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토지2부2권 (5) 저자명: 박경리 출판사명: 솔출판사 토지 2부 2권 일러두기 1) 본문의 표기는 '표준어 모음' (1990. 9. 10.문화부 발표) 에 따른 교정(예: 읍니다 -> 습니다. 일찍기 -> 일 찍이 등) 외에는 원문을 따랐다. 2) 작가의 보충 설명이나 외국어의 번역은 괄호 속에 넣었다. 3) 낯선 어휘나 방언은 책 뒤에 '어휘 풀이' 란을 두어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4) 대화와 직접 인용은 " " 로, 생각과 강조는 ' ' 로 표시하였다. 토지 2부 2권 차례 제 2편 꿈속의 귀마동 15장 꿈속의 귀마동 16장 주구의 무리 17장 덫에 걸리다 제 3편 밤에 일하는 사람들 1장 땡땡이중 2장 나룻배 3장 산청장의 살인 4장 개화당의 반개화론 5장 귀향 6장 쪼깐이집 7장 홀어미와 기생 8장 출발 9장 정염 10장 사나이들 11장 옛 터전 12장 백정네 식구 13장 산놈으로 태어나서 14장 동행 제 4편 용정촌과 서울 1장 묘향산 북변의 묘 2장 부부 3장 목도리를 두르고 온 여자 4장 그들의 만남 5장 해는 저물어가고 6장 집념은 그의 고독 7장 그리웠던 사람들 8장 낭패한 주갑이 9장 발병 [부록] 어휘 풀이 제 2편 꿈속의 귀마동 15장 꿈속의 귀마동 찰상이 난 얼굴에 약을 발라주면서 조선인 조수는 "걱정 마십시오. 저 정도였으니 다행이지 뭡니까." 하고 길상에게 말을 걸어왔다. 약이 스며들어 상처가 쓰라렸다. 조수는 소독된 가제로 상처를 덮고 반창고를 잘라서 붙이며 다시 말했다. "혼수하는 것은 머릴 좀 다친 탓이고 다리뼈는 부러졌지만 병신이 되진 않을 겝니다. 뼈가 붙을 때까지 시일 이 다소 걸리겠지만요. 누이동생이세요?" 아까 의사가 한 말을 되풀이하는데, 누이동생이세요? 어감이 축축하고 은근하다. "아니오." "그럼?" 길상은 못 들은 척 반창고로 눌러놓은 가제를 만져본다. 용모가 헌칠한 편인 조수 눈에 실망 비슷한 것이 지 나간다. "얼굴에 손대지 마십시오." 갑자기 태도가 무뚝뚝해졌다. 서희가 입원실로 옮겨진 뒤 길상은 용정에 기별을 부탁하기 위해 복지 곡물상을 찾아갔다. "아니 얼굴은 왜 그리 되었소?" 하며 은씨는 의아해하다가 길상이 대강 형편을 설명하자, "저런! 아니 무슨 놈의 변이오?" 눈이 휘동그래진다. 길상은 내일 아침 용정으로 사람을 보내달라 부탁하고 몇 자 적은 쪽지를 내민다. "무슨 놈의, 어이구 생판 날벼락을 맞았구먼. 이애 복애야!" 평소 나직한 음성을 높이니깐, 우스꽝스런 기성으로 들린다. 딸아이가 놀라서 쫓아나온다. "여기 미음 한 그릇 내오너라. 마침 속이 안 좋아서 미음을 쑤려 했더니, 어서 한 그릇 내와, 북새통에 언제 속을 차렸을라구." 따근따근한 미음 한 그릇은 고맙다. 미음이 목구멍 속으로 흘러 들어가자 비로소 길상은 추위와 허기를 느낀 다. 은씨는 옆에서 연신 지껄이고 있었다. 아직 혼수 상태에 있다 그 말이냐, 병원에서 내는 음식을 먹겠느냐, 집에서 미음을 쑤어 갈 테니 걱정 말라, 이럴 때 도와야잖겠느냐, 등등 하찮은 선심을 튀겨서 부풀려서. 미음 한 그릇을 비운 길상은 일어섰다. 한보따리 안겨준 은씨의 속 빈 선심을 이리저리 흩날려버리듯이 길상은 어두워진 거리를 거닐어 병원으로 돌 아온다. 바람은 살갗을 찢을 듯 차다. 건물에서 새어나온 등불빛이 얼어붙은 거리에 희미하게 깔려 있고 먼곳 병영 쪽에서 섬찟한 종 소리가 울려오곤 한다. 입원실로 들어온 길상은 벽면 쪽에 붙여놓은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는다. 피곤이 몰려오고, 미음 한 그릇 덕분 에 시장기는 가셨으나 기력은 없다. 긴장이 풀린 탓이겠는데 앉은 채 한잠 자보려고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뼈 부러진 데는 똥물이 제일이라든가?' 뼈 부러진 데 똥물을 먹인다는 것은 농촌에서 흔히 듣는 얘기다. "뼈 부러진 데는 똥물이 제일인 기라. 그기이 넘어만 가믄 되넘어오지 않는 기이 희한하거든." 산에서 헤어진 박총각, 그 당시 삼십을 넘었던 사내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모닥불을 피워놓은 어느 골짜기의 밤이었던 것 같고, 비탈에서 굴러 팔을 삔 열일곱 살짜리 오동이라는 아일 보고 한 말이었다. "남 모함한 놈한테 퍼먹이는 거이 똥물이라 카더마는 상놈들 빼 부러진 데는 그거이, 선약이니, 흥! 약까지 더 럽고 천하고나." 휘파람 불 듯 어둠속에 침이 날아갔었다. "내 소싯적 일이지마는, 세도깨나 쓰는 어떤 양반놈 문전에서 담배를 피웠거든. 그랬더니 흥, 방자한 놈이다 그거지. 그놈의 집구석 하인놈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나를 패는 기라. 나도 힘깨나 쓰는 놈이고 보니 그냥이 야 맞겄나? 몇 놈 작살을 내놨더니 일이 크게 벌어질밖에, 하하하하. 그때 내 꼴이란 모리꾼에 쫓기는 짐승 한 마리라. 중과부적, 별 수 없는 노릇이제. 만신창이가 되고 허리 빼를 뿌라서 달포를 기동을 못했는데 똥물을 묵고 게우 일어났거든. 제에기랄, 무슨 놈의 귀코 귀한 목심이라고, 지금 생각하니 가소롭다야. 이리 굴리도 천 하고 저리 굴리도 천한 목심, 하하하하. 똥물 묵고 부지했다 그거거든." 박총각은 장사였었다. 한때는 임꺽정같이 되는 게 소원이었다고 했고 동학 잔당의 한 사람으로 의병에 합류했 던 것이다. 식량이 큰 그는 노상 배고파했으며 세상을 원망하고 심사가 좋지 않을 때 누가 조금이라도 거스르 기만 하면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휘두르며 광태를 부리곤 했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맥락도 없는 지난일이 불쑥 솟았다간 가라앉고, 지난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 잠 안 오는 안 막을 어지럽힌다. 몇 시쯤 됐을까. 자정이 넘은 것 같은데 서희는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기가 어디야?" 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묻는다. "병원입니다." "병원?" 용정서 오실 때 병원 가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말씀대로 된 거지 뭡니까?" 반가워서 가슴이 뭉클한데 길상은 화난 소리로 오금을 박는다. "앞으론 그러지 마십시오" "길상이 네가 왜 걱정이지? 누구 훈계하는 게야?" 왜 병원에 간다고 거짓말을 했는가? 그 원인과 결과가 한꺼번에 상기되어 그러는 걸까. 서희 얼굴에 독기가 피어난다. "귀찮아서 그렇지요." 이번에는 들떠서 길상이 말한다. "그럼 가버리면 될 거 아냐?" "귀찮아도 별도리가 있습니까? 가버릴 수 없지요." "누구 놀리는 게야?" 서희는 휙 돌아누우려다 꼼짝 않는 한쪽 다리, 군데군데 입은 타박상의 맹렬한 통증 때문에 신음한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 "갑갑해도 참으셔야 합니다. 뼈가 붙을 때까진, 뼈는 부러졌지만 잘못될 염려는 없답니다." "듣기 싫어! 더 이상 지껄이면 여기서 뛰어내릴 테야. 병신이 되면 어떻다는 게지?" "." "상관 말어!" 서희는 설움이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차오르는 눈치다. 길상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기뻐서 안도에서 그러는 것을. "이까짓 다리 하나 부러지면 어때? 눈이나 깜짝할 줄 알어?" 악몽이다. 그것은 순전히 악몽이다. 서희의 음성을 듣고 있는 길상은 눈이 희끗희끗 쌓인 언덕 아래서 망가진 인형처럼 기절한 서희를 안고 미친 듯이 입김을 불어넣던 그때 얼굴, 입술의 감촉을 기억할 수가 없다. 실낱 같은 숨결을 뽑아내는 서희를, 솜두루마기를 벗어 싸안고 언덕 위로 올라온 일, 그곳서 십 리를 걸어 마을에 당도한 일, 마차를 빌려 회령까지 달려온 일, 그 밖의 일을 기억할 수가 없다. 마차 바퀴가 눈앞에서 아물아물 선회하고 있을 뿐, 눈발위의 선혈이 망막 속에 조금 남아 있을 뿐 다른 죽음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다. 서희의 노여움은 어쩌면 입술 위에 닿은 길상의 입김, 그 기억이 부끄러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복지 곡물상에 가서 부탁을 해놨습니다. 용정에 사람을 보내달라구요. 월선아지매가 오시는 게 좋을 듯싶어 서," 서희는 가슴 위에 두 손을 깍지끼면서 대꾸가 없고 길상은 의자에 등을 바싹 붙이며 침묵과 밤과, 병신의 공 간과의 대결을 준비한다. 이상한 마을이었다. 마을이라기보다 이상한 곳이라 해야 옳았다. 몇백 년을 묵었는지 연륜을 알 수 없는 늙은 수양 한 그루가 넓은 둘레에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었다. 수양 그늘에 의지하듯 초막하나가 있었고그 옆에는 초막보다 반듯한 마구간 건물이 있었다. 허허한 벌판에 나무라 곤, 그리고 집이라곤 그것뿐이었다. 수양버들과 초막과 마구간. 한낮의 햇빛이 금싸라기같이 튀고 있었다. 말을 빌릴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길상은 나무 그늘을 향해 걸어갔 다. 흰 수염이 앞가슴을 덮은 노인이 탁자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어JT다. 청나라 늙은이 모습이다. "좀 쉬어가겠습니다." 길상은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고 말했다. "그러시오." '?' 조선말이었던 것이다. 길상은 나둥그러진, 상자같이 생긴 걸상에 앉았다. "차 한잔 드시려오?" 노인이 물었다. "네, 주십시오. 목이 타는 것 같습니다." "그럴 테지." 주전자를 기울이며 노인은 차 한잔을 따라준다. 차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고 갈증이 났던 참이어서 길상은 단숨에 마셨다. 차맛은 좋았고 매우 향기로웠다. "잘 마셨습니다." 찻잔을 탁자 위에 놓으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노인은, "젊은이." 하고 불렀다. "네." "혼자 왔다?" 노인은 뇌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길상은 노인의 모습이 우관스님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 동리의 이름을 뭐라 하는지요." "뭐 동리랄 것도 없겠소만, 이름이 있긴 있지. 귀마동이라 하오." "귀마동이라구요?" "돌아올 귀, 말 마, 귀마동이오." "이상한 이름이군요. 귀마동." 길상은 초막보다 큰 마구간 쪽으로 눈을 보낸다. '귀마동, 귀마동. 말을 비릴 수 있겠구나.' "어르신." "말해보시오." "눈에 보이는 것은 허허벌판인데 이 근처에는 도통 인가가 없느 모양이지요?" "그렇소." "어르신께선, 다른 식구가," "." "혼자 사시는 지요." "그렇소." "아무도 없이, 정녕 혼자 사시는 건가요?" "말 두 필 이왼 강아지새끼 한 마리 없고, 그뿐이겠소? 이 귀마동에는 들짐승 날짐승도 없다오." "그럴 리가," 노인은 방그레 웃는다. 길상은 우관스님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사방을 둘러보시오. 지나가는 철새들도 쉬어갈 나무라고는 이 버들 한 그루요. 풀 한 포기가 없는 불모지에 들짐승인들 어찌 목숨을 부지하겠소? 해가 지면 달이 뜨고오, 그렇지, 달이 지면 해가 또다시 솟아오르고 세월 이 가는 것도 아니요 아니 가는 것도 아닌, 들리는 거라곤 바람 소리뿐. 움직이는 거라곤 구름 조각뿐이라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서 혼자 사시게 되셨습니까?" 노인은 먼 지평선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출가한 몸으로서 정행을 아니 하고 십계를 지키지 아니 한 업보 탓인 듯하오. 이곳은 정처 아닌 허공산야, 고 독지옥이오." "." "젊은이." "네." "젊은이는 어째 혼자왔소?" "아까도 어르신께서 혼자 왔느냐고 물으시었지요?" "물었소이다." "혼자 온게 뭐 잘못된 일인지요. 무슨 까닭이라도," "까닭이 있지. 내 이곳에서 칠백 년을 살고 있소이다만 혼자 찾아온 나그네는 젊은이가 처음이니 하는 말이 오." "칠백 년을 이곳서 사시었다구요!" 길상은 소리를 질렀다. "그렇소. 말이 돌아오지 않아야만 이곳을 떠날 수 있을 텐데 말이오." "칠백 년을, 그럴 수가!" "놀라기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부러졌다는 얘기를 못 들었구려." "그, 그렇다면 어르신께서 신선이다 그 말씀이오?" "하하핫. 하하 신선이긴, 이곳은 신선 사는 곳이 아니라 고독지옥이래두. 나는 그저 마구간의 말이나 지켜주는 마부에 지나지 않소." "그래요? 혼자 찾아온 나그네로선제가 처음이라. 어째 그랬을까요?" "그걸 몰라서 나도 물어본 게요. 반드시 두 사람이 찾아왔었지. 사내와 여인이 함께." "사내와 여인이? 이곳에 오는데 그럴 만한 약속이라도 있다 그 말씀이오?" "약속이라... 약속이라... 아니지. 그건발원 때문이지." "무슨 발원입니까." "이 벌판을 지나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자꾸 내려가면 강이 하나 있소. 그 강을 건너가려고, 그 강은 혼자 외롭 게 건너는 황천길의 삼도천하고는 달라서 남녀 한 쌍이 건너는 강이오. 건너기만 하면 사내와 여인에게 이별 이 없어진다는 게요." "그래서 모두들 그 강을 건너갔나요?"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참을 있다가 노인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단 한쌍도 건넌 일이 없었지." 단 한 쌍도 건넌 일이 없었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서 도리어 길상은 서희를 데려올 것을 그랬다 싶어 후회를 했다. '서희는 도망칠 생각까지 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서희는 분명히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어째서 강을 못 건넜을까요." "젊은이는 이 동리 이름을 물었었소." "네, 물었습니다." "귀마동, 말은 돌아온다는 뜻이오. 돌아온다는 것ㅇ느 강을 못 건넜다는 게 아니겠소? 이곳을 찾아드는 사내와 여인은 아름답고 씩씩하고 그리고 젊지. 아암, 젊고 말고. 샛별 같은 눈들을 하고 있지. 여인은 장다리순같이 연한 발목이요, 사내는 참나무같이 단단한 몸집... 흐흠." "..." "사내와 여인이 이곳을 찾아오면 나는 말 두 필을 마구간에서 내어주는 게요. 그네들이 말에 오르고 나란히 떠날 때 이르는 것은 말고삐를 놓으면 죽는다는 말인데 그 말을 세 번 되풀이하지. 말고삐를 놓으면 죽는다구. 해가 떨어질 무렵, 그들은 건너갈 강을 향해 떠나는 게요. 나란히 떠나는 말 두 팔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명경 같은 둥근 달이 떠오르지. 벌판 저 너머 말 두 필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저녁 이슬을 맞으며 나는 바라보는 게요. 제발 이번에는 돌아오지 말아라 빌면서 말이오. 그러나 그들은 어김없이 돌아왔었소. 말 한 필은 서쪽에 서 돌아오고 다른 한 핀은 동쪽에서 돌아오는 게요. 실은 그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말이 돌아오는 거지만. 한데 사내와 여인은 옛날의 그들이 아니오. 아니거든. 머리칼은 햇볕에 타서 삼을 모양으로 누렇게 뜨고 얼굴 에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굵은 주름, 거미줄 같은 잔주름, 이빨은 빠져서 양볼이 꺼지고 파파할멈 할아 범의 모습들이오. 허나 그보다 슬픈 것은 사내와 여인이 서로를 알지 못하며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일이었 소. 그네들은 타인이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게요. 제가끔 자기 갈 길을 탄식하는 게지." 노인의 목소리는 저승길을 방황하는 망령의 목소리와 흡사했다. "그들은 어째서 백발이 되도록 강을 건너지 못하고 돌아왔을까요. 왜 서로 헤어져서 동쪽과 서쪽에서 돌아왔 을까요." "끝도 없는 벌판을 가다보면 지치고 정신이 멀어지고 그리고 심한 졸음이 오는 게요. 사람을 태운 채 말이 혼 자 저절로 가는 게지. 그네들은 말고삐를 잡은 채, 나란히 가던 말과 동과 서로 갈라지면서 차츰차츰 멀어지면 서 그리고 되돌아오는 것을 모르거든." "차 한잔 더 주십시오." 노인은 찻잔에 차를 부어준다. 역시 차맛은 좋았고 향그러웠다. "한데 꼭 한 쌍 이곳서 떠나 돌아오지 않은 사내와 여인이 있긴 있었지." "강을 건넜다 그 말씀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다시 고개를 저으며 구름을 쳐다 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해거름에 말 한 필이 돌아왔었지. 그건 빈 말이었소. 여인이 죽은 게요. 말고삐를 놓아 말에서 떨어 져 죽은 게요." "사내는요!" "가다가 역시나 그들은 서로 모르게 길이 갈라졌을 게구 그러다가 뒤늦게 깨달았을 게고 찾아 헤맸었겠지. 그 러다가 필시 여인은 말에서 떨어져 죽었을 게요." "사내는 그럼 돌아왔습니까!" "아니, 아직도... 벌판을 방황하고 있겠지. 벌판을. 말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말이오." "어르신!" ".." "그럼 그 돌아온 말 제가 탑시다!" "어쩌실려구." "혼자 강을 건너보겠소!" "허허허." "혼잔 못 가는 곳이란 말씀이오? 그럼 좋소이다. 내 그 방황하는 사내를 찾든지 아니면 죽은 여인을 찾아오겠 소." "여인은 흔적도 없어졌을 게고 짝을 잃은 말도 이미 죽었소." "저기 마구간이 있는데도요?" "본시 네 필이었는데 두 필이 남아 있을 뿐이오. 한데 자네, 죽은 그 여인이 누군지 아나?" 별안간 노인의 어투가 싹 달라졌다. 다음 순간 크게 소리내어 웃던 노인은 길상이 귀에 입술을 바싹 갖다 붙 였다. "그 여인은 바로 서희의 모친 별당아씨였느니라." 소곤거렸다. "뭐라구요!" "여인을 찾아헤매는 사내는 구천이, 알겠느냐? 구천이놈이야. 으하핫... 하하핫," 입을 크게 벌리고 벽력 같은 소리를 내며 웃는다. "으하핫핫핫..." "스님! 우관스님!" "으하핫핫... 하핫핫... 이놈 길상아." "네, 스님, 스님! 길상이올시다!" "이놈 길상아! 너 여기 뭐하러 왔느냐! 돌아가지 못할까! 이 천하에 못난놈 같으니라구." 찢어질 듯 입을 크게 벌리고 호통을 치는데 입안이 새빨갛다. 혓바닥은 불길같이 널름거린다. 혓바닥은 불길이 된다. 활활 붙는 불길이다. "스님!" 외치다가 길상은 제 목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떴다. 꿈이었다. 병실 의자에 앉아서 잠이 들었던 것이다. 길상은 몸을 부르릉 떤다. '낮에 마차를 빌리느라 애를 썼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꾸었을까?" 너무 생생하여 꿈을 꾸었다는 생각이 들질 않는다. 귀마동이란 이상한 마을에 방금 다녀온 것만 같다. 무슨 착 각일까. 낮에 겪은 현실은 꿈 같고 방금 꾼 꿈이 현실만 같으니, 길상은 오싹오싹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며 몸 을 움츠린다. 난로에는 불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겨울 밤에 한여름 낮의 꿈을 꾸다니,' 그새 서희는 잠이 깊이 든 것 같다. 반듯이 누운 몸의 부피는 침대 수평과 거의 엇비슷, 사람이 누워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다만 다리 부분 쪽이 솟아올라서 새까만 창유리에 곡선을 그어놓고 있다. 아무 소리도 기척도 없 는 밤, 어떤 일과도 상관하지 않는 정적이 메스꺼움을 느끼게 할 만큼 냉랭하게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서희는 죽지 부러진 새가 되어 누워 있다. 죽지 부러진 하얀 새 한 마리. 하얀 새는 죽어 있는 게 아닐까? 꿈속에서 들었던 얘기처럼, 그 별당아씨의 소식처럼 하얀 저 새는 죽어 있는 게 아닐까? 돌연 엄습해온 공포가 길상의 덜미를 친다. 손끝에 닿으면 싸늘한 시체일 것 같다. 가까이 다가서서 서희 쪽으로 몸을 기울인 길상은 숨소리 를 듣는다. 미동이 없는데 그러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다물린 엷은 입술에서 체취가 풍겨나온다. 차가운 얼 굴이다. 눈시울이 숨결에 나부끼는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 같다. 입술이 서희 얼굴 가까이... 볼에 닿는다. 마 약같이 괴로운 환희가 심장을 친다. 급기야는 격류가 된다! 물보라가 된다! 격류를 휘어잡으며 길상은 물러선 다. 상쾌한 땀에 전신을 적시고 물러서는 순간 모든 속박에서 풀려난 것을 길상은 느낀다. 끈질기고 집요했던 속박, 격류는 파도가 된다. 파도가 밀려온다. 포효하면서 달려오는 것이다. 산더미 같은 거대한 파도가 그에게 무너져온다. 사나이의 무한한 자신, 거칠고 힘찬 야성이 드디어 춤을 추는 것이다. 길상이 의자로 돌아와 앉았을 때 복도에서 슬리퍼를 끌며 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끊어진 다음 찻 잔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온다. 새벽이 다가오는 것이다. 매식을 하면서 이틀 밤을 보낸 길상은 다시 밤을 맞이하기 위해 저녁을 먹으려고 입원실을 나서는데 "좀 어떠시오?" 조수가 물었다. "기분은 좋은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길상을 따라 나란히 걸으면서 조수는 담배를 꺼내어 권한다. "고맙소." 불을 붙여문다. "입원하신 분, 누이동생이 아니라 하셨는데 그럼 어떤 사이신가요." 그간 무뚝뚝하게 대하던 조수는 아무래도 궁금증을 풀지 않곤 베길 수 없었던지 체면 불구하고 묻는다. "내 처 될 사람이오." "아아 그러시오." 길게 빼는 어투에는 좋잖은 심사를 무마하려는 노력이 있다. 길상은 곁눈질을 하며 싱긋이 웃는다. '이 친구 다시 무뚝뚝해지겠구먼.' "그러고보니 형시도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래요?" "그 얼굴에 흠집이나 남지 말아야겠는데, 그렇지요?" 흠집이 남아라 하는 말과 다름이 없는, 선망에 일그러진 조수의 표정이다. 계집애처럼 샐쭉한 태도로 조수는 약제실로 들어가고 길상은 병원을 나온다. 몇 발짝을 가지 않았는데 "아이구 길상아!" 여자 목소리에 얼굴을 든다. "아, 아지매." 월선이는 바삐 다가오고 기별하러 갔었던 복지 곡물상의 일꾼은 길상한테 인사를 하고 나서 가버린다. "애기씨가 우, 우떻게 되셨노?" 추위에 입술이 새파랗다. 월선은 수박색 솜두루마기를입고 흰 명주수건을 여러 겹 돌려서 얼굴을 싸맸으며 목 이 긴 털장갑을 끼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지금 주무시는 거를 보고 나왔는데 아지매는 곧장 오시는 길이지요?" "운냐." "그럼 저녁을 먹고 들어갑시다." "저녁이고 머고 무슨 경황에, 정말로 애기씨는, 별일 없겠제?"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나 지금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이니까요. 자아," 길상은 월선이 등을 밀다시피, 그들은 밥집으로 들어간다. 저녁 두 상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앉았는 동안 길상 의태연한 태도에 안심이 되었던지 월선은, "혼자서 니가 욕봤구나." 하고 말했다. "운수가 좋았지요. 다리뼈가 좀 잘못돼서 그것 때문에 여러 날 병원에서 묵어야 할까 봐요. 나는 용정에 가야 하니까 아지매를 오시라 했지요. 장사를 못해서 미안하지만요." "별소리를 다 한다. 장사고 머고, 마차가 없어졌다 카길래 처음에는 놀랬다. 참말로 잘못되는 거는 아니겠제?" "뼈만 굳어지면, 그럴 염려는 없을 거라 의사가 장담합디다." "그만 되기 천행이다." 월선은 얼굴을 싸맨 수건을 푼다. 방안 훈기에 새파랬던 얼굴이 벌개지고 있다. 길상은 새삼스럽게 월선이 많 이 여윈 것을 깨닫는다. '늙었구나.' 옥이네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마음바닥에 날카로운 손톱자국을 남겨 놓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다. "용정에는 별일 없겠지요?" "무슨 일이 있겄노." 밥상이 들어왔다. "아침도 제대로 못 들었을 건데 다 자셔야 할 겝니다. 애기씬 밤에 통 주무시질 못해요. 대신 낮에 눈ㅇ르 붙 이는데 한밤중이 되면 허기가 돌지요." 월선은 길상의 얼굴을 쳐다본다. 눈이 움푹 들어간 얼굴에 반창고는 없었지만. "상채기가 났구나." 밥을 먹는 동안 월선은 뭔지 모르게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고 망설이는 기색을 보인다. "길상아." "야." "나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여기 옴시로." "누군데요?" "와 그 윤선생이라고 홍이 핵교 선생질하던 사람, 니도 알제?" "알지요." "우리집에 국밥도 잡수로 오시고 해서, 홍이 핵교 선생이고 해서 인사를 했더마는 와 그리 놀래는지 모르겄더 라. 머하러 회령 왔느냐 하길래 애기씨 다친 얘기를 했지. 그랬더니 어찌나 꼬치꼬치 묻던지," "그 사람이면 뭐 이상할 것도 없지요." 월선의 말을 잘라버린다. 강가에서 두들겨팬 일이 생각나기는 했지만 길상은 대수롭게 여기질 않았다. "그기이 아니고... 그러세, 나도 지금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건데 세상에는 흔히 닮은 사람이 있기는 있더라마 는." "누굴 만났기에요." "저어 김평산이 그, 그 사람." 말을 해놓고 월선은 겁먹은 눈으로 길상을 쳐다본다. "죽은 지가 십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오지요?" 의아해하며 월선을 바라본다. "그, 그걸 모르나. 그래도... 살았이믄 오십이 다 돼갈 건데." 얘기를 한다기보다 월선은 생각을 하며 말을 흘리는 것 같다. "아무래도 서른 살은 가깝게 보이든데, 그러니까 내가 하동에서 주막을 할 적에는 그 사람 나이가... 서른 네댓 인가, 처음에는 윤선생보고 인사를 하느라고 몰랐는데 옆에 있는 거를." "그럼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 말입니까." "음. 함께 노상에서 얘길 하고 있더마. 잘 아는 사인가부던데..." "잘 아는 사이라구요?" 비로소 길상의 얼굴이 긴장한다. 월선은 여전히 생각을 하며, 생각을 흘리듯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무심결에 눈이 마주치는데 하마 내 입에서 말이 나올 뻔 했다. 머리끝이 좁으당하고 눈두덩이 부숭부숭하고 뻐드렁니 그게 앞으로 나오고 좁은 이마에 줄 간 것까지... 김평산이 그 사람을 비로 면대하는 것 같아서, 돼지 상, 음 그런 얼굴이 어디 흔해야 말이지. 섬찟한 생각이 들면서도 자꾸 쳐다봐지는데 그쪽서도 마음이 씌어 그 럴까? 나를 아는 것 같은, 아는," 길상은 밥알을 씹으며 생각에 잠기다가 말을 편다." "김평산이 그 사람한테 아들 형제가 있는 걸 아지매도 아시지요." "그러모, 알지. 둘째아아는 심덕이 고바서 내가 데리고 있을라 카기도 했는데." "큰아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 "그 아아사 못 봤구마." '거북이라고 형편 없는 망나니였지요. 나보다 한 살 위였든지 그러니까 삼십 가까이는 됐을 겝니다. 한복이는 어머니를 닮았고 거복이 그놈은 지 애비를 서윰 용모 그대로 닮았지요." "그렇다믄? 그 사람 큰아들일 기라 그 말이가?" "제가 보지 못했으니 뭐라 할 순 없지요. 세상에는 닮은 사람도 많고... 하지만 윤가 그놈하고 아는 사이라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긴 듭니다마는," 윤선생이 아니고 윤가 그 놈이라는 말에 월선이 놀란다. "윤가 그놈은 행실이 좋지 못해서 학교에서 쫓겨났지요." "쫓겨났다고?" "야, 몰랐습니까?" "그러사 머..." 월선은 또 뭔지 우물쭈물한다. "그러니 아지매도 홍이 선생이거니 생각지 말고 가까이하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밀정의 앞잡이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그러다보니 말의 내용이 묘하게 되어버렸다. 길상은 좀 당황한다. "행실이 좋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수상쩍은 데가 많아서요.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거든요." 부언한다. "수상쩍은 데가 많다믄... 그, 그러고본께, 아닌게 아니라 이상타 싶기는 시피더라마는." 역시 월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는 얼굴이다. "뭐를 어쨌기에요." "이런 말을 해서 좋을지 모르겠다마는 저어 송애 그 아아한테 편지질을 자꾸 하는 모양이더마, 나도 맘속으로 는 선생질하는 사람이 남으 체니아아한테 그라믄 안 되는데 하고,"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어세가 강해진다. "며칠 전만 해도," "아니 그럼 며칠 전까지 용정에 있었다 그 말입니까?" "그, 그런갑더라. 하숙집에 국밥 날라달라고도 하고, 송애가 더러," 길상은 단순한 일이 아닌 것을 확실하게 느낀다. 윤이병이 용정을 떠나지 않았고 더군다나 송애에게 접근한다 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서희가 부상당한 일을 꼬치꼬치 묻더라는 조금전의 월선의 말도 상기된다. '그럼 그 돼지상의 사내는? 설마 거복일까?" 16장 주구의 무리 '저 여자가 무당집 월선이고 이서방을 따라왔다 그거야? 임이어맨가 칠성이 계집인가, 그 여잔 이서방 아들을 놨다... 흥! 인연치고는 고약하구먼. 고약해.' 이맛살을 모으며 월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김두수 입가에 일그러진 웃음이 맴돈다. 무당집이라면 생생한 기억이다. 잡풀이 우거진 폐가였던 그집, 깨어진 질그릇이며 퇴색한 종이꽃들이며 짚 썩은 물이 간장처럼 늘 괴어 있던 뒤란 처마밑이며 솥은 누가 걷어 갔었는지, 허무하게 뚫어진 솥 건 자리에선 썰렁한 냉바람이 불었 었다. 그 솥 없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남의 콩밭에서 베어온 풋콩을 구워먹은 게 몇 번이었던지. 집에서 쫓 겨난 밤이면 흙바닥이 된 그 퇴락하 s방에서 더러 잠을 자기도 했었다. 그러나 기두수는 월선의 얼굴을 기억 하지 못한다. 월선이 마을을 떠날 때 두수는, 아니 거복이는 어린아이였었다. 돌아온 월선은 읍내에 주막을 차 렸으므로 만나본 일은 거의 없었다. 처음 용정의 그 움막 근처에서 용이를 만났던 날만 하더라도 물동이를 들 고 오면서 우째 그라요? 하던 여자를 설핏 보긴 보았으나 사투리에 당혹했을 뿐 김두수는 고향의 무당집 월선 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월선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거둔 김두수, "가만 있자아." 뭉긋이 피어오르는 원한의 지난날을 아래로 아래로 밀어내리는, 힘든 순간을 겪는 것일까. 옆에 선 윤이병을 험상궂게 쳐다본다. "지금부터면 좀 이르겠고... 일단 여관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군. 저녁이나 먹고 나서." 중얼거리며 발길을 떼놓는다. 윤이병도 함께 걸음을 옮긴다. 작은 체구를 감싼 혈겨운 외투는 낡고 초라하다. 소년티가 감돌던 해사한 지난날 얼굴은 찬바람에 바스라진 듯 거칠고 궁기가 역력하다. 불과 한 달 남짓, 새 양복에 머릿기름 냄새를 풍기던 모습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김두수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윤이병은 널찍하고 두툼한 김두수 등바닥에 증오와 공포, 자포자기한 눈길을 보내기도 하고 전봇대 꼭대기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공연히 마주치는 행인을 왜순사같이 거드름을 피우며 째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보아도 자신이 초라 하기만 하다는 것을 느꼈던지 땅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만다. "감주사."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가짜배기 상아 물부리를 물고 있던 여관집 주인 사내는 대기하고 있었던지 김두수를 반 긴다.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와 앉으려는데 다시 김주사 하며 주인 사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또 왜이러시오? 조씨가 이러면 나는 바빠질 걱정부터 먼저 하게 되더군요." 김두수는 꽤나 점잖게 말을 하고 십여 세나 연장인 주인 사내는 희뭇이 웃는다. 이들 사이는 단순한 주객만은 아닌 듯하다. "술상 내오라 했으니 저녁은 나중으로 미룹시다." 굵다란 눈이 긴 얼굴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데 윤이병은 안중에 없는 태도다. "우린 저녁먹고 갈 곳이 있소." "허허 내 김주사 갈 곳 알지. 술 좀 마시고 갔기로 뭐 나무랄 위인도 아니겠고 김주사 처지도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소?" "내 그럴 줄 알았지. 하하핫..." 김두수는 만족스럽게 웃는다. "하기야 양경부 그 사람 나한테는 꼼짝 못하지. 근엄하고 거룩한 척하지만 여보게 김군, 날 좀 봐주게. 여보게 김군, 아무개한테 말 좀 잘해주게. 하하핫..." 목소리 흉내를 내고서 웃고 주인 사내도 웃는데 윤이병은 웃지 않고 자기에게는 대접이 소홀한 주인 사내를 올곧잖게 쳐다본다. 주인 여자가 손수 술상을 차려왔다. "김주사 오랜만이오." "호들갑인지 거짓말인지 등치고 간 빼먹는 소리 그만 하소. 아침에 보구서 오래간만이오?" "어째 그리 인정사정도 없으실까? 술상 들여오는 게 오래간만이다, 그 얘기 아니오?" 주인 여자는 헤실헤실 웃는다. "그거야 내 탓이오? 아주머니 탓이지. 언제 내가 술상 마답니까?" "아니구 이래서 김주사를 못 당한다니까?" "그저 그저, 젊은 사내라면 사죽을 못 쓰거든." 주인 사내가 혀를 두들기는데 아마도 이들 수작은 이들 내외의 환대 방법인 모양이다. 사내뿐만 아니라 여자 도 윤이병은 종시 안중에 없는 태도다. "영감 눈 무서워서, 그럼 김주사 난 물러갑니다." 여자의 흰 버선발이 문지방을 넘고 방문이 닫혀진다. "윤선생이라 하시든가?" 사내는 또다시 굵은 눈망울을 굴린다. "그렇소." 윤이병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 양어깨를 치켜든다. "주인장, 거 잘 봐주슈. 우리네보다 유식쟁이다, 그거요. 하하핫..." "자아 내 잔 받으시오." 주인 사내는 눈동자를 감추고 술잔을 내민다. 윤이병은 반 울상이 되어 그러나 거칠게 술잔을 받아든다. "선생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 했는데 젊은 양반이 뭣 땜에 고생길에 드셨소? 술이 넘쳤구먼." "술은 잔에 넘쳐야 하고 계집은 품에 들어야 한다잖소? 거 양경부의 풍류담이지만요." 김두수는 의식적으로 양경부를 들먹이는 것 같다. 윤이병은 술 비운 잔을 주인 사내에게는 돌리지 않고 김두 수 앞에 내민다. "형님 잔 받으세요." 일개 여고나 주인으로밖에 생각지 않는 윤이병은, 자기 처지를 정확하게 아는 주인 사내보다 훨씬 우둔했다. 김두수는 느긋해져서 술잔을받으며 말했다. "주이장!" "예, 김주사." "부탁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온 사람도, 숨넘어가겠소." 고분고분하는 것만도 아닌 성싶고 실상 김두수도 지껄이는 말과는 달리 상대를 한수 놓고 대하는 것 같다. "부탁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그놈의 숙박곈지 뭔지 골치가 아파서 말이오. 어디 지금까지야 그런 게 있었소?" "그러니 지금까진 여관업이 아닌 객주업이었다 그거 아니겠소?" "허허어, 이 사람이?" 주인 사내 어투는 차츰 내리막길이다. "칠팔 년을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인데 김주사가 그러면 남이 뭐랄까? 언제 우리집에 명태짝 쌓인 것을 보았 었소? 셈찬 아제비가 참기로 하고." 사내는 또 희뭇이 웃는다. 웃음소리를 내는 일이 없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는, 왠지 기분 나쁜 사내라고 윤이병 은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다. "지난 칠월이든가 그놈의 숙박 규칙이라는 게 생겨서 아주 귀찮게 됐다, 그 말인데 이십사 시간 내로 신고하 라, 새 법이지. 안 하던 일을 할려니 자연 잊기도 쉽고, 일전에는," "벌금 물었군요." "벌금뿐인가요? 잘못하면 구류 처분까지 한답디다." "설마 조씨가 그런 꼴이야 당하겠소오? 눈에 명태 껍데기 붙이지 않은 다음에야." 주인장이 되고 조씨가 되고, 알쏭달쏭한데 윤이병이 순각 속을 차리는 모양이다. "그야 그렇겠지만 성가시다 그거지." "앞으론 이 친구한테 부탁하시오. 안성맞춤일 게요." 김두수는 윤이병을 손가락질하며 가리켰으나 주인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실상 벌금쯤은 별게 아니고 경찰서에서 사람이 자주 나오게 되면 여관업에 지장이 있다 그거요." "그렇지만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회령이 길목이니까 엄중히 하긴 해야잖겠소." "그걸 뉘 모른답디까? 나도 허수아비가 아니니 내게 맡겨라 그거지. 나중에 앵경부 만나거든 김주사가 말 좀 하시오." "알았소, 알았소이다." 김두수는 미묘하게 웃다가 "실적을 올리겠다 그거지요?" "그렇지, 장사도 하구요." 눈까풀을 치올리니 굵은 눈망울이 또 움직인다. 윤이병을 보면서 말은 김두수에게, "빤히 아는 일인데 하기야 새삼스럽긴 하지."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김두수는 다부진 산도야지요. 사내는 구렁이다. 목이 길고 느슨한 사내, 담쟁이 속을 스멀스멀 기어가며 이파리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숨겼다 하는 구렁이를 산도야지가 바라보며 시죽시죽 웃는다. "요즘 장사는 어떠시오?" "어느 장사?" 반문하다가 사내는 "요즘 소장사하는 사람들 재미보았다더구먼. 블라디보스톡 방면에 나간 것만 하더라도 우피를 합해서 이만 오 천 두라든가?" 시치미를 떼기 위해 하는 말 같다. "그러고보니 생각이 나는구먼. 김주사." "또 뭐가 있소?" "흑룡강 그쪽 방면에 가본 일이 있소?" "없는데요?" "가볼 생각 없소?" "뭐러요." "하라일이야 많다면 많지." "흑룡강 방면이라?" "그곳 동태를 조사해놓는 것은, 그거 아주 쓸모있는 일일게고 그 곳에서 연해주로 빠져나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게고." 김두수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그러나 사내는 다시 말을 홑뜨려버린다. "내가 왜 이런 얘길 하는고 하니 추서방이라고, 주객간으로 사귀어온 처진데 말이오, 그런 사람이 있소. 그 추 서방이 수일내 흑룡강 방면으로 떠난다는 얘길 들었기에." "무슨 일로 가는데요?" 그 말 대꾸는 없이 "지금 그곳은 한 대목일 게요. 장이 벌어지는 시기니까. 장에는 값나가는 모피다, 녹용은 철이 지났으나 심심 치 않게 나돌 게고, 지금 이곳서 떠난다면 가만있자, 아 다소 시기가 늦은 편인데." "그러니까 추서방인가 뭔가 하는 사람 장사꾼이다 그 말이오?" "아암요. 장사꾼치고도 아주 수십 가지 재줄 지난 사람이지. 특히나 중국말이라면 본바닥 중국놈 뺨칠 지경이 고 만주말도 썩 잘하지요. 그만하니까 잔악한 중국놈들 제쳐놓고 그곳까지 기어들어가는 게 아니겠소? 그러니 그 사람보다 더 좋은 길잡인 구할래야, 어디서 구하겠소?" 김두수는 돌연 주인 사내 얘기를 중단시킨다. "이거 늦어지겠소. 저녁 주셔야지." "아 그러시오." 사내는 천천히 엉덩이를 들어올린다. "그럼." 윤이병에게 눈인사를 하고 나간다. 지체없이 저녁이 들어왔다. 마신 주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김두수는 빈속에 집어넣듯 왕성한 식욕이다. 볼이 미어지게 밥을 먹던 김두수는, 시무룩해서 밥알을 헤치고 있는 윤이병을 힐끔 살펴본다. '햇병아리 같은 놈! 한번 비틀면 목뼈가 뚝하고 뿌러지겠다. 오냐. 아직은 네놈을 좀 써먹어야겠으니 순풍을 보내주마.' 시선을 느낀 윤이병도 힐끔 올려다 본다. "왜?" "..." "심화가 나서 그러나?" "..." "그 계집애가 죽고 사는 건 우리하고 별 상관이 없는 일이야." 아까 노상에서 윤이병이 월선에게 꼬치꼬치 물어서 알아낸 일. 서희가 부상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 관 심이나 인연에 관한 거라면 김두수 쪽이 훨씬 깊고 밀접하다. 그러나 김두수는 윤이병에게 슬그머니 밀어붙이 며, 접시 바닥을 싹 쓸어버리듯이 콩나물을 모두어 듬썩 입속으로 집어넣는다. "어떤 면으로 봐서는 살아주는 편이 낫지. 형편 보아가며 울궈먹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말이야. 그 계집애가 죽었다 해서 유산을 우리가 상속받을 것도 아니겠고." 내평스럽게 말했으나 그의 심중이 착찹하긴 하다. 죽은 서희 부친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고 다음은 일당이 관가에 끌려가서 무참하게 처형된 전후 사정이 상기되었고 가지가지 소문과 낭설로 반죽이 되어 골수에 남은 아비 죽음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보복의 이를 갈다간 맥이 쑥 빠지곤 한다. 지나간 세월과 마주친 것 처럼 용정에 최서희가 있었더라는 그간 확인된 소식, 악의 칼을 갈아야 할까, 길손처럼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 버려야 할까. 시시로 머리를 치켜드는 갈등이다. 그러나, 그러나 다만 확실한 것은 살인 죄인의 아들이라는 정 체를,어떤 상황에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일이다. 최서희가, 또 평사리에 살았었던 사람들이 용정에 있다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다.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서희 일행이 만주 땅으로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 다. 그들만 이곳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괴로워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제 나라 제 겨레를 등졌을망정, 비천하고 간악한 밀정일망정 그 나름의 바닥에서도 유서깊은 무반의 자손이어야 한다. 개처럼 처형된 살인 죄 인의 자손이라니 안 될 말이다. 일본이 등용하는 매국노에게도 서열은 있는 법, 살인 죄인의 자식이 될 수는 없다.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 "만일에 그 여자가 죽는다면... 그렇지요. 김가 그놈 팔자가 쭉 늘어지는 거지요." 밥상에서 물러나 앉으며 윤이병은 자못 비애스런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김간지 박간지 그놈의 성을 어찌 아누, 호." 길상의 근본을 알고 하는 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윤이병은 그저 지나는 말로만 듣고 넘긴다. 김두수의 표정 이 험악하다는 것을 느끼긴 했으나. "내 생전 김가 그놈이 거꾸러지는 걸 보아야겠는데 말입니다. 나는 그날밤 일을 잊을 수 없을 겝니다." 윤이병이 길상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느끼고 있는 원한은 다분히 불순한 것이다. 길상에게 구타당하고 수모를 당한 것을 상기시키려는 목적 의식이 있다. 나는 김두수 당신 때문에 수 모를 당한 것이요, 구타도 당한 것이요, 하는 공로의 주장이 있고 그런 나를 당신은 끝까지 보아주어야 한다는 다짐도 있다. "나도 매몰찬 사내요. 독한 놈이 어디 따로 있답니까? 마음먹기 탓이지요. 마음 한번 모질게 먹으면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길상을 앞세워 김두수에게 간접으로 주는 으름장이다. 아니 차라리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는 애소였 었는지 모른다. 그만큼 윤이병의 생활은 다급했다. "그러면 칼질이라도 할 수 있다 그 말이야? 제기랄! 무슨 놈의 돌이, 밥 먹으려다 이빨 부러지겠다." 그때까지 밥을 퍼먹고 있는 김두수는 상 위에 음식물을 뱉어낸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뻐드렁니는 윤이병의 으름장을 비웃는 것 같이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작은 체구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목소리도 굵게 내민다. "그래?" "이제 나는 그네들 사회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졌고 김가 그놈이 나를 아주 영영 매장해버린 거나 다름없으니 까요. 개처럼 두들겨맞은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 윤이병이가 상의학교 교사 윤이병이 이러고저러 고 했다는 소문이 문제이지요. 이젠 햇빛 아래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학교는 말할것도 없지만 교회에도 발 을 들여 놓을 수 없게 됐으니.. 도장이 꽝 찍혀버렸지요. 그놈 때문에. 하지만 나도 살아야겠어요. 살기 위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도 내 편에서 칼을 먼저 들어야 한다 그겁니다. 기왕에 편은 갈리고 말았으니까요." "하 참, 그걸 뉘 모르나? 그러니까 자넬 여까지 데려온 거구 오늘 밤에 양경부 집에 가자는 거 아닌가." "그건 압니다." 작은 얼굴에 큰 눈을 부릅Em고 대꾸한다. 저녁을 끝낸 김두수는 손뼉을 쳐서 사람을 부른 뒤 밥상을 물리게 한다. "오늘 밤 나하고 같이 가자. 가면 알 게야. 양경부 그 사람 내 말이면 다 들어주게 돼 있어. 자네한테 순사 한 자리 내주는 것쯤 식은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야." 목소리가 은근하건만 윤이병은 "순사보담은!" 하고 어정쩡해한다. "순사보담은 헌병대 보조원으로 들어가고 싶은데요?" 김두수의 얼굴이 구겨진다. "순사보도 아니고 순사야?" "글세 경찰보다는 헌병대가." "곧바로 그러진 못해. 순사로 있다가 오기는 쉬워도." 하고 김두수는 역정을 버럭 낸다. "자네, 도시 건방진 놈이다! 감지덕지해도 뭣할텐데, 매맞고 쫓겨난 게 내 탓이야? 순사도 너에겐 홍감하다? 뭐 대단한 일 했다고, 네놈이 변변했으면 그깟 일로 탄로됐을까?" "하지만 원인으로 말하면은," "듣기 싫다! 예배당에 붙어서 언해 꼬꾸랭이나 배웠다고 네 눈엔 하늘이 돈짝만큼 뵈냐? 헛 참, 가소러워서. 배고픈 놈 밥 먹여주니까 뭐까지 내놓으란다더니, 이봐 윤가야! 코밑이 길지도 않은데 왜 그리 뻔뻔하냐? 붙 어 있을 모가지가 붙어 있는 줄 아냐? 흥, 누군 못나서 이러고 있는줄 알아? 근본을 따지자면 땅 파먹던 상놈 의 새끼들이 야소교 믿은 덕분에 선생이다, 교사다. 그런 따위, 유가 아니란 말이야! 건방진 놈! 때가 때 같으 면 내 앞에서 하정배나 할 놈들이 도무지 아니꼬워서 따따부따, 빌어먹을! 수틀리면 다 때려부숴 버릴 테다!" 윤이병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답답한 것은 네놈이지 내가 아니란 말이다! 내가 안 잡아주면 네놈이 청요리집 머슴이나 될 줄 알어? 누가 잡아주나, 누가!" "그, 그야." "혀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고 싶다. 흥 마음대로 해봐!" "그게 아니고... 아니, 형님 시키는 대로 하겠소." 부성한 눈으로 째려본다. 눈빛에 질려서 윤이병은 "생각이 모자라서요." "약은 놈 같으니라고. 심성으로 대해서는 안 될 위인이라는 점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까놓고 얘기하지. 네놈 이 달가워하지 않는 순사직도 공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순사질 하기 전에 내게 해 주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그거야." "네, 할 수 있느 s일이라면." 풀이 죽어서 말한다. "그게 뭔고 하니 연추를 다녀와야 한다 그거야." "연추로요?" "금녀가 연추에 있어. 그년을 자네가 가서 끌어내야 한다 그 말이야." 목소리는 훨씬 누그러졌다. "네에?" "놀라기는 왜 놀라지?" "금녀를 어떻게 제가," "자네밖엔 데려올 사람이 없거든." 흥분하여 얼굴이 벌개진 윤이병은 가까스로 담배를 붙여문다. "금녀가 따라올까요?" "내 생각엔 안 올 것 같은데요?" "그년도 그 바닥에 가서 색다른 물을 먹었을 테니 호락호락 넘어 오진 않겠지. 그러니 두만강을 넘을 생각은 말아야지. 가령 길림 쪽 이라든가 그쪽으로 유인해가야 할 게야." "이제는 그 여자, 나를 믿지 않을 겁니다." "나네 지금 그대로, 그런 꼴을 하고서 찾아가면... 금녀 같은 그런 계집은 마음이 움직일 거야. 김두수한테 쫓 기고 있다. 너 없이는 못 살겠다. 함께 도망가서 숨어살자. 그런 식으로 말이야. 제에기랄! 그런 것까지 말해 야겠나?" 김두수는 제풀에 화를 낸다. "나를 어떻게 믿고서? 만일 연추에서 금녀하고 함께 한다면? 정말 형님은 안심하고 날 보낼 수 있습니까?" 떠보듯 조심조심 묻는다. 김두수는 씩 웃었다. "밀정놈이 어떻게 그런 곳에 발을 붙이고 사누. 목숨이 오락가락. 왜 내가 못 가고 자네를 보내는가 그걸 생각 해본다면 절로 알 일 아닌가?" "그렇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니지. 자네라면 당분간은 염려없어, 당분간은." "..." "그러나 용정하고 연추 사이, 일합네 독립운동합네 하는 자들의 내왕이 수시로 있고 보면, 자네가 상의학교에 있었던 것은 첫째 금 너가 아는 일이고 비밀이 오래 보장될 수는 없지. 금녀를 끌고 간 놈들이 모두 그런 패 거리니 그만큼 경계도 할 게고 말이야. 실상 그런 거는 아무래도 좋아. 자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네 비밀을 폭로해버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목숨 잃을 생각일랑 아예 안 하는 게 좋을 게야. 곱게 그년을 데리고 와준다면 직업도 얻을 수 있고 그 길에서 출세할 수도 있는 일. 제에기랄 왜 이리 복잡하지? 아무튼 밤에 다 시 상의 하기로 하고," 김두수는 후다닥 일어선다. "하여간에 이제 나가자고. 꽤 저물었구먼." 김두수는 서두는데 윤이병의 얼굴이 어둡다. 함정으로 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김두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실한 윤이병의 현실은 무일푼, 명랑하고 쉽게 남과 사귈 수 있었던 성격이 쓸모 없게 됐다는 것이다.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는 것도 실제 이상의 강박관념이었었고. 김두수가 윤이병을 데리고 찾아간 곳은 왜석으로 된 관사집이었다. 경부보 양준모는 서른네댓, 오는 길에 김두 수가 보부상 아들이니 상놈 출신이니 어쩌니 하고 헐뜯던 말과는 달리 일본옷을 걸치고 있을말정 선비같은 풍 모에 몸짓이 세련돼 보였으며 냉정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처는 그저 수수해 보이는 일본 여자였다. 그 일 본 여자한테 말을 거는 김두수의 일본말은 아주 유창했다. 윤이병은 묘하게 김두수 능력에 신뢰 같은 감정이 이는 것을 깨닫는다. "오래간만이군. 앉게." 냉정한 인상과는 달리 양경부의 음성은 부드럽고 친숙하게 울렸다. "한번 찾아뵙는다는 것이, 늘 바빠서요." 김두수의 태도는 정중했으나 여유가 있다. "그랬을 테지. 바빴을 게야. 한데 이분은?" 김두수 옆에 찬서리 철의 메뚜기처럼 붙어 앉은 윤이병을 보며 묻는다. "네, 윤군. 양경부님한테 인사하게." "처음 뵙겠습니다. 윤이병이올시다." 하고 두 팔을 짚으며 절을 한다. "용정서 학교 교사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제 일을 돕다보니 학교도 쫓겨나게 되고 해서 제가 책임을 지게 되 었습니다. 경부님께서 봐주실 줄 믿고 오래간만에 인사도 드릴 겸 이 친굴 데리고 왔지요." 양경부는 빙긋이 웃는다. "자네 일을 돕다가 실직을 했다면 내가 힘을 써야겠지." "부탁합니다." "염려 말게." "고맙습니다. 아, 이 친구야." 김두수는 익살스럽게 윤이병의 무릎을 쥐어박는다. "아 네, 감사합니다." 당황한 윤이병은 아까처럼 두 팔을 짚고 절을 한다. "그럼 이제 용무는 끝이 났나?" "예, 더 이상 무슨 염치로 부탁을 또 합니까?" "그러면 오래간만이니 술이나 하세. 마침 좋은 술이 들어왔어. 시즈꼬! 시즈꼬!" 양경부는 아내를 부른다. "하이." 대답과 동시 방문이 열리고 여자는 복도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사께오 다세(술 내와)." 부드럽고 친숙을 느끼게 하던 음성과, 세련돼 뵈던 몸짓은 표변하여 난폭하고 천박하다. "하이." 여자는 앵무새처럼 대답하고 방문을 닫는다. 까치걸음을 연상케 하는 발소리를 내며, 그러고는 잠잠해졌다. 부 드러웠던 음성이나 세련된 몸짓은 그의 인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두수에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랬던 것 같다. 술상이 들어왔다. 댓잎 무늬가 있는 하얀 도쿠리에는 따스하게 데워진 일본 술이 들어 있었고 장종지보다 작 은 일본 술잔 사카즈키는 윤이병의 눈에 앙증스럽게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술잔으로 어색하게 술을 마시는 윤이병을 내버려둔 채 양경부와 김두수는 저희끼리 얘기를 나누다가 "헌데 내 말 들으니 달포 전에 일을 저질렀다구?"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질렀다면 아니 할 일을 했다 그 말씀이십니까?" "뭐 그렇다는 건 아니고." "실패는 했지요. 한두 번의 실수는 병가상사라 하지 않습니까." "허나 역시 시끄럽지." "시끄러울 것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대일본제국의 안녕을 위해 숨구멍을 틀어막지 못한 것이 유감일 뿐입니 다." 김두수는 빈정거리듯 말하는데 상대방에 가하는 은근한 압력이다. "그야 누가 모르는가? 하지만 그런 건 마지막 쓰는 수단일 게고 온정을 베풀어서 귀순시키느니만 못하지. 듣 자니까 뭐 최후 수단을 쓸 만한 거물도 아닌 모양 아니야? 그런 자들은 모조리 처치하려 했다가는 연해주에 사는 조선인들은 다 죽어야 한다는 결론이 난다." "대일본제국의 경부보 양준모 씨 입에서 그런 말씀이 낭로 줄은, 이거 참말로 뜻밖입니다." "허 또 시비야? 젊은 혈기가 가상하기는 하지만 선배 말도 좀 귀담아들어야지." "온정을 베풀어서 귀순시키는 게 그야 젤 좋은 방법이긴 하지요만 귀순은 대일본제국의 정책일 뿐, 일선에서 뛰는 우리까지 그 말을 믿었다간 사방팔방 구멍이 숭숭 뚫릴 겝니다. 사실 나는 사방팔방 구멍이 뚫리는 일보 다 내 목숨 날아가는 게 더 두려우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해삼위에서 있었던 일이 어디 저의 사감으로 저질 러진 일입니까? 대일본제국에 충성한 결과로서 내 목숨을 노리는 자가 생겼다면 어디 그놈이 좀도둑입니까? 살인 강도란 말입니까? 내 목숨을 노렸다면 독립군임에 틀림이 없는 게고 그러니 말입니다. 내 목숨을 지키는 것은 대일본제국을 지키는 것과 추호도 다르지 않다 그 말입니다. 나는 경찰 소속이 아닌 헌병대 소속이란 것 을 잊지 마십시오." "알았어, 알았다니까. 하긴 이 방면의 일이야 자네가 선배 아닌가." 김두수는 약점을 잡으려다 되잡힌 꼴이 된 양경부는 슬쩍 머리를 돌린다. "요즘에 느낀 건데 독립운동 한다는 친구들 흉을 잡자고 하는 얘기는 아닐세. 어째 사람들이 왜소해지고 용렬 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오늘날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긴 했으나 본시 우리 조상들은 대인군자의 풍도 가 있었거든. 총 몇 자루 짊어지고 독립할 거라는 꿈을 가지는 것도 황당한 얘기거니와 도무지 함께 뭉치는 힘이 없으니. 말이야 바로 하지, 자네들이나 내가 조선 사람임엔 틀림이 없고 비록 우리가 일본의 녹을 먹고 있다 할지라도 그 일 한다는 친구들 좀 잘나주었으면 싶어. 한결같이 독불장군이요, 상투 보존하고 흰 베옷 입 으면 애국잔 준 알거든. 그게 그네들 철학이란 말이야. 어디 그들뿐이겠나? 국내 관직에 남은 위인들도 한결같 은 생각이란 말이야. 동헌에서 육방관속을 거느리던 시절의 사고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이래가지고 는 밀려나게 마련이지. 실지로 달마다 파직되는 것은 조선인 군수들인데 아예 조선 사람들에겐 능력이 없노라 는 인식이 고질화되어버린다면 큰일이란 말이야. 그런 뜻에서 본다면 김군이야 패기 있고 다소 저돌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하하하... 또 시비 걸 텐가?" 얼핏 듣기엔 중용지도를 체득한 사람의 온건한 의견 같았으나, 속임수요, 교활한 보신술이요, 껍데기뿐인, 절도 에 맞춘 아첨이다. 그러나 속아넘어간 쪽은 김두수가 아닌 윤이병이다. 쭈빗쭈빗하다가, "좋은 말씀이십니다. 처음부터 선비 같으시다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말한 뒤 두 손으로 받쳐서 장종지보다 작은 사카즈키를 양경부 앞에 내미는 윤이병을 곁눈질해 보는 김두수 얼굴에 잔인스런 웃음이 잠시 동안 스치고 지나간다. 기둥시계가 열한 시를 알리고 어디서 돌아오는가 가로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바퀴 구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 려온다. 17장 덫에 걸리다 월선옥에 손님발이 뜸해졌다. 거들어주던 새침이도 돌아가버리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오는데 송애는 넑을 잃고 앉아 있다. "홍이는 어째 상기 오잴까?" 봉구가 거리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하마 오겠지. 혼자 가서 걱정이야? 선생님이 데려다주실 건데 뭐." 송애도 중얼거렸다. 아까 점심 나절쯤 해서 송선생이 월선옥을 찾아왔다. 송선생은 연추서 인편에 편지가 왔다 는 말을 하며 정호 네 집에 급히 전해주어야 할 편진데 집을 모르니 홍이 더러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해서 함께 나간 홍이 여직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아지망이는 언제쯤 오겠습매까?" 물통에서 숟가락을 건져내며 봉구가 묻는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송애는 바락 소리를 지른다. "앙이, 어째 그럽매?" "내가 어쨌기에?" "얼굴이 해쓱해지고서리 소리르," 송애는 외면을 한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밖으로 나타난 것을 깨닫는다. '흥, 멀쩡해서 돌아왔더구먼. 난 또 죽는 줄 알았지.' 회령서 돌아온 길상에 대한 미움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것을 송애는 억제하질 못한다. 회령 병원에 가노라 하며 서희가 길상을 데리고 떠난 뒤 구구한 소문을 송애는 아직 삭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회령에다 과부 하고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에 꼬리를 물고 이번에서는 서희와 혼인할 거라는, 거의 장담하다시피하던 말들이 비상처럼 송애 마음에 흘러들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요즘이다. 길상의 마음이 자기에게 기울어지리라는 희망 은 눈곱만치도 없다. 단념을 한다기보다 단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길상에 대한 원한이요 미움이다. 한때 주변에서도 그랬었거니와 길상에게 시집갈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었던 게 병이었다. 과부 운운할 적에 송애 마음이 열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거라면 서희의 경우는 천길 낭떠러지로 구른 기분인 것이다. 송애에게 동정을 하던 달래오망이조차, "하늘의 별을 따라이. 별수없답매." 냉정히 말했었다. "흥, 사람 없어 시집 못 갈까?" 지글지글 끓는 심화 속에서도 그간 시시로 호의를 보여온 윤이병이 있었다는 것은 상당한 위안이 된다. 봉구는 국솥전에 물걸레질을 하면서 혼자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째 홍이는 오잴까?" 바깥은 아주 어두워지고 말았다. "해가 짧아서 그렇잖아. 어째 방정이니?" 하는데 손님이 들어섰다. "어 춥다." 송애는 얼른 일어선다. 남풋불과 마주한 두 사내의 얼굴, 한 사람은 젊었다. 한 사람은 오십 가깝고 수염을 기 른 깡마른 사람이었는데 만주인의 복장이다. 김두수와 추서방. "이 집 아주머닌 어디 갔나?" 잘 아는 사이처럼 김두수가 묻는다. "회령 갔소." "회령에는 왜?" 목도리를 풀며 능청스럽게 묻는다. "그럴 일이 있어요. 국밥 드릴까요?" "음, 두 그릇. 그런데 아주머닌 오래 못 돌아오는 게야?" "글쎄요." "여기 아저씬 소식이 있는지 모르겄네.?" 송애는 국쪽을 들며 "예." 애매하게 대꾸한다. 김두수는 두 손을 싹싹 비비고 추서방은 이들 대화에 관심이 없는 듯 곰방대를 꺼내어 담 배를 담는다. 김두수와 추서방이 만난 것은 사흘 전의 일이다. 회령서 한양여관 주인 사내의 주선으로 잠시 동안 대면하여 동행할 것을 양해받았으며 추서방은 볼일이 있다 하여 그저께 용정으로 왔고 김두수는 윤이병을 연해주로 떠 나보낸 뒤 오늘 용정에 온 것이다. "김주사." "예." "이곳서 며칠이나 묵으시려오?" "예." 담뱃불을 붙이며 묻는다. "이삼 일... 형편 봐서 하루쯤 일찍 떠날 수도 있을 게요." 김두수의 대답이다. 국밥이 나왔다. 추서방은 담배를 몇 번 빨고 나서 재를 떨어버리고 국밥 사발을 끌어당기 며 조용히 먹기 시작 한다. 김두수는 송애를 살펴보면서 숟갈을 든다. "그러니까 길림에서 후란으로 간다, 그 말씀이지요?" "예. 후란에서 흑룡강으로 곧장 갔으면 좋겠는데 찌찌하루에 볼 일이 좀 있어서요." "지금 떠나도 시기가 늦는다구요?" "늦었지요. 구월부터 겨울 수렵이 시작되는데 십이우러 초순에는 공세로 얼마간 모피를 바치고 그러고 나면 장이 열리거든요. 그 장에 대가야 하는 건데 늦었지요." "그럼 물건을 구하지 못하겠군요." "지난해 깔아놓은 게 있으니까..." 추서방은 굉장히 빠르게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물러나 앉는다. 말을 안 하는 편도 아닌데 왠지 추서방은 과 묵하고 고집이 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김두수는 국물을 홀홀 마신 뒤 국밥 한 그릇을 더 청한다. "대개 그 곳서 나오는 모피란 어떤 거지요?" "첫째 담비가 있고 녹피 곰 여우 늑대 같은 것이 있지만 우리가 구하는 건 주로 담비지요." "물론 엽총으로 사냥을 하겠지요?" "예. 덫도 놓고 함정도 쓰지요. 사슴 같은 것은 구시월에 발정기라 그때가 되면 초자라구, 피목 껍질로 만든 피리를 불어서 수사슴을 유인해가지고 잡지요. 피리 소리가 암사슴 울음하고 비슷하거든요. 그 피리 부는 사람 을 초록인이라 하는데 상당한 연공을 쌓아야만 된다더구먼요." 김두수는 다시 내온 국밥을 홀홀 불어가면서 먹는다. 먹다가 "그러니까 그 일대에 사는 인종은 이른바 오랑캐들이지요?" "그런 셈이지요. 여진족들인데 그들 속으로 들어가보면 그것도 여간 갈래가 많지 않아요." "거래하기는 어떻습니까." "본시 경위가 바르고 한곳에서 눌러 살지 않기 때문에 별 욕심이 없는 살마들이었는데 워낙이 장사하러 들어 가는 중국 사람들이 악랄해서요." 두 그릇째 국밥을 비운 김두수는 손바닥으로 땀을 닦는다. 잠시 동안 얘기를 더 나누다가 그들은 일어섰다. 나 간 뒤 "참말입지 홍이 가아아 어찌 도니 거 앵이요?" 봉구는 또 걱정이다. "방정도 떨어쌌는다." 아닌게 아니라 송애도 불안을 느낀다. 그런데 갔거니 생각했던 방금 나간 두 살마 중 젊은치, 그러니까 김두수 가 되돌아왔다. "머르 있었습매까?" 봉구가 묻는데 그 말에는 대답을 아니 하고 송애더러 잠깐 나오라 손짓을 한다. "왜 그래요?" "실은 내 윤선생 전갈을 받았는데." "윤선생요?" "음. 그러니까 윤선생 하숙하던 집에 잠시 다녀갔음 좋겠어." "윤선생이 회령서 오셨어요? 며칠 전에 회령 간다는 얘길 들었는데." "윤선생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은 못 올 게야." 김두수는 꼭 오라는 다짐도 없이 슬그머니 가버린다. 송애는 다시 넑을 잃는다. 송애로서 처음 보는 사내였다.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슨 전갈을 받았는 지 공금하지도 않다. 한참 만에 '윤선생 하숙하던 집에 잠시 다녀가라구?' 윤이병 하숙집에는 국밥 갖다달라는 주문을 받고 서너 번인가 간 일이 있었다. '윤선생은 길상이보다 못할 게 없다. 길상이는 남의 집 하인이지만 윤선생은 학교 선생님이었어. 지금은 그만 두었다지만,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그런데 홍이는 왜 여태 안 오는 게지? 무슨 일이 생겼나? 음. 하기야 내 처지, 부모도 없고 남의 집에 붙어서 사는 몸이 윤선생 같은 사람한테 시집가면 잘 가는 것 아니야? 봐란 듯 이 내가 시집 먼저 갈 테야. 아암, 내 마음만 작정하면은... 회령서 당분간 못 온다 했던가?' "이보오다." "왜 그래!" "앙이 어째 또 성으 냅내까?" "방정떨지 말라 했잖어!" "무시기, 그럼 걱정도 앙이 됩매까? 날이 아주 저물잲았소?" "선생님하고 함께 가지 않았어? 선생님하고," "객줏집의 할아방이한테," "사내자식이 좁쌀영감처럼, 알았어. 넌 가게 보구 있어. 내 갔다올 테니." 송애는 주섬주섬 두루마기를 찾아 입고 털목도리를 둘둘 감으며 가게를 나선다. 밖으로 나온 송애는 객줏집과 는 반대편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바람이 쇙쇙 분다.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고 그런가 하면 울음이 터질 것같이 목이 메인다. 송애가 간 곳은 얕은 지붕의 집들이 따닥따닥 붙은 동네, 좁은 골목을 한참 들어간 곳의 낡은 초가집 앞이다. 늙은 작부 서울댁이 살던 집이었다. "여보세요." 괴괴한 채 불빛은 새나오는데. "여보세요." 판자문을 흔들어본다. "뉘기요?" 어둠 속에 얼굴이 나타났다. 성루댁은 아니었고 그보다 나이 젊은 여자다. 송애는 보따리를 싸서 떠난 서울댁 은 알지 못했으나 이 여자하고느 s안면이 있다. "아아 국밥집으 처자 앵이요?" "손님 계시지요?" "있지비. 그러잉 들어옵세." 송애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김주사아! 국밥집으 처자 왔소꼬망." "들어오라 해요." 내다보지도 않고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들어가라이?" 송애는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윤이병이 묵고 있던 방에 사내는 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앉아." "무슨 전갈을 받아오셨어요?" 볼멘 목소리다. 아까부터 처음 본, 나이도 많잖은 사내가 반말지거리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윤이병은 깍듯하게 존대를 했는데 뭐가 저렇게 상스러운가 싶기도 하고 "벋장나무같이 서서야 얘기가 되나." 송애는 퍼질러 앉는데, '제법 감칠맛 있게 생겼군 그래.' 빤히 쳐다본다. 송애도 빤히 쳐다본다. 불빛이 둘 사이에서 춤을 춘다. "어서 말해요." "말보다 윤선생 편질 가지고 왔는데." "편질요?" "전에도 편지질을 했다며?" "..." "찾아온 걸 보니 그 쪽에서도 생각이 있는 모양이구먼." 김두수는 먹이를 물어다놓은 맹수같이 느긋한 몸놀림으로 벽에서 등을 뗀다. "거 윤선생 똑똑한 사람이지." "..." "듣자니까 부모형제가 없다며?" "그래요." "허어 참, 왜 그리 톡톡 쏘지?" "가져왔다는 편지나 주세요. 가야 하니까요." "가면은 잠밖에 더 자겠나? 늦은 밤에 국밥 손님이 찾아올 것도 아니겠고, 객줏집 공서방이 양아버지라 하든 가?" "..." "일의 순서를 따지잘 것 같으면 명색이 양부모라는 사람들도 있고 하니 중간에서 내가 나서야 하는 건데." 송애느 역겨운 생각이 든다. "편지 안주시면 그냥 가겠어요." "서둘기도 하네. 편지 뿐인줄 아나? 내 편에 반지도 만들어 보냈어." "반지를요?" "그래. 윤선생을 말할 것 같으면 사람이 똑똑할 뿐만 아니라 고향에서는 부잣집 맏아들이야. 공연히 이런 곳에 와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살림만 유복한가? 가문은 또 어떻고? 시집을 간다면 아주 썩 잘 가는 게야. 내 비위 를 잘 맞추어놔야 일이 수월하다는 것쯤 알아두어얄 게고 흐흐흣..." 송애는 잠시 주판질하는 장사꾼 비슷한 미묘한 생각에 빠진다. "헌데 국밥집에는 길상이라는 그 사람이 더러 오나?" "아니." "윤선생이, 그 여자 길상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근심을 하더구먼. 윤선생으로선 마음에 걸리는 일 이겠지. 설마 그런 것은 아니겠지!" "아니예요!" "아니라?" "그 사람은 곧 장가갈 거라..." "장가 d나 간다면 이쪽에도 생각이 있다 그 말이야?" "아니래두요!" "그건 다행이고... 자아, 그러면은 편지하고 반지를 주어야겠는데." 김두수는 부스럭부스럭 조끼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꾸겨진 편지 한 장과 한지에 돌돌 말은 작은 물건을 꺼내었 다. "자아." 건네준다. 편지 피봉의 글씨는 분명히 윤이병의 필적이다. "편지보다 그 반질 펴보아. 손가락에 맞는가 껴보고," 주저주저하면서 한지에 싸인 것을 송애는 펴본다. 두 돈쭝 가량의 봉숭아 반지다. "손가락에 껴보라구." 송애는 김두수를 한번 건너다본다. 양볼이 발갛게 된다. 눈이 반짝거린다. 조심스럽게 약지에, 작은가 힘을 주 며 낀다. 이때였다. 비호처럼 달겨든 김두수, 언제 마련해두었던지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목을 비튼 닭의 털을 뽑듯이. 손등에 손톱자국은 남겼으나 송애는 허무하게 당하고 말았다. 방안에는 거친 숨소리뿐, 문을 따준 여자는 도시 집안에 있는지 없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다. "이 날강도 같은 놈아." 낮은 목소리다. 김두수는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만족스럽게 웃는다. "날벼락을 맞아 죽을 놈!" "더 크게 외쳐보지. 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테니 말이야." 비로소 자기 처지를 깨닫기나 한 것처럼 송애의 얼굴이 질린다. "외쳐보아. 그러면 윤선생한테 시집가긴 다 틀린 일이지. 그 편이 내겐 좋지 않겠어? 데리고 살 수 있으니까. 안 그래? 흐흐흐..." 송애 얼굴은 더욱더 질린다. 입이 붙어버린 것 같다. "거기서 원한담 오늘 밤 일은 싹 묻어둘 수도 있고, 내야 뭐 여자에 궁한 처지도 아니니 말이야." 김두수는 목구멍 속으로 웃음을 굴린다. "이젠 가보아. 없었던 일로 하면 될 거 아냐? 문벌 좋고 부잣집 맏아들한테 시집가는 건 어려운 일 아니래두. 길상이놈 따위가... 으흐흣흣..." "..." "가보라니까?" 송애는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빛은 약하게 흔들리고 있다. 약하게.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태산 같으나 약 아지는 힘이 더 강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눈물을 짜기 시작한다. 옆방에서 소리가 들린다. 장롱을 열어젖히는 소리다. 송애는 펄쩍 튀듯이 일어선다. 판자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온 송애는 허둥지둥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걸음을 멈춘다. '죽일 놈! 칼을 갈아서 찔러죽일까. 속절없이 내 신세가! 아이구!' 다시 걷기 시작한다. 몇 발짝을 못 가서 '정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다시 몇 발짝을 못 가서 '그놈이 말 안 한다면... 미친 개 한테 물린 셈친다면, 내가 뭐할려고 그곳에는 갔을까? 의심도 안하고, 아이 구!' 그러나 가게 앞에까지 왔을 때 송애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금반지 생각이 났다. 편지를 두고 온 생각도 났다. 얼른 반지를 뽑아 치맛말기 속에 집어넣고 "봉구야? 홍이 왔니?" 하고 가게로 들어가는데 "왔소꼬망." 봉구의 말보다 거기 앉아 있는 길상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송애는 쌀쌀하게 외면을 하며 "그런데 홍이는 어디 갔니?" "방에서 자고 있습매." "벌써?" "벌써랑이? 나간 지 얼마나 오래," 하는데 봉구 입을 틀어막듯이 "오래되긴?" "객줏집에 가보니 앙이 왔다 하잲소? 어디 갔었지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동무 집에서 놀다오는 거야." 천연스럽게 둘러댄다. "봉구야." 길상이 불렀다. "옛꼬망." 봉구는 길상으로부터 돈을 받아들고 나간다. "어디 갔다왔지?" 길상의 노한 음성이다. "누굴보고 묻는 거예요?" "거기보고 물었다!" "왜요?" "그럴 이유가 있어." "이유부터 말해요." "대답부터 듣고 말하겠다!" "기가 막혀서." "기가 막히느 것은 이쪽이야." 송애는 혼란속에 빠진다. 혹시 하는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돌이 킬 수 없는 흠집이 되어 가슴 한복판에 커다랗게 퍼져나간다. "말 못하겠으면 내가 말해주지. 송애가 간 곳은 윤가놈의 하숙집이다." "뭐라구요!" 길상은 등을 굽히며 가겟바닥을 내려다본다. "설사 그렇다해도 무슨 상관이지요?" "나는 상관이 없겠지." "네?" "나는 송애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그, 그래요. 상관이 없지요!" "..." "염치없고 주제넘는 일이에요! 남이야 무슨 짓을," 송애 얼굴이 분노의 불길이 탄다. 혹시 했었던 만큼. 이제는 애정이고 뭐고 다만 미운 것이다. 이 사내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남이야..." "송애." "남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아요! 나도 임자 있는 몸이란 말이에요!" "내 말을 허술히 듣지 말어. 송애는 윤가놈을 만나서는 안 된다. 송애 신세도 망치겠지만." "망치기는 왜 망쳐요?" "윤가놈은 나쁜 놈이야. 학교에서도 쫓겨나지 않았어? 자세한 얘긴 할 수 없지만 그놈으 송애가 좋아서 그러 는 게 아니란 말이다." "좋아하건 안 하건 상관 없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요." "넌 공노인의 양딸이며," 하다 말고 길상은 깊이 뭣인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이다. 담배가 없어 사러 보낸 것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담배 를 꺼내어 붙여문다. 연기를 훅 뿜어내며 "그놈 윤가는 송애를 망칠 뿐만 아니라... 다른 생각이 있었다. 학교를 쫓겨난 빈털터리가 용정에 남아 있는 것 도 수상 쩍지만. 그놈의 하숙비는 어느 놈이 대주는 걸까?" 고향에서는 이름난 부잣집 맏아들이며 가문은 또 어떻고 하던 사내 목소리가 송애 귓가에서 쟁쟁 울린다. 바 닥에 깔린 엷은 의혹이 말려올라오면서 그 목소리는 더욱더 크게 울린다. '모르거든 말이나 말지? 자기가 뭘 안다고 하숙비 누가 대는 걱정까지 하는고?' "송애, 내 말 허술하게 들어선 안 돼. 송애는 후회할 거야. 윤가놈은 송애를 이용하는 거야. 내 말 고깝게 듣지 말구 신셀 망쳐서는 안된다. 송애도 조선나라 백성이거든." "후회해도 좋아요. 이용당하면 어때요? 버림받아도 좋단 말예요! 내가 뭐 양반집 규순가요? 쓸데없는 참견 말 구 가, 가주세요. 사돈의 팔촌이나 된다고 이, 이러는 거예요!" 송애는 앞 뒤 생각 없이 소리를 지른다. 아래위 입술이 실룩실룩 경련을 하고 눈꼬리가 치켜올라간다. 흉한 모 습이다. 길상은 송애가 이미 당해버린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상대가 윤이병 아닌 김두수라는 것을 알 도리는 없는 것이다. 동정심이 일지 않는다. 미운 생각도 없다. 다만 싫은 생각, 보기가 민망스럽다는 냉정한 거리감이 있을 뿐이다. 길상은 몸을 일으킨다. 좀더 설득해보리라는 생각을 버린 것은, 그러나 다만 송애가 싫다는 감정 에서뿐만은 아니다. 감정 자체는 양심으로 봐서는 약점이다. 송애를 아끼고 지켜주리라는 마음보다 상대편, 윤 이병의 정체가 저지를지도 모르는 좋잖은, 그 결과를 근심해서 찾아왔으니까 개운찮은 면이 있다. '누가 저한테 어쨌기에?' 보기만 하면 앵돌아져서 피해가는 것을, 그럴 때마다 길상은 꼴같잖다 싶었고 얼굴이 벌개져서 노려볼 때도 정떨어진다는 생각을 했었다. 송애의 새된 음성을 들었으나 길상은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린다. 길바닥에 피던 담배를 버린다. 마침 뛰어오는 봉구로부터 담뱃갑을 받아든 길상은 "수고했다." 하고 가버린다. 봉구는 입김을 내어뿜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송애는 홍이 잠들어 있는 방을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봉구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어디 두고보자. 어디." "어째 그럽매?" "뭐가!" "소리르 지르문서리," "소리를 질렀음 질렀지, 아아니 네가 시아비냐? 내내 방정을 떨더니 이젠 참견이야?" 죄없는 봉구에게 시비를 건다. 봉구의 입술이 튀튀하게 불거진다. "그만둡세." "그만 안 두면 어쩔테냐?" "이러지 맙소. 무시기 잘못이 있다고 나더러 싸움질하재는 건가." "저게, 뭐 어째? 너하고 쌈하잔다구?" "앙이 그럿소꽝이? 아까부터 나르 보구 성으 앙이 냈다 말임둥?" "달라들어?" 송애는 쫓아 오더니 봉구 뺨을 찰싹 소리나게 때린다. "어째 때립매까! 앙이, 무시기 때리는 법이 어디에 있능야!" 봉구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다. "가게 문이나 닫아!" "싫슴!" 송애는 가겟방에서 뱅뱅이를 돌다시피하다가 뒷간으로 튀어간다. 뒷간의 문고리를 걸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송애는 울음을 터뜨린다. '아아, 죽어버릴까 부다!' 제 3 편 밤에 일하는 사람들 1장 땡땡이중 대문간에서 누군가하고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은 기척이더니, 대문 닫히는 소리가 났었다. 그런 뒤 싸리비를 치켜들고 사랑뜰에 들어온 행랑아범 전서방은 새벽녘에 내린 눈을 담장 겉으로 쑤욱쑤욱 쓸어붙인다. 쥣빛 수 염에 덮인 전서방 입 언저리를 하얀 입김이 바라부는 방향 따라 휘날리고, 오동나무 가지에선 눈가루가 날아 내리곤 한다. 처마 끝에 실린 눈, 담장 용마름에 실린 눈에 아침 햇살이 퍼지면서 반짝거리고 녹아서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끼여 있는 가희동의 아침은 양반님네 기지개처럼 느리고 한가롭기만 하다. 이상현이 기식하고 있는 이판서댁도 아직 식전이다. 당주 이범창의 부인 강씨는 어젯밤 둘째아들과 함께 친정에 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봄 생때같은 외아들이 감옥에서 죽어 나온 뒤 후사를 정하기도 전에 심화병으로 오늘내 일 하고 있는 오라버니의 임종을 보기 위해 간 것이다. 집안이 괴괴하다. 눈을 다 쓸어붙인 전서방은 싸리비를 담장 옆에 휙 던진다. 사양길을 걷고 있는 이 집 뜰안을 서성대던 춥고 배고픈 참새 서너 마리가 푸르륵 날아 올라 오동나무 가지에 앉는다. 전서방은 사랑채 작은 방 쪽을 힐끔 쳐다보며 바짓말을 추킨다. 뭉실한 코는 늙 은이답지 않게 주독이 올라 벌겋고 눈까풀은 늘어져서 심술이 더럭더럭해 보인다. 세도가 빨랫줄 같았던 선대 의 그 좋은 시절, 청지기였던 전서방은 사양길로 치닫는 이 집에 행랑아범으로 눌러앉아 긴 성상을 보낸 늙은 이다. 그에개는 소싯적부터 약간 심상찮은 주벽이 있었다. 주벽이라곤 하나 남에게 뭐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 었고 나무란다고 고쳐질 것도 아니어서 이판서댁에선 무관심하게 봉라온 터인데 육심이 다 된 오늘날까지 그 심상찮은 주벽은 여전하였다. 노상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노상 술을 마실 처지도 못 되지만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 석 달 만에, 그것은 그의 주머니가 일정한 무게에 도달했을적에 결행되는 일이었으니까. 하기 는 풀밭이 섰던 얫날에는 한 달에 두서너 번이 넘었을 테고 요즈막 같아서는 주머니의 무게가 금저울같이 각 박했으므로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으나 주머니를 술판에 끌러놓고 술을 마시는데 바닥에 나도록 밤이 새도록, 마치 보가터진 것 같은 무시무시한 폭음이다. 날이 희뿌옇게 셀 무렵 관가에 끌려가서 곤장 백 대쯤 맞은 꼴 이 되어 돌아오면은 자리에 쓰러지는 동시 인사불성이 되고 이튿날은 한 시각 가량 늦게 일어나는 것 외엔 맡 은 소임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장님같이 눈을 감고 다니는가 하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곤 했었다. 그는 한두 잔의 술은 결코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니 한두 잔쯤 술을 내밀어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니 공술은 안 먹는 꼴이 되었고 한 번의 폭음을 위해 전서방만큼 돈을 사랑하는 위인도 흔치 않을 성싶다. 한번은 상현이 이 불쌍한 늙은이를 위해 밤늦게 돌아오면서 술 한 병을 사온 일이 있었다. "그거 마셔봐야 간에 기별이나 가겠소? 차후는 술 사는 돈 소인 한테 주슈." 하며 경멸하듯 술병은 거들떠보지 않고 거만을 떨었다. 심사가 뒤틀린 상현은 그 말에 대해선 아무 대꾸를 않 고 방에 들어가서 혼자 술병을 비우고 말았다. 그 후에도 상현은 몇 번인가 방에 혼자 앉아서 사온 술병을 기 울인 일이 있었으나 전서방에게 두 번 다시 술병을 내밀지 않았고 술값으로 돈을 준 일도 없었다. 나이 젊어 서 편협하고 콧대가 센 상현의 곯려주는 방법인데 전서방은 전서방대로 지체도 별 것 아닌 시골 선비의 자제, 필경은 우리 상전댁 식객 아니겠느냐는 은근한 거드름과 멸시하는 거동이었고, 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자연 좋지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전서방의 술버릇이라는 것도 소싯적 그의 말을 빌자면 계집이 샛서방질을 한 그 때부터 얻은 것이라나? "하동 서방님." 전서방은 댓돌 아래까지 가서 작은 사랑방을 향해 부른다. "왜 그러느냐." 대답이 퉁겨나왔다. "일어나셨소?" "그래 일어났다." "손님이 찾아왔소이다." 앞 뒤 매듭이 분명찮은 해파리같이 흐물거리는 음성이다. 그것은 늙어서 이가 빠진 탓이겠다. "내게 말이냐?" "그렇소."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방안의 이불이 개켜져 있었고 상현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다 보는 까무끄름한 얼굴에 우수는 있었지만 실의에선 벗어난 듯 안정된 느낌은 있다. "어디서 오신 손님이라든가." "중이오." "중?" "지리산 중놈이라니까요." 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먼, 지금도 이판서 시절인 줄 아나? 싶었으나 상현은, "중하고는 아는 이가 없는데... 이상하군. 분명 나를 찾드냐?" "그렇소이다. 하동서 왔다니까 틀림없는 일 아니겠소?" "흠." "실은 어제도 왔었고 그저께, 그 전날에도 왔었소. 처음에는 시주 받으로 온 땡땡이중인 줄 알고 내쫓았고 다 음은 서방님이 부재중이라 허행을 했습지요." "그렇다면 왜 내게 알리지 않았느냐?" "이가 빠져서 말씀이오, 아마 이빨 사이로 생각이 슬렁슬렁 빠져 버리는 모양이외다. 잊어버렸소. 헤헤헷..." 약을 올리려는지 웃는다. "들라 하게." 상현은 성이 나서 말한다. 전서방은 허리춤을 추켜올리며 어슬렁 어슬렁 걸어간다. '심술궃은 늙은이 같으니라구.' 문간까지 나온 전서방은 헛기침을 하고 대문을 연다. 엄동 추위에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언 혜관이 눈을 부릅 뜨고 서 있었다. "들어오라 하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혜관은 허둥지둥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아따, 곤두박질 치겠구먼." 전서방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집안으로 들어선 혜관은 어디로 가야 할지 서둘면서 사방을 둘레둘레 살핀다. "날 따라오우." 전서방은 중문에서 옆쪽으로 발길을 꺾는다. 사랑 댓돌 아래 이르러서, "중, 아니 손님 오셨소." "오냐." 상현이 마루까지 나온다. "나를 찾아오셨소?" 의아해하며 혜관을 쳐다본다. "네." 혜관은 단주 든 손을 모아 합장하고 나서 "하동서 서울에 당도하기론 나흘이 지났소만 이판서댁 문턱이 어쩌나 높든지요. 해서 오늘은 염치불고하고 식 전에 왔더니, 하마터면 문전에서 동태가 될 뻔하였소." 푸르딩딩하게 언 얼굴, 혜관은 정말 화가 나 있었다. 떠나지 않고 서 있던 전서방이 받아서, "아암요, 이판서댁 문턱이 아니 높을 수 있겠소? 개차반 같은 시절이라 그렇지 판서직이 뉘집 애 이름인 줄 잘못 알았나보오." 상현은 눈을 부릅뜨고 전서방을 노려보다가, "추운데 어서 오르시오." 혜관에게 말한다. "네." 혜관은 마루 끝으로 다가가며 다시 말했다. "중이 동냥을 가면 언제나 먼저 짖어대는 게 강아지더구먼요." 뭐라 응수하려고 입술을 쭈뼛거리던 전서방은 갑자기 늙은이 시늉을 하며 주독이 올라 벌개진 코를 소매 끝으 로 문지르다가 슬그머니 물러나간다. 바랑을 마루 끝에 풀어놓고 상현을 따라 방으로 들어선 혜관은 다시 합 장하고 나서 자리에 앉는다. "소스 혜관이라 하옵고 쌍계사에 있는 중이올시다." "나는 이상현이오." 새삼스럽게 인사를 나눈다. 상현은 눈썹 속에 돋은 몇 가닥 흰털을 바라보며 이 중 나이는 오십에 가까운 모 양이라 짐작하고 얼굴 광대뼈가 불거진 것을 보아 옹고집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혜관은 혜관대로 이동 진을 본 일이 있어서, '부친보다 그릇이 작아 보이는군. 빨근빨근한 성미는 있겠고.' "한데 무슨 일로 오시었소?" "네 다름이 아니오라... 하동서 마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마는..." "무슨 전언이라도..." "전언이라기보다... 마님 말씀이 설 명절에는 꼭 내려오셔서 제사를 뫼시도록," "네... 집안은 별고 없다 하시든가요?" "가내가 두루 편안하신 듯, 별일은 없는 것 같고 마님이 섣달 보름께쯤 억쇠를 올려보내겠다, 그러시더구먼 요." "무슨 일로?" 알면서 묻는 것이나 혜관은 모른다 하고 상현의 얼굴은 침울해 진다. 집을 떠날 때 설에는 꼭 오겠노라 했는 데 이 낯선 중에게 당부하고 그래도 아들이 못 미더워 억쇠를 올려보내겠다는 어머니의 심정을 왜 모르겠는 가. "먼젓번 떠날 적에도 아버님을 뵈옵고 곧 되잡아 오겠노라, 철석같은 맹세를 아니 하였더냐? 그러고도 사 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느니라. 아버님은 이제 돌아오지 못하실 것으로 내 작정하였으니..." 모친 염씨 눈에 눈물이 희번덕였다. 이동전보다 더 늙어버린 염씨, 느슨하게 태평스러웠던 성미도 사오 년 동 안 변한 모양이다. "그러하니 아예 의지하고 믿을 생각은 전혀 없다. 사사로운 일이라도 아녀자가 막고 나설 일이 못 되거늘 하 물며 나랏일을 한다는 마당에서 내 뭐라 하겠느냐? 다만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후사, 가문이 끊겨서야 되겠느냐? 아직도 너 나이 젊다마는... 이곳에 몸져 살기만 한다면야 내 가슴이 이리 답답할까? 앞으로 세월이 어찌 될려는지, 너 말로도 일본으로 갈지 중국으로 갈지 모른다 하지 않았느냐? 서울에 있는 동안 그 동안만 이라도 제발 자주 내려오도록 하여라. 옛날 같지가 않아서 수삼일이면 기차라는 것이 있어서 내왕이 수월타 하니." 상현은 어머님이 말씀을 잘하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말씀이 많아졌다는 생각도 했었다. 며느리를 불러다놓고 고담책을 많이 읽으시나 보다 생각하기도 했었다. "아기 처지도 생각해보려무나.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지 않겠느냐? 남의 가문에 들어와서 할짓을 못하는 게 어디 아기 죄겠느냐? 한데도 노상 민망하고 죄스럽게 여기는 게 여자의 마음이니라." 떠나는 남편을 보지 못하고 장독대 옆에 돌아서 있던 아내 뒷모습이 잠시 눈앞을 스쳐간다. 혜관은 침울해진 상현으로부터 눈길을 돌리며 두 손바닥을 싹싹 비빈다. "날씨가 고추같이 맵소이다." "북방이니까요. 섬진강 겨울바람은 두만강 강바람에 비하면은 차라리 훈풍이지요." 별로 걸맞지 않은 대답이다. "그럴 테지요. 남쪽이야 어디 강물이 제대로 얼고 겨울이 너어가나요?" 혜관도 민적거리기 시작한다. "헌데 스님께서는 무슨 일로 서울 올라오셨소?" "네, 그게 실은, 서방님을 꼭 뵈어야겠기에 소승이 본댁으로 찾아가서 서울의 거처하시는 곳을 물었습지요." "나를 만나려고요?" "네." "그건 또 무슨 까닭이지요?" 상현은 생면부지의 늙지도 젊지도 않은, 일견하여 동냥을 빌고 다니는 땡땡이중으로밖에 볼 수 없는 혜관을 유심히 살펴본다. "간도의 소식을 알고자 불원천리 이곳까지 왔소이다." "뭐라는 게요? 간도의 소식을." 긴장한다. 조준구의 염탐꾼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 것이다. "간도의 소식을 알아야겠기에, 보시다시피 운수의 처지라 거처가 일정치 않아서 여러 가지 일들이 꼬여드는 모양입니다마는... 서방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았더라면 소승이 간도로 한번 건너갈 심산이었소." "대관절 스님께서는 소생이 돌아왔다는 얘기를 뉘한테 들으셨소? 아는 이가 집안 식구말고는 없을 텐데 말씀 이오." 내가, 소생으로 변한 만큼 상현은 단순한 땡땡이중이 아니라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네, 봉순이라고, 서희애기씨랑 함께 자란 침모 딸 봉순이를 아실 겝니다." "알지요." "그 아이는 지금 진주에 있습니다마는 하동에 들르는 길이 있어서 억쇠를 만났던 모양이고 그래 서방님 돌아 오신 소식을 듣고 절로 소승을 찾아왔었더구먼요." "그랬었군요." 대개 경위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중이 소식을 알기 위해 간도까지 가려 했었다는 이유가 상현에게는 궁금하 다. 그러나 혜관은 보따리 속에 꾸겨넣은 무슨 중요한 밀서이기나 하듯 좀체 본론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바깥 쪽에서 톡톡 두드려보는 것 같은, 분명찮은 허두를 다시 꺼내었다. "소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참판댁과는 깊은 연고가 있다 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서희애기씨를 뫼시고 떠난 길상이는 소승이 업어서 기른 거나 다름이 없습지요." 비로소 혜관의 눈에 감정이 서린다. 솟은 관골 언저리가 불그레하게 물들기도 하고, 추위에 얼었던 얼굴이 방 안 온기에 녹으면서 열이 나는 것인지 모른다. 상현의 눈에도 열기가 오른다. "그 아이는 어릴 적부터 재주가 비상했습지요. 소승이 금어인 관계로 마음속 깊이 애지중지했습니다. 경전을 외기보다 화필 한 자루 가지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으로 믿는 무식한 땡땡이중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길 상이 그 아이야 말로 금어로서뿐만 아니라 장차 대덕으로 크게 빛을 내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노장스님께 서 어째 그러셨는지 그 아이를 속계로 풀어주시고 말았지요. 몇 해 전, 그러니까 노장스님께서는 어지러워지는 세상을 한탄하시고 천수관음상 조성에 뜻을 둔 일이 있었소. 그때도 떠나보낸 길상이를 몹시 아쉽게 생각하셨 지요. 길상이놈이면 해낼 수 있는 일인데, 하시면서 말입니다. 상현은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있었다. 혜관은 얘기가 옆길로 간 것을 되돌린다. "연이나 그 아이하고 소승과의 인연 같은 것은 오늘 이 곳을 찾은 일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고 노장스님 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바가 있고 해서 또 다른 일로도." "그럼 그 노장스님의 부탁 때문에 오셨다 그 말씀이오." "네." "노장스님은 또 왜 그러셨을까요?" "노장스님 역시 돌아가신 최참판댁 마님으로부터 서희애기씨 부탁을 받으셨지요." "노장스님이란 어떤 분이시오?" "우관선사라 하옵고 서방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최참판댁과는 선대 때부터 깊은 불연으로 맺어졌습지요. 지금은 돌아가시고 아니 계십니다." "그러면 또 다른 일이라 했는데 그건 무슨 일이오?" 상현은 취조관처럼 차근차근 묻는다. 혜관은 잠시 당혹해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소승으로서 말씀드릴 수가 없소." "그래요? 그럼 간도 일에 대해서 물어보시오." "서희애기씨에 대해서 좀 소상하게 말씀해주시오." "그건 어렵잖은 일이지요." 상현은 침착하고 냉정한 듯했으나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펴는 것이었다. "최서희 규수는 몸 성히 잘 있습니다. 몸 성히 잘 계실 뿐만 아니라 최규수는 최참판네 여장부답게, 그렇지요, 축재하는 데는 비상한 재간이어서 왕시 누리던 위엄과 영광을 그곳에서도 변함없이, 네 그렇습니다." 상현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서희에 대한 얘기를 혜관에게 모조리 털어놓는다. 길상과의 혼담에 관한 것만 제 외하고. 혜관은 안심이 된 얼굴이라기보다 신중한 궁리를 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다. "조금도 염려하실 것 없소. 멀지 않아 최규수는 조가네를 평사리에서 몰아내려 돌아올 겝니다. 근심하셔서 서 울까지 소생을 찾아오신 스님 얘기를 듣는다면... 하하, 하, 핫하... 웃을 겝니다." 맥이 쑥 빠진 웃음 소리다. 찬모가 조반상을 들고 들어왔다. 혜관은 구석지로 엉덩이를 밀어 붙이며, "어서 조반 드십시오. 염려 마시오." 했으나 일어서서 하직하려 하지는 않는다. 할 얘기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따로 밥상 내올 것 없고 밥 한 그릇과 수저 한 벌만 가져다주게." 한사코 사양하는 혜관과 어떻게 해야 할 지 어중간한 꼴을 하고서 있는 찬모 사이에서 중재라도 드는 것처럼 상현이 말했다. 막상 밥과 수저가 밥상 위에 놓여지자 혜관은 순순히 밥상으로 앞으로 다가왔다. 씨근덕거리듯 이 밥을 먹으면서 혜관은 물었다. "서방님은 서울서 뭘 하시오?" "별로 하는 것도 없소. 일본 글을 좀 배우러 다니지요." "일본으로 가시려구요?" "그럴 셈인데 그건 두고봐야겠지요. 배워야 한다고 모두 떠들어 대니까, 죽창 들고 나설 계제도 아니고 젊은놈 들 죽어나는 시절이지요." 쓰디쓰게 웃는다. "이 댁과는 인척," 말이 끝나기 전에 "아니오. 이 댁 이범창 선생은 아버님과 잘 아시는 사이지요." "그러면은 지금 연해주에 계신다는 왕시의 관리사 이볌윤 그 어른하고 이 댁은 한 집안인가요?" "아주 척이 멀지요." 흉금을 풀어놓은 듯 상현은 경계 없이 털어놨으나 실상 그의 기분은 여전히 자포자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심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이를 시초로 하여 혜관은 간도 방면, 이동진이 있다는 연해주 방면, 그곳 독립군에 대한 얘기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목탁이나 두드릴 것이지 중놈 분수에 쓸데없는 관심은왜 가지누.' 상현은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나타내며 모멸하는 것이지만 혜관은 눈치코치없는 미련둥이같이 톡톡 쏘아대듯 하는 말을 부지런히 주워담듯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입맛을 다시고 또 질문을 하고. 밥상을 물린 뒤 두 사 람의 앉은 자리는 멀어졌다. 혜관은 오히려 숨을 꿀꺽 삼키며 기맥이 통한 몸짓을 하며 독립군의 활동 상황을 보다 소상하게 캐내려 든다. "아니 내가 뭐 독립군 하다 온 사람이오. 그리 꼬치꼬치 묻는다고 내가 알 턱이 없지 않소." 상현은 벌컥 소리를 질렀다.마찬가지다. 눈치코치없기로는. "그러나 서방님께서는 아버님 곁에 머물다 오셨으니 그곳 사정이야 훤할게 아닙니까. 이곳 산산골골에 숨어 있는 의병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그곳 형편이오." "아버님 아버님 하지 마시오! 그곳에 가 있다고 모두 독립운동하는 줄 아시오? 독립군 잡아먹는 조선놈도 얼 마든지 있단 말씀이오." "그야 그렇겠지요. 이곳인들 사정이야 매한가지 아니겠소? 의병이 있는가 하면 의병 잡으러 다니는 조선놈 순 사 헌병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놈부터 모가지를 댕강댕강 짤라놔야 한다니까요." 그 말만은 중 혜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통이 터진 상현은 결국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지껄여준다. 연해 주 사정, 간도 사정 그리고 서희가 군자금 거절한 얘기까지 마구 털어놓는다. 아주 사악스런 얼굴로, 알칼진 목소리로, 우둔하 혜관의 몸뚱이를 꼬집어 쥐어뜯고 하는 것처럼 사정이 없는 구박이며 화풀이다. 그러나 이상 한 일은 그렇게 지랄을 하듯 성미를 부리고 나니 좀 속이 가라앉고 오히려 혜관과는 옛적부터 알았던 사이처 럼 친숙해지는 것 아닌가. 지쳐서 서로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상현이 무안쩍어 싱긋이 웃는다. 혜관도 씩 웃는 다. 울퉁불퉁한 까까머리, 광대뼈 언저리는불그레하고, 상현은 불현 듯 저 중머리하고 주막에 가서 술을 마셔 보았으면 생각다가 낄낄 웃는다. "스님." "네." "내 앞에선 앞으로 길상이 칭찬은 마시오." "길상이 칭찬을요?" "칭찬뿐만 아니라 그놈자식 얘기도 말아요." "간도서 사이가 안 좋았구먼요." "대판 싸웠지요. 도시 건방진 놈이오." 하고서 상현은 또 낄낄 웃는다.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을 싫어들 하지요." "거 중이 마음에 없는 아첨 하면 못써요. 속으론 양반 자제란 것을 명패처럼 달고 댕기는 아니꼬운 졸장부 하 면서 말이오." "하 참, 잘난 것도 층층이, 가지가지 다르니까요. 하핫..." "그보다 스님이 봉순이 얘기를 했는데, 그 아이 아니 지금은 이십세가 넘어서 어른일 테지만 어떻게 됐지요?" "네? 아 네. 그게 좀." "그때 봉순이는 왜 오지 않았는지, 무슨 사고가 난 줄 알고 우린 떠났지요." "봉순이는 그때 절에 있었소. 소승도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일단 진주로 가서, 간도로 가든 아니 가든 하라고 타일렀지마는 무슨 까닭인지 막무가내더구먼요." 혜관은 봉순이 길상을 사모하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음력 오월달이었을 것이다. 봄이 꼬리를 감추면서 싱 싱한 푸르름이 산과 들을 덮고, 밤이면 나무 그림자가 미친 듯 소용돌이 쳤었다. 뻐꾸기가 또 어쩌면 그렇게 이숲 저숲에서 흐드러지게 울어쌌던고. 봉순이는 산사에서 며칠 묵었는데 젊은 사미승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존 재, 고통스러운 밤이었을 것이다. 상전을 모시고 온 계집종도 아니요. 신성불가침의 양반댁 규수도 아니요. 의 지가지할 곳 없는 외로운 처녀가 홀로, 뻗치면 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봉순의 자태는 비록 사바를 떠난 사문 이라 할지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금지된 정욕이기 때문에 한결 치열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길상을 떠나보낸 우수와 천부의 교태를 겸한 봉순의 모습, 화류계에 몸을 던질 심산이었던 만큼 무방비 상태를 엿보았을 사미 승들의 고통을 혜관은 지금도 능히 헤아릴 수가 있다. 어디 그들뿐이었던가. 여자에게 둔감하였던 중 늙은 혜 관도 절마당을 알짱거리며 지나가는 봉순이를 보았을 때 가슴에 봄 아지랑이 같은 것이 몰려왔었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곤 하지 않았던가. "기왕의 고집이라고 해야 할지... 딱하게 되었지요. 절에서 며칠을 묵은 뒤 간다온다 말없이 떠나버렸는데 나중 에 들려온 소문을 들으니까 읍내 소리꾼을 찾아갔다는 게요. 그 후 무슨 광대 단체를 따라갔다는 말이 있더니 이번에 본인이 와서 하는 말을 들으니 그동안 고생도 많이 한 것 같고 진주서 기생으로 나간다는 거였소." "왜 기생이 되려는 생각을 했을까? 인물이 그만하면." "인물이 그만하니까 그랬을 테지요. 게다가 천성으로 광대기가 있는 애였던 것 같소." "그렇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이번에 고향 내려가면 진주로 한번 놀러 가봐야겠소. 길상이 소식도 전해주 기로 하구." 혜관은 움찔한다. '능청스럽긴.' 서방님 아닌 도령하며 혜관은 마음속으로 웃었고 상현ㅇ느 못난 돌산 대가리를 하고서 그래도 생각은 잘게 미 치는구나, 그런 말을 눈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봉순이 그 아이 일은 그렇고 최참판댁 애기씨 나이가 이십이 다 되었을 텐데... 아직 혼인은 아니하셨을 테지 요?" 상현은 혜관을 빤히 쳐다보다가 "내가 용정을 떠날 때까지 혼인은 아니 했소." 길상과의 혼인 말은 입밖에 내지 않는다. 모친 염씨에게도 못 한 얘기다.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고 싶은 얘기, 염두에서 싹 몰아내고 싶은 얘기다. 그러나 때때로 생각이 나는 일이며 그럴 때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아파오는 기억이다. "우리 그럼 나가보실까요." 상현은 발작적으로 일어섰다. 기와집 처마가 가지런히 도열한 골목길은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여전히 조용한 듯했으나 햇볕에 녹아 번지 는 눈 물,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음에 어수선하다. 이윽고 장옷에 나막신을 신은 늙은 여자 하나가 지나간다. 그 뒤를 이어 하인에게 업혀가는 소년이 있다. 학교에 가는지 서당으로 가는지. 상현과 혜관 이 길을 꺾어 도는데 뒤에서 인력거 하나가 달려오더니 그들 옆을 바싹 스쳐서 앞서간다. "스님." 상현이 속삭이듯 불렀다. "네." "저 인력거에 누가 탔는지 모르시지요?" "알 턱이 있겠소." "조준구가 타고 있다면 너무 우연이라 생각하겠소?" "조준구가!" "그렇소. 나는 가끔 이 길에서 저 인력거를 본답니다. 인력거꾼의 어거지로 잡아빼는 저 자라모가지모습도 이 제 눈에 익어버렸지요." "그 위인이 이 근방에 살고 있다 그 말씀이오." "소가가 이 근방에 있다더군요. 본가는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소만." "하동서도 소문이 자자합디다. 서울서 대구러 같은 집에 산다구요. 대궐 같은 집에 살건 용궁 같은 집에 살건 마을 사람들은 그 홍씨라는 여인이 동네를 떠준 것만도 고마워서 춤을 출 지경이었지요. 아주 극악무도한 계 집이었소." 극악무도한 계집이라는 말도 중 혜관의 목소리는 아니다. "서울 장안도 그리 넓은 곳은 아닌 모양이오. 나 같은 젖비린내 나는 서생에게도 조준구 그자의 행장을 심심 찮게 들려주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 뭐 요즈음엔 왜인들과 합자한 광산 회사를 설립했다던가요?" "그 소문이라면 소승도 들었소. 그 일 때문에 많은 땅을 처분했다던가요?" "밑져야 본전이니까." "최참판댁 만석 살림을 먹어치우는 것만도 식상할 터인데 또 어떤 짓을 한 줄 아시오?" "둔답을 적잖이 착복했다더군요." "네, 도장을 한 바가지나 만들어서 토지 조산가 뭔가 한다는 작자들과 짜고 말이오. 말이 둔답이지 그놈의 나 라땅 속을 들여다볼 것 같으면 가난뱅이 한두 섬지기 땅도 숱하게 묻혀 있으니 말씀이오. 셋돈 안 물려고 맡 긴 땅 솔랑 날아가지 않았소? 벼록이 간까지 꺼내먹은 게지요." "사람이 염치불고하면 못할 짓이 뭐있겠소. 안 하는 놈이 천치바보 아니오? 목탁 치면서 문전마다 동냥을 비 는 스님이나 나같이 한빈하여 남의 집에 기식하는 소년 서생이나 다 못나서 이런 말이나마 지껄이는 게요. 하 하핫핫... 인심이란 걸렛조각이오." "그건 호의호식하는 사람들만 보아온 탓이지요. 그렇지가 않소. 인심이란 천심이오. 백성을 믿어야 합니다." 혜관은 떼를 쓰는 아이같이 말한다. "그래요? 믿어야 합니까?" 비꼬며 놀려대듯 웃음기 머금은 반문이다. "돌아가신 우리 노장스님께서," "아따, 우리 노장스님, 우리 노장스님, 그것도 염불인가요?" "허허 참, 이번엔 노장스님 얘기가 아니외다. 노장스님의 죽마고우 문의원 말씀인데," "아아 그 늙은 의생이라면, 나도 어릴 적에 침을 맞은 일이 있었소." "그 문의원께서 언젠가 말씀하시었소. 가난한 백성들은 영신환 한 알이라도 소중하게 정성들여서 먹고, 그 한 알의 영신환 몇 배의 정을 느끼지마는 배부른 사람들은 천하 명약도 정으로 받지는 아니 한다구요. 초봄 들판 에서 나물을 캐는 고사리 같은 손은 정에다 정을 돌려줄 줄 알지만 시궁창에 흰밥 쏟아버리는 아낙은 허기든 사람에게 식은죽 한 그릇 베풀 줄 모른다구요." "네, 네, 알았소이다. 허나 장안에 들면 조준구 그 사람도 인심이 후해진다더군요. 한다 하는 날건달 양반들이 그자 문객 노릇을 한다니까 과히 인색치 않다 그 말 아니겠소? 하기는 자신이 천대받던 옛시절을 생각하여 보 복하는 심정으로 그런다고들 하기는 합디다마는... 요지경 같은 세상이오." "조준구 얘기가 났으니 말입니다마는 그 병신 아들 있지 않소?" "꼽추도령인가 그자 말이오?" "흔히들 병신 마음 고운 데 없다고들 하지만." "장가는 들었소?" "아직은, 그 도령이 혼자 하인배들하고 최참판댁에 남아 있는데 몇 번인가 대들보에 목을 맸다는 게요." "거 신통하군요." "하인들한테 들켜서," "들킬 것을 예상하고 목 매단 것 아니오? 병신 좀 존경하라는 투정으로 말이오." "허허 참 사사건건이, 아무튼 지금은 감금된 거나 마찬가진데 주야장천 서책만을 낙을 삼고," "그럼 됐지요 뭐. 그런 낙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요." 이야기를 동가리 동가리 내듯 눙쳐버리는데 혜관은 인내심 깊게 이어간다. "한데 그 도령이 밥상만 받으면 운다는 게요." "그건 또 무슨 청승이지요?" "가슴을 치면서 말이오. 이 더러운 밥을 아니 먹는 의지가 왜 자기에겐 없느냐고 하면서 말이오." "그건 제법이군요." "그러다가 서울서 모친이라는 그 계집이 한번 내려오기만 하면 불쌍한 그 병신 자식을 무섭게 닦달을 한다니 그게 어디 사람의 탈을 쓰고... 하여간 기기묘묘한 세상이오. 지옥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그게 바로..." 그들은 함께 나란히, 그리고 막연한 걸음걸이로 남대문 근처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상현은 이 중머리하고 함께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버렸고 두 사람은 역시 막연하게 어물엄루, 서로의 갈길도 묻지 않 은 채 작별 인사를 한다. 상현은 멀어져가는 혜관의 바랑 진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발길을 돌린다. 갑자기 겨울날 찬바람이 검 정 두루마기 소매 사이로 설렁설렁 기어드는 것을 느낀다. 상현은 몸을 한번 부르릉 떤다. 2장 나룻배 겨울은 겨울인데, 설까지 함참을 기다려야 하는 어중간한 시기여서 장은 쓸쓸하고 한나절이 지나자 벌써 파장 이다. 남 먼저 와서 뱃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봉기는 찌그러진 갓에 누덕누덕 기운 두루마기를 입은 서서 방을 배안으로 이끌어 올리는 한복이를 쳐다본다. "용케 한복이를 만났구마, 서서방. 길가다 엽전 줏은 것보다 재수 좋은 날이오." 봉기가 말을 걸자, "애애라 이 사람아! 너거들도 청춘이 아니 멀었네라." 서서방이 지팡이를 치켜들고 허공에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가래 끓는 소리를 질렀다. "하이고 청춘이 아니 멀었다니 이 무슨 가뭄에 비 내리는 소리요?" 서서방을 뱃바닥에 앉히면서 한복이도 시죽시죽 웃는다. 백발이 아니 멀었네라 해야 할 것을 정신의 혼미 상 태가 여전한 서서방은 청춘이라 한다. 효부며느리가 있고 양자로 얻어온 손자도 방안 심부름쯤 하게끔 자랐는 데 서서방은 읍내로 나다니며 걸식 행각을 그냥 계속하고 있었다. "저 늙은네 죽으면 열부비 세워야 할 기구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마누라 묏등에 앉아 씨부렁거리며 걸식해온 밥을 먹는 것도 여전하였다. 오늘 한복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육로 삼십릿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다음은 혜관이 나룻배에 올랐다. "시님 그간 편안했십니까? 어디 먼길 갔다오시는가배요." 봉기는 배에 오르는 사람마다 말을 걸리고 작정했는가. 구두쇠 소리 듣기론 옛날과 다름없지만 주머니 무게와 는 상관이 없는 말씨만은 싹싹했다. 심술꾸러기 같았던 눈빛도 묘하게 쓸쓸해 보인다. "뭐 먼 길이랄 것도 없고 발 닿는 대로 다녀오는 길이오." 혜관은 눈이 부신 듯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식은 밥덩이를 싼 베수건을 뱃바닥에 놨다가 다시 무릎 위 에 올려놓으며 중얼 중얼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서서방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눈길은 봉기에게 돌아왔다. "요즘엔 살기가 좀 어떠시오?" "물으나 마나, 빤히 아시믄서 그러시오?" 눈을 부릅뜨며 실쭉 웃는데 망건만 두른 봉기 상투머리도 어지간히 희어졌다. 혜관도 허허 하고 웃는다. "말도 마이소. 진작 세상이 이럴 줄 알았더믄 나도 머리 깎고 산에나 갔일 것을." "이제도 늦지 않소." "쪽박에 밥 담듯이 자식새끼들 냉기놓고 말이오? 이자는 할수헐수 없구마. 계집자식 그기이 거물장인께로." "처자식보다, 이거 얼매요? 한냥이라꼬요? 닷돈 하소. 이거 보소, 험 투성인데 온돈 받겄다 그 말이오? ... 그런 재밀 못 버리는 게 아니오?" 봉기 목소리까지 흉내내는 바람에 멀거니 서 있던 사공이 큰 소리를 내며 웃고 한복이 낄낄 웃는다. "아따 시님도 별걸 다 아시오." 옛날 같으면 성을 발칵 냈을 봉기가 허허허 하고 웃는다. "사램이란 답대비, 음 답대비 말입니다. 세월에 속아서 사는 기이 병이다 그 말인 기라요. 내일은 우떨고, 모레 는 우떨고? 하 참 그러다 보믄 어느새 북망산 뫼구덕이 아가리를 떡 벌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차생 길을 닦게 절에 오시오. 내 그러면은 머리 자알 밀어주지요." "허허허헛..." 드높은 봉기 웃음 소리에 굵직한 혜꽌의 웃음 소리가 겹쳐든다. 세 사람의 농부가 나룻배에 오르고 배는 강심 을 향해 물에서 떨어져 나간다. "봉기." 윗 마을에 살다가 화개 쪽에 땅을 얻어 이사간 농부 한 사람이 불렀다. "저눔으 인사 좀 보게? 손자까지 본 나한테 이름자를 놔? 으응?" 눈을 부릅뜬다. "손자 이름을 알아야 아무게 할애비 할 거 아니가. 하기야 외손자 그기이 어디 자손인가? 나겉이 친손자를 보 아야만 소리 한분 치지." "애키 순!" "그런데 거 두만애비 진주로 이사갔다믄?" "갔제." "살림이 따실 긴데 와 동네를 떴는고? "다 떠날 만한 까닭이 있인께로." 옆에 앉은 농부에게 담배 한 대를 얻어서 피워문 봉기는 말을 잇는다. "이팽이 그자가 동네를 뜬 첫 까닭은 아들놈을 잘 둔 때문이고 둘째 까닭은 자네도 알다시피 간난할매 제우답 으로 얻은 금싸래기 겉은 논 다섯 마지기를 뺏긴 때문이고 셋째 까닭은 두만어매가 순사한테 뺨을 맞은 때문 이제." "아따, 돌박에 솔씨 나기를 기다리지. 성급한 사람, 왔다갔다하다가 종을 못 잡겄네. 무신 놈의 까닭이 그리 길 고 꼬여 있노. 한마디로 잘돼서 갔다는 기가 못돼서 갔다는 기가." "못되기도 하고 잘되기도 하고 반반이라." "이팽이댁네가 순사한테 뺨은 와 맞았는고?" 머리를 싼 수건을 턱 밑에서 묶은 초동이 나뭇짐을 지고, 강심에서 가까이 보이는 강변길을 지나간다. "그러니께 지난 초여름의 얘기구마. 머, 머라 카더라? 그놈의 요새 신식 말인데 머라 카더라? 아무튼지간에 말 이사 별기이 아니고, 집안 앞뒤를 깨끗하게 치우라는 통문이 돌았던 일이 있었지."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벵이 돈다고." "그때 일이구마. 빌어먹을, 무슨 놈의 통문은 그리 많은고. 농사꾼은 땅이나 꿍꿍 파믄 되는 긴데 제에기, 아무 튼지간에 집안 앞뒤를 깨끗하게 치우라 카든 그날 주재소 왜순사가 검사마치로 나오지 않았겄나? 그러이 사람 으 일이란 우습다는 긴데 두만어매 그 사람 동네서도 둘째 가라믄 서러울 만큼 정갈하고 야물고, 허 참 궃고 짜잔한 계집들은 아무일이 없었는데 우째 그리 됐던지 솥을 안 씻어놨던 모앵이라. 왜순사 그놈도 좁쌀 양식 오실앞에 싸고 다닐 놈이제, 남으 부석에 들어가서 솥뚜껑까지 열어본 기라. 그래 와 통문대로, 머, 머라 카든 고? 제기랄! 아무튼지간에 깨끗이 치우라는 어명을." "미친 지랄 겉은 소리 다 듣겄다. 어명은 무슨 놈의 말라빠진 어명이고. 그래 왜순사 그놈이 이 나라 금상이라 말가?" "아 그러세. 말이사 우찌 되었든간에." 난처해진 봉기는 반쯤 졸고 잇는 혜관을 힐끗 쳐다본다. 사공은 맥이 빠진 듯 노를 젓고 있었다. 때 묻은 수건 밑에 젊은 나이 해서는 시들어버린 것 같은 얼굴이 솟아올라서 흘러내린 능선, 청자빛으로 웅크린 겨울 산을 향하고 있다. 저 젊은 사공을 위해, 수년 전 호열자에 죽은 늙은 사공은 황천길을 너무 서둘렀던 것 같다. "무식해도 유만부득이지. 어명이라니," 농부는 여전히 분개해 마지 않는다. 우쭐해진 기분과 더불어. "서당 문턱도 안 넘어봤이니 무식한 거는 정한 이치 아니가. 잘난 체하지 말고 내 말이나 들으라이. 아 그러 세, 그 왜순사놈이 솥뚜껑을 열어보고 나서 다짜고짜로 두만어매 뺨을 찰싹 때리지 않았겄나. 거 사람 겉만 보 고 말할 거 아니더마. 두만어매 그 사람 아주 독하데 독해." "어쨋기에, 목이라도 매달아 죽었소?" 안면이 없는 다른 농부가 물었다. "목을 매달았다는게 아니라," "그라믄 사생결단하고 순사한테 달라들었다 그 말이요?" "그것도 아니고, 밀개떡을 한 보따리 해 이고 서울 아들 찾으러 나섰거든. 큰자식 없다고 업수이 보아 당한 봉 변이라는 기지." "하 참." "서울이 한두 발 길인가? 여인네 몸으로 동네 밖을 모리고 살든 사람이 말이다. 그라고 아들 있는 곳을 딱이 아는 것도 아니고, 서울 가서 김서방 찾는 꼴이제. 남정네 둘째놈 영만이가 한사코 말렸지마는 그 엄전한 마누 래가 그때만은 황소 고집인 기라." 돌아앉아 있던 한복이 돌아본다. 이십이 넘었으나 아직 머리를 땋아내린 불머슴아이 같은 한복이는 죽은 어미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어머님도 고집이 세셨지 하고 마음속으로 뇌었을까. "아무튼지간에 보리떡 한 보따리를 해 이고 한 달을 걸었다 카든가 보름을 걸었다 카든가, 서울에 가기는 갔 는데 목수 김두만을 어디서 찾은 기든고?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겄다마는 수일간을 앓아 헤매다가 굶고 지 쳐가지고 남대문 밖에서 해장작겉이 나자빠져 있었다는 게지. 참말이지 모자 상봉을 옛적 얘기책으로 들었네 만은 바로 두만어매 모자 상봉이 얘기책 그대로다 그거라." "그래서 아들 데꼬 와서 분풀이를 했는가?" "분풀이? 일개 목수놈이 우찌 순사한테 분풀일 할꼬? 철랑개비 자줄 지닜다고분풀이를 해? 아들이 어매 기차 태워가지고 같이 온 것만도 두만어매로서는 분이 반분이나 풀맀일 기고 동네 사람한테도 체모가 섰을 기고." "거 순사 얘기가 났으니게 하는 말이지마는 저어기 미늘고개서 조선놈 순사 하나가 등을 찔리서 죽었다네." "머라꼬? 등을 찔리서 죽어?" 반쯤 졸고 있는 것 같은 혜관이 눈을 번쩍 뜬다. 그러더니 묘한 몸짓으로 염주를 매만지며 뱃전에 부서지는 물살을 내러다본다. "순사가 찔리 죽었다믄 그거는 뻔한 일이고 우리네도 그리 생각하는데 왜놈들이사 말할 거 있겄나? 의벼의 짓 이지 머. 그래 왜놈들이 군대를 풀어서 샅샅이 뒤지는데 그 통에, 실상 무신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의병이라고 이름 찍힌 기이 무서바서 숨어댕기든 사람들마나 무더기무더기 잽히온다누마. 그래도 정작은 누가 했는지 가 리내지도 못하고." "조선놈 순사 하나쯤 그리 야단벼락 떨 거는 머 잇노." "조선놈 순사 하나가 큰일이다 그기이 아니지. 그것뿐이라믄. 주재소 몇 군데나 불을 지른 일이며 왜순사도 벌 써 여러 명 목을 제가고 등을 찔러 직이고 한 일이 이곳저곳서 있었다는구마." "그래 그런가? 일전에 우리 동네에도 순사가 왔데. 호구 조사를 한다 캄시로, 그러니 의병 나간 가솔들 조사하 러 온 기라. 그렇지마는 우리 동네사 조씨네 눈이 무서바서 그해 그 난리를 겪은 뒤 의병 나간 사람 가솔이라 곤 한 사람도 없신게로. 김훈장 아들네밖에 더 있어야제. 나도 떠도는 말을 조맨 들었는데 말이 윤보가 아즉 살아 있다고도 하고." "그 말이야 나도 들었거마는. 내 그런 말 믿지는 않으나 축지법을 써서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별의별놈의 재주를 다 부린다 카고, 그거는 머 그렇다 카더라도 이때까지 윤보가 살아 있다믄 국으로 있지야 않겄지. 무슨 사단을 꾸미고 댕기도 댕길 기라." "그렇지요. 그 사람 동학 때도 장수 노릇 했다는 말이 있십니다." 다른 농부도 화제 속으로 끼여든다. "하여간에 동학 때 쌈질한 것만은 틀림이 없지. 장수를 했는지 접주를 했는지는 모르겄다마는, 그거이 윤보 짓 인가 아닌가 알 바 없는 일이라 캐도, 지리산 골짜기에 쥐도 새도 모르는 군사가 천 명은 넘기 숨어 있어서 여차 하믄 치고나올 기라니 대단한 일이제." "아, 나도 그 얘기를 들었소. 천 명 넘기 숨어 있다는 군사가 모두 동학군 하든 사람들이라요. 그때 동학군이 수십만이었으니 천 명 모으기란, 잘난 장수 한 사람 있으믄 어려븐 일은 아닐 기요." 낯선 또 다른 농부의 말, "윤보라는 그 사람이 곰보딱지 흉칙스리 생겨서 아이들도 보믄 달아난다 카고, 연장망대 짊어지고 집이나 지 어주는 목수라 해서 사람들이 대우를 안 해주지마는, 실상은 유식하기가 이를 데 없고, 옛날 동학군에 있을 적 에 저어기 저 백두산, 그 백두산의 정기를 타고난 무슨 도사한테서 비법을 배웠다 카이, 예사 인물은 아니라더 마요." 죽어서 땅속에 썩고 있을 윤보, 그 윤보를 두고 허무 맹랑한 얘기는 솜뭉치처럼 부풀어가는데 무슨 서슬에선 지 말이 뚝 끊어져버린다. 신이 났어야 할 사람들이 이상하게 풀이 죽으면서 침묵을 지킨다. 뱃전을 치는 물소 리 노 젓는 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는 것 같다. "금싸래기 겉은 제우답 다섯 미지기라..." 화개 쪽으로 이사간 농부가 곰방대에 담배를 재면서 혼잣말을 한다. "금싸래기믄 머하고 산몰랭이 비렁땅이믄 머하노. 말해보아야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봉기가 한숨을 쉰다. 먼산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그렇다, 실낱 같은 희망이랄까. 의병에게 겉어보는 실낱 같은 희망이 서글펐던 것이다. 못박힌 손바닥과 굽어진 등과 날로 늘어가는 흰 머리털과 지친 산천, 실낱 같은 희망 을 믿을 수 없다. 이 삼사 년 동안 겪어야 했던 웃을래야 웃을 수 없고 울래야 울 수도 없었던 일들, 적든 많 든 당할 수밖에 없었던 억울함이, 뚜렷하게 막연하게 들려오는 궁핍의 발소리가, 이들을 견딜 수 없게 한다. 관원들의 토색질이 심하고 양반들 하시가 피눈물나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땅 보고 하늘 보고 시절 좋을 것을 축수하며 들판을 초조하게 바라보아온 세월이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내 땅이다! 내 조상이 물려준 내 땅이다! 하늘에 대한 믿음 만큼 확실한 믿음이 언제 어떻게 하여 앞 뒤 돌아볼 새도 없이 무너져버렸는가. 토지조사란 무슨 놈의 낮도깨비냐. 괴상한 측량기구를 둘러메고 산산골골에 스며들어온 주사라 하고 통역이라 하고 기수 니 측량원이니, 그 양복쟁이들이 칼 차고 총멘 순사 헌병보다 더 무서울 줄이야. 아이고오, 하느님 맙소사! 땅 을 치고 통곡한들 감나무를 쳐다보고 짖어대는 것은 강아지뿐이었다. "아무말 말아, 사전을 둔답으로 숨겼다고 큰 벌을 내린단다. 입 꼭 다물고오." 입을 다무나마나 땅 임자는 어느덧 소작료 무는 소작인이 되어 있었고, "이, 이건 내 땅 아니여락우." 양복쟁이들 서슬에 놀란 농부는 엉겁결에 토래질인데 어느덧 논가에 깃대가 꽂히고 새끼줄을 치고. 다라 아닌 일본 정부의 소유로 기록되는 것을 땅 임자는 곡괭이자루만 매만지고 천치처럼 입을 헤벌리며 바라보는 것이 었다. 이같은 판세에 훤하게 사태를 아는 친일파 무리들이 죽치고 앉았을 리 없다. 애매한 둔답을, 위조한 도 장 꾸러미로 유유히 착복했던 것이다. 도처에서 벌어진 이 웃지 못할, 스스로 포기한 결과를 초래한 무지, 호 소할 방법을 모르고 호소할 증거도 없는 영세 농민의 소유지는 도처에서 국유지로 흡수되고 탐욕스런 무리들 이 횡령하고, 아이고오 하느님네! 명천의 하느님네! 한들 산천이 말을 할까. "금싸래기 겉은 제우답 다섯 마지기라 카지마는 그거야 감나무 밑에 누웠다가 입에 떨어진 감 아닌가. 본시 공거로 생긴 기니께, 몇 해 자알 걷어 묵었이믄 억울할 것 하나 없제. 번하게 치다보고 서서 구린 입 한분 못 떼보고 땅 뺏긴 사램이 얼매나 많다고, 이팽이야 밑져도 본전," "하야간에 난리는 난리라. 땅 한뼘 없다고 해서 남의 집 불기경하듯이, 그럴 수 없는 기이, 우리네 사정도 목 구멍에 단내가 나게 생깄다 그거 아니가. 모두 해묵고 살 기이 없인께 농사 안 짓든 사람들까지 땅마지기나 얻어 부칠라고 눈에 불을 키고, 대체 이치를 생각해봐도 안 그렇나. 네댓 마지기 제 땅 가지고 살든 사람들이 제 땅 뺏기고 남의 땅 부치묵고 살자믄 그 배는 되게 땅을 얻어야 하니, 땅 임자는 줄고 작인들은 늘었다 할 것 같으믄... 그렇지 물건의 경우를 보더라도 살 사람이 많으믄은 물건값이 오르는 기이 이친데..." "그러니 마름놈들 농간이 좀 하겄나?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그러고도 마름놈 코밑에서 눈치만 보자 카니 이거는 수풀에 앉은 새맨치로 맴이 놓여야지." "그러니 인심만 사나워지는 것 아니겄소." "제기랄! 맨날 해봐야 그게 그 얘기, 봉기!" "저눔의 주둥이를 고만..." 봉기는 눈을 흡뜨고, 정말 성이 난 것 같다. 실상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근심이 되어 그랬었지만. "빌어묵을! 시끌시끌한데 이팽이 아들 잘 둔 얘기나 듣자. 그 아이 장개는 갔고." "가구말구. 장개만 갔나?" 봉기는 음탕스럽게 웃는다. 농부들은 남의 일에 활기를 되찾는다. "장개말고 어디로 또 갔는고?" 그러나 그 얘기를 미루어놓고 "우리네들하곤 다르네, 달라. 이팽이 내외가 본시부터 물 한방울 안 샐 만큼 야물다는 것을 모릴 사람이 없는 데 참말이지 아들 혼사가 성사된 거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놀랬제." "과부달 막딸이한테 갔다믄?" "그러니 하는 말 아닌가배. 우리네 겉으면 어림 반푼어치나 있일기든가? 첫째 온당찮은 에미 행실을 봐서도, 그런 계집 딸을 뉘가 데리고 갈 기고. 그래도 그 사람들 생각은 딴판이라. 심덕 좋고 일잘하믄 그만이다, 그거 지. 내 사람 된 바에야 친정 어매가 무슨 지랄을 하든 상관할 바 아니라는 거지. 인물이나 좋음사? 말이야 바 로 하지마는 난쟁이 아니가 난쟁이. 연분이라는 게 그거 참, 하야간에 말이 없고 일만 꾸벅꾸벅 한께 집안이야 태평이다마는 흐흐흐..." "사람도 싱겁기는 말을 하다 웃기는 와 웃노." "흐흐흐흣... 그놈의 집구석, 흐흐흣... 조선팔도 다 돌아댕기도 그렇기 송편겉이 꼭같은 며느리 둘을 골라오기 심들 기거마." "작은아들 장가보냈다는 얘기는 못 들엇는데?" "아들 하나에 며느리가 둘이라. 내가 머라 카든고?" "..." "아들 잘 둔 덕이라고 아까 말 안 하든가배. 새파랗게 젊은놈이 또 날로 벌어서 사는 목수 주제에 말이다. 계 집이 둘이라니? 허나 그 계집 둘이 다 보물단지니께 할말 없지. 그러니께 어매가 순사한테 뺨 맞은 일이 있은 뒤 두만이놈은 서울서 거산을 해가지고 돌아왔거든. 몇 해 번 돈 한푼 축없이 갖고 왔고, 그 돈이 수월찮았든 모양인데 계집을 하나 달고 왔제. 얼굴은 서울내기라 때가 쪼옥 빠졌더라마는, 참 내 골라도 우찌 그리 안성맞 춤으로 골랐일꼬? 그것도 난쟁이라, 막딸이하고 꼭같더라 그 말이구마. 과분지 소박댁인지 그거는 모르겄고 아 무튼 처니는 아닌데 서울서 주막을 했다든가 밥집을 했다든가, 머 그거는 그렇고 진주로 이사한 뒤의 소식이 들을 만하제. 가보고 온 사람의 얘긴데 벌어온 돈으로 몽땅 논밭전지를 사서 부모하고 본댁한테 맽기고오 두 만이놈은 목수질을 하고 그것만도 오붓할 긴데 말이다, 밥 위에 떡이더라고 작은 며느리가 비빔밥집을 차렸다 누마. 뭐 쪼깐이집이라 카든가? 비빔밥 맛이 천하일미라 손님이 대나고 대들고." 봉기 목구멍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나고 다른 사람들도 입맛을 다시는데 분위기가 부뿟해진다. "진주라는 데가 기생 많고, 내로라 하는 한량들도 다 와서 그 집 비빔밥을 묵고 간다 카니 그 집구석 문딩이 되듯 안 되겄나?" "차돌 겉은 애비보다 한수 더 떠서 국량까지 넓으니 되겄다, 집구석 되겄어." 이쯤 되면 사람의 마음이란 또 심란해지는 모양이다. 땅이 꺼지게 한숨인 것이다. 공연히 코끝을 만져보고 목 덜미를 쓸어보기도 하고 "이팽이하고 사돈 맺은 장서방도 그렇고." "그 사람이야 졸부 소리 듣는 게 언제라고? 해마다 장배를 늘리서 지난 가슬만 해도 추수는 장서방 배가 독으 로 실어날랐다 카이. 모두 망하는 판에... 뫼를 잘 썼든지 무슨 수가 있거마는." 나룻배는 평사리 나루터에 닿았고 세 사람이 배에서 내렸다. 서서방과 한복이 함께, 좀 떨어져서 망태를 둘러 멘 봉기, 그 세 사람이 모래를 밟으며 둑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혜관이 바라본다. 서서방의 두루마기 자락이 바람에 펄럭인다. 혜관의 눈은 그들 뒷모습에서 마을 족으로 옮겨진다. 옛날 지조 있는 선비는 이 평사리를 지 날 때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아니 보았다는 최참판댁, 고래등 같은 기와집주인이 바뀌어도 높이 그 권위를 자 랑하고 있다. 언덕 아랜 읍하듯 엎드린 초가 마을, 이엉을 갈지 못하고 회갈색으로 변한 지붕이 눈에 띄고 마 을길을 달려가는 아이들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사고." 혜관이 강심으로 나와 방향을 잡는 사공을 불렀다. "예." "쌍계사 주지스님, 근간에 이 나룻배 타고 가시지 않든가?" "못 보았소." "그래?" 뱃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농부 세 사람은 담배를 피우며 계속하여 잡담을 하고 있다. 등짐장수가 어떻겠느냐, 여수나 삼천포에 나가서 미역, 건어 등속을 받아 산촌으로 도붓길 나가면 재미를 본다는 둥, 누가 그걸 몰라 땅을 파겠느냐 밑천이 있어야 그것도 할 수 있는 노릇 아니겠느냐는둥, 차라리 도방으로 나가 날품팔이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둥. "처자식만 없다믄 멋이든지 해묵고 살겄는데, 훌쩍 떠날 수도 있고." "말해 머하겄소." 하다 말고 얼굴을 숙이는 농부는 뱃바닥을 내려다보며, "열 살 난 여식아이를... 자식 삼아 키우겄다는 사램이 있어서, 배나 곯지 말라고 데려다주고 오는 길인데..." 중얼거린다. "말이 시영딸이지. 손쪽박으로 부리묵자는 기고... 갈 때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다시 얼굴을 든 농부는 먼산을 한번 바라보고 나서 곰방대를 뱃전에다 대고 두드린다. 그리고 몇 번 빨아보고 서 허리춤에 찌른다. 다음 나루터 화개에서 혜관과 농부 세 사람은 내렸다. 여식을 수양딸로 주었다던 농부는 주막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각기 제 갈길을 가고, 혜관은 잠시 해를 가늠하듯 하늘을 올려다 본다. '어둡기 전에 갈라나 모르겠군.' 걸음을 떼어놓는다. 발바닥에 익어서 익숙한 이 고장 길이다. 그러나 혜관은 절과는 다른 방향을 잡아 성큼성 큼 발을 내딛는다. 산골짜기 개울물은 얼음 밑에서 흐르고 있었다. 얼어붙은 오솔길을 지나고 낙엽이 푸석푸석 소리내는 겨울, 메마른 수림을 뚫고 한참을 나가자 희뜩희뜩한 눈이 발 아래 밟힌다. 혜관은 바랑을 끌러서 설 피를 꺼내어 신발을 갈아신는다. '어둡기 전에 당도해얄 텐데...' 가파른 산길을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고 오르고 비스듬한 암벽을 흰 노루 한 마리가 지나 간다. 희귀한 흰 노루다. 살생 아니 하는 중을 알았더란 말인가. 개울을 끼고 이켠 길을 가는 혜관을 노루는 가던 길을 멈추며 물끄러미 바라본다. 얼핏 보기엔 사슴 같기도 하다. 흰 노루는 별안간 생각이 난 듯 뛰기 시 작한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올 무렵, 잎은 다 떨쳐버렸으나 볏가리 더미같은 산철쭉 가쟁이가 도랑을 향해 쓰러진 옆의 오솔길로 접어든다. 옥수수뿌리가 앙상한 뼈다귀처럼 남아 있는 화전의 빛깔은 우중충하고 삭막하다. 인가가 가까워진 것이다. 혜관은 잠시 숨을 돌리듯이 걸음을 멈추고 일찌감치 저녁 안개 속에 희미하게 드러나 보이 는 초막 지붕을 바라본다. 높은 산봉우리는 운무에 가려져 천상에 두둥실 떠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서 혜관이 들어선 초막은 수년 전 환이 지나는 길에 요기를 청한 일이 있던, 그러니까 족제비 가죽을 벗기던 노인을 만 난 바로 그 집이다. "윤봉선생 계시오?" "뉘시오?" 뒤꼍에서 돌아나오는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예의 그 노인이다. "혜관스님이구만." "네." "일찍 돌아오셨소." "이를 것도 없지요." "그래 사람은 쉬이 만났소." "어렵게 만났소이다." 노인은 빙그레 웃는다. "방안으로 들어가시오." 방안으로 들어선 혜관은 바랑을 내려놓고 숨을 후우 하며 내쉰다. 방안이 어둡다. 혜관은 부스럭거리며 부싯돌 을 찾아 흙벽에 꽂아놓은 관솔에 불을 댕긴다. 밖에도 어둠이 급히 몰려오고 있었다. 노인은 야트막한 기침 소 리를 내며 부엌으로 들어ㅅ가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아침에 끓여놓은 식은죽을 데우는 것이다. 불빛에 너울 너울 춤을 추는 백발의 모습, 굵은 눈망울에 강한 눈빛이 물결처럼 미끄러지곤 한다. 버릇인 양 노인은 불길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인다.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발자국 소리는 아니었고 바람 소리, 바람 에 굴러가는 낙엽 소리다. 먼 숲속에서 짐승이 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노인은 산나물죽을 바가지에 뜨고 포 개진 그릇 두 개, 주석 숟가락 두 개를 합하여 한 손에 들고 한 손엔 죽바가지, 꼿꼿한 자세로 방으로 들어설 땐 허리를 구부렸다. 죽그릇을 앞에 놓고 노인은 물었다. "서울 구경은 잘 하셨소?" "구경이 다 뭡니까?" "중이라고 구경 못하란 법도 없지 않소?" 놀리려 든다. "구경우커녕 동태가 될 뻔하였소." "어서 드시오. 식기 전에." "네." 혜관은 합장하고 나서 죽사발을 받쳐든다. "한데 환이는 있습니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소. 나갔더라도 곧 돌아올 게요. 말은 없으나 묵척 기다리는 눈치였소." 한동안 침묵 속에 죽을 먹고 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순창 쪽에서 일이 좀 잘못되어 두 사람이 붙들러갔다는 소식이오." 노인의 말에 혜관은 관술불을 쳐다보며 우울해진다. "나룻배에서 잠시 들었지만 환이는 자릴 옮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글세..." "아니면 만주 같은 넓은 천지를 한번 다녀오든지요." "나도 그런 말을 비쳐보았소만 도통 갈 생각을 안 하는 모양이오." "하기는 들은 바에 의하면 그곳 역시," "서울 형편이나 얘기하시오." "소승이야 뭐 그냥 거리를 스쳐갔을 정도니 깊이 묐을 보았겠습니까마는 왜인들이 꽉 짜고 들앉아서 빈틈이라 곤 도무지 있을 성싶지 않더이다. 멀쩡한 낯짝 하구서 연장 달고 다니는 조선 사내놈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허허 스님께서 거 무슨 말버릇이오?" "스님이고 나발이고간에, 이거 윤봉선생 앞에 안됐소만, 소승이 보기론 그 많은 사내놈들 중에 보리죽 먹고 산 길 걸으며 죽창이라도 다듬을 성싶은 위인은 눈에 띄지도 않구요." 지리산 산중까지 무사히 당도하고 보니 혜관은 비로소 화통이 터지는가, 말투는 매우 거칠다. "자고로 흰밥 먹는 서울 사람들치고 똥 안 싸는 자 없고,"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노인은 도무지 감정의 기복을 나타내지 않으며 그러나 놀려주듯 되묻는다. "겁쟁이라 그 말씀이외다. 흰밥 먹는 중놈까지. 중이 동냥 가면 언제나 먼저 짖어대는 게 강아지더라 했더니꺼 져버리더군요." "괄시를 단단히 받았구먼." "흥, 흰밥 처먹는 서울 사람들 눈엔 자고로 적을 보면은 적의 눈까리가 화등잔만해서 쥐구멍밖엔 아니 찾는다 그 말씀이오." 씨근덕거린다. 서울 가서 당한 일이 이만저만 유감이 아닌 모양이다. "작위 거절한 것만 가지고도 지조 높은 선비로 뽐내는 게 서울 양반들 아닙니까? 울화통 달래노라 기생집에 처박혀서 기생이나 껴안고 술 처먹는 자도 우국지사고요." "소승이 찾아가 이부사댁 자제만 하더라도 뭐 왜말 배우러 다닌다 든가요?" 어세는 약했으나 내뱉듯 하는 말이다. "그쪽 소식은 좀 들었소?" "네, 대강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나서 혜관은 자기 생각을 모아보듯 눈을 깜박깜박한다. 간신히 부아통은 가라앉힌 눈치다. "네, 어쩌면 오백 섬지기 땅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노인은 그 말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질 않는다. "그러면 소승은 다녀와야겠습니다." 혜관은 일어섰고, 마당을 나섰을 때 노인은 혜관에게 들고 있던 횄불을 넘겨준다. "그럼 다녀오시오." 혜관이 횃불을 들고 찾아간 곳은 초막에서부터 오 리즘 떨어진, 깊숙한 골짜기였다. 목기막 비슷한 곳, 그 앞 에 걸음을 멈추는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혜관은 횃불을 들고 천천히 돌아선다. "이제 오시오." 잠긴 목소리가 마치 너울을 타고 건너오듯 들리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혜관은 길을 비춰주듯 횃불을 치 켜들고 서 있을 뿐이다. 불빛 아래 나타난 사내, 쇳덩이같이 곧은 몸의 사내, 눈이 번쩍 빛을 발한다. 꾹 다물 린 입술과 짙은 눈썹, 얼굴에는 온통 붉은 불빛과 검은 어둠이 너울거리는데 그것은 괴기스러운 힘이며 광기 며 절망의 정열이다. 뚜벅뚜벅 혜관 옆을 지나서 목기막 안으로 들어가고 혜관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간다. 목가 막 바닥에는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횃불을 끈 혜관은 모닥불 앞에 앉는다. 환이도 맞은켠에 웅크리고 앉는다. 눈은 내리깐 채 혜관이 내어놓은 말에는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태도다. "서울 가서 이부사댁 자제를 만났네." "..." "소식은 소상하게 들었다. 잘 있다더군." 환의 눈까풀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불빛 탓인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형편인 것 같더구먼." 혜관은 그쯤 운을 떼어놓고 나서 차근차근 전후 사정을 상현에게서 들은 대로 얘기를 해나간다. 얘기가 끝나 자 끝난 뒤에도 환이는 아무런 감정의 표시도 말도 없다. "순창 쪽에서 두 사람 잡혀간 얘기 들으셨수?" 불쑥 말을 했다. "들었지, 방금." "혜관스님." "음." "이젠 그 땅을 처분해도 좋을 성싶소." 혜관은 힐끗 쳐다보고 나서 목을 젖히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억새풀같이 끈질긴 계집아이구먼요." "..." "역시 최참판네 핏줄이구먼." 환이는 갑자기 세운 두 무릎 위에 얼굴을 묻으며 웃는다. 나직이 목소리를 굴리며 웃는 것이다. 바람이 낙엽을 몰고 가는 소리, 암벽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 망령들의 울음 소리, 그리고 바람결을 타고 오는 산짐승들의 울음 소리, 무닥불이 허물어지면서 불꽃이 튄다. 3장 산청장의 살인 한밤중 혜관이 눈을 떴을 때, 그때까지 환이는 두 무릎을 세운 채 모닥불을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계곡을 거 술러 올라오는 바람 소리는 칠흑을 향한 산의 울음같이 무시무시하게 들려온다. '저놈의 눈까리엔 잠도 없나부지.' 입맛을 다시며 잠이 안 깬 시늉을 하고 돌아눕는다. '내가 저 빌어먹을 놈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거든.' 혜관은 가끔 죽은 우관스님을 원망한다. 그놈의 땅 오백 석을 위임받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느 절간에서 팔상도나 그리며 이 고생은 아니 했을 것을 하고. 한가로운 절 생활이 그리워서라기보다 법의 입은 몸으로 피 비린내 속에 서 있다는 것이 깨달아 지면은, 제에기 죽어 육신이 썩어지면 그만, 중생이 갈 극락이 있긴 어디 있어? 마음속에 극락이지. 재가에서 오종계 지키는 자 몇이며 중이라고 십종계를 다 지키나? 하다가 부처님 RP 무안쩍어서 변명 비슷한 원망이 나온다. 화필을 놓아버린 아쉬움도 있었다. '빌어먹을, 저놈 눈까리엔 잠도 없나부지. 저 대가리 속에는 지리산이 가득 들어차 있을 게야.' 혜관 눈앞에 불길이 솟아오르고 등에 꽂힌 비수를 타고 피가 넘쳐흐른다. '나무관세음보살!' 골짜기마다 숨어사는 화전민, 이 마을 저 마을을 떠 다니는 남사당패들, 인근 고을마다 장터마다 그 눈들이 떠 오른다. 수효는 적으나 절을 굽히지 아니 하고 가장 혹독한 수난을 겪었던 그들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길 하 나하나가 떠오른다. 다음은 어디에서 불길이 솟아오를 것이며 어느 등바닥에 비수가 꽂혀질 것인가. 숨이 가빠 온다. 재채기가 나오려 하고 목구멍이 간지럽다. 혜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여태 안자는 게야?" "자야지요." 의외로 부드럽고 어진 음성이다. "새벽이 오는가본데, 어서 자지 그래." "네." 환이는 곰가죽을 몸에 둘둘 감고 모닥불로부터 저만치 떨어진 벽을 향해 드러눕는다. 우우우 --- 계곡을 거슬 러오고 휩쓸고 내려가는 바람 소리, 소리 사이를 타고 날카로운 산짐승의 울음이 아슴푸레 들려온다. 약육강식 의 피비린내가 풍겨올 것만 같은 밤이다. 환이는 곧 잠이 든 모양이었고 모닥불 앞으로 바싹 다가앉은 혜관은 나무토막 두 개를 모닥불 위에 올려놓는다. '나무관세음보살.' 불꽃을 튀기며 올려놓은 두 개의 나무토막에 불길은 옮겨봍는다. 한 번 잠이 들기가 무섭게 환이는 깊고 바닥 모를 수마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지 송장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 불빛이 혜관의 골진 머리빼기를 비춰준다. '중놈이 하필이면 동학에 끼여들어가지구... 생각해보면 우관스님도 나같이 땡땡이중임에 틀림없을 것 같고 십 종계를 지켰을 리 만무야.' 모닥불이 무너지면서 반쯤 타고 있던 나무토막이 나둥그러진다. 제자리에 집어다놓고 혜관은 두 팔을 쭉 뻗으 며 하품을 한다. 진심은 어느 누굴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 적에도 환이 괘씸하거나 미운 것은 아니었다.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후회는커녕 국난에 승병을 끌고 출전한 서산대사라 도 된 듯 우쭐해질 때가 있다. 승병이 없는 것이 한탄스럽긴 했지만 그러나 전국에 흩어진 사찰에 뜻있는 동 조자가 없지도 않아 혜관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윤씨부인이 너에게 물려준 전답 문서야. 차후 혜관에게 맡길 터인즉 받고 아니 받는 것은 너의 뜻대 로 할 것이고." 우관은 다음 말을 잇지 않고 환이를 외면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러간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땅은 출가시 윤씨부인이 친정서 가져온 것... 최참판네하고는 아무 연고 없는 땅이다." 음성이 낮았다. 그리고 우관은 혜관을 쳐다보았다. '이 땅이 어째 환이에게 가는가, 그건 자네 좋을 대로 생각하게나.' 그런 말을 눈은 얘기하고 있었다. '예, 스님. 알고 있소. 윤씨부인께서 환이에게 땅을 남기고 간 연유 말입니다.' 수락도 거절도 없는 환이 얼굴에 모멸의 빛이 일렁였다. 별안간 우관은, "환이 이노옴! 듣거라. 네가 어찌하여 인륜을 범한 죄인으로서 원한은 품느냐!" 눈을 부릅뜬다. "여인에게는 재난이 있었을 뿐, 원한을 풀고 명복을 빌어야 하거늘." 숨결이 거칠어진 우관은 눈을 감는다. 끝내 말 한마디 없이 눈을 감고 앉은 우관에게 절을 하고 일어선 환이 는 다음날 새벽 절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서희 일행이 간도로 떠난 그해 가을 어느 아침나 절이었다. 우관은 세상을 떠났고 혜관이 그를 맞이했다. 행색은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거지꼴이었다. 바람과 햇빛에 거칠어진 검은 얼굴이며, 우선 혜관은 우관의 죽음을 한마디로 끝내고 서희에 관한 얘기를 좀 길게 상세하게 들려준다. "그래서요?" 와락 떼밀어내는 차고 모지락스런 반문이다. "아니 뭐, 그, 그렇다는 게지." 혜관은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서희 얘기를 장황하게 한 것은 서희의 유일한 혈육이 환이라는, 그 생각이 앞섰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증이었을 뿐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래서 혜관은 당황했다. "제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오백 섬지기 땅 때문이오." "...?" "군자금으로 쓸려구요." "뭐, 뭐라구?" "군자금으로 쓰겠다, 그겁니다." "그러면은 의병을 일으키겠다 그, 그 말인가?" "아니오." "...?" "동학군을 모아보겠소." "동학군이나 의병이나." "의병 잡아먹는 동학군 말입니다." "의병을 잡아먹다니!" "..." "의병을 잡아먹다니... 히기는 어떻게 쓰든 그건 너의 몫이니까... 돌아가신 두 분의 소원도." 하다가 혜관은 말을 뚝 끊었다. 환의 눈이 무서웠던 것이다. '빌어먹을! 지가 잘한 건 뭐 있다구?" 그러나 우관처럼 어찌하여 인륜을 범한 죄인으로서 원한을 품느냐고 소리지를 수는 없었다. 넓고 큰 발이 덥 석덥석 비난의 심정을 밟아 문드러뜨리는 것 같았다. "남원에 사는 길서방이라고, 아주 신실한 사람인데." 혜관은 문서를 꺼내며 지껄였다. "그 동안 길서방이 그 땅을 맡아주었는데... 그러니까 세 번 추수를 했고," 꺼낸 문서 속에서 명세서의 장부를 뽑아내어 손 끝에 침을 묻히며 혜관은 설명을 할 찬인데, "그거 보자기에 사십시오!" 환이 말했다. "음?" 장부를 넘기려다 말고 혜관이 환이를 쳐다본다. 환이 얼굴에 옷음기가 있었다. "...?" "스님." 대답 대신 "뭐가 좋아서 웃는 거야." 혜관의 목소리는 굵고 노기에 차 있었다. 불거진 양쪽 관골이 시뻘개졌다. "금수도 제 새끼 제 어미가 죽으면 슬피 우는 법인데 웃어? 우, 웃어? 비록 추, 출가는 하셨을 망정 명색이 백 부신데, 생전 네놈 때문에 그 얼마나 마음을 썩였는가 나보다 너,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그, 그 죽음을 듣 곧도 웃어? 발칙한 놈! 쓸개빠진 놈이다!" 주먹을 쥐고 삿대질을 한다. "인륜을 버린 계집년 하나 때문에 신셀 쫄딱 망친 놈이, 그, 그러고도 못 잊어서 걸인 행각으로 날을 지새우는 놈이, 계집은 또 얻으면 계집이야! 자식은 또 낳으면 자식이고오! 네 부친이 어떻게 도, 돌아가셨나! 설마 그걸 잊지는 않았겠지! 만백성을 살리겠다고 칼을 뽑은 장수가 형장의 이, 이슬로 사라졌는데 그 부친을 위한 애간 장은 없었더란 말이냐! 지금이 어느 시절이지!" 기고만장이다. "뭐 어쩌고 어째? 의병을 잡아먹겠다구? 그래 의병 자, 잡아먹겠으면 읍내 헌병대로 가면 될 거 아니냐! 군자 금 투, 투둑이 주, 줄게다! 이 천하의 역적놈아! 부친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계속하여 욕설을 퍼붓던 혜관은 제풀에 놀라서 입을 다문다. 눈을 꿈벅거리며 환이를 바라본다. 어째서 이리 됐더라? 행방불명이 된 것을 두리번두리번 찾는 눈이다. 옳지! 네놈이 웃은 때문이었다. "의병을 잡아먹든 왜병을 잡아먹든 일어서시오." "안 일어서겠다!" "나랑 함께 갑시다." "안 가아!" "가자면 가는 게요." 환이는 혜관의 법의를 확 잡아챈다. 살기를 뿜은 눈이 이글이글 혜꽌의 얼굴 위로 내리 쏟아진다. 혜관은 비슬 거리며 일어섰다. 실상 비슬거리는 척했다. 무안쩍어 그랬었다. 마음속은 후련하고 통쾌했다. 전답 문서랑 든 바랑을 짊어지고 절문을 나섰을 때 환이는 "환쟁이라 다행이오." "...?" "떠돌이중, 매인 몸이 아니어서 그렇다 말이오." "어딜 가는 거야? 남원의 길서방을 찾아가는 겐가?" "아니오." "그럼." "가시면 압니다." 두 사람은 구례와는 방향이 다른 세식쪽을 향해 발을 옮겨놓는다. 산죽 지대, 갈대밭을 지나간다. 앞서가던 혜 관이 물었다. "그 동안 어디 가 있었나?" "조선 팔도," 하다 말고 "제주도에도 가보구요. 저어기 북쪽, 두만강까지 가보았소." 혜관이 돌아본다. 빨갛게 물든 열매 네댓 개 붙은 망개 가지 하나가 환의 구멍난 백립 갓전에 꽂혀 있다. 오는 도중 꺾어서 꽂은 모양인데 혜관은 처음으로 환이 백립 쓴 것을 깨닫는다. 차림이 너무 남루하여 으레 그러려 니 생각한 탓이다. 그렇다면 환이는 진작부터 우관이 죽은 것을 알았더란 말인가. 중이란 절에서 죽었으면 그 만이지 상을 입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아니면 길가다 주운 것을 아무 뜻 없이 머리에 올렸을까? 망개는 왜 꺾어 백립에 꽂았는가. 저게 그러면 온정신일까? 설마 실성한 것은 아니겠지. 혜관은 생각하며 "조선 팔도... 제주도 두만강까지 뭐하러 갔었댔나." 물었다. "홍길동이 제줄 배울려구요." "..." '점점 한다는 소리가 괴이쩍구먼. 설마 실성한 건 아닐 텐데?' "처처에 사람도 많이 삽디다. 인심 후한 데도 있구 각박한 데도 있구요." 혜관도 발이 빠르지만 환이도 산을 타는 속도는 옛날과 다름없이 비상하다. "남해, 어느 섬에 갔다가, 배를 탔었지요. 그 배 안에서 울고 있는 어떤 여인네를 보았소." "..." "친정 가는 여인이었소. 친정어머니, 동생들이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을 자맥질해서 잡은 해물로 곡식 을 바꾸어 가는 길인데 바다 복판까지 나온 배가 굽이를 돌 때 뱃전에 놓은 곡식 자루가 물에 빠져버렸던 게 요... 세상에는 수천 석, 수백 석 전답을 가지고 시집오느 여인도 있는데 말이오." '윤씨부인을 빗대어 하는 말이겠다? 미친놈의 언사는 아니구먼.' 이윽고 해가 서너 뼘이나 남았을 무렵 혜관과 환이는 운봉노인이 있는 초막에 당도하였다. 운봉노인은 혜관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나 양재곤이오." 먼저 통성명을 한다. "소승은 혜관이라 하오." "기연이구려." "예?" 운봉노인은 활기에 차서 껄걸 소리내어 웃었다. "아 그렇지 않소이까? 동학과 불교는 그다가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닌데 말씀이오. 스님께서는 우리 일을 도우 려고 발벗고 나서주셨으니." "아니 무슨 말씀이오? 소승은 도통 모르겠소이다. 발벗고 나서다니." "몰라도 할 수 없는 노릇, 몰랐다면 이곳까지 오시기가 불찰이었소." 운봉은 흰 수염을 흔들며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장년 시절 일군을 질타하던 풍모가 늙은 모습 속에서도 약여 하다. "오늘 밤 이곳에 유하시면서 스님이 납치되어온 까닭을 들으시오." 저녁을 먹은 뒤 밤은 이숙해졌다. 관솔이 타는 방안에 운봉과 혜관이 대치하고 환이 옆자리에 비켜앉았다. 혜 관 쪽에서 먼저 말한다. "아까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은 그 땅 때문인 것 같은데 소승으로선 그것을 환이 개인이 쓰든 군자금 으로 쓰든 하등 관여 할 이유가 없고, 하루 속히 넘겨주는 게..." "아니외다." 운봉은 말을 막았다. "이쪽에서 바라는 것은 군자금이려니와 곤궁한 살림을 규모있게 살아줄 가모요. 혜관께서 우리네 살림을 맡아 주슈." "살림은 무엇이며 가모는 또 무엇을 이르는 말씀이오? 불도 닦는 중을 보고 도통 모를 얘기요." "중은 목탁만 두드리고 우리 동학도는 사람만 죽이구." "그야 뭐." "중은 비단 가사나 걸치고 그렇게들 죽은 망령에게 지장경이나 외주겠다 그거요?" "지장경이나마 소승보고 그러신다고 이 땡땡이중 무슨 힘이 있겠소?" "괴승이 되고 요승이 되면은 힘이 절로 생길 게요. 땅 밑에서 썩을 황천객한테 지장경 외느니보다 살아 있는 사람 위해 칼을 드는 편이 극락길에 가까울 게요." 계속하여 운봉은 객담투였다. 그러나 밤을 새워 얘기를 나눈 다음날 서로간에 양해가 되었고 혜관은 길을 떴 다. 그러나 의병 잡아 먹겠다던 환의 말을 혜관이 깨닫기는 훨씬 후의 일이다. 화적떼로 타락한 무리들, 일본 토벌대에 쫓겨만 다니는 허약한 선비가 이끈 의병들을 환이는 끈질기게 추격하면서 마치 그림자처럼 그들 무 리에게 달라붙어 방화 살인을 감행하고 그들에게 범행을 전가하는 수법을, 그러나 혜관은 별로 놀라지 않았고 환이를 비난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은 일이요, 눈물은 눈물. 이쪽에 전혀 희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길목이든 환이 수하는 복병이요, 화적때와 빛좋은 개살구격인 의병들은 별수없이 노정되는 정규군 이었 다고나 할까. 아침 안개를 등지고 혜관이 목기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 환이는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무슨 염불을 산이 떠나게끔 하는 겁니까?" 혜관은 씩 웃는다. "간밤에 왕생한 이곳 산식구를 위해 경을 외웠네." "고라니라도 죽어 자빠져 있습디까?" "무엇인가가 죽긴 죽었겠지. 안 죽었으면 굶어죽는 놈이 생겼을 테고." "곧 길 떠나야 합니다." "아침은 먹어야지." 환이 고개를 흔든다. "지금부터 떠나야, 가다가 강쇠의 집에서 아침을 해야겠소." "그러지." "강쇠의 집에서 스님은 순창으로 가시오. 그곳에는 천서방이 기다리고 있을 게요." "알았네." 뚱뚱한 몸을 기울이고 을씨년스럽게 행구를 챙긴 혜관은 가진 것 없는 환이와 함께 목기막을 나선다. 숯 굽는 사내. 강쇠의 초막에 당도했을 때 해는 떠올랐다. 오는 도중 땅을 처분해도 좋을 성싶다던 간밤에 한 말의 결론을 환이는 내리지 않았다. 혜관은 역시 땅 처분보다 서희의 소식을 궁금하게 여겼을 환이 심정을 짚 을 수 있었다. 대문에 혜관도 어떻게 할까 보냐 묻질 않았고. 강쇠 모친이 지어낸 아침을 서둘러 먹은 혜관은 순창으로 떠났다. 떠나는 뒷모습을 쳐다보다 돌아선 환이는 수수깡 한아름을 안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강쇠를 불러세운다. "산청으로 가야 하네." "나도 갑니까?" "음, 내일 산청장이 선다." "그라믄 이서방한테 기별을 했십니까?" "사람만 잡아놓으라 했다. 그러니 서둘러서 가야 한다." 덩치가 크고 사팔눈인 강쇠는 손끝으로 입술을 만지며 생각에 잠긴 환이를 쳐다보는데 눈은 환이를 향하지 않 고 한눈을 팔고 있는 것만 같다. "어중간한 때라 장꾼이 모이겄십니까?" "장은 한산할 게고 파장도 이르겠지. 그러나... 서둘러봐야겠어. 떠날 준비나 해." 환이 또래로 보이지만 실상 나이는 강쇠가 아래였다. 사팔뜨기만 아니었다면 과히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그 의 모친이 만나는 사람마다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강쇠는 쌍둥이 중 살아남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갓난아기 적에 하도 영약하게 우는 한 놈을 업고서 나무도 하고 보리방아도 찧고 그러다보니 다른 한 놈은 방에 혼자 누운 채 늘 밝은 방문 쪽만 쳐다보아서 그래서 사팔뜨기가 됐다는 거였다. 그 말을 할 때마다 강쇠의 모친은 안쓰러워하곤 했다. 얼마 후 두 장정은 칡덩굴로 얽어맨 목기 한 짐을 짊어지고 나섰다. "오매 갔다오겄소." 혜진 수건을 쓰고 허둥지둥 도랑까지 나온 강쇠의 모친은, "강쇠야." 강쇠가 돌아본다. 모친은 팔짱을 끼고 오들오들 떨고 있다. "치븐데 들어가소." "운냐." "다니올 깁니다. 내일이나 모레." "그래 어 오니라이. 에미 속 썩이지 말고오." "야." 환이는 햇살이 퍼져나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두 장정은 짐 진 사람 같지 않게 산길을 성큼 성큼 걷는다. 이끼가 말라붙은 바위는 강쇠 모친의 검버섯 핀 얼굴 같다. "성님." "음." "인이가 병들어 죽었다는 소식이오." "..." "과부가 어찌 살란고 모리겄소." 산비둘기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발밑의 눈이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낸다. 얼음 밑을 흐르는 물 소리--- "니가 데려다 살려무나." 강쇠의 양뺨이 벌개진다. "우찌 친구 가숙을, 그, 그럴 수는 없소." "그럴 수 없다는 법도 없지. 왜 억지로 서럽게 살아야 하나. 흐흐... 흐흣..." 나직이 웃는다. "억지로 서럽게 사는 사램이 어디 있겄소. 그렇기 말한다믄야 성님이 더 그렇지 않소." "..." "나겉이 오양이 이런 놈을 좋다 하지도 않을 기고." "빡빡 얽은 곰보도 계집 있더라." "그런 이야기사 머, 아즉 할 때가 아니고... 인이도 고생만 하다가 죽었지요. 하기사 살아남은 우리도 밝은 세 상 볼 것 같지도 않지마는." "..." 산청에 들어선 환이와 강쇠는 객줏집에서 짐을 풀렀다. 객줏집 주인 석포가 집마당에서 가오리 껍데기를 벗기 고 있다가 칼을 놓고 일어섰다. "하따, 목기장수 오래간만에 보겄구마는. 그새 가물치 콧구멍맨치로 와 그리 볼 수 없었는가 모르겄소?" "보믄 이 갈리고 안 보믄 보고 접다 그 말이구마. 이분에도 밥값은 외상일 긴데 우짤 기요?" 숯 굽는 사내요 총각인데 강쇠의 수작은 제법 능란하다. "아아 짐지고 왔는데 밥값 걱정하는 객줏집도 있더란 말이오?" "거 짜질짜질 웃는 눈 본게로 이분에도 안사람 속깨나 썩있겄소." "안사람? 총각도 그런 말 할 줄 아나?" "장가든 벵신보다 실속이야 이쪽이지. 사팔뜨기 눈은 안 닮았인께." 강쇠는 완강한 두 어깨를 쑥 펴 보인다. "이거, 참. 잡놈 찜찌묵겄네?" 환이는 시죽시죽 웃고 서서 구경만 한다. "주인장, 이제 금나해둡시다. 우리 새각시 겉은 성님 간 떨어지겄소." 항용 시시덕거리기를 좋아하는 장돌뱅이, 객쩍은 소리를 늘어놓던 이들 주객은 그러나 밤이 깊어지자 골방에 서 술상을 마주하고 오랫동안 쑤군쑤군 얘기를 나눈다. "지금 용줏골에 숨어 있는 무리들은 지난 가슬에 진주 근방을 쓸고 다니든 화적패들이오. 그 동안 자세히 알 아보았는데 서른 명은 미처 못 되고, 스무남은 명, 힘깨나 쓰는 모양이지만 머리 쓰는 놈은 한 놈도 없고," 석포의 설명이다. "의병에서 갈라져나온 패거리요?" 강쇠가 묻는다. "하여간에 처음에는 그랬던 모양인데 건달 한 놈이 졸개 몇 놈을 구슬러내어 별도로 무리를 만든 모야이라. 이놈들이 못됐고 사납기로 이름이 났는데 민가에 불지르고 재물 뺏고 여자들을 겁탈하고 업어가기 일쑤, 그러 면은 어쩌해서 토벌대가 손을 대지 않고 있느냐, 이상한 얘기 아니겠소?" 석포는 술을 마시는 환이를 쳐다본다. 환이는 다음 말을 계속하라는 듯 잔을 비우고 다시 술을 부어 마신다. "그러니까 간악한 왜놈들이 셈을 놔본 거지요. 양민들이야 어떻게 시달림을 받든지 간에 제놈들에게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 아니겠소? 첫째는 백성들이 의병에 넌더리를 낼 것이라는 셈이고 실컷 시달린 끝에 토벌대가 들어간다면 환영을 받을 것이란 속셈이겠지요. 화적놈들 목표가 왜놈들 아닌 백성일진대 얼마 동안 관망한다 해서 손해볼 것 없잖습니까. 결국 그러니 불지르고 재물 뺏고 여자를 겁탈하고 그런 포악한 행위 그것도 가증 스럽기 짝이없으나 그것에 못지않게 근심스런 것은 일본에 저항하는 일체 행동에 대해서 민심이 멀어져갈 것 이란 점이오. 악랄한 왜놈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 것. 민심이 깨어지고 흩어지고 종래는 왜병들에게 협력하는 사태까지 빚어진다,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요." 석포의 논리는 정연한 편이었다. 객줏집 주인으로 생업을 영위하고 있으나 석포는 동학 잔당 중에서 상당히 유식한 편이었다. 환이보다 다섯 살이 위인 만큼 동학 전쟁에 참가하 경험도 풍부했다. 석포는 김개주보다 운 봉 양재곤 계열의 사람이다. "그러나 종전과는 달리 우리도 되도록, 설사 허약하다손 치더라도 의병들한테 누를 끼치는 일은 삼가야 할 것 같소. 화적단놈들은 물고 늘어지는 편이, 그게 내 생각이오." 강쇠는 고개를 끄덕인다. "성님 이서방 말심에도 일리가 있소. 그런 형편으로는 화적 놈들이야말로 토벌대 이상으로 잡아 없애야 할 거 로 생각이 되구마요. 그런데 그거는 그거고 이번 일에 있어서 근심이 되는 것은 그놈들 산채에다가 흔적을 남 기고 또 그쪽으로 도망을 가믄서 유인한다 카더라도 말입니다. 왜놈들이 속을 것인지 그기이 걱정이구마요." "그거는 염려없네. 서로 내통해 있는 거는 아니니까." 환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듣고만 있다가 처음으로 물었다. "지금쯤 일은 벌어졌겠지요." "아마 지금쯤... 틀림없이." 다음 날 산청 장바닥이 술렁거렸다. 이상한 소문이 쫙 퍼졌다. 잡화상을 하는 일본인 집에 도둑이 들었는지 의 병의 소행인지 알 수 없으나 적잖은 물건을 도난당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겨놓고 간 물건이라는 것도 쓰지 못하게 모두 부숴버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누마. 왜놈 왜년을 묶으고 입에는 재갈을 물리어 나무에 매달아놨다든가." "내가 듣기로는, 찔러직있다는 말도 있고 벽에다 온통 황을 그리놨다 카데. 뭐라고 쓰이 있는고 하니, 무슨 머 이라 카더라? 의병이 왔다 가노라 그렇기 씌어졌다든가?" "그러믄 그냥 도적놈이 아니고 의병이다 그 말이가?" "공연한 소리들 하네. 아침에 내가 그 일본 계집을 그 집 앞에서 보았는데? 얼굴이사 죽을 상이더라마는." "하기야 하도 세상이 분분하니께 별의별 말이 다 나돌지." 세상이 분분하여 별의별 말이 나돈 게 아니라 어젯밤 일본인 잡화상에 괴한이 침입한 것은 사실이었다. 일본 인 부부를 나무에 매달기까지는 아니 했으나 묶고 재갈을 물려놓고, 가져간 물건은 많지 않았지만 온통 부숴 놓고 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술렁거리는 장터에 왜순사 하나가 매눈이 되어 벌써 몇 차례 순사를 했는지 모른다. 환이와 강쇠는 다른 전과는 좀 떨어진 곳에 목기를 쌓아놓고 엉거주춤 서있었다. 때묻은 무명 수건을 쓰고 누 덕누덕한 손저고리 속에 두 팔을 찌르고, 덜덜덜 떨면서 서 있었다. "아이고오, 날씨도 고추겉이 맵다. 이거, 오늘 장사하기는 다 글렀구마. 무신 일이 있어났다고 술렁술렁하노 말 이다." 강쇠가 씨부렁거렸다. 환이는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인데 가끔 눈을 들어 물건 흥정을 하고 있는 건달풍 사내 들 서너 명 쪽을 주의깊게 바라보곤 했다. 복작거리는 장꾼들 속을 헤치고 들어갔던 순사는 샤벨을 절렁거리 며 되돌아나온다. 건달풍의 사내 세 명이 선 자리에서 이동하고 이동하면서 환이를 쳐다본다. 눈깜짝할 사이에 사건이 터졌다. 건달풍 사내들이 순사 둘레를 싸는가 싶더니 외마디 소리와 언제 소매 속에서 팔을 뽑았는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더란 말인가, 소매 속에 두 팔을 찌르며 환이는 강쇠 옆으로 돌아오고 있었으며 건달풍 의 사내 세 명이 달아나는 것이다. "샐인났다아!" "순사가 찔려죽었다아!" "아, 저, 저기 달아난다아!" 엎어진 왜순사 등에 비수는 깊숙이 꽂혀 있었다. 피는 순사복 바짓가랑이로부터 흘러내렸다. 장세 걷으로 다니 던 사내가 요란하게 호각을 울렸다. 장꾼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흰옷을 입은 건달풍 사내들이 저만큼 뛰어간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순사 하나가 그들 뒤를 쫓아가고 뒤늦게 나타난 헌병들이 공포를 쏘아대며 (이 미 상당한 거리였으므로) 달려간다. 다음날 아침 환이와 강쇠는 팔다 남은 목기와 목기를 팔아 사들인 소금을 짊어지고 고개를 넘었다. 그들은 토 벌대가 용줏골 화적의 산채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순경을 유인해간 건달풍의 사내 셋도 무사하게 도피 했다는 것, 용줏골 산속에 흘려놓은 왜인잡화상의 물건 등을 토벌대가 수거했다는 얘기도 듣고 떠나온 것 이 다. "순차에 잡힌 그애들이 풀려나올지도..." 환이 중얼거렸다. 대낮, 사람이 득실거리는 장터 한복판에서 아슬아슬한 모험을 한 데는 환이의 의도가 달리 있었다. 혐의를 용줏골에 은거한 화적떼들에게 명확하게 돌려놓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4장 개화당의 반개화론 구리개에 있는 황춘배의 집 사랑방에서 일본어 교습이 막 끝나고 방 임자 황태수가 두루마기 자락을 여미며 황급히 일어섰다. "전갈이 와서 잠시 아버님께 다녀와야겠소." "아아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수작이야. 생일술 먹자 해놓구서 이건 누굴 희롱하는 겐가?" 서의돈이 빨끈해서 눈알을 굴린다. 울퉁불퉁한 얼굴, 몸집은 작고 대추씨같이 야무지게 생긴 사내다. "성미도 급하긴, 내 올 때까지 설마 술독 바닥이 날까? 곧 돌아올테니 그 동안 술들 하구 게슈." 서의돈은 금세 누그러져서 허허 웃는다. "그렇다면야 방 임자 까짓것 있으나마나. 기생도 아니겠고," 태수는 나가고 방안에 남은 세 사람은 화롯가에 손을 쬐기도 하고 담배를 붙여물기도 한다. 일본어 강사격인 임명빈이 "까막눈 늙은네, 보일 문서가 있어 그러나부지." 중얼거렸다. 고수머리에 두상이 크고 까만 양복 차림이다. "있는 서사는 무엇에다 쓰려구? 그것도 돈 드는 물건이라 아끼는 겐가?" "서사는 서사구 아들한테 보일 게 따로 있는 게지." 강사 교습생 사이지만 친구간인 이들의 대화는 스스럼이 없다. 연소한 상현은 교과를 계속하는 자세로 말없이 앉아 있다. 임명빈은 담배 연기를 푸 하고 내어뿜으며 다시 말했다. "내 일전에 들은 얘기가 있는데 그 일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무슨 얘길 들었기에?" 다잡듯 묻는다. "조준구 그자가 말이야. 자금 때문에 땅문서를," "하하하 알겠네. 자네 부친이 다릴 놨군 그래. 황부자한테 말야." "그런 셈이지." 임명빈이 싱그레 웃는다. "자알 망하게 생겼다, 생겼어. 임역관의 줄타기가 보통인가? 황부자는 어떻구? 쇠전 냄새라면 천리 밖에서도," "만리 밖에서도, 해야지." 만리 밖이란 청나라와의 밀무역으로 거상이 된 황춘배의 내력을 꼬집는 말이다. 한편 임역관이란 다름아닌 임 명빈의 부친이며 전직이 역관인데 왕시 조준굴가 매우 불우하여 권문세가에 발붙이리 길도 없었을 무렵 역관 자리나마 하나 얻어서 권력에 접근하려는 어리석은 꿈을 가지고서 임역관 집을 드나든 일이 있었다. 그런 연 고로 요즘 임역관은 조준구의 문객 노릇을 하고 있는 터이다. "만리 밖이고 천리 밖이고 간에, 늑대 같은 늙은이... 흥, 뻔히 다 알고서," 하다 말고 서의돈은 이마를 숙이고 장난꾸러기처럼 킬킬 웃는다. 임명빈은 상현을 힐끗 쳐다본다. 상현은 관심 깊게 듣고 있는 척했으나 기실 혜관에서 서희로, 서희에서 길상 에게로 생각이 전전하고 있었다. "늑대라 한 대도 조준구 그자는 뭐 숙맥인가? 남의 만석 살림 꿀꺽 삼켰다면 그 수완도 알아봐주어야 한다 구." "흥, 임자 없는 시골 땡뙈기, 그거 집어삼킴 수완으로 이 바닥에서 광산을 해? 하하핫 하하핫... 약은 쥐가 밤 눈 어둡는 얘기가 있지." "어두울 것도 밝을 것도 없어.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그놈의 신회사령인가 뭔가 땜에 사실 조선 사람들 사업하기가 어렵게 되었지 않어? 지금 이 마당에 조선 사람치고 고래심줄 같은 정치줄 잡은 사람도 없지만 말 이야. 조준구 그자의 경우는 친일파치고도 피라미거든. 시골 바닥에서 헌병대장이나 군수 따윌 삶아보는 실력, 그러니 자네 말대로... 하기야 실력이기보다 처지라 해야겠지. 그 처지로서 사업이라시고 벌이는데 일인과 합자 했다는 것은, 또 적당한 시기에 떠밀어내는 그거 괜찮은 술수라고." 고수머리에 두상이 큰 탓도 있겠지만 질깃하고 무거운 인상과는 달리 임경빈의 얘기는 사뿐사뿐 가볍게 나간 다. 임명빈이 말한 신회사령이란 작년 십이월 조선총독부에서 기왕에 있었던 회사령을 한층 보강하여 공포한 것이 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가혹한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본의 경제계 독점을 조장하고 조선인 자본의 진 출을 막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소위 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해서 까다롭고 악랄한 조건으로 조선인에게는 되도록 허가를 아니 하는 방침, 그것은 조선인이 설립한 회사가 삼십 개에도 미달인 데 비하여 일인이 설립한 회사는 백 개를 넘어서고 있다는 실정만으로도 설명이 된다. "괜찮은 술수라구?" "그럼. 너무 가볍게 보는 것도 잘못이야. 미운 놈이라도 인정할 것은 하구 남들은 분수없이 떠벌리고 다닌다고 들 하지만 말이야. 그것만은 아닐 거란 말이지. 실속은 차리고 있더라, 그것 아니겠어?" 여전히 킬킬대며 웃던 서의돈은 "야, 명빈아, 너 정말 캄캄절벽이구나. 그러고보니 자네 부친도 어지간히 능구렝이구, 하기야 그 따위 흑막을 자식놈한테 얘기할 수 없는게 부모된 죄이긴 하지만 말이야. 하하핫... 핫," "흑막이라? 흑막이라면 한시절 외척되는 모세가를 등에 업고 오늘날의 황부자를 만들어준 서참봉 (의돈의 부 친), 그 양반이 선수 아니었든가 몰라?" "암, 암 그것 틀림없는 일이라구. 자네를 말할 것 같으며 아랫도리 벗은 시절부터 앞뒷 집 이웃이기는 하나 서 참봉의 행장이야 이 나보다 더 잘 알 사람이 없지. 하데 자넨 나보다 자네 부친의 근황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 야." "뭐라구? 자네가 알긴 뭘 알어. 방금 하하아 알겠네, 자네 부친이 자릴 놨군 하든 사람이 누군데?" 그 말을 들었을 순간 난 환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거든. 세상에는 말이야, 사기술도 가지가지라. 그 땀을 낼 왜 구놈들이 쓸모있는 거라면 산을 무너뜨리고 돌도 캐내가는데 이 땅에 들여오는 건 총검이다 병이고 사기술이 거든, 하기는 도둑질도 늘면 편하고 덩치 큰 기술로 옮겨가게 마련이지만." 얼굴이 핼쑥해진 임명빈 "이거 그냥 들어넘길 수 없는 말이군. 그러면은 내 아버님이 왜놈의 사기술을 본땄다 그 말이냐?" "그렇지, 바로." "뭣이라구?" "하하핫." "어디다 그, 근거를 두고!" "근거 없는 말을 왜 내가 하누." "근거를 대봐!" "어렵잖지." "뭣이라구? 네놈이 천, 천리안 가졌니? 잘난 체하는 게냐! 지, 지금이 어느 세상," 임명비닝 흥분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이거, 왜 이래? 흥분하지 말라구. 그래 넌 양반이 소반꼴이 된 세상에 꼴사나운양반 행세냐. 그 말이 하고 싶 은 게지? 왜 그리 사람이 못났어 응? 저 부모라 해서 남의 말 끝까지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사리를 헤아려보 려 하지도 않고 덮어놓고 맞서려 드는 그게 옳은 줄 아냐? 양반 흉내야 흉내. 그놈의 효도라는 것 말일세. 우 리들이 밥 먹는 입 가지고 같이 좀 공정해지자구." "뭘 가지고 공정해지자구? 너 말 잘했다! 바로 네놈의 아가리가 적꾼도 만들고 도적놈도 만들구, 응 입이면 다 냐!" 명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상현이 팔을 잡는다. "선생님 참으십시오." "참을 수 없어! 자네 같으면 참겠나?" "의돈 형님은 노상 그렇지 않습니까? 성미를 잘 아시면서." "성밀 알아도 유분수. 내, 내 일이라면," 하는데 명빈은 상현에게 창피한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상현이 억지로 잡아 앉히고 명빈은 또 못 이기는 척 앉아서 씩씩거린다. 의돈은 두 어깨를 들썩이며 웃느다. "이봐 명빈아, 임역관 음덕으로 자네가 일본까지 가서 공분가 유학인가를 하고 돌아오기는 했어도내 모르는 바는 아니야. 임역관이 재직시 별 오류가 없다는 걸, 아들 유학 보내려고 좀 굽실거린 일 말곤 말이야." 서의돈은 슬쩍 추켜세워준다. "합방에 된 후에는 그 직책을 헌신짝 같이 버린 임역관, 내가 그걸 모르겠어? 자네만 하더라도 직업을 아니 갖고 빈들거리는 심정 나 다 알구 있다구. 왜놈들한테 직업 얻으려 아니 하는 갸륵한 심정 말이야." "이거 누굴 놀리는 게냐?" 서의돈의 심통을 알지만 명빈은 그러나 상현이 앞에서 체면은 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내 심정을 말할 것 같으면 통쾌하다 그거야. 임역관께서 합작을 했건 아니 했건 간에 조준구 같은 놈 벗겨먹는 데 배 아플 이유가 뭐겠나?" "또 그 소리야? 도시 왜 이러는 거지?" "허허 내 말을 듣고서 화를 내든 지랄을 하든, 근거가 있긴 있지." 서의돈은 무엇이 그리 재미가 나는지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조준구가 왜놈 미야모도하고 합자해서 사들인 그 광산 말이야. 그 광산 말인데, 그게 폐광 직전이다 그거 아 니겠어? 금이 나기는 어디서 나아?" 나직한 음성이다. "뭐라구? 폐광 직전이라구?" "그 광산 임자가 누군지 모르지?" "..." "자네 부친이 상전만큼이나 섬기는 그 이대감." "그, 그런 얘기 듣긴 했으나," 임명빈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소위 비밀이다 그거지. 최근 우연한 자리에서 그 얘길 들었는데 자네 부친이 관련됐으리라는 것은 오늘 바로 눈칠챘지. 아마 틀림없을 거로? 그런데 어떤 형편인고 하니 미야모도 그자, 완전무결한 허깨비, 허수아비란 말 이야, 돈이 어디 있어서? 합자는 무슨 놈의 합자야? 이대감한테 들어간 돈은 조준구 몫뿐이고 말하자면 서류 상으로만 미야모도가 절반을 출자한 것처럼 돼 있다 그거야. 이대감이 동업자 행셀 하라고 그자를 고용했다는 얘끼고, 그러고 철저하게 사기친 거지. 이대감 그 양반 속으로 되게 웃었을 걸. 으흉하게 보다 익살스런 사람 이니까 말이야. 이놈아 너 그 공돈 나도 공으로 먹어보자. 어차피 그러저러한 곳에 갈 자금이니, 강도질이야 할 수 없고 흐흐흣... 하고 웃었을 게야." 임명빈의 미간이 풀어진다. "명빈아 이제 속이 좀 풀리니? 사기는 쳐도 이대감 그 양반 썩은 선빈 아니야. 골샌님도 아니구. 하여간에 그 놈의 욕심이란게 무엇인가. 불을 보고 뛰어드는 나방같이. 허 참 드디어 이대감 계획이 무르익엇서 조준구는 미야모도의 출자금을 내주고 폐광을 독점하겠노라 동분서주, 절반 값으로 잡힌 땅은 황부자한테 떠내려갈 것 이 뻔하니 나중에 튀는 꼴이 가관일 게야. 하지만 어쩌누, 동아 썩는 것은 밭임자도 모른다고 그놈의 광산 속 몰랐다면 그만 아니야?" "허 참, 진정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잖고? 자네 부친한테 물어보게나." "그러면은 조준구가 아주 거꾸러진다, 그 얘긴가요?" 처음으로 상현이 입을 떼었다. "아직은 멀었지. 광산 하나 넘어진다고 만석 땅이 하루 아침에 없어지기야 할려구." 얘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마침 음식상이 들어온다. 건장한 두 하인이 맞잡아서 들여다놓은 상 위의 음식이 거창하다. 의돈이 입맛을 다신다. "생일상 받으려고 사흘을 굶었더니," "자네 생일 같은 소릴 하는군 그래." 명빈이 타박을 준다. 서의돈은 나가려는 하인을 불러세운다. "김서방 아니면 박서방이겠는데, 김서방, 기왕이면 술 한잔씩 부어 놓고 나가지 그래. 권할 주인 없는 술상 아 닌가." "예, 그럭협쇼." 소댕 같은 너부죽한 버선발이 술상 가까이 다가온다. 술잔에 술을 그득그득 채운다. 술 한잔을 쭉 들이켠 서의 돈은 빈 술잔을 하인에게 내민다. "한잔 받게." "아, 아닙니다요. 감히," "감이나 배나, 받게나." "아 아닙니다요." "허허허 안 받겠으면 빨리 꺼져. 명색이 연장 달린 놈인데 술시중 들라 할 숙야 없지." 하인은 콧물을 들이마시며 히죽히죽 웃는다. "아암요. 나으리. 그렇구 말굽쇼." 의돈은 하인에게 내밀었던 술잔을 상현에게 돌린다. "소년지사야, 이 잔 받게나. 저기 임선생께서는 달짝지근한 약과 전과나 핥으면 되는 게고 술은 자네하고 나하 고," 임명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선전을 급히 집어먹는다. 의돈은 상현으로부터 술잔을 되돌려받으며 "만주 바닥에서 뜨거운 술맛을 익혀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 "내 시기심이 자네 그 매끄럼한 콧등을 이렇게," 손가락을 들어서 집게 꼴을 해 보인다. "청루 왜년한테 끌고 갔을 게야. 으하하하핫핫..." "지랄 같은 소리 또 늘어놓는구먼." 임명빈이 건성으로 거든다. "자넨 잠자코 있어. 지랄 같은 소리 아니 한다 해서 왜년을 데리고 사는 그 누구더라? 이름 한번 유명하지. 이 인직, 지금은 경학원 사성 이인직보다 위대할 것 한푼 없다구." "이인직은 왜 들먹이누." "자네 동업자니까." "내가 언제 벼슬 살았었나?역관직에 있었단 말이냐? 동업자는 무슨 놈의 동업잔구?" "엇비슷한 처지니까 하는 말일세." "엇비슷하다니?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놈 수족 노릇을 내가 했더란 말이야?" "그런 일 아니 했다고 뽐내본들 자네 키가 좀더 높아지는 건 아니야. 다 같이 왜년이 퍼주는 하숙밥을 처먹고 왜글 나부랑일 배워 왔으니 엇비슷하다는 거고. 한 놈은 너무 똑똑해서 나라 팔아먹는데 한다리 낀 것도 사실 이나 신소설을 씁네, 연극을 합네, 하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 것을 흉낸나마 낸답시고, 헌데 자넨 뭘 했지? 매일 쌀가마나 축내는 밥벌레 아니었나 말이다." "신소설이고 연극이고 그거 다 무슨 소용이야. 지 부모, 지 나라 파, 팔아먹는 개새끼가," "허허허, 말귀 어둡다. 애국지사연하지 마라. 피장파장이야." 의돈은 씩 웃다가 상현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홍종이 그애 외삼촌 장지까지 따라 내려갔나?" 묻는다. "내려갔습니다." "거기도 애국지사연하다가 개죽음한 아들 때문에 또 개죽음이라... 하기는 이 풍진세상 갈창 같은 그따위 얇은 뱃가죽 하구서 뒷간 가노라 볼일 못 볼 바에야 일찌감치 자알 갔다만 웃기는 얘기야." "배짱 두둑한 자넨 한 백년 살게애." "아암. 하여간에 죽어도 치사ㄹ스럽게 죽었거든. 옥사? 무슨 놈의 개나 같은 옥사야?" "그 친구 본시부터 새색시였다구." '존경하고 미치고 반하고, 그래서 어쨌다는 게지? 안중근한테 미치고.. 반하고... 그것도 항일이다, 그러니 죄목 이다, 그건가? 죽은 놈이나 가둔 놈이나 다 제정신인가?" "심약한 게 탈이었다구." 의돈이 눈꼬리에 잔주름을 모으며 술잔을 든다. 맞은켠에 있는 상현의 모습이 죽은 홍종의 외사촌, 유인승으로 착각된다. 별안간 술기가 오르는 것 같다. '빌어먹을 놈.' 유인승의 얼굴은 희다. 말 대신 히죽이 웃는다. 몸매는 가늘고 약골이다. 해서 친구들은 그를 인순아씨라 불렀 다. 그런데 유인승이 달라진 것은 하얼빈 역두에서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암살한 그 사건이 터지고부터 주눅이 들어 말을 못하던 그가 떠들기 시작했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흥분하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인순아씨께선 이제 겨우 서방님이 되신 모양이야." 함께 떠들다가도 그의 엄청난 변모에 의아해진 친구들은 웃었다. "아니 저 사람이?" 웃던 친구들도 종래는 웃을 수만도 없게 유인승은 좀더 이상하게 변해갔다. 방바닥을 치고 통곡을 하는가 하 면 때론 소리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넑두린지 혼잣말인지 시부렁거리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저 사람 머리가 이렇게 돌아버린게 아냐?" 한번은 화가 난 서의돈이 유인승 면상에 술잔을 던진 일이 있었다. "이 자식아, 정신차려!" "정신 차리라구? 정신만 차리면 죽은 사람이 사, 살아온단 말이냐?" 오솟매로 얼굴을 닦으며 유인승은 허꼬부라진 소리로 의돈에게 달려들었다. "미친놈! 계집을 상대로 앓는 상사병이라면 그런대로 봐주겠다! 안중근은 사내야, 사내." 그러나 서의돈은 유인승의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은 아니했다. 이 무렵 안중근의 종제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밀고에 의해 평양역에서 체포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북조선 일대에 조직화되어가던 배일 문화운동의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분쇄하려고 노리고 있었던 총독부는 안명근 체포를 기화로 총독 및 총 독부 요인 암살 음모란 터무니없는 내용을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을 대량 검거, 투옥한 것이 작년 초정월의 일 이다. 소위 안악 105인 사건이다. 처음 육백여 명이 체포되었을 때 유인승도 함께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 나 유인승이 체포된 이유는 좀 색다른 것이었다. 요릿집에 들어가서 물 마시듯 술을 퍼먹었다는 게 일종의 발 작이었고 다음엔 운수 사납게 형사와 맞붙어 용감하게 육탄전까지 벌인 게 발작이었고 독립만세를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죽은 안중근을 살려내지 않는다면 모두 다 모가지를 댕강댕강 잘라 죽여버리겠다고 악을 쓴 것도 발작이었다. 검거 선풍이 불고 있는 시기, 날 감옥에 데러다다오 하며 부탁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후일 같은 감방에 함께 있다가 풀려나온 사람이 전해준 말에 의할 것 같으면 감옥에서의 유인승은 너무 어이없었다 는 것이다. 겁에 질려서 거의 반미치광이였었다는 것이다. 비단 포대기 속에 자란 유인승으로서는 감옥소의 풍 경이 바로 죽음의 현장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조급증과 공포심이 그를 죽게 했다는 것이다. "생일술 마시면서 죽은 사람 얘긴 이제 그만두지." 명빈이 돼지고기에 새우젓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 관두자." 한동안 말이 끊어진다. 술이 센 두 사람 사이에서 면무식하듯 조금씩 마신 술에 명빈의 얼굴은 홍당무다. 홍당 무가 된 명빈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의돈 얼굴에 장난끼가 또 서린다. "아까 여기 오는 길에서 말이야, 무당년 푸닥거리하는 구경을 했지. 덕구 덕구 덩덕궁 덩덩," 손끝으로 술판을 치면서 서의돈은 명빈에게 곁눈질이다. 순간 명빈의 낯빛이 변했으나 꾹 참는 기색이다. "덩덕 덩덕궁, 덕구 덕구 덩덕궁, 덩덩 덩덕궁.. 하하하핫... 신풀이 자알 하더구먼. 빌어먹을, 구경꾼 속으로 대 가릴 디밀었다가 호되게 쥐어박히긴 했지만 말이야. 애숭인 줄 알았던 모양이지." 상현이 픽 웃는다. 민적민적 뒤켠으로 물어앉았다가 상 곁으로 다가오곤 하는 명빈의 모습이 불편해 보인다. 임역관의 이름이 덕구다. "그놈의 무당년들 신풀이 자알 하고서 돈은 돈대로, 그런 상팔자가 어디 있어?" "그렇게 따지자면 무당뿐이겠나, 기생도 그렇고," 명빈이 엉거주춤 어물어물 뇐다. "그렇지, 잘 처먹고 재미보고 돈 벌고, 사내 직업치고 그런 거 없는지 모르겠네?" "있지요!" 술이 들어갈수록 얼굴이 창백해지는 상현이 불쑥 말했다. "그게 뭐야?" "바로 그, 기생이나 무당의 기둥서방이 되는 일이지요." "으하핫핫... 핫핫..." 서의돈은 박장대소한다. "그렇지. 그래, 맞았어. 일본 바람 쐰 놈보다 북만주 매운 바람 쐰 놈이 낫구먼. 나이깐엔 제법이야. 하하핫... 덕구 덕구 덩덕궁 덩덩 덩덕궁." 술판을 뚜드린다. "무당이라구 너무 괄시할 것만도 아니라구." 명빈이 부르터서 말했다. "괄시는커녕 부러워서 그러네." "무속이라는 것도 그 나라의 문화 유산인 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거라구." "그래?" "흥." "언제였더라?" "..." "목욕재계하고 도포깃 세우고 갓끈 바로하고 양잿물을 마신다는 시골 양반을 비웃던 친구가 있었는 성싶은데 나도 함께 비웃었네. 그리고 또 총독부에는 세금 아니 내겠다 해서 붙잡혀간 늙은네한테 비하면은 양잿물파는 한량이 아니겠느냐구, 그런 말도 했던 것 같은데 나도 동감을 했네., 전자는 수구당이구 후자는 개화당이라 그 런말도 했었지. 그 친구가 자네 아니었던지?" "그래, 그랬다! 내가." "하하핫핫 하핫핫.. 이봐, 명빈이. 이젠 임역관 허물은 아니 할테니, 덕구 덕구 덩덕궁도 아니 하겠고 하니 화 내지 말구, 그런데 목욕재계하고오, 도포깃 세우고오 갓끈 바로하고오, 양잿물 마시고오, 하하핫... 그놈의 선비 문화를 깡그리 말살을 해야만 조선에 산업이 발달하고 근대화하는 게고오, 하든 자네가 말일세, 무당 문화는 보존하야 한다 그 말인가? 촌수가 그곳에 가까워서 그러는 게야? 하기는 역관도 한때는 궁중 깊숙한 곳에서 요물 노릇을 했으니 촌수가 아니 가깝다 할 수 없고." "마음대로 지껄여." 명빈은 술을 훌쩍 마신다. "자네가 그래 문명국 일본에까지 갔다가 왔으면 그놈의 요물 대신 자전거라는 것이나 한 대 사올 일이지, 고 작 무당년과 촌수 당기기야? 한심해." "흥, 일본이라고 요물이 없나?" "호오? 그놈의 대포 군함 가지고도 요물을 못 잡는단 그 말이야? 아라사도 잡아먹고 청국도 잡아먹고 조선은 송두리째 삼켜버린 그 실력 가지고서?" "자네 얘기 듣고 있다간 대가리가 돌든지 빠개지든지." 명빈은 술잔을 들고 꿀꺽꿀꺽 마신다. "옳지! 그쯤 돼야지." "임선생님 조심하십시오. 의돈형님 수에 거릴면은 또 앓으셔야 하니까요." 상현이 웃으며 충고하는데" "무속이 한 나라의 문화유산인 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다! 내가 그 말을 했기로, 그게 어째서 잘못이야?" 명빈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얼씨구, 술 들어가더니 간덩이 커졌네?" "어느 나라구 무속이 없는 나라는 없어!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 밖의 사정은 모르고 하나만 우겨대는 것 그것 도 여간곤란한 게 아니라구. 일본 유학했다구 날 빈정거리지만 말이야. 그런 자넨 왜 일본말을 배워?" "나야 뭐 유학이 아니라 유람 갈려고 그러네. 왜놈들 씨종자가 작다고들 하니." "흥 세발자전거 한 대 갖고 오겠군." "세발자전거라니?" "애들 타는 자전거야." "이거 말발 서는구먼." "일본 가거들랑, 일본에도 무당 있는 거나 알고 와라. 무당은 어디든지 있어. 서양 문명한 나라라구 무당이 없 는 줄 아나? 미신도 있고 귀신도 있고 다아 있는 거라구. 일본 동경의 그 은좌라는 번화가에도 저녁이 되고 보면 복술쟁이 늙은이가 좌판 펴놓고 앉아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손금도 봐주고 운수도 점쳐주고, 제에기 무 당하고 나하구 촌수가 가깝다구? 오냐 가깝다, 가까워!" 명빈의 상세가 흔들린다. 흔들면서 술을 부어 마신다. "제에기 미신이 어쨌다구? 알고 보면 말이야,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가 미신 덩어리야 미신. 알지도 못하구서 날 친일파로 몰아? 내가 뭐 일본 그것들을 숭배하는줄 알어? 천만의 말씀이라고, 천만에. 소위 일본에서는 신 궁이라는게 있단 말이야. 무당들이 신위를 모신 당집하고 비슷한 게지. 그건 절도 아니구 교회당도 아니구, 그 곳은 귀신이 사는 곳이다, 그거야. 귀신도 하나가 아니라 무슨 놈의 대신이니 무슨 놈의 천황이니, 무슨 놈의 공신이니, 신궁마다 귀신도 가지가지라. 내가 알기로는 불교하고 유교하고 기독교하고 회교라는 그게 말하잘 것 같으면 세계에서 등록을 끝낸 종교라는 건데 흥,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야. 자넨 말이야, 날 친일파로 모, 몰아붙이려고 갖은 애를 다 쓰지만 말이야, 그게 아니라구. 신궁이라는 곳에 가보면 말이야? 이 상야릇한 고대 의장을 한 신관이라는 자가 있어서 하얀 종이를 오린 신대 같은 것을, 그것을 이렇게," 명빈은 신대를 잡아 좌우로 힘차게 흔드는 시늉을 한다. 입술 끝이 아래로 축 처지면서 상현을 서의돈으로 착 각했는지 노려본다. "또 손뼉을 타악! 타악! 치면서.. 그거 무당하고 다를 것이 조금도 없는 거라구. 조금도 다름이 없는 그곳을 천 황이고 고관대작이고 농사꾼, 젊은 것, 늙은 것 할 것 없이 찾아들어 참배를 하는 판이니, 왜놈들 미신이란 알 아봐주어야 한다구. 그자들은 우리 조선백성을 야만이다 미개다 하지만 말이야, 어디 이 나라 백성들이 임금 능에 찾아가서 손뼉치고 절하든가. 사당이라는 것도 조상을 고양하는 거지 누가 줄줄이 찾아와서 참배를 하 누." 서의돈은 명빈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사설을 허용한 모양이다. 시죽시죽 웃으며 술잔을 비울 뿐 응수하지 않는다. "내가 무속도 보존할 가지가 있다 한 것은 그 속 검은 왜놈들이 저희들 미신은 뒤로 감추고서 야만이다, 미개 다 하는 수작을 빤히 알기 때문이라구. 그것이 다 이 나라 문화를 깡그리 없이 하자는 수작이거든. 그러니 내 가 보존하자는 것은 미신을 보존하자 그것은 아니라구. 무속도 우리 백성들이 살아온 자취요, 풍속이라면, 그 걸 아주 싹 지워벌릴 수는 없어. 아암 없구말구. 내 말이 어디가 글러? 나를 친일파로 몰려고 너희놈들이 기를 쓰지만 말이야, 알고 보면 나라는 이놈이, 더 내 나라를 더 잘 안다 그거라구. 자네는 몰라. 모른다 그 말이라 구. 민속이라는 것도 학문이거든. 내가 일본 있을 적에 민속학을 한다는 일본인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 말이 그럴 듯 하더라 그거라구. 민속이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라는 게지. 때문에 그것은 그 민족의 전통이다, 이 거야.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손 치더라도, 경제 사정이 윤택해진다손 치더라도 전통이란 물건이 아니다, 그거 야. 그러니 기계로써도 그거를 맨들 수 없고 돈으로 그것을 살 수도 없다는 게야. 그래 그 일본 사람이 말하기 를 이렇게 기계만 돌아가는 세상이니 소중한 민족의 오랜 유산들이 날로 날로 소멸해가는 판국이라 슬프다! 일본도 이러하거늘 침략을 당하고 정복을 당한 나라에서야 오죽하랴, 그러더란 말이야. 그래! 자전거 한 대 사 온 것보다 무속이라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알고 돌아온 내가... 음, 음,,, 뭐랬지? 음, 그렇구먼. 그 악 랄한 왜놈들이 미신이다! 미신이다! 하고 무당 잡으러 다니는 게, 그래 그게 조선 근대화 작업인 줄 알어? 도 포가 어딨어? 갓끈이 어딨어? 깡그리 조선 것은 없이해보고 싶은... 음, 흑." 명빈은 혀꼬부라진 소리로 한참 횡설수설, 그러더니 어느새 자리에 고꾸라져서 잠이 들어버린다. 서의돈이 상 현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임선생님 며칠 앓으시겠군요." 상현도 쓴웃음을 띤다. "앓으면서라도 술은 배워야 해. 두두둣! 하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놈의 주눅도 고쳐져야 하구. 상현아." "네." "우리 이 자는 여기다 내버려두고 달아나자." "그럴 수야 있습니까. 선생님을 뫼시고 가야지요." "아니 태수가 오면 잘 해서 보내줄 걸세. 정은 없어도 하는 짓은 자상한 편이니까... 명빈이하고 싸우는 건 괜 찮지만 말이야, 태수 하고는," "..." "싸우면 골나해진다. 독선생 앉혀놓고 왜말 배우는 이 사랑방에 자네나 내나 더부살이로 온 처지고 보면, 안 그래?" 서의돈은 눈을 찡긋한다. "나는 지금 취해 있구 그자는 맑은 정신으로 돌아올 텐데, 필시 내 입에서 듣기 좋은 말은 안 나올 거라." 그도 그렇겠다고 상현은 생각한다. 이 새끼야! 만리 밖에서도 쇠전 냄새 맡은 네놈 애비가아, 하고 삿대질이라 도 하는 날엔 의돈보다 상현이 거북해진다. 집안끼리 얽혀 있기도 하지만 서의돈은 명빈과 태수와도 친구 사 이여서 이 사랑방 교습에 끼여들었지만 상현의 경우는 생판 낯선 집이다. 홍종의 형, 그러니까 지금은 만주 유 하현 삼원보에 가 있는 이판서댁 맏아들 윤종과 의돈이 지극한 사이였던 연고로 의돈이 이판서댁 사랑에 나타 났고 젊은이 두 사람이 일본 유학을 작정하고 마땅한 일어 강습소를 찾고 있다느 것을 알게 되어, 그리하여 어울려진 공부바이었으니까. 상현을 끌고 밖으로 나온 서의돈은 개구멍받이로 빠져나온 개구쟁이 처럼 싱글싱글웃는다. "야, 상현아. 날 따라와라." "어디루요?" "예쁜 처녀 얼굴 보러 가자." "처녀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볼 수 있어. 명빈이 집에 가면 말이야." "네?" "명빈이 누이동생 그애가 천하절색이거든." "형님 혼자 가십시오." "허 참, 나 자네하고 겨루고 싶어서 그러는 게야." "무슨 말슴이오?" "기왕이면 미소년하고 겨루겠다 그거 아니냐? 그래야 내 자존심이 만족할 게고. 또 모르지, 자넬 물리치게 될 지 뉘 알어?" "그거는 어찌 되었든 형님이나 저나 처녀 볼 자격 없습니다." "허 장가들 자격이야 없겠지만 쳐다보는 자격까지 없을라구?" "..." "사내 장부가 그런 유연성도 없이 무슨 일을 하누? 가보자." "그럭헙시다." 두 사람은 두루마기 자락을 겨울 바람에 펄럭이며 걷는다. 상현은 대추씨같이 작은 서의돈을 내려다보며 마음 속으로 웃는다. '서의돈, 그 형님 망나니로 소문이 난 사람이야. 술도 말술이지만 취하면 남의 집 담장 밑이고 길바닥이고 아 무데서나 태평스럽게 잠이 드는 위인이거든.' 홍종이 귀띔해주던 말이 생각난다. 거리에 어둠은 아직 아니 깔렸으나 해는 졌고 나귀를 탄 시골 선비가 지나 간다. 눈이라도 내릴까 싶었던지 갈모를 쓴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보인다. 마부도 하인도 없는 혼자 행차신가. '노름꾼, 광대, 천하 잡놈은 말할 것 없고 물지게꾼 백정까지 어울리길 좋아해서 부모님 속도 무던히 썩혔지만 보기보담 호걸이야. 대추씨 같은 몸집에 배짱하나 두둑하지. 가문이고 조상이고 도통 우습게 알거든. 그러나 저래봬도 아는 건 많아. 한번은 문중에서 유식하다 이름난 어른 앞에서, 불론 불러 들여서 꾸중으로 시작한 거 겠지만 의돈형님은 겨루었던 모양이야. 당돌하게 이론으로 공박하여 상대를 무색하게 했거든. 그러고부턴 아무 도 간섭 안 하게 됐다는 게야. 한데 무슨 놈의 꿍꿍이속일까? 이제 h아서 일본말 배울 생각을 하니 말이야.' 홍종의 말이었다. "명빈이 막내누이 말이야. 내가 열한 살 때 그 집 앞에서 태어나는 울음 소리를 들었거든." "아직 나이 어리군요." "어리지도 않지. 열일곱인가? 나는 그 애 삼줄 내거는 걸 보았는데 물론 고추는 없고 숯덩이분이었어." 의돈은 비밀스럽고 신기한 것처럼 시부렁거린다. 그런데 고 계집아이가 절세미인이 될 줄 뉘 알았겠나? 내가 장가갈려고 말을 타고 나섰을 때는 그 계집아이가 아장아장 걸음 말 배우고 있었거든. 나도 장가들면은 저런 계집아이 아비가 되겠지... 한데 그놈의 세월의 조화 라는 걸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나는 아직 늙지 않았는데 그 계집애느 방년이라!" 휘적휘적 걸으면서 의돈의 말도 휘적휘적 힘이 없다. "그 계집애 개명한 아비 덕분에 숙명학굔가 거길 다니는데 말이야. 그래 그런지 여간 밴질맞지가 않아. 말을 걸면 되받을 줄 안단 말이야. 임역관 그 늙은네 아들보다 막내딸 덕보게 생겼어." 효자동까지 온 서의돈은 몸을 돌리면서 상현을 돌아보고 웃는다. "이 새끼야!" "네!" "자네 나한테 굽실굽실하는 거야. 자네 덕 좀 보자구. 미소년을 종자로 거느렸으면 나도 좀은 돋보일 거 아니 겠어?" "그럭허세요. 대신 나중에 술 사야 합니다." "마신 술은 어쩌구?" "뻘써 깼어요." "좋아. 술 사지. 대신 굽실굽실하는 게야?" 겉보기 규모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기와집 앞에 머문 거의돈이 기웃기웃하는가 싶더니 이리 오너라! 말 대신 주먹으로 대문짝을 내리친다. "뉘시오?" 계집종이 놀라서 쫓아나온다. "아씨 계시냐?" "예. 뉘시오?" "나 서의돈인데 오라버니한테 변괴가 생겨 왔으니 너희 아씨보고 내가 좀 만나잔다고 여쭈어라." "서, 서방님한테 변괴가! 아, 아씬 친정 가시구." "허허 명희아씨한테 여쭈라 하지 않느냐?" "예, 예." 계집종은 허둥지둥 쫓아들어간다. 이윽고 명빈의 막내누이 명희가 달려나온다. 얼굴이 초지장이 되어서 "아니! 올아버니가 어, 어지 되셨어요?" 과연 미인이다 하고 상현은 생각했으나 터무니없는 서의돈 거짓말에 굽실거리겠다는 약속을 까먹고 만다. "태수 집에서 지금 늘어졌구먼." "네?" "처음에는 주하고 사하고 꼭 죽는 줄 알았는데," "그, 그래서 어찌 되셨어요?" "하여간에 우리가 떠메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선 기별하러 왔는데," "이 일을 어쩌나? 아버님 어머님도 아니 계시고 올케도," 훌쩍훌쩍 우는 모습이 아직 어리다. "거기서 가야겠군." "네, 그, 그렇게 해야겟어요." 허둥지둥 들어가는 명희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서의돈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돌아선다. "어서 가자구." "그럽시다." 두 사내는 뛰다시피 골목을 돌아나와서 함께 소리내어 웃는다. "어때? 절세미인이지?" "미인은 미인인데 절세미인은 아니오." "그래? 저보다 더한 미인을 보았나?" "보았지요." "어디서?" "만주 벌판에서요. 형님, 목이 칼칼합니다." "그래 가자! 오늘은 기생집이다아!" 5장 귀향 상현은 배앓이하는 것처럼 두 다리를 구부리고 배는 요 위에 붙인 채 생각을 하고 있다. 방문이 희끄름하게 밝아오고 부엌 쪽에서 조반 짓는 기척이 들려온다. 서울에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어머니 염씨는 대만족이었으나 새댁은 남편을 지척에 두고도 늘 쓸쓸한 표정이었다. 의무를 치르듯, 밤의 잠자 리는 이를 악물어도 여인에게서 치욕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어쩌다가 발이라도 닿으면은, 차라리 걷어차는 편이 낫지 살그머니, 눈치를 챌까봐숨을 죽이듯 멀어지는 남편의 몸, 그나마 어두운 잠자리 속에서만 남편을 느꼈을 뿐 진종일 남편의 얼굴 한번 볼 수 없는 가혹한 반가의 법도, 그 법도를 빙자하며 사랑에다 보이지 않 는 울타리를 치고 앉은 남편이다. 거리는 구만리, 남녀란 정에 따라서 구만리도 되고 동체도 되는 건가 하고 새댁은 아궁이 속의 타는 불꽃을 바라본다. '먹기 싫은 음식은 웃목에 두었다 먹지만 사람 싫은 거는 어쩔 수 없고, 그러나 법이 무섭지. 조강지처는 안 버리는 법이야, 할머님이 그러시든가?' '아씨 이것 맛 좀 보시오. 간이 맞는지 모르겠소." 유월이 숙주나물 무친 것을 내민다. 새댁은 먹어본다. "참기름이 너무 든 것 같소. 서방님은 기름 냄샐 안 좋아하시는데," "예. 쇤네 손이 미끄러져서 그만 기름이 좀 더 들어간 것 같소." 음식 솜씨에는 자신이 있는 억쇠 마누라 유월이 낭패한 얼굴이다. "조반은 많이 드시질 않으시니까 너무 염려 말아요." 하는데 귀가 밝은 유월이 "아씨, 서방님 기동하시는가베요?" "글쎄에," "들어가보시야지요." "부르시지도 않는데..." "안 부르시더라도 가보시오. 곧 서울로 떠나실 긴데," "걱정 말아요. 내 알아 할 테니," 새댁은 화를 낸다. 벌써 사랑으로 나가고 있는 남편 발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남남끼리 만내서 정 하나로 살아가는데 서방님도 너무하시지... 이번에는 반가운 소식이 있어야 할긴데," 유월이 중얼주얼 혼잣말같이 시부리며 솥뚜방에 물걸레질을 하는데 "억쇠야! 억쇠 게 없느냐?" 사랑에서 상현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이구, 저 번시가 아직도 안 일어났는가베? 내 간밤에 술을 과하게 마신다 싶더마는," "억쇠야! 억쇠 없느냐?" 행주를 내동댕이치고 행랑을 향해 유월이 달려간다. "보소오! 보, 보소!" "으 음, 와 그라노." 잠에 취한 목소리다. "와 그라다니? 서방님이 부르요." "음." 벌떡 일어난다. 침이 흐르고 눈곱도 덜 떨어진 얼굴의 억쇠가 급히 방문을 열고 나온다. "어이구 그놈의 술이 원수요. 초정월부터 꾸지람 들으면 일년 내내 좋은 일만 생길 기니께." 유월이는 혀를 뚜드리며 부엌으로 돌아가고 억쇠는 사랑으로 달려간다. "서방님 부르셨십니까?" 흘러내리는 허리춤을 끌어올린다. "오냐." "무슨 분부라도," "방으로 들어와." "그냥 여기서 듣겄십니다." "들어오래두." "아니," "허 참, 긴히 할 얘기가 있어." "예." 억쇠는 눈을 비비며 눈곱을 닦아내고 허리끊을 풀어 다시 졸라 맨다. "뭘 해?" "예. 들어갑니다." 방으로 들어간 억쇠는 아랫목에 쭈그리고 앉는다. "긴히 할 말심이란," "음. 그게 좀," "어려블 거 없십니다. 소인이 다 하겄으니께요." "그래 다름이 아니라 억쇠 네가 봉순일 만난 것은 들었고." "예, 만났십니다." "진주 어느곳에 있는지 찾아가면 알까?" "그, 그건 소인 모릅니다. 진주 있다는 얘기만 들었소." "하여간에 진주에 가면 찾긴 찾겠지." "그, 그러시오... 서울 가서 김서방도 찾으니께요. 참, 그, 그렇구마요." "뭐가?" "저어 소리꾼 배서방이 혹 알는지 모르겄소." "어떻게?" "처음 봉순이는 그 소리꾼을 찾아갔이니께요. 또 그 바닥 사람이라서 대개 알지 않겄십니까?" "그럼 그곳에 지금 가보아." "지금요?" "음 되도록 빨리, 서둘러야 하네. 가서 봉순이 거처하는 곳을 알아와." "혹 어디 가지나 않았는지 모르겄소. 일이믄 알아보기 쉽을 듯한데, 그라믄 소인 한달음에 다니오겄십니다." 억쇠는 바람이 들지 않게 문풍지가 접히지 않게 조심스레 방문을 닫아주고 나간다. 상현은 사라져가는 억쇠 발소리를 듣다가 궐련 하나를 꺼내어 불을 붙여문다. 서울서 혜관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줄곧 봉순을 만 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어떤 집착처럼 느껴진다. 봉순이 보고 싶은 이유도 없다. 꼭 만나야 할 사연도 없다. 한데도 무엇 때문에 만나려 하는지... 군소리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도 어쩌면 봉순이를 만나야 한다는 그 유 혹 때문인지 모른다. 담배 연기를 후우 내뿜는다. 방안은 따스하고 놋화로에는 발그스름한 불씨가 묻혀 있다. 어느 곳으로 가도 이곳 방처럼 편한 곳은 없다. 한데도 왜 편안한 집에 붙어 있질 못하는가. 남아 장부의 약심 이란 때문이란 말인가? 생각다가 상현은 씁쓰름하게 웃는다. '무슨 야심이냐?' 사랑 울타리 쪽에 까치가 까까까 까깍... 하고 운다. '저놈의 까치 망령났다. 오늘 떠날 사람이 있는데 울기는 왜 울어? 반가운 손님 찾아올 리도 없는데 말이야.' "서방님 소세하시오." 유월이 세숫물을 마루 끝에 놓고 가버린다. 상현은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끄고 세수를 했다. 조반도 들었다. '억쇠가 왜 여태 안 오는 게야?' 상현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다. 멀다 해야 읍내, 벌써 돌아왔어야 할 억쇠가 웬일일까? 생가하며, 그러나 상 현은 소리꾼 배서방을 못 만나고 억쇠가 돌아온다손 치더라도 진주에 들르리라 결심을 굳힌다. "서방님!" 헐떡거리며 억쇠가 사랑 중문을 들어서는 소리가 난다. "어째 늦었느냐? 들어와." "예. 빌어묵을 놈." 억쇠는 아까처럼 방으로 들어와서 아랫목에 쭈그리고 앉는다. "아 그러시 서방님, 그놈이 봉순이하고 무신 사단이 있는지 나를 보고 그런 지랄이 어디 있겄십니까?" "모른다고 하든가?" "아닙니다. 알기는 아는데 안 가르치주겄다 그겁니다. 온 세상에 그런 심청궃은 놈 처음 봤소." "그래 알아냈어, 못 알아냈어? 그 말부터 해." "그, 그러니께 그놈을 구슬리노라고 진땀을 뺐십니다. 온 세상에 꾼들이라 제각기 고집 하나는 갖고 있는 모양 이지요." "어디 있다더냐?" '예. 진주 가면 말입니다, 연홍이라는 기생이 있답니다. 그 연홍이만 찾으믄, 연홍이 집이라 카믄 모리는 사램 이 없다 카믄서요, 봉순이가 그 늙은 기생집에 아마 있일 기라 하더마요." "그래? 그럼 어서 떠날 준빌 해." "예." "진주서 며칠 묵었다가 서울로 곧장 갈 게야." "그, 그라믄 다니오시는 기이 아니구마요." "그래." "작은 서방님도 안 만나시고 떠나시겄십니까?" "남의 식군데 뭐, 쉬 돌아오지도 않을 거라며?" "그러세요. 보름도 새고... 아씨께서 해산을 하셨으니께 처가에는 며칠 더 묵으시겄지마는," '급히 서둘러. 곧 떠나야 해." "예. 한데 발등에 불 떨어졌나, 하시겄소. 마님께서," 억쇠는 행구를 차리기 위해 급히 나가고 상현은 염씨를 뵈려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어머님, 오늘 떠날까 합니다." "아니 아무말 없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냐?" "가긴 가야지요." "가는 건 아는데 발등에 불 떨어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겠고," 상현이 싱긋이 웃는다. 억쇠 말이 생각나서다. "차일피일할 순 없지요. 서울 T가서 할 일도 있지마는 진주를 들러서 갈까 싶어서요." "진주에는 왜?" 어세가 강하다. "그곳에 최참판댁 유모 딸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갈할 말도 있고 해서," "온." 염씨는 역력히 불쾌감을 나타낸다. "억쇠를 시켜 편지라도 써 보내려무나." "그건 좀..." "나도 억쇠한테 얘긴 들었어. 뭐 그 아이가 기생이 됐다면?" "네. 소자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기생된 아일 찾아가는 게 마땅찮구나." "하오나 사정이 다르잖습니까?" "그야 그렇다만... 아직 너 나이 많다 할 순 없고, 처신을 바로 해야 하느니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상현이 나귀를 타고 집을 떠날 때 새댁은 제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다듬은 명주 옷감이 손가락 사이 로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되잡아서 홈질을 하다간 구김살도 없는 옷감에 인두질을 하고 또 하곤 한다. '간밤에 떠난다는 말 한마디 없더니.' "억쇠야." "예." "음." "서방 얼어죽을까봐서... 흐흐흣 둥둥산겉이 솜을 놔주었으니께요." "너희들은 참 금슬이 좋구나." "새끼 하낫도 없고 누굴 믿고 살겄십니까?" "그래 너는 팔자가 좋다." "서방님." "음." "봉순이는 왜 만나실라 캅니까?" "그걸 몰라서 묻나?" "역시 최참판댁 애기씨 일로 그렇십니까?" "..." "서방님이 영 말심을 안 하시니께 소인 복장이 터질 것 같십니다." "니 복장이 왜 터지나." "나으리 지내시는 것도 궁금하고... 언제쯤 돌아오실 건지... 세상이 분분해질 때마다 나으리가 원망스러바집니 다." "그건 왜?" "아 그러세 한분 쳐들어오시지도 못하고 하마나하하마나 하다가 이 소인 늙어 죽겄소." "그게 그리 쉬운 일이겠나." "그러게요. 산산골골이 왜병놈들이 이 백히듯 백히 있이니 사람들도 이자는 다 틀렸다 카기도 하고 참말이제 우리 나라를 언제 다시 만나뵙게 될란지. 마님이나 아씨 처지도 딱하지 멉니까." "..." "그도 그렇지마는 길상이 그 아이랑 이서방 월선이 그 사람도 이자 돌아오기 글렀십니까?"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조준구가 망하는 날에." "조가 그 사람이 그리 쉽기 망하겄십니까? 왜놈들하고는 찰떡 궁합이 돼서 땅도 많이 뺏고 전보다 더 부자가 안 됐십니까?" "고방에 돈이 쌓이면 사가 생겨서 절로 나가는 게야." "그렇지마는 아직이사 신총 갓심 내놨는데, 왜놈들이 속히 망해야 겄지요. 우리 나으리는," 또 나라마님 타령을 하려는데 상현은 눈길을 들어 구름을 쳐다본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내려간다. 오묵오묵 한 초가들이 오소소 떨고 있는 것 같다. 초정월인데 나무꾼들이 지나가고 도부꾼들이 지나간다. 어째 연을 날 리는 아이들은 눈에 띄질 않고 왜식 목조 건물이 유독 두드러져 보이는지. 읍내를 지나 진주 가는 길로 접어 들면서 억쇠도 말이 없어지고 이리저리 산천을 살피며 간다. 파아랗게 돋아난 보리밭에 까마귀가 무리지어 앉 아 있다. 만주라면 봄날 같은 겨울 날씨다. 주막에 들어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다시 길을 떴다. 거의 진주가 가까워왔을 무렵 "서방님." "음." "서방님이 봉순이를 만내시믄 놀래실 깁니다." "왜?" "소인도 처음에 깜짝 놀랬으니께요. 그 아이가 클 적에도 외양이사 반반했지마는 비단옷 입고 분 바른다고 사 램이 그러크름 변할 수 있는 건지 얼굴이 계란을 삶아서 벗기놓은 것 같고 맵시도 기가 맥히더마요. 소문 들 으니께 진주서 권번 다니믄서 배울 것 다 배우고 또 소리가 명창 될 만하다 하고... 그래서 소리꾼 배서방이 억울해서 못 견디는 모양입니다. 소인이사 잘은 모르지마는 그만한 인물이믄 서울바닥에 갖다놔도 예, 사내들 애간장을 녹힐 기라 하더마요.?" "니가 머를 알어." "하 참, 소인도 서울에 가봤이니께요." "기생방에도 가봤었나?" "헤헤헷... 그거사 머, 우찌 갬히 그런 데를," "그래 서방은 얻었다더냐?" "봉순이 말심입니까?" "음." "기생이 뒷배 봐주는 서방 없이 될 말이겄습니까? 하기는 실찮은 기생이나 머리 얹어주고 고만일 수도 있지마 는 봉순이만하믄 든든한 봉 하나 물었일 깁니다." "그렇게 인물이 좋아졌느냐." "예. 하지마는 서방님은 딴생각 마십시오." 상현이 픽 웃고 만다. "봉순이 그 아아 형편을 봐서, 잘한 건지 못한 건지 그거사 모르겄지마는 기왕 화류계에 나갔으니 그 바닥에 서라도 잘 되얄 긴데, 소인이 서방님이 오셨다는 말을 했더니 많이 울더마요. 애기씨한테 정이 들어 그랬겄지 마는 눈치에 길상이 생각을 더 하는 모양이고," "..." "그만하믄 심성도 괜찮고 짝이 맞는데 길상이는 와 마다했는지 모르겄소." 상현은 듣기도 하고 안 듣기도 하면서 진주에 당도하기론 해나절이었다. 성내 객줏집에 여장을 푼 뒤 상현은 억쇠를 시켜 연홍의 집을 알아오게 이른다. "주인장." 객줏집 앞, 양지 쪽에서 거리를 바라보고 앉아 있던 객줏집 주인이 돌아본다. 초정월이라 한가로운 표정이고 상현의 주종이외 손님도 없는 모양이니 실상 한가롭기도 했을 것이다. "연홍이라는 기생집이 어디 있는지 압니까? 진주 가믄 다 안다 카든데." "연홍이 집이라믄 옥봉에 있지 어디 있겄소." "옥봉, 여기서 멉니까?" "머 멀지는 않소. 초정월부터 연홍이는 와 찾소." "그런 사정까지사 알 것 없고," "독골 가는 길로 가믄 중도가 옥봉이오. 가믄서 물으믄 가르치줄 끼니께." "하기사 머, 서울 가서 김서방도 찾는데," 연홍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기생 동네 옥봉, 번듯하고 운치 있게 꾸며진 노기 연 홍의 기와집은 조용했다. 억쇠가 소리를 질러 사람을 청하니 열네댓쯤 돼 보이는 동기 하나가 대문 사이로 얼 굴을 내민다. 거동이 경망스럽고 생김새도 그러하다. 눈이 큰 것은 귀염성스럽고. "뉘시오?" "여기 하동서 온 봉순이라느 애가 있느냐?" 상현이 묻는다. "네? 봉순이라굽쇼? 그런 사람은 없소." "하동서 온 아이도 없다 SAKFDKSI?" "그럼녀 기화언니 말씀이셔요?" "글쎄다, 기화? 음 그렇겠구나. 그러면 그 기화라는 아일 만나러 왔느니라." "어디서 오시었소?" "하동서 왔다." "하옵지만 기화언닌 여기 안 계시는 걸요?" "여기 없다구?" "네." "그럼 어디 있단 말이냐!" "영감이 대궐 같은 집을 사주시어서," "그 집이 어디냐?" "무슨 일로 오시었소?" 동기는 상현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허 참 갈길이 바쁜 사람이야. 어디 있는지 알려라." "기화언니한테 꾸중 들으면 어쩌게요?" "꾸중 아니 들을 게다. 나는 중한 전갈이 있어 온 사람이야." "그러면은 절 따라오사이다." 동기는 간드러지게 두 어깨를 흔들면서 기생 탯거리를 내려고 애를 쓴다. 남치마에 분홍 반회장 저고리를 입 은 맵시에 풍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년 참 맹랑하구나.' 상현의 뒤를 따라가는 억쇠는 기생집들이 모인 동네를 도둑놈 같이 슬금슬금 살펴본다. 소매를 끌어당겨 코를 풀기도 하고, 골목을 빠져서 한적한 큰길로 나선 동기는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는 으슥한 좁은 길로 들어간다. "여기 잠깐 기다리시오." 당돌하게 명령을 하고 대궐은 아니지만 제법 큰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얼마 후 다시 나온 동기는 아까 연홍 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성함이 누군지 알아오라 하시오." "거 참, 봉순이 세도도 보통이 아니구마는. 이부사댁 서방님이 오싰다고 말해!" 억쇠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이구 참 귀청 떨어지겄소." 핼끈 눈을 흘기며 동기가 들어간 얼마 후 "서방님!" 울먹이는 봉순이 목소리가 마당에서 울렸다. 대문을 와락 열어젖힌다. "서방님! 어인 일이시오." 버들가지처럼 유연한 몸이 상현에게 쏟아질 듯 쏟아질 듯. "음, 오래간만이구나." "한분, 한분 서울로 찾아가 뵐까 생각도 했었지요." 봉순이는 연신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아낸다. "어서, 어서 드십시오, 서방님. 박서방도," 내내 까불랑거리던 동기는 봉순이 우는 것을 처음 보는 터이라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기화언니! 전 가요?" 골목을 뛰어가는 발소리, 그리고 상현과 봉순이는 방에서 마주앉는다. 6장 쪼깐이집 흐느끼도록 몰아대는 바람 속의 둑길을 물지게 진 석이가 부지런히 걷는다. 찌뿌드드하게 흐린 날씨다. 강 건 너 대숲 위에 온통 덩어리 같은 잿빛 하늘, 석이 두 귀가 새빨갛다. 누덕누덕 기운 솜저고리는 오늘 날씨 같은 빛깔이었고 버선이 두둑하여 발은 시렵지 않으나 저고리 도련 사이로 기어드는 바람이 맨살을 찌른다. 물에 젖은 바지 아랫도리는 강정같이 얼어서 오금을 떼어놓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석이네도 이자는 한심 돌리겄네. 세월이 잠깐이라 어느새 석이가 저리 커서.. 머시매 꼭지라고," "한심 돌리기는요? 우리 석이가 열다섯 적부텀 물지게를 지는데! 살아가기는 날이 갈수록 태산이고." "그래도 이자는 평지에 나선 셈 아닌가. 사내 대장부는 입이 중천금이라 카든가? 머시마가 입이 없으믄서도 미련하지 않고 꾸벅꾸벅 일만 하는 거를 보믄은 참말이제, 남으 자석이지마는 애인한 생각이 들어서... 우찌 아 아가 그리 실겁겄노." "실겁으믄 머하겄소. 소도 언더막이 있이야 비비더라고 아무리 나부대봐도 세상에, 딛고 일어설 작지가 있어야 지요. 생때 겉은 가장잃고... 그리만 안 됐이믄 하다못해, 무신 일을 하더라도자석들이 이 고생이사 하겄소? 참 말이제 사는 기이 죽느니보다 나을 기이 없소. 사시사철 부석강생이맨치로 남으 물독에 물이나 채워주고... 불 쌍한 우리 석이 어느 시울에 허리 페고 장개는 갈 긴지." 치맛자락을 걷어 콧물을 닦으며 이웃 아낙과 주고받는 어미의 푸념이지만 겨울이 가고 강둑 수양버들에 물이 올라야 석이는 이가 들끓는 누더기 솜옷을 벗게 되리. 옥봉의 기화네 집 대문을 밀고 석이 들어섰을 때 팔자걸음의 허우대 좋은 중년 사내가 마당을 질러 걸어나왔 다. 코끝이 뭉실하고 구레나룻이 짙은, 두리널찍한 얼굴의 사내는 매우 심기가 좋지 않은 듯 헛기침을 한다. 여느 때와 달리 기화도 배웅하러 따라나오질 않았고 고개를 숙인 채 석이 지나치려 하는데 가래침을 돋구어 퉤! 하고 내뱉는 사내. "이 개쌍놈이! 으응, 눈구멍에다가 말뚝을 박았나?"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른다. 허리를 겨우 구부리며 시늉만으로 인사하는 석이, 마음속으론 '자개는 머 쌍놈 아니라 말가. 돈 가지고 산 그 따우 양반, 누가 모를 기라고.' 비웃는다. "짐승을 구하믄은 은혜를 갚고 사람을 구하믄은 악문을 한다 카더라, 애흐흠!" 기화에게 들으란 듯한 말인가본데 '내가 무신 자개 은혜를 받았다고 저러까?' 흰 가죽신발과 털토시를 낀 손목이 석이 눈 밑에서 지나간다. 덩치에 비하여 작은 손이다. 그 손이 푸들푸들 떨고 있는 것 같다. 석이는 저런 털토시 한번 끼어봤으면 얼마나 따스할까 생각하며 부엌으로 가서 물독에 물 을 붓는다. 아궁이 깊이 군불을 밀어넣던 봉춘네가 석이를 쳐다보다 말고 깜짝 놀라며 부엌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아이구매, 간 떨어졌다." 대문을 메어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던 것이다. "어이구 사람도, 아 문짝이 무신 죄고?" 다시 허리를 꾸부리고 불을 밀어넣는 봉춘네,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기생첩 거나리는 데 돈이믄 다라, 그런 생각이겄지마는 노류장의 계집이라고 어디 돈만 보고 살건데? 논마지 기나 떼어주고 씨받이로 데려오는 무지랭이들하고는 다르지러. 사램이 그래도 기방 출입을 할 양이믄 풍류도 좀 알아야제." 고래 속에서 솔가지불이 훨훠 소리를 내며 탄다. 깨끗한 봉춘네 당목 솜저고리에 불빛이 환하다. 이따금 아궁 이 밖으로 몰려나온 불빛 그림자가 시꺼멓게 그을은 부엌 서까래에서 춤을 추곤 한다. "나이가 젋다 말가 식자가 있어서 점잖다 말가. 기화도 자리잡고 살기는 어려블 기구마." 하다 말고 봉춘네 "석아." 하고 부른다. 물독에 뚜껑을 덫으며 "야." "바깥 날씨가 춥네." "게울이니께요." "여기 불 앞에 와서 손 좀 녹이라모." "괜찮소." "설 보름이 다 갔는데 금년 할만네 때는 물바가지가 얼겄네." "..." 가리 늦기 남강물이 꽁꽁 얼어붙었이니 아아들 얼음 타기는 좋겄다마는, 석아." "야." "숭님에 밥 한덩이 말아줄 기니 묵고 가거라." 부지깽이를 놓고 일어선다. "허기가 들믄 더 춥네라." 석이는 잠자코 부뚜막에 걸터앉는다. "따끈따끈하다. 묵어라." 봉춘네는 뜨거운 숭늉에 밥을 말아서 한 대접하고 김치 보시기를 내밀었다. 숭늉에서 따스한 김이 피어오른다. "자아 숟가락 여 있다." 투박스런 주석 숟가락을 선반에서 집어 건네준다. "어 묵어라." "야." 봉춘네는 아궁이 앞에서 비질한다. "너거 외숙모 요새 벵이 좀 나은가 모리겄네?" "어디가요." "그라믄 아득도 운신을 못한다 말가?" "야. 자꾸 더해가는 모양이더마요." "쯔쯔... 있는 집도 벵이 질믄 살림이 결딴나는 벱인데 남으 땅 부치서 근근히 사는 살림에 자식들이나 적다 말가. 셈찬 큰 자식이 있단 말가. 모두 잔밥에, 제 밥그릇 작은 거만알 긴데 여차한 일이라도 있이믄 늙도 젊 도 않은 나이에 니 외삼촌 일이 난감을 기다." "..." "부모 마음하고 하누님 마음은 고르다고들 하는데 어이구, 세상사를 가만히 보믄 그것도 빈말이라. 어질고 착 한 사람은 도처에서 고생을 하고 남으 입에 든 밥이라도 뺏아묵을 듯이 해구는 사람들만 떵떵 울리고 사는 거 를 보믄은." 말없이 사발을 비운 석이 일어섰다. "갈라나?" "야." 석이를 따라 부엌에서 나오던 봉춘네 "아이고! 눈이 온다!" 계집아이처럼 소리친다. 어느새 눈이 왔을까. 장독 뚜껑에 눈송이가 날아내려 제법 허옇다. "참말로 별일이제? 기화야! 기화양! 눈이 온다! 방문 좀 열고 내다봐라." 진주 땅에 눈이 내리는 일이란 그리 흔치 않다. "와 그라요? 어무니." "눈이 온다 카이! 방구석에 누워 있지만 말고 누구겡 좀 해라." 풀어진 머리를 걷어 비녀를 꽂으며 기화가 방에서 밖을 내다본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종잇장처럼 희다. 이마 의 생채기가 눈에 띈다. "눈이사 오나마나," "젊은 사램이 그라고 있으믄 되나. 눈도 오고 하니 몸단장하고 밖에 나가서 한바퀴 돌고 오라모." 기화는 눈보다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석이 뒷모습을 본다. "석아." "야." 돌아보지 않고 걸음만 멈춘 채 대답한다. "나는 니가 온 줄도 몰랐구나." 하다가 잠시 생각는 눈치고 석이는 다음 말을 기다린다. "너거 어무니보고 내일... 내일 좀 오라고 안 해줄래?" 겨우 상반신을 돌려 기화를 쳐다보며 대답한다. "그럭하겄소." "잊어부리지 마래이." 그것은 봉춘네가 덧붙인 말이다. "알았소." 빈 물통을 덜렁거리며 석이는 길을 돌아나섰다. 제법 큰 눈송이가 너울거리며 날아내린다. 아까보다 추위는 한 결 누그러진 기분이다. 빈속에 따뜻한 숭늉과 밥이 들어간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눈이 내리는 탓일까. 화장 기 없는 기화 얼굴이, 솔밋하면서도 부드러운 이마에 남아 있던 생채기 생각을 석이는 한다. 그 생채기가 옛 일을 생쥐처럼 물어내온다. 아주 먼 옛날 다섯 살 적이든가, 여섯 살 적이든가, 타작마당에 나동그라졌던 유록 빛 꽃신 한 켤레. 나비같고 꽃 같은 신발코는 주황색이다. 신발을 두른 가느다란 선도 주황빛이다. 검정 담방 치마 밑으로 흰 속곳자락이 황망하게 논둑길을 가고 있다. 흔들리면서 가고 있다. 그것은 물바가지를 든 영만 누님 선이다. 봉순이 이마빼기에서 피가 흐른다고 누군가가 외쳤다. 봉순이 죽었다고 외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이 직일 놈들! 동네 가운데 두겄나! 네 이놈들! 당을 지어가지고 좋은 뽄은 안 보고 개백정 겉은 그놈으 손, 하는 짓만 따라하고, 네 이놈들! 나무에 매달아가지고 오줌을 싸게 패야지!' 얼굴이 거무칙칙한 막딸네가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친다. '우리는 안 그랬소!' '봉순이가 상놈으 새끼라고 욕을 한께 거복이가 때렸소!' '봉순이보고 길상이 각시라 칸께요.' '아니요!' '하하핫 하하하...' 조무래기들 목소리, 조무래기들의 웃음 소리--밀물처럼 다가오고 썰물처럼 멀어져간다. 선이가 서희를 업고, 영만이 어매는 봉순이를 안고 간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겹겹이 솟아오른 최참판댁, 그 집으로 이르는 언덕 길을 올라간다. 서희는 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다. 봉순이는 검정 치마에 양회색 저고리다. 빛깔들이 생생하 다. 뚜렷하다. 하늘도 나무들도 뚜렷하다. 굿구경을 갔을 때 손가락을 빨면서 침을 삼키면서 바라본 울긋불긋 한 제수, 칼춤을 추던 무당의 장옷이랑 꽃갓 등, 그런 것만큼이나 빛깔이 생생하다. 그림같이 곱다. 눈발도 없 고 누더기 칙칙하게 때묻은 옷도 없고 물지게도 없다. 그러나 석이는 지난날의 그 오솔길에서 펄쩍 뛰며 소스 라쳐 놀란다. 한 사나이의 심장을 찢는 울부짖음을 들은 것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겹겹이 솟아 있는 언덕 길을 왜헌병이 내려온다. 총대가 내려오고 구둣발이 내려오고 하이칼라 머리가 내려온다. 사내가 울부짖는다. 개 끌리듯 읍내 가는 길을 끌려가며 울부짖는다. '이 천하에 극악무도한 놈아! 내 이 정한조가 살아서 돌아오는 날 바로 그날이 네놈의 제삿날 될 줄 알아라, 아!' 구둣발이 눈앞에 어지럽다. '네 죽어서 못 돌아오게 되믄은 넋이라도 돌아올 기다아! 돌아와서 네놈에 목을 물어 씹을 것이니, 이놈아! 조 준구 놈아!' 하이칼라 머리의 키 작은 사내가 오랏줄에 묶인 사내에게 달려든다. 주먹으로 입을 내지른다. 하이칼라 머리가 이마빼기에서 너풀거린다. 하얗고 빤들빤들한 이마다. 오랏줄에 묶인 사내 입에서 피가 쏟아진다. '하하하하... 하핫핫...' 미친 것같이 웃어젖히며 사내는 피를 내뱉는다. '윤보 이 개자식아! 네놈이 형이가! 네놈이 의병이가아! 내가, 내가아 있었다믄 머리카락을 헤쳐서라도 저놈! 조가 저놈의 숨통을 막았일 기다! 이 악독한 놈아!' 왜헌병이 총대로 옆구리를 찌른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쾍쾍거린다. 넘어졌던 사내가 일어선다. '조가 이놈아! 넋이라도오--' 어미는 밭둑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석이는 짚세기를 벗어 들고 맨발로 뛴다. '아부지이! 아, 아부지이!' 포승을 잡고 가던 왜놈이 돌아보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른다. 구둣발로 걷어찬다. '아부지이! 아부우--지이!' 이번에는 총대 든 놈이 돌아섰다. 총대 끝에는 칼이 꽂혀있다. 총대가 석이 가슴을 겨눈다. '울아부지 와 잡아가노오! 와 잡아가노오! 이놈들아! 나쁜 놈들아! 내 아부지 내놔아라아! 아부지이!' 물지게를 지고 가는 석이 입에선 신음 소리가 난다. 나루터 근처를 지나 장터 옆에 이르렀을 때 눈발은 뜸해져 있었다. 그새 온 눈 때문에 파장이 되지는 않았던 가보다. 정월 들어 처음 서는 장이라 정터가 쓸쓸하다. 희뜩희뜩한 눈발 사이로 포립을 삐뚜름하게 쓴, 눈썹이 새까맣고 수염이 허연 가위장수 노인의 을씨년스런 모습이 보인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다 어려운 처지임이 뻔하다. 곡식 됫박이나 팔아가려고 전을 폈을 것이요, 장보러 나온 사람들 역시 비축한 것이 없어 나왔을 터인 즉 쓸쓸하고 빈한한 장날이다. "임마! 석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다. "아아 관수형님." "형님이 멋꼬? 아제비다, 아제비." 웃으며 다가오는 사내, 바짓말기에 두 손을 찌르고 움츠린 양어깨 사이로 자라처럼 목을 묻은 꼴이다. 삼십이 될까말까. 핏발 선눈이 조그맣고 얼굴빛은 까무잡잡하다. "무신 생각을 하고 가니라고 사램이 불러도 모르노 말이다." "아무 생각도 안 했심다." "쪼깐이집에 가나?" "야." 석이와 나란히 걷는다. 물지게에 걸린 물통 때문에 거리는 있었으나. "나도 거기 간다. 밤샘을 했더마는, 아이고 속쓰리다." "..." "니한테도 내 국밥 한 그릇 사지." "점심은 묵었소." "봉순이 집에서?" "야." "젊은놈이 점심 두세 그릇쯤, 그라고 점심때는 벌써 지났다. 내 주무니 걱정은 말고, 간밤에 한 놈 깝데기 벗 긴인께." "노름했구마요." "했지러." "형님도," "와? 마땅찮다 그 말이가?" "그렇소." "바린 말을 한께로 기특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 아제비가 비리갱이 겉은 장돌뱅이 벳기묵지는 않는다. 꾼들하 고 몇 판 벌였제. 하하핫..." 흰 이빨을 드러내놓고 태평스럽게 웃는다. "말하잘 것 같으믄 이 아제비는 말이다, 암행어사 같은 거다, 그말 아니가. 비리갱이 겉은 장돌뱅이 털어묵는 장터 건달놈들을 한달에 한 분씩, 더도 말고 한 달에 한 분씩만 혼짝을 내주니께, 하하핫..." 움프린 두 어깨 사이에 자라처럼 목을 묻은 모습과는 달리 뱃심 좋은 큰소리다. "그라고 또 노름판에서 걷은 돈 가지고 주색잡기하는 잡놈도 아니고 말이다. 어림없지, 어림없어. 마 그거는 그렇다 하고 봉순이는 집에 있더냐?" "야." "머하더노?" "아픈갑십디다." "그럴기다. 심화병이 났일 기구마." 관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번져나온다. "니 길상이 알제?" "길상이라 카믄," "봉순이하고 함께 있었던 그 최참판네 길상이 말이다." "말이사 많이 들었지마는, 더러 보기도 했지마는 어릴 적이라서," "어리기는 머가 어릴 적고? 니 지금 열하홉, 아마 그렇기는 됐일거로?" "야." "그러믄 보자," 관수는 바짓말기에서 한 손을 뽑아 손가락을 꼽아본다. "열세 살, 그러니께 니가 열세 살 적에 그 난리가 났구마." "열세 살 적에 우리 아부지는 죽었지요." "맞다. 그러니께 육 년 세월이 지났고나. 열세 살이라? 열세살이믄 길상일 모릴 턱이 없지." "모린다는 기이 아니고 얘기해본 적도 없고 해서..." 그러나 관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난데없이 길상이 얘기를 꺼내었는지 궁금했지만 석이 도 되묻지는 않는다. 육 년 전, 그렇다. 가을걷이를 앞둔 그러한 날, 아래윗마을에서 낫, 도끼, 쇠스랑, 대창 등 각기 연장을 손에 든 장정들이 모였을 적에 깃털을 세운 투계처럼 관수는 그들 속에 끼여있었다. 횃불을 켜 든 그 무시무시했 던 밤 조준구의 행방을 결사적으로 찾은 것도 그였었으며 산에서는 용감한 젊은이 중의 한 삶이었다. 끝까지 싸우고 행동을 함께 했었다. 그러나 윤보의 죽음으로 와해된 대열이 우왕좌왕 갈 바를 모르고 흩어졌을 때 양반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김훈장을 싫어했던 관수는 김훈장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마다하고 교분이 두터웠 던 길상과 갈라서버렸던 것이다. 그 후 얼마 동안 관수는 화적떼를 따라다니다가 그것도 시시하여 산을 떠나 진주로 내려왔고 진주서는 또 얼 마 동안은 백정네 집에서 은신했었는데 백정네 딸을 얻은 뒤부터 그의 전력을 알고서 추적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진주 성내를 활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활의 뿌리를 박은 듯싶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은 점도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면 주먹깨나 쓴다는 것, 노름 솜씨가 대단하다는 것, 그리고 가끔은 막일 품팔이도 하고 소매통 실은 소달구지도 글고 다닌다는 대개 그런 정도였었는데 한 가지 소문이 안 일화는 소매통 사건이다. 한낮, 여름 햇빛이 쏟아지 는 날이있었다. 길켠에 소달구지를 세워놓고 인가에서 인분을 담은 소매통을 들고 나오는데 마침 조선인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고약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영치기," 관수는 우선 소달구지 옆에 소매통을 내려놓았다 소매통 아구리를 지푸라기도 막아서 달구지 위에 올려놓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길바닥에 이게 뭐얏!" 하고 순사가 눈알을 굴렸다. "보믄 모르시오?" 관수는 본체만체 지푸라기를 둘둘 말아서 소매통 아구리를 막으려 했다. "뭐? 이 건방진 놈이," "순사 나으리라고 설마 밥그릇에 모래 담아 잡숫겄소?" "아아니 이놈이? 뉘 앞에서 감히 주둥아릴 놀리는 게야!" "순사나으리 아니라 순사나으리 할배라도 머 못할 말 했소?" 관수는 지푸라기를 뭉치다가 그 조금난 눈으로 순사를 쳐다보았다. "뭣이 어쩌고 어째?" 화가 난 순사는 구둣발로 소매통을 걷어찼다. 그러자 소매통이 구르면서 아구리로부터 인분이 길바닥에 콸콸 쏟아진 것이다. 졸지간이라 순사가 놀라기는 좀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관수는 태연자약하게 무쳐 들었던 지 푸라기는 달구지 위에 올려놓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더니 두 손을 모아 인분을 걷어서 소매통 아구리 속에 쏟아붓는 게 아닌가. 기가 질려버린 순사 오도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일어선 관수는 인분이 묵은 손바닥으로 냅다 순사 뺨을 갈긴 것이다. 순식간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하마 한 소동이 벌러질 판에 급보를 받은 순사들이 달려왔다. 그리하여 관수는 며칠 구류를 살기는 했으나 그 정도로 마무리된 것은 순사주임이라는 자가 식민지에 나온 따라지 일본인치고 는 다소 양식이 있었던지 혹은 배짱을 숭상하는 일본인 기질 탓이었던지 관수에게 호의를 베푼 탓이다. "소레 구라이노 하라가마에닷달 에라이 햐구쇼쟈. 다가 히도갓다네. 난또 잇데모다이니혼데이고꾸노 게이샤쯔 쟈. 미세시매노 다메니모 유루수 와께냐이깡(그 정도 배짱이면 훌륭한 농부다. 그러나 심했어. 뭐라 해도 대일 본제국의 경찰이야. 본보기로서도 용서할 순 없어)." 칼날같이 양켠으로 뻗쳐오른 수염 밑에 두툼한 입술을 우물거리며 어눌한 음성으로 말했었다. 그러나 이 밖의, 백정의 딸을 얻어서 산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형님 먼저 가소. 나는 물 질러서 가겄심다." "그래." 관수는 저만큼 보이는 쪼깐이집을 향해 입김을 흩날리며 가고 석이는 도중에서 길을 꺾어든다. 눈은 싱겁게 멎어버리고 하늘은 개기 시작했다. 길가 삽짝 앞에 강아지 한 마리가 오들오들 떨면서 앉아 있었다. 석이 그 앞을 지나친 뒤 강아지는 우우 하고 짖어보다가 그것도 싱겁게 그만둔다. 우물가에는 아낙이 보리쌀을 씻고 있었다. 소매끝을 걷어올린 두 팔뚝이 빨갛다. 석이는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서 물을 퍼올린다. 누구든 직선하 라는 듯 아무렇게나 놔둔 돼지 밥통에 아낙은 보리 뜨물을 부어준다. 물지게를 진 석이는 좁은 골목을 옆걸음 질쳐서 빠져나온다. 쪼깐이집 일각대문을 넘어 가겟방 옆, 장작이 쌓인 골목으로 해서 넓어진 안마당에는 장독 대가 있었고 부엌에 잇달린 방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물독에 물을 부어주고 물지게를 벗어 장독가에 놔둔 석 이는 가겟방 쪽으로 간다. "형님." "음. 물 다 질었나?" "야." "들어오너라." 짚세기를 벗고 강정같이 얼어버린 바짓가랑이 때문에 몸짓이 어색한 석이 방으로 들어간다. "앉아라." 기다랗게 만든 술판 앞에 앉는다. 점심때도 저녁때도 아니어서 가겟방은 손님이 뜸했다. 쪼깐이집은 서울식 비 빔밥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겨울이 되면서부터 국밥을 찾는 손님이 있어 국밥도 겸해 하는데 방안에 걸어놓은 솥에서 서리는 김과 온기로 방안 공기가 후끈하다. 그새 관수는 술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지마씨 여기 국밥 두 그릇 내놓으소." "저, 그, 그러지요." "아니 대답이 와 그리 찐찐하요?" 쪼깐이라는 별명의 서울댁은 묵살하듯 그 말 대꾸는 하지 않는다. 그것으로써 마땅찮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상배기도 아닌데 냉랭하구마는," 관수는 왜 이 여자가 찐찐해하는가를 알고 있다. 물지게꾼, 그러니까 집에서 부리는 하인 같은 존재에 대한 시 중이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 같고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의 석이가 가겟방에 뻗치고 앉은 것을 기분 나빠해한 다는 것을 관수는 어렵잖게 느낄 수 있다. '빌어묵을 계집년이 지는 머 별수 있는가?' 서울댁은 느적느적 사발 두 개에 밥을 나누어 담고 솥뚜껑을 열어젖힌다. 김이 왈칵 솟구쳐오르고 솥뚜껑의 쇳소리가 꽤나 오래 파동하다 사라진다. 놋쇠 국자를 철벙거리며 국을 푸는 여자, 얼굴이 김에 싸여 아리송하 다. 쪼깐이, 조그마한 여자다. 두만이보다 몇 살 위라던가? 얼굴이 조그맣고 코도 입도 밥풀같이 조그맣다. 큰 것은 쌍꺼풀이 굵게 진 눈뿐이다. 눈알이 불거져나온 듯 얼핏 본 느낌이 소눈깔, 윤곽도 다듬어졌고 생김 하나 하나 뜯어보면은 나무랄 곳이 없다. 몸매는 가suf하다. 팔다리도 가녈하다. 다만 팔다리가 짧은 게 어쩐지, 어 디가 어떻달 수 없는데 밤톨 같지가 않고 마늘각시랄까, 노르께하나 핏기 없이 흰 얼굴에 매쑥한 느낌을 안겨 주는 마늘각시다. 마음속으론 욕지거리를 하면서 관수는 묻는다. "영만이 독골에 있소?" 여자는 국자를 솥전에 걸쳐놓고 솥뚜껑을 닫으며 "거기 안 계시고 어딜 가시겠어요?" 오히려 반문하는 투다. "두만형님은 요새 일 안 하지요?" "겨울에 무슨 일이 있겠어요?" 말투는 여전하다. "그이도 초정월이라고 독골에 가 계시오." 그러니 부재중이라는 것을 밝힌다. '제에기! 누가 지 서방보고 술 내놔라 할까봐서? 더럽게 고만도 떨어쌌는다.' 자주 오는 것은 아니나 가끔 올 때면 남정네, 시동생과는 잘 아는 사이라 하여 말만이라도 친절했던 여자다. 조금 전만 해도 수굿하게 대하던 여자다. 순전히 석이 때문이다. "지난해 독골에선 추수 많이 했소?" 관수는 또 물었다. "많이 하기는요? 자리잡은 지가 얼마나 된다고요?" 국밥에 양념장을 뿌리고 여자는 사발을 관수 앞에 놓는다. 석이 앞에 사발을 놓을 때는 손길이 거칠었다. 술판 위에 국물이 조금 엎질러졌다. 관수는 곁눈으로 여자의 손길을 본다. "석아, 어서 묵어라." 하고 자신도 밥을 설설 말아 퍼먹으며 "두만형이 독골에 파묻히 있인께 아지마씨 심사가 덜 좋겄소." 슬쩍 약을 올린다. "덜 좋은 것도 없지요. 부모님이 계시는데 일년 내내 발걸음 끊어야 되겠어요?" 말을 받아서 메어친다. "하항, 그도 그렇소, 듣고 보니. 임마 석아! 달암질쳐서 묵어라." 관수가 넘겨다본다. 사발 속은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쪼깐이집의 국밥, 무를 엇비슷이 썰어넣고 끊인 생대구 국이다. 석이 입에 쫄깃쫄깃한 대구살이 달다. 젖빛깔이 방울방울진 고기는 입속에 들어가기가 바쁘게 녹는다. 향긋한 생파 내음, 사발의 바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발을 기울이며 남은 것을 아쉽게 퍼올리는 석이 모습 을 여자는 멸시의 눈으로 힐끗 쳐다본다. 눈살을 찌푸린다. "아지마시." "예." "물지게꾼이 내놓는 국밥 값은 썩은 돈이요?" "무슨 말을 그렇게," 느닷없이 하는 말에 여자는 당황한다. "똑똑히 들으시오, 각시. 그렇지 두만이 각시믄, 작은 각시든 큰각시든 각시는 각시니께로." "아니." 얼굴이 벌개진다. "보소 서울각시, 각시 씨애비 씨에미 그라고 서방도 다 그렇기 누데기옷을 입고 살아왔소. 그거는 그렇다 치고 또 니는 머꼬? 술판이나 닦는 계집 푼수에 누굴 보고 괄시하고, 차벨할 개뿔이나 있다 그 말가?" 뒤에 가서는 주저없이 반말을 뇌까린다. 여자의 말문이 막히나. 약은 여자다. 시비를 걸려고 별러 하는 수작임 을 알아차린 것이다. "면천한 처지로서 오늘 이만큼이나 살게 된 것을 이웃사촌이더라고 맴이 안 좋을 까닭이야 없제. 멩색이 서방 이나 시동생이나 모두 잘 아는 사이고 보믄 또 고향 있을 적에는 부모들도 형제 겉이 지낸 사정이고 보믄 작 은 각시든 큰 각시든 간에 남과 같이 돈을 받더라도 생각은 좀 달라얄 긴데, 누구 동냥은 줄 알았든가?" "제가 어쨋기에 이리 화를 내실까?" 여자는 누그러진다. "그거야 가심에 손 얹어보믄 빤히 알 일 아니던가? 예사 별수도 없는 것들이 사람을 괄시하는 법이라. 앵이꼽 아서," 그때까지 아무말이 없던 석이 "머를 그러요. 그만 나갑시다." "임마! 니는 가만히 있어라. 아무튼지간에 보소, 서울각시. 김두만을 따라 살라카믄 그 고만 떠는 버르장머리부 터 고치얄 기요. 김씨네 부자가 자리꼽재기로 소문나 있기는 하지마는 경위에 틀린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닌께. 더군다나 두만이는 색에 반해부리는 얼간이도 아니고," 서울댁은 움찔한다. "서울서는 어느 대가댁 기출인지 각시 근본이야 알 턱 없고 영만어매나 두만이댁네는 다 심성 곱고 후덕한 사 램인데 앞으로 조심하는 기이 좋을 기구마. 좋지도 않은 소리 귀에 들어가봐야 큰며느리만 싸고도는 시부모 심사에 부채질일 기고 두만이도 역성들 사람은 아닌께, 내가 이래봬도 입이 싸고, 등쳐서 간 내묵는 솜씨도 노 름판에서 자알 익힌 터이라," 슬쩍슬쩍 급소를 찔러놓고 관수는 일어선다. "석아 가자." 셈을 하고 밖에 나온 관수는 바람에 날려버리듯 침을 뱉는다. 석이는 빈 물지게를 지고 우두커니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약삭빠른 계집년, 펄펄 뛰믄서 달라들기라도 했으믄 덜 밉겄다. 술판을 엎을까봐 겁이 났겄지. 망나니들 데리 고 와서 분탕질할까봐 겁이 났을까? 흐흥 그보다 죽자사자 따라 살라 카이 남정네 눈도 두럽고 시부모 눈도 두럽었겄지. 눈이 시퍼런 본댁이 있어, 지가 무신 자식을 낳았나, 가심이 설렁했을 기라. 제에기, 내사 그놈의 경사 쓰는 목소리만 들어도 정이 안 가는데 하기사 그 집구석 부자가 모두 셈이 빠르니께, 못난 것들!' 관수는 또 퉤! 하고 침을 뱉는다. "석아." "야." "나 그렇잖애도 한분 만낼라 캤더니라." "..." "마침 오늘 만냈이니께, 내 할 얘기도 있고 하니 저녁에 좀 오니라." "그럭허소." "자고 갈 셈치고." "야." 관수는 추수몰 쪽으로 가고 석이는 봉곡 쪽으로 간다. 봉곡에서도 한참 더 걸어서 띄엄띄엄 네댓 채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나무 한 뿌리 눈에 띄지 않는 자갈밭의 언덕이다. 울타리 없는 마당에 들어서며 석이 되돌아본 다. 남강 건너편의 대숲이 아득히 먼 곳에서 어슴푸레 떠 보인다. 그 사이, 넓고 평평한 회갈색 들판이 한없이 뻗어 있다. 넓은 옥토의 임자는 대체 누구일까? 석이는 습관처럼 생각해보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들은 걷혀지 고 동천에 신열을 잃은 희미한 해가 서편 산마루에 걸려 있다. 멀지 않아서 저녁이 찾아올 것이다. 어미는 눈을 들어 아들을 쳐다보는데 눈알이 빨갛다. "무신 일이 있었소?" 울어도 대성통곡을 한 모양이다. "왜 그러요?" "내가 온께 아이들이 울고 있더라. 순연이는 불때기가 씨퍼렇게 부어올라서," "와 그랬던고요?" "와 그라기는? 산에 나무하로 갔다가 산지기한테 잽힜더란다." "...." "나무하고 갈구리하고 뺏았이믄 그만이지 그 무상한 사램이 어디 때릴 구석이 있다고 어린것을 때맀겄노." 석이는 선 채 어미를 바라본다. 열두 살과 여덟 살짜리 두 누이의 손등이 터서 피가 흐르던 것을 아침에도 보 고 집을 나섰다. 들판이 넓고 멀리 야산이 더러 있으나 진주는 본시부터 나무가 귀한 곳이다. 외지서 남강을 따라 숱하게 들어오는 나룻배는 성내의 땔감을 충분하게 대주지만 돈 없는 가난뱅이들 겨울 한철은 몇 리 길 을 걸어야 솔잎이나마 긁어 올 수 있다. 얼음을 깨어 삯빨래를 해야 했고 여름 봄엔 끌밭매기, 치마 밑에 찬밥 한덩이 얻어오는 드난살이에 눈이 진무른 어미와 일년 열두 달 물지게를 지고 나가는 오라비, 언제부터였던가 어린 두 자매는 산지기 눈을 피해가며 근처 산으로 가서 솔잎을 긁어오게 되었다. 틈을 보아서 석이는 한두 짐의 나무를 해다 부엌에 내려주지만 농사도 아니 짓는 처지에 수숫대 콩대 나부랑이도 얻어볼 수 없고 땔감 은 항상 감질나게 딸린다. 자연 어린것들도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산지기 몰래 산을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시래기죽을 끓여 양푼에 퍼다놓고 식구들이 좁은 방안에 둘러앉았을 때 석이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든 순연의 얼굴 쪽으로 쏠린다. 어글어글한 눈이 확 풀어지는가 싶더니 빛이 번쩍 난다. 언제나 양이 차지 않는 아이들 배에서는 꾸럭꾸럭 소리가 난다. 먹는다는 기쁨에서 침이 넘어간다. 설움이 무엇이며 추위가 무엇인가 그런 것 쯤이야, 아이들은 먹을 것을 앞에 둔 이 순간이 무한하게 행복할 뿐이다. 어미는 석이 몫의 시래기죽을 먼저 떠서 밀어준다. "나는 안 묵을라요." "와?" "관수형님이 밥 사주어서 묵었소." 몫이 많아졌다 싶었던지 두 어린 것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래도 묵어라. 사주는 밥이 얼매나 될 기라고 장골들 배는 헛수바다라 카는데," "봉순이 집에서도 밥 한술 얻어묵었인께요. 자아들이나 실컨 묵어보라 카소." 아이들은 어미가 퍼주는 사발을 감싸안 듯이 하고 후루룩 후루룩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죽을 먹는다. 어미도 한술 뜨다 말고 "관수는 우찌 만내서 밥을 억어묵었는고?" 불안해하는 눈빛이다. "길가에서 만났소.: "요새도 그 사람 노름장에 댕기는가? 클 때는 아이가 착실하더마는," 석이는 대꾸하지 않는다. 방안에서는 후루룩거리는 소리만 들렸으며 밖은 어두워온다. 석이 호롱불을 켠다. 불 빛 아래 아이들은 아귀같이 처먹는다. 그 꼴을 잠시 쳐다본 석이 눈이 호롱불같이 깜박인다. 어미 아들이 눈 오고 비오는 날에도 쉬지 않고 품을 파는데 네 식구 밥먹기가 이렇게 고단할 리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어 려운 사정이 따로 있었다. 빚이 있었던 것이다. 일금 심십 원의 빚, 관리의 한 달 월급에 불과하지만 십오 원 짜리 조선인 서기도 수두룩하다면 적은 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금 삼십 원의 빚, 이들에게는 짚고 일어설 수 없는 무서운 짐이며 잡힐 가산도 없는 처지, 비싼 변리 아니고는 얻어쓸 수 없었던 빚이었다. 빚진 경위는 이들이 믿고 온 친정의 사정서부터 시작된다. 친정 오라비는 누이동생(석이네)을 출가시킨 이듬해 부친이 사망 하여 삼년상을 벗었고 상막 치우기가 바쁘게 모친이 죽었다. 혼사 한 번에 초상이 두 번, 작인이지만 부지런한 탓으로 어렵잖게 지내던 살림이 기운 것이다. 이 무렵 조준구 서슬에 견디다 못한 한조가 처가를 연줄 삼아 땅마지기나 얻어부칠 요량으로 찾아왔는데 부지런한 처남을 믿는다면서 요행히 땅을 주겠다는 사람이었다. 그 리하여 솔가할 작정을 하고 평사리에 돌아가 변을 당했다. 막내 복연을 업고 두 아이를 거느린 석이네가 입은 옷 그대로 평사리 마을을 쫓겨서 친정으로 왔을 때 그 집에는 또 하나의 불행이 도사리고 있었다. 올케가 앓 고 있었다. 병은 한 달 두 달에 끝나지 않았다. 자리에 누운 채 운신을 못했는데 허리뼈 속에 병이 생겼다는 것이다. 결국 약값으로 배먹이 소가 없어지고 뼈대가 쓸 만했던 사칸 집이 날아가고 오막살이 초가 한칸으로 자기 식구들은 옮긴 뒤 친정 오라비는 어린 석이와 함께 지금 사는 이 집을 지어주었다. 진인 마른일 조카와 외삼촌이 했지만 일이 끝났을 적에는 빚돈 십 원을 안았다. 그러나 내집이랍시고 살림을 시작한 뒤 석이네는 밤낮 병든 사람처럼 울었다. 총맞아 죽은 남편의 시체를 평사리까지 옮기지도 못하고 읍내 어느 야산에 버리 듯 묻고 온 그 일 때문에 우는 것이었다. 시체를 거기 내버려두고 어찌 내 집이라고 지붕 밑에서 잠을 자겠느 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십 원을 다시 빚내어 시체를 진주까지 옮겨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고 본시 묻혔던 자리 근처에다 터를 사서 이장을 한 것이다. "그때 그만... 봉순이가 순연이나 복연이 둘 중 하나를 달라 했일 적에 보냈더라믄." 허기를 반쯤 달랬을 때 어미는 한숨 섞인 말을 했다. "식구 하나 줄이믄 니 허리도 폐이고, 하나라도 배는 안 곯고 살긴데." "시끄럽소." 석이 화를 벌컥 낸다. 그러나 어미는 또 다시 밀어본다. "거기 갔이믄 밥이사 배부르게 묵을 기고 떨어진 옷은 안 입을 기고, 이 치분 날에 나무하러 산에 갔겄나? 저 렇기 볼따구가 멍들지도 않았을 긴데, 순임금도 사세 불리하니께 독장사를 했다 안 카더나? 우리라고 무신," "아무리 배불리 묵고 떨어진 옷 안 입어도 남자 노리개 되는 것보다 낫소." "그거사 머 봉순이가 키운다고 꼭 그리 된다는 벱이 있나?" "갈 데 있겄소? 그 속에서 살믄 자연고로 그리 되는 기지요." "저 얼굴의 멍 좀 보라모. 내사 간이 아파서 죽겄다." 어미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는다. 정신없이 죽을 퍼먹던 아이들도 배가 불러오니까 숟가락 놀리는 손이 무 디어지며 어미와 오라비 말에 귀를 세운다. 큰애 순연이가 "오빠 나 갈란다, 거기 보내도고." 몸을 흔들며 조른다. "니는 나무 해야 안 하나. 내가 갈 기다. 그제? 어매, 생이는 나보다 큰께로 나무 많이 할 기고, 어매 안 그렇 나?" 막내가 어미한테 동의를 청한다. "이눔 가시나야. 니가 거기 가믄 마리 닦고 군불 때고 밥하고 우찌 그거를 할 기고? 실데없이 까불지 마라, 문 딩이가시나." "거짓말이다. 누가 모릴까봐서? 밥하고 군불 때고 안 한다 카더라. 숭님이나 떠다주고 음. 또오 빗자리 가지고 방이나 씰어주고 그라믄 된다 카더라." "누가 그라더노! 누가 그라더노!" 순연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복연이 옆구리를 쥐어박는다. "어매가 똥돌네보고 하는 말 다 들었다! 다 들었다 말이다." 작은것도 지지 않고 언니의 얼굴을 할퀸다. 한 소동이 벌어질 판인데 "그만 못하겄나?" 오라비 말 한마디에 서로 덤벼들던 동작을 멈춘다. 슬그머니 일어선 석이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처마 끝에 붙여놓은 지게를 지고 낫을 들더니 휭하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 시각쯤 지났을까? 어미는 부엌에 호롱불을 켜놓고 두붓물에 빨래를 주무르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생솔가지 한 짐을 들어다가 부 엌바닥에 놓는다. "니, 니 우짤라꼬 생솔가지를," "걱정 마소." "낮에 순연이 그리키 야단을 맞았는데 알면 큰일날 기다. 그놈의 산지기놈 심술이 좀 하든가?" "우리 순연이 볼따구 피멍든 값이오. 생솔갱이 아무리 뿌질러도 아파서 울지는 않은께요." 석이 음성은 침울하고 무섭게 울렸다. "어매." "와." "관수형님한테 갔다오겄소. 밤에는 아마 못 올 기요." "거기는 와 가노?" 일손을 놓고 아들을 쳐다본다. "좀 다니가라 하더마요." "나는 니가 그 사람 찾아댕기는 기이 좋잖다. 사램이 전에는 안 그렇더마는 노름방에나 댕기고 뽄볼 기이 머 있다고." "..." "사램이란 좋은 거는 배우기 어러바도 나쁜 거는 금세 배우니께. 백정의 딸하고 산다는 것도 내 마음에 끼누 마." "백정은 사람이 아닌가요? 어매는 그런 소리 마소. 설움받기로는 그 사람들이나 우리나 다 같소." "그거사 그렇다 카더라도 노름방 드나들믄 볼장은 다 본 기다. 인이 한분 백이믄은 세상이 무너져도 그 버릇 은 못 고치니께." "갔다오겄소." 기분이 좋지 않은 어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가버린 줄 알았던 석이 다시 나타났다. "잊어부릴 뿐했소. 낮에 봉순이가 내일 어매 좀 오랍디다." "무신 일이고?" "모르겄소." "알았다." 어미는 힐끗 눈을 뜬다. 가물가물한 불빛 아래 여위고 주름진 얼굴, 매달리듯한 눈빛. "석아." "야." "에미는 니를 믿는다. 제발 허방에는 발 딜이놓지 마라. 없이믄 없는 대로 살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겄 나?" "어매는 관수형님을 잘 모르니께 그러요. 어매가 생각는 사람 겉은믄 상종하지도 않을 기요." "그래도 니는 아직 세상 일을 모른다." "허 참." 아들의 발소리는 멀어지고 어미는 힘없이 빨래를 주무른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 먼 곳에서 개짖는 소리, 아이 들이 잠이 들었는가. 그러고는 온 세 상이 쥐죽은 듯이 고요해진다. 7장 홀어미와 기생 첫새벽에 일어난 석이네는 보리방아를 찧는다. 찧다가 허리를 펴고 찧다가는 허리를 펴고 하면서 아침에는 죽 대신 깡보리밥이나마 밥을 짓는다. '날이 샐라 카믄 엄치 있어야겄지?' 아들 생각을 하는 것이다. 왠지 가슴이 뻐근하고 겁이 난다. 꿈자리가 뒤숭숭해선지도 모른다. 석이가 어디로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머릿속에 맴을 돌면서 떠나지 않는다. "아이구 허리야." 방아질을 멈추고 허리를 두드리는데 새벽 하늘에 깜박거리는 별들이 눈에 들어온다. 별리 깜박거리고 석이네 마음도 깜박거린다. 석이가 떠날지도 모근다, 떠날지도 모른다, 떠날지도 모른다--관수를 찾아갔으니 행여 노 름판에나 따라다니다가 몹쓸 날건달이 되지 않을까? 그것이 염려된다면 모를까,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 점을 근심했었다. 역시 꿈 탓이다. '어매, 나 겨드랑에 날개가 돋쳤소.' '어디, 어디?' 석이네는 눈을 비비고 살펴봤으나 석이 겨드랑에는 날개가 없었다. '날개는 무신 날개고?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니요. 날개가 돋쳤소. 탄탄한 날개가요. 그러니께 나는 훨훨 날아댕길라요. 구만리 장천을 훨훨 날아댕길라 요. 훨훨, 훨훨--훨--훨--' 나중에는 아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훨훨 하는 목소리만 되풀이 되풀이 들려왔다.그 목소리에 잠이 깬 것이 다. 다 찧은 보리쌀을 사기에 담아 써억써억 씻는데 훨훨 날아다닌거라던 꿈속의 석이 음성이 들려온다. 귀를 털 어버리고 싶게 들려온다. '무신 그런, 훨훨 가기는 어디로 가노?' 보리쌀을 삶아놓고 어젯밤 두붓물에 주물러놓은 빨래를 솥에 안친다. 둥그렇게 쌓아올린 빨래 한복판에 물을 붓고 양잿물을 넣고--불을 지핀다. '개꿈이지 머. 꿈을 믿다가는 환장한다.' 날이 새기 시작한다. 복닥복닥 빨래 끓는 소리가 난다. '이눔자석이 와 아즉 안 오노. 에미 걱정하는 것을 빤히 알 기믄서.' 석이네는 김이 서리는 빨래를 건져 통에 담는다. 방망이를 빨래 사이에 찌르고 바가지를 엎은 뒤 그것을 이고 자갈길을 달리듯 개천으로 간다. 얼음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 심장을 가로지르고 가는 찬바람, 얼음을 깬다. 방망이로 툭툭 얼음을 깬다. 바스라질 가랑잎같은 몸이 마치 신들린 무당처럼 일을 한다. 마음이, 독기가 얼음 을 깬다. '일이 보배지. 하모 일이 보배고 말고.' '명천에 하나님네. 우리 석이 수명장수 비나이다. 비명횡사 아비몫까지 살게 하소서. 재앙은 물 아래로 가고,' 떠난다는 것은 살아서만 떠나는가, 죽음으로도 떠난다. 석이네 마음 밑바닥에는 꿈이 그런 암시로도 깔려 있는 것이다. 얼음을 깬다. 허공에서 춤을 추는 잡신들에게 방망이질을 하듯 얼음을 깬다. 봄 여름 가을엔 일거리가 많다. 들판이 잠들고 사람들은 아랫목에 웅크리는 겨울 한철에는 편안한 사람들이 내놓는 고된 빨랫거리말고는 돈을 벌 일이 별로 없다. 겨울은 석이네한테 빨래품의 계절인 것이다. 김이 무럭 무럭 나는 삶은 빨래와 손끝이 저리는 개울물이 함께 어울려지면서 빨래는 하얗게 때를 벗는다. 돌아오는 길 은 더디다. 발이 얼어서 무겁다. 해가 떠오르고, 울타리 없는 두 칸 오두막 흙벽에도 햇살이 퍼진다. 아이들이 흙벽에 기대어 어미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비 아즉 안 왓나?" "안 왔소." "색히 안 오고 머하는고?" "아침밥 묵고 올 긴갑다." 아이들은 자나깨나 밥 소리다. "와 방에 안 있고 나왔노. 오늘은 빨래 삶고 해서 방이 따실 긴데." "어매 오는가 볼라꼬." 복연이 누비저고리 앞섶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방에 들어가거라. 따신 방 식후지 말고, 내 밥해서 들어갈 기니." 아이들을 방에 몰아넣고 빨랫줄에 빨래를 넌 뒤 석이네는 밥을 짓는다. 삶은 보리에다 고구마 세 개를 썰어놓 고 밥을 안친다. "어매." 석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아니구, 니, 오나." 얼굴이 어둡다. "와 이리 늦었노. 아니 그, 그, 저고리는 웬 것꼬?" 저고리가 달라졌다 누덕누덕 기운 그 누더기가 아니다. 솜이 폭신해 보이는, 올이 굵은 무명저고리다. 품이 덤 쑥하여 석이는 의젓한 총각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관수형님이 까매기 보믄 아제비야 하겄다 캄시로 입던 것을 벗어주데요." "주니께 고맙기사 하다마는 관수가 니한테 와 그라제?" 떨떠름한 어조다. "달리 생각할 것 없소. 그 형님은 여불이 있인께 준 기지요." 화가 난 목소리다. "그거사 머... 방이 따실기다. 들어가거라. 밥이 끓으니께, 묵고 나가야제." "밥은 묵고 왔소. 이대로 나갈라요." 석이는 뭔가 종이에 싼 것을 부뚜막에 놓는다. "그거는 뭣꼬?" "소개기요. 그 집에서 주더마요." "소개기!" 이번에는 왜 쇠고를 주느냐고 따지지 않고 말을 참는다. 물지게를 챙겨드는 석이 얼굴은 여전히 어둡고 근심 하는 빛이 있었다. 그러나 탈기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야무진 매듭 같은 것,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굳게 작정한 듯한 기색이 엿보인다. 어미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 저만큼 나가다가 석이는 큰소리로 인사한다. "갔다오겄소!" 아침을 먹고 순연이에게 뒷설거지를 시킨 석이네는 아랫목에 굴려놓은 버들고리를 연다. 고리 밑바닥에서 고 동색 주란사 치마와 흰 명주 저고리를 꺼낸다. "옴마, 내 설옷 한분 보자!" 누워서 발길질을 하던 복연이 벌떡 일어났다. 고리짝에서 인조견 자주 치마 연두 저고리를 꺼내본다. 바닥에는 순연의 설빔과 석이 바지저고리 한 벌도 있었다. 재작년 가을이던가, 봉순이 머리를 얹을 무렵, 식구들에게 고 루 한 벌씩 해준 옷이다. 아이들 옷은 댕강하니 짧아지고 품도 좁아졌지만 설날과 제삿날에 입어보고는 일년 내내 옷은 고리 밑바닥에서 잠을 잔다. "옴마, 봉순아지매 집에 가나?" "운냐. 그 옷 못 넣어놓겄나?" "넣으께." 복연이는 기분이 좋다. 봉순아지매 집에 갔다오는 날엔 먹을 것이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은 석이네는 '우짜꼬? 개기를 가지가까? 맘 겉애서는 우리 석이 솟정 풀어주었으믄 똑 좋겄는데, 애라? 없었던 셈치고 가 지고 가자. 밤낮 얻어만 묵고.' 수건에다 고기뭉치를 싸서 든다. 복연이뿐만 아니다. 석이네도 봉순이 오라고 기별을 보내오면 은근히 좋다. 염치를 차려서 오라 하기 전에는 잘 가지 않으나 그 집에 가서 해로운 일은 없다. 돌아올적엔 언제나 빈손이 아니었으니까. "빨래 널어놓은 거 잘 봐라. 바람에 날아갈라." 순연에게 일러놓고 집을 나선다. 옥봉 기화네 집에 갔을 때 "아이구 일찍 오네?" 봉춘네가 아랫방에서 내다보며 반색을 한다.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추분데 들어오소." "야." 석이네는 손에 든 것을 치켜 보인다. "이거," "그기이 머요." "소개긴데," 석이네 얼굴이 순간 자랑스러워진다. "아아니 석이어매 정신 나갔소?" "저어, 저어, 어, 어디서," 늙은이처럼 어린애처럼 피시시 웃는다. "아 말도 안 되는 소리. 나중에 가지가소. 아이들이나 안 끓이주고. 개기가 기러분 집이오?" 마루 끝에 고기뭉치를 놔두고 석이네는 방으로 들어간다. 방 아랫목에는 봉춘네 또래, 오십이 다돼 뵈는 여자 가 자리이불에 두 발을 밀어넣고 앉아 있었다. 어떤 여편넨고?... 하는 눈빛으로 힐끗 쳐다본다. 검정 법단치마 에 자주 고리를 입고 있다. 그러나 그 비단옷은 몇 번을 빨고 다듬었는지 몹시 낡아 보엿다. 푸르스름한 입술 하며 맵시 있게 올린 머리조차 딱하게 보인다. 국향이라는 퇴기다. "추분데 이리 내리와 앉으소." 봉춘네는 일거리를 한켠으로 밀치며 자리를 내주었으나 "괜찮소." 석이네는 웃목에 앉는다. 봉춘네는 옷섶 앞에 꽂은 바늘을 뽑아 저고리 동정을 달면서 "좀 있으믄 기화가 올 기요. 아침 일찍 나갔인께," "어디 갔는데?" 국향이 물었다. "와 그 소화라고 성내에 사는," "소화? 거긴 아침 일찍부터 머하로 갔는고?" "답답해서 갔겄지. 어떻게 좀 몸부림도 쳐보고 싶은 심정도 있었을 기고." "몸부림이라니?" "요새 영감하고 사이가 안 좋거든. 요새가 아니라 처음부터 기화쪽에서는 억지 춘향이었지마는," "기생 팔자란 다 그런 거지 머." 굴향은 손가스러미를 물어뜯는다. "그 차중에 하동서 손님이 왔거든. 참 잘생긴 선비더구나." "그랬는데?" 국향은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냐, 누가 그 사정을 몰라서? 비스듬한 눈길로 붕춘네를 쳐다본다. " 그 손님이 왔다가고부터 맴이 들떠서 아아가 영 정신을 못 차리누마. 불쌍한 생각도 들고 미븐 생각도 들 고," "미븐 생각은 와 드는고?" "죽은 봉춘이 생각이 나서..." "..." "얘기를 듣고 보니 옛적에 함께 크믄서 맘에 두었더라는 총각 소식을 들은 모양이라." 석이네 가슴이 철썩 내려앉는다. 옛적에 함께 크면서 마음을 두었던 남자라면 길상이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의병하다가 만주로 달아났다 하던 길상이 소식을 누가 전했을까? 궁금증이 났으나 무서웠던 그때 기 억 때문에 석이네는 말조심을 하여 물어보지 않는다. "흥! 마음에 두기 아니라 품에 안아도 못 믿을 거는 사내지. 소식을 들었이믄 들었지 어쩌겠다는 건고?" "어찌겄다는 기이 아니라 참봉하고 살기가 싫어진 게지. 그 마음이사 나도 알 만하다. 쪽박에 밥 담아서 묵어 도 뜻이 맞이믄 산다는 말이 안 있더나? 노류장 계집이라도 정이 없으면 종사하기 어렵네라" "그러나 그만한 봉 물기도 안 어렵겄나?" "소문남 높이 났지. 실속을 보믄 그렇지도 않다." "아니 이 집만 해도," "집만 보믄 누구든지 봉 물었다 하겄지. 또 전참봉이 알부자라는 거는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일이고, 하지마는 그렇기 해서 재물 모운 사람치고 행토 없는 사램이 어디 있더나? 이름이 좋아 불로초고 빛좋은 개살구, 대권 아니라 그보다 더한 집이믄 머하는고? 문서가 기화 앞으로 돼 있어야 말이제." "아아니, 그라믄 그렇기 안 돼 있다 말이가?" "글 안 하믄 빛좋은 개살구라는 말을 와 하꼬?" "애시당초 일을 와 그리 조졌는고?" "기화가 그런 거를 따질 성미가?" "그거사 연홍이가 따지야제." "공으로 주지도 않을 전참봉 재물에만 눈이 어두바서 깜박 엎어진기지. 자개야 실속도 채맀일 기고. 아 생각해 보라모? 연홍이가 기개 있는 기생이 어디 있더나. 돈이라 카믄 박물장시 고리 속의 색실만치나 손쉬우니께." "..." "참봉도 자기깐에는 기화한테 헤프게 돈 쓴다는 생각을 하겄지마는 손톱 밑에 물 넣어가믄서 살림사는 여염집 지어미도 아니겄고 기화는 기생 아니가, 기생? 미련한 똥돼지 겉은 인사가 그걸 알아야지. 상놈양반이라 할 수 없는가보더라." 봉춘네는 전참봉을 아주 싫어하는 눈치다. "내가 기화하고 일 년을 함께 살아봤지만 푸지게 돈 주는 것 한분도 못 봤다. 기화가 있이믄 한꺼번에 다 써 부리는 성미이기는 하지마는, 겉으로 바르고 걸치고 하는 거사 그럴 듯, 실상 속은 텡텡 비었다." "그라믄 소화를 찾아가서 어쩌겄다는 건고? 연홍이가 알믄 기화머리끄뎅이 안 성할 긴데?" "뭐 협률사라 커든가? 율협사라 카든가? 광대들이 당을 지어서 소리하고 댕기는," "으음 알 만하다." 국향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소화 옛서방이 아마 협률산가 뭔가 하고 연줄이 닿을 기다. 그러나 소화야 어디 제대로 된 기생가? 덤짜지 덤짜." "덤짜나마나 그런 거 내사 모르겄고," "그러니 기화는 소리 쪽으로 한분 나가보겄다 그거로구마." "그런 생각을 해보는 모앵이라." "하기야 그 아아는 목이 좋으니께 한분 해볼 만도 하지. 그렇기되믄 기화는 진주서 털고 일어설 긴데 딸 삼아 함께 살든 봉춘네 섭운컸다. "자식도 잃고 사는데 머." 봉춘네는 동정을 다 달고 실을 물어 끊으며 쓸쓸하게 뇐다. 과거 놀던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봉춘네를 여염 집 여자라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요염했고 세련된 옷매무새하며 의혹도 갖게 했지만 그는 다만 기생어미였 을 뿐이다. 난봉꾼 남편이 딸을 기방에 팔아먹은 것이다. 딸 봉춘이는 얼굴이 예뻤고 재주도 있었다. 성미도 강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굳게 맹세한 어느 한량이 다른 기생과 하룻밤을 놀아났다 하여 양잿물을 마시고 죽었다. 그를 언니 언니하며 따르던 기화가 혼자 남은 봉춘네를 수양어미로 삼아서 함께 살아온 터이다. "내사 머 살든 집도 있고 하니 그럭저럭 지내겄지마는 나보다 실상은 기화 일이 걱정이다." "젊고 인물 좋고 어디 가믄 못 살까봐서?" "그기이 아니라, 머라 카믄 좋겄노." 봉춘네는 다 된 저고리에 인두질을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하고 석이네는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말이 없다. 한편 속으로 봉춘네가 봉순이 험담을 하는지 칭찬을 하는지 화류계를 모르는 석이네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길 상이 얘기나 좀 해주었으면 싶었다. "좌우당간에 그 아아는 한분 살아보겄다 하는 겔심이 없는 기라. 욕심도 없고, 누가 수만금을 한분 주어보지. 그날로 댓바람에 다 써뿌리고 다음 날에는 돈이 떨어져서 있는 물건 팔아가지고, 그런 성미니께 우찌 고생을 안 하겄노? 고생하지 고생해. 노류장의 기집이믄 좋은 한시절 벌어서 작량을 잘해야 노리에 편할 긴데, 삼십이 넘고 사십이 가까워지믄은 눈먼 새도 안 돌아볼 긴데, 자랑말이 아니라 내가 그래도 남으 살림이다 하는 생각 없이 이럭저럭 절용해감서 꾸리나간께, 지 혼자 살았이믄 영감 몰래 전당포 문턱이 닳았일 기다. 심덕이사 좀 착하나? 불쌍한 것 못 보고 애시당초 사내덕은 못 볼 계집으로 생깄어. 그런 성질 갖고는 사내 덕 못 본다. 우 리 봉춘이도 그랬지마는, 사나아한테 한분 빠지믄 간까지 끄내줄 기집이다. 내가 노상 타이르고 해보지마는 지 도 천성을 맘대로 못하니 우짜노? 그래애, 노류장의 계집이믄 좋은 한시절 벌어서 작량을 잘해야 노리에 고생 을 안 하지. 고생을 안 해." 인두를 화로에 꽂고 다 된 저고리를 개킨다. 국향이는 남의 일로 생각할 수 없는 붕춘네 말에 저도 모르는 한 숨을 내쉰다. "아이구 내 정신 좀 보래? 석이어매 아침은 묵었소?" 봉춘네는 황급하게 일어선다. 얘기가 길었던 것을 깨달은 것 같다. "묵고 왔소." "기화가 와 여태 안 올꼬?"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독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봉춘네는 작은 함지를 들고 들어온다. "이거나 좀 묵어보소. 설에 한 긴데." 콩이랑 깨, 좁쌀로 만든 강정이다. "아따 그기이 이때까지 있었나? 껍데기뿐이라고 징징 울어쌌더마는 그래도 부자 밑이라 걸거마는." 국향이 냉큼 하나를 집어서 와작와작 씹어먹는다. 푸르스름한 입술, 기름때가 가라앉은 듯 거무칙칙하고 주름 투성이의 얼굴, 기생말로의 스산한 찬바람이 그의 얼굴에서 사정없이 일고 있다. "아이들이 없인께 묵을 사램이 있어야제. 석이어매, 묵어보소. 꼬맹이들 생각 말고." 끼니때마다 양이 적다고 투정인 어린것들 생각을 어째 안 할 수 있을까. "꼬맹이들 몫은 있인께 자아 묵어보소." "야." 갈구리 같은 손이 조심스럽게 콩강정 하나를 집는다. 국향은 부지런히 집어먹는다. 와작와작 소리를 내면서 그 래도 체면치레는 해야겠다는 생각인지 "요새는 당초 밥맛이 없어서," 조심스런 석이네한테 공연한 미움의 눈길을 보낸다. "석이 말 들은께 석이 외숙모는 아즉도 운신을 못한다믄서요?" "야." "예삿일 아니거마는. 그래 가을이나 잘했는가요?" "아무리 잘 해봐도 땅이 실찮으니께." "땅이 실찮다니?" "오래비 근력이 좋아서 농사는 더 지을 수 있는데 그기이, 그만 얻어부치든 땅뙈기 서 마지기를 땅임자가 걷 어갔다 커더마요." "그럴 수가," "옛날 같잖아서 땅임자가 마구 바끼니께 농사도 마음놓고 지을 수 없는갑십디다." "왜놈들이 자꾸 묵어들어오니께. 그러니께 고향산천 버리고 만주다 어디다 하고 떠나는 사람이 좀 많든가요? 인심도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이래가지고는 니남정 할 것 없이 살기가 어러버질 기니 큰일이제." "큰일이지. 왜놈 앞에 알랑방귀 끼는 놈말고는," 국향도 한마디 거든다. "요새 성내라도 나가볼라치믄 뚝닥거리는 거는 모두 왜놈들 집 짓는 소리고." "와 아니라? 앵이꼽아서 참말로 못 살지. 진주가 우떤 곳인데? 이헤미(논개)가 왜장 끼고 물에 빠져죽은 곳 아 니가. 요새 젊은년들 보믄은 기생질하는 기이 누워 떡 묵기라. 기생은 기생의 행신이 있는 법인데." 국향이 뒤늦게 열을 올리려 하는데 대문 미는 소리가 난다. "어무니!" "이자 오는가배? 운냐!" 봉춘네가 방문을 열고 나간다. 석이네도 일어서서 뒤따라 나간다. "아이구 아지매 오싰소?" 봉순이 반가워서 웃는다. "아까부텀." 석이네도 피시시 웃는다. "많이 기다맀는가배요. 자아 우리 방에 들어갑시다, 어무니." "와." "따신 점심 해주소이?" 어리광스럽다. 갔던 일이 잘되었는지 모른다. "해주고말고. 걱정 마라. 참 석이어매가 소개기를 싸왔는데 내가 막 야단을 안 쳤나." "아지매도 미쳣는갑다." 방안으로 들어간 기화는 수술이 달린 목도리를 벗어 걸고 장갑을 빼면서 자리에 앉는다. "아지매도 앉으소." 밖에서 웃음짓던 것과는 달리 기화의 목소리는 힘이 없고 석이네를 쳐다보는 눈도 쓸쓸하다. "무신 일이라도 있었는가 모리겄네?" 묻는 석이네 말씨는 옛날 마을에서처럼 무관하지만 태도는 상전을 대하듯 한다. "하도 답답하고 할말도 있고," "할말이라 카믄," "야. 숨 좀 돌리고... 며칠 전에 이부사댁 서방님이 다녀갔소." 기화 눈에 눈물이 빙그르르 돈다. "이부사댁 서방님이라 카믄," "애기씨랑 함께 간도로 갔던 그 양반 모르요?" "아아, 알었다. 그래 소식은," "소식이사 다 들었소. 나 아지매보고 실컷 울라꼬 오라 했소." 기화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가며 상현이 전해준 얘기를 소상하게 들려준다. 영팔이와 용이 월선의 얘 기가 나오자 석이네도 치맛자락을 끌어당겨 콧물을 닦으면서 운다. "남들은 남으 땅에 가서도 멩이 붙어 살아 있는데..." 콧물을 닦던 석이네 드디어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운다. 머리칼이 희어지기에는 이른 나인데 흰머리뿐인가, 햇 빛과 바람에 바래어 검은머리조차 누리께하고 기름기라 없다. 그 머리칼을 떨면서 운다. "무상한 사램이 그, 그때사 와 돌아왔던고. 죽을라꼬 구신이 씌어서, 으흐 흐흣... 차라리 곰보목수나 따라갔더 라믄." "다아 지나간 일이요. 말하믄 뭐하겄소. 아지매나 내나 다 꽁 떨어진 매 신세요. 간 사람들은 다 좋고 남은 사 람만 불쌍치. 복 많은 사람은 가나오나, 애기씨는 그곳에서도 여기 못지않게 부자가 됐다카이 좋으믄서도 서글 프고... 길상이는 멩을 걸오놓고 도왔일 기요. 길상이는 애기씰 위해 태어난 사람인께." "잘됐다 카이 고맙구마." "이사부댁 서방님이 말심하시기를 애기씨는 세상 없이도 하동으로 돌아오고야 말 기랍니다. 애기씨는 조준구 를 잡아묵고 말 기라 안 카요? 그 생각에 똘똘 뭉치서... 하기사 애기씨 성미가 우떻다고? 능히 그리할 기요." "제발 그렇기나 됐으믄, 원통한 말을 어느 곳에 가서 으흐흣... 내 그렇기 되는 날이믄 머리털을 뽑아서 신이라 도 으흐흣..." 석이네는 또 꺼이꺼이 소리를 내어 운다. "김훈장 헹펜이 젤 딱한 모양이고... 아무튼지간에 그렇기 알고 접던 소식을 들었는데 우째 이리 가심에 구멍 이 펑 뚫린 것맨치로 앉아도 그렇고 서도 그렇고 갈 바를 잡을 수가 없는지 모르겄소?" 들은 얘기는 다 털어놨고 눈물도 다 짜냈건만 허하기론 마찬가지, 기화는 멀거니 석이네를 바라보고 석이네는 또 우두커니 방바닥만 내려다본다. 시원할 것 같지만 시원치가 않다. 희망이 잡힐 것 같지만 손바닥에 남은 것 은 아무것도 없다. 죽은 남편은 영원히 잠들어 깨어날 리 없고 날아가버린 길상이 품에 돌아올 리 없다. 방에 마주보고 앉은 사람은 봉순이 아닌 기행 기화와 오동지 섣달에도 빨래품을 팔아야 하는 가난한 홀어미. 웃음 도 말도 허공에 먼지 되어 날아갔다. 무슨 희망이 있는가. 점심을 먹은 뒤 "김서방댁이 죽었다 캅디다." 풀쑥 말을 꺼내었다. "김서방댁이 죽어? 누가 그러더노." "억쇠라고 이부사댁 하인이 그러더마요." "그 할매가 죽었고나." "죽었소." "..." "그거는 그허고 아지매, 나 이곳을 뜰라요." 석이네는 아까 들은 얘기가 있어 잠자코 있다. "어차피 기생 신세 한 남자한테 매달리 살 까닭도 없고, 살림 걷어치울 마음을 정하니께 관수 말이 생각도 나 고." "관수가 머라 카든고?" 갑자기 신경을 세우며 되묻는다. "더러 집에 찾아오고 하는데, 관수가 옛날에는 길상이하고 친했거든요." "그거사 나도 아는 일이고 안 할 말인지도 모르겄지마는 그 사람이 자꾸 우리 석이를 가까이할라 카는데 무신 심산인지 모르겄네?" 석이네 음성에는 심지가 생긴 듯 꼿꼿하다. "그거사 한조아제 생각을 해서 그렇겄지요." "그기이 아니다. 옛날하고 사램이 같아야 말이지. 요새는 딴판 아니가. 순 노름방만 돌아댕기믄서... 내사 마 간 이 타서 죽겄다. 어지도 석이가 그 집에 가서 자지 않았던가배? 꿈자리도 시끄럽고," "그거사 아지매가 모르는 소리요. 관수는 겉보기하고는 다르요. 머이 말 아지매 귀에 가라고 한 소리는 아닐 기고... 한분은 훌쩍 들어서더니 막 속 뒤집는 말을 안 하겄소? 내 다른 사람 같으믄 그냥 듣고만 있지는 않았 일 기지만, 봉순아 니 부자 영감탕구 얻어서 혼자 호사할 기가? 대뜸 그라고 시비를 안 걸겄소?" "그래서?" "아 그러세, 길상이 그깟놈이 어쩌구저쩌구 씰개 빠진 놈이니, 쌍판이 멀쩡해서 똑똑한 놈이 없느니, 평생 종 질밖에 못할 거라는둥." "..." "그래 나중에는, 석이 그 아이 물지게만 져서 되겄나, 사람 맨들어주자, 니 그 집 좀 도와주어라, 그러지 않겄 소?" 석이네는 반신반의하는 얼굴이다. 이때 별안간 바깥이 왁자지껄하고 뛰어가는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봉춘네 국향이 쫓아나가는 기척이다. "무신 일일꼬?" 한참 만에 숨을 몰아쉬며 봉춘네가 돌아왔다. "기화야!" "와 그라요, 어무니?" "밖에서 큰 야단이 났다. 순사들이 쫙 깔맀구나." 기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우리 집을요?" 기화는 왜 우리 집이라 했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그는 순간 상현이를 생각했던 것이다. 왜 생각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우리 집을 와?" "그라믄 누구 집이요?" "누구 집인지 그거는 아즉 모르겄다마는 와글거리는 소리를 들은께 머 독립운동하는 사, 사람이라 카든가 의 병이라 카든가, 그런 사람이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입속이 말랐는지 침을 삼키고 나서 "수,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것을 알고 왜놈 순사들이 둘러쌌다고 안 하나." "그, 그래서 잽힜소?" 석이네는 자세한 것도 모르면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는 순사나 일본 병정들 말만 들어도 떠는 버릇이 있 었다. "말이 이 동네를 다 들출 기라 안 카나. 그라믄 우리집에도 오겄제?" "오, 오겄지요." 기화는 또다시 상현이 생각을 한다. 이미 떠난 사람이며 그럴리 없다 하면서도 그의 부친 이동진을 비롯하여 그간 사정이 불안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8장 출발 물살이 떠는 강을 건너서, 나룻배를 내려섰을 때 아침해가 솟아 올랐다. 조그마한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관수 석이는 걸음을 떼어 놓는다. "잘 갔다오게에" 베수건으로 귀를 싸맨 사공이 소리를 질렀다. 관수는 대답 대신 발밑을 내려다보며 킥 웃어버린다. 사공과는 안면이 두터운가본데 가슴팍 쪽으로 노를 끌어당길 때마다 중풍 든 사람처럼 입술을 씰룩거리던 사공의 얼굴 을 생각하며 웃었는지 모른다. 한참을 걷다가 돌아본다. 강가의 사람들을 태우고 나룻배는 강심 쪽을 향해 가 고 있었다. 마른 잡목숲에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다. 집을 떠나올 때 근심과 의혹의 빛을 감추려고 애쓰던 어미의 눈을 석이는 생각한다. 하동의 아비 산소를 둘러 보겠노라 거짓말을 했었다.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산소에 들를 심산이기도 했다. '아배 원수를 갚겄다는 그 따우로 시시한 생각이믄 애시 날 따라 나설 염도 내지 마라. 한평생이 잠깐인데 무 덤 속에 묻히서 다 썩어부린 세월까지 뒤비시가지고 살아줄라 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사나아라 카믄 원 한도 크기 가지야 하고 인정도 크기 가지야, 그래야만 연장 달고 세상에 나온 보램이 안 있겄나. 이 세상에 억 울한 놈 니 하나뿐인 줄 아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사람 중에 천대받아감서 억울하게 사는 사램이 훨씬 많은 께, 그러니께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 일이 더 바쁘다 그 말 아니가. 곰곰이 생각해봐라. 니는 펭생을 물지게 지고 니 어무니는 죽는 날꺼지 품팔이나 하고, 니 동생들이라고 다를 기이 있을 성싶으나? 좀 펜하게 살잘 것 같으믄 술집말고 갈 곳이 따로 없인께. 너거들 겉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쌯이고 쌯일 만큼 많다. 밥 묵는 사람 보다 죽 묵는 사람이 많고 뺏는 사람보다 뺏기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그래 니가 조준구 한놈직이서 아배 원 수를 갚는다고 머가 해겔되겄나? 달라지는 것은 쥐뿔도 없을 기라 그 말이다. 세상이 달라지야 하는 기라, 세 상이. 되지도 않을 꿈이라 생각하겄지. 모두가 그렇기 생각한다. 천한 백성들은 그렇기 자파하고 살아왔다. 그 러나 꿈이라고만 할 수는 없제. 세상이 한번 바뀔 뻔했거든. 왜놈만 아니었으믄. 지난 동학당 날리 얘기는 니 도 많이 들었을기다. 왜놈만 병정을 몰고 안 왔이믄... 정사를 틀어쥐고 있던 양반놈들, 그놈으 자석들은 세상 이 바뀌는 것보담 남으 나라 종놈 되는 편을 원했으니께. 그러니께 송두리째 넘어갔지. 땅도 넘어가고 백성도 넘어가고.' 밤을 새감며 관수가 들려준 얘기다. '자리꼽재기 그 늙은 전가가 거금을 내던지고 실속도 없는 참봉벼슬을 산 것은 양반이 되어야만 왜놈하고 붙 어묵기 좋을 기니께, 노심초사해서 돈을 번 처지라 눈까리는 밝아서 한치 앞은 본 모양이고, 그런가 하믄, 상 투를 틀거나 산발을 하거나 조맨치도 불펜할 기이 없는 편한 놈들은 개멩바람을 타야만 양반 되는 줄 알고 너 도 나도 머리를 동구리고 댕기는데, 허허... 이마빡에 신짝을 붙이야 양반이랄 것 겉으믄 그놈들은 신짝을 붙일 기고 발바닥은 치키 들고 손바닥으로 걸어야 양반이랄 것 같으믄 또 그렇기 할 긴께 그놈의 양반 체모라는 것 은 어디로 가야 할 긴지 모르겄다. 뒤죽박죽,' 그런 세태 얘기를 하며 웃기도 했었다.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보리밭에 까마귀 서너 마리, 길가는 사람을 멍청히 바라본다. 빈 지게를 지고 목발을 흔들어대며 산으로 올라가는 초동, 잡목숲에 싸아! 하고 바람이 지나간다. "석아." 활갯짓을 하며 걷던 관수가 불렀다. "옥봉 기생집에서 술 묵다가 달아난 사람 잽힜다 카더나? 그런 소문 들었나?" "못 들었소." "안 잽힜다 칼 것 겉으믄 그 재주 보통은 좀 넘는다." "그러세... 재주도 있었겄지마는 내 생각에는 담력이 큰 사람같소." "니 말이 맞다. 재주보담은 담력이겄지." "..." "병신놈으 자석들, 옷 하나도 못 맨들어서 흥, 우리 조선의 상복을 가지간 놈의 쪽발이 자석들이 무신 별수가 있일 기라고." "정말 의병이까요?" "내 듣기로는 청국에서 숨어들어온 사램이라 카데. 독립운동하는 사람, 머 의병하고 다를 것도 없지." 성큼성큼 걸음들이 빠르다. 산이 지나가고 개천이 지나가고. '봉순이 그놈으 가시나가 참말로 진주서 뜰라 카나? 이부산가 삼부산가 그 집구석 자손이 와가지고 씰데없이, 자는 불을 일으키놨인께, 제에길헐!' "석아." "야." "우째 심심코나. 얘기 좀 해라." "..." "봉순이가 정말로 이곳서 뜬다 카더나?" "그런 말을 했갑는데요." "어디로 가는고?" "나도 잘 모르겄소. 광대패를 따라갈 기라 카든지..." "멩창으로 이름 한분 날리보겄다 그 말이구마. 흥, 마음만 가지고 그기이 그리 쉽기 되는 일이라야제. 타고난 소리만 가지고 되는 거는 아니라고. 마음을 독하고 모질게 가지야 하는 기고 참을성도 많아야 하는 긴데 봉순 이는 그렇기 못할 기다. 계집이 정에 헤프거든. 화류계에 있일수록 정에 헤프믄... 뻔한 일이지. 기다리는 거는 추풍낙엽밖엔 없는 기라. 그런데 저기이 멋꼬? 하하앙, 밥 묵기 싫어서 가는 사램이구마." 비탈진 밭둑길로 해서 지게 송장이 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지게 송장이라 아침에 가는 모양이다마는 땅이 얼어서 묏자리나 파겄나." 석이는 걸음을 멈추고 쳐다본다. 괭이 든 사내를 따라 지게 송장이 가고 상복 입은 아낙 하나가 울며 따라간 다. 열 살 안팎의 계집아이 둘, 저고리 앞품에 두 손을 넣고 뛰어가는데 머리에 쓴 천태가 나풀거린다. "가자." "야... 이상쿠마요." "머가." "지게 송장에 상복은 머할라꼬 입었이까요?" "셈을 해보라모." "야?"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 입이 포도청이라. 생이를 빌리오고 상두꾼을 불러오고, 죽은 사람 호사는 되겄지마는 허공에다 뿌리는 돈 아니가. 상복이사 떨어질 때꺼지 입는 기니께. 안 그래? 하하하핫..." "..." "주막까지 갈라 카믄 한나절이 돼얄 긴데. 아이구우 심심타. 니가 통 말이 없인께. 내 옛날 얘기 하나 하까?" 햇살은 한결 두터워졌다. 여전히 말없이 석이는 걷기만 한다. 무명이지만 반짝반짝 윤이 나고 결이 고운 주란 사 회색 바지에 관수가 벗어준 저고리를 입은 석이 모습은 제법 의젓하다. 머리꼬만 울렸어더라면. "젊었을 적의 우리 아부지 얘긴데. 아부지가 이 장에서 저 장으로 장돌뱅이질 하든 그런 시절이었더란다. 상투 는 틀었지마는 삼십이 다 돼가는 총각이었고, 여자를 모르기야 몰랐을까마는... 그랬는데 어느 날 화개 창터에 서 이쁜 각시 하나를 보았더란다. 본시 우리 아부지 난봉기가 좀 있었지. 해서 실금실금 그 각시를 숨어보고 있노라니 향을 사고 초를 사고 과실을 사는데 제사 장이라. 옳다꾸나, 저놈으 각시 과부로구나 하고 아부지는 생각했다는 거지. 그래 부랴부랴 짐을 몽당그려서 주막에다가 맽기놓고 장바구니를 이고 가는 각시 뒤를 따랐 는데 여가집에 가는 줄 알았던 각시는 산으로 올라가더라나? 하하앙, 화전민의 계집이로구나, 내친걸음이고 각 시 댓거리가 보면 볼수록, 여시에 흘린 것 같아서 돌아설 수가 없었던 우리 아부지는 내처 따라가는데 산막도 아니고 자꾸 산속으로 기어들어가더라는 게야. 뜻밖에 각시는 절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제에기랄! 설마 불공을 디리러 갔이믄 새북에야 안 오겄나 싶어서 목기막을 찾아 늘어지게 한잠을 잤더라는 기지. 한잠을 실컷 자고 나서 절 밑 길목을 지키고 있으려니께 가만 있거라, 이놈의 신총이 끊어졌나?" 관수는 허리를 구부리고 짚세기를 들여다본다. "빌어먹을, 재수없게끔," 봇짐 속에서 녺느 한를 꺼내어 길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신발을 얽어맨다. "됐다. 가자."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래 절간 길목을 지키고 있으려니께 아니다다를까, 각시가 나오더라는 기지. 달은 휘영청 높고 산중이 대낮 맨치로 밝은데 실상 첩첩산중에서 달이 그리 밝다는 것도 과히 기분 좋은 거는 아니더라나? 각시는 겁을 집어 묵었던지 산길을 종종걸음으로 내리가고 우리 아부지는 멀찌감치서 따라가는데 우떻게 된 영문인지 각시 허리 띠가 풀리서 슬렁슬렁 내리오더니만 땅바닥에 끌리는데, 그럴수록 각시는 허겁지겁 걷더라는 기지. 그놈으 너 부죽한 허리띠는 마치 허영 꼬랑지맨크로 흔들리믄서," "여시가 둔갑을 했던가배요." 흥미를 나타내며 석이 말했다. "내 얘기 들어보라고. 아부지도 처음에는 저눔으 각시 여시 둔갑한 기이 아닐까 생각했다누마. 그래도, 아무래 도 우짠지 단념을 해부릴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그놈의 허연 허리띠가 눈앞에 아찔거리니께 맴이 한층 더 끌 리가더라는 기지. 죽을 셈치고 걸음을 빨리하야 뒤서 각시를 담싹 안았더란다. 그러자 각시는 그만 기절을 해 부린 거라. 아부지는 기절한 각시를 안고 목기막에서 찬물을 떠다가 얼굴에 끼얹고 해서 게우 각시는 정신을 차맀는데, 첫마디 말이 고맙십니다. 호식이 되었을 나를 구해주었이니 무엇으로 은혜를 갚겄십니까? 하하하 핫... 하하핫... 참말로 거짓말 겉은 얘기 아니가? 여시가 여자로 둔갑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마는 허리띠가 호랭 이로 둔갑한다는 것은 좀, 처음부터 각시는 호랭이 생각만 했던기라. 허리띠 끌리는 소리를 호랭이 발자국 소 리로 들었고 아부지가 뒤에서 안으니 호랭이 아가리로 들어가는 줄 알았던 게지. 그렇기 해서 아부지는 호랭 이를 쫓은 장사가 되었고 꿈 겉은 밤을 목기막에서 보낸 기지. 그래 알고 보니 그 각시는 역시나 과부, 그러니 께 그 과부가 누군고 하니 우리 어무니라." "..." "아부지가 동학에 들어간 것은 아마 과부는 개가하는 기이 옳다는 그 조목이 좋았든 때문이 아닐까? 하하하 하하하핫..." 웃음 소리에 힘이 없다. "어무니 소식은 영 못 듣십니까?" "어디서 듣노? 알아볼 만치 다 알아봤다. 살아서 고생하느니보다 차라리 돌아간 것을 바래는 심정이구마. 허리 띠 풀어진 줄도 모르고 호랭이 생각만 했던 얼띤 노친네... 다부졌으믄 우떻게라도 살아서 나를 찾았일 긴데... 그런 생각 하믄 머리카락 센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오십 리 길은 걸었을까? 관수는 석이를 데리고 마을 어귀의 주막으로 들어간다. "어이구우, 관순지 소금물인지 오래간만에 얼굴 보겄구나." 젊은 주모가 초장부터 헤프게 수작을 걸어온다. "분인가 가룬가 수절하고 잘 있었는지 모르겄네?" "열녀비는 따놓은 당상이지." 관수는 짚세기를 벗고 술청으로 올라간다. "이분 행비가 늦어서 임자 속이 바짝바짝 탔을 긴데, 우선 목부텀 축이야겄네."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고나, 내 속이 타는데 자개 목부텀 축인다아? 호호호..." 간드러지게 웃는다. 석이는 퉁명스럽게 주모를 쳐다보며 관수 옆에 앉는다. "이 총각은 누군고?" "임자 시동생이구마." "아이구우 그렇다믄 이거 첫상면이 되겄네?" "그렇지. 잘 알아서 해얄 기구마. 상다리 안 뿌러질 만큼," "장이 멀어서 유갬이고, 갈길이 바빠서 유갬이구마는," "그놈으 조둥이 잘도 다져놨다." "관수 왔나?" 구석방에서 한 사내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말했다. "야, 성님." 관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주모의 서방인 것 같았다. "가보소." 골방 쪽을 힐끗 쳐다본 주모는 관수에게 말했다. 그 표정은 염치 없는 여태까지의 수작과는 딴판으로 엄숙하 다. 관수는 일어서 골방쪽으로 가고 "총각, 국밥 할라요? 술은 하는지 모르겄네?" 주모 목소리에 석이 당황한다. 천한 계집이라고 마음속으로 멸시를 했었는데 뜻밖에 여자 목소리는 누님같이 부드러웠고 눈이 인자했던 것이다. "구, 국밥 주소." 석이 국밥을 먹고 있는데 골방에서 나온 관수는 막걸리 한 잔에 김치 한 쪽을 씹어삼키면서 "떠나자." 하고 서둘렀다. "돌아올 직에는 들리겄구마." 주막 밖까지 따라나오던 주모 분이는 여름날 차일을 치기 위해 박아놓은 말뚝에 받쳐서 한순간 비틀거리다가 말을 했다. "이 길로 올지 산청을 돌아서 올지 그거는 모릴 일이고 소식 없이믄 오늘 이날, 정화수 물 한그릇 부탁하누마. 그라믄 성님 잘 기시오." 관수 볼 언저리에 소름이 소스랑하게 나돋아 있었다. "잘 다니오게." 구석방에서 나온 얼굴이 싯누런 사내는 어서 가라는 듯 손짓해 보인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라믄 총각도 잘 가시오." 분이 석이에게 말하며 미소짓는다. 광대뼈가 솟은 듯 눈빛이 깊다. 헤프게 수작하던 여자로는 믿을 수가 없다. 야 하고 대답한 석이 보따리를 추스르며 관수 뒤를 따른다. 관수의 걸음은 눈에 띄게 급했다. 한참을 급히 걷 던 걸음이 늘어지고 관수는 별안간 들판을 향해 소리를 내지른다. "하느님이 사람 낼 때 녹 없이는 아니 내네. 우리라 무슨 팔자 그다지 기험할꼬. 부하고 귀한 사람 이런 시절 빈천이요-- 빈하고 천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로세!" 동학교의 교훈가다. 다시 걸음을 빨리한 관수는 입을 봉하듯 말하지 않았다. 땅거미 질 무렵이다. 구레에 당도하였다. 우시장 공터를 지나고 텅텅 비어 있는 장터를 지나서 좁다란 마을길 로 접어든 관수는 곧장 올라간다. 엇비슷한 여염집이 엇비슷하게 자릴 잡은 동네다. 열려져 있는 어느 대문 앞 까지 온 관수, 성큼하니 들어선다. 자그마한 안늙은이가 기름병을 들고 나오다 말고 "관수 오는감?" 안늙은이는 신병이 잦은 듯 얼굴이 배추시래기 빛이다. "어르신 기시지요." "사랑에 기신께 들어가보더라고." 안늙은이는 관수 뒤에 서 있는 석이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집안은 유복한 것 같다. 사간 위채에 아래채가 삼 간, 두 동은 초가였고 남쪽을 향해 돌아앉은 것이 사랑인데 지붕은 기와다. 마당은 시원하게 넓다. 관수는 "매구치기 좋겄제?" 마당이 넓어서 그렇다는 얘기다. 대문을 들어설 때처럼 관수는 사랑 마당으로 성큼 들어선다. "어르신." 이미 말소리를 들은 듯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 "이제 오는군. 올라오게." 안늙은이보다 젊은 백발머리에 쉰네댓 돼 보이는 사람이다. "혜관스님도 오셨네." 관수는 신발을 벗으며 "석아 니도 들어가자." 방으로 들어갔을 때 혜관은 관수보다 석이 쪽을 쳐다본다. "시님, 그새 편안했십니까?" 눈길을 옮기며 혜관은 "편안해지면 죽는 날이지. 앉게." "석아, 인사드리라." 석이는 한순간 날카로운 눈초리로 반백머리와 중머리를 번갈아 보다가 보따리를 내려놓고 절을 한다. "부친 비슷이 있구먼." 혜관이 뇌었다. "어떻십니까? 아이가 실팍하지요?" 관수 말에 반백머리 윤도집이 "우리가 선을 볼라 했더니 정한조 아들이 우리 선을 보러 온 모양이라. 허허헛... 그만하면 되었구먼." 석이 얼굴을 붉힌다. 사실이 그러했다. 윤도집을 따라 혜관도 웃는다. 그러나 관수는 웃지 않고 작은 눈을 더 욱 작게 오므리며 뭔지 골똘히 생각에 빠지는 기색이다. "그는 그렇고 저녁은 안 했겄지." "예." "저녁 먹고, 천천히 떠나도 늦잖어." 윤도집은 뽀뽓한 씨아털을 피운 민들레 같은 느낌을 주는 선비풍의 사람이다. 울퉁불퉁한 중머리에 관골이 튀 어나오고 정력적으로 뚱뚱해진 혜관 옆에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 도집이라는 직명이 설명해주듯 운 봉 양재곤을 총수로 하여 새로 조직된 동학 별파의 중요 간부 중 한 사람이다. 저녁을 먹은 뒤 관수는 "잠시 다녀올 긴께 너는 여기서 기다리라. 낼, 모레, 늦어도 모레는 돌아올게." "야?" 석이 어리둥절해한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다. 신돌 아래서 윤도집과 혜관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관수를 따 라 문밖까지 나가는데 가다 말고 돌아본 관수 "아아, 아? 석아. 니 와 그라제? 귀주기 벗은 지가 몇 해라고 울상이고." 주막을 떠난 후 처음으로 우스갯소리를 하고 웃는다. "모레는 꼭 올 기지요." "으음." 입술을 꼭 다문다. "암 돌아오고말고." 관수는 들어가라는 시늉으로 손을 흔들어대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석이는 방으로 돌아왔다. 혜관과 윤도집 은 석이에게 도무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고 그들의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오는 봄에는 임제종의 이차 총회가 열릴 모양인데," "작년에는 송광사서 열리지 않았었소?" "그랬지요. 금년에는 광주 포교당에서 하지 않을까... 아무튼 이번에는 한층 더 뚜렷하게 명분을 내걸어야 할 게고 임시 관장이고 보면 새로 관장을 뽑아야 하는데 어째 시끄럽지나 않을란가." 혜관은 입맛을 다신다. "임시지만 용운이 그냥 눌러앉는 게 아닐까?" "글쎄올시다." "나이 젊은 게, 그게 좀 어떨는지 모르겠소." "실상 용운이 적합하다 할 수는 없지요. 나이도 나이려니와." "그렇다고 뭐 따로 일할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잖소? 남의 집안 얘기지만." 혜관은 시큰둥한 얼굴이다. "팔은 안으로 굽더라 안 하든가요? 스님." "네?" "용운이 말씀이오." "그래서요." "우리 동학에서 본달 것 같으면 좀 괘씸한 사람이지요. 동학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이 머릴 깎았으니까요. 허허 헛... 그러나 전혀 인연 없는 사람이 앞장서서 일하느니보다 용운이 편히 낫질 않겠소? 하긴 이 시국에 천도다 불도다 할 시기도 아니고 스님하고 우리가 함께 일하는데 지장이 있엇던 것은 아니지만." 윤도집의 언중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배려가 있는 것 같다. "뭐 동학이다 불교다 그런 것보담," 윤도집은 혜관의 말을 가로막는다. "용운이 그 사람을 말하잘 것 같으면 학식이 도저하고 문장은 능히 종장의 영역이요. 젊음과 패기 또한 늠름 하지 않소이까? 민종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그의 부친이나 형을 보더라도 뼈대있는 집안," 이번에는 혜관이 윤도집의 말을 가로막는다. "허나 그 사람한테 약간의 흠이 있지요. 젊은에는 항용 따르기 쉬운 경망과 자만은 있을 수 있는 일이로되, 때 가 때니만큼 시빗거리는 안고 있소." "혜관께서 무엇을 두고 말씀하시는지 대강 짐작은 가오. 허나 지난해 왜중들과 회동하기 위해 맺은 조약," "왜중과 회동이라구요?" 별안간 혜관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얼굴이 벌개진다. 그들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석이 깜짝 놀란다. 윤도집도 다소 머쓱해진 얼굴이다. "왜중과 회동이라니 거짓말도 유분수지.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치가 떨리는 일이거늘, 실상은 그것도 아니었 다 하오! 소승 듣자니까 왜중 족에서 내건 거는 동등한 제휴가 아닌, 조선의 불교 종단을 제놈들한테 예속시 키자는 것이었소. 그걸 쓸개빠진, 어이구우! 그 생각만 하면 소승 가슴에 불이 나서 능지처참을 해도 시원찮을 그놈들을 그만, 똥창까지 썩은 중놈들! 어떡허면 속이 풀리겠소? 그놈! 회광이 그놈을 찢어죽이고 싶소. 동학 의 매국노 이용구를 찾아다닌다는 소문이더니," 혜관의 분노가 너무 격렬하여 윤도집은 열이 식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잠시 동안 말을 끊은 혜관은 고개를 떨 구고 있더니 "경전에는 까막눈이나 진배없는 금어, 이 혜관이 화필을 놓은 지 수삼 년 비록 유리걸식하는 땡땡이중이긴 하 오만," 한숨을 푹 내쉰다. "생각하면 중놈들을 다 때려잡고 싶은 심정이고 쑥밭을 만들고 싶은 심정이오. 아무리 이조 오백 년 배불을 일삼아서 중들이 천민으로 떨어졌기로, 또 도성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끔 천대를 받았기로서니, 어찌하여 조선 중의 서울 입성 금지를 두고 왜중이 와서 조정에다 청원을 했으며 또 그것이 해금됐다 하여 이 땅 중놈 들이 왜중한테 감지덕지 상전 보듯 해야 하느냐! 그까짓 도성출입 아니 하면 어떻단 말씀이오? 부처님이 서울 에 좌정해 계시단 말씀이오? 이 땅에서 서자 처우도 처러운데 그래, 왜중들 의붓자식 노릇까지 해가며 구구하 게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게이요? 조정이 썩고 임금이 불출인 것을 말해봐야 하품인 것을, 소승은 중놈이 더 나쁘다는 게요." 혜관의 얼굴은 다시 싯벌개졌다. 굵다란 주먹을 휘두르고 하마 방바닥이라도 내리칠 기세다. "일체 중생이 불자일진데, 왜국에 내 나라를 들어먹은 도적이라 하여 위정자 아닌 그 나라 선한 백성까지 미 워할 까닭이 없겠지요. 연이나 그자들 법의 속에 숨겨들어오는 게 경전이란 말씀이오? 아니외다. 침략의 칼이 요, 약탈의 창이다 그 말씀이오. 그러하거늘 어째 이 나라 중놈들은, 방백 수령 행차시에 술시중 들고 기생년 까지 사찰에다 대령시켜야 하는 삼보도 아니겠고 내로라하는 늙다리 중들까지 백주에 춤을 춘다 말씀이오. 그 추태를 무엇으로 형용하리까? 회광이 그 찢어죽일 놈이 매국노 이용구에게 빌붙어서 일본까지 건너가더니 허 허어, 나라 망하는 거는 강건너 불구경이요, 조동종의 관장인가 하는 왜중놈들 만나서 손을 잡고 일하잔다고? 그것만으로도 해괴망측한 일이거니와 그나마 완곡한 거적을 당하고 예속이라면 들어주겠다? 무지막지한 섬놈 들에게 불법을 전하여주고 제반 불사를 가르쳐준 사람이 누군데 말씀이오? 천인공노 종천지통할 수모를 당하 고도 그놈 회광의 낯짝은 쇠가죽이든가 칠조약인가를 들고 돌아왔는데, 하아 용궁에서 가져온 여의주로 알았 든가. 똥 보고 모여든 파리떼 같은 중들의 그 거동을 보시지 아니 하였소?" "보았지요." 윤도집이 싱그레 웃는다. 비로소 혜관은 냉정을 찾은 듯 그러나 무안수세하는 아이처럼 입술을 비죽거린다. "하기야 동학도 마찬가지지만요. 산야에는 동학도를 비롯하여 백성들의 그 숱한 피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거늘 왜적의 일등공신이 된 이용구 놈은 말할 것도 없겠고 명색이 교주로 인을 받은 손병희 조차 노일전쟁 때는 왜 군한테 군자금을 헌금한 그 따위 너절한 과오를 범했으니," 혜관은 말해놓고 윤도집을 힐끗 쳐다본다. "그거야 뭐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킨 격이고 왜국에 대한 항쟁은 시작도 동학군이요 아직 의병의 총본산 은 동학이니까, 허허허..." "임진왜란 때는 중들도 잠자코 있진 않았소이다." "그때야 어디 동학이 있었던가요? 허허허... 아무튼 혜관스님 말씀 많이 느시었소. 다음 회합 때는 선동 좀 해 주시야겠소." "중이 사바세계를 누비다보니 세치 혓바닥이 절로 놀게 되더구먼요. 느는 거는 주둥이뿐이외다. 하기는 저 구 석지에 새끼 의병놈 한 마리 있으니," 혜관은 너부죽한 입술을 벌리고 웃으며 석일 바란본다. 석이 씩 웃는다. 여간하여 웃지 않는 석이가. "거 말귀는 밝은 편이구먼. 이놈아." "예." "앞으로도 내 말이나 여기 이 어른 말씀을 공부라 생각허고 귀담아서 잘 들어두어야 한다. 바쁜 세상에 언제 책자 펴놓고 널 가르치겠느냐." "예." "스님께서도 아까 말씀이 있었지만," 객담을 거두고 이야기를 꺼내는 윤도집의 표정에 순간 칼날 같은 것이 지나간다. 살기하고는 다르다. 날카로운 판단이라 할까 결단이라 할까. 민들레 꽃씨같이 뽀뽓한 선비풍과 딴판으로 위압적이며 교활하기조차 하다. 다 혈질인 혜관의 험구도 어쩐지 퇴조할 느낌이다. "오늘날 불교계는 내가 보기에도 인재가 부족한 듯하오. 해서 말씀인데, 좀 길게 앞을 내다보자는 게 내 의견 이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일은 교세를 확장하자는 게 아니라 왜놈들과 싸울 수 있는 길을 트자는 게 목적 인 만큼 그것을 위해선 쓸 수 있는 연자이라면 모조리 모아 갈고 닦고 대비해가면서," "왜 소승이 그걸 모르겠소. 그걸 알기 때문에 아까 용운이에 대한 험 운운한 게요. 험이 있다는 것은 다름아니 오. 용운의 행적이 나쁘고 좋고 간에 그것이 소승 취향 안의 일이라면야 염려될 게 뭐 있겠소. 다만 두드러져 서 일을 하는 데 있어 오해를 살 만한 이유와 원인을 용운 자신이 가지고 있다 그것이오. 몇 해 전 일본으로 건너갔었던 용운이 무슨 심산으로 왜중의 가취법을 들고 나왔느냐, 가취법을 취하느냐 물리치느냐 그것은 모 두 어디까지나 중들간에 논의될 문제겠고 연후에 조치될 문제겠는데 지금 소승으로선 그것을 공박할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할 겨를도 없소이다. 허나 조선 불교계와 제휴할 것을 절실히 바라는 친일 중놈들게요. 파계승조차도, 불교도 시류를 쫓아 개화를 해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철없는 젊은 중들 역시 그것을 옳 다 할 용기는 못가졌을 게요. 그렇게 본다면은 용운은 용기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소. 하나 그것은 앞뒤를 살 피어 나갈 길을 강구하지 않은 저돌적인 만용이오. 그러니 일단은 교계에 크나큰 반대 세력을 만들었다는 허 점을 생각하셔야, 친일 중이든 반일 중이든 교계 자체 일로서 말씀이오. 그리고 또 교계 자체의 일이라고는 하 나, 친일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왜중의 대처풍을 받아들이자는 것은 교계 밖에서도 결코 유쾌한 일은 못 될 거 아니겠소? 다음 용운의 명분이야 조선 불교를 유신하자는 것이겠는데 나라가 망하고 머리 푼 것 같은 이런 시 국에 비록 탈속하였으나 그도 이 나라 백성임에 틀림이 없는 만큼 중이 장가가고 아니 가는 일이 대수요? 숨 끊어진 아비 시체 앞에서 장가 안 보내준다고 투정하는 패륜아하고 뭐가 다르겠소? 그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 해도 경망한 짓이었소. 중들은 고사하고 세인들한테 빈축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지요. 그리고 다음, 승려 가취 의 건백서를 낸 일이오. 이완용 송병준과 한통속이요 왜놈들이 뒷배를 보아주며 총애해 마지않는 김윤식 중 추원 의장인가 하는 그자에게 하필이면 건백서란 말씀이오? 그야 친일분자니까 왜풍 따르겠다는 건백서에는 관심을 가질지 모를 일이오만 용운이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소. 그러나 그보다 딱하게 된 일은 두 번째 건백 서가 어디로 갔느나, 윤도집도 아시다시피 통감 사내한테 가지 않았소? 합방조약이 체결되는 와중에도 말입니 다. 왜적이 이 나라를 약탈하여 통치하는 것을 합법으로 인정한 행위였다고 말한다면 용운은 뭐라 대답하지 요?" "그도 그렇소. 그 두 번 낸 건백서는 건백서의 내용보다 그렇지요. 김윤식도 뭣한데 이 나라를 통치하러 온 통 감 사내한테 냈다는 것은 입이 열 있어도 변명 못하게 생겼지요." "소승이 앞서 오해 살 만한 요인이 있다 한 것은 바로 그 점이오. 오해가 오해로 그쳤더라면... 그게 그렇게는 되지 않거든. 용운이 연해주에 갔을 때만 해도 일제 밀정으로 몰려 그곳 조선 사람이 두만강 물속에다 처넣은 일하며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갔다가 역시나 밀정으로 몰려 학생들이 권총을 쏘아서 지금 저렇게 체머리를 흔 들게 된 일하며 물론 용운이 밀정도 친일파도 아닌 걸 우린 알지마는," "그거야 어디 운용을 알아보고 그랬겠소? 중이니까 덮어놓고 그랬겠지요. 허허허... 중은 모두 친일분자로 본 거 아니겠소? 허허허..." "허어 이거 야단났소이다. 소승 해동하면은 간도를 한번 다녀올 생각인데 용운 꼴을 당하면 어쩌지요?" 혜관의 노여움은 자신의 말대로 자기 취향 안의 것이요 용운에 대한 윤도집 의견을 반대하기 위한 것은 아니 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일단 끝내고 윤도집 판단에 맡기는 눈치다. "가사에다 명패를 달고 가십시오. 성 반 날 일 이길승 반일승 허허헛, 아니면 깎은 머리에 모자나 올려쓰고 법 의 대신 양복을 입으시든가." "그러면은 또 왜헌병놈 총이 무섭구요. 양복보담은 중옷이 그놈들 눈 속여먹기가 쉬운데 말씀이오. 참아라 하 는 명패면 어떻겠소오? 이거 전후좌우 총구가 있대서야 입망 화정 도화 보행 등 그 어느것으로도 아직은 왕생 할 자신이 없으니 소승 좀더 살아야 하는데 말씀이오." "아암요. 좀더가 뭡니까? 오래 살아주셔야, 입적이야 앉아서 하든 서서 하든 물구나무로 하든 그것 다 공연한 호사구요. 스님이 여차하는 날이면 우리부텀 팔다리 짤리는 거요. 그는 그렇고 일단 용운에 대한 우리들의 생 각은 저에게 맡겨주시고 사실은 명분보다 실리니까. 큰 힘을 상대하자면 안팎 위아래 전후좌우 가릴 것 없이 유효적절하게 얽어두어야 하니까요. 명분을 따지잘 것 같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뭐니뭐니해도 회광이 들 고온 칠조약을 깨뜨린 것은 용운의 공로니 건백서 건은 상쇄되는 거요. 뭐 아직이야 우리하곤 줄도 닿지 않았 고... 우리 일을 위한 포석의 하나인데 쓰이든 아니 쓰이든 혜관스님은 용운과 자주 접촉을 가지도록 하시오." "소승도 그럴 생각은 하고 있소이다. 산중 깊이 들어박힌 중들이야 움직이려 하지도 않을 거구요." "아무튼 여러 가지 불미한 일들도 배불정책에 억눌려온 울분의 소이, 성급했던 면도 있었을 게요. 늙은 호랑이 가 잠든 사이 여우 토끼들이 까불었던 게요. 칠조약인가 그것을 깨고 회광의 종매를 매도한 지리산 중들의 패 기도 높이 사야지요. 내용을 모르고 회광에게 부화뇌동했던 중들도 많이 깨우쳤을 테니까. 허허 참 이러고 보 니 주객이 전도되었소. 중이 중의 욕을 하는데 동학인 내가 중을 감싸주니 말이오. 하하핫..." "하여간에 천지만물에는 목숨이 있어서... 서학이니 동학이니 그게 다 젊은데 불교는 너무 늙었는가보우." "그러니 혜관도 환속해서 우리 동학으로 오시오. 허허헛..." "생각해봅시다. 어차피 땡땡이중 부처님도 달가워하시질 않을 테니... 실로 난감하오. 양새 낀 나무처럼 꿈자리 마저 사납소이다. 천중들이 나타나서 이놈 혜관아! 중생들이 와글바글 이놈 혜관아! 우관스님 형제분도 번갈아 서, 우관스님이 나타나서 이놈 혜관아! 김장수는 김장수대로 이놈 혜관아!하하핫... 죽을 지경이오. 몸뚱이가 두 개나 있었으면 쓰겄소. 사바를 싸돌아 다니는 혜관하고 산중에 있는 혜관하고 말이요. 하하핫..." "그러니 동학이 옳다는 게요. 산 중도 사바도 한 심중에 있으니 말씀이오. 허허헛..." 밤늦게까지 얘기를 하다가 윤도집은 안으로 들어가고 혜관과 석이 자리에 들었다. 혜관은 이내 코를 골았고 석이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들의 얘기 하나하나를 되새겨보느라고. 이튿날 조반 먹기 전에 일찍 일어난 석이는 윤도집네 넓은 마당을 쓸어주고 물을 길어다주고 또 나무도 패주 었다. "딸이 있었으믄 사위감인디." 쌀쌀해 보이던 윤도집의 마누라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서 좋아라 한다. "나는 아들만 삼형진디 총각 성씨는 머라 허는고?" "성은 정가고 이름은 석입니더." "석이... 우리집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댕기지마는 마당 쓸어 주고 물 질어주는 사람은 못 봤어야. 나무 될 것 같으면 덕잎 적부텀 안다 안 혀? 큰사람 될 것이여." 아들이 삼형제라 했으나 집안에는 유도집 마누라말고 사람의 그림자라곤 볼 수 없었다. 석이 차려온 조반상 앞에 앉았을 때 별안간 윤도집이 소릴 내어 웃는다. "망둥산이구먼." 석이 밥그릇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마누라 본시부터 손이 작은데 너를 썩 잘 본 모양이라, 허헛..." 혜관도 석이 밥그릇을 복 크게 웃어젖힌다. 윤도집 마누라가 인색하기로 소문나 있는 눈치다. 그것을 짐작하면 서도 석이는 수치감을 느낀다. 조반이 끝나고 한나절이 훨씬 지난 뒤 "석아." 혜관이 점젆게 부른다. "예." "나하고 나가자." 석이는 혜관을 따라 구례 장터로 나섰다. 어제는 텅텅 비어 있던 장터가 오늘은 와글대고 있다. 장날인 것이 다. 법의를 펄러덕거리며 이 전 저 전을 기웃기웃 기웃거리는 혜관의 모습은 갈데없는 파락호, 파계승이 분명 타. 엄지손가락으로 콧등을 문지르는 꼴하며 계집 꽁무니를 바라보는 눈빛하며. 중하고 갓전하고 무슨 상관인 가. 양태갓을 들여다보고 있던 혜관이 묻는다. "석이 너 손재주는 있는 편이냐?" "없십니더." "으음... 장사는?" "그것도 모르겄십니다. 해보지 않았으니께요." "그도 그렇겠군." 갓전 앞에서 물러난 혜관은 아까처럼 기웃거리기를 그만두고 성큼성큼 장터를 빠져나간다. 석이도 빠른 편이 지만 뛰다시피 혜관의 뒤를 쫒는다. 장터에서도 한참을 지나서 혜관은 대장간 앞으로 간다. "박서방 계신가?" "예, 스님" "음." 대장간 안으로 들어간다. "추운 날엔 일할 만하겠군." 풀무질하던 소년이 석이를 힐끗 쳐다본다. "그 대신 흥정이 뜸한께요." 대장간 임자 박서방도 불간 속에 쇠붙이를 넣으며 석이를 힐끗 쳐다본다. "박서방." "예." "이 아이 쓸 만한가?" 혜관은 석이를 가리켜 보인다. "실팍하게 뵈는디요." "석아." "예." "힘이 좋은가?" "예, 심은 있습니더." "너 이곳에서 일 좀 배워볼 생각 없나?" "예?" "물지게 지는 것보담은 나를 게야, 나중에 형편따라 안 서먹는 일이 있더러도. 사람이란, 더욱이 상놈이란 재 주 한 가지씩은 익혀놔야 돼. 이곳에선 널 부려먹는 게 아니라 가르쳐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하겄십니더." "오냐. 잘 생각했다. 말도 없는 놈이 생각 하나는 빠르구먼. 하하핫..." 박서방은 혜관 말에 대해선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이놈아 한눈팔들 말고 풀무질이나 심들기 혀." 소년을 나무랐을 뿐이다. 대장장이지만 우락부락한 구석 없이 차분하고 덤덤해 보이는 박서방이다. 혜관도 박 서방의 의향 따위는 물어볼 생각을 않는다. "가자." 석이를 데리고 대장간을 훌쩍 나와버린다. 뛰다시피 혜관 뒤를 쫓아가며 석이 부른다. "시님!" "인저 입 열었군." "저어 말심 하나 묻겄심더." "물어봐라." "시님은 쌍계사에 기싰다 한께 저이 아부지를 아시겄다 짐작이 갑니다마는 윤도집... 그 어른께서는 아부지를 우찌 아시는지 말심 좀 해주시이소." "내가 얘기를 했지." "예..." 잔뜩 별러 물어본 말이어서 힘이 쓱 빠져버린다. 장터에서 돌아온 혜관은 서둘러 채비를 차리고 떠났다. 윤도집도 사랑을 비운 채 출타중이었고 집안은 쥐죽은 듯 괴괴했다. 석이는 낡은 갓이 걸려 있는 벽을 쳐다보며 혼자 생각에 잠긴다. '시키는 대로 하겄다 했으니 해야겄지마는 어매는 아아들 데리고 우찌 살 긴고... 내가 나와부리믄 어매는 품 을 더 들어야 할 긴데.' 속이 쓰라리다. 그러나 혜관과 윤도집이 자기를 인정해주었다는 느낌은 상당히 강렬한 것이었다. 어젯서녁 상 면을 했을 때 "우리가 선을 볼라 했더니 정한조 아들이 우리 선을 보러 온 모양이라. 허허헛... 그만하면 되었구먼." 그 순간 석이는 이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하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석이는 민감하게 느꼈다. 두 사람이 다 평범 치 않으며 그 말도 평범하게 지나쳐버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면 옳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선 복종하는 것이 또 당연한 일로 석이는 판단한 것이다. 하물며 그들은 큰일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그 큰일을 위해 가는 것은 동시에 아비 원혼을 위로 하는 것임을, 석이는 뚜렷하게 자각한다. 뻐근하게 양어깨를 누지르는 것 같은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 짐을 지고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앞으로 가리라 결의한다. 어미의 가랑잎같이 야윈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손 등에 피딱지가 앉았던 누이동생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등잔불 밑에서 물레를 돌리던 젊은날의 어미 얼굴이 스치고 간다. 낚싯대를 메고 나가면서 석아 니도 따라갈라나 하던 아비 모습이 스치고 간다. 관수는 약속한 대로 돌아왔다. "낯이 설어서 대기 거북했제?" 관수는 늙은이처럼 지쳐 있었다. "아니오." "음. 아무튼 나 잠부텀 한심 자야겄다." 방바닥에 나자빠진 관수는 늪에 빠져들어가듯 잠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얼마 후 관수는 이를 갈기 시작했다. 가 위눌린 듯 헛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석이는 문종이를 뚫고 들어오던 햇빛이 차츰 문살 위쪽으로 쫓겨 올라가 는 것을 쳐다보고 앉아 있다. 일종의 형용할 수 없는 허탈이 온다. 산봉우리 위에 올라선 것처럼 석이의 결단 은 어려웠던 것이다. 석이는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지게를 지고 진주 성내를 돌 아다니던 모습도 자기 아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할 자기 모습도 생판 딴 사람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신발을 벗어들고 아부지! 아부지이! 외치던 그 악몽, 총검이 바로 코앞에서 번득이고 하 늘이 샛노랗던 악몽, 그 악몽 속에서만 자기 자신이 생생하게 살아서 핏줄이 꿈틀거리는 것을 석이는 절감한 다. '왜놈을 치자! 왜놈을 직이자! 우리의 원수 왜놈을 몰아내자! 혜관스님하고 윤도집 어른을 받들자! 내 뼈가 부 서지고 피가 마르고 할 때꺼지.' "어이구 많이 잤다." 하늘이 온통 싯뻘겋게 타들어가는데 갈가마귀떼가 울면서 날아가는데 관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하 고 나서 석이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 눈에 생기가 영롱하다. 가위눌린 것처럼 헛소리를 지르고 늙은이처럼 지 쳐 보이던 얼굴은 비 맞은 푸성귀처럼 풋풋해졌다. "시님은 떠났일 기고 도집어른은 아즉 안 오셨는가배." "안 오셨는갑십니다." "그러믄은 오늘 밤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하동으로 해서 진주로 가자." "야." "석아." "야?" "우떻더노? 밤숭이 겉은 시님하고 대쪽같은 도집어른은?" "시님은 막 성을 내시는데 인정이 많은 것 같고 도집어른은 유하게 하시는데 무섭십디다." "머?" 다소 놀라는 표정이다. "첫눈에 그만큼 볼 줄 알믄... 제법이다." 싱긋이 웃는다. "형님이 밤숭이니 대쪽이니 해놓고서." "요것봐라? 니도 사람 놀릴 줄 아나? 하하핫...하하핫..." 관수는 뱃속에 갇힌 찌꺼기를 모조리 토해내듯 기분 좋게 웃어젖힌다. 윤도집은 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삼형제나 된다는 아들들, 며느리도 있을 법한데 여전히 딴 사람 기척은 없 고 안에서는 신병이 잦은 듯안 윤도집의 마누라 혼자 꼼지락거리고 있는 눈치였다. 주인도 없이 나그네끼리 편하게 잠을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 윤도집 마누라의 딸이 있으면 사위 삼고 싶다는 치사를 들으며 이들은 길 을 떠났다. "석이, 니 말도 없이믄서 실없이 인덕이 있구나." 석이 이모저모를 새삼스럽게 관수는 살펴본다. 잘생긴 얼굴도 못생긴 얼굴도 아니다. 다만 어글어글한 눈은 결 코 그를 업수이여길 수 없는 위엄을 나타내는 것 같고 또 한편 그의 눈은 별화무쌍한 심중을 말 대신 상대편 에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싶었다. '이눔아아가 물건이 되기는 되겄다. 도집어른 하신 말심도 그렇고 그 어른이 여간해서 그렇기는 함부로 말심 을 안 하시는데, 선을 뵈러 온 기이 아니고 선을 보러 왔다 안 하시던가배?' 두 사람은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썰물 때라 하류로 향해 내려가는 뱃발이 빠르다. 상처의 자리, 아비 이장 때 는 하동읍에 들렀을 분 그 엄청난 환난을 겪은 평사리를 떠난 뒤 뱃전에서나마 바라보기는 처음이다. 관수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으나, 석이는 나룻배가 평사리 나루터에 닿았을 때 그 마을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어 금니를 깨물고 돌아서서 강물을 내려다본다. 평사리에서는 초로의 아낙 한 사람과 여남은 살 먹은 머슴아이 두 명이 배에 올랐다. 아낙은 크다만 보통이를 안고 있었다. 배가 다시 햐류를 향해 내려가는데 팔짱을 끼고 보퉁이 옆에 오소소 떨며 앉아 있던 아낙이 별안간 한 팔을 뻗치며 "저기, 저어 우, 웃동네." 하다 말고 무엇에 놀랐는지 다음 말을 꿀컥 삼켜버린다. 배 안을 두리번두리번 살핀다. 보퉁이 옆에서 일어선 아낙은 비틀거리며 관수 옆에까지 다가간다. 살며시 옷자락을 당기면서 "저기, 저어 관수, 니가 관수제?" 속삭인다. 야무네다. "야. 아지매 오래간만임다." 뜻밖에 활달한 관수 태도에 야무네 편이 오히려 안절부절이다. "석아." "야." 완강히 강물만 내려다보며 돌아서질 않는다. "석아. 야무어무니다." "아니 석이라 카믄." 석이 돌아섰고 야무네는 석이를 보는데 미처 뭐라 해야 할지 말을 잊은 듯 두 눈이 싯뻘개지면서 눈물이 글썽 글썽 돈다. 석이 눈도 벌개진다. "니가, 니가 우찌," 치마꼬리를 걷어 눈물을 찍어낸다. "아지매는 어디 갑니까?" 관수는 여전히 태연하게 묻는다. "작은아이가 읍내서 나, 남우집살이를 하는?, 거, 거기 옷 갖다 주로 간다." "살기가 우떻깁니까." "우떻다 할 수도 없고 야무가 농살 지으니께 입에 풀칠은 하지마는... 그래 석이 너거 어매는 잘 있나?" "고생이지요 머." "하기사... 이자는 니도 다 컸고나. 관수가 안 그랬이믄 몰라볼 뿐 안 했나." 아슴푸게한 기억이지만 오줌을 쌌다 하여 ?만이었던지, 키를 쓰고 소금 얻으러 간 아이에게 웬 소금 주었느? 하면서 주걱으로 뺨을 때리던 야무어매 모습이 석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런데 어디 갔다오는 길고." "갔다오는 길이 아니라요 지금 하동 가는 길입니다. 야아가 설에 바빠서 아배 산소에 못 가봤다 캄시로," 관수가 대신 대꾸한다. "그러게, 석이아배 산소가 읍내에 있지. 바람결에 들으니께 이장해 갔다 카든가?" "이장은 했지마는 본시 있던 자리 근처로 옮겼으니께요." "그래 잘했다. 자석이 있으니께, 글믄 관수 니는 석이 식구랑 함께 있다 그말가?" "앙입니다. 지가 무신 정한 거치가 있겄십니까. 지나가는 길에 들맀십니다." "장개는 갔나?" "거치도 없는 놈이 무신," "어짓밤에 태인서 온 도부꾼이 있었제라우. 경찰서라 허든가 주재소라 허든가? 쑥밭이 됐다는 이약을 허잖겄 어?" 화개서 오는 장사꾼풍의 사내가 동행인 긋한 사내엑 소근거리는 말이다. "무신 말이여라? 쑥밭이 됐이야?" "불을 질럿 옴싹 태워부맀는디, 순사놈들은 산으로 끌고가서 옷을 벗지고 직있다잖여?" 관수 입가에 경련 비슷한 미미한 웃음이 번진다. "우짜든지 아금바리 해가지고 옛말 하고 살아라." 야무네가 석이보고 이르는 말. "헌디 그 사람들 순사옷을 입고 있었다니 요상한 일 아녀? 그게 참말인지 아닌지 모를 일이나," "참말일 것 겉으면 뻔혀. 그런 일이야 의병 아니고 뉘가 할 것이여?" "동학이 그랬다는 소문도 있는디, 본시부텀 태인 그쪽 곳에는 동학이 기승했으니께." "보시이소." 관수는 슬며시 밀고들어가는 투로 말을 건다. "왜 그러지라?" 사내는 경계심을 나다내며 방정스럽게 어미를 오그려붙인다. "지금 하는 말심을 듣자니께 태인서 무신 일이 일어났다 캤는데 그기이 정말이오?" "글씨, 이 눈으로 똑똑히 못 봤인께로 장담은 못할 것이오." 공무니를 빼는 어투다. "음... 그거는 그렇겄소만 동학당이 했다는 그런 소문도 있더라는 그 말심이오?" 관수의 표정이 험학해진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글씨, 그, 그런 모앵인디, 아니 나도 들은 이야긴께요... 세상엔 헛소문도 혀다하지 않는개비여?" "흥," "글씨 태인이 본시 그런 곳이니께로 그런 이약도 나올 법하지라우. 우리네야 머 도통 드런 물정은 모르는디," "별의별 놈의 개떡 겉은 말이 다 나도는구마. 동학당 그 직일 놈들이 왜놈하고 붙어묵은 지가 언제 일이라고? 동학놈들이 정말 그런 일을 했다믄 내손가락에 장을 지지겄소." 관수는 퉤!하고 강물에 침을 뱉는다. "하기는 동학당이 왜놈한테 넘어갔다는 소릴 듣기는 들었는디..." 상대편의 험한 얼굴도 그렇고 하여 사내는 여전히 꽁무니를 빼려 든다. "어째 좀 수상쿠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사내는 펄쩍 뛴다. "수상타니 무신 말심이여라우?" 관수는 껄껄 소리내어 웃는다. 웃다가 "형씨, 안 그렇소? 생각해보시오. 태인서 머 그렇고 그런 일을 동학당이 정히 했다 할 것 겉으믄 일본 쪽에서 는 폭도요 역적이니 잡아다가 모가지를 댕강 짜를 일이나, 허 참, 그렇지 않느냐 그 말이오. 조선국에서 볼 것 같으믄," 사내 눈이 뱅글뱅글 돈다. 약삭빠르기로는 그쪽인들 못할까? 말하자면 내 나라 내 땅에서 남의 나라 남의 사 람 눈칫밥을 먹게 된 백성이고 보면, 자아 그렇다면 이 친구는 어느편 사람이다냐? "생각해보시오 형씨, 일본의 대역죄인은 이 조선나라 충신이다! 이치가 안 그렇소?" "글씨 그러니께로 그기이 우떻다는 말심이랑가?" "그러니께 왜놈 종이 된 지가 오래인 동학당놈들이 치키세워주는 소문이다 그거 아니오? 내가 수상타 한 것은 동학을 와 치키올리주는가, 형씨가 말심이오?" "아 아니 이 무신," "형씨는 혹 동학당이라는 것하고 한통속이 아니오? 하하핫... 우리한테 듣기 좋은 얘기는 왜놈들한테 있어서 과히 그렇지도 않을 기고 모가지가 댕강 날아갈, 하하핫..."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꼬아도 한두 번이 아닌 관수 말에 사내는 휘휘 말려든다. 혼돈에 빠진다. 갈피를 잡을 수 없으면서 겁이 난다. "가, 가당치도 않은 이약, 누, 누굴 잡으려고, 동학하고 한통속이긴 커녕 서학도 모리고 아아 서학이긴커녕 남 학 북학도 모른당께!" 팔을 휘젓는다. "하하핫! 으하하하핫! 남학과 북학이라? 에이 여보쇼. 그런 기이 세상에 어디 있다 말이오. 내 하도 형씨께서 겁을 먹고 버얼버얼 떨기에 객담 좀 했수다. 하하하핫..." "석이는 잠자코 관수 웃음 소리를 듣고 있었으나 야무네는 불안해 하는 눈빛으로 관수를 숨어본다. "시답지 않은 소문 몇 마디 말했다가 이런 봉변이 어디 있당가? 간밤에 꿈자리도 안 나빴는디," 투덜투덜했으나 사내는 관수를 두려워하여 힐끔힐끔 숨어본다. "뭐 심심은데 옷깃만 스치도 전생의 연분이란 말 못 들었소? 한 배 타고 감시러 코빼기만 치다보고 가는 것보 담이사 낫지 멀 그러요." 읍내 나루터에서 내린 선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지매 그라믄 잘 가소." 석이 관수가 인사를 하자 야무네 "그, 그래 이렇기 만내가지고 언지 또 보겄노?" 코맹녕이 소리다. "머 안 죽고 살믄 다시 만낼 날 안 있겄소." 갈길이 바쁜 두 사람은 급히 발을 떼놓는다. 한참을 가는데, "석아! 석아이--" 야무네 외치는 소리가 빈 거리, 이른 아침 거리에 메아리쳐 들려온다. 돌아본다. 야무네가 보퉁이를 들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허둥지둥 뛰어온다. "아이고 숨차라. 아이고," 야무네는 숨을 할딱이며, 조그마한 것을 석이 손에 쥐여준다. "아무래도 그냥 가기가 서분해서, 마침 떡장사가 있길래 샀다. 가믄서 입가심이나 해라." "아지매도 참," "이냥, ... 서분해서... 부디 아금바리 해서 옛말 하고 살아라이? 우리사 머 지는 해니께..." 야무네는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 간다. 우두커니 손에 쥐여준 떡을 보다가 야무네 뒷모습을 보곤 하는 석이 어 깨를 툭 친 관수 "어 가자. 간장 녹을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 산 보듯 강 보듯, 가자!" 9장 정염 마을 숲속에서 뻐꾸기가 운다. 바람결따라 멀리서 들려오는가 하면 가까이, 무척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기도 한 다. 멎었다가는 또 운다-- 차라리 저놈의 새 울지나 말았으면 이 밤이 이리 적막하고 길지는 않았을 것을, 봄 이 온 것도 아니 생각했을 것을-- 소복단장한 여인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등잔불을 바라본다. 밤길을 오는 죽 은 남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이년아! 내 죽은 지 몇 달이 되었다고 사내 맞일 생각을 하노! 무덤 위 띠잔지에 부채질하는 년보다 한술을 더 뜨는고나. 몹쓸 계집!' '야아. 맞소. 나는 몹쓸 계집이오. 이녁 생시 적부터 몹쓸 계집이었소. 길손이 오는 언덕길만 치다보믄서 살았 이니께요. 밤마다 이녁심소리를 들으면서 외간남자 생각만 했이니께요. 죽어서 이내 몸이 천 조각 만 조각이 난다 해도 잊을 수가 없었소. 내 육신이 썩고 넋이 허공에 뜬다믄 모를까 잊을 수 없었소.' '헛허어. 기차게 총기 좋은 조물주로군. 한 해 봄쯤 잊을 법도 한데...' 환이는 술잔을 기울인다. '산에는 진달래가 팔 텐데 말예요.' '...' '그 꽃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싶어요. 싶 어...' 여자의 목소리다. 별당아씨의 음성이다. 진달래 꽃이파리다. 꽃송이다. 목소리는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가 된다. 붉은 눈송이가 된다. 핏빛 빗 줄기가 내린다. 핏빛 눈물이 내린다. 환이는 술잔을 기울인다. '새야. 봄밤에 우는 새야. 운다. 울어? 헛허어 어머님, 아니 최참판댁 마님, 당신이 세상을 하직한 지도 어느덧 십 년, 십 년 세월이 지났소이다. 속으로만 우시다가 세상을 떠난 당신이나 꿈속에서만 울며 사는 이놈의 신세 나 생각해보면 우리, 모자이면서 모자가 아니었던 우리, 그 기구했던 인연과 핏줄을 이제는 잊을 만도 한데 말 입니다. 어머님께서는, 아니 최참판댁 마님께서는 그래 저승서 며느님 아드님을 만나셨겠습니다. 흐흐흐...' "하하핫, 하하하핫. 하하핫..." 별안간 터져나온 웃음 소리에 "아니 성님 와 이러시오?" 강쇠가 놀라며 쳐다본다. 환이는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등잔불이 깜박거리는 방안에서 웃음 소리는 사라지고 종내 환이는 말이 없다. 시각을 재듯 천천히 술잔에 술을 붓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리고 결코 말을 하 지 않는 환이의 평소 술버릇에 익숙해져 있는 강쇠이지만 어쩌다가 한번씩 웃어젖히는 그 웃음 소리엔 번번이 놀라곤 한다. '성님 오늘 밤에는 말 좀 허소. 무슨 심산으로 죽은 인이 집에 와서 묵고 갈라 캤는지. 이놈아 너를 장가 보내 기도 심이 드는고나, 그렇기 객쩍은 말심이라고 한분 해보는 기이 좋겄구마는, 그라믄 나는 또 성님 아무리 그 렇지마는 친구 마누라를 그럴 수 있겄십니까? 할 기고요. 흥 생각은 꿀떡 겉으믄서 아닌체, 네놈 낯짝을 보면 다아 안다, 생각이야 꿀떡 겉지마는 꿈속에라도 인이를 만내믄은 우찌 낯을 치키들 것입니까, 이놈아 입술에 붙은 밥풀 같은 소리 마라. 산 놈의 계집도 뺏는 놈이 있는데 죽은 놈 계집쯤 그거는 적선을 하는 거다 적선. 글씨요, 그거사 그렇겄소마는 아무리 과부라 캐도 이 사팔떼기 강쇠놈한테 비하믄은 천양지간인데 일이 수울 하겄십니까? 병신 같은 놈, 범의 장달이 겉은 놈이 낯짝 반반한게 무섭냐? 그럴 양이면 그놈의 연장 싹둑 잘 라서 섬진강에다 내버려. 아이구 성님도 고자가 되는 곰보, 곱새등이 계집도 날 마다할긴데 그 일은 우짜고 요?' 넉살좋게, 밀밭 옆에도 못 가는 강쇠는 술이라도 잔뜩 취한 사람처럼 마음속으로 말 없는 환이의 말까지 자신 이 지껄여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츰 답답해진다. 커다란 덩치가 주체스러워진다. 제에기, 오가는 말이라도 있 어야 안주 한 점이라도 집어묵지, 술 좀 마셔보라는 허튼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싶어지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 오늘 밤과 같이 환이는 술을 마시고 강쇠는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는데 강쇠가 화가 났다. 덥석 덤벼들 듯 술사발을 빼앗은 일이 있다. 씩씩거리며 "내라고 술 못하라는 법 없지." 연거푸 세 사발의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보았으나 숨이 막히고 눈앞이 노오래지고 사 람의 얼굴이 두 개 세 개로 보이고 천장은 올라갔다 내려왔다 종내는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 후 강쇠는 누가 뭐래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제에기, 이렇기 마주보고 앉아서 도를 닦는 것도 아니겄고,' 그러나 눈을 내리깔고 시간을 재듯 술잔에 술을 붓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환이의 변함없는 동작에는, 매 번 느껴온 터이지만 강쇠는 놀라움과 숭배감을 금할 수가 없다. '장사다 장사라. 저런 것이 참말로 장산 기라.사램이 우짜믄 저렇기, 심줄 하나하나가 강철로 된 거맨치로 천 하장사하고 잠 안 자기 내길 한달 것 같으믄 성님이 이길 기구마. 잠은 알 잘수록 눈은 초롱초롱해지고 술은 들어가면 살수록 정신이 마알개가지고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오래기도 까딱 안 한께로, 바윗덩이가 저렇겄지. 심 으로 말할 것 같으믄 나도 넘한테 뒤지지는 않을 기다마는 저런 거는 심도 아닌 기고 깡다구도 아닌 기고, 마 신이라도 들린 사람이라카는 기 옳을 성싶으구마는.' 속으로 중얼중얼하던 강쇠는 "하기야 술 마시는 사람하고 가만히 앉아서 치다만 보는 사람하고 못 견디는 편은 어느쪽인가 뻔하제." 혼잣말인데 그러나 큰소리로 말하고 나서 "성님 나 먼지 자겄소." 대답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 술을 마시는 심사는 아마도 니 죽고 나 죽자는 그런 거는 아닌지 모르겄소?" "..." "술이 아니라 이놈의 내 원수야,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해보자 하믄서 마시오?" "..." "내 술꾼하테 들은께로 술이란 떠들고 씨부리고 해감서 마시야 해독이 된다 카더마는," "..." "제에기, 참말이지 내겉이 미련한 놈 아니믄 제에기랄! 벌써 달아났일 기구마는," 투덜거리다가 강쇠는 옆방에 앉아 있을 젊은 과부도 단념을 하고 벽을 향해 눕는다. 뭉긋이 겨를 태운 온돌방 은 썩 기분이 좋다. 밤이슬에 젖은 옷도 어느새 말라 가슬가슬하다. 여자 생각보다 잠이 먼저 온다. 강쇠는 드 러눕자마자 이내 입술을 불면서 잠이 들었다. '발 닿는 대로 길을 떠나버릴까.' 낮에 산마루를 돌아올 때 이불 봇짐을 등에 지고 상투는 헝클어 진 채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며 가던 사내 생각이 난다. 사내 뒤를 촉새같이 생긴 아이 업은 아낙이 따라가는 것이었다. "이년아! 장석걸음을 걸을 기가! 내 돋으믄 내비리고 갈 긴께 알아 하라고 ." 사내는 아낙에게 욕설을 하다가 다시 환장한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면 마루터를 돌아갔다. 과부는 환이 뒷간에 간 뒤 술병에 새 술을 채워놓았다. 잠이 깉이 든 강쇠는 여자가 들어온 것도 나간 것도 알지 못하고 꿈속에서 달아나는 여자를 잡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여자는 산을 기어오르고 가까이 다가가면은 돌아서서 돌을 굴렸다. '보소 아지마씨, 내 말 좀 들어보소! 청춘이 구만리 겉은 팔자 안 고치고 우찌 살 깁니까? 보소! 아, 아지마씨 요!' 여자는 또 산을 기어오른다. 절벽을 타고 오른다. 나무 위, 한 그루 소나무 위로 올라간다. 나뭇가지가 휘는데 용케 가지를 딛고 서서 여자는 웃는다. "아이고! 그만 참, 내, 내 안 잡을 긴께 내, 내리오소오! 아지마씨요오--" 술상을 가지러 온 것은 자정이 지나고도 훨씬 후 사경이 가까워졌을 무렵이다. 과부한테선 동백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허리를 구부리고 긴 두팔이 술상 쪽으로 뻗치는 순간 여자의 눈은 환이 이마빼기에 와서 화살처럼 꽂혔다. 외면할 겨를도 없이 아래로 미끄러진 시선이 환이의 눈동자를 쏜다. 여자의 눈동자가 파들거린다. 필 사적으로.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절망의 몸부림이다. 사내의 눈동자는 바위벽이었다. 잡지도 놓아주지도 않 는다. 여자의 흰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쓸고 그리고 사라졌다. 강쇠의 입술에선 풀무질이 요란했다. 정좌한 채 환이는 깜박거리는 호롱불을 쳐다본다. 호롱불은 미친 듯, 춤을 추듯 관솔불로 둔갑한다. 아득한 그날의 관솔 불로 둔갑한다. 잠든 것처럼 죽어서 누워 있던 여자, 관솔불은 춤을 추고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여자는 죽어서 누워 있고 환이는 앉아 있는 것이다. '여보?' '...' '저 산새 우는 소리 안 들리세요?' '...' '새들도 밤이 싫은 거예요. 아침이 좋아서, 햇빛이 환한 게 좋아서 저리 지저귀나봐요. 캄캄한 밤이 싫은 거예 요. 나도 저 새들같이 한번 날아보았으면, 산속을 한번만 거닌어보았으면.' 북변의 끄트머리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은 골짜기의 밤, 환이는 완전히 그 밤 한가운데 정좌하고 있는 것이다. '여보?' '...' '나 명년 봄까지 살 수 있을는지...' '...' '산에 진달래가 필 텐데 말예요. 그 꽃잎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음성은 진달래 꽃잎이 되고 꽃송이가 되고--그 꽃잎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 고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싶어. 밤길 가는 노새의 요령같이 멀어져간다.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 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바다, 핏빛 같은 붉은 비가 내린다. 칠흑 같은 검은 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내린다. 오랫동안, 이년 가까이 소식 없었던 나그네가 찾아온 것이다. 북변 끄트머리 어느 깊은 골짜기, 얼음조각 같은 달은 검은 능선 위에 걸려 있는 밤으로부터, 입은 저고리를 벗어 시체를 감싸 묻은 그 무덤으로부터 나그네가 찾아왔다. 등잔의 심지를 줄인다. 벽을 보고 돌아누웠던 강쇠가 어느덧 벽을 등지고 이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목침을 베 고 팔짱을 끼고 모로 누운 모습은 거대하고 의젓하다. 그러면서도 오므렸다 폈다 하며 풀무질을 하는 입술 모 습이 천진하다. 우두커니 강쇠가 자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환이 방문을 밀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순간 안방의 불빛이 황망하게 꺼진다. 중천에 조각달이 댕그머니 떠 있었다. 밤바람이 부드럽다. 부드럽고 야정을 실은 바 람은 멀리서 왔다가 이십 호 가량 옹달샘 같은 마을을 쓸고 숲 쪽으로 넘어간다. 사립문을 밀고 나와서 환이 는 휘적휘적 마을길을 지나간다. 마을과 동떨어진 서편 언덕을 향해 걸어간다. 언덕 중턱에 뿌리박은 한 그루 의 소나무, 가지가 아래로 휘어져 내리덮인 그곳에 샘이 있다. 샘터까지 온 환이는 두 손을 모아 서너 번 물을 떠마시고 얼굴을 씻는다. 소매 끝으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문지르고 가까이 있는 빨랫돌 위에 걸터앉는다. 물 긷는 이 없는 한밤중의 샘에선 철철 물이 넘쳐흐른다. 넘친 물은 작은 도랑을 따라 졸졸졸 소리내며 흐른다. 물소리와 이따금 이는 바람소리, 뻐꾸기 울음. 환이는 곰방대에 담배를 재서 부싯돌로 불을 댕긴다. 손이 가느다랗게 떤다. '어디로 그만 훌쩍 떠나버릴까?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혜관스님 대신 내가 간도로 갈까? 가면 못 돌아오겠 지. 못 돌아올 게야. 못 돌아온들 어떠한가.'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로 저만큼 하얀 자락이 흔들리면서 이곳을 향해 오는 것이 보인다. "...?" 급히 담배를 빨아당긴다. 빨아당기면서 응시한다. 하얀 자락은 보다 가까이 다가온다. "손님." 곰방대를 입술에서 뽑아 손에 쥐고 환이 일어선다. 과부, 죽은이의 아낙이다. "손님 용서하시이소." "..." "아무래도 잠을 잘 수가 없었십니다. 내일이믄 손님은 떠나실 거 아닙니까?" "그렇소." 퉁명스런 대답이다. "그러믄 앞으로는 좀체로 못 보겄소." "..." "그렇기 생각을 한께... 말심이라도 해보고 저버서, 염치를 무릅쓰고 나왔십니다." "할말 있으면 해보시오." "예." 여자는 똘똘 말아붙이듯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땅 위에 쭈그리고 앉는다. 환이를 보는 것도 아니요 아니 보 는 것도 아닌 그런 어중간한 방향을 향해서. 담뱃재를 떨어버리고 천천히 곰방대를 옆구리에 찌른 환이는 빨 랫돌 위에 도로 주질러앉는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나왔십니다." "..." "부끄럼을," "부끄럼이나마나 말해보시오.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드리겠소." "아, 아닙니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수절하는 과부가 아닌 기생이다 생각하믄서 말입니다, 활달한 기생이다 생 각하믄서. 예, 지는 애당초부터 기생이 됐어야 할 팔자를, 잘못 길을 들었십니다. 부끄럼을 부릅쓰고 목숨을 걸 믄은 세상에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겄소?" 여자의 음성은 차츰 가라앉았고 어둠 속에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지는 여기 오믄서 생각해보았십니다. 길 가다가 만나서 허물없이 신세 얘기를 하는 나그네끼리, 그렇기 생 각한다믄 어려블 것도 없일 성싶었고 사램이란 한을 품고 죽는다믄... 풀 수 잇다믄 한을 풀어보자. 예, 그렇기 생각을 했십니다. 말이 여염집 아낙이지 풍류를 좀 알았다는 기이 벵이었던지 모르겄소." 환이는 구부정하게 등을 구부리고서 눈만 치켜뜨고 방금 여자가 걸어온 어둠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인이의 처 선산댁은 그 자신이 활달한 기생으로 자처하고 왔노라 했고 풍류를 좀 알았다는 게 병이었던지 모 르겠다 했는데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풍류를 좀 아는 정도가 아니다. 여자는 한량과 기생들의 분위기 를 가까이 느끼며 성장했다. 그에게는 두 언니가 있었다. 사십 초로에 동가식 서가숙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큰 언니는 젊었던 한시절 한량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진 명기였다. 둘째언니는 가무나 용색이 언니만 못하여 소위 나무기생으로 그 존재가 미미하였으나 대신 언니 뒷시중을 들면서 알뜰하게 축재한 덕분에 지금도 진주 기방 사회에선 제법 콧김이 센 존재다. 기생딸들 덕분에 호강을 하며 살던 선산댁 모친은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본 시는 양반이었으나 오래 전부터 농사꾼으로 탈락된 인이에게 집 한칸까지 마련하여 막내딸을 시집보냈던 것이 다. 그러니까 숫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여느 아낙들과 선산댁은 다른 점이 많았었다. "삼 년 전에 손님은 우리집에 오시서 하룻밤을 지내고 가싰십니다. 그러니까 손님은 오늘로 네 분째 오신 것 이오. 지는 삼 년 동안을 길목을 바라보믄서 살았십니다. 처음 손님을 한분 보고는, 그때부텀 꿈속에서만 살았 던 것 겉소. 길목을 바라보는 일이라도 없었더라믄," 음성이 확실해지고 대담해진다. 교태는 아니었다. 솔직했다. 고백같지도 않고 신상 얘기, 나그네끼리 허물없이 하는 말 같았다. "처음에는 남편 보기가 무서벘십니다. 하늘이 무섭고 세상사람들 눈도 무서벘십니다. 제삿날 멧상을 올릴 적에 는 겨울에도 얼굴에서 땀이 떨어지더마요. 죄 많은 계집, 눈이 시퍼런 서방을 두고 외간남자 생각으로 밤을 지 새는 몹쓸 계집, 그러나 사람이란 미욱하다 하까요? 몹쓸 년 하면서도 어느듯 그런 생각에 익어부리고 괴롬이 없는 날이 차라리 이상터마요." 환이는 조롱하듯 말했다. 여자는 얼굴을 숙이며 입술을 깨문다. "하기는 손님 맘 대강은 짐작하였소. 뜻이 없는 것을 짐작하였소. 짐작하니께 똑똑히 알고 단념하리니 생각했 을 겁니다. 계집이 꼬리를 치는데 바람기 아니게 대할 남정네가 있겄십니까? 추잡한 계집이라 생각해도 억울 할 것 한푼 없소." 환이는 낮게 웃는다. "나는 다만 댁에게 동정을 아니 했을 뿐이오. 형수를 덮치고 형수를 뺏아 달아났던 놈이 천하의 누굴 두고 추 잡하다 하겠소. 그런 짓 한 놈이 남을 동정할 리 없지. 댁이 길목을 바라보면 나는 하늘을 치다보는 게요. 가 시오." "..." "명 보존할 양이면 지금 방에서 코골고 자는 사내 그쪽으로 팔잘 고치시오. 하룻밤 잠자리로 한이 풀릴 것 같 으면 그건 어렵잖은 일이구. 하하핫핫..." 환이 미친 듯이 웃어젖힌다. 그러다가 별안간 몸을 일으키는 여자에게 덤벼든다. 꽉 껴안는다. 여자 얼굴을 뒤 로 젖히며 목에 얼굴을 파묻는 환이 "자아, 어서 가요, 어서 가아. 풍류를 아는 게 병이라구? 흐흐흐... 내 말 잘 들어요. 살려거든, 살아남으려거든 사팔띠기한테 시집가라구." 다시 낮은 소리로 속삭인다. "사팔띠기한테 시집가라구..." 다음 순간 환이는 여자를 떼밀어젖힌다. 여자는 나자빠지면서 몸을 모로 눕힌다. "싫은 계집이 달라붙으면 죽이고 싶더구먼. 왜놈의 배때기를 찌르듯이, 미칠 지경으로 밉더군." 뚜벅뚜벅 걸어간다. 돌아보지 않고 마을을 향해 걸어간다. '저 계집은 목을 매달겠지. 목을 매달 거야. 한 계집 살리려고 잡놈 될 생각은 한푼 없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성님 어디 갔다오시오." 날이 선 강쇠의 음성이다. "바람 피우고 왔네." "세상에 그런 법도 있소?" "과부한테 적선해주고 왔는데 왜?" 사팔눈을 껌벅이며 강쇠는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다. "쳇, 좋다 말았구마요." 쓸쓸한 얼굴이 되면서 강쇠는 외면을 한다. "그나저나 떠나지." "와요? 아침 해장국이 묵을 만할 긴데 첫새북 발등에 불 떨어졌소?" 환이는 짐을 챙겨서 일어선다. 강쇠는 입술을 닷 발이나 내밀고, 괘씸한 듯 환이를 흘겨보며 따라나서기는 한 다. 마을로 빠져나오자 "무신 변덕인지 도모지 종을 잡을 수가 있어야지." "잔말 하는 게야. 잘못하면 원귀 따라온다." "야?" "모르거던 관두고 발이나 부지런히 옮겨." 얼마나 걸었을까 부옇게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강쇠야." "와 그라요!" "섭섭하냐?" "뉘한테요!" "계집을 놓쳐서," "내사 성님 행토가 분하요! 계집이야 어디 그 여자뿐이겠소?" "그 계집 처지했으면 싶다." "머라꼬요? 데리고 놀 때는 언제고, 뭣 주고 뺨맞는다 카더마는 죄 고만 지으소!" 강쇠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른다. "계집이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그 말 못 들었나?" "원한? 뭐가 우찌 됐다고?" 강쇠는 갸우뚱 머리를 기울이며 걸음을 멈추고 히죽히죽 웃는 환이 얼굴을 살핀다. "그, 그라믄," "조금은 대가리가 돌아가나?" "저, 그라믄," "..." "하, 하기야 계집치고 백이믄 백 성님 좋아하지 나를 좋아할 리가 없신께... 계집의 원한이라 카는 것은 그러닌 께 성님이 인이 각시를 뿌리쳤다 그 말심이거마는," "그건 뭐 별일 아니고 그 여자 조금은 우리 일을 알 게야." "그러니까 없이해야 한다 그 말심이오?" "그렇지." "씰데없는 걱정 다 하시오 인이가 계집보고 미주알고주알 말할 성미라야지요." "그러나 함께 살다보면," "나는 성님 생각 옳다 할 수 없소! 사람의 목심이 파리 목심이오?" "너를 내쳤는데도 안 미운가?" "내쳤다고 직이고 밉다고 직이믄 어디 사람 사는 세상 씨나 남겄소? 나도 사내장분데 그 따위로 좀생이 겉은 생각은 안 합니다.!: "뚝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 "조신하는 것도 나쁘잖소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로 사람을 직인다 말이오? 나는 그럴 수 없소!" 강쇠는 펄펄 뛰었으나 환이는 염소가 종이 먹듯 맹한 얼굴이다. 갂므은 맥빠진 웃음기가 지나가기도 한다. 주막에 당도하자 "주모, 잠 좀 잘 방 있소?" 하고 환이 물었다. "아침나절에 잠을 잔다 말입니까?" "아침이고 저녁이고 잠이 오면 자는 거지?" "잠 잘 방이야 없겄소." "그럼 방 하나 빌립시다." "아니 성님 저녁까지는 가야 하는데 잠잘 틈이 어디 있소?" 강쇠는 정색을 한다. "걱정 말어. 내일 가도 되고 모레 가도 돼. 내가 가는 게 아냐. 그들이 날 기다리는 게지." 치워주는 방안으로 들어간 환이는 벌렁 자리에 나자빠지면서 "강쇠야." "와요." "니 인이 집에 한번 가보겠나?" "머하로 갑니까." "죽지 말라구 말리러 가란 말이다. 그렇게 되면 넌 소원 성취할지도 모르고... 그 여자 지금쯤 목을 매달지 않 았는가 몰라. 아무튼 너 알아서 해." 환이는 돌아눕는다. "무신 장난을 하는 깁니까? 말로 축지법을 쓰는 깁니까? 이러는가 하면 저러고 저러는가 하면 이러고 어느 기 이 진담이고 객담이오." 환이는 그러나 대답이 없다. 강쇠가 뭐라 하건 말건 대답을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깊은 늪속으로 빠져들 듯 잠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말았다. 두 무릎을 안고 환의 어깻죽지를 노려보고 있던 강쇠는 불안한 듯 일어섰다. 다 시 주질러앉아 환이를 노려보고 또 일어서고, 몇 차례를 그러다가 술청으로 나가 국밥 한 그릇을 청해 먹는다. 국밥을 먹으면서 강쇠는 생각에 잠긴다. 주모가 무든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그러더니 반쯤 남은 밥을 후딱 후딱 먹어치우고 획하니 밖으로 나간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다가 차츰 걸음을 빨리한다. 이윽고 빤히 보이는 길에서 강쇠는 사라졌다. 강쇠는 거의 저녁때가 다 되어 기진맥진한 꼴을 하고 돌아왔다. 술청에 있는 손님들 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환이 잠든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환이는 나갈 때 그 모습대로 잠이 들어 있었다. 강쇠 는 아랫목에 웅크리고 앉는다. 환이를 깨우려 하지는 않는다. 환이의 잠을 알기 때문이다. 환이의 깊은 잠은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빌어묵을 계집, 싫고 좋은 거를 임의로 하나? 마아 잘 뒤졌다. 저승에 가서 지 서방 인이나 만내지. 일진이 나쁠라 카이... 세상에 성님 겉은 저런 사내 좋아해봤자 계집치고 패가망신, 지 목심꺼지 줄이게 되는 기라.' 환이는 한 낮을 자고 도 한 밤을 자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났다. 강쇠를 힐끗 쳐다보았으나 아무말도 묻지 않 는다. "목을 매 죽었더마요." "..." "염을 해주고 친정에 사람을 보내놓고 그라고 어제 저녁때 왔소." 10장 사나이들 반나절이 훨씬 지나서, 화엄사를 거쳐 구례로, 산들바람에 버들이 휘휘 가지를 휘젓고 있는데 환이는 부어터진 강쇠를 데리고 윤도집네 대문으로 들어섰다. 윤도집의 마누라 환갑이 삼월초엿샛날 그러니까 어제였는데 잔치 를 치른 집 같지 않게 인적기가 별로 없고 암탉이 병아리를 몰고 가는 안마당이 호젓하다. "허허허, 이 사람아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환이와 강쇠가 사랑 문을 들어서려다 말고 돌아본다. 어디 다녀오는 길인지 의관을 갖춘 윤도집이 막 대문간 을 들어서고 있었다. 환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강쇠는 허리를 꺾으며 "아이구 도집어른, 무고하싰십니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다. "주인집 장 떨어지자 나그네 국 마단다더니, 잔칫집에 술 떨어지자 술 안 먹는 자네가 오는군 그래." 강쇠에게 농치듯 한 말이었으나 얼굴에는 환에 대한 불만과 힐책의 빛이 역력했다. '여러 가지로 자네 힘이 크다는 것을 뉘 모르나? 그리고 말하잘 것 같으면 모든 것을 자네 의견에 좇아서 일 해온 것도 사실인데 우리라고 바지저고리는 아닌세. 방자한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 일별하는 눈빛에 그런 의도가 충분히 담겨 있었고 순간 환이의눈빛도 거세게 일렁인다. 윤도집 마누라 환갑날 에 대오지 못한 것은 예가 아닐 테지만 이들에게 있어 환갑잔치쯤 일상 잡사에 불과했으며 환갑잔치를 빙자하 여 시천교, 천도교 어느 파에도 전신하지 않는 세력을 규합하여 조직된 동학당의 지도적 인물들이 모여 회합 을 갖기로 한 것이 일의 알맹인데, 그렇다 하여 하루쯤 일정을 어겼기로 윤도집의 심사가 그렇게 뒤틀릴 까닭 은 없다. 평소 쌓이고 쌓인 환이에 대한 불만이 내비쳐진 것이다. 환의 입가에 서릿발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노골적인 야유, 야유인 동시 살기다. 윤도집의 눈 밑 근육이 파르르 떤다. '졸갑스런 귀신은 물밥 천신도 못 받는다더군요. 도집어른께서는 그럴 분은 아닌 텐데요?' 늘 언행에 중심이 잡혀 있고 심지가 꼿꼿한 윤도집인데 어찌하여 환이에게만은 매번 신경이 곤두서게 되고 그 러면은 신경이 바늘끝으로 변하여 상대방을 찌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때마다 윤도집은 환이의 그 살기 어린 야유에 부딫친다. 살기나 야유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컬을 뽑지 못하고 바늘을 뽑았다는 의식이, 소인배라는 자의식이 그를 부끄럽게 했고 자신에 대한 능멸감 때문에 견딜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어찌하여 매번 환이에 대해서만은 늪과도 같은 도전의 유혹에 빠지는 건지 윤도집은 알 수가 없었다. 깊은 증오심도 없으면서. 야수처럼 사납고 처절한 성품의 김개주, 그 김개주의 영상을 환이에 게서 때때로 느끼기 때문인지 모른다.활화산 같은 그 인물에 완전히 승복하면서도 몸서리쳤던 그 기억, 기억 속 인물의 핏줄을 윤도집은 위험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예리한 심리 대결은 그러나 한순간에 지 나지 못했다. "늦어도 어젯밤까진 올 줄 알았지. 아 글쎄 지리산 호랑이들도 알아 모시는 건각들 아닌가? 허허허헛..." 역시 노련한 윤도집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환이의 눈동자를 직시한 채 후퇴하는 것이다. "그란해도 어짓저닉에는 왔을 긴데 말입니다. 길 떠나다보믄 자연고로 생각잖았던 일도 생기는 법이니께요. 아 무튼지간에 잔칫날에 참니를 못했이니 미안시럽고 억울커마요." 강쇠의 말에 윤도집은 껄껄걸 한 번 더 웃고 나서, "들어가자구. 모두 기다리고 있으니," 사랑채 뜰안으로 들어갔을 때 방안에서 운봉노인의 잔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신호이기나 하듯 다른 몇 사람의 기침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온다. 여닫이문으로 질러놨던 것을 터버린 방안은 널찍했다. 그 넓이만큼 건장한 사내들이 왕방울 같은 눈들을 하고 서 십여 명이나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굵은 눈망울이 들어서는 환이 얼굴에 집중된다. 대체 네놈은 뭐길래 펄펄 뛰는 놈들을 하룻동안이나 방안에다 가두어두느냐 하고 문책하는 표정의 얼굴들이다. 환이의 눈 은 그들 시선 하나를 잡았다간 놔주고 도 하나를 잡고 차례차례 물건을 다루듯, 살피듯, 실로 대적하기 어려운 오만이 전신에 팽창해 있다. 그들 사내들 중에서 환이 아는 얼굴은 윤도집의 큰아들 필구와 진주의 관수 그리 고 산천 객줏집 주인 석포뿐이었다. '흥, 저 자가 바로 조막손이구나.' 환이는 피식 웃는다. 양볼에 공기를 잔뜩 집어넣은 듯, 주먹으로 한번 치면 툭하고 꺼져버릴 것 같은 익살스럽 게 생긴 사십대, 환이보다 네댓 위인 듯싶은 사내는 화가 잔뜩 나서 환이를 노려보다가 다음 순간 씨익 웃는 다. 사내들 중에서도 제일로 왕방울인 그의 눈은 웃음과 더불어, 그 무슨 신기한 조화일까 조그맣게 오므라들 어 실눈이 되어버린다. "거 장석도 아닐 것이고, 그런께로 자리를 잡고 앉았으면 쓰겄소이." 땅땅하게 되바라졌는데 노리끼하고 성근 수염의 사내가 강쇠를 힐끔 쳐다보면서 슬쩍 한마디 던진다. 환이는 운봉노인 가까운 자리에 앉고 강쇠는 석포 옆에 가서 비비고 들앉는다. 내내 부어터져서 따라오던 강쇠는 데 리고 온 자식처럼 약간은 머쓱해지는지 환이 쪽을 자주 바라보곤 한다. 이윽고 늦어진 점심상이 들어왔다. 상 차림이 푸짐하지는 않으나 정갈스럽고 솜씨있게 만든 음식이다. '제에기, 와 이리 임석이 허옇기 사람을 치다보노. 짭고 맵은 거만 묵던 속에 기별이나 가겄나? 제에기, 그놈 의 여편네는 와 죽노 말이다! 사람이 심란해서 임석 맛도 모리겄다. 어디 천지에 성님 겉은 산아말고는 사나 아가 없다 말가? 나 역시도 그 계집말고 천지에 딴 계집이 없는 것도 아니지마는, 빌어묵을 살고 볼 일이제. 죽기는 와 죽노 말이다. 제에기 그럴 바에야 한분 기다리나 보제. 뜨물에도 아아 생기더라고. 아이구 마 내사... 사람 사는 기이 와이런지 모르겄다.' 문어 산적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강쇠는 죽은 인이 아낙 생각을 한다. 대들보에 축 늘어져 있던 소복의 시체가 새삼스럽게 밟혀서 음식 맛을 잃게 한다. 때때로 오싹하니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로는 왜 죽었느냐 하 면서도 이미 정은 뚝 덕어졌다. '사람으 죽음이란 그란해도 무서븐 긴데... 내 손으로 삶도 직이봤지마는 참말로 입맛 없구마. 우리만 거기 안 갔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을 긴데, 제에기, 운수가.' "머를 쭝얼쭝얼. 개대가리 찜져묵는 소리를 혼자 시부리쌌노." 맞은켠에 낮은 관수 말에 강쇠가 찔끔한다. "내, 내가 뭐라 캤기에?" "알아듣기라도 했다믄 혼자 시부맀다 칼까." 어느덧 점심은 끝나 있었고 운봉노인이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은 으흠!" 이윽고 운봉이 허두를 꺼낸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늘 우리는 어렵게 이런 자리를 마련하여 한곳에 모였소. 이같은 모임은 처음 있는 일 이오. 그런 만큼 매우 중요한 일이외다. 그간 우리 동학은 필설로는 다 못할 고난의 길을 걸어왔고 왕시 제폭 구민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서 학정을 쳐부수고 일본에 항쟁한 영광의 동학을 생각허고 무수한 동학의 피가 산 천을 적신 그 마지막 싸움 이후 수십만 동학이 친일파로 혹은 중도파라고나 할까 아무튼 싸움을 잊은 형편이 며 더러는 일개 화적당으로 전락하여 잔명을 보존하는 이 기막힌 세태를 생각을 적에 가슴에 불기둥이 쏫는 것은 여러분도 매일반일 것이오. 이 차중에 비록 그 수효에 있어서 미약하나마 절을 굽히지 아니 하고 가슴에 불길을 그대로 간직해온 여러분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에 감회가 없을 수 있겠소. 연이나 지금은 감회에 젖을 시기도 처지도 아니오. 두서가 없는 얘기요만 그간 여러분들이 일들을 잘해주신 데 대하여 치하의 말씀 을 하고, 으흠," 운봉노인은 숨이 찬 듯 일단 말을 끊었다. "나는 이 정도로 하고 윤도집이 말씀하시오." 앉은 자리에서 물러나듯 그리고 운봉은 눈을 감는다. 탈진한 것 같은 그림자가 얼굴에 감돈다. 신념이 상실되 어가는 그러면서 해떨어지기 전에 무거운 발길을 재촉하는 안간힘을 볼 수 있었다. 늙은 것이다. 힘이 쇠퇴해 가는 것이다. 차근차근하게 얘기를 시작하고 진행하는 윤도집 음성을 귓가에 흘려보내면서 늙은 장수는 산야 를 메우던 동학의 무리와 함성과 그리운 얼굴들을 눈앞에 그려본다. 김개주의 핏발 섰던 눈을 보면서 운봉은 감았던 동자를 연다. 환이를 유심히 한번 보고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어쨋든 그 동안 우리들이 일을 하면서 의견이 구구했고 불만도 있었던 게 실정이었소. 그리고 중론을 모아서 좋은 방안을 채택한 일도 없고, 해서 몇 가지 방안을 준비하여 여러분들의 의견을 묻고 한편 기탄 없는 가부 의 토론을 바라오." "도집어른!" 조막손이 손가가 성급하게 냅다 치듯이 큰소리로 부른다. "말해보시오." "지 말심이 매우 당돌한 것도 겉십니다마는 한 말 디리겄십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입맛을 다신다. "누가 머라 캐도 우리는 생사를 같이할 동료 아니겄십니까? 그런데도 인사도 없이 지내는 사램이 있다믄 그기 이 어디 도리겄십니까? 다 바쁘고 삼지사방으로 흩어져서 일을 하다보니께 역부러 찾아가서 인사를 닦는 일이 사 임의로 할 수야 없지마는 한방에 앉아서 서로 얼굴을 빤히 보믄서도 남겉이 성명 삼자를 모리는 것은 말 할 것 없고," "워따, 무신 사설이 그리 길당가? 옳은 말이긴 혀도," 땅땅하게 되바라진, 노리끼하고 성근 수염의 사내, 임실의 지삼만이 엄지손가락으로 수염을 밀며 환이를 힐끔 쳐다본다. 얼굴을 빤히 보면서 성명 삼자도 모른다는 조막손이 손가의 불평은 환이를 두고 한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운봉과 윤도집 배후에서 움직이는 인물에 대한 관심이 많은 데서 나온 불평이기도 하다. "퉁성명하고 인사 닦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울고? 그건 쉬운 일일세. 어령운 건 서로 알면서 모른 체하는 일 아 니겠나?" 윤도집이 슬쩍 회피한다. "하 참, 알 듯도 허고 모를 듯도 허고... 도집어른께서 노상 변죽만 치시니께로," "변죽을 치믄 한복판이 울릴 거 아니오. 그것도 모리믄서 무슨 일을 한답디요?" 관수가 핀잔인데 어디 지삼만이 몰라 그러는건가? "헤헤헤헷... 그도 그럴 것이요이. 허지마는 변죽 친다고오 가운데가 너무 싸게 울리도 조막손이 되기 십상이여 라우." 와아 하고 웃음 소리가 터진다. "뭐이라꼬?" 조막손이 손가의 얼굴이 벌개진다. "아아니 내가 동네북가?" 방안에서는 또 웃음 소리가 터진다. 운봉도 웃고 환이 싱긋이 웃는다. 그러자 "혜 참 오나가나," 하다가 조막손이 손가는 남보다 더 큰소리로 웃어젖힌다. 손가가 조막손이 된 것은 동학의 마지막 싸움, 우금 치에서 무너지고 패주할 때 생긴 일 때문이다. 몇 사람과 무리를 지어 조막손이도 달아나는데 난데없이 날아 온 오랏줄이 손가 왼편 손목을 감았다. 성미가 급한 데다가 억울하고 분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아나던 손 가는 환도를 뽑아 오랏줄을 끊는다는 게 그만 자기 손목을 끊고 말았다. 그 일화는 웃음거리인 동시 묘하게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덩치와 생김새에 비하여 눈물이 많은 이 사내는 곧잘 장하지혼이라는 문자 를 썼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그의 눈에 눈물이 괴는 것이다. 장하지혼이란 민란 때 장살을 당한 아비의 넋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죽고 죽어, 골백번을 죽어도 양반놈들하고는 화동 못한다아! 장하지혼이 그거를 허락 안 할 것이다아! 이놈들아! 천대받고 설움받는 네놈들이 그거를 잊는다믄 사람으 새끼가 아니다아! 세상에 사람으로 함께 태이 나 가지고오 와 종놀음을 할 것고오! 사대육부 멀쩡한 놈이믄 나무껍질 벳기묵어도 굶어죽진 않을 기다아! 양 반놈, 우리 원수 왜놈한테 빌붙어 사느니 차라리 죽는 기다아!" 조막손이가 거느린 수하에 대한 훈시라는 것이 늘 그런 식이었는데 "흥, 우리사 사대육뷰가 멀쩡한께로 나무껍질이라도 벳기묵겄지마는 이녁이사 그 조막손을 갖고 흐흐흣... 사대 육부 멀쩡한 놈이라는 말만은 뺐이믄 좋겄더마는," 돌아서서 흉을 보지만 결국 손가에게는 조막손은 일종의 애교 같은 것이었다. "인정사정 얘기는 우리 두었다가 후일 좋은 세월이 오면 하기로 하고 그러면," 다시 얘기를 시작한다. 억양 없이 나직한 음성인데 그러나 얘기의 내용은 기왕의 일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 다. 그 비판의 화살은 환에게 가는 것이요, 환이의 독주를 견제하지 않는 운봉에 대한 윤도집 불만의 토로이기 도 했다.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고 그러나 지엽의 얘기는 그만둡시다. 크게 문제를 나누어 생각한다면 이렇게 가파롭게만 나갈 것인가. 그리고 쉬이 끝장이 나야 옳은가. 아니면 다소 완만한 길을 택하여 교세를 확장하면 서 칼만 휘두를 게 아니라 인재양성도 하고, 의병이 아닌 동학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하면서 보다 원대한 계획 을 세울 것인가," "그거사 지 좁은 소견으로 동학이라는 것을 들내놓자 그 말심 아니겄십니까? 그렇다믄 지금 들내놓고 있는 친 일파 동학하고 뭐가 다르겄소. 그렇기 되믄 일 못하지요." 윤도집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관수의 당돌한 반박이다. "그건 외곬으로만 하는 얘기고, 다소 과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쌈지 속에 엽전 몇 닢 넣고 투전판에 간다 고 하지. 한 닢 두 닢 따기고 하고 잃기도 하는데," "그러면 도집어른, 우리가 엽전이라 그 말심이다요?" 알고서 어정대보는 지삼만의 수작이다. "허어, 내 말 마저 듣고, 과한 비유인지 모르겠다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들을 바지저고리로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닌세. 그간의 한일을 과소하게 평해 하는 말도 아니네. 그러나 투전판 얘길 또 해야겠구먼. 가령 여기에 만 냥을 가진 사람이 있고 단돈 한 냥 가진 사람이 있다 하자. 그 두 사람이 투전판을 벌였다면 얼핏 생각하기엔 만 냥 가진 놈이 바보 아니겠나? 그러나 또 뒤집어 생각을 해본다면 한 냥 가진 사람의 한 냥이란 피가 나는 돈, 그러니까 만냥 가진 사람이 백 냥 이백 냥 잃는 거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한 냥 가진 사람이 한푼 을 잃었다면 백 냥 이백 냥의 유가 아니지." "도집 어른께서 무신 말심을 하시려는지 짐작은 갑니다만 투전판 얘기론 아귀가 맞질 않십니다. 투전판에서야 돈 한 닢 가지고 만 냥 못 따라는 법은 없으니께요." 관수가 들이대듯 뇌까린다. "내가 투전판의 요행을 얘기하는 겐가?" "그러니께 도집어른께서는 엽전 얘기가 아니라 왜놈의 수효 말심이겄는디, 말하잘 것 겉으면 왜놈으 수효는 개미떼맨치로 수만이고 우리 싸우는 군사를 말하잘 것 같으면 가뭄에 콩나듯 수효가 적다 그 말심 아니여라 우?" "결국 그런 얘기지." "새삼스럽기 지금 그런 말심을 하신다는 것이 지로서는 이상허요. 애당초 쌈이 되질 않는다는 것밖에 이약이 되질 않는디 그렇다면 수년을 우리가 미친 지랄 혔다 그밖에 더 되겠어라우?" 지삼만의 반박이 여간 아니다. "허허어 자네는 어찌 그리 막말을 하는고? 내 의도는 앞으로 더 탄탄하게 확실하게 지반을 다져가면서 일을 하자는 게 아닌가. 이 지경으로 나갔다가는 장차 화적당으로밖엔," 윤도집은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라면 도집어른, 우리가 화적당 아니고 뭣이다요? 관군이겄소? 지는 화적당으로 치부하고 있지라우. 또 실상 불도 많이 질렀으니께요." "무슨 소리야!" "역정만 내시들 말고 들어보시시오. 의병이냐 동학이냐 갈라놓고 생각하는 것도 지는 마땅찮아요. 수효를 가지 고 따지시는 것도 그렇고, 또 화적당이면 어떻소? 핍박받는 백성이 일어서면은 으레껏 역적이다 화적이다 하 기 매련이고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당구겄소? 실정이 십만 대군 거나리고 서울 가겄어라우?" 윤도집이 밀린다. 이때까지 관망하는 태도로 듣고만 있던 윤도집편인 순창의 장가가 입을 연다. "그러크럼 한마디로 통박 짤라서 말해 치워버릴 양이면 우리가 여기 모일 필요는 없는 거 아니더라고? 성급허 게 날뛸 것 없이 전후사정 이약을 소상히 들은 연후 자게들 생각을 말허는 게 순서 아니겄냐 이거여. 덮어놓 고 무작정 그러는 거 아녀." 느린 말투로 나무란다. 운봉과 환이는 얘기를 듣고 있는지 아닌지 도통 말이 없다. "덮어놓고 무작정 그러는 거 아니라 말시. 이약은 던져놓은 기니께 받아넘겨얄 거 아녀?" 지삼만이 목을 가다듬고 일장연설을 할 심산인데 조막손이 손가가 가로채어 말을 한다. "하모 그렇지. 이야기는 도집어른께서 터놓으신 기라. 대체로 내 생각도 지서방하고 비슷하구마는. 일리 있는 말이다 하고 생각는데, 우리 동료끼리는 체면 겉은 거 집어치우고 참말 좀 하자. 지서방 하는 말도 그거 아닌 가 싶으구마. 우리가 지금꺼지 불지르고 댕기기는 했어도 화적질 안 한 거는 제제가끔이 알 일이겄고오. 그러 나 설사 화적질을 했다 커더라도 상대편이 왜놈이거나 백성들 피빨아서 부재 된 놈이믄 죄될 것도 없는 기라. 그러는데 무신 법이 있을 턱 있나. 잘 묵고 잘 살자고 한 짓 아니겄고 남으 나라도 통째로 꿀컥 생키부리는데 내사 못해서 그렇지 왜헌병놈 둔소에 가서 총이고 화약이고 뺏는 기이 쌈치고도 실속 있기 이기는 기고 오족 놈들 고방 털어 군자금을 했이믄 오죽이나 좋으까? 그런 거를 다 일일이 사린달 것 겉으믄 왜순사놈 등에 칼 꽂을 것도 없는 기고 진짜 도적놈이사 성루에 높이 좌정하여 교주랍시고, 그, 그게 다 우리 동학 팔아묵고 눌 러앉은 자리 아니라 할 수 있겄나아?" 이야기를 엇길로 끌고 나가면서 조막손이는 제풀에 흥분한다. "딱헌 소리 그만혔으면 좋겄소이. 이런 거를 두고 동문서답이라 하는 거요. 명색이 있질 않여? 명색이. 워째서 여기저기 우굴부굴 허는 화적패를 옳다 헌다냐? 나는 도집어른 말심이 지당허다 허겄어야." 사실은 윤도집 얘기는 초반부에서 끊겼고 열심히 들은 것도 아닌데 순창의 장가말고 눈 가장자리가 거무죽죽 하고 입술도 푸르스름한 보부상 임가가 말했다. "잘 생각들 혀보더라고. 주재소에 불지르고 왜순사등에 칼 꽂는 것 그거만 능사 아니랑께. 우리는 그냥 의병이 아녀. 의병이기보담 동학교도란 말시. 칼을 휘두르는 한펜 사람 맘에다 한울님 뜻도 전혀야 한당께로. 그려야 만 우리가 칼을 휘둘러 왜놈을 치는 명분도 서는 거 아니겄어?" "명분이고 개뿔이고, 바린 말 할 것 겉으믄 우리네야 몰린 쥐니께 목심 내놓은 것밖에 확실한 얘기를 못할 기 구마. 그렇잖으믄 아예 애시당초 집어치웠던 기라." 조막손이 내쏘는데 "아 세상에 저러크름 무식혀 무신 일을 헌당가? 우물 안의 개구리여, 개구리. 손자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 라 혔는디 이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몰러? 허는 이야그가 산채에 숨어살면서 고갯마루 지키다가 장꾼들 벗겨 먹는 도적떼." "아아니 멋이 어쩌고 어째? 도적떼?" "워째 억울허다냐? 제 입으로 이야그허고서 따지기는 워째 따지는 게라?" 조막손의 눈알이 불거진다. "아 멋이 어째? 내가 나를 도적떼라 했다 그 말가? 아아니 이거 순도적놈은 니 아니가!" "도적이나 화적이나 매일반인께, 제 얼굴에 침 뱉는 소리 혀놓고," "그 말이야 조막손이가 혔건데? 내 한 말을 거기 갖다 붙일 건 없고, 시비는 혀도 쌈은 안 허는 거여." 지삼만이 거들어주었으나 왈가왈부 시시비비는 말다툼으로 번지고 관수 석포, 나중에는 강쇠까지 주먹으로 삿 대질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삿대질에서 그치고 육박전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실상 핏대를 세우고 떠들어대 었지만 그들끼리의 대결이 별무효력이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싸우는 이들 중에서 학식이 있고 조리 있게 말로는 표현하기 어련운 사람들이며 이들이 십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일 뿐이다. 한데도 왈가왈부 떠들 어보는 것은 먹물 먹은 사람만 대수냐, 우리도 그런 정도는 알고 있으니 무조건 승복은 아니라는 치기 오린 오기였던 것이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환이의 능력을. 몇 사람을 거쳐서 내려오는 지시는 환이로부터, 그리 고 그의 지시는 영락없이 정확한 성과를 거두어왔다. 무조건 승복이 아니라는 오기도 속셈으론 환이에 대한 관심의 표시오 신비스런 뭣으로 가려진 그의 정체를 벗겨보고 싶은 호기심이었던 것이다.물론 자부심도 있었 다. 제가끔 제 수하들을 거느리는 만큼 힘들도 좋고 뚝심도 있었다. 머리도 보통보다는 빠르게 돌아가고 동학 의 가장 불우한 시절을 거쳐온 이들은 관수와 강쇠를 제외하고는 실전의 경험자들이기도 했었다. "그만했으면 많이들 얘길 한 것 같소." 환이의 음성이 팔매처럼 날아왔다. 거만한 분위기에 반발하고 싶은 심정들이지만 방안은 잠잠해졌다. 어디 그 림자 같은 네놈이 얼마나 아는 것이 많고 변설이 좋은가 들어보자는 품을 재면서 환이를 쳐다본다. "왈가왈부, 더 이상 해보아야, 천년이 간들 지상에는 천상의 법이 이루어질 수 없고," 입가게 조소가 감돈다. 지삼만이 속으로 중얼거린다. '거 웃음 한번 고약하당께로. 계집으로 치면 사내 많이 잡아먹을 웃음이여.' "도둑이라도 사람이니 죽이면 살생이요, 아니 죽여도 살생인 것이오. 도둑으로 인하여 죄 없는 백성을 얼어죽 고 굶어죽는다면 그 도둑을 죽이지 아니 하였던 자는 도둑의 손을 빌려 백성을 살해한 것이오.!" 무슨 심산에선지 환이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드높은 소리를 질렀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는 것 같다. 그런데 지 삼만이 씩 웃는다. "누군지 이름 석자나 알고 말 들었음 쓰겄소이. 답대비 뒷간에 갔다가 밑 안 씻은 맴이어라우." 그러나 환이는 천장을 올려다본 채 "묘향산에서 온 천가외다." 한마디 내뱉고 곧 이어 하던 말을 잇는다. "도둑을 죽여도 살생이요 아니 죽여도 살생..." 환의 시선이 천장에서 제 무릎 쪽으로 옮겨진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여러분이 어느편을 택할 것인가." "좀더 펴서 이약을 해주시시요이, 군령이야 짧을수록 좋은디 여긴 살ㅇ방인께로." "나는 동학이, 동학으로서 어느 길을 가야 하는가 그 얘길 할 생각은 없고. 나는 동학이 아니어도 좋은 사람이 라 소임이 없고 경전에도 장님이요. 다만 지금 형편을 구경한 사람의 처지에서 말하라한다면 할 수 있겠소." "..." "지금 크게는 두 쪽으로 갈라진 동학이 있는 거로 알고 있소. 이판국에 소위이쪽이 골수파다 하여 또 하나의 분파를 드러낸다면 동학은 세 쪽이 되는 셈이오. 세 쪽 중 하나가 들내어놓고 포교를 한다면 과연 얼마만한 신도를 흡수할 것이냐, 그것은 도집어른 짐작에 속하는 일이겠고 내가 보기는 도집어른께서 욕심이 많으신 것 같소이다. 칼을 두 개 양손에다 하나씩 들고 쓰시겠다는 뜻으로 생각되오만 그것을 저는 반대하겠소이다. 왜냐 하면 안 될 일이기 때문이오. 손병희 이용구라고 그마마한 욕심이 없었겠소.? 안 되기 때문에 한 손의 칼은 버 린 것이요. 포교를 하고 신도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낮에 일하고 밤엔 잠을 잔다는 것이오. 사도거리를 한낮에 돌아다녀도 왜헌병이 잡아가지 않는다는 얘기도 되겄지요. 손병희의 업적은 많은 동학교도를 연명케 해준 것... 그것이오. 이용구도 그 따위 말을 할지 모르짐나요." "...." "동학당의 명칭 이래, 또 신도라는 명칭 아래 보다 넓게 사람을 포섭하기 위하여 가파로운 일일랑 당분간 쉬 어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낮에 일하느냐 밤에 일하느냐 그것만은 확실히 작정해야 할 것으로 본인은 생각하고 그 결정에 따라서 일신의 거취도 정하겠소.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여기 몇 가지 계획을 짜본 것이 있으니 여러분과 함께 의논해볼 심산이오." 윤도집의 찌푸려졌던 미간이 펴진다. 사실상 환이는 윤도집에게 절반쯤은 양보한 셈이었으니까. 11장 옛 터전 "강쇠야, 너는 우봉어르신네 모시고 먼저 가거라." "성님은 이 새북에 어디 가실라꼬요." "내 가는 데 알아 뭘 해." 환이는 다른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강쇠를 깨워 이르고 길을 떠났다. 희미한 초승달이 떠 있는 새벽 길을 사뭇 걸어간다. 그는 떠날 때 화엄사에 와 있는 혜관을 만나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발길은 엉뚱한 곳을 향해 가는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환이 당도한 곳은 평사리 마을 삼신당이 있는 숲속이었다. 숲속에서 빠져나 온 환이는 불타 없어진 누각터에 가서 우두커니 마을을 내려다본다. 희미하게 보이는 강줄기, 강 건너편 산허 리가 강물처럼 희미한 하늘 아래 누워 있다. 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환이는 조막손이 손가 얼굴을 생각한다. 새벽길을 헤치고 이곳까지 뭣하러 왔는가. 그것에 대해선 도통 생각이 없다. 발이 제 혼자 왔겠지 뭐 하는 투로. 손가의 얼굴을 자꾸만 생각한다. '계집이 있을까, 자식새끼가 있을까, 술은 얼마나 펴마시는고? 옳지! 그자를 한번 찾아가서 술을 마시자. 그자 는 강쇠놈보다 더 못견딜 거야. 말을 시키다 시키다 안 되면 술상을 때려엎을 거야, 환이는 누각터에서 초당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임실의 지삼만이? 그 새낀 배신을 할 놈이다. 물건은 쓸 만하고 큰데 돌아설 게야.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고 그럴 놈은 아니지... 일은 그런 자가 쳐낼 텐데 아깝군. 죽여버릴까?' 환이는 대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대숲에서 허물어진 담장이 보인다. 환이는 허물어진 담장을 넘어선다. 별당 에 불이 켜져 있었다. 환이는 연못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사방에 는 옥색빛 아침이 일렁이고 있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환이는 허물어진 담을 넘어 몸채 안족으로 돌아간 다. 아침이 왔는데 기동하는 사람이 없다. 행랑 쪽으로 돌아간다. 마구간에는 말이 없다. 외양간에도 소가 없 다. "누, 누구요." 환이 돌아본다. "아, 아." 중년을 넘어선, 그러나 훨씬 더 늙어 보이는 육손이가 벙어리처럼 소리를 낸다. "아, 아, 니, 니는," "오래간만이네." "구, 구천이--" 육손의 두 어깨가 축 늘어진다. "있기는 누가 있이꼬? 곱색 서방님밖엔," 그러다가 다시 겁에 질린 것처럼 환이를 쳐다본다. "서방님이라니 장가도 갔단 말이가?" "가, 가기사 갔지마는... 쑤, 쑥대밭이제. 어, 어서 가라고, 거, 거지가 됐다는 소문이더마는," "..." "좀 있으믄 식구들이 일어날 긴데, 식구래야 머..." "옛날엔 나그네를 괄시하지 않았네." "그, 그래서 너 겉은 놈 두었다가 패가망신 안 했나!" 육손의 눈에 분노가 떠오른다. "너도 여직 연명한 걸 보면 의리 있는 놈은 아니지. 하하, 하하하..." "죽으로 왔나? 미쳤나?" "미치지도 죽지도 못하고, 저기 저 말루에 가서 얘기나 좀 하지." 환이는 육손의 겨드랑을 껴안 듯, 육손은 뿌리치려고 몸을 흔들었으나 환의 힘은 반석 같다. 아까와는 사뭇 다 른 공포의 빛이 육손의 얼굴에 떠오른다. 마루 끝에 나란히 앉는다. "어짤라꼬 여긴 왔노." 비실비실 묻는다. "불을 싸질러볼까 싶어 왔더니," "무슨 억하심정으로? 지은 죄도 많으믄서..." "..." "집구석이 콩가리가 됐는데, 그 많은 땅도 남으 손에 넘어가고오, 하기사 뺏은 재물이니께 차라리 속시원할 때 도 있지마는... 멀리 멀리 가서 돌아오지나 말 일이제." "아마 돌아올걸 미친놈..." "누구 얘길 하는 것꼬?" "길상이놈," "뭐이라꼬?" 환이는 일어선다. "잘 있게." 몸을 돌려 걸어나간다. "이보라고! 길상이가 우쨌단 말고!" "겁나서 그러나? 하하 하하핫..."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모습도 사라졌다. "저기이 구신이까? 구신한테 홀린 길까? 아이구 모리겄어. 콩가리 콩가리 집안이고... 죽을라나? 와 눈에 헛것 이 보일꼬?" 멍청하게 서서 중얼거리던 육손이는 벌렁벌렁 활갯짓을 하며 마을로 내려간다. 육손이 환이를 만나지 않았더 라도 실은 정신이 온전하지는 않았다. 순이가 죽은 뒤 순이와의 사이에 낳은 계집아이를 애지중지 길러왔었는 데 그 아이를 서울서 내려왔던 홍씨가 잔심부름 시키겠다 하며 데려간 것이다. 그 후 반정신이 나간 사람이 된 것이다. 육손은 논둑길을 버렁벌렁 걸어간다. "한복이이--" 이른 아침부터 논갈이를 하고 있던 한복이 돌아본다. "니 방금 구천이 못 봤나?" "구천이가 누군데 그러요." "아아, 아 참 니는 잘 모르겄구나. 그라믄 누구 이 길을 안 가더나?" "아무도 안 가던데요." 한복이는 딱하다는 듯 육손이를 쳐다본다. "서울 간 딸 소식 들었소?" "들으나마나." 했으나 육손이는 걸핏하면 벌렁벌렁 두 팔을 휘저으며 마을로 내려왔고 상대편에서 딸 얘기를 안 함변 그 자 신이 꺼내는 것이다. "니는 이분에 생남했다믄?" "야." 어제도 물어본 말이었고 한복이도 어제처럼 짤막하게 대답한다. "참말이제 하늘도 무심쿠나. 샐인 죄인 아들도 딸 낳고 아들 낳고 땅 사고 집 장만해서 사는데..." 갑자기 심술이 치미는 듯 육손이 내뱉는다. 한복이는 말없이 가래질을 시작한다. 또 다시 외로워진 육손이 우 두커니 하늘을 보다가 "아무튼지간에 생각해보믄 그게 다 구천이놈 때문이제. 내가 이리된 것도 물줄기로 찾아올라간다 칼 것 같으 믄... 최참판댁이 안 망했으믄 내가 이리 될 리가 없고오. 그만 아까 그놈의 애목이라도 물어씹을 거로 그랬나? 하기사 구신이제, 구신." 논둑길을 되잡아서 걸어나오는 육손이, 보리쌀 든 사기를 이고 우물길을 가던 봉기 마누라와 마주친다. "육손이 팔자 늘어졌구마." "뭐라꼬요?" "아침부터 놀러 댕기는 팔자가 좀 좋은가?" "할일이 있어야제요. 주인 없는 집," "주인이 없긴 와 없노." "있으나마나, 참 두리어매," "아아니 시집가서 자식 놓고 사는 사람, 뉘집 애 이름이가? 두리, 두리, 와 카노?" "야, 그러사 머, 그런데 말입니다. 구천이 가는 것 안 봤소?" "머라 카노? 이 사람이 환장을 했나? 뜬금없이 구천이라니?" "아, 구천이요. 길상이가 올 기라 카더마요." "쯔쯔," 혀를 차면서 지나치러 하는데 치마꼬리 잡고 따라가는 애처럼 육손이는 봉기 마누라의 하얗게 된 얹은머리를 쳐다보며 따라간다. 밭둑에서 송아지가 운다. 육손이는 봉기 마누라 뒤를 따라가다가 송아지를 우두커니 바라 본다. 봉기 마누라가 우물가에 갔을 때 복동이네(서서방의 자부)가 물을 긷고 있었다. "일직구마요. 벌서 보리를 곱찍었십니까?" 중년티가 완연한 복동네가 안쓰러워하며 묻는다. "누구 해줄 사램이 있어야제." "좀 편할 나인데," "무신 대복으로? 아직이사 곰뱅이가 성한께... 너거는 지난 장에 무명을 많이 냈다믄서?" "많이 내기는요, 열 필 냈지요. 김훈장댁에서는 열다섯 필 내고," "그 댁 자부는 아금발라서 어정개비 서방 데리고 이럭저럭 사는구만." "사램이 용해서 그렇지, 농사 지으니께 반년 양도는 되는 모양이더마요. 남자 손떠배기 없는 우리네보담이야," 요새도 그 집에 순사가 찾아오는가?" "머 그런 말은 안 합디다." "보래?" "야?" "아까 최참판네 육손이가 구천이를 못 봤느냐고 날보고 묻더라. 영 사람이 돌았는가배. 너 씨압씨맨쿠로 또 한 사람 미친 모앵이다." "구천이를 보았느냐고 물어요?" "응." 북동네는 물을 긷다 말고 봉기댁네를 빤히 쳐다본다. 봉기댁네는 보리쌀을 씻고 돼지밥통에 뜨물을 부은 뒤 "여기 물 한 바가지 부어주라." "야." 복동네는 급히 물을 길러 보리쌀 사기에 붓는다. "참 이상도 하지." "뭐가?" "구천이 말을 한께, 실은 나도 보았소." "머라꼬? 구천이를 보았다고?" 보리쌀을 헹구다 말고 복동네를 쳐다본다. "보았소. 긴가민가 하고... 하도 세월이 오래라서 믿기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께 육손이도 보긴 보았구마요." "미친 소리 마라. 구천이가 지금꺼지 살아 있을 리가 없지. 헛것이다." 봉기 마누라는 일소에 붙인다. 이 무렵 환이는 마을 어귀 영산댁 주막을 찾아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환이는 낯선 농부 한 사람을 만났다. 험 상궂게 생긴 사내였다. 사십쯤 보이는 건장한 몸집의 사내는 거름바지게를 짊어지고 가면서 눈을 치뜨고 마주 친 환이를 쳐다보았다. 흐리멍덩했던 눈에 별안간 살기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에 대한 적의였던 모양인데 적의 치고는 치열하다. 그 농부말고 주막에 이르기까지 환이는 아무도 만난 사람이 없다. 마을은 조용하고 너무 조 용하여 그림 같았고 빈터처럼 설렁해지는 기운이 사방에 감돈다. 산천에는 봄빛이 완연하건만, 산은 푸르고 강 물도 푸르고 매끄럽게 흐르고 있었건만 영산댁 주막도 낡고 헐거워 보였다. 엉성하면서도 굴간같이 어두운 느 낌이 든다. "어여 오시시오." 그럴 나이도 아닌 텐데, 머리도 아직은 까만데 그러나 영산댁은 할망구가 다 된 것처럼 국솥에 불을 지폈는가 머리에 불티가 앉아있고 눈까풀이 무겁게 처져서 영산댁은 구천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러크름 일찍 어디 가신다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가겟방 주모 자리에 가서 앉는다. "어디랄 것도 없고 해장이나 합시다." "그러시오." 몇몇 해나 도배를 아니 했던지 술청의 벽면도 그렇고 술판도 기름때에 절어서 거무칙칙하다. 나무통에 꽂아놓 은 싸구려 주석 숟가락마저 을씨년스럽다. 시래깃국 한 대접과 탁배기 한 사발이 술판에 나왔다. "주모는 혼자 사시오?" "두 허벅지에 주먹을 짚고 앉아서 술과 김이 피는 해장국을 노려보듯 하고 앉았던 환이 눈을 들어 영산댁을 쳐다보며 묻는다. "혼자여라우." 툭 내쏘듯 "함께 살아도 편허질 않고 혼자 살자니 적막강산이고 참말이제 워찌 살아야 헐지 모르겄어라우." "주인장은 죽었소?" "야아, 뒤졌제라. 조선팔도 다 댕기면서 계집질 노름판, 그러크름 하고서 멩대로 살 것이오? 법으루 만낸 서방 도 아니지만... 잡것..." 치맛자락을 걷어 힝 하고 코를 푸는데 콧물은 눈물과 엇비슷한 것, 짐승궂다. 외로움에 찌들고 세월에 찌든 모 습이 낡고 때묻은 입성같이 처량하다. 영산댁은 빈 사발에 술을 채워준다. "주모는 이곳에서 오래 살았소?" "하모니라우. 오래됐제요. 내 각시 시절에 청보따리 하나 끼고 와서 여그다가 주막을 차렸인께로 반평생인디, 워째 사람의 맴이 늙은께로 그런가 요새는 아침 저녁으로 뵈는 산천도 늙은 것 같들 않겄소잉?" "산천이 늙는다... 그럴 법도 하군. 늙기는 늙을 게요. 하하하하..." 웃으면서 환이는 옛날에 보기보다 영산댁이 수다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어여 술이나 드시시오. 국이 다 식겄는디," 환이는 해장국 한모금을 마시고 술을 들이켠다. 들이켜면서 바위를 치며 쏟아져내리는 폭포 생각을 했고 술판 에 내려놓은 뒤 묻는다. "동네 인심은 전과 같소?" "말도 마시시오, 모두 뜨내기판인께로, 늙어서 죽고 의병 나가서 죽고, 조가놈 등쌀에 죽고 쫓겨나고, 옛 얼굴 을 보기도 심드는디, 무슨 놈의 조석변동인지 땅 임자 작인이 조석으로 베끼니 이래 가지고는 마을인들 되겄 단 말씨. 소문 들은께로 조가놈이 여거 옥답 몇 마지기를 읍내 왜놈헌티 기부혔다는 말도 있고 그러니 왜놈지 주가 오죽헐 것이며 또 작인이란 작자는 어디서 굴러온 돌멩인지 뉘 알겄어라우? 동네가 아주 망해버린 거 여." "망해버렸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일껏 설명을 했건만 환이는 맨 마지막 말만 들었는지 되물었고, 일껏 설명을 한 영산댁도 자기 한 말을 기억 하지 못한 듯 환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금매 동네가 아주 망해버렸다 그 말 아니여라우." "왜 그렇게 됐소?" "아아 나라가 망혔인께로 자연고로 동네가 망허는 게 이치일 것이요만 여거 사정은 좀 다르단 말씨." "어떻게?" 영산댁은 빈 술잔에 술을 부어놓고, "망한 사단을 찾는달 것 겉으면 오랜 이야긴디 그걸 워찌 다 말헌다요? 한마디로 이 동리 사람들은 조상 대대 로 최참판네 녹을 먹고 살았다 쳐도 과언은 아니여라우." "최참판이 아니라 최임금이었구먼." "말이 그렇다 그거 아녀? 아무튼지간에 동네 기둥이 뚝 뿌러졌는디, 그 댁 서방님이 비명횡사한 게 그것이고 오, 다음에는 최씨네 핏줄이 끊어진 것디, 여식아이가 하나 있었지만 여자가 사람이간디? 자식이 어미 성씨 따 르는 법은 없인께로. 그 차중에 괴정이 돌아서 마을을 싹 쓸어부맀고, 참말 대들보가 뿌러졌지라우. 최참판네, 그댁 마님이." 환이는 가만히 술잔을 들어올린다. "그렇기 되고 본께로 까마구 까치집 채듯이, 천하강산에 혈혈단신 나이도 미성한 여식 하나 남았으니, 아 세상 에 조간가 뭔가 만석살림 침 한 방울 안 흘리고 먹어치웠당께로. 허지만 세상에는 공것이 없어야. 하늘이 씨퍼 렇기 내려다보고 있는디 그 살림을 부지할랍디여? 그것도 왜놈을 앞장세우고 또 그자는 의병들헌티 당한 것을 핑곌 삼고 또, 또 죄 없는 사램꺼지 의병으로 몰아서 잡아죽이고 잡아넘기고, 도척이 겉은 인심 아니고 멋이겄 소? 아무리하면 그, 그러크름 혀서 뺏은 살림이 오래 갈랍디여?" 흥분하여 지껄이다가 영산댁은 갑자기 눈알이 횡해진다. "손님은 어디서 오는 길이여라우?" "어디랄 것도 없고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이오." "그렇담 이 동네 최참판네 형편은 영 모르겄소잉?" "소문쯤이야 들어 알지요." "아아, 알고 기셨어라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영산댁 얼굴에 활기가 떠오른다. "금매 모릴 사람이 없을 것이요이. 이약도 하 많고 그 거궁한 살림이 일패도지, 최씨 가문이 끊겼으니 말이요 이." "요즘 그 댁 형편은 어떤가요?" "말도 마시시오. 헌디 그 댁이라니? 이 근동서는 그 댁이라 말허는 사람 아무도 없단 말씨. 도적놈에다 역적놈 인디." 영산댁은 화를 낸다. "아아, 그럼 조가놈." "그 집구석 이야그라면 말도 마시시오. 서울로 거산해 가다시피허고, 곱새아들 하나가 남아서 하인놈 침모 그 리고 맹추라는 덩신겉은 종년 하날 데리고 거궁한 집을 지키는디 여름이면 풀이 우묵장성이라 구랭이가 우굴 부굴허고 대샆에서는 귀신이 난다는 말도 있는디 흥, 얼마 전에 곱새아들 혼사가 있었지라우." 영산댁 얼굴에 비웃음만도 아닌 묘한 웃음이 지나갔다. 영산댁 입에서 말은 이미 나오게 되어 있는 것, 새삼스 러운 말도 아니었으니 환이는 술잔만 기울인다. 실상 영산댁의 넋두리 섞인 그런 얘기를 들을 이유도 없었다. "그 곱새아들이사 무슨 죄 있간디? 몸이 병신이제 맘은 백옥 겉다 허든디. 내가 왜 이 집 주인이겠느냐면서 오히려 하인 행셀 허고, 그러니 그 집구석 하인이나 종년은 팔자 늘어졌지라우. 방구들에 똥을 싸도 말헐 사램 이 없인께로. 혼사헌다고 금년 봄 들어서 묵은 때를 좀 벗깄일 것이요만," 환이는 자신이 주막에 죽치고 앉아서 왜 떠나지 못하고 있는가하고 생각한다. 해장술 한두 잔 들이켰으면 길 을 떠나야 한다. 서울로 가게 되어 있는 혜관을 만나야 한다. 낡아 기울어져가는 옛 주막에 앉아서 다 알고 있 는, 아니 그 숱한 얘기 속 인물의 한 삶인 자신이 그런 얘기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마을 근황에 대해선 혜관이 더 잘 알고 있고 소상한 보고도 받은 바 있지 않은가.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아아 그렇지라우. 아무리 재물이 좋다고는 혀도 헛다리 짚은 거란 말씨. 빈한한 선비집 딸이라 허는디 아 글씨 명색이 선비랄 것 겉으면 아무리 지체가 높다 헌들, 신랑이 병신인 것은 두고라도 조가네 역 적, 도척인헌티 딸 줄 것이요? 그쪽도 창자가 썩은 선비일시 분명코. 시애비나 시에미 되는 조가 내외들도 아 들을 강아지만큼도 생각 안 허는디 그래 며느리라고 떠받들 것이요? 이야그를 들은께로 혼삿날 받아놓고 곱새 아들이 그랬다는디, 머리 깎고 중이 될려 해도 육신이 온전찮으니 내가 어디로 갈꼬, 허면서 한탄을 혔다 그러 더랑께." "얼굴이 관옥 같다든가? 허허헛..." "손님도 아시기는 아시누마. 암은이라우. 얼굴이사 하눌의 선관이제요. 헌디 손님?" "..." "얼굴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아까부텀 어디서 본 듯허다는 생각을 혔는디 이제 본께로." "어디서 나를 보았소?" "본 게 아니라 닮았어야." "..." "꼭이 닮은 건 아닌디, 비슷이 역력허당께로?" "..." "최참판네, 목 졸리서 죽은 그 양반 말씨, 어딘가는 몰러도 비슷이 있단 말씨." 환이 얼굴이 순간 새파래진다. 입술까지 새파래진다. 희미한, 아주 희미한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번진 채 얼굴 이 굳어져버린다. '그럴테지. 비슷한 데가 있구말구. 한뱃속에서 나온 처지니까.' "손님, 워째 그런다요?" 환이는 빤히 쳐다볼 뿐이다. "손님, 내가 못할 말 혔소?" '어지간히 점은 잘 찍었네. 길목서 술장사 수십 년 이력이 있으니 눈이 맵긴 맵군.' "목 졸리 죽은 사람을 닮았다 한께로, 맴이 안 좋았어라우?" '한데 영산댁, 구천이를 몰라보니 허허헛, 늙긴 늙었군. 허허헛...' 머슥해져서 영산댁은 술잔에 술을 채워주고 환이는 꺼뭇꺼뭇한 점이 박힌 술사발을 들면서 영산댁을 빤히 쳐 다본다. '참 요상한 사람 보겄더라고? 누구간디 최참판내ㅔ 사랑양반을 닮었이까?' "아따아! 이판사판 술이나 한잔씩 하고 가자고." 주막에 새 손님이 들어온다. 두 사람은 억실억실하게 생긴 장골들이요 한 사람은 나이 티가 나는, 곱상한 얼굴 이다. "무신 바람이 불었당가?" 술판을 닦으며 영산댁이 말했다. "올 바람이 불었제." 퉁명스러운 음성과 함께 중년사내 셋은 땀냄새를 풍기며 술청에 오른다. "어디 갔다오는 길이라? 아침부텀서," 술시중을 들면서 영산댁이 물었다. "밥맛 떨어지는 데 갔다오누마." 윗마을 오서방의 대답이다. "밥맛 떨어지는 데랑이?" 술을 벌떡벌떡 들이켜고, 세 사내는 해장국을 훌훌 마신다. "제에기, 영산집이 탕수국 묵을 나이도 아닌 긴데 국맛이 와 이렇소?" "국맛이야 춘하추동 그 맛이제. 내 짐작허니 혓바닥에 바늘 돋쳤는개비여." "혓바닥에 바늘도 돋칬일 기구마는." "밥맛 떨어지고 혓바닥에 바늘 돋쳤다 허는디 노름판서 밤샘혔당가?" "제에기 물어도 쌌는다. 관가 송사라!" "그건 또 무신 말이다요?" "그 빌어묵을 우가놈이, 그 빌어묵을, 그만 질근질근 씹어묵고 싶다마는, 하 참, 사람 악한 거는 범보다 무섭다 카이." 오서방은 속이 타는지 술을 바싹 마른 입술을 열고 들이붓는다. "웟따매 갈증은 이쪽서 나는디, 무신 이야그라?" "우가 그놈이 난데없이 오서방을 의병질했다고 찔렀던 기라." 오서방 대신 그의 처남 끝봉의 말이었다. "오매, 우가 그자가 사람치고는 말자라 혀도 세상에 그럴 수 있는감?" "우가놈이 찌른 건지 다른 누가 찌른 건지 그거는 확실찮은 얘기구마. 우리 눈으로 본 게 아닌께." 곱상스레 생긴 오서방의 외사촌형 전서방이 말을 막는다. 오서방의 수염이 푸들푸들 떤다. "아 그놈 아니고 누가 했겄소? 지리산 중놈이 했겄소?" "허허 설사 그렇더라도," "그 목을 쳐죽인 놈이 며칠 전에, 아 영산댁도 내 말 좀 들어보소. 그놈이, 그 목을 쳐죽일 놈이 우황 든 소를 속임수를 써가지고 팔라 안 카겄소? 그래 이 사람아 장사꾼이 사간다믄 모리까 하기야 속을 장사꾼도 아니지 마는, 다같이 땅 파묵고 사는 농사꾼한테는 그러지 말게, 아 그랬더니 이놈이 티끌이를 잡아서 쌈을 걸어오는 기라. 마치 내가 훼방을 놔서 소를 못 팔기라도 한 거맨치로. 그래서 대판으로 싸웠는데 나중에 들은께 흥정이 안 됐다 커더마. 봉사한테 판다믄 모리까. 이놈이 그래서 나한테 앙심을 품은 모앵인데 온 세상에 잠자다가 날 벼락을 맞아도 푼수가 있지 언제 내가 의병질을 했던고?" "흐흥, 전에도 그런 사람 하나 있었지야. 눈밖에 난 사람이면 의병질혔다 그 한마디로, 죽고 사는 게 그자 손 가락 끝에 매이지 않았더라고?" "아 설사, 설사 말이오. 이분에 내가 읍내 주재소까지 가서 총을 맞아 죽었다 카더라도 내 하나 죽으믄 그만이 다 생각느다믄 어리석은 일이라. 내 자식새끼들이 있는데 애비 원수 안 갚을 기든가? 한조 아들네미도 지, 진 주서 헌헌장부로 커가지고 아배 원수 갚을 기라고 칼을 갈고 있다는 소문 못 들었던가? 천하 없이도 지은 죄 는 남 주는 거 아닌께. 아, 아니고 말고! 이, 이놈을 그만, 맷돌에다 갈아마시도 맴이, 어이구! 우가놈 이놈아!" 그 동안 어지간히 참은 모양이다. 술이 들어가자 둑이 터진 듯 울분이 솟구치는가. 오서방은 바싹 메마른 입술 에 거품을 물고 허공에다 주먹질한다. "허허어, 그럴 기이 아니라고.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캤는데," "그러는 기이 아니라고요? 형니임! 지렝이도 밟으믄 꿈틀거리는데 하물며 사람이, 그것도 생사가 걸린 모함을 받았는데도요?" "사람 영악한 거 범보다 무섭다 안 했나? 그놈 건디리봐야 물구신맨치로 감고들 긴데, 일 없이 풀리나온 것만 도 잘 된 일이라 생각해야제." "하모요. 잘 된 일이라 생각해야제." 끝봉이 사돈뻘 되는 전서방 말에 맞장구를 친다. 외사촌형과 처남이 설동하여 읍내서는 말발이 선다는 허주사 의 보증을 얻어서 겨우 끌어내온 오서방인 만큼 두 사람은 제발 성가신 일이 다시 없기를, 그것만을 바라는 마음은 일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잘 된 일이긴 머가 잘 된 일이오? 아 그래 내가 의병질을 하다 붙들려갔단 말이요?" "허허어. 이런 세상을 살자 카믄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흥챙이가 돼야, 참말로 칼날 같은 세상인 기라. 임금님 도 들어내고 총칼이 소리치는 세상인데 우리 겉은 농사군이야 그저 죽은 듯이 들엎으고 있는 기이 상수라. 도 적을 피하믄 강도를 만낸다는 말도 있듯이, 참말이제 옛적에야 아무리 수령관속이 백성을 수탈한다 캐도 우리 네 상사람끼리는 할말 하고 살았는데, 그뿐인가? 동네에는 법이 있어서 사람 같잖은 놈은 동네에 살지도 못했 고."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으며 전서방이 말을 끊자 끝봉이 받아서 "살도 못했지요. 동구 밖으로 쫓아내믄 그만이었인께. 사람짓 못하믄 맞아죽어도 말을 못하지 않았소? 세상이 이렇기 되어가다가는, 참말이지 이렇기 되어가다가는 조상 산솔 파헤치도 꿀묵은 버부리놀음 안 하겄소?" 한동안 세 사람은 풀이 죽어서 말이 없다.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나그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을 리 없 다. "동네 인심이 너남지간 없이 날로 야박혀가는디 그 중에서도 우가하고 마당쇠하고가 젤로 큰일이란 말씨. 에 지간히 나쁜 축에서는 걸맞지 않더라고? 성씨부텀 그렇제 우가는 외양간에 살어야 허고 마가는 마구간에 살어 야 하는디 그래야 쓸 것인디 푼수없이 사럼집에 산께로 그런 횡패 아니더라고?" 풀이 죽었던 세 사람이 피시식 웃는다. "우가도 우가지마는 속으로는 숭측한 독사뱀이 들앉았다 카더라도 우선 외면 치레만은 하는 놈이니께, 마당쇠 그놈의 행실이야 들내놓은 거고, 옛적 겉으믄 당산나무가 성가싰일 기고 볼기짝에는 멍 가실 날이 없었일 긴 께." "볼기짝에 멍 가실 날 없어도 제 버릇이야 남 주겄소." "영락없는 되놈이라 카이. 마당쇠 그놈 오양을 보라고?" 전서방은 붕어 물 먹듯 담배를 피우고 처남 끝봉이와 매부 오서방 둘이서 말을 주고받는다. "나쁘기로는 우가 그놈 곁방 나앉으라 하겄지마는 천치 겉은 데가 있어서," "칠푼이니 망정이지. 그 차중 우가놈맨치로 재주꺼지 피운다믄 동네 사람 다 잡아묵게? 하야간에 마당쇠 그놈 가진 거라고는 똥창에 똥밖에 없일 기구마. 그 주제에 꼴에 꼴방망이 차고 남해 노량간다고 제 제집만은 오금 덩이겉이 우둔다 카이 한 가지 볼 점은 있는 모양이제?" "그놈도 미친놈이고, 서서방맨치로 미친놈 자꾸 생기겄소." 누이를 좀 위하라는 매부의 압력으로 받아들인 오서방 시뿌드드해서 말대꾸. "허기야 마당쇠헌티는 과한 마누라 아니더라고? 제집이 그만헌께로 동네서 원성도 덜 듣는 거 아닌게라우." "세상에는 호랑이 잡아묵는 담보가 있다 카더라만 마당쇠 그놈한테도 무서븐 거는 하나 있지." 끝봉이 쓴웃음을 띠고 "순사 말이라?" 영산댁 말에 모두 웃는다. 붕어 물 먹듯 곰방대를 빨고 있던 전서방도 웃는다. "주모, 여기 술이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영산댁이 허둥대며 환이 술잔에 술을 붓는다. "순사만 보믄 꽁지에 불 붙은 거맨치로 그 덩치 하고서 도망가는 꼴이라니, 며칠 몇 밤 부엉이새맨치로 숨어 있는 꼴이라니, 가관이제. 오서방 잡을라꼬 순사가 왔일 때만 혀도 허 참 그자가 먼지 뛰더라니까." "그란혀도 마당쇠 아낙이 며칠 동안 애먹었어라우. 어지 저녁때 게우 시루봉에서 찾았다잖여? 아그 달래듯기 달래서 데리왔단께." "미련한 놈이, 하기는 순사라도 그만큼 겁내니께 논골 장서방도 그 원수는 면할 수 있었을 기라." "그런달 것 겉으면 논골 장서방이 순살 물러딜이서 마당쇠를 내쫓았다 그 이야기라?" "장서방이 무슨 권세 있다고? 흥." "그렇담 무신?" "새로 된 땅 임자가 머 왜놈이라 카든가, 왜놈 첩년이란 말도 있고, 그거야 머 자세히 아나마나, 하야간에 세 도를 가진 놈이겄지. 순살 불러들일래믄," "그도 그렇겄소. 순사 말이 났인께로, 아 금매 지난분에 마서방, 순사만 보면 꽁지에 불 붙은 거맨치로 달아나 는디 워째 그런당가? 허고 물었더니 항우장사라도 우쩔 기든고? 화등잔 겉은 문서 있는 제 땅도 뺏들어가는 왜놈이니께, 총 한 방이믄 그만이라요. 내 이 눈으로 푹 꼬꾸라져 죽는 꼴을 봤이니께, 아무리 내 심이 항우장 사라 캐도 총 앞에서는 벨 수 없는 기라요. 아 지리산의 생이틀 겉은 호랑이도 총알에는 못 당하니께, 허질 않 겄소? 그 말 듣고 한참 웃었제라우." 시름을 잊은 것은 아닌데 모두 웃는다. 화제에 오른 마당쇠, 성은 마가요 이름은 당쇠라 해서 마당쇠인데 환이 주막으로 올 때 만난 그 사내가 마당 쇠이다. 이야기를 더 거슬러올려 본다면 십 년 전, 호열자가 퍼졌을 그 무렵 그러니까 죽은 최참판네 김서방이 마름 장서방 집에서 만난 일이 있는 바로 그 농부다. 참판네 마름이믄 천하 제일이오! 떼거지라니! 없는 놈의 이름도 성도 없다 말이오! 하며 엄상궂은 얼굴에 눈을 까뒤집고 덤비던 사내, 해면 해마다 약정한 대로 수곡 을 낸 일이 없고 그럴 때마다 땅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은 거품을 물고 울부짖고 어느놈이 죽는가 사 는가 보자! 동네가 떠나가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괭이를 둘러메고 돈으로 달려가던 사내, 논둑에서 몇 날 몇 밤을 지새우며 누가 논을 떠메고 갈 듯이 지키던 미련한 마당쇠였었다. 그 마당쇠가 논골에서 순사에게 쫓 겨난 것이다. 그러나 마당쇠의 뚝심은 최참판댁으로 밀고 들어갔고 화장작같이 안마당에 드러누워 이치가 안 그렇소오! 최참판네서 땅만 팔지 않았다믄 와 내가 쫓겨났겄소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마침 마을 을 떠나는 작인이 있어 결국 평사리에서는 혹을 하나 붙이고만 셈이다. "흥, 가리늦기 이기이 무슨 고생일꼬. 아무튼지간에 동네에 남아날라 카믄 우가놈 겉이 영악하든가, 마당쇠 겉 이 미련하든가 둘 중 하나라. 이차에 그만... 생각을 고쳐묵고 저븐 생각도 들고, 부산 겉은 도방에나 나가서," 오서방 탄식에 끝봉이 "부산 가서 머 해먹고 살라꼬." "산 입에 거미줄 치겄소. 선창가에서 짐이라도 날라주믄 설마 밥이야 안 굶겄지요." "내 고장도 인심이 이러크름 신산헌디 객지서 어느 누가 타관사람 반기겄으라우?" "도방이니께... 남이야 밥을 묵던 죽을 묵던 참견이야 안 하겄지요. 안 한 의병질 했다고 찌를 놈도 없일 기고 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마음을 놓고 살아야지." "그럴 바에야 부산 갈 것 없고 더 멀리 만주 땅에나 가지 머." "살자니 그렇고 더나자니 또 정처없고 참말이제 우쨌으믄 좋을지 모리겄소."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여. 절에 가면 편헐랑가 혀도 가보면 그렇고, 참고 살아야제. 부모 산소의 풀은 베야, 안 그렇더라고?" "그러시오. 우짠지 동네에 들어가기가 싫구마요." "싫으나 좋으나 할 수 없제." 전서방이 곰방대를 털고 허리춤에 찌르며 일어섰다. "빌어묵을, 제집자식만 없이믄 그놈을 그만, 내 죽고 지 죽고." 전서방은 오서방을 떼밀고 나가고, 끝봉이 술값을 내면서 처음으로 그곳에 외간 사람이 있는 것을 깨달은 듯 환이를 힐끗 쳐다본다. "..."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그 눈매, 끝봉은 까닭도 모르고 허둥대며 주막을 나간다. 허둥지둥 두 사람 뒤를 따르다 가 '가만있자아?' 걸음을 멈춘다. '가만있자, 가만있자... 누구더라? 저게? 마, 맞다! 최참판네 머슴놈 구천이다아!' 긑봉은 오던 길을 되잡아 주막을 향해 사뭇 달려간다. '허 참 뜬금없이, 그자가 여기 머힐라꼬 나타났이꼬? 죽었다 카더라마는 설마...' 그러나 끝봉은 자석같이 잡아끄는 그 눈을 똑똑히 기억한다. 끝봉이 주막 앞에까지 갔을 때 끝봉이 돌아올 것 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환이는 문 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 쳤다. 쫓는 처지도 쫓기는 처지도 아니었는데, 원수도 친구도 아니었는데, 끝봉이로서는 어리둥절한 대결이다. 말한 마디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환이에게 잡힌 눈을 빼내지 못해 숨이 가빠온다. 얼굴이 벌 개진다. 환이 미소지으며 술잔을 드는 순간 끝봉은 물러섰다. 미소짓던 얼굴, 악귀 같은 얼굴, 끝봉은 몸서리를 치면서 헐레벌레 걸어간다. 저만큼 개울가를 따라서 걸어가는, 무명 두루마기에 갓 쓴 전서방과 동저고릿바람 인 오서방 뒷모습을 향해 끝봉은 급히 걸어간다. "사돈," "와 그라요." 전서방이 돌아온다. "오서방!" "야?" 오서방도 돌아서서 기다린다. "거 희한한 일이 다 있구마." "머가요?" "주막에 말이다. 혼자서 술 마시고 있는 사람 안 있더나?" "야." "누군지 아나?" "우찌 알겄소." "구천이다. 최참판네 머슴 구천이란 말이다." "머라 카요?" "사돈, 틀림없는 구천이오. 이 눈으로," "허허어, 신소리 그만허소." 전서방은 일소에 붙인다. "틀림없는 일이라요. 나도 하 이상해서 주막에 도로 안 갔십니까? 가서 똑똑히 봤단 말입니다." "사람을 잘못 보는 수도 있인께." "허허어 참, 내 말이 안 미더브믄 사돈이 가서 한분 보소." 전서방은 팔자걸음을 휘적휘적 걸으며, "가서 볼 것도 없고, 설사 거기 있는 살매이 구천이라 캐도 우리하고는 아아무 상관없는 기라요." "야, 그거사 그렇십니다만," "구천이가... 그거는 아마도 처남이 잘못 보았을 기요.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만무 아니요." "아아니 그거는," "구천이가 죽은 지 언제라꼬요? 지리산에서 최참판네 사랑양반한테 총 맞아서 죽은 걸 모릴 사램이 없지요." "그것은 헛소문인 기라. 말짱 헛소문," "허허어 남우 일에 와 이래쌌는고?" 그러나 세 사람은 구천이가 죽었느니 살았느니, 아니라니 기라니 계속 말씨름을 해가면서 마을로 들어갔을 때 정자나무 아래 예닐곱 명의 사내들이 둘러서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와 이러요?" 끝봉이 기웃이 들여다본다. "설사 구신이라 카더라도 보기는 본 거라요. 무신 돈 나오는 일이라꼬 내가 거짓말을 하겄소." 기운이 한푼 없다는 시늉으로 팔을 젓는, 얼굴이 싯누런 육손의 목소리다. "아무래도 육손이 니 딸네미를 서울에 뺏기고 보니, 하기야 그럴기다. 정신이 온전찮으니께 이것저것 헛갈리는 기라." "내만 보았소? 내만 보았다믄 나도 믿지 않겄소만 서서방네 자부도 보았다 안 카요." "그러시... 그기이 정말이라 칼 것 겉으믄 생각해볼 일이제. 그놈이 어디메쯤 갔는지는 몰라도 다리몽댕이 성한 채 돌리보내는 거는 아닌데," 저승꽃이 피고 쪼글쪼글 주름져서 늙은이 티가 완연한 봉기는 하얀 혓바닥을 내둘러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말 했다. "그거라믄 내가 알구마요." 끝봉이 어깨 너머 얼굴을 내민다. "알다니?" "어디메쯤 간 기이 아니라요. 바로 영산집 주막에서 술 처묵고 있더마요." "그기이 정말이가?" "거 보소. 내가 헛것을 본 기이 아니라요." 육손의 얼굴에 기운이 돌아온다. "허 참 요상한 일이 다 있네. 거짓말 겉네." "방금 주막서 만내고 온 기라요." 끝봉이 그들 사이에 끼여들려고 발돋움을 하는데 옆에 있던 전서방이 옆구리를 찌른다. "...?" "가는 편이 좋겄구마는," 눈짓을 한다. 시꺼먼 수염에 온통 얼굴이 가려진 사내가 괭이로 땅을 툭툭 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서방의 많 찮은 수염이 푸들푸들 떤다. 중풍 든 사람처럼 입술이 비틀어지며 얼굴 근육 전부가 실룩실룩 움직인다. "야. 가, 가입시다." 전서방과 끝봉이 양편에서 오서방을 떼밀 듯,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뜬다. 음흉스럽게 빛나는 눈을 깜박이지 도 않고 괭이 든 사내는 그들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퉤! 퉤퉤퉤." 하며 가래침을 뱉고 씨익 웃는다. 그러는 새 모인 사람들 속에서 봉기는 나잇값을 하느라고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한분 생각해보는 기이 좋을 기구마. 와 우리가 오늘 이지겡으로 살기가 답답해졌는지를. 그거는 날아 가는 새 잡고 물어봐도 알 기구마. 그거는 으흠! 그거는 두말 하믄 입 아플 기고, 그거는 최참판댁이 망한 때 문이다. 어째서 망했노! 할 것 같으믄, 아무아무 땜에 그랬다 할 수도 있지마는, 그러나 시초는 구천이라, 머슴 놈 구천이가 별당아씬가 하는 제집을 업고 달아나지만 안 했이믄 아무리 망했다 망했다 해도 이 지겡까지는 안 됐일 기라. 이 동네가 아주 풍지박산이 된 것도 자초지종..." 하는데 어디서 난데없이 "그렇구마. 최참판네만 안 망했으믄 왜놈한테 땅을 팔았이까! 내가 순사놈한테 쫓기서 논골을 나오지도 않았일 기고오!" 우레 같은 마당쇠의 음성과 함께 험상궂은 얼굴이 사람을 헤치고 들어선다. "듣고 본께 일리 있는 말이라. 별당아씨라는 여자가 살림을 차고 앉았이믄 왜놈 세상 되었다고 이리 허망하 까?" "그라고오, 또오 한 가지이, 우리가 아무리 무식한 농사꾼이지마는 조상 대대로 지키온 기이 삼강오륜이라아. 알겄나아!" 봉기 자신도 모르면서, 그러나 신이 나서 목을 뽑는다. "그, 그렇고말고," 어물쩍거리는 장단이다. "그러니 머슴놈 구천이는 남으 제집을 돔바갔으니 옛 법에는 장살감이라! 그렇나 안 그렇나!" "그, 그도 그렇자." "지금이사 양반의 세도가 땅으로 뚝 떨어졌고 거기다가 이 동네는 양반이 모두 집을 비우고 없는 기라. 하니 께 우리도 삼강오륜을 지키온, 상놈일지라도 천민은 아니고 보믄 종질하든 구천이놈 작살을 못 낼 것도 없다, 내 말은 그거라." "작살뿐이겄소오! 맷돌에 갈아부리지" "그럴 거 없이 당산나무에 매달아서 몽둥이질이나 몇 분 하고." 심약한 편의 제안이다. "아무튼지간에 그놈이 달아나기 전에 잡기부터 하는 기이 좋겄소," 해서 봉기가 앞장선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은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주막으로 달려간다. 점심때가 가까워 지는 시각이다. 뿌연 햇살이 섬진강 물결 위에서 희번덕이고 있었다. "구천이 네 이노옴! 이리 나오니라아!" 주막 앞에 이른 마을 사람들, 그 중에서 봉기가 혼신의 힘을 모아 외쳤다. "뭣이랑가? 오매! 이게 워찌 된 영문이요잉?" 영산댁이 치마끝을 밟아서 휘청거리며 일어섰고 환이는 잠자코 허리끈을 졸라맨다. "구천이 네 이노옴! 이리 못 나오겄나아!" 이번에는 합세한 고함이다. 그 중에서 마당쇠 음성이 유독 짐승 울음같이 굵고 크다. 12장 백정네 식구 "분명 어제 새벽녘에 나갔소?" 혜관이 긴장된 얼굴로 묻는다. "그렇소. 첫새벽이라 떠나는 것은 보지 못했소이다만 강쇠를 깨워서 운봉어른 뫼시고 먼저 가라 이르더랍니 다." 혜관의 긴장에는 개의치 않고 윤도집은 냉정히 말했다. "어디 간다는 행선지도 말 않구요?" "글쎄올시다. 거기 대해선 강쇠가 말 안 하더군요" "그래요? 화엄사에 소승을 만나러 오게 돼 있었는데... 거 이상하군요." "혜관께서도, 아 하루이틀 일이라도 그 사람 걱정이오? 이곳에도 하루 늦게 왔더이다." 윤도집은 입맛을 다시며 쓰다는 표정을 짓는다. 사실 그저께 회합 때 환이 쪽에서 절반쯤은 양보했다고는 하 나 환이가 내놓은 방안이라는 것은 여전히 종전대로, 그 방침을 굳힌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교세를 확장 한다거나 전력을 증강한다는 거나 엄밀히 따진다면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건만, 왜냐하면 윤도집 역시 교세 확장이란 전력 증강의 위장임을 셈하고 내민 터수였으니까. 전혀 감정적 촉각이 없었다 한다면 거짓이겠는데 판단이나 신념을 내던지고서 다툴 만큼, 윤도집이나 환이 다혈질은 아니었다. 그러나 윤도집 쪽은 미처 자세한 설명이 있기 전에 교세 확장으로 몰리고 환이는 전력 증강에 치우치는 분위기로 치달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표면상으론 환이 양보한 것 같으면서 결코 양보한 것이 아니라는 미묘한 결과, 윤도집으로선 유쾌해질 리가 없다. "윤도집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엔 서울로 해서 간도 쪽으로 가게 돼 있지 않소이까? 그래서 그 사람 오기는 올 터인데 그래 근심이 되었지요." "오늘쯤 화엄사로 갈지도 모르지요." "그렇긴 하오만... 꼭이 만나보고 떠날 이유는 없어요." 혜관 얼굴에 불안해하는 기색이 떠돈다. "꿈자리라도 사나웠소?" "소승 심이 맑지 못해 늘 개꿈만 꾸는 터이니 오랜 옛적부터 꿈은 믿지 아니 하오." 혜관은 약간 성이 나서 말했다. "그런데... 혜관께서는 얼마나 기일을 잡으시오?" "글쎄올시다. 철도편으로 갈 테니까 옛날 같가야 하겄소?" "초행이지요?" "예. 만주는 남의 땅이니까." "하지만 간도는 조선 땅이오." "말로야 수천 번인들, 죽은 자식 뭐 만진다는 격 아니겠소?" "허허허... 그렇긴 하오만, 간도만 다녀오시겠소?" "마음으로야 연해주, 그 밖의 우리 독립군이 있는 곳이라면 다 가보고 싶소이다." "그러다가 중옷 벗고 아니 돌아오시면 큰일이지요?" "그야 모르는 일, 청국 여자 얻어서 살림을 차릴지 뉘 알겠소?" "그도 해로운 얘기는 아니외다, 허허허. 헌데 스님." "말씀하시오." "이번에 그 사람이 내놓은 방안이란 걸 혜관께서도 보시었소?" "아니오." "그래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윤도집은 문갑을 열고 네댓 겹으로 접은 한지 하나를 꺼내어 방바닥에 펴놓는다. 가 느다란 붓으로 그린 도판 비슷한 것이다. 대강 짐작은 갔으나 혜관은 상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환이 그 사람하고 의견의 충돌은 있었으나 그러나 머리만은 참으로 명석한 사람이오. 이거 보십시오." 혜관은 도판 비슷한 것을 들여다본다. 지리산을 중심하여 그 주변에 검은 점 여남은 개가 찍혀 있다. 그러니까 검은 점은 지리산에 가장 가까운 둘레의 요지들이고 그 요지들 둘레에는 스무남은 개 정도, 검은 점에다 동그 라미 한 개를 친 것이 그려져 있다. 그 밖에는 동그라미가 두 개, 또 그 밖에는 동그라미가 세 개, 다음은 아 주 먼 곳으로 뛰어서 화살표로 표시된 그냥 동그라미가 여러개 된다. "우리가 기왕에 우리 사람들을 심었던 곳은 혜관께서도 잘 아시는 바이고 여기서 보시다시피 멀리는 강원도 충청도 서울까지 우리자리를 넓히는 건데,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넓히느냐 그 방안도 이미 서 있고, 나로서도 이의를 말할 하등 잘못이 없는 듯하오." "이건 종전의 배가 넘는 지역인데 과연 이렇게 확대하여 무성ㅅ으로 감당하지요?" 혜관은 주의깊게 윤도집의 눈을 쳐다본다. "물주를 잡아야지요." "누가? 무슨 수로?" "전부가, 특히 환이 그 사람, 나 그리고 혜관께서." "있은 것을 뜯어 나누는 일말고는 그런 재간 없소이다." "그런 얘기는 그 사람보고 하시오. 그러면은 그 사람이 재간을 심어줄 것이오. 허허헛..." 혜관은 난감하고 답답한 듯 손톱을 물어뜯는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사람이 모자라오." "그러니까 혜관께서는 청나라 계집 얻어서 살림 차릴 생각 마시고 돌아오시야지요. 허허헛..." "글쎄외다. 이러면은 부득불 청나라 여잘 얻어서 돌아오지 말아야 겠소." "여기 보시오." 윤도집은 도판을 가리킨다. "이렇게 검은 점 하나에다 여러 개 동그라미 하나씩 더한 것을 묶어서 모아놓지 아니 하였소?" "그렇구먼요." "실상 검은 점은 그림자요. 검은 점의 자리는 사람이 있되 노상 없는 거요." 혜관은 도판과 눈싸움을 하듯 검은 점 하나를 노려보고 있다. 골이 진 중머리가 요동하지 않는다. 법의 깃 사 이로 뻗어난 굵은 목이 아직은 힘차고, 뼈마디 굵은 손, 아까 물어뜯던 손톱 사이에 꺼먼 때가 끼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검은 점에 있는 인물들은 건달패, 대장장이, 장사꾼, 객줏집, 판수, 혹은 백정 무엇이든 제각기 생업에 종사허고, 가령 여기 임실의 지삼만이 관수가 있는 여기 진주를 위시한 둘레 몇 개 고을에다 지삼만의 수하를 펴서 일해나가는 거구, 관수는 또 임실을 위시한 둘레 몇 개 고을에다 제 사람을 심는 거요. 이런 방안으로 동그라미 두 개 세 개에다 사람을 펴나갈 것 같으면 이 검은 점은 그림자요 나타나지 않는 숨 은 곳이요 따라서 일을 벌여가는 데 있어 어느 한 곳이 처지더라도 그곳에 그칠 뿐 비화될 염려가 없게 되는 거요. 항용 일이란 크게 벌이면 크게 벌일수록 구멍 뚫릴 확률이 많은 법인데 그것에 대빌 아니 하고서야 밑 천도 이윤도 다 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허니 그 사람의 이 방안은 매우 잘 된 것으로서, 나도 곰 곰이 생각할수록 감탄을 하는바요. 다만 이 같은 개편에 당사자들이 어리둥절한 모양이고 당황해지는 모양인 데..." "한마디로 번거로워졌소이다." 혜관은 또다시 손톱을 물어뜯으며 도판 앞에서 물러나 앉는다. "번거롭기보다 앞으로 새 인물이 새 지역을 손아귀에 넣고 다루는 솜씨, 역시 사람이오." 윤도집은 도판을 접어 문갑 속에다 넣고 나서 "결국은 동학교로 밀고 나가서 동학당으로 하느냐 초반부터 동학당으로 하느냐..." "지금 이 시국에 어렵지요." 윤도집은 혜관을 빤히 쳐다본다. "교로 밀고 나간다면 무당 판수를 지도적 인물로 앉힐밖에요." "말씀 계속하시오." "안 그렇단 말씀이오? 기왕에 하나도 아니요 두 개씩이나 동학교가 있는데 당을 감추고 교를 앞세운달 것 같 으면 다 건져버린 국에서 시래기 건지는 격 아니겠소오. 점판에다 엽전 한두 닢 올려놓고 신수점이나 하는 식 의 우매한 백성이 다소는 모이겠지요. 나라를 위해, 가난한 백성을 위해 싸우기는커녕 죽 먹기에도 코가 석자 오치나 빠질 사람들, 그들을 먹여살릴 자금은 또 어디 있고요? 소승 생각엔 윤도집게서 군자금 생각도 하시고 해서 교도들을 많이 수용할 요량인 모양인데 그건 종이 위에서만 나온 셈이오. 어쨌거나 교는 시세 없을 거요. 당이라야, 아니할 말로 칼 들고 들어가서 왜놈 전대라도 털어올 놈이 생길 것 아니겠소오?" "바로 그런 자를 만드는 순서가 아니오. 종이 위에 낸 셈이라야지 아무데서나 그때그때 따라서 주먹구구는 안 되오." "말은 해야 하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랍니다. 꿍얼꿍얼 넣어두니, 소승의 처지를, 또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달 것 같으면, 당이 아닌 교로 나가시겠도, 그런 방침을 굳힐 경우 손을 끊을 수밖에 없소이다. 명색이, 비록 땡땡 이중이라 하더라도 불교계에 몸 담은 놈이 그래 동학교 전도나 하고 다니겠소오? 앞으로 얘기가 또 되겠지만 돈푼 있고 땅마지기나 있는 사람들 중에는 진실로 나라 생각하는 사람은 불소하고 또 유형무형으로 왜놈에게 침해를 받은 사람도 많을 거외다. 그런 사람을 두고 생각할 적에 당이라는 것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고 또 조 력도 받을 수 있겠으나 절에 와서 시주하고 공양하겠소이까? 그 점 생각해보시야 할 거외다." "우리 오늘은 이만, 더 이상 거론 맙시다. 수십만 동학교도들의 옛 모습을 잊고 하시는 말씀이오." "그때 형편과 지금 형편이 다르오. 그 수십만 동학도 대부분은 왜놈에 의해서, 이용구 손병희에 의해서 초간장 이 된 거요." "허허 오늘은 이만허고오, 혜관께서는 이번 길에 그곳 사정이나 소상하게 알아오시오. 그런 후 우리 다시 얘기 하지요. 의견은 많을수록 좋은 방안이 나오는 법이니까." "대신 선장이 많으면 배가 살으로 올라가지요. 하하핫..." "허허허... 그렇기도 하긴 하지요. 안 그럴 수도 있구요. 허허헛..." 윤도집과 작별한 혜관은 다시 저녁 무렵 화엄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환이는 오지 않았고, 왔다갔다는 얘기도 없었다. '이 자가... 아무래도 그냥 가버린 모양이구먼. 하긴 뭐 만난다고 필히 당부가 있는 것도 아니겠고 최참판네 손 녀한테 지가 할 얘기 있을 턱이 있나.' 혜관은 다음날 새벽 진주를 향해 길을 떠났다. 진주서 관수를 찾아간 혜관은 "그래 봉순이 그 아이 거처는 알아놨냐?" "예. 성내 사는 소화란 기생이 주선을 했길래 여기 주소를 얻어놨고요, 또 봉순이 떠나믄서 하는 말이 이부사 댁 서방님하고는 연락이 닿을 터인즉, 혜관스님께서는 그 이사부댁 그 사람의 거처를 아실 거라," "알긴 알지. 아닌게아니라 서울 가면 그 사람을 만나서 좀더 소상히 알아 떠날 생각이구먼." 혜관은 자갈이 한없이 깔려 있는 강변이자 관수의 처가, 울타리 없이 마당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을 바라본다. 여러 날 비를 보지 못한 강변 자갈 위의 햇볕은 봄이지마는 뜨겁게 느껴진다. 쇠가죽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우리 속에 병아리가 삐약거린다. 아랫도리를 벗은 아이가 자갈밭을 뒤뚝거리며 걸어가고 다람쥐같이 젊은 여 자 하나가 달려나오더니 아기를 안고 도망치듯 부엌 쪽으로 뛰어간다. 혜관은 여자와 아기가 가버리고 없는, 햇볕만 내리쪼이는 자갈밭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하얗게 바래어진 자갈밭은 백정네 인생처럼 살풍경하다. 마을을 흘러다니며 가락을 뽑는 광대들의 그 한맺힌 가락 하나 없이, 햇볕에 타고 있는 쇠가죽처럼 핏빛에 얼룩 진 백정네 인생이 거기, 자갈밭에 굴러 있다. "나무관세음보살." 혜관의 염불 소리였다. 관수는 눈이 희번덕인다. 머릿골이 울툭불툭한 혜관의 옆모습을 쏘아본다. "동학당한테 염불은 무신, 소 때리잡는 기이 업인데 부처님 은덕을 입을 기든가? 극락왕생할 리도 없고." 어조나 음성이 매우 불손하다. 혜관은 퉁거운 고개를 비틀 듯 하며 관수를 쳐다본다. 피시시 웃는다. 무안쩍어 그러는 것 같다. 혜관은 본시 심성이 여린 사람이다. 나이 들고 체중이 늘어서 유들유들했음에도. 관수는 제 처자에게 동정한 혜관이 미웠던 것이다. 그 감정은 관수 나름의 제 처자에 대한 연민이다. '코 하나에다가 눈까리는 두 개 있고 아가리는 하나, 남하고 어디가 다르노. 다를 기이 머 있노 말이다. 같은 사람인데 머가 불쌍타 말고. 불쌍할 것 한푼 없다고. 다 같은 사람새끼 아니가.' "진주로 오기 전에 환이를 한번 보고 올려 했는데 못 만나고 왔구먼." 혜관은 슬며시 화제를 돌린다. "못 만내요?" "음." "만내기로 했십니까?" "잔치 끝내고 화엄사로 오겠다 했는데," "그거는 잔칫날 하로 늦기," "들었네. 기다리다가 안 오기에 내가 윤도집댁으로 갔었지.:" "꼭이 만내고 가시야 할 일이라도 있십니까?" "그런 거는 아니지만..." "본시 성미가 그러니께요. 밤도깨비 아닙니까?" 혜관은 입맛을 쩍쩍 다신다. "그렇다믄, 시님께서 윤도집넬 찾아가싰다믄 전후 사정, 시비 얘기를 들었겄구마요." "대강은," 관수는 얼굴에 비웃음을 띤다. "윤도집 그 어른이 만 번 그래봐야 별수없일 거로요? 윤도집 말심이 조리는 있십니다마는 따지고 볼 것 같으 믄 목탁 뚜디리믄서 들어오는 불공이나 받아 처묵는 중이 되라, 그 얘기 아니겄십니까? 동학이야 본시부텀 쌈 으로 시작된 거지 돈 걷어서 요량껏 하자 그거는 아니었으니깨요." "허허어, 관수 자네도 낭팰세. 그렇게 성품이 옹졸해서야." "대천지 한바다처럼 맴이 넓었으믄 극락이야 가겄지마는 남으 등에 칼 꽂는 짓이야 하겄십니까?" 독기 서린 그 말을 들어넘겨버리고 "그릇이 크다보면 빌어먹어도 빌어먹는다는 생각은 아니 할 것이며 대덕이 되다보면 고기를 먹어도 살생계를 아니 생각할 것인즉, 사람백정이건 소백정이건 낯을 가려서 뭘 하겠나? 거지, 소백정, 갖바치 할 것 없이 시혜 를 받는 편은 거지를 거지로 생각할 것이요, 소백정을 소백정으로 생각할 것이요, 갖바치를 갖바치로 생각할 것이나 심신을 바쳐 만백성을 도우고자 뜻을 세운 사람이면 일국의 제왕이건 다리 밑의 걸인이건 추호 다를 것이 없느니..." 혜관은 자못 엄숙한 낯빛으로 관수를 나무갈ㄴ다. 목탁 두드리며 들어오는 불공이나 바다 처먹는 중, 하며 내 뱉은 말이 사심 없는 비판에서 나온 말이 아님을 혜관이 알기 때문이다. 백정의 딸인 아내와 백정의 손자인 아들에 대한 연민이 관수의 심사를 일그러지게 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뜻이야 그런지 모르겄소만 머, 그릇이 크믄 얼매나 크겄십니까. 산간벽촌의 매 한 마리가 붕새 꿈을 꾸겄십니 까?" 여전히 반항적이다. "하하핫... 그릇 크기를 말한달 것 같으면 피장파장이지 뭐. 우리끼리는 싸우지 말자구." 혜관은 쉽게 타협의 기색을 나타내 보이며 교활하게 씨익 웃는다.힐끗 쳐다보는 관수 눈에 노여움은 없었다. "그는 그렇고, 한조 아들네미 그 아이 얘긴데," "..." "처음 내가 생각하기로는 대장간 일이라도 배우게 하면서, 차츰 가르쳐볼까 했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그런데요?"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럽다. "서울 가는 길에 데리고 가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나는군." "서울요?" "음." "서울 데리가서 우짤라꼬요." "어쩐다기보다는," "촌닭 장에 갖다놔도 멋할 긴데 서울이라니, 주녁들어 병신 되기 아니믄 간뎅이가 부풀어 외자걸음 걷기 십상 이지요. 잘 돼봐야 두만이 꼴 날 기고요. 어차피 좋을 것 하나 없소." 관수의 말은 들은척만척 혜관은 "이사부댁 그 사람이 서울에 있고 또 실팍한 연줄도 있는 모양이니, 그리고 봉순이가 있으니 말이야. 그애가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테고... 한조 아들네미 그 아아 신식 공부 좀 시켜보는 것도 훗날을 위해서 나쁘잖을 게 야." "신식 공부... 그러매요." 관수는 솔깃한 기색을 나타낸다. "하지마는 그 아이가 일자무식, 물지게나 지고 컸는데 그 나이 해가지고 신식 공불 해내겄십니까?" "그야 본인 마음먹기에 달린 거고, 영악한 지 애빌 닮았으면... 내가 보기엔, 영악할 뿐만 아니라 애가 진중해. 뭣이든 시키는 이상을 해낼 천성이 있는 것 같았어." "그건, 지 생각에도 그렇긴 합니다만." 관수는 잡시 생각에 잠긴다. "그런데 시님은 어쩌실랍니까?" 얼굴을 찌푸리며 혜관을 비스듬히 바라본다. "뭘?" "오늘 밤은 어디서 주무시겄는지 그 말심입니다." "잘 곳이 없으면 길바닥에 자면 되는 게야. 비 안 오시면 하늘은 천장이지. 안 그런가? 명색이 운수의 몸, 잠 자리 걱정을 한 대서야." 잰다. "백정네 집은 어떻소." "나쁠 것 없지이--" 어미를 뽑았으나 혜관의 눈알이 빙글빙글 돈다. 일갈하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는 모양인데 그러나, "벼룩 같은 놈아!" 삿대질을 하는데 법의 소매가 마구 춤을 춘다. "이 노래미 창자야!" 까까중머리가 흔들린다. 얼굴이 시뻘겋다. "이놈아! 그따위 배장 가지고 평생 백정질이나 해먹어라! 이놈아! 그래 이놈아! 그렇기 비위를 못 샛길 양이면 백정 딸을 왜 얻었어!" 관수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시님!" "왜 불러! 이 백정놈아!" "시, 시님!" "이놈아! 소 잡는 칼 가지고 날 찔러죽일 테냐?" "그렇다! 이 중놈아!" 방밖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울려왔다. 다음 헝클어진 맨상투의 육척 거구, 화등잔 같은 눈이 시뻘겋게 물든 사 내가 칼을 들고 나타났다. "이놈아! 백정이 니 에밀 XX묵었다 카더나?" "장인어른!" 관수가 맨발로 뛰어나간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칼 든 손을 잡는다. "놔라! 내 집까지 찾아와서 내 사윌 보고 백정이 우떻다고? 딸자식이지마는 내게는 금지옥엽이다! 그래 백정 이니 우떻단 말고오!" 관수가 힘이 썼으니 망정이지, 늙은 백정은 피를 볼 작정인 모양이다. 미친 듯 날뛴다. "장인어른.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 내 다 들었다. 백정의딸이니 갈라지라 그 말가! 내일 같으믄 골백 분이라도 차, 참겄다!" 뒤의 음성은 울음이다. "그런 게 아닙니다. 진정하시고 지 말 들으이소." 혜관이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방문 앞에 벌어진 장인 시위의 실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수가 장인을 억지로 끌고 뒤켠으로 돌아가는 모양인데 이 소동이 벌어졌건만 백정의 마누라와 관수의 처인 그의 딸은 코빼기도 내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 관수는 돌아왔고 야트막한 여자 흐느낌 소리가 뒤꼍에서 들려왔다. "시님!" 관수는 혜관 앞에 꿇어앉았다. "잘못했십니다. 한분만 용서해주십시오." "알았으면 됐네." 넌지시 말했으나 역시 혼이 난 음성이 목구멍에 걸린 듯 조그맣다. "지도 앞으론 그런 생각에서 이겨보겄십니다." "아암 그래야지. 그렇잖고는 정말 사람백정 노릇밖에 못하지." "예, 알겄십니다." 저녁상은 성찬이었다. 말갛게 장만한 채소, 산나물로만 된 찬들의 가짓수가 여간 많지 않다. 고소한 참기름 냄 새, 산나물의 향기가 콧가에 스친다. 혜관의 목구멍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난다. 침 넘어가는 소리를 듣자 관수 눈에 장난기가 어린다. 방에서 밖을 내다보며 부엌 쪽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이보래! 이보래!" 대답이 없는데 다시 "개기국은 와 안 끓있노오!" 역시 대답은 없었지만 '아이구 참, 짓궂기도 하다. 시님보고 우예 개기국 잡수라 카노.' 아낙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업은 아이를 앞으로 돌려 안고 부뚜막에 걸커앉아 젖을 물린다. "과해도 모자라는 게야. 대덕도 아닌 중놈한테 고기라니, 소리 한 번 더 지를까? 또 칼부림 나게. 하하핫핫." "하하하핫... 얼른 대덕 되십시오. 백정네 개기 좀 팔아묵게요." "씨가 말랐으면 말랐지. 이 혜관이 대덕 되겠나." 혜관은 밥 한 숟가락에 밥 분량만큼 나물을 듬뿍 입속에 집어넣는다. 입속이 굴 안만큼이나 깊고 넓은 것만 같다. "시님 대덕 되시기 글렀고, 이 관수놈 붕새 되기 글렀고, 땡땡이중에다가 매 한 마리... 예, 매는 끊임없이 살생 할 기고요, 땡땡이중은 거짓말만 하고 댕길 기고요, 별수 있겄십니까? 아무래도 지옥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 다. 안 그렇십니까, 시님?" "맞어. 하하하하... 하하하핫." 별안간 뚝배기 깨지는 소리를 내어 웃는 바람에 밥알이 튀어서 관수 얼굴에까지 날아온다. 어둑해졌을 무렵, 관수는 석일 만나러 간다고 나가고 혜관은 방안에 큰댓자로 누워서 집이 떠나게끔 코를 고 는데 잠이 들어 코를 곤 것은 아니다. 아까 시퍼런 칼을 들고 날뛰던 헝클어진 맨상투에 육척 거구, 화등잔 같 은 눈알에 핏발이 섰던 사내를 생각하니 으스스해졌던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 13장 산놈으로 태어나서 "정신이 좀 드는가배?" 떴던 눈을 감아버린다. "어이구 시상에, 이리 맞고도 심이 안 끊어졌어이, 하늘이 아는 자손 아니가, 하모. 그 어른이 냄긴 흔적인데 그리 어수럭히 가기야 할라꼬." 춘매는 환이의 손을 잡고 손등을 쓸어준다. 뼈와 가죽뿐인 손바닥이, 물기라곤 없는 메마른 손바닥이 어쩐지 징그럽다. 환이는 더욱 굳게 눈을 감는다. '춘매도 육십이 훨씬 넘었을 게야. 오래 사는군.' "우찌 그리 그 어른을 빼었는고. 씨도둑질은 못한다 카더마는... 나는 아이 적에도 그 어른을 보았고, 목이 짤 린 그 어른의 죽은 얼굴도 보았건만 우찌 그리 부친을 뺐일꼬." 환이 얼굴에 경련이 인다. "참말로 세월이 일장춘몽이다. 엊그제 같은 일들이 십 년 전 이십년 전 삼십 년 전의 일이라니, 나도 한세월은 좋았건만... 아이구 이렇게 정신없이 잠만 자고 있이믄 우짜노... 나도 한세월은 좋았건만, 영웅호걸도 내 품에 들어올 것 같은, 아이고 참말로 무상한 거는 세월이라." "에이, 어지간히 주절대는군." 혀를 차며 잡힌 한 손을 뿌리치고 돌아누우려던 환이 신음한다. "아아니 정신이 돌아왔음서 으뭉스럽기는," 하다가 춘매는 납독이 올라서 푸르죽죽한 입술을 쩍 벌리고 방금 찔끔거리던 것과는 딴판으로 사내처럼 웃는 다. "정신이 들었으믄 미음이라도 한 사발 묵어야 할 거 아니든가배?" "내가 여긴 언제 왔소?" "어지 저녁 때 들어서더니 픽 시러지더만. 옷은 갈갈이 찢어지고 어디서 우떻기 맞았길래, 하룻밤 하루낮을 송 장겉이 자빠져서 죽었는가 싶어서 콧가에다가 손을 몇 분 대봤다고." "미음 있으믄 주소." "그, 그러지." 하다가 춘매노파는 꼿꼿한 허리를 가누더니 맨발이 문턱을 넘는다. 큰 발이다. 튼튼해 뵈는 발이다. 함께 살던 남정네는 십 년 전에 죽고 오도가도 못하게 된 춘매는 살던 산막에 주질러앉아 일구어놓은 화전에 수수, 옥수 수, 고구마 등속을 심어 오늘까지 연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남정네를 두고도 강포수가 돌아오지 않으 면 웅담 팔아 계집 집에 갔나보다고 강짜부리기를 서슴지 않았던 화냥기 많은 사당패 출신의 춘매, 최참판댁 최치수가 김평산을 지리산에 보냈을 때도, 늦게 돌아온 강포수에게 "아이고 돈 생긴 김에 또 계집질했구마." "제기랄, 네 성방이라서 참견이가." 망태를 집어던지며 강포수는 투덜거렸던 것이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이면 춘매노파를 안다. 또 지리산 안의 일 이라면 춘매노파가 모르는 일이 없다. 모르는 일이라면 운봉노인 산하의 동학당이 재조직된 일과 환이 김개주 의 아들인 것만은 아는데 윤씨 소생인 것은 모른다. 춘매노파는 강냉이가루를 끓인 뻑뻑한 죽 한 사발을 데워서 가지고 왔다. 뭐 특별히 환이를 위해 미음을 따로 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환이는 끙끙 앓으며 일어나 앉는다. "이게 미음이오?" "언제 일어날지 몰라서," "죽으면 송장 치워줄랬더니," "내가 더 오래 살 긴께 걱정 안 해도 좋겄구마."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환이는 열려진 방문 밖의구름이 물드는 하늘을 쳐다본다. "어디서 뉘한테 그리 맞았는고?" "알아 뭐하겠소." "알아 바쁠 건 뭐 있을꼬." 춘매노파의 말투는 공대도 반말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다.공대하기는 나이 어려서 아들 같았지만 반말하기에는 천하를 삼킬 듯 기승했던 그의 부친에 대한 존경심이 허락치 않는 때문이다. "유부녀 겁탈하려다가 맞았지요." "에이구, 누가 그 어른 아들 아니랄까봐?" "뭐라구요?" "아 그 어른도 수절과부 겁탈해서 이녁을 낳지 않았던가배?" "수절과부! 그가 누구요!" 환이 눈이 험악하다. "우리라도 알았더라면 버얼서 어마님하고 상면했일 거로?" "모른다 그 말이오?" "모르지. 돌아가신 그 어른이나 알까. 칠칠 한밤중 겉은 비밀인께." "흥! 살아온 가락이군." 환이도 춘매노파에 대해서는 마음을 방치하는 눈치다. 말투가 헤픈 것으로 보아서. "그나저나 우짤 긴고? 몸이 그래가지고 몸조리를 해얄 긴데..." "탕수국 냄새 나는 할망구 옆에서 몸조리가 될 턱이 없지." "말도 우찌 그리 야박스러울고? 미음이나 들라니까." "이름이 좋아 불로초요. 어디 미음이라 생각하고 강냉이죽을 먹어볼까?" 팔뼈가 잘못되었는지 숟가락을 들다가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먹여주어도 좋을지 모르겄네." "그놈의 화냥기는 여전하구먼." "성미도 참." 환이는 죽을 먹기 시작한다. 얼굴에도 온통 피멍, 손등도 푸릇푸릇하다. 주막집 영산댁이 물을 퍼부으며 말리 지 않았던들. "정 이러크름 헐 양이면 내 순사 데리올 것인께! 알아서들 하더라고." 그 말이 주효하여 마당쇠가 먼저 물러났다. "워째 구천이는 꼼짝도 안 한당가? 아 시상에 아비 직인 샐인죄도 그 자식밖에는 칠 곤리가 없는 게라우! 최 참판네 사돈팔촌이나 된다고 이리들 헌답디여? 인심이 이래가지고, 괄시받는 사람끼리 혀야 옳다 그 말이여라 우? 이렁게로 조선이 안 망허고 어쩔랍디여, 응? 살이 살을 무는디 남이사 오죽이나 허겄소잉? 이보더라고! 구천이! 처 죽일 놈의 인사들헌티 맞기는 왜 맞는디야?" 결국 한 사람 두 사람 슬금슬금 물러갔다. 모두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모 양이었다. 슬금슬금 물러가던 마을 사람들은 얼마큼 가다간 도깨비에 또 다시 홀릴 것 같은 생각이라도 들었 던지 마구 뛰면서 도망을 친다. "어이구 이 사람, 아 여길 오기는 뭐하러 왔디야? 온 게 잘못이여, 잘못, 이 피!" 영산댁은 바가지에 물을 떠서 환이 이마에 끼얹어준다. "얼굴 뒤로 젖혀. 코피니게. 아 시상에 맞아죽을 심산이었어? 도망을 치든지 대항을 하든지 그 사람들헌티 맞 아야 헐 까닭도 없는디 워째 꼼짝없이 당하더라 그 말이여?" 영산댁이 말리지 않았던들 맞아죽었을지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피를 보고 미치는 짐승이었으니까. 올라가고 내려가는 숟가락 따라 눈이 올라가고 내려가던 춘매노파. "아무래도 모릴 일이구마는," "뭐가요?" "아 생각해본께 그렇구마. 심이 장사인 강쇠도 성님한테는 못 당한다는 말을 했고, 또 그렇지 않던가배? 지리 산을 비우겉이 날아댕기는 걸음걸인데 수백 멩 군사한테 둘러싸인 것도 아니겄고 대항을 해도 이깄일 거 아니 던가배? 사세가 불리하믄 도망을 쳤어도 그 뉘가 따를 기라고? 내사 심상찮구마." "말이 많소, 허기 들게. 보릿고개를 자알 넘긴 푼수구먼." "흥! 보리밭 한 때기라도 있이야 보릿고갤 넘지. 그런 소리 말고 강쇠보고 토깐이 개기라도 좀 주라 하는 기이 좋겄구마. 솟정나서 못 살겄는데. 늙은 사람을 위해야 복받는다 안 카던가." "강냉이죽 한 사발에 염치 좋소." "염치? 내 이팔청춘 시절에도 염치 안 채리고 살았는데 가리늦기 염치 채리까?" "그만하고 가서 강쇠나 데리고 오소. 토깐이 고기든 호랭이 고기든 이녁 입으로 부탁하고." "내 말 들어묵으야제." "하여간에 강쇠나 데리고 오소." 환이 죽 한 사발을 다 먹고 이마의 땀을 씻는다. "벌시 해가 다 졌는데 우찌 가라고?" "질긴 고길 먹을 지리산 호랭인 없을 테니." "어이구 그라믄 강쇠를 데꼬 온다! 대신 토깐이 한 마리 안 주고는 안 될 거로." 춘매노파는 짚세기를 끌고 나간다. "허, 허, 허허허헛..." 환이는 혼자 되자 헛웃음을 웃는다. '미친놈! 네가 정말 맞아죽고 싶었던 겐가? 왜 무엇 땜에, 죄를 쳐서 그랬었나? 죄를 쳐서 말이야. 으흐흐흣! 아니야. 거기 가보고 싶었다. 거기 연못에 가보고 싶었다.' 환이 눈동자에 괴이한 열기가 떠오른다. '이건 끝이 없는 쳇바퀴요, 나는 한 마리의 개미 아니겠소? 아무것도 없는, 가도 가도 꼭같은 길이요, 길이 있 을 뿐이오. 여보.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진달래 꽃잎 따서 화전 부쳐주겠다던 당신은 없구려.' 환이는 흐느껴 운다. 꿈속에처럼 흐느껴 운다. 초롱을 들고 여자의 한 팔을 껴안은 채 고소성 골짜기를 지나가던 그 한밤. 여자의 가슴에서 치는 고동 소리 가 가랑잎 구르는 소리 사이로 뚜렷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었다. 여자는 걷다가는 최참판댁 쪽을 돌아보며 울 었다. 서희야! 서희야! 울부짖는 여자의 마음속의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치수에게 쫓겨 산막을 버리고, 신발조차 벗겨진 여자를 이끌고 달아나던 그날 밤, 여자는 잠들지 않았어도 헛소리를 질렀다. 헛것을 본 듯 낭 떠러지로 달려가곤 했었다. 환이도 낭떠러지 아래 황홀한 죽음을 보았다. 황홀한 죽음을 보며 열망하며 그 자 신도 헛소리를 지르며 걸었다. 찬바람에 굳어졌던 땅, 잡목숲에서 들려오던 부엉이의 울음 소리, 여자의 작은 손이 손아귀 속에서 타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석등 불빛이 비스듬히 땅에 깔려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찹신만 같았던 우관선사의 법의는 시꺼먼 숲 의 어둠을 등지고 있었다. 두 줄기 안광이 환이 이마를 꿰뚫었다. 우관선사의 법의는, 육신은 점점 커졌다. 더 욱더 커져서 또 커져서 끝내는 하나의 벽이 되고 말았다. 여자는 자꾸만 자꾸만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환이는 손아귀 속에서 타고 있는 작은 손만을 실감했었다. 땅바닥에 다리를 꺾고 굻어앉앗다. '이 여인을 살려주십시오.' 한 시간 넘게 지났을까? 밖은 온통 어둠, 실낱 같은 초생달이 나뭇가지에 은고리처럼 걸려 있었다. 산의 냉기 가 방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울음을 거두고 방문을 닫은 환이는 몸을 누인다. '혜관스님을 못 만났군.' 얼굴을 방바닥에 묻는다. '서희... 서희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스님을 만날 필요는 없지. 어느때고 난 그애를 한번 보러 가리. 먼 빛으로라도 보러가리.' 하다가 환이는 어느덧 수마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진달래 꽃밭이다. 소복한 인이 아낙이 웃고 서 있다. '서방님! 별당아씨 대신 제가 화전을 부쳐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네가 나한테 앙갚음을 할 작정이군.' '앙갚음이라뇨? 그런 말씀 아니 하시는 겁니다. 여한이 없게 제가 부처드리는 화전을 잡수시오.' 인이의 아낙은 흰 쟁반에 파르스름한 화전을 담아 내밀었다. '화전은 부쳐줄 사람은 네가 아니다. 대신 하룻밤 동침하여 너의 원한이 풀어진다면 그렇게 하리.' 환이는 여자를 안았다. 안고 뒹굴었다. 진달래 꽃잎이 쌓인 푹신푹신한 금침 위였다. '어떠냐? 원한을 풀겠느냐?' 환이는 여자의 몸을 다루며 거친 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떠냐? 이젠 여한이 없겠느냐?' '아니옵니다. 욕망무한이외다. 별당아씰 쇤네는 죽일 것이오. 칼은 잘 들게 갈아놨구요. 네, 서방님. 그 계집을 잊는다면 쇤네 만리성이라도 쌓겠소. 손톱 발톱이 빠지고 닳아져도...' 별안간 칼이 사칸 대청에서 곤두박질을 친다. 시퍼런 칼이 곤두박질을 친다. 곤두박질치는 칼을 하얀 여자 손 이 낚아챈다. 버선발을 굴리며 소복의 여자가 칼춤을 춘다. 화엄사다. 단청 빛깔이 찬란한 대웅전 앞이다. 혜관 이 울퉁불퉁한 머리통을 두 손으로 싸안으며 달아난다. 장삼자락이 미친 듯 출렁거린다. 칼춤을 추며 버선발을 굴리며 소복의 여자가 쫓아간다. 흰 치맛자락이 출렁거린다. 어느덧 여자는 송낙을 쓰고 있다. 소복에 송낙이 라니. '나무과안세음보오살! 나무과안세음보오살!' 비명이다. 비명같은 혜관의 염불 소리가 경내에 울려퍼진다. '와하하핫핫... 으아하핫핫핫!' 이건 또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웃음의 함성, 웃음 바다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구름같이 모여든 중들이 일제히 배를 잡고 웃는다. 잿빛 장삼에 검정빛 붉은빛 황금빛 가사를 걸친 중들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 것이 었다. 중들 속에 우관선사가 있다. 소복 여인의 남정네, 인이 얼굴이 있다. 문의원이 있고 수동이 김서방의 얼 굴이 보인다. '저 사람들이! 아아니 언제 중이 됐을꼬? 거참 이상한 일도 있다.' '와하하핫핫...으아하하핫핫!' 웃음 소리, 웃음의 파도는 출렁거리는 장삼자락, 출렁거리는 치맛자락과 범벅이 되어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대웅전 단청한 기둥이, 연화무늬의 연목 뿌리가 흔들리고 숲이 흔들리고 바위가 흔들리고 만산의 진달래 더미 가 흔들리고-- '나무과안세음보오살! 나무과안세음보오살!' 혜관의 비명이 멀어져간다. 새벽 하늘의 별같이 멀어져간다. 구역질이 솟구친다. 환이는 가슴을 잡아뜯는다. "성님?" 강쇠의 음성이다. "성님, 정신차리시오!" "으음..." "성님! 성님요!" "내비리두어." 춘맹의 꺽쉰 음성어다. "내비리두라니,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내비리두라꼬요?" "꿈을 꾸는개비. 아까 죽 한 사발 묵고 한참 시부맀이니 죽지는 않을 기구마." "어이구 참! 이기이 무신 변괸지 모르겄네." "변괴는 무신, 그럴 수도 있는 일이제." "천지개벽을 했다믄 모르까 성님이 몰매를 맞다니 말도 안 돼요." "아 구만리 장천을 나는 새도 화살에 맞고 망망대해를 헴치는 물개기도 낚싯줄에 걸리는데 형체가 있고 보믄 사램이라고 우예 안 당한다고 장담할 기든고?" "안다니 나흘장 간다 카더마는 또 그 안다니 새설 나오누마. 나는 새가 화살에 맞는 거는 정한 이치고 물개기 가 낚시에 걸리는 것도 정한 이치고요," "젠장! 숯이나 굽어묵음시로 귀동냥도 못한 니까짓 산놈이 머를 안다고 큰소리고. 그놈의 이치이치 하지마는 바로 그놈의 정한 이치를 몰랐기 땜에 몰매를 맞았다는 거부터 알아야 하는 기라. 쳇!" "머라 캤소! 한분 더 말해보소." "한분 더 해보라카믄 말 못할까봐서! 임자 있는 제집한테 손을 내밀었인께 몰맬 맞을밖에." "되잖은 소리는 하지도 마소. 서천 쇠가 웃일 일이제. 하 참 내, 손을 내밀기는커녕 내민 손을 뿌리친 기이 동 티였다믄 소금치는 믿겄소." "자게 입으로 한 말인께." "흥, 성님이 빈말하는 거 어제그제 일이던가? 그것 모르믄은 할매도 만고풍산 다 겪었다 할 수는 없일 기요." "누가 그걸 모르건데? 니가 미버서 그랬다, 와!" "할매한테 미움받아 서러불 내가 아니거마는. 밤길 가다 도깨빌만내 시름을 했이믄 했지, 그나저나 이를 우짜 믄 좋노? 업고 가더라 캐도 정신이 들어야 할 긴데." "여기까지 찾아온 사램이 설마, 엎어지믄 코 닿을 긴데 거까지 못 갈까 봐서? 어이구우, 늙으믄 죽어야 하는 기라. 젊은것들 헤굴어 쌓는 거 앵이곱아서,"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소. 백여시가 골백분 둔갑하도록 살고 저블 긴데, 아무튼지간에, 음, 그러니께 잔치 끝에 좋은 일 있기 어렵제." "잔치 끝이라니?" "할매는 몰라도 되는 일이라요." 환이 몸을 뒤친다. "성님! 이자 정신이 좀 듭니까?" 비스듬히 몸을 일으키려 한다. 강쇠가 얼른 팔을 내밀어 부축하여 일으켜 앉힌다. "대관절 일이 우떻게 된 깁니까?" 강쇠가 묻는 말에는 대꾸가 없었고, 환이는 입맛을 다시며 춘매노파를 바라본다. 관솔불을 받고 서 있는 노파 눈은 어둠을 안은 소 같이 검고 깊다. 불빛 아래서는 납독이 올라 푸릇푸릇한 살갗, 염낭주머니처럼 오므라진 입술에서는 끈질긴 삶의 의지가 타고 있는 것만 같다. '저승 가는 관문이 삼도천이지. 그 강가에 노파가 지키고 있다던가? 강ㅇ을 건너러 온 명부객들 깝데기를 벗 겨먹는다는 늙은 아귀가 아마 저런 꼴은 아닌지 모르겠네.' 밤이면 남자 없이 살 수 없었던 계집의 말로가 정녕 저렇게 추한 것인지-- 이승과 저승의 몽롱한 장막을 걷 고 내왕하듯 환이의 시선은 흐렸다가 반짝이곤 한다. "성님." "..." "걸으실 만합니까?" "가야지." "가입시다 그러믄." "으음. 강쇠야." "야." "토끼든 고슴도치는 잡히는 대로 저기, 불로장수할 저 늙은이한테 한 마리 갖다주게." "말도 마이소. 오믄서 내내 토깐이 토깐이, 하고 토깐이 노래를 부르는데 귀에 못이 백힜십니다." 촌매노파가 높이 쳐들어주는 관솔불을 뒤로 하고 강쇠에게 이끌린 환이 산길을 탄다. "강쇠야." "야." "너 고생스럽다는 생각 안 하냐?" "고생이사 타고난 거 아닙니까. 어차피 산놈으로 태어났이니께요." "팔자소관이란 말이지?" "아니지요. 산놈으로 태어났이니께 무신 짓을 해도 더 나빠진다할 기이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잘하는 일로 생각한다 그 말이구먼." "못하는 일은 아니라 생각은 한께요. 잘 묵고 잘 입고 근심걱정 없는 사람들이사 머가 답답해 백성들 생각하 겄소? 우리 겉은 놈 아니믄 누가 나서서 일할 깁니까. 나는 그쯤 생각은 한께요. 성님겉이 학식이 많고 천하를 휘어잡을 그런 뱃심이야 없지마는요." "미친놈, 미친 소리 하는군. 너를 잡고 애기하느니 돌고개에 가서 미루나물 보고 얘길 하지. 그는 그렇고 혜관 스님 신상에 무슨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는데..." "오랑캐한테 붙잡혀갈까 싶어서요?" 그 말 대꾸는 없이 "어서 가자." "그나저나 성님 몸이 펄펄 끓소 불덩이 같구마요." 역시 그 말 대꾸는 없이 "한바탕 하는 모양이야." 멀리서 야수의 울음이 날카롭게 밤공기를 찢는다. "호대감이 한판 치는 모양이지요. 늑대 소리 아닙니까?" "음. 서너 마리 되는가부지." 환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다. "안 되겄소. 지 등에 엎이이소." 강쇠는 다짜고짜 환이를 치켜들고 등에 업는다. "아무래도 잔치 끝에 좋은 일 있기 어려븐갑소." "..." "성님이 우떻다 카믄 일은 다 허사 될 기요. 우짜다가." 등이 뜨겁다. 내쉬는 환의 입김이 열탕을 부은 듯 뜨겁다. 강쇠는 속으로 야단났다는 생각을 한다. '인이 여편네 친정 식구들이 몰리와서 성님을 이 지경 맨들었는가? 성님이 뭐 잘못했다고? 혹 성님이 겁탈할 라 캤기 땜에 죽었다고 뒤집어씨운 길까? 그랬다믄 와 가만히 맞노? 갑재기 허세비가 됐더란 말가. 저 지경 되도록 맞게. 하야간에 오나가나 기집 땜에 말썽인데 성님도 딱하제. 그만 하나 골라잡아서 데꼬 살믄은 이런 일도 없일 기고 벵이 나도 벵구완할 사램이 있을 기고 멋 땜에 사서 고생을 하는지 내사 그만 알다가도 모릴 일이라. 참말 날이 갈수록 모릴 사람은 성님이다. 사램이란 어느 만큼 옆에서 보고 있으믄 알게 되는 긴데 도 리어 성님은 날이 갈수록 더 모르겄다 카이. 우떤때는 구신 같고 우떤 때는 사람 같고...' 발 끝에 익은 길을, 환이를 업고도 수월하게 강쇠는 걸어간다. 산속은 낮보다 밤이 더욱 어수선한 것 같다. 바 람 소리, 숲이 흔들리는 소리도 요란스럽다. 산막으로 들어간 강쇠는 한곁에다 환이를 눕혀놓고 관솔에 불을 붙인다. 환해진 산막 안에 환이는 상처받은 한 마리 짐승같이 엎어져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성님." "..." "몸이 불덩이 겉소." "춥군." 엎어진 채 말했다. "운봉선생님한테 가보까요?" "불이나 피워주게." "이러다가 산중서 큰 벵 나믄 우짤 깁니까." "아직은 죽지 않을 게야. 난 그걸 알아. 난 병들어서는 죽지 않는다." "그렇지마는 누가 그거를 장담하겄소. 자게 몸 자게가 위해야제요." "불이나 피워주게." "야." 강쇠는 토막나무 네댓 개를 얼키설키 얽혀놓고 솔가지에 관솔불을 댕겨서 토막나무 사이에 쑤셔넣는다. 산막 안은 더욱더 환하게 밝아왔다. "강쇠야." "야." 엎으러져 있던 환이는 어느덧 북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벽 쪽에 그림자, 강쇠의 상투머리를 보며 환이는 말했 다. "너 그놈의 굵은 상투머리 연유를 말해보아." "머라꼬요?" "언제 어떤 연유로 해서 상투를 올렸느냐, 그렇게 내 물었다." "별소릴 다 듣겄소. 성님은요? 사모관대 못해보기론 피장파장 아니겄소." "그런가?" 환이는 몸을 흔들어대며 웃는다. 웃다가 "엇 추워!" 몸만은 연신 흔들어댄다. "난 말이다, 이번엔 묘향산으로 갈 게야. 가고말고." "묘향산이라꼬요?" "엇 추워!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느냐? 난 다리 밑에서 사흘을 굶고 인사불성이 된 일이 있어. 문둥이랑 함께 잔 일도 있고. 그뿐인줄 아나? 배가 고파서 복어알을 먹었는데도 안 죽더군. 조선 팔도 내 발이 안 미친 곳이 없 고. 졸면서 낭떠러지를 걸었는데 안 떨어졌더구먼. 그때 그러니까! 그때 그러니까!" 강쇠는, 미련한 강쇠는 환이 얘기를 하는 줄 알았다. 평소보다 말이 많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환이는 병 을 이기려고, 추위를 이기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이야깃 소리 정도였다. 얘기에 두서가 없어지고 "스님 살려주시오! 이 여인을 살려주시오!" 하며 헛소리로 옮겨갔을 때 비로소 강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14장 동행 성내에 사는 소화에게 줄을 놔서, 옛날 소화의 기둥서방이었던 운삼을 찾아 서울에 온 기화는 모든 형편이 예 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협률사에 관계하고 있는 만큼 운삼은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소리꾼이었고 장 안의 모모한 기생집과는 밀접한 줄이 있었다. 말하자면 말발이 선다는 얘기겠는데 그러한 여건도 여건이려니 와 기화의 기생으로서의 자질을 운삼이 높이 샀다는 것에 보다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 는 생래의 목청과 용모며 자태, 그리고 색향으로 전통이 도도한 진주 땅에서 닦여진 언행이며, 그만하게 갖출 수 있는 기생이란 그리 흔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거 소화가 면판만 번드르르했지 변변찮은 계집인 줄 알았는디 보는 눈은 있었던 모양이라." 전라도 태생인 운삼은 어쩌다 비쳐나온 그곳 사투리로 함춘관 안방에 앉아 함춘관의 주인 추산에게 느긋해하 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십을 갓 넘겼으나 운삼은 아직 젊었고 얼핏 보기엔 선비풍도 있어 광대 사회에선 행세 하는 인물이다. 마주앉은 함춘관 주인 추산은 사십줄, 그러나 나이보다는 겉늙은 여자인데 한때 운삼과도 관계 가 있었지만 늙어가는 마당에 서로 흉허물없이 친구처럼 지내는 터였다. "나도 그애가 마음에 들어요. 얼굴은 그만한 애가 왜 없겠어요? 자탠데, 정말 버들 같이 않아요? 사내들 한번 쯤은 품에 안고 싶은, 호호호호홋..." "으음 은은하지. 봄밤에 소리 없이 내리는 비 같고, 허허헛..." "아니야. 기화, 다스릴 기에다가 꽃 화, 좋은 이름이야. 허나 그애 장기는 뭐니뭐니 혀도 소리여. 명창 하나 맨 들 수 있을지도 몰라." "글쎄요. 그건 운삼선생 소관이구요. 저로선 장사가 잘 됐으면 싶어요." "중이 고기맛을 알면 법당에 파리가 안 끊인다 허던디 추산이도 너무 돈맛을 알아서 그래. 겉늙은 게야." "그런 말씀 마셔요." 추산의 얼굴빛이 싸늘해진다. "기생이란 젊은 한철이 용색이지요. 돈 떨어진 늙은 기생 말로를 못 보셔서 그러셔요? 찬서리에 홍낭자 신세, 운삼선생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돈은 좀 아셔야 합니다." "나야 뭐 걱정인가? 함춘관의 추산이 돈 자알 버는디, 허허어." "객담은 남의 나이(팔십) 잡수신 후에나 하셔요." "그럴까? 허허헛..." "기화 그애 경우도 그렇지요. 운삼선생이 골백 번 주선을 하셨다 하더라도, 네, 선생님이 어려우시면 따로 제 가 도와드리지, 사람 하나 맡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애가 마음에 들어서 저로선 상당히 특대우를 한 거니 까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추산에게는 함춘관말고 다방골에 조용하고 조촐한 사람집에 한 채 있었다. 그러나 추산은 거의 함춘관에서 기거하게 되었고 사림집은 행랑어멈이 지키고 있었는데 기화를 위해 그 집을 쓰게 했으며 여 간한 손님이 아니고는 비장한 보물처럼 기화를 함춘관에 불러오지 않았었다. "마음에 들어서만 그러할까?" "네. 물론 기화 뒷배를 서참봉댁 서방님이 보아주시는 탓도 있겠지요. 그 양반한테 빗보이는 날이면 장사 못해 먹으니까요." "추산이 자네도 능구렝이가 다 돼가는구먼, 서참봉네 아들보다 화살은 황부자네 맏아들 황태수한테 꼽아놓고 서," 비로소 추산은 킬킬 웃는다. "허나 서참봉네 아들이건 황부자네 아들이건 잘못된 과녁이야." "어째 그렇지요?" "그건 두고보면 알아. 그러면은 슬슬 나가볼까?" "뭐가 그리 바쁘셔요?" "바쁜 사람이야 자네지. 다음 또 올것이여." 운삼은 회색 두루마기에 연회색 중절모를 삐딱하니 눌러쓰고 방을 나선다. 풍채는 옛날과 다름없는데 목덜미 의 살갗이 늘어져서 걸음을 따라 가늘게 흔들린다. 정한 여자 없이 봄바람처럼 가볍게 정을 주며 여자들을 거 쳐온 사내의 뒷모습을 홀가분하다 해야 할지, 쓸쓸하다 해야 할지, 추산은 대청 기둥을 짚으며 사내가 사라지 고 없는 그곳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서 있다. 겨우 반나절이 지난 시각, 처마 그림자가 댓돌 끝에서 아슬아슬 하게 머물고 있는데 손님이 들기엔 아직 이르다. 담밖 거리에는 오가는 물지게꾼으로 한창이었다. "어머니." "왜." 동기 남선이다. "저어, 중이 왔어요." "중이 왔으면 쌀줌이나 시주하면 될 거 아니냐? 날 보고 일일이 얘기할 것도 없다." "아니어요. 동냥 온 중이 아니어요. 어머닐 만나뵙겠다 하질 않겠어요." "나를? 별일 일세? 중이 나 보잔다구?" "예." "어디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물어보아라." 추산이 역시 다른 아녀자와 마찬가지로 사문을 박대해서는 안된다는 미신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앙화를 두려 워하고 운수에 예민한 때문이다. "저어 오시기는요, 진주서 오시구, 어머님한테 물어볼 말씀이 있다나봐요." "그래? 그럼 들어오시라구." 별로 부피도 없는 바랑을 짊어지고 한 손에는 석장, 한 손에는 단주를 든 혜관이 안마당으로 쑤욱 들어선다. 추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혜관의 행색을 유심히 살핀다. "나무관세음보살!" 혜관은 석장을 마루 끝에 기대어놓고 추산을 향해 합장한다. 마루 위에 서서 내려다보던 추산이 당황하며 손 을 맞잡을 듯 어물어물 고비를 넘긴다. "스님은 이곳에 무슨 일로 오시었소?" "네에, 나무관세음보살!" 다시 한 번 합장하고 마루에 걸터앉더니 "후우--" 숨을 내쉬고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문지른다. 땀 바가지나 쏟았다는 시늉인데 얼굴은 멀쩡했다. "더름이 아니오라 사람을 하나 만나고저 왔소이다. 진주서 온 기화라는 기생 아인데," "기화..." "네에, 가회동 이판서댁에 가서 기화를 찾을까 생각도 했습니다만 곧바로 이곳에 왔습지요." 혜관은 곁눈질을 한다. 가회동 이판서댁이라면 이범창 대감댁을 두고 하는 말이었고 그 댁 아들이 서참봉네 아들과 황부자네 아들과 요즘 어울려 다닌다는 것쯤 추산도 잘 아는 터였다. "기화 그 아일 제가 맡아 있긴 합니다만 지금 이곳엔 없고," "없다면 어디로 갔다 그 말씀이오까?" "성미도 급하십니다. 그 귀한 아일 함부로 할 수 있어야지요? 깊숙이 숨겨놨어요." 추산은 까르르 웃는다. "그러면 소승도 만날 수 없다 그 말씀이오?" "그럴 수 있겠어요? 출가하신 분이 설마 그앨 다치기야 하겠어요? 흐흐흣..." "네에, 네에, 여부가 있겠소이까." "얘야! 남선아!" "예--" 동기가 달려온다. "대사님을 집에까지 모셔다드려라. 그럼 스님, 사연은 후일에 듣기로 하지요. 다녀오십시오." 얕잡는 건지 공대하는 건지 알쏭달쏭한 어투에 미소다. "나무관세음보살. 폐를 끼쳐 죄송하오외다." "천만의 말씀을," 문밖에 나선 혜관은 "얘야." "예." "집이 이곳서 머냐?" "별루," 동기는 홀짝홀짝 뛰듯 걷는다. 가다가 돌이 있으면 한 발을 치켜들고 모차기를 해가면서, 나이 열두서넛? "스님?" 가다가 휘딱 돌아보며 부른다. "왜 그러느냐?" "진주서 오셨다구요?" "그렇느니라." "진주 거기, 서울집이란 비빔밥집 있지요? 스님 가보셨어요?" "쪼깐이집 말이구먼. 넌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 꼬마 아주머니 우리 친척이거든요. 기화언니가 날 진주 한번 데려가주시겠대요." "거미줄같이 얽힌 인연들이구먼, 허헠!" 혜관은 딸국질을 한다. "어멈! 문 열어요. 손님 오셨수!" 대문 열리는 것을 본 동기 남선은 홀짝홀짝 뛰면서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저어..." 내다본 행랑어멈은 혜관을 보자 의외한 표정이다. "어멈!" 기화의 음성이다. "뉘 오셨수?" "스님 한 분이..." "알았어요." 급히 나오는 기색이다. 깨끗하게 단장하고 더욱 아름다워진 기화가 대문간까지 나왔다. "스님!" "응. 그간 잘 있었냐?" 혜관은 부신 듯 눈을 꿈벅거린다. "들어오셔요. 이부사댁 서방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마침 잘 되었구먼. 널 만나보고서 이판서댁으로 갈려 했더니." 집은 열다섯 칸이 넉넉했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기화는 건넌방과 건넌방에 잇달린 다음 방 두 개를 쓰고 있는 모양이다. "어서 오시오, 스님." 상현이 앉은 채 인사를 했다. 혜관은 바랑을 풀어놓고 염불도 합장도 생략한 채 상현과 마주앉는다. "서찰을 받고 여기 와서 대기하고 있었소." "편리한 세상이어서, 좋은 것도 있구먼요." 혜관과 상현은 다같이 어색하게 웃는다. 변명 같은 웃음이다. 봉순이가 아닌 기화를 두고 그들은 남자인 것을 의식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십대의 비구승이건, 아내가 있고 연모하는 여인이 따로 있고 자랑스러운 젊 음을 지닌 사내건 기생 기화를 의식 밖에 몰아낼 수 없는 것이 남자의 생리인지, 아니 기화가 지난날의 봉순 이었다는 것, 비구의 몸이라는 것, 새파란 나이에 기방 출입, 그런 것에서 파생되는 느낌을 극복하기엔 두 사 람이 다 약하다 보는 것이 옳을 성싶다. "연해주까지 가신다는 말씀이었는데." 상현이 말을 꺼내었다. "네, 기왕 간 김에 두루 살펴보고 싶소. 이동진 나리도 그쪽 형편이 용이하시다면 만나뵜으면 싶소." "아버님은 지금도 연추에 계시는 모양이고 용정촌과는 부단히 연락되는 줄 압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대감 댁 큰자제 되시는 이윤종 씨가 유하현 삼원보에 계십니다. 만일 그곳에 가시는 일, 그분을 만나는 일은 스님을 위해서도 매우 유익할 듯하니까요. 연해주에 가셔서 아버님을 보시고 또 삼원보에 가셔서 이윤종 씨를 만나시 면 그곳 사정은 훤해지실 줄 생각합니다." "고맙소, 그렇게 하리다." "이대감댁에선, 특히 그 댁 마님께서는 그곳 사정을 소상히 아시기를 바라니까... 스님께서 어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비를 도와주실 눈치더군요." "주신다면야, 이 소승 손이 작아 못 받겠소이까? 많이만 주십사고 말씀 전하시오." "떠나시기 전에 한번 만나보셔야지요." "그러면은 더욱 좋구요. 능변은 아니지만 발바닥 하나 튼튼해서, 한번 길만 터주시면 문턱이 닳도록 다닐 심산 이오, 하하핫..." 입을 쩍 벌리고 웃는다. 평소보다 더 크게 벌리고. "그건 또? 신돈이나 보우, 그 괴승들의 열째 번 제자쯤 되시려구요?" "하하핫핫... 핫! 안 되고 싶지는 않소이다만 이 밤송이 같은 상판하구서 신통력과는 만리성이요, 그저 땡땡이 중 발바닥만 믿는게지요. 또오 말하잘 것 같으면, 이대감댁을 말하잘 것 같으면 나라은혜를 많이 입었다 할 수 있는 명문거족, 일하는 사람들한테 돈푼이나 내놔야 마음이 편하질 않겠소? 이 중놈은 믿는 발바닥이라도 있 지만 가마 타고 다니던 양반들이야 마음놓고 뛸 수 없는 노릇이니 하는 말이오. 이부사댁 나리야 청백리로서 소싯적부텀 송곳 같은 똥만 쌌으니 연해주 얼음나라에서도 자알 견디시지만요." 매우 신랄하다. 상현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힐끗 쳐다본다. 권위 의식이 눈빛을 싸늘하게 만든다. "견디고 뛰는 것만 대수가 아니지요." "네에, 그걸 소승이 모르겠소? 허니 이대감댁에선 고방문을 반쯤여셔야 하고 서방님같이 명석하고 학문 깊은 젊은분들은 남의 나라에 가셔서 새로운 문물을 자꾸 뺏아와야겠지요. 땡땡이중 발씨가 넓다보니 귀동냥한 것 도 있어서, 용서하시오." "모두가 똑같은 말들을 하니까요. 어지간히 식상하는군요." 하자, 이때까지 중대회의의 참관자처럼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기화, "저어 스님." 하며 그들 대화를 가르고 들어선다. "스님이 간도 가시게 된다는 말씀을 듣고 저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이번 길에 동행하면 안 되겠습니까?" "동행? 봉순이가?" 상현의 입에서 옛날 이름이 불쑥 튀어나온다. "네. 애기씨도 보구 싶구요." "그거 조오치." 혜관이 회심의 미소를 띤다. "스님께서 기생과 동행? 거 재미있군요." 별안간 상현은 그의 평소 균형을 깨뜨리고 박장 대소한다. 애기씨가 보고 싶다 한 기화 말에 충격을 받은 때 문이다. 그러나 순간 적으로 상현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진 봉순이 길상의 앞에 나타났을 때 광경을 상상했다. 이상한 쾌감이 웃음으로 터져나온 것이기도 했다. "서방님도, 기생이라 이마빡에 붙여놓고 다니나요?" 노기에 차서 기화는 상현을 노려본다. "기생이란 글자를 이마빡에 붙여놓고 다닌들 어떠리? 필경 중은 중이요, 기생은 기생 아니겠느냐?" 자기를 위해 서의돈, 황태수까지 동원하여 함춘관에서의 우월한 자리를 마련하는 데 힘을 써준 상현의 입에서 차마 그같이 참혹한 말이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그러나 봉순이는 기생 기화였다. "그는 그렇습지요, 서방님." 미소를 머금는다. 보조개가 패이는 볼에서 턱에 이르는 선이 퍼연하다. 얼굴을 붉힌 편은 상현이다. "스님." "네에." "용무도 끝나고 했으니 함께 가보시겠습니까?" 상현의 눈은 다시 싸늘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이 아니었고 못난 자신을 감추려는 억지다. "잠깐만, 소승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소이다." 하고서 기화를 쳐다본 혜관은 또 성급하게 상현에게 얼굴을 옮긴다. "실은 기화뿐만 아니라 이부사댁 서방님한테도 부탁을 드리려고 마음먹고 왔었소." "내게 무슨 힘이 있겠소." "다름이 아니오라, 기화는 잘 아는 터이나, 그러니까 한시절 전 얘기가 되겠는데 그 왜 최참판댁 애기씨가 계 실 때 일이지요. 김훈장이 의병을 일으켜서 최참판댁을 습격한 그 사건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소. 그 일이 일어난 뒤 조준구가 무고한 마을 농부 정한조를 의병으로 몰아서 죽이지 않았소? 그래 애비를 잃은 자식놈이 늠름하게 자랐소이다. 그애가 가 지금은 지주서 물지게꾼이 되어 생계를 잇고 있소." "그래서요." "놈이 똑똑하고 장차 훌륭한 일꾼이 될 것이외다. 그애를 이번에 소승이 데려올려고 마음을 먹었소. 헌데 모친 의 급환으로 이번엔 동행하질 못하였소. 그런 사정만 없었다면 무조건 기화한테 맡기려 했었지요. 아마 쉬이 올려보낼 터인즉," "저더러 어떻게 하라시는 게지요?" "신식 공부 좀 시켜주시오." 혜관은 눈을 찡긋해 보이며 헤헤거리듯 웃는다. "세상이 바뀌어 아직은 자리가 다져지질 못했으니 그 아이 들어설 구멍쯤 넓은 서울바닥 어디든 있지 않겠소? 가령 이대감댁이나 혹은 다른 양반댁에서 잔심부름 시켜가며, 아이가 진중하고 참을성이 많으니 무슨 일이든 해낼 것이고 인재 하나 키우는 심정으로 선심쓸 분 만나게 하실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말씀인데," "글쎄올시다." "서방님, 저도 부탁드리겠소. 그 아이라면 저도 발벗고 나서겠어요." "바쁜 일 아니니 우선 이 정도로 운은 떼어놓고," 혜관은 또 성급하게 바랑을 찾아 짊어지는 둥 수선을 피우더니 "그럼 봉순이 나 가겠네. 내일 또 보자구." "오늘 밤은 어디서 주무시게요?" "가까운 절마당에라도 가서 자지." 상현은 혜관과 함께 거리로 나온다. 한결 숨구멍이 터진 듯 처마 그늘에 가려졌다가 햇빛에 나타나곤 하는 상 현의 얼굴은 맑아 보인다. 혜관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한눈을 팔며 걷고 있다. "스님." "네에." "머리만 깎았지 사람의 육신으론 다를 것이 없는데 다방골 기방서 나오신 기분이 어떠한지 소생 궁금하외다." "부처님께선 중놈들보고 거짓말을 하라 이르셨소." "뭐라구요?" "머릴 깎았다고 중생을 제도하겠소이까?" "..." "하지만 머릴 깎았으니 흉내라도 내야... 흉내는 거짓이오. 거짓에 속아서 불도에 드는 중생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거짓말쟁이 중놈이야 지옥에 가든 말든... 뭐 그런 것 아니겠소? 하하하핫..." "..." "원래 경전에는 까막눈이 돼서요. 부처님을 욕보이고 다니는 이런 중놈이 있다는 걸, 아아 아니지요. 이 정도, 혜관이 정도의 중놈이라도 많았다면야, 심산에서 불도 닦는 중보다 소승 같은 파락호가 더 많아야 할 세상이 지요, 아암요. 하하하하..." "나는 남을 위해서보다 내 자신을 다스리고 싶소. 심산유곡의 중 생각은 가끔하는데요." 상현의 얼굴에는 갑자기 나이 어린 티가 나타난다. "바람도 번뇌요 시냇물도 번뇌요. 산새들 짐승 울음, 철 따라서 피고 지는 산꽃들, 그 어느 하나 소리와 형체 를 겸하지 않는 것이 없을 터인데 심산유곡이라고 현세가 아니란 말인가. 사시장철 목숨의 소리들은 충만하여 있거늘," 혜관은 수신가를 읊듯 가락을 붙여가며, 구름 흐르는 하늘을 보고 활갯짓하며 가는 늙은네를 쳐다보고 장옷자 락으로 입모습을 감추며 가는 아낙들을 바라본다. 마치 입에서 나가는 말은 여흥이요 거리 풍정에 온통 정신 은 쏠려있다 하듯이. "여하튼 소승은 심산유곡보다는 사람 사는 대처가 좋긴 좋은데 좋다보니 별의별 놈의 일 이 다 생기게 마련이 고 상놈 욕을 하면 상놈이 칼 들고 안 나서나, 양반 욕을 할 것 같으면 이게 또한, 헤헤헷... 일전에만 하더라 도 백정네 집에 갔었다가 소 잡는 칼로 하마터면 저승으로 왕생할 뻔했지요. 소승이 저승으로 가봐야 지옥일 정이라, 필경 삼악도밖엔 갈 곳이 없을 터인즉, 그러하니 되도록 이승에서 민적민적 뭉개며 있고 싶은 게 본심 인데 말씀이오. 실상은 소승이 백정을 욕한 것도 아니었소. 그 편에서 지레 짐작으로 그러려니, 아 그러고서는 시비 아니겠소? 다아 그게 평소 제 마음의 소치였다 할 수 있겠지요. 상놈이건 천민이건, 또오 양반이건, 제 앉은 자리가 마음에 걸려서 하는 터수겠는데 자랑스러울것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창피스러울 것 한푼 없고 떳 떳하지 못할 것도 없고, 남의 눈치를 보니까... 똥뀐 놈이 화내더라고," "훈계하시오?" "아아 아니, 땡땡이중이 뭘 안다고?" "거짓말 말아요." "거짓말 얘기라면 네에, 아까도 소승이 까놓고 얘기하지 않았소이까? 하하핫..."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너구리 달밤에 배 뚜디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스님 배가 너무 나왔소이다. 사바 냄새가 물씬하오." "그 말씀을 들으니까 한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소." "..." "돌아가신 지 벌써 여러 해 전이라... 최치수 그 양반을 모르시오?" "알 턱이 있나요? 얘기는 많이 들었소." "그게 어느 해였던지, 그러니까 초취 부인이 살아 계실 때였으니까 이십 전후가 아니었던지," 휘적휘적 걷고 있었으나 혜관의 말에 상현은 긴장기를 띤다. "전준가 어딘가, 그것도 기억이 뚜렷하진 않지만, 갔다오시는 길에 들르셨소. 우ㅏ관스님이 계시는 절에 말씀 이오. 마님께서는 막중한 시주시고 하니 그 어른에 대한 대접이야 말할 나위 없이 정중했지요. 그 시절만 해도 최치수 그 양반 팔팔하시고 포부도 크셨고 이름난 유학자 장암 그 어른도 크게 기대를 걸었었지요. 오만하더 구먼. 아암. 오만하기가 천하를 눈 밑에 둔 듯하였소. 해서 새파란 소년과 너구리 같은 노장이 문답을 시작하 는데 소년의 변설은 가을 하늘같이 명쾌하고 가히 유학의 골수를 체득한 듯 놀라웠소. 헌데 우관스님의 능청 이 또한 걸물이라, 중들의 주둥이 걱정 아니겠소? 후일에 안 일이오만 결국 탁상공론하여 무엇에 쓰리 그거였 소. 탁상공론이랄 것 같으면 불가에서 먼저 공박을 받아야 할 것인데 그것을 최치수 그 소년이 되받아갔다 그 거였소. 이를 갈면서 분해했겠지요. 하하하..." "그렇게 패기에 찼던 어른이 어찌하여..." "중도에 병들었지요. 비참하게 비명에 가시고," "어째서 병이 들었을까..." "학문을 잘못하면 병이 들 수도 있을 거요. 자기 자신을 찾다 찾다보면 좁쌀이 되니까요." "그럼 나도 좁쌀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말씀이시오?" 되묻는 상현의 어조는 평온했다. "글쎄올시다. 예쁜 계집을 어여삐 보구, 태산은 태산으로 보구 버러지는 버러지로 보구, 그러면은 그게 다 참 말이지 뭐겠소? 육척 장신의 육신을 두고서어 그림자를 찾는 격, 그러다보면 병들 수밖에 더 있겠소? 그러니 계집한테 들린 사람도 흔히 미치지만 자기 자신한테 들린 사람이 더 많이 미치기 아니면 병드는 게지요." 두 사람은 허위적허위적 걸어 가회종으로 들어선다. "이부사댁 서방님." "네."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요? 봉순이가 점심상을 준비 안 한 것도 아닐 텐데, 허참 성급한 양반 때문에 불쌍한 중놈 허기들어서..." "걱정 마십시오. 이대감댁에 가시면 차담상이 나올 게요." 상현은 쓴웃음을 띠었으나 혜관의 머리통과 비대한 몸뚱이를 곁눈으로 훑어본다. 주먹을 쥐고 머리통을 쥐어 박고 싶은 눈길이다. 묵직한 등짝을 꼬집어주고 싶고 툭 나온 배에 발길질을 하고 싶은 얼굴이다. 미워서라기 보다 짜증스럽고 공연히... 혜관은 서울서 닷새 동안 묵었다. 기화는 함춘관 추산이로부터 대단한 우대를 받는 터지만 그에게 매인 몸이 아니었고 또 서의돈이나 황태수 같은 뒷배가 있고 하여 쉽게 양해를 얻어서 혜관의 간도행 동행자가 되었다. 기생티가 나지 않게 흰 당목치마에 자미사 분홍 저고리를 입고 얼굴에는 분을 바르지 않았으나 그런에도 그의 자태는 요염하여 결코 여염집 부인네로 보이지는 않았다. 평양으로 향한 기차 속에서도 승객들의 눈은 중과 함께 있는 기화에게 자주 쏠렸고 차표를 조사하러 다니는 차장, 정차할 때마다 찻간을 둘러보고 지나는 헌병 의 눈도 기화에게 쏠리곤 했다. 혜관의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시늉을 했고 기화는 차창 밖에 나타났다간 사 라지는 낯선 산천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애기씬 날 보고 얼마나 놀라실까. 그 사람은 날 어떻게 대할 것이며... 다 지나간 일인데 덤덤하게 그 사람을 대할 수 있을 게야. 아암, 난 기생이니까 옛날의 봉순이는 아니니까, 철없는 계집아이는 아니니까, 보고 싶어서 찾아가는 거야. 애기씨가 보고 싶고 그 사람도 보고 싶기야 하지. 으음 월선아지매도 이서방도, 그 그러고 김 훈장도 만나뵐 수 있겠지. 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야. 마치 내 마음이 고향으로 가는 것 같구먼. 겨울이 오면 입김도 얼어버린다는 곳이 어째 내 고향일 수 있으리. 오랑캐의 나라, 남의 나라인데 그리운 사람들 때문에 고 향 가는 마음일까. 내 몸이 기생이 되었다고 애기씨나 그 사람이 놀라지는 않을 게야. 종내 그리 되었느냐 하 시겠지.' 기화 눈앞에는 엄마 데려오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울던 어린 날 서희 얼굴이 떠오른다. 차창 밖의 풍경은 무의 미하게 스쳐갔고, 소리소리 지르다간 까무러치던 서희, 새파랗게 질리고 눈을 까뒤집으며 까무러치던 서희, 그 럴 때마다 우짜꼬! 아이구 이 일을 우짜노! 하며 사색이 되던 죽은 어미의 얼굴도 선하게 떠오른다. '엄니, 나 지금 간도 가요. 애기씨 보러 가요. 엄니는 늘 말했지요? 니는 에미가 있인께. 그러던 엄니는 지금 어디 계시오. 엄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봉순인 기생이 되지 않았을 것이오. 엄니가 살아서 지금 나를 본다면 잡 아죽이려 했을 것이오. 그러나 이젠 혈혈단신이오. 잡아죽이려 드는 엄니도 없고 강짜가 심하던 그 노랑이 늙 은이 하고도 헤어졌으니까요. 하긴 늙은이랑은 함께 살았을 적에도 혈혈단신이긴 매일반이었지만요. 외로웠어 요. 외로워서 스님을 따라 간도로 가나부죠? 얼굴이라도 쳐다보면 갈증이 조금은 풀릴 것도 같소. 월선아지맬 보면 엄마 본 듯하겠지요? 애기씬 더욱더 아름답고... 이부사댁 서방님 난 그분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떠나기 전날 상현은 서의돈과 함께 왔었다. 밤늦게까지 상현은 술을 마시었고 죽어라 마시었고 주정도 심했었 다. 종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자식아! 좋으면 좋다고 토정하면 될 거 아니야! 못난 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 서의돈은 상현이 기화에게 뜻이 있어 그러는 것으로 오해했다. "까짓것 기껏해야 기생 그걸 마음댈로 못해? 그래 기화야! 몇 짐이나 풀어놓으면 되겠냐, 응? 술자리에서 만난 손도 아니겠고 사연도 깊은 모양인데 그래 끝대 박절하게 굴 테냐?" "서방님도, 그게 아니어요." "그게 아니라니?" "어찌 이부사댁 서방님께서 저 같은 걸 마음에 두시고 그러시겠어요?" "그렇다면?" "..." "그렇다면 저 자식이 왜 저러는 게야? 내 알기론 주정한 일이 없는 놈인데." "제가 간도 간다니까 아버님 생각이 나서 그러시겠지요." "그럴싸하게 말은 잘 둘러댄다만 내 눈은 못 속인다. 사내가 계집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형님!" "못난 자식!" "네. 못난 놈입니다아!" "이 자식아! 우는 눈구멍에 오줌을 쌀까? 애애라, 이 자식아! 그 것 짤라서 시구문 밖에 내다 걸어! 다부진 놈 으로 알았는데 사람 잘못 봤군. 기생 오입이 뭐가 어려워서 저 지랄이냐 말이다." 서의돈은 그러나 대추씨 같은 몸을 도사려 놓고 지껄이는 사이사이 적당한 거리를 두며 술잔을 비우고 있었 다. "의돈형님!" 상현의 잘생긴 이마빼기에 정맥이 발딱 솟는다. "그래서? 말해보아." "..." "노려만 보면 어쩔 텐가. 웃통 벗고 울 밖에 나가려느냐?" 서의돈 입가에 냉소가 감돈다. "제 눈구멍에 오줌을 싸도 좋고 그것을 짤라서 시구문 밖에 내다 걸어도 좋소이다. 기생 오입 한번 못하는 병 신놈이면 말입니다. 허나 형님은 동녘 동! 하고 계시오." "동녘 동!" "저는 서녘 서!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 "형님께서 뜻이 있으시면 추호 사양하실 것 없소이다. 사실 형님 같은 분의 수청을 든다면야 기화도 이 장안 에서 깃발 날릴 터이고 큰 배에 몸 실은 듯 든든할 터이니 저로선 오히여 형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심정이오. 기화는 불쌍한 아이니까요. 불쌍한," "이놈아! 불쌍하기는 네가 불상타! 사내자식이 마음에도 없는 그 따위 허언은 아니 하는 게야." 상현의 말은 오히려 서의돈 심사에다 불을 지른 것 같다. 찢어발기듯 산적을 가르다 말고 젓가락을 소리나게 놓는다. '머리빡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상통하나 밴밴하다고 뭣이 어쩌고 어째? 추호 사양할 것 없다구? 가소롭다 가 소로워.' 술잔을 들고 쭈욱 들이켠다. "무엇 때문에 제가 허언을 합니까? 오핸 마십시오." "오해할 것도 없지. 허언을 하건 아니 하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자아 술이나 부어." "왜 상관이 없습니까. 형님이야말로 억지 쓰지 마십시오. 좋으면 좋다?" 술심에 상현도 술상을 두드린다. 여엽집처럼 조용한 집안 밤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전으로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기화는 불쌍한 아이, 최참판네와 더불어 도매금으로 넘어갔지요, 네. 역시 조 준구놈의 희생물이니까요." 백자 술병을 들고 술을 따르던 기화는 갑자기 "서방님!" 하고 불렀다. 힐난의 어조다. "말씀이면 다 하시는 줄 아셔요?" 상현의 취안이 기화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두 분 나으리께서 기생 하나를 두고 서로 양보하시는 우의를 제가 모르는 바도 아니요, 선비님네 풍류를 모 를 만큼 촌년도 아니옵니다. 하지만 조준구 희생물이라는 말씀만은 듣기가 민망하옵니다. 그자한테 몸버렸다는 뜻으로 남이 들을까봐서요." 상현을 빤히 쳐다본다. "내가 어디 그런 뜻으로 말했겠느냐? 그간의 사정이야 의돈형님께서도 다소 아시는 터이고, 너의 고적한 처지 가 딱해서 그랬느니라." 약간은 당황하는 듯, 술잔을 기울이는 상현은 뜻밖에 심약하고 비애스런 일면을 노출한다. 새삼스런 일도 아니 건만 새삼스럽게 날이 밝으면 간도를 향해 떠날 기화였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기약없는 여정도 아니며 친정 다녀오듯 다녀올 것을. 그러나 상현은 그리워 찾아가는 낯선 땅에서 기화가 직면하게 될 그곳 사정을 생각 한 것이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은 아닐 것이지만, 찾아가는 정과 맞이하는 정이 엄연하게 다를 것을 모를 기화도 아닐 터인데, 돌아 올 때는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등을 치겠지. 두만강 물살은 거셀 것이다. 그 여름 날, 의남매가 되자면서 최서희가 길상과의 혼인을 선언한 그 여름날, 밤과 낮을 방황하던 용정의 거리가, 이를 갈면서 연추로 가는 마차에 흔들리던 일이며, 상현의 눈앞에 선하다. 아니 불에 달군 철판처럼 저리도록 뜨겁 게 떠오르는 광경, 그산야, 다시 조선 땅을 향해 두만강을 건널 때 상현은 거센 물살을 내려다보며 울었었다. 분해서 울었다. "딱하기론 서방님이십니다. 찾아가는 저도 딱한 계집이지만요." "쓸데없는 소리 마라." 소리를 버럭 지른 상현은 기갈든 사람처럼 술을 벌떡벌떡 들이켰다. 고개를 수그리는 기화 무릎 위에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아아니, 이 계집이 어떻게 배워쳐먹었기에 술상머리서 눈물방울이야? 술맛 떨어지게시리. 귀신이 운감하러 왔 냐!" 이번에는 서의돈이 소리를 지른다. "잘못했습니다, 나으리." "기화는 얼른 눈물을 닦는다. "보자보자 하니 노는 꼴들 차마 못 보겠다! 뭣이 어쩌고 어째? 두분 나으리께서, 뭣이 어째? 언중유골이냐?" "아, 아니옵니다." "자긍심이 그만했으면 기생이 되긴 왜 되었누! 건방진 년 같은니라구! 푼수없이 굴었다간 없다, 없어! 서울바 닥에서 싹 지워줄 테니," "그런 게 아니옵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나를, 이 서의돈을 뭘로 알구, 법당에 앉은 목불로 봤더냐? 요망한 계집년 같으니라구!" 서의돈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결국 기화 얼굴에 술을 끼얹고 뺨을 때리고 술상을 엎고 이만저만한 주정 이 아니었다. 서의돈의 행패는, 장안의 망나니로 놀면서도 아직은 여자에 대한 숫기가 남아 있어서 그 나름대 로 관심의 표시였던지 -- 어젯밤의 일이었다. 기적이 울린다. 정거장이 가까워져 오는 모양이다. 생각에서 풀려난 기화 눈에 창밖 풍경이 들어온다. 들판이 전개되고 있었다. 야트막하고 부드러운 산세는 풍요한 감을 주고 들판에 나도는 농부들의 백의가 유독 희게 보이는 것은 흙빛깔이 짙어서일까. 다시 기적이 운다. 코를 골며 잠이 든 시늉의 혜관의 머리를 쳐들었다. 입 맛을 쩍쩍 다시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개경이 가까워진 모양이라." "개경요?" 기화가 되묻는다. "개성 말이야." "어떻게 그걸 아세요?" "알지." "스님도 초행길 아니신가요?" "서울 떠나서 장단 지났으면 개경이지 뭐." "정거장 하나 더 지나갔는데?" "알어." "그럼 평양 가서 전 어쩌게요?" "묘향산을 다녀올 동란 기화는 조용한 객사 잡아놓고 평양 구경이나 하면 되는 게야." "묘향산까지 따라가면 안 되나요?" 혜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안 된다는 뜻이다. 기화는 혜관이 왜 묘향산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묘향산에 는 보현사라는 절이 있으므로 절에 볼일이 있나보다 대개 그렇게 생각했다. 혜관이 묘향산으로 가기 때문에 여정은 복잡해졌지만 기화는 부탁하여 따라가는 처지여서 불평할 수 없고 자신도 유람하는 기분으로 묘향상까 지 따라가고 싶지만 혜관은 떠날 때부터 그 일에 대해선 애매했었다. "그럼 간도까지는 어느 길로 가죠?" "원산 가서 배 타는 게야." 혜관의 음성은 뚝뚝했다. 기차는 어느덧 개성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제4편 용정촌과 서울 1장 묘향간 북변의 묘 상현으로부터 소상하게 설명을 듣고 왔으므로 용정촌 최서힁의 집을 찾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역두에서 짐 꾼보고 물었을 때 서슴없이 방향을 손가락질해 보이며 이리저리 해서 가면 근방에서 제일 두드러진 새 기와집 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최부자네 집이라는 것이었다. "오나가나 최부자라," 변발한 청인 모습에 혜관의 눈을 쫓아가는데 입술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해가 지는구먼. 기화야 가자." "네."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터이지만 용정촌 역두에서부터 최서희의 콧김이 세다는 것을 혜관과 기화는 실감하며 걸음을 내딛는다. 비대해지면서 생긴 버륵인데 땅바닥을 지신지신 짓누르듯 걸어가는 혜관 뒤를 여행 가방을 든 기화가 계집아이처럼 조르르 따라간다. 회령 여관에서 당목치마는 벗어버리고 법단 남치마에 옥색 주의로 갈아입고 미색 비단 목도리를 목에 감은 기화는 서울서도 다방골 일류 기생의 면모가 약여하건만 그의 걸음걸 이는 혜관의 법의자락이라도 거머잡아야 온전할 것처럼 불안해 보인다. 그리운 사람을,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마음이면 훈훈한 열기에 싸였어야 했을 것을 기화는 오소소 떨며 한기를 느끼듯 마음이 추운 것이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것이다. 하긴 만주 땅 벌판을 불어젖히는 바람은 아직 매웠고 건너온 두만강 나룻배에 몸을 실은 고향 잃은 백성들 모습은 황량했었다. 기화의 화사한 봄 의상도 이곳 풍토에선 너무 일렀었고, "기화야." "네." "아무래도 저것들이 반중인갑다." "반중이라뇨?" "머릴 반만 깎지 아니 했느냐?" 기화는 끼루룩 웃는다. 혜관은 변발의 청인들이 신기해서 못 견디겠다는 눈치다. "그는 그렇고, 이 큰길에서 꺾이면은... 여보시오 행인, 길 좀 물읍시다." 우렁우렁 울려펴지는 혜관 목소리에 앞서 가던 사내가 돌아본다. 얼굴이 거무튀튀한 응칠이다. "뉘기 말입매까?" "댁이오." 혜관은 턱을 주억거렸다. "어째 그러십매까?" 응칠의 거무튀튀한 얼굴에 빨끈거리는 기색이 있다. 혜관의 태도가 너무 거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응칠 이는 기화에게 곁눈질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오면서 얘기는 들었지만 되놈의 땅이라, 뭐 그는 그렇고 경상도서 온 최참판네,"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앙이, 댁은 뉘기시오?" 응칠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보다시피 응, 이쪽은 중이고 저쪽은 꽃다운 여인네, 그러니까 고향땅에서 온 사람인데 댕그마니 높이 솟았다 는 새 기와집 알거든 가르쳐주오." "그리하옵꼬망. 날 따라오시기요." 응칠이는 여태껏 고향땅에서 주인댁을 찾아온 손님을 본 적이 없어 허둥지둥 머리에 올려놓은 털모자를 고쳐 쓰며 걷는다. 털모자는 러시아 제품으로 썩 훌륭했다. 얼마 전 상전 혼인날 썼던 신품이다. "스님." "왜 그래." "어째 겁이 나네요." "되놈의 채갈까봐서?" "스님도, 차암." "좋이 뭘 그래. 되놈들은 여편네 세숫물까지 떠다 바친다더구나. 하하핫." 응칠이 핼끔 돌아본다. '무시기, 무실 하능 안깐이지비? 되세 잘으 생겠궁.' "스님이 그러심 시주 못 받으셔요." "중도 사람이니라. 오장육부 한푼 다를 것 없네." 응칠이 얼른 맞장구를 치며 나선다. "옛꼬망, 그렇습매." "..." "여기 운흥사 중도 남으 안깐하고서리 정으 통하잲앴슴? 그렁이 길이 좁다아 쨏겨났지비." "대체 안깐이 뭐요?" 혜관이 묻는다. "여자라는 말입매다." "흐응, 여자랑 정을 통하고 쫓겨났다아?" "옛꼬망, 그 중 땜서리 집안이 콩가리 됐잲앴슴? 용정서 천하절색으로 잘으 생겐 안깐이 무시레 그 따위 중하 고서리 눈 맞았답매. 여자 맴으 무시라 했슴..., 모르겠슴둥." 응칠이는 서희의 경우도 그렇거니와 날로 변모되어가는 송애를 두고서도 그저 여자라면 모르겠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러면은 이곳에도 절이 있다 그 말인데," "그렇습매. 절이 있소꼬망. 친일파들이 설동으 해서리 지은 절이니끼, 부처도 친일파, 무시기, 그 이용구라? 그 자가 부처님으 보내주었잲앴슴? 그렁이 중놈도," 하다 말고 응칠이는 아차 싶었던지 입을 다물고 우물쭈물 털모자를 고쳐쓴다. 혜관이 "중놈치고 친일파 아닌 놈이 없지." "어째 그리 스님은 어깃장만 놓으셔요?" 응칠이는 또 다시 기화를 핼끔하니 돌아본다. '집난이 같쟁쿠, 취화루 난관보다 월등으 미인으로 생겠슴.' "헌데 친일파 이용구라면 일진회 그자일 터인데 하눌님을 앞가림하고 나선 그자가 불상을?" 혜관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제 다 왔습매다. 여기 기다리고 계시오다." 응칠이는 두 사람을 대문 밖에 세워놓고 급히 집안으로 들어간다. "오나가나 최부자라." 혜관은 집 둘레를 살펴보며 아까 역두에서 한 말을 되풀이한다. "스님." "왜 또 겁이 나나?" "네, 어쩐지." "겁이 나기는 뭐가 겁이 나아." 두 번씩이나 겁난다는 말을 토로하는 기화 심정을 혜관은 잘 알고 있었다. "여기, 낯선 땅처럼 사람들도 그렇게 날 대하잖겠어요?" "그런 생각이 든다면은 따라오긴 왜 따라와." 사람들이라 했으나 서희와 길상을 두고 한 말인 것도 혜관은 알고 있다. "안 그렇다 장담할 순 없지. 되놈의 땅에 와서 이만큼이나 재물을 모았다면 더 말할 나위 없지. 독사같이 모질 지 않고서야." "그건 스님이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 애기씬 맨주먹으로 오신 게 아니 아니어어요. 다 이리 될 만큼," 하는데 응칠이 달려나왔다. "들어오시라 하옵꼬망." 별채처럼 된 곳으로 안내되어 간다. 뒤꼍에서 새침이와 달애어망이 쑤군쑤군 귀엣말을 하곤 한다. 문전에서부 터 안내되어 가는데도 시종 손님 대접이다. 손님임엔 틀림이 없었지만. "오고 보니 이집에 사는 사람인가본데 왜 아무말 안 했을꼬?" "묻지 않는 말으 무시가 자청해 할 수 있겠슴둥?" 지신지신 걸어가며 혜관이 묻고 응칠이 대꾸한다. 그들 뒤를 따라가는 기화는 된서리를 맞은 것처럼 여전히 떨려오고 때론 머릿속이 화끈 달아올라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기도 하다. 오목한 뒤뜰이 있는 별채 의 사랑 비슷해 보이는 방은 사람이 거처한 흔적이 없는데 훈훈하고 따스했다. 한참을 기다렸건만 바깥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혜관과 기화는 무서운 침묵으로 빠져들어간다. 이 때 서희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활자 하나하나는 선명하게 눈에 보였지만 뜻은 모른 채 다른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응칠이가 사십 넘어 뵈는 중과 이십 안팎의 어여쁜 여자가 경상도에서 찾아왔다 했을 때 서희는 혜관과 봉순이라는 것을 직감했 다. 그 직감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성명도 알아보지 않고 거래를 올리는 응칠의 실수를 나무랄 겨를이 없었 다. 실상은 직감이 강렬했다기보다 한순간 감정이 강렬했었다 하는게 옳을 성싶다. 엉겁결에 별채에 안내하라 일러놓고 서희는 읽던 신문을 들여다본 채 생각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봉순아! 부르며 달려가고 싶 은 충동이 전혀 없었다 할 수 는 없다. 봉순아! 하고. '내가 이만 일로 마음이 약해져? 봉순이가 누구야? 내 곁에서 시중들던 아이 아니냐?' 그리운 정을 손아귀 속에서 뭉개버린다. 서희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확고부동한 권위 의식이 잠시 동안 거칠었던 숨결을 잠재워준다. '봉순이... 하인하고 혼인을 했다 해서 최서희가 아닌 거는 아니야. 나는 최 서희다! 최참판댁 유일무이한 핏줄이야. 이곳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나를 바라본다. 고향 사람들은 힐난의 표정으로 내 얼굴을 외면한다. 모두들 나를 격하하여 들고 있다. 봉순이 그 아이는 더욱더 그러하겠구나. 최참 판네 가문이 시궁창에 던져졌다 생각할 게 아니냐? 시녀였던 그 아이가 사모하던 하인이 지금은 내 남편이 야.' 서희는 웃는다. '그도 내 편에서 애걸복걸한 혼인이라면? 모멸의 뭇시선 속에서 그러나 난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야. 나는 손상당하지 않어! 최참판 가문은 손상되지 않는단 말이야! 알겠느냐? 나는 지키는 게야. 최서희의 권 위를. 최참판 가문의 권위를 지키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게야. 영광도 재물도,' 권위 의식의 뿌리는 깊게 아주 깊은 곳으로 뻗어만 가는데 그러나 서희는 날이면 날마다 깊은 뿌리를 썰어대 는 톱질소리를 듣는다. '필경엔 종놈 계집이 될 최서희! 그 어미에 그 딸이로구려?' 상현이 마지막 던지고 간 말을, 그것은 비단 상현 혼자만의 비웃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종을 최서희의 머리칼 하나 안 다치고 최서희 윗자리에 앉힐테다!' 날이면 날마다 보이지 않는 뭇시선 속에서 서희는 깊은 곳을 뻗쳐 들어가고 있는 뿌리를 썰어대는 톱질소리를 듣는다. 그럴 때마다 뿌리는 더욱 깊은 곳으로 뿌리는 더욱더 강인하게, 그것은 서희의 욕망이요 생리요 아집 이다. 불도 사르어 먹으려는 집념이다. 서희는 신문을 문갑 위세 얹어놓고 일어섰다. 경대 앞에서 얼굴을 비춰 본다. '조준구놈! 홍가 그 계집!' 오만과 존엄을 뿌리째 뽑으려 들던 지난날의 사건들이 만화경처럼 일시에 눈앞에 펼쳐진다. 만화경 한귀퉁이 에 비치는 기과한 꼽추의 모습도. '나를, 그 병신놈한테?' 증오의 불길은 끈덕지게 멎지 않는다. 더욱더 치열하게 타오른다. 주홍빛 감댕기에 금봉채를 찌은 쪽머리가, 하얀 목덜미가, 흔들린다. "새침아." "옛꼬망!" 새침이 이내 달려왔다. "손님 여기 건넌방으로 오시라구." "옛꼬망!" 새침이는 다시 달려간다. 이윽고 혜관과 기화는 몸채 건넌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기다리고 앉아 있던 서희는 습관된 신심때문이겠지만 몸을 일으켜 혜관을 맞이하였다. 합장한 혜관은 헛기침을 하였고 기화는 말뚝처럼 서서 넋을 잃고 서희를 바라본다. 서희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오래간만이군, 봉순아." 손을 내민다. "애기씨!" 손은 싸늘했다. 기화의 울음은 목구멍에서 아래로 심장으로 내려가 응어리진다. '아아, 애기씬 혼인을 했구나. 길상이하고...' 시새움도 일지 않았고 그리움도 사라진다. 여태껏 만나본 일이 없는 타인이 손을 내어밀었다. "스님, 앉으시오." "네, 앉겠소이다." 혜관은 방문을 등지고 앉고 기화는 소매 속의 명주 손수건은 꺼내어 손에 쥐며 앉는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세상 밖에 나온 후 처음 밟는 남의 땅이니 수고는 당연한 것 아니겠소이까?" "그는 그렇겠소." 서희는 기화에게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이공에 오는 길, 묘향산 북변 쪽에 들렀다. 왔소이다." "묘향산 북변? 그곳엔 어째서요?" "별당아씨 묘소를 찾느라구요." "뭐라구요!" 서희는 두 주먹을 쥔다. "별당아씨, 애기씨의 어머님의 말씀이외다." 혜관은 서희의 독기 어린 눈을 응시한다. 기화의 얼굴이 핼쑥해진다. "무덤을 찾아서 어쩌시겠다는 건가요, 스님께서?" 음성은 냉랭했다. "소승이 어찌어찌 하겠다는 말씀 드릴 계제도 아니거니와 어쩌겠다는 생각이 있을 수도 없는 일, 애기씨께 말 씀드리는 것으로 소승의 소임은 끝나는 것이오." "어느 누구의 지시였나요?" "우관선사께서 현몽하시었소." "뭐라구요? 우관선사께서 현몽하셨다구요?" "네. 분명그렇소이다." 혜관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허 참," 서희는 실소하듯 웃었으나 그의 창백해진 양볼엔 희미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기화는 묘향산의 무덤 얘기며 현몽 얘기며 모두가 다 뜻밖의 일이었다. 어째서 혜관이 서희를 만나는 벽두부터 그 말을 하는 것이며 별당아 씨의 무덤이 어재서 묘향산 북변에 있다는 것인지 놀랄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관스님께서 극락왕생을 못하신 모양이오. 사바의 일을 그토록 궁금해하시어 현몽까지 하셨다니 말씀이오." 서희는 혜관의 말을 철저히 무시한다. "네, 옳은 말씀이오." "성불은 못할지언정 그 따위 잡귀의 흔적을 찾아다니셨다니," "왜 아니랍니까. 염라국의 수문장이 하품을 할 일이지요." 약이 올라서 서희의 입매가 뱅긍뱅긍 돈다. "네. 그렇소이다. 소승 생각에도 우관선사께서는 삼악도에 거하심이 분명할 터인데, 중생을 섬긴다 하옵시고 갖은 허언을 떡먹듯, 그뿐이겠소? 나무토막이나 쇠붙이로 만든 가짜 부처를 내세워 어진 백성들 주머니나 훑 어먹는 중이고 보면 하하핫... 네. 우관선사께 옵서는 죄인들과 거하심이 분명할 것이오. 관음보살은 중생을 제 도하기 위하여 스스로 부처 되기를 사양하신 것이온데 우관선사를 말씀드리잘 것 같으면 관음보살까지 이르자 면 수백유순 밖에서요, 오백만억천 삼천대천세계의 티끌이온데 염라국의 구문장과 벗하기는커녕 삼악도 옥졸 들과 썩은 고기나 나누어 잡숫는 게 고작일 것이오. 하니 고독 지옥을 소요하시다 묘향산 북변에 있는 무덤의 주인을 만났을지 모를 일 아니겠소?" 혜관은 말대꾸를 그만두어버린 서희를 깊이 응시하며 농담이라기엔 너무 진지한 얼굴이요, 진담이라기엔 얘기 가 황당하고, 성한 사람이라 할 수도 없고 미친 사람도 아닌, 중도 속도 아닌 종잡을 수 없는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다. "애기씨, 못난 자식도 내 자식 나이겠소이까? 나쁜 부모도 내 부모요, 삼세 인연을 사람으로서 어찌 끊을 수 있겠소이까. 못련존자께서도 악모를 꺼리지 아니 하고 석존께 애걸을 하셨사옵니다. 넓은 천지간에는 자식을 돈으로 팔아먹는 부모도 있고 기근에 자식을 잡아먹는 부모도 더러는 있사옵니다. 그와 같은 인면수심의 중생 도 법력으로 회심시키려는 게 불범이온데 애욕에 눈이 어주웠다고는 하나 어머님께서는 패륜을 범한 그 시각 으로부터 눈을 감으실 때까지 살아 지옥을 겪었을 것이요, 한점 핏줄에 대하여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거이오. 애기씨께선 어머님을 용서하시고 법사로써 극락왕생을 비옵소서. 그것은 어머님을 위하기보다 첫째는 애기씨 자신을 위함이요 자손을 위하는 일이오이다. 소승 듣건대 애기씨께선 칠서에 통달 하시고 경전도 널리 섭렵하시었다 하니. 그뿐이겠소? 신학문에도 조예가 있으니 소승 구구한 말씀 더는 아니 올리리다." 혜관의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든 하여간 대단한 열변이다. 서희는 어렸을 때 본 혜관을 생각한다. 많은 중들 중 에 무지렁이 같았던 혜관이, 외모도 관록 있게 비대해졌거니와 가마를 타고 할머니 윤씨와 함께 절에 가면은 항시 우관스님의 주위를 맴돌며 심부름이나 하던 중이, 말주변도 별로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중이 어느새? 그 러나 서희는 혜관의 언변이 두드러져서 인내심 깊게 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심상찮아서다. 생모의 얘기를 하 는 때문만도 아니다. 어딘지 심상찮고 만만찮은 것을 서희는 직감한 것이다. "그러면 대사께선," 스님이라던 칭호가 대사로 승격했다. 비꼬임도 있었으나 새롭게 인식한 점도 없지 않았다. "최참판네 묵은 사연을 들추기 위하여 이곳까지 오시었소?" "아, 아니외다. 소승 그리 한가한 몸도 아니옵고 두루 만주 벌판으로 해서 아라사든가 눈알이 시퍼런 인종이 사는 나라까지 주유할 심산으로, 네, 석존께서도 설산수도를 하시었는데 하하핫... 그렇지마는 이 북국에서도 겨울은 이미 지나가고 있으니 주유하다 보면 염천수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듭니다만 그는 그러하 옵고, 길상이는 이곳에 있지 아니 합니까? 아까부터 하마하마나 하고 인사 있길 학수고대하였는데, 네, 그 아 이를 말할 것 같으면 어릴 적에 소승이 업어 기르다시피 하였고 소승의 영분이 금어이고 보니 길상이는 이른 바 소승의 직제자라," 숨 넘어갈 듯 한바탕 지껄여대는데 서희는 능청을 떠는지 구경을 하는지. 혜관의 광대기엔 차츰 여유가 없어 진다. "수천리, 이 땅을 찾아오게 된 이유 중에는 길상이 그 녀석 멱당가지를 거머잡고서 절로 끌어가고 싶은 심정 그것도 있었고, 왜냐할 것 같으면 우관선사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천수관음 조성을 절실하게 원하셨으니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우관선사께서는 늘 길상이 얘기를 하시었소. 천수관음을 조성할 자 그 놈밖에 없노라고. 소승도 동감이었구요. 그는 그렇고, 길상이는 지금 이곳에 있지 않소이까?" 혜관은 비로소 말을 중단하고 기화에게 재빠른 시선을 던진다. "서방님께서 회령나가셔서 안 계시오. 내일께나 오실는지요." 기화의 머리가 앞으로 수그러지고 혜관은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처럼. 혜관이나 기화가 다같이 예상했던 대로 다. 그러면서도 충격이었다. 능긍맞은 혜관도 숨이 막히는 듯 짓눌린 한숨이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그러면은 스님께선 별채에 가셔서 쉬시겠소?" 서희가 침묵을 잡아젖혔다. "쉬기보담 허기부터 달래야겠소." 얼버무린다. "네. 저녁을 곧 올리도록 하겠소. 봉순인 나랑 함께..." "네." 기화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혜관이 부산스럽게 나간 뒤 "애기씨!" "응." 서희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돈다. "애기씨! 전 기생이 되었답니다." "짐작은 했다." "저도 짐작을 했어요." "..." "서울서 이부사댁 서방님께 이곳 소식은 들었구요." "내가 혼인한다는 얘기도 하시더냐?" "그 말씀은 아니 하셨소. 하지만," "그분은 왜 서울에 계시는고?" "일본으로 공부 가실려구 준빌 하시는가보지요." "그래?" 웃는다. "저도 서울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부사댁 서방님께서 여기 저기 줄을 놔주셔서 지내가기 편안합니다." "편안하기만 해서 쓰겠니? 기와 그 길로 나갔으면 명기가 돼야지. 국창도 되구. 그래 그곳에 못 가보았느냐?" "이부사댁 서방님이 간도에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었지요. 하동까지만. 서울 오기전엔 진주에 있었구 요." "조준구가 여지껏 살아 있다더냐?" "죽진 않았소." 서희와 기화의 눈이 강하게 부딪친다. "하지만 망할 날이 머지 않았을 게요. 소문에 의할 것 같으면 광산을 해서 땅이 절반은 남의 손에 넘어갔다 하더이다." "절반," "그자는 거처를 서울로 옮겼고 꼽추 그 병신만, 그보담 평사리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됐지요? 월선아지매는 어 디 계시어요?" "밤이 길어. 차차 얘기하자꾸나." 드디어 말아놓았던 지나간 세월은 풀어지고 연못가 그 자리로 돌아온 서희와 봉순이는 한 사내를 의식 밖으로 몰아내버린다. 공동의 기억이란 순수한 것이다. 특히 어린 날의 그 공동의 기억 때문에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이 라는 의식의 유대가 지속되는지도 모를 일이라면, 이들이 비록 혈육이 아니요 신분의 또랑이 깊다 하여도, 서 희가 남다른 아집의 여자라 하여도 이들의 해후가 슬프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윽고 저녁삭이 들어왔다. 기척도 없이 집안은 호젓했었는데 저녁상은 그 색체에서부터 호화스러웠다. 저녁상뿐인가, 가옥이며 방안의 세 간이며 청나라풍을 곁들인 호화스러움이 알맞게 조화되어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차츰 마음을 가라앉힌 기화 눈에 그런 모든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서희의 생활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상에 쓰이는 물건 하나하 나 식기에 이르기까지 대개가 박래품이면서도 섬세한 서희 퓌향을 엿볼 수 있다. 생활의 풍도는 옛날 최참판 댁 시절보다 월등하고 새롭다는 것을 깨달으며 기화는 서희가 고향도 잊고 조준구에 대한 보복도 잊어버리고 이곳에 눌러 살 작정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최서희, 그 여자는 자기 일문밖엔 도통 다른 생각이라곤 없어. 어찌하여 최참판네가 몰락을 하였느냐, 아니할 말로 열 손톱이 다 빠져나오는 한이 있어도 종국엔 조준구 목을 누르고 말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참판네를 일으켜세울 것이며 옛날보다 더한 번영과 영광을 누릴 게야. 으음... 그렇지. 최참판네 여인 아니냐? 서희는 오 대 육대 최참판네 여인들의 마지막 꽃 야차 같은 계집이지.' 상현은 그런 말을 했었다. '아니다. 이부사댁 서방님은 여자의 마음을 몰라. 애기씬 고향에 안 돌아갈 작정을 하시고 길상이랑 혼인하신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천년 만년 살 것같이 이렇게 좋은 집을 짓고...' 기화는 산해진미가 실린 저녁상을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늘 각박한 심정의 서희에게 있어 호사스런 생활이 그 삭박함의 중화제하는 것을 기화는 알 턱이 없고 더더군다나 용정촌의 조선인 사회를 휘어잡기 위한 일종의 신화를 서희가 의도하고 이싿는 것을 알 턱이 없다. 잣죽이 든 옥식기를 들고 새침이 들어온다. 리리양실에 물방울 같은 구슬을 씨워서 만든 정등갓이 흔들린다. 귤빛깔의 전등불이 방안 구석구석 비춰주고 유리 들창에선 시꺼먼 바깥 어둠이 방안을 넘겨다본다. 서희는 잣 죽을 들다 말고 별안간 "우관선살라니? 호호호호... 우관선사께서 현몽을 하셨다구? 봉순아, 아까 그 혜관인가 하는 중 미친 중 아니 냐? 호호홋..." 기화는 드높은 서희 웃음 소리에 질린다. "묘향산에 무덤이 있다는 것도 해괴한 얘기구, 그래 너도 그 무덤이라는 걸 보았느냐?" "아니옵니다. 금시초문이오." "그렇다면?" "..." "그 중이 거짓을 말했단 말이냐? 물론 거짓임에는 틀림이 없겠으나 동행한 너도 보지 못한 무덤이 그럼 공중 에 둥실 떠 있었더란말이냐?" "아니옵니다. 저어," 서희는 숟가랏을 든 채 기화를 빤히 쳐다본다. "이상하지 않나. 거짓치고도 해괴망측하구나." "저, 저는 묘향산에 가지 않았습니다. 스님이 다녀오시는 동안 평양에 머물렀어요." "그렇다손 치더라도," "스님은 제게 아무 말슴 안 하셨구요. 함께 가보고 싶었던 곳이지만 스님은 굳이 저를 떼어놓고 가셨어요. 다 만," "다만?" "저는 묘향산에 있는 절에 볼일이 있어 가시나부다 하구." "그래?" 서희는 죽을 들기 시작한다. 위장이 좋지 않아 죽을 먹노라 하면서 서희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 다. 생각한다기보다 혜관의 말이 거짓 아님을 깨달은 얼굴이다. 별채에서 역시 산해진미의 저녁상을 받은 혜관 은 말끔하게 그릇들을 비우고, 혀를 두드리며 입속에 남은 뒷맛을 음미하더니 나간다는 말도 없이 밖으로 나 가버렸다. 이 무렵 객줏집을 몰래 빠져나온 송애는 운흥사 뒷숲 쪽으로 숨어들 듯, 백양나무 밑으로 간 그는 나무를 의 지하여 몸을 바싹 붙이고 선다. 밝은 한낮에도 행인이 뜸한 외진 곳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나무숲을 타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밤에 우는 새 소리, 모두가 음산하고 기분에 좋지가 않다. "내가 나올 때 아버지가 보지는 않았을까?"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고 바람을 피하며 송애는 중얼거린다. 어둠과 바람 소리와 인적이 없는 외딴 곳이 소애 는 불안하다. 기다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불안하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날 보았을지도 몰라. 나중에 물으면 뭐라 하지?" 며칠 전에 공노인은 요새 송애가 왜 그리 덤벙대느냐고 했다. 심상치 않다는 말도 했다. 속마음을 뚫어보듯 쳐 다보던 눈이 무서웠다. 냉정한 눈이었던 것이다. 마음이 심란할밖에 더 있겠느냐 하며 방씨가 감싸듯 했으나 공노인은 영 마땅찮아하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다 안다 해도 이젠 할 수 없어. 난 버린 몸이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이지?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걸... 어쩔 수 없어. 없단 말이야! 죽을 수도 없잖아. 왜 죽어? 나도 살길 찾아서 보란 듯이 잘 살아보는 거야." 그러나 송애는 자기 한 말이 믿어지지 않아 흐느낀다. 어떻게 보란 듯이 살 수 있단 말인가. 백옥 같은 양반댁 규수, 아름다운 최서희는 또한 거대한 자산가, 그를 상대하여 송애가 어떻게 보란 듯이 살 수 있단 말인가. 칠 흑의 어둠은 시꺼먼 먹물같이 송애 심장을 타고 내려간다. "나는 부모도 모르는 객줏집 양딸, 하인인 길상이는 그런 곳에 장갈 들었지만 내게도 그같은 천운이 있을 리 만무. 그것들이 망하고 망해서 거지꼴이 안 되는 이상 어찌 보란 듯 내가 살 수 있을꼬." 송애는 마치 노래라도 부르듯 처절하게 웅얼거린다. "왔어?" 어둔 속에 불쑥 솟아난 사내가 송애 등을 툭 친다. 김두수다. "많이 기다렸나?" "아, 아니오." 송애는 몸을 웅그린다. "누가 잡아먹겠다나? 떨기는 왜 떨어." "추우니까 떨죠. 잡아먹긴 누가 잡아먹어요!" "허허어. 땡삐같이 그리 쏘지만 말고, 모로 가나 옆으로 가나 볼일은 다 본 처지 아냐? 추우면 내 목도리 끌러 줄까?" 등을 어루만진다. "일없어요." "윤가 생각이 나서 그래?" "그 사람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게요." "그했던가? 하하핫..." 김두수는 너털웃음을 웃는다. "그렇담 더욱 좋고, 어디 따끈따끈한 방에나 들어갈까? 절방을 말해놨으니 우리 거기 가서 얘기하자구." 김두수는 송애의 손목을 잡아끈다. "싫어요. 얘기가 있음 여기서 하세요." "물론 얘기야 있지. 그 동안 송애가 일 자알 해주었으니 치사도 하구 말이야." 송애는 더 이상 버티지 않고 김두수르르 따라서 걷는다. 중도 없이 절지기만 사는 절마당으로 그림자처럼 들 어간다. 절지기에겐 돈푼이나 집어주었는지 김두수가 방문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기침 소리 한번 나지 않는다. 등잔의 기름이 타고 있었다. 무장을 풀어버린 듯 송애의 몸짓은 나른해 보였으나 눈빛에는 험악한 자 취를 남기고 있다. 목도리를 풀고 두루마기도 벗어 한구석에 밀어 놓고 자리에 앉으면서 김두수는 "불이 난 지 일 년 다 돼가는데 용정엔 아직도 불탄 자리가 그냥 있는 곳이 있더구먼. 공가 그 늙은이 요즘도 깐깐한가?" "..." "하긴 명색이 양아버지라, 그럼 나한텐 장인뻘이 되는가?" "쓸데 없는 소리 말아요." "흥, 그 늙은이 마음만 돌리면 이런 사위 둔 것도 과히 나쁘진 않을 텐데 말이야." 싱글벙글 웃는 김두수 얼굴을 송애는 빤히 쳐다본다. '돼지 같은 놈. 뭣이 어째고 어째? 윤성생을 말할 것 같으면 사람 똑똑하고 유복하고 가문이 어떻고 시집을 가면 썩 잘 가는 거라구? 그러던 놈이 인두겁을 써도 유만부득이지.' 윤이병이 똑똑한 사내도 아니고 유복하고 가문 좋은 집안의 자식도 아닌 것을 이제는 다 알아버린 송애다. 뿐 인가, 좋아 지낸 여자가 있었다는 것도. "왜 그리 원망스리 쳐다보나. 윤이병 생각이 나서 그런가?" "그래요!" "그래? 그러잖아도 이번 길은 윤이병을 만나러 가는 길이야.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그렇지만 그말 거짓 말이지?" "..." "길상이 그놈 생각하는 거지?" "..." "부질없는 짓이야. 윤이병이라면 내 애초부터 말하지 않았어? 그날밤 일은 싹 묻어둘 수 있지. 내야 뭐 여자에 궁한 처지도 아니니까 말이야." "듣기 싫어요! 남의 신세 망쳐놓고." 참다 못해 송애는 울어버린다. "그건 송애 너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나도 윤이병이 빈털터린 줄 몰랐고, 자아 자아, 한번 엎지른 물을 줏어 담을 수 없고," 순간 김두수는 짐승처럼 송애한테 달려든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는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저항이 약할 수 밖 에 없다. 예상하지 않았던 일도 아니었고. "내 말만 들어. 내 말만 들으면 되는 게야. 호강도 할 수 있고 큰 돈도 만질 수 있고 장차는 큰 요릿집 안주인 노릇도 할 수 있는 게야. 송애도 알지? 새로 지은 매월관 말이야. 겉으론 주인이 따로 있지만 맣이야." 김두수는 둔중한 몸뚱이로 짓누르면서 송애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러나 혼인하여 같이 살자는 얘기만은 하 지 않는다. 어느덧 송애는 자신이 그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몸을 버린 이상 그 남자하고 해 로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윤이병에게 걸었던 희망이 산산이 쪼개지고 만 것에서 온, 자기 자신에 대한 타협적 심리라 할 수도 있다. 예쁘장하고 글방 도련님 같은 윤이병에 비하여 산돼지같이 생긴 김두수지만 사내로서의 능력은 김두수 편이 월등하리라는 새로운 희망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옷을 챙겨 입고 담배를 붙여문 김두수 는 부숭하고 조맨한 눈을 지레 감듯 만족스럽게 송애를 바라본다. "나, 아버지가 이 일 알면 쫓겨나요." 소애는 가렵지고 않은 손등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쫓겨나면 걱정인가? 이 김두수가 있는 한." "나 어서 가야해요." "그렇겠군. 당장엔 쫓겨나도 곤란하니까. 그럼 말이야, 종전같이 앞으로도 내가 보내는 사람한테 좀더 자세히 보고할 것이며," 송애는 떼쓰는 아이처럼 갑자기 몸을 흔든다. 그 동안 송애는 객줏집 손님으로 가장하여 하룻밤씩 묵고 가는 정체 모를 사내에게 실상을 위시하여 공노인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의 동정을 보고해아 었다. 송애는 결코 능 동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객줏집에 묵고 가는 김두수의 끄나풀들은 교묘하게 협박도 하고 김두수가 굉자한 인물이며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 장래를 위해 좋을 것이라는둥 무엇보다 윤이병이란 대수로운 인물이 아니며 김두수의 부하라는 말이 송애에게 절망을 안겨준 대신 김두수를 평가하는 데 효력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윤이병을 빙자하여 송애를 불러들여 능욕한 후 두 번째 만나게 된 김두수였으나 그간 싫든 좋든 김두 수가 송애 머릿속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다. 해서 운흥사 뒷숲에서 김두수가 만나잔다는 전갈을 받 고 어김없이 나오게 된 것이기도 했다. "왜? 내 말이 마땅찮아 그러는 게야? 왜 몸을 쩔쩔 흔들어대누." "이 이렇게 된 바에야 호, 혼사를 해야 하잖겠어요?" "뭐?" 김두수의 부숭하고 조맨한 눈이 둥글해진다. 입가에 비웃음이 지나간다. '흥, 한두 번 건드렸다고 혼인을 한다면 이 김두수 골백번은 장갈 갔겠다. 어리석은 계집애.' "아아니, 송애 너도 딱한 계집애로구나." "뭐라구요?" 나락으로 떨어진 절망의 눈을 들어 송애는 김두수를 쳐다본다. "윤이병은 어떡하구 나하구 살자는 겐가? 싹 덮어주고 묻어주고 한다지 않았나." "하, 하지만 내 몸은," "그렇지. 길상을 생각하면서 윤이병한테 시집갈려 했고오, 윤이병한테 시집갈 작정을 하고서 몸은 다른 사내, 하하핫... 참말로 뜻 같이 되지 않는게 인간사로군. 하하핫..." 송애의 눈알이 시뻘개진다. 김두수의 소의 혀를 연상케 하는 허연 혓바닥을 드러내며 이목을 가리는 밀회인 것도 아랑곳없이 너털웃음이다. 김두수는 이곳을 떠나면 하얼빈으로 간다. 윤이병이 데리고 왔을 금녀를 만나 러 가는 것이다. "아무튼 좋아. 송애 마음먹기 탓이니까. 내 너의 진심을 알기 때문에 한 얘기지." 송애는 김두수의 눈을 피한다. 속을 환하게 들여다 보고 하는 말에 질린 것이다. 더 이상 확약을 받으려고 바 둥거릴 수 없다. "너 하기 탓이야. 일일이 보고를 받는 터에 널 구태여 만나야 할 일도 없으련만 생각이 달사서 만난 거니까 앞으로 내 시키는 대로만 해. 좀 더 길상이 동태를 자세히 알아보도록, 알겠나?" "나를 의심하는 눈치던데..." "그러니까 조심을 해야지. 그 집에 응칠이라는 일꾼 있잖아?" "응칠이를 어떻게 알지요?" "내 모르는 일 없지. 응칠이란 놈이 송애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도 알구 말이야." "어머." "응칠이를 슬슬 구슬러보면 그 집에 드나드는 사람을 알 수 있을 게야. 눈치채지 않게, 알았어? 길상이놈이 잘 되면 너도 배아플 것 아니냐 말이다." "한데 저어 그 사람을 어찌 그리 잘못되길 댁은..." "아아 그건," 처음으로 표시한 송애 의문에 김두수는 당황한다. "그건 내 개인의 원한 같은 건 아니고 또 그자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까놓고 얘기하잘 것 같으면 내 임무가... 마 그런 건데, 더 이상 송애는 알 필요가 없어." 김두수는 무섭게 눈알을 굴린다. "송애가 쓸데없이 이런 얘기 남한테 함부로 했다간 귀신도 모르게... 흐흐흣... 알겠나? 윤선생 같은 사람도 나 한테는 찍소리도 못하지. 흐흐... 흣." 송애는 떤다. 그만큼 김두수의 형상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 대신 잘하기만 하면 사내는 출세가고 돈 벌고, 계집은 호강하고 좋은 서방 얻는 거라. 자아, 그럼 송애는 가보아. 윤이병을 만나면은 송애를 단념하라 할 터이니." 마지막 한 김두수의 말에 송애는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절문을 나선다. '국밥집에 들렀다 가야겠구나. 아버지가 물으면 거기 갔다온다 하구.' 내리막길을 내려오던 송애는 마음에 차츰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윤이병을 만나면은 송애를 단념하라 할 것이라구? 그렇담 자기 사람이다 그 말이겠네.' 발길이 빨라진다. '그 사람 밑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많은 것만 보아도... 이마는 좁고 뻐드렁니, 눈은 조그맣고 생긴 거는 꼭, 하 지만 사내가 인물 뜯어먹구 사나 뭐. 우리집에 다녀간 그 사람들도 자기를 상전만큼이나 떠받드는 모양이던데 생각해보면 그래. 내 진심이 자기 한테 없다는 것 때문에 혼인하자는 말을 입밖에 못 내는 거야. 사내 오기에 그럴 수도 있게Tl. 나를 겁탈해놓고서 차츰 맘을 돌리려 했던 거야.' 자기 유리한 곳으로만 생각을 몰고 가는 송애 마음에 그러나 검은 구름이 없었다 할 수는 없다. 남한테 함부 로 얘기했다간 귀신도 모르게, 했을 때 김두수의 무서운 형상이 떠오르곤 했으니까. "그 사람이 그래봬도 꽤 여자가 따르는 편이라구. 하지만 비윗장 한번 거슬러놓으면 없지, 없어. 황소 같은 사 내도 뻥뻥 나자빠지는 터에." 하룻밤을 묵으면서 송애로부터 서희네 사정을 소상하게 들은 김가라는 사내가 이튿날 아침 세수하러 나와 송 애에게 한 말이다. "그렇게 힘이 센가요?" "힘이 세냐구? 하하핫, 힘이 센 게 아니구 옆구리에 찬 육혈포 힘이지." 그 말을 들었을 때도 송애는 그다지 무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상대가 무섭다는 것은, 헤어날 수 없다는 체념으로 낙착된 때문이요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도 무서움만큼의 유혹이다. 이득이 기재된 이상 진실은 없고 진실이 없는 한 자애심은 두려움을 수반하기 마련. 송애는 그 함정에 깊숙이 빠져들어갔고 김두수는 아 주 쓰기에 생광스런 끄나풀을 하나 불렸고 또 그것은 향락의 도구도 되어준다. 송애가 국밥집 월선옥으로 들어섰을 때 가게에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보기 드문 중이 한 사람 월선이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월선의 옆에는 홍이가 붙어앉아서 중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 "아아 송애가?" 울고 있는 모양이다. 월선의 눈이 시뻘개져 있었다. '웬일일까?' 월선은 연신 눈물을 닦으며 "시님을 이곳서 만나볼 줄은 참말 몰랐습니다. 그저 그만 아무말도 못하겄십니다. 이곳에 온 후로는, 아이구 참." 월선은 눈물을 주테할 수 없어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한다는 것은 "그저 그만 아무말도 못하겄십니다." "많이 늙었구먼." "예." "이 아이는..." "예, 이서방 아들입니다." "그놈 참 잘생겼구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으나 잘생겼다는 말이 반가워서 월선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다. "얼굴만 잘나믄 뭐합니까. 공부도 잘해야 하고 말도 잘 들어야 할긴데," "치이, 옴마는 넘 보믄 언제든지 그러더하. 치이." 홍이는 여위어서 보다 가늘어진 월선의 팔을 머리빡으로 쿵쿵 찧으며 입을 불어댄다. "운냐, 운냐. 하지마는 옴마 때리는 아아 시님이 숭보신다." "옴마는 숭 안 볼까봐서? 와 자꾸 우노." "반갑아서 안 그렇나. 자아 니는 송애아지매한테 가거라. 옴마한테 이리 치대싸으믄 이야기도 못하고." "치이, 없었이믄 인사하라꼬 막 찾아댕깄일 기믄서, 사돈팔촌이 와도 인사하라고 찾아댕기믄서." "이놈아 여기 사돈팔촌이 어딨노." 월선은 또 웃고 혜관도 빙그레 웃고 홍이는 착잡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송애 곁으로 간다. "애기씨랑 길상, 아니 저어," 월선이 하던 말을 되마시듯, 그러더니 어색하게 미소한다. "시님을 만내시믄 얼매나 좋아하실는지, 거기 지하고 가실까요." 월선은 봉순이가 온 것을 모른다. 혜관이 가게에 들어선 것을 우연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거기서 오는 길이구먼." 혜관은 입맛을 다시며 눈을 들어 송애를 한번 쳐다본다. 송애 얼굴이 다소 빳빳해진다. "거기서 차담상을 받고서 거리 구경을 나온 셈이지요." "아아 그라믄 역부러 여까지 오싰구마요." "뭐 최참판네 손녀를 찾아온 것은 아니고 청국 땅에 와서 조선중이 포교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온 길에 들렀는 데 길상이가 장가를 들었더구먼." "예--" 모깃소리 같은 대답이다. "천대만대 참판 하라는 법도 없고 하인이라는 법도 없으니 못 할 일도 아니지요." 혜관은 느긋하게 봉순이도 함께 왔다는 얘기를 미룬다. "기왕 이리 왔고 만났으니 이곳에 온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 얘기나 물어보아야겠소. 길상이를 만났더라 면... 서희가 어디 가고 없다더구먼." "예 회령 가싰다 카더마요. 여기 사는 사람들이... 모두 고생 안 한다 할 구 없십니다." "이동진 그 양반 자제한테 대강 얘긴 들었소만." "그, 그라믄 이부사댁 서방님을 만냈십니까." "서울서 만나보고 오는 길인데요." "일전에도 이부사댁 나리가 연추서 오싰다가," 송애는 이동진이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연추에서 손님이 온 것은 새침이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이름은 중 입 에서 처음 듣는다. "지가 그만 정신이 없어서 무신 말을 해야 할지, 저어, 저어, 거기서는 모둔, 봉순이랑..." "봉순이는 음, 그러니까 함께 와서 지금 최참판네 손녀하고," "머라 카십니까? 보, 봉순이가 와, 왔다고요!" 2장 부부 저녁을 먹고 여관을 나선 길상은 어디를 간다는 작정도 없이 걷는다. 볼일은 다 보았고 내일 아침에 떠나기로 된 이런 전날 밤이면 길상은 견딜 수 없는 고톨을 느낀다. '회령엔 오지 말까부다.' 매번 뇌어보는 말이었으나 길상은 한 달에 적어도 한두 번은 상무로 회령에 오게 된다. 매번 고통을 느끼고 오지 말까부다 마음속으로 뇌면서, 굳이 싫다면 얼마 전에 채용한 서기를 보낼 수도 있는 일인데 굳이 자신이 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설까. 행여 옥이네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일까. 만나서 어쩌겠다는 건가. 돈 이나 몇백 원 집어주면, 그러면은 편한 잠을 잘 수도 있고 꿈에 보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길상은 고독했다. 고독한 부부, 고독한 결혼이었다. 한 사나이로서의 자유는 날갯죽지가 부러졌 다. 사랑하면서,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이면서,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애기씨, 최서희가 지금 길상에 게는 쓸쓸한 아내다. 피차가 다 쓸쓸하고 공허한가. 역설이며 이율배반이다. 인간이란 습관을 뛰어넘기 어려운 동물인지 모른다. 그 콧대 센 최서희는 어느 부인네 이상으로 공손했고, 지순하기만 하던 길상은 다분히 거칠 어졌는데 그래도 서로 사이에 폭은 남아 있는 것이다. "허어 김주사, 신색이 훤합니다." "어이구 김선생, 왠일이시오." 김주사도 되고 김선생도 되고 김길상 씨도 되고 면전에 웃고 굽실거리는 얼굴들이 돌아서면 퉤! 하고 침 뱉어 가며 하인놈 푼수에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더라고 거들먹거리는 꼴 눈꼴시어 못보겠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 말일 터인데. 서희라고 예외일 수 있는가. 시기와 조롱을 면전에서는 교묘히 감추는 뭇시선 속에 상처 받기론 마찬가지다. 그 상처를 서로 감추고 못 본 척한다. 왜 드러내 보이고 만져주고 하질 못하는가. 길상은 가끔 옥 이네와 의 생활을 생각할 때가 있다. 올망졸망 바가지를 달고 보따리를 인 유량민들을 생각할 때가 있다. 혹은 만주 벌판을 횡행하며 싸우는 사내들 무리에 몸을 던지고 이따금 바람처럼 찾아가는 옥이네를 상상할 때가 있 다. 공상은 옥이네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다. 연민 때문도 아니다. 자유, 사랑의 고통, 사랑의 질곡에서 빠져 달아나고 싶은 마음, 옥이네는 아무것도 길상에게 걸어놓은 것이 없다. 만주의 벌판은 넓다. 황사가 나는 공간 은 무한하며 말굽소리가 가슴을 떨리게 하는 대륙이다. 강물도 산림도 얽매이기에는 삭막하고 광활하다. 길상 은 또 하동의 지리산, 그 지리산 속의 절을 생각할 때가 있다. 상자 속에 들앉은 불상처럼 답답함이 재생되는 추억이다. 산 밖에는 세상이 없는 줄 알았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우관스님의 애정, 그런 애정의 형태밖에는 몰 랐었던 어린 시절을 길상은 아픔 없이 되새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상자 속에 들앉은 불상이다. 이 생활은 주판알이다. 몇 개가 올라가고 몇 개가 내려오고... 그러 면은 서희를 떠나 나는 살 수 있을까?' 길상은 잠재된 탕출에의 욕망이 고개를 더 이상 쳐들까봐서 걸음을 급히 한다. 뛰듯이 급히 한다. 어둠이 입속 으로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온다. '서희는 태어날 아기에 대해 희망을 걸고 있다. 나도 그렇다! 나는 털모자를 깊숙이 쓰고 수염 끝에 얼음 방울 이 달렸었던 연해주 사내들을 잊는 거다. 주판알 튕겨가며 자금이나 대어주고...' 그는 어느덧 옥이네가 세 얻어 살던 집앞에까지 와 있었다. "앙이 어째 또 왔습매?" 주인집 중늙은이가 마을갔다 돌아오면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길상은 허리를 굽힌다. "별일없소꼬망." "무슨 소식 못 들었습니까?" "소식으 무시기, 있을 리 없지비. 들어오시기요. 밤바람이 되새 차다잉." 흰 수건을 쓰고 팔짱을 낀 중늙은이는 등을 구부정하게 기울이며 마당으로 들어가고 길상이 따라들어간다. 방 에 앉은 길상은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알다가도 용정 손님으 맘 모르겠음. 어찌 그러지비? 응?" "뭐 별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이 이상하잖소? 그까짓 과수집 잊어부리잲고," "못 잊어 그런 건 아니지요. 돈이다 좀 전하고 싶어서... 옥이가 가여워서 그럽니다." "제 싫음 패앙 감상아도 그만 앵이요? 딱해서 그러지비." "글쎄요... 행여나 싶어서..." "저녁은 들었슴둥?" "네." "옥이어망이한테는 야속하겠지만는 그 안깐 용정 손님으 짝이 앙입매. 멀쩡한 새총각이 과수집 장개도 앙이 될 말인데 그런 거 앙이래도 영 기운다 말이. 꽃같은 신부, 소문 들어이... 용정 손님 여기 찾아오는 거를 알면 은," "압니다." "무시기 안다아?" "네. 그 사람도 옥이네를 도와주어서 고생 안 하고 살길 바라지요." 덤덤하게 대답하는 길상은 옥이 옥이네보다 황야의 바람 소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가볼까요? 할 일이 없고 여관에선 심심해서 나와본 거요." "말이 그렇지비. 갈 곳 없어 이곳을 찾는 건 앙이잲소." 밤길을 휘적휘적 돌아왔는데 한양여관에서는 응칠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왠일이냐? 내일 갈 텐데?" "행여 안 오실까 아씨께서 걱정으 하셨슴둥. 고향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매다." "고향 손님?" "옛꼬망. 하동서 중하고," "중!" 혜관이라 생각했다. 가슴이 마구 뛴다. 방망이질하듯 뛴다. 기쁨 슬픔이 함께 얽혀 목이 매는 것 같다. "그러고 우리 아씨만큼 잘으 생긱 안깐이 함게 오셨습매다." 상기된 얼굴이 구겨진다. "봉순이라 하더냐?" "옛꼬망. 아씨께서 그리 불렀습매다." "알았다. 어차피 내일은 떠나려 했어. 마저 일찌감치 잠이나 자거라." "옛꼬망." 응칠이 물러간다. 길상은 담배를 붙여문다. '봉순이가 왔다구? 봉순이가...' 또 하나의 묵은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봉순이 넌 내 누이야.' 길상은 옷을 벗고 불도 끄고 자리에 든다. 조용하다. 밤은 초저녁을 지나가고 있었다. "추서방, 이제 오시오?" 조용한 밤을 가르고 주인 사내의 음성이 들려온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는 사내였었는데. "허 참, 이번에도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소." 나직하지만 굵고 울려퍼지는 음성이다. "김두수 그도 버젓이 살아 돌아왔는데 산신이 노했을 리도 없고," "산신만 가지곤 안 돼. 목신 석신 수신 귀신이 한둘이라지요. 김아무개 그 사람은 진작 떠났으니까." "그는 그렇고 이번 행비엔 재미보았소?" "글세, 장사하는 사람치고 재미보았다는 얘기 하는 것 못 들었고, 하하핫..." 호탕한 것 같았지만 까칠한 심지가 있는 웃음 소리다. "헛허어, 누가 구전이라도 뜯어먹자 덤빈 모양인데," 흐물흐물 감겨드는 것 같은 여관 주인의 음성. "투전판도 아니겠고 구전 먹을 장사는 따로 있는 게요. 이 추서방 못 가본 곳 없고 못 해본 장사 없지만 아편 장사만은 피해왔으니까. 그는 그렇고, 이번 행비엔 영 뒷맛이 좋질 않구먼." "그건 또 어째서요?" "주인장이 부탁하는 일이라 동행하긴 했으나... 왜 그 김두수라는 사람, 그 사람 말이오." '음, 또 김두수라 했겠다?' 길상은 베개에 턱을 받치고 양귀를 세운다. "그 사람, 왜요?" "장삿길 알아보려고 간 사람은 아니지요?" "그, 글쎄올씨다. 내 듣기론 장삿길 터보겠다 하든데요?" "아닐 거요. 틀림없소." "장사... 아니면 일부러 그곳까지 갈 리 있겠소?" "장사도 하긴 하겠지... 아편장사." "그럴 리가?" "그러나 장사는 새치길 게고 본업은 밀정일 게요." "설마 하니, 사람 잘못보셨소." "주인장하고 전부터 잘 아는 사이시오?" "잘 안다면 안다 할 수 있고, 그 사람 원해 성미가 좀 그렇지요. 고약하긴 해도... 아마 추서방 비윗장을 몹시 긁은 모양이구먼." "비윗장 긁었다고 남 모함할까. 나 그 따위로 좀스러운 사내는 아니외다." 여자 웃음 소리, 다른 남자의 음성이 얽혀들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얼마 후 사내는 길상이 누운 옆방에 드는 기색이었다. 방문 열어젖히는 소리가 나고 침구 들여가는 기척, 타둑타둑 나는 발소 리. "석아!" "예" 발소리는 되돌아온다. "내 심부름 좀 해다오. 소주 한 병하고 안주 한 접시 알았냐?" 주기가 있는 음성이다. "예" 타둑타둑 들려오는 발소리. "석아." 이번에는 길상이 불렀다. "예" "거기 좀 섰거라." "용정 손님 안 주무셨어요?" "음." 어둠 속을 더듬어 돈을 꺼낸 길상이 방문을 연다. "나도 소주 한 병. 뭣이든 안주 한 접시하구." "불 꺼졌기게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옆방 불빛에 그늘진 석이 얼굴이 사라진 뒤. '무슨 악연인지 모르겠다.' 길상은 어둠 속에서 담배를 붙여문다. 작년 십이월 초순이던가. 회령서 서희롸 함께 고통스런 밤과 낮들을 보 내고 서로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회령을 떠나 용정촌으로 돌아갈 때 학성과 안미대 중간 지점 험한 계곡 에서 마차가 뒤집힌 일은. 그때 서희는 회령 병원에 입원을 했었고 길상은 얼굴에 찰상을 입었었다. 월선이 용 정서 서희를 간호하기 위해 달려왔으며 오는 도중 노상에서 우연히 만났었다는 사내, 윤이병과 함께 있었더라 는 사내 얘기를 월선을 했었다. "무심결에 눈이 마주치는데 하마 내 입에서 말이 나올 뻔했다. 머리 끝이 좁으당하고 눈두덩이 부숭부숭하고 뻐드렁니, 그게 앞으로 나오고 좁은 이마에 줄간 것까지... 김평산이 그 사람을 바로 면대하는 것 같아서, 돼지 상... 음, 그런 얼굴이 어디 흔해야 말이지 섬찟한 생각이 들면서도 자꾸만 쳐다봐지는데, 그쪽서도 마음이 씌 어 그러까? 나를 아는 것 같은, 아는..." 생각을 하고 또 해보며 뇌었었다. 그런 뒤 정초가 되어 길상은 공노인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 세배온 거간 권서방을 공노인은 다글다글 볶아대고 있었다. "내 눈을 못 속인다 못 속여, 권가놈아. 정신 맑게 가져야 하느니, 당장엔 입에 달다구 꿀떡꿀떡 삼키지마는 결국은 내 살 뜯어먹는 일이라. 그래 본색을 알고서도 구전 탐나서 땅거래 또 들어줄 텐가?" "형님은 요소요소에다가 땅을 사서 집을 짓는다 그렇게 말하지마는 각각 그 임자가 다른 거는 어찌 된 일입니 까. 그거 모르겠습디다. 무슨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겠고, 영문 모르겠네요." "숭물스런 놈. 훤히 알면서, 무쇠신발 신은 그놈이 병아리 오줌 갈기듯 그 따위 구전, 아 거기 미련이 남아 그 러는 게야? 그 임자라는 것들이 모두 허새비라는 걸 몰라 수작인고? 요소의 땅이 팔렸다아 싶으면 집이 덜컥 들어서고 그럴 때마다 무쇠신발 신은 놈이 얼씬거린다는 건 집일 하는 일꾼들도 다 아는 일이라." "이상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마는요 글쎄요, 신색도 썩 부하게 뵈지는 않는데 무슨 놈의 큰 권셀 가졌다구, 에 이 모르겠소. 한번 실수는 병가상사라 했는데 두고두고 깨씹으니 형님도 어지간하오. 요소요소에 땅을 사고 집 을 짓는다 하지마는 그거 모두 내가 중개한 것도 아니겠고 시초에 한 번인데 에이, 모르겠수다." "좌우지간에 큰일이라. 사람들이 생각이 없어서, 함께 똘똘 뭉치도 뭣할 긴데 그놈이 일본 영사관에다 줄을 달 고서 앞으로 무슨 행악을 할지 모르는 일, 애초에 자릴 잡게 한 것부터가." "어이구, 또 저 소리." "처음 어디 매가가 없겠느냐고 물어올 때부터 그 조맨한 눈이 좋질 않았어. 눈두덩이 부숭부숭하고 입술이 튀 튀하고 흡사 돼지상인데," 이때까지 얘기만 듣고 있던 길상이 "혹 이름이 김거복이라 하지 않았는지요?" 하고 공노인에게 불쑥 물었다. "김가는 김간데 김두수라 하더구마. 태생은 경상도라 하든가?" "고향은 어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고향은... 가만있자, 응 함안이라 한 것 같군. 맞어, 함안이라 했어." 길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뭐가 그럴 거라는 게야?" 공노인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차차, 차차 아시게 되겠지요." 길상은 얼버무렸으나 김두수라는 자가 월선이 만났었다는 바로 그 사내임에 틀림없고 김평산의 아들 거복임을 확신했다. 함안댁이 자살한 뒤 김평산의 아들 형제가 외가인 함안으로 간 일이며 이백릿길을 걸어서, 더러는 소달구지를 얻어 타기도 하며 노숙하며 풀포기에 찔려서 얼굴이 탈바가지가 된 어린 한복이, 평사리 생가를 찾아오던 그 불쌍한 한복이를 길상이 잊을 리 있겠는가. 형거복은 외가에서도 바람잡아 나갔노라던 한복의 말 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인연이란 기기묘묘, 이럴 수 있을까? 김위관 자손이 최참판댁 핏줄, 서희가 피신해온 간도에 나타나다니... 장 난치고도, 도대체 운명의 실꾸리를 어디다 숨겨놨기에 얽히고설키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던 것이다. 길상의 확신은 얼마 후 사실로 밝혀졌다. 해란강 상류에 벌목꾼으로 들어 갔던 용이가 돌아와서 "길상이 니가 그런 말을 하니께 나도 말하지 않을 수 없거마."하며 거복이를 만났던 일을 처음으로 털어놨던 것이다. '김두수라... 김두수라 했겠다? 옆방에 든 추서방이란 어떤 인물일까?' 길상은 손끝에 잡히는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를 눌러끄고, 성냥을 그어 유리 등피를 치켜들며 불을 켠다. 발 소리가 들려온다. "손님, 용정 손님, 여기 술 사왔어요." "음." 방문을 열고 석이는 술병과 안주접시를 디밀었다. "석아." "예." "너 옆방 손님보구 말이야." "예." "과히 실례가 안 된다면 함께 술을 마실 수 없겠는가 여쭈어봐라." "그, 그러지요." 길상이 시킨 대로 말하는 석이 목소리가 옆방 쪽에서 들려온다. "그래? 괜찮지." 사내 목소리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생면부지의 두 사내는 합석하게 되면서 술상도 새로 마련해왔다. 길상은 술잔을 내밀며 "저는 용정에 사는 김길상이올시다." "아, 그러시오? 나는 추풍이오." "네?" "춘풍이 아니라 추풍이오. 하하핫..." 수염을 기른 깡마른 사내는 만주인의 복장이다. 전작이 있었던 모양이다. 추서방의 눈은 게슴츠레했다. "뭐하십니까?" "장사꾼이죠." "장사꾼이긴 저도 마찬가지올시다만 무슨 장사를 하시는지요?" "무슨 장사를 한다기보다 누굴 상대해서 장사를 하느냐, 왜 그런고하니 팔고 사고 하는 게 일정치 않으니까." "네에---" "이곳 토종들 상대하는 장산데 말씀이오, 그러니까 뜨내기 장돌뱅이지요." "토종이라면?" "소위 오랑캐라 하는 인종 말이오." "결국 청인이구먼요." "만주족이라고도 하고 여진족이라는 말도 있지만 내가 토종이라 하는 것은 외지의 물이 안 든 종자 말인데, 실은 그것도 오지로 들어가면 상당히 여러 족속들이 있고 갈래가 많아요." "그러니까 교역이군요." "그렇지요. 소금, 곡식, 담배 같은 것 외에도 자질구레한 걸 가져가서 녹용이나 여러 가지 모피하고 바꾸는 장 사지요." "자아, 술 드십시오." 길상은 정중하게 추서방에게 술을 권하고 자신도 마신다. '말이 많을 것 같은 얼굴이 아닌데... 아까는 김두수를 아편장수 밀정일 거라? 어째서 그런 말을 했을까?' "실은 오래간만에 술을 좀 했소이다. 밖에서 말이오. 술이 들어가니까 이일 저일 참았던 일들이 막 터져나오려 고만 하니, 그래 또 술을 마시기로 한 거였죠." 추서방은 길상의 인물이나 하는 말에 대해선 별반 관심이 없는듯싶었고 상대가 길상이 아니었어도 한판 떠들 어볼 심산인 것 같다. 연달아 술을 마셔대면서 "형씨, 보아하니 나보다는 새까맣게 젊은 양반인데 거 요즘 젊은놈들 못쓰겠습디다." "죄송합니다." "아아니 죄송할 건 없고, 술상 함께 하자 자청해온 것도 요즘 젊은 사람 기백인 듯하긴 하오만." "뵙기 전엔 이렇게 연만하신 줄은 미처 몰랐습지요. 객사에서 쓸쓸하기로, 실례가 많습니다." "허어 그 정도는 돼야지. 내 오늘 밖에서 술 좀 했소. 장삿길엔 술은 안 하기로 돼 있으니까, 아무튼 너나 할 것 없이 조선놈들! 나술 마시면 술버릇 고약하오. 내 버릇 내 알기 때문에... 흥, 뭐라구? 오랑캐라구?" 하더니 추서방은 수염에 묻힌 입을 크게 벌리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갈긴다. "여보 젊은 양반, 내 이런다고 장바닥을 굴러다니는 장돌뱅이로만 보지 마슈. 이래봬도 홍범도 장군하테 탄약 총포를 날라다준 사람이오. 뭐 홍범도라고 근본이야 별수 있소? 지가 산포수 뭐겠소. 하기야 장하기야 장하지. 아암, 장하구말구. 세상을 가다보면 야인에 큰 재목들이 많은 법이오. 어이크! 내 술버릇 고약해서, 뭐 어차피 둑은 터졌고, 그러니까 모두들 그래요. 추서방 입은 촛병마개만큼이나 탄탄한데 그놈의 술 때문에 못 믿겠다 구. 하하하핫, 하하핫핫핫, 아무튼 조선놈의 새끼들,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그 말이오. 오랑캐? 이번에도 어 떤 놈 하나하고 동행을 했는데 그놈은," 하다가 추서방은 아까처럼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욕설이 맞는 것을 기다려서 길상이 묻는다. "어디까지 가셨는데요?" "어디긴 어디? 오론촌들이 사는 흑룡강 지방," "굉장히 먼 곳까지 가셨군요. 오론촌이란 뭡니까?" "그곳에 사는 여진족 중의 한 족속이오. 아주 깨끗하게 남아 있소, 깨끗하게 말이오. 중국 본토로 따라들어간 여진놈들은 불알까지 다 썩었지마는. 아, 그뿐이오? 가깝게는 용정촌에 사는 놈들도 도방이랍시고, 흥! 본시 오랑캐라 일컬은 사람들을 말할 것 같으면 말 잘타고 수렵에 능통하고 물을 찾아 짐승들을 몰고 다니면서 정 처없는 생활을 하니만큼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인심이 후하단 말이오. 도시 그 사람들은 의식에 소용되는 것 이 왼 내 것이라 하는 생각이 엷단 말이오. 철따라 수렵하고 어망 풀어 고기 잡고. 그게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중 국 땅 한인들이 슬금슬금 기어들어 갖은 술수로 망쳐놓더니 글쎄, 이제는 조선놈까지 덩달아 아편을 팔아볼 생각이라니? 천하에 온 그런 죽일 놈의 죄가 또 있겠느냐 그 말이오." 추서방은 여전히 연달아 술을 마시며 떠들어댄다. 대단한 주량이다. 그 술을 장삿길에는 안 마신다 하니 의지 가 강한 사람인가보다 길상은 생각한다. "그러면은 곡물이나 소금이나 기름, 화약 대신 아편 먹고 아편 가지고 사슴 잡고 담비 잡고 그러란 말인가? 세상에 그런 악랄한 짓이 어디 또 있을라구. 그 사람들은 말이오, 그 사람들은 한번 언약 하면은 문서 이상으 로 약조를 지키는 사람들이오. 남을 배신하고 남의 빚돈 떼어먹고 속임수 같은 것 쓸 줄 모른단 말이오. 이를 테면 얏사 같은 경우도," "얏사가 뭐지요?" "공세요. 모피를 바치는 거지요. 그 얏사를 내지 않고 도망치는 경우는 그들 씨족들이 보상하게 돼 있고, 그러 니만큼 간악한 놈들이 그런 기풍을 이용해서," "어른께서는," "뭐 어른? 나는 그 정도론 늙진 않았고," "아, 네." "하여간에 사악한 놈들이 그곳을 유린하여 값비싼 녹용이나 귀한 모피를 개값으로 뺏아가니," "뭐 그런 것쯤이야, 중국 본토의 한족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만주족에 나라도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추서방은 말문이 막힌 듯 취기 어린 눈이 퀭해진다. "그 그거야, 물고기나 잡아먹고 짐승 잡아서 사는 사람들의 소행은 아니니까, 나라의 용상 같은 거는 어차피 어느 도둑놈이든 걸터 앉게 마련이고 백성들 배 안 곯리고 잘살게 하면은 성군이 되는것, 백성들 못살게 다글 다글 볶아대는 자는 폭군이 되는 것. 아, 그래 그렇담, 흑룡강 유역까지 제 나라 들어먹은 원수 찾아 한인들이 왔었다 그 말이오? 청나라 임금한테는 만 번이라도 이맛방아를 찧을 좀도둑 같은 놈들이," 길상은 빙그레 웃는다. "추선생께서는 그곳 여진족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군요." "여보시오, 나 선생 말 들을만치 유식하지도 않소. 그러나 나는, 나는 말이오? 나는 어진 백성을 좋아하거든. 내 비록 장사꾼이지만 말이오. 그래 생각해보슈, 젊은 양반. 사시사철 열심히 정직하게 욕심 없이 일해서 사는 사람이 여진족이라 해서 밉고 아편장사에다 밀정 노릇까지 하는 자가 조선 사람이라 해서 어여쁘겠소? 내 자 식이라도 도둑놈은 도둑놈이요, 남의 자식이라도 성인은 성인이오. 아 그래 절에 모셔놓은 부처님을 조선 사람 이라서 예배하는 거요?" 길상은 껄껄 소리내어 웃는다. "아편장사랄 것 같으면 청국을 망해먹자는 건데 밀정이라면 좀더 우리하고 관계가 깊은 것 같습니다. 우리 독 립지사를 잡아먹는 게 밀정이니 말씀이오." "암, 그렇지." "그렇다면 대안의 불구경하듯 할 순 없겠군요. 대체 그자는 누구이며 흑룡강 유역까진 왜 갔을까요?" "아니 내가 뭐라 했기에요?" 취중에서도 정신이 드는 듯 추서방은 길상을 쳐다본다. 그 얼굴은 도무지 흥분하고 많은 말을 지껄인 것 같지 가 않다. 과묵해 보이고 고집이 세게 보인다. "제가 잘못 들었나요?" "뭐 말이오?" "동행한 뭐 김? 김두수라든가요?" "내가 그 얘길 합디까?" 여관 주인하고 주고받은 얘기였으나 길상은 시치미를 떼고 "네, 그런 말씀 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밀정이니 아편장수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추서방은 입맛을 다시며 "내 짐작이지만 나쁜 놈이지요." 하고는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길상은 술을 권하고 자신도 천천히 술잔을 들면서 "이렇게 만난 것도 무슨 인연인지, 저 같은 사람 알아서 과히 해 될 것도 없는 성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무슨?" "저는 용정서 장사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용정에 들르는 일이 있으면은 찾아주십시오." "용정이야 더러 가지요." "김길상을 찾아도 되구요. 객줏집 하는 공노인을 혹 아시는지요?" "알다마다, 그 깐깐한 늙은이!" "아아, 아시는군요." "더러 그 집에 숙박한 일도 있소." "그곳을 찾아오셔도 됩니다. 꼭 다시 한 번 만나뵙고 싶습니다." "그러지요." 공노인 얘기가 나오자 추서방은 다소 느긋해지는 기색을 보인다. 3장 목도리를 두르고 온 여자 어수선한 바람이 며칠을 두고 불어젖히는데 해가 막 떨어지려는 무렵이다. 포염시에서 전당포를 하던 양서방 이 찾아왔다. 문 사이로 비대한 몸을 비스듬히 디미는 양서방을 보았을 때 윤이병의 낯빛이 싹 변했다. "송장이 된 줄 알았더니 멀쩡하구먼." "학교서 말 돌아왔소." 창백해진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을 띤다. "그까짓것, 학교랄 것도 없고 서당이지, 서당." 양서방은 새삼스럽게 방안을 휘이 둘러본다. 낡은 침상이 하나, 나무 의자가 둘, 난로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윤이병 체격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큰 외투가 벽면에 마치 교수형을 당한 사람같이 축 늘어져 있었다. "어떻게 오시었소?" "이 사람 돌았나?" "..." "몰라서 그러는 게요? 정말로?" 기름이 흐르는 유들유들한 양서방 얼굴에 아편쟁이 같은 비밀스런 웃음이 흐른다. 웃을 일이 아닌데. 윤이병은 종잇조각을 꺼내어 말아서 난로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침상 밑에서 나무 몇 토막과 석탄 한 삽을 떠넣은 뒤 성냥을 그어대고서 난로 문을 소리나게 닫는다. "하여간 앉으시오." 양서방은 좁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강물이 다 풀렸는데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구먼. 윤씨는 학교에 나간다니까 굶어죽을 염려는 없겠소." "..." "그 여자 신원 보장이 대단한 효력을 가진 모양인데," "그 여자 신원 보장? 흥, 용정 상의학교서 교사질한 게 유리했던 거지요." 윤이병은 시부렁한 태도로 내뱉는다. "어떻게 해서 쫓겨났느냐, 그 사연은 모를 테니 말이죠?" "..." "그건 그렇고 윤씨, 이번이 마지막이오. 마지막 통고다 그 말이오." "..." "이미 김주사는 하얼빈으로 떠났소." "떠나요?" "떠나지 않고. 그럼 훈춘에 죽치고 앉았는 줄 알았소?" "..." "하긴 떠난다 기별해놓고 안 간 윤씨 처지고 보면 김주사가 떠났다는 말도 미덥지가 못할 게요만. 대관절 떠 난다고 훈춘에 기별해놓고서 못 떠난 이유가 뭐요?" "나도 지금은 뭐가 뭔지 모르겠소.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오. 구어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하시오." "그렇다면 진작이나 그럴 일이지. 훈춘에 기별은 왜 했소?" "재촉이 성화 같으니 낸들 어쩌란 말이오!" 윤이병은 갑자기 포악해지며 석탄 그릇 위에 놓인 삽을 집어들 기세다. 그러나 양서방은 가만히 말라빠진 윤 이병의 손등을 바라보며 "성화가 아니라 선풍이라도 그렇지. 안 될 일은 안 되는 것," "안 될 일이었다면 기별했을 리 없지. 될 듯했으니까." "그게 지금은 할 수 없게 됐다, 그 얘기요?" "..." "설마 속임수 쓰자는 거는 아니겠지?" 양서방의 눈알이 빙그르르 돈다. 김두수와 공통된 표정이다. 윤이병은 그것을 느낀다. 하는 일이 같다보면 표 정 같은 것도 닮아지는지 모를 일이라고 윤이병은 생각한다. 급박한 속에 묘한 여유 같은것, 어쩌면 자신도 저 런 표정을 할 때가 있을지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간 시일은 충분했고 죽자살자하든 계집인데 달고 달아나지 못하고서 민적거리는 까닭이 뭐요?" "양서방." "날 부를 게 아니라 사정 얘기부터 들읍시다." "양서방은 도대체 얼마만한 돈을 받았기에 그리 열심히오?" "흐흐흣흣... 흐흐흐흐..."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양서방은 매끈매끈해 보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은 듯 웃는다. 침상과 의자와 난로 밖에 없는 좁은 방, 난로 안에서 타는 석탄 열기가 퍼져나기 시작한다. 양서방은 웃다가 털모자를 벗어 침상을 향해 던지고 "윤씨." "..." "당신도 어리석지만은 않을 게요. 그래서 이곳까지 오게 됐을 텐데, 뭐라구? 날보고 얼마만한 돈을 받았느냐 구? 돈이야 받았지. 돈 안 받고 일한 시러베자식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먹고 떨어져도 좋은 돈이 아닌 것만은 명심하고." "그, 그야." 윤이병은 당황한다. "그, 그러니까 이곳 일은 꼬박꼬박 보골 하지 않아소." "그 일은 윤씨 아니라도 할 사람이 있으니까, 금년가 뭔가 하는 그 여자 일만은 윤씨 아니면," "그러니까 아까 내가 한 말도," 조급하게 꺼내는 윤이병의 말을 가로막으며 "안 된다 그건데, 그렇기 때문에 윤씨는 이곳까지 왔던 거고, 괜히 마음이 흔들려 이곳에 눌러앉을 생각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따로 없지. 윤씨가 할려는 말 나 다 알어. 남의 계집에 관한 일 뭘 그리 열심이냐, 그거 아니겠어? 그렇지. 내 일은 아니지. 하나," 양서방은 협박을 놓을 때 흔히 하는 그 버릇, 눈이 아래로 미끄러진다. 윤이병의 가슴에다 총을 겨누겠다는 것 인지 아니면 일말의 가책 같은 것이 있어 상대방 눈을 정시하지 못하는 때문인지. "믹적거리지 말고 빨리 해치워야 할 사정은 윤씨 쪽에 있다 그 말이오. 말귀가 어두운 사람도 아니겠고, 당신 이 그렇다는 걸 이곳에다 귀띔만 해주면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 뻔한 일이지만 귀띔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용 정촌과 연락이 닿는 날엔 윤씨가 어떤 처신을 할 사람인지 결과는 말할 필요가 없지." 윤이병은 잠자코 있다. 양서방의 말은 윤이병의 근간 사정을 들이쑤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그러니까 김두수가 윤이병 하숙에 도망쳐온 금녀를 빼앗아 훈춘으로 갔을 때, 김두수에 의해 체 포되고 살해당한 의병장 박재수의 아우 박재연과 점박이 사내 장인걸에 의해 금녀는 납치되었고 김두수는 간 신히 몸을 피했는데, 금녀를 뒤쫓아 포염까지 간 김두수는 그들 일행을 놓치고 보복의 일념으로 끈덕지게 뒤 쫓던 박재연을 해삼위에서 역습을 하여 그에게 중상을 입힌 바 있다. 그 사건으로 하여 연해주 방면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된 김두수, 둥여지책으로 윤이병을 연추로 보내어 금녀를 유인해오게 했던 것인데, 흑룡강 방면을 돌다가 추서방보다 한발 먼저 돌아온 김두수는 훈춘에 머물면 서 연추의 소식을 기다렸던 것이다. 윤이병의 처지로선 훈춘서 김두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늘 목에 걸 린 가시처럼 느껴져 왔었다. 그러던 참에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이동진이 연추를 떠났다. 필시 용정촌에 갔거 나 아니면 다른 곳에 갔다 하더라도 용정을 거쳐서 갈 것이 분명했으므로 윤이병은 연추를 떠나야겠다는 생각 에 이르렀던 것이다. 금녀를 동반한는 데는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금녀를 동반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었지 만, 상대편에선 으레 그러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윤이병이 기별까지 해놓고 눌러앉아 있는 데는 그러서의 계산 이 있었다. 그도 자신이 약다고 자처하는 사내였으니까, "이봐요, 윤이병!" 양서방의 음성은 별안간 높았고 반말지거리다. "김두수, 그 사람을 너 잘못보았어. 김두수의 손을 피해 이곳에서 꼼짝만 안 하면 계집과 함께 잘 지낼 줄 알 지만 말이야. 가령 협박에 못 이겨 그랬노라, 그자들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노라 하며 손이야 발이야 빌고 보 면 혹 모르지, 이곳에서 널 용서해줄지도. 그러나 한번 해치운다 하면은 김두수 그 사람, 자기 손 아니라도 조 반 먹기 전, 그건 쉬운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해. 이곳이 어떤 곳인데? 이쪽이건 저쪽이건 사람 하나 해치는 일 쯤, 코쟁이 뭐랄 줄 아냐? 되놈이 나설 줄 아냐? 결국은 계집이냐 너의 생명이냐 두 가지 중 하날 택하면 되 는 게야. 내 이 얘기도 그러니까 이곳에서 널 밀정으로 낙인찍혔으면 그 길로밖엔 살길이 없는 게야. 배신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배신하는 순간부터 등바닥 가슴팍 두 곳에 총구멍 나기 마련이야. 이건 내가 생각해서 해 주는 얘기지. 연해주 일대 만주 벌판을 오가는 사람이면 그쯤 무법이구 사람들 간땡이도 큰게야. 나 솔직히 말 하자면 김두순가 뭔가 그잘 과히 좋게 생각는 처지도 아니지만 어차피 그 길로 살아왔으니." 한마디 말 없이 양서방의 장광설을 듣고 있던 윤이병은 "그걸 누가 모르나요? 내가 그 여자한테 미련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곳에 눌러 살 수 없다는 건 잘 알아 요." "그렇다면," "나도 심각하단 말입니다! 내가 뭐 되지도 않은 일 기별한 줄 아시오? 도대체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요!" 양서방은 반신반의의 표정이다. "가기로 돼 있던 일이 점박이 장가놈한테 방해받았단 말이오!" "뭐!" "그놈이 금녀한테 야심을 갖고 있단 말이오!" "허허 참, 그렇담 그 계집 서방이 몇 개야?" "뜻이 맞은 뒤 서방이지." "그럼 혼자, 사내 혼자 달았다 그 말이야?" "양서방도 말조심해요. 당신하고 나하고 언제 그리 친했었다고 반말이오!" "허허허, 이거 뻑세게 나오는군." "불난 집에 부채질이오? 양서방도 생각해보아요. 그 여잔 애초부터," "어어, 그런 소리 날 보고 해야 소용없어." "아무튼 늦어도 열흘 안엔 이곳을 뜰 테니까 김두수 그 사람한테 하얼빈서 좀 기다리라 할밖에 없지 않아요?" "자신 있소?" "설득해봐야지요. 여잔 이곳 떠나기를 꺼리니까... 싫다는 여잘 그자가... 양서방, 내 처지도 생각해보아요." 윤이병 눈에 눈물이 고인다.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고 목숨은 하나밖에 없으니 아무튼 운수가 나쁜 게요. 김두수... 그놈은 독사야. 상 판은 돼지 같지만, 그런 놈도 세상에 흔치는 않을걸. 나도 내심으론 윤선생을 동정하고 있지." 한동안 지껄이고 다짐을 두고 하다가 양서방은 밖이 어둑어둑해졌을 때 일어섰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난다면서 그는 떠났다. "병신 같은 놈! 흥 네깐 놈들." 윤이병은 양서방이 떠나기가 무섭게 혼자 주먹을 휘두르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난롯가에 도로 주질러앉 은 윤이병은 욕설을 퍼부을 만큼 기세가 등등해 뵈지는 않는다.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윤이병이 정체를 감추 고 연추에 있는 금녀를 찾아갔을 때 여자의 마음은 이미 변해 있었다. 비겁하고 소심하고 약아빠진 사내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일말의 동정이랄까, 김두수의 처적을 피해 왔다는 사나이 말에 금녀는 책 임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았다. 이곳 조선인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던 금녀는 윤이병을 장인걸에게 소 개했다. 용정서 교사를 했었다는 이력을 곁들여 말하고 일자리를 얻어주었던 것이다. 그것뿐 금녀가 윤이병을 대하는 태도는 타인과 다름없었다. 감정도 차디차게 식어서 돌이킬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이 취한 행동이야 여 하튼간에 여자 마음은 떠나지 않았으리라 믿었던 윤이병이었던 만큼 자신이 띠고 온 임무가 좌절되고 출세에 의 꿈도 이루지 못하리라는 실망에 앞서 여자를 잃었다는 패배감 때문에 충격은 컸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금녀는 점박이 사내 장인걸을 경모하는 기색이어서 윤이병은 질투의 괴로움마저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놓친 가오리가 뭣만하다든가, 금녀를 유인하여 김두수에게 넘겨주고 출세의 길을 트려 했었던 사내가, 아무튼 금녀는 이제 윤이병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핀 꽃이었다. 손에 닿지 않기 때문에 한층 요염하게 핀 꽃이었고, 욕망으로써도 꺾을 수 없는 꽃을 방편으로 어찌 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훈춘에 있는 김두수에게 연추 를 떠난다고 기별해 보낸 것은, 윤이병이란 사내가 짜낼 수 있었던 지혜의 결과다. 그는 자신이 떠나기 앞서 김두수가 훈춘에서 떠나주길 바랐던 것이다. 두수를 멀리 하얼빈으로 쫓아보내놓고 자신은 이동진이 돌아오기 전에 연추를 떠나 중국 본토로 달아날 생각이었던 것이다. 금녀를 동반하지 않는 자신을 김두수가 그냥 놔두 지 않을 것 같아서다. 설령 그냥 놔준다 하더라도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언제인가는 처치하고 말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밀정이라는 낙인은 일제의 녹을 먹고 그 길에서 출세를 못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직업은 못 된다. 그 낙인을 사양하고 싶은 심정도 갈렬했다. '하여튼 금녀만 끌어내가면 만사는 잘 되는 건데 오늘 밤 다시 한번 시도해보자.' 양서방이 금년가 뭔가 하는 그 여자 일만은 윤씨 아니면, 했을때 이제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을 윤이병은 생각한다. 점박이 사내 장가가 금녀에게 야심을 갖고 있다는 말도 거짓이었다. 금녀 쪽 에선 뜻이 없는데 사내 혼자 그런다는 것도 은근히 풍겨주었다. 모두 거짓이다. 왜 그랬을까. 자존심에 상처를 받기 싫은 때문일까? 금녀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런 것도 물론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무엇보 다 윤이병의 거짓들은 자기 방어의 본능에서다. 왜냐하면 금녀와의 관련 때문에 자신이 쓰여졌고, 당분간 얼마 동안이나마 금녀와의 깊은 유대 의식을 상대방에게 인식시킴으로써 무사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윤이병은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금녀만 날 따라와준다면... 그렇게 마음이 돌아설 수 있을까? 내 말이라면 금녀는 무엇이든 들어줄 줄 알았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희생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은... 수많은 여자들이 그러했고, 그래서 남 자들은 크게 성공할 수도 있었다. 봄바람같이 그리 쉽게 마음이 변해? 내가 크게 잘못한 건 뭐 있누? 이게 다 지땜에 겪는 고초 아니냐 말이다. 나쁜 계집이다! 지를 찾아서 왔는데 그 빌어먹을 년만 아니었다면 내가 왜 김두수한테 이런 꼴을 당하누. 나도 혁명지사로 활약할 수 있었다. 상해 같은 곳에 가서 공부도 더 할 수 있었 다. 부잣집 딸한테 장가들 수도 있었고, 장래가 양양했던 내 신세를 누가 망쳤어? 술집에 팔려간 계집년 하나 땜에, 결국 이런 걸 두고 불운이라 하는가? 그 상놈 하인놈! 길상이한테 매맞은 걸 내가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개처럼 쫓겨난 것을 내가 어찌 잊어? 그게 다 금녀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야! 응당 보상해주어야지! 아암, 네가 날 좋아서 날 찾아다녔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화를 입은 게다! 나, 나, 널 끌어서라도 데리고 갈 테야! 내가 살아야겠어! 그놈을 멀리 하얼빈으로 쫓아보내고서 상해건 어디건 달아나려 했지만 널 끌어다주고, 그까짓 순사같은 건 안해. 상해 가는 여비나 두둑이 받아야겠다! 이렇게 된바에야 너를 위해 가슴 아플 이유 가 없지. 피해자는 나니까.' 그러나 윤이병은 금녀를 데리고 가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 목에 새끼줄을 걸고 끌어갈 수도 없는 일이다. 어쨌 든 마음이 와야 몸도 온다. 윤이병은 하숙집 노파에게 저녁은 아니 하겠다 이르고 밖으로 나온다. 마을에는 행 복한 불빛들이 새어나와 뿌옇게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건초를 싣고 늦게 돌아가는 마차가 있다. 밤바람은 차 지만 나올 때 걸쳐입고 온 우장같이 큰 외투가 무겁다. 한 겨울 동안 애용해온 낡은 외투. '내가 왜 이리 구질구질 살아야 하나. 난 이렇게 천하게 살 수는 없다. 젊고 앞길이 길단 말이야! 망할놈의 계 집년!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야! 그러고도 날 배반하고 딴 남자를 생각해?' 윤이병이 간 곳은 학교였다. 학교라야 민가를 개조해 만든 초라한 건물이지만. 교지기에게 열쇠를 받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윤이병은 불을 켜놓고 책상서랍 속에서 종이와 펜과 잉크를 꺼내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금 녀, 했다가 지우고 몇 줄 쓰다간 찢어버리고 결국 금녀, 나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서 있다. 만나자, 너 를 만나지 않고는 이 밤이 무사할 것 같지 않다. 그 말만 쓴 편지를 봉투에 넣고 봉한 뒤 교지기한테 가서 "할아범." 부른다. "예, 선상님." "이거 편진데 말이오." "예." "심선생한테 가서 전해주시오. 직접 전하셔야 합니다." "예." "그리고 내가 학교 사무실에 기다리고 있다구요. 학교 일 땜에 그러니까." 윤이병은 구차스럼 변멸을 덧붙인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난로에 불을 피워놓고 외투를 벗는다. '지가 그런 편지 받고 안 나오진 못할 거야.' 여유를 찾으려고 윤이병은 빙그레 혼자 웃어본다. '끝내 안 되면은, 제에기, 이판사판이다! 이동진인가 이선생 부친인가, 그 사람 오기 전에 이곳을 떠야 해. 상 해로 가든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든, 제에기, 계집 하나 때문에 내 청운의 꿈은 산산조각이다! 교회당에서 만 난 것부터가 불행의 씨앗일 줄이야, 빌어먹을. 고집이 센 것도 불행을 자초하는 게야. 기왕 그렇게 된 바에야 김두수하고 고분고분 살 일이지. 술집에까지 팔려갔음 끝장 다 본 건데, 흥 점박이 장가놈, 그 중년 사낼 지가 좋아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 날 줄 아나? 독립이고 개나발이고 지지리궁상인데 어차피 어느 고랑창에서 총맞아 죽을 게 고작인걸, 미친년!' 하나부터 열까지 타산으로만 사려하는 윤이병이 또 질투하는 감정을 무어라 해석했음 좋을지 그것은 그 자신 도 알지 못하는 감정의 갈등이다. 질투. 밖에선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숲에서는 부엉이가 울고 메마 른 땅을 구르며 지나가는 러시아인의 마치소리. 성곽처럼 넓고 훌륭한 러시아인의 저택이 윤이병 눈앞에 스친 다. 철책에 둘러싸인 넓은 정원 아득히 깊은 곳에 솟아 있던 저택, 백설같이 고운 피부의 소녀가 모피 외투에 몸을 싸고 미사를 디리기 위해 성당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던 광경, 윤이병은 꿈나라를 바라보듯 우두커니 서 있곤 했었다. 우장같이 크고 낡은 외투를 걸치고서. '한때 난 누구에게든 귀여움을 받았다. 명랑한 청년이라 했다. 싹싹해서 만나고 나면 기분이 좋다고들 했다. 교회에 나오는 딸 가진 어머님들이 특히 날 좋아했다. 그땐... 그 사람들 딸들을 난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내 꿈은 더 컸고 더 높았으니까. 금녀를 좋아한건 사실이야. 금녀의 집안이 망하지 않았다면 결혼을 했을지 몰라. 처가의 후원을 받아서 일본으로 유학하고, 결국 금녀도 나도 불운 했던 거야. 교회당에 나오는 처녀 중에 금녀 가 젤 예뻤지. 감히 김두수 같은 놈, 언감생심이지. 찬송가를 부를 때 금녀는 천사 같았어. 그런 그가 점박이 병신을 좋아해? 아닐 거야. 독립투사라고 존경하는 거겠지. 아니다, 그 사내 냉정한 것 같지만 어딘지 마음을 따습게 하는 것이 있어. 어딘지 월등하고 의지적인 큰 기둥 같은 것이 있어.' 윤이병은 일어서서 창밖의 어둠을 내다본다.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이 있다. 말소리도 있다. '오는구나!' "선상님 오십매다." 교지기 늙은이 목소리가 들려오고 사무실 문이 열렸다. 금녀는 목도리 속에 얼굴을 파묻고 들어왔다. 새까만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목도리 속의 피부가 생동하는 것 같았다. 연추에 온 후 변모된 금녀의 모습인 것이다. "금녀!" 윤이병은 금녀 곁으로 다가가며 간절한 목소리로 불렀다. 금녀는 목도리를 풀기 위한 것처럼 윤이병의 뜨거운 분위기에서 비켜선다. "자아, 여기 앉자. 춥지?" "조금." 금녀는 난롯가 의자에 앉는다. 목도리를 접어서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단정한 자세로. "저녁은 먹었어?" "먹었어요." "그 댁 아주머니가 엄해서 말이야. 좀처럼 찾아갈 수 없더군." "엄한 분이에요. 오늘 밤도 나오기가 어려웠는데, 윤선생한테 중대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윤이병은 또박또박 하는 금녀 말투에 초조함을 느낀다. "중대한 일이야." 한숨을 푹 내쉰다. 가장만은 아니었다. 윤이병으로선 나오는 게 한숨뿐이었으니까. "김두수 그놈 때문에 우린 노상 수풀에 앉은 새야." 금녀는 발끝을 내려다본다. 김두수 말이 나와도 별반 동요를 나타내지 않는다. "금녀." "네." "우리 도망가자, 응?" "저는 도망 안 가요." 발끝을 내려다본 채 주저없는 대답이다. "그럼 난 어쩌라는 거야, 응? 죽으라는 게야?"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잖아요. 윤선생님은 다른 분과 결혼하시라구요. 그러면 김두수가 윤선생님을 노리지 않 을 거 아니에요?" "널 잊고?" "전 일평생 결혼 안 할 거예요. 누구든 저하고 결혼을 하면은 불행을 겪어야 하니까요. 전 결혼할 자격도 없구 요. 술집에서 술 팔던 여자," "그건 잠시 아냐. 며칠, 술이나 제대로 팔았나 뭐? 지금 금녀는 학교 선생님이야." "..." "나하고 달아나자, 응? 난 너 없인 못 살아. 그러니까 이곳까지 찾아온 거 아냐?" "윤선생님." "말해봐." "전엔 저한테서 달아나기만 했었는데 요즘 전 그게 의문으로 자꾸 떠올라와요. 윤선생님이 전과는 다르다구 요." 윤이병은 움찔한다. "그, 그건... 널 잊으려고도 했었지, 이를 악물고. 하지만 안 되더군. 내가 예까지 왔을 땐 어떤 고난도 함께 하 리라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야. 어떤 고난이라도, 한데 넌 전과 같지는 않았다." "..." "난 밤낮으로 질투했다! 가슴을 치며 질투하고 괴로워했다!" "..." "넌 마음이 변했어. 넌 장인걸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난 어떡하면 좋지? 나도 자존심은 있어. 사내란 말이 야. 혼자 떠나야 했을지도 몰라. 넌 장인걸 그 사람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존경해요. 나를 살아가게, 희망을 갖게 해주신 분이니까요. 세상을 사는 일에 눈뜨게 해 주신 분이니까요. 그분은 은인이에요." "은인? 다만 그것뿐이야?" "네, 그것뿐이에요." "금녀!" 윤이병은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인 금녀의 손을 덥석 잡는다. 찬 손이다. "놓으세요. 여긴 학교 사무실이에요." "금녀, 내 말 들어. 김두수가 우릴 쫓고 있어. 우리가 여기 있는걸 알았나봐." "그걸 윤선생은 어떻게 아셨죠?" "포염에서 협박 편지가 왔다." "포염에서요? 보여주세요." "찢어버렸어. 누구라도 보게 되면 말이야, 우리들 사이가 소문나지 않겠어?" "..." "우린 이미 부부나 다름없어." "이제사요?" 금녀 입가에 서글퍼하는 웃음이 감돈다. 난로 온도에 여자 양볼은 붉게 타고 있었다. "넌 내게 처녀를 바쳤어. 우리의 사이가 비밀 될 게 뭐 있나? 이곳서 신세진 분들께 떳떳이 인사하고 둘이서 떠나자. 상해나 그런 대도시에 가서 숨어 살자, 응?" 숨을 할딱이며 윤이병은 금녀에게 덤벼든다. "이거 놓으세요!" "안 놓겠다! 함께 간다는 약속 없인," "소릴 지를 테요!" "질러. 얼마든지! 조만간 김두수놈은 우리에게 자객을 보낼 거야. 그걸 생각한다면 뭐가 무섭겠어? 우리가 남 이야?" 윤이병은 한 팔로 금녀의 허리를 누르고 한 팔로는 가슴을 잡으며 마룻바닥에 여자를 쓰러뜨리려고 발버둥친 다. 몇 달 동안 성에 굶주린 욕정이 광증으로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금녀는 만만치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윤이병을 떼밀었다. 윤이병은 제 힘에 겨워 마룻바닥에 흉한 꼴로 나자빠졌다. "나 소릴 못 지를 것도 없지만 윤선생을 망신시키고 싶진 않았어요." 몸을 일으키며 윤이병은 신음한다. 분노의 신음이다. "혼자 떠나세요. 혼자 떠나시기만 하면 김두순 결코 윤선생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내 불행한 길을 함 께 가자 안 하겠어요." "그, 그게 진심이야? 변명 말어!" "변명 아닙니다! 어느 곳 어느때든 나는 혼자서 당할 거예요! 김두수의 칼이라도 좋구요. 총이라도 좋구요. 그 동안 나는 내 인생을 착실히 살아갈 거예요." "거짓말 마라, 이년아!" "윤선생이야말로 거짓말 마세요!" "그럼 한 가지 묻자!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 불행에서 나를 밀어낸다는 그거냐?" "꼭 듣고 싶으시다면, 윤선생은 타인이기 때문이지요. 옛날은 어리석은 계집아이의 착각이었구요. 나 윤선생한 테 정 없어요." "으으음, 이년! 갈보 같은 년!" 이지러진 윤이병의 얼굴은 추악했다. 금녀 눈에 증오의 빛이 이글거린다. 긴두수를 보던 바로 그 눈이다. "나는 갈보가 아니지만 윤이병은 밀정이오!" "뭐라구? 이년!" "난 김두수 그놈한테 몸 팔지 않았어! 하지만 윤이병은 양심을 팔았단 말이에요!" 윤이병은 금녀를 치려구 덤빈다. 금녀는 사무실 구석으로 몸을 피하면서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내가 소리지르면 당신은 연추를 못 떠나, 알겠어요? 소리지르면 할아버지가 달려올 거예요. 그걸 몰라서 이러 는가요?" 윤이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난 최근에 당신이 김두수 손발이 된 걸 깨달았지요. 끝내 모르는 척하려 했지만." "증거를 대!" 그러나 윤이병은 한풀 꺾이어져서 중얼거렸다. "이동진 선생님이 떠난 후 연추를 떠나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왜 그러셨어요?" "난 처음부터 너 데리고," "아니지요. 날 데리고 도망가는 거 아니지요. 김두수한테 넘겨주려 했던 거예요." "아니야!" "용정촌 하숙방에서 김두수가 협박한 대로 네, 맞아요. 그런 처신하다가 학굘 쫓겨났지요? 나 윤선생을... 나 때문이겠지요, 시작은. 아무 말씀 마시고 떠나시는 거예요. 김두수 손아귀서 벗어나 어디든 가시는 거예요." 금녀는 목도리를 집어들고 나가버렸다. 이튿날 윤이병은 양서방에 앞서 연추를 떠났다. 크고 무겁고 낡아버린 외투를 걸치고, 역시 낡은 가방 하나를 들고서. 4장 그들의 만남 해가 꼬빡 넘어간 직후 마차는 용정촌 역두에 당도하였다. 회색 두루마기 차림에 회색 모자를 눌러쓰고 검정 구두를 신은 길상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뒤를 따라 응칠이가 내렸다. 멋을 내느라고 삐뚜름하게 쓴 털모자 를 한번 만져보며 응칠이는 까닭없이 씩 웃는다. "너 먼저 가거라." 길상은 마차에서 내린 손님들이 흩어져가는 역두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씨한테 무시기라 말합매까?" "잠깐 들를 데가 있어." 응칠이를 먼저 보낸 길상은 국밥집 월선옥에 들어섰다. 뜨내기 일꾼 서너 명이 국밥을 먹고 있다. "앙이 어떻기?" 하다말고 막둥이, 그러니까 작년 여름 길상에게 면상을 얻어맞고 코피를 쏟았던 젊은이, 그리고 또 한 사람 곱 슬머리의 사내가 어색하게 웃는다. 등을 보이고 앉은 두 사람이 돌아본다. 신전 하던 박서방과 엿도가 주인이었던 홍서방이다. 그들도 앉은 자세를 고치는 시늉은 했으나 역시 어색한 미소를 띤다. 모두 서희네 집을 신축할 때 날품팔이로 모여왔었던 일꾼들이다. "저기, 저어 혜관스님이..." 국솥에서 국을 뜨다 말고 김이 안개처럼 서려 오르는데, 월선은 상기된 얼굴이다. 이미 알고 왔으니 서둘 것 조금도 없다는 시늉으로 길상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인다. 다분히 신경질적이다. 잘못을 저지른 듯 월선은 당혹 해한다. "일들 끝냈소?" 모자를 벗어놓고 일꾼들 사이를 가르듯 들어앉으며 길상이 묻는다. "이럭저럭 하루 해를 넘기긴 했소만," 얼굴은 여전히 두리넓적하고 판대기처럼 가슴팍이 탄탄해 보이는 홍서방이 코를 홀짝거리며 대꾸했다. 박서방 과 막둥이,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일꾼은 공연히 서로를 살피듯 힐끔힐끔 쳐다보며 먹는다. "아지매." "그, 그래..." "저한테도 국밥을, 아니 술 한잔 주십시오." 해놓고 의아해하는 월선을 외면하듯 "한잔들 하시겠소?" 길상은 일꾼들을 둘러본다. "두꺼비가 파리를 싫다 안 할 게고, 뱀이 두꺼빌 싫다 안 할 게고 허허헛, 마다할 리 있겠습니까? 하하핫핫..." 드높은 웃음 소리를 내며 홍서방은 웃어젖힌다. "하긴 그렇군요. 실컷들 한번 마셔보슈. 아지매, 여기 술." "그 동안 술배 많이 곯았으니, 열흘 굶은 호랑이가 절도섬을 생각하겠습니까?" 박서방이 헤헤거리며 말했다. 자신이야 술을 즐기는 성질이 아니지만 술고래 홍서방이야 염치 차리겠느냐는 뜻이다. 엉성한 상투에서 몇 가닥 머리칼이 이마 쪽으로 흘러내려 그 머리칼 사이에서 땀방울이 희번덕인다. 시장기가 심했던 모양이다. "술배 곤 것만은 틀림없지마는 박씨 성 가진 어떤 놈처럼 투정부린 일 없지." "그럴 게야. 부뚜막에 올라서 똥 싸는 강아진 원체 얌전하니까." "암, 암. 점잖은 선비 뒷구멍에서 호박씰 까구, 그럴지언정 박씨성 가진 어떤 놈처럼 투정하다 쥐어박힌 일 없 구." "흥, 얌전한지 점잖은지 그놈의 주둥이는 내 매값으로 나온 술 안 마셨다 그 말인고?" "매값으로 돈 몇 냥 받은 흥부 얘기 들었지마는, 아무리 팔아먹을 신주도 족보도 없는 갖바치기로서니 매값으 로 술 얻어먹었다는 얘긴 금시초문이라. 굳이 그 술 내력을 얘기한달 것 같으면 그 건들건들 가을바람에 흔들 어대는 수숫대, 전라도 사내 덕분이지. 그 나그네 아니더면 술은커녕 박가놈, 네 골통이 박살났을 게야." "저, 저 도끼뿌리 맞을 놈의 심사 보게나? 의리가 없어도 유만부동이지." 홍서방과 박서방이 입씨름을 벌이는 동안 소주 몇 잔씩을 한 일꾼들의 표정은 한결 느긋해졌다. "어떻소. 박서방은 술보다 국밥 한 그릇 더 하는 게?" 입만 살아서 활기차 보이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박서방을 보고 길상이 권한다. "아, 아니오. 쫄아든 배창자에 짐이 무거우면 탈나기 십상이오. 아, 배탈나서 일 못하면 어쩔려구요? 기왕지사 먹은 국밥 값이나, 헤헤헷..." "그나저나 큰일이구먼. 신전도 내구 엿도가도 다시 차려얄 텐데." "차리자니 땅이 있어야지요. 땅 임자도 코가 석 자 오 치나 빠졌는데 우리네 사정 봐줄 리도 없고," 하는데 순간 갸름하게 찢어진 박서방 눈이 모이를 발견한 새새끼처럼 둥글해진다. 심술궂은 웃음이 번진다. "이보게, 홍서방." 박서방의 저의를 알았는지 홍서방은 모르는 척한다. "거, 떡 벌어지게 차렸다는 엿도가 어찌 됐누?" "뭐, 뭐?" 모두 싱긋이 웃는다. "떵떵거리더니 그놈의 엿도가 어디로 날라갔지?" "지랄하네. 곰팡이 쓸은 얘기 뭐할려고 또 꺼내!" 소리를 바락 질렀으나 홍서방은 풀이 죽는다. 지난 여름 동업자가 나타나서 엿도가를 크게 차렸노라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홍서방은 실상 고공살이에 불과했고 결국 보수가 날품팔이만큼 못하다하여 슬그머니 공사판으 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 일을 두고 박서방이 놀려댄 것이다. 홍서방의 사기없는 허풍도 허풍이려니와 박서방의 낙천도 어지간하다 할밖에. 길상이 걱정을 했으니 뭔가 도와줄 맥도 있을 법한데 홍서방 놀려먹는 일에 더한 흥미를 가지다니, 조상 대대로 핍박받는 천업이지만 장인 기질 탓이었을까. "좌우당간에 전라도 그 사내 말 하나 자알 하더구먼." 웃음거리가 된 홍서방은 그러나 비윗살 좋게 얼렁뚱땅 화제를 돌린다. "흥, 귀동냥 가지구." "잔말 말어. 귀동냥 아냐!" "엿도가 주인이 공사판엔 왜 왔던고?" "구경을 했단 말이야. 술까지 얻어먹지 않았어? 그래 그 친구 말재간에 탄복을 했지.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 어주더군. 거짓말 아니라구." "말으 잘하기도 합두마네두, 그 두생이 뵈기보다아 심이 장사였답매. 이렇게 잡고서리 앙이 놓잖앴슴?" 막둥이 멱살잡는 시늉을 한다. "장사라기보다 깡다구지." 길상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급하게는 아니었으나 쉴새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월선은 멍청히 어두운 거리 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동 생각을 하는군. 아지매 당신이나 내나 못 잊어할 게 뭐 있소? 우린 고향 잃은 사람... 아니지요.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오.' 갑자기 두만아비 생각이 난다. 길상은 왜 하필 두만아비 생각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허풍 떠는 홍서방, 한 그릇 국밥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낙천인 박서방, 이들 때문인지 모른다. 풍전등화 같은 목숨, 하루살이 같은 인생의 이들. 연해주를, 만주 땅을 유랑하는 백성들이 품팔이 일꾼뿐일까마는 독립지사든 장사꾼이든 혹은 서 희 같은 자산가, 심지어 김두수 등속의 앞잡이까지 풍전등화의 목숨이며 하루살이 같은 인생임엔 대동소이한 것, 남의 땅 위에 뿌리박기도 어렵거니와 뿌리가 내린들 튼튼할 까닭이 없다. 길상은 끝까지 살아남을 사람은 두만아비 같은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죽은 윤보는 번갯불에 콩 구워먹을 놈이니 약은 쥐가 밤눈 어둡 다느니 했었지만. '이들 날품팔이도, 연해주의 이동진 그 양반도, 최서희, 김두수, 용이, 영팔이아제, 김훈장, 모두 허상이란 말이 냐. 조준구도 봉순이도 이상현 모두 다 허상이란 말이냐. 악인도 선인도 모두 허상이란 말이냐. 좋은 일 나쁜 일 남의 일이라면 거리에 굴러 있는 개똥 보듯 오로지 꿀벌처럼 불개미처럼 제 일족의 성을 쌓고 먹이를 비축 하고 그게 실상이란 말이냐? 크게는 한 국가 한 민족도 그래야만 오래 살아남는다. 지금은 허허한 곳을 많은 조선 백성이 방황하는데 꿈을 위해서, 원수들 때문에, 한과 정 때문에... 살아남으면은 얼마나 더 살아남을 것 이며, 허허헛... 허허헛' "재미있고 사귀어볼 만한 사람인데 뭐라든가? 뭐 조갑이라든가?" "조갑이 아니고 주갑이오!" 골방에서 얼굴을 쑥 내민 홍이 몹시 마땅찮다는 투로 말했다. "옳지. 그때 홍이아버지하고 함께 왔었지?" "그래요. 울 아부지하고 함께 왔소. 주갑이아제는 사탕도 사주고 나랑 강가에 가서 옷도 빨아 입고," 하다 말고 홍이는 킬킬 웃는다. "그 사람 그러니까 여러 해 전 우리 신전에 온 일이 있었지. 두번이든가? 그러니까 용정에도 있었던 일이," 박서방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홍이 "그 아제는 말이오, 주갑이아제는 말이오, 노래도 참 잘해요!" "홍아, 어른들 말심하는데 그라믄 못쓴다. 니는 공부나 해야제?" 월선이 나무란다. "치이, 이름도 조갑이라 캄시로." 홍이 얼굴이 골방 속으로 쑥 들어가버린다. "말이 났으니, 그래 홍이아버지는 요즘 뭘 합니까?" 홍서방이 월선에게 묻는다. "농사짓지 뭘 하겄십니까." "산판에 갔다는 소문이든데요?" "게울 동안이지요." "그러면 주갑인가 하는 그 사람도 함께 갔소?" 박서방은 용이 소식보다 주갑의 행방이 궁금한 눈치다. "야, 함께서 농사짓는가배요." "하긴 우리도 어떻게 해보긴 해봐야겠는데," "그렇소꼬망. 어디르 가기는 가야지비. 어이구 이놈으 세사앙으 어찌 살겠음? 나는 장개도 앙이 갔으이," 그 동안 얌전했던 막둥이, 술이 오르면서 울분도 오르는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다. 서희 얘기를 이렇고저렇고 하다가 길상에게 면상을 쥐어박힌 기억도 새로워지는 모양이다. "농사도 지어본 사람이 짓는 게야. 아무나 하는 줄 알어? 갖바치 놈이 그래 송곳 갖고 땅 파겠냐?" "지랄하네. 그러면 홍가 네놈은 엿도가의 주걱 가지고 땅 파려 했었나?" "내가 언제 농사짓겠다 했어?" "나도 농사짓겠다는 말은 안 했어." "그럼 송곳 가지고 벌목하러 갈 작정이었군 그래." "네놈이 주걱 가지고 간다면야 나도 송곳 가지고 못 가란 법 없지." "앙숙이구먼요." 길상이 술잔을 들며 웃는다. "아, 글쎄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주인양반," 하다가 홍서방은 주인양반이란 자기 말이 어색하여 큼! 하고 콧똥을 뀐다. "저놈의 인사가 말입니다, 내 아니면 벌써 옛날옛적에, 아 글쎄 공사판에 끌어다놓기만 하면 술투정에 밥투정 삯투정, 걸핏하면 쌈질이요, 그러나 지가 아무리 그런다고 앉은뱅이 용쓰기지 뭐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저놈으 몰골 가지고서 그래도 이 형님이 뒤에 뻐티고 있으니 한번 울어보는 거다, 그거지요." "흥, 뱃속에 든 할아버지 있다는 얘긴 들었어도 나이 어린 형님있다는 건 금시초문인걸? 그보다 앉은뱅이 용 쓰기라구? 앉아서라도 용을 쓰는데 넌 그럼 서서 뭘 했냐, 응? 그놈의 판대기 같은 가슴팍 말짱 헛거다 그거 야? 하긴 수숫대같이 헌들헌들하더라만 힘은 그 조갑인가 그 친구가 쓰더만. 외양 가지고 힘자랑 말라." "조갑이가 아니고 주갑이라 카이!" 또다시 골방에서 얼굴을 내민 홍이 참견이다. 화가 잔뜩 난 눈이다. "아아 아, 내가 또 실수를 했군. 그래 그래, 조갑이 아니라 주갑이," 홍이는 어른들 대화에 끼여들고 싶어 못 견디겠던지 뚱딴지 같은 말을 한다. "주갑이아제는 말이오, 일가를 찾을라꼬 대국에 왔다 카데요?" "뭐 일가?" "주천자가 일가래요. 주천자 찾으로 왔다 캄시로," 모두 폭소를 터뜨린다. 길상도 웃었다. 월선이도 웃는다. 얼굴이 시뻘개진 홍이, "시이, 누가 거짓부리 할까봐서? 나 들었단 말이오!" "하하핫, 하하하핫, 전라도 그 나그네 크게 한판 노는구먼. 성씨가 주가니까 주천자 일가임에는 틀림없는 일이 고, 하하핫, 하하하하! 뱃가죽 늘어지겠다, 하하핫..." "시이, 누가 시이, 우섭기는 머가 우섭소!" 마치 제 자신이 조롱당한 것처럼 홍이는 입을 불며 울상을 짓는다. "홍아, 니 정말로 어른 앞에서 그럴 기가?" "옴마는 아무것도 모름시로, 주갑이아제는 여기 저, 저 사람들보다 훨씬 몇 배가 그, 그래요! 마음씨 좋은데 그 런데 와 놀리대노 말이다!" "그래 그래, 홍이 네 말이 옳을 성싶다." 달래듯 하는 길상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홍이 난처해하는 표정이다. 누가 뭐 길상이아제 보고 그랬나? 변명 비슷하게 그러고는 슬그머니 골방 안에 숨어버린다. "하하핫 하하, 그렇긴 하군. 홍천자 박천자 소린 못 들었어도, 그러니 빈말은 아냐. 주천자 일가라는 것." "홍이가 잘못 들었는가배요. 그 사람이 그런 말 한 게 아니고 고향서 집 떠나올 때 그 사람 아버지가 대국 땅 에 가거들랑 주천자를 찾으라고..." 월선이 웃음을 참으며 변명을 해준다. "주갑이라는 사람으 말이 앙이래두, 사세에가 불리하잉까 순임금도 독장사르 했다잽매? 사람으 일 모른다잉. 안 그렇습매?" 막둥이 길상을 두고 긁는다. "그렇지이. 우리가 비록 막벌이꾼이라지만 사람 팔자 알 수 없는게야." 홍서방 역시 길상에게 비양치듯 말했다. 술잔 얻어마셨다고 쓸개까지 뽑아버릴 나일쏘냐, 그런 가락을 품고 으 쓱해져서 목을 뽑았다. "그렇소꽝이. 사람으 팔자 모른다이? 돈으 벌면 양반 되잲소? 뉘기 알겠관디? 내일이라도 금덩이 줏어 부재 앙이 된다는 법 없답매. 나두 부잿집 처네한테 장개 못 간다느 법두 없지비." 막둥이 곱상스레 생긴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암, 암, 인연이란 모르는 게야." 홍서방이 말을 더 잇기 전에 "막둥이." 하고 길상이 불렀다. "무시기, 무슨 일입매까?" 볼멘소리다. "젊은 혈기에 자네한테 손찌검한 일 잘한 일이라 생각지는 않아. 그러나 부자 빈자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자넬 업수이여긴다면 이 자리에서 이런 말 하지도 않겠네만 사내들이란 치고받고 싸울수도 있는 일 아니야?" "무시기, 그기야 그렇소꼬망." "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힐끔힐끔 눈치를 보아가며 홍서방도 건성으로 거든다. "그땐 자네도 막일꾼이지만 나도 남의 집 하인이었다. 지금 같으면 자네도 그런 말 안 했을 거고 나도 널 치 지는 않았겠지." 나도 남의 집 하인이었다는 말에 모두들 적잖게 놀란다. "하여간 돈 많고 지체 높은 여인의 남편이 되고 보니 공연히들 죄인이 되는 것 같아서, 옹졸해 그렇겠지만," 길상은 자조의 웃음을 짓는다. "그, 그야 못 되어 한이지." 홍서방은 얼버무리고 이 눈치 저 눈치 본 박서방은 딴전을 편다. "아 글쎄, 그때 얘긴데 도급놈이, 넌 누구냐! 하니까 주갑이 그 사람 대답이란 게 허 참. 누구긴, 조선 사람이 여라우 하더란 말이야." "도급은 무슨 놈의 도급, 친일파 졸개놈이지." "졸개건 달개건, 그놈이 또 이 새끼! 하니까 하따 천지간에 새끼아닌 게 있더라고? 사람 새끼냐, 짐승 새끼냐, 조선놈 새끼냐. 하 이거 아부지한테 미안스럽소이. 용서하시쇼. 아무튼 조선 사람 새끼냐 왜놈으 새끼냐, 그거 는 구별되얏이믄 쓰겄소잉. 따깔모자 썼다고 까불지 마시라 그 말인디." 박서방은 주갑의 음성까지 흉내내며, "그리고 또 그랬었지. 합심을 혀얄 것인디 한 사람은 매를 맞고 다른 사람들은 기경만 혀고 어디 이런 인심이 있을 것이요? 다같이 손해보는 처지랄 것 같으면," "허허어, 점입가경이네." "뭐라구? 점입 뭐? 서당개도 아닌데 제법 풍월을 아는구먼." "갖바치라 할 수 없네. 문자만 나오면 풍월이야?" "헷! 양반님네 쓰는 문자치고 풍월 아닌 것이 어디 있어서." "제법일세. 박가 네놈도 그만했으면 입에 거미줄은 안 치겠네." "동곳 빼는구먼." 돈 안 내는 술이라 하여 무작정 마시지는 않았다. "허, 고맙습니다. 국밥값도 안 내고 가겠습니다." 적당한 시기를 가늠하여 일꾼들은 일어섰다. 묘하게 염치는 이런 가난한 사람들이 유독 잘 차린다. 말없이 웃 기만 하던 곱슬머리의 사내와 막둥이, 그리고 홍서방 박서방은 거리로 나가고 국밥집에는 길상이 혼자 남았다. "아지매." "와." "봉순이가 왔다구요." "응, 저어 혜관시님도 함께 오싰더마." 월선은 남들 앞에서 어정쩡해하던 말투와는 다르게, 길상이 장가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내 붙이를 대하듯 스스 럼없이 말했다. "뭐하러 왔는가요?" 신경질과 우수가 어지럽게 감도는 길상의 표정이다. "시님은 이곳 사정 둘러보러 오싰다 카고 봉순이는 서울서 마침 시님을 만내서 동행해 왔다 그러더마." "서울서요." "응." "왜 서울입니까." "그거는 저기," "얘기하십시오." "봉순이가 저기, 기생이 됐더마." "내 그럴 줄 알았소." "..." "그 기집애가 그렇게 될 줄 알았소." "어미가 없으니," "네." 길상은 웃을 일도 아닌데 웃으며 무릎을 내려다본다. 크고 뼈마디가 길쭉한 두 손을 깍지껴보다가 푼다. "다 지 팔자지." "네." "..." "지 팔자지요." 골방에선 홍이 잠들었는지 아무 기척이 없다. 봉구가 기명통 물을 거리에 뿌리고 들어온다. 서투른 휘파람을 불며 씻은 그릇들을 헹구고 마른 행주로 닦는다. "아즈망이." "와." "파르 다 쓰구 없습매다. 내일 아침 국에 넣을 거 사와야겠음." "진작 말하지 않고, 저문데," 월선은 돈을 꺼내준다. "장날까지 쓸 만큼만 사오너라." "옛꼬망." 봉구는 물 묻은 손을 바지에 슬쩍슬쩍 문지르며 나간다. "하동 얘기는 좀 들었습니까?" "듣기야 들었지마는..." "두만이아버지는 잘산다 하던가요?" "두만이가 야물어서 땅도 사고, 진주 가서 산다 카더마는." 월선은 쪼깐이집이라던 비빔밥집 얘기는 하지 않는다. 자기와 흡사한 얘기여서 말하기 민망스러운 것이다. "하필 두만이아버지 얘기는?" "..." "죽은 정한조 그 사람 식구들이 진주서 고생을 한다 카더마. 그라고 나는 잘 모리지마는 관수라고," "네, 그런 놈이 있었지요.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군요." 순간 길상의 눈밑 근육이 떨렸다. "그 사램이 정한조 그 사람 아들을 많이 보살피준다 카든지... 어서 가봐야 안 하겄나? 집에서 기다리고 계실 긴데." "가봐야지요." 모자를 쓰고 길상은 거리에 나왔다. '이 못난 놈아, 온정신 가지고 만나볼 배짱이 없었다 그 얘기겠는데.' 길상은 트림을 한다. 술냄새가 역겹다. 모든 것이 역겹다. 슬프고 애처롭고, 자책감이 비틀어져서 여기저기 마 구 터져나올 것만 같다. 슬프지도 않고 애처롭지도 않고 자책감도 아닌 것처럼. '못난 놈! 사내자식이 감당 못할 짓을 왜 저질렀으며... 감당 못할 일은 또 어디 있누.' 막둥이를 보고 한 자신의 말도 되새겨보면 구역질이 날 지경으로 메스껍다. 이기고 지고 할 이유도 없는 것을 스스로 종기를 만들어서 고름을 터트린 것 같은 불쾌감. 무엇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 했던가. '흥, 길서상회라. 길서상회의 임자가 김길상.' 희미한 밝음, 사무실 안에서 비쳐나온 불빛 아래 길서상회 그러니까 연립으로 지어 전포로 세낸 건물 중 왼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곡물 무역의 사무실이다. 문을 드르르 열고 길상이 들어선다. "앙이!" 응칠이 앉은 의자에서 뛰어오르듯 일어선다. 서기의 자리이긴 했으나 놀랄 것까지는 없겠는데. 그러나 송애가 그의 옆에 의자를 끌어당겨 놓고 앉아 있었다. 길상은 송애를 본체만체 "이서기는 어디 갔어?" "밥으 먹으러 갔소꼬망. 상기도 앙이 오잲으이 기, 기다리고 있습매다." 송애는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난처해서 그러는지 독을 피우느라 그러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길상은 송애를 향해 몸을 돌린다. "송애는 여기 웬일루 왔어?" "..." "송애가 이러면 안 될 텐데?" 힐끗 쳐다본다. 흰 숙수 반회장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몹시 추워 보인다. "응칠이도 마찬가지야. 뜻이 맞다면 공노인을 찾아갈 일이지." 응칠의 얼굴은 빨개졌고, 송애 얼굴에는 노기가 떠오른다. 길상은 김두수나 윤이병에 대하여 섣불리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송애가 응칠이 혼자 있는 곳에 와서 노닥거리는 이유를 뻔히 알면서도. 송애는 내갈기듯 "그런 걱정 누가 해달라 했어요?" "걱정 안 할 수 없지." "그러다가 머리카락 세겠어요!" 미움에 눈이 이글이글 탄다. "송애, 그, 그러는 거," 응칠이 당황한다. "너 밥줄 떨어질까봐서 그러니? 난 이 세상에 무서운 것 없어." 길상이 "누가 너한테 무섬증을 주었나? 응?" 송애는 찔끔한다. "무서운 것 없으니까 없다 한 거예요!" "세상 다 살았냐?" "왜 다 살아요? 앞날이 구만리 같은데, 이를 악물고 살아야죠. 살구말구요." 길상은 껄껄껄 웃는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롭다. "대체 우리 송애한테 누가 한을 그리 안겨주었을까?" "누구 놀리는 거예요!" "송애, 그, 그러면 앙이 된다이." "병신 육갑하네." 송애는 응칠에게 욕지거리를 하고서 몸을 일으키려 한다. 그 순간 길상은 송애의 뺨을 때린다. "왜 이래요?" 송애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응칠의 얼굴은 새파래진다. "내 이전에 좋게 타일렀지. 망신당하기 전에 정신 똑똑히 차려. 네가 응칠이를 왜 찾아왔는가 그걸 모를 만큼 세상이 어리석지도 않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 송애는 울음을 뚝 그친다. 여자의 눈은 무섭도록 빠르게 생각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아무래도 모를 일이에요." 일그러진 미소를 띤다. "혼인까지 해놓고서 무슨 까닭으로 강짜부리는지 말예요." 아연했던 길상이 별안간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응칠의 얼굴은 더욱더 파아래진다. "하하핫... 하 관두지. 너도 그만했으면 헤엄질 잘 치겠고 걱정이 안 돼서 좋다. 그러나 허사야. 네 하는 짓이, 하하핫... 강짜라?" 길상은 웃어젖히는데 눈물 한 줄기 흘러내린다. 송애를 동정한 것도 아니었건만.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는지 모른다. "미안하게 됐네, 뺨을 때려서." 어두운 거리에 나온 길상은 드디어 취기가 돈다. '어이구우 이놈의 세상을 그만,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음 그, 그렇구나. 내 나면서부터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만사가 그런 식이다. 음, 지금부터 내 중 형님을, 아니지 중 선생님을 만나보고 또 봉순이 그 계집애를 만나보고오 그러면 되는 거 아냐? 제에기, 용정촌에선 별반 인심도 못 얻을 중이 뭐하러 왔을까? 중하고 기생 하고 기생하고 중, 어이구 봉순이 너 잘했다. 하인놈이 상전아씨 서방 된 것보다 훨씬 낫다야.' 길상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갈짓자로 걸으며 '신발이란 발에 맞아야 하고 사람의 짝도 푼수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이공의 말씀은 없었던 것으로 하는 편이 상책인 성싶고,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요.' 혼인하기 전 김훈장이 하던 말을 마음속으로 뇌인다. "하하핫... 하인놈이 상전아씨 서방 된 것보다 낫다야. 하하핫... 하하..." 행인이 뜸한 밤거리 하늘엔 별도 잘 보이지 않고 흐린 날씬가본데 웃음을 터뜨리는 눈자위에서 불이 번쩍번쩍 튀는 것을 길상은 느낀다. 온통 하늘이 시뻘겋게 타고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진다. 언제였던가. 용정촌에 불이 난 뒤 꿈에서 보았었던 진홍빛 노을보다 더 짙은 빛깔, 아니 하늘에서 억겁의 불이, 죄업의 불이 활활 타고 있 는 것 같은 환각과 환청이 귀를 울린다. 수백 수천의 승려들이 독경하는 높고 낮은 음색의 합성이다. 길상은 땀에 젖어서 대문 앞에 섰다. 혜관이 있다는 사랑으로 곧장 향한다. "스님." 기침 소리가 난다. "혜관스님." "들어오게나. 자네 집 아닌가." 길상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행차가 매우 어렵군 그래." "네." 길상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면서 "스님께서는 연갑이 어찌 되시옵니까?" 혜관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중놈이 연갑 헤이게 생겼어? 마흔네댓 되는지 모르겠네." 내뱉듯 말했다. "저는 육십이 다 된 노스님인 줄 알았사옵니다." 한참 동안 길상을 쳐다보고 있던 혜관이 입을 쩍 벌리고 웃는다. "하하하핫... 역시, 내 밑천을 아는데, 하하하핫... 풍진 세상을 살다보니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느냐?" 길상은 얼굴을 들었다. "뭐하러 오셨습니까?" "한밑천 긁으러 왔네." "한밑천 나올 듯하더이까?" "그런 내가 물어볼 말이고오, 어디다 쓰겠느냐는 말은 물질 않으니," "스님께서 절 짓겠다는 말씀은 아니 하실 터이고." "과연." "..." "만주 벌판의 바람은 다르군 그래." "네, 다르지요. 김평산의 큰아들 김거복이 밀정으로 횡행하는 곳이니," "뭐이라구?" 혜관은 눈을 크게 벌리고 길상을 쳐다본다. 그러나 이내 덤덤해진다. "그런 조물들이야 어느 곳엔들 없을까마는 그보다 김평산의 아들이라니 놀랍구먼. 나무관세음보살." 혜관은 널따란 법의 소매 속에 한 손을 쑤셔넣고 긁적긁적 긁는다. "오나가나 그놈의 조물과 빈대, 벼룩이 귀찮기는 귀찮지. 그렇다고 구데기 무서워 장 안 담굴 순 없는 일이고 오."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렇지? 말주변이 늘었고 속임수가 늘었고, 화적단을 따라다니다 보니 이것저것 느는 게 많아지더구먼." "..." "그는 그렇고, 한밑천 긁으러 왔다는 아까 그, 그건 빈말일세. 진빚도 솔찮으니 무슨 염치로," "진 빚이라뇨?" "차차 알게 될 테지. 밑천이야 많을수록 좋은 거지만 이쪽도 바쁠테니까." 길상은 진 빚이라는 말을 곰곰 생각해본다. 짐작이 가지 않는 말이다. "이동진 선생 자제분이 이곳 사정 얘길 안 하던가요?" "체면치레가 소중한 그 젊은 양반이 미주알고주알 얘기할 리 없지. 내가 또 여기 올 심산이었으니 백문이 불 여일견이라, 그는 그렇고 안에서 봉순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네. 알고 있습니다." 길상은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린다. 머릿골이 띵! 하니 무거워온다. "수천리 멀다 않고 왔는데 섭섭하게 대해선 안 될 게야. 알겠지?" "잠시 들어갔다 오지요." 불이 환하게 비쳐나온 서희 방을 향해 길상은 다가간다. 방엔 팽팽하게 불빛이 들어찬 것 같고 넘쳐서 굴러나 올 것만 같은 긴장감을 길상은 느낀다. 신돌 아래서 기침을 한다. 그리고 방 앞에 가서, "들어가도 좋소?" "네." 짤막한 서희의 대답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봉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방님, 어래간만이오." 조용한 음성, 조용한 몸가짐, 역시 봉순은 기생이었다. 서희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래간만이군. 그간 별일 없었겠지?" 길상은 엄청나게 변모한 봉순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별일이 없었느냐는 말도 실수였고. 봉순은 배시시웃 었다. "별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길상도 실소한다. "앉지." "네." 비로소 길상은 서희에게 눈길을 돌린다. "속이 안 좋다고 했는데 괜찮소?" "괜찮습니다." 길상의 시선이 서희에게 옮겨진 뒤 봉순이는 자리에 앉는데 아랫도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간신히 견디어 낸다. 전등이 두 개, 세 개, 네 개로 보였고 움직이지 않던 서희의 까만 눈동자도 여러개로 엇갈려 흔들린다. "오면서 잠시 들었는데 서울서 왔다며?" 길상의 음성이 먼 곳에서 울려오는 것 같다. "네." "관수가 살아 있다 하던데?" "진주에 있어요. 얼마 동안은 숨어 있었지요." "음..." "한조아제 아들이, 그러니까 열아홉 살이어요. 진주서 물지게품을 팔아 사는데 고생이 말할 수 없고, 그래도 제 아버지," 하다가 봉순은 말을 끊어버린다. 옛날로 끌어당기는 감정의 줄을 뚝 끊어버리듯이. 옛날의 말투, 옛날의 습관 이 뛰쳐나올 듯 두려웠던 것이다. "그 아이도 칼을 갈겠군, 조준구한테." 서희가 봉순이 하려는 말을 이어주듯 말했다. 길상이 중얼거린다. "원수는 원수를 낳고 또 원술 낳고, 끝없는 놀음인가보군..." 모두 외양은 평이했다. 다같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않았다. 대결도 냉전도 아니었다. 미움은 물론 아니었다. 옛날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세 사람의 노력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자기 감정에 가 장 냉혹한 사람은 최서희였다. 5장 해는 저물어가고 다음날 김훈장을 찾아가자는 약속을 했는데 다음날이 되어 떠나려 할 무렵 봉순이는 별안간 골치가 아프다 했 고 자신은 월선아지매랑 내일 가겠노라 고집을 피웠다. 아프다는 것은 빈말이었고 조신을 한 것이다. 남녀간의 애정은 이미 바랄 길 없다 하더라도 오누이같이 자란 정이야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사, 오 년간 나누어져 살아 온 데 대한 회포나마 풀고 싶었겠지. 길상과 함께 가면 따사로운 위안 정도는 받을 수도 있겠는데 봉순은 그 욕망조차 참는 것이다. 서희 눈을 꺼려한 때문은 아니다. 투기할 만큼 자신없는 서희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봉 순은 기생 나름의 처신을 체득한 조신이었을 것이다. 혜관은 길상과 함께 집을 나서면서 "사람이란 환경 따라서 몇 번이든 변성하는 모양이야." 봉순이를 두고 한 말인 줄을 아는 길상은 먼산을 본다. "아무리 환경이 바뀌어도 변성 안 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럴까?" "훈장 어른도 그렇고 최참판댁 손녀도 그렇지요." "듣고 보니..." 혜관은 며칠 사이 용정촌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살펴보았을 텐데 호기심은 여일한 모양이다. 청인들이 지나 갈 때마다 돌아보았고 히사시가미나 혹은 마루마게의 큰 머리에다 책보를 끼고 게다 소리를 딸각딸각 내며 왜 녀가 지나갈 때에도 돌아보곤 했다. "왜인들도 꽤 많군." "아직은 많은 편 아닙니다만 자꾸 기어나올 겁니다." "그럼 청국도 먹자는 겐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나." "중국 땅에 한 치 두 치 밀고 오는 만큼 조선 독립은 멀어져가겠지요." 길상은 대답하면서 마차를 빌려 타고 갈까말까 생각한다. 김훈장의 독설이 무서웠던 것은 아니나, 마차가 즐비 하게 줄지은 곳을 지나쳐버린다. "일본에 먹힐 만큼 청국이 허약한 건 설마 아니겠지?" "글쎄요. 개미가 몇 마리 달겨들면 굼벵이도 못 견디지요. 일본뿐이라면... 지금은 중국의 내정도 머리 골치 아 프게 돼 있고," "황제가 물러나고 미국식으로 대통령이 들어앉았다든가?" "그러나 군벌 때문에 앞으로 어려운 일이 중첩되겠지요. 손문이 할 수 없이 물러나고 원세개가 들앉았는데 그 야말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인이 받는다는 실정입니다. 백성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돼 있지요. 정세 변화가 무상하고 숱하게 피를 흘렸는데 그것도 개죽음이 될 판국으로 몰리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워낙이 땅덩어리가 크니 여기저기 뜯어먹고 찢어먹는다손 치더라도 조선 꼴이야 되겠는가. 뜯기면서 찢기면서도 새 살이 돋을 거구 종기가 나면 서도 연신 터지고 아물고 그러는 동안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더라 도 차츰 성한 몸으로 돼가겠지. 조선처럼 송두리째 먹히기야 할려구." 두 사람은 시내에서 빠져나와 들판으로 걸어나온다. "마차로 갈까 했습니다만 훈장 어른께서 워낙이 고생스럽게 지내시니까." "최참판댁 귀한 사위 자네가 보행인데... 진수성찬 배불리 먹어서 고맙기야 하다만, 산골짝에서 죽은 사람들의 가속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생이 이만저만 해야지." "..." "최참판네 은덕은 아직 받고 있는 게 사실이나... 산에서 숯을 굽고 백정네 사위로 은신하고 물지게품 빨래품 등짐장수 객주업에다 노름꾼, 잘해야 괭이 이마빡만한 땅을 의지하구 그래도 그 사람들 지성으로 뛰고 있으니, 의병이란 빛 좋은 개살구야. 문어 제 다리 짤라먹는 격이지 뭐겠나. 순절이 의로운 일이긴 하나 그 보다 나라 가, 백성이 살아나느냐 영영 죽어버리고 마느냐 그게 화급한 지금 사정이거늘 이름만 높이 나고, 선비들의 하 는 양이란 나죽고 보겠다는 게지 너 죽이겠다는 독념은 모자란단 말씀이야. 자고로 묘비명도 없는 수많은 일 꾼이 일을 이룩하게 마련이지만 혈기와 비분강개만으로 되는 일 하나 없고... 하기는 나라 사정이 다급했던 만 큼 제 몸 부딪칠 방안밖에 없다 판단할 수도 있지. 그러나 지그시 늦추고 늦추어서 땅굴을 파야, 기백 명 기십 명 이끌고서 쳐들어간다고, 그건 다 죽자는 게고 꿀벌의 경우도 죽음의 침을 함부로 찌르는 건 아니야. 벌집을 잃은 벌은 벌집부터 만들고 제제가끔 해야 할 일을 정한 뒤 결사대든 불사대든... 모두 하는 양이 전멸의 길을 택한 것밖에, 일한 게 아니라 허울 좋은 이름 석자 남기는 것," "..." "보나마나 김훈장 그 양반도 꼬장꼬장 말라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게야." 하다가 껄걸 웃는다. "스님." "왜애? 비윗장 상하냐?" "어젯밤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최참판네 은덕을 아직 받고 있다는 말씀, 무슨 뜻이지요?" "그거라면 얘기가 좀 길지. 내 땅 내놔라 해도 곤란한 일이구 내놔라 한다구 내줄 사람도 아니겠으나, 한땐 그 런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닐 게다. 최참판네 최서희 애기씨가 만주 벌판에서 비럭질이라도 아니 할싸 싶었던 게지." 길상은 혼란을 느낀다. "여기저기 다아 돌아본 연후에, 무방하면은 자네한테 얘기해줌세." "혹," 혜관은 길상의 옆모습을 힐끗 쳐다본다. "혹 별당아씨께서 살아 계시는 거... 아닌지요." "별당아씨? 허허어, 이 사람아, 장모님을 별당아씨라니 하하핫..." 헛웃음을 웃는다. 혜관의 얼굴 따로, 웃음 소리 따로, 넓은 들판을 호탕한 웃음이 굴러간다. 멀리 멀리까지 굴 러서 씨 뿌리는 청인 농부 발밑에 웃음은 멎어버린 것 같다. "이곳 땅은 어떤가?" 집게처럼 코를 잡고 코를 탱! 푼 혜관은 앞섶에 손가락을 문지르며 물었다. "척박한 편은 아니지요. 추위가 길어서 어려울 경우가 많지만 수 백 년 일구어 먹은 땅이 아니니까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이곳은 무인지경이었고, 만주족이란 대체로 농사보다 목축을 많이 하는 모양이더군요." 얘기를 하면서도 길상은 혜관이 별당아씨 죽음에 대하여 명백한 답을 해주지 앉는 것에 의심을 품었다기보다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수수께끼 같은 거지가 와서 별당아씨는 죽었노라고 전한 소식 이외 어느 누구도 별당아씨 생사에 관해 아는 이 없다. 한 번 더 따져보고 싶지만 길상은 참는다. 무방하 면은 얘기해주겠다고 혜관이 말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정호네 집에 들어갔을 때 곱게 늙은 백발의 노마님이 내다보았다. 그러니가 김두수에게 잡혀가서 살해당한 의 병장 박재수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김두수를 쫓다가 해삼위에서 역시 김두수의 반격을 받고 부상한 박재연 의 어머니다. "안녕하십니까." 길상은 공손하게 인사한다. "어인 스님께서 함께 오시오?" "네, 고향서 오신 손님이십니다. 생원님께서는 출타중이신지요." "몸져 계시나분데 들어가보시오." 길상은 작은방 앞으로 간다. "생원님." "왔거든 들어오시지." 쌀쌀한 음성이다. 길상은 방문을 열었다.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김훈장은 부스럭거리며 버선은 신고 탕건 을 집어 쓴다. "하동서 혜관스님이 오셨습니다." "뭐이라?" 눈을 크게 뜨는데 김훈장의 눈엔 아무런 빛이 없다. "스님, 들어오십시오." "이거 안 되겠는걸. 나무관세음보살." 혜관은 합장을 하고 자리에 무거운 몸을 내린다. "최참판네 손녀께서 영 잘못하시는 일이구먼." 혜관은 김훈장의 초췌한 모습을 곁눈질하며 짐짓 괘씸하다는 시늉이다. "하동서 오셨다니, 내정신이 아직은 맑은데 초면이구먼." 김훈장은 빛 잃은 눈을 들어 혜관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 소승은 우관선사의 법제자오이다. 나무관세음보살." 또 한번 합장한다. "우관이라면 나도 잘 아는 터이나, 우관은 아직도 건재하시오?" "입적하셨습니다." "그래요?" 김훈장은 길상에게는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요즘은 어떠냐는 안부도 않는다. 그런 김훈장 태도에는 익숙해진 듯 길상은 덤덤히 앉아 있다. 혜관으로부터 눈길을 떼고 장죽을 찾아 담배를 넣으며 김훈장, "요즘 중들 믿을 수 없더구먼." 뼈와 살가죽만 남은 손에서 담뱃가루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언젠가 한번, 담배 제가 넣어드리지요, 했다가 쌀 쌀하게 거절당한 일이 있는 길상은 김훈장의 힘없이 흔들리는 손만 쳐다보고 있다. "글쎄올습니다. 중놈들이 앞장서서 친일들을 하니까 이놈의 땡땡이중 동냥하기도 매우 난감하게 됐소이다." "중들이 유부녀를 유인하여 해괴스런 패륜을 자행함은 이조 오백년 비일비재한 일이나, 그래 이제는 친일의 앞장이라?" 세사에 어두운 김훈장도 운흥사 중 본연의 행적을 들어서 아는 모양인데 혜관의 입에서 친일을 한다는 말이 나왔으니, 빛 잃은 눈에 잠시 동안 불꽃이 인다. "지옥이 터질 지경이지요. 하하핫..." "그러면은 비구는 그런 중들의 아류가 아니라 그 말이오?" 김훈장은 스님 대신 비구라는 호칭으로 중 당자인 혜관에 대해 모멸감을 나타낸다. "친일도 맘대로 안 되는 일입죠. 내로라 하는 중놈들, 하하하핫! 빈도 같은 땡떙이, 입이나 벙긋하겠소이까?" 비구라는 호칭에 응수하여 소승 대신 빈도라는 말을 쓰고 혜관은 입이 찢어져라 벌리다간 하품을 깨문다. "하긴 우관의 법제자라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빨다가 기침을 한다. "좀 드물긴 드문 인물이었지. 중 되기 아까웠어." 김훈장은 혼잣말처럼 뇌인다. 다소 기가 꺾인 것을 우관을 내세우며 방패삼은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신 노장께서는 한 가지 잘못한 일이 있습지요." "..." "최참판네 그 마님께, 네, 시주로선 으뜸이시니 덕택에 지리산 중놈들 연망한 일도 여러 번 있었사오나," "..." "여기 이 길상이를 내주신 것이 잘못이었다 그 말씀인데, 왜 그런고 하니 멀쩡한 놈 하나 하인배로 만들었고 절로서는 대덕 될 인물 하나 잃은 셈이지요. 하, 그뿐이겠습니까? 돌아가신 노장께서는 만백성을 특히나 학정 에 시달리고 나라는 기우는데 갈 곳이 없이 방황하는 백성들을 위해 팔뚝 두 개의 관음상으론 도저히 미치지 못할 일인즉 천수관음을 조성코자 소원하시었소. 허나 천수관음을 조성할 자 길상을 두고 달리 없었으니 후회 막급이라. 그러하니 불계에서는 아사달을 놓친 셈이요, 길상이 본인으로선 하인배로 전락하여 뼈아픈 설음을 맛보았으니 우관선사께서 그 일만은 매우 잘못하시었소. 하하핫... 지나간 일 얘기하면은 무슨 이득이 있겠소이 까마는, 오늘 최참판네 사위가 되어 개인으론 영달이나 불계의 손실은 크오이다." 길상은 여전히 덤덤하게 앉아 있었고 김훈장은 의외란 얼굴이다. 말하자면 혜관은 말의 쌍칼을 쓴 셈이다. 길 상이 사바로 나간 것을 불계의 손실이라 한 말은 우관을 두고 중 되기 아깝다 한 김훈장 말의 답변이요, 멀쩡 한 놈 하나 하인배로 만들었다는 말은 짐작컨대 최서희와 길상이 혼인하였다 하여 백안시하는 모양이니 그것 을 쑤셔댄 것이다. '흠, 우관의 법제자라구? 제법 능수능란하군 그래.' 김훈장은 인식을 달리한다. 옹고집은 흙속에 들어간다면 모를까, 그러나 문벌에 대한 경모심에 못지않게 학덕 이 있는 사람, 출중한 사람에겐 서슴없이 말석에 물러나 앉을 줄 아는 김훈장인 만큼, 뭐 그런다고 혜관에게도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왕시 목수 윤보에게 가슴을 열어주었던 그런 심사와 비슷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리 고 길상을, 바로 보기 싫은 그 옹고집으로 하여 사실 김훈장은 쓸쓸하기도 했었단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 훈장은 고향의 소식이 궁금하였다. 체면에 물어보는 것을 참고 있었지만 화제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옮겨지 자면 날을 세우거나 심드렁해하거나 해서는 안되겠기 때문이다. "절 형편이야 내 소관이 아니나, 우관은 입적했다 했고오, 그래 평사리 마을 사람들은 다 편히들 있는지 모르 겠소오?" "편히들 있을 리 없지요. 참 빈도가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생원님 댁을 한 번 찾아갔어야 하는 건데 오나가 나 왜놈들 앞잡이 그놈의 조물 때문에 근접을 못하고서 왔소이다." "그, 그러면 죽진 않고," 별안간 김훈장의 눈알이 시뻘개긴다. "아무리 칼 끝에 사는 세상이기로, 가속이 늘었다는 얘길 들엇소이다. 아들 형제라든가...?며누님을 잘 두셔서 밤낮으로 길쌈하구." 김훈장은 미친 사람처럼 담배를 빨아댄다. "조준구 그놈이 그, 그놈이 해악질을 할 줄 알았더니..." "마을에 있어야 해악질을 하지 않겠소?" "그렇담?" "큰집엔 꼽추 아들만 남아 있고 술울로 솔가하여 내려오는 일이라곤 좀체 없는 모양이오. 생원님을 말씀드리 자면 의병장으로 이름이나 있는 만큼," 하다가 혜관은 심술궂게 김훈장을 곁눈질해 본다. 김훈장 얼굴엔 수줍은 미소, 비장한 감회, 그런 것이 오락가 락하는 것 같았다. "네, 그러니만큼 왜놈 순사가 더러 들락거린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하면 차츰," "왜놈 순사가? 죽일 놈들!" 신음하듯 했으나 김훈장 얼굴에는 오래간만에 온기가 도는 성싶고 평온해진 듯싶었다. 자연 김훈장으로선 혜 관이 반갑잖을 수 없다. "그때만 해도 이 늙은 몸이 쓰였지. 이곳에선 이제 신다 버린 신발 신세라. 잘나고 똑똑한 젊은 양반들이 나한 테 일거릴 주어야 말이지. 참 법호가 어찌 되시오?" "혜관이외다." "혜관... 그래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소." "네, 별로 이렇다할 소임은 없소이다. 떠나올 적에 윤도집이나고 동학하는 사람이 중옷 벗고 아니 돌아오면 어 쩌나 하더이다. ㄱ,래서 소승 말하기를 청국 여자 얻어서 살림 차릴지 뉘 알겠냐구, 하하하..." "저런, 부처님 돌아앉으실 소릴," 김훈장은 참으려다 웃는다. "부처님 돌아앉으실 일은 약과올시다." "그러면은?" "오종계 중 가장 엄한 계율을 범한 일도 허다했소이다." "그러면은 살생을 하였다 그 말이오?" "방조를 했지요." "그러고도 염주를 목에 걸구 계시오?" 김훈장은 농인지 진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다. "서산대사나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환속하였다는 얘긴 못 들었소." "아아," 비로소 김훈장은 깨닫는다. "하하핫 하하핫..." 길상은 김훈장이 웃는 것을 처음 보는 것같이 생각되어 얼굴을 숙인다. '고집스런 늙은이 같으니라구.'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하하핫, 대사 반갑소." "허 참, 양반님네 체면치레가 있지. 비구에서 대사로 건너뛰시면 어쩌지요? 대사도 비구임엔 다를 바 없겠으 나." "비양일랑 그만 치시구 나일 대접해서 그쯤 해두시오. 이거 술 생각이 간절하구먼. 그래 길상이는 오래산만에 날 찾아오면서 응," 기분이 좋았던 참이어서 길상에게 말을 걸긴 했으나 손핼 본 생각이었던지, "하기야 전과 다르니 이리 찾아온 것만도 영광으로 알아야 하겠지이?" 비튼다. "생원님께선 술을 드시면 건강에 해롭고 스님께서는 아시다시피," 길상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다. "중들도 곡차라 하구선 잘 마시더군." "네. 술이면 오종계에 걸리겠습니다만 곡차랄 것 같으면, 하하핫... 그러나 소승 워낙이 대식이라 술 들어갈 구 멍이 없는 모양인지 입에 대질 않소." "거 참, 하긴 나도 요즘엔 영 술을 못하고 있소. 그래 얼마나 머물 생각이시오." "작정한 바는 없으나," "졸지간에 이리 만나니 알고 싶었던 것도 무엇이었나 잘 생각이나질 않소. 그러면은 어쩐다아? 아무튼 모처럼 기운이 나는구먼. 오래간만에 용정촌에 나가봐야겟소." 김훈장은 일어섰다. 허리는 여전히 꼿꼿했다. "오랫동안 못 만난 친구도 있고, 나 혜관을 모시고 그 양반들한테 가보고 싶어 그러는 게요. 젊은것들은 신다 가 버린 신발같이 생각들 하지만 고향도 선영도 버리고 이곳까지 올 때는 마음으로야, 그렇지 내 나라를 찾는 일이면 태산이라도 떠멜..." 하다가 목이 메는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에 먼지가 든 것처럼 슬쩍 눈물을 닦아낸다. "우리도 모르는 바 아니지. 늙은 사람들, 일하는데 발에 걸거치기만 한다는 걸." 수건을 찾아 얼굴을 문지른다. 주의를 걸치면서 "누가 그런 말을 하더구먼. 늙은이들한텐 저이들 하는 일을 토설안 하는 이유를 말이오. 단근질을 해도 해서는 안 될 얘긴 안 하겠지만 어리석하고 고지식하여 걸려든다는 게지. 하기는 손이 떨려 육혈포도 쏘지 못하는 늙 은네들, 안중근이 될 수도 없고 구령 하나 외치지도 못하니 국관인들, 그러나 우리네 애국충정마저 주착없고 빈 책상만 뚜디린다고 허물해야 쓰겠는가, 그 말 아니겠소?" "설마한들 누가 그런 말을 했겠소." "길상이한테 물어보슈. 그간의 사정 잘 알 터인데, 그리고 또 한가지 내 속을 뒤집는 것은," 옷고름을 여민 김장훈은 기침 한번 하고서 "길상이는 듣기가 거북하겠으나 최참판네 그 아이요. 이네 낭군 맞아서 어른이 됐으나 그래도 명색이 내가 사 부요. 평사리 있을 적에 천자문에서부터 내가 가르친 아이였소. 돌아가신 윤씨부인을 말하면은 치마 두른 게 한이었지. 분명하시고 담대하시고 과히 남자로 치면 두령감, 그것도 일급이오. 한데 서희 그 아인 조모님을 닮 지 않았소. 그게 큰 실망이오. 하여간에 나갑시다." 밖으로 나온 김훈장은 노부인에게 다녀오겠노라 정중히 인사하고 덩달아서 혜관도 인사하고 두 사람이 앞서나 가자 길상은 노부인에게 하숙비가 든 봉투 한 장을 건네준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잘 가오." 길상이 바삐 걸어나왔을 때 김훈장은 하던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제 일문 생각밖엔 도통 안 하는 성미요. 일문도 내 나라가 있은 뒤의 일문이요, 내 자신도 일문이 있은 후의 내 자신이라. 이렇게 말하면은 내가 편히 못 있는 데 대한 불평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게 아이오. 실상 내가 그 아이 덕분으로 먹고 자고, 그걸 거절 못하고서 주체스런 목숨을 부지하자니 심히 괴롭소이다." 김훈장은 징징거리며 늘어놓기 시작한다. "앙사부육 그것도 인간의 도리요.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그 인간지사를 버릴 수도 있는 일이오. 물론 만주 땅 연해주에온 사람들이 모두가 독립투사일 순 없소. 밀정놈도 많고 왜놈 밑에 경찰질하는 자들도 있고 친일 나 팔을 부는 부자놈들도 더러는 있소. 그러나 혜관도 들어 아시겠으나 이부사댁, 그 왜 이동진이라는 그 양반 말 씀이오. 그분이 이곳에 오신 지도 아마 십 년이 넘을 게요. 모든 것을 초개같이 버리고서 그 양반이 이곳에는 뭣하러 왔겠소. 더군다나 허릐 그 아이 부친과 이공은 죽마고우 아니오?" 서희가 군자금을 거절했다는 얘기가 나오기까지 사설이 길다. 길상은 말뚝처럼 뒤따라간다. 그는 김훈장 얘기 를 듣고 있지 않았다. 들었다손 치더라도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 '좀 있으면 장마철이 된다. 저기 저 좁은 강도 범람할 거야. 난 지금 실개천같이 조용하다. 바다같이 조용한 게 아니고 저 실개천같이... 내게도 언젠가는 장마철이 찾아올 거아. 범람할 거다. 음... 이선생께선 윤이병이 그 자가 연추에 와 있다고 하셨던가? 선생질을 한다구? 거긴 왜 갔을까? 송애는 또... 망할 놈의 계집애! 추풍이 라던 그 장사꾼은 과연 날 찾아올까? 쓸모있는 사람 같았다.' 길상의 생각은 뛴다. 바쁘게 뛴다. '관수가... 하하핫...' 간밤에 혜관한테 들은 얘기가 생각나서 길상은 웃을 뻔했다. 관수의 장인이 소 잡는 칼을 들고 혜관을 죽이겠 다고 소리지른 장면이 눈앞에 선하다. "생원님." 갑자기 부르며 길상은 걸음을 빨리하여 김훈장 곁으로 다가간다. "왜 그러는 게야." 삐닥하니 꼬부라진 심사가 그대로 돋쳐 있는 음성이다. 김훈장으로서는 이미 이루어진 혼사, 아니꼽고 기찰 일 이지만 왈가왈부할 시기는 지났고 다소는 화해하고 싶은 기분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레 수월찮은 일이어서 유독 군자름을 거절한 서의 험담의 사설이 길어지는 것 같고, 그 최서희가 너의 여편네 아니냐, 그러니 내 마 음이 쉽게 풀리겠느냐, 식으로 몰고 가는 모양인데 그 심리는 아이들의 쌈질 후의 그것과도 비슷하여 길상은 마음속으로 웃음이 났다. "관수를 아시지요?" "알구말구." 순간 김훈장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놈아아가 살긴 살았는가?" "고생은 했으나, 실팍한 일꾼이지요." 혜관이 대신 대답했다. "하긴 담력이 있고 해서... 되바라진 게 험이었으나 산에 있을 때는 사사건건 불평이었고 양반을 짤라낸 상투 만큼도," 김훈장 얼굴에는 불쾌한 빛이 역력하다. "원래 관수 그자는 양반을 좋아하질 않았으니까 생원님이라고 예외일 순 없었겠지요. 그래 그자가 상놈도 심 에 차질 않아서 백정네 사위로 들어갔지 뭡니까?" "백정네 사위? 허허, 저 일을 어쩌누. 자식들을 어디다 써먹으려구." "백정일 시키겠지요." "허 참, 기벽이구먼. 내 한땐 그놈을 죽이려 한 일이 있었소." "군령을 어겼구먼요." "군령을 어겼을 정도가 아니지. 명색이 의병장인 나를 두고," 김훈장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저 늙은이 또 토라졌구먼, 관수 얘길 잘못 꺼내었어.' 길상은 뒤늦게 김훈장의 상처를 건드린 것을 깨닫고 후회를 한다. 자긍심 하나 가지고 살아온 김훈장이 치명 적이던 관수의 언동을 잊었을 리 없다. '저놈의 늙은이, 떠메다가 평사리에 갖다놔야겄다. 누구 산에 유람온 줄 아나? 백미에 뉘 한 톨 섞이듯, 상놈 판에 양반이 무신 소용고.' 꼭이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그런 악담이 전혀 김훈장 귀에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노움! 이 고야안 노움! 감히, 아무리 양반이 흥챙이가 되얐기로 세상에 이런 법도 있냐?' 헝클어진 상투를 흔들며 고함치던 김훈장 음성이 귓가에 살아난다. '이놈아아야, 니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그놈의 독기 좀 뽑아부리야만 무슨 일을 해도 할 긴데, 참말로 니 그 래서는 못씬다아. 기운만 가지고 일하는 거 아니고 사람을 싸안을 온기라는 기이 있어야제. 못난 놈이 관에서 매맞고 집에 와서 걔집 치는 거라. 서름은 서름대로 사키고오 노움도 노움대로 사키고 합심해서... 이 골짜기꺼 지 온 우리들 사나아장부가 계집들맨치로 찌작짜작 쌈질이나 하겄는가.' 관수를 타이르던 윤보의 음성도 들려온다. '어이구우, 어매요 아배요. 이자아는 물밥도 그만이고 이 윤보 까마귀밥 되게 생깄소.' 팔배개를 하고 하늘에 돋아난 별을 바라보며 흥얼거리던 윤보의 음성도 들려온다. 김훈장도 윤보 생각을 하는 지 말이 없고 혜관은 지신지신 무거운 체중을 옮기며 사방 산천을 바라보며 얼굴은 무념무상이다. "혜관대사아." 김훈장이 불렀다. "네." "불가에선 자결이 죄가 되오?" "그렇소이다." "그러면은 고려장은 어떠하오?" "그것도 살생이 아니오이까?" "왜란 떄 서산대사 승병들은 환속하지 아니 했다 하시었소." "글쎄올습니다. 빈도가 높고 높은 부처님의 뜻을 터럭만큼은 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광대무변 억조창생 속에 서 터럭 하나 가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이까. 목탁 뚜드리는 것밖엔 능이 없소이다." "개병 바람이 불어와서 나라가 망하얐는데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이곳까지 건너온 사람들조차 온통 개명 바 람에 취하여서 제 나라의 전통을 헌신짝 버리듯, 그러고서도 나라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 그 말 내 묻고 싶소. 재 이 구차한 목숨 양잿물 한 사발이면 그만이겠으나 왜적 앞이라면 모를까 젊은놈들 인심이 각박하다 하여 어찌 소인배 같은 그 짓을 하렜소오? 차라리 어떤 때는 이놈들아 아! 늙은것 쓸모없이 되멌으면 고려장이나 시켜라, 하고 외치고 싶소. 내 산천, 윤보놈이 죽은 골짜기 그롯에서 송장이 되지 못한 것이 한이오. 산송장이 되어서 곡식이나 축내는 이 육신이 주체스럽소. 내 잘은 모르나 이곳은 개판이오. 혜관께서는 기댈 가지지 마 시오. 늙은것들은 육신이 말을 아니 들으니 탁상공론으로 비방하지말는 젊은것들은 어찌하여 탁상공론이냐 그 말씀이오. 탁상공론도 해괴망측, 갈래갈래 흩어지고 슬기 있고 분명하고 선비의 귀감인 이동진 같은 그 사람조 차 이제는 퇴물로 왈가왈부니, 이래가지고 무슨 이릉ㄹ 하겠소? 듣자니까 모금한 독립자금을 착복하였느니 싸 움보다 교육을 먼저 하여 장차를 내다보느니, 아라사 편이냐 청국 편이냐, 심지어는 선비놈들이 나랄 망해 먹 었으니 선비놈들 국으로 있으라. 자유다 평등이다! 상감이 무엇이냐! 서양에선 상감이란 없고 고깃간 주인도 제 잘나면 우두머리가 된다! 그야말로 해괴망측한 탁상공론이 아니고 뭐겠소? 보라! 청나라도 임금을 몰아내 고 농사꾼 아들이 대통령 되지 않았느냐. 허허허. 나라는 왜놈에게 뺏기고서 개판이오, 개판. 그래 아니할 말로 백정이 우두머리가 되어 백성에게 소 잡는 법이나 가르치겠다 그 말이오? 모름지기 우리 이조 오백년은 유교 를 바탕하여 삼강오륜,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치는 정사였었소. 탐관오리, 역신들로 하여 백성 이 도탄에 빠진 일을 아니 생각하는 것은 아니나 이렇게 타락한 지경은 아니었소. 그것도 나라 찾겠다고 망명 을 한 지도층 인물들이 말이오." 김훈장은 숨이 찬 듯 말을 끊고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곳이 다르면 인심도 변하는 법인가, 내 존경해 마지않든 이부사댁 그 양반조차 자제한테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부할 것을 당부하였다 하니 원수놈 나라에 보내는 일도 대경실색할 노릇이거늘, 그러면은 나라의 독립을 백 년 후 늦잡는다, 그런 요량 아리고 뭐겠소? 일각이 여삼춘데 이러다간 왜놈 되고 아라사놈 되고 청국놈 되고 뿔뿔이 흩어져서 조선은 그, 그렇소! 없어지기밖에 더하겠소?" 6장 집념은 그의 고독 기화는 눈시울을 좁힌다. 서편으로 기우는 햇살이 눈에 부셨던 것이다. 햇살뿐만 아니라 바람에 펄럭이는 서희 의 연회색 망토자락과 머리에 쓴 순백색 새틴 머플러도 눈부셨다. 서울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복장 때문이지 만 긴접을 허용치 않는 위엄과 성숙한 아름다움은 너무 현란하였다. 예날의 서희는 꽃같고 구슬같이 영공하였 는데 북변의 바람 탓일까, 낯선 남의 땅, 남의 산천이기 탓일까. "너는 이곳 물정을 몰라." "..." "어디 조선뿐이겠느냐? 일본은 멀지 않은 앞날 중국도 먹어치울게야 그런 힘 앞에 네가 믿는 신령이 밤새 군 량미를 쌓아주고 산을 무너뜨려 왜병을 몰살이라도 하게 한다면, 그야 모르지. 두 주먹과 심장 하나 가지고 목 이 터지게 외쳐보아. 단 한 명의 왜병도 죽어넘어지진 않어. 혜관이라는 중 비록 시주걸립 하는 빈승 이나 세 상사에 문리가 나 있어서 이곳 김훈장보담 시계가 넓어서 씨원하더구나." "하오나, 천한 계집이 뭘 알겠사옵니까만 장부라면 뜻을 잊고 보신만 하며 세월을 보낼 수 없는 일 아니오이 까?" "나는 내 힘으로 내 잃은 것을 찾을 게야. 그래 이상현 그 선비님께서 최서희라는 계집, 천하의 악종이란 말씀 아니 하시더냐?" "설마하니," 그러나 기화는 얼굴을 붉힌다. '최참판네 여인 아니냐? 서희는 오대 육대, 최참판네 여인들의 마지막 꽃, 야차 같은 계집이지.' 상현의 음성이 귀에 쟁쟁하다. "옹졸한 사내니까 그런 말 아니 했을 리 없지. 허나 눈썹 하나 까딱할 최서희겠느냐? 실속 한푼 없는 주제 이 마빡에 핏대 세우는 무리들한테 동조할 나 아니니라. 그랬을 양이면, 그리 심약한 최서희였었다면 벌써 옛날 최참판네 내당에서 목을 매었을걸?" 입매가 뱅글뱅글 돈다. 두 눈동자에 암담한 정열이 일렁인다. 기화는 한순간이나마 깊은 착각에 빠졌다. 최치 수를 대하고 있다는 착각이다. 미얀마재비 같은 최치수가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 가는 길을 막고 서 있는 환상이 겹친다. 그리고 착각과 환상이 썰물같이 물러간 자리에 다소곳하였던 길상이 앞에서의 서희 모습이 나 부끼는 머플러처럼 흔들리며 정지한다. 지금 엇비슷한 사이를 두고 걷고 있는 여자와 그 서희는 과연 동일 인 물일까. 상상할 수가 없다. 일찍이 다소곳하였던 서희를 상상해본 일이 없다. "아씨께선 잘못 생각하고 계셔요." "아무렵 어떠냐. 그러나 수모를 잊을 내가 아니니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사오나 상현서방님 진심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서방님은 아씨를 마음속으론 염 려하시," 차마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은 입밖에 낼 수가 없다. 서희는 기화의 저의를 알았으나 그러나 위로받지는 못한 다. 참담했었던 지난 여름이 가시처럼 핏속에 곤두서는 것을 참았을 뿐이다. 미친 듯 웃어젖히던 상현의 웃음 소리, 내 일전에 송장환이 그 위인더러 서희 하고 혼인하라 권한 일이 있거늘, 하하핫... 무서워서 싫다더군. 무 서워서 말이오! 서희는 어금니를 꽉 깨문다. 관골이 움직인다. 여름만 참담하였던가. 겨울도 참담했었다. 길상 과 동서하던 과부를 찾아갔었던 길목 앙상하게 여윈 여자의 얼굴, 어망이 뉘기야? 묻는 아이를 무섭게 노려보 던 여자 머리엔 솜가루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서희는 부르르 몸을떤다. 자신이 송두리째 무너지려는 찰나였었 다. 어쩌면 그때는 자유를 향해 달릴 수 있는 길목이었는지 모른다. 집념의 질곡에서 풀려날 순간이었는지 몰 느다. "봉순아." "예." "너의 창을 한번 듣고 싶구나." 기화는 어리둥절하다. 왜 갑자기 얘기 방향이 엉뚱해졌는가 싶어서다. "어릴 적에는 재간이었지만 이젠 천기온데 어찌 아씨 앞에서," 쓴웃음을 띠는데 서희의 화제는 다시 한 번 회전한다. "조준구가 토지를 절반이나 작살냈다 했었지?" "예." "남의 손에 넘어간 그 땅 되살 수는 없을까?" "아씨께서?" "내 벌써부터 공노인을 한번 보내리니 했었다." "월선아지매 삼촌이라든 노인 말씀이셔요?" "음." "노인이지만 빈틈없는 사람이야. 젊어서부터 사방을 떠다녀서 견문이 넓고 사세에도 밝아. 이곳에서 거간업도 하고 있으니까, 나구말론 시정잡배라드라만... 신실하여 마음놓고 일을 맡길 수 있었지." "월선아지매 삼촌이시니까." 그 대답은 없고 "당분간 그 땅을 모조리 거둬들이긴... 어렵겠지. 그러나 서서히 이제부터 시작하는 게야." 서희는 실성한 사람같이 별안간 웃어젖힌다. "나 그럴 줄 알았다. 호호홋... 호호홋호, 오 년이 지나갔고 앞으로 또 오 년, 십 년 안에 나는 그 땅을 모조리 거둬들일 테니 두고보아라. 조준구놈! 이미 절반 작살이 났다구? 그랬을 게야. 나는 그놈을 알거지로 만들 테 다! 아암, 그리고 말려죽이는 게야." 입매가 뱅글뱅글 돌 때 기화는 최치수로 착각하고 무서웠었는데 서희의 미친 듯한 웃음 소리는 가슴을 뭉클하 게 한다. 애기씨는 불쌍하다, 불행한 여인이다. 마음속으로 뇌는 기화 눈에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아름다움으 로 현란하였던 서희 모습은 한갓 허깨비로 보여진다. 자신을 내려다본다. 발등에서 흔들리는 남빛 비단치마, 하얀 버선발이 눈부시게 움직이는데 역시 자신도 허깨비인 것을 깨닫는다. 비로소 기화는 용정에 온 이후 처 음으로 서희가 자기에게 무척 가까운 사람인 것을 느낀다. 별당 연못가에 상복 입은 계집아이 둘이 서로 마주 잡고 앉았었던 그 시절처럼. 서희도 기화가 아니었었다면 미친 듯 허한 웃음을 웃었을 리가 없다. 서희는 그런 웃음을 웃은 적이 없었으니까. "절반이 작살났다지만 아주 남의 손으로 넘어간 것은 아니라 하더이다. 서울 가서 들은 얘깁니다만," 기하는 서희의 흩어지려는 마음을 부축하듯 침착하게 허두를 꺼내었다. "상현서방님이 주선을 해주셔서 저의 집에 자주 어시는 손님 몇분이 계시온데 그분들 주석에서 조준구의 얘기 를 많이 들었어요." "어째서 그 사람들이 조준구 얘길 한다더냐?" "예, 모두 이래저래 관계가 있는 눈치였었고 그리고 상현서방님께서 조준구의 정체를 소상히 아시니까 자연 얘기가, 그러니까 좋은 얘긴 아니 나오지요. 서울서의 그자 행적도 빈축을 사는 모양이구요. 이일 저일 손을 대느라 장안의 친일파 졸개들 명문의 놀량패 자제들과 밤낮 어울려 다니는 것도 좋게 볼 사람이 없습지요." "그래 무슨 얘길 들었느냐?" "얘기가 아주 복잡해서 소상하게 전해드리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금도 나오지 않는 광산을 속아서 샀다는 거였습니다. 그것 사기위해 장안의 갑부 황춘배라는 사람한테 땅문서 절반을 잡히어 빚을 냈다는 얘기구요. 그 황춘배 아드님이 황태수라고 역시 저의 집에 상현서방님과 함께 오십니다. 그러니 그 말은 빈말이 아닐 거예 요." "그러니까 팔아버린 게 아니라 그 말이냐?" "하지만 갚을 길이 없으니 팔린 거나 다름없고 광산으로 일확천금을 꿈꾼 조준구는 급한 나머지 시세 절반도 못 되게 땅을 잡혔다든가, 해서 엄청난 손해라 하더구먼요. 광산을 속아서 사는 데는 일본인도 끼여 있었다던 가, 쳐놓은 그물에 걸렸다 그런 말들도 하고," "음... 이상현이 그 사람도 팔자가 늘어졌나보구나." "예?" "기방 출입이 잦으니까 말이야." "그분들은 일본 유학 갈려고 일본말을 함께 배우신다 하더이다. 그러니 자연 젊은 혈기에, 또 저를 도와주시는 배려도 있을 것이옵니다." 서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눈이 어떤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는 것 같았다. 두 여인은 운홍사 절문을 들어섰다. 중이 없는 절이지만 절지기한테 법당 문을 열라 이르고 서희는 망토를 벗 는다. 소복의 모습이 그림자 같고 얼굴이 창백하다. 성난 눈으로 기화를 쳐다본다. 법당안은 썰렁했다. 흑탱 한 폭에 본존도 없는 법당은 지난 여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단청을 한 것하고 일진회의 이용구 소장이던 한 자 여섯 치 가량의 관음상이 한 구 더 늘은 것이다. 절지기 사나이가 놋쇠 촛대에 꽂힌 초에 불을 붙여준다. 서희 는 그 촛불에 향을 사르어 향로에 꽂는다. 합장하고 배례한 뒤 몇 발짝 물러서서 예배를 울린다. 기화도 함께 예배를 울린다. 그런 뒤 정좌한 서희는 경을 외기 시작했다. 평이한 음성으로 정구업진언을 왼 서희는 금강경 을 송하기 시작한다. "여시아문하사오니일시에불이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하가여-대비구중천이백오심인으로구하시다이시에세존이 식기에착의지발하기소입-사위대성하사걸식하실세," 조금 물러서서 손을 맞잡고 시화는 독경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드높으면서 쇳소리 없는 둥근 음성이 법당 안 을 가득 메운다. 촛불이 곧게 발돋움하듯 천장을 향해 타고 향에선 하늘은 몇 줄기 자연이 맴을 돌며 피어오 르고 있었다. "불고수보리하사되제보살-마하살이응여시-항복기심이니소유일체중생지류에약난생-약태생-약습생-약유생-약무 색-약유상-약무상-약비유상-비무상을아개영입무여열반하야," 일진의 바람, 바람 소리와 함께 법당 문풍지가 운다. 촛불이 좌우로 흔들리고 향연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낭랑 한 독경 소리, 관음상만이 요지부동이다. '나는 이 세상에 뭘 하러 나왔는가. 몸단장하고 술잔에 술을 따르기 위해 나왔나? 가무로 사내들 마음을 기쁘 게 하기 위해 나왔나. 어릴 적엔 좋은 옷 입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기쁠 줄 알았었지. 엄마가 무서운 눈으로 날 보든 것을, 때리든 엄마 마음도... 부평초 같은 서러움, 죽어서 망령 되면 난 어딜 갈 까?' 어릴 때 쌍계사 명부전에서 본 지옥변상의 탱화 생각이 난다. 어린 마음이 마구 떨리던 그때 일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서희의 손을 잡고 절마당에 뛰어가면서 '애기씨!' '왜 그래.' '이 세상에서 말입니다. 나쁜 짓 하믄 아까 본 그런 지옥에 떨어진다 안 캅니까? 우리도 지옥 가믄 우짤고요? 내사 마 무서바서 벌벌 떨었십니다.' '나는 안 무서. 염라대왕 불러다가 야단을 칠 테야. 수동이랑 돌이랑 복이 삼수 또오, 또오 육손이 김서방 길 상이 또오 개똥이, 모두 다아 데리고 가지, 몸둥이를 들려가지고 날 따라가는 거야.' '치이, 개똥인 덩신인데요?' '동네 사람 다 데리고 가지 뭐. 난 안 무서!' '그라믄 나는 우짤꼬?' 기화는 바닥에서 스며든 차가움에 몇 발짝 발을 떼어놓곤 한다. 차츰 기화는 부처님 존재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소복한 서희 뒷모습만 보인다. 금봉채에 진주를 박은 국화잠이 쪽머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유 연한 두 어깨, 물결처럼 부드럽게 잡힌 치마의 주름, 그의 아름다움은 그의 권위요 아집이요 숙명이다. 그의 아름다움과 위엄과 집념은 그의 고독이다. 일사불란 독경하고 있는 서희의 모습은 애처롭다. 책에 열중할 때는 책이 부처님일 것이요, 자수에 열중할 때는 바늘이 부처님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는 신도 인간도 존재치 않았는지 모른다. 절마당 쪽에서 얘깃소리가 들려온다. 부친 최치수의 피 때문일까. 묘향산 북변에 묻힌 어미의 배신 때문일까. 서희는 독경을 끝내고 일어섰다. 침착 해진 얼굴이다. 망토를 입고 머플러를 머리에 감고 법당 밖으로 나서며 서희는 절지기와 얘기를 하고 있는 최 기남의 처를 흘긋 쳐다본다. "어이구! 지금 막 부인께서 와 계시다는 말을 들었던 참입지요." 까무잡잡한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며 호들갑이다. "그간 안녕하섰어요?" 서희로서는 매우 상냥한 편이다. "네, 덕분에. 부인께서는 더욱더 아름다워지시고 뵐 적마다 참말 우리 조선 사람들의 자랑입니다요, 네." 투박스런 외투를 입었는데, 아첨이 과히 밉잖다. "자랑될 게 뭐 있겠소,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이?" 비꼬는데 서희는 교묘하게 자기 자신의 위치를 천명한다. 일본 영사관 서기 최기남의 처에게. "부인께서 그러신다면 우린 어쩌게요? 앞잡이니 주구니 매국노니 별의별 말을 다 한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릴 보호해주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일본 영사관밖에 더 있겠습니까?" 최기남의 처는 적이 만족해한다. 마치 백만 군병을 얻은 것처럼. "그럼 일 보십시오. 먼저 가보겠소."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데 "아, 아닙니다. 저도 일은 다 보았세요. 함께 가겠세요." 허둥지둥 따라붙는다. 절문을 나섰다. 해는 산마루에 아슬아슬 걸려 있었다. "절 일을 맡으셔서 수고가 많소." "수고랄 건 없으나 네, 시초 우리가 설동해서 시작한 일인 만큼 그냥 내버려두고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 아 니겠세요? 뭐니뭐니해도 절 일이라면 부인의 도움이 크지요." "시주 좀 한 걸 가지고 뭘 그러시오." 기화는 잠자코 걷는다. 세정에 빠른 기남의 처는 기화에게서 풍겨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는지 묵살한다. 하 기는 서희에게 일구월심 관심을 쏟다보니 안중에 기화가 없었는지 모른다. "하여간에 그 송씨댁 자부 때문에 지가 안 해도 될 고생을 하는 셈인데 하 참, 중이 없는 절 있으나마나 안 그렇습니까요, 부인." "그 스님은 아주 가셨소?" "갈 수밖에 별도리 없지요. 듣자니까 훈춘에 있다던가, 일을 저질러도 유분수 아니겠습니까? 하기는 중도 사람 이고 보면 상사병에 안 걸린다 장담할 수 없는 일이죠만, 그러니 왜중처럼 조선의 중들도 장가를 가야 할까봐 요." 서희는 쓴웃음을 띤다. "가숙이 있었다면 본연스님도 상사병에 걸렸겠습니까? 또 한 곳에 느긋이 발붙였을 거구요." "그도 그럴 법하군요." "꽤 신도들도 생기고 잘되나부다 싶었는데 글쎄, 우리 조선 사람들한텐 뭐니뭐니해도 불교가 젤 아니겠세요? 야소교다 천도교다 뭐다 하고 판을 치고 있는 이곳에 젤 형편없는 게 불교인데 그나마 중까지 도망쳐버렸으 니." 줄 한 끝을 잡고 힘껏 잡아당기듯 여자는 화제를 놓지 않는다. "절의 형편도 딱하게 되긴 됐지만 그보다 송씨네 집안이 더 딱하게 됐세요. 쑥밭이 됐지 뭡니까. 시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지금 당주는 변변치가 못하지요. 우리끼리니 하는 말입니다만 사람은 작은아들 편이 똑똑하지 않 아요?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악악거리지만요." 서희 얼굴에 아까 쓴웃음과는 다른 엷은 조소가 번진다. "큰아들은 위인이 인색하고 속도 좁구요, 재물을 아낀다고 모이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더군요. 사업이 연달아서 실패라지 뭡니까? 가정이 불화하여 그렇기도 하겠지만요." 하다가 최기남의 처는 사방을 둘러본다. 여전히 기화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건지. 이런 여자의 경우 저보다 아 름다운 사람에 대한 시기심은 자신의 신분과 비교해본 뒤 발로되고 그것은 선망이 아닌 모멸로 표현되는 모양 이다. 최기남의 처는 목소리를 줄였다. "글세 들리는 말로는 송씨댁 자부 몸에 매자국 가실 날이 없고, 부정을 했으면 갈라서버리는 게 상식 아니겠 세요? 그것도 아니고 하여간에 사내가 못나도 아주 형편없는 위인," "학교는 잘돼 나가잖소?" "그건 그런 만한 사정이 있다더군요. 죽은 송병문 씨가 큰아들 사람됨을 알고서 따로 작은아들 몫을 갈라놨다 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학교에다 밀어넣었다는 거지요. 학교라는 게 무슨 돈버는 일입니까요? 그러니 당장엔 기름이 돌아서 잘되는 것 같지만 한두 해 지나면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아니겠세요? 이래저래 집안은 쫄딱 망하게 돼 있세요. 송병문 씨 그 양반 생시에는 길에서 우릴 만나면 어떻게 한 줄 아세요? 마치 똥이라도 본 듯 침을 뱉았답니다. 용정에선 그 사람을 모두 우러러봤구요. 그렇지만 집안이 망할러면, 아 글쎄 그것만이라 면 또 모르겠는데 이것 헛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못난 큰아들 매질도 매질이고 아 글세 아편을 내외가 한 다잖세요?" "그건 그렇고 아주머닌 영사관의 일본 여자, 그러니까 영사 마누라를 아시오?"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쥐어박듯 서희는 딴전을 폈다. "안다면은," "친분이 있으신가 그 말이오." "아암요, 알다마다요. 바쁠 때는 가서 일도 도와주고 지가 일본말은 조금은 하니까요." 7장 그리웠던 사람들 통포슬 근처 문루구, 용이와 영팔이 사는 마을이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옴마! 이자 다 와가는갑다!" 킬킬거리며 주갑에 대한 얘기를 기화에게 들려주던 홍이 껑충 뛴다. "제발 좀 까불지 마라." 보따리를 이고 홍이 손을 잡고 가던 월선이 비틀거린다. 홍이는 설빔이던 옥색바지에 자줏빝 마고자를 입고 염낭을 차고 설날보다 더 기분이 좋은 것 같다. 들어서 일하던 청인 농부가 이들 일행을 먻빠진 듯 바라본다. 띄엄띄엄 산재해 있는 조선인 농가에서도 사람들이 놀란 눈들을 하고 내다본다. 특히 옥색 두루마기 자락과 비단 목도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작은 가죽가방을 든 기화의 멀어지는 뒷모습엔 안타깝고 아쉬워하는 눈들이 따라간다. 사람들의 경이에 찬 눈이 기하에게 쏠릴 때마다 홍이의 코는 아마 한 치쯤 높아지는 듯. "에헴! 우리 누님이란 말이다, 에헴!" 그 동안 기화를 보면 공연히 성이 난 시늉을 하다가 휭하니 달아나버리기도 했던 홍이가 함께 용정촌을 떠나 오면서부터 입속에 굴려보던 누님이 차츰 입밖으로 나오고 다음부턴 썩 기분이 명랑해졌다. 잘 웃고 잘 지껄 이고, 학교 얘기며 친구들 얘기며 밑천을 다 털어버린 것이다. "제발 좀 까불지 마라. 옴마 손을 놓고 혼자 뛰든지, 니가 그라믄 옴마는 보따리 이고 밭구덕에 나자빠질 기 다." "옴마는 와 그리 생각이 없노." "머라 카노?" "내가 손을 꼭 잡았는데 머한다꼬 나자빠질 기로." "그냥 걸음사?" "그라믄?" "껑충껑충 뛰지마는 다 생각하고 뛴단 말이다. 핵교에선 언제든지 말타기라 카믄 난 기수가 되거든." "그거는 머 니가 나이도 적고 몸도 작은께 그렇지." "그래도 이자는 날 업수이 안 본다! 큰아아들도 날 보믄 응, 꼬마대장 카고 또오, 또 날 풍뎅이라 카는데?" 홍이는 월선의 팔을 놓고 위이잉! 하고 입을 불면서 몇 바퀴 맴을 돈다. "아이구우, 어지럽다! 그만 못 두겄나?" "옴마만 야단이제. 왜놈 학교 새끼들 책보 뺏고 나선 날 보고 모두 풍뎅이라 안 카나? 날새고 그렇다고." 홍이는 그 내력을 엄마가 대신 설명해주었으면, 하고 기화에게 곁눈질하며 씩 웃는다. "풍뎅이가 날새기는 머가 날새노. 뺑뺑 돌기만 하지." "왜놈 학교 아아들 책보는 왜 뺏았는고?" 기화가 묻는다. "그러세, 저눔우 아아 땜에 큰 난리가 한번 날 뻔했다. 그래놓고 저리 잘했다고 기고만장 아니가." 월선이도 생각하니 우스웠던지 웃는다. "무슨 일이기에요?" "아아 그러세, 왜놈 학교 댕기는 조선 아이는 매국노다 하는 말을 어디서 들었던지 무담시 가는 아아 책보를 뺏아가지고 가에다가 던져부린 기라. 그래 쌈이 붙고, 어디 그 아아 부모가 가만 있을라 캐야제? 영사관에서 알기만 하믄 티끌이를 못 잡는 판에 얼시구나 말성을 부릴 기라 카더라. 그러니 핵교 선생님이랑 길상이가 나 서서 그 아아 아부지를 만내가지고 술까지 사줌시로 안 달랬겄나? 참말고 친일파였다믄 말성이 많았을 가구마 는." 기화 말에 홍이 코가 벌름해진다. "옴마는 아무것도 모른께, 왜놈우 새끼들이 머라 카는 줄 아나?" "머라 카더노." "시나징 고로세! 모두 모두 직이라아!" "그기이 무슨 말고?" "되놈들 직이라! 모두 모두 직이라아!" "조선 사람보고 안 그라는데 니가 와 그라제?" "우리 조선 사람들은 벌써 다 직이비맀인께, 그래서 우리도 여기 도망 안 왔나." 기화의 낯빛이 확 변한다. 월선도 잠자코 맞다. 도랑물이 햇빛에 희번덕이며 흐르고 오리들이 떼지어 놀고 있 다. 들판엔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잘 썩어서 포스라운 흙에선 따스한 김이라도 서리 오르는 듯. "누님." "와?" 기화는 벌겋게 상기된 홍이를 바라보며 미소한다. "지금 생각이 하나 나요." "무신 생각?" "그 와 떡장시 할매하고 개똥이라고," "생각이 나?" "야. 할매는 얼굴이 샛까맣고 구신같이 뵈든데, 개똥이는 침을 질질 흘리믄서 팽이를 참 잘 치고 할매는 올 적 마다 나한테 떡을 주었소." "홍이는 참 명념이 좋구나." 기화는 한숨을 쉰다. 월선이 "그때가 그런께 일곱 살이었소?" "음, 일곱 살이었제." "그때 윈 읍내 살았소. 참 생각한께로 고구매 많이 묵었다." 홍이는 또 껑충껑충 뛴다. 기화는 "그라믄 와 이 누부는 모르노?" "조맨치 생각이 나기는 하지마는," "하기는 김서방댁처럼 나는 자주 가지 않아서 그런갑다." "봉순이는 변하기도 많이 변했인께... 김서방댁도 죽었다 카이 참말로 무상하다. 얼매나 고생을 했일꼬." "말이 많고 시산이라 그렇지 사람은 착했지요." "욕심이라곤 없었지." "그런 사람이 죽을 때까지 염불하듯 조준구를 저주했소." "김서방 공덕이 있는데 알거지로 쫓아냈이니 와 안 그러겄노." "옴마 이자 다 왔다! 내 쫓아가서 아부지 데꼬오께!" 홍이는 월선의 손을 풀고 뛰어간다. 추위를 탄 것같이 월선의 얼굴이 오소소해지고, 자그맣게 된다. "봉순이 니를 보믄 홍이아배가 놀랠 기다." 홍이 모습이 어떤 삽짝 안으로 사라진다. 이윽고 성큼한 키의 용이가 삽짝 앞에 나와 이쪽을 바라본다. 아비를 따라나온 홍이는 어딘지 막 뛰어간다. 용이는 다가오지 않고 삽짝 앞에 장승처럼 서있었다. 용이 집에서 좀 떨 어진 그곳 삽짝으로 홍이 사라진다. "꼭 팔랑개비 같네." 기화 말에 "와 아니라. 홍이 들어간 삽짝이 판술네 집이다." "아아." 하는에 영팔이 허위적거리듯 뛰어나오고 영팔의 아낙 판술네가 허둥지둥 쫓아나온다. 기화는 헉! 하고 흐느낀 다. 여전히 용이는 장승처럼 삽짝 앞에 서 있었다. "보, 봉순아." 영팔의 얼굴은 창백하였고 "봉순아-으흐흣..." 판술네는 울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아지매, 그, 그만 울지 마소." 그러는 기화도 처음으로 격렬히 오열한다. "이기이 꿈가 생시가. 니가 우찌 여기로 으흐흣흣..."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봉순의 등을 미는 용이의 손은 열병 앓는 것처럼 뜨거웠다. 집안으로 들어섰다. 임이네가 맹숭한 얼굴인 채 마 른 빨래를 걷고 있었다. 살이 쪄서 통통한데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어 거무튀튀하다. "무신 바람이 불어서 봉순이가 여까지 왔는고?" "그 동안 임이어매 잘 있었십니까." "죽지 않았이니 잘 있었다. 할밖에." 임이네는 월선이를 힐끗 쳐다본다. "임도 보고 뽕도 따고 흥," 입속말로 중얼거리더니 "방에 들어가거라." 모두 방으로 들어가고 월선이만 보따릴 마루 끝에 내려놓고 어깨를 두드린다. 느적느적 빨랠 걷으며 임이네는 "초록은 동색이라 간도댁이 든든하겄네." 꼬집는다. "든든하나마나 그 아아가 여기 있을 기건데? 잠시 다니로 왔거마는,"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찾아오는 사램이 다 있고," "임이네는 안 보러 왔다 말가?" "흥, 나는 임이네고 거기는 홍이네다 그거구만? 이놈의 새끼는 오래간만에 에미 보러 와가지고 어디 갔노?" "아까 도술이하고 뛰어가더마." "온갖 것들이 날 괄시한께 내 속에서 빠진 새끼조차," 중얼거리며 돌아선 임이네는 마루 끝에 놓인 보따리에 눈이 간다. "그건 뭔고?" "참 이거 괴기하고 머 좀 사왔는데," "그럼 이리 주지. 어차피 저녁은 여기서 해야 할 건께." 임이네는 보따리째 옴싹 받아 안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아지매는 안 들어오요?" 기화가 안에서 말했다. "아지마씨, 들어오소." 영팔이도 거들었다. "괜찮소. 여기 좀 앉았다가," "아 임이네랑 모두 안 들어오구?" 판술네가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울어서 눈이 시뻘겋다. "내 걱정 말고 들어가지?" 부엌에 보따릴 갖다놓고 나와서 마당을 싹싹 쓸어붙이며 임이네가 말했다. 월선이는 울타리 너머 먼 하늘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판술네는 방문을 닫는다. "흥, 죽은 할애비가 살아온 것맨치 반갑고나." 싹싹 비질을 한다. 임이네의 언동은 옛날보다 한층 더 거칠다. 도무지 도리에 닿지 않는 앙탈인 것이다. 그는 꿀같이 달콤한 지난날의 그 돈의 맛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속주머니를 차고 있다. 불 속에 전 재산을 잃었다고는 하나 여기저기 남에게 빚 준 돈을 거뒸고, 살림에서 뜯어내고 주갑이 하숙비에서 뜯어내고 곡식을 몰래 내고 또 길쌈을 하여서 팔고 그러나 속주머니 속의 돈이 불어나는 것은 거북이 걸음보다 더디니 말이다. 십전짜리가 일원짜리 지폐가 되고 일원짜리 지폐가 십원짜리 지폐가 되고 하던 국밥집 시절의 호경기 는 꿈도 꾸어볼 수 없으니 말이다. 임이네는 베틀에 앉았다가도 화를 벌컥벌컥 내곤 한다. 도무지 가소로워 견 딜 수 없는 것이다. 하동서 고구마 장살 하며 한 품 두 푼 전대 속에 밀어넣을 때 임이네는 그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은 지전 은전 동전 손에 닿는 대로 품속에 넣던 월선옥 시절만이 눈앞에 오락가락 도무지 살 재미 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느는 것은 병적인 신경질이었고 월선이가 부모 죽인 원수만큼 미운 것이었다. 옛날같 이 임이네는 용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았다뿐인가, 마치 짐짝이라도 떠맡은 듯, 그러니까 비교 겠는데 월선옥이냐 남편이냐, 할 적에 남편의 존재는 썩돌 같은 것이며 월선옥은 황금덩이 같은 것, 월선은 황 금덩이를 가졌는데 나는 썩돌을 주웠다는 억울함, 도무지 도리에 닿지도 않는 억지요 욕심인 것이다. 그는 말 끝마다 되놈 나라에 끌어다놓고서도 어떤 년은 그늘에 앉아 돈이나 셈하는 도방 생활이고 어떤 년은 핻빛 받 으며 품팔이 촌구석 생할이냐, 이따금 용이와 대판 싸움이 벌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임이네의 상사병과 같은 돈에 대한 집념은 고쳐지질 않았고 용이는 용이대로 용정서의 그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놓여난 것만을 다행으 로 여기듯 대개는 임이네 신경질에 무감각인 편이었다. 그리고 월선을 위한 바람막이 같은 자신을 깨달을 적 에 용이는 일상의 추악한 단면을 외면할 만큼 인내심이 깊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고, 불쌍한 것.' 순수하게, 옛날과 같이 순수하게 용이는 월선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지난 겨울 벌목일을 끝내고 용이 는 월선에게 먼저 갔었다. 많지 않았지만 품삯의 일불 내놓았을 때 월선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그러나 다음 월선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머 내사 어려블 기이 없는데 집에 가지가소" "여기가 내 집인데?" 월선의 눈에 눈물이 글썽 돌았다. "걱정 말고 넣어 두어. 양식 팔 만큼은 따로 내놨으니까," "그, 그래도 지는, 돈 씰 데가 어디 있습니까." "씰 데가 없이믄 신주맨치로 뫼시놓으라모." 그러고는 오래간만에 용이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월선은 죄진 사람처럼 도둑질하는 것처럼 돈을 집어들고 손 아귀 속에 꼭 감추어버린다. 삼십원 남짓한 돈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 홍이 크면 장개 밑천 할라요." 비질하는 임이네 손 끝에 신경질이 더럭더럭 붙은 양을 멀거니 쳐다만 보고 앉았는데 홍이가 가서 알렸던지 임이가 왔다. "왔십니까? 오시노라 욕봤네요." 우선 월선에게 내키지 않는 인사를 한 임이 "어매, 봉순이가 왔다믄서요?" "왔단다. 와? 사돈팔촌이나 된다고 숨이 들심날심 쫓아왔나?" 빗자루를 울타리 곁에 홱 집어던진다. "어이구 참 어매도, 내 땅 까매기만 봐도 반갑다 카는데," "그래 반가운 까매기가 방에 있다. 들어가봐라. 내 속에서 빠진 자식도 세를 따르는 세상인께" 임이는 홀작홀작 걸어서 마루로 올라가더니 방문을 두르르 연다. 그러고는 끼르룩끼르룩 웃으며 "아이구 참 세월 빠르다. 봉순이가 어른이 다 되구! 참말 하이카라구나." 판술네는 들어오라고 권하고 영팔이와 용이는 외면을 한다. "머 안 들어가도 좋십니다. 비잡은 방에 지까지 들어갈 거 머 있겄십니까." "허허 안 들어오겄으믄 방문이나 닫지." 영팔이 입맛을 다시고 눈살을 찌푸린다. "야," 해놓고 "참말이제 봉순이 니는 용 됐고나. 거기 남은 사람들은 다 죽은 줄 알았더마는, 보니께 더 잘된 것 같구마는." "잘되기는 뭐가," "아, 차림만 봐도 우리네사 순 촌년이라도 그렇기 촌년일 수가 없는데 얼굴은 흑국놈맨치로 새까맣고 손은 갈 구리고," "들어오든지 나가든지," "야. 그러믄," 임이는 방문을 닫아주고 마루에 걸터앉은 월선의 뒷모습을, 그의 주변을 유심히 쳐다본다. 뭐 가져온 거나 없 는지 살피는 눈초리다. "아이구 내사 마, 머가 먼지 모리겄네. 간도댁 엄마요." "와." "봉순이는 부자한테 시집갔는가베요? 주산이를 감고 찬물에는 손도 안 넣는 팔자겉이 뵈니께." "…" "사램이 심사가 따로 있소? 내 팔자 생각한께 천양지간이고, 부모없는 봉순이는 팔자가 저리 쭉 늘어졌는데 나는 와 이렇겄소? 세상에 촌놈도 그런 촌놈은 없일 기고 살림이나 넉넉하단 말가… 군식구라고 아무데나 치 았인께. 참말로 생각해보믄 야속하요." "실데없는 소리." 부엌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임이는 사냥개처럼 그 소리에 민감하다. 신발을 끌고 부엌으로 급히 간다. "어매 멉니까?" "머기는 머라?" 임이네는 부엌바닥에 보따리를 펼쳐놨다가 얼른 덮어버리려 한다. "모녀간에 인심도, 누가 뺏아갈라 카요?" 하면서도 임이는 보따리 한곁을 재빨리 걷어젖힌다. 쇠고기 꾸러미, 간청어가 한 믓 과일에서 나물거리, 푸짐 하다. 마치 제사 장을 봐온 것 같다. 임이의 입이 헤벌어진다. "오래간만에 솟정 풀것소." "너거 집에 갈 기이 어디 있노? 국이나 끓이거든 한 사발 얻어묵고 가거라." "어매도 참 너무하요. 사위 생각도 좀 안 하고요?" "가지가믄 니 서방 입에 들어가겄나? 니 아가리 들어가기도 모자랄 긴데." "그러지 말고 쫌 주소." "돈 많은데 사묵으라모?" "누구 말을 하는지 모리겄네." 임이는 쇠고기 꾸러미를 풀어헤치려 한다. "야가 와 이라노?" 딸의 손을 밀어내며 임이네는 마지못해 쇠고기를 조금 썰어서 내밀고 짚으로 엮은 간청어 한 마리를 빼내준 다. "어매도 손이 작아서 부자 살기는 글렀다." "제발 니나 손이 커서 부자 살아라. 나 너거 집에 몇 달 있었다마는 내 묵은 양식은 내놨은께," "또 그 소리, 귀에 못 박히겄소. 어매는 내 시집갈 때 해준 기이 머 있어서 그러요." "키운 공만도 태산이다. 양식 짊어지고 니가 세상에 나왔더나?" "자식 안 키우는 부모도 있소?" "안 키우는 부모도 있지." 그 애미의 그 딸이다. 먹을 것을 놓고 으르렁거리는 꼴이란 짐승만도 못하다. 임이는 종이 한쪽을 쭉 찢어 고 기 한 토막과 청어 한 마리를 싸면서 "어매." "와." "봉순이 그 가시나 용 됐더마요." "부럽다 그 말가?" "안 부러울 사람 있겄소?" "니도 한분 그리 되보라모," "임우로 되는 일임사," "때는 늦었다마는," "야?" "갓똑똑이 말 마라." "무슨 소리요." "기생 되믄 호강하는 거사 정한 이치 아니가." "그, 그라믄 봉순이 기생이 됐다 그 말이오?" "보믄 몰라? 지가 무슨 수로 부자한테 시집을 가노." "아아, 그렇구나." 임이는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그러나 선망의 눈빛은 여전하다. "잔말 그만하고 물이나 한 동이 길어오니라. 저녁이나 해묵어야제." "우리 저녁은 누가 하고요." "그라믄 가거라?" "그라믄 구야아배 밥 한 그릇만 주소. 나 거들어주고 저녁은 얻어 묵고 갈라요." "누구 찬치 치냐?" "어매도 참 마당에 풀 나겄소." "니나 안 그렇게 해라." 임이는 물동이를 들고 나간다. 그새 임이네는 나뭇단 속에 보따리를 감춘다. "아니, 이 집이 왜 이리 시끄럽다냐?" 주갑의 목소리다. "손님 왔소." 임이 대꾸한다. 8장 낭패한 주갑이 홍이 학교 때문이라면서 하룻밤을 묵은 월선이 홍이를 데리고 황황히 돌아간 뒤 기화는 며칠을 더 영팔의 집 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는 서울로 돌아가야 하며 더 이상 지체할 이유도 사정도 없었는데 민적민적 날을 보내 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기화는 다만 막연했을 뿐이었고 기약없이 어디로 무슨 일로 떠났는지 알 수 없는 혜관 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구차스런 구실에 지나지 못하였다. 아침 일찍부터 영팔이는 소를 몰고 들에 나갔고 아이들은 산에 땔감이나 하러 갔는지, 판술네도 방금 빨래통 을 이고 시내에 나가 버린 집안은 텅 비어서 산중처럼 고요했다. 마당은 넓었지만 움막 같은 집에 세간이라곤 겨우 끓여먹을 수 있을 정도의 솥단지 그릇에 버들고리가 하나, 이불 그리고 일원 팔십전을 주고 사들였다는 베틀이 전부였다. 기화가 오면서부터 영팔이 아이들과 함께 자는 작은방엔 춘궁을 넘길 얼마간의 곡식이 있는 모양이었으나. "돼지하고 머가 다르겄노. 나을 거 하나 없제. 하기사 이 몇 해를 우떻기 살았을꼬 싶으니 꿈 겉기는 하다마는 너남지간에 고생은 다 마찬가지니께 없는 놈은 오나가나," 무료하게 앉아 있던 기화는 판술네 말을 생각하곤 한다. "겨울 동안 신판에 가서 번 돈은 고향 가믄 땅 살 기라고 벌벌 떰시로," "앗따! 별소리 다 하네, 배 안 곯고 사는 거만 해도, 봉순아, 판술네 말이야 노상 하는 염불인께 귀담아 듣지 마라. 니 있고 저븐 대로, 묵는 기이 험해서 그렇지." "아아니 그기이 무슨 말이오? 지가 그, 그라믄 봉순이 와 있다고 군담을 했다 그 말이오?" "군담은 군담이제." "아이구 참, 세상에 그런 모함이 어디 있소? 너무 반가바서 밤에 잠도 안 오는 사람보고, 봉순이 밥이 기러바 서 우리 찾아왔겄소? 옷이 기러바서 우리를 찾아왔겄소? 가다오다 이녁도 노망든 소리 잘하더라." 판술네는 영팔에게 눈을 흘겼다. 고생에 찌들어 나이보다 늙은 판술네의 그러는 모습엔 뜻밖에도 처녀 같은 수줍음이 남아 있다. "밤낮 하는 얘기가 그 얘기 아니가. 허허허어 참. 이쪽 형편이야 말하나마나. 그쪽 소식을 듣고 본께 맴이 반 분쯤은 풀리는 성싶구나. 쥐구멍에 볕들 날 있더라고 설마하니 우리라고 고향 돌아갈 날이 없겄나. 돼지겉이 살든 쇠겉이 살든 고향 돌아갈 희망만 있이믄." "그라믄 그렇기 말을 하믄 될 긴데 남우 속에도 없는 말을 우찌 그리 사스럽게 하는고." 판술네가 당황하여 남편을 윽박지르지 않더라도 그들의 마음은 기화가 잘 안다. 이제 가야겠다는 말이 나올 것을 두려워하는 그들 마음을. 어차피 떠날 사람이지만. 손때가 묻은 베틀을 무심히 쓸어보던 기화는 슬며시 베틀에 올라가서 앉아본다. 정답다. "지아비는 밭 갈고 지어미는 길쌈하고… 어머닌 나더러 그렇게 살기를 바랬다. 지아비는 밭 갈고 지어미는 길 쌈하고… 사람이 사는 이치가." 땅 밑을 흐르는 물줄기 처럼 지맥의 굼틀거림처럼 기화는 요동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는 누굴 위해 비단옷을 입었나. 내 가장 내 자식 등을 덮기 위한 길쌈이라면 추야장천 긴긴 밤도 길지 않 을 것을.' 세월이 꿈틀꿈틀 움직이며 지나간다. 사람들, 흘러가버린 사람들, 남아 있는 사람이 지나간다. 무리를 지어가는 얼굴들이 지나간다. 외롭게 홀로 가는 사내 구천의 얼굴도 지나간다. 그 들판 그 강물 얼음 녹은 강물 소리, 떼지어 앉은 보리밭의 까마귀들이 지나간다. 미친 또출네, 동학을 찬미하던 노랫소리, 곳간을 부수던 그 흉년 의 밤, 날마다 지게 송장이 나가던 마을길, 담뱃대를 든 김훈장이 지나가던 논둑길, 아침 이슬이 듬뿍 실렸던 풀잎들, 지하수처럼 지맥처럼 흐르고 꿈틀거리며 마음 밑바닥에서 요동하기 시작한다. 기화는 어느덧 자신이 지난 역사의 운행속을 흐르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피의 운행이요 남의 피인 동시에 자신의 피. 서희가 간도로 떠난 후 오 년 간은 망실의 폐쇠의 세월이었음에 틀림없다. 하동에서 진주로, 진주에서 다시 서울로 격 변한 생활의 오 년 간은 해 저문 날 낯선 길손이 휘적휘적 걸어가던 세월임이 분명하다. 과거에 걸어놓은 고 리가 오늘 이 손때 묻은 베틀 위에서 처음으로 연결되고, 과거를 운행하던 피는 비로소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어져 흐르고 망실된 오 년 간, 안개처럼 침침하며 까마득하며 떠나버린 밤배처럼 자취가 없다. 이상한 일이다. 한데 이 격렬함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이 안쓰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밑바닥에서부터 거슬러 오르는 삭막 한 바람 소리는 어디서 오는 것이며 아아 또 이 한은 어디서 연유되어 맺힌 것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기 화는 알지 못한다. 밀짚 더미만 수북이 쌓인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기화는 삽짝 밖에 나간다. "아니 제술아, 돼지밥 얻어오나?" 둘째 제술이 물지게 지듯 돼지 밥통을 지고 온다. "나는 산에 간 줄 알았지." "아니요." 돼지우리 앞에서 지게 걸빵을 풀며 제술은 유순한 음성으로 말했다. "돼지밥은 어디서 얻어 오지?" "노대인 집에서요." "그럼 청국 사람이냐?" "야. 우리 땅 임잡니다. 사람의 기척을 알고 꿀꿀대는 돼지우리를 들여다보며 기화는 또 묻는다. "그냥 주니?" "아니오. 새낄 치믄 반씩." "음, 그렇겠구나, 그 사람들은 돼질 안 치는 모양이지? 돼지밥을 남 주는 걸 보면." "아니오. 청국 사람들은 모두 놔먹이니께요." 우리 기둥을 짚은 기화의 하얀 손과 풍겨오는 향긋한 체취에 제술은 당황한다. 돼지우리 문을 열고 허둥지둥 돼지밥을 구유통에 붓는다. 열일곱 된 소년치고는 꽤 몸집이 완강한 편이다. "제술아." "예." "너 석이를 아나?" "압니다. 성하고 동갑이오." "그래? 난 너하고 동갑인 줄 알았다." "물지게품을 판다 카지요?" "음." "그때, 석이아부지 왜놈한테 잽히갈 때 석히가 짚신 벗고 따라가던 일… 나도 그때 봤이니께요." "제술이 너는 석이한테 비하면 복이 많다. 어릴 적에는 부모 없는 설움이 젤 크지. 넌 최참판댁 애기씨보다 복 이 많아."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아무리 그러까요." 제술은 실소하듯 웃고 "아니다. 그건 정말이야. 비단 금침보담 엄마의 팔이 더 따뜻하거든." 기화는 발길을 돌린다. 아침나절에 잠시 뿌린 빗물이 움푹 패인 길에 고여 있다. 파란 하늘이 빗물 속에 있고 구름도 빗물 속에 있고 바람이 불어와서 웅덩이의 빗물은 호수같이 흔들린다. "아니다. 그건 정말이야…" 기화는 걸으며 혼자 중얼거린다. 제술은 빈 통을 양손에 들다 말고 당목치마를 바람에 나부끼며 가는 기화의 뒷모습을 쳐다본다. '아무도 없나?' 용이 집 삽짝을 들어서며 기화는 집안을 둘러본다. 임이네가 반가워하지 않는다고 벌걸음을 끓을 수 없어서 기화는 하루 한 번씩은 찾아온다. 부엌에 사람의 기척이 있다. "아지매." 부르며 부엌을 들여다보던 기화는 기겁을 하며 물러선다. 오갈솥을 손에 든 채 주갑이 벌떡 일어섰다. "난, 난 임이어맨 줄 알구서," "아아, 조선서 온 손님이여라우?" 태현스럽게 말했으나 주갑의 목덜미는 벌개진다. 부엌바닥에 주질러앉아서 주갑은 정신없이 뭔가를 먹고 있었 던 것이다. "하 참, 못 배운 도둑질을 헌께로 동티가 날밖에 더 있겠으라우?" "무, 무슨." 하며 기화는 꽁무니를 빼듯 돌아서려는데 "손님 내 말 좀 들으시오. 기왕지사 망산은 당혔인께로 분통터지는 이야그 허야지. 혀서 살풀일 안 헌다면은 참말로 병날 것이여." 비쩍 마른 사내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말하는 꼴이 하도 우스워 기화는 저도 모르게 실소한다. "손님 들으시오. 이 오갈솥에 뮛이 들었는고 허니 개깃국도 아니고 쇄개기 볶은 거다 말시. 야들야들헌 살개기 만 듬북듬북 넣어서 환장허게 맛나게끔 볶은 거다, 그말 아니여라우? 그라면 이게 어디서 나왔다냐? 바로 저 거 나뭇단 속에서 나왔단 말시. 이 개기는 어디서 온 개기냐? 용정 있는 홍이어매가 사갖고 온 개기라. 손님 내 말 들으시오?" 하다가 주갑은 기침을 한다. "손님도 잡숫지 않었더라고? 첫날, 그런께 손님이 오시던 저녁상에 쇠털이 매욕한 개깃국, 야, 생각이 날 것이 요잉? 그러니께로 임이넨가 그게 천하 악독한 제집이다, 그 말이어라우. 오갈솥에 보굴보굴 끓여서 혼자 처먹 다가 이 나뭇단 속에 숨겨놓고 시시로 들며 나며 혼자 처먹는다 그건디, 아, 생각해보시쇼? 기왕지사, 손님이 나 내나 어차피 나그네 아니어라우. 그런께 그거는 그렇다 치겄어라우. 밥값을 내건 아니 내건. 욕심 없는 사 람이 그리 흔할 것이여? 허나 그 제집은, 이거 용서하시쇼. 그 제집은 제 가장한테도 나그네 대접을 한다 그거 여. 세상에 칼벼락을 맞아도 그 죄가 사해지겄어라우? 기왕에 망신은 당혔고, 아 사내장부가 부석에 들어와서 이게 무신 꼴이겄소잉? 허나아 내 오늘은 요눔의 개기를 몽땅 묵어부리고 오갈솥도 탕탕 부시부릴라 작정혔이 야." 기화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임이네가 그런 여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새롭게만 들리 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런 짓을 하는 임이네 성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갑의 경우는 여느 날과는 달랐다. 그 역시 임이네 성정이 조금치도 새로울 것이 없었건만 흥분했다. 마무리 화가 나도 느릿느릿 약올려주며 골탕을 먹이는 것이 주갑의 장기였는데, 하기는 그 장기가 임이네게만은 통하질 않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 때문에 흥분할 주갑은 아니었다. 기화에게 들킨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선녀같이 보이는 기화 에게 들짐승 같은 꼴을 보인 것이 창피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황한 나머지 여자에게 여자 욕을 하는 불출이 자신을 느낀 때문이다. 창피하고 못났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함정에 빠진 듯 자신을 다스릴 수 없는 것에 화가 났고 화를 내다보니 또 당황하고 한마디로 갈팡질팡 이었다 '헷 참, 언제는 주갑이 잘났더랑가? 언제나 요모양 요꼴인디 새삼스럽기, 각시 얼굴이 강한 선녀 겉다고 지기 랄! 내 제집 될 것이여?' 별안간 주갑은 부엌바닥에 퍼질러앉더니 오갈솥을 들여다본다. 멍청히 서 있는 기화에겐 아랑곳없이 손가락으 로 남은 고기를 집어먹는다. "손님" "....." "손님도 괴기 한점 잡수려오?" "아, 아니에요." " 여거 오래 있으면 솟정 날 것이오." 씩 웃는다. 그 웃음에 따라 기화도 피시시 웃는다. 별안간 주갑의 얼굴이 환해진다. "용이형님 참말로 복 없는 사내란께." 밑도끝도없이 한마디 불쑥 뇌다가 오갈솥을 들고 일어선다. "이자 반 년은 견디겠소잉." 부엌을 나온 주갑은 " 어이 배 터직겠네. 호랭이 잡아라 혀도 잡겄는디, 허허허허 하하핫!" 한바탕 웃어젖히더니 주갑은 정말 오갈솥을 깨버릴 심산인지 그것을 든 책 횡하니 나가버린다. 이번에는 기화 가 견디지 못하고 배를 잡으며 웃는다. " 호호호호홋… 아이 우스워라. 무슨 사람이 호호홋…" 하다가 기회는 임이네가 올 것 같아 가슴이 뛴다. 겁이 나서라기보다 어떤 꼴을 할까 하는 호기심인데 차마 바로 보기 민망스런 광경이 두려워 기화는 급한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저만큼 개천가를, 주갑이 건들건들 몸 을 흔들며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개천가에서 오갈솥을 박살을 냈는지 손에 든 것은 없었다. '흥이 말이 썩 노랠 잘한다던가?' 계집아이처럼 낄길 웃는다. '강가에 가서 어디 병창이나 한번 해볼까이? 호호홋??…' 기화는 냇가로 내려간다. "심심해서 나왔고나." 빨래를 하다 돌아보며 판술네가 말했다. " 아침에 비 한줄기 하더니 날시 참 좋소." 나무에선 움이 트는가, 보기엔 나목인데 보리밭은 푸르다. "와 아니라, 시절 빠르지. 엊그제만 해도 냇물이 손에 시리더라마는, 봄이 올라 카이 이리 바쁜데 우짜믄 겨울 은 그리 길었는고 모르겄네." 판술네는 냇물에 빨래를 휘휘 저으며 헹군다. 기화는 돌팍 위에 걸터앉는다. "아닌게아니라 봄이 막 쫓아오는 것 같소. 처음 왔을 때는 바람이 어찌나 차던지 하동의 겨울 날씨 같았고 언 제 풀리나 싶더니… 옛날 어릴 적 생각엔 오랑캐 사는 곳엔 사시사철 얼음이 얼고 모진 바람이 불고 사철 짐 승가죽을 둘러쓰고 그렇게들 사는 줄만 알았소 집 도 없이 굴이나 토막에서 사는 줄만 알았는데 사람 사는 곳 은 다 마찬가진 것을," "봄 가을이 짧지. 봄이다 싶으면 이내 여름이고 가을인가 싶으믄 금시 눈이 쏟아진께. 그래서 너남지간에 남정 네들은 긴 게울 한동안 집 떠나서 벌이를 하는데 또 그렇게들 안 하믄 살 수도 없고, 대신 식구들은 강물이 풀릴 때까지 근심이라. 강이 얼믄은 언제 마적단이 들어닥칠지 한시도 맘을 못 놓네라. 너남지간에 이런 곳에 와서 땅 파묵는데 가진 기어 머 있겄노? 내일이라도 떠난다믄 지고 이고 더 남을 기이 없는 살림 아니겄나? 단지 무서븐 거는, 아 그놈의 마적놈들은 늙고 젊고가 없는, 계집이라 카믄 말귀에 싣고 내빼니께 참말로 사람 살 곳이 아니네라. 날씨만 해도 그렇지. 세상에 우리 고향 걸은 데가 어디 또 있을 기라고." "한겨울이면 얼마나 춥소?" " 말도 못한다." "운신 못할 만큼? 밖에 나가면 얼어죽을 만큼 추울까?" "얼어죽는 일도 흔히 있겄지. 하지마는 사람겉이 영악한 거는 없는갑더라. 처음에사 많이 울었지. 새끼들… 불 쌍하고 애비에미 잘못 만내 내 새끼들 적이는갑다 싶고…머할라꼬 남 안 하는 의병인가 먼가 해가지고 고향도 집도 잃고 선영도 버리고 이리 됐노 하믄서 원망도 많이 했다마는 새까맣게 탄 판술아배 얼굴 보믄 또 가심이 아프고." "애기씨는 조금도 도와주시지 않았소?" " 안 도와주셨다고 말할 수는 없일 기구마. 거기 있었임 하기사 우리 판술아배도 석이아 배 꼴 안 났겄나? 그 러이 도망온 것도 그분 덕택이고 용정 있일 적엔 짚신을 삼아 팔았지만 그것 가지고 다섯 식구 입치례가 됐겄 나? 다 음으로 양으로 그분 덕을 보았지. 처음에사 용정서 장사 해보라고… 밑천을 얼마간 주시겄다는 말이 있었지마는 판술아배겉이 용한 성미에 장사는 무신, 여기 들어올 적에도 홍이아배가 한사코 말맀는데, 송충이 솔잎을 묵어야제 갈잎 묵으믄 죽는다 캄시로, 뿌리쳤지. 아니나다를까 홍이아배도 끝장에는 장살 때리치우고 작년서부터 우리 옆에 오기는 왔제. 그래도 땅이 걸어서 농사는 짓기 수울한 편이고 씨 뿌릴 때만 하나님이 변덕 안 부리믄, 그라고 또 그 샛바람만 곱기 지나가믄 가을걷이는 실팍하지." "언제가는 돌아가야지요." "하모 돌아가야 하고말고. 마음 겉애서는 지금이라도 그만 훨훨 날아서 가고 접다. 바가지를 들고 빌어묵더라 도 가고 접다." 흐르는 시냇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돌팍에 부딪쳐서 영롱하게 구르는 물보라를 바라보며 기화는 "아지매." 하고 새삼스럽게 불러본다. "와." "나는 아지매하고는 다르요." "다르다니?" "나는 낯선 땅에서 이곳저곳 헤매다가 죽고 싶소. 고향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소." "니사 거기서 왔인께 그렇지." "아니오. 그래서가 아닙니다. 고향, 누가 날 반기줄 기라고…여기 올 때 고향 가는 기분이었소, 친정 가는 새댁 같은 마음이었소," 판술네는 기화의 눈치를 살핀다. "마땅한 사람이 있이믄." "있이믄?" "팔잘 고치야지. 니만한 인물에." "노류장의 계집이 팔잘 고치면 어떻게 고치겄소?" "그렇게 맘 묵으믄 못씬다." 판술네는 빨래를 짠다. "팔잘 고친다 해도 남의 첩이겄지요. 첨이라도 좋으니 미칠 만큼 좋은 사내가 나타난다믄, 그것도 내 처지에 오래 가겠소?" "올리보지 말고 내리다보믄 사램이사 얼마든지 안 있겄나. 남의 첩이라니? 내사 마, 용정의 홍이어매만 보믄 불쌍해서, 참말로 서글픈 세상을 산다아. 사람이 사는 낙이란 한 가장 밑에서 자식 낳고, 고생이 되더라도 그 렇기 살아야지. 좋고 궂고가 어디 있노? 우리도 어디 정분나서 만낸 부부가? 부모가 짝지어주니께 얼굴도 모 리고 시집와서… 자식 낳고 살믄은 절로 제 가숙 소중한 거 알게 되고 사람 사는 기이 별거 아니네라. 잘산다 고 밥 두 그릇 묵겄나?" "저기 가는 기이 임이 아니오?" 판술네가 고객를 들어 본다. 밭둑길을 임이가 가고 있었다. 임이는 검정치마에 자줏빛 저고리, 나들이 차림으로 부지런히 걸어간다. "어딜 가는 걸까." "노대인 집에 가는 게지" " 노대인이라니? 아지매 땅 임자 말이오?" "니가 우찌 그걸 아노?" "아까 제술이가 돼지밥 얻어오길래 물어봤지요." "청국 사람이다. 이 근동에서는 젤 부잔데 저 빌어묵을 계집이 또 꼬릴 치고 가는고나. 사나이가 덩신이니께 망정이지." " 왜요?" "사램이 막말을 하믄 안 되는 줄 안다마는, 핏줄은 못 속이는 거라. 저것도 화냥기가 있어서 큰일이다. 일 거 들어준다고 가그는 간다마는 일은 무신 일, 왔다갔다하다가 노대인을 낚는 거지. 그래 돈푼이난 얻어어고, 우 리 판술아배는 그걸 못 봐서… 그래도 홍이아배는 속이 깊어서 아예 내색을 안 하지마는 에미라는 건 또 어떻 건데? 조세질을 해서 그리 안하도록 해얄 긴데 나하고 무신 상관 이냐, 개가죽을 썼는지 도리어 우리가 남사 스러바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기화는 팔짱을 끼고 구부정하니 걸어가는 임이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우리 판술아배가 밉다고 눈에 까시처럼 해도 임이 저아는 비우가 좋아서, 나 겉으믄 발 걸음도 안 할 긴데 아지매, 아제요, 하고 조석으로 찾아와서 어쩌고저쩌고 사설을 한바탕 까고 가기가 일쑤지. 어딘지 저 아이는 골이 빈 기다. 화냥기에다가 게을러서, 지 에미야 성정이 그래 그렇지 야물기는 예사로 야물건데? 인물도 에미 만 못하고 촌구석에서 농사꾼 제집이 분이 다 머꼬? 시꺼머둥둥한 얼굴에 헛덕헛덕 분칠하고 나오는 꼴이라 니, 상판대기뿐이지 모가지를 보믄 까매기가 할아배야 할 기거마는." "아지매." "와." "노대인이란 청국 사람 얼마나 부자요?" "그러시, 누가 속살림이야 알까마는 이 근동의 땅이 다 그 사람거라 한께 여간 부재가 아닌갑더라." "이자매? 나 겉으면 좀 비싸게 팔리겄지요?" "야아가 무신 소릴 하노?" "임이는 푼돈이지만 난 목돈 받겠지요?" "미쳤나?" "유부녀가 그러는데 난 기생 아니오?" "와 그런 말을 하제?" "아지매가 부모뻘이면 노대인인가… 하하핫… 내가 얻으면 사위뻘 될 거 아니오? 사위 덕 좀 봅시다." "꿈에도 그런 소릴랑 마라!" "그보다 이자매, 나 가고 싶지가 않소" "가고 싶지 않으믄 안 가믄 될 거 아니가." "그라고 또 길상이… 하하핫… 그 사람이 용정 사니까. 여자 맘은 아무래도 표독스런가부지요?" 판술네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9장 발병 "아부지 나 죽소잉! 어이구 배야! 어이구우우-" 아이를 트는 아낙처럼 누군가가 계속하여 소리를 질렀다. 분명 사내의 음성이긴 했지만. "어이구우-속절없이 죽네요오! 어이구 배야! 어국-" '아니 저거는 주갑이 소리 아니가? 어디서 또 진탕 마싰구나. 빌어묵을 자석. 헌데 내 팔은 와 이리 천근겉이 무겁노?' "아부지이! 갑이놈 정녕 죽을 것인개비여? 고향산천도 못 보고 늙으신 아, 아부지 얼굴도 못 보고오 씨종자 하 나 없이 객사 죽음이라, 어이구 몽다리귀신 되야 물밥 한술 못 먹고 불쌍한 혼백이 처처를 헤맬 것인디 분하 고 억울하야 참말 눈을 못 감겠으라우! 어이구 배야! 어구구!" '지랄하네. 또 지랄해.' 용이는 눈을 떴다. 꿈은 아니었다. 육중한 무게가 오른팔을 짓누르고 있었다. 임이네의 무거운 머리통이었다. 신음은 옆방에서 들려오고, "제에기!" 용이는 화가 나서 왼팔로 임이네를 떠밀어낸다. '미븐 강아지 웃주둥에 똥 싼다 카더마는,' 임이네는 입맛을 다시며 잠꼬대하듯 중얼중얼거린다. "어이구, 어이구 배야!" 용이 벌떡 일어나면서 "보래!" 임이네를 흔들어 깨운다. "와요!" 잠은 임이네가 먼저 깨어 있었던 눈치다. "썩은 나무둥지맨치로 떠덩구칠 때는 언제고 깨우기는 와 깨우요." 판자 덧문에 가려 달빛도 막힌 방안은 굴간처럼 칠흑이다. 용이는 바짓말을 치키며 "주서방이 벵난 모양이다." "..." "어서 일어나라고," "이 밤중에 벵이 난들 우짤 기요? 나는 의원 아닌께." 돌아눕는다. "소가지도," 하다 말고 주갑이 신음 소리에 용이는 허둥지둥 방문을 떼민다. 달빛이 소나기처럼 방안에 들친다. 서늘한 야 기가 밀려들어온다. "주갑이! 와 그라제?" "어이구 배야! 성님 나 죽소! 창자가 막 터지는 것 같소. 어이구, 이게 무슨 날벼락이랑가?" "곽란이까?" 방안으로 들어간 용이는 등잔에 불을 켜 대고서 방문을 닫는다. "아니, 이땀 좀 보게?" 산발한 머리칼이 엉겨붙은 주갑의 얼굴은 땀에 흠신 젖어 있었다. 새우처럼 모로 꾸부리 고 누운 주갑은 연신 허위적거린다. "이럴 기이 아니라 좀 주물러보자." "주물러서 나을 벵 아닌 성싶소. 어이구 배야! 서, 성님 이러크름 아픈디 어디 살겄으라우? 어이구 배야!" "아프다고 관대로 죽나? 배나 한분 주물러보자." "아, 아니여라우," 용이 손을 뿌리치고 주갑이는 데굴제굴 구르며 벽에 가서 꽝 부딪는다. "허 참, 그라믄 객구나 한분 물리보까?" "객구나 손구나 무슨 소용 있을랍디여? 그보다도 성님." "..." "나 죽거들랑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미친 소리 마라!" "머리털 한 줌 짤라서 향여 늙으신 울 마부지 만내시면은 날 본 듯이 으흐흐흣흣... 어이구우 으흐흣..." "허허어, 와 이리 청승이고. 아프다고 저저이 다 죽었으믄 세상에 사람 씨나 남었겄나. 그만 시끄럽다. 가서 내 영팔이를 깨워 올 긴께 좀 참아봐라." 용이는 급히 방을 나섰다. 신발을 찾아 신으며 "봐라! 임아!" "..." "좀 일어나서 토장물 맨들고, 사램이 아파서 죽는다 산다 하는데 처자빠져서," 그러나 임이네는 못 들은 척 '내 그럴 줄 알았지. 게걸든 거맨치로 뒤져서 그걸 다 처묵었이니 소배지가 아닌 다음에야, 물독다, 둘독해.' 이불자락을 끌어당기며 두 다리를 쭉 뻗는다. '꼴에 꼴방망이 차고 남해 노량 간다 카더마는 제집 천신도 못하는 주제에 머 우쩌고 우때? 성님, 성님은 다 좋은데 단이 없어야. 합당허지 않으면은 부모 자식도 딱 의절을 하는 법인디 그까짓 제집, 나 겉으면은 벌시 옛날 고릿적에, 아 그까짓 되놈한테나 주어버맀일 것이요잉, 급살해 뒤질놈의 인사, 그눔의 인사가 뒤져도 큰 일이제? 송장 치다꺼리는 누가 할 기며?, 임이네는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팔자 사나운 년은 간데쪽쪽, 빌어묵을, 한 나이나 젊었이믄 청국놈 첩이나 돼서 호강이나 하제. 이 세상에 내 일신 하나뿐 자식이고 소나아고 다 소용없다. 무신 소용 있노.' 용이는 등을 꾸부리고 영팔이네를 향해 급히 걷고 있었다. "환장하게도 밝다! 어이구우!" 끝없이 펼처진 것 같은 들판은 한낮처럼 밝았다. 멀리 멀리 저승 골짜기까지 이어지는가 싶게. "그자가 지 말대로 죽지나 않을란가?" 영팔이 집 큰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영팔이!" 큰방 문이 열렸다. "이 밤중에 웬일입니까?" 판술네가 내다보며 말했다. 기화, 임이도 얼굴을 내민다. 그들은 잠들지 않았고 밤 깊은 줄 모르게 얘기를 하 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서방이 다 죽게 생깄소. 영팔이가 객구나 한분 물리봤이믄 싶어서." "이 밤중에 큰일났구나. 보소 ! 판술아배요!" 판술네가 작은방으로 건너가서 남정네를 깨우는데 "어이구 참, 노대인댁에 의원이 한 사람 와 있다 카든데," 임이가 높은 목정으로 말했다. 용이는 임이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니는 와 여기 와 있노. 밤 가는 줄 모르나?" 나무란다. "우짭니까 구야아배기 막 때리직일라 카는데, 피신 안 왔십니까. 멧돼지맨크로 한분 성이 나믄 물불을 안 가린 깨 집에 있다가는 맞아죽십니다." "니 행사가 좋음사? 찬물 마시고 속 채리야 할 기다." "누가 살고 저버 사는 죽 압니까 짝도 거이방해야," 뾰루퉁한다. "주서방이 아프다구?" 잠이 덜 깨어 눈을 비비며 영팔이 나온다. "가서 객구 좀 물리야겄다." 기화는 부엌바닥에 앉아 쇠고기볶음을 먹던 주갑이 생각이 나서 웃음이 치민다. 영팔이 임이를 보고 "아니 임이는 우얀 일고?" "피신왔십니다." "흠! 허서방도 사나아 구실 하는구마. 시작한 김에 다리몽댕이 딱 뿌질러 앉히잖고," 침을 퉤! 뱉는다. "어서 가자." 용이 재촛한다. "아이 참 내 정신 좀 봐. 노대인 집에 의원이 와 있다. 카든데 그라믄 거기 가보고 와야겄소." 그러나 두 사내는 임이 말은 들은 척하지 않는다. 삽짝을 나서면서 영팔이 "한 가랑이 두 다리 끼고 가볼 일이다, 제에기이." "아제는 내 말이라 카믄 자다가도 장대 즐고 나온다 카이." 하면서도영팔이 말마따나 한 가랑이 두 다리 끼는 심정인지 임이는 사람이 아픈데 어쩔 거냐, 중얼거리며 밤 길을 나갔다. "언제부터 저리 인정이 많아졌는고? 노대인 집만 아니었단 봐라, 숨이 넘어간다 캐도 갈기든가." 판술네 말이었다. "그래도 지 엄마보담은 독하진 않지요?" 기화 말에 "그건 그렇다. 칠칠치 않고 눈치코치 없고 제집치고는 파철이지마는 에미보다는 악기가 적은 편이지. 그나저나 주서방이 아파서 큰일이구마." "체했는가 부지요." 기화는 오갈솥을 안고 손가락으로 고깃덩이를 집어먹던 주갑이 꼴이 생각키어 웃음이 나올 것 같다. "밤이데 제집들이, 우우 몰리갈 수도 없고... 우리가 간다고 벵이 낫일 것도 아니겄고 큰일이구마." "임이엄마하고는 새가 안 좋은가보든데," "앙숙이제. 하기야 임이네하고 잘 지낼 사람이 어디 있겄노. 건들건들하고 실없는 소릴 해싸아서 그렇지 주서 방 그, 사람 좋네라." "예, 좋은 사람 같았어요." 기화는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봉순이 니 와 그리 웃어쌌노?" "내가 웃어요?" 용이 집에서는 한 바가지 토장물에 식은밥 한 덩이를 말아서 임이네가 들고 나왔고 마당에 끌려나온 마당에 끌려나온 주갑은 배를 움켜쥔 채 어이구 배야 어이구 배야! 영팔이는 식칼을 들고 서 있었다. "머하노? 어서 안 해오고," 용이 임이네를 노려보았다. "어디 몸뚱이 두 개요?" "악다구니는 무신 악다구니고 ! 사램이 아파서 죽겄는데." "내가 벵나라 캤소! 날 보고 와 이라요." "멋이!" "여 있소! 해갖고 왔는데 공연히 트집이네." 임이네는 토장물 든 바가지를 쑥 내민다. "아따 쌈은 나중에 하고," 영팔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고 주갑은 동헌 뜨락에 끌려나온 중죄인같이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연신 앓는 소리였다. 이때 삽짝으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그의 뒤를 임이가 졸졸 따라들어왔다. "의원이 왔인께 객구는 나중에 물리이소!" 임이 언동은 전리품을 들고 오는 병사처럼 의기양양했다. "머라꼬?" 용이와 영팔이 동시에 말했고 주갑이 소리를 질렀다. "어이구! 의원님! 날 살려주시쇼!" "야아가? 니는 우짠 일고? 의원은 또 우찌 된 거며?" 임이네가 딸을 빤히 쳐다본다. "노대인 집에서, 나중에 얘기 다 하께요." 의원이 말했다. "예!" 영팔이와 용이 주갑의 겨드랑이를 잡고 두 다리를 떠메듯 급히 방안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용이는 등잔의 심지를 돋구었다. 의원은 신음을 참으며 땀을 흘리고 있는 주갑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두 사내는 장석같이 선 채 주갑을 내려다본다. 벽면에 비친 상투머리 그림자가 증잔불 따라 가늘게 흔들린다. 이윽고 의원은 염낭 속 에서 침을 꺼내었다. 그리고 주갑의 손을 끌어당겨 엄지손가락 사이에 침을 꽂았다. 장골 두 사람은 숨을 마시 듯 의원의 동작을 내려 다보았고 주갑은 눈알을 빙글빙글 돌렸다. 트림을 한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난다. "어, 어이구우 쬐깬 숨이 트이누마요잉." 의원은 다시 다른 쪽의 혈에다 침을 꽂았다. 주갑의 배에선 맹렬한 소리가 났다. 배에서뿐만 아니라 아래서도 방귀 소리가 연달아 났다. "어이구매 이자 살겄어라우!" "채했던가배요?" 용이 물었다. 의원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사관을 틀 것도 없구먼." 하며 침을 거두었다. "고맙구마이라우. 이 은혜를 워쩔 것이여?" 주갑은 벌떡일어나 앉으며 의원에게 절을 했다. "온 사람도," 용이는 어이없는 듯 웃었고 영팔이는 화난 음성으로 "넘은 십년감수 시켜놓고 지 혼자 멀쩡하네." "아, 아니랑께요. 내가 엄살부린 거 아니란 말시. 편작 겉은 선상님을 만냈인께로 씻은 돗," 비로소 용이와 영팔은 당황해 하며 의원에게 인사를 한다. "고맙십니다. 선상님." 의원은 빙그레 웃을 뿐이다. 머리는 깎았고 턱수염도 깎았는데 돋아나기 시작한 수염과 머리털은 반백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크고 꼬리가 긴 눈은 아주 유순해 보인다. "여기 오신 지 오래되셨소?" 묻는다. "오래됐다 할 수는 없고 조선서 온 지는 사오 년 되는가배요." 영팔가 대답한다. "음, 그러면...나는 여기서 자고 갔으면 갔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소?" "괜찮고말고요. 잠자리가 험해서, 노대인댁이," 용이 당황한다. 이부자리가 없다. "아무데나 자야 할 길손인데 청인보담이야 우리 동포 집이 마음은 편하겠소." "너무 누추해서," "나를 의원 대접 마시오. 한방을 좀 배우긴 했으나 장사꾼이오. 병자 옆에서 잠시 눈 붙였다가 떠날 테니까." "이거 황송무지하야 참말 워쩐디여잉?" 잠시 눈 붙였다가 떠날 거라 말한 의원은 잠잘 채비를 하지 않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영팔이와 용이 역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경청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헌디 떠나신다면 워디로 떠나실랑가요?" "해삼위로 가는 길이오." "아이구매 그런디 이러크름 생명의 은인 아니여라우? 성씨에 이름 함자라도 알아야 쓰질 않겄소잉?" "성은 강가요. 돌팔이의원 이름은 아나마나." "하, 지는 성이 주가구마요. 그런께로 주갑이고 여기 기신 성님은 이씨 성에 이름은 용이, 저기 저 성님은 김 씨 성에다 영팔이여라우. 아따! 경상도내기 뚝뚝하다는 걸 모를까봐서 그러고 있소?" "무신 소릴 하노?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 카든 주둥이가, 어이구우 잘도 나불거린다." 모두 웃는다. "참말이여. 이런 경우를 두고 천행이라 하는 건디, 언제 그랬드냐, 날아보라면 날 것이여. 하하핫..." 말이 많아도 구수하고 능청스러웠는데 오늘 밤 주갑이는 적잖게 수다스럽다. 고통에서 벗어나 기뻐서도 그랬 겠지만 낮에 기화에게 초라한 꼴을 보였을 때부터 주갑의 신경은 안정하질 못했던 것이다. 병의 원인을 알고 있는 만큼, 그것 때문에도 마음이 온전할 수 없었다. "체증이니 망정이지 창자라도 터졌더라면 별수없었지요. 양지바른 곳에 뭊힐 수밖에," "어이구 선상님 말심 낮추시쇼. 보니께 우리보담 한 돌금은 연세가 위실 텐디." "소년 대접이 어렵다오 그보다 사는 형편은 어떠시오?" "고생이지요." 영팔이 말했다. "경상도에서 어찌 여까지 오시었소? 혹 철도 공사." "아니여라우." 주갑이 손을 내저었다. "이 성님들은 의병질하다 쨏겨왔었지라우." "아아 그러시오?" "저 사람 말 믿지 마시이소. 허풍이 심해서, 저거들이 무신, 그런인야나 되겄십니까?" "허어, 사람은 첫눈에 면 안단 말씨. 걱정 안 혀도 좋겄구마. 철도 공사라면 이 주갑이 경우랑께요. 본시부텀 동학인디, 저이 부친을 말심드리잘 것 겉으면은 민란 때마다 앞장섰었지라우. 이 못난 자석이 속아서 왜놈 노 가다 일을 하지 않았겄소! 천상 이리 되고 본께로 오랑캐 땅의 거름밖엔 될 게 없을 것이여." "그렇게 말한다면 다 마찬가지 아니겠소? 고생을 낙으로 삼고 살아야지. 당신네들 보기에는 염낭에 침이나 넣 어 다닌다고 고생을 덜하려니,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은 다 마찬가지요. 이리 다니다가 밤이슬 맞으며 돌베개 하고 잠자는 것두 한두 번이 아니며 차마 말로는 다못할 고초가 있소이다. 또 나만 그렇다는 것도 아니오. 많 은 사람들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 마음가짐 아니고서는 하룬들 어디 부지하겠소? 오로지 나라 찾을 일심으로, 그게 또 보람 아니겠소? 우린 배부른 돼지는 될 수 없으니 말이오." "그, 그러니께 선상님께서는 독립운동," "독립운동이랄 것도 없고 내 마음이 그렇다는 얘기요." "암요, 암으니라우. 배부른 돼지는 될 수 없을 것이요, 사람인디." "나도 본시는 농군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조실부모하고 서럽게 자랐소. 지금은 소싯적에 배운 한방으로 호구지 책을 삼고는 있으나 한때, 기천 원 자본금으로 장사도 했소만 내 품 에 넣을 돈도 아니요, 그럴 시절도 아니잖 소? 기천 원 아니라 기십만 원 기백만원인들 이 시국에 내 돈이거니 믿어서도 안 되고 양전옥답을 자손에게 물린다는 생각 자체가 욕스러운 것 아니겠소? 나라를 빼앗긴 못난 백성이 가산 지키기에 급급, 그게 얼마나 가겠느냐 그 말이오. 다만 자손들을 가르칠 일이오. 피가 나게 가르쳐 깨우쳐야 할 것이오, 내 나라를 잊지 않 고 내 나라 찾을 길을. 장신들의 고생스러움이야 내 물으나마나 훤히 알고 있소이다. 제발 낙심 마시고 가난과 고통을 낙으로 삼으시오. 당신들은 순결합니다. 이렇게 다녀보면 입으로만 큰소리치면서 동가식 서가숙 하는, 일없는 무리들이 여간 많지 않소." "지가 바루 동가식 서가숙 하고 있구만이라우." 주갑이 풀죽은 말을 했다. 의원은 빙긋이 웃는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마찬가지, 동가식 서가숙이오. 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그야 이 몸도 남의 공밥은 안 먹은께로, 허기사 공밥도 쬐깬은 골통에 먹물이 들어야 흐흐흣... 안 그렇지 라?" "얼씨구? 주갑이 신나누마." 장안에 웃음 소리가 터진다. 혈에다 침을 꽂아 기가 통하여 체증을 고치듯 사람들의 마음도 그 기가 통했음인 지 한결 편안하고 비록 누추한 방이나마, 네 사람이 무릎을 맞댈 만큼 그득히 들어찬 방이나마 느긋한 여우가 감돈다. "참말로 이런 밤에 술이라도 있었이면은 얼매나 좋을까잉?"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는 얘기는 작년 이맘때쯤 했는지 모르겄네?" 시치미를 딱 떼고 하는 용이 말에 한바탕 웃음 소리다. "미련한 가람 객담 내놓을 것 겉으면은 참말이제 감당할 재간 없단게로. 그보담 선상님 술상은 없지만도 좋은 말심 더 듣고 저븐디," "내가 여기 오기론 작년, 재작년인데 당신들은 사오 년 나보다 선배구먼. 뿐이겠소? 왜놈들과 싸운 경력을 보 나, 허허어헛..." "저이들이야 머, 눈먼 말이 요령 소리 듣고 따라간 기지요." "바로 그거요. 요령 소리 듣고 따라간다는 그것, 따라가는 백성이 많았으면 우릴 내 나라를 빼앗기진 않았을 게요. 오소리 감투가 둘이라는 말이 있지만 어중간히 눈 밝은 자들이 큰일이라. 결국은 순결한 마음 순박한 열 정만이 저어 수만 리 장천을 날으는 철새처럼 목적한 곳에 당도할 수 있는 게요. 그리고 수만 리 장천같이 왜 놈이 망하여 내 땅에서 물러가는 날도 멀고 험난하니 우리는 우리 당대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싸 우다 죽으면 우리의 아들 딸들이 독립 정신을 이어주어야 하고 양전옥답 물릴 어리석은 생각 말고 피땀나게 자손들을 가르쳐야 하는 게요. 내가 이런 얘길 하는 것은 밤이 길어서도 아니요 잠이 안 와서도 아니오. 이 얘 기가 즉 내게는 일이란 말씀이오. 당신네들이 내 얘기를 듣고 자식을 가르치고 또 남에게도 그러기를 권하다 면 나는 조그마한 씨알을 하나 뿌린 것이 될 것이오. 내가 만주 벌판 이곳 저곳 방황하며 침이나 찔러주고 약 처방이나 지어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호구지책을 위한 그것만이라곤 할 수 없고 한푼이라도 교욱 사업에 보태 쓰자 그 심정인 만큼," 하는데 강의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헌디 지헌티는 그놈의 가르쳐볼 아들딸이란 게 없들 않겄어여? 철천지 한이구만이라우." 주갑은 영팔이를 바라보며 맥없이 말했다. "아들딸이란 반드시 내 아들딸만이겠소? 조선의 아들딸, 일꾼이면 모두 내 아들 내 딸이거니 생각해야, 가르친 다는 것도 옛날같이 사서삼경을 외게 하는 그 따위는 아니지. 우선은 우리가 뒤진 신학문을 배우게 하는 거지 만 그보다 근본을 가르쳐야, 근본이 뭔고 하니 애국애족하는 마음, 내 나라 내 겨레를 잊어서는 아니 되고 배 반해서는 아니 되고 한길 한마음 빼앗긴 조국을 찾아야 한다, 그 근본을 심어주는 것이 가르치는 것 아니겠소. 그것은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도 누구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오. 낫 놓고 기격자 모르는 사람도 가 르칠 수 있는 일이오. 고되다 하지 말고 서럽다 하지 말고 정직하게 부지런히 내가 조선 사람인 겆을 잊지 말 고, 그게 다 교육이오 당신네 같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아지기 위해서는 내 자신 발바닥이 닳아빠지는 한이 있어도 만주 땅 상상 골골... 훌륭한 사람들도 많소. 왜놈이 먹어들어온다고 실망 마시오. 밀정놈들이 우 글거린다고 겁낼 것 없고. 한겨울에 모포 한 장어깨에 둘러메고 내 겨레를 위해 뛰는 사람이 많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시오." 밤 가는 줄 모르게 강의원은 나직한 음성으로 얘기를 했다. 그간 국내에서의 의병 종태에 관한 것으로부터 혁 명이 일어난 청국의 사정도 알기 쉬운 말로 얘기해주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용이는 용정촌의 최서희가 이런 사람에게 군자금을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연추에 있는 이동진의 청도 거절한 서희고 보면. "참말이여라우. 조선의 닭 돼지가 될지언정 어째 왜놈이 될까보냐, 그러크름 말심혔다니, 암이라우. 종자가 있 는디 골백분 죽어도오 왜논 될 것이라? 그 의병장은 참말로 지당한 말씸 혔소. 조선 사람은 성씨도 안 바꾸는 디," "하지마는 이곳에서는 청국 사람으로 넘어간 사램이 적잖다 카든데." 영팔이 강의원을 힐끔 살펴본다. 강의원은 가늘은 한숨을 내쉬었고 말은 없었다. "그거야 머 땅 때문이고 몇몇 사램이 그렇기 해주었으니 조선 사람이 땅을 가질 수 있는거 아니겄나." 1909년 청일간에 맺어진 소위 간도협약이라는 것에 의해 표면상으론 조선인의 토지소유권이 인정된 것이었으 나 여전히 청국 관헌에서는 귀화하지 않는 조선인에게는 토지소유권을 인정치 않았느므로 결국 귀화치 않는 조선인 토지 소유자는 지방 주인이라 칭하는 귀화 조선인의 명의를 빌려 지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을 두 고 한 용이 말이었다. "말하잘 것 같으면 정조를 팔아서 동포를 도와준다 그것인디, 어디 내실이 그렇단가? 횡폐가 여간 아니란 말 들었지야. 고런 놈 중에 친일파나 없었이면 쓰겄는디 아 용정촌에선 고놈의 앞잽이가 조선인 탈을 쓰고 내밀 히 왜놈의 돈으로 땅을 산다 말시. 청국놈의 핍박이 심허다 혀도 그러나 대국 아니더라고? 나도 지금은 청인 헌티 품팔일 허고 있지마는, 더럽다는 생각도 허지마는 그 따위 섬놈 들보담이사 나을 것이여. 가만히 본께로 청국 사람들은 우리 조선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이여. 성님 생각혀보더라고? 그 양가죽을 쓴 왜놈우 새끼들이 까매기 깐치 집 채듯이 남의 나라를 뺏아 들앉아서, 아 금매 성님 생각혀 보더라고? 그런 놈의 새끼들이 처국 허고 시비만 헌달 것 겉으면 뭐이 워쩌고 워째야? 간도 에 있는 조선 사람을 보호헌다? 참말로 웃일 일 아니 랑가? 그건 그렇다 허고 따지고 보면은 억울한 일 한두 가질 것이여? 여그는 본시 우리 조상의 땅 아녀? 선 상님 그렇지라우? 여그를, 칠칠헌 숲을 쳐헤치고 농토로 맨든 것도 조선 사람 아니여라우? 헌디 청인이 와서 내놔라! 허니 복통 칠 일이여. 그런 사연을 생각헌달 것 겉으면은 피눈물날 일이여. 허나 과서지사를 생각혀서 왜놈의 영사관으로 모일 것 이여? 싸가지없는 놈들! 옛말에 도둑을 피한께로 강도를 만낸다안 헙디여. 왜놈은 조선 삶 보호한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허고 지각 없는 조선놈은 얼씨구 허고 늑대 품을 어미 젖줄 찾듯이 몰리 가니 청국놈눈에 쌍심지 안 켜질 것이여?" 강의원은 다소 놀란 눈으로 주갑을 쳐다보고 있었다. 신이 난 주갑은 "내가 이래뵈야도 성님들맨크로 착하지는 안 혀요. 안 댕기본 데가 없인께로 보고 듣고 무식혀도 알 만치는 안단 말시. 일진회놈들 땀씨 속아도 보고오 왜놈우 새끼 거둥도 많이 봤이야! 결국으는 고놈의 새끼들 대국도 들어묵을 판이디 당허는 사람끼리 손잡아야혀. 말도 안 되는 소리여. 아 섬놈의 새끼, 언감생심이제? 대국을 먹어야? 선상님 말심대로 가르쳐야 허는디 대국 사람들허고 손잡아야 허는 것도 가르쳐야 헐 것이여. 그렇지 라?" 닭이 홰를 친다. 달은 엄치 기운 모양이다. "주씨 말이 옳소, 옳아요.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면 백만대국이 무섭잖을 것인데..." 날이 회뿌옇게 밝아왔을 때 강의원은 떠나야겠다면서 나섰다. 세 장정은 무척 아쉬워하는 얼굴로 문밖에까지 따라나왔는데 "들어가보시오. 내 지나는 길이 있으면 또 들르리다." "예. 꼭 그렇기 해주시이소." 주갑이만은 아무말이 없었다. 강의원이 눈으로 인사하며 돌아서려는데 주갑이 힐쭉 웃는다. 몇 발짝 걸어가다 가 주갑의 웃음이 마음에 걸렸던지 강의원은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주갑은 힐쭉 웃었다. 웃고 나서 주먹으로 코언저리를 쓱쓱 문지르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웃긴 왜 웃어? 묘한 사람이구먼.' 강의원은 어이구! 배야! 엄살만은 아니겠으나 간밤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미수를 흘린다. '아무튼 재미있는 친구야. 그러면은, 짐을 찾아서 떠나보는 거다.' 크고 꼬리가 긴 눈을 깜박거린다. 새벽녘에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인데 눈동자는 씻긴 듯 맑고 빛났다. 성큼성 큼, 젊은이 못잖게 힘찬 걸음걸이다. 초로에 다다른 사람답지 않다. 노대인과 안면이 있어 유하게 된 강의원은 조그마한 손가방을 그 집에서 찾아들었다. 비대한 노대인은 조반을 먹고 가라고 원했으나 강의원은 그것을 정 중히 사양하고 대신 소작하는 조선인들 특히 용이 일행을 보살펴 줄 적극적인 임이를 떠올렸던 모양이다. 강의원이 들판길을 나서서 얼마나 걸었을까. 동편 산 언저리가 벌겋게 물드는데 길편에 한 그루 늘어진 버드 나무 아래 한 사내가 앉아 있다가 가까이 가는 강의원을 보자 벅떡 일어섰다. "아니! 이 사람아." "선상님, 여그서 선상님을 기다렸지라우." "왜?" 어휘 풀이 셈찬 아제비(31:3): [방언]수염 난 아저씨. 홍감(36:19): [방언] 황감. 황송하고 감격스러움. 하마(43:1): [방언] 이제 곧. 용마름(56:6): 초가의 용마루나 담 위에 덮는 어엉. 생때같은(56:12): 몸이 튼튼하여 통 병이 없는. 거물장(73:24): [방언] 거멀장. 두 물건 사이가 벌어지지 못하게 잇대는 쉿조각. 오실앞(75:18): [방언] 오지랖. 겉옷의 앞자락. 해장작겉이(76:25): [방언] 갓 해놓은 장작처럼. 산몰랭이 비렁땅(78:21): [방언] 산모퉁이의 버려진 땅. 거산(81:13): 큰 재산. 도붓길(82:26): 행상 길. 시영딸(83:7): [방언] 수양딸. 가쟁이(83:29): 가지. 황(101:21): [방언] 환칠. 되는 대로 얼룩덜룩하게 칠함. 소댕(69:13): 솥뚜껑. 하마나하마나(128:16): [방언] 이제나 이제나. 갓심(128:29): [방언] 갓. 이제 막. 애인한(133:17): 애처러운. 실겁겄노(133:15): [방언] 슬기롭다. 작지(133:17): [방언] 작대기. 부석강생이(133:20): [방언] 부엌강아지. 악문(134:10): 배신. 고래(134:29): 방고래. 방 구들장 밑으로 낸 고랑. 숭님(135:18): [방언]숭늉. 해구는(136:11): [방언] 날뛰는. 소매통(142:8): [방언] 오줌통. 고만(145:17): [방언] 교만. 경사(147:29): 서울말씨. 헛수 바다(149:27): [방언] 배가 금방 꺼져버린다는 의미. 덤짜(161:13): 툼과 노래가 시원치 않은 하급 기생. 노리(162:12): 늙은이. 노년. 가을(163:21): 가을걷이. 동구리고(170:10): [방언] 깎다. 생이(172:5): [방언] 상여. 여가집(172:24): 여염집. 신총(173:1): 짚신이나 미투리의 총. 매구(17:24): [방언] 꽹과리. 귀주기(178:5): [방언] 기저귀. 종장(179:12): 경학에 밝고 글을 잘하는 사람. 망둥산(186:8): 수북히, 산같이 담은 밥을 비유. 아금바리(193:11): [방언] 아금밭게. 알뜰하게. 천신(210:10): 철따라 새로 나는 물건을 먼저 신위에 올림. 사도(221:17): 조선 때, 유수를 두었던 네 곳. 곧 개성, 솽주, 수원, 강화. 곰뱅이(226:17): [방언] 두 다리. 씨압씨(226:29): [방언] 시아버지. 거산(231:2):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흩어짐. 우둔다(236:26): [방언] 떠받든다. 생이틀(237:22): [방언] 상여. '무섭다'는 의미로 쓰였음. 돔바갔이니(243:4): 훔쳐갔으니. 안다니 나홀장 간다(263:18): [방언] 아는게 많은 척하지만. 오일장도 모르고 서지도 않는 나홀장에 가는 것을 비꼰 말. 홍낭자(269:22): 베짱이. 차담상(280:27): 다담상. 집난이(290:12): 시집간 딸. 멱당가지(296:30): [방언] 목덜미. 리리양실(299:21): 서양에서 들어온 실의 일종. 땡삐(301:28): [방언] 땅벌. 절도섬(338:25): '절도'를 잘못 쓴 말. 뭍으로 나올 수 없는 섬. 두생이(340:22): [방언] 늙은이. 동곳 빼는구먼(346:7): 항복하다. 주의(364:13): 두루마기. 앙사부육(365:12): 어버이를 섬기고 처작를 보살핌. 홍챙이(367:14):[방언] 형편없이 무너진 상태. 시산이(383:22): [방언] 주책바가지. 기러바서(391:26): [방언] 아쉬워서. 오갈솥(395:1): 오가리솥. 아가리가 안으로 꼬부라진 옹달솥. 조세질(400:24): [방언] 충고. 떠덩구칠(402:25): [방언] 떠다밀다. 사관(408:13): 침을 놓는 손과 발의 네 뼈마디. '사관트다'는 '사관에 침을 놓다'의 뜻. 인야(410:13): [방언] 인재. 인품. 뇌심(417:17): 마음으로 괴로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