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토지1부3권 (4) 저자명: 박경리 출판사명: 솔출판사 토지4 2부 1권 차례 제 1편 북국의 풍우 1장 화제 2장 회영루에서 3장 교사 송장환 4장 꿈 5장 가스집 6장 두루마기의 사내 7장 이사 8장 주구와 갈보 9장 신축 공사 10장 정호의 질문 11장 밤비 12장 작은 새의 죽음 13장 법회 14장 지난 얘기 15장 귀국 16장 불 뿜는 여름밤 나비 17장 공노인의 양식 제 2편 꿈속의 귀마동 1장 뱀은 죽여야 2장 남도 사내 3장 사진 4장 바닷가에서 5장 임이네 작전 6장 정 떼고 가려고 7장 노동자들 8장 심장을 쪼개어 바치리까 9장 구만리 장천을 날으는 새야 10장 풍운 11장 신발이란 발에 맞아야 12장 회령 나들이 13장 뜨내기꾼 14장 목도리 (부록) 어휘풀이 2부 주요 인물 2부 주요 인물 계보 주요 무대 지도 제 1편 북국의 풍우 1장 화재 1991년의 오월, 용정촌 대화재는 시가의 건물 절반 이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사진을 거슬러올리며 달겨든. 오월에 흔히 부는 서북풍이 시가를 화염의 바다로 몰아넣고 걷잡을 수 없게 했던 것이다. 아직 공사가 진행중에 있는 절에 피신한 서희 일행은 용이와 길상, 월선이 임이네 홍이, 그리고 간도에 오면서 부터 서희 시중을 들게 된 새침이와 부엌일을 하는 달래오망이, 일꾼 두 사람이었다. 절로 오게 된 것은 지난 삼월 포교하러 왔었던 중 본연이 일본 통감부 파출소의 서기였던 최기남의 협조를 얻어 사찰 건립에 착수하였 을 때 서희는 적지 않은 금액을 희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절로 피신해온 사람은 서희 일행만은 아니었지만, 용정촌의 교포 이재민의 대부분은 천주교 성당으로 혹은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다는 것이다. 경상도 하동 땅에서는 삼천리 밖, 두만강 너머 북녘에 있는 남의 땅에는 오월에도 찬서리가 내린다. 서희는 절 방 하나를 비워 간신히 하룻밤을 보냈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뜨락에 끌어다놓은 짐짝을 의지하고 혹은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며 악몽 같은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아왔을 때 공포와 절망 그리고 추위 때문에 사람들 얼굴은 모두 풀빛이었고 고량을 섞은 주먹밥으로 아침 요기를 한 뒤에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 이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이불 혹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옹기종기 한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과 떨어져서 헛간 처마 밑에 이불을 감고 짐짝처럼 나둥그러져 있는 것은 임이네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만 없었 더라면 송장으로 잘못 알았을지 모른다. 남정네들은 어지러운 절마당을 미친 듯이 서성거리는가 하면 용정촌 을 끼고 서남으로부터 동북쪽을 향해 흐르는 해란강을 바라보며 말라터져서 피가 배어난 입술을 떨고, 더러는 불탄 자리를 살피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느지막해서 월선의 삼촌 공노인이 찾아왔다. "거기까지는 불이 안 갔다 캐서 맘놓고 있었십니다." 소금에 절인 푸성귀처럼 후줄그레한, 웃음도 아닌 울음도 아닌 표정으로 월선은 공노인 어깨 너머 저만큼 등 을 돌리고 앉아 있는 용이 모습을 바라보면 말했다. "아슬아슬하게 불은 면했다마는 용정이 망했구나." 몸집이 작달만한 공노인은 피곤에 지친 듯, 서희를 보러 간다면서 절방 쪽으로 종종걸음이다. 얼마 후 돌아나 온 그는 "아가씨께 우리집으로 옮기시도록 했이니 너거들도 집으로 가자. 한데서 이래가 되겠나." 임이네가 가지 않을 것은 뻔했고 용이도 평소 공노인을 피하는 터여서 월선은 "애기씨가 가시는데, 방을 두세 개는 쓰시얄 기고... 우리는 고만 여기 있다가 빈터에 막이나 쳐서 나가겄십니 다." 하고 사양한다. 공노인은 고개를 돌려 핏기 어린 눈을 굴리며 용이 쪽을 바라보다가 "그러면 너 마음대로 해라. 네가 사서 고생을 내가 말리겠나 너 숙모가 말리겠나." 화를 내며 중얼중얼 중얼거리며 돌아간다. 공노인은 용이 못나고 임이네가 악독해서 조카딸이 고생한다고 늘 그들을 좋지 않게 생각했었다. 공노인이 돌아가는 것을 먼발치로 본 용이는 백양나무 밑으로 옮겨가 앉는다. 담배 한 대를 피워물고 퉁포슬 근처 문루구사에서 청인의 땅을 소작하고 사는 영팔이 생각을 한다. 그곳에는 임이도 시집가서 살고 있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묵어야... 그새 삼 년이 지나갔고나.' 여위어서 더욱 길어진 영팔이 얼굴이 떠오른다. 삼 년 전 이맘때쯤 그러니까 햇수로는 삼 년이지만 만 이태가 되는 셈이다. 그때 영팔이네 식구들과 용이 식 구들은 한집에서 복닥거리며 살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영팔이는 길 떠날 채비를 차리는 것이었다. 어디 가 느냐고 물었더니 천보산 동광에 광부로 가려는 사람이 있어 따라가보겠노라는 대답이다. "무신 뜬금없는 말을 하노. 그라믄 니도 광부가 되겄다 그 말이가?" "언제꺼지 이러고 있일 수 있나. 거기 가봐서 있일 만하믄 식구들 데리갈란다. 머 날삯으로 쳐서 오십 전을 준 다 카이." "안 된다. 그런 되지도 않을 소리 집어치우고 나랑 장시나 하자. 밑천은 애기씨가 좀 주실 모앵이니..." "내사 장시는 못하겄네." "와 못하겄노." "장시도 이골이 나야 하는 기고 땅 파묵던 놈이 무신..." "하믄 하는 기지. 누구는 뱃속에서부터 배워 나오나?" "그것도 그렇지만은 친한 새 동사하는 거 아니거마는. 친구 잃기 십상이제." "안 된다! 안 된다믄 안 되는 줄 알아라. 굶어도 묵어도 함께 있이야제. 우떻기 해서 우리가 여까지 왔다고 니 만 따로 떨어져나갈기고." 울먹였으나 기어이 뿌리치고 떠났다. 그러나 영팔이 식구를 데리러 돌아왔을 때 광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 니었다. 지난해부터 천보산 동광은 청나라 변무독 진소상이 봉금을 하여 일이 없어졌고 돌아오는 길에 퉁포슬 근처에서 청인 땅을 얻어 부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럼 외진 곳에 마적단이라도 오믄 우짤 기고." 용이 다시 말리려 했다. "머 그리 외진 곳도 아니더마. 나믄서부터 농꾼인데 믿을 거는 땅밖에 더 있겄나. 천보산에 같이 간 사램이 날 보고 봉밀구로 안 가겄느냐고 해쌌더마는..." "봉밀구가 어딘데?" "두도구서 한 백 리 된다 카지? 어랑촌을 지내서 골짜기로 들어가믄 거기가 봉밀구라 카더마." "머 하는 곳인데?" "금 캐는 곳이란다. 사금 나는 데가 있고 더 골짜기로 들어가믄 금광이 있다 카더마. 한 십 년 전만 해도 오천 멩이나 되는 광부가 일을 했다 카이 굉장했던 기라. 요새는 금도 줄어들어서, 그렇더라 캐도 심심찮이 벌이는 될 기라 캄서, 하다못해 거기서는 나무들이 좋아서 숯을 구워 팔더라도..." "실없는 소리." "머 내사 안 가기로 작정했이니께... 어떤 나그네 말이 그곳에는 되놈들이 몰래 앵속을 심기 따문에 낯선 사램 이 가믄 큰일난다는 기라. 그래서 홀몸이믄 모르까, 식구들 데리고 우찌? 그런 곳에 갔다가 아편쟁이라도 되믄 신세 쫄딱 망칠 기고 생각을 고치묵었구마." 영팔은 구릿빛 얼굴에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같이 가자 카든 사람은 우떤 사램인데?" "짚세기를 팔라고 갔다가 신집에서 만낸 사램인데 전라도서 동학을 했다 카든가? 전쟁이 나는 바람에 일진회 를 따라왔다더마. 철도까는 데 인부 노릇을 한 모앵이라." "그거 시시한 놈이고나. 그런 자를 가까이 하믄 안 되제." "가까이 하나마나 함께 안 갔이니께." "대개 그런 놈이 일본놈 염탐꾼이라 카더마." "염탐하믄 했지, 별기이 있나? 알고 보믄 그 사람도 우리겉이 고향을 버린 불쌍한 사램이제." 결국 영팔이는 말리는 용이를 뿌리치고 가족과 함께 떠났다. 그곳에 가서 정착한 영팔이는, 일 년에 네댓 번, 여위어서 더욱 길어진 얼굴에 쓸쓸한 웃음을 띠며 용정토 용이를 찾아오곤 했는데 때로는 부모 무덤에 어느 누가 벌초를 해줄까보냐 하며 울기도 했다. 어딜 다녀오는지 길상이 홍이와 함께 절마당을 들어선다. 길상의 발길이 용이 있는 쪽을 향해 옮겨지는 것을 본 홍이는 슬그머니 방향을 바꾸며 월선이 있는 곳으로 가버린다. 홍이는 아비를 몹시 두려워했다. 길상은 용이 옆에 와서 강 쪽을 바라본다. "작년 이맘때, 그때도 오월이었제?" "오월이었지요." 강물에 시선을 둔 채 대꾸한다. "무신 구신 든 달이 아닌가 모르겄네." 지난 해 오월에도 한번 용정촌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그때 화재는 대단찮은 것이었지만 때를 같이하여 청나라 병정이 총질하는 불상사가 발생한 데다 마적떼 내습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시가는 일대 혼란 속에 빠졌던 것이다. 산으로 도망가는 사람, 회령으로 피난짐을 실어내는 사람, 그러나 뒤늦게 허위임이 밝혀져 가 라앉긴 했으나 대단한 소동을 겪었던 것이다. "김훈장께서는 어디로 가싰으꼬." "거기 가셨겠지요." 거기란 유림계의 모임 장소를 가리킨 말이다. "이리로 뫼시고 오는 긴데." "가시잔다고 오셨겠어요?" "..." "애기씨를 여간 꺼려해야지요." "불이 나기 전에 아프시다 캐서 찾아가보았더마는, 마침 불이야 하는 바람에 뛰쳐나오고는... 그 양반 기신 곳 은 불이 늦기 옮깄이니 피신은 하싰겄지." "..." "아침이나 얻어잡샀는지 모르겄네." "그 어른도 딱하지요. 딱하기로야 모두 다 마찬가지지만..." "남우 땅에 와가지고."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의 땅이긴 매일반 아니오. 우리 땅이 어디 있습니까?" 길상은 신경질을 부리는 것 같다. 용이 힐끗 올려다본다. 한동안 서로간에 말이 없다. 짐짝을 기대고 앉아서 울고 있는 여자를 바라볼 뿐이다. "이 차중에 영팔이 있는 데 가서 농사나 지어보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농사..." "송충이는 솔잎을 묵어야제. 영찰이 생각이 옳았던 기라." 용이 심정이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길상은 못 들은 척 잠자코 있다. "이보오!" 새침이 목소리다. 그것도 못 들은 척한다. "이보오!" "왜 그래?" 역정을 내며 돌아본다. "아기씨께서 얼피덩 오랍시오." 그냥 뻗치고 있던 길상이 부시시 발길을 옮겨놓는다. 피곤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용이는 다시 생각에 잠긴 다. 남의 집 불구경을 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홀가분해졌다고나 할까, 용이는 몇 해 동안 용정촌에서의 생활 을 몸서리치며 생각한다. 지긋지긋한 생활이었다. 월선이 공노인의 도움을 받아 국밥집을 시작한 것은 영팔이 퉁포슬로 떠나기 전의 일이다. 옛날 이곳에서 국 밥집을 차린 경험이 있었고 또 주막도 차린 일이 있는 월선이기에, 처음에는 용이도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었 다. 대수롭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자신 육장을 돌면서 곡식을 받아 파는 뜨내기 장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 다. 그러나 장사란 용이 생각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운도 따라야겠지만 경험이 없었고 낯이 설었고 무엇보다 구변이 없는 게 제일 곤란했다. 기껏 하노라 하여도 장사는 본전치기가 일쑤였다. 장사도 이골이 나야 한다던 영팔이 말을 용이는 몇 번 생각했는지 모른다. 대신 국밥집은 번창하여 월선이 혼자로는 손이 모자라 임이네 도 가겟방에 나앉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결국 용이네 세 식구는 월선의 국밥집에 매달려서 사는 결과가 되었다. 우직하고 보수적인 농민의 습성이 섬세하지만 오기가 또한 대단했던 용이는 차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오뉴월 뙤약볕에 끌밭을 맸으믄 맸지, 촌에서는 어디 기집이 장출입이나 하든가? 그런데 이 꼴이 뭣꼬?' 사실 그러했다. 장에는 남정네가 가게 마련이었다. 남의 집 통지기, 천인의 계집, 지아비 없는 늙은 과부 아닌 이상 농부들도 양반들 법도에 준해서 형식이나마 제 여자에게 내외를 시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곳 이 다르고 풍습이 다르다는 것으로 용이는 부끄러운 마음을 달래려고도 했고, 달리 방편도 없는 처지에 참아 야 한다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순간이었다. 한 사내가 보잘것없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한 지붕 밑에 두 여자를 거느린다는 일만 해도 그러했다. 투전판을 기웃거리는 건달패라면 모를까, 무슨 푼수로? 기껏 농사나 지어먹던 놈이, 제 혼자 입치레도 못하는 주제에, 길을 걷다가도 그 생각을 하면 세상이 좁아 보 였다. 노점에서 점심 요기 삼아 술 한잔을 들이켤 때도 이마빡을 치듯 수치심은 달려들었고, 그러면 용이는 해 란강 나루터로 나간다. 그곳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언제까지 서 있는 것이다. 고향을 버린 죄라고 뇌면서, 머리 칼은 벌써 희끗희끗했다. 두 어깨도 구부정했다. 흰 베수건 어깨에 걸어, 장구를 메고 싱긋이 웃던 사내, 큰 키 를 점잖게 가누고 맴을 돌며 장단을 치던 풍신 좋고 인물 좋았던 사내, 그 젊은날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용 이는 심신이 모두 보잘것없이 변해버렸다. 소심하게 남의 눈치를 살폈으며 항상 누군가가 자기 흉을 보고 욕 을 하는 것 같은 강박이 그의 행동거지를 불안정하게 했다. 집에 들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식구들과 말을 하 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돌연 거칠다 못해 미친 것처럼 포악해지는 일이 있었다. 다만 일 년에 몇 번 있는 제 삿날, 흰 베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홍이와 함께 제사를 모실 적에 옛날의 용이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날만은 홍이에게도 조금은 애정을 표시한다. 이렇게 천성이 변하고 나이보다 늙게 된 것은 앞서 말한 이유에서이지만 사실은 보다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용정촌의 월선옥이 장사 잘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파다하게 나돈 소문이거니와 속모르는 사람들은 한 밑천을 잡아도 단단히 잡았을 거라고들 수군거렸다. 그러나 실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삼 년 동안 겨우 식구들 의 의식을 해결했을 뿐 벌어놓은 것은 없었다. 벌어놓은 것이 없다는 사실은 남의 눈에도 수수께끼였지만 아 는 사람은 알고 있었고 용이나 월선이 까닭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칠 줄 모르는 임이네 탐욕 때문이다. 그가 찬 속주머니는 밑 없는 항아리 같은 것이었지만, 들어가도 끝이 없었다. 청나라 돈 일본 돈 할 것 없이, 아마 동전은 백동전이 되고 백동전은 은전이 되고 은전은 다시 지전으로 둔갑하여 어디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월선이는 셈에 우둔하였다. 용이는 용이대로 하숙집을 들르듯 잠자고 밥 먹 는 일 이외 일체를 모르는 척 지내왔었다. 임이네의 축재 방법 혹은 훔치는 방법은 교묘했다. 교묘하지 않더라 도 그러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푼돈쯤 얼마든지 집어낼 수 있는 가게 사정이었고 임이네도 처음에는 푼돈에서 시작했겠지만 도벽이란 거듭될수록 액수에 대담해지게 마련이다. 증거는 없었다. 내버려둔다면 월선은 거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임이네를 불러다놓고 따졌다. "마른하늘에 베락 치겄소! 세상에 이런 애맨 소릴 듣고 우찌 살겄소? 내가 쇠전 한푼이라도 손을 댔다믄 앉고 일어서질 못할 기요! 그라고도 내 손이 온전하까! 손가락이 옹굴어져서 문둥이가 될 기요! 하늘이 씨퍼렇게 내 리다보고 있소! 뵈기 싫으믄 뵈기 싫으니 나가라고 곱기 말할 일이지, 이렇기 금사망을 씨워서 쫓아내겄다 그 말이요? 야아, 좋소. 내가 나가믄 될 거 아니요. 천장에 배미 든 것맨치로 이녁들 싫음 내가 나가믄 될 거 아니요. 홍이는 내가 낳은 자식이니 데리고 나가겄소. 길가서 얼어죽든지 굶어죽든지 이녁들 참견할 것도 없고 요." 부잣집 마나님같이 몸이 불은 임이네는 눈을 부릅뜨고 용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거침없이 말을 쏟아놓는 다. 뻔한 일인데, 움직일 수 없는 일인데, 용이는 일시 당황한다. 그것을 느낀 임이네는 참나무같이 단단한 주 먹으로 방바닥을 친다. "아이구 분해라! 사고무친한 곳에 이런 설움 줄라꼬 끌고 왔던가? 이러크름 사람을 괄시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주야로 손발 잦아지게 종질해가믄서 새주둥이 겉은 입 하나 사는 것 뿐인데, 우떤 년이 우떻게 속새 질을 했는지는 모르겄소만 무신 죄를 졌길래 불러다놓고 이렇기 죄인 추달하듯이, 억울하고 분하고, 이래가지 고 우찌 살겄소! 내가 따로 작량을 했다믄 내 귀한 자식 멩줄인들 성하까." "머라꼬? 홍이 멩을 두고 맹세한다 그 말가!" "야. 내 청백하니 멋엔들 맹세 못하겄소?"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귀타 카는데, 천하에 몹쓸 기집!" 얼굴이 파아랗게 질린다. 임이네는 태도를 표변하고 운다. "내가 뭣 때문에 따로 주무니를 차겄소. 옷 입고 밥 묵으믄 고만이지. 가닥 다른 자식 임이가 있이니 의심을 하는지는 모르겄소만 제집 자식 출가시키믄 고만이지 내 죽은 뒤 물 떠줄 홍이가 있는데 머한다꼬 딴맘 묵을 기요. 성님한테 자식이라도 있이믄 모르까 헐헐단신 우리 홍이를 그리 귀키 생각하는데 살림이 어디 갈 기라 꼬." 월선이를 성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희귀한 일이거니와 누르러져서 호소하듯 우는데, 그러나 결국 자기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치 양보가 없었다. 승강이는 계속되었으나 바위에 계란 부딪는 꼴이었다. "몹쓸 년! 하늘 안 무섭나!" 지쳐버린 용이는 주먹으로 볼을 쥐어박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낯선 주점에 들어간 그는 술을 청해놓고 밤늦게 까지 혼자 앉아 있다가 김훈장 숙소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밤길을 가면서 중얼거렸다. "설마, 지도 사람인데 그쯤 했이믄 그 짓을 또 할라꼬?" 그러나 여전했다. 어쩔 수 없는 욕망이었던 것이다. 용이는 타일러도 보고 매질도 했으나 임이네 입에서 나오 는 말은 한결같이 천지 신명에 맹세코 청백하다는 말뿐이었다. "이년아! 한 번이라도 좋으니 했다고 해봐! 내 그러면 세 식구, 빌어묵어도 니한테 다 맽기고 나갈 기니." 참으로 용이는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 한 거를 우찌 했다 칼 기요! 꼬지는 타고 개기는 설 일이제. 보선목이라도 뒤집어 보이까? 심심하믄 죄 없 는 사람 불러다놓고 둥개둥이를 치니 정말 이자는 나도 못 살겄소. 그렇기 못 보겄거든 고만 비상을 믹이서 직이부리소." 이쯤 되면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요지부동한 임이네 거짓과 거짓말을 벗기고야 말겠다는, 순전히 대결을 위한 대결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옛날에는 말 없이도 다스려졌던 여자가 어느새 거인이 되었고 사내는 힘 잃고 이 빠진, 천부의 자긍심만은 잃지 않으리라 몸부림치는 한 마리의 늙은 사자. 월선이로 인한 사랑의 투정이라면 얼마간의 연민도 가질 수 있는 용이였다. 그러나 비참했던 이력 때문에 버림당하지 않는 것만이 살길인 줄 믿 었던 지난날의 임이네는 아니었다. 남편 없어도 돈 있으면 산다는 배짱이었다. 용이보다, 아니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소중한 것은 돈, 오직 돈이었다. 돈에다만 그는 그 자신의 장래를 걸었다. 이 세상 마지막이 온다 하 여도 혼자만은 살아남을 것 같은 왕성한 생명력, 불모의 바위틈을 피 흘려가며 기어오르는 생명에의 의지, 무 서운 힘이었다. 그런 뜻에서는 본시부터 임이네는 거인이었는지 모른다. 한번은 공노인이 용이를 불러냈다. "사내가 잘나믄 열 계집도 거나린다는데 자네는 어찌 처리하길래 집구석이 그 모양인고?" "볼 낯이 없십니다." "내 본시부터 월선이가 계집 자식 있는 자네를 따라 사는 것을 좋잖게 생각했네만 지 어미가 그런 처지고 보 니..." "그거는..." "알고 있다. 알 만치는 알고 있다 말이다. 너거들이 첫정이라서 그런 것도 알고 임이넨가 그 계집 내력도, 그 러나 사정은 어떻든 간데 자네가 월선이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맘이 있다면..." 노기와 모멸의 빛이 늙은 눈에 가득 찼다. "아무튼 남 보기 세 식구가, 불쌍한 여자 하나를 뜯어먹고 산다해도 변명할 수 없는 처지 아닌가." "..." "가게 집세는 밀리기 일쑤라 하는데 임이넨가 빈주먹 쥐고 온 그 계집은 어디서 돈디 나서 이자놀인고? 기가 막히서, 용전촌의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어디 한번 물어보자! 월선옥이 집세 밀릴 만큼, 그렇게 파리를 날리는 국밥집인가 아닌가. 세상 사람이 웃을 일 아니가. 체모가 없어도 유분수지. 누가 채리준 가겐데? 길게 그라면 내 그눔의 가게 불을 싹 질러버릴 기니 자식도 없이 불쌍한 그거를..." 공노인은 흥분했다. 그날 밤 늦게 술이 취해 돌아온 용이는 방에 들어서자 임이네 머리채부터 낚아챘다. 죽일 기세였다. 주먹이 얼굴을 내리친다. 코피가 쏟아지고 비명이 울려퍼진다. "보소! 보소! 와 이러요?" 위기를 느낀 임이네는 월선의 등뒤로 도망쳤다. 월선을 떼밀어 자빠뜨리고 용이는 임이네를 다시 낚아챈다. "아부지! 아부지!" 자다 일어난 홍이 울부짖는다. 그러나 주먹은 임이네를 난타하고 있었다. "보소! 참으소, 야?" 하며 월선이 다시 막아서는데 어느 사이 쓰러졌던 임이네 손은 월선의 두 다리를 껴안고 넘어뜨렸다. "병 주고 약 주는 것가아! 니 죽고 나 죽자!" 피투성이가 된 임이네는 월선에게 덤벼들었다. 얼마간 술기운에서 깨어난 용이 눈에 비친 광경은 '지옥이구나, 지옥. 이기가 지옥이다!' 가까스로 몸을 뽑아낸 월선이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밖으로 뛰어나간다. "제집 소나아 공모해서 날 쳤겄다?" 선불 맞은 멧돼지같이 이번에는 용이에게 들이덤빈다. 용이는 아까와 달리 때릴 생각은 잊고 울음도 아니요 웃음도 아닌, 목구멍에서 구룩구룩 소리를 내다가 "지옥이다, 지옥! 이기이 지옥이구나!" 임이네 악담을 들으며 집을 나섰을 때 월선이는 밤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용이는 잠자코 걷기 시작했다. 월선이 뒤따라온다. 시가를 빠져나와 쓸쓸해진 거리에 이르렀을 때 용이 돌아보았다. "머하로 따라오노." "그만 가입시다, 집에." 월선이 다가서며 그의 팔을 잡는다. "내, 내, 내가 사람가? 사내자식이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로 용이는 집을 나간 채 소식이 없다가 두 달 만에 몹시도 추운 날 심한 기침을 하며 돌아왔다. 그랬는데 그 후 어느 날 임이네는 꼭 한 번 실수를 했다. 이웃 기름집 아낙에게 꾸어주기 위해 십 원짜리 한 장과 일 원짜리 열 장을 꼬기꼬기 접어서 품에 넣었다가 미처 건네주기 전에 그것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용이 주워들었다. "이기이 무신 돈고?" 임이네가 당황한 것은 일순간이었다. "홍이 털외투 하나 사줄라꼬 모은 돈이요." 태연스럽게 말했다. "뭐라꼬?" "이녁이사 괜찮겄지마는 성님은 어디 그렇소? 해달라 카기가 미안스러바서요." "참마로 니는 지옥에 떨어질 년이구나." "..." "사램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제. 그러나 잘못을 알기 따문에 사람 아니가? 니는 우찌 니 잘못을 모르노." 용이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슬프게 보였다. "내가 멋을 잘못했단 말이요? 종년겉이 부리묵음서 그까짓 돈 이십 원, 남우 집을 살았이믄 품삯을 받아도 받 았일 거 아니요!" "허허어!" 실성한 것처럼 용이는 웃다 말았다. 오히려 이날은 흐지부지 끝이 났지만 홍이 외투를 사기 위해 모았다던 그 돈은 결국 외투 사는 데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안을 느꼈음인지 이자놀이만은 중지한 눈치였다. 어제 저녁, 불이 나기 전에 용이는 김훈장이 앓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또 고향 생각이 나서 그런 기지, 하며 술 한 병을 들고 찾아갔었다. 세들어 있는 단칸방, 컴컴하고 통풍도 잘 안 되는 방에 기척도 없이 누워 있던 김훈장은 용이 성냥을 그어 남포에 불을 붙이자 때 묻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으며 탕건을 집어 쓰는 것이었 다.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뭐 노상 그렇지." 하다가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닦는 척하며 눈물을 씻는다. 서희의 눈치를 보아가며 길상이 다소의 금품을 갖 다주기는 하나 할 일 없고 무료해서도 그랬겠지만 동가식서가숙, 같은 처지의 망명 선비들 신세를 지는 일이 더 많았다. 어려울 때는 용이를 찾아올 만도 한데 체통이 소중한 김훈장은 스스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이렇기, 혼자 누버 기시믄 우짭니까." "..." "애기씨 댁에라도 가시야지요." "싫네. 그애가 나를 반기지도 않겠지만 반긴다 하여도 거기는 안 가겠네." "..." "내 자네를 보고 할말은 아니네만 사람이란 씨가 있는 법이야. 그럴 수는 없어. 간 곳마다 그애 말이 입질에 오르내리니 심히 듣기가 거북해." 용이는 쓰게 입맛을 다실 뿐이다. "명색이 양반이면 사내도 못할 짓을, 그래 규중의 규수가? 아무리 낯선 땅이기로, 겨우 열아홉 나이의 처녀 몸 으로 미천한 시정배하고 한당이 되어 장사라니? 투기 사업이라니?" 미천한 시장배란 공노인을 가리켜 한 말이다. "하기는 최참판댁 여인네라면... 허나 윤씨부인은 그렇지가 않았어. 참으로 그 풍도가 능히 본받을 만했었지." "형편이 다르니께요." "진토 속에 묻혀도 옥은 옥이야. 으으응, 그럴 수가 있나. 부사댁 이공 경우만 해도 그렇지. 이공이 누군데? 돌 아간 그애 부친 최공하고 이공이 어떤 사이였나? 한데 서희가 그렇게 대접할 수 있겠나? 부친이나 다름없는 이공의 청을 거절하다니. 설령 그런 인연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말일세. 나라를 위해 몸바친 사람들한테 군자금 몇 푼 못 주겠느냐? 친일파가 짓는 절에는 희사를 하면서 말이야. 서희는 조선의 백성이 아니었더란 말인가?" 하고 시작하는 김훈장의 푸념을 듣고 있는데 별안간 거리가 시끄러워졌다. 불이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 으로 뛰어나온 용이가 불길이 바로 자기 가게 근처에서 나는 것을 보고 달려갔을 때, 기름집에서 난 불이 옮 아 이미 불길은 가게를 휩싸고 있었다. "홍아! 홍아!" 미친 듯 울부짖는 월선의 고함이 고막을 찢는다. 거리는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화하고 거무칙칙한 어둠과 시뻘 겋게 솟아오르는 불기둥과 사태처럼 쏟아지는 사람의 무리, 짐짝--용이 혼잡을 헤치고 뛰어들었을 때 베개 하 나를 품에 안은 임이네가 불길 속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매고 있었다. "홍이는?" "호, 호, 홍이요?" 베개만 안은 채 임이네는 몽롱하게 용이를 쳐다보았다. "아아는 우짜고 베개만." 베개를 불길 속에 냅다 던지며 "아기이 아아가!" 임이네를 거리 쪽으로 밀어던지고 불속으로 뛰어들려 하는데, "보소오! 보, 보소! 홍이 여기 있소!" "아부지! 아부지이!" 사람 울타리 속에 갇힌 월선과 홍이 악머구리처럼 동시에 외쳤다. 이때 나자빠졌던 임이네가 벌떡 일어섰다. "베개! 베, 베개, 아아앗! 내 베개!" 불속으로 달려간다. "아니 저기이!" 간신히 치맛자락은 잡았는데 그새 불길이 옷에 옮는다. 용이는 임이네를 거리 쪽으로 질질 끌어내어 몸뚱이를 땅바악에 굴리듯, 옷에 옮겨붙은 불을 끈다. 그러나 임이네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 한 다. "이기이 환장했나!" "내 베개! 아아악! 내 베개!" 용이 팔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던 임이네 사지가 갑자기 뒤틀리고 무섭게 경련을 하더니 까무러치고 말았다. 용이는 비로소 그 베개 속에 큰돈이 들어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어째 이럽매? 밥으 묵쟁쿠 일어납세." 달래오망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용이 눈알이 금세 시뻘개진다. 월선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홍이만 맥빠진 얼굴을 하고서 송장같이 나동그라진 제 어미 옆에 앉아 있었다. 이상한 감각, 용이는 전신을 부르르 떤다. 뱀 한 마리를 밟은 것 같은 감각이 전신을 타고 올라온다. 힘을 준다. 발에 힘을 준다--죄책, 무섬증, 잔인한 증오심, 뒹굴며 싸운다. 힘을 준다. 힘을 준다! 뱀의 창자가 터진다. 뒹굴고 굽이치면서 뱀을 죽는다. 용이 얼굴에 땀이 흘러내린다. '배미다! 배미! 저 기집은 숭악한 독사배미다!' 2장 회영루에서 "부르셨습니까?" 서희는 방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길상은 방문 밖에서 양미간에 꼬막살을 잡히고 있는 서희를 넌지시 건너다본다. "이부사댁 서방님 소식은 들었느냐?" 또박또박 잘라 하는 말은 따지는 품이다. "듣지 못했습니다." 길상의 시선은 서희 미간에서 위쪽으로 기어올라간다. 술이 달린 옥색 빛깔의 박래품 비단목도리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다. "듣지 못했다?" 꼬막살이 펴지면서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아직은, 하지만 무사하시겠지요." "뭐라구?" "송선생님댁에까지 불은 번지지 않았으니 별일 없을 것입니다." "송선생댁에 그냥 묵고 계신지 아닌지 어떻게 안단 말이냐?" "지금이라도 가서..." "무슨 변고라도 나지 않았다면 설마한들 그래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 나를 찾아보지 않는단 말이냐?" "..." "내 있던 곳이 불바다가 됐는데도 말이야." "그럼 송선생님댁에 가보겠습니다." 길상의 시선은 다시 내려와서 서희의 심중을 나무라듯 일별을 던지고 돌아선다.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 사내장부라면 올 리가 없지.' 부드럽고 텁수룩한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린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길상은 어수선한 절마당을 빠져 서 백양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내리막길을 지나간다. 절은 시가와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므로 곧 시가 에 이르렀다. 새벽녘에 불은 제물에 꺼졌는데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있었다. 깨어진 질그릇 벽돌이 곳 곳에 쌓여 더미를 이루고 날씨는 찌뿌둥하니 개운치 않다. 구름 사이로 엷은 햇빛이 무참하게 쓰러진 회신의 거리를 비춰주고 있었다. 바람이 일 때마다 재에 덮인 불씨가 희미해진 불덩이를 드러내곤 한다. 허물어진 집 터에는 모닥불을 모아놓고 꼬챙이에 꿴 감자를 굽고 있는 아이 업은 아낙이 있었다. 얼굴에는 눈물자국 콧물 이 엉켜붙은 아이 둘이 목을 뽑고 그것을 지켜본다. 타다 남은 판자 기둥 따위를 주워모으는 사내가 있고 잿 더미를 헤치고 삽질하는 사내가 있고 우두커니 불탄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이가 있다. 아우성도 이야기 소리도 없는 조용한 폐허. 멀리 해란강 하반을 따라 육도천이 합류하는 회령 가도를 향해 펼쳐진 상부 예정지 넓은 들판에 청나라 농부들이 밭에 씨를 뿌리고 있었다. 이곳의 파종기는 일러야 사월 하순, 대개의 작물은 오 월이 파종의 적기다. 불탄 자리가 끝나고부터 거리는 시끄러워진다. 짐짝들이 길편에 늘비하게 쌓여 있었다. 화재를 면한 이 지역 주민과 불난 자리에서 쫓겨온 이재민들이 우왕좌왕 붐비고 있다. 잡답 속을 전족한 청국 여인은 은귀고리를 흔들며 새된 소리로 지껄이며 지나간다. 그을음을 뒤집어쓴 청인 사내가 외바퀴 수레를 밀고 간다. 맨상투의 바지저고리 바람의 사내가 가고 아이가 절룩거리며 따라간다. 마차 소달구지가 가고 지게짐이 간다. 청국말 조 선말이 왕왕거리듯 귓전을 스친다. 길상은 그들 속을 헤치며 빠져나간다. '어거지 떼를 써도 푼수가 있지, 그럴 나인가?' 길상은 서희의 복잡한 심정을 생각하는 것이다. 서희로부터 심한 모욕을 받은 뒤 이상현이 발걸음을 끊은 지 달포가 된다. 상현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아무리 고생을 해도 자기 뜻대로 하려는 그 성질만은 변함이 없군. 하긴 뜻대로 할 수 없으니까 성질을 부리 겠지만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에구망이나! 나도 한분 봅세!" "잘으 생깄궁, 헌헌장부으 앙이겠능가?" "어느 에미나이가 저 총각으 콱 잡을랑가 모릅지." 북새통에 거리를 나돌던 처녀아이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가한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화재를 당한 축들은 아닌 모양이다. 길상은 얼굴을 반듯하게 쳐들고 지나가는 것이지만 목덜미는 벌겋게 물든다. 노상 젊은 여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젊은 여자뿐만 아니라 용정촌에서 길상을 탐내는 사람은 많았다. 스물여섯, 총각의 나이론 늙은 편이지만 말수가 적고 어딘지 모르게 근심띤 독특한 표정은 사람의 마음을 끌리게 한다. 대부분 두만강 연변에서 일찍부터 건너온 이곳 사람들은 남도 사람들처럼 반상을 가리는 기풍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해서 길상이 비록 하인의 신분일망정 준수한 외모와 침착한 행동거지, 학식도 녹록잖게 들었다는 점에 서도 좋게 생각들 하는 것 같았다. 자연 혼담이 생기고 유복한 집안에서 딸을 주겠다고 자청해오기도 했다. 그 럴 때마다 웬 까닭인지 서희는 완연하게 불쾌해하는 낯빛이 되었다. 그런 태도는 길상에게 고민스러운 것이었 다. 서희가 이상현을 사모하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십자가 장터에서 왼편으로 꺾어 한참을 들어갔을 때 조용한 주택가가 나타난다. 송선생댁은 상당히 넓은 면 적을 그곳에 차지하고 있었다. 삥 둘러진 높은 담장 안에 여러 동의 건물이 있는 규모가 큰 저택이다. 용정촌 에서는 손꼽히는 자산과 명망이 있는 송병문 씨가 당주인데 이미 환갑을 지낸 노인이며 중풍으로 몸이 자유롭 지 못했다. 송선생이란 그의 둘째아들 장환이다. 부친 송병문 씨가 설립한 상의학교의 교사로서 실질적인 경영 자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뜰에는 짐이 쌓여 있고 사람들로 붐빈다. 친지들이 짐짝을 끌고 몰려든 모양이다. 화재를 면한 집도 소동을 겪기로는 다를 게 없다. "이기 뉘기요? 경상도집으 길상이 아잉매? 간밤으 혼짝 났지비?" 촐랭이같이 생겼으나 사람이 좋아 보이는 머슴 점생이 어디서 풀쑥 나타나 위로의 말을 걸었다. "그래 어디메 들었습매?" "절로 피했지요." "쯔쯔, 사람으 다치잲구?" "네. 이선생은 학교 가셨습니까?" "앙입매. 핵교오 앙이 갔음. 사랑으로 들어가봅세." 짐짝이 나둥그러진 사이를 빠져서 길상은 뒤뜰 쪽으로 돌아나간다. 사랑은 마치 여관집 같았다. 청나라식으로 벽돌을 튼튼하게 쌓은 건물인데 네댓 개의 방이 즐비하니 붙어 있다. 방 앞은 난간으로 된 복도다. 맨 끝의 상 현이 거처하는 방 앞에서 "서방님 계십니까?" "길상이냐?"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방문이 열렸다. "들어오게." 들어오라 한 사람은 생각지 않았던 김훈장이었다. 장죽을 입에서 뽑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반가워 서 그러는 것이었다. "생원님께선 여기 계셨구만요." 방으로 들어간 길상은 자리에 앉는다. "무슨 일로 왔느냐?" 초조하고 반가운 빛을 애써 감추며 상현은 냉정하게 물었다. "애기씨께서 별일 없으신지 알아보라 하셨습니다." 길상은 상체를 세운 채 상현을 건너다본다. 상현의 얼굴은 점점 상기되어간다. 그것이 민망스러운지 성이 잔뜩 나버린 표정으로 변해간다. 김훈장은 벌레르 씹은 듯 쓴 얼굴이다. 육십 노인이 아니라 칠심도 넘어 보이게 늙 은 모습, 고운 때가 묻은 두루마기에 머리에 쓴 갓은 윤이 흐르는 새것이다. 유림계에 나가 있거나 아니면 남 의 사랑에서 소일하는 김훈장의 처지를 생각하여 길상이 지난 가을 갓방에서 탕건과 갓을 오 원에 장만해주었 던 것이다. "그래 아기씨께선 어디로 피하셨느냐?" 화난 표정인 채 상현이 물었다. "절에 계십니다." "절에?" "절에 갔을 테지." 심술궂게 말하며 김훈장은 재떨이에 대고 장죽을 뚜드린다. "큰 손해는 없었고?" 다시 상현이 물었다. "집이 탔을 뿐입니다. 마침 고방은 비어 있었구요." "그래?" 그러고는 썰렁한 방안에서 서로 멍멍히 바라본다. 방아니 조용해지자 바깥의 소음이 두드러진다. 상현이 눈살 을 찌푸리고 김훈장의 신경도 곤두서는지 표정이 꾸겨진다. 식객의 자격지심이라지만 상현은 상의학교에 나가 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다소의 급료나마 받는 처지지만 불길에 쫓겨왔다고는 하나 불청객인 김훈장은 송선생댁 과 아무런 친분이 없었다. 송병문 씨가 건강했을 무렵에는 어떤 인연의 손님이든 찾아오는 사람을 섭섭하게 하지 않았고 사랑방은 마음놓고 쉬어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의 맏아들 송영환은 인색한 사람이었다. 이심전 심 길상의 마음도 편안치가 않다. 처량한 김훈장 처지 때문에 우울해진다. "이서방이 몹시 걱정을 하더군요." "이서방도 절로 갔나?" "네. 생원님 뫼시고 올 거를 그랬다고 하면서..." "내가 왜 거길 가아!" 버럭 소리를 지른다. "친일배나 가지. 내 갈 데가 없으면..." 순간 풀이 죽는다. 상현과 길상의 눈이 창문 쪽으로 쫓겨간다. "개판이다, 개판. 개판이라도 유분수지. 어떻게 된 놈의 세상이길래..." 으음 하고 큰기침이다. 궁색하여 큰소리를 쳐보는 터이지만. "양놈의 교를 믿는 야소쟁이도 저이들이 어느 나라 백성인 줄은 알고 마음으로라도 왜적들에 대항해나가는데 이 나라 고래로 내려온, 음, 그렇지. 그, 그놈의 중놈까지 앞장서서 친일을 아니 하나, 지각이 있는 애라 믿었 던 서희가, 그 아이가 그놈의 절에 시주를 해? 시주를 한단 말이야? 의병들 군자금도 거절했던 그 아이가? 하 기는 오장육부가 다 썩어가는 유림놈들도 쇠전 한푼 얻어볼까 들먹거리고, 동학놈들은 숫제 발벗고 나서서 원 수의 주구 노릇을 하니, 이래가지고도 나라가 안 망했다면 귀신이 곡을 했을 게야." 여러 가지 설움이 겹쳐서 장죽은 든 손이 부들부들 떤다. 상현과 길상은 침묵을 지킨다. 김훈장의 심정은 안 다. 함께 울고 싶은 기분이다. 그러나 짜증스러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자고로 한 집안이 망하려 들어도 온갖 잡신들이 먼저 나서서 굿을 치기는 하지만 이, 이거는 공자 맹자 부처 까지 메고 나와 도깨비굿을 치고 있으니 손바닥만한 이 고장에서, 내 땅도 아니요 쫓겨나온 남의 땅에서," 재떨이를 장죽으로 마구 친다. "모두가 다 그런 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유림이나 동학도나 불교도도 말입니다. 그중 소수가, 어느 시절이든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상현이 말을 막는다. "그, 그건 그렇지." 어성이 낮아졌다. 길상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 아니, 왜?" 김훈장은 허둥지둥이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은 나를 설마 어떻게 조처해주겠지 하고 품었던 기대, 아무 언 질도 없이 일어서다니 싶었던 것이다. "좀더 얘기나 하다 가지 그래." 목이 멘 음성이다. "그럴 새가 없습니다. 지금부터 처리할 일이..." 상현은 입술을 깨무는 듯 묘한 표정이다. 그 역시 길상이 길을 터주면 함께 가서 서희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분별없는 생각이 치민다. 길상에게 우롱을 당한 것 같아 괘씸하다. 질투가 뭉굴뭉굴 피어오른다.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들 두 사람의 얼굴을 외면한 채 길상은 밖으로 나왔다. 오던 거릴르 되돌아 지나가는데 불탄 집 자리에 막 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찬서리나 피해보자고, 어둠이 오기 전에 서두는 것이다. 절마당을 들어섰을 때 용이는 그제도 백양나무를 등지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멍해 있는 그의 눈에는 길상 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서희 방 앞에 이르는 길상은 "다녀왔습니다." 방문이 열리고 길상을 빤히 쳐다본 서희는 "그래서?" 하며 다음 말의 재촉이다. "이부사댁 서방님은 별일 없이 송선생댁에 계셨습니다." "별일 없이? 병들지도 아니하고?" 세게 말을 내뱉는데도 입매가 뱅글뱅글 돈다. "그리고 생원님께서도 함께 계시더군요." "그 늙은이가 함께 있어? 쇠파리처럼 여기저기 잘 붙어다니는구먼." 이쪽에서 굽혀 사람을 보냈는데도 오지 않는 상현에 대한 노여움이 애꿏은 김훈장에게 튄 것이다. "애기씨!" 길상의 얼굴이 벌개진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오!" 서희는 지나쳤다 싶었는지 길상을 노려볼 뿐 대꾸는 없다. "뜻이 맞아서 이곳까지 함께 오신 어른 아닙니까. 애기씨까지 그러시면 그 어른더러 돌아가시란 말씀이오?" 곧을 길을 가듯 사양이 없다. "내 험담을 하고 다니는 늙은이를 어떻게 받들란 말이냐?" "험담은 무슨 험담입니까. 섭섭해 하신 말씀이지요." "듣기 싫어!" 그러나 길상은 개의치 않고 할말은 한다. "가실 곳이 만만치 않아 이부사댁 서방님을 믿고 그곳으로 피신하신 모양인데 아시다시피 서방님도 그 댁 객 원이고 보면 심중이 편하시겠습니까." "..." "무슨 조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서희는 들은 척하지 않고 "이서방은 어디 있지?" 하고 딴전을 피운다. 난처할 때 하는 서희의 버릇이다. "밖에 있습니다." "일꾼들은?" "근처에 있겠지요." "지금부터 공서방 객줏집으로 내 옮겨가야 해." "옮기셔야지요." "일꾼들 불러다 짐을 나르게 하고, 길상이는 내일," 하다가 멀리 하늘로 시선을 던진다.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린다.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싶었을 때 다음 순간 서 희는 싸늘하게 길상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내일, 길상이는 회령으로 가야 해." "..." "회령에 있는 재목을 모조리 사는 게야. 수량이 많지 않으면 원목을 그곳 제재소에서 키기로 하고." "그렇게 많이 어디다 쓰시려구요." "많을지 적을지 그것은 가봐야 알 일 아니냐? 두고보아. 재목이 동이 날 테니." "..." "우선 이게 오백 원인데," 하며 서희는 흰 종이에 싼 것을 내밀었다. 길상이 받아든다. "일꾼들을 데리고 가서 일부 목재를 실어 보내고 나머지는 계약을 걸어놓아요."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다음은 이서방이 해야 할 일인데 이서방은 따로 일꾼을 사서 불탄 자리를 말끔하게 하고, 우리 집터 만이 아니라 장터 옆의 그 자리도 함께 치우는 거야." "그러면 그 터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요?" "어떻게 하다니? 상부국에서 샀었더라면 벌써 헐렸을 집을 아니냐? 이제는 헐고말고 할 것도 없이 물이 났으 니 땅은 땅임자 마음대로야." "하지만..." "뭐가 하지만?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는 거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길상은 물러난다. 늦은 점심때쯤, 절에 있는 짐 일부를 날라다놓고 서희가 옮겨간 공노인의 객줏집은 비좁을 골목 안에 있었다. 봉놋방이라 하여 나그네들이 함께 묵는 큰방 이외 손님을 받는 방은 네 개였는데 그중 두 개를 치우고 서희가 들었다. 공노인의 마누라는 허리가 길고 팔이 길고 공노인보다 키가 큰 안늙은이였으나 꼬장꼬장 말라서 늙기 로는 영감보다 더한 것 같았다. 그는 양딸 송애와 함께 늦은 점심을 짓느라 바빴다. 달래오망이와 새침이는 간 밤에 버린 옷들을 모아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서희 방에 점심상이 들어갔다. 그런 뒤 길상과 일꾼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봉놋방으로 송애는 밥상을 날라왔다. 동실동실한, 귀염성이 있게 생긴 송애는 들어 오면서부터 얼굴이 홍당무였다. 일꾼들은 길상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핀다. 길상은 모르는 척 일꾼들만 빤히 쳐 다본다. "반찬도 없는 점심이 늦어서 배고프제?" 공노인의 마누라 방씨가 뒤따라 들어왔다. "아아니, 이서방은 어디 가고?" "네, 저어..." 길상이 우물쭈물 말한다. 용이는 짐을 날라다놓고 도망치듯 절로 돌아간 것이다. "사람도, 점심이나 묵고 가지." 용이 심정을 아는 방씬 언짢아서 혀를 찬다. "송애야." "예." "절에 점심 좀 날라다주어라." "숭녕 디리고 가겠소." "사람들도, 와서 밥이나 묵지." 하다가 홍당무가 되어 나가는 송애 옆모습을 본 방씨가 빙긋 웃는다. 언제였던지 길상을 두고 송애가 어떻겠 느냐 하며 월선에게 묻던 공노인의 말을 송애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하면 걸맞는 짝이라고 방씨도 그때 말을 했었다. 그러나 월선이는 그 일에 대하여 통 말이 없었고 흐지부지되고 만 일이었다. 해가 두어 뼘쯤 남았을 때 길상은 공노인 객줏집을 나서서 다시 송선생댁을 찾아갔다. "무슨 일로 왔지?" 혼자 책을 읽고 있던 상현은 지치고 힘이 쑥 빠진 얼굴이다. 길상이 돌아간 뒤 혼자서 내내 마음속으로 싸움 을 벌였던 것이다. "생원님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아까 나가셨는데..." "어디 가신단 말씀도 없으시고요?" "잠시 다녀오겠다 하시면서 나가셨다." "그럼 돌아오시는 거지요?" "돌아오시겠지. 한데 왜 그러나?" "이걸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종이에 싼 돈을 내밀었다. "그게 뭔가?" "돈입니다." "그래?" 상현이 받아든다. 우선 잠자리는 상현과 함께 하더라도 식사만은 밖에 나가서 하라는 뜻으로 길상은 돈 십 원 을 싸가지고 온 것이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하자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바쁜가?" 상현이 물었다. "바쁠 건 없지만 내일 회령으로 떠납니다." "뭣하러?" "목재를 살려구요." "벌써 집을 짓자는 겐가?" 별일 없이? 병들지도 아니하고? 하면서 서희는 상현에 대한 감정을 그런 식으로 길상에게 쏟아놓더니 상현도 역시 서희에 대한 감정을 그런 식으로 길상에게 비벼댄다. "지금 안 바쁘면, 아직 저녁 먹을 시간은 아니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씩 할까?" "네?" "불 소동에 애를 썼을 테니 풀어야지." 길상은 할말이 있나 보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요." 나란히 송선생댁을 나선다. 두 사람의 키는 엇비슷하게 중키는 훨씬 넘는다. 몸매는 상현이 편이 가늘어 보인 다. 거리는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잠시 동안 불탄 방향으로 시선을 보낸 상현은 눈길을 거두고 그와 정반대편 을 향해 곧장 걸어간다. 회영루라 쓰인 청요리집 나무 간판 앞에 걸음을 멈춘 상현은 비스듬히, 자세도 눈길도 비스듬히 길상을 돌아본다. 두 사람은 오래되어 낡고 비좁은 층계를 밟으며 올라간다. 층계는 디딜 때마다 삐 걱삐걱 소리를 냈다. 이층은 아래층보다 좁고 탁자도 세 개가 놓여 있을 뿐인데 텅 비어 있었다. 거리 쪽으로 창이 하나 나 있었으나 삼면이 벽이어서 침침하고 곰팡이 냄새 기름 냄새가 찌들어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마주보고 앉는다. 변발의 소년이 따라왔다. "머 들어해?" "음, 술 두근하고," "..." "집을 것 두어 가지, 해삼탕이 좋겠구먼. 나머지는 알아서 가져와." 송선생과 더러 왔기 때문에 소년과 상현은 서로 낯이 익다. 길상은 창밖을 내다본다. 찌푸렸던 하늘은 개고 서 산 쪽으로 기우는 해,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다소 급한 속도로 어젯밤처럼 바람이 불 모양이다. 가 재수 없는 것들만...' 푹 파여 들어간 두 눈에 불을 뿜던 사내 얼굴이 떠오른다. 노일전쟁 때다.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의 일이다. 헌병 보조원이었던 김두구는 아라사의 첩자라 하여 한 사내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잡고 보니 그는 의병총사 유인석 계열의 의병장 박모라는 인물이었다. 물론 총살당하고 말았지만 박모의 동생이 김두수를 기억했다는 것은 실수였다. 끊임없이 추적해 다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서든 만나게 되면 죽이리라는 상대편의 결심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조선만 같아봐라, 내가 그만두는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담배 연기를 뿜어댄다. '흥! 의병장? 독립운동? 개나발 같은 소리 작작해. 왜놈이 임금이건 조선놈이 임금이건 나한테 무슨 상관이야? 어느 놈이 잘살든 못살든 내 알 바 아니고 내가 근심할 일은 내 일신 하나뿐이야. 언제 어떤 놈이 나를 대신 해주었더란 말인가? 천대와 구박... 천대와 구박, 내가 받은 건 그것밖에 없었다. 나라가 망했다고 울어? 우는 눈구멍에 오줌을 깔기지. 나라가 뭐야? 망해라! 망해! 살인 죄인의 자식인 이 김두수, 조선 백성 되길 버얼써, 십여 년 전에 사양해온 터라. 조선 백성? 개돼지 취급이라도 조선 만세를 부를까? 발붙일 곳이 없어도 내 나 라 내 강산이라며 울까? 의병장? 독립투사? 여부가 있나. 주렁주렁 한 줄에 엮어서 그 절개 높은 상판에다 똥 칠을 할 테다! 난 대 일본제국의 주구요 역적이요 대 악당 김두수란 말이야. 까짓 비수 한 자루 품고 비리갱 이같이 만주 벌판을 헤매는 그 놈을 내가 무서워해? 천만의 말씀이다. 천만의 말씀! 그 따위 배포라면 이 김 두수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않았을 게야. 우국 열사라는 놈들이 목숨을 걸었으면 나도 목숨을 걸었다. 걸었 어!' "아이 숨차아." 술병을 든 서울댁이 부산스럽게 숨을 내쉬며 들어온다. 문을 닫아걸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한 동안 달그닥거리 더니 술상을 보아왔다. "일요일 이래나 뭐래나? 점방문 닫은 집이 많아. 황주값도 오르고 말이야. 빌어먹을 놈들, 불난 걸 기화 삼아 서 저희들 배때기 불릴 생각만 한단 말이야. 술값은 김 주사가 내는 거야." "얼굴 간지럽군. 술값 내랄 때는 김 주사요?" "그것 다 살아오면서 배운 국량 아니던가? 호호홋...? 사내와 계집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내, 오면서 이상한 사람 봤구먼. 기분 좋지 않은데?" "이상한 사람이라니?" 김두수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분명히 나갈 때는 골목에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야. 올 때 보니 한 사내가," "어디? 문 앞에요?" "아아니, 골목을 좀 들어서서, 담 벽에 박쥐처럼 착 붙어 있지 않겠어? 행로병잔가 굶주린 사람인가 했지. 얼 굴이 죽을상이라 뭐하면 집에 데려와서 더운 국물이라도 먹일까 싶어서," 김두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어디 아프냐고 물었더니 잡아먹을 듯 나를 쳐다보는데 소름이 오싹 끼치질 않겠어? 얼굴에 구멍이 뚫릴까 무 섭더군. 내 산길을 가다가 비적놈을 만난다 해도 무서워한 계집은 아닌데 말이야. 그 눈, 꼭 사람 잡아먹을 눈 이더군." 김두수는 자기를 찾아 헤매다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을 깨달은 사내가 본시 자리로 되돌아와 골목을 지키는 거라 생각했다. 사내가 본시 자리로 되돌아와 골목을 지키는 거라 생각했다. '야단났군. 막다른 골목인데, 어디로 빠져나가지? 설마 한들 그놈이 거기서 밤이야 새겠나.'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술 마실 때 딴 생각하면 못써." "서울댁." "왜 그래." "아까 뭐랬소? 비적놈을 만나도 안 무섭다 했던가?" "그랬어." "비적을 만난 일 있소?" "만난 일 있지. 여러 해 전에 천보산 동광에서 술장사를 할 때야. 두도구로 나오는 길에 비적놈을 만나서 돈을 털린 일이 있어." "그놈 비적 눈에는 서울댁이 계집으로 안 보였던 모양이구만." 깔깔대며 웃는다. 그런데 갑자기 김두수가 마시려던 술잔을 상 위에 도로 놓으며 너털웃음을 젖힌다. "좀도둑 만났다는 게 그리 우스워." 건성으로 웃은 자기에 비하여 요란스런 김두수 웃음에 서울댁은 어리둥절한다. "서울댁, 서태포가 어딘지 아오? 가본 일 있소?." "몰라. 가본 일도 없어." "삼십 년 전에도 이곳에 비적들이 있었을까?" "삼십 년 전의 일을 어떻게 알어. 세상에 나왔을까 말까 할 대 일을," "사십 넘은 할망구가 왜 이러지요?" "아아니 내가 임자를 애숭이 취급한다고 이러기야?" "삼십 년 전 도대체 이 고장에 얼마만한 사람이 살았을까."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얼마 전에 어떤 첨지한테 속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삼십 년 전에 약초를 캘려고 서태포에 갔다가 비적을 만나 붙들렸다던가, 어쨌다던가? 삼십 년 전이라면 이 용정도 조그만 촌락이었을 텐데. 사람 벗겨먹고 사는 비 적놈들이... 왕청현 같은 곳이야 무인지경 아니었을까? 그놈의 첨지, 사람을 놀려먹어도 솜씨가 보통은 넘는 모 양이야." 너털웃음에서 시작했는데 중얼중얼 기어들면서 생각에 잠긴다. "서태포고 동태포고 간에 임자, 왜말 썩 잘 잘한다며?" "잘하구말구." "어디서 배웠지? 글도 아나?" "알다마다. 이래봬도 열 여섯에 집 나와서 일본 사람 양자가 될 뻔했지." "그래? 왜놈 될 뻔했구나. 될 뻔했다가 안 됐으니 다행이야. 나도 그만 갈보 될 뻔했다가 안 됐더라면 좋았을 걸." "아니 갈보하고 일본 사람하고 어째서 같소!" 화를 발끈 낸다. "같지. 일부종사 못한 년이 갈보요, 두 나라 섬기는 놈이 역적이니." 사내와 계집은 수작을 늘어놓으며 제법 혀가 꼬부라지는 상태까지 술을 마셨다. "그래애, 내가 어찌 해서 팔자가 이리 됐는고 하니, 신세타령 좀 해야겠어. 나하고 같이 술 처먹는 놈이면 한 번씩은 꼭 들려주는 얘기야. "같이 술 처먹는 놈이라 할 거 뭐 있누. 나하고 잠자리 한 놈이라 하지." "그래 그래, 그것도 빈말은 아냐. 내가 왜 이리 됐는고 하니, 잘 들어. 나이 어린 게 하하핫핫 제법 오입쟁이 같은 수작을 부리는군. 그, 그래 내가 왜 이리 됐는고 하니 그게 다 사내놈 때문이야." "여부가 있나. 사내놈 없어 어찌 갈보질을 하누." "날 우습게 보지 말라고, 이래봐도, 양반 어쩌구저쩌구 하더라만, 나 이래봬도 한 남지 정해서 살 때는 한눈 안 판단 말이야. 괜히 구렝이 같은 생각하며 좋아하질 말라고." "허, 눈먼 새도 안 돌아보겠다. 다 늙은 게," "그래 내 팔자가 어째서 이리 되었는고 하니," 하고 시작한 넋두리에 의할 것 같으면 서울댁은 어느 돈 많은 중인 집의 통지기였다는 것이다. "통지기나 갈보나," 김두수는 듣는 둥 마는 둥 핀잔만 준다. 대개 화류계의 여자들이란 자기 신상 예길 하기 좋아했고 김두수도 흔히 듣는 얘기다. 하여간 찬거리를 사러 장에 다니던 통지기는 장꾼들이 벌이는 투전판에서 구전이나 뜯어먹 고 사는 백수건달하고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 은근히 정을 통해오다가 함께 살기로 언약하고 수원서 서울로 도망을 친 것이 열 여덟 때, 처음에는 사 내도 죽을 둥 살 둥 했으나 계집아이가 훔쳐온 금품이 떨어지자 정 도 식더라는 것이다. 객줏집에 밥값은 밀리고, 결국 계집아이를 객줏집에 남겨놓고 사내는 혼자 달아났는데 처 음에는 돈 마련을 하러 간 줄 알았고, 눈이 진무를 만큼 울기도 했으나 설마 설마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믿었어. 끝까지 믿었단 말이야. 그래 술판에 나앉으라는 객주집 여편네하고 한 달을 꼬박이 싸웠 어. 밥값을 지워놓고 사내가 달아났으니 팔린 몸이라는 게야. 죽으려고 우물에도 뛰어가고 목을 맬려고도 했었 어. 그러나, 모진 게 목숨이더군. 객줏집 여편네한테 매도 많이 맞았고, 많이 맞았지. 그리하여 내 신세가 술집 에서 술집으로 떠돌아다니게 됐는데," "세상에 얼빠진 놈도 다 있군." "뭐?" "그 놈팽이 말이지, 아 그래 밥값만 지워놓고 달아나아?" "오오라, 몸값은 왜 안 받아갔느냐 그 말이겠다?" "그렇지." "어디서 많이 해쳐먹은 솜씬가보군. "아암. 나야 처음 만난 계집애부터. 얼빠진 놈 같으니라구. 아 밥값만 지워놓고 달아나아?" "얼씨구, 이 새끼 봐라?" 흐릿한 눈이 김두수를 쳐다본다. 치맛말은 풀어져서 반허리에 걸려 있고 헤벌어진 입매가 실룩실룩 움직인다. "몇 계집애를 그렇게 해먹었는데 그 중에서 아까운 년이 하나 있더란 말이야. 그래서 큰마음 한 번 먹고 되돌 아갔지. 몸값으로 받은 돈에 밥값까지 보태서 찾으러 갔더니 아 고년 보지? 그새 술판에 나앉아 딴 놈하고 시 시덕거리며 언제 보았느냐?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버리려다 참았지." "야, 이 새끼야!" 서울댁은 팔을 훌쩍 들더니 손가락으로 김두수의 코끝을 찌를 듯이 "야, 이 개보다 못한 새끼야아! 난 너 같은 놈을 보면 물어 죽이고 싶더라! 뭣이 어쩌고 어째? 밥값만 지워 놓 고 도망을 갔느냐구? 얼빠진 놈이라구? 이 천하의 악당놈아! 내 진작부터 네놈이 그렇고 그런 걸 눈치는 챘 어. 이 세기야! 너 우리 유 서방을 뭐 할려고 기다리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이게 술 처먹더니 간덩이가 부풀었나? 왜 이리 지랄이야!" "나는 술을 처먹었으나, 네놈은 똥이나 처먹어라! 개보다도 못한 놈!" "이게 죽고 싶어서 이래? 날 누군 줄 알고? 까불어봐라! 죽인다아!" "오냐 네놈이 누군지 난 안다! 네놈이 밀정놈인 줄 안단 말이다!" "뭐라구? 이 계집?" "밀정놈이 갈보보다 더 더럽다는 것쯤 나도 안다! 양반? 웃기지 말아라, 이 밀정놈아!" "이게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쳇! 목숨 같은 거야 네깟놈한테나 소중한 거지. 누가 주인다면 겁낼 줄 알어? 겁낼 줄 알어!" 서울댁은 삿대질을 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김두수는 완전히 밀리는 기색이다. 이런 여자에게는 위협이나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술에 취해서 하늘이 돈짝만큼 보여 무서운 것을 모르는 상태다. 때려 죽였으 면 제일 시원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 한편 김두수는 나중 일을 생각하는 여유를 가진 사내이긴 했다. 골 목을 지키고 있을 사내가 염두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봐요, 서울댁." "서울댁이고 뭐고 듣기 싫어!" "사람이 왜 그래요? 술 먹은 개라니 내가 참아야겠지만 아 농담도 못하겠소? 무관하니까 서울댁도 주정한 개 고 나도 따라서 약을 올려준 건데 그걸 가지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는구먼." "거짓말 말어!" "허허 이런 딱할 데가 있나. 잠이나 자는 건데 공연히 비싼 술 먹고 내가 욕을 보는군. 서울댁은 날 우습게 보 는지 모르지만 내 그런 사람 아니오. 나를 순 도둑놈 외입쟁이로 보는 모양인데, 뭐 또 뭐래더라? 밀정? 허허 참 기가 막혀서." 김두수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은 물론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내를 염두에 둔 때문이다. 설마 밤까 지 있겠느냐 싶었으나 안 그러리라는 확신도 없는 일이고 보면 서울댁을 구슬러서 써먹어야 할 계제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울댁이 밀정놈이라고 떠들어대는데 말소리가 울 밖에 나가는 것도 곤란했고 밀정놈이라는 생각이 밖의 사내와 연관을 지우게 되고 서울댁이 의심을 품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술김에 무슨 일을 저지르 게 될지 모른다. 아무튼 달래 놓고 보는 것이 우선 현명한 처사인 것이다. "내가 이래봬도 행실이 나쁜 사내는 아니오. 오래 전부터 회령에 정혼한 처녀가 있어서 장가 밑천이나 마련할 려고 볕 바르지 못한 장사는 할망정 내 마음은 일편단심이라. 행로에서 이 여자 저 여자 실없이 사귀는 성미 도 아니란 말이오. 공연히 쓸데없는 객담 몇 마디를 가지고. 아, 술자리서 무슨 말을 못하겠소. 한데 사람을 그 렇게 수모 주는 법이 어디 있소? 응?" 회령에 정혼한 처녀가 있다는 말이 나오면서부터 서울댁을 풀이 죽는다. "흥. 어떤 년은 팔자가 좋아서." 차츰차츰 서울댁의 표정은 달라져간다. 시새움과 선망이 풍랑 만난 배처럼 눈동자 속에서 떠올랐다 가라앉았 다 한다. "흥! 일편단심이라? 행로에서 이 여자 저 여자 실없이 사귀는 성미도 아니라구?" "그렇소. 날 기다리고 있는 처녀는 나한테 과분한 사람이오. 인물도 곱고 마음씨도 곱고 행동거지도 차분한 백 옥같이 깨끗한 처녀요." 곁눈질을 하며 김두수는 서울댁의 심정을 슬금슬금 굴려본다. 아주 쉽게 여자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는 게 재미있었던 것이다. "아이구, 나는 뭐 하고 살았는고? 아이구, 나는 뭘 하고 살았는고?" 숨통이 막히는 듯 주먹으로 제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던 서울댁은 기어코 두 다리를 뻗는다. 애고애고 내 팔 자야 하며 울음을 뽑아낸다. 하기는 이런 일이 없었더라도 술만 마시면 통곡을 하는 것이 서울댁의 버릇이긴 했다. "허허 또 내가 말을 잘못했나? 이거 참, 학을 떼겠구먼." 치마를 걷어 코를 풀고, 다시 애고애고 내 팔자야가 시작된다. '빌어먹을 계집년. 생각 같아서는 이 주먹으로 저 년의 코뼈를 때려 부쉈음 좋겠다마는.' "자, 자 서울댁, 이러지 마시오. 허허, 분 바른 얼굴이 호랭이 가죽 되겠소." 간지럽게 달래는 김두수 목소리에 서울댁도 무안하였던지 "몰라! 몰라!" 반허리로 내려간 치맛자락을 질질 끌며 제 방으로 달아난다. 한 동안 그 쪽에서 어중간한 울음을 잡히더니 곯 아떨어진 모양이다. 김두수는 킬킬 웃다가 술상을 마루에 내 놓고 방문을 닫은 뒤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얼마를 잤는지 눈을 떴을 때 방안은 캄캄했다. "한밤중 아닐까?"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서울댁!" "왜 그러는 거야." 쌀쌀한 목소리가 부엌 쪽에서 들려왔다. "아니 좀 깨워달라 하지 않았소." "안 깨워도 일어났으니 됐잖아. 아직 초저녁이야." "제에기랄!" 김두수는 등잔에 불부터 켜 놓고 이불을 밀어붙인 뒤 행구에서 옷을 꺼낸다. 당코바지(각반 친 것처럼 바짓가 랑이가 홀쭉한, 다소 고급인 작업복)와 나파후쿠(역시 카키색의 작업복)의 윗도리를 꺼내어 서둘며 입고 벗어 둔 한복은 차곡차곡 개켜 손가방 속에 넣는다. 가방은 열쇠로 잠그고 도리우치를 깊숙이 눌러 쓴다. "서울댁." "왜?" "이리, 날 좀 봅시다." 시부뚱해서 서울댁이 나타났다. "자아, 술값하고," 일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내어놓는다. 서울댁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유 서방과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라 훈춘에 살 때부터 - 서울댁이 유 서방과 동서한 지 삼 년이 못 되었다. - 일 년에 두서너 번 다녀갔고 몇 달 전에 용정으로 이사온 뒤, 그러니까 불이 나기 전에 왔다가 달포만에 다시 온 셈인데 그렇게 무고 가면서 김 두수는 동전 한 푼 낸 일이 없었다. 술값이야 내겠거니 싶었으나, 일 원짜리를 다섯 장이나 냉큼 낼 줄이야. "미안하지만 서울댁, 담배 한 곽 사다주소." "그러지." 금세 기분이 좋아서 달려나간 서울댁은 이내 돌아왔다. 담배를 받아 호주머니 속에 밀어 놓은 김두수는 물었 다. "낮의 행로병잔가 뭔가 하던 사람이 여태도 거기 있습디까?" "왜 묻지?" "송장이 되지나 않았나 싶어서." "어디 갔는지 없어." 김두수는 "그럼 유 서방은 못 만나고 가우." "아주 떠나는 게야? 밤인데?" "들를 곳이 있어서요. 사람 좀 만나고 하자면 아무래도 그 댁에서 자야겠어. 그럼 서울댁, 잘 있소. 유 서방한 테 내 못 만나고 갔다 전하시오." "그야," 김두수는 어두운 골목을 나선다. 도리우치의 챙을 얼굴 쪽으로 깊숙이 기울이며 큰길에 나왔어도 낮의 그 사 내 비슷한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설혹 어디서서 살피고 있었다 하더라도 차림새를 바꾸어버린 김두수를 알아보기는 어려웠으리라. 일본 영사관 근처에까지 간 김두수는 영사관 뒤편에 달라붙은 관사로 들어간다. 현관 앞에서 "고멘구다사이(실례합니다)." "하아이-(네에-)" 길게 늘어뜨린 고운 여자 목소리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일본 여인이 나온다. "아라! 긴쌍나노?(어머! 김씨예요?)" "곤방와(안녕하십니까)?" 김두수는 꾸벅 절을 하고 주인은 아직 안 돌아왔느냐고 묻는다. 곧 올 테니까 기다리라 하며 여자는 도코노마 (객실)로 안내해준다. 그리고 이내 차를 끓여 내왔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친숙해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 9장 신축 공사 쌓아올려 놓은 재목이 좁다랗게 만들어준 그늘 밑에 멍석을 깔아놓고 새침이 송애가 점심을 날라오자 목수, 일꾼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둘어앉는다. 용이와 길상이도 함께 와서 멍석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는다. 그 동 안 길상은 물자 구입을 위해 회령과 국자가를 수시로 내왕하면서 동시에 세 군데다 벌여놓은 공사를 돌보랴 그밖에도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므로 일꾼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는 일이라곤 거의 없었다.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길상이 합석한 때문인지 모두들 어딘지 불안전한 조심성과 서투른 몸짓들을 하며 밥을 먹기 시작한다. 얼굴이 두리넙적하고 가슴팍이 판때기처럼 탄탄해 보이는 홍 서방이 길상과 마주앉은 박 서방을 힐끔힐끔 쳐 다본다. '고양이 앞의 쥐도 아니겠고 박가 저놈의 자식 밥숟가락이 콧구멍으로 들어갈라. 아아니 목수가 또 왜 저 모 양이야? 멍석에 바늘이라고 꽂혔단 말가. 민적거리는 꼴이라니.' 마음속으로 중얼중얼 중얼거리는 홍 서방 역시 주눅이 든 것처럼 평소의 걸찍한 그 농담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절은 치들도 마찬가지, 말이 없다. 하여간 분위기가 묘하다. 모두 어려운 자리에 초대받아 온 손 님처럼 어색하다. 길상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없이 밥을 먹고 있었으나 묘한 분위기를 충 분히 의식하고 있는 눈치다. 사흘 전에 불상사가 있긴 있었다. 길상이 또래의 일꾼 막둥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별안간 얼굴빛이 달라진 길상이 면상을 쳐서 막둥이가 코피를 쏟은 일이 있었다. 그 일 때문에 목수 나 일꾼들의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흥, 종이 종을 부리면 식칼로 형문 친대더라." 하고 빈정거리는 치들도 있었다. 때리지 않아도 될 텐데 왜 저러나 하고 용이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일 때문 에 어색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길상이 끼어든 점심 자리는 분위기가 묘해질 것이 뻔하 다. 전부터 일꾼들은 길상을 대할 때 뭔지 모르게 사이를 터놓지 못한 불편을 느껴온 터이다. 불신감하고는 다 른 것이지만 나잇살 먹은 일꾼들도 길상에게 친근한 반말을 쓰다가는 갑자기 당황하며 존댓말을 썼고 존댓말 을 쓰다가는 어색하여 반말로 돌아가는, 갈팡질팡하게 되는 이상한 심리적 혼란에 빠지는데, 위엄이랄까 고고 해 뵌다 할까 천성으로 타고난 인품과 그것과는 상반되는 신분의 인식이 사람들 마음의 균형을 일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존경심과 친근미의 혼란, 동시에 선망과 시새움의 혼란이었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침나절만 해도 자갈을 나르면서 일꾼들은 길상을 화제에 올렸는데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은 신전을 하다가 태워버리고 날품을 팔게 된 박 서방이었다. "어쩐지 냉바람이 훵하니 도는 것 같아서 말이야. 영 만만하지가 않어. 젊은 사람이 왜 그런지 모르겠어." 상투가 헝클어지고 볼품없는 얼굴이지만 박 서방의 길게 찢어진 눈꼬리는 장인 특유의 민감한 것을 느끼게 한 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그의 말상대는 엿도가를 하다가 박 서방 꼴이 된 홍 서방이었다. 그들은 사십 가까운 장년들, 품팔이로 살아온 다른 일꾼들과는 다르게 독립된 생업에 종사해왔었다는 자부심을 은근히 풍기며 죽이 맞아서 곧잘 지껄이곤 했다. "길상이 그 사람 말일세." "갖바치 주제에, 뭐 어째? 만만치가 않다구? 천상의 선관을 감히 갖바치놈, 흥." 비꼰다. "갖바치나 뭐나 처지야 피장파장 다를 게 없고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네." "처지는 피자파장이라. 그렇지 족보는 따질 것 없다, 제에기랄! 상놈 천민한테 족보가 있어야 말이지. 하야간에 사람이란 오늘 이 때가 중요한 게야." "아, 누가 오늘을 얘기하는 겐가." "아무리 그래 봐야 피장파장 될 수 없는 걸 어쩌누. 꼭 같이 길을 떠나도 십 리밖에 못 온 놈이 있고, 백 리, 천 리를 간 놈이 있다면 그래도 피장파장인가? 만만하지가 않다? 아암, 말해 뭣 하누. 꿈도 못 꿀 일이지, 꿈 도." 홍 서방은 일부러 동 가자는데 서 가는 식의 말재간을 즐긴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자네 십 원짜리 구경했나?" "...?" "십 원이 열 자이면 백 원이라, 백 원이 열이면 천 원, 만 원, 엽전으로 치면... 하하아 꿈이라도 한번 꾸어봤으 면 좋겠어." "무슨 뚱딴지야?" "게다가 천하절색 양귀비 같은 처녀도 따라올 게고, 애키! 감히, 갖바치 천둥이가 어떻게 만만하게 군다는 게 야?" 겨우 홍 서방의 말뜻을 알아차림 박 서방은 펄쩍 뛴다. "모르는 소리이, 재물이야 어찌 되었건 신분이 천양기산인데 말도 안 될 일이지." "안 될 것도 없지. 식자 들었겠다, 똑똑하고 인물 좋고... 소문도 파다하던걸?" "소문? 무슨 소문." "용정에서 그 사람을 탐내는 집도 수월찮지." "그야 내가 알기로도." "간도 땅에 와서 돈냥이나 벌어 내노라 하는 사람들, 그런 혼처도 두 군데나 있었다는데 그 사람 상전이 운을 안 뗀다는 게야." "..." "그러니 총각을 늙히는 것은 다 그 지체 높다는 처녀의 생각이 달라 그렇다는 게지." "미친 소리." "막둥이가 왜 얻어맞은지 아나? 그 얘기를 했다가 맞은 거래." "그야 터무니없는 말이니까 때릴 만도 하지." "글쎄 나는 그 이상은 모른다네." 그것으로 일단 말은 끊어졌는가 싶었는데 강회를 버무리면서 미진했던 박 서방은 또 시작했다. "잘나고 똑똑한 걸 뉘 모르나? 점잖고 분명하고 보통 사람은 아니지. 근본이야 어떻든 그만하면 대접받을 만 도 하고, 한데 이상한 일이라. 자네 말마따나 함께 길을 떠나서 십 리 가는 놈 있고 백 리, 천 리 가는 놈 있 는데 나 같은 인생이야 보나마나 십 리 패거리고 나면서부터 자파한 처지라. 옥하고 석돌로나 비할까? 설사 자네 말대로 된다 해도 분복 아니겠나? 그런데 난 그 얘기가 아니야. 공연스리 그 사람 앞에 가기만 하면 어 쩌는 것도 아닌데 사람을 확 떠밀어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참말이지 어쩌지도 않는데, 그러면 무 안당한 것처럼 화가 부룩부룩 나고." "공장한 소릴 하는군." "내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봤거든." "흐응?" "바로 얼굴이었어." "...?" "뭐랄까? 그 얼굴이라는 게, 그, 그게 제 얼굴이 아니더란 그 말이야. 웃어도 그렇고 화를 내도 그렇고, 그건 제 얼굴이 아니더란 말이야. 어디 남 모를 곳에다가 제 육신을 감추어두고," "그럼 사람이 아니고 그림자야? 귀신이란 그 말이야? 온 세상에 별 해괴한 말을 다 듣겠군." "아아니 그림자라는 것도 아니고 귀신이라는 것도 아닌데, 이것을 어떻게 얘길 해야 하나. 옳지, 이야기를 까 꾸로 해야겠군. 어디 남 모르는 곳에다가 제 마음을 놔두고 왔을 거라. 어때? 그렇게 말하니 알아들을 만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는 게야?" 강회를 이겨대며 지껄이는 말은 용이도 들었다. '무슨 말을 하노? 뭐라꼬?' 왠지 가슴이 철썩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웃어도 그렇고 화를 내도 그렇고, 그건 제 얼굴이 아니란 말이야. 어 디 남 모를 곳에다가 제 육신을 두고, 옳지 이야기를 까꾸로 해야겠군. 어디 남 모를 곳에다가 제 마음을 놔두 고 왔을 거라. 박 서방의 말이 모호하면서도 차츰 뭔지 모르게 알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간도에 온 후 길상이 변했다는 것과 박 서방의 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가슴이 철썩 내려앉는 기분이 되는 것은... 어쩌면 용이 의식 밑바닥에 자기도 모르게 깔려 있던 길상에 대한 느낌과 박 서방의 말이 맞아떨어진 데서 온 충격이나 아 니었던지, 자신도 모르게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던 느낌은 아주 옛날 길상이 소년일 때부터 지니게 된 것이 나 아니었던지. 용이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중 팔자라는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육신이든 혹은 마음이든 길상은 그가 자란 절에다가 그 어느 것 하나를 놔두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단정한 모습으로 밥을 먹고 있는 길상을 용이는 불안하게 살핀다. 박 서방의 말이 생각났지 때문은 아니다. 지 금의 용이는 박 서방이나 그 밖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이유 때문에 길상과 대하고 있는 게 마음에 편칠 않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거복이놈이 장차 무신 해악이라도 끼친다믄... 길상이한테 거복이놈 만낸 얘기 해두는 기이 좋지 않을까?' 요즘 용이는 거복이를 만났다는 것이 하나의 부담거리였다. '머, 길손겉이 지나가부렸는데, 그놈아 말로도 지나는 길이라 했고 머가 그리 대수러운 일이라고...' 하동에 있을 때 마을로 돌아온 한복이를 모두 자연스럽게 대해 오던 일을 생각하면 거복이를 만났다 해서 그 게 그리 대수로운 일일 수는 없다. 길상에게 지나는 마로 우연히 만났노라 해도 좋고 만난 일이 있었지 하고 혼자 생각하다 잊어버려도 무방한 일이다. 그러나 용이 놓인 자리는 다소 복잡했고 심리 상태는 좀더 복잡했 다. 첫째로 용이가 만나 거복(김두수)의 인상은 시일이 지날수록 무섬증을 안겨준다. 김평산을 만난 것 같은 착각인데 세상 사람들에게 보복을 맹세하기라도 한 것 같은 독기 품은 눈꼬리, 원한에 가득 찼던 울음, 뱃바닥 으로 당을 밀고 가는 것 같은 찐득한 목소리는 꿈자리까지 어지럽게 한다. '애비 죄도 태산 겉은데, 이쪽에서 원수를 삼았으믄 삼았지 저쪽서 원수 삼을 아무 티끌이도 없는 거 아니가.' 사리는 어찌 되었든 불행은 사리를 따져가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오래되었고 숨가쁘게 닥쳐든 변동 의 연속으로 낡은 기억이 되어버린 최치수 살해 사건이 용이 마음속에 뚜렷이 되살아나는 것도 결코 기분 좋 은 일은 아니었고, 기분이 나쁘다뿐이겠는가, 서방님만 그리 되시지 않았더라면... 죽은 자식 고추 만지는 것 같은 한탄도 고개를 들고 일어선다. 하기는 최치수가 살해되지 않았더라면 서희를 위시하여 일행은 간도 땅을 밟지 않았을 것이요, 이들의 갈 길은 좋든 나쁘든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다. 용이는 임이네와 맺어지지도 않았 을 것이다. 아무튼 한 배를 타고 풍랑을 같이 겪은 간도의 일행에게 근심을 감추고 있는 용이는 어쩔 수 없이 의리를 저버리는 것 같은 심정이다. '그놈아아가 지 동생하고는 달라서, 어릴 적부터 사람 안 될 기라고 마을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는데 어디서 무 신 짓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겄네? 김평산이 그자를 눈앞에 보는 것겉이, 애비를 빼썼더마. 그렇지마 는... 이곳까지 와서 해악을 끼칠 까닭이야 없지. 또 지 말로도 나를 만낸 것을 한으로 한다 했이니 저쪽에서 피하고 싶은 심정이고 보믄 다시 머 할라꼬 나타나겄노.' 기어이 외면하려 드는 마음, 용이는 혼자 화를 낸다. 어쩌란 말인가. 제에기! 다 뿌리치고 달아날까? 눈밭을 달려가는 늑대맨치로 달아날까? 꽁꽁 묶어놓은 이놈의 줄을 끊어부리고 - 그러나 가슴에 젖어드는 것은 연민 의 눈물일 뿐이다. 살인 공범자 칠성의 아낙, 마을에서 개처럼 쫓겨났던 여자, 아이 셋을 앞세우고 한 끼의 끼 니를 위해 매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여자는 지금 홍이 어미로서 용이 아낙으로서 이곳에까지 왔다. 증오했고 한 마리의 뱀으로 치부하며 저주했고 죽어지라고 구타했으며 인연을 원망했던 그 여자에 대한 한 가 닥의 아픔은 용이 인생에 있어 어떤 뜻을 갖는 것일까.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 험악한 전력에서 여자를 숨 겨주고 싶은 거의 본능인 그 충동적 아픔은 도대체 어떤 형태의 애정이란 말일까? 일행 중 어느 누구도 그를 위해주고 따스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과거사를 드러내어 여자를 천대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싸웠으면서도 용이는 여자의 과거만은 절대로 건드린 일이 없다. 당초부터 그들의 관계 도 그런 것에서 시작되었다. 도대체 어떤 형태의 애정일까. 용이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간도로 떠나오면서부 터 일행에게 있어서 임이네는 불물의 존재였다. 그리고 은근히 서희와의 접근을 막는 데 신경을 써온 존재이 기도 했다. 그 불문의 존재가 거복이로 인하여 풀쑥 떠오른다는 것, 떠올라 일행의 마음을 산란스럽게 하는 일 이 두려웠고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죄책감도 되살려져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가만히 그 일을 덮어두고 싶은 연민의 정이 더 짙게 마음을 지배한다. '빌어먹을! 고만 내가 못 본 척하고 지내부리는 건데.' 점심이 끝나자마자 길상은 얼른 일어섰다. 얼굴을 찌푸리듯, 하다가 목수를 한 번 쳐다보고 공사장에서 떠나버 렸다. 그가 떠나자 일꾼들은 그늘에 드러눕기도 하고 한켠에서는 젊은 치들이 시시덕거리며 장난질이었고 목 수는 쌈지 속의 담배를 골통에 담는다. "불난 덕분에, 집은 사라올렸다만 또 그 덕분에 밥 빌어먹게도 되고, 무슨 놈의 조환지 온..." 홍 서방이 말을 시작했다. "가슬 바램이 불믄 집일도 긑장나잲겠음? 큰일입꼬망." 비스듬히 용이 곁에 드러누운 뜨내기 일꾼 말이었다. "메뚜기 신세지." 박 서방이 내뱉는다. "어디로 간다 하더라도 찬바람이 불기 전에 움직여봐야겠는데," "가긴 어딜 가아?" "그럼 용정 바닥에서 얼어죽으란 말이야!" "어디매 가기르 작정으 한 곳이라도 있습매까?" 뜨내기 일꾼이 묻는다. "이 사람이, 갈 만한 곳이 있으면 여기 이러고 있겠나?" "용정 바닥에서 얼어죽을 수밖에 없겠군." "흥, 박가야, 찬바람 불거든 자네 먼저 떠나게. 먼저 가서 언 손 호호 불며 염라대왕 따님 꽃신이나 지으면서 날 기다리게. 그러면 내 볼일 다아 보아놓고 가지. 가서 따끈따끈한 엿 한 솥 고아 자네 언 손을 녹여줄 것이 니." 왁자지껄 웃는다. "제기랄! 저승 가서도 갖바치, 엿장수야? 한심스럽다, 한심스러워. 저승 가면 재상이나 한 번 지내볼까 생각하 는 차에 그 무슨 부질없는 말씀인고?" 양반 흉내에 웃음이 또 이어진다. "갖바치 재상 되면 엿장수는 산감 노릇이나 해야겠구나. 여봐라! 나인, 게 아무도 없느냐? 허허헛..." "애키! 이 사람들. 역모 죄인을 잡아갈 형방나졸도 없어졌으니, 좋은 세상이다." 목수가 나무라듯 농하듯 한마디. "좋은 세상이구말구, 아암, 거지가 상팔자라. 집 없는 백성 나라 있어 뭣 하라. 천하가 내 집인데 간다고 잡을 손가, 얼시구절시구다!" 홍 서방이 앉아서 어깨춤이다. "그러나저러나 연해주에 가서 마우제들 고깃배나 타볼까?" 이야기는 앞으로 어쩌겠느냐는 것으로 계속된다. 광산으로 찾아가자는 둥 조선으로 되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둥 농사짓는 게 어떻겠느냐 별의별 의견들이 나온다. 그러나 누구 하나 무엇을 하겠으며 어디로 가겠다고 작 정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하기는 날이면 날마다 엇비슷한 얘기를 해오는 터이지만 작정은커녕 심각하게 의논하 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근심하는 얼굴들도 아닌 성싶다. 어떻게 될 대로 되겠지. 언제는 뭐 이보다 나은 날이 있 었는가. 우선은 품팔이라도 해서 목줄은 이어가고 있으니, 살아온 길도 그러하거니와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알 수는 없으나 무슨 뾰족한 희망이 있다고 계획을 세우고 미리부터 근심할 것인가. 노상 하루살이, 지금은 초 여름인데 찬바람 불 가을 걱정이 다 뭐냐. 막일꾼이 아닌 박 서방이나 혼 서방의 경우도 독립된 생업이다 뿐 이지 겨우 그날그날 보내는 하루살이 인생인 데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마적단에나 끼여들지 뭐." "음, 마적 두목 발이나 씻어주게?" "그런 소리 말라구, 내 이래봬도 총 쏠 줄 안다 말이야. 젊었을 한 시절 마패 찬 관찰사가 간도에 왔을 때 사 포대로 들어가서 배운 총질 솜씨를 몰라 하는 소리야?" 반은 졸고 반은 얘기소리를 들으며 목재 더미에 등을 기대고 앉은 용이는 소피를 보려고 몸을 일으켰다. 이쪽 을 향해 걸어오는 작달만한 늙은이, 공 노인이다. 용이는 허둥지둥 일자리를 질러 뒤켠으로 난 길로 빠져나간 다. 으슥한 구석에서 소피를 보고 난 용이는 "흥, 길상이만 변했나? 나도 변했지." 일터로 돌아가지 않고 반대편을 향해 사뭇 걸어올라간다. 불타 버린 빈터가 널빗하게 연이어져 있는 곳에 우 뚝 솟아오른 기와집 두 동, 아직 담장을 쌓지 않아 빈터를 지나서 마당으로 들어선 용이는 "응칠이는 어디 갔소?" 숫돌에 대팻날을 갈고 있던 정 목수가 돌아본다. "객줏집에 갔슴둥." 큼지막하게 칸수를 잡은 두 동의 기와집은 문짝이 하나도 없어 훵둥그래했다. 마루도 아직 깔지 않았고 구들 도 놓지 않았지만 가게 공사에 비하면 거반 완공을 본 셈이다. "점심으 잡쉤습매까?" 정 목수가 물었다. "예, 응칠이는 점심 먹으로 갔소?" "앙입매다. 점심으 여기서 같이 먹고 볼일 보러," 일손을 멈추지 않고 대꾸한다. 용이는 땅바닥에 주질러앉으며 못이 박힌 손바닥을 맞대고 비빈다. "해도 엄 치 질어지고 햇볕도 제법 따끈하구마요." "해는 질어지잉 일 시키느 사람으 좋겠소꼬망. 일꾼들이 골 빠지게 생깄잲는가?" 숫돌에 날이 갈리는 소리가 서걱서걱 들려온다. "담배나 한 대 태우고 하소." 용이는 담배 쌈지를 꺼내며 말했다. 정 목수는 대팻날을 눈앞에 가져가 갈린 상태를 살핀다. "그쪽 일은 어떻게 됐습매까?" "게우 초방이 끝났는데 기와는 언제 올라갈란지, 대목 한 사람으로는 아무래도 더딜 성싶구마요. 거기보다 이 쪽 일이 더 바쁘기야 하지만." "이쪽으 일도 바쁘지마내두, 내레 더 바쁘오. 하던 일으 내팡가채 놓구 갈 수도 없엉이. 식구들으 내레 죽은 줄루 알잲을까 모릅시." 정 서방은 대팻날을 물에 헹구어놓고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아 담배를 넣는다. 두 사내의 얼굴이 모두 새까 만 검둥이다. "실은 나도 맴이 바쁘요." "이 서방이 무시기 그리," "언제꺼지 여기 이러고 있일 수는 없는 일이고 나도 내 살길 찾아가야 한 하겄소." "앙이, 내 듣기로 가게 지으믄 국밥집으 다시, 그라믄 장시는 앙이 하겠음?" "장사요? 어림도 없는 소리요." "공째루 가게 중다아덩이?" "그러는 나하고 상관이 없소." "그렁이 어디매 작정으 된 곳이 있습매까?" "농살 지어볼 생각이지마는 그것도 가봐야 알 일이고," "..." "정 목수는 안 댕기본 데가 없다 카이 어디 입치레할 만한 곳은 없겄소?" "으음... 그 입치레라는 기 어렵지비. 이 서방 심이 좋은가 모르겠소꼬망." "아직이야, 일로 이골이 났으니께요." "그래두 만만챌겠내." "장사만 아니믄 못할 것 없일 성싶소." "벌목꾼 말이." "벌목꾼? 나무 베는 일꾼 말이요?" "옛꼬망. 내레 한창 시절 그 일으 많이 했소꼬망." "그러믄 목숫일은 언제부터 했기요." "목숫일은 겨울에는 쉬니, 그렁이까 겨울 한철 산판에 들어가능기요. 욕심, 그거 다아 허욕이랑이." 정 목수는 피식 웃는다. "목숫일이 없는 겨울에는 산으로 갔다 그 말이요?" "옛꼬망. 그래도 부재 앙이 됐으이." 하고 정 목수는 또 피식 웃다가 곰방대를 털고 일어섰다. 갈아놓은 대팻날을 대패에 끼우고 이리저리 망치질 을 해서 날의 위치를 고른 뒤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더니 송판을 밀기 시작한다. 대팻밥이 밀대 아래로 떨어 진다. "이서방." "야." "정 할 일 없으믄 그 일으 해보오다. 내 그 방면의 일이라믄 인심 좋은 목파한테 붙여주겠음." "생각해봅시다." "내레 그 일 땜에 망한 사램이지마내두... 일도 기막히게 심이들지마내두 일 년 내내 하느 거 앙이니 구시월 동짓달 해서 서너달로 끝나는 일잉이 여름 한철으 농새 지어놓고 할 수 있는 벌이잉 심만 좋으믄 할 만합지." 정 목수는 망치를 들고 대팻날을 다시 고른다. "그 일 땜에 망하다니 무신 말이요?" "예기를 하재믄... 세월이 약이라등가? 인간이 미렌한 겐가 모릅지. 사램이 사는 데 너무 서두느응 거 앙입매. 다아 지나간 일이랑이." 정 목수는 혼자 중얼거리듯 하다가 얘기를 꺼내었다. 십 년 전의 일이라는 것이다. 본시 정 목수 내외는 종성 에 있었는데 남부럽잖게 한번 살아보겠다고 일곱 살 난 큰아이를 형네 집에 맡겨놓고 젖먹이 하나를 데리고 내외는 간도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철을 목숫일을 하고 겨울철에는 산에 벌목꾼으로 들어갔고, 그 리하여 사오 년을 지내다 보니 수월찮이 돈이 모이더라는 것이다. 돈이 모이게 되니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도 아까울 지경으로 사람이 구두쇠로 변하고 돈을 보는 일이라면 몸뚱아리가 찢어지든 말든, 그리하여 해마다 고 행으로 돌아가는 것을 미루면서 꿈을 키워 갔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에도 산으로 들어갔는데 시월 초에서 섣 달 그믐께까지 고된 일을 치르고 그믐날 집이라고 찾아오니 그의 눈앞에는 집터만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눈 이 뒤집힌 정 목수는 잿더미를 뒤졌으나 아내와 자식의 시체는 없었고 마을로 달려가서 수소문했으나 처자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는 것이다. 다소 외딴 곳이기는 했으나 아니 먼 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사람 이 어찌 되었는지 까맣게 모르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고 한다는 말이 불난 것도 아침이 되어 알았다, 마적이 와서 불지르고 댁네를 데리가지 않았겠느냐, 더러는 남자를 따라 도망가면서 집에 불을 지른 게 아니냐 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찌 되었소." "더 말해 무실 하겠습광이? 미친 듯이 두 해르 찾아 헤맸단 말이, 허사였습매. 마적이 데리고 갔는지, 샛서방 따라갔는지 흔적이 없었지비." "..." "그러덩이 어느 날 아침에 깨달아지더라 말입꼬망. 잊어부리자. 아무리 해도 소앵이 없는 일 앙이겠능가. 사램 이란 서두는 게 앙이요. 목수가 대패질하듯 설설 살아야지비." "그라믄 기다리고 있다는 식구는?" "새장가 들었지비. 아아새끼가 셋이라잉. 회령에다 두었습매." 그런 말을 하는 정 목수 얼굴은 담담했고 어두운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말대로 대패질하듯 세상을 천천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말을 들려준 후 정 목수와 용이는 친숙해졌다. 용이는 밤이 면 술병을 들고 새집 헛간에 거적을 깔아 등잔불을 켜 놓고 거적 위에 마주앉아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 를 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아부지이! 아부지!" 숨이 넘어갈 듯 홍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멋꼬?" 문짝 대신 늘어뜨려놓은 거적을 들고 용이 고개를 내밀었다. "영팔이아제가 오싰소오!" "머 영팔이아제가 와!" 용이는 거적을 밀어젖히고 마당으로 뒤어나간다. "용아." 어둠 속에서 목쉰 듯한 영팔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 우쩐 일고, 이 농사철에." "불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용이 눈시울이 화끈하며 뜨거워진다. "드, 들어가자. 목수 양반이 기시지마는," 영팔이 등을 민다. 10장 정호의 질문 "여러분, 여기가 어디지요?" 칠판에 그려놓은 것은 조선과 만주의 지도였다. 송 선생은 요동반도 서북쪽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놓고 물었 다. "안시이성입니다." 앉은키가 고르지 못하여 들숭날숭해 보이는 생도들 좌석에서는 일제히 입이 벌려졌고 굵고 가녀린 목소리가 혼합하여 울려퍼졌다. "네, 그렇습니다." 송 선생의 백묵 든 손은 아래로 내려와서 요동반도 끄트머리쯤 동그라미 하나를 더 그려넣는다. "안시성에서 훨씬 내려온 이곳이 지금의 대련입니다. 그리고 올라간 여기가 요동성이며 한참을 더 올라가서 지금의 장춘이지요. 부여성은 장춘 후방에 있고 지금의 하얼빈은 여기." 대련, 요동성, 장춘, 할 때마다 만주 지도 속에는 동그라미 하나씩 늘어난다. "그러면 다음 이쪽을 보십시오. 우리 조선 땅과 아라사, 그리고 청국, 이 세 나라의 국경이 모여 있는 이곳은 연해주로 넘어가는 길목인데 여기 훈춘 방면에서 보기로 합시다. 훈춘에서 북쪽으로 사뭇 올라가면 송화강," 송 선생은 강줄기를 죽 그어나갔다. 역사를 가르치는지, 지리를 가르치는지 어쩌면 그 두 가지를 다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훈춘에서 송화강까지 그 사이의 거리는 족히 이천 리는 될 것입니다. 우리 조선 땅의 길이를 삼천 리라 하는 데 여러분들도 지도상으로 대개는 짐작이 될 줄 압니다. 자아 그러면 그 당시의 국경선을 그어봅시다. 안시성과 요동성 밖에 있는 요하를 따라 백묵이 힘찬 줄을 그어나간다. 부여성 외곽으로 해서 하얼빈까지 왔 을 때 백묵이 부러졌다. 나머지 짧아진 백묵이 송화강을 따라 시베리아로 쭉 빠져나간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압록강 두만강 밖에 있는 이 땅덩어리의 크기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잃어버린 강토, 조선의 땅덩어리만하다고 여러분은 생각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의 강토 조선, 조선의 땅덩어리만한 것이, 어쩌면 더 클지도 모르는 땅덩어리가 압록강 두만강 너머에 또 하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예! 알겠습니다아!" "이 넓은 땅덩어리가 고구려 적에는 우리 영토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예! 선생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간도 땅에서도 천 리 밖 이천 리 밖에까지 우리 당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 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은 먼젓번 시간에 이미 얘기하였거니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던 수양제가 어 떻게 하여 참패를 당하고 도망을 쳤는가, 용군여신이라는 당태종은 안시성에서 어떻게 참패를 당하고 회군하 였는가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예!" "양만춘 태수한테 쫓겨갔습니다!" "당태종은 양만춘 태수 용맹에 감복하여 비단 백 필을 주었습니다." "아닙니다! 먼저 양만춘 태수가 성 위에 올라가서 송별의 예를 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의지국이니까 요." 송 선생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용맹스럽고 슬기로웠던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이곳 넓은 만주 벌판에 말발굽을 굴리며 대국과 능히 그 힘 을 겨루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그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그렇게 세 동강으로 갈라져서 힘을 합치지 못하고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그 결과 요동 일대의 넓은 영토를 잃게 된 것입니다. 신라가 당 나라의 힘을 빌 려 백제를 치고 다음 고구려를 거꾸러뜨리고 삼국을 통일하기는 했으나, 그리고 자랑스럽고 찬란한 문화를 이 룩하기는 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 크게 잃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넓은 우리 영토가 떨어져나갔 을 분만 아니라 많은 백성을 잃은 비극을 낳은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당나라는 신라까지 먹으려 했었고 당나 라에 의해 주권도 많이 침해당했던 것입니다. 여하간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처참한 일 입니다. 그러나 더욱 처참한 것은 동족이 상쟁하여 나라가 망하는 일이며 그보다 더 처참한 것은 오늘날과 같 이 제 민족이 제 나라를 팔아먹는 그것입니다. 이야기는 다시 돌아가서, 그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오늘날의 우 리들처럼 다시 제 나라를 찾기 위해 처절한 항쟁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한편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인들은 신라와 함께 당나라와 싸우려고 했었고 혹은 일부의 고구려인들은 말갈과 합세하여 당을 치려고도 했 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이루어지질 못했으며 실지는 끝내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어부지리라는 말을 아십니까? 물세와 조개가 하나는 먹으려 하고 하나는 먹히지 않으려고 서로 안간힘을 쓰며 싸울 때 지나가던 어부는 힘들이지 않고 그들을 잡아갔습니다. 서로 싸우다가 남에게 먹힌 비유였는데,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먹으려 했고 먹히지 않으려는 치열한 싸움으로 망했다는 점을 여러분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국가가 망한 교훈일 뿐만 아니라 적게는 우리 개개인에게도 필요로 하는 교훈인 것입니다." 일단 말을 끊고 가볍게 숨을 쉰 송 선생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리하여 그 당시 신라와 협조한 고구려인들은 그런대로 신라에 동화되어 한민족으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만 말갈과 합류한 고구려인들은 발해국을 세웠으니 세월과 더불어 우리 많은 동족들은 이민족이 되어버렸지요. 생각해보십시오. 한 피를 나눈 내 겨레가 말도 풍습도 다른 남의 백성이 되어 제 조상을 잃은 사실을.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청인들 속에 잃은 우리 형제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슬픈 일이지요? 지금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 간도도 아 득한 옛날에는 우리 땅이었었고 근자에 와서도 우리 부모들이 피땀 흘리며 이 땅을 일구었건만 이미 이곳은, 우리 땅이 아닌 이 고장에서 청국 사람들로부터 가지가지 헤일 수 없이 받은 핍박의 역사도 여러분들은 잘 기 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변발을 하고 다브잔스를 입고 청국인으로 귀화하기만 하면 피딴 흘려 일군 땅을 내 땅 으로 할 수도 있으련만,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은 변발도 아니 헸고 다브잔스도 아니 입었고 귀화도 하지 않았 습니다. 왜? 그것은 어떤 핍박, 어떤 설움보다 조선인이 아니라는 설움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조선글을 쓰고,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 조선말로써 여러분에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청국인이 아니요 아라사인이 아니요 왜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나라를 잃 었습니다! 일찍이 이 넓은 만주 벌판의 주인이었던 우리 조상! 이조 오백 년 동안 임진왜란을 겪고 병자호란 을 겪었습니다마는 오늘과 같이 이렇게 송두리째 나라와 주권을 잃은 일은 없었습니다. 반만 년 역사에서 이 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조상에게 면목이 없는 부끄러운 후손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저 슬픈 고구려인들, 말갈족에 동화되어 조상을 잃은 내 겨레의 운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영토의 일부를, 우리 겨레를 잃었으되, 그러나 신라에서 고려로 이조 오백 년을 우리 단일 민족은 면면히 이어왔었습니다. 그 러나 오늘날, 우리는 나라를 송두리째, 백성들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빼앗기고야 말았습니다. 그 옛날의 슬픈 고구려인들처럼 우리도 일본에게 동화되고 만다면 영원히 영원히 우리의 민족과 국가는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 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저 슬픈 고구려인들을 기억하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국토와 주권을 빼앗은 왜놈들 은 다음 우리의 문화를 빼앗고 우리 민족의 얼을 뺏을 것입니다. 우리 조선 사람이 왜인들 옷을 입고 왜나막 신을 신고 왜말을 지껄이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은 친일파놈들이 그런 꼴을 하고 거들먹거립니다만 후일 우리 모두가 그리 되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우리는 어떻게 해 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편지를 쓰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셈을 하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싸우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입니다. 알아야만 싸울 수 있습니다. 알아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 분!" 말을 끊은 송 선생은 발끝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 교실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조용하다. 초롱초 롱한 수십 개의 눈동자가 송 선생의 수그린 이마를 쏘아보고 있었다. 딸랑! 딸랑! 손종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 다. "그러면 종이 났으니 오늘은 이만하겠습니다." 송 선생은 교탁 위에 펴놓은 책을 들려다 말고 "한데, 한 가지 말해두어야 할 게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뒷간에다 낙서를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어색한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그리고 생도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이후부터는 절대로 그런 야비한 짓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완용을 위시하여 오적놈들을 미워하고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는 마음이야 갸륵합니다마는 여러분은 공부하는 생도들로서 몸과 마음을 닦고 지식을 익혀 장차 우리의 원수들과 정정당당하게 싸워나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내장부가 뒷간에 오적놈 이름이나 갈겨놓고 보 복을 한 것 같은 기분을 맛본대서야 그 따위로 졸장부가 되어 쓰겠습니까?"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하는 말에 생도들은 무안쩍은 듯 헤헤헷 하고 웃는다. 마지막 역사 시간이었다. 송 선생이 교실 밖으로 나가버리자 교실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덩치들이 크고 열다섯에서 일일고여덟 난 나이배기 생도들은 어느 새 교탁 가까운 곳에 둥근 울타리를 치고 서서 일본과 매국노에 대해 성급한 성토를 벌이고 있었고 열 살부터 열다섯 이하의 꼬마들은 연장자들 울타리 사이를 비집고 얼굴을 디밀며 성토를 경청 하는가 하면 더러는 끼리끼리 소곤거리고 말다툼하고 집에 돌아갈 차비를 차리기도 하고. 소학부 삼 학년 반 의 교실이다. 사 학년이 졸업반이지만 학교가 설립된 지 삼 년이었으므로 삼 학년이 최고 학년인 셈인데 열 살짜리 홍이로부터 열여덟 살 고령도 서너 명이 넘는다. "공부만 하고 있음 잃은 나라가 찾아지나? 공부 가지고 싸워지느냐 말이다." "총을 들어야지. 모두 나서서 용정의 왜놈 아아들이라도 죽어버려야 해!" "그보다 왜놈 앞잡이를 먼저 박살내야 한다구." "맨주먹 쥐고야 할 수 없는 일 아냐? 말이 그렇지." "청국놈들은 왜 잠자코 있는 게지? 먹어들어올 게 뻔한데 말이야. 이곳에 온 왜놈들이라면 하다못해 이발쟁이 라도, 그게 다 보통 이발쟁이가 아니란 말이야. 우리형이 그러던걸. 모두 일 꾸미는 염탐꾼들이라구." 연장자들은 흥분하고 당장에라도 한몫의 남아 구실을 할 듯이 떠들어댔으나 아직은 골통이 말랑말랑한 그들로 서 무슨 결론을 내릴 것이며 엄두가 나겠는가. 기껏 떠들다가 학교문을 나설 때는 비애에 가슴이 아프고 좀더 어른이 된 뒤에 보자, 체념으로밖에 달리 갈 길이 없고 발길은 집으로 향하게 마련인 것이다. "정호야. 너 책보 안 싸고 뭘 해?" 짝패인 홍이 물었으나 정호는 책상머리의 칼자국만 골똘히 쳐다보고 있다. "정호야. 너 안 가는 거야?" "음." "어서 책보 싸라." "음."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다가 책보를 싸기는 싸지만 골똘하게 뭣인가 생각하기론 마찬가지다. 귀엽고 희말쑥하 게 생겼으며 의복도 깨끗한 홍이에 비하여 머리는 큰 편, 눈은 작고 꽉 다물은 입술이 두툼한 정호는 누덕누 덕 기운 옷을 입었고 빈한한 처지를 한눈으로 짐작하게 하지만 늠름하고 꺾이지 않을 기상이 되바라지지 않고 뾰족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풍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두 짝패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정호가 한 살 위 인 열하나, 장난이 심한데 어쩐 일인지 정호에게만은 꼼짝 못하는 홍이였고, 반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정호는 제일 공부를 못하는 홍이를 얕보지 않았다. "그럴 것 없이 왜놈 학교(강도보통학교) 다니는 조선놈의 새끼들 골통을 바수어주는 게 어때?" "그보다 책보를 뺏아서 불에 태워버리자구." "그 새끼들 집구석에 밤마다 가서 돌을 던질까?" 연장자들은 여전히 울타리를 싸고 서서 가능성이 없는 일에서 차츰 가능한 일로 의견이 좁혀져 들어가는 모양 이다. "어서 가자." 홍이가 재촉한다. "너 먼저 가아." "왜?" "선생님한테 여쭈어볼 말이 있어." "...?" 홍이는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채 정호 뒤를 졸래졸래 따라간다. 교무실 앞에까지 간 정호는 물을 밀었다. 정호 가 들어가는 뒤를 따라 무심하게 얼굴을 디민 홍이는 이상현이 있는 것을 보자 목을 움츠리며 얼른 물러선다. 물러서는 순간 코앞에는 벌써 닫혀진 문이 싸늘하게 보였다. 얼굴이 벌개진 홍이는 문에다 발길질 시늉을 하 다가 돌아선다. 언제나 만나면 본척만척 어떤 때는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는 이상현이 어린 홍이 마음에 적지 않은 상처였다. 이상현만 보지 않았더라도 아무렇지 않았을 일이 문을 닫아버리고 들어간 정호까지 괘씸하고 야속해진다. '체! 옴마(월선이)는 양반이라서 그런다 하지마는 생원님은 양반이라도 안 그러더라. 아부지보고는 웃고 말을 하면서도 왜 나만 보면 본체만체할까? 수염이 허연 그 양반 할아버지도, 고놈 자알 생겼다 하면서 머릴 쓰다 듬어주던데... 에이이! 정호새끼, 낼 보기만 해봐라.' 쓸쓸해져서 홍이 혼자 터덜터덜 가는데, 이때 교무실 안으로 들어선 정호는 창 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송 선생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선생님." 송 선생은 몹시 당황하고 난처해한다. 애써서 감정을 감추는 것 같다. "무슨 일이냐?" "한말씀 여쭈어보겠습니다." "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정호의 얼굴이 순간 홍당무가 된다. "무슨 말이지?" 송 선생의 음성은 낮았다. 정호는 두 주먹을 꼭 쥔다. "선생님께서는 아까 싸우기 위해 글을 배운다 하셨습니다. 또 알아야 싸울 수 있고 알아야 이길 수 있다고 하 셨습니다." "그랬었지." 송 선생은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끄는데 손끝이 약간 떠는 것 같다. "제가 어떤 어른께 말씀을 듣고, 아무래도 좀... 저어 선생님 그러면 이완용과 그 일당놈들은 무지몽매해서 나 라를 팔아먹었을까요?" 송 선생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며 희미한 웃음을 떠올린다. "무지몽매했다 할 수는 없겠지. 대신까지 지냈는데 어찌 무지몽매했겠느냐. 그러나 정호야, 천성이 악독하고 교활한 자에게는 지식도 그 악독과 교활에 쓰이는 법이다. 연장도 쓰기 나름이 아니겠느냐? 우리 어머님께서 음식 장만에 쓰시는 칼이 도둑놈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연장이 될 수도 있고, 지식도 그와 마찬가지로 쓰기 나 름이야." "선생님!" "오냐. 말해보아." "우리 집에 계시는 생원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학문은 칼이 아니라구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뭐?" "학문은 도덕을 높이는 것으로 사우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하셨습니다." "으음... 어째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제가 생원님께 여쭈어봤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왜적한테 나라를 빼앗겼느냐구요. 그랬더니 생원님께서 말씀하 시기를 강도놈하고 선비하고 함께 길을 가는데 강도가 칼을 빼들면 짐을 뺏길 수밖에 없고 목숨도 뺏길 수 밖에 없는 일 아니겠느냐고," "음, 그래서?" 이쪽으로 등을 보이고 창가에 서 있던 상현이 돌아서면서 정호를 빤히 쳐다본다. "또 생원님께서는 말씀하시었습니다. 천지만물의 이치가 힘이나 육신만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덕 이 없는 도적이 번성할 수 없고 따라서 일본도 불원간에 망할 거라 하셨습니다." "음, 옳은 말씀이시다. 그래서 정호가 내 한 말에 의심을 품었군." "예. 선생님께서는 싸우기 위해 글을 배운다고 하셨습니다." "음, 그랬었지. 그러나 도적과 함께 간 선비가 지혜로웠으면 도적에게 물건을 뺏기고 목숨까지 잃었겠느냐? 도 적과 함께 가지 않는 방편도 있었을 게고 보신을 위한 방편도 있었을 텐데?" "..." "자고로 천하는 도적이 다스리는 게 아니고 성현이 다스리는 게야. 성현은 도덕이 높으시고 지혜로워서 도적 의 침범을 용서치 않지. 그러나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 지혜로움도 땅에 떨어지고 그리하여 나라가 망하는 법 이야. 홍수를 막기 위해서는 산에 나무를 심듯이 흑심 품은 이웃이 있으면 양병을 하여 대비를 하고 이웃이 옳지 못할 대는 한발 더 나아가서 칼을 뽑아 칠 수도 있는데 학문이란 원래 사람으로서 옳게 가는 길잡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도적의 방편도 될 수 있고, 칼도 마찬가지, 우리가 뽑는 칼은 내 나라를 위한 충성과 희생이지 만 왜놈의 칼은 탐욕과 죄악이다. 그러나 도둑의 무리 못지 않게 경계를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현의 길을 배웠으되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모르는 무리 말이다. 이들이 도둑과 합세 하여 나라를 망해먹은 셈이야. 첫째는 왕실, 왕실은 왕실의 안녕만을 위해 백성을 배반했다. 둘째는 고관대작, 일신의 영달과 일문의 무사태평을 위해 백성을 배반했다. 셋째는 선비들, 제 한몸 닦기 위해 청탁만을 가려 백 성들을 이끌지 못했으니 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배움에의 길은 내 나라를 위한 것, 내 겨레를 위한 것, 총도 될 수 있고 칼도 될 수 있고 분필도 될 수 있고," 하다가 송 선생은 말을 뚝 끊었다. 정호는 얼굴이 벌개져 있었고 상현은 창 밖을 내다보고 서 있었다. 송 선생 은 다시 당황하고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저, 그럼 저는 가겠습니다." 꾸벅 절을 한 정호는 허둥지둥 나간다. 그가 나가는 것과 동시 "똑똑한 아이군요." 돌아선 채 상현이 말했다. "네, 기가 막히게 명석한 아이지요." 송장환의 목소리는 무겁고 우울하게 울린다. "그 애 어머님이 채소장사를 하여 아들 둘을 학교에 보내고 있지요." "가난한 집 아이구먼요." "네. 찢어지게... 월사금을 그만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네?" "야채장사를 할망정 비럭질 공부는 안 시킬 사람이지요."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들이군요." "체통을 지키는 거지요, 그네들 나름대로. 그 아이 조부님께서는 척사론의 만인소를 올릴 때 소수의 한 분이었 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요?" 하며 상현은 돌아선다. 여전히 송장환은 우울해 보였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 선생." "네." "이 선생께서는 신분 제도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시는지요."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상현이 미처 답변을 하기도 전에 덧붙이기를 "아시다시피, 다소의 재산을 모았다 하여 이곳에서는 유지로 통하고 잇긴 합니다만 문별 없는 상민 출신의 우 리 집안이고 보니... 이 선생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상현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나 자르듯 분명하게 얘기한다. "신분 제도는 이미 형식상으로는 타파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감정적으로 용납되기는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 을까요?" "미욱한 질문이었지요. 여러 해 전에, 그런 것으로 인하여 갈등을 겪은 일이 지금 생각나서 물어본 겝니다." 하고 복잡한 미소를 띤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광대놀음이었지요. 신분과 재력의 실랑이라고나 할까요. 그때는 돈푼 있는 쪽에서 상 대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아니 어쩌면 막상막하였을 겁니다." 송장환은 낮은 소리로 웃는다.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싶었으나 상현은 "하긴 요즘 세상은 주먹이 신분의 상하를 결정짓는 게 아닌가 싶소. 땟국이 조르르 흐르는 족보 따위... 주먹은 곧 돈이니까요. 그것을 현명하게 깨달은 사람이 이 고장에선 최씨네 그 규수가 아닌지." 상현은 이빨을 달각달각 맞물리듯 말했다. "최씨네 규수..." "어떠시오, 송선생?" "네?" "그 규수를 신부감으로 한번 생각해보시는 게," 상현의 얼굴에는 악마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아이크, 그런 말씀 아십시오. 내게는 벼랑에 핀 꽃이지만, 무섭습니다." "무서워요?" "네. 이 선생한텐 미안한 말씀이나 나는 그런 여자 싫습니다." "그래요?" "이 선생." "네. 말씀하십시오." "아깐 기분이 안 좋으셨지요?" "생도한테 하신 말씀 땜에 기분이 안 좋을 거다 그 말씀이오?" "네." "사실이 그러니까요." 상현은 냉담하게 말했다. 송 선생은 생각하듯 손톱을 물다가 "평소 생각하는 일입니다만 이곳에 와서 운동을 하고 계시는 분들 대부분이 국가과 왕실을 분리해서 생각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글쎄올시다. 분리해서 생각한다..." "이 선생께서도 그 분들과 같은 생각입니까?" 송 선생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왕실과 선비들을 배반자라고 공격한 데 대해 상현이 어떤 기분으로 받아들일는 지 근심이 되는 모양이다. 평소 온건한 그의 성품으로는 있을 법한 일이기도 했다. "아직 나는 서양 문물에 깊이 접하질 못해서 의회 제도니 대통령 제 같은 것 생소하구요, 뭐라 말씀드리기는 어렵군요. 명칭이야 여하튼 한 사람의 통치자는 있어야잖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하지만 우리 독립투사들의 통치자에 대한 생각은 달라져야 하리라 믿습니다. 충성심의 대상이 임 금이어서는 안 되겠다 그 말입니다. 이제는 일반 서민들에게 왕은 국가의 상징으로 납득시킬 수 없지요. 극단 적으로 얘기하자면 임금에게 충성은 공자왈, 맹자왈 하는 선비의 소임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러나 동학란 때 과시했던 일반 백성들의 무서운 그 힘은 잠들은 채 있단 말입니다." "송 선생 말씀에 저도 동감입니다만 그러나 반드시 이 곳에서 운동하는 분들 모두가 국왕에 대한 충성을 운동 의 이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는데요? 대부분의 인사들은 왕실에 대한 백성들의 감상을 적당히 운동에 불을 지르는 데 이용하거나 혹은 이용하려는 그만한 술수쯤은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함께가 아니라 백성이란 예나 지금이나 이용당한다 그 말씀이오?" 송장환은 좀처럼 나타내지 않는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심경이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몹시 들떠서 날카 로워진 것 같다. 상현을 다둑거리기 위해 시작한 말이 빗나간 것도 전에 없었던 일이다. 상현은 송장환 심중에 안정되지 못한 무엇이 있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온건한 속에 묻혀 있는 신념이 술의 힘을 빌어 밖으로 새나오는데 오늘은 술 안 마시고도 여기저기서 불군불군 비어져나올 기세다. 상현은 정호라는 아이와 송 선생 사이가 심상하지 않음을 조금은 알 듯했다. 무겁게 침묵을 지키던 송 선생은 "김 선생은 아직 못 돌아오시는 모양이죠?" 화제를 돌린다. "못 돌아오시는 모양입니다." 김 선생이란 상의학교의 교사로 와 있는 사람이다. 지난 해 십이 월,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한 총독 데라 우치 암살 사건, 물론 그것은 조작된 것이었지만, 얼마 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부친이 잡혀갔다는 기별을 받은 김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간 채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이다. "큰일이오. 결국 신민회를 때려잡는 흉계인데 이렇게 되면 국내의 사립 학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 우리 교육 사업에도 크게 파급될 게요." "그럴 테지요." 하고 상현은 머리를 쓸어넘긴다. 11장 밤비 나루터에 닿았을 때 해는 서편으로 엄치 기울어져서 사선으로 보내오는 빛살을 받고 물결은 번득번득 황금빛 으로 희번덕이고 있었다. 강구를 향해 떠내려가는 긴 뗏목배, 장대를 든 뗏목꾼은 은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이 켠 나루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철새가 무리를 지어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들꽃들이 피어 있는 곁을 흰모시 두루마기 입은 길상이 성큼성 큼 걸어가고 회색 양복바지에 누리끼한 세루 양복저고리, 역시 누루끼한 여름 모자를 쓴 송장환도 함께 걷는 데 길상이보다 키는 약간 낮은 편이다. 이들이 회령에 들어서니 땅거미가 질 무렵, 잡화상 점두로부터 비쳐 나 온 몇 개의 등불은 희미하고 칠월로 접어든 초여름의 저녁 바람이 살랑거린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거리는 철새가 무리를 지어서 날으던 하늘처럼 어수선하다. 짐을 진 지게꾼은 헝클어진 상투에 땀을 흘리며 가고 화 주인 듯 땅딸보의 사내는 팔자걸음으로 따라간다. 한 팔은 머리에 인 곡식 자루를 잡고 한 팔만 휘저으며 바 삐 가는 아낙의 등에는 띠로 얽어맨, 잠든 어린것의 고개가 힘없이 흔들거리고 양복쟁이가 가는가 하면, 샤벨 을 철거덕거리며 순사가 지나간다. 담뱃가게 창구 안에는 마루마게(기혼 여자들 머리 모양)의 기생 퇴물 같은 일녀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 옆의 검정고양이가 거리를 향해 기지개를 켠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송 선생께서는?" 기름이 없는 머리칼을 더풀거리며 걷고 있는 송장환에게 길상이 묻는다. "여관에 들어야지요. 함께 듭시다." 이들은 우연히 한 마차를 타고 같이 왔다. 송장환은 청진까지 교사를 데리러 간다고 했다. 이들 앞을 지팡이를 짚은 늙은 일본인 한 사람이 걸어간다. 쥐색 히도에(홑겹옷) 아랫도리를 양켠 다리에서부터 걷어올려 검정 오 비(허리끈) 사이에 끼우고, 그러니까 정강이는 물론 엉덩이도 아슬아슬한데, 와라지(왜 짚새기)를 신은 늙은 사내는 등에 봇짐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애크망이나! 개상놈으, 망칙스럽다." 사내의 드러난 정강이를 보고 기겁을 한 아낙이 얼른 길을 비켜선다. "저 늙은 것은 뭘 해처먹겠다고 여까지 왔을까? 송장환이 중얼거렸다. "자식놈이라도 찾아온 게지요. 행색을 보아하니 죄 없는 백성인 성싶소." "그래요? 내 눈에는 굶주린 늙은 짐승 같소." 송장환은 길가에 침을 탁 뱉는다. "하늘 아래, 아마 거지들은 모두가 다 동족일 게요... 도적놈들이 황금덩이를 가져와서 나누어 쓰자 할 리도 없 을 게고." "하여간에 나, 저것들 꼴 보기 싫어서 강만 넘어오면 속이 뒤틀려요. 용정에선 그래도 손님 처신은 하는데 여 기 것들은 사뭇 주인 행셀 한단 말이오." 그들은 한양여관으로 들어간다. 한양여관은 회령 출입이 잦은 길상의 단골집이다. "어서 오시오! 아주머니, 용정 손님 오셨수." 사환아이가 소리친다. "용정 손님이라니?" 방문이 드르르 열린다. "어서 오시오. 자주 보겠구먼요." 사십을 넘긴 듯 뚱뚱한 여자는 붙임성있게 말했다. "한 분은 초면이구... 석아, 조용한 별채로 어서 모셔라." "예에 - 손님." 사환아이는 손가방을 받아들면서 덧니를 드러내고 웃는다. 주근깨 투성이의 얼굴이다. 옆집을 사들여서 개조한 여관은 ㄹ자 집이라고 할까. 몇 번이나 모퉁이를 돌아서 들어간 곳에 본채와는 반대 방향으로 마루가 난 한옥 인데 담장에 붙여서 장작이 쌓여 있다. 사환아이는 입구에서 안쪽, 끄트머리 방의 방문을 활짝 열어놓더니 방 석 두 개를 한 손에 한 개씩, 마치 손뼉을 친 모양으로 툭툭 먼지를 털어낸다. "함께 드실 거죠?" "음." 송장환의 대꾸다. 남폿불을 켜놓은 사환아이는 다시 물었다.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먹어야지." 이번에도 송장환이 말했다. 사환아이가 나가자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안으로 들어선 송장환은 옆벽 높다란 곳 의 들창을 살펴보더니 모자와 양복저고리를 벗어 걸어놓고 자리에 앉는다. 길상은 두루마기 자락을 걷으며 앉 는다. "비나 오시지 말아야겠는데." 송장환이 열려진 방문 밖을 내다본다. 하늘에는 별이 나돋기 시작했으나 어째 희미하다. 연푸른 하늘에는 군데 군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올 때는 잘 구워진 벽돌짝처럼 칠월 햇볕에 탄탄해진 길을 마차는 기세 좋게 달려왔었건만. 옆방에서 손님이 든 모양이다. 방문을 화다닥 열어젖히는 소리가 났다. "이봐! 색시!" "옛꼬망." 장작을 안고 가던 젊은 여자의 대답이다. "재떨이도 없구 성냥도 좀 갖다놔요." "옛꼬망." 송장환은 방문을 닫는다. "청진에는 여러 날 묵으시오?" 길상이 묻는다. "곧 돌아와야지요. 학교 일이 마음에 놓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이들이 도 무슨 짓을 할지." 하고 송장환은 허허 웃는다. 며칠 전에 사소하긴 했으나 크게 벌어질 수도 있는 사건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홍이가 저질렀던 일이어서 길 상도 관여했는데, 그러니까 큰 아이들이 모여서 계획하고 있던 배일운동을 홍이가 남 먼저 행동으로 나간 것 이지만 그것은 즉흥이요 우발이었다. 길 가다가 만난 간도보통학교 생도의 책보를 빼앗아 달아나던 홍이가 책 보를 강물에 집어던지고 뒤쫓아온 상대 아이에게 왜놈의 종이라 욕지거리를 하고 주먹질까지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벌어지면서 송장환은 비로소 생도들이 저지를 뻔했던 일을 알고 당황하였다. 상대편 아이의 아비는 규 모가 작은 곡물상으로 길상과는 천면이 있어서 송장환과 세 사람이 술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일이 밖에 퍼지 지 않게 마무리되긴 했다. 그러지 않아도 배일사상의 온상인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티끌을 찾고 있던 일본 영 사관이고 보면, 상대편 아이 아비가 친일분자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덕분에 송장환도 미연에 아이들을 무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송장환은 내심 매우 만족해 있었다. "손님, 여기 재떨이 가져왔소꼬망." 여자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안주인이 버릇을 잘못 가르쳤구먼." 옆방 손님의 잡음이 섞여 목쉰 듯한 음성이다. "가져왔으면 방에 들어와서 놓아두고 나갈 일이지, 아 그래 날더러 받으라 그 말이냐?" 여자는 방으로 들어가는 기색이다. "이봐, 색시." "옛꼬망." "사람이 그리 눈치가 없어서야 어떻게 사누?" "무시기 말심입매까?" "내 아까 들어오면서부터 눈여겨봤지. 외양이 그만했으면 사내 눈치도 볼 줄 알아야 안 그래?" "..." "어때? 오늘밤 나하고 잘까?" "양이 어디새 그런 말으 하지비?" 여자의 목청이 쨍! 하고 울린다. "허허어, 이 맹꽁이 좀 보게? 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돈 벌고 재미보고." 음탕스런 웃음소리. "앙이! 어째 이러지비!" 사내가 손목이라도 잡았는지 송장환은 눈살을 찌푸리고 길상은 얼굴을 숙인다. "앙이! 이 불한당놈으! 놓지 못하겠니야," 말소리가 뚝 끊어지면서 버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송장환이 벌떡 일어섰다. 옆방으로 쫓아간다. 방문은 반쯤 열려져 있었다. "이 무슨 짓이오!" 사내는 여자의 손목을 잡은 게 아니었고 목을 누르듯 껴안고 있었다. 움찔하고 놀란 사내가 팔의 힘을 빼는 순간 여자는 노여움과 수치심에 얼굴이 자줏빛이 되어 달려나가고 염치 좋은 치한은, 나이도 오십이 다 돼 보 이는데, 우르르 마루로 쫓아나온다. "대관절 넌 누구냐?" 오히려 삿대질이다. "나는 옆방에 든 손이오." "손이면 손이지, 발이 아니고 손이라면 남의 방에는 왜 와서 기웃거리는 게야!" 비쭉한 턱수염이 덜덜 떤다. "보아하니 체면 차릴 연세도 되셨는데 무슨 추태시오. 여기가 청룬줄 아시었소?" "아아니 이놈 봐라?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그래 네놈이 그년의 서방이더란 말이냐?" "말씀 삼가시오." "이놈이!" "이 양반이 왜 이러시오?" "뭣이 어쩌구 어째?" 주먹을 휘두르는데 그 팔목을 송장환이 재빠르게 낚아채서 꽉 누른다. "젊은 사람한테 봉변을 당해야겠소?" "이놈이 사람을 치네!" 팔목을 잡힌 채 어정쩡해가지고 사내는 엄살을 부린다. "송선생, 그만 내버려두시오." 길상이 언제 나왔는지 뒤에서 말을 걸었다. 그와 동시 여관집 안주인과 사환아이가 황황히 쫓아왔다. "왜 이러시오, 장 주사." "아아니 안주인, 이런 법도 있소?" "허허 장 주사아." "젊은 놈들이 당을 지어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한테 행패라니!" 제 한 일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 멀찍이 서 있는 길상이까지 몰아서, 무안쩍어 그랬을 테지만 크다만 눈알이 빠져나올 만큼 부릅뜨고 호통치는 꼴이 가관은 가관이다. 기가 막힌 송장환과 길상이 마주보며 쓴웃음을 짓는 다. 안주인은 대강 사정을 알고 온 모양이었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풍상꾼이라, "장 주사, 고정하시오. 그놈의 계집이 본시 성미가 못돼놔서, 우리 집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장 주사가 어떤 양반인지 알 턱이 있나요?" 사내 팔을 잡고 등을 두드리는 시늉까지 한다. "계집은 그렇다 치고, 어디 순 불한당놈들이 장유유서도 모른다 그 말인고?" 마당을 향해 침을 뱉는다. "젊은 사람들이 사정도 모르고, 자아 방으로 들어가시오." 안주인은 송장환과 길상을 떼민다. 두 사람이 여전히 쓴웃음을 머금은 채 방으로 들어오는데 "나 여관 옮기겠소! 천정에 뱀 든 걸 참았지, 저놈의 불한당놈들하고는," 안주인은 계속 달랬으나 사내는 나갈 채비를 차리는 기색이다. "장 주사, 어째 이러시오? 수년 주객인데, 내 그 계집 불러다 혼을 내겠소. 석아!" "예!" "옥이에미 좀 오라고 해!" "여기 아니면 여관이 없나?" 사내는 떨어진 위신을 기어 세울 심산인지 말리는 안주인 손을 뿌리치고 나가는 모양이다. "입맛 씁쓸하군." 송장환이 피식 웃는다. "아주망이 부르셨습매까?" "부르셨습매까? 그래 불렀다!" "..." "너 여기가 어딘 줄 아니?" "..." "설마 여염집으로 잘못 안 건 아니겠지?" "미안합꼬망." "내 애당초 뭐래든? 견디기 어려울 거라 하지 않았어? 잘 생각해 보라구 하지 않았느냐 말이야. 더구나 애까 지 달구서, 애걸하길래 사정을 봐준 건데 이렇게 손님을 쫓아버린대서야 장사가 되겠어?" "손님이," "손님이 널 잡아먹겠다던? 설사 좀 지나쳤다손 치더라도 이런 영업집에 있는 이상 비위 상하지 않고 슬쩍 받 아넘길 줄 알아얄 거 아니냐 말이다. 그런 투로 톡톡 쏘아대다간, 손발 끊어지기 십상이지. 본시부터 여관업이 란 별의별 손님들이 드나들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어디 사람이면 다 같은 줄 아니?" "아주망이 앞으로 조심하겠습매다. 한 번만 너그럽기 용서하옵소." "아니할 말로 손님이 손목 한번 잡았음 어때? 닳아지는 것도 아니겠고 그러구러 너도 돈푼이나 얻어 쓸 게 아 니냐? 물정 모르는 계집애도 아니겠고 손님이 등을 긁어 달래면 긁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게야." "아주머니 그만들 하시오. 여관 간판 갈아단다면 모르까, 여관업에 청루업까지 겸할 수야 있소?" 방안에 앉은 채 따끔하게 한마디, 길상이 찌른다. "아니 그, 글쎄 그자의 버릇을 내 모르지는 않는데 시끄러운 게 귀찮아서 말이오." 안주인은 당황한다. "앞으로 조심해, 사람이 살자면 별의별 일을 다 겪는 게야. 밥 먹는 일이 그리 수울한 줄 아니?" 하다가 우물쭈물 나가는가 아뭇소리가 없다. "밥 먹는 일이 그리 수울한 줄 아느냐구... 하긴 그렇지." 송장환의 말이다. 저녁을 먹은 뒤 사환아이가 밥상을 물리자 송장환은 양복저고리를 내려 입고 모자를 쓰면서 "나 잠시 나갔다 오겠소." "그러시오." 혼자 된 길상은 두루마기를 벗어 걸고 조끼주머니 속에 꼬기꼬기 접어 넣은 신문을 꺼내어 남폿불 밑으로 옮 겨 앉는다. 앞뒤의 기사를 대강 훑어보고 만주 방면에 조선인 모발을 수출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읽기 시작한 다. 내용인즉 요즘 조선인들 간에 단발하는 풍이 성행한다는 것이요, 잘라낸 모발은 청국인 편체에 쓰이기 때 문에 만주로 수출되어 그 값세가 수월찮다는 것이다. 서울서 발해오디는 총독부의 어용 신문 매일신보다. "손님 계십매까." 길상이 고개를 든다. "손님." "네. 어째 그러시오." 길상은 아까 소동을 일으켰던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어 이부자리를 가져왔습매다." "아아 네." 여자는 방문을 열었다. 길상은 읽던 신문을 접고 한켠으로 비켜 앉는다. 여자는 얇삭한 요 이부자리 한 벌을 방에 들여놓고 "손님." "네." "아까는 소란을 피워서 죄송하옵꼬망." "아니, 뭐." 하다가 놀란다. 석 달 전에 불이 난 다음 다음날 길상이 응칠이를 데리고 회령으로 오던 마차 속에서 만나 여 자였다. 배고프다고 우는 계집아이를 잡으러 왔었던, 응칠이 말로는 가스집이라던. 아직 길상을 알아보지 못하 는 모양이었고 여자는 경황이 없었던 그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남폿불이 어른거리는 눈시울에 눈물이 맺힌 듯. 길상은 이상한 감동과 흥분을 느낀다. '아까 안주인이 옥이 에미라 했던가?' 나머지 이불 한 채와 베개를 방안으로 옮겨온 여자는 "손님." "네." "자리를 깔아드리옵께나?" "괜찮소!" 화난 목소리에 껌적 놀라며 여자는 눈을 든다. "나중에 동행이 오면 우리가 깔고 자겠소." "아니," "..." "저어 손님으... 신평리에서," 길상은 웃는다. 왜 웃었는지 아까는 또 왜 화를 냈는지, 미묘한 감정의 틈바구니 속에 끼여든 것을 느낀다. "애기는 잘 크오?" "옛꼬망. 염치없습매다."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때는 인사도 양이 하고서리... 이곳서 참말입지 우세스럽소꼬망." "그런 말씀 마시오. 벌어먹고 사는 일이 우세스러울 것 조금도 없습니다." 울음을 참으며 "동행하신 손님으 오시거든 감사스럽다는 말씀 전해주옵소." "조금도 개의하지 마시오." "그, 그라믄 안녕히 주무시옵께나." 여자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물러선다. 신돌 위에서 신발 신는 소리, 마당을 밟고 가는 발자국 소리, 그리 고 사라진다. 길상은 이불 위에 놓인 베개 하나를 낚아채서 벌렁 누워버린다. 갑자기 사방이 적막의 덩어리처 럼 길상의 가슴을 내리누른다. '여자...' 천장에 환을 그려놓은 남폿불의 등피 그림자를 멀거니 올려다본다. 용정에서 풀려나왔다는 기분, 그것은 주술 에서 풀려 나온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이 자유로워졌다는 자각이 왜 이리 무거운가. 그 이유를 길 상은 물론 알고 있다. 그 동안 잠재워둔 젊은 육신이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을 넘고 일단 회령 에 오기만 하면, 회령 땅은 길상에게 있어서 자유와 죄업의 고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자... 계집... 그만 송애 그 계집애를 얻어서 살까?' 눅진눅진하게 솟아나는 땀과도 같은 유혹의 감각이 춘일관의 작부 화심을 연상케 한다. 지폐 한 두 장을 던져 주면 기다란 손가락으로 얼른 주워들던 화심이, 부스스한 머리칼이며 조그마한 눈과 주걱턱 위에 불빛이 미끄 러지고, 그 주걱턱을 때려 부숴버리고 싶었던 미움, 어금니를 베물고 지긋이 누르면 다시 솟아오르는 것은 구 토증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구역질나는 혐오였다. 늦은 밤길 그림자를 밟고 여관으로 돌아오면 술에 취해서 잠이 들고. 처음 여자와 동침했던 날 밤에는 여관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낯선 주점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그곳 에서 쓰러져 잤다.- 손님, 봉순이라는 사람이 뉘신데 내내 부르고 울고 하셨지요? 해장국을 권하며 주점의 사 내가 놀려대듯 물었었다. 내가요? 하다가 길상은 허허헛 하고 웃었다. 별안간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장작을 덮은 함석을 때리는 소리다. 그러더니 싸아 - 하고 들려오는 빗소리, 빗발은 고르게 쏟아진다. '기어 비가 쏟아지는군.' 길상은 송장환이 날씨 걱정을 하던 일을 생각하긴 했으나 실컷 비가 왔으면, 강물이 범람하고 길이 끊어지고 그러면 용정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어떻게 되나? 어떻게... 하다가 길상은 깜박 잠이 들었다. "어이쿠!" 신돌 위에 후닥닥 뛰어오르는 구둣발 소리가 났다. 송장환이 돌아온 것이다. "이거 야단났구먼." 방문을 열고 송장환이 들어섰다. "김형 주무시오?" "아, 아니오." 길상이 일어나 앉는다. 송장환의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반짝인다. "비를 맞았군요." "뛰어왔는데도, 아 글쎄 술을 사는데 비가," 하다가 술병을 치켜들어 보이며 "김형하고 함께 할려고, 술상 보아달라 일렀으니 곧 가져올 게요." 송장환은 윗도리를 벗어 걸고 가방 속에서 수건을 꺼내어 얼굴, 머리를 닦고 양복바지를 슬쩍슬쩍 닦는다. "이런 나엔 술 안 마시고는 못 견딜 것 같소." "모자는 어떻게 했소?" "아니, 내가... 깜박 잊고 그 댁에 놔두고 왔구먼." 껄껄껄 웃을 줄 알았는데 송장환은 얼굴을 찌푸린다. "에잇! 좋은 소식이란 하나도 없고 정신도 나가게 됐수다." 수건을 던지고 펄썩 주저앉는다. 이윽고 사환아이가 상을 보아왔다. 두 사람은 술상을 마주하고 "김형, 잔 드시오." "네." 비에 쫓겨 들어왔는지 조그마한 부전나비 한 마리가 주변을 어지럽게 맴을 돌다가 술상 가까이로 온다. 나비 를 후려 잡은 송장환이 방문을 연다. 굵은 빗발, 높아지는 빗소리, 나비를 버리고 방문을 닫는다. 술을 마시고 붓고 권하고 하면서 취해오기를 기다리는지 서로 말이 없다. 길상과 송장환은 꽤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한 집에서 기거하는 상현은 손님으로 조심스럽게 대접하면서 어느 면으로든지 거리가 먼 길상을 형님 대하듯 친 구 대하듯, 송장환의 기분에는 상현보다 길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길상도 그의 신실한 인간성을 신뢰하여 무관 하게 대하는 듯싶었다. 언제였던가 술자리에서의 일이었는데 동학란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술김에 그랬을 테 지만 송장환은 동학의 접주 김개주를 찬양하며 열광적으로 한바탕 떠들어댔던 것이다. 길상은 온건한 성품의 그가 살인귀로까지 구전되어 온 김개주를 찬양하는 게 이상했다. 그도 술김에 "거 김 아무개, 실은 내 삼촌뻘 되는 사람이란 말이오." 하고 한방 터뜨렸던 것이다. "뭐라구요!" "하하핫... 하하핫... 내 그 내력을 얘기하리다. 실은 삼촌은 고사하고 부모도 없는 놈이오만 김 아무개 그 사람 한테 우관이라는 형님이 계시었소. 중이지요. 그 스님께서 나를 줏어다 길러주셨는데 부모 없는 놈한테 성씨인 들 있었겠소? 해서 그 스님 성씨를 따서 김가이니, 따져 보슈. 삼촌뻘이 안 되는가." "허허, 이거 참으로 기연이오. 그래 김형은 그 영웅을 만나보신 일이 있소?" "내가 여덟 살 아니면 아홉? 그쯤해서 세상을 하직한 사람을 어디서 만납디까?" "그거 유감이오, 유감. 허허 참, 그러면 그분의 형 되는 우관?" "우관 스님 말씀이오?" "그 분은 어떠했소?" 송장환의 눈에는 호기심이 넘실넘실했다. "독수리 같은 중이었소. 늙으 독수리... 대자대비하시고, 준열무비하시고, 교활무쌍하시고, 호방음탕하시고. 나는 그 어른이 비구인지 세간인인지 잘 모르겠오. 하하핫..." 이런 정도쯤 이들은 무관한 사이였다. 송장환은 술이 반쯤 오르는 모양이다. "일각이 여삼춘데 이기 비가 와서 야단이구먼." "나는 비가 한 사나흘 쏟아졌음 좋겠소." "에이, 악담 마시오. 겨우 줄을 잡아서 선생 한 분 모시러 가는데." "세월이 긴데 뭘 그리 서두르시오." "용정에 데려다놔야, 그래야 마음을 놓지요. 세상 돌아가는 꼴 보아하니, 마음이 바쁘오." "..." "얼마 전에는 그놈의 사립학교 규칙이라는 것을 공포해가지고 총독놈이 반일운동에 쐐기를 박으려 했고 작년 에는 심지어 그네들 앞잡이 노릇을 했던 단체까지 해산했고, 신문도 경성일보, 매일신보 두 여용 신문만 남겨 놓고 모조리 폐간을 했는데 이놈들이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가 총독 암살이라는 터무니없는 사건을 날조해 가지고 신민회를 때려잡고 있는 판국이니 하기는 사립학교 규칙이라는 것을 공포했기로 사립학교가 존재하는 이상 항일을 아니 하겠소? 하니 그네들이 그걸 모를 리 없고, 국내 사립학교가 된서리를 맞는 게지요. 신민회 뿌리를 뽑는다면 신민회의 조직체인 사립 학교들이 무너질 것은 뻔한 일. 그러니 국외에 있는 구이들만이라도 정신을 바싹 차려야잖겠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지금의 교육 사업을 보다 더 확장해나갈 심산이오. 그래서 내 마음이 이리 서둘러지는 게 아니오?" "우리 지금은 술이나 마시고 학교 일은 맑은 정신이 들 때," 열중하여 더 말을 계속할 판인데 송장환은 좀 머쓱해한다. "김형은 내 하는 일에 이해가 없구먼요." "이해는 하지만 문외한이고 보니, 비 내리는 이런 날씨처럼 술이 들어가서 흐려진 마음에 여자 생각이나 하지. 나는 내내 여자 생각만 하고 있었소." 길상은 송장환을 골탕먹이듯 쳐다본다. "주정으론 아직 이르오." 얼굴이 빨개진다. "누가 누군지 빤히 알고 있는 용정에서 풀려나왔으면 접장 감투는 멀찌감치 벗어놓고," "하, 참." 하다가 송장환은 술을 훌쩍 마신다. "내가 알기론 우리 사내새끼들이란 본시부터 아까 그 치한하고 같은 종자여서, 성인군자도 여자와는 무관하지 않았고 하물며 우리네 범부들이야. 흐음, 사실 왈가왈부할 것도 아니었지." "그, 그래..." '부처님이라고 안 하까? 중놈이라고 어디 안 하더나? 하기로는 마찬가지니께. 하하핫... 성인군자도 그거는 한 다. 절손은 불효니께로.' 봉기의 딸 두리를 수수밭에서 범한 삼수가 하던 말이 길상의 의식 속에 퍼뜩 떠올랐다. "김형이나 내나 장갈 가야 하는 건데 좀 늦었지요." 송장환은 감정 처리가 좀 곤란했던지 허둥지둥 방문을 열고 사환아이를 불러대더니 돈을 꺼내어주며 술을 사 오라고 이른다. "술은 아직 있는데 그러시오?" "마시다 떨어지면, 기다리는 동안 김이 새니까요." "송 선생." "네." "우리 지금부터 색시집에 안 갈래요?" "접장이 그럴 수 있나요? 그나저나," 다시 허둥지둥 술을 마신다. 좀 성이 난 얼굴이 되어 "내 아까 잠시 들렀던 친저 집에서 들은 소식이오만 아버님하고 친면이 있는 윤 참봉이란 어른이 자결하셨다 는 게요. 세상이 이리 우울해서 참말이지 못 견디겠소." 길상의 입에서 여자 말이 나올까봐 겁이 났던지 송장환은 성급히 말을 잇는다. "지금 총독부에서 외부에 새나지 못하게 철통같이 막고 있어서 그렇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식만으로도 합 방 이후, 방방곡곡에서 유생들이 연이어 자결을 한다는데 도대체 자기 한 몸 죽어서 어쩌겠다는 게지요?" "..." "분통이 터지요." 송장환은 연거푸 술을 들이켠다. 길상도 계속해 술을 마신다. "자결을 했다는 대부분의 유생들이 육순, 칠순의 고령이라니, 허 참,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나는 본시 옹 졸하고 편협한 유생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나라를 이 지경으로 이끌어온 그네들 책임을 용서할 수도 없 거니와 그러나 생각해보니 절식을 해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목을 찔러 죽고 아편을 먹고... 칠순, 육순의 늙은 이들이 말입니다. 늙은이들한테는 참말이지 자결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게요. 그러고 보니 유교적 윤리관 속에는 확실히 무슨 비밀이 있긴 있는 모양이오. 나는 어디까지나 그런 행위를 퇴영으로밖엔 생각지 않습니다 만 그러나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니까요. 뭔지 몰라? 꽃잎이 할랑할랑 지는 것 같고 설원에 한 마리 사슴이 서 있는 것 같고, 왜놈들이 배때기 갈라 제치고 죽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게 있단 말입니다. 그 살기하고는 자못 다른, 송선생. 네. 거 거룩한 얘긴 좀 그만둘 수 없소? ... 나같이 상전에게 모이나 부지런히 물어 나르는 개미 같은 인생에겐 값비싼 얘기요. 아 누가 김형 저력을 모르는 줄 아시오? 저력이라? 의 나간 일 말이오. 김생원한테 들었소 허허 왜 이러시오? 꽃잎도 사슴도 못 된 김생원께서 잠꼬대를 하신 게요. 동병상련, 총각끼리의 따로 얘기가 있을 게 아니오. 네, 네, 그럼 노총각끼리의 따로 얘기합시다. 하는 수 없이 송장환은 웃는다. 송선생, 아까 그 과부 어떻소? 아까 과부라니요? 조금 전에 봉변을 당한 여자 말이요. 거 인물 좋습디다. 과부인 걸 어떻게? 용정소 재봉소 하던 여자요. 그래요? 허나 그건 절대로 안 될 의논이지요. 왜, 과부는 수절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럼 김형, 그 여자한테 장갈 들겠다 그 말씀이요? 안 될 것도 없지요. 장갈 못 든 늙은 총각은 흔히 과부 얼굴에 보자기를 씌워서 데려와 사는 게 불문율 아니 오? 그런 소리 마슈. 멀쩡한 총각이 과부장가라니. 사환아이가 새 술을 가져오고 해거 어지간히 취한 이들은 횡설수설 늦게까지 마시고 지껄이고 하다가 길상이 문득 생각이 난 듯 송선생. 하고 불렀다. 말하시지, 총각 형. 우리 상전 애기씨를 어찌 생각하시오? 뭐라구요? 당신네들은 이 고장에서 신식 양반이 된 사람이고 하니 구식 앵반댁 우리 상전 애기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말 아니오. 할말은 아닌지는 모르나 내 장가드는 일보다 우리 상전 애기씨 혼인이 더 시급한 일이오. 거 참 이상하다? 뭐가 이상하다는 게요. 아 글쎄 며칠 전에 이선생이 날 보고 그런 얘길 하더란 말이오. 혹 서로 의논이라도 했었소? 이선생이? 이부사댁 서방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그 말씀이오? 불그레했던 길상이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진다. 공연히 놀리지 마시오. 부부란 인물이 거이방해야지, 나같이 못생긴 놈이 될 법이나 한 일이오? 내가 김형만틈 자알 생겼다면야 서슴없지요. 망설일 일이 뭐 있겠소? 무섭다는 둥, 그런 여잔 좋아하지 않는다는 둥 상현에게 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은근슬쩍 길상에게 충돌 이질한 것이다. 그도 심상치 않은 소문은 다소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장 작은 새의 죽음 비는 밤중에 그친 모양이다. 땅밑에 빗물은 스미고 뜰은 말끔했지만 나직이 내려앉은 잿빛 하늘은 여전히 비 를 머금고 있었다. 날씨 걱정을 하면서 송장환은 후줄그레한 양복저고리, 모자도 없이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 고 떠났다. 거무칙칙한 나뭇가기와 음산하게 도열한 초가지붕과 군데군데 쌀 속에 섞인 벼알갱이같이 기와집 이 있는 거리를 지나고 시가 중심지도 지나서 장거리 가까운 복지곡물상으로 길상은 들어간다. 용정으, 김씨 오셨습매다! 도래방석에 팥을 쏟아붓던 일꾼이 소리를 지른다. 곡물상 앞에는 소달구지 한 대가 있었고, 인부들이 곡식가마 를 가게 깊숙한 곳에 져 나르고 있었다. 아이고오, 김씨 오시오. 간막이 뒤에서 얼굴이 짤막하고 살빛이 흰 사십 남짓한 복지곡물상 주인은씨가 나오면서 반색을 한다. 그간 안녕하시었서? 구럼요, 그럼요. 이렇게 멀쩡합니다. 그새 생남도 하구요 너스레 띤다. 경사였었구먼요 자아 이리 들어오시오. 칸막이 안에 책상에 있고 금고 장부가 있고 야트막한 걸상이 있다. 길상은 걸상에 앉는다. 어젯밤에 오시었소? 네. 은씨는 책상 위에 한 팔을 얹어놓고 상긋상긋 웃는 것 같은 눈으로 길상을 바라본다. 이마가 옆으로 길고 머 리숱이 짙고 눈은 연신 상긋상긋 웃는 것 같지만 바람둥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아, 담배. 궐련을 내민다. 길상은 담배를 즐기지는 않았으나 받아서 붙여문다. 은씨도 함께 붙여물고 연기를 뿜어내며 한데 청진에서 아직 이씨가 안 오누만요 ,오늘도 날씨가 이래놔서. 요즘 장사는 어써시오? 햄마다 지금이 어려운 때 어려운때 아닙니까? 나보다 더 잘 알 텐데? 불나고 집 짓고 통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놈의 화재는... 우리도 함께 당한 셈이오. 톡톡히 재밀 보았을 테죠, 뭐. 무슨 말씀이오? 용정소 곡물이 안 나오니 여기 곡가가 치솟았을 것은 뻔한 일이지요. 하하핫... 곳간이 텅 비어 있었는데두요? 거 엄살 그만 피우시오. 그나저나 이번에 수금 좀 해가야겠소. 그, 그게 허허 훗발을 보시려면 그러지 마슈. 앞으로 은씨 우리하고 거래 안 하시려오? 미소를 띠며 은근히 으름장을 놓는다. 그, 그야. 은씨는 당황하는 빛을 감춘다. 용정과 청진의 중간 지점인 회령의 복지곡물상은 그 동안 곡물보관에서 인계, 그리고 지불 관계 등 역할을 대행해왔을 뿐만 아니라 은씨 자신 길상과 신용거래를 터왔었다. 그러니까 은씨 로서는 적은 자본으로 사업을 크게 굴려온 셈인데 겨울부터 이른봄까지 용정사 내온 잡곡 칠백 가마의 대금 청산을 미적거려왔던 것이다. 용정의 화재 이후 현물 거래가 중단된 때문에 자금 유통에 차질이 없는 것은 아 니다. 그보다 약아빠진 은씨로서는 용정의 사정, 그러니까 서희가 어느 정도의 손재를 보았으며 다시 대규모의 곡물을 취급하게 될는지 어떨지는, 그형편을 관망하는 속 검은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여 길상은 그에 게 말로써 방망이를 안긴 것이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길상은 이같이 상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슬쩍슬쩍 쥐어박아 가면서도 구슬려야 한다. 그쪽에서 뿐만 아니라 이쪽에서도 이용해야 하는 것 이 바로 은씨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고, 어쨌든 내가 그새 생남도 하고 했으니 한턱을 해야 겠소. 은씨는 화제를 돌린다. 한턱을 해야 한다는 것은 보나마나, 가게에서 쪽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의 살림집인데 그 살림집 건넌방서 술상을 벌이는 일이다. 길상은 여러 번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가 어떤 속셈인지 또 어 떤 태도로 나올 것인지를. 딸아이를 눈앞에 알짱거리게 할 것이요, 딸 자랑이 늘어질 것이요, 길상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갖은 재주를 피울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물론 장사하고는 전혀 다른 성질의, 딱할 지경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 마음, 길상을 탐내는 욕심인 것이다. 딸은 아버지를 닮았으되 아버지보다는 인물이 못했다. 살결이 희고 얼굴이 짤막하고 아버지처럼 옆으로 넓은 이마, 눈빛은 짙었다. 얼핏 보기엔 땟물이 빠졌고 눈에 띄는 얼굴이신 했다. 열일곱 살이라 했다. 은씨는 사내아이들 못지 않게, 그의 표현을 빌자면 예배당 학교에 보내어 신식 공부를 시켰노라는 것이었고 음식 솜씨 바느질 솜씨 나무랄 데가 없고 인물도 회령 바닥에는 내 딸만한 아이가 없다는 것이다. 어젯밤에 과음한 탓인지 속이 좋지 않소. 요다음에 하지요. 아니 젊은 사람이 객지에 와서, 색시 집에라도 갔었소? 왜요? 가면 안 되나요? 안 될 거야 없지만... 어젯밤엔 용정소 함께 온 사람이 있어서요. 여관에서 했지요. 그 보다 우리 셈 얘기나 합시다. 글쎄, 그러니까 나도 청진의 이씨를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겠소? 기별은 왔습니다. 날씨만 좋으면 오늘 올지도 모르지요. 이씨한테 나도 몰려 있으니, 지금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오. 뭐 염려할 것 없어요. 이씨 같은 사람이야. 내 십 년 넘게 거래를 해봤으나 도장을 찍은 듯 확실한 사람이니까. 허허 이씨는 이씨고 나는 지금 은씨 얘길 하고 있는 게요. 그러니까 이씨만 오면, 만일 못 오게 되면 내 달리 변통하리다. 그러면 불가불 여기서 며칠 묵을 수밖에 없겠군요. 여관이 불편하면 우리집 오슈. 여관보담 나을 게요. 길상은 웃기만 하고 대답을 아니 한다. 잠자리도 편할 게고 음식도, 아니, 여관에서 쉬겠습니다. 이젠 집일도 끝이 나고 했으니, 하긴 돌아가봐야 일을 또 시작해야 할 게고. 일을 시작하다니? 고방을 더 크게 지어놨으니 그걸 채워야 할 거 아닙니까? 아직은 용정 장이 시원찮으니 이번에는 두도구 쪽으 로 가서 쳐와야겠어요. 은씨는 마음속으로 셈을 놔보듯 아무말이 없다. 그새 거리는 실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상은 우산을 빌어 쓰고 복지곡물상을 나섰다. 비안개에 젖어서 집들이 나지막해 보였고 인적이 뜸해진 장거리였다. 지게꾼이 가게 처 마 밑에 팔짱을 끼고 서서 비를 바라본다. 발가락이 내비친 꿰진 짚세기, 맨발 등에 빗물이 튀기고 있다. 가게 안에서는 낮술을 마시는 술꾼들이 맥빠지게 수심가를 부르고 있고 주모는 커다란 주머니를 옆구리 쪽으로 밀 어붙이며 주머니 끈을 여미고 있다. 우장 입은 사내가 지나간다. 갈모는 썼으나 비를 맞으며 늙은이가 자나간 다. 제비 한 마리가 길바닥을 거슬러오르고 또 되풀이 거슬러오르고 하며 날아간다. 사방은 음산하고 하늘은 더욱 낮아지고 빗발도 굵어진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 방향을 따라 빗줄기는 흩어지면서 땅바닥에 물보라가 일곤 한다. 지이미! 거적을 뒤집어쓴 거지가 걸음을 빨리하며 욕설이다. 이보오! 김씨! 김씨 앙입매? 닝닝거리며 꿀벌 같은 목소리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우산을 받은 채 길상이 돌아보지 않고 가노라니 귀에 익 은 목소리다. 우산을 받은 채 길상이 돌아보지 않고 가노라니 잡화상 앞에 있던 화심이 쫓아온다. 팔짝팔짝 빗 물을 튀기며 달려오더니 우산속으로 홀랑 들어선다. 앙이 귀먹었슴? 주먹으로 옆구리를 쿡 찌른다. 길상은 걸음을 멈추고 몸 전체를 화심이 쪽으로 돌린다. 어째 코끝으 볼 수 없슴매까? 길거리에서 왜 이러지? 엄격한 눈빛이다. 화났슴둥? 길거리서 이러지 말어. 싫슴? 그래 싫다. 화장기 없는 화심이 얼굴은 무쪽 같다. 부숭한 눈두덩에 가려진 눈은 조금맣고 코도 조그맣고 눈썹은 숫제 밀 어놓은 듯했다. 따라오면 물구덕에 처박아버릴테니. 길상은 몸을 돌리고 걷기 시작한다. 쳇! 하다가 화심이는 사람으 괄시 말라이. 했으니 따라오지는 않는다. 길상은 몇 군데 들를 곳이 있었으나 여관에 가서 낮잠이나 자니. 여관 쪽으로 발길을 옮겨놓는다. 여관 앞에까지 갔을 때다. 대문 옆에, 그러니까 그곳은 처마 밑이었는데 계집 아이 하나가 벽 쪽에 등을 바싹 붙이고 앉아 있었다. 낙수에 패여 땅이 움푹한 곳에 괴다가 흐르곤 하는 빗물 에 연방 생기고 꺼지고 하며 흐름을 따라가는 거품을 계집아이가 손가락끝으로 지우고, 지우곤 하는 것이다. 귀밑머리를 쭝쭝 땋아 뒷머리와 한묶음이 된 노르스름한 머리털이 축축히 젖어 있다. 계집아이는 우산을 두드 리는 빗소리에 눈을 들다가 어른의 구둣발을 보고 차츰차츰 고개를 처울린다. 뉘한테 야단을 맞았는지 눈물자 국이 남아 있다. 옥아? ... 뭐 하고 있니? 아주방이. 오냐. 어째 내 이름으 알지비? 길상은 빙그레 웃는다. 옥이는 아주방일 모르겠어? 응?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눈치다. 하기는 그때 옥이 눈에는 먹을 것 이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잘 아는데도? 무시기, 어찌 알지바? 옥인 용정애서 살았지? 응, 그래 나 용정. 갑자기 아이는 기운을 얻은 듯 눈이 활발해진다. 옥이 엄마는 바느질하시고, 아주방인 뉘기야? 옥이는 발딱 일어선다. 날 따라오면 알으켜준다. 어디메? 맛있는 것도 사주고 얘기도 해주고, 우리 어망이는 어찌구서리? 아주방이도 여기 있는걸, 여관을 손가락질한다. 맛있는 것 먹고 함께 돌아오는 거야. 으응... 하지만, 망설인다. 자라, 아주방이가 안고 갈 테다. 신발은 벗고, 아주방이 옷에 흙 묻으면 안 되겠지? 길상은 우산을 든 채 한 팔로 아일 안는데 옥이는 저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 안긴다. 음, 됐어. 아앙, 내 신발으, 버둥거린다. 우산을 들고 옥이 안고 아주방이 신발 들 수 없잖아? 내 나가 예쁜 꽃신 한 켤레 사주마. 앙이. 어망이한테 매맞는다 말이. 아니야. 아주방이 다 얘기하면 매 안 맞아. 길상은 그냥 걸어간다. 우리가 돌아와서 신발이 그냥 있으면 옥인 실발이 두 켤레가 되는 거야. 누가 가져가버리면... 그렇지, 누구 옥 이만한 애가 줏어 신겠지? 옥이가 꽃신 얻은 것만큼 기뻐할 것 아니겠어? 안 그래? 옥이는 비로소 안심이 된 듯 길상의 어깨를 잡는다. 따뜻한 아이의 체온과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온다. 꼭 새새끼 같구나. 하는데 바늘에나 찔린 듯 마음이 뜨끔한다. 확실히 통증이다. 분명히 육체가 느낀 아픔이다. 길상은 죽은 꾀꼬 리새끼 생각을 했던 것이다. 재작년, 지금은 화재 때문에 집 뒤의 숲은 황폐했지만 그 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완만한 언덕을 이룬 집 뒤의 숲은 소나무 전나무 느릅나무가 제법 우거져서 인가를 끼고 도는 챰새떼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새들의 좋은 보금자리였었다. 철따라 새들이 종류에는 다소 변동이 있는 듯싶었으나 변 함없이 숲에 죽치고 사는 것은 까치와 참새인 듯, 바람이 몹시 불었고 비가 억수로 내린 다음날이었던가. 길상 은 무심히 들어 넘길 수 없는 새 울음소리를 들었다. 숲에서는 노장 새들이 지저귀었으므로 새 울음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없겠는데 그 울음소리는 마치 뇌수 어느 곳에 망치질을 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한 곳에서 계속하여 우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더니 둥주리가 뒤집어졌나? 아무래도 어미 잃은 새새끼 같다. 그 울음소리를 길상은 이틀 동안이나 들었다. 바쁘게 나돌아더니다가 뒤꼍 우물가에 와서 얼굴을 씻을라치면 잊어버렸던 새 울음이 또 들려오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이따금 울었다, 사흘 되는 아침 갈상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울음소리를 따라갔더니 높이가 팔을 뻗으면 닿을 솔가지에 걸레꼴이 된 꾀꼬리 새 끼 한 마리가 앉아서 우는 것이었다. 사람이 가까이 가자 긴장을 했는지 흡사 매새끼같이 사나운 꼴이 되었다. 손에 잡힌 새는 필사적 반항을 시도했으나 며칠을 굶었음이 분명한 그에세 나부대볼만한 힘은 없었고 날으는 능력도 없었고, 다만 무섭게 큰소리로 울부 짖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끈한 온기와 앙상한 뼈의 감촉, 길상 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이놈아 그냥 있음 굶어죽어. 집으로 돌아온 길상은 횃대를 급히 만들었다. 방에 들여다놓고 새를 횃대 위에 옮기니 체념했는지 울음도 멈 추고 웅크린다 깨를 빻아오고 파리를 잡아오고, 한소동을 피웠으나 새새끼는 모이를 먹을 생각을 않는다. 길상 은 새가 하마 굶어서 기진하여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제발 먹어라 하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는 수 없이 주둥이를 열고 파리 한 마리를 밀어 넣었으나 내뱉는다. 세상에 이런 답답할 노릇이 있나.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그리 되었는지 새새끼가 주둥이를 벌리고 큰소리로 울었고 길상은 재빠르게 깨를 넣어 주었다. 그것은 참으로 한 찰나의 일치였다. 새는 연신 입을 벌리면서 모이를 받아먹기로 작정한 것 같다. 끝 내는 횃대에서 뛰어내려 무릎 위에 올라 날개를 터덜거린다. 그 날개짓은 온통 환희로, 생명의 부활로 보여졌 다. 깨를 먹여주는 길상은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다. 안 돼. 너무 많이 먹으면 굶은 속에 배탈나아. 횃대에 새를 옮겨놓고 물을 떠먹여 주었다. 그날은 온종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이튿날도 온종일 바람 이 불고 비가 내렸다. 길상은 꾀꼬리새끼에게 나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새는 문밖에서 발소리만 나도 울었 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찢어질 만큼 날개를 흔들어대며 털이 성긴 목을 길게 뽑고 길상이 가는 방향 따라 머리를 돌리며 울어대었다. 밤에는 횃대 양켠에다 상자를 쌓아놓고 그 위에 종이랑 보자기를 덮어서 어둡게 해준 뒤 길상은 혼자 남폿불 아래서 장부 정리도 하고 책도 읽곤 하는데 온 세상이 잠들고 새도 잠들고, 무료 하여 나리야? 하고 불러보면 삐옥!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리야? 삐옥! 나리야? 삐옥! 새끼새는 여치, 지렁이를 매우 좋아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던가? 길상은 밤에 초롱을 들고 여치 우는 소리를 따라 플숲을 뒤졌다. 낮에는 도약력이 굉장하던 여치도 밤에 불을 들이대면 꼼짝없이 풀잎에 매달려 있어 잡기가 수월하였다. 오래간만에 비가 개이고 해가 솟았다. 뿌옇게 햇살이 퍼지는데 뒷숲에서 고약한 괴성 이 울려왔다. 호호호- 하며 아름답게 울다가도 어떤 서슬에선지 꾀꾀 콰콰콰아- 하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내지 르는 꾀꼬리를 모르는 바 아니나 이때는 마치 여러 갈래의 소리와 소리가 서로 맞부딫쳐서 소리끼리 처참한 상처를 입으며 밀려나온 것 같은, 새끼를 찾는 울음임이 분명했다. 길상은 엄지손가락에 새끼새의 발을 올려가 지고 뒷숲으로 달려갔다. 꾀꼬리는 숲 위에 날으며 괴성을 지르고 새끼는 손가락에 앉아서 삐옥! 삐옥! 하며 울었다. 길상은 본시 있던 자리에 새끼새를 올려놓고 멀찌감치 숲속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꾀꼬리는 맴을 돌며 여전히 우는데 길상의 손가락에서 떠난 새끼는 왠지 침묵을 지킨다. 늘 암수 두 마리가 사이좋게 이 가지 저 가지로 옮겨앉으며 쾌쾌거리기도 하고 호호호오 하며 화창한 노래를 뽑기도 하더니, 한 마리는 어디로 갔는지 아마도 그 심한 소동에 꾀꼬리 일가에는 기막힌 사건이 벌어졌음이 틀림없다. 새끼를 찾아온 놈이 어미인지 아비인지 그것도 알 수 없고 다른 새끼들은 어디에 흩어졌는지 그것도 알 수 없고 꾀꼬리는 한참을 맴돌다가 새끼에게는 접근해보지도 못하고 어딘지 날아가버린다. 길상은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긴장하여 돌덩이같 이 새끼는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나리야? 라고 불러보았다. 삐삐삐욱! 삐욱! 삐삐욱! 미친 것처럼 날갯짓이다. 불쌍한 것. 널 어쩌면 좋지? 길상은 다시 손가락에 받아 옮긴다. 풀밭에 와서 내려놓고 여치를 찾아볼 생각인데 새는 불안을 느끼는지 사 흘 가까이 굶주리며 울부짖던 그 장소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디뚝디뚝 뛰어서 길상의 무릎위에 올라앉는다. 하는 수 없이 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뒤뜰로 들어오는데 서희와 마주쳤다. 새새끼를 줏어왔다면서? 네. 그냥 두면 굶어죽을 성싶어서요. 장난을 하아 들킨 소녀같이 길상은 성이 난 얼굴이었다. 큰 일거리 생겼구먼. 다음날 아침애도 꾀꼬리는 새끼를 찾아왔다. 길상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새끼를 데리고 나갔으나 결과는 마찬 가지였다. 도대체 어찌하여 새끼 한 마리만 나뭇가지에 남아 있어야 했으며 꾀꼬리가 날아가는 곳은 어디일 까? 길상은 꾀꼬리가 날아가는 하늘을 멀거니 쳐다본다. 엿새쯤 지났을 때 꾀꼬리는 새끼를 찾아오질 않았다. 새끼새는 제법 털에 윤이 나고 노랑과 검정의 빛깔도 선명해졌다. 나리야? 하고 부르면 여전히 삐욱! 하고 대 답을 했고 방을 오래 비웠다가 돌아오면 횃대에서 뛰어내려 너무 기뻐서 입을 벌린 채 울음 소리도 내지 못했 는데 참으로 열광적인 애정의 표시였다. 그런데 하나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무수한 살생을 자행하게 되는 것은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이거니와 한 마리의 꾀꼬리새끼를 키우기 위해선, 날개가 상한 한 마 리의 벌을 위해 슬퍼하던 길상도 매일 살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하찮은 미물에게조차 각기 다른 성정이 있는 것을 알았다. 여치란 놈도 그 성정이 각기 다른 성싶었다. 아주 지독히 반항하는 놈이 있었다. 새 주둥이 속에서도 결사적인 투쟁으로 먹지 못하고 내뱉는 일이 번번이 있었는데 이럴 때는 여치의 목을 비틀 수 밖에 없다. 나무아비타불! 목이 비틀린 여치를 새 입에 넣어주고 다시 극락왕생하여라. 하는 것이다. 지렁이를 꼬챙이로 자를 때도 손끝에 전해오는 생명의 꿈틀거림. 나무아비타불! 극락왕생하여라. 그러던 어느 날 길상은 김훈장한테 들렀는데 우연히 꾀꼬리새끼 얘기가 나왔었다. 거 말이 새새끼지 많이 먹어야 할게야. 온종일 어미가 물어다 먹이는 걸 보면, 원체 새란 놈은 많이 먹지, 제 몸뚱이에 비해서. 김훈장의 말을 듣고 과식시킨 것이 빌미가 되어 탈이 났다. 새는 이틀 동안을 거식을 하고 물만 받아먹더니 나중에는 횃대에 앉아있지도 못하게 기진 하였다. 결국 새는 죽고 말았 다. 길상은 새의 삶이 너무 슬프고 위로 받을 수 없어서 생명을 받지 말아라. 다시는 나지도 말고 죽지도 말아라. 그 동안 지은 업이 있다면 내가 대신 받으마. 하고 중얼거렸다. 그 후 길상은 숲속에서 쨍- 울리던 새의 울음소리가 좀처럼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새소 리만 들으면 몸이 떨렸고 한밤중에 방구석에서 구들배미 우는 소리만 들어도 아플 때의 그 작은 새 울음소리 로 착각하여 벌떡 일어나 앉곤 했다. 옥이를 안은 길상은 어떤 청요리집 앞에까지 와 있었다. 한 손으로 우산 을 접고 청요리집으로 들어선다. 구석진 옆에 가서 옥이를 내려 의자에 앉히고 자신은 맞은켠 자리에 앉는다. 옥인 이런 데 와봤어? 고개를 살랑살랑 흔듣다. 부끄럽고 조금은 겁도 나는 득 사방을 둘레둘레 돌아본다. 길상은 뭘 먹을라느냐고 물어오는 청인 사내에게 호떡 몇 개, 잡채 하나, 그리고 술을 가져다 달라 한다. 자아 옥인 호떡 먹고 아주방인 술 마시자. 아이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다가 호떡을 집어 베어문다. 길상은 술을 마시며 아이를 건너다본다. 천천히 먹어. 체하면 안 돼. 무심히 한 말이었지만 길상의 생각은 과식을 시켜 죽인 새 쪽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보고 잡 아가면 어떡하나, 사흘을 굶고 찬비를 맞으며 울부짖던 자리를 나리는 무서워하고 있다. 이대로 두면 어미는 어미대로 어쩌지 못하고 안타까울 뿐, 그랬었던 생각은 과연 순수한 염려뿐이었을까? 어미에게 돌려주기에는 서운하여 차마 그러질 못했던 마음은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을까? 산새는 산에 두어 자연의 섭리에 맡길 일이 었다. 병이 났다 하더라도 어미에게는 병에 대한 처방이 있었을 게 아니냐. 그러고 보면 살려야 한다는 마음이 죽인 결과가 되었다. 때에 따라서 애정이란 이렇게 참혹한 것일까? 길상은 술을 마시며 옥이를 바라본다. 아이 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는 길상은 힐끔힐끔 살피며 열심히 호떡을 먹는다. 배탈이 나면 어떡하나? 죽은 새와 아이가 혼돈되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옥아. 응. 이제 고만 먹구, 자아 아주방이가 고기 줄께. 호떡은 싸 달라 해서 집에 갖구 가자. 응. 아이는 미련이 남는 득 베어먹던 것을 손에 든 채 접시에 남은 것을 내려다본다. 이봐요. 예, 예. 하고 사내가 쫒아온다. 접시에 남은 호떡, 종이에 싸주시오. 서너 개 더 넣고. 예, 예. 자아 고기. 길상은 잡채 속의 고기 한 점을 집어 아이 입에 넣어준다. 아주방이. 응. 날 어찌 알지비? 어망이도 아능 기야? 알구말구. 길상은 아이가 잊고 있는 기억을 들추어내기가 싫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아이 입에 거기 한 점을 더 넣 어주며 얼버무린다. 꽃신을 사 신기고 입이 함박만큼이나 벌어진 옥이를 안고 여관에 돌아갔을 때 안주인은 의심에 찬 눈초리였고 옥이엄마는 얼굴을 붉힌다. 어망이! 이거 봅세. 꽃신이당이. 아주방이가 사주었지비. 옥이는 또랑또랑 소리를 지르며, 그러나 원망스럽게 비오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만 아니 온다면 그걸 신고 길거리에 나가서 잔뜩 뽐냈을 텐데 하고. 이튿날도 비가 내렸다. 길상은 여관 뜰에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이 비에 길이 끊어졌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시뻘건 흙탕물이 쓸고 내려가는 강물을 그려본다. 언제였었는가. 육도 천의 시뻘건 흙탕물 위로 숨바꼭질하듯 떠내려가던 바가지 한 짝이 부어오른 송장의 배로 착각이 된다. 이눔 우 자석아 송장이 다 돼가는 나를 여기 떠메다놓고 죽는 마당에 호강을 시키겠다 그 말가? 애라 아서라. 참말 로 멋대가리 없는 짓이다. 죽음 직전의 윤보 목소리다. 니는 모른다. 니는 몰라. 하늘을 쳐다보고 뫼까매귀 소 리를 들으믄서, 야 이놈아아야 방구석에서 죽는 것보담, 죽으믄서 계집 새끼 치다보믄서 애척을 못 끊는 불쌍 한 놈들보다 얼마나 홀가분하노 . 김훈장이말을 막았다. 몸에서 피비린내 땀내음이 풍겨왔으나 윤보의 눈은 맑 았고 빛이 있었다. 생원님. 입도 흙속에 들어가믄 썩어부릴 건데, 시부리는 것도 살아 있일 적의 낙이 아니겄 소? 안 그렇십니까? 아무것도 없는 기라요 저, 저것 보이소. 피냄새를 맡고 뫼까매귀가 따라 안 옵니까? 사램 이 어리석어서 겁을 내는 기라요. 참말이제, 옛적 사람들이 얼어죽은 구신 흩이불이 웬말이요, 굶어죽은 구신 배맞이 밥이 웬일이냐 하더마는 총 맞어 죽은 구신 무덤 지어 머 하겄십니까? 저 배고픈 뫼까매귀가 뜯어묵는 기이 제격 아니겄십니까? 내가 죽으면 저 까매귀놈이 파묵을 기고요. 육신이란 본시부터 그런 거 아니겄십니 까? 허허어 그거를 모른다 말입니다. 출혈이 심하여 새파래진 곰보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있었다. 길상은 추한 평소의 그 얼굴이 부처님같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따신 구들막에서 요 깔고 이불 덮고 자석들이 울고... 자석들이 울고 큰 생이에 댕그렇기 누워서... 상두가를 들으믄서 명정 공포가 바람에 펄럭이믄서 아아아, 그기 이 아닌 기라요. 육신에 속아서 사람은 죽는다꼬 생각하는 기라요. 육신을 헌옷같이 벗어부리믄 그만인데, 내 사 마, 헐헐 날아서 가는 기라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기라요. 거기 가믄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고 부재도 없고 빈자도 없고 불쌍한 과부도 없고 홀애비도 없고 부모 잃은 자석도 없고 자석잃은 부모도 없고 왜놈도 조 선놈도 없고... 그랬으믄 얼매나 좋겄고? 그라믄 나는 콧노래나 부르믄서 집이나 지을라누마요. - 천심으로 살 다가 천심으로 떠난 사람이다. 송선생은 유생들의 자결을 꽃잎이 지는 것 같고 설원의 한 마리 사슴 같다 했 으나 어찌 윤보 목수 죽음만 할까. 웃으며 갔다. 참으로 그는 의인이었다. 길상은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비를 바라보며 생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어제부터 꾀꼬리새끼의 죽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윤보 의 죽음을 생각한 것도 죽음이 가지는 동일한 뜻에서인지 모른다. 한 생명에 대한 자비와 다른 생명에 대한 잔혹, 꾀꼬리새끼를 위해 여치의 목을 비틀어 죽인 일, 이 이율배반의 근원은 어디 있으며 뭐라 설명되어질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도 양육강식의 원칙이냐? 아니다. 사랑의 이기심이냐? 아니다. 애정의 의무 냐?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선택이냐?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이 율배반의 자비와 잔혹은 영원한 우 주의 비밀이냐? 지금 애기씨는 내게 있어 한 말리의 꾀꼬리새끼란 말일까? 나는 애기씨를 위해 누구의 목을 비틀고 있는 게지? 언제가 겪었던 일이 연쇄적으로 뇌리에 떠오른다.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는데 눈에 띈 것 이 맷돌이었고 그 맷돌 밑부분에 쳐놓은 거미줄에서는 바야흐로 무서운 사투가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모기 모 양이나 모기보다는 한결 완강하고 정력적으로 생긴 날벌레와 그 날벌레보다 작은 거미 한 마리와의 싸움이었 다. 파득거리는 벌레의 날개에서 무시무시하게 큰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길상은 물 묻은 손을 뻗쳐 거미줄을 확 젖혔다. 한데 달아날 줄 알았던 거미는 몸을 움츠리고 가사 상태를 위장하면서 다리 두개를 뻗쳐 벌레를 잡고 놓질 않는다. 두 개의 다리는 흡반이 달린 문어다리 같았다. 순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증오심에서 길상은 거미를 문들어 죽이고 말았다. 날벌레는 높이높이비상하여 가버렸다. 그러나 길상의 마음은 개운치가 않았다. 목숨의 위기를 느꼈음에도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미는 그만큼 기아선당에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 면 주린 것에게서 먹이를 빼앗고 죽이기까지 했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처사였더란 말인가. 비를 바라다보면서 길상은 생각한다. 이런 경우 자신의 손길이 벌레에서 있어서 하느님이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심판은 과연 옳 았던가?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도. 비에 갇혀서 지루한 망상과 욕정에 저항해가며 길상은 사흘을 여관방에서 지냈다. 그 동안 한 일이라고는 복지곡물상에서 절반 가량의 수금을 한 것뿐, 날씨 탓인지 청진의 이씨는 오지 않았고, 날이 드는 것을 보자 길상은 떠날 채비를 차렸다. 그리고 그는 옥이네에게 돈 이십 원을 주며 어디 셋 방이라도 얻어 나가라고 이렀다. 옥이네는 여러 번 사양했으나 싼 셋방 한 얻으면 한 달은 그 돈 가지고 살 겁니다. 그 동안 바느질품이나 얻어볼 궁리를 하십시오. 월세 이삼 원이면 방 하나쯤은 넉넉히 얻을 수 있고 두 식구 끊여먹을 솥단지 등을 장만하다 하더라도 이십 원이면 한 달만 살겠는가. 옥이네로서는 만져보지 못한 큰 돈이요, 구원의 길이다. 한 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손님으 어찌 만나뵈읍습매까? 고개를 숙인 채 옥이네는 물었다. 장거리 근처에 있는 복지곡물상을 아시오? 모릅매다. 복지곡물상. 복지곡물상... 외듯 중얼거린다. 그곳으로 연락하면 됩니다.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해놓으시오. 어려운 일보다... 옥이네는 끝내 고맙다는 말을 못하고, 길상은 떠났다. 13장 법회 서희 옆의 여인의 얼굴은 실상 넓은 편이었으나 양컨 귀밑으로부터 턱끝에 이르는 선이 가늘게 좁혀졌고 아마 도 귀밑으로부터 가리마를 향해 솔밋이 접혀져 올라갔으므로 마치 은행알 같은 모양이라고나 할까. 언뜻 보기 에 얼굴은 갸름한 것 같았다. 숱이 짙은 눈썹은 그린 듯 둥글었다. 크게 쌍꺼풀이 진 눈은, 눈동자의 빛깔이 연한 데다 눈시울이 길어서 졸고 있는 것 같고, 오똑한 코는 모양이 좋았고 잔주름이 모인 입술은 작고 분홍 빛인데 젖냄새라도 풍 겨울 듯 연하다. 몸은 늘씬하게 컸다. 염주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은 길고 가늘었다. 살 결이 희뿌옇고 머리칼은 살짝 곱슬머리, 미색 순인치마, 깨끼적삼 속에는 눙이 부시게 희고 아름다운 육체가 아른거린다. 목덜이에는 부드러운 잔털이 한방향으로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알맞은 크기의 쪽머리에 감은 검 자줏빛 갑사댕기, 비취의 봉채 비녀, 말뚝잠, 귀이개, 매화잠을 꽂고 있었는데 이 값진 패물은 송병문 씨가 맏 며느리 될 규수를 위해 솜씨좋은 국자가의 청인 패물장이에게 각별히 부탁하여 만들어서 예물로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송영환의 아니요 송장환의 형수 되는 사람, 올해 스물여덟 살이며 아들 하나를 두었고 집 안에서는 다음 태기를 고대하고 있는 형편이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정구업진언』에서 「개경게」를 외우고 지금 송하고 있는 것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채고액 사리자 색불이공공불이색. 본연스님의 낮은 음성에 따라 법회에 나온 부녀들의 목소리가 향연과 함께 열려 있는 법당 문을 빠져서 절마 당으로 퍼져나간다. 아직 송진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법당 안은 휘둥그레 넓어 보인다. 붉은 인조견으로 둘러 진 불단에는 후불탱화로 금선의 흑탱 한 폭이 댕그머니 걸려 있을 뿐 협시보살은 말할 것도 없고 본존 자리도 빈 채였다. 불단향화측에 겨우 여섯 치 가량의 자그마한 관음상 일구가 모셔져 있었다. 이 관음상의 내력은 학 성에 사는 김씨 성의 한 노파가 현몽을 얻어 산 바위 밑에서 발견한 것으로 때마침 운흥사가 건립되어 보시도 나 것이라 한다. 단청도 입히지 못한 절의 외양도 내부와 다를 것 없이 휭둥그레했다. 허연 기둥 사이에 허구 처럼 열려져 있는 법당 문, 마치 흰빛의 부엉이 같은 인상이라 해서 좋을지. 용정 유지들의 회사금으로 겨우겨 우 공정이 끝났다고는 하나 제대로 사찰의 면목을 갖추려면 앞으로 신도들의 보다 많은 시주가 필요하겠다. 나흘 전 부터 절 짓는 데 힘을 쓴, 소위 돈푼이나 있다는 집안의 부녀들을 모아놓고 법회를 열게 된 것도 실 은 목적이, 절을 위해 좀더 시주해달라는 데 있었다. 본연 스님은 이목구비가 매우 훌륭하게 생겼고 몸집은 언 강했으며 법회를 계획하고 법사로 자청한만큼 경쇠나 두드리고 다니던 땡땡이중은 아니었다. 물곤 고승도 아 니요. 학승도 아니었으나 구변이 좋고 경정도 다는 읽었었다. 나이는 마흔하나, 장년이요. 내리 뜬 눈을 한번씩 들 때 눈에서는 빛이 났다. 송병문 씨의 자부 장씨를 볼 때는 더욱더 빛이 났다. 지혜가 아니요. 번뇌였다 하 더라도, 하여간 눈에 광채가 많은 것만은 확실하다. 반야심경을 외는 동안 분단에는 메가 지어 올려지고 과일 한 접시가 올랐다. 그리고 목탁소리가 멎으면서 불경 외는 소리도 멎는다. 목탁을 한곁에 앉아서 본연스님은 돌아서서 반가부좌하고 경상 앞에 앉아서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을 경상위에 펼쳤다. 「석안심관법」을 쭉 읽어나가던 본연은 경문 해석으로 들어간다. 대저, 일체중생 모든 무리들 알로 낳은 것이든지, 태로 낳은 것이든지, 습기로 낳은 것이든지, 위탁함이 없이 홀연히 낳은 것이든지, 빛이 없는 것이든지, 생각이 있고 생각이 없는 것이든지, 혹은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이든지, 무릇 목숨 있는 모든 것을 나는 무여열반에 들어가게 하야 멸도 하나니 그러나 무량하고 무수하며 무애한 중생을 열반으로 들어가게 하되 실은 누구 하나 멸도 얻는 자 없으니 이 어찌 된 연고이뇨. 수보리여. 만일 정사가 살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켰다한다면 벌써 그는 정사라 할 수 없느니라. 그것은 또 왜 그런고 하니 수보리여 , 누구든 아상 즉 살아 있다는 생각, 중생상 즉 어느 하나라는 생각, 수자상 내가 한 사람이라는 생각, 이런 생각을 일으켰다면 벌써 정사라 할 수 없기 때문이라. 이렇게 세존께서 말씀하였는 데, 정사의 길이 대각의 지혜를 구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거늘 무량 무수 무애한 중생을 어찌 다 제도할 것이며 제도치 못할 시는 정사라 할수 없으므로 중생을 제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한 수보리에 대한 세존의 말씀이오. 하다가 본연스님은 소리를 높였다. 일체중생아! 어디 있느냐! 망상으로 있는 것이라! 십이 망상이 어디 있느뇨! 십이 망상은 본래 공한 것이어늘, 망상으로 있는 중생을 어찌 있다 하느뇨! 만법도 무명의 그림자이어 늘 하물며 천지간에 무엇이 있다 하느뇨! 음성은 다시 낮아진다. 옛날 천축국에서 선지를 심기 위하여 동쪽으로 오신 달마대사께서 숭산 소림사 석굴에 구 년 동안을 면벽하고 계실 무렵, 후에 중국 선종의 이조가 되신 혜가가 찾아와서 달마대사에게 참구 하였습니다. 이 혜가라는 사람 도 『열반경』을 읽고 견성 했었다는 사람이었소. 그러나 견성한다고 해도 완전한 것이 못 되는 수도 있고 해 서 혜가는 견딜심 있게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돌아보지를 아니하더라 그 말씀이오. 그때 마침 눈이 내렸는데 혜가가 서 있는 눈이 오고 또 와서 쌓여 가슴팍까지 차올랐으나 여전히 달마대사는 돌아보지 아니했다는 것이었소. 그래 혜가가 칼로 제 한 팔을 자르니 그때야 비로소 돌아보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랍 니다. 혜가는 저의 마음이 편치 않으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한즉 달마대사는 손을 쑥 내밀며 마음을 내어주게, 그러면 편안하게 해주리라. 혜가는 마음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 더랍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 있습니까? 서희는 본연스님의 설법을 귀로는 듣되 마음은 오불관언이었다.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알아듣는지 어쩐지 송병 문 씨의 자부 장씨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었다. 서희는 그 여인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본다. 법회 에 모인 여인들은 모두 이십 명 가량, 육십대의 안늙은이가 서너 명, 대 부분이 사십대의 중년층이었고 삼십대 아래가 네댓 명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서희다. 나이가 어리다 뿐인가. 처녀라고는 혼자였다. 불교에 독실했던 할머니에 대한 사모와 어릴 적에 가마 타고 다니던 절에 대한 향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 나 아직은 처녀의 몸으로 무리를 해서까지 법회에 나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내심 서희는 본연을 존경하지 않 았고 땡땡이중을 조금 면한 정도로밖에는 생각지 않아, 설법에는 흥미가 없었다. 다만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기 위해 사람 모이는 장소에 나왔을 뿐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친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서희는 먼 앞 날의 계획을 위해, 일본 영사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최기남과 법회에 나올 것을 권유하러 온 최기남의 처로 부터 호의까지는 몰라도 악감은 사지 않게 처신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이용할 일이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하간 법회에 나온 서희는 주변에 대하여 겉으론 무관심하였다. 쳐다보거나 말거나 수군 거리거나 말거나, 여전히 강한 자긍심과 어릴 적부터 익혀온 당당하고 의젓한 언행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가. 짊어지고 온 문별도 문별이려니와, 타고난 미모도 미모려니와, 사람들은 무엇보다 이미 거상으로 군림하게 된 그의 부력을 두려워했고 그들로서는 상상 할 수 없는, 대담하고 결단성에 넘쳐 보이는 그 저력에 한풀 꺾이고 마는 성싶었다. 시샘을 한다거나 허물을 찾는다 하기에는 여러 면마에 영 동떨어진 인물이긴 했다. 서희는 회 색에 가까운 갈매빛 치마에 흰 은조사 깨끼적삼, 수수한 차림새였고 화장기도 전혀 없는 얼굴이었지만 사람들 속에서 두드러지기로는 넓고 훤하게 트인 이마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란히 앉은 송병문 씨의 자부 장씨와 서희 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장씨는 서희같이 이목구비가 깎은 듯단정하고 윤곽이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운 여자는 아니었다. 서희같이 의엄과 자부에 가득 찬 모습도 아니었다. 총명함이 눈빛 속에 여실한 그런 여자도 아니었 다. 어딘지 얼되고 멍청이 같았는데 매력이랄까, 어리석으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흘리는 것 같은 미묘한 것이 있다. 진득진득하면서도 불쾌하지 않고 전혀 자기 의지를 가지지 않은 허한 구석이 있는 여자. 이 여자는 집안에서 이부사댁 서장님을 더러 만날까? 만나면 서로 얘기를 주고받을까? 송씨네댁은 개화군이라 서 내외를 아니 하는지도 모르지. 그러면 내가 법회에 나온다는 말쯤, 이 여인네는 인사치레 삼아 얘길 했을지 도... 이상현을 생각할 때면 서희 마음에는 분통이 치솟는다. 불이 난 뒤 집을 잣고 새 집으로 이사를 하고, 그런데 도 상현은 그 동안 여전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서희는 옹졸한 위인 같으니라구 하며 마음속으로 경 멸을 했으나 무시하는 마음은 잠시였고 매일 투지에 가득 차서 상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자존심을 빡빡 긁 어놓은 사내, 나타나기만 하면 내가 받은 상처의 열 배 스무 배로 갚아 주리라, 서희의 기다림은 순전히 그 보 복을 위한 정열로써 지탱되어 있었다. 때로는 자기 처지가 그러하니 애써 피하는 거라고 자위를 해보기도 했 으나 그런 이해심보다 노상 앞질러 달아나는 것은 자기 위주의 철저한 이기심이었다. 설혹 내가 군자금을 거절했기로, 독립지사들을 좀 비방했기로 어찌, 내 사정을 몰라주는 거지? 어떻게 해서 하 등을 떠나왔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도 그럴 수 있어? 천지간에 누가 있다고? 한이 맺히고 맺힌 나를, 산 설고 물 설은 이곳까지 함께 온 정리만으로도 그럴 수는 없을 텐데, 난 하동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살 을 찢고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고초를 겪는 한이 있어도 나는 내가 세운 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내 살이 찢고 내 뼈를 깎고 내 피를 말리던 원수를 어찌 꿈속엔들 잊으리! 서희 눈앞에는 빠져 죽으려고 튀어갔었던 별당의 연못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패악을 부리며 덤벼들던 홍씨 얼 굴이 떠오르고 반들반들 윤이 나고 살이 찐 조준구, 꼽추도령 병수 모습이 떠오른다. 내 원수를 갚기 위해선 무슨 짓인들 못할까보냐. 삭풍이 몰아치는 이 만주 벌판에서까지 와가지고 그래 독립운동에 부화뇌동하여 고 행으로 돌아 갈 수 없는 몸이 될 수는 없지. 그럴 수는 없어. 내 넋을 이곳에 묻을 수는 없단 말이야!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내 친일인들 아니 할 손가? 아암요. 이부사댁 서방님, 친일과 절에다가 나는 시주를 했소. 그래서 어떻다는 게지요? 내 돈을 악전이라구요? 그렇구 말구요. 우리 조상님네는 이부사댁 조상님네처럼 청 백리는 아니었더란 말씀 못 들으셨소? 악전이면 어떻고 친일파면 어떻소? 내 일념은 오로지 잃은 최참판댁을 찾는 일이오. 원수를 갚는 일이오. 태산보다도 크고 바다보다 깊은 이 내 원한을 풀지 못한다면 나는 죽은 목 숨이오. 당신네들은 싸우시오. 나는 이 손톱 마디마디에 피를 흘리며 기어서라도 돌아가야 할 사람이오. 왜인 들이 그리 쉽게 물러갈 성싶으오? 내 여자의 기각으로도 그런 어려운 일일 게요. 낸들 왜국이 망해 거꾸러진 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조준구를, 그 계빈을 사도거리에 끌어내어 내 원한의 비수를 꽂는다면 오죽이나 좋겠 소? 그러나 그것은 하시 세월이오. 나는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소. 내 생전 내 눈으로, 그렇소. 나는 일각이 여 삼추요. 내가 죽지 못한 이유가 뭐였지요? 이곳 수천 리 타국에서까지 온 이유가 뭐였느냐 말씀이오. 내 돈이 아까워 군자금을 아니 낸 것 아니었소. 당신네들에게 협력을 한다면 나는 내 희망을 버려야 하는 게요. 나는 원수의 힘을 빌어 원수를 칠 것이오. 생각해보시오. 기백, 기천의 군병에다 여인네들 비녀 가락지나 뽑아서 마 련한 군자금으로 왜군을 치겠다는 생각, 그런 마음일 뿐이오. 애국심을 뿐이오. 그리고 결국엔 헛된 꿈일 뿐이 오. 나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했을 뿐이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른바 내가 써야 할 군자 금을 마련하는 일이오. 충분히 마련되는 그날 나는 돌아갈 것이오. 그리고 싸울 것이오. 내 원수하고, 섬진강 강가에 뿌린 눈물을, 내 자신에게 한 맹세를 나는 잊지 않을 것이오. 이 원을 위해 서방님을 잊어야 한다면 내 골백번이라도 잊으리다. .. 본연스님은 『금강반야경』을 읽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서희는 자신이 결심한 대로 처신할 것을 믿어 의심한 일이 없다. 상현과의 애정의 갈등에 있어서도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이냐, 그 해답 은 이미 작성된 바이었고 수정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그 접에 있어서도 서희는 자기 결단에 의심을 품은 일 이 없다. 설사 상현이 이성을 잃고 결사적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서희는 결코 그와는 인연을 맺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땅속에 뿌리를 박은 바위만큼 움직일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서희는 자체심을 잃지 않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뻗대어보는 상현이 괘씸한 것이다. 정사는 어떤 것에 사로잡혀 보시를 하면 아니 되느니, 색. 성, 향. 미. 촉. 법. 이 육진에 주하여 보시하지 말지 어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정사가 자취를 남지고자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보시를 하지 않으면 아 니 되느니 그는 왜 그런고 하니 수보리여, 정사가 생각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보시를 하면 그 공덕이 쌓이고 쌓여서 쉬이 헤아리지 못하리라. 수보리여, 어찌 생각하느뇨. 동방 허공의 양을 가히 헤아리겠느뇨? 강설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대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우리가 흔인을 못하는 이유는 그대에게 있고 내게 있는 게 아니다. 하니 그 보상은 그대가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나와 같이 겨루려 하는가? 서희의 생각은 바로 것이었다. 굳게 지키는 성이라 하여 어찌 창을 들고 한번 휘둘러보려 하지도 않 는냐? 휘둘러보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아리숭한 태도만 취하는 상현이 노여운 것이다. 휘두르고 달려드는 창을 서희는 분질러버림으로써 애정을 확인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남겨놓고 끝장을 내고 싶은 것이다. 서희는 그러한 자신의 욕망을 깊은 애정으로 믿고 있었다. 삼륜공적 다시 말하면은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다. 그러니 시자, 수자, 보시, 이 삼륜공적에 생각이 사로 잡히는 한에 있어서는 결코 공덕이 아니 되고 정사도 될 수 없다 그 말씀이오... 법희가 끝나기는 해가 서산에 아슴아슴 떨어지려 할 무렵이었다. 본연스님은 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흐르는 땀 을 닦았다. 법단 밖으로 나온 일동 속에서 스님, 수고하시었소. 까무잡잡하게 생긴 최기남의 처가 본연 가까이 다가와 합장하고 말하였다. 본연의 눈은 여인네들과 어울려 어 정쩡하게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는 장씨부인 목덜미에 가서 꽂힌다. 관골쪽이 점을 찍은 듯 붉어지는가 싶더 니 고개를 숙인다. 스님. 예 우린 여자라 그런지 모르지만 스님 설법이 좀 어려운 것 같소. 소승도 그러하거늘. 하고 본연은 숙였던 얼굴을 들며 애매하게 웃는다. 불법은 참으로 쉽고도 어렵고... 구만 리 밖인 듯, 그러나 가까운 곳에 있는 듯도 하오. 날로 짓는 게 죄업인데 스님, 이래가지고 이 중생이 극락왕생하겠소? 최기남의 처는 거무죽죽한 손을 들 어 입을 가리고 웃는다. 지옥엘 가니 중들도 적잖게 와 있더라 하더이다. 파계승이겠지요. 여자는 또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호호 하고 웃는다. 파계승이든... 하긴 불제자들이 중 보고 젤에 오시오? 부처님 뵈러 오시는 게지요. 그러니 부지런히 공덕을 쌓 고 차생에선 사람으로 태어나지 마십시오. 공덕을 쌓는 일이 쉽지 않으니. 소승은 최주사 양주분만 믿고 있소이다. 여러 신도들의 신공으로 이만큼이나 절이 모양을 갖추기는 했소이다 만 아직 본존도 뫼시지 못하고 있는 처지이니, 여러분께서 좀더 분발을 해주셔야겠소. 그야 기왕지사, 중도페지할 수는 없는 일이고, 이 중생 신발이 닳게 생겼소. 최기남의 처가 사설을 끝냈을 때 절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좌가 빗자루를 들고 서성대고 있을 뿐이었다. 작별 인사를 한 최기남의 처가 급한 걸음으로 뒤떨어져가고 있는 서희와 장씨 그리고 해가 져서 쓰지 않게 된 양산을 들고 그들 뒤를 따라가는 새침이, 일행들 가까이까지 간다. 아이구 숨차라. 장씨가 돌아본다. 새침이는 뒤로 처지고 세 사람은 서희를 중심해서 나란이 걸어간다. 걷는 도중 최기남의 처 는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았다. 과히 밉잖은 말솜씨로 절의 사정이 이러저러하다는, 이미 알고 있는 일을 누누 이 설명하고 나서 공든 탑이 무너지겠느냐는 말을 되풀이해가며 시주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장씨는 열심히 듣 는 것 같았고 서희는 들은척만척 걷고 있었다. 아무튼 두 분 젊은이들은 꽃같이 고우시니, 그것만으로도 남보다 많은 복락을 누리는 셈인데 그러니 한번 더 크게 선심쓰시오. 차생에 가서도 부귀영화를 누리게 말이오. 아이구 참 내 또 얘길 해야겠으니 그럼 천천히들 오시오. 최기남의 처는 부지런히 달려간다. 부인은 어떠시오? 서희는 밑도끝도 없이 물었다. 예? 집안에서 잘에 나오시는 일을 싫어들 안 하시나요? 예... 돌아가신 시어머님께서 불교를 믿으셨어요. 그래서, 하지만 되련님은 싫으시겠지요. 내색은 아니 하시지, 송선생께서는 그럼 야소교를 믿으시나요? 아직은 그렇지만 야소교를 믿으실 생각은 하시는 모양이에요. 학교 일 땜에 그런가 보지요? 나는 잘 모르지만, 되련님은 학교 일밖엔 모르시거든요. 얘기를 하며 내려가는데 이편을 향해 올라오는 남자 모습이 서희 눈에 뛴다. 이상현이다. 그쪽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지만 이편을 보기론 그쪽이 먼저인 듯 벌써 십분 의식하고 있는 걸음걸이다. 설희의 시선이 강하게 쏠려 있는데 아이 이선생님이 오시네요. 장씨의 음성이 한결 높고 들뜬다. 그 목소리가 기회였었는지 상현은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당황해하는 듯했으 나 어색하다. 이렇게 두 분이 함께 웬일이시죠? 상현이 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왔다. 법회에 갔다오는 길이에요. 장씨는 여전히 음성을 높였다. 신 눈시울이 여러 번 깜박거린다. 네, 그러세요? 오래간만입니다. 상현은 새삼스럽게 서희를 향해 인사를 했다. 네 그란 이선생께서도 별고 없으셨어요? 쳔연스럽게 평서 서방님이라 하던 것을 이선생이라고 달리 부르며 서희는 말했다. 이사를 하셨다지요. 네. 한번 가뵌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할 일 없이 바빠서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시오. 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용서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겉으론 예사롭게 주고받는 말이었으나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감정의 대결이 팽팽하다. 그들은 예사로움을 꾸미는 데 온 힘을 다하였으므로 옆에 장씨가 있다는 것은 이미 잊었다. 눈치가 빠르지 못한 장씨도 어쩐지 어색하여 우물쭈물하다가, 입속으로 먼저 간다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떳으나 그들은 미처 인사치례할 겨를 이 없다. 어느 쪽이든 잡아당긴 고삐를 늦추어야지, 한데 별안간 서희의 쪽에서 고삐를 확 잡아채다가는 어처 구니없이 놓아버린다. 꼼짝않는 중에 그것은 서로가 의식할 수 있는 역력한 행동이었다. 하시는 일 없이 바쁠 수도 있습니까? ... 그는 그렇고 의논을 좀 드릴 일이 있습니다만, ... 당혹한 기대와 기쁨이 얽혀들며 상현의 얼굴은 균형을 잃는다.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의 서방님으로서는 역 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혼란이며 서희가 그쯤 나오고 보니 자신이 이겼다는 기분보다 왠지 졌다는 생각마 저 들고 균형을 잃은 얼굴이 이그러지기까지 한다. 저의 집까지, 어려우시겠지만 한번 와주실 수 없겠어요? 네, 가, 가지요. 내일이 일요일이니까?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데 이번에는 서희의 얼굴이 벌개진다. 분통이 터져서 그러는 것 같다. 서희가 발길 을 옮기자 상현은 휘청거리듯 길을 비켜준다. 서희는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고 양산을 든 새침이 멍하 니 서 있는 상현을 돌아보다가 얼른 서희를 따라간다. 제에기! 오라가라 해놓고서, 왜 자기 편에서 화를 내는 거지! 절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온 상현은 풀밭에 다리를 뻗고 앉는다. 앉은 채 돌을 주워 팔매질을 한다. 또 하고 또 팔매질을 하는데 얼굴은 츰 어두워진다. 숲속에도 어둠이 묻어온다. 절에서 돌아온 서희는 저녁을 먹 고 대청에 나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서희의 얼굴도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차피 어느때든 해 결은 해야 할 일이었어. 놀라겠지. 노발대발하겠지. 그러나 이미 벌써부터 작정해온 일이 아냐? 서희는 부채질 을 멈춘다. 생모 별당아씨를 문득 생각했던 것이다. 십여 년 동안 서희는 어머니 생각을 한 일이 별로 없다. 그것은 의식적인 회피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생각이 떠오르다니, 왜 갑자기 기억에서 지워버린 어머니 를 생각했는가.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며 들어섰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허리를 깊이 굽히며 절을 한다. 어서 올라오시오. 낡아서 갈색으로 변해버린 흰 가죽신을 신돌 옆에 벗어놓고 여자 발처럼 작은 공노인의 버선발이 조심스럽게 올라선다. 용정 바닥에서 젤 먼저 지은 집입니다. 애기씨 낙성이 되어 이사한 지 보름이나 된 집을 새삼스럽게 두러보며 공노인은 스스럽지 않게 웃는다. 하나 아직은 가게 일이 남아 있지 않소. 기와가 올라갔으니 불원간 일이 끝나겠지요. 이번에는 길상이가 욕을 많이 봤습니다. 길상이가 아니 하면 누가 하겠소. 그는 그렇습니다. 비굴하지 않고 자기 분수를 지키며 않아 있는 공노인을 바라보다가 서희가 물었다. 그래 어인 일로 오시었소. 예. 공노인은 입맛을 한번 다시고 나서 용정의 형편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색이 있어서 한말씀 여쭈어볼까 하고 왔습니다. 이상하게 돌아가다니요. 예. 좀 형편이 어수선합니다. 혹 애기씨께서는 들으신 일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는. ... 지금 일본 영사관에서는 뭐 구제회라 하는지. 그런 거를 맨들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그 얘기라면 나도 들은 바가 있소. 예. 그래서. 뭐, 이재민들의 땅을 잡고 집 지을 돈을 빌려준다는 그런 얘기 아니든가요? 예. 그렇습니다. 아직은 결정을 본 거는 아닌 모양이나, 결국 왜놈들의 빤히 들여다보이는 시꺼먼 마음보 아니 겠습니까? ... 저네들 말로는 집을 태우고 돈이 없어서 집을 못 짓게 되는 사람들의 형편을 기화로 상부국에서는 헐값으로 땅을 사들일 것인즉 그렇게 되면 용정의 조선 사람들이 줄게 될 것이고 청인들이 판을 칠 것이니 미리 그런 일이 없도록 손을 쓰자 그러겠는데 멀쩡한 남의 땅을 치고 들어와서 도적해 먹은 놈들이 그런 인심 쓸리는 없 고 항상 그놈들의 수작이란 입에 발린 말로써 시작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에는 청국 사람들을 대신해서 저희들이 판을 치자는 그 심보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서희는 잠자코 듣기만 한다. 설사 땅을 잡혀가지고 돈푼이나 얻어서 그 돈으로 집을 짓는다하더라도 대개가 모두 빚을못 갚을 거하는 바로 그 점을 알고 영사관 놈들이 일을 꾸미는 것인데, 아 빚을 못 갚으면 땅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렇잖애도 벌 써부터 왜놈들은 이곳에다가 저희들 세력을 심으려고 조선놈의 앞잽이들을 내세워 요지를 손에 넣으려고 획책 을 해왔던 터이고, 우리가 힘이 부쳐서 잃은 나라를 되 찾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원수는 왜놈이고 보면 안 그 렇습니까? 애기씨. 초가삼간 다 타도 빈대 타 빈대 타 죽는 게 시원하다는 속담이 있듯이 청국 사람들한테 팔았음 팔았지, 이치가 안 그렇습니까. 그러나 사람들 마음이란 파는 것보담은 우선 빚을 쓸려 하는 게고 나중 일이야 어찌 되든지간에 돈이나 빌려놓고, 때 묻은 고장에서, 되도록이면 뜨고 싶지 않은 게지요. 상부국에 팔 든 왜인들한테 잡히든 결과는 피장파장인데도 말입니다. 빙빙 돌려가면서 하는 말에 짜증이 난 서희는 그래서 공노인은 어떻게 하겠다는 게요. 결론을 재촉한다. 예.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땅을 사더라도 조선 사람이 사야 하고 땅을 잡고 돈을 빌려주더라도 조선 사람이 빌려주는 게 젤 좋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입니다. 음... 하지만 일본 영사관에서 꾸미고 있는 일이라면 그네들 정부에서나 또는 은행에서 돈이 나올 터인데 이곳 조선 사람들이 무슨 수로 그들과 겨주며 감당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게 좋겠다, 그 말씀입니다. 뭐 제가 애기씨한테 선심을 써 주십사. 그런 뜻으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왕이면 왜인들보다는 조선 사람들이 땅이든 돈이든 틀어쥐고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이지여. 앞으론 땅값이 오르게 마련일 게고, 이자라는 것도 딱 정해져 잇는 거니까 장사보 담 못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대신 손해보는 일은 없고 빚 쓴 사람들한테는 못할 짓이지마는 빚을 못 갚 을 경우는 잡은 땅이 있으니, 하기는 어차피 어렵게 된 사람들, 같은 조건이라면 쓰는 사람도 같은 조선 사람 끼리라야 밈도 놓일 게구 말입니다. 글쎄... 그러니까 아무래도. 하는데 서희는 말을 막는다. 공노인의 뜻은 나도 알 말하오. 그러나 좀더 두고 생각해보아야 겠소. 그, 그야 그렇습지요. 당장에야 어디. 길상이도 회령 가고 없으니. 공노인은 다른 때보다 서희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느낀다. 그러나 자기 한 말에 관심이 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할꼬? 월선이 그애 일은 못을 박아놔야 하는 건데... 공노인은 물러날까 어쩔까 망설이다가 이서방이 영팔이를 따라가더니 소식이 없구만요. 달포나 됐는데, 하며 어렵게 허두를 꺼내었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농사라도 지어볼 심산인 모양입니다. 이서방이 그런 말을 하고 갔소?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마는 여기서 뭐 해먹고 살 만한 일이 있어야지요." "기왕지사 일꾼도 쓰는 형편이니 여기 있으라고 전부터 내 말해온 터인데." "사람이 고지식해놔서요. 하기는 짓던 농사니, 그 편이 그 사람한테는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 "그러나 월선이 일을 생각하면 제가 데리고 있을 생각도 여러 번 해봤습니다마는 늙어가는 처지에 얹혀살라 하지도 않을 기고." 공노인은 힐끗 서희의 기색을 살핀다. 역력하게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이다. "가게 하나 줄 터인데 하던 장살 다시 하면 되잖소. 이서방은 가더라도." 공노인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 그야 애기씨께서 그렇기만 해주신다면 가게를 차리는 밑천은 어떡허든 지가." 서희는 모인 이맛살을 펴며 "내가 월선이를 괄시할 수는 없지요." 14장 지난 얘기 "이선생."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상현은 화다닥 책을 덮어버린다. "이선생 계세요?" 방문을 열고 송장환이 오소소한 표정으로 들어온다. 방문 밖의 하늘은 별도 없는가, 새짜맣다. "책 읽고 계셨군요." "아니, 책 읽는 것도 아니오. 앉으시지요." "네." 사실 상현은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문 갔다오시는 길이오?" "네에. 다녀왔습니다." 스스로를 비웃듯 비꼬듯 말하면서 담배를 붙여문다. 운헌선생이 어제 별세하여 송장환은 상가에 다녀온 길이 다. "이선생." "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도둑놈 같은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송장환은 밑도끝도없는 말을 내뱉는다. "무슨 말씀을." 이 친구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가, 상현은 건성이다. "셋방살이 좁은 방 한 칸에 문상객들 발들여놓을 자리도 없고... 한데도 그 곳에 모인 분들은 모두 사람의 얼 굴을 한 사람들이더구먼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도깨비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말씀이오?" 또 시작하는군, 하듯 씁쓸한 낯빛으로 상현이 응답하는데 그 말은 들은 처고 않고 "해삼위에서 아드님이신 권필응씨가 오셨습디다. 그분 성함이야 오래 전부터 익히 듣고 있었으나 뵈옵기는 이 번이 처음이었소. 참 그렇지. 이선생께서는 잘 아시겠구먼." "아뇨. 나도 성함만 들었을 뿐이오." "만나뵌 일이 없었던가요? 이선생 어르신네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데도 말입니다." "만나뵌 일은 없었소. 본시 불초자식이라 이수삼 년 동안 아버님 세계에는 한치도 접근해보질 못하였소." 상현은 누구에겐지 모를 비웃음을 띤다. "그래요?... 허름한 옷차림에 찌들고 주름진 얼굴... 밀정놈들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러하셨지만 누구 보나 불운 하고 발붙일 곳 없는 유랑민 행색입디다." "연세도 상당하실걸요." "사십은 넘었겠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무서운 눈이더군요." "네?" 송장환은 방에 들어올 때처럼 오소소한 얼굴이 된다. "꺼질 줄 모르는 영혼의 불길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 눈을 나는 일찌기 본 일이 없소. 왠지 눈물이 왈칵 쏟 아질 것 같더구먼요." 상현도 권필응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들은 바는 있었다. 연해주에서 만주 일대를 누비고 다니면서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의 조직과 계책이 그의 예리하고 치밀한 두뇌로써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그가 쟁쟁하게 이름을 드날 리는 독립투사들과는 달리 어둠에 숨은 무서운 일꾼이라는 것을 아니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내 이곳에서 애국지사라는 사람들은 많이 만나기도 했었지만... 이상설 선생은 회초리같이 맵고 부러지지 않 는 성품이시고 김약연 선생은 덤쑥한 정자나무같이 믿음직스럽고 덕이 있는 분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독립 지사라는 분들을 볼 것 같으면 어딘지 오르게 속기가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 야망이 엿보이기도 하 고, 독립지사임을 코에 거는 것 같기도 하구요. 하기는 물론 훌륭하신 분들도 많기야 많지요. 그런데 권필응 씨 그분은 훌륭하다기보다 뭐라 했으면 좋을까? 허름한 옷차림 속에, 찌들고 주름진 속에 지혜와 열정과 용기 의 영롱한 구슬을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 눈은... 슬픔과 통곡과 무서운 결의와, 그럼에도 맑디맑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 "그분을 뵈오니 돌아가신 운헌선생이 더욱 훌륭한 어른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디다." "..." "도대체 이게 뭡니까? 한심스럽다는 생각뿐이오. 기름기 흐르고 허여 멀쑥한 얼굴들에 구토를 느낄 지경이오. 고대광실 높은 집에는 돼지들이 살고 있었더란 말씀이오? 저 사람은 내 재물을 축낼 사람인가? 보탤 사람인 가? 담장은 한층 높여야겠고 고방은 더 넓혀야겠고... 만 자기를 돈으로써 가치를 재보는 치사스럽고 추악한 낯빤대기들! 남이 밥 한 그릇 먹을 때 두 그릇 먹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상현은 성장환이 왜 흥분하는지 짐작이 간다. 권필응 씨를 만났기 때문만이 아니다. 아침에 뜰에서 형제가 말 다툼하는 소리를 들었다. 다투는 소리를 상현이 들었거니 생각하고 송장환도 서슴없이 마음을 내뱉는 모양이 다. "나는 면식이 없어서 조문도 못 갔지만." 울분에 찬 송장환의 심정을 외면하듯 상현은 말머리를 돌린다. 약간의 반발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서희가 왜 만나자 하는가 그 말만 생각하고 있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도 있었다." "나고 깊이는 알지 못합니다만 아버님께서 그 분을 매우 존경하셨지요. 아버님만 저리 되시지 않았더라도..." 하다가 무슨 생각이 나는지 피시시 웃는다.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성냥개비를 하 나 집어 내려다본다. 보다가 성냥개비를 분지른다. "아직 나이 덜 들어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상가에서 나온 뒤 내내 공상만 하고 왔었지요. 되지도 않을 일을 가 지고 말입니다. 사람이란 도저히 가망이 없을 때 오히려 더 많은 꿈을 꾸고 어리석게 공상을 하고 하는 모양 이오.그렇게 라도 해서 받으려 하는 심정인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에는 상현도 동감이다. 고뇌스러운 동감이었다. 서희를 두고 그칠 줄 모르게 꿈을 꾸어온 자기 자신, 가 망이 없기 때문에 밤마다 공상으로 지새워야 하는, 때론 서희를 이끌고 바람 부는 벌판을 헤메기도 하고, 때론 대안이 아득한 빙하를 건너기도 하고 상해같은 곳에, 깊숙이 묻혀 서희와 함께 난롯불 앞에서 한 겨울을 보내 기도 하고 부모와 처, 동생과 영원히 이별할 결심을 해보기도 하고 남아로서의 포부를 헌신짝처럼 버려보기도 하고- 그것은 스스로 위로받기 위한 공상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그놈의 공상이라는 게." 송장환은 또 피시시 웃는다. "만일 운헌선생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아버님께서 저리 병환에 계시지만 않았더라면, 하고요. 그러면은 이 사랑을 그 어른께 내어드려서 편안히 계시도록 뒷받침해드린다 말입니다. 그분 한 분을 위해서가 아니시요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들 몇 놈을 신교육을 받게 하는 한편 운헌선생같이 학덕이 높으신 어른의 훈도를 받게 한다 말입니다. 인물을 키우고 준열한 기상을 가꾸는, 그야말로 하늘천 따지 따위로 윗도리나 흔들어대는 서당 식말구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탄탄하게 인격을 연마한 아이들을 일본이나 상해 등지로 유학 보내오 또 다지 거든요. 그렇게 하면 참일꾼이 몇 명 돌아올 것이란 말입니다. 설령 우리 겨레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일념만으로 나라가 찾아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몇몇 열혈에 불타는 독 립투사들이 오장을 짜듯 절규한다 하여 독립이 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중구난방이지요. 질서와 계획과 준비 와 실천, 이렇게 부거 부서에서 마무리 할 일꾼이야말로... 나 같은 놈이야 어디까지나 일개 머슴 아닙니까? 장 차 일을 꾸려나갈 그네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는데 이 집 높은 대문 앞에 내가 서 있 는 게 아니겠소? 누더기 속에 쌓인 장차의 일꾼을 가르치는 선생이, 그네들 머슴으로 지처하는 내가 사는 집 대문이 왜 그리 높으냐 그 말 아니오? 이선생 웃으시오? 웃어도 좋소." "송선생 얘길 듣고 있으니 숙하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그런 농은 마시오." 송장환은 얼굴을 붉힌다. "아니지요. 개구장이 무례한이지만 유방같은 영웅을 만난다면 말입니다." 비로소 두 사람은 소리내어 웃는다. "하여간에, 사업도 중요하기야 하지요. 왜놈보다 우리 조선인들이 경제권을 잡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이거 답 답해서 어디 살겠소? 요즘 같아서는 정말 죽고 싶도록 자신이 없어져요. 내 어떻게 하든지 이곳에서나마 교육 사업을 기필코 확장하려 결심을 했으나." 얼굴을 숙이며 깊은 한숨이다. "형제지간의 의리를 끊고서라도... 되는 방법만 있으면, 그 방법이 없소. 집에 불을 지르고 강도 행위라도 하지 않는 한. 이선생이 한 지붕 밑에 계시니 하는 얘기요만 왠만하면 누워 계신 아버님께 심로는 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지요. 많이 참았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지경 에 이르렀고, 생각해보면 치가 떨립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내 말씀을 들으신 아버님은 형님만 보시면 으으으- 의살 표시하시려고 안간힘을 쓰시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아버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 토록 안타까워하시는가 뻔히 알면서도 형님도 모르는 척 세상에 자식의 도리로서 그럴 수 있겠소? 나도 불효막심한 놈이었지요. 어쩌라고 말씀도 못하시고 기둥도 못하시는 아버님 께." "너무 상심 마시오." "나는 내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소. 우둔한 놈이지요. 좀더 잽싼 성미 였더라면 내 오늘과 같은 곤경에는 빠지 지 않았을 게요. 형님 성미를 뻔히 알면서 말입니다. 학교 설립 그 당시에 한몫을 떼어주시라고 말씀드렸더라 면 아버님께서도 조절 하셨을 텐데, 이런 주제에 뭘 하겠다구." "여태까지 낙망하신 일이 없었는데 오늘밤에 왜 이러시오?" 상현은 진심에서 말했고, 진심인 만큼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으며 절망하는 송장환 이상으로 절망감에 사로잡 힌다. "이도저도 안 되면 재력 있고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에게 학굘 넘겨주겠소. 나는 권필응 씨 같은 분, 그런 분 을 따라다니며 총을 메든, 심부름꾼이 되든, 마지막까지 뻗쳐보기야 하겠지만." 오랫동안 침묵이 흐른다. 남폿불이 상현의 오른쪽 볼과 송장환의 왼쪽 볼을 비쳐주고 있다. 송장환이 상반을 구부린다. 얼굴에 그늘이 지면서 왼쪽 이마 한곁에 불빛이 미끄러진다. 성냥갑을 만지작거리는 큼직한 손. "참 아까 상가에서 김생원을 만나뵈었습니다." "거기 오셨어요?" "네 어제부터 오셔서 밤샘하시고," "근자에는 통 뵌 일이 없는데.." "이 선생 안불 묻더군요. 오늘 비로소 알았지만 정호, 그 아일 아시오?" "정호라뇨?" "얼마 전에 와서 내게 따지던 아이 말입니다." " 아, 네. 그 아이 집에 김생원이 계신다 그 말씀이지요?" "어떻게 아시었소? 이선생은 그 댁엘 가보셨던가요?" "가기는요. 도적과 선비. 그 얘기라면 김생원말고 달리 말하실 분이 없지요. 그때 그 아이 얘길 들었을 때 김 생원이 가 계신다는 농가가 바로 그 아이 집이란 것을 깨달았어요." 두 사람이 웃는데 다 맥이 쑤욱 빠진 웃음 소리다. 밤은 꽤 저물었고, 한테도 송장환은 일어서서 갈 생각을 아 니 한다. "실은 정호... 그 댁하고 묘한 일로." 하다가 얼른 성냥갑을 열고 성냥 한 개비를 꺼내어 뚝 문지른다. "정호 누님하고 혼담이 있었지요." "혼담이 있었다구요?" "네. 지금은 출가해서 훈춘에 산다던가요?" 드물게 상현의 얼굴에는 장난스런 웃음기가 돈다. 송장환의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던 것이다. "순전히 제가 혼자 좋아서, 이른바 짝사랑이었지만." "송선생도 엉뚱한 데가 있었군요." "네. 아버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소." 무안하여 말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사 년 전인가요? 집안이 어려워 그랬겠지만, 정호 누님은 나보다 하나 위인 노처녀였었지요. 미인이 라 할 수는 없지만, 비록 낡은 무명옷을 입었을망정 참 깨끗하게 보이더군요. 조용하고..." "헌데 처녀 총각이 어디서 만났기에요" "집안에서 가끔," "집안에서?" "네 바느질 솜씨가 대단했지요. 정호 누님은 그것으로 어려운 살림살이를 도우고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집에도 드나들며 일거리를 얻어가지고 하고 가져오기도 하고 줄곧 내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 "그래서 그날 정혼가 하는 아이 앞에서 쩔쩔매었군요." "정호 그애야 모르는 일이지만요 내가 그때 흥분을 했지요." "안절부절이더구먼요." "나는 정호 누님한테 장갈 들려고 했지요. 야채장사 딸이건 백정네 딸이건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땐 그렇 게 생갓했어요." "지금은?"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본인 하나에 달린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버님께 여쭈었지요. 결심은 단단한데 가슴 은 뛰고 말은 자꾸 더듬거려지고 진땀이 흐르더구먼요. 아버님은 어이가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너도 참 엉뚱한 데가 있었구나 하시는데 완연히 탐탁해하시는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시고는 한 달이 넘게 그 일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씀이 없어요. 속이 타더구먼. 다시 무릎을 끊고 앉아서 되풀이 땀을 뺏지요. 아버님은 혼사란 걸맞지 않으면 후환이 있는 법인데 하여간 매파 말이 다른 혼담이 있는 눈치더라는 게요. 뜻밖이었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자만심이 있었던 게지요. 이쪽서 말만 건내면 잠지덕지 응할 것이란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그랬던 만큼 초조해집디다. 한편으론 그런 식으로 꾸며서 나를 단념하게 하 려는 겐가 싶기도 하구요. 대뜸 장거리로 나가서 정호 어머님을 만났지요. 서로 안면이야 있는 터이고,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철없기도 하고 한편 순수하기도 했었지요.정호 어머님께서는 내 말을 들으시더니 빙긋이 웃습니다. 그리고 당자가 와서 애길 해 쓰겠는가? 어른들이 계시는데, 그쯤이니 응하는 거 아니오? 한 데 문제는 형님 때문에 뒤집어졌지요. 노발대발 매파를 불러다 놓고, 그 죄없는 매파에게 따지는 거였어요. 별 의별 말을 다 했지요. 그네들이 손가락에 불을 켜고 득천하다 하더라도 혼사는 안 된 거라구... 일이 그쯤 됐는 데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운헌선생을 통해 그 댁 내력을 알게 되었더란 말입니다. 비록 삯바느질 야채장사를 하며 이국 타향에서 명보존을 하고 살지만 지체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린 견줄 처지가 못됐던 거지요. 그리고 정호 아버님만 하더라도 연해주 방면에서 의암선생 밑에 의병장으로 활약하시다가 왜헌병에게 체포되어 총살 된 분이었소. 아버님은 몹시 당황하시며 아뿔사! 하고 무릎을 치십디다. 그러고 난 다음, 어떻게 됐는고 하니, 생각해보십시오. 돈푼이나 있다고 유세하며 그분들에게 모욕을 가한 송씨 집에서 아무리 저자세로 나가건... 처 음엔 너무 간난하였고 그런대로 아버님의 명망이 있어 정호 어머님께서는 굳이 외면하신 건 아니었지요. 뭐 부질없는 지나간 얘기요만..." 송장환은 우물쭈물 마무리면서 자신의 장광설이 부끄러운지 큼지막한 두 손으로 얼굴을 빡빡 문지른다. 술기 없는 맑은 정신으로 주절주절 늘어놓은 그의 심적 상태는 초조와 불안, 좌절의 위기에 있음이 확실했다. 형에 대한 증오심이 극도에 달해 있는 것도 짐작 할 수 있었다. "늦었군요. 이선생도 주무셔야 할 텐데." 담뱃갑을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다 말고 "이선생." "네." "내일은 일요일이고 하니 예배당에 나가보시지 않으렵니까?" "예배당엘요?" 눙이 휘둥그래진다. "별 하실 일이 없으면 말입니다." "거긴 묏 하게요?" "구경 삼아서 한번 나가보는 것도," "싫소이다." "어제 윤선생하고 약속을 했기에... 혹 이선생께서도 무료하실까 싶어서요." "야소교를 믇을 생각이슈?" 상현이 퉁명스레 물었다. "아니오, 아직은," "그럼 장치는 그러실 수 있으시다 그 말씀이오?" "못마땅하셔서 그러시오?" "못마땅하기는요. 송선생께서 알아 하실 일을." 하더니 상현은 빨끈해지며 뇌까리듯 말을 이었다. "하나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어째 야소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경박한 듯 보여지더구면요." "그야 사람 나름 아니겠소? 개다가 서양서 온 종교니까 우리 풍습에 어긋나는 접도 있을 거구요. 그럼 안녕히 주무시오." 밖에 나온 송장환은 상현이 누구를 두고 경박하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달표 전애 천진서 데려온 교사 윤이 병에 대한 상현의 반감을 느낀 때문이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의 분위기는 상당히 노골적인 것이었다. 기독교인 이라 하여 술을 퍼마시는 것에 상현은 조소를 머금었고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서희 얘기를 하며 "허, 참 그런 보물이 내게 굴러왔으면 얼마나 좋겠소? 이만하면 그리 자격이 없달 수도 없을 게고 우리 조부 님께서는," 하며 집안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상현의 비위를 건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송장환은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윤이병을 다소 철은 없으나 순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송장환은 막 자기 거쳐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별안 간 후원 쪽에서 점쟁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15장 귀국 눈이 부시게 햇볕이 쏟아지는 거리를 나섰을 때 평시와는 달리 사방은 낯이 설고 무척 복닥거리는 것 같았다. 상현은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이 생소했을 뿐 아니라 향해를 끝내고 뭍으로 올라온 뱃사람을 대하듯 호기심을 품은 눈들이 자기를 숨어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걸음을 빨리한다. 어떤 커다란 변화를 분명히 예감하면 서 그 예감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으나 한시 바삐 부딫쳐보고 싶은 초조함이 발길을 사뭇 재촉한다. 새 집 대 문 앞에 섰을 때 마당에 물을 뿌리고 있던 새침이가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쫓아나왔다. "서방님 오시오?" 집안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아가씨! 서방님 요셨습매다!" 정적이 그대로 계속되는가 싶더니 안방 문이 열리고 서희가 나타났다. 신돌 가까이까지 간 상현은 순간 무지 개를 본 것 같았다. 서희는 생수 물빛치마에 역시 생수 깨끼적삼을 입고 있었는데 적삼의 빛깔은 은은한 분홍 이다. 크고 또렷한 눈동자가 상현의 이마를 쏘아본다. "올라오시오. 고개를 숙이고 신돌 위에 산발을 벗는데 아찔함과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낀다. 무슨 연유로 별안간 절망 이 엄습해오는지 상현은 알지 못한다. 서희는 건너방 방문 곁에 그림같이 서서 상현이 방에 들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서희의 맑고 빛나는 눈은 창백한 사나이 얼굴에서 여전히 집요하게 떠나지 않았다. 상현은 방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는데 방안도 캄캄하다. 햇빛을 밟고 왔기 때문이었을까? 햇빛 탓 만은 아닌 성싶다. 황량 한 들판에 홀로 앉은 견딜 수 없는 고독감이 마음 바닥을 쿡쿡 찌른다. 안방으로 건너간 서희는 무엇을 하는 지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 바다는 어디메쯤이었을까? 갑자기 왜? 그때 생각을 왜 하는 걸까?' 의문을 풀기 도 전에 상현은 어느 덧 환상의 바다 위에 있었다. 배가 뒹굴기 시작했다. 선창을 하얀 물보라가 친다. 기관 소리, 기름 냄새가 뇌수를 건드린다. 선실메운 남녀노소의 선객들 모두 죽은 듯이 누워 있다. 뱃사람의 고함 소리, 아이 우는 소리가 먼, 먼,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상현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는다. 뉘를 굼 실 넘어서 떨어지는 배, 선창에는 다시 불보라가 흩어진다. '아아- 한배를 탔어도 서희는 천리 밖으로구나. 이 러다가 하선이라도 된다면 나는 서희를 꼭 껴안고 죽으리라.' 상현은 감았던 눈을 떴다. 서희의 창백한 얼굴이 눈 가득히 들어온다. 월선이 서희를 이끌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며 복도 쪽을 향해 나온다. 배가 뉘를 넘어설 때마다 월선이와 서희는 함께 쓰러지곤 한다. 겨우 복도 쪽을 향해 엎드린 서희는 토하는 모양이었고 월선이도 입을 악물며 서희의 들을 토닥토닥 뚜드려준다. '꼼짝 못하고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빌어먹을! 내 누이였다면... 무슨 놈의 지켜야 할 예절이 이렇게더 많단 말이냐.' 상현이 김훈장 쪽을 힐끗 쳐다보는데 길상의 눈과 부딪친다. 당황하며 길상은외면을 했으나 그 눈에는 노기가 가득 차 있었다. 서희를 바라보는 자신을 그 눈이 줄곧 지키고 있었던 것을 상현은 깨닫는다. 부산서 청진까지 하륜선을 타고 올 때의 일이었다. 잊고 있었던 일이 왜 생각이 났는지. 상현은 자기 의식 속에 길상이라는 인 물이 깊이 박혀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새침이가 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상 위에는 술잔 두 개가 놓여 있었 다. '...?' 뒷걸음질치듯 나간 새침이는 안방 앞으로 간다. 낮은 목소리로 뮌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 것 같다. 다 시 돌아온 새침이는 술잔 두 곳에 술을 부어놓고 나간다. '...?' 이윽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나면서 서희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평소 화장을 아 니 하는 서희에게는 엷은 지분 내음이 풍겨온다. 상현은 상 위의 술잔 두 개를 외면하며, "길상이는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네." 하고 서희는 단정하게 앉는다. "어딜 갔기에요." "어제 회령으로 나갔지요." "김생원께선 더러 오시오?" "아니오." "집이 훌륭합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화제는 막혀 버린다. 여전히 집안에는 인기척이 없고 한낮은 괴괴하다. 이윽고 서희는 예 기치 못한 것을 물었다. "이부사댁 서방님께서는 저의 아버님을 보신 적이 있으셔요?" "아니오." 의아해서 서희를 쳐다본다. "그러면 저의 할머님을 보신 적은?" "만나뵌 적이 있소" "어릴 적의 일이겠군요." "네. 몇 살이었던지 기억이 뚜렷하진 않지만, 아마 탈상 때였던지요." "제 아버님의 탈상 말씀이오?" "네. 어머님을 따라갔었는데 온전 세 닢을 주시던 기억이 있소." 대답은 하며너 서희가 무슨 생각에서 뜻밖의 일을 묻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긴장되었던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 는 것이다. "그러면 저의 생모의 얘기, 혹 들으신 적이 있으셔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당황하실 일 조금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분명히 있었던 일 아니겠소?" "하필이면 지금에," "어제 처음으로 저는 그 기구한 여인을 생각했답니다. 오늘날 저의 운명은 아마 그분이 정해버린 듯 싶어서 말입니다." "무슨 뜻이오?" "차차 말씀드리지요." 상현은 애써 술상에는 눈을 두지 않으려 하나 묘하게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이 술상과 서희의 얘기는 무슨 상관이 있나 싶어서 아무래도 술상이 괴이쩍다. 간도에 처음 왔을 때 상현은 서희와 한 지붕 밑에서 기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젊은 때 남녀 인만큼 서로 내외를 아니 할 수 없었다. 한방에 단 둘이 있은 적은 없었다. 한데 방문을 열어놨다고는 하지만 새침이나 길상이도 옆에 없고 빈 빈같은 정적 속에 두 사람이 마주앉은 것 도 그랬으려니와 술상까지 차려다놓은 것은 아무래도 민망스럽다. 게다가 무슨 까닭으로 기억속에서 묻어버린 생모까지를 들추어 얘기를 하는 걸까. "저의 생모, 별당아씬 돌아가셨다더군요." 말씨 뿐만 아니라 서희의 태도는 생모를 타인으로 치부한 듯 태연하다. "돌아가셨다구요?" "네. 오래 전에, 길상이가 어느 날 전해준 소식이었소." "길상이가 어떻게?" "어떤 거지가 와서 전해주고 갔답니다." "헌데." "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그 말씀이시오? 그 세상에 혈육이라곤 아무도 없는 천애고아 최서희의 처지를 설명 하기 위해서지요." "이미 아는, 일을 새삼스럽소이다." 그 말 대답은 없이, "아버님 생시 이부사댁 어른께서는 형제지간이나 진배없는 친구였습니다.그리고 제가 듣기로는 돌아가신 할머 님께서 서방님을 늘 염두에 두시고 정혼 아니 하셨다면 손녀사위를 삼으러 하셨다구요." 상현의 얼굴에 열이 오른다. "그런 연유도 연유려니와 우리는 이곳까지 함께 왔습니다. 피차의 생각이야 어떻게 다르는 저는 서방님과 연 추에 계시는 아버님을 가장 가까운 분으로 생각해왔으며 그러니 만큼 저의 처신에 대해서는 의논드릴 분이 달 리 안 계신 줄 압니다. 하오나 엄연한 남남이고 보면 어찌 속속들이 허물없이 대할 수 있겠습니까. 해서 오늘 옵시사 한 것은 의로 남매가 되어주시기를 간청하고저." "뭐라구요!" "허락하여주십시오. 서로가 남남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지켜야 할 법도가 많고," 상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누이로 생각하시고 저도 오라버니로 모시고 그러기 위해 술상을 마련하였습니다." 상현은 서희가 쐐기를 박는다고 생각했다. 아니 말뚝을 박는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이 쾅쾅 울리고 숨이 찼다. 나쁜 계집애! 나쁜 계집애! "네 좋소이다! 원하신다면 내 부족하나마 서희애기씨 오라버니가 되어드리리다. 그러면 이 술을 마시면 결의남 매가 되는 거다 그 말씀이오?" "네." 상현은 술잔을 듬썩 든다. "그럼 거기서도 술잔을 드시오!" 서희는 두 손으로 술잔을 받는다. "이 술잔은,"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이오! 하고 외치는 대신 상현은 술을 들이켠다. 잔을 비운 그는 자작하여 연거푸 술을 들 이켜는 것이다. 눈동자는 바로소 똑바르게 자리를 잡고 서희를 바라본다 "그럼 누이. 오라비한테 할 의논이란 뭣인가!" 씹어먹을 듯 증오에 찬 목소리다. 서희의 입술 빛이 순간 변한 듯 싶더니 "저의 나이 열아홉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이 수천리 타국에서 지아비 없이 홀로 지내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벅차고 어렵습니 다. 이 머리꼴리를 늘이고 다니는 것도 남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천애 고아이고 보니 제 스스로 그 일을 결정 하지 않을 수 없소." "이제는 천애고아가 아니잖소." "그러니 의논을 드리려 하는 게요." "신랑감을 이 오라비더러 구해오라 그 말이오?" "아닙니다. 이미 그 상대는 있습니다. 다만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 하니 않습니까?" 상현의 얼굴이 파아랗게 질린다. 무릎 위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가 누구요?"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다. "길상이요." "그래요?" 하다가 미친 듯이 웃어체친다. 어느 덧 기장한 서희의 얼굴도 파랗게 되어 있었다. "하하핫핫핫... 하핫핫핫... 내 그러지 않아도 누이의 신랑감을 하하핫핫... 물색하는 중이었더니 내 일전에 송장 환이 그 위인더러 서희하고 혼인하라고 귄한 일이 있었거늘 하하핫 무서워서 싫다더군 무서워서 말이오!" "뭐라 하시었소!" 순건 서희의 눈꼬리는 칼이 된다. "필경엔 종놈 계집이 될 최서희! 그 어미에 그 딸이로구려!" 술잔을 집어든 상현은 서희 얼둘을 향해 확 뿌린다. 서희 얼굴에 술이 흘러내리고 상현은 방에서 뛰쳐 나간다. 그날 밤 상현은 거쳐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디서 잠을 잤는지 학교에 나타난 그의 얼굴은 거의 죽을 상이었다. "이선생 어디 아프시오?" 송장환이 물었으나 묵묵부답니다. "어젯밤은 어딜 가시었소?" 대답이 없기론 마찬가지 였다. 하루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윤 이병이 그 사람 최서희의 신랑감으로 일등이오." 하고 중얼거린다. "네?" 되묻는 송장환의 말엔 아랑곳없이 상현은 미친 사람같이 웃는다. "송 선생 추호도 가차없이 낭만을 위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가령 국가나 민족을 위해서 말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결의를 해야 할 시기에는 우리는 사내들이니까요." "그러면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고 산다면?"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태평성세라면 모를까." "하하핫...하하핫... 이도저도 아닌 놈은 죽어야겠구먼. 아니면 공중에 붕 떠서 살아야 할까?" "그거야 어디 살았다 할 수 있소? 죽은 게지." "내 발목에 간신히 걸려 있는 가느다란 줄 한 가닥이 뭔지 아시오? 그놈의 썩어 빠진 쥐뿔만도 못한 도리라는 게요. 더러는 우직한 농사꾼들 중엔 그 놈의 도리라는 것을 기둥 삼아 구차스런 삶을 지탱하는 자들이 휠씬 많더군요." "도리라는 건 간단 명료한 것 아닙니까?" "글쎄올시다. 본시는 양반의 것이 아니었소? 한데 지키기론 상놈들이 더 열심이니 말입니다." 송장환은 완연히 불쾌한 낯빛이 된다. "더러는 도리라는 그물을 시원스럽게 걷어 버리고... 그렇지요. 보복의 정열에 몸을 태우고 그런 여자는 있구 요. 그것도 사는 하나의 방식일까요? 나는 무슨 방식을 취할까 연구해봐야겠지요 아니면 때려치워 버리던지 요." 그런 뒤 얼마 후 방학이 되었고 상현은 연주로 간다면서 부랴부랴 떠났다. 어느 날 송장환은 상현으로부터 편 지 한 장을 받았다. 그간 형에게는 신세 많이 졌소이다. 가내 두루 무고 하시 온지요. 떠날 때 말씀 드려야 했 을 것을 이 곳서 서면으로 대신하오니 용서하시오. 생은 이 곳서 곧장 고행에 돌아가기로 작정하였소. 형의 건 투를 빌며 내내 안녕하시기를. 간단한 사연이다. 송장환은 상현의 부진이 아들의 귀국을 원한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서 언제인가는 떠나리라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편지를 받고 보니 서운하고 당황해진다. 학교 일 때문 에 그러했고 이런 식으로 훌쩍 떠나 버린 그가 야속하기도 했다. '어딘지 좀 이상했는데?' 연추로 떠나기 전 상현의 모습이 떠오른다. 참식을 잊다시피 술만 마시던 모습이 병자같이 초췌한 몰골이 왠지 마음에 걸린다. 송장환은 편지를 책상 위에 놓고 담배를 붙여 물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한 더위를 찢어 발기듯 매미가 운다. 16장 불 뿜는 여름밤 나비 벽시계가 추를 흔드는 소리만 들리는데 길상은 마루끝에 옆모습을 보이며 걸터앉았고 서희는 마루 복판에 깔 아놓은 화문석위에 앉아 있었다. 그간 일처리에 대한 보고를 끝낸 길상은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길상의 옆모습만 골똘히 쳐다보고 있을 뿐 서희는 말이 없다. 시선을 느낀 길상의 얼굴이 굳어지면 굳 어질수록 굳어져가는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냐료고 서휘는 기를 쓴다. 도시 무엇을 찾아내려는 걸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물체를 만졌을 떄 확실히 손에 잡혀지는 감촉만큼 서희는 자신의 직감을 언제나 신봉한다. 내 직감이 한 번이나 빗나간 일이 있었던가? 틀림없이 길상에게 무슨 변화가 일고 있는 게야. 틀림없이 갸름한 모양의 귀를 향해 뻗어올라간 길상의 완강한 턱뼈에서 찬바람이 설렁설렁 불어오는 것을 느낀다. 응어리처럼 의혹의 덩어리가 부풀어올라 숨이 막힐 것 같다. 무슨 근거로? 이건 도시 황당한 예감이 아니냐? 그러나 내 직감은 한 번도 빗나간 일이 없었다.- 눈앞에 바닥 모를 심연이 아기리를 벌리고 잇는 것이 보인다. 꺼지지 않는 불길같이 그 오랜 집념이 심연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피 맺힌 손끄으로 차곡차곡 쌓여올린 그 숱한 계획도 잠 못 이루던 저주의 밤도 간절한 승리의 염원도 바닥 모를 심연도 꺼져들아가는 것이 보인다. 지렛대가 흔들이면서 모든 것이 와그르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길 상의 완강한 턱뼈에서 설렁설렁 불어오는 찬바람 별안간 남의 수족 노릇을 아니 하겠노라고 와쳐대는 길상의 고함이 귀청을 찢는다. 아아, 반항과 거부의 격렬한 몸짓이 보인다. '그럴리가 있나 그럴 리 없지.' 권위의 깃 털을 온통 세우고 공장새처럼 화려한 우월감과 표범처럼 표독스런 자부심을 환기시키며 발목이 묶인 길상을 눈앞에 부기위해 서희는 신앙 같은 자신의 직감에서 떨어져나가려고 맹렬히 닻줄을 감아올린다. 그럴 리가 있 나 그럴 리 없지 아암 그건이 더위에서 온 망상이니라 망상이구말구 네가 나를 떠나 어딜 산말 말이야? 너의 이십칠년의 세월은 나를 위해 있었던 거구 내가 세상에 나온 십구 년의 세월을 너는 내게 충성했었다. 더위에 서 온 망상이야. 이부사댁 서방님이 떠난 후 내 마음이 허해진 탓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어느덧 삼아올린 닻 줄은 풀어지고 확실한 종전의 사념 그 사념의 항구에 자신이 정박해 있음을 서희는 발견한다. 무엇인가가 무 너지고 있는 것이다. 기왕의 믿음이 어처구니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달아난다. 남의 수족 되기를 거부하는 길상이가 나도 내 갈길을 가야겠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길상이가 작은 주먹으론 때려 부술수 없는 거대한 운명 의 바위로 커가는 것이다. 뭇느일이 있었던가. 표면상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오히려 길상 전보다 수긋햐졌으며 공노인이 가져온 새로운 사업 계획에 대해서 강하게 의견을 내세우는 일이 없었다. 그랬었기 때 문에 의혹을 한층 짙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 사림은 가버리지 않았느냐?' 예감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속에 한 가닥 외길 같은 적막이 스며든다. '내 얼굴에 술을 끼얹고 미친 듯이 뛰어나가던 사람 아마 다시는 나타나 지 않으리 뜬구름 같은 그 사람을 놓아주고 나는 평생토록 충성하리라 믿은 이 사내를 내 곁에 두려 하였지만 설마한들 지가 내 곁에서 떠날 수 있을까? 떠날 수 있을까 겨루던 상대가 물러나버렸기에 어쩌면 갈상이는 제 마음을 단속하는지도 모르겠어 비겁해지기가 싫어서 말이야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길상이는 그럴 수 있는 사내지 아아니 뭐라고!' 순간 서희의 감정이 용수철 처럼 된다. '뭐라구? 감히 뉘하고 겨룬단 말이냐! 이 내 최서희를 두고 나가 뉘에게 겨루어? 그럴수도 있느냐?' 상하로 선명하개 그어진 돈독한 그 낡은 관념을 직 감이 몰고 온거의 공포에 가까운 예감을 비로소 떼밀어내고 때려눕힌다. 길상을 겨누었던 필사적인 촉수는 방 향을 잃는다. '내 천길 낭떠러지를 뛰어내리듯 너를 택하러 하기는 했으되 어찌 감히 너 스스로가 생심을 품 을 수 있단 말이냐? 하늘의 별을 따지 어림 반푼이나 있는 일이겠느냐! 언감생심 나를 여자로 보아? 계집으로 네눈에 보이더란 말이냐? 그래 너는 장살의 그 숱한 사연도 몰랐더란 말이냐? 내 비록 너는 천애고아로서 이 곳까지 왔다마는 양반이 아직은 썩은 무말랭이가 되진 않았어! 감히 하인의 신분로서!' 천길말길 뛴다. 그러나 어디까지 그것은 서희의 환상일 따름 실상은 바위처럼 앉아 있을 뿐이고 '어어, 나를, 이 나를 모두가 덤벼서 떡을 치는 구나 더러운 떡메로 나를 치는 구나 아아아 미치겠구나!' 상현의 신들린 것 같은 웃음 소리가 달려든다. '하하핫... 하하하핫. 내 그렇지 않아도 누이 신랑감을 하하하핫... 물색하는 중이었더니, 내 일전에 송장환이 그 위인더러 서희하고 혼인하라고 권한 일이 있었거늘, 하하하핫 무서워서 싫다더군. 무서워서 말이오!' '정말 미치겠구나!' 이마에 땀방울이 솟아나고 얼굴빛이 바래어간다. 아내가 있는 처지, 어쩔 수 없는 강을 끼고 맴을 돌면서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입히며 서로의 애정을 학대 하며 마음을 엄폐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다 할지라도 종말을 그렇게 지은 것은 잔혹한 일이었으리라. 결의남 매의 제의로써 상현의 가슴에 칼을 꽂았고 길상을 지아비로 맞이하겠노라는 말로 치명상을 주었다. 그만했으 면 발걸음을 끊음으로써 서희에게 상처를 준 그 사내에게 앙심대로 열 배 스무 배의 보복은 한 셈이다. 마지 막 내뱉고 간 상현의 독설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절망의 절규, 상처 입은 울음이겠는데 그러나 서희는 백 번 그렇게 생각이 미쳐도 터럭만큼의 위안도 받을 수가 없다. 자신의 가해 행위는 당연한 것이지만 상대의 가 해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서희는 승리가 아니라 참패였다고 생각한다. 승리가 아닌 이상 끝장은 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상현은 여전히 빚을 지워놓고 갔으며 그 빚은 반드시 받아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상현의 애정을 쟁취한 것이 된다. 보복심의 푸른 불길이 타고 있는 한 상현에의 애정은 서희 마음속에서 무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상현은 떠나고 없지 않은가. 어떻게 이 빚을 받아내리. '송장환에게, 나와 혼인하라고 권한 일이 있었다구요? 무서워서 싫다더라구요? 무서워서 싫다더라구요? 무서 워서 싫다더라구요! 그 머저리 같은, 병신 같은 작자가 말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서희는 땀을 흘리고 길상은 굳어진 채 앉아 있다. 이들 두 사람의 무거운 침묵 사이를 시계 소리만 왔다갔다 한다. 마루 기둥에 걸린 부엉이 모양의 시계는 황금빛 추를 쉴새없이 흔들고 있는 것이다. 길상은 시계소리를 들으며 들숭날숭한 이빨을 드러내어놓고 손짓발짓하며 지껄이던 청국 상인 맹서방을 생각한다. 시계는 박래품 을 좋아하는 서희가 맹서방한테 고가로 사들인 것인데 멀리 멀리서 산보다 큰 배를 타고 온 물건이며 중국 땅 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 맹서방은 그렇게 허풍을 떨었다. 실은 연해주로 해서 들어오는 러시아 상품이었 지만. 하기는 그의 허풍이라는 것도 고지식하여 새로운 물건을 가져올 때마다 매양 멀리 멀리서 산보다 큰 배 를 타고 왔다는 것이요, 중국 땅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니, 거짓말도 그 정도로 고지식하면 거짓말이 아 닐 수도 있는지, 서희는 맹서방을 다른 상인들보다 신용하는 눈치였고 그가 가져오는 물건이면 곧잘 사들였다. 화장품, 값진 향수 등을, 일 년 내내 외출이라고는 거의 없었건만 수달피 목도리, 레이스, 비단, 털로 된 것 등 여러 개 목도리를, 장갑도 가죽에서 털, 견직 제품, 모양이 새로운 것이면 사들였고 손수건 한 장도 박래품 아 닌 것은 쓰지 않는 최고급이었다. 그와 같은 습벽은 서울 육의전까지 가서 값진 청나라 비단을 끊어다가 의복 을 지어 입던 어린 시절 생활풍도의 연장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자질구레한 물건에는 집착하는 것 같은 기색도 아닌 것을 보아서는 긴장된 나날의 삭막을 견디어나가는 일종의 숨구멍 같은 것이나 아니었던지. 허영으로 보 기에는 긍지가 높은 서희였었고 가난해본 적이 없는 생활이었으니 남을 염두에 두고 사치할 리 없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사치는 서희 재력으론 별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패물 따위에 손을 대는 일이 없었으니까. 길상이 시계 소리를 들으며 새삼스럽게 맹서방을 생각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서희가 길상에게서 무엇 인가를 찾아내려고 기를 쓰는 만큼 그도 무엇인지는 모르나 서희 내면에 충만되어 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격정을 충분히 감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서희처럼 찾아내려고 기를 쓰지는 않았다. 피하 는 길을 택하여 시계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맹서방 생각을 한 것이다. 부엉이 벽시계가 시간을 알린다. 다섯 번을 쳤다. "가게는 네 개가 남았다 했던가?" 서희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딱으며 입을 떼었다. "네." "그러면 다 나가기 전에 월선의 몫을 정해주어야겠지?" "공노인 면을 봐서라도 그러셔야지요." "공노인 면을 봐?" "공노인께서 웬만했으면 부탁을 했겠습니까?" 어력게 말씀드린 거지요." "뭐라고? 누가 뉘한테 부탁을 한단 말이냐?" 길상은 마음속으로 아뿔사 하고 후회한다. "이부사댁 어른의 부탁도 거절한 나를 몰라서 하는 말이냐? 한갓 시정배의 면을 내가 뭣 땜에 봐주는 게지?" 이럴 때, 공노인의 면을 무시할 수 없다든가, 그의 공로를 일일이 열거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것을 모르는 서 희도 아니었고 어거지를 쓰기 시작한 감정을 악화시킬 뿐이다. 서희는 주려니 마음먹었다가도 상대편에서 달 라고 하면 안 주는 그런 고약한 성미의 여자였다. 안 줄 뿐만 아니라 상대를 핍박하기까지 한다. 자기 명령을 거역이라도 한 것처럼, 비럭질하고 다니는 남루한 차림의 걸인을 대하는 것처럼, 이런 서희의 성미를 다소는 알고 있는 공노인이었기에 전 날에도 월선에게 가게를 주겠느냐고 물어보진 못하고 빙빙 겉돌려 의도를 타지 했는데 그래서 서희는 짜증을 냈던 거이다. 아무튼 남이 요구를 할 경우 격렬하고 심술궂게 거절하는 서희의 심리에는 남의 것을 얻으려고만 하는 근성에 혐오를 느낀 탓만은 아닌 성싶고 노상 주기만 하는 자기 처지에 한가닥 외로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월선이한테 그 가게를 주는 게야. 그것을 똑똑히 해두어야돼. 내 할머님이 그 여자를 돌보아주셨듯이 나 도 그 여자를 돌보아주는 것뿐이야. 뉘가 감히 나한테 하라마라, 되지못하게." 길상은 침으로 입술을 축였으나 침묵한 채다. 공노인의 면을 봐서 어쩌고 했다 하여 노한 것은 일상의 서희가 그러했으니, 또 가게는 내주기로 결정했으니 깊이 개의할 것은 없고, 자기 멍령에 불응하면은 새파랗게 질려서 까무러칠 때까지 울던 어린날의 서희 모습을 길상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별당아가씨가 종적을 감춘 뒤 생긴 버릇이었다. 서희가 까무러칠 때마다 우짜노! 아이구 이 일을 우짜노! 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갈팡질팡하 던 봉순네의 모습도 떠오른다. 생모를 모욕하고 최씨 가문을 모욕했다 하여 삼수를 묶어 매질을 시켰고 칠촌 숙모뻘인 홍씨를 마굿간에서 들고 나온 채찍으로 후려치려고 했었던 서희, 그때 나이 열 살이었던가 열한 살 이었던가. 길상은 시계 소리를 들으며 맹서방 생각을 하며 서희의 터질 것 같은 격정에서 피해 있긴 했으나 기절하는 전조의 울음을 예감했던 것이다. 상현이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부사댁 이상현 서방님 - "그는 그렇고 내 일러둘 말이 있어." "..." "이서방 아낙인가 하는 그 계집 말인데." 길상은 고개를 쳐든다. "그 계집은 월선이하고 함께 들여서는 안 되겠어." 일찍이 서희는 한 번도 임이네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왜? 내가 모를까 봐서? 놀라기는 왜 놀라지?' '알고 계셨구먼요. 역시...' '모를 턱이 있겠느냐? 서방 따라오는 계집을 내 막을 이유는 없고 월선이랑 함께 살건 말건 그것도 내 상관할 바 아니었지. 허나 비록 남 주기 위해 지은 가게지만 그건 내 집이야.' '그 아낙이 어디 죄이이겠습니까?' '죄인이 아니니 하늘 밑에 얼굴을 들고 나다니지 않느냐? 그러나 그 아낙은 원수의 계집이야. 내 굳이 저주하 는 것은 아니나 그 계집을 도와줄 순 없는 일이야.' 길상은 눈길을 돌린다. "가게를 월선에게 주긴 주되, 그 일에 대해선 똑똑히 알려주어라." "설마, 염치가 있을 터인데 함께야 들겠습니까?" "하여간에 일러두어." "그건 못하겠습니다." "어째서." 서희의 입매가 뱅글뱅글 돈다. 입매가 뱅글뱅글 도는 것은 그의 부친 최치수의 모습 그대로다. "그 여자는 가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그러리라 생각하느냐?" 서희는 조소를 머금는다. "네. 이서방이 조처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 여전히 조소를 머금은 채 들었던 부채를 거칠게 놓고 서희는 일어섰다. 길상도 물러난다. 발을 걷고 방안으로 들어선 서희는 들창 밑에 놓인 자 반 길이나 되는 수틀 앞에 무릎을 펴고 앉는다. 손수건을 꺼내어 손을 닦고 수틀을 덮은 백지를 걷어 넘긴다. 연옥색 비단에 꽂은 비늘을 뽑는다. 실 한 바람을 바늘귀에 끼고, 수를 놓기 시작한다. 사군자 중의 난초 한 폭이다. 수틀은 이상현이 떠난 뒤 맨 것이며, 그것을 매었을 때 "아가씨, 이 더분 여름에 수를 놓다이 어째 그럽지요?" 새침이 눈이 휘둥그래졌고 달래오망이도 "오뉴월에는 입서엉도 앙이 꿰매잲는가? 어째 저러지비?" 하고 놀랬었다. 도무지 심상찮은 짓이었다. 그러나 서희는 꾸준히, 땀을 닦아가며 그 일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머리칼같이 가늘은 바늘을 쥔 하얀 서희의 손은 벽시계 속에서 왔다갔다하는 추만큼 정확하다. 혼란을 거듭했 던 서희의 사념은 차츰 정확한 손끝과 정확한 시계의 추처럼 정리되어간다. 길상은 해를 가늠하듯 고개를 들고 서편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 뒤뜰 우물가로 걸어간다. 새침이 송애가 우물 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소근소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새침이는 길상을 보자 당황하며 빨다 만 수건에 비누질 을 하고 송애는 돌아본다.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증오심에 가득 차서 길상을 노려본다. '...?' 후닥닥 일어서더니 치마를 터는 시늉을 하다 말고 "나 간다!" 무엇에 쫓기듯 송애는 달아난다. '...?' 길상은 송애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왜 그러느냐는 듯 새침이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새침이는 눈을 내리깐 채 수 건만 빠는 것이다. "응칠이 아직 안 왔나?" "옛꼬망." 눈을 내리깐 채 대꾸다. 그도 재빠르게 수건을 빨아가지고 가버린다. 땀이 배어 끈적한 얼굴을 씻은 길상은 거 리로 나섰다. 이상현이 연추로 떠났다는 얘기를 길상은 송장환에게 들었다. 희령으로 간 사이 상현과 서희, 두 사람에게 일 어난 사건을 전혀 모르는 길상으로서는 간다는 말 한마디 않고 떠난 것이 좀 이상했으나 개학이 되면 돌아오 려니 생각했다. 서희에게는 이부사댁 서방님이 연추로 떠나셨다더군요, 하고 말하기는 어려워 기색만 살피다가 새침이더러 애기씨는 뭘 하고 계시느냐고 물어본 적은 있었다. "수틀 매고 계십매다." "수틀을?" "옛꼬망. 평풍 수놓으시문서리, 이 더분데 어째 그러시는지 알 수 없답매." '송선생 형수씨한테 얘길 들으신 모양이로구나.' 그런 뒤 얼마를 있다가 송장환으로부터 상현에게서 편지가 왔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곳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편지의 내용도. 길상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비로소 서희와 상현의 사이에 심상찮은 일이 있었음을 눈치챘다. "어째 아기씬 밥으 앙이 드시고 수만 놓고 기시능가 모르겠음." "참말입지 별스럽당이. 어째 그러지비?" 달래오망이와 새침이 얘기를 들은 길상은 서희가 이미 장환의 형수로부터 상현이 고향으로 떠나버린 소식을 듣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길 모퉁이들 돌아서는데 홍서방과 갖바치 박서방이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진흙을 밟는 모습이 눈에 띈다. 여전히 객담을 주고 받으며, 한 사람은 킬킬대고 한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품팔 곳이 있는 한 그들의 인생은 항상 낙천인가. 길상은 그 옆을 얼른 지나친다. 지나치면서 까무러치도록 우는 대신 서희는 수틀 앞에서 이 여 름에 땀을 흘리는 것이며 순전히 그것은 독기라 생각한다. 신축한 창고 앞에까지 갔을 때 응칠이는 막 창고 문을 잠그고 있었다. "다 딜였나?" "옛꼬망." 응칠이는 돌아서며 열쇠를 길상에게 건네준다. "염서방은?" "가물덕이 아프다고," "집에 갔나?" "방금 갔소꼬망." "그러면... 응칠이 네가 내일은 회령으로 가야겠다." "회령으로 말입매까? 갔다오고서리 며칠 앙이 되잲앴음?" "밀 백 가마 은씨한테 갖다주는 게다." "날씨가 어떨랑가..." "..." "성님은 앙이 가겠습매까?" "음." "성님." "왜." "부탁은 없습매까?" 응칠이는 별안간 싱글벙글 웃는다. "무슨 부탁?" "앙이, 부탁이 있잲을까 싶어서... 지난번에 갔덩이 성님 소문 자자합대다." 길상은 우두커니 응칠이를 바라볼 뿐이다. "좋아지내는 안깐, 흐흐흐... 은씨가 꼬치꼬치 캐물으이 무시레 말으 하겠슴둥? 모르이 모른다 했지비." 나이가 길상이보다 다선 살이 아래이나 같은 처지의 총각이어서 응칠이는 공연히 신이 나는 모양이다. 한편 길상이 송애하고 좋아 지내는 게 아닐까 여겼던 것이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얻은 듯 마음이 들뜨는 것이기도 했다. 길상은 아무 대꾸 없이 돌아선다. 몇 발짝 걸어가다가 발을 멈추고. "내일, 일찍 서둘러야 해." 무안해진 응칠이, 거무튀튀한 얼굴이 부어오른다. 응칠의 말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새 수차 회령을 드나들면서 길상과 옥이네의 관계는 심상찮게 발전했다. 그런데 응칠에게 냉정한 반응을 보인 것은 왜 그랬는 지 길상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창고 앞 골목을 빠졋 길상은 장거리 넓은 길로 나섰다. 아직 장거리는 자리 가 제대로 잡혀 있지는 않았고 벽돌로 연달아 지은 십여 개 점포만이 댕그렇게 눈을 끈다. 얼마 전에 완성시 킨 서희의 소유 건물이다. 점포 뒤켠에는 방금 길상이 다녀온 목조 창고의 지풍이 점포를 넘어서 높이 솟아 있었다. 대부분이 지지부진한 공사요, 혹은 자금조달이 어려워 숫제 내팽개쳐진 빈터도 수월찮이 있는 주변 사 정이고 보면 벽돌로 쌓은 십여 개 점포에다 덩실하게 높이 솟은 창고의 완성은 단연 사방을 압도하고 선구자 처럼 거룩하게도 보인다. 그것은 또 최서희의 부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기도 했다. 점포들은 공사가 끝나기 무섭게, 적잖은 보상금과 월세인데도 계약을 끝내고 거의 세를 들었다. 곡물상을 위시하여 포목전, 잡화상, 제 수전, 농기구, 그릇전, 지전, 고깃간, 그중에서 곡물상은 두 집이었으며, 점포마다 물건이 가득가득 채워져 벌써 풍성하게 면목을 갖추고 있었다. 곡물상과 잡화상은 청진과 회령의 상인이 세들었는데 그것은 지점 비슷한 것 이었다. 자본금이 부치는 사람들은 침만 골칵골칵 삼켰지 아예 엄두를 못 내었고, 그도 그럴 것이 간도 내의 각처 장사꾼을 상대하여 도매를 하는 한편 대개가 회령 청진을 통한 무역을 겸하는 터이어서 듬쑥한 자본 없 이는 경영이 어려운 것이다. 본시 이 장소는 장거리에서 다소 빠지는 편이었는데 남 먼저 건물이 들어섰고 업 종도 고르게 짜여지게 되니 장차 장거리에서도 노른자위가 될 것이 뻔했다. 남은 네 게의 점포는 임자가 없어 서라기보다 서희 쪽에서 어떤 업종을 골라서 세를 내느냐 고려중이었던 것이다. 장거리를 지나 길상이 공노인네 객줏집으로 들어서는 데 아까 우물가에서 이상한 행동을 했던 송애와 또다시 마주쳤다. 송애는 노기 띤 눈길을 길상에게 던지더니 거친 몸짓을 하며 뒤안으로 돌아가버린다. '응칠이놈이 쓸데없이 주둥이를 놀렸구나.' 길상은 송애하고는 아슬아슬한 인연 같은 것을 생각했으나 노한 눈길과 노골적인 태도가 몹시 불쾌하다. 한때 호기심을 가져본 계집아이기는 했지만 호기심에 대한 죄스러움보다 왠지 정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길상이가?" "네." 봉놋방에서 나그네와 장기판을 벌이려던 공노인이 담뱃대를 주워들고 마루로 나왔다. "거기 앉아라." "네. 아주머니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하며 길상이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홍이에미(월선)한테 간 모양이다." 하며 부채를 밀어준다. 길상은 부채는 들지 않고 손님방에 저녁상을 날라가는 전서방을 쳐다본다. 상투머리를 동여맨, 땟국이 흐르는 수건이 너풀거린다. "아직도 바쁜 모양이제?" "그저 그렇지요. 맥이 좀 빠지는군요." "그럴 게다. 혼자 애를 썼으니," 길상이 눈치를 살핀다. "이서방은 왜 여태 안 올까요?" "그러기 말이다. 오도막이라도 하나 맨들어놓고 올랑가." 공노인은 또 다시 길상의 눈치를 살핀다. "그런데 가게는 거의 반 다 나갔을 거로?" "아직 네 개가 남았지요. 실은," 공노인의 눈빛이 초초해진다. "월선아지매한테 가려다가 이서방도 안 계시고 해서 여기 왔지요." "음." "가게가 다 나가기 전에 월선아지매더러 적당한 거로 하나 골라 옮기시라구요." "적당한 거나마나, 음 적당한 거나마나, 아무거면 어떻노?" 공노인은 마음을 놓는 동시 흥분한다. "그 장소라면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누워서 떡 먹기보다, 아암 국밥집 하기는 과남한 장소 아닌가. 하 야간에 고마운 일이다. 고마운 일이라," "다 어른께서 수골 많이 하신 덕분이지요." "내가 무슨, 내가 뭘 했다고... 따지고 보면, 나하고 애기씨를 말할 것 같으면 본시는 아무 인연이 없었다 할 수 있겠으나 내 조카딸하고의 인연이야 없었다고 할 수 없지. 내 그 전사는 다 들어서 알고 있는 기라. 홍이네 어매가 세상을 떴을 적에 장사를 지내주신 분이 지금 애기씨 할머님이라 들었고 홍이네 장사 밑천도 그 어른 이 주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람이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지. 누가 뭐라 하든 자식 없는내 처지고 보면 어디서 떨어졌든지간에 월선이는 귀하고 하나밖에 없는 내 조카딸 아닌가? 그 아이가 받은 은혜를 내가 갚는 거는 당 연지사고, 하니 내 수고가 뭐그리 대수겠나. 할 만한 일을 했다뿐이지. 그리고 여기는 남의 땅이라 우리가 서 로 도우고 합심하는 게 당연지사지. 아암 당연지사고 말고. 안 그렇나." 기분이 좋아서 당연지사를 되풀이한다. 묵은 얘기까지 꺼내면서. "그나저나 내가 한시름 놨다. 이놈의 밤낮 번다고 벌어도 하나 있는 조카딸을, 하기야 이도저도 안 되면 내 장 릿빚이라도 내서 가게를 차려주리니 생각은 했지마는," 엄살을 떠는 것은 아니었다. 공노인의 형편은 사실이 그러했다. 늙은 두 내외 객주업만으로도 어렵잖게 지낼 터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거간까지 겸했으면서도 저축된 돈은 없었다. 공노인댁이 살림을 해프게 살기는 했다. 무슨 인연으로서든지 공노인을 거쳐서 용정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과는 항상 친척처럼 오가고 지내는데 그냥 오가고 지내는 게 아니었다. 늘 장무새가 없네 양식이 없네 땔감이 없네 하고 손 벌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어이구 우리 좀 적게 먹지 하며 퍼주기를 잘하는 공노인댁이요, 공노인 역시 돈 떨어진 나그네 그저 재워주고 일자리 마련해주고, 그의 말대로 그것은 당연지사로 알고 있었으니 장 밑에 돈이 모일 까닭이 없다. "허, 도둑놈도 사귀어두면 해로울 게 없지. 다 쓰일 대가 있거든. 왜놈 앞잽이 말고는 다 내 동포 아닌가?" 이따금 공노인은 호기스런 말도 했으나 사실 대사를 경영하는 처지가 아닌 바에야 언제 어떻게 도둑을 써먹는 단 말인가. 그보다 공노인은 간도 땅의 조선 사람들을 수풀에 앉은 새로 봤을 것이다. 뿌리를 박을 수 없는 남 의 땅, 제비는 제비끼리, 물오리는 물오리끼리 날으듯, 철 따라서 무리지어 떠날 때 날개 하나만 믿고 떠나듯 이 공노인은 방랑의 자기 생애에서 용정 땅을 반드시 종착역으론 생각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방랑자에겐 많은 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임이넨가 뭔가 하는 그 계집이..." 하다가 공노인은 입맛을 쭈욱 다신다. "하기야 계집 나무랄 것 있나. 이서방 하기 탓이니, 이번에도 합가해서 살 생각이면 나 그냥은 안 둘 작정하고 있구만. 다리몽댕이를 뿌질러놓을 기구만." 재떨이에 담뱃대를 치면서 길상을 상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할 판인데 새침이가 들어선다. "할아방이." "왜." "우리 아기씨께서 잠시 다니가시라 하십매다." "나를." "옛꼬망." "왜?" "모르겠습매다." 길상은 임이네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17장 공노인의 양식 촉촉히 물기가 밴 모시치마 아랫단을 한 발로 누르고 치마폭 한 끝을 쥐면서 다리미를 가져가던 공노인댁 방 씨가 "야아가, 팔에 힘 좀 주어라. 아까맨치로 대리미 엎을라고 이러나?" 하며 송애를 힐긋 쳐다본다. 무릎을 세우고 치맛말을 쥔 송애는 두 팔에 힘츨 준다. "옳지." 긴 허리를 기울이며 방씨는 쓰윽쓰윽 다리미로 치마폭을 쓸어올린다. 더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면서 모시 치마는 빳빳하게 풀발이 서고 투명하게 아른거린다. "해나 지거든 하지." 마루기둥에 등을 붙이고 담뱃대를 뻑뻑 빨면서 공노인이 말했다. "밟아놓은 기라서, 마르믄 또 물을 뿜어야 한께." "이 한낮에 윤구락 앞에 안 있어도 숨이 맥히는데," "아따, 그라믄 이녁은 와 목구멍에 불을 때고 있소?" 핀잔에 공노인은 픽 웃는다. "그나저나 한더위도 갈 때가 됐는데, 어제 장에는 누우렇기 익은 호박이 났더마요." "익은 호박 나올 때도 됐지." "두어 덩이 사다가 호박오가리나 맨들까 싶더마는... 하기사 서리를 맞아감서 마른 오가리라야 달긴 단데, 야아 가 팔에 힘 좀 주어라. 니 오늘은 와 그래 맥시 없노." 깜짝 놀라며 송애는 팔에 힘을 준다. 얼굴이 벌개진다. "거 참." 공노인이 입맛을 쭈욱 다신다. "와요?" 빈약한 코, 짱구처럼 이마는 솟았지만 짜질짜질하게 귀여운 눈으로 방씨는 영감을 쳐다본다. "이서방 말이요." "그러세... 무슨 일이야 있을까마는 영 더디구만요." "어서 와얄 긴데..." "추수라도 해주고 올라능가?" "그러면 낭팬데..." "와요?" "머." 얼버무려놓고 공노인은 "송애야," "예." "너, 왜 그리 기운이 없어 뵈노? 어디 아프나?" "아니요." 고개를 숙인다. "안색도 안 좋구나." 방씨는 다리미를 들고 마루긑으로 몸을 돌리며 하얀 재가 덮인 숯불에 부채질을 한다. 공노인은 담뱃대를 허 리춤에 찌르고 낡은 합죽선을 쥐더니 마당으로 내려선다. "아아니 점심은 안 잡숫고 나가시오?" 마누라가 등뒤에서 물었으나 헛기침만 하고 밖으로 나온다. 흐느적흐느적 걸으면서, 역시 흐느적흐느적 부채질 을 한다. 한낮의 거리는 내왕하는 사람이 뜸한 것 같고 소달구지도 지겨운 듯 바퀴를 굴리며 천천히 간다. 청 국 여인이 은귀걸이를 흔들며 햇빛이 나간 창가에 조롱을 내건다. 집 짓는 곳에서는 일꾼들이 그늘에 모여 앉 아 점심들을 먹고 있었다. '찬바람 불기 전에 집들이 다 들앉을랑가 모르겄네. 좀 어려울 거로?" 선술집 앞을 지나가는데 "형님! 형님! 어디 가시오!" 부르는 소리에 공노인은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동업자 거간인 권서방, 곰보는 아니지만 땀구멍이 뻥뻥 뚫린 얼굴은 술깨나 마시는 듯 벌겋다. "어디 가면 뭐 할라꼬?" 공노인의 대꾸는 투명스럽다. "하 참 형님 기분 오늘은 고르잖구먼요." "네가 숨 넘어가게 부를 때는 꼭 사단이 있더라." "어찌 그리 잘 아시오? 그렇잖아도 형님 찾아갈라고 했소. 자아, 자, 술이나 하면서 얘기 좀 합시다." 밖에까지 나와서 마치 병아리 몰 듯 선술집 쪽으로 공노인을 몬다. "네놈 얘기라면 뻔하지." 못 이긴 척 몰려가는 공노인의 투는 여전히 퉁명하다. 술판 앞에 앉는다. "너 요새 세월 좋은 모양이구나. 대낮부터 술 마시는 걸 보니," "낮술 한두 잔쯤 언제는 제가 안 마시던가요?" 권서방은 주모에게 술을 따르라 하여 공노인에게 권한다. 술잔에 입을 가져가다 말고 "권가야. 너 복장 옳게 써야 한다. 그란하면 용정 바닥에 못 붙어 있게 할 테니," "아이구 겁주지 마소. 어린 자식들 데리고 어디 가서 빌어먹으라고 그러시오?" "얼렁뚱땅 날 속일라 해도 안 된다." "허허 참 형님 기분 오늘은 고르잖구먼요. 나는 어디 흥정 붙이러 가시는 줄 알았는데," 공노인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으면서 "한 다리 끼고 싶나?" "그야 끼워야 주신다면야 마다할 사람 있겠소? 덩어리가 큰가요?" "덩어리가 크고 자시고 아무것도 없다. 안됐구만." "내숭스럽기는, 누가 모를까 봐서요?" "뭘 안단 말고." "형님이 내숭스럽다 그 말 아니오." "믿지 못할 세상에 안 내숭스러우면 어떻게 사누." "뭐가 그리 믿읍지 못합니까." "너 같은 무리가 있으니 못 믿겠다." "아아니 제가 형님한테 뭘 어쨋기에요?" "말 마라. 나도 다 알 만치는 알고 있다. 그래 구전은 얼마나 먹었나?" "새 발에 피지 얼마랄 것 있소? 쌀말이나 팔고 아이새끼들 등이나 가려주고..." 하다가 움찔한다. 저도 무르게 실토한 꼴이 됐다. "하기야 그놈이, 무쇠신을 신고 다닐 놈이지." "무슨 말씀이오?" "다라운 노랭일 거다 그 말이네." "누구 말입니까?" "허 참 내숭스럽긴 네놈이다. 그래 입술이 튀튀하게 나오고 눈두덩이 부숭한 그 젊은놈을 몰라서 하는 말인 가?" "..." "설마 네놈이 그자의 본색을 모르고서 땅을 주선한 건 아니겠지?" "보, 본색이라니요." 권서방은 눈에 띄게 당황한다. "이 땅에서 그만큼이나 살았으면 이 눈치 저 눈치 볼 줄도 알 긴데 아 그래 그 본색이 뭔지 몰랐다 그 말인 가?" "우리네야 뭐, 가뭄에 콩 나듯 생긴 흥정인데 눈치볼 것도 없고." 권서방은 풀이 죽는다. 동업자라고는 하나 권서방으로서는 공노인 힐난에 싫은 얼굴을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장사를 한답시고 떠돌아다니다가 용정에 흘러들어온 것이 십여 년 전, 빈털터리가 된 그는 공노인네 객줏집에 묵으면서 그의 은혜를 받았었고, 일거리도 더러 떼어주어, 이른바 오늘날 이곳에 죽치고 앉아 거간 노릇이나하 며 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셈인데 사십이 가까워 공노인댁 중매로 늦강가를 들어서 늘그막에 아 들을 셋이나 두었으니, 그리고 공노인의 평소 처신이나 생각이 곧은 것도 알고 있었고, 싫은 얼굴을 하기는커 녕 되잡혔다 싶어 난처하기 짝이 없다. "처음 볼 때부터 심상찮다 싶었지. 그래 느죽느죽하면서 밀어왔는데 아니나다를까? 그놈이 영사관 뒤에 붙은 왜노믜 집을 드나드는 것을 내가 봤거든. 용정 바닥의 내주거지를 다 아는 처지라면 모를까 생판 낯선 놈이 그곳을 드나들었다면 뻔한 노릇 아닌가? 밀정놈이지. 밀정놈이란 말이다. 주선을 해준 네놈이나 땅임자 지씨도 그렇지. 자기 욕심만 채우는 것은 역적이다 그 말인기라." "알고 했을 리가 있겠소." "그야 내가 밀정이오 하지는 않았겠지. 앞잽이요 하지도 않았겠지. 네놈은 눈칠 채고도 모르는 척했을 게고." "형님, 너무 그러지 마시오." "지씨만 해도 안 그런가? 그 땅 안 팔면 안 될 그런 답답한 처지도 아닌데 말이다. 값을 후하게 준다니까 되 잡아서 다른 땅 살 요량으로 팔았겠지." "값을 후하게 준 것만은 사실이요. 그러니 흥정이 된 거지요." "생각해봐라. 지금 땅을 팔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터에, 왜놈이고 되놈이고 간에 먹우고 있는 판국인데 후하 게 값을 치른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나 그 말이다. 그래 뭐를 할 거라 하던고?" "요리집을 하겠다든가. 곧 지을 거라 하더구먼요. 전주는 청진에 있고 그 김두수라는 젊은 사람이 요리집 차리 는 거는 아니랍디다." "하여간에 꿍꿍잇속이 따로 있는 모양인데," "그렇지마는 내가 흥정 안 붙인다 해서 다른 거간들도 나같이 할것도 아니겠고," "듣기 싫다. 그런 생각이니 조선 사람들이 남의 땅에 와서 빌어먹게 된 거 아닌가. 아무리 구전을 많이 낸다 하더라도 조선 사람 아니면 땅이고 집이고 흥정을 붙이지 말라고 내가 늘상 말하지 않았나. 땅이나 집뿐인가? 하다못해 물건 하나라도 조선 사람끼리, 물건이며는 파는 거야 되놈이고 왜놈이고 상관은 없겠으나, 그러니 간 단하게 말해서 물건이면 그놈들한테 사서는 안 되고, 집이나 땅은 그놈들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 그 말이구만." 권서방은 말을 디밀어보려고 입을 주빗거린다. 마침 그는 공노인에게 오금을 박기에 충분한 공노인의 행적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러나 틈을 주지 않고 공노인은 말을 계속한다. "반대로 우리 물건은 그네들한테 팔고 그네들 땅이나 집은 우리가 사고, 그게 다 거간들의 소관 아니냐 말이 다. 그렇게 되면 용정은 우리 조선 사람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게고 가난한 사람들은 생업을 얻을 수 있 고 네놈같이 흘러들어온 유랑민이 밥 한 그릇이라도 따따스리 얻어먹을 수 있고, 사람들이 지각이 없어서 큰 일이다. 남의 땅에서 게우 발붙이고 사는데... 어찌 지 꼬랭이를 짤라서 먹을라 하노 말이다. 꼬랭이만 없어지 면야? 그러다보면 몸뚱이 먹고 대가리 먹고 뭐가 남아? 눈앞의 이익에만 눈깔이 시뻘개가지고, 변발을 하고 청인이 된다면 모를까. 왜나막신을 신고 왜놈이 된다면 모를까. 그래도 용정에서나마 조선 사람들이 많으니께 우리가 이런 생업도 하게 되는 거 아니겠나? 왜놈이 밀고 들어오고 되놈이 밀고 들어오고 그라면 조선 사람들 은 밀리나게 될 건데 혼자 남아서 거간 노릇하겠다 그 말가? 흥 조선 사람 없는 왜놈 구덕이 속에서 종노릇이 나 하지. 그보다도 앞집이나 밀정놈들은 왜놈 되놈보다 더하단 말이다. 왜놈의 열 몫 스무 몫 하는 액귀란 말 이다. 이래도 내 말 못 알아듣겠나?" 작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오히려 의기양양해진 권서방 큰기침을 한다. "형님." "할말 있거든 해봐라." "그러면 묻겠소. 형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는 것은 내 진작부터 모르는 바는 아니오마는 형님도 말 다르고 하는 일 다릅디다." "뭐라고?" "작년 여름, 경상도 집에서 산 땅을 상부국에 주선한 사람은 형님 아니었다 말씀이오?"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권서방은 떵떵거린다. "내가 주선했지." "그러면 형님부터가 형님 말씀을 거역한 거 아니오." "모르는 소리, 어째 그랬는고 내 그 얘기 해주지." 공노인은 여유만만하게 입맛을 다시고 나서 싱그레 웃는다. 권서방에게 반격하게 된 것을 무척 재미나하는 것 같다. "그때 형편부터 얘기해야겠구만. 경상도 댁에서 산 땅이라는 게 너도 알다시피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지. 지금 이야 넓은 길이 나고 해서 일등 요지가 될 기다마는 그때만 해도 시내 복판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기십 평 땅에 게딱지만한 집들을 세우고 살았는데, 해서 땅값도 쌌고 그러니 상부국에서 땅을 사들일 기미를 알아차린 되놈 노가가 가만히 손을 쓴 거라. 평에 오 원 주겠다. 얼시구 이 무슨 횡재냐 할밖에, 그렇기 해서 바로 넘어가게 된 것을 경상도 댁에서 육 원의 값새를 놔가지고 발등치길 할 게지. 아슬아슬하게 말이다." "그거는 그렇다 칩시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것은 경상도 집의 땅을 누가 상부국에 주선했느냐 그 말 아닙니 까." "허허허 성미도 급하다. 내가 어물적거리며 구렝이 담 넘는 것처럼 맡도끝도없이, 그럴 사람인가? 왜 내가 그 땅을 주선했는고 하니, 첫째는 그 당이 신작로 부지가 된다는 그 점이지. 되놈이고 왜놈이고 간에 집이 들어서 는 것은 아니거든. 또 하나는 시기라는 게 있는데 그 시기만 지나가면 땅값은 푹 물러질 거다 하는 예산 때문 이지. 그래 결과를 봐서 누가 손핼 봤나? 청나라 상부국이 손핼 봤다. 알겠나? 다음은 오 원에 살려던 되놈이 못 샀으니 배가 아팠고 다음엔 땅 판 사람들이제. 그러나 그네들이 땅값 올리려고 배짱부리게 돼 있진 않았단 말이다. 중구난방으로 더 받아봐야 몇 푼 더 받았겠나. 한 덩어리를 틀어쥐고 돈 있는 사람이 부리는 배짱이라 야. 물론 그 댁하고 나하고는 각별한 사정이 있긴 있지. 그나저나 그렇게라도 했으니 조선 사람 부자 하나 더 생겼고 이참에도 집 태운 사람들한테 돈도 풀었고." 그러자 권서방은 꼿꼿이 세운 허리를 구부린다. 입을 우물거리며 말을 할까말까 망설인다. "내 생각 같애서는 그렇게 수울히 번 돈 이자 없이 주었으면 싶지만 그건 내 돈 아니니... 돈을 풀게 하는 데 도 힘이 많이 들었고." "알겠소. 아, 알겠습니다. 헌데 말이 났으니 하는 얘깁니다만 그 돈 풀었다는," "아직 내 얘긴 안 끝났다. 그리고 또 일부 남은 땅에다가 점포를 즐빗이 지었으니, 암 아암 어떻든지간에 조선 사람이 용정 바닥의 거래를 쥐었다 폈다 해야지.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덮더라도, 조선하고는 사정이 다르지, 달라. 거 연추의 최아무개라는 사람만 하더라도 남의 땅에서 거부가 되었으니 큰소리쳐가면서 의병도 조련하고 군자금도 내놓고 없는 겨레 돌보아주고 암 아암 조선 사람이 잘돼야지. 누구든 조선 사람이면 잘돼 야지. 밀정놈 앞잽이 빼놓고는." 언제까지 얘기가 계속될지 권서방은 답답하여 한숨을 내쉰다. 어찌어찌 하다가 말허리를 꺾은 권서방은 비로 소 자신의 용건을 꺼낸다. "경상도 댁에서 땅을 잡고 빚을 준다는데 그거 어떻게 좀," "아아니 남의 집 곁방살이하는 네가 잡힐 땅이 어디 있어서?" "제가 얻자는 게 아니고 헤헤... 술갑이나 벌어야지요. 너 아직도 나를 모르고나. 없어서 빚내자는 사람한테 구 전이나 뜽어먹자고 신발 닳아가면서 이 여름에 내가 댕기는 줄 알았나? 애끼! 이 몹쓸 인사야. 때꺼리 떨어지 거든 내 마누라한테 곡식자루 디밀면 될 기고, 아예 비리갱이를 뜯어먹을 궁리는 말아라. 그라면 나는 가야겠 다." 공노인은 길었던 얘기를 뚝 잡아끊고 권서방이 뒤에서 뭐라 지껄이건 자기 할말은 다 했다는 듯 만족스럽게 거리로 나와 느적느적 걷기 시작한다. 움막 옆의 그늘이 진 곳에 가마니를 깔아놓고 임이네는 이웃 아낙과 잡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공노인을 보자 마지못해 일어서는 시늉을 하며 "오십니까." 잡담하던 아낙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서 가버린다. "어디 갔는가?" 월선이를 찾는 것이다. "홍이하고 김훈장한테 갔는가배요." 임이네는 김훈장과 공노인의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을 안다. "거긴 뭣 하러?" "모르겄십니다. 문안드리로 갔겄지요." "할일도 없구만." 임이네는 물러나 앉으며 "좀 앉으시이소." 공노인은 월선이가 없어서 차라리 잘됐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는다. 돈을 감춘 베개를 불 속 에 태워버린 뒤 다 죽게 되었던 임이네는 어느덧 본시 모습으로 회복되어 신수가 좋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글세... 지나는 길이지. 한데 이서방한테서 무슨 기별이나 있었던가?" "기별은 무슨 기별입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언제 그 사람 가족 생각하던가요?" 공노인의 잘못이기나 하듯, 화를 낸다. 공노인은 이 여편네 동삼이라도 삶아먹었는가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 렸으나 여하튼 오늘은 달래야 할 계제였으므로 우선 담배부터 피워문다. '전사야 어떻든 심히 난감하구만. 좀 박절한 짓이지. 이서방이 있어야 하는 건데,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공노인은 서희가 하던 말을 곰곰이 생각한다. 서희의 말을 듣기전 바로 어제 저녁때까지만 해도 이번에 합가 하는 일이 있다면 이서방 다리몽댕이를 뿌질러놓겠다고 길상에게 으르렁거렸는데 오히려 지금은 불쌍한 생각 이 드니,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에 공노인은 걱정스럽다. 아무리 미운 여자라도 여자는 여자이니 우격다짐은 할 수 없다. 사실 공노인은 서희와 임이네 관계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동서 용정에 온 일행이 임이네를 도외시 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지마는, 임이네와 용이 그리고 월선 세 사람 사이의 내력을 월선이로서 도 삼촌한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어서, 그래서 그 사정도 다소는 아는 바이고 전에 영팔이 내외가 용이 식구들과 함께 있었을 때 영팔이댁네가 다소 실수를 하여 방씨한테 임이아비는 살인 죄인이었노라는 말을 흘 렸는데 공노인은 마누라한테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서희가 임이네를 월선이와 함께 들지 못하게 했다 해서 살인 사건이 서희의 집안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데까지 공노인은 상상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임이네는 어떻게 할라는고?" 겨우 거북스럽게 허두를 뗀다. "야? 뭐 말입니까?" "실은," "..." "실은 아기씨께서 가게를 하나 주시겠다고 허락이 내렸는데 그러니 그 아이는 장사를 시작해얄 기고 임이네는 어찌 할 셈인가 그 말이구만." "어찌따니요?" 부지중에 되묻기는 했으나 임이네도 눈치없는 여자는 아니어서 곧 말뜻을 알아차린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다. "이서방도 없고 하니 부득불 내가 조처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입맛을 쩝쩝 다신다. 가게를 다 짓고 나면 가게 한 칸쯤 월선에게 주려니 임이네도 생각했었고, 줄 것이라는 소문도 들었었다. 그러나 그 가게에서 자기 자신이 제외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어찌 하겠 느냐 묻는 그 자체가 제외한다는 뜻이요, 그쯤 의논이 됐다는 것을 임이네로서는 깨닫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것이 서희의 의사라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임이네는 그 사랑스런 은전이랑 지전의 꿈을 결코 버린 것은 아니었다. 국밥집만 다시 차린다면 그 행복한 꿈은 다시 한 번 실현되라르는 것을 의심 없이 기대하고 있었다. 완전히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한다아? 이러면 어떨꼬?" "..." "이서방이 돌아올 동안 우리 객주방 하나 비워줄 터이니 와 있는게 어떨꼬?" "..."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구만. 불원 이서방이 돌아올 테니까." 공노인은 빤히 쳐다보는 임이네 얼굴을 피하여 떠내려가는 하늘의 구름을 보다가 저만큼 뛰노는 아이들을 보 다가 영 줏대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하지." "싫소!" "뭐라고?" "싫다 했소!" "삻다고?" "야아. 나하고 무신 상관이 있다고 거긴 갑니까. 사돈의 팔촌이나 된다고 거길 갑니까. 내사 이 움막에서 그냥 있일랍니다. 홍이아베가 돌아오믄 설마한들 제집 새끼 굶기직이겠소?" 공노인은 엉거주춤 일어서다 말고 도로 주질러앉는다. 당황했던 것이다. 억척스런 여편네가 가게에 함께 들겠 다고 떼를 쓰면 어쩌나 금심했는데 뜻밖의 결과는 난감하기가 오히려 더하다. 평소 마땅찮게 여기던 용이지만 공노인의 심중 깊이는 그를 멸시하고 있지 않았다. 겉으론 용한 것 같았으나 상당히 깡다리가 있는 사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맺어진 서로의 인연은 떳떳은 못하지만 아무튼 조카사위라 할 수 있고 사정은 어찌 되었든 자기 없는 사이 월선이만 나가고 임이네와 홍이를 움막에 내버려두었다 생각한다면 사람의 체면이 말이 아니 다.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막말을 하면 쓰나?" 달래려 든다. 달래는 것이 이 여자에게 얼마나 큰 약점 잡히는 일인지 공노인은 아직 모른다. "지가 막말한 게 잘못이요? 막보자는 사람한테 잘못이 없고요?" "누가 막보자 했는고" "이리 쳐도 알고 저리 쳐도 아요. 누굴 세 살 먹은 아인 줄 알았소? 천천무리 겉은 우리 식구 떼어부릴라는 생각이 있으믄 와 본인이 말 못하고 흥! 우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 삼촌이 다 있는고?" 이제는 내가 아니고 우리 식구를 들고 나온다. 몰릴 수밖에 없는 공노인이다. 그까짓 사내 헤어져라 하면 그만 이겠으나 월선의 애틋한 심정을 아는 공노인은 그럴 수도 없다. "무슨 말인고?" "벅수라서 내가 그러려니 하겄소? 참말 그러고 보니 나를 벅수로 알았는가배요. 서로 짜가지고, 그래 웬일로 오늘 김훈장한테 가는고 싶더마는, 속이 빤히 들여다봬요. 사람 괄시하는 거는 좋지마는, 사람 벵신은 맨들지 마소." "아니 월선이 말을 하는가? 이거 생트집이구나. 월선이는 아직 가게 일도 모르고 있는데." "그라믄 까매귀 날자 배 떨어졌구마요?" "허 참, 내가 이렇게 되면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기찰 노릇이구만. 실은 아기씨께서 임이네를 함께 들지 못하 도록 말씀하셨지 죄없는 월선이는 왜 걸고 드는가?" 임이네 얼굴이 변한다. 비로소 생각이 거기 미친다. 그러나 시치미를 뗀다. 월선이 계책한 거라고 늘어져야만 자신의 형세가 유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손발이 척척 들어맞네요." "허허 고약한 사람이구만." 공노인은 여전히 무르게 나간다. 임이네는 눈을 희뜨고 한번 노려보다가 머리를 휘젓듯 외면을 하여 입을 비 죽거린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못할 말 한 것도 아니요, 이서방이 없는 형편이라 내 집에 가자고 권해본 건데." "이름이 좋아 불로초요." "허허 이서방 그 인사, 에핀네 버릇 하나 고약하게 가르쳤구만. 어디 그럴 수가 있나. 으음응." 공노인은 끝내 화를 내고 만다. "버릇이야 부모가 가르치지 서방이 가르치겄소? 본시 상사람의 자식이니 할 수 없지요. 하지마는 백정이 집에 가서도 할머니야 할아배야 하믄서 넋디리는 것은 안 배웠으니께요." 무당이던 월선어미를 끌고 와서 오금을 박은 것이다. "오오냐, 자네 그 말 잘했네. 할머니야 할아배야 하고 넋디리는 무당네 딸하고 한지붕 밑에 살 순 없지. 알았 네." 머리끝까지 분이 치민 공노인은 부들부들 떨면서 담뱃대를 허리춤에 찌르고 합죽선을 집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휭하니 가버린다. 제2편 꿈속의 귀마동 1장 뱀은 죽여야 유하현 삼원보에서 선배이자 동지요 신민회 회원인 신모가 보내온 편지를 앞에 놓고 장환은 깊은 생각에 잠긴 다. 지출을 줄이려는 형과의 암투 때문에 학교 일이 말이 아니어서 우울한 심정을 적어 보낸 서신의 회답이다. 절망적이기론 그 쪽도 매한가지였다. 이시영 이동녕 등 신민회의 여러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의 기지를 삼으려고 솔가하여 그곳 삼원보에 모여든 사 정은 장환도 소상히 알고 있는 일이거니와 지난해 중학 과정 정도의 학과와 군사 훈련을 겸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장차 독립운동에 투신할 청소년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 금년 들어서는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세웠고 신흥강습소를 통화현합니하로 옮겨 중하교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그간의 소식은 들어왔었지만, 짐작하 지 않았던 일은 아니었다. 그곳이 신민회의 조직체인 만큼 회원 육백 명이 체포된 국내의 소용돌이가 미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장환이 생각한 것보다 사태는 뭔지 더 심각한 모양이다. '정말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장환은 조갈증 같은 것을 느낀다. 느긋하게 뻗쳐볼 수 없는 초조함이 피를 거칠게 한다. '하마나 하고 기다렸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다. 국경은 한치도 무너지지 않았고 더욱 굳어졌다.' 한줄기 희망의 등불같이 감명을 받았던 권필응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곧이어 상현의 부친 이동진은 어느 위치 에 서 있을까 하고 문득 생각한다. 상현은 늘 불초자식이라 하며 한 번도 자기 부친의 활동 상황에 대하여 말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상현의 부친이 연추의 최재형과 거취를 같이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고 이범윤과도 각별한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아는 일이다. 장환이 왜 갑자기 그 생각을 했는가 하면 재작년 연추에 서 최재형이 이범윤을 암살하려 했었다는 그 불미한 풍문을 상기한 때문이다. 불미한 사건의 원인은 이범유니 최재형의 이름으로 모금한 군자금을 유용한 때문이라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친일배들의 교묘한 이간 술책이 빚은 낭설이라고도 했었지만 두 사람이 반목하게 된 것만은 사실인 듯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이 근 년에 와서 국내 침공이 소문만 파다하였지, 산발적인 국경 침투가 없지는 않았으나 일본 수비병을 교란하는 데 그쳤을 뿐, 두망강 얼음을 밟고 간도로 건너 왔다가 연해주로 옮겨가서 이범윤과 제휴한 홍범도조차 이렇 다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으니 뭔지 잘못되어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연해주의 실정을 볼 것 같으면 현재 어느곳보다 강력한 무장투쟁의 기지라 할 수 있다. 반일 감정도 가장 치열한 곳으로 거기서는 노유 귀천 차별 없이 친일 분자라면 가차없는 응징을 당해야 했고 밀정들도 발붙이기에 매우 위태로운, 그렇게 단결이 굳은 곳이다. 간도의 오랜 영토권 분쟁으로 말미암아 조선인과 청국인 간에 반목과 대립이 빚은 숙원 때문에 조선 인을 보호한다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들이닥친 일본에 대하여 한때 우매한 민심이 쏠렸던 사정과는 달리 연해 주는 순전한 이민이요, 귀화를 강요당하기도 했었지만 서로간의 원한이 없는 만큼 그쪽도 느슨하고 이쪽도 적 의가 없었으며 설령 귀화하였다 손치더라도 간도에서처럼 변발하고 다브잔스를 입음으로써 동화도어가 버리는 그런 현상은 없었다. 민족 의식의 자연스러운 발로에 따라 조선인으로서의 행동은 자유스러웠다, 낙인처럼 피 차 판이한 인종적 외모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같은 여건 하에서 조선 의병들의 적극적인 독립투쟁이 전개 되는 연해주에 과민한 신경을 써온 일본 당국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조선 의병의 무장해제, 체포와 소환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지만, 일본과의 국경분쟁을 원치 않는 러시아 정부로서는 일단 민간인들의 총기 거래, 체 류, 조선인들의 여권 검사 등 단속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형식이었을 뿐, 오히려 일러전쟁 때 참전한 러시아군 퇴역 장병들은 많은 동정을 표시하여 이범윤에게 예비병 사단과 총기 탄약을 빌려주겠다는 제안도 있었다고 했으니--그 제안은 정부의 제지로 성사를 못 보았다--게다가 군자금 모금도 활발하였고 헐값으로 일본 군대 의 총기보다 월등 우수한 것을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었던 것도 연해주의 유리한 사정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어째서 그곳 지도자들은 침착하고 있는 것일까. 국경이 한치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일본 수비대의 국경 수비가 철통같았기 때문이라 하겠지. 그 점도 있었 겠지. 국내에서 적극적으로 호응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노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게다. 그러나 그보다 지도자들의 보조가 맞지 않게 된 데 더 큰 원인이 있는 게야. 그 틈을 타고 소위 계몽파, 물론 나도 계몽파에 속할지 모르지만 양두구육, 그놈들은 계몽파라는 탈을 썼을 뿐이지... 필시 내부 분열에는 최봉준놈 일파의 농 간이 있었던 게다. 그놈의 미적지근한 신문만 봐도 능히 짐작 할 수 있는 일이었어.' 연해주 교포 간에 제일가는 거부 최봉준은 몇 해 전에 그가 출자하여 "해조신문"이라는 것을 발간한 일이 있 었다. 발간 시초부터 지극히 소극적인 논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압력에 이 개월을 넘겼을 뿐 폐간해버렸는 데 그의 상선이 북선 일대를 내왕하며 치부에 여념이 없는 이상 일본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 다. 그래서 그랬던지 재작년에는 최본준이 그자가 연추 의병파를 맹렬히 공격하고 나섰던 것이다. 무력항쟁이 무효하다는 언론을 공공연히 자행했던 것이다. 폭탄을 안고 달려가든지 무슨수를 써야지. 내살속에 들끊는 구데기부터 쓸어내야, 죽일 놈들!" 중얼거리는데 안에서 어째서 그런 흉칙한소문이 났는가 말 못하겠소오!" 영환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또 발악이 시작되는가 보다. 요즘 송영환의 발악은 일과의 하나였다. 정녕 말 목하겠소오? 당자가 모른다면 그러면 뉘가 아느냐 그말아니요오!" 굵지 않고 높은 목청이어서 고함이 괴상스럽다. 아직은 경어를 쓰는 것으로 보아 위험 상태는 아니나, 저러다 언제 어떻게 수라장이 될지 모를 일이다. 장환은 혀를 차면서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렇잖아도 울적한데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소동, 장환은 참말이지 넌더리가 난다. 형수인 장씨를 족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영환도 별채 에 누위 있는 부친이나 집안 하인들이 들을세라 아내를 가두어 놓고 닦달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이제는 숫제 드러내놓고 남의 눈치 살필 것 없는 란이다. 이유인즉 괴상망측한 소문 때문인데 장씨부인과 운흥사의 중 본 연의 관계가 심상찮다는, 연기같이 피어서 퍼진 소문, 본연이 한밤중에 송병문 씨 댁 담장을 넘더라는 둥, 운 흥사 승방에서 남녀의 웃음 소리가 들리더라는 둥, 송병문 씨 댁엔 과년한 딸도 없고 며느리가 미인이니, 필시 그렇고 그런 게 아니겠느냐, 얘기는 꼬리를 달고 삽시간에 회오리바람같이 일었고 용정조선인 사회에 쫙 퍼졌 던 것이다. 영환은 아내가 설마한들 중놈과 그러랴 싶으나 사실이 그렇잖다 하더라도 흉악한 소문이 나돌았다 는 자체가 그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의심하기에 앞서 왜 이런 끔찍스런 재난, 불행이 들이닥쳤느냐는 것이 였다. 원인의 장본인이 바로 장씨라는 그 점 하나만 가지고 날이면 날마다 사업도 팽개치다시피 추단하고 욕 설하고 욕설에서 폭행인 것이다. 장씨는 부인했다. 부인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 무근한 일이니 도리가 없다. 장씨는 본연에게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본연의 열띤 눈길을 의식해본 일조차 없었다. 포류의 체질이나 날카롭 고 심지가 강해 뵈던 미청년 상현을 볼 때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두근거린 일은 있었지만 장씨는 중을 중으로 보았을 뿐 한 번도 사내로 생각한 일은 없었다. 아가리에 자물쇠를 채웠나아! 왜 말을 못하는 게야!" 유모는 애를 데리고 달아났겠지.' 장환은 쓴웃음을 띤다. 정녕 말 못할까! 인두로 주둥이를 지져야겠어!" 지겹다, 지겨워. 아버님만 안 계셔도 집구석에 불을 지르고 싶다! 못난 사람.' 그러나 정환은 귀를 기울인다. 욕설이 들려오고 기물 던지는 소리가 난다. 창피하여 하인들도 쥐죽은 듯 기척 이 없다. 이 화냥년! 계집이 꼬릴 쳤으니 그런 소문이 났지이! 에이! 죽어라! 죽어!" 하루이틀도 아니고.'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장환은 방안을 빙빙 돌다가 더 견딜 수 없어 방문을 열고 나간다. 모르는 척 내보 려두리라 결심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형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을 가지고도 모질지 못한 장환인 것이다. 어쩌면 영환은 동생이 와서 싸움을 말려주겠거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씨의 비명이 급히 걷는 장환의 발목을 휘감는다. 왜 이러시오?" 아내를 치고 밟고 하는 영환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고 방구석으로 밀고 간 장환은 장씨의 몸을 가려주듯 뻗치 고 서서 숨을 할딱이는 형과 마주본다. 등뒤에서 히익히익 울어대는 여자의 울음소리. 정말 왜 이러시죠?" 영환은 동생보다 몸집이 작고 키도 작았지만 머리는 동생보다 큰 편이였다. 장환의 얼굴은 불그레했고 영환의 얼굴은 누리끼리한 검은 빛이다. 살가죽은 두꺼워 보였고 이목구비는 정연했으나 빡빡한 용모다. 내가, 내, 내가 챙피스러워서 어떻게 용정 바닥에서 살겠느냐." 도시 뭐가 챙피하다는 겁니까." 집구석에 망쪼가 들었다. 이런 망신이 어디 있겠느냐." 형님은 몰라서 이러시오? 몰라서 날이면 날마다 이 소동이냐 말입니다." 그래 모른다! 모르니까 알고 싶어 이런다." 두 어깨로 숨을 쉬며 마른 입술을 축인다. 참말 딱하시오." 하다가 돌아보며 형수씨는 건넌방으로 가십시오." 장씨는 꺼이꺼이 울면서 방문을 열고 나간다. 형님." ..." 뭣 땜에 이러시는 거지요? 체면 때문입니까." 용정 바닥 어디다 얼굴을 쳐들고 다니겠냐." 그게 어디 형수씨 때문인가요?" 그럼 뉘 때문이냐." 소문 때문이지요." 그래 소문 때문이다. 너 형수 소문 때문이다." 형님은 알고 계십니다. 형수씨가 결백하다는 걸." 그렇지만 너 형수 때문에 난 앙화가 아니냐?" 앙화를 당한 사람은 형수씹니다. 길 가다가 기왓장이 떨어져 머리를 깬 사람을 끌고 와서 매질하는 경우도 있 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형수씨는 법회에 혼자 나가신 건 아니잖습니까? 여러 부녀들과 함께, 그 속에서 불륜 을 저질렀단 말씀이오? 집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형수씨는 법회 이왼 밖에 나가신 일이 없고, 술도 안 하 시고 친구도 없는 형님은 늘 일찍 귀가하셔서 함께 저녁을 드셨습니다." 술 안 마시고 친구 없는 게 그래 그게 어떻다는 게냐?" 삘죽한다. 장환은 방바닥을 내려다본다. 물사발 하나, 낡은 손거울 하나가 부서져서 흩어져 있다. 어떻다는 게 아니라... 외박하신 일이라곤 없었고...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형수씬 중놈을 만났겠느냐 그 말이지 요. 연기가 되어 나갔단 말입니까?" 영환은 대꾸를 못하고 장환은 맥이 빠지는 듯, 그러다가 음성을 높인다. 그놈의 절을 때리부시는 겁니다! 유부녀한테 사련을 품은 파계승이 있는 절을 말입니다!" 영환의 작은 눈에 겁이 실린다. 아니면 중놈을 용정서 쫓아내든지 잡아다가 닦달을 하시든지요." 그, 그것도 꼬투리를 잡아야." 장환은 한숨을 내쉰다. 어지간히 지겹다. 도대체 이 양반의 머린 어떻게 생겼을까?' 거의 매일아다시피 되풀이되는 형과 아우의 대화인 것이다. 장환은 형이 질투에 눈이 뒤집혀 날뛰었다면 오히 려 인간적이요 동정이 갈 성싶다. 아내의 정조는 문제 밖이다. 오로지 풍문으로 손상된 자기 체면! 너 때문이 다.! 너 때문이다! 그 일념에 쫒겨 분별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소심한 그에겐 절을 때려부술 용기가 없고 중을 끌고 올 용기도 없는 것이다. 세상이 부끄러워서 내 저런 것을 계집으로 맞이한 게 잘못이었다. 차라리 박색이었던들, 이런 기막힌 꼴이야 당하겠느냐?"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싶은 증오감을 가까스로 누른 송장환 얼굴에 모멸의 웃음이 번진다. 저어, 도령님." 마침 잘되었다 싶어 장환이 얼른 방을 빠져나간다. 신돌 아래 촐랑이 같은 점생이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왜 그러나?" 손님이 오셨습매다." 그럼 안으로 모실 일이지." 앙입매다. 도련님으," 또오." 앙이 선생님으 나오시라 하옵꼬망." 뉘신데?" 학교으 새로 오신 선생님입매다." 송장환이 대문께까지 나간다. 자그마한 몸집인 윤이병이 벙청한 꼴을 하고 서 있었다. 들어오시잖고 왜 이러고 계슈?" 아니 저어," 들어오시오." 윤이병은 민적거린다. 바쁘시지 않소?" 아니오." 그럼 강가로, 산책이나 하잖겠소?" 산책이나 할 그런 여유 있는 표정은 아닌데 어딘지 절박한 것만 같은데, 그러나 이쪽도 울적한 터이라 그럽시다." 송장환은 순순히 따라나선다. 강가로 가자던 윤이병은 그새 자기한 말을 잊었는지 사뭇 언덕을 향해 걷는다. 언덕 위에 목 미처 나무 그늘로 찾아든 윤이병은 펄썩 주저앉으며 송장환을 쳐다보고 한숨울 내쉰다. 여자이 이처럼 곱살스럽고 항상 명랑하게 웃길 잘하는 윤이병으로는 좀 드문 일이다. 방학이 되었어도 고향에는 돌아 가지 않고 용정에 머물러 있엇는데 그새 교회에 많은 사람들을 사귀어 이집저집 놀러 다니며 무료하지 않게 날을 보내고 있는 성싶었다. 천성이 명랑하고 싹싹해서 그런대로 환영을 받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궐련을 뽑아 입에 물고 성냥을 그으면서 송장환이 묻는다. 어색하고 난처해하 는 웃음이 윤이병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좀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무슨 일인데?" 하면서 송장환도 풀밭에 앉는다. 실은," ..." 누이가 집에서 도망을 오지 않았겠소?" 네?" 그러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기에," 매씨께서는 어째서?" 네. 저어 말씀드리기가... 시집 안 가려고 그, 그런 모양이오." 좀 상상이 안 간다는 듯 송장환은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윤이병은 한때 망설이는 눈치다. 이크!" 별안간 송장환이 뛰어 일어선다. 뱀, 뱀이오!" 얼굴이 새파래진다. 윤이병은 재빨리 발 아래에 있는 커다란 돌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린다. 어딥니까?" 여, 여기요!" 손가락질을 하는 곳에 과히 크지 않은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윤이병은 애이! 하고 소릴 지르며 돌 을 던졌다. 똬리는 풀었으나 뱀은 돌 밑에 깔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서둘지 않고 다시 큼직한 돌을 주운 윤이 병이 뱀의 머리통을 때려부순다. 사탄이오. 뱀은 죽여야 합니다." 살생을 끝내고 씩 웃는다. 송장환의 얼굴은 노랗게 돼 있었다. 나는 뱀이라면 아주 딱 질색이오." 이 뚯하지 않은 사건에 용기를 얻기라도 한 듯 윤이병의 얼굴에느 생기가 돌았다. 뱀은 영원히 인간의 저주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 교도들은 뱀을 죽여야 할 의무가 있어요." 뱀을 죽여야 할 의무가 있다면 나는 야소교를 못 믿겠는데요? 난 뱀을 못 죽입니다." 두 사람은 웃는다. 한데 송선생." 네." 어떻게 돈 좀 마련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우러급에서 빼기로 하구요." 얼마나?" 이십 원 쯤이면... 돌려보내야잖겠어요." 드리지요." 고맙소." 돈 이십 원 때문에 풀이 죽을 사람은 아닌데 하고 송장환은 다소 괴이쩍게 생각한다. 그들은 언덕에서 내려왔고 집에 들러서 돈 이십 원을 받은 뒤 윤이병은 송장환과 헤어졌다. 어째 일이 묘하게 됐군.' 실상 윤이병은 이런 결과를 가져올 양이면 당초부터 송장환을 밖으로 불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실토를 하고 돈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국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누이라 한 것은 그 순간의 착상이며 사실은 애 인? 아무툰 애인이었던 여잔데 삼 년 전, 그러니까 청진에 있을대 예배당에 나가면서 알게 된 여자다. 상민이 지만 조촐하게 사는 집 딸로서, 윤이병은 결혼을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상현이나 송장환 앞에서는 집안 자랑 도 하고 했지만 그것은 별 악의 없는 허풍이며 기실 윤이병의 문벌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사귐성 있는 성격 때문에 교회의 주선으로 중학을 마쳤지만 집안 살림은 그를 도울 형편이 아니였다. 그랬는데 여자의 집안이 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비가 투전에 재미를 붙여 가산을 탕진한 끝에 주정뱅이가 되었고 끝장에는 딸을 술 집에 팔아먹은 것이다. 그렇게 되어 엷은 추억을 남기고 두 남녀는 헤어졌다. 그 후 여자는 어떤 사내가 몸값 을 치르고 빼내서 해삼위로 갔다는 소식이었는데 한 달을 못 넘기고 여자는 도망을 쳐서 윤이병을 찾아온 것 이다. 그의 말로는 술집에 있었음 있었지 그 사내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흐느껴 우는 첫사랑의 여인 모 습에 윤이병이 동정을 느낀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 결혼의 의무 없이 육체를 소유할 수 있다는 심리가 불장난 으로 끌고 갔다. 하숙방에서 한 사나흘을 함께 지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내는 물론 여자를 앗아갔지만 유뷰녀를 유괴했다 하여 윤이병은 나가던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지난 유월의 일 이였고, 마침 어떤 연줄로 하여 정중히 모시러 온 송장환을 따라 용정으로 온 것이다. 한편 끌러간 여자는 해 삼위에는 가지 않았고 친정에 맡겨져서 감시를 받게 되었는데 상대편 사내는 노상 떠나 있었으므로 해삼위에 근거를 둔 생활도 아니어서 여자를 잡아둘 수만 있다면 아무 곳이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 사내가 바로 김두 수요 여자의 이름은 심금녀. 여비 조로 돈 이십 원을 주어서 금녀를 달래어 돌려보내리라 마음먹은 윤이병은, 그러나 하룻밤은 아무래도 묵여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 마차편이 있을 리 없고, 하룻밤은 이미 서로가 터놓은 젊은 육체여서 아무 저항 없이 선을 넘었다. 날이 새었을 때 윤이병의 긴장은 느슨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책임 감도 사랑에 순교하겠다는 열정도 없이 다만 환락 때문에 윤이병은 민적민적, 금녀를 옆에 둔 채 시일을 넘기 고 있던 어느 날 늙은이 한 사람을 앞세운 김두수가 상이학교에 나타났다. 방학이어서 학교는 텅 비어 있었으 나 학교 건물에 잇따른 초가집에는 학교지기 박서방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어째 오싰습매까?" 박서방이 이들을 보고 물었다. 김두수는 늙은이를 밀어젖히고 나섰다. 댁은 뉘시오?" 공손스럽게 묻는다. 여기 핵교 지키고 있는 사람입꼬망." 네 그러시오? 다름이 아니라. 이 노인께서 윤이병 선생을 찾아 오셨는데, 바로 윤선생의 부친 되시는 어른이 오." 실상 늙은이는 금녀의 아비였다. 아 그렇습매까?" 선생의 부친이라는 말에 굽혔던 박서방 허리가 더 굽혀진다. 지금으 방학 앙입매까? 윤선생님 하숙에 계실 겝매다." 하숙을 모르니 학교로 찾아온 게요." 예. 저도 모릅매다. 아 참 우리 아아새끼, 오봉아! 오봉이 거기 있니야?" 옛꼬망! 아바이." 예닐곱 살 됨직한 아이가 쫓아나온다. 윤선생님으 하숙으 알지비?" 옛꼬망." 그러문 됐다. 어서 이 손님으 뫼시다 드레라." 김두수는 히쭉 웃는다. 그럼 가실까요?" 우물쭈물하던 늙은이는 매에 채인 병아리처럼 눈알도 굴리지 못하고 디둑디둑 걸음을 옮겨놓는다. 머리꼬랑지 를 늘인 머슴아이 뒤를 따라 골목을 지나서 어느 집 앞에 이르렀다. 아이는 쪽문을 밀고 별채 뜰안으로 들어 간다. 김두수도 따라들어간다. 선생님! 손님 오셨습매다!" 뭐라구?" 방안에서 후다닥 일어서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고했구나." 김두수는 동전 한 닢을 아이에게 주며 이제 돌아가라고 손짓을 한다. 쪽문 밖의 늙은이는 답답한 듯 수염을 문지르고 있었다. 김두수는 신돌 위의 여자 신발을 보고 또 히쭉 웃는다. 방안에서는 폭풍ㅇ르 예감한 듯 조용 하다. 아뭇소리도 없다. 돌아본 김두수는 눈초리로 쪽문 밖에 서 있는 늙은이를 뜰안으로 끌어들이고 나서 좁 은 마루를 밟고 올라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순간 윤이병은 도망을 칠 듯한 몸집을 하다가 쓰러지듯 자리 에 자리에 앉는데 얼굴은 사색이었고 여자는 불길 같은 증오를 뿜어내며 김두수를 쏘아본다. 노인장, 들어보슈. 여까지 함께 왔으면 일의 끝막음은 해주셔야잖겠소?" 늙은이는 마루로 올라서기는 했으나 김두수 뒤에 몸을 숨기려한다. 김두수는 옆으로 비키며 늙은이 등을 확 떼밀어버린다. 비틀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선 늙은이는 부들부들 떨다가 금녀 눈을 피해 한구석에 가서 웅크린 다. 들어선 김두수는 팔을 뒤로 돌려 방문을 닫고 두 남녀 앞에 바싹 다가앉는다. 오래간만이구먼." 윤이병에게 조소를 보내고 나서 불길 같은 증오에 타고 있는 금녀를 냉엄하게 바라본다. 내, 내가 금녀를 오, 오해는 마시오." 그러나 못 들은 척 김두수는 금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도,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뭐라는 게야? 신대를 잡았나? 떨기는 왜 그리 떨어?" 쥐를 어르는 고양이다. 이새끼야, 이번에야말로 부다고야(돼지우리, 감옥소라는 뜻) 맛을 좀 볼래?" 네?" 이놈의 새끼 혼 빠졌나? 내가 누군지 으흐흣... 내 할라고 마음만 먹는다면 네깐놈 한둘쯤 돌 채운다." 네?" 머저리 같은 놈의 새끼, 그 주제에 선생이라? 임마? 돌 채운다는건 두만강에 처넣는다 그 얘기야! 그뿐인 줄 아나? 죽기가 소원이라면 더 멋진 방법도 있지. 배때기 갈라서 말이다, 아편덩이를 넣고 길림으로나 날라다줄 수도 있지. 저년한테 상복을 입혀서 말이야. 으흐흐..." 소름끼치게 웃는다. 윤이병은 입이 붙어버린 듯 넋이 나간 듯 김두수를 쳐다본다. 김두수는 시선을 금녀에게 옮긴다. 금녀의 눈에는 여전히 증오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금녀." ..." 그 동안 더 예뻐졌군 그래." 순간 김두수 얼굴에 침이 날라왔다. 궁지에 몰린 짐승같이 금녀는 으르렁거린다. 옷소매를 들고 얼굴의 침방울 을 닦으려다 말고 김두수는 눈을 치켜뜨며 금녀를 노려본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윤이병의 턱을 치고 있었다. 장 남도사내 도랑물에 얼굴을 씻은 용이는 나무 그림자가 희미하게 깔려 있는 뜰안으로 들어오면서 베수건을 허리춤에 찌 른다. 기둥에 초롱을 걸어놓고 영팔이댁네는 소금물에 손을 적셔가며 주먹밥을 뭉치고 있었다. 베밤방이 모습 의 영팔이 기웃이 들여다보며 넉넉하게 하라고. 길 가믄 배가 고프네라." 야. 넉넉할 깁니다." 판술네는 손바닥 위의 밥덩이를 이리저리 굴러가며 꼭꼭 쥔다. 날씨는 좋겄구마." 용이 말에 영팔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전에는 머리숱이 많아서 주먹만했던 상투가 어째 작아진 것 같다. 별이 총총 나 있네." 설마 비야 안 오겄지." 그러모. 비는 무신." 하는데 아이고 치버라. 새북바램이 제법 설렁하네요' 임이가 팔짱을 끼고 홀닥홀닥 뛰어들어온다. 오나아." 삼베수건을 펴고 뭉친 주먹밥을 옮겨놓으며 판술네는 알은 체한다. 아아니! 아부지 점심은 우리가 쌀라 카는데 와 이럽니까?" 천부당한 일이란 듯 호들갑을 떠는 임이를 애키 요년! 하듯 영팔이 눈을 희뜨고 쳐다본다. 누가 하믄 어떻나?" 판술네의 말투로 예사롭지는 못하다. 아부지 점심 싸디릴라꼬 막 밥 안치놓고 안 왔십니까." 흥, 너거 해주는 밥 얻어묵고 길 떠날라 캤다가는 아마 해가 중천에 떨 거로?" 임이 말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인사치레라는 것을 용이도 알고는 있었으나 영팔의 핀잔은 못 들은 척 잠자코 곰방대에 담배를 넣는다. 누가 이렇기 첫새북부터 떠나실 줄 알았이야 말이지요" 백릿길을 첫새북부터 안 떠나믄 우짤 기든고?" 좀더 일찍이 일어나는 긴데 빌어묵을 남정네가..." 잘못된 거는 모두 조상 탓이라네." 앗따. 새북부터 무신 잔소리가 그리 많소." 판술네는 남편을 나무라듯 했으나 그 역시 마음속으로는 임이가 괘씸하다. 빌어묵을 년. 저눔으 조둥이만 달고 다니믄 비렁땅에 가서도 굶지는 않을 기구마. 새살만 찰찰 깠지. 순 도칙 이 같은 년 한다 한다해도 너무한다. 사램이 은공을 모르믄 금수만도 못한 기라. 멩색이 지를 키운 아밴데.' 그래도 임이가 소자는 소자로구마. 이리키 첫새북에 일어나 왔이니께로" 평소 입이 뜨로 유순한 영팔이지만 임이가 미워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그로서는 좀 집요하게 걸고든다. 빈 정거리거나 말거나 들은 척도 않고 그라믄 구야아배 깨워야겄심다." 임이는 씽하니 나간다. 이르지마는 아침은 묵어야 안하겄나. 방에 들어가자. 임자, 어서 밥상 딜이라고." 방으로 들어온 영팔이는 장대같이 늘비하게 잠든 dlk이들을 저만큼 밀어붙이고 등잔의 심지를 돋군다. 용정에 불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영팔이를 따라 용이는 이곳에 와서 두 달을 훨씬 넘게 시일을 보냈 다. 그 동안 청인들에게 농사품을 팔아서 곡식섬이나 장만했는데 그것을 임이한테 맡겨 놓고 오늘떠나기로 한 것은 영팔이와 의논 끝의 일이다. 혓바닥 세 치 가지고 오만 생색을 다 내는 천성이기로 곡식섬이나 매련해주었이니께 설마한들 한겨울이야 지 에미 거친 못하겄나.' 용이는 한겨울 동안 임이네를 딸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정목수가 다리를 놔준 청인 목파를 따라 산에 들어갈 심산이었다. 영팔이도 동행하기로 작정을 보았다. 이 새로운 계획에 대하여 용이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영팔이는 희망을 걸었다. 돈을 벌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희망, 한편 벌목일이 끝나면 함께 와서 농사를 짓겠 다는 용이 말에도 그는 씨익씨익 숨을 내쉬며 무척이나 기뻐했던 것이다. 조반을 끝낸 용이는 판술네가 꾸려준 망태기 하나를 들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때를 같이하여 임이와 그의 남 정네 허서방이 나타났다. 아이구 아부지! 떠날라깝니까." 음." 아이구 참, 우짜믄 좋노. 차일피일하다가 그만, 보소! 그래 내가 머라 캅디까? 장날엔 나가서 흥이 옷벌이나 사다놓으라고 그렇기실이 노이 되도록 일렀건마는," 죄없는 남정네 탓을 하며 역시 그 혓바닥 세 치로 생색을 낸다. 그건 말으 어디새 했지비?" 어이구, 이 답답! 귀구멍이 맥힜던가배!" 허서방은 무안한 듯 뭉실한 코를 만지다가 바지에 슬슬 손을 문지르다. 머슴살이의 뜨내기지만 소같이 일 잘 하는 그 점을 보고 영팔이 임이에게 중매를 들었는데 허서방은 좀 모자라는 위인이었다. 무골호인으로 뵈기도 했으나 쪼맨한 눈에는 진득한 욕심도 다소는 있는 성싶고. 무시기... 이렇게 떠낭이, 장인어른 미안스럽습매다." 흥, 그래도 밥 묵는 입이라고 인사는 할 줄 아는구마." 허허 버릇없이, 가장한테 그래서 쓰나?" 용이 나무란다. 그래도 임이가 소자는 소자다." 영팔이 또 빈정거린다. 소자 되고 저븐 마음이사 태산 겉지마는 못사니 우짭니까? 우리도 잘살믄 옛말 안 하겄십니까." 샐쭉해져서 응수하다가 아부지, 이거 넣어이소. 하며 봉지 하나를 내민다. 멋꼬?" 담뱁니다." 음" 하고 용이는 봉지를 받아 망태 속에 넣는다. 이렇기 떠나시믄 서분해서 우짭니까." 서분할 것 없다. 곧 너 어미하고 올 거 아니가." 홍이도 올 깁니까?" 그거는 가봐야제. 핵교 댕기는 놈을... 그라믄 아지마씨 잘 기시이소." 용이는 영팔이댁네에게 인사를 하고 삽짝을 나선다. 잘 가시이소." 삽짝 앞까지 나온 판술이네가 인사를 한다. 임이 내외 영팔이 해서 네 사람은 휭하니 트인 벌판길을 나선다. 달은 없지만 별빛이 밝다. 잠든 마을에 불빛은 없고. 이자 너거들은 들어가거라." 야." 하면서도 따라 내려온다. 너거들은 들어가거라. 내가 바래다주고 올 기니," 이번에는 영팔이가 말했다. 그라믄 우리는 들어가겄십니다. 애새끼가 깰까 싶어서," 임이가 걸음을 멈추고 허서방도 걸음을 멈춘다. 그라믄 장인어른 편히 가옵소." 잘 있게." 두 사람은 처지고 영팔과 용이 걷는다. 용아." 음." 아무래도 시일이 좀 걸리겄제?" 가봐야 알겄지마는 일찍 오믄 머 하겄노. 용정에는 아직 집일이 한창일 기고 품 좀 팔다가 산에 들어갈 시기 쯤 해서 오든가." 여기도 품일이야 얼매든지 있지. 웬만하믄 추석은 여기와서 새라." 가봐서." 한참동안 말없이 걷다가 영팔이 입을 연다. 나는 이가 온다니께 이자는 살 성싶으다. 우떡허든지..." ..." 뻬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돈 모아서 고향 가야제. 맘 겉애서는 빌어묵으서라도 가자... 하로에도 몇 분 그 생각 을 하는지 모른다. 이 험한 고장에 와서 돼지겉이 살믄서 되놈들 종노릇까지 할라카니, 옛날에는 땅 한 때기 없는 농사꾼 신셀 원망도 많이 했지마는, 지금 생각하믄 그때가 청풍당석이던 기라." 그렇지마는 고향 돌아가는 일이 그리 쉽겄나. 조가놈이 있는 한에 있어서는 고향 가기 어러블 기다. 의병 나갔 다고... 여기서도 의병이라 카믄 왜놈우 순사들 눈가리에 핏발을 세우는데," 머 나도 그쯤은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니다. 고향에는 못 가더라고 근가죽에 가 서... 아 지리산에 들어가서 화전을 부치묵더라캐도... 참말로 하나님은 무심타. 죄없는 백성을 이렇기 고초를 겪게 하다니, 하기야 죽은 사 람 생각을 하믄 멩 보전한 것만도 고맙기 생각해야겄지마는 죽은 윤보형님 생각을 하믄 실프네 서럽게 말도 못하겄다마는," 멩이 붙었다고 머 고마울 것 하낫도 없다. 윤보형님은 그렇기 잘 죽었지. 죽을 때 말마따나 육신을 벗어던지고 훌훌 잘 날라갔지머," 사십이 넘은 두 사내는 별빛을 밟고 주거니받거지, 헤어질 줄 모르고 간다. 서로의 마음에 친구 이상의 것이 짙으게 흐르고 있다. 한 살갗 한 피 같은 것이,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는 또 다른 그리움, 그것은 서로를 통하여 고향을 느끼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향, 어쩌다가 고향을 잃었는가. 이자 그만 돌아가거라." 음." 언제꺼지 따라올라카노?" 조금만 더, 아직 날이 안 밝았다." 한동안 묵묵히 걷는다. 참, 내가 거복이 만낸 얘기를 너보고 안 했제?" 거복이?" 음, 김평산이 아들놈 말이다." 가아를 어디서?" 영팔이 놀란다. 용정서 만냈는데..." 그눔아아가 우찌 여길 왔던고?" 차마 만냈다는 말을 못하겄기에 아무보고도 얘기를 안 했다. 처음에는 반갑더마는... 차차 시일이 지나고 생각 해보니 우째 맴이 찜찜하더마. 꼭 김평산을 만낸 것 겉애서," 영팔이는 찜찜하다는 말을 실감할 수 없는 모양이다. 우선 신기롭고 반가운 기색이다. 지딴에는 원한에 차서 울더마는," 하기야 여까지 왔으니 곡절이야 얼매나 많았겄노." 곡절보다도, 내 짐작이지마는 벨로 좋은 일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부모가 없으니," 지 말로는 떠돌다가... 뭐 장사도 하고 노동판에 십장 노릇도 했다 카지마는 믿을 수 없고." 아무튼지 희한한 일이다. 가아가 이곳까지 오다니," 우린들 이곳까지 올 줄 뉘 알았겄나." 죄가 있이믄 애비한테 있지 자식이 무신 죄 있겄노." 그건 그렇지." 했으나 용이 마음은 여전히 찜찜하다. 만났다는 얘기는 할 수 있었으나 막연한 불안가지는 말할 수가 없었다. 개천가지 온 용이는 이자 돌아가거라." 그러까?" 용이는 개천에 놓인 돌을 건너뛰고 영팔이는 머문다. 그라믄, 될 수 있는 대로 어서 오라고." 음." 용이는 걸음을 빨리한다. 그리고 용이는 돌아보지 않았고 영팔이는 오랫동안 서 있다가 용이 모습이 조그맣게, 그리고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발길을 돌려놓는다. 퉁포슬까지 나온 용이는 국자기로 뻗은 넓은 길을 버리고 세림하 물줄기를 따라 두도구 쪽을 향해 발길을 꺾 었다. 국자가로 돌아가나 두도구를 돌아가나 용정에 이르기는 매일반, 두 이정이 모두 실팍한 백릿길이다. 초 가을의 흙모래 실은 바람이 백양나뭇잎을 선들선들 흔들어주며 자나가지만 아직은 머뭇거리는 눚더위, 짚신발 밑의 볕살에 익은 외줄기 길바닥은 뜨겁다. 홀로 걷는, 굽이져 뻗어가는 이 타관의 길이 새삼스레 서러울까닭 이야 없겠는데 가도가도 황토의 남도길, 등짐장수가 맨발로 갔으며, 액병과 보리 흉년에는 집안에, 길바닥에 송장이 썩던 그 고국의 산천, 척박한 땅에선들 아니 서러울 날이 있었을까마는, 기름지다고 찾아온 간도 땅의 사위는 어찌 이다지도 삭막한가고 용이는 생각한다. 헤어질 무렵 뻬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돈 모아 고향 가야 제 하던 영팔의 말이 가슴에 맺힌 때문일까. 사십 리는 넘게 걸었을까? 서북쪽과 서남쪽으로 갈라지는 강줄기와 외줄기 길, 길을 따라 강줄기와도 작별하 고 야트막한 언덕을 넘고 평지를 지나고, 줄곧 이르니 길폭이 넓은 용두가도가 가로누워 있다. 오른편 멀찌감 치 두도구의 시가가 바라다 보인다. 용두가도로 들어선 용이는 두도구를 뒤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곡식 이 익는 들판 너머 해란강이 보인다. 이정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줄천의 해도 서편으로 조금은 기운 듯, 목이 컬컬하여 주막에 들러 술 한사발 들이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용이는 마을 어귀 길켠에서 물 긷는 아낙에게서 물 한 바가지를 얻어마시고 남은 물로 얼굴을 씻은 뒤 나무 그늘 밑에 가서 다리를 뻗고 앉는다. 두도구나 용정, 어느곳에도 장이 서는 날이 아니어서 사람과 우마의 내왕이 뜸한 길거리를 맥없이 바라보다가 용이는 망태 속에서 점심꾸러미를 꺼낸다. 집은 다 지었는가 모르겄네.' 월선의 얼굴이 떠오른다. 용이는 주먹밥 한 덩이를 베어먹는다. 저만큼 도랑물에 오리들이 노닐고 삿갓 쓴 청 인 농부는 양켠 광우리에 채소를 실은 천칭을 어깨에 지고 밭둑길을 간다. 을판에서 불어오는 흙바람에 곡식 익는 내음이 실려온다. 무신 희맹이 있노. 영팔이는 아아들겉이 좋아하더라마는 왜놈이 안 망하는데 우찌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노 말이다.' 삼베에 싼 주먹밥을 절반도 못 먹었는데 배가 불러왔다. 내가 머 황소라꼬 이거를 다 묵을까?" 풀잎에 손을 비벼 닦고 점심꾸러미를 망태 속에 집어넣은 용이는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아 담배를 넣는다. 영팔이처럼 희망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용이는 호되게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겨우 땅을 짚고 일 어선 것 같은 느낌이긴 했다. 전신에 멍이 들어 얼얼한 아픔이 상기도 계속되고 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어있 다는 안도감에 심신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수렁 속에 빠져들어가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는 용이 머릿속에 불현듯 십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날마다 마을에서 송장이 나가던 무서운 그해, 사람 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스러지던 황막한 시기를 살아남았을 때 용이는 방종과 무기력의 수렁에서 기어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번에는 용정을 휩쓸고 지나간 화재 뒤끝의 폐허 속에서 생활에 순응하던 구 역질나는 자기 자신과 작별할 수 있었다. 그 치욕스러운 생활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사치요, 희망이 없어도 좋았다. 내 자리에 내가 돌아왔다는 안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용이 생각은 그러했고 잘게 갈라졌던 신경이 굵게 뭉쳐지면서 메말랐던 바닥에 물이 고여드는 것을 깨닫는다. 사내로서의 자부심이 풍요한 사랑의 물길이 되어 흐르는 것을-- 용이는 월선의 체취를 강하게 느낀 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보는 것도 아니요. 들판을 보는 것도 아닌데 용이 눈에 무엇인가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이었다. 한 사내가 맞은켠에서 용이를 보고 실쭉 웃는다. .?' 행색을 봉께로 나그넨디, 어디까지 가시는 게라우?" 용이는 마음속으로 놀란다. 전라도 사투리는 뜻밖이었다. 강을 하나 끼고 이쪽은 경상도요 저쪽은 전라도인 고 향 땅에서는 귀에 익었던 말씨, 용이는 저도 모르게 반가운 표정이 되어서 야, 용정까지 가요." 으응?" 상대편도 놀란다. 아아니 경상도 아니랑가?" 그렇소." 허허허, 이거 반갑소." 하더니 사내는 머슴아이처럼 코를 한번 들이마시고 겨드랑에 낀 때 묻은 괴나리봇짐을 추스르며 나무 그늘 안 으로 들어선다. 어이크매."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쬐금 쉬었다가... 나도 용정 가는 길잉께." 사내는 용이와 엇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형편없이 여위고 빈약한 체구다. 사내는 들판을 바라보는 척, 그러나 왠지 조마조마해하고 있는 것 같다. 늘어난 목덜미 살가죽이 불럭불럭 흔들리고 먼지 낀 눈시울도 자주 흔들 린다. 용이 담뱃대를 털자 얼른 얼굴을 돌리고 쳐다본다. 형씨." 야." 아까처럼 힐쭉 웃는다. 들숭날숭한 이빨이 담뱃진에 절어서 시꺼멓다. 거 담배 한대 적선하소." 그러소." 담배쌈지를 풀어주고 곰방대도 내미는데 담뱃대는 여 있당게로." 허리춤에서 제것을 뽑아들고 골통에 담배를 담는다. 부싯돌을 비벼 불을 붙이더니 뱃속 깊은 곳까지 빨아당긴 다. 눈이 가물가물하고, 그러기를 몇 번, 온종일 딤배를 굶었어라우. 어지럽네?" 물부리에서 입술을 뗀다. 얼굴이 노오래진다. 허 참, 밥을 굶었이면 굶었제 담배 굶곤 못 살 거라 혔는디. 빈속이라 하늘이 비잉비잉 돈당께." 그렇잖아도 용이는 처음 사내를 보았을 때 허기진 얼굴이라 생각했었다. 망태 속에 손을 넣어 점심꾸러미를 꺼낸 용이는 묵던 기라 안됐소만 요기 좀 하겄소?" 아니 워째 이러신다요?" 당황한다. 시장할 때는 개떡 하나라도," 야, 야아, 하모니라우. 허나 이거 이래 쓰겄소?" 나는 배불리 묵었인께 그냥 가지가봐야 쉴 기고..." 미안스러 우쩐디야?" 사내는 몹시 수줍어한다. 그, 그라믄 한 개만 얻어," 하는데 목구멍 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난다. 뼈와 껍데기뿐인 마디 굵은 손이 주먹밥 하나를 잡는다. 목구 멍으로 밥이 넘어가는 소리가 꿀떡꿀떡 들려온다. 몹시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한 개만 얻어먹겠다던 사내는 저도 모르게 남은 주먹밥을 모조리 먹어치운다. 그리고 나서 정신이 드는가 껄걸 웃는다. 웃는데 눈꼬리가 젖 는다. 참말이제 이기이 무슨 고생인지 모르겄소잉. 하하핫.... 나 이틀을 굶었당게로." 집이 어딘데?" 집? 집은 무슨 집이랑가?" 그라믄 식구들은?" 이 차중에 식구라도 있었이면 되놈한테 팔아먹었을 것이여." 옛말에 눈물도 배가 불러야 난다 하더니 주린 배를 채우고 보니 설움이 치미는가 보다. 용이는 입맛을 다시며 외면을 한다. 그런디 형씨." 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아니랍디까여? 고향은 경상도 어디지라우?" 떠도는 처지, 고향을 말해 머 하겄소." 하기는 그려. 그놈의 가지도 못헐 고향 말해 머 헌디야? 다 엇비슷한 사정일 것이니... 좌우당간에, 객지에 나 와본께로 내 땅 까마귀만 보아도 반갑다 안 하더라고? 안티 묻은 곳이사 어디든간에 전라도 경상도가 아니 먼 이웃이니께... 수천리 되놈우 땅에서 이리 만내는 것도 예사 인연 아니랑께. 그런디 성씨는 어찌 되지라우?" 이가요." 하, 이씨라. 나는 주가요. 이름은 갑이고 그러니께 주갑인디 어떤놈은 주걱 주걱 하고 부르들 않는개비여? 헌 디 내가 고향을 떠나올 적에, 대국 땅으로 가노라 혔더니 우리 아부지 말심이, 허허엇 갑이 이노움, 예 아부지, 니 성씨가 어찌 되더라고? 예. 아부지 주가 아니게라우? 이노움 주가가 아니라 주씨라 혀, 주씨. 그려 니가 대 국 땅에 간당께 내 당부헐 일이 있는디 대국 땅에 가거들랑 조상을 찾아봐야 헌다. 그거여. 예? 조상을 어찌 찾는다요? 주천자를 찾으믄 된다 그 말이여, 주천자를. 대국 땅까지 가서 조상을 안 찾는대서야 자손된 도리에 쓰겠눈감? 예, 아부지. 찾아보겠으라우, 하하핫... 어디 가서 찾는당가? 하하핫핫..." 용이도 웃는다. 말솜씨가 재미나서 심심산골 수수깡울타리 앞에서 수작하는 부자간의 모습이 훤하게 떠오른다. 허허헛헛... 허헛 주천자를 찾으라고? 허허헛..." 기분좋게 웃는 용이를 힐긋 쳐다본 주갑이는 지극히 만족해한다. 헌디 형씨 내 말 좀 들어보더라고." 허허헛, 야. 말해보소." 실은 그러크름 혀서 이 땅에 왔는디 와봉께로 이곳은 주천자 땅이 아니고 오랑캐 땅이더라 그 말이여." 두 사내는 또 다시 유쾌한 웃음을 터뜨린다. 웃는 주갑의 얼굴은 언제 슬퍼했나, 언제 배고파했나 싶으리만큼 태평스럽다. 이자 길 떠나야겄소." 용이 망태를 둘러매고 일어섰다. 그러십시다." 주갑도 엉거주춤 일어서는데 용이 도로 주질러앉으며 망태 속을 부실부실 뒤적인다. 보소." 왜 워찌 그런디요?" 담배쌈지 있이믄 내놓으소." 어리둥절하다가 주갑이는 낡고 때에 절어서 번들거리는 담배쌈지를 내 놓는다. 용이는 임이가 준 담배봉지를 뜯고 주갑의 담배쌈지에 꾹꾹 눌러가며 옮겨넣는다. 아니 이거 기찰 일이구마. 니라우 이런 인심이 어디 있더랑가?" 주갑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말라비틀어지고 검버섯이 얼룩덜룩 핀 얼굴 이 갑자기 팽팽해지며 윤이 흐르는 것만 같다. 기분에 따라서 그렇게 달라지는 주갑의 얼굴을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용이는 망태를 어깨에 걸머진다. 먼저 길켠으로 올라선 주갑이는 아이처럼 몸을 삥 돌리며 건너오는 용이를 쳐다보며 또 빙글빙글 웃는 다. 담배 한 쌈지 얻은 게 그에게는 그렇게 행복했던 모양이다. 둘은 나란히 길을 걷는다. 주갑이도 키는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워낙 여위어서 가랑잎처럼 몸이 흔들거린다. 듣자니께 용정서는 큰 불이 났다 그러는디 형씨는 용정 사시오?" 살았지마는 이번에는 이사하러 가는 길이요." 흠." ..." 벌어묵고 살 길이 없어서 그러는 게라우?" 벌어묵고 살 길이 있이나마나, 본시 농사짓던 처지니께..." 그 말은 그것으로써 흘려버리는 듯하더니 실은 좀 만낼 사람이 있어서 용정으로 가는 길인디 그 사람이 지금도 거기 살고 있을랑가 모르겄고, 내 아깨 부터 형씨한테 물을란걸 다른 말 하니라고 정신을 뺏겼당게로. 그 사람도 경산돈디 뜽금 없이 신집에서 만나 갖고." ..." 천보산으로 함께 일자리 찾아간 일이 있었어라우, 갔다가 허탕만 치고 나는 그냥 봉밀구로 갔었지라우. 그리 헤어지고는 못 봤는디. 참말로 좋은 사람아여. 참말로," 그 사람 김영팔이라 안 합디까?" 아니! 워찌 형씨가 그걸 안당가?" 주갑이는 펄쩍 뛴다. 영팔이한테 들었소." 야? 그게 정말인게라우?" 용이는 주갑이 마음에 들었다. 사귄 지 오랜 사람 같았고 함께 걷고 있노라니 여러 해 동안 풀어보지 못한 어 둠과 긴장이 풀어지면서 옛날, 그 아주 옛날처럼 농치던 버릇마저 주빗주빗 돋아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 지금 영팔이 집에서 오는 길이요. 헌데 봉밀구에선 아편쟁이 되놈한테 매맞고 쫓겨오는 것 아니요?" 워찌 그리 잘 안다요? 그는 그렇고 영팔이 그 사람 병 안 나고 잘 있습디여?" 퉁포슬 쪽에서 되놈 땅 붙이고 입에 풀칠이야 하고 있소." 그기이 어디여? 식솔도 많다 혔는디." 멋하믄 우리하고 산에 안 가겠소? 시적 벌어묵고 살아야 할 형편인가 본데," 산에라니?" 산에 말이요." 광산 말이랑가? 어림없제, 어림없당게로. 나 우리 아부질 두고 맹셀 했이니," 주갑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용이는 웃는다. 가겄다는 사램이 있다 캐도오 내 두 손 마주잡고 말릴 긴께. 아금매, 그러면 형씨가 그놈의 산으로 간다 말 씨?" 되놈한테 당하긴 대게 당한 모양이구마." 껄껄 웃는다. 말도 말랑께. 내 이력을 말헐 것 겉으면 책을 모아도오 하모니라우, 책을 모아도, 소싯적부텀 동학당 땜시로 안 혀본 고생이 없고오 맷집도 좋아서 애지간헌 일로는 끄덕도 안 혀. 헌디 그놈의 고장은 생판 사람백정들만 살고 있더란 말씨, 사람백정들만. 나도 이런 약골은 아니었는디 더 있다가는 게우 붙어 있는 살가죽도 남아나 지 않겄다 생각허고 줄행랑을 놨지라우. 형씨, 아예 광산 갈 염일랑 굴컥 샘키부리랑께. 내 진정코 하는 말인 게라우." 주갑의 사투리를 즐기듯 듣고 가는 용이 그게 아니고, 산이믄 모두가 다 광산인 것도 아니겄고 나무산도 있다 그 말이구마는." ..." 벌목하러 가자 그 말이구마." 벌목! 벌목꾼으로 가자아 그 말심이랑가?" 영팔이도 함께 가기로 약조를 했이니께." 가만 기시요. 가만, 그러면," 주갑은 망설이는 게 아니었다. 너무 좋았던 김에 팔을 뻗고 용이 가는 길을 막고 선다. 참말로 영팔이 그 사람도 함께 간다 그 말인게라우." 빈말 아니요." 그럼매. 형씨가 빈말헐 사람이건디? 그, 그, 그거라면 쓸만허다뿐이겄소? 하 참 내가 간밤에 무신 꿈을 꾸었 제?" 용꿈 꾸었소?" 허허허헛... 담배 한 쌈지 얻었고, 주린 창자에 밥이 들어갔고 영팔이 그 사람 소식을 들었고 또오 일자리도 구 헐 판이면," 주갑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지껄이다가 하하핫... 그까짓 용꿈 꾸나마나. 돔무 따라 강남 간다 안 헙디여? 영팔이 거 좋은 사람인디," 주갑은 걷기 시작한다. 용정 가믄 지금쯤 집일이 한창일 기요. 거기서 품 좀 들다가, 벌목은 겨울 일잉께." 하모, 하모니라우. 벌목이사 겨울 일이란 걸 모르간디? 이렇게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일이란 난생 첨이랑께. 하 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혔는디 참말로 그런개비여." 도중, 줄곧 얘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용정에 당도했을 땐 사방에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장 사진 차일 귀퉁이를 잡아맨 소나무 기둥 옆에 금녀는 서 있다. 한 손은 나무기둥을 짚고 손수건을 쥔 다른 한 손은 맥없이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린다. 햇빛과 비바람에 바래어 회갈색 으로 변한 차일도 이따금 펄러덕거린다. 운명과 같이 가열한 햇빛이 튀는 들판을 금녀는 바라보는 것이다. 어 둡고 잠긴 눈에 끝도 없는 들판, 먼 지평선 위에 아직한 구릉이 권태롭게 드러누운 것을 볼 수 있었지만 그 구릉조차 금녀에게는 막막하고 그저 한없이 뻗은 벌판으로만 느껴진다. 모래실은 바람은 여전히 얼굴을 치고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고, 이곳이 어디메쯤인지, 무슨 이름의 역두인지 금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행선 지가 훈춘이라는 것, 뉘에게 들었던지, 아니면 출발시 무슨 팻말이라도 눈앞에 지나갔었는지 희미한 기억 같은 게 있을 뿐이다. 행선지가 훈춘이건 혹은 청진이건 금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옥을 가고 있다는 생각 이 이외엔. 서러운 마음은 터럭만치도 없고 울음 같은 것도 잠들어버린 지가 얼마 만인가. 가뭄에 갈라진 땅바 닥처럼 가열한 햇빛이 튀고 있는 저 길바닥처럼 차라리 거칠 대로 거칠어 암산같이 무디어버린 신경이 지옥과 의 싸움을 위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처음 해삼위에서 청진에 있는 윤이병한테 도망을 갔을 때 금녀는 울었다. 그리고 김두수에게 끌려 떠날 때는 무력하고 겁 많은 사내 윤이병을 원망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용정으로 윤이병을 찾아왔을 때 금녀는 거의 몽 유병자 같은 상태였었다. 당황하고 겁에 질린 사내 얼굴을 대했을 때도 금녀는 그저 막막했을 뿐 서러움도 그 리움도 원망도 가질 수가 없었다. 인심처럼 바싹하게 메마른 마루 끝에 혼자 앉혀놓고 마치 액병을 지닌 병자 를 보듯, 비실비실 피해 달아나듯 나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 말이야. 나 다, 다녀와야겠어." 하며 황황히 나가는 사내 뒷모습을 바라본 금녀는 이 세상 넓은 천지에 오로지 자기 혼자밖에 없다는 것을 가 슴이 터지도록 절감했다. 혼자밖에 없다! 금녀는 차일이 펄럭이는 소리를 들으며 어제일을 생각한다. 윤이병을 멸시해서도 아니요 원망 같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억세어지는 마음 사잇길을 지나가는 풍경 같은 거, 윤이병 과 김두수 사이에 어떤 타협이 이루어졌는지 금녀는 그런 것을 살필 겨를도 없었거니와 하여간 그들은 술상을 벌이었다. 그리고 금녀의 아비는 과객처럼 그들 사이에 끼어서 죄없는 술만 축내고 있었다. 금녀는 방 한구석 에 짐짝처럼 처박혀서 기묘하기 그지없는 그네들 주연을 돌같이 굳어진 눈동자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어때? 내 시키는 대로 하는 게지?" 김두수는 술을 들이켜고 술잔을 놓으며 다짐하듯 물었다. 윤이병은 술잔을 든 채 눈을 내리깔았다. 정맥이 내 비친 손이 하얗게 보였다. 내 시키는 대로만 해준다면 자네가 저지른 일쯤," 졸개를 대하듯 김두수의 태도는 느긋하고 관대해 있었다. 물론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그땐 말해 뭣 하나? 끝장나는 게고 아무튼 내 시키는 대로만 해준다면 이번 일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디 그뿐이겠나? 내 보아하니 자네도 노상 돈이 아쉬운 꼴인데 그까짓 양심 이고 개나발이고 내가 잘사는 것 이외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돈푼 마지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잘 만 하면 큰돈 만드는 구멍도 뚫어줄 수 있다 그거야. 또 자넨 명색이 선생이라 학식이 있으니 뉘 아나? 나도 자네 같은 끈이 있으면 좋겠기에 하는 말일세. 누이 좋고 매부 좋고." ..." 내 말 알아듣겠어?" ..." 내 말 알아듣겠느냐 말이다!" 알아들었소." 윤이병의 목소리는 의외로 퉁명스러웠다. 위기를 모면한 안도감도 있었겠지만 자기를 필요로 하는 상대방의 의도를 안 이상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성싶다. 금녀아비는 게겔스럽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게슴츠레한 눈을 불안하게 깜빡거리다간 우는 것도 아니요 웃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짓고 젊은놈들 어는 한 사람 술을 권하는 일이 없건만 연방 자작으로 술에 절어드는 것이었다. 그새 무슨 말을 했 던지 김두수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내 네놈 목을 댕강 달아매놓고 갔으면 좋겠다마는 자아 술이나 받게." 김두수는 제법 호기스럽게 군다. 윤이병이 술 마시는 것이 째려보다가 피멍이 든 윤이병의 턱을 바라보며 힐 죽 웃는다. 내가 알지 알어. 그걸 모른다면 애가 네놈 목을 댕강 달아매놓고 가지 그냥 두나? 저기 저 계집이," 김두수는 금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네가 좋아서 달아나왔다면 어림 반푼어치나 있는 일인가? 저년은 자네 아니라도, 나무 둥우리라도 도망갈 수 있는 곳이라면... 저년하고 나는 원수로 세상에 태어났단 말이야. 나는 평생 저년을 잡으러 다닐 게고, 하긴 내 팔자가 잡으러 다니게 돼 있는 팔자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니 자네도 내게서 도망갈 생각일랑 아예 말어. 어쨌 거나 내 한 말을 깊이 명심하고, 싫든 좋든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테니," 순간 윤이병 얼굴에 공포의 빛이 지나갔다. 차일 안에는 머리에 꽃을 꽂은 청국 여인과 농부들이 서 있었다. 칡덩굴로 탄탄하게 엮은 광우리 속에서 중병 아리가 삐약삐약 운다. 어떻게 하면 달아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금녀는 김두수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증오할 뿐이다. 너무 격렬한 증오심 때문에 불안이나 공포증이 없는 것 이다. 목숨이 찢겨지는 한이 있어도, 자기 심장에 비수를 꽂는 광경을 상상하여도 도무지 무섬증을 느낄 수가 없다. 무섬증을 느끼기는커녕 전신을 내던지고 싸워야 하는 것에 대한 어떤 희열마저 솟아난다. 저항하고 증 오하는 것도 일종의 정열인지 모른다. 두번 다시 윤선생한텐 가지 말아야지. 두 번 다시는...' 해는 서편 쪽으로 기울어 차일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동쪽으로 뻗는다. 저만큼 풀섶에 퍼질러 앉은 김두수는 궐련을 꼬나물고 튀튀하게 나온 입술을 젖히며 한 마차를 타고 온 나그네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죽어버릴까? 차라리, 마차 바퀴에 깔려서 죽어버릴까? 아냐! 살아야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마지막까지... 난 저 악당놈한테 굴복하지 않아.' 형씨." 네," 김두수는 격에 맞지도 않게 공손한 대답이다. 나그네는 햇볕에 그을리어 그랬던지 꺼무스름한 낯빛인데 왼편 귀 근처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푸르스름한 낯빛인데 왼편 귀 근처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푸르스름한 반점 이 퍼져 있었다. 어떤 때는 다부져 보이는 표정이었고 어떤 때는 아주 병신스러워 보이기도 했었다. 몸은 단단 하고 날렵한 것 같다. 장사꾼은 아닌 듯싶고 선비 같은 인상도 아니었으며 차림새는 초라했다. 그러나 어쩐지 사람 자체는 초라해 뵈지 않는다. 형씨를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소이다." 그래요? 어디서 나를 봤을까요?" 김두수는 여전히 공손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러나 상대편 기색에 재빠른 주의력을 모으며 묻는다. 글세... 어디 사시오?" 어디라 딱이 말할 수 없구먼요. 철새처럼 장삿길 따라다니니 말입니다. 동주리 틀고 자리잡아 앉을 새가 있어 야지요." 무슨 장살 하시는데." 이것저것, 젊을 때 돈을 벌어야잖겠소? 닥치는 대로 해보는 거지요." 젊을 때... 그야, 그러나 돈 버는 일이 어디 쉬워야지요." 사내자식 배짱 하나 튼튼하면야 재물쯤..." 그 배짱이라는 것도 날 때 타고나야지요." 아암, 그야 그렇지요." 첫눈에 보기에도 형씨 담력이야 보통은 아니라 싶었소만 수단도 보통은 아닌 모양이오. 하하핫..." 그건 또 왜요?" 김두수는 마음속으로 경계심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되묻는다. 저기 저 서 있는 여인을 보니 말이오." 사나이는 금녀 뒷모습에 눈짓을 했다. 내 여핀네요." 그렇다면 더욱 놀라운 수단이지요. 저렇게 보기 드문 미인을 형씨 같이 못생긴, 하 이건 말이 지나쳤구만." 김두수의 부숭한 눈두덩이 빨개진다. 불쾌한 모양이다. 본시 계집이란 가지는 게요. 재물과 같은 거 아니겠소? 가지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일색 양귀비가 대수겠 소? 개 핥아놓은 죽사발같이 얼굴만 멀쩡하고 속빈 놈이나 계집이 오길 기다리는 게지." 옹졸하게 응수한다. 바, 바로 그렇소이다. 남자 못생긴 것하고 잘났다는 말과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저렇게 미인인 부인을 가진 사 람이면 아암요 잘난 남자지요." 나그네는 낭패한 듯 허둥지둥 말을 꿰맞추었으나 마음속으론 낭패했던 것 같지는 않다. 또 돌아서 있는 금녀 를 말처럼 그렇게 미인으로 감탄하는 것도 아닌 성싶다. 사실 금녀는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미인은 아니었다. 키는 여자치고 다소 큰 편이며 몸매가 고왔고 뽀오얀 얼굴빛에 담백한 느낌의 별 특징 없는 얼굴이지만 쌍꺼 풀이 크게 진 눈, 어두우면서 강한 눈빛이 평탄찮을 운명을 암시하는 듯싶었고 김두수를 향할 때 그 눈은 표 독스럽게 이글거린다. 훈춘에 도착한 김두수는 여인숙을 찾아가는데 얼굴에 반점이 있는 사내도 그의 뒤를 따라온다. 김두수는 돌연 몸을 휙 돌렸다. 사내의 표정을 잡기 위해서다. 사내는 천하태평인 얼굴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형씨께서는 어딜 가시오?" 묻는 김두수 말에는 대답 없이 형씨께서는 여관으로 가시는 길 아닙니까?" 되묻는다. 여관엘 가지요." 나도 여관을 찾아가는 길이오." 이윽고 이들은 조촐한 여관으로 들어갔다. 일행으로 생각한 사동은 나란히 붙은 방 두 개를 정해주고 나간다. 금녀는 여전히 방 한구석에 몸을 쑤셔박듯 도사리고 앉는다. 그러한 그 여자의 습벽에는 이미 익숙해진 김두 수는 방 가운데 뻗치고 서서 지긋하게 바라볼 뿐, 말이 없다. 남폿불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저 녁상이 들어왔다. 겸상이 아닌 각각 다른 밥상을 마주하고 치러야할 의무처럼 밥을 먹는다. 이런 분위기나 따 로따로 밥을 먹는 행위에도 익숙해 있는 듯 김두수는 그의 인간성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이만큼 인내심 깊게 말이 없다. 도시 금녀에게 가는 김두수의 애정이란 어떤 성질의 것이었을까? 끝내 거역하고 나서는 여자의 끈 질긴 고집 앞에 끝내 맞서보고야 말겠다는 그도 그러한 고집 때문일까? 아니 역시 애정이었을 것이다. 밥을 절반쯤 먹었을 때 김두수는 금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마치 혼잣말같이 씨부렸다. 네가 죽어 없어지지 않는 한 넌 나한테서 몸을 숨길 순 없어. 나는 본시부터 사람 찾아내는 재주만은 비상하 게 타고났으니 말이야." 하고 밥이 가득 든 입을 헤벌리고 끼들끼들 웃는다. 금녀는 밥숟갈을 탁 놓고 본시의 구석자리로 돌아가 도사 린다. 음 그만치 먹었으면 굶어죽진 않겠지." 김두수는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사동이 가져온 숭늉을 한 모금 머금은 뒤, 입가심하듯 굴럭굴럭 입을 굴 리는데 금녀는 그 소리에 몸서리치듯 부르릉 떤다. 어허허 잘 먹었다." 하며 툇마루로 나간 김두수는 옆방 기색을 은근히 살핀다. 그러자 그 방에 든 점박이 사내도 열려진 방문 사 이로 얼굴을 쑥 내밀며 어리석은 것 같은 웃음을 띤다. 방안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마루를 희미하게 비춰준다. 형씨는 이곳이 초행이시오?" 김두수는 지체없이 말을 던진다. 아니외다. 이곳에 형님이 계실 때는 가끔 왔었지요." 형님이," 네," 한데 지금은 안 계시다 그 말씀이오?" 전엔 이곳에서 제법 버젓하게 살았었는데 속임수를 당해 홈싹 망해버린 게요. 그래 이곳을 떠났습니다." 헌데 이번엔 무슨 일로?" 이곳에 왔다기보다 지나는 길이지요. 나는 웅기 형님한테 가는 길인데 조카가 하나 있어서요." 조카지요. 그럼 거기서 유하실 수도," 한데 거시 가서 묵을 형편이 못 됩니다. 실은 그애를 데리고, 네, 그애 장가를 들이러 가는 길이지요." 그렇습니까." 사내는 이러섰다. 어디 가시려고 그러시오? 술이나 하십니다." 김두수는 점박이사내를 좀더 다루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나중에 하십시다. 그앨 데리고 와야겠어요. 내일 아침에 떠나야 하니까 지금 기다리고 있을 겝니다." 사내가 나가버리자 김두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쩐지 이상하다. 수상쩍은 구석이 있단 말이야. 마차에서부터... 혹 내가 누군지 알고 노리는 놈이 아닌지 몰 라.' 김두수는 용정 그 막다른 골목에서 당할 뻔했던 일이 있고부터 퍽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어쩌면 크다만 고긴지도 모르지. 어딘지 냄새가 다른 것 같단 말이야.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방안으로 들어간 김두수는 벽에 머리를 기대인 채 졸고 있는 금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온종일 마차를 타 고 왔으니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요 연일 긴장된 신경도 피곤했을 것이다. 김두수는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금 녀와 자신의 관계가 어처구니없이 여겨진다. 수없이 여자를 겪은 김두수다. 농락하고 난 뒤 술집에 여자를 팔 아먹은 일도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여자에게만은 집념이 계속되는가. 금녀는 소스라쳐 놀라면 자세 를 꼿꼿이 세운다. 졸고있던 눈이 샛별 같이 빛나고 표독스럽게 눈빛이 변해간다. 김두수는 순간 여자의 머 리채를 와락 잡으며 메어칠 듯하다가 놓아준다. 남폿불을 불어 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그는 점박이사내가 든 방과는 반대쪽에 있는 방 앞에 가서 안의 기척을 살핀다. 불이 꺼져있는 방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보일락말락 방문을 열어놓고 그곳에다 눈을 갖다대어 바깥을 내다본다. 만일 의 경우를 위해서, 그만큼 김두수는 용의주도했던 것이다. 이윽고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김두수는 슬 며시 몸을 일으켜 문틈으로 눈을 가져간다. 두 사나이가 들어서는데 점박이사내는 손가락질을 한다. 김두수가 든 방을 가리킨 것이다. 점박이사내보다 키가 큰 다른 사내가 손가락질한 방을 힐끗 쳐다보는데 방에서 새어 나온 희미한 밝음 속에 나타난 사내 얼굴을 본 김두수는 놀란다. 용정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박 모의 동생이 아닌가. 그러나 김두수는 다음 순간 씩 웃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 있는 게 안전하다 할 순 없지. 이 장소에서 떠나는게 옳을 게야. 금녀를 어떡하나?' 점박이사내에게 의심을 품기는 했으되 박모의 동생이 나타나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 밖의 일이었다. 우연인지 누가 알아? 아니다. 그자가 점박이놈 조카가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어. 그러니 우연이라 할 수는 없 다. 혹? 나하고 아무상관이 없이 저놈들은 일을 꾸미려고 만나는지... 하여간 이렇거나 저렇거나 여기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김두수는 바쁘게 생각을 굴려본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노리고 왔다는 것이 제일 정확한 판단인 듯싶다. 빌어먹을! 저년만 아니면, 이래가지고는 꼼짝할 수도 없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얼마 동안이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두운 방안에서 곤두세우고 있는 김두수의 귀에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 다. 마룻장 밟는 소리가 났고 다음 옆방 문 열리는 소리... 역시 그랬었구나! 한데 점박이사내놈, 그놈이 어떻게 내 얼굴을 알았을까?' 금녀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졸면서 그녀는 꿈을 꾸다간 놀라 깨고 졸다간 꿈을 꾸고, 꿈은 토막토막이었고 잠도 토막토막이었다. 푸른 물이 밀려오는가 하면 마차 속에 자신이 앉아 있었고, 수염을 흔들 며 술을 마시던 아버지 얼굴이 나타나는가 하면 윤이병의 목이 졸린 모습이 지나가고, 인기척이 있어 금녀는 눈을 떴다. 김두수가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질 것을 대비하며 금녀는 두 팔에 힘을 준 다. 이놈! 꼼짝 말아라!" 전혀 다른 목청이다. 목소리를 죽인, 그러나 무시무시하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나직이 눌러 찌그러뜨린 경악의 소리다. 계집뿐이야." 뭐라구?" 계집 혼자람 말이다." 그놈 여핀네야. 계집을 두고 멀리 갔을 리 없어." 점박이사내 음성이다. 금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한다. 이봐." 예?" 네 서방놈 간 곳을 대라." ..." 어디 갔는지 말 못해?" 나, 난 몰라요." 거짓말 말고 어서 대답하란 말이야!" 나 난 아무것도 몰라요." 금녀는 사실 김두수가 어디 갔는지 알지 못했다. 이놈이 눈칠 챘다!" 어떻게 눈칠 채누? 조용히 기다려보자구. 뒷간에 갔는지도 모르니." 아니야, 자세히 보게. 자리에 든 흔적이 없어." 음?" 저 여자도 불 꺼진 방에 앉은 채 , 뺀 거다!" 계집을 두고 빼?" 빼는 데는 귀신이야. 빌어먹을!"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계속된다. 금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거라 생각한다. 할 수 없다." 그럼 여자를 끌고 가자." 여자!" 음, 인질이야." 계집을 버리고 달아난 놈이." 허나 그놈한테는 과남한 미인이거든. 필시 계집 찾으러 나타날게야." 하여간 그럼 그래보세. 여보시오!" ..." 일어서란 말이오." 아니 제가..." 잔말은 안 하는 게 좋고 우릴 따라가주어야겠어! 시끄럽게 굴면 그땐 사정없이 한방 갈겨버릴 테니까." 키 큰 사내가 팔을 와락 잡아끈다. 일어선 금녀의 등을 떼밀고 방 밖으로 몰아낸다. 끽소리 마라. 옆구리에 총구멍 낼 생각 없으면," 금녀의 몽롱해 있던 의식이 살아났다. 김두수를 죽이러 온 사람들! 그, 그러면 이 사람들은...' 금녀의 전신이 와들와들 떤다. 무서움 때문이 아니다. 환희다. 날아갈 듯, 금녀 는 무슨 말을 해야 한다 생각 했으나 혀가 굳어버렸는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대체 당신네들은 뉘시오, 하고 물어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인숙을 빠져나와 어두운 거리로 나왔을 때 금녀는 하늘의 별들을 우러러본다. 비로 소 마음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는 곳이 도둑의 소굴이든 악마가 살고 있는 곳이든, 다만 김두수를 떠나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금녀 는 정체 모를 두 사나이가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신비스런 존재로 여겨진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장 바닷가에서 마차가 다닐 수 없는 좁고 울퉁불퉁하고 험한 길을 얼마 동안이나 걸었는지, 금녀는 찝찔한 바닷바람을 허파 깊숙이 들이마시었다. 몇 번을 그렇게 했는지 모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묵묵히 걷고 있는 두 사내는 금녀를 인질로 납치해간다고 생각할 터이지만 금녀는 줄곧 신비스런 환상과 흥분에 들떠 있었다. 구름 위를 둥둥 떠온 듯 피곤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지금은 옛일이지만 그렇다, 그것은 꽤나 아득히 먼 옛일인 것이다. 짙은 나무숲에서 매미가 힘차게 여름을 노 래할 때 찬송가를 부르던 예배당이 생각난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던 딱딱한 마룻바닥의 감각도 생생하게 살아난다. 빼앗긴 내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울먹이며 외치던 두루마기 입은 중년 남자는 누구였던가? 교회당 안이 술렁거리고 소용돌이치고, 젊은 사내들 얼굴에는 땀방울인지 눈물방울이었던지, 그리고 벌겋게 상기되어 그것은 참 아름다웠었다. 여러분, 거룩한 우리의 하나님 예수를 믿는 사람이 백만이 되는 그날! 그렇습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잃었던 내 강토를 찾을 것이외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날의 영광과 승리를 위해 복음 전파에 몸 바쳐야 할 것이외다!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다. 강 하나를 넘어서면 그곳에 우리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한 눈빛 강한 사내들이 신출 귀몰한가는 얘기들은 누가 들려주었던가? 금녀는 지금 그 전설 속을 걷고 있는 것을 느낀다. 불과 일 년이 못 되는 세월이었는데, 새까만 어둠이었으며 과거 일체를 깡그리 망각해버렸던 불과 일 년이 못 되는 오욕의 세 월이었는데, 그 새까만 한 장의 책갈피를 넘기고 보니 새로운 천지가, 아니 그것은 아직 성급한 얘기겠고 행복 했던 낡은 시절이 희미하게, 차츰은 뚜렷하게 빛깔을 띠며 나타나는 것이다. 종소리에 흔들리는 교회당의 풍경 이 있고 어머니의 미소짓는 얼굴이 있고 연한 새순에 햇볕이 일렁이는 봄날이 있고 머리꼬리에 자줏빛 댕기를 물리던 거울 속에 청순한 얼굴이 있고 항구에 정박했었던 화륜선을 구경 하러 나갔었던 조그마한 계집아이 도 있다. 어깨에 모포를 걸치고 지나가던 눈동자 푸른 아라사인과 견장이 시뻘겋던 왜병들의 구둣발 소리와 갓 쓰고 장죽 문 늙은이와 얼음판 위에 팽이를 치는 머슴아이와 마치 그림책처럼 한 장 한 장 책갈피를 넘길 수록 선명해지는 추억의 알록달록한 풍경-- 그러나 윤이병의 모습만은 어느 책장 속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새까맣게 먹칠된 그 장 속에 묻혀버렸는가. 키 큰 사내가 담뱃불을 붙인다. 보기 좋은 콧날이 성냥불빛에 솟아났다가 사라진다. 뿌연 연기가 어둠 속에 흩 날린다. 다시 빨아당기는 담뱃불에 콧날이 나타나고, 여까지 오는 동안 두 사내는 자신들의 신분을 짐작케 할 만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바닷바람에 젖어서 눅눅한 것 같은 땅을, 아직은 지열이 식지 않고 있는 길바닥을 타둑타둑 밟으며 금녀는 사 내들을 따라간다. 그리고 비로소 금녀는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더할 수 없는 기대와 흥미를 가 져보는 것이다. 이제 다 왔구먼." 점박이사내가 뒤에서 말했다. 마을 불빛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쓸쓸한 한촌임을 알 수 있었다. 포염시에서도 외떨어진 단호산포대 및 흑룡만을 바라보는 마치와야라는 곳이다. 키 큰 사내는 길바닥에 담배꼬초를 휙 던진다. 바람에 불꽃이 튀다가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사내는 나직한 목소리로 혼자 웃는다. 그의 웃는 심정을 잘 헤아리고 있는 듯 점박이사내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다 뚝 끊어버린다. 판 자로 벽을 친 오두막 앞에 이르렀을 때 점박이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문을 두드린다. 뉘시오." 맑고 드높은 여자의 음성이 집안에서 울렸다. 나야," 이번에는 키 큰 사내가 말했다. 작은아버님이세요?" 음." 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는 손에 든 등불을 치켜들며 밖을 비춰준다. 집안으로 들어선 키 큰 사내는 젊은 여자 에게 묻는다. 애비 왔냐?" 아뇨. 기별만 왔어요." 점박이사내와는 이미 구면인 듯 친숙한 표정을 지었으나 금녀에게 눈길을 보낸 여자는 누구냐고 묻듯 키 큰 사내를 쳐다본다. 집 외모에 비해 꽤 넓은 온돌방으로 금녀는 사내들을 따라 드어갔다. 자자부레한 세간이 놓여 있는 방, 그러나 그 세간들은 일상을 위한 청빈한 비품이었을 뿐 생활이 어렵다는 것은 역력했고 방 아랫목에는 젖먹이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앉으세요. 누추합니다." 여자는 금녀에게 공손스럽게 말했다. 나이는 스물넷쯤 됐을까? 금녀보다는 적 어도 네댓은 위인 듯싶고 차 림새는 초라하다. 용모도 아름답다 할 수는 없으나 눈빛이 맑고 총명해 보였으며 단정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 사내는 자리에 앉은 후에는 무뚝뚝해진 얼굴을 마주볼 뿐이었다. 키 큰 사내는 김두수에게 체포되어 총살 된 의병장 박모의 동생이며 정호의 삼촌 박재연인데 용정 골목에서 김두수와 마주쳤을 그때처럼 옷차림은 남 루하지가 않았다. 여자는 송장환이 짝사랑했었다가 청혼까지 한 일이 있는 정호의 누님 정순이, 그러니까 박재 연의 조카딸이다. 남폿불을 받고 앉아 있는 점박이사내는 장인걸, 지금은 그 병신스러웠던 얼굴, 천하태평인 듯한 표정은 말끔히 가셔지고 다부진 일면만 남아서 얼굴의 윤곽이 뚜렷했고 준열한 감을 준다. 왼편 귀 근처 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퍼져 있는 반점도 음영 같아서 오히려 어떤 우수를 자아낸다. 이들은 용정에서 우연 히 김두수를 보았고 김두수가 훈춘으로 가는 것을 알아낸 후 박재연은 한발 먼저 훈춘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 으며 장인걸은 김두수를 따른 것이다. 물론 이들은 일을 위한 동지요 이들은 용정행이 김두수를 잡자는 데 목 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금녀를 끌고 오기는 왔으되 이미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눈치는 아 니었다. 저녁은..." 정순은 물었다. 안 먹었다." 박재연은 입맛이 쓰다는 듯 눈길을 돌린다. 시장하시겠어요. 그럼 잠시만..." 정순은 방문을 열고 나간다. 금녀는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을 수밖에, 때론 낯가림하는 아이처럼 눈 을 깜박거리기도 하고, 그러나 그는 앉은자리가 몹시 편하다는 생각을 한다. 염치없이 졸음까지 오는 것이다. 한참 만에 장인걸이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금녀를 건너다본다. 고향이 어디시오?" 느닷없이 물었다. 네?" 금녀는 졸음을 떨어버리듯 고개를 흔든다. 고향이 어디시오?" 저어 청진..." 그러면은 댁의 남편, 그자의 고향은 어디지요?" 남편 아닙니다!" 장인걸이 피익 웃는다. 금녀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다. 아무 인연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할 테지요. 그렇다 하고 고향은 알 거 아니오?" 경상도라 하더군요." 경상도라," 박재연이 힐끔 눈을 들어 금녀를 본다. 한데 그자가 댁을 찾으러 오리라 생각하지오?" 아마," 댁은 찾아오는 걸 기다리시오?" 아니오. 저, 전 도망쳤다가 붙잡혀가는 길이었어요." 설마," 저어, 용정의 요, 용정에 가셔서 상의학교 선생 윤이병이라는 사람한테 물어보심 아, 아실 거예요." 금녀는 엉겁결에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달리 자신에 대해 증명할 길이 없었다. 오는 동안에는 그러했고 이 집안 에 들어와서도 그러했던 금녀의 얼빠진 것같이 안심스러워 뵈던 얼굴에 처음으로 격렬한 분노가 떠오른다. 상의학교? 그건 송병문 씨가 경영하는 학굔데." 박재연의 말이었다.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윤이병이라는 사람한테 도망갔다가, 수, 숨어 있다가 저어..." 얼굴이 분노로 긴장된 것과는 반대로 말은 허둥지둥이다. 자기의 처지를 설명해야겠다는 욕망이 강하면 강할 수록 무딘 다리로 민첩하게 뛰려고 몸부림치는 거 같은, 그런 혼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내들은 더 이상 금 녀 말에 관심을 기울이려 하질 않는다. 상의학교라... 송장환.." 박재연은 별안간 껄껄 웃는다. 왜 그러지?" 장인걸이 의아해서 묻는다. 사연이 좀 있어서. 그 일이 생각나 웃는 것세. 송병문 씨 둘째아들을 송장환이라 하는데 거 착실한 청년이야." 혼자말처럼, 그러고는 더 이상 설명은 않는다. 그것으로써 금녀는 다시 잊혀진 존재로 오두마니 남겨지고 사내 들은 제각기 생각에 빠지는 듯 말이 없다. 이윽고 저녁상이 들어온다. 안손님은 방이 누추하지만 저쪽에다 차렸는데요." 정순은 면구스러워하는 얼굴로 금녀에게 말했다. 그럴 것 없다. 내외도 옛날얘기, 마우제놈 땅에 살면서 무슨," 박재연은 혀를 찼다. 정순은 급히 나가 다른 방에 차려놨다는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드세요." 네." 금녀는 행동거지에 자유를 느끼며 사양 않고 밥숟갈을 든다. 무안하고 생소하고 어쩌고 그런 것을 금녀는 느 낄 겨를이 없었다. 우선 배가 고팠고 또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낄 만큼 그는 일체의 대결 의식에서 놓여나 있 었다. 정순아." 예." 금녀 때문에 엉거추춤 서 있는 조카딸을 불러놓고 박재연은 장난스럽게 웃는다. 너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 무슨 말씀이신지," 송씨댁에 시집을 갔었더라면 이 고생은 아니 할 걸, 안 그러냐?" 작은아버님도," 정순은 몹시 난처했던지 얼굴을 붉힌다. 그러고는 얼른 나가버린다. 이날 밤 금녀는 아기를 안고 온 정순이롸 함께 고리짝 궤짝이 놓인 조그만한 방에서 잠을 잤다. 버릇이 그러 했는지 한방에 자리를 깐 낯선 안손님에 대해 정순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상을 받았을 때 금녀는 두 사내가 말도 없이 떠난 것을 알았다. 정순이는 각별한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으나. 사람됨이 은근하 여 금녀는 외갓집에라도 와서 묵는 듯 마음이 평온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이삼 일 동안이었고 정순이 빌려주 는 모시적삼으로 갈아입고 땀에 젖은 제 모시적삼을 벗어서 비누질을 하고 빠는데 금녀는 별안간 손끝에서부 터 형용할 수 없을이만큼 무서운 고독이 뻗쳐오르는 것을 느낀다. 내가 왜 여까지 와 있는 겔까? 난 뭐야? 옳지! 난 술집에 팔려 갔었던 계집이었지. 술집에서는 아무 일도 없 었다.' 금녀는 저도 모르게 비눗물 묻은 손으로 쪽머리를 만져본다. 그러고 나서 일손을 놓고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 다본다. 집안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드려온다. 김두수놈이 날 채갔다. 김두수놈하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 윤이병이...' 윤이병이, 그 사람이 나를 잡아먹었다. 아니야 아니야.' 하늘이 흐르는 구름으로부터 눈길을 거둔 금녀는 그늘진 뒤안, 습기가 습습하게 풍겨오는 땅바닥을 내려다본 다. 이미 난 글렸다. 술집 계집... 밀정놈 김두수 여편네...' 금녀는 다시 적삼을 빨기 시작한다. 새까맣게 지워버렸던 불과 일 년이 못 되는 세월이 빛깔을 띠며 마음속에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픔으로, 오욕으로. 적삼을 빨랫줄에 널어놓고 금녀는 정순에게는 아무말도 없이 바닷 가로 나간다. 갑자기 정순이 거북하게 느껴졌고 조그마한 오두막집이 생소하게 느껴진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삭막하기 그지없는 마을이다. 사오십 호 가량의 볼품없는 오두막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는 대개가 고깃배를 타거나 노동에 종사하는 하루살이 인생들이 등을 비비고 사는데 포염시 뒤켠 언덕을 하나 넘 은 곳에 소위 카레스카야 스라브도카라 불리는, 수천명의 조선 이민들이 살고 있는 그 부락과도 별로 내왕이 없는 빈한하고 외로운 마을, 금녀는 무릎을 세우고 세운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바다를 바라본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절망에서의 탈출 뒤에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 픈 찰나인가. 희망이 일러이는 금녀 가슴에는 뜻하지 않았던 조바심이 아프게 바다의 파도가 방천을 치듯 쉴 새없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빼앗길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불안이 없다. 지금 금녀가 가져보는 앞으로 의 자기 운명에 대한 기대와 흥미가 과연 희망적인 것인지 그 어떤 실 마리도 잡아보지 못한 채 방향도 알 지 못한 채 악몽 속에 허덕여온 여자는 희망 그 자체를 겁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만금을 가졌어도 높 은 베개에 깊숙이 잠드는 사람이 허다하거늘 때 묻은 염낭 속의 찌그러진 구리돈 한 푼을 갖고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금 금녀와 같은 처지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금녀에게는 절망 그 자체 가 삶이었었는지 모른다. 순간 불꽃 튀기듯 뻗치어온 절망과의 대결, 그 긴박한 찰나가 삶의 증거였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서러움이나 근심이나 불안은 절망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온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금녀는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치밀어오르는 오열을 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살아야 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수없이 자신에게 되풀이 물어보는 것이지만 검푸른 바다처럼 막막할 뿐이다.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늙은 아버 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겁에 질렸던 윤이병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들에 대한 원망스러움이 싹트기 시작한다. 심화병으로 죽은 어머니와 눈먼 망아지처럼 아버지 곁에 있을 어린 사내동생이 생각난다. 한곳으로 똘똘 뭉쳐 졌던 증오심이 그 대상을 잃자 풀리어나면서 그와의 성질이 다른 미움과 사랑이 금녀 가슴에 젖어든다. 금녀가 바닷가에 앉아서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장인걸이 정순의 집에 나타났다. 그 여자 있지요?" 장인걸이 낮은 음성으로 정순에게 물었다. 아까, 바닷가에 나간 모양이에요." 바닷가에 나갔다 해도 도망가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지 장인걸은 놀라지 않는다. 데려오기는 왔는데 처치곤란이구먼." 혼자말처럼, 그리고 금녀를 찾을 양인지 발길을 돌린다. 이상한 여자다. 도대체 어떤 신분의 여자일까?' 무관심한 척했으나 장인걸은 금녀를 데리고 오는 도중에도 늘 그 생각을 했었다. 용모가 아름답다거나 그렇지 못하다거나 그런 점에선 별 흥미가 없지만 머리를 올린 것을 봐서는 분명 처녀는 아닐 터인데, 그런데 어쩐지 아낙으론 보이지 않았고 교육을 받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양가집 소생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기 앉아 있구먼.' 장인걸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금녀 가까이 다가간다. 여보시오." 돌아본다.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어 있다. 묵묵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장인걸이 놓아드릴 테니 가시려오?" 뜻밖의 말을 한다. 네? 저를 말이에요?" 그렇소." 금녀의 입술이 파들파들 떤다. 가, 갈 곳이 없는걸요." 그러면은?" 어쩌겠냐는 것이다. 가면 붙잡힐 거예요. 틀림없이 붙잡힐 거예요." 그자한테 말이오?" 네." 장인걸은 멀찌감치 엉덩이를 내려놓고 앉는다. 담배를 붙여물고 나서 도대체 그자와는 어떤 관계요?" 팔려갔지요. 파, 팔려간 거예요." 팔려가다니?" 눈살을 찌푸린다. 양미간이 솟으면서 표정이 살벌해진다. 하긴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지요. 헌데 말씨로 보아 글을 배웠소?" 네." 어디서?" 예배당에 다니면서 거기 학교에 다녔어요." 그럼 언문은 다 알겠구먼요." 한문도 조금은," 올해 몇이시오?" 스물한 살입니다." 오랫동안 침묵이 계속되고 장인걸은 담배만 피운다. 그자가 밀정놈이 것을, 아니 헌병 보조원을 지냈다는 것을 알았었소?" 밀정이라는 정도는, 늘 장사한다고 했었지만요." 아무 물정 모르는 여인네라면 몰라도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 어찌 그리 무모한 처사에 순종하였소?" 집이 망한 탓이었어요. 차음엔 술집에, 술집에는 잠시였었지만," 하다 말고 금녀는 두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운다. 하기는 사람마다 사정이 다를 테지요." 장인걸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럽고 약해져 있었다. 사람마다," 장임걸은 다시 중얼거리다가 푸르스름한 얼굴의 반점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멀리 먼 곳, 바다끝으로 시선을 던진다. 눈에 눈물같은 것이 어리다가 별안간 일어선다. 들어갑시다. 댁의 처신에 대해선 우리도 책임이 있는 듯하니 생각해보기로 하구요." 그러다니 발길을 돌린다. 금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휘적휘적 걷는데 남자가 한 말에 매달릴 수 없는 강한 자비 의식이 눈앞을 캄캄하게 한다. 그 그러면 절 보내주시겠어요!" 금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전, 전 술집 여자였단 말예요!" 금녀는 시비라도 거는 듯 장인걸을 노려본다. 그래서요?" 금녀는 깜짝 놀란다. 그리고 다음,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참말이지 그래서 어쨌다는 갠가. 그게 이 남자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장인걸은 다시걷기 시작한다. 그놈을 잡아죽일 때까지, 그럼 기다려보슈. 고생스럽겠지만 연추로 가면 혹 댁이 할 만한 일거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하여간에 내일 연추로 떠나는 게 좋을 듯싶소." ."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글도 배웠다는 사람이 남한테 팔려가는 일이 있어도 안 되겠지만 술집에 있었다고, 무 슨 벼슬을 한 것도 아닐 테인데 술집 여자란 말이에요! 하고 큰소리칠 것도 아니오." 장인걸은 금녀의 말투를 흉내내어놓고 웃는다. 금녀는 가슴이 뭉클하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지만 착찹한 얼굴 표정은 펴지지가 않는다. 정순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장인걸은 이튿날 아침 금녀를 데리고 연추를 향해 떠났다. 그들이 떠난 뒤 김두 수는 포염시에 잠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끄나풀인 전당포 주인 양서방을 찾아갔다. 허 오랫간만이오." 양서방이란 유들유들하게 살이 찐, 사십 가까이나 된 사내였다. 사실은 김두수의 끄나풀이라기보다 일본 영사관에서 심어놓은 앞잡이다. 이번엔 무슨 일로 오셨소." 비록 나이느 훨씬 처지는 김두수였으나 일본 경찰과 영사관의 신임이 두텁고 민활한 일꾼으로 인정받아온 터 이어서 양서방도 김두수에겐 저자세다. 혹 아실지는 모르겠소만," 무슨 일인데요?" 얼굴에 이렇게," 김두수는 자기 얼굴에 귀밑으로부터 입술 가까이까지 손으로 가리켜 보이며 푸르스름한 점이 박힌 사내를 아는지? 나인 서른을 좀 넘었을까?" 귀밑으로부터 푸르스름한 점이 박힌 사내라구요?" 키는 중키보다 좀더 될까?" 생각이 안 나느데..." 그럼 수소문이라도 좀 해보슈." 여기 사는 사람이오?"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에 여기까지 온 것만은 틀림이 없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놈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재 여편내를 달고 갔으니," 양서방은 의아한 듯 쳐다본다. 마 그런 내막이야 차차로 얘기하기로 하고 나는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는 처지라 양서방이 한번 잘 알아보슈. 제에기! 재수가 없으려니," 김두수는 마치 자기 안방에나 온 듯 자리에 벌렁 나자빠진다. 그리고는 이내 코를 골기 시작한다. 돼지 같은 놈.' 양서방은 노상 나이 대접을 안 해주고 떵떵거리는 김두수에게 유감이 많다. 그러나 하라는 일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허술하게 차려놓은 전당포보다 그런 일거리가 그에게는 생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저녁때 밖에서 돌아온 양서방은 그때까지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김두수를 흔들어 깨운다. 부스스 일어나 앉은 김두수는 눈을 비비며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소?" 글세, 듣기는 좀 들었는데, 이름도 성도 모르고..." 양서방은 감질나게 말했다. 이름도 성도 모른다면 그럼 뭘 들었다는 게요." 김두수는 역증을 낸다. 글세, 그게," 하여간에 지금 이곳에 있긴 있다는 게요?" 연추로 떠났다는구먼." 뭐라구요?" 펄쩍 뛴다. 이곳에 사는 사람이면 내가 환희 다 아는 터이지만, 여기저기 수소문해봐도 알 재간이 있어야지요. 그것도 눈 치껏 해야 하니까." 그럼 연추로 갔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그것도 확실치는 않고 역두에 나가서 지게꾼한테 물어봤구먼. 혹 얼굴에 푸르스름한 점이 있는 사내를 본 일 이 있느냐고 했더니 아침에 연추 가는 마차를 타는 것을 봤다는 게고 여자를 데리고 가더라는 게요." 그, 그럼 틀림없구먼." 김두수는 혀를 찬다. 장 임이네 작전 이 사람아, 서둘 것 없네. 찬은 없지만 저녁이나 먹고 가게." 예, 저어..." 종호 모친 신씨의 만류도 그렇고 방학이 시작되면서부터 만날 수 없게 된 정호를 모처럼 만나 앞뒤를 쏘다니 며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홍이를 갈라낼 수도 없어 월선은 엉거주춤하다. 너무 폐스러버서," 별말을 다 하는구먼. 그새 김생원께서 돌아오실지도 모르잖나." 그러세요..." 그 어른이 딱해서 그러는 게야. 자네라도 찾아온 걸 보시면 한결위안이 될 게 아닌가." 예. 다 저희들 생각이 모자라서..." 아닐세. 남남끼리 그만할 수도 없지. 그러면 여기 앉아 쉬고 있게." 예" 서편에서 뻗어온 햇볕이 오지항아리를 자글자글 태우고 있었다. 열기 실은, 아니 뜨거운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온다. 나뭇잎도 치덕치덕 물기를 머금고 흐느적거린다. 뒤꼍에서 웃는 흥이 웃름소리, 지껄여대는 정호 목 소리. 아이들은 여름 햇빛이 오히려 즐거운 모양이다. 홍이아배는 와 아직도 안 오까? 설마 무신 일이 있는 거는 아니겄지. 우찌 날도 이렇기 긴지 모르겄다. 절에나 한분 가봤이믄...' 칠월 백중날 절에 못 간 생각을 한다. 지난 초봄 절을 짓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올해는 죽은 어미를 위해 백중날엔 동참하리니 월선은 마음먹었었다. 사는 기이 멋인지, 불났다는 거는 핑계 아닌가. 내 정성이 없어 그랬겄지.' 부모 기일이면 월선은 자기와 임이네를 귀밑머리 마주 푼 계집이 아니라 하여 참여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아버 리던 용이를 생각한다. 모든 것을 용이 스스로 외아들 홍이와 함께 진행시키던 제삿날의 행사, 그것은 떳떳하 고 도도했으며 월선이뿐만 아니라 임이네도 고독하고 씁쓸한 날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월선은 아무도 몰래 숨 어서 혼백을 부르며 메상을 올리던 어미 기일은 간장이 찢겨져 나가는 것 같은 서러운 날이었고 해서 백중에 는 절에 가려니, 흠씬 울고 망령의 천도를 손발이 닳도록 빌려 했었는데. 어매, 우찌 아들자석 하나 못 두었소. 살아생전보다 어매 죽은 뒤가 더 서럽소. 무배믄 우떻고 사당이믄, 백정 이믄 우떻소. 서러운 사람끼리 만나서 아들딸 낳아서, 와 그리 못 살았소. 참말로 차생이 없다믄 땅속에 누운 어맨들 우찌 한을 풀 것이며 낸들 우찌 눈을 감고 죽을 수 있겄소. 서럽게 나서 서럽게 살다가 서럽게 죽어야 하는 우리네들 신세가... 어매, 우찌 아니 서럽다 하겄소?' 월선은 강가를 향해 뛰어가는 두 아이의 모 습을 바라본다. 아이들의 모습은 차츰 작아져서 콩알만큼 되고 녹두알만큼 되고 그런 뒤 없어져버렸다. 강둑 가까이 나무 한 그루만이 우두커니 싱겁게 서 있다. 그늘진 나무 밑에 깔아놓은 멍석에서 호박잎 찐 것, 열무김치, 된장국, 맛깔스러운 찬에 조밥으로 저녁을 끝냈 을 때 해는 넘어갔다. 멀리 보이는 육도천 냇물은 비 오신 뒤의 흙탕물처럼 뿌엏고 불그리하게 노을을 반사하 고 있었다. 모두가 다 고생이네." 멍석 위에 그릇들을 함지박에 옮겨놓으며 신씨는 혼잣말처럼 뇌었다. 그럿을 옮겨놓을 때마다 풀발이 서고 악 센 삼베치마에서 서걱서걱 천이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허리도 굵고 손목도 굵고, 햇볕에 그을러 구릿빛 나는 신씨 얼굴에 땀이 흘러내린다. 고생이사 머... 고생을 낙으로 삼고 살 수도 있겄지마는," 손등으로 땀을 훔치는 월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신씨 자네도 입이 없는 여잘세." 하고 빙긋이 웃는다. 과묵하기론 신씨도 마찬가지, 월선의 처지를 소상하게 알고 있는 신씨는 측은한 마음에서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겠지. 그러나 천성이 그렇지도 하려니와 사대부집 여인으로 감정의 억제가 일상이었으 니 얄싹한 말돌림을 삼가는 것이겠는데, 그러나 자네도 입이 없는 여잘세, 한 말에는 고통에 순종하는 착한 마 음을 칭찬하고 아울러 나도 말을 못하나 자네 슬픔은 알고 있네, 하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여벌의 소반 하나가 없는 가난한 살림살이. 함지박에 담아와서 멍석에 폈던 음식 그릇을 도로 함지박에 담으 니 정호가 얼른 그것을 들고 부엌으로 간다. 홍이도 덩달아서 멍석 위에 남은 빈 그릇을 거둬들고 정호 뒤를 따라 부엌으로 쫓아간다. 이상타? 울 옴마는 사내자식이 부석에 들어오믄 못씬다 카더마는 , 정호는 나보다 공부도 잘하고 양반이라 카 는데 와 부석에 들어갈꼬?' 이상하다는 생각은 이내 잊어버린다. 홍이는 어둡기 전에 정호와 밖에 나가 한바탕 더 놀고 싶어 좀이 쑤신다. 잘 묵었십니다. 그라믄 날도 저물고 생원님께서도 안 오시니." 갈 채비를 차리듯 월선이 일어선다. 갈려고?" 예. 저어 노마님께," 그냥 가게. 지금 잠이 드신 모양이야." 홍아! 홍아." 뒤꼍에서 홍이 달려나온다. 옴마야. 갈라꼬?" 음," 벌써?" 벌써라니? 해가 졌다. 어둡어오는데," 그놈 참, 눈이 샛별 같구나." 신씨는 새삼스럽게 홍이를 찬찬히 뜯어본다. 씨가 따로 없다더니, 하며 감탄하는 표정이다. 월선의 입이 절로 벌어진다. 자랑스러움이 염치없이 얼굴 가득히 퍼진다. 얼굴값을 못하고 행사는 개차반입니다." 사내자식이 그래야지, 얌전만 해서 어디 쓸려고." 신씨는 몇 걸음 따라나오며 월선의 작별 인사를 받는다. 또 오게," 예." 월선은 홍이 손목을 잡고 걸음을 빨리한다. 홍아아--" 홍이 돌아본다. 저만큼 정호의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보인다. 또오 놀러 와라아--" 그래애--" 대답하며 월선의 손을 뿌리치고 홍이는 팔랑개비처럼 몸을 빙글빙글 돌린다. 기분이 좋을 때 버릇이다. 넘어지겄네." 안 넘어진다아." 어서 가자. 저물겄구나." 여광이 자취를 감추면서 정호네 초가삼간도 저녁 안개 속에 멀어진다. 저기 또랑이다." 월선은 아이 손목을 잡으며 실개천을 건너뛴다. 핏줄이 닿지 않는 모자는 타박타박, 말없이 걷는다. 도랑가 풀 섶에 숨은 개구리가 운다. 옴마." 와." 아부지는 와 안 오노." 보고 접나?" 응." 언제는 아부지가 무섭다 카더마는?" 아부지가 성을 내믄... 그때 그만 나도 따라갈 거로 그랬다." 핵교는 우짜고?" 그런께 안 따라갔지 머." 따라갔이믄, 벌써 한 달이 헐껀 넘었는데 옴마 보고 저버서 울었일 거 아니가." 홍이는 히힝 하고 웃다가 코를 들이마신다. 홍아." 응?" 니 아부지 따라갔이믄 옴마 보고 저버서 울었겄제?" 사내자식이 울어?" 그라믄 옴마 떨어져도 아 보고 접다 그 말이가?" 울지는 안 해도..." 아직 보드라운 아이의 손을, 꼬무락거리는 손을 손아귀 속에 느끼며 월선은 위태, 위태롭게 이어온 모자지간의 정을 생각한다. 얼핏 보기는 개구쟁이요 응석받이 같지만 한 가지, 다른 아이들 보다 홍이에게 예민하고 조숙 한 면이 있는 것을 월선은 느낀다. 생모 임이네와 자기 사이에서 양켠의 심중을 재빠르게 헤아리고 적당히 안 개를 피울 줄 아는 홍이를 임이네보다 월선이 더 잘 알고 있었 다. 사실 홍이에게는 월선이나 임이네의 애 정이 늘 불안한 것이다. 집안에서 소동이 벌어질 때마다 임이네는 홍이를 점령했고 방어의 성곽을 삼았고 월 선은 공포에 떨며 바라보았던 것이다. 홍이는 어쩔 수 없이 피가 부르는 그 인력 때문에 생모한테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싸움도 없이 또 전의조차 없었던 월선은 성곽을 향해 백기를 흔들어야 하는데 홍이는 그것을 보는 일이 민망하였고 슬펐다. 아비가 보고 싶다 한 것도 두 편의 불안스런 애정의 틈바구니서 불안해 지는 때문이며 할머니 할아버지 제삿날에만 겨우 부자지간의 정을 표시했을 뿐인, 평소에 냉정했던 아비가 실 상 홍이 마음속에서는 든든한 기둥이었던 것이다. 옴마." 와," 정호가 그러는데 말이다, 정호형님은 삼촌이 데리갔다 카더라." 삼촌이니까 데려갔겄지." 그런데 말이다. 그기이 양코배기가 사는, 뭐라 카더라? 아아 마우제 땅이라 카든다? 거기로 데리고 갔대. 마차 를 타고 한참 동안 가는 곳이래." 그 멀리꺼지?" 별안간 홍이는 신중해지는 것 같더니 갈음을 멈추고 발돋움하듯, 그리고 목소리를 낮춘다. 옴마, 정호삼촌은 독립운동하는 사람이래. 정호형님도 독립운동하로 갔다 카더라." 머라꼬?" 월선은 움찔한다. 강에서 헴질함서 말이다. 정호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캄서나 보고만 살짝 말해주는데 옴마도 남보고 말하 믄 안 된다?" 운냐. 말 안 하께." 정호아부지는 말이다. 왜놈한테 붙잡히소 총 맞고 죽었대, 그래서 정호도 좀더 크믄 독립운동하로 나갈 기라 캄시로 나보고도 어른이 되믄 독립운동하로 나가자 안 카나? 그래서 우리는 헴질하다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 세를 했다." 머라꼬?" 두만강에 얼음이 얼믄 말이다. 우리 독립군 아저씨들은 총을 메고 말을 타고 왜놈을 쳐들어간다 카는데, 옴마 참 신나겄제? 나도 크믄 총 메고 말 타고," 큰일날 소리!" 아슴한 어둠에 하얗게 떠오른 아이 얼굴을 월선은 노려본다. 그 강한 기세에 홍이 머쓱해진다. 니 저분때도 일을 저질러서 큰일날 뻔 안 했나!" 그거사 머," 그때도 길상이아제랑 선생님이랑 아니었으믄 우찌 될 뻔했제? 니는 영사관에서 맞아죽었을 기다!" 일부러 겁을 준다. 그래도 머 선생님은 야단 안 치던데? 옴마만 그러지, 선생님은 늘 말했는데 머, 왜놈은 우리 원수놈이라꼬. 그 러이 왜놈으 핵교 댕기는 조선놈으 새끼 다 직이야 한다꼬," 그래 선생님이 그러시더나!" 그거사 머 다른 아아들이 그랬지마는 선생님도 독립," 듣기 싫다! 눈먼 말이 요령 소리만 듣고 가더라고 니가 머를 아노." 다하가 월선은 홍이 손목을 다시 잡고 걷기 시작한다. 큰길로 나섰을 때 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불빛과 그리 고 길섶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 풀 내음새. 그런 일이사 양반들이나 유식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제. 우리네 겉은 상사람은 그저 일이나 꿍꿍 하고, 그 양반 들이사 나라 은덕도 많이 입었고 벼슬자리도 살았고 영화도 누맀이니... 자손만대꺼지 백정은 백정으로 살아야 하고 무당은 무당으로 살아야 하고 노비는 노비로 살아야 하는데 어느 세상이라고... 무신 좋은 일이 있일 기 든고? 상놈들이 해서 되는 일 하나 없었고, 떼죽음당한 것 밖에는 머가 있었노." 그래도 옴마, 학교서 그러는데 홍장군은 포수라 카더라." 하기사 윤보목수 겉은 사람도 있긴 있었다마는..." 월선은 휘적휘적 걸으며 지난날의 그 쓰라렸던 기억을 더듬는다. 야밤에 최참판댁을 습격하고 마을을 떠난 그 숱한 장정들, 지리산에 있다고도 했고 순창에서 떼죽음당했다고도 했고 덕유산으로 몰렸다고도 했고 그 분분 한 소문 속에 한겨울 늦은 봄까지 어느 하룻 밤인들 스산한 꿈 없이 지낸 일이 있었던가. 한 가지 솔잎에다 희망을 걸고 한 개의 조약돌에도 기원을 걸고 나뭇배 장배가 드나드는 나루터에서 기적의 소식을 기다리며 겨 울바람보다 맵고 아팠던, 실날 같은 희망, 김훈장은 이르기를 의병은 이 나라의 얼이요 꽃이라, 그러나 얼이요 꽃인 그네들 대부분은 황량한 산천의 객귀가 되었고 장정들을 이끌고 분투한 윤보도 골짜기에 피를 뿌리며 숨 졌다 하지 않던가.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김훈장과 영팔이와 용이, 그리고 길상이 이역 수천리 남의 땅에서 지금 구차스런 명을 잇고 있는 것이다. 옴마, 나 잠온다." 온종일 뛰고 솟고 놀았인께 잠도 올 기다." 볼멘 소리다. 잠이 와서 못 걷겠다." 업어돌라 그 말이가?" 응." 청 메고 말 타고 왜놈은 쳐들어갈 기라 카더마는 그런 생각 함시로 업어돌라꼬?" 월선은 엎드리며 등을 내민다. 치이. 잠이 오느데 머." 얼마 가지 않아 홍이는 등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들었다. 언제 이리 컸는고 모르겠네. 제법 묵직하구나. 이자 한 칠판 년만 있으믄, 칠팔 년만... 그라믄 헌헌장부가 안 되겄나.' 가냘픈 두 어깨에는 아이 무게가 겨웁다. 그러나 무게만큼이나 월선의 기쁨은 크다. 어디서 이눔자식 짝이 있는지 모르겠네. 배필은 천상에서 맺어주는 기라 카더마는 우리 홍이 짝이라믄 월궁의 선녀 같아야지. 천지간에 다 봐도 우리 홍이겉이 잘 생긴 아이는 없더라. 없고말고. 이만한 나이믄 한창 밉어 질 땐데, 모두 솔밤싱이맨치로 밉어질 땐데.' 마음속으로 중얼중얼 중얼거리며 혼자 웃는다. 아이의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미래의 찬란한 오색 무지 개의 꿈은 더욱더 넓게 깃털을 펴서 걸음은 가벼워지고 월선은 갈길이 먼 것을 잊어버린다. 용정 움막집 앞에 당도했을 때 밤은 꽤 저물었고 길켠에는 부채를 들고 아낙들이 나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홍이어망이. 어디 갔다 저물기 옵매까?" 야아, 좀..." 다 큰 아아르 업고 오당이, 무시기, 그리 키워 되겠습매?" 아낙 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잠이 들어서..." 월선은 남톳불이 새나오는 움막 출입처에 늘어뜨린 거적자락을 걷고 아이 업은 등을 구부리며 안으로 들어간 다. ...?" 남톳불울 등지고 임이네가 앉아 있었다. 흡사 돌부처로 변한 것처럼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도 미동을 않는다. 자식이 우찌나 무겁든지 이자는 못 업고 댕기겄네." 중얼거리며 삿자리 위에 내려 뉘고 베개를 끌어당겨 머리 밑에 받쳐준다. 아이는 입맛을 다시다가 모로 돌아 눕고, 그리고는 새끈새끈 고른 숨소리를 낸다. 임이네는 여전히 미동도 않느다. 월선은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싶 었지만 이웃 아낙들과 돈 거래 때문에 싸웠거니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잡아먹을 듯 소리를 버럭 지른다. 남톳불을 등져서 얼굴에는 그늘이 졌는데도 눈이 번쩍번쩍 빛난다. 와 그라는고?" 월선은 바보스럽게 되묻는다. 와 그라다니!" 성님, 성님 하던 그 존댓말은 고사하고 손아래, 마치 집에서 부리는 종을 대하듯 표변한 임이네 언동에 월선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어차피 최참판네 서희가 허락지 않은 일이라면 임이네가 무슨 재주를 넘어도 월선이를 따라 국밥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그것은 임이네가 공서방으로부터 말을 듣는 순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또 월선의 어리둥 절해하는 얼굴을 보아 월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쯤 능히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치 를 떨며 덮쳐들 듯이 사납게 나오는 것은 월서니말고 달리 분노를 터뜨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월선이야 억울 하건 말건 헤아릴 여자도 아니겠지만 국밥집 때문에 빌붙어온 세월이고 보면 국밥집의 활용 가치가 사라진 지 금 월선을 어떻든 숙명적인 자신의 적수로 간주할 수밖에 없느 임이네는 그런 여자다. 이 수천 녀 묵은 백여시 겉은 년!" 야, 아니 뭐라 캤제?" 월선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천년 묵은 백여시 겉은 년이라 했다! 했으니 우떻다는 것꼬! 와, 나는 니한테 년자 붙이지 못할 사람으로 알았 더나?" 아, 아닌 밤중에 홍두께도 유분수지 무, 무신 영문이제?" 월선은 허둥지둥 일어섰다가 삿자리 위에 주질러앉곤 한다. 뭣이 어쩌고 어쩨? 김훈장한테 문안드리로 간다꼬?" 그놈의 삼촌인지 공간지하고 자알 짰다, 자알 짰어! 한 년 은 슬쩍 피하고 늙은 구렝이 겉은 게, 뭐 어쩌고 어째? 우리 모자한테 객줏집 방 하나 비워주겄다고? 이, 순! 심보가 먹빛이다. 겉으로 숫되고 어진 척함서 속에 수년 묵은 땟국이 흐르고 있는 네년이다!" 사람 참 기차네. 무, 무신 일이 우찌 됐는지 알기나, 아, 알기나 알아야," 어멍떨어도 그걸 모를 내가 아니구마. 흥, 쓴물 단물 다아 빨아묵고, 쓴물 단물 다아 빨아먹고 오! 이자는 소 앵이 없어졌다아, 그 말이제? 그 말이제?" 임이네는 펄쩍 일어선다. 월선에게 덤벼들어 칠 기세다. 하하핫핫... 서천 쇠가 웃일 기다! 순순히 물러나갈 내가 아닌께. 몰작하게 볼 사람이 따로 있지." 월선이는 민적민적 뒤로 물러나 앉으며 새파랗게 질린 채 입술을 떤다. 머슴이 삼 년을 남의 집에 살믄 새경이 얼맨 줄 아나?" 통통하게 살찐 팔뚝을 휘두르며 삿대질이다. 그냥은 안 나간다아! 안 나가야! 산도 설고 물도 선 이 되놈으 땅에까지 와서 내 손발 잦아지게 종질했다! 새 경을 내놓으란 말이다! 새경을! 못 내놓겄나? 이 순 백여시 같은 년! 어림도 없다! 서방 뺏고 자식 뺏고 나를 종겉이 부리묵더마는 이자는 갈데올데 없는 나를 떼어버리겄다 그 말이제? 어디 간대로 되는가, 허어 간대로 는 안 될 기다! 천하없이도 안 될 기다! 내 누넹 이렇게 피눈물을 나게 하고 네년이 따신 방에 발 뻗고 잠잘 줄 알았더나?" 청산유수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만 목도 쉬지 않는다. 놀라 잠이 깬 홍이 한구석에 처박히듯 하고 앉아서 까만 눈을 굴리며 두 사람의 어미를 번갈아 본다. 아, 아무래도 이, 이거 미쳤는갑다." 오냐! 미쳤다. 환장 안 하고 우찌 사램이 살겄노! 어린 자식 데리고," 다짜고짜 경위 설명이 없다. 경위 설명을 못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거다. 경위 설명을 해버린다면 욕설을 퍼 부을 구실이 없어지는 것이고 아예 사실을 깔아뭉게고 앉아서 하는 지랄인 것이다. 결국 아이고데고, 동네가 시끄럽게 울음잡히 는 것을 본 월선은 허둥지둥 밤길을 뛰어서 공노인네 객줏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김 훈장을 뵈려고 정호네 집에 간 새 일어났던 일과 서희의 의중을 알게 된 것인데, 그래서 임이네가 지랑발광을 하게 된 까닭도 알게 된 것인데, 알았다 하여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요, 답답하기론 마찬가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지만 월선의 성미가 물러서도 그랬으나 벙리 냉가슴 앓듯 말을 할 수 없는 형편이기도 했다. 공노 인의 경우도 답답하기론 마찬가지였다. 지독스런 계집에 대한 미움과 노여운 생각 같아서는 평안감사도 제 하 기 싫으면 그만이라고 한마디 내뱉어버리면 그만이겠으나 그러질 못하는 게 서로 얽혀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미묘복잡한 사정이고 보면. 임이네가 공노인 객주집에 옮겨만 준다면 문제는 썩 간단하게 끝나지겠는데 가게 에 함께 드는 것은 서희의 말이 일단 떨어진 이상 될 법도 않는 일이요, 그러자니 움막에 그들 모자만을 남겨 둘 수밖에 없고 사정은 여하튼 우선 용이가 돌아와서 그들 모자만 움막에 동그마니 남은 꼴을 본다면 월선이 나 공노인의 처지가 실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할 수 없십니다. 홍이아배가 올 때꺼지 가게는 비워두고 함께 있일랍니다.." 그래도 야아야, 아기씨께서 마음내키는 김에... 그러더가 사정이 또 달라지면 죽도 밥도 아니다." ..." 무슨 놈의 계집이 그렇기 염치없고 뻔뻔한지, 아무래도 쇠가죽을 덮어썼는갑다." ..." 떼거지를 쓰기만 하면 함께 밀고 들을 거라 생각는 모양인데, 아닌게아니라 우리 겉으면 지겠다. 하야간에 지 고 이기고 간에 아기씨가 안 된다면 그건 안 되는 거 아니가." 설마 ... 홍이아배가 근일간에 오기는 안 오겄십니까? 기다리보겄십니다." 하기야, 그렇게밖에 할 도리가 없겠지." 공노인은 입맛을 쩝쩝 다신다. 사람 영악한 건 범보다 부섭다 하더라마는 이서방도 팔자는 고약하지. 에잇..." 공노인은 재떨이를 끌어당겨 가래를 뱉고 거 담뱃대 좀 주소!" 걱정스럽게 쭈그리고 앉은 방씨에게 화를 된통 낸다. 월선이 움막에서 떠나지 않게 되자 이번에는 임이네 쪽에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함께 가게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념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자기가 야료를 부려서 월선을 움막에 묶어두었다 한다면 용이 돌아왔 을 때 자기 처지가 불리해질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공노인네 객줏집에 든다는 것은 월선이나 공노인의 입장 을 좋게 할 뿐이고, 어떻든 한 가지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편을 취하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생각을 임이네는 했 다. 월선은 가게에 들어야 하고 자기 모자는 움막에 남아서, 용이 돌아왔을 때 비참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 그 들이 객줏집 방을 하나 치워서 들게 하려는 것도 바로 용이의 심정을 염려하는 때문 이 아닌가. 엿장수 마음대로? 누군 밸이 없는 줄 알았던가?' 해서 임이네는 내가 설어서 그랬소. 성님 생각해 보이소. 처음엔 성님이 날 괄시하여 그러는 줄만 알았지 뭡니까? 좁은 소견 에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믿을 수 없더마요." 임이네가 그렇게 표변하고 나오자 뒤늦게 화가 치미는지 월선은 눈물을 찔끔거린다. 성님이 여기 움막에 우리랑 함께 있다고 해서 밥 나오고 옷 나올것도 아니고 염치없는 생각인지 모르겄소만 홍이를 위해서도 한나이나 젊어 두 곰뱅이 성할 때 벌어야 안 하겄소? 공든 탑이 무너지겄소? 나한테도 그렇 지만은 성님한테도 천지간에 누가 있십니까. 저거, 비리깽이 겉은 저눔 자식 하나뿐인데 짜작빠작 싸워싸아도 우리 죽으믄 물 떠줄 자식 아니겄소? 다 내가 잘못했소. 그러니 가게에 들도록 하이소. 객주집에는, 성님도 생 각해보소, 무신 염치로 내가 들겄소. 남우 영업집 방 하나를 내가 차지하다니 그기이 어디 될 말이겄소? 아즉 은 여름이고 여기서 견딜 만도 하니, 장시 시작하믄 먹는 거사 갖다 묵을 기고," 장장 그칠줄 모르는 사설에, 그 사설에 지쳐 자빠진 월선은 아무튼 그도 그럴법한 얘기 아닌가 싶기도 했고 삼사 일의 승강이 끝에 임이네는 소기의 목적을 거두었다. 그 동안에라도 행여 용이가 들이닥치지 않을까 조 마조마 마음을 써가면서. 월선이 국밥집을 시작하자 임이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횡포해져갔다. 그것은 또 한 돈을 장만하리라는 꿈이 깨어져버린 데서 온 분통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국밥집에는 머슴아이 하나를 데렸고 객줏집의 송애도 때때로 와서 거들어주고 해서 순탄하게 개업을 한 셈인데 임이네는 마치 인질처럼 홍 이를 감시하여 가게에 보내는 일이 없었다. 결국 월선이 찾아가게 되고 찿아가면 임이네는 자식 없는 설움을 뼈가 녹아나게 받아야 했다. 임이네는 세 끼 밥을 날라오게 했다. 그게 다 심술인데, 양껏 밥은 먹고 할일은 없고 본시 게으른 여자는 아니었으므로 임이네는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불더미 속에 사라져버린 돈 생각을 하면 당장 미쳐날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회수하지 못한 돈이 있었던 게 다행으로 화재 때문에 망하기론 매 한가지인 그런 사람을 번질나케 찾아다니며 단돈 십 전, 오 전이라도 받아내는데 다소는 재미를 붙인 눈치 였다. 장 정 떼고 가려고 하따야아, 굉장하구만." 헐렁하지만 풀기가 없이 축 늘어진 심베적삼 앞섶을 무심결인 듯 자꾸 잡아당기면서 주갑이는 눈꼬리가 찢어 질 만큼 크게 벌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점두 에서 새나온 불빛도 있었으나 가리는 아직 어둡지는 얺았 다. 불도 대게 큰 불이었던 모양인디, 그보담도 고랫등 겉은 집들이 그단새 들어섰다 그 말이구만이라우? 무슨 수 로 이리 들앉았다 말이랑가? 하따야." 만리장성도 쌓는데 머 그리 눈깔을 뒤집을 것도 없거마는." 그새 또 달라진 거리를, 용이도 바라보며 낯선 고장에 들어선 듯 공연히 찬바람이 이는 마음을 꾹꾹 눌러지르 면서 주갑이 말에 비벼대듯 휘청거려지는 객담을 걸어보는 것이다. 참말로, 참말로 걱정인디," 걱정은 무신 걱정, 산 입에 거미줄 칠까봐? 몸뚱아리 하나 누일 곳 없일까봐?" 오는 동안 무관해져서 용이 어투는 무척 조잡하다. 거미줄 칠라 치면 입은 금세 땅밑에서 썩어 있을 거고 잠자리야 한바다면 몰라도 대천지에 이 내 한몸 누일 곳 없을랍디요? 그기이 아니랑게로." 그라믄." 내 동포가 못살아도 걱정이요 잘살아도 걱정이다 그 말이어라우. 못살면은 애간장이 타서 못 보겄고 잘사면은 부러워서 주린 창자가 띠끔띠끔," 하는데 용이 걸음을 멈춘다. 그는 줄곧 걸으면서 국밥집을 눈으로 찾고 있은 것이다. 국밥집, 월선옥, 뜨내기풍 의 사내 서너 명이 책상다리를 하고서 국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월선은 가겟방에 넋나간 것처럼 앉아 있었고 송애가 가마솥에서 국을 푸고 있다. 주서방, 술 한잔 하겄소?" 마달 사람이 있을 것이요?" 용이는 가게 안을 한번 더 살펴보고 나서 고개를 푹 숙이며 들어선다. 어, 언니, 아제가 오시오!" 송애가 먼저 보고 월선을 부른다. 주갑이 맹해진 표정을 짓고 월선이 역시 용이를 보기는 보았으되 맹해진 얼 굴이다. 용이는 말없이 짚세기를 벗고 가겟방으로 올라간다. 주갑은 어릿더리하면서도 용이 곁에 바싹 달라붙 듯 신발을 벗더니 방으로 올라선다. 들고 온 짐꾸러미를 한구석에 밀어붙인 용이는 길다랗게 만들어놓은 판 앞에 앉는다. 여기 술 좀." 월선이 얼굴이 순간 벌겋게 상기된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 사람처럼, 용이를 모르는 사람이면 손님 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집일 때문에 타처에서 찾아왔는지 국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뜨내기풍의 사내들도 용이 를 단골 손님쯤으로 보는 눈치다. 그러나 용이 거동의 새삼스런 것은 아니었다. 삼 년을 장사하는 동안 익힌 버릇이다. 눈에 띄게 완연하게 달라진 월선이 얼굴을 힐끔힐끔 숨어보는 사내들은 단골이기보다 정인이 아닌가고 추측을 해보는 것이지만 남의 정사에 호기심을 가져보기엔 너무 지쳐버린 하루살이의 인생들, 국밥 사발의 남은 국물 을 쏟아붓고는 슬금슬금 자리를 뜬다. 용이는 가게 안의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 랑곳하지 않 았다. 월선에게 등을 돌린 채 주갑에게 술을 권하고 자신도 메마른 속을 축인다. 대체 어찌 되는 거간디, 아까 들은게로 아제라 하였는디," 용이는 월선이 있는 곳에 고갯짓을 한번 하고 나서 저기 저 여편네가 내 안사람이요.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 술 마시는 것하고는 무신 상관이요? 보아하니 일은 제대로 돼가는 성싶고, 마음을 놓아도 좋을 것 겉고 하니 마지막으로 오늘밤은 진탕 마십시다. 자아 주서방 술 잔 비우라 카이." 용이는 주갑의 술잔에 술을 그득히 붓는다. 그러나 주갑은 국밥집 안주인이 용이 안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뭣이 그리 불편한지 술을 마시기는 마시되 콧구멍을 후비다가 머리를 만지다가 발바닥을 쓸어보다가, 어느덧 손님들은 한 사람 없이 다 떠나고, 뻗치고 앉은 용이 뒷모습이 거북하였던지 송애도 온다간다 말없이 가버렸 다. 월선은 월선대로 임이네와 홍이를 움막에 남겨둔 것이 죄책이 되어 얼어 있었다. 꽤 술이 돌았는 모양이 다. 주갑은 별안간 상 위에 술상을 소리나게 놓더니 형씨!" 와 그러요?" 이런 법은 없지라우! 경상도 법은 어떤지 모르겄소만 구중궁궐도 아니겄고 아래윗채 따로이 거하는 것도 아니 겄고 공짜술이니께로 국으로 처먹어라 그런지는 모르겄는디 지척간 얼굴을 빤히 대하고 있음서 인사 한마디 없이 술만 퍼마시라 그 말씀이랑가? 나 술 안 마실라요!" 가랑잎같이 마르고 가뿐해 보이는 몸뚱이가 뒤로 훌쩍 물러나 앉는다. 용이 피식 웃는다. 아따! 얻어먹는 주제에 챙기는 것도 많다. 임자 여기 와서 인사 하라고." 야." 오다가 만냈는데 알고 봉게 영팔이하고도 아는 처지라, 또 고향이 전라도고, 주서방." 야. 이렁게로 성이 반분이나 풀리는디 워디 잡것이 굴러와갖고 신소리하는 건가 생각했을 것이요잉, 미안스럽 소. 용서하시게라우. 이리 뵈야도 나무 패라면 팰 것이요 밥 하라면 밥 할 것인께, 형씨 말씸이 산엘 가자고 혔으니 워째 영문을 모르겄으라우." 인사는 그만 하소. 자아 술, 마시고 저버도 오늘밤 아니믄 못 마실 기니." 다시 술잔이 오고가는 데 따라서 말도 수월찮이 오고간다. 대체 워디다가 돈을 싸놨기에 이 용정 바닥에 집들이 이러크름 번듯번듯하게 들어섰겄냐, 내 생각으로는 그렇 다 그 말인디, 하, 세상 조화가 참말로 희안치도 않소. 비렁땅 내 고향 두고 괴나리봇짐 겨드랑이 끼고 떠나올 적에는 그놈이 그놈인디, 눈깔 세 개 박힌 놈도 없고 그놈이 그놈인디, 하 참 보따리가 보통이 되고오 곁방살 이가 제집살이 되고," 그거 다 까닭이 있지, 까닭이 있다니까." 그만헌 까닭이야 내 모르는 배도 아닌디," 와? 주갑이 자네 이런 국밥집 차렸다고 날 빗대 하는 말인가!" 엇따야, 이건 어느 보에서 터지는 물이란가?" 나중에 보고 놀래 자빠지지 말고 하하하핫..." 호탕하게 웃는 웃음 소리에 월선은 껌쩍 놀란다.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웃음 소리다. 웃음에 이어서 여보게 주모, 여기 술 좀 더 가져오라고." 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주전자로 술판을 친다. 여보게 주모... 여보게 주모라니,' 얼굴은 파아랗다 못해 실룩실룩 눈밑의 근육이 떤다. 술을 담은 주전자를 가지고 갔을 때 용이는 힐끗 눈을 들어 월선을 쳐다본다. 험악한 눈빛이다. 불쌍한 것, 너에게 무신 죄가 있노. 죄가 있다믄 이 내, 이 용이라는 이놈한테 죄가 있지, 하지마는 너가 좀 당 해주어야겠다. 너는 살인 죄인의 계집이 아니니 말이다!' 월선이." 야." 앉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월선은 엉거주춤 선 채 눈밑 근육이 파들파들 떨고 있다. 홍이에미하고 홍이는 어디 있노?" 야, 저어," 저어? 저어라는 곳에 있단 말가?" 용이는 마음속으로 못난 놈 못난 놈 하고 외치며 어디 있오!" 거기 움막에 있소." 움막에?" 야, 야--" 으음 그렇게 됐구나. 그렇기는 그럴 테지." 어찌 당신 남으 소, 속도 모르고 그러시요." 내가 점쟁이가? 남으 속을 알게?" 너, 너무하시오." 여기 있는 연놈들이 너무했지! 내가 너무한 것 머 있노! 오냐. 월선이 덕분에 내 계집새끼 잘 묵고 지내기야 했었지. 그걸 누가 모르나?" 참말이제 당신 환장하였소?" 주갑은 얄싹한 아래위 입술을 마음놓고 벌린 채 안사람이라 했다가 주모라 부르기도 한 이상야릇하기만 한 이 들을 번갈아 보기에 바쁘다. 길고 긴 세월, 질기고도 한 많았던 인연, 그 엄청나게 긴 세월 동안 한 번 거역이 없었던 월선의 눈에 처음으로 칼날이 섰다. 네가 손가락에 불을 키고 득천을 해봐라. 자식 낳은 계집을 버리는가! 오만천 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천 대한다고 그 계집을 버릴 내가 아니란 말이다! 나쁜 연놈들! 젊은 거나 늙은 거나." 월선은 남부끄러운 것도 잊은 듯 퍼질러앉더니 흐느낀다. 니, 내가 멋을 우, 우떻게 했다고," 용이는 별안간 상을 발길질하여 엎어버리더니 벌떡 일어선다. 아아니 형씨! 이게 무슨 짓이랑가? 참말로 이게 무슨 놈의 행실이랑가? 천하 명관도 알아야 송사헌다 혔는 디?" 그러나 이미 용이는 신발을 신고 가게를 나서는 판이었다. 이, 이거 워쩐디야? 이 이런 날벼락은 내 생전 첨인디 아주머니." 하다가 행여 용이를 놓칠세라 그도 짚세기를 반쯤 끌고 급히 달려 나간다. 나가다가 돌아보고 엉거주춤하더니 에라 내 모르겠다 싶었는지 형씨! 형씨!" 부르고 쫓아간다. 형씨!" 용이를 뒤쫓은 주갑이는 어깨를 덥석 잡는다. 용이는 울면서 걷고 있었다. 아, 아니 워찌 이런다요? 우는개비여?" ..." 나 아무래도 사람 잘못 본 것 같소." 주서방." 와 그러요. 말허소." 용이는 울면서 한편 허허 하고 웃는다. 술냄새가 마구 풍겨온다. 나 정 떼고 갈라고 그랬소, 이번에 눌러앉으믄 나는 개새끼거든. 아암 개새끼! 소새끼! 사람 아니제." 정을 떼고 가는 데도 유만부득이제. 제 가숙을 두고 정을 떼고 가다니." 모르거든 말 마소. 지금부터 우리가 가는 곳에는 백 년 묵은 구렝이가 한 마리 있일 기요. 그 구렝이가 이 세 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기출의 에미거든. 주서방." ..." 계집도 그렇겄자마는, 주서방." 말허소." 주서방 장개 안 들었소?" 까매기괴기 먹었는개비여. 낮에 말 안 헙디여?" 식구가 없다는 것하고 장개 안 갔다는 것하고는 다르제." 다르기는 뭐가 다를 것이요? 매한가지제," 아 그러세. 하, 하여간에 계집도 그렇겄지마는 사내한테도 기영머리 마주 풀고 법으로 만낸 여편내가 오래 살 아주어야, 파뿌리 되도록 살아주어야, 계집이 팔자가 세도 안 되겄지마는 사내도 팔자가 세믄 그거는 볼장 다 보는 기라. 산다고 살아도 그거느 부평초 인생인 기라. 어이구 취한다. 으윽윽." 울음을 터뜨린다. 참말 환장하겄으라우. 워찌 이런디야? 이런 세상에 못난 사내 또 보겄더라고?" 정 떼고 가니라고 그런께 우는 거는 참견 안 했이믄 좋겄고, 어이구, 어이구 빌어묵을, 사내 되기가 이러크름 어러븐 긴가, 어어다, 다 왔소, 다 왔구마, 주서방!" 귀창 떨어지겄소." 이자 다 왔구마. 이자는 보따리가 보퉁이가 되고 곁방살이가 제 집살이 되고 그 따위 주딩이는 안 놀릴 기구 마. 홍아! 이놈 홍아!" 아, 아부지다!" 홍이 총알같이 뛰어나왔다. 흐음 나 술 묵었다. 너거 에미 자빠져 자나?" 아니요. 옴마! 옴마! 아부지!" 거적을 걷고 용이는 움막 속으로 들어간다. 주서방 들어오소, 마음놓고, 여기는 큰 배 탄 것만치나 편할 기요." 주갑이 들어간다. 임이네는 쪽을 고쳐 비녀를 찌르면서 부어터진 얼굴이다. 그 얼굴을 삐닥한 몸짓을 하고 서 서 눈에는 웃음기를 풍기면서 용이 바라본다. 그간 아이 어른 편안하시고요?" 이녁 보기에 편안하시고요?" 낯선 손님 주갑은 안중에 없는 모양이다. 보아하니 잘 자시고 잘 주무시고 얼굴이 봉덕각시 겉구마." 남폿불이 신나게 타고 있다. 봉덕각시오? 기가 맥히요." 그래 월선이는 어디 가고 없다 말고?" 자개 길 찾아갔지 어디 가기는 가겄소." 자개 길이라... 홍아!" 예!" 황주, 황주 사오너라. 여기 돈." 하며 용이는 십 전짜리 두 닢을 홍이 앞에 던진다. 홍이는 술병을 들고 쫓아나간다. 주서방 앉으소. 그라고 저기, 저기 앉은 여편네가 내 아들 어미요." 하자 임이네는 빨끈해져서 처자식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앞일을 생각하믄 눈앞이 캄캄한데 무신 주정은 주정이요! 그 동안에 우떤 일이 생깄는가 알기나 알고 이러는 기요?" 알지. 아니께 내일 짐 싸믄 되는 기라." 머라꼬요?" 그러나 용이는 임이네에게 더 말을 시끼지 않았다. 임이네는 용이가 옛날, 몹시 두려웠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을 막연하나마 느낀다. 말이 없어도 의사를 쫓을밖에 없었던 사내. 한때는 남편보다 자식보다 돈만 있으면 보 장된 앞날을 확신할 수 있었던 임이네에게 그 확신이 사라진 때문일까. 그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용이 역 시 삼 년 간의 치사스러웠던 생활을 청산하기로 이미 굳게 마음 먹고 돌아온 것이다. 밤이 깊어지도록 술을 마시던 용이는 차츰 말수가 줄고 주갑이 혼자 떠들어대다가 언제 쓰러져 잤는지 거의 동시에 두 산내가 눈을 떴을 때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임이네는 움막에 남게 된 모자의 비참했던 꼴을 이모 저모, 마치 금간 곳을 찾으려는 듯 뚜드려보고 내비쳐보고 했으나 용이 도통 대꾸가 없었다. 점심인지 아침인지 밥을 먹은 뒤 용이는 주갑과 함께 아무말도 남기지 않고 움막을 나와 버렸다. 주갑은 신전을 하던 박서방을 찾아본다면서 가고 용이는 길상을 만나기 위해 서희 집으로 간다. 거의 집이 다 된 것을 보고 떠나기는 했어도 살림이 꽉 짜이고 사람이 살게 된 최서희의 거점, 늘씬늘씬하게 잡은 기와집은 용이 마음을 위압했다. 움막에 남아 있던 임이네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서방 앙입매까?" 점심을 먹고 나오던 응칠이가 반가워한다. 언제 오싰습내까?" 어젯밤에, 길상이 있나?" 옛꼬망. 성님 방에 았습매다." 방이 어딘데?" 응칠이는 저기 저 방입매다." 손가락질을 하며 가리켜준다. 무시기 바빠서 나는 가겠습매다." 용이는 길상의 거처하는 방 앞에서 기침을 한 번 하고 길상이 있는가?" 길상이는 방문부터 열어젖힌다. 수척해진 얼굴이다. 그러나 집일할 때와 달리 낯빛은 본시대로 희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어젯밤에." 영팔이아제는 편안하시고요." 음 그럭저럭." 올라오시지요." 애기씨한테 인살 해야겄제?" 나중에 하시지요. 하여간에 올라오시오." 길상과 마주앉은 용이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으려 하는데 담배 여 있습니다." 하고 길상이 궐련을 내어놓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 담배가 절반쯤 타들어가는 동안 서로 말이 없다. 김훈장께서는 안녕하시고." 네." 나... 일간에 떠날까 싶어." 영팔이아제 계시는 곳으로?" 우선은." 이번에... 섭섭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자네도 그런 말을 하나?" ..." 그러지 말게." 제가 어디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길상은 용이를 가만히, 유심히 바라본다. 일간이라 하셨는데 언제쯤 떠나시려구요." 와?" 용이 표정에는 준열한 것이 있었다. 용정에 온 이후 처음 보는 표정이다. 서로의 마음가짐까지가 전도된 것을 길상이 느낀다. 아직도 내가 애기씨 선심에 매달려 있는 줄 아느냐? 그런 눈빛이다. 아닌게 아니라 길상은 용 이를 위해 얼마간의 금전을주선해보리라 생각하고 떠날 시기를 물었던 것이다. 국자가에 가서 청인 목파를 만나본 뒤 떠날까 싶다." 목파..." 겨울 한 철 벌목벌이나 해보까, 그리 작정을 했네." 고될 건데요?" 나는 아직은 젊다. 세상에 수울한 일이 어디 있을라구." 그러나 사서 고생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 못할 것은 맘고생이제. 육신을 부리묵는 기이 훨씬 편치. 안 그런다? 오장에 기름이 꺼니께 인간이 더 러바지더구마." 용이는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끈다. 길상은 대항할 듯이 용이를 응시한다. 용이 말에서 서희를 위시하여 자기에 대한 비난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용이는 이들을 비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월선을, 공노인을 비난했던 것도 아 니었다. 오히려 월선을 위해 가게를 마련해준 서희 나 길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요 월선을 두고 떠나는 마당에서 공노 인이 용정에 있다는 것을 다행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쩐지 우리 생각이 다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제?" 뿔뿔이 다 흩어져가고 있다 그 말이지요. 내 자신부터가..." ..." 실은 남들에게보다 지 자신 마음속에서 무엇이 흩어져가고 있다는 게 옳을 겁니다. 이렇기 살아야 하는 겐 가..." 하다가 길상은 얼굴을 붉히며 눈에 노기를 띤다. 얼굴이 안 좋구마는. 어디 몸이 아픈 거 아니가?" 용이는 말허리를 잘라버린다. 용이아제는 제가 머 변명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아시오?" 길상의 음성이 별안간 투박해졌고 신경도 따라서 투박하게 모여든 느낌을 준 다. 나 장가들 생각입니다." 들어야겄지." 계집아이가 하나 따른 과부요." 머라꼬?" 나이는 스물셋인가 넷이가... 얼굴도 반반하구요." 무신 그런 소리를 하노?" 와요? 종놈한테 과부라면 제격 아닙니까?" 와 니가 종놈고. 종놈이라면 요즘 세상에, 니답지도 않다." 하면서 용이는 서희와의 소문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장 노동자들 매사를 자기 뜻한 대로 주저없이 한다고는 하지만 월선에게 들기를 허락한 가게 건에 관하여 여러 가지 면에 서 서희의 심기가 좋지 않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인사하는 용이를 쌀쌀하게 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는데 용 이로서는 서희 처사를 가혹하다 할 하드의 이유가 없고 원망하는 마음도 아니었지만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지 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자격지심과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대상도 분명찮은 분노 같은 것 때문이고 전혀 예기 치 못했던 일이 아니었다. 임이네 문제가 거론되었더라는 그간의 사정은 능히 있음직한 것이다. 그럼에도 등에 붙어 다니는 혹덩어리같이 흉한 임이네 과거사가 좀더 명료하게 떠올려졌으리라는 상상은 견디기 어려웠다. 설마 모릴 리가 있겄나. 그때는 나이 어린 아이였다 하지마는 모릴 리가 없지. 그러세... 혹 누가 옆에서 말 안 했다믄 모리고 기실 수도 있겄지. 무신 좋은 일이라고 일러 까바치까.' 이따금 생각을 해보지만, 그래서 그나마 어정쩡하게 버텨왔었다. 지금은 모호한 안개가 걷히고, 햇볕을 가리던 차일도 걷히고,타는 듯 뜨거운 햇볕이 정수리에 내리쏟아지는 것 같은 기분, 뜨겁고 아프다는 느낌이 어떤 영 악한 소리를 충돌질한다. 자격지심이 격해지면 그럴수록 등에 붙은 흉한 혹처럼 험했던 이력을 짊어진 임이네 를 전신으로, 온 심장으로 가려주고 싶은 증오와 연민이 격렬하게 갈등하는 그 숙명적인 감정을 용이는 가눌 만한 여유를 못 가진다. 서희의 처사를 가혹하다 생각지는 않으면서, 원망하는 마음도 아니면서 그러나 처음부 터 남정네가 죄를 졌으면 남정네가 받을 것이요, 이미 벌을 받아 죽은 사람인데 어째 계집이 그 죄를 또 받아 짊어져야겠느냐, 그런 항변은 있었다. 그래, 그곳에 간 일은 잘되었는가?"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서희의 보랏빛 생수 겹저고리는 제철이거만 삼베 고의적삼의 용이 몰골은 간밤의 술이 과했건 탓도 있겠지만 누추했다. 세월에 바래어진 생활의 황막함이 전신에서 배어난다. 탈망한 사내를 보면, 저, 저기 탈망한 사내가 온다! 기겁을 하며 숨던 고향의 사대부집 여인네들 생각을 했었는지 서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헝클어진 용이 맨상투를 바라본다. 잘되고 못되고가 있겄십니까." 삐죽하니 비어져나온 듯 대꾸가 퉁명스럽다. 잘되고 못되고가 있겠느냐?" 서희도 말꼬리에서 감정을 치켜올린다. 예. 본시부텀 땅 파묵던 놈이 두더지맨쿠로 땅 팔 일말고 다른 무신 일이 있겄십니까." 으음?" 송충이는 솔잎을 묵어야지 갈잎을 묵으믄 죽십니다." 퉁명스런 정도를 넘어서 노골적으로 비꼬며 서희 권위를 때려부수려 드는 기색이다. 오만했던 서희 눈빛이 별 안간 흐려진다. 어둠에 자백질하듯 절망 같은 것, 외로움 같은 것이 솟구쳤다 가라앉곤 한다. 드디어 서희 눈 에는 환하게 영롱한 본시의 빛이 켜진다. 내가 너희들한테 빚진 게 있느냐?" 아, 아닙니다. 그런 말심을." 비로소 당황한다. 왜들 이러는 게지? 모두들!" 작은 주먹으로 마룻장을 내리친다. 날카로운 음성이 넓은 집안에 울려퍼진다. 너희들이 나로 인하여 이 만주 벌판에까지 왔더라 그 말이냐? 왜들 이러는 게지!" 용이 얼굴이 시뻘개진다. 아닙니다. 애기씨! 지, 지가, 지 자신이 노여바서 그렇십니다. 누, 누굴 원망하는 기이 아닙니다.' 이제는 최참판댁 작인도 하인도 아니란 그 말이겠다? 세상이 달라지고 고장도 달라지고 오오라, 그 말이렷다! 그쯤은 나도 알고 있어! 모두 마음대로 하는 게야. 누가 발목을 묶어놨기에 제 갈길을 못 가는 게냐, 마음대로 가면 될 거 아니겠느냐?" 용이는 입이 붙어버린 듯 말을 못한다. 하동 땅에서 의병인가 뭔가 일으켰으면 그게 어디 최참판댁을 위해 한 짓이겠느냐? 기훈장 그 늙은이만 하더 라도, 길상이 역시, 난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단 말이야. 고향서 살수 없었던 것은 내 탓이 아니야! 최참판댁 탓 도 아니야! 왜들 빚 준 것처럼 내게 감고 드는 게지?" 흥분했으나 서희는 임이네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사세가 불리하면 순임금이 독장사를 하더라고 혈혈단신 계집아이가 사고무친한 이곳에 있기로 어찌 인심이 여 반장, 간사스럽구나." 내리 두드리면서도 여전히 임이네 말을 꺼내지 않는다. 역시 서희는 지혜로움을 잊지 않았다. 임이네 얘기를 꺼내면 마지막, 용이도 그렇거니와 자기 자신부터 용이를 다시 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용이 는 끝내 변명 한마디, 항변 한마디 못한다. 서희 앞에서 물러난 용이는 그 집 담장을 끼고 걸어간다. 새로 쌓은 담장에서는 아직 마르지 않은 횟가루 냄 새가 풍겨왔다. 돌을 끼운 하얀 회벽의 담장과 맑아서 일렁이는 것 같은 푸른 하늘과 멀리 멀리서, 지평선 저 쪽에서 비적단이 사진을 몰고 나타날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과-- 용이는 문득 옛날 최참판댁 담장을 생각한 다. 치수 도령에게 까닭없이 매를 맞고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 긴 담장 옆을 울면서 가던 어린 소년의 모습 이. 능소화보다 짙은 놀이 하늘과 강물을 미친 듯이 불태우던, 마치 엊그제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삼십 년도 전의 일이다. 울고 가는 소년은 용이 자신이었으나 홍이로 착각되기도 한다. 절에서 윤씨부인 가마를 따라오던 까까머리 길상이 같기도 하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맞기만 해야 하느냐고 울부짖었을 때 도련님은 양반이 고 너는 상사람 자식이니께, 하던 어미 슬픈 눈도 생각난다. 참하게 생긴 누이, 서분이라는 이름과 같이 하얀 얼굴의 누이가 죽던 날은 언제였던지 송곳 같은 비가 억수로 쏟어지던 밤이었었던가? 조그마한 시체를 거적에 말아서 지게에 얹고 곡괭이를 지팡이 삼아 뒷동산으로 올라가던 아비의 뒷모습, 비는 개이고 일렁이는 것처럼 맑고 푸른 하늘이었던 듯싶다. 싸리나무 울타리 밖에 서서 치수 도령은 울고 있었다. 치수 도령의 얼굴과 그의 딸 서희의 얼굴이 번갈아 눈앞을 어지럽힌다. 의리 없는 놈이지요." 방금 과부한테 장가들겠다던 길상이 그 일과 나와 무슨 상관이겠느냐 그러듯이 중얼거렸다. 내리깐 눈꼬리가 뚜렷하게 패여진 창백한 얼굴에 수염이 꺼무꺼무하다. 육신보다 영혼이 피폐한 것 같다. 꽉 다물린 입술이 묘 하게 육육적이고 청수했던 그 투명한 정열과는 다른, 암벽을 뚫고 나가려는 암담한 몸부림 같은 것이 느껴진 다. 무신 말을 하노?" 나는 의리 없는 놈입니다." 그거를 따지자 카믄 사람마다, 나부터가..." ..." 사람이 도리를 다하고 의를 지키는 기이 어디 인력으로만 되더나?" 그런 뜻이 아니고, 네.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쓴웃음을 띠었다. ...?" 은혜를 입었으니까 은혜는 갚아야 한다, 사람의 도리는 그런 거라고... 항상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수천 수만의 노비들이 말입니다. 상놈들이 말입니다. 양반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 이를테면 죽은 수동이아제겉이 말입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주가를 위해 바쳐야 하는 거로, 수동이아제 는 그 생각이 골수에 박혀버렸던 사람이었지요. 실제 또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무서운 정열이더군 요. 용이아제도 아시다시피,"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도시 은혜란 뭡니까? 양반들 먹고 남은 찌꺼기를 던져주는 게은혭니다. 상놈 노비들은 먹다 남은 찌꺼기를 얻 어먹으면서 감지덕지 은혜를 받는 게지요. 나는 말입니다, 돌아가신 마님을 그렇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괴팍한 서방님도 그렇게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생각지 않았단 말입니다. 서방님은 어린 마음 에도 영악한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이었던 것같아요. 은혜를 준다거나 갚으라거나 그런 생 각은 안 했던 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분한텐 슬픔 같은 것, 그렇습니다. 한이라 하는게 좋겠지요. 이 세상 아 무도 믿지 않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님도, 그 어른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러러 뵙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나에게 글을 배우게 하시고... 어릴 적에는 나는 그것을 크나큰 은혜로 알았지요. 그 러나 그건 정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내는 정 말입니다. 상전이 한인에게 베푸는 은혜, 그건 아니었습 니다. 그 어른은 웃으신 일이 없었지만 웃음보다 더 정을 느끼게 하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 어른 눈에는 자 기 자신을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빛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슬퍼할 줄 모르고 불쌍하게 생각는 마음이 없이 어찌 남을 위해 슬퍼하겠습니까. 배고파본 사람만이 배고픈 것을 알 듯이 말입니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 픔을 알 듯이 말입니다. 해서, 그, 그렇지요. 나는 그렇습니다. 그분을 불쌍히 여기고 정을 느낀 겁니다. 애기씨 의 경우에도... 애기씬 세상에 귀한 보물이었지요. 연꽃이고 꾀꼬리새끼고 뭣이든 원하는 대로 해드리고 싶었 고... 산에 있을 때 말입니다, 나는 부엉이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도 울음 소리는 똑같은 거리 밖에서 울었습니다. 아무리 쫓아가도 쫓아간 것만큼 앞서가는 달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지치고 잠 이 들었지요. 어떤 때는 노루새끼를 뒤쫓아 온종일 산을 뛰었습니다. 잡으면 안아주고 맛난 풀을 먹여주고 가 슴이 아파서 미어지는 것만 같았는데 그놈의 노루새끼는 한사코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진달래철에는 진달래 를 따먹고 머루철에는 머루를 따먹고 해가 져서 사방이 캄캄해진 뒤 돌아가곤 했습니다. 우관스님이 이놈 다 리몽댕이를 뿌질러놓겠다고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정말 몽둥이를 들고 달려나오셨지요. 나는 스님 눈에서, 호랑이한테 물려가지는 않았을까? 그런 겁에 질린 빛을 보았습니다. 돌아온 것만이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빛 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정을 확인하기 위해 번번이 산속을 헤매다가 어두워서 절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스님 은 몽둥이로 때리진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커다란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박았습니다. 스님은 내게 있어서 어머님이요 아버님이었습니다. 법의에 싸인 넓은 가슴은 어머님의 품이었습니다. 하얀 눈썹밑에 굵다란 눈은 잊을 수 없는 아버님의 눈이었습니다. 어머님의 눈이었습니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아니었던 노승... 나는 그 어 른이 보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나는 누구든 사람을 보면 솔나무에선 솔냄새가 나고 느릅나무에선 구린내가 나고 계피나무에선 맵싸한 향기가 나듯이 단박에 그 사람의 냄새를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그 런 얘기는 아니고요, 사람의 정이 있느냐 없느냐... 아무리 남에게 좋게 보여도 정이 없는 자는 거짓말쟁입니 다. 네, 거짓말쟁입니다. 가증한 거짓말쟁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건 거짓말쟁입니다. 자신을 슬프게 생각해본 일도, 불쌍하다 생각해본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슬픈 것처럼, 불쌍한 것처럼 읊조 리지요. 남에게는 대자대비한 것처럼 몸짓이 아주 큽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한테 하는 거짓말입니다. 나는 언 젠가 어느 주막에서 눈물 한 방울을 쪼르르 흘리며 이보란 듯 옷고름으로 찍어내는 늙은 영감쟁이를 본 일이 있소. 눈물은 아닌 흘려도 슬픈 것이요 비오듯 쏟아져도 슬픈 것인데 어거지로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을 소중하 게 옷고름으로 찍어내는 그 품을 보고 구역질을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네. 의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서희 애기씨는 보물입니다. 연꽃이지요. 꾀꼬리새낍니다. 윤보 목수는 웃어도 슬 펐지요. 울어도 태평스럽고요. 그 못생긴 곰보 얼굴이 얼마나 예뻤는지 생각나시지 않습니까?" 꿈결의 헛소리처럼 지껄이는 것이다. 용이는 이렇게 지껄여대는 길상을 별로 본 일이 없다. 어쩌면 그는 마음 속으로 혼자 지껄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지도 모른다. 이눔아아가 와 이라제?'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의 정이 없는 거짓말쟁이는 아무래도 탈바가지일 수밖에 없고 평산이 같은 극악무도한 살인귀하테조차 느낄수 있는 연민마저 느낄 수 없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김평산이가 제 자식 역성을 들어 막 딸네를 때린 일을 말입니다. 그나마 쥐꼬리만한 육친의 정이라도 있으니 말입니다." 지나간 일 얘기하믄 머 하노." 네?" 길상은 용이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생각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여지껏 말을 했던 것이 아니었고 생각에 헤 매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돌연 길상은 종이 종을 부리면 식칼로 형문 친다더라고 그렇게 말들 하는가분데." 내뱉었다 지난 초여름 집일이 한창일 때 막둥이라는 젊은 일꾼의 면상을 쳐서 코피 쏟는 것을 보고 일꾼들이 길상에게 빗대어 한 말인데 그 말을 늘상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리고 하는 소리를 맘에 낄 거 없다." 과히 틀린 말 아니지요. 용이아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신다. 그 말씀이오? 나한테 유감이 없다 그 말입니까?" 억지쓰지 마라." 억진지도 모르지요. 네, 억지쓰는 겁니다. 이곳에 있는 이상, 그렇지요. 이 댁에 있는 이상 나는 종이 종을 부 리면 식칼로 형문 친다는 허물에서 벗어나진 못할 겝니다." 남이야 머라 카든," 용이아제는 남이 뭐라 하든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그야," 하다가 용이는 얼굴을 붉힌다. 남이 뭐라 하든, 하기는 상관이 없겠지요... 내 마음 때문이겠지요." 전에 없이 니가 와 이라제?" 전에 없이 ... 그럴까요?" 떠나겄다, 설마 그 생각은 아니겠제? 그런 생각 함시고 과부장가 들겄다 생각한 거는 아니겄제?" 떠나고 싶지요. 어디든 말입니다." 오랜 동안 두 사람 상이에 침묵이 지나간다. 뒤꼍에서 재재거리는 새침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간세상 오만가지가 뜻대로 되는 기이 없다. 생각하믄 머리 깎고 중 되는 기이 젤 편치." 다시 절로 들어갑니까?" 길상은 쓰디쓰게 웃었다. 용이는 걸음을 멈추고 아까 길상이 건네준 궐련갑 속에서 담배 한 가치를 뽑아 문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 아당긴다. '그러면은 어디로 가는 거지?' 떠날 것을 굳게 작정했건만, 물론 이 길로 떠나는 건 아니었지만 발길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용이는 깨닫는다. '에라 모르겄다!' 길켠 처마 밑에 가서 주질러앉는다. 길폭은 넓지만 내왕이 변화하지 않는 뒷길은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다. 햇볕도 여름과 달리 튀질 않고 스며들어 있다. 맞은켠에는 문살이 촘촘하고 잘게 된 출입문이 하나, 청인 집이 다. 무슨 장사를 하는 집인지 검정칠을 한 판때기에 금박을 한 흔적이 있는 글씨를 판 간판이 나붙어 있다. 출 입문이 열리면서 여자가 우는 아이를 안고 나온다. 소매가 넓은 푸른빛 무명옷에 높이 걷어올린 머리에는 요 란스런 꽃삼을 꽂고, 전족을 아니 한 것으로 보아 만주족인 듯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 지 않고 여자는 아이를 흔들어댄다. 다시 출입문이 열린다. 이번에는 변발한 사내가 나왔다. 그는 여자로부터 우는 아이를 받아 안으며 여자더러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눈치다. 여자는 들어가고 이마빡이 불거져나 온 사내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그리고 우는 아이를 흔들어대며 뭐라 중얼대며 어디론가 가버린다. '짐승도 새끼를 낳고 새로 알을 까는데...' 담배 연기를 후욱 뿜어낸다. '마음을 말로는 다 못하지. 골백분을 말해보아야 그럴수록 마음과는 딴판이제. 죽으믄 육신이야 썩어서 흙이 될 기지마는... 맘은 남아서 허공을 떠다니까? 그런다 카더라도 썩는 송장하고 멋이 다를꼬. 살아서도 버부리 혼이 떠다닌다고 입을 열까?' 어젯밤 월선에게 표덕스럽게 군 것을 뉘우치는 것이다. 말로는 정을 떼고 가노라 그랬다 했고 여자를 위해 울 기도 했으나 따지고 보면 움막에 남은 임이네 홍이를 위한 분노 때문이었다고, 그러는 편이 진심에 더 가까운 것을 모르는 용이는 아니다. 기영머리 마주 풀고 법으로 만난 여편네가 오래 살아주어야, 파뿌리 되도록 살아 주어야, 어젯밤 술 마시고 주갑이한테 한 말도 생각이 난다. "법으로 만낸 계집하고 파뿌리 되도록 살았으믄 흥, 흐흐흥..." 용이는 헛웃음을 웃는다. 월선이 무당 딸이 아니었더라면, 육례를 갖추어 혼인을 했더라면, 떡판 같은 아들 샛별 같은 딸을 낳아주었더 라면, 수숫대 움막인들... 이보다 더 좋은 얘기는 없다. 도깨비 방망이를 치면서 밥 나와라 하면 밥 나오고 옷 나와라 하면 옷나오는 황당한 꿈이다. 밥 나와라 하면 밥 나오고 옷 나와라 하면 옷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같 이 황당하고 선심만 쓰게 돼 있는 하나님이란 도시 어디메서 낮잠을 주무시는가. 천둥만 치지 않았더라면, 홍 수만 나지 않았더라면, 흉년이 들지 않았더라면, 액병이 돌지 않았더라면, 전쟁만 나지 않았더라면... 우둔한 자 의 별 따러 가는 얘기가 아닌가. 그래도 다시 강청댁한테 정을 붙이고 월선을 잊을 수 없었더라면, 보부상 늙 은이한테 시집갔던 월선이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월선이 또 다시 마을을 더나지 않았더라면, 하룻밤 실 수, 임이네를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강청댁이 자식을 낳아주었더라면, 죽지 않았더라면- 회한 없는 세월이 어디 있을 것이며 세월과 더불어 가중되는 운명의 무게를 피할 자 그 누구겠는가. 그러나 수고는 싸움이지 복 종이 아니기에, 회한과 운명의 무게와 더불어 있는 자만이 영혼은 높은 곳으로, 육신은 낮은 곳으로, 그리하여 도깨비 방망이와는 아무 상관 없는 진실의 쓴잔을 마시게 되는 것이다. '과부장가... 길상이가 말이지?' 한 사내가 길 아래켠에서 걸어온다. 우쭐우쭐 걸음걸이가 매우 활달하다. 홍서방이다. "홍서방" 걷어올린 바짓가랑이, 일을 하다 나왔는가. 뚜룩뚜룩 정맥이 솟아 난 정강이를 쳐다보며 용이 불렀다. "어! 난 또 누구라고?" 군살을 흔들고 웃으며 홍서방은 용이 옆에 와서 펄썩 주저앉는다. "담배나 한대 피우고 갈까?" 허리춤에서 담뱃대를 뽑으려 한다. 용이 궐련 한 가치를 내밀어 준다. "고맙소." 담배를 붙여물고 성냥개비를 휙 던지며 "퉁포슬에 갔다더니?" "야." "그래서," "그래서 머 금송아지라도 얻었일 것 겉소?" "그야아 천년 묵은 동삼인들 못 얻으란 법 없지." "하나님 눈이 멀었다믄 모를까." "하나님의 눈이 멀었는지 어쨌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부처님만은 아무래도 눈이 멀은 모양이오." "그거는 무슨 소리요?" 홍서방 입에서 입김처럼 담배 연기가 새나온다. "그놈의 운흥사, 중놈이," "...?" "세상이 망조라. 별 희한한 일이 다 있지." "..." "송씨댁 알지요? 이서방도." "송씨댁이라믄 상의학교의," "그렇지. 꽤 인심도 쓰고 한 집안인데 그 댁 어른이 중풍으로 앓아누운 뒤는 집구석이 콩가루가 된 모양이오." "그럴 리가 있겄소. 송선생님은 우리아아 선생님인데 착실하고 잘난 사람 아니오?" "그 동생 얘기가 아니오. 아직 장가 전이니 별문제고 그 댁 며느리 애긴데 별의별 해괴망칙한 소문이 떠돌더 니만 결국 끝장을 보기는 본 셈이지." "우쨌기에 그러요?" "운흥사 중놈을 붙어묵었더라 그 말 아니오." "뭐라고요?" "얼굴 반반하게 생긴 계집치고 행토 없는 게 없더라고, 저렇게 되면 그 집구석도 쑥밭이라." "아무리 그렇지만는," "아아 바로 며칠 전에 운흥사 중놈이 몰매를 맞고 쫓겨났어도?" "음..." "덕분에 부처님은 촐촐하게 굶고 계실 터인즉 부처님 눈이 안 어둡고서야 그 고생이겠소?" "중이 괴기맛을 알믄 머 우떻다 카더마는," "법당에 파리 떠날 날이 없다 그 말인데, 빌어먹을! 멀쩡한 상투달고도 평생 코맹맹이 계집 하나 보고 살아가 야 하는 이눔의 팔자, 하기야 이서방 경우는 다르지." 홍서방은 곁눈질을 하며 씩 웃는다. "요새는 어디서 일을 하고 있소?" 용이 말을 돌려버린다. "사람 괄시하누만." "야?" "아 그래, 내가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일할 사람으로 보입디까?" "얼굴에 안 써붙있이니께." 홍서방은 만족스럽게 몸을 좌우로 흔들어대다가 짤막해진 꽁초를 버린다. "돈을 댄 사람이 있어서 엿도가 다시 차렸수다." "그거 잘된 일이구마." "개미 쳇바퀴 도는 격이지 뭐. 나는 그렇다 치고 이서방도 거 썩 잘됐구먼요." "..." "거기야 계란 노른자위 아니오? 게다가 공짜로 얻은 가게요, 부자 되기는 따놓은 당상, 옛말에도 불난 자리는 재수가 있다더구먼." "갈쿠리로 돈 걷게 생깄소." 용이는 비웃음을 띠었다. "남의 일 같네?" "나하고 무신 상관이요" "주머닛돈이나 쌈짓돈이나," "실없는 소리는 안 했으믄 좋겄고 박서방은 요새 머하는고오?" "그놈의 늘 푼수없는 갖바치, 노상 그렇지요. 지 말로는 용정의 집일 끝나면 판자벽이라도 둘러쳐놓고 가겔 내 겠다는 건데..." "..." "장사하기가 싫은 모양이라," "그래도 생업인데," "해골바가지처럼 말라비틀어져서, 보기가 딱하더만. 하기는 따른 식구들이 많으니 고생이지. 이놈의 갖바치 박 가야, 배운 도둑질이나 해! 할라 치면 밑천을 벌어야지 헤벌쭉 웃는데 흥? 주변머리없는 자식." "일은 어디서 하는데요?" "거 왜 전당포 뒤켠에 있던 지씨, 그 양반 집 자리에 지금 큰 기생집을 짓고 있거든요." "기생집을," "아마 가을까진 그 집 일이 계속될 모양인데 말이 많더구먼." "..." "당을 판 지씨도 욕을 먹는 모양이고, 왜 그런고 하니 뒷돈을 대주는 게 왜놈이라는 게요. 서울서 기생 데려다 장사할 사람은 조선 사람이지만, 그러니 실제 주인이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그 말이지." "사단이 있는 집이구만." "기생 천 명이 온들 우리하곤 아무 상관 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이크! 내가 너무 오래 지껄였구만. 해도 짧아 지는데 움직여야 먹고 살지." 홍서방은 우쭐우쭐 걸어가버리고 용이도 일어선다. 전당포 뒤켠 지씨 집터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주갑이 혼자 뒷짐을 지고서 바삐 움직이는 일꾼들 주변을 서 성거리고 있었다. 일꾼들의 몸들이 좋아서 그랬던지 주갑의 목은 몹시 길어 보였고 박서방의 모습은 눈에 띄 질 않았다. "주서방." "오매, 워찌 온다요?" 검버섯이 핀 얼굴에 가물가물 웃음기가 번진다. "큰애기, 길이라도 안 잃었는가 싶어서 왔거마는." "울아부지 겉은 소릴 혀?" "멀 하고 있소?" "구겡하고 있었어라우." "박서방은 안 보이네?" "저어기, 안쪽서 흙 파는개비여." "만냈소?" "잠시, 남의 일 허는디 진 야길 헐 수도 없고 그런다고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헐일없이 어정거리고 있 었지라우." 용이는 맞은켠 처마 밑에 가서 쭈그리고 앉는다. 따라온 주갑이 홍서방이 그랬던 것처럼 용이 옆에 털석 주저 앉는다. 날람하게 가벼워 보이는 몸집이 다를 뿐이다. 아까처럼 궐련을 나누어 피운다. "형씨." "야." "불각처 생각이 나는디, 기집이란 요물이랑께." "저 집 짓는 것을 보니, 기생집이라 허니 말이요. 피 빨아먹는 깍다구 겉은 기집들이 모여들겄다는 생각이 든 다 그 말 아니겄어?" "..." "내가 봉밀구에 있을 적 이야근디 하참, 그 불쌍한 고아부들 땀 밴푼돈을 노리고 깍다구 겉은 기집들이 모여 든단 말씨. 나도 푼푼 절용해서 모은 두 냥을 곱다시 삐얏기지 않았더라고? 첨엔 신세타령으로 사람 풀을 콱 직이놓고 다음은 살짝살짝 피함시로 간장을 녹이놓고 담은 심센 놈 불러다가 몽뎅이질헙디다요. 그래 내가 은 두 냥을 어떻게 삐얏깄는고 허니 심센 놈들 몽뎅이질에 그만 항복혔다 그 말인디, 심이 없인께로 맴이사 가뭄 날의 찰흙맨치나 단단혔지마는 무신 수로 당할랍디여? 더 있다가는 게우 붙어 있는 살가죽도 남아나지 않겄다 생각허고 중행랑, 형씰 만내 여게 앉아 있는디 참말로 인생이란 일장춘몽이라. 그 일이 지금은 까매득허요잉. 하하핫 하하하..." 용이도 따라 웃는다. "거놈의 은 두 냥만 있었으믄... 홍이 그놈아아 눈깔사탕을 사주는 긴데 그 빌어묵을 깍다구 겉은 기집년 밑구 멍에 쑤시넣었으니 지기랄! 어른 체면이 말도 아니란 말요." 주갑은 하늘을 쳐다보며 빙글빙글 웃는다. "그라믄 내 돈 십 전 빌려줄 것이니 사탕 사주소." 용이 웃음을 머금은 채 주머니끈을 끄르려 하는데 "그렇다믄 그 국밥집 아짐씨 박하분 한 통도 사주고 싶소잉." 슬쩍 곁눈질을 한다. "시시한 소리, 그라믄 다 집어치우소." 끄르려던 주머니서 손을 떼는데 그러나 용이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주갑이 옆에 있으면 왠지 마음이 태평 해진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집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다. "이눔새끼 무슨 잔소리야! 품삯 정한 대로 주었으면 고만이지. 어제도 쭝얼쭝얼 턱주가릴 놀리더니 오늘 또오, 뭐 어째!" 캡을 쓰고 당꼬바지를 입은 사내가 눈알을 굴리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아아니, 그리 화만 낼 것도 아니란 말이오. 경위가 그렇지 않다 그 말 아니오." 상투가 헝클어지고 몸집들이 좋은 일꾼들 속에 유독 볼품없는 사내, 박서방이다. "개나발 같은 소리 하지도 말어! 따타부타 씨부려봐야 허기밖에 들 게 없어!" "딴데서 한 푼수가 있는데, 생각들 해보시오. 장골이 온종일 일을 하다 보면 힘도 부치고 국수 한 그릇 막걸리 한잔이라도 마셔야 허릴 필 것 아니겠소? 사람을 그리 우격다짐으로 부린다고 비용이 더 적게 드는 것도 아니 라 말이오." "그럼 딴데 가서 일하면 될 거 아냐. 못 가게 누가 잡았나? 재수없이 왜 자꾸 이 지랄이야." 일꾼들의 일손이 느적느적해지고 행인들이 서넛 모여든다. "아니 저 따깔모자 쓴 자가 누구다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주갑이 길 가다 멈추고 시비 구경을 하는 사람에게 묻는다. "글세, 도급 맡은 모앵인데 나도 모르겠음. 차린 꼴로 봐 무시기, 왜물으 많이 퍼마신 것 같소꼬망." 행인도 당꼬바지를 입은 사내를 좋잖게 바라본다. "여기 다 물어보면 알게요만 나는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 말이오. 그러니 뭐 술 생각이 나서 하는 얘기도 아니고 뒷바라지할 여인네들이 없어서 점심을 안 내놓겠다는 것은 알 만한 얘기요만 술이야 술집에서 가져오 는 거 아니겠소? 출출한데 한잔씩 들이켜면 일도 신이 나서 많이 할 게고." 박서방은 눅진눅진하게 물러서질 않는다. "이눔새끼가 도대체 너 뭐길래, 뭘 믿고 이러는 게지?" "허허 참 믿을 것이 어디 있다고? 뭘 믿는단 말이오. 본시 술은 즐기지 않는다 그러지 않았소? 경위가 그렇지 않다 그 얘길 하는게요." 엇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얘기에 사내는 사내대로 화통이 터졌는가 "이런 벽창호 같은! 이 건방진 새끼야!" 주먹을 쥐고 박서방의 면상을 내리친다. 박서방이 퍼썩 쓰러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주갑이 달려간다. 어느덧 그는 사내 뒷덜미 양복깃을 낚아챈다. "아, 아니!" 사내는 목을 흔들어대며 돌아서려 한다. 그러나 좀처럼 그렇게 되지는 않았고 눈알만 뒤로 돌아가고 목은 삐 딱하니 기울어 마치 목병 앓는 사람의 꼴이 되었는데 구경꾼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진다. 용이도 껄걸 웃는다. 몸집이 땅땅한 사내는 실상 입으로만 큰소리를 쳤지 힘은 별것이 아니었던 모양이고 삐쩍 말라서 뼈다귀만 남 은 것 같았으나 노동에 단련된 주갑의 뚝심은 보기와는 달랐다. "너, 넌 누구야!" "누구긴, 조선 사람이어라우." "이, 이새끼 죽고 싶어 이래!" "엄살도 가지가지랑께." "못 놓겠어?놓아!" "놓는 거야 어렵잖은디 보아허니 나이도 많들 않은개비여? 쇠가 굳은 것도 아닌개비여? 검배팔도 아닌개비여? 헌디 워찌 입정은 그리 더럽고 손목때기는 방정스럽다요?" 구경꾼들은 또 웃는다. 일꾼들은 숫제 일손을 놓고 모여든다. 버둥거리다가 간신히 빠져 나간 사내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다. "이새끼!" "하따 천지간에 새끼 아닌 게 있더라고? 사람 새끼냐, 짐승 새끼냐, 조선놈 새끼냐, 하 이거 아부지한테 미안 스럽소잉. 용서하시쇼. 아무튼 조선 사람 새끼냐 왜놈으 새끼냐, 그거는 구별되얐이믄 쓰겄소잉. 따깔모자 썼다 고 까불지 마시라 그 말인디." "이새끼 수상한 놈이구나." 사내는 위신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쓴다. "수상하기사 이녁 아닌게라우? 꼴을 보면 알쪼다 그 말인디, 얼마에 도급을 받았는지 모르겄소만 내 보기에는 도급 맡을 만헌 인재도 아닌 성싶고오, 내 이런 형편은 다소 안다 그 말이여. 공사판이라면 안 댕기본 곳이 없 잉게로 눈치 하나 벌었제. 물어보나마나 뻔혀. 도급 맡은 인재라면 이러크름 곤장허지는 않다 그거여. 십장이 제 십장, 허니 술값 점심값을 이녁 개비에 넣어부맀다 그거여. 뻔혀, 뻔허다 그거란 말시." 파랗게 질렸던 사내 얼굴이 순간 홍당무가 된다. "이눔새끼 죽어봐라!" 미치광이처럼 벽돌이 쌓인 더미 쪽으로 몸을 돌린다. 벽돌 하나를 집는 순간이었다. 크다만 짚세기 신은 발이 벽돌 집은 손을 밟는다. 일꾼 중의 한 사람이었다. 험악해진 일꾼들의 눈이 밟힌 손으로 집중되고 주갑은 내리 지껄이고 있었다. "모두 벅수여, 벅수랑게로. 한 공사판에서 함께 품일 판달라치면, 같은 처지 한 형제 겉은 처지 아니더라고? 합심을 허얄 것인디 한 사람을 매를 맞고 다른 사람들은 구겡만 허고 어디 이런 인심이 있을 것이요? 다같이 손해보는 처지랄 것 겉으면 다같이 따져야 그래야 되는 것인디." 벽돌은 집지 못하고 간신히 손만 뽑아낸 사내, 겁에 질려서 사방을 둘러본다. 빙 둘러싼 일꾼들의 눈에는 살기 가 돌고 그 살기에 기름을 붓듯이 주갑은 여전히 지껄여대고 있다. 사내는 잽싸게 인부를 울타리를 비집고 뛰 어간다. 뛰면서 "이 이 개새끼들! 영사관에 알려서 혼달음내줄 터이니 꼼짝 말고 있어!" 고함을 친다. "굿헌 뒤 날장구 친당께!" 주갑이 사내 등을 향해 응수한다. 그러고는 허허어 허허어 하고 웃는다. 구경꾼 일꾼들도 웃는다. 박서방은 뒷 전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좀도적이여, 좀도적, 두고 보랑께? 내일이믄 점심값 술값이 나올것이요. 좀도적이란 본시 겁이 많으니께, 좀도 적이란 으레 계집이나 아아새끼들, 심이 없는 사람들이나 이분이분 건디리는 불쌍한 친구랑께. 뭐 연장 들 것 없이 손목때기만 한분 밟아주어도 간이 오그라들었을 기고오." 8장 심장을 쪼개어 바치리까 길상은 뒤곁에서 서희의 노한 음성을 들었다. 그의 노여움은 용이보다 자기 자신에게 던져진 것이라 생각한다. 뒤곁을 들락거리며 일을 하던 새침이 달래오망이가 길상을 힐끗힐끗 훔쳐본다. 이들 역시 길상과 마찬가지로 용이를 거쳐서 길상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이와의 깊은 사연을 잘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 들 이러는 게지? 모두들! 하는 모두들, 그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었고 그간 서희의 무거운 침묵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때때로 벌어지는 체통 잃은 신경질도 보아왔다. 왜 그러겠느냐? 중늙은 찬모와 어린 계집아이는 길 상이 회령에다 여자를 얻어놓은 때문이라하며 수군거렸다. "우리 아가씨보다 그 과수댁 더 미인으로 생긴 모앵이디?" 호기심에 차서 달래오망이가 말하면 새침이는 "설마... 우리 아가씨보다 그럴 리 있겠슴둥?" 그의 이름대로 새침해서 말했고 "그러문 어째 빠졌는가?" "그러기 별난 일이랑이." "송애는 상기 혼자 생각으 한답매?" "어째 생각으 앙이 하겠슴둥?" "그래도 소앵이 없지비. 돈이구 권세문 제일인 이런 세상 암잉둥?그것도 싫당이, 그런 사람으 송애가 목으 매다안다고 무시기 맘 돌리겠음?" 소문이라는 것은 흔히 사실보다 한발 먼저 가는 수가 있다. 길상의 이번 경우가 그러하다. 회령 한영여관에서 우연히 만난 옥이네라는 젊은 과부는 시초부터 치한의 추태 대상으로 나타났었다. 송장환 같은 순정파라면 모를 까 술집 여자를 희롱한 경험이 있었고 스물일곱 나이의 건장한 사내인 길 상에게는 그 사건이 자극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고, 해서 그는 '내가 알기론 우리 사내새끼들이란 본시부터 아까 그 치한 같은 종자여서, 성인군자도 여자와는 무관하지 않 았고, 하물며 우리네 범부들이야... 흐흠 사실은 왈가왈부할 것도 아니었지.'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녀에게 도움을 준 것에는 별 저의가 없었다. 손님으 어찌 만나뵈옵습매까? 고개 를 숙이고 여자가 물었을 때도 무심히 말했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장거리 복지곡물상회로 연락을 하라고. 여자를 두고 정사를 생각했더라면 길상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다만 자진하여 딸을 떠맡기려는 은씨를 귀찮게 생각는 터라 그 은씨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은 기분은 있었던지. 소문은 바로 그 은씨 입에 서 시작된 것이거니와 창고 앞에서 응칠이가 그 여자와의 일을 말했고 송애가 험악한 태도로 대했을 때 사실 소문은 앞서 와 있었다 할 수 있겠다. 여자에 대해 심상찮은 욕망은 이미 발동된 후였다 하더라도 회령에서 가끔 피우는 바람기였을 뿐 구체적인 것인 아니었으니 말이다. "김형, 거 소문 고약하던데 설마 사실은 아니겠지요?" 언젠가 송장환이 물어본 일이 있었다. "왜요? 사실이면 어쩌시겠소?" "턱없이 품행이 방정치 못하오." "그럼 머릴 깎을까요?" "머리 깎은 놈도 마찬가집디다. 거 불쌍한 과부 울리지 말구 정들기 전에 손 떼시오." 길상은 옥이네에게 어떤 장래를 약속하는 따위의 언질을 준 일은 없다. 냉정하다기보다 무책임했다. 그것을 그 는 여자에게 감추려 하지 않았다. "손을 떼라니요? 장가갈 생각인데 그러시오?" 여자에 대한 감정이 무책임했을 뿐만 아니라 소문에 대해서도 길상은 무책임했다. 여자와의 혼인을 그는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면서도 입으로 부담 없이 지껄이며 스스로 소문을 조장해온 것이다. 누가 어느 정도의 소문을 서희에게 옮겨놓았는지, 아니면 새침이 달래오망이가 하는 말을 그들 모르게 우연히 들었 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희령의 일을 서희는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가느다란 실오라기 한 가닥 같은 귀띔만 잡아도 예리한 추리력은 맹렬하게 인내 깊게 전체를 규명해나가고야 마는 그런 지독한 성미였으니까. 그간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줄곧 침묵이 계속되어왔었다. 그것은 바람 없는 바다같이 표 면상으로는 지극히 조용했었지만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생물들이 끊임없는 사투를 벌이고 있을 바닷속처럼 서 희 심중 깊은 곳에서는 모조리 동원된 지혜와 걱정이 무서운 싸움을 벌이고 있으리라는 것을 일거수 일투족 그 습벽을 잘 아는 길상으로서는 능히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길상의 사랑이 범상한 남녀의 사랑일 수 없게 잘 조련되어온 것이었다 할지라도, 관음상을 향해 느끼듯이, 전 혀 일방적이요 정밀한 그런 유의 사랑이었었다 할지라도, 어느 날 갑자기 그 대상이 이쪽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무상에서 보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며 상대의 고통이 고통으로 오되 희열 이 따를 것이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런데 길상은 왜 절망하는 것일까. 견디기 어려운 오뇌 속으로만 빠져들어가 고 있는 것일까. 견디기 어려운 오뇌 속으로만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서 이상현은 빙빙 돌다가 떠나고 말았다. 그들의 접근할 수 없었던 거리는 길상과 서희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서희의 대상으로서 상현은 사모와 기혼자, 이두 상극선상의 존재며 길상은 야망과 하인,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상극된 것은 아니다.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 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 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길상은 그러나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대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 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 대체로 길상의 심정은 이런 정도로 밝혀볼 수 있겠고 서희 의 경우, 길상이 생각했던 것처럼 서희 역시 그렇게 믿고 있음을 틀림없다. 시초부터 야망의 수단이 아닌 길상과의 결합은 가능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길상과의 결합에 있어 그것 이외 어 떤 구실로 서희는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겠는가. 자식을 버리고 구천이를 따라간 생모를 생각해서라도, 그렇 다면... 서희의 보다 깊은 영혼 속에는 수명적인 길상과의 애정이 잠을 자고 있었다 할 수는 없을까. 무시무시 한 내적 투쟁은 과연 야망의 좌절에서만 빚어졌다 할 수 있을까. 강렬한 질투, 강렬한 패배감, 광적이 증오심- 이튿날 열두시가 지난 뒤 길상은 편지 한 장을 조끼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처음에는 왼편 쪽을 곧장 가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발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빨리한다. 그가 들어간 곳은 상의 학교 교사실이었다. 윤이병이 넋나간 사람같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윤선생." 윤이병은 펄쩍 뛰듯 놀란다. 잘못을 들킨 사람 같고 몸집이 더욱 더 작아 보인다. "아 예. 어, 어떻게 오시었소?" 헐레벌레 일어서며 의자를 끌어당겨준다. "자아 앉으시오." "고맙소." "무슨 일로?" 역시 안정을 잃은 표정이다. "송선생은 아직 공부 가르칩니까?" "네. 곧 끝날 겝니다." "그 댁에 손님이 와 계시다는 말을 들었기에." "네? 손님이라구요?" "연추에서 오신 손님이라 들었는데 편지 한 장 그 편에 보낼까 싶어서요." "아, 네." 하는데 윤이병의 눈에 긴장하는 빚이 돈다. 그러니까 금녀를 데려가면서 발목을 묶어놓듯 자기 끄나풀 되기를 강요했던 김두수에게 한 달 남짓 되는 동안 윤이병은 비교적 충실히 첩자 노릇을 한 셈이었다. 김두수가 용정 에 나타나는 일은 드물었고 수족 노릇을 하는 한가라는 위인에게 연락을 취하곤 했었다. 그런데 우선 김두수 가 수집하고자 한 정보는 최서희를 중심한 일군의 사람들, 영문을 모르는 윤이병은 서희를 중심한 일군의 사 람들이 독립운동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러는 한편 서희의 미모나 처지 그리고 재산 등 매우 식지가 움직이는 것을 윤이병은 다만 방도가 막연하여 관망 상태에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저런 일들로 하여 자연 태도에 심상찮음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요즘 듣건대 윤선생께선 술을 많이 하신다면요." 신문에 눈을 주다가 길상이 묻는다. "많이 하다니, 낭설이오." 윤이병은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부정한다. 순간 길상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 있었다. '윤선생, 그 사람 왠지 불안한 것 같소. 요즘 돈 쓰는 게 헤프고 남자가 몸치장은 뭣 땀에 그리 하는지, 나가 는 월급은 뻔한데 말이오. 얼마 전만 해도 누이가 왔다면서 여비도 변통해가곤 했었는데...' 송장환은 입맛이 쓰다는 듯 뇌었던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작은 몸집이 더욱 줄어든 듯한 꼴을 하고 있긴 했으 나 해사한 얼굴에 썩어울리는 하늘색 양복은 새로 지어 입은 것인 듯싶다. 윤이병은 한동안 어디 몸이라도 불 편한 듯, 망설이는 것 같더니 "손님이라면 역시... 운동하는 분이겠군요." 그 말은 일기 시작한 의혹에 갈구리처럼 걸려들었다. "아니 내가 듣기론 친척이라든가, 그렇게 들었소." 하면서 길상은 송장환이 경계하여 윤이병에게 아무말 하지 않았던 것을 눈치채었다. 손님이란 다른 사람 아닌 권필응이었다. 마침 종이 울리고 송장환이 벌건 얼궁르 하고서 돌아온다. "어, 김형." 하고 웃는다. "끝난 게요?" "네, 토요일이니까." 윤이병은 가만히 다음 대화를 기다리는 눈치다. "좀 나갑시다." 술 마시러 나가자 한다면, 해도 안 저물어 이상할 게고 윤선생도 나갑시다, 하지 않을 수 없어 길상은 난처한 대로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네, 그럽시다." 송장환은 다행히 왜 그러느냐 하고 묻질 않았다. "그럼 윤선생, 나 먼저 나가겠소. 뒷일 부탁합니다." 윤이병은 그러라고 대답하기는 했으되 실망보다 묘하게 외로운 표정이 된다. 거리로 나선 길상은 "권필응 선생 아직 안 떠나셨지요?" "네." "댁으로 혼자 찾아갈까 하다가 송선생 편에 전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뭔데 그러시오?" "편지요." "이동진 선생께 말입니까?" "그렇소." "그것뿐이오?" "그런 셈이지요." "그건 그렇고." 하다가 송장환은 길 위에서 생각하는 것 같다. "김형." "네." "우리 강가에 회 먹으러 안 가겠소? 별일 없지요?" "내일 회령에 갈 일만 남아 있소." "그럼 됐수다." 송장환은 이마 위에 내려온 머리칼을 더풀거리며 걷기 시작한다. 나루터와는 사뭇 떨어진 한적한 강가 언덕에 제법 운치가 있어뵈는 주점이 하나 있었다. 풍류객에 고담준론의 우국지사 등이 드나드는 좀 색다른 주점인 것이다. "아주머니, 횟거리가 뭐 있소." 송장환은 들어서면서 물었다. "오늘 회는 안 되겠는데," "왜요?" "물이 좋잖아요. 생선찜 같으면 되는데," "그럼 그거라도 해주슈. 우선 술부터 들여주시고요." 열려 있는 들창에서 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방으로 들어간 송장환은 윗도리를 벗어놓고 자리에 앉는다. "그동안 골치가 지근지근 쑤셨는데 오늘 좀 풀어야겠소." 중 본연 사건 때문에 송장환은 골치를 앓은 모양이다. 남의 집안 사정이어서 길상은 아무말 하지 않는다. 술이 들어오고 대작으로 몇 순배 한 뒤 "김형." 송장환의 표정은 자못 심각하다. "네." "나 결국은 떠나기로 작정했소." "이번에 말이오?" "아니, 권선생께서 연추 다녀오신 뒤, 그 양반이 상해로 가신다니까 나도 동행할 작정이오." "상해는, 왜요?" "나야 뭐 본시부터 심부름꾼 아니오? 권선생 따라다니면서 시중이나 들어드릴 생각이오." 송장환은 조금 전의 심각했던 표정과는 달리 하하핫... 하고 웃는다. 그러나 공허한 울림이다. 그러고는 다시 우울하게 말없이 술을 마신다. 어느덧 생선찜도 들어왔고 주기도 상당히 올랐다. "붕괴될 것이 시간 문제로만 남아 있는 대청제국인데," 송장환이 얘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이놈의 땅 만주가 미묘하게 될 게고." "이미 미묘하게 돼 있지요." 길상이 짜증스럽게 말한다. "남의 집안싸움이라 해버리면 고만이겠으나 그게 그렇게도 끝나지 않을 테니 걱정이지요. 왕창 그냥 무너져서 그것으로 고만이면 중국을 위해서 그렇고 앞으로 전개될 우리들 일을 위해서도, 우선 우리가 뛸 수 있는 자리 의 일관성은 있어야겠는데 말입니다." "그 일관성이라는 것도 나름이지 뭐." 길상은 여전히 짜증스럽게 말했다. 뻔히 아는 일들을 밤낮 되풀이하는 것이 지겹고 그래서 송장환이 싫어질 때가 있다. "그건 그렇소. 일본의 입김이 들어간 일관성이라면 그건 절망이지요. 아무튼 예상하건대 청조는 이곳을 그네들 마지막 보루로 삼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연해주와 중국 본토와의 연결이 어려워 질 게고 분열을 일삼는 게 인간 본성인데 활동 범위가 몇 동강이 나고 보면 작은 대가리들만 불어날 게고 처처에 흩어진 우리 이민들의 자각이란 발라 수도 없는 거구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자리에서 동화되고 만단 말입니다. 영원히 죽는 거지 요." "그럴까요? 나는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데? 삼백 년 가까이 만주족한테 지배되어온 한족이 오늘날 청조를 엎어 버리려 하는 것을 눈앞에 보지 않소?" "소수민족하곤 경우가 썩 다르지요. 조선이 삼백 년을 지배당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씨가 말랐을 것이오." 길상은 잠자코 만다. 그것은 송장환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옳아서 어쨌다는 거냐, 다만 옳을 뿐이 아니냐, 너는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고 나는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을 뿐, 너는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고 나는 혼란 속에 빠져 있다. 그것뿐이야. 권필응이라는 사람을 따라간다고는 하지만 사실 어디로 가나 교육 사 업 이상의 적격 장소는 아마 없을걸? 근거와 열정은 있어도 자넨 영악하질 못해. 민첩하지도 못하고 말이야. 길상은 속으로 뇌이며 송장환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까닭 없이 깔보는... 그것은 자기 자신을 깔보는 심정임에 틀림이 없다. "하여간에 이러나저러나 답답하기론 마찬가진데, 아무튼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처음부터 손문이 일본을 끌어들이려 했던 그거요. 외제를 끌어들여 안 망한 나라가 없고 설령 망하지 않았다 손치더라도 제 육신의 일 부를 찢어준 역사를 우리는 잊을 수 없을 거요. 결국 배신이 다반사로 되어 있는 일본이고 보면 약속대로 할 리도 만무고 그래서 우리는 그 광동점령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았소. 어째 그 일을 생각하면 김옥균 의 경우가 눈앞에 떠오른다 말입니다. 물론 땅덩어리가 크고 하니 그 규모에 있어서나 광범위한 조직 도처에 서 감행되는 치열한 투쟁이라든가 시야가 넓은 지도자에 자각하고 호응하고 나서는 일반민들, 어느 면으로는 석금을 논할 처지는 아니지만 겨우 몇자루의 총과 일본도 나부랑이로 궁성 담장이나 넘던 김옥균이 왜 눈앞에 떠오를까요? 왜 모두들 전철을 밟느냐 그거겠지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을 거라구." "경상도 속담에 낭개에도 돌에도 못 댄다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할 수 없어 그랬다는 변명 같은 얘긴데, 그 손문선생께서도 다급한 김에 그랬을 거요. 조갈증이 나서 말입니다." 길상은 심각한 송장환을 발길질하듯 냉정하게 웃는다. 그러나 송장환의 열이 식을 리 없다. "하여간에 그놈의 혁명 세력이라는 것도 가닥이 너무 많아서 과연 앞으로 중국이라는 이 땅덩어리 위에 어떻 게 엮어나갈는지, 우리는 또 어느 곳에다 포석을 놔야 하는지, 그러나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 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들은 말에 의하면 혁명 단체의 결사대 대원들은 일 주일 이내에 효험을 나타내는 치명적인 독약 주사를 맞고 전투에 나선다고도 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왠 지 우리는 잠을 자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단 말입니다." 언제 내렸는지 들창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발이 고와서 거의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안개에 싸인 강물과 강물에서 번져나간 것만 같은 모래밭과 거의 평면으로 펼쳐진 숲, 그리고 뗏목들, 멀지않아 겨울이 오고 강물 이 얼어버리면 뗏목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열띤 송장환 음성을 바람 소리처럼 이제는 무심하게 들으며, 술잔을 손에 들고 창 밖을 바라보는 길상의 가슴에 돌연 뜨거운 것이 치민다. 불덩이 같은 슬픔이, 생명의 근원에서 오는 눈물 같은 것이, 무엇 때문에 슬픈가. 무르익은 봄날 보랏빛 꽃이 포도송이같이 주렁주렁 매달린 등나무 에는 크고 퉁겁고 윤이 흐르는 곰벌만 찾아왔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부를 들판의 작은 꽃에는 무슨 벌레가 찾아드는 걸까. 심장을 쪼갤 수만 있다면 그 가냘픈 작을 벌레에게도 주고, 공작새 같고 연꽃 같은 너희 애기 씨에게도 주고, 이 만주 땅 벌판에 누더기같이 찾아온 내 겨레에게도 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명신에게 피 흐르는 내 심장의 일부를 주고 싶다... 술잔을 놓은 길상이 담배를 붙여문다. 길상이 자기 얘기로부터 와전히 떠나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송장환이 당황한다. "김형." "네." "김형이 무슨 일로," "뭐 말이오?" "이동진 선생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편지 때문에 그러시오?" "좀 궁금해서," 길상은 갑자기 취기 어린 눈이 된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남의 일에 열심인가... 좀 모르겠군." 담배를 비벼끄고 술잔에 술을 붓고 그리고 마신다. "김형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생겼나 싶어서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그런 변화 말이오?" 피식 웃는다. "우리 상전 애기씨 흔처 땜에 그러는 게요." "...?" "연추에 계시는 그 어른은 우리 상전 애기씨 아버님이나 다를 바 없는 분이니까." "어디 혼처가 생겼다 그 말이오?" "왜? 생겼다면 송선생 마음이 좀 달라질까?" "허 참 거북하게 자꾸 이러기요?" "혼처가 아니 생기니 그 어른더러 오시라 가시라 하게 됐다 그 말 아니오. 나도 나이 삼십을 바라보는데 몽다 리귀신은 되기가 싫고," "그러면!" "파발은 안 태우고 말만 달리면 되겠소? 성미도 급하지." 송장환은 서희와 길상과의 혼인을 생각했음을 분명하다. 얼굴이 빨개진다. "회령서 눈이 빠지게 날 기다리는 과수댁이 있다는 것을 설마 송선생이 모르실 리가 없겠는데?" 길상은 큰 소리로 웃는다. 두 사람은 어둡기 전에 우산 하나를 빌려 쓰고 주점을 나왔다. 붐비 같은, 그러나 한결 살갗을 차가운 비를 맞 으며 이들은 윤이병에 대한 얘기를 약간 했다. 서로간에 경계하라는 암시 정도로. 이튿날, 이른 아침 길상은 회령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서희는 깨어서 길상이 나가는 것을 알고 있는 기 색이었고 사업을 위한 회령행이지만 서희의 기분이 심상할 리 없다는 것을 길상은 쓴약을 머금듯 느낀다. 밤 에는 계속하여 부슬비가 내리더니 이른 아침 하늘을 맑게 개이고 얼마지 않아 해가 솟아오를 것 같다. 그러나 거리는 아직 조용하다. 장거리 쪽으로 들어섰을 때 무엇을 하러 나왔는지 우두커니 서 있는 월선의 뒷모습이 눈에 띈다. 길상은 인사를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축 처진 두 어깨며 힘없이 늘어뜨린 두팔 하며 망실 상태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못 본 척 급히 지나쳐버린다. 떠나기로 작정한 용이와 가게를 차리고 앉은 월선이, 축 처진 두 어깨며 힘없이 늘어뜨린 두 팔하며, 길상은 월선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오광대굿이 벌어지던 하동 장터의 장작불이 타오르던 밤. 명주수건을 풀어 어린 봉순이 얼굴을 싸주던 그 외로운 여자. 순간 길상은 목을 꺾어 발끝을 내려다보며 달아나듯 급히 걷는다. 마차는 쾌적하게 달렸고 푸른 두만강을 질러서 나룻배는 대안 조선의 땅으로 길상을 내려놨다. '빌어먹을! 용이아제도 떠나고 모두 다 떠나는구먼. 나도 따라갈까부다. 송선생 따라서 상해나 북경이나, 뒷골 목의 쓰레기통 뒤지는 거지가 돼보든지 아니면 권총 솜씨를 익혀보든지.' 자기 몸가짐이 허물어져가는 것 같다. 팔난봉으로 히죽히죽 풀려나가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 높은 봉우리를 향해 쇄부채 같응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독수리 같은 생각이 든다. 그 영약한 눈알과 발톱을, 전율하는 힘을, 심장을 쪼아먹는 그 구부러진 주둥이를, 도시 운명은 어디 있단 말인가, 평화는 어디 있고 사 랑은 또 어디 있는가, 심장을 쪼개어 받쳐질 그것들은 도시 어디메에 있는가... 싸움은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 과의. "날씨 좋습니다." 같은 나룻배를 타고 왔을 뿐인 생면부지 나그네에게 길상은 말을 걸었다. "비 오신 뒤라 산천이 맑아졌소이다." 나그네는 묵객 같은 말을 한다. "네, 사람의 마음도 산천같이 씻겨졌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글쎄울시다. 사람의 마음이 빗물에 씻겨진다면야 공자 맹자가 무슨 소용이겠소." 나그네는 성큼성큼 앞서가고 뒤따르던 다른 행인도 길상을 앞서 지나가고 하늘의 구름만이 다가오다가는 머리 위를 넘어 사라진다. 회령으로 들어가서 여관에 방을 잡은 길상은 저녁을 청해놓고 행구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어 비스듬히 드러누 워 읽기 시작한다. 책자는 벌써 오래 전 상해에서 간행된 추용의 저술 『혁명군』이다. 내용은 청조 타도의 선 언이요 혁명의 필연을 설파한 것으로, 그 저자도 이미 옥사하여 세상에 없다. 이 책자를 길상은 송장환에게 빌 렸던 것이다. "저녁상 들어가요오." 방 밖에서 뜻밖의 여관집 안주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상은 재빨리 책을 뒤집어놓으며 일어나 앉는다. 방문을 열어놓고 밥상을 들여오는 안주인, 뜻 모를 미소를 띤다. "아주머니께서, 이거 황송해 어쩌지요?" "그놈자식 석이놈을 심부름 보냈더니 영 와야지요? 바쁘면 내 장산데 어쩌겠소." "천천히 먹어도 되는데..." "이거 다 김씨 탓이야." "네?" "쓸만한 계집을 싹 돌려뺐으니 내가 이 고생 아니오? 자아 어서 들어요, 식기 전에," 밥그릇의 뚜껑을 벗겨준다. 길상이 수저를 드는데 여자는 나가지 않고 엉거주춤 서 있다. "그래 요즘 재미가 어떻소? 깨가 쏟아지는 거 아니오?" 길상은 비웃음 반 무안기 반 하여 웃는다. "나야 뭐 장사가 되니 좋기야 좋지만 살림을 차려놓고 밥은 여관에 와서 자시는 심보를 모르겠구먼?" 단순한 호기심을 위한 천착인가, 아니면 나이를 잊은 계집의 교태인가. 길상은 밥을 뜨다 말고 여자를 힐끔 쳐 다본다. 여관에 들어올 때 가짜배기 상아 물부리에 궐련을 끼워 물고 태깔을 부리며 앉아 있던 여자의 남편 얼굴이 떠오른다. "아주머니가 보고 싶어서요." "정말?" "네에!" 길상은 후딱후딱 밥을 먹기 시작한다. 여자는 간드러지게 웃다가 "늙은 게 한이로군." 겨우 방문 닫아주고 나간다. "제에기랄!" 밥을 먹은 뒤 길상은 여관을 나섰다. 복지곡물상에서 계산을 끝내고 내온 술상을 마다하지 않고 얼근히 술이 취해 거리를 나섰을 때 밤은 꽤 저물어 있었다. '용정에는 송애도 있고 그 밖에 시집오겠다는 처녀도 있고 은씨 딸도 그만하면 됐는데 왜 하필 과부장가, 과 부장가, 하는 겔까. 이 나쁜 놈의 새끼야! 언제든지 손쉽게 버리려고 그러는 게지? 흥, 누가 약속이라도 했더 란 말이야? 밖에서 과부장가, 과부장가 하는 것 하고 옥이네한텐 손님같이 찾아가는 것하곤 상당히 거리가 있 지. 여자는 함께 산다는 것 꿈도 꾸고 있질 않단 말이야. 양해하고 들었는데 나쁜 놈이고 좋은 놈이고 어딨어? 여관에서 못 사내들 희롱감이 되느니보다 아암, 여자는 다행으로 생각할 게야. 그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됐으니 어차피 누구에게든 먹인 먹이야. 여자를 위해 슬퍼할 것도 안스러워할 것도... 음 뭐 그렇지 뭐.' 비틀거리며 여자가 세든 방의 방문을 열었을 때 남폿불 아래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여자는 후다닥 놀라서 일 어섰다. 아랫목에는 옥이 잠들어 있었다. "누가 잡아먹으러 왔나? 놀라기는 왜 놀라는 게요?" 여자는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깐다. 자기 몸을 바치는 체념이 아니다. 사내의 마음을 체념하는 것이다. 9장 구만리 장천 나는 새야 일요일이어서 홍이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길거리에 아이들이 노는데 저만큼 주갑이 보따리 하나를 들고 걸어 오는 것을 보았다. "주갑이아제? 어디 가요?" "저기, 저어기." 팔을 들고 허공을 가리키며 벌죽 웃는다. "저기, 저어기, 어딘데?" "강가에 간당게로." "강가에?뭐하고 갑니까?" "그거사 뭐," "그라믄 나도 따라갈라요." "니가?" "야." "아따, 그리 허자고." 이번에는 시꺼멓게 담뱃진에 절은, 들쑥날쑥한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다. 홍이는 주갑이가 좋다. 아버지처럼 무섭지 않아서 좋았고 엄마들처럼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았다. 그가 하는 말이면 어쩐지 우습고 재미가 난다. 길모퉁이를 돌아갔을 때 "홍아, 이 보따리 좀 받더라고." 하며 주갑은 들고 온 보따리를 홍이에게 건네준다. 그러고 나서 때묻은 주머니를 끄른다. "이보랑께." 잡화상 앞이다. 계집아이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여기 돈 두 푼인디 눈깔사탕 돈대로만 주시요잉." 그새 며칠 동안 집 짓는 곳을 찾아다니며 날품을 팔더니 돈푼 생겼다고 걸핏하면 홍이에게 군 것을 사주곤 했 었다. 그러면 홍이는 으레 그러려니 사양 없이 받아먹는 것이다. 주갑은 보따리를 되받아 들고 홍이는 신문지 조각에 싼 사탕을 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강가에까지 갔을 때 "주갑이아제." "워찌 그려?" "정말로 우리 내일 촌으로 가요?" "간당게로, 니 아부지가 그런다 혔응게로 틀림없이 가기는 갈 것이여." "그라믄 나는 핵교도 못 가겄소." "그놈의 공부 헌다고 벼슬헐 거란가? 성명 삼 자만 쓰면 된다 말씨." "아제는 성명 삼 잔가 뭐? 성명 두 자 아니요? 주갑, 나도 이홍." "이잉 안 그려. 주씨 성에다 갑이니께로 성명 삼 자 아니더라고?" 홍이는 개글개글 웃는다. 웃다가 다시 시무룩해지며 "핵교 못 가믄 정호도 못 보고..." "정호가 누군디?" "우리 반에서 젤 공부 잘하고 또오 나하고 젤 친한 동무요." "처처에 사람은 살고 있잉게로 맨들면 되는 거여. 걱정허지 말어." "옴마도 보고 저블 기고..." "그건 그려. 내가 생각혀도 국밥집 니 엄니 데려갔이면 좋겄는디." 그 말 대꾸는 없다. 강가 모래밭을 밟고 가던 주갑은 "홍아." "야?" "넌, 저어기 저기, 풀밭에 가서 나비나 잡고 놀들 않겄어?" "나비가 있어야제요." "그라면... 옳지! 여치가 있을 긴디 가보더라고." 주갑은 별나게 갑친다. "와요?" "허 이눔아아가 어른 말 들어야 헌당게로?" 여간 엄격하지가 않다. "나 좀 있다 널 부를 것이니 어른 말 듣더라고." 홍이는 시부롱해서 내려온 곳을 되잡아 풀밭 쪽으로 간다. "홍아-" 홍이 휙 돌아본다. "눈깔사탕 빨고 이잉-" 홍이는 풀밭에 와서 펄썩 주저앉으며 사탕 한 알을 입에 넣는다. 따돌리려 드는 주갑이 섭섭해서가 아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길에서 아이들과 놀 적에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내일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슬퍼진다. '와 가겟집 옴마한텐 못 가라 카노. 와 아부지는 성만 낼까? 가겠집 옴마한텐 한분 가보지도 않고, 이렇기 말 도 없이 떠나믄 정호가 나를 나쁘다 할 기고. 손가락 걸어서 지하고 나하고 맹세를 했는데 말이다. 선생님도 그렇고 김생원도 그렇고... 아부지는 와 그렇게 성만 낼까.' 사탕이 녹아서 침이 흐르려 한다. 얼른 침을 삼킨다. 그러나 홍이는 이내 달디단 사탕맛과 여치를 잡느라고 시 간 가는 것을 잊고 슬픈 생각도 잊는다. 풀냄새도 좋고 발등을 간질여주는 풀의 촉감도 기분에 좋다. 뒹굴어보 기도 하고 벅수를 넘어보기도 하고 풀꽃을 따서 신발에 소복이 담아보기도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홍아-이-" 주갑이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일어선다. "여기 있소오-" 신발을 들고 홍이 쫓아 내려간다. 신발에 담았던 풀꽃들이, 그새 시들어서 모래밭 위에 더러 떨어진다. "하 참, 몸이 날아갈 것같이 개볍네. 이러크름 좋은 거를..." 눈이 둥그래져서 홍이는 주갑이를 쳐다본다. 전혀 딴 사람이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매욕하고 머리도 감고, 홍아? 이자는 사람겉이 뵈들 않더라고? 그렇지야?" "옷도 갈아입었소?" "하모. 무명옷으로 갈아입었제. 여름도 설설 물러갔잉게로." 주갑이 싱글벙글 웃는다. 단정하게 빗어올린 상투하며 땟국이 빠져버린 얼굴, 그리고 흰 베옷은... 학이 한 마 리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입술은 푸르스름하다. 강물이 차가웠던 게다. 제삿날이면 옷 갈아입고 망건 위에 갓 을 쓰고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홍이 마음에 자랑스러움이 넘쳤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학같이 슬기롭게 보이 는 주갑이아제, 왠지 가슴이 찐해진다. "이자부터 벗은 옷을 빨아야제." 엄지손가락으로 코끝을 퉁긴다. 본시대로의 주갑이다. 그 꼴은. "우리 옹마보고 빨아돌라 카믄. 남자가 우찌..." 홍이는 민망해진다. "아니여, 남자가 우찌랑이? 그 따위 소린 약은 버려지가 허는 말인디 공자왈 선비들 양기로 모자래서 엄살 떤 거란 말씨." "양기가 머요?" "그건 니가 상투 찌르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되여." 주갑은 물가에 주질러앉는다. 조그맣게 된 토막 비누를 꺼내여 빨래를 시작한다. 홍이는 옆에 쭈그리고 앉는 다. 가죽과 뼈뿐인, 그러나 뼈마디가 굵은 손이 익숙하게 비누질을 하고, 주무르고 비비고, "아제요." "말하더라고." "맹세를 안 지키믄 죽어 저승에 가서 세를 뺀다 카든데," "그려." "그라믄 우짜꼬? 나 정호하고 맹세를 했는데." 홍이는 울상이 된다. "무신 맹세를 혔는디?" "후제, 크믄 말 타고 총 들고 독립운동하자고." "후제 일 아니랑가?" 주갑은 껄걸 웃는다. "하지마는 촌에 가서 공부도 안 하고 촌놈 되믄 말을 우찌 탈 기요? 총은 우찌 쏘고?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배워야 나라를 찾는다고," "지이기럴! 아따야아 안 배워도 동학난리 때 이 주갑이 총 쏘았당께. 말이사 안 타보았지마는, 자고로 식자우 환이란 말이 있덜 않더라고? 니 거 무른 대가리에 식자깨나 들었다고 벌써 우환인 기여. 하늘 보고 땅 보고 절기를 알면 세상 이치는 거기 다 있다 그 말인디, 애라 모르겄다." 하더니 주갑은 "새가 새가 날아든다아-" 별안간 목을 뽑는다. 어찌나 목소리가 크든지 홍이는 깜짝 놀란다. 새가 새가 날아든다아 온갖 새가 날아든다 남풍 쫓아 떨치나니 구만리 장천에 대붕새 문황이 나 계시니 기상조양의 봉황새애 문한기후 깊은 회포오 울고 남은 공작새 소선적벽 칠월야 .... 기막히는 목청이다. 쩌렁쩌렁 산천을 울리는가 하면 애연하게 올라가고 침통하게 내려오는, 자유자재로 굴리는 가락가락- 신이나서 앉은 채 어깨를 들석이기도 하고 목의 복숭아뼈가 전율하기도 하고 일손을 멈추며 얼굴 을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구만리 장천을 나는 대붕새를 생각함인가, 만경창파 녹수상에 원불상리 원앙새 를 생각함인가, 스르르 눈을 감고 눈꼬리에 한 줄기 눈물이 흐르듯. 성성제혈 염화지 귀촉도 불여귀이 홍이는 나른한 채 신발에 남아 있는 풀꽃을 모아 다발을 지어서 강물에 퐁당퐁당 담그곤 한다. 이따금 지나가 는 뗏목배 나룻배 사공과 선객들 중에 좋다! 잘한다! 소리가 들려오고 뱃전을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삿갓을 쓴 청인 사공들은 대개 이쪽을 응시한 채 가버리고 혹은 제 할 일만 하기도 하고. 야월공산 저문 날에 저 두견이 울음 운다아 이산으로 오며 귀촉도 저산으로 가며 귀촉도 짝을 지어서 우르-음 운다아 이이이이잇 이이잇 이, 이, 이 주갑이는 다 빤 옷을 모래 위에 펴놓고 물가로 돌아온다. 곰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넣는다. 손등은 까맣고 물에 불은 손바닥이 희여끄름하다. "주갑이아제." "워째 그려?" "주갑이아제는 아들 없소?" "있었제." "어디에?" "그거는 지금 모르겄구마." "그라믄 미적단이 데리갔소?" "아니제. 전생에 있었다 그거여. 아들만 있었간디? 딸도 있었고 마누래도 있었고 사방처마에 풍겡이 빙글빙글 도는 기와집에 살았었구마. 앞뒤로 기화요초는 우거지고오 나무가 너불너불 춤을 춤시로, 새들은 사철을 지저 귀고 비단 보로 위에는 나는 이러크름 앉아서." 허리를 쭉 편다. "치이 거짓말," 주갑은 곰방대를 물고 불을 붙인다. "들판에서 깜박깜박허는 별을 치다봄시로 그런 생각을 허는 것도 재미진 일이니께. 심심허거나 배가 고플 적 에, 치불 적에 그런 생각허믄 배고픈 것 치분 것 더러 잊을 수 있다 그 말인디 홍이도 후제 그런 일이 있일 것 겉으면 그리 해보더라고?" "주갑이아제, 배 많이 고파봤소?" "하모. 배 많이 고파봤제. 헌디 굶는다고 사람으 목심이 관대로 없어 안 지니께 조화가 요상타 그거 아녀?" 주갑은 킬킬 웃는 것 같더니 성급하게 담뱃대를 빨아당긴다. 꺼지려던 담뱃불이 희미하게 피어나고 주갑이 콧 구멍에서 연기가 풀려나온다. "뭐니뭐니 허도 배고픈 정 아는 그게 사람으로서는 제일로 가는 정인디, 혀서 나도 니 아부지를 믿고 정이 들 어서 따라가는 거 거로 시작된다 그거여. 저기 보더라고. 저기 물새도 모이 찾아서 지 새끼 먼저 먹이는 거, 어디 사람뿐이간디?" 두 다리를 세우고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앉아서 풀꽃 한 송이를 띄워 보내고 있던 홍이 얼굴을 들면서 "아, 나도 아요!" "뭐를?" "주갑이아제." "말허라니께." "길상이아제 아요?" "모르는디?" "우리 선생님하고 친하고 또 나를 귀여워하고 또오 자알 생기고 또 공부 많이 하고." 하다가 킬킬 웃는다. "언젠가 말이요? 작년인가, 아부지 심부름을 갔는데 길상이아제 방으로 간께 흐흐흐흣... 길상이아제 방으로 간 께 말입니다. 아제가 들창문에 문구멍을 뚫어놓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소. 아제, 하고 불렀더니 손을 흔들믄서 가만히 있으라 안 캅니까?" "워째 그러더랑가?" "그러더니 아제는 나를 번쩍 안아서 들창문 문구멍에 눈을 갖다 대주느 거 아니겄소?" "뭐가 있었지야?" "참새요" "참새애?" "야. 참새들이 모여서 수수알갱이를 묵고 있는데 모두 새끼들을 데리고 안 있겄소? 어미 참새도 여러 마리고 새끼 참새는 더 많아요. 참 신기롭더마요." "으음." "길상이아제가 수수알갱이를 준 거라요. 그런데 길상이아제는 홍아! 야?한께 참새란 놈이 저리 사람을 안 믿으 까? 문을 열고 내다보믄 다 달아나거든. 지금도 쫑긋쫑긋 사방에다 정신 파니라고 어미는 제대로 묵지도 못한 다 말이다. 벌써 여러 날짼데 도무지 나하고는 친하려 안 하거든, 함시로 슬픈 얼굴을 하드라 말입니다. 나도 그때 문구멍에서 새끼 주둥이 열고 모이 먹이는 것 똑똑히 봤소." 주갑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이른 새벽, 어둠이 걷혀지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할 무렵이다. 실하게 꼰 새끼줄로 멜빵을 삼아 짐을 짊어진 용이와 주갑이, 옷보퉁이를 이고 간장이 든 두루미병 하나를 든 임이네. 그리고 조그맣게 만든 보 따리를 짊어진 홍이는 흡사 바랑을 짊어진 새끼중 같았다. 이들 일행은 야간도주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없이 움막을 나서는 것이었다. 장거리를 피해서 사잇길로, 희미한 불빛을 밟으며 간다. 임이네는 못내 머리끄덩이가 뒤로 끌리는 것 같은 심정을 버리지 못한다. '머 거기가 천 리 만 리 밖이라든가? 오고가고 이백릿길 설마한들 다시 못 올라더나?' 거둬들이지 못한, 얼마간의 빚 준 돈 때문에 그렇다. 공노인네 객줏집 앞을 지나간다. '못 받는 돈이사 그렇고, 그년 오지기 당하는 기이 고소해서 내사마 춤이라도 추고 접다. 그만 말라져 죽어부 리라 이년아! 내 낭군 내 자식이 어디로 갈 기든고?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보지? 지 사람 되고 지 자식 될 기든가. 이자는 홍이아배도 아주 끊어부리기로 단을 내린 모앵이니, 흥! 공가놈 늙은 것도 그렇지. 누가 자개 만치 꾀가 없이까바? 사람을 사알살 꼬시더마는 내가 언제 난 여자라고? 그러크름 사람을 괄시하고 구박허더 마는, 나는 내 낭군 내 자식하고 떴다 봐라 하고 떠난다 말이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고, 얼매나 속이 씨언하노.' 그러나 누가 있어 남편을 따라 통포슬로 가겠느냐. 아니면 대신 월선이를 보내고 너는 남아 그 가게를 차지하 겠느냐, 어느편을 택하겠느냐 하고 말한다면 임이네는 과연 어느편을 택했을까? 사실 그의 독백이라는 것도 평소의 야멸찬 말재간에 비하면 맥이 빠져 있고 마음과 말이 따로따로 노는 느낌이 적지 않다. 임이네는 앞서가는 용이 뒷모습을 흘낏 쳐다본다. 짐 위에 올려놓은 바가지 두 짝이 조금씩 흔들리고 널찍한 어깨도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두 사내는 말없이 걷는다. 홍이도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걷고 있다. '저놈의 흑덩어리는 와 달고 가는 거지?' 춤을 추고 싶다 하지만 역시 기분이 안 좋은 거다. 주갑이를 빌어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며칠을 있으면서 임이네는 주갑에게 여간 거만했던 것이 아니다. 얼빠진 못난 사내로 치부했으며, 때문에 날품을 팔아 밥값을 냈어도 심드렁하게 굴었고 용이는 모르는 그 돈이 제 주머니 속에 들어갔고, 주갑이 밥그릇에 밥을 담을 때는 밑빠진 그릇에다 밥을 담듯이 조심조심, 그러고도 주걱 잡은 손은 망설이는 것이었다. 좀더 적게 담을 수는 없 을까 하고, 옛날 윤보 목수를 홀아비에 가난뱅이 무식꾼 쟁이받이 이상으로 생각지 않고 업신여겼듯이. '덩신 같은 년. 지 주제에 장사라고? 내가 있어서 손발이 맞았이니께 그만치라도 돈을 벌었지. 세상에 그런 벅 수가 어디 있노. 돈이 들고나는 것도 모름시로 만판 해봐야 남 좋은 일 시키는 기지 머. 송애 그년의 가시나만 호박구덩이에 굴렀다. 고 가시나아도 약아빠져서 자알 해처묵을 기구마는.' 배가 아프다. 배가 아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월선이 돈을 번 게 아니라 임이네 자신이 돈을 벌었다는 내막은 내막인 채 내버려두고 송애도 생쥐처럼 돈을 물어낼 것이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억울하다.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월선에 대한 미움이 송애에게로 옮겨간다. 철천지 원수같이 미워진다. '발톱만한 제집아년이 간덩이가 부풀게 생겼고나. 고 가시나아 앞길도 뻔하지 뻔해. 시집도 안 갔으믄서, 하기 사 누가 아냐? 객줏집에서 컸으니께 뭇 사나들이 들랑거리는 객줏집이고 보믄 말이 가시나지. 지가 무신, 정차 잘돼바야 기생이고 색주가밖에 더 되랄고?' 미움은 자꾸자꾸 피어오른다. 뭉게구름같이 부풀어오른다. 억울하고 괴씸하다. 신경질이 치밀어서 이고 가는 보통이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어진다. '거기는 장차 젤 좋은 자리가 된답매. 가만 누버서 돈 버는 장소랑이. 국밥집으 아주망이 쇠스라앙으 돈 긁으 거라, 무시기 그런 말들 모두 하지 않겠음?": 새벽바람을 마시며 가는 임이네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온다. 수결을 태산준령을 넘는 듯 거칠어진다. 남편 자식도 갖고, 국밥집도 갖고 월선이는 죽어버리고 미운 사람들도 다 죽어버리고 그래주었으면 임이네는 오죽이나 좋았을까. 참으로 욕망 무한, 슬픔없는 목숨이며 비렁땅 꽃 한 포기 새 한 마리 없는 황막한 인생이 다. 시내를 막 벗어나려 했을 때다. 용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그러기로 미리 약속이나 돼 있었던 것처럼 주갑 이도 걸음을 딱 멈추기는 멈췄으되 용이를 쳐다보지는 못하고 목을 뽑으며 보이지 않는 강변 쪽을 바라본다. 용이는 길 한켠에 가서 다리를 꺾고 비스듬히 드러눕듯 몸을 넘어뜨리며 어깨에 걸린 새끼멜빵을 벗긴다. 짐 을 내려놓고 일어선 용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주서방." "야." 주갑의 음성은 계집아이처럼 가냘프고 기어든다. "여기서 좀 기다리주겄소?" "그, 그렇기 허겄소!" 기어들던 목소리가 용수철 모양으로 튀어오른다. "홍아." "야." "니 날 따라가자." "어디로요?" "암말 말고, 가자." 평생 없었던 일이다. 용이는 아들의 손목을 잡았다. 뒤늦게 무엇인가를 깨달은 암이네 "홍이 데꼬, 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임자는 여기 주서방하고 기다리는 기이 좋겄고." "안 하랄요! 나도 따라갈랍니다. 내가 가서 안 될 곳이 어디 있소." "따라가야?" 되묻는데 무시무시한 분위기다. 움직이는 않는데도 전신을 후들후들 떠는 것만 같다. 임이네는 물러선다. "나, 나, 내가 가믄 우떨 기라고, 우, 우째서 그라요." "너 신상을 생각해서 그런다." "그기이 무신 말이지요?" "두말 마라. 홍이하고 월선이를 데리고 내 종적을 감추어부리믄 니는 혼자 살겄제?" "야? 뭐라꼬요?" "그렇기 안 되기를 원하거든 여기 기다리고 있어라. 가자, 홍아." "아부지." "와야?" "이 짐은 우짜고요?" "이 짐은 짊어지고 가자. 그거는 니 소용품이니께ㅣ." 홍이는 매인 양새끼처럼 아비를 따라간다. "홍아-" 뒤에서 울부짖는다. "옴마아-" 홍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아비를 따라 걷는다. "홍아-공부 잘혀어! 총 들고 말 타게 말이여-" 주갑의 고함이 귀청을 친다. 국밥집에 갔을 때 월선이는 없었다. 송애가 자다 일어나며 어디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홍이 니는 여기 있거라." 홍이를 가겟방에 남겨두고 용이는 어둠을 헤치듯 뛰어간다. 그는 움막으로 가는 것이다. 걷다가 뛰다가 미치광이 같다. 움막의 거적을 걷고 들어서며 "월선아!" 씽 하니 되돌아오는 정적과 어둠, "월선아!" 캄캄한 움막 안을 더듬는다. 미친 듯이 해맨다. "워, 월선아-" 손 끝에 닿는 굳어진 몸뚱이, 낚아채고 뜨겁게 포옹하고 흐느껴 운다. "지가 여기 있는 거를 우떻게 알았소?" 여자의 목소리는 싸늘하다. "니는 내가 떠나는 거를 우찌 알았노." "꿈을 꾸었소." 낮게 웃는다. "호랭이 새끼는 산으로 가고 오리 새끼는 물로 간다 하더마요." "그거는, 그거는 다아 우리하고 상관이 없는 얘기다." 여자 얼굴에 입맞춤하며 뜨거운 눈물로 얼굴을 적신다. "이리 될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소. 지가 들어서 당신 신세를 궂힌 것도 다 알고 있소. 버리고 가, 가소." "..." 비바람이었다. 뇌성벽력이었다. 휩쓸고 가는 사내의 정열, 그것은 경건한 의식이다. 참으로 여러 해 만에. 밀려 갔던 조수가 천천히 다시 되돌아온다. 조용하게 슬프게. 물 부피는 불어나서 방천벽에 금을 그으며 조용하게 슬프게 올라온다. 충만하고 넘친다. "가게에 홍이 데리다놨다." "야?" "심이 들겄지마는 공부시키고 니가 키워라." "참말이요?" "음." "지 엄마가," "데리고 가믄 아이는 버린다. 내가 그곳에 가기는 가되 가을 한철 있일 기고 곧 산으로 갈 기구마." "산에는 머 할라꼬 가시오." "벌목꾼들 벌이가 좋다더마. 겨울 보내고 산에서 내리올 적에는 이리로 오께. 여름 한철은 가서 농사지어주고 내 맘 알겄나?" "야." 월선이는 사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운다. "니가 알았으믄 됐다. 우리가 더 이상 머를 바라겄노. 나를 위해 모질게 맘을 묵을라 캤더마는... 결국에는 이 렇기밖에 못 살 긴갑다. 그라고 내 간 뒤 객줏집 어른께 내가 그 동안 저지른 일들, 내 잘못을 잘 알고 있더라 고, 무신 면목이 있어 인사를 하겄느냐고 니가 잘 말해라." 용이로서는 긴 얘기였다. 꽤 곰상스럽게 타이르는 투이기도 했다. 움막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새어든다. 역 두 쪽에서 말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개울가에 짐을 풀어놓고 점심 요기를 끝낸 일행은 각기 제마음대로 시선을 던지고 있다가 용이는 담배를 붙여 물었고 임이네는 개울물에 얼굴을 씻기 시작한다. 팡파짐한 엉덩이는 아직 탄력에 넘쳐 있다. 서른아홉, 황혼 은 바라보는 무르익은 나이. 흐르는 시냇물같이 활기차고, 자식과 이별하고 온 슬픔이 없을 리 없겠는데 시냇 물같이 바위벽같이 여자의 모습은 자연 그것으로만 보인다. 머리에 쓴 수건을 벗겨 상기된 얼굴을 닦는다. 그 러자 주갑이 훌쩍 일어서며 밥을 다 비워버린 양푼을 절렁 든다. 개울 옆에 가서 물을 퍼서 마신다. 입가에 흐 르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고 별안간 양푼을 치켜들고 주먹으로 치기 시작한다. 쇠붙이 아닌 주먹에서 뭐 그 리 희한한 소리가 날 리도 없겠는데 그러나 장단이 썩 잘 맞고 곁들여서 그 일품의 노래를 뽑으니 임이네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용이는 변화 없는 표정이 한참을 혼자서 신을 내던 주갑이는 "형씨." "와요." "나 이래봬도 어떤 여자한테 옷 한 불 얻어입은 일이 있어지라우." "흠." "아마 그 여자가 나헌티 반혀서 그랬나비여." "눈이 멀었든 게지." "눈이 멀었든 게 아녀. 귀가 밟았다 그거여." "흠." "그게 또 기생이다 그 말인디, 하기사 기생 퇴물이었제. 주막서 술쪽 든 신세가 되얐으니 기생 퇴물이라, 아 그 기생 퇴물이 귀가 밝더라 그 말이요." "하든 가락이 있어 그랬겄지." "하모니라우. 바로 그거여. 그래 뭐래는고 허니, 아깝도다. 명창이 됐을 것인디 이 손이 이리 험허게 되얐으니 만고풍상 다 겪었소잉. 함시로 내 손을, 이 내 손을 어루만지더라 그거여." "흠." 용이는 귀담아 듣고 있지도 않는 듯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만 피운다. "그리하여, 며칠을 공짜로 주막에서 묵음시로 가는세 베옷 한 불을 얻어입었지라우." "함께 살지 그랬소?" "한데 그게..." 주갑이는 장난스럽게 웃는다. "반해서 옷까지 해주었으믄...." 용이의 말은 어디까지나 건성이다. "귀만 밝아서는 안 되겠더라 그거요?" 느닷없이 임이네가 말참견이다. 용이 눈에 조소가 지나간다. 새벽길에서 홍아-하며 울부짖던 소리가 멀리서 차츰차츰 꼬리를 감추듯 용이 마음에서 아픔이 사라진다. "홍가분해졌다." "야?" 주갑이 되물었으나 용이는 대꾸 없이 담배통을 돌에 대고 뚜드린다. "아짐씨, 귀만 밝아서는 안 되겄다 그게 아니랑께요." 주갑은 임이네에게 말머리를 돌린다. "쪼그랑할매더라 그 말이어라우." 용이 웃는다. 화가 나서 웃고 서글퍼서 웃고 자기 자신이 옹졸해서 웃고 주갑이 부러워서 웃고, 임이네는 샐쭉 해진다. 방심한 사이, 뭔지 주갑이한테 말려든 기분이 들었다. 성난 임이네 얼굴에 곁눈질을 하며 주갑은 다시 양푼을 치기 시작한다. "양푼 쭈그러지겄소!..." 임이네가 팩 소리를 지른다. 10장 풍운 출발시, 꽃잎같이 팔랑거리며 날아내리던 눈은 훈춘이 가까워지면서 치열하게 내려 쏟아지기 시작했다. 숱한 눈송이들은 날아내리기가 바쁘게 세찬 바람에 휩쓸리어 눈보라가 되었고 다시 바람은 눈을 몰고 산간 구릉 쪽 으로 달려가서 눈무덤을 만들어놓고 했다. 눈이 쌓일 새가 없는 깡깡 얼어붙은 길을 마차는 달리는 것이다. 날 아내리고 날아오르면서 광무하고 광한하는 눈, 울부짖는 바람소리, 포장을 찢어발기듯 지나가는 바람 소리, 지 각은 지축에 밀착하며 숨을 죽이고. 앞이 가려 보이지 않는 길을 숙련된 말은 규칙적인 발굽 소리를 내며 말 방울을 울리며 달리고 있다. 북방 이곳에서는 흔하게 불어대는 강풍인 것이다. 마차에 흔들리면서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권필응은 궐련을 피워물고 있었다. 바싹하게 메마른 얼굴, 메마른 입술, 이따금 희미하게 내리깔고 있던 눈시울을 들어 올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권필응의 눈은 무섭게 빛났다. 생각을 한곳으로 집중시킬 때 튀는 광채다. 권필응의 옆자리에, 조는 것도 아닌 성싶은데 눈을 감은 채 마차에 흔들리고 있는 사람은 이동진, 고국을 떠나 열두 성상을 보낸 이동진의 모습에는 황혼이 깃들었다. 삼심대 좋은 시절을 만주 벌판 사진과 풍설에 흩날려 버리고 오십 고개에 다 다른 마흔아홉 나이보다 늙었다. 이들 두 사람은 만주 군벌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 는 모 중국인과 접촉하기 위해 갈림으로 가는 길이다. 도중 용정서 며칠 머물면서 길림과의 연락을 다시 면밀 하게 취한 뒤 떠나게 된다. '치수 그자가 땅밑에서 지금 내 심중을 안다면? 아마 나를 타살이라도 하려 들 게야." 눈을 감은 채 씁쓰레한 웃음이 떠오른다. 피곤하여 의식이 차츰 희미해지면서부터 이동진은 용정에 있는 서희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서희로부터, 그의 부친이요. 자신과의 막역지우인 최치수를 연상한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겠는데 그보다 이동진을 되도록 피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피하려 한다고 피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상념 속에 기어드는 상현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초췌한 얼굴, 노한 눈동자, 지난 열므 연주에 나타났 던 아들과의 대면을 되새겨본다는 것은 역시 우울하다. 몇 날을 자지 않고 먹지 않고 해매어온 것 같은 상현은 냉수 한 그릇을 마신 뒤 비로소 눈은 분노에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인사를 하고 그간의 경위를 대강 설명하고 나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그 어미에 그 딸, 사람이 그렇게도 치사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몹시 자제를 하는 것 같았으나 감정은 터져나오고 말았다. "치사스럽다!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시치미를 떼었다. 이놈아, 무슨 소릴 하는게냐! 남들은 집도 버리고 가조도 버리고 희망도 기약도 없는 세월을 오로지 내 겨레를 위해 뛰는데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사내자식이 이 무슨 추태냐! 하며 소리치고 싶었으나. "네. 후안무치로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명색이 사대부집 규수가 하인놈하고 혼인이라뇨? 그 것도 처녀의 몸으로 그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까?" "..." "물론 저는 아버님을 뵙기 위해 이곳에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촤참판네 서희아가씨와 함께 온 것도 사실이며 그런 만큼 책임을 느낍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마는 아버님께서도 돌아가신 그 어른과의 우의를 생각하 시면 외면하실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버님께서 이번 일은 기필코 막으셔야 합니다. 정녕코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모두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반대의 절실한 이유는 등뒤에 감추어버리고 자못 정당한 척, 그 구차스러 움을 돌아볼 만한 여유가 없다. 그뿐이랴, 길상과 서희와의 혼인을 빠개버릴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 어떤 비열 한 수단도 서슴없이, 죄책감 없이 감행할 상현의 정신 상태였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네?" "어째 너는 한 나라의 공주가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기를 자청했던고사 생각은 못하느냐?" 이동진은 껄걸 소리내어 웃었지만 웃음 소리는 어색했다. "치사스럽기는커녕 서희는 총명하게 판단하고 결정한 거 아니냐?" "뭐라 말씀하십니까? 아버님!" "여러 가지 좋은 자질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다 메어치고 하찮은 권위에 매달렸던 최치수 그 사람이 생각나는 군. 그 사람에게 있어선 아마 자기 스스로를 얽어매려는 서글픈 방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불행한 친 구였지." 상현에게 의미심장한, 어버이로서의 충고였다. "네에. 아버님! 저도 그 하찮은 권위를 아직은 선봉하고 있습니다." 강한 몸짓으로 반항하며 상현은 내뱉었다. "내 말을 마저 들어. 하여간에 서희는 그 아버지의 딸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한데 지금은 윤 씨부인 그 어른의 손녀였었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 듯 드는구먼. 상현이 너의 생각이 잘못이니라. 서희는 비록 계집아이지만 사내보다 담력이 있어 눈도 매눈이야. 아마 연해주 간도 바닥을 다 찾아도 길상이만한 신랑감은 없을걸? 뿐이겠느냐? 하동 땅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만한 배필을 구하긴 힘들 게야. 길상이는 서희한테 아주 썩 걸맞는 짝이니라." 이동진은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아들 심장에 꽂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피는 흘릴 만큼 흘러야 종기는 치유되는 법이다. 감정 같아서는 지지리 못났다 싶어 울화통이 치밀고 한편으로는 부자간의 정, 나이도 어린데 싶어 심약해지기도 한다. 검붉게 타고 있던 상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진다. "아버님!" "상현이 넌 걱정 안 해도 돼. 너는 너의 앞일만 생각하면 되는 게야. 여자란 아무라 잘났다 하더라도 웬만한 남자라면 만나서 얽매여 살게 마련이요 사내는 그렇지 않아. 언제든지 혼자 서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내가 전에 말했듯이 고향에 가서 사돈댁과 상의하여 일본에 가도록 해라. 그리고 잘 판단하여 너는 조선에 남 아 있어라. 밖에서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라 안에 뿌리를 박는 것도 사실은 시급한 일이지. 알겠느냐, 내 말? 그리고 일러두고 싶은 말은, 어떤 경우에도 내 겨레를 배신하지 말아라. 그것은 너의 죽임이다. 그 이상의 행동에 대해선 너의 판단에 맡긴다." 상현은 이동진의 말을 조금도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패배감과 증오심에서 이글이글 타는 눈이 마치 원수 를 보듯 아버지를 쏘아본다. "아닙니다! 저는 그놈을 찔러 죽이려 했습니다!" "못난 놈!" 상현으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경련 같은 웃음을 떠올린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아버님께서도 시류에 따르시겠다 그 말씀이군요." 이동진은 머리끝까지 치미는 노여움을 꾹 참는다. "시류라니?" "시류를,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글쎄다. 네가 아비인 나한테 따지고 드는 것도 시류의 일종 아니겠느냐? 그것을 허용하는 내 자신을 생각해 보건대 나 역시 시류에 따르고 있다 할 수 있겠지. 하나 예배당에 나가서 찬송가는 아니불렀느니라. 하하핫..." 어거지로 웃는 웃음 소리는 초라하고 오히려 아들보다 이동진을 왜소한, 자신도 패기로 잃어버린 지극히 평범 한 남자로 전락시키는 것이었다. "네. 그러실 테지요." 하다가 갑자기 상현은 목을 "꺾어버리듯 고개를 숙인다.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는 것이다. 비로소 상현은 자 기 마음속에 난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절감한다. 서희 마음 한구석에 자기를 향한 한줄기 사모의 정은 있으려니 하던 희망까지 완전히 난도질당한 것을 깨닫는다. 과연 길상은 자기 적수인가? 아버지의 말이 아니 었더라도 그 얄량스런 가문 하나 뽑아버린다면 길상은 이, 나 상현을 훨씬 능가하는 인물이 아니냐, 죽이고 싶 다. 함께 달라붙어서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싶다.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서희는 벼랑에 혼자 피어 있어 라! "머리가,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습니다. 아버님!" 상현은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불민한 놈!' 말발굽 소리, 말방울 소리, 거슬러 올라가는 바람 소리-희미해져가던 의식 속에 기어들어왔던 갖가지 상념이 현실에 밝혀서 넘어진다. 바람 소리 말방울 소리 말발굽 소리 갖가지 상념이 마차바퀴에 깔려서 시체처럼 길 바닥에 뻗는다. 과연 이번 길림행은 성공할 것인가. 이동진과 권필응이 훈춘 역두에 내렸을 때 눈발은 다소 기세를 죽이는 듯 싶었다. 아직은 해지기 전이지만, 물 론 해는 구름 속에 가리어 훈춘 시내는 온통 서릿빛 나는 회색 안개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곳 에 유할 집이 있어서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거리를 두터운 외투깃을 세우며 서두르지 않고 두 사람은 걷는 다. 역두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이라지만 시내와는 반대쪽 방향이었으므로 얼마지 않아 시야에 들판이 펼쳐졌 다. 희뜩희뜩 내리는 눈발 사이로 나직한 구릉 기슭에 몸을 비벼대듯, 농가들이 눈에 띄었고 전봇대같이 밋밋 한 겨울 남두도 몇 그루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이들이 다다른 곳은 몇 동의 농가가 산재해 있는 중심부쯤 퉁거운 말뚝 위에, 그러니까 지상으로부터 두서너 자쯤 올려서 바닥을 만든 만주식 곡창과 건조장, 그리고 가축사 등이 늘비하게 줄지어 있는 옆이다. 그곳에서 벽돌로 두텁게 벽을 쌓고 곧은 사선을 이룬 지붕 에 기와를 올린 견고한 집 한 동을 바라볼 수 있었다. 벽면마다 잘게 엮은 창살의 창문이 있고 집의 외양도 순전한 만주식이다. 두 사람이 미처 출입문으로 다가서기도 전에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권선생님 오십니까?" 솜바지에 기장이 긴 솜저고리를 입었고 털이 달린 피모를 깊게 뒤집어쓴 삼십 안팎의 사나이, 행동거지가 조 심스럽다.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데 조금도 비굴하지 않고 어딘지 세련된 것 같아 남의 집 하인살 이로는 생각할 수 없는데, 그러나 그는 이 집의 머슴 진서방이었다. "오영감께서는 계시느냐?" "안 계십니다. 시내 노대인댁에 잔치가 있어서 가셨는데 하마 돌아오실 겁니다." 진서방은 튼튼한 판자에 무늬를 아로새긴 출입문 쪽으로 앞서가서 "마님, 연추서 손님이 오셨습ㄴ이다." 하고는 문을 열어준다. "손님이라구?" 드높고 탄력 있는 여자 목청이 밖에까지 울려나왔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은 목소리와는 딴판으로 머리칼이 희 끗희끗한 초로의 여자다. 몸집이 비대하고 어딘지 희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의 차람새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리 모양은 쪽머리요 다섯 돈쭝 가량의 작은 금비녀를 찌르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것은 번들거리는 까만 공 단에 섬세한 매듭단추를 달고 소매가 넓은 청국 여인의 복장이었다. 털신발을 신은 발은 여자치고 굉장히 큰 발이었다. "그간 안녕하시었습니까." 권필응이 인사를 하자 "아이구 권선생이시구먼. 이게 얼마 만이오? 그건 그렇고 다른 한 분은? 오오라! 이선생 아니시오? 이동진 선 생." "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이를 어쩌나. 나도 이제 망령이 드는가 보지요? 이선생을 못 알아보다니, 이런 결례가 어디 있겠소? 용서하시 오. 자아, 두 분 어서 들어오세요." 수다스럽지만 정다운 늙은 여자다. "하룻밤 신셀 지고 가야겠습니다." 권필응과 이동진은 모자를 벗고 눈을 털며 들어선다. 방아느이 훈훈한 열기가 얼굴을 친다. "그래 그곳은 다 편안들 하시던가요?" "별일 없지요." 권필응이 대꾸한다. "하여간에 반갑군요. 하룻밤이 아니라 열흘, 한 달이면 싫어하겠소오? 이제는 겨울로 접어들었으니 할 일 없는 밤이 좀 길우? 영감이 돌아오시면 입이 함박같이 벌어지겠소. 그래 우리 아이들은 다 잘 있다 하던가요?" 난롯가에 여덟모 난 나무의자를 잡아당겨 손짓으로 앉을 것을 권하며 늙은 여자는 말했다. 두 사내는 의자에 걸터앉아 난로에 언손을 쬐며, 권필응이 대꾸했다. "아주머니께서 아시는 이상으로 우린들 알겠습니까?" "하긴 그래요. 연추는 지척이지만 배태로, 뭐라 하던가? 그곳이야 수 천 리, 좀 멀어야지." 아들 둘을 페테르스부르크까지 유학 보낸 늙은 여자는 이들로부터 아무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도 실 망하는 빛 없이 매우 원기왕성하고 유쾌해 보인다. 남자같이 소탈하기도 하다. "그러면 우선 차 먼저 넣어드리지." 늙은 여자가 방에서 나간 뒤 두 사람은 망연한 눈길을, 석탄이 타고 있는 벽면 난로에 던지고 앉아 있다. 방안 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여덟모의 탁자 두 개가 놓여 있고 탁자를 축소시킨 것 같은 모양의 의자가 네댓 개, 벽 면 쪽에는 침상 같은 걸상이 있었다. 걸상 위에는 아라사 제품인 듯 선명한 붉은 빛깔의 푹신한 모포가 깔려 있었다. 묵직한 선인도의 분채대병이 하나 사방 탁자에 놓였고 벽에 박아넣은 세 폭의 미인도 하며 천장에서 늘어진 사각등 등등, 방안의 퍽으나 호사스런 중국풍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 집 당주는 청국에 귀화하여 현재 지방주의을 지내고 있는 오득술이라는 사람이다. 그의 마누라는 방금 방 에서 나간 늙은 여잔데 성씨는 문씨며 올해 나이 쉰아홉, 영감보다 세 살이 연장이니 오영감의 금년 나이는 쉰여섯인 셈이다. 어디서 연유되어 퍼진 말인지, 문씨는 옛날 어느 감영의 행수기생이었다고 한다. 오십이 되 면서부터 몸이 붇기 시작해 지금은 얼굴도 호박덩이같이 커졌으나 사십대까진 발이 큰 것이 험이었지 미인이 었다는 얘기다. 오득술도 영감이라는 존칭으로 떠받쳐주곤 있지만 전신이 아전이라는 것이고 그러니까 젊었을 시절, 남녀는 눈이 맞았고 사또가 총애하는 문씨이고 보면 결국 도피 행각 끝에 국경을 넘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과거지사를 들추어 흉허물 볼 사람도 없겠으나 이제는 일장의 춘몽일 뿐 하여간에 오늘날 적지 않은 토 지와 재물을 가지고 훈춘에 정착하게 된 오영감 내외는 지방 주인으로서 동포들의 편리를 충실히 봐주는 면에 서도 그러했고 독립지사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왔으며 내외가 다 손님들을 좋아하는 성품 때문에 신망이 있 었다. 오늘의 터전을 잡기까지 다소의 불미스런 일들이 없었다 할 수는 없지만 제 나라 국적을 버리고 청국에 귀화한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향리로서의 경험을 사고무친한 남의 땅에서 생존경쟁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 뻔하다. 물정 모르는 선비들과 다르고 우직한 농사꾼과도 다른, 약삭빠르고 요령 있는 처신, 체면 같은 것 생각할 필요가 없는 셈속, 그래서 개간한 땅에 처음 심은 것이 앵속이었다. 당시에는 앵속 재배가 불 법화되지 않았었고 아편 기호의 악습이 날로 만연되는 사태에 공급이 딸리는 형편이어서 오영감은 상당한 이 득을 보았다. 연추에 있는 최재형의 지우를 얻어서 아라사군에 소규모나 군납을 하여 재산을 불리기도 했고, 이런 역정으로 보아서 오영감이 고결한 인품을 가졌다 할 수 없고 학식이 깊은 것도 아니며 정의감에 불타는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묘한 것은 귀화를 했던 탓인지 조선의 사회와 깊은 유대를 가지려는 노력에는 집요한 것이 있었다. 거의 비굴할 정도로 우국지사들의 발길이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귀화했다는 그 자체에 대한 심한 열등의식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심리를 짓궂은 사람들이 더러 이용하기도 했 고 괴롭혀주기도 했다. 이들 부부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최재형의 주선으로 페테르스부르크에 유학간 두 아들 은 부모를 일찍 여윈 오영감 동생의 자식들이었다. 뜨거운 중국차를 받쳐들고 들어온 문씨는 "또 쏟아지는구먼요." 하며 찻잔을 건네준다. 받으면서 이동진이 되묻는다. "눈이 또 쏟아집니까." "네. 펑펑 쏟아지고 있구먼요." 권필응은 찻잔을 손아귀에 꽉 쥐듯하며 차를 마신다. "내일 못 떠나면 야단인데." 이동진이 근심스럽게 뇌인다. "여기 오는 눈이야 뭐, 날이 새면 바람이 말짱 쓸어갈 건데 무슨 걱정이오? 우리 영감한테 붙잡혀 못 떠난다 면 혹 모를까, 눈에 붙잡힐 일은 없을 게요." 한 모금 차를 마시고 나서 이동진이 묻는다. "여긴 첫눈이 언제 왔습니까." "아 글쎄, 시월 초순에 벌써 왔다오. 그래서 가을같이 땜에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몰라요." "그럼 소를 빌려야 할 사람들은 가을갈이도 못했겠군요." "아마, 못한 사람이 숱할걸요." "명년 봄엔 농부들 골이 빠지겠구먼요." "이 차중에 해빙기라도 늦어진다면 큰일이오. 파종이 더욱더 늦어질 거 아니에요? 겨울이 긴 이고장에선 농사 철이 번개 같다니까요. 그래도 우리 조선 살마들끼리야," 하는데 별안간 "아주머니가 어디 조선 사람이오?" 말이 통 없던 권필응이 장난을 걸 듯 말해놓고 피식 웃는다. "아아니," 항의를 하려다 말고 문씨는 까르르 웃는다. 이동진도 웃는다. "하긴 우리도 되놈 다 되긴 했지요." "다 된 게 뭡니까? 아주 돼버렸지요. 그런데 조선 사람들끼리말고 되놈들끼린 어떻게 하든가요?" "권선생도 무척이나 짓궂은 데가 있구먼." 한바탕 웃고 나서 문씨는 "청인들 밑에서 소작하는 조선 사람들 거 말도 마시오. 소작만 하는게 아니라 반머슴이지. 걸핏하면 불러다 부 려먹고 소도 그냥 빌려주는 줄 아시오? 그나마 빌려와선 별안간 추위는 닥치고 땅은 얼고 참말이지 눈물 나 서, 빚이나 져보시오? 딸이고 마누라 할것없이 빚 못 갚으면 뺏긴다오." 슬그머니 일어선 권필응은 벽면의 미인도 앞에 서서 그것을 바라본다. "이선생." "말씀하시오." 여섯 살이나 연하이건만 이동진은 정중하게 대한다. "옛날에 말입니다." 권필응은 난롯가로 돌아와 앉는다. "욕심으로 똥창까지 막혀버린 시어머니가 있었더랍니다. 그에겐 며느리가 셋 있었는데 며느리들의 관심사는 무지무지하게 많은 시어머니의 패물이었소." 이동진은 무심상하게 앉아 있고 문씨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나 호기심에 차서 권필응을 쳐다본다. "드디어 시어머니는 병이 들었고 정말 똥창이 막혀서 똥을 못 누게 되었더랍니다. 헌데 어떻게 했는고 하니, 큰며느리가 손가락으로 똥을 후벼냈더라 그겁니다. 똥이 아니라 그건 시어머니의 패물이었으니까요. 오오 내 효성스런 며늘아기야 내 패물은 모두 너에게 주리니, 그 말이 나올 것을 믿었던 게지요. 자아, 그런데 속이 탄 사람을 둘째며느리였소. 어떻게 어떻게 해서 큰며느리가 뒷간으로 쫓아간 새 드디어 둘째며느리는 손가락으로 똥을 후변애는 영광을 입었던 거요. 셋째며느리는 어떻게 했는고 하니 밖에 나와서 엉엉 울었더랍니다." 문씨가 한마디 디밀었다. "인심이 서글퍼서 울었구먼." "아니지요. 그 귀하고 귀한 황금의 똥을 도저히 만져볼 기회가 없어진 때문이지요." 이동진은 빙그레 웃고 문씨는 게집아이처럼 캑캑거리며 웃다가 "그, 그래서 어찌 되었지요?" "뭐, 말씀입니까?" "아 그 패물 말이오." "그건 모릅니다." 권필응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간도 땅에는 우리 조선 사람이 청인들보다 네 배 넘게 살고 있지요?" "그렇게 될 게요." "땅은 겨우 산간 언덕바지에 청인들의 반 정도... 왜 그럴까요? 아주머니." "권선생도, 권선생이나 아실 일이지 이 늙은 여자가 어찌 알겟소." 이동진은 혼자 빙그레 웃는다. 별안간 추위는 닥치고 땅은 얼고 참말이지 눈물 나서, 하던 문씨 말에 대한 권 필응의 비애는 우회하다가 왜 그럴까요? 아주머니로 맺어진 것이다. 저녁을 끝낸 뒤 잡담들을 하고 있을 즈음 오영감은 손님 한 사람을 데리고 귀가했다. 떠들썩한 오영감의 목소 리가 문 밖에서 들렸지만 소피라도 보러 갔었는지, "아이구 이거 어쩐 일이시오!" 먼저 들어온 손님은 회색이 만면해져서 권피응과 이동진에게 소리쳤다. 권필응 연배쯤 됐을까? 싱겁게 키가 큰 것 같고 턱이 짧다. 어쩌다 눈에 띄는 수염 몇 오라기, 조그마한 눈이 만만치가 않다. "그간 안녕들 하시었소?" 두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를 나눈다. "하하핫... 마침 잘되얐군그랴. 내 뭐라든가? 함께 가자 할 때는 뭔가 맘에 씌어 그러는 게고, 거 보아. 날 따라 왔었기 때문에 귀한 손님을 만나게 된 거 아냐?" 들어서면서 오영감은 너털웃음이다. 양털을 속에 받친 외투를 벗어 걸고 털모자도 벗어버린 오영감의 머리는 다행히 변발은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과 매한가지로 하이칼러머리였으나 입은 것은 회색 비단 다브잔스에 곱게 누비고 전을 두른 마꿸을 겹쳐 입고 있어다. 턱밑의 수염도 두 치쯤 되겠고. "아무튼, 잘 오시었소. 반가운 손님이 한꺼번에, 모두들 앉으시오." "여전하십니다." 이동진이 자리에 앉으며 웃는다. "아암요. 여전하다마다요. 아직은 밤을 새워 술 마실 자신 있소이다. 이보게 허군, 자네도 앉게나." 자기 수하사람처럼 허군이라 불린 허묵이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그는 오영감에게 깍듯이 공손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오영감 역시 호칭이 만만했을 뿐 태도는 대등한 것이었다. 이윽고 술자리가 베풀어졌다. 문씨도 영 감 못지않게 기분이 좋아서 술 시중을 핑계삼아 방안을 들락거리며 말 한마디라도 귀담아 듣고 싶어했고 자신 도 말참견을 하고 싶어했고 오영감은 또 그러는 마누라를 나무라거나 쫓아내려 하지 않는다. 술이 얼근해지자 술맛 떨어지게 기왕이면 늙은 기생말고 젊은 기생 불러들이라 하며 버릇없이, 주정 비슷하게 허묵이 이죽거렸 지만 늙은 내외는 그런 일에 이력이 난 듯 기분 상해하는 흔적이 없다. 주연이 무르익어 사내들끼리 시국으로 얘기가 들어가자 문씨는 하품을 깨물게 되고 손님들 술심부름을 하녀에 게 밀어버리게 되고 마작판이 벌어지기는 틀렸고 밤은 저문다. 문씨는 슬며시 침실로 사라지고 만다. "풍지박산이라 풍지박산, 춘추전국시대는 유도 아니라니, 바야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온 게요." 오영감이 신발함이 나서 지껄인다. "군웅할거하라고 누가 내버려둔답니까? 양놈 왜놈들 발목때기를 누가 묶어놨다 하든가요?" 수전증이 있는지 손에 든 술잔의 술을 엎지르며 허묵이 뇌까린다. 권필응은 이동진에게 술잔을 건네주며 "내 보기는 태평성세만 같소. 해가 지면 해가 또 뜨고," 허묵의 재빠른 시선이, 그러나 미처 권필응의 표정을 포착하기도 전에 상대편 왼팔에 꽉 몰려든다. 무서운 인 력으로 허묵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당황한다. 권필응은 눈을 내리깐 채,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슬그머 니 허묵의 파들거리는 촉수를 놔준다. '무서운 놈이다.!' 허묵은 허둥지둥 입속에 술을 털어넣는다. '살갗의 구멍 하나하나를 곧추세우고 있었구나. 수풀 속에 웅크린 맹수 터럭같이 말이다. 마치 흡반처럼 주변 의 안팎을 모조리 흡수한다. 저놈의 살갗은 어떤 자리 어떤 군중 속에서도 적과 동지를 가려낼 것이다. 시종 눈을 내리깔고 있구나. 저놈의 귀는 무엇을 듣고 있는고? 필경 멀리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리로부터 위험과 안 전을 가려내고 있겠지.' 허묵은 권필응에게 술잔을 쑥 내민다. "권형, 내 술잔 받으시오." "네." 철철 넘치게 술을 붓는다. 수전증 때문이 아니다. 이동진과 오영감의 얘기가 어울리고 있다. 이동진의 큼직큼 직한 체구에 비하여 권필응은 초라하다. 얼굴도 그렇다. 미남은 아니지만 호남, 얼굴이 훤한 이동진에 비하면 권필응은 강마르고 소소하고, 투박스런 곳이 없다. 학자풍의 흰 수염을 흩날리며 너그럽고 유연했던 그의 부친 운헌성생과도 딴판이다. 한데도 왜 권필응 편에 빛이 날까? 허묵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동진은 서너 번 만난 일이 있고 권필응은 이번이 두 번째다. 술자리에 마주앉기는 처음이었고. '이동진이 저 사람 정도면은... 다분히 호방하고 야망도 있는 것 같고 반역적 기질... 폭도 넓고, 사내장부로서 저만하면, 그러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없단 말이야. 어딘지 성글단 말이야. 민첩하고 치밀한 수하 몇을 거 느린다면 그런 대로 두령감이긴 하지. 한데 두 사람을 함께 두고 보니 어째서 이동진 저 사람의 빛이 죽을까? 도대체 권가 저자의 빛은 어디서 오는 겔까? 그 비밀은 무엇일까? 허묵은 거만한 사내였다. 마음속으로 좀처럼 남에게 승복 아니하는 사내였다. "권형. 자아 또 술잔 받으시오." "네." 또 다시 철철 넘치게 술을 붓는다. 그렇게 대화 없이 잔을 주고 받고 하는 동안 이동진과 오영감은 여전히 얘 기를 계속하고 있다. '분명 이자는 지도자다운 꼴은 아닌데... 어둠과 침묵 속에 묻힌 인물, 그러나 혼자서도 무슨 일을 해치울 것 같다. 기적을 이룰 것 같다.' "권형!" "네, 말슴하시오." "이선생은 크다만 광주리 같소. 권형은 놋쇠 주발 같구요." "그래요? 당신은 간옹 같구려." 허묵은 꿈적하며 놀란다. "과찬 마시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아주 썩 기분좋게 들었소." "만주 벌판에 제국 하나 설립하시오." 허묵은 전신을 흔들어대며 큰 소리로 웃는다. "자아, 주발이고 나발이고간에 잔이나 받으시오. 투전판을 기웃기웃하는 그 따위 눈빛도 거두시고," 네가 부어서 처마셔라, 하듯 술잔을 건네준 뒤 술병을 거칠게 밀어붙인다. 허묵은 손가락 다섯 개를 머리칼 속 에 쑤셔넣고 긁적긁적 긁어대다가 술을 부어 마신다. 그리고 나서 슬며시 도망을 치듯 오영감을 끌어당겨서 그들 대화 안으로 숨어들어버린다. "무창을 점거했다 할 것 같으면 따닥따닥 붙어 있는 한구나 한양이야 저절로 그저 먹은 거나 다름이 없는 거 구, 한마디로 말할 것 같으면 앞으로 점령 지구를 지키는 것은 혁명군의 군자금 조달에 달려 있다. 그거 아니 겠어?" "그건 재론할 필요가 없는 게요. 다른 성들이 낮잠이라도 처자빠져 자고 있다면 모를까, 벌집을 쑤셔놓은 듯 각 성마다 아우성인데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뭐 권군이 번갯불이랍디까? 군자금 따윈 지금 문제가 안 돼 요. 내 얘기는 임시 아군도둑 자리에 모셔 앉혀진 그 얼간이 같은 여원홍 그 인물에 대해서," "허허 이 사람, 자네도 거 개떡 같은 말을 하네그랴. 도독 자리 아니라 설령 황제 자리라 하더라도 임시변통인 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 형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논바닥에서 허수아빌 쑥 뽑아다 앉혀놔도 개탄할 것 한푼 없네. 게다가 내 듣기론 그 사람 혁명 당한 사람은 아니더란만 사람이 어질고 덕망도 있다 하더구먼." "덕망이라구요? 하하핫... 핫핫,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도독으로 추대할려고 혁명군 병사들이 찾아갔을 때 어떻 게 한 줄 아시오? 그 병신이 저 죽이러 온 줄 알고서 비명을 지르며 집안에서 마구 도망질을 했답니다." "허허 그거 다 상관없대두. 아 허수아빌 쑥 뽑아와 앉혀놔도, 하기야 사태가 수습되기까지 사실은 허수아빌수 록 더 좋다 그거 아니겠어?" "허수아비한테 칼을 쥐여줘 보슈? 허수아비로 그칠 성싶소? 굼벵이도 궁글 재주 있답니다." 건성으로 하는 허묵의 말에 오영감은 그것도 모르고 열을 올린다. 하기는 오영감의 말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 니다. 중국인 사회에 지기도 많았고 수시로 묵고 가는 독립지사들, 자연 들은 풍월이 있는 데다 그 나름의 판 단도 꽤 실질적인 것이었다. 언제 그랬는지 이동진은 침상 같은 걸상에 기사 쭉 뻗어 있었다. 코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권필응은 계속하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여간에 앞으로 원세개가 어떻게 나오느냐, 그게 볼 만한 일일 게야. 뭐니뭐니해도 실상 원세개 향배에 따라 사태는 결정되는 거 아니겠어?" "배신자 원세개 말이오? 네에, 무술전병때처럼 말이지요?" "암, 암, 그렇지. 한데 말씀이야. 그때보다 원세개로선 놀아보기가 훨씬 더 좋게 되었다 그거거든." "그럴까요?" 허묵은 비웃는다. "서태후 없는 청나라 조정은 원세개한테 죽어라 매달릴 게고 혁명당 쪽에선 또 결사적 추파를 보낼 거구." "그렇담 밖에 나가 있는 손문 선생 그 양반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복장이 바싹바싹 타겠구먼." "물론이지. 말해 뭘 하누. 설핏 잘못되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놈이 먹는 꼴이 될 게야." "손문인들 곰은 아니지요. 그 사람도 돈 먹는 중국놈의 한 사람이오." "그거야 어찌 되었든 중국놈한테 돈 뺏기지 않으려면 곰 쪽에 무진장 군자금이,"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탕이 장사군이라 할 수 없군요. 군자금, 군자금, 군자금 혼자서 자금성내로 걸어 들어간답디까?" "허허 그놈의 말버릇." 입씨름이 장장 밤 두시까지 계속된다. 시월에 일어난, 그러니까 신해혁명에 관한 얘긴데 좀처럼 끝이 날 것 같 지 않다. 얘기는 사천의 폭동이 혁명군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로 옮겨간다. 애초 철도 국유를 둘러싸고 지식 인 민중들 사이에 권리 회수운동이 활발하던 차, 철도 국유는 한갓 애매한 구실이요 내막은 국고의 궁핍을 모 면키 위해 막대한 외국 차관을 끌어들이려는 수단이라 하여 특히 이해관계가 밀접한 사천성에서 대대적 폭동 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두고 오영감과 허묵은 실랑이질이다. 혁명군 쪽에서 계획한 일이다. 10월 19일 조서에 도 혁명당이 국가 안녕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밀모한 것이라 했다. d니다, 오히려 관련이 없기 때문에 혁명당 에 뒤집어씌우려 했다. 그러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끌고 간 단방을 왜 죽였느냐? 군대 속에 혁명당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 아니다, 오기로 돼 있던 은 오만 냥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급료를 못받은 병사 들 불만에서 저질러진 일이다. 그가 살해된 다음날 온 오만 냥이 도착했는데 하루 사이가 단방에겐 비운었고 혁명군에겐 행운이었다, 등등... 끝이 없다. 권필응은 취한 사람 같지 않았다. 일체 대화에 끼여들지 않고 술만 마셨는데도 그의 등뼈는 곧았고 한 방울 술이 술잔에서 넘쳐흐르지 않았다. 새벽 세시가 지나면서 결국은 오 영감이 나가떨어졌다. 허묵은 회롱희롱하며 몸을 가누지 못한다. 그러나 그도 정신은 멀쩡했다. "여보시오, 권형!" 허묵은 갑자기 권필응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왜 그러시오?" "당신 벙어리 대회장에 시합하러 왔소?" "..." "뭐라 말 좀 해얄 거 아니오!" "..." "권형. 좀 물어봅시다! 강유위가 잘났소, 손문이 잘났소!" "그건 알아 뭘 하려오?" "강유위의 『대동사회』를 볼 것 같으면, 일! 전세계는 하나의 총정부를 두고오 약간의 구역으로 난눈다. 이! 총정부 및 구정부는 모두 민선에 의한다. 삼! 무가족, 남녀 동서는 일년을 넘지 못하며 시기에 이르면 모름지 기 남에게 넘긴다. 사! 아 그 정도로 하고 그놈의 양귀신에 들린 손문은 무슨 정치 이념을 들고 나왔더라?" "..." "그러면 내 또 묻겠소오. 양계초가 잘났소, 손문이 잘났소?" "모르겠소." "다음은, 다음은 말입니다아, 담사동과 손문은 어떠하오? 무술정변 때 모두가 다 달아는 형세에서 홀로 남아 말하기를 중국 변법을 위해 피 흘리는자, 청하노니 사동으로부터 시작될 것을 ... 그러고 죽었는데 어떻소! 권 형! 당신은 조선의 담사동이 되겠다 그거요? 말하시오." "나 그쪽 일은 잘 모르오." 허묵은 캑캑거리며 웃는다. 한참을 캑캑거리며 웃다가, "눈 감고 아옹이네." "사탕발림이지." "해서, 만주 벌판에 제국 하나 설립하라 했겄다? 그래 내가 보좌에 앉으면 권형은 재상 되려오?" "이놈아!" 권필응 입에서 무서운 노성이 터졌다. 그러나 이내 목소리는 낮아졌다. "마주 벌판의 들쥐가 되겠다. 어쩔 테냐." "하하아아핫핫. 하하아하아핫..." 자리에서 일어선 권필응은 탁자 다리를 한 발로 밀어붙인다. 덜덜 소리를 내며 탁자는 밀려간다.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 독립지사연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애국애족하는 풍월객이 있고, 이건 또 뭐야? 혁명투 사냐?" 코를 고는 이동진, 나가떨어진 오영감을 함께 싸잡아서 욕설이다. "야! 이놈아! 강유위가 너 할애비냐? 양계초가 너 애비란 말이냐?" 허묵은 잛은 턱을 흔들며 캑캑캑 웃고 권필응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그새 눈은 멎었고 구름도 날아가고 없는 하늘에 별이 몹시 가깝다. 주기가 한꺼번에 엄습해온다. 멀리서 닭이 홰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쇠죽을 끓이러 나온 진서방이 땅바닥에 주질러앚아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권필응을 보자 다가온다. "권선생님." "응." "술이 과하셨군요." "아니다. 밤하늘이 얼마나 좋으냐?" "눈이 그쳐서 길 떠나시기 마침 다행이군요. 날씨도 좀 풀리는 것 같구요." 11장 신발이란 발에맞아야 길상은 마차를 빌려 타고 가자 했으나 이동진은 걸어가자고 했다. 날씨는 맑았다. 바람은 일었지만 이 고장으 로선 아직 모진 추위는 아니다. 이동진이 용정에 온 지 이틀째, 권필응과 함께 묵고 있었으므로 어제 잠깐 들 러 서희를 보고 간 뒤 오늘이 두 번짼데 "김훈장을 잠시 찾아뵈야겠다. 길상이 함께 가주겠나?" 해서 두 사람은 집을 나섰던 것이다. 시내를 지나는 동안 어느쪽에서도 말이 없었다. 서로가 다 할 얘기가 있 었을 터인데, 연추로 보낸 길상의 편지 건에 대해서 한마디쯤 말이 있을 법한데 건드리지 않는다. 복잡한 심회 로 두 사람이 걷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역시 뭔가 모를 벽이 있다. 아들 상현에게는 용정 바닥을 다 찾아도 길상이만한 신랑감은 없을 것이라 단언한 이동진, 막상 본인을 대하고 보니 옛일이 생각난다. 사랑 뜨락에서 장작 한아름을 안고 오던 소년. 통인감이라 했던 자신의 말이 생각난다. 만석꾼 최참판댁 사라엥서 통인감이라 했던 소년이 오늘날 서희 신랑감이 될 줄이야. 상현의 심정과 일맥 통하는 감정이 이동진에게는 괴롭다. 괴롭 기는 길상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괴롭다기보다 주제넘는 짓을 했었구나, 후회가 되는 것이다. 서희에게선 그것 을 못 느꼈는데 이동진에게는 양반님네들 알아서 할 일인데 네가 뭐 한다고 남의 제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 는가, 뚜렷한 간격이다. 평소 이동진의 인격을 존중해온 터인데도 불구하고. 시내를 벗어났다. 겨울의 들판은 쓸쓸하다. 겨울과 밀접한 북쪽고장이기 때문에 더욱 쓸쓸하다. 두 사람이 어 깨를 나란히하고 거닐면서 각기 다른 처지였던 옛날, 그 남쪽의 고향을 생각하기 때문에 북방의 이 겨울 풍경 이 한결 더 생소하고 황막했을까. "농가라 했던가?" 이동진이 물었다. "네." "노인이 적적하시겠구먼." "그러실 테지요." "농가라면... 식구는 많은가?" "노부인하고 며느님,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큰아이는 연추에 있는 삼촌을 따라갔다 하더군요." "노부인이라구? 그럼 그냥 농사꾼은 아니란 말이지?" "네 의병장 하다 왜 헌병한테 잡혀 총살을 당한, 박 , 박재수라... 이름은 잘 기억할 수 없군요." "맞어. 박재수, 그런분이 계셨지." "바로 그분의 가족이라는 말을 훈장 어른께 들었습니다." "그래?" 이동진은 더 이상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심중에 충격은 다소 받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묘하구먼.' 박재수의 동생 박재연을 안다. 연령의 층이 상당하여 사석에선 별로 만난 일이 없지만. 우연이라 생각한 것은 오는 도중 해삼위에서 들은 얘기 때문이다. 박재연이 어떤 괴한의 습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얘기였다. 괴한이란 필시 밀정일 것이며, 밀정일진대 거물도아닌 박재연을 살해코자 연해주까지 침입하여 끈덕지게 노렸 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 노린 이유는 무엇이며, 만일 밀정이 아니라면 사원으로 볼 수밖에 없겠는데 남에 게 원한 살 그런 위인은 아니라는, 대강 그런 얘기였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다 하기는 했지만 그 렇다손치더라도 지금 찾아가는 가족들에게는 소식을 알려야 할 것인지 이동진은 망설인다. "그런데 용이 그 사람은 통포슬로 갔다며?" "네." "가족들을 다 데리고 갔나?" "그런 셈이지요." 길상은 애매하게 대답한다. 이동진은 임이네나 월선이, 그리고 최참판 댁과 얽힌 사정은 잘 모른다. 용이는 어 릴 적에 치수를 따라 다녔으므로 아는 터이지만 하동 읍내에서 평사리 마을의 일을 속속들이 알 리 없고 최치 수 살해 사건이 난 것은 고향을 떠난 후였으니까. "이 댁입니다." 길상이 초가 앞에 서며 말했다. 이동진은 또 한번 망설인다. '관두지. 모르는 편이 아는 것보다 마음 편할게 아닌가. 노모가 계시다고 했는데...' "허, 참, 이, 이거 이럴 수가 있나. 이공." 김훈장은 버선발로 뛰어내리다시피 이동진 손을 덥석 잡으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다. "많이 늙으셨구먼요.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날씨가 춥소이다. 자 방으로 들어가셔서, 온 도무지 목이 매어서." 방안으로 들어간 이동진을 아랫목으로 밀어앚히듯 하며 김훈장은 연신 코를 들이마신다. "고맙소이다. 고맙소. 이 늙은 것을 잊지 않고 찾아주시니, 국사에 바쁘실 텐데 말씀이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늙으면 할 수 없는가 보오. 요즈막에는 고향이 눈앞에 어른거려 견딜 수 없소. 꼬장꼬장하던 내 성미가 ... 이 제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만 하고, 이공, 서희 그 아일 만나보시었소?" "네. 잠깐 동안 보았습니다." "그 아이, 아주 못쓰게 됐소. 사대부집 규수가 시정배로 떨어졌다 그 말이오? 이미 이공께서도 섭섭한 일을 당 하셔서 아실 터이지만," 이동진을 만나 반갑고 추위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던 답답증, 두가지가 함께 몰려 김훈장을 흥분시켰던 것이 다. 흥분은 요즈막의 그의 병이기도 했었다. 체통을 아주 잃어버렸다 할 만큼 서희에 대한 험담을 못해 기를 쓴다. "철없는 아일 어쩌겠습니까? 김생원께서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그, 그야 주체스런 명을 그 아이 덕분에 이어나가는 처지고 보면, 말 못하지요. 꿀먹은 벙어리 같이 말 못하 지요. 장사를 하건 친일을 하건... 그 아인 나를 이곳에다, 용정서 뚝 떨어진 이런 외진 곳에다 귀양을 보낸 거 란 말씀이오. 봄 여름이면 또 모르겠는데 늙은 몸이 눈 오고 바람 부는 겨울을, 한두 걸음도 아니요 어딜 나가 겠소? 속절없는 갇힌 몸이오. 하니 서희 그 아이가 내 하는 소리를 듣기 싫다 그거겠는데,"하다가가 김훈장은 불안스럽게 길상의 눈치를 본다. 다른 때처럼 서회를 변호하고 나서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걸리는 모양 이다. 길상은 한곳에 시선을 모르고 돌부처같이 앉아 있었다. '이 양반이 노망기도 좀 있는가 본데, 이래가지고는 인적 없는 절도에 귀양 온 거나 다름없기 하지, 이상해지 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훈춘의 오득술 내외 생각이 난다. 손님만 보면 기갈 든 사람같이 붙잡는 그들 심리 속에 깊이 뿌리박힌 외로 움을 생각해본다. 내외가 함께, 그리고 유복한 살림이건만, 귀화하여 보장되고 약속받은 터전이건만 이민족 속 의 우리, 이민족 속의 나, 그 의식이 그들만의 것은 아니다. 흘러온 수만 이곳 조선인들의 사무친 슬픔이다. 늙 어 쇠잔해졌고 단신의 김훈장의 경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모시올 같은 수염을 흔들며 치매 같은 꼴을 하 고 앉아 있는 김훈장이 미구에 찾아올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고국 땅을 다시 밟을 희망이 없는 늙은이, 담뱃대를 물고 큰기침을 하며 ??아을길을 거닐어볼 꿈조차 꾸어볼 수 없는 늙은이, 십 년 이십년 후의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십 년을 보내고 나면 독립이 될까? 기약이 없다. 영영, 어쩌면 영원히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자기 자신은 한낱 어릿광대인 지도 모른다. 어쩌면 최치수 그는 꿈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던 영악하고 강인한 인간이었는지 모른다. 사방 팔방 이 절망의 두터운 벽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길림으로 간다지만 아홉 마리 소 중의 터럭 하나만큼이나 도움이 될는지, 제 집에 불이 났는데 남의 집 불을 꺼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선생, 그물 한 코 ??였어보는 셈 칩시다. 한 코라도 부지런히 엮어나가면 고기 잡는 구물이 될 겁니다. 안 그렇소?'하고 웃던 권필응의 얼굴이 생각난다. "한데 이공."?? 이동진은 아차 싶어서 김훈장을 쳐다본다. 주절대는 김훈장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들자니까 큰자제가 향리로 돌아갔다구요?" "네." "그거 잘못하시었고, 나는 내 아들 한경이를 못 데리고 온 것이 한이 되나 말입니다." 이동진은 꾀시시 웃는다. 조상 숭배의 사상이 사무쳐 있는 김훈장을 알기 때문이다. "선영은 어쩌시구요." "선영... 그러니 내가," 자기 가슴에 주먹질을 할 듯하더니 그러지를 못하고 살가죽이 늘어난 눈만 꿈벅거린다. "기왕 나는 그러하나 이공께서는 향리에 선영 지킬 자제가 또 있지 않소." "그애는 양자 갔으니까요." "그는... 그렇고 지금 청나라에선 야단이라면서요?" "글쎄올시다." 또 그 얘긴가 싶어 이동진은 지겹다 생각한다. 정작 청국 사람 그네들은 잠잠한데 왜 조선인들이 이 야단인고 싶기도 하다. "조정을 뒤엎고 임금을 쫓아내려 한다면서요?" "여진족이 삼백 년 가까이 해먹었느니 한족이 가만 있겠습니까." "하긴 그렇소. 오랑캐들이 오랫동안 누리긴 했지요." "실은." 이동진의 어세??가 달라졌다. "오늘 여기 찾아온 것은 훈장어른을 뵙고 의논도 할 겸." "무슨 일이신데?" 김훈장은 꾸부렸던 등을 꼿꼿이 일으켜 세운다. 겨우 선비로서의 체통을 자각한 것 같다. "여기 본인이 앉아 있고 해서 다소 거북하기 합니다만 갈길이 바쁘고 떠나고 나면 좀체 오기가 어려울 것 같 아 여쭙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겠소. 길상과 서희의 혼인 문제입니다." "뭐라 하시었소?" 김훈장의 눈이 등잔같이 커다래지는데 길상은 실감을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도 분명 길상과 서희의 혼인이란 말을 들었다. 그러나 상대들이 바로 두 사람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왜 그런고 하니 연추에 적에 보낸 편지 속에 자신도 혼인을 해야 할 처지고 보니 애기씨의 혼인을 먼저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을 비쳤기 때 문이다. "아아니 누구와 누가 혼인을 한다는 말씀이오." "지난 여름에 상현이가 연추, 소생한테 와서 하는 얘기가 있었소이다. 길상이는 모르는 일이겠습니다만 서희가 길상이하고 혼인할 것을 원한다는 얘기였었소." "저런 해괴망칙한!" 김훈장이 소리지르는 것과 동시 길상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진다. "허허허. 훈장 어른께서는 어찌 그리 고루하시오. 그러면 서희가 처녀 몸으로 늙어야 한다 그 말씀이시오?" 이동진은 저도 모르게 화를 낸다. 김훈장에게 화를 낸다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길상이 등석 한 것을 깨달은 김훈장의 허둥지둥 장님이 더듬듯이 담뱃대를 찾는다. 빈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다시 허둥지둥 뽑아서 담배를 넣고 성냥을 그어대고 연기를 뿜어내면서 눈을 감는다. "양편에 다 부모가 없는 만큼 훈장 어른께서는 길상의 아버님이 되신 셈치시고 소생은 서희 아비 된 셈쳐서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 옳을 줄 생각합니다." "... " "지금 이 자리에선 이 일 이외는 일체 거론될 필요가 없고, " "그것은 안 되는 얘깁니다!" 총알같이 길상의 음성이 날아 들어왔다. 그의 손등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언제 그리 했는지 소등을 물어 뜯은 것이다.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방안, 김훈장 이동진 어느 편도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 다. "왜? 자네도 훈장 어른과 같이 고독한 생각이냐?" "아닙니다. 저는 이미 언약을 한 여자가 있습니다. 애기씨도 알고 계시지오." 이상한 일이었다. 이동진의 어께가 축 쳐진다. 실망이기보다 안도의 분위기다. 김훈장은 붕어 물 먹듯 부지런 히 담배를 피워댄다. "신발이란," 담뱃대를 빨고 "발에 맞아야 하고," 담뱃대를 빨고 "사람의 짝도 푼수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담뱃대를 빨고 "이공의 말씀은 없었던 것으로 하는 편이 상책인 성싶소.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요." "... " "서희 그 아이가 실리에 너무 눈이 어두워서,"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다. 길상의 턱밑에 심한 경련이 인다. "길상이 장가간들 설마하니 서희 일을 몰라라 하겠소? 약은 쥐가 밤눈이 어둡다는 말이 있긴 있지요." 문틈 사이로 겨울바람이 스며드는데 길상의 이마에 땀이 배어 난다. 용정으로 돌아온 이동진은 서희 집에 들르지 않고 곧장 자기 숙소로 돌아갔으며 길상은 변두리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술판 위에 앉아 길상은 똬리를 틀고 대가리만 치켜든 뱀의 형상을 하고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것 이었다. '뱀아 뱀아. 만인간한테 저주를 받은 뱀아. 나는 슬픈 뱀이고 너도 슬픈 뱀이다. 난들 뱀이 되고 싶어 되었겠 나. 넌들 뱀이 되고 싶어 되었겠나. 왜 뱀이 싫은가. 뱀이기 때문이다. 왜 싫은가. 상놈이기 때문이다. 어느 뼈 다귀의 손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노래이며 신음이며 울음이며 그칠 수 없는 슬픔의 불길. 길상은 밤새도록 마셨다. 내장이 타고 불이 붙는 황주 를 마셨다. 새벽녘에 핏발 같은 눈알을 하고서 길상은 느닷없이 월선옥에 들어왔다. "이 새북에 길상이 웬일고?" 가게 바닥에 퍼질러않아 파를 다듬고 있던 월선이 의아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밤새 술을 했더니...해장국 먹으러 왔지요." 월선이 핏빛 같은 길상의 눈을 힐끔 쳐다본다. "뭣 땜에 밤새워서 술을 했노." 가겟방 등불이 김에 서려 뿌옇다. 송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밥쌀을 씻고 있었다. 머슴아이 봉구는 국솥에 불 을 지피고 있었다. 쌉싸래하고 구수한 국 냄새가 풍겨온다. 홍이만 자고 있는 모양이다. "국이 닳지 않아서 맛이 없일 긴데 조금만 기다리겠나?" "그러지요." "봉구야, 부지런히 불 때라." "옛꼬망." 가겟방에 걸터앉은 길상은 궐련을 꺼내 붙여문다. "아지매." "와." "와...와?" 월선의 음성을 흉내내본다. "참, 와 숭내를 내제?" "인심이 무서워서요." "새삼스럽게," 월선은 다시 핏빛 도는 길상의 눈을 쳐다본다. 길상을 웃고 있었다. "손등은 와 그랬노. 피딱지가 앉았네." "야." "묻는데 야?" "야." "참말로 이상타. 뜬금없이 새북에 와가지고 와 그러제? 무신 일이 있었나야? 술 묵고 쌈이라도 했나?" "아무 일도 없었소. 용이아제 소식은 듣습니까?" "으음, 며칠 전에 펜지가 왔다. 인편에 붙이왔더마." 파리한 얼굴이 미소에 허물어진다. 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 "산에 들어갑시로 보낸 펜진데 뵈주까?" "야." 치마르 털고 일어서서 가겟방에 잇달린 골방으로 들어간 월선은 꼬기꼬기 접은 편지를 가지고 나왔다. 침을 묻혀가며 꼭꼭 눌러 쓴 연필자국, 짙은 빛과 연한 빛깔의 서툰 글자가 비틀배틀 연이어진 편지는 흥이에미 보 아라에서 시작된다. '날씨가 치버지는데 흥이랑 잘 있는지 모르겄소. 훈장어른, 애기씨, 길상이 객줏집 모도 다 잘 기시는지 모르 겄소. 여기서는 영팔이, 주갑이, 함께 산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용정 가는 사램이 있어서 일자 적어 보내니 그 리 아소-' "아주방이. 국으 가지왔습매다." 송애는 어대 갔는지 그새 없어졌다. 편지를 접에 봉투 속에 넣어 두고 길상은 뜨거운 국물을 마신다. 속이 따 갑다. 쓰라린다. 한데 어떤 쾌감이 있다. 아픔에서 오는 쾌감이다. 더 아파라, 더! 용솟음 치고 싶어진다. 씨름 마당에서 지르던 함성 같은 것이 목구멍에서 꾸럭꾸럭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신발이란...발에 맞아야 하고...사람의 짝도 푼수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훈장 어른 말씀이 옳습니다. 옳다마다 요. 야합이 아닌다음에야 그런 일 있을 수 없지요...서희 그 아이가 실리에 너무 눈이 어두워서...네에.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옳은 말씀이오. 옳다마다요.' 함성 같은 것이 목구멍에서 꾸럭꾸럭 소리를 내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서운 심연을 본 어제 충걱이 가슴 바닥에서 아직 울렁거리고 잇다. 두 어깨가 축 처지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던 이동진의 얼굴이 크게 커다랗게 눈앞에서 확대되어간다. 가슴 바닥에서 우렁거리고 있는 것은 실상 충격이기보다 두려움이다. 오싹오 싹해니는 공포감이다. 도둑이 칼을 들고 덤비는 것보다 더 큰 무서움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미움도 사랑 도 없는 비정 그것이 아닐까. 칼 든 모둑 한 사람마저 없는 오직 한 사람이 남은 세상을 상상해보라. 하늘과 산이 무서울 것이며 들판과 시냇물도 무서울 것이다. 비정이기 때문이다. 하나 남은 사람은 차츰 들판을, 산을 닮아가고 사람이 아니게 되어갈 것이다. 사람이 사람 이니게 되어가는 공포. 처음, 서희가 길상이하고 혼일할 것을 원하다는 얘기였었소 하고 이동진이 꺼내었을 때는 충격이었다. 평소 서희의 마음을 짐작했으면서도 전 혀 처음 듣는 놀라움이었다. 밤길에서 허공을 디딜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않는, 그리고 격력해지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손등을 물어뜯은 것이다. "아지매." "와." "아지매는 무당 딸이고," 순간 월선의 얼굴빛이 싹 변한다. '아아 저 눈이 무서워하고 있구나.' "나는 낳아서 산속에 버려진 백정 아들인지 광대 아들인지," "와 그런 소리를 하노." 넞운 움송아더, 머움울 ㄶㅎ우묜소 어퍼허눈 뉸아 길상을 쳐다본다. '내가 여길 왜 왔을까? 옳지. 수없이 겪었을, 그 무서움이 새겨진 월선아재매 얼굴이 보고 싶어 왔을 게야.' 김훈장의 사람됨이 잔인해서도 아니다. 고의로 한 말도 아니다. 사람됨이 잔인했거나 고의로 한 짓이라면 미워 해버리면 그만이다. 등을 돌려버리면 그만이다. 김훈장은 오히려 착한 편이다. 정직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리사 욕도 별반 없는 사람이다. 고 지식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르로서는 당연하다. 팔이 어깻죽지에 붙어 있듯이, 다리가 엉덩이 쪽에 붙어 있듯이 추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의 말이다. 다만 김훈장은 길상을 한 그 루 나무고 본 것이다. 한덩이 길가에 굴러 있는 돌로 본 것이다. 그렇 때는 그 자신도 나무였다. 돌어었다. 결 코 반대 그 자체가 부당했다는 것은 아니다. 부당했던들 어떠랴. 아픔이 있고 미움이 있고 실낱 같은 괴로움이 라도 있었더라면. 몇백 년의 세월이, 몇백 년의 제도가 빛어낸 메울 수 없는 심연, 이켠과 저켠이 결코 합칠 수 없는 단층, 왜 그것을 여지껏 못 깨달았는가. 아니 아니 못깨달았을 리가 있나. 길상은 온종일 창고 속에서 장부 정리를 하고 재고 조사를 했다. 세시가 지난 뒤 응철이를 집으로 쫓아버리고 창고방에, 퀴퀴한 냄새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괴로운 잠에 빠져들어갔다. 허고에 떨어지는 꿈을 연 달아 꾼다. 쫓기는가 하면 쫓고 벼랑이나 하면 벌판. 쫓는 사람 쫓기는 사람은 서희였다가 상현으로 변하기도 했고, 김형-김형-상현이 쫓아오면서 불렀다. 김형! 김형! 멀리서 들려오던 목청이 아주 가까이서 울린다. "허허어. 이개가지고는 업어가도 모르겠군." 송장환의 음성이다. "어," 벌떡 일어나 앉는다. 송장환의 불그레한 얼굴이, 난처해하는 표정이다. 깨우느라고 애를 먹은 눈치다. "듣자니까 밤에는 집에도 안들어왔다는데 글쎄, 어디서 무엇을 했기에 이리 정신을 못 차리는 게요?" 길상은 잠이 덜 깨어 입맛을 다신다. "행실이 나빠서 영 못쓰겠구먼." "행실이 좋은 사람, 그래 무슨 일로 날 찾는 게지요?" "무슨 일이나마나, 응철이가 여기 계시자기에 찾아왔는데 그냥 가버리려 했소." "이별주를 하자 그 말이구먼. 내일 떠나는 게요?" "이별주는 이별주로되 나는 얼마간 여기서 지체될 것 같고 두 양반이 내일 떠나시는데 집안이 시끄러워서 말 입니다. " "밖에서 한턱 하시겠다 그 말씀이오?" "그렇소. 김형도 참석해주시오." "가만히 계시오. 그러면은 어느쪽에서 주연을 배풀어야 하는지 좀 생각해봅시다. 우리 댁 상전께서도 그냥 있 을 일이 못 되거든요." "강가 그 주점이 좋겠구먼." "나도 그 생각이오." 벌써 밖은 어둑어둑했다. 강가 주점에서 길상과 이동진이 또다시 대면했을 때 길상은 냉정했다. 이동진도 전날모다 차가운 표정이었다. 이동진의 차가운 표정은 위장이었다. 그도 그렇 것이 길상과 해어져 숙소로 돌아온 이동진은 "아뿔사!"하고 실수를 깨달은 것이다. 전후 사정을 보아 길상의 거절은 당연했다. 밸이 빠진 사내새끼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분위가 속에서 혼인 제의를 받아들일 그 따위 위인이었더라면 이동진이 무엇 때문에 그런 역할 을 맡아 나왔을 것인가.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럴 것을 예상했다. 할 수도 있다. 무의식의 방해 공작이 었다란 말인가. 김훈장에게 가지 않았어도 얘기는 할 수 있었다. 이동진은 참으로 착잡한 기분이었다. 주연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길상이 모르는 사십대 사내가 세 사람 이동진과 귄필응을 따라왔 던 것이다. 간단한 이름 소개 정도로 인사를 끝낸 뒤 연령의 층이 있어서 비교적 조심스레 술을 마시며 오가 는 대화도 나직했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다. "김군." 뜻밖에 귄필응이 길상을 불렀다. 초대면인데, 길상이 당황하여 대답한다. "네." "밖이 좀 수상하군." 아주 들릴락말락 낮은 음성이다. 순간 길상은 그들이 밀담을 위해 자리를 비워 달라는 뜻으로 들었다. 길상은 가만히 일어섰다. 방문을 밀고 한 발 내딛는 순간 누군가가 얼른 등을 돌리면서 급한 걸음으로, 다음은 뛸 기 세다. 길상이 바싹 다가갔다. 뛴다. 길상의 팔이 먼저였다. 상대편 팔을 겨드랑에 꼭 끼고 마치 다정한 친구처 럼 주점을 나선 길상은 "윤선생." "..." "어찌 된 일이시오?" "나, 저어, 저어 여기 술 마시러 왔다가," "혼자서?" "흐, 혼자서," 길상은 그의 팔을 낀 채 강가 쪽을 향해 걷는다. 아이가 어른 팔에 매달려 걷고 있는 것 같다. "춥죠?" "... " "춥지 않소?" 길상은 말하면서 자기 내부 속에 숨어 있는 잔인성을 강하게 느낀다. 물론 강바람음 맵다. 그러나 윤이명이 떠 는 것은 추위 탓만은 아니다. 주점서 한참 떨어진 모래밭까지 온 길성은 비로소 팔을 풀어준다. 풀어주는 순간 윤이병은 뛴다. 뛴다는 것은 자신의 죄질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뛰어도 소용없을 것이 뻔한데 그러나 그것은 죄를 범한 자 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이새끼!" 목덜미를 거머잡고, 민들레 씨앗같이 가벼운 몸뚱이를 빙그르르 돌려세우는 것과 동시 한손이 연상을 내리치 고 있었다. 연거푸 친다. 치고 또 친다. 길상은 죽여버릴까 싶었다. 죽일 수도 있는 일이 었다. 전혀 반항을 못 하기 때문에 죽일 수 없었다. 뻗어버린 윤이명을 일으켜세운 길상은 "내일 일찍 용정을 떠나라. 만일에, 만일에 말이다. 되지 못한 수를 쓴다면 그땐 넌 죽이겠다. 자아 가라!" 획 떠밀어버린다. 쓰러진다. 비실비실 일어선 윤이병을 비실비실 몇 걸을을 가다가 마친 것처럼 달아난다. 울 음을 터뜨리며 날아 난다. 달아나는 뒷보습을, 달밤에 바닷가를 기어다니는 게같이 달아나는 윤이병을 바라보고 서 있던 길상은 손등에 통증을 느끼낟. 손등을 싸잡으며 모래밭에 털썩 주질러 앉는다. "그 양반 귀신이구먼. 허 참." "한 발을 들어서 발끝으로 모래를 거슬러 올리고 날려보내며 "귀신이구먼." 주연 자리에 돌아가기가 싫었다. 울음을 터뜨리며 달아난던 조그마한 사내 윤이병이 미운 것도 아니다. 불쌍한 생각도 없다. 다만 얼어붙어버린 것 같은 겨울밤의 달과 어디든 행구를 챙겨 떠나야 할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만 실감할 뿐이다. 12장 회령 나들이 십이월로 접어들었다. 길상은 길 떠날 채비를 차리고 안에서 기별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집에 살면서 서희 얼굴을 못 본 지 가 보름이 넘는다. 서로간의 용무는 새침이가 왔다갔다하면서 전달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어젯밤 새침이가 와서 하는 말이 "아가씨 몸이 아파 회려아병원에 가신답매." "어디서 아프신데?" "잘으 모르겠소꼬망. 진찰을 받아보잲고 어찌 알겠슴둥?" "그래서?" "무시기, 그렁이 낼일 아침 아기씨랑 함께 가야 한다 하시문서리 채비 채레라 하십매다." 말을 끝내고 홀짝홀짝 뛰는 시눙을 하며 가는 새침이 뒷모습이 묘하게 마음이 걸렸으나. 아파서 병원에 간다 는데 달이 생각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 '어디가 아플까?' 미상불 걱정스런 일이긴 하다. 웬만한 명이면 한양 몇 첩 달여 먹고 나면 그만인데, 비교적 서희는 건강했었 다. 길성은 걱정을 하면서 한편으론 서희를 보는 것이 불안스럽다. 겁이 나기도 한다. 말이 상전이지 어린날부 터 인라까지 고락을 하께 하면서 서희의 일거수 일투족을 엎에서 지켜보며 지순한 사랑일이라다ㅗ 우러러뵙는 것은 아니요 내려다보녀 어린 누이 같이 응석과 봇된 성미를 허용해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동징을 김훈장 방에서 만난 이후부터 길상은 서희가 두럽다. 이동진은 서희를 만나지 않고 그냥 떠났었지만 서희가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서희의 희망을 거절앴었다는 죄책감에서는 물론 아니다. 무엇을 거절당했으며 무엇을 희망했었는가. 혼인을 거절하고 혼인을 희망했었다. 단순히 그럿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지순한 것을 거 절당한 것은 이 편이며 거절할 것은 그 펼이 아니었던가? 길상읟 ㅜ려움은 서희에 대한 자기 의식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보는데 있었다. 이윽고 새침이가 왔다. 아기씨는 곧 나가게 되어 있으니 먼저 역두에 가서 기다리라는 전갈이다. 역두에는 아침 안개가 차츰 걷혀지고 있었다. 완벽하게 방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입김을 내어붐으면서 우왕좌 왕하고 있었다. 사계절 어느때보다 강물이 얼어붙는 겨울철의 교통이 가장 활발한 만큼 역두는 활기에 찬 느 낀앋. 시가의 절반은 황무지로 만들었던 지난 오월의 무서운 화ㅏ재의 상처도 이제는 말끔하게 가셔진 용정은 바야흐로 육로가 된 두만강을 수없이 달릴 마차에 짐을 가드가득 샐어보내야 하는 관분, 활기에 넘칠 수 밖에 없다. "아니 박서방 아니오?" 방한모에 얼굴이 거의 가려진 키가 작은 사내는 지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회령 가시오?" 입김을 뿜어내며 웃는다. "어제 지게는 지시었소."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할 수 없지 않소?" "그러나 생업이 따로 있는데 지게 질 것까지야," "모두들 생업, 생업 하지만 그거 다 옛날 얘기요. 그렇다고 뭐...음 억을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나는 지게 지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지요." "그건 또 왜 그럴까요." 어차피 서희를 기다리며 서 있는 무료한 시간이다. "그걸 말로 하기는 어렵소. 바로 이 내 심정이니," 박서방은 제 가슴을 두드려 보이며 웃는다. 길상도 함께 웃는다. 길상도 함께 웃는다. "품팔이하면서부터 내 맘이 편해져서, 내 식구들도 따라서 맘이 편해지고, 먹는 거야 죽 한 그릇이면 어때서?" "흠..." "내 성심성의껏 지은 신발이 그냥 몇 푼 돈을 남겨놓고 떠나는 것은 참말로 견딜 수 없는 일이거든. 그나마 누구 손에 고이 간직되는 물건인가요? 아무리 꽃 같고 달덩이 같은 신부 발에 신겨지는 신발일지라도 필경에 는 해어지고 버려지는 게 신발 아니겠소? 그것을 눈이 진무르도록 내 맘을 다해서...서글픈 얘기지. 서글푼 얘 기라...그나마 개명돼가는 세상 아니오?" 새침이를 데리고 서희가 역두에 나타났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망토가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다. 진갈색 빛 망토다. 손에 낀 가죽 장갑도 갈색이다. 머리엔 망토에 달린 모자(후드)를 섰고 투명한 작은 얼굴이 그 속에 있다. 처음 입어본 옷인데 오랫동안 맵시를 익혀버린 듯이 자연스럽고 서희엑;는 썩 잘 어울렸다. '어디가 분명 아프긴 아프신 모양이야.' 길상은 미간을 모으며 유심히 서희를 바라본다. 그가 근심했던 것 같은 불안, 두려움은 일지 않았다. '안색이 좋지 않아.' 여위어서 서희의 눈동자는 커다랗고 한결 짙어진 눈시울은 눈 가장자리에 병적인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엷 고 부드러운 입술도 다소 푸르스럼한 것 같다. 그러나 병적인 음영과 초췌해 보이는 얼굴은 오히려 처연한 아 름다움을 발산한다. 여러 시선이 서희에게 집중된다. 여자, 남자, 어린이, 노인 할것없이 모두 두려운 눈으로 서희를 바라본다. 숨이 막히고 고뇌스러우며 ㄴ탄식하게 되는 아무튼 보는 사람에게 황홀감을 주기보다 괴로 움을 주는 서희의 미모, 묭정 바닥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뿌린 여자이던가. 전설과 같은 얘기돌. 어떻게 하 여 저 흑요석 같은 눈동자의 어린 여자는 어마어마한 그 재산을 삼사 년 동안 쌓아올렸을까. 기적이다. 그 기 적을 상징하는 것이 독특한 그의 용모다. 기품과 요기와 교만과 총명의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여자. 서희의 시선은 일순도 머문곳이 없었다. 길상에게조차 단 일별을 혀용치 않고 마차에 오른다. 털을 마닥에 깐 작은 단 화, 역두에 선 사람들이 마지막 본 것은 서희의 그 귀여운 구둣발이었다. 새침이는 길상에게 접은 모포 한 장과 여행 가방을, 그리고 점심이 들어 있는 봉지 하나를 건네준다. "너는 안 가는 게냐?" 놀라서 길상이 묻는다. "옛꼬망." "아니!" "아기씨가 가자구 앙이 했슴둥." "그럼 시중은 누가 들지?" 당황한다. "귀래가 시중 들면 앙이 되겠슴?" 하고 새침이 실쭉 웃는다. 길상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으나 도리가 없다. 마차에 오를 수밖에 없다. 마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으니 어제 저녁때 홀짝홀짝 뛰는 시눙을 하며 가던 새침의 뒷모습이 묘하게 마음에 걸겨 을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보다 좀더 뚜렷하고 불길한 의홀이 고개를 치켜든다. '왜 새침이를 안 데리고 가실까? 한 발 밖으로 나가실 때도 꼭 새침이를 데리고 갔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정 말로 아픈 걸까? 정말로 안 아프다면 왜? 그는 그렇고 여관에 묵게 될 텐데 시중은 누가 들어주지. 이상한 일 이다. 그렇지만 아프지 않은 것을 아프다 이유가 없니 않은가.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는 걸까,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지. 이우가, 그럴 까닭이 없단 말이야. 역시 어대가 아프신 거야.' 그러나 그것으로 위혹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의혹은 끈덕지게 물고늘어졌다. 길상은 눈을 내리깐다. 가죽장 갑을 긴 속이 거기 무릎 위에 깍지껴져서 놓여 있다. 길상은 새침이가 건네주던 모포를 서희 무릎에 덮어준다. 서희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마차는 츨발했다. 끝없는 방황, 끝없는 여정의 사람들을 싣고 회령이라는 확실한 방향을 정한 마차는 얼어붙은 외줄기 길을 따라 떠난 것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겨울 하늘, 바람은 스산하게 불지만 산천은 얼음덮게를 쓰고 사진 한 틀 없는 괘적한 공기다. 두만강을 그냥 달려갈 마차, 여정을 한결 빨라지겠지. 마차마퀴는 빙판 위에서 매끄럽게 굴러간다. 멀 리 구릉진 곳에 회갈색 수노루 한 마리가 뛰어가는 것을 볼 수 있고 잎 떨어진 백양나무는 연방 마차 창밖에 서 달아난다. 끝없이 끝없이 회백색으로 펼쳐진 벌판, 나직한 구름이 가끔씩 나타났다간 사라진다. 서희는 변함없는 자세, 돌덩이로 굳어버렸는지 고개 한번 돌리려 않는다. 만주 벌펀을 겨울 풍령을 그에게 있 어 무연한 것인가 보다. 그는 오로지 그 자신으리 심중만을 골똘히 들어댜보고 잇는 성싶다. 다만 달물려진 입 매에 어떤 결의가 엿보일 뿐이다. 용정이 멀어지면 질수록 입매를 감도는 결의가 굳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도 대체 서희는 무슨 결의를 하고 죵정을 떠났을까. 여거 시간을 달린 마차는 점심때쯤 해서 신흥평에 당도 했다. 손님들은 전심 요기를 위해 모두 마차에서 내려 주막으로 몰려갔다. 길상은 점심 봉지를 서희에게 내밀었다. 서희는 고개를 한번 저었을 뿐이다. "저는 주막에 가서 먹겠습니다. 점심 드십시오." 서희는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엉거주춤하던 길상을 하는 수 ㅇ벗이 빈 마차 속에 서희 혼자를 남겨두고 나 온다. 밖에 나온 순간이었다.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옥이네였다. 처음 이곳에서 옥이네를 만났던 생각이 난 것이다. 왜 옥이네 생각이 났을까. 옥이네와 마차 속에 앉은 서희 사이에 줄이 쫙 그어진 것 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 여자하고 애기씨가 무슨 상관이지? 무슨 상관아냐 말이다.' 길상은 자기 자신에게 신경질을 낸다. '제에게! 될 대로 되겠지. 내가 무슨 상관이며 그 여자는 또오...그여자가 어떻다는 게지?' 주막에 들어서자마자 길상을 술부터 청했다.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켠다. 속이 얼얼하는 독한 술이다. '내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무슨 상관이냐 말이다!' 실상은 서희를 안중에 두지 않으리가 결심한다. 안중에 두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다. '내가 종놈이야! 내가 빚졌어! 내가 팔려왔어! 내 이두 다리는 최참판네 다리가 아냐!이 내 두 다리는 엄연하 게 분명하게 있었을 성도 낯짝도 모르는 내 부모가 만들어준 내 다리란 말이야! 어디든 내 말대로 갈 수 있단 말이야! 누가 잡아! 누가 잡느냐 말이다! 그만 했으면 응, 그만 해주었으면 땅밑의 윤씨부인께서도 날 의리 없 는 놈이라 하지는 않을걸. 에이잇, 싫다 싫어! 도둑놈들을 위해서 내가 살아? 양반놈들 위해 내가 살아? 난 간 다. 간단 말이야. 흐음, 그 권필응이가 그 사람 근사하더군 그래. 나도 반하긴 반한 모양이야. 송장환만 반한 줄 알았더니, 애기씨? 아니 최서희 이 계집애야!' 길상은 마차가 떠나기 직전까지 주막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술 냄새를 피우며 혼란된 의식을 극복하지도 못 하고 마차에 올랐다. '어떠시오? 애기씨? 길상이 술 처먹은 꼴 보고 역겹지도 않으시오? 도도하고 오만무쌍하고, 내 그 그물에 걸 릴 성싶소? 종신 종놈은 안 될 겝니다. 안 되고말구요! 애기씨 어릴 적에 나무를 깎아서 신랑 신부 양반 상놈 기생에다 종놈, 뜻대로 소원대로 다 만들어드리긴 했습니다만 난 나무토막은아니오! 피가 통하고 썩는 살점을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최서희! 당신하고 꼭같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야합이라면 모르까? 당신 어머니 야합 이나 했었지만 최서희가 그럴 여자요?' 길상은 회령이 가까위질수록 그야말로 지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 마음속으로 광태를 부리고 있는 것이 다. '최서희가 그럴 여자나 말아야! 사모하는 이상현을 불러다놓고 길상이를 서방으로 맞겠다 하며 돌려보낸 그런 최서희가 아닌가 말이다! 한 마디쯤 너 뉘 앞인데 감히 술을 마셨지? 몰상식한 인간 같으니라구, 아니 몰상식 한 종논 같으니라구 하실 만도 한데 말입니다!' 회령에 도착햇다. 길상의 마음속의 광풍은 계속아여 불고 있었다. 옥이네와 서희 사이에 줄이 그어진다. 되풀 이 줄이 그어진다. 무엇 때문이지 분명 하지 않은 줄이 심장을 가로지르면은 냉정해지겨는 노력을 어처구니없 이 뒤엎어버리곤 한다. 길상이 서희를 데리고 한양여관으로 들어섰을 때 여관집 주인 여자ㅢ 눈은 와등잔 같이 벌어졌다. 가짜배기 상아 물부리를 물고 있던 그의 남편도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사환 석이놈의 눈도 크게 벌어졌다. 그들은 무 도 서희에게 눈이 못박힌 듯싶었다. 팜다 못했든지 연관집 주인 여자는 길상에게 바싹 다가섰다. "거 뉘시오?" 귓속말로 물었으나 "방 말입니다. 젤 좋은 방 하나 비워주시고." 여관집 주인 여자의 말은 들은 척 않고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젤 좋은 방이, 글쎄 좋은 방이래야." 여자는 태연하게 서 있는 서희를 훔쳐본다. 아무 표정이 없는 데 질린다. "그리구 심부름할 여자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소." 길상은 여전히 큰소리고 말했다. "별안간 어디서," "없다면 할 수 없지. 아주머니께서 수고 좀 해주시오. 시중 좀 들어주시라 그 말입니다! 말아들으시겠소?" "아아니 대낮부터 주정이신가? 나 귀도 안 먹었는데 왜 이러시까?" 여자는 볼멘소리로 말하기는 했으되 지금껏 이렇게 뼉세게 나오는 길상을 상상해본 일조차 없었기에 밀리는 기색이다. 길상은 무섭게 여자를 쏘아본다. "하여간에 부탁드리는 거니," "네, 네 그러지요." 기세에 눌려버린 여자는 서희를 안내해주고 돌아와 서 있는 길상에게 다시 물었다. "거 뉘시오?" "공주님이시오." "농담이시겠지만, 아닌게아니라 공주님이라 할 만도 하구먼. 내 일찍부터 이 장사 해왔으나 저런 손님 보기는 처음인데?" 감탄해 마지않는다. "그러니 아주머니께서 시중을 잘 들어주시야겠소. 실수가 없도록 해주시오." "네, 네, 알았소이다. 궁금증은 풀어주니 않으면서." "그럼 저는 나갔다 오겠습니다. 절 찾으시거든 복지곡물상에 갔다고만 말씀해주십시오." 길상은 이닐 밤 여관에 돌아가지 않았다. 거는 이를 득득 갈면서 술에 곤죽이 된어 옥이네와 잠자리를 함께했 다. 그리고 조반째쯤 해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저를 찾으시든가요?" "아침에 부르시더구먼. 가보시오." "조반은 드시었소?" "아직 안 드시겠다 하시더구먼." "어제 저녁은요." "조금 드셨소. 도모지 어려워서..." 여자는 악간 눈살을 찌푸린다. 길상은 망연히 서 있었다. "아니, 가보시라니까?" "그러지요. 한데 어는 방이오." "날 따라오우." 길상은 주인 여자를 따라가면서 과나연 서희는 무서운 여자라 생각한다. 낯선 여관에 혼자 내버려두었는데도 아침이 되어 비로소 자기를 찾더라는 여관집 주인 여자의 말이 싱각나서다. "이 방이오." "알았소." 길상은 주인 여자가 가고 난 뒤 발 밑을 한번 내려다보고 나서 "부르셨습니까." "... " 길상은 방물을 뚜드렸다. "들어와."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방문을 열었다. 망안에는 개켜놓은 모포 한장, 여행 가방 하나 그리고 옷걸이에 망토가 늘어져 있을 뿐 자줏빛 치마저고리를 입은 서희는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서 있지만 말고 앉아." 무릎을 꺾고 앉는데 길상에게는 억만년과도 같은 침묵이 흐른다. 입을 떼기론 서희가 먼저였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 " "날 좀 데겨다주어." "병원에 말씀입니까?" "아냐." "... " "그 여자 집에 말이야." "네?" "길상이 살림을 차렸다는 그 여자 집에 날 데려다주어." "뭐라 말씀하셨지요!" "왜? 안 데겨다주겠다 그 말이냐?" "... " "나 그 여잘 한번 만나고 싶어." 길상은 고개를 들고 서희를 쳐다본다. 분에 못이겨 이글이글 타고 있을 줄 생각한 눈은 의뢰로 설움에 가득 차 있다. 그런 서희의 눈은 처음 본다. "애기씨께서 왜 그곳에 가셔야 합니까?" "나도 모르겠다." 서희는 외면을 하고 벽에 축 늘어져 있는 망토자락을 쳐다본다. "안 됩니다! 애기씨가 거기 가실 이유가 없습니다." 거의 비명이다. "이유가 있어." "그래도 안됩니다!" "그래! 그러면 나는 이여관에서 움직이지 않을 테야. 모든 굴욕을 참고 이곳에까지 왔어. 이대로 용정에 돌아 갈 성싶으냐?" "그러면 저는 애기씨한테 하직 인사를 올릴밖에 없겠소." "마음대로 하려무나. 나는 이곳서 뗘ㅓ나지 않을 테니, 그 여잘 보기전에는." 노한 길상의 눈을 똑보라, 쇳덩이같이 받아내는 서희의 눈빛은 아까 그 서러움이 아니었다. 증오와 원망과 용 서하지 않겠다는, 목숨을 내어건 그런 치열한 눈빛이다. 한치의 여유도 없다. 문 밖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조반상 들여도 되겠습니까?" 주연 여자의 들뜬 음성이다. "아니요. 나 조반 아니 하겠소." 서희의 대답이다. 13장 뜨내기꾼 "야, 복애야! 여기 숭늉 한 그릇 다오!" 그릇을 질려놓고 은씨는 계산이 끝난 장부를 포개 얹으며 하던 일을 계속한다. "쌍놈들이 병영인지 뭔지를 짓는다고 날이 날마다 물자가 산더미같이 들어오고 야단법석인데 그 틈새 끼어서 우리네 곡물상들은 같은 말씀 아니오. 아래가지고는, 자아 김씨 담배 태우시오." "동팔은 길상에게 담뱃갑을 내민다. 길상이 담배 한 가치를 뽑아서 주는데 딸아이가 숭늉 대접을 들고 들어왔 다. 체면치레였을것을 이상 냉담하게 물대접을 받아서 벌떡벌떡 들이켠 은씨는 숭늉을 내어주고 그도 담배를 붙여문다. 마고다 입은 양 어께가 으스름 하다. 솜을 두텁게 두어서 그렇지만 한결 몸이 불어난 것같은 느낌이 다. 짤막하고 살빛이 흰 걸굴에 군살이 오른 것을 보더니 "그 상인들 그림자도 볼 수 없는 게 한 달이오. 이래가지고 어디서 해먹겠어요? 밑이 지든 빚이 지든 장사란 물건이 들고나고 들아야 하는 건데... 그 빌어먹을 명영인지 옘병인지는 뭘 하는지 모르겠구먼. 재목상들은 덕 분에 한대목 보는 모양이던데. 자본이 있다면, 글쎄 넉넉한 자본이 있다면 강뚝에다 제재하나 차리를 것도 괜 찮겠지. 원목은 원목대로 사고팔고 기계는 운반을 만들어 팔고 삯돈 받고 나물 켜주기도 하고, 꿩 먹고 알먹는 것 아니겟소? 여거 가지 돌아가는 형편을 가만히 보아하니 장사라는 것도 정미소나 방앗간을 겸해 해야지, 윈 체 곡물이란 뭐뭐라 이렇게 요즘같이 짐발이 묶여서는," 덩치를 보아 듬직한데 은씨는 방정맞게 담뱃재를 털어낸다. 상긋상긋 웃는 것 같은 눈매는 변함이 벗으나 군 살 오른 얼굴에 수심을 띠다 보니 여덟팔자 눔썹이 되고 그것이 또 우는 듯 웃는 듯, 연관이 전만 영 못하다. "불경이 타령의 초장이구먼요." 길상은 은씨 하는 먕을 멀끄러미 쳐다본다. "허허 참 실정 얘길 하는데, 애이 여보시오. 타령의 초장이라니," "그럼 중장이오?" "나이 대접 해주구레. 이래뵈도 내 딸년이 정혼을 햇으니 멀잖아 장인 소릴 들을 텐데 하하핫... 김씨하고 내가 어째서 요즘 이리 됐는지 모르겠소." 은씨는 빤히 펴다보는 것 같은 길상의 눈길이 거북산 몽양이다. 실상 길상은 은씨에게 감정이 있어서 쳐다보 는 것이 아니었다. 거듭하여, 파사악ㅌ이 연거푸 밀얻가치는 혼란에 지쳐 빠져서 이제는 의식이 반 이상이 대 상도 없는 막연한 곳에 한눈을 팔고 있는 상태였다. 해서 그의 다음 말은 은씨 너스레하고는 사뭇 장단이 맞 지 않는다. "불경기는 청진서 곡식을 실어내지 않아 그런 거구요." "그러니까 그 말이 내 말 아니오. 듣자 하니 일본 미시장에서 곡가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형편이라니 천진서 는 배가 뜨지 못하는 게고 그러니 마치 이건 길 막힌 곳에 마차가 자꾸자꾸 밀어닥치는 꼴이라. 강이 얼었으 니 회령서는 간도 곡물을 아니 실어낼 수도 없고 말이오." "좀 좋소?" "좋기는?" "이런 기회, 농사꾼이야 눈물을 빼든 핏물을 빼든 헐값으로 빼앗아다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두시라 그 말 아니 오. 그걸 모르실 은씨는 아닐 성싶은데 왜 남의 돈으로만 장살 하겨 들지요?" 건성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은씨는 여전히 감정이 있어 빈정거리는 투로 받는 모양이다. "그 무슨 말이오? 아 그래, 그러면 내 밑천은 장농 바닥에다 깔아 두었더라 그 말이오?" 억울해 죽겠다는 시늉으로 여덟팔자 눈썹은 더욱 아래로 쳐진다. "난리가 날까 봐서요?" 길상은 비밀 상황을 애기하듯 소근거린다. "하하핫...하하핫, 김씨 그러지 맙시다. 아까도 말했지만 어째 우리 사이가 틀어졌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는 그렇고 하하핫...경성서 말이오, 겅성서 열렷다는 상업회 의손가 뭐 그곳에서 위논이 됐다는 그 일 말이 오." 얘기를 돌려버린다. "세금철폐안 말씀이오?" "그, 그렇지, 그렇지, 그 일 말이오." 지난 사월달에 서울서 상업회의소연합회에서 의결되었고 정부에 건의키로 된 미곡수출입세철폐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듣자 하니까, 아니 신문에서 봤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에서 그 회의가 다시 열린다잖소? 그래서 조선서도 여러 대표들을 뽑아 그곳에 보낸다더니만. 세금 안 내는 운동을 허허 말이요. 한데 그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소식을 못 들었소. 혹 김씨는 아시오?" "간도에 사는 사람이 이찌 조선의 일을 은씨보다 더 잘 알겠습니까." "또오, 허허어." "모릅니다. 안들 뭐 신통하겠어요? 그럿 다아 살 그저 뺏아가자는 수작이겠지요." "그럴까? 우리네 곡물상으로서는, 박리다매하는 처지고 보면 헤택을," "황소한테 매달려 다니는 소꼬리만도 못한 조선 사람 장사꾼들 혜택을 받으면 얼마나 받을 라구요." "말인죽슨 그런데 우리네는 그놈의 홍소꼬리에도 못 드는 영세 상인이라, 하하핫...하지만 김씨 사정이야 어디 그렇소? 용정선 이름난 거상이고 보면," 아첨이다. "모두 다 배꼽이 빠지게 우스운 얘기요만 그보다 용정에 세금도 왜놈들이 징수한답디까?" 하고 길상은 맥빠진 소리를 냈다. "말을 하자면 그런 거고 뭐 세금 얘기는 거렇고 그런 것, 장차 김씨는 수만금 재산의," 순간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은시를 노려보던 길상이 또 다시 허허 하고 웃으며 재떨이에 담배를 꾹 눌러끈다. 은시는 우물쭈물하는데 당황한 것은 아이었다. 험한 눈및에 질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 철해 보인 그것뿐이다. 그 동안 딸고의 혼담을 꺼내지조차 못하게 한 길상의 태도가 야미웠고 자기 딸보다 더 나았더라면 또 모르겠 는데 그렇지도 않은 과부를 얻었다는 것이 잘난 자기 딸에 댄한 모욕한 같아 고위적으로 나발을 불어대었지만 ㅐㅇ정히 셈을 되보면 길상을 적대시하여 이로울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최근 들은 일이 있는 소문대로- 서희의 남편이 될 것이라는-되리라는 것은 믿지 않았다. 아무렴 근본이 하인, 그 따위를, 지가 잘났으면 얼마 나 잘났으랴. 여유 있는 판단을 은씨는 하고 있었다. "김씨." "... " "이곳에다가 병영을 짓는 일을 어찌 생각하시오." 화제를 바꾸어놓고도 딸아이를 불러대어 숭늉을 가져오라 하더니 환약을 꺼내어 입에 털어넣고 물을 쏟아붓는 다. 생김새냐 덩치에 비하여 역시 하는 양이 방정스럽다. "아무래도, 앞으로 온전찮을 것 같은데 김씨 생각은 어떻소?" 은씨는 다시 물었다. "무엇이 온전찮을 거란 말씀이오?" "시끄러워지겠다 그 말이지. 회령이 말이오." "회령이란 터가 본시 옛날부터 그렇게 되기로 돼 있는 모양이지요." "옛날은 옛날이고, 어디 병영뿐인 줄 아시오?" "두만강 따라 큰 신작로 나는 얘긴가요?" "그렇지, 청진서 회령 간의 길이야 그런대로 인마의 내왕을 위한 길이라 하겠으나 웅기서부터 두만강 따라 느 는 신작로는 심상하지가 않다는 게요. 이곳에 짓는 병영 하며." "국경이니까 그런 게지요. 강물이ㅣ 얼때마다 독립군들이 내려올테니까." "독립군보다 요즘 청나라 안에서 날리를 겪고 있다니까 그 틈새를 타고 왜놈들이 전쟁을 일으킬 심산은 아닌 지 모르겠소." "전쟁은 무슨..." "병영만 해도 그렇지. 독립군들이 필시 구곳에다 눈독을 들일 터인데 우리네 장사꾼들 마음이 안 놓이지요." "간담이 써늘합니까? 걱정 마시오. 생각하기 나름 아닙니까? 은씨같은 졸부에겐 오히려 병영이다 신작로다 그 모두가 든든하게 울타리 노릇 해줄게요. 제발 걱정일랑 마시고 남의 돈으로만 장사할 생각도 마시고, 장농 바 닥에 깔아놓은 밑천 활용해서 서상 한번 돼보시오. 뭐 그런 거 아닙니까?" "졸부라니?" "아까 거상은 아니시라 말씀 아니 하셨소? 졸부랄밖에요." 길상은 바람 부는 날의 키 큰 수숫대처럼 마음과 몸이 다 함께 흔들거러며 맥없이 주워섬기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더라고, 하기는 말 속에 모멸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능청스런 은씨도 조금은 발끈 해지는 눈치다. "언중유골이라, 나 이 은무진은 그래 이 나라 노선 백성이 아니더라 그 말씀이오?" 정색하며 따지고 든다. 복지곡물상을 나선 길상은 별안간 누낭ㅍ이 캄캄해져오는 것을 느낀다. 방금 은씨하고 옥신각신 언쟁으로까지 발전해간 일이 꿈속의 일이었던 양 아리숭하다. 어제 하루는 니처 술만 마시었고 오늘은 아침도 굶은 채. 미쳐 날뛰는 말이 기진하여 두 다리 꺾어버릴 것 만 같은 피곤과 망실이 엄습해온다. 언 다ㄸㅇ을 구르며 짐 실은 마차가 니나간다. 방한모를 깊게 쓰고 눈만 내놓은 마부의 모습이 무척 훌륭해 보인다. 말 한 필이 길상의 옆을 스쳐서 질주한다. 일본 장교의 망토자락이 펄리덕거닌다. 서희의 망토 입은 모슴이 나타났다가 멀어진다. 멀리, 먼 곳으로 멀어져간다. 말굽 소리도 차츰 바보같이 멀어져가고 사라진다. 구름이 날리고 하늘에는 네 줄기 전선, 사위는 여전한 겨울이며 묵굴의 낯선 풍경이다. 허술한 뒷독목 음식점으로 찾아들어간 길상이 청한 것은 역시 술이었다. 삶은 돼지고기 한 접시와 술이 넘치 는 술잘과, 그럿들을 올려놓은 술판을 골똘히 내려다보고 않았던 길상이 이윽소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아침나 절이라 음식점에는 손님이 없었다. 길상이 또래의 젊은 사내말고는, 사내는 늦은 조반을 드는 모양이다. 얇삭 한 주석숟가락이 낯4간지럽게 보일 만큼 몸집이 장대한 젊은이다. 주모 격인 여자와 주고받는 얘기로 미루어 연해주에 벌이하러 갔다가 한철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눈치다. "돈은 얼마나 벌어왔소." 술잔을 임에서 떼며 길상이 느닷없이 말을 던졌다. 사내는 어리둥절하다가 "돈 백 원이나 벌었습매다." 하고 똑똑하게 대꾸한다. "뭘 하셨기에?" "고깃배르 탔습매다. 마우제 고깃배요." '마우제 고깃배...고깃배...' "어째 거까지 벌이하러 갔었소?" "무시기 까닭이 있겠습매까? 먹고 살기 어려워서 가난뱅이들으 모두 많이 가잲소? 손님으 이 고장 사람 앙이 겠으니 잘을 모르겠소꼬망." "철새처럼 가고... 오고 많이들 그러는 걸 왜 모르겠소." 길상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술을 마신다. '가고 오고...가고 싶은데 왜 못 떠나나. 있고 싶은데 왜 떠나려 하는 게야. 어느게 진심이냐 말이다. 어느편이 진심이냐 말이다. 서희는 여관방에 도사리고 있겠지. 울고 있진 않을 게야.' "내 사사아로는, 본시 장사르 했습매다." 사내는 똑똑한 말씨와 생김새와는 다르게 길상의 옆으로 바싹 다가않으며 주변머리가 놓아 뵈지도 않은 어투 로 말을 시작했다. "펭안도에서 등심장사알 했소꼬망." "말씨는 평안도 아닌데요?" "태생으 이 고장 입매다. 무시기, 부미형제가 함경도 말씰 쓰잉 말 씨 고쳐지잲습대다." "장사아르 어째 치웠슴둥?" 주모의 말참견이다. "그렁이 작넌입매다. 초정월임둥. 펭안도 순천 장날에 큰 날리가 벌어졌지비." "무시기, 난리랑이?" "장사꾼들이 벌떼같이 일어서서 왜놈들으 때레죽이구 왜놈들으 집에 불으 지르구," "왜놈으 때려죽였다 말이?" "옛꼬망." '결단을 내려아지, 결단은. 내가 가면 서희는 혼자 남는다. 무너질 것이다. 서희의 소망, 서희의 인생은 무너지 고 말겠지. 간다면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는게 문제가 아니야. 떠나는 게 문제다. 떠나는 게, 떠나버리는게...' "우리 조선 사람암도 예닐곱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답매." "애그마니나! 육실할 왜간나, 얘기합소. 그렁이 궈래도 거기 있었다 그 말임둥?" "옛꼬망. 있었잲고? 함계 돌으 던지구 왜놈으 밟아 죽이구 불으 지르구 했소꽝이. 왜놈으 간나들으 수태 죽었 습매." '오길까. 이독일까. 배배 비틀어진 마음이까. 못난 사낸는 되기 싫다 그건가? 그렇지? 그렇지? 지금 너 옆에는 순천 장 폭동 사건에 가담한 사내가 지껄이고 잇다. 몸이 건장하고 순박해 뵌다. 씩씩하구. 너는 지금 기가 죽 4어 있어. 못난 놈이라구 말이야. 쩨쩨하고 갈밭쥐새끼 같은 눔이라구 말이야. 그래 술맛이 이리 쓰고 괴로운 게냐? 오 년 전에, 그렇지 오 년 전의 일이구나. 최참판댁을 습격해 온 말을 사람들과 합류했을 때 일이다. 마 을 사람들이 조준구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너는 서희를 위래 토지 문서를 찾으려고 뛰어다녔다. 나 라는 비운보다 서희 비운에 너는 더 많은 눈물을 쑫았다. 그때 넌 평사리 벽춘의 작은 개구리였어. 지금은 달 라. 넓은 만주 벌판에 서 있단 말이다. 잘난 사내들, 쓸개가 썩지 않는 사내들이 모여드는 것이란 말이야. 삭풍 열사 속에 윳긴은 묻으려고. 한 달에도 몇 번씩 넘나드는 국경에서 너는 무엇을 보았나. 고향 잃은 가난한 내 겨레가 이불짐에 솥단지 하나 얹고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영팔이아제는 청인들 땅을 부치러 떠났고 용이 아 제는 벌목꾼이 되어 떠났고 이 사내는 마우제 고깃배를 타다 돌아왔다. 그렇지. 높은 곳에 좌정해 있었던 지닌 날의 이부사댁 나으리, 슬기로운 선비로 우러러보았었던 이동진 씨. 그 사람조차 지금 내 눈에는 개새끼로 보 인다. 그런데 너는 어떠냐? 너는! 한 계집아이를 잊이 못하고 꾀꼬리새끼를 잊지 못하고 넌, 넌 더한 개새끼 다! 한데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무엇을 타협하려 했나? 서희와 혼인할 생각을 했지? 당당하게 좋 아하는 여자를 거머채는 게 뭐가 나쁘냐구? 아니, 아니다. 종신 종놈이 되어서라도 서희 곁에 있고 싶은 게 너 본심 아니었나? 안 그렇단 말이냐?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 왜 못 떠나지?' "난장판이 벌이진 까닭으 장세 내라 앙이 내겠다. 시비서 시작했습매다. 처음으 해물장사 조서방보고 왜놈이 장세 내라, 앙이 내겟다, 그렁이 왜놈이 달겨들어 것을 찢었답매. 무시기 그렁이 장사꾼 장군들이 몰려간 겝매 다. 말은 갓값 물어내라는 게지만," '어릴 때부터 넌 구천이 그 사람을 늘 부러워했다. 천상의 선관이 하계에 하강해온 것처럼, 늘 그 사랑에 대해 선 그렇게 생각했다. 아름다운 별당아씨를 데리고 도망간 것을 이 세상에서 젤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했었다. 너는 서희를 그런 꿈으로 바라보아왔다. 그러나 서희는 별당아씨는 아니었다. 흥, 무슨 지랄 망근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게야?' "최봉환이라는 사람으 보부상 접주입매. 거 사람 영악하고 똑똑합두망.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장꾼들으 하나로 딱 뭉치게 하잲는가? 그런 사람이 칼 들고 말 타면 장수 되는 게에 앙이겠소오? 떠억 뻗치고 서서 여러분! 당 시네들은 단지 갓값만 받으려고 이곳에 왔습니까! 허더란 날이. 그렁이 장꾼들은 앙이요! 장세르폐지하라고 우 리는 오구하러 왔소오! 하며 우뢰 같은 소리르 지르잲능가. 신바람이 절로 나더라. 그 말 앙이겠소오? 무시기, 그렁이 그 왜놈으 아아가 겁이 어럭 나잲을 게요? 장세는 앙이 받겠다 했소광이. 무시기, 그래도 최봉환이 그 사람 그 수에 넘어가ㅣ 않습데다. 아주 다부집데다. 여러분! 이 일본 사람의 말만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내는 그때 모습을 퓽내내듯 두 팔을 번쩍 치켜올리는데 때에 절고 누덕누덕 솜이 비어져나오는 반두루마기 의 소캣부리가 처양하기만 하다. "그러이 장꾼들으 모두 말만 가지고는 믿을 수 ㅇ벗소오! 약정서를 쓰시오! 했짆앴소? 앙이 되겠다는 게지. 왜 놈으 그 간나새끼가 앙이 되겠다 하더랑이. 돌이 날아갔지비. 그렁이 왜놈으 그 간나세끼가 총질을 했슴. 그렇 지마네두 총으 가지구 어쩔 것이랑? 눙과부 즉, 어쩔 것이람? 불 지르구 왜놈으 간나새끼들으 보이는 쪽쪽 때 레죽이구 밟아죽이구 왜놈으 간나아들 집이라면 모조리 때레부시구 낭태질으 했답매. 어째 앙이 그러겠소? 생 각해봅세. 무시기, 남의 땅에 왔으면서리, 피땀 흘린 등짐장수 삼지까지 노리는 데야 어찌 가마니 않아 당하겠 슴? 없는 놈이야 어디로 가나 당당하잲는가? 몸 하나 한새쿠 싸울 수 있답매. 일이 그리 됐으이 왜헌병놈으 새끼들이 오잲을 게요? 잠잠하겠슴? 모두 집들으 비워놓고 달아났지비. 아주망이도 한분 생각으 해봅세. 나쁜 놈으 새끼들 앙인가. 개놈으 새끼들 앙인가. 왜놈의 간나새끼라면 칼르 푹푹 찔러주고 싶장이. 연해주 우리 조 선 사람들으 모두 칼을 갈고 있단 말이." 사내가 밥값을 치르고 떠난 뒤에도 길상은 술잔을 기울이고 앉아 있었다. '옥이네하고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냥 용정으로 가자 할까? 모두 헛소문이니 믿지 말라 할까? 아니면 관계를 끊을 테니 그냥 돌아가자고 할까. 서희하고 혼인하겠다 할까. 거짓말도 방편이라 했어. 우선 저러고 뻗쳐 있는 서희를 여관방에서 끌어내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에잇, 빌어먹을! 가보자면 가는 게지 못 갈 건 무 었어! 과 부건 언청이건 상전 아씨께서 선보겠다는 걸! 고마운 얘기 아니냐말이다! 제에기랄.' 14장 목도리 한양여관에 있는 서희는 안주인을 불렀다. "혹 댁에선 아는지 모르겠소?" "뭐 말씀인데요?" 주인 여자는 하얀 동정이 삼각으로 내려가서 맺어진 서희의 앞가슴 쪽에 불안한 눈길을 보낸다. "나하고 함께 온 그 사람이 살림을 차렸다는 집 말이오." "네? 아니, 그, 그거는." 당황한다. "내가 좀 만나보려고 그래요." "저는 모르는데요?" 여자는 당황했다가 생각해보니 당황해핳 까닭이 없다. 어떤 신분, 어떤관계, 어떤 내막인지 알 수 없지만 뭔지 점입가경의 느낌도 없지 않아 갑자기 신이난다. "그렇지만 그 여자라면 잘 알지요." "... " "본씨 옥이네는, 네. 그러니까 그 여자 말인데요. 옥이네는 우리 여관에 있었답니다. 계집아이가 하나 딸린 의 지가지할 곳이 없는 과부지요. 스물에 살이간... 아마 그쯤 됐을걸요. 예쁘장하게 생긴 편이지요. 고생만 안 했 더라면." "그런 말은 그만두시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사는 집이라니까." "네? 아아 네." 콧배기를 치는 것 같은 말에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도 머쓱해서 입을 다문다. "집을 모근다니 할 수 없군. 누구 다른 사람이라도 혹..." 서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가만히 있자... 아, 우리집의 석이란 놈이 알는지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하지만 김씨가 뫼시고 가면 될 텐데? 곧 돌아오지 않을까요?" 시치미를 떼고 서희 신경을 건드려줄 양으로, 그러고 나서 여자는 잽싸게 서희 눈을 훔쳐본다. 한동안 침묵이 다. 이윽고 "네. 알았어요." "타둑타둑 발소리를 내며 나간 여자는 "석아! 석이 거 없나?" 요란스럽게 갈라진 음성으로 불러낸다. "무슨 일이세요." 변성기에 든 목청이다. "너 옥이네, 그 여자 살림을 차렸다는 집 알지?" "살림을 차리기는요? 삯바느질 시작한걸요?" 변호하듯 퉁명스럽다. "아나 모르나, 그러나 대답하면 될 거 아냐." "알아요." "그럼 됐다." "왜요?" "용정서 오신 안손님 좀 뫼셔다 드려야겠다." "뭐 하러요?" "이녀석아!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할 일이지. 네가 알아야겠니?" 화를 낸다. 여자는 서희 앞에서 주눅이 들고 어리벙벙했던 일이 세상 생각이 나서 신경질을 부리는 누치였다. '참, 정말 무슨 공주이기나 한가? 도도하기나 원,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을 계집종부리듯, 외양값 하느라고 조 막만한 계집애가.' 공연히,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남편 옆모습을 향해 여자는 혀를 차고 눈을 흘긴다. "여보." "왜 그래." 하릴없이 심심한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 긴 여자의 남편은 실낱만큼이나 가늘게 다듬은 대꼬치 로 물부리를 쑤시고 있었다. "참 이상도 하지." "뭐가 이상하다는 게야." "아 글쎄 김씬가 뭔가 그 사람이 데리고 온 처녀 말이우." "천하절색이라서?" "아아니 당신두 넋 빠졌수?" "사내들이란 늙으나 젊으나... 아 글쎄, 옥이네를 찾아가겠다지뭐요? 김씬 김씨대로 식전에 벌써 내빼고 돌아오 지 않으니 필유곡절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허 참, 임자 수선떠는 게 더 이상하군. 젊은 계집도 아닌 주제에 샘이 나서 그러는 게야?" 천천히 얼굴을 들고 마누라를 올려다보는데 커다맣게 불거진 눈이 어쩐지 섬뜩하다. "망측스러워라. 별난 사람이 왔으니 그렇잖소. 옥이네만 해도 우리 집에 있었던 계집아니오?" 무안하여 제풀에 또 화를 닌다. 그러면서도 서희가 나오는 기척을 느끼자 얼른 방문을 열어본다. 서희는 어제 들어왔을 때 그 차림을 하고 나왔다. 그러고서는 인사는커녕 일별도 ㅇ벗이 석이를 따라 걸어나간다. 갈색 망 토나락이 펄럭이듯 문간에서 사라진다. '정말 무슨 공주이기나 한가? 도도하기가 원, 안하무인이라니, 당돌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여자는 혀를 두르리고 방문을 소리나게 닫아붙인다. 석이를 따라가는 동안 서희는 아무말도 묻지 않았다. 석이는 아예 말 따위는 걸어볼 생각을 않고 덧니 사이로 거쁜 숨을 내쉬며 우쭐우쭐 앞서 걸어간다. 이따금 주근깨투성인 걸굴을 찌푸리고 엷은 구름밖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삼키곤 한다. 사춘기의 소년은 어쩐지 부끄러운 것이다. '참말로 예쁘다. 아기씬 옥이엄말 왜 찾아가는 겔까? 침모로 데겨갈려구? 김씨 땜에 혼내줄려고? 껌껌하고 좁 은 골망에 들어갈 수 있을까"예쁘기도 하지만 또 얼마나 돈이 많으면...청진 갔을 때도 저렇게 좋은 옷 입은 여잔 못봤다. ." 소년은 또다시 하늘을 올려다 본다. 옥이네가 세든 집은 허술한 오막살이였다. 중심지와 과히 멀지 ㅇ낳은 곳인데 그런 허술한 추가들이 산재해 있었다. 마당에는 나뭇단이 흩어져 있었으며 꿀꿀거리는 돼지 소리도 들려왔다. "옥이엄마!" "뉘기야?" "손님이 찾아오셨소!" "무시기, 뭐이래?" 놀란 목소리다. 석이는 볼일 다 보았다는 겐가, 인사도 없이 등을 앞으로 확 꺾으며 달음 박질쳐서 달아나버린 다. 방문을 열고 얼굴만 내보인 옥이네는 서희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안색이 싹 면한다. "어디매서 오셨습매까?" 서희는 눈시울을 치켜올리며 얼굴만 내민 옥이네를 응시한다. 포수가 짐승을 겨먄하듯이. 앙상하게 여윈 얼굴 이다. 머리칼에는 솜 가루가 않았는가 희뿌옇다. 아무렇게나 걸쳐입은 옷매무새. "잠시 들어가도 좋겠소?" "옛꼬망. 방이 누추항이, 이르 어쩌겠슴둥?" 나중은 혼잣말이었다. 옥이네는 옥이를 방구석에 떠밀어붙인다. 솜뭉치도 아아 곁으로 밀어붙인다. 옷감을 말 아들이고 가위 실꾸리를 만짇고리에 집어던지고, 앙상한 팔이 처칠고 재빠르게 움직였으나 천조각 솜부스러기 는 여기저기 굴러 있다. 옥이네는 삯바느질로 얻어온 남자바지에 솜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서희는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와 앉아 있었다. "어망이 뉘기야?" 구석지에 떼밀린 채 옥이 물었다. 옥이네는 아이를 무섭게 노려본다. 어미의 공포, 어미의 경계심은 그대로 전 달되어 생쥐간이 몸을 도사린 아이는 옥을 깎아서 만든 것 같은 서희 옆모습에 눈길을 박고 움직일 줄 모른 다. 손에는 알맹이도 없는 케러멜 빈 꽉이 꼭 쥐어녀 있었다. 무릎 하나를 세우고 서희오 마무앉아 눈을 내리깐 오이네는 슬그머니 손끈에서 골무를 뽑아 손바닥 속에 감추 어버린다. "나 용정서 왔소." "용정서..." 옥이네 안색은 또다시 변했다. 방안 흙벽에는 주렁주렁 못이 박혀 있었다. 한곳에는 유일한 나들이 옷이었을까, 검정 치마에 남색 솜저고리가 걸려 있었고 그 옆에 눈에 익은 쥐색 남자 목도리 하나가 축 매달려 있다. 길상의 것이다. 허둥지둥, 목에 감 는 것을 잊어비리고 간 모양이다. 어젯밤 길상이 이곳에 와서 묵고 간 것을 알아차림 서희는 아무래도 처녀 이 만큼 얼굴에 핏기를 모았으나 이내 일그러진다. 모기 흉하게 비침하게 일그러진다. "살림을 차렸다기, 왔더니 찢어지게 가난하구먼. 길상이도 천하에 못난 사내구." 격한 음성이었는데 다음은 침묵의 게속이다. 차츰 침욱은 옥이네의 완강한 의지로 굳어져가는 것 같았다. 수그 린 그이 콧날에 자존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대신 서희의 격노는 식어갔고 눈이 잔인하게 빛난다. "삯바느질하는 게요?" "그렇습매다." "무시기, 그럭저럭 살아갑네다." "벌이가 괜찮소?" "애기엄마." "우리집에 가지 않겠소?" "무시기, 뭐래 갑네까?" 처음으로 눈을 들어 서희를 정시한다. 의심과 경계의 빛이 팽팽하다. "침모로 가자 그 말이오." "침모..." "어렵지 않게 해주겠소." "싫습매다." "싫다구?" "옛꼬망." 눈을 떨군다. "싫습매다. 김씨 구분 저하고 아무 상관 없소꼬망. 동정으 받앗습매다마는 펴일 날 있으면 갚아드리얍지요. 그 리 생각으 하고 있으니." 목소리가 댓살같이 곧게 울려온다. 서희 얼굴이 긴장된다. "그래요? 내가 듣기하곤 다르군." "... " "그 사람은 애기엄마랑 혼인할 생각을 하는데도 애기엄만 아니 하겠다 그 말인가요?" 이상한 일이다. 순간적인 심리 변화라는 것은. 서희는 거짓 없이 말했던 것이다. 사실 당초부터 서희에게는 경 쟁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얼굴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고 따위는, 그런 것을 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숨푸레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길상은 무엇을 원했으며 어떤 결과를 만들려는가. 서희가 거짓 없이 말했다 는 것은 길상이 이 여자오 헤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떄문이다. 설령 사랑하니 않는다 하더라도. 아니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건 설움 때문이야. 서희는 속으로 되이며 눈길을 여자도 목도리도 아닌 곳으로 옮긴다. 서희가 알리고도 길상에게는 좋은 혼처가 많았다. 그럿을 다 마다하고 볼품없고 가난에 찌들은, 아이까지 딸린 과부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떠벌리고 다녔다는것은, 그것이 길상의 슬픔이라는 것을 서희는 비로소 느낀다. "앙입매다. 거짓말으 마옵소꽝이. 어째 모르겠습매까. 생각으 해보옵소. 어째 새총각으 처지 알라까지 따른 가 스집과 혼인하겠슴? 사람으 괄시하면 앙이 됩매다. 누귀 그 말으 믿겠소꽝이? 그러잖애도 그분이 도와준 돈으 갚겠다아 그 일념으로 밥 새워가문서리 바느질으 하는 기요." 이번에는 곧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강하게 흔들린다. 상처받은 비둑기가 날개를 퍼득거리듯이, "가셔서 말씀 전해주옵소." 서희는 바람 부는 거리를, 펄럭이는 망토나락을 곡 쥐며 걷는다. 세상에 나서 오늘까지 혼자 걸어보기는 처음 이다. 더군다나 집 떠나온 낯선 고장의 거리를. '북쪽 여자라서 그럴까? 성질이 드세다.' 앙상하게 여윈 얼굴, 솜가루가 않은 뿌연 머리카락, 아무렇겐 걸쳐 입은 옷매무새-눈앞이 밟힌다. 미움도 동정 도 아니면서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가 마음에 실려온다. 서희는 거리를 눈여겨보지 않고 걸어간다. 들린 것처럼 쫓기는 것처럼 걸음이 빨라지다가는 느낌에 젖는지 보조가 느려지기도 한다. '고아 같다. 뭐 언제나 내가 고아 아니었었나? 그렇지만 더욱더 고아 같다.' 못에 매달린 목도리를 보았을 때 서희는 여자를 집에 데려다놓고 길상에게 고통을 주리니 생각해쑈었다. 길상 이 자기를 낯선 여관에다 내버려두고 여자 집을 찾아간 행위가 애정 없는 것이었다 ㅎ다러도 용서할 수 없었 던 것이다. 겸코 용서하지 않으리. 그 무자비한 감정을 무엇을 풀어놨나. 풀린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서희는 스스로, 자기 자신마저 질곡에서 풀어버린 것이다. 용정에 쌓아 올려 놓은 자기 성으로 돌아간다면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나 그 끈질긴 숙원가 원한에 사무친 보복심과 잠들 수 없는 자긍을 내어 버린 나유, 무겁고 숨막히는 철갑을 벗어버린 자유다. 사랑할 수 있는 자유, 다 버리고 어디든 떠날수 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바 람에 날려가는 나뭇잎같이 왜 슬프고 외로운지, 고아의 느낌이 가슴을 저미는지 서희는 알수가 없다. 덮어놓고 걷는다. 하늘 끝까지 내처 걸어갈 것처럼 걷는다. 여관과는 사뭇 방향이 다른 것도 개의치 않는다. 거리에 일 본인 상점이 눈에 뛴다. 잡화상이 있고 담뱃가게가 있다. 식료품에 의류를 진열한 오복점이 있다. 이발소가 있 고 목욕탕 간판도 보인다. 목덜미에 회칠을 하고 목욕대야를 한 팔에 낀 일본 기생이 움츠리며 지나간다. 왜나 막신 소리가 ㅋ나락카락 맑게 울린다. 일본 병대 서너 명이 점잔을 빼며 기생 옆을 지나친다. 걸음을 멈추고 오복점을 바라보고 있던 서희가 그곳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앞치마를 입고 제법 격식을 갖춘 고 조오(점원)가 뛰어나오면서 "이랏샤이(어서오십시오)." 서희를 살펴본 고조오는 질린 듯 연신 꾸벅꾸벅 절을 한다. "나니가 고이리요우데스까(무엇을 찾으십니까)." 서희가 멍해지며 쳐다보노라니까 비로소 조선 여자인 것을 깨달은 고조오는 더욱 허리를 굽신거린다. 조선 사 람이면 모두 초라하고 거지 같다는 소견머리로서는 일종의 경이였을 것이다. '히야! 에라이, 미분노 다가이 히오라시이나아(야아! 대단히 높은 신분의 사람인가 보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듯 "겐상 좃또(겐씨 잠깐만)." 주판질을 하며 장부 정리를 하고 있던 반토오(책임자)를 부른다. "나니가(뭐냐)?" 고개를 든 그도 서희를 보다 후다닥 놀란 시늉을 하며 일어선다.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비굴한 웃음을 띠며 "오도꼬노 에리마끼(남자 목도리)," 똑똑한 발음이다. "하아, 하아, 고자이마스. 시바라꾸, 하이. 좃또 오마찌 구다사이(네, 네, 있습니다. 잠시 좀 기다려 주십시오)."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조선 여자가 일본말 쓴 것이 그에게는 크나큰 영광이었던가. 의기양양해서 진열장의 열고 진열장 유리위에 남자용 목도리를 펴놓는다. 서희는 여러 개의 목도리를 차례차례 넘겨보고 나서 그 중 진갈색을 하나 뽑아낸다. "이꾸라(얼마냐)." "하아, 하이, 고엔데 고자이마스(네, 네. 오원입니다)." 서희는 지갑을 꺼내어 십원을 내어준다. 거스름과 함께 물건을 꾸려준 반토오는 "하꾸라이힝 데스카라(박래품이어서)." 그래서 비싸다는 얘긴 모양이다. 방아 찧는 것만큼이나 방정맞게 절을 해대는 꼴을 본체만체 오복점을 나선 서희는 전혀 뜻밖의 자기 행위에 놀라고 당황한다. '어째 내가 이걸 샀을까? ' 후회하는 것은 아닌데 화를 내며 주어야 할지 남자코 내밀어야 할지 난감하다. 여관에 서희가 들어섰을 때 "이제 오시는군요."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주인 여자가 맞이한다. "저어 김씨가 돌아왔어요. 방금 들어왔어요." 벼르고 있었던가. 여자는 건들건들, 놀려대듯한 태도로 말했다. 아무 대답이 없자 다시 "술이 고주망태가 돼서 돌아왔습니다. 원 세사에 대낮부터 무슨 술을 그렇게나 마셨는지 아마 지금 안손님 방 에 있을 게요." "내 방에?" "네에. 그렇다니까요." 여자는 의미를 품은 웃음을 흘리고 그의 남편은 마누라 어깨 너머로 안 보는 척하면서 묘하게 끈적거리는 기 분나쁜 눈초리로 서희를 쳐다본다. "어떻습니까? 계집이 몰품없지요? 안손님한테 비하면 설중매에다 야화도 못 되지 않든가요? 공연히 김씨가 그 러지." 어디서 배운 풍월인가, 겨우 틀이 잡힌 듯 자신 있게 지껄였다. "방자하기가 들여우 같구먼." 서슴없이 내뱉고는 아연히서 입도 다물지 못하는 여자를 내버려 두고 들어간다. "대단한 여자ㅜ먼. 자알 당했어, 잘 당해. 싸지 싸아. 임자 화냥기는 예나 지금이나, 하핫하하..." 사내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젊은 아이에게 모욕을 당한 마누라를 툭툭 친다. 서희는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길상은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가라앉은 눈이 차갑게 서희를 쏘아본다. 그러나 중심을 못 잡는 듯 상체는 흔들린다. "구경 자알 하고 오십니까? 아가씨." 애기씨가 아니라 아가씨. "경치가 어떻든가요? 눈이 세 개 달렸습디까아? 코가 정수리에 붙었던가요?" 서희는 장승처럼 선 채 길상을 내려다본다. 지독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네에? 네? 코가 정수리에 붙었더냐고 묻지 않습니까? 아가씨! 나, 나 오늘부터 최서희 종논 아니기로 했소이 다. 본시 문서 없는 종놈이고 보니 몸값 치를 필요는 없곘구요, 그 그리고 그 동안 뼈가 빠지게 머슴살일 했지 마는 새경 달라고도 아니 하겠소. 피자파장 줄 것 받을 것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 인간 대 인간으로 나갑시다 요. 아시겠어요? 네, 네? 그래 불쌍한 가스댁이 구경 자알 했수다. 그렇고 음... 얼마나 시주를 하고 돌아오시었 소? 어떤 양반네는 흉년에 보리 한 말 주고 논 한 마지기 뺏아서 떵떵 울리는 만석 꾼이 됐다 그 말이고오, 음... 그런데 사람은 얼마에 사시었소? 설마 보리 한 말은 이니겠지요? 아무리 사람값이 헐하기로 논 한 마지 기 꼴이야 되겠습니까? 아무리 창자가 비고오 비리오른 강가지 꼴이 된 그 가스댁 모녀지만 말입니다아. 하하 핫... 하하핫... 허나 그렇게는 안 됐을걸요? 섬섬옥수 내민 손이 부끄러움이나 아니 당했을까. 이 길상이놈 걱 정했수다. 아가씨! 돔방석에 앉은 놈만 도도한 줄 아시오? 피죽 먹는 놈도 도도할 수 있단 말입니다. 신주 모 시고 족보에 곰팡이 실는 양반네만 기고 만장인 줄 아시오? 상놈 백정도 기고만장 못하란 법 없지요. 대명천 지에 돈 있고 족보 있는 사람들만 사는 줄 알았다간 큰코다칠 게요. 오장육분 어느쪽이 성할까? 그래 아가씨! 최참판네 아가씨! 그 여자 돈 안 받지요? 이 정든 님의 돈도 안 받는 여자요. 안 받지요? 네, 네? 한마디 말씀 이 없으시군." 말을 뚝 끊고 고개를 숙인다. 조는가 했더니 자맥질하던 해녀같이 얼굴을 처켜세운다. 아까처럼 차가운 눈은 아니다. 몽롱한 취안 이다. 씩 웃는다. "최서희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흥, 천하를 주름잡을 텐가? 어림도 없다!" 어조를 싹 바꾸며 반말지꺼리다. 자승처럼 서 있는 서희 얼굴에 경련이 인다. "넌 일개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단 말이야! 거 꿈 하나 거창하지. 아무리 돼지 멱따는 소리 질러봐야 이곳에 구 종별배도 없고 으음, 있다면 왜놈의 경찰이 있겠구먼. 흥, 그 새뼈가지 몸뚱이로 어쩔 텐가? 난 지금이라도 널 희롱할 수 있어. 벌릴 수도 있고 흙발로 짓밟을 수도 있고 가는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수도 있다 그 말이야. 날 부처님 사춘쯤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큰 잠못이지. 아암 큰 잘못이고 말고. 나 술 안취했어. 내 핏속엔 술인 아니고오, 음 그렇지 그래. 대역죄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게야. 아니다. 아니 그보다 식칼 들고 고개마루를 지 키는 산도둑놈의 파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어?" "이놈아!" 드디어 서희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네에. 애기씨 말씀하시오." "너 나를 막볼 참이구나." "네에. 막보아도 무방하구 처음 본대도 상관없소이다. 십여 년 세월 수천수만 번을 보아와도 늘상 처음이었으 니까요." 길상은 끼들끼들 웃다가 또 고개를 푹 숙인다. 서희는 망토를 벗어던지고 방바닥서 굴러떨어진 꾸러미를 누어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그것 을 길상의 얼굴을 향해 냅다 던진다. "죽여버린 테다!" 서희는 방바닥에 주질러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어릴 때처럼, 기가 넘어서 숨이 껄떡 넘어갈 것 같다. 언제나 서희는 그랬었다. 슬퍼서 우는 일은 없었다. 분해서 우는 것이다. 다만 어릴 때와 다르다면 치마꼬리를 꼭 물 고 울음 소리가 새나지 않게 우는 것뿐이다. "난 난 길상이하고 도망갈 생각까지 했단 말이야. 다 버리고 달아나도 놓다는 생각을 했단 말이야." "그 여자 바에 그, 그 여자 방에서 목도리를 봤단 말이야으흐흐흐흐흣..." 길상의 눈동자가 한가운데 박힌다. "그 꾸러미가 뭔지 알어? 아느냐 말이야! 으흐흐... 목도리란 말이야 목도리." 하더니 와락 달겨들어 나둥그러진 꾸러미를 낚아챈다. 포장지를 와둑와득 잡아 찢는다. 알맹이가 밖으로 나왔 다. 그것을 집어든 서희는 또 다시 길상의 면상을 향해 집어던진다. 진갈색 목도리가 얼굴을 스쳐서 무릎. 위 에 떨어진다. "헌 목도리 내버려! 내버리란 말이야!흐흐흑... 으흐흐흣..." 엄마 데려와! 엄마 데려와! 하며 발광하고 울부짖고 까무라치고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그칠 줄 모 르게 패악을 부리던 유년 시절, 그때 서희를 생생하게 어제일처럼 기억하고 있는 길상이지만 길상은 어떻게 할 바를 모른다. 술이 깨고 정신이 번쩍 들지만 무릎 위에 떨어진 목도리를 집었다간 불에 덴 것처럼 놓고 또 다시 집었다간 놓고 하면서 서희의 울음을 그치게 할 엄두를 못 낸다. 드디어 그는 목도리를 두 손으로 꽉 움 켜뒤고서 마치 훔쳐서 달아나는 도둑놈처럼 방을 뛰쳐나간다. 문밖에서 엿들어려고 서 있던 여관집 주인 여자 와 하마터면 이바빡을 부딪칠 뻔했다. 제방으로 돌아온 길상은 우리 속에 갇힌 짐승처럼 "미쳤을까? 애기씬 미쳤을까?" 중얼거러며 맴을 돈다. 다음날 아침 길상은 서희를 몰아댔다. 용정으로 가자는 것이다. 두 남녀는 여관을 나왔고 함께 길을 걸었고 마 차에 올랐으나 성난 얼굴로 서로 외면하는 것이었다. 상대편 얼굴 보기가 민망하기도 했으나 그보다 역시 아 직은 서로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멍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푼수없이 지껄인 길상이나 체모 잃고 울어버린 서희, 푼수없었다고 느끼는 이상, 체모 잃어ㅅ다고 느끼는 이상, 이들 사이에슨 엄연한 거리가 있는 거고 거리 를 의식하면 할수록 멍울은 굳어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더 깊은 고뇌를 안고 돌아가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 차 속에서 때론 절망이, 때론 희망이 교차하는 마음은 끝없이 방황하면서. 그러나 이들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왔다. 그것은 용정을 향해 달리던 마차가 어떻게 되어 그랬던지 뒤집힌 사 건이다. 학성에서 안미대에 이르는 중간쯤, 계곡 사이의 좁고 가파로운 내리만 길을 달리던 마차가 돌연 뒤집 히면서 계곡으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어휘풀이 *괄호 속의 숫자는 본물 속의 면수와 행수를 가리킴. 오망이(11:19): "방언"어머니. 봉금(13:29):일정한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음. 앵속(14:18):양귀비. 얼피덩(16:21): "방언"얼른. 끝발(17:12):매마른 밭. 가뭄을 타 딱딱해진 밭. 통지기(17:14):계집종의 낮춤말. 배미(19:4): "방언"뱀. 꼬지는 타고 개기는 설 일이제(20:114): "방언"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지경. 둥개둥이를 치니(20:15): "방언"마음대로 굴린다. 묵쟁쿠(25:28): "방언"먹지 않고. 회신(27:11):재와 불탄 끄트러기. 우세(69:27):남우세. 남에게서 받는 놀림이나 비웃음. 안깐(70:23): "방언"아낙네. 가스집(70:23): "방언"과숫댁 두룸박(98:17): "방언"뒤웅박. 강회(114:17):생석회 곤장한(114:28): "방언"국량이 좁고 꾀죄죄한. 마우제(119:8):마우내. '러시아 사람'을 얕잡아 부르던 말. 초방(120:26):기중을 세우고 처음으로 끼우는 중인방'인방'은 기둥 사이에 가로지른 나무. 거이방(153:16): "방언"맞세울 만큼 비슷함. 둥주리(160:25): "방언"둥지 구들배미(164:22): "방언"구둘기미. 귀뚜라미의 일종. 가물덕(210:16): "방언"마누라. 윤구락(215:28): "방언"숯불. 피워놓은 불. 용정 바닥의 내주거지(219:17):용정 바닥의 안팎. 먹우고(219:30): "방언"뻗대다. 천천무리(226:21): "방언"구박둥이. 벅수(226:27):바보. 포류의 체질(232:1):갯버들처러 가늘고 연약한 체질. 거천(243:8): "방언"봉양 실이 노이 되도록(243:24): "방언"실이 밧줄이 되도록. '되풀이, 되풀이 하여'의 뜻. 청풍당석(245:23):좋고 편한 상태를 뜻함. 행사(281:23):행동이나 하는 짓. 어멍(288:8): "방언"의뭉. 몰작하게(288:13): "방언"물렁하게. 쉽게. 탈망(303:16):망건을 벗음. 형문(308:30):형장으로 정강이를 때리던 형벌 버부리(310:26): "방언"벙어리. 행토(313:2) "방언" 행티. 행짜(심술을 부려 남을 해하는 행위)를 부리는 버릇. 검배팔(318:9): "방언"곰배팔. 개비(318:26): "방언"호주머니. 식지가 움직이는(324:3):구미가 당기다. 탐이나다. 갑친다(335:12): "방언"깝친다. 재촉한다. 세(337:7): "방언"혀. 신분적인 하계로 인해 실연당하고 마침내는 떠돌이 알사로까지 잔락하는 개인적 아픔을 맛보기도 한다. 강쇠, 최범준, 손태산 등과 함께 진주의 친일갑부 이도영과 김두만의 집을 습격 강탈 시키고 만주로 탈출한다. 만주 의 시골 지방을 떠돌며 행상을 하는 한편 그곳의 독립운동 조직과도 연결을 맺게 된다. 공노인:고월선의 백부, 떠돌이 인삼 장사를 하다가 용정에 객줏집을 열고 거간으ㅗ 자리를 잡는다. 최서희가 용정에서 거상으로 일어서는데 큰 도움을 누며, 조준구로부터 빼앗긴 토지와 재산을 회수하는 일을 대리한다. 이동진:청백리의 후손이자 개명한 양반 출신이 개화파 민족주의자. 최치수와 동문 수학한 절친한 친구이다. 순 수한 복벽주의자도 완전한 공화주위자도 되지 놋하는 사상적 동요를 겪으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노령, 연추 등지를 방랑한다. 김한복:김평산의 둘째아들. 김평산이 처형당하고 함안댁이 자살한 뒤에도 펑사리를 떠나지 않고 부모의 산소를 지키며 산다. 김두수와의 형제 관계를 애용하겨는 관수의 부탁을 받고 간도를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 하기도 한다. 김두수(거복):김평산의 장남으로 본명을 거복. 일본의 밀정이 되어 만주를 무대로 암약하면서 회령 순사부장에 이른다. 윤이병을 교묘히 이용하다 살해하는 등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면모를 보이지만, 살인 죄인의 자식 이라는 한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인물로써, 심금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고, 동생 한복을 끔찍히 아끼는 양면성을 드러낸다. 나이가 들어 밀정으로서의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 신경에서 자동차 서비스 공장을 차린 이 홍에게 접근하여 동업을 제의한다. 강봉기:남의 말 하기 놓아하고 가족의 이해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농민. 시집간 딸 두리가 삼수에게 겁탈당했던 험을 감추기 위해 복동네 를 모함했으나, 분에 못이긴 복동네가 자살하자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백하고 몰매 를 맞는다. 공송애:공노이늬 장녀. 길상을 사모하다 김두수의 손에 떨어져 일본 군인의 첩으로까지 타락한다. 전락에 전락 을 거듭하다 봉천에 정착하여 술집을 차린다. 공월선:이용과 평생 동안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무당 월선네의 딸. 이용이 강청댁과 결혼한 후 나이 많은 보부 상에게 시집갔으나 살지 못하고 하동 읍내로 돌아와 윤씨부인의 두움을 얻어 주막집을 연다. 서희 일행과 함 께 간도로 이주하며, 그곳에서 국밥집을 경영하게 된다. 이용에 대해서는 숭고한 사랑을, 연적인 강쳥댁과 임 이네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이해를, 용이의 앋르인 이홍에게는 생보보다도 더한 헌신적인 애정을 발휘한다. 암 에 걸려 깊은 한을 남긴 채 이용의 품에 안겨 숨 거둔다. 김강쇠:지리산 화전민 출신의 숯구이로서, 김환에게 깊은 애저을 니끼며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심복. 김환이 자 살한 뒤 관수를 따라 부산에서 부두 노동운동을 노직하다가 발각되어 지리산으로 돌아온다. 지삼만에게 복수 할 기회를 엿보던 중 지사만은 다른 자에게 피살되고 만다. 백정의 외손녀인 송관수의 딸 영선을 아들 휘의 부인으로 맞아 들인다. 김두만:김이평의 장남. 목수 윤보를 따라 서울에서 목수일을 배우다가 진주에 정착한다. 본처 막딸이를 멀리 하고 작은집 쪼깐이와 함께 밥집과 술도가를 경영하여 치부한다. 아버지가 최씨 집안의 종이었다가 면천한 작 인이라는 과거를 은폐하기 위해 최씨 집안을 모략하고 평사리 사람들을 멀리한다. 김훈장:양반의 체통을 중시하며 유학에 기초한 전통적인 유리관과 기국관을 고수나는 몰락양반. 가문과 대를 잇기 위해 적국을 뒤져 양자를 얻은 뒤에, 윤보와 더불어 의병운동에 가담한다. 의병이 뿔뿔이 흩어지자 서희 일행을 따라 간도로 건너가 지내다가 병사한다. 박재연:연해주의 독깁운동가로서 박정석, 정호 형제의 숙부. 김두수에 의해 일본군에 넘겨져 처형당한 형의 원 수를 갚기 위해 김두수를 추적한다. 송영환:송장환의 장형으로 옹졸하고 그릇이 작아 가산을 거의 탕진한다. 용정촌 중과의 불미스런 소문을 핑계 로 부인 장씨를 학대하며, 이에 견디다 못한 장씨는 가출한 채 소식이 두절된다. 막일꾼 같은 아낙 염씨를 후 실로 맞아 용정에서 여생을 보낸다. 송장환:상민 출신으로 용정에서 손꼽히는 부를 축적한 송병문이 둘째 아들. 용정에서 상의학교 교사를 하다가 권필응을 따라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신태성:상해 임정 이동휘 계열의 돌립운동가. 독립지사의 딸 은혜와 동거생활을 하는 냉정하고 이론적인 인물 로서 자신과 노선이 다른 동지를 밀고하기도한다. 심금녀:김두수에 쫓겨 옛애인 윤이병을 차자 구원을 청하지만, 윤이명은 오히려 김두수이 수족으로 변신하고 만다. 김두수를 죽이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ㄷ김두수의 애인으로 오해받아 납치된다. 만주의 독립운동가 장인 걸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지만, 재차 김두수의 손에 떨어지게 되자 자살한다. 심운희(쎄리판 심):러시아에 귀하하여 연추에 살고 있는 교포. 부유하고 인품이 온화하여 독립지사들이 집을 드나들며 망향의 시름을 달래기도 한다. 윤도집:동학 잔당의 뛰어난 지략가. 포교와 교세의 확장을 중시함으로써 김환의 무장 투쟁 노선과 대립한다. 윤이병:심금녀의 옛애인이며 용정 상의학교 교사. 김두수의 앞잡이로 전락하여 만주를 전전하다가 김두수에게 살해당한다. 이용:성실하고 내성적이며 과묵한 성격의 농민. 평사리에서 제일 풍신 좋고 인물 좋던 사내로 월선과 초연을 겪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강청댁과 혼인한다. 월선에 대한 변함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고 강청댁의 극심한 투기 에 시달리면서도 부모가 맺어 육례를 올렸다는 이유로 가정을 유지한다. 강청댁이 죽은 후 말없이 떠난 월선 에 대한 그리움과 공허감을 이기지 못해 임이네와 관계하여 흥이를 낳는다. 월선과 다시 재회하나, 이번에는 앋르을 낳아준 임이네에 대한 도리를 지키기 위해 두 여자를 함께 거느리고 살아간다. 간도로 이주한 뒤 통포 슬로 들어가 중국인의 작인이 되어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사판에 벌목노동을 나서기도 한다. 서희 일행을 따 라 평사리로 귀향하여 그곳에서 죽는다. 이흥:이용과 임이네의 소생. 수려한 용모와 곧은 심지를 지닌 청년이지만 싱모 임이네에 대한 증오와 모멸의 감정으로 일그러진 성장기를 보낸다. 진주의 처녀 염장이와의 초연을 이루지 못하고 김훈장의 외손녀 허보연 과 결혼한다. 화물회사 트럭 운전수로 생활하다가 아비 이용의 임종을 지킨 후 가족을 이끌로 자신이 자라난 용정으로 이주한다. 공노인의 유산을 기반으로 신경에서 자동차 서비스 공장을 운영한다. 임이네:왕성한 소유욕과 잡초와 같이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여인. 남편 칠성이 최치수 살해사건에 관계되어 처 형당하자 평사리를 떠나 온갖 곡절을 겪을 끝에 다시 돌아와 이용과 동거한다. 이용과의 사이에 아들 흥이를 낳았으나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용이에 대한 소유욕이 금적에 대한 소유욕으로 바뀌어진다. 용정이 생활 을 거치면서 월선의 돈은 착복하여 이자놀이까지 벌이는 등 재산 소유에 맹목적인 집착을 보인다. 진주로 돌 아와 결핵성 복막염에 걸려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과 무참한 투쟁을 벌이다가 죽는다. 장인걸:귈필응의 오른팔 격인 만주의 독립운동가. 김금녀에게 연정을 느끼나 미래를 알 수 없는 자신의 생활 때문에 단념하고 만다. 훈춘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는다. 정석:조준구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정한조의 아들. 진주에서 물지게꾼으로 연명하지만 재능과 기개를 함께 같춘 인물이다. 서희의 조준구에 대한 복수에 일조하면서 학업을 계속하여 진주에서 학교 교사로 근무하 기에 이른다. 아편쟁이로 타락한 기화에게 마지막까지 애정어린 헌신을 보인다. 부인 양을례와 불화 끝에 갈 라서고 부산에서 비밀 조직에 착수하던 중 발각되어 한복을 따라 간도로 피신한다. 조병수:조준구와 흥씨 사이에서 난 꼽추 아들. 부모ㅢ 죄업에 괴로와하며 유리걸식하다가 소목꾼이 되어 통영 에 정착한다. 조준구:최참판댁의 먼 외가 친척뻘이 되는 인물. 개화 바람을 타고 일본인의 역관 노릇을 하기도 했던 교활하 고 소심한 성격의 악인이다. 최치수가 살해되고 윤씨부인이 호열자로 쓰러지자 서울의 가족을 이끌고 평사리 로 들어와 어린 서희를 몰아내고 최씨 집안의 모든 재산과 실권을 장악한다. 토지를 답로고 광산업에 진출했 다가 연속되는 실패 끝에 결국 서희에게 토지를 모두 되빼앗기고 만다.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자로 전락하여 말 년을 보낸다. 주갑:세속적 관습을 벗어나 좋은 목청을 내지르며 거칠 것 없는 방랑의 삶을 사는 자라도 출신의 인물. 지삼만:동학 잔당의 일원으로서 교세 확장을 우선시하는 논리를 가지고 김환과 대립하는 인물. 김환을 밀고하 고 청일교라는 사교를 만들어 교주로 군림하다가 치정 문제로 심복에게 피살당한다. 최윤국:형인 최환국과는 달리 정역적이고 행동이 앞서는 성격을 지닌 서희의 둘째아들. 진주고보 재학중 광주 학생의거를 계기로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청년의 혈기와 민족 현실의 우울함 사이에서 고뇌하다 가출, 온갖 고생을 겪은 후 귀향한다. 주막집 양녀 숙이에게 동정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며, 일본으로 건너가 농과 대학에 입학한다. 최환국:신중하고 사려깊은 성품을 지닌 서희의 큰아들. 서울에서 K중학을 마치고 와세다 대학 법과에 진학했 다가 동경 미술학교로 전학.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혜관:우관의 제자이며 그어 출신인 승려. 김환과의 인연을 계기로 동학 잔당들이 연락과 살림을 책임지게 된 다. 관수, 석이, 역학 등을 김환과 연결시키며,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조직이 구례, 서울, 용정까지 확충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김환이 죽고 조직이 침체되자 세 번째 만주행을 감행하며 그곳에서 종적을 감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