와?" 치수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내외간이니께 한 마리를 찾아서 나올 깁니 다." 치수는 아낙을 흘낏 노려본다. "음양의 이치니께요." 강포수는 포를 뜨면서 거들었다. '빌어먹을, 우찌 저리 눈치코치도 없노.' 수동이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얼마 후 아닌게아니라 죽은 놈과 똑같은 크기의 지네가 나타났다. "저거 보이소. 쇤네 말이 맞지요." 아낙은 또 웃었다. 치수는 쓴 입맛을 다신다. 그는 지네를 몹시 싫어했다. 호랑이보다 아마 그는 지네를 더 무서워했을 것이다. 그날 밤 치수는 밤새도록 지네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 17장 바람인가? 그것은 동상이몽의 경우보다 더 각박한 행위였었다. 더러는 물방앗간서, 풀숲 혹은 바위 뒤켠에서, 그러나 보다 빈번히 삼신당을 이용하여 귀녀와 칠성이는 제각기 간절한 기대와 야망에 불타는, 육체적으로는 불모지와 다 름없는 관계를 계속하고 이었다. 제각기의 야망과 기대는 사람다운 애정을 거부함은 물론 정사에 따르게 마련인 얘욕조차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행 위는 오로지 목적을 위한 것, 목적을 향한 고행이었으며 본능을 초월한 것 이었다. 그것은 추악한,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그 점에서는 사나이보다 여 자 편이 더 강하고 철저하였다. 이같이 깊은 밤에 행해지는 비정의 밀회는 평산의 물샐틈없이 세밀한 시 에 따라 비밀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 아이를 배대하느냐 못하느냐, 어쩌면 그것은 신과의 위대한 도박인지 모른다. 아들을 낳는다면 세 사람은 다같 이 승리의 술잔을 들 것이요, 딸을 낳는다면 귀녀와 평산의 새로운 음모에 서 칠성이는 탈락될 것이다. 당산 숲,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삼신당은 언제 나 무겁게 밤을 지키고 있었으며 당 안에 모셔놓은 동자불 미륵은 미소를 머금으시고 이들, 열렬한 기자의 행워를 내려보신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속 삭임같이 삼신당 처마를 스쳐가고 나뭇잎과 나뭇잎의 몸을비비는 기척, 밤 꾀꼬리가 동쳐녀같이 울고 부엉이는 늙은 총각의 넋처럼 우는데 미륵불은 다만, 어느 공장이 녹이고 부어서 마음없이 빚어놓은 한갓 쇠붙이에 지나 지 않는단 말일까. 부처님은 노상 말씀이 없으시고 미소만 띠셨다. "이보 래? 구녀." 사나이 가슴에 짓눌린 귀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온달이가," "..." "안 그렇나?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안 온다믄 야단이제. 그새 아아를 배믄 아무래도 의심을 안 받겄나? 달수가 있인께. 그렇겄제?" 온달이란 평산이 작명한 최치수의 별칭이었다. "웬 걱정이오. 설마 추석 전엔 안 올까!" 앙칼진 목소리가 튕겨져나왔다. "그런 거를 주제넘다 하는 기요." 목청이 낮았으나 이번에는 난데 상관이 없다니." 사내는 강하게 압박해간다. 여자는 신음 같은웃음으로 저항했다. " 떡 줄 사람은 따로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아이가 생기서도 머할 긴데 없는 아아 애비가 어디 있노?" "그, 그거사 그렇다마는 생기는 거로 생각하고 있잉께 미리할 거정은 놔 야제." "욕심만 목구멍까지 차가지고." 한곳에서풀려난 남녀는 원수처럼 헤어진다. 귀녀가 먼저 산에서 내려다. 치마를 폭 뒤집어쓰고 내려가는 여자 뒷모습을 좇아가듯 부엉이 우는 울음 이 잇닿는다. 샘터로 내려간 칠성이가 무릎을 꿇으며 엎드려 샘물을 마시 고 일어섰을 때 파수병 노릇을 하던 평산이 바짓말기에 손을 찌르고 어슬 렁어슬렁 마을을 향해 내려가는 것이었다. "빌어묵을! 살쾡이 겉은 년. 흥, 씨가 제일이지 밭이 무신 소용고." 입가에 흐른 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칠 성이도 내려가버린 삼신당 지붕에 조각난 달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엿장수 마음대로?' 동자불은 그런 말씀을 뇌고 계실지 모른다. 최참판댁 봉순네 방에서는 함안댁과 임이네가 와서 봉순네를 거들어 느질 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보름이면 추석이다. 하인들 입성까지 손이 미치지 못하여 마을에서 손끝이 야물다는 함안댁과 임이네가 불려온 것이다. 지난 해 추석 전에도 이들이 와서 거들어 주었었다. 성질이 찬찬한 함안댁은 바 느질을 즐기며 했고 솜씨는 봉순네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김서방이나 귀녀 나 삼월의 옷 정도는 미끈하게 뽑아낼 줄 알았다. 임이네는 일손이빨라서 머슴 옷을 숭덩숭덩 마르고 지어내었으나 바느질은 거칠었다. "나는 아무 래도 선일이 낫더마요. 내리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나믄 궁둥이뼈가 아파 서." "그거 다 습관이네라." 함안댁은 바늘을 뽑아 옷섶에 꽂고 등잔의 심지를 돋우며 임이네 말에 대꾸했다. "김서방댁이, 아이고 무서리야, 재웁지도 않 는가배, 날 보고 그라지마는, 일이라도 하니께 세월 가는 줄 모르지." 봉순네는 자를 들고 품을 재며 말했다. 임이네는, "그거 다 팔잡니다. 낭 개서 따온 것 겉은 솜씨니께, 싫었으믄 솜씨가 늘었겠소." "젊었일 적에는 솜씨 자랑 하니라고 밤 가는 줄 모르고 했지마는 나이 들어갈수록 살아온 세상이 한스러바서... 그래도 일만 잡으믄 이생각 저생각 다 잊으니께 일이 보배지." "하기는 그렇겄소. 머니머니해도 혼자 사는 사램이 젤 섧다 카더 마요." "말해 머하노, 자식이 아프니 함께 걱정해줄 사램이 있나," "봉순이 아부지가 그리 자식 낳기를 기다맀다믄서요." "내 복이 없어 그렇 지. 인제 남겉이 살 긴갑다 생각든 것도 잠시였지. 꿈길 겉다." 함안댁은 임이네와 봉순네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봉순네는 담담하게 남의 말을 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내 가 열여섯에 시집을 갔는데, 가니께 신랑 나이가 열한 살이더마. 게다가 우 찌나간풀던지 여름이믄 또랑에서 미꾸라지 잡노라고 옷이 흙에 범벅이 되 고 겨울이믄얼음판에서 온종일 미끄럼을 타는 바람에 바지 밑바닥이 성할 날 없었고 날이믄 날마다연날리기, 연실에 손 비이기는 일쑤고 그래가지고 돌아오믄 이눔으 가씨나야! 니 때문에 손비었다 하믄서 머리끄뎅이를 잡아 끌고, 그래도 서방님이라고 말대꾸 한분 못하고 살았지. 런 세월을 살다보 니 어느덧 이녁은 다른 계집하고 눈이 맞아서 바람도 많이 피우고, 하기사 내 복에는 과한 인물이었잉께. 우리 봉순이가 지 아바이를 쑥빼썼지." "입 에 붙은 말이 아니라 봉순이가 크믄 중신애비 땜에 개가 목이 쉴 깁니다." "그러세, 그거사 다 커봐야 알겄지마는," "그래서 우찌 되었소." 말없이 일만 하는 것이 답답하였고 본시 말 좋아하는 성미여서 임이네는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랬는데 민란이 일어나가지고 이녁이 멋을 안다고 앞장을 섰던가배. 집 안이 수라장이 되고 이녁은 관가에서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기생 하나를 데리고 도망을 안 갔나." "이만저만한 바람쟁이 아니었는가배요. 붙들리믄 죽을 판에 무신 정에 계 집까지 끼고" "하기사 기생 쪽에서 한사코 따라갔다더라마는 그렁저렁 십 년 넘기 타관 에서 소식도 없이 떠돌아댕깄는데 무신 바램이 불었던고, 아무래도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봉순이 저거를 하나 떨어뜨릴라꼬 돌아왔던가. 집안이 수 라장이 되믄서 나는 할 수 없이 연피연피로 말해주는 사램이 있어서 이 댁 에 와 있었는데 떡, 찾아 안 왔겄나? 이녁 나이 서른을 넘었고 나도 서른 다섯이었지. 이 댁을 하직하고 이녁을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갓는데 본시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네라. 그라고 풍상을 겪어서 그랬든지 몰라도 우찌나 나를 위하고 다시는 고생 안 시키겄다 캄서," "말하기를, 올바람은 잡는다 캅디다." "이자는 나도 세상을 살 긴갑다 싶어서, 거기다가 난데없이 태기까지 안 있겄나." "그러니께 삼신이 끌어댕깄구마." "세상에 그 좋아하는 거라니... 보래 조심하라고, 내가 다 할 기니 임자는 가만 잇으라고, 함서 아아 떨어질까 봐 벌벌 떨더마. 밤이믄 넘어진다고밖에 나오지도 하 게 하고." "그만했이믄 원도 한도 다 풀었겄소. 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그런 호강 한분 해봤이믄." 임이네가 수선을 떠는데 함안댁은 여전히 말없이 일 감에 시침을 두고 있었다. "남들도 그랬지. 날 보고 복 터졌다고. 밤이 되 믄 싫다 카느데도 어디 배 한분 만지보자 얼매나 컸는가 함서, 하기사 이 녁도 삼십이 넘기 자식이 없잉께 좋기야 와 안 좋았겄노. 하도 그래싸아서 나도 걱정이 되더마. 딸을 놓으믄 우짤꼬 싶어서, 그래 딸이믄 우짤 기요했 더니 딸이믄 우떻고 아들이믄 우떻노 하더라만 그래도 걱정이 돼서 아들을 낳얄 긴데 하고 내가 아들 노래를 부르믄 이녁 말이, 나는 딸이라도 낳기만 하 믄 춤을 출란다." 봉순네는 임이네에게 들려준다기보다 엣날 추억 속으로 잠겨들어가고 있었다. "태기가 있고부텀은 우떡허든 살아볼라고 이녁도 고 생 많이 했지. 손에 안 익은 장사를 하노라고, 그러니까 아이가 여섯 달 됐 을 때, 이녁 말이 산월에는 집에 있어야 한다믄서 서둘러 서울로 장삿길을 떠났는데 그기 마지막 길이 될 줄 뉘 알았겄노. 도둑떼한테 걸리서 그만..." "그러기 세상사가 다 뜻대로 안 되나배요." 처음으로 함안댁이 입을 떼었 다. "다시 만내가지고 일 녕도 못 살았지. 상막 앞에서 곡을 하다가 우리 봉순이를 낳앗는데 낳기만 하믄 춤을 추겄다 카든 사람은 간곳이 없고 이 웃 할매가 삼줄을 끊어줌서, 그 할매도 울고 나도 울고, 남보다 바삐 갈라 꼬 그리 정을 주었든가, 사람으 가슴에다가 못을 박아놓고 무정하고 야속 한 남정네, 내가 발을 헛디디서 아아 지울까봐 신돌에 신발까지 갖다 주든 사람이... 첫국밥을 끓이주는 데 시상에 목에 넘어가야지. 참말이제 그때 핏 덩이만 없었다믄 함께 가겄더마. 강보에 싸인 봉순이를 안고 이 댁으로 돌 아왔을 때 눈물이 길을 막고... 그래도 사람 목숨 모진 기라. 세월이 간께 배 고프믄 밥 묵고 잠 오믄 잠자고 잊을 때도 있으니." "우짤 깁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제요." "그러기 우리 봉순이 치울 때까지 는 살아얄 긴데... 남들 겉으믄 버얼써 며느리 사위 보았일 거를, 어서어서 세월이 가고." 밤이 깊어져서 방마다 등잔불이 하나 둘 꺼질 무렵 일손들 을 놓은 함안댁과 임이네는 낡은 초롱으로 발밑을 비춰가며 언덕을 내려갔 다. 그들이 돌아간 뒤 봉순네는 방소리에 귀기울여가며 일손을 멈추지 않 고 옷 짓는 일을 계속한다. "바램인가?" 고개를 든다. "이상해라. 요새는 꼭 이맘때만 되믄." 옷섶에 바늘을 꽂고 초롱에 불을 옮겨 붙인 봉순네는 소리 나지 않게 분 을 열고 나간다. 뒤꼍으로 돌아갔을 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누고!" "..." "누고!" "누구긴," 가라앉은 귀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롱을 치켜든다. 귀녀의 얼굴이 드 러났다. 귀녀는 불빛을 받고 한두 번 눈을 깜박였다. "귀녀가?" "야. 도둑인 줄 알았소?" "밤마다 요맘때만 되믄 인적기가 있어서 오늘은 마음묵고 나와봤지." 귀녀의 얼굴은 탈바가지를 쓴 것처럼 움직이질 않앗 다. 움푹 패인 큰 눈이 봉순네를 쏘아본다. "잠이 와야지요." 탈바가지 같은 얼굴은 여전히, 입술만 움직였다. "와 잠이 안 오노. 다 큰 처니가 잠이 안 온다믄 그거 큰 병일세." "흥, 봉 순어매도 그라믄 병이라서 잠이 안 오요." 봉순네는 말문이 막혔다. "추석이 닥치오니께 우리 어매 생각도 나고, 물밥 한 그릇 못 얻어묵고떠 돌아댕길 혼백 생각한께 잠이 안 오누마요." 말은 그랬으나 그러나 귀녀의 얼굴은 여전히 탈바가지를 쓴 듯 딱딱하였고 괴이했다. 봉순네는 무섬증을 느낀다. "니도 그런 생각을 다 하나?" 초롱을 내려 귀녀의 얼굴을 지워버린다. "나는 사람으 자식 아니라 말이요?" "사람된 도리가 어렵지. 원망이 있어 서도 안 되네라, 순리대로 살아야,"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지 봉순네도 알 수 가 없었다. "무신 말을 그렇게 하요?" "그러매..." "내가 뉘한테 원망이 있단 말이요?" 되잡힌다. 한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니면서도 봉순네는 그럴 때마다 당고 마는데 "와 그런지 그런 생각이 드누마. 섬찟한 생각이 말이다. 남으 탓을 하믄 안 되니라. 타고난 제 신세를 남으 탓으로," 기분에 쫓겨서 역시 되잡힐 소리를 지껄인다. "기가 맥히서, 바람 쏘일라 꼬 좀 나왔기로, 그기이 우때서 그러요?" "우때서 그렇다는 기이 아니고 니를 보니께 자아는 원한을 품고 있다... 아, 아니다. 저 아이는 맘이 모질 다, 그런 생각이 드누만." 귀녀는 여느 때와 달리 시비를 더 이상 가리려 하지 않았다. 치맛자락을 날리듯이 거칠게 등을 돌리고 제 처소로 사라진 다. 봉순네도 초롱을 돌리며 오던 길을 되잡는다. 귀녀에게 하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밥 한 그릇 못 얻어먹고 떠돌아 다닐 혼백 생각을 한다는 그 말 때문에 봉순네는 그랬는지 모른다. 그 말이 임시변통 의 거짓이라는 것은 뻔했으니까 감동한 것은 물론 아니었고 다만 귀녀가 무서웠던 것이다. 초롱불을 받고 서 있던 귀년의 크고 움푹 패인 꺼무꺼무 한 눈동자가 무서웠다. 그 눈동자 속에 그칠 줄 모르는 집념이 미끄러운 뱀의 살갗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밤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이 가시나가 이불을 걷어차고, 감기들겄네." 방으로 돌아온 봉순네는 이 불자락을 끌어올려 주고 아이 얼굴을 우두커니 들여다본다. 방바닥이 뜨겁 고 화로를 들여놓아 아이의 얼굴은 앵도같이 붉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 빼기에 달라붙고 시큼한 땀 냄새가 풍겨온다. "그린 듯이 이삐구나. 내 자 식이지만 크믄 참말이제 문전의 개가 목이 쉬겄다." 빙긋이 웃는데 봉순이 는 덮어준 이불을 다시 걷어찬다. "저 아바이가 살았이믄 얼매나 귀히 여 기겄노. 금이야 옥이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볼라 칼 긴데 다 복이 없어서," 하다 만 일을 들고 봉순네는 옷섶의 바늘을 뽑는다. 당산에서 내려온 평산은 곧장 제 집으로 돌아갔다. 최참판댁의 바느질을 거들어주고 집에 돌아온 함안댁이 작은방 베틀 위에 올라앉다가 남편이 돌아온 기적을 고 동작을 멈추었다. 등잔불을 불어 끈다. 큰방으로 들어간 평산은 옷을 벗고 자리에 들었다. 얼마후 그는 곤하게 잠이 들었다. 황금더미에 올라앉은 꿈을 꾸면서 '누구 마음대로?' 평산의 꿈속에 미륵님이 나타나서 빈정거리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평의 오산도 딱하기 한량없으나 미륵께서도 적이 심술이 있으신 모양이다. 오색 무지개를 잡아보려고 힘겹게 언덕을 기어올라가는데 이 불운한 무리를 기 다리고 있는 것은 무서운 재앙이요 함정이라는 것을 한마디 귀띔도 없이 오히려 요만큼 더, 요만큼 좀더, 손짓을 하는 것이나 아닐는지. 차생의 일 은 불문에 부치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지옥의 심음은 볼만한 구경거리지 도 모르겠다. '나는 죄의 연대자가 아니로소이다.' '나는 하수인과는 하등의 연고가 없 소이다.' '다만 구경을 했을 뿐이외다.' 시원한 얼굴로 중얼거릴지 모를 일이다. 옛적에 천지만물을 다스리는하나 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보내시어 인간의 고초를 함께 겪게 하시었다 하고, 석가여래께서는 다음 미륵불이 오시어 중생을 건지시리라 예언하시 었는데 그때는 진금으로 땅을 깔 것이며 의식은 원하면 스스로 올 것이며 쾌락이 무량하고 남녀가 오백 세에 이르러 혼인을 하게 된다는 참으로 즐 거운 세상이, 그러나 오십 몇억 년을 기다리는 동안미륵불께서는 곧장 구 경만하실 모양이다. 그렇다면 한결같이 세상은 악역과 선역이 있어 늘 정 해진 대본대로 움직이는 무대이며 인간은 광대인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평산은 황금더미에 올라앉은 끔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체 누구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18장 초록은 동색 나무 사이에서 움직이는 옆모습으로 총구가 옮겨지는데 "구천아!" 수동이 외쳤다. 외침에 이어 총성이 산을 흔들었다. 몸뚱어리가 솟구치니, 몇 번인가 굴 렀다. 구르는 몸이 그 구르는 상태의 계속처럼 바위를 넘어 달아난다. "저 놈 잡아라!" 치수가 고함쳤다. 강포수가 뛴다. 수동이도 함께 뛰면서 강포 수의 허리춤을 잡는다. "강포수, 강포수, 강, 강포수." 허덕이며 뇐다. "사, 살리주소. 살리..." 강포수의 걸음이 한결 느리어진다. "뭣들 하느냐!" 훨씬 뒤떨어져서 뛰어오던 치수가 다시 고함쳤다. "구신 곡하겄십니더. 금 시 어디 갔일꼬요?" 바위를 넘어서서 엉거주춤하며 강포수가 말했다. 구천 이 어느 방향으로 달아낫는가 알고 있는 강포수는 풀숲을 헤치며 우회한 다. 귀신같이 산을 타는 구천이를 잡으려면 강포수가 서둘지 않으면 안 된 다. 설령 치수나 수동이난다 하더라도 결코 그네들은 산사람이 아닌것 이다. 한동안을 헤매다가 일행은 언덕 밑에 나직이 엎드린 초막 하나를 발 견했다. 방금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은 보였으나 이미 초막은 텅 비어 있었 으며 여자의 미투리 한 짝이 엎어진 채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구천이 별당아씨를 업고 달아났음이 분명하다. 치수는 텅 빈 초막을 향해 총질을 했다. "초록은 동색이군." 얼굴이 풀빛으로 변해서 후둘후둘 떨고 있는 수동이를 노려보며 최치는 씹어뱉았다. 구천이를 처음 만났던 자리에는 칡뿌리가 굴러 있었고 기운 무명자루에 머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산에 들어와서 보름 동안을 지냈을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최치수는 이틀 동안을 거의 쉬지 않고 강포수와 수 동이를 앞장세워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러나 구천이의 모습을 다시 찾 질 못했다. '소내기다.' 잠결에 수동이는 소나기 소리를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계곡을 흐르는 소 리임을 알았다. 항상 잠결에 듣는 물소리는 소나기로 잘못 알곤 한다. 산막 안에는 희뿌연 아침이 스며들었다. 치수는 모로 누운 채 죽은 듯 고요했고 강포수는 구지레한 수염 속의 입을 벌리고 누워 있었다. 들쭉날쭉한 이빨 사이로 소란스런 숨결을 뿜어내며 입맛을 다시곤 했다. '하루 해가 또 밝아 오는고나.' 일어난 수동은 옷에 붙은 가랑잎을 떨고 어젯밤 불 피운 자리, 나무토막이 본래 모양대로 재가 되어 있는 자리에 가랑잎을 한줌 올려놓고 비싯돌을 비벼 불을 지핀다. 다시 토막나무를 올려놓고 불이 옮겨 붙는 것 을 지켜본다. 산막 안에 차츰 온기가 퍼져나간다. 지치는 일 없이 일각일각 굴러내리는 물소리, 소리에 소리가 이어져 끊임이 없다. 소로 하여 더욱 적 막한 산중의 아침을, 아침안개를 헤치며 수동이는 산막 밖으로 나갔다. 살 갗을 에는 것같이 찬기운이 목덜미에 와닿는다. 노루와 달리 혼자 다니는 경우가 별로 없는 고라니가 이번에도 두 마리 숲 사이로 숨어서 지나간다. 수동이는 우묵하게 덮은 철쭉가지를 휘어잡으며 이끼 낀 바위를 밟고 큰 개울에서 갈라져나온 작은 개울가로 내려간다. 잡목을 감아올라간 머루덩 굴이 거무죽죽하게 이슬에 젖어 잇엇다. 서릿빛을 띤 철쭉의 뒷잎에도 이 슬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누릿누릿하게 단풍이 든 잎새들이 한결 눈에 띈다. 해뜨기 전의 산 빛깔은 선명하고 푸르름이 짙었다. 개울을 내려다보 고 있던 수동이 고개를 들고 동편 산봉우리를 바라본다. 겹겹이 이어진 산봉우리 위에 얼음살같이 갈라져서 쭉쭉 뻗는 구름이 연분홍빛을 띠더니 그것이 시시각각 짙어지면서 봉우리마다 조금씩 다른 색조를 드리운다. 한결 짙어진 구름은 진홍으로, 하늘은 온통 불바다로 변해간다. 장엄하고 화려한 해돋이의 의식이 시작되려는 이 다. 그러나 수동이는 그 장엄하고 눈이 부신 해동이 광경에 넋을 잃고 있 었던 것은 아니다. '모레, 낼모레가 추석 명절인데 서방님은 가실 생각이나 하시는지 모르겄다. 제주 없는 제사는 우찌 모실 기며 성묘는 또,' 아무래 도 최치수는 추석을 산속에서 쇨 것만 같았다. '답답해서 답답해서 못 살겄 다. 차라리 내 심구멍이 그만 콱 맥히 부맀이믄.' 소나무를 꾸불꾸불 휘감 고 올라간 머루덩굴을 쳐다본다. 바싹 죄어가며 제 부피를 늘이고 있는 머 루덩굴, 늙은 짐승의 겉가죽 같기도 했고. 강하게 강하게 감고 올라간 덩굴 은 뱀같이 징그럽기도 했다. '서방님은 우찌 나를 그만 내부리두시는 길까? 돌아가시서, 집에 돌아가시서 요절을 내실라 꼬 내부리두시는 길까? '초록은 동색이라고? 와 안 그라시겄노. 총대로 패 시든지 철환으로 바람구멍을 내시든지 하 시지. 사람으 간장을 바싹바싹 태우기만 하시까.' 구천이를 도망가게 한 짓 이 실수 아닌 고의였었다는 것을 안 이상, 의당 수동에게 어떤 조처가 있 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동정도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초 록은 동색이라는 말 한마디 내뱉은 이외, 치수의 얼굴에서 노여워하는 기 색조차 볼 수 없었다. 구천이를 찾는 데 정신이 팔려 그랬다고 할 수는 없 었다. 닦달을 하려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이요, 그 괴팍한 성 미에 배신한 종 하나쯤 총으로 쏴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최치수는 수동의 행위를 용서한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그 일을까맣 게 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럴수록 수동이는 오히려 두려움을 갖는다. 책감 도 컸었다. 설령 상전이 너그럽게 용서한다 치더라도 수동이는 자신의 행 위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천에 대하여 절도를 잃은 연민과 숭배의 감정은 그러나 또다시 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 상전을 배신 안 하리라 장담 못한다. 그럼에도 수동의 뼛속 깊이 박힌 종으로서의 상전에 대한 충성심 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다. 세수를 하고 산막으로 돌아왔을 때 강포수는 어 디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최치수는 사랑에서처럼 편안한 자세로 일어나 앉아 있었다. 아침인사를 올리고 수동이 조반 지을 채비를 차리는데 "수동 아." 치수가 불렀다. "예." 콧물을 들이마시는 수동의 얄팍하고 자그마한 코끝이 빨갰다. "오늘이 며 칠이지?" "열이틀이올시다." "추석이 임박했군." "예."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던 수동이 눈을 내리떴다. 치수는 더 이상뭐라 하지 않았다. '안 내리가실란가? 설마 그러기야 하시겄나.' 산막 밖으로 나온 수동이는 오가리솥에다 밥을 안쳤다. 솔가지를 툭툭분 질러 불을 지피 다가 소나무를 휘감고 올라간 머루덩굴에 눈이 간다. 비비 꼬여서 소나를 바싹 죄며 이가지 저가지 남의 나무에 거미줄 치듯이 엉켜붙은 덩굴은 우 악스런 생명에의 집념으로 보인다. '그 일이 있은 지 근 일 년 만에 구천이를 찾아나선 서방님 아니가. 그동 안 아무 긴피 도 없이 말이다. 그라믄 지금 서방님이 나를 예사로 보신다 캐도 그기이 예삿일이까? 틀림이 없을 기다. 마을로 돌아가시기만 하믄 날, 나를 나무에 매달겄지...' 김진사댁, 그러니까 과부 며느리의 시할머니 되는 사람이 젊었 을 시절, 그때 수동이는 코흘리개의 어린 나이엿었다. 마을 어떤 젊은이가 양반댁 아씨 거처방 앞을 야밤에 지나갔다 하여 당산 나무에 매달아 사형 하는 광경을 수동이는 본 일이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젊은 사나이는 실에 매달린 공처럼 몽둥이로 칠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얼울하고 외치다가 외치다가 사나이는 결국 혀를 물고 죽었던 것이다. 죽이는 일은 흔치 않으 나 죄과에 따라서 나무에 매달아 매질하는 것은 흔히 있는 마을의 사법이 었다. 최치수는 강포수도 수동이도 없는 텅 빈 산막 안에 홀로 앉아, 낯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잇는 것처럼 그런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루 덩굴의 집념과 최치수의 집념에는 얼마만한 거리가 있는 것일까. 귀녀의 집념이 머루덩굴을 닮았다면 치수의 집념은 덩굴에 휘감기면서 하늘로 뻗 으며 제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려는 소나무의 의지를 닮았다할 수 있을 는지 도 모르겠다. 천지만물이 시작과 끝이 있음으로 하여 생명이 존재한다고들 하고 탄은 무덤에 박히는 새로운 팻말의 하나라고들 하고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에 서 집념은 율동이며 전개이며 결실이라고들 하고, 초목과 금수와 충류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들 한다. 인간의 죽음은 좀 사치 스러워서 땅속 깊숙이 묻혀지고 혹은 풍습에 따라 영혼의 천상행을 위해 편주에 실어 물 위에 장사지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짐승들같이 고기이 되는 일도 있고 짐승에게 창자를 찢기기도 하고 까마귀 밥이 될 수도 있 다. 이 갖가지 죽음의 처리를 앞두면서, 헛된 탄생에 삶을 있는 그 동안 집 념의 조화는 참으로 위대하여 옷을 걸치고 언어를 사용하고 기기묘묘한 연 극으로써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비극과 희극이 등을 댄 양면 모습이며 무덤의 팻말을 향해 앞뒷걸음을 하는 눈물 감춘희극배 우, 웃음 참는 비극배우의 일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귀녀와 평산의경우도 그러하거니와 패륜을 다스린다는, 양반의 권위 손상에 보복을 한다는, 적어 도 그만한 이유를 박아놓은 집념을 앞세우고 지금 구천이를 쫓고 있는 최 치수는 웃음 참는 비극의 배우일까. 그의 집념이 설령 본능과는 거리가 있 는 것이며 정열과 욕망과도 거리가 있는 것이며 복잡한 인과관계가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풍토가 빚은 계율에의 복종이며 그 이행은 풍습의 괴뢰적 역할밖에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집념에는 다를 바가 없을 성싶기는하 다. 동학을 믿고 서학을 믿는 교도들이나 성악설,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가 들이나 나라를 뒤엎고 권좌에 올라 만백성을 살리겠다는 혁명가나 그네들 이 갖는 명확한 자각 혹은 사명감이 없었다 하더라도 풍습의 역사는 길어 서 설령 최치수의 심적 상태가 지금 완만하지만 오히려 명확한 자각이나 사명감, 광신보다 지워버리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 묵은 때는 그 것이 희미하여도 빠지기 힘든 것이다. 구천이를 발견한 후 이틀 동안 수의 모습은 아주 발랄했으며 줄기차고 졍력적으로 보이었다. 겨우 초당과 사랑 사이를 오가며 말벗도 없이 폐쇄 상태였으며 나태하고 병약하여 썩어서 괴 어 있는 연못물 같았던 생활, 그렇게 살아온 최치수가 옷이 젖도록 땀을 흘렸으며 팽팽하게 긴장된 피부, 상기된 분홍빛 혈색, 눈은 햇빛을 받아 보 석처럼 빛나고 슬기와 아름다기조차 했던 그 모습에는 초조함이 었다. 권 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냉소를 띠지도 않았다. 생명이 타 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시간을 잊을 수 있었던 희열이 있었다. 지금까지 고 난 성격 때문에 보다 불행했었던 사나이가 겹겹이 싸인 울타리 안의 고래 등 같은 지불 밑에서 잠이 오지 앟는 한밤중이면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혼 자 미치곤 했었는데 팽팽했었던 이틀을 보내고 하산을 생학해보는 지금, 썩어서 고여 있는 연못물같은 망상이 다시 마약같이 핏줄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이놈, 나를 아무리 지켜보고 앉아 있어도 별수없느니라. 나는 자네 한테 덤비지 않을 테니 말일세.' '헤헤헤... 나으리, 소인은 이렇게 가만히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습까? 가만히요. 눈에 거슬릴 까닭이 없습니다요. 소인이 뭐 어쩌기에요. 혼자 마 음놓고 춤을 추십시오. 소인을 생각하시는 게 병이라니까요.' '네 이놈, 내목을 누르지 말라. 귀신같이 감겨들지 말라. 날 놓아라! 어럽 다. 머리가 천근같이 무겁고나. 자네가 그런다고 춤을 추어? 계집한테 미치 란 말이냐? 천만금을 주고 벼슬을 사란 말이냐? 초를 든 의병이 되란 말이 냐? 선심을 쓰고 송덕비를 덛으란 말이냐? 아서라, 자네한테 속지 않으려 네. 날이 새면, 날이 새기만 하면...' '날이 새고 햇빛이 저 석류나무를 비춰 도 소인이야 어디 갈 곳 있습니까? 이렇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억 겁이 가도 소인은 이렇게 꼼짝없이 불사신 아닙니까. 강철로써도 끊을 수 없고 초열지옥의 화염으로써도 태울 수 없고 한빙으로써도 얼어붙게 할 수 없는 영원불명이요. 아시겠습니까. 소인은 시각이요 세월이외다. 아시겠습 니까?' '알다마다, 알다마다! 자넨 세월일세. 자네는 불사신이라 했겄다? 옳 아. 헌데 나는 지금 자넬 잡아먹고 있지 않느냐? 일각일각을 잡아먹고 있 다 하겠지? 우리 그러지 말구, 자네는 자네대로 나는 나대로 숨을 쉬지 않 겠느냐? 따로따로, 자넨 자네, 나는 나일세.' '그리 못 견디어 하시면서, 소 인이 뭐랍디까? 글을 읽어보십시오. 성현들의 말씀에 허기는 면할 것입니 다.' '허허헛... 허허헛헛헛헛...' '시꺼멓게 구워서 진이 다 빠져버린 숯덩이로 불을 붙이면 붉게, 뜨겁게 타오르지 않습디 까? 사마천이 사내자식으로서 그의 근본을 잃고도 소금덩이 핥듯이 세을 아껴서 핥았습죠. 아무리 세월이 일장춘몽이라지만 그자에게는 꽤 쓸모 있 고 오붓했을 겝니다. 그것도 싫으시다면 연산군이 되십시오. 그까짓 것 참 외 씹어돌리듯 와작와작 먹어치우시오. 만석 들판에서 뒤굴어보는 겝니다.' '말 말게, 말 말게. 부질없는 말 말게나. 기실 나는 세월이요 세월은 나란 말일세. 알겠느냐? 나는 자네 속에 있고 자네는 내 속에 있느니라.' 한밤중 고래등 같은 지붕 밑에서 망상과 망상언의, 그 참으로 부질없는 시간이 지 금 최치수에게 엄습해 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갈 심산에 꼬리를 물고 달 라붙는 망상, 그 동안 꽤 오랫동안 작별하고 있었던 괴물이 그의 앞에 뻗 치고 앉아서 헤죽헤죽 웃는 것이다. 비록 십만 대군을 거느린 꽃다운 장수 로서 소리 높이 질타하며 전신을 들어 용솟음치는 화려무쌍한 전지는 아닐 지라도 넓고 넓은 벌판에서 이삭 하나 줍는 하찮은 하인 한 놈의 추적일지 라도 구천이를 만난 후 이틀 동안은 팽팽한 시간이었는데 이제 산은 더 무 거운 권태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축 늘어지고 말았다. 조반 준비가 다 되었을 때 얼굴이 벌개진 강포수가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요." 수동이 산막 쪽을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호랭이가!" "어, 어디 있소!" "호랭이를 본 기이 아니고 호랭이 발자국을 봤단 말이다. 일어나서 얼굴 씻을라꼬 샘터 쪽으로 갔구마. 갔더니만 냄새가, 피 냄새가, 비린 냄새가 확 나지 않겄나? 그래서 찾아봤지. 산양 한 마리를 꺼꾸러뜨 리놓고 내장을 온통 끄내 묵었더마. 새북에 그랬던가배. 그 영악한 놈이 또 와서 묵을라꼬 덤불 속에 끌고 가서 잡샀는 기라. 발자국을 찾아본께보통 으로 큰 놈이 아니더마. 그래서 총을 갖고 되잡아갔지. 멀리 갔일 성싶지 않아서 랬 는데, 있이야지. 하여간에 멀리 가지는 않았일 기고, 밤에는 남은 괴기 묵 을라꼬 틀림없이 돌아올 긴께, 그래서 가다가 되돌아왔다." "짐승 사냥하게 생깄소?" "호랭이 아니가 호랭이." 강포수는 흥분해 있었다. "호랭일 함부로 만나건대? 포수가 호랭일 만났 다믄 그거는 약초캐는 사람이 동삼 본 거맨치로, 하모 그렇고말고." "나으리는 꺼떡도 안 하실 기요. 말이사 해보소마는... 모레, 낼모레가 석 인데." 밥을 먹으면서 강포수는 치수에게 호랑이 이야기를 꺼내었다. 수동 이 말한 대로 치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발자국만 보아도 덕채만한, 아, 아주 예사로 큰 놈이 아입니다. 틀림이 밤에는 올 깁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한 방만 그으믄," 했으나 여전히 말이 없었다. 조반이 끝난 뒤 여느 때같이 산막을 떠날 각 을 않고 그냥 묵묵히 앉아만 있던 최치수는 반나절이 지난 후에 비로소 산 에서 내려갈 것을 말했다. 치수의 말을 들은 강포수는 당황한다. 굵은 눈을 깜박이며 어떤 지시를 내릴 것인지 마음을 조이는 눈치이다. 이미 호랑이 사냥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다. 치수는 강포수에게 함께 가자든가 사나 에 남아 있다가 추석 후에 다시 만나자든가 그 어느편의 말도 없었다. "산 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선 일체 입밖에 내지 말라." 그 말 한마디뿐이었다. 강포수는 수동이보다 더 서둘러 하산 준비를 한다. 행여 자기를 떨뜨려놓 고 가버리지 않을까 겁을 먹은 아이 같았다. 소인은 어떻게 할까요, 따위의 말조차 입밖에 내지 않았다. 산을 내려오면서부터 최치수 모습은 차츰 변 해지기 시작했다. 얼굴은 주글주글 주름이 잡힌 것 같았다. 윤기 있던 입굴 은 바싹 말라붙고 꺼풀이 일어 꺼실꺼실했다. 자세는 꾸부정했으며 꾸부정 한 모습은 늙은 당나귀 희끗희끗한 가루눈 내리는 잿빛 하늘 밑을 어가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강포수는 앞장서서 걷고 있었는데 긴장한 눈이 빛 나고 있었다. 산 밑에까지 가서 자네는 산에 남아있게, 할지도 모를 일이 다. 그렇게 되면 귀녀를 만날 수 없다. 짐승 우리같이 답답하던 최참판댁이 이제는 꿈결같이 감미롭고 귀녀 발길이 맹돌던 그 우물가, 행랑채 마당은 가슴 떨리게 그리운 곳이다. 수동이는 치수를 따라 뒤지지 않으고 땀을 흘 리며 서둘렀다. 짐을 지고 있었고 별로 실하지 못한 몸에 근심으로 그는 지쳐 있었다. 마 을에 맡겨둔 나귀와 짐을 찾아 해 안에 그들은 구례에 당도하여 최치수의 앉을 자리도 마련 못하고 마당에 우두커니 세워둔 채 염서방은 방으로 달려가서 망거늘 쓴다. 옷을 갈아 입는다. 하며 법석을 떨었고, 집안의 아낙들은 눈이 휘둥구래져서 영문을몰 라했다. "아 마리에 돗자리 깔지 못한디야!" 염서방은 아들에게 눈을 부릅떴다. 머슴에게는, "어서 사랑방 치우고 불, 불도 지피랑게." "아이구매 참, 쇠돌이 니는 사랑방에 불 지피라이. 아가, 니는 마리에 자리 깔고." 마누라가 차분하게 이른다. 허둥지둥 두루마기 고 름을 여미며 염서방이 다가오자 수동이는 사냥갔다 오는 길에 해가 떨어져 서 하룻밤 묵고 가려고 왔다는 설명을 한다. 마루에 오른 치수는 염서방의 인사를 받긴 받았으나 농사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다. 염서방 이 최참판댁에서 최치수를 본 것은 두 번, 그것도 세배만 하고 나왔을 뿐 이다. 괴팍한 성미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으나 우울한 눈이 자기를 멀거 니 바라보고 있는 데는 염서방도 좌불안석이었다. 마침 사랑방을 치웠다는 머슴 말에 염서방은 서둘러 최치수를 모셔 들여놓고 자신은 닭을 잡아라 찹쌀을 담가라 하면서 최치수를 피해 집안을 헐레벌레 돌아다녔다. 집은 초가였으나 널찍했다. 굵직한 기둥이며 뜰안도 넓어 살림이 넉넉함을 알 수 있었다. 산막이나 화전민들의 움막 생각을 하면 염서방 집의 널찍한 사 랑방은 청풍당석이겠는데 염서방은 최참판댁의 대궐 같은 집 생각만 하고 누추하다는 말을 되풀이 뇌었다. 쇠죽을 얻어서 나귀에게 먹이고 있는 수 동이를 보고도 집이 누추하다는 말을 되풀이 되풀이 뇌곤 한다. "아따 참, 산에서는 움막에 꾸부리고 잤는데, 거기 비하믄 대금산이라요. 머로 그래쌌소." 구례까지 내려와 이제는 마음을 놓은 강포수는 제법 으스대면서 핀잔 어 말했다. "아부지, 펭풍 찾아오요이." 열네댓 살 돼 보이는 계집아이가 커다란 병풍을 이고 오며 웃었다. "쓰고 마는 싸게 갖다 주지 않고, 으이잉." 염서방은 눈사를 찌푸렸다. 치수가 든 사랑방에 치려는 모양이다. 계집애는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팡파짐한 엉덩이와 머리꼬리에 드린 자주댕기를 흔들며 집안으로 들어간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동이 얼굴이 파아랗게 질린다. 순간 이상한 충동을느 꼈던 것이다. 비린내 나는 아이를 보고 이상한 충동을 느낀 일이 우선 부 끄러웠고 좀체 그런 일이 없었는데 수동은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놀랐던 것이다. 지난 여름 평산이를 따라 산에 갔다 온 삼수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화전민 초막에서 잠자는 아낙을 보고 살인이라도 할 뻔했었다는 얘 기며, 돌아오는 길에 편산이 여자를 사주어서 재미를 보았다는 이야기, 그 말을 들었을 때 에는 더러운 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수동이었다. 죽은 분이가 수동게 시집왔을 때 나이는 더했으나 몸집이 작고 키도 작았었다. 수동이는 분이 를 연상하며 염서방 딸에게 욕정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럴 겨를이 있는 형 편인가, 절박하고 불안한 심정인데, 내일이면 마을에 당도할 것이다. 그러 고 나면 자기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그런 마당에서 망측 한 욕망을 느끼다니, 그것도 어린 계집아이에게. 수동이는 힘없이 나귀를맨 나무에 등 을 기대었다. 염서방은 헐레벌레 안으로 들어가고 멀리 들판에는 놀이 걷 혀지면서 어둠이 묻어오기 시작했다. "강포수." "와." "추석에는 성묘 가야제요." "성묘 갈 조상이 있이야제." "조상 없는 자손이 어디 있소. 우리네들이사 남으 집에 매인 몸이지마는," "누가 떨어티리도 떨어티리기야 했겄지마는 철나고 보니께 이 빠진 주막집 할마구가 날 줏어왔다더마. 그러니 조상을 우찌 알겄노. 내 강가라는 성도 알고 보믄 그할망구 성이라." "기른 이도 부모 아니요." "말 마라. 그 할망구가 좀더 살았이믄 내가 죽었을 기다." "몹시 했던가 배." "내가 사램이 도기로는 홀애비 포수를 만냈기 때문인데, 어디서 죽었 는지 알 수 있이야제. 사냥 나간 길로 감감소식이니 아마도 짐승에게 잡히 먹힌 기라. 그때는 하도 서러바서 며칠 몇 날을 산속을 헤매믄서 찾기도 했다마는, 그래 나는 포수가 됐지." 밤에 자리에 든 수동이는 잠을 자지 못 했다. 마을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최치수는 웃으면서 하인들에게 수동이 사형을 명령할지 모른다. 두렵고 절박한 심정에 몰릴수 록 이상한 일은 육체가 욕구하는 고통이 심해오는 것이다. 팔월 한가위를 바로 앞둔 밤은 밝았다. 방문에 감나무 잎의 그림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여자의손짓 같았고 여자의 치맛자락 같았고 여자의 머리카락 같았다. "아 아 참 못 전디겄구나. 아무래도 내가 죽을 긴갑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망 령이 어디 있노. 그놈이, 삼수 그놈이 샐인하겄더라 하더니마는 참말이제 샐인하겄고나. 짐승 겉은 놈이라고 욕을 했다마는 사램이란... 아아 우찌 저 리도 달은 밝은고. 미치게 달도 밝다." 수동이는 일어나 앉았다. "안 자고 머하노." 자는 줄만 알았던 강포수가 물었다. 수동이는 찔끔하며 놀란다. "멋을 그 리 구둥구둥 시부리고 있었노." "아, 아무것도 아니요." "미치게 달도 밝게." "야?" 수동이는 제 한 말을 듣고 그러는 줄 알고 등골에 땀을 흘린다.강포수도 일어나 앉았다. "참말이제 미치겄구마, 수동아." "..." "부모형제 없는 놈이 누굴 의지하고 살기는 살아야겄는데." 강포수는 한숨을 내쉰다. "이 나이 해가지고, 나도 미쳤지. 내외간의 정이 우떤 것꼬." "머 몰라서 묻소." "잠자리를 같이하는 기이 정이라 그 말이가." "그렇겄지요." "아니다. 그런 기이 아닐 기구마. 세상에 기집이 없어서? 한곬으로 쏠리는 그거지. 머 머라 캤이믄 좋을꼬? 한 목심 걸어놓고, 머 머라캤이믄 좋을꼬?" 수동이는 어이 가 없어 수여메 묻힌 강포수의 얼굴을 바라본다. 멀리서 첫닭 우는 소리가 났다. 19장 배추밭 풍경 추석을 보내고 곡식을 거둬들인 들판은 쓸쓸했다. 천수만 바라본는 산비탈 동가리 논에 얼마간 베지 않은 벼가 남아 있다. 여원 나뭇잎에 벌레가 모여들 듯 털어봐야 얼마 될 성싶지 않은 동가리논 에 참새떼들이 모여 마음놓고 포식이다. 군데군데 누우렇게 된 무, 배추가 칙칙한 회갈색 들판에 얼룩진 것같이 눈에 띄기도 했다. 땅이 얼기 전에 그것도 거뒤들여 장에 내가거나 아니면 김장을 담가야 할 태인데 추위가 아직은 임박해있진 않았다. 볏가리에 포근한 햇볕이 머물고 있었으니까. "아 그래 비기윤신도 유분수지. 수수알갱이까지 떨어가다가. 온 내." 아랫마을에 여남은 마지기 논을 내놓는 윗마을 의 신출내기 지주가 세곡이 모자란다 하여 따줄이네 집 수수까지 떨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김훈장과 서서방이 분개하고 있는 이 다. "하기사 아흔아홉 섬 가진 놈이 한 섬 가진 놈 것을 빼앗아 백 섬을 채운다 캅디다만." "세강속말일세. 이리 인심이 각박하니 어찌 나라가 안망 하겠느냐." "그거는 샌님 모르시는 말씀이요." 내외간에 금실이 좋은 것을 보고 노상 못마땅해서 세강속말이니, 상것이 니 하던 김훈장의 언동이 생각나서 서서방은 쀼루퉁해 말을 받았다. "세상이 변한 기이 아니고 본시부텀 그런 거 아입니까. 지체 높은 최함댁 에서도 본시 재물을 모으기로는, 아 세상이 다 아는 일 아입니까. 숭년에 보리 한 말 주고 뺏은 땅이 새끼를 치고 새낄 쳐서, 그렇기 생각하믄 세상 이 그릇되어 그렇다고만 할 수 있겄십니까." "허허, 이 사람이, 그러면은 세 사이 잘돼간다아 그 말인고?" "잘될 것도 없고 노상 그런 거 아니겄십니 까." "한심하지 한심하여,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벼슬아치들은 구전문사 하고 상것들은 구전성명에 급급하니 누가 나서서 원수를 막을 건고?" "나라 상감님도 어쩌지 못하시는 일을 샌님이 걱정하신다고 안 될 일이되 겄십니까. 그러 니께 머리칼이 자꾸 희어지구마요." "고얀지고! 이러니 세강속말이라 할 수 밖에, 상것들이 양반 알기를 음, 음,"하다가 김훈장은 소를 매둔 말뚝을 담 뱃대로 두드린다. 조준구나 문의원이 이야기할 때는 양반된 체모를 굳게 지켰고 열을 올려 논쟁을 하기는 하되 격조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며 때론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상사람을 대할 때의 김훈장은 아마래도 좀 우스꽝스럽다. 변덕스럽다 할 만큼 희노애락이 즉시즉시 얼굴에 나타난다. 어쩌면 그것은 허심탄회하고 서민들에게 더한 친근감을 느낀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윤보나 서서방을 만나기만 하면 이러저러한 애기를 먼저 꺼내었고 그러다가는 곧잘 언성을 높이는데, 다음 만나면 여전히 이러저러한 얘기를 그쪽에서 꺼내놓게 마련이었다. 윤보나 서서방 역시 노하는김훈장을 조금 도 무서워하지 않는 대신 설혹 심한 욕설이 나와도 망음속 깊이 끼는 일은 없었다. "옛적에는 그래도 푼수에 맞추어서 체통을 지켰거늘 늘 양반 상놈 할것없이 막돼가는 판국이니 길이 있되 같이 길이 없고 해가 떠 있되지함 절벽이라, 참으로 치신무지, 한심할 노릇이지." "우짜겄십니까. 그래도 사는 날까지는 살아봐야제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더라고." "허허 이러니... 쇠귀에 경 읽기."한는데 서서방은 한눈을 팔고 있다가 "아아니 저놈이 어디 가노?" 따줄이가 괴나리봇짐을 겨드랑이에 끼고 내 려온다. "니 어디 가나?" 따줄이는 김훈장에게 꾸벅 절을 하고 나서 서서방에게 대답했다. "읍내?" "야. 객줏집에 머슴이나 살라누마요." 검버섯이 핀 얼굴을 찡그린다. '도, 돈 없이믄 사나아는 허수애비다. 돈만 있어 보제? 아무리 벵신이라도 계집이란 뜻대로 되는 기라.' 하던 따줄이 수수알갱이까지 털리고 마을을 떠나는 것이다. "입 하나라도 덜어야지 우짜겄십니꺼. 새경이라도 받아야 집식구들 보리죽에 안 보태십 니꺼." "하기야." 김훈장은 잠자코 있었다. "가보게.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겄나." "노상 당하는 일인께요." "가보게." "야." 따줄이는 다시 김훈장에게 절을 하고 얼굴을 실룩 이며 코를 들이 마시며 허적허적 걸어 내려간다. 김훈장의 담뱃대가 다시 말뚝을 쳤다. 두 번 세 번, 그러다가 담배쌈지를 꺼내었다. 칠성의 밭과 용이가 부치는 밭은 밭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붙어있 었다. 베수건을 이마 중간까지 내려쓴 임이네는 무를 뽑고 용이는 장에 내가려골 배추를뽑 고 있었다. 얼마나 그악스럽게 거름을 먹였던지 임이네 밭의 무는 땅 밑으 로 내려가다 못해 땅 위로 솟아올라서 보기에 팀스러웠다. 이랑을 따라 배추를 뽑고 무를 뽑던 용이와 임이네는 밭고랑에 무, 배의 무더기가 쌓이면서 그들의 거리가 차츰 가까워진다. 밭둑 하나 사이에 둔 이랑에 이르렀다. 큰 목청으로 떠들지 않아도 서로의 말이 통할 수 있는 거리에 온 것이다. "강청댁이 어디 아프요?" 벼르고 있었던 임이네가 말문을 열었다. "모르겄소." 뽑은 배추를 무더기 위로 휙 던지면서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았다. "배추 뽑는 거사, 여자 할 일인데 강청댁도 어지간하요." "..." "복도 많지." "... 임이네는 일손을 놓고 거들떠보지 않는 야속한 남자를 바라본다. "무신 배추뿌리가 그리 크요." 다시 한 번 끌어보듯 말을 건다. "뿌리 크믄 머하요. 배추 속이 들어야지." "영 거름을 못 묵었느가배요. 잎 이 억세고, 비리가 끓어서 그런가?하기사 뿌리가 크믄 속이 비더마요." "못된 송아지엉덩이서 뿔 나더라고 사람도 안 그렇소." 임이네를 두고 하 는 말인지 강청댁을 두고 하는 말인지 빈정거리는 것인데 임이네는 자기 좋은 대로 강청댁 흉이거니 생각하고 까르르까르르 웃어댄다. "그래도 못도니 논이 제우답 된다 안 캅니까." 용이는 다시 입을 다물고 손만 움직인다. "작년 봄에," 하며 임이네는 말며리를 돌린다. "아아가 서는데 우찌나 배추뿌리 생각이 나든지, 옆에 두고 안 주는 거맨치로 눈물이 다 날라 캅디다. 그놈의 베은 무신 놈의 벵인지 꼭 없는 거만 청한다 말이요." "..." "달포 동안을 못 묵고 비실비실, 일이 좀 많소? 세상에 우리집 임이 배겉 이 정 없는 사람이 또 있이까. 이녁은 세 끼 밥 한 그릇씩 게눈 감추듯이 뚝딱 묵으치우믄서 옆으 사람이사 죽든가 말든가, 말이나 안 하믄사 부애 나 덜 나제요. 한다는 말이 배지가 불러서 안 묵지 새끼 선다고 안 묵으까. 세상에 버릴 말이라도 그러는 법이 어디 있겄소? 지금 배추뿌리를 본께 그 때 일이 생각나누마요." 용이는 낫을 들고 배추뿌리 몇 개를 썩썩 잘랐다. "예 있소. 지금 실컨 잡사보소." 지껄이는 입을 막기라도 하듯이 임이네 쪽으로 던져준다. "아니 지금 묵 고 저버선 한 말은 아니요. 이야기가 그렇다 그 말 아니요. 남정네가 하도 미 련해서." 그러나 임이네는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배추뿌리를 주워모아 한곁에 둔다. 그리고 좀더 다가서듯이 "이팝에 비단을 감고 있어도 정 없는 세상은 못 산다 카더마요." 노골적 으로 털어놓으며 대담하게 나오는데, 그러나 용이는 통 관심이 없다. "쪽박 을 차도 마음난 맞이믄 살지, 안 그렇소? 나므 제집한테 속태우는 것도골 벵은 골벵이지마는 그것도 남자 하기에 달닌 거 아니겄소. 안 보는 데서는 무신 짓을 하든지 집에 들믄 가숙 불쌍한 줄 알고 따따스리 대하믄 그만 아니겄소? 욕심난 똥창까지 차가지고 이녁 밥그릇 작은 줄만 알았지 제집, 자식새끼는 옆에서 죽어도 모릴 사람이요. 살아갈수록 나이 들어갈수록 서 글프고 가소롭고 한이 되네요." 칠성이 사람됨되미을 알고 있는 용이는 임 이네가 빈말을 하고 있다 생각지는 않았다. 동정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으 나 여자들끼리 라면 모르되 외간남자를 보고 제 남편 험담하는 임이네가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강청댁 겉은 처지라믄 밤낮 업고 살라 캐도 싫다 안 컸소. 그 날리를 쳐도 어디 평생 매질을 하까 입정 더럽게 욕을 한분 하까, 바로 대놓고 말하기사 간지럽지마는 양반이요, 양반. 우리 입임 아배 겉으믄 버얼써 뼉다구가 뿌질러짔일 기요. 도구가에 보쌀 몇 알 흘맀 다고 주개로 때꾹때꾹 때리는 성민데 시집오자마자 당장 그 버릇 내놓십디 다. 내가 뼈빠지게 일을 하께 그냥저냥 넘어가지, 객리에 나가서 풍상도 겪 을 만치 껶었을 긴데 천성이믄 할 수 없는가배요." "팔자 소관 아니요!" 화난 소리를 내뱉고 용이는 일손을 빨리하여 임이네 를 피해 앞으로 나가는데 임이네는 기를 쓰고 따라붙는다. 서두르는 바람 에 뽑는 무가 부러지곤 한다. 이런 호젓한 기회가 다시 있을 것 같지 않았 던 것이다. 무슨 생각을 했던지 임이네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굴을 닦 고 손도 닦는다. 그러더니 걸이 고운 무 하나를 골라 들었다. 낫으로 껍데 기를 벗기고 두 쪽을 나누어 잠시 미소짓다가 밭둑을 넘어 용이 겉으로 다 가선다. "저어," 용이 좋잖은 눈으로 돌아본다. "이거 물이 많아서, 잡사보소. 목도 마를 기요. 요기도 될 기요." 애원이었다. 눈에 가득 실린 애원의 마음, 용이는 멍하니 여자를 쳐다본다. 아무말 않고 무꼬랑지 쪽을 든다. 그것을 두툼한 입으로 가져가서 용이는 와드득 깨물었다. 강청댁의 말하따나 상사병, 그 병색이 가셔지지 않은 어둡고 슬픈 얼굴에 소름이 돋아난다. 무는 이가 시 리게 차가웠다. 이 광경을 칠성이 보았다. "자알들 노는구나. 수작이 보통은 아니구마." 용이 얼굴이 변했다. "그기이 무신 소리고?" "아따, 내가 더 강짜가 나서 하는 말인 줄 아나?" "개돼지 같은 소리 마라." "머가 다르노. 붙으믄 다 개돼지나 마찬가지 앙 이가." 얼굴이 파래진 용이는 헛웃음을 웃는다. "사당놈도 맑은 정신 갖고는 그런 말 못할 기다. 자석 놓고 살믄서, 아라 아서, 자석노미 니 꼴 될까 무섭다." "흥." "추잡한 아가리 놀리지만 말고 일아나 거들게. 해 떨어진다." "계집년 두었다가 삶아묵으라꼬?" "누구를 자꾸 닮아가는구나, 노상 붙어 다니더마는. 그 꼴 닮다가는 쪽박 찰 기다. 팔아묵을 족보도 없는 주제에," "쥐구멍에도 햇빛 드는 날 있다고 평생 똥장군만 지라는 법도 없지." 전 같으면 남먼저 무를 캐어 남 먼저 장날에 내려갔을 칠성이는 늘어지게 잠 을 잔 눈치다. 부숭부숭 누니 부어 있었다. 손은 바짓 말기에 찌르고 어거 주춤 서 있는 꼴에 요이는 구역질을 느낀다. 임이네는 어느새 무밭으로 건 너가서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당황해 하거나 남편의 기색을 살피는 것도 아니었다. 칠성이는 마치 간통이라도 한 현장을 본 것같이 빈정거리기는 했으나 그의 말대로 심각하게 강짜를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임이네는자기 아악 으로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실하고 암팡지고일 잘하는 일꾼일 따름이다. 잠자리에서 몸을 탐낼 적에도 봇짐장수 시절, 논 다니나 매춘부를 다루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임이네이기 때무네 그렇 다고 할 수는 없다. 귀녀에게도 그랬으며 어떤 여자가 제 아낙이 되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을에서 임이네만큼 일 잘하는 여자는 드물고 아이 셋을 낳았으면서도 터질 듯 싱싱하고 예쁜 여자는 없다. 용이 마음에처음 으로 임이네에 대한 연민이 일었다. 그러나 용이는 부정이라도 탈 것처럼 먹던 무를 내던저버린다. 그리고 밭고랑 사이에 자빠뜨려노흔 지게를 가져 와서 받쳐놓고 배추를 주섬주섬 얹는다. "보소, 실없는 소리 고만하고 나왔 거든 무시나 좀 날라보소." 용이 지게에 배추를 올리는 것을 본 임이네는 천연스럽게 낯도 안 붉히고 말했다. "내가 안 나왔이믄 우짤라 캤더노." " 할 수 없겄지요. 오밤중이라도 하던 일은 끝내야, 곧 땅이 얼어 붙을 긴데 헝겅망겅하고 있을 기요?" "애시당초 그럴 요량이믄 오밤중까지 혼자서 하지. 계집년 덕택에나 좀편 해볼라누마." "흥,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밥 묵는 사람 따로 있소? 눈이 있거든 좀 보지. 강청댁은 집에서 낮잠을 자는데 서방님은 종일 점심도 굶 고, 떡판 겉은 자식을 낳아주어도 내 팔자는 이렇다 카이." 여태까지 일을 농으로 돌리듯 임이네는 실쭉 웃기까지 했다. "네 년이 꼬 리를 치니께 용이가 밥 생각도 잊은 거지 머." 이번에는 달다 쓰다 말없이 용이는 제 할 일만 한다. "실없는 소리 고만하소. 서방 덕에 편해보지는 못 할망정 앰한 소릴랑 그만두소." "화냥기 있는 년이 편했다가는 볼장 다 본 다." 해는 어느덧 서편에서 까뭇거리고 있었다. 추위를 타는 듯 오종종하니 깊단에 모여 앉았던 참새들도 잠자리를 마련하려고 강가 대숲을 향해 날아 간다. 오가는 사람도 끊어진 텅 빈 길에 젊은 비구 한 사람이 급히 걸어오 고 있었다. 해는 아주 넘어갔다. 여광이 강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젊은 비구는 최참판댁 문전에서 내의를 전하고 돌이는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마 당을 질러 급히 안채로 달려간다. "마님." "..." "연곡사에서 스님이 오섰습니다." "스님이라니, 어느 스님이 오셨다 말이 냐." 윤씨부인의 목소리가 조급하게 들렸다. "젊은 스님올시다." "서신을 가지고 오셨느냐?" "예. 그렇게 말심하십니다." "삼월이를 불러라." 삼월이 달려왔다. 서신을 들여오고 스님은 거처할 곳으로 모시라고 윤부 인이 이른다. 윤씨부인은 방바닥에 놓인 열쇠 꾸러미를 주워 문갑 위에 올 려놓았다가 다시 그것을 서랍 속에 집어넣는다. 그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듯 옷걸이에 걸린 저고리를 내려서 그럴 필요도 없는데 갈아입는다. "마님, 가져왔십니다." 삼월이 봉서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등잔에 불을 밝히려 하는데, "너는 물러가거라." 삼월이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황황히 나간다. 윤씨부인은 편지를 쥔 채 그냥 앉아 있었다. 방안이 어둑해온다. 겨우 편지를 꺼내다 말고 방안의 어 둠을 느낀 윤씨부인은 등잔에 불을 밝힌다. 손이 떨고 있었다. 환이의 일이온데 그토록 애타게 소식 모연하더니 간밤 에 제발로 기진한 몰골이 되어 걸어 들어왔기에 미물 인생에 내리신 부처 님의 크나크신 자비에 눈물 짓고, 우선 은신처로 양인을 옮겼으며 차차 대 책 마련하겠사오니 부인께서는 뇌심 푸시기를 바라옵니다. -우관 합장 윤 씨부인은 잠을 못 잤다. 아침을 맞이한 윤씨부인의 눈은 불면의 밤을보냈 음에도 맑은 빛을 띠고 있었으며 부드럽고 평화스럽게 보였다. 병을 앓다 가 기적으로 회복기에 든 병자가 모든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거와 같은 얼 굴이었다. 반나절이 지났을 때 마치 편지의 사연을 알고 잇는 것처럼 치수 가 들어왔다. 산에서 돌아오자 그냥 자리에 쓰러져 며칠을 일어나지 못하 더니 나흘 전에 일어나서 어제는 화심리 장암선생의 병상을 찾아보고 돌아 왔다. 치수의 얼굴은 평상시와 같아 보였다. 아들이 방으로 들어섰을 때 윤 씨부인 얼굴은 역시 굳어졌다. 여전히 서로의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느끼 면 서 모자는 장암선생의 병세 얘기를 나누다가 더 이상 화제를 찾지 못하고 무거운 침묵에 빠 진다. 이제는 치수 쪽에서도 탐색전을 벌이지 않았고 윤씨부인도 아들의기 색을 살피지 않 았다. 서로가 신경의 싸움을 잠시 멈추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윽고 수 는 이삼 일 지간에 다시 사냥하러 떠나겠다는 말을 꺼내었다. "몸이 실치 못한데 어쩌려구 그러느냐?" 무슨 뜻인지 피식 웃으며 치수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장암선생께서 자네는 나보다 더한 신선놀음 일세 하시며 웃으시더군요. 이런 시태에 쉽지 않은 일이라 하시기도 하고, 나무라시는 말씀이겠지요만."하더니 제 한 말에 쫓기듯이 일어섰다. 윤씨부 인은 무수히 시달려온 아들과의 감정 대립 속에서도 한 번 느껴본 일이 없 는 증오감 같은 것을 느낀다. '오냐, 쫓아보아라. 환이는 네 손에 잡히지는 않을 게다.' 치수가 나간 뒤 윤씨부인은 손수 자리를 깔고 눕는다. 누워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졌다. 험준한 고개를 넘은 잠시의 휴식이었을까. 맑 고 부드럽게 빛나던 눈은 감겨져 마음을 닫아버린 것같이 느껴진다. 얼마 전의 평화스러웠던 마음을. 잔주름이 수없이 모인 넓은 이마, 양볼은 쪼그 라들고, 삭막하고 허무한 얼굴이었다. 낮잠에서 겨우 눈을 떴을 때 윤씨부인의 차렵저고리를 지어서 봉순네가가 지고 왔다. "서희는 요즘도 어미 생각을 잊지 못하느냐?" 윤씨부인의 묻는 말에 봉순 네는 당황한다. 몇 달 동안을 윤씨는 손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봉순네는 마음으로 그것을 야속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예, 저어," "..." "요새 부쩍 또 생각하시는 갑십니다. 그새 잘 노시더니." "어찌 잊겠느냐. 세상에는 몹쓸 어미도 많다." 비웃는 것 같은 여유 있는 말이었다. "죄가 많아서 그러느니라. 자식을 낳은 여자는 죄인이지." 봉순네는 잠자코 고개만 숙인다. "월선어미," "예?" "딸 말이다. 월선이라던 그 아이는 지금도 장사하고 있겠지." 느닷없이 물었다. "저어," 당황한다기보다 꾸중을 들은 것처럼 봉순네 얼굴이 벌개진다. "장살 안 하느냐?" "저어, 계, 계집이 팔자가 기박해서 저어 바, 바람을 잡아서 간 모 양입니다. 마님께 뵐 낯이 없어서... 본시 심성은 고운 계집인데 팔자는 인 력으로 못하는..." 말꼬리가 끊어졌다. 별당아씨를 두둔해서 한 말은 아니었 는데 윤씨부인이 혹 오해라도 할까 싶었던 모양이다. "어밀 닮았으면 심성이야 곱겠지." 중얼거렸다. "계집이 욕심이 없고 야무지질 못해서 고생할 깁니다." "제 어미도 욕심이 없었느니라." "..." "그 아이를 좀 찾았으면 좋겠는데." "어디로 갔는지, 간 데를 아무도 모르 는 갑십니다." "돌아오겠지, 언제든 한 번은. 혹 다녀가거나 사는 곳이라도 알게 되거든 나에게 알리게." "예." 대범한 어른이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싶은 모양이지만 고마워하는 표이 다. "어미에게 갚을 것이 있어서... 월선네는 시물을 받지 않았었지." 봉순네가 나가고 혼자 된 윤씨부인은 다시 중얼거렸다. "어밀 닮았으면 심성이야 곱겠지." ... 거루 고각은 공중 높이 솟아 있고 별유천지에 인간이라 사자들 거동 보소 연직사자 월직사자 일직사자 저승사자 흑혜사자 망자씨 목을 새로 엮어 세와전에 대합하니 세왕은 용상에 재기하고 체판관이 문서 잡고 망자씨더러 이르는 말이 너 이 세상에서 무슨 공덕 하였간데 이리 왔느냐... 오귀굿 중의 시황굿 대목에서 주무던 월선네의 가락이 귀에 들려왔다.삼 지창에 칠쇠방울을 흔들며 쉰대부채를 활짝 펴들던 무당 월선네는, 꽃갓에 전복 입은 월선네는 늠름하고 헌칠했었다. 그 모습도 윤씨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참으시오 아씨, 쇤네를 믿으시 고. 재아이 물러갈 깁니다." 월선이는 늦게 낳은 딸이어서 월선네는 윤씨부 인보다 십여 세나 나이 위였었다. "이 세상에서 지은 죄는 이 세상에서 씻 고 가야제요. 죽어서 거악귀신이 되믄 자손한테 적악이요 최씨 가문에 적 악이요. 제 목심끊어 비명횡사한다믄 시한이 차기까지 저승문이 안 열리니 께요." 월선네는 팔이 길었다. 삼지창은 오른손에 들고 부채, 방울을 왼손 에 들고 두 팔을 쳐들면은, 쳐들고 굿마당을 빙글빙글 돌면은 그 위풍에 사람들은 한때 숨을 죽였다. 이때만은 누구나 월선네에게 승복하며 그의 위력을 믿었다. 근동에 많은 무격들 중에서 월선네는 참다운 주술사였으며 대부분이 큰 굿을 관장할 수 없는 선무당들 속에서 흔치 않은 무였었다. 그럼에도 그는 노상 가난하여 의식이 어려울 때가 있었으나 제물만 차려주 면 어느곳이든 굿하기를 사양치 않았고 남이 업신여기는 무당의 신분을 그 자신을 위해 한탄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그는 딸 월선이를 위해 미안하게 측은하게 여겼던 것뿐이었다. '마음이 씌어서 한 짓이요. 아무말 말고 가지 고 가소. 시물을 받으믄 추구를 받을기요.' 윤씨부인을 위해 신탁을 해준 보수로 문의원이 내어준 금품을 바우가 가지고 갔을 때 월선네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치수의 조모 조씨가 죽고 살림을 떠맡은 후 윤씨부인은 도와 주고 싶어했으나 그것도 월선네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맑은 물인데 이러믄 정리가 꾸중물 됩니다. 영신을 속이놓고 전곡까지받 아묵겄소?' 뜻을 전하는 바우를 책망했었다. 다만 최참판댁에서 굿을 부탁 하면 그때는 정성들여 일을 보았고 시물도 받았다. 윤씨부인은 시물을 주 기 위해 굿을 자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난 가슬에 굿을 몇 마당이나 했는데 월선네 꼴이 와 저렇노? 사흘에 피죽한 모금도 못 얻어묵은 것 같 네.' '계집이 질정이 없어 안 그렇나.' '곡식 날 때 번 돈으로 겨울 양식 장만할 요량은 안 하고 노상 됫박이니, 늙어 꼬부라져 서도 굿을 할 긴가.' '말 듣기로는 젊은 서방을 얻었다 카대. 와 저분때 보 니께 눈어덕이 씨푸뤃게 안 됐든가? 서방 찾아갔다가 되기 맞았다 카더마.' '실없는 소리, 남으 말 하기 좋더라 고, 얼굴에 멍든 거사 본시 월선네는 술을 좋아하니께, 술 처묵고 밤에 오다가 넘어진게지. 맞을 사램이 따로 있다. 무당이름이 럽 고 여자된 것이 한이지 사나아로 태이났다믄 한량이 돼도 크게 놀았일 기 다.' 마을 아낙들의 흉도 듣고 동정도 받고 하면서 월선네는 여전히 가난 했었고 술을 좋아했었다. 그 탓으로 딸을 객리에 여읜 뒤 다 쓰러져가는 막살이로 돌아오던 어느 날 밤 월선네는 개천가에서 쓰러져 죽었다. 빈속 에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윤씨부인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별당 뜰로 들어선 그는 연못가에서 봉순이와 재잘거리며 놀 고 있는 서희를 바라본다. 윤씨부인이 별당에 가 있는 것을 모르는 수동이 는 뒤안을 지나치다가 별당의 돌담에 붙어서서 피곤한 숨을 쉰다. 눈이 푹 꺼지고 안색도 나빴다. 20장 이지러진 달 최찬판댁에서 구박을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군식구에 틀림없는 강포수의 처지는 따분할 것이었다. 집도 절도 없는 신세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 는 일이라 하더라도 추석 명절을 남의 집에서 보내야 하는 강포수의 심정 은 복잡하고 서글펐다. 지금까지 화전민 집 아니면 단골주막 같은 곳에서 수수떡이나 얻어먹으며 무심상하게 보내던 추석이 이렇게까지 외롭고 쓸쓸 한 날인 줄은 미처 몰랐다.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무색옷을 입고 몰려다녔 으며 어른들은 함지와 버들저고리에 제물을 담아 이고 들고 성묘에 나섰으 며 최참판댁에서도 계집종과 하인들은 모두 새옷을 입고 술과 떡을 양껏 마시며 먹으며-수동이 함께 술을 마시자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희희낙락 한 속에 홀로 때묻은 자기 의복을 쳐다볼 때 강포수는 콧등이 시큰해졌던 것이다. 봉순네는 강포수를 위해 몹시 언짢아했지만 추석을 코앞에 두고 집안이 온통 북새를 떠는데 강포수를 위해 의복을 마련할 겨를도 없었거니 와 남의 식구요, 최치수를 따라 다시 강포수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예상도 하지 못한 터이라 입성 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은 봉순네의 잘못은 아니었 다. "괜찮십니다. 걱정 마이소. 괜찮십니다." 하기는 했으나 눈치코치 없는 강포수도 남의 기색에 마음이 쓰이곤 했다. 귀녀에게는 더욱 그래서, 강포수는 되도록 귀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사실은 추석 전날, 그러니까 마을에는 열사흗날에 당도했으므 로 틈이 없었고 그 다음날 강포수는 읍내 장에 나가서 숙고사저고리 한 감 을 끊어왔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미련한 강포수는 자기 입성 따위는 생각 지 않았었다. 꼬기꼬기 접은 숙고사저고리 한 감을, 저녁때 뒤안으로 돌가 는 귀녀를 허둥지둥 쫓아가서 내밀었을 때, "이거 머요?" "저고리감이다. 추석이 내일이지마는," "와 나를 주는 기요?"하는 데는 할말이 없었다. 다만 "어서 받아라. 눈들이 있인께." "참 우습네, 내가 와 이거를 받을 기요?" 누가 오지 않나 싶어서 힐끗힐끗 뒤돌아보던 강포수는 마음이 바빴다. " 정 못 받겄나!" 화를 버럭 내었다. "곡절도 모르고 받겄소?" "그라믄 좋다. 부석에다가 싸질러버리지." 뒷방 아궁이에 처넣으려 했다. "희한한 성미도 다 보겄네. 그라믄 인 주 소." 강포수의 입은 금세 헤벌어졌다. "심에 차지 않겄지마는, 졸지간에 내가 머를 아나." 화낸 것을 뉘우치며 말하는데 "금가락지 한 짝에 비하믄 새발의 피지 머." 귀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강포수에게서 산 물건은 아무 효험이 없던 것이다. 강포수는 갈고리 같은 손으로 수염을 마구 비벼대었다. "그, 그거사, 그, 그까짓, 내가 팔아 없이하기는 했지마는 앞으로 내 틀없 이," 귀녀는 킬킬 웃는다. "도둑질해서 해줄라요?" "그, 그런 소리 마라. 해줄수 있지. 해주고말고. 실없는 말이 아니다. 곰만, 아 아니 이분에 산에서 덕채만한 호랭이를 봤는 데 그거만 잡아보라지? 포수의 벌이가 우떤지 영 모르구마는." 귀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여전히 킬킬대며 치마폭 속에 꼬기꼬기 은 저고릿감을 숨겨가지고 슬며시 돌아섰던 것이다. 기가 죽어서 꼼짝못했던 추석이 가고 난 후에도 강포수는 여전히 최참댁 에 있기가 거북하고 눈치가 보였다. 그럴 것이 최치수는 오는 날부터 몸져 누워 있으므로 얼굴 한번 볼 수 없었고 언제 산으로 떠난다는 기약도 없 이, 그리고 꼭이 있어달라는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강포수는 자신을 물 위에 도는 기름같이 생각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대개 낮에는 주 막에 가서 노닥거리다가 어두워서 제 방으로 돌아오면 그의 귀는 귀녀가있 는 곳으로 쏠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을 보내야 했었다. 그래서 귀녀가 가 끔 밤에 김서방네 채마밭으로 해서 밖에 나가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물 정 모르는 강포수였다. '대체 머, 머하로 나가는 길까? 혹시 다른 사나아하 고 눈이 맞아서?' 그럴 듯한 일이었다. 강포수는 주막에 가서 홧김에 술을 퍼마시곤 했다. "강포수, 자네 어쩌자 고 산에 가서 짐승 잡을 생각은 않고 여기 죽치고 있나." 심심하면 평산은 강포수를 집적였다. "여기 정이 들어서 못 떠나겄구마요." 벌개진 눈을 껌벅이고 강포수가 응수하면 으레 "여기 정이 들어? 응 그러 고 보니 수상쩍다 싶더니 영산댁하고 그렇다 그 얘기로군. 허나 이 사람아, 계집 술청에 내놓고 기생서방 모양으로 놀고 먹자, 설마 그런 심산은아니 겠지?" 개쩍은 소리를 했다. 그러면 또 주모는 주모대로 "미치도 한 분 두 분 미 친 기 아니랑게. 눈이 등잔등 겉은 내 가장이 있는디 정갱이가 성할라믄 입 다물고 있소!" 악을 썼다. "같이 듣고서 그러네? 여기 정들었다 안 하든가?" "외상값은 안 걷히고 그란혀도 부아통이 부글부글 끓어서 죽겄는디 워쩌자고 이런당가?" "그럴 것 없이 강포수, 내 시키는 대로 하게. 체통을 신주 뫼시듯하는 거 누구네 집 며느리 도 하인놈을 따라 도망갔는데 그눔의 서방, 오다가다 만난 영산댁 서방쯤, 계집 업고 지리산 으로 달아나면 될 거 아닌가. 누구네처럼 간부 사냥하러 쫓아온다 하더도 자네를 당적할 그럴 위인은 아니니, 아아 영산댁만 해도 안 그런가? 밤낮 와서 술판 돈이나 뜯어가는 그깟 놈팽이 서방은 일찌감치 걷어차고, 강포 수로 말할 것 같으면 남의 집에 매인 종놈도 아니요, 하늘만 쳐다보며 보 리죽 먹는 농사꾼도 아니요, 천지가 다 아는, 애새끼들도 알아먹는 명포수 아닌가? 호랑이를 잡으면 호피 값이 얼만지 아나? 곰을 잡으면 웅담 값이 얼만지 아나? 종놈, 농ㄴ사꾼하고는 다르다 말씀이야. 사내 나이 사십이면 한창 나이 닌 가. 게다가 강포수 심덕은, 그 심덕만은 백옥이거든." 언젠가 읍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포수가 주먹을 불끈불끈 쥐면서 울짖던 말을 고스란히 옮겨놓으며 평산이 키들키들 웃는다. "괴연한 소리 마소." 강포수는 술을 들이켜고 나서 살이 빠진 얼굴에 맥 없는 웃음을 띤다. "여기 산천에 정이 들었다 말이요. 누가 영산댁," "허허 아무리 정들었기로 설마 산천을 안고 잘까." "처가 좋으믄 처갓집 말뚝도 좋게 뵌다 안 그럽디까." "아닌게 아니라 강포수 뱅났당게. 사램이 싹 변했지라우. 숫된 사람이 외곬으로 흐르믄 그거 큰일이요잉." 주모도 달라진 강포수를 심상하게 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말 마소, 말 마소. 아무도 내 속 모른다. 제기! 달밤에 나무 그림자 잡기로 그눔의 가시 나 속을," "뭐? 가시나?" 평산이 되물었다. 강포수는 눈이 둥그래져서 입을 다물었다. '이자가?...' 주막에 들어서는 낯선 나그네에게 주모는 "어서 오시오." "제법 날씨가 맵네. 곧 서리가 내리겠군." 나그네는 도폿자락을 제치며 술판 앞에 앉는다. 평산은 주질러앉아 쩍 않 는 강포수를 겨우 구슬려 밖으로 나왔다. "내사 아즉 안 갈라누마. 해가 남았는데, 가봐야 쭌범겉이 앉아서 머하소." "누가 거기 가라 하나? 객담은 이제 그만두지." 평산은 슬슬 걸으며 은근 하게 말했다. "산에 또 갈 건가? 최치수가 간다 했었나?" "모르겄소, 가기는 가겄지요." "그렇다고 자네 일은 다 접어놓고 이리 소 일을 하면 쓰나." "그러기요. 우떤 때는 그만 떠나까 싶으기도 하지마는 사 램으 정이라는 기이 인력으로 안 되누마요." "그러지 말고 나한테 털어놔라. 누가 아나? 뜨물에도 아이 생기더라고, 굴 맘에 두고 있나?" "그, 그기이..." "말하게." "그, 그기이," "허 참!" 강포수는 맘을 작정한 듯 "참판님댁의 그눔으 가시나, 귀, 귀녀요." "허 그거 안 될 말이지." "안 되다니." "눈이 천앙산같이 높을 건데." "높으믄 얼매나 높겄소! 종년이 높으믄 얼 매나 높겄소!" 환장한 것같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생각이 다 있구마. 나으리한테 말심디리서 돈보다 귀녈 달라 할 구 마. 사람을 그리 괄시 마소! 두고보소! 이 강포수는 처니장개 못 들라는 벱 이 어디 있소!" 강포수는 평산을 칠 듯이 발악을 했다. "허, 잘해보지. 뜻대로 되는가." 평산은 비웃었다. 비웃으면서 일이 꽤 까 다롭게 됐다는 생각을 한다. 이튿날 평산은 강포수를 찾아온 척하며 최참 판댁 행랑에 왔다. 정작 강포수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기웃기웃하다가 먼 발치에 보이는 귀녀에게 눈짓을 했다. 우물가에 와서 손을 씻는 척하는 귀 녀 뒤에 다가선 평산은 "밤에 조심하라고. 어젯밤에 강포수가 뒤를 밟는 것을 가까스로 주막에 끌고 갔지." 그러니까 주막에 나와 싸우고 돌아간 강포수는 밤에 귀녀 뒤를 밟다가 멀찌감치서 망을 보고 있던 평산에게 들 키었던 것이다. "어디 가나?" 소매 속에 팔을 찌르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평산이 막아섰다. "어디 가 기는요." 강포수는 입속말로 우물쩍거렸다. "그라면 나하고 주막에 가자. 낮에는 자네 맘을 알면서 이러쿵저러쿵했네. 누가 아나? 좋은 궁리가 날지." 평산은 얼렁뚱땅하며 민적거리는 강포수의 등을 밀고 주막 으로 갔다. 한잠이 든 주모를 꺠운다. "사람 환장허겄네, 환장혀! 이녁 집 안방이간디! 잠도 못 자게 워째서 런 다냐?" "손님 받는 데 밤낮이 있나? 그러지 말고, 밖은 한밤중이지만 술집 은 지금 한창 아닌가." "색주가 데리고 장사하간디?" "그러지 말래도, 술 팔아주겠다는데 무슨 잔말인고." 멍하니 바보처럼 서 있던 강포수는 저녁때, 며칠 후면 산으로 떠나게 된다는 수동의 말이 생각 났다. 평산을 밀어젖히고 주막을 나서려 하는데 "제기럴! 어디 갈려고 이 래?" 평산이 끌어앉힌다. 술 한 잔을 꾸역꾸역 마신 강포수는 다시 벌떡 일어섰다. "자아 자아, 어딜 갈려고 이러나. 보물을 묻어놓은 곳이 있나? 금가락지가 다시 나올 것 같은가?" 슬쩍 공갈을 때린다. 평산은 강포수를 마을에서 쫓아내야겠다고 궁리를하 며 강포수가 일 어서려 할 때마다 물귀신처럼 감겨든다. "김생원 몸이요, 내 몸이요? 내 몸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와이리 감기붙소!" 기어이 강포수는 삿대질을 하 며 평산에게 대어들었다. 강포수를 괄시 못하여 술을 팔아주기는 하던 주 모가 강포수 편역이 되어 "적악 그만 허소. 심심하믄 도깨비하고 씨름이나 헐 일이제, 순한 사람을 워쩌자고 그리 못 살도록 한다요, 응?" 실랑이를 하다가 평산은 당산의 일도 궁금하고 설마 강포수가 그곳을 고 있지는 않으려니 생각하며 일어섰다. 헐레벌레 걸어가는 강포수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평산이 뒤따른다. 평산의 존재 같은 것 염두에도 없는 듯 최참판댁의 언더막까지 올라간강 포수는 두리번두리번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희망을 버린 그런 몸짓으로 두 팔을 번쩍 올렸다가 내리더니 한 자리에 못박힌 듯 우뚝 서버린다. 얼 마를 그러다가 사랑 담장 밖에 서 있는 나무밑에 가서 펄썩 주저앉는 것이 었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귀녀가 집에 돌아온 뒤였었다. 간밤의 그 일을 알려주고 평산이 가고 난 뒤 밤을 기다린 귀녀는 어느때보다 조심스레 사 방을 살피며 김서방네 채마밭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강포수는 미 리 밖으로 나가서 올빼미같이 눈을 벌리고 나무 곁에 바싹 붙어 서 있었 다. 며칠 후면 떠나게 된다는 말이 강포수로 하여금 물불을 가리지 않게 했던 것이다. 그림자 모양으로 소리없이 귀녀가 나오는데 불문곡직하고 강 포수의 손이 덜미를 잡는다. 귀녀는 고함을 입속에서 깨물었다. 강포수인 것을 알아차렸다. 몸을 틀고 돌아선 귀녀는 주먹으로 강포수를 떠밀었다. 바위같이 단단한 앞가슴이었다. "어디 가노?" "..." "어디 가노?" "..." "나하고 가자." "치성디리로 가요!" 물어뜯는 목소리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고 뭐고 허사구마. 이잔 말을 했이니 가보아야 부 정탈기고 집에 도로 갈라요. 재수없게 멋 땜에 줄줄 따라댕기요!" 앙칼지게 말했다. "나하고 함께 가자." "싫소!" "안 된다믄 니 죽고 나 죽는다." "고함치기 전에 비키고!" "아무것도 안 무섭다." "이런 짓 하믄 우찌 되는지 아요? 맞어죽을 거 모르고 이러요?" "고함을 쳐라!" 하며 귀녀의 손목을 꽉 잡는다. "아얏!" 기실 귀녀 쪽에서 큰소리를 지르지 못한다. 손의 뼈가 부서지는것 같이 아팠으나 참는다. 사람들이 깨어나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귀녀 자신이었다. 강포수는 으스러지게 잡은 귀녀의 손목을 끈다. 귀녀는 안 끌 려가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그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어디 가는 기요." "..." 귀녀는 당산 쪽으로 가면 평산을 만날 것을 생각한다. 어제 저녁에도 포 수는 평산을 만났다 했는데 또다시 만난다면 위험한 일인 것을 깨달았다. 귀녀는 끌려가면서 평산이 망을 보고 있을 곳과 엇갈리는 초당 뒤꼍으로 강포수를 밀어젖힌다. 강포수는 길이건 풀숲이건 천방지축을 모르고 걷고 있었으므로, 하여간 그는 최참판댁에서 멀어지는 인적기 없는 곳이면 어디 든 좋았었다. 초당 뒤꼍을 돌아 그곳에서 후미진 숲속을 헤치고 들어간다. 그리고 아 주 멀리까지 왔을 때 귀녀는 쓰러지듯 주질러앉았다. "귀, 귀녀야." 아까 배짱과는 달리 강포수는 떨었다. 이지러져 반쪽도 안 되는 달이 어 붙은 것같이 반 공중에 떠 있었다. 멀리서 산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녀야." 감히 귀녀를 어쩌지 못하고 강포수는 사시나무 떨 듯 여전히 떨고 있다. "우짤라는 기요!" "나하고 살자." "어림도 없소!" "이자는 더 기다릴 수가 없다. 곧 산으로 떠난다카니." "나는 강포수하고 살 생각 추호도 없소. 이런 일을 남이 안다믄 큰일날 기요. 강포수하고 살 처지가 아니요.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마는, 때가 오면 알겄지마는, 이런 일 을 알게 되믄 강포수도 살아남지 못할 기요."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최참판댁 나리를 섬기는 여자이니라. 나를 종으로 알았다가는 큰코 다칠 것이다. 최참판댁 핏줄을 이을 아기를 낳을 여자이 니라. 감히 얼굴 들고 쳐다보지도 못할 나를.' 그렇게 생각한 것은 물론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만한 뜻을 감추고 한 임에 틀림이 없다. 후일 생각하면 그런 뜻을 깨닫게 되려니, 귀녀는 복선을 깔았 던 것이다. "후일 후회하지 말고, 오늘 밤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기니 그 리 아소. 만일 무신 일이 있다믄 강포수 목 열 개 있어도 모자랄 기요." 그 러나 그 말은 역효과를 내었다. 오히려 광포하게 했다. "죽으믄 죽었지!" 강포수는 지금 귀녀는 다른 사내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 을 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심장이 부서지는 것 같은 질투가 치솟 았다. "죽으믄 죽었지!" 외치며 달려들어 귀녀를 가랑잎더미 위에 쓰러뜨린다. "강포수! 잠시만 기 다리소." "안 된다!" "나 말 들을게 잠시만." 귀녀는 우람스런 사나이의 몸을 떠민다. "나 말 들을 기니. 이 산중에서 어딜 달아나겄소? 나도 다 생각이 있인께 조금만 참았다가 내 얘기 들으소." 딴은 그렇다. 떠밀리면서도 귀녀는 따라왔었다. 강포수는 처음부터 여자에게서 욕심만 채우자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귀녀를 놓아주 는데 강포수는 수백 리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온 황소같이 숨을 몰아쉬었 다. 귀녀는 일어나 두 무릎을 모으고 깍지낀 손을 얹었다. "잠시 생각해보 고..." 귀녀는 돌을 하나하나 쌓아서 방축을 만드는 것처럼 사태를 앞에서 부터 뒤까지 생각해본다. 귀녀의 생각은 암팡지고 민첩하게 돌아간다. 어차 피 버린 몸이다. 지아비가 있어 정ㅇ조를 지켜야 할 처지도 아니다. 칠성이 든 강포수든 누구이든 원하는 것은 남자의 씨가 아닌가. 일이 귀찮게 된 것만은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강포수는 을판 살판 덤비니 별 뾰족한 방도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무신 핑계라도 대고 칠성이를 따부리까. 그럴 수는 없을기다.일은 벌이고 말았이니. 그라믄 후일 강포수는 어떻게 하노. 버젓이 내가 최참판 댁 귀한 독자 어미로 들앉고 보믄 설마 이곳에 나를 끌고 와서 욕보인 일 을 발설하기야 할라꼬. 칠성이보다 강포수가 다루기가 쉽지. 미련하고 눈치 없고...그때는 그때 도리가 있겄지.' 판단이 후딱후딱 지나갔다. 따지고 보면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하고 분명하게 행동하지 못한 은 귀녀의 잘못이다. 처음은 그 망측한 물건 때문에 꼬리를 잡혔고 다음은 강 포수 혼자 몸이 달아하는 게 재미있었다. 셈속으로만 대하는 칠성이나 거 들떠보지조차 않는 최치수나 심지어 평산이까지, 마음만은 도도했던 귀녀 의 자신을 그네들은 꺾었다. 여자로서 용모에 자신이 있는 귀녀로서는 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런 지경에서 엉기엉기 달라붙은 강포수가 관 심은 없으면서 귀녀에게 한가닥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좋소." 귀녀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자 강포수는 다시 떨기 시작했다. "이리 된 바에야 할 수 없지. 강포수가 날 곱게 돌리보내줄 리도 없고." 귀녀는 노름꾼같이 말했다. "하나 다짐은 해야겄소. 이 일ㅇ이 탄로되믄 끝 장나는 줄 아시오." 강포수는 전후 생각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귀녀가 응 해온 것만 기뻐서 하늘로 둥둥 떠가는 것 같았고 오싹해지도록 피가 끓었 다. 귀중한 수중의 보물을 어찌해야 좋을지 강아지처럼 킹킹거리며 부처림, 신령님, 산신령을 대하듯 경건하며 수줍기가 마치 신방에 든 순진한 신랑 같았다. 가랑잎 위에 제 저고리를 벗어 깔고 여자의 몸을 싸안는 그것은 눈물겹도록 지순한 광경이었다. 이미 남자를 알아버린 귀녀는 강포수도 체 면 없는 칠성이 같은 줄 알았다. 귀녀 편에 도리어 수치심이 없었다. 자포 적인 개방의 태세였다. 귀녀는 강포수가 칠성이와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 나하고 살자, 나하고," 귀녀는 꿈결처럼 강포수의 목소리를 들었다. 산바람은 싸늘했으나 몸에서 는 땀이 흘렀다. 이지러져서 반쪽도 안 되는 달은 여전히 얼어붙은 것처럼 반 공중에 떠 있었다. 후둑후둑 나뭇잎이 떨어진다. 가지에 남은 뭇잎도 바 람에 바스락거렸다. 귀녀는 동침의 비밀, 쾌락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와 그리 싫었이까? 구역질이 날 만큼 싫었는데, 칠성이 그놈! 그래서 애기가 안 생깄이까.' 이지러진 달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헤어지면서 "주막에나 가서 자소." 귀녀는 일부러 성난 척하며 말했다. "감기 들겄다." 따라오며 강포수가 말했다. "이리 따라오믄 우짤 기요! 저어리, 저쪽으로 돌아가소!" "그, 그러께. 감 기들믄," 다음, 다음날 최치수는 무슨 심산인지 벌을 주기는커녕 또다시 수 동이를 데리고 강포수와 함께 산을 향해 떠났다. 21장 운봉의 명인들 봉순이는 누워서 발뒤꿈치로 방바닥을 쿵쿵 굴러본다. 그래도 쓸쓸하고심 심하다. 나직한 천장은 따분하고 찌뿌둥한 하늘 같은 생각이 든다. 천장이 딱 갈라지면서 해가 나와주었으 면 싶고 구름이 춤을 추었으면 싶고 이산 저산 날아 다니는 노랑새가 날들 었으면 싶고 하얀 연이 떠내려왔으면 싶다. '뵈기 싫어! 뵈기 싫대도! 봉순이 기집앤 가란 말이야! 촛대! 까다구!' 조 금 전에 삼월이 손목을 잡고서 발을 구르고 주먹을 휘두르며 악을 쓰던서 희가 아무래 도 야속해 견딜 수 없었다. 시죽시죽 웃으며 서 있는 길상이도 미워서 견 딜 수 없었다. '애기씨 머리를 짱구라 안 캅니까.' '짱구가 뭐야?' 봉순이는 반반한 제 이마에 주먹을 갖다 대면서 '이렇게, 이렇게 볼가져서 나온 이마를 보고 짱구라 한다 안 캅니까.'했던 것이 그만 서희 비위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넌 촛대야! 촛대란 말이야! 깍 다구야! 깍다구란 말이야! 개똥네가 그러던걸? 촛대야! 깍다구야!' 서희에게뿐만 아니라 봉순이는 삼월이에게도 야단을 맞았다. '나도 개똥어 매가 그래서 그랬는데...'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봉순이는 고쟁이 밑의 작은 버선발로 다시 방바닥을 찬다. "제집아가, 못 일어나겄나!" 일손을 늦추지 않고 봉순네가 나무란다. 해가 서편으로 움직 이는 탓일까, 겨울이 다가오는 때문일까, 장짓빛이 푸르스름하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오는고나." 김서방댁이 호들갑스럽게 턱을 까불며 방 문을 열고 얼굴을 디밀었다. "그러게요. 서리가 벌써 내맀다 카이." 역시 일손을 늦추지 않고 봉순네는 대꾸했다. 방안으로 들어온 김서방도 문풍지 한쪽을 쭉 찢는다. 치맛말기 속에 꼬기꼬기 싸서 찔러놓은 담배를 꺼내어 찢어낸 종이에 말아서 침을 바른다. "이러다가 날이 떠르르 치버지믄 짐장하니라고 얄 리가 날 긴데." 중얼거 리며 김서방댁은 부젓가락으로 화로 속의 불씨를 집어내어 담배를 붙문다. 손목이 나무껍질같이 앙상하다. 봉순이는 모로 누워서 곱친 두 팔 속에 얼 굴을 끼우고 김서방댁을 노려본다. 김서방댁은, "좀 쉬어감소 하라모. 사람죽어서 발 뻗쳐놨나?"하며 담배 연기를 뿜어낸 다. "일이란 미루어 나가믄 한이 있이야제요. 해놓고 놀지." "아따 손이 일하지, 입이 일하나?" 결국 자기를 상대하여 이야기를 하자 는 것이다. "무신 일이 있었소?" "내 얘기 좀 들어보지. 아 시상에 사위보고 외손자까지 본 나를 칠 까? 이 나이 해가지고 소나아한테 매맞고 살겄느냐 말이다." "김서방댁이 머 또 잘못했는가배요." "이사람아, 너거들은 멋이든지 나부 텀 잘못이라 쳐놓고, 선후사정도 모르믄서." "김서방이사 비단길 겉은 사람 이니께요." 김서방댁은 담배를 뻑뻑 피운다. "설령 내가 잘못했다 치자. 내가 질정이 없어서 그랬다 치자. 이 나이 가 지고 내가 매맞고 살겄나?" 그러나 김서방댁 얼굴에는 분해하는 빛이라곤 없었다. "거미가 오줌을 누 었는가 뽈개미가 쐈는가, 어짓밤 말이다, 하도 등이 근지러버서 좀 긁어달 라 캤더마는," 봉순네는 피식 웃는다. "웃일 기이 아니라고." "그 암된 김서방이 학을 뗐겄소." "시상에 돌아누운 채 꿈쩍을 해양지? 그 것만이라믄 나도 가만히 있었일 기라. 우짜다가 내 발이 닿았던가배. 발을 탁 걷어차지 않겄나 응? 그래 일어났지. 등잔불을 켜놓고 쫀쫀히 시작했구 마. 내 계란 겉은 발이 우째서 그러요! 내가 문딩이가! 자식 셋은 지리산어 느 중놈이 맨들었나! 함서 퍼부었지." 김서방댁의 말은 좀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을 까집고 노려보으나 김서방대긍ㄴ 제 말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봉순이는 천 장을 본다. 누리끼리하게 그을은 천장에는 파리똥이 붙어 있었다. 파리똥은 기어가는 벌레 같았다. 봉순이는 눈을 좁혔다 벌렸다 하며 파리똥이 벌레 가 아닌가, 골똘하게 쳐다본다. 까만 점은 스멀스멀 기어다닌다. 시력을 모 으면 모을수록 눈이 맵고 눈물이 나는데 벌레임에 틀림이 없을 것란 생각 이 든다. 그때 읍내에 갈 적에 나룻배를 탔을 적에, 나룻배랑 자신은 가만 히 있는데 강물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가 대숲이 가고 있다는 생 각을 했다. 초가지붕들이, 산들이 구름이 바삐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와 비슷한 착각에서 봉순이는 눈을 좁혔다 벌렸다 하며 눈이 매운 것 도 참으며 이미 벌레로 생각해버린 천장의 파리똥을 열심히 쳐다다. "허리뻬가 굳었나! 정 못 일어나겄나!" 봉순네가 자를 들고 봉순의 종아리 를 친다. "아얏!" 말허리를 꺾인 김서방댁이 "내비나 두어라. 아아들이 다 그렇지. 시상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으," 다시 하던 말을 이어가려 하는데 발딱 일어나 앉은 봉순이 "내가 우째서 깍다구요?" 김서방댁 옆에 무릎을 바싹 대며 따진다. "뭐라고?" "내가 우째서 촛대요!" "무신 소리고?" "애길씰 짱구라 해놓고 날보고는 깍다구라고요? 나도 그라믄 개똥이어가 그러더라고 일러줄라요!" 김서방댁은 봉순이 말뜻을 알아차리고 개글개글 웃는다. "니가 하도 야불 아서 안 그랬나. 흐흐흐핫... 그래서 오만 발이나 성이 났고나, 으흐흐흣..." 봉순네가 싱긋이 웃는다. "밤낮 묵고 할 일이 없인께 남으 숭만 보고, 으 으으해해해 하는 거는 누구건데? 지 숭은 뒤에 차고 남으 숭은 앞에 차 네." 입술을 헤벌리고 침을 흘리는 개똥이 흉내를 간드러지게 낸다. "고년 입도 야물다." "와 욕하요! 개똥이어매가 키었소!" "이눔의 가시나! 어른한테 무신 악다구니고." 봉순네가 야단을 친다. "아이고 모르겄다." 김서방댁은 화도 내지 않고 시죽시죽 웃으며 그러나 말할 흥은 깨어진 듯 "나가볼라누마. 봉순이 무서바서." 김서방댁이 나가자 "기여바서 그라는데 어른한테 그라믄 못씬다." 봉순네는 더 이상 나무라지는 않았다. 봉순이는 쪼그리고 앉아서 여히 부 르튼 얼굴로 어미의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심심하다는 정 도가 아니라 화가 치미는 것이다. 누가 미운 것도 아니었고 촛대니 깍다구 니 하는 말에 비위가 틀어져서도 아니었다. 봉순이는 덮어놓고 화가 나는 것이다. 날개가 있어서 훨훨 날아간다면 화가 풀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옴마." "와." "이분 설에도 읍내 오광대 구겡 보내줄 기제?" "..." "옴마? 지난 설맨치로 길상이하고 오광대 구겡 갈 기다." "..." "월선이 아지매가 자리잡아서 맨 앞에서 구겡할 긴데." "시사니 겉은 소리 말고... 깃이 좀 내려앉았는가." 인두로 깃을 누르다가 봉순네는 자를 들고 깃이 앉은 자리를 재본다. "세 치 낙낙하믄 제자리에 앉힌 건데 와 처져 뵈꼬?" 혼자 중얼거렸다. "옴마아!" "..." "그라믄 설에는 우리 안 보내줄 기가?" "내일 말을 하믄 허세비가 웃는단 다." "허세비가 우찌 웃노?" 봉순이 발길질을 하여 가위를 차 내린다. "내일 모레 설이 오나! 와 이리 숨을 몰아쌌노! 일하는데 정신 산란하게." "구겡 보내준다 카믄 될 거 아니 가." "..." "그때 월선이아지매는 떡국도 끓이주고 콩엿도 사주고 화닥도 갖다주고, 그 떡국 참 맛나 든데. 우리집 떡국보다 맛나든데..." '월선이아지매가 있이야말이지... 생각해 보믄 요눔의 새끼들 땜에 일이 꼬인 거 아니가. 빌어묵을 강청댁, 그 제집이 나만 보믄 못잡아묵어서 응글응글하는 것도그 때문이제. 그는 그렇다 하고 월선이는 어디 갔이꼬? 추석에는 와서 어매 무덤의 풀이나 빌 긴가 싶었더마는, 고생은 안 하는가 모르겄다.' "옴마." "..." "옴마아." "정신 산란타 캤는데 니 질기 이럴 것가!" "치이." 저고리 안을 붙여나가는데 봉순네의 손은 날 듯 빨랐다. 바늘에 가득 찬 주름을 실 쪽으로 밀어내며 부챗살을 펴듯 쭉 펴서는 매듭을 짓고 실을 물어 끊는다. '그만 돌아올 거 아니가. 오믄 지 입 하나 못 묵겄나. 마 니께서도 돌봐주실 모앵이고, 객리 서 고생하느니보다, 안 할 말로 강청댁한테 얹히서 살믄 우떻노. 기왕지사 일은 그리 된 기 고. 없는 농사꾼이 두 가숙 거느린다는 기 남으 이목에 안됐기야 하겄마는 그것도 팔자 소관 아니가. 그러다가 씨라도 하나 떨어지믄 그거나 보고... 쯔쯔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집이 서방 얻어가지는 안했을 긴데, 강원도 삼장사 따라갔다 카지마는 누가 봤나? 제집이 우찌 그리 박복한고. 지 일 신 하나를...' 봉순이도 혼자 주절주절 지껄이고 있었다. "분 바르고 비단옷 입고 참 이삐든데 별당아씨맨치로 이삐든데, 노래도잘 부르고 참 노래도 잘 부르던데," "머라꼬?" "오광대 말이다. 옴마니는 오광대 구겡 안 했나?" "실이 노이 되도록 오광대 노래만 불러라. 그라믄 밥이 나오고 옷이 나올 기다." "나도 후제 크믄 비단 입고 분 바르고 노래 부를란다." "뭐라꼬?" 봉순네는 고개를 쳐들었다. 봉순이의 눈은 꿈꾸듯 몽롱했다. "후제 크믄 나도," "이년아! 그런 소리 또 해라! 윤디로 주둥이를 지지부릴 긴께!" "와? 그라믄 어떻노?" "신세가 번할 기다! 니 하나 바라고 산 에미 신세 도 번할 긴께!" "와? 그라믄 와?" 봉순이는 약을 올려주려고 일부러 따지고 든다. 기승을 부리던 봉순네는 그만 어리벙벙해 서 말을 못한다. 말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심 매우 당혹했다. 아이들 에 는 분 바르고 비단옷 입고 훨훨 타는 장작불에 비친 여광대의 모습은 활홀 하게 아름다웠을 것이다. 노름꾼 머슴들 장돌뱅이를 가릴 것 없이 청하기 만 하면 해우차를 받고 몸을 파는 여자라고 차마 알려줄 수 없는 일이다. 봉순네는 사당이건 광대이건, 창을 하든 재주를 부리든 계집이면 모두 몸 을 파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대개가 또 그러했었다. 탈놀음과 남창은 엄한 법식에 따라서 오랜 세월 피나는 수련을 한 광대들인데 따라서 나이도 지 긋했었고 그들은 자신의 업에 대하여 고집과 자부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 과 달리 법식도 없고 사장도 없고 닥치는 대로 잡동사니를 내용으로 하며 이마을 저마을 뜬구름같이 떠돌아 다니는 게 사당들인데 그네들은 굿거리 에서 매춘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여사당이 위주가 된다.여사당 에게는 거사라는 남편이 있고 이 거사는 계집의 시중을 드는 대신 벌어들 이는 해우차는 인솔자인 모갑에게 일부를 바치고 나머지로써 생활을 꾸려 가는, 말하자면 계집 팔아서 의식을 해결하는 사내였다. 그런 만큼 여사당 은 매춘부치고도 아주 비천하며 역시 뜨내기 신세인 매분구와 다를 바 없 는 창녀인 것이다. 당대의 명창들을 무색하게 했던 여광대 채선이는 여자 가 있어서 그의 이름이 한량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창극을 무 척 좋아했던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는 그간의 소식이야 봉순네가 알 까닭 이 없겠으나 설령 알았다 한들 농사꾼 계집이 되어 펼 날 없는 고생을 바 랐으면 바랐지 결코 딸이 광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단옷 입고 분 바르고," 봉순이 심통도 보통이 아니다. 약을 올려주려고 또 지껄이는데 참다못한 봉순네는 으이잉! 하며 아이의 머리통을 쥐어박는 다. "밖에 못 나가겄나!" 결국 울어야 끝장이 난다. 봉순이는 울음보를 터뜨릴 기회를 잡기나 한듯 울면서 밖으로 나간다. 봉순네는 저고리 안팎을 맞추어 시침을 두며 '빌어묵을, 속도 없는 짓을 내가 했지. 괜히 오광대 구겡은 보내가지고 자는 호랭이 건디리놓은 것 아니가. 그놈 길상이놈 탈바가지가 동티라이.' 봉순네는 움찔하며 놀란 다. 행여 봉순이 문밖에 서있다가 놀라는 자기를 보지나 않았을까 의심이 났던지 재빨리 문 쪽에 눈을 보내는 데 낯색이 변한 것이 역력하다. "외가 도 골육은 골육이니께, 가시나가 나믄서부텀," 눈앞이 아슴해지면서 일감이 잘 보이지 않는다. 봉순네의 조부는 운봉 사람이었다. 구례 순창도 그러하 거니와 특히 운봉에서 창극조의 명인들을 많이 낳았는데 명창 중의 명창이 요 창극의 중시조며 가왕이라 일컬어진 오만하고 괴벽스런 송홍록도 운봉 태생이다. 송홍록말고도 동생 송광록과 그의 아들 송우룡에 양학천등 이 있어 모두 동편의 거장들이었다. 봉순네의 조부도 한때는 알려졌던 광 대였으나 말로가 시원치 않았다. 봉순네의 기억에는 볼품없는 초라한 늙은 이, 중풍이 들어서 팔을 못 쓰게 된 늙은이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 나 그가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햇볕에 드 는 마루에 하부죽한 입술을 떨며 어린 손녀를 상대하여 곧잘 얘길 해주곤 했었다. '옛적에 권삼득이라는 명창이 있었는디, 그 사람은 상사람이 아녀, 향반의 자제니께로, 그러 니께 비가비구머잉. 그 양반이 유시적부텀 허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극 조에 미치니 부모는 수삼 그걸 버리라 권유혔든 기여. 아 생각혀보더라고? 양반 허는 일이간디? 그래도 듣질 않은게로 가문에 수치라 문중에서 모여 갖고 직이기로 의논이 됐던 기여. 그 양반도 죽기로 작정을 허고서 거적을 썼는디 마지막 가는 길에 하나 소청이 있노라 허드랑게. 그게 뭔고 허니 가조 일곡을 부르고 죽겄노라 허는 거 아니겄어? 기왕지사 직이기로 작은 혔으니 죽는 사람 소원 하나 못 풀어주랴 허락을 허고 모두 빙 둘러서 듣 는디 거적 밑에서 새나오는 가조 일곡이 그만 사람으 오만간장을 다 녹이 지 않았더라고? 울음바다가 됐당게로. 그래 하도 가긍허여 문중이 다시 의 논을 혔지야. 족보에서 활적하고 내쫓기로 혔다이. 참말이제, 장혀. 대장부 여. 목심을 버맀이믄 버맀지 창극은 안 버맀인게로. 말이 쉽지. 그런게로 천하 명창이 된 거 아니더라고?' 이 밖에도 조부는 괴팍하고 오만한 송홍록 못 지않게 괴팍하고 기상이 센 기생 맹렬이, 그들의 곡절 많았던 정사 얘기며, 굶주리며 헐벗으면서도 끈으로 상투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각고 끝에 명창 이 되었다는 염계달의 얘기며... '허 명창이 절로 되는 줄 아나벼? 어림없는 소리여. 명산대천에 가서 십 년 이십 년 피를 동우로 쏟아감서 목을 다듬는디, 그래가지고도 목을 못 얻은 사램이 인게 로 예삿일이간디? 참말이제 뻬를 깎고 피를 쏟고 났이야, 어떤 명창은 절 기둥을 안고 돌믄서 소리를 지르는디 제 목소리 터지는 거를 천둥이 떨어 진 줄 알고 까물어졌이야. 예삿일 아니랑게로.' 늙은이는 봉순네 철이 들기 전에 죽었다. 봉순네 부친은 뜻을 펴보지 못하고 병들어 중도에서 업을 폐 한 늙은이의 생애를 애석히 여겨 눈물을 글썽이곤 했었다. 비록 극의 길에 들어서지는 않았으나 소질은 불행한 늙은이보다 부친에게 더 있었던 모양 으로 이따금 목을 가다듬고 가조 일곡을 일창하는 모습을 봉순네는 여러번 보았으며 지금도 그 청담한 목청이 귀에 쟁쟁했다. 방에서 쫓겨난 봉순이는 저만큼 오는 길상을 보자 이미 눈물은 말랐는데 새삼스럽게 훌쩍 거린다. "와 그리 찔찔 울고 있노?" "울믄 와! 니가 무신 상관이고." "으응? 그라믄 울어라. 많이 울어라." 길상은 봉순이 옆을 휙 지나가버린다. 뭐라고 몇 마디 말을 걸어주었면 울음을 그칠 건데 싶었으나 길상은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서운하고 괘 씸했다. 더 울어볼까 싶었지만 억지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봉순잉는 마구간 앞에 갔다. 나귀 두 마리는 산으로 가고 없었으며 구간 이 텅 비어 있었다. 나머지 한 마리가 멍청한 눈을 하고 봉순이를 바라본 다. 봉순이는 마구간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쌉쌉한 마구간의 냄새가 풍겨 왔다. 나귀는 유리구슬 같은 눈을 꿈뻑꿈뻑했다. 갈기는 여름보다 빛깔이 짙고 윤이 났다. 나귀는 희유끄름하고 푸르뎅뎅한 것 같고 불그스름한 것 같기도 한 혓바닥을 내밀어 마른풀을 입속에 말아넣는다. 봉순이는 커란 콧구멍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나귀는 다시 혀를 내밀고 풀을 입속에 말아 넣더니 맷돌 갈 듯 으석으석 소리를 내며 씹는다. '아이 싫다! 저눔으 세빠닥, 뭐 같을꼬? 징그러바라!' 봉순이는 후딱 돌아 앉는다. 웬일인지 집안은 조용했다. 넓은 집안에 살던 사람들이 모조리 보 따리를 싸가지고 달아나버린 듯 소리가 없다. '간난할매가 죽었다!' 눈앞에 간난할멈의 쪼그라든 모습이 솟는다. 봉순이 는 눈을 부릅떴으나 간난할멈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한참 만 에 다시 강물에서 자맥질하는 사람들 모습같이 간난할멈의 얼굴이 솟아났 다. 파뿌리 같은 머리칼이 얼굴을 덮고 부스럼과 눈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이가 다 빠져버린 입을 반쯤 벌리며 간난할멈은 숨차했다. 봉순이는 무섬 증이 났다. 생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간난할멈이 무서워 견딜 수 없다. 길 상이 얘기해주던 지옥 생각이 났다. '지옥은 말이다. 팔열지옥이라고 여덟 곳이 있는데 말이다, 등활지옥서는 죄인끼리 원수가 돼서 서로 물어뜯고 뼈다귀만 남을 때까지 싸운단다. 그 라믄 옥졸이 철퇴를 가지고 와서 죄인들을 가루로 맨들고 괴기겉이 저미 고, 그래가지고 죽어부리믄 고만인데 바람이 한분 불어오믄 다시 살아나서 말이다. 또 물어뜯고, 그 지옥살이를 오백 년 동안을 하는데 이 세상에서 살생을 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 카더라. 다음은 흑승지옥인데, 여기서는 천 년을 산다 카는데 도끼로 찍고 벌겋게 달군 쇠줄로 쳐서 살을 찍어내고.' 절에서 자 랐으므로 길상은 지옥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죄인을 쇠절구통에 넣어서 쇠절 구공이로 찧는다는 둥, 쇠붙이로 된 사자 범 이리 독수리가 몰려와서 죄의 골수까지 먹어치운다는 둥, 죄인을 쇠꼬치에 끼워 불에 구우면 오장이 다 터져나온다는 둥, 봉순이는 무서움을 쫓으려고 처마끝을 올려다본다. 봄에 왔던 제비는 없고 제비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제비야 제비야 강남 제비 야." 맥없이 불러보지만 강남으로 벌써 떠난 제비가 있을 리 없다. 봉순이 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쫓아나간다. 마음속으로는 간난할멈에 대한, 지옥에 대한 무서움이 가득 차 있었으면서 '누가 애기씨한테 갈까봐? 치이, 안 갈 기다! 길상인 머심앤데 함께 놀라지, 누가 갈까바서, 삼월이가 코도 닦아주 고 얼굴도 닦아주고, 치이.' 언덕 아래 강물은 초겨울 햇빛을 받고 희미하 게 번득이고 있었다. 구름 없는 하늘은 한없이 높이높이 보였다. 타작마당 에 조무래기들이 놀고 말과 사람을 실은 나룻배는 강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마을로 내려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길상이 초당에 가 있을 것 은 생각이 들었다. 봉순이는 당산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돌층계위에서 내려다 본 초당에는 길상이 있는 기척이 없다. 뒤켠으로 돌아가 내려다보았지만 아궁이 쪽에도 길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누각 앞에 또출네가 우뚝 서 있었다. "또출네!" 그나마 반갑다 싶어 봉순이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로 다가가며 뒷짐을지 고 "머하요?" "나 말가?" 햇빛을 똑바로 노려보고 선 채 또출네는 이빨을 드러내며 흠 씬 웃는다. "기별 받을라고 중문까지 나왔구마." "무신 기별?" "아따 귀는 시집 보냈는갑다! 세상도 세상도 우찌 그리 무 서븐고? 백미 오백 섬을 부처님께 바치고 골짜기마다 등을 달았거마는, 천 년만년 영화를 빌었거마는 부처님도 눈이 멀고 신장님도 눈이 멀고 터줏대 감도 눈이 멀고 조상님도 눈이 멀었고나아!" 별안간 또출네는 손뼉을 치며 외친다. "벌떼겉이 포졸들이 오는고나아! 내 아들이 동학당 우두머리라꼬 요? 당치 않은 말씀 마오! 보소 나으리, 형방 나으리. 우리 아들 서울 갔소. 과거 보러 서울 갔소. 하모 진정이오! 아암 그렇고 말고. 수의사또 이몽룡 이 뉜지 아니요? 서문고개 목신님께 백일기도 디리서 얻은 금지옥엽 겉은 내 아들이란 말이요.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요, 날 어쩌고 가시랴요." 봉순 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우짜믄 그리 밤도 긴고. 추야장천 긴긴 밤에 임의 얼굴 보고지고. 옥 겉은 임의 얼굴, 달 겉은 임의 거동, 지리상사 보고지고. 동풍이 온화허니 임의 해포 불어온가. 반가울사 춘풍이요, 춘풍에 피는 꽃 은 웃난 듯 임의 얼굴, 저 꽃겉이 보고지고." 그러다가 또출네는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빨을 모두 드러내고 벌죽벌죽 웃으며 춤을 춘다. 간 밤에 어느 길목에서 도둑떼나 등짐장수 아니면 행실 나쁜 길손이 욕을 보 였는가, 찢어진 아랫도리 옷자락이 마구 흔들리고 퍼어렇게 멍이 든 허벅 지를 드러내며 또출네는 춤을 춘다. 어느덧 엷은 햇빛은 꼬리를 감추고 서편에는 놀이 타고 있었다. 나무들이 지껄이며 골짜기에서 내려온다. 22장 백의인들의 인식 근자에 와서 사이가 뜸했던 용이와 칠성이의 거리는 배추를 뽑던 날, 그 일이 있은 뒤 더 욱더 벌어졌다. 감정이 나빠졌을 뿐 아니라 한 마을에서 얼굴을 대하는 이 드물어졌다. 들일이 끝났고 겨울 준비도 별 것 아닌 한가한 철이어서 서로 어울려 술잔이나 나누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인데 용이는 못질을 한 월선의 주막을 본 뒤론 읍내 장에 가는 일은 물론 마을 주막에 도 출입하지 않아, 하기는 칠성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좀체 만나 는 일이 없었다. 용이는 거의 매일같이 까대기에 들어박혀 가마니를짜고 짚세기 를 삼고 연장 손질을 하며 날을 보내었다. 그는 골똘히 일 속에 정신을 묻 었다. 일에서 손을 놓고 우두커니 앉았는 시간을 몹시 두려워했다. 용이는 마을 친구들로부터 떠났을 뿐만 아니라 강청댁에게는 더 멀리 떠난 사람이 었다. 울고불고, 작은방으로 떠밀고 들어오는가 하면, 미친 듯 마을을 쏘다 니며 강청댁은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벌이곤 했는데 이제는 용이를 닮아 돌처럼 굳어졌다. 돌처럼 차게 변해버린 것이다. 말이 없었고 싸돌아다니던 마을길에서 그를 볼 수 없었으며 안방에 들어박혀 어쩌다가 버선볼을 대기도 하고 틀 위에 앉아보기도 했다. 가끔, 아주 가끔 제 머리를 와득와득 잡아뜯으며 우 는 일이 있었다. 꼭 한 번 장독으로 쫓아가서 독을 깬 일이 있었다. 제 머 리를 와득와득 뜯으며 울 적에 용이는 강청댁 옆에 와서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싸늘하게 갈라진 내외, 용이나 강청댁이 다 함께 변했으나 한 가지 강청댁에게 변하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임이네에 대한 증오심이다. 불길같이 타는 질투심이다. 어디서든지 임이네를 만나기만 하면 눈에 불을 켰고 마음속으로 그를 갈기갈기 물어뜯었다. "온 저 제집이 환장을 해도 한두 분 환장한 기이 아니네? 지아비 죽인 샐인죄인가, 조상 묏구덕을 판 불구대천인가, 아무래도 나를 못 잡아묵어서 저리 꼬치꼬치 마르는가배." 임이네는 헛웃음을 웃으며 남 앞에서 강청댁을 조롱했다. 은근한 쾌감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임이네는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는 않고 피해갔다. 마을 낙 들도 임이네 편역을 들어서 "임이네, 무당 불러서 살풀이를 하든가 해라. 하로 보고 말 사이도 아니고 한 이웃에서 어 디 할 짓까."하며 웃곤 했다. 강청댁은 전보다 더 살림을 모르게 됐는데 집안은 옛날보다 깨끗이 돈되 고, 그래서 도리어 냉기가 도는 것 같았다. 용이는 할 일이 없으면 부엌에서 식칼을 내와 숫돌에 갈았다. 말끔히 운 외양간을 다시 치우고 쇠죽은 연달아 쑤어서 쇠죽통이 비어 소가 배를 곯 는 일이 없었다. 소만은 이 집에서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고 살이 피둥피둥 쪄서 털결이 곱고 기름이 흘렀다. 용이는 가끔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갔 다. 산에 가면 그는 맥을 놓았다. 가랑잎을 긁어모아서 불을 지펴놓고 한없 이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용이 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사내자식이 떠난 계집을 왜 이리 잊지 못하는가 자신에게 화를 내보기도 했다. 마을에 강이 없고 길이 없었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랬더라면 나룻배에 월선이가 타 있을까, 길목을 월선이 우죽우죽 걸어올까 하는 생각도 일어나지는 않았을걸. 나룻배와 키 큰 버드나무가 우뚝우뚝 서 있는 길을 보면 항상 용이의 가슴은떨렸고 그곳에서 월선이 모습을 찾지 못했을 때 용이는 제 눈이 멀었으면 생각는 것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에 떨어지고 새들이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갈 때 용이는 빈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사램이 변할라 카믄 하로 아침에 변한다 카더마는 어디 시상에 이서방이 변하까? 저렇게만 변한다믄 보따리에 돈 싸가지고 댕기믄서 제발 바람 좀 피우소 안 카겄나? 잔손질을 해서 집안에 앵이가 돌게 해놓고 강청댁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네. 남편 덕에 호강을 하니 이자는 직성이 안 풀맀겄 나." "와 아니라요. 자식도 못 놓은 주제에 복이 넘고 처져서 밤낮 처자빠 져 있다 안 카요. 인물 좋겄다, 풍신 좋겄다, 그것만으로도 남편 복이 터졌 는데 처자빠져 있어도 입에 밥이 들어가니 농사꾼 제집치고 그런 상팔자가 어디 있겄소?" 사정을 훤히 다 알면서 일부러 빈정거려보는 것인데 눈치 없는 그들 중의 하나가 그 말들을 진담인 줄 알고 입을 삐쭉거렸다. "집에 앵이가 돌믄 머하겄소. 풍신 좋고 인물 좋으믄 머하겄소. 한지붕 밑에서 남 남으로 사는데 음식이사 묵기 싫으믄 두었다가 다시 묵지만 사람 싫은 거 사, 하모요, 사람 싫은 세상은 못 산다 캅디다. 쪽박을 차고 빌어묵어도," 다른 아낙들은 떼고 너 말이 맞다 맞다 하며 맞장구를 치면서 까르르 웃어 젖히는 것이었다. 밖의 인심 같은 것은 아랑곳 없는 강청댁은 우물가에서 이웃을 만나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물만 긷고 나면 온다간다 말없이 휑하니 가버렸으며 나중에는 숫제 밤에 아무도 없을 때를 골라 물을 길어 가게 되었다. 마을에서는 다시 소문이 퍼졌다. 시어머니 묏등의 잔디풀을 와득와득 뜯고 있더라는 둥, 한밤중에 개천가에 나와 우두커니 앉아서 혼 자 중얼중얼 씨부리고 있더라는 둥, 월선어미의 신이 강청댁한테 지폈다는 둥. 동짓달 초여드렛날은 용이 모친의 기일이다. 제사 장을 보기 위해 용이 망태를 메고 집을 나서려 했을 때 강청댁은 깔아놓은 멍석에 앉아서 제기 를 닦고 있었다. 강바람은 매웠다. 추위가 일찍 오는 모양이었다. 바람이 모래를 싣고 온다. 용이는 소매 끝으로 눈을 비비며 걷는다. 못질한 월선이 주막을 본 뒤 여러 달 만에 가보는 읍내 장길이다. 강둑에서 아이들이 연을 올리고 있었다. 바람이 구름을 다 날려버린 고 푸른 하늘에 하얀 소연이 둥둥 떠서 올라간다. 바람을 잘 잡아올리는 연은 높이, 하늘 높이 물레의 줄을 풀면서 올라간다. 사금파리 가루에 송진을 먹 여서 철사같이 질긴 연줄이 풀려나가는 소리, 바람소리, 물살이 이는 소리, 아이들의 눈은 흰 연을 따라 떠날 줄 모른다. 용이 나루터 쪽을 내려갔을 때 낚싯대를 걸쳐놓고 뱃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고 있던 한조가 "용이형님."하고 불렀다. "장에 가요?" "음. 뭐가 좀 물리나?" 용이는 다가가며 물었다. "허 참, 썩어빠진 배 물 퍼내기 바빠서, 요새 와 그리 볼 수가 없십니까." 그 말 대답은 없고 "내일이 어무니 기일인데," "하 참 장날 다음이라 잘 잡숫겄소." 용이는 나룻배가 하마 오나 물길 쪽을 바라본다. "돈만 있으믄 장날이고 머고 있나. 어디 가도 만수판이지." "개기는 우짤 기요?" "자반개기는 사야 안 하겄나?" "내 개기 사소." "에키! 미친놈, 제상에 민물개기 쓰는 법도 있나?" 한조는 껄걸 웃는다. 용이는 곰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넣는다. "이분 가슬에는 윤보형님이 안 오 셨는데 무신 사단이 생긴 거 아닌지 모르겄소." "그러세..." "설에도 안 오시믄 필유곡절이 있을 기요." "머 무신 일이 있을라고." "허 참 무신 일이 있다믄, 기일이나 알아야 제사나 지내주지." "실없는 소 리 마라. 사람으 멩이 그리 허술한가?" "모르지요. 죽을라카믄 파리 목심이 지요. 지나는 나그네한테 들었는데 외지는 말이 아니라 카네요. 상감을 지 키는 순검들은 모두 노랑머리에 눈까리 파아란, 도깨비 겉은 놈들인데 실 상 알고 보믄 상감은 볼모나 다름없다 그러데요. 나라는 곧 망하고 땅은 다 뺏길거라 함서, 이리 시수가 상그러븐데 전죄가 있는 윤보형님이 성하 겄소." "..." "의병들 속에 뛰어들어서 한판 날리고 있는지 모리겄소만. 얌잔하게 집이 나 하고 있었으믄 가슬에는 돌아왔일 거 아니요." "하기는 모르지. 그 성미에," "김훈장도 그러더마요. 동학 때는 역적질을 했다고 욕을 해쌌더마는 요새는 칭찬이 자자하더마요. 그래도 쓸모있는 놈 이라 의병들 속에 끼여들었을 기라 하심서, 효심이 지극한데 가슬에는 벌 초도 않는 것을 보아 비록 상놈이지마는 나라 일을 하고 있을 것이 틀없 다, 하기는 김훈장 그 양반도 한판 치고 싶은 생각이 꿀떡 겉은 모양인데," 한조는 씩 웃는다. 용이 읍내 장에 들어서려 했을 때 그의 눈은 어쩔 수 없이 월선의 주막으로 갔고 멈추어진 다리는 말뚝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집은 퇴락할 대로 퇴락하여 혼령을 빼앗긴 또출네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몇 달지간인데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저렇게 변할 수 을 까. 사람 없는 집에 가을이 왔다고 지붕을 갈았을 리도 없다. 모두 황금빛 지붕인데, 오목하 게 새 이엉을 갈아입고 겨울을 맞는데 월선의 주막은 회갈색의 지붕이 나 마 한귀퉁이 푹 꺼져서 여름이 오기 전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이엉을 갈아야겄다! 색히 이엉을 엮어서 치버지기 전에 이엉을 갈아야 다!' 별안간 떠오른 생각은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짚이 모자라믄 두만형님한 테 빌리지, 빌리믄 된다!' 지척에 월선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퇴 락한 집은 월선의 육신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붕에 이엉을 입혀주는 일은 월선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지는 것이다. 찢겨지는 것 같은 슬픔 속에 한가닥 따스한 충족 같은 기분이 돌았다. 겨우 발을떼놓는 다. '몹쓸 것!' 장은 한산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로 접어든 시기, 설 대목이 오기까지장 은 쓸쓸할 것이 다. 장타령하는 각설이떼들의 목청에는 힘이 없고 아들 만나러 서울 간던 방물장수 노인의 외침도 힘이 없고 물건들은 묵고 낡아서 땟국이 흘렀다. 그것들은 일찍 온 추위에 오종종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주막만 득실거렸다. 시래기국에 막걸리 한잔을 곁들여 추위를 풀고자 는 장사꾼들이 쉴새없이 들락거렸다. "이월 꽃바람에 중늙은이 얼어죽는다 하더마는 겨울도 문턱인데 와 이리 치버." "사람도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하믄 못씨는 기라. 치불라카믄 싹 치버야 기운이 나지." "아따 이 사람 동삼 삶아먹었나." 용이는 예년과 다름없이 제사 장을 보 아 망태 속에 넣었다. 마지막 향과 초를 사기 위해 잡화상 앞에 머물렀다. 장사가 꾸려주는 향과 초를 망태 속에 넣고 셈을 하려는데 옆에서 누가 그 의 옷소매를 잡앙당겼다. "구멘이네." 혀꼬부라진 소리가 들렸다. 용이 얼굴을 들고 힐끗 쳐다본다. 방물고를 펴 놓은 노파가 합죽한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아아." "생각이 나나?" "야." 눈까풀이 내려지고 얼굴 근육이 굳어진다. "그새 통 볼 수 없더마는, 그래 마음은 잡았나?" 노파는 그때보다 훨씬 의젓하고 친절했다. "영 얼굴이 못쓰게 됐네." 혀를 찬다. 용이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 월선이라는 여자 만나보았 나?" 말이 쫓아왔다. "어디서 만나겄소?" "음... 그라믄 영영 못 만났구나. 나는 한 분 만났는 데." "머라고요?" 후딱 돌아섰다. "그러니께 여러 달 전이구마." "어, 어디서 만났소?" "여기서, 여기 장바닥에서 만났지. 내가 자네 얘기를 했다." "..." "우찌나 울던지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하더라. 그래서 이 사람아 그렇게 정을 못 끊으믄 만나서 살지 그러나 했더마는 아무말 안 하고 울기만 하데. 그새 어디로갔 었더냐고 또 물 었구마. 멀리는 안갔다고 함서 이분에는 정말 먼 데 가기로 작정이 되어여 기 한분 와본 기라나?" "..." "행여 그 마을 사람을 만나서 소식이나 들을 긴가 싶어서 왔더니만 아무도 못 만내고 할매한테 소식을 듣게 됐다 함서 돈 세 푼을 주고 잘 기 시오 하고 갔다. 제집이 어질어빠지게 생깄더마." "어, 어디로 간다 합디까!" "그 말은 안 하고 아주 먼 데, 먼 데로만 간다 하더마. 우찌나 울던지 나도 절로 눈물이 나데." 켜졌던 불이 꺼지듯 용이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 그럼 잘 기시오! 할 매." 용이 허둥지둥 달아난다. "이, 이보시오! 이보소! 초값 안 주고 가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서 있던 장사꾼이 기겁을 하며 고함을 쳤다. "아, 아 그만 내가..." 돌아온 용이는 주머니를 끌러 돈을 찾는데 손이 떨고 있었다. 제사 장을 보아온 망태를 내려놓고 용이는 안절부절, 마당을 왔다갔다하는가 하면까 대기 에 들어가 연장들을 말짱 챙겨놨다가는 도로 집어넣고 제정신 아닌 사람같 았다. 강청댁은 떡쌀을 담그고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며 일하고 있었다. 예년 같으면 이웃아 낙들을 불러와서 거들어달라 해놓고 본인은 깔깔거리며 말참견에 더 열중 했던 강청댁이 그림자처럼 왔다갔다하며 여느때보다 정성을 많이 들이는 것 같았다. 용이는 이날 밤 한잠도 자지 않았다. 강청댁은 온종일 꿈지럭거 린 때문인지 잠이 깊이 든 눈치였다. 자정쯤 됐을까, 견디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워입고 용이는 방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 안방에서 자는 줄 알았던 강청댁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어디 가요!" "바람 쏘일라꼬." "이 치운 밤에," "답답해서 미치겄다." "안 될 기요! 어디 가는지 내가 알지." "어디 가믄 임자가 무슨 상관이가." "내가 알지, 알아! 임이네 그년 만나러 가는 걸 알지, 알어!" "뭐하고?" "여자의 원한은 오뉴월 서릴 내리게 한다는 말 모르요?" "내가 이녁 나무 에 매달리는 꼴 안 보고 죽을 줄 알았습디까?" 저 밑바닥 한없이 깊은 땅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것처럼 강청댁의 목소리는 음산하였다. 용이는 소 리를 내어 웃는다. 강청댁의 말은 용이를 노엽게 하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나섰다. 강청댁이 따라나선다. 용이는 호롱에다 불을 켜 들고 까대기로 간 다. 까대기 기둥에 박힌 못에다 호롱을 걸어놓고 뒤로 돌아간 용이는 짚 한 동을 메고 왔다. 그리고 까대기에 퍼질러앉더니 짚을 뽑아가며 이엉을 엮기 시작했다. 속저고리 속곳바람으로 따라나온 강청댁은 팔짱 끼고가만 히 남편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용이는 짚 한 줌을 뽑아놓고는 엮고 시 뽑 아놓고는 엮고 다시 뽑아놓고는 엮고. 호롱불에 비친 옆모습이, 손이 움직 일 때마다 앞뒤로 올라가고 내려오고 할 뿐 다물어진 입술이 열리지 않았 다. 바라보고 있는 강청댁이나 이엉을 엮는 용이나 서로가 다 땅에서 솟은 나무 같았다. 움직일 때는 바람을 탄 나무 같았다. 마당에 쌒아놓은 나뭇단 에서 떨어진 가랑잎이 구른다.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강청댁 은 벌벌 떨기 시작한다. 몸은 차츰 오그라든다. 작은 몸이, 작은 이, 가늘고 긴 목이 오그라든다. 찬바람은 사정없이 속곳가랑이 사이로, 짧은 속적삼 소매 사이로 스며든 다."방에 들어가거라. 나 아무데도 안 갈 기다." 용이는 입술이 떨어졌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강청댁은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한참 후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 려왔다. 이튿날 밤, 내외는 목욕재계하고 제상을 차렸다. 한지를 깐 제상에 괸 제찬은 조촐했다. 지방을 모셔놓고 의관을 차려입은 용이 분향을 하고 재배한 뒤 자리에 꿇어앉았다. 소복한 강청댁이 술을 따라 내미는 잔을 두 손으로 받은 용이는 모사에 세 번 따르고 술잔을 강청댁에게 넘긴다. 강청 댁이 술잔을 제상 위에 올려놓고 정저하는 동안 용이 다시 재배한다.축 문을 읽고 강청댁이 두 번째 잔을 올리고 종헌한 뒤 첨작하고 나서 강댁은 메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메에다 수저를 꽂는다. 용이와 강청댁은 제상 밑에 오랫동안 엎드려 있었다. 강청댁의 작은 깨가 물결쳤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나 전신으로 울고 있었다. 제상에는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새벽은 아직 멀었는기 첫닭 우는 소리는 벌써 났는데 마 을의 밤은 무겁고 조용했다. '어무니, 어무니, 이녁보고 가르키감서 데꼬 살 라고 생시 말심하싰는데 자식도 없는 이 내 팔자 우찌 했이믄 좋겄습니 까.' 지방과 축문을 불사르고 제수를 물릴 것도 잊은 두 내외는 양켠으로 갈져 앉아서 서로들 멀거니 바라본다. 향도 꺼지고 방안에는 향내만 감돌았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나 있었다. 강청댁은 제찬을 나누려고 함지를 이고마 을로 나섰다. 개가 짖었다 두만네의 개가 먼저 짖었다. "성님! 두만네성님!" 두만네 삽짝 앞에서 문을 흔든다. 개는 미친 듯 짖어댄다. "누고오" 잠에 취한 두만네 목소리, 방에 불이 켜졌다. 강청댁이 문을 떠밀고 마당에 들어서자 냄새 를 맡은 개가 졸래졸래 따라오면서 짖는 것을 멈추었다. 방문을 열고 마에 나온 두만네가 말했다. "제사 모싰나?" "야." 마루에 함지를 내리자 두만네는 부엌에서 그릇을 가 져왔다. 설기 한귀퉁이를 뜯어버리 고 시 한귀퉁이를 뜯어 맛을 본다. "간 이 맞네."부실거리는 바깥 기척에 영만이 옴마 하며 기어나왔다. 두만네는 웃었다. 무안해진 영만이 히이잉 하고 혀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시끄럽다, 시잇! 깰라."두만네는 탕수 그릇을 기울여 아이에게 국물을 마시게 한 뒤 떡 한쪽을 떼어준다."혼자서 짭찔하게 장만했네. 아닌게아니라 너거 집에 제사 때가 됐을 긴데 하구 생각은 했다마는 오라는 말도 없고 해서 거들어 주지도 못했고나. 울었나? 눈이 와 그리 부었노?""논이 나서 좀 울었소." " 울기는 와 우노. 사람 사는 기이 다 그런 긴데 섭하게 생각지 마라."하고 두만네는 "보소, 보소, 두만아배요, 일어나시서 제삿밥 잡사보소." 아이들 듣지 않게 소곤거리며 음식을 방안으로 디밀어넣는다. 강청댁이 나서려 하 자 "보래." 하며 두만네가 불러세웠다. "제사 음식 몇 집 돌맀노?" "여기가 첨이요." "한참 거리겄네." "걸리겄요." "날씨도 고추겉이 매버서 얼겄구나." "..." "그런데 말이다. 이런 말 하믄 니 가 우찌 생각할 긴고 모르겄다마는 임이네 빼놓지 마라이?" "..." "아무리 틀어져도 음식 가지고 그러믄 안 되네라." "...""이웃사촌이더라고, 하로 보고 말 것까. 강청댁 니도 좀 지나친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더라." "..." "눈이 등잔등 겉은 가장 있고 자식 있는 제집이 무신 그런 간 큰 생각을하 겄노. 풀어부리 라.""알겄소!" 강청댁은 성이 나서 돌아섰다. 다음에는 함지를 인 강청댁이 편산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사람 기척에 작은방 문이 덜커덩 열렸다. "제삿 밥 가지고 왔소." 함안댁은 문 가까이 호롱불을 내놓고 웃었다. 무섭게 여윈 얼굴, 밤바람은 찬데 그의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앉아 서 얻어먹기 차마 미안하네." "얼굴이 영 말이 아니요." "뭐 노상 그렇지." 강청댁은 마을에 제사 음식을 다 나누고 맨 마지막에 임이네 마당으로들어 섰다. 사방은 어둠이 좀 겉혀지기 시작했다. 임이네는 그릇을 비우면서 잘 지내보자는 시늉으로 이말 저말 걸어왔으나 강청댁은 입 한번 떼지 않고 함지에 빈 그릇을 착착 담아서 돌아섰다."빌어묵을 년, 그럴라 카믄 머할라 꼬 음식은 가지오노. 내사 비상섞었을까 무섭네." 임이네는 침을 뱉으면서 도 떡 한귀퉁이를 뚝 잘라서 입이 미어지게 먹는다. 제 3편 종말과 발아 1장 작은 춘사 조반을 지어내고 아궁이 깊숙이 가욋불을 지핀 데다 화로까지 들여놓은 방안은 후텁했다. 종자로 쓸 옥수수 조 수수 따위, 씨앗주머니가 올망졸망 서까래에 매달려있는데 아랫목에 쌓아둔 더미 속에서 메주 뜨기 냄새가 코 를 찌른다. 명주필을 풀어놓고 마름질을 하던 함안댁은 숨을 모으더니 기 어이 잔기침을 한다.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님 그것도 고 집이요” 실을 물어 끊으며 두만네가 말했다. “고집이 아니면 어쩌겠” 하다가 다시 괴로운 기침을 한다. 두만네는 방문을 밀고 밖을 내다본다. “이 제집아야, 할무니 머라 안 카시나?”선이는 보리방아를 찧고 있었 다. “야?”“할머니가 뒤보실란갑다. 어 들어가봐라” 선이는 절굿공이를 놓고 늙은이 방으로 급히 들어간다. 방문을 닫은 두 네는 일감을 잡으면서 “그라지 말고 읍내 나가시서 약국한테 진맥 한분 해보는 기이 좋겄소. ”“...” “첫째, 사람이 살아야제요. 강산이 내 거라도 내 눈하나 없이믄 고만인 데피를 쏟아감서 베만 짜믄 우짤 깁니까”“야무네가 그러든가?” “야, 피를 쏟고 까무라쳤다믄서요. 마침 야무네가 갔이니께, 그란 했이 믄큰일날 뿐 안 했겄소?”“아무한테 말하지 말라 했는데 입이 경해서” “그런 기이 아니고 일 때문에 성님 부르러 갈라 칸께, 일을 하시겠느냐 캄서, 머 지도 걱정이 돼서 한말이 겠지요. 이웃사촌 이더라고 우리도 알기 는 알아야 안 하겠십니까. 모리는 기이 우리 불찰이지요.” “...”“웃마을에 일을 낼까 싶었더마는 가보니께 그냥 길쌈이 하고 기 시길래,”“늘 신세를 지면서 큰일때마다 보조는커녕 삯을 받고 일을 하니 자네 볼 낯이 없네”“별말심을 다 하시오. 그런 걱정은 마시고 이분에는 일 안 하신 셈치고 약첩이나 잡수이소” “끼니 잇기도 어려운대 약은 무슨....아이가 보기보다 품을 많이 잡네.” 함안댁은 선이 저고리의 품을 재어보며 두만네의 말을 회피한다. “가시나 가 벌써부터 가심이 생기서 안 그렇소.”“열다섯이면 가슴 생길 때도 됐 지. 남의 집에 보내기 꼭 알맞는 나이다. ”“치아부리고 나믄 한시름 놓겠 지마는, 개혼이라서 일 두서도 모리겠고 남한테 욕이나 안 묵을란지 모르 겄소.”“별여놓기 탓이지. 번다하게 할 것 있나. 아직은 날도 넉넉하니 ” “하기사... 그라고 또, 상막은 우리집에 없지마는 참판님댁의 수모님 거 도 안했는데 혼사하기가 우째 면구스럽기도 하고.” “법으로 치자면 영만이가 양자 간 셈인데 자네 집하고 상관이 있을란 가, 글쎄.... 뭐 범절 차리는 집안도 아니겠고 형편대로 하는 거지 “그렇기는 하요마는 상사람 이라도 지킬 거는 지키야 안 하겠십니까.”범절 차리는 집안도 아니라는 말이 마음에 거슬렸다. ‘사램이 다 좋은데, 이 지경 돼가지고도 상사람 하 시하는 버릇만은 못 고치는가. “어쨌거나 참 세월이 유수 겉소. 내 시집오 던 날이 어제그제 겉거마는...묵으나 굶으나 못’가리쳤다는 소리만은 듣지 말아알 긴데 걱정이요.”“글쎄, 혼수 장만한 걸 보아서 시모 될 사람이 예 사 야문 사람 아닌 것 같더군”“하모요.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고, 시모 될 사람뿐만 아니라 집안의 내림이 본시 그런갑십디다. ” “살림은 따숩다더구먼.”“야, 장배도 부리고 하니께 단단할 깁니다. ” “아이가 심성이 고와서 웬만하면 잘살 게다. ”“살아봐야 잘사는가 안 하겠소.”“하긴 그렇지. 시집가고 장가드는 날 안 좋으려니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살아봐야..”함안댁은 가위질을 하면서 “나도 시집을 적에도 다 혼인 잘한다고들 했지.”그러나 함안댁은 한숨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땀을 흘리면 서도 아랫목 따뜻한 곳으로 옮겨 앉는다. “치혼사 한다 그랬겠지요.” “그 양반도 세상을 잘못 만나 그렇지, 뭣한 시절이면 중인 집안에 혼살 했겠나.”“...” “가문 뜯어먹고 살더라고, 어려서는 외가 것 먹고 성례 후엔 처가것 고 늙으면 사돈댁 것 먹는다 안 하든가?” “성님도 짓덕이사 많이 타가지고 안 왔습니까?”“글쎄... 친정 살림, 그 거 다 허한 거라네”“그래도 잘만 간수했이믄” “새발에 핀데 말할것도 없다.”“우리네사 제우답이지 우리거는 아니지 마는 이녁 거만 있이믄 멋이 어렵겠소”“이 사람아 그런 소리 말게. 그 양반이 상사람들겉이 농살 짓겠나.?”“엎어놓고 매로 때리믄 맞지 우짜겠 습니까”두만네의 어세는 신랄했고 함안댁은 얼굴에 노기를 뜬다. “맞을 사람이 따로 있지”“안 배운 일을 하기는 어렵겠지마는 술을 과 하고 손장난이 과도하니께 성님이 이 고생 아니겠소” “배우지 못해 일을 못하시나.? 속 모르는 말 말게. 술이 과하고 그렇로 소니, 용이 못된 이무기가 물속에서 광을 칙더라고... 때못 만난 한탄을 어 쩔꼬?”함안댁 눈에 눈물이 글썽 돈다. “성님, 이런다고 섭하게 생각지는 마소. 하 보기가 딱해서, 못 오르는나 무는 치다보지도 말라 했는데 지금 벼슬길을 바랐겠소? 김훈장은 남들겉이 농사짓고 하거마는 아무도 그 양반을 양반 아니라 생각는 사람은 없소. 강 산이 내 거라도 내 눈 하나 없이믄 고만인데 성님겉이 뻬가 가루가 되게, 그러다가 여차하시믄 우짤랍니까.”“명은 하늘에 달린 거구, 지아비 섬기 는 지어미의 도리를 잊어 쓰겠나. 아무나 병이 들었기”로소니 행세하는 집안의 여자가 제 먹을 약 제 손으로 지어오는 법은 없느니라. ”뚫고 들 어갈 여지없이 함안댁은 잘라 말한 뒤 입술을 꾹 다물었다. 깻이파리 같은 좁은 얼굴은 더없이 쌀쌀해 보였으며 험한 일에 못이 박히고 뼈마디가 아 오른 손은 노여움을 참는지 떨고 있었다. 본시 남에게 싫은 말하기를 좋하 지 않는 두만네의 공연한 말을 했다 싶어 뉘우친다. ‘딱하기도 하다’미운생각이 들었으나 ‘하기사 논이 나겄지. 하시하는 상것들 품삯을 들라카이. 너무 양반이라 고유시를 해서 그거 한 가지가 벵인데 배울 기이 많고 본뵈기 될 만한 사 람 아닌가. 남사 머라 카든지 이녁 가장은 하늘이니께.’ 두만네는 일손을 놓고 밖으로 나갔다. “선아, 저녁 안 할라나? 쌀 한 뚜 벙 더 넣고 밥 좀 보더랍게 해라 ”“야.” “할무이 미음 디맀나?”“디맀심다. ” 두만네는 작은 모판을 들고 들어왔다. 방바닥에 놓으면서 “성님 시장 헐 긴데 이거 잡숫고 하소 ”“뭣인데?” 함안댁도 두만네에게는 옹글진 마음을 애써 푸는 듯 아무렇지 않게 물 다. 목소리는 고르지 못했으나. “배추뿌린대 삶아서 콩고물을 묻혔소. 묵을 만하요.”“여태 그게 있었 나?”“독 안에 감차아둔 것을 아침에 밥위에 얹어서 쪘다마는, 새끼들이 클라꼬 그라는가 우찌 묵을라 카든지.” 두 아낙은 일감을 밀쳐놓고 삶은 배추뿌리를 먹는다. 말랑하고 향긋한 새가 나며, 쌉쌀한 맛을 혀 끝에 느끼며, 입가에 콩고물을 묻혀가며 먹는 다. “우째 올해는 추위가 일찍 오는 것 같소.”“혼인날을 받아서 마음이 조급하니 그렇지.”“그런지 모르겠소.” 하 는데 마당에서“치버라. 아마도 이집 아랫묵은 떠떳할 기다. ” 큰 목청의 막딸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바람에 굳어진 땅을 자박자박 밟 는 발소리도 들려온다. 두만네 얼굴에 낭패한 빛이 돈다. “얼음장 겉은 과 부 궁둥이 좀 녹히야겄소, 성님.”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덜커덕 열린다. “아아니”함안댁을 본 막딸네는 머쓱해져서 엉거주춤 서버린다. “코 벤 죄인도 아니겠고 내가 못 들어간 건 머꼬?”방문을 덜커덩 닫고 막딸네는 팔짱을 끼며 두만네 옆애 쭈그리고 앉는다. 함안댁은 먹던 것을 그만두고 입가에 묻은 콩고물을 닦는다. 수건을 끌어당겨 손도 깨끗이 은 뒤 막딸네는 거들떠보지 않고 하던 일감을 손에 들었다. “와, 더 안 잡숫고?”“많이 먹었네 ” “막딸네 니 좀 묵어볼라나?”두만네는 모판을 막딸네 앞으로 밀어낸다. “이 귀한 기이 아즉 있었던가배요 ”막딸네는 냉큼 집어서 한입 베어문 다. “혼삿날을 받았다믄서요?” “음”함안댁을 힐끗 쳐다본 막딸네는 “쇤네야 본시 본 바 없고 배운 기이 없어서 ”“지랄한다. ” 두만네가 가로막듯이 말하며 눈을 껌벅인다. “마른자리 일이사 할 수 있 겠소? 히드렛일이라도 있으믄 시키소.”“아즉이사 머, 남은 날이 넉넉한께 급히 서둘일도 없다.”“와 그리 늘어지게 날을 받았소? 혼삿날은 예사로 안 칩겠는데.”“그러기 말이다. 날을 받다 본께, 그 집 제삿날이 있고 해 서 달도 가시야겠고 자연 그리 됐는갑더라. ” “가슬에 했으면 좋았을 긴데.”“와 아니라” 함안댁은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일만 하고 있었다. “소문 들은께 그 집 정물이 된 거는 내림이라 카는데 선이도 시집살이가 어려블 기요.”“그래 야 사램이 되제”했으나 두만네 얼굴은 유쾌해 뵈지는 않았다. “나 어지 화심리 갔다 왔소, 성님”“머하로” “큰굿 한다 캐서 구겡 안 갔십디까.”“한량이네.” “읍내 쌀개가 와서 하는데 낯짝하나 볼만하까 신이 올라야 말이 지요” “쌀개는 선무당인께, 얼굴 하나는 반반하지.” “기생도 인물보다 가무가 조하야 명기가 된다 카는데 맹물이요, 맹물. 끈만 만지믄서 사설이 돼 있이야제.” “오매! 야단났소! 오매!” 삽짝 밖에서부터 외치는 선이 목소리가 들려 온다. 두만네는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와 그러노” “거복 어무니 큰일났심더”일손을 멈춘 함안댁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 “말을 해야 알제, 무신 일고?”“저, 내, 내가 물을 긷고 있는데 거북이 가 보, 봉순이를 돌로 쳐서, 피가 피가, 보, 봉순이 주, 죽...”. 막딸네와 두만네가 동시에 일어섰다. 함안댁은 돌같이 굳어져서 움직일 줄모른다. “이거 큰일났고나.”두만네가 먼저 나섰다. “그예 일은 터지고 말았네. 내가 머라 캤노. 동네 가운데 못 둘 기라고 리 말했는데 애비 아들이 모두 개백정가, 사람 알기로, 응?” 막딸네도 삽 짝을 나서며 얼씨구나 싶었던지 악을 쓴다. 먹눈 모양으로 빛을 잃은 함안 댁의 작은 눈이 천장을 한번 보고 방문을 한 번 보고 방바닥을 쓸며 일거 리로 옮겨지자 그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다시 일을 시작했다. 골똘 히, 골똘히, 그는 일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직 이 세상에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날 듯 달려가는 선이를 따라 두만네는 뚱뚱한 몸을 뒤뚝거리며 쫓아가고막딸네는 팔짱을 낀 채 논둑길 을 걸어간다, 텅 비어 있는 타작마당에 “이놈아! 이놈아! 이놈아! ”서희 목소리만이 쨍쨍 울리고 있었다. 꽃신 을 벗어 든 서희가 장석같이 서 있는 거복이 무릎을 꽃신으로 때리는 것이 다. 거복이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두만네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 진 봉순이를 안아 일으킨다. “물, 물을 긷는데 보, 봉순이가 주, 죽었다 캄 서 아이들이 떠, 떠들믄서 도망을 치길래 와보니께 피, 피가.” 선이 숨을 헉헉거리며 지껄인다. “시끄럽다.! 어 가서 물 한 바가지 못 가지오겠나.”하자 선이 우물가로 달려가고 서희한테 꽃신으로 정강이를 얻어 맞으며 장석같이 서 있던 거복이 별안간 “와아-”울음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간다. 거복이 달아나는 서슬 에 나자빠진 서희도 “와아-” 하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옴마, 물!” 선이 물바가지를 내밀었다. 두만네는 한입 가득히 물을 머금고 봉순이 굴에 뿜는다. 그 짓을 두 번 했을때 봉순이 깨어났다. “봉순아! 아가!”“으으으...” “봉순아, 내가 보이나?”두만네 말을 따라 선이 “봉순아 내가 보이냐!”하며 소리를 지른다. “으으으.. .응.”“살았다! 봉순아!” 선이 소리질렀다. 서희는 발을 버둥거리며 귀청이 찢어질 만큼 악을 쓰 며울부짖고 있었다. “선아, 어 가서 애기씨 달래라. 그라고 업어라”.바가지의 물로 대강 얼 굴을 씻어낸 두만네는 치맛자락으로 닦아준다.“코피를 쏟았는가배.” 막딸네가 기웃이 들여다보았다. “아니 이마빡이 터졌구나. 쯔쯧... 계집 자식이 면상에 숭이 지믄 안 될 긴데.”“조금 찍혔고나. 잘 아물믄 숭이사 되겄나.”두만네는 애써 일이 크게 되지 않기를 바라듯 말했다. 봉순이는 비죽비죽 소리를 죽이며 울었다. 도망갔던 조무래기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아가며 모여들었다. “이 직일 눔들! 동네 가운데 두겄나! 네 이눔들! 당 을 지어가지고 좋은 뽄은 안 보고 개백정 겉은 그눈으 손 하는 짓만 따라 하고, 네 이놈들! 나무에 매달아가지고 오줌을 싸게 패야지!” 막딸네가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치고 선이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서 를 억지로 업으려고 애를 쓴다. “우리는 안 그랫소!”“봉순이가 상놈의 새끼라고 욕을 한께 거복이가 때렸소!”“봉순이보고 길상이 각시라 칸께요.” “아니요! 젖이 생깄는가 함서 가심을 만질라 칸께요.”“하하핫 하하 하...”조무래기들은 소리를 합쳐서 웃는다. “세상 다 돼 가는구나, 머리빡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에키! 이개눔 의자석들! 하다가 두만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웃는다. “아니요! 거북이가 김서 방 집의 씨감자 훔치내다가 들키서 맞았소. 그래서 봉순이한테 분풀이를 했소!”“네 이놈들! 이리 다 오니라! 도둑질하는 놈, 손목때기 놀린 놈, 쌍 소리 하는 놈, 다 잡아서 정갱일를 뿌질러 놓을란다.!” 막딸네가 주먹을 휘두르며 쫓아가자 거미알 같이 사방으로 흩어 지면서 무래기들은“나는 봉순이 안 때렸소!” “나는 씨감자 안 파묵었소!”“나는 쌍소리 안 했소!” 제가끔 발뺌을 하며 달아난다. 두만네는 봉순이를 안고 선이는 서희를 업고 꽃신도 찾아 들고 논둑길로 해서 최참판댁을 향해 걸어간다. “봉순네한테는 금지옥엽인데 뼈가 아프겄다. 이마빡에 숭이나 안졌으믄 좋겠는데, 여식아 면상에 숭이 지믄 안 될 긴데...”혼자 중얼거리며 두만네는 서편에 떨어 지려는 해를 가득히 안고간더, 서희도 선이 등에 업혀서 여전히 울음을 그 치지 않고 있었다. 최참판댁 대문 앞에까지 거의 다 왔을 때 봉순이는 “나 내리서 걸여갈라요.”안겨서 가는 게 부끄러웠던지 몸을 비비적거 렸다. 두만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함안댁은 일사불란, 그야말로 머리칼 하나 흔들리는 것 같지 않는 모습으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두만네가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양어깨가 한 번 흔들렸으나 그의 일손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까무라쳤던가배요. 코피를 쏟고.”비로소 일을 놓고 함안댁은 두만네를 올려다보았다. 일시에 땀구멍이 열려지는가 얼굴에 땀이 솟아나고 입술을 떨기 시작했다. 웃을 듯 말 듯, 그러더니 눈에 눈물이 돈다. “설마 죽었을 까 싶기는 했다마는 ”함안댁이 안심하는 것을 보자 새삼스럽게 화가 나는 모양이다. 두만네는 볼멘 목소리로 “참판님댁에서 그런 얄 리가 없었소. 봉순네는 울고불고, 코피만 터졌이 믄몰라도 이마빡이 찍혔이니 우짤까부냐고 함서, 볼때기도 아니고 이마 한가운데를 그래놨 니 어디 치워묵겄느냐 함서, 하기사 그럴 만도 하지요. 여식아아 이마에 숭 이 있이믄 팔자가 세다 안합디까. 시집보내기 어러불 긴께 에미 맘에 안 그러겠소? 둘도 안된 하나 자식을 금이야 옥이야 키웠는데 그러고 말고, 애기씨도 놀랬는지 머리가 펄펄 끓고”함안댁은 눈물을 거두고 본시처럼 일감을 잡으며 말이 없다. “성님 액운도 많소. 하눈님도 무심하시지.” 이날 밤에 거복이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밤도 역시 돌아오지 았고 사흘이 되는 날 점심때쯤 해서 눈이 푹 꺼진 꼴이 되어 거복이 뒤안 으로 숨어 들어왔다.그리고 부엌 뒷문을 넘어서 부엌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사람 기척에 기겁을 하며 뒷문 옆 흙벽에 몸을 바싹 붙인다. 흙벽에 걸어 둔 배추 시래기가 바람에 와삭거리며 거복이 얼굴에 와서 부딪치곤 한다. 목을 조금 뽑고 곁눈으로 부엌안을 살핀다. 한복이 물독을 열고 물을 떠 마시고 있었다. 거복이는 비죽이 웃는다. 문지방을 슬며시 걷어찬다. 물바가지를 든채 한복이 쳐다본다. 형을 본 그는 물바가지를 들고 부엌 닥을 쩔쩔매며 어쩔줄 모르다가 마당 쪽을 뒤돌아보고 나서 뒷문으로 살금 살금 다가왔다. “형아.” “어머이 가시나?”“응 ” “어디 기시노?”“작은방에 ” “베짜는 소리도 안나는데?”그냥 앉아서. “나 배고파 죽겠다. 밥 좀 주어”“굶었나?” “굶었다, 어서 밥이나 주어”한복이는 아까처럼 살금살금 걸어가서 저 한테는 무거운 솥뚜껑을 낑낑거리며 열어본다, 그러더니 거복에게 낙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밥밖에 없다. ” “그거라도 가져와. 배가 고파 죽겠는데, 빌어먹을!”한복이 한참 부엌바 닥에서 뱅뱅이를 돌다가 삶아놓은 보리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발견하고 거 복에게 손짓을 한다. 뒤꼍에 가 있으라는 시늉으로 밥 그룻에 삶은 보를 몇 주걱 떠놓고 먹다 둔 된장뚝배기 숟가락을 챙겨서 부엌 문지바에 놓고, 한복이 먼저 문지방을 넘어선 위 위꼍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복에게 하나씩 날아간다. 거복이는 미친 듯이 그것을 먹는다 “어디서 잤노?”“산에서 ” 거복이는 봉순이가 죽은 줄 알았다. 그래서 마을로 내려오지 못하고 산 서 이틀 밤을 잤던 것이다. 너무 배가 고파서 도토리를 주워 깨물어 먹고 손톱이 빠질 지경으로 흙을 헤쳐 나무뿌리를 파먹고 했으나 요기는 되지 못했다. 배가 고프고 추워서 미칠 지경, 더 이상 견딜수 없어 마을에 내려 왔다가 조무래기를 만났다. 봉순이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에 마음을 놓은 거복이는 집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역시 어머니가 무서웠다. 어지간히 허기 를 채운 거복이는 “어머니 머하시노?” 하고 다시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하신다. ” “와?”“...” 한복이 어린 눈에는 비난이 있었다. “어, 어, 어머니!” 별안간 뒤로 나자빠진 거복이 소리를 지른다. 언제 왔던지 함안댁이 뒤 서 멱살을 잡았던 것이다.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다, 다시는, 한번만 용서해주시오! ” “거복이는 멱살을 잡힌채 질질 끌려간다. 한복이도 울면서 따라 간다.” “한복아 너는 나가 놀아라.”“거복이를 방안에 끌어들인 함안댁은 문 고리를 걸었다.”“어, 어머니! 다, 다, 다시는 ” “거복아”“예, 예”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 죄가 아니고 내 죈 것 같다. ”낮은 목소리였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너하고 나하고 죽는 수밖에 없겠구 나. 죽어서 너는 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나는 복 많은 사람으로 태 어나야겠다,”“어머니이 ” “자아, 너랑 나랑 한끈에 목을 매고 죽자. 알겠느냐?”방안에서 거복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고 문밖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한복이 방문을 주먹으 로 치면서 “어머니! 죽지 마시오! 어머니!” 방안에서 발버둥을 치던 거복이 소리를 지른다. “한복아! 아, 아, 어버 지!”한복이는 맨발로 뛰어서 주막 쪽으로 달려간다. “아부지! 아부지!” 2장 늙은 보수파와 개화파 때늦은 겨울비가 치적치적 내리더니 그치기는 했다. 나룻배에서 내린 문 의원은 나귀도 하인도 없이 혼자 마을길을 들어섰다. 아직 얼음이 얼 지경 은 아니었고 대낮 했볕에 마을길은 질벅질벅 했다. 지게를 내동댕이쳐 놓 고 초동들이 둑에다 불을 놓고 있었다. 띠잔디는 축축할 텐데 바람에 말랐 는지 그럭저럭 타들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람 따라 연기는 방향을 옮 기곤 한다. 누더기를 주렁주렁 걸친 또출네가 나막신을 끌며 논둑길을 지 나간다. 문의원이 논둑길을 지나가는 또출네를 멀거니 바라보며 걸음을 잠 시 멈춘다. 누구네 집에서 비손을 했던지 떡 한덩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입을 가져가서 베어먹으며 가는데 여윈 개 한 마리가 졸래졸래 뒤따라간 다. 주렁주렁 걸친옷 중에서 옷자락 하나가 흘려내려 논둑길을 쓸며 마치 뱀처럼 나막신 뒷굽을 따라 끌려간다. 또출네 손바닥의 조밥 한덩이만 쳐 다보며 따라가던 여윈 개는 흐늘흐늘 끌려가는 옷자락을 밟고 나둥그러졌 다가 다시 일어나 침을 흘리며 꼬리를 치며 따라간다. 얼마를 가다가 뭐라 고 소리를 지르더니 또출네는 손바닥에 남은 떡을 내동댕이 치고 쏜살같이 달려간다. 마침내 굶주린 개는 너무 기뻐서 꼬리가 부러질 만큼 흔들어대 면서 떡 한 조각을 차지한다. 서리맞은 감도 이제는 다 따내고 나뭇잎 하 나 남은 것이 없는 감나무에 반가운 손님이 오겠다는 건지 까치가 와서 깍 깍거리다 날아간다. 김훈장 대문 앞에까지 간 문의원은 "여봐라." 하고 잔기침을 하자 이내 김훈장이 나타났다. "아아니 어찌된 일이시 오?" 문의원은 어리둥절해하며 김훈장을 쳐다본다. "몸이 편치 않으시다는 전 갈을 받고 왔는데."김훈장은 씁쓰레 웃는다. "실은 병자가 따로 있소. 수고스럽지마는 소야선생님께서 동행해주시야 소." "어디 말씀이요?"''저 김진사댁 며늘아긴데.'' 김훈장은 장죽을 휘젓고 앞서 걸으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전에 없이 김장 은 우울해보였다. 김진사댁 문전에 이르자 김훈장은 내인을 알리는 듯 큰 기침을 여러 번 했다. 안에서 겨우 기척이 났다. 김훈장은 대문을 들어섰고 마당에 이르렀다. ''아주머님, 소야선생께서 오셨소이다. ' 해놓고''오르십시오.'' 김훈장은 이곳 사랑에서 자기는 기다리겠노라 하고 물러난다. 얼마나 오 랫동안 불을 지피지 않았던지 사랑방은 얼음장 이었다. 김훈장은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담아 피워물고 방안을 돌아본다. 여름에 썩어서 무너진 장판지 사이로 흙바닥이 드러나 있고 찢어진 문종이 사이로 찬바이 사정없이 스며 들어온다. ''흠, 뭐니뭐니 하지만 무후가 가장 처참하군. 이렇게 한 집안이 문을 닫히다니...남은 사람이라곤 내가 있을 뿐인데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기막힐 노릇이다. 올해도 성사를 못 보고 넘어 가는군.''김훈장은 가을 추수를 끝내놓고 붙이가 몇사람 살고 있는 함양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역시 허행이었다. 다만 그는 부모도 없이 떠돌아 다니 는, 삼십이 다 된 십촌이 훨씬 넘는 김씨붙이가 한사람 조차 치르지 못한 불쌍한 노총각이라는 것이었다. ''명년에야말로 어떻게 해서라도 그 사람을 찾아보아야, 후사를 맡기지 못하고 내가 눈을 감는다면 지하에 계신 선조 들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는고. 집을 날리고 땅을 파는 한이 있더라...''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김훈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의원이 나오는 기척에 김훈장은 벌떡 일어서서 사랑을 나섰다. 차마 냉방에 문의원을 들어오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병세를 묻지도 않고 수고가 많았었다는 인사를 한 뒤 김훈장은 올 때처럼 장죽을 저으며 앞서 질척거르는 길을 내려간다, 자기집 앞에 당도했을 때 ''소찬이나마 점심이라도 함께 하시지 않겠소?''최참판댁에 가면 진수성 찬의 대접을 받을 것을 모르는 김훈장은 아니다. 권하는 성의를 받고 안 받고는 문의원의 자유나 예의를 지킴은 김훈장의 도리였다. 그것을 아는 의원은, ''예, 신셀 지겠소이다.'' 점심 준비를 하는 동안 사랑에 마주앉은 김훈장은 생각난 듯 입을 떼었 다. ''소야선생께서 김평산이 그자 아낙네에게 약을 지어 보내셨소?'' 문의원이 대답없이 빙그레 웃는다. ''거 괴연한 짓을 하시었소'' ''그렇잖아도 약첩을 돌려보내 왔더구먼요.''''그자가 제 약으로 지어 보 냈더라면 그 따위 호기는 부리지 않았을 게요.'''글쎄올시다.'' ''소야선생깨서는 어떻게 아시고?'''실은 일전에 다녀간 일이 있지 않았 소?'''예, 그 김평산이 아들놈 때문이 최참판댁 아기하고 침모딸이 ...'' ''예. 아기가 경풍을 일으켰지요. 그때 우연히 죽은 간난할멈의 조카며느 를 만났지요."''이평이 아낙네 말씀이오.?'' ''그렇소. 그래 그 사람이 김평산의 실인 얘기를 하더구먼요.''얘기를 듣 고 보니 병은 뇌짐이 아니겠소.''''허어, 그거 참.'' 김진사댁 며느리의 병에 대해서 의원한테 무슨 말이 있을 것을 참을성 게 기다리고 있던 김훈장은 남의 병명을 듣고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을 느낀다. ''나도 잘은 아는 바 없으나 그 실인이 요족하고.'' ''그, 그건 그렇소이다. 본받을 만한 아낙이오. 비록 지체는 떨어지마는 본바가 있었던지 그 망나니 한테는 오히려 과분한 여자지요.''''간난할멈 조카며느리 마음씀 이 고맙기도 했거니와 병이 병인 만큼 그냥 있을수도 없어서 약을 지어 보냈더미 그 옹졸한 위인이, 허 참.''''심화에서 난 병일 게 요.'' ''저대로 내버려두면 오래 살진 못하리?''"한데 김진사댁 며늘아기가." 결국 김훈장은 더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내었다. "글쎄올시다. 이헐다 할 병은 아닌 것 같고... 무엇에 심히 놀라지 않았는가 싶은데"."놀라다니?" ''물어도 대답이 없고..... 하여간에 좀더 두고 보아야겠소. 너무 심려할 은 없고,''"...?" "걱정 마시오 사람이란 병없이 살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소."마침 밥상이 들어왔다. 개다리소반에 깡보리밥 두 그릇, 된장국, 김치에 간장종지, 그이 전부였다. "드십시오.""달게 먹겠소이다." 두 사람은 말없이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김훈장은 본시 먹성이 좋았으 나문의원도 목에 걸 리는 깡보리밥을 마다 않고 그릇을 비웠다. 김훈장 호의에 대한 보답이 었던 것이다. 밥상을 물린 뒤 숭늉으로 입가심하는 김훈장 얼굴은 매우 만 족해 보였다. "아까도 이야기가 좀 났지마는 연작불생봉 이더라고 김평산 이 그자의 아들놈이 여간 말썽이 아니오. 도벽이 있어서 일전에도 동사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견이 많았으나 차마 마을에서 쫓아낼 수도 없고, 그 어미가 죽기를 작정하고 아들놈과 함께 목을 맨 모양인데 아비란 자가 달 려와서 아들놈 비행을 나무랄 생각은 않고 반죽음이 된 아낙을 까무치도록 때린 모양이오." "그 말은 들었소.""그런 자식이라면 아예 없는 편이 나을 듯도 싶소이다. 허나 생각하면 우리 집안 일도 낭패요." "....""김진사댁 사랑에서 생각한 일이오만 가만히 생각하니 무후같이 처 참한 일은 다시 없을 성싶소. 수재를 두어서 가학을 잇지는 못할망정 선영 받들 자손만은 있어야, 퇴락한 사랑을 바라보니 참으로 몰골이 써늘해지더 이다. ""아닌게 아니라 두 분 청상의 정황을 보니" "...""숨이 붙어 살아 있다 할 수는 있으나 송장과 진배없는 인생 아니겠 소. 뜰안 출입도 더러 하시고 해야 할 터인데 그분들은 죄인으로 자처하고 계시니 딱하오. 양반의 체통도 소중하기야 하겠으나 체통지키기 위해서 세 상에 태어난 것도 아닐 터인데.""어찌 체통이라고만 하시오. 사람의 도리지 요."''김생원께서는 듣기가 역겨울지 모르겠소만 시초의 도리가 지금 도리 로 지켜져 내려와 있질 못하오. 체통으로 변해버린 게지요. 그거 다 허상이 외다. 도리어 상민들이더 신실하게 도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 있지요. 제수가 산더미 같으면 뭘하소. 정한수 한 그릇에 망인에 대한 정희의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지 않지요. 하긴 어느 세월이든 본시의 것을 오래 지키는 쪽은 서민인가 하오. 지금 친일하면 삭발하고 양풍을 따라 의 관을 바꾼 사람들은 모두 양반들 아니겠소?''''제나라 백성 다스리는 대도 남의힘. 제 겨레를 치는 데도 남의 힘, 그럴때의 체통은 불관지산가본데, 허 참, 이야기가 빗나갔소이다.''잔뜩 찌푸리고 있는 김훈장은, "소야선생께서는 어찌 사팔눈으로만 세상을 보시오.''하고 쓴웃음을 띤 다. "사팔눈으로 보는 것은 피장파장인가 하오.''문의원은 허허 하고 웃는다. "그거는 그렇고, 듣자니까 서울서는 만민공동회라든가 관민공동회라든 가? 뭐 그런 것이 생겼다 하는데 대체 그것은 무엇이요? 말로는 고관대작 에서부터 아녀자 백정까지 한자라에 모여서 시국을 논했다 하는데 그게 사 실이오?'' "사실인가보오. 갑신변란 때 미국으로 달아난 서재필이란 사람이 돌아서 만든 독립협회라는 게 있지 않소. 그 단체에서 꾀한 일인 모양인데 이게 또 기승을 부다면 장차 왕실이 위태로워질 것인즉, 게다가 상감께서는 개 호당을 싫어하시는 터이라 그 왜 참의대신 조병식이 보부상들을 긁어모와 서 만든 황국협회, 그 단체에서 무리를 풀어서 만민공동회를 쳐부술려고 습격을 했다는 소식이오. 세상이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소이다." 허 그것 참 야릇한 일이오. 한쪽에는 아녀자에게 백정까지 끌어 들이거 한쪽에서는 보 부상들이니 이거 천민들이 세상을 만났구려.'세상을 만난게 아니라 반식자 와 권력자들의 고깃밥이 된 거지요.''그야말로 탁상에서 공론을 펴다가 짧 은 겨울해를 핑계삼아 문의원은 김훈장 사랑에서 몸을 일으켰다. 문의원이 최참판댁 언더막을 올라섰을 때 장작 한아름을 안고 초당 쪽로 올라가는 귀녀 뒷모습이 있었다. 초당 뒤안의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귀년는 바깥 기척을 살핀다. 등쪽 은누각이 있는 축대 였으므로 뒤안은 후미진 골목 같았다. 얼마 후 평산이 슬며시 나타났다. 들은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글세 설마 설엔 돌아오껬지""그렇기야 하겠지만 행여 지체가 되믄." 말하면서 귀녀는 침을 뱉았다. "산에서 얼어죽거나 호랑이 밥이 되었으 면 안성맞춤이겠다만, 헤헤헤...""누워서 떡을 묵으면 눈에 고물이 떨어진답 니다.""아무튼 아들만 낳아라. 아들만." "그랬이믄 오죽이나 좋을까.""일이란 잘 되려면 거꾸로 가도 되는 법, 일 이 척척 들어맞는 걸 보니."언제 왔는지 축대 위에서 또출네기 엉덩이를 추켜들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녀는 침을 퇴퇴 뱉으며, "추석에 왔으니 일은 잘된 편이지요."하는데 강포수의 텁석부리 얼굴이 눈앞에 보인다. "강포수 아인지, 그거사 삼신이나 알 일이지" "일이 이쯤 됐으니 다음 일을 생각해보아야겠는데, 칠성이놈보고는 말 아." "거기서나 조심하시오. 흥, 아이애비?""왜? 씨가 나빠 그러나?" "이만저만이게요?""그렇잖아도 낮에 만나서 얘기는 했지'" "얘기라뇨?""최치수가 지금은 출타중이니 귀녀를 만나지 말라 했지. 어차 피 그놈이 알기는 알게 되겠지만 어째 께림직하구먼." "...""그놈의 눈이 멀뚱멀뚱해 있는게 좀 걱정일세." 귀녀와 김평산의 눈이 마주친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서 다같이 살의를 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실뱀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거는 그렇고 어디 손 한번 잡아볼까?"히죽거리며 평산은 미끈하고 기름기가 돌아서 끈적거리 는 것 같은 귀녀의 손목을 잡는다. "왜 이러요!" "아따, 네가 뭐 숫처년가? 이제부터 최치수가 돌아오기까지 재미는 내가 봐야지. 내 닮은 자식 낳을 리도 없고 안 그런가?" "미쳤소?""너만 해도 그렇지. 이제는 사내 맛을 알았으니 몸이 달아 잠도 안 올 테니 말이세."귀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악을 쓰지 않았다. "그야 의논이 잘 되면, 기왕 버린 몸 아니겄소."한참 만에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귀녀의 말뜻을 평산은 안다. 아까본 살의와 관계되는 말이라는 것 을. "의논이 못 돌 리가 있나. 이제는 한 배를 탄, 말하자면 나는 사공이요 는 손님일세. 풍량을 만나지 않고 행선지까지 닿으려면 사공의 머리를 써 야잖겠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 그러니 일심동체가 돼야지." 김펑산은 징그렇게 웃으며 귀녀 가슴에 손 을 대려 하는데 엉덩이를 취켜들고 입을 함박만큼이나 벌리며 축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또출네가 캑캑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귀녀와 김평산이 얼 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한다. "빌어먹을 년! 십년은 감수했다.!" 얼굴을 치켜들고 또출네를 본 김평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욕설을 퍼붓 다. "내가 다 알지러. 헤헤헤..."미친 계집이 질정없이 지껄여대는 말인줄 뻔 히 알면서도 남녀는 섬뜩해지는 모양이었다. "어서 가소." 귀녀는 평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또출네는 여전히 캑캑거리며 웃다. 마치 송진엿을 고아서 바른 것 처럼 뻣뻣하게 굳어진 머리를 풀어해리고 밑을 내려다보며 웃는 얼굴은 함정에 빠진 먹이를 내려다보는 마귀의 얼굴 같았다. "행세하는 집의 며느리가 서방질을 해? 데키! 이 연놈들! 내가 다 알지러. 알고 말고. 청상의 불쌍한 과부가 십년을 수절하더니 쪽박에 밥 담 듯이 어린 자식 남겨두고 까까머리 중놈 따라 월장 도주가 웬말이고? 미친 년아, 기든 년아, 죽은 자식 다시 오나아.!""제기, 재수없게 저년을 그만." 하다가 평산은 종종걸음으로 초당 뒤를 돌아서 숲속으로 사라진다. 귀녀는 아궁이 속에 남은 장작을 깊숙이 밀어넣고 또출네가 시부렁거리는 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며 언덕을 내려온다. "네 이, 이놈! 도꿋날 맞아 죽을 놈아! 독사구더기 속에 썩을 놈아! 바로 네 연놈이 내 자식 주리를 틀었고나! 고 부 백산은," 한번 뒤돌아본 귀녀는 "제발 올 겨울에는 어디가서 얼어죽어라! 미친 년." 김서방댁 채마밭에는 서리맞은 시금치가 불긋불긋하게 얼어서 남아있다. 귀녀가 밭을 질러서 지나가는데 "귀녀야, 귀녀야!"숨을 몰아쉬면서 김서방댁이 불렀다. "와여."심드렁하게 귀년가 돌아본다. "이리 좀 와바라.""무신 일인데 그러요!" "허허, 참 해로븐 일 아니라니."귀녀는 발 길을 되돌린다. 솜을 두어 듬성 듬성 누비 속곳바람으로 열어봍인 방문에서 반쯤 몸을 내민 김서방댁이 "니를 생기서 그러는데 그 낮짝 좀 풀어라.""낯짝이고 뭐고 제발 치매나 좀 입으소. 사나이들이 우글부글하는대.""다 늙은 거를 우짤 기라고." "마님께서 아시믄 우짤라요.""내가 마 까깝해서... 올라오니라." "뭐할라꼬요?""허허 참 귀한 거 줄라 카는데." 귀녀는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어디 갔다 오노." "초당에 갔다 오요.""머하로." "군볼 넣고 왔소.""서방님도 안 기시는데?" "안 기시지마는 비가 와서 곰패기 실문 되겄소.""길상일 시키지." "머 할 일도 없고 해서.""냠냠해서 호박풀떼기를 좀 쑤었다." "호박풀떼기요?" 귀녀는 눈이 번쩍하더니 방문을 열로 침을 뱉는다. 김 서방댁은 아랫목에 포대기를 덮어놓은 사기를 끄집어낸다. "금년에는 호박오가리가 우찌나 달든지 생청 겉더라. 그래서 팥하고 찹 하고 넣엇 고았더니 세가 설설 녹게 달더고나." 귀녀 목구멍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난다."아닌게아니라 요새 배탈이 났는지 영 음식을 못 묵었는데.""가만 있거라이. 나 정기에 가서 숟가락하 고 그릇 가지올 기니." 김서방댁은 치마를 반허리에 걸치고 참나무 같은 맨발에 짚세기를 끼며 부엌으로 간다. 귀녀는 입맛이 동하여 사기 뚜껑을 열었다. 호박오가리를 넣고 쑨 죽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다. 치마를 펄럭 이며 김서방댁이 들어왔다. 시금치나물 한 보시기, 그릇과 순가락을 방바닥 에 놓고 사기에 걸쳐둔 국자로 사발 가득히 죽을 떠서 귀녀 앞에 놓는다." 서리맞은 시금치라 맛이 좋다. 먹어봐라." 권할 것도 없이 귀녀는 기갈든 사람처럼 둑을 먹는다. 한 사발을 냉큼 먹어치우고 나서"이자 살 것 겉소." "달제?""야." 김서방댁에게 칭찬할 만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음식 솜씨가 좋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음식을 나과 갈라먹길 좋아하고 남에게 나눌 때도 시원 스럽게 듬뿍듬뿍 퍼주는 일이다. 대신 얻어먹는 사람은 끝도 맺음도 없는 지겨운 장광설을 들어주어야 한다. 김서방댁은 사람만 보면 마치 기갈든 것처럼 있는 것 다 찾아서 입에 쏟아붓듯, 기러고는 못 가게 잡고 늘어져 서 해가 지는지 날이 새는지 아랑곳없이 주절주절 끝없이 지껄였다. "세상 에 귀녀야, 내 말 좀 들어보래. 사돈인가 오돈인가 우리 큰아아 시어미 이 다.""아따, 또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 하요." "허 참, 너거들은 와 그렇노? 내 말이라 카믄. 가슬에 가아가 친정왔다 갈때 말이다, 하니라고 깨를 두 되나 주었고 찹쌀, 차조, 녹두, 팥,"김서방 댁은 일일이 손가락 꼽아가며"올망졸망 싸가지고 보내지 않았겄나. 그것도 안에서 달아주믄 어림이나 있는 일인가? 그래도 우리 몫의 밭이 있어서 다 늙은 기이, 외손자까지 본 내가 여름 내내 밭에서 살았으니 망정이지, 아 그러니께 다문 그거라도 싸줄 수 있는 거 아니가. 출가외인이라고 가사 빈 손으로 보냈더라도 저거드이 우짤 긴고? 법으로 만났는데 내쫓만 묵고 벗 고 살라나? 더라 안카나?" "누가 또 그런 말을 합디까?""남이사 올망졸망 산 거를 이고 따라 안 갔 더나. 아이새끼를 업고 가는데짐을 가지갈 수 있이야제. 혼인한 뒤에도 말 썽이 많았네라. 농사꾼이 머가 대단하다고 가사 말하자믄 우리 편에서는 낙혼인데, 하더라나? 우리 개똥이아배가 본시 종이었다 그 말이지. 가 낙혼 이낙 개떡이가 하라 캤나! 이러구 저러구 말이 많은 것은 그거 다 이바지 가 적다는 생트집일 기고, 내가 본시부텀 길쌈은 안배웠이니께." 3장 살려주십시오. 지리산으로 되돌아온 최치수는 달포 가량 산속을 헤매어 발 안 닿은 곳 이없었지만 구천이를 찾지 못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가지 않으리라 다짐 하며 이를 악물었는데 결국 환이는 우관선사를, 속세에 살았더라면 백부라 불렀어야 했을 늙은 사문을 찾아 연곡사로 갔다. 어쩌다가 바람에 날린 솔 씨하나. 석벽에 떨어져서 움이 트고 애처롭게 자란 한 그루의 소나무는 트 인곳 없이 병풍같이 둘러싼 능선에 해가 돋고 달이 뜨며 그 해가 다시 떨 어지고 달이지는 것을 바라보며 능선 밖에 광할한 천지가 있어 그곳에서도 해와 달이 지고뜨는 것을 모른다. 환이는 석벽에 떨어진 한 알의 솔씨, 석벽에서 애처롭게 자란 한 그루 소나무 같은 소년이었다. 나서 자라면서 철 따라 달라지는 숲의 울림, 먼곳에서의 짐승 발자국, 날짐승의 나래짓, 온갖 초목과 산꽃들이 내어뿜은 향기, 허공에서 손짓하는 무지개 같은 그런 정을 쫓아 땀을 흘리고 잠이 들고 꿈을 꾸었다. 산빡에 세상이 있어 그곳에서도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여름날 절을 찾아온 사나이를 따라 숲길을 뚫고 산을 벗어나 주막에 묵으면서부터 였다. 눈이 빛나고 날카로우면서 소년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는 사나이는 그의 생부라 했다. 많은 동학의 무리를 거느린 부친, 그 부친 곁에 그림자같이 따라다녔던 환이는 동학란에 참가 했고 처참한 싸음의 종말을 보았으며 부친을 형장에서 앓었다. 도피의 수 백리 길은 산 첩첩 가시밭길이었다. 환이 깨달은 것은 병풍이 둘러쳐진 것 같은 산속과 넓은 산 밖의 세상을 비춰주는 해와 달이 같지 않을뿐만 아니 라 산속은 차갑고 고요한 달의 세계요. 산 밖은 지글지글 타는 해의세계, 하나는 환과 같이 적막한 평화, 하나는 고뇌의 몸을 떨어야 하는 현실이라 는 것이다. '원망하지 말라. 억망중생이 다그렇느니라.원망하지 아니하면 고통은 기 이 되느니라.' 우관선사는 그런 말로 타이른 일이 있었다. 환이는 산을, 평지를 가는 사람보다 더 빠르게 탈 수 있었다. 은신의 묘 함, 추적의 냄새를 산짐승과 마찬가지로 말을 수 있었다. 그러나 끝없이 쫓 기는 몸은 숨이 가쁘다. 쫓는 자보다 더 뛰어야 하고 휴식의 틈이 없다. 그 러나 그는 산을 벗어나 멀리 사람 사는 곳으로 갈 용기가 없는 것이다. 숙명 같은 그의 생장과 필연적인 환난은 어느덧 그에게 불행한 유랑의 성을 길러주기도 했으리니와 그의 핏속에는 이미 고독한, 어으곳이든 정착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 성싶다. 질서가 있고 평온한 것 같은 마을은 본시 부터 그의 발붙일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평지에 나간다면 뭍에 오른 고기 같이 산에서 익은 발은 힘을 잃을 것이며 은신의 지혜는 쓸모없이 될 것이 다. 그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면서도 산을 벗어날 용기가 없었다. 만일 혼잣몸이었던들 어느 개천가나 바위 틈새에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그는 우관선사를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서움에 질린 별당아씨는 거의 발 광 상태에 있었다. 잠들지 은 시각에도 헛소리를 지르며 헛것을 보며 낭떠 러지로 달려가곤 했다. 환이도 역시 죽음으로써 얻어질 휴식을, 죽음에 이 르는 황홀한 것 같은 종말을 눈앞에 보며 열망하며 어느덧 그 자신도 헛소 리를 지르고 있었다. 찬바람에 굳어진 땅을 밟으며, 잡목숲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에 쫓며 병들어서 타는 것같이 뜨거운 여자의 손을 쥐고 환이는 우관선사 앞에 섰 다. "살려주십시오." 석등 불빛이 비스듬히 땅에 깔렸는데 우관선사는 하늘로 솟은 탑신 았 다. 시꺼먼 숲의 어둠을 등지고 우관은 서 있었다. 두 줄기의 안광이 얼굴을 꿰뚫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우관의 몸은 점점 더 커지고, 더욱더 커지고 끝네는 전신을 볼 수 없다.반대로 여자는 자꾸만 자꾸만 작아지는 것 같고, 손아귀에 든 손이, 불덩이같이 뜨거운 손이, 손 아닌 여자의 몸 전체인 것 같고 나중에는 그것마저 거품이 되어 사라져 없 어지고 마는 것 같은 환각. 두 다리를 꺾고 환이는 땅바닥에 꿇어앉는다. "이 여인을 살려주십시오." 우관은 돌아섰다. 손짓을 했다. 법의를 밤바람 에 날리며 늙은 사문은 앞서가는 것이었다. 최치수는 구천이 어떤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긴 것을 알아차렸다. '사양하겠소. 소승이 천도해야 할, 그런 비명에 갈 사내는 없을 것이외다.' 우관이 한 말이 생각났다. 예측치 못했 던 일도 아니요 깨닫는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이미 추석 전에 산에 내려가면서 추적의 고삐를 늦추어주는 것임을 알고 있었으며 쫓기는 그들 의 숨구멍을 열어주고 안정한 도피처를 마련할 것을 생각지 않았던 것은아 니다. 한 달 가량 산을 비운 동안 우관의 손이 뻗쳐 그들을 구원했으리라는 것도 상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치수는 왜 산으로 되돌아왔을까. 또다시 그는 우연에 기대를 걸어보는것 일까. 남의 눈을 두려워할 위인도 아니요. 조상에 대하여 경건한 마음가짐 의 치수도 아니다. 그렇다면 추석 명절, 조상 앞에 술잔을 올리기 위해 산 을 내려갔다는 것이 절대 불가피했던 이유는 아닌것이다. 그거는 그렇다 치고 이미 남녀는 안전한 피신처에 숨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눈이 쌓 이기 시작한 산에 머무는 까닭은 무엇일까. 산에 와서 열흘이 훨씬 지난 뒤 의복과 식량을 싣고 온 돌이는 산에 눈이 쌓였을 것이며 일기도 매우 한랭할 터인데 귀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윤씨부인의 말을 전해주었다. 최수 는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돌아가려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이 같이 애매모호한 상전을 수수께끼로, 그것도 무서운 힘, 언제 터질지 모르 는 힘을 숨겨 가진 수수께끼로 느끼며 매일같이 대하고 있는 수동은 전전 긍긍이었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무서운 공상은 미칠 지경으로 그에게 시달 림을 주었다. 김서방같이 겁이 많은 사내는 아니었으나 원체 수동이는 신 경이 약한 편이다. 치수는 예상을 뒤집고 집에 돌아온 뒤 어떤 벌도 가하 지 않았을 뿐더러 구천이를 도망가게 한 수동의 의도를 나무라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올 때만 해도 힘이 센 하인들을 제쳐놓고 치수는 다시 수동에게 동행할 것을 명령했다. 이같이 수수께끼인 상전 옆을 떠나 지 못하고 고통을 겪는 한편 수동이는 산이, 눈에 묻힌 적막한 산이 무서 웠다. 치수와 산, 치수 때문에 산이 더 무서웠고 적막하게 눈에 묻힌 산 문 에 치수가 더 무서웠는지 모른다. 자기 실책에 대한, 언제 가해질지 모르는 혹독한 벌에 대한 무서움 그런 것과는 성질이 다른 무섬증인 것 같았다. 물론 때로는 치수의 광포한 힘이 솟구쳐 구천에게 겨누었던 것처럼 총이 자기 가슴에 겨누어질 것이라는, 눈에 묻힌 계곡으로 밀어뜨릴 것이라는 환각에 사로잡혀 몸을 떨곤 했으나 대개는 수동의 마음 맡바닥에서 안개이 서려 올라오는 그 공포가 무엇에 연유된 것인지 모를 때가 더 많았다. 어 떤 때는 날짐승조차 죽어 없어진 천지가 붉은 흙탕물 속에 잠겨버리고 그 흙탕물 속에서 수동이 혼자 파득거리고 있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창칼을 든 무시무시하게 큰 무쇠로 된 수문장, 그것도 수백 수천 명의 수문장 한 가운데 자신이 서 있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구례 염서방 집에서 본 그 집 아이의 벌거벗은 몸뚱이가 마치 화전민 집에서 막대기로 쳐서 죽인 지네이 몸에 쩍쩍 달라붙어 오는 것 같았고 정신을 차려보면 사방은 산이요 소나 무에 담뿍 실린 눈이 마람에 흩날려 내리는 광경이요 그리고 한결같은 최 치수, 걷고 있는 그 수수께끼의 모습이었다. 정녕 그것은 수동의 오랜 금욕 생활이 빚은 신경병이 아닐까, 극도의 고독에서 온 병일지도 모른다. 짐승 의 경우도, 한갓 날짐승의 경우에도 교배하는 본능 아닌 외로움만으로병들 어 죽는 있으며 날짐승과 물고기가 서로 갚은 우정을 나누었다는 것도 외 로움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가를 알려주는 얘기가 아닐까. 물론 수동이는 자신이 병들었다고 생각지 못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신경쇠약인데 아낙을 잃은 후 최참판댁에 찾아든 구천의 존재는 수동에게 있어 상당히 큰 비중 을 차지한 것이 사실이고 형님같이, 혹은 어버이같이 사랑한 마음은외로운 그에게 다시없는 위안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구천이를 잃은 허전함은 본인 도 모를 비애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종으로서의 윤리, 오늘까지 떠 받치고 있던 그 나름대로의 윤리가 무너진 데서 오는 정신적인 무질서가 그 마음 바닥에 고여 있던 외로움을 다스릴 수 없는 지경으로 빠뜨렸다 보 아야 옳을 성싶다. 수동에게는 최치수와 눈에 묻힌 산말고 또 한 가지 무 서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화전민 집에 잠자리를 펼때 그곳에 있는 아낙이 다. '강포수! 제, 제발 내 손발 좀 묶어주소!' 한밤중에 고함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제 손으로 입을 틸어막은 일이 차 있 었다. 아침이 되면 기진맥진하여 그러나 호구를 빠져나가는 듯 그는 비틀 거리며 일행을 따라나서곤 했었다. '이눔으 산이 아무래도 날 잡아묵을 기다!' 그는 산이 운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산은 울고, 소리지르며 웃는다고 생각했다. "왜 꼴이 그 모양이냐." 한면 치수가 물어본 일이 있었다. "잠을 통 못 자누마요." 강포수가 대신 대답했다. 치수는 빙그레 웃었다. 이런 중에서도 수동이는 구천이 이미 이 산중에 없는 것을 확신했다. "아아 그 사람들인가? 젊은 내외 말입니까. 선녀같이 생긴 여인네랑 훤칠하게 생긴 남정네랑 저기, 저 새미서 물을 마시는 거를 보고 무신 연유가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심다." "가만히 있자... 그러고 본께 생각이 나누마요. 해거름인데, 밥을 좀 달라캄 서 들어왔는데 보매 상사람도 아닌 것 같고 나이도 삼십이 못 된, 스물네뎃 됐이까?" 두 번째 산에 당도한 그 무렵에는 그와 비슷한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었다. 차 츰 시일이 지나자 "모르겄소. 통 그런 사람 못 봤소." "이 겨울에 길도 맥힜는데 짐승 잡는 포수도 아니겄고 더군다나 여자가따 랐다니, 거 찾아봐야 소용없일 깁니다." 그러고는 보았다는 사람은 없어지고 말았다. 강포수도, "산에서 빠져나가 기 아니믄 죽었거나, 찾아도 소용없겄구마는."하며 혼자 지껄였다. 그러나 수동은 구천이 죽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이들은 큰 사냥은 못했으나 심심찮을 정도의 잔짐승들은 잡았다. 강포수는 잡지 한 호랑이 이야기를 몇 번씩이나 하곤 했다. 가을에 왔을 때보다 강포수는 훨 씬 침착해져 있었고 확신에 찬 것같이 보였다. '지가 나한테 허신을 했는데 어디 갈 기고? 나으리한테 말심디리서 가 데 리고 살 기구마. 뼈가 가루가 되게 벌러서 한분 살아볼기구마. 세상에 태어 날 적에 제가끔 짝을 지어 왔일 긴데 내라고 짝이 없을라고? 남으 집에 매 인 몸이니께 지가 그렇게 말하는 하지마는 종년 신세보담이야, 누구 꺼릴 거 없이 살아보는 기이 지한테도 복이니께.' 강포수는 매일매일 다짐하면 서 귀녀의 이야기는 일체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귀녀의 다짐을 명심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최치수에게 허락을 얻는 데서만은 그 다짐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면에서 강포수는 곰과 같이 우둔하고 뚝심 센 사내였다. 해나절 쯤 해서 수동이는 산 밑 마을에 실어다 놓은 식량과 의복가지를 가지러 내 려갔다. 날씨도 흐리고 해서 치수와 강포수는 뜸막에서 쉬고 있었다. '언제 꺼정 미루고 있을 순 없이께.' 결심을 굳힌 강포수는 곁눈질을 하며 치수의 기색을 살핀다. 치수는 끄러 미에 비스듬히 기대어 잠을 자는가 싶더니 눈을 떴다. 눈을 떴다간 다시 감곤 한다. 뜸막 안에는 불이 타고 있어서 춥지 않았다. 강포수는 혀를 내 밀어 입술을 한번 축이고 나서 "나으리!" 천천히 치수의 눈은 강포수에게로 옮겨왔다. "말심드릴 기이 있십니다." "..." "저어, 말심드릴 일이 있십니다." "..." 강포수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갑자기 최치수는 바위가 된 것같이 완 강해 보였던 것이다. "저어..." 치수는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귀, 귀녀 말심입니다." "귀녀?" "에." "..." "이 나이 해가지고 여, 염치없는, 그, 그, 그거사 사나이한테 나이가 무,무 신, 아직이사 하, 한창 나인데," 검붉어진 얼굴을 실룩이며 강포수는 혀를 내밀어 다시 입술을 축인다. " 내내, 무신 약조도 없이 나으리를 따라댕깄심다. 가을, 겨울 한철의 벌이는 그만두고 처음에사 억만금을 주시도 매이는 것은 싫다캤십니다. 그, 그랬는 데 서욼 오신나으리가 총을 가지고 오시서 그만 총에 반해가지고," 제법 차근차근 말을 하다 말고 최치수의 눈을 본 강포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 는 것을 느끼다. "저, 저 다른 거 다 싫구마요. 나으리 귀, 귀녀를 주이소." 강포수는 눈을 딱 감고 소매로 얼굴을 문지른다. 최치수는 눈길을 돌이면서 "귀녀를 달 라?"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예, 예, 주시기만 하시믄 펭생, 페, 펭생을 호랑이도 잡으라 카시믄 잡고 곰을 잡으라 카시믄 잡고." "사람은?" "예?" "사람도 잡겠느냐?" "예, 저 그거사." 최치수는 입을 다물었다. "도,도망간 구, 구처닝 말심입니까?" "아닐쎄." "그, 그라믄 찾아내서," "이젠 상관 말게." "예?" 최치수는 눈을 감아버린다. 아무말도 듣기 싫다는 얼굴이다. 강포수 는 눈앞이 캄캄해온다고 생각했다. 캄캄해오는데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하던 귀녀의 말이 비로소 칼끝같이 그의 심장에 와서 닿았다. 이튿날, 바람은 매웠으나 햇빛이 환하여 날씨는 매우 좋았다. 일행은 냥길 을 나섰다. 겨울에는 대개의 짐승들이 야산으로 내려온다. 때문에 사냥철치 고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곰은 동면을 하지만 운수가 좋으면 동면하는 곰을 발견하는 수가 있고 뜻밖의 횡재를 한다. 지나밤 뜸막에서 망상에 시 달리지 않고 잠을 잔 수동이는 여느 때보다 다소 팔팔한 것 같았으나 강포 수는 휘청거렸다. 치수는 설피를 신고 탄대를 허리에 차고 총을 고 앞서 걷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 보이는 사냥꾼이었다. "강포수!" "..." "와 그라요? 어디 아프요?"했으나 수동이 묻는 말에 대꾸가 없기론 마찬 가지다. 수염에 묻힌 입술만 실룩이고 있었다. 치수가 밟고 간 자국을 강포 수가 밟고 강포수가 밟고 간 자국을 수동이 밟고 간다. 계곡마다 얼어붙은 물은 멀리서 뜨물을 쏟아놓은 듯 하얗게 보였고 눈 속에서 드러난 벽풍경 은 묵화같이 보였다. 바람 소리뿐, 산속의 세 사람의 사나이는 무엇 때문에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목적을 잊고 발밑에서 들려오는 나뭇가 지에 실린 눈이 날아내린다. 걷고 있는 어깨 위에 푹석 떨어져내리곤 한다. 눈 속에 묻힌 산은 잠자는 듯 죽는 듯, 때론 거대한 몸을 일으켜 천지를 뒤흔들고 포효할 것만 같은 생각이 엄습해온다. 멀리 솟아오른 대봉도 하 얀 눈옷을 입고 있다. 그 봉우리에 겨울 햇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고산 지대가 아니어서 길이 험준하지는 않다. '자네는 나보다 더한 신선놀음일세. 이런 시태에 쉽지 않은 일이야.' 치수 는 장암선생이 하던 말을 생각해본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억만금을 주어 도 남에게 매어 있길 싫어했었던 사냥꾼이라면 말입니다. 그 신선놀음의 사냥꾼은 지금 한 계집때문에 허깨비가 된 모양입니다.허깨비도 좋고 신선 도 다 좋지 않습니까. 산에 와도 사냥꾼이 못 되고 마을에 가도 사내가 못 되고 서원에 들어서도 학자가 못 되고 만석꾼 땅문서는 있되 장자가 못 되 고 어머님이계셔도 아들이 못 되고 자식이 있어도 아비가 못 되고 계집이 있을 때도 지아비가 못 된 인이 개화당이 되겠습니까, 수구파가 되겠습니 까. 가동들을 거느린 의병대장이 되겠습니까. 신선이 못 되면 허깨비라도 되어야겠습니다만 무엇에 미쳐서 허깨비가 되오리까. 그럼에도 잡사를 잊 지 못하니... 이 적막한 산속에서 진실로 제 자신이 사람의 자식임을 잊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영신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는지요. 하온데 선생님, 이 무시무시한 생명의 울이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은 산에서 한 발만, 사람 세 상으로 나갈 것 같으면 사람이 아니 자신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어인 까닭 이오니까. 기름이 잦아드는 등잔 같고 곰팡이 슨 서책 같은 벌레먹은 기둥 같고 사람들의 얼굴은 온통 물건으로만 보이니 말입니다. 사람을 미워하여, 아니올시다. 미워하는 척했을 뿐 입니다. 영신도 목숨도 실상이 아니며 다 만 영원불멸의 월만이 영신을 조롱하며 목숨을 딱해하는 것이겠습니까. 억 만금을 주어도 싫다던 사냥꾼은 산에서 영신을 보았을 테지요. 계집을 달 라고 애원하던 사내는 목숨이 있음을 알았을 테지요. 그는 세월에 눈가림 당한 한 마리의 복 많은 망아지가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세월의 뜻을 아 시고 세상과 하직하실 수 있겠습니까.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 눈앞 에는 흰 눈다 잿빛 나뭇가지가, 그리고 푸른 소나무가 더 많이 보이기 시 작했습니다. 아 저기, 저기 노루가 한 마리 뛰고 있습니다!' 치수는 총의 안전 장치를 풀었다. 노루는 나목 사이에서 얼른거렸다. 러나 주력이 강한 노루는 산등성이를 향해 뛰어오른다. 강포수도 총의 안전 장 치를 풀고 노루를 쫓았으나 곧장 달리지 않고 산등성이를 향해 이리저리 사선을 긋듯 하며 올라간다. 서두르지 않더라도 산등을 넘으면 틀림없이 노루는 한눈을 팔고 있을 것이다. 강포수와 최치수가 산등성이를 넘지 않 고 이켠에 몸을 숨긴 채 산 너머를 내려다보았을 때 노루는 사정거리밖에 까지는 아니었으나 상당히 먼 곳에 가서 한눈을 팔고 있었다. 우뚝우뚝 선 나목들이장애가 되어 위치를 옮기는데 무슨 생각을 했던지 노루는 다시 뛰 기 시작했다. 다른 때 았으면 강포수 입에서 제기! 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 다. 그러나 지각에 밀폐된 깊은 땅 속 같은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 다. 치수는 몸을 털고 일어섰다. 올라왔던 내리막을 뒤돌아본다. 노루를 다시 쫓을 흥미를 잃은 모양이었다. 수동이 아래서 엉금엉금 올라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강포수는 치수가 일어선 것도 잊고 노루가 산등성이를 넘어간 것도 잊고 시야에 로누운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막에서의 치수 얼굴이, 빤히 쳐다보던 귀녀의 얼굴이 구분할 수 없게 빠른 속도로 번갈아 시야를 어지럽히곤 한다. "으읍," 강포수는 목소리를 물어 끊는다. 무지무지하게 큰 산돼지가, 작은 소만한 산돼지가 강포수 시야를 밟고 들어선 것이다. "아니세. 내말에 대답하게." "그야 두렵지 않을 사람이 있겠나. 그때만은 천하의 사람 마음이다 같잖 든가." "그렇지.한데 왜 드려울까." "왜 두렵긴? 맞을까보아 두렵지." "맞을까보아? 오래 살고 싶다 그 말이겠 다." "그렇지. 모두 오래 살고 싶은 게야. 쓸데없는 말 이제 그만두게." 석운 계신가? 할 때처럼 이동진의 목소리는 무거웠고 얼굴에는 짜증스런 빛이 떠올랐다. "오래 살아서 뭘 하나." "이 사람아, 옛날옛적 칠서 배우기 전에 했던 얘 기 아니가. 머지않아 사십을 바라보게 될 텐데 무슨 철없는 소리." 그러나 최치수는 들은척하지 않고 "언젠가, 어릴 때 일이었던 것 같은데 개미가 집을 짓는 것을 구경했지. 개미란 놈이 흙덩이를 구멍 밖으로 물어 내는데 구멍 밖에 흙덩이가 제법 성벽같이 쌓이더란 말씀이야. 그건, 개미 란 놈에겐 거대한 성벽이지. 그런데 그놈들은 가랑잎을 물어다가 훍이허물 어지지 않게 해놓고는 그 위에다 흙을 나르고 쌓이면 또 가랑잎을 물어다 덮곤 하더구먼. 그리고 또 하나는 산에서 본 일인데 토끼란 놈이 지나가기 에 장난 삼아 뒤쫓아보니 막다른 골짜기에서 제놈이가면 얼마나 가랴 하고 말일세. 헌데 그놈이 귀신같이 없어지지 않았겠나? 하도 어이없어 하니까 뒤따라 온 강포수란 놈이 빙긋이 웃으면서 저 쌓인 돌 사이로 어갔다는 게 야. 미친 소리 말라 싶었지. 쌓인 돌무덤에는 토끼가 들어갈 만한 구멍은 하나도 없었거든, 헌데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게지. 자세히 살펴보니 조그 마한 구멍가에 털이 하나 붙어 있더구먼. 돌을 들어냈지. 그것도 여러 개를 들어내면서 강포수란 놈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웬걸, 빨간 눈이 보이질 않 겠나, 거 토낄 잡아 뭐하시려고 그럽니까, 쓸데없는 살생은맙시다 하는 포 수놈 말이 기특해서 내버려두고 말긴 말았으나 그 구멍 말일세, 그 조그만 구멍 말일세, 그 구멍이," 하는데 최치수의 얼굴은 치매 같았다. 눈은 더욱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동 진은 고개를 두어 번 저으며 우울하게 최치수를 바라본다. 헤벌어진 옷깃 사이에 내비친 가슴에는 뼈가 솟아나 있었으며 산바람에 타서 아직 때를 벗지 못한 거무스름한 얼굴에 비해 가슴팍의 피부는 휘고 푸르스름했다. 치수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깜박 졸다가 깨난 사람 같았다. 그는 씩 웃었 다. 영악하고 교활한 짐승의 표정이다. "한데 자넨 화심리에 들렀다 오는 길인가?"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음." "병환에 차도가 있으시든가?' "있을 리가 있나. 그만하면 오래 견디시는 편이지. 문의원 말마따나 고으 로 병도 이기시는 모양인데, 글쎄 얾마나 가실까? 피골이 상접해서 뵈옵기 가 민망하고 그런 중에도 자네 말씀을 하시더군.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총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 "뭐라고?" "허허, 자네 얘길 하고 있는 게야." "내 야기라?"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으니 왜병한테 당했느니 또 뭐래든 가? 아아 동학당 남은 무리한테 총 맞아 죽었느니, 소문은 망측하더라만 덕분에 자넨 오래 살겠어." 최치수는 킬킬킬 웃는다. 헤벌어진 깃을 모으고 한참을 킬킬거리며 웃더니. "송장이 된 지 이미 오랜 줄 알았더니 송장이 또 한 번 죽는구나. 흐흐흐 흣, 이러다가 정작 죽으면 다반사 같아서 자넨 문상도 오지 못할 거라. 하하핫..." 순간 이동진의 눈빛은 약간 달라졌다. "그럴지도 모르지." "한데 소문에 근거가 없는 거는 아니고." "죽을 뻔했단 말인가?" "죽을 뻔했지. 수동이 놈이 죽다 살아났지. 산돼지 가 보복을 했단 말이야 하는 짓이 사람보다 분명하더군." "얼빠진 이 나라 선비들보다 낫군 그래." 사람보다 분명하다고 말하는 최 치수의 의도, 최치수의 보복심이 어떤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 동진은 먼 테두리에서 최치수의 목을 조르는 심정으로 말을 했다. "한데 짐승은 역시 짐승이라. 총 놓은 놈은 따로 있는데 죄없는 수동이놈 다가 결딴이 났거든, 조금만 빗나갔어도 명 보존을 못했을 터인데." "짐승이 사람 사냥을 했네그려. 그놈의 신식총 때문에 사람 사냥꾼이 철 을 만났다 싶더니 짐승까지 사람 사냥을 하다니 그 아니 갸륵하다 할 수 있을꼬?" 이동진은 곁눈질을 하며 최치수를 본다. '자네가 양반임을 의심할 순 없지. 허나 선비는 아닐세. 최씨네는 본부터 이곳에 터전을 잡을 때부터 선비는 아니었네. 홀태바지에 상투를 자르고 접시바닥같이 얕은 잔재주를 부리던 그 자네 형뻘 되는 조가라는 작자도 보기가 딱하기는 딱하더라마는 간부놈을 찾아서 총을 메고 다니는, 그게 무슨 꼴인가? 간부와 부정녀의 이름이 족보에 남을 것도 아니겠고." 최치 수는 이동진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알고 있었다. "왜? 자네 샘이 나서 그 러나? 그럼 내 총 한 자루 자네한테 줌세. 자네도 한번 사삶 사냥 해보게 나." "그거 구미 당기는 얘기다. 진작 그렇게 나올 일이지. 기왕이면 한 자 루만 준다 할 게 아니라 두 자루 다 내놓게. 원래 짐승 사냥엔 활이라야 제격이지, 안 그런가?" "두 자루면, 아아 그러면은 이땅의 왜놈들을 싹 쓸 어내겠다 그 말인가?" "허허, 이 사람이 날더러 김옥균이 전철을 밟으라는 겐가? 꼭대기를 타고 앉아야 될 노릇을 그렇게 말하면 어쩌라는 게지?" " 그것 가지고는 일이 안 되겠다 그 말인가? 그렇다면 서울 그 양반한테 내 다리를 놔주지." "내 목은 달아나고 왜인들 턱밑만 바라보던 그 개명양반은 두둑한 감투하 나 쓰겠구먼." "의병대장 의암선생이 충주에서 왜병하고 싸웠을 적에 의병 들이 쓴 화승총의 사정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나? 신식총은 비오는 날에 도 상관없는 무기일세. 상놈 출신 김백선이 유생 출신의 의병장 십 인 몫 을 했다고들 하거니와 신식총은 화승총의 백 몫은 할 게야." 피차가 다 실 없는 객담으로 실랑이를 하는데 이동진이 "그럼 자네도 동사할 텐가?" 어조가 싹 달라져 있었다. 최치수는 놀라지 않았다. 이동진을 빤히 쳐보았 다. 그리고 물었다. "떠나는 겐가?" "..." "떠나서 어쩌자는 게야." 이동진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양무 릎 위에 주먹쥐고 놓아둔 손의 엄지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였다. 뜰에서 장 작을 안고 뛰어가면서 불어대는 길상이의 입김 소리가 들여온다. "안 떠나면 어쩌겠나." 오랜 후에 이동진이 뇌었다. "그야 자네 알아 할 일이겠지만." "실은 하직하러 온 길일세." "그예 간다면 말릴 이유는 없지. 간다면 어디로?" "서울로 갔다가 만날 사 람들 만나보고 할 일도 있어서 좀 머물겠네. 그러고 나면 아마 강을 넘게 되겠지." "강을? 어느, 강을." "북쪽 마지막 강이지 어디겠나." "청나라 쪽이냐 아라사 쪽이냐 그 말일 세." 친로파 이범진 계열의 인물로서 재작년 정월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 킨 이소응과 이동진의 재종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치수는 그렇 게 물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이 땅을 벗어나고 보면 그때 형세에 따라서 움직이게 되겠지." 자세한 설명을 회피했다. "강을 넘건 바다를 건너건 다를 바 없지. 찢어먹으려고 드는 늑대놈들에 매일반 아니겠나?" "그럴 테지." "어리석은 임금께서 아라사 공사관으로 이어하신 뒤 아라사 나 그 밑에 빌붙은 놈들이 한판 자알 놀더니만 요즘엔 왜국도 세력을 만회 하여 아라사하고 함께 나누어 나누어 먹기를 궁리들 하는 모양인데 모처럼 뜻을 세우긴 했으나 자네 길이 허행이나 되지 않을란가?" "허허, 이삶이, 누가 나라 들어먹을 뜻이라도 세웠단 말인가?" "그렇다면 누굴 위해서 가 려는 거지? 이 마을에 김훈장이라는 미친 사람이 있어서 국모 살해의 원수 를 갚아야 한다고 노상 짖어대는 모양인데 자네도 그 등속인가?" "석운!" "말해보게." "자네 그 악담하는 버릇 좀 고치게. 세상만사의 이치를 웃어 넘기려 들면 가소롭지 않은 것은 없을 걸세. 그럴 양이면 애당초 사람 사 는 곳에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물정 모르고 노상 고지식하게 떠들어대는 김훈장도 딱하기야 딱하나 그래도 자네들보담은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으 니 어쩌겠나." "자네는 거짓말을 하고 있고 나는 참말을 했을 뿐이네. 그럼 묻겠는데, 내 궁금증을 풀어주게. 자네가 마지막 강을 넘으려 하는 것은 누 굴 위해서? 백성인가, 군왕인가?" 얇삭한 입술을 더욱 얇게 벌어지면서 최 치수는 간악하기 이를데없는 미소를 흘린다. 이동진은 쓴웃음으로 대항하 며 "백성이라 하기도 어렵고 군왕이라 하기도 어렵네." "..." "굳이 말하라 한다면 이 산천을 위해서, 그렇게 말할까?" "열전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지 뭐겠나. 자넨 사내 대장부라는 말을 우 귀히 여기는 사람이니." 이동진은 껄껄 웃는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빈말은 아니겠다." "나라 망하고 충신이 난들 무엇하리오." "낙화의 처절한 자태는 한결 아름 다운 법이니라." 두 사내는 소리를 합하여 껄껄 웃어젖힌다. 주안상을 마주한 그들은 허탈한 웃음 뒤에 오는 빈터 같은 마음에다 술을 들이붓는다. "안다는 게 병일세." "..." "석운, 자네같이 아는 것은 더욱 고치기 어려운 고질이고. 아무래도 장선 생께서는 학덕이 모자라셨던 모양이야.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만 길러내셨 으니." 이동진의 얼굴은 술이 올라 불그레했다. 최치수가 술을 부어주는 술 잔을 내려다보며 이동진은 다시 중얼거렸다. "상민들이 부러울 때가 있지." "어려울 것 없다. 의관을 벗어버리면 될 거 아니가. 머릴 깎으면 중놈이 될 것이요, 칼 들고 푸줏간에 들어가면 백정이 될 것이요." "말 말게. 기백 년 세월 동안 골수에 박힌 생각은 어느 나무에 다 걸어놓고? 수백 수천의 잔뿌리가 골수에 박혀서 이것을 치면 저것이 솟 아나고 저것을 치면 이것이 솟아나고 지금의 나라 꼴이 그 모양일세. 양반 들 머리통하고 흡사하지. 그러니 하나를 알면 그것이 전부인 줄 아는 상민 들의 우직함이 부럽다 그 말 아닌가. 지켜야 할 체통이 태산 같데, 이리 보 고 저리 보고 아래 위 훑어보고 그러다 보면 이도저도 아닌 게 양반이이며 글줄이나 읽었다는 그게 또 우환이라. 쇠스랑이든 곡괭이든 들고 나설 수 있는 상민 천민이 얼마나 홀가분할꼬? 그네들은 짐승이 적을 만났을 때 그 것을 습격하듯이 잽싸고 교활하고 용감하거든. 삼강오륜의 법은 몰라도 그 네들은 뭐가 옳고 그른가를, 무엇을 막아야 하고 무엇을 몰내야 하는 가를 심장으로 느끼거든." "싱거운 소리 그만 하게. 송충이 죽음을 보고 곡하는 수작이지." "허허 이 사람아." "양반이 썩었고 체통만 태산 같고 하지만 그놈의 체통이 있어서 짐승으로 떨어지지 않아! 그것들이 천민으로 떨어지기까지는, 흥 오히려 짐 승 편이 슬기롭지. 제 먹이를 위해 혼자 피투성이 싸움이라도 하지만 우중 이라는 것은 수가 많아야, 무리를 지어서 비로소 그 속에 끼여들어 칼이든 쇠스랑이든 휘두르며 피맛을 보고 너부죽한 아가리를 벌리며 웃는 게야.비 겁하고 천한 것들이 옳고 그르고를 알어? 용감하고 잽싸고 심장으로 느껴? 흥, 혼자 일어서 서 저도 당당한 인간임을 과시하고 양반한테 대항해오는 놈이 있다면 내천 석쯤 떼어주 지." "있다면 어떡헐 텐가? 무엇이든 지나치면 옹졸해지는 법, 물론 상민들 이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닐세. 선비들이라고 모두가 다 지조 있는 인물이 아닌 것같이. 개중에 슬기 있는 놈도 있어서, 오늘같이 어지러운 세상에는 쓸모없는 글자로써 꺼멓게 먹칠이 된 식자의 머리보다 천만 가지의 이치는 모르더라도 한 가지 이치에 눈을 뜬 상민들의 외곬으로 치닫는 행동이 필 요하지 않을까 그 뜻이야. 내 예를 하나 들어서 말하지. 상민으로서 의병의 선봉장을 맡았던 김백선 말이야. 아까 자네가 말했듯이 유생 출신 의병장 의 십인 몫을 한 김백선 그가 유생 출신의 어떤 의병장보다 잘 싸운 것은 한가지 이치에 투철했던 때문이요, 안승우가 원군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심장보다 두뇌로 일처리를 하려 했던 때문이지. 원군을 보내주지 않아서 왜군한테 패하고 돌아온 김백선이 분을 못 참고 안승우에게 칼을 빼어들이 대었다 해 서 엄한 군율로 다스린 의암선생의 경우만 해도 그렇지 않는가? 강직한 품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결국은 서재인이고 식견의 결과에 지나지 않어.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만큼 의병의 수효가 탐이 나는 마당에서 유생 출신 의병장 열 사람 몫은 넉넉할 인물을 개죽음을 시켰다는 것은." 의암 유인석은 강원도사람으로서 전통적인 유학 사상을 고수한 거유이며 관직을 탐하지 않 는 청빈하고 지조 높은 선비다. 1895년 왕비 시역에 대한 보복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봉기한 의병들의 중의에 따라 의병대장에 추대된 그는 전국 사림에게 개화 신법의 반대와 외세 배 격의 격문으로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지방 관헌들을 피로써 숙청하고 병 에 항쟁했던 것이다. 그 유인석이 그때 선봉장으로서 선전하였던 평민 출 신의 김백선이 원군을 보내지 않아 패퇴하게 되자 그 분함을 참지 못하고 안승우에게 칼을 뽑아들었다 하여 마지막 노모를 한 번 보게 해달라는 간 절한 소원조차 물리치고 군율에 의해 김백선을 처형했던 것이다. 김백선의 죽음은 충주 황강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이 되기도 했었다. 그것을 두고 동 진이 말한 것이다. 그 말에 대해서는 최치수도 아무 답변을 하지 않았다. "김백선이가 살았더라면 천석지기는 됐을 텐데 여러 가지로 아깝게 다." 이동진은 껄걸 웃다가 수잔을 비웠다. "출신이야 어찌 되었든 좋은 기둥 감이 많이 없어졌지. 전봉준이도 그렇거니와 이곳을 쓸고 간 거 김아무개 라는 친구도 쓸만한 인물이었는데." 김아무개라 했을 때 최치수의 눈에는 불이 켜졌고 눈밑의 근육이 파들파들 떨었다. 최치수의 사랑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이동진은 작별을 했다. 여느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마지막의 강을 넘을 작정을 하고 나누는 작별이건만 어느쪽에서도 그 일에는 언급을아니 했다. 이동진은 바람에 도폿자락을 나부끼며 나귀를 타고 언덕을 내려간다. 나 루터 가까이 갔을 때, "무슨 일인고?" 하고 이동진은 나귀를 모는 하인에게 물었다. "신행길인가 봅니다." 하인의 대답 아니라도 알 수 있는 풍경이었다. 나룻배 위에는 이미 마 한 틀이 올려져 있었고 말을 탄 신랑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신랑은 농짝이랑 함이랑 예단 둥우리를 배 위에 실어올리는 것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두만 네의 선이가 신행가는 길이었다. 뱃사공은 신이 나서 큰소리로 물건 놓을 자리를 지시하고 있었으며 진솔 의복에 미투리, 갓을 슨 두만아비는 성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으며 두만이 영만이도 누님 신행길에 동행하 는가 새옷으로 차려입고 부러워서 모여드는 조무래기들을 향해 벙긋벙긋 웃고 있었다. 마을 아낙들에게 둘러싸인 두만네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신부 맘씨가 착한께로 동지 섣달, 이 치븐 날이 눈 녹는 봄날맨치로, 참 날씨도 좋소." 신랑도 들어보란 듯이 막딸네가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명경겉이 물결 도 좋다. 신부 앞길맨치로, 누구 집 딸내미라고 안좋겄소." 야무네가 맞장 구를 쳤다. "어제꺼정 그리 바람이 불더마는, 날은 받은 날이고 밤에 잠이 안오더마는 이리 날씨가 풀리니께 섭한 정도 덜하네." 두만네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비죽이 웃는다. 남의 일이긴 하나 이런 사스 런 자리에서도 팔짱을 끼고 나선 강청댁과 임이네 사이에는 냉전이 벌어지 고 있었다. 남정네들 사이에 끼어들어 멍하니 강물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용이 모습에 임이네 시선이 갈 때마다 강청댁은 눈에 불을 켰고 염치불문 임이네 앞을 막아서곤 했다. 그러면 임이네는 임이네대로 강청댁 심사에 일부러 불을 지르듯 자리를 바꿔가며 웃음기를 머금고 용이를 바라보는것 이었다. "우리는 육로로 가지." 이동진은 그들 산행길의 일행과 동행할 것을 사양 해서 말했다. 하인은 다소 불만스런 표정으로 나귀를 돌려 세웠다. 이동진이 떠난 다음날 최참판댁에서는 두 바리의 짐짝이 읍내로 향해 났 다. 그 짐은 이동진의 문전에서 머물렀다. 5장 난리가 난다는 소문 출혈이 심해서 살리기 어렵다고 생각한 수동이는 혼미의 며칠을 보낸 뒤 겨우 기력을 찾 았으나 문의원 말에 의할 것 같으면 병신을 면키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순 간이었던 것 같고 꿈속 같았던 산에서의 사건, 그 소동의 와중에서 신없이 허우적거리며 최참판댁까지 따라온 강포수는 초상집의 강아지처럼 눈에 거 슬리는 존재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행랑에 웅크리고 앉아서 한숨 을 내쉬며 바깥 기척에 귀를 세울 뿐이었다. 최치수는 말이 없었고 강포수 역시 말이 없었으니 어떤 경위로 하여 수동이가 멧돼지한테 변을 당하였는 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강포수는 자신이 멧돼지에게 선불을 맞 혔기 때문에 일이 벌어진 것을 집안 하인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줄로 생 각했다. 최참판댁에 당도했을 무렵에는 수동이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강포수도 극도로 흥분되어 최참판댁 하인들이 방망이를 고 자기를 때려잡기 위해 모조리 달려오는 것 같은 착란에서 부들부들 떨곤 했었다. 명포수인 그가 처음으로 짐승에게 선불을 맞혔다는 사실, 그것은 수동이 부상당한 일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겼던 것이다. 일단 수동이의 목숨을 건진 후에도 강포수는 사태를 한번 돌이켜 생각해본다거나 앞으로의 자기 처신 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이 없었다. 산막에서 귀녀를 달라고 애원했을 적에 쇳덩이 같았던 최치수의 침묵이 자신을 짓누르던 일이며 산성이에 엎디어 있을 때 얼음장 같은 최치수의 웃는 얼굴과 귀녀의 얼굴이 번갈아서 눈앞 에 나타났었던 일이며 돌연 시야에 뛰어든 무지무지하게 큰 산돼지, 창칼 같은 이빨이며 피투성이의 수동이 입술은 하얗게, 눈은 꼭 감겨져 있었다. 모두 꿈속의 일만 같다. 막막하고 희미하여 구름 바다에 휩싸인 것만 같다. 그러나 여전히 귀녀의 얼굴은 더욱더 선명하여 떨쳐버려 해도 눈앞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자는 다 틀렸구마, 틀렸어." 귀녀에 대한 꿈도 희망도 다 사라진 것을 깨달은 강포수는 제 가슴에 먹 질을 하며 처량한 울음과 같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내가, 내가 선불을 맞히다니. 이 내가, 명포수라 카는 내가." 강포수는 중 얼거리면서도 귀녀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귀녀는 좀처럼 강포수 앞에나타 나주질 않았다. 어쩌다가 용케 먼발치에서 귀녀를 보았다 싶으면 다음 순 간 연기같이, 참말로 강포수는 연기같이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서 귀녀와 마주친 일도 서너번은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귀녀는 말조 차 걸지 못하게 달아났던 것이다. '나으리한테 단단히 다짐을 받았는갑다. 안 그러믄 저럴 수가 있겄나.' '그 가시나, 내가 선불을 맞힜다고, 하, 하기 사 총대 놓으믄 고만이지. 총대 놓으믄...' 쭈그리고 앉아서 장지문에 비친 햇빛을 보고 강포수는 반나절이 지난 것을 짐작한다. 주막에라도 가야겠다, 생각은 여러 번 했으나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강포수, 거기서 머하여?' 지난밤 어둠 속에서 노기 띤 목소리로 말하던 삼수의 음성이 마음에 걸려 방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밤중이었다. 정랑에 가다 말고 강포수의 발길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는 하 얀 미투리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주 작은 신발 두 켤레. 당 뜰에서 나뭇잎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안에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귀 녀와 삼월의 숨결소리였다. 강포수의 두 다리는 말뚝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와서 발목이 묻힌대도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눈이 무릎을 묻고 목 에까지 차올라도 움직이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는 선 채 꿈을 꾸고 있었다.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귀녀의 숨결이 자기 품속에서 들려오고 다는, 그 리고 여자를 팔에 안고 있다는,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니는 내 짝이다, 전생 에서 짝지어준 내 사람이다, 하며 수없이 뇌고 있는 자신의 환상을 의심치 않고 강포수는 말뚝같이 서 있었던 것이다. "강포수 거기서 머하여!" 강포수는 몽롱한 눈을 들었다. 어둠밖에 없었다. 품에 여자는 어느덧 없어지고 말뚝같이 서 있는 자신의 무게 이외는 모두 가 어둠이었다. "허 참 강포수!" 그것은 삼수의 목소리였다. "무슨 짓이요?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서 있는 거요!" "으음음..." "이 사람이 넋이 빠졌나!" 삼수는 강포수의 팔을 와락 잡아끌었다. "아아." 정신이 든 듯 말했다. "당신 미쳤소? 큰일나겠구마. 가시나들 자는 방 앞에서 우짤라고 그리 서 있었소!" "머, 저어." 강포수는 처량하게 웃었다. "나잇살이나 묵어감서, 아 기집 생각이 나믄 주막에나 내려갈 것이지. 고 저버서 거기 서 잇었단 말이요? 반죽은된 사람을 데리다 놓고 아 그래 강 포수는 기집 생각에 침을 질질 흘릴 기요?"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할말이 없는 강포수가 무슨 말을더 하겠는가. "넨장, 우리 차지도 안 되는 것들을, 어디서 굴러묵었는지 늙다 리 산도둑눔 겉운 게 비위도 좋고 염치도 좋다." 삼수는 욕설을 하며 가버렸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얼굴이 화끈거리는 간 밤의 일이었다. "강포수!" "예!" 쭈그리고 읹았던 강포수는 헛것을 잡듯 방안을 헤매며 대답한다. 방 문을 열고 김서방이 얼굴을 디밀었다. 강포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는 엉겹결에 일어섰다. 김서방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몸집이 작은 김서방 은 꾸부정하니 서 있는 강포수를 발돋움이라도 할 둣이 올려다본다. "앉이소."하고 김서방이 앉는다. 강포수도 따라 앉는다. 그의 얼굴은 파아 랗게 돼 있었다. "나리마님께서 그러시는데." "..." "나리마님께서 알아 처리할 터이니 강포수는 산에 돌아가 있으라누 마." "예?" "그렇게 말하믄 알 거라 하시더마." 강포수의 험악한 얼굴을 - 김서방 눈 에는 몹시 험악하게 보였다 - 김서방은 겁먹은 눈을 힐끔힐끔 살핀다. "야. 알겄심더." 강포수는 간밤의 일이 최치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생각 을 했다. "알겄심더." 강포수는 윗목에 놓아둔 조그마한 망태하고 벽에 걸치둔, 오랜 세월 와 함께 지내온 화승총을 챙겨든다. "그 동안 궁색하지 않게 쓸 돈을 좀 주라 하시는데 얼매나 줄꼬?" 김서방 은 화승총을 겁내어 뒤로 물러나 앉으며 물었다. "머 돈 보고 안 왔이니께 요. 사냥꾼이 총 한 자루믄 살지요." 신식총에 미쳐서 따라왔건만 이제 강 포수에게 갖고 싶다는 생각은 손톱만치도 없었다. "그래도 조맨이라도 가 지가야제. 나리마님이 우찌 처리하실란고, 그거사 모르겄다마는." "그라믄 노자나 주소."하는데 강포수 눈에 눈물이 글썽 돌았다. 얼른 얼굴을 숙였기 에 그 눈물을 김서방은 보지 못했다. 얼마간 노자를 꾸려서 문밖까지 나온 김서방은 "나리마님한테 인사할 거 는 없고. 지금 손님이 와 계시니께로." 김서방이 그러지 않아도 강포수는 최치수한테 인사하러 갈 마음은 없었다. 강포수는 언덕길을 터덜터덜 내려 가면서 '내가 한 일은 다 허사였고나. 설령 내가 선불을 맞힜기로 양반하고 상놈이 사는 세상이 이 러큼 다르단 말가. 양반하고 상놈으 사는 세상이.' 난생 처음으로 강포수 마음속에 원한이 심어졌다. 최치수의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말을 그는 조금 도 씹어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사 내가 물정을 몰라 이러는 거겠지. 양반은 상놈의 껍데기도 벗기는 사람들이니께. 산속에 숨어서 사는 사람들 말이 이자는 알겄구마. 동학패들이 양반이라 카믄 이를 던 심정도 알겄구마. 다같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아무리 상하 구별이 있다고는 하지마 는, 나 때문에 수동이 다칬다고는 하지마는, 그 동안 함께 산을 타고 한솥 밥을 묵고 한 사람으 정리도 모른다 말가.' 울분은 모두 귀녀를 얻을 수 없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강포수는 이미 산에서부터 최치수가 귀녀를 내어놓지 않을 것을 짐작했었고 그 때문에 평생 처음 승 에게 선불을 맞혔는데 명포수인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는 것, 사람이 상했으며 그리하여 지금 얼마간의 노자를 들고 언덕을 내려오 는 자기 꼴이 문전걸식하는 거지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어느 누구에게도 내여 있기를 원치 않았던 본래의 피는 견디기 어려운 노여움으로 치솟는 것이었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살갗보다 그의 음을 더 아프게 했다. 후일, 강포수는 이날을 평생 잊지 못하게 된다. 마을로 내려갔을 때 논바 닥에서 얼음을 타고 있던 조무래기들이 강포수를 보자 이상한 함성을 지르 며 논둑길을 뛰어서 몰려왔다. "강포수?" "..." "수동이 정말로 배가 터졌소!" 그것은 물어보는 말이 아니라 함성이었다. "강포수! 텁석부리 강포수!" "..." "수동이 정말로 총 맞았소!" 아이들의 함성에는 높고 낮음이 없었다. 여름 논물 속에서 합창하는 개리 의 울음 같았다. 강포수는 묵묵히 걸어간다. "버부리 강포수!" "텁석부리 강포수!" "고자 강포오수우!" 조무래기들은 쫓지도 않건만 와와! 하며 소리를 지르 고 달아난다. "강포수는 그기이 없다네!" 마귀 새끼같이 웃어댔다. 아이들도 알아먹는 명포수라는 강포수는 아이들 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했다. 수동이를 데리고 온 뒤 처음 이 길을 지났을 때 아이들은 궁금해서 물었다. 강포수는 아이들 묻는 말에 한마디도 대꾸 할 수 없었다. 아이들도 알아먹는 명포수인 자기가 어찌 선불 맞힌 이기를 할 수 있으랴 싶었고 충격이 컸던 만큼 넋이 빠져서도 그러했다. 다음에 이 길을 지날 때 아이들은 또 물었다. 그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그리하 여 어느덧 강포수는 아이들 노리갯감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강포수는 그기이 없다네에 - " "버부리 강포수!" "텁석부리 강포오수!" 아이들은 논물 속의 개구리들같이 합창을 했다. "데키놈!" 서서방이 나룻배에서 내려 마을길로 올라오다가 아이들의 못된 장난을 보고 야단을 친다. 그러나 아이들은 수를 믿고 거리에 자신이 있었 던지 서서방의 부릅뜬 눈은 아랑곳없다. "텁석부리 강포오수! 칠푼이 강포 오수! 버부리 강포오수!" "빌어묵을 새끼들이." 서서방은 기름병을 길가에 놓고 돌을 하나 주워서 아이들을 향해 팔매을 한다. 거미알같이 흩어지면서, 아이들은 타작마당을 향해 달아나면서 외치 는 소리는 멀어졌다. "우째 세상이 거꾸로 될라꼬 새끼들이 먼지 기승을 부리네. 한데 강포수는 어디 가노? 보따리 싸들고." 서서방은 추위에 꾸부러진 손으로 입김에 축축이 젖은 입언저리 수염을닦 는다. "산에 가야지요." "하직하고 가는 길가." "야." "수동이는 좀 어떠노?" "병신이 될 기라 카더마는... 명은 건짔는가배요." "지금 산에 가믄 머하겄노. 모진 추위나 보내고 떠나는 기이 좋을거로?" "..." "고놈으 새끼들 어른들 찜쪄묵을라 칸다." "그라믄 가보소. 나는 이쪽으로 갈라요." 강포수는 손에 든 보따리, 총을 낯선 물건같이 내려다보다가, "어디 가긴, 산에 가지." 기운을 내어 주모 말에 대답하고 술판 앞에 와 앉는다. "이자 신물도 나 게 됐지라우." "신물이 아니라 욕지질이 나구마." 뚝배기에 시래기국을 푸면서 주모는 강포수를 힐끗 쳐다본다. 방안은 이 서려서 뭉뭉했다. 검붉은 강포수 코 끝에 콧물이 달려있다. 떨어지려 하자 들이마시며, "어서 술이나 주지." "사람이 상했인게로 그댁 일도 인자 끝장이 났다, 사냥은 안 헐기라 그말 이요?" "끝장났제. 시작이 있이믄 끝도 있는 법이라."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삯은 두둑이 받았지라우? 이분에는 허랑히들 허지 맑고 장개드시요이, 잉?" 주모는 잽싸게 술판을 닦으면서 타이르듯 말하고 뚝배기를 갖다 놓는다. 숟가락을 챙겨놓으면서 다시, "정신채리서 장개드시요이? 나이 사십질인디 뉘가 구신 차지할 것이요.안 그렇다요? 강포수." 강포수는 훌훌 소리내어 국을 마시고 주모가 부어주는 술을 쭉 들이다. 술사발을 놓고 김치 조각을 집어 우직우직 씹는다. "장개라고? 오늘 술값이야 걱정 없일 기다마는." "평산이 그 작자 말 들은 게로 한밑천 장만할 거이라 허든디?" "양반은 양반을 모르는 기라. 상놈이 양반을 알제." "그거 무신 소리요?" "..." "그러매 그러믄 아무것도 못 얻었다 그 말인게라우?" "영산댁이 와 걱정고." "오늘 만낸 주인 주객이간디? 걱정 안 허게 생겼 소?" "..." "허긴 사람이 상했인게로 무신 경황인들 있을랍디여? 그래도 따신 방에서 설이나 쇠고 갈 것이제." "설이사 계집 자식 있는 놈의 설 아니가. 뿌리 없는 나무, 머 말라 죽은 명절이고 개발의 달걀이구마." 허하게 웃는다. 이때, "어허어. 내 영산댁 보고 저버서 왔네. 조선팔도 다 댕기도 영산댁 술맛이 제일이고." 들어선 사내는 윤보였다. 푸릇푸릇 멍이 든 것 같은 곰보 얼굴에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아이고매! 곰보목수. 안 죽고 살아 있었다요?" "죽기는 와 죽노. 장가 한 분 못 들어보고 몽다리구신 될라꼬 죽나?" 연장 망태를 내려놓는다. "하이고, 그란혀도 사십 총각 장개들라고 권허고 있는디. 그러고 본게로몽 다리구신이 둘이나 모였으라. 무당 불러 굿 안 혀도 쓸란가 모르겄네이. 하 이고 참 별일 났당께." 주모는 기분이 썩 좋아서 솥뚜껑을 덜커덩 열어젖 히며 지껄였다. "이기이 누구더라? 강포수 앙이가!" 윤보는 허리를 꺾었다. 얼뜬 시늉을 하며 강포수 어깨 너머, 수염 가까이 얼굴을 쑥 디민 다. 슬그머니 목을 비틀고 강포수는 윤보를 본다. 평소의 사람 좋고 병신스 러웠던 얼굴이 아니었다. "오래간만이구마." "사흘에 피죽 한모금도 못 묵었나? 와 그리 기운이 없 노. 아무튼 지간에 목부터 축이야지." 강포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해 물을 다루었는가 그에게서 갯가 냄새가 났다. 주모는 두 괴물 같은 사나이 에게 술시중을 들면서 강포수를 대신하여 그간의 신상 얘기를 들준 다. 강포수 아니냐 하면서 정답게 하던 아까와는 달리 주모의 얘기를 듣는 윤보의 얼굴은 시종 냉정했다. "그런게로 강포수만 허탕친 게 아닌개비여." 주모는 윤보의 빈잔에 술을 부었다. 강포수는 한마디 참견 없는 남의 일처럼 듣고 있었다. "그런 말 자 꾸 하믄 맘이 이상해진다. 초가삼간 다 타도 빈대 죽는 기이 시원터라고심 청 이 난께 더 말하지 않는 기이 좋겄고, 그런데 그놈으 멧돼지가 와 수동를 떠받았는고? 종놈이 무신 죄가 있을 기고." "..." "강포수, 와 그랬노." 되잡아 묻는다. "선불 맞힜구마." 퉁명스럽게 말했다. "선불? 누가?" "누구긴? 내가 그랬지." "허허, 그거 변일세. 산신한테 추굴 받았구마. 송 충이가 갈잎을 묵으믄 죽는 법이다. 곳간에 사가 생긴 그 잘난 엽전 몇 낲 받을라고 양반 따라서 총 메고 댕깄이니. 내가 영 사람 잘못 봤구마. 명포 수 꼴 좋다." 윤보는 껄걸 소리내어 웃는다. "사가 생긴 엽전이라도 주기만 했이믄 장개라도 들지 않겄더라고." 주모 가 강포수 편역을 들어 거들어준다. "장개는 들어 뭐하노. 니나 내나 매인 곳 없이 이리저리 살다가 가는 기이 좋을 기다. 세상 꼴을 보니께 앞으로 난리가 나도 큰 난리가 날 기라 카는데 씰데없이 애물 맨들 거 있나." "난 리가 난다고?" 주모의 눈동자가 벌어진다. "날 기라 카더마." "난리가 난다면 우리 겉은 사람은 워찌 될 것이요?" "그거 알믄 벌써 신선 됐지. 이러고 있이까? 동학 난리는 소분지애씨라 마." "오매, 그러면 벌써 난리가 났단 그 말이요." "원님네 버선발로 뛰는 난리 겉은 거는 노상 있는 일이고, 유식자들 말을 들어볼 것 겉으믄, 아 유식자 들이 그러더마. 양놈들하고 왜놈들하고 결국 붙을 기라고." "붙으면 저희끼 리 붙을 일이지, 우리 조선 땅하고 무슨 상관이더라고?" "이 축구 봤나. 삼 거리에 앉아 술장사를 하믄서 그것도 모르나. 이치를 생각해보라고. 이 조 선 땅이 묵고 저버서 목에 춤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 양놈 왜놈이 마주보 고 있는 땅이 어디고?" "그러면 우리 땅에서 난리를 친다 그 말이어라우?" "그렇지. 고래 쌈에 새 비 등이 터지더라고, 영락없는 그 판이지. 난리가 나기만 하믄 동학당한테 쓰던 철포 대포는 유도 아닐 기고 한방 터지기만 하믄 산이 무너진다 든 가. 그뿐이가, 양놈 왜놈이 이쪽저쪽에서 개미떼맨치로 기어올라올 판이니 볼장 다 보는 게지." "그, 그러면 워쩔 것이요? 검정콩 볶아서 산에 가야겄 소잉, 이?" "영산댁 죽기 싫나." "죽고 저븐 사램이 어디 있당가." "그라믄 강포수 따라가지." "워쩌자고 모두 그랬샀는 게라우? 우스갯말 아니랑게." "걱정 마라. 최참 판댁이 떠난 뒤에도 늦잖을 긴께. 종놈 데리고 사냥 댕기는 거를 보아도 여기는 태평성세라. 영산댁 머 가진 거 잇다고 그러노. 술 팔아서 돈 좀 벌 었나." "돈 벌었이면 이 장사 허고 있을 것이요? 좌우당간에 밤에 잠 안올 일 생겼당게." 웃었으나 영산댁 눈에는 겁이 실려 있었다. 언제부턴지 강포 수는 벽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잠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귀녀와의 그 잡목숲에서의 정사의 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간밤에 그녀와 삼월이 잠이 들었던 방앞에서 말뚝같이 선 채 환상을 보고 느끼던 것처럼. 그러나 주모와 윤보는 그가 잠든 줄 알았다. "동네는 별일 없었나?" 윤보는 말아놓은 국밥을 먹으며 물었다. "동네는 안가고 왔다요?" "술 생각이 나서." "두만네 집의 딸애를 치웠는디, 왜 그 장배 부리는 장서방 일지라우?" " 음, 전에 고지기를 했제." "고지기나 뭣이나 지금은 장배 부리고 속이 따습 다 허든디, 허기는 두만네도 밑천 들고 보면야 그렇고 그런게로, 모두 혼사 잘 헌다고들 허드랑게. 예물도 짤짤허게 받았다 허고, 그라고 평산이 개차 반, 그댁네 말인디 다 죽게 생겼다든가. 목구멍에서 피 쏟으면 질게 살지는 못헌다 안 헙디여? 문의원이 불쌍허다고 약첩이나 지어 보낸 모양인디 평 산이 그자가 돌리보냈다든가, 지 주제에 흥, 썩어질 눔으 체통 차린답시고 입이 열 있이도 못 다 웃겄더라고." "용이네 집구석은 잘 있는가 모르겄네." "말 마시오. 동네가 시끄러웠지라 우. 그 왜 무당딸 월선인가 그 제집하고 허서방이 좋게 지냈지라. 헌디 제 집이 그만 서방을 얻어가들 않았겄소?" "서방은 무신 서방, 내가 진주서 만났는데." "그거 참말이요잉?" 윤보는 쓰게 입맛을 다신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심각해져서 말이 없다. " 헌디 이서방이 그 때문에 죽을 뻔혔지야. 벵이 나서." "미친 놈." "옛말로 신발은 발에 맞아야 허드라고, 양반도 아니겄고 상사람인디 씨당 초 너무 따질 것도 아니었는디." "두 계집 데꼬 살믄 우떨 기라고, 못난 놈." "강청댁이 좀 혀야제? 가서 개 패듯이 팼다더마." "사나아가 잘나믄 열 계집도 거나린다 카는데 그리 못하게 처릴 했어야지." "허긴 이서방이 본시 용해서... 요새는 마누라를 얼 씬도 못하게 하고 각방자리 헌다더만. 그래서 강청댁이 미쳐 댕기다가 좀 잠잠해지기는 헌 것 겉은디." 윤보는 소리내어 웃는다. "그러니 옹졸한 놈이지."하는데 문을 열고 용이 들어섰다. "형님." "호랭이도 제 말 하믄 온다더니. 그래 얼굴 좀 보자." 못난 놈, 미친 놈 하며 욕설을 했으나 윤보의 눈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형님 오시는 거 봤다 캐서 왔소. 집에 갑시다." "안 갈란다, 너거 집에는." "와요?" "각방자리 한다 카든데 니 마누라가 내 저녘 해주겄나." 용이 얼굴을 붉힌다. "모두들 걱정했소. 집에 갑시다." "허어 안 간다 카는데 와 이라노?" "그라믄 여기 살 기요?" 윤보는 그러나 자기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용이 마음씨가 기뻐서슬 슬 곁눈질을 하며 입매를 허물어뜨린다. "이서방 허자는 대로 허랑께. 다 정리가 있어 그러지 않는다요?" 주모는 윤보 입에서 각방자리 한다는 말이 나오자 허튼소리 한다고 용이 노할까봐 무안스 레 앉아 있다가 권했다. "내 참." 윤보는 못 이긴 척 일어났다. 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가고 난 뒤 잊 혀진 짐짝같이 숫제 술방에 누워버린 강포수의 뒷모습만이 남았다. 6장 살해 설을 앞둔 최참판댁은 앞뒤가 분주했다. 특히 부엌을 중심한 곳이 들었다. 귀녀와 삼월이는 사랑과 안방의 시중, 그리고 봉순이가 곁에 있기는 하나 별당의 서희도 돌보아야겠기에 바깥 일에는 참여 못했고, 김서방댁과 남이 연이 여치네 드난꾼들과 마을의 여러 아낙들까지 불러들여 벌써 여러 날 전부터 연이네의 지시 아래 부산을 떨고 있었다. 큰 가마솥에 안친 다섯 말들이 시루에서 연달아 쪄낸 술밥 엿밥은 이미 담그고 고고 하여 술은익 고 있 었으며 엿은 사기마다 퍼내어 여기저기 찬마루에 널려 있었다. 고방에서는 곶감이다 대추다 밤에서 잣 호두 은행, 가을에 장만한 호박오가리 정과 거리를 꺼내놓고우 물가에는 새앙이 무덤같이 그득히 담겨진 소쿠리가 두 개나 있었다. 여치네는 소매를 걷어올리고 벌개진 팔뚝을 휘두르며 깨를 씻고 있다. 그 깨의 분량은 농가에서 담그는 떡쌀보다 많았다. 한켠에서는 산적거리 생선포를 뜨고 있었으며 햇볕이 바른 행랑 뜰에는멍 석에 아낙들이 둘러앉아 잡담을 하며 제기를 닦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쌓인 것은 음식요, 발에 채는 것은 일거리였다. 마을 아낙들은 그 많은 먹을 것을 보며 집에 두고 온 자식들 생각을 했고 울타리 밖에서는 기웃기웃 안을 들여다보며 제 어미가 행여 지에밥이라도 뭉쳐서 한덩이 내주지 않을까 손가락을 물고 섰는 아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낙들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어미 찾아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고 그래도 철부지가 따라나서면길가 돌 을 주워, "이눔 자식! 집에 못 가겄나!"하며 위협을 했으니 문밖에 아이들이 와 있 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어미 치마 꼬리를 잡고 흥얼 거리는 임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임이네는 집에 못 가겠느냐고 나무 라기는 했으나 건성으로 하는 말이었고 감주를 만들려고 막 찌어서 내놓은 지에밥을 슬쩍 집어서 손바닥을 호호 불어가며 뭉쳐서 아이에게 주기도 하고 남의눈 치 보아가며 밤이랑 대추를 집어주기도 했다. "새끼 버릇도 더럽게 딜인다. 일질에 아아는 머할라고 데리고 오노." 산적 을 장만하던 김서방댁이 지껄이며 혀를 찼으나 임이네는 그때만은 귀거리 흉내를 냈다. 한편 봉순네는 여러 날 밤을 새가며 지은 설빔을 챙기느라 바빴다. 이에 는 임이네와 두만네가 바느질을 거들어주었으나 함안댁이 빠졌기 때문에 일은 좀 더딘 편이었다. 그러나 이럭저럭 끝막음은 했으며 동정이나 속고 름 다는 것이 더러 남았을 뿐이다. 두만네는 아무래도 시어머니 병세가 수 상쩍다 하며 일이 끝나자 이내 돌아갔고 임이네는 드난꾼들 속에 끼여 바 깥일을 모두 시원시원 해내고 있었다. 섣달 그믐날, 이른바 아이들에게는 까치설날이었다. 서희는 까치저고리에 오색으로 지은 까치두루마기를 입고 역시 까치저고리를 입은 봉순이와 함께 별당 뜰에서 깡충거리고 었 다. 그는 여전히 어미를 잊지 않고 있었으나 까치설은 즐거운 모양이었다. 봉순이 이마에는 흠집이 하나 나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는 별 지장이 있을 것 같지는 았 으나 없느니보다 나을 리는 없다. 그믐날 밤에는 밤마다 장등을 한다. 고방 앞에 쭈그리고 앉은 돌이는 등잔이란 등잔은 모조리 꺼내어놓고 기름을 그 득그득 붓고 있었다. 행랑 뜨락에서는 아침부터 떡치는 소리로 요란했다. " 에이야 흑!" "데이야 흑!" 기세 좋은 소리와 함께 철버덕철버덕 떡치는 소리. "모르겄다! 내 허리야. 이자부터는 떡 묵는 놈만 쳐라." 메를 물에 적시다 가 삼수는 나앉는다. "지랄한다. 떡만 묵어봐라. 입을 찢을 기니." 절구통 옆에 꾸부리고서 물에 손을 담가가며 뭉게지기 시작한 떡을 이저 리 굴려주던 김서방댁이 눈을 흘긴다. 게똥이녀석, 침을 흘리며 어미를 바 라본다. 영팔이 빙긋이 웃으며 나선다. 손바닥에 침을 뱉고 메를 잡으며, "어디 한번 쳐보까?" 아낙들은 멍석위에 즐비이 앉아 쳐낸 인절미를 모양 있게 다듬어 콩가루에 굴리기도 하고 몽우리 없이 잘 쳐졌는가 뜯어먹어 보기도 한다. 김서방은 깨끗한 차림을 하고 행랑에서도 상방인 넓은 방에 마을의 서서방과 함께 앉아 밤을 치고 있었다. 서서방은 한자 길이가 넘는 문어다리로 봉황을 오린다. "나으리. 진지상 올려 왔습니다." 방문 앞에 밥상을 놓고 귀녀가 아뢴다. "점심이냐?" "예." 아무말이 없자 귀녀는 다소곳이 두 손으로 방문을 열고 밥상을 들여다. 최치수는 귀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머금는다. 그 러더니 귀녀의 허리 쪽을 가만히 노리듯 본다. 본시 귀녀의 허리는 굵은 편이었고 아직은 몸에 변화가 나타날 시기도 아니었으나 최치수의 눈길은 무서웠다. 사랑에서 나온 귀녀는 뒤뜰에 한찬 서 있다가 부엌으로 들어간 다. 연기와 김이 서리고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부엌에서는 전을 지져느 라 한창이었다. "어째 강청댁은 코빼기도 안보이노." 여치네 말에, "오나마나지 머. 제집이 궂어서, 하는 일이라는 기이."하며 임이네가 헐뜯 었다. 그런 주고받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귀녀는 우두커니 팔짱을 끼 고 서 있다가 숭늉을 떠서 부엌을 나선다. "숭늉 가지왔습니다." 아까처럼 다소곳이 두 손으로 방문을 열고 다시 두 손으로 숭늉 그릇을 든 귀녀는 그것을 밥상 위에 놓는다. 최치수는 숭늉 그릇을 들었다. "진지상 물리오리까?" 대답이 없었다. 숭늉을 마신 뒤 별안간, "이년!" "예?" "이년! 그래 애는 뱄느냐?" 삼신당에서 은조랑씨 제앙님네 하며 빌던 일을 생각하여 최치수의 잔이 발동된 것이다. 속절없이 애를 잰 귀녀로서는 청천의 벽력 같은 말이었다. 얼굴이 풀잎같이 변한다. "무, 무슨 말심을..." "나쁜 년 같으니라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더라고 이년!" "..." "소행을 생각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만 강포수한테 들은 말이 있고 해서 서 하느니라." "예?" 귀녀는 희미하게, 아주 휘미하게 여유를 되찾는다. "산중에 가시 화전을 일구며 살겠느냐?" "무슨 말씀이온지." 귀녀는 디딤판을 차 던지고 앞으로 나서듯이 반문했다. 자신들의 음모와 상관이 없는 다만 강포수와의 관계를 두고 최치수가 추궁했었다는 것을 그는 재빨리 포착던 것이다. "종문서를 내어줄 것이니." 종문서를 내주고 어쩌고 할 것도 없었다. 노비 제도는 관습으로 남아 을 뿐 나라에서 철폐한 지 이미 사오 년이 지났으니까. "무슨 말씀 이온지 쇤네, 잘 모르겠사옵니다." 비로소 귀녀는 얼굴을 꼿꼿 이 세우고 커다란 눈에 희미한 빛을 띠며 최치수를 쳐다본다. 이년 하며 불호령을 내리던 얼굴과는 딴판으로 실실 웃고 있었다. "강포수 계집이 되 라 그 말이야. 총 대신 너를 주는 게야." 웃음은 일시에 사라졌다. 귀녀 얼 굴에 이는 변화를 응시한다. 핏물이 괴기라도 한 듯 벌겋게 핏발이 선 귀 녀의 눈이 최치수의 눈을 피하기는커녕 무섭게 대항한다. "억울하옵니다." 뱃속에서 밀어내듯 목소리는 굵었다. "종년 신세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싫사옵니다!" "왜?" "싫사옵니다!" "강포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 늙은 것이 죽으려고 그런 말을 했나 봅니다." "사내가 계집을 탐하는 것은 음양의 이치이거늘."하다가 말을 끊은 최치수는 눈에 불을 켰다. 험악 하게 일그러진 얼굴, 입매가 뱅글뱅글 돌았다. "초당에 불 지피라고 어서 일러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녀는 조용히 일어섰고 조용히 밥상을 들고 방 밖으로 나온다. 길상을 찾아낸 귀녀는 초당에 가서 불을 지피라고 일러놓고 자신은 고방 뒤켠 무 도 지나는 이 없는 곳에 가서 팔짱을 끼고 쭈그려앉는다. 일년 내내 햇볕 이라곤 들지 않은 응달은 창자까지 얼어 붙는 것 같은 냉기르 몰고 왔다. 귀녀는 전신을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상 기되어, 좀처럼 붉힌 일이 없는데 양볼은 타는 듯 붉었다. '어떻게 하노? 씹어서 묵어도 분이 안 풀릴 원수놈을! 한시가 바쁘다! 한시가!' 이를 부드 득 간다. '그렇다고 어둠이 오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최치수가 강포수와 귀녀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그것을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 는 일이었다. 최치수가 윤씨부인에게, "귀녀를 강포수에게 주기로 했습니 다."하고 입을 벌리기 전에 그 입을 암흑 속에 묻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귀녀를 강포수에게 주기로 했습니다."하는 날에는 만사는 휴의다. 야망은 모래무덤같이 허물어지고 말 것이며 뱃속의 아이는 쓸모없는 핏덩이, 숲속 에나 내다버릴 물건밖에는 되지 못한다. 수동이를 나귀 등에 싣고 돌아오 던 날, 그 황망한 중에 돌아왔다는 인사를 올린 후 아직 한 번도 최치수 모자는 상면한 일이 없다. 그러니까 그렇다면 때는 늦지 않았다. 생각이 거 기까지 미쳤을 때 귀녀의 이빨 사이에서 무서운 소리가 새나왔다. 악마의 얼굴, 악마의 미소, 악마의 희열, 보복의 화신. '내가 강포수하고 살아? 내 가 강포수하고 살아? 화전을 일구며 살수 있겠느냐?' 이제는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보복 때문이다. 서희가 얼굴에 침을 뱉었을 적에 귀녀는 보 복의 칼을 갈았다. 이제는 그 칼을 내리침에 주저할 것이 없는 것이다. 미 죽이기로 작정하였고 죽일 것을 주저했던 귀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귀녀는 만석꾼 살림보다, 아니 백만 석의 살림보다 여자로서 물리침을 당 한 원한이 더 강하였다. 최치수를 사랑했던 것도 아니었으며서. 지금 귀녀 는 백만석의 사림을 차지하는 야망보다 노비로서 짓밟힘을 당한 원한이 더 치열하였다. '그놈은 나를 손톱 사이에 낀 떼만큼도 생각지 않았다!' 비단과 누더기를 구별하는 따위의 자존심! 야수 같은 강포수에의 허신과 인간 쓰레기 같은 칠성이와의 동침을 거치면서 마지막까지 최치수에게 여자 대접을 받고자하 는 희망은 애정일까 허영일까 또는 집념일까. 억압을 쌓기 위해 목욕재계 하고 동자불 앞에서 도움의 기도를 올리던 귀녀, 모든 것은 밖에서부터 시 작되었던 것이다. 밖만 싱그러우면 마음속의 쓰레기는, 자기만이 아는 쓰레 기는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고독한 여자가 아니다. 부처님이 무섭지 않은 여자였던 것이다. 귀녀는 채마밭을 질러서 급히 초 당쪽으로 올라간다 초당 뒤켠으로 돌아간다. 길상이 장작불을 지펴놓고 그 앞에 퍼질러 앉아서 주머니칼로 뭔가 열심히 깎고 있었다. "길상아!" 열중 해 있던 길상이 놀라서 일어섰다. 주머니칼은 손에 들었으나 깎고 있던 나 무 토막은 땅에 굴러떨어졌다. "아이구 놀랬다." "니 심부름 좀 해야겄다." "어디로요?" "나으리께서 곧 올라오실 모양인데 김평산이. 거복이 아버지 말이다." "야." "여기 초당에 좀 오십사고. 나으리께서 이르시는 말이다." 길상이 가려고 하자, "그 양반보고 내가 이르더라고 그래라, 초당으로 오시라고, 나리께서 곧 오실 기니. 내 그 동안 불 보고 있을께 어서 뛰어가거라." 길상은 언덕을 뛰어내려간다. '집에 붙어 있지 않으면 우짤꼬?' 귀녀는 급히 서둘며 아궁이 속의 불붙고 있는 장작을 꺼내어 묵혀둔 채있 는 협실 - 그러니까 이따금 치수가 올라와서 쓰는 방옆에 붙은 조그마한 방인데 그곳은 방문이 뒤켠에 나 있었고 방문 앞에 아궁이가 있었다 - 그 아궁이에 꺼낸 장작을 밀어넣는다. 묵혀둔 방이어서 불이 잘 들지 않았다. 눈물이 찔끔찔끔 짜면서 겨우 불을 살라놓고 초조하게 초당 앞쪽으로 나간 다. 다행한 일이었다. 띵띵한 몸을 굴리며 팔을 휘저으며 평산이 길상와 함 께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귀녀는 뒤안으로 되돌아와서 아궁이 앞에 앉는다. 평산이 초당 앞까지 이른 기색이 나자 귀녀는 큰기침을 했다. 그래놓고 나 서 "길상아!" 길상이 뒤안에 왔다. "너 어서 가서 장작 한아름 가져오너라." "많이 넣었는데요?" "아니다. 골방이 습해서 거기 갈라넣었다. 나으리가 오시기 전에 방이 따끈따끈 끓어야지. 그란하믄 야단벼락 내리실 기니. 와 골방엔 불을 안 넣노? 오늘은 섣달 그믐이니께 불짐을 해야 한다." 길상은 다시 언덕을 뛰어내려간다. 길상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나서 산이 급히 뒤로 돌아왔다. "큰일났소." "무슨 일인데." 평산은 귀녀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잠자코 내 말만 들으시오, 길상이 오 기 전에. 그 개 같은 놈이 오늘 나를 보고 강포수 따라가라 하지 않겠소?" "치수가?" "가만히 듣기만 하시오. 산에서 돌아온 그날 마님한테 인사하고 여직상면 하지 않았으니 나를 강포수한테 보낸다는 말을 아직은 하지 않았을 게요. 그러나 일은 급하게 됐단 말이요.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있는 것을 마님 이 안다믄 만사는 허사요. 가만히 기시요. 내 말만 들으소. 그러니께 마님 한테 말이 가기 전에 요절을 내야겄소. 초당에 불 지피라 했으니 오늘 밤 에 여기 와서 잘 기요. 집안이 시끄러우니까 여기 와서 잘 모양이요. 그러 니 준빌 하고 삼신당에서 기다리시요. 내 형편 봐서 빠져나갈 것이니." 귀녀는 단숨에 지껄였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압력을 가하듯 평산을 노보 는 것이었다. 평산의 얼굴이 굳어지고 뻐드렁니 위의 입술이 말을 할 둣이 떨렸으나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귀녀의 말이 날았다. "이제 앞에 나가 기시요. 길상이가 장작 안고 오면은 기다리고 있는 하다 가 내가 가서 그 양반을 마나지 하고 어물쩍거리며 내리가시요. 가다가 사 랑에 들러 인사나 하고 가면 길상이 눈칠 채지는 않을 테니까. 후일 이러 쿵저러쿵 말도 없일 기고. 자아, 어서 나가요." 귀녀는 평산을 떠밀었다. 목 적을 위해서 줄달음치는 무모한 행위라 할 수 있었지만 짧은 시간의 임기 응변은 대단한 것이었다. 귀녀가 시키는 대로 초당 뜰에 나간 평산이 얼쩡 거리고 있을 때 길상이 장작 한아른을 안고 올라왔다. "오신다더냐?" "모르겄십니다. 오신다 하시었으니 오시겄지요." "음... 뭐 여기서 기다릴 것 없이 내가 그리로 내려가지." 사랑으로 냐려간 평산은 반길 턱이 없는 치수에게 이러쿵저러쿵 인사도 아니요 잡답도 아닌 말을 하고 나서 우물쭈물 돌아섰다. 치수는 무슨 일로 저자가, 싶었으나 일 이 설이어서 궁한 말을 하려다 간 게 아닌가고 개의치를 않았다. 그믐밤 어둠 속에서 평산은 오랫동안 떨며 귀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서 운 계집이다. 한데 왜 안 오나.' 평산은 언 발을 구른다. 모닥불이라도 피 웠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 추워서 일이나 쳐내겠나.' 순간 평산은 모든 계획을 다 팽개쳐버리 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추위도 추위려니와 그는 마음속에서 떨려 올라오 는 무서움을 느꼈다. 귀녀가 무서웠다. 그러나 귀녀가 삼신당 앞에 나타났 을 때 "치수는 초당에 있나?" 하고 먼저 물었던 것이다. "거기서 지금 자고 있소. 이것부터 한잔 하시요." 귀녀는 조그마한 두루미병을 내밀었다. 술이었다. 추위를 막고 평산의 을 키우기 위해 술을 가져왔던 것이다. "으음." 평산은 술병을 물고 꿀컥꿀컥 술을 들이마신다. 술병을 놓으면서 평산은, "됐다!" "괜찮소?" "뭐가?" "떨고 있지 읺소." "추우니까. 오늘 밤이면 끝장이 난다. 그러고 나면 우리 세상이다." 자신을 격려하듯이 말했다. "어떻게 할라요?" "어떻게 하기는, 너는 구경이나 하고 떡이나 먹어라." 살해하는 방법까지 설명할 용기는 없었다. "그 개놈이 자식! 줒는 꼴을 내 가 못 보아 한이요." "죽으믄 그만이다." 평산은 다시 떨기 시작했다. "참, 잊어부릴 뻔했소. 혹 나중에 말이라도 나오믄 안 되니께 일러두어야겄소. 행여 낮에는 뭐할려고 치수를 만났느냐 고 묻는다믄 구천이 행방을 수소믄해보라 일렀다든가 하고 실수가 없도록 하시요." 그러고 내일 아침에 제사도 모시고 할 기니 일찍 내려올 게고 서 둘러야 한다는 말을 했다. 평산은 술병을 물고 술을 마신다. 침침 칠흑 같 은 그믐밥, 마을에는 불빛들이 깜박이고 있었다. 빈 술병을 들고 집으로 내려온 귀녀는 잠들지 않고 두신거리는 행랑 뜰에 나가서 잠시 얼 쩡거리다가 다시 부엌 쪽으로 들어와서 음식을 장만하며 잡담을 하고 는 속게 끼여들었다. 평산은 초당 층계를 더듬고 발소리를 죽여가며 치수 방 앞을 향해 간다. 그림자도 없이 안 성맞춤인 밤이다. 방 앞에서 귀를 기울인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온다. 히 잠든 모양이다. 방문을 당겨본다. 문고리가 걸려 있다. 손바닥에 침을 흠씬 뱉어서 장이를 뚫은 손이 문고리를 벗긴다. 방문이 열려지고 닫혀졌다. 얼 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우욱..." 낮은 목소리, 발버둥치는 소리, 낮은 숨이 찬 신음, 발버둥치는 소리, 틀거 리는 소리, 소리... 소리가 멎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헉헉 흐느끼는 것 같고 쥐어짜는 것 같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한층 크게 들려온다. 이를 악물 면서 새어나는 거칠은 숨소리, 방문이 열리고 허둥지둥 뛰어나오는 모습. 모습이 땅바닥에서 나동그라졌다. 시꺼먼 무엇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것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누, 누, 누고?" 했으나 목소리는 입 밖에 나가지 않았다. 기다시피 하다가 일어선 평산은 초당의 뜰을 벗어 났다. 마을을 피하여 초당 뒷면 숲속으로 해서 달아나기로 된 애당초의 획 도 잊은 평산은 사뭇 미친 둣 마을을 향해 달아난다. 마을은 모두 잠들지 않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것은 그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작은 방에는 불이 커져 있었다. 그러나 베 짜는 소리는 없었다. 아무 척도 없었다. 큰반으로 기어들어갔던 평산은 다시 문을 박차고 작은 방으로 달 려간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함안댁은 베틀 위에 엎드려져 있었다. 멀거 니 바라보다가 "불을 켜놓고 뭘 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띤띤한 몸을 흔들고 짖었다. "불을 켜놓고 뭘 하느 냐 했것다!" 함안댁이 얼굴을 들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비참한 얼굴이었다. "못 일어날까!" "아아." 함안댁은 몸서리를 친다. "아아. 흉측스런 꿈도, 흉측스런 꿈을 꾸었소." 평산이 주먹을 떤다. "아가리 찢을라! 자빠져 자란 말이야!" 하다가 그는 함안댁의 멱살을 잡고 베틀에서 질질 끌어낸다. "왜 이러시 요," "으으잉! 죽여버려야지." "왜 이러시요. 여보!" 평산은 함안댁을 쓰러뜨린다. 뼈만 남은 여자의 몸 을, 메말라서 잎 떨어진 겨울나무 같은 여자의 몸을 주먹으로 마구 내지르 며 머리끄덩이를 잡아끌며 발길질하며, 그러다가 울부짖으며 정욕을 채우 는 것이었다.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송장같이 된 여자를 이리 뒤치고 저 리 뒤치면서 다시 범하여 신음하는 평산은 공포레 몰린 구역질과도 같은 배설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평산이 도망친 뒤 초당 뜰에 서 있던 검은 것, 또출네는 킬킬거리며 웃다가 비죽비죽 울기 시작했다. "내 자식 어디가 우떻다고 그 몹쓸 년이 신방에서 달아나노. 이년을 디 가서 잡아오노. 옥황상제도 보옵시요. 부리제석도 보옵시요. 호패 찬 내 자 식이 금의환향하옵시고 삼현육각 잽히시고 고을마다 송덕비요, 춘향이도 넋을 잃고," 중얼중얼 끝도 없이 지껄이다가 일어선 또출네는, "아이고 날씨도 고추걸이 맵다. 신방 채맀는데 신랑 신부가 꽁꽁 얼겄네. 불을 때야제. 불 을 때줄 기니, 그것도 공덕이라." 어둠하고 또출네는 아무 상관이 없었는 가, 언덕을 쏜살같이 내려간 그는 김서방 집의 채마밭으로 들어간다. 집을 비워놓고 식구들은 모두 울타리 안의 최참판댁에서 밤을 새가며 일들 하고 있었다. 기둥에 초롱 하나만 덩그렇게 걸려 마당을 비춰놓고 있었다. 마당 으로 들어간 또출네는 기둥에 걸린 초롱을 들어낸다. 대숲에서 바람이 울 고 지나간다. 방문의 문풍지가 팔락팔락 소리를 냈다. 초롱을 들고 초당으로 올라오는데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싸락눈이 내다. 또출네는 초롱을 들고 초당 뜰을 왔다갔다하며 "소원성취 비나이다. 소워성취 비나이다." 한없이 그러고 다니다가 또출네 는 돌층계를 밟고 올라간다. 연신 입속으로 소원성취, 소원성취 하면서 누 각으로 들어간다. 누각 마룻장을 뚜벅뚜벅 밟고 돌면서 역시 소원성취, 원 성취 하며 중얼거린다. "아이고 내거 군불 땔 긴데, 치버서 내 자식이 꽁꽁 얼겄네." 초롱을 누각 바닥에 놓고 또출네는 아까처럼 언덕을 쏜살같이 내 려간다. 다시 김서방 집 마당으로 들어선 그는 쌓아놓은 솔가지 한 단을 번쩍 치켜든다. 장정이 무릎에 힘을 주어가며 묶은 솔가지 한 단을 장정 못잖은 힘으로 버리 위에 얹더니 한 팔을 휘저으며 누각 마르까지 가서 내 려놓고 그 짓을 세 번, 네 번을 되풀이하여 마룻바닥에 솔가지를 쌓는다. " 아이고오 이만하믄 방에 불이 날 기다." 마지막 나뭇단을 내동댕이쳤을 때 쓰러졌던 초롱에서 불이 기름을 타고와 서 나뭇단에 옮아갔다. 어느덧 싸락눈은 멎고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장엄한 정월 초하루의 돋 이를 서둘고 있는 것이다. 탁탁 불꽃이 튀며 솔가지에 불이 핀다. 누각이 훤하게 밝아왔다. 또출는 덩실덩실 춤을 춘다. 추면서 다시 초당 뜰로 내려온다. "소원축수 하나이다아!"싸락눈이 깔린 뜰에서 나붓이 절을 하고 또 절을 한다. 잠들지 않고 있던 마을은 동녘이 밝아오자 한층 더 활기를 띠고 술 렁거리는 것 같았다. 누각이 불타고 있는 것을 먼저 발견한 것은 마을에서 였다. "불이야! 불이야!" 한 사람이 외치자 "불이야! 불이야!" 여기저기 외치고 순식간에 마을과 최참판댁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에 손에 물동이를 들고 언덕을 몰려서 달려온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또출네는 불붙는 누각 쪽으로 도망친다. 졸이 아들 잡으러 온다고 소리소리지르며. 김서방은 초당으로 면저 달려간다. "나으리! 나으리!" 누각세서 기왓장이 날아왔다. "나으리!" 김서방은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나으리!" 김서방은 시체를 끌어내었다. 끌어낸 뒤 그는 치수가 이미 죽어 있는 것 을 알았다. "나,나,나으리가 돌아가싰다아!" 절규가 무리둘울 뚫고 울려퍼졌다. "나으리가 돌아가싰다아-" "저년 잡아라-" "나으리 돌아가싰다아-" "저년 잡아라아-" 불과 죽음과 물동이와 뭉둥이와, 당산은 순식간에 수라 장으로 화했다. 해가 솟아올랐다. 온 천지에 새해를 엄숙히 축복하며 솟아 올랐다. 강물도 하늘도 땅도 아름다웠고 새로웠다. 또출네는 무너진 누각과 더불어 타죽었다. 최씨 가문의 마지막 사내였던 최치수는 삼끈으 로 교살되어 세상에 마지막을 고했다. 7장 농민들은 슬퍼하는 관객 무리를 잃고 무인지경에 홀로 남은 그림자, 갈밭에 기어드는 한 마리의 눈먼 뱀이었을까. 그러나 윤씨부인의 자제력은 놀랍고 훌륭했으며 헌칠한 몸을 휩싼 당목 치마저고리의 모습은 조금도 변 함이 없었다. 입술이 터져서 피가 배어났으나 눈빛은 힘차게 나며 그의 언 동은 분명했다. 어느때부터였던지 강을 내려다보는 마을 언덕에 터전을 잡았던 영천 씨의 일가, 문벌과 재물로써 백 년을 넘게 이 지방에 군림해왔으며 특히 드센 여인들 손으로 이룩했고 지켜왔었던 최씨집안의 마지막 사내, 이 사내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상제는 하나, 여식 혼자였다. 사람들 속에는 평산이 있었다. 그는 평소 외면하여 인사도 없이 지내던 김훈장에 게 전과 달리 공손하게 몸을 굽히며 무슨 이런 변이 있겠느냐고 말을 었 다. 김훈장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한숨을 지으며 참으로 해괴한 일이 라하며 맞장구를 칠 판인데 삐뚜름하게 자빠진 갓 모양 하며 술에 절은 듯 한 김평산의 작은 눈을 보자 입맛을 다시며 몸을 비키는 것이었다. 버림받 은 평산의 눈은 다시 바쁘게 남의 눈을 찾아 헤메다가 귀녀 모습에 가서 부딪쳤다. 이때만은 눈밑의 군살덩이가 푸룩푸룩 떨었다. 애통해하는 많은 노비들, 그 중에서도 귀녀의 슬퍼하는 모양은 유별하였다. '저년이 사람을 몇이나 잡을 꼬?' 평산은 기갈이 든 사람같이 어번에는 서서방을 잡고 무슨 변이 겠느 냐 하며 성급히 말을 걸었다. 사실 무슨 변이겠느냐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 을 사람들과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온, 어떤 연유에서든 최참판댁과 인 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은 아닌말로 하나님이라도 살해를 당한 것 같은 이 엄청난 사건에 넋이 빠진 것 같았다. 뜻하지 않던 훙사를 천착한다거나 호기심에서 왈가왈부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백상들은 항상 어디서든 속성에 얽매인 현실적인 동물이다. 북방에서 흘 러들어오는 문믈 이외 거의 폐쇄 상태에 있는 땅에서는 그것이 정신이든물 질이든 자체 내에서 공급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까닭으로 하여 한층 완강 하게 떠받쳐져 왔던 한반도의 이씨 오백 년의 정치 체제는 오백 년이라는 그 기간이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장기 집권이었던 만큼 굳어질 대로 굳어졌 다 할 수 있고 늙어서 쇠잔해졌다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사회에서는 그 변 화가 완만하여 어떤 생업에 종사하고 있건 대개의 경우 백성들 앞에 놓인 현실이란 별로 변화가 없고 오래 쓴 연장을 철 따라 꺼내어 다시 쓰고 간 수하는 그런 성질의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는데 특히 농민들은 되풀이 되는 그런 성질의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는데 특히 농민들은 되풀이되 는 사계절의 변동에 민감하여 근심하는 이외 천재지변이 없는 한 달라질 리가 없는 논토에 콱 달라붙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현실에의 충직한 하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절이 좋고 관아에서의 수탈이 뜸하고 라 서 보릿고개를 넘길 만한 가을걷이가 있으면, 방바닥이 따습고 솜옷을 넉 넉히 입을 수 있는 처지라면 농민들은 상도가 몸에 밴 장사꾼처럼 인사치 레에 깍듯해지는 법이다. 우선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하고 나랏님께 감사하 고 터줏님께 감사하고 조상에게 감사를 올린다. 이들이 현실적이라는 것은 푼ㅅ를 아는 겸양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푼수, 바로 이 수를 헤아리는 겸양 때문에 이들은 최치수의 죽음을 보고 하느님이라도 살해된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들은 하느님을 본 일 이 없다. 그 누구도 본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랏님도 본 일이 없고 터줏님도 조상님의 얼굴도 모른다. 설령 삼 대 사 대쯤, 어린 시절에 본 일 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죽은 후 만난 일이 없다. 다만 하님을 하늘 과 달에서, 별빛이나 구름이나 강물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크나큰 것, 혹은 신기하고 위태로운 것에서 느끼는 것이며, 자연에 존재하는 크나큰 것, 혹 은 신기하고 위태로운 것에서 느끼는 것이며, 나랏님은 포졸의 육모방망이 나 원님이나 원님들의 거룩한 도임 행차 같은 데서 느끼는 것이며, 터줏대 감은 무당의 주술에서, 조상은 시주 위패에서 느끼는 것인데, 나 님을 말할 것 같으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특히 농민들이 실감하는 것로 는 사계절 천후를 임의로 하심이요. 세상에 태어나고 또한 하직하는 인간 사를 관장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나랏님을 말할 것 같으면 나라 땅의 임 자로서 병사와 부역의 의무를 받고 세물을 바치며 법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땅 위에서의 어른이시고 모든 영신과 터줏대감, 조상은 집안의 안녕 을 보살피는 분들이시다. 불행과 행복을 줄 수 있고 고통과 안락을 내릴수 있는 그분네 들 권능을 알진대, 배부르고 의복이 넉넉하면 감사를 올리는 인사치레는당 연하고 응당 그 리 하여야만 후사가 있을 것임에 그들 입버릇같이 감찰선생도 쑥떡 하나주 는 것을 치더라고, 아무튼 눈앞에 없는 그분네들과의 수수관계는 그렇다 치고 그와는 달리 최참판댁은 그들에게 있어 보다 뚜렷하고 지척에서 볼 수 있는 현실로서 존재해왔다. 그들과 다름없이 두 개의 눈에 입이 하나이 며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사람으로서 눈앞에 실감하여 의무를 다하고 감사 를 올려야 할 상대들이었던 것이다. 나라땅의 임자이신 나랏님은 멀었고만 석의 벼를 거둬들이는 토지 소유자인 최참판댁은 가까웠다. 그 토지에서 명을 이나가 는 농부들에게는 언덕 위에 높이 솟은 성곽과 같은 기와집, 그 속에서 많 은 노비들을 거느리고 사는 그 집의 당주인 최치수는 누가 뭐라 하든 절대 적인 권위의 상징이다.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권리를 인정하듯 이 농민들은 만의 볏섬을 거둬들이는 최참판댁의 부를 인정한다. 그 재력 과 권력이 농민들 생활에 미치기는 하나, 그러나 그들의 생활, 부의축적과 권리의 공고함에 농인들은 관여하지 않는다. 그들의 인생은 농민들 자신의 인생 밖에 존재해 있기 때문이다. 굶주리고 헐벗어애 하는 훙년이 들지 않 는 한, 수탈이 자심하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은 농민들의 현실이 아니기 때 문이다. "세상에 무엇이 설네 설네 해도 배고픈 설음 겉을라고." 배고픈 설움. 설사 고사리 같은 손이 보리아삭을 줍고 부황증에 눈이 묻 힌 아낙을 빌려온 달구지에 싣고 읍내로 떠나는 남편, 간조기 한 마리 떼 문에 밥상머리에서 형제가 주먹질을 하며 싸워야하는 이런 정도의 각박한 생활로서는 여전히 최참판댁의 풍요한 들판은 그들의 상관이 없다. 그것은 최참판댁의 토지이며 이삭도 최참판댁의 이삭인 것이다. 이같이 빠득빠득 한 선에 머물고 있는한 농민들은 여하한 것이든 변화를 싫어한다. 떠돌이 목수 윤보 나 등짐장수를 하며 객리의 물을 먹었던 칠성이, 이들이 어떤 서슬 에 상 이 고르지 못한을 한탄하고 최참판댁의 재물을 악업으로 쌓은 것이라고 빈 정대는 일이 있어도 그런 멍울진 말쯤, 고기 먹는 중이 남의 문전에서 동 냥을 빌며 염불하는 소리만큼의 관심도 갖지 않는다. 현명한 위정자는 그 빠득빠득한 마지막의 선을 알아서 농민들을 곱게 잠재워두지만 그런 뜻에 서 최참판댁의 역대 여장부들도 현명한 마을 사람들의 최참판댁에 대한 은 대개 그러하거니와 그같이 삶에는 관여치 않던 그들이 반대로 죽음에 있어 서는 그렇질 않았다. 아무해 아무때, 그해 무서운 흉년에 굶다가 굶다가 헛 것을 보았던지 아부니는 고기 반찬을 청하시지 않았겄소, 고기는 커녕 강 물이 말라서 바닥이 턱턱 갈라진 판국인데, 그때 보리죽이나마 한 그릇 못 드린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고 자식들 끈 맺어주라고 노상 뒷전이었던 아부니, 내가 어찌 잊고서라도 고기 한점 입에 넣을까보 냐 하며 부친의 죽음 앞에 가슴을 치는 아들을 흔히 보지만 마을 사람들은 돌담에 골통을 툭툭 치면서 "호상인데 멀 그러나. 살 만큼 살았으니께 갈 때도 됐지 머."했다. 아무개네 아들놈이 강에 빠져죽었다 하면 "자식이사 또 놓으믄 자식 아니가. 무자식 상팔자더라고 자식 없는 중이 사까?" 나랑 가자고 울부짖는 어미, 아비는 괭이를 들고 미친 듯 뒷산으로 달가 는 광경을 마을 사람들은 덤덤히 바라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 라 자식을, 부모를, 혹은 가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런 이별들을 쉬이 잊 어버려야 하고 또 쉬이 잊어버린다. 날씨가 가물다고 근심하며 비가 쏟아 져 둑이 터지겠다고 근심하며 파종의 시기릎 잡으려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마른 논에 물 대느라 밤낮이 없는 그들은 슬픈 이별을 잊은 속에 파묻어릴 수 밖에 없다. "설네 설네 해도 어디 배고픈 설음 겉을라고." 슬픔도 기쁨도 다 단조롭 건만 최참판댁의 흉사만은 결코 그들에게 단조로운 것이 아니었다. 제 일 보다 서러울 리는 없겄는데 아낙들은 치마가 젖게 울었고 남정네들은 없이 콧물을 들이마셨다. 판소리 심청전에서 인당수 물에 심청이 빠지는 대목에 서 울음 소리가 번지는 굿마당의 구경꾼들같이 울지 않는 윤씨부인을 보고 우는 것이며 상제인 조그마한 서희를 보고 우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그 들 동류의 죽음이 아니어서, 옛이야기 속의 그 희한한 사람들의 일이어서 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례식이 끝나면 비명에 간 고혼을 위해 해원굿을 할 것이며 그 행사에 마을 아낙들은 또다시 치마가 젖을 줄 알았는데 기대 는 어긋나서 최참판댁에서는 아무런 행사도 벌이질 않았다. 뒤죽박죽이 된 설을 보내고 정월 대보름날 세운 볏가리가 걷어진 대신 을 에는 영등할멈네의 물대가 세워졌다. 이월로 접어든 것이다. 땅에는 봄의 입김이 서리고 강 기슭의 대숲이 한결 연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바람 올 린 음식이 가만가만 나누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금년에도 시절이 잘되기를 빌었다. "성님 와 이리 날씨가 춥소? 바램이 불어서 눈도 못 떠겄구마요." 임이내는 입술이 파아래가지고 두만네 방에 들어섰다. 버선을 깁고 있던 두만네는 "금년에는 할만네가 며늘예기를 데리고 내리오는갑다. 별나게 바램이 네. 자 여기 앉아라." 두만네는 자리 이불을 걷어준다. "사램이나 영신이나 며느리 미운 정은 다 같은가배요." "그러세... 사람 나름이겄지. 우리 어무니는 그렇지 않았네 라. 가시고 난께 이리 서분해서 죽겄네." "그래도 돌아가신 이가 복이 많소. 원성 안 들을라꼬 손녀 시집보내고 아 가싰이니." "와 아니라. 그래도 좀더 사싰더라믄, 벽을 짊어지고 앉아 기시 도 든든하더니만." "머 잘 가싰지요. 때 맞차서." 추운 데서 들어와 몸이 녹은 임이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갔다. "아이 고 치버라. 성님 기시요?" 이번에는 막딸네다. "어서 오게." "임이네 니 왔고나. 와 왔는고 내가 알지러." 막딸네는 임이네를 보고 실쭉 웃는다. "알다니? 뭘 안다는 건고?" 막딸네는 자리 이불 밑에 다리를 쭉 집어넣으면서, "강청댁하고 대판 쌈 을 했다믄서? 하기는 눈에 불이 나기는 났일기다. 나도 심청이 날 것 겉은 데 와 안 그러겄노." "멋 땜에 심청이 날꼬?" "동아 겉고 봉숭애꽃 겉은데 심청이 안 날까? 우찌 그리 살성도 좋노. 말 이제 농사꾼 제집 되기 아깝다." "동헌에서 원님 칭찬한다 카더마는 가마 고만 태우는 기이 좋겄구마. 지 럼증 날 긴께." 임이네는 눈을 내리뜨며,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다. "쇠전 한푼 나올 기라고 빈 가마 태우까? 언제 난 임이네라꼬? 동네방네 생일떡 다 묵어봤 지마는 임이네 시래기죽 한분 못 묵었이니께." "아따아. 시사니 나을장 가 는 소리 하네. 얼굴 좋은 것도 겨울 한철이지. 들일만 시작되믄." 임이네는 입장 곤란한 애기는 슬쩍 피하고 얼굴 애기도 돌려놓는다. 막딸네는 시시 죽 웃다가 "말 마라. 이 내 얼굴이사 여름 겨울도 없인께. 고목낭게 문질러 살가을 벗긴다믄 모르까. 빌어묵을, 서방 있는 년들 낯짝 밴들하믄 머하노. 그 얼 굴 날 좀 빌리도라. 서방질 좀 하게." "입도 궃다. 막딸네 니도 그거 예삿병 아니다." 두만네가 눈살을 찌푸리는 데 "성님 그 말 마소. 배부른 사람하고 배고픈 사람하고 같겄소? 기러블 것 없는 성님이 할말 아니구마." 두만네는 얼굴을 붉히고 임이네는 헤실헤실 웃는다. "한데, 성님." "와, 또 무신 말 할라 카노." "최참댁, 죽은 그 양반 말이요. 그 읍내 쌀개 가 제 명에 간 거아니라 칸다든데." "그거나 천하가 아는 일인데 머 새삼 스럽게." "그기이 아니라요. 수동이만 죽었이믄 그런 일은 없었일 기라 그 말이구마. 그러니께 수동이 대신 잡아갔다는 거 아니겄소? 아니기 아니라 죽겄다든 수동이 뽀시락뽀시락 살아난께 말이요." "미친 소리." "쌀개 말로는 최참판댁에서 무당을 괄시했기 때문이라는 거 지요. 월선네 살았일 적에는 한달이 멀다고 굿을 했는데 그 후로는 채덮어 서 영신이 그 목심 바꿈에 눈도 떠보지 않았다, 그란하요? 그 말도 일리가 있긴 있는 것 같소." "말 마라. 쌀개가 시물을 못 얻으니께 배가 아파서 하 는 소리지. 전생에서 다 매련이 되어 그런 거로, 임우로 남의 목심 대신하 까." "그렇게만 말할 것도 아니라요. 저세상이라고 그리 머가 다르겄소? 우 짜다가 문서대로 못하는 일도 있일 기요." 임이네는 그런 예기에는 별 흥미가 없는 듯 "그런데 말이요, 성님." 하고 이야기를 가로채었다. "그 초상 때 말입니다." "초상 때라니 누구 초상 때 말고." "최참판네 말이요. 그때 귀녀 꼴 봤 소?" "와?" "귀녀 꼴이 심상합디까?" "그러세." "죽을 상 아닙니까? 넋이 빠지가지고 미친 년 안 같습디까?" "대게 서러 하더구마." "그날 안 서러븐 사람 있었겄소? 모두 다 울었지요." "하기는 뭐 요새 귀녀가 맨날 서방님 묏등에 가서 운다는 말도 하더라만 내사 예사로 들었 지." "혹 돌아가신 그 양반이 귀녀한테 정이라도 주었일까요." "그거나 남녀간의 일이란 모르니께, 이제사 다 소용없는 일 아니가." 두만 네는 무심히 밀어버린다. 이때까지 두 사람 하는 애기를 참을성 있게 들며 말참견을 하지 않던 막딸네가 풀쑥 말했다. "내가 희한한 말을 들었구마." "무신 말?" 임이네가 얼른 말을 받았다. "말이 나가믄 큰일날 긴데." "아 말이 나가긴 어디로 나가?" "확실찮은 얘길 했다가 나중에 똥 묵으믄 우짤라꼬." "내사 오늘 입때까지 말소두래기 일으킨 일은 없구마." "말이 귀녀가 애를 땠다 카데. 아직이사 치마 밑 일인께 진맥 않고서야장 담 못하겄지마 는." "그어래? 거 심상찮은 일이구나. 그렇다믄 최참판댁 그 양반 아이라 그 말이것다?" "그럴 리가 있나." 두만네가 일소에 부친다. "만일 그렇다믄, 마, 만일 그렇다믄, 마, 만일 아 들이라도 놓는다카믄 그거 참, 성님 그거 참 예삿일 아니요, 만석꾼 살림 이." 임이네는 숨이 가빠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두만네는 여전히 자 신 있게 "그럴 리 없다." 하고 굳이 부정한다. 밤에 임이네는 요즘 술만 마시고 다니는 칠성이를 기 다리다가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잠이 들었다. 자정은 지나지 않았을 성싶 었는데 술에 취해 돌아온 칠성이 임이네에게 발길질을 했다. "아아니 무신 팔자가 좋아 술만 마시고 댕기더마는 사람은 와 차요. 자는 사람을 발덩거질 와 하요." 화가 난 임이네는 흩어진 머리를 뭉치며 일어나 앉아 악다구니 를 한다. "네년이 이런께 될 일도 안 되는 기라. 이자 오십니까 하고, 잠도 안 자고, 와 한분 못 그라노. 아무튼지간에 네년 만내서 좋은 일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었인께." "남천 쇠가 웃겄네." 칠성이는 다시 발길질을 했다. "재수없는 년이다. 와 일이 그리 꼬이는지 모르겄네. 십년 공부 나무아무타불이고." "흥 어디 노름판에서 쫀쫀히 털맀 구마. 세상없어도 곡식은 못 내갈 긴께. 알아서 하소." "노름판? 그까짓 쇠 전 몇 푼 굴리는 노름판이 내 눈에 뛸 줄 알았더나. 그까짓 벵아리 오줌싸 는 것 겉은 이얘기는 하지 마라! 재수없는 년!" "듣자듣자하니 그래 물어봅 시다. 우째서 내가 재수없는 년이오! 있던 사람을 내가 축을 냈소, 축을 내! 숟가락몽댕이 하나라도 붙었임 붙었지 축난 기이 머 있소, 응. 머를 가 축을 냈기에 재수없는 년이요. 술을 묵었이믄 입으로 묵었제. 괜히 미안한 께 그러는 갑소만 무안쑤시하는 것도 유분수지, 응." 임이네의 끄트머리 말에는 교태가 있었다. 벌써 오랫동안 그들은 잠자를 함께 하지 않았던 것이다. 칠성이도 임이네를 걷어찰 때는 그 생각이 있어 서 그랬기에 서로 원수같이 응얼거리고 욕설하고 미워하고 하면서도 그런 욕심이 민감하게 화합이 된다. "지랄 같은 년. 생각이 있어믄 진작 안아주 고 쓸어주고 할 일이지 앙앙거리기는 와 앙아거리노." "내 말 사돈이 하네. 생각이 있이믄 살째기 옆에 누울 일이지 와 발덩지 를 하요." "고년, 말에 고물 묻겄다." "말 마소. 막딸네가 내 얼굴 빌리다라 캅디다." "머?" "내 얼굴 빌리주믄 서방질하겠다고, 도아 겉고 복숭애꽃 같다 캄시로, 그 말만 한 줄 아요? 농사꾼 제집 되기 참말로 아낍다요." 임이네는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오는 칠성이에게 등을 비비고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제집년 눈까리가 삐었 는갑다. 서방질이 머가 어러바서? 내 가서 솟증 풀어주어야겄구마." "흫 어느 년 죽는 꼴 볼라꼬요." "눈도 까딱 안 할 기다. 니까짓 것 죽는 다고 내가 놀랠 성싶나. 계집이 없어서? 새 장가 또 한분 들지." "머요! 와 내가 죽소! 막딸네 금년 죽인다 캤지!" 임이네는 칠성이를 할퀴 었다. 사랑 싸움이라 할까 정사의 전주라 할까 히히덕거리며 몸을 섰는데 완연히 그것은 짐승의 세계였다. 그런 뜻에서 임이네나 칠성이는 맞먹는적 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끈질긴 생명력과 생식력, 쾌락은 그들의 왕성한 식욕 은 것이며 한술의 밥도 제 입에 더 쑤셔넣고자 하는 식탐 같은 것이었다. 아 낌과 보살핌이 없는 맹렬한 성행위요 격투 같은 것이었다. 폭풍이 지나가 고 기진맥진한 그들은 죽은 듯 말이 없고 밖에서 첫닭이 울었다. "보소!" "와." "오늘 참 이상한 소리 들었구마." "먼데." "귀녀 말이요." "머라꼬?" 칠성이 어세가 튕겨졌다. "아 최참판네 귀녀 말이요." "그래서." "애를 뱄다 카든가?" "뭐라꼬" 칠성이 벌떡 일어 앉는다. "와 그리 일어나요.""옷 입어야제.그래 정말이가!" "막딸네가 그라는데 어디서 들었다 캄서 확실찮다 하기는 합디다만 애를 뱄다믄 그건, 그 와 죽은 양반 그 사람 애가 아니겄소?" 칠성이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꼼 짝도 못하고 있었다. "옷 안 입고 머하요." 그 말 대답은 없이"니 정히 그 말 들었나?" "듣기야 들었소만 막딸네 말이 확실찮다믄서 입 밖에 말 내지 말라고 벌벌 떨더마요. 참 그 렇게 되기만 하는 날이믄 귀녀 그게 팔자를 고치고, 아 그런 호박이 디 있 겄소? 꿈이나 꾸어볼 일이요?" 별안간 칠성이 으허허헛 하고 웃어젖힌다. "아니 보소. 당신" "으하하핫... 으하하핫 흐흐핫핫..." 칠성이는 들린 것같이 연신 웃음을 터뜨 리는 것이었다. "아아니 미, 미쳤소?" 임이네는 거의 벌거숭이가 된 몸을 일으켰다."보, 보소!" 겨우 웃음을 거둔 칠성이는,"참말로 우습네, 우습어." "머가 우습소!""남이 아아 놓는데 이쪽에서 힘주는 꼴이제. 아 그래 만석꾼 살림이 니 눈앞에 어른어른해서 그러나?" 칠성이는 미칠 것 같은 기쁨을 억지로 누르며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말다. "참! 나는 미친 줄 알았네.""니가 미쳤지 와 네가 미쳤노!" 하더니 칠성이는 다ㅣ 임이네한테 와락 덤벼들었다. 8장 심증 아침밥을 먹기가 바쁘게 마을로 나간 칠성이는 김평산의 집에서 주막으로 몇 번인가 왔다갔다했으나 김평산을 만나지 못했다. 읍내에 나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초조하고 설레어지는 마음을 누르가 매우 힘들었다. 그는 벌써 여러 번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던 말을 다시 뇐 다."만일에 그렇다믄 이거는 따놓은 당상이고." 배고프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김평산의 집과 주막을 왔다갔다하며 없는 사람을 무자 정 기다릴 수도 업슨ㄴ 노릇이어서 집에 돌아온 칠성이는 어두컴컴한 방서 점심상을 받았다. 식은 보리밥을 숭늉에 말아 후딱후딱 먹는데 그릇에 밥 한 덩이씩을 받아놓고 그 앞에 앉은 아이들은 서로의 밥을 겨냥해보면 제 밥이 적다고 투정이다. "망할 놈으 새끼들! 어서 처묵어라." 칠성이 눈을 부릅떴으나"히잉." 하고 연방 투정이고 돌을 갓넘긴 어긴것은 엉귀엉귀 기어들며 된장 뚝배를 잡아당기려 한다. 임이네는 어린것을 끌어내어 볼기짝을 친다. 어린것은 울 고 큰애들은 여전히 칭얼거리는데 임이네 밥그릇에 무덤을 이룬 보리밥은 쑥쑥굻어 내려가고 있었다. "제기! 새끼 젖꼭지나 물리놓고 밥 좀 처묵어 라!" 칠성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화가 나기는커녕 말 탄 신랑 같고 마음은 한없이 높은 공중으로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썩 좋은 기분, 너무 좋아서 누구든 물어뜯고 싶은 충동인데 물론 임이네가 좋아서도 아니요 아 무튼 화를 내어보는 것이다. 임이네는 눈을 흘기며 왁살스럽게 어린것을 끌어당겨 젖을 무리고 된장을 뜸뿍떠서 입속에 흘러붓는다. "제에기, 악마 구리 겉은 새끼들하고 언제 허리 피고 한분 살아보것노. 소배애지 겉은제 집 년 배 채울라꼬, 홍 일년 열두달 내 뼛골이 쑤시니." 자기는 밥맛조차 잃었 는데 변함없이 달게 먹는 임이네 꼴이 눈에 거슬렸는지 밥상 앞에서 물러 나 앉으며 칠성이 지껄였다. 여전히 그저 그래보는 것이기는 했다. "흥, 접 시밥 묵고 방만 지키는 년 데부다 놓고 사소. 내사 안 묵고는 일 못하겄 마." 윗목에 굴러 있는 곰방대를 주워 허리춤에 찌른 칠성이는 방을 나선다.임 이네는 천만 뜻 밖에 밥상에 남은 우거지국과 밥을 제 밥그릇에 쏟아붓고 말아서 먹다가방 문을 조금 밀치며 밖을 내다본다. 마당에서 얼쩡거리고 있던 칠성은 병신 손가락이 뭉실한 두드러져 보이는 손을 들고 코를 푼다. 그리고 손을 옷에 문질렀다. "보소!" 했으나 들은척만척이다. "보소, 임이아배요!" "..." "귀에 소케를 막았나. 보소! 임이아배요!" "지랄한다. 와, 멀 할라노." "오늘은 날씨도 풀린 것 같고 그런데 보리밭에 거름 좀 안 낼 기요?" "나는 모른 일이구마." "머라 캤소. 이녁은 모르는 일이라고요?" 그라믄 내가 이 이마빡으로 여 다 내라 그 말이요?" "하고 저브믄 하는 기지, 못하라고 누가 말리지는 않을 긴께." 말하면서 실실 웃다가 턱을 쳐들며 하늘을 우러러보낟. 공중에서는 연방 벼를 실은 마차가 수없이 자기가난한 집을 향해 달려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임이네는 문 을 밀어붙이고 얼굴을 온통내밀며 "지금 말 한분 더 해보소. 나 기가 맥히 서, 그래 이 동네는 봉사만 모이 산답디까." "기집년이 거름을 내믄 그것도 숭이 되나. 숭볼라 카믄 보라 캐라. 어느 연놈이 니 거 소배애지만한 창자 를 채워주지는 않을 긴께. 기덜이 무서바서 장 못 담그나든 소리도 아직들 어보지 못했고." "그래 남정네는 놔두었다가 삶아묵겄소." "흥, 내 집 곳간에 재물만 그득 그득 차보제? 숭이 어딨더노. 모두가 와서 포리 손을 부빌 긴데. 숭이 어딨 더노. 음지가 앙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고 그럴 날이 있일 기구마." "얼씨 구 좋겄소. 꿈길에서 이녁 집에 곳간 있는 거 보았구마." "하기사 오만 숭 은 다 묻히고 화냥 때는 못 벗는다 하더마." 임이네를 돌아보며 황소 한 마리라도 씹어돌릴 것 같은 건강한 이빨을 드러내고 칠성이 웃는다. 임이 네는 얼굴이 벌개져서 노려본다. "와? 내가 빈말 한. 양심에 찔리나? 꼬리 치고 댕기는 거를 내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러." 칠성이는 마당에서 뱅뱅이 를 돌다가 한쪽 어깨를 꿈틀하며 한번 움직여보고 나서 천천히 발길을 돌 려 집을 나섰다. '재물만 있어 보제? 어느놈이 나를 업신여길 것꼬. 사람으 마음이란 있는 놈은 제 거 뺏아 가도 보믄 반가운 기고 없는 놈은 제 거 안고 와도 반갑잖은 기라. 나도떵 떵 울리고 한분 살아볼 기구마.' 주막에 갔을 때 거기 사람들 속에 평산이 있었다. "꽁지에 불붙었소. 아침나절부터 웬일로 왔다갔다해쌌는다요?" 주모가 칠 성이를 보자 말했다. 칠성이는 평산에서 곁눈질을 하고 비비고 들어갔나 평산은 모르는 척했다. "아무튼지간에 그렇게 된 바에야 외손봉사 할 수 밖에 없겄지." 윤보의 우렁우렁한 목청이 울렸다. "하지만 사후 양자도 되는 거니께." 낯선 나그네가 말했다. 드물게 그들 속에 두만아비도 있었는데 평산과 을 대고 앉다시피 하고 앉아서 말이 없다. "사후 양자? 붙이가 있이야 말이지. 최가 집에 씨가 말랐는데 어이서 려 올꼬?" "가운이 기울라믄 할 수 없는 일이라. 옛말에 돈아 돈아 나갈라믄 소리없이 나가라 했는데 그눔으 돈이 악문 안 하고 나가야 말이제. 살림이 망할라 카믄 사람부텀 먼저 상하고 시작하는 거니께." "그거는 성급한 얘기지." 두만아비가 한마디 하며 쑥 밀고나왔다. 낯선 나 그네는 눈을 깜박깜박하며 두만아비를 본다. "돌아가신 나으리가 살림을 관장하신 것도 아니겄고 마님께서 분별하니 일조일석에 그 살림이 흔들릴 까닭이야 없지." 하고 두만아비가 덧붙여 말했다. 칠성이는 이빨을 쑤시고 있는 평산의 색 을 살피면서 한편 최참판댁에 관한 얘기에는 귀를 기울인다. "흥 삼천갑자 동방석인가? 오십질에 앉은 늙은이가 언제 갈지 누가 노." 윤보가 이죽거렸다. "그렇게 말한다믄 죽음에 노소가 있나? 젊다고 안 죽 고 늙다고 다 죽는 건 아니지." 두만아비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열내지 마라고. 술 처묵으믄서 열 내믄 나자빠진다." "남이 잘되믄 배 아프고 남이 못되믄 신이 나는 그 따위 심보부텀 고치라니께. 그래야복 을 받지." "그래 그렇다, 네놈이 땅 몇 마지기 얻어낸 생각을 하믄 이가 갈 리서 밤에 잠이 안 온다." 윤보는 싱글싱글 웃으며 두만아비의 부아를 돋 구었다."내가 머 땅 몇 마지기 얻었다고 참판댁 역성을 드는 거는 아니다. 사람으 도리가 그렇지 않다 그 말이지." "번갯불에 콩 꾸버묵는 놈인데 내가 니를 잡고 실랭이하믄 머하겄노. 러 나 이놈아, 남은 세상 두분 살지 못할 기니 쉬어감서 좀 살아보라. 남으 걱 정하는 기는 니 천성치고는 기특한 일이다만, 식자들이 말하기로 처성자옥 이다." "골골이 빌어먹어 댕기더마는 문자 하나 잘 배웟다." "그러매, 니는 양반도 선비도 아니겄고 의병장도 동학군도 아닌께로 성자 옥인들 상관이 없일지는 모르겄다마는 명 끓네, 명 끓어. 일을 하는 것도 한도가 있지. 놀고 묵으믄서 도둑질하고 노름하라는 게 아니다. 밥도 한꺼 분에 묵으면 체하는 법이고 일도 한꺼분에 할라 카믄 나자빠지는 법, 이팽 이 니놈 하는 짓이 계집자식 비단옷 입혀놓고 황천객 되겄나 그거 아니가. 뼉다구만 남아가지고." 평산은 이빨을 쑤시다가 찟! 찟! 하며 입속에 바람 을 밀어넣고 불어내고, 그 짓만 되풀이하고 있엇다. 칠성이는 술 한잔을 받 아놓고 야금야금 마시며 집요하게 평산의 눈을 쫓아씅나 평산은 한번도 칠 성이에게 눈이 마주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속이 아파서 술을 안 받는구 먼."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평산은 혼자 씨부렁거렸다. '가만 있자. 그라믄 우찌 되는 것꼬? 애는 뱄다 카더라도, 헛소문 아고 참 소문이라 카더라도 최치수가 죽었으니께 그기이 우찌 되는 일인지 모르겄 네? 김평산이 저 양반 얼굴 봐서는 조맨치도 좋은 일은 없는 것 겉고 나만 헛물을 켰다 그 말이가? 그러니께 최치수가, 그 온달이가 죽었다믄 아이 아베는... 아이 아배가 있어야, 그, 그러믄...' 구름에 떠서 둥둥 떠내려가고 있던 칠성이는 그만 커다란 의문의 바위에 이마빡이 부딪치고 말았다. '가만히 있자. 먼가 일이 꼬여서 간단치가 않구마. 가만히 있자. 평산이저 양반이 재미없 어 하는 저 상판때기는 일이 다 버그러져서 그렇다 그 말인가. 가만히 있 자. 그래도 경영한 일을 그리 수울케 단념해부릴까? 가만히 있자. 그러믄 귀녀 뱃속에 든 아이는 우찌되노. 내가 아이 아배라고 떠맡을 긴가? 맙소 사. 그렇게는 안 될 거로? 그렇게 안 될 일이구마. 아무튼지간에 씨는 누구 것이든지간에 치수도 귀녀하고 관계는 가짔인께 내가 떠맡을 까닭은 없겄 고 그, 그렇다믄 역시 최씨네 씨, 최씨네가 떠맡을 긴데 가, 가만 있자...' 칠성이 전심전력을 모아서 사태를 판단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평산이는 여자같이 통통한 손으로 입언저리를 닦으면서 일었다. 윤보와 나그네오 두만아비는 여전히 주거니받거니 지 껄이고 있었다. 그 말들은 이제 칠성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는 산이 주막 밖으로 사라진 후 다소 우물쩍거리고 있다가 슬며시 일어서 나왔다. 평산의 뒷모습은 전보다 더 살이 찐 것같이 보였으나 행색은 초라하고 궁 기는 더해 보이는 것 같았다. 칠성이 걸음을 빨리하여 다가갔으나 평산은 돌아보지 않았다. 알고서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저어." ."..." "김생원!" 하는 수 없이 불렀으나 칠성이는 노상 평산에 대한 호칭에 곤란을 느다. 자연 말꼬리가 흐려지는 것이다. 평산은 목을 비틀듯 하며, 나온 입술을 더 욱 내어밀고 눈을 부릅뜨며 돌아보았다. 어쩐지 오싹해지는 얼굴이었다. "뭐할려고 그러는 게야?" 하인을 대하듯 억양을 높였다. "...?" 평산은 혀를 두들긴다. "내가 머... 들은 얘기가 있어서 한분 물어볼라꼬." 평산은 눈이 빛나더니 잠잠해졌다. 머쓱해진 칠성이는 "아 내가 머 잘못 한 일이라도 했소? 전에 없이," "잘못한 일이 없지." 하더니 걷기 시작한다. "전에는 그럴 새가 아니었는데 요새는 와 그랍니 까?" "그럴 새가 아니라니!" "저, 그 머." "상놈이 양반을 알기를 발싸개만도 못한게 아니, 버르장머릴 고쳐놔야지. 내가 자네 술친구냐? 그럴 새가 아니라니!" "그, 그거사 아 내가 김생원하고 새기자 캤소!" 생각해보니 화가 났던 것 이다."아 내가 김생원하고 노름하자 했소? 동사를 하자 했소? 발싸개만큼 도 안 생각한 건 또 멉니까?" "...""나도 생각이 있어서 만날라 칸 기고 볼일 없이 따라오는 거는 아니라 요. 일이란 시작이 있이믄 끝맺음도 있는거니께 그 끝맺음을 나도 알아야 겄다 그거가마요. 아 사람이 죽었인께로 우찌 된느 긴지. 나도 소문을 들을 만큼 들었고,"하는데 평산은 칠성을 외면한다. 외면한 눈에 최참판댁 집이 보이고 당신이 보였다. 지금은 타고 없어진 누각 자리. 평산은 하는 수 없 이 시선을 돌려 앞길을 본다."귀녀가 애를 뱄다 카는데." "뭐?" 처음으로 평산은 놀라움을 나타내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 내가 듣기로는 애를 뱄다 캅니다.""그거 금시초문이다." 평산은 크케 몸짓을 하며 호들갑을 떤다."정말이요?" "아 내가 왜 거짓말을 해.""귀녀가 그런 말 안 하든가요?" "자네보고 하든가? 나보다 자네가 가까울 텐데?" 칠성이는 의심에 가득 차 서 평산을 본다."요즈막에 나는 그녀를 본 일이 통 없네. 천리 밖일세. 나 는 자네하고 귀녀가 서로 배짱이 맞아서 날 따돌리는가 했지. 그래 정말 애를 뱄다던가?" 순간 칠성이는 자신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세요. 거 소문이." 자신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만저만 낙담이 아 니다. 어쩌면 애를 뱄다는 것도 헛소문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고 보니 귀녀 그년이 자네나 나를 농락한 모양일세. 년 생긴 것을 보아 열 사내도 모자랄 것 같기는 하더라마는, 참말이지 뒤에 우환이나 없었으면 좋으련만.""그라믄 김생원도 씨를 주었고?" "아아, 아." 평산이는 팔을 저어 보이면서 "그, 그걸 한베개 동서라 하든가? 온 내 창피스러워서."하다가 다시 "우환이나 없었으면 좋으련만." 칠성이를 내버려두고 가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아귀가 안 맞는 얘기 아니가." 칠성이는 길섶에 침을 뱉는다. "오늘로서 끝장나는 얘기는 아닌께 두고 보자. 하기사 밑져야 본전 아가." 그러나 칠성이의 기분은 굉장한 손해를 본 것같이 불쾌하고 짜증스럽고어 디든지 화풀이를 좀 해야만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용이 있냐?" 칠성이는 용이 집에 들어서면서 소리를 질렀다. "흠." 용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사램인 줄 알았더마는 두 발 가진 짐승이 오네." 용이는 마당에서 솔가지를 자뀌로 찍어서 나뭇단을 만들고 있었다."앉은뱅이가 된 줄 알았 더마는 기어나와서 머하노." 칠성이는 용이 말에 응수하며 비스듬히 절구 통에 기대어 선다."겨울 다 보내고 나무는 무신 놈의 나무고." "겨울은 오고 또 온다. 한 살 묵으믄 두 살 안 묵나?""살림 되겄고나." "되고말고.""와 이리 시비조고. 누가 니 살림 못되라고 축수라도 했나?" "나는 니를 사람으로 안 본께 반갑잖다 그 말이다.""허, 참." 무밭에서 칠성이가 이러쿵저러쿵 상말을 하고부터 용이는 내내 그것을 서 치 않고 칠성이를 상대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아지마씨가 편하게 생겼다."하도 괄시를 받아 칠성이 풀이 껶여 입속말로 중얼거렸다."무신 바램이 불어서 왔노." 용이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나뭇단 위에 걸터앉아 곰방대를 꺼내어 담를 담으며 물었다."세상 만사가 다 귀찮아서." "사람 되겄고나.""잔소리 말고 나도 담배 한대 태우자." 칠성이는 곰방대를 뽑았다. 용이는 그의 손바닥에 담배를 조금 나누어고 자신은 담뱃불을 붙인다. 한참 동안 두 사내는 실낱 구름이 날리며 가는 하늘을 보면서 담배 연를 뻑뻑 뿜어낸다."용이 니도 어지간히 미친 놈이다." "...""빈 주막에 이엉을 갈아놓고 보믄 기집이 되돌아올 기라 카더나." "...""참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기집이라 카믄 내사 입에서 냄새가 난다. 요물이지 요물." 칠성이는 살쾡이 같은 귀녀 생각을 했다. 귀녀 생각을 하 니 그새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부글부글 끓는다. '흥 내가 가만히 물러설 거라고? 나를 눈뜬 장님으로 알았다가는 큰코 칠 기다. 무신 꿍꿍 잇속이 필시 있일 기구마. 김평산이 그자가 나를 멀리하기로는 오래됐이 께.' "용아!""..." "아까 주막에 간께 윤보랑 이팽이란 최참판네 얘길 해쌌더만.""..." "참말이제 이자는 문도 닫고 했이니 그 집 망하기는 안 망하겄나?""망하기 는 와 망하노 누구 좋을라고 망해?""그렇지마는,아까 주막에서도 그러더라 만 살림이 빠질리 카믄 사람부터 먼지 상하는 법이지. 세상에 죽음을 당해 도 그렇게 당할 수가 있나.""이상힌 일이지." "이상한 일이다." 칠성이는 맞장구를 치면서 용이의 기색을 살핀다. "또출네가 생전에 남을 해꾸지한 일이 없었다." 용이는 의심에 차서 칠성 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칠성이는 공연히 마음이 켕겨서 얼굴이 굳어진다."그렇지만 지도 죽고 불까지 냈는데." "글리 싶어서 그러지는 몰라도 꿈에 뵈더마.""어떻게?" "또출네가 춤을 추믄서 내가 와 사람을 직었겄느냐고.""글리 싶어서 그렇겠 지.""그래도 이상한 일이다. 미친 여자가 삼끈을 장만했다는 기이. 나으리를 해칠라고 삼끈을 가지 댕깄다믄 그거는 또출네가 미친 기이 아니거든." "그, 그렇다믄?""그러니께, 이상타는 거 아닌가. 나으리 성미가 무섭기는 하 지마는 원한 살 분은 아니었고 남들은 이러쿵저러쿵 하지마는 착한 분이었 지." 용이 눈에 눈물이 돈다. "나는 그 어름 심성을 잘 알고 있구마.""그래도 또출네말고는...소문 들으니 께 그 양반이 또출네를 한 분 때맀다믄서?""또출네야 어디 그 양반만 때맀 다? 니도 때리지 않았다. 애새끼들한텐 노상 맞았지.""그,그렇기는 하다마 는." 용이는 다시 그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칠성이를 바라보는 것이었따. "그렇다믄 구천이까?" 칠성이는 용이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날아서 왔이까? 그럴 리 없지." 용이는 입을 다물었다. 용이의 의심이 지 나치게 뚜렷하였으므로 칠성이는 자기 자신이 혐의를 받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귀녀와 김평산과의 관계도 연줄을 이어서 그에게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그는 의심받기 알맞은 태도로 허둥지둥 이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는 집에까지 오는 동안 크게 깨달았다. 한꺼번에 많 은 의문이 풀렸던 것이다. 목구멍에서 피가 끼둑끼둑 넘어 올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칠성이로서는 크나큰 발견이요 꿈 아닌 현실이 그의 발밑에 와서 착 달라붙는 것 같은 희열이 그의 전신에 맴을 돌았다. '그러면 그렇지! 죽은 사람은 입이 없다. 삼줄이 어디 흔하게 굴러있나. 끼 줄이믄 모르까.' 해가 한 뼘쯤은 길어졌는가, 칠성이는 아슴아슴 어둡기 시 작한 논둑길을 생각을 짜며 걸어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막에 있었던 두만아비는 소를 몰고 집 쪽을 향해 가고 있었으며 윗마을 김진사댁을 다 녀오는지 장죽을 든 김훈장이 활개짓을 하며 내려오는 모습도 볼 수 있었 다. 음력 이월도 하순에 접어들고 이제부터 농부들은 일손이 바빠질 것이 다. 칠성이는 곧장 평산의 집으로 가서 열려져 있는 문을 지나 선뜻 마당 으로 들어섰다. 저녁도 짓지 않는가 부엌에서는 아무 소리가 없고 작은방 에서 베 짜는 소리만 들려왔다."김생원 기시요?" 대답이 없다."김생원." 목청을 높였다. 작은방 문이 열리면서 함안댁의 여윈 얼굴이 내다본다."뉘 시요?""접니다. 칠성이구마요." "뭣하거 왔소.""김생원 안 기십니까." "아직 안 들어오싰소.""아까 나랑 함꼐 나왔는데?" "집에는 안 오싰소." 불빛을 등진 함안댁 모습이 하도 흉하여 칠성이는 급 히 발길을 돌린다.'주막에 도로 갔나?' 갈 때와는 달리 헐레벌레 주막으로 달려간다. 평산이 그곳에 있었다. 다른 술꾼들은 다 흩 어지고 평산이 혼자 쓸쓸하게 술 한잔을 내려다보며 무료하게 앉아 있다. "아아니 꽁지에 불붙었나? 아침부텀 왔다갔다, 워쌔 이런다요?" 주모가 아 까처럼 빈정거렸다. 그러나 그 말은 들은척않고"또 와 기시구마요." 헐레벌레 찾아왔으나 칠성이는 여유를 나타내며 씩 웃는다."하이 참 별꼴 다 본다요? 도를 닦는디야? 부처가 될 것이요? 한 잔 술 받아낳고 매양 러 고 있는 게라우." 주모는 평산에게 눈을 흘기며 짜증스레 술판을 닦고 술 잔이랑 수저를 기명 물통에 쳐넣는다. "날 찾아왔나?" 평산은 희미한 눈을 들어 칠성이를 보았다. "머 찾아온 거는 아니자마는 할일도 없고 심심해서.""심심한 것 좋지." "야?""심심한 것 나쁘지 않네." 하고 나서 김평산은 공연히 으허허 하고 웃었다."무신 말심이요?" "뭐 나도 심심해서 말해본 걸세." 주모는 기명 물통을 들고 구정물을 비우 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김생원." 칠성이 바싹 다가앉았다."거 삼줄 말입니다. 새끼줄도 아니고 삼줄인데." 칠성이 곁눈질을 한다. 평산의 손등이 떨었다. 무르팍도 조금 움직였따." 이상한 일이지요. 삼줄이 어이서 나왔는가, 죽은 사람은 입이 없어도 술판 위로 올라가고 술잔을 잡았다. 술잔을 꽉 잡았다."그 아가리에 사철 고기만 쳐넣게 되면 될 거 아닌가.""그, 그러매요." "걱정 말라. 눈앞에 은금보화가 저벅저벅 소리를 낼 게다.""그 뿌러진 손가 락에 금테두리도 할 수 있지.""사람 놀리지 마소." 평산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웃는 눈에 칼날이 서 있었으나 칠성이는 달 아 웃었다. 좋아서 웃고 신기해서 웃었다. "아 미쳤나벼. 칡범 겉은 얼굴 허고 있더마, 워째 이런다요? 집 떠나가소." "술이나 주소 김생원 잔에도 듬뿍듬뿍 술 부어놓고 거기 문어회도 한 접시 내어놓소!" 주모 말에 칠성이는 호기스럽게 떠들었다."무슨 도깨비장난인지, 아니 저 양반이 참말 미쳤나벼?"평산은 연신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9장 발각 죽음을 당한 사람은 물론 죽인 사람도 다 함께 지금은 지하 명부에 가 을 것이므로 사건은 이미 끝났다고들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이나 집안 하인들 은 모두 또출네의 소행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또출네가 최치수를 살해하지 않았으리라는 사건은 결코 끝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은 용이말고도 두 사람이 있었다. 그 한 사람이 윤씨부인이 었다. 다른 한 사람은 봉순네였다. 용이와 마찬가지로 윤씨부인의 혹은 삼 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미친 여자가 삼끈을 준비했다가 살해하는 그 치밀 한 살해 방법을 과연 생각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처음 윤씨는 환이를 눈앞에 떠올렸다. 끝내 그들을 추적할 것이며 종말을 보고야 말 최치수를 그들 쪽에서 먼저 손을 쓸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관선사의 서신에서 환이가 은신처로부터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확을 얻은 후 윤씨부인은 그 무서운 망상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다음, 마음에 젚인 인물은 강포수였다. 그들 사이에 있을 거래나 약속 같은 것은 알 길이 없지만 강 포수가 떠날 때 노자밖에 준 것이 없었다는 김서방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 다. 그것도 그믐밤 산속 화전민 집에서 술을 퍼마시고 울었다는 그간의 상 세한 동태를 알게 되어 의심을 풀 수 밖에 없었다."그렇다면 누구냐? 누가 한 짓이냐?" 한밤중 허공을 바라보며 윤씨부인은 혼자 중얼거렸다."몹쓸 어미로고, 죄 많은 이 어미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 흘러내렸다.윤씨부인은 끊임없이 매질을 하던 형리를 잃었다. 생전의 최치수는 아들이 아니었으며 가혹한 형리였던 것이 다. 그것을 윤씨부인은 원했으며 또 그렇게 되게 만든 사람이 윤씨부인이 다. 그 사실을 지금 윤씨부인은 공포 없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엾은 형 리, 세월을 물어뜯으며 물어뜯으며 지겨워서 못 견디어 하다가 그 세월에 눌리어 가버린 사람, 최치수는 윤씨부인을 치죄하기 위해 쌓아 올린 재단 에 바쳐진 한 마리의 여윈 염소는 아니었던지. 사면을 받지 아니하려고 끝 내 고개를 내저었던 윤씨부인이기에 매를 버릴 수 없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제단 앞에서 지겨운 시간을 뜯어 먹어야 했던 한 마리의 여윈 염소는 니었 던지. 산에서 돌아오던날 어머님 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달려온 치수 를 뿌리친 그때부터 윤씨부인은 죽은 남편의 아내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 지로 그 남편의 아들인 치수의 어미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의식의 심층에 는 부정의 여인이며 아내와 어미의 자격을 잃은 육체적인 낙인이 빚은 절 망 이외의 것이 또 있었다. 핏덩어리를 낳아서 팽개치고 온 뼈저린 성의 절망이었다. 전자의 경우 어미의 자격을 빼앗은 것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스스로 어미의 권리를 버린 것인데 결국은 두 경우가 다 버렸다 함이 옳은 성싶다. 그러나 버림은 버림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적악이며 그 무 게는 짊어저야 하는 짐이었다. 짐은 땅이 꺼지게 무거운 것이었다. 양켠에 실은 무게를 느끼면 느낄수록 허리는 휘어지고 발목은 파묻혀 어 갔다. 조금만 움직여도 산산조각이 날 것 같은, 그러나 윤씨부인은 이십년 을 넘게 모질게 지탱해왔던 것이다. 자신의 살을 가르고 세상에 태어나서 젖꼭지 한번 물려주지 못한 채 버리고 온 생명에 대한 소리 없는 통곡과 고독한 소년기를, 비뚤어진 청년기를, 권태에 짓이겨져 폐인을 방불케 했던 장년기를, 그렇게 변모되어온 최치수를 발보며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쪽 짐짝은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고 한쪽 짐짝은 반공중에 곤두선 채 씨 부인은 그 아래 서이는 것이다. 그 균형이 부서져서 윤씨부인이 산산조각 으로 난 것은 아니었다. 윤씨부인의 의식의 심층을 한층 더 깊이 파고 내 려간다면 죄악의 정열로써 침독되어 있는 곳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십 년 넘는 세월 동안 그의 바닥에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 남자의 비극 이 삼줄과 같은 질긴 거미줄을 쳐놓고 있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남 자, 그 남자의 비극과 더불어 사라온 윤씨부인이 사면을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요 피맺히는 아들의 매질을 원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뜻밖의 재난 으로써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운명을 원망하지도 않았었다. 영원히 사면되기를 원치 않았던 그에게는 그와 같이 끈질기고 무서운 사랑의 이기 심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몹쓸 어미로고, 이 죄 많은 어미,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거짓으로 라도, 아픔 위에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라도 치수 에게는 어머니였어야 했던 자기 자신을 깨달은 것이다. 산산조각이 난 것 은 저울대에 실렸던 무게의 변동 탓이 아니었다. 그것은 회한 때문이다. 공 포 없이 생각할 수 없는 치죄자로서의 최치수, 그는 아들을 잃은 것이 아 니었다. 도현의 고초를 겪는 망모의 구원을 위해 석가에게 법을 물었던 목 련존자일 수 없는, 심판장의 형리로 그 어미 스스로가 만들었던 것이다. 목 련존자의 악모 이상의 악모임을 윤씨부인은 깨달은 것이다. 윤씨부인은 차츰 집안 하인들의 얼굴을 숨어서 살피는 괴벽이 생기기 작 했다. 충성에 굳어져서 어떤 것으로도 변하게 할 수 없는 김서방까지 어둡 고 의심에 가득 찬 누초리로 살폈으며 계집종들에게는 그러질 않았으나 하 릴없이 하인들을 불러다 놓고 뚫어지게 그들의 눈을 쳐다봄으로써 상대들 을 몹시 당황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전에없이 김서방이 사는 별채에 불쑥 나타나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일도 있었다. 최참판댁의 팽팽하게 뻗쳐온 오랜 세월의 질서가 무너지려고 했다. 가면 같은 윤씨부인 얼굴에 독기가 서리고 하인들은 불안에 싸여 전전긍긍했다. 날이 갈수록 윤씨부인게서 뿜 어나오는 독기는 치열해졌으며 삼엄하고 공포에 찬 공기는 충만하여 하인 들은 주술에 걸린 것처럼 빠져나갈 구멍조차 찾을 수 없이 마치 제가끔 자 신이 치수를 죽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 봉순네는 윤씨부인 과는 다르게 또출네 소행이 아님을 믿고 있었다. 윤씨부인의 의심이 이곳 저곳을 더듬으며 초점을 찾지 못하는데 반하여 봉순네는 한곳으로 쏠리어 그것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무슨 확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봉순네 는 귀녀를 주시하는 자기 직감을 믿었다. 서희를 미워한다거나 상전에 대 하여 원한을 품고 있다거나 종의 신세를 한탄한다거나 그런 일보다 직감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어느 날 밤, 그날 밤의 광경이었다. 초롱불에 비쳐진 귀 녀의 얼굴을 봉순네는 잊지 못한다. 노리 속에 악령과 같이 그 귀녀의 얼 굴은 남아 있다. "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네라. 다 처지에 따라서 나빠지기 도 하고 좋아지기도 하고, 제 살기가 편하믄 머할라꼬 남을 원망하겄노, 안 그렇나? 사흘 굶으믄 엔간한 사람이 아니믄 맘 잘못 묵기 쉽지." 삼월에게 그런 말을 했었고 삼월이는 삼월이대로 "배고프다고 저이 도둑질 다 한답 디까. 창지가 비틀어져도 청백겉은 사람이사 남으 담 넘겄소?" 김서방댁이 거어 서 " 천성으로 타고나는 기라. 서방질하는 년 다로 있고 도둑질하는 놈 따 로 있제." 했으나 봉순네는 " 그래도 그렇게 말할 거 아니구마. 착한 사램 이라고 어디 나쁜 마음 안 묵건데? 그라믄 부처님 안 되겄나? 사램이란 하 루에도 몇 분은 나쁜 마음 묵지. 나쁜 사람도 하루에 한 분쯤은 좋은 마음 묵어 보고 지은 죄도 무서바해보고." 늘 그러던 봉순네였으나 녀에게 대해 서만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가지는 그 신뢰를 가질 수 없었다. 평범하고 사람이 좋은 이 아낙에 무슨 추리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사태를 판단할 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직감이며 본능이다. 해를 끼칠 적을 느낌 으로 판별하는 그 짐승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한 번 그렇게 되자 생각은 끈질기게 봉순네를 따랐다. 뜻하지 않게 또출네가 어들어 치수의 죽음은 완벽하게 묻혀진 비밀이 되었고 그 요행을 오로지 저를 굽어살피시는 신령 의 은공으로 알며 거리낄 것 없이 뱃속의 아이가 자라기만을 기다리고 있 던 귀녀는 다음 남은 윤씨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바야흐로 연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판이었는데 봉순네는 귀녀의 두 가지 다른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흐르던 문틈 사로 본 그의 얼굴과 슬픔에 자지 러진 듯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의 얼굴을. 그러던 어느 날 봉순네는 귀녀 가 애를 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틀림없이 무신 사단이 있고나!' 봉순네 는 귀녀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서희에게 전보다 더한 마음을 썼다. 낮에는 노상 별당에 머물면서 바느질을 했고 서희를 보살피면서 귀 녀의 접근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다. "봉 순네" "예" "그래서 심청이는 어찌 됐어?" "공양미 삼백 석을 절에 바고 아 버님을 눈을 드게 해줍시사 축수를 하믄서 인당수 푸른 물에 풍덩 빠짔지 요." "불쌍해라." "그래서 하늘의 옥황상제님께서는 심청이 효심이 지극한 것을 귀히 여기서 다시 심청을 환생키로 했는데." "환생이 머꼬." "다시 이 세상에 살아나게 했다 그 말씀이지요." "으음." "인당수 푸른 물에 빠진 심 청이는 용궁에 갔십니다. 거기 가니께 어마님인 곽씨부인이 가지 않겄십니 까?" 서희의 눈이 번쩍했다. 봉순네는 아뿔사 생각하는데 "용궁에 가면 어 머님을 만날 수 있어?" 바싹 다가앉으며 서희는 봉순네의 무릎을 짚고 올 려다본다. "그, 그거사 머, 옛이야기니께요. 말하기를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 고 노래는 참말이라 하니께요." 해놓고 급히 본시의 얘기로 말머리를 돌렸 으나 서희는 듣는 둥 마는 둥 손가락을 입에 물고 징징릴 판이다. "용궁의 용왕께서는 심청이를 연꽃에 실어서 물 위로 올리 보냈지요. 그 꽃은 세상 에 없는 희한한 꽃인데 마침내 뱃사공이 그거를 보고." "안 들을 테야! 듣 기 싫어!" 두 다리를 바둥거렸으나 울지는 않았다. 최치수가 죽은 후 무거 운 집안 공기에 눌려서 서희도 많이 억제를 하고 조심을 하는 것 같았다. 밤이 되어 서희를 재워놓고 봉순네는 화로에 을 담으려고 방문을 열었다. 봉순네는 소리를 치려다가 입술을 다문다. 윤씨부인이 마루 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돌아보지도 않고 멍하니. 봉순네는 나갈 수도 없고 문을 닫을 수도 없어 엉거주춤 있는데 "봉순네." 하고 윤씨부인이 불렀다. "예." "내가 일어설 수가 없군. 팔 좀 잡아주게." "예, 마님." 봉순네는 얼른 신돌 아래 내려서며 송구스러운 듯 팔을 잡아다. 일어선 윤씨부인은 봉순네의 손을 뿌리쳤다. 혼자 걸어보려 한다. 휘청거렸 다. "마님." 봉순네는 다시 손을 내밀어 부축한다. "내가 어쩌자고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 "봉순네." "예." "내가 앞으로 몇 해나 더 살겠냐?" " 오래, 오래 사시야지요. 애기씨를," 봉순네는 목이 메어 말을 끝맺지를 못 한다. "서희 말이냐." "애기씨가 어느분을 의지하고... 천지간에 외로운 애기 씨 아니십니까." "가엾은 아이다." "잊으셔야 합니다." "잊으라고... 찾아야 잊을 수 있지 않겠느냐? 찾아야." 윤씨부인은 고개를 돌려 봉순네를 빤히 쳐다본다. "하오나." "봉순네 자넨 알 게야." "..." "그 미친 여인이 한 짓이 아니네." "마님!" "그렇지? 자넨 알 게야." 윤씨부인을 안방까지 축해온 봉 순네는 보료 위에 윤씨부인을 누이려 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몸짓을 하며 앉았다. 그리고 봉순네를 멀거니 건너다보는 것이었다. "내 말 알아듣겠는 가." "예, 마님." "그럼 누구겠느냐." 윤씨부인은 봉순네 얼굴에서 눈을 떼 지 않고 소곤거리듯 말했다. "우찌 쇤네가." "모르겠다 그 말이냐." 봉순네 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마에 땀이 송송 솟아났다. "그럼 미친 그 여인의 소행이란 말이지?" "..." "말하게." "..." "이 집안에 있네. 삼줄을 은 손이 이 집안에 있네. 봉순네, 내 가슴 위에서 맷돌을 들어내주게." 윤씨부인은 울 기 시작했다. 산산조각이 난 모습이었다. 이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가 련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봉순네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마님." 눈물을 닦은 봉순네 눈은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열에 들떠서 떨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는 결심을 한 것이다. 봉순네로서는 목숨을 걸어놓고 하는 모험이었다. 아니, 자기 목숨 하나만을 걸어 놓고 할 수 있는 이었다면 그 는 진작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귀녀를 추달해보십시오." "뭐라고 했 지?" 어둠을 뚫어내듯 윤씨부인의 눈은 크게 확실하게 벌어졌다. "몸이 이 상합니다. 분명 아이를 가진 듯해서..." "아이를..." 중얼거렸다. 눈은 본시로, 희미한 상태로 눈물에 구겨진 상태로 돌아갔다. "추달을 하시면은 행여 다 른 일도." 봉순네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술 까지 종잇장처럼 하얗게 돼 있었다. '내가 생사람을 잡는지 모르겄다. 가, 내가 생사람을,' 별당으로 돌아온 봉순네는 열병든 사람같이 이불을 뒤집 어쓰고 밤새도록 떨었다. 아침에 윤씨부인은 물그릇을 들어 내가는 귀녀의 모습을 반쯤 눈을 내리깐 상태로 바라보았다. '아이를 밴 계집이다.' 아이 를 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윤씨부인의 마음은 관대하였다. 관대하였다기 보다 관심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옛날 자신이 남모르게 아이를 밴 일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상기해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루 해가 저물고 저 녁도 다 끝난 뒤 윤씨부인은 귀녀를 불러들였다. 귀녀는 자기를 불러들이 는 이유를 알고 있는 듯 처음부터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옷섶 앞이 살포시 들려 있었다. 가슴이 한결 솟아 보였다. 양어깨의 선이 가늘어지고, 아이를 배태한 여자 특유의 가냘픈 선이 잔잔하게 갈앉은 듯. "너 몸이 불편한 거 아니냐." "..." "왜 대답이 없느냐." "마님." "홀몸이 아니로구나." "마, 마님." "바른대로 말하여라." 귀녀 눈에서 눈물이 후둑후둑 떨어진다. 무릎 위에 깍지 끼고 놓은 손등 위로 눈물 방울이 연신 떨어진다. "울기부터 하지 말고바 른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죽여주옵소서!" 윤씨부인은 귀녀의 우는 모습을 가만히 내다 본다. '아일 밴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윤씨부인 눈앞에 질려서 입술 까지 종잇장처럼 하얗게 되었던 봉순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비가 누구 냐. 말하면 짝을 지어주마." 귀녀는 더욱더 소리를 높이며 운다. 윤씨부인 은 또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며 우는 귀녀를 바라본다. "짝이 될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이냐." "예, 마님." "어째서 그렇느냐 아내 있는 사람이냐." "아, 아니옵니다.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분이옵니다." "..." "마님, 나, 나으리께 서," "뭐라구!" "죽여주옵소서. 아, 아, 애기, 애기 아버지는 돌아가신 나라 옵니다." "뭐라구!" 윤씨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옳거니!" 윤씨부 인 입에서 목소리가 찢겨져 나왔다. "어,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마, 마님." "옳거니!" 또 다시 찢어져서 목소리는 울려퍼졌다. 귀녀는 얼굴을 들어 윤 씨부인을 본다. 잿빛이 된 얼굴, 죽은 사람의 얼굴, 그 얼굴 위에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삼월아! 거 누구 없느냐." 삼월이 달려왔다. "김서방을 오 라 하여라." 김서방이 달려왔다. 김서방의 낯빛도 달라져 있었다. "올라오 게." "예." 김서방은 마루에 올라섰다. "방안으로 들어오게." 김서방은 벌벌 떨며 방안에 발을 디밀었다. "이년을 끌어내게." "예.""마님!" 귀녀가 울부 짖는다. "끌어내어 고방에 가두어라." 김서방은 엉겁결에 귀녀 어깨를 덥석 잡는다. 귀녀는 몸을 흔들며 "감히 뉘에게!" 악을 썼다. 바삐 못할까!" "나 가자." "내 몸에 손대지 마시오! 혀를 물고 자결할 터이니." 윤씨부인은 안 절부절 마당에서 서성거리는 삼월이에게 돌이를 불러오라 이른다. 돌이 왔 다. 추상 같은 명령에 두 사나이는 귀녀의 팔을 비다시피 하며 일으켜세웠 다. "마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마루까지 끌려나간 귀녀는 고개를 돌려 윤씨부인을 보며 소리쳤다. "마님!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네 이년! 네 죄 를 네가 모르느냐. 철퇴로 쳐죽일 년 같으니라구. 뭣들 하느냐!" 귀녀는 마 당으로 끌려내려갔다. 최씨 가문의 핏줄을 이몸이 받았거늘 무슨 죄 있다 고 이러십니까!" 김서방의 눈이 크게 벌어지고 이 주춤한다. 윤씨부인은 그 들을 따라 마당에 내려섰고 그들을 따라 고방 앞에까지 이르렀다. 귀녀는 발광을 하며 연신 울부짖었다. 김서방과 돌이는 귀녀를 고방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쇠통을 채워라." 커다란 자물쇠 잠그는 소리가 귀녀의 울부짖는 소리 사이를 뚫고 들려왔다. 윤씨부인은 열쇠를 받아들었다. 고방 에 갇히어진 채 사흘 낮 사흘 밤을 귀녀는 찬물 한모금 마시지 못했다. 밤 낮없이 물을 청하던 그 처참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새벽녘 윤씨부인은 초롱을 들고 김서방에게 고방문을 열게 하고 들어섰다. 굶주리 고 목마른 귀녀는 마지막 기력을 다모아 윤씨부인과 맞서려 했다. 초롱을 든 윤씨부인은 죽음의 사자같이 귀녀 앞에 군림했다. "이년! 네가 내 아들 을 죽였고나." 귀녀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아들이 생산 못하 는 몸인 줄 너는 몰랐더냐?" 귀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이번에는 윤씨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너 혼자 죽어서는 억울할 게다, 안 그렇느냐? 동사 한 자가 누구냐. 아이 애비는 누구냐?" "..." "물로 목을 축이고 얘기하겠느 냐." 귀녀는 신음했다. "물 마시고 싶지 않느냐." "물, 물, 무우--" 귀녀는 제 목을 잡아뜯으며 물소리를 되풀이한다. "그래 물을 주겠다. 말하라! 동 사한 자가 누구냐." 물 무우무우--" 윤씨 부인은 김서방에게 고갯짓을 하며 물을 떠오라 했다. 김서방이 바가지에물 을 담아왔다. 물 바가지를 윤씨부인에게 건넬 때 김서방의 양볼은 실룩거렸다. "여기 물가 져왔다. 물 마시기 전에 말하여라. 동사한 자가 누구냐! 애 아비는 누구 냐?" "치, 치, 치, 칠성이--" 윤씨부인은 바가지의 물을 귀녀 얼굴에 끼얹 었다. 귀녀는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혀를 내둘러 미친 듯이 빨았다. 윤 씨부인의 손이 얼굴을 갈긴다. 귀녀는 앞으로 고꾸라져 납작하니 엎드렸다. 다만 독사같이 얼굴만을 쳐들고 쏘아본다. 해골이 된 얼굴, 코가 높이 솟아 오르고 깊은 나락같이 꺼져 들어간 두 눈, 저주와 원한의 불이 붙는다. 고 방에서 윤씨부인은 "저년한테 물을 갖다주게. 먹을 것도 조금 주어라." 하 고 나서 푸들푸들 떤다. 물과 음식을 디밀어넣자 귀녀는 고방바닥에 배를 붙인 상태로 역시 독사처럼 얼굴만 쳐들고 그릇 속에 그 얼굴을 처박으면 서 물을 빨았다. 고방문이 잠겨지고 열쇠는 다시 윤씨부인이 들다. 그는 고 방 앞을 떠나지 않은 채 돌이를 불렀다. "칠성이놈 집에 가서 그놈을 잡아 오너라. 귀녀가 오란다 하고 시끄럽지 않게 데리고 와야 하느니라." 김서방 에게는 "복이하고 삼수를 문전에서 기다리게 하고 칠성이놈이 오면은 고방 에 가두도록, 묶어야 하느니라. 놓쳐서는 안 되네."하고 명령했다. 칠성이는 임이네조차 알지 못하게 끌려왔다. 이미 형세가 그른 것을 깨달았고 최치 수 살해에는 관여치 않았던 칠성이는 깊이 닦달할 것도 없이 평산과 공모 한 사실, 삼줄에 의심을 품었던 일, 그것을 미끼 삼아 장래의 한몫을 보장 받았던 일까지 술술 자백했다. "지사 무신 죄가 있십니까. 씨 빌리달라 캐 서 빌리준 죄밖에는, 아무것도 모르구마요. 일이 다 된 후에야 지도 눈치를 챘을 뿐입니다. 씨 빌리준 죄밖에는." 붙잡혀온 평산은 처음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름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묘를 판다는 사실까지 잊고. 그것은 일종의 발광이었다. "내가 무슨 상관이요? 연놈이 붙어서 한 짓을. 나는 상관없소! 금시초문이요! 하느님이 굽어보실 거요! 가세가 기울 었기로 명색이 의관의 집! 아아! 나는 모르는 일이요!" 뻐드러진 이빨사이 로 침이 튀었다. 끌려오면서 밭둑에 굴러떨어져 돌에 찢겨진 얼굴에서는 피가 배어나고 흙탕에 젖은 무명 도포는 옷고름조차 떨어져 반쯤 벗겨진 상태였다. 동네에 소문이 쫙 퍼졌다. "허허, 동아 속 썩는 거는 밭 임자도 모른다 하더마는 종년이 일을 저질러도크게 저질렀구마." "간도 크제? 우 째 그런 일을 꾸밌이꼬?" "처음부터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갔제. 생산을 못허는 양반을 두고 씨를 속이려 했이니." 반죽음이 된 귀녀는 이미 빠져 나갈 구멍이 없음을 깨닫고 조용했으며 칠성이는 씨 빌려준 죄밖에 없니 그 어마어마한 살인에 비한다면 계집종과의 음행쯤 무슨 큰 죄가 되랴 싶 었던지 "빌어묵을, 재수가 없일래니. 빌어묵을! 재수가 없일래니."하고 투덜 거렸을 정도였다. 평산만은 끝끝내 소리를 지르고 발광을 계속하고 있었다. 살이 찐데다 붓기까지 한 손을 불끈불끈 쥐면서 명색이 양반인데 이런 모 함을 받는다는 것은, 모함을 받았다는 그 일만으로도 천추의 한이되 고 조상한테 뵐 낯이 없으며 자손들에게 한을 남기는 일인즉 윤씨부인은일 월같이 살펴서 종년과 상놈의 그 욕된 범죄의 자리에서 자신을 풀어내라고 되풀이되풀이 지치지도 않고 외 치는 것이었다. 읍내 관아로 죄인들이 옮겨지는 날 갓 위에 갈모를 쓰고이 른 봄비를 맞으 면서 이 기괴한 살인 사건의 죄인들 얼굴을 보려고 이웃마을에서까지 사들 은 모여들었다. 10장 살인자의 아들들 귀녀와 두 사나이가 읍내 관가로 끌려간 날 밤에도 비는 계속해 내렸다.봄 을 재촉하는 실 비였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는 새벽에 접어들면서 멎고 날이 샜다고 부산을 떠는 계명에 따라 비안개를 헤치며 마을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산의 집의 울타리 없는 마당 가에 울타리 삼아서 내버려두었 던 죽은 살구나무도 거무칙칙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형! 형아 --- 어무니 가!" "아이고오---어머니이---" 거복이 형제가 외치며 울부짖었다.함안댁 이 목을 매고 죽은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이웃인 야무네가 맨 먼저 쫓아 왔다. 야무네가 마을을 향해 외치는 소리에 남정네들이 진흙길을 달려왔다. 거무죽죽하게 썩어가는 나무에 매달린 시체는 비에 흠씬 젖어 있었다.떠들 어대는 사람들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죽음의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지붕 위에서, 정자나무 얽힌 가지 끝에서 까우까우 울었다. "전하에 무작한 놈! 돌로 쳐직일 놈 같으니라고." 눈에 핏발을 세운 남정네들은 옆에 평산이 있다면 찢어죽일 기세였다. 강기슭은 아직 비안개에 덮여 희뿌옇게 보였다. 그 비안개 속을 뚫고 도롱이에 삿갓을 쓴 뗏목꾼이 뗏목을 몰고 강물 하구 를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으며 안개 무더기는 산중턱에도 몰려들어 산봉우 리만 아슴푸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허허어 열녀 났네. 열녀 났구마." 장 마당에 굿거리라도 벌어진 듯 바짓말을 추키며 달려온 봉기가 지붕 위에 앉은 까마귀 모양으로 시이 나서 지껄였다. 눈언저리에 푸르스름하게 달무 리가 진 봉기 얼굴은 올빼미 같았다. 눈알은 제물에 군침 삼키는 묏까마귀 같았다.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지? 나테서 빚을 받아? 하는 배 짱이기는 했으나 워낙 빚쟁이 칠성이도 뚝심이 센 사내여서 심히 마음이 편칠 않았는데 마침 어제 칠성이 관가에 끌려갔기 그렇잖아도 유괘했었던 봉기였었다. 그는 눈을 희번덕이며 목맨 새끼줄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열 녀는 열년데, 허 참 열녀 나믄 머하겄노. 샐인 죄인한테는 개발에 달걀 아 니가." 재미스럽게 말했다 싶었겠지만 그 싱운 말을 흥분한 사람들이 귀담 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우왕좌왕하여 할바를 모른다. 그들을 헤치고 윤보가 들어섰다. "무신 보기 좋은 구겡거리가 났다고 이리 들 서 있노! 영팔이 니이리 온나! 거기 벅수겉이 서 있지 말고." 고함소리 에 뻗장나무같이 영팔이 앞으로 나서는데 얼굴은 평소보다 더 젖어서 눅진 눅진해진 새끼줄을 잡아 끊고 치마를 러쓴 시체를 윤보와 영팔이 끌어내린 다. "아까운 사람, 엄전코 손끝 야물고 염치 바르더니." 방으로 옮겨지는 시 체를 따라가며 두만네는 운다. "그러기, 매사가 야물고 짭찔텀는," 서서방의 늙은 마누라도 눈물을 찍어낸다. 옮겨지는 시체를 따라 사람들이 방 앞으 로 몰릴 때 봉기는 짚세기를 벗어던지고 원숭이 같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 서 목맨 새끼줄을 걷어 차근차근감아 손목에 끼고 난 다음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툭툭 분지른다. 그 소리에 아 본 몇몇 아낙들이 머쓱해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잠시였다. 어느새 나무 밑으로 몰려들었다. 바우랑 붙들이, 마을의 젊은치들도 덤듯이 쫓아왔다. 모두 엉겨붙어 나뭇가지를 꺾어 간수하기에 바쁘다. 순식간에 나 무는 한 개의 기둥이 되고 말았다. 넋빠진 것처럼 강청댁이 그 광경을 바 라보고 서 있었다. 서서방은 주저주저하다가 두만네와 마주보고 서서 눈물 을 짜고 있는 마누라를 힐끗 쳐다본다. 그는 살며시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 가지 하나를 주워 옷소매 속에 밀어넣는다. 노상 횟배를 앓는 마누라 생각 을 했던 모양이다. "이기이 만병에 다 좋다 카지마는 그 중에서도 하늘병 에는 떨어지게 듣는다 카더마." 몽톡하게 된 나무를 올려다보며 봉기는 의 기양양해서 말했다. "죽은 나무라서 우떨란고? 효험이 있이까?" 아낙 한 사람이 미심쩍게 말했다. 봉기는 씩 웃는다. 죽은 사람의 정기를 받아 약물 이 된다는 믿음에서 모두들 덤벼들어 꺾은 것인데 죽은나무여서 과연 정기 가 통하겠느냐는 아낙의 의심이다. 병에 효험이 있기로는 목을 매단 끈이 나 새끼줄이 제일이라는 것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온 말이었다. 남 먼저 그 것을 차지했으니 봉기로서는 대만족이 아닐 수 없다. "갈밭 쥐새끼 겉은 놈!" 침을 칙 뱉으며 한조는 봉기 모르게 욕설을 퍼붓는다. "집에 갖다 놔 라. 단디히 해라이?" 곱상스레 생긴 제 딸에게 물같이 새끼줄, 나뭇가지를 안겨주며 봉기는 이른다. 조석으로 대하던 이웃의 죽음을 보면서 불로초도 아니겠고, 하늘에서 뿌려지는 은전도 아닌데 욕심을 내어 뒤질세라 서둘렀 던 아낙들은 차츰 제풀에 민망해져서 떠들기 시작했다. 함안댁이 불쌍하다 는 것이요, 정히 여자로서는 본볼 만한 사람이었다는 칭찬이다. 칭찬이라도 하면 노염을 탄 영신이 무정한 자신들을용서해주리라, 그런 생각이라도 하 는 것처럼. 막딸네도 방망이 휘두르는 사령같이 손에 든 나뭇가지를 휘두 르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소나아를 잘못 만내서, 그랄라 카믄 내겉이 혼자 살았던 편이 나았던 기라. 과부 신세 한탄할 것 하낫도 없구마. 그 세가 오만 발이나 빠져 죽을 놈의 인사가," "그란혀 도 세가 오만 발이나 빠져 죽게 생겼어라우." 주모 영산댁 핀잔 말이다. 세 만 빠져 죽어 도 안 될 기구마. 능지처참을 해야지.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법이 어디있 노. 그러니께 내가 벌써부터 뭐라 카든고? 동네 밖에 쫓아내야 한다고 그 리 실이 노이 되도록 말했거마는 누구 하나 들어묵어야제. 진작 내 말 귀담아들었이믄 최참판댁서도 그 숭측스런 변은 안 당했일 거 아니가. 하기사 거복이어매는 이차저차, 아니 멀게 죽기는 죽을 사램이지 만, 밤낮없이 피를 쏟아가믄서 거무겉이 베틀에만 눌어붙어 있었으니. 못 묵고 못 자고 항우장 사라꼬 견디겄나." 시체의 염을 끝내고 나온 윤보는 몽달이가 되어 서 있는 살구나무를 쳐다본다. "허허어, 인심 좋다, 인심 좋 아. 삼천갑자 동방석이 될라꼬 모두 애쓰는고나. 허허헛....." 사람들만 여들 어 와글거렸지 가난하기로야 말할 것도 없고 친척 한 사람 없는 상가는 외 롭기 그지없었다. 근동에 김평산의 먼 친척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으나 평 소 내왕을 끊고 지낸 것 같았으며 살인 죄인의 집에 초상이 있다 해서 외 면하던 그들이 찾아올 것 같지 않았고 기별을 하려 해도 마을 사람들은 어 느곳의 누구인지 잘 알질 못했다. 거복이 외가 함안에 기별을 한다 것도 그랬다. 가고오고 여러 날이 걸릴 것이요 사실 도 기별하러 갈 사람도 없 으며, 그쪽에서 남부끄럽다고 시체를 거두러 안 온대도 별수었다. 결국 마 을에서 초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윤보가 후딱후딱 두드려맞춘 관 속에 서 비로소 휴식하는 함안댁, 그 관 앞에 누더기 같은 일상에 입던 옷 그 모양대로 형제는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울다가 지친 한복이는 땟자국으로 얼룩진 배꼽을 바짓말기 사이에 내어놓고 꾸벅꾸벅 졸았다. 잠이 깨면 생 각이 난 듯 울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복이는 고개를 푹숙 인 채 아비를 닮아 눈두덩이 부석한 눈밑으로, 좁은 이미빡에 노인네 은 주름을 모으며 힐끔힐끔 사람들을 숨어 보았다. 그러다가 조는 동생을 팔 꿈치로 쥐어박곤 한다. 그러면 한복이는 다시 소리를 지르며 울었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함안댁이 목을 매 죽었다고 외치며 마을 사람들이 진흙길 을 달려가는 것을 본 임이네는 엉겁결에 헛간으로 뛰어갔다가 뒤안 짚단 옆으로 뛰어갔다가 하며 허둥대었다. 결국 그는 방안으로 쫓아 들어갔다. 문고리를 걸어 잠가놓고 "이 일을 우짜노, 이 일을 우짜노," 마을 사람들이 달려서 그에게도 목을 매달아 죽으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방안을 헤매는 것이다. 아이들은 한구석에 처박혀 어미하는 양을 겁에 질려서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 것은 방바닥에 나동그라져서 잠들어 있었다. "이기이 꿈가, 생시가. 이, 이 일이 정히 생시가?" 임이네는 제 가슴을 치고 머리칼을 잡아뜯는다. 그리고 울었다. 방안을 헤매며 때묻은 버들고리, 함롱, 씨앗주머니. 지 앉은 등잔을 눈을 닦고 또 보고 보지만 그런 것들이 변함없이 제자리에 놓여있 다 해서 평시처럼 칠성이 걸어들어올 리는 만무였다. 어제 관가에 끄려가 는 남편을 제 눈으로 보았다. 죄인치고도 살인 죄인이요, 최참판댁 사랑양 반을 죽인 상놈인 것이다. 누명이라 믿는 것도, 누명을 벗고 돌아오리라는 것도 허망한 기대이며 만의 일도 희망을 가져볼 수 없는 일이다."어디 가 서 살꼬. 이 새끼들 데리고 내가 어디 가서 살꼬. 으흐흣흣....." 방바닥을 친다. 그 서슬에 어린것이 깨고 어린 것이 우는 바람에 구석에 처박혀 있 던 아이 둘이 울음보를 터뜨린다. "목이 뿌러질 놈의 인사! 샐인 죄인이 웬 말이고! 우리는 다 죽었네. 이자는 다 죽는고나!" 비 갠 뒤의 햇빛은 유난 히 맑다. 미나리밭이 눈에 띄게 푸르고 흐르는 도랑물을 햇빛이 희롱한다. 그 햇빛도 어느덧 꼬리를 감추었다. 바람이 거슬거슬 일기 시작했다. 이제 초상집에는 별 신통한 구경거리는 없었다. 염을 하고 관을 짜고 초상 채비 를 차렸던 몇몇 장정들은 두만네가 쑤어온 팥죽을 먹는다. 먼 발치에서 침 을 삼키며 바라보던 아이들은 죽사발이 비는 것을 보자 실망하며 흩어진 다. 아이들은 벌죽거리는 마을길을 내려오다가 임이네 삽짝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차츰 아이들은 그 앞에 모여들었다. 집안을 기웃웃 들여다본다. 한 아이가 돌을 주워 팔매질을 했다. 다른 한 놈이 또 돌을 주워 팔매질을 한 다. 돌은 마루에 떨어지고 장독에 떨어지고 방문에 와서 부딪친다. "샐인 죄인!" "도둑놈!" "곰배팔!" 아이들이 함성을 지른다. 머리를 풀어헤친 임이 네가 방문을 열고 쫓아나왔다. 팔매질은 멋었으나 아이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임이네를 바라본다. 핏줄이 부푼 임이네의 얼굴은 검붉었다. 번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아이들을 노려보았으나 아이들은 도망가지 않았 다. 임이네 역시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기를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간 듯했 다. "이눔으 살림! 이눔으 살림!" 별안간 임이네는 헛간으로 달려가서 괭이 를 들고 나왔다. "이고 지고 갈 것까! 이눔으 살림 이고 지고 갈 것까아!" 하더니 장독을 때려부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 경 을 더 자세히 보려고 삽짝 밖에서 마당 안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다.구 경꾼은 아이들 뿐만 아니었다. 어느덧 어른들도 마당에 들어섰다. 말리는 사람도 없고 론 위로해주는 사람도 없다. 아이 어른 모두 입이 붙은 것처럼 임이네가 세간 을 부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간장독이 깨어졌다. 까만 간장이 콸콸 쏟 아진다. "하늘이 안 무섭나!" 처음으로 누군가가 외쳤다. "하늘이 무섭다니! 하늘이 무섭다니! 내가 샐인했소?" 임이네는 입에 거품을 물고 몸을 솟구 치며 외쳤다. 빙 둘러선 사람들 앞에 버티고 선 임이네는 "세상에이런 법 도 있소? 우리 임이아배가 무신 죄를 졌다고 관가 놈들이 개 끌 듯이 끌고 갔겄소! 최참판네 세도가 도도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요만 죄 없는 사람 누명 씌우는 짓만은 못할 기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영이 아요! 두고보소! 두고보란 말이요! 무죄 석방될 것인께! 참말로 사람으 말 알겄구 마! 참말로 사람으 맘 알겄구마! 이런 인심이 어디 있소!" 단 말을 끊고 임 이네는 사방을 둘러본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쌀쌀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 을 뿐이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검붉어진 임이네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입 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 했소! 우리 임이아배가 샐인할 사램이요? 죄라고는 씨 빌리준 것밖에 없소! 그 천하에 무도한 년이, 사람을 날로 씹 어묵을 그년이 평산이 그놈하고 배가 맞아서 한 것 아닌가 말이요! 천부당 만부당, 와 우리 임이아배가 억울하게 당할 기요? 그년이,그, ,그년이, 물구신맨치로 감기들어서 그 간을 빼묵어도 시원찮을 그년이! 사람들아!좀 생각해보소! 소 나아치고 제집 마다카는 놈 보았소? 열 제집도 싫다 안 칼 긴데 그 매구겉 은년이 지 한몸 내놓겄다 카는데 마다할 시레비자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겄느냐 말이요.그 런 시레비 겉은 놈이 있이믄 나 눈 닦고 볼라요! 눈 닦고 똑독히 볼라요!" "....." "내가 을 잘못했소? 내 말이 그르단 말이요? 와 말이 없소! 한마디 대꾸가 없소! 옳 으믄 옳고 그르믄 그르다고 말 좀 들어봅시다! 그,그래, 나도 거복어매맨치 로 목을 매달고 죽으라 그 말이요? 죄 어없이 나도 목을 매고 죽으란 말이 요! 옳거니! 죽으믄 초상 쳐주겄다 그 말이구마! 내 죽는 꼴 볼라꼬 이리 와서 나를 지키고 있는 기요?" "..." "그. 그래 샐인 죄인 제집은 어서 불쌍 하고 아무 죄 없이 누명 쓰고 잡히간 사람 제집은 불쌍치도 않다 그 말이 요! 세상 인심 좋소! 세상 인심." 하더니 임이네는 땅바닥에 픽 쓰러졌다. 기절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 칠성이의 삼간 오두막은 수라장이 된 채 비어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임이네는 도망을 간 것이다. 야간도주했다는 소문은 금세 마을에서 퍼졌다. 어제는 많은 사람들이득실 거리더니 오늘의 상가에는 별로 사람이 없어 한층 쓸쓸했다. 최참판댁 눈 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하기는 어제 저녁때 삼수가 와서 야료를 부리고 갔 다. 최참판댁에서 누가 시켰을 리는 만무고 약자를 넘보는 본시 그 심사 때문에 그랬을 테지만 힘 좋은 영팔이, 지게에 관을 지고 나섰을 때 괭이 와 삽을 든장정이 몇 명 따라왔을 뿐 함안댁의 저승길을 전송하는사람이 없었다. 더러 먼발치에서 관이 나가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윤 보 핀잔을 겁내어 얼른 제 집안으로 사라진다. 마을 사람들은 벌써 칠성이 가 부쳐먹던 최참판댁 땅을 누가 얻을 것인지 그것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응달진 산비탈을 걸어올라가면서 윤보는 "무겁나? 심들제?" 하고 영팔에게 말을 걸었다. "머" 하며 영팔이 짧게 말하고 길이 가파로워지자더욱더 지 게 진 허리를 꾸부린다. "송장하고 나하고 무신 연분인지 모르겄다. 내 손으로 염한 것만도 열 은 넘을 기다." 윤보는 영을 넘어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용이와 조 는 묵묵히 걷고 있었고 좀 뒤떨어져서 서서방이 따라오고 있었다. 훨씬 더 뒤떨어져서 거복이와 한복이 따라오는 것이다. 윤보가 영팡이 옆을 스쳐서 앞서 나간다. 경사가 급한 북향의 산비탈에 바람이 휭휭 소리를 내며 지나 간다. 앙상하게 메마르고 키만 자란 소나무가지 사이에 이 음지하고는 인 연이 없을 것만 같은 푸른 하늘이 비쳐들어 있었다. 자갈이 많은 박한 땅 에 밤알보다 작은 솔방울들이 굴러 있고 어쩌다가 땅에 붙은 것 같은 철쭉 이 눈에 띄곤 하는데 어거지로 움이 트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가 좀 팡 팡하구마. 머 더 올라가봐야 별수 있겄나." 윤보는 묏등 하나쯤 가까스로 들어설 만한 자리를 괭이로 두드리며 말했다. 영팔이 받침 작대기에 힘을 주며 지게다리를 땅에 붙인다. 어깨에서 지게를 풀어낸 영이는 작대기를 괴어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다. "땅이 녹았는가 모르겄소." 한조가 관 옆에 서며 말했다. "그러세, 응달이 돼서 녹았이까?" 윤보는 발끝으로 자갈을 헤쳐본다. "자갈도 많고" "쌀밥 보리밥 찾을 거 있나. 할 수 없제."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올라온 서서방이 흐느끼듯이 말했다. "나는 구겡이 나 했지. 일은 거들어 못 주겄다." "방오나 좀 봐주소. 머리를 어디로 두믄 좋겄소." 윤보가 말했다. " 흠, 내가 훙수는 아니지마는, 가만있다." 서서방 은 들고 온 지팡이로 방향을 가리키며 "이쪽이 서북간인께, 그렇지. 저쪽으 로 머리를 두믄 좋겄구마." 거복이와 한복이 굴 은 눈물이 말라 풀을 개어 붙인 듯 번들거렸다. 코가 흘러내린 한복이 밑 은 고양이 코밑같이 발갰다. "흥, 이팽이 그놈." 괭이로 땅을 파며 윤보가 중얼거렸다. 용이는 잠자코 윤보와 함께 땅을 판다. "죽 쑤어 보냈다고 그 런 난리 벼락이 없었던 모앵이라. 그래 그런지 오늘은 그 아지마씨가 얼씬 도 안하는구마." "최참판댁 눈이 무서바서 그랬겄지." 서서방은 곰방대에 담배를 넣으며 대꾸한다. "그러니께 번갰불에 콩 구어묵을 놈이지. 사람이 너무 약삭 빨라도 못쓰는 법이요." "의리가 안 있나. 제우답도 얻었고, 본시 조상들이 그 솥에서 밥을 묵었인께." "의리란 그런 게 아니요. 땅마지기나 얻었다고 감지덕지하게 의 리라 말이요. 평생 면천 못할 천성이지. 용심이 있고 심사가 나쁜 놈이 아 닌 것은 나도 아요. 사나자식이 접시바닥맨치로 속이 좁고 늘 푼수가 없다 그 말이구마. 그래도 그놈이 가숙을 잘 만내서." "제가, 자갈투성이다." 삽 질을 하던 한조가 투덜거린다. 서로 번갈아가면서 한참을 파내려갔을 때 노오랗고 포스라운 흙이 나타났다. 윤보는 흙 한 줌을 집어들고 들여다본 다. "이거 명당 자리 아닌가 모르겄네. 흙이 황금덩이 안 겉나?" 그러나 그 말에 관심을 가져보는 사람은 없었다. 말하는 윤보 자신도 그저 그래보았 을 뿐이다. 아비 어미 잃은 채 죄인 자식이라는 낙인을 안고 북향 비탈의 박토 같은 형제의 앞날을 생각하면 명당 자리가 뭐 말라비틀어진 거냐 싶 었을 것이다. 담배만 뻑뻑 태우고 있던 서서방이 "모를 이제. 병당 자리란 동삼하고 같은 거라 인력으로 얻어질 수 없는 기니께." "흥, 굶어죽은 구신 배맞이 밥이 무슨 소앵이며 얼어죽은 구신 홑이불이 무신 소앵일꼬?" 한조 가 빈정거리며 땀을 닦는다. "그런 애기는 있지. 옛날옛적에 난리가 나서 도망을 가다가 어매가 죽었는데 어린 형제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묻었더란 다. 그래 그형제가 고생 긑에 성공을 했고 만금을 모으고 보니께 노상 근 심이라. 어매를 길에 묻고 온 일이 마음에 걸리더라 그 말이지. 그래 형제 가 어느 날 함께 길을 떠났지. 어릴 적의 기억을 더듬어감서, 지성이믄 감 천이라고 어매의 무덤을 찾았구마. 그래 돈이 없나 머가 없나, 형제는 수천 금을 주고 명을 날리는 풍수를 데려다가 묘자리를 잡아놓고 이장을 서둘렀 지. 사토장이가 무덤을 파고 무덤 뚜껑을헤치 자 동서리 겉은 김이 물씬 올라오지 않았겄나? 이때 풍수가 아뿔사! 하며 사토장이보고 급 히 흙을 도로 덮으라 했지, 바로 그곳이 명당 자리였던 기라." "그래서 찌 되었노?" 영팔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무덤을 열었이니 정기가 다 날아간 기지. 그러고 나서 그 형제는 일패도지라. 일시에 거지가 됐다 카더 마." 하관을 하고 흙무덤을 지었을 때 앙상하게 여위고 키만 큰 소나무가 지 사이로 햇빛이 겨우 조금 기어들어왔다.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아이 둘 은 한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추위에 얼굴은 먹빛이었고 언 손은 게 다리같이 꾸부정했다. 윤보가 손을 털고 물러난다. "욕봤네. 아무튼지간에 고맘다, 팔 아. 니도 이 대낮에 지게 송장지고 오니라고." 서서방은 일어서며 치사를 한다. "내 집 일겉으믄 남부끄러바서 한낮에 지게 송장, 그 짓을 할 수 있 었겄소?" 영팔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기 하는 말 아닌가." 용이와 한조 는 바위 위에 엉덩이를 얹고 쉬고 있었다. 골통에 담배를 넣고 있던 윤보 는 "거복아." 하며 불렀다. 거복이는 선 자리에 그냥 뻗치고 선 채 힐끔쳐 다본다. "니 오늘이 며칠인지 아나? 열이레다. 너거 어무니 돌아간 날이 그러니께 월 열엿새라 말이다. 여기가 니 어무니 산소고. 잘 명님해두어라. 알겄나?" 그 냥 뻗치고 서 있던 거복이 순간 몸을 날렸다. 마치 소가 머리를 숙이고 뿔 이 목표물을 겨냥하며 달려가는 것처럼, 소나무 둥치에 가서 머리를 처박 는다. 제 머리를 처박고 또 처박으며 산이 울리는 통곡을 터뜨리는 것이었 다. "형, 형아!" 한복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으나 추위에 얼어버린목소리는 분 명치 않았다. 눈물만 줄줄줄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용이 쫓아가서 거이를 잡는다. 솔옹이에 찍힌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윤보는 연장을 걷어들고 한 마디 말도 없이 성난 것처럼 혼자 내려간다. 모두들 그 뒤를 따른다. 아이 들도 별수없이 어른들을 따라 내려간다. 마을에 닿았을 때 서편에 해가 뉘 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11장 구제된 영혼 이상한 것은 김평산의 체중은 줄지 않는 일이었다. 생 지옥 같은 옥중에서 수수밥 한덩이 얻어먹고 날마다 받는 고문에 살이 찢 기고 피멍이 들고 했으나 체중만은 줄지 않았다. 체중이 줄지 않았다해서 풍골이 좋다는 애기는 아니다. 그는 물에서 건져올려 놓은 익사체같이 살 이 팅팅 불어서 흡사 복어 같기도 했다. 뼈와 살가죽만 남아 곧 죽게 생긴 칠성이의 모습보다 김평산의 모습은 오히려 더 처참했다. 살이 내리지 않 는 것은 본시 체질이거나 아니면 병적인 것인 듯했다. 그 몰골도 몰골이거 니와 평산이는 정녕 비천한 광대요 하나의 노리개였다. 그래서 조금은 더 연명해나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놈, 이실직고 못하겠느냐?" "예, 사 또." 평산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본다. 일푼 일리도 리지 않는, 늘 하는 그 몸짓이다. 그런 다음 입맛을 한 번 쭉 다시고 소의 이실직고라는 것을 수령 앞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반가에 태어나서, 어엿한 의관의 집 자손으로, 비록 가세는 기울어 곤궁하오나 양반의 체통을 저버리고 비천한 계집종과 동사할 소인은 아니오며 더더군다나 저년이 직고한 바와 같이, 또 사또께서 통찰하시는 바와 같이 계집종과 정을 통한바는 없사옵고 그와 같은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름에 있어서 그 은밀함이야 더할 나위없이 은밀 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저놈에게 누설하여 동사할 것을 권유했겠사옵니까. 소인 만의 일이라도 최참판댁 재물을 탐하여 해할 뜻을 품었다면 저 계집 종하고 정을 통함이 온전할 것이요 소인의 씨를 심음이 마땅하거늘 그렇지 아니함이 명명백백하오니 어찌 소인에게 죄가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삼척 동자에게 물어본들 그이치에 어긋남이 없을 거이매 소인을 방면하여 주심 이 옳은 줄 아뢰옵고 거듭거듭 말씀드리는 바이오나 반가에 태어나소, 어 엿한 의관의 집 자손으로 비록 가세는 기울어 곤궁하오나." 당당한 공술을 듣는 수령과 배석한 관원들은 웃음을 깨문다. "오냐 알았다. 칠성이놈이 공모를 하였느냐 그 말만 하라." 자기 웅변에 중 했던 평산은 "예. 그놈은 씨만 빌려주었습죠." 하다가 아뿔사! 평산은 황급 히 혀를 내둘러 돼지처럼 나온 입술을 축이는 것이었다. "네 이놈!" "아니 옵니다, 사또, 소인은 모르느 일이옵고." "저놈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오도록 매우 쳐라!" "예이." 집장사령이 평산을 끌고 가서 형틀에 맨다. "사또오 억 울하오! 이 몸은 청백하오!" 한 대를 맞고 나면 "사또오! 소인이 적질을 하 였단 말씀이오! 무슨 죄명이오!" 했으나 다섯을 넘기기 전에 "소인이 했소 이다! 최치수는 소인이 사, 삼끈으로 모, 목을." 그러나 다시 풀려 수령 앞 에 이르면 "반가에 태어나서, 어엿한 의관의 집 자손으로, 비록 가세는 기 울어 곤궁하오나,"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히 일장의 소극이었다. "얼빠 진 놈." 수령은 웃음을 깨물고 관속들도 복어같이 팅팅하게 진 평산을 재 미스럽게 구경한다. 한편 귀녀는 문초가 있을 때 두 사나이와 대면하게 되 는데 그의 목소리는 항상 또랑도랑했으며 범행을 부인한 일이 없었다. 모 든 것을 숨김없이 말하였다. 다만 칠성이를 공모자로 진술하는 것만은 사 실과 달랐다. "모의의 정을 알면서 음행만 하였느냐 아니면 살인에 관여하 였느냐." "살인에 관여하였사옵니다." "저, 저 쳐죽일 년이!"오 랏줄에 묶인 채 칠성이는 몸을 솟구쳤고 달려가서 밑빠진 짚신발로 귀녀의 엉덩이를 내질럿 다. 이때마다 오랏줄을 잡고 있던 사령은 함께 달음박질을 해야만 했다. 귀 녀는 싸늘한 미소를 흘리며 칠성이를 흘겨보았다. '이놈아! 나는 니를 끌고 가야겄다. 백옥 겉은 니 몸을 물욕 하나로 짓밟은 네놈을 살려두고 내가 갈 성싶으냐? 어림없다, 어림없어.' "이년아! 이 천하에 악독한 년아! 모, 모 몹쓸 년아! 하, 하늘이 무섭지 않나아!" 길길이 뛰다가 기가 넘은 칠성 이는 이를 악물고 까무러친다. 그는 어떤 고문을 당하여도 결코 공를 시인 하는 일이 없었다. 고문과 울분과 중오 때문에 칠성이는 나무 껍질처럼 여 위어서 방금 그 목숨의 불길이 꺼질 듯싶었으나 귀녀의 대한 중오, 복수심 이 겨우 삶을 지탱하는가 싶었다. 그의 앞니는 모조리 부러지고 없었다. 평 산과 칠성이는 얼마 후 처형되었다. 거두어주는 사람 없는 그 시체는 황량 한 들판에서 썩었고 야견과 까마귀의 밥이 되었다. 귀녀는 임신한 몸이어 서 해산까지 형의 집행은 연기되었다. 한편 정월 초순에 지리산을 떠나 강원도 쪽으로 갔었던 강포수는 평소의 절도를 잊고 좀 거친 사냥질을 했다. 선불을 맞힌 자기 솜씨에 대한 불안과 귀녀에게 는 어쩔수 없는 정 때문에 그런 고통을 잊기 위해 마구잡이로 짐승을 사냥했 던 것이다. 그러던 참에 그는 암사슴을 한 마리 쓰러뜨렸는데 잡고 보니 새끼 밴 사슴이었다. 그때 비로소 강포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이 들 면서 그는 지리산에 돌아갈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그는 내내 새 끼 밴 암사슴이 마음에 걸리었다. 어릴 적에 자기를 길러준 포수가 려준 애기를 그는 언제나 잊지 않았다. 그것은 포수에 대한 교훈같은 것이었고 강포수는 궅게 지켜온 그 교훈을 처음으로 저버린 것이다. 암사슴이 새끼 를 밴 것을 몰랐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잡고 보니 그 교훈을 생각했고 후 회했다 하는게 옳았을 것이다. 그 애긴즉, 어떤 포수가 사냥길에 노루를 만 났다. 포수를 보고도 노루는 도망을 가지 않았다. 슬프게 쳐다보는노루에게 망설 임없이 총을 들이대는데 노루는 두 발을 들고 흔들어 보였다. 포수를 고도 노루는 도망을 가지 않았다. 슬프게 쳐다보는 노루에게 망설임없이 총을 들이대는데 노루는 두 발을 들고 흔들어 보였다. 그것은 살려달라고 애원 하는 시늉인 것 같았다. 이상하게 여긴 포수가 자세히 살펴보니 노루는 새 끼를 낳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욕심 많은 포수는 그예 총을 놓아 노루 를 잡았다. 노루를 떠메고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앞 채마밭 에 또 한 마리의 노루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포수는 재수 좋은 날이라 생각며 그 노루도 거꾸러뜨렸다. 신이 난 포수는 마누라를 부르며 집안으로 들어 갔다. 웬일이냐? 마당에도 노루 한 마리가 우뚝 서 있었다. 포수는 화약을 급히 재어 그 노루마저 쏘아 거꾸러뜨렸다. 그러나 채마밭에 노루로 보였 던 것은 그의 마누라였고 마당에 노루로 보였던 것은 그의 자식이었다. 산청까지 온 강포수는 어느 주막에서 친면이 있는 화전민 한 사람을 만났 다. "강포수는 돈 좀 벌었는가배요." "말도 마라." 강포수는 손을 내저었으 나 장날에 내면 이내 돈이 될 물건들을 제법 묵직하게 간수해온 터이기는 했다. 그 속에는 새끼 밴 암사슴의 녹비도 들어 있었다. 화전민과 함께 술 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애기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사건은 강포수가 강원 도로 떠나기 전에 일어났으나 외부 소식이 늦은 산중이었으므로 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강포수의 놀라움도 심했다. "머, 머, 머라꼬!" 술판을 뒤엎을 듯하며 일어섰다. 그 길로 강포수는 쌍계사 근처까지 와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화개에서 나룻배를 타고 읍내에 당도했다. 객줏집에서 밤을 꼬박이 샌 그는 다음날 절반 가량의 물건을 처분하여 적잖은 돈을 손에 쥐고 옥사 장을 찾아갔다. 죽을 목숨을 살릴 도리는 없었지만 귀녀가죽는 날까지 강포수는 뒷바라지를 할 결심이었다. 이슥한 밤에 강포수는 먹을 것을 련 하여 귀녀를 찾아갔다. "날 보자는 사람이 뉘기요." 어두운 옥 속에서 또랑 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나, 나다. 강포수다." 어둠에 익은 눈에, 옥 창살 사이로 희읍스름한 귀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중죄인이어서 족쇄를 걸 고 있는 것 같았다. "강포수가 왜 왔소." "몹쓸 계집!" 쇠가죽 같은 손으로 창살을 잡고 흔들며 강포수는 울먹였다. "흥!" "하늘이 무서바서우찌 그 짓 을 했노." "시끄럽소. 죽을 사람보고 그런 소리 하믄 머할 기요.""이 무상한 계집아. 재, 재물이 머라꼬 그, 짓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으믄 고 만이지."강포수는 다음날 밤에도 찾아갔다. 옥사장에게 뇌물을 쓰고 귀녀에 게는 또 먹을 것을 가져왔다. 수중에 돈이 떨어질 때까지 그는 매일 밤 찾 아왔다. 귀녀는 그를 반기지 않았고 고맙게 생각지도 았았다. 그러나 강포 수는 지순한 마음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지는 푼전에 는데 우짤고?' 객줏 집 구석방에서 강포수는 탄식을 했다. 낯이 익고 외상 떼어 먹을 위인이 아님을 알고 객줏집에 그냥 주질러 있는 것은 어렵잖은 일이었으나 돈이 없고서야 귀녀의 뒷바라지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산에 돌아가서 사냥 을 해서 돈을 장만한다는 것은 임박해오는 사정으로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이만 낳으면 귀녀는 죽을 것이다. 텁석부리 그의 얼굴은 더욱더 초췌해 보였다. 누구의 지삭이든 강포수는 귀녀가 낳은 아이를 신이 기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도 적잖은 목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보다 당 장에는 귀녀 뒷바라지가 시급한 것이다. 어느덧 시절은 봄이었다. 무심하게 보아온 객줏집 울타리 밖의 복사꽃은 떨어지고 있었다. 연둣빛 안개 같고 구름 같았던 먼 곳의 수양버들도 이제는 뚜렷한 푸빛이 되어 있었다. 객줏집 앞을 나가며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드높고 맑게 울린다. 강포수는 간다온다 말없이 객줏집을 나섰다. 그는 나룻배에 올랐다. 사공이 강포수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히죽히죽 웃다가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고 놀리려 했다. 그러나 강포수는 강가 먼산만 바라 보고 서 있었다. 평사리 마을에는 들일이 한창이었다. 사람과 소는 모조리 들판에 나와 늦봄의 따가운 햇볕 밑에 일들을 하고 있었다. 강포수는 마을 사람과 마주치기를 꺼려 길을 피하여 임자가 나와 있지 않은 밭둑 길을 급히 질러 간다. 밭둑에는 쇠비름, 쇠뜨기 같은 잡풀이 많이 자라서 벌레들이 그 사이 를 나돌고 있었다. 최참판댁 언더막길을 올라서 강포수는 행랑문으는 가지 않고 사랑의 담장을 끼고 김서방네 채마밭 쪽으로 돌아간다. 살찐 암탉이 채마밭의 상추를 쪼아 먹고 있었다. 강포수는 가만히 멈추어서서 안을 살 핀다. 부엌문 쪽에서 김서방댁 치마꼬리가 아른거렸다. 그러더니 김서방댁 은 부엌문지방을 이리 넘고 저리 넘고 하는데 머리에 병을 이고 있다. 목 이 긴 두루미병이다. 두 손으로, 떨어지지 않게 잡은 김서방댁은 연신 문지 방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건너뛰며"초서방아 초서방아 임자 없는 나캉 살자. 초서방아 초서방아 임자 없는 나캉 살자." 중얼중얼하다가는 병 을 내려서 그 병에다 소리나게 입을 맞추곤 한다. 강포수는우스꽝스런 광경을 웃으려 하지도 않고 슬금슬금 다가간다. "아지마씨" "아이고, 누오? 강포수 아닌가배." "야""이눔으 초가 죽을라 캐서 좀 살리노라고 양밥하누 마. 초서방아, 초서방아, 임자 없는 나캉 살자."다시 초병에 입을 맞추면서 장독으로 가더니 그것을 내려놓고 온다."그래 외놈이 하룻밤을 자고 가도 만리성을 쌓는다 카는데." 김서방댁은 단단히 따져보겠다는 듯 말문을 열 었다. "지난 여름부텀 우리 서방님을 따라댕기믄서 한솥에 밥도 묵었을긴 데 세상에 그런 벱이 어디 있소? 초상 때는 초상 온만 사램이 다와서 눈을 짰는데 강포수는 코빼기도 볼 수 없더마." "몰랐소. 강원도 가 있었이니께 요." "강원도? 내 소문 들으니께, 옥에 있는 그 몹쓸 년을 만낼라꼬 노읍에 산다 카더마는?" "...""아무튼지간에 짐승을 구해주믄 은혜를 갚고 사람을 구해주믄 악문을 한다 카기는 하드라만." 강포수의 눈이 번쩍 빛났다. "여 기서는 그년을 씹어묵지 못해서 불불 떠는데, 마님께서 모르시니께 그렇지 아시믄 이 동네 발도 못 딜이놓을 기구마." 마침 김서방이 돌아왔다. 강포 수 얼굴이 순간 긴장된다. "오래간만이오." 강포수가 먼저 인사를 한다. "래 간만이구마." 김서방도 그리 좋은 얼굴은 하지 않았다. 그도 강포수가 귀녀 때문에 읍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애기가 좀 있어서 왔소." "말 하소." "저, 밖에 좀 갔이믄 좋겄구마." 김서방은 아까보다 더 싫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매정하게 하지는 못하고 강포수를 따라나온다. 밖에 나온 강 포수는 비로소 당산에 누각이 없어진 것을 깨닫는다. 굳어져 던 그의 얼굴 은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한동안은 말문이 막힌 듯 멍하니 서 있었다. "할 애기 있이믄 하소." 재촉한다. "저어 다른 기이 아니고," 말을 끊었다가 다시 "나 얼굴에 쇠가죽을 씨고왔 소." "..." "사람으 인연이라는 것도 그렇고, 내 눈이 어두바서 그랬겄지마 는, 나리가 살아 기실 적에 그러니께 산에서 그랬구마요. 품삸이고 총이고 일없이니께 귀녀를 달라꼬 했소." "머라꼬!""나리는 아무 말심 안 하시더마 요. 그러던 참에 수동이가 그 모양돼서 돌아왔소. 그래 나도 미안하고 해서 그냥 떠나기는 떠났는데 노비만 얻어가지고 떠나믄서 야속하다 생했구마." 평소의 강포수와는 달리 침착하고 하는 말에도 조리가 있었다. "김서방도 알겄지마는 여름에서 게울까지 부지런히 사냥을 했이믄... 머 그런 것 지금 따질라 카는 거는 아니고 그 계집 소이를 생각한다믄... 내 눈이 어두바서, 정이 더런 긴가, 이자는 살아남지 못할 긴데." 강포수 눈에 눈물이 핑 돈 다. 강포수의 말은 김서방에게 모두 새로운 것이었다. 비로소최지수 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한 말의 뜻을 알 듯도 했다. '나리마님께서는 녀를 강포수한테 주실 작정이시었던가.' 소심하고 마음 약한 김서방은 초췌한 강포수의 꼴도 불쌍하거니와 뭔지 가슴을 에는 것이 있었다. "거기다가 애 는 낳으믄 누가 기를 것이며, 어린것에 무신 죄가 있겄소. 사람 새끼를 버 릴 수는 없는 거 아니겄소." '하기는 노비만 주어서 노냈지. 머슴도 일을 하믄 새경이 있일 긴데, 그래도 강포수라 카믄 명포수로 이름 날린 사람 아니가. 안 오겄다느 사람을 억지로 데리와가지고.... 듣고 보니 강포수가 야속하게 생각할 만도 하다. 본시심성이야 고운 사람 아니가.'"나 이 문전 에 다시 안 올라 했소. 양반하고 상놈으 사는 세상이 천리 밖이구나 생각 했구마. 그러고도 내가 여기 온 거는 그 죄 많고 몸쓸 계을.... 마, 마지막 가는데 무, 물밥이라도... 그 계집을 위해서 서러버할 사램이이 천지간에 누가 있겄소. 찢어죽이고 싶게 밉지마는 사람으 정이... 그, 그 정 더런 기구마." 강포수는 울먹인다. "알았소, 알았소, 아무말 말고 여기 기다리고 있이소. 마님 심정을 생하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지마는." 김서방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강포 수는 그냥 땅바닥에 퍼질러 앉는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창칼 같 은 흰 이빨을 세우고 달려오는 멧돼지 모습만 있었다. 얼마나 시각이 지나 갔을까.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강포수가 눈을 들어을 때 해 를 가리며 구름이 자나가고 있었다. 솜뭉치같이 하얀 구름이. 강포수!"김서 방 이 불렀다. 돌아본다. 돌이 부대를 하나 갖다놓고 인사도 없이 급히 가린 다. 김서방의 얼굴은 하얗게 바래 있었다. 입술빛 까지도 하얗게 돼 있었 다. "내가 자작으로 삼백 냥만 말심디맀는데 허락하싰으니께, 우선 백냥만 가지고 왔소. 어서 이거 짊어지고 가소. 나머지 이백 냥은 후일에 와서 가 지가고. 선걸음에 가소."김서방은 발밑에 내려놓은 백 냥 꾸러미가 든 자루 를 갈켰다. "고, 고맙소!""어서 가라니께!" 김서방의 입술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날로 읍내에 돌아온 강포수는 밤에 옥사장이에게 돈 몇 푼 을 쥐여주고 귀녀를 만났다. 여전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귀녀는 쌀쌀했다. 그러면서 귀 녀가 며칠만큼씩 찾아가는 강포수에게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경질 은 차츰 횡포와 발악으로 변해갔다. "이기이 뭔고? 썩어서 곰팡이가 쓴 곶 감을 가지고 와서 날 묵으라고? 눈까리가 삐었는갑다! 썩은 곶감 볼 줄도 모르는 그놈의 눈까리 뽑아서 개나 묵으라 카지!" 창살에 바싹 얼굴을 붙 이고 있는 강포수 얼굴에 곶감을 냅다 던졌다. "산도둑놈겉이 생기가지고 꼴에 꼴방맹이 차고 남해 노량 간다 카더마는 늙은 기이 비우도 좋고 염치 도 좋다! 그 꼴 보기 싫으니께 제발 이젠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아아 정말 미치겄네! 환장하겄네!" 그리 발광을 하다가도 금세 설기덕이 먹고 싶다는 둥 파전을 좀 먹었으면 좋겠다는 둥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지껄이는 거이었다. 강포수는 그러면 또 부리나케 청는 것을 마련해 갔다. 그러나 여전히 귀녀는 생트집을 잡고 욕 설을 퍼붓는 것이다. 소리소리지르고 우는가 하면 가다가 개천에 빠져서 콱 고꾸라져 죽으라고 악담을 하며 제 가슴을 치곤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강포수는 귀녀의 고통을 자신이 반은 나누어 가진 듯 도리어 위안을 느끼 며 돌아가는 것이었다. 어쩌면 귀녀의 생애가 끝나는 날 강포수의 생애도 끝나는 것인도 모를 일이다. 함께 죽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귀녀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까지의 강포수 인생과는 같을 수 없는, 다른 것으로 변 할 것이라는 뜻이다. 지금 강포수는 귀녀와 더불어 있다. 옥중과 옥 밖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엄연한 법의 거리요 지척이면서 가장 먼 그들 서로가 서로를 보고 느낄 뿐이지만 그러나 강포수는 일찍이 귀녀가 이같이 자신 가까이 있는 것을 느낀 적이 없다. 가랑잎더미 위에 쓰러뜨렸을 적에도 귀 녀는 강포수에게 멀고먼 존재였었다. 강포수를 종아하건 싫어하건 그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저주받은 악녀이건 축복받은 선녀이건 그것도 강포수하고는 관계가 없었다. 다만 거기 그 여자가 있다는 것과 그 여자를 위해 서러워해줄 단 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있다는 것, 그것뿐이다. 귀녀의 해산달은 가까워오는 모양이었다. 강포수는 가끔 귀녀 뱃 속의 아이는 자 기 것이 아닌가고 생각해보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물거품같이 이 내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귀녀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 다. 하나의 탄생은 하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귀녀의 죽음, 그것은 강포수에 게 범람하는 강물이었다. 강포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이 흘러내려가는 시뻘건 흙탕물이다. 강포수는 그간 끊었던 술을 한두 잔씩 마게 되었다. 봄 이 가버리고 여름이 닥치려는 기색이 그를 못 견디게 했다. 날이 갈수록 그의 주량은 늘었다. 귀녀의 행패가 늘어가는 것처럼 강포수의 주량도 늘 어갔다. 그러나 옛날 같지는 않았다. 몸이 많이 축난 때문이기도 했으나 돈 도 아껴야 했다. 지난 장날 최참판댁 돌이 나머지 이백냥을 나귀에 실어서 갖다준 것을 객줏집에 맡겨놓고 쓰고 있는 형편이며 그것이 닥이 나면 큰 일이었다. 술을 마시며 강포수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런대로 매양 마찬가지 로 돌아가고 있었다. 장싸군들은 여전히 주막을 들락거렸다. 때묻은 주머니 끈을 풀었다 여미는 그들 중에는 낯익은 사람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이십을 넘은 총각이 있는가 하면 백발머리도 있었다. 주막 앞을 평 사리 마을의 농부들이 떠들어대며 지나가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최참판댁 의 그 요란스럽고 끔찍한 사건들을 잊은 듯했다. 해산 때에 간신히 명을 잇고 있는 계집종, 그가 아직 옥중에 남아 있다는 것도 다 잊은 듯했다. 모 두들 하느니 시절 얘기요 보리 농사에 대한 인사였다. 암소 암퇘지의 씨받 는 얘기였다. 장사꾼은 장사꾼대로 농민들한테서 곡식이나 돈을 얼마만큼 뜯어내기 위해선 그들도 역시 시절 좋을 것을 아니 바랄 수 없는 것이다. 더러 시국을 근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임금님의 독약을 었느니 안 먹었느 니 시비였고 국상이 날지 모른다는 시비였다. 국상이 나면 백립을 쓰기 때 문에 망하는 건 양대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재모꾼은 국상 날까 근심이 었고 보부상은 동학군을 빙자하는 화적놈들 때문에 산길 가기가 어렵다는 것이었고 가난한 선비는 쓸모없이 된 글공부를 한탄한다는 것이며 벼슬을 사기 위해, 혹은 더 높은 벼슬에 오르기 위해 서울 가는뇌물 바리는 여전하는 것이다."상놈도 돈 있이니께 양반 되더라. 돈 없는 족보 치키들고 있어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네. 흥, 상놈이 양반 되어서 타곳으로 옮기가는 것은 그래도 염치 있는 놈이고 제 바닥에서 지 밑천을 환히아는 데 양반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는 꼴 차마 못 봐주지.""도처에 문서는 난이 로고." 어떤 유식꾼의 말이었다. 강포수는 며칠간 객줏집을 떠나서 산을돌 아다니다 왔다. 젖어미를 정해놓고 온 것이다. '며칠 안 갔이니께 기다맀을 기다.' 장에서 산 시루떡과 불에 구운 어포를 싸서 강포수는 귀녀를 찾아 갔다. "귀녀" 소리를 낮추며 불렀다."귀녀야." 대답이 없다. "나다. 강포수 다." "흥, 또 왔구마. 어디서 뒤진 줄 알았더마는."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포 수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여기 묵을 거 가지왔다. 받아라."몸을 질질 끌며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딜이보낼게. 손은 어 라."강포수는 꾸러미를 모로 세워 창살 사이로 넣으려 했다. "강포수, 손." "머라꼬." 강포수는 흠씬 놀라며 물러섰다. "손." 귀녀는 여전히 창살 밖으 로 손을 내밀어놓고 있었다. 강포수는 겁을 내어 떨면서 조그마한 귀녀의 손을 잡아본다. 조그마한 손, 손아귀 속에서 바스러질 것 같은 손이다. "마, 마. 많이 여빘고나." "강포수의 손은 쇠가죽 겉소." 부드럽고 낮은 목소였 다. "이, 이 거 배고플 긴데." 다시 꾸러미를 디밀려 하는데 이번에는 귀녀 쪽에서 포 수의 손을 거머잡았다. "강포수, 내 잘못했소." "알았이믄 됐다." "내 그간 행패를 부리고 한 거는 후회스러바서 그, 그래소. 포전쪼고 당신하고 살 것 을, 강포수 아, 아낙이 되어 자식 낳고 살 것을, 으흐흐흐...." 밖에 나온 강 포수는 담벼락에 머리를 쳐박고 짐승같이 울었다. 하늘에는 별이 깜박이고 있었다. 북두칠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깜박이고 있었다. 오월 중순이 지나 서 귀녀는 옥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강포수는 귀녀가 낳은 핏덩이를 안고 사라졌다. 그를 아는 사람 앞 에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12장 달구지를 타고 오는 소년 두만네는 콩밭 을 매다가 "내 정신 좀 보래? 점심 때도 모리고." 호미를 동댕이치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두만네는 서둘러 점심을 챙겨서 새벽부터 논에 나가 김 을 매는 남편에게 가져간다. 그러나 남편의 기분은 몹시 나빴고 기운이 없 어 보였다. "목이 좀 아프구마." 막걸리 두 잔을 들이켜더니 두만아비는 밥 을 드는 둥 마는 둥 했다. 두만네는 논둑길을 아 오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일이 너무 세도 입맛이 떨어지지. 두만이만 한몫 을 해도 이녁 허리가 좀 필 긴데." 논물 가까운 곳 여기저기 돋아난 애기 여귀풀 사이에 숨어 있던 개구리들이 두만네 발길에 놀라 논물 속으로 풍 덩풍덩 뛰어든다. 술취한 것처럼 희뿌옆게 흔들거리는 하늘과 부풀 로 부 푼 뭉게 구름이 떠 있던 논물에는 수없는 파문이 일면서 하늘과 구름이 구 겨지고 부글부글 흙물이 솟는다. 아마 강가에서도 조무래기들이 개구리처 럼 물속으로 풍덩풍덩 뛰어들며 개구리헤엄을 치고 있을 게다. 저만큼, 논 서너 동가리 너머 김을 매고 있는 사나이는 용이었다. "점심은 잡사았십니 까아!" 통을 이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약간 비틀며 두만네는 인사 삼아 소리를 질렀다. "야아, 이자부텀 묵으러 가야제요오." 습습한 공기를, 햇빛에 번들거리는 기 를 흔들어주면서 용이 대꾸 소리가 돌아왔다. "두 식구우, 무신 살림이 바빠아서어, 점심도 못 갖다 준답니까아. 간이 서 큰일 나겄소오. 야단 좀 치시이소, 야단!" 허리를 펴며 일어선 용이는 씁쓰 름하게 웃는 것 같았다. 그는 벌죽버죽한 흙탕에서 발을 빼며 논둑 쪽으로 나와 걸터앉으며 담배를 피울 참인 모양이다.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빼다가 정강이에 달라붙어 피를 빨고 있는 거머리를 떼어낸다. 논둑길을 가는 두 만네는 "딸자식이란 참말이제 남으 식구구나. 가부리니 고만이네.들자식 겉 으믄 며느리가 밥통 이고 댕길 긴데." 시집보낸 선이를 문득 생각했던 것 이다. 시가의 살림은 착시하고 딸자식 하나 잘 가르쳤다는 시부모의 칭찬 도 바람결에 들려왔으니 그만하면 마음은 놓을 만했다. 그러나 두만네는 선이가 하던 일을 자신이 할 때마다 딸 생각이 나곤 한다. "어서 가야지. 밭둑에 호미를 동댕이치고 왔는데 가서 하던 일 끝맺음하야제." 러나 허전 한 생각이 앞서 발길이 더디었다. 딸을 생각해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요즘 왠지 두만네는 비감한 생각이 들었고 사람 사는 일이 서글펐다. 귀녀 가 아들을 낳아놓고 죽었다는 소문도 그러했고 지게 송장으로 나간 함안댁 생각이 새삼스레 떠올랐으며 암팡지고 욕심이 많아 탈이었지, 남의 일이라 도 몸 사리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해주던 임이네에 대서도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정네가 사람 죽인 죄인이라 해서 아낙도 따라 죽으라는 법은 없다. 다만 함안댁이 죽고 보니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맺고 끊고, 그 정ㅇ갈한 성미가 본보기처럼 되어서 눈이 매롱매롱하게 살아 있 는 임이네가 미웠던 것이다. "그란해도 참판댁 눈이 무서바서 못 살았일 긴데." 위로의 말 한마디 못해주고 백안시 속에 야간도주를 했으니 두만네 는 그 처사가 야속했다고 뉘우쳐지는 것이다. 소문로는 친정에 가서 그럴 수 없는 학대를 받고 있다고도 했고 읍내 장거리에서 죽장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도 있었다. 이 셋을 데리고 백정의 움막에 빌붙어서 살고 있더라는 말도 있었다.어느 것이 참말인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홀몸도 아니고 자식새끼가 셋이나 딸맀이니 어디 가서 지가 편한밥 한 끄니를 얻어묵겄노." 보기만 하면 발 정한 암코양이같이 으르렁거리던 강청댁이, 임이네가 마을을 떠나고 나면 춤이라도 추며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막상 떠난 뒤에는 아낙들의 예상과는 달리 강청댁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기뻐하는 기색도 없었다. 여일게 심 드렁해서 세상만사가 다귀찮다는 얼굴이었다. 어쩌다가 우물가에서나 그의 모습을 볼까. 여간해서 들 판에 나오는 일이 없었다. 용이는 여전히 새벽 동이 트면 들판에 나가 종 일 일했다. 해가 서편에 넘어가고 땅거미가 질 무렵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서방이 정기일까지 한다믄서?" "빨래는 안 할까 봐?" "그러다가는 제집 00까지 빨아주겄고나." 벌써부터 동네에 퍼진 소문인데 아낙들은 새삶스럽 게 쌍심지를 돋우며 흉허물이었다. "농사꾼 제집이 그래가지고는 천상 바 가지밖에 더 자겄나. 호미꽁댕이를 들고 온종일 밭에서 나대도 밥 묵을라 카믄 하늘 치다뵈는데 곰뱅이 성한 년이 하세월하고 나자빠져 있이니 참, 정갱이에씨 씰을까 무섭네." 분개하여 저마다 지껄였다. 농사꾼 여편네가 일 안 하는 것 이상의 부도덕은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강청댁을 따돌릴 것을 잔뜩 벼르는 아낙들이었으나 뭐 따돌릴 것도 없이 스스로 끼 여 들어오지 않기로는 전과 매일반이었다. 살구나무는 아예뿌리째 뽑혀 없어진, 평산의 오두막집 가까이이까지 온 두만네는 "이집 앞을 지가 믄 밤낮없이 베틀 소리가 들리더마는, 그기이 엊그제 겉거마는 사람은 없 고 빈집만 남아서 구신 나게 생깄고나." 몇 달 되지 않았으나 봄에서 여름 으로 건너오는 비가 잦은 계절이었기에 마당은 잡풀이 우거지고 뱀과 두더 지가 판을 치게 돼 있었다. 깨어진 장독 뚜껑, 자루 없는 소매바가지, 테가 풀어진 빨래통 하며 모든 사림이 낡고 파괴된 채 아무데나 굴러 있다. 그 앞을 지나치려던 두만네는 움찔하며 걸음을 멈춘다. 마루 끝에 사내아잉가 오두머니 혼자 않아 있었다. 빈집에 동네 아이가 와 있을 리도 없는데 싶 었던 두만네는 잡풀을 으씩으씩 밟으며 마당으로 들어선다. "니가 누고 오?" 아이를 가만히 쳐다본다. "아니! 니, 니 한복이 아니가?" 아이의 양입 술 끝이 아래로 처지면서 비죽비죽 움직였으나 그것을 얼버무듯, 걸터앚은 두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어댄다. 한복이었다. 초상이 끝난 뒤 옷가지를 싸 고 얼마간의 노자와 먹ㅇ르 것을 주어서 함안 외갓집으로 떠나보냈던 형 제, 그 한복이었다. "한복아, 니가 우쩐 일고." 두만네는 흙먼지가 쌓인 마 루에 통을 내려놓고 새삼스럽게 한복이 모습을 살핀다. "그래 여기는 머할 라꼬 왔노." 아이는 주먹을 눈으로 가져가며 이이잉! 하고 가냘픈 울음을 터뜨린다. "어마님 생각이 나서 왔고나. 울지 마라. 울지 라." 치맛 자락을 당겨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두만네는 자신의 눈물도 닦으면서 먹 은 소리로 연신 울지 말라고 한다. 어린 것이 그먼 곳에서 어떻게 걸어왔 는지, 간밤에는 풀섶에서 쓰러져 잤던가 풀모기에 뜯겼던지 독초에 얼굴을 비볐던지, 얼굴은 탈바가지 같았다. 신발도 없는 맨발에, 오다가 다 해져서 벗어던진 모양이다. 후줄그레한 옷은 너덜너덜해질 만치 다 해어져서 땀냄 새가 물씬 코를 찔렀다. "니 성은 어디 있노? 함께 왔나?" "아, 아니요. 외갓집에 있소." "시상에 거기가 어디라고, 그 먼 곳에서 우 찌 왔노? 그래 걸어서 왔나?" "걸어왔소" 안심이 되었던지 한복이는 울음 을 그치고 대답했다. "지나가는 소달구지도 있었일 긴데, 그래 좀 태우달라 고도 안 했나?" "....." "안 태우주더나?" 한복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시상에 신도 벗고 뙤약볕을 걸어오는데 무상한 사람들, 자식 키우는 램이믄." 두만 네는 얼굴도 못 보 어느 누구인지 모를 달구지 임자가 꽤나 괘씸한 모양이 었다. "배는 안 고프나." 처음으로 생각난 듯 "배,배, 고프요." "우짜끼나! 그라믄 우선." 두만네는 통을 끌어당겨 남편이 먹다 남긴, 거의 그대로 있 는 보리밥, 된장, 풋김치를 꺼내어놓고 숟가락은 자기 치맛자락에 닦아 한 복이 손에 지여준다. "우선에 묵고,그라고 나랑 집에 가자." 아이는 숨쉴 틈 도 없는 듯 허둥지둥 입속에 밥을 끌어넣는다. "외갓집인들 할매 살았일 때 말이지 외숙모가 머 좋다고 너거들을 반기겄노. 이녁 자식들도 많다 카 든데." 반쯤 밥이 줄었을 때 한복이는 탈가지가 된 얼굴을 긁적거리며 밥 을 씹기를 시작했다. 얼마 후 두만네는 한복이를 앞세우고 집으로 갔다. " 한복이가 왔다." 영만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온다.돼지우리 속 의 밀린 거름을 쳐내고 있던 두만이도 그 소리를 듣고 쫓아나온다. "한아!" 다시 영만이 소리치며 한복의 손을 잡으려 하자 두만이는 동생을 쥐어박아 놓고 그 신 은 신기한 짐승을 보듯이 한복이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그의 의식 속에는 살인 죄인의 자식, 살인 죄인, 강렬하게 새겨진 기억이며 말이었던 것이다. 살인 죄인의 자식."한복이가 오래간만에 왔는데 와 그라고 있노." 두만네가 주의를 주었으나 그는 여전히 신기한 짐승, 언제 이빨을 드러고 덤빌지 모르느 짐승새끼를 대하는 것 같은 경계를 풀지 않는다. 영만이는 머쓱해지고 한복이는 비실비실 두만네 등뒤로 몸을 피하며 숨어버리려 하 는데 짓궂게 따라오는 눈에 오도가도 못하고 입을 실룩거린다. "아니 이눔으 자식이 불각처 버부리가 됐나?" 두만네가 윽박지른다. "씨이, 샐인 죄인 자식보고 말도 하지 마라 카든데." 불만스러워서 눈을 희뜨며어 미 눈치를 살펴본다. 순간 두만네의 손바닥이 볼에 가서 철썩 소리를 냈다. 두만이는 볼을 감싸며 기겁을 한다. 얼굴이 파아랗게 질린다. 차마 울지는 못했으나 대신 울음을 터뜨린 쪽은 한복이었다. 아까 제 집에서 가냘프게 울던 울음과는 달리 공포에 쫓기는 것 같은 울부짖이 다."이눔 자식, 니가 머를 아노! 머리빡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두만이는 일 찍이 이같이 노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두만네는 한복이를 달 래어 손발을 씻겨주고 빨아놓은 영만의 옷을 갈아입혀 준다. "두만이 말 믿지 마라. 니는 양반집 자손이고 또 니 어마님은 얼매나 엄전코 착ㅎ나 어른이라고, 한복이 니는 어마님을 닮았인께." 어미 얘기가 나오자 한복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가득 고였다. 참는 눈치였다. 왠지 그는 두만이한테 미 안한 생각이 들었고 또 울면 두만이 혼날 것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란 단순하여 한복이와 영만이는 이내 어울려 놀았다. 어미의 영이 무서워서도 그랬을 테지만 두만이도 차츰 불쌍하다는 사려가 생겼음인지 제가 차던 제 기도 주고 신던 것이지만 밑이 멀쩡한 짚세기도 한 켤레 찾아서 한복에게 주며 마음을 살려고 은근히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복아." "응." " 니 성은 어딨노?" "외갓집에." "와 함께 안 왔노." "나, 가자고 안 했다." " 와?" "오믄 매맞으까바서." 두만이는 픽 웃는다. "그라믄 니는?" "나는.....나 는, 그냥 와봤다." "우리 오매가 그러는데 니 어매 보고 저버서 왔지?" "....." "외갓집에서 니 구박하더나."한복이는 고개를 저었다. "밥은 많이 주 나?" "응." "매 안 맞나?" "응....형이 밤낮 매맞는다." 해가 서 두만아비는 돌아왔다. 피로하고 입맛을 잃어 그랬던지 짜증스런 표정이었다. 그는 마누 라한테 한복의 얘기를 들었으나 아무말이 없었고 저녁상을 물린 뒤 "나 웃 마을에 갔다 와야겄구마." 했다. "머하실라꼬요?" "웃마을 장샘이가 신거리 에 갔다온 모양인데 사돈댁 소식이나 좀들었이믄 싶어서." 하고 두만아비 는 여전히 한복이에 대해서는 아무말 없이 나가버다. 그러더니 아주 밤이 깊어서 돌아와왔다. "안 자고 머하는고?" "아직 야심하지 않았소." "온종일 일하고, 밤에는 자야제." "이녁이나 일찍 안 주무시고, 그래 사돈댁 소식은 좀 들었소?" 두만네는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을 계속하며 묻는다. "그러세. 그기이...상중대에 갔다 캐서 나온 김에 거까지 갔더니만 거기서도 장샘이 를 못 만났구마." "아따, 출가외인이라고 머 땜에 딸 생각을 해쌌소.""그러 매 거기 간 김에 염서방하고 이야기 좀 하다 오니께 이리 저물구마." 두만 아비는 담배를 붙여물면서 "이눔으 세상이 우찌 될라꼬 이러는지 모르겄 다." "와요?"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동네가 더럽게 돼가거든." "무신 일이 있었소." "거 김진사댁 며눌아씨 말인데," "..." "마을 젊은놈이 넘나보 는 모양이라." "머라꼬요." "참말이제 양반은 가리는것도 많아서, 두 고부가 꿀묵은 버부리 겉이 말 못하고 애간장이탔던 모양 이라." "우떻게 됐는데 그러요?" "아 그러매, 내가 김진사댁 문전을 지가는 데 이상한 놈이 담을 넘는 기라. 도둑도 이니겄고 가만 안의 동저을 실핀 께 여인네 호통치는 소리가 나더마. 그래 대문을 뚜리맀지. 참 내 기가 맥 히서, 그 댁 마님이 문을 열어주시서 들어가니께 탈바가지 쓴 놈이 그냥 나를 떠밀고 나가는 기라. 그댁 마님 말로는 전에도 한분 그런 일이 있어 서 며눌아씨가 병까지 났다는데. 남이 부끄러바서 입밖에 말도 못 다누마." "우떤 놈이까?" "탈바가지는 썼어도 내 누군지 짐작은 했지." "누굽디까?"" 그거는 임자 알 것 없고 내 그놈의 탈바가지를확 잡아뜯을라 카다가 하 동 네가 시끄러버서 그만두었구마." "세상에!" "그런 일이 다시 없었이믄 좋겄 지마는 여인데 둘이서 사시니께.... 참 큰일이구마." "애래가지고는 이웃 무 서바서 어디 살겄소?" "참맟 동리에 망조가 들라꼬 그러가." "이녁이 알거 들랑 내일이라도 김훈장한테 가서 말심디리소. 그런눔을 그냥 두겄소?" " 거 참판님댁에서 구천이 그눔이 그 짓을 해놔서 모두 간덩이가 부었는갑 다." "그냥 둘 일이 아니요.""그거는 임자가 모르는 소리구마. 내가 와 그눔 의 탈바가지를 잡아뜯지 않았는가 아나? 이런 세상일수록 남에게 원수지믄 안 되는기라. 사람이란 앙심을 묵으믄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귀녀 그년 을 봐도 그렇지." "그, 그렇기는 하요만." "누군지 내가 모르느 척해야지. 그거는 그렇고 평산이 아들 말인데." "...." "임자, 설마 우리집에 둘라꼬 데 리온 거는 아니겄지?" "식구 하나 입이 무서븐데 우찌 그러겄소?" "묵는 것도 묵는 거지마는 보내도록 해야지." "며칠은," "며칠 둘 것 없고 내일이 라도 보내라니까." "발도 부르트고 하루만더 재웠다 보냅시다. 우리도 자식 키우는 사램인데." "그런 생각할라 카믄한정 이 없지. 참판님댁에서도 아시믄 좋아 안 하실 기고." "....." 다음날 두만네 는 몰래 두만이를 불렀다. "니 오늘은 집에 있고, 한복이는 밖에 내보내지 마라. 이들이 해꼬지할라." 해놓고 두만네는 밭에 나갔다. 논에 가고 밭에 가고 어른 없는 집에서, 제가차기 땅따기 그런 놀이에 만 이는 싫증이 났다. 한복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고 싶어 했으나 두만이는 덮 어놓고 못 나가게만 했다. 저녁 지을 때쯤 해서 두만이는 어미가 돌아올 것으로 알고 둑 밑 풀밭에 매놓은 소를 찾으러 나갔다. 형이 나가는 것을 본 영만이는 "우리 미꾸라지 잡으러 가자." 신이 나서 말했다. "그래, 가재도 잡자." 한복이도 신이 나서 말했다. 아이 둘은 쏜살같이 밖으로 뒤어나갔다. 두아 이는 가재가 많은 개울가를 알고 있었다. 미꾸라지가 많은 곳도 알고 있었 다. 해는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뛰어 가면서 발목에 감기는 개 울물의 감촉을 미리부터 즐긴다. 그 개울에 가려며 타작마당을 자나야 하 고 물방앗간도 자나서 좀 올라가야 한다. 두 꼬마는 달음박질 경주를 했다. 한복이는 목을 앞으로 내밀며 뒤었고 영만이는 가슴을 내밀며 뒤로 자빠질 듯한 모습으로 뛴다. "저기이? 한복이 아니가.""한복이다." "한복이놈이다!" 타작마당에서 놀고 있던 영만이 또래의 조무래기들이 확 흩어진다. 그러나 다음 왁자하느 떠들면서 두 아이를 빙 둘러쌌다. "샐인놈 의 새끼야! 니 머하로 여기 왔노!"한 놈이 쏘아댔다. 한 놈은 돌을 주워 던 졌다. 한 놈은 바싹 다가서서 한복의 머리끄덩이를 끄덕인다. 그러자 모두 와 하고 달겨들었다. 영만이 소리를 지르고 울었다. 조무래기들은 복이한테 매맞은 생각을 하며 더욱더 한복에게 주먹질을 한다. 소를 몰고 오다가이 광경을 본 두만이가 "이, 이놈들아!" 하며 소를 내버려두고 달려왔다. 두만이가 지난날 이 타작마당에서 대장노 릇을 했던 거복 이보다 힘이 센 것을 아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주먹질을 그만고 물러났다. 땅바닥에 쓰러졌던 한복이 얼른 일어나 앉았다. 그는 울지 않으 려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얼굴에는 조금 피가 비쳐 있었다 탈바가지의 얼굴이 하룻밤 편한 잠에서 나았는가 싶더니 손톱자국으로 다시 부풀어올 랐다. "이눔새끼들! 직인다! 직여!" 두만이는 두 주먹을 휘둘러 보였다. "거 복이한테 나도 매맞았다." 한 놈이 항의를 했다. "나도 맞았다.!" "도!" "한 복이 지 어디 거복이가아!" 두만이는 한복이를 보호한 데 대하여 만족을 느며 고함쳤다. 그러나 아이들은 무엇을 봤는지 우우하니 딴 곳을 향해서 몰려 간다. 두만이 돌아보았을 때 말을 타고 양복을 입은 서울양반이 마을 길을 들어서고 있었다. 별안간 텅 비어버린 타작마당에 두만이와 한복이만 우뚝 남아 있었다. 영만이도 눈물을 닦으면서 아이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나쁜 놈의 새끼들! 직이비릴라 카다가 두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 더욱더 뉘우 쳐지기도 했고 한편 자기 위세를 뽐내는 기분이 되기도 한 두만이는 손목 을 잡고 한 손으로는 소를 몰며 집으로 돌아간다. 마을 초가지붕에서는 여 기저기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헤는 넘어 산허리에 몸을 감추고 있 었다. 타는 듯 붉은 놀이 들판 가득히 퍼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들의 얼굴을 물들였다. 한복이는 이날 하룻밤을 더 묵고 다음날 아침 두만네가 타이르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콩가루를 붇힌 찰밥을 싸고 엽전 다섯닢 을 얻어 허리끈에 묶고, 또 새로 삼은 짚세기를 신고 여벌로 주는 새 짚세 기는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났다. "한복아, 니 소달구지 만내거든 태우달라 캐라." 두만네는 저만큼 걸어가는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복아, 또 오니라 아." 영만이 소리쳤다. 그 후에도 한복이는 철새같이 평사리에 나타나곤 했다. 타작마당에서 한 그 봉변을 잊었는가. 그 봉변을 잊지 못하고 겁내면서도 나서 자란 마을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더 컸었는지 모른다. 한복이 나타날 때 마다 마을 아이들 눈에서 적의는 줄어들었다. 철이 바뀌어도 한복이 나타 나지 않으면 아이들은 들먹였다. 어른들도 말을 했다. 하기는 한복이 마을 에 오면 두만네 집에서만 잠을 자고 밥을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네 집 에서도 하루이틀쯤 그를 재워주었고 먹여주었으며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 았던 막딸네도 한복이를 불러다 점심쯤은 먹여주었다. 어린 방랑자. 철새같 이 옛 둥우리를 잊지 못해 찾아오는 한복이를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가 엾게 생각했다. 이제 그는 달구지 신세를 질 줄 알았고 오다가 날이 저물 면 장터, 빈 좌판 위에 잠자느 궁리도 생기게 되었다. 13장 개나리를 꺾어 들고 정월 초하루, 최참판댁 서희는 부친의 삼년집상에서 풀려났다. 아직 담제가 남아 있었으나 상복은 벗은 것이다. 조석에 올리는 상식때 철든 사 람이라면 육친의 죽음 당신의 슬픔을 되새겨가며 곡을 했을 테지만 어린 서희는 만 이태 동안 조석으로 곡을 할 때마다 슬픔을 키워나갔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날이 지나가는 데 따라 자신이 고아나다름이 없는 사실과 아울러 부친의 죽음의 뜻을 알기 시작했다. 우제, 졸곡, 소상, 대의 행사와 조석상식의 일과는 어린아이에게는 과중한 것이었으나 대신 서희는 그런 것을 통하여 정신이 단련되고 생각이 제법 성숙해졌으며 이제는 의젓 한 태도를 서희한테 볼수 있게 되었다. 서울서 내려온 조준구는 그 동안 두 번 서울을 다녀온 후 줄곧 이곳에 머문 채, 윤씨부인과 결코 내색하지 않았으나 집안 하인들은 달가워하지 않았건만 그 자신은 안늙이하고 어린 손녀만 남은 적적한 상중의 집안을 의당 보호하고 감독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임자 없는 사랑에 죽치고 있었다. 탈상을 한 뒤에도 그는 마을을 떠나지 않았 다. 삼수를 제외를 하인들, 특히 다리 병신이 되어 연명한 수동이는 마음속 에 불을 켜고 준구를 미워했다.'흥! 소리개 까치집 뺏듯이.' 뭣 때문에 자시이 그러는지 헤아려볼 여지도 없는, 본능적이며 치열한 미 움이었다. 최참판댁 하인들은 진작부터 그러했거니와 마을 사람들도 차츰 조준구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의 말을 허풍으로 들었으며 지체 높은 신분 도 시들하게 보았고 최참판댁의 일개 식객으로밖에는 더 이상 대접하질 않 았다. 그가 마을을 떠난 뒤의 소문, 삼수 입에서 나왔건 어디서 나왔건 소 문에 의할 것 같으면 사신을 수행해 먼 나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둥,이번 에 서울 가면 아무 대감의 주선으로 큼지막한 감투 하나는 쓰게 도리 것이 요, 그렇게 되면 지방 수령쯤 졸개 부리듯 할 그런 처지가 될 것이라는 둥, 그러나 최치수 장례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래 여름에야 찾아온 모습은 지 난해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름 양복에 깡깡모자였으며 하인 하나 따르 지 않은 세낸 말을 타고 왔다.그 거머비마저 최참판댁에서 내준 것을 모르 는 사람은 없었다. 원체 선비란 말부터 앞세우는 법이 아니라는 둥, 선비는 무슨 놈의 선비, 예를 하늘같이 숭상하는 선비가 삭발하고 홀태바질 입을 까 보냐, 지난날 그를 칭찬하던 사람이 먼저 눈을 부라리며 흉을 보았다. 이따금 마을로 내려가는 준구가 "이 논에는 벼가 몇 섬이나 나는고?" 마치 최참판댁의 당주같이 거드름을 피우고 물어보면 은"석 섬지기 논이오. 시절 좋을 때에는 석 섬지기지요." 입맛을 쩍쩍 다며 농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고 "금년에는 날씨가 고른 것 같구먼." "날씨 좋은 것만 믿으믄 농사는 절로 되는 줄 아시오." "그러면은?""서울반 님들은 모를 기구마요. 곡식이 병드는 것도 모를 기고 뜯어묵는 물기이 있 는 것도 모를 기구마요."하고 비우었다. 정월 초하루가 가고 대보름이 지나 가고 연 띄우는 아이들도 없어지면 세월은 달음박질이라도 치듯이 봄기운 을 향해 마구 달려가는데 어느덧 사랑 뜰에 있는 옥매화는 싸라기만큼 작 은 봉오리를 물더니만 안개 같고 하얀 너울같이 활짝 피었다. 무렇게나 제 마음대로 자라난 울타리 밖의 물앵두나무도 볼그스름한 꽃이 피려하고 있 었다. 마구간과 외양간의 우마들도 발동을하여 코를 불고 발길질하는 소리 를 들을 수 있었다. "방이 왜 이리 냉하냐? 불을 지펴라." 준구가 방에서 얼굴만 내밀며 길상에게 일렀다. "예" 하면서 길상은 준구를 힐끗 쳐다본 다. 불을 지피라 할 때마다 길상은 죽은 상전을 생각했고 왜 서울양반은 서울로 가지 않나 싶어서 화가 나는 것이다. "길상아!" 김서방이 불렀다. 옳다꾸나 잘되었다 싶은 길상은 "야!"하며 준구를 피하여 뛰어간다. 변성기 에 들어선 길상의 대답은 목쉰 듯하면서도 소리가 굵었다. 김서방이 앞서 가면서 따라오라는 시늉으로 소을 흔들었다. 뒤꼍으로 돌아간 김서방은 고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까 니 머했노?" 고방 속에서 김서방이 물었다. 김서방 역시 누구든 사랑 쪽에 얼씬거리면 신경의 날을 세우는 것이었다. "방이 냉하다 하시믄서 불 지피라고." 길상의 말을 들은 서 방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고방 속에서 한참을 부스럭거리던 김서방은 포 를 싼 꾸러미와 매화주가 든 하얀 두루미병을 들고 나왔다. "불은 심부름 갔다 와서 때고." "어디 갑니까?" "김훈장댁에 갖다드려라. 내일이 그 양반 생신이라니께." 길상은 잠자코 두루미병을 받아 목을 잡고 한손에는 어포 꾸러미를 들었다. "갔다 오겄심다." "어 갔다 오너라." 길상이 문밖에 나섰 을 때 개똥이녀석이 팽이를 치고 있다가 팽이 채를 휙 제끼며 길상을 치는 시늉을 했다. "히히히.....노앴제?" "안 놀랬다 와!" 길상은 일부러 위협을 주 듯 눈을 까집고 소리를 질렀다. "히히히.....거있말 마아." 개똥이는 침을 질 질 흘리면서 한편 흘러내리는 코를 들이마신다.코끝이 푸르딩딩했다. 팽이 는 잘 돌고 있었다. "어이 가노." "어디 가믄 머할래!""나요 따야가얀다." "따라오기만 해봐라. 가다가 개고랑창에 처넣어부릴 긴께.""힝 어임없다.!" 길상이를 칠 듯이 팽이채를 휘둘렀으나 정말 개천에 처넣을 줄알았던지 똥 이는 굳이 따라오지 않고 다시 팽이를 치기 새작했다. 길상이와 동갑인 올 해 열여섯의 개똥이는 여전히 천치였다. '따라오믄 성이 가실 긴데 어서 갔다 와야지.' 길상이는 며칠 전에 개동이 로하여 싸움이 붙었던 김서방 내외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생각하며 킥 웃는 다. 본시부터 사이가 나빴던 삼수에게 못된 장난을하여 개똥이 얻어맞은데 서 발단된 부부간의 싸움이었다. "임자 닮아서 저 모양 아니가!" "어어? 이 녁 닮았지 머한다꼬 내 닮았이꼬.""낳은 사람이 누고!" "이녁 아들이지 남 으 아들이요! 누가 씨도둑질했나!""밭이 나쁘니께." "씨가 나빴지 밭이 나빠? 밭이 무슨 소용이던고? 천하없이도 씨는 못 속다 요.""아무리 씨가 좋아도 비렁땅에는 도사리밖에 안 되는 법이라!" 김서방 이 삿대질을 했다."아무리 밭이 좋아도 피보리 심은 땅에 보리 나까! 하늘 보고 침뱉기지. 와 날 원망하요!"김서방댁이 홀짝홀짝 뛰면서 삿대질을 했 다. "저 저 아가리! 대시당초 내가 원수를 만냈지!" 김서방이 제 가스을 쳤 다."내 할말 사돈이 하네. 사람 잡아도 유분수지! 아이구 내 팔자야!" 김서 방댁이 가슴을 쳤다.길상이는 언덕막길을 내려가면서 연신 킬킬거리며 웃 는다. 그 일이 생각나서 웃는 것이기는 했으나 웬일인지 길상이는 마음이 달뜨고 세상이 온통 훤한 것 같아서 즐거웠다. 가물가물 젖어드는 것 같은 햇빛, 축축한 봄의 입김이 사방에서 길상의 가슴을 간질러주는 것 았 다. 아직은 끝이 누우렇고 옹그러든 채였으나 까치들이 앉아 있는 보밭에 도 봄 기운은 완연했다. 아이들이 불을 놓아 꺼멒게 그을린 논둑길, 꾸불꾸 불한 논둑길은 마치 뱀 같았으나 그 길을 가는 농부들, 보리를 밟고 있는 농부들의 흰옷이랑 머리를 동여맨 베수건이 정답고 화사하게 보였다. 햇볕 바른 언덕에 꾸부정하게 자라난 뽕나무 밑둥에는 흙이 녹아서 허물어지고, 겨우 뽕나무의 뿌리가 나머지 흙을 움켜잡고 있는 것 같았다. "참말이지 봄이 왔구나."크게 소리를 질러보려다 그만두고 대신 길상이는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본다. 정초에는 그렇게 많은 연이 푸른 연이 푸른 하늘에 떠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모를 줄 끊긴 연 생각이 났다. 찾지 못한 연은 높이 올라가서 수미산에 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나 길상은 떠내려가는 구름이 못 견디게 좋았 다. 하늘 빛깔도 좋았고 맴을 도는 소리개의 쭉 뻗은 날갯죽지, 그 날갯죽 지에 올라앉아서 꿈을 꾸었을 때처럼 넓은 하늘을 날고 싶은 기분이 용솟 음친다. 길상은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모른다. 길상은 목소리가 굵게 터져 나오는 이 시기가 자신에게 있어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눈은 더욱 크고 서늘해졌으며 긴 목이 좀 퉁거워졌고 양어깨가 벌어졌으며 다리에는 힘줄 도 생긴 이런 변모가 인생에서의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봄에 눈을 떴기 때문에 이 화창한 봄날씨가 좋았던 것이다. 이 소년에게 또 나의 이유는 최참판댁의 서희가 상복을 벗은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옥색 저고리에 남 치마를 입었던 서희, 제법 늘씬하게 큰 봉순이도 서희를 다라 무색 옷을 입고 입이 벌어졌던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너무 오랫동안 암담하고 비애 에 가득 찬 집 속에 마음을 가두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기나긴 겨울이었다 고 해도 좋았을 것이다."길상아!" "야""천상만 보고 어디 가노?" "아" 영팔이, 봄갈이하러 가는가 소를 몰고 길상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김훈장댁에 가요.""술 가지고 가나?" "야""무슨 술고?" 영할이 침을 삼켰다. "매화주요. 내일 김훈장님 생신이라 카믄서 가지가라 합디다.""음" 소는 처음으로 굴레를 쓰고 밖에 나온 모양이다. 새로 엮은 굴레 빛깔은 햇보리같이 신선해 보였다. 소도 그러했다. 털빛이 희여끄름하 여 앳된 모습이 가련하게 느껴진다. 어린 계집아이같이 세상을 신기로워하 기보다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송아치가 언제 이러 컸으까?" "이잔 송아치 아니다."영팔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잔 다 컸지. 가슬이믄 씨를 안 받겄나?"애무하듯 등을 한 번 만져보는 영팔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혼자 웃는다. 소는 수줍음을 타는 것처럼 슬그 머니 밭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요령이 짤랑짤랑 흔들리면서 청아한 소를 낸다. "이자는 남으 소 안 빌리도 되겄소.""그러모. 내 소가 있는데 머할라꼬 남 으 소 빌리겄노.""부자 됐소.""농사꾼한테는 소가 보배지. 이놈을 먹이노라 고 골이 빠졌다."말이 적은 영팔이었으나 아이를 상대해서도 저절로 자랑 이 나오는 모양이다. 평생 처음 가져보는 소였으니. "그렇지마는 좀 불쌍하 요.""와" "아즉 어린 것 겉소.""아, 아 아니다. 어리기는? 가슬이믄 씨를 받을 긴데?" 했으나 영팔이도 다소 불안한 듯 눈을 꿈벅거리며 털이 희여끄름한 소를 쳐다본다. "너무 일 많이 시키지 마소. 아즉은 어린데, 굴레도 무거바 뵈 요.""이눔 자식이."하다가 영팔이 껄껄 웃는다. "그러세. 내 맴이 바빠서 안 그렇나. 한분 시험 삼아서, 심에 버겁게야 일 시키겄나."찬바람 이 싫지 않은지 영팔이는 벙싯벙싯 웃었다.영팔이와 헤어진 길상은 불을 지피라던 준구의 말을 생각하고 뜀박질로 김훈장 집 앞에서까지 뛰어갔다. "샌님! 계십니까!"숨이 차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김훈장의 딸 점아기가 내 다보다가 얼른 들어가버린다. 얼마동안이 지난 뒤 부엌 쪽에서 "안 계시구 먼." 내외를 하느라고 그곳에서 대딥이 들려왔다. "여기 술 가지고 왔소."길상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거기 마루에 놔두고 가지."여전히 부엌 쪽에ㅓ 대답이 들려왔다. 길상은 대문을 밀고 안마당에 들어섰다. 깨끗하게 치워진 마루에 두루미병과 어포 꾸러미를 놔두고 "여기 놓고 가요!"했으나 이번에는 대꾸가 없었다. 대문을 나선 길상이는 곧장 돌아갈 판인데 문이 열려져 있는 사랑 마당쪽 으로 눈이 갔다. 햇볕 바른 곳이어서 그랬던지 별당 뜰의 개나리는 움이 트고 있을 뿐인데 그곳의 개나리는 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옳지. 저걸 꺾어서 애기씨한테 드려야지. 방에 두믄 곧 꽃이 필기다."길은 서슴없이 들어가서 조심성 없게 꽃가지를 우직우직 꺾는다. 한두 가지 꺾 는다는 것이 꺾는 재미에 한아름이나 꺾었을 때 그 기척을 안 정아기는 성 이 나서 내다보았으나 다른 사람 아닌 길상인 것을 알고 아무말 없이 도로 들어가버린다. 길상이는 실실 웃었다. 설마 술이랑 어포를 가져온 사라보고 야단을 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좀 심술스런 웃음이긴 했다. 그가꽃을 한아름 안고 의기양양하여 별당 뜰에 들어갔을 때 서희는 봉순이와 함께 연못가 에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붕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애씨!" 서희는 가만히 있었고 봉순이 돌아보았다. "어이서?"꽃을 본 봉순이 홀딱 일어서며 물었다. "훈장님 댁에서."하는데"훈장님이 뭐야? 선생님이지."하고 서희는 길상이를 노려보았다. 조용했을 뿐 서희의 성깔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얻었나?"노려보는 서희 눈초리에 길상이는 감히 제 마음대로 꺾어왔다는 말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어서 방에 꽂아라. 따신 방에 두므는 꽃이 필 기다."봉순이 꽃을 받아 안았다. 그러더니 꽃가지 속에서 필 듯 말 듯한 꽃 한 가지를 꺾은 봉순이는 서희 귀밑머리에 꽂아주면서 "애기씨 참 예쁘 요." 하고 웃었다."너도 꽂아주련?" 서희도 웃으며 꽃 한 가지를 꺾어 봉순이 귀밑머리에 꽂아준다. 그러고나 서 두 아이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갈상이도 벙실벙실 웃는다. "길상아!"삼월이가 불렀다. 길상이는 그곳에 더 서 있고 싶은 마음이 가득 했으나 뛰어간다."사랑에서 부르신다. 어쨌길래 노발대발이고?"아차 하고 생각한 길상이는 "군불" 하다 가 다시 사랑을 향해 뛰어간다 준구는 마루에 나와 서 있었다. 얼굴이 벌 겋게 상기되어 있었다."지, 지금 곧." 길상이 당황해서 말했다. "이리 와!" 길상이 신돌 가까이 다가왔다."더 가까이!" 길상은 얼굴이 파아 래졌다. "이리 못 올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다가간 길상의 뺨을 준구는 연달아 갈겨대는 것이다. 길상은 두 볼을 감싸며 "잘못했습니 다, 나리." 이소동을 알고 김서방이 달려왔다. 길상이도 심부름 갔다 왔다 는 말을 안 했거니와 김서방도 심부름을 시켰노라는 변명을 해주지 못한 다. 길상의 경우는 변명이 도리 것이요 김서방의 경우는 역성을 드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식객으로 주제넘은 짓이나 그는 엄연한 양반 나리요 두 사람은 노비인 것이다. "다음부터는 명념하고, 어서 가서 불 지피라."김서방 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노여움을 꿀컥꿀컥 삼키면서 말했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조준구는 방문이 날아갈 듯 닫아붙이며 방안으로 들 어갔다. 이날 해질 무렵, 나무 한 짐을 지고 둑길을 지나오다가 담배 생각 이 난 용이는 지게를 받쳐놓고 둑길에 걸터앉아 담배를 붙여물었다. 버드나무 잔가지 사이로 황금빛 광선이 미친 듯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던 해가 산허리에서 꼬리를 감추면서 천지에 번지는 놀을 안고 버드나무가 우 뚝우뚝 선 길을 보퉁이를 인 여자가 아이 둘을 앞세우고 걸어왔다. 가까이 왔을 때 여자는 보퉁이말고도 아이까지 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니!"용이는 입에 문 곰방대를 뽑으며 벌떡 일어선다. "칠성이댁네 아니시오!"여자가 걸음을 빨리했다. "오래간만이요."인사말을 하고 여자는 눈을 내리깐다. 거지나 다름없이 변 모한 임이네였다. 두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 네 개가 미동도 않고 용이를 쳐다본다. 등의 아이는 허리를 꾸부리고 얼굴만 어미 등에 붙인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사람의 자식 같지가 않았다. 소담스럽게 검던 임이네의 머리는 간물에 절였던 것같이 붉게 바래어지고 바스라져서 상하 게 솟아오른 광대뼈 위에 흩어져 있었다. "고생하셨구마요." 잠긴 목소리로 용이 말했다."그런데 어떻게 오시오?" "여, 여기 살라꼬 왔소. 정 여기소 못 살라 카믄, 그, 그만 새끼들하고 이강 물에 빠지죽을랍니다.""..." "차라리 그 편이 낫겄지요." 하는데 임이네는 울지 않는다. 눈은 내리깐채 였고 꼬챙이같이 여윈 손이 머리 위의 보퉁이를 받쳐 잡고 있었다. 아이들 은 여전히 용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지는 세월도 지냈이니께..... 두만이 집에 가보이소. 아이들이 춥겄소."용 이는 눈길을 돌렸다. 14장 사양의 만가 썩은 아랬부분을 도려낸 곳에 새 판자를 끼워 못질하는 윤보를 김훈장은 장죽을 물고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못을 치는 장도리의 울림이 장단같이 정확하고 가락이 있는 것만 같다. 윤보가 소질하고 있는 것은 김진사댁 솟 을대문의 문짝이었다."아예 새것으로 갈아버렸으면 좋으련만." 김훈장이 중 얼거렸다."괜찮십니다. 위는 말짱하니께요. 꼴 보고 매 보고 하겄십니까. 사 람만 금하믄 될 긴께요." 사람만 금하면 된다는 마을 할 때 윤보는 묘한 웃음을 흘리었다. 여인네들은 얼씬하지 않았고 빈집같이 파괴했다. 처마끝 의 그늘이 제법 써늘해 보인다. 뒷숲에서는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자네 내 일 떠난다고 했나?" "예. 해가 질어지니께 좀 벌어야 안 하겄십니까.""음 그야 그렇지... 사장도 빗물이 새어 기둥 하나가 썩는 모양인데.""아즉은 전딜 만할 깁니다. 기왓 장이나 손보십시오.""기둥을 갈려면 일이 크겠지?" "클 거는 없지마는 빗물만 안 새믄 이삼 년이사 별일 없일 깁니다.""하기는 손을 댈려면 한 두 곳이 아니지."못질을 끝낸 윤보는 대패를 손에 들고 날을 들여다보다가 망치로 살짝살짝 두드려 맞춘다."생원님은 금년 가슬에도 함양 가실 깁니 까?" 김훈장은 우물쭈물할 뿐 그 말 대꾸는 하지 않았다. 맑고 놓은 하늘이 쨍! 하고 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둑길을 을 몰 며 자나가는 나그네 무명옷에 쌀쌀한 햇빛이 내려앉고 수수알의 모개를 다 꺾어버린 키 큰 수숫대가 선들선들 건성으로 움직이며 당산의 잡목숲이 미 친 듯이 물들어서 그것도 우수수 우수수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계절이면 대 개 가을겉이를 끝낸 들판은 허퉁해지는 것인데, 이 근래 몇 해 동안 김훈 장은 추수만 끝나면은 어딘지 모르게 사라졌다가 달포 가량 지난 에 돌아 오곤 했다. 지난 가을에도 그러했다. 돌아올 때는 떠날 때와는 달리 몹시 지치고 낙심한 얼굴이었다. 그러한 그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긴 사람들은 어디 여자라도 숨겨둔 모양이며 곡식을 내어 돈을 장만하여 찾아가나 보다 고들 했다. 씨를 받으려고 엉큼스런 속셈에서 그러는가 보다고 했다. "나이 있이니께. 마나님하고 아들 삼형제를 땅에 묻고부텀 저리 상투가 허 옇게 됐지마는 나이를 보나 근력을 바서라도 자식 볼라 카믄 못 볼 것도 없지.""세는 아 도 침은 질게 뱉고 싶은 그게 인정이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성시 알아서 할 일인데.""그거는 또 와.""안 그런가? 상사람 딸이나 과수댁이라도 집안에 딜여놓고 자식도 볼 겸 노리의 몸도 의타하고 하믄 좋을 긴데 곧 죽어도 그렇게 하기는 싫은 기라.""그러세." "소리치는 문벌도 아니겄고 가산이 넉넉한 것도 아니겄고 양반댁 새처니가 탕수국 냄새 나 는 김훈장한테 시집을 기든가?""그야 알 수 없느 일이제. 째보나 곱새라믄 못 올 것도 없ㄷ. 혼사 못할 것 없지.""째보, 곱새? 그거 될 만한 얘기다. 사람 병신쯤이야 가문 병신보다는 나을 테니 그렇다면 앙혼인들 못하까." "째보, 곱새등이도 괜찮다믄 판서, 참판 사위도 어렵잖지러." 하고는 깔깔웃 었다. 마을 사람들이 혹 볼일이 있어 찾아갔다가 김훈장 어디 가셨느냐고 물어볼라치면 "일갓집에 가싰는가 부지요." 딸 점아기가 노상 그렇게만 대답햇다. 김훈장이 양자를 얻으려고 혈안이돼 십촌이 넘는다 는 떠돌이 노총각을 찾아서 떠난 것을 아는 사람은 윤보말고는 별로 었다. 요즈음 김훈장에게서 그 나들이는 가을만 되면 도지는 병과 같은 것이었 다. 윤보는 대패질을 끝내고 대문짝을 달기 시작한다. 해진 곳을 올을 골라 가며 감쪽같이 기워낸 솜씨 좋은 바느질장이같이 대문짝은 나무의 빛깔만 달랐지 말짱했다."수고했네." 김훈장의 치사를 들으며연장 망태에 연장을 챙겨넣고 윤보가 땀을 닦고 는 데 손주놈을 안은 서서방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서서방은 김훈장에게 인사 를 했다. 김훈장은 손자를 안은 서서방을 마땅찮게 쳐다본다. "일이 다 끝 났는가배.""야" "손이 싸서 일찍이 끝냈고나." "일이랄 것 있소. 한창 바쁘겄구마요.""그러매. 아이들은 들에 나가고 할망 구는 또 아프다 캄서 누워 있으니, 이놈은 울어쌌고, 할 수없이 젖 멕이러 갓다 오누마.""배 좀 고프면 고팠지." 김훈장은 시큰둥해서 말했으나 사내놈이 채신머리없이 아이까지 안고 나느 냐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서서방은 서서방대로 우리는 양반이 아니니께 요, 새 물 묵듯 하느 어린 것 배 곯릴 수 있겄소? 하는 투의 표정을 나타 내었다. "사당에 비가 샌다 카시더니 그곳도 고치십니까." 김훈장을 곯려줄 심산인지 서서방은 슬슬 얘기를 몰았다. 김훈장은 묵부답 이었고 대신윤보가 대답했다. "기와는 고치야 할 거로요." "사당을 손보는 것도 시급한 일이기는 하겄지마는 더 시급한 일은 로 안 있겄십니까?""...." "양가에 다 자손이 끊어졌이니, 진사님댁이사 기왕지사, 천운을 한탄할에 없지마는 샌님께서는 선영봉사를 어느분한테 맽기실라꼬 이러시오?" 외면한 채 여전히 말이 없었으나 풀이 팍 죽은 김훈장의 기색은 역력다. 그는 붕어가 물 먹듯이 성급히 장죽을 빨아대는 것이었으나 담배는 이미 다 타버리고 재만 남아 연기가 나지 않았다 윤보는 서서방의 심통을 깨닫 고 씩 웃었다."이제 내 손으로 무덤 지을 생각은 못하겠네." 한참 지난 뒤 김훈장은 약한 목소리로 중어거렸다. 다른 일 같았으면 상이 건방지게 무슨 참견이냐! 햇을 것이요, 서서방은 서서방대로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그 놈자 좀 빼어달라고 대거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마는 문을 닫는대서야.""문을 다기는 왜 닫아!" 드디어 역정을 내며 이성을 높였다. 지난 가을 허행에 그친 일이 새삼레 생각나 부아가 치밀기도 했던 것이다. 찾는 사람은 서울로 갔다는 막연한 소식에 얼마나 큰 실망을 안고 돌아왔던가. 약을 올려준 서서방은 자나가는 농부를 붙잡고 딴전을 펴고 있었다."금년 에는 귀보리가 많아서 영 성가시구마. 자네 밀밭에도 귀밀이 수울찮이 이 던데?""그러기 말입니다. 뽑아도 한정이 있이야지요." 역정을 내는 김훈장을 내버려두고 손자를 안은 서서방은 농부들을 따라 아 랫마을을 향해 내려가다. 수군수군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가는 그들 뒷모습을 멍청히 바보 던 김훈장은 장죽을 돌팍에 치면서 담뱃재를 털어낸다. "생원님." 윤보는 연장 망태를 어깨에 걸머지며"한복이라는 도령, 나무 될 거는 떡잎 적부터 알더라고, 거 장노가 있겄더마요." 뜻밖의 말을 한마디 했다. "눈군 데?" 김훈장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였다. 계절 다라 찾아노는 김평산의 둘 째아들을 모를 리가 없었고 측은하여 머리를 쓰다듬어준 일도 있었다 그러 나 서서방이 문을 닫고 어쩌고 한 뒤끝이어서 경계를 했던 것이다. "김평 산이 그 양반 둘째아들 말입니다. 같은 종씨 아닙니까."김훈장은 눈을 부릅 뜨며 윤보를 노려본다. 도령이니, 김평산 그 양반이니하는 존칭부가 심상찮은데 같은 종씨가 아니냐는 말에서 윤보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 알만 했던 것이다. 김훈장은 치미는 분노를 누르고 입을 다물었다. 윤보하고 헤 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백정놈의 씨를 양자 삼았으면 삼았지!' 김훈장은 별안간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낀다. 악의가 있어 윤보가 그랬다고는 생 각지 않았다. 서서방의 경우도 심술을 부렸지만 속으로 걱정해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허다고 괘씸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체통을잃으니 양반들도 상것들의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어린애와도 같이 철없는 설움이 복받치는 것이다. 그 노총각의 행방을 찾지 못하는 초조함에서도 그러했거 니와 다른 또 하나의 까닭이 있었다. 옛날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 외로 운 두청상이 살고 있는 김진사댁을 넘보는 놈이 있다는 것이다. 구놈이 누 구인지 동네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요절을 내고 말 것을, 제 는 마을에 그 영이 통하지 않는다. 결국 담을 높이고 대문 단속을 할밖에, 궁여지책을 쓸 수 밖에 없는 일이 생각할수록 김훈장을 슬프게 했다."아버님, 점심상 올릴까 요." 딸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훈장은 사랑에 오른다. 도배를 하고 장판도 갈아낸 방안은 한결 밝고 정결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문갑이며서 책이 눈에 띈다. 지난 이월 최참판댁 서희에게 글을 가르치면서부터 곡식 과 신탄은 어렵잖게 그쪽에서 내어주었고 농사도 하인들이 거들어주어 살 림이 한결 넉넉해진 것이다. 최참판댁 하인들은 서희를 위해 좀더 학식이 높은 선생을 모셔올 수도 있을 것인데 하고 의아한 마음이었으나 윤씨는 김훈장에게 서희를 일임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의당 김훈장이 서희의 선이 될 수 있는 사람임을 믿고 있었다. "그 양반을 말할 것 같으면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마는 화심리 암선 생하고 한자리에서 유식을 겨루는 터이고 최참판댁 사랑양반으로 말할 것 같으믄 장암선생께 글을 배웠이니께. 누구 누구니 해도 이 근동에서느 그 양반 학식을 따를 사람이 없일 기구마.""그러기. 그 양반하고 집안인 김진 사도 이십 세 안에 장원급제하신 분이고, 다 글 좋은 내림 안닌가배." 저희 들 자식이 천자문이나 배웠다고 농부들은 우쭐해서 추켜세우지만 론 그것 은 모르느 말이었다. 화심리 장암선생하고 자리를 같이하였다는 것은 빈말 이다. 젊었을 때 장암선생을 찾아가 말석에서 선생의 강론을 근청한 일은 있었으나 어릴 적부터 사랑하던 제자인 최치수에 비하면 김훈장은 제자의 서열에도 들지 못했다. 김진사의 얘기도 이십 안에 초시에 등과한 것만은 틀림없으나 장원급제는 아니었다. 다만 김훈장에게 남다른 점이 다 면 강기의 능력인데 돌대가리 속에 들어박혀 움직일 줄 모르는 그런 기력 이라고나 할까. 하늘 천 따아 지! 상체를 흔들며 배우기 시작한 천자문이 골수에 박혀들어간 것처럼 후일 어른이 되어 얻은 지식도 그런 식이어서 깨우침이나 비판의 여지없이 통째로 받아들였고 고스란히 그의 완고한 돌 대가리 속에 사장되어 왔엇다. 그 완고함은 흔히들 있는 아집이나 자부하 고는 다른 것이었다. 외곬에서 시작한 완고함이었다 그런 뜻에서는 서에게 정확히 글을 가르치는 좋은 선생인지도 모른다. 딸 점아기가 점심상을 가져왔다. 양식과 신탄이 넉넉함에도 밥상에 놓인 밥그릇에는 여전 히 깡보리밥, 짠 김치, 된장찌개도 저과 변함없는 소찬이었다. "문의원께서 오셨다가 아버님이 안 계셔서," "언제?""한 시각 전에 오셨더랬습니다." "그 러면 최참판댁에 가셨겠군.""아니옵니다. 그곳을 들르시고 화개로 가신다 하시면서," "그래?"술을 드는데 서운해하는 낯빛이다. 점아기가 나간 뒤 깡 보리밥을 씹으면서 지난번 찾아왔을 때 문의원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김 훈장은 생각했다. '각처에 왜인들 은행이라는 게 생겨서하전 어음까지 떼는 판국이니 장차어 찌 될지... 노상 하는 말이오만 큰일이외다.' '깡그리 쫓아내기 전에는 그놈 들이 무슨 짓인들 아니 하겠소?''지각 없는 사람들은 서울 제물포 사이에 나는 듯한 철마가 달리고 종로 네거리에는 전등불이 휘황하며 한강에는 철 교를 놓았다하여 신기해들 하는 모양인데 그런 것을 우리네가 만들고 우리 네 임의로 한다면야 반가운 일이지요. 우리들도 남들만큼 나라 정이 달라 져야 할 테니 말이오. 헌데 그 내막을 알고 보면 가슴을 칠 일이고 숫제 쓸개를 뽑아서 갖다바친 꼴이지 뭐겠소? 위정자들은 장차 이 나라를 어느 곳으로 몰고 갈려는지 생각이나 해보고 처신을 하는지 심히 의심스럽소이 다 듣자니 서울 제물포 간의 철도만 하더라도 그 권리를 얻기 위하여 미국 인이 임금 관계 대신에게 막대한 금액을 헌납했다는구려. 라에서 그네들에 게 철도를 부설하는 땅을 빌려주었으면 정당한 임대료와 권리금을 떳떳하 게 받아야 하거늘 상호간의 약정서의 내용이라는 게 실로 해괴하다 하오. 우리 땅에 우리 일꾼 부려서 역사를 해놓고 우리 백성들이 돈을 내어 기차 라는 것을 탈 터인데 그 돈이 모두 외인들 품속에 들어가고 세금 한푼 내 지 않게 되어 있다 하니, 주린 창자를 졸라매며 손바만한 땅뙈기 하나를 믿고 사는 농사꾼한테는 피가 나게 갈구리질하여 세금을 거둬들이면서 말 씀이오. 겨우 선심 쓴다는 게, 편지 내왕과 병정들 무기 실어나르는 데서만 은 기차 운임 없이 보아주겠다니, 그놈의 편지 부피가 얼마나 될 것이며 실어나를 병정이나 무기 같은 것도 허실한 얘기 아니겠소? 그럴 계제가 돼 있느냐 말씀이오. 한데 또 하나 해괴한 일은 그 리 마저 이문을 붙여서 미국인이 왜인들에게 팔아넘겼고 왜인들이 그것을성사 했다 하지 않소?''참으로 통분할 노릇이오.' '어디 그뿐이겠소. 도처에서 우리 금광을 파헤쳐서 각 나라들이 엄청난 이 득을 보고 있다 하오. 아까 철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새발의 피 같은 돈을 헌납하고 기막 힌 조건으로 약정서를 작성하는 것은 그래도 나은 편이오. 허가도 없이 마 구 덤벼서 도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오. 왜인들은 저희네들 군대까지 끌고 와서 엄포를 놓고 어떤 나라의 사신은 허가를 급히 해주지 않는다고 외부협판 유기환의 뺨까지 쳤다 하니. 산의 나무들은 저희들 마대로 베어 다 팔고 바다의 고기도 저희들 마음대로 잡아가고 삼포를 강점하는가 하면 조선옷 입은 왜인이 작당하여 수년을 정성들여 키운 삼을 모조리 뽑아가고 백성들 재물까지 약탈함이 다반사요. 그럼에도 적반하장으로 죄책을 재물 잃은 우리 백성한테 물으니 누구를 믿고 생업에 종사하겠소? 이렇게 민생 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의 힘은 날로 쇠약해가거늘 임금께는 외인들 손을 빌려 그네들 식의 궁궐을 짓는다 하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외 다.' 나라의 사정, 일가 문중의 사정이 모두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묻혀들 어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김훈장은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숟가락 을 놓고 낡은, 생채기 투성이가 된 소반을 멍청이 내려다보고 앉았는데 딸 은 숭늉을 떠받쳐 가지고 왔다. 점아기가 식기 속에 밥이 고스란히 남은 것을 보고 근심한다."망할 놈의 세상." 딸이 상을 물린 뒤 김훈장은 중얼거렸다. 이렇게 앉아 있는데 조준구가 찾 아왔다. 조석으로 대면하는 터이며 그의 사람됨을 멸시하면서도 늘 답답한 심정이 말벗 없는 김훈장은 싫지 않게 그를 맞이 했다. 논쟁이 벌여져서 흥분하는 일 이외 그의 문벌에 대한 존경만은 변함이 없었으므로 평소 김 훈장은 예에 벗어난 언행을 깊이 삼가고 있었다."출타중이라 들었는데 언 제 오시었소.""예. 목포에 만날 사람이 있어 갔다가 돌아오기는 어제였는데 읍에서 하루를 묵엇지요.""시원한 소식이라도 들으셨소?" "무슨 시원한 소식이 있겠소. 물정이나 실피고 왔지요." 김훈장은 딸에게주 안상을 차려오라 하여 조준구와 마주앉으며 답답한 하루해를 보낼 참이었 다. 서로 술잔을 건네면서 "뭐니뭐니 하지만 이렇게 기강이 땅에 떨어지고 만 것은 예학이 쇠퇴한 때문이오. 온갖 잡인들이 모인 서울도 그러하거니 와 이 산간 벽촌에서조차 삼강오륜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소. 천리의 절문 을 어려워 아니 하고 인사의 예칙을 저버리니." 하고 시작하는 김훈장은 어김없이 논쟁의 실마리를 먼저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이퇘계의 사칠 정이 나오면 반대파 율곡과 그의 제자들이 나오고 다시 퇘계의 제자들로하 여 대항케 하는 기나긴 사설이 누에가 실을 뽑듯, 하긴 해가 길긴 했다. " 내 태생이 영남이라 하여 그러는 것은 아니오면 율곡이나 우암은 그 기상 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기는 했으되, 하기야 도량이 넓다고만 할 수도 없지 요. 우암이 백호를 사문난적이라 하여 들이친 것을 보면은, 제 아무리 그리 하여도 그러나 정통으로는 퇴계가 아니겠소? 동방의 주자라 일컫는 도 결 코 우연은 아닐 게요. 저네들이 그 호방한 성품 탓으로 야심이 크고 명리 를 아니 좇았다고 할 수도 없는데 그런 만큼 눈에는 크게 비쳤을는지 모르 나 속은 허술한 것을 면키 어려웠고 우암은 적잖이 허장성세한 구석이 있 었거든. 참으로 단성스리 학문을 궁리하고 심혈을 바친 사람은 퇴계요. 그 분의 제자들도 월등 출중했었지요. 백호나 미수, 거 모두가 기막힌 학이요 문장가며 미수의 글씨야말로 그 멋에 따를 사람이 없을 게요." 조준구 역 시 하품을 깨물며 듣다가 자기 변설을 휘두를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다. 이 니 기니 호론 낙론 그게다 무엇이냐, 그 따위 잡귀 같은 수구파야말로 망 국의 원흉이요 개화파를 물어뜯은 그 잘못으로 하여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 지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며, 도시 예학이라는 것이 나라 부강고 무슨 상관이냐, 일본의 명치유신을 아느냐? 이리저리하여 그네들은 대국청 나라를 쓰러뜨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열강들도 일본의 눈치를 실피게끔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옛적에는 우리 문물을 빌려갔던 그네들이 지금은 우리 땅에 철도를 놓아주게끔 기술과 모든 국력이 앞서지 않았느냐고 떠들 어대는 것이었다."생각해보시오. 서울 제물포 사이 팔십 리 길을 마포에서 용산 오가는 시간이면 내왕할 수 있단 말씀이오. 차비가 많으냐 하면 동문 에서 남문까지의 교가 정도면 족할 것이오. 설비를 말하면은 별방에 뒷간 이 있고 훤하게 사방이 트인 경치를 유리창으로 바라보며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 휘황한 개명을 이해 못하는우민들이 아이 하나 치어죽였다고 십만 원을 짜내어 만든 전차를 불질러 버렸으니 그 몽매함을 한탄할 기력도 없 소이다. 이제는 우물 속에서 개구리들이 와글거리는 소리조차 듣기가 싫 소!"장장 몇 시간을 해가 기울 때까지, 입씨름은 결국 격한 어조에서 다시 상투가 어쩌구 양복이 어쩌구 고함, 삿대질에 이르면 논쟁은 끝막음에 가 까워지는 것으 서로가 다 알고 있는 터이었다. 숨이 가쁘고 입에 침이 마 르고 하여 김훈장이 자리끼를 끌어당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켬으로써 일단 마릉ㄴ 끝나지만 노여움에 찬 서로의 얼굴을 노려본 채였다. 쪼글쪼글하게 구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어 까칠한 얼굴의 김훈장은 아무리 노기를 띠어도 그의 눈은 허 하게 보였다.꾸부정하게 꾸부린 양어꺠도.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조준구의 맨들맨들한 얼굴 에는 윤이 흘렀다. 검정빛이 많이 도는 눈을 치떴음에도 이마에는 주름이 잡히지 않았다. 김 훈장이 먼저 눈길을 돌리며 장죽을 뻗쳐 담배 그릇을 끌어당긴다. 담배 한 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자리끼의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여러 번 문지른 뒤 골통에채 워서 불을 붙이는데 꽤 시간이 지나간다. 콧구멍으로 연기를 뿜어내며 한 손으론 버선발을 슬슬 문지르는 것인데 이쯤 되면 어느덧 그들은 화해가 된 것을 서로 알아차린다. 두 사람이 다 무료한 처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 었으므로 아주 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서희는 제 아버님을 닮아서 성미가 명석하고 할머님같이 대범할 것 같소. 역식이나마 장차."어설프게 말을 찾아서 김훈장이 먼저 입을 떼었다. "글쎄올씨다. 허나 최씨 성을 이 어나갈 처지가 못 되니."준구는 애매하게 뇌었다. "돌아가신 그 양반은 실 로 출중한 분이었는데 어느 길에서는 그 양반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했지만 그것 다 모르는 소리고 무식한 농사꾼들이 학문의 깊이를 알아야지요. 처 음에는 송학을 하더니만 대성할 줄 알았지요. 그 양반의 사부 장암선생께 서 당신한테 과남한 제자라 하신 적이 한 번 있었지요. 그러더니만 뜻밖에 명학을 연구하지 않았겠소? 저 양반이 어쩌자고 저럴까 했더니만 웬걸, 그 것도 집어치웁디다그려. 그 다음부터 자꾸 이상해 지더구먼요. 생각해보면 장암선생의 줄기를 탔던 것이 그 양반한테는 잘못이 아니었던가싶소." 김 훈장 은 다시 열중하기 시작했다. "장암선생계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진실로 옳은 학문은 나라 정치를 휘둘러지는 것도 아니며 또 휘두를 생각 도 말아야 한다구요. 왜 그런고 하니 깨친 바 진리를 정치의 기툴로 삼고 자 할 때 그 장소에 깨친 바의 진리가 맞먹질 않는다는 게요." 조준구는 진력이 나는지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그래 공자께서도 생시에는 그 어른 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제후는 한 사람도 없었고 난세라 그렇다고 할 수 없 는 것이 깨침의 시초는 그 쓰임, 연장하고는 상관을 맺지 못하는 문이라는 거요. 그래 처음부터 엇먹기 마련인 정치하고 진리라는 것이 다음 세상으로 넘가 면 깨친 바 진리라는 것이 성질과 모양을 달리하여 조금씩 정치와 맞먹어 들어간다는 것이오. 그러고 나서 또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그놈의 진리가 더욱 괴상스런 허울을 쓰고 정치나 세상 풍습과 아주 썩 잘 맞먹어버린다 는 게요. 그러고 나면 차츰차츰 다시 엇먹기를 시작하는데 그 괴물이 본시 깨친 바의 바탕으로 돌아가기 떄문에 그런 게 아니고 괴상한 허울이 영낡 아서 못 쓰게되니 그런다는 게지요. 이때는 벌써 아래로 아래로 한정없이 떨어지고 퍼져서 도깨비, 귀신이 어 무당의 푸닥거리감밖에는 안 된다 그 말씀이오." 김훈장은 물을 머금고 입 속을 축였다."그래서 그게 낱낱이 병이 되고 썩어문드러져서 종래는 망령 만 남겨놓고 죽어 없어진다는 것이오. 일찍이 역사를 훑어보건대 진리가 방패 된 일이 없고 남의 땅을 쳐서 제 나라 부강을 꾀하는데 도움이 된 일 이 없고 오히려 창검과 시체더미 위에서 한 나라가 번창했으며 백성들 마 음을 애국충성의 너울을 씌워놓고 도적을 만들었다는 게요. 진리는 구국세 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요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내는 데 뜻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게요.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이 진리를 깨치면 그것이 봉우리의 끝이요 한 사람에서 두 사람 세 사람 거치는 동안 메아리가 조화를 부리듯 이 제소리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게요.""그러면 그 따위를 깨칠 필요가 있소? 지금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소만 수많은 중뇨 들이 모두 그 따위가 아니었소? 그래서 다비를 하면 사리가 나온다는 게고.""허허, 들어보시오. 내 소견이 아니니까. 장암께서는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하시면서 다시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아래라는것은 상놈들 천민을 말함은 아니라는 게요. 아래위를 뭘루 책정하는고하니 마음의 소위에다 두는데 그 마음이 곱고 착 한 데 두는 것도 아니라는 게요. 진나라 진시황이 악독하기 때문에 아랫사 람이라는 것은 아니며 오로지 우자이기 때문에 비천하다는 게요. 그런가 하면 독짓는 옹기장이 중에서도 현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게지요. 비천한 들 은 궁궐을 돼지우리로 꾸며놓고 거룩할진저 하며 찬탄하고, 슬기로운 자는 한줌의 흙을 빚으면서도 높은 곳에서 울려오는 절묘한 소리르 ㄹ듣는다는 게요." 김훈장은 들은 바 모든 얘기를다 할 참인 모양이었다. "비단 위정자뿐만 아니라 불교나 유고나 서양서 건너왔다는 천주학이나 든 신봉자가 돼지우리를 사당으로 모셔놓고 쓸데없이 절만 하고 있는데 게요. 그렇다고 해서 구국경세르 ㄹ울부짖고 목이 터지게 소 계를 올리는 실학파 사람들, 치양지 지행합을 내세우는 명학하는 사람들 역시 좀 나은 옷, 좀 넉넉한 먹을 것을 백성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인데 우중들은 나은 것을 베풀어도 자꾸 더 바라며 또 바라는 바와 같이 도니다 하여 진리하고는 하 등의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하나마나의 얘기 아니오." 참고 있던 준구는 성 이 나서 내뱉았다."하나마나의 애기지요. 장암의 말씀이지만." 하다가 그 자 신도 막연해졌던지 준구를 멍하니 쳐다본다. "그렇지요...얘기론 그렇지요. 그러나 분명 무엇이 있긴 있을게요. 무엇이...""있긴 뭐가 있겠소. 한강 물을 두 주먹으로 움켜잡는 것 같은 얘기가 아니오.""참말이라는 것이 허황한 것 같기도 하고 참말이 수울 듯하면서 쉽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참게 산 다는 일이 반드시 옳게 산다는 것도 아닐 성싶고 아주 적은 사람들이 옳게 들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참되게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 같고... 착하 고 악하다는 것과도 다른 뜻이 있는 듯하면서 모르겠고 모를 듯하면서 알 성싶기도 하고... 아마 장암선생 그분 자신도 그렇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 먼." 김훈장은 중얼중얼 넔이 빠진 것처럼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문밖 이 어둑어둑해오기 시작했다. 점아기가 등잔에 기름을 채워가지고 왔다. 양 복 입고 머리 깎은 신식 양반이 싫었던지 "아버님, 저녁상 올리오리까?" 문밖에서 쌀쌀하게 물었다. "좀 후에 하겠다."준구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점아기의 발소리가 멀어진 뒤 "거 이상한 말을 들었소이다."하며언 성을 낮추어 말했다. "이상한 말이라니요?" "어디서 들은 얘긴데 거 김진댁 말씀이오."하자 김훈장의 얼굴은 빳빳하게 굳어지고 불빛이 흔들리는 눈에 혼란이 일었다."그댁 젊은 분한테 몹쓸 병이 생겼다는 마릉ㄹ 들었소.예사 로 넘겨 들으려다가 그 병이 하 끔찍하여, 뭐 마목이라 하던가요?" 준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두려움을 나타내며 말하였다. "물론 허튼 말인 줄 생각은 했었지만." "금시초문이오." 김훈장의 목소리는 매우 엄숙했다. " 하오나 집안이라 하여 깊은 안의 사정을 소생이 어찌 알겠소이까?" 그 답 이 매우 기모했다. 안의 사정을 모르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을까. "허허, 만일에 그렇다면 청춘이 아깝고 애달프오.""지아비 없는 여인에게는 이미 청춘은 없소이다.""허나 몸은 살아 있지 않소." "죽은 몸이나 다름없지요. 이 땅의 여인들은 그렇게들 살아왔소."김훈장은 눈을 감았다. 아 까 멍청했을 때와는 따판으로 그의 얼굴에는 서릿발 같은 비장한 및이 돌 고 있었다. 조준구를 전송하고 사람으로 돌아온 김훈장은 무두질해놓은 모 시올같이 하얗고 성글은 수염을 떨며 눈물을 떨어뜨린다. 탈바가지를 쓰고 담을 넘어온다는 괴한을막기 위해, 그 밖에도 이완된 마을 풍기를 생각하 여 김진사댁 나이 어린 과부 며느리를 겁탈에서 지키기 위해 마목병에 걸 렸다는 헛소문이 나게 한 것은 김훈장 자신의 계책이었던 것이다. 그는지 금 그 과부 며느리의 청춘이 가엾어서 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양반의 권가 땅에 떨어져서 잡인들이 그 절대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세상 추세에 통분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김훈장의 울음은 이조 오백 년 저변에 서 지탱해온 불길이 꺼져가는 데 대한 만가였는지도 모른다. 15장 돌아온 임이네"내사 좀 쉬어야겄다. 다리가 몽개져서 죽을 지경이구 마." 수건을 풀어 땀을 닦으며 막딸네는 수풀 쪽으로 간다. 햇볕에 단모래 밭을 맨발이 저벅저벅 지나간 뒤 야무네가 홀딱홀딱 따라가고 또 한 아낙 이 뒤를 쫓는다. 물가에서 삼을 가르고 있던 두만네가 돌아본다."손맞을 때 해치우얄 긴데 이 사람들아! 어디 가노!""성님, 나 죽겄소! 땀 좀 식히가지 고 할 기구마!" 돌아보지도 않고 막딸네는 악을 썼다. "누구 몸은 무쇠로 만들었나!""염라대왕이 잡아간다 캐도 할 수 없구마. 내사 좀 쉬야겄소!" 아낙들은 바위 뒤켠 그늘진 곳에 갓 모두 함께 나자빠진다. 해진 삼베적삼 사이로 맨살이 드러난 등에 시원한 잡풀이 닿았다. 말려올라간 삼베 단방 치마, 속곳가랑이를 질끈질끈 동여맨 무르팍 아래 종아리가 그냥 드러난다. 노동에 단련이 된 아낙들의 종아리는 사내들처럼 힘줄이 솟고 짐만 끌고 다닌 늙은 당나귀같이 앙상하고 구릿빛이 되어 번들거렸다. 뙤약볕 밑에서 땀을 흘린 얼굴들은 삻은 문어 빛깔이었으며 검은 손등과 반대로 삼을 가 르는 손바닥은 물기에 불어서 희여끄름했다. "망할 놈의 여편네들, 누구는 안 쉬고 저븐가? 모두 슬슬 빠져나가믄 일은 누가 할 것고.불 평하는 두만네의 목소리가 지척에서처럼 들려왔으나 큰 바위에 가려진 낙 네들 눈에는 삼막에서 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온 삭신이 쑤신다. 이 빌어묵을 놈의 팔자, 이래가지고는 못 살겄다. 광대가 되든지 매분구가 되든지, 이 무써리 나는 일 좀 면하고 살았이믄 얼매나 좋겄노.""매인 몸도 아닌데 소원대로 한분 해보라모. 이팔청춘 한창 시절 아니가. 아무도 말릴 사람 없일 기니." 막딸네 한탄에 야무네가 놀려준다. "참말이제, 살아갈수록 논 이 난다. 해도 해도 일은 끝이 없고, 이리 비지땀을 흘리믄서 일을 해봤자 어디 내 일가? 남 좋으라 하는 일이지. 철기 겉은 모시옷도 남이 입고 열석세 베옷도 남이입 고 사시장철 들일 없는 날은베틀에 앉아서,""하기야 우리는 노상 등빠진 삼 베적삼이고, 백정 제집도 오뉴월에는 그늘에서 하품하는데 어디 농사꾼 제 집이 사람가." "소지, 소다!""소? 소는 그래도 게울 한철은 쉰다. 죽으믄 다 함께 흙 될 긴데 참말로 세상 고르잖구마. 이분에는 또 두만네 성님이 재 미를 보는 모양인데," "무신 재미고?"막딸네는 휘딱 돌아누우며 야무네를 쳐다본다. "그눔으 상두충 때문에 동네마다 뽕나무가 다 망했는데," "아 거, 그 성님은 꼬치를 많이 했는갑네," "가슬이믄 명주 값이 더럭 오를 긴데." 가슬까지 갈 것도 없고 지금 벌써부터 장에서는 명주올 값이 금값이라 카더마. 되는 집은 영 하는 일마다 뜻대로고,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를 깬다 카더마는."" 별스럽게 다른 해보다 누에를 많이 쳤지." "자기네 뽕나무도 많았고 최참 판댁 뽕밭을 밀었지. 그 뽕나무들은 말짱했이니, 그거 다 재수가 아니가." " 참내, 잠 좀 잘라 캤더이 오지기 씨부려쌌는다." 죽은 듯 늘어져 누워 있던 아낙이 일어나 앉으며 혀를 두들긴다. "밤에는 잠 안 자고 머했더노." "어 짓밤 곱다시 뜬눈으로 새었구마." "와?""서방인가 남방인가 오밤중에 토사 곽란란을 만내서 주하고 사하고, 꼭 과부 되는 줄 알았더니마는, 그래 할 수 없이 물밥을 해가지고 내가 객구를 물맀지." "니가?""도리가 있어야제. 이가 없이믄 잇몸도 이 노릇 하더라고 오밤중에 남으 동네까지 무당 찾아 갈 수도 없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씨부맀지 머." "그래 칼이 넘어가더나." "넘어가고말고.""그눔으 구신, 배가 대기 고팠던갑다. 니 소리 듣고 나가는 거 보니께. 삼돌할매라도 부르지 그랬나." "그눔으 할망구 노망이 들어서," "노망은 무신 노망? 소리만 카랑카랑 하더마.""내사 그눔으 할마우 꼴도 기 싫구마. 비윗장이 상해서. 그러매 제삿밥을 보냈더마는 멀쩡한 나물을 가지 고 쉬어빠짔네 어쩌네 함서 제집년이 이래가지고는 사내 등골 뺄 기라 하 더라나? 우찌나 돋던지 보리 타작 때 타작 마당에서 만났길래 막 딜이대주 었지 머.""그는 그렇고 두만네 성님은 우짤라꼬 임이네 그년을 싸고도는지 모르겄네." 막딸네는 말머리를 돌렸다. "싸고돌기는 머를 싸고돌아. 웃는낯 에 침 못 뱉고," 못마땅한 목소리로 야무네가 말했다. :두만아배도 좋잖게 생각는갑든데," " 야 머 임이네가 그 집서 사나,""그래도 붙이니께 동리서 살지." "시끄럽다. 같은 과부끼리 그 래쌀 것 없다.""같은 과부끼리라니, 우리 막딸아배도 샐인하고 죽었나?"우 찌 돼서 죽었든 과부는 다같은 과부 아니가. 니가 그리 안 해도 찬바램이 불믄 임이네는동 네 붙어 있지도 못할 기다. 지금이사 일손이 모자라니께 품이라도 들어서 입에 풀칠이도 하지마는," "아따, 모두 극락세계 가겄고나. 적선들도 좋기는 좋다마는 베룩 이도 낯짝이 있지. 동네에 기어드는 것부터가," "그라믄 우짤 것꼬. 모진 목 심 못 죽고. 얼매나 고생이 됐이믄 여기로 왔일꼬?""소문 들으니께 최참판 댁 김서방보고 애걸복걸했다믄서?" "그랬다 카데. 부치던 땅뙈기 달라 했 다 카더마. 그거사 염치없는 소리지. 김서방 노발대발한 모양이라.""노발발 만 해? 안 쫓아내는 것만도 희한하지." "원체 김서방이야 착한 사램이니께 보고 못 본 척했겄지." "그라믄 최참판댁 그 어른도 모르까." "모르시겄지." "알믄 치를 떨 긴데." "그러세..." 삼막 가까운 물가에 모여앉 은 아낙들 속에서 임이네도 삼을 가르고 있었다. 다른 아낙들은 제가끔 제 몫의 삼이 들어 있는 일이었으나 임이네는 품팔이였다. 겨우 밥이나 얻먹 는 품팔이였다. 그 모습도 옛날 같지 않거니와 행동거지도 옛날과는 다르게 겸허하였고 손 에서 눈을 떼는 일이 없었다. 일손도 빠르고 입도 빠른 아낙들 속에서 홀 로 그만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남들이 웃을적에도 그는 웃지 않았다. 임이네의 아이들, 임이와 아래로 벌거숭이 아들 둘은 뙤약볕이 쏟아지는 물가에 앉아서 점심을 날라올 둑길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변의 모래와 조약돌들은 하얗게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길은 둑길에서 조도 움직이지 않았다. 망루에 선 파수병의 눈길도 그렇게 열심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친정 온 선이가 통을 이고 맨 먼저 둑길에 나타났다. 아이들의 여 서 개의 눈이 빛났다. 임이가 몸을 일으켰다. 세 아이가 우뚝 서서 둑길을 노려본다. 선이 뒤에는 막딸이, 푸건이가 통을 이고 따랐으며 다음은 두만 이 지게를 지고 따라온다. 모두 삼막에 모여서 일하는 아낙들의 점심인 것 이다. 아이들은 제 어미 쪽을 향해 달음박질쳐서 가다. "옴마! 밥!"임이네는 둑길에 한 번 시선을 보내고 나서 다시 눈길을 일손으로 옮긴다. 모래바닥 에 점심이 펼쳐졌다. 선이가 그릇에다 숟가락을 꺼내놓고 반찬을 이곳저에 다 갈라놓고 두만네는 밥을 푼다. 아낙들은 물가에 가서 낯을 씻고 점심 먹을 채비를 하는 동안 아이 셋은 밥만 노려보고 서 있었다. 불룩한 배, 꼬 챙이를 찔러놓은 것 같은 팔 다리."선이가 수고하는고나." 야무네는 물이 흐르는얼굴을 머릿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무신 수고는," 뽀오얀 얼굴에 웃음을 띤다. "아이 젖은 잘 나나?" "야."얼굴을 붉힌다. 해산하기 위해 친 정에 돌아왔던 선이는 아들을 낳았다."떡판 겉은 아들을 낳았이니 문이 좁 아라 하고 시가에 돌아가겄고나. 좋을 때다."밥을 담아서 밥그릇을 돌리던 두만네는 임이네 밥그릇에는 꾹꾹 눌러서 밥을 담았으면서도 한 주걱을 더 올려서 밥무덤이 위로 솟았다."나중 사람은 우짤라꼬 그라요." 쳐다보고 있 던 막딸네는 혀를 두들겼다."낼모레 사위 볼 사람이 밥투정은?" 두만네는 애써 무마하려는 기색으로 말하며 "선아, 이거 임이네 주어라." "성님 밥이 모자라믄 우짤라꼬 이러시오." 임이네는 송구해하며 꾸부정하느 두 어깨를 꾸부렸다. "모자라믄 내가 굶지. 임아, 식이 니도 이리 오나."어미 옆에 싹 다가서며 눈을 희번덕이고 있는 이이들 팔을 잡아끌어 앉힌 두만네는 제끔 밥을 담아주고 선이는 반찬을 챙겨준다. "사또 지날라고 길 닦아놓은께 거 지가 먼지 지나가더라고."막딸네는 화가 나서 지껄이며 침을 뱉는다. 두만 네는 팔꿈치로 막딸네 옆구리를 찔렀다."아이들이사 배고픈 생각밖에 더 하나? 과부끼리 좀 잘 사귀라모.""과부도 유별이요." "임이네 쌀 동냥해서 고사떡 맨들어가지고 막딸네한테 고사 지내야겄다 무엇이 틀어졌는고원." 애써 얼버무리는 두만네 편역을 든 야무네는 "강청댁 대신 아니요."임이는 쓰다달다 말없이 벌써 구박에느 이력이 난 듯 아이들을 보고 "어서 묵으 라."했다.먹어라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입이 미어지게 밥을 퍼넣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자 강변에는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어둠이 오기 전에 일은막 바지에 이르렀다.저게 섰는 선붓님아 칼 옆의 첨사 빼어 젓어보고 잡수시 오 처갓집 담장 안에 유자나무 탱자나무 등애잔 술이라니 비상술 내 모르 까 두만네는 구성진 노래를 불러놓고 노래 내력을 이야기하다. "계모가 우 찌나 독하던지 장가온 사위한테 비상 든 술을 내놓은께 신부가 하 답답하 여 칼 옆의 첨사 뺴서 젓어보고 마시라고 노래를 했더란다. 첨사 색이 하 믄 알 기니께. 그래도 철은 낫던가배. 그러니께 신랑이 하는 말이 자기도 비상술인 줄 알았다는 기지. 유자나무 탱자나무의 까시가 좀 험한가? 그러 니께 계모 맘이 험한 것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게지." 다시 두만네가 노래를 부르면 아낙들은 그 노래에 따라 후렴을 부르고 러 면서 고된 일의 시름을 푼다. 한낮의 뙤약볕에서 거칠어졌던 여자들의 마 음을 황혼의 산야가 어루만져주고 잠자리를 찾아 날아가는 새들은 이네들 에게 보금자리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손톱 밑이 쓰릴 만큼 갈라가는 삼줄 기도 남편의 잠방이가 될 것이요. 자식들의 적삼이 도리 것이며 가늘게 희 게 무두질한 삼실은 시집갈딸, 함롱에 들어갈 것이며 도 더러는 과가에, 참 판댁에 세물로 들어갈 것이다. 일손은 빨라지고 별이 돋아났을 적에는 일 단 일은 끝이 났다. 별빛을 밟으며 아낙들 무리에서 떨어진 임이네가 집으 로 돌아온다. 아이들을 앞세우고. 초승달이 마을 감나무 위에 걸려 있었다. 아이들은 졸음이 오는지 앞으로 넘어질 듯하다가 바로 걷곤 한다. 점심 한 끼 저녁 한 끼를 얻어먹으려고 어미를 따라서 온종일 뙤약볕에서 서성거리더니 지쳤는가. 아니, 아니었다. 배가 부른 때문에 졸음이 왔던 것이다. 두드리면 북소리가 날 만 큼 배가 불렀다. 밤바람이 차고 누더기도 걸치지 못한 벌거숭이지만 배이 날 염려는 없다. 그 동안 아이들의 위장은 한없이 줄어들게 되어 있고 한 정없이 늘어나게도 돼 있었으니 죽으라고 굶겨도 죽지 않았고 죽으라고 퍼 먹여도 죽지 않았던 아이들이다. 집에 돌아온 아이들은 흙방으로 기어들어 갔고 임이네는 마룻바닥에 늘어졌다. 아이들은 이내 잠이 들고 임이네는 잠들지 못한 채 공중에 떠 있는 초승달을 쳐다본다. 아이들에게는 천성이 없는 것일까. 아니, 사람에게는 본시 천성이 없는 것일까. 삼 년 동안 아이 들은 울고 투정하던 버릇이 없어지고 말았다. 넘어져서 이마에 피가 흘도 울지를 않았다. 물가에서나 혹은 길가에서 끈질기게 흙을 움켜쥐고 목을 쳐드는 잡풀같이, 비가 쏟아지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문적문적 썩어가 다가 속잎이 트고 다시 자라는 풀, 가뭄이 계속되어 감물이 마르고 땅이 갈라지고 그래도 물기를 꼭 껴안고서 견디어내는 잡풀, 아이들은 아무것이 나 잘 먹었다.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잠을 잤다. 여름에도 몸에는 이가 었으 며 꼬챙이 같은 팔다리에느 ㄴ모기가 덤벼들었고 부스럼이 난 머리통에는 쉴새없이 파리가 엉켜붙었다. 아이들은 먹는 풀을 알고 있었으며 나무껍질 을 벗겨 먹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메뚜기를 구워먹고 호박을 따오고 무를 뽑아오고 콩을 훑어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 년 동안의 떠도는 생활 속에서 무엇보다 철저하게 훈련이 된 것은 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었다. 아무리 야단을 맞고 배가 고프고 매질을 당하여도 울지 말아야 한다 는 것. 보리 타작이 있을 때 임이는 어미와 함께 이삭을 주우러 나갔었다. 보리 임자 몰래 보릿단 옆에 붙어서서 보리 모개를 분질러 바구니 속에 넣 는 것을 "이 가사나야. 밭 임자 볼라." 임이네는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호박을 훔쳐왔을 때도 "이 가시나야. 들키믄 우짤 기고. 동네서 쫓기나믄 우짤 기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나 보리든 호박이든 그것은모두 주린 그들 뱃속으로 들어갔다. 임이네는 몸을 뒤챘다. 쇳덩이같이 몸은 무거다. 울타리 밖 저 만큼 옥수숫대가 꺼멓게 주뼛주뼛 보였다.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고이- 오늘 하루는 넘깄거마는..." 한숨 대신 버릇이 되어 나오는 이 었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일을 생각하면 흙바닥이라도 기어들어갈 방 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언제 마을을 쫓겨날지 모른다는 그 근심만 없다 면. '깅청댁이 알믄 날리 벼락이 날 긴데, 알기만 하믄 쫓아낼라고 미쳐 날 뛸 긴데.' 보리 타작이 끝났을 때 어느 날 밤 용이가 겉보리 한 말을 갖다 준 일이 있었다. 옛날과 달리 임이네는 용이으 마음을 짚어본다는나 고마 워하기보다 겁이 더럭 났었다. 강청댁 말대로 옛날에는 용이에 대한 그의 감정은 화냥기였었는지도 모 다. 어쨌든 그는 용이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무던히 애를 쓴 것만은 틀림이 없엇다. 그러나 지금은 가뭄에 마 르고 갈라진 논바닥 같은 임이네의 마음이었으며 남자를 그리는 정이란조 금치도 없었다. 처음에는 고생이 견디기 어려웠고 세상을 원망도 했었으나 갈라진 논바닥이기보다 오히려 바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픈 것도 없고 슬픈 것도 없엇다. 화냥기처럼 그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조차 없었다. 누가 보아도 그는 거지 중의 상거지꼴이었다. 옷이 찢어지면 그런 대로,손 등에 땟자국 이럭혀도 그런 대로, 미운 사람도 고운 사람도 없었다. 그의 그러한 꼴은미 움을 덜 사는 데 도움이 되었고 강청댁의 경계를 받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었다. 그것을 임이네는 또 알고 있었다. 거지의 옷이 성하면 밥을 잘 주지 않는 경험을 통하여 습득한지헤 였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용이가 갖다 준 겉보리 한 말은 며칠의 양식으로 흡족하기는 했으나 근심의 씨가 되었다. 강청댁이 알면 어쩌나 근심이었을 뿐 용이의 마음씀을 기뻐하지는 않았다. 백정하고 움막에 살았다는 풍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임이네는 아이들과의 한 끼를 위해 보리밭에서 치마를 걷은 일이 있었고 강가 바위뒤에서 백정에게 몸을 맡긴 일이 있었 고 빈집에서도 몸을 팔았다. 몸을 맡겼던 사내는 백정말고도 소금장수, 머 슴놈, 떠도는 나그네,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는 사내들었다. 여자에 궁한 그네들이지만 아이 셋이 따른 임이네를 길게 데리고 살려 하지는 않았다. 모기가 몹시 덤빈다. 손바닥을 탁탁 치다가 임이네는 일어났다. 쇠닻을 내 린 듯이 무거운 몸을 질질 끌 듯하며 마당으로 내려 간 그는 모깃불을 피 웠다. 내일 품을 팔기 위해서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되겠기 때문이다. 모깃 불 옆에 우두커니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사람 기척이 났다. "누구요." "나요" 용이의 목소리였다. 조심성 있게 들어선 용이는 망태를내 려놓더니 아가리를 풀고 뭣인지 마당에 줄 부었다. 감자가 대굴대굴 굴러 나왔다. 임이네는 흠칫 놀라서 일어선다. "아아들 잡니까." "야" 임이네는 아이들 자느냐는 말에 용이의 기색을 핀 다. 밥 한 끼에도 치마끈을 풀었는데 거절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 감자를 팠는데 아아들 삶아먹이소." 목소리에는 아무것도 요구하는 뜻이 없었다. "그, 글, 그래도 강청댁이 아, 알믄 난리 벼락이 날 깉데," 어둠 속에서 이 는 피식 웃는 것 같았다.. "걱정 마시이소. 모르요. 아아들 굶기서 되겄소." "그, 그라믄 와 이캅니까." "....""생판, 이, 이런 공것을." 하다가 별안간 임 이네는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을 터뜨린 임이네 자신이 용이보다 더욱 당 황한다. 일 년 넘게 눈물 방울이라고는 흘려본 적도 없었고 울음을 터뜨리 기 전에 고맙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런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는데 어째서울 음이 터져나 왔는지 그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울음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와, 와 이랍니까."성정이 여자 울음에 약한 용이 어찌 할 바를 모른다. 임이네 한테 무슨 딴마음이 있어 찾아온 용이는 아니었다. "머 운다고," 하면서 쩔 쩔매다가 그는 어느덧 말뚝같이 굳어지고 말았다. 약하게 비춰주는 모깃불, 희미하게 흔들리는 여자의 모습, 오장을 후벼하는 것 같은 여자의 흐는낌 소리, 가슴에 불이 댕겨지는 것 같은 축은한 마음은 이상한 감동을불러일 으켰던 것이다. 오랫동안 한 번도 느껴본 일이 없는 남자로서의 충동이었다. 용이는 입을 깨문다. 질겅질겅 꺠물다가 뒷걸음질치듯, 그러나 빈망태를 얼른 집어들고 도망을 쳐서 그는 문밖으로 나왔다. 문밖으로 나온 그는 그냥 다려서 강가 로 나갔다. 강물에다 얼굴을 처박은 용이는 몸속에서 끓고 있는 열이 식기 를 기다린다. 용이는 그 동안 자신을 병신으로 단념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강청댁도 했었다. 용이는 강청댁에게 접근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고강청댁 역시 애쓰는 그와 함께 노력을 했으나 남자의 기능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던 이 다. 그의 노리에는 이미 월선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건만, 그래서 그는 자 신의 마음이 회복된 것이라 생각했으나 몸은 회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러던 그가, 아까 그 순간은 생각만 해도 벼락을 맞을 것만 같았다. 그럴 수 가 없는 일이었다. 용이는 물속에서 얼굴을 들엇다. 그는 상투를 풀고 옷도 벗고 강물속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몸은 흥분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체내 에 잠겨 있는 힘이 마구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물속에서 기어나온 용이는 머리를 짜고 물기를 뺴고 이럭저럭 묶어 올린 뒤 옷을 입고 모래바닥에 몸 을 뉘었다. 모래밭은 낮에 빨아들인 햇볕이 남아 있어 그리 자지는 않았다. 하늘에는 초승달 뒤에 별이 총총 나 있었다. 별과 초승달을 가늠해보는 동 안 용이는 자신의 몸이 식어가는 것을 느꼈고 시계가 흐려지면서 잠이 들 었다. 마을 쪽에서 첫닭 우는 소리에 용이는 눈을 떴다. 아니, 한기를 느끼고 잠 이 깨었던 것이다. 그는 모래를 털어내고 뛰어서 둑으로 올라섰다. 임이네 집 앞을 지나갈 때도 그는 뛰었다. 집 삽짝문을 들어섰을 때 누구냐고 묻는 강청댁 목소리가 방안에서 들왔 다. 그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용이는 헛간에 망태를 집어던지 고 헛기침 한 번 하고서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디 갔습디까?" "강가 에." "강가는 와요?" "매욕하고 머리 감고."강청댁은 더 이상 아무말도 안 했다. 용이는 한참 동안을 머뭇머뭇하고 서 있었다. "와 그리 장석겉이 서 있소!" "새벽인데..." "그라믄 나가든지요." " 임자 잠 안 잤는가?""무신 걱 정!" 용이는 후딱 바지끈을 끌렀다. 강청댁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무운 한숨을 내쉬며 물러난다. 강청댁 입에서도 한숨이 새나왔다. 역시 불능이었 다. 불능일 뿐만 아니라 강청댁을 끌어안는 순간 영영 잊은 듯 희미하기만 했던 월선의 얼굴이 용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나, 나 병신 은 아닐 긴데 와 이러까." "..." "임자 미운 생각도 다 없어졌는데 와 이러 까.""무당년 넋 때문이요." 강청댁은 중얼거리며 돌아누웠다. 16장 이부사댁 도령 이동진이 이 고장을 떠난 것은 최치수가 죽기 전의 일이다. 그의 본가에는 칠순이 넘은 노모, 어린 아들 형제 그리고 부인이 살고 있었다. 문중이 넓은데다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겼을 뿐인 이동진의 맏아들은 염진사댁 딸과 혼약이 되어 있고 부인 친정 편으로 척이 은 염진 사댁이 부유했으므로 가장 없는 이들 식구들을 굶어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 을 것이다. 그러나 넉넉한 사람이라 할 수는 없었다. 이동진의 조부와 부친 은 다같이 현관은 아닐지라도 관운이 길어 줄곧 벼슬을 살았으나 둥주리를 틀 사이 없이 이곳저곳 고을살이로 떠돈 탓이었던지, 청백리 엑스구멍은 소구부리 같다는 말처럼 가난하여 그랬었던지 그네들은 자손을 위해 땅을 장만하지 않았다. 고지식하며 푼수를 지키다가 간 그들에 비해 이진은 성 품이 호방했다. 깊이 심취되어 끝내는 장암선생의 사상이 격렬한 독념과 냉소로 화하고 바닥 모르게 떨어져 내려가는 권태 속에서 삶의 가치를 부 정한 최치수, 끝내 자기 자신을 구렁텅이에 내던지듯, 그러한 최치수와는 반대로 진작부터 근본과의 씨름이 허망함을, 또 자신은 그 길에 있어 적재 가 아님을 깨달은 이동진은 웬만한 깊이에서 발을 뽑아버린 인데 그의 비 판적인 정신은 다분히 문의원과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상민층에 무한한 애정과 희망을 걸고 있는 중인 출신의 문의원과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니었 을지라도 이동진은 상민층을 동정하고 이해하려 했었고 동학란에 대해서도 최치수가 보는 각도하고는 달랐다. 그는 결코 상민들을 오합지졸로 생각지 않았다. 지도자와 민중이 뭉쳐서 태운 그 정열을 높이 가했으며 국권 아닌 왕권의 연장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위정자의 우졸을 통렬히 비난했다. 이러한 이동진인 만큼 벼슬길을 도외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늘 관망하는 상태로 있으면서 가사에는 무념하였으므로 달리 가세가 펴지질 못했다. 그 러던 참에 그는 훌쩍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동진의 부인 염씨느 ㄴ대범 하다기보다 본래 언동이 느리었고 태평한 성미의 여인이었다. 맏이는 처가 될 집안이 부유했고 둘째는 자손이 끊긴 당숙에게 양자로 갈 작정이었는데 벼를 백 섬 넘게 거둬들이는 넉넉한 살림살이라 염씨는 아들 형제의 장래 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았다. 집 나간 지 오래인 남편에 대해서도 언제이든 돌아오겠거니 생각했으며 종들은 면천되어 나가고 -나라에서 공사노비의 제도를 폐지했을 때 이동진은 종문서를 사르 고 그들을 내어 보냈다-출가 할 때 친정에서 데리고 온 사팔뜨기 몸종, 그 와 짝을 지어준 억쇠, 두 노비를 거느리고 살림을 꾸려가는 터이었다. 아들 의 친한 친구였던 이동진의 이러한 집안 형편을 최참판댁 윤씨부인은 소상 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정초 탈상과 새해 인사를 겸 하여 염씨를 따라온 이동진의 맏아들 상현을 귀엽게 보았던지 윤씨인은 필 묵을 사 써라 하며 은전 몇 닢을 손에 꼭 쥐여준 일이 있었다. 근래에 와 서 눈에 띄게 달라진 윤씨부인은 하인들 앞에서조차 그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허다했었지만 그러나 상현에게 보인 친애의 표시는 파격적인 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씨부인은 일 년에 핟 번씩 이부사댁 -이동진의 조 부 직위-에 곡식을 보내곤 했었다. 지금 돌이 몰고 가는 소달구지도 며칠 후에 제사가 있을 부사댁을 향해 가는 것이다. 백미 두 섬에 찹쌀이 한 가 마, 팥 녹두가 각각 두말에 생청이 한 되, 계란 열 꾸러미,피륙 세 필을 실은 달구지 끄트머리에 길상이 걸터앉아 흔들리고 있었다. 방물수 할멈을 기다리다 못해 봉순네는 길상을 읍에 다녀오라 했는데 마침 돌이 읍에 가는 길이어서 길상은 나룻배를 기다리지 않고 소달구지에 올라탔던 것이다. 심부름이란 당사실을 사오는 일이었다. 절에 있을 때 금어스님한테 화필을 익힌 길상은 언제가 탈바가지를 만들어 봉순네를 감탄케 했거니와 심심하면 나무든 흙이든 깎고 빚고 해서 꼭두각시를 만들어보는 것은 그의 유 일한 낙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꼭두각시에 옷을 해 입히는 것은 또 봉순이의 취미였 다. 옷뿐만 아니라 이불이며 베개, 대추 한 알도 들어갈 성싶지 않는 염이 며 꽃버선 따위에 이르기까지 그의 반짇고리 속에는 어미한테 훔쳐낸 무색 엉겊이며 비단을 오려 만든 여러 가지 곷 그리고 꼭두각시는 수월찮게 모 여서 굿마당을 벌여도 넉넉할 만했다."이 빌어묵을 가시나, 무당집도 아니 겄고 구신 나겄다!" 봉순네는 마음놓고 봉순이를 쥐어박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희는 그런 꼭두각시에 관심이 없었으며 바늘 실을 들고 소꼽장난 같은 옷을 만들어보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무 될 거는 떡잎 적부터 알더라고 보선볼 하나라도 대볼 생각은 않고 저고리 진동이나 하나 붙이보 던지, 그런 이세는 배울 생각 안 하고 밤낮 한다는 기이 이러 지랄 겉은 짓이니, 이기이 머꼬? 구신 떡 당새기가!" 받짇고리를 엎으며 봉순네는 화 를 내기도 했다. 그랬는데 뜻밖에 서희가 수를 놓아보겠다는 말을 했다. 봉 순이도 덩달아서 저도 수를 놓겠다고 했다."곧 방물장수 할매가 올 깁니다. 그때 당사실 사가지고요... 날씨도 더분데."봉순네는 대견스러워 눈을 가물 가물해가며 웃었다. 솜씨 좋은 숙수가 진귀한 생선을 구해다 고 칼의 날을 살펴보는 그럴 때 기분이랄까, 천하장사가 실직한 적수를 만나서 자기 팔 뚝을 슬슬 만져보는 그럴 때의 기분이랄까, 이제부터 자기 솜씨 닾는 데까 지, 글을 가르치는 김훈장 이상으로 소위 그 '이세'라는 것을 가르치리라 생각하니 어느새 이렇게 컸었던가 싶기도 하여 봉순네의 마음이 기뻤던 것 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자주 드나들던 방물장수 할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번 말을 내어놓으면 발 등에 불이 붙은 것처럼 성화를 하는 서희 성미여서 우선 급한 대로 봉순네는 장롱 구석에 둘둘 말어놓은 한지 뭉치를 꺼내었 다. 때가 묻고 보풀이 일어 너덜너덜한 한지를 펴보지만 별로 쓰인 일이 없는 당사실의 구색이 맞을 리가 없다. 봉순네는 주황색 법단 한 동가리를 잘라 염낭에 두는 수무늬를 그려넣고 사방에무명 단을 둘러싸서 수틀에 끼웠다." 우선에 분홍실 가지고 여기 매화꽃 이파리 부텀 놓아보시이소. 방물장수가 곧 올 기니께요."며칠이 지났으나 방물장수 할멈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고 나이깐에는 제법 솜씨가 좋다 하며 남에게 자랑 말을 준비하고 있던 봉순데는 한편 실망을 했다. 서희의 씨는 말이 아니었다. 엉망진창이었다. 들쭉날쭉 울이 늘어나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비 단이 쭈그러들어 수를 놨는지 구멍을 내었는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 다. 봉순이 솜씨는 좋앗다. 서희보다 나이 두 살 위였고 바늘이 손에 익기 도 했으나 역시 타고난 재주라고 할까, 가늘가늘하게 빠져나간 실구멍은 가지런했으며 도토롬한 매화 꽃잎은 제법 살아 있는 듯 보였다.봉순네 는 내심 만족했다. 그러나 안존한 성미에 비하여 참을성이 없는 봉순이는 이내 싫증을 내 어 그것을 팽개치고 꼭두각시에만 마음을 썼다. 서희는 싫증도 나고 자신 에게는 힘에 겨운 일이었을 텐데 그러나 땀을 흘리며 꾸준히 매화꽃을 끝 내고 잎도 끝내고 나비에 쓰일 노랑실이 없다고 신경질을 부렸던 것다. 그 렇게 되어 길상은 지금 읍내로 간다. 돌이 읍내로 가는 줄 알았더라면 봉 순네느 ㄴ길상을 보내지 않앗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상은 돌이 읍내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달구지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길상은 생각에 빠져서 자신이 달구지를 타고 있다는 것을, 읍에 심부름 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거의 잊었다. 꾸불꾸불 밀려오는 물굽이가 바닷가의 방죽을 치고 또 치는 것처럼 잇닿아 밀려오는 공상은 그에게 다시없이 감로운 것 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수많은 생각들은 마치 만화경같이 찬란하고 다양했다. 갖가지 빛깔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소리가 들려오고 과거에서 미래까지 추억과 꿈은 마음대로 끝도 시작도 없이 그의 생각 속 넓은 공간을 비상하는 것이다. 추억의 창문에서는 어느 길모퉁이에서 들었 던 소슬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장님이 불고 가던 피리 소가 들려왔고 범 패소리, 새벽산사에 울리던 장엄한 인경 소리가 들려왔고 강물을 건너오는 뱃사공의 노랫소리, 추억의 창문에서 명주 수건으로 감싼 월선아지매의 얼 굴이 보였다. 옥색 명주저고리에 흰 당목치마를 바람에 나부끼며 서 있던 모습도 지나갔다. 월선아지매의 모습은 별당아씨의 뒷모습으로 변해갔고 산을 바라보던 슬픈 구천이의 옆얼굴이 나타났다.장리를 갈지자로 걸어가 는 주정꾼의 모습도 있었다. 개평을 안 준다고 주절주절 지껄이며 뒤따라 가는 노름판의 졸개들도. "에따! 이눔으 자석들아! 돈벼락을 맞이믄 죽어도 좋다 그 말이제!" 엽전 몇 닢을 던져주고 크게 소리내어 웃고 가던 주정꾼의 새빨간 코도지 나갔다. 황황히 타는 장작불, 어둠을, 밤을 삼키듯이 타오르는 주황빛은 그러나 제 몸이어 둠에 물들어 사방에 칙칙한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 빛을 받고 혹은 등 지고 춤을 추던 광대들, 번들번들 빛이 튀고 흔들리곤 하던 탈바가지의 처 연한 모습, 빠른 가락의 타령조가 고조되면 청포 황포의 악공들의 수족과 얼굴은 낚싯줄에 파닥이는 잉어 모양으로 전율하는 것 같았다. 이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영상을 내버려두고 길상의 생각은 별안간 달음박질서 엉뚱 한 곳으로 간다. 어느 한낮에 꾼 꿈으로 날아갔다. 다시 뛰어서 우뚝 멈춘 곳은 숲속이며 개울가였다. 쭈그리고 앉아서 물매암이가 도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서워졌다. 낙락 장송들의 허리가 모조리 부러져서 길상에 게 넘어져올 것만 같았다. 일어서서 팔매같이 치달리는데 산이 쩌렁쩌렁 소리를 내며 뒤쫓아 오고 겹겹이 싸인 사방 능선 위 들쑥날쑥한 늘에는 잿 빛 구름이 뭉게뭉게 피면서 구름은 성난 아수라로 변하고 그들이 모는 화 차가 되억 천지는 칠흑 속에 덮이면서 벼락이 산을 무너뜨리고 계곡을 솟 구치게 한 것 같았다. 길상은 치달리면서 자신의 몸뚱아리가 한점 먼지같 이 느껴졌다. 길상은 부처님이 자기만은 돌보아주실 거고 자비를 내려주실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절문을 들어서면서 소리를 지르고 울다. 지나가던 혜관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래도 경풍 들린 것처럼 우는 상 을 심상찮게 여겼던지 혜관은 안아주며 달래었다. 나뭇잎 사이에 빨간 놀 이 부서지고 있었다. 길상은 자신이 달구지 위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 속 에 알을 까놨이까? 여왕개미가 찾아 못 들어가믄 알은 우찌 되까? 일개미 들은 다 우찌 되었이꼬?길상은 아침에 사랑 뜰에서 잡풀을 뽑았다. 풀을 뽑으면서 뒷걸음질을 치는데 돌담에 세워놓은 대막대기가 길상의 머리를 치고 넘어졌다. 썩어서 시꺼멓게 된 대막대기였다. 머리를 만지며 대막대기 를 치우려 하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대막대기의 여기저기를 치우 려 하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대막대기의 여기저기 구멍이 난 곳에 서, 갈라진 틈 사이에서 개미떼가 마구 쏟아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대막대 기 마디 속에 개미집을 지었던 모양이다. 징그럽게 떼지어 나오는 개미들 속에 두드러지게 큰 놈이 보였다. 여왕개미다. 길상은 조심스럽게 시대로 돌담에다 대막대기를 기대어놓았으나 왠지 마음이 꺼림칙하였다. 마당에 나가떨어진 개미의 수도 수월찮지만 대막대기의 마디 하나하나가 다 독립 된 방이라면 그 여왕개미에서부터 졸개에 이르기까지 제 집을 찾아 무척 헤맬 것 같았다. 언제였던가, 한 번 철쭉 옆에 놓인 돌을 들어낸 일이 있었 다. 돌 밑은 개미집이었다. 하얀 쌀알 같은, 쌀알보다 훨씬작았지만 개미알 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리석은 개미들은 사람의 눈 두 개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미친 듯이 알을 물어나르며 감추려고 기를 쓰는 것이었 다. 길상은 알을 깨어보면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궁금증과 호기심에서 그의 손가락은 거의 알무덤 쪽으로 갈 뻔했다. 손 끝에 알이 뽀도록 뭉개어지는 괴상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지나간다. 그러 나 순간 살생계 생각이 났다. 욕망을 누르며 길상은 돌을 제자리에 놓아두 고 손을 털며 일어섰다. 손 끝에 알이 뽀도독 뭉개어 지는 감각은 그냥 남 아 있고 가슴은 떨리었다. 길상은 그 일이 생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 다. 해당화 잎에 다닥다닥 붙은 진딧물이나 송충나방이가 까놓은 연옥색 빛깔의 알을 보면 영락없이 그때의 좋지 않는 기분이 되살아나서 얼른 피 하곤 하는데 여전히 손 끝에 이상한 감각이 남는다. 문질러주고 싶은 욕망 이 강할수록 버이 나고 불쾌해지는 것을, 지금 길상이 그 생각을 하는 것 은 달구지에 실려가는 계란꾸러미 때문인도 모른다. 타작 마당에 한복이 혼자 쓸쓸하게 못치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니 또 왔고나." "음" "니 성은 와 한분도 안 오노?" "형은 어데 갔다." "어데?" "몰라.""외갓집에서 내쫓았 나?" "아니, 매맞고 나가서, 그라고는 안 돌아온다." 한복이는 강 쪽을 바라 보다가 땅바닥에 주질러앉으며 못으로 땅을 푹푹 찔렀다. 여기저기 솟은 머리빡의 부스럼에서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길상이는 불쌍하여 견딜 수 없었다. "니도 여기 자꾸 오믄 매 안 맞을 기가?" 한복이는 매 안 맞는다고 했다. 그러더니 비시시 일어서며 바지 끈에 매달아놓은 엽전 두 닢을 길상에게 보이며 웃었다. 영팔이네 소를 며칠 동안 먹여주었더니 엽전 두 닢을 주라 는 것이다. 그것가지고 뭘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한복이는 맡겨두었다가 차 츰 벌어서 보태어 자기 어머니 산소에 비석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어느 시절에?"옹그러들어서 강아지만큼 작아 보이는 한복이가 길상의 눈에는 딱 하기만 했다. 그러나 한복이는 조금만 더 크면 남의 집 머슴도 살 수 있고 품일도 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면 돈을 모아서 비석을 세울 수 있다 는 것이다. 그러나 한복이는 별안간 풀이 죽었다. 또렷또렷했던 눈이 흐려 졌다. "그런데 그만 영팔이아제 집에 소가 병이 났다....." "영팔이아제 집의 소가!""음, 배가 막 부어오르고, 아무것도 안 묵고... 영팔이아제는 사색이 돼서, 그래서 그만 나는 도망해왔다." "어떻게 배가 부르더노?" "이렇게." 한복이는 자기 배를 내밀고 그 위에다 두 팔을 벌려 원을 만들어 보이며배 가 부른 시늉을 해 보였다. '짐승이나 사램이나 버러지라 카더라도 이 세상 에 한분 태어났이믄 다같이 살다 죽어얄 긴데 사램은 짐승을 부리묵고 또 잡아묵고, 호랭이는 어진 노루 사슴을 잡아묵고 날짐승은 도 버러지를 잡 아묵고 우째 모두 목심이 목숨을 직이가믄서 사는 것이까? 사램이 벵드는 것도 그렇지마는 짐승들은 와 벵이 드까. 사람은 약도 지어묵고 침도 맞고 무당이 와서 굿도 하지마는 말 못하고 쫓기만 댕기는 짐승들은 누가 그래 주꼬.늘 혼자 사는데, 벵이 들믄 짐승들은 산속에나 굴속에서 혼자 죽겄지. 혼자 울 믄서 죽겄지. 아아 불쌍한 짐승들아! 사람같이 나쁜 거는 없다. 그러니께 우리 마님도 벌 받아서 돌아가싰지. 나는 강포수가 밉더마. 나는 그런 새램 이 싫구마. 사램이나 짐승이나 목심은 다 마찬가지 아니가? 죽어서 다음 세상에는 사람도 개가 될지 사슴이 될지 누가 아노. 부처님께서는 고파서 죽게 된 호랭이한테 당신 몸을 던지서 먹있다고 하지 않든가 배? 아 참, 영팔이아제 집의 소는? 그눔으 소는 또 와 하필이믄 뱅이 들었이까? 우리 소들은 말짱 성하고 팔팔한데 가난뱅이 영팔이 아제 소가 하필이믄. 그 아 제 소가 죽는 날이믄 미칠 긴데. 부처님도 가난뱅이는 죽어라 죽어라 가난 하기만 하라 하시는 길까? 이부사댁에는 가만히 있어도 이리 온갖 것이 저 절로 가는데 그 댁의 도련님은 참 못된 성질이더마. 우리 애씨 성질도 그렇지마는 와 그 도련님을 보믄 미분 생각이 드까?... 한복이 바끈 에 끼워둔 엽전에 밤새 은전으로 둔갑을 했이믄 좋겄다. 다음날에는 또 두 닢이 네 닢이 되고 자꾸자꾸 밤마나 불어나서 지 머무니 산소에 비석도 세 우고. 불쌍한 아이다. 한복이는 불쌍한 아인데 와 고생이꼬?""길상아 이눔 자석, 니는 타고 가니께 호시제?" 별안간 돌이 목소리가 귀에 울려왔다. " 야?""남은 땀을 흘리믄서 걷는데 니는 타고 가니께 호시제?"길상은깜짝 놀 라며 달구지에서 뛰어내린다. 그는 공상에 빠져서 돌이 혼자 땀을 흘리며 걷고 있는 것을 까마득 히 잊고 있었다. "내가 소 몰 긴께 이자 돌이형님이 타고 가소."길상은 삐 를 뺏으려 했다. 돌이는 손을 뿌리치며 "한분 그래본 기지. 나잇살이나 묵 은 멀쩡한 장골이 그럴 수야 있나." 다붙은 복덜미에 땀이 배어나서 적삼 깃이 젖었으나 돌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웃는다. "타라, 타라." "안 할라요. 그라믄 함께 거렁가십시다.""허허 내가 그랬다고 니가 성냈나?" "아니요." " 머 심심해서 안 그래봤나. 하도 말이 없어서, 니나 타라." 그러나길상은 돌 이하고 나란히 걸으며 간다. "이리 날이 가물어서 큰이이네. 타지방에는 난 리가 났단다. 논의 나락이 타는 판이다." "그러기 말이요." "우리 동네사 머 니머니해도 강물이 있이니께. 그래도 흉년은 못면할 거로?" "전번에는 웃 마을하고 물싸움이 나서 웃마을 사람 하나가 허리를 뿌질렀다가 안 카 요.""허리 뿌질러지는 거쯤이야 똥 묵으믄 나을 기고, 더 심보지? 샐인이 안 나는가. 제에기 서울 그 양반." 하다 말고 돌이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 와요?""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길상아!" "야?" "니 삼월이를 우찌 생각하노?""우지 생각하기는요? 마음씨 착하지요." "그래도 여자는 모르는 기라. 귀녀, 그녀만 하더라도." "그 여자사 머 시부 텀 악독했이니께요. 와 삼월이를 들먹이요?" "맴이사 착하지. 귀녀 그년하 고는 천양지간이지... 마음도 어질고 여자답게 생기고, 그런데 알 수 없는 기라, 여자 맴이라는 것은." 길상은 피시시 혼자 웃는다. 그 웃는 모습은 곁눈질하는 돌이 얼굴이, 얼굴은 볕에 익어서 벌겠지만 목덜미 쪽에서부터 핏기가 솟아올라 그 상기를 감당하기 어려웠던지 땀을 닦는 하며 얼굴을 문질러댔다. "그런데 말입니다." "와?" "사람 벵을 고친다믄 소 벵도 못 고칠 것 없지 요?" "그기이 무신 말고?""사램이 묵어서 낫는 약이라믄 소가 묵어서 안 낫겄소?" "그러세... 나는 모르겄다." "..." "그거는 와 묻노? 떤금없이 와 묻 노." "영팔이아제 집의 송아치가." "송아치? 그기이 어디 송아치고? 가슬이 믄 씨를 받을 긴데." "그러매 그 소 말이요. 배가 불러서 다 죽게 됐고 영 팔이아제는 사색이 됐다고 안 카요." "와 그런고?" "사람은 아프믄 아다고 하지마는 말 못하는 짐승이니 영팔이아제도 기가 안 차겄소?""바램이 들어 갔나? 그럴 때는 방기만 끼믄 나을 기데.... 할 수 없제. 운수지 머. 그래도 살라 카믄 살 기고 죽을라 카믄 죽는 기라." "얼마나 영팔이아제가 우두고 기렀다고.""농사꾼한테 소 한 마리가 누구네 집 아아 이름가? 저저이 가지 는 것도 아닌데, 안됐고나."읍내에 당도한 이들은 이부사댁과 터로 갈라졌 다. 구색을 맞추어서 한지에 말아놓은 당사실 한 뭉치를 사든 길상은 장마 당을 빠져나왔다. "우짤꼬" 중얼거리면서 길상은 이부사댁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놓는다. '철없는 짓 한다고 꾸중하시까?' 걸음을 머추었다가 다 시 떼어놓곤 한다. 그러나 문약국 앞에까지 갔을 때 심부름꾼 아이가 쫓아 나왔고 문의원은 부재중이라 했다. 약재 때문에 진주로 나갔다는 것이다. " 와 그라노? 누구 병자 생깄나?" "아 아니, 그만 여기 온 김에. 아무겄도 아 니다." 길상은 당황하여 발길을 돌리었다. 발길을돌리는 순간 길상은 만일 문의원이 계셨더라면 자기 청을 들어주었을 것 같았고 사람의 병을 고치는 데 소의 병인들 못 고쳐주랴 싶은 생각에서 억울하고 안타까운 기분이 되 었다. "니 어디 갔다가 이자사 오노."돌이는 길상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 이다. 이부사댁 행랑 쪽 뜰 안에 한 그루 감나무가 있었는데 그 감나무 밑 에 깔아놓은 멍석에 앉아서 돌이는 콩국에 만국수를 먹고 있었다. 길상이는 잠자코 돌이 옆에 가서 퍼질러 앉았다. "길상이도 왔고나." 쇠가 웃으며 나왔다. 새우같이 자그마한 눈이었다. 웃으니까 더욱 눈은 작았다. 얼굴 중간이 꺼지고 이마빡과 턱이 앞으로 나온데다가 길어서 얼굴 전체의 느낌도 새우를 연상케 했다. 취한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의 입에서는 늘 술 냄새가 났다. 그래서 노상 얼굴도 불그레했다. "가만 있거라. 니도 국수 한 그릇 갖다 줄 기니."억쇠는 휘적휘적 행랑과 안채를 질러놓은 담벽을 따라 뒤켠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당사실은 샀나?" "야" 돌이는 남은 콩국물을 다 마시고 사발을 멍석 위에 놓았다. "참 씨이원타. 억쇠 마누라 솜씨가 좋아서 언제 와도 음식은 감칠 맛이있 거든. 니 배고프제?""괜찮소." 멍석 위에는 곯아버린 감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밤톨만큼 자란 감도 있다. "날이 가물어서 감도 자꾸 떨어지는가? 감이사 비가 많이 와야 떨어지는긴 데?"돌이 감나무를 올려다보고 중얼거리는데 국수를 들고 나오던 억쇠가 말했다. "거름을 잘못했는가 모르지. 작년에 감이 하도 작아서 거름을 했더 마는 자꾸 떨어지네. 자아 길상이 묵어라." 길상은 사발을 받아든다. 손바 닥이 서늘했다. 방금 우물을 길어서 콩국을 한 모양이다. 이부사댁 우물이 차기로는 유명했으니까. 맛보다 시원해서 좋았다. 돌이는 엉덩이를 털고 일 어서며 소한테 물을 먹일 참인지 우물 쪽으로 돌아가고 억쇠도 뒤꼍으로돌 아간다. 길상이는 호자 앉아 국수를 먹는다. 땀이 식는 것 같았다. 나무 그 늘 밑은 시원하였다. 국수를 반즘 먹었을 때 별안간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나더니 우박처럼 감이 국수 사발을 치면서 떨어져 내렸다. 감뿐만 아니라 가뭄에 쌓이고 쌓였던 흙먼지도 날아 내렸다. 길상은 누가 장난을 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언제 어 올라갔던지 상현이도령이 새까만 눈을 반작이며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길 상의 얼굴이 벌개진다. 길상이는 어쩐지 상현이도령이 싫었다. 이심전심으 로 그쪽에서도 길상이 싫은 모양이었다. 길상은 사발을 멍석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먹으려면 먹을 수 도 있었다. 감을 집어내고 다소의 먼지쯤은 꺼 릴 것도 없었다. 상현은 나무를 타고 쪼르르 내려왔다. " 왜 안 먹는 거 냐!"짙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길상이 반밖에 안 될 성싶은 조그마한 상현이 는 어른처럼 호령을 했다. 길상은 잠자코 그를 바라본다. 영롱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얼굴빛은 다소가 무스름했으나 얇삭한 입술, 오똑하니 날이 선 코, 미소년이다. 성깔과 자부심이 몸 전에 서 배어나온다. "고만 먹겠습니다." 길상의 말씨는 달라졌고, 정중하나 단호 했다. "네 상전이 먹으라면 어쩌겠느냐?" 길상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대답 을 해!" "먹을 것입니다.""그럼 먹어. 내가 먹으라 했다." "도련님은 소인 상전이 아니옵니다." "뭐라구?"상현은 한발로 땅을 굴렀다. 그러나 다음 순 간 킬킬 웃으며 달려가버린다. 아마 억쇠가 오는 것을 본 모양이다. 억쇠는 감이 수북이 떨어져 있는 사발을 보더니 "또 도련님이 장난을 히구나." 얼 굴을 찌푸렸다. "새로 한 그릇 해다 주지." "아, 아니요. 이자 못 묵겄소."" 한창 감풀 나이니께 마음에 끼지 마라." 억쇠는 다시 부엌 쪽으로 가서 마 누라에게 국수 한 그릇을 더 마련하라 이르는 모양이었으나 길상은 끝내 마다하고 돌이와 함께 그 문전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돌이는 아무래도 마님께서 그 댁 상현도령한테 욕심을 내시는 모양이라 했다."하지마느 정 혼을 했이니께 할 수 없지. 욕심 내실 만도 하지. 똑똑하고 벌써 기상이 보 통 아니라니." 길상은 왠지 모르게 괴로웠다. 심장을 바늘 긑이 찔러주는 듯 쓰라리고 설은 생 각이 치밀었다. 오는 동안 내내 길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에닿 았을 때 어디서 길상이 오는 것을 보았는지 한복이 달려왔다. 아침때와 달 리 그의 달려오는 걸음걸이는 가벼웠고 웃고 있었다. "저 말이지! 여, 영팔이아제 소 말이다아, 방구 뀌었다." 하고 소리를 질다. "으음 그러믄 안 죽겄고나." 돌이 대꾸를 했다. 가까이 온 한복이는 다시한 번 길상이를 향해 되풀이 말했다. "소가 방구를 끼믄 낫는다 카데. 그래서 부른 배도 꺼지고 풀도 뜯어묵는다. 영팔이아제가 싱글벙글 안 하나." 길상 이는 피시시 웃었다. 언덕을 올라갈 대 길상의 얼궁에서는 우울한 빛이 가 셔졌다. 17장 서희의 출타 별안간 윤씨부인은 나들이를 결정하였다. 봄부터 시작 된 심한 한발로 풍년은 바랄 수 없고 평작이나마 빌었던 농민들의 기대는 헛되어 흉작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최참판댁 소유의 전답을 찾아서 실정을 살피러 나가겠다는 것이다. 최참판댁의 농토는 상당히 광범 위하 지역에 산재해 있었으므로 그곳을 모두 돌아보려면 행정도 고될 뿐 아니라 침식도 불편하겠는데 서희를 동반해 간다는 것이다. 집안 하인들 모두 놀래었고 김서방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너무 뜻밖의 일이어서 그렇기도 했으나 흉년이 들어 인심들이 흉흉한데 무 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했다. 그러나 한 번 영이 떨어지면 그것으로 그만이 지 김서방으로서는 의견을 말할 여지가 없었다. 집안 노비들이 문전답에 모를 심는다든가 추수를 한다는가 할 때 윤씨부인은 가끔 나가서 둘러보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멀리 흩어져 있는 농토는 물론 마을의 농사 혀장에도 나가본 일이 없는 윤씨부인이지만 무자비하게 엄습해온 몇 차례 흉년말고 는 시절 따라 다소의 변동이 없을 수 없다 하더라도 농토와 농민과 최참판 댁 사이의 순환은 아주 순조로웠다. 그것은 한말로 윤씨부인의 두뇌와 담 력의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다음은 김서방의 충직이었고 토지의 대소를 막 론하고 땅 있는 곳마다 둔 마름의 존재는 미약하여 권이나 영향력은 별반 없었다. 엄격히 말해서 마름은 김서방이라 할 수 있겠고 그네들은 김서방 의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윤씨 부인이 자기 농토의 현장을 모르는 것은 틀 림이 없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최참판댁 판도가 지도처럼 확실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농사의 과정에서 일기의 변화, 수확의 가감, 농가의 소비 상태, 이런 일에 세심꾼에 불과했다. 윤씨 머릿속는 최참판댁 판도가 지도 처럼 확실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농사의 과정에서 일기의 변화, 수확의 가 감, 농가의 소비 상태, 이런 일에 세심한 관심이 있었고 윤씨부인은 속아넘 어가지 않았다. 오랜 세월 최참판댁 농토에 의해 살아온 마름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윤씨부인은 근동 어느 지주보다 관대하여 피가 나게 착취 하는 일은 없었지만 대신 부정을 감지하는 예리한 그의 느낌에 한 번 걸려 들기만 하면 그때야말로 어느, 어떤 지주들보다가 혹한 결단이 내려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서방이 앞뒤를 쏘다니면서 들 이 준비를 했으나 막상 출발할 때 행잘들은 절에 갈 때와 별다른 게 없었 다. 가마 두 틀에 조군이 여섯 명, 김서방과 삼월이 그리고 개똥이가 함께 가게 되었다. 집안 하인들은 모조리 전송하기 위해 문전에 나섰다. 하인들 보다 몇 발짝 앞서서 조준구는 서 있었다. 조군이 가마를 들어올렸을 때 " 살펴 다녀오십시오." 하며 조준구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가마 안에 은 윤씨부인은 무표정했다. "마님,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봉순네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비로소 씨 부인은 "봉순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하고 입을 떼었다. 노비들은 각기 안 녕히 다녀오라고 인사를 했다. 두 번째 가마에는 자줏빛 치마에 검정 선을 두른, 생고사 깨끼 적삼을 입은 서희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봉순네는 마 음이 놓이지 않는 듯 가마 안의 서희 옷매무새를 고쳐준다."얘기씨, 안녕히 다니오시오." 두 손을 맞잡으며 봉순이 인사했다. 두 손을 맞잡은품은 상 전을 대하는 아랫사람의 몸가짐이라기보다 성숙해진 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품으로서 연연하 고 보기에 아름다웠다. 서희는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작은 독수였 을까 작은 늑대였을까, 어여쁜 꽃, 구슬 같은 차갑고 맑은 빛, 서희는 그런 온갖 것을 벌써부터 지니고 있는 듯싶었다. 가마는 언덕을 향해서 천천히 내려갔다 김서방은 앞서고 삼월이는 두 째 가마 옆에서 붙어서 걸어가고 개똥이 껑충거리며 맨 마지막을, 짐 실은 말 의 고삐를 잡고 따라갔다. 준구는 돌아서며 봉순네를 힐끔 쳐다본다. 봉순 네도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개같이 충직한 계집이로고.' '개같이 비루한 양반이로구마.' 자기를 젖혀놓고 일개 고공살이에 불과한 여자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한 윤씨부인의 분부는 조준구의 비웃장을 뒤틀어놓고 았다. 그 러한 그의 속셈을 빤히 아는 봉순네는 조금도 그를 위해 민망한 생각을 갖 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녀와 일맥상통할 것 같은 준구에게 늘, 봉순네로서는 분에 넘칠 만큼 불손한 태도를 취해온 터이었다. 귀녀가 그런 사건을 저지른 후 봉순네도 그렇거니와 수동이는 말할 것도없 고 대개 모두가 다소는 병적인 경계심을 품어왔었기 때문에 사실 준구에게 정신적 구박이 자심했다. 합죽선을 확 펴들고 준구는 크게 소리를 내어 가래를 내뱉었다. 봉순네는 치맛자락을 걷어 치마끈 사이에 찔렀다. 문전에서 미처 식구들이 흩어지기도 전에 김서방댁이 복이를 잡고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어느새 들 어갔던지 수동이 바지게를 얹은 지게를 지고 절룩거리며 나왔다. 봉순네는 얼른 외면하다가 지나간 뒤 봉순네의 눈은 수동의 뒷모습을 쫓아다. 언젠가 봉순네는 수동이에게 말했다. "앉은일이나 하지. 심에 버거븐 일을 와 할꼬?""그라믄 나는 밥 묵지 말고 죽으라 말이요!" 버럭 소리를 내며 화를 내었다. 그 부 터 봉순네는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봉순네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는 모두 다 그랬다. 아마 수동이는 풀을 베러 가는 모양이다. 지게 한 귀퉁이가 몹시 올라가고 내려가고 한다. 누구나 보는 사람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딱하기만 했다. '일한다고 뒤지겄소? 일 안 하고 우찌 살 기요! 종 놈이 일 안 하고 우찌 살 기요! 뒤지믄 뒤졌지 좀 내버리두란 말이요!' 기 우뚱기우뚱하며 내려가는 수동의 뒷모습은 그런 말을 외치고 있는 것만 같 았다. 김서방도 수동이는 건드리지 못했다. 봉순네와 마찬가지로 힘든 일은 남 시키는 게 어떠냐고 한 번 말했다가 된통 신경질을 받았다. 어안이 벙 벙해진 김서방은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다고 이러노, 응?" "내비두란 말이요! 제발 내비리두란 말이요!" 악을 쓰던 수동이는울음 을 터뜨 렸다. "모두들 나리마님이 내 대신 가싰다고, 으흐흐흣.... 와 나 겉은 천천 무리가 안 가고 으흐흣..." 제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 김서방은 할 수 없 이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부터 김서방은 금간 그릇을 다루듯 마음은 쓰면서도 수동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수동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봉순네는 집안으로 들어갔고 준구는 사람에 길상이를 불러다 놓 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꾸짖고 있었다. 가마와 가마를 따른 일행은 마을길에 들어섰다. 밭에서 논에서 일하던 자 여자, 근심스럽게 밭둑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늙은이도 모두 일어서서 지 나가는 윤씨부인 가마를 향해 허리를 꾸부렸다. 그러나 윤씨부인은 일부러 그런 인사를 외면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지 않았으나 서희 역시 할머니와 꼭 같은 자세로 주변에 개의치 않고 가마에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이랑을 지으며 벼를 쓸고 지나간다. 비를 몰고 올 바람이 아니다. 비를 쫓아버리는 선들선들 부는 바람은 사람들의 애를 태운다. 겨우 여물이 들기 시작한벼 는 그 여물이 제대로 영글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부터 메뚜기들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마을길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윤씨부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부인은 따르는 하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했다. 자기 자신도 괴로운 것 이다. 언제나 나들이할 때 느끼는 일이었다. 말 한마디 못하고 지눌릴 것만 같은 분위기의 몇십 리 길을 가다보면 하인들은 행정의 고됨보다 긴장에서 오는 정신적인 피로에 지쳐버린다. 삼 년을 넘게 두문불출 끝의 오늘나들 이를, 그것도 윤씨부인 난생 처음 땅을 둘러보는 행각인 것이다. 조군들의 발이 돌 없는 곳을 조 심성스럽게 더듬고 간다. 길 옆 도랑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 다. 웅덩이같이 패어진 곳에 물이 조금 괴어 있었고 엉덩이에 쇠똥이 묻은 어미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물이 말라서 바닥이 드런난, 그러나 다소의 습 기는 남아 있는 개울 바닥에 앉아 있었다. 가마가 좀더 내려갔을때 잔돌 을 모아서 만들어놓은 웅덩이가 또 나타났다. 아낙 한 사람과 아이들이 엎 드려 낯을 씻고 있었다. 사람 기척에 낯을 씻고 있던 악이 돌아보았다. 김서방의 얼굴이확 구겨졌다. 그와 동시에 아낙은 화다닥 뛰어간다. 아낙과 아이들은 메밀밭에 뛰어 달아난다. 아이들도 따라서 뛰어간다. 아낙과 아이들은 메밀밭에 뛰어 들며 펄썩 주저앉는다. 그러나 메밀밭에 온전히 몸을 다 숨길 수는 없는 일이며 엉겁결에 한 짓이었다. 개울에 돌아서서 있었던 편이 나았을 것을, 생각한 것은 메밀밭에 몸이 숨겨지지 않았을 때다. 공교롭게 윤씨부인은그 광경을 보았다. 가마를 멈추게 하고 누구냐고 물었다. 김서방은 혀가 얼어 붙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삼월이와 조군들도 서로 눈치만 본다. "메밀밭에 숨은 아낙은 누구냐?" 거듭 물었다. "마님" "무슨 까닭으로 숨지 불러오너라." "예""어이 임이애구마." 개똥이 소리르 질렀으니 무슨 말인지 윤씨부인은 알아듣지 못했다. 김서방은 메밀밭으로 건너갔다. 이 대천지 원 수야! 하며 주먹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 김서방은 "잠자코 있일 일이지 숨기는 와 숨어가지고."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잡아먹을 듯 얼굴을 일그러 뜨린다."마님께서 오라니께. 가서 알아 할 기구마." 임이네는 파들파들 떨었 다. 아이들도 떨었다."이리 된 바에야 나도 모르겄고. 어, 가보라니께!" 가 마 앞에 끌리다시피 다가간 임이네는 땅바닥에 몸을 던졌다. "누군고?" " 마, 마님!" "..." "마님, 죽여주시오!" "이 동네 사는 아낙이냐?" 김서방에게 묻는다. "예. 그 죽일 놈의 처, 칠성이 계집이옵니다." "칠성이....."윤씨부인 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윤씨 부인 눈에 중오의 빛은 없었다. 오히려 딱해하는, 당황해하는 빛이 지나갔다. 마을에서는 아 무도 알지 못하는 사실을 윤씨부인은 알고 있었다. 두 사내가 먼저 처형되 고 다음 귀녀가 죽을 때 개심을 한 그는 칠성이 무죄하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 것은 수령의 잘못이 아니요 귀녀의 악 업이긴 하나 문초중 수령 자신도 칠성에게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없 지도 았았다. 김평산도 칠성이 씨만 빌려주었다는 말을 부지중에 했었다. 좀더 현명했더라면, 좀더 성의가 있었더라면 억울한 죽음은 없었을지도 모 를 일이다. 그러나 끝난 뒤였으며 어쩔 도리가 없다. 사후에라도 자손들을 위해 누명을 벗겨줌이 옳은 처사였겠지만 그것은 위정자의 우매함을 폭로 하는 짓이었다. 결코 명예스러운 일은 못된다. 비밀에 부쳐고 말았다. 극비 에 부쳐진 그 사실을 수령은 윤씨부인에게 알려주었다. 여러 가지 면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최참판댁이어서 그만한 성의를 보였던지 아니 면 피해자의 입장인 만큼 진상을 알려주었는지 그 의도는 알 수 없었으 나."주, 죽여주시오. 어린 자식 데리고 모진 목심 못 끊고....마, 마님." 임이 네는 드디어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을 그치라니께!" 김서방이 발을 꿀렀 다. 임이네는 흐느끼면서 울음을 죽인다."아이가 몇이냐?" "예, 마님, 셋입 니다." 아이들은 그냥 메밀밭에 숨어 있었다."뭘 하고 사는고?" 윤씨부인의 목소리는 낮았고 부드러웠다. 아니 머뭇거리는 듯 들렸다. 김서방은 부드러 운 부인의 목소리에 움찔하여 놀란다."예, 품팔이, 품을 팔아서 게우 풀칠 을 하고." 다시 흐느껴 운다. 찢겨진 적삼 사이로 때가 밀린 등이 떨고 있 다. "음....그래.... 알았느니라." 하고 나서 한참을 지난 뒤 씨부인은 김서방 을 보고 떠나라고 일렀다. "마님! 살려주시오!" 길에 엎디어 통곡하는 임이네를 밀어뜨려 놓고 가마는 그곳을 떠난다.가 마는 좀 넓은 길에 나섰다. 이제 겨우 마을을 지나려 하는데 하인들 얼굴 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임이네의 출현 때문에 모두 얼이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마을과 떨어지면서 들판에는 일하는 사 람들의 모습이 끊어진다. 길보퉁이를 돌아설 때 강가 모래밭 쪽에서 노랫 소리가 들려왔다.억만장자 연대 밑에 홀로 앉아서 우는 저 과수야 너는 살아 애썩이고 나는 죽어 살썩이고 썩이기는 일반이라아윤보였다. 낚 싯대를 들고 돌아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윤씨부인 일행이 나가 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듯싶었다. 가마가 그의 곁을 지나가고 난 뒤 윤보는 휙 돌아보았다. 말고삐를 잡은 개똥이 벙글벙글 웃으며 나귀는 제 마음대로 가거나 말거나 고삐만 잡고 있으면 그만이라 여기는지 목을 뒤로 만 뽑아서 윤보를 본다. 윤보는 낚싯대를 쳐들며 때리는 시늉을 한다. 개똥 이는 혀를 날름 내밀며 윤보를 놀려주며 저 멀리 가기까지 을 올리는 것이었다. 윤보는 히죽이 웃으며 다시 아까 부르던 노래를 되풀하 여 부르며 물이 말라서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강물을 향해 모래를 짧으며 간다. 가마에 앉은 윤씨부인은 윤보를 안다 동학군을 따라다녔던 일도 알 고 있었다. 방금 부르던 노래는 자기를 향한 조롱인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최참판댁의 소작인도 아니요 상민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매 여 살기를 싫어하는 자유인이며 방랑자요 자기 존엄을 알고 있다. 쓴웃음 을 띠고 윤씨부인은 햇빛이 튀고 있는 강변을 바라본다. 머지않은 날 참판 댁의 그 기나긴 역사는 끝이 날 것이요 양반 계급이 무너질 것을 예감하는 거이다. 기골이 좋았던 시할머님, 시할머님은 생산을 많이 했으나 자식들을 다 기르지 못했다고 했다. 참판부인이던 증조할머니, 참판의 모친이던 고조 할머니. 그러니까 타성의 여인들 오 대가 최참판댁을 이룩하였고 지켜왔으 며 마지막 최씨의 피를 받은 서희로써 긑이 난다. 다른 핏줄의 여인들이 지켜 내려온 가문은 제 핏줄의 여인으로 하여금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야릇한 운명 같기도 했다. 윤씨부인은 최씨 집안이 무너질 것이요 양반 계급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 자기 자신에게도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초초하거나 불안하지가 않았다. 이제 겨우 서희는 아홉 살이 아닌가. 앞으로 몇 달이 지나면 열 살 이 될 것이다. 그 어린 서희를 두고 불안을 느끼지 는 자신이 스스로 이상 해지기도 했다. 친애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었던가. 문의원이 있었고 월선네 가 있었고 바우 내외가 있었다. 윤씨부인은 그들에게 애정을 느꼈으며 신 분을 느끼지 않았었다. 그리고 또 우관스님이 있다. 아들 환이가 있던 환이 아비가 있었다 그들은 신분의 희생자들이다. 슬픔을 지녔던 그들은 신뢰로 혹은 혈육으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육체로 맺어던 사람들이다. 윤씨부인 은 지금 가마에 흔들리고 있는 지점까지 어떻게 왔는가 자기 자신에게 물 어본다. 안개였다. 뿌옆게 서려오는 안개였으며 자신의 죄업마저 미망 속으 로 꺼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피곤하구나.' 자기에게 최후가 가까이 있다는 예감은 그에게 해방을 의하는 것이었을까. 스스로 끊을 수 없었던 자기 목 숨을 운명에게 내어맡겼고 그 운명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은 승리를 기다 리는 것 같은 충족이 동반하는 감정이었다면 어린 서희에게는 가한 일이었 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윤씨부인 마음속 깊은 곳에는 거대한 최참판댁 재 물과 문벌에 대한 저주가 없었다 할 것인가. 의무의 무거운 짐을 저주가 없었다 할 것인가. 의무의 무거운 짐을 저주하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인 가. 아들의 죽음은 모성의 눈물, 모성의 회한을 몰고 왔으나 그러나 의무의 짐을 얼마간 벗어넘겼다 한다면 그것도 서희를 위해서는 가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윤씨부인은 자기 죽음이 가까워오고 있으리라는 예감 아래 가엾은 환이에 대한 조처를 생각해보는데 저항을 느끼지 않는다. 사십년 가까운 세월을 최씨 가문에 슴살이를 했다는 기분에서, 엄청나게 불리어나간 재산의 일부 를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에 저항을 느끼지 않는다. 결국 자기 는 최씨 문중의 사람이 아니었고 다만 타인, 고공살이에 지나지 않았었다 는 의식은 그의 죄책감을 많이 무마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나는 당신네들 편의 사람이 아니요, 나는 저 죽은 바우나 간난할멈, 월선네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소. 윤씨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권위와 담력과 두뇌는 오로지 최씨 문중에 시종하기 위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확실한 사정은모르면서 아까 임이네가 울부짖던 광경 을 보고 다소는 짐작은 했던 모양으로 눈에 띄게 카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서희는 별안간 높은 목청으로 말을 했다. "저, 저기 저게 뭐야?" 산과 잇닿은 논둑에 길을 잃었는지 노루새끼 한 리 가 우뚝하니 서 있었다. "아, 노루새끼구마요." 삼월이 대답했다. "아니 저게 뛰어가네." 노루새끼는 몇 발짝 뛰어가다가 다시 우뚝 멈추어섰다. "저, 저걸 잡아왔으면." "잡을 수가 있어야지요." "잡아서 우리 집에서 길렀으면." "포수가 총으로 잡는다믄 모르까 산채로는 좀 처럼 좀체 못 잡습니다." 이번에는 김서방이 대답했다. 서희가 지껄이는 바람에 일행은 한결 긴장이 풀어지는 모양이었다. 늦은 점심때쯤 되어 일행은 죽림골에 당도했다. 그곳 마름의 집으로 찾아 들어갔을 때 그 집 내외는 기절을 할 만큼 놀랐다. 마름의 얼굴은 종잇장 같이 변했고 그의 마누라 얼굴은 푸르딩딩하게 변했다. 마치 그들이 장악 하고 있는 권한과 이득을 모조리 뺏으러 나온 것같이 착각을 하는 모양이 다. 윤씨부인의 행차란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흉년을 울어댈 여유마저 그들에게는 없었다. 불난 집같이 법석을 떨고 나서 겨우 마련된 방으로 윤씨부인과 서희는 안내되었다. "고단하냐?" 윤씨부인은 서희에게 물었다. "아니옵니다." "농사꾼들은 우리가 타고 온 그 길을 노상 걸어다니지.""예. 알고 있사옵니다." "앞으로 며칠을 더 다닐 것이다. 너의 땅을 눈여겨 보아두어야 하느니 라.""예" 18장 습격 겨울이 오면 임이네 식구는 굶어죽거나 마을을 떠날 줄 알았다. 지난해는 한발이 심하여 나라에서는 방곡령을 발포하기에 이르렀고 기민 들을 구제하기 위해 혜민원을 설치하는 등,그러나 민심은 흉흉했다. 이곳도 흉년이기는 매일반인데 땅 한뼘없는 임이네가 자식들과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또 마을 사람들은 제가끔 보릿고개를 근심하 는 터에 임이네가 굶어죽을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최참판댁에서 다행히 소출을 탕감해주었고 더러는 고방에서 곡식 을 내는 형편이어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네들 자신이 굶어죽을 판이었으니까. 그런데 굶어죽 기는커녕 임이네는 살이 토실토실오르고 얼굴이 희부옇게 윤이 나면서부터 차츰 기를 펴기 시작했으니. 옛날같이 옷차림이 깨끗해졌고 그럭저럭 겨울 을 나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그것이 마을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다. 더욱 이 아낙들의 자존심을 비틀어놓고 말았다. 동정을 보이던 사람조차 임이네 에게 적의를 나타내었다. 그는 살인자의 계집이요, 땅뙈기 한뼘 없는 거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살인 자의 계집답게, 백정한테 치마를 걷은 천한 계집답게, 한뼘의 땅이 없이 남 에게 구걸하는 거지답게 행색도 그러해야 하거니와 처신도 물론 그러해야 한다. 다른 아낙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말갛게 옷을 입고 얼굴 에 윤이 흐르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최참판댁 윤씨부인이 용서를 해주었다는 소문, 김서방이 곡식 말씩 보내어주어서 굶지 않게 되 었다는 소문, 봄부터 밭마지기나 얻어 부치게 될것이라는 소문, 모두가 다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다. 자연히 마을 사람, 특히 아낙네들은 실속도 없 이, 또 죽은 사람이 반가워할 리도 없는 동정을 최치수한테 보내게 되고 마을의 분위기는 묘한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으레 나오는 예기지만 죽은 사람을 들먹인다는 것은 귀신을 들먹이는 것이 되고 원한에 찬 혼령이 최 참판댁 지붕, 당 모퉁이를 돌면서 밤이면 밤마다 운다는 것이었다. "이자 최참판댁도 망할 기구마. 망할 징조지." "아, 망하기야 벌써부텀 안 망했나? 씨를 말맀는데. 그거믄 결딴난 기지."" 어마님이 하 기승스러바서 아들을 먼지 보내더마는." "그거사 최참판댁 내림이고." "그렇다 카더라도 자식의 원수를 치마폭에다 싸? 말도 안되는 소리다."보 다 심하게 최치수가 윤씨부인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는, 그 밖에 윤씨 위엄 에 손상을 주는 말들이 은밀하게 떠돌았다. 막딸네는 임이네를 욕하는 데 는 농사짓는 것만큼 열심이었다. 막딸이는 아침부터 산으로 들로 헤매면서 찬바람에 살갗이 트고 웅그러진 손으로 진종일 나물을 캐며 작은 키가 더 욱더 줄어드는 것만 같았는데 그의 어미는 우물가에서 입속에 찬바람을 가 득 넣으며 열을올리고 있었다. "그년 팔자 늘어졌지. 천 년 묵은 구미호다. 꼬리가 여남은 개나 되니께로 사람들 맘을 그렇게 홀키지. 그 새살이 얼매나 좋았이면 그 댁 마님을 녹 있일꼬? 마님도 마님 아니가. 자식 직인 핏줄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하늘을 쳐다보고는 그 짓 못할 거로? 그런 법이 어디있노? 참 희한하고 굿할 일 아니가. 두고 보라모. 내 눈 밖에 나믄 사단이 생기기 매련이라. 아 김평산인가 그놈 때만 해도 내가 뭐라 카든고? 동네 밖에 쫓아내야 한다고 그리 실이 노이되도록 시부맀거마는 들어묵어야제. 아니나 다를까? 그 일이 안 벌어 졌든가배? 내 빈말 안 하거마는. 작년만 해도 그년이 동네에 들어오고부텀 날이 가물더니마는 흉년이 안 들었나? 그 년이 들어서 필시 동네가 망할 기구마. 쫓아내야지. 안 되지러. 안될기 구마.""최참판댁에서 감싸는데 우리가 우찌 쫓아낼 것꼬. 아닌게아니라 눈 이 씨어서 못 보것더마. 인제는 날 괄시할 연놈은 없일기다, 날 어느 연놈 이 쫓아내? 하는 것겉이 낯짝 쳐들고 댕기는 꼴이 눈이 씨어서." 아낙이 맞장구를 치자 막딸네는 코를 풀고 고개를 설레 설레흔든다. "안 될기구마, 안되고 말고," "사램이란 지 푼수를 알아얄 긴데, 제 집이 땅알스러바서 안 그렇나. 허연 잇석을 들어내고 희희낙낙하니 웃을 처지가 되나? 참 세상에 비윗장에 좋 은 그런 계집도 처음 봤다." 야무네도 거들었다. "우리가 아무리 이래도 소용없구마. 너거들이사 북을 치든 징을 치든 내 사 내할 일 할 기니께,임이네 심보는 그거 아니가? 어디서 올을 구해왔는 지 베틀맸더마.""베틀을 매?" 이렇게들 찧고 볶고 하는 가운 데 두만네만은 아무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도 결코 임이네한테 호의적일수만 없었다. '도둑놈의 제집은 도둑년일 수밖에 없다 카더마는 풀이 죽어 있을 때는 그기 다 겉가죽이었던가?" 이네들이 흥분하고 떠드는 만큼 사실은 임이네 가 뻔뻔스럽게 처신한 것은 아니었다. 하얀이빨을 드러내고 웃긴 웃었다. 웃을 만도 했을 것이다. 살던 오두막에 돌아와서 별을 보지않고 잠드는 것 만 기뻐했던 그가, 그러나 굶주림이 닥쳐오면 겨울이 오면 바람부는 길을 떠나 인가 많은 고장에 가서 걸식을 할 수밖에없었을 그에게 다른 사람도 아닌 윤씨부인으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뻗쳤으니 잃었던 웃음을 찾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기쁨보다 감사라는 감격이 조금만 더 많았 더라도- 진상을 안다면 감사는커녕 기쁨인들 느꼈겠는가. 원한에 가득차서 갖은 학대에 대한 보복의 물길이 불타올랐을 것이다.- 눈물을 흘렸을 것이 며, 겸허했을 것을. 고마운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임이네 는 본시 죄의식이 엷은 여자다. 죄의식을 가지라는 것도 실상 어거지였고 칠성이의 죄명 탓으로 모든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만 것을 그는 날벼락으 로 생각했고 재앙이라 생각했으며 부부로서의 정신적인 유대를 갖지 못한 만큼 고난과 슬픔과 또한 기쁨까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비춰주는 대로의 반응일뿐 이었다. 고마운 척, 눈물겨운 척할수 있는 교 활한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넘쳐흐르는 생명력, 조금만 땅이 걸고 짓 밟지만 않으면 무섭게 자라는 잡풀 같은 생명력은 교활한 지혜를 위해 여우를 지 않았다 할수있을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 눈에 그가 거들먹거리는 것같이 보였다는 것은 윤씨부인이 도와준다거나 먹고 입는 것이 자기네들과 같아 졌다는 시샘 때문에 그렇지도 하려니와 그 무성한 생명력에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서 더욱 그렇게 보여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아낙들은 옛날로 돌아간 그 미모에 약이 올랐을 것이다. 이제 임이네한테서는 찌은 궁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랄만한 회복이었다. '살인 죄인의 계집이.' 두만네 마음에도 그 생각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작년 봄에 임이네가 마을에 찾아들었을 때는 살인 죄 인의 가족이기 때문에 불쌍했던 그가 지금은 그 살인 죄인의 가족이기 때 문에 불쾌한 존재인 것이다. 함안잭이 지아비의 죄업으로하여 스스로 목숨을끊 은 만큼 그렇게 까지는 못하여도 죄인의 지어미도 죄인임에는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 왜 하지 않느냐는 두만네의 생각인 것이다. 죄인이 아니어도 남편잃은 과부라면 몸을 조심스레 가져야 한다는 게 만네 의 뿌리박힌 생각이고 보면 다른 아낙들의 시기심하고는 다소 다른 점이 있기는 했다.'염치없는 계집.' 들판에는 봄이 활짝 펼쳐졌다. 이곳저곳에서 봄갈이가 시작되었다."이년! 뜯어죽일 년!" 강청댁이 냇가 옆길을 뛰어가며 외쳤다. "집구석에 들어박혀 있인께로 나를 송장으로 봤나! 갈기갈기 찢어..." 을 쓰 는 바람에 작은 몸은 온통 입뿐인 것같이 보였다. 치달리면서 작은 몸을 솟구치곤 하는데 마치 바람에 바구니가 굴러가는 것 같다. "강청댁이 와 저카노?" 시냇가에 앉아서 빨래를 하던 아낙들이 강청댁을 바라본다."어디, 내가 한분 가보고 오지." 막딸네는 방망이를 팽개치고 일어 섰다. 대개 아낙들이 짐작은 했으나 역시 강청댁은 임이네 집 마당으로 돌 진해 들어갔다."네 이년!" 목이 터져라 강청대은 고함을 질렀다. 서까래만하게 가는 기둥에 흙이부 실부실 떨어지는 벽은 구멍이 숭숭 나 있고, 문짝도 없는 부엌에서 뒷설거 지를 하던 임이네가 기웃이 내다보다가 얼른 얼굴을 밀어넣는다. "이년! 이리 나오니라! 사생결판을 내자!" 그러나 나오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부엌으로 달겨들었다. 대뜸 부뚜막에 씻어놓은 밥사발을 들어 임이네 의 면상을 향해 던진다. 빗나간 사발은 선반에 부딪치고 요란한 소리를 내 며 부엌바닥에 흩어진다. 임이네는 이미 싸움태세를 작정한 듯 유리한 자 리를 잡을 참이었던지 밖으로 달려나간다. 강청댁이 뒤쫓았다. 마루 앞에서 임이네는 우뚝 멈추었다. 강청댁이 와락 달겨든다. 와락 떠밀어낸다. "미쳤나. 와 이카노?""미쳐? 와 내가 미쳐!" "안 미쳤이믄 말로 해라. 싸움을 하더라 캐도 영문이나 알자." 강청댁이 짝 뛰면서 임이네 뺨을갈긴다. "니 날 쳤제?" 임이네 눈이 벌겋게 물든다. "오냐 쳤다. 치고만 말 줄 아나? 네년 가랭이를 찢어 놓을기다!""가랭이를, 찢어? 누구 가랭 이를?""네년 가랭이다.!" "어느년 가랭이는 성할기고?" 자신있게 말하고 나서 임이네는 헛웃음을 웃는다."이,이잉 주둥이를 찢을 라!""허 참, 내 주둥이 찢기는 거를 구겅하고 있을 내가? 중풍이 들었이믄 모를까." 강청댁은 입가에 거품을 뿜었으나 옛날 월선이를 대할 때와는 달 리 아주 신중하다. 욕설없이 손을 뻗쳐 임이네 앞가슴을 움켜잡는 동시에 한 손이 머리채를 낚아채려 한다. 임이네는 낚아채려는 손목을 꽉 잡고 비 튼다. 어디선지 임이가 쫓아왔다."와 울 어매 때리요! 와 울 어매 때리요!" 달겨들며 강청댁의 옆구리를 꼬집는다. 강청댁이 발길질을하여 임이를 걷 어찬다."이년, 이 직일 년! 동네 가운게 사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얄 긴데 무 신 정에 서방질인고! 이년 바린말 해라! 다 알고 왔다!" 드디어 한덩어리가 된 두 아낙을 서로 잡아뜯고 물어 뜯는다.임이는 팔팔 짝 뛰다가 뒤로 쫓아가서 빗자루를 들고 와서 치는 것이었으나 제 어미가 맞는지 강청댁이 맞는지 분간할 수 없고 빗자루 따위 아낙들에게 아플리도 없다."서방질 했다! 했이믄 어떻노!" "이년! 내 서방을 뺏고 니가 목심 부지할 줄 알았더나!""누가 뺐었노! 제발 로 걸어왔지.재가 홀치웠나! 끌고왔나!" 울타리 밖에 숨어서 재미나게 구경 하던 막딸네는 강청댁이 밀리는 것을 보자 마을을 향해 외치면서 아낙들을 불러대었다."강청댁이 죽겄다! 임이네가 강청댁을 직인다!" 시냇가에 빨래하던 아낙들이 몰려왔다. 집에 있던 아낙들도 달려왔다."이 년을 진작 쫓아냈이야 하는 긴데 눈이 불쌍해서 두었다마는 악문을 하니! 이년이 쇠 가죽을 썻자 개가죽을 썻나!""이런 년은 직이야 한다!" "밟아 직이라!""찢어 직이라!" "동네 망해묵을 년! 이년을 안 쫓아내믄 또 흉년 들 기다!" 풀려나온 강댁 은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아이고 아이고 하며 통곡을 하고 대신 아낙들이 한 번에 덤벼들어 임이네를 사정없이 족친다. 임이는 울 어매 살려달라고 울면서 논둑길을 쫓아간다. 봄갈이를 하면 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아저씨여! 울 어매 죽소!""...?" "울 어매 죽소! 강청댁이 와서 어매 직이여!" 낯색이 변한 용이 논이 뛰어 나간다. 부토를 짊어지고 오던 영팔이에게도 임이는 "아제씨요! 울 어매 살 리주소! 울 어매 살리주소! 울 어매 죽소!""무, 무신 소리고?" 어리둥절하다가 용이 쫓아가는 뒷모습을 보자 지게를 받쳐놓고 그도 달간 다. 집안은 수라장이었다. 피를 본 야수같이 아낙들은 온전히 미쳐있었다. "이기이 무신 짓꼬!" 용이는 삽짝에 세워놓은 작대기를 들고 휘두른가. 영 팔이도 엉겁결에 솔가지를 들고 정신없이 날뛰는 아낙들의 엉덩이를 마구 휘갈긴다."오냐! 제집 영낭 들로 왔고나! 이 팔난봉아!" 영겨붙는 강청댁을 걷어차고 용이는 멱살을 잡아 아낙 하나를 끌어낸다. 비로소 아낙들은 비실비실 하나 둘 물러서며 정신이 드는지 옷매무새를 고 치고 풀어진 머리를 틀어얹고 하며 무안함을 얼버무리려 하는데 임이네는 땅바닥에 엎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다. 옷은 모조리 뜯겨지고 뜯겨진 옷 사이로 내비친 살에 할퀴인 자국, 자국이 지렁이같이 그러져있다. 얼굴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이 섬뜩 였는지 아낙들은 눈을 내리 깔았다. 강청댁만은 또 아이고 아이고 하 며 통곡을 한다. 임이네를 안아 일으키며 "이 금수만도 못한 계집년들아!" 하고 용이 울부짖었다. 영팔이는 아낙들에게 침을 뱉었다. "바로 백정년들 아니가, 응?" 영팔이의 욕설이었다. 아낙들은 대꾸를 못한 다. 낮게 신음하는 임이네를 방에 안아 들여 뉘여놓고 나온 용이의 얼굴은 새파랬다. 입술을 떨고 있었다. 마루에서 내려선 용이는 눈에 불을 뿜으며 아낙들을 노려본다. 내심 아낙들은 부끄러웠다. 두렵기도 했다. 러나 호기 심이 두려움을 밀어 내었다. 슬슬 빠져서 가버릴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면 서 다음 벌어질 일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기대가 그들 가슴을 부풀게 했 다. 도대체 어찌된 진상인가, 영팔이도 눈독에 지게를 받쳐놓고 온 것을 잊 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강청댁은 통곡을 멈추었다. 안 보는 척하며 용이의 무섭게 부릅뜬 눈을 본다. "이 썩은 꼴 보고 나는 못 산다! 못 살 거마는. 어디 제집이 없어서 무당년 아니믄 살인 죄인 제집고 .날 직이고, 직이고 나소 다 데리고 살아라!" 강청댁은 용이에게 몸을 던졌다"직이라! 직이...." 용이는 주먹을 쥐고 강청댁 면상을 치고 바로 걷어찬다. 당장 죽일 것같 은 기세다. 그 기세에 눌려 강청댁은 두 번 덤비지 못한다."칠거지악 중에 멋이 들어 있 는고 니 아나?" 강청댁의 얼굴은 보기에도 흉하게 일그러진다. "옳거니!" 영팔이 외쳤다. "그 둘째는 강세보는 일이다.""맞다, 맞아! 사내 대장부 열 계집인들 못 거 느리까.""그 다음은 가장을 대수로 안 여기는 일이다. 그래도 할말이 있 나?" 강청댁이 표독스럽게 용이를 노려본다. "저 여자는 애를 뱄다. 자손 없는 집 자손을 놓아줄 기다. 만일에 아이를못 놓게 되믄 조상네 뫼를 파도 말 못할 기다." 강청댁이 기절을 하고 나자빠진다. 아낙들은 공포를 느끼고 빠져 달아다. "용아, 니, 니 그기이 정말이가?" 영팔이 슬금슬금 기듯이 다가와서 용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용이 얼굴에서 희망도 절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전의 그 노여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무한 눈이 영팔이를 응시한다. "우짜다가..." 중얼거리더니 발부리에 침을 뱉는다. "그, 그렇다믄 큰일났고나. 아이가 떨어짔이믄, 이 이거... 악마구리떼겉이모 여들어 팼이 니." 영팔이는 나자빠진 강청댁을차마 일으키지는 못하고 엉거주춤 등을꾸 부리고 내려다본다. "일어나소! 엄살 그만 부리고!" 귀청이 떨어져나갈 만큼 고함을 질렀다. 용 이는 넋빠진 것같이 서 있었다.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나가 버린다. 이 일은 최참판댁 윤씨부 인 귀에까지 들어갔다. 상민층의 의지할 곳 없는 과부가 아이를 뱄다는 것 은, 더욱이 자식없는 사람에게 아이를 낳아준다는 것은 허물은 겠지만 치 명적인 것은 아니다. 수절하던 과부도 아니겠고 임이네의 이력은 이미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새삼스럽게 망신이랄수도 없는 데 최참판댁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김서방은 윤씨인 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까불랑거리 쌋더마는 이번에야 쫓겨 안 나겄나? 청백겉이 엎드려 있어도 뭣 할 긴데 오장에 기름이 끼니께 사 나아 생각까지 하고 뭐가 이쁘다고 참판님댁에서 보아주꼬?" 아낙들은 이 번에야말로 틀림없이 임이네는 마을에서 쫓겨날 것을 믿었다. 요다음에는 거지가 아니라 앉은뱅이가 되어서 기어와도 냉수 한 그릇 주는가 보고 벼 르는 아낙도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최참판댁에서는 아무말이 없었다. 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여론을 무시하고 칠성이살았을 때 부치던 밭을 내어주얶다는 소식이 있었다. 마을의 여론이라 했지만 남자들은 동정을 하 는 편이어서 "자식 없는데 우짤 기요? 어디서 떨어졌든지 간에 선영봉사할 자식은 있이야제.기차븐 농사꾼이 부신 성시로 또 장가를 들 것이며,하기사 노하봐야 아들이 될지 딸이될지, 그러나 놓던 바탕이믄 또 놓을 것인께." 선영봉사 어쩌구 저쩌구 하면 아낙들도 할말은 없다. "팔자에 있이믄 할 수 없는갑다. 그리 죽도록 맞았는데 아이가 안 떨어는 걸를 보니. 삼신도 눈이 멀었지. 하기는 몰라. 흔히 있는 일이니께, 다른데 서 자식을 보믄 삼신이 시샘을 해가지고 사십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던 본 처한테도 태기가 있다카니. 강청댁이 자식을 놓아보지?그까짓 임이네 열을 놓으믄 무신 소용고. 멧상 들자식이 제일이지." 그러나 임이네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감에 따라 아낙들의 입은 잠잠해져 갔다. 기정사실로 어수 없이 인정하게 된 것이다. 용이는 사람이 달라졌다. 뻔뻔스러워졌고 어딘지 모르 게 추해진 것 같이 보였다. 묶어두었던 주문이 사슬이 끊어진 듯 용이는 두 여자를 번갈아가며 가까이 했다.임이네를 한 번 범한 뒤 강청댁에도 남 자의 기능이 가능해졌던 것이었다. 그는 그런 행위에서 자식을 소망하지 않았다. 임이네로부터 임신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히려 어리둥했고 다음 은 무감동의 상태로 돌아갔다. 임이네가 마을 여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던 그때 잠시동안 임이네가 자기자식을 가졌다는 것을 실감했을 뿐이며 삽짝 을 나서면서부터 감동을 잃었다. 그 대신 정력은 그칠줄 모르는 듯 두 여 자에게 쏟아졌고 날로 황음해갔으며 거의 광적으로 되어갔지만 그는 여자 둘을 증오하고 멸시했다. 너희들이 짐승이지 사람이냐고 욕설을 퍼 붓는가 하면 나도 짐승이지 사람은 아니라 하면서 헛웃음을 웃곤 했다. 그러면서 도 여전히 아편쟁이처럼 육체에 탐닉하는 옹이는 아무 쓸모 없는 놀량패가 되어갔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쌈질을 하는 것이 일쑤요 농사꾼이 농 사지을 생각은 안하고 장돌뱅이를 따라 다니기도 했으며 소를 꺼내어 장에 가서 팔아 노름에다 털어넣고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여자 는 용이 앞에서는 끽소리를 못하고 고분고분 순종하는여자로 변해갔 다. 용이에게는 꼼짝 못 하면서 물론 두 여자는 끊임없이 싸웠다. 입씨에 주먹질까지 하며 싸웠으나 싸우면서도 그악스럽게 일은 해내었다. 임이네 는 본시부터 일꾼이었지만 게으른 강청댁도 임이네 못지않은 일꾼이 되었 다."허 참, 살다 별꼴다 보겄네." 마을 늙은이들은 어이없어했다. 두 여자는 밭을 매다가 호미를 동댕이 치 고 싸웠고 논의 김을 매다가 흙 묻은 손으로 서로 할퀴며싸웠다. 그러나 이해관계에서는언 제나 그들 공동 의 이해로써 합심하게 되는데는 놀랍고 신기로움을 금할 수 없었다. 도꾼 이 와서 곡식과 새물을 바꿀때도 두 여자가 한꺼번에 대거리를 하는 바람 에 도부꾼은 달아나다시피 했고 자기논에 물을 대기 위해물꼬를 막은 봉기 하고 싸울 때도 두 여자는 한꺼번에 덤볐으며 봉기가 물꼬를 막으면 트고 하여 밤을 꼬박이 지새다시피 두 여자는 분투 했다."허허 참, 이자 그만하 는 게 좋겼구마이?" 흐린눈을 들고 용이는 영산댁을 멍하니 바라본다. 영 산댁은 용이의마음을 이해한다."사램이 모도 제살고 저븐 데로 살 수 있간 디? 나도 이 썩은 꼴 보아가면서 술장사 화고 저버서 허는 게라우? 농사꾼 이 몸뚱아리 하나가 보밴디 워쩌자고 그리 술만 마신다요? 다 이 세상에 나와서 죄닦음 하니라고 그런 거르 워짤 것이요? 참말이제, 눈 분 감으믄 세상만사가 다 그만인디 애탕끌탕허믄시로 살아 있는 동안은 면할 도리가 없는 기니께 이서방도 맘 고치묵으시오. 본성을 망치믄 될 것이요? 내 알 겄어라우. 이서방이 그러는 거 알지라우. 사램이 변한 게 아니고 변해보고 저버서 그런다고. 사램이 그리 허무허게 변할 것이요? 곰보목수는 아까운 놈 버렸다고 한탄을 혀쌋더마는 나는 안 그렇다고 장담을혔인께로." 주막에 술꾼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용이 영산댁의 말허리를 끊듯이 일섰 다. 그리고 어깨로 바람을 끊듯 나가 버린다. 19장 욕정의 제물 마을에 불빛이 하나 둘씩 나돋기 시작했다. 숲에서는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훈장댁을 나선 조준구 목덜미에 썰렁한 저녁 냉기가 지나간다. '흐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것인가.' 우러러보는 하늘에는 아직 푸른 기가 남아 있는 듯 싶은데 별들이 영롱하게 반짝인다. '남아장부 세상에 태어나서 이대로 썩을 수는 없는 일이 아가. 어느 때까지 이 수모를 견디어야만 하는 걸까?'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 린다. 조준구는 눈물을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가래를 돋구어 길섶에 뱉아낸다. '내 기필코... 받은 수모를 돌려주리라. 그것을 잊는다면 어찌 사내자식이라 할 수 있겠느냐? 허허헛... 허허허, 노비들조차 날 과객 취급을 하지 않았던가? 허허허... 때가 있을 것이다, 때가. 어떤 일이 있어 도 최가 집에 뿌리를 박고 그날을 기다리는 거야.' 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조준구는 명확히 알지 못하였다. 그날이 오면, 그렇다, 그날이 오면 무 수한 수모, 눈물나는 천대에 대하여 보복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맹세는 조준 구의 마음을 쓰라리게 했을 뿐이었다. 까마득한 앞날, 까마득하기만 한가? 까마득하게 느낄수록 세월은 허송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김평산에게 최치 수의 살해를 암시하고 부랴부랴 서울로 떠날 때 조구는 머지않은 장래에 행운이 굴러올 것을 믿었다. 최치수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행 운은 바로 지척에 있음을 느꼈다. 그랬던 그 행운의 걸음은 어찌 이다지도 더딘가. 아니 오히려 시일이 지나갈수록 뒷걸음질치며 멀어져가고 있는 것 이다. 윤씨부인은 도무지 늙지 않은 것 같았으며 대신 서희는 날로 성장해 가고 있으니 말이다. 조준구는 방금 김훈장테 들은 말이 초겨울 가랑잎을 몰고 가는 바람 소리같이 처연하게 되새겨졌다. "저 기왕 말이 났으니 남 원 이진사댁하고 정혼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바둑판을 밀어내며 무심히 뇌는 말을 조준구는 의아하게 들었다. 김훈장은 준구도 이미 알고 있는 일 로 생각하는 모양이어서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하고 조준구는 되묻지 않았 다. "문의원의 생각이 옳을 게요. 나도 그만하면 합당하다 생각하오. 조공 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글쎄올시 다." 해놓고 김훈장의 기색을 살폈다. "부인께서 썩 마음이 내키지는 을 겝 니다. 허나 손녀를 주는 게 아니고 그 댁 손자를 데려와야 할 형편이니, 어 느 곳에 정혼을 한다하여도 데려와야 할 형편인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서 희 혼약 문제인 것을 비로소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김훈장이 알고 있는 일 을 한 집안에서 자기는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울분이 치밀었으나 조준구는 내색할 수 없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야 그렇지요." "어느 모로 보나, 개중에는 아들, 손자뿐만 아니라 신주라도 바가며 혼인 맺기를 바라는 양반들도 있을 게요만 그 남원 이진사댁 가풍이 여간 옹고집이라야 지요? 부인께서도 지나간 일은 물로 씻어야 할 게고." "지나간 일이라뇨?" "조공께서는 모르시오? 하긴 모르시겠지요. 오랜 옛날의 얘기고 그간 입밖 에 낼 수도 없었던 일인 만큼 모르실 게요. 거 왜 남원 윤씨댁이 난을 피 하고자 윤씨댁에서 비호를 간청했던 거지요. 그 댁을말 할 것 같으면 윤씨부인 외가편으로 척이 닿고 돌아가신 친정아버님으로는 처가편이었단 말씀이오. 하기는 한 다리가 천리라는 말이 있긴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부인의 친정어머님의 육촌 오라버님이니 과히 가까운 처지라고는 할 수 없지요. 척이 멀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하여간에 그 댁에선 거절을 했지요." "그런 일이 있었구먼요." "다 돌아가신 양반들의 일이오만 지금 계신 그 어른 조부께선 그야말로 서학 배척의 골수였었요. 하기야 그 런 싸움에는 친동기간에도 우애를 찾기 어려운 법인데 하여간에 윤씨댁의 멸족이 그 댁 책임이었다 할 수는 없으나 도움을 청한 데 대한 거절은 원 한을 남긴 거지요." "그랬었군요." 준구는 마음속으로 혼담의 진척을 가늠 해보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김훈장 말에 감동을 나타내었다. "그러 니 부인께서는 마음이 착잡하신 게지요. 이진사댁만 하더라도 그 렇고, 뭐 지나간 일 생각해서라기보다 체면이 있지 않겠소? 재물을 탐하여 손자를 내어주는 것 같은 남의 이목이 있고 그러니 서희를 데려간다면 모를까 손잘 내주긴 싫다 그러는 거지요. 양편이 다 아이들을 탐내면서 막상 타협은 어려운 모 양이요." "내가 듣기로는 읍내에 그 이동진인가 하는 사람의 아들을 마음 에 두고 계시다는," 김훈장은 손부터 내저었다. "이미 정혼을 한 데다가 맏아들이 아니오? 그건 안 될 의논이지요." "그렇 긴 하지요." " 우리가 왈가왈부한 처지는 아니겠소만 나는 문의원이 권유하는 것을 옳고 보아요. 굶주린 이리같이 최참판댁 재물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은 뻔 한 일, 가사 서희가 병신이라 하더라도 혼인맺기를 원하는 양반들이 얼마 든지 있을 거란 말씀이오. 허나 이진사댁 사람들, 그 옹고집이 오히려 좋은 거고 청빈했던 선비 가풍을 보나 또 당자가 출중하고 맏이도 아니니 그만 하면 서희를 위해서는," "하지만 아직 나이 있는데 서둘 거는 없요." "그렇 지가 않지요. 정혼은 해두어야지요. 사람 일을 뉘 알겠소?" 그 말 대답은 하지 않고 김훈장은 우울하게 조준구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남원 이진사댁 인가 뭔가 하는 그 집하고 정혼이 안 된다 하더라도, 상대가 누구든 서희 정혼은 불원 결정된 것이다. 금년 아니면 내년, 내년 아니면 내후년. 그런 데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곳에 있는 걸까? 다만 의식을 위해이 곳에 있단 말이냐?' 부엉이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을에 하나 씩 나돋기 시작한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조준구는 귀녀와 김평산의 용기를 부러워하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며 술 취한 사람같이 휘청거렸 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그럴 용기가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으며 결 과는 귀녀나 김평산의 운명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대한 산더미 모양으로 눈앞에 보이는 최참판댁의 재물에 손가락 하나 러볼 방법 이 없음을 그는 깨닫는다. 막연하였던 희망, 현실로 돌아와서 차근차근 따 지고 앞뒤를 돌아본다면 그 기대와 희망은 물거품이다. 창창하게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니, 그보 다 더 허망한 것이다. 도깨비 방망이를 얻는 꿈이다. 준구는 서울에 있는 아내 생각을 했다. 짜증이 더럭더럭 눌어붙은 얼굴을 눈앞에떠올린다. 그는 아내가 무서웠다. '서울로 올라간다면?' 사실 준구는 서울로 올라다 하여도 발붙일 곳이 없다. 멀어져 가는 기대를 마치 물에 빠지는 사람이 지푸라기를 거머잡듯이 이 곳에 남아 거머잡아보는 것이기는 했으나 서울 로 돌아갈 형편이 못 되었다. 기다리는 것은 앙칼지고 허욕에 가득 찬 아 내 얼굴과 채귀뿐인 것이다. "빌어먹을 할망구! 오늘 밤에라도 뒤어져라!" 조준구는 주먹을 휘두르다가 넘어질 뻔했다. "흥, 신주 위하듯이 위해겄고 나." 여자 목소리에 당황한 조준구는 어두컴컴한 앞을 바라보았다. 아낙 둘 이 논둑길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면서 말다툼하는 소리였다. "누가 위해달라 캤건데? 무신 상팔자를 타고났다고." 뒤의 여자가 말대꾸다. "남 못 낳는 자식 가졌으니 그만하면 상팔자 아니가." "누가 못 가지라 말맀 나?" "뱃속에 든 것 가지고 유시를 하는데 낳으믄 천하를 이고 도리질을 안 하겄나." "천하를 이고 도리지를 할 년이 북상 겉은 배를 안고 밭 매로 다니까?" "그러니께 누가 뭐라 카든고? 누워 있으라 안 카나. 밥도 떠믹이 줄 기니께." "비양치지 말고 그만 콱 뒤져죽으라꼬 신령한테 물 떠놓고 빌 것이지. 와 사람을 다글다글 볶노." "옛날 옛적에 어떤 숭악한 년이 지 자 식을 지 손으로 직이놓고 본처가 직있다고 모함을 했다 카더마는, 복장 바 르게 묵으얄 기구마는. 신상에 해롭지, 해로워." "이러믄 이다 하고 저러믄 저런다 하고, 그래 내가 사나아 벌은 밥을 묵는다고 이러나,사 나아 벌은 옷을 입는다고 이러나. 뒤견이 목에 피 내어묵듯이 내 손발 잦 아지게 일하믄서 밥 한술 얻어묵으믄 그만인데." "서방 차지하고 그런 고 생도 안 할라 캤는가?" "아이고 무써리야. 서방이고 남방이고 내사 귀찮으 니까 강청댁이 다 가지라고. 어떤 년은 편하게 누워서 서방 덕에 묵고 자 고 했다카더라마는." "그랬지러. 나는 서방 덕에 누워서 묵고 자고했다마는 네년 만내고부텀은 남정네가 저 꼴이지. 다 네년 탓이다! 네년 탓이란 말이다!" "그러니께, 긴말 할 것 없고 새끼 뽑아서 줄 기니께 이녁이 키우라고, 키워. 서방 생각이나 서 그랬던 것도 아니겄고 그것 다 배부른 년들이나, 낭개도 돌에도 못 대 고 그놈으 겉보리 한 말 때문에." "흥, 또 그 소리고나. 낯짝 치다보인다. 눈이 등잔 겉은 서방 살았일 적에도 네년이 우리 남정네보고 꼬리를 쳤는 데 이자는 외고 펴고 멋이 두러바서 새끼 뽑아 날 주고 니가 나앉을 것꼬. 서천 쇠가 웃일 소리는 안 하는 기이 좋겄구마." 싸움에도 이력이 났는지 죽이 맞는다고나 할까, 육박전은 피하면서 입씨름은 잠시도 멎지 않았다. 준구는 저도 모르게 여자들 주고 받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걷고 있었다. 자기 갈 방향을 깨닫고 걸음을 돌린 것은 여자들의 입씨름이 멎었을 때였 다. 여자들은 각기 제 집으로 갈라져 들어가고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며 확 실찮은 감나무 그림자가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준구는 자신이 생각하 여도 넋이 빠졌다 싶어 어둠 속에서 씁쓰름하게 웃는다. 그와 동시에 별안 간 여자 생각이 났다. 삼월이의 갸늘한 몸매가 손 끝에 느껴졌던 것이다. 제비같이 민첩하게 피해 다니며 일 년 가까이 기회를 주지 않고 속을 썩이 던 삼월이를 범한 것은 달포 전의 일이었다. 그것도 삼수의 은밀한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본시 여자에게 흥미가 많은 체질은 아니었으나 시골 생활에 무던히 지쳐 있었던 만큼 어쩔 수 없는 작심이라 할 수도 있 겠고 상대가 노비인 만큼 크게 말썽이 있을 염려나 책임이 없으니 저지르 기 쉬운 일이기도 했었다. 여자란 으레 그런 것인지, 구렁이를 보듯이 싫어 서 눈이 마주치던 것조차 피하던 삼월이는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눈길이 달 라졌다. 두 번 세 번, 사나이 품에 안긴 후로는 "으리, 절 버리시면 저, 저 는 죽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오늘 밤엔 그년을 불러와야겠군.' 겨우 준구 의 마음은 후련해지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울화통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준구가 사랑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삼월이가 와서 불을 켜놨나 보다 생각하며 무심히 방문을 열 고 쑥 들어선 준구는 우뚝 멈추어섰다. 망 한가운데 흰 수염의 노인이 단 정하게 앉아, 들어서는 준구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문의원이었다. " 어인 일이시오?" 준구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는 자신이 이 집에서 식 객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방 임자도 없는 방에 일 개 의생이 푼수를 모른다는 노여움만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방금 김훈장 한테 들은 말도 있고 하여 주의 신경은 한층 더 곤두섰던 것이다. "볼일이 있어 지나던 길에 날도 저물고 해서요. 이거 안 계신데 예가 아니었던 것 같소이다." 문의원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그 로서는 김서방 이 안내하는 대로 들어섰을 뿐이지만. "의원께서는 상투를 그냥 남겨었는 데 개명은 나보다 먼저 했구먼." 맨들맨들한 얼굴이 파아래지며 준구는 내 뱉었다. 문의원은 그 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면 동학이 이 고장에서 도 판을 친 모양인데, 그래서 최참판 식구들도 쓸개 빠진 모양이지요?" 옹 졸하기가 한량이 없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조준구도 윤씨부인에게 미치는 문의원의 영향력을 생각하여 참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희혼담이 큰 위 협인 데다 끝내 자기만을 따돌리는 처사가 괘씸하였고 유일한 친척이 자를 업신여기고서 모든 의논을 문의원과 하는 윤씨부인 심사에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진짓상 올릴까요?" 삼월이 문밖에 와서 물었다. "오냐." 준구는 대 답해놓고 문의원에게 옆모습으로 보이며 비스듬히 자리에 앉는다. '내 비록 형편이 궁하여 이곳에 와 있기는 하나 이 집에 신세 못질 처지는 아니다. 나야말로 이 집의 유일한 친척인데 사람을 이리 대접할 수 있겠느냐? 임자 는 아닐지라도 내가 거처하는 방에 내 허락도 없이 어디 뼈귄지도 모를 저 늙은 것이 척 들어앉아 웃고 있어? 괘씸하고나! 어디 두고보아라. 내 녹록 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리. 그렇다! 서울로 가자! 가서 아내와 아들을 끌 고 오는 거다. 설마 내쫓지는 못하겠지. 내쫓는 날까지 어디 한번 겨루어보 자. 시어머님 조씨부인은 분명 내 조부의 누이동생이었것다? 늙은 암늑대 같으니라고. 제 아무리 담력이 센들 시어머님붙를 내어쫓진 못하리. 억만금을 준대도 끄덕 않고 내 이 집에 죽치고 있을 이 니 어디 두고보아라.' 조준구의 눈은 번쩍번쩍 빛났다. 다소 신경이 과민해 있었다. 서희가 늙어죽기까지 혼인을 안 할 리고 없겠는데, 뻔히 아는 일이 왜 그다지 조준구 마음에 거슬리었을까. 삼월이는 준구 앞에 저녁상을 놓 았다. "문의원께서는 저녁 드시었소?" 조준구는 억지로라도 목소리를 밀어 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염려 마시고 드시오." 조구는 술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차츰 침묵에 견디기 어려워옴을 느낀다. 문의원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좌선하는 중같이 고요히 앉아 있었으며 준구에 대 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물어놓고 준 구는 참을성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화를 내었다. "남원으로 해서 연곡사를 다녀오는 길이오." "남원?" "예." "문의 원께서는 진맥만 용한 줄 알았는데 중매에도 능이 있습니다그려." 문원은 여전히 앉은 자세를 허물지 않고 미소만 띄운다. "그래 성사가 될 성싶 소?"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소이다." "예? 모르시겠다구요?" 하고 비 웃는다. "연곡사의 우관을 찾아서 갔다 오는 길인데 사바를 떠난 중을 데 리고 무슨 일을 꾀하겠소?" 문의원은 점잖게 준구를 희롱했다. "남원에도 중 친구가 계시오?" 자제심을 잃고 준구는 야비하게 나온다. 예. 친구는 없 어도 중은 있더군요, 소도 있고 나귀도 가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개새끼 꼴 도 볼 수 있고 거 이도령한테 수절하던 못난 계집 춘향이 놀던 광한루 구 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지요." 문의원은 이번에도 빙그레 웃었다. 준구는 얼굴을 붉힌다. 순간 그는 문의원의 비윗장을 건드린 것은 실수였다고 뉘 우쳤다. "이번 연곡사에 가서 우관, 예 중놈입니다. 그 은 중이 내 친구지 요. 어찌나 입심이 좋던지. 어서 진지 드십시오." '늙은 여우 같으니라구.' 준구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밥을 입속에 밀어넣는다. 저녁상을 물리고 숭 늉으로 입가심을 한 뒤 준구는 상냥하게 표변한 태도로 슬며시 시국 이야 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아까 폭언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일을 생각하면 낯 간지러운 일이었으나 문의원과 아주 틀어져서도 안되 겠다는 생각을 한 때문이다. 얇삭하기로 접시바닥 같은, 속이 훤하게 들다 보이는 이야기는 서재필에 관한 것이었다. 명문의 자제로서 갑신정변 때는 이십의 약관으로서 일의 성패야 어찌 되었든, 또 삼일천하의 짧은 시일이 든 하여간에 병조참판을 칭하던 그 사람이 만리이국 미국에 가서 공부한 것은 의학이었으며 이 미개한 나라에서는 의원을 천시하지 개명한 나라에 서는 의원의 대우가 으뜸이요 기술로서가 아니라 학문으로서 연하며, 어쩌 구저쩌구 문의원의 환심 사기에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돌아와서 외 무대신 자리를 마다하고 신문을 만들고 몽매한 백성을 깨우치려 노력하였 지만 실상 그분의 본업은 의학박사였단 말씀이오. 외국에서는 박사라면 거 대단한 거지요. 그런 양반이 이곳에 부질 못하고 돌아갔으니." "돌아갈 수 밖에 없지 않소." "글쎄올시다. 상감께서 지나치게 소심했기때문이지요. 왕 실을 없이하고 미국처럼 대통령을 뽑을까 두려워하신 나머지, 이래가지고 는 나라가 안 망하고 어찌 견디겠소? 내 역시 가문을 말하자면 남에게 뒤 지는 편은 아니오만 나라꼴이 제대로 되려면 식자들이 먼저 깨달아야 하고 서재필이 그 양반과 같이 서양 문물에 밝아서 반상의 구습부터 타파해야 할 것이오." 그때그때 형편 따라 생각을 고치는 것쯤조준구 에게는 여반장이지만 반상의 구습 타파라는 말은 매우 어렵게 한다. 기 의 사에 반한 말이라서이기보다 동학이 이 고장에서 판을 치더니 최참판 식구 들도 쓸개가 빠졌나 보다고 조금 전에 한 말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양 문물에 밝은 것도 좋고 반상의 구습을 타파하는 것도 좋고, 허나 서재필인 가 그 양반같이 되는 것은 곤란하지 않겠소?" "그건 또 왜 그러시오?" "그 양반이 명문의 자제로서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겠는데 이십 의 약관으로 장 사들을 이꿀고 국사를 바로잡을 충심에서 거사한 먹으로 의술을 배운 것도 장한 일이었소. 허나 그 양만이 어디 우리 나라 백성이오? 이름 석자를 버 리고 그곳 이름에다 그 나라 백성이 되었고 그 나라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 였는데, 근본이 잘못 되어버린 그 사람 본을 따는 것은, 글쎄올시다. 산간 벽촌에서 침이나 꽂고 약방문이나 쓰는 늙은이 소견에는." 준구는 그만 머 쓱해지고 만다. "그,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입속말로 우물쩍거렸다. 김훈장 같으면 응수할 말도 있었고 얼 버무리는 것도 효과 있게 했을 터인데 신분적인 멸시감을 가지면서도 상 그러했듯이 상대가 녹록치 않음을 깨닫는다. 오늘따라 그의 비위를 건드려 준 것을 후회하는 기분과 아울러 조준구는 매우 난처하다. 이때 마침 삼월 이가 왔다. 삼월이는 당황해하는 얼굴로 "나리께서 불편하시다면 저, 저 저 쪽 방에 자리를 마련하라 하시는데요." "나 말이냐?" 조준구는 믿을 수 없 다는 듯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예." 뭐 그럴 것 없 네. 여기 함께 자릴 깔게. 이야기나 하면서." 문의원은 온건하게 말했으나 자신이 저쪽으로 가겠다 하며 사양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아니다. 저 방에 자리를 보아라! 나는 곁에 사람이 있으면 잠을 이루지 한 다." 조준구는 거의 울부짖듯 말했다. 풀이 죽은 삼월이는 조준구가 쓰던 침구를 마루에 내어놓고 새로 가져온 이부자리를 문의원을 위해 폈다. 큰 대청을 사이하여 이쪽저쪽으로 갈라진 방에 결코 등분의 차이가 있었던 것 은 아니다. 다만 하나는 치수가 쓰던 방이요 하나는 협실이 딸려 있어서 뒤뜰로 통하게 되어 있고 계집종들이 협실을 지나 들락거리는 일이 았다. 윤씨부인으로서는 준구도 객이요 문의원도 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나이를 대접하여 문의원을 치수 거처방에 묵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준구에게는 가혹했다. 어쩌면 너의 위치를 명심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는 윤씨부인의 경고였었는지도 모른다. 자리는 보아놓고 일어서서 나간 삼월이 방문을 닫았다. 마루에 내어놓은 이부자리를 안고 가는 발리 가 들렸다. 입술을 실룩거리며 앉아있던 준구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사 도 없이 방문을 밀어젖히고, 다음은 거칠게 닫았다. 삼월이는 자리를 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선 준구는 삼월이를 내려다본다. 긴 머리채가 등을 타 고 엉덩이 밑에까지, 자주 댕기가 방바닥에 닿아 몸이 움직이는 데 따라 흔들린다. 준구는 돌연 삼월이 등뒤에서 덮쳐들었다. 살인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준구는 두 팔로 여자의 몸을 조이면서 손을 유을 더듬는다. "나리, 어쩌려고 이러시오." 삼월이 목소리를 죽였다. "잔말 마 라!" "문의원께서 들으시겠습니다." "잔말 말라니까!" 준구는 이불 위에 삼 월이를 쓰러뜨렸다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한손을 뻗어 협실 문을 밀어붙이 고 삼월이를 그곳으로 끌고 들어간다. "안됩니다. 마님께서 부르시면 큰일 납니다." 삼월이는 치맛말기를 잡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부르면불렀지 잠깐, 잠깐이야." 숨을 허덕이며 덤벼들었다. "이놈의 세상!" 울분인지 욕인 지 준구는 삼월이를 집어삼킬 듯이 맹렬하게 덤볐다. 욕심을 풀어버린 준 구는 협실에서 기어나와 깔아놓은 이불 위에 벌렁 나자빠졌다. "밤에 또 와." "싫습니다." 얼굴이 시뻘개진 삼월이는 화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라면 오는 거야."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20장 김서방댁멍석에 엿기름을 펴놓고 김서방댁은 꾸부렸던 허리를 폈다. "허리야. 날이 궂을란가?" 허리를 두드리며 마루에 굴러 있는 곰방대, 담배 그릇을 끌어당긴다. 해는 반나절쯤 된 것 같았다. 푸성귀밭에 흰나비 두 마 리가 맴을 돌고 뒤쪽 대숲에서 참새떼가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붙 여문 김서방댁은 볼꼬사납게 연기를 뿜어낸다. 헤벌어진 속삼 사이로 내비 쳐진 검은 살결도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요눔으 닭우새끼!" 곰방대를 휘 두른다. 엿기름을 쪼아먹던 닭이 구구거리며 슬며시 달아난다. 김서방댁은 다시 담뱃대를 빨아댄다. "성냥간에 식칼 없다 카더마는." 지난 가을 가뭄 이 들어서 꺠농사가 실치 못했으나 그래도 먹을만큼은 깨를 털었는데 살림 살이에 규모가 없는 김서방댁은 이리저리 마을에 인심을 고 친정 온 딸에게 긴요하지도 않는 깨를 덥석 펴주고 보니 정작 자기네한는 양념깨 한 톨이 남지 않게 되었다. '머니머니해도 임석이란 양념이 갖아야, 아무리 개기다 머다 해도 양념 없어보제? 무신 맛이 나는고. 산채라도 양 념만 갖게 해놓으믄 밥맛이 절로 나는 기다. 사람들은 의복이 날개라 카지 마는 이팝이 분이라는 말이 더 맞니라. 계집은 머라 캐도 임석 솜씨가 있 어야 큰소리치지. 질삼이사 못하믄 장에 가서 끊어오믄 될 기고 바느질이 사 성시 있이믄 삯 주어 해입을 기고 임석만은 못 그라네. 조석으로 는 거 를 사 묵겄나 삯 주겄나? 임석이란 솜씨 자랑 말고 양념단지 갖추라 캤는 데.' 흉년 때문에 죽도 끓일 수 없게 되었다고 양식을 얻으려 온 딸에게 그 따위 철딱서니 없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깨를 퍼준 김서방댁은 살림살 이에 규모 없는 자신을 탓할 생각은 아니 하고 대장간에 식칼 없다는 말만 태평스럽게 뇌고 있는 것이다. 신돌에다 대고 두드려 재를 털어낸 곰방대 를 마루에 팽개친 김서방댁은 보시기 하나를 찾아들고 나선다. "좀 돌라 카지 별 수 있나. 아, 야앗, 허리가 와 이카노? 날이 궂을란갑다." 일손이 빠른 김서방댁은 아침나절 조밭을 매어놓고 움이 알맞게 튼 엿기름도 펴 말려놓고, 그러고 보니, 할 일이 없어 심심하기도 했다. 깨도 얻을 겸 누구 든 붙잡고 이야기 할 심산인 것이다. 채마밭을 질러서 뒤꼍을 돌아 별당 옆을 지나가는데 별당 뜰에 쭈그리고 앉은 봉순네 뒷모습이 에 띄었다. " 봉순네 거기서 머하노?" 봉순네가 돌아본다. 또 업덩어리를 만났고나 하는 표정이다. "깨가 떨어져서 좀 얻으까 싶어서." 하며 김서방댁은 보시기를 쳐들어 보인다. "깨가 떨어져요?" "식범 겉은 얼굴 하지 마라. 머 봉순네 니 살림도 아닌데 와 그리 엉그리노?" "아니, 작년 가슬에 깨 많이 했다고 자랑한 사램이 누군데 그러요?" "어디 나 혼자 묵나?" " 다 퍼주었구만." 봉순네는 혀를 찬다. "퍼줄라꼬 해서 퍼준거는 아니고," 하 다가 별안간 무슨 생각이 났던지 "세상에 그년들 얘기 좀 들어보래. 그년들이 있는 것 없는 것 다 얻어 묵고," 하며 시작할 판인데 "시끄럽소, 들으나마나. 주지 말고 야속다하지 말 일이지." 봉순네는 돌아앉아 버린다. "우째서 모두 내 말이라 카믄 노내 기 챗국겉이 그리 싫어하노. 그런데 니 석류꽃은 머할라꼬 줏노?" "아까바서 줏소." "아깝다니 그기이 어디 쓰이나?" "멍도 안 들고 시들지도 않고 우찌나 이쁜지." "미쳤다. 할 일도 없는다." "해가 들믄 시들 것 아니요." "사십이 넘은 제집이 그래 그 꽃 가지고 사깜 살 것까?" "애기씨 줄라꼬요. 바구니에 수북이 담아놓으니께 볼만 안 하요? 이런 빛 깔 다홍치마가 있다믄 한분 입어보고 싶소." "니도 가리늦기 맴이 싱숭생 숭하는갑다. 서방 없는 과부라 할 수 없고나. 서방 생각이 나서 그러제?" 음탕하게 웃는다. 봉순네는 성이 나서 노려본다. "나잇살이나 묵어감서 우 찌 입정이 그렇소? 그러니께 밤낮 내 것 펴주고도 남한테 좋은 리 못 듣 지." "노래미 창자다, 노래미 창자. 금시 그리 성을 낼 거는 머 있노. 내 말 이 글러서 그러나? 음양의 이치가 그런 건데 니가 머 숫처니도 아니겄고 자식까지 낳았이믄 알 거는 다 알 긴데 그래쌀 것 없거마는. 그는 그렇고 어느년이 내 것 묵고 욕을 하더노. 세상에 내 욕하는 년들 죄 받지 죄받아. 묵을 때는 성님아 아지매야 함시로, 그년들 복장을 그리 묵고 복 받겄나?" "주지 말고 싫은 소리 하지 말지." "내가 무신 싫은 소릴 했다고 그러노." "모르니께 탈이 지. 알믄 고칠 긴데. 두만네보고는 또 무신 소릴 했길래 그 엄전한 사램이, 응?" "허 참, 말 이라고는 간난할매한테 공을 디리쌌더마는 밑천은 실하게 뽑았다 했지. 그 말이 머가 그리 비우에 거슬리든고?" "김서방이 골병들겄소." 봉순네는 혀를 끌끌 찬다."그 놈의 남정네 말은 내 앞에서 하지도 마라. 내가 문둥인가? 내 말만 하믄 산 너머 간 부애가 쫓아오는가? 골병이사 내가 들지 와 지가 들꼬?" 라고 시작하여 숨쉬는 것조차 아끼듯이 내리 지꺼여댄다. 봉순네는 아예 듣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는 김서방댁도 싱거워진 모양이다. 넋두리를 끊고 "봉 순네." "..." "우리 애기씨 말이다." "..." "남원의 이진댁이라 카든가? 정말 그 댁하고 말이 있나?" "모르겄소." "니가 모른다고?" "내가 어찌 알 기요. 모르요." 김서방댁 얼굴에 심술이 나돋았다. 알면서 자기에게는 털어놓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실 봉순네는 그 일에 대해서 자세히 는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한마디라도 말이 잘못 나간다면 주착인 김서방댁 이 어떤 말을 퍼뜨릴지 염려되었다. 그래딴 전을 폈다. "김서방댁 그 꼴이 머요!" "와." "이러고 있다가 마님께서 오시 믄 칭찬하시겄소." "와, 내 꼴이 우떻노?" "내가 해 준 적삼을 우짜고 속적 삼바람이요." "늙은기이 꼴내믄 머할꼬? 꼴낸다고 누가 업어가까? 친정 온 우리 큰아아 주었지." "아무리 늙으도 그렇지, 그러니께 김서방이 바로 안 볼라 카지." "흥, 바로 안 보믄 우짤 기든고? 지가 내 뵈기 싫다고 제집질 하까. 그것이사 안 하지. 자랑 말이 아니라 밉네 곱네 하서도 자식은 낳았 고 남으 제집한테 눈 안 뜨는 그거 하나는 내 복 아니가. 그런거 가지고는 속 썩인 일 없구마." "사램이 용해서 그렇지. 내가 남자라믄 일시도 못 볼 긴데, 어이구 무써리야." 안 한다 안 한다 하면서도 어느덧 봉순네는 김서 방댁 말상대를 해주고 있었다. "니 아무 리 그래싸아도, 내가 부러울 거로? 손끝 야문 것 무신 소용고? 제집은 팔 자가 좋아라 하네라. 구중궁궐 속에서 갖은 호사를 다 해도 외기러기 울고 가는 소리는 애달픈 기다. 제집은 자식 놓을 때, 자식 놓고 지지고 볶으믄 서 살아도 가장 밑에서 살아야. 천하절색 양귀비는 뭐하노? 임 없는 절색 아무 소용없다. 임자 있는 박색보다 머가 낫노! 손끝 야물고 범절 차리고, 그거 다 소용없다." 김서방댁은 팔을 휘저어가며 무엇을 하러 기 왔든가 그것도 잊고, 봉순네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 가 아랑곳도 없다. " 한나 이나 젊으니께 이러고저러고 함서 손끝 뜯어먹으믄서 세월가는 줄 모르지 마는 나이 들어보지? 적막강산디아, 적막강산. 딸자식을 키워서 남 자고 나 믄 그만 아니가? 내가 왜 혼자 살았던고 함서 가슴 칠 날이 있일 긴께. 옛 말에도 재주 있는 놈치고 안 빌어묵는 것 못 봤다 하는데 바느질쟁이 잘사 는 거는 나도 못 봤구마. 흥, 손끝 야문 것 가지고 유시를 해, 유실 해?" 시비 끝도 아닌데 김서방댁은 시비로 착각을 했던지 봉순네에게 바로 들이 대면서 삿대질가지 한다. "아니 김서방댁!" "음." 조금은 아뿔사 싶었던지 주춤한다. 봉순네 얼굴에는 핏기가 가셔지고 없었다. "내 빌어묵도록 제발 오래 사소. 그것도 팔자 소관이라믄 할 수 없지요. 그거는 그렇고, 내가 언 제 유실했소? 내 손끝 야물다고 언제 유시를 했느냐 말이요." 돌연 김서방 댁은 히히히 하고 웃는다. "머, 내가 봉순네라고 그랬나. 이를테믄 말이 그 렇다 그 말 아니가. 어디 그기이 내 말가? 흔히 재주 있는 놈 빌어묵는다 안 하든가배." 다시 히히히 하며 웃는다. 맥이 빠질 일이었다. "봉순네!" 서 희가 봉순이와 함께 쫓아 들어왔다. 그들 뒤를 삼월이 따라 들어왔다. 안정 을 잃은 모습이었다. "어디 갔다 오십니까?" "우리 산에 갔다 왔어. 이봐. 산딸기 많이 땄지?" 꽃바구니를 내보인다. 빨갛게 익은 산딸기가 가득 들 어 있었다. "산딸기도 좋지마는 이 손등 좀 보이소. 넝쿨에 막 할키가지고. 삼월이 니도 철없다. 산에는 머할라꼬 갔노." "마님께서 애기씨보시고 산이 랑 강가에 가서 놀라 하시믄서 날 따라가라 하데요." 봉순네는 아무말 못 한다. "음..... 나는 연이네한테 가서 깨나 좀 얻으까?" 김서방댁이 일어서 나간다. 봉순네는 "애기씨, 이 석류꽃 이쁘지요?" "응." "방에 갖다 놓으믄 이쁠 기요. 내일 아침이믄 다 시들겄지마는."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 을 본 봉순네는 잠시 동안 삼월이를 지켜본다. 삼월이는 봉순네 입에서 무 엇이 나올지 두려운 듯 우두커니 발 아래를 내려다보며 떠나지 못하고 서 있다. "삼월아!" "야." 봉순네의 눈빛이 몹시 엄격해진다. "너 몸조심 해야 한 다." "..." "마님께서는 아무 말씀 안 하시지마는 무서운 어른인 줄은 너도 알고 있일 기다." "..." "니한테 잘못이 없는 것은 나도 안다. 니가 피하노라 고 고생한 것도 안다. 그러나 이자부터는 니 맘대로 안 될 기니 그기이 걱 정이구나." "..." "어디 가서 원망할 곳도 없일 기고 천하게 태어난 거나 한탄할까..." 말을 하면서도 봉순네는 막연해진다. 조준구라는 인물의 존재부터가 막연하다면 막연했다. 식색이라 하기에는 엄연한 최참 판댁 친척이요, 친척이라 하기에는 또 뭔지 모르게 막고 나서는 것이 있었 다. 그러나 어쨌든 상대방은 양반임엔 틀림이 없다. 상사람이 항거해서는 안 되는 양반이다. 삼월이 종의 신분인 이상 울며 겨자먹기로 용납하지 않 을 수 없는 일이다. 봉순네의 기분이 막연해지는 다른 한 가지이유는 삼월 이에 대한 기분도 있다. 일 년 남짓 동안 삼월이 조준구를 피해 다닌 것을 봉순네는 알고 있었다. 봉순네 앞에서는 서슴없이 조준구의 험담을 했던 삼월이었다. 그러한 삼월이를 과연 조준구에게 몰아붙여 놓고 적의를 가져 야 하는가. 봉순네 는 조준구를 늘 의심해왔고 경계해왔다. 그 기분을 삼월 이에게도 가져야 하는지 망설여지는 것이다. 여자란 어리석다.본성이 착하 고 귀녀와는 천양지간이라 하더라도 한번 헌신한 남자에게는 상대가 몹쓸 간 일 경우라도 여자는 약해지며 눈이 어두워지는 법이다. 서희를 데리고 산 에는 뭣하러 갔느냐고 나무랐던 것도 봉순네의 마음은 결코 평온할 수 없 었기 때문이다. '비우도 좋고 낯가죽도 뚜껍지.' 조준구에 대한 비방도 이 제는 삼월이 앞에서는 드러내놓고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라는 팔잔가배 요." 삼월이 푹푹 울기 시작한다. 그의 마음도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얼마 전까지 만 해도 다른 노비들의 마음과 삼월이의 마음은 다름이 없었다. 붙이 는 외로운 집안을 들어먹으려고 노리는 늑대같이 조준구를 보았었다. "생각해 보믄 체모 잃은 짓이지마는 지나간 일 탓하믄 머하겠노. 마님께서 처분을 우찌 내리실지 그거는 모를 일이나 니를 생각하니 서울 그 양반 형편이 나 아져서 소실로 데려가기만 한다믄 니를 위해서는 더 바랄 기이 없일 성싶 다마는, 어디 사는 일이 뜻대로 되드나?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 캐도니 하 기 탓이니께 마음 잘못 묵는 일만 없이믄," 삼월이는 몹시 흐느껴 울었다. 기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했겠지만 조준구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봉순네 말대 로 형편이 나아져서 소실로 서울만 데리고 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양 반 집안에서 종첩 두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나으리, 저를 버리시면 저 는 죽습니다.' '설마 너를 버리겠느냐? 걱정 마라.' 품에 안고 있을 때 무슨 말을 못할까. 일시의 노리갯감으로 지내다가 훌쩍 서울로 떠나버리고 잊는 다 하더라도 별 수 없는 일이다. "울지 마라. 내가 너 맘을 상하게 했는갑 다. 니 심정을 믿고, 경망스런 처신은 말아라. 눈들도 많고 하니." 눈물을 닦고 별당 밖으로 나간 삼월이는 이내 되돌아왔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와 그러노." "저, 저, 마님께서" 하다가 삼월이는 몸을 부르르 떨 었다. "말을 해봐라." "사랑의 나리가 마님하고 함께 마루에 서." "무신 말씀을 하시던가?" "그분, 그, 그, 그분이 서울 가실란가배요." 삼월이는 봉순 네에게 넘어지듯 하며 울음 소리를 죽인다. "가시기야 전에도 가싰지." "혹 나 땜에 마 님께서." "그러세... 가만 있거라. 내 나가 한번 실피보자." 붕순네는 월이를 밀어내고 안채로 돌아왔다. 윤씨부인은 마루 끝에 서 있었고 조준구는 신돌 위의 신발을 신고 었다. 봉순네는 까닭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넌지시 내려다보는 윤씨부인의 눈길은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노여 움도 아니었고 냉소도 아니었고 멸시도 아니었다. 조준구를 내려다보는 의 눈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것에 대하여 갖는 연민이라고 할까. 조준구 도 그 눈길을 의식하였음인지 한동안 실발을 신을 뒤에서 앞을 떠나지 못 하고 몸을 굳힌 채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을까. "봉순 네." "예." "서희가 돌아왔느냐?" "예, 돌아오셨습니다." 이때 마침 김서방댁 은 연이네를 잡고 한참을 지껄인 끝에 깨를 얻어서 돌아나가다가또 무슨 생 각에선지 별당으로 봉순네를 찾아가 그곳에 없는 것을 보고 무심히 안채로 돌아왔다. 마루 끝에 우뚝 서 있는 윤씨부인을 본 김서방댁은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 다. "저 아낙의 꼴이 왜 저 모양이냐?" 봉순네는 돌아보았고 그때까지 엉 거주춤 서 있던 조준구는 겨우 결음을 옮겨 뻣뻤해진 자세로 걸어나갔다. "천성이....." 봉순네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윤씨부인은 희미한 아주 희미 한 미소를, 그것도 감추듯 하며 "천성이면 할 수 없지." 이튿날 조준구는 서울로 떠났다. 집안 하인들 사이의 이야기로는 아주 떠난 것이라했다. 이 미 삼월 이와의 관계는 모두가 아는 비밀이었기에 그 일 때문에 조준구는 윤씨인에 게 꾸중을 들었고 또 쫓겨갔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있나, 그거는 니가 모 르는 이야기다. 우리 마님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니지. 쫓아내실라 카믄 벌 써 쭃아내싰지. 밉상을 좀 떨었다고? 이번만은 그 양반도 낯가죽이 간지러 바서 자기 스스로 떠난 기라. 이자는 다시 못 올 기구마." 그러는 중에서 삼수만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 했다. 삼월이에 대한 책임이 있어서 위로하느 라 그랬는지 모르나 그는 확실하게 조준구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 했다.돌 아오느냐 안 돌 아오느냐 시끄럽게 말이 되는 것은 물론 삼월이 때문이다. 집안에서 동하 는 편이 있는가 하면 돌이와 복이 그리고 수동이는 삼월이를 좋잖게 대하 는 편이었다. 복이와 돌이는 삼월이에게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다. 수동이는 조준구를 너무 미워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도 동정하는 편과 시 하는 편, 양편으로 갈라져서 들일하는 사이사이 말이 오고가곤 했다. 그 말 은 김훈장 귀에도 들어갔다. 김훈장을 줄곧 조준구와 사귀어오던 터이어서 그 말을 누가 귀에 넣어주었던 모양이다. "허허, 그것 참 안되었고나. 강약 이 부동인데, 몹쓸 짓을 하고 갔구먼. 아무리 노비기로 노류장의 계집이 아 닌 바에야, 그럴 수가 있나. 몸을 버렸으면 의당 데리고 가야지.허 참, 그렇 게까지 몹쓸 사람인 줄은 몰랐구먼." 성근 수염을 쓰다듬으며 무연히 었다. 삼월이는 여위어갔다. 삼수가 아무리 돌아올 것이라 했어도 삼월이는 믿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준구가 삼월이에게 남긴 말은 없었다. 원망이란 희망 이 있을 때에 생기는 마음이다. 삼월이는 준구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움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밤이 되면 그는 잠을 잘 수 없었고 구 미를 잃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옛날 구천이에 대해서 느낀 그움 같은 것 은 사실 삼월의 생애하고는 연이 없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별당 아씨와 구천이 달아났을 때 삼월이는 세상이 허무하고 쓸쓸했으나 침식을 잃지는 않았었다. 날로 여위어가는 삼월이를 두고 김서방와 김서방댁이 한 밤중에 대판으로 한번 싸웠다. 불을 끄고 자려는데 "그눔으 가시나 지 푼 수에 그 양반 소실 될라 캤던가? 세는 짧아도 침을 질게 뱉는다 카더 마는 지 주제에 돌이나 복이나 끼어맞추어 주는 대로 기다리고 있일 일지, 낯짝 반반하다고 넘친 생각을 한 기지." "허 참 시끄럽거마는, 잘라 카는 데." 김서방은 이불 속에서 혀를 두들겼다. "아 내 말이 그르요? 오르지 못 할 나무는 치다보지도 말라 캤는데, 사나이들이사 열 계집 싫다 하까? 그 생각을 못하고 지 신세지가 조졌지." "이 소갈머리없는 늙은것아! 삼월이가 그러고 싶어 그랬나. 그저 말이라믄 사죽을 못 쓰니께 어이 그만," 김서방 은 돌아누웠다. "와요? 이녁 무신 상관 있소?" "..." "하 참, 어느쪽이 늙것꼬? 그래도 밴밴하게 생겼다고 가시나 편역드는 것가?" "미친 것! 백 분을 말 하는 무신 소용고. 내 입을 놀린 기이 잘못이지." 김서방은 자신이 또 걸려 들었구나 싶었다. 말이 나오지 않아 걱정이지 김서방댁은 얼씨구나 좋다 싶어서 물고 늘어질 것이 뻔했다. 이불을 훌쩍 걷고 일어나 앉은 김서방댁 은 등잔에 불을 켰다. "오늘 밤에는 하늘이 두 쪼가리가 나는 한이 있어도 따지야겠구마. 보소, 대관절 나를 몇푼어치로 생각허요?" 생떼였다. 그것은 병인지 모를 일이다. 이불 속의 김서방은 자기 가슴을 치고 싶도록 후회를 했다. 공연히 말을 받아 오늘 밤 잠자기는 다 틀린 일라 생각하니, 내친 걸 음인가 "개 값도 안된다! 와!" 하고 고함을 질렀다. "개 값도 안 된다꼬? 자식 낳고 살아온 라를 개 값도 안 된다꼬? 개 값도 안 나가는 기집 왜 데 꼬 살았노! 애씨당초 말았이믄 될 거 아니가. 이제 늘고 할수헐수 없이니께 날 박대하는 것까! 젊은 시절에는 안 그랬나? 문둥이보다 더 보기 싫다고 저눔으 아가리로 말했제? 안 했다고 말 못할기구마. 이자는 아들 낳고 딸 손주까지 봤이니 설마한들 내 살아온 정을 모를까 더 니 이거는 살아갈수록 태산이 아니가. 말만 하믄 일일이 막고 나서믄서 사 람의 입이 흙 속에 묻히서 썩으믄 모르까 우찌 할말도 못 하고 살라 말 고." 언제까지 계속이 될지 알 수 없는 넋두리다. "에이! 빌어묵을!" 김서방 은 견디다 못해 일어나서 방문을 박차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김서방댁은 재빨리 남편의 다리 하나를 낚아챘다. "내 죽으믄 고만이다! 문이보다 보기 싫다 카는 이 늙은 것이 죽으믄 고만 아니가." 어이어이 우는 것이다. 함께 살아오면서 몇천 번을 들었는지 모를 꼭같은 말이었다. 그것을 뻔히 알면 서 김서방은 여전히 죽는다는 말이 무서웠다. 죽는다는 말을 겁내고 있는 자기 자신의 소심을 가슴 치고 한탄하면서도 무서웠다. 가는 엉덩방아를 찧는 시늉을 하며 방에서 감히 떠나지 못하고 이불을 집어쓰고 목구멍 속 에서 울부짖는다. '마음대로 해라. 죽을라 카믄 죽어라! 내가 아나!' 그렇게 승강이를 하는 날 밤은 으레 새벽까지 수난을 겪어야 한다. 아침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김서방댁의 얼굴은 멀쩡했다. 21장 바닥 모를 늪 "어디로 가꼬? 멀리 달아났이믄 좋겄다." 빈 집안을 빙빙 돌면서 용이 중얼거린다. "멀리 달아났이믄 좋겄다." 옛날 모친이 살 아 있을 때도 달아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깨닫고 울었던 용이가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역시 달아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위해목 이 메이는 것이다. 그는 집을 나섰다. 모두 들에 나와서 일들을 하고 는데 무인지경을 가듯이 용이는 걸어간다. 둑길로 올라선 용이는 강물을 오랫동 안 바라보고 서 있다가 모래밭으로 내려간다. 짚신 밑에서 전해져오는 모 래의 열기가 조금은 쾌적했다. 강 너머 대숲에 쏟아지는 햇빛은 아마 지금 이 한창인 듯, 청록색 강물을 따라 용이는 상류쪽을 향해 걸어올라간다. 한 참을 걸어올라갔을 때 산모롱이에 가려져 마을은 보이지 않게 되다. 그곳 에서부터 바위가 나타나지 시작했다. "어디로 가꼬? 소리도 매도 없이, 이 산천을 잊을 수 있는 곳으로 달아날 수는 없이까? 이 산천을 잊을 수 있 는? 무엇을 못 잊는다말고?" 못 잊을 것은 아무것도 없을 성싶었다. 애착 이 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응달진 곳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 부모의 무덤이 는앞에 떠올랐다. 모친의 얼굴이 떠올랐고 기억조차 희미한부친 생 각이 났다. 마마에 죽은 누이의 얼굴도 떠올랐다. '이놈아! 이 불효 막심한 놈아!' 부친의 고함이 들려오는 것 같다. 언제였던가,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밤 마루에 나앉아서 얼굴에 돋아난 구슬을 잡아뜯으며 우는 누이를 위해 세수를 하고 의관을 차려입은 부친이 손님네하 며 빌던 그 우렁우렁하게 울리던 목소리. '용아, 니 나이 사십을 바라보데 우짤라고 아직도 마음을 못 잡노. 조강지처를 박대하믄 빌어묵는다. 여자란 남자 하기 탓이지. 인연이 없는 계집 생각을 하믄 머할 것꼬?' '그렇소. 어 매 말이 맞소. 인연 없는 계집 생각을 왜 내가 하겠소?' 용이는 바위를 건 너뛰어간다. 깎아지른 듯 암벽과 잇닿은 강물은 그늘이 져서 한층 짙게 일 렁이고 있었다. '새북마다 생각하요. 오늘은 들판에 나가서 을 하자고. 해가 솟으면 그 생각은 간 곳이 없고 계집들 얼굴이 뫼구 겉이 보이는 거를 우 짜겄소? 어매 잘못이요. 신발은 발에 맞아야 한다 했소. 손바닥만한 남으 땅뙈기 부치묵고 사는 농사꾼이 망하믄 얼매나 망할 기며 흥하면 얼매나 흥하겄소? 어매는 무당 딸하고 혼살 하믄 망한다 안 했소? 우떻게 망합니 까? 다 부질없는 말이요. 소용없는 말이요.' '원망 마라.그 기이 다 니 팔자 아니가. 니 말대로 부질없는 일이다. 쏟아진 물을 다시담 을 수는 없이니께. 그거는 그렇다마는 니 맘묵기 탓이 아니가? 니 말대로 손바닥만한 남으 땅뙈기 부치묵고 사는 농사꾼이 망하믄 얼매나 망하고 흥 하믄 얼매나 흥하겄노. 그거는 그렇다마는 우리 집안이 양반이 아니라도 조상은 종도 아니고 갖바치도 아니고 무당도 없었네라. 와 니가 그거를 생 각 못하노.' "용이 아니가아." 큰 목청이 맑은 공기를 흔들며 울려다. 강물 을 내려다보고 있던 용이는 소리나는 곳으로 얼굴을 돌린다. 윤보의 목소 리라는 것을 알면서 "니 일들 하는 꼴 안 볼라꼬 여기 왔제?" 대꾸 없이 용이는 다시 바위를 건너뛰어 낚싯줄을 내려놓고 앉아 있는 윤보 곁으로 다가간다. "좀 잽히요?" "누가 괴기를 낚나? 세월을 낚고 있는 기다. 강태 공은 아니다마는." 용이는 다래끼를 들여다본다. 텅 비어 있었다. "정 말 한 마리도 못 잡았구마요." "파이다." 그러고는 두 사람 사이에 침이 계 속된다. 용이는 강 건너쪽을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서 있었다. 이윽고 낚싯 대가 푸른 하늘에 원을 그리며 치올라갔다. 잉어 한 마리가 곤두선 채 뛰 고 있었다. 은빛 바늘이 예리한 칼날같이 희번덕인다. 낚싯줄을 당기는 윤 보의 울퉁불퉁한 마마자극 얼굴이 상기된다. 제법 큰 놈이었다. 잉어 아가 리 속에서 낚시를 끌러내어 다래끼에 집어넣는다. "니가 진작 올 거로그랬 나?" 하고 윤보는 싱겁게 웃었다. "이곳 인심 참 고약하더라." 미끼를 끼우 며 다시 윤보는 말했다. "와요?" 얼굴을 쳐들고 화개 쪽 산허리에 솜뭉치 처럼 피어올라오는 구름을 보며 용이 되물었다. "니 발밑 좀 봐라." 용이 눈을 내려뜨린다. 보이는 것은 바위 밑의 짙푸른 물이다. "머 말이요?" "머 가 보이노?" 윤보는 낚싯줄을 던져놓고 히죽히죽 웃는다. "물밖에 더 있 소?" "그래. 물이 있지." "...?" "시퍼런 물이 이만큼 있이믄 됐지 머." "...?" "지난해 가뭄든 것을 핑계하는 건지 인심이 고약해졌다. 미련한 것들이 강 물이 푸른 것을 모르고 하늘만 치다보거든." "천년만년 살고 저버서 그러 지요." "안 살고 저븐 사램이 어디 있노. 덩신들맨치로, 장에 가문 무더기 무더기 쌓놓은 기이 곡식인데." "무신 일이 있었소?" "나 온 더러바서, 말 하기도 싫구마. 배고프믄 송장 뜯어묵을 놈의 새끼들!" 짐작이 갔으나 용이 입을 다물었다. "막걸리는 두어 잔 마싰다마는 밥을 굶었더니 속이 쓰린 데." "밥을 굶었소?" "장에 갈 새도 없고, 하기사 언제 장에 가서 양식 팔 아왔나? 나참, 보리됫박이나 살라 캐도 내놓는 놈 한놈 없네. 그라믄 꾸어 달라했지. 그것도 마다 안 하나? 윤보가 돈이 없어 배를 곯나?" "그라믄 와 우리집에 안 왔소." 용이는 럭 역정을 낸다. "너거 집에 갈 정 없다. 계집들 손톱 밑에 든 곡식 꿀 생각이 안나더마." 해놓고 윤보는 곁눈로 용 이 기색을 살폈으나 용이는 양미간을 모은 채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 을 뿐이다. 마을의 인심이 나빠진 것은 사실이다. 그럭저럭 보리농사는 제 대로 된 편인데 지난해 가뭄 생각을 잊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은 보리 한 됫박을 내려 하지 않았다. 벼농사가 어찌 될지 마음을 놓지 못하는 때문이 다. 이제 일할 근력이 없는 안늙은이들은 비석이 있는 무덤가 백일나무 밑 에 모여앉아 들판을 근심스레 바라보며 입하나라도 덜게 그만 갔으면 좋겠 다는 말들을 했고 밀겨 떡을 들고 나오던 어린것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 게 되었다. 흉년의 공표에 한번 사로잡히기만 하면 농민들은 하늘도 땅도 믿지 않았고 다정한 이웃, 핏줄이 얽힌 동기간도 믿지 않는다. 오직 수중에 있는 곡식만 믿는다. "이년아! 시어미 밥그릇에 주개질할 적는 니 손목때기는 풍이 들제?" "어디 누구든 배불리 묵십니까." "흥, 네이사 들면날면 안 체묵나. 긴긴 해에 밥만 바라보고 있는 이 늙은 것 창자가 등 에 붙는 생각을 하나?" "들면날면 묵을 기이 어디 있십니까." "으뭉떨지 마 라! 내가 다 안다. 새끼들만 주렁주렁 내질러서 부모 공양할 줄 모르는 네 년은 나곁이 안 될 줄 아나?" "삼신이 한 짓을 지가 우짤 깁니까." "남들은 아들 낳아서 이팝에다 저승길 닦을라꼬 절에도 간다 카더마는 우째 나는 접시만한 창자도 못 채우는고?" "어무니 복이 없어서 안 그렇십니까." "이 년 쫑쫑 앙조가릴 것까! 네년은 내가 눈이라도 멀었이믄 싶을거다마는 내 다 봤다!" "멋을 봤십니까?" "새끼들 누른밥 들고 댕기는 것 봤단 말이다." "어머니, 그런 기이 아입니다. 우리가 딴 솥 걸어놓고 어머니한테만 죽 디 맀겄십니까. 푸근네 집에서 참판댁에 일해주고얻어온 누른밥 한덩이를 주 길래." "그래, 그라믄 그렇다 하자. 나신 것을 얻어왔이믄 새끼들한테만 옥 지질이 나도록 퍼멕이야 옳겄나?" "그 여믄 것을 어무니가 우찌 잡숫겄십 니까." "여물믄 끓이서도 못 묵나?" 가난은 이런 것이며 굶주림엔 체모가 없는 것이다. 제사 음식을 마을에 돌리고 혼례장을 찾아온 각설이떼에게는 술밥이 나누어지고 생일에는 며느리 손이 서 살림 망하겠노라 하면서도 떡 시루에 칼질하는 시어니 얼굴에 미소가 도는 그런 안정과 우애를 사람들은 순박한 농민들 기질이라 생각하지만 먹이와 직결되는 수성이 또한 농민들 의 기질인 것을. 풍요한 대지, 삼엄하고 삭막한 대지, 대지의 그 양면 생리 는 농민의 생리요, 농민은 대지의 산물이다. 좀더 날이 가물면 농민들의 눈 빛은 달라질 것이다. 남의 논물을 볼 는 야비한 도둑의 눈이 될 것이며 자기 논물을 볼 때는 도둑을 지키는 험악한 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으르릉거리며 시기하며 언쟁할 것이요 드디어는 괭이나 쇠스랑이무 기로 변하여 피 를 흘리게도 되는 것이다. "용아!" "..." "니 요새 읍내에 안 간다믄?" "가믄 머하겄 소." 윤보는 씩 웃는다. "와 안 가노? 가서 노름도 하고 소가 또 있이믄끌 고 가서 팔아묵 고." "소가 있이믄 그러겄소. 돈이 있이믄 가서 노름도 하고 계집도 사고." 용이는 두 눈을 희번덕이며 으르렁거렸다. "그라믄 오늘 저녁 나하고 가겄나?" 용이 굴이 하얗게 질려 윤보를 무섭게 노려본다. "가서 노름도 하고 술도 마시고 계 집도 사로, 어떻노?" 용이는 눈을 내리깐다. "그만해두소. 더 말하믄 형님을 이 물속에 처넣어부릴 기요." "개털을 삼 년 동안 굴뚝에 넣어두어도 색은 제 색이라 하더마는 니도 우찌 그리 지지리 못나게 변할 줄을 모르노. 사 내자식이 털털 털어부리고 가서 못 만날 것도 없일 긴데." "까짓 계집 만 나믄 뭐하겄소. 돌아올 것을 떠나기는 와 떠났던고?" 용이는 월선이 돌아왔다는 소문을들 은 뒤 읍에 나가지 않았다. 윤보는 은근히 약을 올려주고 있는 것이다. "노 름도 하고 술도 퍼마시고 소도 팔아묵고, 그뿐인가? 두 계집을 거나리고 하니께 어지간히 저눔도 간이 커졌는가 아니믄 영영 건달패가 될 긴가 싶 었더마는 흥, 보고 저브믄 가봐라? 이런 구석을 찾아댕기믄서 맘 아파할 것 머 있노? 종사꾼치고는 상팔자라. 계집 하나도 천신을 못하는데 차하면 셋 되겄네. 니 월선이 얘기 안 듣고 싶나?" "..." "돈을 벌어 왔다더마. 영감 얻어 간 기이 아니고 강원도 인삼장사라 카던 그 사람이 삼촌뻘 되는 사람 이라 카든가? 그럴 법도 한 일이지. 월선어미 인연이란 그런 거니께." "..."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이는 바위를 건너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 습은 윤보 시야에서 사라졌다. "빌어묵을 놈의 자식." 윤가 월선이를 만난 것은 달포 전의 일이었다. 읍내에 일거리가 있어 연장 태를 짊어지고 나룻배를 내리는데 방천 가에 멍하니 앉아 있는 여자가 있었다. 장날이 아니어서 나룻배 이외 별로 들어온 배는 없었고 사람도 드문 방천 가였다. 여자는 멍한 채, 땅 바닥을 더듬듯 잡히는 풀잎을 뜯어서 한잎 한 잎 강물에 띄워보곤 하는 것이었다. 그냥 지나치려던 윤보는 어디서 본 듯 싶은 모습이어서 발길을 멈추었다. 여자는 얼굴을 돌려 윤보를 올려다보았 다. "아니 이기이 누고?" 하자 여자는 소스라쳐 놀라며 일섰다. "월선이 아 니가!" "..." "어, 언제, 언제 왔노?" 월선을 말없이 헤죽하니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그간 잘 있었소?" "내야 머 노상 잘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그래." 했으나 윤보도 할말을 몰랐다. 윤보가 월선의 소식을 좀더 자세히 들은 것은 주막에서였다. "이자는 들앉을 집 한칸 장만해가지고 조촐하게 혼자 살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이가 있는데 언 제꺼정 혼자 살겄소? 가진 재물도 있이니께 놀량패들 눈에 불을 킬 기요." 주막 주모의 말이었다. "멋을 해서 재물은 장만했는고?" "알고 보니께 영감 얻어간 기이 아니고 그 강원도 삼장사라는 남자는 월선이 애비 동생이라누 마. 그러니께 그 삼촌 내외를 따라서 간도로 갔다든가? 거기 가서 멋을 했 는지 그거사 모르지마는 거기가믄 돈 번다 하더마. 하기사 우리겉이 쭈그 렁박 늙은 것이 간다믄 을 벌 긴지 그거는 모르겄소만." 주막에 건달패들 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의 얘기도 월선에 관한 것이었다. 월선 의 재물이 얼마쯤 되겠느냐는 것이었고 누가 그 여자를 낚느냐는 얘기였 다. "돈 좋지. 월선이 시세가 날로 올라가누만. 무당이고 백정이고 소용없 는 기라. 옛날 그 손에서 술잔 받아묵던 장돌뱅이들이 이자는 장에서 월선 이를 만나믄 굽신굽신,어느 대가 댁 마님을 대하는 것 맨치로, 그러니 우찌 사람들이 돈을 보고 환장을 안 하겄노." 주막 에서 그런 얘기를 들은 며칠 뒤 윤보는 다시 월선이를 만났다. 하루일을끝 내고 주막에 들르는 길에서였다. 초가였으나 칸수가 넓고 기둥도 탄탄해 보이는 집앞에 월선이 서 있다. 배 포가 두둑한 윤보였지만 왠지 월선이 다시 만난 것은 거북했다. 월선이는 도무지 옛날의 월선이 같지가 않았다. 그때보다 늙기는 했으나 아름다워졌 으며 도방 여자같이 옷맵시가 고왔다. 그러나 그런 변화 때문에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윤보는 월선이 아닌 월선이 허깨비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 일 갔다 오시오?" "일하고," 왠는 모 르지만 갑자기 함부로 말을 놓을 수 없어서 윤보는 어중간하게 대꾸하고 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기가 우리집이요." 월선이 또 말을 했다. "거 탄탄하구마. 집을 잘 장만했네?" 마주보고 있기가 민망하여 발돋 움하며 울타리 안의 집을 넘겨다 본다. 그러나 월선이는 윤보더러 들어와 서 쉬어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저어, 모두들 잘 지내고있소?" "모두 라니?" "최참판댁의," "그집 사랑 양반이 죽었고 귀녀도 죽고 평산이 성이 도 죽었구마. 평산이 마누라는 목매달아 죽고." "그 얘기는 들었소." "동네 에 한분 오믄 될 긴데," "욕하겄지요." "누가?" "봉순이어매랑 마님께서..." "그 사람들 일이야 나하고는 새가 뜨니께." "칠성이댁네..." 윤보는 저도 모 르게 월서의 눈빛을 살폈다. 푸른 기가 도는 월선의 눈엔 절망, 비애 원망, 그 어느것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얇삭하 고 연한 입술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용이 애를 가짔다 카더마." "자손없 는 집안에 경사 났소." 하는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윤보는 외면할 수 밖에 었다. "용이도 그리 되고 저버서 그런 거는 아니었으니께. 그놈도 지금은 미친놈 이 다 됐지." 월선이는 흐느껴 울었다. 놀이 묻어오는 길에서 소복한 여자 의 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 윤보는 차츰 화가 치미는 것을 느낀다. '미친 지랄들 하고 있다. 사내나 계집이나 꼭 마찬가지다. 이것들이 우짤라 꼬 이라는지 도통 나는 모르겄다. 제에기!' "머 이것저것 생각할것 없고 동네 한분 다니가는 기이 좋을 기구마. 최참판네 집하고는 의리도 있일기 니. 그라믄 나는 가야겄네." 윤보는 성급하게 지껄여놓고 우는 여자를 남겨 둔 채 주막을 향했다. 제4편 역병과 흉년 1장 서울서 온 손님들 나귀에서 내린 조준구는 키 작고 머리 큰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이, 뻣하게 힘을 주며 목을 돌려 사방을 돌아보았다. 긴장 때문인지 햇빛에 그을린 얼 굴은 굳어진 것 같았고 눈에 괴로움과 불안이 차 있었다. 뒤따르던 초라한 가마 두 틀이 멎는다. 짐 실은 나귀도 멎었다. 마부는 구레나룻에 얽힌 얼 굴의 땀을 닦았고 조군들은 조심스럽게 멜빵을 풀며 내려놓는 가마에 곁눈 질을 한다. "다 왔느냐?" 가마 안에서 묻는 말이었다. 보따리를 이고 따라 온 계집종이 "네, 아씨." 하고 대답한다. 가마 속에서 나온 여인은 삼십오륙 세쯤 되었는지, 사방을 휘잉 둘러보고 나서 까끄름하게 눈꼬리를 모으며 조준구를 바라본다. "자네, 행랑에 가서 서울서 행차시라고 급히 일러라." 여인의 눈초리를 얼른 피하여 조준구는 마부한테 다급히 말했다. 소란스 런 바깥 기척에 누구 하나쯤 쫓아나올 법도 한데 감감하여 아내 보기에민 망한 것이다. 여인은 그의 안사람 홍씨였다. 안 오겠다는 것을, 그야말로 감언이설로 얼러가면서 겨우 출발하기에 이르렀고 오는 도중 갖은 불평과 짜증부리기를 서슴지 않던 홍씨를 아무튼 이곳까지 데리고 오는 데 성공은 했으나 이를 맞이하는 최참판댁 응대는 여간 근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늙 은이와 어린 손녀가 있을 뿐인 최참판댁에서의 자기 위치는 당주 못지는 위세를 누린다고 홍씨에게 누누이 설명한 바도 있었으니. 칼로 찢어놓은 듯 가늘고 조그마한 홍씨 눈꼬리는 사납게 보였다. 눈동자는 자세히 가려 낼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었다. 눈과 같이 역시 조그마하고 도토름하게 솟 은 입술은 주름 하나 없이 번들거렸고 살결은 연하고 희었으나 기름이 가 라앉은 듯 어딘지 모르게 불결한 느낌이며 몸집은 작아서 암팡져 보다. 오 는 도중 주막에서 갈아입었는지 옥색 모시치마와 흰 적삼은 구김살이 없었 으나 옥색에 남빛 전을 두른 당혜 속의 버선을 깨끗치 못했다. 뒤늦게 달 려나온 복이와 길상이는 뜻하지 않게 요란스런 행차와 가마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보자 영문을 몰라 멍하게 바라보는데 다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 다. 홍씨가 타고 온 가마 뒤켠에 마치 짐짝같이 내버려져 아무도 관하 지 않았던 가마 속에서 뭔지 모를 이상한 것이 엉금엉금 기어나왔던 것다. 그것은 아이 였었다. 분명 사내아이임에 틀림이 없다. 얼굴을 봐서는 여남은 살쯤 된 것 같았고 평생 햇 빛이라곤 받아본 일이 없었던지 종잇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눈은 무섭게 었 다. 꼽추였었다. 아이는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듯 계집종 곁에 가서 치마폭 속에 몸을 숨기듯 하며 눈만 내밀고 사방의 형편을 경이에 찬 표정으로 살 펴보는 것이었다. 복이와 길상이는 이 처참한 광경을 장석처럼 지켜보고 서 있었다. 홍씨는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조준구는 창피함을 견디는 얼굴이었다. "길상아, 이놈!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 급히 마님께 서 여쭈어 라! 서울서 아씨가 오셨다고." 악쓰는 소리에 놀란 길상은 "예, 예." 하며 허겁지겁 대문 안으로 쫓아들어간다. 조준구는 복이를 노려보며 다시 말했 다. "삼월이는 어디 갔느냐." 복이는 노려보는 눈과 맞서며 말이 없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나와서 아씰 모셔들이라 이르지 못하겠느냐?" 반항적 인 몸짓으로 등을 돌리며 가는 복이 뒷모습을 준구는 낭패한듯 바라보다가 우물쭈물 돌아본다. "하인놈들이 왜 저 모양이오?" 홍씨는 을 찡그린다. "별안간의 일이라 넋이 나갔나보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저 장 석걸음 걷는 것 보시오. 바깥의 기척이 이리 역력한데 낮잠들을 자는 게 요?" 언제까지 서 있으란 말인가요." 얼굴이 벌개진 삼월이 달려나왔다. 사 정은 어찌 되었든 영영 그만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돌아온 것이 우선 반가 웠던 모양이다. "나으리, 돌아오셨습니까." "오냐. 어서 아씰 안로 모셔라." 갑자기 준구의 목소리는 엄격하고 쌀쌀해졌다. "예." 삼월이는 홍씨를 향해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며 "아씨, 어서 드십시오." 이때 길상의 말을 들은 김 서방은 쓴 약을 머금은 듯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어인 일로 이렇게." 하자 준구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짐을 날라 들이도록 하게. 그리고 이 사람 들, 김서방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마부와 조군은 웅기중이 김서방 얼굴을 쳐다본다. 김서방은 기가 막혀서 아무말도 못하데 조준구는 도망치듯이 발을 떼었다. 꼽추도령은 계집종 치맛자락을 붙들고 휩싸이듯 하며 대문 쪽으로 비실비실 걸어간다. "나으리, 아씰 어디로 뫼실 까요?" 눈을 내리뜨고 걸어가면서 삼월이 물었다. "소세부터 해야겠다. 날 씨는 왜 이리 덥다지? 무슨 놈의 흙먼지는 그리 기승인 모르겠고나." 홍씨 말을 얼른 받은 준구는 "그러면 별당으로 뫼셔라. 아씨께선 이곳 사정 을 잘 모르시니 삼월이 알아서 받들어야 하느니라." "예." 흥분하여 기되었 던 삼월의 낯빛이 조금 달라졌다. 준구 얼굴에서 삼월은 자신을 향한 혐오 의 빛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먼저 가서 아주머님을 뵈올 테니 부 인도 오래 지체하지 마시오." 준구는 안으로 들어가고 삼월이는 별당으로 향했다. 별당 문 앞에서 뒤돌아본 삼월이는 비로소 계집종의 치맛자락을 잡고 오는 이상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소스라쳐 놀라는 삼이를 곁눈질한 홍씨는 "왜 그러느냐?" "아, 아니옵니다." "저 아이 땜에 그러느냐?" 마치 남의 아이를 바라보듯, 그러고 나서 홍씨는 까르르 웃는다. 삼월이는 웃는 홍씨의 얼굴을 바로 보질 못한다. 마루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봉순네 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어, 서울 아씨께서," 다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봉순네는 날카롭게 삼월이를 바라다. "나으리께서 오셨는데 함 께 아씨도 오시었소." 말하는 삼월이를 밀어젖히듯 마루 위로 성큼 올라선 홍씨는 "너는 누구지? 침모냐?" 하고 물었다. "예." 봉순네는 질린다. "삼월 이라 했던가? 너는 서둘러 소셋물을 가져오너라. 이곳에 드니 좀 살 것 같 군. 무슨 놈의 흙먼지는 그리 기승인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싶더니만, 맹추야!" "네, 아씨." 보따리를 고 우두커니 서 있는 계집종이 얼른 다가왔다. 장마철에 급히 자란 나무같이 맺힌 곳이 없는 계집종, 치마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강아지처럼 아이도 따라서 앞으로 왔다. 봉순네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너는 저 방에 가서 짐을 풀어라. 그리 고 옥색 항라 치마저고리를 다려야 한다. 급히 해야 하느니라. 침모, 숯불 좀 마련해주게." 위세가 당당하였으므로 엉겁결에 마루에서 내려섰다. 홍씨 는 발을 내려놓은 서희 방의 발을 젖히며 들어섰고 마루에서 엉거주춤해 있던 꼽추아이도 어머니를 따라 서희 방으로 들어섰다. 이미 사정을 알았 을 터인데 서희는 등을 돌리고 앉아서 글씨를 쓰고 있다. 홍씨는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일어서서 손윗사람을 맞이할 줄 모르는 서희를 괘씸하게 생각하 고 노기 등등하여 자리에 앉는다. 하인에게 숯불을 만들라 일러놓고 급히 되돌아온 봉순네 는 방안 형편을 알기 위해 "덥겠습니다." 하며 발을 말아서 절반쯤 리는데 "봉순네!" 붓을 놓고 돌아앉으며 서희는 불렀다. 오만스러움과 위엄이 절로 몸에 밴, 나이치고는 두려우리만큼 침착한 얼굴이다. "이 사람들은 누구냐?" 이분드링 아니라 이 사람들이라 한다. "예, 저어." 하는데 홍씨가 말을 받았다. "서희는 나를 잘 모르는 모양이군. 하긴 서로 만난 일이 었으 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 "그러니까 어떻게 되나. 숙모뻘이 되는구 먼. 병수는, 아 참 서희는 올해 몇 살이지?" 하며 홍씨는 수그러져 나왔다.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봉순네가 대신 "올해 열 살이옵니 다." "음, 그러면 병수가 열두 살이니 오라버니가 되는구먼." "봉순네." 반 쯤 걷어놓은 발 밖에서 예, 하는 봉순네의 마음은 평온치 못다. "할머님께 서 손님들을 여기 뫼시라 하였느냐?" "예, 저 쇤네는... 삼월이가 뫼시고 왔 습니다." "아아니 내가 못 올 곳으로 왔나?" 홍씨는 찢어진 눈꼬리가 곤두 선다. "이거 어린애한테 절은 못 받을망정 이런 망신이 어디 있어?" 서희 는 가만히 바라본다. 당황한 봉순네는 "이, 이런 일이 처음이기 때문에, 저 어." "봉순네!" "에, 애기씨." "저 손님은 사으로 뫼 셔야 할 것 아니냐? 여긴 내 처소란 말이야." 서희는 병수에게 손가락해 보였다. 그 안하무인의 태도에 홍씨도 잠시 동안 머쓱해진다. 손님이 아닌 친지라 하더라도 그렇다. 사실 결례를 한 것은 홍씨 쪽이 먼저라 할 수도 있었다. 다짜고짜 낯선 사람이 발을 걷고 방안에 들어선 것이 그렇고 그들 을 손님으로 치부한다면 규수 방에 병수가 들어온 것은 잘못이다. 남녀칠 세부동석이란 엄연한 윤리 도덕이 지켜지고 있는 이상은. 장본인인 병는 모든 일이 다 어리둥절할 뿐이었던지, 서희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해맑은 눈둥자에는 어떤 의문의 빛도 없었으며 얼굴은 아름다웠다. 계집아이같이 입술은 발그레했다. 마침 대야에 물을 떠받쳐 온 삼월이 말했다. "여기 소 셋물 가져왔습니다." 멋쩍은 순간을 용케 넘기는구나 싶었던지 홍씨는 일 어섰다. "그러면 너는 사랑에 가 있거라." 아들에게 홍씨는 말했다.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님." 병수는 두려운 눈초리로 홍씨를 올려다본다. "도 련님, 제가 뫼셔다 드리겠습니다." 삼월이 말했다. 병수는 삼월이를 따라 나가고 홍씨도 소세를 하기 위해 나간다. 요란스럽게 소세를 끝낸 홍씨는 맹추가 내민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기 혼 자 바쁜 마음에서 서희와의 미묘한 얄력 따위는 생각지 않으려는 눈치였고 맹추의 시중을 받으며 화장하기에 열중한다. "옷은 어찌 되었느냐..." "아직 대리밋불이." "여태 눨 했느냐? 빨리 못하겠느냐!" "네." 맹추는 물러간다. 그러나 땀을 뻘뻘 흘리며 항라 치마저고리를 다려 왔을 때 홍씨의 화장은 아직 끝나 있지 않았다. 서희는 등을 돌리고 글씨 쓰던 것을 다시 계속하 고 있었으나 이마빼기에 푸른 줄이 솟아나곤 했다. 그러나 참는 것 같았다. '사대부집 부인이 와 저 모양일꼬? 조심스런 데가없고 상 사람들인 우리보다 범절을 모르는고나. 또 행세하는 집안의 부인이 천기맨 치로 화장도 유별나게 한다. 하기사 그 나으리에 그 아씨라.' 마루에 펼쳐 놓은 일거리를 치우며 봉순네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어서 건너오라고 준구로부터 재촉이 왔을 때 홍씨는 옷을 갈아입느라고 법석이었다. "왜 이 리 땀이 나느냐? 맹추야. 부채 가져와서 부쳐라." 두 번째 삼월이 전갈해왔 을 때 비로소 홍씨의 몸치장을 끝이 났다. 옥색 항라 치마저고리옷고름에 는 남빛 오장 수술에 밀화장도 노리개가 매달려 있었다. 옥가락지를 끼고 검정자주의감댕이 를 감은 쪽에는 옥비녀로 비취로 된 나비잠 말뚝잠이 꽂혀 시원해 보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살결이 희고 서울 여자라 땟물이 빠져 눈을 끌 게 하기는 했다. 윤씨부인 거처 방으로 들어간 홍씨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윤씨부인에게 절을 하는 것이나 절하는 품은 단정치가 못하였다. 다소 얼 굴을 숙인 윤씨부인은 눈을 치뜨듯 하며 쳐다보는데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말은 없다. 그 동안 준구도 변변히 말을 못한 눈치다. "서울에 가니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옵고 집을 팔아서 그간의 부채를 정리하고 보니." 우는 소리다. 그러나 집을 팔았다는 것은 빈말이다. "앞으로의 생계도 막막할뿐 더러 처가에 신세를 지는 것도 도리가 아닌 듯하여 생각다 못해 함께 내려 가자고 했사옵니다. 당분간." 생계가 어려워 불원천리 이곳 먼족을 믿으며 찾아온 사람의 차림치고는, 어느 유족한 사대부집 부인에 못않게 호사스런 홍씨를 아까와 달리 윤씨부인은 똑바로 쳐다본다. "서희도 병수어미가 있 으면 어머니 겸 외로움이 적을 듯도 싶어서, 아랫것들에게만 의존하여 범 절에 소홀함이 있을까 근심이 없는바도 아니어서." 홍씨는 조금 전에 서희 에게 당한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이 났다. "그런 점이 없지도 않을 것 같사 옵니다." 하고 남편 말에 맞장구를 쳤으나 윤씨부인은 는 둥 마는 둥 "거처할 곳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네?" 준구는 당한다. " 우선 비어 있는 사랑, 협실도 있고 하니 그 방을 쓰는 게 어떨까? 차차 마 련토록 하고." "네, 네, 그거야 뭐." 준구는 한시름 놓은 듯 두 어깨를 폈다. "먼길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겠네. 그럼 물러가서 쉬도록 하게." 윤씨부인은 홍씨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방에서 물러나온 홍씨는 "사랑의 비어 있는 방이라뇨? 아녀자가 어떻게 사랑에 있겠소?" "쉿! 며칠 동안이라 하시지 않았소." 준구는 얼른 홍씨를 더밀었다. 사랑 뜰에까지 나온 홍씨는 불만에 차서 "별당, 그곳을 썼으면, 뜰도 시원해 보이고 연당도 있어서 좋았는데." "거, 거긴 안 될 거요. 서희 있는 곳이라." "할머님 옆에 오면 될 거 아니 오? 안채도 넓어서 별유천지 같은데." "며칠만 참으시오." 준구는 홍씨에게 자신이 거처하는 방을 보여준 뒤 실이 붙은 건넌방 으로 건너와 방문을 열었다. 병수가 우두머니 혼자 앉아 있다가 뒤뚝거듯 하며 일어섰다. "병수도 인살 시킬 걸 그랬소." "온 창피스러워서요." 하며 홍씬느 아이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면 짐을 옮겨오도록 해야겠군. 맹추는 거기 있소?" "그런가 보지요. 한데 서희 그 계집아이 여간 맹랑하지가 않 소." "똑똑한 편이오." "똑똑한지 어떤지 안하무인으로, 버르장머리가 말이 아니에요." "..." "오는 날부터 속상해서... 안 오겠다는 사람을, 천 리 길을 오게 해놓고 이건 뭐 과객 취급 아닙니까?" "참아봅시다. 아마 아래채를 정리하여 내주실 게요. 식구라고는 노인네만 돌아가시면 서희 혼자니 우릴 위해 이 집은 별유천지가 될 것이오." "노인네가 돌아가요? 정정해서 우리 보다 오래 살겠더군먼요." 홍씨는 여전히 불만에 차 있다. 최참판댁에 홍씨 가 와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벌써 집안 하인들 사이에는 준구보다 홍씨가 한술 더 뜬다는 말이 나돌았다. 준구보다 더 염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도 수동이는 서슴없이 조준구를 비방하였고준구의 역성 을 드는 삼수에게 주먹다짐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병신 육갑하네.내 가 심이 없어서 맞고 있는 줄 아나? 종놈 주제에 가타부타할 거는 머 있 노? 주는 밥이나 처먹고 일이나 하믄 그만이지. 충신비 세워줄 기라고 저 리 풀세게 날뛰나?" 삼수는 구시렁거리며 피해갔다. 아닌게아니라 수동의 행동에는 광기가 있었고 정상이 아니었다. 이튿날 해나절이 지났을 때 자 기 댁네를 보고 김서방은 말했다. "해 안으로 짐을 옮기얄 긴데." "짐을 옮 기다 니요?" "서둘러야겄는데... 짐 좀 챙기야겄구마." "아닌 밤중에 홍두깨디밀 더라고 짐은 와 챙기요? 난리가 났소?" 왜가리 소리를 질렀다. "서울서 온 손님 땜에." "분 바른 그 아씨 말이요?" "분이사 발랐거나 말거나." "패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더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짐이나 챙기라니!" "짐 을 챙기믄 어디 갈기요?" "행랑이믄 됐지 머." "내사 싫구마." "싫고 좋고가 어디 있노! 마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하기사 잘 생각하싰지. 우리는 아무데고 끼여 있이믄 되지마는 그 사람들을 집안에," 하다가 김서방은 마 누라의 사정없 는 입을 생각하여 말을 끊는다. 마님이 작정하신 일이라는 말에는 김서댁 도 꼼짝없이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챙겨놓은 짐을 하인들이 제가끔 행랑 으로 옮기고, 그 리하여 해가 넘어가기 전에 뒤채는 비게 되었다. 이튿날부 터 윤호와 화개에 있는 대목을 불러다가 집 수리가 시작되었는데 본시 뒤 채는 대숲 근처에 사당이 있어서 사당 가까이 별채로서 지은 집이며 지금 채마밭이 되어 있는 곳은 뜰이었었다. 워낙 식솔이 적어 퇴락한 채 워둔 집을 김서방댁이 들고부터 집 꼴은 더욱 험하게 되었으나 하인이 거처할 성질의 집은 아니었었다. 홍씨는 패악스럽고 욕심이 많은데 비하여 우둔하 고 요사스럽지는 않았다. 최참판댁이 온 후부터 그가 하는 일이란 몸단장 이요, 맛난 것을 양껏 청해 먹는 그것이 일과였다. 조준구는 윤씨부인에게 처가 신세를 졌다고 했는데 그것 역시 빈말이었다. 홍씨의 문벌은조씨네 보다 떨어지는 편이었으나 살림은 유복했다. 그러나 홍씨가 물려받아온것 이라곤 사치하는 기풍과 남에게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함 뿐이었고, 그 습벽 은 남편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danfl 준구나 곤란을 겪어도 홍씨는 자기 소유에 귀이개 하나 내어놓는 일이 없었다. 병신이지만 하나밖에 없 는 자식에게조차 그의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준구는 홍씨에게 꼼 짝 못했다. 그것은 애정하고는 다른 것인 듯 싶었다. 어쩌면 아들 때인지도 모른다. 홍씨는 꼽추의 원인을 준구에게 몰아붙였던 것이다. 다리가 짧고 두상이 큰, 어딘지 이상한 조씨 가문의 내림을 두고 공박을 했던 것이다. " 홍씨 집안에는 그런 사람 없소. 사대가 크고 훤칠하지요. 궁색한 것만도 몸 서리가 쳐지는데 이런 병신까지 낳았으니 친정보기 부끄럽소." 그 말에는 어떻게 반론을 펼 수가 없고 준구 자신이 생각해도 전혀 근거 없는 말 은 아닌 듯 싶었다. 그것은 차츰 자라서 강박 의식으로 변했으며 부부가 접촉에 공포를 느끼게 되었고 자연 준구는 여자에 대해 흥미를 체질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홍씨는 뒤채를수 리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남편에게 조르기를 별당을 쓰게 해달라는 것이요 속짐이 따로 있는 준구는 그러한 아내의 눈치코치 없는 짓거리가 답답하다. 준구 는 뒤채를 왜 고치는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나 윤씨부인은 말이 없는데 싫다좋다 하고 나설 계제도 아니었다. 혹 몸채의 일부를 비우기 위 한 것인지, 그것도 모를 일이긴 했으나 조준구의 신경은 날이 서있었다. 하 인이 살던 집에 자기 처자가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편 삼월이는 삼월이 대로 속을 태운다. 준구는 삼월이와 마주칠 때마다 외면 을 하기 일쑤였다. 곁에 사람이 없을 때는 더욱 쌀쌀하게 굴었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면 족했을 삼월이였으나 말은커녕 눈길 한번 보내는 일이 없었 다. 그러면 그럴수록 원망에 마음은 달뜨게 마련이다. 어느날 뒷곁에서 준 구와 마주친 삼월이는 "나으리." 눈에 눈물이 글썽 돌았다. "으으... 음, 이 요망스러운 것이!" 다짜고짜 주먹을 쥐고 삼월이의 볼을 쥐어 박았다. "너 무하십니다." 얼굴을 감싸며 땅 바닥에 쓰러진 삼월이는 소리 죽이며 운다. "잠자코 쳐박혀 있을 일이지." "너, 너무하십니다. 나으리께서 마, 말씀해놓 으히고, 으흐흐..." "뉘 앞에서 말대꾸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침을 칵 뱉 으며 준구는 돌아섰다. 이튿날 집안 하인들은 삼월이 볼이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을 보았다. 밤새껏 울어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러나그는 윤씨 부인 앞에 나가는 것만 피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할 일을 하는 이었 다. "적선을 못할망정 쪽박이나 깨지 말랬다고, 삼월이 무신 죄 있다고 저 모양으로 팼는고? 아무리 종년이기로 이녁 종년이란 말가?" "와 아니라. 굴러온 돌이 본돌 깨더라고,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이지. 아 그러매, 하도 되잖은 말을 하니께 귀뚱이 맥히서, 머 별당을 자개가 쓰겠다 카든가?" " 머라꼬? 누가." "누구기는, 서울서 오신 그 양반 마누라가 그런다더라." "허 허, 갈수록 산이구나. 갬히 그런 말을 입밖에 내더라 그 말가? 우리 애기씨는 어쩌고." "애기씨 는 안채가 넓으니." "환장하겄네, 업덩이도 이만저만?" "마님도 무던시지. 우리 같으믄 그만 당장 쫓아버릴 긴데." "법도가 있이니께. 아무튼지간에 업덩어리 짊어졌다. 그 요상스런 내외간에다가 곱새 아들까지." "재가 마 저분에 기절초풍 안 했나." "너도 보았고나." "얼굴은 멀쩡한데, 어디 그기 이 사램이더나?" 부엌에서뿐만 아니라 마을에까지 꼽추아이 소문이 자자하 였고 홍씨에 대한 비방의 소리도 높았다. 집 손질이 끝나고도배까지 다 해 버렸을 때 윤씨부인은 김서방을 불렀다. 사랑에 머물고 있는 홍씨 모를 뒤 채로 옮기게 하라는 분부가 내린 것이다. '잘하시는 일이지. 정신이 산란해 서 도무지, 아예 안의 출입을 말아주었이믄 좋겄다.' 김서방은 사랑에 나가 조준구에게 윤씨부인의 말을 전했다. "뭐라구?" 이미 대항할 말을 준비하 고 있었던 조준구는 뜻밖에란 듯 경악의 표정부터 지었다. "내가 이 집 종 으로 왔단 말이냐?" "너무 과하신 말씀을." "내 말이 과하고? 어째 내 말이 과하냐? 이 집 처사가 과하지! 명색이 사대부집 자손이요 시머님 의 친정붙이를 이곳에서는 그렇게 대접하게 돼 있단 말이냐?" "아, 아니옵 니다. 본시 뒤채는," "말 말게, 본시야 어찌 되었든 자네들이 살고 있었던 것만은 명백한 일 아니냐? 돼지우리같이 해놓고 살던 집에 들라는 그런 무 엄한 법이 어디 있는냐!" "하, 하오나 말짱 새집으로 손을 보았고." "듣기 실하! 썩 물러가라. 내가 가서 아주머님을 뵙고 말씀드리다! 아무런 산간 벽촌에서 행세하는 집안의 법도를 모르기로서니." 준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얼굴을 노여움에 홍당무가 되었고 숨결은 거칠었다. 윤씨 방으로 들어간 조준구는 평소 어려워하던 표정과는 달리 꼿꼿하게 얼굴을 쳐들었다. "여쭐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말해보게." "이럴 줄 알았더라면 불원천리 이곳까지 처자를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입다. 굶주 리고 헐벗는 한이 있을지라도 어찌 노비의 처신을 감수하겠습니까. 할님께 서 존명해 계셨더라면 친정 손주며느리가 종이 살던 집으로 쫓겨나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셨겠습니까?" 준구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허나 지금 어머 님은 계시지 않지." 윤씨부인은 나직이 말했다. "돌아가신 어른에 대한 효 성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자네 말로 일리는 있네." "뒤채로 나가라는 분 부는 거두어주시고 대신," 윤씨부인은 그 말을 묵살하고 서 "자네로 말할 것 같으면 분명 내겐 손아랫사람이것다?" "...?" "내가 효부가 아님은 차치 하고 자네가 할말은 아닐세." 준구는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 머님은 자네 집안에선 출가외인일세." "하, 하오나." "두말 말게." "하, 하오 나 명색이 사대부집 자손이 종의 거처로 쫓겨나다니 그, 그것은 너무하신 처사 아니옵니까?" "그 집이 행랑이냐?" "김서방이 거처하던 곳입니다." " 김서방은 종이 아닐세. 그도 그렇거니와 그곳말고는 있을 만한 곳이 없고 사랑에 아녀자를 동거케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느냐?" "어려운 부탁이온 데, 서희는 아직 어린 몸이니 아주머님 가까이 두시는 편이 어떠하온지요. 안채는 넓은 방도 많고, 하오면 병수어미를 벌당에." "안 될 말이네. 손님이 소중하지 않는 바는 아니나 서희는 이 집의 임자니라. 경망하게 어디로 옮 기겠느냐? 정 자네들이 불편하다면 할 수 는 일, 서울로 돌아가게. 나로서 는 그 집을 수리한 것도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을 했기 때문이요 더 이상 말하여 나를 불효하게 하지 말라." 준구의 기세는 눈에 띄게 꺾였다. "그리 고 또 한 가지 일러둘 일은, 뒤채로 옮긴 뒤 되도록 자네 안사람, 안의 출 입은 삼가도록 일러주게. 하인들의 질서가 안 잡히고 서희만 하더라도 한 창 예민할 시기니만큼, 나는 자네 안사이 서희 본보기 도길 원치 않네." 드 물게 윤씨부인은 자기 의사를 명백히 나타내었다. 2장 발병 김서방댁의 입은 아무도 고칠 수 없는 우환이다. 이번에도 그 입 때문에 평지풍파가 일었 다. "서울아씨요, 양반댁에서 종첩 얻기 예사 아입니까?" 푸성귀밭에 곧잘 나타나서 오이랑 가지를 따는 김서방댁은 어려움 없이 마루에 나앉아 홍씨 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그건 무슨 소린고?" 더러운 계집이 감히 뉘에 게 말을 걸어오나 싶으면서도 홍씨는 말상대를 해준 셈이다. "아이고오 참, 모르실 리가 없는데 그러십니까." "무어?" "상사람들이사그럴 성시도 못 되 고 또 갬히 그럴 수도 없는 일이지마는 양반댁에서는 흔히 소가를 두지 않 십니까? 성시 따라서 열 첩도 거느린다 카기는 하지마는 기생첩보다는 종 첩이 나을깁니다. 손쪽박겉이 부리묵을 기고 또 보니께로 선영봉사할 자손 이 몸도 안 성한 것 겉고, 하기사 서출이믄 멧상 받들 처지는 아닐 깁니다 는." 얼굴이 푸르락노르락하던 홍씨는 "네 이년!" 소리를 질렀다. "예?" "아 가리 닥치지 못할까! 뉘 앞에서 감히." "예, 예 쇤네가 그만." 김서방댁은 뒤늦게 깨달았다. 자손이 몸도 안 성한 것 같다는 말에서 린 것이라 생각하고 "잘못했십니더. 한분만 용서해주시이소." 그러나 홍씨는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너 지금 뭐라 했느냐? 다시 한 번 말하여보 아라." "예. 저어 그만 입을 헛놀맀십니더. 눈이 등잔등 겉은 장자 도련님을 두고, 종첩 하직 열 있이믄 머하겄습니까." "종첩이라니!" "예?" 김서방댁은 멀뚱멀뚱 홍씨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뒤채에서는 뜻하지 았던 불난리가 일어났다. 삼월이 불려가고 준구는 끝내 아니라고 잡아떼고, 집안 하인들에 게는 보통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제기랄! 00 을 떼어버리지 그거를 달고 댕기?" 홍씨에게 쩔쩔매는 준구 꼴을 엿보고 돌아온 돌아가 그 광경을 말 로 옮기자 수동이는 얼굴이 벌개져서 뇌까렸다. 이 무렵 김서방은 각처에 있는 최참판댁 농토를 돌아보고 올해 수확을 예상하면서 나귀를 몰고 있었 다. 소나기를 피하여 정자 밑에 서 있다가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아 햇 볕은 김서방 정수리에 뜨겁게 쏟아져내렸다. 검푸르게 약이 오른 벼가 는 것은 아니지만 풍년을 꿈꾸어볼 수 없는 들판의 사정이었다. 수량이 줄어 든 강물은 좁은 배 폭만큼 눈이 부시게 펼쳐진 모래밭 너머 조약돌이 깔린 복판을 흐르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가 버드나무 잎새들은 그런대로, 조금 전에 뿌린 소나기 덕분에 갈증을 면한 듯 흙먼지가 끼어있지는 않았다. 갯 마을의 도부꾼들은 북쪽을 향해 연방 지나가고 있었다. 곡식 한톨 내지않 으려고 벌벌 떠는 농가에서 잘해야 수수, 조 같은 잡곡을 바꿀 수 있고 그것도어 려우면 감자라 도 바라는 마음에서 도부꾼들은 길을 재촉하고 쓸데없는 남의 걱정을 본 다. '기왕 그렇게 된 바에야 아들을 낳아야지. 그라믄 이서방도 맘을 잡을 긴께.' 별안간 김서방은 속이 울렁거렸다. "체했는가?" 감나무골 김서방 집 에서 닭 잡아 차려낸 조반이 과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서방 은 그 집 막내 아들이 여러 번 뒷간에 드나들던 일이 묘하게 마음에 걸린 다. 그 아이의 풀빛같이 새파랗던 얼굴이 생각난다. '이정으로돌리믄 안 될 긴데.' 마지막 행선지 용수골이 끝나면 곧장 평사리로 돌아갈 판인데너 무 행로가 길었 기 때문인지 저네는 그렇지가 않았었는데 전신이 나른하고 눈앞에 불이 튀 는 것 같은 피곤이 엄습해온다. 말방울을 울리며 김서방은 용수골 마을로 들어섰다. 초가지붕이 오목하게 보이는 돌담 옆에서 내린 김서방은 나귀를 몰고 대문 앞을 지나 뽕나무에 나귀를 매어놓고 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으 며 집안으로 들어간다. "장서방 있소!" 널찍한 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 던 장서방이 "어서 오소." 별로 반기지 않는 낯색으로 말다. 그러나 그는 상을 물리고 짚세기를 찾아 신으며 마당으로 내려왔다. "거 밥상 치우고 마리에 걸레질 좀 해라!" 장서방은 부엌을 향해 역정난 목소리로 고함쳤다. 재작년, 최참판댁에 들어간 현물과 문서에 적힌 수량에 차이가 생겨 옥신 각신 다툰 일이 있었다. 그 후부터 김서방은 감정을 씻었는데 장서방 쪽은 까끄름하게 노염을 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니가 거먹거리싸아도 본시 근 본을 알고 보믄 종놈 아니가.' 하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별일 없었소?" 김서방은 땀을 닦으며 말을 걸었다. "앉기나 하소." 장서방은 나무 밑에 놓 인 평상을 가리켰다. 평상에 걸터앉는 김서방을 힐끔 쳐다본 장서방은 땅 바닥에 쭈그리고 앉으며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는다. "이곳 형편은 어떻 소?" "이곳이라고 별나겄소? 실치 않소." 이때 들에서 일을 하다 오는지 바 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상투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여맨 농부 한 사람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험상궂게 생긴 얼굴에다 몸짓도 건장하다. " 나 오라 캤소?" 장서방을 노려보며 말했다. "오라 캤네." 담배에 불을 당겨 빨면서 장서 방은 농부에게 곁눈질을 한다. "와요?" "와라니? 몰라서 묻는 것가?" 모르 겄소. 모르니께 묻는 거 아니오." 시비조다. "마침 여기 참판댁의 김서방도 오고 했이니 따로 따질 것도 있고." "그렇소? 판관이 왔나 그 말이구마. 그 라믄 말해보소." 농부는 안하무인이다. "모른다 카이 내 말하지러. 자네 어 젯밤에 우리 거름구데기서 거름을 몇 장군 퍼갔노?" "누가 그러요?" "본 사램이 있다." "이름을 대소. 어느놈인지 똥벼락을 맞힐 기니."대어 든다. 장서방은 잠시 후퇴하는 기미를 보이면서 "동네에 자네말고 누가그 짓을 할 기고!" 언성을 높인다. "그 말 할라꼬 바쁜 사람 오라가라 했소? 그라고 판관까지 불러왔소?" 눈을 까집으며 농부는 김서방을 노려본다. 김 서방은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었다. "그라믄 그 얘기는 자네하고 나중에 하기로 하고 금년에는 밀린 나락 낼 것까 안낼 것까 그 말이나 해라. 나도 김서방 앞에서 자네한테 다짐을 두어야겄네. 자 네가 내 집 머슴도 아니겄고 판관이나 내가 자네 몫을 물어낼 수는 없는 일 아니가." "그거사 나보고 묻지 말고 시절보고 물어보소. 누가 축내고 저 버서 축내는 줄 아요?" "축내고 싶으지는 않은데 곡식만 낼라 카믄 마지막 한 섬에 가서 손이 오그러진다 그 말가?" "내가 문딩이건데? 이 오그라지 다니!" "그라믄 와 그라노?" 심각한 것도 아니었고 약을 실실 올린다. 농부 의 얼굴이 벌개진다. "자손만대꺼지 최참판네한테 빌어묵을 기요!" "머라 꼬?" "그럴 거 없이 좋게 말하소." 처음으로 김서방은 말리고 나섰다. 최참 판댁 권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이런 농부는 별로 본 일이 없어 김서방은 기가 질려 있었다. "좀 생각해보소. 고방에 썩어나는 기이 곡식일 긴데, 아 그래 나락 한 섬 축났다고 최참판네가 망하겄소? 그까짓 고방 속에 사는 새앙쥐 양식밖에 안 될 긴데. 그래 사램이 새앙쥐보다 못하다 그 말요?" 김서방한테 곁눈질을 하며 엉뚱한 말을 한다. "허허, 자네 말을 따르자믄 해마다 흉년이 드는 가분데 모두가 다 자겉이 하다믄 최참판댁은 나라에 세물 내고 고방은 텅 비는 꼴이 안 되겠나? 그 것도 다른 양반들겉이 피가 나게 긁어간다믄 또 모르지. 여기 김서방이 있 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사램이 체모가 좀 있어야 안 하겄나." "없는 놈이 체모 차리게 됐건데?" 마당에 침을 뱉는다. 장서방 마누라가 밖에서 돌아왔다. 그는 말다툼에는 무관심해하며 김서방만 보고 반색을 했다. "오 실 떄쯤 됐다고 생각했더마는. 어서 마리로 올라가입시다." 하고 딸아이 이 름을 부르며 뒤안으로 돌아간다. 장서방은 한층 늘어진 어세로 따지는 건 지 시빌 하는 건지 분간키 어려운 말을 다시 뇌었다. "그놈의 없는 놈 소 리 귀에 못이 안 배기겄나? 자네보다 훨씬 못한 사람도 그런 거지는 안 쓰 는데." "떼거지라니!" 농부는 가슴을 딱 벌리고 장서방을 칠 듯이 다가왔다. "허 참, 이리 엇먹지 말고 좋도록 하시오." 김서방은 쌍방 기색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떼거지라니!" 삿대질을 한다. 장서방은 유유히 앉아 있다. " 그래 참판네 마름이믄 천하 제일이요! 떼거지라니! 없는 놈은 이름도 성도 없다 말이요?" 김서방의 얼굴이 해쓱해진다. 농의 부릅뜬 눈은 살기가 등등했다. "기가 맥히서." "기가 맥히는 편은 나요!떼거 지라니! 그래 쪽박 들고 내가 장서방 문전에서 빌어묵었소?" "고슴도치하 고 따질 일이세. 말귀 어두븐 것도 한도가 있다. 떼거지쓴다는 기 우째서 쪽박 들고 빌어묵는다로 가노? 바로 그러니께 떼거지쓴다 말할밖에." "흥, 옛말 하나 그런 것 없지. 호랭이가 하품하니 좀생이가 먼저 나서서 우쭐거 린다 카더마는." "맞다, 맞다, 나는 좀생이고 참판님댁에서 자만대꺼지 빌어 묵을기고, 자네 속 편할 대로 생각해라. 오금을 박든지 말뚝을 막든지. 그 러나 자네가 끝내 약정한 대로 안 한다믄, 내 집서 머슴을 산 것도 아니겄 고 할 수 없제. 약정대로 할 사람한테 땅을 맽길밖에. 여기 김서방도 서서 다 듣고 보았이니 날 원망은 말아라." "머라꼬!" 농부는 펄쩍 뛴다. "머라 꼬! 우짜고 우째?" 하다가 그는 너털웃음을 한바탕 뜨린다. "하하핫... 으핫 하하하... 조상 대대로 부치온 땅을, 내 눈에 흙이 안 들어갔는데 어느놈이 부치묵어? 어림없다! 어림없다! 어림없는 소리다! 냉수 마시고 속 차리서 들으소! 내 막마음 한분 묵으믄, 어느 시래비자식이 땅을 내놔? 어느 시래 비자식이 그 땅을 부치묵어? 어림없다! 대갈통이 가리가 될 기다!" 거품을 뿜으며 맹수같이 울부짖는다. 그러더니 별안간 누가 와서 그 땅을 떠메고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립문을 향해 냅다 다. 문턱까지 나간 그는 훌쩍 돌아선다. "어느놈이 죽고 사는가 보자! 어느놈이!" 주먹을 쳐들고 위협을 하더니 다음 순간 쏜살같이 달려나간다. 코도 작고 입도 작고 얼굴 전체가 좁쌀 같은 인상인데 눈썹만 짙고 굵은 장서방 얼굴에 장난스런 미소가 떠 올랐다. 장서방의 아낙은 마루를 쓸고 자리를 깔면서 "머할라고 또 건디리 요." "아 그놈이 간밤에 우리 거름데기서 거름을 퍼내갔이니 혼달음을 좀 낸 기지. 김서방도 마침 와 있었이니 그놈 속으론 겁이 대기났일기라." 하 고 장서방은 껄걸 웃는다. 김서방은 영문을 몰라서 내외의 거동을 번갈아 살펴본다. "노상 있는 일인데 제 버릇 개 주겄소. 여편네가 알믄, 할 짓 다 하는데 야속다 안 하겄소?" 아낙은 기름에 절인 부채를 챙겨놓고 나서 "어 서 올라오이소. 이 더분데욕 보십니다." 하고 상냥스레 웃는다. 김서방은 얼떨떨해하며 마루로 올라서 부채를 집어들었다. 장서방도 함께 마루에 오르더니 "거 먼지 술상이나 채 리오도록 하소. 김서방은 술을 못하지마는 사내끼리 얼굴만 치다보고 얘기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흐흐흐... 그눔 자식 괭이 들고, 며칠 동안 잠 못 자 고 논을 지킬 기구마." "논을 지키다니?" "미련한 놈이제. 땅만 내놓으라 카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믄서 괭이 울러메고 몇 날 며칠 논에 서서 논을 지키요. 얼씬도 못하게. 놈이 우찌나 이군이 세던지 항우장사라 그런 식으 로 혼을 내줄 수 밖에 없고." "희한한 성미구마." "팔푼이제. 기운 좋은 놈 치고 팔푼이 아닌 놈이 있더라고?" 술상이 들어오자 김서방은 마지못해 한 잔을 받아 마시고 다음은 장서방이 자작하며 얘기를 계속한다. "아까 그놈 이 으름장을 놓았는데 그건 빈말 아닐 기요. 설사 땅을 뺏어서 내놓는다 카더라도 선뜻 나서서 부칠라 카는 사람을 없일 기구마. 흙 한삽 일쿠지 못하고 대갈통이 박살날 기니께." 장서방은 그 사나이에 대해서 퍽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크게 남을 해치는 일은 없으나 곡식에 대해서는 탐 욕이 여간 아니어서 거름을 훔쳐가는 것은 미리 상습이라는 것이다. 그래 그런지 벼곡식이나 밭곡식의 수확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것이며 또 그의 못된 버릇의 하나는 소출할 때 벼 한 섬을 한결같이 까먹는다는 것이 다. "이웃 사람 말로는 추수가 끝나믄 소출량의 나락은 딸로 쌓아놓는다 카더마. 그래가지고는 실어낼 때가 되믄 마당 안에는 뱅뱅이를 돌고 손톱 을 물어뜯고 하다가 기여 한 섬을 들어낸다는데 그게 해마다라. 그래도 그 놈이 계집 하나는 잘 만내서 배를 놔가지고 몰래 볼치기를 하니께, 내가 손해볼 거는 없지마는 참 희한한 놈이거든. 포악하고 미한 놈이 그래도 부 지런히 기이 하나 복이라 제법 살림은 따습거마는." 이 밖에도 그 사내의 이상한 일면을 이야기했다. 제 아낙 위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하찮은 일로이 웃 아낙과 그의 아낙이 말다툼을 했다는 것이다. 어디서 말을 들었던지 논에서 일을 하던 그가 눈이 시뻘개 져서 달려왔는데 제 아낙이 가로막고 서지 않았다러마녀 우람한 그 주먹에 살인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아낙이 달래니까 금시 양순한 짐승이 되어 부스스 돌서더라 는 것이다. 이야기에 재미를 붙인 장서방은, 속에 술도 들어가고 해서 그랬 던지 김서방한테 품은 악감정은 다 풀어진 모양이다. 연신 너털웃음을 웃 으며 좁쌀 같은 얼굴에 혈기가 돌고 썩 기분이 좋은 것 같다. 한편 김서방 은 장서방의 얘기를 재미나게 들으면서도 뱃속이 무겁고 골치가 띵하니 도 는 것 같기도 하여 마음속에서부터 유쾌해지지는 않았다. 그서 그는 서둘 러 이곳 사정을 물어보고 의견을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점심 이 다 된 모양인데 어딜 갈라고 이리요?" "찬은 없지마는 점심이 다 됐십 니다. 잡숫고 떠나이소. 맨입으로 가시문 우리가 섭섭해서 우짭니까." 내외 가 다함께 말리었다. "뱃속이 안 좋고 전신이 찌뿌득해서 그만 가서 드러 누블랍니다." "그라믄 더욱 그렇지. 하루 쉬어가도록 하소.여독인가 분데, 지금 떠난다 캐도 해 안에는 닿지 못할 기구마." "그러이소. 하루푹 쉬었다가 내일 아침에 떠나는 기이 좋겄십니다." 김서방은 굳이 떠나겠다 하며 나귀에 올랐다. 작별을 하고 떠나는데 여전히 속은 뒤집힐 것같이 고 통스러웠다. 마을 어귀를 나섰을 때였다. 과연, 아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 며 달려나간 그 농부는 괭이를 들고 논둑에 우뚝 서 있었다. 상당한 거리 여서 그랬는지 그는 나귀를 타고 가는 길손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고 똑바 로 들판만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날 나귀는 어느 집안의 묘 소인지 평평한 지대에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는 숲 곁을 지나간다. 그 숲을 둥그스름하게 돌아서 한모퉁이 로 나섰을 때 김서방 눈에, 언제 어디서 왔던지 바로 그 농부가 저만큼 섶 에 구부리고 앉아 머리를 조아리는 모양이 보였다. '...?' 나귀가 미처 그곳 까지 가기 전에 그는 일어서서 길 아래 논둑을 지나 숲속으로 걸어간다. 아까 그가 서 있었던 들판으로부터 숲을 질러서 김서방보다 먼저 와 있었 던 것이다. 농부가 구부리고 앉아서 머리를 조아리던 장소까지 나귀가 갔 을 때 김서방은 실소를 한다. 속만 언짢지 않았더라면 그는 크게 리를 내 어 웃었을지도 모른다. 눈이 주먹만 하고 입이 쭉 찢어진 대장군이 길섶에 우뚝 박혀 있었던 것이다. 농부는 땅을 뺏기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을까. 김서방이 최참판댁에 당도한 것은 밤이 이슥했을 때였다. 밤이 늦었으므로 윤씨부인에게 다녀왔다는 보고도 못하고 김서방은 곧장 행랑으로 갔다. 김 서방댁은 속곳바람으로 당잔에 불을 댕기면서 잘 다녀왔느는 인사 따위는 본시 할 줄 모르는 성미였고 "방아 좀 찧었더니 팔이 빠질라 카네." 푸념 부터 시작한다. "이자 나이 드니께 일이 무섭구마." 김서방 없는 사이 뒤채 에 일어난 풍파는 자기하고 하등 상관도 없는 듯 태평스럽게 하품이 늘어 진다. "늙어지믄 소용없는 기라. 봉숭애꽃 겉은 시절이 어제그제 곁은데 이 자는 날만 궂을라 카믄 뼈골 안 쑤시는 곳이 없니." "되잖은 소리 그만하고, 사램이 죽겄는데," 김서방은 방바닥에 픽 쓰러다. " 저녁은 잡샀소?" "저녁이고 머고." "그라믄 옷이나 벗고 누우소. 입은 채 그냥 잘라요?" "요나 어서 깔아주고." "이 더븐 날에 무신 요를 깔라 하요? 내사 상사램이라 그런지 구늘이 좋더마. 겨울에는 뜨근뜨근 불을 때서 몸 을 지져야 이튿날가뿐하고 여름에는 찹찹한 데 배를 붙이고 있이믄 시원하 고." "잔소리 그만하라니께! 아, 배탈이 났이니께! 요나 어서!" 김서방댁은 겨우 납작하게 짜부러진 요를 꺼내어 깐다. "누가 아프라 캤나? 날 보고 와 앙살인고?" 요 위로 옮겨 누운 김서방은,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비틀 거리며 뒷간으로 간다. 계속해서 두 번을 뒷간에 갔다 온 김서방은 "이정 인가?"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자리에 눕더니 별안간 뛰어 일어났다. 문지 방을 넘어 툇마루에 몸을 걸친 채 구토를 한다. 코를 골고자던 김서방댁이 "와 그라요?" "..." "더위 마신 것 아니요?" 부스스 일어난 김서방댁은 밖에 나가서 바가지에 물을 떠왔다. 구토증이 멎은 김서방은 바가지 물로 입을 씻는다. 김서방댁은 서걱서걱 삼베 속곳이 부딪는 소리를 내며 재를 퍼다 붓고 오물 처리를 한다. "객터에 나갈수록 묵는 거를 조심해얄 긴데 권한 다고 묵고 덥다고 맹물 마시고, 벵나기 십상이지. 눈의 까시맨치로 날 보기 싫어서 그래싸아도 내집겉이 좋은 곳이 어디 있이며 이녁 가숙겉이 알뜰히 생각할 사램이 어디 있일 기라고." 그런 말이라도 지껄이지 않는다면 밤 깊은 하늘 밑에서 "서생원, 점잖은 처지에 와 그리 야단이요? 가만 있이소. 새는 날에는 양껏 대접할 기니께." 하며 보시락거리는 쥐를 상대했을 것이 요, "날이 궂일라꼬 내 팔이 그리 쑤시던갑다. 삭신을 거짓말 안 하니께." 하며 달무리 진 하늘을 쳐다보았을 이다. 김서방댁이 오물을 미처 다 치우 기 전에 김서방은 다시 얼굴을 내어밀고 툇마루에 두 손을 짚으며 구토를 했다. "이거 아무래도 객구가 들었는가배. 가만 있이소." 김서방댁은 부리나케부 엌으로 달려가서 바가지에다 물밥을 말고 커다만 식칼을 들고 나왔다. "이 리 나오소. 한분 물리봅시다." 위급해진 김서방은 기어서 마당으로 내려왔 다. 넓은 행랑채 마당은 횡하니 넓었고 들일에 고단하였던지 깊이 잠들어 아무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다. 처마의 그림자는 달무리 때문에 희미하고 장독 사이에서 귀뚜라미만 울고 있었다. "성주 구신도 아니고 부리석도 아 니고 굶어죽은 구신아, 칼 맞아 죽은 두신아, 오다가다 죽은 구신아, 임벵 에 죽은 구신아, 괴정에 죽은 구신아!" 지껄이는 그 자체에 무한한 기쁨을 느낀 김서방댁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귀신을 불러대었다. "상사 들어 죽은 구신아, 몽다리 구신아, 호식에 간 구신아!" 끝도 없이, 귀신은 참 많기도 하다. 드디어 "쉰네 살 묵는 김씨방성한테," 하며 또 한참을지껄 여대더니 "썩 물러가라! 써어억! 위이." 휘두르던 칼을 냅다 던진다. 날은 바깥 쪽을 향해 떨어졌다. 바가시 속의 물밥을 문밖에 가서 버리고 돌아온 김서방댁은 "이자 괜찮을 기요. 아주 깨분하구마." 그러나 아무 효험이 없 었다. 김서방은 연이어 뒷간을 들락거렸다. 구토도 심하였다. 새벽닭이 울 무렵 등잔 밑의 김서방 얼굴을 놀랄 만큼 변해 있었다. 뒤늦게 당황한 기 서방댁은 "이, 이정이구마는, 그러고 본께 어지 강청댁도 주고 사하고 한다 카더니, 그래서 이서방이 읍내 약 지으로 간다 카더마는." 채마밭으로 달려 간 김서방댁은 부추를 잘라왔다. 흙도 떨어낼 겨를이 없고 고추장에 버무 려 김서방의 입을 열고 밀어놓는다. "이정에는 이기에 젤이니께, 설사가 잽 힐 기요." 했으나 김서방은 그것을 씹을 기력도, 삼킬 기력도 없었다.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길이대로 누워 신음조차없이 조용 했다. 몇 번이나 닭이 울었는지 동편 하늘이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을때 행랑의 이 방 저 방에서 기동하는 기척이 들려왔다. 하인들은 김서방 주변으로 몰려들다. 그리고 어느덧 별들은 빛을 잃었다.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 읍내 장을 향해 가는 달구지의 소방울 리, 새 벽은 서서히 걷혀갔다. "사램이 이 지경 되도록 와 우릴 안 깨웠소!" 수동 이 고함을 질렀다. 3장 사형잿빛으로 엉겨 있던 구름바다와 희끄무레한 아침 안개 속에 외길 모양으로 흐르는 강물, 대숲과 수풀, 초가지붕, 지붕 위에 하얗게 피어 있 던 박꽃까지 화려한 여광에 물든 듯싶더니 해는 드디어 산허리에서 왈칵 솟아올랐다. 어둠은 장엄하게 장막을 거뒀다. 해의 윤곽이 부서지고 비말과 같은 광선이 날아내리는 산천은 황홀하다. 들판에 싱싱한 푸르이 가득 들 어찬다. 최참판댁 행랑 뜨락에도 처마밑을 지나서 아침해는 비쳐들어왔다. 김서방은 그 뜨락에, 돗자리 위에 누워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허깨비로 변해버린 모습, 구토와 설사는 뜸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탈 수증에 빠진 얼굴, 움푹 꺼져버린 눈두덩에 눈알만 불거져나왔다. 눈알이희 미하게 움직이고 있는 듯싶었으나 의식은 가물가물했고 엉성한 수염 사이 의 얼굴은 푸르다 못해 잿빛이었다. "아이고! 우리 개똥이아배 죽겄네! 이 일을 우찌 할꼬오!" 김서방댁은 울부짖었다. 알부짖다가 코를 풀곤 한다. " 보소! 개똥이아배, 정신 차리소, 야! 사램이 죽어가는데 우찌 의원은 이리 더디 오요!" 읍내 문의원을 부르러 길상은 방금 떠났는데 김서방댁은 조바 심을 내어 소리쳤다. 하인들은 빙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을 뿐 한마디 말이 없다. "방으로 옮기야 안 하겄소?" 돌이 수동이를 보고 수군거렸다. "아니, 의원이 오신 뒤에." 수동이는 김서방 얼굴에서 눈을 지 않고 대꾸한다. 윤씨부인도 심한 동요를 나타내며 중문까지 나와서 먼치로 바라보고 있다가 돌아갔다. "이 무상한 사람 좀 보지? 개똥이아배! 정신 채 리소. 사램이 죽겄는데 이리 적막강산이까! 보소! 정신 좀 채리소!" 몸을 쩔쩔 흔들었으나 김서방은 말을 잃었다. "나는 우찌 살라고 이녁이 이러요! 누굴 의지하고 살라꼬 이러요! 시상에, 굿을 하든가 무당을 부르든가 이러 고만 있이믄 우짤긴고오!" 집안에서는 어젯밤 김서방이 돌아온것을 아 무도 몰랐다. 아침이 되어 기동을 하면서 김서방댁 넋두리에 우우 몰려왔 다. 사실 김서방댁 자신만 해도 그러했다. 밤이었고 그래서 흔히 있는 토사 곽란으로 생각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혼자서 객귀를 물리고 했었다. 새벽녘 에는 이질로 알았으나 날이 밝아옴에 따라 당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 서방을 지켜보고 서 있는 하인들은 모두 김서방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울고불고하는 김서방댁보다 그들이 더 절실하게, 김서방은 죽을 것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말 뚝같이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것도, 김서방댁 울부짖음에 어울릴 수 는 것도 김서방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모른다. '문의원이 오시도 소 용없다. 저래가지고는 못 살 기다.' '저 방정스런 할망구나 대신 죽어버렸 이믄 좋겄다.' 아무리 넉살을 피우며 울어도 하인들은 김서방댁에게는 동 정을 하지 않았다. 계집종들과 드난꾼 아낙들이 부엌 뒤쪽에서 수군거리며 바라보고 서 있었다. 봉순네는 잠시 다녀간 후 윤씨부인으로터 어떤 지시 를 받았는지 얼씬하지 않았다. 몇 해 동안 연이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바 우 내외만은 명대로 살다 갔다 할 수 있었으나 최치수의 죽음, 귀녀의 죽 음, 집안 식구는 아니었지만 불에 타죽은 또출네 하며, 죽음치고는 비참한 그들 비명을 보았건만 새로이 직면하는 죽음은 여전히 하인들 가슴에 전율 을 일게 한다. 의원을 데리러 간 길상이 읍에서 돌아오기 에 마을에서 올 라온 여치네가 용이의 처 강정댁이 죽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막 주 하고 사하고 했다 카더마는 아까 그만 죽었다 안 카요." "강청댁이 죽었다 고?" 하인들은 일제히 되뇌었다. "이서방이 시체를 잡고 막 울로, 동네에서 는 강청댁맨치로 주하고 사하고 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카더마, 돌림벵인 가배요." 이때 삼수가 외쳤다. "그라믄 괴정이다!" 괴 정!" 호열자라는 말이다. 모든 얼굴이 순식간에 빳빳해진다. "여러 해 에 사, 사람들을 몰살시킸다 카는 그 벵 말인가?" 수동이만은 그것을 이미 짐 작하고 있었던지 말이 없고, 묵묵히 김서방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 벵은 걸리기만 하믄 죽는다!" 빙 둘러싸고 있던 사람의 울타리는 무너진다. 불거져나온 두 눈, 관골과 코만 댕그랗게 솟아오른 해골, 김서방의 그런 모 습은 순간 이들에게 다른 뜻으로 비쳤다. 암담하고 침울하고슬펐던 눈빛은 일제히 공포로 변했다. 삼수가 맨 먼저 그 자리에서 떠났다. 술렁술렁 다 빠져나갔다. 김서방댁조차 그 넉살스런 넋두리를 그만두고 민적민적 엉덩 이를 밀면서 물러나 앉는다. 때마친 볼일이 있어 최참판댁에 묵고 있던 마 장리의 마름 염서방은 윤씨부인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말에 오라 도 아치듯 가벼러 다. 그런 행동들을 야박스럽게 생각한 돌이는우물 쭈물하며 서 있었다. 수동이만이 본시의 모습대로 주변을 거들떠보지도않 았다. 불안해진 돌이는 수동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다리가 성치 못한 수동이 휘청리 며 얼굴을 든다. 그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돌이는 하는 수 없었던 지 얼굴이 벌개지며 돌아섰다. 햇살은 활짝 퍼졌으나 아직 뜨겁지는 않았 다. 하기는 이제 여름은 가고 있었으니까. "김서방!" 수동이 별안간 다리를 꺾고 엎드리며 오열한다. 김서방의 굵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부친 같고 형님 같았던 김서방, 어질고 마음씨 고왔던 김서방의 음의 길이 외로 운 데 울음이 터졌던 것이다. "개, 개또-" 김서방이 입술을 움직였다. "개똥 이녀석 말이요? 김서방!" 고개를 끄덕인다. "남이하고 함께 딸네 집에 갔다 카요." 수동이는 흐느끼며 알려준다. 자기가 갈 것을 알고 병신 자식을 찾 았던 모양이다. 김서방은 그러냐 하듯이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의 일 상은 무너졌다. 마을의 일상도 무너졌다. 불과 공포는 시시각각 검은 구름 같이 마을을, 최참판댁을 엄습해오고 있었다. "어제 이서방은 약을 못 짓고 빈손으로 오던데." "와?" "의원이 없었던 갑더라." "이자는 의원이 와도 소 용없을 기구마." "사람 많이 상하겄다." "점쟁이가 그랬다 카든가? 들에 곡 식은 만수판인데 금년에는 묵을 사램이 없일 기라 하더란다." 그림자도 발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무서운 사태를 예감하여 하인들은 이곳저곳을 서성 거리며 할 바를 몰라한다. "김서방!" 수동이는 훨씬 더 몸을 기울여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상투로부터 빠져나온 머리칼이 목덜미서 흔들린다. 무릎 을 땅에 짚어 뒤로 뻗는 종아리, 짚신바닥에 내려쪼이는 햇빛은 이제 따가 웠다. 수동의 그러한 모습은 죽음길을 헤매고 있는 김서방보다 더 고독하 고 서러워 보였다. 김서방댁은 이제 울부짖지 않고 멍해 있었다. 까마귀 우 는 소리에 삼수가 침을뱉는다. "수동이형님." 견디다 못해 칭얼거리는 아이 같이 돌이 불렀다. "혀, 형님 이, 이리 오소." 그러나 몸을 일으킨 수동이는 김서방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고 김서방댁을 바라본다. 김서방댁은 눈을 깜박거렸다. "의원이 이리 늦어지니, 방으로 옮겨야겄소." "그, 그러기." "딸 네한테 기별해서 개똥이도 오고 해얄 긴데." "지금 가서 언제 오겄노. 한발 두발도아닌데 문의원 은 머한다고 아즉 안 오는고. 길상이 그 눔 자석은 또 함흥차사가 됐단 가. 사램이 죽겄는데 해를 잡힐라 카네." 생각이 난 듯 김서방댁은 눈물을 질 금질금 흘린다. 수동이는 김서방 곁에서 떠났다. 절룩거리며 안채로 들어갔 을 때 신돌 위에 윤씨부인이 서 있었다. "마님." "차도가 있느냐?" 절망적 인 목소리였다. 수동이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최치수가 죽은 후 수동 이는 윤씨부인을 이렇게 마주 대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딸네 에 기별을 해야겄십니다. 개똥이녀석이 제 누부하고 함께 거기 가 있어서 머리 풀 사 람이 없십니다." 김서방을 잃는다는 것은 서희를 위해 기둥을 잃는 것이다. 윤씨부인은 김서방이 자기보다 오래 살아줄 것을 믿었다. "그러면 집안에 무슨 일이 다시 생길지 알 수 없으니 마을에 내려가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게, 문의원께서는 어찌 이리 더디시냐." 수동이 절룩리며 물러났다. 돌이를 마을로 내려보내고 "삼수 니 이리 온나. 맞잡아서 김서방을 방에 옮기자." "와 나만 보고 그러요." 멀찌감치 선 채 삼수는 외면을 한다. "그라믄 땅바 닥에서 죽일라 카나!" "할 수 없제요.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께." "안 죽을 놈이 어디 있노!" 수동이 덤벼들 듯이 김서방을 안아 일으킨다. 몸집이 작 고 가랑잎 같은 꼴이어서 담싹 안기는안았 으나 다리가 성치 못한 수동은 휘청거렸다. 복이 후둘후둘 떨면서 다가다. 겨우 두 사내가 김서방을 방으로 옮겼을 때 "아이고오! 무신 이런 액운이 다 있겄노!" 방에 따라 들어가는 대신 마당에 퍼질러앉은 김서방댁은 울기 시작했다. "무울." 김서방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마을에, 집안에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몸채와 뒤채의 거리가 멀고 대숲을 타 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때문에 사정을 모르기는 피차 마찬가으나, 홍씨는 삼월이를 가두어놓고 닦달에 여념이 없었다. 남편 말에서 꼬투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년! 바른대로 일러라! 네년이 스스로 나리한테 꼬리를 쳤지." " 아, 아니옵니다." "주둥이를 찢어놓을라! 이실직고 못하겠느냐!" "억울하옵 니다. 저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이년 보게나? 죄가 없다?" 매는 삼월이 등에서 연신 바람을 일으켰다. "아이구!" 엷은 적삼 속의 맨살 이나 다름없는 등이 물든 것을 볼 수 있다 "죽일 년!" 부러진 매를 들고 새것을 집어든다. "너무하십니다. 저는 아씨의 종이 아니옵니다. 마님께 여 쭈시오." "뭐라구?" 이번에는 삼월이 얼굴에 매가 날았다. 손등이 부풀고 얼굴이 부풀었다. 샛노랑 적삼이 찢어졌다. 밖에서 맹추는 부들부들 떨면서 삼월이 신음에 귀를 는 다. "죽여주시오. 이렇게 된 몸, 살아 무엇 하겄소." 삼월이는 이를 갈며 대 항한다. 그의 마음 속에는 매질하는 홍씨에 대한 원망보다 준구에 대한 원 망이 더하였다. "기왕 죽을 몸이라면 할말 다 하리다. 비록 천한 종년의 몸 이오나 제 몸 지킬 줄은 알고 있었소. 으음, 제 몸 지킬 줄은, 으음,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서 겁탈, 아이고! 되이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싼다 캤는데 그 나으리에 그 아씨." "이년!" 입 술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뉘에게 말대꾸냐!" 나중에는 홍씨도 뭐가 뭔지 모르게 신들린 무당가팅 삼월이를 때리고 있었다. 이 무렵 김훈장 사랑에 서 허둥지둥 걸어나온 준구는 죽은 것같이 조용한, 들판에 사람이라곤 별 로 찾아볼 수 없는 마을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걸음을 빨리한다. 부를 접어 든 손이 앞으로, 뒤로 휘저어진다. 수염 없는 얼굴, 여자같이 매끄러운 얼 굴은 한층 더 윤이 흐르는 것 같다. 서둘면 서둘수록 그의 짧은 다리는 까 치걸음으로 보이다. 누가 달려와서 덜미를 잡기라도 할 것처럼 크게 벌어 진 눈이 뒤편으로 돌아가곤 한다. 최참판댁까지 달려 온 그는 사랑마루에 오두머니 앉은 아들을 확인하고 나서 급히 홍씨의 소 로 걸음을 옮긴다. 신발을 내지르듯 벗어젖히고 마루로 올라선 그는 안방 문을 열려 했다. 그의 눈에는 오돌오돌 떨고 있는 맹추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인, 이 방문 좀 여시오!" 남편 목소리를 들은 홍씨는 마 참 잘 되었다 싶었던지 매를 손에 든 채 거리낌없이 방문을 열었다. 방안 에 한 발을 디민 준구는 "아니!" 핏발이 서서 한층 더 눈동자가 흐려진 홍 씨는 어떠냐!하고 묻듯이 남편을 바라본다. 나자빠진 삼월이는 이를 악문 채 신음을 누르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옷 사이에, 내비친 살에지렁이 같 은 맷자국이 휘감겨 있었다. 홍씨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머금는다.잔 인하다든가 앙 칼지다든가 그런 표현보다 무지막지하다 할 수 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구 는 경위를 따지려 하지 않고 맹추를 불렀다. "어서 끌고 나가라!" 준구는 입술이 파를르 떨린다. 삼월이 매맞은 ㅇ리 때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는 마음이 바빠서 신경질이 나는 것이다. 엉거주춤 서서 기색을 살피는 맹 추를 본 홍씬느 손에 든 매를 던졌다. 방바닥에는 부러진 매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홍씨 자신도 어지가닣 지쳤던 것이다. 매를 버리는 것을 본 맹추는 삼월이를 부축해 일으켰다. "죽일 년 같으니라구." 비틀거리며 지방 을 넘는 삼월이 뒤통수를 향해 폭행의 종지부 같은 홍씨의 욕설이 쫓아갔 다. 마루 끝에서 내려서려고 휘청거리던 삼월이 돌아본다. 불꽃이 이는 것 같은 두 눈이 준구를 본다. 준구는 당황한 듯했으나 "이년! 썩 나가지 못할 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방문을 닫는다. "흥, 자알 하시었소." 남편에 대 해서는 심히 노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종년에 대한사매질은 습관으로 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홍씨인 만큼 남편 보기 민망하다는 생각도 물론 하 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 그런 일 따질 때가 아니오." 다른 때 같으면 풀이 죽었을 남편 굴에 서 흥분된 빛을 본 홍씨는 "듣기 싫소! 나는 가겠어요. 서울로 돌아가겠단 말입니다." "허허, 지금 그 일 따질 떄가 아니래도," "그럼 난리라도 났다 그 말씀이오?" "난리가 났다면 피신이라도 하겠으나 야단났소." "...?" "지금 행랑에서는 김서방이 죽게 된 모양이고." "그게 무슨 상관이오?" 준구는 입 속이 탄다. 두터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인다. "그, 게 심상찮은 병이오." "..." "호열자인 모양인데 마을에서는 사람이 하나 죽고 연방 병자가 난다는 얘기요." 홍씨 얼굴이 변한다. "듣기로는 읍내에서도 야단이 났다는 거요." "그, 그럼 어떡허지요? 나, 난 서울로 가겠어요." 홍씨는 벌떡 일어섰다. " 어림도 없는 소리, 마음대로 오고가고 할 것 같소? 가다가 죽을게요. 이런 때는," 하는데 그 말에는 관심이 없고 홍씨는 당장에라도 떠날 듯 짐을 챙 길 기세다. "부인!" "..." "내 말을 들이시오." "나는 서울 가겠어요. 여기서 죽을 수 없어요. 어서 가마라도 마련하여주시오." "이 철없는, 자아 내 말 들으시오. 나는 그 병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소." "네?" "일본 사람들은 그 것을 전염병이라 하오. 왜 그 여러 해 전에 그 병이 돌지 않았소?" "그랬 지요?" "그 병은 입으로 해서 옮겨지는 병이라 하오. 그러니 먹는 것만 조 심하면 괜찮다는 게요. 날것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거요. 무엇이든 음식은 끓 여서 먹기만 하면 병이 옮을 염려는 없고, 그러니 우리 식구는 이곳에서 꼼짝 안 하는 게 가장 안전한 일이오. 죽만 끓여 먹으면 될 거 아니오? 찬 바람만 불면 되니까." 하다가 준구는 홍씨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인지 한참 동안을 수군거렸다. 홍씨는 반신반의의 눈으로 남편을 본다. "맹추야!" " 네." "사랑에 가서 술 데리고 오너라!" 문의원이 출타중인데다 나룻배가 끊 겨 육로로 혼자 돌아온 길상은 김서방이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울었다. 울면서 그는 윤씨부인에게 가서 다녀온 결과를 이야기한다. "절에 가신 지 며칠이나 되었다 하더냐!" "삼 일 전에 가셨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 읍 에서도 병자들이 생겼다더냐!" "예. 나릿선도 끊어지고 여기저기 새끼줄을 치고, 죽은 사람도 더려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사람 많이 상하겠고나." " 읍내서는 아픈 사람들을 병막에 끌고 간다는 말이 나돌아 모두 문들을 닫 아걸고 길에는 별로 사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문들을 닫아걸고 길에는 별로 사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 해 전에 이런 병이 돌았지." 윤씨 부인은 길상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의 눈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 직 이곳 하늘은 화창한 것 같은데 먼 곳에서 잿빛 구름이 움직이는 것을 볼수 있었다. 새들이 숲을 향해 날아간다. 별안간 마른하늘이 울었다. 잿빛 구은 좀더 빠르게 이 마을을 향해 움직여온다. 4장 골목마다 사신이 까대기 앞에 주질러앉은 용이는 하늘만 쳐다본다. 흩어진 상투하며, 성한 사람 같았다. '사람으 도리가 이럴 수 없을 긴데, 사람으 도리가....'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없는 집에, 마을 전체가 쥐죽은 듯이 고요한데 염도 못한 강청댁 시체를 홀로 방안네 글려놓은 채 밖에 나앉아 하늘만 쳐다보 고 있는 것이다. 염을 하기는커녕 무섬증 때문에 용이는 시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오늘은 임이네도 나타나지 않는다. 두둥산 같은 배를 안고 시적 산기가 있을 듯싶은 몸을 끌고 와서 어제, 그제는 죽이나마 쑤어주었는데. '귀밑머릴 마주 풀고, 시, 십여 년을 넘기 살아온 정리를 해서도이럴 수는 없일 긴데.'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그러나 흉한 꼴이 되어 싸늘하게 변한 시체를 지키고 앉아 있을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희한한 일이구마. 어느년이 못 묵을 것을 음석에 넣은 것아닌 지 모르겄네?" 병이 난 시초부터 강청댁은 임이네를 두고 의심부터 했다. 구토와 설사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자 강청댁은 용이도 공모했을 거라 억설을 하며울 부짖었다. "오냐아! 내 죽고 나거든 아들딸 놓고 재미있게 살겄다 그로구나 아! 하늘이 서퍼렇다! 하늘이!" 그만 뒈지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용이는 병 이 심상찮음을 깨닫고 읍에 나갔다. 그러나 문의원을 만나지 못했고 다른 약국에서도 약을 짓지 못했다. 사방에 병자가 생겨 의원은 모두 출타중이 었으며 돌림병이 돈다고 읍내는 몹시 술렁거렸다. 별수없이 장바닥에서 쑥 한 엮음을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광란을 부릴 기력조차 없어진 강청댁은 그럼에도 버둥거리며 악담을 뇌이고 있었다. "제집 소나아 공몰 해서 사약 을 먹있고나. 그러니께 의원을 안데리고 온 거 아니가. 누구 아무도 없나! 원통해서 내가 우찌 죽으꼬!" 강청댁은 마지막 순간까지 용이에 대한 원한 에 사무쳐서 나부대었다. 읍내에 돌림병이 돈다고 했어도 그는 믿지 않았 고 마을에서는 최초의 희생자였던 만큼 무서운 괴정임을 강댁은 물론 용이 도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제기랄! 집구석에 앉았다고 안 죽을 기든가? 백 보나 이백 보나 마찬가지 아니가. 영팔아! 가자. 용이 그눔으 자석 방구석 에 송장 썩겄다!" 울타리 밖의 떠들썩한 윤보 목소리를 듣고 영팔이 슬며 시 나왔다. "보소." 아낙이 따라오며 불렀다. "못 들어가겄나!" 영팔이 역정 을 낸다. "그렇지마는 우떤 벵이라고." "잔소리 라!" "남 들은 다 꼼짝 안 하는데 이녁만 그래쌀 거 없거마는." "꼼짝 안 하믄 보 형님이 왔이까!" 실상 영팔이도 불안하여 화를 내는 것이다. "아지마씨, 걱 정 마소. 운수가 닿을라 카믄 방에 앉아서도 접시물에 빠지죽는다 안 캅디 까?" 윤보 말에 대꾸를 하러 하자 영팔이는 제 아낙을 떠밀어넣고 삽짝을 닫느다. "용이 그눔으 자석 우짜고 있습디까." 마을길을 내려오면서 영팔이 물었다. "아까 읍에서 오는 길에 잠시 딜이다봤더니 천장만쳐다보고 있 더마." "..." "벵도 벵이지만 인심이 무서바서 보리 서너 말 짊어지고오니라 고, 그래 집에 갖다 놓고 나오는 길 아니가. 강청댁이 죽은 지가 며칠 됐노?" 한 사 나흘 됐이까요?" "흥, 기특하게 관은 짜놨더라마는 이때꺼지 송장을 안 치 우고 머했던고?" "혼자서 엄두가 안 났일 기요. 아부텀도 무서바서 못 갔 이니께요." "끌어내서 꿍꿍 파묻으믄 될 긴데 이참에 무신 예를 차릴 기든 가! 아직이사 초죽음이니 관에라도 들어가지." "..." "꼬 돼가는 거 보니께 사램이 상해도 많이 상하겄다." "읍내도 벵자가 많소?" 야단이제. 병 막에 끌고 가까 싶어서 문들을 철장하고 벵자 난 거를 숨기니께 그렇지 백 명 아니라 수천 명 될지 모르지." "서, 설마 작은 골에서 그렇다믄 어디 사 람으 씨나 남겄소?" "그러매... 우찌 되는 판국인지 낸들 알겄나. 내 총각 시절에," 이런 마당에서도 총각 시절에 하고 나오는 말에 영팔이는 웃음을 금치 못한다. 지금은 뭐 총각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때 괴정이 돌아서 사람 많이 죽었지." "나도 그때 일은 아요. 웃마을에서 송장 못지나가 게 할라꼬 삽곡괭이 들고 나오던 일이며 벵이 지나간 뒤 새미에 물 지르러 온 웃마을 사램 이 뚜디리맞던 일, 난리를 겪은 것맨치로 생생하게 생각나누마요." "나는그 때, 지금은 죽 고 없지마는 읍내 박목수 집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는데 날마다 관 짜니고, 덕분에 박목수는 그해 겨울 돈푼이나 써가믄서 지냈지마는. 관만 돌세가 나는 기 아니었고 상두꾼 백정들 세도도도 대단했던 기라. 손이 모자라니 께. 백정들을 불러서 송장 치다꺼리를 시킸이니께. 그것도 초짜드막 일이고 백정이라고 저승차사가 피해가는 법 있나? 굿하던 무당도 굿마당에서 나자 빠지는 판에." 용이 집에 가는 도중 그들은 마을 사람을 한 람도 만나지 못했다. 영팔이는 누구 하나라도 더 나타나주기를 바라듯이 사방을 불안스 럽게 둘러보곤 하며 걷고 있었다. "최참판댁 김서방도 죽고." "김서방이 죽 어?" 읍에서 갓 돌아와 초문일 터인데 윤보는 예사롭게 반문했다. "김서방 이 죽은 뒤 또 벵자가 났다 카든가요? 도네서도 아픈 사램이 제법 된다 하 고 김진사댁 두 과수도 벵이 걸맀다 카드마요." 보는 실쭉 웃는다. "본시부 텀 그 댁 며느리는 벵자니께." "그것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일 기고... 아무튼지간에 언제 누가 당할 긴지 장담하겄소? 벵에 걸맀다 카믄 그거는 사지밥 짓는 기니께." "..." " 살아도 살았는가 싶지가 않소." "한 가지 좋은 것은," 윤보는 길섶에 침을 칙 뱉는다. "한 가지 좋은 것은 흉년하고 달라서 있는 놈 는 놈 차별이 없는 그기라. 벵이사 어디 수숫대 우막집만 찾아가나?" 그은 용 이 집 마당에 들어섰다. "용아" 까대기 앞에 앉은 채 용이 푹 패인 눈을 들어 윤보를 쳐다본다. "우짤라고 그러고 있노. 우리가 온께 저승에서 할아 비 만난 거맨치로 반갑제?" 한마디 던져놓고 윤보는 서슴없이 마루에 올라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영팔이 따라들어가려 하자, "니는 삼끈이 나 찾아오니라." 하고 윤보는 명령했다. 영팔이 까대기 쪽로 걸어갔을 떄 용이는 애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영팔이는 잠자코 갈라서 타래를 만들어놓 은 삼을 한 묶음 찾아내어 그것을 여러 가닥으로 나누어 이어간다. 갈아입 히려고 내놓았던 모양이다. 시체 머리맡에 옷은 한 벌 놓여 있었다. "흥, 있는 놈인들 이 차중에 향목 삶은 물에 뫼욕시키겄나! 제기럴! 저승 가는 길에 강물 만나거든 때는 벗는 기지 머." 지껄이며 윤보는 굳어져버린 시 체에 옷을 갈아입히고 영팔이 가져온 삼줄로 염을 한다. "이거 좀 잡아라." 굽어진 두 팔을 겨드랑이에 바싹 갖다붙이고 삼줄을 돌린 한 끝을 영팔에 게 내민다. "잡아댕기라." 윤보는 시체에다 기 버선발을 뻗쳐가면서 질근질 근 힘을 주어 묶는다. 감정이라곤 손톱만치도 없는 얼굴이다. 시체가 아닌 나무막대기를 다루듯이, 무서운 전염병에 죽은 사람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 는 것 같다. 송장 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용이는 어머니를 따라 잔칫집에 왔다가 쫓겨난 소년처럼 까대기 아펭 웅크리고 있었다. 실상 몇 번 방에 들어가보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발이 떨 어지지 않았다. 방에는커녕 방문 앞에도 가볼 수가 없었다. '짐승만도 하고 나. 짐승인들 이러까?' 일을 끝내고 밖에 나와 손을 씻으며 윤보는 말했다. "용이 니도 야박한 놈이고나. 십여 년을 데꼬 살던 계집인데 벵이 그리 무 섭나?" 손을 씻은 윤보는 허리춤에서 수건을 꺼내어 손을 닦으며 용이 곁 으로 다가왔다. 눈빛이 무서웠다. "벵이, 벵이 무서바서 안 그래요." "그라 믄!" "야박하기사... 야박하다뿐이겄소. 금수만도 못할 긴데. 이, 이럴수가 없일 긴데 무서바서, 무섬증이," 윤보는 눈빛이 부드러워다. "죄가 많아서 안 그렇나. 니도 강청댁 속 안 썩있다고는 말 못할긴께..." "우, 우쩐지 얼굴 보는 기이 무서바서 사람으 도리가 이, 이럴 수 없일 긴데..." 흐느껴 운다. "정 떼고 가니라고 그런 기다. 시끄럽다." 영팔이 눈을 꿈벅이며 위로한다. 관은 용이 짊어졌다. 연장을 든 사내 둘이 뒤따랐다. 초가을 푸른 하늘에 구름은 호사스럽게 피어서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하관할 때 용이는 몹시 울었다. "지랄한다. 그리 애닯거든 저승에 가서 다시 만내 살라모." 윤보의 핀잔이었다. 황토 무덤을 지어놓고 윤보와 영팔이물 러났다. 요이는 두 무릎을 꺾고 일어설 줄 모른다. "용이 저놈도 정이 많은 기이 탈이라. 그놈으 정 때문에 대추나무 연 걸리듯이 여기저기 걸리서," 중얼거리며 윤보는 부싯돌로 담뱃불을 붙인다. 땀이 번들거리는 흉한 얼굴 위로 담배연기가 피어올라간다. "사람으 목심 질길라 카믄 쇠따줄맨치로 질기더라마는 죽을라 가믄 포리 목심겉이 허무한 기라. 이라고 있는 우린들 언제 깜박 가부릴 긴지 그거사 하나님이나 하는 일 제." 영팔이 말에 윤보는 "제법 말 겉은 말을 하기는 한다마는 뜬금없이 그거는 또 와?" 생 각해보소. 이눔 의 돌림벵이 왜벵인께 하는 말이 아니요. 그러니쎄께, 저어 내 어릴 것에이 벵이 돌았일 적에도 왜눔으 새끼들이 묻히가지고 온 벵이라 안 합디요! 인 벵이나 손님 겉은 벵에 사램이 많이 죽기사 하지마는 괴정에 비하믄 소분 지애씨고, 어디 그리 추풍낙엽맨치로 쓸고 가건데? 이눔으 세상이 우찌 될 라꼬 이러는지. 왜눔 들어오고부텀 잘되는 거 하나 없이니께. 하다하다 나 중에는 그눔으 새끼들 벵까지 가지와서 우리 조선 사람 씨를 말라 안 카 요? 이럴 때 와 사명대사 겉은 영험한 어른이 안 나시는지 모르겄소." 역 사적인 사실을 두고 무식한 농사꾼 영팔이 사명대사를 추모할 리는 없다. 영팔이 믿는 것은 사명대사에 대한 전설이었다. 우매한 백성들은 왕시 사 명대사가 행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그 신통력을 의심치 않았다. 이들은 그 당시 사명대사는 일본까지 항복을 받으러 갔었다고 했며 왜인들 앞에서 쇠방석을 타고 바다에 떠 있었다 했으며 무쇠로 만든 고방 속에 가두어놓 고 밤새도록 쇠가 벌겋게 달기까지 불을 때었으나 이튿날 고방 문을 열었 을 때 사명대사 얼굴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는 둥, 그리하여 도술로써 드디어 왜인에게 항복을 받았으며 그네들의 씨를 말리기 위하여 해마다 구 멍 없는 인치 삼백 장을 바칠 것을 조약하고 돌아왔다는것 이다. 백성들의 복수심과 짓밟힌 자부심에서 지어낸 황당한 이야기에 과한 것이지만 그러나 무력한 백성들은 신비한 힘에 대한 기대 없이는 어떤 희 망도 가져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인들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는 영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보는 " 니 말이 맞다. 니 말이 맞다. 하하하하 핫..." 허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윤보가 웃음을 거둔 뒤 두 사나이의 시선은 울고 있는 용이에게로 간다. 사실 두 사나이는 용이의복잡한 마음 을 이해하기는 하나 그의 슬픔을 공가할 수는 없었다. 아니, 강청댁의 죽음 자체가 이들에게는 마치 일상 다반사같이 무감동하게 바래봬졌던 것이다. 그것 참 안됐네, 하며 조의를 베풀 상황이 아니었다. 시시각각으로 발소리 도 없이 다가오고 있을 병마,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덮쳐올지 모르는 보 이지 않는 제앙 앞에 마을 전체는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머지 않아 집집에서 병자의 신음이 들려올 것이다. 시체는 줄을 잇고 마을 산으 로 떠날 것이다. 아니, 시체를 거둘 사람조차 없을 만큼 마을 전체를 휩쓸 고 지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이십여 년 전 잊었던 악몽은 보다 강한 빛깔 을 띠고 사람들 가슴속에 절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윤보는 허리 춤에 곰방대를 찔렀다. "용아." "..." "이자 내리가자." "..." "이눔으 자식아! 덜 서러버서 눈믈이 난다. 대동지란을 우찌 피할 꼬!" 윤 보는 팔굽으로 쥐어박으며 용이를 끌어 일으킨다. 집앞까지 내려온 용이는 "형님, 고소. 영팔이 니도." 주문을 뇌듯 한마디 하더니 마당으로 급히 들어간다. "제기 럴! 세빠지게 초상 쳐주고 초상술 한잔 없는 이런 법도 있나?" 울타리 밖 에 엉거주춤 서 있는 영팔에게 윤보는 허튼소리를 계속한다. "주막 영산댁 은 문 철장해놓고 읍내로 달아난 모양인데." "남정네 찾아갔겄지요." "잘한 생각이제." 하다가 울타리 위로 목을 쑥 뽑는다. 용이네 마을 넘겨다본다. " 임이넨가 뭔가, 코빼기도 볼 수 없이니 우찌 된 일고?" "아마도 몸풀 때가 되었일 기요." "세상 참 요상하다. 머할라꼬 이 풍진 세상을 살겄다고 꾸역 꾸역 나올라 카노. 나온 목심도 보존키 어러븐 이 판국에," 그들은 나란히 마을길을 올라간다. "흠, 이분에는 애기 송장이구마." 윤보는 혀를 찬다. 죽 은 아이를 거적에 말아 지게에 짊어지고 가는 농부가 있었다. 방문은 열어 젖혀진 채, 못 살아서 타관으로 솔가해버린 빈집 같은 마당 안을 이리저리 혼자 서성거리다가 용이는 까대기 앞에 웅크리고 앉는다. 요란스럽게 늘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집안이, 허무하게 안타깝 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소도 없고 닭도 없고 참새 한 마리 얼씬거리지않 는다. 조랑말을 타고 첩첩산골인 강청으로 갈 때 상객은 외삼촌이었다. 구 레나룻이 소담스러운 중늙은이. 이제 막 개울 얼음을 녹인 이른봄의 바람 이 솔잎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외삼촌의 하얀 무명 두루마기 위에서도 솔 잎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울타리 없는 마당에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다. "실랑 좋네." "얼굴이 관옥 겉구마." "아무래도 신부가찌부는데?" 대례판에 선 신부의 키는 작았다. 외삼촌은 아직 나이 어려서 그런 거라 했다. 몸집 작은 여자는 으레 씨암탉이니 자손 귀한 집에 아일 많이 낳아 줄 거라고 위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삼촌의 말은 다 맞질 않았다. 신 부는 삼십이 넘었어도 키는 자라지 않았으며 배태 한번 못하고 가버렸으 니. 신방 촛불 밑에서 용이는 신부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살결이가무잡 잡했다. 예쁘지도 않았다. 분꽃같이 뽀얀 월선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다. '어디서 살아 있일꼬...' 울컥 치미는 눈물 때문에 돌아앉고 말았다. 날이밝 기도 전에 외 삼촌을 찾아갔다. "외삼촌, 이자 떠나십시다." "머라꼬? 이눔아야, 그런벱이 어디 있노?" "집에 가서 봄갈이도 해얄 기고요." 용이 그예 떠나겠다는 고 집을 버리지 않았다. 처가 사람들은 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는 줄 알았다. 한데 나이 어린 신부는 함께 가겠다 하며 나서는 것이었다. 후일 가마를 보낼 터이니 며칠 쉬었다가 신행을 하라고 상객 간 외삼촌이 타이 르는 것이었으나 그는 걸어서 따라나섰다. 당돌한 신부의 행동은 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지만. 신부집은 과히 넉넉지 못한 데다 자식들이 많아서 그 많은 자식들 중 딸 하나를 위해 각별히 근심하지 않았다. "대접이 소홀하다고 그러는가?" 장인 되는 사람이 용이에게 한마디 했을뿐 딸을 데려가려 면 가고, 두고 가려면 두고 가라는 투의 무관심이었다. 떠날 때도 변변한예 단 없이 초라하게 나선 딸을 위해 장모 역시 가슴 아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신부를 종랑말에 태우고 신랑은 걸어서 고개를 넘었다. 신부를 집 에 데려다 놓고 잔치를 베푼 다음날 용이는 여독도 풀지 않은 채 봄갈이에 나섰다. 허전하고 서러운 마음에서 소엉덩이를 갈기곤 했다. 해가 중천에 올랐을 떼 새댁은 점심을 이고 왔다. 짧은 검정 무명치마에 흰 당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버선목과 치마 사이에 종아리가 보일락말락했다. 처녀 적에 입던 옷이었던 모양이다. "너무 옷이 없고나." 무던한 성미의 모친이 섭섭 한 표정으로 말을 하다가 "하기사 자식들이 많으믄, 한가씩만 찍어 입힐라 캐도 심이 들지. 내 식구 된 바에야 해입히가문서 살지." 옷 없다 한 말을 주워담듯이, 모친은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용이는 새댁게 등을 돌리고 점 심을 먹었다. 새댁은 등뒤에서 통을 받쳐 이고 온 똬리를 돌리고 있었다. 용이 귀에 똬리를 손가락에 끼고 뱅뱅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봄이라 하 지만 바람이 불고, 들판의 바람은 아직 매운데 짧은 치마 밑이 종아리는 시려울거라 용이는 생각했다. 풋살구같이 오종종하고 빈한해 보이는 얼굴 을, 입안에 밥을 밀어놓으며 눈앞에 떠올려본다. 솜털이 햇빛에 보송보송 일어섰던 하얀 얼굴이 저절로 솟아오른다. 푸른 빛이 도는 눈에 눈믈이 그 득 고이던 얼굴, 용이는 목이 메었다. 숭늉을 연달아 마셔가며 밥을 넘긴 다. 멀리 보리밭에 내외가 나와서 보리를 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점심을 끝내고 돌아보았을 때 새댁은 언제 갔었던지 산기슭 쪽에서 급히 논둑길을 밟으며 걸엉고 있었다. 손에는 할미꽃 한웅큼이 쥐어져 있었다. 가까이까지 온 새댁은 "저어, 이거." 할미꽃을 용이 코앞에 쑥 내밀었다. " 피었소." 하고 해죽이 웃었다. "벌써..." 입속말로 우물쩍거렸다. 새댁 얼굴 이 빨개졌다 용이 얼굴도 붉어졌다. "봄이니께." 훌쩍 일어서서 그 동안 논 둑의 풀을 뜯어먹고 있는 소 곁으로 간다. 소를 논으로 몰고 가서 쟁기를 끼우며 용이 "어서 가아!"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새댁에게 소리를 질렀 다. 5 장 생과 사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허기와 피곤 때문에 잠시 의식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외치는 목소리에 눈을 떳을 때 용이는 등바닥에 냉기가 스미는 것 을 느꼈다. 자신이 까대기 앞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동시 어디선 지 모르게 구수한 쇠죽 냄새가 콧가에 와서 닿았다. 오래 전에 벌써 외양 간은 비어 있었고 뒤꼍의 쇠죽솥은 녹이 슨 채 내려두었는데 쇠죽을 쑤는 냄새가 날 리 없다. "아제씨요! 아제씨!" 미친 것처럼 불러대는 아이 목소 리에 용이는 얼굴을 쳐들었다. 아이의 울부짖는 목소리는 있었으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없다. 사방은 캄캄하다. 시커먼 하늘이 입을 쩍 벌리고 머리 위에서 덮칠 듯이 내려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전신이 후둘후둘 떨려온다. "아제씨요!" 장독 근처에서 들려온다. 이는 무서워서 그 자리에 멈춘 채 우 는 것이다. "와 그라노?" "야?" 울음을 그치고 아이는 소리나는 곳을 향해 달려온다. "누가 또 아프나?" "거기 있음서 와 아무말 안 하요!" 어른같이 꾸짖으면서 악을 썼다. 용이 몸을 일으킨다. '참 그랬지. 낮에 산에 갔다. 산에 가서 땅을 파고 윤보형님하고 영팔이하고... 음, 지(강청댁)를 묻어주 고 돌아왔는데 그라고도 아즉하룻밤에 안 지나갔다 말이지? 이 집에는 지 금 나말고 아무도 없고, 아무도없다 그 말인가? 그런데 또 누가 죽는다는 기고? 이 아이는 임인데?' "임아, 니 어매도죽 었나?" 나지막하게 물어본다. "우, 울 옴마가 죽겄소." "그래, 사람들이 많 이 죽을 기다." "아이고 참, 애기 낳을라꼬 안 그러요." "뭐라구?" "네 방구 석을 매믄서 아제씨를 불러오라 안 카요." "애기..." "어서 가입시다. 삼 가 르는 구실이할매도 벵이 나고 부정탄다 캄시로 아무도 안 올라 안 카요. 어서 가십시다. 울 옴마 죽겄소!" "..." "아제씨요!" "가, 가자.니부터 먼 지 가거라." 임이는 캄캄한 밤, 도깨비들만 골목을 배회하고 있을 것만같은 무서운 밤을 향해 달려나간다. '얼매 전에 내가 관을 짊어지고 산으로 갔는 데, 윤보형님이랑 영팔이하고 지를 묻어놓고 돌아왔는데, 그라믄 아즉도 하 룻반이 안 지나갔다 그말이제? 하룻밤도... 먼 옛날 일 겉은데 아즉 몇 시 각도 안 지나갔다 말이제? 지가 정을 떼고 가니라고 그리 무섬증을 주고 갔이까? 집이 텅 비었구나. 쥐새끼 한 마리도 없는갑다.' 임이네가 죽게 되 었다든가 그런 일은 염두에 없었다. 무서운 병이 퍼져서 자신도 죽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용이는 발을 떼놓는다. 천천히 집안 기척에 귀를 기울이듯 하며.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도들려오지 않았다. 마을길을 지나갈 때 수숫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덕 위 최참판댁에 불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불빛이 깜 박이고 있었다. 섣달 그믐밤처럼 방마다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았다. 임이는 마루 끝에 앉아 울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임아!" "..." "어매가 죽었나?" 다가가며 목쉰 소리로 는다. "보소." 방안에서 임이네 목 소리가 들려왔다. "이녁이 좀 들어와야겄소." "내가?" "그라믄 우짤 기요? 이 차중에 아도 없 이 우찌 아일 낳을 기요?" "내, 내가?" "그, 그라믄 우짤 기요? 누구 자식 인데 이녁이 그러요!" 화내는 소리에 용이는 더듬듯 마루를 올라선다. 방문 을 연다. 문바람에 등잔불이 흔들렸다. 벽을 짊어지고 앉은 임이네는 무서 운 눈으로 용이를 노려본다. "내가 백정이 사직을 놓소, 문딩이 사직을 놓 소! 죽은 계집 생각만 하고." 하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시끄럽마." 슬며시 얼굴을 돌린다. 윗목에 사내아이 둘은 배꼽을 내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 법으로 안 만냈이믄 사람도 아니란 말인가." 하다가 별안간 "아이구우." 머 리를 벽에 부딪으며 임이네는 소리를 질렀다. 진통이 오는 모양이다. "아이 구우, 어매! 나 살리주소!" 두 손을 쳐들고 허공을 잡는데 이빨과 이빨이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이마에서 두 볼에서 구슬땀이 솟아나온다. "아이구우, 보소!" 임이네는 앞으로 넘어져오며 두 팔로 용이 정강이를 안는다. 여자의 팔은 쇳덩이같이 단단했다. 두 팔은 용이 정강이 를 조이며 물려들었다. "보소!" 단말마 같은 여자비명을 들으면서 그러나 용이는 꼼짝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도 쓰러져버릴 것 은 위태로운 의식에 매달려 움직이질 못한다. 가물거리는 등잔불같이 끊일 듯 이어질 듯 강청댁이 죽었다는, 이미 흙속에 파묻어버렸다는 사실이 팔매처 럼 가슴을 치다간 달아나고 할 뿐이다. 물려들어온 팔이 풀어지면서 임이 네는 자리에 쓰러진다. 진통이 멎은 것이다. 빛나는 눈이 용이 얼굴을 올려 다본다. 무섭게 부푼 배 때문인지 여자의 두 어깨는 가냘프고 홀몸일 때 찾을 수 없었던 처녀성을 느끼게 한다. "어지간했이믄 혼자 놓을라 캤소. 무서바서, 우짠지 이분에는 무서바서. 벌써 여러 날 전부터 배가 아프믄서 자꾸 끄는 기이 심상치가 않소. 구실이할매도 아푸다 카고. 누가 와줄라 캐 야제요. 나는 팔자치리 못한 여자니께 밭이사 나쁘겄지마는 씨는 이녁 씨 아니요?" 임이네는 차분하게 말을 했다. 짐승같이 비명을 르고 이빨을 드 러내어 바드득 소리를 내던 조금 전의 처참했던 얼굴은 구통 뒤의 평화스 런 휴식으로 돌아와 있었다. 슬기롭고 신비하기조차 했다. 땀에 흠씬 젖어 서 아름다웠다. 그러더니 임이네는 잠이 드는가 싶었다. '죽는 걸까?' 여전 히 장석같이 서서 용이는 임이네를 내려다본다. 아이를 낳은 현장을 본 일 이 없어 그렇기도 했으려니와 용이 머릿속에는 죽음이 가득 차서 잠들려는 임이네 역시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그 런데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은 사슬에서 풀려나지 못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 는다. 이따금 허탈이 오고 그 허퉁하게 비어가는 자리에 괭이를 들고 묏자 리를 파던 영팔의 푸르뎅뎅한 얼굴이 지나가고 붉은 흙무덤이 떠오르곤 한 다. "으아악!" 임이네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뛰어 일어났다. 그 무서운 비명이 몇 번 되풀이되었을까. 여자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는 것을 보는 순 간 용이는 사슬에서 풀려난 것처럼 "아, 임자!" 울부짖으며 임이네를 안았 다. 임이네는 떠밀었다. 무서운 힘이었다. 용이는 나자빠지면서 무엇이 쏟 아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천지가 멎어버린 것 같은, 시간도 멎어버린 것 같 은 정적이, 그러고 나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파도처럼 방안에 퍼지고 울렸 다. 두 주먹을 모은 채 꼿꼿하게 선 고추에서 오즘이치솟았다. 임이네 얼굴 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일찍이 용이는 그와 같이 아름다운 미소를 임 이네한테서 본 일이 없다. "보소." 이번에는 환하게 웃었다. 용이는 손바닥 으로 여자 얼굴 위의 땀을 닦아준다. 물결치듯이 용이 전신은 떨고 있었다. "이러고 있일 기이 아니라 보소, 탯줄부터 끊어주소. 저기, 저어기 가새하 고 실이 있거마요." 용이는 가위와 실을 는다. "탯줄을 실로 묶어가지고 나 서 짜르소. 한뼘쯤 해서 묶으고." 임이네 시키는 대로 한다. "와 그리 떨고 있소? 아이는 닦아서 저기 포대기에 싸가지고 내옆에 눕히주소." 역시 시 키는 대로 한다. 검붉었던 아이 얼굴은 차츰 붉은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젖꼭지를 찾듯이 빨간 입술을 내두르는 것이 릅사 둥우리 속에서 모이를 받아먹는 순간의 까치새끼 혓바닥 같다. 이윽고 태반이 나오고 출혈이 심 했다. 용이 얼굴이 창백해진다. "걱정 말고 안태는 짚에 싸소." 충만된 기쁨 을 서서히 감당해가면서 임이네는 용이에게 지시했다. 여왕벌같이 위엄에 차 있었고 자신에 넘쳐 있다. 임이네가 첫국밥을 먹는 것을 본 용이는 비린내와 열기에 숨이 막힐 것 같 은 방안에서 빠져나왔다. 짚에 싼 태반을 가지고 강가로 향한다. 마을에는 집집마다 여러 가지 모양의 부적이 나붙었다. 부적을 내어준 무당이나 중 들도 죽어가건만, 그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는다는 가시 돋친 엉게나무 토 막을 방문 위에 걸어놨는가 하면 여인의 피 묻은 속곳, 닭피가 묻은 짚으 로 만든 허수아비가 삽짝에 내걸려있기도 했다. 병이 그런 방어를 겁낼 는 없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형상으로 들리지 않은 함성을 지르면서 골목을 점령하고 마을을 점령하고 방방곡곡을 바람같이 휩쓸며 지나가는 병균. 그 들의 습격 대상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었다. 부자와 빈자의 구별이 없 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도 않았다. 인심은 흉년의 유가 아니었다. 난리가 났다면 피난이나 가지 하고 사람들은 절망했으며 희망을 미신에 걸어보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소문에 의 하면 서울서는 임금이 등극한 지 사십년 망육순을 겸한 칭겅례식도 호열자 의 창궐로 연기되었다 한다. 그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의 황당무계한 낭설 이 분분하였다. 수구문 밖에는 송장이 태산을 이루고 있다는 둥, 미처 숨도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끌고 가서 산 채 불에 태워죽인다는 둥, 길을 걷 는 사람이면 모조리 왜놈과 양놈이 합세하여 끌어다가 병막에 가두어놓고 굶겨죽이고 때려죽이고 침을 놓아 죽인다는 둥, 그렇게 해서 죽은 원귀가 어찌나 많던지 십만 대군이 넘을 것이고 측은게 생각하는 신령의 도움을 얻어서 모두 신병으로 둔갑하여 왜놈과 양놈들을 무찔러 이 땅에서 쓸어낼 날도 그리 멀지는 않았으리라는 말이 무지몽매한 사람들간에 떠돌았다. 그 러나 믿는 그들 중에 병으로 죽어서 자신도 신병이 되어 나라를 구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초에는 고개를 넘어가는 망자에게는 상두꾼이 있었다. 다음에는 거적에 만 초라한지게 송장이 수없이 고개를 넘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여유가 있을 때의 일이다. 밭이나 뒤꼍에 외빈을 차려 겨우 섬피를 덮어두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행로중에 죽은 시체는 그나마 거둘 사 람이 없어 굶주린 늑대와 야견들, 까마귀에 뜯기는 처지가 되었다. 평사리 마을에서는 김진사댁 두 청상이 죽었다. 김훈장이 장사를 지내주었으며 빈 집에는 쥐들도 살지 못하여 먹을 것을 찾아 들쥐가 되었다. 영팔이 막내딸 이 죽었고 임이네는 사내아이 둘을 잃었다. 누구네 집의 누구 누구 하며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용이는 영팔이 딸을 묻어주고 돌아오 는 길에서 앓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텅빈 집안을 헤매며 용이는 임이네 도 병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 둘이 이미 죽었다는 생각을 했다. "가봐 야지. 가서, 송장을 치워야지. 소, 소, 송장을 내가 치워얄 긴데." 하면서 토 하고 설사를 계속하였다. 이미 쇠약해져 있던 몸이어서 병을 한층 극성스 럽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 용이는 자신이 가서 송장을 치워야 한다는 헛소 리를 수없이 하다가 이틀이 지난 밤에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는 꿈속에서 강물을 보았다. '목이 탄다! 저 강물을 다 마시야지. 다 마시야지.' 그러나 강물 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싶으면 그것은 강물이 아닌 햇볕에 단 조약돌 이었다. "강물을 마시야지. 강물이 어디 있노!" 뛰어 일어났다. 그러나 모래 속에두 다리는 천근같이 빠져들어가고 발을 떼어놓을 수가 없다. '악! 으으억!' 아 무리 발을 떼어놓으려 해도 발은 모래 속으로 묻혀 들어갈 뿐이다. '보소! 이리로 오소. 돌박 위로 걸어야제요.' 강청댁이 손을 내밀었다. 강청댁의 손을 잡는 순간 강청댁이 간곳이 없고 월선이 서 있었다. 치마가 나부끼고 있었다. 치마는 황홀한 옥색이었다. 옥색 치마는 다시 넘실거리는 강물이 되었다. '물, 물, 물이다!' 용이는 어느새 강물 속에 둥둥 떠내려가고있었다. 목구멍에 물이 철철 넘쳐서 들어왔다. 비몽사몽이었다. 환상이면서 또 상이 아니었다. 용이는 실제 어둠을 헤치고 강가에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강물 속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물결은 수없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 으며 다시 다가왔다. 초승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한편 최참판댁에서는 김서방이 죽은 뒤 돌이와 봉순네는 동시에 발병하여 죽었다. 그 다음의 희 생자는 윤씨부인이었다. 길상은 밤실을 타고 읍내까지 문의원을데리러 갔 다. 문의원이 와도 이미 허사인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길상은 앉아서 부 인의 죽음을 기다릴 수 없었고 수동이도 동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읍내 에 가서 길상이 들은 소식은 문의원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집에서 말 고 출타한 곳, 그러니까 우관스님을 찾아 절에 갔다는 것은 착오였었고 진 주에 갔었다가 그곳에서 변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돌아온길상이 그 사실을 알렸을 때 윤씨부인은 힘없는 팔을 들어 자기 가슴을 두 번인가 두드렸다. 그리고 숨을 거둘 때는 손목을 잡고 길상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러는 동안 뒤채에 있는 서울 식구들은 얼씬거리지 않았다. 다만 준구만은 윤씨 부인이 앓는다는 말을 듣고 두 번인가 안채에 나타났다. 마치내 운명을 조 준구를 항해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또 얼마나 가슴 죄게 하 는 시간의 고문이었던가. 간교한 인간들이 항상 그러하듯이 조준구도 무척 이나 소심한 사내였었다. 언제 어떻게 자신도 병마에 말려들어갈 것인지, 음식만 끓여서 먹으면 된다는 지식을 가지고도 그는 안심을 못하였다. 윤씨부인이 병었 다는 것은 행운의 서광이요 병균이 어느 통로로 해서 자신에게 침입할 지 모른다는 공포는암 흑이다. 이 양극 사이에서 그는 무던히도 조바심하였다. 안채에 나타났어도 준구는 결코 직접은 병자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길상이를 통해서 혹은 삼 월이를 통해서 병세를 물었으며 그것도 입을 열면 입으로 병균이 들어온다 는 불안이 있어 그랬던지 반벙어리 식으로 손짓발짓하며 의사를 나타내는 모습이야말로 가관이었다. 그러나 하인들은 그런 꼴을 보고 웃을 여가 없 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되는 거요. 찬바람만 불면 병은 절로 물러날 거요.이 고비만 넘기 면." 방안에 있을 때 준구는 곧잘 용을 불끈불끈 쓰며 지껄였다. 그 몸짓과 말투를 어느새 홍씨도 닮아가게 되었고 두 내외는 온종일을 그런 식으로 마주보고 앉아서 용을 썼던 것이다. 윤씨부인이 죽은 뒤의 최참판댁 넓은 집안은 일시에 폐허가 되었다. 식솔이 많기 때문이기도 핬으나 마을에서도 가장 많은 시체가 최참판댁에서 나갔고 김서방을 위시하여 순 네 그리고 윤씨부인이 죽었다는 것은 대들보가 부러지고 기둥이 빠져나간 것이나 다름이 없 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서희와 길상이 발병하였다. 어미를 잃은 봉순이는 어 미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계속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 떄문에 거의 광란 태 가 되었다. 봉순이는 서희를 내버려두고 도장 속으로 혼자 기어들어가서 나오질 않았다. 다른 하인들 역시 뿔뿔이 헤어져서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 는지 알 수 없었으며 다만 수동이 혼자 절룩거리며 서희를 돌보고 길상이 를 돌보가 하다가는 그 역시 발광한 사람처럼 뒤뚤로 달려가곤 했는데 그 럴 때의 그의 눈동자는 온전히 미친 그런 상태로 변하는 것이었다. "오니 라! 이 천하에 직일 놈의 인사야! 나오니라! 사램이 다 죽어가는데 너거들 만 살라 카나! 이 배은망덩한 도척이 겉은 인사야!" 다름아닌 준구네 식구 들이 방문을 닫아걸고 있는 방을 향해 거품을 뿜으며 소리소리지르는 것이 었다. "이 천하에 숭악한 도척이 겉은 인사야! 이 살림을 다 묵을라꼬! 어 림없다! 어림없다! 내 벌씨부텀 그 검정 속심을 알고 있었구마! 다죽기를 바라는 기지!" "저런 죽일 놈 보게나. 저, 저런!" 방안의 준구는 간신히그런 정도로 응수하였을 뿐 결코 방문을 열고 나오지는 않았다. 나타나지 않았 을 뿐만 아니라 수동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일을 저지를까 싶어 마음 속으로는 여간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자신이 양반으로서 또 사람으 로서 위엄을 잃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려니와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런 판국에 양반 상놈 가릴 처지도 못 되었고 수동이 칼을 들고설친대도 막아줄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허, 참 기가 막혀서. 하기는 법은 먹고 주먹은 가까우니 미친놈을 상대할 수도 없거니와, 어디 두고보자, 네 놈이 살아남는다면 혼벼락을 내어줄 테니." 이불 밑에서 활개치더라고 준 구는 홍씨가 알아들을 정도의 입속말로 우물쩍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행 여 홍씨가 욕설하고 나서서 수동이를 자극할까 보아 그는 방문을 등지 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홍씨 입에서 욕설이 나올 때는 수동이 발소리가멀 리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동이의 미친 증세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한밤중에도 대문 밖을 쫓아나가며 "도둑이야! 도둑이야!" 하며 마을을 항해 소리를 질렀다. 그런가 하면 새도 록 잠을 자지 않고 집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이눔으 도둑눔으 새끼, 오기만 와봐라! 골통을 깨부릴 기니. 사람으 눈 하나 없이니께, 어림없다! 숟가락 몽댕이 하나 못 들어낼 기다! 어느놈이? 어느놈이? 이 도둑눔으 새끼야!" 이날 밤도 수동이는 절룩거리며 집 주변을 돌고 있었다. 이 무렵 길상이는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그는 자신이 어디서 기어나왔는지 알지 못했다. 목이 타는 듯 갈증을 느꼈을 뿐이다. 길상이 기어나오는 것을 본 쥐 한 마리가 도장 쪽으로 달아난다. 도장 문 하나가 활짝 열려져 있었다. 그러나 길상이 눈에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물, 물을 찾고 있었다.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물물물..." 했으나 입밖에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물, 물, 물." 차가운 촉감. 이마에 싸늘한 것이 닿는다. 싸늘한촉감을 따라 얼굴을 디밀었다. 그러나 입속에 흘러들어오는 것은 없다. 얼굴을 자꾸꾸 디밀었다. 떠받쳐져 얼굴은 위로 위로 올라갔다. 무릎을 세우고 다시 발을 디뎠다. 길상이는 물동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물동이의 아가리가 나타났다. 얼굴을 쳐박고 미친 듯이물 을 빨아당겼다. 얼마나 마셨던지 의식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의식이 깨어났을 때길 상은 물이 아닌 술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도장 안에 와 있는 것을 알았다. " 아아? 이자는 살 것 같다! 살 것 같다!" 하고 외쳤다. 외쳤다고 생각했으나 실제 목소리는 여전히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애기씨는!' 걸어갈 기력은 없었다. 아까보다 맑아진 정신으로 다시 엉금엉금 기어서 도장 밖으로 나 온다. '밤이었구나.' 하늘의 별이 보였다. 부엉이 울음 소리도 들려왔다. '마 님도 돌아가시고 김서방, 봉순어매도 죽었다. 봉순이도 죽었이까?애기씨는! 애기씨는 우찌 됐이고?' 별당 뜰에까지 기어갔다. "애기씨! 애기씨!" 부림 을 쳤으나 목소리는 목구멍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봉순아! 봉순아!" " 무, 무... 물." 마루에 쓰러진 서희 목소리였다. "무우울." 정신을 아까보다 좀더 맑아왔다. 기어서 도장으로 돌아온 길상이는 상두꾼들이 제 집 모양 으로 들어와서 마시고 먹고 하다 버리고 갔을 성싶은 바가지를 주워들었 다. 바가지로 술을 떴다. 바가지를 들고 별당으로 갈 때 길상은기지 않고 천천히 걸어본다. "애기씨!" 외친 것이었으나 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아무 튼 목이 틔었다. "무우울." 길상이는 서희를 반쯤 안아 일으켜 바가지를 입에 갖다대었다. 서희입에서 술이 다할 때까지 바가지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뒤 길상이 는 서희와 함께 쓰러져 잠이 들었다. 6장 버선등에 기는 햇살 장대에 떠밀리어 방향을 돌린 나룻배가 강심으로 나왔다. 뱃전에 서서멀 어지는 마을을 보는 것도 아니면서 용이는 눈을 그곳에 보내는 것이다. 겨울의 강물은 추 위에 거칠어진 사람의 살갗 비슷하다. 잘게 이는 물결은 돋아난 소름같이, 그리고 떨고 있는 듯 보였다. 암록색 비취처럼 아름다웠던 여름날의 물빛 은 삭막한 청회색으로 변하여 마음에 절망을 안겨준다. 들물이어서 저항이 심한 물살을 거슬러가며 나룻배는 하구 쪽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며칠 전 이었다. 용이는 윤보와 함께 술을 마시었다. "그리 보고 저브믄 가보라모." 월선이 말을 입밖에 낸 것도 아니었는데 윤보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산이높 아서 못 가나, 물이 깊어서 못 가나, 엎어지믄 코 닿을 곳에 사람을 두고 와 못 가노.우화 든 소맨치로 앓을 것 없거마는." 주모 영산댁이 웃었다. "계집, 사나아 요절 로 빼썼다. 하는 것이 꼭같다 그 말이다. 당일이믄 오고가고 하는 지척인데 만리성을 쌓다 말가. 나 참, 하는 짓들을 보믄 우서바서. 혼자 사는 계집이 머 그리 살 기이 있일 기라고 장날이믄 장날마다 나와서." "지난 장날 나 도 만났당게로." 말하면서 영산댁은 용이 얼굴을 쳐다보다. "모두둘 편안하 시오? 하고 물었겄지. 모두는 머가 모두고. 그만 이서방이 우찌 지내고 있 소? 애새끼는 잘 크며 임이네하고 금슬이 좋으냐고 물어볼 일이제." "사램 이 본시 암되니께 그런 게라우." "계집 사나아 하는 짓들이 모두 와 그렇 노! 연기 쐰 사람맨치로. 월선이한테는 최참판네 길상이가 자주 드나드는 모양인데 그러니께 이곳 소식이야 세세히 알고 있일 기구마. 그래도 머가 더 알고 처븐지 장날이믄 장바닥을 해갈고 댕기믄서, 그렇기 궁금하믄 와 서 제 눈으로 보고 가믄 될 거 아니가. 코 벤 죄인도 아니겄고 와 못오 노?" "곰보 목수는 모를 게라우. 속속들이 맺힌 정을 우찌 알 것이요?" "제 에기, 모르기는 와 몰라!" "곰보목수헌티 반 한 여자도 있습디여?" "그라믄 나를 숫총각으로 알았다 그 말가? 영댁." 영 산댁은 깔깔깔 웃었다. "그런 정하고는 다르당게로." 용이는 끝내 말없이 그들의 수을 듣 고만 있었다. 나룻배는 화심리 나루터에서 술 취한 사나이, 농부 두 사람을 싣고 뱃머리를 돌렸다 용이는 여전히 뱃전에 서서 멀어지는 마을을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곳에 눈을 던지고 있었다. 노 젓는 소리가 있을 뿐 사람 들은 별로 말이 없다. 사공은 이십이나 되었을까. 성례는 한 모양으로 크다 만 상투는 틀었으나 얼굴은 몹시 앳되다. 선객들은 물어보지 았지만 햇볕 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과 반백의 수염을 흩날리며 평생을 나룻배와 더불어 살아온 그 늙은 사공이 죽은 것을 알고 있다. 화심리 나루터에서 탄 술취 한 장돌뱅이풍의 사나이는 퍼질러앉아 방금도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 빌어묵을 놈의 세상!" 비틀거리며 일어선 사나이는 뱃전으로 다가가서 솜 바지 허리춤을 내리며 체모 없이 오줌을 갈긴다. 사내들은눈살을 찌 푸리며 외면을 한다. 여자들은 입속말로 욕지거리를 하며 무안스러움을 버 무린다. 허리춤을 걷어올린 사내는 취안을 허공에 띄우다가 비실비실 돌아 와서 본시 자리에 주저앉는다. "빌어묵을 놈의 세상!" 다시 같은 말을 내뱉 는다. "빌어묵기는커녕 주선이 되겄거마는." 사람을 옆에 두고 혼자 술을 마시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넌지시 말을 걸어 술 한잔 얻어먹을 생각이 간 절하였는데 어느새 술병이 바닥이 나버린 것을 알아차린 봉기는심통이 나 서 핀잔을 준 것이다. "머라꼬? 주선 되겄다고? 하하하... 하하핫핫..." 이를드러 내고 크게 웃어젖히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두 쳐다본다. "허파에 바람 안 들어가겄나." 입을 쫑긋쫑긋 내밀며 봉기는 다시 이죽거렸다. "주선 되겄다 고? 그라믄 신선 되겄다 그 말인가분데 에잇, 빌어묵을!" 느닷없이 사나이 는 술병을 집어들고 강물을 향해 집어던진다 놀라 목을 움츠렸던 봉기는 목을 뽑아올린다. 말짱한 두루미병을 집어삼킨 강물을 원망스럽게 바라본 다. "돈도 소용없고 집도 소용없고 살림도 소용없고, 다 뚜디리 팔았구마. 개값 으로 팔아치웠 다 그 말이구마. 보소." 사나이는 봉기에게 덤빌 듯이 삿대질을 한다. 내가 던진 숭벵 이 아깝다 그 말이요? 오빼미겉이 그눔으 눈 몽창시리도 크다." "별 한한 소리를 다 듣겄다. 아 남으 술벵을 내가 아까바할 거는 머 있이꼬." "맞소! 맞거마는 내 살림 내가 떡을 치는데 말할 사램이 어디 있겄소. 내 살림 내 가 떡을 치는데 조상도 말 못할 기구마. 썩어죽을 놈의 조상! 묏구덕을 파 든지, 제기." 하다가 사나이는 "마누라가 있다 말가 자식이 있다 말가. 혈혈 단신, 솥단지 걸어놓고 야장스리 살림할 것도 없고 내 그래서떡을 쳤구 마. 개 값으로 뚜디리 팔고 한잔 묵었다 그 말이요. 흥 신선이 되어간믄 오 직이나 좋으까?" 사나이는 배안을 둘러보며 오죽이나 좋을까 보내고 넋빠 진 사람같이 되풀이 말하였으나 사람들은 관심이 없고 우울하게 강물만 바 라보고 있었다. "지난 가슬에 장삿길에서 돌아오니께로 마누라 아들놈이 뒤지고 없더마. 집은 텅텅 비어 있고 날 맞아줄 사램이 아무도 없더마." 사 나이는 입숙을 실룩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역시 무관심하게 강만 바라볼 뿐 사나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지난 가을 곳곳서 창 궐했던 호열자 로 말미암아 식구를 잃은 사람은 비단 사나이만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송장 보고 놀라는 사람이 없듯이 액병이 떼지어서 몰고 간 죽음의 그 흔한 후문쯤 대단할것 이 없었다. "장에 가도 머 살 기이 있겄나?" 영팔이 용이에게 말하며 뱃전 에대 대고 곰방대를 두드린다. 곰방대의 물부리를 훅훅 불어보고 몇 번 빨 아보고 하더니 허리춤에 찌른다. "대목장인데 와 없일라고. 금탕값이겄지마 는." 용이 대꾸해준다. "자반개기는 한 마리 사얄 긴데..." 중얼거리는 영팔 이 얼굴에 소룸이 돋아나고 낯빛은 푸르뎅뎅했다. "어디 한두 사램이 죽었 이야 말이제. 골골마다 홀애비 과부 수두룩할 기거마는. 그 흔한 과부 하나 얻으믄 될 긴데 이고 살림이고 와 개 값으로 팔았꼬?" 역시 봉기 말에 동 의하는 사람은 없고 "단대목인데 이래가지고는 설을 쇠겄나. 년 같으믄." 하며 딴전을 편다. "그러세... 나릿선을 못 탄 장꾼들이 육로로 끼억끼억 들 어갈긴데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네." 아닌게 아니라 강에서 바라보이는 길 에는 소달구지 하나, 나귀 한마리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없다. "얻어묵을 구신이사 많아졌지마는, 빌어묵을, 나부텀도 찬물 떠놓고 말까싶 었지. 구신이고 조상이고 따지고 보믄 산 사람을 위해 있는 거 아니가. 이리 못 살게 는데 걸게 차린 제상을 무신 여치로 받을 기든고?" "하기사 못된 것은 모도 조 상 탓이라 하니께." 배안은 다시 잠잠해졌다. 섣달 그믐이 바싹 다가선 하늘은 빙하같이 딱딱하고 매끄러울 것 같았다. 잔가지를 흔들어 줄 정도의 바람은 냉기 때문에 날카롭다. 노 젓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내 나루터에 배가 닿자 사공은 방천에 박혀 있는 말뚝에 벌이줄을 묶어놓고 뭍에 산판을 걸친다. 사람들은 자기 물건을 챙겨들고 장터로 옮긴다. 그들 속에 섞여 영팔이, 용이가 나란히 걸어간다. 두 사나이의 키는 엇비슷했다. 얼굴은 무쪽같이 길고 못생겼으나 영팔의 체격은 탄탄하고 장대하여 풍신 이 좋은 용이와 더불어 사람들 속에 두드러져 보인다. 솜 고의저고에 갓도 망건도 없이 굵은 무명수건으로 상투머리를 동여매었으면서도 위풍이 당당 하다. 불룩한 배를 앞세우고 자못 호기에 차서 걸어오던 땅달막한 말단 관 원 하나가 이들 두 사나이를 보고 매우 불유쾌한 듯 눈살을 찌푸린다. "세 상에 사람겉이 미련하고 간장이 질긴 기이 또 있이까." 영팔이 중얼거렸다. 용이는 잠자코 걸음을 함께 할 뿐이다. "미련하기만 한가? 또 얼매나 간사 스런 기이 사램이라고. 땅을 치믄서 통곡을 하다가도 끼니 때가 되믄 입에 밥이 들어가니께. 저거보라모. 살겄다고 모두 이고 지고 부지런히 가고 있 는 장꾼들 보라니께. 참말이지 사는 기이 머엇인고 모르겄구마." "..." "죄 있는 놈 이 벼락맞는다는 것도 생판 거짓말이다. 이분에 변을 당한 사람들 만 보더라도, 곰곰이 생각해보니께 그럴 수가 없다 그말이구마. 하느님 맴 이 일월겉이 사람으 사는 꼴을 비쳤이믄 그수가 있겄나?" "..." "하기야 사 람 사는 기이 어디 이치에 꼭꼭 들어맞더라고? 몹쓸 짓 많이 하는 사람일 수록 남으 눈물로 잘 살고 허기진 사람은 손에 쥔 밥 한덩이를 빼앗기어도 일어서서 싸울 힘이 없이니께로, 손발이 닳도록 빌어도 무상한 거는 하느 님이라." 용이 귀에 영팔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들려왔다. 대신 '이놈아, 우 찌 그리 사나자식이 단이 없노. 부가 만내준 가숙은 벵이 들어 죽었이니 할 수 없고 지사 무신 짓을 했던지 간에 자식 낳아준 제집인데 그거를 버 리겄나? 모두 팔자다. 니가 몸부림을 친다고 머가 달라지겄나? 이 구비를 한분 넘기보라. 그라믄 사램이 사는 기이 벨거 아니네라, 그거를 깨달을 기 다.' 모친의 꾸짖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읍내에 내가 왔다고 월 선이를 꼭 만낼 것도 아니겄고 또무신 염치로 만날기며 할말인들 있겄십니 까.' '그라믄 니 가심이 와 그리뛰노? 나는 니 맴을 못 믿고 있는 기다. 그 래도 조상이 니를 돌봐주니께 이분에 죽지도않았고 자손도 얻 은 거 아니가. 이씨네 집에 문을 안 닫게 된 것만도 고마븐데 무신 딴 각 을 하노 말이다. 월선이하고 또 상관을 하믄 자손에 해로블 것을 우찌 모 리노?' '그 말 마소, 오매. 그 말 마소!' 몸이 휘청거렸다. 눈앞에 월선이 걸 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착각은 한번에서 그치지 않았 다. 사방에서 용이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은 모두 월선이었다. 치마를 두른 여인들은 하나같이 월선이로 보이는 것이다. 용이는 눈등을 주먹으로비빈 다. 사람들이 와글거리고 있었다. 다투는 목소리가 귀에 흘러들어왔다. 얼 음조각이 떠있는 연에서 눈을 떨어뜨렸을 때 죽장수 노파의 곰보 얼굴, 하 부죽한 입술 위에 콧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지게를 받쳐 놓 고 나무꾼은 죽을 먹고 있었다. 움푹움푹 패어들어간 윤보의 곰보 얼굴이 죽장수 노파 얼굴 대신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주막에서 핀잔을 주던 그 얼굴이다. '이놈 용아! 제사 장, 핑계가 좋고나, 진작 그럴 일이제.' 하는 것 같다. "허해서 그런가? 와 없는 사람이 눈앞에 자꾸 밟힐꼬?"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라꼬?" 못 알아들은 영팔이 되묻는다. "아, 아무것도 아니구 마." 용이로서는 월선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후, 그러니까 지난 초가을 강청댁이 약을 지으러 온 일이 한번 있었을 뿐 장에 나오기는 오늘이 처음 이다. '먼발치서 얼굴이라도 한번 봤이믄...' 틀없이 월선이를 만날 것이다. 용이는 그것을 알고 있다. 집을 나설 때부터, 아니 장에 가리라 마음을 먹 은 순간부터, 간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였고 장날과 월선이를 떼어놓고 생 각할 수 없다. 임이네가 긴장한 것도 그 때문이며 아이를 안고 젖을 물린 채 코를 홀짝거리며 아이의 존재를 무언중 과시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 다. 농부들은 들일에 자기 아낙을 내어놓는 하나 장에 내보내는 일은 지극 히 드물다. 그런 만큼 걸식하다시피 장바닥을 쏘다니던 전력도 전력이려니 와 아제 어엿한 용이 아낙이 된 이상 임이네는 월선이를 만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남편 대신 제사 장을 보아오겠노라 하며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 다. 용이는 등잔불 밑에 젖을 문채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임이네를 아무 인연도 없는 남같이 바라보면서 그 안에 있는 자기 핏줄까지 자신과는 아 무 상관도 없는, 어쩌다가 세상에 태어났을 목숨이거니 생각하며 잠을 이 룰 수 없었던 것이다. 건어전 앞에까지 온 영팔이는 슬며시 뒤졌다. 용이는 그것도 모르고 사뭇 걷고 있었다. 양켠에 늘어선 노전이나 좌판에 쌓인 물 건에 눈을 주는 일도 없이. 영팔이는 한동안 용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 른 가자미 한 두름을 들어보며 임자에게 얼마냐고 묻는다. 실상 월선이는 나루터에서 용이를 보았다. '설마 설장에도 안 올라고? 찬물 떠놓고 제사 지내지는 않을 긴데.' 아침부터 월선이는 나루터에 나가서 서성거렸다. 나 룻배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는 무더기로 쌓아 올려놓은 방천가 나뭇단 뒤에 모를 숨겼다. 숨어서 용이 영팔이와 함께 장터를 향해 가는 것을 보 았다. 그러나 월선이는 그들을 뒤쫓지 않고 마치 길 잃은 사람처럼 방천가 에서 헤매다가 '아들 낳고 사는 사람을 내, 내가 만내믄 머할 것꼬.' 주먹 으로 제 가슴을 쥐어박으며 월선이는 집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생각이 있이믄 날 찾아오겄지.' 그러나 그것은 절망에 가까운 기대였다. 다시 방향 을 바꾸어 나루터로 달려나왔다. "자꾸 왔다갔다해싸아도 어디 그리 싼 나 무가 있일 기라고, 그만 내 나무 사소 야?" 솔가지 몇 단을 지게를 받쳐놓 고 손님을기다리고 있던 나무꾼이 월선이를 보고 말했다. "아, 아니요." 하는데 마치 나무꾼이 박지 르기라도 한 것처럼 월선이 눈에 눈물이 글썽 돈다. '아들낳고 사는 사람을 내, 내가 우짤 기라고 만내서 무신 할말이 있일 기라고,' 그러나 발길은 어 느덧 장터로 향하고 있었으며 잡답 속으로 들어섰다. 월선의 얼굴은 시시로 변했다. 입술은 푸르스름했고 떨고 있었다. 눈은 슬 을 끼운 듯 움질 일 줄 몰랐다. 양볼을 감싼 명주수건 사이로 비어져나온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낀다. 용이와 월선이 부딪친 곳은 싸전 근처였다. 남녀가 말을 잃고 쳐다본다. 용이 먼저 눈을 내리깐다. "오래간만이네." 눈을 내리깐 채 쓸쓸하게 웃는다. 말을 할 듯 할 듯 하다가 그러나 월선의 입술은 떨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어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겠는데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니었다. "하는 일 없이... 그, 그냥 살고 있소." 입술이 떨려서인지 긴 말을 못한다. 모두 다 편안하시오, 했을 것을 월선이는 그 말을 잊어버렸다. "우리," 하다가 용이 는 다시 한참 만에 "어디 좀 가서." 그 말도 끝내지 못하고 용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경계를 해서라기보다 그는 그 자신이 어디쯤 와서 서 있었 는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싸전 앞에서 있던 젊은 사나이가 빤히 쳐다본다. 용이는 몸을 돌렸다. 한 손에 빈 망태를 들고 느릿느릿 걷기 시 작한다. 월선이도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무작정, 그러나 그들은 마치 한 줄기 운명의 줄을 따라가듯이 용이는 앞서가고 월선이는 사나이의 넓은 등 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이다. 마을의 한조가 그들을 외면하며 지나갔다. 시끄러운 장터를 빠져나왔다. 대장간 앞도 지났다. 잔터의 소음이 꿈결같이 멀어져갔다. 듬성듬성 잡목이 있는 곳이다. 가랑잎이 군데군데 뒹굴고 있었 다. 겨울의 햇빛은 살얼음 같이 가냘픈 것이기는 했으나 나뭇잎을 다 떨어 낸 밋밋한 잡목은 햇볕을 크게 방해하지는 않았다. 한 번 뒤돌아본 용이는 잔디 있는 곳에 가서 앉았다. 본시 풍신이 좋아서 그렇지 밋밋한 나뭇가지 의 엷은 그늘을 받고 앉은 용이의 얼굴은 몹시 허약해 보였다. 지난 가을 병을 앓은 뒤 회복이 충분하지 했던 모양이다. "칩겄는데..." "칩지 않소." 용이는 앉으라는 말도 잊고 멀리 있는 둑길을 바라본다. "용케 살았구마... 용케..." "멩이 길어서, 세월도 길고." "천행이다." 별안간 용이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눈알도 벌겋게 물들었다. 터져나오려는 것을 누르듯이 어금니 를 다무는가, 관골이 흔들렸다. "참판님댁 마님께서 돌아가신 것도 알겄구 마." "야." "봉순어매도 죽었지." "알고 있소." 말이 끊기었다. 그들은 다같 이 강청댁이 죽었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아, 앉지." "야." 용이와 떨어져서 월선이는 쭈그리고 앉는다. "아들을낳았 다 카지요." "..." "어무니가 살아 기셨으믄 얼매나 좋아하싰겄소." "..." "자식 는 집에 멧상 들 자손을 낳아주었으니." 월선의 목이 메인다. "니, 니는..." "..." "우 리어매를 원망 안 하나?" 월선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용이를 본다. 용이는 월선의 눈길을 느끼면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얼핏 보았을 때는 허약하 게만 보이던 용이 낯빛은 부황증에 걸린 것처럼 누리끼했다. 옆모습이어서 귀 언저리에 모인 잔주름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원망을 할 처지라야지 요. 어느 누가 무당하고 사돈 맺기를 원하겄소." "나는 원망을 다." "..." "기 차븐 농사꾼이 망하믄 얼매나 망하겄소 하므서, 신발은 발에 맞아야 한다 고 하믄서 원망을 했다." 둑길에 달구지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우찌 니는 그리 원망이 없노. 나를 야속다 생각했겄지." "아니요." "어째 서?" "무당의 자식이 우찌 남과 같이 살기를 바라겄소.살아서 이, 이렇게 만내는 것만도." 하다가 월선이는 그예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자가 우 는 동안 용이는 둑길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니울음이 원망이다! 창자를 끊는 그 울음이 원망 아니고 머겄노.' "그 동안 어디 가서 있었노." 시 몰 라서 묻는 말은 아니었다. "먼데 가 있었소."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대꾸 했다. "먼데..." "저어기, 간도에 가 있었소." "간도..." "야." "거기는 대국 땅 아니가?" "꼭이 대국 땅은 아니라 카더마요. 우리 조선 사람이 많이 살고 있소." "..." "멋이든지 해묵고 살겄더마는, 인심도 후하더마는 오고 저버서." "강원도 삼장시는," 입을 떼어놓고 용이는 눈을 감는다.부끄러웠던 것이다. 강원도 삼장수는 실상 월선이 삼촌뻘이 되는 사람이라는 말을 윤보한테 들 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방물장수 노파가 들려준 을 잊질 못한다. 사진은 임이네에게 아이까지 낳게 했으면서도 미묘해지는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막 을 수 없었고 또한 자기 자신을 한없이 비웃기도했던 것이다. "삼촌이요. 어릴 적에 한분 만낸 일이 있었소. 우연하게 다시만나서 따라갔소." "그라 믄 그곳에서는 머를 하고." "숙모하고 국밥장시를 했소." "숙모하고..." 더 이상 물어볼 염치도 없었거니와 숙모하고하는 말이 마음을 얼마간 편하게 해주기는 했었다. 용이는 눈을 들어 나무위를 올려다본다. 바람이 지나간 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월선의 흰 명주수이 나부낀다. '그리 험한 꼴을 당했이믄서도 사람으 맴이란, 우찌 이리 끝이없는 길까.' 다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월선이는 두툼하게 솜을 둔 용이 버선발을 내려다보고 있다. '임이 네가 집었겄지. 토란겉이... 발이 얼지 게 솜을 많이 두고.' 월선이는 벌떡 일어섰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던 것다. 의아스럽게 용이 쳐다본다. '아아, 내가 무신 소용이고. 법으로 만낸 사람이 제일이고 이자는 자식 낳 아준 사람이 제일 아니가.' 도로 주질러앉는다. 용이처럼 둑길에 눈을 보낸 다. '그런 생각하믄 벌받는다. 지난 가슬에 죽엇이믄 이리 서로 만나볼 수 있었겄나. 내 박복을 한탄하지 누굴 원망하겄노. 이렇게 살라는 팔자라 믄...' 눈은 다시 용이 버선으로 옮겨졌다. 햇볕이 좀 두터워졌는가 한결밝 은 햇살이 버선등에 기어오르고 있다. "다음에... 다음에 니를 찾아가꺼마. 괜찮겄제?" 용이는 결단이라도 내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