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토지 2부3권(6) 저자명: 박경리 출판사명: 솔출판사 토지 2부 3권 차례 제 4편 10장 부자 11장 폐가처럼 12장 밤길에서 13장 정 14장 소나기 사랑 15장 면대 16장 강원도 인삼 17장 혜관의 견문 18장 영웅의 아들 제 5편 세월을 넘고 1장 황막하다는 것 2장 사춘기 3장 가난한 사람들 4장 예감 5장 하얼빈행 6장 최종보고 7장 벌목장의 오두막 8장 사랑 9장 아귀지옥 10장 찾아온 사람 11장 닮은 얼굴의 기억 12장 추적 13장 김두수 14장 늙은 호랑이와 젊은 이리 15장 화살같이 부록 어휘 풀이 제 4편 용정촌과 서울 10장 부자 무성한 구레나룻이 희끗희끗했다. 골격은 완강했으며 손은 크고 힘줄이 솟은 손등은 거칠었다. 오십에서 육십을 바라보는 늙은이는 소년 하나를 데리고 용정촌 장터를 향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노인은 칡넝쿨로 엮은 크다만 망태를 한쪽 어깨에 걸머졌고 소년은 바랑을 진 상좌처럼 보따리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소년과 노인은 다같이 수피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부지. "와" "여기는 조선사램 참 많소." "많을밖에. 여기가 무인지경일 적에 우리 조선사람들이 먼저 들어와서 땅을 파고 살았인께." 말을 할 때 무성한 수염에 덮인 노인의 입술은 다소 실룩거리는 것 같았다." "아부지. 저거는 총포 아니오?" "음." 노인은 이미 그곳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청인의 총포상이었다. 점두에는 죽은 꿩이 몇 마리 매달려 있었고 박제한 새랑 작은 짐승도 진열되어 있었다. 꽤 큰 점포였으며 그러니까 수렵에 관한 일체의 물건을 매매하는 모양이었다." "아부지" "..." "한분 들어가서 구겡하입시다." "아서라. 구겡은 무신, 사지도 않을 김서," 노인은 침을 꿀꺽삼키며 총포상을 외면한다." "그래도 구겡 한분 하는 거사 머," "어 가자. 그런 일로 여기 안 왔인께," "어깨로 바람을 끊듯 노인은 걸음을 빨리한다." "내사 마 아부지맨치로 사냥이나 함서 살고 저븐데," "머라꼬?" "와 못 그라라 카는지 모르겄소" "사람은 한 곳에다가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기라. 정처가 없는 놈만큼 팔자 사나운 놈도 없인께. 몇 분이나 얘기를 해야 알아들을기고오!" 화를 낸다. "공부하믄 머할 기요? 나라도 없어서 쨏기와가지고," "나라가 없일수록 눈이 밝아야, 그래야 살제." "그까짓 공부 쬐끔 했다고 나라도 없임서 임금이 될 깁니까?" "이눔아아가 머라 카노!"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쳐다본다. 노인의 축 늘어졌던 눈꺼풀이 별안간 말려올라가기라도 하였는가, 눈알이 커다랗게 불거져나왔다." "니 지금 머라 캤제?"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묻는다." "나라도 없임서 임금이 돌 깁니까, 그랬소!" "어이서 그런 말을 들었노?" "..." "그런 말을 와 하노?" "임금이 젤 높으다 칸께요." 소년은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보고 노인의 얼굴은 새파래진다. "두메야." "야?" "그라믄 니는 젤 높은 사람이 되고접다 그 말가?" "그렇기 안 될 긴게 사냥꾼 되겄다 안 킵니까." 노인은 잠자코 걸음을 옮긴다. 총포상에서 몇 집 안가 이번에는 전포가 나타났다. 검정 바탕에 금박 글씨의 간판이 나붇었고 처마끝에 장대를 걸어좋고 그 장대에는 첨이 매달려 있었다. 소년 두메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걸 한 번 보고 나서 구레나룻이 무성한 아비의 얼굴을 힐끔 살핀다. 아버지도 옛날엔 화살로 짐승을 사냥했느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다. '지 에미를 닮았이까? 지 에미를...' 노인 눈에 눈물이 어린다. '그렇지마는 아 그렇지마는 반은 내 피가 섞있는데 자석이 영악해도 지 에미 같기야 할라고. 하기는 나도 내 평생이 살생인데 안 되지, 안 된다. 우리 두메 손은 피에 젖으문 안 된다. 글 배와서 선상질이나 시켜야제. 그기이 마 제일이다. "아부지, 장터가 다 끝나가는데 어디로 갑니까." "초행이고 한께 우선 객줏집에 들어서 형편도 알아보고," 솜 든 한복에 여진족의 원시적 수피 신발을 신은 노인과 소년은 공노인의 객줏집을 찾아 들어갔다. 방을 정하고 짐을 푼 텁석부리 노인은 주인 보기를 청했다. "들어오시오." 공노인은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말했다. "이거 미안스럽구마는." 강한 경상도 사투리에 공노인의 표정이 조금 움직인다. 노인을 따라 소년도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비가 자리에 앉자 두메도 앉는다. 그리고 공노인을 주의깊게 쳐다보고 공노인 마누라가 하다 만 바느질 거리에 눈길을 옮긴다. 두메는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통성명을 한 공노인은 물었다. "손주요?" "아니오. 아들이구마요." "하아 그렇소?" "늘그막에," 노인은 눈길이 방바닥으로 내려간다. "거 한자리 할 얼굴이구먼." "예?" 놀란 듯 방바닥으로 떨어졌던 눈이 황망하게 공노인 기색을 살핀다. "장차 기골이 장대하겠소." "예..." "나는 자식이 없어놔서 총기 있게 생긴 애들만 보면 하하핫...물건 같으면 훔쳐서라도 갖겠으나," 두메의 꺼무꺼무한 눈매를 즐기듯 쳐다보고 쳐다보곤 하며 공노인은 말했다. 두메는 칭찬에도 별로 동하는 기색 없이 태연히 앉아 있었다. "총기 있게 생기나마나 부몰 잘 만내야 앞길이 열릴 긴데," 지나는 말이 아닌, 서글픈 독백 같다. "그는 그렇고 어째 날 보자 하셨소, 손님?" "예. 그기이 다름아니라, 그러니까 나는 산포순데," "그런 성 싶었소." "우띠키?" "객줏집을 하다 보니 반은 관상쟁이 점쟁이, 그는 그렇고 말씨를 들으니 영남 태생인가 본데," 하면서 공노인은 김두수를 떠올린다. 이 곳에 와서 두 번째 만나는 경상도 서럼아런 샹걱울 헌더. "말씨란 다 그렿지마는 유독 영남 사람은 태생을 못 속이지요." 김두수를 생각하며 한 말이었는데, 순간 텁석부리 노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속일 기이 머 있겄소. 샐인 죄인도 아니겄고," 하는데 노인의 얼굴이 별안간 새파래졌다. "아니 손님을 보고 한 얘기가 아니라 이곳이 타국이니 자연 각처사람이 모여들고오 해서, 아 생각해보시오? 좋은 뜻으로나 나쁜 뜻으로나 태생뿐이겠소? 성명 삼자도 속이고 오가는 사람이 많소. 나라 찾겠다고 주야로 독심 먹은 독립지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또오 그 양반들을 잡겠다고 날뛰는 밀정놈들도 한둘이겠소? 하야간에 이곳 사정이, 그는 그렇고 손님은 경상도 어디시오?" "경상도가 아니라 강원도요." "한데?" "어릴 적에, 크기로, 경상도였소." 노인은 떼밀어내듯 "아 그래요? 실은 나도 소싯적에 떠나서 고향이랄 건 없으나 강원도 태생이오. 이거 반갑소. 강원도면은 어디시오?" "어디랄 것도 없고 저절로 떨어져서 저절로 자랐인께 소백산 어느 골짜기겄지요." 발끈거리는 성미를 누르듯 "아무튼지 간에 나는 산포수 강간데 내가 주인장을 보자 한 것은 여기가 초행이고," "어디서 오시는데 그러오?" "가야하에서 오는 길이오. 그러니," "그곳에 사시오?" 강노인은 눈알이 툭 불거진다. 안늙은이처럼 조신스런 공노인 얼굴을 노려본다. 번번이 얘기를 잘라먹는 상대방에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민 것이다. '나도 성질 많이 달라졌고나. 빌어묵을 늙은이, 좁쌀양식 오시랖에 싸다니겄다. 우짠 잔소리가 그리 많노' 강노인은 슬며시 외면하며 중얼거리듯 "짐승 쫓아 다니는 산포수놈이 정한 거처나 있겄소?" "그러니까 그 뭐냐, 한마디로 물건 거래를 해달라 그 얘기구먼." 우직한 인품인 것을 시험한 공노인은 고삐를 늦추듯 슬그머니 웃으며 대신 말을 훌쩍 뛰어넘긴다 "물건은 물건이오만 이곳 형편이," "그건 어렵잖은 일이오. 내일이 장날이니까 장에 내놔도 쉬운 일이고 날더러 흥정 붙여달라면 그도 그럴 수 있는 일이오." 수월하게 말했으나 강노인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물건은 어떻게 되오?" "담비가 네댓 장, 웅담 좀하고 녹용이 열 냥쭝이나 될란가..." "짭짤하구먼." "헐한 거는 근가죽에서 팔았인께." "아 참, 그렇지. 밤이면 추서방이 돌아오겠군. 그 사람이면 억울찮게 처분될거요." 그 말을 흘려듣는다. 강노인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어차피 물건을 팔아야 학자금을 마련할 기고," 혼자 중얼거린다. 어른들이 얘기하는 동안 두메는 평정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주인장." "예." "이거는 딴 얘기요만 실은 자식놈을 좀 가르키보까 싶어서 오긴 왔는데 그걸," "이곳으로 이살 하시려구요?" "그렇담 주인장보고 말심할 것도 없고...나는 산에 가서 벌이를 해야 한께," "그 나이에?" "나이야 보기보담은 많잖소. 아직은," "학교에 들어가는 일이라면 어려울 것 없고 이 곳 학교 사정이야 한 사람이라도 학생을 더 받아서 가르쳐볼려고 애쓰는 터이고, 그러니까 아이를 어디다 맡기느냐," "바로 그기이 걱정이구마요." "욕심 같아서는 내가 맡아도 좋은데 객줏집이라...뭐 그것도 어려울 것 업소. 선생하고 의논하면 되니까, 내가 자알 아는 선생님이 계시오." 공노인은 두메를 쳐다보며 공연히 혼자서 만족해한다. 해나절이 지나서 강노인, 그러니까 강포수는 두메를 데리고 거리에 나섰다. "한바퀴 돌아보고 니 가지고 싶은 거 있이믄 말해라." "무신 돈이 있어서," "돈 있다." "늙으면 우짤라꼬," "늙으믄...그라믄 죽제." 강포수는 좁혀진 눈꺼풀을 깜빡거린다. "나도 아부지 따라댕기믄서." "또오 그 소리...이자 니가 여기서 핵교 댕기게 되믄은 명년봄에나 만날 기구마." "산중에서 아부지 혼자 벵나믄 우짤기요." "벵이 와 나노? 안난다." "그걸 우찌 알겄소." "안 난다 카이!" "..." "어디 가서 점심이나 사 묵자." 해서 이들 부자는 월선옥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이소." 강포수는 고개만을 끄덕인다. 그리고 월선을 빤히 쳐다본다. 월선도 강포수를 쳐다보고 또 두메를 본다. 서로 알 턱이 없는 모르는 얼굴이다. 잠자코 이들은 내놓은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곳이라고 경상도 사람 못 오란 법 없제. 경상도 사람이라고 저저이 나를 아는 것도 아니겄고, 하지마는 주거니받거니 말하는 기이 귀찮거든. 모리고 지내는 기이 상수라.' 강포수는 국밥을 우악스럽게 입속으로 떠밀어넣으며 생각했고,월선은 또 '버부린가? 우째 이상타?' 그러나 말이 없는 여자며, 설령 강포수가 경상도 사투리로 얘길했다손 치더라도 이러니저러니 물어볼 성미도 아니거니와 자신에 관한 설명도 없을 것이 뻔했다. 이력이 밝혀지는 것을 꺼리는 때문이었다. 최참판댁을 습격하고 입산하여 왜병대들과 싸운 소위 의병이라는 행적을 지닌 이력이,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이역 수천리, 고향을 등지고 온 일행을 생각할 때 일본이 없는 세상이라면 모를까, 비밀로 아니해도 좋을 일까지 의식은 노상 비밀스럽게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포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들 두메의 어미가 누구인가를, 두메의 출생지가 어디인가를, 그 것은 엄숙한 비밀이다. 두메의 전도를 위해서, 두메는 살인 죄인의 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강포수는 자신이 생존해 있음으로 하여 두메생모에 대한 비밀 누설의 가능성이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자신의 이력이 추적당한다는 것은 즉 두메 생모의 정체가 밝혀지는 결과가 된다. 세상에 두메를 보고 이 아이가 옥중에서 났거니 알아차릴 사람은 없지만 그 핏덩이를 안고 자취를 감춘 강포수를 알아볼 사람은 많을 것이 아니겠는가. 강포수는 자기 자신이 살인죄인으로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필사적인 도피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두메에 대한 무량한 사랑 때문이다. '아부지. 나는 와 엄마가 없소.' ;니 에미? 죽었제. 니를 낳아놓고 벵이 나서 죽었구마.; 강포수는 힐끗 월선을 쳐다본다. 그새 월선은 다른 손님의 국밥을 말고 있었다. "아즈망이 저분때는 내가 잘못했지비?" 국밥 마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젊은 사내가 말했다. "머를요?" "국밥이랑 술이랑 인심 후이 사주었잲앴소?" "아아," "무시기 돌아감서리 생각하이 맴이 좋잲앴습매." "앞으로는 착한 사람보고 그러지 마소." "그러기로 했습매. 우리 조선사람끼리." 이때였다. 책보를 끼고 학교에서 돌아오던 홍이가 문턱에 들어서자 제 어미를 놀래주기 위해 한 짓이겠으나 종이로 접은 제비를 월선을 향해 날렸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게 두메 얼굴에 와서 부딪쳤다. "무시ㅣ 니ㅜ기야!" 두메 입에선 이 지방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한쪽 눈썹이 치올라갔고 얼굴이 벌개졌다. 놀랐다기보다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놀란 것은 홍이 편이었으니, 상대가 저보다 큰 아이라는 것을 깨닫자 순간 도전적 표정을 짓는다. "어째 그럽매?" 홍아! 하며 질책하는 월선의 음성과 동시 두메는 두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섰다. "앙이 내가 시켔음? 제비가 날아갔지비." 홍이 입에서도 이 지방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무시래?" "홍아, 이놈아! 잘못했다 빌어라. 손님아아한테 그라믄 우짜노." 강포수는 못 들은 척 앉아 있었다. "제비보고 빌라 카지 와 내가 비노?" 책보를 후딱 던지고 "한판 하겠음 나 따라오기야!" 가게서 쫓아나가며 홍이 약을 올린다. "저 간나아르?" 일어서 나가려는데 강포수가 아들의 허리춤을 덥석 잡았고 "아가야. 그만 니가 참아라. 니보다 나이 어린께. 내 들어오기만 하믄그놈을, 철이 없어 그 런걸 우짜겄노," 두메는 월선을 가만히 바라본다. 눈이 젖가슴 쪽으로 내려간다. 분노, 절망, 그리움이 기차 창밖에서 지나가는 전봇대처럼 빠르게지나간다. 두메는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숟가락을 들고 먹다만 국밥을 연거푸 입속에 밀어넣는다. 이 무렵 공노인 객줏집에선, "그래 만나보았소?" 공노인이 들어서는 추서방을 보고 물었다. "만나보나마나," 슬그머니 자리에 앉는다. "그건 또 무슨 소린고?" "살림이 꽉 째여 있어서 우리 같은 장돌뱅인 몸 두기가 거북해. 나중엔 짜증이 나더군요" "그게 다 못살 징조라." "잘 사는 게 그리 귀찮은 거라면 심신이 편한 편을 택하겠소"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한갓 물건에 불과한 거고 요는 사람이라." "공노인도 구변 늘었소." "아, 언제는 내 말 못하던가?" "사람이 똑똑하고 신중하더구먼요. 첫눈에서부터. 허나 젊은 나이에 장자풍이 몸에 배여 장래가," "그건 추서방이 몰라서 하는 소리야. 부잣집에 장가갔다고 그 사람이 그런 게 아니고...오히려 심담이 약해진 편이지. 신중하면서도 고집세고 사내다웠는데...양새에 낀 나무 꼴이 되어 과연 보담 두령감인데, 재목도 적소에 쓰여야, 그래 무슨 얘길 하든가?" "김두수 얘기를 자세히 묻더군요." "음. 김두수 얘기라면 나하고도 한 적이 있지." "그리고 장삿길을 바꾸어볼 생각이 없느냐구," "그러니까 곡물로," "그렇지요, 오지의 손 안 간 곳의 곡물을 거둬보라 그건데," "그거 좋지. 이 문이 실팍하고 일정하니까." 추서방은 그말 대꾸는 아니했다. 달가워하는 표정이 아니다. "아 참, 내가 깜박 잊고 있었구먼. 우리집에 산포수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물건을 좀 가져왔다고, 해서 내가 추서방 얘길 했지." "산포수요?" "늙수그레한 사람인데," "수피를 가져왔던가요?" "녹용도 열 냥은 된다던가?" "어디서 온 사람일까?" "가야호에서 왔다던가." "거기서 왜 여까지 왔을까? 앉아서도 얼마든지 처분되는 건데," "아들땜에 온 모양이라. 손주같은 아들을 데려왔더군." "네? 손주 같은 아들을 데려왔다구요? 경상도 사투리 쓰지 않았어요?" "경상도 사투릴 쓰더구먼." "그럼 강포순가분데," 추서방은 싱그레 웃는다 "맞어. 성씨가 강이라 하더구먼. 추서방은 그 사람을 아누마." "알다마다요. 괴짜지요. 그리고 명포수구요." "참 세상 넓고도 좁네." "사람은 진국인데 한 가지 버릇이 있지요." "무슨 버릇? 추서방처럼 주사가 있나?" "전엔 술을 한 모양인데 나는 강포수 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소. 버릇이란 지난 얘길 물으면 화를 내지요" "음.그렇더구먼." "고향은 강원도란 말을 겨우 하긴 하는데 말씨는 갈데없는 경상도 사투리지요?" 공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자기 말로는 소백산에 오래 있었다고도 하고 아무튼 홍범도 산포대를 따라 강을 넘어온 모양인데 한때 홍장군을 따라다니다가 안 사람이지요." "거 아들아이 하나 잘 두었더마." "해천에 용 났다는 말도 못 들었소?" "눈치를 보아하니 아이 어미는 없는 모양이고," "죽었다더군요." "아마 곧 들어올 게야." "아아니, 송애야! 니 거시서 뭘 하제? 응?" 공노인댁 방씨의 음성이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송애의 음성은 바로 방 앞에서 들린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거동이 수상해서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 니 요즘 와 그러제? 응?" 공노인이 방문을 활짝 연다. 송애가 거기 서 있었다. 얼굴이 푸르죽죽하다. "허허어. 임자 무슨 목청이 그 모양이오." "요즘 송애 저 아이가," "허어어 손님 기시는데 왜 이러지?" "무슨 연곤지는 모르나 아까부텀 방 앞에서 엿듣고 있지 않겄소? 전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영 요즘 아이가 싹 변했소." "그만두지 못하겠소오? 나무라도 옛날 말이지 다 큰 아일, 볼일이 있으니 왔다가 서 있었던 게지." 마누라에게 눈짓을 하며 극력 송애 편을 든다. "참, 그런 버릇은 좋은 거 아니거만." 방씨는 부르터서 "전서방! 전서방! 볕 드는데 장독 뚜껑 좀 안 열어놓고 머하나." 뒤안을 돌아가며 신경질이다. "앙이 송애는 손이 없답매? 대세 높이 앉았음 앙이 묵는 짐승이란 말이." 송애는 꼼짝않고 선 자리에 그냥 있었다. "나는 가서 낮잠이나 자야겠군." 추서방이 슬며시 자리를 비워준다. "송애야." "송애야." "..." "아니, 이리 좀 들어와." 송애는 방안으로 들어와 공노인과 마주앉는다. 옛날에 비하여 행동거지가 당돌하다. '이렇게 자꾸 빗나가는데 윽박지르면 안 되지.' '능청스럽구나. 아버지 맘속에 의심이 잔뜩 있으면서 안 그런 척, 누가 그걸 모를까봐서? 길상이한테 얘기 다 들었을 텐데 흥!' 송애는 힐끗 쳐다본다. '저 눈길이 좋잖아.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사내 잘난 것도 병이다.' '나도 내 생각이 다 있어요. 날 키워주었다 하겠지만 나 앉아서 공밥 먹진 않았어. 나가라면 나갈 거구, 나가라 하지 않아도 나갈 때 되면 나갈거구.' "송애야." "..." "너 요즘 근심이 있나?" "아니오." "그럼?" "..." "아버지한테 속 시원하게 털어놔" '어림도 없다. 어차피 내 신세는 망친 거구, 이젠 될 대로 되는 수 밖에 없지. 하지만,' 송애의 눈이 빛난다. "너 길상이 땜에 그러는 거지?" 공노인은 김두수 얘기는 입 밖에 내서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김두수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직 모르지만 김두수와 함께 있더라는, 윤이병과 송애 사이가 수상하다는 얘기는 들어서 안다. "왜 지가 그 사람 땜에 그래요?" "글쎄. 아무렇지도 않다면 다행한 일이고, 우리끼리지만 혼삿말도 있었으니 너 마음이 좋을 리 없지." "상관없는 일이에요. 장가갔으면 그만이지. 자기 사람도 아닌 날, 응칠이하고 함께 있었다고 막 야단하잖아요?" "음." "남이야 어쩌거나, 아버지 어머니가 나무란다면 듣겠지만 왜 그 사람이 구로눈 고장ㅅ?" "모르는 처지가 아니니 그랬겠지. 동생같이 생각하구서," "아니에요. 그것 아니에요. 강짜를 부리는 거예요." 손톱으로 길상의 얼굴을 할퀴듯. 공노인의 낯빛이 변한다. 소리를 지르려다 꾹 참는다. "그건 너 생각이야. 너 말을 믿을 사람이 있겠나? 그런 말 하면 너 얼굴 쳐다봐." "친아버지 같으면 그런 말씀 안 하실 거예요." "양아버지나 친아버지나, 검정 것을 희다 하겠나? 마음 고쳐먹고, 너만한 인물에 혼처는 얼마든지 있어." "저는 시집 안 가요!" 갑자기 송애는 울음을 터뜨린다. 우는 송애는 길상이도 밉지만 김두수도 미웠다. '개 같은 놈! 내 신세를 요모양 요 꼴로 만들어놓고서 혼인 약속4도 안 하고, 어이구 그만 물에 풍덩 빠져죽었음 좋겠다!' "저는 시집 안 가요!" 울며 뛰어나가는 송애 뒷모습을 보며 공노인은 '애가 안 저랬는데, 가망이 없구먼.오늘을 기르면서 천성을 그리 몰랐을까?' 김두수의 관계를 모르는 공노인으로선 절망에 쫓기는 송애의 포악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밤에 송애는 은밀한 연락을 받고 강변 횟집으로 갔다. 김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술상을 받고 앉은 김두수의 눈은 핏발이 서서 시뻘겋게 되어있었다. 자포자기한 송애는 훨씬 대담해진 눈길을 김두수에게 던진다 "왜 그리 눈이 퉁퉁 부었나." "울었어요." "왜, 내가 보고 싶어 울었나?" "엿듣다가 들켰거든요." "음. 직물 충실하게 시행하다 그리 되었구먼. 그렇담 눈이 가라낮게 내가 쓸어주어야지." 김두수는 송애의 손을 슬쩍 끌어당겼다. 술냄새가 끼친다. "그래 무엇을 엿들었나." "추서방이라는 장사꾼," "추서방? 그래서!" "그 사람하고 아버지하고 하는 얘길 듣다가," "그래 듣다가, 무슨 얘기야?" "똑똑히는 못 들었지만 김두수 이름도 나온 것 같아요." "뭐라구?" 김두수는 가만히 생각을 더듬어보는 눈치다. 한참 후 그는 싱긋이 웃었다. 뭣 땜에 웃는지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골치 아프군." 말은 그랬다. "송애," "예." "너 윤선생 보고 싶냐?" "싱거운 소리 말아요." "흥, 보고 싶어도 이젠 할 수 없네." "왜요?" "멀리 갔으니까 멀리," 김두수의 눈이 번쩍 빛난다. "술이나 부어. 객줏집에 있었으면 그만한, 기가 기까나이." "예? 기가 기까나이?" "눈치가 없다는 왜말이야." 김두수는 서투른 솜씨로 부어주는 술을 쭉 들이켠 뒤 "윤이병이 어딜 간 것 같애?"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계집이란 본시 그런 건지도 몰라. 송애!" "귀청 떨어지겠어요." "너 나이엔, 하긴 구중궁궐 속에 있었던 게 아니지. 뭇놈이 들락거리는 객줏집의 양딸!" "사람을 업신여기는 거예요?" 발끈한다. 낮에 일이 었었던 만큼. "너 말이다!" 김두수는 송애에게 똑바로 손가락질을 했다. "만일에 내가 멀리 가고 다른 놈이 네 앞에 나타나면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하겠지?" "윤선생하고 저하곤 아무 관계가 없지 않아요." 찔끔해서 어세를 낮추었다. "흥! 나한테는 몸을 바쳤다 그 얘기야? 윤이병이 죽었다면 어쩔래?" "네?" "칼로 옆구리를 푹 찔러서 어느 산골짝에 내다버렸다면?" "아이구 끔찍해라?" "끔찍하지?" 송애 눈에 거비 실린다. "나를 배신하는 연놈의 끝장은 그것이야!" 김두수는 생각없이 지껄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송애에게 꼼짝할 수 업게 겁을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육체 관계만 가지고 안심이 안 되었다. 앞으로 송애는 유용하게 써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쁜 년들! 계집이란," "제가 뭐 어쨌기에 이러는 거예요?" "아아니 말대꾸를 자꾸 할 템가? 너 나를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응?" "..." "술 부엇!" 송애는 할 수 없이 술을 부어준다. "윤이병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그건 모르는 일이고 이 만주바닥에서 명 긴 놈들 많잖을 테니 한 말이야. 그는 그렇고 서울서 기생 아씨가 왔다며?" "그 얘긴," "다 알고 있어." "그 사람은 지금 퉁포슬에 가 있어요." "그래? 이름을 봉순이라 했지!" "잘 아시네요." "잘 알구말구. 어이구 속이 좋잖아." 김두수는 토할 듯 하다가 발로 술상을 확 밀어붙인다. "이열치열이란 말이 있지." 송애를 와락 끌어당긴다. 송애를 놀락하면서 김두수는 윤이병을 생각하고 있었다. 윤이병을 살해한 것은 다분히 감정적 충동이 있었다. 그는 김두수를 배신하고 직무에 태만했다 할 수는 없었다. 비밀을 누설할 처지도 아니었다. 비밀의 누설은 즉 자기 비밀이 누설이 따르기 때문에 소심한 윤이병은 영구히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엄격히 따져본다면 윤이병은 앞잡이기는 했어도 전혀 김두수 개인을 위한 끄나풀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또 연적이었고, 그녀를 유인해오지 못했던 것은 이미 연적이 아니라는 증거다. 도망치고자 한 것 역시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윤이병의 능력으론 어쩔 수 없었는데도. 구실은 끄나풀을 끊고 도망치려 했다는 그것이다. 이미 연적이 아닌 이상에 보복의 쾌감이 있을 리도 없다. '금녀는, 금녀는 장가란 놈을 사랑한단 말입니다! 난, 난 어쩔 수 없었어요!' 겁에 질려 외치던 윤이병의 얼굴이 정사중에도 김두수 눈앞에 떠오른다. '넌 배신자야!' '아닙니다! 형님! 앞으로는 무슨 짓이든,' '넌 믿을 수 없는 인간이다!' '아, 아니오! 믿어주시오!' '넌 내 비법을 가지고 있어!' 김두수는 송애를 거칠게 다루었다. 남자를 알아버린 송애는 대담하게 매달려온다. '이년! 내 너를 기어이 잡아온다! 죽이진 않어. 살려놓고!' 금녀에 대한 증오에 김두수는 이빨을 갈았다. 송애는 그것을 흥분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11장 폐가처럼 구석지에 있는 침모방에서 다듬이 소리가 들려온다. 빠른 방망이 소리가 한동안 계속 되더니 늘어지고, 숨을 돌린 듯 늘어졌던 방망이 소리는 다시 빨라지곤 한다. 빨라지고 늘어지는 다듬이 소리는 단조롭고 권태스럽게 반복된다. "해 안으로는 끝장이 앙이 나겠궁." 가마솥 옆에서 땅콩을 까먹으며 눈알이 조맨한 부엌아이가 말했다. "무시레?" 삶은 돼지고기를 솥에서 꺼내어 그릇에 옮기다 말고 찬모는 힐끗 쳐다본다. "다듬이 말입꼬망. 진종일 방맹이 소리 듣잲겠슴둥?" "맹추라잉. 뉘기 참견하는 사람 있음? 쉬어감서리 하잲구." "상으 받으라구 그러지비." 계집아이는 오독오독 콩을 씹으며 입을 비쭉거린다. 찬모도 하던 일을 멈추고 콩을 집어 먹으며 "유모가 있었으면 손을 맞잡고서리 얼피덩 했지비. 다딤이질 혼자서는 지친다 말이." "아주망이가 거들어주옵소." "내가 맹추관디? 할 일 없음 낮잠으 자겠음. 니나 유섭애기 보아주는 기야 쥔 아즈망이 무시기 정신 있겠음." "나도 맹추 앙임매. 유모도 앙입매다. 무시레 다섯 살 된 간나아 혼자 놀게 내비리두잲구 별스럽다이. 그렁이 점점 버릇이 나빠지잲소? 봐주재도 머리르 끌구 머리끼 앙이 남는답매." "귀한 송씨 자손이라 말이." "유모는 어째 나가구선 사람으 속으 썩이는 기야." "나가고 싶어 나갔음? 나가랑이까 나갔지비." "그렁이 하느 말입꼬망. 공연스레 쥔 아즈망이 역성들어개지구, 유모가 나서서 흑백으 가리겠음? 남자 여자 일으 남이 어째 알겠습매까?" "에게? 시집도 앙이 간 처녀가 망칙스럽다아?" "중하고 만낸건 앙이 만낸건 유모 나설자리 앙이다 그 말임둥. 눈에 불으 키고서리 미쳐 날뛰는 쥔 양반한테 대든 기 잘못이 앙이 겠느냐 그 말입꼬망." "매질이 심하이까 그랬지비." "주인 아주방이느 미치구 주인 아주망이느 넋빠지구." 계집아이와 찬모가 일은 아니하고 잡담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송영환의 처 장씨는 뜰에 나와서 나무밑동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아들 유섭이 뛰놀고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아니요 안 보는 것도 아닌, 얼굴에 햇빛이 비친다. 굵은 쌍꺼풀이 풀어진 눈은 노곤한 피곤에 젖은 것 같았다. 은행알 모양의 얼굴도 많이 변하여 턱끝이 날카로워졌고 주근깨가 솟아올라 초라해 보인다. 누리끼리한 짚베옷을 입은 때문인지 모른다. 흰 댕기가 감긴 쪽머리에도 햇빛이 흔들린다. 바람이 불어 앙상한 때깔을 벗은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 옷소매 속에서 나긋하게 뻗어난 손목에도 햇살은 노닐고. 창백하고 투명한 손은 창백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전보다 더욱 아름답다. 다듬이 소리가 빨라진다. 유섭이 객사 모퉁이를 향해 뛰어간다. 뭐라 외치며 머슴 점생을 쫓아서 간다. 뜨락의 나무엔 일제히 움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여리고 연하면서 힘차게, 가늠할 수 없는 무서운 힘으로 생명은 공간을 향해 팽창해가고 있었다. 겨울을 견디고 어렵게 찾아온 봄은,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릴 것이다. 나무들은 숨가쁘게 신록으로부터 녹음으로, 긴 여름이 계속될 것이다. 긴 여름이. 장씨는 머슴 점생을 쫓아서 간 아들도 잊고 시부 송병문 씨 장례식 때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굴건 제복을 한, 얼굴이 검은 남편의 모습과 울어서 평소보다 얼굴이 더 붉었던 시동생의 모습. '아버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지금 생각은 그렇다. 그러나 장례식 당시 얼굴이 까만 남편과 얼굴이 시뻘갰던 시동생의 굴건제복한 모습에 웃음이 터질 Qsj 했었던 일을 장씨는 생각한다. 죽음이나 슬픔을 실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땐 일가친천ㄱ들이 방마다 그득 들어차서, 마당에도 사람들은 그득히 들어차서...지금은 빈집인데, 아무도 없는 빈집만 같은데,' 일가친척과 낯익은 사람들이 모두 모여든 초상집에서, 그들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상주 송영환은 저 계집이 왜 머릴 풀었느냐! 저 계집이 왜 상복을 입었느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광란을 부리고야 말았다. 분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억울하다는 마음도 없었다. 부끄럽지도 않았다. 장씨는, 그때야말로 남편의 일그러진 얼굴과 핏발선 눈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형님! 이 무슨 짓이오!" 송장환은 형의 팔을 비틀며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죄없는 분을 언제까지 이러시기요? 아버님 시신을 모시고서 이럴 수가 있소?" 낮은 목소리였지만, 송장환은 형의 팔을 잡은 채 귀 가까이 입을 바싹 들이대었다. 남 보기엔 속삭이며 감싸고 달래는 듯 했으나 "정히 이러실 것 같으면 내게도 생각이 있소. 아버님 생시엔 많이 참았지만 나도 남부끄러운 것 개의치 않겠소." 송영환은 순간 위축된 듯 기가 꺾였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영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 억제 못하는 것은 이미 어쩔수 없게 된 병인지 모른다. 또 사람들이 많은 속에서 발작률이 높은 병이기도 했다. 못난 놈, 계집 단속도 못하고, 창피하지 않느냐? 그는 사방에서 그런 모명의 눈길을 느낀다. 누구 한 사람 눈과 마주친 일이 없는데, 느낄뿐만 아니라 영황은 그 눈기에서 도망치려고 갈팡질팡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의 눈을 쫓는 사람이 없는데, 몇 개 수십 개의 눈동자는 수백 개가 되고 수천 개가 되어 못난 놈! 치사한 놈! 하며 마구 웃어대는 소리를 영환은 듣는다. 내가 왜! 왜! 무엇 땜에 모멸을 받느냐! 저 계집년 때문이다! 계집년 때문이다! 오직 저 계집년 때문에 내가 행셀 못하게 됐다! 일찍이 감히 누가 내게, 나를!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영환은 어김없이 장씨에게 매질이다. 아내의 부정이나 결백은 이미 문제가 아닌 것이다. 초상 때야 말할 나위 없지. 수십 수백의 눈동자, 웃음 소리, 조롱소리. '방마다 그득그득 들어낮아서 내 흉을 볼게야. 놀림감이 되고 웃을 게야. 음 얼마나 애통하시오? 하면서도 내 앞에서 웃고, 계집년 때문이다!' 장씨는 지척에 있지 아니한가. "이 계집! 무슨 낯짝으로 머릴 풀었어! 상복은 왜 입고오!" 영환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쥐어박히든 떠밀리든 처분대로 하십시오, 그런 모습으로 멍청해 있는 장씨 태도도 괴이쩍긴 했었다. 노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아니면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있을법한데, 그럴수록 많은 일가친지로부터 중놈하고 내통하기는 한 모양이로구나, 그러니 저리 죽여줍쇼 하지 않겠어? 풍문이 아니라 사실로서 받아들이리라는 것도 장씨는 깨닫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 역시 영환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병인지도 모른다. 천성은 소심하고 판단성이 없는데 부잣집 맏아들로서 욕망의 좌절을 본 일이 없는 영환에게 비대한 흑같이 자라난 것이 자만심과 이기심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질이 아닌 것으로서 예민하기보다 차라리 우둔한 성품과는 반대로 자만심과 이기심에 한해선 어떤 경우에도 반응은 과민하였다. 과민하다는 것은 영환의 경우 우둔하다는 것과 톨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우둔하다는 말이 나왔으니 장씨의 경우 너무나 빠르고 쉽게 고통이나 불행에 무감각해져버리고 습관화된다는 것도 우둔함과 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님 장례 댄 참 사람이 많았다. 왜 이리 집안이 조용할까. 빈 집 같네. 다듬이 소리만 나고, 그땐 참 많은 사람이 왔었다. 상의학교 학생들까지 모두 상여 뒤를 따라서, 날씨도 추웠는데 바람이 막 불어쌌는데...' 장씨는 눈을 들어 구름 가는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 높이 철새가 무리를 지어 날아간다. "끝순아, 너 어째 그러냐? 얼굴은 솟아오른 보름달같이 훤한데 도무지 소견머리라곤, 그래 시집이나 가겠냐? 어디 부잣집에 화초 며느리로 데려간다면 모를까...그렇더라도 그렇지. 언젠가는 살림을 주관해야 하는데 아무리 하인들이 많아도 가모의 마음씀이 다 미쳐야 집안 살림이 되는 건데," 태생은 서울이지만 벼슬길에 그냥 눌러앉아버린 아버지를 따라 온성에 와서 자랐고, 그 곳에서 출가한 고모가 장씨 어릴 적에,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던 얘기였다. "늦게 둔 자식이라 그럴까? 마음이 착한 건지 바보라 그런지..." 나중에는 혼잣말같이 뇌었다. 날아가는 철새를 보며 장씨는 고모의 말을 생각한다. 그때도 날아가는 철새를 보고 있었던가,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맥락도 없이 옛날 말이 생각났을리 없다. '장례 때는 멀리서도 다 왔는데 그분은 못 왔다. 이선생 그분만 안왔어. 고행가신 후론 종무소식, 이제 용정에는 안 오시는 걸까? 아버님께서 연추에 계시는데 설마 한번쯤은 오겠지. 유모도 그렇구먼. 왜 안 올까. 살짝 한번 오면 될 텐데...' 장례식이 있은 후 몇 달 동안 영환의 병은 진일보하여 새로운 증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번은 "마나님으 죄 없습매다. 이러문은 참말입지 앙이 되오. 무시기, 사람이 이러키 때리는 벱이 어디새 있슴동?" 유모가 말렸을 때 "뭣이 어째? 옳거니? 그렇지! 이 계집! 네가 바로 그 중놈을 붙여주었구나" 영환은 욕설에 주먹질까지 해서 유모를 내쫓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영환은 어떤 누구도 장씨에게 대한 동정을 용서치 않았고 장씨부정의 부인을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길 가다가 날벼락 맞은 거라구. 내 잘못이 뭐냐 말이야. 다 계집 하나 잘못 만난 탓이지. 저 계집 탓으로 내가 이 수몰 당하는 게야." 장씨의 부정을 기를 쓰며 주장한다.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가면서 일가친척이 못난 놈, 옹졸한 놈, 몰상식한 놈하며 각기 내뱉은 말들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혼을 하면 될 거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이혼은 못 한다. 이미 장씨를 학대해서 쾌감을 느끼는 때문이다. 주변에서 소외당하는 과잉 자각은 그의 설 자리를 좁혔고 숨구멍은 아내를 학대하는 행위에서만이 트이는 것이었으니까. 하여 영환은 날로날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었고 황폐한 감정의 수렁 속으로 아편장이처럼 빠져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촉진한 것은 부친이 자기 몰래 동생 장환을 위해 재산을 때로 마련해둔 사실이다. "뉘시오." 머슴 정생ㅇ이를 쫓아가더니 그 길로 점생에게 업혀 밖으로 나간 유섭을 불러들여야지, 불러들여야지 마음속으로 연신 중얼거리며. 그러나 장씨는 그냥 땅바닥에 가라낮은 채 움직이질 않는데 누군가 뜰안에 들어선 사람이 있었다. "지는 객줏집 공가올시다만," "예?" '젊은 댁네 몰골이 말이 아니고나.'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장씨 얼굴을 피하면서 공노인은 "송선생님께 객줏집 공가라 하면, 송선생님은 기시는지요." "계실 성 싶은데," "좀 만내서 얘기드릴 게 있습니다만," "예. 잠깐만 기다리시오." 의외로 상냥하게 말하며 일어서 객관 쪽으로 돌아간다. 공노인은 장씨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사람의 송병문씨 집안 형편 얘기를 생각한다. "집안이 망하려면 순식간이라. 그 왜 자부가 중하고 어쨋느니 하던 소문이 나돈 것이 그러니까 작년 여름이던가? 일년이 못 됐지. 송노인이 별세한 지도 반년이 채 못됐었고... 그야말로 쑥밭이라 쑥밭. 사업은 사고의 연발이요. 하는 일마다 실패, 주인이 그 모양이고 보니 창고지기는 물건을 빼돌려, 서기는 장부를 속이고, 말짱 남 좋은 일, 남의 살림이 되고 만 게야. 집안은 집안대로 가모가 그 지경이니 하인들 세상, 말을 제대로 듣나,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낮잠을 잤으면 잤지, 수챗구멍에 허연 쌀이 쏟아져 있고 연장은 여기저기 굴러서 그것 하나 간수하려 안 하거든. 연한 고기는 하인들 밥상에 오르고 질긴 고기는 주인 밥상에 오르고, 으레 집안이 망하기 시작하면은 젤 먼저 나타나는 게 집안 하인들부터 흥청거리는 게 상정인데, 고삐를 잡을 사람은 둘째아들 그 송 선생말고 누가 있겠어? 한데도 그 사람은 학교 일에 미쳐 있고 또 설사 집안일에 관여하려 한 대도 그 못난 위인이 펄펄 뛸 게야. 옆구리에 구데기 실린 것은 모르고 손 끝에 까시 든 것만 안다든가, 그러니까 행여 동생이 살림 차지나 아니 할까 벌벌 떠는 형편 아니겠어? 하참, 송노인은 재산도 많이 모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셨지...그 어른이 정정하실 때 넓은 객관은 손님으로 노상 붐볐었는데 지금은 헛간이나 진배없이 돼버렸고. 참말로 남의 일이지만 애석하단 말이야." 송장환은 부친이 별세한 후 객관의 방 하나를 치우고 그 곳에 나와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끄러운 집안에서 객관 쪽으로 피신한 것이다. "되련님." 장씨는 문밖에 서서, 철새가 날아가던 하늘, 이젠 구름만 흐르고 있는 하늘을, 그 뾰족해진 턱을 쳐들고 올려다보며 시동생을 불렀다. "주무세요?되련님." "안 잡니다." 대면하기 거북하여 송장환은 방문을 열어보지 않고 대꾸했다.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누구지요?" "뭐 객줏집의 공," 미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장환은 급히 말했다. "네. 들어오라 하세요." 이윽고 공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여기 혼자 기시누만요." "네. 조용해서요. 앉으세요." "예." 앉는다. "저녁에 올려 했는데 오늘은 주일이라 집에 기실 것 같아서." "잘 오셨습니다." "그렇잖아도," 장환은 애매하게 뒷말은 남겨둔 채 "혜관이라든가요?" "조선서 온 중 말입니까?" "예. 돌아왔다는 얘기 못 들었소. 내 듣기론 시일이 오래 걸릴 거라 하지요? 아마," "그 중 재미있더군요." "글쎄요. 길상일 업어 키웠다던가요? 중 치고는," 공노인은 싱긋이 웃는다. "삼원보에 간다기에 소개장을 써주었습니다만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소. 나도 그곳 소식이 궁금하다오." "중이니까 어디 일정이 있겠소?" "웬만했으면 동행하려 했었는데, 늘 그곳 일이 궁금해서요, 공노인께서도 들어 아시겠지요?" "예. 알고 있소. 조선서, 팔도의 모모한 사람들이 몽땅 그곳으로 옮겨왔다는 얘긴 들었지요. 장차 우리 군대도 거기서," "포부도 크고 계획도 크지요. 제발 왜놈의 세력이 그곳까진 뻗치지 말아야 될 텐데, 참 그보다 공노인." "예." " 댁에 있는 그 처녀야가 양녀든가요?" 공노인 얼굴에 당혹해하는 빛이 지나간다. "양딸이지요." "강보에 싸였을 때부터 기르셨습니까?" "아니지요. 엄치 커서," 송장환의 저의를 몰라 공노인은 의아한 얼굴로 변한다. 처음 얘기가 났을 때는 요즘 송애의 심상찮은 행동에 대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두 번째 말에서 행여 혼담이 아닌가고 공노인은 생각해보는 것이다. "실은 해괴한 일이 좀 있어서요. 그래 길서상회의 김형을 한번 만나볼까 싶었던 참이었는데 마침 공노인께서 오셨으니." '혹? 그 계집아이가 길상을 걸고들어 좋잖은 얘기라도 퍼뜨린 것이 아닐까?' 어제 낮에 송애 하던 말이 되살아나서 무너지 섬뜩한 생각이 든다. "공노인께선 기른 정이 있으니까 듣기 거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처녀애가 뉘한테 이용당하고 있지나 않는지요." "예..." 장환의 말대로 기른 정이 있어 공노인은 순간 송애 행적을 은폐하고 싶은 묘한 감정에 빠진다. 광대뼈가 솟은 송장환의 얼굴도 매우 우울해 보인다. 송애 일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 처녀애 일신상의 일이라면 내가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겠습니다만," "전에 학교에 있던 윤선생을 우리 송애가 더러 만났었다는 그 얘기지요." "알고 계셨구먼요." "네..." "..." "실은 더러 만났었다는 그런 정도가 아닌 모양입니다. 복잡하고 뭔가 심상치가 않은 일들이...대충 얘길 추려보면은 윤가, 그러니까 윤선생이란 그자가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강가 주점에 염탐하러 왔다가 본색이 드러나 김형에게 맞았지요. 그게 작년에 있었던일 아닙니까? 그랬는데 며칠전에 연추에서 사람이 왔어요. 이동진 선생하고 동행했었다는데 이선생께선 용정에 들르시지 않구, 그 사람 얘기가 상의학교에 있었다는 윤이병이란 사람이 연추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겁니다. 필시 그놈이 그곳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 선생질을 가장하고 있을 거구, 그 윤가놈을 댁의 그 처녀애가 만났다는 것은 단순한 남녀관계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지요만 최근에 와서 몇 가지 드러난 일이 있어요. 윤가놈이 이곳에 있을 때 괴상한 사내를 자주 만나는 것을 본 일이 있다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그 사내 정체가 무엇인지 뻔하다는 거지요." '그 김두수란 놈 얘기구나.' "한데 그 사내를 댁의 처녀애가 만났다는 얘기가 있고 오늘 아침에도 들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어젯밤 강가 주점에서 괴상한 그 사내를 만났다지 않겠어요? 이렇게 되고 보면 단순한 처녀애 일신상 문제는 아닌 성 싶단 말입니다." 공노인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윤이병은 물론 김두수 얘기도 초문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어젯밤에 송애가 강가 주점에서 김두수를 만났다는 것은 충격이다. 밀정의 앞잡이라는 것만도 이곳에선 용서를 받을 수 없는 반역이겠는데 처녀의 몸으로 은밀한 주점에서 사내를 만났다면 볼장 다 본 것이 아닌가. "공노인이 어떤 분이란 것을 잘 알고 있고 길서상회 김형을 위시하여 경상도에서 온 분들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공노인만큼 다 한마음 한뜻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사로운 정리를 저도 모르진 않습니다만 어쨌든 공노인께서 일이 크게 벌어지지 않게끔 손을 써 주십시오. 매우 좋잔은 징좁니다." "어느 모로나 좋은 일은 아니지요." 공노인은 침을 꼴깍 삼킨다. 목이 칼칼하게 타는 것 같았다. 밀정의 앞잡이보다 여자로서 몸을 망쳤을 것이 더 충격적인 공노인은 역시 구세대의 사람이다. 여자의 지조는 즉 정조라는 사고방식, 이것이 이 세대의 공통적 가치관인 것이다. 여자는 사명을 위해 목숨을 버렸음 버렸지 사명보다는 정조가 중한 그 가치관, 김훈장의 골수에 박힌 사상이요 역시 서민이며 산전수전 다 겪은 공노인의 사고의 생리다. 술수의 한계는 몸을 더럽히지 않는 곳까지 ??벽의 아름다움이지만 그것은 또한 낙조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척골 유림들은 꽃같이 떨어져갔고 들개처럼 약속된 조석이 없었던 천민들은 미련하고 우둔하게 죽어 간 것이 아니었던가. "그건 그렇지만, 아 참 얘기에 정신이 팔려서, 공노인께선 무슨 일로," 겨우 생각이 미친 듯 송장환은 얼굴을 붉힌다. "대단치도 않는 일이오만," 공노인은 낯빛이 달라진 채 앉아 있다가 내키지 않는 대답을 했다. "말씀하십시오." "예." "죄송합니다." "아니, 실은 우리집에 손님이 들었는데 아들아이를 하나 데리고 왔더구먼요. 그 아이를 학교에 넣어서 가르치겠다는," "그건 어려운 일 아니지요. 아시다시피 우린," "예. 한데 그게 좀, 아버지 생업이 포수라 아이 공불 시키자면, 그러니까 아이 혼자 이곳에 맡길수 없다 그 얘기였었소." "몇 살인데요." "열두세 살쯤 됐을까요?" "열두세 살쯤...그러면은," "아이가 똑똑해 뵈고, 내 집에 두고도 싶지만 객줏집이라서," "전 같으면 제가 데리고 있어도 좋겠지만 저 역시 집안 형편이, 교육상 좋지도 않을 겁니다." "하동댁 생각도 해 보았지만..." "..." 공노인은 두메를 어제오늘 본 터이지만 송장환은 보지도 못한 두메다. 한데 두 사람은 이상하게 두메 거처에 대해 심각하게 궁리를 한다. 조금 전의 대화가 살벌했고 불쾌한 것이었기에 양인은 다같이 무거운 기분에서 도망치고 싶은 때문일 것이다. "그렇군요. 정호네 집이 좋겠소." "정호네 집이라면?" "훈장어른이 계시던 곳 말입니다." "아아, 하지만 훈장 어른께서도 협소하실 텐데요?" "지금은 계시지 안지요. 혜관인가 그 중과 동행해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알고 있소. 하나 돌아오실 건데," "가시면서 그곳 형편 보아 안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이 있었지요. 제 생각엔 안 돌아오실 것 같고, 또 돌아오시면은 그때 형편 따라서 달리 처리할 수 있으니까 우선," "하긴 그 포수도 오래 머물 처지가 못 되고 하니 급하긴 급하지요." "아무튼 내일 그애를 학교에 보내십시오." "그러지요." 송장환의 집을 떠난 공노인은 집에까지 돌아오는 동안 마음을 가라앉힌다. 섣불리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마음의 다짐을 하고서. 진종일 공노인은 마누라에겐 입을 다문 채 송애 거동에 정신을 썼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을 했으나 송애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어떤 순간엔 입술 언저리에 경련이 일곤 한다. 뒤꼍에 돌아가서 머슴 전서방과 다투곤 한다. "네가 무너데 날 보고 이러나저러라 하니!" "사람 앙입매? 성애는 사람 앙임둥?" 전서방은 약을 올린다. "머슴 주제에 건방지긴, 꼴도 같잖은 게 날 없신여긴단 말이야." "피차 일반입매. 앙이 그런가? 뽄세 낼 거 없단 말이. 전에느 송애가 앙이 그러더이 되세 달라졌다이. 시집으 못 가이 벵이 나잲앴음?" "뭣이?" "무시기, 미친 안깐 앙이가 생각으 할 때도 있지비. 어째 그러니야? 잉?" 공노인은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방안에서는 문구멍으로 대문간 동정을 자주 살폈다. 마누라가 들어오면 잠 좀 자야겠다면서 쫓아내곤 했다. '이 짓도 하로이틀이지.' 해가 지고 사방이 어스름해졌을 무렵이다. 대문간에서 송애가 어떤 사내하고 얘기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사내의 얼굴은 잘 볼수 없었으나 김두수는 아니었다. '손님이 드는 걸까?' 아니었다. 사내는 돌아가는 모양이다. "누구냐? 손님 드시려면 뒷방이," 하면서 공노인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닙니다. 집을 찾는 사람이오." 송애는 천연스럽게 말하고선 제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진서방이 혼자 투덜거리며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노인은 제 방으로 들어간 송애를 내버려둔다. 사방이 캄캄해졌을 때 송애의 흰 저고리가 대문 밖을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노인은 황급히 일어섰다. "왜 이리 오늘은 유별난고 모르겠네?" 방씨가 말했다. "허허어 전에 안하던 버릇, 가장이면 하늘인데 안에서 왜 이리 말이 많을꼬?" "얼씨구?" 공노인은 대문 밖에 나갔다. 송애는 뒤돌아보는 일도 없이 급히 걷는다. 송애의 사라진 곳은 송장환이 말하던 것처럼 강가 주점이었다. 급히 발길을 돌린 공노인은, 늦게까지 길서상회 사무실에 머물고 있을 길상을 찾아갔다. "웬일이시오? 바쁘게." "잠시 나와야겠구먼." "네." 길상은 담배를 비벼끄고 일어섰다. 걸음이 빠른 공노인을 따라 무슨 일이냐는 질문 없이 길상도 걸음을 빨리한다. 번화한 곳을 빠져서 인가가 드문드문한 곳에 이르렀을 때 "송애가 그놈을 만나고 있구먼. 강가 주점에서." "지금 말입니까?" "지가 거기 갈 까닭이 없고 송선생이 그러는데 어젯밤에도, 그놈을 만난 모양이다. 아무튼 자네가 가서 그놈인지 아닌지," "김두수 말이지요?" "그렇지. 나는 얼굴을 전에 보아 알고 있으나 월선이 말론 하동의 그 왜, 그러니까 자네가 확인을 해야 한다 그 얘기구먼. 월선이가 만난 그자가 지금 송애를 만나고 있는지," 공노인은 숨이 찬 모양이다. 주점에 도착한 길상은 자세한 설명은 아니했으나 주인의 양해를 구하여 그들이 들어 있다는 옆방으로 소리없이 들어갔다. 칸을 질러놓은 칸막이 사이로 눈을 가져간 길상은 '거복이다! 틀림없는 거복이다!'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진다. 돌아본다. 공노인은 눈짓을 한다. 길상은 바로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은 말을 잊은 채 서 있었다. 한동안이 지난 뒤 길상은 결정을 한 모양이다. 공노인 귓가에다 대고 "나갑시다." 방에서 나온 길상은 멀찍이 공노인을 끌고 갔다. "부딪쳐봅시다." "부딪쳐 보아?" "제놈도 약점이 있으니까요." "더 영악해지면 어쩌려구?" "그러니까 밀정인 것은 아예 모르는 척하십시오. 딸아이가 바람이 나서 잡으러 왔다는 식으로 끝내 말씀하셔야 하구 나는 이 집에 술 마시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척 해야지요." "그러면 내가 먼저 가서 떠들어대야겠구먼." "눈치 하나는 비상할 테니까 잘 하셔야 합니다. 윤이병이 얘기는 입 밖에도 내지 마세요." "알았다." 헛기침을 하고 공노인은 김두수와 송애가 있는 방으로 다가간다. 방 앞에서 다시 헛기침을 하고 나서 "실례하겠소." "뭐라고?" 김두수 음성이다. 공노인은 서슴없이 방문을 열어젖힌다. "송애야!" 송애는 용수철 같이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이게 어찌된 일고오!" 이미 구면인 김두수, 계면쩍은 웃음을 흘리며 "허허 주인장 허어," "이노옴! 이 천하에 개망나니 같은 놈! 남의 집 자식을 여기가 어디라구 응? 이놈!" "허허어 왜들 이러시오? 생면부지의 처지도 아니겠고," 유들유들하다. "이놈아! 생면부지의 처지가 아니니 더욱 가증코나. 가옥 주선을 해달라고 내 집에 오더니만 딸자식 흘려낼려든 네놈의 흑심을 내가 몰랐으니! 송애 이년! 집에 못 가겄나! 오늘 이때까지 키운 공이 기껏 이것이냐 그 말이다! 어디 사람이 없어서 저런 순 날도둑 겉은 놈을!" "아아니 듣자 듣자 하니, 말이면 다 하는 겐가? 그러면은 물어봅시다. 송애가 노인장 딸이라서 이러는 게요?" "이놈아! 안 낳았어도 길렀으면 부모다! 이놈을 영사관 순사한테 끌고 가든지 해야지!" ] "허허헛...허허하하핫...나를 순사한테 끌고 가요?" 길상이 방 앞을 지나치는 척하다가, "아니 공노인 아니시오? 여기서 왜 이러시지요?" "아이구 마침 잘되었네. 내 분통이 터져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네. 세상에도 흉악한 사람도적놈이 저기, 저, 저기 앉아 있네. 다리몽댕일 뿌지르든지 허리뼐 동강내든지, 계집애 하나 버렸다! 버렸어!" 고개를 숙이고 오도가도 못한 채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송애가 힐끗 눈을 들어 길상을 본다. 길상의 눈이 김두수 눈에 가서 박힌다. 김두수도 길상의 출현에는 놀란 눈치다. "아니, 이게 누군가? 너 거복이 아닌가?" "그렇다! 나 김평산의 아들 거복이다! 종놈의 신분으로 뉘한테 반말이냐?" 길상은 웃는다. "지금은 최서희의 사내가 돼서 거들먹거린다는 얘길 들었지만," "다아 자네 부친 덕분이지." 길상은 여전히 웃는다. "뭣이?" "그러니까 자네도 좀은 얌전하라 그 말이야. 피장파장 아니겠어?" "아니 이게 어쩐 일인고?" 길상은 공노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공노인께서는 따님 데리고 가십시오. 깨진 그릇, 고함치고 욕설한다고 성해집니까? 나 이 친구 잘 압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기가 막히는 상봉이오. 하니, 딸 이 사람한테 주면 될 거 아니오. 그런 타협도 친척같이 오가는 처지, 못할 것도 없고 우선 기막히는 상봉에 할 얘기도 많으니, 떠들어보아야 공노인은 얼굴에 침뱉기 아니겠습니까?" 길상은 송애의 팔을 확 짭아끈다. "아버지 따라가아!" "놔요!" "부끄럽지도 않아? 술집 계집이야?" 문 밖으로 등을 떼밀어낸다. 송애는 두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이를 뽀도독 갈았다. "이봐여! 주인!" 소동에 놀라서 문밖에 와 있던 여주인이, "여기 있습매!" "여기 술상 새로 차려오시오! 밤새도록 마실 테니까." 문 밖에서 어정대고 있는 공노인 바로 코앞인데 문을 쾅 닫아버린다. "아무튼 반갑네. 종의 자식이건 살인자의 자식이건 피차 상관할 것 없고 이곳에선 조선사람끼리만도 반가운 법인데 자네하고 나하곤, 마 과거지산 그만두고." 길상은 너스렐 떤다. 김두수는 조그마한 눈을 좁히며 침착하게 길상의 거동을 응시한다. 그러나 얼굴은 핼쑥했다. 한참 후, 별안간 김두수는 그릇 깨지듯 큰소리로 웃어젖힌다. "조오치, 술 마시는 데야 원수가 따로 있나." 12장 밤길에서 제법 육중한 느낌이었고 규모도 넉넉한 이층 가옥이었다, 이층에는 발코니가 있었고 삼단 층계를 따라 금속 난간이 돌려져 있는 포치는 넓었다. 이곳 중류 이상 러시아인들의 주택 양식이지만 중국취향을 약간 곁들인 벽돌 건물이다. 집주인은 심운희. 이 지방에서는 쎄리판 심으로 통하는 귀화한 조선인이다. 러시아 정부의 도헌이며 부호요. 이범윤과 손을 잡고 일찍부터 항일투쟁에 앞장선 최재형의 비호아래 청부업자로서 칠팔천 원의 자산을 모았으며 인품이 온유하여 신망있는 인물로서, 쎄리판 심은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재산에 비하여도 그렇거니와 두 딸아이를 가진 내외의 단출한 식구에는 집이 아무래도 분에 넘는 것이 사실인데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쎄리판 심에게는 하얼빈에서 큰 약종상을 하는 형이 있었다. 쎄리판 심이 연추에 집을 신축하려 했을 때 형은 적잖은 보조금을 내 놓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 "허비하는 게 아니니까 집이란 돈 넣은 만큼, 팔 때도 그 값 지니고 있는 게야. 잘 지어." "하지만 푼수에 맞게," "모르는 소리, 인종이 다른 곳에서 제대로 행셀 하려면, 행셀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업의 터전이고 그러니까 신용이라는 게 제일인데 신용이 뭐냐, 재산이거든 재산. 재산이란 은금보화로 뭉쳐서 농짝 속에 넣어두어서는 모르는 게야.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그럴 것이나 장사 혹은 사업하는 사람이랄 것 같으면," 하다가 말이 길어질 듯 싶었던지 "그러니까 한마디로 집이란 집임자의 재산을 남한테 알리는 거고 실컷 살고서도 집이란 제 값 제 짊어지고 있는 거니까, 신용 얻어, 남한테 대우 받어. 그러니 버젓하게 집은 지어야 한다 그 말이야." 보조금뿐만 아니라 형은 "뭐니뭐니해도 벽돌 쌓는 데는 중국인이 젤이고." 하얼빈에서 기술자까지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집을 지은지 어느덧 오 년. 지금은 견사 같은 느낌의 어둠이다. 엷고 맑은 어둠의 시각이며 밤이다. 쎄리판 심의 이층집 발코니가 하얗게 떠 있는 것 같다. 아래층만이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포치도 환하다. 낮보다 훨씬 하강해버린 기온은 한랭하다. 설마 수확을 앞둔 들판의 곡식들이 얼어버리기야 했을라구. 문이 열린다. 불빛이 환한 포치에 남자 손님 두 사람이 나온다. 주인 내외가 따라나오고 마지막 금녀도 모습을 나타낸다. 금녀는 검정 통치마에 미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금녀는 바로 쎄리판 심 집에 기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에는 러시아 아이들과 함께 그네들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두 딸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낮에는 조선인 학교에 나가는 것이었다. 장인걸이 이 집에 금녀를 소개해주었을 때 쎄리판 심은 온유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심씨를 만나서 기쁜게 세 가지 있소. 그 하나는 종씨라는 게요. 심씨는 그리 흔한 성은 아니지 않소. 둘째는 식구가 적어서 넓은 집이 적적했는데 손님은 잦은 편이지만 늘 집에 눌리는 기분 이었거든. 그리고 셋째는 애들이 우리 조선나라 글을 배울 수 있게 됐으니 그것 또한 다행 아니겠소? 아 참 또 한가지 있지. 야소교 학교에서 공불 했다니까 신자일 테고 말이오. 당신도 그렇게 생각 안 하오?" "네 그렇구먼요. 여러 가지가 우리 형편에 안성맞춤이지 뭐겠어요? 다 장선생님 덕분 아니겠어요?" 부인은 장인걸과 금녀를 번갈아 보았다. 금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렇구말구. 장선생 덕분이지. 하여간 우리 화조 아가씨들이 돌아오면 언니 하나 생겼다고 젤 기뻐할 게요. 하하하.." 큰 딸애 이름은 수연이요, 작은따랭 이름이 수앵, 해서 쎄리판 심은 딸들을 말할 적에 곧잘 화조 아가씨라 했던 것이다. 언동이 온유하고 여자를 존대하며 점잖게 우스갯소릴 잘하는 쎄리판 심과 자연스럽게 남편 말에 동조하며 대화를 보충하며 항상 여유가 있는 부인, 이들 내외는 외유내강, 겉보긴 부드러우나 마음가짐은 매우 엄격한 편이었다. 금녀는 새로운 가풍 속에서 이들 내외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 지적인 여교사의 품위를 갖추게 된 것도 화목하고 질서 있는 이 행복한 가정의 일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과거 이력에서 온 열등감을 극복하고 신념과 허식없는 정직한 자세로 인생에 대한 희망을 깨우쳐 준 것은 장인걸이었다. 금녀는 많이 변하였다. 배우며 가르치며 구각에서 빠른 속도로 탈피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가십시오. 바람이 찹니다." 뜰을 질러 앞서가던 사내는 코트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찌르고,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장인걸이다. "네. 이제 들어가십시오."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이동진이 돌아보며 장인걸과 같은 말을 했다. "그럼 또 봅시다." 쎄리판 심이 말했고 "안녕히 가세요." 부인과 금녀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거리에 나온 두 사내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놓는다. 하늘 가득히 뿌려진 별은, 별 하나하나 에서 뿜어낸 여광들은 서로 녹아 흘러서, 그야말로 은하인가, 지상에도 견사 같은 엷고 맑은 어둠이 부유하고 있는 아름다운 밤이다. 밤바람이 한랭하여 더욱 맑은 느낌인지, 멀리 있는 성당의 첨탑이 뚜렷하게 솟아올라 있다. "장동지." "네." "고집은 이제 그쯤 해두는 게 어떻소?" "네?" "내 말 알아듣겠소?" "..." "심운회 씨 내외분이 장동지 생각을 많이 하지. 번번히 저녁 초대하는 저의쯤 장동지도 모르진 않을 게요." "..." "살림을 차리시오." 장인걸은 성당 첨탑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띤다. "저보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실 일 아니겠습니까?" "허허 내게는 조선 땅에 내자가 있고 장가든 자식놈이 둘이오. 몰라서 그러는 게요." "..." 이동진은 담배를 꺼낸다. 장인걸에게 하나 주고 자기도 한 개비 입에 물고서 바람을 막으며 담뱃불을 붙인다. "자아 붙이시오" 두 손을 오므리며 내미는 성냥불에 장인걸은 등을 꾸부리고 담뱃불을 붙인다. "죄송합니다." 깊이 빨아넘긴 담배연기를 토하면서 이동진은 "야박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없어진 지 십년 가까이 되는 처자, 언제까지 염두에 두는 것도 못난 짓 아니겠소?"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닙니다만," 말과는 달리 빨아당기는 담뱃불에 비친 장인걸의 얼굴, 왼편 귀 근처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푸르스름한 반점이 드러난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구 년 전의 얘기다. 노일전쟁 당시 이범윤 휘하에서 젊은 열정을 태우던 장인걸은 러시아군에 가담한 이범윤의 명령을 받고 국경을 넘은 일이 있다. 적군의 동태를 염탐하기 위하여. 그때 장인걸은 임무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처자가 있는 집으로 갔던 것이다. 그것을 근거지로 하여 얼마 동안 일군의 동태를 살피다가 보고차 본진으로 돌아간 사이 뒤늦게 밀정이 장인걸의 정체를 탐지했고 처자는 일군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은..." 혼잣말 같이 중얼거리는 이동진은 요즘 자주 하동에 있는 가족을 염두에 떠올리는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 늙었을 아내와 아들, 그리고 상봉한 일 없는 자부, 손주, 양자 보낸 작은 아들의 소출이긴 했으나. '내가 늙은 탓일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탓일까. 심씨댁 환한 불 빛, 딸아이들의 웃음 소리, 그 속에서 왜 내 눈시울은 뜨거워졌을까. 늙은 탓이 아니다. 늙도 젊도 않기 때문일 게야. 늙은 골수파들은 한치 의심없는 충성심으로 끝장냈고 끝장내려 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허허허어. 물줄기라도 찾아주려고 내가?' "처성자옥이라 아니 합니까?" 장인걸의 말이 귓전을 지나간다. "음...그런 생각을 한다면 대처 할 사람 아무도 없지." "사람 따라서 처지도 매우 다르지 않겠습니까. 다시는 가슴에 못 박히는 일...글쎄요. 먼 훗날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순 없지만요." "뭐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말이 있지. 너무 억제하는 것도 심신에 좋질 않아." "남 보기에 제가 억제하는 것처럼 그랬을까요?" 장인걸은 웃는다. 목쉰 것 같은 웃음 소리였다. 이동진도 싱긋이 웃는다.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게요.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리도 없고." "선생님." "..." "심금녀 그 여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제 나이 젊습니까? 돈이 있습니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놈이," "서른다섯...늙었소?" "그 여잔 스물하나, 둘이라던가요? 선생님 더 이상 그 얘기는 하지 맙시다. 그보다, 장인걸은 말머리를 꺾었다. "권선생께선 어째 이리 소식이 없지요?" 장인걸의 어조는 다분히 신경질적이었다. "글쎄...아닌게 아니라," "어디서 화를 당하시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동진도 어젯밤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해서 숙소 주인인 염씨에게 어디서 화를 당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 하고 장인걸과 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삼월 초순, 급변하는 중국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면서 상해 방면으로 떠나 지금은 구월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데 권필응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던 권필응이 이동진과 장인걸이 동석한 자리에서 장인걸과 동배인 강일석을 상대로 격론을 벌인 일이 있었다. 격론이라기보다 감히 맞설 수 없는 강일석은 조심스런 의견을 내비쳤을 뿐이었는데 비판이나 반론을 혀용치 않겠다는, 거칠고 독선적인 분위기를 독기처럼 뿜어내며 권필응 혼자 앞질러간 그 날의 토론이었다. 그 친구가 왜 그랬을까? 그 양반이 왜 그랬을까? 전에 없었던 일이었어. 구두 소리만 울리는 밤길에서 두 사내는 동시에 그때 일을 상기하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부질없는 생각이야. 망상이다. 기우다. 그분만은 끝까지... 허술하게 죽진 않아. 장인걸은 자신이 얼마나 권필응의 무사함을 바라고 있는가를 비로소 깨닫는다. 얼마나 깊이 그를 신뢰하고 있는가를 깨닫는다. 청년처럼 그에게 열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 것이었다. 영하 사십 도, 한천을 나는 쇠붙이 화살처럼 냉엄하고 재빠르며 방향 감각이 정확한 권필응이다.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의 언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요 강렬하며 전파력을 갖는 암시, 그 천태만 변하는 암시의 눈빛에 연유한다. 그의 눈은 음성보다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으며 때론 명령하고 설득하고... 특히 강압하는 그 눈빛은 마수 같아서 아무도 거역하거나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통곡을 들을 수 있었고 따스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무자비한 결단을 볼 수 있었다. 예민한 젊은이들, 감성이 풍부한 젊은이일수록, 그의 암시는 신비로움이다. 이 시대의 소위 지도자로서 그는 전혀 유형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단점으로 볼 수 있겠으나... 그는 많은 사람, 군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하고나 어울리어 시국을 논하고 이상을 말하는 일이 없다. 비분하여 눈물짓는 일이 없다. 호탕하게 그를 상상할 수 있을까? 송진처럼 찐득찐득 눌어붙어서 협상하는 그를 상상할 수 있을까? 구렁이 담 넘어가듯 교활한 관용을 그에게선 바랄 수 없다. 그는 생래가 수줍은 사내였는지 모른다. 과대한 몸짓 과대한 변설,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은 그 많은 자칭 타칭의 독립지사 영웅들, 권필응의 수줍음은 그러나 영웅심에 대한 강한 제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항상 환상을 배제하며 정확하고 적확하게 사고를 집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론 그 정확함으로 하여 그를 환상하게 된다. 믿게 된다. 불가사의한 힘을 느끼게 한다. 그러한 권선생이 어째 그댄 흥분했을까? 다변했을까? 초조했다. 왜? 까닭을 모르겠군. 장인걸은 권필응의 특성을 생각하다가 그때 광경을 눈앞에 떠올린다. 얘기는 흑룡강에서 시작되었다. 청국이 흑룡강 좌안을 러시아 영토로 양보하기에 이르는 1858년 애훈조약에 얽힌 얘기였다. 그때 권필응은 벽에 등을 기대듯 앉아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이월 청조 마지막 황제로서 종지부를 찍은 선통의 퇴위로 얘기는 넘어갔고 가정부를 조직한 원세개가 혁명정부의 대총통 손문을 밀어내고 자신이 대총통으로 취임한 중국 정변에 화제는 이르렀다. 과연 원세개는 조선독립군을 도와줄 인물이냐, 원세개? 벽에 기대서서 말이 없었던 권필응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날카로운 어조로 쏘았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그자는 틀림없이 일본과 야합할걸? 내뱉었다. 그렇지요? 인물이랄 것 같으면 뭐니 해도 손문이, 강한 어세에 당황한 강일석은 얘기의 중심을 잃었다. 손문? 손문보다 위대했던 것은 삼민주의였지. 이번에는 냉소했다. 위대한 것 많았지 손문보다 위대한 것 말이야. 삼합회를 위시한 여러 비밀결사가 위대했어. 기라성 같은 혁명지도자 혁명군 그리고 홍수전이 뿌려놓고 간 씨앗을 줏어먹은 농민들, 그리고 또 있어, 광산노동자들! 손문은 뭘 했나? 삼민주의? 손문은 일찍이 홍수전 막하의 한 숙로에게 배웠건만 삼민주의는 태평천국의 정치요강을 앞서지 못하였고 그건 아류에 불과한 것. 온건파 강유위의 대동사회사상에 비하면 월등 뒤떨어진다 그 말이야. 그러나 삼민주의는 손문보다 위대했어. 손문은 뭘 했나? 했지. 메뚜기처럼 뛰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믿지 못할 일본 낭인과의 약속을 믿고 삼백만 발의 탄약을 믿고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 얻은 게 무엇이냐? 혁명군의 희생과 좌절이었어. 혁명정부 대총통 손문이 직접 전선에 나선 것은 불과 사오 년 전의 일이야. 막대한 무기가 있으리라 믿었던, 그렇지, 그때도 믿었었지. 막대한 무기가 있으리라 믿고 공격한 진남관 사건 때가 처음이었단 말이야. 그나마 진남관의 무기고는 빈털터리, 번번이 그랬었다. 망명 잘하는 것만이 능순냐? 부지런한 것만 능수냐? 불은 부지런히 지르고 다녔으니까. 손문이 위대했던 것은 마카온지 아모인지 그곳 양인 의사 중에서 유일한 중국인 양의였었다는 그 점일 게야. 하하하... 흥분한 권필응은 여지없이 손문을 깔아뭉개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원세개 같은 간물하고야 월등 다르지. 이동진의 말이었다. 장인걸과 강일석은 이동진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야, 양다리 걸쳤다가 앉아서 집어삼킨 원세개에 비하면 고생도 했고 깨끗하기야 했겠지요. 거대하고, 얼마든지 더 거대할 수 있는 혁명군과 민중들을 떠메기엔 역부족이란 뜻입니다. 그만한 인물, 혁명당 속엔 기라성같이 많았었다 그거지요 뭐. 권필응은 갑자기 시무룩해졌던 것이다. 인물 비교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하고의 연관을 생각할 때 사정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친일은 손문 쪽이고, 삼원보 그곳에서 원세개가 이판서댁 형제분들과 친문이 있다 하여 큰 기댈 걸고 있질 않습니까? 강일석이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정치야, 정치! 정치에 친분이 어딨어! 권필응은 화를 벌컥 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게 어찌 됐다는 게야! 보통 신경질이 아니었다. 사고무친한 곳에서 기반을 닦자면 내실은 어찌 되었든 명색이 대총통인데 그 위력이란 망국의 유랑민과 진배없는 지금 처지로선 막대한 것 아니겠습니까? 강일석은 꾸역꾸역 말을 밀어냈다. 이동진과 장인걸은 묵묵히 두사람을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실낱 같은 게지. 인정가화에 속할 문제고, 망국의 유랑민일 경우엔 말이야! 그래 자네는 자네 자신을 유랑민이라 생각하나? 그 그건, 아니지이! 분명 아니렷다? 그래, 정착을 허용해주고 학교 설립 인정해주고... 조선 땅에서 먹고 살 수 없어 남부여대건너온 망국의 백성들 경우엔 그 정도의 호의란 대단한 거겠지. 허나, 적어도 자네나 나, 또 삼원보에 온 사람이면 원세개한테 감사하고 기댈 건다는것은 그건 밸 빠진 수작이야! 왜냐, 그건 지엽이니까, 근간은 아냐! 권필응의 얼굴은 검붉어졌다. 큰몫들을 노리는 투전판에서 망이나 보아주고 구전 먹는 날건달 이라도 좋다! 방편으로 한다면은.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너 죽으면 나 죽게 되고 나 죽으면 너 죽게 된다는 바로 그 점에서만이 손을 잡는게 정치야! 친면이 어딨어? 이해관계야, 이해관계! 하물며, 음, 우리에겐 정치할 한치의 영토도 없어. 각박하고 가혹한 싸움이 있을 뿐인데 누구에게 감사하고 누구에게 은헬 느껴? 신뢰는 더욱 금물, 그따위 자질구레한 잡티가 붙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 도시 왜 이리 화를 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얘기도 산만하였다. 투전판이니 정치니 하는 말의 내용도 모호하였다. 권필응은 다소 어세를 누그러뜨렸다. 앞으로 군벌시대가 올 게다. 아니 이미 왔어. 군벌의 용병들은, 일본의 사정과는 다른 소위 용병인데 정권유지 정권탈취 그 어느편이든 도구에 불과한 용병에게 총을 쥐어주어야 하고 급료를 건네주어야 하고, 그 막대한 돈이 어디서 나오나? 만신창이 된 형편에서 백성들을 짜보아야 과부족, 어렵잖게 원세개는 일본과 야합할 게야. 싫든 좋든. 일본이 그낭 놔두지도 않을 거구, 그렇게 단순하게, 쉽사리, 물론 단순하게는 아니지. 그도 중국인이니까... 그,그러면은 결국 우리 독립군에게는 어느쪽이, 어느편도 아니야. 우리 스스로, ... 비밀조직에 접근해가는 게야. 네? 원세개를 타도하고 손문도 견제하는 세력. 중국이 혼자 서지 못할 때 조선 독립은 불가능이야. 정권을 위해, 혁명을 위해 외세를 업는 자들과 우리는 친구가 아냐. 태평천국도 동학도 외세에 무너졌어. 태평천국이나 동학이 어떤 성질의 것이든 그것은 순전히 순수한 백성들의 힘이었다는 점을 자네, 강일석은 앞으로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게야. 만일 해답을 얻지 못할 시, 자네는 향리로 돌아가야 해. 이야기는 대충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 마지막 말은 이동진과 장인걸에게도 들으라는 얘기 같았다. 선생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동진을 향릴로 돌아가야 해, 그 말을 되씹고 있었던 것이다. 왜 나는 이리 늙었고 권필응 씨는 그리 젊었는가. 나는 불꺼진 잿더미 같고 그는 활활 타는 관솔불 같다. 쏜살같이 앞난ㄹ을 내다보는데 나는 무거운 이조잔재에 눌리어 이리 늙어가고 있다. 한땐 나도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을 했었지. 옛날 그 동학란 무렵만해도 그들을 이해했었다. 처음 이곳 노만 국경을 방황하면서 무엇인가를 잡은 듯했었다. 그러나 서희와 길상의 혼인을 나는 진심에서 축복하지 못했고 새로운 물결을 타려 할 때 왜 난 내 언동은 어릿광대로만 느껴졌을까. 장동지. 네. 십오륙 년 전 일이군. 내게 최치수라고 괴팍한 친구 한 사람이 있었지. 그러니까 그대가 장동지 지금 나이쯤 됐겠군. 그 친군 비명에 갔지만... 내가 이곳으로 떠나올 때 그 친구... 자네가 마지막 강을 넘으려 하는 것은 누굴 위해서? 백성인가 군왕인가, 하고 묻더군.허허헛... 악의에 차서 한 말이었지. 나느 백성이라 하기도 어렵고 군왕이라 하기도 어렵고 굳이 말하려면 이 산천을 위해서, 그렇게 말할까? 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하니 군왕이면 군왕 백성이면 백성이지 산천은 무슨 놈의 산천인지, 결국 땅덩어리 얘기겠는데 사람 없는 땅에 무슨 뜻이 있을까... 산천은 조국이고 조국이면 민족은 함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공연한 일을 생각하십니다. 근간의 이동진 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장인걸은 위로하듯 말했다. 아니지. 그때 분명히 말했던 것 같애. 군왕이라 하기도 어렵다는 말을 했거든. 오늘날 내 허점은 십오 년 전 이미 그때 그 말 속에 있었던 게야. 나는 어느편이냐 어느편에 속하느냐. 모호했지. 군왕에 대한 역도들로서 동학당 농민들이 학살당한 그 시절에. 십오 년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느 왜놈에 의해, 혁명군에 의해서 조선과 청국의 두 왕조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느 내가 어느편인지 알질 못했고 내 나라 내 땅을 위해서. 내 나라 내 땅, 거 좋은 말이지, 그 얼마나 좋은 말인가? 허허헛 허허허허... 웃음 소리가 어둠 속에 메아리 친다. 선생님, 우리 숙소로 가지 말고 술집에 안 가시렵니까? 이 사람아... 술이야 심씨댁에서 하지 않았나. 그게 어디 술입니까? 병아리 오줌이지. 그나마 마우재 양반댁이 라서 그놈의 격식은. 술은 술집에서 마셔야 합니다. 가시지요. 그들은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주점에 들어섰을 때 주점 안엔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최도현댁 심부름꾼 두 사람과 젊은 연락원 한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동진과 장인걸은 그들을 피해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는다. 럼주를 마시면서 장인걸은 주정 비슷이 말했다. 독한 술이라 주기가 쉬 오르기도 했었고. 선생님은 아직 목욕을 안 하셔서 그렇습니다. 뭐이라구? 목욕치고도 여자 목욕 말입니다. 술과 투전과 아편은 그만두구 요. 그 술과 투전과 여자 중에서 청백리 후손의 탈을 벗기엔 여자가 젤이다, 그 말씀입니다. 푸욱 빠져보시란 그 말씀입니다. 체면 차리느라 남의 눈 피해가면서 그러지들 마시라 그 말씀입니다. 외고 펴고 오입쟁이 한번 되어보시라그요. 말뚱말뚱한 눈을 하고서 장인걸은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에게 실로 대담무쌍한 모욕을 퍼부었다. 술집으로 가자 한 것도 어쩌면 그말을 하기 위해선지 모른다. 이동진의 눈은 게슴츠레했다. 무슨 버르장머리냐! 할 만도 한데 오히려 기대나 했던 것처럼 듣고만 있다. 기생방에서 에헴! 그건 안 됩니다. 이곳에 기생방이 있을 턱도 없지요만. 여잘 가지고 논다 생각지 말구요, 너무 억제하면 심신에 해롭느니 못난 짓이니 하시지도 말구요, 여자한테 한번 빠져보시라 그 말입니다.! 체통요? 도덕? 군자지도? 다 내팽개쳐보십시오. 그러면 인간의 살갗가 살갗이 닿는 것 이외 아무것도 없을 거란 말입니다. 상놈 양반, 식자고 까막눈이고 없어질 거란 말입니다. 사실 선생님이 이곳에 오셔서 고생하시는 것, 향리에서 처자 궁둥이나 뚜드려주시고 사시느니보다 못할 것이다. 그 말씀 드리고 싶소, 왜냐하면 선생님은 처자 생각에 피를 줄줄, 네 마음으로 고통하십니까? 하시겠지요. 그러나 남아장부 할일을 하는데 으흠! 하시는 거 아닙니까? 남아장부도 좋기야 좋지요. 그러나 인간이 더 좋습니다. 남아장부도 필경엔 사람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그놈의 남아장부탓으로 선생님이 거추장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군왕이라 할수도 없고 백성이라 할 수도 없고 산천 얘기가 나오는 거지요. 젊은 연락원과 최도현댁 심부름꾼은 어느새 가버렸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마우재, 그러니까 목공 예르밀이 수염을 흔들며 입을 함박같이 벌리고서 그 또래의 사내들과 떠들어대고 있었다. 장인걸은 계속 횡설수설이었다. 선생님 저는 말입니다, 군왕? 물론 군왕은 아니구요, 백성보다 조국보다 저는 말입니다! 내 처자를 죽인 자들! 네, 그자들에 대한 보복심이 제일입니다. 뼈를 깎고 살을 저미니까요. 네. 보복심입니다! 내 실책에 대한,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뉘우침이구요! 쎄리판 심 집에서 나와가지고 함께 길을 거닐며 한 자신의 말을 장인걸은 뒤집어엎는다. 애국애족이 뭡니까. 애국애족은 피가 통해야, 파란 말입니다. 싸늘하게 식은 피말구요 펄펄 끓는 피 말입니다. 그건 시초에 부모형제 처자식에서 시작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옛날에 미친 것은 헛미쳤던 것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헛미쳤기 때문에 처자를 죽인 겁니다. 바로 그놈의 남아장부라는 허깨비 때문에요. 처자를 죽인 겁니다. 바로 그놈의 남아장부라는 허깨비 때문에요. 처자를이, 잃은 후 저, 저는 참말로 미쳤습니다. 애국애족의 신념도 생기구요, 가차없이 한점 주저없이 왜놈과는 하늘을 같이 아니 하겠다는 맹세를 해, 했습니다. 했지요? 그리구 비로소 비, 비로소 고통과 ㅡㄹ픔에서 일어서는 힘을 어, 얻은 것입니다. 하다가 장인걸은 주먹으로 탁자를 쾅 쳤다. 심금녀 그 여자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쎄리판 심 집에 맡기지 만 않았더라면 버, 벌써 사고가 났으 ㄹ겁니다. 네? 심씨 부처가 결혼을 원한다구요? 압니다. 알아요. 얌전하게 말이지요? 얌전하게... 하하핫핫... 얌전할 적에는 생각이 깊어지니까요. 안 되지요. 그 여자 앞날을 생각하게 되니까요. 남보고는 빠지라면서 너는 왜 안 빠지느냐구, 그러시겠지요. 선생님, 이거 빠진 겁니다. 안빠지고서야 그 여자 앞날을 새, 생각하겠습니까? 빠, 빠진 것보다 더하지요, 더해요. 그여자 안아보고 싶어요. 탐이 납니다! 두 사내는 상당히 술을 마셨다. 밤도 깊어졌다. 목공 예르밀 일행이 남아 있었다. 예르밀이 주먹을 내밀고 아래턱도 내밀고 이빨을 악물며 눈알을 굴린다. 싸움이 났는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누구의 흉내를 낸 모양, 까르르 깔깔 웃음 소리가 터져나온다. 주점 여자가 그들 곁에 다가서며 제법 그럴싸한 러시아 말을 지껄였다. 장인걸은 선생님! 우린 뜨내깁니다. ! 선생님도 저도 모두가 뜨내기란 말입니다. 만주 일대 연해주 일대에 산재해 있는 수, 수십만 우리 개척민들에게 말입니다! 그새 얘기의 내용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우린 개척민들에게 있어선 군식굽니다. 그들을 계몽하여 그들에게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하고, 그거 망상입니다. 처음부터 잘못이었단 말입니다. 똑똑히 기억해야 할 일은, 그렇지요, 개척민 그네들은 조선 위정자 밑에 살 수 없었던 가난뱅이들이었고 우리 ㄴ왜적 치하에서 살 수 없었던 민족주의자들입니다. 그네들은 황망학 무인경을 피땀으로 일쿠었습니다. 피땀으로 일쿨 때 그들에게 보호해줄 정부도 호소해줄 위정자도 없었습니다. 민족주의자 조오치요, 독립투사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 훌륭한 양반들이 나라 잃고 이곳 타국에 와서 개척민들, 일찍이 버림받았었던 그네들을 언덕 삼아 비비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래 그네들에게 호령하고 지도할 푼수가 되나요? 애국애족이면 단가요? 국토회복이면 단가요? 염치없는 짓 아니고 뭡니까? 그들에겐 피땀 흘려 일쿠은 땅보다 버림받았던, 은덕이라곤 받은 일이 없는 조국이란 게 더 소중할 리 없지 않습니까? 제가 무슨 얘길 하는고 하니 그네들에게 주도권을 주라 그 얘깁니다. 그래야만 수십만 이민들은 한 깃발 밑에 모일 거란 그 말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들 속에서만이 조직은 가능하고 공고할 것이며 확대될 거란 그 얘기죠. 홍수전이든 이수성이든 양수청이든 그들 속에서 나와야 한다 그 얘깁니다. 일전에 권선생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동학이나 태평천국에 동원된 그 엄청난 민병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요? 지금 이곳엔 모두 잘나고 슬기로운 대가리들만... 총 몇백 정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지요? 수십만 이민들에 수천의 독립군, 수천이나마 그게 뭉쳐진 것도 아니잖습니까. 물론 누워서 떡먹듯 되는 일 아니 라는 걸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할 것은 그네들을 종속적 존재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그겁니다. 군자금을 내라! 우리는 독립군이다! 편리를 보아주게, 우린 독립군이다! 그 얘기는 국내에 살 만하여 남은 사람들한테나 할 일이지요. 안그렇습니까?최재형 씨가 있지 않느냐 하시겠지만 행동 범위가 좁구요, 솔직히 말해서 식자 몇 사람의 무대 아니냐 말씀입니다. 반일 감정만 유도할 뿐 밑바닥 사람들에겐 미치지 못하고 있소. 군자금을 내라 편리를 보아주게, 그럴 게 아니라 수십만 이민들 모두가 일선에 서게끔 시일이 걸리더라도, 전투가 아니더라도, 제가끔 생업을 영위하면서 그물고리처럼 맺어나가야 한다 그 얘기, 점잖으신 분들이 오늘밤엔 웬일이세요? 졸려 죽겠습니다. 주점 여자가 살랑거리듯 걸어오며 웃었다. 주점에 남은 사람은 두 사람 이동진, 장인걸뿐이었다. 어 참, 이거. 두 사내는 마지못해 일어선다. 장인걸이 셈을 하고 밖으로 나갔을 때 어둠 속에 이동진이 뻗치고 서 있었다. 장동지. 네. 걷자. 걷자 아니 해도 걸어야 할 것을, 주점 앞에서 얼마나 걸어갔을까. 장인걸! 네? 너 나한테 좀 맞아야겠다. 말이 끝나기 전에 이동진은 장인걸의 뺨을 연거푸 갈겨댄다. 졸지간이긴 했으나 장인걸은 허수아비처럼 맞는다. 남아장부가 널 때린다. 나는 남아장부 아닐 수 없고, 중구난방도 하근이야! 다음날 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면해싸ㄷ. 그리고 이틀뒤 조선에까지 동행하기로 한 공노인과 함께 혜관이 찾아왔을 때 이동진은 지극히 평정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였고 서희가 생남하였다는 소식도 담담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13 장정 분단장을 끝낸 기화는 서의돈 머리맡에 살포시 앉았다. 배를 깔고 누워서 담배를 피우던 서의돈이 기화야. 예. 기어 전주로 내려가려느냐? 예. 기어? ... 보고 싶어 어떡허지? 설마., 그럴라구요.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겠어? .. 보고 싶지 않느냐 말이야. 그건 가보아야 알지 않겠사옵니까? 으음... 거짓을 아니 해서 좋았다. 서의돈은 담배를 눌러끄고 재떨이를 밀어내며 바로 눕는다. 한동안 서로 침묵이다. 분위기는 차츰, 차츰 팽팽해져서 하마 터질 듯. 두려운 생각은 없으나 기화는 답답증을 느낀다. 날샌 지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서방님. ... 댁에 가보셔야지요. 노려본다. 서의돈 눈에 증오심이 이글거린다. 잔말 말구 감나히 거기 앉아 있어! 예. 서울엔 아직 늦더위가 남아 있었다. 밤은 서늘하여 솜이불이 살갗에 싫지 아니했고 훤해진 수풀엔 아침저녁 선들바람이 불었으나, 남색 수단치마와 옥색 반회장의 생고사 저고리를 입은 기화는 참을성 있게 앉아 있다. 햇살은 마루끝에 왔는가 장지문이 눈에 부시게 밝다. 기생의 법도를 알어? 아느냐구! 별안간 서의돈이 소리를 지른다. 잘못했습니다. 뭘 잘못했다는 게야? ... 어떤 경우에도 사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기생이다! 그게 너의 천진이란 말이야! 순간 서의돈의 얼굴이 파아래졌다. 벌떡 일어나 앉는다. 기화는 고개를 수구린다. 기분대로 살 양이면 왜 기생이 됐냐? 왜! 왜 기생이 되었느냐구. 나쁜 계집 같으니라구, 기화는 서의돈이 어째 화를 내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돈에 팔렸음 돈값을 해야 하는 거구 정에 팔렸음 정의 값을 해야 하는게야! 얼굴만 반반하면 제일이야? 가무에 능하면 그게 기생인 줄 알았더냐? 당돌한 계집년! 서의돈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욕설은 차츰 고조되어 나중에는 그야말로 지랄발광이다. 기화가 초여름 간도에서 돌아온 후 상현과의 관계는 최서의화의 주종 관계에서 빚어진 인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서의돈은 그렇게 못 잊어 생각이 나면 일본까지 상현을 쫓아갈 일이지 왜 안 가느냐는 둥 전주로 내려간다는 것도 소리 공부가 목적이 아닐 것이며 그 팔도 오입장이 운삼이놈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때문이 아니냐는 둥 생트집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보고 싶지 않겠느냐고 묻는 말의 대답을 가지고 따지려 하지는 않는다. 분명 화근은 그것이었는데 억설을 했음 했지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 때문이겠다. 기화는 말없이 겪는다. 순종한다기보다 서의돈의 성미를 아니다. 그 성미가 두려워서 그런것도 아니다. 언젠가 추산이 늘려준 말은 말도 말어. 순 개고기야. 술은 말술이 ??62쪽없음 여기 쑤시고 저기 쑤셔대고 장사는 끝장날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 로 추산은 꾸욱 참을 수밖에. 그런 북새통에 일본글을 함께 배운 이상현 이홍종 두 사람은 팔월 말께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서의돈은 기화를 못 잊어 그랬던지 그 자신이 말했듯이 공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람하기 위한 것이어서 시기를 늦추었는지 모를 일이나 그들과 동행하지 않았다.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히는구나. 그래 어딜 보구 반했냐? 응? 누가 그분한테 반해서 그랬나요, 뭐? 허허어 이 말 좀 듣게? 안 반했으면 만석지기 땅문서 갖다바치더냐? 그분, 볼품없지만 사내다운 데가 있어요. 뭇 잡놈들 거느리고 다닌다구? 아니면 길바닥이든 남의 집 처마밑이든 술 처먹고 나자빠져 잔다구? 어머니도 참, 기생 팔자...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 그 말이냐? 저도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하기야... 결국은 재수가 없었던 게야. 그 망나니가 너한테 눈독을 들인 것부터가. 황부자네 아들이야 가슴이 쓰리고 아리더라도 친구지간, 황태수에게 화살을 꽂았던만큼 추산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편 옛나의 정인 소화의 부탁을 받고 기화를 추산에게 천거한 운삼은 명창 하나 만들어보겠다는 기왕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여자관계로 경력이 화려했던 운삼도 이제는 오십줄, 타다 남은 불씨처럼 기화에 대한 상심 같은 것 없지 않았으나, 그런 정감은 기화의 소질을 길러주자는 집념으로 변해갔다. 서의돈과의 관계에 대해서 일말의 질투도 있었으나 서의돈의 광기에 먹혀 기화가 자라지 못하게 될 것을 더 두려워했다. 해서 서둘렀던 것이다. 당대의 명창이었고 이젠 늙어서 전주에 은거하고 있는 권봉득에게 기화를 맡길 것을. 그 일에 대해선 추산도 찬성이었다.어차피 서의돈이 기화 뒤에 버티고 있는 이상 골칫거리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주행은 기화, 추산, 운삼, 이 세 사람 사이에서 합의를 보았다. 한동안 분탕을 치던 서의돈은 제풀에 지치고 만 것 같았다. 술상차려와! 예. 급히 술상은 방안으로 들여졌다. 뭘 하고 있는 게야? 술상 왔으면 술잔에 술을 쳐야 할 거 아냐? 예. 예 귀신이 붙었나? 예말곤 할말 없어? 서의돈의 음성은 누그러져 있었다. 술을 들이켜고 술잔을 상 위에 놓으며 서의돈은 한탄하듯 말했다. 팔자야, 팔자. ...? 안주를 어적어적 씹으면서 내가 평생 널 데리고 살겠냐? 너도 마찬가지, 날 따라 평생을 살겠냐? 어차피 우린 스쳐가는 인연인데 사내새끼, 나도 딱한 놈이긴 하지. 안그러냐? 이젠 제발 역정 그만 내셔요. 말인즉슨 장안 갑부 황부자 아들도 아니겠고 옥골선풍이상현도 아니겠고, 일본 유학하고 돌아온 하이카라 임명빈도 아니겠고, 아니 터수에 네가 나르 받아주었다는 것만도 고마운 얘기 아니겠느냐? 그렇지? 울퉁불퉁한 얼굴에 스스로 비웃는 웃음이 지나간다.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셔요? 아니어요 서방님. 뭐가 아니라? 전 서방님을 좋아하거든요. 뭣이라구? 아깐 거짓말을 아니하더니 내가 또 야단치까봐서 그러느냐? 서방님께서 제게 한살림을 차려주시어서 허신하였습니까? 그건 아니지. 그렇담 서방님께서 저를 겁탈하시었습니까? 그, 그것도 아니지. 비록 노류장화일지라도... 재물도 강제도 아닌 바엔 정 없이 몸을 맡겼겠사옵니까? 그, 그런가? 별안간 서의돈의 눈빛이 환해졌다. 순간 기화는 울퉁불퉁한 서의돈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망나니가 수줍음을 탄 것이다. 어린 소년같이. 그는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치하게 한숨을 토하고 슬픈 눈이 되고 그런가 하면 득의에 차서 빙글빙글 웃기도 했다. 잔소리는 일체 없었다. 그리고 종내 전주에는 아니 가겠다는 말을 기화는 하지 않았고 서의돈 역시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가겠네. 술이 남았습니다. 아니야. 추산의 박대가 좀 하겠냐? 미안하네. 그렇진 않습니다. 그보다 소세도 아니 하시구 가시려구요? 세수하면 못난 얼굴에 광이 나겠느냐? 괘념 말어. 두루마기르 ㄹ기화가 입히고 옷고름을 여며주는데 갑자기 서의돈은 기화의 두 손을 꽉 잡는다. 기화! ... 내가 왜 이러는지 참말 모르겠다.! 서방님! 울음을 터뜨린다. 무슨 까닭의 울음인지 기화 자신 알지 못하고 서 눈물을 쏟는다. 문간에서 만리성이라도 쌓으로 가는 사람처럼 침통한 이별을 했는데 저만큼 길모퉁이를 돌려다 말고 서의돈은 대문간으로 되돌아 왔다. 참, 혜관이란 중 산으로 돌아갔나? 예. 어제 떠났습니다. 그럼 그 노인은? 여숙에 묵고 계시지요. 그래... 그러면은 오늘밤, 늦게 한번 들르지. 방으로 돌아온 기화는 두뺨을 싸안고 쪼고린 채 방바닥을 내려다본다. 왜 울었을까... 생남을 하셧다구? 애기씨가 생남을... 애기씰 닮았을까 길상일 닮았을까... 아씨. 행랑어멈이 문밖에 와서 불렀다. 애기씰 닮았을까 길상일 닮았을까... 아씨, 술상 내갈깝쇼? 응 그, 그래줘요. 방문을 열고 들어온 행랑어멈은 혼났었죠? 흐음.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기화는 픽 웃는다. 서참봉네 서방님도 너무하시지. 달덩이 같은 우리 아씰 왜 울리씰까. 이불을 개키면서 어멈은 기화의 울어서 부은 눈을 힐끗 살펴본다. 어이구 딱도 하시지. 쇤네야 뭘 알겠습니까만 기화아씨도 허다하게 많은 양반 다 두시고, 말 말아요 어멈. 예, 예, 쇤네야 뭐, 이불을 개켜놓고 술상을 내간 어멈은 걸레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방도 닦아야겠지만 할 얘기도 있는 것 같다. 어멈은 걸레질을 하면서 아까 운삼어른이 두 번이나 다녀갔었죠. 그 어른이 왜요? 글쎄... 서참봉네 서방님이 계시다 해써ㄷ니 그냥 돌아가셨다가 조금 전에 다시 오셨습죠. 무슨 일일까? 아마 함춘관 마님이 가보시라 했나부지요. 또 어머니 심화 끓이셨겠군. 왜 아니겠소? 황부자네 서방님 생각을 하시면은, 쇤네도 억울한 뎁쇼. 아씨 생각을 해서 말입니다. 그런 말 하지 말래두, 예,예, 쇤네야 뭘 압니까마는 굴러온 복을, 그만두래두, 사람의 인연을 누가 장담하겠수? 그야 그렇습지요.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도시 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한두 번, 어멈은 방문을 열고 문지방을 닦는다. 함춘관 마님만 해도, 지금은 비 오신 뒤 땅처럼 단단해졌죠만 젊은 시절엔 운삼어른 땜에 속 무던히도 썩이셨소. 그땐 물불 안 가리는 외곬로만 흐르는 성미였으니까... 세월이란 일장춘몽이라든가 이제는 모두 오십줄 사십줄을 나서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 싶게 무관한 벗님같이 지내시니, 하기는 화류계의 인연이란 노상 그런 거지만요. 일어서서 문기둥을 닦는다. 어멈은 어찌 그리 옛일을 자 ㄹ알아요? 예? 기둥을 닦다 말고 돌아본다. 아 예, 쇤네야 뭐 소싯적부터 이 바닥에서 살아왔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일 아니겠소? 별의별 일이 많았습죠. 함춘관 마님계서도 죽는다구 소나무에 목을 매지 않았겠소? 그때 새파래졌던 운삼어른의 얼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요. 효자동 집으로 돌아온 서의돈은 한숨 늘어지게 잠을 잔 뒤 하인을 불렀다. 너 임역관댁에 가보고 오너라. 예. 임역관께서 계시는지 그리고 임선생도 계시는지 여쭈어보아라. 예. 하인은 이내 돌아왔다. 계시더냐? 예, 계신다 하더구만입쇼. 알았다. 세숫물 떠오고 안에 가서 은년이더러 내 갈아입을 옷 내오라고 일러. 예.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서의돈은 임역관 대문 앞에서 큰기침을 했다. 일오너라아! 하인이 달려왔다. 서방님 계시냐?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큰기침을 하고 작은사랑 쪽을 들어간다. 임공 계신가? 어이구, 또 무슨 꿍꿍이속인고. 고수머리에 큰 두상, 임명빈이 싱긋이 웃으며 내다본다. 허허허. 보리죽 마시던 창자에 쌀밥 들어가면 설사를 한다던가?공대받다가 설사나면 어쩌누. 그래 명빈아, 그새 밥 잘 먹고 잠 잘 잤느냐? 스승을 보고서 저눔의 버르장머리,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지? 지척이 천리라더니, 그새 말 늘었군. 방에 들어가 앉은 서의돈은 구러련을 붙여문다. 기화아씨께서도 기체 마강하옵시고? 지랄하네. 지랄이야 자네 특허 아니던가? 그새 말 늘었다니까, 요즘 소문 듣자니 침소는 하늘천정 아래가 아니라더구먼. 한 여인의 힘이 실로 위대한 거라구. 이거 참말 말 늘었네? 그새 이인직일 따라다녔나? 이인직이 얘기르 왜 하느냐, 의돈의 저의를 아는 명빈은 한마디 쯤 실토를 해야겠다 생각했던지, 아닌게아니라 나도 이야기꾼 한번 되어볼까 싶어서... 목하 심사숙고중이라구. 기가 차네. 살다 보면은 서ㅉ고에서 해가 떠오른다던가? 허허어...뭣이 어쩌구 어째? 이야기꾼? 이야기꾼이 어때서? 야바위꾼도 난감불락일 터인데 허허허헛... 이야기꾼이라? 명빈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심각하 ㄴ토론으로 들어갈 준비인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별수없는 거라구. 겸양의 미덕을 보이기 위해서 이야기꾼이라 하기는 했으되 소위 그 소설가라는 게 얼마나 도도한 직업인지 알기나 아나?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말할 것 아ㅓㅄ는 일이고 바다 건너 일본의 실정만 하더라도 세상에서 존경받는 그처지가 고관대작 유가 아니라구. 내 농담하는 것도 아니구 일시적 생각도 아니구 단단히 결심을 했어, 우선 시작은 번역부터 해보려해. 다행히 일본말엔 자신이 있고 남의 나라 좋은 소설들을 골라서 시작해볼 참인데, 그러니까 일본에서 진작ㅈ부터 해외의 문학작품들이 번역되어 널리 소개돼 있으니까 그런 것 중에서 좋은 거를, 경사났구먼. 남의 얘기 끝까지 듣기나 하구서 말하라구. 나느 아무튼 상당히 신념을 굳혔다. 그 애기부터 하고 싶은 거라구. 물론 글을 모르는 사람이야 별 문제겠으나 글줄 읽는 사람이면은 위아래 부담없이 읽혀지는 게 소설이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몇몇 식자들이 새로운 문명을 두고 왈가왈부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보다 많으 ㄴ사람 이반대중이 짧은 시일에 눈을 뜬다느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 얘기라구. 우물 안에서도 한 권의 소설을 통해서 그 나라의 풍습이며 새로운 사상, 그네들의 생활방도 종교 윤리관을 싹 훑을 수 있다면은 그런 작품의 소개란 상당히 시급한 일일 게고 몇 사람은 선구자가 있어야잖겠어? 물론 지금까지의 얘기르 번역하느 ㄴ일인데 그런다음, 관두어. 이거 참, 침침절벽이군 그래. 관두란 말이야. 뭐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명? 소설이란 걸 가지고 전달을 한다구? 그렇지 않구? 이봐 명빈이, 이야기란 건 말이야, 단군 할아버지적부터 있어온게야. 사람은 이미 그때부터 개명을 했구. 자네 같은 보리죽 대가리때문에 빌어먹을! 그래서 개명 소리가 자꾸, 자꾸 나오는 게야. 번역이니 뭐니 하니까 하는 얘긴데 대포나 군함 만드는 서적이면 모를까 그까짓 왜나막신 소리가 나구 양고기 누린내가 물씬 나는 그따위 사상이고 개나발이고 일벗어! 눈깔이 두 개, 입 코 있고 두짝 귀가 잇고 두 발로 걷는 사람의 새끼면은 다아, 다 옛날 고릿적 부터 머리 싸매고 꿍꿍거리며 할 얘기 다 해놨는데 그까짓 양고기 누린내 나는 것들 새삼스럽게, 아서어. 그만두란 말이야. 그렇잖아도 자네 대가린 남보다 무거워서 뛰기가 불편한 터수에, 하다말고 서의돈은 말을 뚝 끊는다. 천장을 올려다보켜 목의 복숭아뼈를 슬슬 만진다. 더하지 왜 그만두나, 생각 고쳤네. 뭐? 널 상대로 무슨 얘길 하겠냐. 여보게 명빈, 굴원의 그 회사가 뭐 그리 좋은고? 물에 빠져 죽을 사람이 과연 시 쓸 생각이 날까? 하던 멍청한 그자 얼굴이 생각나서 입맛 떨어진다. 뭐 소설을 쓰겠다구? 삼대 구년 묵은 소리. 다소는 무안스러웠던 임명빈은 멋쩍은 웃음을 띤다. 임명빈은 이인직에 따라갈려면 허리굽는다구. 잘난 소리 말라구! 선생질 하는 게야. 교장까진 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임명빈은 몹시 충격을 받는다. 모욕감도 있었지만 사실 명빈은 바로 오늘 아침 큰사랑에 불러 갔었다. 불려가서 부친한테 들은 얘기가 바로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질이나 하는 게야. 얘길 들으니까 공연한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쓸데없는 짓 그만두구. 자고로 무사는 가난하다는 게 통념인데 그나마 저저이 다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천부의 자질이 있어야, 선생으로 취직하도록 해. 장차 교장까진 될 수 있겠지. 명빈은 부친의 말을 덤덤하게 들었다. 으레 그러려니 생각한 때문이다. 부친의 평소 지론이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해서 되지 안 될지 모르는 일엔 애당초 손을 대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재능에 관하여는 자를 대어서 재볼 수 없는 것이요 성공에 관해서도 도장 찍어놓고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명빈은 부친의 말로 하여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누가 뭐래도 나느 해볼 거라구. 얼굴을 붉히고 말한 임명빈은 그 자신의 결심을 나타낼 양인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 점심 싸가지고 다니며 말릴걸. 엿장수 마음대로? 아암 엿장수 마음대론 안 되지. 임명빈 마음대론 안 돼. 약이 목구멍까지 오른 임명빈 한다는 말이 의리 없는 인간이구먼. 나도 점심 싸가지고 다니며 기화하곤 살림 못하게 할 거야. 농담이 아니라 심각한 표정으로, 좀더 흔들어대면은 울기라도 할상호가 아닌가. 그건 두고보아야만 알 일이고, 의돈은 킬킬대고 웃는다. 긴 소리 할 것 없어. 오늘 나한테 온 용무가 뭐야? 아무리 신경질을 부려보려 해도 신경질이 되어지지 않는, 시무룩한 음성으로 묻는다. 실은 임명빈 선생을 만나러 온 것은 아니고오 임역관을 뵈올까 해서 왔는데, 그래 자네 춘부장께서는 지금 댁에 계신가? 서의돈의 놀려대는 품은 변한이 없다. 무슨 일로 그러는 게야. 그건... 그렇지. 그건 차차 알게 될 거구. 날 안내 좀 해주게. 명빈이 일어섰다. 그들은 함께 큰사랑으로 건너갔다. 아버님. 명빈이 문밖에서 불렀다. 음. 차분한 음성이었다. 의돈이가 만나뵈려고 왔습니다. 그래? 임역관이 방문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서공. 아들의 친구지만 지체가 다른 까닭으로 임역관의 태도는 매우 정중하다. 안녕하십니까. 문안드리옵니다. 방안으로 들어온 의돈은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명빈은 시무룩해진 채 작은 사랑, 자기 처소로 돌아간다. 서참봉께서도 안녕하시구요. 앞뒷집이면서 짐짓 안부를 모르는 듯 묻는다. 네. 노인장, 매우 왕성하십니다. 다행이오. 그보다 그 뭡니까, 명빈이가 지지리 궁상, 문사가 되겠다기에 지금 막 야단을 쳐주었습니다. 임역관은 비윽레 웃는다. 신분은 중인이지만 과거의 직위가 임연관인만큼 사람을 대하는 품이 옹생스럽지 않다. 몸가짐도 세련되었으며 흰 머리칼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초로, 젊었을 시절에는 아들보다 풍채며 용모가 월등 잘났을 성싶다. 막내딸 명희가 미인인 것도 아버지를 닮은 때문인지. 방안이 으리으리할 리가 없겠으나 조촐하여 살림의 풍도는 넉넉한 듯 싶다. 한데? 무슨 일로 왔느냐 묻는 투다. 그러나 서의돈은 내의를 말하지 않고 연신 임명빈의 흉허물만 늘어놓는다. 덩치만 컸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왜 아니겠습니까. 명빈이는 그렇다 치고 서공도 경륜과 포부가 클 터인데, 네, 요즘엔 하늘천정 밑이 침소가 아니옵니다. 지난달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가실 걸 그랬구먼. 그들이 다녀와서 그곳 형편 소상하게 알아본 뒤 갈 작정입니다. 그 생각도 나쁘진 않소. 요즘도 그 조씨네댁에 출입하십니까? 가끔 들르지요. 약간 당황한 듯 임역관은 서의돈의 눈치를 살핀다. 네에... ... 황춘배 노인에게 땅을 잡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이번에는 당황하느 ㄴ빛을 감추지 못한다. 어째 그걸 물으시오? 서의돈은 씩 웃는다.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땅을 잡히고 빚을 냈지요. 이득은 결국, 빚돈이 나올 가망 없는 땅문서고 보면 황춘배 노인이 보게 되는 거구 폐광을 처분한 그 모대감이," 임역관 얼굴에 의혹이 피어오른다. 말하자면 음모는 또 음모였으니까. 또 대체 이자는 극비에 부쳐지고 있는 폐광을 어디서 알았으며 그 말을 꺼내는 저의는 무엇인가. 임역관은 아무 대꾸 없이 서의돈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다름이 아니오라 그 빚을 황노인보다 싼 이자로 대봉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되면 어느편이 이득을 보게 되는지요." "..." "누구의 손에 가든 그 땅문서는 떠내려가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좀 자세한 애길 해주시오." "폐광을 처분한 그 막대한 돈이 어디로 갔는지 소생도 짐작됩니다. 해서 모대감을 존경하는 바이고," "히 참," 임역관은 할 수 없이 웃어버린다. "아무튼 그런 경위와는 상관없는 일이겠습니다만 내일 공과 성을 가진 노인이 찾아오면 만나 주십시오." 사뭇 우격다짐이다. "그건 또 어째서요?" "간도에서 불천리 언 사람이니까 자세한 얘기는 그 노인이 할 것입니다. 간도에서 왔다는 말에 임역관은 긴장한다. "몇 시쯤, 보내면 되겠습니까? 허락 같은 것은 받으나마나 혼자 결정하고 서둘러 댄다. "언제라도, 종일 집에 있겠소." "알았습니다. 하면은 물러가겠습니다." 서의돈 역시 서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사랑 작은사랑으로 건너오는데 열려진 중문 안에 얼른거리는 명희 눈과 서희의 눈이 부딪친다. 명희는 눈을 흘기며 급히 몸을 숨기다. 지난 이월이던지, 황태수 집에서 생일 술을 먹다가 술을 못하는 임명빈이 과음하여 쓰러져 자는 것을 본 서의돈이 상현을 데리고 나와서 오라버니한테 변괴가 생겼노라 거짓을 하여 명희를 놀라게 한, 그때 일을 두고 명희는 아직 노여움을 풀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의돈은 작은사랑 쪽을 넘겨다본다. "명빈이!" "왜 그래." "나 가네." "들어왔다 가게." "내일 밤 함춘관에서 만나자구." 의돈은 대문을 나섰다. 14장 소나기의 사랑 공노인이 효자동 임역관 집 앞에까지 왔을 때 어여쁜 명희가 대문을 막 나서는 참이었다. 그는 공노인을 보자 주춤 멈추었다. '하아, 역관어른 딸이구먼. 거 참하게 생겼구마.' 명희는 낯선 노인을 의아하게 쳐다보더니 "뉘 댁을 찾으세요?" 하고 묻는다. "역관 어른을 찾아왔소." "그러면은," 하다가 "뉘시라 여쭐까요?" 이번에는 공노인을 똑바로 쳐다본다. "예. 일전에 한번 왔다간 사람인데 서참봉댁 서방님 주선으로," "아 네." 명희 얼굴에 웃음기가 지나간다. "잠깐 기다리세요." '얼굴만 참한 게 아니고 맘씨도 참한갑다.' 공노인은 갑자기 용정촌의 두메 생각을 한다. 지난봄에 아비 강포수랑 함께 왔을 때 물건 같으면 훔쳐서라도 갖겠으나, 했던 생각이 난 것이다. 강포수가 떠난 뒤 두메는 정호네 집에 묵으면서 정호랑 함께 상의 학교를 다니고 있다. 가끔 할배 하고 부르며 찾아오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이놈아, 아부지라 불러라. 너 아버지도 나 같은 늙은이 아니가, 하면 두메는 싱긋 웃는 것이었다. 두메를 생각하여 즐거웠던 공노인 마음에 장마철 하늘처럼 검은 구름이 덮쳐 온다. 집을 나간 채 소식 없는 송애로 생각이 옮겨진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또 하는 구나. 엎지러진 물, 어쩔 수 없지.' 집안에 들어갔다 나온 명희는 공노인을 큰사랑에까지 안내해 준다. "어서 오시오. 노인장." 임역관이 공노인을 정중히 맞이했다. "일전에는 폐가 많았소." "별말씀을," 그러니까 공노인은 임역관댁을 두 번째 방문하는 샘이다. "거 참 출중한 따님을 두셨소." 공노인으로선 출중하다는 말을 최고의 찬사로 생각했다. 요조하다든지 절세미인이라든지 그런 말보다는. "글세 올시다. 남들이 그러니까 그런가 하지요." 임역관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허물허물 무너진다. 그도 무던히 딸을 사랑하는 눈치다. "세상에 아무 부러울게 없는데," "자녀분을 못 두셨군요." "예."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도 있으니까, 사랑스런 대신 근심도 많은 법이요." "그게 사람 사는 낙이고 세상에 나온 보람 아니겠소. 저같이 족보 없는 상사람이야 굳이 후사를 생각해서 그런 거는 아닙니다마는," "상사람이고 양반이고 간에 앞으로는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져 얄 게요. 선영봉사 하기 위해 서 사람이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고 제 몫을 살기 위해 태어났을 테니 말이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조상에 사로잡혀서 귀신이 활보하는 격이지. 그러니까 조상들이 행셀 했지 어디 사람이 행셀 했소? 좋은 인제는 썩어 묻히고, 하니 나라가 망할 밖에. 적어도 망한 원인의 하나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지만 앞으로는 젊은 사람들 생각 많이 달라질 게요. 내가 서참봉네 아들을 밉잖게 생각하는 것, 이거 참 얘기가 아니구먼. 그는 그렇고 어제 가회동에서 그 사람을 만났소이다." "예." 공노인은 긴장을 나타내며 임역관을 바라본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사람한테는 솔깃한 얘기였을 것이고, 말로는 변리가 다소 눅다 하여 크게 좌우된 일이 아닌 터에 내 체면도 있겠으나 앞으로 사업이 확장될 것인즉 길을 터놓는 뜻에서 과히 나쁘지 않겠다 하였소만, 그야 노인장께서 간청해 오셨다는 얘기는 아니 했소이다." 임역관은 공노인을 곁눈질해보며 실실 웃는다. "수고 많았습니다." "수고가 별 수고겠소? 거짓말 한 것밖에." "허허헛... 헛 예. 거짓말하는 수고 보다 더 큰 수고가 있겠습니까," "거짓말을 떡 먹듯 해야만, 눈에는 눈으로, 이빨엔 이빨로, 그런 말을 어디선가 들었소." "지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공노인은 안 늙은이처럼 입술을 오므리며 웃는다. 조바심하던 것이 성사되고 보니 저절로 느긋해지는 것이다. "결국은 그렇게 되면은 황부자가 이득을 놓친 셈이 아니오? 허허헛... 하긴 그 늙은네야 이날까지 꿩 먹고 알 먹고 노상 그렇게 해서 수만금을 쌓아 놨으니," 임역관은 싹싹하게, 얘기를 곧잘 한다. "조준구 그 사람도 이 돌을 뽑아 저 구멍에 메우는 격이니 피장파장일 테고, 그러면은 이해 득실이 어찌되는 게지요?" "뻔 한일 아니겠습니까." "뻔 한일이라면?" "빼앗긴 땅을 땅 임자가 제 돈 내고 다시 사들이는," "사들이긴요." "어쨌거나 제 땅 잡고 돈 내놓는 것도, 그렇지요. 분명 실은 실인 성싶고," "그건 이미 옛날의 실이 아니겠소. 찾게 되면은," "그러니까... 역관어근은 잡칸이나 늘이시오." 공노인은 역시 거간이다. 이 거래를 굳히기 위해 은근슬쩍 사례에 대한 정도를 비춘 것이다. "역관어른이라... 무색하지 않소이까? 하긴 역관이라는 업이 이쪽저쪽 말 건네주는 것이고 보면," 흰 머리칼 한 올 없는 머리를 흔들며 임역관은 뜻밖에도 호탕스럽게 웃는다. 술상을 마주한 두 사람은 흉금을 풀어놓고 잔을 나누며 임역관은 시국 얘기를, 공노인은 간도와 연해주의 사정을 얘기하며 해 지는 것을 모른다. "저 같은 무식꾼이 뭘 알겠습니까마는 자릴 잡아야 해요, 자릴. 어떻게 잡는고 하니 청국 사람이나 왜놈들 그늘을 피해서 제제가끔 생업을 가지야 하는 거고 더군다나 왜놈이 들어 설 수 없게끔, 더 이상은 들어설 수 없게끔 땅을 차지하되, 그놈들한테는 팔지 말아야 하고 조선 사람 자금으로 곡물이건 소 돼지건 거래를 틀어쥐어야 하고 농사꾼은 절대로 왜놈한텐 곡식을 내지 말아야 하고 하다 못해 잡화상 음식점 채소가게, 뭣이든 조선 사람이 해서 조선 사람 은 조선 사람 가게에서만 물건을 사게 해야, 암만 주먹을 쥐고 떠들어 봐야 소용없소. 할 수 있는 한 재물의 힘을 기르는 것밖에는. 그러니까 동족끼리 배아파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지요. 그 곳에선 큰 자본주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래야 대항할 수 있는 일 아니겠소? 저저히 총을 들고 싸울 수 없는 일 이고 그렇다면 실속 채우는 길밖에 더 있겠소? 아니할 말로 왜놈의 오푼변 빛을 쓰느니 조선 사람 육푼변 돈을 써라! 조선사람 돈이 왜놈 돈보다 비싸서야 될 말이 아니지마는 그런 기분으로 앞날을 내다보자 그 뜻이오. 용정만 하더라도 용정바닥에 조선사람 돈이 많이 돌아야만 그래야만 용정이 조선사람 입김으로 통하게 되는 거고, 다른 곳까지 뻗치기 난감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얘기지요. 안 그렀습니까, 역관어른?" "하면은 그 돈을 조선에 있는 전답에 묻어두고 쓰겠소?" 뜻하지 않은 역습에 공노인은 당황한다. "그, 그야 친일파놈, 그, 그렇지요. 친일파는 왜놈하고 다를 것이 없고, 조선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조선에서도 아까 지가 말심한데로 조선 사람들이 일심으로 뭉쳐서 하면은, 아무리 값이 싸도 왜놈의 물건은 안 산다는, 예 그렇지요. 내 무식한 국량에도 왜놈 속셈이야 뻔한 거 아니겠소? 달콤한 꿀을 발라서 빨고 나면 비상이 나오는 것처럼 저희들이 장바닥을 다 차지한 다음에야 부르는 게 값 아니겠소? 허니 실한 바람 사고 파는데도 그 이득이 조선사람 주머니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 생각 안 한다 면은 장차 그 놈들 머슴밖엔 해먹을 짓이 없게된다 그 얘기요." "그 말씀은 옳은 말씀이오. 일찍이 면암 최익현 선생께서 그 비슷한 말씀을 하셨지만, 애초에 망하기 시작한 꼬타리가 거기 있었던 거지요." "지는 본시 무식하여 아는 것이 없소 만 청국이 망한 것도 그 때문이라 하더만요. 그래서 백성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수차 난을 겪게 되었고 이번만 하더라도 철로를 백성들 자금으로 깔자 한 데서부터 시작된 일이라 하니, 나라에서는 외국놈들 빚돈 얻어서 하겠다 하고 빚돈 얻어 보아야 단물은 그놈, 외국놈들이 다 빨아먹고 빈 껍데기만 남아날 거니까, 이치가 안 그렇습니까? 하니 어떤 경우 어떤 사정이 있어도 그놈들 올가미를 쓰지 않으려면은, 어디 총칼만 가지고 나라를 빼앗습니까? 하 참 기가 막힐 일이지요. 왜놈하고 우리하고 어디 변변히 쌈질이나 했소? 알갱이를 쑥 뽑아 먹히니까 껍데기만 살짝 건드려도 그냥 짜부러지기 마련 아니겠소?" "허허헛, 노인장 대단하시오. 허허헛... 나 같은 처지야 친일파 등이나 쳐 먹고 살밖에 없지만, 허허헛...." 공노인의 흥분을 가라앉힌 듯 임역관은 말했다. "어이구 해가 깜빡 졌구마요." 임역관은 말렸으나 공노인은 일어섰다. "하면은 내일 오시겠소?" "내일?" "가회동 그자 소가에 함께 가기로 했으니까 기다릴 게요." "예, 예. 오지요. 오고 말고요." 임역관과 작별한 공노인은 대로를 내노란 듯 활게짓 하며 걸어 내려온다. 술이 거나하기도 했으나 조선에 나온 목적을 달성하게 된 데에 만족을 느낀 것이다. '나로선 생명 부지다마는 그놈의 얘기라면 귀가 아프게 들은 터이고, 이놈! 어디한번 망해 보아라. 네놈 얼마나 간악한 놈인지는 모르겠다마는 내 이공가도 만만치 않을 테니 조선 팔도 대국 땅까지 안 가본 데 없이, 네 놈 하나 잡아먹기 어렵잖을 거구마. 천하 악독한 놈 같으니라구, 흐흐흣... 누구한테 땅을 잡히는가, 누구 돈인가 그걸 알면은 기절 초풍 하겠지? 눈앞이 캄캄할 게야. 그렇게 또 일이 될 건 뭐라? 그것뿐이든가? 다음이 있지. 다음 남은 것도... 어허 취한다. 공가가, 내 이래뵈도 늙긴 늙었다마는 아직 쓸모가 있지이. 아무튼 이쪽 일을 마무리 해놔야, 그려면은 하동으로 내려가서 그중도 한분 더 만나보고 봉순인가 기환가 그 아이... 음 취한다. 참 기분이 좋구나.' 거리는 어둑어둑 해오는데 공노인은 두 활개를 저으며 벌렁벌렁 걷는다. '자연히 그렇게 되면은 한편쪽은 고향에 내려오게 될 거고 땅마지기나 얻어 부칠 거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영팔이 그 사람, 고향 못가서 환장인데 아무튼 지간에 그 공로가 봉순 그 아이, 역관어른도 속이 훤하게 트인 사람 이더마. 보기에는 골샌님 같이 곱상하게 생겼는데 쪼를 빼지 않고 영 사람이 괜찮아.' 나뭇짐이 지나간다. 팔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나뭇짐인지 아니면 싸게 팔려가는 나뭇짐인지, 공노인은 숙소로 정한 객주집으로 들어간다. "노인장 이제 오시우?" 마루끝에 나앉아 있던 객주집 주인이 말했다. "예."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소. 예쁜 기생 아씨요." "아아 예." 공노인이 방문을 열었을 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기화 혼자만이 아니었다. 진주서 물지게 지던 석이, 그러니까 조준구 손에 의해 왜 헌병에게 넘겨졌고 총살을 당한 한조의 아들, 석이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관수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기화가 상현을 설득하고 또 서의돈의 조력을 얻어서 석이는 여름부터 황태수네 집에 신부름꾼으로 와 있었다. 밤에는 야간 학교에 나가기로 하고. "네가 웬일로 또 왔나?" 공노인은 얼마 전에 혜관이 하동으로 떠나기 앞서 그와 함께 석이를 만난 일이 있었다. 그때 석이의 내력을 다소 알게된 것이다. "석이가 하도 쫄라서 찾아 안 왔습니까. 또 그 일이 어찌 되었나 궁금하기도 하구요." "그 일은 잘됐다. 다 되게 돼 있는 일이니까. 지금 역관어른 댁에서 술대접 받고 오는 길이 구만." "예. 하동에는 언제 내려가시겠어요?" "내일 그자를 만나기로 했으니," "내일...." 기화 얼굴이 일그러지고 석이는 가면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진다. "잘하셔야 해요." "그럼." "어떡하든." "아암 걱정 마라. 그 일이 마무리되면은 혜관스님을 만나보고 일단 용정으로 가야겠지. 한데 무슨 부탁이 있어서?" 공노인은 석이를 바라본다. "가기는 가지마는 내가 진주까지 가게 될랑가 그건 모르겠는데 니가 집 걱정이 되서 그러나?" "아닙니다." 석이는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그새 서울물을 먹은 탓인지 말끔해 보인다. "그러면?" "실은 다른 게 아니구, 여간 고집을 부려야지요?" 기화는 딱딱하다는 듯 석이를 힐끔 쳐다본다. 석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공노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준구 집에 들어가게 다리를 놔 달라는 거 아니겠어요? 석이가," "뭐라구?" 공노인은 펄쩍뛴다. "아니 아가 우찌 알고서?"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그게 지가 경솔해서..." 얼굴을 붉힌다. "아직 철없는 아이한테, 허 참 그런 얘길 하면 어쩌나?" 공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간 불쾌해 하지 않는다. "할아부지." 석이의 음성은 여전히 또박또박했다. "일이란 조그만 것으로도 그르치기 쉬운 건데 어째 으흠..." "할아부지, 지는 말입니다, 도로 찾을라 캐도 찾을 수 없는... 예. 지는 목숨을 걸어놓고 맹새 하겠십니다. 지는 아부지의 원수 조준구를 잊어본 일이 없십니다." "그러면 니가 그자를 죽이겠다 그 말가?" 공노인의 낯빛이 완전히 달라진다. 눈가에 노기를 띄고 기화를 노려본다.기화는 어쩔 줄을 몰라한다. "아닙니다." "그러면은!" "그놈이 망하기까지, 마지막 망하는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고 싶어서 그럽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자 눈앞에 알짱거려서 좋을 것 하나 없어!" "압니다. 하지마는 지는 목심을 걸고 의심 안 사게 처신하겄십니다." "철없는 아이가! 그런 짓 못한다." "지 나이가 열아홉입니다. 죽기로 결심했으믄 무슨 일이든 못하겄십니까 믿어 주시이소." "할아버지." 기화가 조심스럽게 거들어 준다. "석이는 좀 달라요. 입이 무겁고 내색하는 일이라곤 없어서 모두들 칭찬을 하지요. 너무 화만 내시지 마시고." 공노인은 화를 내면서도 석이를 살피고 있었다. 결심이 바윗돌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혜관이 석이를 두고 하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나 일은 결코 작은 일이라 할 순 없다. "그러나 그자가 너 얼굴을 알는지 모를일 아닌가." "아부지, 아, 부지가," 하는데 석이는 목이 콱멘다. "거 보라구. 그렇게 복받치는 울음 가지고서," "예 아부지가 끌리 갈 때 그놈을 한번 보았을 뿐입니다." 석이는 울음을 삼킨다. "하여간에 이 자리에서 당장 정할 일이 못 된다. 받아줄는지 안받아줄는지 안 받아줄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지마는 아직 나는 그자를 만나지 안했고 또 그런 일이라면 뭐니 해도 혜관스님하고 의논을 해야 하니까 우선," 공노인의 어세는 다소 누그러졌으나 일을 누설한 기화에 대해선 화가 풓리 않는 모양이다. 쓴맛을 다시며 내뱉는다. "여자는 할 수 없는 거다. 옛말에도 여자하곤 대사를 논하지 말라. 했지마는, 이세상의 저절로 되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조심하고 조심을 해도 일이 나 될라면 안 되는 법인데 어이구 참. 하기야 너 때문에 일이 돼가기는 하지마는 잘못될 양이면 애시당초 안 하느니보다 못하지." "잘못했어요." 기화는 순순히 빈다. 석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지내놓고 봐야 알 일이겄십니다마는 할아버지." "무슨 말을 또 할라 카노!" "지 한 말심만 더 들어주이소." "들으나마나," "아무튼지 간에 앞으로 그 집안일을 알아낼라 카믄 지가 그 집에 들어가 있는 기이 젤 상책이 아니가 싶어서 말입니다." "그거는 얼마든지 해줄 사람이 있다. 너가 걱정 안 해도, 그 뿐만 아니라 이일이 잘되면 너 아니라도 저절로 남이 원수를 갚아주게 되는 거고," 공노인과 석이의 고집은 꼭같이 맞서서 물러 설줄 모른다. 결국 혜관을 만나본 뒤 다시 의논하자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데 공노인은 속으로 석이의 끈기도 무던하다고 감탄하긴 했다. 밖으로 나온 석이는 어둠 속에서 울었다. "봉순이 누님, 미안합니다." 봉순이 누님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나왔다. 언제나 호칭을 빼고 말했었다. 아니 거의 말을 스스로 한일이라곤 없었으며 묻는 말에 대하여 그렇다거나 안 그렇다거나 그 정도의 대답이 고작이던 석이였었다. "내가 잘못했다. 너 원한을 생각하구서 내가 말한 것이," "지는 우떠허든 그 집에 들어가고야 말깁니다. 그 할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거맨치로 그놈을 직이지는 않을 깁니다. 직이고 나믄 그만 아니겄소! 누님! 으흐흐." 흐느낀다. 석이 우는 마음을 안다. 기화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짚신을 벗어들고 아비뒤를 쫓으며 절규하던 소년을 생각하며. "누님 지는 말입니다. 지, 지는 말입니다! 그놈 하나가 원수 아닙니다. 지 혼자 서러운가요? 누, 누님도 서, 서런 사람입니다. 고향의 어매 동생들도...으흐흣... 빨래품에, 냇가 얼음을 깨던 우리 어, 어매 손을 잊는다믄 나, 나는 개자식입니다. 으흐흣..." 어두운 거리, 지나는 사람 없는 길 위에서 남매 같이 서로 의지하며 흐느껴 운다. 헤어질 무렵 해서 기화는 코맹녕이 소리로 "나 열흘 후에는 전주 내려간다." "거긴 와요?" 석이 역시 코맹녕이 소리로 물었다. 아는 얘기 되물어 보는 심정을, 석이는 고개를 숙인다. 부끄러웠다. 묻고 나서 깨달아 졌던 것이다. 가슴을 저미듯 뼈를 까는 듯한 울음 뒤 돋아난 그리움 같은 것이, 석이는 기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발길을 휙 돌려놓는다. "그럼 지는 가볼랍니다." 어둠 속을 달음박질하듯, 석이는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가 잔소리 깨나 하실 거야. 하지만 열흘 지나면 떠날건데 뭐...' 기화는 어쩔 수 없이 서의돈을 생각한다. 서울을 떠남으로써 서의돈과의 사이가 끝난 것을 알고 있다. 소위 화류계의 소나기 같이 지나가는 사랑이다. 사랑은 일찍 끝내고 재물에 얽힌 정사가 긴 것이 또한 화류계의 생태, 기화는 이미 그것을 터득했다. 재물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명성에 연연한 것도 아니면서. 그러나 기화는 자신보다 사나이를 더 알아버렸다. '처자가 있고 앞날이 구만리 같은데... 참봉댁 서방님이라고, 진심으로 날 생각해주신 것만도 잊을 수 없을 거야, 난, 난 왜 이럴까. 뿌리 없는 나무같이 내가 그런 거야. 내 마음이 그런 거야. 전주 내려간다고... 끝까지 해본다? 안 될 거야.' 집 앞 골목을 막 들어서는데 누가 앞을 가로막는다. "뉘시오!" 말없이 상대는 기화의 팔을 낚아챈다. "아이 서방님도,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서, 밤길에 놀라지 않아요." "마음이 바빠서 방에 앉아 기다릴 수 없더구나." "들어가셔요, 집에." "아니다." "그러믄요?" "한강에 나가서 선유나 했으면 오죽 좋겠느냐?" "망령이셔." "아니면 우리 도둑질이라도 해서 나룻배타고 달아날까?" "뭐 땜에 도둑질을 해요?" "글세 말이다. 허허헛..." "들어가셔요, 집에." "싫다. 무작정 밤길을 걸어 보자구나. 걷고 있노라면 무슨 좋은 생각 올지도 모르지. 선관 선녀가 되어 득천할 궁리가 생길지도," "뭐, 저승 삼도천을 함께 건너게 될지도 모르구요. 그렇게 하세요 무작정 걸어 보겠어요."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듯 가까이 다가서서 걷기 시작한다. "기화는 삼도천을 어떻게 알지?" " 잘 몰라요." "어떻게?" "어려서 자란... 중 되려다 만 아이, 아이하구 함께 자랐으니까 어릴 적부터..." "..." 말한 데로 이들은 무작정 걷는다. 사람이 지나가고 불빛이 지나고 결국 찾아간 곳은 남산이었다. "기화." "예." "나도 일본으로 건너갈까 싶어." "잘 생각 하셨어요." "넌 역시 그렇게 밖에 말못하겠느냐?" "예." "난 이런 생각을 해봤어." "..." "기화도 일본에 갈 수 없을까 하구," "예?" "일본에 말이야. 나랑 함께." "일본에 가서 전 뭘 하지요?" "..." 오솔길, 소나무 밑동에 서의돈은 털썩 주저앉는다. 풀벌레가 운다. 어둠 속에 달빛도 없는데 서울 장안도 숨죽은 듯 조용히 누워 있는데, 정녕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숲속은 설렁한 야기에 오소소 몸짓하는 것 같고, 풀벌레만 우는가. 부엉이도 울어 쌌는다. 서의돈은 손을 뻗어 기화를 제 옆에 앉힌다. "사실..." 덧없는 이야기다. 기화는 풀벌레 밤새 울음에 귀를 기울인다. "사실 자신 없는 얘기지. 기화하고 일본으로 함께 간다면," "서방님하고 저하고 함께 유랑할 돈은 어디 있어요? 댁에서 아신다면 서방님께 보내드리는 돈도 끊으실 텐데요." "그럼 생각도 못 해보나?" "..." "생각도 아니해본다면 이 세상 무슨 재미로 살어. 나 일본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기화는 기생이라 생각지 말구 공부를 한다 면은, 그곳에 가면 시시한 학교도 많다던데 기예 학교, 그러니까 수예 학교 같은 곳이겠지만, 아껴서 쓰면 내 한몫으로 둘이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서방님 우리 만주로 갈까요?" 하는데 순간 길상이 기화 눈앞에 스치고 지나간다. 생생하다. "만주?" "예. 그것도 자신 없으시죠?" "만주로 가면 어떡하나?" "그곳에 가면 지가 벌 수 있을 거예요. 서방님은 독립군이 되구요." "독립군... 너는 기생집을 하겠지." "밥집을 하겠어요." "그거 진정이냐?" "생각해본 거지요." "그래... 그럴 거야. 생각을 해본다아. 그러고는 말이 끊어졌다. 허망한 얘기였던 것이다. 그들은 다같이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얘기했다. 화류계의 사랑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소나기였다. 긴긴 여름 무더위 속에 내려지는 소나기. 15장 면대 기생출신인 조준구의 소실 향심은 속이 부글부글 끌었다. 팔자타령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어제 당한 일만 생각하면은, 삼십에서 두서넛을 넘긴 나이, 실상 향심이 자신도 제 나이 서른둘인지 셋인지 잘은 모르고 있었다. 출생이 좀 복잡하여 자라기론 이모뻘 된다는 사람, 다방골 근방에 있는 집에서였다. 생일을 차려 먹은 기억도 없고... 서른셋인지, 둘인지, 매를 맞아본지가 십 년이 넘을 란가? 이십년 전에는 술 주정꾼 이모부한테 무척 매를 맞았었다. 그래도 밥을 굶기는 이모보다 나은 편이었다. "내가 너 이모부냐? 이모부? 이모가 어딨어! 촌수로 따지자면 팔촌 십촌도 훨씬 넘을텐데 이모는 무슨 놈의 말라비틀어진 이모야! 울기만 했단 봐라! 그래도 아가리 찢어줄 테다! 찢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으며 입술을 쥐어박던 눈알이 시뻘건 사내, 며칠 전에도 찾아 왔었다. 삼을같이 어석어석 바래인 수염, 살은 피둥피둥 쪘는데 때국이 흐르고 줄레줄레 해진 옷을 입고서. "야앗! 향심아! 너, 혼자 고대광실 높이 좌정 했으면 다냐? 그래 나 같은 건 눈앞에 뵈지도 않는다 그거로구나 야아! 너 향심이 올챙이 적 생각 안 나냐?" 보자마자 내지르는 일성은 육 년 동안 달라진 것이 없는 그 예의 구절구절 이다. 유서처럼 백년이 가도 아니 변할 것인가. 삼을 같은 수염을 흔들며 그는 말을 이었다. "어느 놈을 붙어 내질렀는지 내질러만 놓고선, 그 핏덩이 기른 이 내, 내란 말이야! 알겠냐? 그래 넌 흙 먹고 컸더란 말이야? 바람 마시고 컸더란 말이야?" 신돌 위에 한 발을 얻고 한 팔의 소매를 걷어올리며, 향심이 안방에서 지폐 석 장을 쥐고 나온다. "난 부자든 거지예요. 내 속을 뉘 알겠소. 이모부 제발 이젠 날 놔주어요. 이게 마지막 이예요. 자아, 받으시고 제 죽는 꼴 보시려거든 또 오세요." 죽는 꼴 보려거든 또 오라는 말 역시 육 년 동안 내내 해왔었고 앞으로도 또 말할 것이 분명하다. "난부자 든거지? 백옥 같은 손가락의 그 반지며 그 봉채 비녀며 그게 그럼 구릿쇠란 말이냐?" "몰라서 그러세요? 이건 나으리가 아시잖아요. 없어져 보세요. 그양반 성미 금방 순살 보낼 거예요. "그런가? 헤헤헷헷... 실은 나도 말씀이야, 안되면 물꾼 이라도 될까 했다만 이 나이 해가지고 남의 눈도 생각해야지. 안 그러냐? 핏줄이야 어찌 되었건 내가 널 길렀으니 명색이 애비 아니겠냐? 이모부, 이모부 했지만 서두," "...' "아, 그래 봉을 물었다는 장안의 평판이 아니더라도 너 얼굴의 똥칠이요 헹세하는 그 댁 나으리 체면은 또 뭐가 되겠냐. 육십 나이에 물지게 지고서 다방골을 어슬렁거린다면 말씀이야." "누가 그런 걱정 해달랬어요? 똥칠을 하건 회칠을 하건." 향심은 눈을 흘겼다. "허 말이야 쉽지만서두 남들 평판에 무심할손가?" "기가 막혀서, 이모부! 오늘 이때까지 적게 가져가서 물꾼 된다는 거예요?" "그런 말 마라. 운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단다." 돈 삼 원을 쥐고 비굴하게 웃으며 늙은 사내는 돌아갔다. '세상 고르잖을 걸 한타하면 뭣하리. 돈 이백 냥 친정집에 받아주고 후취로 들어간 가매는 늙은 남편, 남 낳은 자식, 보는 것도 딱할텐데... 흐음, 사시장철 빨래품 바느질품, 그런 인생도 있은 것을, 한탄하면 뭣하리, 살아주고 가는 게야.' 향심은 가야금을 내려서 줄을 고른다. 손끝에 닿는 줄이 부르릉 떨면서 운다. '이모부 생각은 왜 했을까? 어제 매맞은 때문일 게다. 십여 년만에 매를 맞았다. 자 그러면 가야금이 내 대신 울어 주겠지, 서러워하겠지. 오늘같이 맑은 날엔 가야금도 제 목청을 뽑아줄게 아니야?' 가야금을 누르고 퉁기는 손끝에서 청아한 소리가, 구슬같이 물방울같이 새벽에 사라지는 별같이 우는 밤새 소리같이 흐느낌이 되고 통곡이 되고 한탄이 되면서 향심의 얼굴에 짙은 우수가 흐른다. 절세가인은 아니지만 어딘지 투박해 뵈는, 미모에 가까운 얼굴이다. 그 얼굴은 우수가 흐르면서 작아지고 커지는 것만 같다.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가야금을 타고 넘어간다. 별안간 향심은 다섯 개 줄을 모두 움켜잡은 듯 한꺼번에 퉁긴다. 둥당당둥! 요란하고 어지러운 소리와 더불어 가야금은 무릎에서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휴우우!" 어제 매맞은 생각이 또 났던 것이다. 오십에 가까운 여자의 흉측스런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해질 무렵, 그러니까 어제 저녁 향심은 교동집에 불러 갔었다. "이 계집! 내 성미가 어떤지 알아야겠느냐?" 밤낯없이 거꾸로 영험하다는 약을 상용한들 나이를 거역할 것이던가. 눈꺼풀이 축 쳐져서 본시부터 작았던 눈은 더욱 심술궂게 탐욕스럽게 작아졌고 빛깔이 뚜렸하지 못한 눈동자는 몹시 불결했으며 주름 사이엔 분이 밀려서 희뜩희뜩 얼룩이 졌고 도토름하게 솟은 입술만은 주름하나 없이 번들거렸다. 제 일신만의 안락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던 조준구의 정처 홍씨, 십 년 동안 추하게 늙은 모습이었다. "마님. 어째 역정을 내시오?" 향심은 얼굴을 수그리며 물었다. "이 계집이? 그래 몰라서 묻는 게냐?" "예. 무슨 영문인지," "사내 오장 빼먹은 게 업이고 보면 과연, 누가 기생 아니랄까 봐서? 허나 내가 사내 아닌 여인인 것을, 사내한테 하던 수작 나한테도 통할 줄 알았더냐? "..." "영감인지 탱감인지, 일 한판 크게 친답시고 별의놈의 상것들까지 끌고 와서 낮밤 가리지 않고 소란을 떠는 형편이고 보니 내 너를 오늘까지 눈 감아 두었거늘, 화류계의 종사한 계집이면 첩년의 처신을 어찌 해야 하는 것쯤은 알 게 아니냐. 한 달! 한 달이야! 한 달 동안 집에 발걸음 아니하다니! 지금 어디 있지?" 향심은 고개를 수그린 채 대답을 못한다. 한달 동안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면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회동 집에도 어제 낮에 잠시 왔다가 임역관을 만나 뒤 나갔고 그러니까 남산 쪽이라든가 숨겨놓은 여자 집에 한달 내내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이화학당을 다니다만 신여성이라든지. "향심이 낭패 볼까 걱정이다만 그보다 교동마님인지 뭔지 그 여자 처지가 아주 딱하겠는걸?" 설중매라는 기생이 귀뜸을 하여 말했었다. "왜요, 언니?" "이 개명천지, 처녀인 데다가 식자 있는 신여성이겠다, 늙은 거 밀어내고서 정처자리에 앉겠다면?" "어림이나 있는 일 이예요?" "그건 모를 일이야. 성미가 대단하다니까, 게다가 왜놈 다 돼가는 자네 영감한테 늙은 도깨비보다 젊은 신여성이면 뽐 내볼 만도 하구." 그러나 향심은 들은 데로 말을 전할 처지가 못된다. "어째 대답을 못하느냐! 안방 벽장 속에라도 가두어 두었느냐?" "설마." 실소한다. "설마라구? 이 계집이 묻는 말엔 대답을 아니 하구서 웃어? 감히 뉘 앞이라고 아가리 헤 벌리고 웃는 게야?" 축 쳐졌던 눈꺼풀이 치켜 올라간다. 누리딩딩한 눈 흰자위가 섬찟하게 드러난다. "사내 업인 하루밤이 어려우냐? 기왕의 노류장화, 우리 집 범의 장다리 같은 하인 놈 몇 보내주랴?" 향심의 얼굴이 빨개졌다. "과하십니다." "과해?" 기생첩은 종첩과는 다르다. 옛날에 말려 죽이다시피한 삼월이하곤 다르다는 얘기다. 성질이 무던하기는 하나 죽여줍시오 할 향심도 아니거니와 가무이든 용모 자태이든 기생이란 남자의 노리개인 것이 공인된 업이고 보면 남의 첩살이가 도덕에 어긋남을 새삼스럽게 말한 계제도 아니요 또 비록 천업이긴 하나 기생 사회의 특수성이란 게 있다. 자고로 내로라는 풍류객 호걸은 말할 것 없고 부유층 권력층과 부단히 접촉하는 만큼 이들 사이에 조성되는 여론이란 상당히 전파력을 갖는 것이며 사내들 행세하는데 영향력이 있다. 함에도 불구하고 홍씨는 향심이 무릎 앞으로 바싹 다가가 앉는다. "과하다 했겠다? 호강에 겨워서 요가에 똥 싸는 소리 아니 나게끔 내 버릇을 가르쳐 주마." 향심의 뺨에서 세찬 소리가 났다. 졸지간의 일이어서 향심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뺨을 감싼다. 다음엔 앞가슴을. 옷고름 두 개가 와드득 뜯겨 나갔다. "마님!" "오냐." 머리채를 잡으려던 홍씨는 향심이 피하는 것을 보고 대신 얼굴에 주먹질을 한다. "무슨 짓이오!" "내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던 참이었어! 뭣이든 걸리기만 하면 박살을 낼 참이었단 말이야! 손님 접대가 잦아서 얻은 계집이라기에 기방 출입이 잦은 것보다는 낫겠거니 해서 눈감아 두었다만 본가를 개떡으로 아는 네년 버르장머릴 고쳐주어야겠어! 이년! 이 상년아! 사내 없이 하루를 못 살겠으면," 입에 담기조차 차마 부끄러운 음담 패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빛깔이 뚜렷하지 않은 눈동자가 추잡스럽게 이글거렸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도투롬하고 주름하나 없이 번들거리는 입술은 나불나불 낙지처럼 유난해 보였다. 향심이 넋이 쑥 빠지는 것만 같았다. 빛 좋은 개살구라든가? 이름이 양반 댁 어부인이지, 무식하고 염체 없고 도대체 사람인지, 상스럽기가 머슴방 도는 갈보 곁방 나앉을 게야, 등등 풍문이 돌았으나 겪어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겠거니, 새삼 향심은 개탄을 했는데 쥐어박고 욕설하는 것보다 더 헐떡거리며 얼굴 위의 뿜어내는 홍씨의 더운 입김이 견디기 어려웠다. 마치 지옥의 열탕 속에 빠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고정하시오 마님. 마님께서 못 살라 시면 아니 살겠소." "뭣이? 어그그 허리야, 게 누구 없느냐!" 못 들은 척 하는지 집안에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향심은 재빨리 물러나 앉으며 "심화 끊이실 것 없소. 기생팔자야 노류장환데 만나고 갈라지는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어그그 허리야! 게 누구 없느냐!" "또 발명한다고 꾸중하시겠지만 한 말씀 드릴 것은 나으린 가회동 집에 계시질 않소." 향심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떨어진 옷고름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밤길을 돌아왔던 것이다. '세상 고르잖은 걸 한탄하면 뭣하리. 한탄할 것도 없어. 그 늙은 여잔들 나보다 한푼 나을 것 없지. 원하면은 범의 눈썹도 구하겠지만 마귀 같은 그 얼굴이야 어찌 하누. 양반댁의 어부인? 무슨 놈의 썩어질 양반이고. 내 기생팔자하구, 천만에 아니 바꾸겠다.' 사악하고 탐욕스럽고 음란한 것 말고도 내외가 닮은 점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미련할 지경으로 우매하다는 것이다. 향심은 허겁지겁 일본인 미야모도에게 합자금을 내주고 단독 권리를 갖게 된 광산이 폐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언젠가 조준구와 임역관이 주석에서 광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옆에서 술시중을 들고 있던 향심이 임역관을 향해 피식 웃은 일은 있었다. 임역관은 눈을 꿈벅꿈벅하다가 향심에게 굳이 감출 생각이 아니었던지 피익 웃었던 것이다. 명색은 여하튼 한지붕 밑에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녀의 이같이 외로운 관계가 있을까. '하긴 나도 나쁜 년인지 모르겠다. 섬길래야 섬겨볼 구석이 있어야지. 불쌍한 그 병신 자식을 시골구석에 쳐박아 놓고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던...사람 아니야?' 매맞은 일은 잊어버리고 이야기로만 들어온 조준구의 외아들 꼽추도령, 아니 이제는 꼽추서방님 생각을 하며 향심이 언짢아하는데 "아씨, 나으리 오시오." 행랑아범이 밖에서 말했다. "알았어." 향심은 거울 속에 얼굴을 잠시 비춰보고 일어선다. 신돌 위에 내려섰을 때 연회색 양복에 챙이 약간 짧은 듯싶은 중절모를 쓴 조준구가 중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공같이 얼굴이 동그랬다. 배도 그러했다. 여전히 상체보다 다리는 짧았다. 비록 비대해져서 얼굴은 공같이 동그랬으나 십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목구비는 잘생긴 편이었고 옷차림도 빈틈이 없다. 아무 말 없이 조준구는 안방으로 들어왔다. "옷 갈아입으셔요?" "음." 향심은 장 속에서 옷 한 벌을 꺼내어 갈아입는 것을 거들어준다. "교동에 가셨습니까?" 벗어던진 양말을 치우며 향심이 묻는다. "아니. 왜 묻는 게야." "어제 교동에 갔었어요." "자네가?" "예." "뭣하러 거긴 가누." "제가 간 게 아니구 마님께서 부르셨어요. 한 달이나 아니 드셨다 하시더군요."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거기 일 말인가?" "예." "그럼 자네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이냐?" "다 안는 일을 저라고 모르겠어요?" "섭섭한가?" "섭섭하기론 교동마님이시죠." "그럼 교동에서도 안다는 겐가?" 조준구는 안석에 몸을 기대고서 담배를 뽑아문다. "모르시는 눈치더군요." "알면 귀찮지. 늙어빠져도 투기심은 남아 있어서," 조준구는 옛날과 달리 마누라를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모양이다. 담뱃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숙이 빨아서 연기를 뿜어내며 "그보다 손님이 온다 했는데." "임역관이 모시고 올 손님 말씀이지요?" "모시고 오긴 그까짓 것, 장살 해서 돈푼이나 모은 늙은인가 본데 후일 쓰일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럼 술상 준빌 해야겠습니다." "있는 것 가지고 하면 돼. 내 집 안방에 들오는 것만도 과분할 터인데, 본가는 아니지만," "본가면은 과분이 아니라 구분이겠수." "또, 또 저런 소리, 요망 떨지 말라 일렀거늘," 향심은 야릇하게 웃는다. "흥, 본가... 어느 사당패가 그리 상스러울까." 마침 임역관이 왔다는 행랑아범의 전갈이다. "어험! 들어오라 일러라." 조준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향심은 건넌방으로 건너가면서 신돌 위에 신발을 벗는 임역관을 보고 웃으며 허리를 굽힌다. 임역관이 공노인을 데리고 안방에 들어갔을 때 "어서 오시오 임역관,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얼굴에 웃음을 띠고서 조준구는 그들을 맞이한다. 공노인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그 무표정한 얼굴에 곁눈질을 하며 임역관이 말했다. "공노인께서는 달리 볼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조공과의 언약도 있고 해서 내가 억지를 썼소이다. 아무튼 앞으론 서로 거래가 잦을터인즉, 진작부터 통성명은 했어야 하는 건데," "아, 그래요?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소이다. 앉으시오." "예. 지는 공필선이라 합니다. 태생은 강원도올시다." 무표정의 얼굴이나 말씨만은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다. "아 그렇소? 나는 조준구요." "예. 역관어른을 통해서 성함을 들었습니다마는," "나도 노인장 이름은 들었소만," 조준구는 처음 웃음으로 맞이할 때와는 딴판으로 거만스럽다. '흥, 황부자한테 돈을 얻을 때와는 사뭇 딴판이구먼, 하긴 지금으로선 발 등에 불 떨어지진 않았으니까. 좀 안된 얘기지만 자금에 감질이 나면은 저 초라한 늙은이한테 절하는 것도 불사할 테니.' 임역관은 사람 좋은 듯한 미소를 머금었으나 속으론 냉소한다. '처지가 불우하면은 지렁이같이 천하고 처지가 나아지면은 독사같이 간악하고, 그러면서도 맹꽁이라...' 최참판네 만석살림을 손에 넣은 지도 언 육 년인가? 아니 윤씨부인이 죽은 햇수를 따지자면 십일 년 세월인데 그간 날로날로 늘어가는 것은 체중과 교만, 체중이야 달갑지 않는 것일 테지만 모든 사람을 눈 아래로 보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높이 좌정해 있는것을 인식시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교만이야말로 재물에 대한 더러운 욕심과 버금되는 욕망일진대 이득을 가져다줄 공노인에게 웃음을 보내는 것도 당연지사이나 거만해지는 것 또한 당연지사, 볕나고 먹구름 가고, 대인에서 시시각각 변화의 되풀이는, 왕시 기어서 오라 하여도 불사했을 임역관에겐 말할 나위 없는 것이고 구세주처럼 우러러보던 왜인에 대해서조차 차한에 부재 아니었으니. "그래 임역관에게서 대충 얘기는 들었소만," 이번에는 성명 삼자 얘기가 아니고 거래의 내용에 관한 얘기다. 공노인은 여전히 무표정인 채 "지도 역관어른으로부터 대충의 얘긴는 들었습니다마는," 돈을 꾸어주는 사람의 처지를 은근히 과시한다. 임역관 눈은 장난스럽게 움직였고 조준구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다.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아, 물론 그랬겠지--요." 억지로 붙이는'요,'공노인의 눈알이 빙그르르 돈다. "공노인께서는 조공과 거래를 터놓는 게 얼마나 앞으로 유리한 것인지 차차 아시게 되실 거외다.” 임역관은 은근슬쩍 북을 친다. "예, 그야 뭐, 역관어른을 말심할 것 같으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어른이니까.” "그건 과찬이시고 나보다 조공이 그런 분이오. 뭐 그런 분이나마나 장차 조선 재계를 주름잡을 것이니,” "예, 그러시겠지요. 지도 서울바닥에는 친분 있는 대감이 몇 분 계시고 해서, 재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는 대개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또 관아 출입이 잦은 일본인 대상과도 다소는 거래 가 있고,” 눈도 깜박이지 않고 공노인은 주워섬긴다. 임역관도 어이가 없는 표정인데 그 반응은 조준구한테서 재빠르게 나타났다. "친분 있는... 대감이라면?" "예" "하면 뉘시오." "그것은 좀, 이름 밝히기가 거북합니다. 모두 돈을 거래하는 처지고 보니!” "하긴, 그렇기도 하겠소." "예. 그거는 피차 지켜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빚돈 쓴다는 소문도 달가운 것은 아닐 것이고 이 늙은 것 형편으로도 돈이 많다는 소문 좋을 것 한푼 없지요.” 조준구는 보잘것없는 이 늙은이의 실속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해서 장안의 모모한 양반의 형편을 다소는 알고 있습니다만 조참판,” 하다가 마치 내가 잘못 안 것이나 아닌지 하는 투로 물어보는 듯 임역관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잘못이 아니라고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여줄 임역관도 아니거니와 공노인의 능청에는 다만 아연할 뿐이었던지 임역관은 멍청하니 쳐다본다. "하, 제가 얼핏 들었기에, 해서 조참판댁 형편은 도통 모르는 터이라,” "그러면은 내키는 대로 하시오." 조참판댁 형편은 도통 모른다는 말에 조준구의 자존심이 상한다. 조참판이라는 말투로 미묘한 것 같고, 그러나 조준구는 왠지 한풀 꺾인다. 노인의 정체가 차츰 대단한 것같이 생각되는 때문이다. 말씨는 비굴할 정도로 공손했으나 태도가 자신에 넘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 그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구 우선 술이나 합시다." 어조를 누그러뜨린다. "거 좋소이다." 갑자기 임역관은 활기에 넘쳐서 말했다. 조준구는 어거지로 임역관 기분에 동조하듯 하며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온 향심에게 "술상 들여오게, 조심해서 잘 차리도록." 그러나 차려온 술상은 초라하기가 이를데 없다. 있는 것 가지고 하면 돼, 내 집 안방에 들어오는 것만도 과분하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말 앞장세우려고 일부러, 그러니까 골탕을 먹일 심산이었던 것이다. 과연 조준구의 얼굴은 푸르락노르락 눈꼬리가 올라가고 내려가고 "아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저어," "저어고 뭐고, 다시 차려와." 조준구는 신경질을 꾹꾹 누르고 행여 아까 한 말을 향심이 무심코 지껄일까 두려워하며 말했다. "허허어, 무신 말심을, 억만장자일수록 요식을 절용하는 법인데 이만하면 진수성찬이오. 재물이란 뼈로 깎듯하여 모은것이고 보면, 자고로 장자의 도가 있으니, 해서 지도 찬이 두 가지 이상이면 혼벼락을 내지요.” 꿀먹은 벙어리. 조준구의 기는 여지없이 꺾이고 말았다. 향심은 쓰거운 웃음을 띤 채 처마끝에서 맴돌고 있는 흰구름을 바라본다. 그까짓 정도, 조준구를 난처하게 했다 하여 어제 매맞은 것에 분풀이가 된 것처럼 자위하고 있는 자신이 서글펐던 것이다. '광산이 그렇다는 걸 내가 알면서 말 안 했다... 그걸 안다면? 배은망덕한 년! 이 목을 쳐죽일 년! 할 게야. 잡아먹으려 들걸?' 쌍꺼풀이 굵은 눈을 딩굴딩굴 굴리며 덤벼들 조준구 얼굴이 떠 오른다. '마님께서 못 살라시면 아니 살겠소.' 향심은 어제 교동에서 한 자신의 말을 생각하며 또 희미하게 웃는다. '심화 끊이실 것 없소. 기생팔자야 노류장환데 만나고 갈라지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흥씨는 살지 말아라, 하지는 않았다. 살지 말라 하지 않는 이상 향심이 스스로 떠날 생각은 없다. 처마 끝에 걸렸던 구름이 해당화 잎새를 스치며 흘러가고 있다. '갈 곳이라곤 다방골밖에 더 있어? 대목장 다 본, 삼십을 넘긴 내가 다방골로 돌아간들 어느 누가 두 팔 벌리며 반가이 맞아주리. 그곳이나 이곳이나 다를 게 뭐 있나. 술자리에 앉기는 매일반, 어차피... 살아주는 게야. 정이 없으니 미울 것도 없고 남 보듯 살면 되는 게야.' 찬모가 다시 차려낸 술상을 행랑아범이 들여온다. 향심은 술상을 잠시 살펴본 뒤 육간대청을 미끄럼 타듯 소리없이 술상을 뒤따른다. 옥색 관사치마가 느긋하게 흔들린다. 몸짓이 의젓하고 나이에서 오는 당당함이 있다. "불찰을 용서하시오, 나으리." 아무 일도 없었던 표정이다. 조준구, 임역관, 어느편인지 모를 시선을 보내며 향심은 사과한다. "불찰을 알았으면 손님께 술이나 권하게." 점잖게 말하긴 했으나 조준구의 얼굴은 어지간히 복잡하다. 어디다 대고 화를 내야 할지 그것도 애매하거니와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화를 내려 해도 꼬투리가 없다. 그런데 볼품없이 초라한 늙은네가 자신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우롱을 하고 있다는 느낌, 왜우롱을 하는가.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든 무엇이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조준구를 마음속으로 비웃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양보하는 게 좋은가, 작정하기 어렵다. 향심은 다소곳하게 술자리 한 모서리에 몸을 가눈다. 그리고 백자 주전자를 술잔에 기울인다. 잔마다 호박색 술이 넘실거린다. "자아, 그러면은 술잔 드시오." "예" "임역관도 드시오." "들지요." 술 한모금을 마신 조준구는 "술잔을 나누고 있노라면 서로 신분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다손 치더라도 자연스럽게, 노인장 그렇지 않소이까? 친숙해질 수 있는 게 사내장부들," "아암요, 그렇고 말고요. 해서 때로는 불로주라고도 하고," '뚱딴지 같은 소릴 하는군. 무식꾼이라 할 수 없단 말이야.' 조준구 비웃음을 띠는데 임역관이 "허허어, 개명 양반인 조공께서 어찌 그런 숫된 말씀을 하시오?" 신분 운운에 대해서 한방 놓은 것이다. "실은 내 말이 숫된 게 아니라 임역관 비윗장을 긁어서 그러시는 게지요. 하하핫... 핫핫..." 임역관은 조준구에게 조심하라는 듯 눈짓을 한다. 향심은 고개를 숙이며 손가락의 금반지를 돌리고 있었다. "조공은 늘상 저런 성미니 노인장께선 개의치 마시오. 왕시 안동 김씨네와 더불어 풍양 조씨네 세도가 좀 하였소?" 공노인의 기분을 매우 존중하고 염려하는 듯하면서 한편 조준구를 추켜세운 것이다. 조준구의 심기가 확 풀어진다. "아암요. 지가 역관어른을 하늘겉이 우러러보고 곧은 심성을 태산겉이 믿기야 합니다마는 참판댁 나으리 지체가 어떤 것인지 그것쯤은 알고 있소. 개의하고 안 하고가 어디 있겠소.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허허어...역관어른께서도 까마득한데 지같은 늙은 것이." 참판댁이란 말은 여전히 미묘하였으나 임역관보다 한술 더 뜨는 공노인의 말이 조준구에겐 퍽이나 만족스러웠다. "세상이 골망태가 되어 이제는 남의 나라에서 벼슬을 받는 처지긴 합니다마는 그럴수록 우리 임금님께서 내린 지난날의 벼슬 이름이 더 소중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야기는 또 엇길인데, 아까 불로주란 말도 생각이 났고, 아무튼 아득한 조상의 벼슬이긴 하지만 정확히는 조참의댁이라야 옳은 것이고, 그러니까 합방 후 대일본제국 천황폐하가 내리는 작위와 은사, 그 영광에 목욕할 처지가 못 되었던 피라미 친이라 조준구, 그의 선망을 달래는 데 공노인의 말은 매우 적절하였다. "그야 말할 나위 있겠소? 그자들 거득먹거리는 꼴이라니 온, 도무지 눈이 씨어서, 한 세월 전만 하여도 문객 노릇 하던 놈이 백작이다 뭐다." 임역관이 허허 하고 웃는다. 향심은 술잔에 술을 채우고, "그는 그렇고 노인장께선 연치가 어찌 되시오?" 문객 노릇 하던 놈이 백작이다 뭐다, 송병준을 가리킨 말인데 더 이상 거론하기 뭐했던지 조준구는 화제를 꺾었다. 공노인은 술잔을 놓으며 "나이랄 것 있습니까. 조만간에 환갑상을 받아야 할 처지긴 합니다마는 차려줄 사람이나 있을지 모르겠구마요." "그러면 자손이 없다 그 말이오?" "예." "허어..." "팔자에 없는 모양입니다. 세월이 유수 같아서 하루아침에 흘러가 버린 것 같지마는 나이를 생각해보니, 예, 피땀으로 모은 재물 뉘한테 전자하고 돌아가야 하는가, 비라도 부실부실 내리는 밤이면은 허무하고 마음이 설픗해지기도 하고." "그것 참 억울하겠소." '저자, 저 어리석은 위인 좀 보게? 후손 없단 말만 들어도 구미가 동한다 그겐가? 하기는 도둑질이란 한번 배우면 안 하고 못 배기는 거구... 허어, 그러나 저 씨꺼먼 마음보 때문에 제 망하는 걸 모르고 있으니 세상에 이치같이 절묘한 게 어디 있을라구. 밤하늘의 그 수많은 별들의 운행같이 삼라만상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거란 없는 게야. 돌아갈 자리에 돌아가고 돌아올 자리에 돌아오고, 우리가 다만 못 믿는 것은 이르고 더디 오는 그 차이 때문이고 마음이 바쁜 때문이지. 뉘우침말고는 악이란 결코 용서받을 순 없는 게야.' 임역관은 공노인과 조준구의 수작을 바라보며 폐광을 생각한다. 악인 조준구를 그같이, 그야말로 절묘하게 몰아붙인 완전한 계략을, 추호의 의심 없이 벌써부터 금방석에 앉은 것 같은 조준구의 살집 좋은 얼굴을, 웃음이 치민다. 흑심은 흑심에 의해 타도되는 이치를 어찌 절묘하지 않다 할손가. "형님 한 분이 있어서 내 반생을 걸고 모은 재산은 조카들에게 넘어갈 것이겠지마는 형님의 재산이 저보다 월등하고 보니 그 자손들이 생광스럽게 생각이나 할는지요." "재물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두면은 더 두고 싶은 게 인간의 상정 아니겠소?" "글쎄올시다. 좋은 만큼 근심걱정도 많아지는 법이니." "형님께서는 뭘 하셨기에 그리 많은 재산을 모으셨소?" "예. 하얼빈에서 약종상을 하고 있지요." 바람 잡아 다니다 죽은 형을 어느덧 엉뚱하게 분장을 해서 공노인은 등장시킨다. 그러나 즉흥적으로 한 말은 아니다. 서울로 오기전에 혜관을 따라 연추까지 갔었던 공노인은 그곳에서 삼 일을 묵는 동안, 자연 용정촌 상의학교에 있었던 윤이병의 얘기를 듣게 되었고 그곳 사정을 듣다 보니 이 사람 저 사람 얘기가 나왔는데 심운회와 하얼빈에서 약종상을 하는 그의 형에 관한 것도 잡담에 끼여든 것이다. 그러니까 귀동냥한 것을 신빙성을 굳히기 위해 써먹은 것이다. "아아 그래요? 그러니까 거상이시군요." "그런 셈이지요." "청국 땅에서 거상이라면 대단할 거요." "워낙이 땅덩어리가 크고 사람도 많은 곳이어서 그럴밖에요. 서울서 내노라 하는 장사꾼도 그곳에 가면은 구멍가게, 좀 심하게 말하자면 그렇지요. 저하고는 달라서 형은 풍신도 좋고, 조선서는 상사람이라 하여 핍박도 받았으나 그곳에서는 공가성 때문에 후대를 받은 셈이지요. 조상을 따지잘 것 같으면은 세상에 왕손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지마는 그 숱하게 있던 왕들보다 중국에서는 공자를 더 떠받혀 모시는 모양이니까 아마 그렇지 않나 싶고, 허허헛..." "조공. 아무래도 밑천 뽑기 어려울 것 같소." 임역관의 핀잔인데 그러나 거드름을 싹 가라앉혀버린 조준구는 허허헛! 하며 사람 좋은 것 같은 웃음을 터뜨린다. "자 술 드십시오." "예, 들고 있소." "임역관도 많이 드시우? 향심이는 뭘 그리 넋을 놓고 있느냐? 손님께 술을 권하지 않고서?" "예, 나으리. 잠시 방심하였사옵니다. 용서하시오." "교동 생각을 털어버려." 조준구는 향심에게까지 선심을 베풀어 자상하게 군다. "풍파가 일었구먼." 임역관이 말참견을 했다. "허어. 점잖은 분이 남의 집안 망신시키려고 그러시오?" "망신은 무슨 망신, 처첩간에 흔히 있는 일인데." "골칫거리오." "사내가 잘나면 열 계집도 거느린다 했는데 조공은 잘나질 못했나?" "계집도 계집 나름 아니겠소?" "향심이한테만 눈을 팔았다면 별 풍파가 없었을 터인데 조공께서는 파는 곳이 또 있었던 거 아니오?" "그런 일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거요. 하하핫..." "모르는 척하는 것은 어렵잖은 일이오만 알쏭달쏭, 똑똑히나 알아야 말이지요. 바람결의 말로는 신여성이라며요?" "그렇잖으면 누가 공을 들이겠소." "이거, 향심이 베개 젖을 얘기구먼." "그런 데는 도통한 여자니까." "예, 나으리. 쇤네는 저기 머릿장처럼 요지부동입니다요." "으레 나이 먹은 소는 고기맛도 질깃한 법이고, 조공 그보다 그 신여성께서는 여릿여릿하게 어린 처녀시라구요?" "허어? 이거 크게 사단이 나겠구먼.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어부인은 어떡허고 새장가입니까?" "칠거지악을 모르시오?" "농인 줄 알았더니." "기필코 내치겠다는 얘긴 아니오. 부실한 자식이 하나뿐인데다 투기심이 이만저만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 그 얘기 아니겠소." "그럴 수도 있다? 하항, 그러면 그렇게 될 가망이 많구먼. 상대는 신여성인데다가, 신여성이 뭔고 하니 서양풍을 따라가는 게 신여성 일진대 그곳에선 일부일처를 반드시 지킨다 하지 않소? 게다가 여릿여릿하게 어린 여자가 무릎 앞에서 빠작빠작 졸라대면은 조공도 별수없을 게요. 늙은 조강지처를 버리느냐 젊은 신여성 정인을 버리느냐." "서양풍 얘기가 났으니 말인데 사실 우리 조선에서 소실 두는 풍습이 성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요. 서양에서는 칠거지악이 없어도 살다 정이 없어지면 이혼하는 것이 보통이고 재혼을 몇번 하여도 흉허물이 없지만 조선에선 조강지처를 아니 버린다는 불문율 때문에 부득이 소실 두는 풍조가 생긴 모양인데 신여성뿐만 아니라 조선도 문명국이 되려면은 우리네 남자들도 생각해볼만한 일인 성싶소." 임역관은 그 말에 대한 의견을 말하지 않고 대신 잠자코 있던 공노인이 말했다. "본시부터 배운 것이 없어서 뭐가 좋고, 나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래서 묻는 얘깁니다마는, 문명국이 우리네보다 좋은 것이 뭐 있습니까." "그거야 얘기를 하자면 간단치가 않지요. 첫째 그들은 부자라는 점이오. 물론 우리네 국토보다 땅덩어리가 커서 모든 자원이 풍부한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나 무엇보다 문명이 발달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게요. 가령 영국 같은 나라를 말할 것 같으면 본시 조그마한 섬나라에 불과했는데 오늘날 도처에 그들 식민지가 있고 세계서 으뜸가는 강국이 된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문명 덕분이오. 사람의 손 대신 기계로써 만사를 움직이고 만들어내고 그게 또 사람 몇 몫의 일을 해내니 자연 물품을 손쉽고 싸게 만들어 쓰고 남으니 남의 나라에 팔고, 절로 부강해질 수밖에 더 있겠소? 부강해짐으로 하여 약소국을 차례차례 집어삼켰던 거요." "그러면은 결국 우리네 같은 장사꾼에다가 도적놈이다 그 말씀 아니겠소? 문명국이란." 열을 올리며 장광설을 늘어놨던 조준구는 머쓱해진다. "조공. 역시나 밑천 뽑기는 어렵겠소. 하하핫핫..." 임역관은 유쾌해져서 술을 쭉 들이켠다. "공노인 제 잔 받으시오." "죄송하구마요." 임역관이 넘긴 술잔에 향심은 술을 따르고 그것을 마시는 공노인을 쳐다보던 조준구,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많이 양보한다. 대신 조준구는 향심을 노려보는 것이다. "거 왜 눈두덩은 부성부성하냐? 간밤에 지네가 오줌이라도 쌌단 말이냐? 술자리에 앉는 계집이란 상시 용모 자태, 행동거지가 일월 같아야지." 기여, 지지리 못난 꼴을 노출하고야 만다. "관에서 매맞은 사내가 집에 와서 계집 친다던가? 나 조공의 그 성미 하나 마음에 안 들어요. 술맛 떨어지게끔." 술주정 비슷하게 임역관은 투덜거렸다. "역관어른 뭘 그러시오? 참판댁 나으리도 주정하신 건데." 공노인은 말리는 시누이처럼. 그러나 세 사람은 다같이 상당히 취해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 향심은 미소를 머금은 채 술시중을 들고 있다. "근 그렇고, 조고옹? 부자 좋아하는 조준구 나으리, 앞으로 공노인의 돈, 모조리 끌어다 쓰려거든, 그런 심산이면은 이 임역관한테 집칸 늘려주셔얄 거요. 아시겠소? 주정 아니외다." "아, 알았소. 청빈하다는 분이 웬,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하시오." "하, 손톱 밑에 까시 든 것은 아프지만 옆구리에 구더기 실는 것은 모르더라고, 내가 청빈해요? 이쪽저쪽 말 건네주고 연명하는 자가 청빈하면 얼마나 청빈했겠소. 아예 내일 아침 술김에 한 말이란 말 하지 마슈." "알았다니까, 내 임역관을 섭섭하게 할 순 없지요." "여보게 향심이." "예." 임역관은 술잔을 내밀었다. "술잔 가득히" "예." "자네, 어제는 교동 갔다와서 눈두덩이 지네 오줌 싼 꼴이 됐으니, 앞으로가 더 큰일일세. 남산 갔다오면은 눈두덩이 독사 오줌 싼 꼴이 될 테니." "이거, 이거 왜 이러시오?" 세 사람은 모두 술이 거나했다. 그중에서도 조준구는 더 많이 취해 있었다. "자고로 도적을 피하면은 강도를 만나더라고, 생각해보시오. 이화학당을 다니다 말았다는 신여성이 더군다나 처녀의 몸으로 조공을 보았다는 점, 딸치고도 늦게 둔 딸 나이에 그래 조공 재물에만 눈이 어두워졌을 성싶소?" "이거 듣자듣자하니, 뭐 그만두지요. 그보다 노인장, 거금을 모은 얘기나 들려주시지 않겠소?" 눈을 부릅뜨려다 말고 조준구는 술기 탓이겠지만 입을 헤벌리고 웃는다. "거금도 아니거니와 얘기라는 것도 시시합니다. 청나라 비적놈 등쳐먹은 덕분에." "허어? 비적의 등을 쳐먹어요?" "예. 하마터면 그때 죽을 뻔했지요. 그러니까 서태포에서 비적한테 잡혔는데, 서태포가 어딘고 하니 왕청현 춘명사 근처지요. 사람도 잘 다니지 않는 험난한 곳이고 열 자, 스무자나 되는 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하늘이 보이질 않소. 뿐이겠습니까? 가시덤불만 해도 사람들 키를 넘으니께요. 그러니 도모지 길이란 게 없소." "그런 곳을 뭣하러 가시었소." 조준구는 호기심을 나타내며 물었다. 임역관도 향심이도 흥미를 느껴 귀를 기울인다. "약초 캐러 갔었지요. 내가 이래봬도 몸은 짝달막한 게 볼품은 없지마는 담은 찬 편이오. 그땐 나이도 젊었고, 그래 비적놈들이 나를 죽이려고 끌고 나가는데 이젠 속절없이 죽는구나 싶었지요.구구하게 살려달라고 빌진 않았소. 하야간에 청룡도가 번쩍하는데 내 목은 붙어 있고 대신 팔뚝만한 자작나무가 나둥그러지더란 말입니다. 알고 보니 내 처신이 마음에 들었다 그거지요." "그래 어찌 되었소?" "저이들 패거리가 되라는 거였지요?" 여기서부터 공노인의 말은 달라진다. "살자니 어쩝니까? 우선 그러겠노라 하고선 야심한 틈을 타서 비적놈 녹용을 훔쳐서 들고 뛰었지요. 허허헛..." "아닌게아니라 몸집보다 담이 크신가 보오." "예. 젊은 시절엔 그게 밑천이었지요. 아무튼 그 녹용을 밑천으로 해서 담비 장살 했지요. 흑룡강으로 해서 그 일대를 돌아다니며. 그곳의 담비는 유명하니까요. 아 그러세, 노국하고 청국이 흑룡강을 두고 여러번 쌈을 한 것도 담비 때문이라니까 그 일대가 담비밭이지요." "담비가 값진 것이긴 하지. 옛날에도 궁중에 뇌물로 쓰였으니까." 사실무근의 얘기를 공노인은 그럴싸하게 늘어놓았는데 자신하고는 무관하였어도 들은 풍월이니 아주 황당한 것이라 할 수는 없었다. "담비하고 녹용 장사를 해서 한밑천 잡은 뒤, 다음 손을 댄 것이 금광이었소." 임역관이 공노인을 힐끗 쳐다본다. 반사적으로 향심이 임역관을 쳐다본다. "금광을?" 조준구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예. 금광 다음엔 사금을 했고요. 지가 그러는 동안 형은 형대로 약종상을 시작하여 번창했으니 형제한테 꼭같이 재운이 온거지요." 공노인은 금광과 사금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을 않고 넘어간다. "금광에 관한 얘길 좀 해주시오. 나에게는 참고가 될 테니까요." "그 얘길 하자면 길지요. 차차 하기로 하고, 지 혼자만 얘기하는 것도 예가 아니니까요." 공노인은 도망치듯 술잔을 들었다. "향심이, 조공 술잔이 비었네." 임역관이 얘기가 엇길로 흐르게 도와준다. "예. 나으리 약주 드셔요." 향심이도 날렵하게 술을 부어 조준구에게 권한다. 손발이 척척 맞는 셈인데 이윽고 주연은 끝났다. 하직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온 임역관은 공노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공노인, 대단하시오." "지도 술버릇이 좀 나쁩니다. 그래서 악담이 나올까 봐서 조심을 많이 했소." "허허헛허허, 사람 하나 병신 만들기 힘이 드는구먼요." "예. 허나 생각한 것보다는 간악한 위인이 쉬이 속는구마요."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제 손가락으로 제 눈 찌르지요. 공노인을 도와주는 것은 바로, 그자의 욕심 아니겠소?" "그러나 땅문서를 쥘 때까지 칼자루는 그자 손에 있다 할 것이고." 어느덧 이들 사이에는 신분이나 식견에서 오는 거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역관어른." "네." "저기," 하다가, "아니 다음에 말씀드리겠소. 역시 그러는 편이." "무슨 얘긴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시오. 그러면 여숙으로 가시려오?" "예." 행길가에서 두 사람은 헤어진다. 16장 강원도 인삼 하동 장거리 객줏집에 하룻밤을 묵으면서 공노인은 이부사댁을 찾지 아니하였다. 혜관으로부터 연추의 소식은 이미 전해들었을 것이며 상현을 알고 이동진과도 면식이 있었으나 그들의 가족을 알지 못하는 공노인 처지라, 그러나 며칠간을 그곳에서 보냈을 뿐인 혜관보다는 그곳 사정에 소상한 공노인인만큼 스스로 통성명하고서 찾아가지 못할 것도 없다. 못 찾아가는 이유는 두만강 너머 간도에서 온 노인 아닌 강원도 삼장수로 왔었기 때문이다. 당분간 그러한 가장이 필요하다. 해서 일부러 하동 장날에 때맞추어 이곳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객주집 마루에서 삼 보따리를 챙기는 공노인에게 주인이 말을 걸었다. "노인장, 노인장은 이곳이 초행인 모양이구마요." "내 말이오?" 바짓말에 두 손을 찌르고 엉거주춤 마당에 쭈그리고 앉은 사내를 돌아본다. "못 본 얼굴이니께 묻는 말이오." "나는 주인장 얼굴을 아는데 그러시오?" "나를? 어디서 보았소?" 죄지을 사람 같지도 않은데 사내는 까닭없이 당황한다. "십여 년 전, 그러니까 십사오 년쯤 될란가?" "그땐 호랭이 담배 묵던 시절이오." "그때 내가 이곳에 왔을 적에 이 집에서 잤으니까, 집은 옛날 그대로구만." "하하하, 그렇소? 하도 이 사람 저 사람 들락거리니께." "나도 한시절 객주업을 한 일이 있소만 한번 든 손님 얼굴 잊은적이 별로 없었소. 내가 그러니까 육칠 일 묵었을 게요." 사내는 또 까닭없이 실쭉한다. 꾀죄죄한 장돌뱅이 주제에 객주업은 무슨 객주업인고 싶었던지. "그러믄 십여 년 동안 어딜 갔길래 못 왔소?" 따지듯 묻는다. "밤낮 해봐야 개미 쳇바퀴 도는 것, 때리치우고 다른 일을 좀 하다가 뜻대로 되지가 않아서," "새미를 파도 한 새미를 파라 캤는데... 해가 중천에 떴소. 지금 나가서 장사가 되겄소?" 바짓말에 찔렀던 손을 뽑아 손톱 사이에 낀 때를 후벼파며 사내는 아예 관심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팔리겠거니 생각지도 않소." "하기는 요새 농사꾼들이 무신 수로 삼 한 뿌리 사가겄소. 죽는다, 산다, 해싸아도 어제가 옛날이라. 산 넘으믄 또 산이 있고 갈수록,그래도 옛날에는 겨울 한철 뼈빠지게 길쌈을 하믄 살림 한모퉁이는 막았는데 그놈의 광목이다 옥양목이다 하고 기계로 짠 것을 풀어묵이니 손바닥만한 땅만 파가지고, 흥 그놈의 땅이나마 질게 가지기나 함사? 장릿빚에 안 넘어가믄 천행이지. 별 수 없는 소작, 그것도 수울하건대? 아무나 부치든가? 골이 빠지는 거는 농사꾼이라." 사내는 혼잣말같이 중얼중얼 중얼거렸다. "주인장이야 이런 객주업을 하는데 무슨 걱정이오." 공노인은 장사 나갈 생각은 않고 마루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야? 아항, 피장파장 아니겄소? 벌써 딴 고장에는 왜놈들이 여관이라는 걸 지었다 카이 여기도 불원 그런 것이 생길 기고, 만사가 다 그런 쪼라요. 아 그러시, 왜놈 점방도 좀 생깄소? 말끔하니 조촐하니, 그러니께 조선 사람들 가게는 돼지우리 겉은 꼴이 되고 객줏집도 마찬가진 기라요. 왜놈들이 모갯돈을 가지고 와서 물건을 싸악 거둬가고 질퍽하게 풀어놓으니 장돌뱅이들은 찌들어가고 객주업이 될 기 머요. 아무래도 왜놈 밑에서 종질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사램이 없일 것 같소." 사내는 땅바닥에 침을 탁 뱉는다. "그도 그렇겠소." "노인장도 장바닥에서 인삼 팔 생각 마소. 저어기, 저 왜놈 밑에서 서기질하고 순사질하는 놈들 집을 찾아가서 파는 기이 상술 기요." "나도 그런 생각 안 한 바는 아니지마는." 사내는 까닭없이 당황하고 실쭉해하고 하더니 어느새 걱정을 해주는 눈빛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설설 나가볼까?" 공노인은 인삼 보따리를 들고 일어섰다. "주인장." "야." "잘 계시오." "해 안에 떠나시오?" "그렇소." 공노인은 장거리로 나왔다. 이 전 저 전을 둘러보며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십여 년 전 이 장터에 난전을 폈던 일이 어제같이 새롭게 떠오른다. 옛날과 달라진 것은 없다. 왕왕대는 장꾼의 고함이며 그 자리에 그 전이며 맨상투에 망태 짊어진 젊은 농부들이며 파는 품목과 꼭같은 모습들의 장돌뱅이들이며- '가만 있자. 내가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소식이야 전해 들었겠지마는 이곳의 소식은 내말고 누가 전할꼬? 이별하고 산지 한 해 두 해도 아니겠고 십여 년, 이동진 그 양반 대범해서 내색은 안 하지마는 사람의 마음은 매일반이라.' 공노인은 생각을 하며 걷는다. '쉬이 돌아올 형편도 아니고 앞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를일인데 하야간데-'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도 왔십니다아-" 공노인이 힐끗 쳐다본다. 싸전 앞이었다. 거지 세 명이 바가지를 두드리며 꾸벅 절을 한다. 싸전 주인이 미처 뭐라기도 전에 품! 품바 장타령 또 한 대목이 나온다아아 품! 품바 장타령 일자 한 장 들고 보니 일월솜솜 해솜솜 밤중 샛별 산넘어가네 품! 품바 장타령 이자 한 장 들고 보니 이등 저등 북을 지고 행수기생이 춤추네 품! 품바 장타령 삼자 한 장 들고 보니 삼암신령 불로초는, "아이구! 시끄럽다!" 싸전 주인이 팔을 내저었으나 각설이떼는 몸을 우쭐거리며 이 머리 저 머리 저희끼리, 장단 맞추듯 박치기를 해가며 사자 한 장, 오자 한 장까지 타령은 넘어간다. "시끄럽다 카이! 그놈의 타령 그만 못 두겄나?" 동전을 던져준다. 그것을 주우면서 "넨장, 타령도 안 하고 그라믄 공돈 묵으라 말이오?" 각설이는 투덜거리는 척, "지랄하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분인데 그놈의 각설이타령 머시 그리 듣기 좋을 기라고, 내사 마 순사놈들 호각 소리하고 너거들 왕왕거리는 소리가 젤 듣기 싫다." "그라믄 한밤중에 여편네 곡하는 소리는 우떻십디까?" "뭣이라꼬?" "돼지 멱 따는 소리는 듣기가 좋십디까?" "이 세빠질 놈들이! 사람 부애를 돋굴 기가!" "헤헤헷... 헤, 그라믄 멩년에 또 오겄십니다. 운수대통하고 수명 장수하고, 헤헤헷... 헤 잘 있이이소." 싸전 앞에서 돈셈을 하고 있던 갓 쓴 사내가 "멩년에 또 오겄십니다? 장날마다 오는디, 저눔들 나이는 여러 백살 될 것이어라?" "하모요. 우리는 신선인께요." "하하아 하하아, 신선이 모두 등장 갔더랑가?" "신선놀음에 도꾸자리 부러진다는 말도 못 들었소? 에이고, 강 너머 사람하고는 말이 안 되는 기라. 품, 품바 장타령!" 변함없는 옛날 그대로의 장터 풍경이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간들간들한 전라도 사투리가 일렁이고 초가을의 하얀 햇볕이 장꾼들 흰 옷 위에서 일렁이고 소음은 연기처럼 자욱한데 떡장수 죽장수는 그 자리에, 요기하는 농부와 짐꾼들 사공, 더 이상 찌들 수도 없고 검어질 수도 없는 살가죽에 강을 건너온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미칠 듯 지나간다. 난전의 차일이 펄러덕거린다. '가랑잎 같은 인생이다. 해묵은 지푸라기, 으흠... 십 년을 넘기 돌리고 돌린 물레, 내가 왜 이런 비감한 마음을 가질꼬? 십여 년을 남의 땅에 죽치고 앉았더니 허물어진 저 산 언더막의 흙이 뻘간 것도 잊어버리고 내 마음이 설픗한 것은 아마도... 훠이훠이 영을 넘어 이 장에서 저 장으로, 내 옛날이 생각난 때문일 기라.' 나무꾼 소년이 나무지게를 받쳐놓고 그 그늘에 앉아 밀개떡을 먹고 있다. 누가 내 나무를 사갈까, 행인의 눈을 살피면서 때론 저보다 처지가 낫다고 생각하는, 팥죽이랑 떡을 사먹는 사람들을 선망에 차서 쳐다보곤 한다. '저 늙은이가 아직도 안 죽고 살아 있구마.' 공노인은 피식 웃는다. “어허어! 떠리미요, 떠리미! 이렇기 싼 물건은 난생 못 봤일 기요! 봤이믄 봤다 카소! 야?” 깡마른 등짐장수 늙은이는 자기 모습과 마찬가지로 낡고 때묻은 잡동사니 물건들을 줄레줄레 해진 삿자리에 펴놓고 가래 끓는 목소리로 혀를 내둘러 마른 입술을 연방 축여가며 외치고 있었다. 공노인을 그 옆을 스치며 지나간다. "떠리미요. 떠리미! 몽땅 개값으로 던지고 갈라누마. 서울 있는 내 자식놈 찾아갈라누마. 누구든지 몽땅, 모, 몽땅, 어허헉." 기침에 자지러지다가 다시 "누,누구든지 몽땅 가지믄은 수 터지요! 못 사믄은 나중에 배아플 기고, 어허어! 보소! 여기 간밤에 용꿈 꾼 사람은 없소? 몽땅 가지가라니께? 개값으로, 개값에 던지고 갈라누마. 여기 없는 기이머 있소? 처니애들 시집갈 때 가지가는 구봉 베갯모가 있고 금박찍은 갑사댕기, 발끝까지 치렁치렁 닿는 달비가 있고오 박화분에 동백기름." 가래 끓는 목소리가 뒤통수에 쫓아온다. 공노인은 돌아선다. "여보시오." "야?" 등짐장수는 어리둥절 쳐다본다. "아 참, 머 살라고 그러요." "댁과 같은 장돌뱅인데 사기는 뭘 사요?" "삼대 구년 만에 물건 하나 파는가 싶더니마는," "좀 쉬었다 하라고 내가 왔소." 공노인은 땅바닥에 주질러앉으며 곰방대를 뽑는다. "담배 한 대 안 하겠소?" "어디요? 담배 할 줄을 알아야제요." "무던히 참을성도 많소. 하기야... 그래 서울 있는 아들 찾아가는 재미로 사시오?" "그거사 머, 헤에에..." "내가 십여 년 전에 여길 왔을 적에, 그때도 노인장은 서울 있는 아들 찾아갈려고 물건을 개값으로 몽땅 팔겠다 했는데 그래 그새 한번쯤 아들을 찾아갔습디까?" 담배를 버끔버끔 피우며 공노인은 실실 웃는다. "그거사 머 장사니께로," "장사하는 푼수를 그렇게만 배웠다 그 말이오?" "아, 장사꾼치고 참말만 했다간 밥 빌어묵을 기구마는," 성이 좀 난 얼굴이다. "허 참, 거짓말도 가지가지라. 거짓말 몇 마디에 만석살림이 오고 가고 수천금이 오고가는데, 숫제 거짓말이 아니라 외곬, 외골수라 해야겠구마." "하기사 옛말에 말 한마디 천 냥 빚 갚는다는, 그것도 한갓 재주 라오." "아무튼 그 말 한 가지만 가지고는 밑천이 짧아 안 되겠구만." "말 밑천이사 머 가지나마나 마찬가지니께." "왜 그렇소?" "아무래도 살 사람은 사고 안 살 사람은 안 사는 기라요." "안 살 사람도 사게 하는 것이 장사 아니오." "돈이 있어야 안살 물건도 사제요. 장꾼들이란 사고 저버도 급히 소용 안 되믄은 안 사는 기고 저븐 생각이 없어도 우짤 수 없이 소용이 되는 거는 사는 기고, 가만히 앉아서 살피보소. 장꾼들은 대개가 농사지기들인데 땅 파서 금덩이 나오잖으니께. 여름 내내 땀 흘리 바야 나라에 세금 바치고 땅 임자는 추수 거둬가고 자손된 도리 선영봉사 안 할 수 없고, 뻔한 기라요. 도방맨치로 우푹지푹해야 안 살 것도 사고 하지." "그렇다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사갈 사람은 사갈 거 아니오. 허기지게끔 떠들 것도 없거마요." "그거는 그렇지가 않소. 원님이 도임할 적에도 삼현육각을 잽히는데 꾸워다놓은 보릿자리겉이 앉아 있으믄 무신 재미가 있겄소. 저 늙은이 또 저 소리 한다 싶겄지마는 귀에 익은 소리 안듣고 가믄은 서분할 기라요. 장에 갔다가 머를 잊어부리고 온 것맨치로 사람우 맴이란 그런 거니께." 공노인은 허허 하고 웃는다. 그렇기도 하겠다 싶은 것이다. "그러면은, 나도 사고 싶지는 않지만는 소용되는 거를 하나 사볼까?" 막상 사려니까 살 물건이 없다. 공노인은 백동 동구리를 골라잡는다. "곰방대가 있는데 그려요?" "선사할려고 그러오." 공노인은 값을 치르고 물건을 간수한 뒤에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인삼 보따리를 펴려니 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변한 것 같았는데 역시 안 변한 것도 아니구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머라캤소?" 백동 동구리를 팔고 나니 맥이 풀리는지, 저녁 술잔 값을 벌어 마음이 놓여서인지 외치는 것을 그만둔 늙은이가 되물었다. "이것도 변했다 그 얘기요." "그거사 머, 십년이믄 강산도 변한다 했으니께." "노인장 넋두리하고 각설이타령이 안 변했기에, 허허허... 필묵 장수 참빗장수가 모두 젊은 사람이고 저기 저 고둥어 한 손 가지고 농부랑 실갱이하는 해물장수, 십여 년 전만 해도 이팔청춘인 줄 알았는데 그때 삼을 몇 뿌리 팔았기 때문에 기억을 하고 있지마는, 이제는 앞머리가 훌렁 까지고 남은 머리마저도 반백이니." "늙고 죽는 이치 아니겄소." "맞소." 공노인은 끝내 삼 보따리를 펴놓지 않고 일어섰다. "노인장 많이 파시오." "야. 고맙소." 장터를 빠져나온 공노인은 이부사댁을 찾아간다. 서울의 기화로부터 소상하게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집 찾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소음의 바다 같은 장터와는 반대로 이부사댁 문전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하다. 담장 안에서 넘겨다보는 감나무에 풋풋한 열매가 수없이 매달러 풍성해 보일 뿐. 대문도 꼭 잠겨져 있었다. 몇 번인가 대문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뉘십니까?" 억쇠가 대문을 열고 내다보며 묻는다. '이 사람이 억쇠렸다!' 수건을 동여맨, 눈이 조맨하고 입도 합죽이, 턱이 뾰족하게 길고 얼굴 중간이 푹 꺼진 새우같이 생긴 사내, 그는 장사꾼풍의 공노인을 살펴보며 묻는다. "어디서 왔소." "어디서 오나마나, 나는 인삼장수요." "인삼장수가 머하러?" "머하기는, 인삼 팔러 왔지." "허 참." 억쇠는 코웃음치며 공노인 어깨 너머 먼산을 본다. "삼이 참 좋소." "좋으믄 머하겄소." "좋으면 효험이 크질 않겠소?" "묵을 사램이 있어야제요." "그러지 말고 안에 가서 상전한테 말 좀 건네보는 게 좋겠소." "말 건네보나마나, 인삼이라 카믄 팔자 좋은 얘긴데 그런 거사 근심걱정 없이 펜안한 사램이 묵는 기고, 다른 데 가보소. 만판 그래봐야 이 집에서는 삼 못 팔 기요." 하고 돌아서려는 억쇠를 공노인은 붙잡는다. "갈길이 바빠서 헐하게 처분하려고 그러오." "하아, 이 노인이 와 이리 엉겨붙노. 헐하기 아니라 그저 준다 캐도 이 댁에서는 인삼을 잡술 처지가 아닌 기라요. 해 넘어가기 전에 다른 데나 가서 팔아보소." 그러나 공노인은 잡은 옷소매를 놓지 않는다. "이거 참, 학 떼겄네." "하야간에 내 얘기나 좀 들어보소. 나는 이곳에 장삿길로 온 게 아니오." "그라믄 머하러 왔소?" "십여 년 전에 한분 와보고서는 이번이 첫길인데 그러니까 거기, 그 장터로 가는 삼거리에서 주막을 하던 월선이라고." "머라꼬요?" 새우눈같이 조그마한 눈이 벌어진다. "그 아이가 내 조카딸인데, 오래 못 보았고 죽기 전에 그 아이를 한번 만나볼까 싶어서 왔더니만," "아니! 워, 월선이라 카믄," 공노인은 억쇠 놀라는 얼굴을 못 본 척 "찾는 그 아이는 간 데 없고 이번 길이 허행이 되지 않았겠소? 사정이 그러하니 애당초부터 장사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러니만큼 헐하게 처분하고," 억쇠는 어느덧 대문 밖에 나와 있었다. "노인, 아까 머라 캤소?"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뭐라 카다니? 인삼 사라고 했지. "아니 그 말말고요, 주막하는 월선이라 캤지요?" "그랬소. 그 아이가 내 조카딸이오." "참말입니까?" "아무 까닭 없이 거짓말 할 리가 있겠소?" "조카딸이라 카믄." "바람잡이 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 형이 어쩌다 무당하고 눈이 맞아서 생겨난 딸아이지요. 아이라지만 이젠 사십줄, 이웃에 수소문도 해봤지마는 아무도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고." "그렇다믄 친조카딸 아니오?" "그야 그렇지." "하아참, 이거 참, 아무튼 우리 이야기 좀 하입시다. 문전에서 긴 얘기 할수 없인께." 억쇠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놓는다. 그의 뒤를 공노인은 졸졸 따라간다. "이보시오, 삼은 어찌 되는 거요?" "삼 얘기는 두었다 하고 그보다 급한 일은 조카딸 행방 아니겄소. 노인이 찾아오기는 바로 찾아온 기요." "바로 찾아오다니? 그러면 내 조카딸 행방을 안다 그 말이오?" "행방뿐이겄소?" "뭐라구요?" "불쌍한 간도댁 일이라 카믄," 공노인이 반가운 척할 판인데 별안간 억쇠는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섰다. "가만 있거라, 그라믄은?" 장난기를 머금은 공노인 눈이 억쇠 얼굴을 더듬고 지나간다. 억쇠는 열심히 기억을 되살리려고 미간을 찌푸린다. "그라믄은, 가만 있거라... 그때 간도댁은 강원도 삼장사를 따라 갔다 캤제? 그 삼장사가 그러니께 삼촌이라 카든가? 옳지! 맞다 맞아! 바로 이 노인이." "맞기는 뭐가 맞다는 게요?" 공노인은 중천에서 기울기 시작하는 해를 가늠하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노인." "조카딸 행방을 안다 하잖았소?" "야. 그보다도 지가 한 말심 묻겄는데요. 그러니께 전에, 십년도 훨씬 넘은 얘기구마요. 조카딸하고 함께 간도로 간 사램이 노인 아입니까?" "그렇소. 나요." "하 이거 참, 세상이란 넓고도 좁소. 어째 하필이믄 우리댁에 삼을 팔러 오셨으꼬, 홍이어매 얘기도 얘기거니와 지도 그곳 얘기 듣고 접고." "홍이어매라면은." 능청을 떠는 공노인도 어딘지 속이 간질간질하다. "그러니께 노인 조카딸 말입니다. 지가 자세하게 말심하지요. 아무튼지간에 반갑십니다. 그라믄 가입시다." "그러면은 주막에 가겠소?" "아 아입니다. 우리댁 형편상," 억쇠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이 간 곳은 나루터 근처, 나뭇 짐을 풀어버린 빈 나뭇배가 몇 척 물결에 흐느적흐느적 흔들리고 있었다. 강물은 비취빛, 가을로 접어든 물빛이었고 그러고 보니 강 너머 바라뵈는 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쌓아올려 놓은 장작더미에 등을 기대고서 나란히 앉는다. "참말로 산천도 좋다." 공노인이 중얼거렸다. 아예 월선의 행방에 관심이 없는 것을 억쇠에게 숨기려 하지 않는다. 숨 넘어갈 듯 따져물을 것을 예상했던 억쇠는 묘해지면서 공노인을 쳐다본다. 기대가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억쇠는 간도 얘기가 듣고 싶은 것이다. 사실 상현이 돌아와서 대강 그쪽 소식은 들었고, 서희 일행보다 훨씬 앞서 갔다온 이 낯선 노인에게 새삼스럽게 들을 얘기도 있을 성싶지 않았으나. 공노인은 천천히 곰방대를 뽑아 쌈지 속의 담배를 곰방대에 털어 넣는다. "오면서 얘기가, 월선이 간도로 갔다 했는데 어찌 된 경위로 그렇게 됐는지..." 담배를 버끔버끔 피우며 공노인은 한가롭게 물었다. "우선 묻겄십니다. 그라믄은 노인은 그때 간도에서 조카딸이 돌아온 후 한 분도 못 만냈다 그 말심입니까?" "못 만났지. 그 아이가 한사코 고향 가겠다기 보내놓고 보니 우리도 그곳에서 살 재미가 없어서," "그렇다믄 수울찮이 해가 갔는데 우예 한분도 안 찾아왔십니까." "수천릿길을 어떻게? 만주바닥, 연해주로 해서 함경도를 떠돌아다녔는데," "하 참, 그렇담 아무것도 모르시겄구마." 억쇠는 떠듬떠듬 최참판댁 사정에서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월선이 간도로 가게 된 제반 사정의 설명이었으니까 억쇠가 한 얘기 중에 공노인이 모르는 일은 없었다. 다만 윤씨부인이 살아 있을 때 상현을 손녀사위로 삼고 싶어했다는 얘기만 처음 듣는 것이었다. '길상이하고 혼인한 얘기를 듣는다면은? 생남까지 하구...' "대강 그렇게 돼서 모두 간도에 갔고 우리댁 서방님도 갔다오신기지요." "음... 그렇게 되었구마.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소." "아까 노인이 말심하시기를 연해준가 그곳까진 가보았다 했는데." "가보긴 가봤소." "지도 우리댁 서방님한테서 대강은 말심을 들었지마는 세세히야." "세세히는 알아 뭐하겠소.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 아니오." "그러씨, 그거는 그렇겄지마는. 언제까지 기실 긴가 답답해서." "대답하기로야 매일반 아니겠소?" "대체 거기 사람들은 조선으로 쳐들어올 꿈이나 꾸고 있는지 모르겄소.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감감소식, 우리댁 나으리는 도아오실 긴피가 없인께 말입니다." "당분간은 돌아오기 어려울 거구만." "와 그러십니까." 술이 오른 것처럼 억쇠의 얼굴이 벌개진다. "쳐들어가는 꿈이야 밤마다 꾸겠지마는 그게 마음만 먹는다고 될일인가? 청룡도 가진 놈과 바늘로 싸우는 격이지." "청룡도가 머어요?" "대국에서 쌈할 적에 쓰는 큰 칼 말이구만." "아 장수가 쓰는 것... 그나저나 형편이 그렇다 카믄은 여기 기신 분들이 솔가를 해서 그곳에 가든지, 무신 수를 내야지 언제꺼정 이러고 있겄십니까. 왜놈 순사 헌벵만 바도 가심이 덜컥덜컥 내리앉고." "그러나 일본에 공부간 아드님이 있다니까 그럴 수는 없을 기고, 어디 먼 곳으로 골살이 하로 간 셈 쳐야지." 공노인은 얘기하면서 까무잡잡하고 미간에 성깔이 일렁이던 상현을 생각한다. "그나저나 이래가지고 질기 살겄소?" "집안 형편이 어렵단 말이오?" "넉넉하달 수는 없소. 그저 그만그만..." "모두가 다 살기 어려운 세상이니," "하기사 우리댁은 대대로 청백리라꼬 칭송받는 집안이라서 옛날인들 잘살았든 거는 아니지마는 그래도 옛날에사 기나 피고 살았거마는, 우리댁 마님도 천성이 누긋해서 술에 술탄 듯 물에 물 탄듯하시더니마 요새는 자주 자리에 눕고 탈기를 하시는 모앵인데... 그렇기 될 바에야 애시당초 나으리께서 가시지를 말았어야 하는 긴데 여기 사정도 사정이거니와 나으리께서도 얼매나 고생이 막심하겄십니까. 치버서 오줌을 누믄은 줄기채 얼어부린다 카는 곳에." "그것은 별걱정 안 해도 될 거요. 춥기야 하지마는 원체 추위를 막고 살게 돼 있으니, 그리고 그곳에도 조선 사람도 많이 살고 모두가 합심을 해서 도우니까." "그 얘기는 우리 서방님도 합디다마는," "이말 저말 할 거 없이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고, 월선이가 거기 갔다 하니, 내 역부러야 수천릿길 그곳을 어찌 가겠소? 하나 우선은 그 지방 근처에 터전을 잡고 있으니." "야?" "지금 내 마누라가 함경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거든. 이분엔 부모 산소에 벌초나 할 심산으로 내려왔던 길에 조카딸을 찾은 거니까." "하, 그, 그러면은," "사정이 그러니 무슨 전할 말이라도 있으면 하소." "그, 그렇다면 우리 마님을 한분 만내시는 기이 우떻겄십니까? 하룻밤 주무시고," "아니 해가 어지간히 기울었는데 가볼 데가 있어서, 곧 나릿선을 타야겠소. 더욱이나 그 아아 소식도 들었으니." "이거 참, 무신 말을 해야 할꼬? 참 야, 우리댁 새아씨께서 태기가 있으시니 한시름 놨소. 일본으로 떠나시기 전에 오싰다 가싰는데." "월선이한테 전하면 되겄소?" "하모요. 그곳에서는 내왕이 있다 캤인께. 그라고 또," 억쇠는 실상이, 용이 말도 했고 김훈장, 서희에게 안부 전하라는 얘기도 했다. 공노인은 굳이 싫다는 것을, 삼 몇 뿌리를 나누어서 억쇠에게 쥐어주고 말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우죽우죽 따라오는 그를 뿌리치다시피 떠나는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파장까지는 아직 해가 남아 있어서 나룻배에 탄 손님은 별로 많지 않았다. 노 젓는 소리만 단조롭고 배는 상류를 향해 물살을 가르며 올라간다. "금년 시절은 어떻소." 공노인은 함께 탄 농부에게 물었다. "낫 들고 논에 들어가봐야 알겄지마는 이대로 가믄 풍년 들 성싶소." "그거 다행이구마." "풍년 들믄 머합니까. 메뚜기나 배애지 터지제." 내뱉듯 말한다. "메뚜기 배애지야 풍년 안 든다고 못 채우겠소?" "사람이라도, 놀고 걷어가는 놈들은 메뚜기 아니겄소." "허허헛, 사람메뚜기 말이구만." "야아. 사람메뚜기 말이오." "왜메뚜기까지 끼여들었으니." " 와, 아니라요. 왜메뚜기야 곡식만 묵건대요? 흙까지 퍼묵으니 걱정이제. 흉년에 겉보리 몇 말 주고 땅 뺏든 부자놈들도 많았지마는 왜놈들은 생짜로, 문서 없다, 신고 안 했다 해서 뺏아가고, 팔아묵을 거는 딸년밖에 없으니 무슨 놈의 세상이 천륜마저, 참말로 살 마음 없소. 사람이 아파도 약 한첩 지어먹일 수 없는 이런 놈의 팔자가 어딨겄소? 그만 하늘 땅이 딱 붙어부맀이믄 싶은 생각뿐이라요." "그런 말 마소. 죽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사람은 살아야제." 사공이 말했다. "당신 겉은 사람이사 날벌이 해서 그냥저냥 사니께 그렇지." "허, 그냥저냥 살다니요? 그런 소리 마소. 장배 부리든 장서방은 졸부가 됐는데 우리네라고," "세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고 기다리볼 일이구마. 나릿선 부리든 아무개가 졸부 되는 날을." "하하핫 하하 그러 잖애도 귓밥만 만지고 있소." "장서방 겉은 사람이사 제 배 가지고 장사를 하니께. 장사눈이 밝아서," "어디 그 사람뿐입디까? 요새는 돈푼 가진 사람이믄 왜놈들 뽄을 보고 장삿길로 많이 나가더마. 그러니 밑천 적은 사람들은 자연히 밀리나게 될밖에 없고." "누가 아나?" "멀 말이오?" "이보다 좋은 백 모아가지고 나릿선 부릴 사람이 생길는지." "이것도 벌이라고?" "인심이 날로 영악해져서 그뿐이라믄 좋겄는데 약삭빠른 놈들은 왜놈 집구석에 벌써부터 종살이로 들어갈 국량들 하고." 공노인이 평사리에 당도했을 때 마을은 조용했다. 해는 엄치 기울어 아이들이 소를 몰고 돌아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공노인은 높이 솟은 최참판댁 고래등 같은 집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주막을 찾아간다. "어서 오시시요." 영산댁이 맞이했다. "여기 술 한잔 주시오." 공노인은 술판 앞에 앉았다. "못 보든 얼굴인디 타곳서 오신게라우?" "그렇소." "장삿길이랑가요?" "그렇소." 영산댁은 술과 안주를 술판에 내놓는다. "날이 설렁해졌소." "야. 길 걷기 좋겄소이." 공노인은 시장하던 참이라 단숨에 술잔을 비워낸다. "한잔 더 하시겄소?" "한잔 더 주시오." 주막에 손님이라곤 공노인 혼자였다. "어째 동네가 이리 조용한가 모르겠소?" "조용할 때도 있고, 노상 조용한 것은 아니지라우." "옛날에 내가 이곳에 삼을 팔러 온 일이 있는데," "언제였어라?" "그게 아주 오래된 일이지요. 그때 최참판댁이라든지, 그 댁에서 삼을 팔았는데 그 댁 마님 여태 살아 계시는지 모르겠소." "그댁 마님이면 누구 말심이랑가요?" "마님이 여러 사람이오?" "아 금매. 그 댁 형편이...젊은 사람이었소?" "아니, 젊진 않았소." "그렇담 아주 아득히 옛시절인디 거기 삼 팔러 가시려고 그러요?" "그러세..." "삼은커냥 도라지 한 뿌리도 못 팔 것이오." "왜 그렇소? 망했소?" "망한 거나 진배없지라우. 사람이 살아야제." "사람이 안 살면은, 그럼 귀신이 살고 있다 그 말이오?" "귀신이야 우굴우굴할 것이오. 비명에 간 사램이 많은게로. 병신한 사람이 살고 있는디, 색씨가 있긴 있지만, 하인도 없는 건 아니지만 모두 온당하들 못한께로." "그거 참 괴이쩍구만. 어째 그렇소?" "이야그할라면은 길제요. 근동이면 모릴 사람은 없일 것인디." "그럭허소." 술은 쳐놓고 영산댁은 물었다. "노인은 어디소 오는 길이라?" "어디랄 것 있소. 조선팔도 뜬구름같이 다니니." "객지바람을 많이 쏘였으면 아는 것도 많겄소이." "아는 게 뭐 있겠소. 그저 인심을 알 뿐이지." "그란게로, 인심을 안다면 아는 거 아닌게라우? 그래 워디가 젤 인심이 좋습디여?" "좋은 곳이 어디 있겠소. 오뉴월 햇볕에 갈아버린 마음들이지. 축축하니 물기들이 있어야 인심도 좋아지는 거 아니겠소?" 17장 혜관의 견문 맨드라미가 아주 시들어비린 뜨락에 신병이 잦은 윤도집의 마누라가 배추시레기빛 얼굴을 하구서 새빨간 김장고추를 멍석에 펴널고 있었다. 시들어버린 맨드라미와 참나무같이 말라 뼈만 앙상한 마누라 손등을 번갈아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윤도집이 몸을 돌린다. 혜관이 기다리고 있는지 오래인 사랑으로 걸음을 옮긴다. 어깨뼈가 솟은 듯싶은 뒷모습에서 냉정하고 마땅치 않아하는 기색이 배나고 있었다. 사랑방으로 들어간 윤도집은 헛기침을 하고 오른편 버선발을 아랫배 쪽으로 끌어당기듯 앉는다. "어찌 오시었소? 혜관께서는 매우 어려우신 걸음이오." 비꼰다. "소승이 택일을 잘못하지나 않았을까 지금 그걸 생각든 중이오. 어째 고끝이 설렁하오이다." 비꼬는 윤도집에게 혜관은 심통이 난 듯 응수한다. "그간 지리산에서 호랑이밥이 되지 않았나 근심하였소이다." "근심하시었다구요? 허어." "..." "만주벌판 비적놈들이 무리지어 횡행하는 그곳을 싸돌아다녔지마는 총구멍은커녕 철상 하나 없이 곱게 돌아왔는데 설마한들, 지리산의 산신이 노망들지 않은 다음에야. 씀바귀 같은 중고기, 뭐가 맛있다고 하하핫..." "그도 그리 생각할 것이, 돌아오는 날 얼굴 구경 한번 시켜주고는 종무소식이었으니," "그나저나, 운봉선생께서 편찮으신 모양인데," "그 소식을 들었소이다." "그야, 들었을 테이지요만 연세가 연세인만큼," "별일이야 있을라구요. 나이에 비해 건장한 어른이시고, 용이 못 된 이무기는 원래 명이 긴 법이오." 운봉 양재곤에 대해서 윤도집은 감정이 좋지 않음을 나타낸다. "글쎄올시다. 만의 일,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은 환이가 산에 남아있으려 하지 않을 테니," 방문 쪽에 한눈을 팔고 있던 윤도집의 눈이 재빠르게 돌아와 혜관 눈에 박힌다.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낸다. "그럴 때가 되면은 그런대로 대책이 있을 것이고, 어느 누군들 몇백 년을 사는 것은 아니지 않소?" "사람 목숨이야 한 살에도 죽고 두 살에도 죽는 것, 동학의 윗돌이 빠지고 아랫돌이 빠져나간다면 중간돌이 허공에 붕 하니 뜰 것인즉 그래 소승이 근심하는 바이오." "돌의 씨가 말랐답디까?" "돌도 돌 나름, 청석도 있고 썩돌도 있고 개울돌, 부지기수인데 아무거나 위아래에다 쑤셔박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환이가 아랫돌이오? 머릿돌 아니든가요?" 비웃는다. "허허어 그렇다면야 더더구나, 도집어른 말씀대로 하자면 머릿돌, 소승은 아랫돌이라 하였으니, 어느편이든 몸뚱아리만 가지고선 아무 일도 못 하지요." "어째 대사께서는 돌로만 비유하시오. 목재에 비유하심이 보다 적절할 듯싶소. 재목이란 구멍을 메우는게 아니며 용도 따라 켜서 기둥도 하구 판자도 하구, 결국 목적에 닿는 집을 지으면 되는 거 아니겠소?" "지금 우리 사정에 그럴 여유가 있소? 돌을 줏어 구멍 막기도 어려운데, 집을 짓는대도 그렇지요. 소리가 요란할 게요." 혜관은 한숨을 깨문다. 환이와 윤도집의 오랜 평행선이 이제는 차츰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느낀 때문이다. "소리가 나는 게 아니라 시간이 걸릴 테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소이다. 간도 용정이라는 곳에 갔더니 그곳에서도 사방에서 집들을 짓소 있더구먼요. 작년 봄에 불이 나서 그런다고들 하기도 하고 음흉한 왜놈이 뒤에서 조종하여 조선인 앞잡이들이 요지마다 땅을 검잡아서 집들을 짓고 있다고도 하고, 그러나 그보다 학교라는 것을 많이 세우고 있다는 것이 두드러지는데, 그야 간도뿐이겠소? 도처의 사정이 엇비슷할터이지만 특히 종교단체, 그러니까 시천교에서 대종교 천주교 야소교 제제가끔 학교 세우는 경주라도 벌이는 느낌이 들었소이다. 말인즉 백 년 앞을 내다본다든가? 백 년 앞을 내다보는 것도 좋고 천 년 앞을 내다보는 것은 더욱 좋겠지요. 그러나 무엇을 내다보느냐, 무엇을 내다보고 가르치느냐, 새소리를 가르친다고도 하고 그것에 곁들여서 애국 소리 독립 소리도 가르친다 그런 말이었는데 소리란 모두가 기왕에 있어 온 것들이요, 그놈의 새소리라는 것은 양소리를 이름이겠는데 아 글쎄 서양 소리라고 사람의 소리가 아닌 것도 아닐 터인즉 소리만 질러서 될 일이라면은 부처소리만 가지고도 능히," "각설하시고," 윤도집이 말을 막는다. "끝이 없는 얘기는 그만두시고 그곳 사정이나 얘기해주시오." 혜관이 껄걸 웃고 윤도집도 하는 수 없이 웃는다. "그렇잖아도 적잖은 밑천을 장만해오긴 왔소만 술도 익어야만 떠는 법 아니오니까? 보고 들은 것이 많다 한들 원래가 무식한 땡땡이중, 그간의 견문이란 것도 푹 익혀야, 해서 오늘 이렇게 하하핫핫..." "아따, 서문이 기오이다." "그러니까, 아...수운제 교조께서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구십 년 전, 아마 갑신년 생이지요?" "아직 서문이오?" "성미도 급하지 않은 분이 왜 이리 깝치시오? 하여간 소승이 잘못 안 것은 아니겠지요?" "정확히 아시었소. 한데 중이 동학의 교조 생신을 알아 뭣하시려오." "생각하는바가 있어서요." "머리 기르시고 우리 쪽으로 개종하시겠소?" "천만의 말씀, 소승 얘기나 끝까지 들어보시고서, 그러면은 수운제께서 붙잡히어 처형당하신 해가 갑자년이라 생각되는데, 포교는 그 이전 삼사 년으로 보아야겠지요?" "그렇소이다." "가만히 있자아, 그러면은 대체로 십 년 간의 차이가 있는데," "뭐가 말씀이오?" 실실 웃던 웃음이 윤도집 입가에서 사라진다. "태평천국과의 사이가 그렇다는 얘기요." "..." "홍수전이 나기론 수운제보다 십이 년 접인 임신년, 같은 잔내비띠라... 그로부터 삼십팔 년 후 경술년에 기병하였으니 대략 나기도 십 년 넘기의 차이요, 기병하고 포교한 것도 그러니까 이쪽에서 십 년이 처니는 셈인데," "오리무중이구려. 무슨 말씀을 하려는 건지, 짐작이 안 가는구먼요." "소승은 동학과 태평천궁의 유사한 점을 얘기하려는 거요." "참말로 태평하시오, 태평천국처럼. 그런 얘기 지금 해서 무어에다 쓰시려오?" "버릴 말이라도 일단은 들으시오. 핵이 있어야 부챗살도 열리는 것 아니겠소? 소승도 여러 가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하는 말이니," "..." "이번에 그 땅으로 건너가서 이런저런 얘기도 들어보았고 소승이 눈으로도 두루 살펴보았는데 웬일인지 불각처 태평천국과 동학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리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도 막연하나마 느껴지더란 말씀이오." "그래서요," "그 얘기를 시작한달 것 같으면, 그러니까 시초 여진족이 어째서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로 쳐들어갔느냐, 그것은 이자성이 일으킨 민란으 진압하여다라고 명나라 조정에서 요청을 한 때문인데," 무슨 얘기를 하려는가. 혜관은 턱없이 거슬러올라가서 얘기의 대목을 잡는다. 그러자 민란에 관한 것이라면 중의 소간이 아니란 듯 윤도집은 말허를 부질러버린다. "민란 말씀이오? 새삼스럽게 이자성의 얘긴 할 것도 없어요. 기왕 새삼스러울려면 진나라 한나라 수, 당, 송! 어느 시대를 막론하구 이자성이 없었던 일이 있었소? 농민 반란 떄문에 여진족을 불러들여서 여진족에게 먹혀버린 명조만 하더라도 시초 농민 봉기로써 이룩한 나라 아니었던가요?" "그, 그야," "어느놈이고 간에 그랬었소. 어느놈이고 간에, 농민들의 고혈로써 혁명을 성취하고 정권을 잡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농민들은 그들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되는 게요. 왜냐하면 무너뜨린 정권의 전철을 그들도 밟게 마련이니까. 해서 농민들은 언제나 닭 쫓던 개 모양으로 지붕만 쳐다보는 게요. 그것뿐이라면? 한술 더 떠서, 어제까지 농민들을 위하여! 핍박받는 가난한 백성을 위하여! 모두 한 기치 아래 모이라고 목이 터지게 외치든 자칭 구세주는 권자에 오르기 무섭게 농민들 등에 화살을 꽂는 게요, 흥! 그걸 새삼스럽게, 지금 이자성은 들먹여 뭐하시려오? 하나마나 뻔한," 유장하게 나가려던 혜관의 코가 납작해졌으나 윤도집도 그답지 않게 꽤 팔팔거린 셈이다. "여보시오 도집어른, 그렇게 한곳으로 몰아붙이고 보면 윤도집께서도 도망갈 구멍이 막혀버리지 않겠소? 만일 동학이 조선 천지를 장악하였더라도 역시나 그렇게 됐을 것이란 얘기요? 오늘은 심기가 매우 좋지 않으신 모양인데 하여간 거두절미하지요. 소승 하든말 계속하겠소. 그러니까 대략 십 년의 연대 차이가 있는 태평천국과 조선의 동학이 다같이 신흥 종교이면서 또 엇비슷한 나라 사정하에 군병을 일으킨 사실이 흡사하고 교리에 있었서도 그러한, 엇비슷한 점이 없질 않소. 과격하기야 그쪽이 월등하겠으나," 혜관은 여진족이 산해관을 넘어 운운하던 말은 생략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엇비슷하지요?" 윤도집이 반문한다. "우선 잡동사니라는 점을 들 수 있겠소." "잡동사니요?" "네. 잡동사닙니다. 태평천국의 교주이자 자칭 천왕인 홍수전이 야소교에다가 불교와 도교를 곁들여서," "이보시오 혜관스님. 남의 집안 얘기긴 하지만 그런 낭설이 어디있소? 홍수전이 사찰과 종묘를 때리부싰고 불지르고 했다는 얘기는 들었소만, 허참." "그건 훨씬 훗날의 얘기고 시초에 있어서는 백련교의 흐름 속에서," "백련교의 흐름과는 상관도 없는 그것은 순전한 야소교요. 그리고 또 백련교라는 것도 미륵불의 강생을 내세웠다 하여 종래의 불교하군 사뭇 다른게요." "그 점은 소승도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윤도집은 들은 척 만 척 "권력의 그늘 밑에서 비단 가사에 기름져온 중들, 이조 오백년 더할 수 없는 핍박 속에서도 권력자에게 추파 보내기에 여념이 없었던 중들 아니었소? 돈 있는 아녀자들 치마폭에 가려졌던 게 조선의 사찰이었소. 그런고로 친일의 춤을 중들이 남 먼저 추고 나온게요. 어찌 아전인수 백련고 운운하시오." "아전인수라니, 하하하핫...하하핫, 소승이 불교로써 윤도집께 대항한다 말씀이외까? 추호 그럴 생각 없고 오히려 우리 조선에서 되어온 불교나 중들에 대한 도집어른의 통박에는 소승도 동감하는 바이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중이 한 짓이오. 사람이 한 짓, 부처님 말씀은 아니외다." "그렇게 하라는 말이야 없었겠지요. 허나 핍박하고 착취하는 자, 칼을 들고 대항하라는 말도 없었겠지요." "허 참, 칼 들고 싸움하는 교가, 그렇게 따지자면은 종전의 교치고 그렇지 않는 교가 어딨겠소? 내 듣자니까 야소교도 남이 왼뺨을 치면 오른뺨도 내밀라 했다지 않소. 그러니 잡동사니 아니고서는 칼 들고 싸우기 어렵지요." "원래가 불교나 유교는 물심양면으로 힘있는 자를 위해 봉사해온 종교요. 해서 교조께서는 불도 유도 누천년에 운이 다했다는 말씀을 하시었소 서학은 좀 다르지요만," "소승이 도학을 헐뜯자고 한 말이오? 불교를 옹호하자고 한 말도 아니구요. 성미도 급하지 않는 분이 니 잘났네 내 잘났네 하자는게 아닌 터인데 외곬으로만 얘기를 몰고가니 온," 혜관은 딱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비로소 윤도집은 웃는다. "예, 말씀하시오 스님." "네." 혜관은 침을 삼키고 말한다. "윤도집께서 자꾸만 말하는 바람에 생각이 무산하였소. 어어 그러면 우선 잡동사니다 한 연유를 얘길 해야겠소. 수운제께서는 본시 사족인 만큼 유학에 통했을 것은 물론, 사십 가깝도록 방랑을 하다가 도를 받았다 했는데 그 동안 불경에 관심이 없었을 리 없지요. 서학을 아는 분이 불도에 등한했을까요? 소승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고? 네, 그렇소. 중요한 것은 잡동사니라는 것과 민생을 위하여 농민들을 몰고서 침략자에게 칼을 들었고 외세를 몰아내려 했던 그 점이 태평천국과 흡사하다 그 얘기요. 어째서 흡사한가, 그것을 동학으로선 극구 부인하려지마는 수운제께서는 분명히 태평천국의 홍수전 영향을 받았을 것이오. 홍수전을 일개 난적으로 치부하는 조선의 형편이고 보면 그쪽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소승의 말을 언어도단이라 하 뿐이나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겠소. 좀더 합당한 말이 있을 법하긴 합니다마는 도집어른도 아시다시피 소승 배운 않는고로 뜻이 잘 전하여 질지 답답하오만, 한마디로 동학이 하는 것은 하늘이요, 하늘에서 도를 받아 천도라 그러나 분명 영신을 본으로 삼은게지요. 그러나 홍수전은 스스로 자신을 천왕으로 일컬었지마는 그의 포부는 인도였을 것이오. 처음부터 그들은 칼을 휘드르고 나왔으니까요. 중국에서는 칼을 휘두르지 않는 유교나 도교도 눈앞에 볼 수 없는 하늘나라 얘기는 하지 않았소. 알맹이야 서로 다르겠지마는 어떻게 사느냐는 얘기지요. 불교, 손쉽게 백련교를 예로 들어도 그렇소. 참 아까 윤도집께서는 아전인수라 하셨지요? 아전인수가 아닌 것이, 소승은 백련교를 불교와는 먼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터라, 백련교 역시 극락 가는 일보다 사람들 입에 풀칠 하는 일이 더 시급했다 그거 아니겠소? 중국이란 곳은 말짱 그 판이오. 내세보다 현세요. 하늘보다 땅이 중요하다, 어째 소승이 백련교 얘기를 하느고 하니, 오늘날 청조를 무너뜨린 힘은 대체 무엇이냐," "꼭 같은 순환이지 뭐겠소." "아니오. 도집어른이 말슴하신 종전과는 양상이 좀 달라요. 그러니까 청조를 무너뜨린 힘은 무엇이냐, 그 힘의 줄기를 찾아볼 것 같으면 줄기 중에서도 백련교가 꽤나 굵은 줄기거든요. 향이야 피웠다 하더이다만 목탁 뚜디리는 것보다 무예에 힘을 썼고 그의 날개 밑으로 기어들어왔던 농부며 역졸이며 광부들이며 그것들은 말할 나위 없이 청조를 때리부시려는 힘이었을 것이고 그 저력이 다시 태평천국을 깔리며 스며들어 갔었고 홍수전이 패망한 후 그것은 또 신해혁명의 저력이 되었고, 지금 앞으로도 그 힘은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 나갈 것이 틀림없소. 그러면은 어떻게 그 힘이 종전같이 몽땅몽땅 끊이질 않고 이어져서 내려왔는가, 강력한 정권이 들어서질 않아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도집어른 말씀대로 속아서 내려온 역사로 하여 단련된 때문이겠고 그러나 그보다 먼저 어째서 그들, 중국의 농민들은 번번이 정권을 때리엎을 수 있었느냐, 그게 중요한 것 같소. 우리 조선에 있어서 민란이 빈번하였건만 농민군이 정권을 엎은 일이 없었소. 수십만 동학군도 시초에는 왕가를 인정한 나머지의. 백성들 권리 주장을 앞세우고 대항했던 거쇼. 그러나 동학군은 패망했고 지리멸렬, 친일파로 많이 넘어갔지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게 중요한 게요. 중국에서는 힘있는 자를 위한 종교였었다고 도집어른이 말씀하신 유교라는 것조차 사람 사는 버번의 얘기며 영신 섬기는 얘기는 아니거든. 한데 조선에선 칼을 들고 싸운 동학조차 영신 섬기는 것이 본이오, 자아 이렇게 되면 뭔가 확실해지는 게 있질 않소? 중국이란 곳엔 기껏 있어야 귀신 정도," "그러면은 영신과 귀신이 어떻게 다리외까?" "그, 그야, 그 그것은," 억지든 무엇이든 시원하게 나가던 혜관의 변설이 막혀버린다. 허를 찔리어 당황한 것이다. "그, 그것은 찍어서 말하기가, 네, 더군다나 이 무식한 중이," 하다가 무안수세처럼 씩 웃는다. "여, 역시 다르기는 다른 거지요. 본래 천지만물이 미망에서 미망으로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그 끝이 없는 육도윤회이온데 그곳을 벗어나 사성문 영역으로 들어감으로써 비, 비로소 영신이라 일컬을 것이며 귀신이란 이승에도 저승에도 못 간 잡신이고 보면은," "혜관께서 불교에 바탕을 두고 말씀하시니 나도 알게 쉽게 불교식으로 얘기하겠소. 도교란, 즉 노자와 장자 같은 사람을 드고 말할 것 같으면은 소승에 속한다 할 수 있겠는데 소승도 분명 사성문에 들어갈 수 있거늘 어찌하여 중국에는 영신이 없다 하시오." 몰린 혜관은 화를 벌컥 낸다. "아따, 도집어른도 좁쌀양식 오지랖에 싸 다니겠소. 다행히 그렇다는 얘기 아니오. 그렇게 낱낱을 가려낸다는 것이 어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소? 귀신이고 영신이고 논바닥에서 훑어낸 벼이삭도 아니겠고 노자 장자가 어디로 갔는지 묵자가 귀신나라에 가서 재상 노릇을 하는지 아는 바 없소만, 또 대승으로 볼려면 볼 수도 있는 수운제나 해월이 사성문 중 보살이 되었는지 부처가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오만," 하다가 혜관은 그 문제에서 도망을 친다. "종교 가지고 따지잘 것 같으면은 애당초 불교 얘길 했을 일이지 무엇 땜에 동학을 쳐들었겠소. 소승은 어디까지나 종교를 빌어서 중국과 조선의 사정, 백성들의 성향 같은 것을 말하려 했던 게요. 아무튼 또 거두절미하지요. 아까 하던 말이오만 백련교나 태평천국이 뿌려놓은 씨앗이 오늘날 중국에선 아주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는 것은 수천 년 사람을 본으로 하는 그곳 사상 때문이며 싹이 나자마자 짤려버린 우리네 조선국 사정과는 판이하지요. 아무리 비바람이 드세어도 나무가 뿌리째 뽑혀나가는 일이란 없을 것으로 소승은 그렇게 보았소. 중언부언하는 것 같소만 그네들의 종교는 신비라기보다 실질이오. 일찍이 우리 신라 중들이 당나라 불교계를 주름잡았단 일은 오늘 이 시점에서도 납득될 수 있는 일 아니겠소? 법비이오. 중들이 무예를 익히는 것 소위 도술이지요. 살생계를 범하고 드는 게지요. 우리 조선 중, 의상이나 원효에게서 피비린내를 생각할 수 있겠소? 종교의 본질로 봐서는 우리 쪽이 깊다면 깊은 거지요. 우리 조선에 있어선 유교만 해도 그렇지요. 학문으로서만 높이 올라갔고 실생활에는 도통 쓸모가 없었어요. 그야 실학을 도외시하고 예학만을 숭상하였으니 일반 백성들에겐 조상의 묘 지키는 것과 선영봉사하는 것 이외 가르친 것이 없구요. 충절까지도 선비들이 독점하였으니, 동학은 또 어떠한가 하면은 처니 자연의 이법을 뜻하는 중국의 천도와는 다른 하나님의 도, 천도란 말씀이오. 이런 얘기는 머리 깎은 중의 할말이 아닌 것은 말할 낭위 없지만, 음... 그러나 앞으로 동학이 어디로 나갈 것인가 어떻게 뿌리를 박을 것인가 그게 중요하기 때문에 소승 감히 고언을 드리는 바이오. 노상 쟁점이 칼 드는 일과 포교하는 일 어느편에 치중하느냐, 물론 포교하고 소승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오만, 소승도 도집어른 심중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요. 단순한 포교가 아니라는 것쯤은. 해서 중국 땅에 가서도 독립군의 활동 상태를 살피는 한편 백련교나 태평천국에 관한 것에 유심히 귀를 기울였던 것이오. 사실, 지금의 그곳 형편을 들어본즉 가지가지 비밀결사가 있긴 있으나 교 같은 것은 신다 버린 신짝 꼴이 되고 그 줄기를 타고 내려온 인재들만이 별의별 사람에게 섞여 일들 하고 있다더군요. 하기야 그렇게 되니 가지도 많을 것이겠으나 목적은 같아서 청조를 몰아냈듯이 또 하나의 패자 원세개도 몰아내려 하고, 거머리같이 들붙어서 피를 빨아대는 외세도 몰아내어 모두가 공평하게 먹고 입고 죄없이 핍박받지 아니하고 양반 상놈 구별 없는 앞날을 위해 싸우며 준비하며," 윤도집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제는 어지간히 밑천도 떨어졌는가 혜관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문지르면서 곁눈질하여 윤도집의 표정을 살핀다. 이윽고 "얘기의 골자는 결국 환이와 내 사이의 의견 대립, 그것이로구먼." "그것은 도집어른 뜻대로 생각하시오." "환이에게 신념이 있소?" "소승에게 물어보실 말씀은 아니오이다." 이때만은 혜관의 얼굴은 완강하였다. "그러면 왕시 김개주 접주의 전철을 밟아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은 해보시었소?" "아니 되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소이다. 밟을래야 밟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게요. 수만 군병이 있소이까?" "군병이 있고 없고, 과격한 행동은 종말을 재촉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적은 수효는 아껴야 하오. 새끼를 쳐야지요. 시간을 벌어야 하오." "적은 수효라도 안 쓰면 녹이 쓸지요. 또 김개주 접주의 경우만 하더라도 과격한 행동 때문에 종말을 초래한 것은 아니었소. 동학군 자체가 대세에 의해 무너졌지 김접주의 과격한 행동 때문에 무너진 것은 아니잖습니까?" "..." "윤도집께서는 지나치게 염려하시는 게요. 소승 아까도 얘기했소만 만주 땅엘 가니까 처처에 우리 동포들이 학굘 만들고 있습니다. 서당 같은 거야 말할 것도 없구요. 그래 소승은 생각했소이다. 배우는 것도 좋고 인재양성도 시급한 일이기는 하나 뭔가 같이 해나가야 할 일이 있지 않는가 하구요. 극단으로 얘기하자면 학교라는 곳도 법당 안의 염불 같은 것이 되기 쉽다. 네, 십 년 뒤도 좋고 오십년 뒤까지 기다려보는 것도 무방하지만 그 기간 동안 백성들은 잊을 것이오. 교활무쌍한 홰 위정자들,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성싶소? 하니 불씨를 여기저기 묻어놓을 필요가 있다, 때때로 터지기도 하고 불붙기도 하구, 백성들 가슴에 충격을 주는 일이 교실 안에서 얻은 지식을 전파하는 것보아 월등 효력도 있거니와 널리 퍼지고, 함께 뛰고 싶어지는 거 아니겠소? 그러니 그것이 보다 강한 백성들 교육 방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오. 또 길러낸 인재들 뿌릴 박게하는 토양도 되구요. 미적지근한 것 가지고는 푹 가라앉아 버리지요. 불씨는 하나 둘 꺼져버린다 말입니다. 윤도집께서는 교세 확장을 통하여 누긋하게 인원을 불려가면서 힘을 모아 치고나가자는 셈을 하십니다만 안 됩니다. 푹 가라앉은 백성, 불씨 잃은 백성이 주문만 외고서는 법당에 앉아 저승길 닦는 절의 신도들과 한푼 다를 것이 없지요. 어디까지나 동학은 위장이어야 하오. 신도들 대가리 수에 희망을 걸지 마시오." "그러면 혜관께서는 중옷 벗을 각오도 돼 있다 그 말씀이시오?" 윤도집은 날카롭게 반문했다. "꼭이 벗어야 한다면 벗을 수도 있는 일이지요. 중옷 입었다고 성불하게 생겼소? 하하핫..." "이제 그 얘기는 그 정도 하십시다.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나도 생각해보겠소. 그러나 환이가 생각을 좀 달리해주지 않는다면 양보하기 어렵지요. 내가 보건대 운봉선생이나 혜관께서는 회피를 하십디다만 그사람한테 신념이 있는가 그게 문제요. 투철하지요. 그러나 투철하다하여 그것을 신념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외다. 그 사람은 위험의 불씨를 안고 있소. 신념이 있느냐 하고 묻는다 해서 그 사람이 배신자가 된다거나 굴복한다거나 안일한 생활과 타협을 한다거나, 그럴 위인이 아닌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 오히려 그 반대, 제 몸을 불사르거나 때리부시는 최후수단을 언제 어느 시 그가 결행할지 모를 일이오. 그리고 그것에는 우리, 이 피나게 줏어뫄 형체를 겨우 만들어 놓은 동학이 함께 불사루어지거나 때려부숴질 위험이 있소." 순간 혜관의 낯빛이 흐려진다. 윤조딥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기 때문이다. 메마른 정열, 그렇다, 환이의 정열은 메마른 것이다. 메말랐기 때문에 냉철한 것이다. 목적은 있으나 희미하고 과정만이 뚜렷하다. 대담하고 인내심 깊은 것은 먕망을 위한 집념 때문이 아니다. 절망의 정열, 그렇다. 환이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걷고 있다. 혜관의 입에선 자신도 모를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때 문간에서 인기척이 났다. "우리 스님도 여기 오셨지요." "사랑에 기시니 들아가보시쇼." 윤도집 마누라의 말이었다. "절에서 누가 온 모양이지요?" "학장이 왔을 게요." 혜관은 입맛을 다신다. 곧 이어 "스님." 문 밖에서 혜관을 찾는다. "오냐. 손님 오셨느냐?" "예." "그래 알았다. 내 곧 가마." "그럼 저는 먼저 가오리까?" "그래라." 혜관은 절을 떠나오면서 윤도집댁에 가 있을 터이니 손님이 찾아오거든 곧 기별하라는 말을 학장에게 일렀던 것이다. 학장이 가고난 뒤 한도안 서로 머쓱해서 바라보다가 아무런 합치점도 발견하지 못한 채 혜관은 일어섰다. 윤도집 얼굴에는 흥분한 자신에 대하여 후회하는 빛이 조금은 있었다. 작별인사를 하고 문밖을 막 나서려는데 한 사내가 다가왔다. 혜관은 누구더라? 하는 시늉으로 땅땅하게 되바라진, 노리끼하고 성근 수염의 사내을 쳐다보는데 "도집어른 그간 별고 없으시오?" 혜관이 돌아본다. 뒤에 서 있던 윤도집의 표정이 묘하다. "자네가 웬일인가?" 혜관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여거 볼일이 쪼깬 있어서 왔다가 들맀지라우." "들어가세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혜관은 걸음을 빨리한다. 그 사내는 임실의 지삼만이었다. 혜관이 쌍계사로 돌아갔을 때 공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어구 노인장, 용케 오시었소." 혜관은 반색을 한다. "안 오고 어쩌겠소. 두루두루 살펴보고 돌아가야지요." "일은 어찌 되었소." "자알 되어갑니다. 약은 쥐가 밤눈이 어둡다 하잖소?" "하하하핫... 네. 그렇소. 그는 그렇고 오늘 하루 쉬었다가 내일 아침에나 떠나지요." "허허, 절 인심이 여간 아니구먼요." "네?" "앉은 자리에서 내쫓기지 않아 다행이오만," "무슨 말씀을 하시오." "내일 아침 떠난다 해도 한번쯤 더 쉬었다 가라 하는게 수인사 아니겠소?" "하하핫핫핫... 그러시다간 노인장께서는 밤눈 어두워지겠소. 내일은, 그렇구먼요. 공노인께서 만나보실 사람이 있어 그러오." "아항, 이거 늙으면 나를 환대하나 천대하나 그것엔 눈치가 빨라지고 허허헛헛... 참을성 없이 잘 삐치지요." 하룻밤을 절에 묵으면서 공노인은 대충 서울의 일을 혜관에게 얘기해주었다. "뭐니 해도 봉순이 힘이 컸구먼요." "예." "이래저래 그 아이는 최참판댁을 위해서, 그게 모두 삼생의 인연이가보우." "그 아이도 아이려니와 일본으로 건너가 없지만 이부사댁 자제분이 만들어 놓은 연줄 아니겠소?" "그야 그렇습지요. 그것도 삼생의 연분이라 할밖에요." "참, 옷깃이 스쳐도 그렇다 하거늘, 허나 이부사댁 그 사람은 최참판댁 손녀사위가 될 뻔했었소." "그 얘기는 들은 듯도 하구," "어쩌다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이든 위하여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요. 역적을 섬기든 도둑놈을 섬기든, 위할 것이 없는 사람보담이야, 않그렇소? 공노인." "그야." "나라를 섬기면 더욱 좋고 가난한 백성을 섬기면 더더구나 좋고 은인을 섬기는 것도," "가지," 공노인이 말허리를 잘라버린다. 누굴 뭐 어린앤 줄 아나? 섶어 소위 삐친 것이다. 조준구를 손바닥에 올려놨던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노인 특유의 어리광도 있긴 있었다. "말인데 조준구 집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한 어쨌으면 좋겠소?" "석이가요? 음..." "내 생각에는 안 될 일이라, 하도 그러니 스님하고 의논해보마고 했지요." "수는 있겠소?" "집에 지금 있으니까 안 될 거야 없지요. 임역관이 말하면은." "그럼 그렇게 하지요 뭐." "예?" "아이가 경망한 짓은 안 할 게요. 병법에도 싸움에 있어서 상대를 알아야 한다 했으니," 혜관의 결단은 아주 쉬었다. 너무 쉬워서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넌다는 신조가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공노인은 잠자코 만다. 혜관을 따라 운봉 양재곤의 초막을 공노인이 찾아간 것은 다음날 점심때쯤이었다. "혜관스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소이다. 올라오시오." 백발이 성성한 운봉노인이 정중하게 맞아주었다. 운봉노인 옆에는 환이도 있었으나 통성명도 없이 그는 다만 고개를 숙이며 몸짓으로 인사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혜관은 보릿자루 떠메다 놓고 가는 것처럼 간다온다는 말도 없이 휭하니 가버리는 것이다. 18장 영웅의 아들 "발바닥에 지남철을 붙였나?" 석벽을 타는 산양과도 같이 험하게 경사진 산길을 평지 가듯 내려가는 환이를 뒤쫓아 내려가며 공노인은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반평생을 영에서 영을 넘어 방랑으로 보낸 공노인이었는데 건각이란 자부심도 있었고, 나이 탓일까 도저히 앞서가는 환이를 뒤따를 재간이 없다. 설령 한창나이였다 하더라도 저 걸음에는 따를 수 없으리라, 공노인은 화가 나면서도 속으론 감탄한다. 걸음은 그렇다 치고 위인이 노인에 대한 터럭만큼의 친절도 없다. 괘씸한 인사 같으니라구. 씽하니 혼자 내려가면은 어느덧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허둥지둥 한참을 내려가노라면 나무 밑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게 아마 공노인을 기다리는 품인 모양이다. 그러나 공노인이 가까이 가기도 전에 훌쩍 일어선 환이는 다시 씽하니, 바람같이 내려가버린다. 이러기를 몇 차례, 얘기를 나우어보기는커녕 낯선 나그네만도 못하다.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는 심사 같기도 하고. '지가 아무리 먹어봐야 서른대여섯, 마흔에는 못 미쳤을 텐데, 그래 저놈의 인사한텐 부모도 없나?' 이끼 낀 바위 틈으로 수북이 쌓인 가랑잎 사이로 그리고 산죽을 비집고 실날같이 그어진 좁고 희미한 길을 따라 공노인은 시근덕거리며 급히 걸어 내려가는데 환이의 모습은 영 나타나지 않는다. '제에기, 네가 이 늙은 나를 골탕먹여보자는 심뽀인 모양이지마는 좀 그렇게는 안 될 거로? 여보게! 젊은이 함께 가세나! 하면서 내가 동곳을 뺄 줄 아나? 어림없지. 가도가도 사람새끼라곤 눈 닦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는 만주 벌판을 헤맨 공서방을 몰라? 산? 산이라면 이까짓 것 백두산을 위시하여 안 댕겨본 산이 어디 있었어? 내 나이는 비록 늙었다마는, 하기는 이 산도 명산이긴 명산이구만. 구렁이가 또아리를 튼 것처럼 겹겹이 산이라,' 시근덕거리다간 산세를 살피는 여유는 있다. 만산은 활홀한 단풍, 황홀하다기보다 일대 장관이다. 눈이 시렵도록 푸른 하늘에 기대어 황색과 적색, 그리고 미련처럼 점철된 녹색의 능선이 가파롭게 혹은 완만하게 연이어져간다. '가거나말거나. 내가 부탁해서 따라온 것도 아니겠고 저쪽에서 슬며시 따라나와 가지고서, 내 길 못 찾아 산속을 헤맬 인간도 아니니, 그는 그렇다 치고 도모지 저자가 어떻게 생겨먹었기 저리 귀신같이 산을 탈까. 축지법을 쓴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게야. 서두른 것도 아닌데 절로 가는 모양이지?' 오기는 차츰 사라지고 감탄을 하는데 퍼뜩 공노인 머릿속에 주막 주모의 말이 떠오른다. '축지법을 쓴단 말시. 하룻밤에 산을 타고 수백 리를 간다는디,' "그러면은?" 환이가 간 방향을 향해 공노인의 눈이 차츰 벌어진다. 그리고는 다시 눈이 좁혀들면서 중얼거린다. "음... 이거 차근차근 생각해볼 일이구나." 그러니까 평사리 영산댁 주막에 하룻밤을 묵으면서 공노인은 실로 많은 얘기, 새로운 사실들으 알게 되었는데 특히 최참판네 내력에 관하여 영산댁은 소상하게 얘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꼬치꼬치 캐어물을 것도 없었다. 술꾼이 끊어진 휑뎅그레한 술판이 외로웠는지 모른다. 영산댁의 얘기는 별당아씨에 관한 대목에 이르러 고조되어갔다. "말이 머슴이지. 머슴이긴 혀도 인물이 옥골선풍이었지라우. 어디서 떠돌아왔는지 근본을 웨찌 알겄으라? 이야그는 많았제요. 어느 양반으 서출이라고도 히얐고 깊은 산중에서 도를 닦다가 중도지폐혔다는 말도 있었는디, 또 동학당 허다가 내빼온 거란 말을 허는 사람도, 그러니께 동학 난리가 있었을 적에 최참판네는 터럭 하나 다치질 않았든 그 일을 두고 나온 말이 아닌가 싶소이. 그러니께 마님이 거두어준 것 아니겄느냐 그 말이여라우. 그런디 삼수란 놈이, 삼수가 누군고 허니, 조가가 왜 헌병헌테 찔러서, 총을 맞고 밭뚝에 꺼꾸러져 죽은 놈인디 아 글씨 그 놈이 의병질이나 허고 그리 되얐이면 내가 놈짜 붙여감시로 이야글 할 것이여? 그놈은 그러크럼 죽을 만혀. 그러니께로 의병이 들고일어났늘 적에 삼수놈은 양다리르 걸쳤다 그거 아니겄소? 처음에는 제 상전을 저바리고 조가놈 편역이 돼야 동네 사람 헌티 못할 짓 많이 혔잖이요? 그러든 놈이 의병이 최참판네로 치고들어갈 때 문을 여어주었고 앞장서 날뛰었답매, 헌디 그놈이 그 북새통에 다시 돌아눕지 않았겄소? 조가를 숨겨주고 그러면은 톡톡히 한밑천을 잡을 줄로 알았을 것이요. 어림이나 있는 일이관디? 내가 워째 삼수 이야그를? 옳제! 야 그, 그렇지라우. 삼수놈이 구천이 뒤를 밟아 따라간 일이 있었다잖이요? 그런께로 축지법을 쓴단 말씨. 하룻밤에 산을 타고 수백리를 간다는디." "설마한들 하룻밤에 수백 리를 갈까." "금매. 산을 잘 타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일이여라우. 최참판네 사랑양반이 총을 듥고서도 눈앞에 있던 구천일 놓쳤인께로." "그건 또 왜요?" "이야그는 이렇게 됐지라. 구천이랑 별당아씨가 도망을 친 뒤 사랑양반은 두 남녀를 잡겄다는 독심을 먹고설랑 포수를 하나 사잖았겠소? 강포수라구," "강포수?" "야. 턱섭부리 강포수, 이 근동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명포수여라우. 사랑양반은 강포수하고 수동이란 하인을 데리고 지리산을 이잡듯이 뒤졌는디 금매, 눈앞에 보고설랑 놓치지 않았겄소? 혼자 뛰었다면 또 모르겄소. 산막에 숨겨둔 별당아씰 업고 달아났으니 그게 귀신이지 사람이랄 수는 도저히 없지라." 영산댁은 최참판댁이 어떻게 멸망했는가를, 최치수의 살해로부터 마을에 호열자가 만연하여 윤씨부인을 위시하여 집안의 수족같은 하인들이 죽어나간 일, 그 틈을 타고 조준구가 재산을 가로챈 경위며 보리흉년, 마을 사람으로 의병을 조직한 윤보며 김훈장, 처음 횃불을 들고 최참판댁부터 습격한 그날 밤 광경 등, 계속하여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것은 나중에 들은 소문이요만, 글씨 참말 겉지도 않소만," "무슨 소문인데요?" "아 글씨 구천이를 쌍계사의 노장스님 조카라 안 허겄소?" "노장스님이라면?" "우관스님이라고 했으라우. 여러 해 전에 돌아가셨지마는 생시에 최참판댁하고 인연이 깊은 중이란 말씨. 어떻기 생각하면 동학난리 때 최참판댁을 다치잖게 헌 것도 그런 연고 때문인가 허는 생각도 드요만, 워째 그러냘 것 겉으면 노장스님의 동생이 바로 그 동학당 장수 김개주 아니겄소?" "김개주라구!" "손님도 아시누만. 야아, 바로 그 김개주 장수가, 헌달 것 같으면 구천이가 김개주 장수의 아들이 되는 폭이어라우. 노장스님 조카랄 것 같으면." "허어," "만일에 그렇다면 기찬 얘기 아니겄소? 그때, 내 젊은 시절 그 김장수가 이곳에 쳐들어왔지라우, 이제 최참판네 박살이 나느구나 헜소. 헌디 그것은 참말 썰물 겉은 것이었더란께로? 새벽에 소리없이 동학군은 빠져나가 부리지 않았겄더라구? 풀잎 하나 다친 것이 없어야. 헌디 읍내로 나간 동학군을 그러들 안혔소. 송림 모래밭에선 양반 아전, 모모한 사람들 목이 추풍낙엽으로 떨어졌답매.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인께," 면면이 또 이어지는 사연, 막바지에 가서 영산댁은 이런 얘기를 했다. "올봄이었제. 아 글씨 올봄 일이랑께요. 어디서 죽은 줄만 알았는디 누구든 다 그렇기 생각했지라우. 헌디 그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구천이가 난데 없이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겄소?" "그것 참 휘안한 일이구먼." 건성으로 장단을 쳤으나 공노인은 마음으로 깊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구천이는 그들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얘기다. "소위를 생각허면 맞아야 싸제 벌써 죽었어야 헐 목숨인께로. 헌디 사람으 매음이란 요상한 것이여. 때리는 쪽보다 맞는 편이, 설사 죽을 죄를 졌다 혀도 불쌍한 것 아니겄소? 그때 내가 뜯어말리면서 순사가 온다 허질 않았으면 아마 맞아죽었을 것이여. 달아나지도 않고 대항허지도 않고 지가 죽지 어쩔 것이라? 허기는 그러크름 맞고서 종적을 감추었으니 살아 있을 것이란 장담은 못혀." 공노인은 비탈이 심한 길을 천천히 내려간다. 환이는 나무 밑동에 앉아 있었다. 공노인을 보자 일어서려 한다. "가만," 공노인은 손짓을 했다. "늙은 사람 좀 쉬어가자구."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다 환은 땅밑을 내려다보며 도로 주질러 앉는다. "숨이 가빠서가 아니라 담배 생각이 나서, 뭐 날 받아놓은 일도 없는데 안 그렇소?" 공노인은 환이와 마주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곰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잰다. "늙은 사람을 내버려두고 혼자가면 어쩌누." 아무말이 없다. 환이는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했고 소나무를 친친 감고 올라간 칡넝쿠을 바라보는 것 같기곧 했다. 담배를 붙여문 공노인을 연기를 뿜어내며 "지리산에는 호랑이가 많다든데 산속을 헤매다 호식이 되면, 허참 유언도 못하고, 그러면 안 되지." "..." "호랑이 얘기가 났으니 말인데 젊은 양반, 혹 텁석부리 강포수를 아시오?" 순간 환이의 상체가 햇솜처럼 앞으로 훌렁 기우는 것 같았다. "이 근동에선 명포수로서 그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든데," 환이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공노인을 빤히 쳐다본다. '왜 그런 말을 나한테 묻는 거요.' 눈이 공노인을 힐난한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는 모르오." "아아 그래요?" "..." "어째 내가 이런 말을 묻는고 하니, 용정에 있는 내 객줏집에 강포수라는 사냥꾼이 한번 찾아온 일이 있었소. 그러니까 지난 봄이었구먼. 오십이 훨씬 넘은 텁석부리 사내였는데 아마 손준가부다 처음에 그리 생각했지. 여나문 살 먹은 아들애 하나를 데리고서 왔더란 말이오. 용정에 온 이유인즉 사냥한 것을 팔기도 하려니와 그보다 아들애 공부를 시키자는 것이었는데 말씨를 듣고보니 영남사투리라. 해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만 무슨 곡절이 있었든지 화를 벌컥 내더란 말이오. 자기 고향은 경상도가 아니고 강원도며 그것도 어디서 났는지 모른다, 뭐 그거는 그렇고, 여기 오는 길에 하룻밤을 묵은 주막집에서 공교롭게도 강포수 얘기를 하지 않겠소? 지나가는 얘기였는데 주모 말을 요리조리 되살려보니 나이며 생김새며 또 아이 하나를 안고 갔다는 얘기며 아무래도 우리 객줏집에서 만난 그 강포수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이 산에서 호랑이 얘기를 하다보니 그 일이 피뚝 떠오르지 않겠소? 만일에 그 강포수가 틀림이 없달 것 같으면 세상이란 넓고도 좁은 것," 구천아! 수동의 절규다. 환이 돌아보았을 때 최치수의 총구는 자기에게로 옮겨지고 있었다. 구천아! 구천아! 구천천천... 천아아아... 환의 귀에 연달아 들려오는 수동의 고함 소리, 고함은 고함을 부르고 또 부르고 연이어져 연속된다. 강포수, 텁석부리 강포수는 남쪽을 향해 뛰었다. 서쪽을 향해 뛰는 환의 방향을 몰랐을 리 없다. 강포수는 우회함으로써 환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런 시절이. 꽃구름 같은 시절이라 할까 통곡의 시절이라 할까. 지나간 시절은 아름답다. 이제는 아름다운 것이 되었다. 상천도 사람도 처절한 비애, 젊었던 육신도. '형님! 어머님! 아아 당신!' 환의 손끝이 떤다. "강포수를 본 일은 없소만 얘기는 더러 들었소." 발 아래 돌을 주워 숲 사이에서 알짱거리는 한 쌍의 고라니를 향해 팔매질을 하고서 환이는 입을 떼었다. "세상이란 넓고도 좁은 것이란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그 강포수가 볼일이 있었던지 아들아이를 데리고 나가고 난 뒤 모피장사를 하는 추서방이라는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겠소? 얼핏 생각하기로 흥정을 붙여주자는 것이었소. 그래 얘기르 했더니 아 글쎄 아는 사이였더라 그 말씀이야. 추서방이 다소 홍범도 장군과는 관련이 있어서 강포수 내력을 알더란 말이오. 구라니까 삼수 갑산에서 홍범도 장군이 산포대를 만들었을 때 강포수도 참여하였고 그들을 따라서 두만강을 넘었다는 것이오. 역시나 추서방 말도 고향을 물으면 화를 낸다더구먼." "그러나 같은 강포수는 아닐 겁니다." "어째서?" 이번에는 공노인이 환이르 빤히 쳐다본다. 얼음같이 가라앉은 눈이 마주본다. "제가 들은 얘기론, 떠도는 소문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온 사람의 말입니다. 강포수는 죽었다는 것이었소." 물론 거짓말이다. 공노인은 눈길을 거두고 미소한다. "하기는 넓은 세상 닮은 사람도 많을 게고, 처지가 비슷비슷한 사람도 왜 없겠소." "..." "그는 그렇고오, 젊은 양반, 댁은 어디까지 가는 거요." "제 말입니까?" "그렇소." "글쎄올시다. 작정은 아니 했으나 서울까지 동행할까요?" "서울까지?" "네. 그럼," 일어섰다. 가파로운 길을 환이 앞서가고 공노인이 뒤따른다. '틀림없다. 주모가 말하든 바로 그자, 김개주의 아들임에도 틀림이 없을 게야. 그것은 혜관이 이자를 대하는 품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아버님!' 환이는 아버지 김개주가 죽었다는 생각을 한다. 십구 년 전 전주 감영에서 효수당한 김개주의 죽음을 어제 있었던 일같이 환이는 생각한다. 다음은 김두수의 아비 김평산에게 교살당한 이부형 최치수의 죽음을 생각하고 다음은 호열자로 죽은 생모 윤씨부인, 북방 이름 모를 깊은 산에 묻어주고 온 여자. 십오 년 전, 십일 년 전, 칠 년 전의 죽음들이다. 어제 일 같다. 그 죽음들이 어제라는 한가닥 새끼줄에 대롱대롱 매달리어 메마른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아버님!' 환의 발길이 빨라진다. 바람같이 삽시간에 그는 공노인으로부터 그의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사람들 말이, 얘기책은 거짓말이지마는 노래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아니지이, 얘기책 그게 다 참말인 기라. 그러고 보니 우리가 모두 얘기책 속에서 살고 있다 안 할 수 없구먼.' 공노인은 두메며 길상이며 월선이 봉순이 모두 기찬 얘기책 속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하나의 인생이 모두 다 기차다.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뜻대로 살아볼려니까 피투성이가 되는 게야. 인간의 인연같이 무서운 거이 어디 있나.' 공노인은 천천히 산을 내려간다. 노인을 골탕먹이려고 혼자 앞서 내려가버렸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되니 부아가 날 것도 없고. 그러나 얼마를 내려가도 환의 모습이 나타나질 않는다. 하마 나타날 거라는 어림짐작을 한 지도 오래다. '이거 길을 잘못 든 거는 아닌지 모르겠네. 가만 있자.' 사방을 살펴본다. '에이구 모르겠다. 바로 가나 모로 가나 산에서 내려가기만 하면 됐지 뭐.' 한참을 내려가다 공노인은 담배 생각이 나서 바위에 걸터앉는다. '하야간에 기기묘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어쨋거나 김개주 장수의 아들이랄 것 같으면 그만한 대접은 해주어야겠고 서울에는 뭣하러 갈려는고?' 이리하여 또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랬는데 먼저 내려간 줄 알았던 환이 위쪽에서 성큼성큼 걸어내려온다. '...?"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울었구나. 못난 위인 같으니라구.' 공노인은 공연히 마음이 놓인다. 구례 윤도집댁에 당도한 두사람은 인색스런 가모지만 음식 솜씨가 좋은 이 집에서 저녁을 치렀다. 깐깐하고 냉정한 성미의 윤도집과 역시 깐깐하고 능청스런 공노인, 서로 사이에 까칠까칠한 까시랭이 같은 것이 느껴졌던지 몇 마디 오가는 얘기는 겉돌기만 하였고 장승같이 앉아 입을 떼려 하지 않는 환의 존재도 거북했던지 윤도집은 초저녁에 자리를 떴고 사랑의 불도 초저녁에 꺼졌다. 이튿날 아침 공노인이 눈을 떴을 때 환이는 단정한 모습으로 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이미 세수도 끝낸 눈치였고 어디서 났는지 눈빛같이 흰 진솔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망건에 탕건까지 쓰고 있질 않은가. '어떻게 된 일이고?' 소쇄한 선비. 공노인은 경이에 찬 눈을 크게 뜬다. '허어, 과연 김개주 장수의 아들이로다. 천질이 귀골이구만. 저러허니 별당아씬가, 명을 걸고서 인연을 맺었지.' 공노인은 몸을 일으켰다. 입맛을 다시고 기지개를 켜면서 "어이구 잘 잤다. 어떻게나 곤하든지." "더 주무시지 않고," 환이 입에서 제대로 된 음성이 나왔다. "실컷 잤거마는," 오히려 공노인 쪽이 수줍어 한다. "오늘 떠나시는 거지요." "아암 떠나야지요." "가시는 길에 평사리 주막에 들르시렵니까?" 공노인은 놀라며 환이를 쳐다본다. 입가에 미소가 흐르고 있다. "거, 거긴 뭣하러 또 가겠소." "흠씬 더 매를 맞았으면 싶어서요." 공노인은 차마 그 얼굴을 더 볼 수가 없어 외면을 한다. "저어 그러니까 석이라는 아이르 아는지 모르겠소?" 난처해진 공노인, 이미 혜관과 타협을 본 석이 문제를, 다시 거론할 필요도 없는 일을 꺼내었다. "알지요." "그 아이가 한사코 조준구 집에 들어가겠다 하니, 혜관스님한텐 얘기를 했소만," "본인이 소원이라면 괜찮겠지요." "행여 무슨 일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싶어서 그러오." "저지를 만큼 원한이 얕을까요?" "원한이 깊으니까 근심하는 거요." "글쎄올시다. 원한이 깊을수록 뱀처럼 지혜로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럴 법한 말이긴 하나..." 하고는 공노인 말을 뚝 끊었다. 행여 환이가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겁내는 표정이 되어서. 왜 공노인은 별안간 환이를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그 자신 의식하지 못한 일이나 그것은 상민의 피, 공노인 내부에 흐르고 있는 상민의 피 탓이다. 김개주의 아들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저 준수한 젊은이가 김개주의 아들이라니 김개주는 영웅이다. 상민의 영웅이다. 이조 오백 년을 들어엎으려던 그를 사람들은 살인귀라 하였다. 압제자의 목을 추풍낙엽같이 날려버린 살인자, 살인귀건 흡혈귀건 아무래도 좋았다. 뭣이건 그는 핍박받아온 백성들 가슴에 등불로 살아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서울로 압송한 데 반하여 김개주는 위험인물이라 하여 체포 즉시 전주 감영에서 효수되었다. 위험시한 만큼 상민들 가슴에는 낙인처럼 뜨겁게 남아 있는 풍운아 김개주, 그 반역의 피를 지금 눈앞에 있는 아들에게서 본다. 반역의 피는 모든 상민들의 피다. 양반댁 유부녀를 데리고 달아난 것도 반역의 피 때문이다. 반역의 피는 억압된 상민들의 진실이요 소망이다. 수백 수천 년의 소망이다. 서울에 도착했다. 여인숙에 든 두 사람은 잠시 쉬었다가 이곳에서 저녁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제각기 볼일을 보러 나섰다. 공노인은 우선 임역관을 찾아갔다. 명빈이 일부러 나와서 공노인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웃었다. 큰사랑에 들어갔을 때 임역관도 명빈과 똑같은 웃음을 띠었다. "일이 안 될 뻔했지요." 웃는 얼굴로 임역관은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예.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 될 뻔했소이다." "허허어." 공노인은 눈을 딩굴딩굴 굴린다. "황부자가 말을 들어먹어야지요.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변리 같으면 자기도 그 정도로 내려줄 수 있다 그 얘기 아니겠소? 하기야 절로 굴러오게 돼 있는 땅인데 왜 안그러겠소. 조준구 돈으로 빚을 갚는다면야 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튼 조준구가 그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약은 자가 돼나서 양다리를 걸치려 할 게구요, 그래서 서참봉네 아들하고 우리집 아이가 수습을 했소이다." "어떻게요?" "황부자에 큰아들하고 모두 친구간이어서, 다 친구 좋다는 게 그런 거지요. 태수가 그러니까 황춘배노인 아들인데 그 아이가 아비를 설득하는데 처음엔 영 들어먹지 않았어요. 황춘배가 어떻게서 돈을 벌었게요? 허허헛... 태수가 아버지한테 협박을 놨지요. 그 땅은 조준구가 눈이 시퍼런 땅 임자를 놔두고 뺏은 땅이니 후일을 생각하라고 허허헛헛..." "거 참, 부친의 재산이자 즉 자기 재신이 될 터인데 기특한 사람이구먼요. 젊은 사람이," "젊으니까 그렇지요." "젊다고 어디 다 그렇겠습니까?" "신학문 덕도 있는 셈이지요. 종전만 같애도 부모 하는 일에 감히 자식이 뭐랄 수 있었습니까? 하여간 일은 썩 잘돼간 겝니다." "수고하시었습니다. 한데 자질구레한 부탁을 하나 더 드려야겠습니다. 기왕 일을 보아주는 김에," 하고 공노인은 석에 대해 얘기를 한다. 아비가 조준구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것까지 소상하게 말하지 않고 "그러니까 이를테면 염탐꾼 비슷한 거지요. 여러 가지로 그 집 형편 돌아가는 것을 안다는 일이 유익하니까요." "그거 참 거창하십니다." 하고 임역관은 웃었다. 좀 내키지 않은 듯했으나 거절은 아니 했다. 조준구를 만날 날을 주선해달라 하고 임역관 집을 나온 공노인은 이틀 동안 기화를 만났고 석이도 만났다. 그러나 동행이 있다는 얘기는 그들에게 하지 않았다. "석아, 잘해라.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 될라." 기화는 철없는 동생을 보듯 걱정스러워했고 석이는 "걱정하기 마이소." 이를 악물 듯 말했다. "아직은 어느 집에 있게 될지 모르는 게야. 내 생각에는 황부자댁에 있었다니까 믿고 응낙을 한 모양이야. 또 심부름꾼이 하나 필요하기도 하구," "한데 말입니다. 할아부지." "오냐. 소원성취해서 좋은가?" "좋기보다... 한데 말입니다. 교동집의 그 여자가," "그 여자가?" "평사리에 내리가서 육손이딸을 데리다 놨다 카니께," "육손이는 누군고?" "최참판댁 하인이오. 딸아이를 조준구 마누라가 부려먹을려고 뺏아왔다 하더구먼요. 석이가 조심하는 건 혹 그 아이가 석이를 알아보면 어쩌나 하구, 아주 어릴 때니까 알아볼 리 없다 해도." 기화가 대신 설명을 한다. "아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해도 될 게야. 간다 해도 남산 쪽이 아니면 가회동, 본가에는 도통 발걸음을 안 한다는 얘기니까." 이러는 동안 환이는 무슨 볼일을 보고 다니는지 언제나 밤늦게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그냥 자리에 들었다. 공노인의 호기심이 발동했으나 환이에게는 능청을 부릴 수 없다.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아무튼 공노인은 환이에게 풀이 푹 죽었다. 환이는 아무리 늦게 돌아와서 자리에 들어도 아침이면 공노인보다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함께 밥상머리에 앉으면은 자연 공노인이 환이에게 보고를 하게된다. 그렇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어제는 누굴 만나 뭘 했노라는 식으로, 그러면 환이는 언제나 어둡고 우울한 표정으로 밥을 먹으며 말이 없는 것이다. 이날도 공노인은 밥상머리에서 "오늘은 조준구하고 만나기로 되었는데 아마 일이 뜻대로 될 성싶소." 환이 힐끗 쳐다본다. "일을 매듭짓고 나면 일단 회령으로 돌아가야겠는데," "그러면 공노인과 함께 저도 쳐들어가겠소." 공노인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쳐들어가다니요?" "방법이야 여하튼 쳐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비로소 공노인은 환이 서울까지 따라온 이유를 깨닫는다. "예 좋소이다. 함께 가시지요." 해서 두 사람은 미리 기별이 가 있는 가회동 조준구 소가를 찾아들었다. 향심이 의아해하며 환이를 쳐다보았고 방안으로 들어가자 보료 위에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던 조준구도 어리둥절한 듯 환이를 쳐다보더니 힐난하는 눈빛을 공노인에게 올긴다. "안녕하시었소. 역관어른께서 누차 기별이 있었기 찾아왔십지요." "헌데 저 사람 뉘시오?" 턱으로 환이를 가리킨다. "예, 시골에 있는 분이온데, 지가 떠나고 나면 주로 거기서 연락을 할 터이고, 허나 그보다 저 사람이 산중에서 오랫동안 수도하여, 앞일을 보는 눈 번삼치 않고 사주관상은 물론이려니와," 조준구 눈에 희미하게나 호기심이 떠오른다. 범상치 않다는 말도 그의 용모에서 수긍이 되고 산중에서 수도하였다는 말도 산중냄새가 풍겨오는 듯하여 수긍할 수 있다. 환이는 어처구니 없는 공노인의 거짓말에 웃음을 입가에 띠며 때때로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빛이 조준구의 면상을 치곤 하는 것이었다. "해서는 안 될 일, 해서 좋은 일을 반드시 알려주는데 그것이 백 번이면 백 번 빗나간 일이 없고 보면 과히 신통력이라 아니 할 수 없소이다. 특히나 사업, 그 중에서도 광산같이 종잡기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긴요한 사람이지요." "호오? 그러면은 나도 한번 시험을 해보아야겠구먼. 정말 효험이 있다면 내 여기저기 얘기하여 돈 벌게 할 수도 있고," "아아, 아닙니다." 공노인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돈 받고 그런 짓 할 사람은 아니오. 그랬을 양이면 돈방석에 앉았을 것이오만 아무나 보아주는 것도 아니구 보아달랜다구 보아주는 것도 아니구," "그러나 밥은 먹고 살아야지," 거만하게 내뿜는다. "먹고 사는 거야 걱정 없으니까." "아 그래요? 그럼 어디 내 관상부터 보아주겠나?" 환이를 향해 말했다. 환이 피시시 웃으며 알이 없다. "말이 없는 걸 보니, 음." 평신저두는커녕 묻는 말에 대답도 없는 것에 기분이 상한 것이다. "오늘 일진이 나빠서," 말하는 환의 눈꼬리가 흔들린다. "일진?" "이 댁 문전에 들어섰을 때 일진이 나쁘다는 생각을 했었소." 공노인과 환의 눈이 마주쳤다. 공노인 눈에는 말할 수 없는 만족의 빛이 떠오르고 입가에 교활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흘러갔다. 제5편 세월을 넘고 1장 황막하다는 것 길상이보다 두세 살쯤 위일까? 몸집이 작은 사내는 시종 여유있는 미소를 띠며 술잔을 거듭했다. 그러나 미소짓는 사내의 얼굴은 온유하기보다 오히려 그 미소로 하여 싸늘한 냉기를 느끼게 한다. 연장자인 귄필응의 앞이어서 그랬는지 술버릇도 좋았고 단정한 몸가짐에는 잘 훈련된 흔적이 있었으며 평지를 같은 보조로 가듯이 억양 없는 나지막한 음성이었다. 어쨌건 좀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상해에서 오는 길이며 이름은 신태성이라 했다. "대체적으로, 중국으로선 이번 세계대전의 덕을 보는 형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리가." "네?" 하며 신태성은 신경이 무딘 것처럼 길상을 희미하게 쳐다보았다. 길상은 불쾌했던지 미간을 찌푸린다. "교주만을 비롯한 청도 산동반도 등, 독일이 차지했던 것을 참전을 빙자하고 일본이 탈치한 것이 바로 재작년의 일 아닙니까." "그는 그렇지요." "뿐이겠소? 원세개가 일본이 내민 이십이 조 요구 조항에 도장을 찍은 것도 바로 작년이었구요. 한데도 이번 전쟁에 덕을 보나요?" 신태성은 다음 말을 기다리듯 잠자코 있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은 1914년 7월의 일이다. 영국과 공수동맹국인 일본은 호기도래, 쾌재를 부르며 교주만의 공격 개시로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이 획득했던 중국에서의 디딤판을 차례차례 공략하여 손아귀에 넣었는데 그것은 물론 영국과의 공수동맹국으로서 대독선전에 의한 군사행동이라는 정당성을 앞세운 노골적인 침략이었던 것이다. 그 저의는 원세개 코앞에다 디민 소위 이십일 조에 이르는 요구 조항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구라파에서 열강이 전쟁이라는 급한 불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교활하기 그지없는 여우는 독일을 몰아내기가 바쁘게 이십일 조에 이르는 요구 조항에 도장을 받아내어 부당한 권리를 굳히려 한 것인데 이십일 조 요구 조항에는 점령한 교주만 청도 산동반도 등 독일에 속해 있던 기왕의 권익을 일본의 권익으로 인정하라는 조항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남만과 몽고에 대한 정치적인 개입, 기타 경제적 침략을 골자로 한 요구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그들의 목적을 관철하는 데 있어 무력으로 위협하였고 거금으로 원세개 측근을 매수하였으며 대총통 자리는 물론 유지하게 할 것이나 황제에의 열망도 뒷받침하겠노라 회유하였던 것이다. 결국 원세개는 도장을 찍었고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그 너구리 또한 배일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부채질하며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던 것이나, 1913년 토원군이 봉기했을 때 손문을 일본으로 패주케 하고 남경을 함락했던 그때와 달리, 원세개는 옥좌에 오른 지 석 달 남짓 재차 봉기한 토원군에 밀리어 제정취소를 선포하는 희극을 연출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석 달 후, 그러니까 금년 유월, 중국의 역사를 뒷걸음질시킨 인물 원세개는 그 나름대로 울울한 심정을 안고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세계대전은 아직 계속되고 있으며 중국의 정정은 미로와 안개, 예측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단기서 내각이 성립되었고, 무창 혁명 때부터 꼭두각시였던 여원홍이 지금은 대총통이다. "노일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을사보호조약이라는 것을 강요하여 통째 먹어치운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 아닙니까?" "네." 계속 얘기를 해보란 듯 신태성은 또다시 길상을 희미하게 쳐다본다. "그때 경우와 지금 중국의 형편이 한푼 다를 것이 없는 거로 소생은 생각하오." "물론 흡사하지요." "한데도 신형은 세계대전의 덕을 중국이 보고 있다 말씀하시오? 나로선 납득되지 않는 얘기요." "내. 흡사합니다. 그놈들의 수법이, 그리고 그놈들의 노린 바와 같이 될지도 모를 불행을 예상할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렇다면은?" "그러나 조선의 경우 그 노일전쟁이란 게 좀 묘해요. 결국은 일본이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일시나마 막은 거지요. 그 결과로서 너 떡 하나 먹어라 하고 내던져진 것이 바로 조선 아니겠소? 허나 중국의 경우 떡 하나 먹으라는 식으로 내던져질까요?" "..." "그러기엔 너무 땅덩어리가 크지요. 무슨 인심이 좋아서 왜놈 혼자 처먹게 내버려두겠습니까. 지금이야 발등에 떨어진 불 끄노라 정신이 없지만요." 싸늘하게 웃는다. "하면은,"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왜놈들이 아무리 뜀박질을 해본들 그보다는 중국의 경제 성장이 앞설 거란 그 말입니다. 그 경제 성장이야 말로 중국으로선 지금이 절호의 기회요. 세계대전이 갖다준 기회란 말입니다. 모두 이해가 상반되어 얽히고설켜 복잡한 이번 세계대전은 그 싸움터가 구라파인만큼 당분간 세계 열강들은 중국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고 군비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고 보면 상품을 생산하며 외국에 팔 여력이 없어집니다. 결국 중국에 수입괘온 모든 그곳 공업 상품이 품절될밖에요. 일본이 제아무리 뛰고 날아도 구미 각국에서 쏟아붓던 상품을 대신 충당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하여 거대한 외국 자본이 중국의 허약한 자본을 짓밟아 자라나지 못하게 하던 힘에서 중국이 당분간이나마 놓여나면은? 뻔한 얘기지요. 어디 중국 사람이라고 멍청이 보고만 있겠어요? 이미 그런 조짐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민족자본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지요. 결국 무순한 독충에 시달리어 만신창이가 되었던 몸뚱아리에 새살이 돌아나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구요. 아무리 잠식해와도 일본은 기껏 남만주 정도를 넘지 못하지요. 물론 제 얘기는 중국에 한한 것이겠습니다만," "그것은 신군의 말이 옳아." 권필응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그 점에서는 퍽 기회가 좋았던 게야. 허나 일본의 경우도 기회가 좋았던 거지 하하하핫..." 길상은 주판으로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눈앞에는 사무실의 장부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길상의 물음은 하나의 타성이었다. "어떻게 되라라 누가 장담하겠나. 사람이 미치듯이 역사라는 것도 때론 미치니까. 예측할 수 없는 일이란 얼마든지 있는 거구. 대체로 그렇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예측일 뿐이지." 신태성은 생선포를 찢어서 입에 밀어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희미하게 또 쳐다본다. 그 눈길엔 무슨 뜻ㄷ이 있는지 아니면 버릇인지, 결코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길상은 자신이 산중 개구리라면 신태성은 양자강 잉어겠구나, 엉뚱한 비유를 해보는데 자조의 웃음이 푹하고 터지려는 것을 술잔으로 막는다. 술이 창자를 타고 내려간다. 노여움도 비애도 아닌데 뜨거운 것이 마디에서 마디로 도약하듯 울컥 치밀고 또 치민다. '아니지.' 다시 술잔을 들어 목구멍에 들이붓는다. '네모 반듯하게 줄을 그어간다. 사방팔방으로 아주 정확하게 도판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머리통 속에 차곡차곡 밀어넣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그래 선생님 말씀대로 사람이 미치듯이 때론 역사도 미친다면은, 사방팔방 정확했던 줄도 서로 얽히고설켜서 쓸모가 없게 된다. 저 친구 대단히 똑똑하고 대단히 머리가 좋아 뵌다. 도판 하나가 머릿속에 들앉아 있는게야. 하지만 미치는데야... 함께 미쳐야지. 저 희미한 시선이 미쳐? 싸늘한 냉기는 찬바람도 아니고 얼음장 밑을 흐르는 차디찬 강물도 아니고 그냥 냉기일 뿐이다. 미쳐? 어림없지. 그럼 나는 미쳤나? 미칠 수 있단 말이야? 지금 나는 외도하듯이 이 사람들 속에 끼여 있는 거 아니냐말이다. 해서 긴가라는 저 친구가 나를 우롱하는 게야. 임마, 보아하니 돈푼이나 있는 모양인데, 그러니까 독립운동가, 응 그놈의 독립운동가라는 비단옷도 한벌 걸쳐보겠다 그거야? 병신 같은 자식, 하고 날 우롱하고 있는게야. 그렇고 말고. 상해 바닥에서 새물먹고 머리통 속에 도판 하나 꾸겨넣고, 그렇담 그런 조롱 할 만도 하지. 아암 할 만하고 말고, 미친놈 소용없고 미치지도 못한 이런 놈은 더욱 소용없고, 왜 불쾌해. 어째서 저 친구가 맘에 안 들어? 못난 놈!' 돌연 주갑이라던 사내 얼굴이 길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주갑이, 작년 섣달 그믐께 산판의 일을 끝내고 용정에 돌아오는 용이를 따라왔었던 사내다. 전라도 사투리의 수수깡같이 야윈 사내, 그 무식한 사내가 길상을 우롱했던 것이다. 길상의 뺌을 겨냥하여 우스개의 일격을 가했고 길상의 가슴팍을 겨냥하여 세상을 두루 다녀본 경험담의 난타질을 했다. 미끄럽기가 미꾸라지 같은 말은 모두가 화살이었다. "내가 이런 이야그를 헌다고 혀서 댁의 덕을 좀 보자, 그건 아닌게라우. 없이 사는 우리 성님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트집부리는 것도 아닌께로 오해는 마시더라고." 술이 거나해진 용이 혀꼬부라진 소리로 "저놈의 인사 또 사설 나온다. 때리치어라! 때리치워!" 했으나 아랑곳없이 "이리 뵈야도 나는 내 근본 믿고 사는 사람, 세상에는 제 근본이 제일이어라우. 지 애비 지 에미가 제일 아녀? 개천에 빠졌거나 용상에 빠졌거나, 하늘 밑에서 땅 위에서 사는 거는 다 마찬가지란 말씨. 마찬가지랄 것 같으면은 제 근본이 남만 못헐 것 없는거여." "군대쟁이 영문 모르는 소리 그만두라!" 혀꼬부라진 소리가 다시 끼여들었으나, "형님, 산판에서 몇 해 동안 벌목을 혔어도 아직 머리털 안 빠졌당가?" "대포 겉은 소리 뻥뻥 하는고나." "아, 암은이라우. 대포가 소리만 크더란가? 박살은 안 내고오?" "그까짓 모기다리 겉은 몸뚱이로 박살을 내 누굴?" "심자랑 하는 놈치고 제 대가리 안 깨는 놈 없더랑께?" "말 잘하는 놈치고 옥살이 안 하는 놈 없지." "제법이오 성님. 좌우당간 내가 헐라는 말은 뭐였지라? 아 그렇구만이라우. 좌우당간 개명천지가 되야서 니도 나도 양복 입꼬 모자 쓰고, 아 그게 웨찌 나쁠 것이여? 허나 눈까리 머리텅은 까맣다, 그걸 잊지 마시라 그말이어라우. 근본 잃은 놈은 산에도 물가에도 못 가는 법이여. 연해주 방면을 몇 해 동안 돌아댕기면서 가만히 살펴본께로 역시나 돈푼 있는 놈들이 다 썩었어야. 내가 몇 해를 따라다닌 강의원께서 말심하시기를 설한풍허고 강냉이죽은 소금이날, 썩을래야 썩을 수 없지야. 식자 들었다는 놈도 마찬가지여. 계집년 옷고름에 노리개 달고 댕기는 것과 별다를 게 없더랑게로. 식자라는 게 노리개더란 말씨. 남헌티 자랑허는 상판대기 뻔뻔한 놈치고 계집 덕에 호강허겄다는 생각 안 가진 놈 없고오," 순간 용이 술상을 번쩍 들어 엎었다. "네놈 말이 맞다! 계집 덕에 호강한 놈이 여기 있어! 여, 여기 있단 말이다!" 용이는 제 가슴에 주먹질을 하며 별안간 아우성을 쳤다. "그 계집이 죽게 생겼다! 살아서 오래오래 날 호강시켜줄 그 계집이, 와 그 계집이 죽을라 카노!" 주갑이 얼굴이 새파래졌고 길상은 술상을 엎을 수 없었던 자신을 덫에 걸린 한 마리의 쥐라고 생각했다. 월선이 살아나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은 뒤 용이를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술상이었던 것이다. "이번 세계대전이 얼마나 갈지... 중국이 웬만큼 힘을 회복하면은 결국 일본과의 싸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태성의 목소리였다. "싸움이 붙으면 우리가 좋지." "여기까지 파급되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만 지금 본토에선 배일운동이 한창입니다. 특히 일본 상품, 일본 화페 배격에도 정부에서 부채질을 하는 데다가 자본가 상인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 국민들은 또 자발적입니다. 그러니까 물결이 크지요." "끈질긴 저항이 될 게야. 이젠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닌, 저항은 조직화되어가고 있다. 아편전쟁 때처럼 평영단의 깃발을 세우고서 모여든 수만 농민들이 이백여 명의 영국인을 노상에서 살해하는, 앞으론 그런 일은 없을 게야. 그러나 더 무섭지. 자각하고 꾀가 생긴 민중이란," "그렇지요." "만일 일본과 싸움이 붙게 된다면 이번에는 양상이 달라. 물론 세계대전이 끝나준 후 의 경우겠지만 이젠 일본이 고립될 수밖에 없지." "남은 핏댈 세우고 싸우는 판국인데 무방비 별 저항도 없는 곳을 점령하여 저 혼자 요리하여 처먹는데 어여삐 볼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불난 집에 든 도둑 격이지요." "김군." 권필응은 신태성과의 화제를 끊고 길상을 불렀다. "네." "자네 중국인들, 특히 서민층의 기질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글쎄올시다." "실속을 차리는 사람들이야. 그런 점에서는 우리 조선 사람들 따라가려면 아득해. 흔히 소리를 지르고 떠들어대는 그들을 보는 경우가 있지만 그들은 떠드는 척해 보이는 거야. 잘못했다고 연신 이마방아를 찧어대지만 그것도 잘못한 척해 보이는 거구. 천치바보처럼 맹하니 사람을 쳐다보지만 그것 역시, 실상 그네들 알맹이는 소란하지 않고 비굴하지도 않고 아주 잔잔하거든. 그네들의 행동이나 태도는 옷과 같은 것이어서 필요할 때 입고 불필요할 적엔 벗어딘지는 게야. 그러니 알몸은 언제나 말짱하지.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구 대체로 그렇다는 건데 그들은 빌어서 될 일이면 빌엇 되게 하구 볼기를 맞아 될 일이라면 볼기를 맞으며 되게 하구." "응큼한 민족이지요." 감정의 요동이 없는 신태성의 음성이다. "일본놈들 배 가르고 자결하는 따위 그건 말하자면 속결전법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그네들은 그것으로 한몫보고 있긴 하지. 어쩔 수 없는 섬나라 일본이 가지는 한계점을 가장 유효하게 활용하고 있는 셈이야. 백번이라도 도망갈 필요가 있으면 도망가서 다시 싸우는 중국인은 그러니까 언제나 힘을 다 빼지 않는다 그런 얘기가 되겠군. 국민성이 겁쟁이다 비굴하다 애국심이 없다, 그건 일본의 성급한 속단이야. 어째 하필 일본의 견해를 말하느냐, 조선의 식자들은 뿌지불식간 일본 여론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 중국인만큼 존대한 민족도 그리 흔친 않아. 달겨들어 물어뜯고 질겅질겅 씹어도 슬그머니 빠져나가 제자리에 서는 민족이야." 그런 얘기를 하는 권필응의 저의를 깨달으면서 모르는 척 길상은 듣기만 한다. "지금 중국 도처에서 배일운동이 날로 고조되어가고 있는데 아까 신군이 말한 것처럼 정부가 부채질하고 자본가 상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국민들은 자발적인 게 사실이야. 하니 혼연일체 같긴 하지만 알고 보면 동상이몽이거든. 원세개는 자신의 권자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십일 조 조약에 도장을 찍어놓고서 자신에게 올 국민들의 화살을 일본 쪽으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배일운동을 부채질한 것이요 자본가들은 자신들 자본의 신장을 위한 배일운동의 열렬한 지지, 그러나 국민들은 결코 어느 개인의 권력 유지 어느 개인의 자본 발전을 위해선 아니거든. 민족과 국가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지. 어떤 뜻에서는 이들 삼자간의 관계야말로 치열하고 원한 깊은 것이라 보아야 해. 그들의 싸움은 오랜 옛날부터 계속되어왔고 앞으로도 계속되어 나갈 것인데, 군벌시대라하여 칼든 사람이 정치하는 시대라고 한마디로 말해버릴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중국 형편이긴 하나... 군벌정치의 특징으론 중간층이 없어지는 상태를 말할 수 있지. ㅏ고로 군벌정치란 백성과의 힘내기 정친데 그런마큼 강력한 힘을 제켠으로 몰아들이는 것은 당여지사, 강렬한 힘은 무엇이냐 그건 말할 것 없이 무력과 금력이지. 결국 그러니만큼 자본가들은 권략과 결탁하지 않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군소자본가들을 잡아먹는 것이 그들 생리고 보면, 그리고 또 권력층과 이윤 분배를 위해서도 군소자본가들을 잡아먹고서 자신이 비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존재하는 자들의 운명이기도 하니까. 그러면 결과는 어찌 되나, 와해된 중간층은 별수 없이 하층으로 흡수된다. 중간층이 내려앉아 깔리는 만큼 저변은 넓어진다. 이렇게 되면 또 불안해지는 것은 권력층이야. 힘을 보강하지 않으면 안 돼. 간단하게 비유를 한다면 산처럼 저변에서 경사를 이루며 정상이 있는 정치 형태와는 다르게 저변에다 꼿꼿이 칼을 곶아 놓은 것 같은 군벌정치 형태에 있어선 칼은 칼이로되 산보다는 허약하지. 저변에 쫙 깔린 수억의 개미들이 스물스물 기어올라가는 날엔? 칼끝을 높일 수밖에, 결국 힘의 보강인데 화급해지면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도 어렵잖은 일이요 그 넓은 저변에 우글거리는 개미떼를 소모하기 위한 전쟁도 불사 아니겠나?" 권필응은 일단 말을 끊고 술잔을 들었다. 신태성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요동 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길상은 권필응의 내리깐 눈언저리를 바라본다. 삭막한 그늘이 새 그림자처럼 지나간다. "배신에서 시작하여 배신으로 끝내는 야망..." 혼잣말같이 했다. 그리곤 술잔으로 놓고 얼굴을 들었다. "아까 내가 그 서민 기질을 말한 것은 중국의 저변이던 것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어서였지. 오늘날 구미에선 대개의 나라들이 민주주의라는 것으로 정치이념을 삼고 제도라는 것도 그것에 따라서 정해져 있으며 중국에 있어서도 손문이 시도해본 정치 형태인데 사실은 말이 새롭다뿐이지 그러한 관념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상당히 뿌리깊게 박혀온 정치사상이야. 요순시대가 바로 그러한 소위 민주주의 정치 형태라고 나는 생각하지. 요, 순은 황하를 터뜨림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백성들에 물었던 거지 권력을 구축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힘자랑을 하려 하진 않았거든. 요순시대란 중국인들에게 있어선 그네들의 이상이요 바라는 정치 형태, 우리 조선에 비하여 그런 정신 면에서 상당히 훈련이 된 민족이라 나는 생각하네. 조선에서도 민란이 끊일 새 없었으나 정권을 엎은 일이 없었고 동학이라는 종교적 조직과 합함으로써 비로소 대규모의 민란이 가능했었지만 중국에 비하면은 상당히 소극적인 것, 군왕을 부정하지 않았거든. 나는 가끔 의심 많은 중국인 기질을 생각할 때가 있어. 그것을 나는 결함으로 생각하지 않지. 배신당하고 기만당해온 역사, 왜 중국의 민중들은 기만당한 것을 자각하느냐, 그것은 그들 농민들 스스로가 엎은 정권을 가로채간 패자, 어제까지 동지였던 그 패자의 칼끝을 농민들은 등줄기에 느껴야 하는 역사, 반복되어온 역사 때문이지. 조선 사람들에겐 군왕에 대한 배신감 같은 것은 아주 희박하거든. 중국인은 의심이 많다, 당연하지. 믿지 않는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을 찾는 욕망이 강하다, 그렇게도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이것은 민족성의 얘기지만... 중국의 서민들 기질 얘기야. 김군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만... 그러면 더부살이 같이 이곳에 와 있는 우리는 막말로 어느곳에 빌붙어야 하는가..." 다시 권필응은 길상이 부어놓은 술잔을 들고 눈을 내리깐다. "지금 배일을 외치는 중국 사람들... 부채질 하는 사람,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들 모두 우릴 배신할 걸세. 우린 중국 민중들에게 배워야 해. 볼기를 맞아 될 일이면 볼기를 맞고 도망갈 필요가 있으면 백 번이라도 도망가고. 그리고 우린 그들 민중들게게 빌붙어서 함께 가야 해. 지구전에 도전해오는 속결전이란 일종의 환상이며 항상 기만당하는 것, 일본놈들은 중국 사람들을 겁쟁이로 보고 있다. 기만당하고 있는 게야. 우린 기만당해선 안 돼." 밤이 자물어 신태성은 돌아갔고 길상은 권필응에게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겨우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입은 채 불도 켜보지 않고 길상은 자리에 쓰러졌다. 얼마쯤이나 잠을 잤을까. 길상은 눈을 떴다. 몸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어제 저녁에 술을 마셨다. 아주 많이 마셨다.' 중얼거리는데 끈적끈적한 문어다리 같은 것이 철버덕 얼굴 위에 떨어져 서 목을 감는다. 길상은 징그러운 환각에 머리를 마구 흔들어댄다. 이상한 환각과 더불어 육체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는 것같다. 사지에 감각이 돌아온다. 손을 뻗쳐 어둠속을 더듬더듬 더듬는다. 자리끼를 더듬다 말고 길상은 일어서서 전등을 켠다. 부신 눈에 흰버섯 같은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작은 얼굴 큰 얼굴 두 개의 얼굴은 푸른 산돌 틈새서 솟아난 흰 버섯. 아내와 둘째아들, 생후 육 개월 된 윤국의 잠든 얼굴이다. 어둠이 눈부신 밝음으로 변했는데 어미와 어린 것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첫아이 때도 그러했었다. 아이가 젖을 많아 빠는 요즘은 서희는 업어가도 모르게 깊은 잠속에 빠진다. 또 많이 잤다. 길상은 자리끼를 찾던 생각을 잊어버리고 어린것과 아내 얼굴을 번갈아 내려다본다. 유모 젖을 먹여라 했었지만 기여 제 젖을 먹이는 서희다. 길상은 두 개의 얼굴말고 유모 곁에서 꼼작 않고 잠들었을 큰아들 환국이를 생각한다. '그놈을 데려다 놓으면 문어다리 세 개가 되겠구나. 하나는 내 목을 감고 둘은 각각 내 한 팔씩을 감는다. 그러면 나느 꼼짝할 수 없지. 꼼짝할 수 없구말구.' 허리를 구부려 어린것의 볼을 쓸어주고 전등을 끈 뒤 길상은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의 공허, 공허 속에 어둠이 스며오고, 가득히 스며오고 밤의 침묵이 모난 짐짝처럼 창자를 타고 내려간다. 모서리에 찔리는 통증과 더불어 마음바닥에 짐짝이 가라앉는다. 밤인가, 아니 신새벽이다. 물먹은 듯 별들이 희미하게 하얗게 깜박거린다. 초가을의 냉기가 옷깃 사이로 기어든다. 가난하다. 허기지게 마음이 가난하다. 길상은 안마당으로 돌아나간다. 옛날 최참판댁 안마당을 걸어가는 착각이 든다. 오소소 떨며 신새벽 안마당을 건너서 사랑에 군불을 때러 가던 소년. 그 동안 과연 세월을 흘렀는가. 흘렀갔는가. 사랑에서 불빛이 새나온다. '벌써 일어나셨구먼.' 창문에서 새나온 불빛은 사랑채 처마밑을 아슴프레하게 비쳐준다. '그렇게 술을 많이 하시고서도,' 길상은 그곳을 피하듯 급히 뒤꼍으로 돌아나간다. 숲에서 밤새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꺼뭇한 잡목숲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곧장 숲속으로 들어간다. 나직한 잡목숲에서 얼마 안 가 별빛을 가리는 짙은 숲이 이어진다. 육 년 전 용정을 삼킨 대화재 때 불길을 면할 수 있었던 숲이다. 가득히 들어찬 나무 그림자를 두 어깨로 가르듯 길상은 성큼성큼 걷는다. 숲은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와 달리 길상의 입에선 늙은이처럼 한숨이 자꾸 새나온다. "이렇게 나와보는 것도 여러 해 만이군." 낙엽더미 위에 엉덩이를 박고 앉는다. 앉아서도 한숨을 쉰다. 답답한 것이다. 밤이슬에 젖은 바지가랑이가 살갗에 차다. "왜 이리 답답한가. 가슴에다 맷돌을 얹어놓은 것 같다." 들어주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맷돌을 가슴에 얹어놨다기보다 아까 자리 속에서 느낀 그것, 끈적끈적하고 물컹물컹한 것, 문어다리가 목과 양쪽 손목에 휘감기어 흡반이 피를 빨아대는 것처럼 죄어드는 느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 버섯 세 개가 푸른 바위 곁에서, 서희의 얼굴이요 환국이와 윤국이의 얼굴이다. 아이들은 유모 젖 아닌 제 젖으로 기르는 서희, 그 끈질긴 종족보존 본능에 길상은 넌더리를 칠 때가 있다. '당연하지 당연해. 천애고아가 제 핏줄을 보았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내 핏줄,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핏줄이다. 소중하기론 그 사람하고 뭐가 다를까.' 그러나 기상은 내 할머님, 할 적의 서희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다. 내 아버님 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그 절절함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애정이라기보다 숭배와 절대적인 감정이랄밖에. 서희는 열 개 손톱이 다 빠지는 한이 있어도, 기어서라도 돌아갈 거라 했다. 잃었던 모든 것을 찾을 것이라 했다. 그 무서운 집념은 핏줄에 대한 흐느낌에서 비롯된다. 길상은 공노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정한조의 아들 석이를 생각한다. "흐흐흐흐...흐흐흣, 이를 갈아야 하고 칼을 갈아야 할 그런 아무것도 내겐 없다." 허전하다. 가믓이 메인다.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아픔이 온다. 다시 허전해진다. "돌아가겠지. 금년은 아니고 늦어도 명년엔 돌아갈 거야. 내게는 조가 그놈에 대한 응어리도 없는데, 한이 맺힌 것도 없는데 다만 악질 친일파 나쁜 놈일 뿐이지. 최서희는 친일파 아니란 말이야? 보복을 위해서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든 어떤 이유든지 이유를 이마빡에 붙이고 다니는 친일파는 아무도 없어. 돌아가겠지. 명년에... 내가 왜 거길 가나. 뭣하러 돌아가나." 눈앞에 공노인이 웃고 있다. 그새 앞니가 빠져서 하부죽한 입술을 오므리며 웃고 있다. "나머지 이천 석에 목을 매고 있는데 허허허헛... 별수없지이. 별도리 없을 거야. 하긴 이천 석이라면 그것도 장자는 장자라. 천석꾼이 아무데나 굴러있나? 조가놈 지 신상을 위해 그것이나마 꼭 붙들고 있어야 하는 건데 욕심이 사람 잡지. 내리막길을 또 멎어지는 것도 아니구. 광산에 미쳐 미두에 미쳐, 한 번 미치고 보면 끝나는 법이거든. 잃은 것 찾으려고 두 번 미치니께. 자고로 노름꾼이란 마지막 껍데기까지 뺏겨야 손 털고 물러나거든. 회를 쳐 먹든 초를 쳐 먹든 그것은 조준구 사정이고 아무튼지간에 돌아갈 날도 멀지 않았으니, 허허헛헛..." 공노인의 웃음 소리가 갈가마귀 우는 소리처럼 길상의 귓가를 맴돈다. "망해라. 망해라, 최서희! 망해! 망해! 망해라. 그러면 넌 내 아내가 되고 나느 환국이 윤국이 애비가 된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망해? 어떻게 망하느냐 말이다! 비적단이 몰려와도 최서희는 안 망한다. 고향에는 옛날같이, 옛날과 다름없는 엄청난 땅이 최서희를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지금까지,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만은 타인이었다. 오 년 동안-서희가 독단으로 일을 진행해 왔었다. 그 독단은 서희의 의사였다기 보다 조선에서 매입되는 토지에 관한 일엔 길상이 극단적으로 회피해온 것이 실정이다. 서희는 서희대로 얼마나 외로웠을 것인가. 그러나 서희는 의지로 뻗쳐왔고 길상은 애정 때문에 뻗쳐왔다. 먼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은 더 있어야 한다. 나뭇가지가 얼기설기 걸려 있는 희뿌연 하늘에 별이 하나 동편 기슭을 향해 떨어진다. 날이 갈수록 애정의 질곡은 뼛속 깊이 몰려들어가는데 그럴수록 몸을 흔들며 질곡에서 빠져나가는 꿈은 희망봉만큼이나 거대해지는 것. 자승자박의 상태는 바로 그 상승작용의 갈등 때문이다. '그러면은 오늘, 오늘은 아니야. 청진의 이씨가 오기로 돼 있고 권선생님도 아직 떠나시지 않았으니, 그러면 내일? 모레?' 길상은 하얼빈에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하얼빈의 상가를 한번 둘러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된다. 그러나 지금, 돌아갈 준비에 착수해야 하는 지금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인 것이다. 다소의 용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송장환이 김훈장의 유품 몇 가지를 가지고 지금 하얼빈에 와 있다는 기별을 받긴 받았다. 이 년 전 상의학교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삼원보에 갔었던 송장환이 그보다 앞서 그러니까 오 년을 거슬러올라 당시 혜관과 함께 떠났던 김훈장은 삼원보에 눌러앉아버린 것인데 그 김훈장이 별세하고 이미 장례까지 치렀다는 송장환의 편지를 달포 전에 길상은 받은 바 있다. 송장환은 어떤 임무를 띠고 당분가 하얼빈에 머물 것이라 했으니 서둘 것은 없고 그러나 그가 떠나기 전에 한번 가기는 가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간나아르 달고서리 어디에 재가르 하겠수꼬마?" 여자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옥이네였다. 회령 셋방에서 자취를 감춘 후 오 년인가 육 년인가 세월이 흐른 후의 대면에서 길상이 묻는 말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우연히 나루터에서 마주쳤을 때 여자는 당황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눈 둘 곳을 몰라했다. 그러나 여자는 곧 평정한 상태로 돌아갔었다. "옥이는 어떡허고 혼자요?" "하얼빈에 있소꼬망." "하얼빈?" "예배당핵교르 댕깁매다." "아아 벌써... 옥이엄마는 뭘 하구서?" "예수 믿으이 서양 사람 목사님댁에 있습매다. 일해주고서리," "옥이랑 함께?" "." "다행이구먼" 길상은 강바람을 막으며 담배를 붙여물었다. 옥이네 차림새는 깨끗했다. 검정 치마에 흰 무명적삼이었으나. 길상은 물살에 흔들리는 뱃전에 등을 붙이며 다시 물었다. "헌데 어딜 가는 길이오?" "하얼빈 목사님댁으로 돌아가는 길입꼬망. 한 분 계시는 오라바이 만났다는 기별을 받고서리," 길상은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나루터에서 만나 한 배에 오르자마자 하필이면 개가했느냐 그 말부터 물을 것은 뭣인가, 물어본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고소를 머금었다. 여자의 담담한 태도가 오히려 마음에 아팠던 것이다. "어차피, 옥이엄마도 시집을 가야, 혼자 살 수 없을..." 길상은 또다시 그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미웠고 딱했다. "예술 믿고 살잲고? 우리 옥이 크느 거르 보구서리 낙으 삼겠습매다." 길상은 나루터에서 옥이네 만난 얘기를 서희에게 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서희는 가끔 옥이네 행방을 궁금해 했었지만. 길상은 예수를 믿고 옥이 크는 것을 낙으로 삼겠다면서 발끝을 한 번 내려다보고 고개를 들어 강기슭에 눈을 던지는 검정 치마에 흰 무명적삼을 입은 여자를 다시 생각한다. 그를 만난 것은 한 보름쯤 전의 일이다. 하얼빈이 넓은 도시라 하여도 서양 사람의 목사댁이라면 쉬이 찾을 수 있으리라, 찾아가서 어쩌겠다는 겐가, 돈을 주어? 정을 주어? 돈은 받지 않을 것이요 정은 줄 수가 없다. 개갈하지 않은 한 여자는 어느 하늘 밑에서건 버림받은 사내를 생각할것이요 사내는 또 가끔 고독한 여자의 생애를 묵은 상처처럼, 궂은 날 묵은 상처의 통증처럼 마음 한구석에 떠올릴 것이다. '그까짓 처녀도 아닌 과부, 한평생을 나하고 함께 살 생각이야 당초 안 했을 것이고 개갈 하건 아니 하건 제 쯧대로 하는 거지 내 관여할 바는 아닌 게야.' 어둠과 숲속의 기척들이 길상의 등을, 양어깨를 누르며 떠밀어내는 것만 같다. 숲속에서 내려온 길상은 "선생님 일어나셨습니까?" 사랑방 앞에서 묻는다. "음."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별로 탐탁해하는 음성이 아니다. 길상이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권필응은 책을 보는 것도 아니요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자리에 들지도 않았던 것처럼 침구도 말짱하니 개켜놓았고, 마주앉은 뒤 한동안 길상은 멍한 표정이었고 권필응 역시 그러했다. "선생님" "..." "저는 정말로 뼈아프게 내 나라를 사랑하는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순간 권필응의 깡마른 몸이 약간 동요를 일으키는 것 같다. "모두 열심히 목숨을 내걸고서, 네. 저도 그럴 수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육친 같이 제 피같이 그렇게 조국이란 것을 실감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 "네?" 권필응은 말이 없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선생님 부끄럽습니다." "말로써 되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는... 그만두지. 그보다 자네 부인께서 친일하는 덕분에 내가 이곳에 무사할 수 있으니 고마운 일 아닌가." 권필응은 웃었다. 길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런 말을 하는 권필응의 저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비난한 것 같았으나 따뜻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권필응, 말로써 되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은 어젯밤 신태성을 두고 한 말인 듯, 서희의 경우도 역시 깊이 개의치 말라는 뜻인 것이다. 2장 사춘기 "무시레? 월선옥네 안깐 말임둥?" "그렇다니까." "쯔쯔쯧, 거 아무래도 살기 어렵잲잉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해르 넘기기... 어렵지비." "그래가지고 며칠 전엔 물 길러 나오지 않았겠소?" "홍이 앙이 시키려고 그랬을 기야." "무슨 청승인고." "객줏집 공노인이 데리고 가서 벵구환 하겠다면서리, 별의별 말으 아이 했겠음? 무시기, 그래두 앙이 듣는다이. 홍이 땜에 한새쿠 고집부린다 말이." "제 속에서 난 자식이래두 제 일신이 병들면 귀찮은 법인데 그까짓 남의 자식, 난 그 속을 모르겠구먼. 입버릇이 우리 홍이 공부시키고 장가들이고, 눈이 시퍼렇게 생모가 살아 있는데 말예요." "그는 그렇기 말으 할 수 없습매. 홍이 가아느 다르다이." "다르기는 뭐가 다르겠소." "다르지비. 며칠 전에도 밤중에 뛰어들잲앴음? 우리 어망이 죽는다구 울면서리, 그래 갔덩이 피를 쏟고 까무라쳤답매." "아무리 그래두 오리새끼는 물로 가는 거예요." "그 안깐 홍이가 낙이구 보람인데 어쩌겠음." "나이가 어찌 되지요?" "오십이 다돼간다이. 마흔아홉이랍매." "사람마다 아홉수가 사납지." "되우 고생으 하덩이 돈으 모아 발뻗고 사재니까 병이 나잲슴? 불쌍하답매." 마루에 앉아 고추 꼭지를 따며, 두 아낙이 이웃집에 사는 월선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함경도 말씨를 쓰는 오십 안팎의 여자는 가위로 고추를 자르며 씨를 털어내고, 마을왔다 일을 거들어주는 서울말씨의 여자는 고추꼭지를 딴다. 가을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롭게 지나가고 예배당 종소리는 은은하게 울려온다. 두메는 책을 펴놓고 앉았으나 공부할 기분이 아니다. 몇 주일 동안 성당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열여덟 살의 사춘기, 소학교는 시초부터 고학년에 들어가 진작 졸업을 했고 지금은 중학생으로서 명년 봄에는 졸업이었다. 정호네 일가가 연해주로 이사하는 바람에 시내 하숙으로 옮긴 지도 어느덧 일년이 넘었다. '공부를 하면 머하나. 내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좋아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이 칭찬해주면 머해, 남인데.' 정호가 연해주로 떠나버린 후의 일 년은 두메에게 더욱 외롭고 쓸쓸한 날들이었다. 강포수가 죽은 것은 삼 년전의 일이다. 장마가 계속되는 여름방학, 가야하 상류에 있는 소삼차구로 가려던 두메는 하천의 범람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마가 그치고 아비 있는 곳에 갔을 때, 두메는 아비가 죽은 것을 알았다. 산막 근처 화전민들에 의해 이미 장사를 치렀다는 것이었다. 사인은 오발사고라 했으나 다분히 미심쩍은 점이 있었다. "아부지! 아부지! 두메가 왔소!" 울부짖었으나 험준한 산속에 돌아오는 것은 울부짖음의 메아리 뿐이었다. 강포수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해 봄, 그러니까 두메를 학교에 넣어놓고 돌아간 후 한번도 용정촌에 나타난 일이 없었던 그가 뜻밖에 송장환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서는 거금인 삼백원을 내놓았다. "선생님이 요량하시어 두메 학자로 했이믄 좋겄십니다." 그 말뿐이었다.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두메를 불러내어 잠시 만나본 뒤 강포수는 아무말 없이 그림자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공노인을 찾지 않고 송장환을 찾아온 것은 방학에 돌아온 두메로부터 선생님이 얼마나 잘해주시는가 소상하게 얘기를 들은 때문일 것이며 스승이란 부모나 마찬가지라는 종전의 생각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경상도 사람, 경상도와 연고가 있는 사람에 대한 강포수의 기피증이 작용 아니했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송장환은 학자금 삼백 원을 공노인에게 이관하고 적절한 조치를 부탁하면서 용정을 떠났다. 공노인은 그것을 활용하여 이자만으로 두메 학자금에 충당했는데, 학자금이래야 늘 수석을 차지해온 두메였으므로 학교에 내는 돈이란 별로 없었고 하숙비와 약간의 잡비 정도였으니까 원금 삼백 원은 축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셈이다. 밖에서는 여전히 함경도 사투리와 서울 말씨 아낙들이 주고받는 얘기, 고추를 자르는 가위 소리가 들려왔다. '용돈이 떨어졌는데, 벌써 떨어졌는데...' 두메는 죽은 아비 생각을 하다가 공노인을 찾아가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필요를 느꼈다기보다 가야 하는데 가기가 싫은 것이다. 공노인댁 방씨 할머니가 들먹이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가기가 싫다. 열려 있는 들창에 새 그림자가 지나간다. "사람이 저 지경 되었는데, 사내는 그림자도 안 비치지 않아요? 본처는 아니지만..." "본처 앙이기로는 홍이에미도 같소꼬망. 시집으 보낸 딸애는 전 남편 사이에서 났답매." "그런 시시꼴꼴한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데리고 살든 여자 아니예요? 아픈 사람을 내팽개쳐놓구 너무 야박하지 않소." "그거는 행펴이 좀 다르당이. 홍이아바이가 와봅세? 얼시구 홍이에미가 오재능가. 지난해도 와가지구서리 벵재가 누워 있지도 못했다이. 벵이 더 나빠지잲앴음? 홍이르 다글다글 볶고서리 가지구 팔으 잡아끌구 도산으 피웠답매." "학교 다니는 애를, 그래 데려가서 어쩌겠다는 겐가?" "그러잉 에미 값세도 못하느 거이 앵이요." "..." "홍이아바이는 가슬걷이 하구 나문 산판에 갈 기구, 거기서리 일으하구 나문 설에는 올 것입매." "정월의 견우직녀구먼." "호호홋홋... 그 말이 바로 맞다잉." "설이 오기 전에 죽으면 어떡허지요?" "무시기... 그렁이 불쌍하지비." "자식까지 맡겨놓구..." "앙임매. 홍이까지 없어보라이. 그 안깐 깜박 죽어버린답매." "아주머니두, 홍이네 얘기라면 사사건건 역성이요." "마음이 착하이." "어쨌거나 사내가 물렁죽이라 그래요. 다스리지도 못할 두 계집 거느리긴 왜 거느렸는구." "도척이 같은 성정으 하누님도 관대루느 못하신답매. 옥루몽으 보며느 양창곡의 둘째부인 황씨든가, 무슨 보살이 오장육부를 끄내서 냇물에 씻재잉요? 악하다고 해서리 직일 수도 없는 일입매. 그 안깐 두고 도망을 해보랑이? 바늘산이라도 피흘리감서리 다라오잴까? 전생에서 죄르 짓구서리 만낸 인연이지비." "죄를 짓고 만났다..." '나가보기나 하자. 답답해서 꼭 미칠 것 같다.' 두메는 후다닥 일어선다. 학생복 상의 단추를 끼우며 나가는데 베수건을 쓴 아낙 둘이 고개를 치켜든다. "무시기, 학생 어디매 나가능가? 공일이라 성다앙에 갑매?" "아니오. 저기이..." "나가보랑이. 방으 지키구서리 그새 앙이 나가더이..." "갔다오겠습니다." "갔다옵세." "어이구, 저 도령 거동 보소. 현언장부 아니오?" 서울말씨의 아낙이 까르르 웃는다. "인물이 훤하지비. 일등 신랑감 앙입매? 자랑스럽다이." 문을 열고 나가는 두메 목덜미가 시뻘겋다. '만사가 다 시시해. 그만 총 메구 산에나 들어갈까부다.' 집앞에서 몇 발짝 걸어나온 두메는 남의 집 울타리를 올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방향을 바꾸어 발길을 옮긴다. 부끄러운 기억 때문에 아무래도 객줏집에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거지가 부끄러웠고 그들이 주고받던 말은 또 얼마나 모욕적이던가. 두메가 용정 시내로 하숙을 옮기면서부터 한 가지 버릇이 생겼는데 할 일 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그 버릇이다. 두메는 항상 외로웠고 쓸쓸했다. 사람이 그리웠다. 특히 여인에 대한 그리움은 번번이 충동적으로 그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해거름, 두메는 저도 모르게 백화수라는 요리집 앞에 넋을 잃고 서 있었던 것이다. 권번에서 정식으로 수업한 기생도 아닌 기생들, 얼굴들은 반반하고 수심가 잡가정도는 흉내낼 줄 아는 그런 여자들이 저녁 술손님을 맞기 위해 분단장을 하고서 드나들고 있었다. 두메는 그 여자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두메야." 누가 불렀으나 두메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두메야! 니 거기서 뭐하노?" 두메는 아찔했다. 돌아보았을 때 공노인댁 방씨가 근심스런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러고 며칠 후 두메는 객줏집에 용돈을 받으러 갔다. 공노인은 조선에 가고 없었으며, 일전에 일도 있고 하여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왔다는 말 없이 마루끝에 걸터앉아 사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봉놋방 옆방에서 얘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씨와 순이네의 음성이었다. 송애가 나가고 머슴 권서방도 이태 전에 새경을 받아 고향으로 가버린 뒤 딸애를 데리고 사십 가까운 순이네라는 여자가 들어왔던 것이다. 순이도 열다섯 그도 자기 몫의 일을 맡아하고 있었다. "늘 보믄 에미 가난이 든 아이 같다. 그 날도 넋을 잃고 서 있는데 어찌 불쌍한지..." "열여덟 살 아니오? 에미 가난은 무슨, 계집애 생각할 나이지요, 머." "그러세. 에미 없이 자라서 그런 데 눈이 먼저 떠지는지도 모르지만," "여자 좋아하게 생겼습니다. 저번에도 우리 순일 눈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람에 순이가 무안해 죽을 뻔했다 그러더구먼요." "그건 순이 편이 조달해서 그런 게지. 두메가 무신..." "그렇게만 말할 수 없지요. 하필이면 기생집 앞에 서 있을 건 뭐람? 열여덟이면, 장가들어서 아이아범도 될 수 있는 나이 아니오?" "그건 그렇지만, 두메 처지로는 공부를 더 해얄 기고 장개사 늦잡아야지. 핵교 선상님도 그렇지마는, 우리집 늙은이가 얼매나 그 아아한테 희망을 보고 있다고? 장차 큰사람 될 기라 카고 신동이란 두메를 두고 하는 말이라 카든지... 에미 애비가 없어도 자알 커야 할 긴데," "신동이고 뭐고 그런 데 눈뜨면 별 수 없는 거요, 패가망신하는 것도..." "무신, 아직 어린 것을 두고, 무신 말을 하노?" "아니 그렇다는 얘기지요." "하고 버릴 말이라도... 그 나이가 되믄 가시나 머시마 할 것 없이..." "두메 아버지가 죽은 건 나도 알지마는 어머니는 어찌 됐어요?" "그러세, 그걸 뉘 알겄나. 두메를 낳아놓고 이내 죽었다던가? 그것도 우리집 늙은이가 들은 말이고..." "누가 아나요?" "머를?" "두메는 좀 잘났수? 꺼무꺼무한 눈하며, 산포수 아들 같지가 않아요." "내사 한 분 설핏 봤지마는, 아비사 못났지. 그래도 두메 피섯이 있더마. 해천에 용 나는 수도 있인께." "모르는 일이지요. 그애 어머니가 살았는지. 안 그래요? 두메를 보면 그래 어머니 인물이 보통 아닐 거요. 산포수 계집 되기는 아까운 여자였다면? 바람잡아 나갔는지 뉘 알아요? 호호홋홋... 두메 그애도 좀 여자 좋아하게 생겼수?" "별소릴 다 하네. 안 본 일을 가지고 간둥간둥 얘기하는 거 아니다. 어림짐작만 가지고 말한다믄 그 아아 어마니 공주마마라고는 못할까? 이럭저럭 다 됐구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방씨는 순이네와 함께 이불호청을 꿰매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두메야!" 당황한 방씨, 새파랗게 질린 두메 얼굴을 보자 그도 낯빛이 변한다. 두메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쏜살같이 뛰어나간다. "두메야!" 돌아보지 않았고 대문을 탕 닫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두메는 고물상 모퉁이 골목을 들어선다. 찾아간 곳은 육 년 전, 작부 출신인 서울댁이 살았으며 김두수가 가끔 와서 묵고 가던 그 집이었다. 서울댁이 용정을 떠난 것은 벌써 옛날의 얘기였고, 송애가 김두수 계략에 걸려 몸을 버렸던 그날 밤, 문을 따주던 여자는 물론 그 후 집 임자가 여러 차례 바뀐 뒤 월선이가 사들였다. 초가는 함석지붕으로 갈아얹혔으며 나무판자 문도 대문으로 달라져 있긴 했다. 월선이 이곳으로 옮긴 것은 병이 무거워지면서 국밥장사를 할 수 없게 된 때문이다. 공노인 내외는 집 사는 것을 처음부터 반대했다. 월선이를 객줏집으로 데려가서 병을 고쳐야 하며 방씨가 옆에서 병간호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선은 자기 병이 그렇게 중병도 아니며 장사 안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거라고 우겼다. 그것이 다 홍이 때문이라는 것은 뻔한 일, 공노인 내외는 남의 속에서 빠진 것 수덕망덕 볼 거라 그러느냐 하면서 화를 냈던 것이다. "홍아! 홍이 있어?" 두메는 문을 흔든다. "두메 형! 어서 와." 홍이 뛰어나온다. 그새 키가 많이 컸다. 목소리는 앳되고 얼굴도 여리게 보였지만 아비를 닮아선지 키는 두메와 비슷하다. "어서 들어와. 일요일이라구 왔어?" "응. 어머닌 좀 어때?" "그저 그렇지 뭐." 환하게 밝았던 홍이 얼굴이 어두워진다. 열려진 대문 사이로 마루에 걸터앉은 남자의 모습이 반쯤 보인다. "손님 오셨어?" "응." "어디서?" "몰라. 한데 말이다, 그 손님 절름발이야." 홍이는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두메가 마당에 들어갔을 때 마루에 걸터앉은 남자는 사십 남짓 콧날이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그는 들어선 두메를 유심히 바라본다. 눈에 미소가 흐르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두메 왔나?" 방안에서 월선이 반갑게 묻는다. 두메는 마루까지 올라가서 "네 아주머니. 좀 어떻습니까. 일요일이라서 놀러 왔습니다." "응, 잘 왔다. 홍아." "야?" "누부보고 점심, 어서 하라 캐라. 손님도 기시고 두메도 왔인께로." "야." "그라고 니도 점심 묵고 나믄 두메랑 놀러 가거라. 집구석에만 들어배키 있지 말고." "옴마는 편안하게 누워 있이믄 될 긴데 별걱정을 다 한다. 형, 우리집에 말이다? 서누나가 와서 밥해준다." "그래?" "누나!" "알았어!" 홍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부엌에서 미리 대답한다. 안자는 얼마 전 서희가 보내준 그 집 심부름아이다. 편애라 하면 좀 우스운 얘기지만 옛날 최치수가 용이에게 그러했듯이 월선에 대한 서희의 관심은 각별하였다. 육친에 가까운 그런 정인데,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주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에도 여러 번 보내었고 월선이 치명적 병을 앓고 있으며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자상하게 돌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색다른 음식을 만들게 하여 안자에게 들러 보낸 것도 수차례, 그래서 안자는 이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던 것이다. 남의 눈치를 핼끔핼끔 보는 객줏집 순이와는 달리 안자는 투박하게 생겼고 무던했다. 순이보다 나이도 많았으며 홍이 누나같이 따랐다. 안자! 서! 안자! 서 하며 곧잘 놀려주기도 하고, 언제부턴가 안자는 서누나로 불렸는데 누나라는 호칭을 안자는 매우 만족해했다. "학생이냐?" 마루 끝에 걸터앉은 손님이 말을 걸었다. "네, 아저씨." 두메 대신 홍이 나선다. "이 형은 우리 학교 졸업반입니다. 전교에서 젤 공부 잘해요." "그러냐? 고마운 얘기군. 아암 공부 잘해야지." 손님의 눈빛은 홍이랑 두메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두메는 손님에게 별반 관심이 없고 부엌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누나? 안자누나? 누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좁은 이마에 약간 고수머리, 광대뼈가 솟아오른 안자 얼굴이 떠오른다. 안자가 진짜 누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안자보다 더 못생기고 호박같이 못생긴 여자라도, 그런 여자라도 진짜 누님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두메는 생각한다. 두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가 아는 아이가 하나 있지. 그 아이도 아마 너이들 학교에 다녔을 게야." "누굽니까? 이름이 뭐지요? 아저씨." 홍이 성급하게 묻는다. "음 지금은 연추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마는," "네에? 뭐라구요?" 두메가 고개를 휙 돌린다. "아저씨! 그애 이름 박정호 아닙니까?" "아니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눈을 껌벅껌벅하며 손님은 장난스런 미소를 띤다. "맞아요! 알았어요!" 홍이 얼굴이 시뻘겋게 부푼다. "아저씬 정호 작은아버지, 틀림없어요. 그렇지요? 다그치듯 말했으나 목소리는 낮았다. "그럴까? 잘못 알았다." "아저씬 우릴 믿지 못해 그러시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도 애국잡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모두 애국자 될 사람들입니다. 저, 저는 담박에 알아차렸습니다. 정호 말이 나왔을 때, 저는 정호한테서 작은아버지가 밀정놈 때, 땜에 다리를 다쳤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손님 얼굴을 바라보던 두메는 눈이 다리 쪽으로 내려간다. 손님은 애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릴 철없는 애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린 정호하고 두메형하고 맹셀 한 사이란 말입니다. 독립을 위해 같이 싸우고 같이 죽자구, 모르셔서 그렇지 두메형은 정호랑 한집에 살았어요. 우린 아저씨 얘기 입밖에 내지 않아요. 그 정도는 우리도 알구 있어요." 홍이 음성은 아주 낮았다. 부엌의 안자가 들을세라, 방안의 어머니가 들을세라. "애국자 되려면 앞으로 알고도 모르는 척 그런 것도 배워야지. 핫하핫하핫...." 손님은, 아니 박재연은 크게 소리내어 웃어젖힌다. 홍이도 따라서 귀엽게 웃었고 두메는 싱긋이 한번 웃는다. "아저씨는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는데, 정호놈이 밤낮 너희들 얘기만 하잖겠어?" 박재연은 권필응과 동행하여 용정까지 왔다. 용정에서 모종의 회합이 있어서인데 안전을 꾀하기 위해 권필응과 따로 숙소를 정해야 했고, 여관이나 객줏집도 일본의 경찰력이 강화된 요즘 위험이 없다 할 수 없으므로 길상이 월선의 집을 주선한 것이다. 박재연은 이 집 골목에 들어설 때 육 년 전 김두수와 마주쳤던 그 골목이라는 것을 깨닫고 매우 심기가 좋지 않았으나 자기를 피하여 한잠 늘어지게 자고 밤이 되어 양복과 캡으로 변장한 김두수가 빠져나간 바로 그 집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다. "아저씨" 두메가 점잖게 불렀다. "오냐." "할머님이랑 아주머님께선 안녕하십니까?" 응석받이 홍이하고는 다르다. "음. 모두 편안하시다. 아주머님께서도 가끔 두메 얘길 하시지." "아저씨 제 얘기는요." 샘이 나서 얼른 묻는다. "홍이 얘기도 물론 하시구." "저도 자주 놀러 갔었거든요. 셋이서 늘 붙어다녔어요." 이리하여 두 소년과 점심상을 함께 받은 박재연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막상 조카애들에겐 엄격했으면서도. 그의 기분이 좋은 것을 기화로 홍이는 스스럼없이 이것저것 질문이었고 두메는 침착하게 요점만 따서 질문을 하곤 한다. 점심이 끝난 뒤에도 두 소년은 박재연에게 늘어졌다. 열다섯 사춘기에 들어선 홍이와 사춘기에 있는 두메, 그들 세계에서의 느낌이란 의외로 엉뚱한 것이 있었다. 상상력은 자유로웠으며 분방했다. 가령, "그까짓 대포나 총 같은 것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사람 없는 밀림 속에 큰 굴을 파놓고 쇠붙이랑 화약을 실어들여서 만드는 거예요. 중국 사람 아라사 사람들도 다아 왜놈을 미워하니까 말입니다. 그 사람들 기술자를 불러와서, 안 하겠다면 아무도 모르게 부대에다 넣어가지고 데려가는 겁니다. 탄약이구 총이구 막 맨들지요. 그래가지구 결판을 내는 겁니다." 하는 식이다. 두메는 두메대로 "철없는 소리 마. 그럴 군자금이 어디서 나와? 그보다 열 명이든 다섯 명이든 조를 수백 개 맨들어서 영사관이고 파출소고 불을 지르고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왜놈 순사 헌병을 죽이는 겁니다. 밀정놈들은 이잡듯 없애야 하구요. 그러노라면 잡혀서 죽는 사람도 많이 생기겠지요. 하지만 총질하는 전쟁보담이야 덜 죽을 거 아니겠습니까? 한 곳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정신을 못 차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은 자연 중국 사람들도 나설거 아니겠어요?" 홍이는 덩달아서 "아저씨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조선 사람 두 명이 왜놈 하나를 죽이면 된다구요. 그러면 이 용정에선 왜놈 씨가 마를 거 아닙니까? 조선 사람이 훨씬 많거든요. 중국 사람들은 좋아라 할 거구요. 지금 중국 사람들도 모두가 배일 운동을 하구 있잖아요?" "글쎄다. 하하핫핫...." 속으로 박재연은 땀을 뺀다. 워낙이 흥분의 도수가 올라가 있는 소년들에게 너희들은 공부나 해, 하며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갈 시간이 되자 그는 다소 엄격한 표정이 되어 일어섰다. "우리 훗날에 또 만나자." 박재연이 나가버린 뒤 홍이와 두메는 맥이 확 풀어진다. "우리도 나갈까, 형?" "응." 신돌 위에서 신발을 신으면서 홍이는 "옴마 우리 좀 나갔다 오께." "그래라. 두메는 밥 많이 묵었나?" "네. 많이 먹었습니다." "어이구, 어이구, 좀이 쑤셔서 일요일을 그냥 배길 수 있담?" 걸레를 빨며 안자가 핀잔이다. 고물상 앞길까지 나온 두메는 어쩔까 망설이는 듯 "홍아." "응." "객줏집에 안 가겠니?" "거긴," 대답이 찐찐하다. "나 거기 가기 싫어하는 거, 형 잘 알지 않아?" "그래. 실은 나도... 그럼 선생님한테 놀러 갈까?" "그게 좋겠다!" 홍이 빙긋 웃는다. "형! 호떡 사가자!" "나 돈 없다." "걱정 마. 나한테 있어." 호주머닐 툭툭 친다. 홍이 다른 날보다 들떠 있는 것을 두메는 이상하게 생각한다. '정호 작은아버지 때문이겠지.' 그렇다손 치더라도 홍이는 여느 때완 사뭇 다르다. 얼핏 보기에 명랑하고 흥분에서 오는 수선스러움 같았으나 어쩐지 그런 행동이 억지처럼도 느껴진다. 호떡 열 개를 사든 홍이와 두메가 문을 닫고 나오는데 호떡집 간판이 흔들리고 간판에 걸려 있는 붉은 천이 흔들렸다. "저눔의 간판 좀 높이 매달 수는 없을까? 매번 부딪친단 말이야." 머리를 매만지며 화가 나서 두메는 말했다. "형." "왜." "우리 선생님한테 가지 말고 강가에 안 가겠어?" "강가는 왜. "그냥," "그럼 가자꾸나. 나는 아무래도 좋아." 호떡봉지를 들고 홍이는 터덜터덜 앞서 걷는다. 종전까지 들떠있었던 홍이 뒷모습은 기운이 빠진 듯 두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두메가 함께 걷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 보였다. 강가에 나갔을 때 노을과 단풍이 강물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뗏목이 강 위를 흐르고 있었다. "좀 있으면 너이네 아버지 산판에 가시겠구나." "응," 홍이는 짤막하게 대꾸하고 모래밭에 다릴 뻗고 앉는다. "형, 호떡 먹자." 봉지를 찢어 호떡을 펴놓고 두메를 한 번 쳐다본 뒤 홍이는 호떡 하날 입 가득히 베어문다. 소년들은 피차 아무말 없이 노을을 받고 떠내려가는 뗏목을 바라보며 한 개, 두 개, 세 개, 호떡을 먹어 나간다. "왜 그래?" "뭘." "실컷 까불더니 맥빠졌나?" "맥빠지긴," 입안에 가득 찬 호떡 때문만도 아닌 듯 목멘 홍이 음성이다. "어럽쇼? 울어?" "형!" "말해보아." "우리 옴마 죽을 거래." "..." "못 고치는 병이래." "누가 그랬어?" "옴마하고 나만 모르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그랬다는 거야." 베어무는 호떡 위에 후둑후둑 눈물이 떨어진다. 호떡을 꿀컥 삼킨다. "저번때 응칠이가 하는 말을 내가 몰래 들었거든." "오래 앓았으니까 너도 그만한 각오는 돼 있어야지." "옴마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야 안 한 것도 아니지만 병원에서 딱 잘라서 말했다니까... 불쌍한 옴마!" 먹던 호떡을 버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껴 운다. "그래도 너에겐 친어머니가 또 계시지 않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부, 불쌍하다는 거지. 흐흐흣흣... 흐흐..." 격렬하게 흐느낀다. 흐느끼면서 "나, 나 벌받을지 모르지만 퉁포슬에 있는 어머닌 싫다! 날 낳아준 사람 같지가 않아. 나쁜 사람이야! 욕심꾸러기야! 세상에 돈밖엔 몰라!" 두메는 떠내려가는 뗏목을 바라본다. '넌 그래도 나보담은 낫다.' "형! 나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알어? 모를거야. 모, 모를거야!" "알 턱이 없지." 홍이는 울면서 '퉁포슬의 어머닐 난 왜 미워할까? 미워하는 내가 또 밉고, 부끄럽기도 해. 하지만 우리 옴만 죽는다. 죽는단 말이야! 그걸 좋아할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 난 옴마 눈만 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홍아, 이놈 자식아, 하면은 화나는 일도 다 풀어지고, 그런 옴마가 죽다니, 어이구우...' "옴마가 죽으면 나, 나 퉁포슬 어머닐 용서 못할 거야." "임마, 그건 너 옹졸한 생각이야. 너 친엄마가 여기 엄마 죽인 것도 아니고 병이 나서 그런 건데," 콧물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그걸 누가 몰라? 모르느냐고!" 별안간 악을 쓴다. "나한테 비하면 넌 팔자가 늘어진 거야." "뭐이라구? 팔자가 늘어져?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난 내 아부지 돌아가시는 것도 못 봤다. 묏등을 치며 혼자 울었어." "그, 그렇지마는 모, 모르는 편이 낫다! 죽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 쳐다보고 있는 것보담," "그쯤 해두어. 사내자식이, 나는 난생 엄마라 불러본 일도 없고 불러볼 사람도 없었다, 임마." "지나간 얘기는 왜 하노! 나는 지금," "그만 하라니까! 홍아, 서러워 말아라 해야겠니? 시시하게. 한데 너이네 아버진 왜 안오시냐?" "아부진 그런 사람이야. 냉정해. 나한테도... 산판일 끝나면 오시겠지. 오시면 산판서 셈해온 돈 반으로 똑같이 나누어서 옴마한테 주겠지." 홍이는 비웃듯 말했다. "불쌍한 울옴마." "제에기랄! 또 울옴마야? 실컷 혼자서 울어! 나 갈 테니까." 두메는 훌쩍 일어선다. 짜증이 난 얼굴이다. 그러나 두메는 모래밭을 왔다갔다할 뿐 혼자 돌아가진 않는다. 노을은 차츰 사라져가고 있었다. 불붙듯 붉은 노을, 강 건너 단풍든 숲이 서서히 검은 빛깔로 옮겨지고 있다. "두메형." "실컷 울어." "가아." 돌팔매질을 하며 "실컷 울라니까." "깜깜해온다." 두 소년은 모래를 밟으며 돌아간다. "호떡 네 개 남았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선생님한테 들고 가기가 안됐어." "선생님한테 갈 테야?" "집에는 눈이 부어서." "그래, 그러자. 돈 남아 있으면 서너 개 더 사라." 호떡 꾸러밀 안고 그들은 김사달 선생의 하숙집을 찾아 들어간다. "선생님!" "어, 놀러 왔구나." "네!" "들어와라." 김사달은 코를 매만지며 책상 앞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돌아앉는다. 아주 젊은 동안의 청년이다. "계실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홍이 호떡 봉지를 한곁에 놓으며 말했다. "나야 밤낮 있지. 학교 가는 일말곤," 벽에 붙여 책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으며 고리짝 위에는 이불이, 그리고 벽에 양복 한 벌이 대롱대롱 걸려 있을 뿐 몹시 살풍경한 방이다. "그게 뭐냐? 이리 내." "호떡입니다." 홍이 얼굴이 빨개져서 내놓는다. "함께 먹자." 두메와 홍이 마주본다. 두메가 "저희들은 먹었습니다." "그래?" 김사달은 출출했던지 호떡을 뭉떡뭉떡 베어먹는다. "그래 공부는 좀 하고 놀러 다니냐? 홍이 말이야." "실은," 두메가 말을 하다 말고 홍일 힐끗 쳐다본다. 홍이 눈을 깜박거린다. 씩 웃는 두메 "홍이가 찔찔 울어서 끌고 왔습니다. 종아리 좀 때려주시라구요." 두메는 선생님이라기보다 형님을 대하듯 한다. "울긴, 왜?" "어머니 병환 땜에 그러는 거지요 뭐." "음... 그거 야단났군." 사정을 다소 아는 김사달 얼굴이 흐려진다. "어머니 병환은 의사에게 맡겨두고 홍이는 공부나 열심히 해. 성적이 시원찮아. 그래서 어머님이 병 나신 것 아니야?" 홍이는 잠자코 있다. "그는 그렇고, 두메야." "네." "너 이름 말이다." "이름요?" "응, 아버님께서 두메산골이 좋아 그렇게 지으신 ?? 너 이름 좋다고 생각해. 그러나 앞으로 넌 아무래도 ?? 살 모양이니 음에 맞는 한자 이름이라도 있어야겠어. ?? "네." "강두메, 나도 이름 짓는덴 자신이 없지만 두메 두는 ?? 메는 매화나무 매, 그러니까 머, 메에서 마, 매가 ?? 두매 어떠냐?" "두보의 두짜지요?" "그렇지이." "두는 좋은데요. 매화나무 매가 어쩐지 여자 이름 ??까?" "그렇지가 않다. 중국 사람 중에는 매화나무 매자의 ??람이 더러 있어." "글쎄요, 좋긴 좋은데요." "그럼 그렇게 하는 거다." 김사달은 다시 호떡을 뭉떡뭉떡 베어먹는다. "일전에 송선생님한테서 편지가 왔었다." "네? 송선생님한테서요?" "응. 두매 너 얘기가 있었다. 명년엔 졸업인데 중국 군관?? 수 있게 주선중이란 말씀이 씌어 있었어. 열심히 해야 ??너에게 기댈 걸고 있어." "네." "선생님 저는요." 실은 샘이 나는 것도 아닌데 홍이 말했다. "홍이 너는 아직 새까맣다. 아직은 몇 년 더 있어야지." "네. 그건 알아요." "어머님 간호나 잘 해드려. 공부도 더하구." 그러나 아무래도 홍이는 풀이 죽는다. 안 그런 척하려고 ?? 눈치였으나 때때로 멍해지곤 한다. 3장 가난한 사람들 동저고릿바람으로 권서방은 헐레벌레 객줏집을 들어선다. 들어서자마자 고함을 지른다. "아주머니!" "와 그라요?" 햇볕 바른 마루에 걸터앉아 마늘을 까고 있던 방씨가 짱구 이마를 든다. "형님 안 오셨지요?" "오기는 어디로 와." "안 오셔요..." "함흥차사가 된 모양이구나." "머리가 빠져서 가리맛길이 훤했다. 이마만 툭 불거졌을 뿐 양볼은 더욱 꺼지고 방씨의 허리는 한층 길어 보인다. "큰일났는데, 제에기." 마루에 몸을 내던지듯 앉으며 권서방은 한숨을 내쉰다. "큰일은 무슨 큰일, 다 늙어빠진 처지에 마누라 해산달도 아니겠고..." "그런 악담 마시오. 해산달이라니? 날 죽어라 그 말입니까?" 해산달도 아닐 거라 했는데 권서방은 역정을 낸다. "그거는 삼신님 하시기 탓이고, 다 지 묵을 거는 타고 나오니께 생기는 거야 어쩔 수 없지. 그런데 큰일이라니 무신 일이요?" "아주머니한테 얘기해봐야 소용없어요. 아무튼 형님이 오셔야 얘기가 되는 건데," 권서방은 콧구멍을 후비다가 마루 밑을 내려다보며 풀이 죽어서 말했다. 목덜미의 살갗은 늘어지고 머리칼도 희끗희끗한 권서방. 늦장가를 들어 올망졸망 손자 같은 자식들. 세월이 바쁘고 마음도 바빴을 것이다. "아이구 참, 그래요? 이자는 사정이 영 달라졌거마는..." "예?" "아 그러세, 권서방이 급할 때 부르는 거는 노상 아주머니 아니었소? 그래 봐야 별 실속도 없일 기구마는..." "무슨 말씀이오?" "우리집 늙은네 말이오. 권서방이 찾아싸아도 별 실속이 없일 기다 그 말 아니오?" "하긴 그렇소. 실속은커녕 얼굴 보기도 어려운데 그러나 이번만은 꼭 만나야..." 하다 말고 순이네가 뒤꼍으로 옮겨가는 무 배추를 힐끗 쳐다본다. "실은 말입니다, 길서상회 그 댁에서 그 왜 곳간 뒤에 있는 땅을 판다 했다면서요? 그게 틀림없는 얘기겠지요?" "그러기,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나야 뭐 밖의 일을 알아야 말이지." "그 땅을 사자는 사람이 있어요." "판다면야 사자는 사람은 많을 기요." "그걸 내가 좀, 그래야 겨울을 나지 않겠소? 형님이 어서 오셔얄텐데..." "오는 거사 기약이 없는 일이고 바깥주인한테 말해보는 게 좋을성싶구마는..." "그걸 나도 생각 안 한거는 아니지만 몇몇 거간들이 명함을 들여 본 모양인데 자기는 모른다 공노인한테 물어보아라, 하더라는 게요." 방씨는 짐작이 가는 듯 잠자코 만다. 자기 말대로 바깥일은 모르는 방씨였으나 길서상회댁이 불원간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 길상이 그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늙은이가 기력 좋은 것도 탈이라니까." "왜 아니라요." "환갑을 지냈으면 편안하게 안방 차지나 하고 계실 일이지, 큰 집 드나들 듯 조선에는 뭣하러 밤낮 가시는지 모르겠소." "역마살이 들어서, 그것도 병이라." "혹 서울에 소가라도 둔 것 아닙니까? 늘그막에 자식이라도 보려고?" "그 주제에? 무신 억만장자라고," "약초 캐러 다니던 젊었을 시절에 백두산을 위시하여 안 가본 산이 없노라고 노상 자랑하더니 산삼을 캐서 장복을 하싰는가?" "모르지요 그거야. 내사 동삼 꼬랑지도 구겡 못했인께." 방씨는 웃는다. 가리맛길이 훤하고 양볼은 푹 꺼졌어도 웃는 눈매는 여전히 귀엽다. "볼품도 없는 늙은이가, 하긴 코밑이 길어서 수는 하게 생겼습니다만." "아무튼지 젊었을 때부터 한곳에 붙어 있이믄 몸살이 나는 성미니께 그것도 집안 내림인가배요." "내림요?" "월선옥의 그 아아 부친, 그러니께 시숙도 객지로 객지로 떠돌아 다니시더니 객사 죽음하싰지." "참 월선옥의 그 아주머니 좀 어떠시오?" "..." "금년 넘기기 어렵다고들 하던데," 방씨의 얼굴빛이 금시 달라진다. "누가 그런 말 합디까?" "글쎄, 소, 소문이..." "아프다고 사람이 다 죽는가요?" "그야 그렇지요." "그놈아아는 고집이 세서..." "..." 죽는다는 말에 발끈 화를 내던 방씨는 제풀에 기가 죽는다. "우리 늙은네 뒤 핏줄이라고는 그 아이 하나뿐인 거는 권서방도 알지만 그만 우리말을 듣고 여기 오믄은 좀 좋겄소? 아무리 집에 가자고 타이르고 달래도 보고, 남의 이목이 있지 않소? 남이 부끄럽다 카이. 그놈의 아이새끼 땜에 못 오는 기요. 수덕망덕을 볼 그놈의 아이새끼 땜에," 치마를 걷어 콧물을 닦는다. "남부끄러울 거야 뭐 있겠소. 아무도 병든 조카딸 내버려둔다는 말 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이서방은 통 안 오는 모양 아니요?" 방씨 얼굴이 벌개진다. "그 목이 뿌러져 죽을 놈의 인사, 안 와보는 거는 고사하고 지 새끼가지 아픈 사람한테 처맡기놓고, 아 그러시, 천 리 밖에 산단 말가 만 리 밖에 산단 말가, 가물치 콧구멍, 분한 생각 같아서는 못할 짓이 없겠지마는 참는 기지." "그 사람 그래도 속으론 끓을 게요. 본시 의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 소리 마소. 마음속으로 육도벼슬을 하믄 뭐하는고? 와서 찬물 한 그릇이라도 떠주는 그기이 남남끼리 함께 살던 정이지. 세상에 그리키 매몰차고 독사같이 모질고," "글쎄요. 사내들이란 떠나 있으면 자연 잊을 수도 있고 그 사람도 살기가 고생스러우니,"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아픈 사람만 하까? 내 이분에 오기만 해봐라. 모가지를 비틀어부릴 긴께." "그 팔로 장골 모가지를 비틀어요? 하하핫 하하하..." "오직 괘씸하믄 그런 말을 하까? 하기사 아무리 괘씸해도 이쪽은 지는 해, 죽는 사람만 불쌍하지. 그 찬한 기이 명이나 길어서 살았이믄 좋겄는데 어이구 신령님도 야속하시지." "박복한 사람은 가로 뛰고 세로 뛰어도 별수없어요. 신령님이 어디 있으며, 그것 다 구름잡는 얘기고 제기랄!" "그러기, 박복한 사람은..." "더럽고 아니꼬운 놈들만 잘사는 이눔의 세상 아니오? 도둑질 많이 하는 놈일수록 잘살고 신령님이 있긴 어디 있어? 신령님? 복장 터지는 얘기지." 갑자기 흥분하여 허공에다 주먹질을 하던 권서방은 벌떡 일어섰다. "아주머니. 나 가겠소!" 무슨 급한 볼일이라도 생각나 듯 허둥지둥 쫓아나간다. "온 사람도..." 문간을 쳐다보던 방씨는 다시 마늘을 까기 시작한다. 거리에 나온 권서방은 제에기랄! 제에기랄!을 연발하며 걷는다. 공노인의 귀가가 늦어져서 화가 났지만 노상 하는 공노인 잔소리가 생각나서 울화가 치민 것이다. "내가 복장 옳게 못 써서 떼돈을 벌었단 말이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의 석가살이, 어린 자식새끼들 배불리 못 먹이고 흥! 집 사는 사람이, 땅 사는 사람이 누구냐 따져가면서 흥정 붙이게 생겼어? 상대가 누구면 어때? 거간이야 흥정 붙이고 구전 먹으면 그만이야.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구. 아 내가 독립운동하는 사람을 찔러서 왜놈한테 돈을 받아먹었나아?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삼시 세끼 죽물이라도 먹어야 애국자도 되고 양심가도 되지. 나도 공노인만큼 지반 잡고 산다면야, 그 늙은이보다 더한 양심 찾고 애국자도 되겠다! 제에기, 제에기랄! 지금 같애서야 왜놈 아니라 왜놈의 할애비라도 좋다! 우리 식구 먹여만 살려준다면, 이 나이 해가지구서 기저귀 차는 어린것부터... 생각만 하면 눈앞이 캄캄한데 그것 찾고 이것 찾고, 언제? 우리가 잘못해 나라를 잃었나? 빌어먹을, 참말이지 사람이라도 잡아먹고 싶은 심정이다!" 마마자국만큼 굵었던 땀구멍도 졸아들고 검버섯이 핀 얼굴이 푸릇푸릇하다. 설렁한 날씨 탓이겠지만 울분, 누구에겐지도 모를 분노 때문에도 그런 성싶다. 객줏집을 찾아갔을 때 권서방은 조급했을 뿐이었다. 공노인이 아직 오지 않았으리라는 짐작도 했었고 땅 사자는 사람이 성화를 부린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기 혼자서 그냥 조급했을 뿐이다. 박복한 사람은 가로세로 뛰어도 별수없다는 자신의 말이, 그 말 때문에 권서방의 울분이 제풀에 폭발한 것이다. 굳이 따진달 것 같으면 공노인이 권서방을 도와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고, 권서방 처신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권리도 없는 것이지만, 그간 공노인은 그를 도와준 것이며 처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했었다. 그러나 이 몇 해 동안 이들의 관계가 약간 달라진 것이다. 한마디로 공노인은 권서방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용정 형편에 도통 관심이 없어졌던 것이다. 그는 서울 조준구와의 싸움에 열중해 있었다. 처음 서희의 부탁을 받고 혜관을 따라 서울에 갔을 때 공노인은 자기 임무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이유와 정당성이 있었지만 어느새 공노인은 조준구와의 지략적 싸움에, 싸움 그 자체에 빠져들어갔던 것이다. 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으로, 논문서가 넘어올 때마다 공노인은 성 하나를 공략한 쾌감과 나머지 성을 향한 용솟음 때문에 그는 자신이 노쇠해가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 일 이외 관심을 가졌다면 그것은 월선이 중한 병을 앓고 있다는 일이며 겨우 현상 유지를 하는 객주업에 대해서도 무관심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권서방의 분노는 차츰 가라앉았다. 별도리가 없다는 체념이 그이 걸음걸이를 더디게 한다. 무슨 바쁜 일이 있는 듯 객줏집을 뛰어나오기는 했으나 별볼일이 없었고 갈 만한 곳도 없었다. '내 잘못이야. 늦장가는 왜 들어서 이 고생인고. 털고 일어서자 해도 딸린 식구가 없어야 말이지. 홀몸이라면 되든 안 되든 훌쩍 떠나서 고깃배를 타든지 광산일을 하든지, 그것도 못하면 길가 송장이 되면 그만 아냐? 이건 죽도 사도 못하고, 그놈의 아이새끼들 생각만 하면 머리빡의 핏줄이 터질 지경이야. 겨울이 눈앞에 있는데 내 잘못이야. 늦장가는 왜 들어서,' "아저씨 어디 가세요?" 권서방 앞을 젊은 여자가 가로막는다. "뭐야?" 권서방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저라니?" "아저씨도. 나 송애예요." "아아니 뭐이라구?" "그간 안녕하셨어요?" "대관절 어찌된 일이야." "제가요? 왜요?" 상글상글 웃는다. 신수가 훤했다. 손목시계를 차고 금반지를 끼고 옷도 비단이다. 눈썹을 가늘게 치켜올려 그린 얼굴은 옛날의 송애를 연상할 수 없다. "이거, 그래 그간 어디 가 있었지?" "봉천에요." "시집은 갔나?" "글쎄요?" "살기가 편해진 모양이구나, 아주 하이칼라가 됐네?" "저라구 못살라는 법 있나요?" 눈에 날이 선다. "그야 그렇지. 그래 객줏집에 오는 길이냐?" "거긴 왜요? 제가 거길 뭣하러 가나요?" "아아니이, 이 말하는 것 좀 보게나?" "난 거기 볼일이 없어요." "거기 볼일이 없다니? 이봐 송애." 눈을 부릅뜬다. "말씀하세요." "낳은 사람이 부모면은 길러준 사람도 부모는 부모야. 거기 볼일이 없다니? 네가 어떻게 해서 나갔는지 곡절이야 모르겠다만 그러는 게 아니야. 보아하니 썩 잘된 모양인데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안하면 못쓴다." "실컷 부려먹구, 나 그집에서 공밥 안 먹었어요. 그리고 난 빈몸으로 나간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신세진 것 없어요. 공연히 모르는 말씀 마세요." 쌀쌀하기가 이를 데 없다. "네가 자란 이력을 내가 아는데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해? 애키! 순, 잔말 말구 술 한 병이라도 사들고 찾아가아. 사람이 은혜는 알아야지.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그런 얘기는 그만두시구요.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보다 나 아저씨하고 의논할 일이 있어요. 찾아가 뵐려고 생각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만났네요. 다름이아니라 집칸이나 장만해볼까 싶어서요." "그만두어. 한다는 얘기가 괘씸하기 짝이 없구나." 화를 낸다. "아저씨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데 왜 그리 화를 내죠? 객줏집에서 먹여살려 주나요?" "이득이 된다구?" "구전이라도 받을 거 아니에요. 누가 공짜로 해달랬어요." "야, 야아! 이 계집애야! 네까짓것 구전 안 먹어도 이 권필구 굶어죽진 않아. 앞길이 먼데 복장을 그따위로 써가지고 빤하다 빤해. 몹쓸 기집애 같으니라구." 퉤! 침을 뱉은 권서방, 송애를 떼밀어내고 걷는다. "흥, 계집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사는구먼." "그래, 그새 세월이 오십 년 백 년 지나갔다! 이 할망구야!" 권서방, 퉤! 퉤! 또 침을 뱉는다. '제에기랄! 오늘은 연달아 화난는 일만 생기는군. 제에기랄!" 왜놈 아니라 왜놈의 할애비라도 좋으니 우리 식구 먹여만 준다면... 방금까지 그랬었던 권서방이다. "참 세상이 더럽고나야.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새파랗게 젊은 것이 만리장성 같은 앞날을 두고, 내 나이 오십이 넘었어도... 무섭군. 세상 인심 무서워. 하아 참!" 탄식한다. 다음 권서방이 찾아간 곳은 갖바치 박서방의 가게다. 손바닥만한 점포에서 박서방은 신발을 짓고 있었다. "바람 한번 잘 불었군요." 가죽신발 한 짝을 신틀에 끼워놓고 징을 받으면서 박서방이 말했다.] "샛바람이 불고 있는데 또 뭐라?" "샛바람? 그건 또 왜요?" "온갖 게 다 아니꼬와서 못 살겠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젊은 마누라한테 혼짝났구먼..." "돼지꼬리만한 상투라도 있었다면 모르지. 누구처럼..." 권서방은 엉성하고 성근 박서방의 상투머리를 곁눈질하며 성난 얼굴로 말했다. "하긴 잘 생각했어요. 형님 상투 짤라버린 건 썩 잘한 일이었지. 봉변을 덜 당할 테니까. 우리 마누란 상툴 끄덕이재두 늙어빠져서 그럴 힘이 없소." 약을 올리면서 박서방은 끌을 찾아든다. 권서방은 삿자리가 깔린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지랄 같은 세상. 나도 진작, 누구처럼 엿판이나 메고 용정을 떠나는 건데..." "배꼽 웃을 얘기 하지도 마시오. 홍가 같은 놈도 들어왔는데..." "언제?" "그저께 왔다던가," 남한테 이용만 당하고 빚만 지게 된 홍서방이 엿판이 짊어지고 용정을 떠난 지가 이 년이 넘었다. 그 홍서방이 돌아왔다는 박서방의 얘긴 것이다. "돈 좀 벌어 왔나?" "물으나마나, 무슨 돈을 벌어요? 홍가 허풍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이구. 엿판 메고 다니면서 돈을 벌었다면 그건 누웠던 송장이 일어날 일이요." "그야, 엿판 메고 나갔지만 딴 일도 할 수 있는 거구..." "혹 모르지요. 가다가 금덩이나 줏었다면," "흥, 돌아오는 사람이 왜 그리 많아?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철인가?" 권서방의 기분은 여전히 우울하다. "누가 또 돌아왔기?" 박서방은 일손을 놓고 곰방대를 꺼낸다. "그 왜 객줏집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아 데려다 길린, 그애 말이구먼. 아주 몰라보게 됐던데요?" "으음..." "닷새 전인가? 당혜 한 켤레 지어달라고 왔었는데, 나도 처음 몰라 봤지요. 땟물이 쪽 빠졌더만. 거 아무래도 온당치 않을게요." "아 글쎄 고년이 내가 객줏집에 가느냐 물었더니 거긴 왜 가느냐, 볼일이 없다. 그러질 않겠어? 배은 망덕도 유분수지. 자식 없는 늙은이들 자식삼아 기른 것을 내가 뻔히 아는데 세상에 그럴 수가 있나?" "아닌게아니라 나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들더구먼. 무슨 원한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늙은이들 심성 몰라서 하는 얘긴가? 그년이 바람이 나서 나갔지." "하여간 여염집 여자는 아니 것 같고 그렇다고 술집 여자도 아닌 것 같고 뭐 봉천에 가 있었다던가?" "뻔하지." "뻔하지요." "돈푼 있는 놈 물어서 첩살이 아니면 지가 무슨 재주로 시계다 반지다," "상판이 반반하니까. 기명통에 손 안 당구고 살자면은, 그런 길밖에 없었겠지요." 하는데, 사내 하나가 바쁜 일일라도 있는 듯 헐레벌레 들어선다. "아아니, 이 사람 홍가 아닌가?" "어이구, 이거 누구요? 오래간만이구먼." 홍서방은 머리를 긁는 시늉을 한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박서방은 곰방대를 발 밑에 떨고 일손을 잡는다. "이 년 넘기, 많이 늙었네?" "세월이 거꾸로 돌지 않는 바에야 안 늙고 어쩌겠수. 형님도 많이 늙었수다." "그래 돈 많이 벌었다면?" "또 저 놈의 박가, 쫑알거렸구먼." "흥, 그게 참말이라면 오죽이나 좋을까? 떨어진 밥풀이라도 줏어 먹게." "알기는 아는구먼. 내 잘되면 덕보는 것쯤," "홍가가 돈을 벌었다면 나는 벌써 옛날에 돈방석에 앉았겠다아." "혀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는다." "아암. 엿판메고 돈 벌어왔다는 놈도 있는데, 그 까짓 침 좀 길게 뱉기로서니." "아아니, 이놈의 인사가 누굴 바람 따라 굴러온 가랑잎 신세로 아나?" 홍서방의 어투가 삐딱해진다. "망망대해서 오가도 못하는 철새 신세지." "꼬막딱지만한 점방에서 남의 밑창이나 꿰매주는 갖바치 신세 안 부럽구먼" "그럴 거야. 저승에 먼저 가서 재상 노릇 할 테니까." "누굴 굴리는 거야?" "엿가락도 아니겠고 거적을 쓰면 굴릴 수도 있겠지." 홍서방의 얼굴이 벌개진다. "내가 네놈한테 밥달랬나? 얻어 먹으러 왔냐?" "화내는 것부터가 수상쩍어. 기어들어온 놈이 고갤숙여도 뭣할텐데 뭣처럼 대가릴 치켜들어? 그래가지고는 홍가야, 밥 빌어먹기 썩 글렀다. 썩 글렀어." "뭣이 어쩌고 어째? 너 이놈! 말 다 했냐?" 홍서방이 주먹을 휘두를 기세다. "아아, 왜이래? 노상 하는 친구간의 가락인데," 권서방이 막고 들어선다. "말 다 안했지. 아직 할말이 많이 남았다." "박서방은 태연하세 연장통을 뒤적이며 둘을 찾아내어 신발 모서리를 쓸기 시작한다. "야 이놈아! 밥 빌어먹기 썩 글렀다구? 사람을 뭘루 보는게야! 네깐놈이 날 업수이 보아? 꼬막딱지만한 점방 하나 생겼다구 도실청에 오른 성싶냐! 이 개새끼!" 치려고 덤비는데 권서방이 팔을 꽉 잡는다. "이 사람이 왜이래? 안하던 짓을 하는구먼." "놔요!" 권서방을 뿌리치려 하자 박서방은 줄을 던지고 일어섰다. "이놈아 정신차려!" 소리를 지른다. "뭣이 어째?" "노상 몸이 성할 줄 아냐? 피래미라도 열 마리 잡으면 중고기야! 되지도 않을 고래 잡을 생각만 하구서, 판판 생일은 굶고 넘기면서 생일 잘 먹을 생각만 하고 이틀 굶는 놈이 바로 네놈이다." "굶거나 말거나 웬 참견이야! 네놈 참견을 왜 내가 받누. 오사죽음할 놈 같으니라구." "다 친구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화낼 것 없네. 자아 앉으라구. 앉으라니까" 권서방은 억지로 홍서방을 눌러 앉히려 한다. 못 이긴 척 물러서며 홍서방을 길을 행해 침을 뱉는다. "더러워서. 되지 못한 것이 사람 괄시하는구먼." 한결 누그러진다. "옛말에도 영에서 매맞고 집에 와서 계집 친대더라." "네놈이 계집이야! 계집이냐구! 하기야 쓴물 단물 다 빠진 늙은 쥐새끼 같은 놈이니까 계집보다 나을 것이 없지." 욕설을 하면서 홍서방은 계면쩍게 웃는다. 웃는 얼굴을 힐끗 쳐다본 박서방 던진 줄을 찾아 일자리에 앉으면서 "내가 네놈 계잡 같으면 벌써 옛날에 쓸모없는 그놈의 연장 뽑아 버렸을게야." "흥. 계집같이 입만 살아서." "제수씨 물이 눅어 그렇지." 권서방이 껄걸 소리내어 웃는다. "닭싸움이군. 그런데 싸움이 끝나면은 그 왜 화해주란 거 있잖은가? 듣자 하니 홍서방 돈 좀 잡은 모양인데 이럴 때 인심쓰는 게야." "그, 그야..." 풀이 죽어 우물거리더니 무슨 생각이 났던지 벌죽 웃는다. "허허어 참, 형님두 하루만 기다리슈, 내 떡 벌어지게, 예 일류 요리집에서 기생 불러다놓고 떡 벌어지게 한턱하겠소." "에키! 순, 이 능구렝이야. 곧 죽어도 돈 없단 소린 못하는군. 그나저나 세월은 가고 동지섣달 단대목같이 저승길은 다가오는데 아직도 끼니 걱정이라, 이거 이래가지고 정말 안 되겠는걸?" 자탄하며 거리를 내다보던 권서방 "여보게들, 저기 안깐이 온다." 홍서방과 일하던 박서방이 동시에 거리 쪽을 내다본다. "용정 사람들 노망한 게야. 저렇게 당당한 신살 보고 안깐이라니, 허허어허..." 권서방은 맥빠진 웃음을 웃는다. 거리에는 배가 나와서 그렇지 당당한 초로의 신사 한 사람이 개화장이란 것을 짚고, 뽐낸 몸짓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중절모자를 눌러쓰고 회색 춘추 코트를 입고 코밑의 소위 카이젤 수염이란 게 엄숙하다. 시천교의 간부며 열렬한 친일파 남비산이란 사람이다. 이때 어디선지 왜병이 탄 말 한 필이 질풍같이 달려왔다. 남비산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는데, 순간 남비산의 몸이 기운다. 길 위에 나자빠지는가 싶더니 용케, 나온 배 덕을 보았는지 몸의 균형을 잡는데 얼굴은 홍당무, 번쩍 쳐들었던 손의 개화장이 그냥 허공에 떠 있다. 그 모습은 개화장을 든 채 만세를 부르는 꼴이다. "으하하핫...으하하핫..." 신전에 앉은 세 사나이 입에서 동시에 폭소가 터진다. 남비산은 울 듯이 입을 비죽거리다가 팔을 내리고 개화장으로 땅을 짚으며 눈알을 굴린다. "으흠..." 큰기침을 한다. "으하핫핫... 하핫핫..." 세 사내는 다시 목청을 합쳐서 웃어제친다. "고얀놈들!" 남비산은 개화장으로 삿대질을 하다가 종종걸음으로 가버린다. "아이구 배야! 으하하핫. 아이구 배꼽 터지겠네." 남비산을 왜 하필이면 안깐이라 하느냐, 남비는 왜말로 나베요, 산은, 정확한 발음으로 상이지만 씨나 혹은 님, 그러니까 남비산은 남비님 왜말로 ?? 아낙을 부엌데기로 낮추어 말한 속어다. 그러니까 이곳 말로 안깐이 되는 셈인데 그런 별명으로 불리어지는 남비산이 용정 주민들에게 미움과 경멸의 대상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우리네 홀쭉 들어간 이 배가 웃음 때문에 지금 터질 지경이지만, 그놈의 뚱뚱이배는 보통 조화를 부리는 게 아니라구. 으허헛헛핫핫..." 박서방이 또 웃어젖힌다. "어떻게?" 권서방이 묻는다. 박서방은 줄을 든 채 일어섰다. "이렇게 배를 쑥 내밀고, 개화장이 도리깨질을 하며 걷다가..." "아아, 그거 틀렸다. 이렇게 이렇게..." 좁은 점방 안에서 이번에는 홍서방이 배를 쑥 내밀고 개화장 흔들어대는 시늉을 한다. "아이구 배야! 아이구" 하며 권서방이 웃는다. "그러다가 왜놈 순사만 얼씬했다 싶으면 그눔의 배 간데온데가 없어진단 말슴이야. 왜말도 못하는 주제 대가리는 연신 떡방아를 찡어대고..." "실속이 없는 게지. 진짜 놈들은 엎어치고 메치면서 속 차리고 협조하고, 저눔의 개화장은 말짱 헛거야." 권서방 말에 홍서방이 "도대체 그놈의 개화장이란 뭣인고?" "뭣이긴, 개화장이지." "허허 개화장을 뉘 몰라서?" 칠 듯이 으르렁거리더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홍서방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아? 개화장이고 개뿔이고 다같은 막대긴데 그러니까 지팽이다 그거 아니겠어? 안 그래? 내가 이상히 여기는 것은 사대육부 멀쩡한 놈이 먼길 가는 것도 아닌 터에 그걸 휘두르고 다닌다 그거야. 지팽이라는 것은, 본시 눈 어두운 사람, 늙어서 다리에 힘 빠진 사람들이 짚는 게야. 또 있지. 수백 리 먼길 가는 사람, 험한 산길 가는 사람이 그걸 들고 다닌다 그 말씀이야. 그리고 동냥 얻으려 밤낮 쏘다녀야 하는 중놈이 드는 거구, 아이고대고, 빈 창자 움켜쥐며 곡을 해야 하는 상주, 그러니까 좋을것이 하나도 없는 것인데 모자쓰고 양복 입고, 구두 신은 놈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엘 가도 개화장이라. 모자 쓰고 양복 입고 구두 신은 양놈들은, 그러면 모두 양기 부족이다 그런 얘기가 되지 않겠어?" "지랄 같은 소리." "그 말은 맞네. 지팽이라는 건 대체로 장님이나 늙은네 거지들이 드는 거니." 권서방이 홍서방 말에 동의하고 박서방은 연장들을 밀어붙이며 일어선다. "나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점방 좀 보라고." 접은 등을 펴면서 나간다. 권서방과 홍서방은 하던 얘기가 뚝 잘린 기분이다. 웃음과 객담 뒤에 오는 허무와 절망 같은 것이 두 사람의 가슴을 적신다. 울어도 시원찮을 텐데 뭐가 좋아서... 두 사람은 다같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형님." "왜." "형님은 살기가 어떻습니까." "나앉은 거지가 도신세 걱정하누만." "그렇게 되는구먼요." "하기야 피장파장, 우리 같은 어정개비가 큰일이라..." "듣자니까 길서상회댁에 마차가 있다는데..." "짐마차?" "그건 전부터 있었던 거구, 내가 용정 떠나기 전에 마차 한번 끌어보지 않겠느냐, 말이 있었지요. 그걸 마다하고 떠났는데 이번에 오니까 그댁 식구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가..." "그거라면 끌어보겠다 그 말인 게로군." "내가 차마 찾아갈 순 없고 공노인이 계신다면..." "그 늙은인 말도 말어. 함흥차사야. 그 늙은이 기다렸다간 목 뿌러진다." "..." "헛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길서상회 그 댁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도 있어. 창고 뒤의 공지를 팔려고 내놨다는 것은 확실한... 그래서 나도 공노인을 일각이 여삼추라 기다리고 있는 판이지." "그래요?... 용정바닥의 돈 싹 쓸려가겠소. 땅이다 집이다 팔고 가면은... 그래서 공노인 조선 출입이 잦구먼요." "아마..." "오나가나 돈 있는 사람이야 무슨 걱정이겠소." "하여간에 되는 놈은 엎어져도 금가락지가 코에 걸리니까. 그 집은 이번 전쟁통에 무지무지하게 또 벌었지." "어떻게요?" "그 집에서 두류를 많이 취급하긴 옛날부턴데 생각해보면 눈이 밝고 꾀가 많았던 게지. 허기야 밑천이 든든하니까 그 짓도 했겠지만. 다른 곡물에 비하여 아무래도 두류는 수량이 적다 그거야. 그걸 몽땅 사서 혼자 차지... 남이 안 가진 물건 값이야 마음대로 아니겠어? 헌데 이번 난리통에 어찌 되었는고 하니, 강낭콩 완두콩 한 섬이 많아야 칠팔 원... 그게 글쎄 이십오륙 원에서 삼십 원까지 세 배 네 배로 치솟았거든. 하참! 그러니 그 장사가 어찌 됐겠어? 갈구리로 마구 돈을 거둘 수밖에. 강낭콩 완두콩은 코쟁이들이 좋아 먹는 거라나? 멀리 미국 영국으로 나간다는 게야. 하여간에 되는 사람은 엎어져도 코 끝에 금가락지가 걸린다니까." "구만리 밖의 얘기 들으나마나..." "공노인이 돌아오면 내놨다는 땅이나, 그것만 흥정 붙이면 그럭저럭 겨울은 넘기겠는데 글쎄..." "공노인은 번질나게 조선을 드나들면 무슨 부가 있소?" "그 늙은이야 뭐 미쳤지 미쳐. 요즘에 아주 유식해져서 에헴! 자고로 사람이란 어쩌고저쩌고 천년 묵은 여우가 다 돼간다." "홀몸만 같애도 제에기이, 여기 올 것도 없이 아주 멀리 날라버리는 건데." "입 하나 더 보탠 거지. 자네가 떠돌아 다니는 새 식구들 굶어죽진 않았어. 사는 거야 기막혔지만." "그건 빈말이 아니오." 두 사내는 우두커니 서로 바라본다. 뾰족한 수가 없다. 한 해, 두 해 책장 넘기듯 쉽게 가버리고 설마 설마 하며 보낸 세월 배불리 먹은 일 별로 없고 일 안 하며 놀아본 것도 아니지만 이들 눈앞에는 황혼의 서리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길서상회 그 집을 지을 때만 해도 이들은 퍽이나 낙천가들이었다. 어설픈 도방 출신, 땅에도 사람에게도 매이기 싫어한 기질 탓으로 여름 한철 노래 부르지 않았건만 겨울 메뚜기 신셀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덩치는 큰 것이 오히려 더 을씨년스럽다. 권서방이 아침에 집을 나올 때 "이보우 돈 있으면 몇 닢 주옵게나. 이불, 솜이 돌뎅이 같아서리 타오잲고 앙이 되었겠음. 겨울으 어찌 날까 심란하답매." 젊은 마누라가 뒤통수에다 대고 말했다. 아저씨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데 왜 그리 화를 내죠? 송애가 던진 말이 울린다. 귓가에서 자꾸만 울린다. 홍서방은 혼자 주절거리고 있었다. "연해주에 가서 고깃배를 타보았는데 안 되겠더군. 물이 무서워서, 도무지 물이 무서워서 꼼짝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배라곤 나룻배 말곤 타본 일이 없었거든요. 처음부터 늙었다고 하는 것을... 별수 있어요? 미역국이지. 몇 해 전에 용정서 함께 막일을 하던 막둥이놈, 그놈도 배 타는 게 어설퍼서 쩔쩔매는걸... 그래도 젊은 놈이니, 이제 우린 해먹을 것이 없어." 우리라고 했으나 권서방은 잠자코 있었다. 자긴들 거간 아니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제법 설렁해지는군." 박서방이 술병을 들고 들어온다. "그게 뭐야?" "보면 몰라?" "술 들었냐? 아니면 맹물이야?" "술이다! 네놈이 화해술 안 사오니 내가 사왔다 왜?" "술도 못 처먹으면서... 되놈이 맹물 부어준 건 아닌지 모르겠네." 중얼거리듯 그러나 홍서방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점심에 먹고 남은 김치와 풋고추졸임을 꺼내놓고 술잔으론 밥그릇 뚜껑에 물대접을 내어놓는다. "형님, 우리 듭시다..." 두 사내는 엉거주춤 등을 꾸부리고서 찌꺼기 같은 값싼 술을 허겁지겁 마신다. "지금 오면서 공노인댁 양딸로 있던 그앨 또 만났구먼." "뭐라구 해?" 권서방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아저씨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데 하던 말이 단비같이 마음바닥에 스며들고 있었다. "뭐라 하긴요. 어떤 사내하고 함께 가는데 그애도 영 온당찮어. 이마빡의 제비초리 하고선 사내 몇 잡아먹을걸." "사내가 뻐드렁니에 돼지상 아니던가?" "제법 곱상하게 생겼던데? 뻐드렁니에 돼지상이랄 것 같으면 왜 그..." "이상한 놈이었지. 송애가 객줏집에서 나간 것도 그놈 때문인 모양인데..." 하면서도 여전히 권서방 귀에는 아저씨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데, 그말이 맴을 돈다. 홍서방은 그들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형님 술 안 드시겠소?" "들지." 4장 예감 마차가 있었지만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서희는 인력거를 타고 집을 떠났다. '마음이 왜 이리 소란스러운지 모를 일이야.' 서희는 눈을 감는다. 뭉게구름같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정체 모를 근심은 벌써 달포 가까이 서희를 어지럽혀온 터이긴 했다. 실상 정체를 전혀 모른다 할 수만도 없는 근심인 것이다. '서두는 게야.' 얄팍한 입술을 굳게 다무는 서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마음이 그럴 때는 서둘러야 한다는 것, 보다 결연히 단안을 내려야 한다는 것, 이미 내디딘 걸음이 비틀거려서는 안 될 것이며... 서희에게는 모든 일이 뜻대로 어김없이 아니 예상 이상으로 된 것이 사실이다. 다만 마무리가 남아 있을 뿐, 강남으로 가는 제비처럼 날면 되는 것이다. 자식 둘을 앞세우고 날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 허한가. 때때로 마음 밑바닥에서 거슬러오르는 설렁한 냉바람은 무슨 까닭인가. 전신을 떨게 하는 춥고 적막한 바람앞에 그냥 주저 앉아 버리고 싶어지는 그 까닭을 서희가 왜 모르겠는가. 내내 외면해 왔었다. 보이지 않게 가로질러진 벽을 서희는 무던히도 둔하게 느끼지 않는 듯 외면해 왔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는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과연 길상은 처자와 더불어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가. 인력거에 흔들리면서 서희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길상은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내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두 자식의 끈질긴 핏줄을 설마 외면하기야 할라구. 다짐했으나 대단히 자신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가야 해. 돌아간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 아니냐. 십 년 동안 이를 갈았다. 아니 십오 년 동안 이를 갈았다. 원한에 맺힌 세월을, 원한대로였다면,' 원한대로였다면 밤낮으로 이를 갈아 이빨 하나 남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남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간다! 돌아가서 조가놈! 홍가 그 계집! 마지막 살에 붙인 내의까지 벗게 할 테다! 내 소망은 바로 눈앞에 와 있어. 내 주저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서희의 양볼이 파아랗게 질린다. 증오와 저주의 바다다. 조준구와 홍씨의 두 물기둥이 솟아오른다. 연속적으로 최참판댁을 엄습해 왔었던 불운의 씨앗들이 두 물기둥 둘레에서 맴을 돈다. '어찌 너희들이 넘보았느냐. 어찌 너희들이 강탈하였느냐. 어찌 너희들이 감히 오욕을 끼얹을 수 있었더란 말이냐. 나는 돌아간다! 그이가 돌아가지 않는대도 나는 돌아간다! 그것은 애초부터 말없는 약속이 아니었더냐? 그것은 엄연한 약속이다. 이제 내 원한은 그이의 원한이 아니며 그이의 돌아갈 이유도 아닌 것을 안다. 왜? 왜? 왜 내 원한이 그이 원한이 아니란 말이냐! 남이니까, 내 혈육이 아니니까.' 서희 심중에 경풍이 인다. 자기 뜻한 대로 자기 소망대로, 그것이 되지 않을 때 이는 어릴 적의 그 경풍이다. 양볼은 더욱더 푸르게 질린다. '내 인내는 그이를 위한 인내가 아니었다.' 숨을 돌리듯 서희는 자신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무조건이 있을 수 없는. 세월에서 터득한 판단이 그의 경풍을 잠재운 것이다. 판단. 서희의 소망과 서희의 가진 것 그 모든 것을 잃지 않는 이상 길상은 길상 자신을 잃을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양반도 아니요 상민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남편도 하인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부자도 빈자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애국자도 반역자도 될 수 없었던, 왜 김길상은 허공에 떠버렸는가. 그것은 서희의 가진 것과 서희의 소망의 무게 탓이다. 시초, 치열한 소망과 기득권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관 때문에 휘청거렸지만 최서희는 기왕의 자리에서 떠나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무게에 최서희는 눌리어 떠나질 못했다. 그 무게는 소망과 가치관의 약화와 반비례하여 가중되어왔다. 이제 무게는 완벽하다. 그렇다. 떠나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마상에 상전 아씨를 싣고 말고삐를 잡으며 가는 하인이 아니고서는 돌아가지 못할 길상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서희에게 그것은 처절하고 절대절명의 판단이다. 아이 둘이 아비의 옷깃을 잡아주리니 그 희망에 기대를 걸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 애소하지 못하는 것도 그 판단 때문이다. 파아랗게 질렸던 서희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평정으로 돌아간다.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별안간 인력거가 전후로 강하게 흔들렸다. "무시기! 어째 이럽매!" 차부 천서방이 고함을 질렀다. "아아니! 뭣이 어째?"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뒤쫓아 울렸다. "어째 가는 인력거 앞에 달기드는 기야!" "달기들어? 이게 성한 사람이야? 가는 사람을 디려받고서 무슨 개수작이지?" "앙이 이 간나아! 사람으 잡아묵는당이? 꿈꾸다 나왔니야!" "간나아랑이! 어디다 대구 함부르, 이놈아! 눈깔이 멀었냐! 네놈 눈에 내가 간나아로 보이니?" 여자가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려는 기색이다. "이거, 이거! 하 참, 기가 차서 말으 못하겠다이." 여자 팔을 뿌리치는 모양이다. "아 모두들 보았잲앴음? 이 안깐이 덤벼들었지비?" 구경꾼이 모여든 것이다. 와글와글 소리가 요란하다. "손이야 발이야 빌어도 내 가만히 안 둘 것인데 아아, 글쎄 이게 뒤질려고 이래? 응? 가는 사람을 디려받아 놓고 뭐 어째? 너! 너 다리몽댕이 성할 줄 아냐?" "이거 참말입지, 마른하늘 울잴까?" "천서방, 시간 없네." 인력거 안에서 서희가 말했다. "옛꼬망. 내 니르 죽이주잲은 거 고맙기 생각하랑이." 천서방이 인력거 손잡이를 드는데 "곱게 갈 줄 아냐? 사람을 치어놓고 욕설까지, 가긴 어디루 가아!" 인력거가 또 흔들린다. "이 쌍간나아! 비키지 못하니야!" "쌍간나아? 어느놈 집구석의 종놈인지 모르겠다만 자손 대대로 종질할 이놈아!" "가는 차에 뛰어들고서리 미친 지랄 혼자 한답매." "천서방, 안 가고 뭘 하는 게야." "이 간나가 못 가게서리 막지 앙이합매까?" 비로소 서희는 인력거의 가리개를 젖힌다. 예상한 대로 악쓰는 여자는 송애였다. "거기 좀 비켜줄 수 없겠느냐?" "뭐라구요?" 송애 입가에 경련 같은 웃음이 떠오른다. "비켜줄 수 없겠느냐 했느니라." 똑바로 송애를 쳐다본다. 구경꾼들의 눈이 일제히 서희에게 쏠린다. 투명한 얼음 조각이다. 푸르고 아름다운 비수의 날이다. 그리고 고귀한 학 한 마리. 구경꾼들은 다음 벌어질 광경에 숨을 죽이며 지켜본다. 송애는 잠시 비틀거리듯,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다. "비켜줄 수 없다면요? 어쩌시겠어요 마님." "..." "타고 다니는 양반만 사람이지 걸어 다니는 우리네 상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마님." 구경꾼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거기서는 친일파로 명이 나신 모양인데 이쪽에도 고래 심줄만큼이나 튼튼한 뒷줄이 있답니다. 하늘 밑에 머리 둔 사람이 어디 당신네들뿐인 줄 아셨소?" 계속 지키는 서희 침묵이 송애에겐 기분 나쁘다.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사람을 치고 욕설까지 하고 그냥 보낼 순 없어요. 나두 왜헌병 나으리의 여편네니까요." "무시기, 저 안깐 왜헌병 여편네라?" "지금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음?" "저게 객줏집 양딸 앙입매까?" 구경꾼들 속에서 숙덕거리는 소리. "송애야! 너 그러면 못쓴다아?" 드디어 구경꾼 속에서 큰소리 하나가 튀어올랐다. "모르는 처지도 아닌데 그럴 수 있냐? 아까부터 내 보고 있었다. 부딪친 건 너 쪽이란 말이야. 일부러 찍자를 부리자 하는 건데 아서, 아서. 사람이 그럼 못써 못쓴단 말이야." "뭐라구요?" 송애가 인력거 손잡이를 움켜쥔 채 돌아본다. 거간 권서방이다. "그렇답매! 증거가 있다이! 본 사람이 있는 기야!" 살았다 싶었던지 천서방이 소리지르고 송애도 소리지른다. "남의 일 참견 말아요!" "사람 변할라니 잠시, 너도 이젠 막돼먹었구나, 야아!" "창자에서 소리가 꼬갈꼬갈 나는 가난뱅이 살판나겠네? 돈푼이나 좋이 받겠구먼." 하다가 그쪽은 내버려두고 "아무튼 그냥은 못 가! 땅에 엎디어 빌어도, 뭐 쌍간나아라구? 이 새끼야! 끌고 다니면 무법천지냐? 경찰서에 가서, 거기 가서 따지자!" 경찰서에 가자는 것은 진심이 아니었으며 애를 먹이자는 것이었는데 인력거에서 서희가 내려섰다. 수군거리던 구경꾼들이 잠잠해진다. 옥색 자미사의 춘추 두루마기, 미색 장갑을 끼었고 순백색 치맛자락이 물결친다. 고독과 고뇌와 멍에를 쓴 불행한 여인 천부의 미모는 과연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은 아닐 성싶다. 자신의 미모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는 가엾은 천치가 아니면은 그 행복이 환상일 따름이요 기만일 뿐이다. 여자의 미모는 타인의 행복이다. 행복하리라 오해하는 뭇 사람들에게 바수어서 나누어주는, 가령 지금의 이런 경우다. 서희에게 집중되는 뭇 시선들은 바수어서 나누어 가진 일순의 작은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호기심과 흥미와 동경과, 자아, 그러면은 다음 어떠한 광경이 벌어져서 구경꾼들을 흡족하게 해줄 것인가. 미인은 노상 무대 위의 희극배우요 익살꾼은 무대 위의 광대다. "타지." 나직한 음성이다. "타는 게야." 송애는 당황하고 구경꾼들은 의아해한다. "마침 그쪽, 영사관으로 가는 길이니 타고 가는 게야. 왜헌병 부인께서 걸어가 되겠느냐?" 송애는 풀이 콱 죽으면서 낭패한 기색을 드러낸다. "내가 왜 타요?" 뒷걸음질을 친다. "내 발 있으니 걸어가겠소." 인력거 손잡이를 슬그머니 놓는다. "하 참, 아니꼬와서..." 길가에 침을 뱉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응? 여보세요! 권간지 거간인지 하는 아저씨!" 하고 몸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권서방은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허허허 하고 웃는다. "되게 걸렸답매." 누군가의 말에 구경꾼들도 웃는다. "마님. 타시옵게나." 해서 인력거는 떠나고, 송애는 권서방에게 시비를 건다. 그것은 건성이며 일종의 무안수세인데, "막돼먹었다구? 내가 막돼먹어선 누구 할애빌 붙어먹었나?" 오 년 간의 험악했던 생활을 들내어놓는다. "온당한 여자가 길가에서 가는 사람을 잡고 시빌 해?" 권서방은 시비 상대가 안 되는 것을 깨닫고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럼, 그럼. 시비하게 생겼지비. 헌병나리 가물댁 아입매?" "밟혀죽어도 말 못한단 말이요!" "무시레, 인력거 떡 타고시리 가잲구서?" "아암! 친일파보다 헌병나리 가물댁이 높다이. 송사하면 어길 것입매." 여기저기서 야유가 날아온다. 그러나 송애는 얼굴도 붉히지 않는다. "비켜요, 비켜!" 구경꾼들을 헤치고 송애는 나간다. 뒤통술 치듯이 날아오는 웃음 소리. "뱁새가 황새 따라가자면 가랑이가 찢어지지, 찢어져!" "되게 영광이겠궁, 왜헌병 가물댁이랑이. 허허헛, 허허헛헛..." 망신을 주기 위한 것이 도리어 자기쪽에서 당하고 말았다. 타고 다니는 양반만 사람이지 걸어 다니는 우리네 상것들은 사람 아니냐 까지는 좋았는데 일본의 헌병 나으리 여편네에서 들통이 난 것이다. 울림장을 영 잘못 놓은 것이다. 왜헌병 여편네라는 말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오 년 전에 객줏집을 떠난 송애는 김두수를 따라 봉천까지 갔었다. 그곳에서 김두수는 귀찮은 짐짝을 버리듯 송애를 떨어뜨리고 떠났는데 떠나면서 두칠이라는 사내를 면대시켜주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두칠이 동생이 송앨 돌봐줄 테니까, 알았어?" 그러고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송애는 지금도 김두수의 그 웃음 소리만은 기억하고 있다. 두칠이가 처음 송애를 데려간 곳은 카페였다. 송애는 많이 울었다. 그러나 김두수가 떠날 때 이미 버림받은 것을 예감하였고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던 송애는 한편 카페라는 화려하고 새로운 분위기에 호기심이 없지도 않았다. 봉천은 용정에 비하여 말할 수 없이 큰 도시였으며 한때 여진의 서울이었던만큼 신구 건물이 그득히 들어찼고 그 도시를 수없이 오가는 행인 속에 잘나고 멋진 여자들도 많았다. 처음부터 송애의 가슴은 설레이고 있었다. 그러나 울었던 것이다. 얼굴이 반반했던 송애는 카페 여급으로 출발하여 전전한 곳은 다 그렇고 그런 장소였는데, 그렇고 그런 장소에서의 오 년은 수치심 없는, 자포자기한 세상을 우습게 보는, 뻔뻔스럽고 거칠고 배짱 하나 대단하여 교활하고 가학적인 한 여자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사내라면 모두 같은 개, 그 개의 본성을 이용하여 여자는 적당히 울궈내면 된다는 신조도 터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소의 돈을 모으긴 했다. 최근에 와서 일본 헌병 하나를 알고 지내게 되었는데 그자가 송애에게 반하기는 반한 모양인지 술집에는 나가지 못하게 하고 생활비랍시고 돈을 갖다주곤 했으나 결혼한 것도 아니며 결혼의 약속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술집에 나가지 않고 빈둥빈둥 놀게 된 송애는 사내가 오지 않는 밤이면 자연 이일 저일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는데, '집을 하나 살까? 이 돈 가지구? 어림도 없다. 이 봉천바닥에 이 돈 가지고 살 집이 어디 있어. 그 새끼는 걷어차고 어디 중국놈 하나 잡아볼까?' 돌아누워 보지만 하릴없이 낮잠만 자다 보니 밤은 길고 지루하기만 했다. '아니야. 가만 있자... 용정 같으면? 살 수 있을 게야. 그러면 내가 용정에 간단 말이야? 아니지. 사서 세를 내면 되지 않겠어? 돈 더 벌어서 그것 팔아 보태고 하면은 큰 집 마련이 어려울 것 없지. 그리고 요리집을 차리는 거야. 내 보란 듯이, 송애는 죽지 않았다고.' 공상은 공상을 낳아 드디어 결론을 내린 송애는 마음이 달떴다. 있는 대로 다 끼고 차고 걸치고서 용정에 나타났던 것이다. '지랄 같은 말을 했지. 최가 계집이 친일파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영사관에 볼일이 있어 가는 거야 빈말은 아닐 것이고 필시 웃대가리나 상대하지 피래미 같은 거야, 그래 내가 거기 갔더라면 내 꼴이 머가 되누. 나 땜에 그 새끼도 혼짝날 건데, 흥!'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아득하다. 아득할 뿐만 아니라 최서희에게 보복하리라는 계획도 없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심술이 났던 것이다. 저기 길서상회 인력거 간다는 행인의 말에 어디 한번 곯려주자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인력거 안의 사람이 길상인지 서흰지, 어느쪽이거니 생각하고서. 왜헌병의 여편네라 한 것도 순간적인 착오였다. 그러면 일본 헌병의 여편네란 어떤 것이냐. 제일 밑바닥 색주가보다 못한 것이 일본인하고 사는 조선 여자다. 그것도 지극히 드문 일이지만. 웃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구경꾼도 없는 호젓한 길을 거니는 송애, 아무리 수치심을 잃고 배짱 하나 두둑해졌다지만 다른 곳 아닌 용정에서 그것도 긁어 부스럼, 처량하고 심란해질 수밖에 없다. '모르겠다. 웃으려면 웃으래지. 조롱하고 욕하고, 그 이상 지들이 뭘 해? 욕이 살을 뜯고 들어가나? 이미 난 들내놓은 계집이야. 싯누런 상판들 하구서 구경이랍시고 모여든 꼴이라니, 막돼먹었건 온당찮건 그래도 난 네놈들보담은 배가 부르단 말이야. 웃어? 이 새끼들아! 웃고 싶은 건 나야, 나아! 지게 지고 서 있던 놈, 보퉁이 이고 서 있던 년들, 그래 인력거 타고 가는 년은 친일을 해도 좋고 걸어 다니는 나 같은 년은 왜놈 계집년이니 죽일 년이다 그거지? 흥! 웃기지 마라. 인력거 타고 다니는 년은 갖다바치지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나는 이 나는 왜놈을 뺏겨먹는다 이거야. 병신같이 늙은 놈! 햇볕에 쭈구리고 앉아서 어느놈이 술이나 안 사주는가, 어디 흥정거리나 없는가 하고 궁리나 할 일이지 주제넘게 뭐 그러면 못쓴다구? 못쓰기는 옛날 옛적에 못쓰게 됐다! 못쓰게 안 됐으면 지가 밥 먹여주어? 옷 입혀주어? 흥!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사람 한평생, 에라 모르겠다. 수 틀리면 이곳에서 날라버리면 그만, 내 답답할 것 한푼 없다구. 이 세상에 그것 달린 놈이 있는 한 밥 먹을 수 있고 옷 입을 수 있는 내 신세가 좀 좋으냐! 흥! 비단옷에 잇밥 먹기론 최가 계집이나 나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꿀릴 게 뭐 있누? 좋아하네 죽네 사네 그거 다 말짱, 말짱, 헛거라구.' 속으로 쫑알거려보는 것이지만 심란하기론 마찬가지다. 여관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명색뿐인 여관, 방 한구석에 뎅그렇게 놓인 가방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수염 자국이 까실까실한 왜헌병 나까지의 체취가 되살아난다. 여관방에 나까지라도 기다리고 있었으면 싶어진다. 봉천에 있는 자가 올 리도 만무하건만, 악질로 소문이 나 있지만 여자에겐 숙맥인 나까지였다. 구석진 여관방의 벌거숭이 전등이 생각난다. 그 벌거숭이 전등 밑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까지를 상상해본다. 가슴에 쓰러져서 한바탕 울어버릴까? 아니야 실컷 아양을 떨고 즐거운 밤을 보내는 거야. '미친년! 나까지 그 새끼하곤 머리카락 파뿌리 되도록 살 것 같애? 미친년! 그런 것 기대했던 것은 옛날 옛적 고릿적 얘기야. 왜놈이고 되놈이고, 아무라도 좋다 이거야. 살다가 송장 되면 버려주는 놈 있다면 말이야. 김두수! 그 죽일 놈! 어디서 뒤졌나? 개처럼 뒤진 것 아냐? 뒤져도 그놈이 옳은 죽음은 못했을 거야. 악독한 놈! 아마 그놈이 윤이병을 죽였을 게야. 김가놈이 윤가놈을 죽였다면? 흐흐흐... 그건 썩 잘한 일이지. 그랬다면 말이야. 아암, 잘한 일이구말구, 그 쥐새끼같은 놈 땜에 나도 김두수한테 당한 게야. 다 뒈져라! 다 뒈져! 김길상이 그 개새끼! 모두 개새끼다! 사내놈은 왜놈 나까지놈도 개새끼야. 모두 다아, 세상의 사내놈들 다아!' 이름도 기억에 없는 사내들 얼굴이 눈앞에 풀쑥 솟았다간 자맥질하듯 사라지고 솟곤 한다. '미친년, 여기다 꼬딱지만한 집은 사놔 뭘 하누. 집이고 대궐이고 공연한 미친 지랄이지.' 송애는 얼굴을 숙이고 풀이 죽어서 여관에 들어선다. 이 무렵 서희는 여사집 내실에 와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용정촌에 거류하는 일본인 상류층 부인네들이 모임을 갖고 회식하는 날이다. 비공식적인 친목회라고나 할까. 막강한 국력을 업고 이곳에 와 있는 일본의 관공리와 거상의 부인네들, 든든한 존재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적막하기로 말한다면 이들이다. 아무리 국력이 막강하다 하여도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용정에서 일본인 수효를 능가하는 조선인들의 사상은 배일 일변도, 일인을 백안시하기론 중국인도 마찬가지였다. 시시로 이는 정세의 불안과 유언비어의 범람,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원인이 있다. 숫자상으로 볼 때 간도 전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칠백여 명, 그 반수인 삼백사오십 명이 용정에 있는데 남녀가 반반이다. 이 반수를 차지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소위 작부, 창부 중에서도 아주 저질의 계집들이다. 여러 해 전 일본이 용정촌에다 임시 파출소를 설치하면서부터 관공서를 따라 어중이떠중이가 밀려들었을 때 이들을 겨냥하여 기생작부들이 몰려왔었고 가족을 동반하지 못한 일본인 관민들은 자연 이들에게 의존할 수박에 없었는데 그 천하고 음탕한 언동은 조선인들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후 임시 파출소가 없어지고 대신 영사관이 생기면서 일인들의 수가 줄어들었으나 자국인들의 유치 작전으로 여러 가지 토목 공사를 영사관이 일으켜 다시 일인들은 증가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역시 여자들의 대다수는 창부들이었다. 이런 사정 속에서 소수인 양갓집 부녀들의 외로움도 외로움이거니와 용정땅의 주민들은 고의적이든 아니든 이들 양갓집 부녀들까지 비천한 창부로 대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북극의 겨울은 길고 모든 것이 낯설은 풍물 속에 거의 밀폐되다시피한 몇몇의 부녀들이 모임을 갖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긴 했다. 열 명이 못 되는 이들 회원 중 유일한 조선 여자가 서희였다. 회원 중에는 이미 이곳을 떠난 사람도 있었고, 용정에 있는 사람 중 두 명이 불참하여 다섯 명의 여자가 지금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서희는 이 모임에 참석한다. 이같은 공개적인 친일 행동은 서희의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파견된 헌병장교의 처는 영사부인과 마찬가지로 양복 차림의 젊은 여자다. 갸름한 얼굴에 코가 길었다. 또 한 여자는 이마가 좁고 살결은 희었으나 무턱이다 싶게 생겼는데 곡물과 잡화 무역을 하는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 여자는 황매 빛깔에 연두빛과 ??빛의 잔무늬가 있는, 지리맨 바탕의 기모노 그리고 연갈색과 남색이 얽섞인 하오리를 걸쳐입고 있었으며 상당히 세련되고 교양있는 분위기를 가졌다. 이들 중에서 연장자인 듯 우중충한 회색 계통의 기모노 하오리에 남색 오비를 맨여자는 우편 국장 마누라였고. "그렇게 해주어서 우리 여자들 입장에선 좋긴 좋지만요."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까르르 웃고 나서 다시, "조선 여자는 일본 남자하고 결혼하는 일이란 거의 없지 않아요?" 하고 말했다. "그건 틀립니다아. 일본 남자하고 결혼 안 하는게 아니에요, 일본 남자가 조선 여자하군 안 하는 거지요." 코가 긴 헌병 장교의 처가 나무라듯 말했다. "그럴까? 그러면 일본 여자는 조선 남자하고 결혼하는 사례가 더러 있던데, 그러고 보면 이거 불명예 아니유? 남자의 정조관이 여자보다 훨씬 높다 그 얘기가 되니 말예요. 호호홋..." 코 긴 여자 말이 막힌다. 그러나 "그, 그야 첩으론 데리고 사는 일이 흔히 있겠지요만 여자야 어디 첩을 거느리고 살 수 있나요?" 자기 한말이 우스웠던지 호호호오하고 웃는다. "술집이나 유곽의 여자 얘기겠지요. 나는 양갓집 딸의 경우, 일본 남자와 결혼하는 일이란 거의 없지 않느냐는 거예요." 서희는 노상에서 행패를 부리던 송애 생각을 한다. 일본 헌병 나으리의 여편네라고 뽐내는 송애, 그 자리에서는 철저하게 묵살했으나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그런데 또 이곳에 와서 송애 말과 관련 있는 얘기를 듣게 되니 이래저래 착잡하다. "그거야 뭐 일본의 경우도 그렇지요. 양갓집 여자가 조선 남잘 따라 사는 건 아니지 않아요?" "내가 듣기엔 그렇지 않아요. 조선 남자는 화류계의 여자를 처로 맞이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거예요." "아아니, 쯔무라상.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당신 일본 여잔데 그래 일본 여잘 그리 깎아내리기예요?" "깎아내린다는 것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요." "어머, 알고 보니 쯔무라상 당신 조선인 편이구먼. 그것 좀 곤란한 얘기 아녜요? 차라리 아이누족 편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까?"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실실 웃는다. 아이누족이란 일본에서 가장 이단시되고 혐오하는 일본 북방에 사는 종족이다. 서희는 그 모욕을 감내하고 앉아 있다. "도시 그런 것에 관심한다는 게 우스워요." "하여간 일본 여자의 경우가 비율이 높다... 그보다는 조선 여자의 비율이 높은 편이..." 중얼거리는데 "아아니 이분이, 집요하군요. 쯔무라상 당신 총독부에 보고서라도 내시겠어요, 아니면 그 문제 가지고 박사 논문이라도 쓰시겠어요?" "박사 논문 안 될 것도 없지만..."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깔깔거리고 웃다가 서희를 향해 "오꾸사마(부인)." 군계 속의 일학처럼 앉아 있던 서희 "네." "오꾸사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선 여성의 입장에서..." 영사 마누라, 정확히 영사대리의 마누라는 아까부터 우편국장댁과 열심히 그들 집안 얘기를 하고 있었다. 서희는 웃고 만다. "나는 이런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오꾸사마의 견핼 듣고 싶군요." "글쎄요... 보호받는 사람의 심리 같은 것은 아무래도 적개감...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여자의 정조관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이?" "글쎄요. 수치겠지요. 그보다 더한 수치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반대의 경우라면? 일본이 조선 같은처지라면요?" "우리 나라에선 타민족에 대한 그런 역사가 없었으니까, 뭐라 말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역시," "역시?" "그럴 경우에도 수치로 생각하겠지요." "양쪽의 경우 다아?" "글쎄요. 내가 조선 여자 전부의 입장에서 말하긴 어렵지요. 그렇지만 옛날에 중국 왕족에게 시집가는 경우에도 그건 죽으라는 것보다 더한 것으로 여겼으니까." "그야 이역만리 부모형젤 떠나서 가니까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살아 이별은 죽음보담은 나은 게 상식 아니겠소? 임진왜란 때도 많은 조선 여자들은 그 수치심 때문에 자결을 했으니까요." 코 긴 여자 입에서 이때 "시다다까," "시다다까모노입니까?" 서희가 미소지으면 말했을 때 여자는 낯을 붉힌다. '시다다까'라 할 적에는 강하다는 뜻이 되지만 '시다다까모노'라 할 것 같으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할 사람을 면전에 두고 할 말은 못 된다. 여자는 서희가 온유하게 웃으며 찔렀기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사실 코 긴 여자는 모노라는 말까지 붙이려다 그만두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를 지키는 것보다 상대가 이민족이란 점이 중요하다 그거로군요. 그렇담 자존심일까요? 우월감은 가졌을 리 없겠고..." "피의 순수 때문인 겝니다. 듣자니까 일본서는 사촌끼리도 혼인을 한다지만 조선에서 사촌은커녕 남이라도 성씨가 같으면 혼인 못하지요. 일본에 비하여 성씨도 얼마 되지 않는데도,"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 조카가 조도전대학 사학과에 다녀요. 수재지요. 그 아이 말이 일본인과 조선인은 혼인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피를 섞어서 조선인이 없어져야 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중국은 워낙이 인구가 많아 어렵겠지만 조선쯤이야 가능한 일이라나요? 서양 역사에서 보면 알레기산다 대왕도 그 땅을 정복하면은 그 땅에서 반드시 제 나라 남녀를 데려가서 씨를 뿌렸다는 거예요." 이건 또 지독한 얘기다. "그렇게 될까요? 통치는 받지만 한 민족이 말살이야 되겠어요?" 서희는 흥분도 감정도 없이 말했다. 연연한 연분홍 저고리의 순백색 치마, 볼을 쓸어보는 그의 흰손에 심해 같은 비취 쌍가락지가 눈에 스민다. 코가 긴 여자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그 말 뜻은 나도 알겠지만 민족의 순수한 것을 따지자면 우리 일본같이 순수한 민족도 드물 거 아니겠어요? 왜냐하면은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사방이 바다예요, 해서 일찍이 외적이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거든요. 그런 순수한 나라도 조그마한 섬나라이지만 세계 도처에 식민지가 있고, 구태여 피 섞지 않아도 잘만 해나가지 않아요? 생각해보세요. 피부빛이 씨커먼 인도인하고 영국인이 피 섞겠어요?" 우편국장댁말고 모두 여학교는 나온 처지여서 일단은 유식하다. "아무튼 정복을 당한 나라는 노예의 처지를 벗어날 순 없지요. 그 학생은 인도적 입장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내 조카는 멀리 내다본 거 아닐까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학문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불만이에요. 멀리보다 당장이 문제거든, 좀더 철저히 할 필요가 있어요. 도대체 우리가 지금 지배하는 처진가요? 이곳에서 조선인들이 판을 치고, 마치 우리가 지배당하는 꼴 아니에요? 반일분자는 가차없이 색출해야해요. 우환덩어리지 뭡니까?" 이때 "그만들 두어요. 여자들이 무슨, 정치적 얘긴 필요 없어." 영사부인이 서희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이런 얘기라도 안 하면, 노가미상 가문 자랑을 들어야 하니까? 안 그래요? 오꾸사마." 쯔무라 양행 안주인 말에 모두 깔깔 웃는다. "내가 무슨 자랑을 했다구..." 우편국장댁이 멋쩍게 웃는다. "아 참! 사이상." 코가 긴 여자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오꾸사마가 아닌 사이상 하고 부른다. "네." "조선 사람 욕해서 미안해요." "패장은 말이 없지요." 태연스럽게 서희는 여자 눈을 본다. "일전에 말예요, 나 누굴 만났는데 혹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 "김두수라는 사람 아시죠?" "네 알아요." 역시 태연자약이다. "어떻게 아시지요?" "만난 일은 없어요. 말로, 잘 알지요." 엄격해진 서희 눈빛이 여자를 당황하게 한다. "글쎄, 좀 이상한 얘길 한 것 같았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이번에는 서릿발 같은 웃음이 지나간다. 여자는 더 이상 말을 못한다. "혹 만나게 되면 전해주시겠습니까?" "무슨?" "내가 한번 만나잔다구요. 도움이 됐으면 싶지만 그 사람 부친에 대해 할 얘기도 있다구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이 일본 여자 귀에는 그저 심상한 얘기로 들렸지만 그것은 김두수에게 무시무시한 협박인 것이다. "전하지요. 회령에 자주 가니깐," "회령에 있나요?" 서희는 알면서 묻는다. "그곳에서, 지금은 순사부장이에요." "출세했군요." "그 사람 처지로선 그렇지도 않나봐요. 자유롭게 일선에서 뛰고 싶은 모양이죠?" 돌아오는 인력거 속에서 서희는 나직하게 웃는다. 하하하하... 나직이 소리내어 웃는다. '오늘은 송사리들이 꽤나 나를 번거롭게 했다.' 서희는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웃는다.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모서리가 다 깎여버린 능숙한 태도는 그 옛날의 윤씨부인을 연상케한다. 이날 밤 길상은 서희의 얼굴을 피하면서 말했다. "나 내일 하얼빈에 가겠소." "거긴 뭣하시려구요." "상가를 한 번 둘러보구... 전부터 그러려니 했었는데," 이번에는 서희 쪽에서 길상을 외면한다. 두 사람 사이에 굳게 뚜껑을 닫아놓고 지낸 일을 길상이 처음으로 건드린 것이다.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얼빈의 상가를 둘러볼 필요는 없다. 억지라면 억지였고 나는 가는 것에 반대라는 의사 표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서희가 느낀 것은 길상의 고민이다. 결정적인 일이라면 억지를 쓰지 않을 것이며 의사 표시 같은 것 할 사람이 아니다. 뜨거운 것이 서희 목에 치밀었다. 일종의 안도, 안도라고나 할까, 그러나 다음 순간 뜨거운 감정 속에 냉혹한 판단이 밀려든다. '아니다. 고민이란 진작부터 있어왔던 것, 저이는 결정을 내리려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말이 길상의 입에서 나왔다. "송선생이 그곳에 와 있는 모양인데, 김생원 유품을 가져왔다는 얘기니까 가보기는 가보아야겠소." "송선생이 이곳에는 왜 못 오십니까?" "그쪽에 볼일이 있는 모양이오." 침묵이 계속된다. 서로의 얼굴은 가면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가면 뒤에는 의지의 싸움이 불꽃을 튀긴다. 서희에게는 쓰러지려는 마음이 십분의 일, 그 십분의 일을 두려워하여 싸운다. 길상은 반반이다. 그러나 서희만큼 치열하지는 않다. 그에게는 반반 이외 방황이 있었다. 북국의 바람소리 말발굽 소리 그리고 숨막히는 사진의 벌판이 바닥을 넓히고 있었다. 마음의 바닥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서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오늘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길상이 힐끗 쳐다본다. "헌병 장교 이와자끼의 처가 김두수 얘기를 하더구먼요." "어떻게?" 재빠른 반응이 나타난다.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면서 얘기의 내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뭐라 했소." "한번 오라고, 부친 얘기도 있으니까 만나거든 그리 전하라 했습니다." "잘했소." 길상은 빙그레 웃는다. 서희는 한숨을 깨물고 "저문데 주무시지요." "그럽시다." 5장 하얼빈행 작은 창문에 쇠덧문이 달린 벽돌집들, 벽돌 빛깔도 그렇고 쇠덧문의 녹슨 빛깔도 그렇고 우중충한 길 하며 암울한 것, 음산한 분위기다. 겨우 마차 정도는 드나들 수 있는 길폭인데 송장환이 약도를 그려준 대로 길상이 찾아간 집은 이웃과 비슷한, 눈에 별로 띄지 않는 건물이었다. '아무래도 조선 사람이 사는 집 같진 않아.' 주변을 둘러본다. 이층집도 군데군데 있어서 마치 벽돌더미의 계곡으로 들어선 것 같다. 육중하고 어둠침침한 중국인 주택가의 독특한 느낌, 그러나 집들은 비교적 깨끗했고 지나가는 행인도 드물었으며 중류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곳인 듯하다. 잿빛 지붕의 골이진 기왓장에는 으스름 저녁빛이 묻어오고 있었다. "누굴 찾아오셨어요?" 맑은 여자의 음성이다. "아 네, 여기...." 하다가 조선 말씨와는 달리 상대가 중국 여자인 데 당황한다. 북청색 다브잔스를 입은 미끈한 체격이다. 귀엔 은귀고리가 흔들리고, 장을 보아오는지 꾸러미와 한 묶음의 꽃을 들고 있었다. "송선생님을 찾아오셨어요?" "네. 그렇습니다만,"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자는 문틈에 매달린 줄을 잡아당긴다. 이윽고 앞머리를 자른 중국 소녀가 문을 열어준다. 여자는 소녀에게 나직한 중국말로 뭐라 얘기한다. 소녀는 빠르게 외치듯 높은 목청으로 대답했으며 돌아본 여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네." 외부에서 보기보단 집 내부는 아늑하고 깨끗했으며 상당한 취미인이 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지금 송선생님, 기다리고 계시지요." 안내해가면서 여자는 말했다. 뽀오얀 목덜미에 보송보송 잔털이 청결하게 느껴지는데도 육감적이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송장환은 의자에서 급히 일어섰다. 그 역시 다브잔스 차림이다. "고맙소, 수냥." 송장환은 여자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 "별말씀을..." 불빛 아래 은귀고리가 반짝거렸다. "잘 오셨소, 김형." 비로소 송장환은 길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해 사이 송장환은 아주 노숙해진 것 같다. "참, 소개를 해야겠군요. 이분은 이 댁의 수냥입니다. 우리하곤 절친한 친구지요. 여기는 이미 수냥에게 말씀드린 일이 있는 김길상씨, 인사하시오." "처음 뵙겠어요.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자 얼굴에는 묘하게, 의미심장한 표정이 지나간다. 어쩌면 그는 길상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네. 폐를 끼치게 되는군요." 시종 길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럼 전..." 하고 여자는 나간다. "중국 여자가 어찌 저리 조선 말을 잘하지요?" "오히려 중국 말이 서툰 편 아닐까요?" "그럼 조선 여잔가 보군. 송선생도 그 옷 입으니까 조선 사람으론 보이지 않소." "수냥은 틀림없는 중국 여자요." "미인인 데다가 교육도 받은 것 같은데?" "아무렴. 김형 부인만 할려구요." "송선생도 꽤 응큼해졌소." "오핸 마시오. 이미 졸업한 사람을 보구, 앉기나 하시오." "입학도 않구서 졸업이오?" 송장환과 마주앉으며 길상은 궐련을 꺼내어 붙여문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난 원체 여복이 없는 사람이라," 틀림없는 중국 여자, 수냥이라 부르는 여자, 그러나 수냥은 중국 여자는 아니다. 연추에서 선생을 하던 심금녀다. 길상과 송장환은 심금녀를 모르지만 옛날에 심금녀를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알아보기 힘들지 모른다. 어찌하여 그 여자는 중국 여자가 되었으며 이집에 와서 살고 있는가. "하여간 오래간만이오." 담뱃재를 털며 길상은 새삼스럽게, 우울하게 말했다.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마나 하구..." "아까 찾아간 그 약재상 굉장하든데요?" "이곳에선 거상으로 손꼽히지요. 그리고 조선 사람인 것을 대개는 모르구요. 사실 귀화한 지도 오래됐지만," "그래 송선생은 선생질도 그만두고 독립운동도 그만두고 약재상서기로 눌러앉을 작정이시오?" "하하핫...핫..." 대답없이 웃기만 한다. "권선생님 거기 가셨지요?" "네, 오셨더군요?" "아까는 실례가 많았소. 남의 고공살이니까 할 수 없이..." "남의 고공살이치곤 하숙방이 아주 훌륭하오." "이건 객실이구 내 방은 따로 있지요." 한 폭 신선도에 길상의 눈이 간다. 격조 높은 그림이며 연대도 오래된 것 같다. 그림 한 폭 이왼 장식이라곤 없고 의자와 탁자 그 밖의 몇 가지 비품은 품위있고 정교한 제품이다. 방안은 살풍경한 편이었다. 그림을 보고 있는 길상의 옆모습을 눈여겨본 송장환이 묻는다. "어째 안색이 좋잖은데 건강은 어떠시오?" "건강요? 좋을 리 없지요. 그 왜 곳간에 돈이 쌓이면 사가 생긴다지 않소?" 자조의 웃음을 흘린다. 송장환은 우물쭈물하다가 "인사가 늦었소만 아이들은 잘 크겠지요? 부인께서도 안녕하시구." "매우. 순풍에 돛 단 듯 잘 되어가는 것 같소." 송장환은 언짢아하는 듯 입맛을 다신다. 뒤틀리어가는 길상에게서 그는 형 영환을 연상한다. 하다가 당황한다. "두메, 그 아이는 학교 잘다니고 있는지 모르겠소?" "어째 남의 소식만 물으시오." "그쪽 소식이야 물으나마나 아니겠소? 뻔하지요." "형님께서는 그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하셨소." 송장환은 밖은 어두워져, 방안 전등이 뎅그랗게 비치는 창문을 바라본다. "할 수 없지요. 자업자득,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깨닫지 못한다면 그만이지요." 내뱉는다. 서로 맨정신으론 이야기가 겉돌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소녀는 꽃병을 들고 수냥은 술안주를 차려왔다. 꽃병을 내려놓는다. 꽃병을 창문 가까운 곳에 놓은 소녀는 다람쥐처럼 달아난다. "애가 조선 말을 못해서요." 수냥은 변명 비슷하게 말하며 탁자 위에 접시를 하나씩 내려놓는다. "고맙소. 굉장합니다. 워낙이 수냥 솜씨가 좋으니까." 외국 여자라서 그랬는지 송장환은 친구 대하듯 한다. 이제 보니까 송선생님 아첨도 잘하시네요." "이거 참, 하하하핫... 아무튼 중국 사람들, 남의 말 안 믿는 것이 탈이거든."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수냥은 웃는다. "그는 그렇고 수냥. 저녁은 천천히 가져오십시오. 술은 꼬마 시켜서 들여보내주시고요." "알았어요. 그럼 편히 드십시오." 길상에게 약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아까처럼 나간다. "이건 하숙인이 아니라 바로 주인 아니오?" 길상은 탁자 위에 놓인 술병과 안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미리 부탁을 했지요. 김형하고 실컷 마셔보려고..." 송장환은 길상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길상이 술병을 받아 송장환 술잔에 술을 붓는다. "김형! 이렇게 만나서 반갑소." 술잔을 든다. 묵묵히 몇 잔을 거듭한 뒤 "불쌍한 늙은이, 고집불통 같으니라구." 하며 길상은 중얼거렸다. "불쌍하긴, 그분 나름대로 소신껏 살다가 돌아가실 때가 되어 돌아가셨는데 노소간에 그런 끝장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 몇이나 되겠소. 나라 잃은 백성 아니오." "미구에 또 한 사람 죽을 사람이 있지요. 나라 잃은 백성이." "무슨 소리요?" "월선옥의 그 아주머니가 죽게 생겼어요. 금년 넘기기 어렵다는데 혹 모르지요. 명년까지 갈란가..." "무슨 병인데?" "암이라는 게요. 병원에서 그렇게 진단이 내렸소." 놀란다. 그러다가 "술맛 떨어지는 얘긴 그만둡시다." 송장환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명년이면 그리운 고향산천을 밟게 생겼는데 말이오. 하긴 월선옥 아주머니 처지론 김훈장과는 달라서 가고 싶은 고향도 아니겠지만..." 길상의 찌푸려진 양미간을 슬며시 쳐다보다가 송장환은 아까처럼 창문을 바라본다. 빈집처럼 집안은 조용하다. 밖에선 바람이 일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래 김훈장의 유품이란 뭐지요?" "유품이래야 별 것 있겠소?" "아드님한테 쓴 유서 한 통하구, 그 동안의 기록인 듯싶은 글이 꽤 많더구먼요." "그런 걸 쓰시다니, 그 노인네 청사에 이름은 남기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무료한 시간에 해보신 장난이겠지요." "고생하다 돌아가신 노인은 노인이고, 자아 술잔 받으시오. 그리고 그간 쌓인 얘기나 들려주슈." "글쎄, 쌓인 얘기보다... 그럼 김형도 물론 떠나시겠군요." "내가요?" "아니란 말씀이오?" 길상은 허허헛 하고 웃는다. 맥없이 웃는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송선생." "그, 그걸 제가 어떻게... " "능청스럽기는," "허어 참, 아까는 응큼스럽다 하더니 이제 능청스럽다구요?" "술수가 늘어서 다행이오." "마음으로야 골백번이라도 남으시오! 남아야 합니다 하고 싶지요. 이곳에서 뛰는 사람 가족 생각하게 생겼소?" "권선생께서 날 잡으라는 말씀은 안 하시던가요?" 그 말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기색도 나타내지 않는다. "가문이 내게 무슨 상관이겠소. 최씨 가문의 재건, 하인이었을 시절에는 그래도 쥐꼬리만한 의미는 있었겠지만," 길상은 연거푸 술잔을 기울인다. "흥! 내가 가문에 장가든 것도 아니겠고..." "용렬하긴. 김형!" "말씀하시오. 부르지만 말구," "김형답지도 않소." "별 수 없는 놈이지요. 본시부터," "핑계요. 핑계. 나 저래서 장가 못 간다니까." 길상의 처지, 길상의 마음을 잘 알면서 짐짓 농담으로 돌려버린다. "김, 길, 상, 하하하핫... 이름 한번 좋소. 길서상회? 길할 길에, 서역 서, 길상서희상회로 왜 안 했는지 모르겠구먼. 그놈의 한 짝씩만 갖다붙여 놨으니 이꼴인가 보오. 서로 손 한 개씩만 잡고서 한 손은 제각기 반대로 향해 필사란 말이요. 하하핫..." "와락 끌어당겨 나머지 손도 잡으시구려. 하하핫..." 소녀가 술을 가져왔다. 송장환은 소녀에게도 중국 말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바람이 부는군.' 창밖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북국 특유의 샛바람 소리다. 머지않아 겨울이 온다. 어둡고 침침한 겨울이. 얼음무덤 같은 벌판에 유랑민들은 망령같이 헤맬 것이다. 강이란 강은 모두 육로가 되어 비적들의 말굽이 소란할 것이며 운수업, 산판에 활기가 넘칠 것이다. 그 긴 겨울, 독립군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짐승 가죽의 신발을 신고 구레나룻이 무성하더라는 강포수, 고향을 물으니까 화를 내더란 늙은 포수가 송장환을 찾아와서 학자금을 맡기고 그러고 나서 돌아간 그는 오발사고로 죽었다. 강포수, 강두메... 강포수, 귀녀, 강두메?' 길상의 생각은 여기서 멎었다. "송선생은 언제까지 여기 계실 작정이오." "당분간, 그 당분간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오만 어딘가 또 옮겨지게 되겠지요." 상당히 많은 술을 마셨는데 두 사람은 다같이 취하질 못한다. 얘기를 겉돌리고 있을 뿐 정작 중요한 것엔 피차 시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김훈장의 유품 전달이 주목적이 아님은 뻔한 일, "앞으로 고난은 중첩이오. 그런만큼 일하는 보람은 있겠짐나요." "..." "식자들간에 정세를 낙관하여 김칫국부터 마시는 사람이 있고 지나치게 비관하여 이젠 독립이고 머고 다 글렀다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비관도 낙관도 할 수 없어요." "같은 상황인데 왜 그렇게 견해 차이가 나지요?" "김칫국부터 마시는 사람의 시국관은 그러니까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면 국제적으로 일본이 되게 몰릴 것이며 영국과의 관계도 지난날과는 달라서 공수동맹은 한갓 휴지가 될 것이요, 일본을 이용하여 로셔의 남진을 막았던 그때 사정과는 판이한 만큼 일본 자체가 열강의 강적으로 등장했으니 결국 사면초가," "그러면 조선은 독립할 수 있다, 그 얘긴가요?" "일본이 고립하게 되면 독립의 기운도 짙어진다, 그 얘기겠지요." "중국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주고 조선을 독립시켜주고... 흠, 꿀같이 달콤한 공상이오. 오나가나 그놈의 세계대전 얘기뿐이긴 하나, 그래 비관하는 사람들은 어떤 견핸가요." "바로 그거요. 오나가나 세계대전 얘기, 독립을 절실히 바라면서 실천력이 약한 사람들의 희망이지요. 더 과하게 말하자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일 게구. 나는 비관적인 편에 동의를 하지요. 아무튼 이기든 지든 구라파는 황폐했고 또 당분간은 전쟁을 바라지 않을 것이며 만주와 밀접한 이해 관계가 있는 로셔의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전쟁의 주동국인만큼 전쟁이 가져온 피폐를 단시일 내에 복구 할 수 없을 거 아니겠소. 외부에 힘을 돌리기는커녕 눈을 돌릴 겨를도 없을 거요. 그 틈바구니를 이용 안 할 일본인가요. 국제 여론이 아무리 와글와글해도 먹어버리면 고만이오. 그렇게 되면 우린 바로 우리말입니다. 만주의 우리 독립군 거점은 완전히 와해돼버리는 거지요. 말살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연해주와 중국 본토는 개별적으로 놀아야 합니다." 길상은 담배를 붙여문다. 뿜어내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송장환 이야기에 유념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시선이 한 폭 그림 쪽으로 간다.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바로 그런 상태에 대한 대비를 하는 일이오. 말하자면 그런 상태 하에서 투쟁할 수 있는 기틀과 방법의 훈련이오. 두만강 얼음판을 넘나들며 국경 수비병이나 집적이는 데 불과한 그런 따위의 일 아무 소용도 없거니와 일본이 만주를 먹어 버린 후에는 가능하지도 못한 일이오. 오지대에서 군대를 조련하여 기회가 오면은 일군과 일전을 불사한다, 그건 망상이오. 도시 우스운 일 아닙니까? 그러나 그네들은 그네들대로 땅 위에 있게 하구 이쪽은 이쪽대로 두더지처럼 땅속을 파가면서 일을 하면 되는 거니까 도리어 그네들, 쟁쟁한 명성의 독립투사들과 그들이 거느린 수병은 그대로 들먹들먹해주는 편이 좋지요. 그 양반들이 알면은 천장이 낮다고 뛰겠지만 우리로서는 일종의 엄폐역할로 이용이 되는 것 아니겠소?" 송장환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님을 길상은 안다. 옛날에 비하여 매우 정리가 된 얘기였으나 술이 들어가면 늘어놓는 그의 장광설의 잔재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서 안 될 얘기를 흘릴 위인이 아닌 것도 길상은 안다. 단순한 시국 얘기가 아닌 것도 길상은 안다. 단순한 시국 얘기가 아닌 어떤 목적 의식을 갖고 하는 말이라는 것도 그것을 예상하고 길상은 이곳까지 오지 않았던가.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길상은 담배를 눌러끄며 말했다. "네, 그러지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 그러니까 그것을 일종의 변법이라고나 표현할까요? 정규적인 군사 훈련이라든가 몇몇 명성있는 사람이 뛰어다니면서 쥐꼬리만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든가 국제 여론에 호소한다든가, 극단적으로 말해서 의병 봉기의 연장으로밖에 볼 수 없는, 물론 만주 땅의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도자들 거의가 의병 출신인 것도 사실이고 그런 종래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하다가 송장환은 그 얘기를 끝내지 않은 채 훌쩍 딴 곳으로 넘어 간다. "우리가 지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멀지 않은 앞날 통화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로 옮겨진 후 군사학을 포함한 중학 정도의 교과를 가르치며 교명도 신흥중학교로 개칭하였음)가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 왕청현의 중광단도 마찬가지겠지만," 목을 축이듯 술을 마시는 송장환은 본론에 들어가서도 아직 핵심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니까 산산조각이 날 것이 뻔한데 한마디로 말해 그럴 바엔 우리가 쪼개버려야 한다 그겁니다." "쪼개다니요?" 길상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깨버려야 해요." "그건 또 어째서요?" "아까 내가 일종의 변법이라 하지 않았소? 덩어릴 되도록 이면 잘게 부셔서 여기저기 뿌려놓는다 그거지요." "뿌려놔서 어떻게요? 어떻게 활용한다는 거지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은 많아야 칠팔 명, 대개 오륙 명이 한조가 됩니다. 그 한 조가 신흥무관학교 하나 혹은 독립군의 한 소대, 연대, 사단도 될 수 있지요. 그 한조가 열 개의 스물, 서른, 백, 천, 그물 고리처럼 엮어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어느 조도 자신들의 조가 그물 고리처럼 엮여 있는 걸 모르지요. 서로 독립되어 전혀 직접으론 연관을 갖지 않기 때문이오. 처음 출발에 있어선 몇 개의 조가 만들어질는지 예상할 수 없고 또 나로선 몰라야 합니다. 가르치는 교과, 교과라기보다 훈련이겠지요만, 그것도 일률적인 것은 아니지요. 소요에 따라 훈련의 성질이 달라질 수 있는, 말하자면 다양한 것이 되겠지요." "왜 그리 복잡하지요?" "아마 내 설명이 복잡했던 모양이오." "그러면 신흥학교, 중광단과는 의논이 됐소?" "아니지요. 의논할 성질이 아니지요." "의논도 없이 될 법이나 한 일이오?" "내 설명이 두서가 없어 그렇소. 보충하지요. 그쪽 사람들과 합의를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설령합의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게 되어버리지요. 합의란 결국 들내놓은 일 아니겠소. 애초부터 그쪽 인원을 믿고 그쪽 인원으로 기간을 삼자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신흥 학교나 중광단뿐만 아니라 대소 어느 독립단체이든 마찬가지겠으나 그들 모두를 서로 모르게 흡수한다는 것은 이상이지요. 그 것은 이상입니다. 크게, 먼곳을 내다보는 견지에선 그보다 튼튼한 보신과 존속하여 투쟁하는 방법이란 달리 없어요. 하나 당장에야 좁게 생각하면은 그것은 틀림없는 배신이요 파괴 공작이지요. 정도도 아니구요. 아무튼 그러니까 시작에 있어선 이쪽에서 확보한 인원으로," "한데 송선생 말씀에는 약간의 모순이 있소." "네?" " 모순이 있단 말이요. 아까 그네들은 지상에서 들먹들먹해주는 편이 엄폐 역할을 해주는 폭이란 말씀을 했었소. 또 산산조각을 내어 여러 곳에 흐트려야 한다고도 했었지요? 그런가 하면 쪼개는 데 있어서 그들과의 합의 없인 가능치 못할 일을, 합의하여 이루어지는 일이란 의미가 없다... 나로선 납득이 가질 않소." 송장환은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나서 술을 먹는다. "역시 설명 부족이오. 마음이 조급하다보니, 그러니까 엄밀히 말한다면 깨뜨려야 할 것은 신흥학교 그것을 두고 한 말이오. 쓸만한 사람 쓸만한 학생을 쥐도 새도 모르게 훔쳐내야 하는 거지요. 군관 학교에서 정규적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을 활용하자 그것이겠고 나이들이 젊어야 한다는 점도 있지요. 그러나 그런 도둑질 하기엔 좀 시일이 필요할 게요." 설명은 엉성하였으나 길상은 다시 뭐라곤 하지 않는다. 송장환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을 때 이미 길상은 자신의 지적이 피상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권필응은 그런 일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권필응은 길상이 자기들 대열에 깊숙이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강가 횟집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오랫동안 훈장질한 사람의 말이, 지독하게도 설득력이 없구먼." 송장환의 얼굴이 환해진다. 느슨해진 길상을 느낀 것이다. "마음이 조급해서 그렇지요. 하하핫... 자아 술, 술 듭시다." "네, 들지요." 두 사람은 함께 술잔을 든다. "간단 명료하게 말해서 너도 나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귀신 같은 손이 홍시 속을 속 빼내고 홍시 겁데기는 놔둔 채, 그 홍시 속을 또 아무도 모르게 봉지마다 갈라서 또 모르게 여기저기 숨겨두고 일조 이조 그런 식으로 형성하는 거구, 물론 홍시 속말고도 여기저기서 훔쳐오기도 하고 꼬셔오기도 하고 오고 싶은 사람 골라내어 데려오기도 하겠으나 그 아무도 모르고 보이지도 않는 한 조, 한 조, 제각기 제나름의 구실을 한다 그거겠고 그 한 조 한 조의 움직임은 아무도 모르는 새 전체의 큰 대열이 된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거지요. 나는 김형만 믿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지요." "나보다는 권선생님께서 더 믿으시는 모양이던데요?" "공부 잘했다구 사탕 하나 주시는 거요." "하하핫... 자아, 자 술," "군사활동과는 직접 관련이 없겠구먼." "관련이 없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고요. 개미가 뚝을 무너뜨리는 일, 벌들이 이곳저곳을 쑤셔대는 일, 그것도 쌈이라면 싸움이니까, 무기도 대포나 기관총 아닌 성냥 한곽, 단도 한 자루, 심지어는 혓바닥 세치까지 무기로 쓰면 무기가 되는 거요." "혓바닥 세 치로 목줄기를 물어뜯습니까?" "허허허, 왜 이러시오?" 송장환은 비로소 취기가 도는지 빙글빙글 웃기 시작한다. "그 왜 있지 않소. 몇 해 전에 용정선 산으로 도망가구 왜인들은 짐을 싸가지고 회령으로 달아나고," 길상도 킬킬대며 웃는다. 비적이 습격한다는 유언비어가 빚었던 그때 그 희비극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 가난한 동포들 골탕먹는 생각은 못하구요?" "머릴 짜면은 별의별 방법이 다 생기겠지요." 이날 밤 길상은 송장환과 함께 잤다. 새벽녘까지 밖에선 바람이 불었다. 길상은 뭐가 뭔지 모를 착잡한 심정의 밤을 보냈다. 하얼빈을 찾아오려고 했을 때의 심정, 그 심정의 변화는 없었다. 고통이나 갈등도 없었다. 막연한 공백 같은 것, 그 공백의 의식이 바람 소릴 듣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그 공백에 월선이 죽을 것이라는, 김두수가 회령에서 순사부장을 하고 있다는, 혜관스님이 관수의 백정 장인으로부터 혼이 났었다는, 아주 오래된 그런 따위의 일들, 자기 자신의 거취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일들이 떠올랐다간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어째 일어나셨소, 더 주무시질 않고." 길상이 일어나 부시럭거리는 기척에 송장환도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일찌감치 가지요." "아직 날이 새지 않았소." "그럭저럭 나가면은 날이 밝을 게요. 일찌감치 서둘러야 구경도 할 것 아니오. 여관은 잡아놨고 늦더라도 어젯저녁에 돌아가는 건데," 길상은 허리의 혁대를 조른다. "조반이야 어디서 드나 마찬가지 아니오. 자아, 자 앉으시오. 앉으라니까." 송장환은 기를 쓰고 말린다. 길상은 송장환의 손을 밀어낸다. "술 안 취한 맨정신으로 또 무슨 말씀 하시려구요?" "네. 깨고 보니 할말은 한마디도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좀 포악하게 구시오." "네." 길상은 양복 저고릴 입는다. "내가 의병인가 뭔가... 산으로 들어갔었던 일 아시지요?" "압니다." "그런 행적이 있는데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최참판댁 가문을 다시 세우는 데 방해물이 되지 않겠소?" "네?" "하하핫... 그런 이유 땜에 안 돌아간다는 얘기는 아니외다. 하하핫..." 결국 송장환에게 주는 확답인 셈이다. 길상의 말은 타성이었는지도 모르고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한 못질이었는지도 모른다. "환영이오! 대환영이오. 김형! 나, 나는 어렵게 생각했소. 어려운 일이라구요. 자신이 없었거든." 송장환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고 길상이 나가는 것을 한 번쯤 더 말려야 하는 여유를 잃을 만큼 들떠 있었다. 문간에서 길상은 돌아보았다. "송선생." "네. 말씀하시오." "부탁이 하나 있소. 수냥이라던 그 여자한테 좀 알아봐달라구요." "뭔데요." "미국인 목사의 집, 나 그럼 가겠소." 무성의한 부탁이었다. 그 말뿐이었다. 미국인 목사의 집. 그나저나 송장환은 기분이 좋다. 새벽 공기는 상쾌하게 심장에 스며들었다. "제에기! 미국인 목사의 집! 무슨 놈의," 하며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손님 가셨어요?" 검정 다브잔스를 입고 단정하게 머릴 빗어넘긴 수냥이 물었다. "네. 갔습니다. 그놈의 친구," "아침 준빌 다 해놨는데," "또 올 겁니다. 참 미국인 목사의 집! 그 친구가 알아봐달라구요." "어머. 뭐가 그리 기분 좋으시죠?" "네. 기분 좋습니다. 날씨도 좋을 것 같군요. 바람도 자구요." 수냥은 웃으며 제 방쪽을 향해 가는 송장환 뒷모습을 바라본다. "아 참, 수냥! 수냥!" "나 여기 있어요." "그 친구 부탁, 알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알아봐드리지요." 길상이 미국인 목사집을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의 일이었다. 과연 그 집에 옥이네가 있을지 그것은 의문이었으나 숲에 싸인 빨간 벽돌집 지붕은 푸른 기와였다. 그 건물 옆에 납작한 창고 같은 부속 건물이 있었다. 창고는 아니었고 사람이 거처하는 곳인 듯, 노인과 중국옷 입은 계집아이가 뜰에 나와 있었다. "여보시오." 노인보다 소녀가 재빨리 돌아본다. "앙이! 뉘기요? 아지방이 앙입매!" 옥이였다. "옥아." "아지방이!" 옥이 달려와서 두 손을 맞잡는다. "많이 컸구나. 언제 이리 컸니?" "아지방이 어찌 알고서리 찾아왔습매?" "응," 그러자 노인이 중국 말로 누구냐고 묻는다. 옥이는 자랑스럽게 발음이 좋은 중국 말씨로 아저씨라고 대답한다. 길상은 엉거주춤 노인에게 허릴 구부린다. 노인은 고갤 끄덕이고 신사양반이라 하며 중얼거린다. "아지방일 보구 신사라 하잲음? 양복으 입으서이까 그러지비." 우쭐해진 옥이는 노인에게 곁눈질을 한다. 간데없는 중국 계집아이다. "아지방이 이 할바이 교회지기답매." "음. 어망이는 어디 있니?" "어망이?" 길상의 손을 잡은 옥이의 두 손이 긴장을 나타낸다. "저리로 가기요." 어감이 싹 달라졌다. 얼마를 가다가 옥이는 길상의 손을 놓고 뛰어간다. "어망이! 어망이!" 길상은 옥이 가는 곳을 향해 따라간다. 큰 건물 속에서 행주치마를 두른 옥이네가 나온다. 길상을 보는 순간 나무막대기처럼 우뚝 서 버린다. 옥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홱 돌아서며 엉뚱스럽게 노랠 흥얼거린다. '옥인 이제 철이 들었구나.' 길상은 씁쓸하게 웃는다. "어찌 오싰습매까?" 물으면서 옥이네는 행주치마에 손을 닦는다. "여기 올 일 있어서 왔다가..." "괜스런 짓을 하십매다." "좀 나갈 수 없소?" "목사님 부배가 다 안 계십매다. 집이 비어서 그냥 돌아가시옵께나." "잠깐만. 교회지기도 저기 있고 잠시 못 나올 건 없지 않소?" 갑자기 험악해지는 길상의 눈에 질렸던지 "그럼 잠깐만 저기 길에서리 기다리주잲겠슴둥?" "그러지." 옥이네는 총총히 집안으로 사라진다. "옥아." "옛꼬망." "엄마랑 같이 나가자." "싫습매다." "어째서?" "집 보아얍지." "교회지기가 있는데두?" "앙이랍매. 나는 집 보아야 한다이." 하다가 뒤꼍으로 돌아가는 강아지를 향해 "존! 존!" 갑자기 몸을 날리며 달아난다. "옥아! 옥아!" 그러나 옥이는 뒤꼍으로 사라졌고 존 존 하며 부르는 소리만 슬픈 가락같이 들려온다. '철이 들었구나.' 옥이네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는 아무말 없이 종종걸음으로 나갔고 길상은 뚜벅뚜벅 뒤를 따른다. 한참을 종종걸음으로 걷던 옥이네는 길거리에서 돌아섰다. 성이 난 얼굴이다. "어찌 오싰습매까?" "아까 말했잖았소." "볼일이 있어 오신 거느 압매다. 여긴 뭣하러 오십매까?" "만나러 왔지. 뭣하러 오긴," "사람으 체면도 있잲잉요? 만내서리 어쩌겠다느 겁매까?" "..." "옥이도 이젠 철들었습매다." "알고 있소." 한참을 내려와서, 길가 청요리집으로 길상은 떠밀다시피 옥이네를 밀어젖힌다. 내내 화를 내고 있던 옥이네는 겁먹은 눈으로 길상을 힐끔 쳐다보았다. 자그마한 방에 딱딱한 의자에 마주보고 앉은 후에도 옥이네는 겁먹은 눈으로 길상을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눈을 내리깐다. '뭣하러 이 여잘 만나러 왔을까.' 여자의 오목한 턱을 바라본다. 옥색 솜저고리를 입고 있다. 겹저고리로 보일 만큼 차분하고 동정 끝이 꼭 맞는 저고리다. 길상은 주문 받으러 온 소년에게 요리 몇 접시와 소량의 술을 주문한다. "저 어서 가야 합매다."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길상은 궐련을 붙여물고 연기를 뿜어내며 '뭣하러 이 여잘 만나러 왔을까?' "우린 만나면 앙이 되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옥이엄마." "옛꼬망." "여기 내가 찾아온 것, 지난날의 일들, 용서해주시오." "... " "내가 잘못했소." 옥이네한테 사과하는 길상의 의식 속에는 봉순이를 포함한 모든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참회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말씀으, 무시레 합네까. 회령에서 일으... 도아주세서 고맙게 생각으 하고 있습매다. 잘못한 거 없소꼬망." "아무 일 없이 내가 도와준 거요?" 옥이네는 고개를 들고 길상을 바라본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잘못한 일이라고? 그런 식으로 후회하기냐? 비로소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없었던 일로 생각하기요." 눈물을 닦아내며 매몰차게 말한다. "어디세, 무시기 자겍 있다아고, 생각으 하겠습매까. 그런 일 있었다는 것 발설 앙이 할 터이이까 걱정으 마옵소. 우세 앙이 시킬 것이니." 흐느낀다. "내가 임자보구 말을 잘못 한 것 같소." 우는 여자를 멍하니 쳐다본다. 여자는 왜 우는가. 예수를 믿고 옥이 자라는 것을 낙으로 삼겠다던 여자가 울기는 왜 우는가. 잘못했으며 용서해달라고 했다. 게다가 아무 일 없이 내가 도와주었느냐고도 했다. 길상의 진실이 여자에게는 아픔이다. 길상은 반쯤 몸을 일으켜 탁자 건너, 눈물을 닦는 여자의 손을 와락 낚아챈다. 잡힌 손을 뽑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길상은 두 손으로 꼭 눌러 잡으며 "내가 나쁜 놈이야. 자격이 없기론 내 편이지." 그리고 손을 놓아준다. "용서해주옵소! 가, 가겠습매다!" 여자는 방에서 달려나간다. 어떻게나 날쌔든지 일순간만 같다. 길상은 탁자 위에 두 주먹을 얹은 채 멍해 있다가 허허헛 하고 웃는다. "미친놈." 길상은 일주일을 머물다가 옥이 털외투 한 벌을 사가지고 수냥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하얼빈을 떠났다. 6장 최종 보고 '제에기랄! 이놈의 곳을 그만 훌훌 털고,' 저녁 무렵, 퇴근 때가 가까워지면은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김두수였다. 요즘에 와선 그런 심화가 부쩍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털고 일어서려면 언제든 그럴 수 있었고 애초부터 김두수에게 이 자리는 잠정적인 것,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거리에만 나가면 득의에 찬 얼굴, 존대해지는 걸음걸이. 도시 세상이 우습게 여겨지는 것은 이 년 전 회령 경찰서에 왔을 당시와 다를것이 없었다. 제왕이라도 된 듯 조맨한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휘둘러보며 가죽 장화가 지신지신 땅을 밟는 소리, 아비를 닮아서인지 사십이 못 되었는데 살이 붙기 시작하여 배가 나온 것은 물론 바지가 찢어질 만큼 엉덩이의 살도 무겁게 보였다. 그 엉덩이 쪽을 왔다갔다하는 것이 가죽집 속에 넣어서 허리에 찬 권총이다. '흠, 조선놈의 새끼치고 순사부장이 어디야? 네깐놈들 꿈이나 꾸어봐?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갔음 갔지.' 김두수가 특히 의기양양해지는 것은 거리에서 일본인 순사를 만났을 때다. 구두 소리가 탕! 날 만큼 뒷굽을 모으며 경례를 붙일 때 김두수는 에에헴 하고 잔기침을 한다. 아이들은 달아나고 가난한 백성들은 슬금슬금 피하고 장사꾼들은 두 손을 비비며 헤헤 하고 웃거나 절을 하게 마련이다. 왜기생들은 추파를 보내었고 관공리들의 아내나 딸들은 "고꾸로우사마(수고하십니다)." 깍듯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만 하면 나도...' 그럴 때면 그의 뇌리 속에 동생 한복의 모습이 스쳐가곤 했다. 추위에 먹빛이 되었던 얼굴, 꽁꽁 얼어서 게다리같이 꾸부정했던 손. '지는 지, 나는 나야. 너는 착하게 살아라. 천대받고 살아라! 흥.' 햇빛조차 인색한 비탈진 북편의 음지, 그곳에 만들어진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기도 했다. '살인 죄인의 아들이라? 흐흐흣... 아버지, 나는 말입니다, 살인을 해도 좋은 허가장 받은 놈이오. 참 세상 우습지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그 고장에 간다면? 비오는 날 개새끼처럼 쫓겨났던 그 마을에. '아버지, 모두 내 앞에선 뻔하지요. 두 손을 마주잡고, 네, 반한 여자를 보듯이 웃습니다, 부장님, 부장님, 부장님, 흐흐흣... 육모 방망이를 든 어사또,' 그러나 김두수는 사무치는 그 옛날 일에다 자신의 생애를 거는 그럴 위인이 아니었고 호기를 부리되, 획 부리는 것만으로 만족해 하는 사내도 아니었다. 보다는 현실적, 계산속이 빠른 사내다. 경찰관의 제복을 입은 후 몇 달이 못 되어 그는 자유로운 활동을 원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그 동안 몸에 붙은 습벽, 한곳에 죽치고 앉아 있질 못하는 그 습벽 탓일 게고 둘째는 예금통장의 금액이 뭉청뭉청 올라가지 않는 일, 다음이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금녀 때문이다. 김두수가 회령 경찰서에 자릴 잡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금녀가 얽혀든 박재연의 피습사건, 그것에는 또 해를 거슬러올라가야 하는 인과관계가 있었으나, 어쨌든 박재연을 피습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두수 자신이 연해주나 그 근방에 발 붙이기 매우 곤란하여 위험하다는 상황과 금녀를 잃었다는 단순한 결과에 그치지 않고 금녀로 인하여 김두수 윤이병의 정체가 드러난 결과는 더욱더 금녀는 물론 그 주변에 근접할 수 없는 사정을 야기시킨 것이다. 결국 일하기 어렵게 되었고 동시에 금녀를 뺏아오기도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당분간 안전지대에서 침잠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순사부장이라는 자리가 그리 대단할 것은 없으나 정규적인 교육을 받은 바 없고 떠돌이 같은, 근본이 희미한 그에게, 더군다나 조선인에게 그런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그의 말마따나 조선놈의 새끼치곤 순사부장이 어디야? 꿈이나 꾸어봐? 였을 것이 틀림없긴 없다. 과거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 유능한 밀정, 밀정이기보다 소질이 풍부한 첩보원으로 인정되어온 것도 그러려니와 흑룡강 일대를 답사하여 제출한 보고서가 그의 앞으로의 지위를 굳혔다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쓰다 버릴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면밀하고 요령이 있었으며 아주 긴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김두수, 중국 말에도 통하였고 게다가 조선인, 영사관이나 헌병대나 혹은 경찰서에서 그런 인물을 확보해두고 싶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해서 당분간 침잠의 필요성이 있다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령에다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제에기랄! 이놈의 곳을 그만, 하며 퇴근 때가 가까운 한가한 시간에는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것도 실상 벗으려면 언제든지 벗을 수 있는 처지면서 그 시기를 가늠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초조함에서 나온 말이긴 했다. '금녀를 하얼빈에서 보았다구?' 책상에 턱을 괴고서 김두수는 중얼거린다. 달포 전에 포염의 양서방이 물어다준 정보다. '금녀를 하얼빈에서 보아?' 턱을 괴었던 손을 풀고 김두수는 입맛을 쩍쩍 다신다. "그런데 말요, 그게 금년지 아닌지 확실치는 않소." "뭐요?" "차림새가 간데 없는 되년이더란 말이오." "되년?" "영락없어요. 시장에서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있는 꼴이..." "그럼?" "한데, 얼굴 역시 영락없는 그 여자라." "하기야 닮은 사람도 세상엔 얼마든지 있지." "글쎄... 그렇게 되년으로 변장하구서 윤가 그자하고 숨어사는 건 아닌지?" "윤가? 으하하핫... 으하핫... 윤가라? 그놈하고 살림 차렸을까? 그야 모르지, 귀신이라면 똑똑히 알겠는데 말이야. 으하핫핫," 양서방의 얼굴빛이 변했다. 윤이병의 죽음을 확실하게 감지한 것이다. "그놈하고 살든 안 살든 그년이 거기 정말 하얼빈에 있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야." 김두수는 양서방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연상인 자기에게 반말지거리를 하는 김두수에 대해 늘 불쾌해했던 양서방은 그럴 겨를도 없을 만큼 공포를 느낀다. "내 말 잘들어. 포염에 돌아가거든 연추에 금녀가 있는지 없는지 그걸 알아내야 해. 확실한 거를, 그리고 나한테 보고하는 게야." 그러겠노라 하고 떠난 양서방한테선 아직 아무런 기별이 없다. '하여간에 그년의 거처만 확인된다면, 이건 의외로 큰 수확이 있을지도 모르지.' 결코 김두수는 금녀를 찾아내는 일에만 열중하는 것은 아니다. 김두수는 점박이 사내 얼굴을 생각했고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박재연을 생각했고 그 밖에 뜻하지 않은 거물이 걸려들지 모른다는, 그런 공상을 아울러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년은 죽어도 내 손에 죽을 것이요 살아도 내 손에서 살아난다!' 김두수는 이빨을 따각따각 맞부딪친다. 결심을 굳히는 시늉이기도 했지만 요즘 새로 생긴 버릇이다. 그 버릇의 내력은 어떤 계획에서 비롯된 것인데 뻐드렁 이빨을 고치는 일이다. 미관상의 이유에서보다 앞으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시기에 대비하여 인상이 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다. 봉천이나 그밖의 큰 도시에 나가서 뻐드렁니 두 개쯤 빼고, 남과 같이 되지 않더라도 튀튀하게 튀어나온 입술만은 어떻게 좀 달리 해야겠다는, 그것에 착안한 후부터 김두수는 앞니빨 부딪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문을 홱 열고 조선인 염순사가 샤벨을 철거덕거리며 들어왔다. "부장님." "왜에." 눈을 치뜨며 쳐다본다. "그 늙은이가 왔습니다." "와? 언제?" "조금 전에요." "어디 들었어?" "그 왜 늘 드는 객줏집에 들었습니다." "그래..." 앞니빨을 따각따각 부딪다가 "그러면은 어쩐다? 가서 데리고 와." "뭐라 하고 데려올까요?" "지금이 몇 시야?" 팔을 들어 시계를 본다. 다섯시 반이다. "가서 말이야," "네!" "무조건 가자구 해. 잔소릴 자꾸 하면은 내가 보잔다구." "알았습니다." 염순사가 나가버린 뒤 김두수는 의자에서 슬그머니 일어선다. 가죽장화에서 비걱비걱 소리가 난다. 방으로부터 걸어나간 그는 유치장을 한바퀴 둘러본다. 유치장은 만원이다. 두만강을 건너는 관문인고로 사건의 건수가 많았고 간도지방 일대에서 잡은 범인을 압송 해오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유치장은 항상 넘치게 마련이다. "어이구! 사람 살려! 아, 아무 잘못, 어이구우, 어구구." "고노야로우 (이놈의 새끼) 바린 말이 해라! 곤치쿠쇼 (이 짐승놈)! 말이 안 하게소까!" 취조실에서 새나오는 비명 소리, 취조관의 고함 소리다. '내가 이대로 주질러앉는다면 그까짓 서장... 경부쯤이야 문제 없겠고.' 제에기랄! 이놈의 곳을 그만, 했으되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을 밀고 들어서며 "수구 후유다나 (곧 겨울이야)." 김두수 말에 보고서를 쓰고 있던 왜순사가 "아사유우와 히에마스네 (아침저녁은 차갑다)." 맞장구친다. "도만고오가 고옷다라 우루사쿠나루조 (두만강이 얼면 귀찮아진다)." 사진 두 장을 놓고 비교해보고 있던 형사의 말이다. "시여우노 나이 야쯔라다나 (할 수 없는 새끼들이야)." 왜순사 대꾸였는데 할 수 없는 새끼들이란 독립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부죠상 (부장님)." 사진을 보고 있던 형사가 다가오며 김두수를 부른다. "나니까 (뭐야)?" "이 사진 좀 보십시오." 사진 두 장을 내민다. "아무래도 동일 인물 같지 않단 말입니다." 하나는 독사진이었고 하나는 여러 명이 찍은 사진이다. "동일 인물이야. 두 얼굴을 다 눈여겨두는 게야. 놈은 어느 한쪽의 얼굴을 하구서 나타날 테니까." 김두수는 아무렇지 않게 밀어버린다. 이윽고 염순사가 공노인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밖은 어스름하니 어두워져가고 있었으며 벌거숭이 전구가 책상들, 실내 기물에 붉은 빛을 던지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라가라 하는 게요?" 공노인은 대뜸 삿대질을 하며 고개를 흔들어 대었다. "거기 앉기나 해요." 김두수는 손가락을 아래로 가리키며 지극히 사무적이다. "오라 하는 데는 그만한 명분이 있을 터이고 가라 하는 데도 명분이 있을 터인데 그 말부터 들어야만 앉겠구먼." "명분이고 나발이고 앉으라면 앉는 거요." 소리를 바락 지르며 눈알을 디굴디굴 굴린다. 그렇다고 공노인이 기죽지는 않는다. "이런 행폴 해도 괜찮다는 법 있나? 내 입에서 육도문짜 나오기전," 하며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김두수는 태연하게 말했다. "조선 출입은 왜 그리 잦소?" "잦은 것도 법에 걸리나?" "아편장사라도 하는 게요?" "예사, 제 밑 꾸린 놈이 남의 밑도 꾸린 줄 알지." 순사도 아니요 명색이 순사부장인데, 그러나 방 보아가며 똥싸더라고 김두수의 여러 가지 약점을 잡고 있는 공노인 뱃심좋게 나간다. 김두수 입속으로 웃으며 "좀 앉아 기다려주어야겠어." 책상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순사 하나를 불러댄다. "네! 부장님." "이게, 이게 뭐야 이 보고서 다시 작성해서 내! 그따위로 어벙하게 굴지 말구 알았나!" "네!" 공노인이 또다시 삿대질을 하며 덤빌 판인데 김두수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모자걸이에 걸린 모자를 집어쓴다. "좀 나가실까요? 늙은이." 하고는 먼저 밖으로 나가버린다. 뒤따라 나가는 공노인 속으로 '그 놈의 자리가 자리값은 하는 모양이야. 저녀석이 제법 의젓해졌어? 제 버릇 개 줄까마는.' 중얼거리면서도 뒤통수에다 대고 삿대질이다. "날 건드러봐야 재미 한푼 없다! 아암 재미없구말구. 이 늙은놈이 이래뵈도." "건드리긴 누가 건드려." 앞서가며 대꾸한다. "그럼 왜 오라가라! 내가 이래뵈도 안 가본 곳 없고 안 해본 짓 없고, 긁어 부스럼이란 말 몰라서 그러는 게야? 몰라서 그러느냐구!" 갈 곳 없는 장돌뱅이 행셀 한다. "입 못 다물겠소? 할망구처럼 걸음걸이도 조신스런 늙인이가, 허참, 주책없는 척, 성미 급한 척, 하하하핫... 능구렝이 같으니라구," 공노인도 김두수가 웃는 데는 김이 샐밖에, 새삼스럽게 오 년 전 묵은 송애 일을 쳐들어 힐책하기도 맥빠지는 일, 다만 이자가 무슨 까닭으로 자길 불러왔으며 지금 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그것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용의주도한 공노인, 다시 사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이곳저곳 자신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누굴 만났으며 무슨 일을 했는가 차근차근 기억을 살려 더듬어본다. 걸릴 만한 일이 없다. 모든 것은 합법적이었다. '이자가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노인장." "..." "내 집으로 가는 게요." "거긴 왜." "술이나 한잔 대접할려구요." "뭣 땜에." "우린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지 않소? 안 그렇습니까?" "깊다면 그건 악연이지." "술대접 받을 이유도 없고, 그거라면 나는 내 거처로 가야겠구먼." "허어, 조준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놀려먹는 공노인이 그리 융통성이 없어서야," "뭐이라구?" 고노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왜? 놀랍소?" "놀라울 것 없지." "서울 출입이 잦는데 그런 정도야 내 다 알고 있지요. 하하핫... 하하아." "내가 조준구를 손바닥에 올리건 발바닥에 올리건 그것은 임자가 상관할 일 아니지." "상관할 바 아닌지 그건 두고볼 일이고," "누구네 부친은 그놈을 손바닥에 올려놓질 못해서 이용만 당했다 하긴 하더라만." "누구네 부친?" 반문하는 김두수, 걸음을 멈춘다. "그게 누구지요? 최서희의 부친 말씀이오?" "글세 그것까진 모르겠구, 재주는 곰이 넘었는데 돈은 중국놈이 먹었다 하기도 하더구만." 김두수는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숨을 거칠게 쉬는지 양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객담은 그만두는 게 좋겠고 내 집에 노인장을 초대하는 만큼 용건이 있다는 것쯤, 날 심히 건드리면 좋잖을 게요."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걸음을 빨리한다. '약이 좀 과했나? 흥, 제놈이 어쩔 거야? 회령바닥을 제 집 안마당같이 설치고 다니기는 한다마는 제놈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 있지.' 공노인의 배짱이 두둑해진다. 굳이 피할 이유도 없다 싶었다. 아니 피하기보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차츰 강해진다. 어느덧 거리에는 어둠이 깔려 물컹물컹한 늪과 같은 검은 기류가 흐르고 그 물컹물컹한 어둠에 거리의 불빛, 붉은 불빛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공노인이 김두수를 따라간 곳은 그의 말대로 그가 사는 집이었다. 목조의 왜식 건물, 소위 관사라는 집이다. 여기서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좁은 현관에서 문을 열면 바로 그곳에 갸구노마인데 김두수가 문을 열자마자 "오동쨩(아부지)!" 하고 뛰어나온 아이, 쟌자꼬리는 일본 아이의 옷을 입은 사내아이는 네 살쯤이나 됐을까? 그런데 그대로, 그야말로 그대로, 만일 김두수의 몸이 줄어져서 그 아이만큼의 크기가 된다면 쌍둥이 한 쌍이 될 것이 틀림없다. 공노인은 치미는 웃음을 참는다. "꼬라, 꼬라, 도께(아서, 아서, 비켜)." 매달리는 아이를 떼밀어내긴 했어도 눈에 웃음기가 돈다. "야다이! 미야게 오꾸레요 잉(싫어! 선물 줘 잉)." "고멘, 고멘, 와스레다. 아스 갓대구로가라, 사아 오갸꾸상다. 앗찌에 유께(미안 미안, 잊어버렸다. 내일 사올 테니, 자아 손님이다. 저리 가거라)." 아이는 나온 김두수의 배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오도쨩노 바카(아버지 바보)!" 아이가 달아나자 김두수, 고래땅 같은 고함을 지른다. "나니쓰루까! 데데공까(뭐해! 나오지 못해!)." "하이 하이." 하며 나타난 여자, 추녀는 추녀이나 정체가 야릇하다. 기모노의 긴 소매를 걷어올리기 위해 어깨에 걸었던 끈을 풀면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얼굴빛은 아편장이처럼 누리팅팅했다. 두 볼은 장난스런 조물주가 반죽한 것을 한 덩이씩을 더 붙였는가, 솟아오른 두볼 사이에 코와 입이 묻혀버렸다. "고노 아마메! 나니오 보야보야시도루까(이 계집년! 뭘 꾸무적거리고 있어)!" "스미마셍(죄송합니다)," "사께다! 준비세(술이다! 준비해)!" 공노인은 객실에 올라갔다. 방안에 먼지 한톨 볼 수 없게 깨끗했으나 별 세간은 없고 방석과 화로가 있었는데 화로 속에는 숯불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장가들었구만." 얼떨떨해 있던 공노인이 말했다. "장가요? 그런 악담 마슈." "그러면은?" "하녀요, 하녀." "아까 그 아들아이는?" "그거야 뭐 어디서 낳거나," 입맛을 쩍쩍 다신다. "하긴..." 하고 공노인은, 혼자 중얼거린다. 아편장이처럼 얼굴이 누리팅팅한 여자는 하녀도 되고 작부도 되는, 용정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유의 여자라는 것을 공노인은 진작부터 짐작했다. 김두수는 공노인 앞에서 경찰관 제복을 훌렁 벗고 속내의 모습을 드러내더니 다시 고함을 쳤다. 하이 하이 하면서 여자는 단젠(두툼한 일본 남자의 겨울옷)을 가져 나와 사내에게 입혀준다. 그러는 동안 김두수는 계속 여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오비(허리끈)를 묶으면서 김두수, 화롯가에 와서 앉는다. "불이나 쪼이슈. 저녁이 되니까 설렁하구먼." 김두수는 살이 통통한 손을 화로 위에 쬔다. '개상놈 같으니라구, 아니꼽고 더럽다마는 기왕지사 여가지 왔으니 나도 알아볼 만큼 알고 가야겠다..." 그런 공노인 눈에 대하여, '이 백 년 묵은 너구리 같은 늙은이, 내가 명심코 잡아먹으려면 그거야 문제없다마는.' 김두수의 눈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일본 사람 다 됐구만," "일본놈 안 되고서 내 설 자리가 어디요?" 일말의 자포도 풍긴다. 그러나 그것이 꾸며대는 것임을 공노인은 안다. "하기야 순사부장까지 됐으니 분골쇄신해야겠지." "순사부장? 그까짓 것쯤이야." "그까짓 것쯤..." "노인장." 공노인은 빤히 쳐다본다 "소리지르고 삿대질하고, 이젠 조용해졌구먼." "웃는 낯에 침뱉진 못하지. 술대접 하겠다는 데야." "나는 또 상당히 보챌 줄 알았지요." "순장부장 아니라 서장이라도 그렇지, 늙은이보고 그 말버릇이 뭔고? 좋든 궂든 뻔히 아는 처지에 보채다니," 눈을 부릅뜬다. "내가 공노인이니까 반말이라도 들어주지, 몰라 그러는 게요? 피차 알 만큼 다 알면서 안개를 모락모락 피울 필요 없소." "아는 거는 아는 거고 버르장머린 버르장머리야." "답답한 늙은이로군. 내가 노인장한테 반말 지껄인들 못할 게 뭐 있수. 순사부장 아니라두 말이야." "김위관댁 자손이라서?" "그렇다! 이 늙은 것!" 별안간 김두수 얼굴에 살기가 넘친다. "행사가 좋아야 양반 행셀 하지. 족보만 가지고? 하기야 그놈의 족보도 아주 못쓰게 되어 없느니만 못한 형편이지만." 김두수의 뻐드렁니가 떠걱떠걱 소리를 낸다. 이번에는 습관적인 그것이 아니다. 아래턱이 덜덜 떨고 있었던 것이다. "내 하나 밑천이란 다름아닌 담력 그것인데 그거에다가 이젠 살만큼 살았겠다 할 일 다 했겠다 남한테 몹쓸 짓 한 일 없고 법 어긴 일 없고 세상에 무서울 게 뭐 있나. 그놈의 순사부장 감투 아니라 총독 감투래도 마찬가지야." 이만저만 약을 올리는 게 아니다. 아는 수 없었던지 김두수, 밖을 향해 빨리 술 가져오지 않느냐고 소리소리 지른다. 조그마하 술상이 들어왔다. 김두수는 연신 여자한테 욕설을 퍼부으나 그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여자는 으레 그러려니, 일본 말을 모르는 공노인은 욕인지 뭔지 알지 못했지만 '저것도 사람이라고,' 그러면서도 작전을 세우듯 곰곰이 생각한다. "술이나 드슈." 술은 일본술 아닌 매화주였다. 어디서 선사 들어온 술이었던 모양이다. 공노인은 술맛 좋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 빙빙 돌려댈 필요 없이 오늘 공노인을 내 집에 오라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 최서희 그 여자가 전갈해 보던 말에 대한 내 답변이요." "전갈해온 말이라구?" 공노인은 눈이 둥그래진다. "자세한 설명도 필요 없고 닥 이 말만 전해주슈. 앞으로 당분간은 이 김두수, 길상하고 언약한 것 지켜나갈 생각이라구." "이상하구만. 그쪽에서 뭐 꿀리는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길상이 의병질 한 걸 내가 모를 성싶소? 앉아서 천리 보는 사람이요." "내 듣기하곤 매우 다르구만. 내가 듣기로는 조준구 그자가 최참판테 살림을 가로채는 바람에 박살을 냈다, 그런 얘기였고 아, 조준구에 관한 얘기라면 시시콜콜 내 모르는 일 없으나 의병질이란 금시초문이구만?" "속 들여다뵈는 소릴 하니까 일견 거간쟁이 같긴 하오만, 조준구 일이라면 시시콜콜 다 안다구? 뭘 알아요! 뭘!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인이 먹었다?" 한정없이 늘어지고 좀체 말꼬리를 잡히지도 않는 공노인 성격에 신경질이지만 재주는 곰이 넘었다는 얘기가 김두수 가슴속에서 뭉클거리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신경이 굵기론 피장파장 담력은 공노인이 위겠으나 배짱 하나야 김두수가 월등했을 테니, 그러나 아비에 관한 일이었으니까. "그게 글세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은 아닌 기라. 왠고 하니?" 하다가 공노인은 "뭐 그리 긴요한 것은 아닌데 그만두지. 다 지나간 얘기," 김두수는 몇 번이나 근거가 뭐냐 파고 물으려다 꾹 참는다. 공노인 말마따나 지나간 얘기다. 죽은 아비가 살아 돌아올 리도 없는거고 살인자란 저주스런 죄명이 없어질 까닭도 없는 것이다. 억울한 죄명을 쓰고 죽은 것도 아닌 바에야 들추어 뭘 하겠는가. 김두수로서는 그러한 사실을 발설해주지 않을 것만 바랄 뿐, 아비 일에 발을 쑤셔넣어 좋을 것이 없다. 설려 공노인이 암시하는 조준구와의 어떤 관련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조용하길, 오로지 조용하게 그 일을 잊어주길 바랄 뿐이다. "공노인의 말이 맞소. 지나간 얘기 피차 안 하기로, 그게 길상이하고 나하고 사이에 한 언약이오." 공노인의 경우도 그렇다. 필요 이상의 말, 하고 싶어 하는가. 다 김두수의 속마음을 떠보자는 것이요, 김두수와 조준구 그 악인 둘사이에 깊은 도랑을 파두자는 것이 현명하다는 셈속밖엔 없다. 조준구에 대한 은근한 모략만 하더라도 공노인으로선 억지춘향이다. 최치수 살해의 암시를 준 조준구 언동에 관해서는 하나님과 조준구 자신밖에 알지 못하는 만큼 공노인으로서 억지춘향격인 일을 김두수가 공노인에게 꼬치꼬치 캐고드는 것보담을 그렇게 나오는 편이 훨씬 수얼하다. 도리켜 생각해보건대 그들 악인끼리 손을 잡을 리 없겠으나 잡은들 별수없다. 조준구 재산에 관한 한 조준구가 불법이었지 서희쪽에선 빈틈어벗디, 합법적으로 회수하였으니까, 김두수의 촉수가 혜관이나 김환이 있는 지리사 쪽에 뻗쳐 있지 않다면. 잠자코 술을 마시던 김두수 "조준구는 아주 작살이 난 게요?" 역시 궁금한지 묻는다. "거의." "뭘 어쨌기에 그리 됐소?" "알면서 왜 물을꼬?" "안다 해도 당사자들같이야 확실하겠소?" "확실히는 알아 어디다 쓸려구, 광산과 미두를 해서 그랬지 뭐." "뒷돈은 이쪽에서 대주고," "인심 조오치. 만석살림을 빼앗기고도 사업 밑천 대어주었으니, 으허허헛..." "사업 밑언을 대어주어요?" "작살난 거야 제 운이 없었거나 아니면 천벌을 받았던 게지. 이치가 제가 한 몫은 제 차지, 남이 대신 해주진 않아. 콩 심은 데 콩나고 아편 심은 데 아편 나고." "흥." 공노인이 말을 비웃는다. "그나저나 경상도 양반, 뭉개진 왜짚세기 같이 못생긴 계집을 얻어살 건 뭐란?" "뭐라구?" "기왕이면 다홍치마랬다구 송애는 거기 비하면은 천하일색 양귀비 아닌가." "까마귀 고길 먹었소? 내 계집 아니라 하잖았소. 하녀요 하녀! 멀쩡한 정신으로 주정을 왜 하는 게요." "아 참, 그랬었던가? 그래 송애는 어떻게 하였나." "봉천까지 데리고 갔다가 떼내지 못해 땀을 뺐지요." "그래 어찌 되었나." "보나마나 술집 신세 안 졌겠소?" "죽일 놈," "적선했지요." "뭘 적선했나." 이때부터 공노인 감정에 에누리가 없어진다. "싹수가 노랬어요. 나, 독립운동하는 놈과 여자 하나는 잘 보거든. 양딸이랍시고 시집도 보내야 해, 앓는 이 빠진 꼴이 됐지요 뭐." "이놈아, 콩 심은 데 콩 나고 아편 심은 데 아편난다!" "나지요. 그거 뻔한 얘기 아닙니까? 한데 아편이 콩값보다 비싸다는 것 모르는 모양이구먼." "뭣이 어째? 이 개놈아!" "나 화나면 미치니까 웃어야지. 하하하핫, 핫핫..." 하다가 김두수는 뒤로 벌렁 나자빠진다. 단쟁 자락이 걷히고 디룩디룩 살찐 종아리가 불빛을 받고 고깃덩이처럼 번들거린다. 공노인은 술상을 때려엎고 일어섰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개놈 같으니라구." 공노인이 어둠을 향해 몇 발짝인가 걸었을 때 두르륵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욕설이 공노인 뒤통수에 마구 날아온다. 그러나 발목을 현관 기둥에 묶어버린 듯 달려오지는 않는다. 공노인은 돌아보며, "개상놈아." 외치고서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한다. 김두수는 멧돼지처럼 날뛰었으나 여전히 달려오지 않았다. 얼마를 걷는 동아 김두수의 악쓰는 소리는 차츰 멀어져갔다. "짐승이지, 설마 사람일까?" 공노인은 취기가 도는 머릿속에서 조준구와 김두수를 비교해보고 있었다. '확실히, 확실히 조준구 놈이 더 악인이다. 저놈은 개지랄이라도 한다. 내야 원래 나쁜놈이지 하고 들내놓기도 한단 말이다. 음.' 이튿날 해가 한 뼘쯤 남았을 무렵 공노인은 용정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서자 그는 월선의 용태부터 묻는다. 방씨는, "이녁 겉은 한량이 그거는 머할라꼬 묻소." "한량? 엔병지랄하는구만?" 전에 없이 욕설을 하며 공노인은 화를 낸다. "늙어감서, 안 하던 욕가지 하네. 아 그렇기 걱정이 되믄 와 진작 못 왔소!" 방씨도 화를 낸다. 물으나마나, 대답하나마나 월선의 용태는 뻔하지 않는가. 몇 달 동안의, 아니 몇 년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 공노인은 자리에 주질러앉는다. 기적을 바라며 온 것도 아니었고 내내 월선을 생각하며 온 것도 아니었다. 성은 모조리 함락했고, 그것이 비록 최서희를 대신한 대리전재이긴 했었지만 심혈을 기울였던 과제는 끝난 뒤의 허무, 알맹이가 떠나고 빈껍데기를 느끼는 순간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월선이, 가슴에 주먹질하며 통곡하고 싶은 기왕의 현실이 공노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허둥지둥 곰방대를 찾는다, 담배쌈지 속에 골통을 밀어놓고 담배를 재는데 담뱃가루가 방바닥에 출출 떨어진다. "언제 우떻기 된지 모리는데." "..." "홍이애비 그 목이 뿌러져 죽을 인사는 코끝도 안 보이고 어느 누가 그 아아 머리맡에 앉아줄 기라고 이녁을 그리 태평이오." 방씨, 찔금거리다. "초상이 났단 말가! 방정스럽게 울기는 왜 우노!" 피워물었던 곰방대를 뽑아 마누라를 칠 듯이 내저으며 화를 낸다. "이녁도 이사 말 안 들었는 기요? 남이사 모라도 이녁은 아는 일 아니오?" "으흠..." "생각하믄 괘씸해서, 괘씸해서 이가 뽀독뽀독 갈리요. 전생이 일 월선이가 그놈의 집구석 이가놈의 집구석에 얼매나 빚이 졌기에 이렇기 모지락스럽게도 당하는가. 그놈의 식구들 아니믄 와 벵이났이꼬? 지 하나 주둥이 묵으면 얼매나 묵을 기라고, 그 고된 장시하니라고 벵이 났지." 넋두릴 하면서도 공노인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내놓는다. 그러나 넋두리하는 숙모의 마음보다 말이 없는 삼촌의 마음이 더 아플 것은 정한 이치다. "내사 마, 가고 저버도 안 가거마는. 보믄 눈물이 나싸아서 아픈사람 마음만 심란할 게고." "먹는 거는 좀 어떻는고?" "참판네댁에서 조심부리 임석을 내리보내는데 속에서 받아야 말이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공노인인은 냉수를 가져오라 하여 한 대접을 다 들이켰다. 대접을 내동댕이친 공노인은 자그마한 무명보따리 하나를 들고 간다온단 말 없이 집을 나선다. 길서상회댁 대문을 들어서면서 공노인은 길상을 찾는다. "주인어른 하얼빈 갔소꼬망. 아직 앙이 돌아오셨습매다." 하인의 대답이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서희는 윤국이를 안고 있다가 유모에게 건네준다. "그새 많이 컸구만요." "오시는 길이오?" "예." "수고가 많았소." "이것저것 마무리짓노라 이번 행비는 시일을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그랬을 테지요." "들어오면서 듣자니까 도련님 부친께서는 하얼빈에 가셨다구요?" "가셨소." "무슨 일이?" "돌아가신 김훈장 유품을 가지러 가신다구." "아, 예예." "..." "그러면은," 공노인은 삼 보따리 같은 무명보자기를 끌러 서류뭉치를 꺼낸다. "이것은 집문서올시다." 서류 속에 끼여 있는 봉투 하나를 꺼내어 서희 앞으로 내민다. 서희는 집어들고 봉투 속의 서률 꺼내어 대강 훑어본다. "제가 본 바로는 조촐했습니다마는," "집은 비웠어요?" "예, 집볼 사람을 구해서 넣어놨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진주란 곳은 엉성하더만요. 두드러지게 큰 집도 없고." 공노인은 나머지 서류뭉치를 또 밀어내놓는다. "이젠 바닥이 났습니다." 말없이 서희가 서류를 들춰보고 있는 동안 공노인은 허탈한 상태로 멍하니 창문 쪽을 쳐다본다. 굵었던 눈망울이 축 늘어져 보인다. 이제 일이 끝났다. 나오 년 동안 조선을 내왕하며 미치듯 몰두했던 자기 자신이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제 회령에서도 그런 생각은 아니 했다. 아니 오늘 용정으로 오는 마차 속에서도 그런 생각은 아니 했다. 객줏집, 자기 집에 들어섰을 때, 십년, 이십 년을 한꺼번에 건너뛴 것 같은 노쇠한 자기 육신을 느낀다. "한 오백 석 가량 남았지만 그거야 이삼 년 생활비로 다 들어갈깁니다." 중얼거리듯 말한다. 서희는 서류를 한테 모아 옆으로 밀어내놓으며, "요즘 봉순이는 어떻게 지내던가요." "예, 이번에는 서울에도 없고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얘기였습니다마는 어느 지방으로 내려갔는지 알 수 없더구만요. 제발 소리공부나 하고 있었으면 좋으련만, 독심이 없어서. 모두들 얘기가, 지긋이 공부하면은 명창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한데도 번번이 중도지폐, 이번에도 공부하러 내려갔다 하기는 했으나 한두 번이라야지요. 보기는 안존한데 안존한데 정이 헤퍼서 중심을 못 잡는 모양입니다. 소리공부 하러 갔대도 그렇고, 어디 알거지 같은 사내를 얻어갔대도 그렇고 얼마 안 있어 서울로 또 오겠지요." 공노인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 동안 봉순에 대한 소식은 그 범주에서 벗어난 일어 없건만 서희는 서류를 훑어보고 난 뒷면 반드시 봉순의 얘기부터 묻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공노인 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일은 없었고 질문이 없는 서희에게 공노인은 또 습성처럼 보고를 시작한다. "이분에 가니까 이부사댁 젊은 양반이 일본서 돌아오셨더구만요. 저는 무식해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임역관 댁 자제분과 몇몇 분이 함께서 책을 내신다고, 그런 말심을 들었습니다. 몸이 많이 축난 것 같고 술이 과하신 눈치더군요. 음 또 그라고 석이 그 아이 말심입니다마는 조준구 집에 더 있을 일도 없구 해서 진주로 내려갔습니다. 석이 말이 서기질이나 하겠다면서, 여러 가지로 그 아이 한 일이 많았습니다. 마음으로야, 조준구를 쳐죽이고 싶은 적이 한두번 아니었겠지요. 잘 참아주었으니, 마님께서도 각별히 유념하셔야," 공노인은 최종 보고를 하면서 문득 서희가 전처럼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 친다. '공노인.' '예.' '공노인.' '예.' 별안간 최서희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공노인도 허허허헛 하고 웃는다. 공노인의 웃음은 울음 같았고 최서희의 돌연한 웃음은 미친 것 같았다. 그 웃음은 이내 멎었다. "수고가 많았소, 공노인." "별말씀을." "우리 차차 의논하기로 하고 피곤하실 텐데 가서 편히 쉬십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일어서려다 말고 "아 참, 회령서," 공노인은 도로 앉으며 김두수를 만난 얘기를 한다. 서희는 유심히 들었을 뿐 역시 아무말이 없다. 7장 벌목장의 오두막 추수가 끝난 들판이 동토로 변하는 것은 삽시간이다. 명년에 찾아올 봄의 파종 시기도 삽시간이고 보면 그 삽시간 틈새에 가을갈이를 해놓는 것은 좋다. 좋다는 걸 뉘가 모르는가, 소를 빌리는게 문제였다. 아무튼 용이는 소를 빌렸고 가을갈이를 하고 있었다. 나뭇잎을 다 털어낸 발둑의 고목이 엷어진 햇살을 엉거주춤 받고 있다. 쇠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쟁기는 앞으로 쑥쑥 빠져가고 검게 기름진 흙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지며서 흩어진다. 밭둑을 넘어 발 끝을 넘어 밭을 밟고서 "이랴! 이랴!" 소가 되돌아오면은 쟁기도 방향을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이러기를 몇 차례인가. 밭둑에 밋밋이 서 있는 고목 한 그루갈이 용의 모습도 그러하다. 밋밋이하고 물기 빠진, 나무는 동면으로 들어 갔을 테지만 용이의 끝없이 되풀이되는 움직임만 같으다. 가끔 야트막한 둑길을 길손이 지나가고 멀리 쟁기질하는 농부가 한둘 눈에 띄기도 한다. 밭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저 끝에서 이 끝으로 되풀이되는 쟁기질, 회뿌연 해는 중천에서 기울고 밭둑길을 밟고 멀리서 임이네가 점심을 이고 온다. 쟁기질을 하는 용이와 점심을 이고 오는 임이네의 거리는 가까워지지만. "점심 가지고 왔소." 용이는 말이 없고 거들떠보지 않는다. 발 끝까지 소를 몰고 간 뒤 소에서 쟁기를 풀고 둑 밑에 박아놓은 말뚝에 소를 맨다. 밭둑으로 올라온 용이는 마른풀을 내려다보며 펄쩍 주저앉는다. 통 속에서 주전자를 꺼내어 술부터 한잔 마시고 다음 조와 콩을 섞은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장석처럼 서 있던 임이네가 "우떤 사람이 집에 와서 기다리고 있소." "와." "이녁 만나러 왔다 카드마." "그라믄 같이 오지." 아무말 안 한다. 손님은 내버려두고 슬며시 나왔을 거시 틀림없다. "어디서 왔는고?" "용정서 왔다요.": 대답하면서 눈을 흘긴다. "손 왔다는 얘기라도 함께 인심 좋아졌구마." "흥." "그 손님 임자 아들네미가 보낸 사람은 아니든가?"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밥을 먹으며 묻는다. "뭐라꼬요? 홍이 말이오!" "에미 보고 접다는 전갈이나 아니든가?" "그저, 용정서 사람 왔다는 말마 하믄 붙었던 입도 떨어지고 안하던 농담도 하고 흥!" "..." "그놈이 내 새끼든가? 그년 새끼 다 됐지. 오금 겉은 남으 자식, 생나무 가르듯 빼앗더니, 하늘이 무심하까. 벌받아 벵이 났지." "공부시키지 말고 데리고 오지. 나무나 해 나르게, 그라믄 주머니 돈 몇 닢이 불어나겄지. 못 그래서 분하기야 분할 기구마." "그렇소! 그래요! 내가 낳은 자식 볶아묵든 지져묵든 누가 말할기요!" 용이는 밥을 씹으며 먼 들판으로 눈을 던진다. 도시 마음이라곤 한 오래기도 없는 눈이다. 숟가락을 놓고 숭늉을 마신다. 임이네는 술주전자와 술잔 그리고 고추장 보시기 하나를 남겨놓곤 빈 그릇을 통 속에 챙겨넣는다. "봐라." 밥통을 이고 일어서며 "머 또 할말 있소?" "내가 일하다 들어갈 수 없고 소를 놀릴 수도 없인게 용정서 왔다는 사람 이리 오라고 하지." "답답은 사램이 우물 판다 캅디다. 내가 멋 땜에 그런 심부름 할기요. 흥! 궁둥이가 덜석덜석하겄소." "하모 궁둥이가 와 덜석덜석 안 할 기고. 죽었다믄 재산 정리하러 쫓아갈 기고, 아니믄 누가 아나? 죽기 전에 벌어놓은 돈 주라꼬 날오라 카는지." "누구 비양치는 거요! 그까짓 앵이곱은 돈 조금도 안 반갑소!" 용이 담배를 붙여문다. 그리고 부지런히 돌아가는 임이네 뒷모습을 바라본다. 임이네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길에 괴나리 봇짐을 겨드랑이에 낀 사내 하나가 우줄우줄 걸어온다. 안면이 전혀 없는 사내다. 땟국이 조르르 흐르는 초라한 사내다. "여보시오." 용이 눈을 들어 본다. "댁이 이용이란 사람이오?" "그렇소." 사내는 비스듬한 밭둑길을 뛰다시피 내려온다. "세상에 그런 인심이 어디 있담?" "..." "진작 가르쳐주었으면, 갈길이 바쁜 사람인데," 불평을 늘어놓는다. 용정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눈꼴이 사나웠을 임이네, 초라한 몰골의 나그네를 무던히 박대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용이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거, 형씨 마누라요?" "그렇소." "방망이 좀 안겨야겠습니다." 대답이 없자 나그네는 부르튼다. 꽤나 고지식하게 생긴 얼굴이다. "하여간에 부탁받은 일이나 치루고 가야지. 다름이 아니라 편지 한 장을 받아왔소." 사내는 허리춤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며 "꼭 이용이라는 사람한테 전해야지 다른 사람은 주지 말라 하기에, 여 있소." 용이는 편질 받는다. 받았을 뿐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사내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랬었는지 묻지도 않는데 편질 받아온 경위를 설명한다. 역두에 중학생이 하나 나와 퉁포슬 가는 사람을 찾더라는 것이다. 나그네는 내가 간다 했더니 편지 전해주면은 마차삯을 내겠노라, 그래 선뜻 전하마 하고 받아온 거시라 했다. "자세히 가르쳐주어서 집 찾는 데 힘이 들진 않았으나 아까 그 여인네가 그 중학생의 계모는 아니오?" "생모요." "헌데 어찌 편지는 형씨한테 전해야 한다고 당부 당부 했을까?" 그 말 대꾸는 아니 하고 "술 한잔 드시겄소?" "주시면 고맙지요." 몹시 시장하고 갈증이 난 듯 용이 부어준 술 한잔을 사내는 들이켰다. 얼마 후 갈길이 바쁘다며서 사내는 떠났다. 소는 마른풀을 뜯고 있었다. 용이 얼굴에 소름이 돋아난다. 천천히 편지 피봉을 찢는다. 홍이 편지가 들어 있었다. 먼저 인사말 몇 마디 적고, 편지 받으시는 대로 곧 용정에 오시기를 소자는 바라고 있습니다. 오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병환은 날로 나빠져서 언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만일 이번에도 아버지께서 아니 오시면은 소자 대단히 당돌하오나 아버지를 다시는 뵈옵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사옵니다. 재차 엎드려 비옵니다. 용이는 담배 한 대를 더 태우고 나서 천천히 일어섰다. 소를 몰고 아까처럼 발 끝에서, 저 끝으로 다시 이 끝으로 끝없는 반복을 되풀이할 뿐 철새가 무리지어 날아가는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않는다. 소 임자에게 소를 돌려주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영팔이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자 오나." "음." "밭은 다 갈았나?" "음." "용정에서 사람이 왔다면?" "음." "무신 좋잖은 기별이라도 있었나?" "머, 별일 아니다." "그런데 와 일부러," "일부러 보낸 기이 아니고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라." "그런가?" "밥은 묵었나?" "묵었지." "방에 들어가자." 호롱불을 켜놓고 두 사내는 우두커니 서로 마주본다. "니 용정에 한분 가보지. 가을갈이도 했고 했이니," 불안스럽게 쳐다본다. 실상 영판은 월선이 아프다는 것은 알지만 위중한 사정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곧 산에 갈 긴데..." "아직 얼매간의 시일은 안 있나." "..." "한분 갔다오지." "산판일 끝나믄 갈 긴데 머." 임이네가 저녁상을 들고 와서 메치듯 내려놓는다. "아지마씨." 영팔의 노한 눈이 임이네를 쳐다본다. "와요? 무신 할말 있소?" "질기 그러다가 뜨거운 꼴 한분 볼 기요." "아이고 무서바라. 이가네 집구석에서 쫓기나믄 이 일을 우짜노? 당장 바가지를 들고 사도거리에 나갈 긴데, 흥!" "내 겉으믄 그만," "그만? 우짤 기요? 가랑이를 찢어부릴라요?" 번번이 있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당하는 것은 영팔이었다. 그것을 알면서 영팔은 못 참는다. "흥, 무시 할 일이 없어서 남의 제집까지 챙길라 카는고? 앵이곱고 더러바서 할 일이 없이믄 햇빛에 나가서 흰머리나 뽑을 일이지." 방문을 탁 닫고 나간다. "어이구 가심이야." 가슴을 치는 것은 용이 아닌 영팔이다. 임이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용이는 남의 일을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뒷전에 물러나 있었으니 그것을 바라보는 영팔이 견디질 못하는 것이다. 그는 "목에서 이런 게 올라온다!" 하며 주먹을 밀어올리곤 했었다. 사실 주위에서 보기엔 용의 무관심은 뱀꼬리처럼 차갑고 무자비한 것이었다. 해서 영팔이는 용아,니 심장은 쇳덩이로 됐느냐, 하고 물었으나 줏대없는 사내라고 나무라진 않았다. 그러나 그런 면에선 우두한 임이네다. 설령 우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개의할 임이네는 아니었지만, 방자하기로는 천성이라 치고 날마다 느는 것은 신경질이었다. 왜 신경질이 느는가. 그것은 조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월선의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에서도 그러했고, 만일 그가 죽고 나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재산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공노인이 차지할 것인가 아니면 홍이 몫으로 떨어질 것인가. 홍이 앞으로 떨어진다면 그것이 순조롭게 자기 손으로 굴러들어올 수 있을까? 도시 월선의 재산은 얼마나 되며, 이미 자기 모르게 처리된 것이나 아닐까? 홍이아배하고 무슨 암약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 용정촌 동정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해진 임이네다. 가능하다며 그곳으로 가서 월선의 주변을 맴도는 것이 가자 상책일 것이데 꿈쩍않고 용이 뻗치고 있는 것도 미워서 견딜 수 없고 시시로 신경질이 발동하게 되는 것은 순전히 재물과 관련이 있다. 졸갑스런 귀신이 물밥도 못 얻어먹는다는 옛말처럼 임이네 신경질은 또 졸갑 그것이기도 했다. "용이 니도 참말이제 팔자 사나운 놈이다. 우짜다가 저런 계집을 만나서, 삼신도 눈이 어둡다." 영팔이 한숨 섞인 말을 했다. 홍이가 나지 않았으며 저런 악종계집을 짊어졌을 리 없었을 것이란 뜻이요, 월선에게 기출이 있었다면 하는 뜻이기도 했다. 영팔은 이십 년이 가까운 옛일을 생각한다. 월선이가 달아났을 때의 일을. 그때 용이는 앓았었다. 앓고 일어난 용이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일을 했었다. 마누라 옷가지 빨아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강청댁은 자파한 사람처럼 암담한 성질로 변했던 것을 영팔이는 알고 있었다. 용이 얼마나 무서운 사내인가를, 부부관계를 갖지 않았던 것을 영팔은 알고 있다. 말없이 밥을 먹고 있는 용이를 바라본다. 주름지고 여윈 것도 그렇지만 사람이 바스라진 것만 같다. 영팔은 이십 년 전의 용이 얼굴을 생각해보려 했으나 그때 얼굴을 기억해낼 수가 없다. '나는 그래도 아들이 삼형제, 이자 다 안 컸나? 판술에미도 나 없이믄 죽을 줄 알고, 고생이다 고생이다 함서도 자식 가장밖에는 모리는데, 어디 세상에 임이네 같을라고. 도척이도 저러지는 않았을기다. 클 때는 용이가 우리 또래에선 젤 잘살 줄 알았다. 농사꾼 되기 아까분 인물이라 안 했나. 우짜다가 인연이 잘못돼가지고 저꼴이 됐노. 계집이 사나아를 잘못 만내도 골벵이지마는 남자가 계집을 잘못 안내도 일생이 허사라.' "이봐라." 용이 쳐다본다. "니 그만 홍이하고 월선이를 데리고 그만." "..." "그마 소리도 매도 없이 가부리라." "..." "그렇기 하믄 월선이 벵도 나을지 모르지. 니도 사람답게 한분 살아보고,"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라꼬요?" 임이네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선다. 행여 용정의 얘기나 하지 않을까 싶어서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한 말 한분 더 해보소!" "하라 카믄 못 할까봐요!" 증오에 차서 임이넬 노려본다. "멋이 어찌고 어째? 홍이하고 그년하고 소리도 매도 없이 가부리라?" "그랬이니 우떻단 말이오." "내하고 무신 철천지 원수가 져서 그러노오! 니 할애빌 잡아묵었나! 니 에미를 잡아묵었나!" 막 나온다 "아니 이 계집이," 그러다가 영팔은 악이 오르는 모양이다. 용이 숟가락을 놓고 밥상을 밀어낸다. "으응? 세상 좋구나! 과연 좋구나. 죽으라믄 죽는 시늉을 내도 멋할 긴데 사람을 밟아? 야 세사 좋고 돈 좋구나! 이 좋은 세상에 돈에 둥때난 계집은 거 누구 딸맨치로 화냥질을 하는 기다!" 영팔이 과거사를 건드려 말하기는 처음이다. 임이네 기가 꺾인 듯 했으나 다음 순간 "오오냐! 돈 내놔라 이놈아! 너 먼지 붙어묵을란다!" 밥그릇이 날았다. 임이네 어깻죽지에 맞아 방바닥에 떨어지면서 그릇은 깨어지고 남아 있던 수수밥알이 사방에 흩어진다. "아이고오! 분하고 원통하고오!" 다리를 쭉 벌리고 앉아 통곡이다. 용이는 일어서 나가고 영팔이도 할 수 없이 피할 수밖에 없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지 사흘이 지났을까? 첫새벽에 임이 남정네 허서방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왔다. 용이는 겨울 땔감을 보태기 위해 마른풀을 메려고 지게와 낫을 챙겨들고 있었다. "자, 장인!" "아침부터 왜 이러나." "다, 다, 달아났습매다." "뭐가?" "구, 구야에미가 다, 다, 달아났습매다!" "뭐라구?" "옷으 챙게가지고." 하다가 마당에 펄쩍 주저앉는다. "이 일으 어쩝매까! 어이구 이 일으 어쩌믄 좋지비?" "아침부터 무신 일인고? 어디 초상이 났나?" 부엌에서 들었을 터인데 임이네는 딴청이다. "장모! 내 말으 들어주시기요. 구, 구야네 장모보고서리 어디 간다 말하지 않았슴둥?" "어디 가다니?" "다, 달아났소꼬망! 옷으 챙게가지고 다, 달아났다 말이! 장모! 말으 해주소꼬망! 어디에 가다 했습매까!" "아닌밤중에 홍도깨라더니 무시 소린고, 내사 통 못 알아듣겄네." "어이구 이 일으 어쩌지비? 간나이 새끼는 누가 키운답매? 어이구우," "차라리 잘됐네. 질잖은 일이라믄 일찌감치 조짐이 나는 기이 낫다." 우두커니 서 있던 용이 내뱉은 말이다. "앙이 됩매다! 그년을 찾아야 합매다! 장모 그년으 간 곳으 가르쳐주옵께나. 딸으 가 곳으 모를 리 있겠슴둥? 어망이한테는 한마디 하고 가잲앴겠음? 가르쳐줍세." "이거 참말로 학을 떼겄네. 임자가 간수 못한 년을 낸들 우짤 기든고? 알면서 와 안 가르쳐줄꼬? 허 참, 별의별 일이 다 있고나. 그년 땜에 내가 당하는 거를 생각하믄 이가 뼈가 갈린다. 하기사 화냥질을 하드 사당질을 하드 그년 꼴 눈앞에 아 보는 편이," 허서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은 좋습매다! 장모가 우리 구야르 맡아주시기요! 그거를 달고서리 그년으 찾아다닐 수는 없잲이요?" "아이구 맙시사!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와 내가 너거들 새끼를 맡노. 그런 소리 두분 다시 했다 봐라! 제년을 키워 시집도낸 것만도 태산 같은데,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는 이씨네란 말이다! 이씨네! 어디 그년이 이씨 성이든가?" 임이네는 펄쩍펄쩍 뛴다. 용이는 온다간다 말없이 지게를 지고 나가버렸고허서방은 "좋소! 좋단 말이!" 외치며 달려간다. 한참 후 그는 여섯 살짜리 사내아이 손목을 끌고 왔다. 얼굴에 코와 눈물이 범벅이 된 아이는 연신 소리소리 지르며 울어댔다. 임이네 마당에 뻗치고 서 있었다. "안 된다믄 안 되는 줄 알아라! 이 집이 뉘 집인데 허가네 자손을 받을 기고오!" 고래땅 같은 소릴 지른다. "그년으 여기 딸이라 말이! 찾아달래잲으 것만도 고맙지비!" "뭣이 어째?" "아일 맡으랑이! 사람으 탈으 쓰고서리, 외손자는 자식 앙임둥?" 아이를 밀어내고 밀어들이고 아이는 왕왕거리며 울다간 파아랗게 질리고, 종내 허서방은 아이를 내버려둔 채 임이를 찾는다면서 동네를 뛰쳐나갔다. 농가가 띄엄띄엄 있는 마을에서도 임이는 늘 화제였는데 도망을 쳤다는 말 은 꽤 심심찮은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 독한 여자가 손주아일 굶겨죽일 게야." "어째 굶기죽인단 말이? 사위네 집에서 양식 퍼가던데? 내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답매. 양식 가지가구서리 간나르 굶겨직여? 그러면은 참말입지 벌받는당이." "벌받는 걸 생각하나?" 임이네 얘기서부터 "자식 두고 가는 년 앞길이 뻔하지 뻔해." "간나새끼느 말할 것도 없지비. 아이애비 눈이 화등자 같아도 샛서방하고 댕기던 거를 생각 앙이 합매?" 어쨌거나 아이가 눈물과 콧물과 땟국이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서 양지바른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가끔 보게 되었다. 아이는 어망이 하고 울지는 않았다. 아방이 하고 울었다. 그것은 찍히고 할퀴우고 상처투성이가 될 한 생장의 출발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시간은 간다. 인간사의 격동이 무슨 상관일까. 경천지동이 무슨 상관일까. 시간은 천연스럽게 가는 것이다. 용이와 영팔이 그리고 영팔이 큰아들 판술이는 제철이 되었으므로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예년과 다름없이 산을 향해 떠났다. 여전히 시간은 무심히 가고 있었다. 능란한 벌목군 용이와 영팔이는, 그러나 이젠 힘이 부치는 노동이다. "이젠 늙었고나. 이 짓도 앞으로 얼매나 해묵을란고?" 일을 끝내고 벌목꾼들이 묵는 오두막에 돌아온 영팔은 장작불 앞에 앉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마 올해로 끝장날 것 같구먼. 나이 들며 별 수없는 거야. 제아무리 항우장사라 해도 늙는 것은 못 당하지." 밥솥에 불을 지피던 벌목군 송서방 맞장구에, "그렇슴. 그렁이 고래장을 한단 말이. 제발 제발 올해만 해먹고서리 물러가랑이. 젊은놈도 그래야 벌어먹잲잉요?" "아따 지랄 같은 소리 하네. 아 그럼 너도 젊은 축에 든다 그 말이야?" "오뉴월 하루 해가 무섭다는 말으 앙이 들었슴둥?" "얼매나 아쉬우믄 저런 말을 하까. 그거는 둘짜리 아아들이 나보고 하는 말이고 고래장감으로는 피장파장이라." 영팔의 말이었다. 용이는 곰방대를 물고 잠자코 있었다. 한편에선 옷을 벗고 이를 잡는 사람도 있다. 오두막 하나에 열 명 가까운 일꾼들이 묵는다. 취사는 돌려가며 교대로 했고 나무는 무진장이어서 오두막 안은 훈훈했다. "저녁밥이나 처먹고 나서 이 사냥을 하드 곰 사냥을 하든 할 일이지 피묻은 손톱으로 밥 먹을 거야? 입맛 떨어지게," 정갈한 서울태생 유가가 눈살을 찌푸린다. "가려워서 미치겠는 걸 어떻게 해?" "거 등짝 보니가 떡 쳤으면 좋겠는 걸?" "떡을 치든 굿을 치든 이놈의 이나 싹 쓸어주었음 좋겠네." 방안은 불길과 사람들 입김으로 오히려 후덥지근한 편이다. 밥솥국솥에서 피어오르는 김 때문에도 그러했고, 김과 담배연기는 안개처럼 자욱하다. 사람의 모습, 불빛 그리고 의식까지 혼합이 된 듯 방안은 차츰 몽롱해진다. 용의 얼굴은 더욱더 몽롱하다. "금년 들어 아주 진가가 쭉 빠지는 모양이지?" "뉘기?" "이서방 말이야." "그 사람으 원체 말이 없답매." "그렇지 않어. 술적슬적 하는 말이 여간 익살스럽지가 않았다구." "익살이구 대살이구 우리도 멀잲이요. 담박 저꼴 된당이. 남으 걱정 그만둡세." "허참, 산을 내려갈 적에는 수울찮은 돈을 쥐고 가는데 말이야. 그게 꼭 물을 쥔 것 같단 그 말이야. 언제 빠져나갔는지 빈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기가 차지." "험하게 번 돈으 험하게 쓰기 마련임매." "험하게 벌다니? 도둑질로 벌었단 말이야?" 대답은 서울태생 윤가가 한다. "아따 도둑질이 그리 험한 벌인 줄 아냐? 울타리 넘으면 그만이지. 그건 좀도둑의 경우고 큰도둑이야 푹신한 보료에 앉아 긴 담배대를 물고 에헴! 에헴! 하고 있어도 재물은 저절로 쌓이는 게야. 벌목꾼같이 험한 벌이가 어디 또 있을라고." "험하기론 광부도 그렇지. 그 바닥은 더 험하다구." "그나저나 돈을 쓰게 되는 건 목돈이기 때문인데 간덩이가 커지거든. 몇 달 고생했으니까 한잔, 한잔에 끝이 나야지. 홀애비는 목돈 손에 들고 그냥 갈 수 있어? 여잘 아 찾아갈 수 없는 거야. 그러다보면 돈은 절로 술술, 옛다! 모르겠다 될대로 돼라! 그렇게 되는 게야." "제일 좋은 것은 선금 받고 오는 건데. 그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단 말이야. 선금을 받고 하는 일은 어쩐지 공일을 해주는 것 같아서 신명이 아 나거든." "선금 주는 사람은 또 어디 있구." "그러니까 사람이란 본시부텀 도둑 심보라. 그저 그날 벌어서 그날 사는 게 우리 같은 처지에선 제일 좋은 거지. 가족들 입치레는 맘 놓아도 되니까. 그러나 그놈의 날일도 일 년 열두 달 눈비 오는 날 빼고 하면은, 고새이야 타고난 것, 사는 날까지... 젊은시절에는 설마 내가 뭘 한들 남만 못살까 보냐 했었지만," 일꾼들은 둘러앉아 타령이다. 이러 생활의 연속... "어이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오두막 안에 찬바람이 씽 하고 몰려든다. 등불이 흔들린다. 뿌옇게 서린 공기가 맴을 돈다. 두 사람이 눈을 털고 들어섰다. "영팔이아제!" 소년이 소릴 질렀다. "이기이 누고!" "아제!" "홍아! 니가 우짠 일고? 니 아부지 저기 있다." 홍이는 소매끝을 끌어당겨 눈물을 닦으며 돌부처 모양으로 앉아있는 용이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누구야?" 누군가가 묻는다. "누구긴? 이서방 아들네미지." "학생이구만." "중학생이구마." 영팔이 자랑스럽게 뽐낸다. "여기까지 머하러 왔노!" 돌부처 모양으로 앉아 있던 용이 입에서 노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몰라서 그릅니까." 새파랗게 질려서 홍이 대답한다. 눈에는 증오가 이글이글 타고 있다. "죽었나?" "그랬으면 저는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무신 소릴 하노?" 영팔이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홍이는 양보하기로 결심한 듯 잠자코 구석자리에 가서 앉는다. 불안스럽게 용이와 홍의 얼굴을 번갈아보던 영팔이는 일꾼들과 어울려 앉아 있는, 홍이와 동행한 사내를 보고 묻는다. "외팔이 넌 뭐하러 왔노." 벌목하다가 팔이 바스라지 사내는 아랫마을에 사는 이서방이다. "술잔 값이나 벌라고 왔소." "뭐?" "저기 학생이 데려다달라 하기," "그라믄 홍아, 니 판술일 못 만냈다 그 말이가?" "야?" 그러나 외팔이 이서방이 "판술이는 상계마을로 갔소. 우리 동네는 건건이가 떨어져서, 내일 아침에나 올 게요." "판술이가 고생하는구먼." 누군가가 말했다. "젊은니까, 어서 밥이나 먹자." 벌목꾼들은 밥솥을 중심하여 둘러앉는다. 외팔이 이서방도 그들 사이를 비비고 들앉는다. "홍아 니도 오너라." 영팔이 불렀다. "지는 아 먹겠습니다." "허어 빼지 말고 온나." "배 안 고파요." 홍이는 구석자리에서 처박히듯 앉아서 대답한다. "거 이서방 아들 하나 잘 두었군. 아까는 털모자 속이라 모르겠더니 인물이 훤하군." "이서방 아잇적하고 꼭같지." 영팔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외팔이는 얻어먹는 밥이어서 그런지 게걸스럽게 허둥지둥 먹는다. 용이는 모래알 씹듯 밥알을 씹고 있는 것 같다. 그 용이를 영팔이는 곁눈질하며 보곤 한다. 겨울이 아무리 길다 하여도 종일 고된 일을 한 벌목꾼들은 저녁이 끝나고 잠시 잡담을 하다가 아내 잠이 들었다. 모두 다 잠이 들고 산중의 밤은 바람뿐, 눈더미가 무너지는 소리뿐,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사람은 용이와 홍이다. 홍이는 구석진 벽에 붙어 누웠고 그 옆이 영팔이, 용이 떨어진 저쪽 구석에 누워 있었다. 새벽녘이 가가워서 용변보러 나갔다 온 영팔이 홍이를 흔들었다. "아제." 홍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야기 좀 해보라. 나는 무시 영문인고 모르겄다." "정말 모릅니까." "그러세, 머 말고." "옴마 아픈 것도 모른다 말입니까." "알지. 그거사 알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합니까." "여기 산판일 끝나믄 너거 아부지 갈 거 아니가." "산판일이면, 그게 대순가요?" 홍이는 울먹인다. "옴마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산판에서 돈 벌어 팔자 고치겠소! 너무, 너무." 하다 흐느껴 운다.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운다. "자세히 얘기 좀 해도라. 그냥 아픈 기이 아니다 그 말가?" "아부지는 알아요. 옴마가 죽을 병이라는 걸, 알면서 아제보고 얘기 안 했는가 부지요." "죽을 병이라고?" 비로소 영팔이는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용정에서 사람이 왔다는 얘기도 그렇고 용이의 심상찮은 근래의 태도도 생각킨다. "죽기 전에 하고, 이편에 편지도 보내고 했는데 아부지한테서 아무 소식도 없었소. 저는 두번 다시 아버지를 대면 안 할라 했지만 옴마가 불상해서 또 왔습니다." 영팔이는 코를 잡아당기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옴마는 며칠 못 가요. 의사도 그런 말을 했거든요." "세상에 그 미친놈 좀 보게. 그게 온정신인가. 와 그라제? 나보고는 그 런 말 입밖에도 안 냈다. 내가 지난 여름에 갔을 때만 해도 니 옴마는 꿈직이길래 얼굴은 안 좋더라마는... 산판에서 금을 캔 것도 아니겄고 오늘만 내일만 하는 사람한테 그럴 수가 있나. 하여간에 내일 아침 맥당가지를 끌고서라도 가야지."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다. 홍이 옆에 누웠으나 잠이 올 리가 없다. '알다가도 모릴 일이제. 와 나한테 말을 안 하노 말이다. 우찌 보믄 그런 말 입박에 내기 싫은 심정도 알 성싶기는 하다마는 그 성미에... 그렇지마는 용이는 와 거기 안 가노 말이다. 그기이 이상하지 않나. 남녀간의 저이 떨어졌어도 수천 리 타관에 와가지고 그럴 수는 없일 긴데... 혼자 속으로 앓는 거는 확실하다. 이 몇 달동안 사람이 변한 것도 아지 보니 그 때문인데... 참,' 피리 소리 같은 샛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지쳐버렸는지 홍이는 잠이 든 것 같다. '월선이가 죽어? 월선이가... 허, 월선이가 죽다니 그게 웬말고,' 별안간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차고 올라온다. 눈언저리가 불덩이처럼 뜨겁다. 명주수건에 떡이랑 곶감이랑 약과랑 어미가 사준 제수음식을 들고 마을길을 헤작헤작 걸어가던 어릴 적 월선의 모습이 뚜렷하게 눈감은 망막에 떠오른다. 영팔이는 떡이랑 곶감이랑 그런 제수음식을 싼 명주수건을 쳐다보며 계집애 뒤를 따라갔다. 저절로 침이 넘어가고 나중엔 부아가 치밀었다. '이눔 가시나, 나도 그만 무당새기나 될 거로.' 침 넘어가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영팔이는 계집애 댕기꼬리를 잡아당겼다. "누가 이카노!" 계집애는 팔짝 뛰며 돌아보았다. "누가 우쨌기?" "와 남으 머리끄댕이를 잡아땡기노?" "내가 안 그랬다. 바램이 그랬일 기다." 다시 헤작헤작 걸어가는데 더욱 심술이 난 영팔이는 댕기꼬리를 좀더 세게 잡아끌었다. "와 이카노?" "누가 우쨌기?" "와 잡아땡기노!" "내가 안 그랬다. 저기 저어기 깐치가 와서 그랬을 기다." "누가 모를까 봐서? 용이오래비한테 일러줄 기다." "일러. 그라믄 누가 겁낼까 봐서? 지 오래비도 아님서," 사십 연도 더 되는 아득한 옛날의 일이다. 술에 취한 월선에미가 쓰러져 죽었던 그곳에서 비탈진 길을 자꾸 올라가며 앙상한 소나무와 오리나무가 몇 그루 있고 그곳에도 또 한참 가면 바로 영팔의 부모 무덤이 있다. 그곳에서 비스듬히 빠져내려간 고세 영팔이형 무덤이 있고 액병 때 죽은 계집아이는 어디 묻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다. 영팔의 얼굴은 뜨거운 눈물로 젖는다. 월선이 죽을 것이라는 소식은 그간 뜸했던 망향의 설움을 몰고 온 것이다. 동이 텄다. 홍이 소스라치듯 일어나 앉았다. "내려가야지." 영팔의 목소리였다. 희미한 속에 용이도 일어나 앉아 있었다.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홍이는 재빨리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깊숙이 내려쓴다. "홍이 니 어젯저녁도 굶었는데 식은밥 한덩이 먹고 갈래?" "싫습니다. 내려가다가 배고프면 사먹지요." "외팔이는 깨울 것 없고, 자아 가자." 나서는데 용이는 옷과 털모자만 썼다뿐이지 보따리는 놔둔 채 나온다. 영팔이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왠지 보따리 안 가져오느냐고 물어볼 수가 없다. '하기야 판술이도 있고 나도...' 산을 내려가면서 "판수리기 오믄은 나도 곧 갈 긴께." 하고 영팔이 말했다. 대꾸가 없다. 얼마를 내려가다가 용이는 우뚝 멈추어 섰다. 홍이를 보는 것도 아니요 영팔이를 보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시선을 허공에 띄우며 "한 이레만 있이믄 여기 일이 끝나는데 일 끝내고 갈 긴께 오늘은 니 혼자 가거라." "뭐라꼬?" 영팔이 뛰듯이 돌아섰다. 홍이는 매서운 눈을 하고 돌아보았다. "오늘은 니 혼자 가거라. 일 끝내놓고 갈 기니," "정신이 있나!" "정시 말짱하다." "사람이 오늘만 내일만 한다 카는데 산판일을 끝내? 이놈아!" 삿대질을 하며 영팔은 고함을 질렀다. 그 말 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용이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않는다. "좋습니다! 네 좋습니다. 사판일을 끝내고 오실 필요 없습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아비를 쏘아본다. 아들의 그 격렬한 눈을, 수천 년을 괴어 있는 호수와 같이 맑았으나 빛이 없는 용이의 눈이 마주본다. 어떤 물체가 와도 그냥 퉁겨버릴 듯 차가운 눈이다. 늙어서 바스라지고 초라한 벌목꾼, 그러나 그 불가사의한 눈은 거대하기조차 하다. 정지한 그 상태가. "좋습니다! 좋아요!" 홍이 달음막질쳐서 뛰어내려간다. "홍아! 홍아!" 영팔이 외치며 뛰어 따라간다. 홍이 손목을 꽉 잡는다. "홍아, 나랑 가자. 아제하고 같이 가자!' 하고는 용이에게로 몸을 돌린다. "이 독사 같은 자석아! 니놈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 니놈은 산판에서 떼돈 벌어라! 오늘은 홍이 땜에 그냥 간다마는 어디 보자! 니놈 사지가 성할 긴가! 내 니놈을 직이부릴 기다." 용이는 길섶에 선바위같이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홍이의 울음소리, 죽인다고 소리소리치는 영팔의 고함, 그러나 목소리도 모습도 사라졌다. 나무 위에 실린 눈이 바람 떠나 날아내리고 일출의 장엄한 광경이 빛과 그늘을 부각하듯... 사방은 태고적 같은 침묵이 쌓여간다. 8장 사랑 햇빛이 서편 창가에 두 줄기 비쳐들어 그 빛 속에서 시끄럽게 먼지가 날고 있었으며 이따금 풀쑥풀쑥 기어든 담배연기가 맴을 돌고 있었다. 겨울날에 모처럼 스며든 햇빛이건만 암울한 사람들 마음을 더욱더 암울하게 할뿐이다. 방에는 주름살투성이의 한층 얼굴이 길어진 영팔이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탄 공노인은 담뱃대를 털기가 무섭게 누가 담뱃대로 뒤꼭지를 후려치기라도 할 듯 재빠르게 새 담배를 넣어서 불을 붙였고, 그것을 무한정 연기가 나든 안 나든 입에 물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방학이어서 학교를 쉬고 있는 방을 지키는 사람은 방씨였다. 이러기를 벌써 사흘, 월선은 기름 떨어진 호롱의 심지처럼 기름 아닌 심지를 태우고 있는 그런 상태, 죽음은 일각일각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다가오고 있다기보다 이미 사신은 머리맡에 와 있는 것이다. 끈질기게 심지를 태우고 있는 불길은 잦아졌다가 아슬아슬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두메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지만 하마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나간 채 기척이 없는 홍이 걱정을 하고 기회를 잡은 두메가 벌떡얼어선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온 두메는 부엌을 들여다본다. "홍이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던 안자 "몰라." 안자의 야올은 불길에 상기되어 사과처럼 빨갛다. 두메는 안자가 예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는 다음 순간 이럴 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죄책감을 느끼며 거친 목소리로 "이 자식 또 거기 갔구나!" 내뱉는다. "홍이 그애도 어디가 좀 어찌 됐나 부지? 길가에 나섰다고 소문났어. 지 아부지가 용정에 왔으면 길 몰라 못 올까 봐서 거긴 왜 자꾸 가누." 사정을 잘 아는 안자는 화를 내며 말했다. "오죽 답답하며 그럴까!" 두메도 화난 소리로 응수하고 마당으로 돌아나와 변소가 있는 뒤꼍으로 간다. 홍이 거기 서서 울고 있었다. 털모자를 쓰고 외투도 입고 아마 거기 가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고서 분하여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두메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우두커니 뒷모습을 바라볼밖에. 임종이 가까워온다는 사실보다 실낱 같은 생명이 끊겼다 이어지곤 하면서 홍이아버지를 분명 기다리고 있을 병자의 끈질긴 소망을 두메도 알 듯했기 때문이다. 인편에 편지를 보낼 때 홍이는 두메에게 말했다. 이번에 만일 아버지가 오지 않는다면 평생 상면 아니 하겠다고, 주먹을 쥐고서, 그러나 홍이는 그 선언을 스스로 저버리고 사람까지 사서 산판의 아버지를 찾아갔었다. 그는 하산하면서 다시 맹세했으리라. 다시는 아버지라 하지도 않을 것이요 상면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이는 해질 무렵이며 그 길목에 가서 우두커니 서 있곤 하는 것이다. 행여 울지도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을 안고, 이제는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이별보다 아버지가 지켜보지 않는 자리에서 어머니를 가게 할 수 없다는 소망이 무너지는 분노 때문에 그는 울고 있는 것이다. 두메는 알 수가 없었다. 왜 홍이아버지가 오질 않는가를. 그것은 비단 두메뿐만 아니었다. 모두가 그러했다. 모를 일이었다. 야속한 놈 인정머리 없는 놈, 뉘 땜에 병이 났겠느냐, 날이면 날마다 욕을 하는 방씨에게도 용이 오지 않는 일은 수수께끼였다. "홍아." "..." "거기나 가보자." "가면 뭘 해." "그래도 여기서 울고 있으면 별수 있나?" 가면 뭘 해 하고서도 홍이는 걸음을 옮긴다. 행여 울지도 몰라, 홍이는 수없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소년은 해란강의 바람이 몹시 부는 길목에서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눈만 내어놓고 서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러고 서 있지는 못했다. 그새 집에서는 어머니가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불현듯한 생각. 홍이는 안절부절 못하다 그만 돌아선다. 천천히 걷다가 걸음이 빨라지고 다음은 허둥지둥 미친 듯 뛴다. 따라서 그의 뒤를 따라가는 두메도 허둥대다가 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홍이의 심정이 전염되자 자신의 심정이 된 것처럼, 냉철한 두메가. 홍이엄마를 두메도 좋아했었다. 그러나 두메는 이 순가 임종도 못 본 아비의 임종을 혼동하고 착각했는지 모른다. 집에 갔을 때 "막 의사가 다녀갔어." 하고 아자가 말했다. 길서상회댁에서 특청을 하고 인력걸 보내어 모셔왔다는 것이다. 그전에도 의사는 서희 간청으로 몇 번 왔다갔었다. 의사가 왔어도 병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진통제를 쓰는 것, 보혈 주사를 놓아주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이 있을 순 없었지만 의사가 다녀간 후면 월선은 반드시 홍이를 찾았다. 고통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때도 고통이 가셔질 땐 홍이를 찾았고 고통스러울 때는 홍이더러 나가라 했다. 마음속으로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 용이에 대해선 일절 말이 없었다. 이 여자에게 이런 고집이 있었나 싶으리만큼. 그러나 죽음에 대비하는 것이었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맘에서지 늘 몸을 닦아달라 했고 머리를 빗겨달라했다. "널 찾는다. 어서 가봐라." 안자가 말하지 않아도 홍이는 방씨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두메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작은방으로 들어가고 홍이는 월선이 누워있는 안방으로 들어간다. "옴마!" "운냐." 커다랗고 푸른기가 도는 눈이 홍이를 쳐다본다. 좀 생기가 나는 것 같다. "어디 갔더노." "바람 좀 쏘이고 왔다." "치분데 감기 들믄 우짤라꼬?" "이 사람아 너 걱정이나 해라." 방씨가 말했다. "숙모요." "와." "우리 홍이, 에미 병 땜에 많이 야빘지요?" "아무리 야비도 아픈 사람만하까?" 월선의 얼굴은 주먹만했다. 몸도 오그라든 것처럼 작아졌다. 본래 뼈대가 가늘었던 여자, 그 가는 뼈대가 드러난 손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옛날과 다름없는 것은 푸른기를 띤 눈뿐이다. 아니 옛날보다 더 크고 더 맑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이상하게도 어떤 충만감조차 넘실거린다. 육체적인 고통이 멎는 순간의 그의 눈은 항상 그러했다. "홍아." "응." "니는 후제 커서 이사가 됐이믄 좋겄다." "공불 많이 해야지 내가 어떻게?" "그렇구나. 공불 많이 해야겄제? 공부 많이 하는 것도 그리 좋은거는 아니다. 공부도 할라 카믄 피가 마를 긴께. 그라믄 니는 그만 하동 가서 장시를 하는 기이 좋겄다. 베장시, 비단장시 말이다. 난리가 나도 짊어지고 달아나믄은 팔아감시로 굶지는 않을 긴께 안 그렇나? 그렇제?" "옴마는 참," "부자도 안 좋을 기고 너무 기찹아도 못 살 기고 그냥저냥 묵을만치 하고 사는 기이 젤 좋다. 식구들이 화목하고 자식은 서넛 낳아서 나는 똑 그랬이믄, 우리 홍이가 그랬이믄 싶다." "사람도, 아 그만해두어라. 얘기도 너무 하믄 지친다." 방씨는 울컥울컥 치미는 것을 삼키며 이불깃을 끌어당겨주며 말했다. "내가 또 기운이 빠지고 아파오믄은 말도 못할 것 아니오. 숙모님은 내 맘도 모름시로 걱정만 해쌌소. 홍아," "옴마, 이자 고만 얘기해라. 옴마 하라 카는 대로 할 긴께, 기운 빠진다 카이." "아니다. 지금은 아주 편안하다. 소원대로 말하믄은 사모관대하고 대례청에 서는 니를 보고 접지마는, 니겉이 착하고 세상에서 젤 이삔 니 각시, 쪽도리 쓴 것도 보고 접지마는 이대로도 괜찮다. 이자 다 컸고 어디 가도 구박받을 나이는 지났인께." "얘비 에미가 있는데 와 구박을 받을 기고, 실데없는 걱정한다. 니 일신 생각이나 좀 해라." 참다 참다 방씨는 화를 낸다. "야아. 그거를 누가 모립니까. 에미 애비가 있어도 어린거는 불쌍한게요. 우리 홍이가 열 살도 못 됐다믄 참말로 가심이 아플 깁니다." 홍이는 울고 "무신 인연이, 이런 인연이 있노." 방씨는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이러기를 또 며칠. 섣달 그믐날 해거름이었다. 공노인댁 방씨는 제사차림을 위해 객줏집으로 돌아갔고 공노인도 잠시 방을 비운사이 망태 하나를 어깨에 걸머지고 초췌해진 사내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솜을 두어 누덕누덕 기운 반두루마기도 벗어던진다. 그는 마루 끝에 망태를 내려놓고 신발을 벗는다. "홍아!" 부엌에서 쫓아나온 안자가 외쳤다. "홍아! 아버지 왔다!" 홍이 안방 문을 박차듯 뛰어나온다. 동시에 작은방의 문이 떠나 갈 듯 열렸고 영팔이와 두메가 나왔다. 홍이의 얼굴은 홍당무였다. 영팔이 얼굴도 벌갰다. 두메 얼굴만이 푸르스름하다. 모두 벙어리가 되어버렸는지 마루에 걸터앉아 찌가다비를 벗고 있는 용이 뒷모습을 쳐다본다. 마루에 올라선 용이는 털모자를 벗어던졌다. 솜을 두어 누덕누덕 기운 반두루마기도 벗어던진다. 그러는 동안 말 한마디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몸 전체에서 뿜어내는 준엄한 기운에 세 사람은 압도되어 선 자리에 굳어버린 채다. 방문은 열렸고 그리도 닫혀졌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월선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신판이 끝내고 왔다." 용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럴 줄 알았십니다." "임자." 얼굴 가까이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 떤다. 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댄다. 얼마 후 그 경련은 멎었다. "임자." "야." "가만히," 이불 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머리를 쓸어주고 주먹만큼 작아진 얼굴에서 턱을 쓸어주고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어이구우! 니가 이서방을 기다리노라, 어이구우! 이 불쌍한 것아!" 방씨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러는 사이 미리 준비해놨던 월선의 옷 한 벌이 지붕 위에 올려졌고 안자와 순이네는 사자밥을 짓는다. 공노인은 허허어 허허어 하며 앉았다간 서고 섰다간 앉고,영팔이 두메는 눈물만 뚝뚝 떨어뜨린다. 기별을 받은 길상이 달려왔다. 그러나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물러나왔다. 용이 혼자서 염을 하겠노라 했기 때문이다. 시신이 놓인 방에서 물러나려다 홍이 뒤쫓아왔다. "옴마!" 가슴 위에 모아놓은 뼈뿐인 손을 잡고 다시 "옴마!" 홍이 계속하여 옴마! 옴마! 부르며 방에서 뛰쳐나간다. 오랜 병 끝이어서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해서 장례는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입관이 끝나고 굴건제복한 홍이와 삼베두건을 쓴 용이 침착하게 빈소를 지키며 문상객을 맞이한다. 생전에는 외로웠던 월선이었으나 죽어 누워 있는 그의 빈소는 쓸쓸하지 않았다. 객주업과 거간업으로 알음이 넓었고 적당히 교활하면서 수완가인 반면 사욕이 없는 탓으로 쌓아올린 공노인의 지반이 있었으므로 그의 영향 하의 시정배라 할까, 그런 남정네들이 공노인의 면을 보아 많이들 다녀갔다. 국밥집 시절의 단골이던 역시 엇비슷한 사람들도 더러 다녀갔고 홍이 학교의 선생님, 친구들도 문사 왔었다. "이서방 넋 빠졌구먼. 정신 차리라구. 멀지 않아 다 갈 건데 뭘 그래?" 거간 권서방이 그런 말을 했다. 신전 박서방과 엿도가 하던 홍서방은 눈을 꿈뻑꿈뻑하며 "홍아, 네가 젤 딱하구나. 엄마 보고 싶어 어쩔래? 그럴수록 공부 열심히 해야지." 그런 위로의 말을 했다. 그리고 길서상회 서희가 문상 온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그는 남과 다름없이 절차대로 예를 치렀다. 옛날 하인이나 다름없는 작인 용이에게 맞절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영팔이는 너무 놀래어 얼굴빛마녀 샛노래졌다. 그러나 용이와 홍이는 서희의 정중함에 답하는 정중함으로 대하였을 뿐 비굴이나 감사의 특별한 변화는 나타내지 않았다. 빈소에서 나온 서희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언저리를 닦는다. 영팔의 얼굴은 다시 한번 노랗게 변하였다. "김서방." 손수건을 소매 속에 넣으며 서희는 또 뜻밖에 영팔이를 불렀다. "예 얘기씨! 아, 아니 마님." "고생이 많았지요?" "고생이랄 게..." "조금만 참아요. 올해 안으로 우린 돌아가게 될 게요." "예." 영팔이 실감도 하기 전에 서희는 어느덧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인력거에 오르고 있었다. 영팔이 뒤쫓아가서 허리를 굽히고 서희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리고 인력거는 떠났다. 넋을 잃고 서 있던 영팔이 작은방으로 쫓아들어간다. 별안간 그는 어흥! 어흥! 하고 소같이 울어젖히는 게 아닌가. "어이구우 어이구우 일 년만 더 살았어도, 어이구우 무신 놈의 복이 그리 없노오!" 도라가게 된다! 꿈 같은 얘기, 꿈 같은 일이 영팔을 울게 한다. 월선에 대한 연민과 그간의 세월의 설움이 울음과 더불어 목구멍에서 꺼이꺼이 넘어오는 것이다. "어이구우!" 이 북새통에 두메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초상전에는 줄곧 붙어 있던 두메가 묘한 소외감 때문에 사라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한 가지 불상사는,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던 공노인이 마루에서 발을 헛디뎌 마당에 굴러떨어져 발을 삐인 일이다. 대단찮다고 우겼으나 운신하기가 어려우니 결국 방에서 벽을 등지고 앉을 수밖에. 영팔이와 길상이 그리고 다시 밤샘하겠다고 찾아온 권서방 해서 네 사람은 한방에서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술상이 들어오고 긴 밤을 새기 위해 이들은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뭐니뭐니해도 일을 당하고 보니 우리는 객식구라. 아무리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도 이서방 홍이만은 못하네. 그걸 나는 깨달았구만. 그 불쌍한 내조카딸한테 홍이라도 없었더라면 상주 없는 빈청 내 어찌 그 적막한 꼴을 보겠나. 기왕지사 사람은 갔고오 이서방하고 홍이가 저러고 있으니 한결 마음에 위로가 되는구만. 고마운 생각도 들고," 공노인이 눈물을 홀짝이며 말했다. 월선의 죽음으로 하여 공노인과 용이 부자간의 석연치 못하였던 감정은 눈녹듯 하였고 그들 부자가 주관하는 장례는 공노인 마음을 다시 없이 애틋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에 미치지 못한 자기 슬픔에 희환보다 만족하는 것이기도 했다. "예, 맞십니다. 안 낳았다뿐이지, 홍이가 산에 왔일 적에... 자기 낳은 자식인들 그러겄십니까?" "암, 암, 남 낳은 자식이라도 저만만 하다면야, 내 낳은 자식 열이면 뭘 해?" 권서방도 영팔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여댄다. 으레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감정이란 확대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좋은 것은 더욱더 좋게, 나쁜 것은 더욱더 나쁘게, 슬픔이나 기쁨도 표준을 잃기 쉽다. 그러나 용이와 홍의 슬픔이나 죽은 사람에 대한 애정은 그들이 느끼는 것 이상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돌아가시고 보니 아지매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 주는 사람이었던가 그게 깨달아지는군요. 나도 울적할 땐 그분을 찾아가곤 했었는데, 이젠... 누굴 찾아가서," 길상은 밖에서 술을 많이 하고 온 눈치였고 계속 술을 마시면서 말했다. 말씨는 침착했으나 주정을 부릴 듯 위태위태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얘기씨도, 아, 아니 최참판댁 그분도 눈물을 흘리시던데, 누가 그거를 생각할 수나 있었겄나. 길상이가 있이니 말하기는 안된 일이지만 나는 세상에 그분 눈에 눈물이 있다는 건 참말이제 생각해본일이 없었구마. 하도 이상해서 아마 애기를 낳고 아이 어무니가 되고 뵈 사람들 설움을 알게 된 기이 아닌가 하고," "그거는 아닐 겝니다. 그 사람 애기어멈이 되어 울었던 건 아닐게요. 월선아지매, 그분에 대해서만은 어머니를 대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있었지요." "그럴까?" 영팔이는 아무래도 실감할 수 없는지 맹하니 길상을 쳐다본다. "나도 때때로 어머니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네에, 어머니같이 말입니다. 가서 주정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하고," 길상은 어지간히 휘청거리는 것 같다. 생과 사 그 틈바구니의 빛깔이란 참으로 미묘하다. 시신은 아직 방에 있고 땅속에 묻히는 그 동안 숨막히는 그 시간을 사람들은 고인과 그리고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얘기로 하여 숨구멍을 트고 있는 것이다. 슬픔이 덜한 사람은 그것으로 보충하는 마음, 슬픔이 깊은 사람은 그것으로 위로받고 "하야간에 우리 월선이는 마음시 하나 가지고 그 기박한 팔자를 곱게 넘긴 셈이기는 하지. 내 이서방을 미워도 하고 욕도 하고 했었지마는 실상 그 사람만큼 분명한 사내도 드물어." "그 그건 예. 맞십니다. 아랫도리 벗었던 시절부터 용이하고는 이날까지 예, 보기는 유한 것 같지마는 속으론 지 성미를 굽히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못 합니다. 그러나 나도 모릴 일이 많고, 아, 이분 일만 해도 홍이가 그러크름 산가지 와서... 하 참, 산판일을 굳이 끝내고야 오느냐 그겁니다. 도무지 그럴 만한 일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라고 아프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마는 위중하다는 것도 홍이가 산에 오기까지 입을 다물고 말을 해야지요." "영팔이아제 그거는, 그거는 알 만해요. 왜 용이아제가 그랬는지," "와 그랬이까?" "그렇다 카더라도." "그리고 또 월선아지매가 죽을 것이라는 확실한 일을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받을 수 잇는 고통을 다 받아보자는 심산이 아니었을까요." "허 참, 우리네는 모를 일이구먼." 권서방이 웃었다. "나는 이 세상에 나서 저 빈청에 있는 용이아제의 그런 얼굴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 얼굴이 무섭고 가슴이 저립니다. 슬픔 같은 것하고 비교가 안 돼요. 온 세상에 그럴 수 있습니까?" "글세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고 우리네야 그냥 살면 사는가보다 하고," 권서방이 중얼거리며 길상의 술잔에 술을 붓는다. "옛말에 사람이란 관뚜껑에 못을 박아야만 그 사람이 어떻다는 말을 할 수있다 했는데 그 말이 맞는 말이야. 내 조카딸도 따지고 보면 못살다 간 것도 아닌 성싶네. 그리고 이서방도 복 없단 말은 못할 것 같애. 흔히 사람들은 팔자치레라는 말을 하는데 다지고 볼 것 같으면 육례를 갖추고 만난 부부라도 필경엔 남남 아니겠느냐 그거지, 여기 앉은 사람들이야 내 조카딸 근본을 아니 하는 말인데 그러니까 형수뻘 되는 사람이 그런 처지가 아니었거나 또는 이서방 모친이 그런 처지인데도 불고하고 허혼을 했다 한다며 물론 이서방하고 내 조카딸은 은앙새겉이 잘살았겠지. 그러나 만났다간 헤어지고 헤어졌다간 또 만나고 그 끈질긴 인연하고 기구한 세월이 반드시 음,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 맘이 더 굳게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면은 반드시 박복했다 할 수만도 없을 것 같애." "형님, 거 풍월 아는 소리외다." "아암 풍월 알구말구. 내 비록 늙고 못생긴 마누라, 자식 하나 생산 못한 마누라지만 그 할망구 하나 보고 살긴 살았으되, 그러니 사람에 미친 일은 없으나 나는 미치는 성미야. 약촐 캔답시고 산에 미쳐서 다녔고 또 미친 일이 많았지. 남이 보기에는 헛일하고 고생한 보답 없다 하겠지만 내 마음에 열심히면 그게 보람이요, 미치는거지." "지금이니까 그러시지. 조카딸 생전에야 어디 그러셨소. 이서방을 눈에 까시처럼 생각했던 게 사실이지 뭐." "그거는 또 나대로의 애정일 게고 아무튼, 어쩐지 이서방이 이제는 내 아들 같고 홍이가 내 손자 같네. 이렇게 외롭잖게 그 아이가 저승길을 떠났으니 사람이란 어떤 뜻으로 외롭지 않게 죽는 그것이 복인 것 같단 말이야." 출관하는 날은 북쪽 날씨치고는 따스한 편이었다. 하늘도 맑았다. 흰 곷상여는 서희가 경비를 내어 만들었고 아자랑 순이 순이네 그리고 시집간 새침이까지 흰 베치마 하나씩을 얻어입었다. 두건은 용이말고 영팔이 두메도 얻어썼고 상주는 홍이 혼자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뒤따랐다. 생전의 월선을 아는 사람 들이지만 흰 상여의 장례행렬이 조촐하여 구경삼아 따라가는 이도 적지 않았다. 돌아서 한참을 가 양지바른 곳이 장지였다. 상여가 멎고 바람에 펄럭이는 만장이 멎고 그리고 사람들도 멎었다. 사람들 속에는 꽤 많은 아낙들이 끼여 있었다. 그들은 홍이 칭찬에 침이 마를 지경이었고. "이 산소느 길서상회 그 댁에서 마련했다잲이요?" "상여도 그 댁에서 맨들었답매." "어쩌믄? 친척도 아니라든데?" "그 집 도렝이 아바이하고 무시기 걸린 게지. 그 댁 바깥주인으 본시 하인이었으니까 말이." "아무튼 죽어서 호사하는 것도 괜찮구먼." "무시기, 죽어 호사하느 기 어렵지비." 미리 간 인부들이 파놓은 곳에 막 하관을 하려 했을 때다. 돌연 여자의 곡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곡성이 나는 곳으로 머리를 돌린다. 두 아낙이 이곳을 향해 달려온다. 부고를 받고 오는 임이네와 영팔의 처 판술네였다. 비호같이 다려오는 것은 임이네였고 판술네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뒤따르고 있었다. "하관하지." 영팔이 명령했다. 관은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아이고 성님! 이기이 웬일입니까아! 아프다 아프다 해도 이리 쉬이 갈 줄 내 몰랐네에." 임이네는 달려오며서 가락에다 사설을 넣는다. "성님! 성님! 우리 홍이 두고, 세상에 이럴 수도 있십니까? 아이고오! 아이고오!" 묘구덕 옆에까지 바싹 다가가 앉은 임이네, 주먹으로 땅을 친다. "마지막 가는 길에 얼굴 한분도 못 보다니! 아이고오 아이고오!" 판술네는 묘구덕까지는 미처 가지도 못하고 "아이구우 성님요! 이이기 우찌된 일입니까." 하며 그 말만 되풀이하며 운다. "시끄럽다. 일질에 저리 좀 비키라!" 영팔이 자기 아낙을 발길짓하듯 떼밀어낸다. "야, 야," 판술네는 민적민적 물러서면서 운다. "흥, 저 헛울음 좀 보게? 청산유수구만." "무시기 저리 슬프겠음? 참말로 흉내 잘도 낸당이." 아낙들이 수군거린다. "아이고오! 아이고오! 저승차사도 무심하고 염라대왕도 무상하지. 부처 겉은 우리 성님 오사죽은 시키다니, 아이고! 아이고오! 장개가는 우리 홍이 와 안 보고 갔십니까! 야속하요! 성님! 성님 야속하요! 그리 소원하더니만 아이고오 아이고오 형제같이 의지하고 내가 살았는데 이자는 누구 믿고 살라 하요! 한번 가믄 못 올길을 언제 다시 불꼬! 아이고 성님! 기왕지사 갈라거든 고향에나 가서 죽지. 손발 잦아지게 애탕으로 끓탕으로 홍이 생각하더니만 와 며느리도 못 보고 혼자 갔고! 아이고오! 아이고오! 불쌍한 우리 성님!" 한 손으로 코를 풀어 뿌려가면서 자지러지게 입담도 좋은 곡성이다. 그러나 남정네들은 묵묵히 묘에 흙을 덮고 있었다. 한참을 울고 난 임이네도 멋쩍었던지 치마를 끌어당겨 콧물을 닦고 몇 발짝 물러나 앉으며 "위중하믄 위중하다는 기별이라도 있어야제. 그랬이믄 생전에 얼굴 한분이라도 보았을 긴데 세상에 이리 야속할 데가 어딨겄소. 모두 내식구고 나만 군식구란 말이든가? 참말로 인심 야박하구나." '살판났는데 머가 야박하고 야속한고?' 영팔이는 삽질을 하면서 삽으로 내리쳐주고 싶은 미운 생각을 참는다. 누구 한 사라 와서 이이네 참으라고 말리는 사람은 없고, 더는 아이고 대고 하기만 민망했던지 미적거리고 있던 임이네 "흥 굴러온 돌이 본돌 치고 객이 주인 노릇 한다 카더니만," 하고 삽질하는 영팔의 어깻죽지를 노려본다. 상대를 하며 시끄럽다 생각하면서도 영팔의 참을성이 터진다. "거기 좀 비키소. 곡이사 상석 때나 하고," 떼밀어낸다. "와 사람을 치노." "일질에 걸거치니께 그렇지." "말로 하지. 곰배팔가? 사람을 치기는 와 쳐?" "초상 끝이 좋을라 카믄, 저어기 가서 가만 앉아 있이소." "초상 끝이 좋을라 카믄? 어디 두고봅시다." 드물게 양보를 한다. 그리고 물러는 나되 "흥! 그년 팔자 늘어졌고나." 조그만 목소리로, 그러나 영팔이 들을 수 있게 뇐다. "저것을 그만!" 영팔이 역시 작은 목소리로 뇌며 분노를 꿀컥 삼킨다. 어쨌거나 둥그스름하게 무덤은 만들어졌고 일꾼들이 삽으로 흙을 다지면서 장사는 마지막에 이르고 있었다. 9장. 아귀지옥 장례가 끝난 뒤 안방에는 빈소가 있었고 작은방에는 용이 부자와 영팔이 거처하게 됨으로 임이네는 부득불 판술네와 함께 객줏집에 묵을 수밖에 없었는데 임이네의 안달은 이미 모두가 예사했던 일. "비단가리 하나라도 챙기야제. 남 좋은 일 와 시킬 기고. 이게 다 누군 건데? 우리 홍이, 홍이 거란 말이다." 해가 뜨기도 전에 달려와서 들으란 듯 집 앞뒤를 쏘다닌다. 그리고 잡아먹기라도 할 듯 서슬 푸르게 영팔이 내외를 대하는 것이었다. 이틀 밤이 지난 뒤 "삼우제나 보고 갔이믄 싶지마는 아지매는 우리 판술네하고 함께 집에 가 있이소." 영팔이 입에서 말이 떨어지자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임이네는 팔을 걷고 나섰다. "보자보자하니, 해도 가이방해야지 그래, 가라 오라 대관절 판술아 배가 먼데 그러요?" "여기 있어 봤자 동네방네 우세스럽소. 누구 귀머거린 줄 아나?" "그래 귀머거리가 아니믄!" "죽은 사람 얘기는 와 하고 댕기요! 우리 홍이가 있어서 사람 구실을 했다?" "그거야 틀림없는 얘기제. 우리 홍이 아니었으믄 상주 하나 없는 생이. 꽃생이큰 머하고 금생이믄 머하노. 가련한 그 꼴 보기가 참 좋았겄소. 내가 어디 틀린 말 했단 말이오?" "임이네를 잡고 말하느니 마차 끄는 말이나 보고 얘기하지." "허어어, 내 말 사돈이 한다더니, 사람 좋은 체 그러지 마소! 누가 그 속을 모를까 봐서? 속에는 열두 꼬리가 달린 능구렝이가 들어 있다 카이. 피도 살도 안 닿았는데 만사 제폐하고 여기 와서 친정 오래비 행세하는 거는 무신 까닭이오. 마음이 시꺼멓다! 마음이 그래 집 하 채라도 거기 몫이 될 성싶으든가? 입다 남은 옷가지 임자 없는 살림이니 나도 좀 차지하자 그런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내 눈이 시퍼렇기 살아 있는 이상은." "이런 벼락을 맞아도," "돌아앉은 구신도 물밥으로 달래야지 나한테 우떻기 했다고? 내 맘이 좋아야 모지라진 빗자리 하나라도 얻을 기구마." 못 견디겠던지 홍이 작은방에서 뛰어나왔다. 용이는 장례가 끝난 뒤 이불을 쓰고 송장같이 밤낮으로 자고 있는 상태였다. "가소! 가란 말이오!" 악을 썼다. "뭐라꼬? 니 누보고 하는 말고? 여기 이 사람보고 하는 말이제?" "어머니가 무슨 상관이오! 어머닌 아무 상관 없단 말이오! 권리도 없고! 끝내 그러면은 내 이 집에다 불을 지르고 말 기니가 네! 불을 지르고 싹 불을 지르고!" 하며 흐느껴 운다. 임이네 어세가 누그러진다. "지랄한다. 다 니 생각해서," "내 생각할 거 없어요. 어머니 마음보나 고쳐요! 무슨 경사난 줄 압니까? 남이 부끄럽소!" "어이구 자식도 에미 마음을 모르고, 우째 나는 이리 인덕이 없는고 모 르겄다." 흐지부지 끝이 났으나 판술네만 혼자 돌아갔고 임이네는 전과 같이 설치고 다니지는 않았으나 바위틈에서 대가리만 내밀고 외계를 살피는 뱀같이 객줏집 일각에 도사리고 앉아 사사건건 귀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객줏집으로 후퇴한 것은 용이와 홍의 날카로워진 감정의 칼날을 패해보자는 것이요, 둘째는 공노인의 내외가 월선이 남긴 재산에 대하여 상당한 재량권이 있는 거승로 짐작한 때문인데 그러면 공노인 내외는 어째서 그처럼 사갈시하던 임이네를 붙여놓고 있느냐, 체면상 박절히 할 수 없는 때문이지만 그보다 용이와 홍이를 대접해서 형식이나마 임이네를 존중해주었던 것이다. 사흘 만에 용이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그는 정말 사흘동안 깊은 수렁과 같은 잠 속에 빠졌던 것이다. "홍아." 옆에 앉아 있던 홍이 "아부지." 반가웠던 것이다. "나 냉수 한 그릇 주라." "야." 홍이 냉수를 떠다 건네준다. 단숨에 다 마시고 빈 그릇을 놓으며 "며칠인가?" "사흘 밤 내리 계속해서 잤소." "음... 영팔이아제는 어디 갔노. 집에 갔나?" "아니오. 판술이옴마만 가고, 아제는 가라 캤는데 객줏집 할아부지가 좀 기다리라 캐서, 그라고 길상이아제도 그랬는가배요. 좀 있으라고," "그런데 어디 갔노?" "심심하다 하서 권서방하고 술 마시러 가싰는가배요." "..." "점심 좀 잡수시야지요?" "음, 그래야겄지." 이 무렵 영팔이는 박서방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정초라 손님이 없고 일거리도 없는 거게에 권서방과 함께, 술은 권서방이 냈다. 조선서 공노인이 돌아온 후 공노인의 은덕으로 몇 군데 흥증을 붙여주어 한겨우 동안 호구지책은 되었으나 영팔이를 불러내어 술까지 사는 데는 권서방 나름의 은근한 술수가 있었다. 길서상희 뒤편에 있는 땅이 아직 팔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을 영팔이가 어떻게 좀 다리를 놔주었으면 싶어서다. "금년 설은 가꾸로 쇴는데, 여기 이렇기 앉아서 술을 마신께 별놈의 생각이 다 나누마." "그럴 거야. 그새 김서방도 많이 늙었거든." 술을 못하는 박서방은 곰방대를 물고 콧구멍에서 연기를 내며 말했다. "내가 여길 떠난 지도 칠팔 년 될거로. 그땐 신을 삼아서 박서방 한테 넘기고 주갑이를 만낸 것도 여긴데 광산에 일자릴 얻을라꼬 함께 떠난 일 하며... 지금 내 심정이 우떤지 당시들은 모를 기구마." 월선이 죽어서 쓸쓸한 것도 그렇지마 뜻하지 않았던 귀향에의 서광이 그의 마음을 몹시 복잡하게 한 것이다. 희비쌍곡이라고나 할까. 우직한 영팔이는, 자다가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그 기막힌 소식을 되새겨보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영팔은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초상집에서 혼자만 좋아하고 있는 것은... 참말로 나도 야박한 놈이구나. 월선이가 죽었는데, 죽은 지 며칠이 됐다고,' 그러나 어느새 행복의 나라고 떠날 배를 타기 위해 뱃머리에 서있는 아이같이 영팔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한다. 행여 배가 안 오며 어떻게 하나, 과연 나도 태워줄 것인가, 설레임은 불안과 초조로 변해간다. '이거는 상가집에 온 까매기 겉은 것 아니가. 남은 사램이 죽었는데 좋아서 지랄을 하고 있으니, 하기사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산사람은 살아야제.' 하기도 했으나 들뜨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또 의기소침하는 마음상태의 되풀이는 종내 신경질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죽은 김훈장도 모습을 드러내며 영팔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모르기는 왜 몰라. 누군 안 겪었나? 고향산천 버린 것도 마찬가지 사고무친한 곳에 와서 고생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래도 김서방, 우리네보담은 나은 편이야. 길서상회댁 든든한 울타리가 있어, 함께 온 일행들이 일가친척같이 서로 의지하고 살았으니," 권서방 말에 영팔이는 "그거는 그렇소만, 김훈장이 돌아가시고 홍이네도 죽고 보니 그뿐이겄소? 참말로 말 못할 일이 많구마. 하기야 살아남은 사람은 궂이 일 마른 일 다 보지마는..." "아까 말이 났으니 그러는데 주갑이 그 사람 요즘에 어디 있는지 김서방 아요?" 박서방이 물었다. "일정한 거처가 있겄소? 연해주 방면을 돌아댕기겄지요." "글세 작년에 난데없이 여기 왔더구만." "섣달 그믐께 이서방하고 함께 왔지요?" "그랬다더구먼. 만나기론 초정이었지." "뜻밖에 산판으로 찾아왔십디다. 그래서 이서방하고는 용정으로 가고 나 는 집으로 갔인께." 박사방은 킥킥 웃는다. "하여간에 그만치 재미있는 사람도 드물 거야. 만났다 하며 얘깃거리가 생기거든. 그때 마침 나는 다리가 아파서 절룩거리고 있었는데 아 글세 만나자마자 다짜고짜로 발바닥에 침을 놔주겠다고 덤비지 않겠어? 침을 함부러 맞나? 잘못 놓으면 흔히 죽는 수도 있는데 뭘 믿고. 그래 안 할려고 했지. 했더니 허허 그러들 마시랑께 내가 박사방한티 해를 끼칠 사람인지 아닌지 잘 알 거 아니어라우? 해서 억지로 발을 내밀긴 했으나 아무래도 미심쩍어. 이놈의 뜨내기가, 싶어 겁이 더럭 나는 거라. 침을 막 놓으려는데 발을 빼버렸지. 오매 워째 이런다요? 그래 주서방이 의원도 아니겠고 했더니 누군 뱃속서부텀 배워 나오는 사람 있더란 말씨? 그러는 거 아니어라우, 사내장부 죽는 한이 있어도 간이 그러크름 콩마혀서야, 싸가지없는 소린 그만두고, 그래 할 수 없이 하하핫..." "그래 어찌 되었나." "씻은 듯이." "주갑이가 우리한테서 도망친 것이, 그 말 할라 카던 긴데, 우떤 의원한테 반해가지고 간다온다 말없이 가 기라요. 그 한의한테서 침놓는 거는 배웄을 기거마는," "그 얘기는 하더군. 한데 전과는 좀 사람이 달라진 것 같고." "그 한의가 누군지는 모르지마는 독립운동하는 사람 같더마." "옳아. 바로 주서방 하는 수작이 독립운동하는 것 같더라 그 말이오. 아주 유식해지고," "무식했일 때도 주갑이 하는 말은 멋인지 뼈대가 있었지요. 사람이 수숫 대처럼 남보기 헐렁벌렁해서 그렇지." 권서방은 주갑이를 모르기도 하려니와 무슨 궁리를 하는지 얘기에 끼여들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독립운동이고 머고우리네 무식군이야 무슨 일을 하겠나만 그것도 따른 식구가 없어야 말이지." "그러니까 처자식이 거물장이라 안 하요." "식구란 웃목에 밥상 보듯 늘 그런데 막상 떨치고 떠날라 하며 그게 그렇게 안 되더구먼." "없인께 그러지요. 내 없이믄 못 살기라는 생각을 한께요. 그까짓 묵고 사는 걱정만 없다믄 남자란," 하는데 권서방이 "김서방, 나 청이 하나 있는데," 허두를 꺼내었다. "야?" "부탁이 하나 있소." "나한테 말이오?" 어리둥절한다. "김서방도 알다시피 일정한 직업도 재주도 없는 내가 거간이랍시고," 시작하여 권서방은 신세타령을 한참 늘어놨다. "해서 얘긴데 힘 좀 빌립시다." "하참, 나한테 무시 힘이 있다고," "길서상희 바깥양반하곤 잘 아는 터가 아니오." "그거야." "다름이 아니라 장터에 그러니까 곡간 뒤에 빈터 말인데 그게 덩어리가 크거든요." "그걸 팔려고 내놨다는 소문은 벌써부터였지. 한데 아직 팔았다는 말은 없고 또 듣자니까 곡간도 그렇고 가게도 모조리 판다 하고... 김서방. 날 좀 살게 해주소. 그걸 내가 맡아서 팔아주면은 목돈을 자아 조그마한 가게라도 하나," 영팔이는 서희가 한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내 사정을 길서상희 바깥양반한테 말을 좀 해주며은." "나는 잘 모르겠소만 그런 일이라 카믄 공노인이," "그 늙인이 넋나갔어요. 세상만사가 다 귀찮다는, 저번에 조선 갔다 오 더니만 영 폭싹 늙어버리고 이번엔 또 조카딸이 죽고 보니," "그, 그것도 그렇겄소만, 말하는 기야 어렵잖지마는 그러세, 그 사람들 생각은 따로 있지 않겄소?" "되든 안 되든 말이라도 한번 건네주시오. 김서방 나 알지 않소?" "말만 엄벙했지, 재주는 없구먼." 박서방이 끼여들었다. "옳아, 내겐 시 짓는 재준 없네." "엿 고우는 내주도 없고," "그럼." "엿판 메고 떠난다는 얘기는 했었지." "안 되며 별수 있나. 사는 날가진 살아야지." "김서방." "야." "엿판 메고 떠나는 것 볼 수 없지. 악마구리같이 우는 새끼들, 젊은 마누라 뿌리치고, 안 그렇겠소?" "그야," 허허 하고 영팔이 웃는다. "하니, 어려운 일 아니거든 말 좀 건네주라고, 뜨물에도 아이 생기더라고 뉘 알아요?" "말이나 해보겄소. 그놈의 가나오나 계집 자식 땜에," "김서방이야 이젠 고생 다 했지. 범의 장다리 겉은 아들아이가 셋," "하긴 이자 다 컸지요. 홍이애비 일이 난감하지.' "난감할 것 뭣 있소.' 마음이 느긋해진 권서방이 명태를 찢어 초간장에 찍어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국밥집 아주머니가 집도 한 칸 남겨놨겠다 그간 번 돈도 수울찮을 건데 식구가 많단 말가," "속 모리는 소리 하지도 마소. 은금보화가 산더미겉이 쌓여도 그사람 맴이사," "죽은 그 아주머니 생각 땜에 그렇다 그거요?" "사내자식이 그런 거사 잊어부릴 수도 있겄지요. 거 세상에 사내치고 못 할 것은 계집 하나 잘못 마내는 일인데," "홍이엄마가 대단하긴 하지." "대단할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요. 쇠라며 다 삼키는 부가사리라 카 이. 자식이고 가장이고 살가죽가지 뺏겨묵을 계집인께. 웬만하면 이런 얘기 하고 접지도 않고 사내가 얼매나 못났이믄 친구 계집 험담할 기요. 나는 피도 살도 안 닿은 남이지마는 우떤 때는 꼭괭이로 그만 콱 찍어 직이부맀이믄 싶을 때도 있다 카이. 젊은 시절에도 영악하고 욕심이 많았지마는 그래도 촌에 살아 물정은 모리더니 도방에 나와 세상물정을 알고서부터는 날로 느는 게 패악이고 날 잡아묵으소, 그 판이라, 이거는 머 남부끄 러운 줄을 아나," 흥분한다. "사내가 물러서 그런 게요. 이서방이 용해서 그렇다니까." "이서방이 용해? 그거는 모리는 소리라요. 그 사람이 그렇기 사는 거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고집이제, 순 고집이라요. 내용을 몰라 그렇지." "그래도 계집이란 말로 안 되면 매로 다스려야지." 그 말에 박서방 "장담하구먼요. 예사 제가 못하는 사람이 남의 말은 하기 쉽지. 하하 핫..." 놀려준다. "에키 순," "말이 무섭겄소. 매가 무섭겄소. 숨 끊어지지 않는 한... 용이 아니더믄 그 계집 뒤졌거나 다리 밑에 거적 쓰고 앉는 신세엿일 긴데 사람으 탈을 쓰고 그걸 모르는데 말해 머하겄소." 그 정도로 그쳤으며 임이네 과거사에 언급은 안 한다. 듣는 사람들도 남자들이라 미주알고주알 파고 묻지는 않았다. "아까 권서방은 집도 남기놓고 돈도 남기놨을 기라 했지마는 두고 보라고요. 참말로 구신이 곡할 일들이 생길 긴께," 영팔이는 한숨을 내쉰다. "사람이란 팔자가 기박하다 보믄은 인성이 달라지기도 한다고들 하더라만 설령 그렇다 카더라도 그것도 정돠 있는 기리요. 고슴도치도 제 샜기는 귀타 카든데 제 주둥이 하나밖에 모리는 그기이 어디 사람인가." 영팔은 꾸역구역 올라오는 것을 꾹꾹 누르듯 술을 들이켠다. "제에기, 아니꼬운 꼴 보기가 싫어서 한시라도 집에 가고 접지마는 무신일인지 좀 기다리고 있이라 카이." 영팔이는 박서방 가게에서 나온 뒤에 곧장 월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할 일없이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다가 해란강 강가의 살을 에는 바람을 받으며 서 있기도 하고 어두워진 뒤 술집을 찾아들었다. '왜 내 마음이 이리 이상한지 모르겄네. 정말로 고향에는 돌아가게 될 긴가? 그라믄 또 월선이는 정말로 죽었다 그 말이지? 나는 좋아해야 하나 실퍼해야 하나. 도라가문 아무 일 없일까? 왜놈의 순사가 잡으로 오지 않으까?' 또 하루가 지났다. 임이네는 여전히 마을을 돌아다니며 나발을 불어대고 있었다. "말로만 우리 홍이, 우리 홍이 했지. 챙겨보니께 세상에 옷 한가지 변변한 게 없더라니까," "그래도 홍이는 늘 부잣집 아들같이 차리고 다니든데?" "그러니께 그 계집이 예삿것이 아니다 그거 아니오. 겉만 번드르르 남보기 빈치만 낫지 옛이야기도 있지 않드가배. 투둑하게 입은 전실자식은 늘 오돌오돌 떨고 있는데 친자식은 얇은 옷을 입었는데도 추위를 안 타더라고, 해서 아바니가 옷을 뜯어본께 전실자식의 옷에는 갈대꽃을 넣었고 제 자식 옷에 찰떡 같은 목화솜을 넣었더라나?" "월선옥 아주머니한텐 자기 낳은 자식이 없지 않았수?" "그러니께 그 계집이 우리 홍이아배를 잡아놓을라꼬 사랑스럽지도 않는 우리 홍일 껌뻑 넘어갈 듯 좋아하는 시늉을 했제. 그러니 그년이 벌받아 뒤진 거라 카이. 죄는 지은 대로 공은 닦은 대로, 소문엔 돈 많이 벌었다 카더마는... 그 내숭스런 년이 그걸 어디다 묻어놨는지." "그런 얘기는 할 필요가 없지 않우? 홍이아버지가 벌어준 돈도 아니겠고," 얘기를 듣는 상대도 얄미웠는지 쏘아준다. "그런 말 마소. 우리 홍이아배가 산판서 번 돈 꼬박꼬박 그년한테 갖다준 걸 몰라 그렇지." "그야 홍일 맡겨놨으니까," "맽기놨나? 뺏아갔지." "아 말이야 바로 하지. 산판에서 떼돈 벌었겠수? 국밥집을 했으니 망정이지 굶고 있으며 남편이 벌어다 아 먹였을라구? 그런 소리 자꾸 하면 임이엄마 얼굴 쳐다봐요." "알고 본께 한통소이었구마. 돈 벌었다 하는 말이 머가 우째서? 영낭들고 나서는 거를 본께 이 집에도 그 돈 묻어놓은 거는 아니오?" 돈 잃어버린사람은 세상 사람이 다 도둑이로 뵌다. 임이네 경우도 월선이 남겼을 것이 분명한 돈의 행방을 필사적으로 추적하다 보니 의심 안 가는 곳이 없다. 해서 시비가 붙는데 월선에게 호감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월선에게 동정이 모이니까 공연히 심통나는 사람도 있고 국밥집 하던 여자가 호사스런 장사를 치렀다 하여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법한 얘기다. "흥! 미꾸라지 용 됐네. 무당딸, 술 팔던 여자가 그런 꽃상여에 실려갔음 나는 금은보화로 만든 상여 타고 가야겠구먼." 그런 여자를 만나면 임이네는 신이 별의별 해괴망측한 얘기를 꺼내며 월선을 헐뜯는데 예를 들자며 고향에 있을 때 관계했던 사내가 한둘이 아니라는 둥, 숲속에서 백정놈한테도 치마를 걷었다는 둥 거의 자신이 밟아온 이력이 어느새 월선의 이력으로 둔갑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이네는 월선을 헐뜯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죽이 맞는 사람과 얘기를 주고받는 것도 그렇지만 시비까지 벌여가며 월선의 편역을 드는 사람들에게조차 접근해가는 이유는 돈의 행방에 대한 무슨 단서라도 잡자는 속셈에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수법을 월선에게 적용했던 것이다. 남한테 돈을 주어 이자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불행하게도 임이네는 어떤 것도 알아내질 못하였고 환장이 된 그는 영팔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며 왜 영팔이가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무느냐, 왜 나를 따돌리느냐, 그렇다면 그럴 마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초상이 끝났을 때 먼저 가라 했던 영팔의 말을 새삼스레 꺼내어 시비를 건다. "내가 와 가아! 내가 와 가느냐구! 여기가 어딘데 내가 가아! 그년 땜에 그 촌구석에 쫓겨가서 못할 고생 다 했는데 그것만 생각하믄 이가 뼈가 갈리는데 내가 와 가느냐고? 당연하게 있일 사램이 있는데 자개가 가라 마라, 거기서 가라고! 무신 상관이 있어서 이 집에 죽치고 있느냐 말이오! 그래 내개 객줏집에 가 있고 김서방은 여기 와 있어? 멋 땜에? 집 임잔가, 집 임잔가, 말이오! 그년 서방이든가 말이오! 내 참말로 이런 경우없는 일 듣도 보도 못했구마!" "미친개를 갈밨이믄 갈밨지 아무리 입에 거품을 물어도 내사 볼일 다 보고 갈 긴께, 그라고 여기 임이네 집이 아니고 홍이엄마 집인께 다른 데 가서 잘 생각 없구마. 임예 집이라믄 있이라고 고사를 해도 있일 사람 아니니께." 영팔이도 어지간히 약을 올린다. 그러나 정작 일이 크게 벌어지기는 그날 밤, 홍이는 두메 하숙방으로 자러 가고 작은방에는 길상과 영팔이 용이 세 사람이 함께 자리를 했다. "진작 이런 얘기를 했어야 하는 건데 나는 나대로 좀 깊이 생각해봐야겠기," 길상이 말을 꺼내었다. "실은 월선아지매 생전, 내게 돈 팔백 원을 맡긴 일이 있어요. 아지매 말이 홍이아배는 내 생전 이 돈을 받지 않을 것이니 네가 가지고 있다가 전하라 그런 말 하더군요. 아지매 말이 또 홍이 공부도 시키고 장가도 들일 양으로 그 돈을 모았다는 겁니다. 나로서는 아지매가 말한 대로 용이아제한테 드리며 고만이겠으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 돈 받을 수 없다." 용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길상이나 영팔이 다 예상한 대로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돌아가신 아지매가 그런 말을 하긴 하더구먼요. 그 성미에 받지 않을 거를 생각해서 그럴 경우 내가 그 돈을 맡아 있다가 홍이를 위해 필요할 때는 써달라구요." "그럼 그기이 좋겠구마." 영팔이 말했다. "그러나 제 형편이 그럴 수 없게 됐어요." "그럴 수 없게 되다니?" "그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그러고 멀지 않아서 아제들은 고향으로 내려가게 될 건데 그렇담 영팔이아제가 그 돈을 맡아주시는 게 어떨까요?" "그 그러야 모, 못할 것도 없지마는." 이때였다. 아침을 먹기가 바쁘게 객줏집을 나와 온종일 싸돌아다니면서 동정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던 임이네는 길상이 가는 것을 보았다. 필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직가만 임이네는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벽에 붙어서서 방안의 말을 엿들은 것이다. 외치고 나오는데 주저할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와 내 자식 거를 김서방이 맡을 것꼬! 에미 애비가 눈이 시퍼러니 살아 있는데 에미 애비 손에 쥐어줄 일이지 누가 어느 놈이 그것에 손댈 것꼬!" 방문을 막차고 들어왔다. "이 여자가 와 이러제?" 용이는 남을 보듯 중얼거렸다. "하여간에 이 일을 옳게 끝단지우지 않는다믄 생사가 날 긴께! 나도 이잔 오기요! 오기! 누가 죽고 사는가 보자! 천금 겉은 내 자식! 그래 우리 홍이가 김서방 자식인가 길상이 자식인가! 우째서 우째서 내 자식 일을 좌지우지한단 말입네까!" "자식이야 임이엄마 자식이지요." 길상이 말에 "그러면은! 그러면은, 우째서 내가 임이엄만가 홍이엄마다! 홍이엄마!" "그걸 누가 모르나요? 하지마는 내가 맡아 있는 돈은 실상 여기있는 사람, 어느 사람의 돈도 아니고 홍이 돈도 아니지요. 죽은 월선아지매 것이고 보면 월선아지매 생각대로 해야지요." "그 말 한분 잘했다! 그 여자는 홍이한테 주기로 했다니까 그거는 홍이 돈 아니구 누구 돈이고? 그런데 우째서 길상이가 가져야 하고 또 김서방이 가져야 하노!" "가진다기보다 맡아 있는 거지요." "맡아 있거나 가져 있거나 매한가지, 그 돈 이래 내놔!" "용이아제가 안 가지겠다 하였소." "애비는 마다해도 에미인 나는 가져야겠다. 내놔."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영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 돈 못 맡는다! 나라 금사자리를 준다 캐도 안 맡을란다! 이 더러븐 꼴을 삼천갑자 동방석이라고 보까? 당할 때마다 명이 십 년씩은 줄 긴데, 두 사람이 알아서 의논하라고," 하면서 방문을 거칠게 닫아붙이고 나간다. "임자 거기 좀 앉아." 용이 음성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임이네는 시위를 하듯 거친 몸짓으로 무릎 하나를 세우고 되바라진 눈을 휘두른다. "그 돈, 임자 줄 수도 있다. 내가 받아서 임자 주믄 될 거 아니가?" "그, 그야, 어차피 홍일 위해 쓸 거 아니오." 당장 회색이 돈다. "그러나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신 일인데요? 하라 카는 대로 하겄소." "돈을 받는 대신, 그 대신 해야 할 일은 우리하고 인연을 끊는 일이다. 홍이에미도 아니고 내 계집도 아니고 임자가 멀리 떠나든지 아니믄 우리가 멀리 떠나든지." "뭐라꼬요?" 그렇게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임이네는 놀란다. 길상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임이네는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말 대신 울기 시작한다. "우째 그리 야속한 말을 합니까? 진작부텀 눈에 까시처럼 하더니, 사람이 죽어서 이제는 없는데 그래도 내가 까시가 됩니까?" 그것이 헛울음이라는 것은 뻔한 일, 눈앞에 다가온 황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임이네는 아니다. 두 사내는 침묵으로 지켜본다. 그 큰돈을 어디서 만져보노, 논을 사도 서른 마지기는 더 살 긴데, 좋은 논 서른 마지기만 해도 나락을 팔구십 섬은 너끈히 추수할 기고, 이삼 년만 추수한 나락으 굴리믄 백 섬지기 백오십 섬지기는 누워서 떡먹기... 청국놈 땅 부치다가 일어서믄 남는 것은 이불보따리뿐인데, 이때를 놓치면 그런 돈 꿈에나 만져볼까? 헛울음을 울면서 임이네 생각은 재빠르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불속에 태워버린 돈 생각이난다. 그 돈까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팔자가 기박하여 그렇기 못 봐서 밤낮으로 천대하고, 그래도 갈데올데 없으니 오늘까지 살았소마는 이자는 못 보아서 애간장을 태우던 사람도 죽고 없는데 우찌 그리 막말을 합니까. 이녁 마음만 고치묵으믄 남부럽잖은 자식 남과 같이 키워서 노리 보고 살 긴데," 그래도 말이 없자 초조해진 임이네 "정 그렇다믄 좋소. 나 소리도 매도 없이 이녁 앞에 나타나지 않을 긴께." 순간 용이 주먹이 임이네 얼굴을 친다. "아아나 쑥떡!" 당장에 임이네 코에서 코피가 펑펑 쏟아진다. "홍이? 천금 같은 자식?" "아제! 이런 안 됩니다!" 길상이 얼른 임이네 상체를 뒤로 젖힌다. 임이네는 숨이 넘어가는 듯 나자빠진다. 용이의 잔인한 웃음이 방안을 흔들어댄다. "길상이 보았나? 돈이 있으며 저 계집 혼자 아귀가 되는 거 아니다! 나도 홍이도 아귀가 된다! 아니면 살인 죄인이 되든지." 길상이 얼른 밖으로 나가 바가지에 물을 떠온다. 용이는 물건을 보듯 임이네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얼굴에 물을 끼얹고 벽에 걸려 있는 수건을 찬물에 적셔 이마에 올려놓고 그러는데 길상의 손을 확 뿌리치며 임이네는 일어나 앉는다. 바다에서 숨돌리는 비바리의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고 나서 "이렇게 되고 보믄 이판사판," 말을 시작하려 하는데 용이 말했다. "길상아." "네." "나가자. 안 나가면 나는 사람을 죽이겠다." "네. 나갑시다." 길상은 정말 살기를 느낀 것이다. 한 팔은 용의 팔목을 잡고 다른 한 팔로 벗어놓은 외투 털모자, 그리고 벽에 걸린 용이 흰 두루 마기와 털모자를 주섬주섬 거둬들고 밖으로 나온다. 집을 나서서 골목에 나온 뒤 비로소 길상은 뚜벅뚜벅 걸어가는 용이에게 두루마기를 걸쳐주고 털모자를 씌워주고 그런 뒤 자기도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쓴다. 바람은 살을 에듯 차다. "윌 집에 갑시다, 아제." "아니다. 가믄서 얘기 끝내고 작은아버지댁에 들리겄다." "작은아버지?" "객줏집 말이다." 용이 입에서는 처음, 공노인을 두고 작은아버지란 말이 나왔다. 삼촌도 아니요 아저씨도 아닌 작은아버지, 그 호칭 속에는 무한한 애정이 서려 있었다. 길상의 가슴에도 용이에 대한 애정이 솟는다. 인간에 대한 애정. "아까 자넨 영팔이더러 그 돈을 맡으라 했는데 그거는 처음부터 안 될 얘 기네. 나는 사내니까, 하는 오기에서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홍이에미가 원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피땀을, 홍이는 그것 없이도 큰다. 그것 없이도... 홍이가 기어 공부를 하겠다믄 무신 짓을 하더라도 내가 공부시킬 것이요, 하지마는 자식은 제 부모가 젤 잘 알지. 홍이는 공부에 별로 생각이 없다. 이곳에 있자 카니 공부랍시고 한 거지. 또 장가드는 일도 그렇다. 형편 되는 대로 정화수 한 그릇 가지고 예는 올릴 수 있는 거고, 피땀나게 살다 간 사람 땜에 우리가 편하게 살아 옳겄나?" 용이의 음성은 잔잔하였다. "그래 이거는 내 생각이네만 그 돈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고 홍이 처지로서도... 길가에 버릴 수는 없는 돈 아니가? 그러니 독립운동 하는 곳에 기부하는 게 좋겄다. 홍이에미가 홍이에게 남긴 거라면 홍이가 그걸 맏아서 독립운동 하는 데 썼다 할 것 같으면 과히, 안 그렇나?" "아제!" 길상이 용이 팔을 꽉 잡는다. "아제!" "나보고 그럴 것 없다." "어지 그리 못살았습니까. 아제하고 아지매는," "아니다. 우리는 많이 살았다. 살 수 있는 데까지 살았네라." "그, 그건 압니다." 용이하고 헤어진 길상은 울면서 집에 돌아갔다. 용이 객줏집에 들어갔을 때 공노인과 방씨는 용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아랫목에 끌어다가 앉히려 한다. 그러나 용이는 기어 윗복에 서서 "작은아버님 그리고 숙모님," 공노인과 방씨의 눈이 화등잔만큼이나 커다래진다. "절 받으십시오." "응, 응, 그, 그러지." 공노인은 엉겁결에 안고 방씨도 낯선 집에 온 것처럼 두리번거리다가 공노인 옆에 앉는다. 용이는 절을 올린다. "거, 거 이제 앉게, 앉아요." "예." 두루마기 자락을 걷고 앉는다. 방씨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공노인은 쉴새없이 눈을 깜박거린다. "그, 그렇잖아도 내, 자네하고 김서방을 만나려 했는데 오늘 밤은 김서 방이 거기 간다기에." "예, 방금 왔다갔십니다." "그래?" "이서방." 방씨가 새 사위를 본 듯 은근하게 부른다. "저녁은 묵었나?" "예, 묵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홍이에미가 살던 집 말입니다만," "응." "지는 내일 남은 일을 해놓고 떠날 작정입니다." "떠나기는? 뭣하러 떠나누?" 그 말 대답은 없이 "홍이에미는 불쌍하게 살다 간 사람입니다." "..." "해서 작은아버님께서 알아 하시겠지마는 불쌍하게 살다 간 사람의 집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이 좋은 듯싶어서," "그게 무슨 소린가." "내일이라도 여기 방 하나 치워주시므은 빈소를 옮기고, 별거는 없지만 세간도 옮기고 홍이에미 옷은 무덤가에 가져가서 사루울 작정입니다. 아무튼 집은 싹 비워야겠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구렁이(임이네)가 들앉을 것이란 말은 차마 입밖에 내질 못한다. 그러나 공노인는 짐작을 한다. "당분간, 홍이는 이곳에서 빈소에 상식도 올리야 하고," "그것은 어찌 하든, 내 말이나 들어보게." "예." "아무튼 자네하고 김서방은 이제부터 고향 갈 차비를 차려야 하네. 아니 고향이 아니지. 진주로 가는 게야. 길서사회도 여름, 늦어도 여름에는 이곳을 떠날 걸세. 허니 자네들은 미리 가 있는 게야. 진주에 가면은 관수, 관수를 알지?" "예. 압니다." 용이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거기 있어서 다 주선하게 돼 있고, 머 자세한 얘기는 떠날 때 해도 늦잖으니, 일단 퉁포슬로 돌아가서 차빌 서두는 게야." "알겠습니다." 10장 찾아온 사람 빈소를 객줏집에 옮기는 동시 홍이의 거처도 그곳으로 옮기었고 텅 비어버린, 월선이 살던 집, 용이는 방 두 개와 부엌에 대못을 박았다. 자기 심장에다 대못을 박듯이. 그리고 텅 빈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장도리를 들여다보며 또 한참의 시각을 보내다가 마지막 대문에다 못질을 한다. 이 무렵 임이네의 분통은 절정을 넘었고 산송장처럼 나가떨어졌다. 임이네의 탐욕이 아귀 지옥의 그것이었다면 대못을 쾅쾅! 박아대는 용이의 잔인성도 바로 그와 흡사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전생에 자신은 미식을 하되 처자, 혹은 남편 자식에겐 주질 않아 식토귀로 변한 아귀는 남이 토해낸 것이 먹고 싶어 늘 괴로워하였다 하고, 주야로 아이 다섯을 낳아 제 낳은 아일 먹건만 배가 차지 않는 아귀, 자신의 머리를 무딪쳐 쏟아지는 뇌수밖에 먹을 수 없는 아귀, 똥과 고름과 피를 먹고 사는 아귀, 염열기갈에 견디지 못하고 쳥류를 향해 달려가면은 몽둥이 든 채귀가 길을 막고, 눈앞의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은 순식간에 화염으로 변하는, 그 고통 많은 아귀들의 전죄는 탐욕 질투라 하거늘, 과연 용이는 그 아귀지옥의 채귀는 아니었더란 말인가. 지난날 용정 대화재시에 돈을 숨긴 베개를 불속에 태워 버렸던 그때처럼 객죽집 방 한구석에 산송장이 드디어 나둥그러진 임이네는 식음을 전폐하고 짐승처럼 신음하는 것이었다. 냉혹한 소외와 처절한 고독, 임이네의 외관적인 그 병은 그러나 애정으론 치유될 수 없고 황금의 힘에 의할박에 없는데 어느 누구, 애정도 황금도 그에게 시약하는 사람이 없었다. 용정 일이 일단락 되자 용이와 영팔이는 귀향을 서둘기 위해 퉁포슬을 향해 떠났다. 그런 뒤 음력 삼월의 해빙기가 찾아온 용정 역두에는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그때처럼 별 가진 것 없이 이젠 늙어버린 용이 내외, 영팔이 내외, 그리고 코흘리깨 어린것들이 성장하여 늠름해진 소년 청년이 된자식들을 앞세우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 두메형!" 홍이는 두메의 손을 흔들며 차마 마차에 오르질 못한다. "어서 타아. 나도 얼마 있으면 이곳을 떠나 군관학교에 갈 건데 뭐," "응, 알아 그건. 하지만 형! 나 또 온다. 형 만나러 올거야. 어머니 산소도 여기 있지 않어?" "그래, 그래, 또 마나자." "할아버지! 할머니! 나 또 오께요!" "오냐, 오냐, 와야 하고말고," 길상에게는 모자를 벗고 절을 했다. 그리고 마차는 떠난 것이다. 임이네의 저주, 저주의 피눈물도 멀어지는 마차와 더불어 가버린 것이다. 행방을 감춘 임이는 물론 동행하지 못하였고 친정에 맡겨졌던 임이의 아들 구야는 막사 떠난다니까 그 애비가 내 새끼 내가 기른다면서 찾아갔다. 그리고 영팔이 권서방을 위해 길상에게 청한 것은 성사를 못 보았다. 대신 대못질을 했던 월선의 비 집에 권서방네 식구와 홍서방네 식구가 세 없이 들 수 있게 된 것을 그들은 기뻐했으며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일 없다는 공노인 말에 희망을 걸었다. 어수선한 봄이 무르익고 해란강 물빛이 푸르게 희번득일 무렵 두메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용정을 떠났다. 송장환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동안 길상은 하얼빈을 세 차례나 다녀왔던 것이다. 사랑 툇마루에 햇볕이 들친다. 길상은 툇마루에 묵은 책들을 꺼내어 거풍도 할 겸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부르며 환국이가 쫓아온다. "왜 그러느냐." "아버지 또 어디 가요?" "아니다. 누가 간더더냐?" "아아니..." 환국이는 손가락으로 툇마루를 밀며 애매하게 대답한다. "손에 가시들며 어쩔려구?" 길상은 마룻바닥은 미는 아이의 손을 떼밀어낸다. "아버지?" "왜." "그때, 그때 말이지요?" "음." "그때 아버지가 하얼빈 가셨을 때 나 어머니 방에서 잤어요.' "좋았겠구나. 어머니 옆에서 잤냐?" "아아니," "그럼?" "난 윤국이 소 잡고 잤어요." "왜?" "어머닌 앉아 계셨거든." "..." "어머니는 울었어요." 길상의 낯빛이 변한다. 길상이 하얼빈으로 떠날 때마다 이젠 안 돌아올지 모른다 생각한 서희의 심중을 상상할 수 있다. 제아무리 담찬 여자, 자제심이 강한 여자이기로 그 심중이 온당할 리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집안식구는 눈치채지 못하였으나 아이가 느낀 것이다. 전후 사정은 여섯 살 난 아이가 알 리 없겠으나 어미 기분에 대해선 민감하다. 아이의 심장과 어미의 심장이 직결되어 있는 것처럼, 아이는 눈으로 머리로 느끼는 게 아니라, 공기로 피부로 느낀다. "아마 어머닌 배가 아팠던가 부지?" "약도 안 잡수던데도?" 환국이는 다시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을 민다. "손에 까시 들어. 그러지 말아라." 얼른 손을 내린다. 모두 환국이는 아버지 길상을 닮았다고들 한다. 환국의 성질은 느긋하였고 인정이 많았다. 서희가 어쩌다 하인을 나무라는 그런 광경과 마주치면은 못 들은 척 안 본 척 조용히 혼자 장난질을 하고 논다. 하인이 돌아간 뒤에도 한참을 놀다가 슬그머니 꾸중들은 하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고는 공연히 칭얼대며 업아달라든가 아니면 종이배를 만들어달라든가 해서, 그런 행동으로 위로하곤 했다. 아이의 눈은 샛별같이 반짝였다. 새를 좋아하고 고양이 강아지를 좋아했다. 돌이 지나기 전부터 달 보러 나가자고 밤이면 바깥쪽을 가리키곤 했었다. 집안의 모든 식구들은 아이를 사랑했으며 기쁨의 대상이었고 그럼에도 이 어린 것을 경의없이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환국이에 비하여 둘째 윤국이는 겨우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성정이 강한 편이었고 예민했으며 아무에게나 더분다분 가질 않았다. 욕구가 거절되면 매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해서 둘째는 어머니를 닮았나보다고들 한다. "아버지." "오냐." "이 책 뭐할려고 내와요?" "거풍하는 거야." "거풍이 뭐지요?" "오래 놔두먼 습기가 차서 책이 썩거든. 그래 말리는 거야." "아아, 그런데 아버지, 어디 가시는 거 아니지요?" "그렇다니까." "아버지." "또 왜 그러느냐." "뒷숲에서 새가 알을 깠어요." "그 알 집어내면 못쓴다." "네, 알아요. 빨리 알 까서 새끼가 됐음 좋겠어요." 아이는 툇마루에 두 손을 잡고 팔작팔작 뛴다. "아버지가 환국이보고 꾀꼬리새끼 얘길 했던가?" "네." 하는데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길상은 아차 싶었다. 그때 꾀꼬리 새끼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 일이 생각났다. 처음 아이는 대단히 흥미있게 그 얘길 들었으나 나중에는 기분을 상해했던 것이다. "왜 엄마가 새낄 두고 갔을까요? 두고 안 갔음 새낀 죽지 않았을 텐데... 밤새 울고서 목이 아프진 않았을까?" 눈에 눈물이 글썽했었다. "주인어른." 하인 장쇠가 와서 부른다. "왜 그러느냐." "저어, 횟집에서 심부름꾼이 왔습니다." "뭣하러 왔더더냐." "손님 심부름을," "들어오라고 해." "이 책은 제가," "아니다. 내가 알아 챙길 터이니," 얼마 후 장쇠가 횟집 심부름꾼을 데리고 왔다. 심부름꾼은 쪽지하나를 내밀었다. 쪽지엔, '편지 받는 대로 곧 오시오.' 공노인의 필적이다. "공노인이 주신 건가?" "네." "혼자 계시냐?" "아닙니다. 낯선 손님 한 분하고 함께 계십니다." "알았다." 환국이는 안으로 들어갔는지 없었다. "내가 해지기까지 안 오면은 책들을 방에 들여놓도록," 장쇠에게 이르고 길상은 옷을 갈아입는다. '함께 있다는 손님은 누굴까?' 횟집으로 가면서 궁금해한다. 하얼빈이나 연해주 방면에서 온 손님이면 공노인을 통할 리가 없다. 만일 조선서 사람이 왔다 하여도 공노인은 집으로 데려왔을 것이 아닌가. '혹 김두수, 그럴지도 모르겠군?' 길상은 곧 횟집에 당도하였다.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어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사내가 옆모습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한복차림이다. "왔구먼." 그와 마주보고 있던 공노인이 얼굴을 돌린다. 약간 난색을 보이는 미묘한 웃음이 지나간다. 그러나 이내 낯선 사내에게 조심스런 시선을 보낸다. "앉지." 공노인이 권했고 "네." 하고 길상은 자리에 앉는다. 길상은 사내의 강한 시선을 느낀다. 어쩐지 사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곤혹감에 빠진다. "자네 모르겠나?" 공노인의 조심스런 음성이다. "저 무슨 말씀인지," "인사나 해야지." 비로소 길상은 낯선 사내를 바라본다. "..." "하기야 나도 좀 알아보기 힘들구먼." 사내 입에서 말이 떨어졌다. 낮은 음성, 웃음 섞인 말투. "아니!" "이제 알 만한가1" "댁은 뉘시오!" 길상이 외친다. 사내는 껄껄걸 소리내어 웃는다. "무덤 속에서 망령이 나타난 것 같은가?" "구, 구," "맞어. 구천이다. 내 본명은 아니지만," 길상은 현기증을 느낀다. "통성명할 필요도 없겠구만." 공노인은 조금 물러나 앉듯하면 어색하게 말했다. "그래, 서희랑 애들은 잘 있느냐?" 환이 술잔을 들며 길상을 지그시 바라본다. 눈에 이글이글 불길이 인다.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차디찬 것이 동공에 모여들고 몸 전체에서 중심을 향해 모여드는 것 같다. 길상의 얼굴은, 귀뿌리끼지 붉게 타들어간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민 것이다. "네. 덕분으로," 도전적으로 뇌가린다. "소식은 다소 알고 있었으나," 환이 중얼거렸다. 길상은 거칠게 고개를 돌리며 도대체 어찌 된것입니 까? 그런 눈초리로 공노인을 쳐다본다. 공노인은 눈을 꿈벅꿈벅할 뿐이다. '도시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공노인." 길상의 음성은 날카로웠다. 공노인은 엉금엉금 기어가는 베짱이처럼 서 툴고 어설픈 연막을 피우며 길상을 본다. "공노인께서는 아시는 사이신가요?" "그, 그렇지. 알구말구. 거 뭐냐... 김개주 장수 외아드님이시고 또," 하다 씩 웃는다. "뭐라구요?" "그러고 또 우관스님의 조카 되시는 분이지." 길상은 또다시 충격을 받는다. "혜관스님이 자네보고 아무말 안 하든가?" 음흉을 떤다. "못 들었습니다. 어찌 제게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데 이마뼈가 불룩불룩 흔들리는 것 같다. 공노인은 대답을 못하고 환이를 힐끗 쳐다본다. "하기는 그러실 만한 이유는 있었겠지요." 하다가 실상은 대뜸 자기 앞에 놓인 빈 잔을 환이에게 내민다. "잔 받으십시오. 옛날 글 배우던 제자가 드리는 잔입니다." 환이를 노려본다. 잠자코 잔을 받는다. 술을 따르는 길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술을 들이키며 환이는 잔을 돌려주며 "내 잔도 받게." 하고 술을 부어준다. 길상은 술잔을 내려다본 채 "그래 여기는 뭣하러 오셨습니까." "뜻없이 왔느니라." 길상은 술을 들이붓듯 마신다. "잘 오셨습니다. 옛날처럼 최참판댁을 또 한번 망하게 해주십시오." "김서방! 자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공노인이 고함치듯 말했다. "네. 지금 최서희는 옛날 만석살림을 회복하였습니다. 공노인께서 잘 아시다시피, 저는 그 살림 망하기를 소원하거든요." "거, 괜찮은 생각이야. 그 재산 날 주면은 조준구보담 쓸 만한 곳에 쓸 게야, 산중에 가서 반역과 패륜의 왕국이라도 세우면, 그거 조오치." 환의 대답이다. "그, 그럼 나는 가보겠는데," 공노인은 꽁지를 빼듯 일어섰다. 팽팽한 분위기를 휘저으며 문앞까지 가서 "김서방," "..." "분별이 있어야 하네." 그러고는 나가버린다. 길상은 냉정을 되찾는다. '왜 내가 흥분하는가. 흥분할 이유가 없지. 김개주 장수의 외아들? 그리고 우관스님의 조카, 그럴 테지. 김개주 장수의 아들이라며 마땅히 우관스님의 조카일밖에. 어째서? 그럼 어째서 최참판댁에선 머슴 구천이가 되었나.' 이십 년 세월만 무서운가? 이 무서운 인연들. 목구멍으로 술이 타고 내려가는데, 뜨거운 빼주가 넘어가는데 머릿속이 차츰 맑아온다. 선명하게 어느때보다 선명하게 지난 일들이 새롭게 눈앞을 지나가고 있다. 소년 길상이는 구천이를 두려워했다. 쥐어박히며 태오하 그리기를 가르치는 혜관보다 남몰래 손짓하며 데려가서는 글을 가르쳐주던, 말이 적고 엄격해 보이던 사람. 무한한 숭배와 경의로 바라보던 그 사람은 최참판댁 몰락의 횃불을 든 최초의 인물이다. 서희의 불행은 그로 인하여 시작되었고 서희와 자신과의 인연도 이 사람으로 인한 인연이다. '뭣 땜에 나는 이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나.' 길상은 눈을 들어 환이를 본다. 그림자 같기도 했고 쇳덩이 같기도 했고 그런 모습으로 조용히 자작을 하고 있었다. 신경의 어느 한 오리도 길상에게 뻗쳐오는 것이 없다. 무인지경에 있는 사람이다. 아니 거인이다. 그것이 그림자건 쇳덩이건. 솨잔한 몸이다. 깡마른 얼굴이다. 늙었다거나 젊었다거나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이다. 길상은 차츰 숨결이 가빠오는 것을 느낀다. 시선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살아 있는 생명이 무슨 힘으로 저다지도 응고되어 반사할 줄을 모르는가. 길상은 숨이 가쁜 채 대결한다. 전신의 기를 뿜어내어 자신의 자리를 굳히며 대결하려 한다. 힘이 부친다. 힘이 빠져나간다. 지친다. 바위와 개미의 씨름 같다. 길상의 무엇이든 얘기를 하려고 빠져달아는 힘을 허둥지둥 모은다. 순간 환의 눈이 길상에게로 옯겨지면서 "내가 서희를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 "네?" "최서희를, 이 김환이가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만나셔야 할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이곳에 뜻없이 왔노라고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제 생각 같아서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과연 그럴까?" "..." "후안무치하다 그거로군." "네, 그렇습니다." "내 낯가죽은 이십 년 풍설 속에서 후안 정도가 아닐세. 쇠가죽처럼 단단해졌거든. 그래도 아니 되겠느냐?" "쇠가죽이 아니라 쇳덩이가 되셨습니다 해도 만나서는 아니 되지요." 환이는 소리내어 웃는다. "그보다 별당아씨는 어찌 되셨습니까. 살아 계시오?" "자네 장모님 말이냐?" 차갑다. "네." "언젠가 거지 한 사람이 분명 너에게 알려주었을걸? 지금으로부터 십이 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정말로 돌아가시었습니까? 혜관스님 말씀은 들었지만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오 년 전 일이라고 했었지. 자아 술 마시게, 오늘 밤에 징그러운 뱀이 허물을 벗는 날이야." 또 웃는다.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길상은 순간 그 웃는 모습이 누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누굴 닮았을까? 저 웃는 얼굴... 우관스님도... 아니다.' 입에 뱅뱅 돌면서 생각나지 않는 이름 같다. 저런 웃음의 얼굴을 누가 가졌던가. 길상은 기억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다가 무거운 납덩어리 속으로 빠져들어가듯 또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환의 존재에 놀라기 시작한다. 조용히, 적당한 간격을 두어가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환의 술버릇이, 지리산의 숯 굽던 사팔눈 강쇠를 번번이 곤혹에 빠뜨렸던 그 술버릇, 강쇠는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하고 코를 골면 되었다. 그러나 길상은 그럴 수 없다. 이따금 자신도 술을 부어 마시지만 낯선 주막의 낯선 나그네끼리 마시는 술이 아니다. 숨통이 막힐 것 같은 상황에서 길상은 술이 떨어져 아이를 부르고 술을 가져오게 하고 해서 숨구멍을 트곤 했는데 그새 두 번이나 술이 들어왔다. '사람 미치겠군.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이럴 경우 어떤 장사도 못 당할 것이라 했던 강쇠의 말을 들었더라면 길상은 이렇게 몸을 뒤틀지 않았을지 모른다. '남의 간을 빼먹는 여우도 아니겠고,' 웃는 얼굴이 누굴 닮았는지, 생각해내려던 것을 그만둔 것은 벌써였고 이제 길상은 환이와 자신이 얽혔던 지난 일, 김개주 장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사실조차 염두에 없다. 방안 가득한 그의 존재와의 필사적인 싸움, 형용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과의 싸움에서 길상은 자신이 탈진해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제가 뭐라 불렀으면 되겠습니까." 쉰 목소리로 길상이 묻는다. "음?" 빤히 쳐다본다. 길상도 그 눈을 마주본다. "장인어른 하고 부를 수는 없겠지." '..." "양반의 유부녀를 유인한 상놈이 선배라면 너는 상놈으로서 양반댁 규수와 혼인하였으니 후배 아니겠느냐?" 환이는 또 웃었다. '저 웃음, 웃는 얼굴, 누굴 닮았을까?' 잊었던 의문이 다시 솟는다. "그래 아들이 둘이랬지?" "앗!" "...?" "알았습니다." "뭘 알았어?" 그 웃음의 얼굴이 바로 자기 둘째 윤국이의 얼굴인 것을 길상은 깨닫는다. 바로 윤국의 웃는 얼굴 그 얼굴이다. 횟집 전체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상춘객들이 다 돌아가고 밤이 온 것이다. 별안간 길상은 취기를 느낀다. 왠지 긴장이 풀어진다. "네. 닮았습니다." "..." "우리 윤국이 그놈을 닮았군요." 환이 얼굴에 경련이 인다. "그럴테지." "네?" "당연히 그럴 게야." "당연히..." "그 아이의 증조할머니, 즉 윤씨부인은 내 어머니였으니까 닮았을 테지. 그러면은 내가 작은할아버진가? 반쪼가리 작은할아버지군 그래. 하하핫..." "뭐라 하시는 게요!" 길상이 일어섰다. 휘청거린다. 환이의 눈은 몽롱해진다. "내 피가, 상놈 양반 반반이 섞인 핀데, 아 참, 그 두 놈 아이들도 그렇군 그래, 하하하..." "정말, 정말로 그, 그렇습니까?" 길상은 도로 주질러앉으며 넋이 바진 듯 환이를 바라본다. 길상의 시야가 흐려지곤 한다. 모조리 지쳐버린 신경이 다만 술기운으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계속되는 난타에 이젠 무릎을 꿇어버린 꼴이다. 취기가 밀물처럼 달려온다. "길상아." 먼 곳에서 들려온다. "나가지." 역시 먼 곳에서. "강가로 가지 않겠느냐?" "네. 가지요. 가겠습니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멀리서 울려온다. 물결 소리가 들려온다. 샛바람 소리 같은 것도 들려온다. 사방은 칠흑이다. 또 물결 소리, 철썩이는 물 소리. 그리고 음산한 목소리, 그리고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노랫소리. "별당았기가 어떤 여자던고? 어떤 여자였던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었던 현세와 하늘에 수명할 수 없었던 사람, 땅을 끊을 수 없었던 초나라의 굴원은, 그 굴원은 돌을 안고 멱라에 빠졌건만, 그 기나긴 방류도 끝이 낚건만 어찌 나는 살아 있는가," 한 사나이가 어둠 속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형수를 범한 내가 백주대로에서 내 불륜을 외치고 또 외칠지언정 차마 내 어머니의 불륜은 햇빛이 부끄럽구나! 내 아버지의 만행은 햇빛이 부끄럽구나! 어찌하여 하늘은 그들을 벌하십니까! 어찌하여 나는 햇빛에서 어둠으로, 네! 어둠으로 내 부모를 몰고 가고 있는 겁니까! 하늘이여 그대는! 벌하였을지언정... 흐흐흐흣... 한 청상이 사람 없는 산중에서 힘센 사내에게 유린당한 것이 죄가 되겠습니까? 앙화를 당한 여자를 매질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러나 나는 그 여인에게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 여인을 구렁창으로 떠 밀어넣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양반이어서 그랬을까요? 내 아버님을 사랑하여 그랬을까요! 아버님! 임자 없는 여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있구말구요! 당신이 죄인입니까! 아닙니다! 으흐흐... 한데도 왜 당신네들 불륜을 이 어둠 속에서 나는 해명을 해야 하는 거지요? 아버님!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네들을 다칠 수 없습니다., 으흐흐흐..." 한 소년이 울고 있었다. 꿈속에서 한 소년이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모래밭을 치는 물결 소리가 있었다. 철석철석, 무심한 물 소리가.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두 아들을 섬긴 한 며느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내게 진 빚 때문에 그려셨습니까! 아니면 그 강간자를 당신은 사랑했기 때문에 그러셨습니까! 대답해주십시오! 양반의 법도를 저주했노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어머님! 당신보다 며느님이 진실했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어머님! 저는 한번 짖어보려고 만주 땅에 왔습니다! 짖어보려고 무거운 쇠철갑을 벗어보려구요! 아버지의 피를 아십니까! 내 아버지는 옳았소! 옳았소이다! 당신을 유리한 것도 옳았고 아귀같이 피를 뿌린 것도 옳았소! 내게 더 많은 피를 뿌리게 하옵시고 더 큰 역도가 되게 하옵시고! 조선 천지를 피로 씻어내게 하옵시고! 방방곡곡 슬픈 울음이 끊기게 하옵시고 죄 아닌 것을 죄 되게 하지 마시옵고!" 꿈도 멀어져갔다. 빛깔과 빛깔이 난무했다. 우관스님이 거기 서있는 듯했으나 그 모습도 사라졌다. 길상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객줏집 안방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머리맡에 앉아서 싱긋이 웃고 있는 얼굴을 발견했다. 길상은 소스라쳐 일어났다. "젊은 사람이 술엔 나보다 약하구먼." "어,어떻게 되어서...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정신을 잃어본 일이라곤 없었다. "어떻게 여기 와 있습니까, 선생님." 저도 모르게 길상은 환을 선생님이라 부른 것이다. "내가 끌고 왔지." 너무 너무 평정한 얼굴이다. 정녕 어젯밤 일은 모두 꿈이었더란 말인가. 그 통곡과 절규가. 길상은 들창문을 올려다보다. 창문이 뿌옇다. 날이 샌 것이다. 다시 방안을 둘러본다. 안방이다. 침구는 말짱 새것, 환이는 단정하게, 옷도 단정하게 입고서 앉아 있다. 준수한 선비다. '아니다. 꿈은 무슨 꿈, 돌아가신 마님을 어머님이라 했다. 김개주장수와 윤씨부인...' "세수를 하게. 해장국을 먹어야지." "네." 세숫물은 마루 끝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얼씬거리질 않았다. 공노인과 방씨는 방을 비워두고 어디 갔는지, 세수를 하면서 '공노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을까...' 얼굴을 닦고 방을 들어간 길상은 환이와 마주보고 앉는다. 멀리 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길상은 별안간 마구간에서 말을 꺼내어 이 사내랑 함께 타고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면은 화살이 활시위에서 떠난 것처럼 돌아보지도 않고 달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이윽고 해장국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소반을 들고 순이네가 들어왔다. 주전자와 투박한 사기 술잔이 두 개다. 두 사내는 훌훌 불며 해장국을 마시고 집에서 담근 밀주인 듯, 탁배기를 단숨에 마신다. 공노인이 들어왔다. "잘 주무셨습니까?" 정중하게 환에게 인사를 한다. "내 평생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잤소이다." 의아해하는 빛이 공노인 눈을 스치고 간다. 온유해 보이는 환의 얼굴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길서상희 당주께서도 잘 주무시고," 이번에는 길상을 향해 농조로 말했다. "잘 잤습니다." 공노인은 자리에 앉으며 곰방대를 뽑는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환이 묻는다. "아닙니다. 속이 좋질 않아서," 사양하고 담배를 붙여문다. "알고 보니 김서방 형편없구만." "어째서 그랬는지," "인사불성, 늘씬하게 늘어졌는데 지리산의 호랑님이 아니더면 노상에서 마차에 깔려도 모를 법하지 않았나." "난생 처음입니다." "하기야 그럴밖에, 사죽을 못 쓰다가 그만 축 늘어진 게야." "공노인께선 경험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있다마다, 정기를 타고난 사람 앞에선 누구든 그렇지. 이런 말도 처음 하는 말이네만," "어째서 처음으로 말씀하시지요?" "이 늙은 것이 이래봬도 수백 년 묵은 여우쯤은 되네. 사람이란 날때부 터 푼수라는 게 있는 게야. 그게 천질이라는 거지. 해서 내가 짐승으로 치자면 호랑이는 못 되고오," "오늘 아침 보아하니, 정기는 정기로되 독기가 폭 빠졌구만. 해서 입이 떨어진 게야." 본인을 앉혀놓고 하는 찬사는 때에 따라 불쾌한 것인데, 그러나 환이는 태연하게 듣고 있다가 "수백 년 묵은 여우보다 수천 년 묵은 너구리요." "예. 독기가 좀 과했으면은 이완용 못지않게 나라를 팔아먹었을게요. 그 놈의 독기가 모자라 조가놈의 목만 누르고 말았자먼," 하며 공노인은 으허허헛 하고 신을 내어 웃는다. 길상은 자기와 김환과의 어색한 관계를 중재하기 위한 사설인 것을 깨닫는다. '능청스런 늙은이.' "그는 그렇고... 나하고 술내기, 오늘도 해볼 생각 없나?" 환이 길상에게 묻는다. 공노인이 거든다. "그렇게 하지. 집 걱정은 말고." "...?" "집에는 못 들어간다고 내가 기별해놨네." "그렇게 하지요. 며칠이고 제가 이길 때까지." 그리하여 두 사내는 붙어다니면서, 사흘 밤 사흘 낮을 마시고, 강가에 나와 외치고 함께 뒹굴고, 기묘한 시합을 계속하였다. 공노인의 말로는 백중지세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로 끝내는게 어떠나 하며 흐물흐물 웃는 것이다. 참으로 기괴망측한 일이었다. 미친 지랄이었다. 환이도 길상도 세상에 나와 그렇게 깝데기를 훌랑 벗어본 일이 없다. 그것은 일종의 치료였는지 모른다. 아픔의 치료, 그리고 길상은 환이로부터 오는 갖가지 저항을 극복할 수 있었고 숭배감과 증오감 얽힌 감정을 극복할 수 이썼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의 장막을 걷고 환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환이는 만주 문턱에 와서 술 목욕과 모래 목욕을 썩 잘했다 하며 웃었다. "숙부님! 우리 며칠 후 하얼빈으로 갑시다." "거긴 뭣하러," "제가 만나기로 약속한 분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데 내가 왜?" "누가 이기는가 내기하실 분이 계시오. 그분은 숙부님 앞에서도 결코 인사불성이 되진 않을 겁니다." "음..." "공노인은 지리산 호랑이라 하시었지만, 중국 땅 들쥐하고 조선 땅 들쥐가 한판 붙는 겁니다." "중국 사람인가?" "아니지요. 우리 동족입니다. 그분은 이곳에 오래 계셨으니까요." 나흘째 되는 밤 길상은 집으로 돌아갔고 환이는 객줏집에 묵었다. 그리고 비로소 이날 밤 공노인은 월선에 관한 얘기며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희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아직 한번도 물어본 일이 없지만 길상이가 함께 갈 건지 안 갈건지... 역시 아무 말씀이 없지만 아이들 어머님도 온통 그것에만 정신이 쏠려 있을 겁니다. 시일이 다가오며 올수록," "공노인." "예." "서희는 최참판댁 여인이오. 주변의 사정은 사정일 것이고 서희 생각은 생각, 길상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야 그렇습지요만...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만," "공노인은 가시는 게지요?" "아아니 내가 뭣하러 갑니까?" 펄쩍 뛴다. "가서 내가 할 일이 뭐 있다구요." "여생을 편히 지내야지요." "편하다는 그 날이 죽는 날이지요. 이래봬도 아직 일거리는 있소." "..." "그 댁의 일은 끝났지만 나는 나대로 이곳에 지반을 잡았고 이 사람 저 사람 참견해가면서 그러다 죽겠소. 그게 또 낙이니까요. 몇해 동안 그 조가놈이 내 진기를 다 빼먹었고 세상에 상대 못할 것은 양반들이라, 나는 이곳에서 시정잡배들한테 잔소리나 하고 사는 것이 제격이지요." 11장 닮은 얼굴의 기억 "어머니," "오냐." "이거 보아요. 윤국이가 이 말을 납작하게 해놨어요." "바람이 빠진 게로구나." "네. 바람이 다 빠져버렸어요." "그럼 내가 바람을 넣어주마." "아닙니다. 나도 바람 넣을 줄 알아요. 하지만 구멍에 붙은 쇠붙이를 윤국이가 떼어버려서 바람을 넣을 수가 없는 걸요." 서희는 고무로 된 장난감 말을 주워든다. 윤국이는 뒤뚝뒤뚝 방안을 걸어다니며 종이를 찢어발기더니 이번에는 경대 서랍을 열어 젖히고 그 속에 있는 것을 낱낱이 꺼내 방안에 늘어놓는다. "망가졌구먼. 우리 윤국이 기운이 센가 부지?" "응." "어째서 아기는 찢고 부숫고 그러지요?" "아기는 다 그런단다. 환국이 너도 어릴 적에는 그랬지." "내가요?" "음." "그럼 윤국이는 나만큼 자란 뒤에 사랑에 가야겠네요?" "어째서?" "아버지 서책을 다 찢을 거 아닙니까?" "그렇구나. 하지만 환국아." "네. 어머니." "아기가 찢고 부싯고 하는 것은 그것이 뭣인가 알고 싶어 그러는 거란다. 환국이는 다 컸으니까 이것은 종이이구나 저거는 상자구나, 하고 보기만 해도 알지만 아기는 걸어서는 모르지. 그러니까 찢어보고 부셔보는 거야. 그러니까 말리면 안 된다, 알겠니?" "네." "너 동생이 예쁘냐?" "네. 예뻐요. 너무 너무 예뻐요. 하지만 윤국이가 상자 같은 것 꺼내려고 애쓰면 불쌍해요. 다칠까봐 겁도 나구요. 한데 말예요. 어머니, 윤국이는 지가 꼭 할려고만 하거든요. 내가 꺼내주는 거는 싫은 가봐요."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환국이는 싱긋이 웃는다. "그러냐?" 서희도 미소한다. '사랑스러운 것들, 너희들은 어디서 생겨났느냐? 하나님이 주셨지. 하나님, 정녕 꿈은 아닐까? 환국이는 이제 여섯 살, 윤국이도 돌이 지났고 어서 자라라, 어서.' 윤국이는 화장수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한참을 놀다가 싫증이 났는지 환국이가 접어주는 종이배도 마다하고 엄마 엄마 하며 서희 무릎에 기어오른다. "엄마?" 고개를 갸웃하며 정답게 부른다. 젖을 달라는 것이다. 젖은 돌전에 떼었는데 하루 두세 차례 엄마의 빈 젖을 잠시라도 빨아야 직성이 풀리는 윤국이다. 그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을 때 떼를 쓰며 울고 하지는 않는데 아이는 기가 푹 죽는다. 그리고 아이는 노는 일에도 열중하지 못하고 억지 웃음을 자꾸 웃는 것이 가여워 서희는 빈 젖을 잠시만 빨리곤 했다. "조금만 빠는 거야. 우리 윤국인 착하니까, 그렇지?" 서희는 오지랖을 걷고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윤국은 기분이 좋아서 고사리같은 귀여운 손가락을 어미 입에 넣으며 또 쳐다보며 젖이 나오지 않는 젖꼭지를 빤다.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던 환국이 무릎을 민적거리며 다가온다. "어머니?" "으응?" "나도 어머니 젖 먹고 컸지요?" "그럼." "저어,저어, 저 말이지요?" "뭐냐." "저어, 한번 만져봤으면." "다 큰 도련님이?" 환국이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빙그르르 돌린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킬킬 웃으며 마루로 뛰어 나간다. 킬킬거리고 웃는 소리 뒤 "아버지?" 환국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냐" 길상이 들어오는 모양이다. "윤국아? 이제 됐지?" 젖꼭지를 물고 안 놓으려는 윤국일 달래어 내려놓으며 옷매무새를 고친다. 길상이 방으로 들어왔다. "여보." 선 채 부른다. "네." 길상이 낮에 안방으로 들어오는 일은 그리 흔치가 않다. "사랑에 계신 손님께 인살 해야겠소." "네?" 이 또한 거의 없었던 일이다. 서희는 길상을 쳐다본다. 다소 긴장된 표정이다. "손님이 오셨어요?" "방금 모시고 왔소." "어떤 분이신데 제가 인살 합니까." "만나 뵈면 알 것이오." 상현의 부친 이동진 씨라면 그렇다 할 것인데, 서희는 의아해한다. 그렇다면 달리 사랑으로 내려가 인사를 치러야 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달리 사랑으로 내려가 인사를 치러야 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길상이 독립지사들과 교분이 두터운 것은 알고 있으나 서희 쪽에서 외면하는 것은 물론 길상도 그런 영분에 서희를 끌어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은, "뭘 하는 거요." 길상의 어세는 날카롭고 강했다. 유모를 불러 아이들을 맡기고 사랑으로 내려간 서희는 방문에서 어쩐지 가슴이 철썩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길상이 먼저 들어가고 서희가 뒤따라 들어갔을 때 거기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람은 김환이었다. 서희는 그를 일별하는 순간 전신이 굳어진다. 그는 윤씨부인을 보았던 것이다. 착각이었다. 분명히 그는 남자였고 장년이었다. 상대편 김환이 역시 미동 없이 서희를 쳐다본다. "어른께 인사드려요." 부드러운 길상의 음성에 서희는 자신을 수습하였고 상대편도 희미하게 몸짓하는 것을 느낄 수 이었다. '할머님...' 서희는 할머니 윤씨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최치수는 희미하게, 어머니 별당아씨는 보다 더 희미하게 기억하지만 열 살 때 별세한 할머니의 얼굴만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다. "돌아가신 할머님의 친정조카뻘 되시는 분이오." "네?" 귀를 의심한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절을 오리시오." 길상의 음성이 또 날아왔다. 서희는 최초, 그 일별의 착각에 쫓기듯 저도 모르게 몸을 가누며 큰절을 올린다. 고개를 들고 상대를 바라본다. 똑바로 응시한다. 거기엔 전혀 다른 얼굴이 서희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어찌 할머님 생존시에는 한 번도 뵈올 수 없었습니까." 묻는 말에 길상은 말이 없고 환이도 말이 없다. "할머님 친가 윤씨 짐안은 서학으로 남은 분이 안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그러하오면?" "더 깊이 묻지 말게. 어떤 관계로든 돌아가신 할머님과 핏줄이 닿았으니 최참판댁 손녀에게 하대하는 게 아니겠느냐?" "네." 서희는 고개를 숙인다. 범치 못할 위엄이 있다. 서희는 난생처음으로 그것을 느낀다. '분명하게 생겼구나. 그 사람보다는 몸집이 작군. 뚜렷하기도 하구. 과연 최참판네 여인이구먼.' 넓은 이마를 바라보며 환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그 사람은 나약하였다. 부드러웠지. 서희처럼 총명하지 않았다. 산 속의 새, 산속의 꽃, 진달래 꽃이었던가. 묘향산 북변 무덤 속에서 잠자는 사람.' 환이는 아직도 곁에서 그 여자가 숨쉬고 있는 것을 느낀다. "지금 어디서 오시는 길이옵니까?" 소스하치다가 환의 몽롱했던 눈이 본시로 돌아간다. "지리산에서 묘향산을 거쳐 오는 길일세." 서희 눈동자는 정지한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시었는지요." "만주 풍물을 구경할려구 왔네." "할머님 생전에 할머님을 보신 적이 계시온지요." "만나뵈온 일이 있지. 그도 여러 번," "헌데 어찌 할머님께선 저에게 그런 말씀을 아니 하셨을까요." 환이는 쓰디쓰게 웃는다. "그것은 저승에 가서나 물어볼 일 아니겠느냐? 할머님의 심중이시니," "..." "그러나 장차 할머님의 심중을 알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사랑을 나서는 순간 서희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여 안방까지 건너왔는지 알 수 없다. '옛날에 어디선가 보았던 얼굴이야. 어딘선가... 할머님 얼굴로 착각한 것 말구, 어디서 보았을까? 이날 밤 서희는 길상이 들어오기를 고대하였다.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다렸으나 끝내 길상은 사랑에서 올라오질 않았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도 지나고 길상은 손님과 함께 하얼빈에 볼일이 있어 떠났다는 전간이다. "이럴 수가?" 도사리고서 밤을 꼬박이 밝힌 서희는 노했다. 격노한 것이다. 서희가 서희가 남편 길상에게 이렇게 노해보기는 처음이다. 안절부절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마음, 서희는 이불을 깔고 드러눕고 말았다. 아이들을 멀리하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마구 울었다. 인철이라며 큰절까지 시킨 손님에 대한 짙은 의혹을 풀어주지도 않고 떠난 것도 괘씸하고 분하였으나 행선지가 하얼빈이라는 데도 쌓이고 쌓인 감정이 폭팔한 것이다. 그러나 실컷 울고 난 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무렵 서희는 안정을 찾는다. 냉정해지니까 왜 울고 왜 그토록 노하였는지 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손님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기로 그것은 종전과 별다를 것이 없는 자시노가 실상의 생활인 것이 깨달아진다. '인척이면 인척인가보다 생각하면 될 거 아닌가. 그이도 모든 것 정리하고 할 일이 없어지니 손님 뫼시고 하얼빈으로 갈 수도 있는 일,' 결국 눈을 감아주기로 결심한다. 자리를 치우라 이르고 세수를 한 서희는 어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불러들여 놀아주는 것이다. 더욱 자상하게 깊은 애정을 기울이며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열중한다. "어머님." "오냐." "어제 말예요? 산에 갔지 않아요?" "산에," "그랬더니 새가 나를 쪼려 해서 혼이 났어요." "어째서?" "아마 둥주리에 있는 새낄 잡아갈까봐서 그랬나 봐요," "저런," 하는데 서희 마음속에 묘향산! 하며 외치는 소리, 소리가, 지리산에서 묘향산을 거쳐 오는 길일세, 하던 말이 산사의 종소리처럼 과앙과앙 되풀이 심장을 치고 온다. 어제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묘향선이란 지명은 심장에 갈고리질을 했다. 진득진득 심장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그러나 서희는 그 말을 외면하고 말았다. 견디어야겠기에 서희는 외면하고 못 들은 척하는 일이 흔히 있다. 그 묘향산이 지금 아우성치며 달려나오려 한다. 그렇다! 오래 전 혜관은 서희를 찾아와서 묘향산 북변에 있는 무덤 얘기를 했었다. "안자야! 거 안자 없느냐?" 안자는 이내 달려왔다. "예, 마님." "너 지금 곧장 객줏집에 가서 공노인더러 잠시 다녀가라고 일러라." "예." 윤국이는 잠이 들었다. 환국이는 언제 나갔는지 뜰에서 강아지와 뒹굴며 놀고 있었다. '묘향산...' 다시 길상에 대한 노여움이 치민다.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이 치민다. 혼자 타인들에게 둘러싸였던 지난날에도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진 않았다.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숨가쁜 도약이 있었을 뿐이다. 싸움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승리의 언덕은 외로운 자리였는지 모른다. 서희희 승리를 축복해주고 기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외로운 싸움이었다고는 하지만 동행자는 있지 아니하였던가. 그 동행자들이 지금 서희의 승리를 외면한다. 아니 쓰디쓰게 바라본다. 공노인조차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기운내! 서희야! 여기서 헛디디면 나락이다. 이제 내게는 최참판댁을 일으키고 원수들을 치는 목적만은 아니다. 내 아이들 내 쉬여운 것들을 풍요한 토양에 심어야 하는 거야. 내 귀여운 것들 너희들을 말귀에 달고서 만주 땅을 헤맬 순 없다!' 그러나 서희는 예날같이 꼿꼿이 설 수가 없다. 흥분하고 노하면서도 마음 밑바닥에는 칼날이 서늘한 기준이 미동하지 않고 있는다는 것을 서희 자신은 알고 있었고 또 사실이 그러했다. 한데 이 수습될 수 없는 혼란에서 서희는 차츰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다. 사랑이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 어느편을 위해서도 잃어서는 안 되는 사랑 때문에. 아이들한테 아비가 있어야 하고 아비한테도 아이들은 있어야 한다. 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쉬여운 것들을 말귀에 달고서 만주 땅을 헤맬 수 없다! 는 외침은 자신이 마구 흔들리고 있다는 이외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낯선 손님과 떠나버린 길상은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오늘 이런 결과가 오기까지 꾸준히 기다려주었는지 모른다. 그 나름의 애정과 최참판댁에 대한 의리 때문에 이런 결과까지 끌어놨는지 모른다. 그리고 떠났는지 모른다. 서희 마음속에서 묘향산은 행방불명이 되고 오로지 길상의 마음, 길상의 행방을 뒤쫓고 있을 때 "무슨 일이신지요." 하며 공노인이 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들어오시오." "예." 공노인은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온다. 자리에 앉았어도 말이 없다.공노인은 더욱더 조심스럽게 대기하는 상태였는데 왜 서희가 오라 하였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온 눈치였다. "지리산에서 오셨다는 손님 그간 공노인댁에서 유하셨소?" "예, 그렇습니다." "그분을 공노인은 언제부터 아시었소." "한 오륙 년 되나 봅니다." "어떻게 아시었나요?" "조선에 갔을 때 지리산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그러면은 어찌하여 내게는 그 말씀을 아니 하셨던가요?" "..." "그러는 데는 그럴 만한 r까닭이라도 있으셨나요?"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마는," 공농니은 서희를 힐끔 쳐다본다. "지금도 말씀하실 수 없겠소?" "그거는..." "..."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마는 실은 저도 확실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나에게도 말씀 안하신 건가요?" "그, 그거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거 뭣입니까 이곳에선 독립지사라 합니다만, 그, 그러니까 의병으로서 또 그분의 신분이 세상에 들나는 것은," "신분이라면?" "그, 글쎄 그것도 확실한 얘길 들은 바는 없습니다마는 잠작컨대," 공노인은 말을 끊는다. "짐작컨대?" "거의 짐작에 틀림이 없는 것으로 알고는 있습니다마는 왕시 동학의 접주였던 김개주 장수의 외아드님이라는, 풍문도 그렇고, 예. 풍문도 그러했습니다." 공노인은 또다시 서희를 힐끔 쳐다본다. 서희 추궁에 못 이겨 말을 털어놓는 것은 아닌 성싶다. 이 정도면 말을 해도 괜찮을 것이요, 차라리 해두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던 것 같다. "그래요." 서희는 생각에 빠진다. '지리산에서 왔다는 말과 서학이 아닌 동학이라는 말은 맞는군. 김개주의 왜아들? 그러면 어찌하여 윤씨 가문과 핏줄이 닿는다는 게지? 윤씨와 김씨, 할머님께선 일찍이 여형제가 계셨더란 말인가? 나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괴정에 죽은 김서방이 윤씨댁하인이었고, 그 사람도 여형제 말ㅇ느 아니했다. 또 이상한 점은 있어, 임개준가 그 동학의 괴수가 중인이라 하였는데 윤씨 짐안에서 혼인을 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의문은 또 있어. 만부득한 사정으로 그렇게 되었다 가정하더라도 집안이 그 풍랑을 겪는데 한번쯤 나타날 법한 일이 아니냐? 그런데 나는 할머님으로 착각을 했다... 그리고 묘향산은 또 무엇이냐?' "정녕 공노인 말씀에 딴 뜻은 없겠지요?" "딴 뜻이라니요? 딴 뜻이 있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공노인은 서희 혜안을 안다. 그 말이 진정이냐고 물었어야 할 것을 왜 하필이면 딴 뜻이 없느냐고 묻는가.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라면, 아니다. 그것은 길상의 소관이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분이 돌아가신 아버님 못지않은 훌륭한 자질과," 하는데, "치우시오!" "아,예." "동학당하고 우린 아무 상관이 없고. 상관이 없다뿐이겟고? 양반에 대적한 사람들 아니었던가요? "예. 그야 그렇습니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어찌하여 공노인이 우리집 서방님을 불러내어서 대면을 시켰느냐 그거요. 말씀하시오." "그것은 그분이 원하셨습니다." "그러면은 그분이 여기 사정을 소상히 알고 오셨다 그 말씀이요?" "그런 줄로 압니다." "좀더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오." "언젠가 이곳에 오신 일이 있었지요. 혜관스님이라구, 지리산에서 가깝게 지내는 여러 가지 사정말고도, 그러니까 우관스님이 그분의 백부님이며 혜관스림이 직계 제자이고 보면," "그게 육 년 전의 일이었소?" "그런 줄로 압니다." 서희는 머릿속에서 두 개의 묘향산이 부딪치면서 소리를 낸다. 하나는 혜관의 묘향산이고 다른 하나는 김환의 묘향산이다. 두 사람은 묘향산 북변에 있는 무덤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즉 서희 생모와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 비밀을 길상은 알고 있다.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서희는 단정을 내린다. "우린집 서방님하고 사흘 낮 사흘 밤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내셨지요?" "줄곧 강가 횟집에서 약줄 드셨지요. 강가 모래밭에서 함께 뒹굴고... 한이 많으신 분일 것 같았습니다." "알았소. 그럼 가십시오." 서희는 흩어지는 자신을 감추려는 듯 성급하게 말했다. "예.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공노인은 황황히 나간다. 온통 머릿속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데 서희는 무릎 위에 두 손을 깍지끼고 앉아서 "가만히 있자, 가만히 있자... 가만히." 방바닥 한 곳을, 까만 딱지가 붙어 있는 방바닥을 골똘히 내려다보며 가만히만 되풀이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생각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감나히 있자, 우관스님하고 김개주! 그리고 그분 혜관스님... 그리고 또 환국이아버지... 절이다... 절,' 개미 쳇바퀴 돌 듯 서희의 생각은 같은 둘레를 몇 번이고 돈다. 돌고 또 돈다. '어째서 할머님을 닮았느냐, 어째서 김씨가 할머님의 핏줄이냐,' 망치질하듯 머릿속이 광광 울린다. 소리는 소리를 낳고 또 낳고 '어찌 너는 도망을 치려 하느냐! 너가 만난 사람은 구천이 그 하인이 아니더냐! 할머님을 닮았다는 것, 할머님의 핏줄이라는 것, 그것을 방패 삼아 너는 너의 기억까지 지우려 하느냐? 그것은 차후 규명될 일, 그자는 구천이다! 분명히! 분명히!' 서희는 입술을 껄며 옷을 갈아입는다. 뒤꼍에서 유모와 환국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안자야!" "예!" "천서방더러 인력거 준비하라고 일러!" "예." 인력거에 오른 서희는 "절로 가는 게요." "옛꼬망." 인력거는 절을 향해 떠났다. 그새 중이 들숭날숭하던 운흥사는 또 다시 중 없는 절이 되어 황폐해 있다.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고 절지기가 있는 아래채 쪽에서 장작으 패고 있던 절지기가 당황하며 쫓아나온다. "어이구 마님, 어쩐 일이십니까." "오래간만이오." 인력거에서 내린 서희는 습관처럼 말했다. "예. 그 동안 통 안 오시기에, 예" 허리를 굽실거린다. "법당 문 좀 열어주시오." "예,예" 절지기는 달려가서 열쇠를 꺼내왔다. 쇠통을 풀고 법당 문을 열면서 "찾아오시는 분이 안 계셔서 먼지가 잔뜩 쌓였구만요. 잠시만, 좀 훔치겠습니다." "아니요. 개의하지 마시오." 서희의 흰 버선발은 주저없이 먼지가 쌓인 마루를 밟고 올라간다. 주인 없는 집이나 중 없는 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봄은 무르익어가건만 법당 안은 냉기가 감돈다.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하는 동안 절 뒤꼍에서는 쌈질하는 아이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육 년 동안 법당 안은 낡은 것 이외 달라진 것이 있다면 후불 탱화 앞에 보전이 안치된 것뿐이다. 치졸한 솜씨로 근래에 조성한 불상인 모양인데 그것도 도금이 벗겨져서 희뜩희뜩했다. 서희가 예배를 올리고 있는 동안 절지기는 방석을 가져왔다. 예배를 올릴 적마다 서희의 남색 법단치마는 먼지를 쓴다. '서가세존, 저는 어느 길로 가야 하나이까?' 다시 예배 '한 지아비를 섬기고 살 수 없는 저를 굽어살피옵소서.' 또다시 예배 '억만 억겁 세월에서 한 인생은 티끌이온데 티끌일 수 없는 이 마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서희는 불단 앞에 정좌하여 불경을 송하기 시작한다. 패다 만 장작 옆에 을씨년스럽게 쭈그리고 앉은 절지기는 무료하게 툇마루에 걸터앉은 차부 천서방에게 말을 걸었다. "그 동안 통 안오시더니," 천서방은 마땅찮아 그러는지 대답 없이 바라볼 뿐이다. "절이 이래 가지고는 안 지었느니만 못하니까, 세상에 중놈 씨가 말랐는지 용정 인심이 나빠서 그렇는지," "절이라도 지었으이, 신서방이 굶지 않았지비." 천서방 대꾸는 퉁명스럽다. "절 안 지었으면 내가 본연스님을 따라 여기 왔을 리 없고, 제기랄! 한번 자릴 잡으면 뜨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 중 어디세, 무시레 하고 살지비?" "내가 알 턱이 없지. 목탁이나 뚜디리며 동냥하고 다리겠지 뭐. 배운 도둑질이 염불인데... 한데 그 송씨네 자부가 미쳤다면?" "미치기는, 어디세 그런 말으 들었지비?" "글TP 뜬소문이겠지만," "불고수보리하사되 제보살- 마하실 이응여시- 항복 기실이니 소유일체 중생- 지류에- 약난 생," 법당에 울려퍼지는 서희의 독경은 비명처럼 드높다. "세상에는 하도 헛소문이 많이 나도니까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내가 듣기엔 아편을 찌른다 하더구먼." "패가망신이랍매." "자고로 여자가 잘나면 팔자가 안 좋거나 집안이 망하거나 둘 중하나지. 송씨네 자부도 얼굴이 반반하기 때문에 집안이 망하고 멀쩡한 중 하나 망쳐먹구, 그 여인네야 잘못한 거 하나 없지." "무시레?" "그건 내가 안다니까. 잘못이라면 얼굴 잘난 것, 그놈의 잘난 얼굴땜에 중이 하나 미쳤고 남편은 남편대로 못난 사내가 되고, 아무튼 여자가 잘나면 아무리 해도 남자는 못나기밖에 더 할 일이 없어지는 게지." 절지기는 독경 소리가 울려퍼지는 법당 쪽을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서희를 두고 하는 말인 성싶다. 천서방은 절지길 빤히 쳐다보다가 "무시기, 그러믄 송씨네 자부는 결백하다 그르느 기야?" "내 알기론 본연스님 손 한번 못 잡아봤을걸? 혼자서 미쳐 날뛰었지." '이 도둑놈으 새끼! 그 도산을 피울 적에는 입 다물고서리, 불기경 하잲앴는가. 실실 웃고서리?' 서희의 독경 소리가 낮아진다. 끝나가는가 싶었는데 다시 높아진다. 그리고 뱃속에서 밀어내듯 힘찬 음성으로 변해간다. "말하자면 운수가 나빴던 거야. 여자 하나 버리는데 그치지 않고 집구석마저 흠싹 무너졌으니,망할려면 잠시야, 잠시. 그래 옛날에도 만석살림 자랑 말라 했잖어?" "그러문 어찌 그때 용정이 좁다아 하고 도산이 났을 적에 그 자부 잘못 없다, 한마디 앙이 했음? 절에 있는 절지기 증거 설 만하잲음?" "먹고 할 일 없어 그 짓을 해? 뭐가 답답해서," "심뽀 나쁘다당이, 그러문 못쓰는 기야. 사람으 말할 때 말으 해야지비. 억울한 사람으 도와주어야지비." 하면서 천서방은 난데없이 달겨들어 대로 한가운데서 소란을 피우던 송애 생각이 났다. 작년 가을의 일이었다. "대자대비한 부처님도 아니겠고 남의 싸움에," "세상이 그러이 인심으 나빠지고 흑백 가리는 일이 없어지구, 신서방은 그런 일 앙이 당한다 장담하겠음?" "나야 뭐 다 산 세상인데 흥, 어째 오늘은 길어지누만." 법당 쪽을 힐끗 펴다본다. 사방은 어둑어둑해오기 시작한다. "다 산 세사앙? 그러문 나도 하남디 하겠음. 소문 들으이 신서방 돈으 받고서리 절방 빌리준다 하더랍매." "벼락맞을 소리!" "그것도 남 눈으 피하는 남녀한테 빌려준다 하잲음? 억울하답매?" "누가 그런 소릴 해!" "자고 온 사람으 입에서 나온 말 아잉까? 절에 살문서리 질기 그러랑이. 남 망하는 거 바래문은 저도 망한답매. 여기 풀이나 좀 뽑지비. 이렁이 불공이 들겠는가?" "걱정 말어. 쓸데없는 걱정, 나야 뭐 내일이라도 떠버리면 그만이야." "흐음, 그렇기 되는 날 그러문 내가 와서 살아야지비." 천서방은 웃는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법당 안의 독경은 그칠 줄 모른다. 12장 추적 유쾌한 여행이었다. 다음 정거장이 하얼빈이다. 길상은 환이 화술에 말려들어 웃기를 몇 번 했는지. 그 중에서도 조준구 골탕먹인 얘기가 젤 우스웠다. 아마 환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해보기도 처음이겠으나 길상은 신기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지금껏 뇌리 속에 있던 인물과 이렇게 상반할 수 있는가 하고. 이따금 환이는 소년같이 웃었고 창밖을 호기심에 가득 차 바라보기도 했었다. 평범한 친구였다. 손위라는 생각도, 신비스런 그 과묵의 얼굴도 아니었다. 수백 개 화살같이 세게 날아오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불륜의 죄악을 안고 어둡게 타는 눈도 아니었다. 누구든 함께 여행을 하다보면은 상호간에 가로놓인 의식의 울타리는 다소간 걷히게 마련이라지만 환의 경우 여행 탓이 아님은 물론이다. 만일 환의 이러한 모습을 혜관이나 강쇠가 보았더라면 천지개벽한 것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공노인 그 노인네 여간내기가 아니거든." "말해 뭣합니까." "광대도 이만저만, 우릴고 웃기고 조준구를 곯려는대 손발이 척척, 그 사악한 놈도 그네를 타는 꼴이라. 나는 산중에서 도를 닦아 온 영험 있는 도사요 조준구한테 땅문서가 있는 한 공노인은 무한정의 전주이니 그자가 처음엔 여의봉을 양손에 든 것 같았을게야. 하하핫..." 환이는 악의 없는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오륙 년 동안 서울을 십여 차례나 오르내리며 그자라고 함께 놀아주었는데, 얘기가 많지. 생각하면 좀 너무했다 싶기도 하구, 두 번째 광산을 살 적에," 하고 시작하는 일종의 사기극은 다음과 같다. 진짜 사기꾼이 광주하고 짠 일인데 그것을 공노인이 알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광주는 안 팔려 하는 시늉을 하고 사기꾼은 살려고 마구 덤비고 그러면서 슬쩍슬쩍 그런 정보를 조준구 귀에 넣어주는 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기극은 조준구가 처음 광산에 실패한 뒤 다시 만회해보려고 기를 쓰는 것에서 착상이 된 것이며 공노인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는데 아무튼 조준구가 그 사기극에 걸려주기를 바란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고, 그러던 참 산중 도사가 행차하여 그 사기꾼 집에 자꾸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짐짓 사기극은 모르는 척 이 집에 서광이 비쳤다는 둥 큰 재운이 있다는 둥 실없는 소릴 하는 한편 식지가 움직이는 상태의 조준구한테 가서는 그 광산을 사면 크게 손해를 볼 터이니 결코 사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수차 했다는 거다. 조준구는 또 자기편의 꾼들이 탐지해온 바에 의해 도사가 그 집에 드나든 다는 것, 어떠어떠했다는 것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므로, '오냐 네놈이 그놈한테 광산을 안겨주려는 수작이구나.' 일은 그렇게 되어 조준구한테 낙찰이 되고 결과는 도사가 예언한 대로 사기꾼은 어렵잖게 거금을 손에 넣었고 조준구는 또 크게 당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보십시오. 제 말을 안 믿으시더니, 하고 환이는 실컷 윽박질렀으나 그때부터 조준구는 매달리더라는 것이다. 길상은 배를 잡고 웃으며 "거 너무했군요. 침 한 방울 안 묻히고서 하하핫..." "그래 그자가 나를 깜박 믿게 되었는데 그 집안의 일이야 석이가 있으니까 명경알 들여다보듯 환한 터이고 물론 조준구는 끝내 석이하고 우리 관계는 몰랐지. 석이는 임역관이 천거했으니까. 미리 알고 드는 데야 도사가 안 될 수 없는 일, 재미나는 것은 기미에 미친 조준군데 이미 그땐 그도 완전히 내리막길이고 보면 무엇이든 거머잡으려 했겠지." 기미란 미두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의 증권 매매 비슷한 투기업으로서 세계대전중 곡가의 오름세 내림세가 조석으로 급변하는 시기, 흥한 사람 망한 사람이 속출했었는데 현물 없는 약속거래인 만큼 모험이 따르는 일종의 도막인 것이다. "덕분에 나도 제물포를 드나들며 기미라는 것의 묘미를 터득할 기회가 있었지. 허나 조준구는 안 돼. 사악하고 교활하지만 사람 가지고 노는 것만큼도 안 되거든. 재물을 가지고 놀 위인이 못돼. 해서 처음엔 하락할 것을 알면서 사라고 권하는 게야. 그래 몇 번 실팰했지. 값이 오를 것을 알면서 팔라 하고 그러기를 몇 번 다음엔 반대야. 틀림없이 하락한다 해서 또 팔라고 권하지. 안 패는 게야. 몇 번을 그러고 나면 또 내게 매달릴밖에 나중엔 돌아버리더군. 미친 것처럼 마구 내던지고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그 날뛰는 꼴이란 꼭 벼룩 같더란 말이야.하하하..." 환의 웃음 소리엔 힘이 빠져간다. "누굴 물고늘어지겠나. 날이 궂을려면 삼 년 묵은 옴자리가 가렵다든가? 최초에 잘못 산 광산을 들고나와 임역관을 물고늘어진 게지. 한들 별도리 있겠나? 본시 광산이란 그런 건데, 그자가 사악하기론 이를 데가 없지만 그릇이 작아. 그릇이 작은 놈이 곶감 빼먹듯 그렇게나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릇 작은 놈의 욕심이 너무 황당했거든." 장난꾸러기같이 웃곤 하던 환이, 그러나 역시 차창 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열기가 오른 듯 떨고 있는 듯 그렇게 보여질 순간이었다. 환이가 들려준 얘기를 길상은 공노인으로부터 듣지 못하였다. 그것은 길상이 회피한 탓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노인이 들려주었던 조준구의 본처 홍씨나 정식으로 혼인하였다는 신여성이나 향심에 관한 얘기를 환이 쪽에서는 하지 않았다. "얘기를 하자면 많지. 술 마시는 것 이외 사철을 쏘다녔던 이십 년... 상하, 전후 좌우 사람 구경 많이 했으니까..." 용정에 나타는 그는 이십 년 세월을 결산하기 위해서든가. 어느 덧 기차는 하얼빈역 구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 왔나 보군." "네." "천천히 내리지." "그러지요." 그런데 천천히 안내릴래야 안 내릴 수 없는 사정이 하나 생긴 것이다. 무심히 차창 밖을 내다보던 길상이 눈에 말쑥한 회색 춘추복을 입고 손가방 하나를 들고서 플랫폼을 걸어나가는 사내 모습이 잡힌 것이다. 얼핏 지나서 뒷모습만 남겼으나 김두수였다. "선생님." 실상은 나직이 속삭였다. 숙부님이 선생님으로 변했다. 환이는 호칭에 대해선 전혀 무관심이었다. "먼저 내리십시오 떨어져 가야겠습니다." "어째서?"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역 앞에서도 제가 선생님께 다가가기 전엔, 멀찌감치 따라오시도록, 어서 내리십시오." "알았네." 하고 환이 먼저 내렸다. 그리고 거의 막판에 가서 길상은 기차에서 내렸다. '그놈이 하얼빈에는 뭣하러 나타났을까.' 길상은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며 걷는다. '혹? 저 양반 뒤에 밟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구먼. 그렇다면 그놈이 먼저 나갈 리 없지. 그러나, 개찰구에서 지킬까?' 길상은 개찰구가 가까워지자 그쪽을 열심히 살폈으나 김두수는 없었고 개찰구 밖 저만치서 환이 얼쩡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뛴다. 개찰구를 나선 뒤에도 길상은 사방에다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으나 김두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쩡얼쩡 시골 사람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환이만 눈에 뛴다. 재빠르게 길상은 역 광장을 질러가서 마차를 잡았다. 마차에 오르면서 환이에게 손짓을 한다. 몸짓이 분주하지 않았건만 환이는 순식간에 다가와 마차에 오른다. 도중에서 길상은 마차를 한 번 갈아탔다. 그리고서 여관을 찾아든 것이다. "선생님. 혹 조선서 선생님 뒤를 밟을," "경찰 말이냐?" "네." "그런 일은 없겠으나 하기는 알 수 없는 일이지." "김평산을 아시지요? 김위관 집의 김평산 말입니다." "알지." "그자의 아들놈이, 그러니까 큰놈이지요. 저하고는 아마 동갑쯤 되겠습니다만 그놈이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밀정으로 놀았지요." "이곳에 와 있다는 얘기로군." "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령서 순사부장으로 있었습니다. 한데 아까 기차 안에서 그놈이 가는 것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필시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나타났을 겁니다." "목적이라면?" "떠돌이 그놈이 젊은 나이에 순사부장까지 올라갔다면 과히 짐작 하실 수 있는 일이지요. 노일전쟁 때부터 이곳에 흘러와서 왜헌병보조원 노릇을 했다는 예기고 그놈 손 끝에 걸린 사람이 수울찮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해치울 수 없었던가?" "얘기가 많습니다. 회령이라면 간도로 건너오는 길목인데 그곳에다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을 삼십 남짓한 젊은놈을 순사부장으로 앉혔다면 그만큼 한 일도 많고 능력도 있었다 할 수 있겠는데 하여간 좀 귀신 같은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니까 악운도 긴 편이구요." 길상은 그간 김두수와의 관계, 박재연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대충 설명한다. "김평산이..." 중얼거렸을 뿐 환이는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별말이 없었다. "만일의 경우르 생각해서 그랬습니다만 그놈의 지나가는 꼴을 보니까 전혀 이쪽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뒤를 밟았다면 앞서 내릴 리도 없고, 하지만 그놈이 하얼빈으로 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서든 좋잖은 징조지요." 길상의 얼굴은 궁리하는 것 같다. 그런 일은 없겠으나 하긴 알 수 없다는, 환이 무슨 일을 길상은 중요시한다. 조선서 환이 무슨 일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세세히는 알지 못한다. 공노인이 조선에서 돌아오면은, 일종의 보고를 하게 되는데 서희에게 하는 보고가 있고 또 길상에게 들려주는 말이 따로 있었다. 김환이라는 이름을 들먹인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혜관을 비롯하여 관수, 석이, 운봉노인, 윤도집 등에 관한 얘기, 그들 둘레에 관한 얘기를 종합해볼 것 같으면 어렵잖게 그들이 심상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혜관이 만주에 왔을 때도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님을 길상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환일 직접 대한 길상의 판단, 말하자면 거물이라는 것이다. 김환의 호칭이 선생님으로 낙착된 것이 바로 거물로, 권필응과 버금가는 거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선생님." 부르는 말에 환은 "싱겁군." "네?" "이렇게 맹숭맹숭 쳐다보고 있으니 하는 말일세." 도통 김두수 얘기엔 신경을 쓰고 있질 않는 것 같다. "피로하진 않으십니까?" "피로? 내가 걸어왔었던가?" 환은 껄걸 웃는다. "산중에서 도를 닦는 도사가 머릴 깎으면 어떡허누." "깎으셔야 합니다." "어렵잖어." "네." 길상은 여관의 사동을 불러서 서툴기는 했으나 중국 말로 마차 하나를 부르라고 부탁한다. "마차 왔어해!" 사동이 소리쳤다. 마차에 김환과 함께 오른 길상은 송장환이 있는 약종상에서 과히 멀지 않은 명화원이라는 청요리집 앞에서 내린다. 큰 요리집이다. 깊숙한 곳에 방 한 칸을 잡은 뒤 요리와 술을 청해놓고 길상은 쪽지 하나를 써서 사동에게 쥐여주며 약종상 이름과 송장환의 이름을 대고 빨리 갔다오라고 한다. 사동은 연신 고갤 끄덕이고서 나갔다.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있는데 송장환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김형. 여긴 왜 오셨소. 내 숙소로 가시지 않고," 하다가 동행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춤한다. "앉으시오." 길상은 자리부터 권한다. "인사하십시오. 송선생. 조선서 오신 김선생님이시오." "아 네. 저는 송장환이올시다." 길상의 말에 잠시 기다리라는 시늉을 해보이며 "잔 받으십시오." 김환에게 공손스럽게 술잔을 바친다. 환은 잔을 받고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잔을 되돌려준다. 그리고 술을 부어준다. 아무말 없이. 김환에게 공손스럽게 술잔을 바친다. 환은 잔을 받고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잔을 되돌려준다. 그리고 술을 부어준다. 아무말 없이. "실은 그곳으로 갈려다가 역에서 김두수를 만났소." "김두수를," "네. 뭐 우릴 따라온 것 같지는 않습디다마는 조심은 해야겠기, 권선생님께서는 모레께나 오시지요?" "네, 모레 오시기로 돼 있어요." "그러면 나는 선생님 뫼시고 훈춘에 가서 기다리겠소. 권선생님을 그곳에서 만나뵙지요." "그래도 무방하지요." "그곳에서 연추까지 동행하게 되면 그러구요." "김두수 땜에 그러시오?" "꼭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에," 하다말고 "선생님." "음." "여기 송선생께선 용정에서 오랫동안 교육 사업을 하시다가," "혜관한테서 들었어." "혜관스님 말씀입니까?" 송장환의 표정이 싹 달라진다. "혜관이 다녀와서 송장환께 얘길 하더군요." "그럼 혜관스님께선 안녕히 계신지요." "별일없이 지내고 있소." 명화원에서 주연은 간단하게 끝냈다. 송장환은 약종상에 돌아가고 김환과 길상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거리로 나섰다. 이튿날 길상은 그새 양복장이로 달라져버린 김환과 함께 훈춘을 향해 떠났다. 길상과 송장환이 수냥의 정체를 알았던들, 윤이병과의 삼각관계가 빚은 사건의 꼬임새를 알았던들... 아무튼 사흘 후 송장환은 약종상에서 권필응과 장인걸이 하얼빈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냥 집에 도착한 권필응과 장인걸은 광동까지 다녀온 긴 여행길에 지쳐 있었다.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정결하게 준비된 침실에 가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금녀는 해를 감늠해보면서 장바구니를 팔에 끼고 장을 향해 집을 떠났다. 금녀는 무척 행복했다. 권필응이 빙그레 웃고 바라보는데 "금녀, 잘 있었소?" 하면 장인걸은 악수를 했다. 그 따뜻한 손의 감촉이 아직도 손바닥에 역력히 남아 있다. 금녀, 잘 있었소? 귓가에 맴도는 음성 '네. 선생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만났을 때 못한 말을 금녀는 장길을 가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혼자 웃는다. '좀 얼굴이 안되셨어요. 피곤해 보였어요. 푹 쉬세요.' 금녀는 가벼운 보조로 걷는다. 햇빛은 밝고 인생이 아름답다. 아비가 딸을 술집에 팔아먹은 과거의 그 비정의 추억이, 애인을 짐승 아가리에 넣으려던 잔악한 사내의 추억도 이젠 말끔히 가셔지고 없다. 금녀는 현재가 더없이 만족스럽고 고마운 것이다. 헤어져 있고 범상한 남녀의 관계도 맺지 않았던 장인걸이지만 어디서든 마음으로 지켜주는 눈이 있다는 것은 삶에의 의지가 된다. 장은 풍성했다. 시장이란 언제나 풍성한 곳이지만 겨울을 겪고 무르익어가는 봄날의 장거리란 태양빛과 더불어 신선한 생명에의 향기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소음이 장거리에 가득 차 있다. 소리와 소리, 또 소리, 합쳐서 꿀벌들처럼 닝닝거리는 소리, 언뜻언뜻 귓가에 스쳐가는, 얼마요, 싸게 하시오, 금녀는 그 소리를 헤치고 들어간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눈에 익은 장사꾼 청인 할아버지, 모두모두 착한 얼굴이다. 소리는 꿀벌의 나랫짓처럼 생활의 활기찬 약동의 소리들이다. 금녀는 야채를 골라서 장바구니 속에 넣고 셈을 하고 다시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간다. 붐빈다. 사람들의 어깨와 어깨가 부딪는다. 과일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춘 금녀는 귤 몇 알을 고르는데 뒤에서 떼미는 바람에 쓰러지려다 돌아본다. 그때 금녀 눈에 들어온 것은 저만치 상당한 거리에서 필사적으로 사람을 헤치며 오는 사내, 앞사람 어깨에 가려져 코에서부터 윗부분 얼굴만 보이는 사내, 순간 금녀는 몸을 날리려고 허리에 힘을 주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원상태로 돌아간다. 그는 천천히 고깃관으로 다가간다.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천연스런 태도다. 돼지고기, 쇠고기를 사서 바구니에 넣고 시장을 빠져나간다. 금녀를 뒤쫓아서 잡답을 헤치고 나온 김두수, 숨을 크게 내쉰다.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딱는다. 얼굴 아랫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만일 얼굴 아랫부분이 사람 어깨에 가려지지 않았더라면 금녀, 일별에서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기차에서내렸을 때와는 달리, 시장을 배회할 작정으로 그랬었는지 김두수는 허름한 노동자 차림새다. 김두수는 금녀가 돌아볼지 모른다는 것에 대비하여 자주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곤 한다. 그리고 길가에 늘어선 점포 쪽으로 몸을 바싹 붙여, 점포가 엄폐물이기나 하듯 얼굴을 점포 쪽으로 돌려가며 금녀 뒤를 따른다. 금녀가 잡화상으로 들어간다. 김두수는 당황하여 점포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인다. 한참 후 금녀는 잡화상에서 나왔다. 천천히 아까와 똑같은 보조로 걸어간다. '으흐흐흣... 이렇게 빨리, 이건 그저 호박이 굴러들어온 게야. 으흐흐...' 당초부터 양서방이 이 장거리에서 금녀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기에 김두수는 장거리에 늘어붙을 각오를 하고 왔던 것이다. 하얼빈에 도착하자 그는 시장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여관을 잡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곧장 나와서, 그러니까 오늘까지 나흘을 배회하는 터였다. 작년 가을부터 금년 오월까지 김두수는 면밀하게 준빌 했었다. 봉천에 가서 뻐드렁니도 교정하여 얼마간 밀어넣었고, 그 동안 그는 연추에 금녀가 없다는 것도 몇 번이나 확인시켰다. '드디어, 드디어 저 계집은 내 앞에서 지금 걷고 있다. 지금이라도 나는 저년을 잡아끌고 갈 수 있다. 한소동 벌어지겠지만. 그러나 참자. 너가 가면 어딜 가겠느냐. 조롱 속의 한 마리 새, 쭉지가 뿌러지게 퍼덕거려보아야 그곳은 조롱 속이란 말이야. 하하하... 으하하핫핫...' 김두수는 마음속으로 통쾌하게 웃는다. 전신이 으쓱으쓱 밀물 같은 기쁨이 밀려온다. 아까는 뒤쫓느라 혈안이 되어 미처 느낄 겨를도 없었던 기쁨이. '저 계집 하나가 내 먹인 아니야. 뿌릴 뽑을 테다. 뿌릴. 박재연! 점박이놈! 점박이놈이 저년의 정부가 됐다구! 아무튼 좋다! 저년을 낚는 낚싯줄에 더 큰 고기가 함께 매달려올지 뉘 아나?' 그러나 금녀는 집이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것을 김두수는 알 리가 없다. '예뻐졌구먼. 아주 쏵 빠졌어. 알른거리는 저 흰 다리, 발목! 미끈하구나. 영락없는 되년이다. 내가 이래도 계집 복은 있거든. 시초부터 계집이란 갖고 놀다가 버릴 적에는 돈이 되더라 그 말이야. 저 연도 커다란 고기를 주렁주렁 내게 끌고 올 게야. 아암 그래야지. 그렇지. 네년만은 죽이지도 않을 게고 버리지도 않을 게다. 얌전히, 얌전하게 회령, 응 그놈, 내 자식놈 어미가 되어주는 게야.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아암 비어 있구말고. 개벽천지가 안 되는 이상 너는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목에 새끼를 걸어서라도 그 자리에 끌고 갈 것이야!' 금녀는 길 모퉁이를 돈다. 김두수도 길 모퉁이를 돌았다. 길은 차츰 호젓한 곳으로 뻗어간다.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점점 더 후미진길, 김두수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주택가로 금녀가 가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오로지 금녀가 돌아보지만 말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판사판이야. 돌아본다면 저년 하나 낚아버리면 되는 거구 다행히 끝내 모르고 간다면 멀리서 저년이 들어가는 집을 확인했다가 그러고서 줄줄이 엮어낸다. 내일 새벽에라도 헌병 두 명만 있으면, 만일 저년이 돌아본다면, 일이 좀 까다로워지겠지, 제발이다. 돌아보지 말아다오.' 햇빛이 가려진 골목이었다. 강아지새끼 한 마리 없다. 한켠엔 주택의 뒷담이면 한켠은 굳게 문이 닫혀진 집들이다. '이제 집이 가까워오는 모양이구나.' 그때였다. 슬그머니 금녀가 돌아본다. 김두수와 금녀의 눈이 마주친다. 금녀는 짐짓 놀란 척 엉거주춤한다. 동시 김두수는 뛴다. 뛰어서 금녀의 손목을 와락 잡는다. 그리고 아랫배에서 치미는 웃음을 웃는다. 허연 혓바닥이 들나고 양볼이 흔들린다. "오늘 운수는 절반이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소리지를 테예요!" "질러보아. 하하핫... 마, 절반의 운이라도 운은 운이야. 하하핫," "이것 놓으세요! 나 달아나지 않아요!" 금녀는 잡혔던 손목을 확 뿌리친다. "하기야 걸음마 배우는 아이도 아니겠고 혹 축지법을 쓴다면 모를까. 소원대로, 하하하..." 금녀 어깨에 바싹 몸을 붙인다. 금녀가 피하면은 또다시 몸을 붙여오고 그러나 손목을 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금녀는 시장바구니를 김두수 쪽 팔로 옮겨서 건다. 김두수의 몸이 닿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오셨죠?" "어떻게라니? 금녀 만나러 왔지?" "고맙군요. 나 혼자 내버리고 달아날 적은 언제였나요?" "이거 듣덛 중 처음 듣는 소리군. 조심해야겠는걸?" "흥! 그게 거짓말인가요?" "목숨이 오락가락할 판인데 어쩌누. 금녀야 기회 보아 뺏아오면 되는 거구. 하지만 금녀는 천우신조라 생각했을텐데? 안 그랬던가?" "물론이지요. 하나님이 도우신 거예요." "새삼스럽게 아웅다웅할 것 없다. 그래 금녀는 언제부터 중국 여자가 됐지?" "자식 없는 늙은이들 양녀로 들어간 거예요. 난 조선 여자가 아니란 말이예요. 날 잡아가진 못해요! 아시겠어요?" "제 서방이 찾아가겠다는데도?" 길 모퉁이였다. "누구 마음대로," 하는 것과 동시 금녀의 손은 시장바구니 속으로 들어갔고 한구석에 찔러넣었던 권총, 그것을 김두수 허벅지에다 대고, 총성과 고함소리, 금녀는 바람같이 길모퉁이를 돌아간다. 길모퉁이를 또 하나 더 돌고 벽돌 이층집 문을 밀며 들어선다. 금녀넌 안에서 문을 잠근다. "구마 아주머니, 아주머니!" 우창한 중국 말이다. 기름에 절인 듯 볼품없는 중국 여자가 얼굴을 내민다. 오십 가까운 연배다. "오오, 들어와요." 금녀의 입술은 먹빛이었다. "아주머니," 여자 가슴에 쓰러진다. "어찌 이러는 거야?" "나 사람을 죽였어요." "뭣이? 사람을 죽여해?" "밀정놈을 죽였어요." "밀, 정, 놈, 을?" "네." "어, 어디서?" "저기 저어기 뒷골목에서," 하며 금녀는 와들와들 떤다. "아앙 그래 총소린가, 그러니까 그게?" 중국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금녀를 끌어다가 의자에 앉힌다. 그리고 주방에서 뜨거운 차를 부어서 내민다. "이거 마셔요. 덜덜 떨기는, 떨지 말어." "나 여기 있다가 어두워진 뒤 가겠어요." "그, 그렇게 해." 뜨거운 차를 마신 금녀 이마에선 땀이 흐른다. "에이고 또 씨끄럽게 됐구먼. 하지마는 할 수 없는 일, 좋은 세상 돼야 할 건데," 이 집은 순전한 중국인의 집이다. 권필응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말하자면 비밀 연락을 취하는 장소이며 대개 금녀가 연락의 임무를 맡고 있는 터였다. "누가 따라오지 아니했어?" "아무도 없었어요." "참말로 죽었다면 이 근방을 뒤질 거 아닌지 몰라?" "글쎄요." 금녀는 망실상태였다. "나 한분 나가보고 올까?" 여자는 금녀가 대답을 하기 전에 방에서 나갔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다시 떨기 시작한다. 금녀가 장거리를 빠져나와서 길켠에 있는 잡화상으로 들어간 것은 호신용으로 장바구니 밑바닥에 넣고 다니던 권총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핀 하나를 사고 지갑을 찾는 척하여 밑바닥에 있는 권총을 끌러올려 고기 뭉치 사이에 찔러넣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침착했었던 금녀는 그러나 권총을 그을때는 정신이 없었다. 과연 김두수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그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사람을 죽였을까? 내가?" 호신용으로 받았던 소형 권총으로 사격 연습까지 했었는데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금녀는 한번도 실감해본 적이 없다. 다만 습관처럼 장에 갈 때는 장바구니 속에, 외출할 때는 핸드백 속에, 그것은 권총을 건네주었던 장인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모른다. 여자가 돌아왔다. 기름에 절인 듯한 여자 얼굴에는 어리둥절해하는 빛이 있었다. "이보아 수냥, 밀정놈 죽지 아니했다." "네?" "강도, 강도가 호주머니 돈 뺏아갔다 말하던걸?" 금녀는 바보처럼 기름때가 묻어 번들거리는 여자 옷깃을 쳐다본다. "병원으로 갔어, 병원."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많이 모여했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순경이, 저어기, 저쪽으로 뛰어갔어." "집과는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그래서요." "사람들 다 가버리고 없어. 수냥이 정말 쏘았어?" 금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그럼 아주머니 난 가보겠어요." "그렇게 해서 가면 안 돼. 옷 갈아입어. 다른 사람이 혹 보았을 수도 있으니까." 금녀는 여자가 내주는 낡고 헐렁한 회색 다브잔스로 갈아입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한다. 골목을 나선 금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어댄다. 김두수를 만났다는 것부터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햇빛은 밝고 인생은 아름다워 보였는데, 시장은 풍성하고 사람들의 소리들은 꿀벌처럼 닝닝거리며 삶을 찬미하는 것만 같았는데 끔찍한 사건이 바로 코앞에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집에 도착했을 때 사방은 깜깜했다. 간신히 초인종 줄을 잡아당긴다. 땅바닥을 굴리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그리고 또 요란스럽게 대문이 열렸다. "어머나! 아씨!" 노래를 부르듯 높은 목청으로 계집애가 외쳤다. "손님! 손님! 아씨 돌아왔어요!" 계집애는 안을 향해 높은 목청을 굴린다. "조용히 해." 금녀는 계집아이 팔에 기대듯 집에 들어간다. 대문을 잠그고 뒤쫓아온 계집아이 "아씨! 왜 이리 됐어요? 나는 거러진가 싶었어요." 송장환과 장인걸이 복도 쪽에 나와 서 있었다. "어찌된 거요! 수냥!" 옷차림새며 얼굴빛을 보고 심상찮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송장환이 먼저 물었다. 장인걸의 낯빛은 파리했다. 귀가가 늦은 금녀에게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으리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장인걸을 보는 순간 금녀는 울음을 터뜨린다. "쫓긴 거예요." "쪼, 쫓기다니, 수냥 뉘한테 쪼, 쫓겼단 말입니까!" 송장환의 입술이 실룩거린다. 장인걸은 "송군. 자넨 선생님 곁에 가 있게," "네." "가 있게. 자아." 등을 떼민다. "네 . 그, 그렇지만," "허허어, 가 있으래두, 내가 알아 선처할 테니까." 송장환은 못내 마음이 놓이질 않는지 민적거리다가 돌아보곤 하며 객실 쪽으로 간다. "금녀." "선생님." 더욱 흐느껴 운다. 비 맞은 참새 꼴이다. 훌렁한 옷 탓일까. 금녀의 몸이 아주 작아진 것 같다.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야. 납치당한 줄 알고, 방에 들어가서 자세한 얘길 해." 금녀는 거처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뒤따라 들어온 장인걸은 문을 꼭 닫고 침상 옆 의자에 앉는다. 눈물을 닦으며 주춤거리다가 금녀는 침상에 걸터 앉는다. "김두수지." "네." "어떻게 빠져나왓지?" "주, 죽이려고 총을 쐈는데," "어디서?" "길에서요." "뭐?" 흐느끼면서 금녀는 대강의 경위를 설명한다. "너무 덤볐구먼." "처음엔 침착했는데, 총을 쐈을 땐 뭐가 뭔지, 정신이 없었어요." "괜찮어. 그것도 경험이야. 내가 사태를 판단하건데 그놈이 강도라 한 것은 금녀를 표면에 떠올리지 않으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야. 그러니 우선은 이 사건의 뒤끝이 시끄럽지는 않을 것 같다." "저도 오면서 그걸 생각하긴 했어요. 더 섬찟하고," "금녀를 납치하지 않고 뒤를 밟았다는 것은, 그렇지. 박재연 씨와 내가 목표였을 게야." "모두 제 탓이예요." "누구 탓이 어딨어?" 장인걸은 힐난하듯 금녀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낸다면 어떡허지요?" "찾아내기 전에 쳐야지." "..." "병원에 갔다구 했었나?" "네." 장인걸은 자신의 무릎을 내러보다가 금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금녀의 무릎이 떨고 있다. 안 그러려고 무척 애를 쓰는 것 같은데 찬비 맞고 온 아이처럼 떨고 있다. 소복히 솟은 유방도 흔들리고 있다. 옷은 낡고 때묻었으나 신선한 육체가 옷 밑에서 마구 떨고 있는 것이다. 장인걸은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연추에서 장인걸은 금녈 위해 호신용 권총을 하나 구해주었고 사격술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의 필수조건의 하나로 가르쳐준 것은 아니었다. 금녀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김두수로부터 지켜주자는 염려가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금녀가 하얼빈에 온 것은 권필응의 제의를 금녀가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였지 장인걸의 희망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님, 저도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십시오." 금녀는 장인걸에게 애원했던 것이다. 사실 금녀는 모든 면에서 준비가 완료된 여자라 할 수 있었다. 심운회 씨 댁에서 닦아진 처신은 원만하고 세련되었으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 자신 꾸준히 공부도 했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수 있는 용모 그리고 분별할 수 있는 나이 이십칠 세. 장인걸은 연민과 애정으로 하얼빈으로 떠나게 될 그에게 사격술을 가르쳤다. 그것이 오늘 그를 구하게 된 것은 다행이나 앞으로 야기될 문제는 많다. 김두수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듭을 지어야지.' 장인걸은 결론을 내렸다. "금녀." "네." "금녀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요." "..." "금녀가 아니래도 이곳을 탐지할려면 할 수 있는 거요. 김두수는 박재연 씨와 내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우연찮게 만나 뒤를 밟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내 탓이다 하는 생각은 아예 말아요. 우린 무인지경을 가면서 일하는 게 아니거든." "고마워요, 선생님." "옷 갈아입고 쉬어." 방을 나서려다 말고 장인걸은 되돌아본다. "용기를 내는 거요. 우리는 어차피 한 운명이오. 알겠어?" 금녀를 포옹해주고 등을 토닥거려준 뒤 장인걸은 방에서 나갔다. 객실로 돌아갔을 때 권필응은 담배를 피우로 있었고 송장환은 꽁지 빠진 장닭 같은 꼴을 하고 창가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서, 선생님. 그러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쫓기다니, 밀정놈한테 쫓긴 거지요?" "아니면 누가 그랬겠나?' "실은 용정의 김형이," "김군은 훈춘으로 갔다지 않았나." "네. 갔지요. 훈춘으로 간 이유가 이곳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 좋지 않다 그런 판단 때문입니다." "좀 요령있게 말해. 나 지금 바쁘니까." 장인걸은 좀체 그런 일이 없는데 짜증을 부린다. "그러니까 하얼빈역에서 김두수란 놈을 봤다는 겁니다." "뭐? 왜 진작 그말을 안했어!" 장인걸은 권필응도 안중에 없는 듯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저어," "이미 일은 저질러졌는데 말하면 뭘 해!" 송장환한테 날벼락이다. 금녀 앞에서는 그렇게 말했으나 장인걸은 권총 발사로 하여 그 꼬리가 쥐꼬리든 호랑이 꼬리든 일단 김두수에게 꼬리는 잡힌 거라 생각한 것이다. "저어 변명 같습니다만, 김형이 훈춘 간다는 얘긴 수냥한테 말했습니다만 김두수 얘긴 수냥한테는, 저녁에 만나 뵙고 제가 말씀드리려 했었지요. 김두수놈이 김형의 동행을 쫓는 게 아닌가고 의심 했기 땜에, 수냥의 경운 전혀," 당황하며 횡설수설이다. "할 수 없지. 사후책을 강구해야지." 장인걸은 노기를 푼다. 딴은 그렇기도 했다. 송장환이나 김길상이 금녀와 김두수의 관계를 모르는 이상. "하지만 그놈은 박재연 씨 그리고 나를 알어." 송장환은 낭패한 듯 어쩔 줄 모른다. 권필응은 한마디의 말도 없이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그, 그렇담 그자가 이곳을 탐지했다 그 말씀입니까?" "그렇게 해선 안 되겠다 생각하고 수냥은 다른 곳으로 유인하여 총을 쐈다는 게야." "네." 권필응이 희미하게 웃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놈은 죽지 않았어. 부상을 입었을 뿐이야." "선생님." "음." 권필응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군다. "나가보겠습니다.." "어딜," "그놈이 병원에 입원을 했다니까 후환을 없이해야겠지요." "음..." 장인걸은 모자를 쓰고 혁댈 조르며 나간다. 나간 뒤 권필응은 중얼거렸다. "그놈이 그 병원에 있을까." 밤늦게 돌아온 장인걸은 "고 생쥐 같은 놈의 새끼, 병원을 옮겼더군. 어느 병원으로 옮겼는지 오리무중이오. 악운이 센 놈!" 13장 김두수 악운이 센 김두수, 그가 입은 총상은 관통인데 총구가 빗나간 때문에 비스듬히 총알이 빠져나갔고 또 아슬아슬하게 뼈는 피한 상태여서 지극히 경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정도의 총상이라면 뭐 병원을 가릴 것도 없으련만 무리를 해서까지 병원을 옮긴 이유는 뭣인가. 그는 다시 습격해올 것을 예상한 것이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그러니까 박재연과 점박이 사내가 금녀 배후에 있을 것 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빠져 달아난 금녀로부터 사실이 밝혀질 것은 뼌한 일이었으니까. 당초부터 김두수는 금녀가 중국 여자로 변모되었다는 것에 심상찮음을 냄새맡은 것이다. 용의주도한 김두수는 큰 병원으로 옮기면서도 다른 환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삼등 병실에 입원을 했다. '빌어먹을! 설마하니 그년이 권총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생각하면 머리끝까지 분통이 치밀지만 용케 참아낸다. 그보다 김두수는 상황 판단에 골몰하고 있었다는 게 옳을 성싶다. 총성을 듣고 동리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순경이 달려왔을 때 김두수는 돌발적으로 "강도야!" 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어디, 어느쪽으로 갔어!" 다급하게 묻는 순경에게 김두수는 금녀가 도망친 반대 방향을 손가락질하여 강도야! 계속 소리질러댔던 것이다. 첫째는 자신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요, 둘째는 금녀를 중국 관헌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총상치고는 경상이었지만 다리에선 연신 피가 흐르고 충격적인 순간을 겪은 김두수가, 그것도 타고난 팔자였을까, 좋게 말하여 첩보원의 두뇌는 혼란 속에서도 냉철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금녀의 배후가 의외로 대단할 것이란 짐작이다. 그들을 제 손으로 낚으려면 조용, 조용해야 하는 것이다. '한번 실수는 병가상사라. 그년이 권총까지 소지하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누. 흥, 크게 놀아, 어디 두고보자. 언제까지 네가 크게 노는가. 흐흐흐...' 분노를 깨물며 웃는다. "젊은이, 댁은 다리를 다쳤소?" 늑막염으로 입원한 늙은 중국인이 물었다. 노인은 옆구리에 끼워 놓은 고무줄대에서 피고름이 쏟아져나오는데 아픈 것보다 심심한 것을 더 못 견디어하는 성싶었다. "강도를 만났어요. 강도를," "저, 저런, 다리를 맞았으니 망정이지 배나 가슴을 맞았으면 가는 거 아니야? 불행중 다행이구먼. 병신이 되어도 목숨은 붙었으니," "병신은 안 된답니다. 뼈는 가만히 놔두고 근육을 뚫고 나갔으니 아물기만 하면 된다는 거요." "그건 더한 불행중 다행이구먼. 하지만 총 안 맞았느니보담야 못하지." "말해 뭣 합니까." "그런데 젊은이 어째 말씨가 고르질 않소?" "나는 조선 사람이오." "아아 그래서 우리말이 어쩐지... 조선 사람이라, 그렇지. 일본 사람보담야, 아암 일본 사람보담이야 낫지." "어째 그렇소?" "조선은 우리 나라 동생 나라 아니야? 옛적부터 우리 힘이 약해서 동생 나라를 못 건져주고 왜놈이 밥이 된 게야. 우리 대국이 이빠진 호랑이 꼴이 됐거든." 가래 끓는 목소리로 측은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노인은 말했다. 김두수는 변성명한 것은 물론 중국인이라 하고 입원한 일을 생각했으나. '다 뒈지게 생겨가지고 입은 살아서, 뭐 동생 나라? 이빠진 호랑이? 크게 나오는군. 크게 나오는 것들이 왜 이리 많지?' 노인한테는 가족들의 풀입이 잦았다. 먹고 살 만한 상인 집안인 것 같았다. 며느리, 딸, 아들, 사위가 번갈아가며 찾아왔고 때론 갓난아기를 딸이나 며느리가 안고 오는 일이 있었으며 손자라는 중학생. 소년도 오곤 했었다. 가족들은 노인이 병세가 비관적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는 듯 때때로 우울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노인은 어린 것을 보며 해골같이 마른 얼굴에 미소를 띠고 누운 채 머리를 흔들어 보이기도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어 아이를 얼러보기도 했다. 노인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도통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 노인 옆에 있는 무슨 병인지 개복 수술을 한 소년에게도 드문드문 문병 오는 사람이 있었고 모친인 부골스럽게 생긴 중년 여자가 소년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목마르냐 하며 물을 먹여주고 머리 아프냐 하며 머리 위에 손을 얹어보곤 하는 여자, 술이 많은 머리에 금으로 된 고리잠을 찌르고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김두수를 가엾게 생각했는지 노인은 이따금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며칠이 지났다. 김두수의 마음도 묘하게 허전해지기 시작한다. 다리의 통증이 차츰 덜해가니까 대신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누가 뭐라하지도 않는데 노인한테 가족이라도 올라치면 혼자 마음속으로 허세를 부려보곤 한다. '내가 누군 줄 아냐? 알면 뒤로 나자빠질 게야. 이 젊은 나이네 순사부장이란 왜놈들한테도 어려운 감투라구. 흥 내 사정 때문에 이따위 더러운 삼등 병실에 숨져가는 늙은것하고 배때기 갈라제친 애새끼하고 함께 견디어 배긴다만 희령에만 있었다 봐라. 흥, 일등 병실 손님이라구. 너희들이 날 동정해서 먹을 걸 주어? 두 손으로 받들고 진상을 해도 먹을 둥 말 둥,' 식성이 좋은 김두수는 주는 것은 마다 않고 잘 먹었고, 아무리 마음속으로 허세를 부려본들 이불 밑에 활개치기. 이곳은 조선 땅이 아니오 아직은 주권을 거머쥐고 있는 중국, 일본의 감투가 무서워 벌벌 떨 중국인은 어디 있고? 치기에 가득 찬 푸념도 외로워서, 김두수도 몸 아프고 무료하니 옛날에 내버린 그 외로움이 찾아온 것이겠지. '만일 희령에서 내가 다리를 다쳐 입원을 했다면 문병객이 줄줄이 이어졌을 게야. 유지란 놈들 내 눈치 안 보게 생겼어?' 그것도 서글픈 잠꼬대. 낙착되는 것은 금녀에 대한 증오다. 총을 쏘아서만도 아니다. '그년만 고분고분 내 말 들었으면 나도 마음잡아 순사부장으로 눌러앉을 수도 있었다구. 안전한 자리에서 차근차근 출셀 할 수 있었다 그 말이야. 그런다고 내 계집년 하나 땜에 신세 망칠 못난 사내는 아니다만. 두고 보아. 내 기필코 알 먹고 꿩 먹을 테니 두고보란 말이야. 아무튼 이번 일로 큰 고기 꼬리는 만진 셈이고 큰 고기가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시일이 걸리더라도 낚게 되는 게야.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가 헛수고 아니겠냐?' 서슴없이 총을 들이댄 금녀에 대한 분노도 컸거니와 한편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대하여 김두수는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것 같은 자신의 집념에 쾌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입원한 지 일주일 남짓 늑막염을 앓던 노인은 죽었다. 노인의 시체가 실려나간 날 밤 김두수는 꿈을 꾸었다. 도포를 입고 살이 피둥피둥 찐 아비가 '이놈 거복아!' '네. 아버지.' '자빠져서 아비 말 들을 텐가?' '아버지, 다리에 총을 맞아 일어나 앉을 수가 없습니다.' '이 천하의 못난 놈 같으니라구. 오죽이나 못났으면 계집이 쏘는 총을 맞아? 으응? 이 애비는 세상을 못 다 살았어도 포부만은 컸느니라. 대역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사세가 불리하면은 대역도가 되는 것이요, 시운을 잘 만나면 용상에도 앉는 법, 그래 고까짓 계집년한테 총을 맞아? 이이잉? 대역도가 되기는커녕 두만강의 사공질도 못하겠다.' '하지만 아버지 용상이 없어졌는데 대역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놈아 용상은 만들면은 있는 것, 땅덩어리가 물속에 가라앉았더란 말이냐? 이 만주 벌판은 넓고 쓸 만하구나. 그깟 최참판 만 석이 문제겠느냐?' '네. 그러기는 하옵니다.' '암, 암 최참판이 만석이 문제 아니구말구, 아암,' 아비는 벌렁벌렁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하얀 도폿자락이 펄러덕거리는데 그 도폿자락 밑에 여자 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금녀!' 외쳤으나 히죽이 웃는 얼굴이 희령에 있는 아들아이를 낳은 하녀 오다께의 걸레 같은 얼굴이 아닌가. '고노아마메! 나니시니 기다까(이 계집! 뭣하러 왔어)!' 오다께는 훌쩍훌쩍 울었고 아비 평산은 넓은 도폿자락을 너풀거리며 연신 춤을 춘다. '암, 암 최참판 만석이 문제겠느냐? 문제 아니구말구.' '아이고오! 어머니! 어머니가 아니십니까! 어머니!' 오다께의 모습은 생모 함안댁이었다. 눈을 희뜨고 김두수를 노려 본다. '어머니! 어머니!' '이놈! 사람 안 될 거라 했더니! 부모 말이 문서이니라!' 김두수는 외치다가 잠을 깨었다. 전신이 땀에 흠씬 젖어 있었다. 마른 입술을 그 소 혓바닥 같은 혀를 내둘러 축이며 '고약한 꿈을 꾸었군. 재수없게시리 죽은 사람들은 왜 꿈에 보이나. 제에기!' 김두수는 저도 모르게 사람이 죽어나간 옆자리의 침대를 바라본다. 소름이 오싹 끼친다. 창밖은 깜깜했고 전등이 희뿌연 빛을 방안에 던져주고 있어JT다. 그리고 소년의 모친이 염주를 매만지며 입속으로 중얼중얼 염불을 외고 있었다. '마음이 뒤숭숭하니 그런 꿈을 꾸었나 보다.'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이것은 또 어쩐 일인가. 김두수는 당황한다. 눈물이 볼을 타고 자꾸만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미쳤어! 이놈아! 아, 너 미쳤냐!' 하는데 소울음 같은 소리가 목구멍을 박차고 나온다. "으으으... 으흣흣..." 소년의 모친이 놀라서 쫓아온다. 반듯이 누워 있던 소년도 얼굴을 치켜든다. "아니, 아니, 왜 이러는 거요? 으으, 울지 말라니까, 이봐요. 남자분! 이 이걸 어쩌나?" 소년의 모친은 당황하여 어깨를 흔들어주려고 손이 왔다간 도로 가슴 위에 깍지끼고서 "이봐요, 어쩌나? 남자분!" "으흐흣흣... 으응응, 아이구우 으흣흣..." "가엾어라..." 김두수의 울음은 좀체 멎질 않았다. 하는 수 없었던지 여자는 아들 옆으로 돌아가서 우두커니 김두수 쪽을 바라본다. "쯔쯔... 아무도 가족이 없는 모양이지? 죽 한 그릇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으니 딱하고나. 아빠오야." "네, 어머니." "세상엔 제 가족이 없는 사람이 젤 불쌍하단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아저씨 위로해드리세요." 그렇게 하여 또 일주일이 지나고 김두수는 퇴원을 했다. 충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고 보행이 자유롭지도 못하였다. 곧장 희령에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처음 묵었던 여관에서 얼마간 정양하기로 하고. 병원에서 한바탕 신나게 울어젖힌 김두수는 쉽사리 외롭다는 감정과 작별할 수 있었다. 여관에서 일하는 하녀 아냥에게 부탁하여 입에 맞는 음식을 별도로 청해 먹는 것과, 앙상하게 마르고 조그마했으며 이마가 좁고 턱끝이 날타로운 아냥을, 날 유혹하세요, 하듯 뼈뿐인 듯싶은 엉덩이를 흔들고 다니는 아냥을 희롱하는 것이 정양을 하고 있는 김두수의 요즘 즐거움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김두수의 머리는 항상 금녀의 배후를 쫓고 있었다. 총 나부랭이 가지고 왕청형 깊은 골짜기에서 훈련이랍시고, 김두수의 말을 빌리자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기백 명의 병력으로 결빙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 국경 수비병을 건드리는 그런 정도와는 양상이 다른, '연해주 방면과 하얼빈... 하얼빈, 중국 본토까지,,, 중국 여자, 일정한 주거지, 장바구니 속에 있었던 권총, 도망가기 십상인 골목, 금녀가 금녀가 말이지? 여관이나 음식점에서 연락을 하고 권총을 주고 받고 그러고 누군가를 암살하고 붙잡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처형되고... 그런 류하곤 다르지. 금녀를 그렇게 훈련시켰다면은 이런 류하곤 다르지. 다르고말구. 상당히 계획적이며 큰 단체가 만들어지고 있다아?' 끊임없이 맴도는 그 대목, 그러나 김두수는 지치지 않고 그 대목을 씹어보고 또 씹어보는 것을 멈추질 않는다. '아무튼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수확이라 할 수 있을 게야. 왜놈들이 어떤 놈인데? 흥, 내가 그래도 이만하니까, 조선놈이요, 학식이라는 것도 겨우 읽고 쓸 정도에 순사부장? 호호호... 어디 두고보아라. 날고 뛴다는 놈들 코 납작하게 해줄 테니 말이야. 그러면은 어떻게 한다. 일이 이리 된 이상 당분간은 금녀를 하얼빈에서 찾기는 글렀어. 서둘러보아야 꽁꽁 숨어버린 이상 내 혼자 힘으로 s 서울 가서 김서방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고,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바빠도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지. 하여간 이 다리가 자유로워지면은 일단 희령으로 돌아가는 거다. 가서 양가놈더러 연해주의 사정을 끊임없이 살펴보라 해야지. 금녀가 연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리고 양가놈이 금녀를 아느니만큼 앞으로 여러 가지 써먹을밖에 없겠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윤이병 그놈 좀 두고볼 걸 그랬나? 그랬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까? 금녀애비부터 찾아야겠군 동생놈을 끌고 다녀도, 그것도 좋지. 하하 참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자꾸 하면은 뜻밖에 좋은 생각이 떠오르거든.' 만족스럽게 혼자 실실 웃으며 밀어넣은 앞니를 따각따각 맞부딪는다. '하지만... 연해주에도 없고, 먼 곳, 가령 본토 상해 같은 곳으로 날아버릴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님." 방문 밖에서 은근히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초저녁이 지나고 꽤 저문 시각이다. "왔으면 들어와." 하녀 아냥이 다람쥐처럼 조르르 기어들어 온다. 그러더니 별안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기 시작한다. 한눈으로 헛울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김두수는 "왜 그래. 왜 우는 게야?" 정답게 허리에 팔을 감으며 묻는다. "으흐으흣... 으흣," 머리를 앞뒤로 주억거려가며 자못, 서러워서 더는 견딜 수 없네요, 하는 시늉이다. '상해까지 뻗쳐서 생각할 건 없다구. 아무튼 연해주에서 하얼빈 그 사이에서 꼬리는 잡혀.' 계집애 허리에 팔을 감은 채 김두수는 생각한다. "손님, 으흐흣흣..." "허허어, 말을 해야 알지. 자아, 자 울지만 말구, 내 눈물 닦아줄까?" "아, 아니에요. 저같이 불쌍한 계집애는 죽어야 해요. 기찻길에 가서 치여죽는 게 나아요." "무슨 소릴 하는게야? 아이구, 내 간 떨어지겠다." "손님 같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어떻게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말을 하라는 거 아니야?" '제에기랄! 엿가락같이 늘어지는군.' "편지를 받았거든요." "남자한테서 받았나?" "아아 아니에요. 저를 그런 여자로 아세요?" 얼굴을 감싸던 손을 내리고 빤히 쳐다본다. 명주 고름처럼 아래로 흘러진 굴곡 없는 얼굴에 짙은 눈썹이 묘하다. "고향서 온 거예요. 아버지가 보낸 편지예요." "그래, 아버지가 보냈는데?" 하면서 계집아이 허리에 감은 파렝 힘을 주며 침상 곁으로 밀어붙인다. "병이 나서 약값이 없다구," "응, 그거 참 딱하게 됐구나." "어떡허면 좋지요? 돈을 부쳐달라지 않겠어요?" "그럼 돈 부쳐야지." "저한테 무슨 돈이 있어야지요." "걱정 마라. 효자는 하늘에서 아느니라." 걱정 말라는 말에서 계집아이는 일단 목적이 달성된 줄 믿는 눈치다. "자아, 걱정 말구," 김두수는 계집아이를 침상에 쓰러뜨린다. 그새 서너 차롄가 계집애는 이 침상에서 김두수와 어울린 일이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남자 경험이 많은 계집앤 퍽 순진한 척했다. 한데 오늘 밤은 오히려 계집애 쪽이 능동적이다. '조그만한 계집애가 벌써 사내 맛을 알아가지고, 게다가 돈 울러내는 방법도 알고 있거든.' 김두수는 계집애를 좀 혼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리에 총상도 거의 다 나았고 성욕은 왕성했다. "이봐." 계집애는 콧소리로 응 하며 회초리같이 가늘은 손이 퉁거운 김두수의 목을 꽉 껴안는다. "이걸 주인이 보면 쫓아내겠지?" "쫓아 못 내." '하하아, 주인놈하고도 관계가 있군 그래.' 김두수는 병아리 챈 매같이, 저항할 수도 없는 유리한 고지에서 난폭하게 마음대로 힘을 행사한다. 계집애는 돈거래의 약속이 끝난 것으로 단정하고서 참아낼 수 없는 고통을 용케 견디어내지만 그래도 앓는 소리를 내곤 한다. 김두수는 모처럼의 흡족한 정사를 치렀다. 이튿날 아침. "인력거 하나 불러다 주어." 김두수는 눈치를 핼끔핼끔 보며 하마나, 조바심내고 있는 계집애에게 부탁하고 손가방 하나를 챙겨들었다. 방을 나선 그는 마지막 셈을 하는데, 눈치를 살필 정도가 아니다. 아냥은 눈을 무섭게 희번덕이며 김두수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미 인력거는 와서 기다리고 있다. 셈을 끝낸 김두수는 아냥을 돌아보며 싱긋이 웃는다. 아냥도 일그러진 얼굴에 억지 웃음을 띤다. "그간 신세 많이 졌다." "아니예요." "그럼 잘 있어?" 계집애 얼굴이 순간 시뻘개진다. 김두수를 따라 총알같이 문밖으로 뛰어나온다. "손님!" "왜 그래?" "약속한 돈 안 주시오?" "뭐? 약속? 뭘 약속했나," "어젯밤에 돈, 아버지 약값," "아아 그 얘긴 들은 것 같군. 내가 그러니까 뭐랬느냐, 옳지.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 했지 않아?' 인력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던 차부가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정말 그냥 기가냐?" "그냥 가지 뭘 들고 가란 말이야?" 껄껄걸 소리내어 웃으며 김두수는 인력거에 오른다. 차부는 거칠은 동작으로 인력거를 끄는데 계짖ㅂ애 입에서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상욕이 마구 쏫아져나왔다. 손짓 발짓, 전신으로 분노를 표시하는 계집애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김두수가 간 곳은 다른 여관이었다. 인력거에서 내려 차부에게 돈을 치를 때 차부는 멸시에 찬 눈초리를 김두수를 쳐다보았다. "왜 보아?" 그러나 차부는 그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고 인력거의 손잡이를 잡는다. 수치를 모르는 자 세상에서 못할 짓이 뭐 있겠는가. 한 마리의 이리가 대로상에서 대상이 무엇이든, 어린이 늙은의 아름다운 여인이든 먹이인 이상 찢어발기는 잔인성은 수치가 없는 수성 그 본능인 것이다. 그가 힘센 이리인 이상 힘이 미치는 데까지 잔인성은 발휘돌 것이다. 늙고 이가 빠져 걸레 같은 한 마리의 이리가 되기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는. 포식을 하고 적당히 휴식하고 지극히 쾌적해진 김두수는 차부의 말없는 눈 따위, 희령 같았으면 얼굴에다 주먹질을 했을 테지만, 천천히 육중한 몸을 흔들며 새로운 여관에, 어쩌면 새로운 대상이 있을지 모르는 여관에 들어선 것이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더 보낸 김두수는 여행에 지장이 없다는 확신을 얻고 하얼빈을 떠났다. 이럭저럭 하얼빈에 와서 한 달이라는 기간이 지난 것이다. 용정에 나타난 김두수는 요릿집 백화수를 찾아들었다. 요릿집 안주인 계월이 "오래간만이오 김부장." 좀 굵은 목청으로 말했다. 기색도 그 음성 비슷하여 반갑거나 싫은 것의 구분이 잘 안 된다. 푸르스름한 낯빛에 갸름한 윤곽의 미인이며 나이는 삼십을 넘었고 눈시울이 짙어서 눈매가 뚜렷하다. "아늑한 방에 앉아보는 것도 오래간만이구먼." 다리를 쭉 뻗는다. 계월이는 버르장머리없이, 하듯 김두수의 몸을 주욱 훑어본다. "하얼빈을 다녀오는 길이오." "으음? 한데 신색이, 아니 얼굴이 달라진 것 아니요?" "호남이지요?" "호남? 김부장이 호남되면 볼장 다 본 거지." "허허 그러지를 마슈." "하지만 달라진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어디가 달라졌는지 잘 알아맞혀 보시오." "글세? 알았다, 이빨 고쳤지요?" "역시 나잇값은 하는구먼." "김부장. 입정 좀 고치시오. 나이 들었고 감투도 큼직한 걸 써봤는데 어찌 점잖게 처신 못하시오. 성정이 그래서는 앞으로 혼 좀 날게요." "흥 내 혼날 때까지만 제발 살아주소." P월에 대해서는 마구잡이로 나가지 않고 조금은 조심을 하는 눈치가. 성미가 파분하고 냉정한 여자이기 때문이지만 그를 보아주는 배후가 꽤 고위층임이 틀림없다. "이빨도 고치고 했으면 앞으로 좀 점잔하게 놀아요. 저지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아니 내가 뭘 저질렀다는 겁니까?" "능청은 또, 아무리 일을 잘해도 처신을 그래서야, 일본인이 어디 귀머거린가?" "무슨 말을 하는 게지요?" "그 여자가 용정에 나타났습니다." "언제요?" "작년 늦가을인가?" "난데없이, 허 참," "봉천서 왔다나?" "안주인이 만났댔소?" "만나긴 내가 뭐하러 만나?" "그럼." "소문을 들었지. 봉천서 화류계를 떠돌은 모양인데," "그야 뻔한 얘기 아니오." "김부장은 한가닥 양심도 없소? 뻔한일이오?" "안주인이 그런 일 하면 어쩌지요? 장사 못하겠구먼." "장사 얘기는 왜 하지요? 장가하고 관계가 있나요? 내가 어느 놈팽이한테 처녀 유인해서 망가뜨려가지고 데려오라 하든가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장대같이 꼿꼿한 얘기 하게 생겼소?" "산전수전 겪었으면 겪었지, 내 산전수전 겪었으니 김부장 개망나니짓 잘했다 칭찬해드리까?" "피장파장이란 얘기지요. 계집 사내란 원래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소." 계월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아무리 일 잘한다고 무슨 일인들 허용된다 생각하면 잘못이요." "감투 땜에 벌벌 떨 나는 아니니까." "그 배짱 나도 알아요." 슬쩍 그래 놓고 계월은 대로상에서 송애가 최서희와 옥신각신했던 일을 김두수에게 들려준다. 김두수는 손뼉을 치며 좋아라고 웃었다. "그렇게도 좋아요?" "속이 씨원하구먼." "송애가 망신을 당해서 말이오?" "그보다 콧대 높은 그 계집." 하는데 계월이는 "이상하다? 김부장 그 댁하고 무슨 원한이라도 있수?" 김두수는 찔끔한다. "원한이 있을 턱이 있소? 언제 보았다구?" "최씨네 그분 이곳 영사관하고 여간 가까운 사이가 아니에요. 헌금도 하구, 이곳에선 친일파로 지목을 받고 있잖아요?" "그래요?" "몰랐나요?" "전혀 몰랐다 할 수는 없지요." "객줏집 양딸이 신셀 망친 것은 최씨 그분 집안을 살피려고 그랬다면서요?" "아니 그런 억설이 어디 있소? 뭣 땜에?" "나도 얘긴 들었어요." "얘기라니! 뉘한테 무슨 얘길 들었단 말이오." "뉘한테 들었건 그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최씨네 집을 영탐했었다 뭐 그런 얘기지요." "그런 말 같잖은 얘긴 하지도 마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그럴거 아닙니까." "그러니 이상하다는 거지." "허 참, 안주인이 그래 그걸 몰라서 그러시오? 이 집 집터를 살적에에만 해도 공가 그 늙은 것이 얼마나 훼방을 놨는지, 그것 모르시오?" "김두수는 초조해하는 기색을 드러낸다. 혹 서희와 계월이 사이에 무슨 줄이 닿지는 않았을까? 영사관을 서희가 들쑤신 거나 아닐까? 계월의 언동에는 그런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충분히 있다. 이제는 서희를 쏠아댈 수도 없는 형편, 계월의 말이 아니어도 서희는 완벽한 친일파다. 김두수는 시초부터 선수를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운흥사 건립의 시주로써 시작한 서희는 그의 재력과 문벌과 높은 교양과 미모로써 오히려 일본인들은 그를 우러러볼 지경이다. 만의 일이라도 쵯희의 부친을 김두수의 부친이 살해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날엔... "공가하고 최씨네하고 가깝겠다, 송애란 년이 공가 양딸 아니었소? EH 연해주 방면에서 손님들이, 그 손님이란 게 어떤 손님인지는 모르나," "이 고장에서야 다 그렇지 뭐. 되도록 그런 것에는 손 안 대는 게 좋아요. 여긴 회령이 아니라 용정촌이거든. 송앤가 그 여자도 왜헌병 나으리 여편네라 하며 뻐기다가 망신당한 거예요. 김부장 능력은 대단하지만 들나는 건 좋잖아요. 우선 우리부터가 의심받으면 장사도 안 되고 일도 안 되는 거예요." 김두수는 요릿집 백화수에서 술과 여자와 더불어 하룻밤을 호유했으나 겉보기였을 뿐 그의 마음은 편안치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전전긍긍하는 자신이 서글프기도 했다. '제에기, 최가년이 발설했다간 봐라. 못 먹는 밥에 재 뿌리기, 그까짓 아편장사를 하든 뭘 하든 난 살 수 있어. 기왕지사 옷은 벗었고,'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김두수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영사관의 최서기 집을 찾아갔다. "어이구우 김부장, 이게 웬일이시오? 우리집엘 다 오시고," "나는 여기 오면 안 됩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반가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오? 자아 어서, 어서 여기 앉으시오." 나이는 김두수보다 적어도 칠팔 세는 위인 듯싶었는데 체신머리없이 깜빡 죽는 시늉이다. 관료 사회에서 터득한 처신의 지혜인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 그의 아내처럼 과히 밉잖은 행동거지다. "지나는 길에, 혹 계시나 하고 왔지요." "잘 왔어요, 잘 왔어, 술이나 합시다." 최서기는 큰소리를 지른다. "여보! 여보!" "예-" 마누라가 나타났다. "어이고 김부장님 아니세요? 그란 안녕하셨에요?" "아주머닌 영 늙질 않구먼요." 김두수도 적당히 아첨한다. "나일 먹는데 늙지 않긴," "여보, 저기 뭐냐, 응 술상 차려요. 심심하든 참에 잘됐수다." 마누라가 나가려 하자 "안주는 장만하는 대로 들여오구 술부터 먼저 내와요." "성미도 급하셔라." 하고 나간다. "그래 사표를 냈다며요?" "냈어요." "거 잘한 짓일까? 아깝지 않소?" "글세. 한곳에 매여 있는게, 그걸 견딜 수가 있어야지. 떠났다 해서 그 일 안 보는 것도 아닌데," "하기야 뭐 김부장이라면 또 만만찮은 일거릴 맡았겠지요. 아무튼 사표 낸 건 용단이었소., 나는 이 나이에 말단 서기 자릴 애지중지하고 있으니 말이요. 하하핫," 그 말을 들은 척 않고 "그간 몸이 좀 불편해서 쭉 쉬고 있었는데 한 달을 쉬고 보니 캄캄 절벽이라, 뭐 달라진 건 없습니까?" "달라진 게 뭐 있겠소." "그 자릴 뜨고 보니 귀동냥도 수울찮은 일이구먼." "탄탄해요, 탄탄. 이젠 안심하고 일할 수 있고, 아닌게아니라 그 동안 일진일퇴 그럴 때마다 수풀에 앉은 새 모양으로, 일본 편에서 있는 우리네 처진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나 일본은 한 세월 전관 달라요." 술상이 들어왔다. "미국이고 아라사고 간에 중국, 특히 만주에 대해서는 일본의 입김을 살피는 형편 아니오? 게다가 중국은 자꾸 무너져가고 있어요. 제가끔 땅 쪼가리를 쪼개갖고 독립이다 뭐이다 소란을 떠는 판국에 일본은 군비를 강화하고 있고 조선에는 언제든지 유사시에 출동할 수 있는 군대가 대기하고 있지 않소? 하하핫... 술 드시오." 김두수는 아니꼽다는 표정이다. "중국뿐이오? 아라사도 지금 난리를 겪고 있지 않소? 들으니까 황제가 물러나고,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혁명군에 의해 총살됐다는 소문도 있고 분분하기가 말할 수 없는 모양인데, 그게 다 일본을 위해선 유리한 거지요 만주를 손에 넣는 거야 떠 먹기보다 쉬운 일 아니겠소? 중국이나 아라사가 방해하려 해도 그럴 거물이 있겠소?" "그런 나라의 얘기는, 그런 일이야 나라 웃대가리가 할 일이고 여기 사정 얘기나 해주슈. 내가 그 동안 봉천에 가 있었고 봉천에서 하얼빈으로 갔고 용정에 온 지 참 오랜만이오." "여기야 좋지요. 전쟁 덕분에 경기가 좋았자요. 특히나 곡물 무역을 하던 사람들 톡특히 재미보았지. 그 왜 길서 상회, 하여간 그 집은 보통 운이 아니었어요. 많이 벌었을 걸. 그러나 호사다마라든가?" 김두수의 귀가 쫑긋해진다. "호사다마라니?"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집사람이 어디서 들었는지 듣고 와서 얘길 하더구먼. 그 길서상회 바깥주인이 도망을 갔다든가?" "도망이라니?" "안사람들 하는 얘길 다 믿을 수야 없지만," "왜 도망을 갔을까?" "그러니까 혼인 전에 회령여관에서 일해주던 과부하고 눈이 맞아 살림을 차렸다는 얘긴데 벌써 오륙 년 전에 나돈 소문이지요. 그러니까 그 과부를 버리고 최씨 그분하고 혼인을 한 셈인데 그 여자가 봉천이라든가? 장춘이라든가 그곳 어느 예배당 집에 있는 것을 알고서 옛정을 생각했던지 만난 모양이라. 만나기가 불찰이지." "그래서 그 여자하고 도망을 했단 그말이오?" "그런가 봅디다. 해서 최씨 그 부인네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고 있다누마. 그 부인네야 우리 집사람하고 친면이 있고 왜 그 운흥사 지을 때도 힘 많이 썼지. 영사관 하고도 무척 가까워 용정에 사는 조선 사람한테 미움도 많이 받았고, 우리네들처럼. 하기는 남편이 저리 되면 여자가 사업 꾸려가기도 어려울 게요." 김두수는 서희가 이곳에서 떠주는 것만은 찬성이다. 그러나 길상이 여자를 데리고 도망갔다는 말은 좀 믿기지가 않는다. "희령에서 여자하고 살림하였다는 얘기는 사실일까?" "그건 틀림없는 얘기라더구먼. 그 왜 복지상회라고, 곡물 거래상에서 나온 말이고 여자는 한양여관에 잠시 있었다더군요. 본시 여자는 용정서 바느질품을 들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희령으로 갔었고 그러고 보면 용정 있을 때부터 눈이 맞았을 가능성도 있어요." "그 과부가 미인인가요? 잘난 여편에 자식을 버리고 달아날 만큼." "예쁘장하게 생겼다 하고, 고분고분해서 남자 마음 사로잡을 만하다든가? 최씨 그 부인네야 신분도 신분이러니와 너무 똑똑해서... 그러니까 사내로서는 애로도 안 있었겠소? 그런 점으론 이해가 돼요." '한양여관이라... 자세한 얘기야 거기 가서 들으면 틀림없겠고, 아무튼 최서희가 이곳에서 떠주는 것만은 나로서도 좋긴 좋지. 천장에 뱀 든 것처럼 늘 찐찐했었다.' 14장 늙은 호랑이와 젊은 이리 훈춘에 도착했을 때 가도에는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많은 소들이 무리를 지어 노령 국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식육이 될 농우들이 러시아에 팔려가는 것이다. 어중간한 양복장이가 된 김환은 노령을 향해 수없이 지나가는 농우들의 무리를 넋나간 듯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얼빈에서도 변두리, 러시아인 양복점에서 사 입은 연갈색의 양복은 싸구리 제품이라 몸에 맞지 않았고 고물상을 더듬어 찾아낸 찌그러진 모자며 구두는 어중간한 신사로서 안성맞춤이긴 했으나, 길상은 웃음을 많이 참아 온 터이다. 깎은 머리가 서운한지 목덜미에 손이 자주 올라가는 김환은 어중간한 신사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어리숙한 시골 신사이기도 했었다. "선생님, 가시지요." 하는 말에 느린 걸음을 옮긴다. 눈에 잡힌 김환의 옆모습이 종전까지와는 사뭇 달라져 있는 것을 길상은 느낀다. 잿빛으로 보일 만큼 건조하고 심줄이 나돋은 것같이 변해버린 얼굴에서 뭔지 충격적인 절망을 본다. '왜 저럴까.' 갑자기 부산스런 몸짓이 되며 길상은 "그 집까지 갈려면 꽤 걸어야 하는데 마차 한 대 빌릴까요?" "날씨도 좋고, 구경 삼아," 짤막한 대답이다. "하긴 날씨가 하 좋아서 걸어가고 싶긴 합니다만." 오는 동안 내내 기분이 좋았던 김환이 별안간 변화를 일으킨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마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은 김환의 기분을 길상은 느낄 수 있었다. 뭔지는 모르나 처참하게 가라앉는다. 어떤 때는 한 발 내밀 적에 빠른 속도로 쑥쑥 떨어져내리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다. 길상은 가라앉는 환의 기분을 건져올려야겠다고 생각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초조하고 답답하다. 푸릇푸릇한 들판에 펼쳐진 봄은 화사했다. 들판 위에 떨어지는 새 그림자는 금방 겨울을 잊은 경망한 계집의 웃음 같기도 하고 벌써 낙엽인가 하는 착각에서 당황해지기도 하고, 햇빛은 먼 밖에서 얼쩡얼쩡 서성거린다.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추풍이라는 장사꾼의 집입니다." 겨우 짜낸 길상의 얘깃거리다. "그 추서방이란 사람 좀 재미있어요. 주로 수피를 다루는 뜨내기 장사꾼인데 흑룡강 유변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내오지요. 그곳 방언에 능통하고 그곳 사정이라면 훤하지요. 때 안 묻은 그곳의 토민들을 늘 찬양하면서 중국 문화에 물든 여진족을 매도하는 그런 위인입니다." 한양여관에서 처음 만났었던 일부터 시작하여 물론 강포수 얘기로 나오게 되었다. "사람이 워낙 야인 기질이라 장사꾼 같지가 않고 사냥꾼... 아마 그 자신도 흑룡강 유역을 드나드는 일을 장삿길이란 것을 접어 놓고 즐기는 것 같아요. 한번은 뒤를 보아줄 테니 곡물을 취급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한 일이 있었지요 싫다더구요. 돈을 버는 일엔 관심이 없는 겁니다. 본시는 무산에 집이 있었다는데, 훈춘으로 옮긴 지 삼 년쯤 되지요." 길상의 얘기를 듣는지 여전히 말없이 걷고 있던 김환은 슬그머니 땅바닥에 주질러앉는다. "발이 아프셔서 그러십니까?" 대꾸 없이 구두를 벗은 환은 두 짝의 구두끈을 풀더니 모아서 다시 묶는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일어섰다. "벗고 가시려구요?" "음." "그럼 신발 하나 사 신지요." "괜찮아. 아주 가벼워서 좋군."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했으나 주질 않는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길상아." "네." "말짱 헛거야, 말짱!" 소릴 내지른다. "말짱, 말짱 헛거야!" "무슨?" "조물주 같은 나쁜 놈이 어디 있으며 조물주 같은 사기꾼이 어디 있단 말이냐!" "선생님." "선생님? 내가 어째서 너 선생이냐! 어째서 너 선생이냐 말이다! 구역질나는 소리 집어치워!" 빙벽을 끊고 오는 바람 소리처럼 차고 드세다. "나를 이십 년 동안 목숨도 아닌 목숨을 살게 해놓구서! 순 날도둑놈 같으니라구!" "..." "여자! 여자! 여자가 뭐야! 부모! 부모는 또 뭐야! 애국자는 뭐야! 독립지사? 개나 먹으라지! 부처님! 예수님! 하눌님? 네이놈들아! 인간이면 요만큼은 해도 좋느니라! 요만큼? 그게 뭐야! 손에 피묻히는 일이다. 꿈벅꿈벅한 눈, 슬픈 눈, 착하디착한 짐승의 눈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소의 피건 인간의 피건 피는 피야. 소도 슬퍼할 줄 아는 동물이요 인간도 슬퍼할 줄 아는 동물이야! 그러나 하나님! 그런 정도라면은 눈감아주겠노라, 그만큼은, 뭐가 그만큼이야! 뭐가! 행위 말인가 마음 말인가! 똥 누다가 밑 안 씻은 것처럼 그따위로 어정쩡한 게 어디 있어! 살생하지 말아라! 그럴 순 없지. 모두 중 될 순 없으니까, 해서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며 허언하면 아니 되느니라. 흥, 하나님의 손은 말짱하고 입도 정갈하시니 그러실 테지." 김환은 풀무질하듯 숨이 차게 웃는다. "팔려가는 소를 보고 운다, 울어! 성현들을 대신하여 죄인이 된 슬픈 백성을 위해 운다, 울어! 불쌍한 악마 백정아! 도수장 앞에서 마지막 가락을 뽑는 소야! 너희들 죽은 목숨, 산 목숨을 위해 운다!"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어느 누군가가 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네, 소의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호랑이의 세상이 되고 늑대의 세상이 되고," "옳은 말이야. 그래서는 안 되겠지. 허헛...그러니까 요만큼은 괜찮다, 그거 아니겠나? 단 살생계를 범하였으니 부처는 될 수 없다 그거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희생자는 천물이요 죄인이지. 어쩔 수 없게 몰아넣어놓고. 하나님은 착하시지. 허허, 허허허... 누군가 소를 죽여주어야 소고기를 먹을 테고, 누군가 호랑이를 죽여주어야 호환을 면할 테고 누군가 나쁜 놈을 죽여주어야 살인 강도, 역적이 없어질 테고, 날이면 날마다 살생은 아니 끊이는데, 죄인은 날로날로 늘어만 가는데, 성현은 무엇을 했느냐! 살생 아니 하고 간음 아니 하고 도둑질 아니 하고 허언 아니 하고 모함 아니 하고 그 아니 하는 성현을 먹고 마시고 입고 잠들게 한 것은 하나님 아닌 죄인들의 덕분이라, 소의 세상, 호랑이의 세상, 살인 강도의 세상에서 어찌 성인인들 연명하여 도를 닦았겠느냐? 살아 생전에는 죄인들 덕분에 덕을 높일 수 있었고 죽어서는 또 극락 꽃밭에서 소요하는 신세, 그래 대성은 무엇이냐! 대오각성한 자가 대성이라, 무엇을 대오각성하였느냐! 살생을 하지 말아라, 그러면 굶어죽을 것이요, 먹혀죽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아라, 그러면은 수만 수천억의 생물들이 날로 번식하여 지렁이도 우글우글 독사도 우글우글 메뚜기도 우글우글 호랑이, 늑대, 갖은 동물들이 우글댈 것이며, 인간의 종자는 날로 줄어들어 종국엔 사멸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죄짓게 해놓고서 죄짓지 말아라, 요만큼은 해도 그 이상은 아니 된다. 요만큼도 실은 아니 되는 일이로되 죄인의 멍에를 지는 자는 있어야 할 것인즉 그렇지이, 대성의 자리가 맑고 그 자리가 피로 물들지 않는 것은 무수한 죄인들의, 무거운 죄인의 멍에 덕분이거늘 그 위대한 희생자는 도시 무엇이냐! 영원한 육도윤회의 죄인들이요 육도 중에서도 천상만은 아득한 노예들이다, 그 말이냐?" 미친 것처럼 소리소리 지르는 동안 김환의 사유는 말짱 헛거라고 외친 것에서 진전을 하고 있었으나 절망의 소리임에는 다를 바가 없고 갈팡질팡 실상 그 자신 자기 입술에서 튀어나가는 말의 뜻을 헤아리고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불교에 정통하신 분이 그런 억지 말씀을 왜 하십니까." 길상은 뭔가 얘기를 해야만 했다. "뭐?" 김환은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그러나 길상을 보는 눈은 아니다. "나 그런 것 몰라. 중놈들 잠꼬댈 알아 뭘 해! 애비는 살인귀! 어미는 부정녀? 얼마나 좋으냐? 죄인의 멍에를 끌고 저 세상, 업화지옥으로 간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허어허헛... 하하핫... 나도 살인귀, 내 그 여인도 부정녀!" "..." "극락 천당 같은 것 일없다! 시름에 젖은 듯 죄인을 만들어내고 지우고 하는 그 따위 교활한 조물주의 총아가 되느니보다 지옥이야말로 내 고향이야! 영원한 업화가 꺼지지 않고 불 붙은 그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아암 고향이구말구." "기탄없이 말한다면은 선생님의 말씀, 그것은 자기 변명입니다." 비로소 길상의 입에선 확실한 말이 나왔다. "뭐?" "과연 그렇게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없다고 가상하더라도 말씀입니다. 죽음이란 처참해도 있는 채 그대로 놔두고 사는 것이니까요. 사람이 사람 아닐 수 없는 이상 죽음은 넘어갈 수도 없는 거니까요. 설령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짐승을 죽인다 하더라도 죽음은 죽음일 뿐이겠지요. 형벌만이 우리에겐 살아 있는 것일 겁니다." "이놈아!" 돌연 김환은 달겨들어 들고 있던 구두로 길상의 얼굴을 내리친다. "이놈아! 죽여줄 테니, 죽음은 죽음뿐이다. 형벌이든 보상이든 내가 받을 테니 안심하고 죽어라! 이놈아!" 신발짝이 마구 날아온다. 그러나 몇 번을 그렇게 얻어맞던 길상이 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내지른다. 욱 하며 환이 길바닥에 나가둥그러졌다. 길상은 부풀어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다가 길켠에 쭈그리고 앉으며 호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환이도 나동그라졌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네놈은 절에 가서 중질이나 할 놈이다." "네에, 나는 절에 가서 중질이라도 하겠소만 김환 아저씨는 미치광이 병원에나 가서 들앉으시오!" "오냐 이놈아! 중놈보다는 미친 놈이 낫다!" "사십 고개를 넘었으면 시시껄렁한 옛일쯤 잊을 일이지. 윤씨 피가 흘러서 그런가요? 조카딸 아제비가 꼭같구먼. 나 같으면 이십년을 꾸역꾸역하지 않았을 게요! 죄인은 거룩한 희생자라 스스로 말하면서 뭣 땜에 이십 년을 허송하였던가요? 희생자면 희생자지 하나님 부처님 욕할 것 한푼 없다구요!" "이 중놈아! 누가 우관 밑에서 자랐다 하지 않을까 봐서 그러냐?" "네에. 맞아요! 우관스님은 김개주 장수보다 그릇이 컸지요." "중놈의 세계는 소천세계 중천세계 대천세계도 티끌이요, 시방 무진의 법계이니 그릇이 큰 거야 당연하지. 그놈의 엉터리!" "잘 아시는군요." 환은 덤벼들어 칠 생각은 않는다. "현감놈 대가리 하나 덮치지 못한 그까짓 큰 그릇 있으나마나," 구름이 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새 잎새들이 미풍 따라 곱게 몸을 누이고 있었다. 삼라만상의 질서, 법칙에 귀의하듯이. "안 가시렵니까?" 환은 잠자코 일어섰으나 옆구리가 결리는 모양이었다. 길상의 얼굴을 치던 구두짝을 들고 걷는다. 얼굴이 더욱더 부풀어오른 길상이 잠자코 따라 걷는다. 걷다가 발밑을 내려다본다. 거기 구두를 신은 자기 발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양말을 신은 김환의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해란강변에서의 미쳐 날뛰던 사흘 밤의 일이 생각난다. 사흘 밤이 끝난 후 김환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생각한다. 사흘 밤으로써 김환의 깊은 상흔은 치유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깊이 박힌 뿌리가 사흘 밤으로 뽑혀질 까닭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길상은 김환의 외침으로 오히려 자신이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는 그 자신을. 그것은 생명의 유한이다. 죄에 얽매인 것 아닌 삼라만상, 모든 것은 생명이 있고 또 생명이 없는 유한, 역설이라면 기막힌 역설이겠으나. 어느 시기까지 유지될 안정일지는 모르지만 길상은 서희와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사랑이 담백한 상태로 자리잡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이 죽 끓듯 하는 환의 그 반역의 피조차 돌연 잠들어버린 느낌이다. 왜 이리 고요한가. 고요하게 고요하게 네 개의 발은 내디뎌지고 있는 것이다. 추서방 집에 당도했을 때 환은 완전한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이들을 맞이하는 추서방이란 사내, 빙긋이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오." "네." 하고 길상은 씁쓰레 웃는다. 방으로 들어갈 때 환은 신고 온 양말짝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하는 말이 "술 있습니까?" 통성명을 하지 않았는데 주막 주인을 대하듯 퉁명스럽게 내던졌다. "있지요." "그럼 듬뿍 주시오." 길상이 이곳에 오기론 두 번째다. 작년 가을 하얼빈을 내왕할 때 송장환과 함께 이곳을 찾은 일이 있었다. 술상이 들어왔다. 술상과 함께 추서방도 진을 치고 앉는다. 술 한 잔씩을 마신 후 "얼굴이 그래서 술이 해로울 텐데?" 하고 추서방이 말했다. 길상은 개의치 않았고 김환은 단정하게 앉아서 연달아 술을 부어 마신다. "저보다 선생님, 허리가 결리실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김환은 노기 띤 눈으로 길상을 노려볼 뿐이다. 이런 두 사람의 미묘한 싸움을 눈치채었을 텐데 그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추서방은 그의 평소 버릇대로 술이 들어가니 마구 지껄이기 시작한다. "술만 안 마시면은 추서방 입은 촛병 마개만큼 미덥은데 술 들어갔다 싶으면 헤퍼진다, 그렇게 말들 하구 구박도 했는데 그 대신, 내 한 가지 남보다 월등한 것이 있긴 있어요. 지껄여서 안 될 경우엔 절대로 술은 안 마시거든. 마시고 안 마시는 것이 자유자재이고 보면 입 굳은 것보다 사실이야 그 편이 더 어려운 일 아니겠느냐 그 말인데." "그렇게 장담하다가 누구 잡아가서 거꾸로 매달어놓고 술을 들어부으면 어쩌시겠소." 길상이 타박을 준다. "매달리는 것도 실수 있은 연후의 얘기라, 그럴 염려는 없지요. 술이란 지껄여가면서 독기를 풀어가면서 마셔야 하는 거구 그 독기를 풀지 못한달 것 같으면 저기, 저 양반 모양으로 길 가다가도 미치고, 하 이거 실례가 많소. 이곳 북방엔 양반이 드물어서요. 그는 그렇고오, 성씨 이름 함자도 피차 모르는 터이긴 하지만 저기 저어 앉아 계시는 분 참말로 만고풍상 다 겪은 얼굴이구먼. 내 말 틀림없을 것이오. 우리네 같은 사람 얼굴 자주 못 보는 사람일수록 실은 관상을 잘 보는 법이고, 그러니까 뭐냐, 좁은 조선 땅이 좀 갑갑했을까? 그렇지요? 내 말이 맞지요? 길서상회 주인 양반," "양반은 무슨 놈의 얼어죽을 양반이오. 길서상회 주인이면 주인이지. 분명 하인은 아닐 터이니까." "허어어, 준수하게만 생각했더니 뜻밖에 꼬부랑한 갈고리도 갖고 계시누마요. 저기 저분은 갈고리가 몇 개나 되는지 거 독기 좀 풀어가면서 술 드는 것이 좋을 성도 싶은데," 주정 비슷하게 빗댄다. "추서방도 나같이 얼굴 부풀어도 괜찮으려면 얘기 계속하시오." "허어어 그렇게 됐소?" 그러자 김환은 뒤로 물러나 앉으며 발로 상다리를 확 밀어낸다. 상은 덜덜거리며 추서방 배 가까운 곳에서 멎었다. 그러더니 벌렁 나자빠진다. 나자빠지자 다시 벽을 향해 돌아누워버린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잠이 든 모양인데 잠든 모습은 조용했다. 가엾을 만큼 조용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잠이 든 김환은 권필응 일행이 도착하기까지 잠에서 깨어나질 않았다. 방에 들어선 권필응은 "깨우지 말게." 하고 길상에게 말했다. 저녁을 먹은 뒤 장인걸은 하얼빈에서 일어난 일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길상은 놀랄밖에 없다. "이상합니다. 그자가 어떻게 수냥을 알았을까요." "알어요." "네?" "그 사정은 설명할 필요 없고," "그러면 수냥을 그곳에 남겨놓고, 그래도 되는 건지요." "당분간은 이동 안 하는 게 좋고, 아무튼 연추로 함께 가는 거지요?" 장인걸이 간단하게 생략해가며, 그리고 물었다. "네." "그럼 차차, 차차 의논하기로 하지요." 방은 넓은 편이었으나 벽을 향해 누운 환이 옆에 권필응이 눕고 다음 장인걸이, 벽 쪽에 길상이 눕고 해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환이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잠이 덜 깬 눈을 하고서 두 남자와 대면하였다. "나는 연추에 사는 권필응이란 사람입니다." 말에 "나는 조선 지리산에 사는 사람이오." 하고 김환은 대꾸했다. "지리산에서 숯을 구우십니까?" "네, 숯도 굽고, 목기도 만들고 짐승도 잡지요." "하아, 등 따습고 배가 부를 일입니다." 환이 눈을 들어 권필응을 쳐다본다. "으음...괜찮소." "괜찮습니까? 하하핫..." 권필응이 웃는다. "들쥐는 아니고, 조선의 늑대하고 만주 땅 늑대가 만나게 되어 반갑수다. 나는 오래간만에 세수 좀 하고 와야겠소." 김환이 휭하니 방에서 나가버린다. 권필응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고 조반이 끝나기 무섭게 네 사람이 된 일행은 연추를 향해 떠났다. 연추에서 숙소를 정한 길상은 김환과 함께 이동진을 찾아가는 것이다. 밤이었다. 이동진과 김환의 대면을 길상은 염려하지는 않았다. 이동진 쪽에서 어떻게 나오든. 이동진의 거처방은 넓었고 구석진 곳이었다. 창문 밖 뒤뜰에는 백양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부기는 빠졌으나 시퍼런 멍이 남은 얼굴을 하고서 길상이 앞서 들어가자 책상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이동진이 "오래간만이군. 이곳엔 무슨 일로 왔," 하다 말고 뒤따라 들어오는 낯선 남자에게 눈길을 옮긴다. "...?" 알아보지 못한다. "어서 앉게." 길상은 오른편, 김환은 왼편, 그러니까 이동진과는 삼각을 이루는 자리에 각각 앉는다. 이동진의 눈이 날카로워지며 김환을 응시한다. 경악으로 번쩍 빛나던 눈이 다음 순간 흔들린다. 얼굴이 핼쑥해진다. "오래간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시었습니까." "너는 누구냐." 눈이 벌어지면서 쏘아본다. "김환이올시다. 이부사댁 나으리께서 아시다시피 구천이라 부르던 시절도 있었지요." "..." "이곳에 온 김에 찾아뵙지 않는 것도 예가 아닌 듯 싶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선지 이동진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자네도 어지간히 낯가죽이 두꺼워졌군 그래." 김환은 희미하게 웃는다. "그래, 예가 아닌 것 같아서 찾아왔느냐?" "..." "진작부터 그놈의 예라는 것을 차릴 것을 그랬군." "..." "예라는 말이란 편리한 것이어서 곧잘 그것을 앞장세워 용무를 보게 되는 오늘날의 인심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것도 염치의 정도 나름이지. 뻔뻔스럽게 내가 누구기에 찾아왔나." "..." "자네가 이십 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는가, 그건 내 알 바 아니나 설령 의병장을 하였다손 치더라도 그것으로 과거의 파렴치가 상쇄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의병장 아니라 왜놈의 산귀신(일본 천황을 이름)을 찔러죽였다 하더라도 말짱 헛거야." 담뱃재를 떨어내는 이동진의 손이 덜덜 떤다. "그렇다면 김두수 같은 처지가 되어 나타났다면 뻔뻔스럽지 않았겠습니까?" 충격을 받으며 이동진은 환을 노려본다. "그런 말씀이 두려웠으면 찾아왔겠습니까? 고매하신 도덕군자가 무서웠다면 말입니다." "뭣이라구? 이놈!" "살인, 간음, 도둑의 집안이어서도 아니 되겠으나 허울만 좋고 편협한 도덕군자의 집안이어서도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수신제가의 그 어정쩡한 자리는 당분간 아녀자에게나 맡기시는 것이 어떠하올지." "이놈아!" 기막힌 수모다. 길상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아래를 내려다본 채 움직이지 못한다. "네. 머슴놈 구천이놈아! 하시렵니까? 의암선생." 이동진의 앞으로 기울어지려던 자세가 그냥 고정되어버린다. 길상은 굳게 자세를 지키고 앉아 있다. 김환이 의암선생이라 함은 일종의 야유다. 왕시 상민 출신의 의병장 김백선이 같은 의병장 안승우가 원병을 보내주지 않아 일본군에게 패한 것을 분히 여기고 안승우에게 칼을 뽑아들었다 하여 의병대장 유인석이 추상같은 군기를 고집하여 죽기 전 노모를 보게 해달라는 마지막 애원마저 뿌리치고 사형에 처한 그 일을 두고 야유한 것이다. 상민 출신의 선봉장인 김백선은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후일 유인석이 충주 등지에서 패배한 요인이 김백선을 잃은 데 있었던 것이다. "으음... 시절이 다르구먼. 허허헛... 기우는 햇빛이 뜨거우면 얼마나 뜨겁겠는가." 이동진은 자탄하듯 쓰거운 웃음을 흘렸으나 그것은 신음이었다. "지난날의 양반이란 이젠 죄인이지. 자학하지 않으면 아니 되고 이유 없는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으면 아니 되고, 허허헛, 허허헛... 그러나 너!" 하고 이동진은 김환에게 손가락질했다. "너를 보는 내 마음엔 마패 찬 어사또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지는군. 목을 댕강 짤라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높이 걸어올리는 광경도. 허허헛헛... 오백 년 사직이 새삼스럽게 아름다워. 자나깨나 독립이라는 공염불을 위해 무엇이든 수용되고 허용이 되는 이 벌판에선. 그렇지, 그런 뜻에선 자넬 환영해야겠나?" 복받쳐오르는 것을 참는 이동진. "환영해주십시오!" 애원하듯 길상은 얼굴을 숙인 채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주게. 다음날 또 만나세." "네." 김환과 길상이 나간 뒤 이동진은 오열한다. '이 사람아, 석운(최치수의 호). 나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네. 참말로 모르겠네. 이십 년을 방황하였건만 나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고 생각은 호박 오가리처럼 쭈글어들었네. 저네들은 싱싱한 호박 넝쿨처럼 사방에다 줄기를 뻗고서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일세. 어떻게 그리 변신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일세. 철사 같은 그 신경의 줄이 나를 휘감더군. 옴짝할 수 없게끔 나를 휘감더군. 우리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한갓 감상이요, 그네들이 추하다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었네. 내 노여운 음성은 허울만 남은 호랑이 울음이었고, 그네들의 맞서는 음성은 발톱으로 먹이를 찢어발기는 이리떼의 울음이었네. 이 사람, 석운, 늙은 탓이 아닐세 늙은 탓이 아니야. 내 나이 이제 오십을 넘겼을 뿐인데 세월이 달라진 게야. 그리고 우린 이조 오백 년의 무거운 세월을 싫든 좋든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지. 하기야 살아남으려면 의관이 무슨 소용이겠나. 맨발로 뛰어야 할 때는 맨발로 뛰고, 물구나무를 서야 한다면 물구나물 서야 하고. 한데 그게 안 되거든. 자넨 선견지명이 있었지. 그래, 오백 년은 너무 길었어. 오백 년 동안에 된 또랑은 너무 깊었거든. 하기야 설피 한 켤레에 몸을 담고 설원을 질러가는 지독한 이곳 젊은이들의 그 지독한 욕설이야 당연하긴 하지. 서울서는 문벌 좋고 유복한 집 자제들이 주색에 빠져서 자포자기하는 것으로서 절개가 되는, 아아 그러니 의암을 희롱하고 이 나를 희롱한들 내 무슨 말로 대꾸할꼬.' 흐느껴 우는데 밖에서 "선생님." "..." "선생님, 이선생님." "들어오시오." 이동진은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풀며 말했다. 장인걸이 들어왔다. "장동지요?" "네." 장인걸은 몹시 당황한다. 도대체 이동진이 울다니, 그도 눈이 시뻘개지도록, 우울한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뜻밖이다. "오늘 왔소?" "네." "그래 일은 어떻게 됐소?" 손수건으로 또다시 코를 풀며 말했다. "권선생께서 말씀이 계시겠지요. 그보다 그곳 박군한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호주머니 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놓는다. 이동진은 그것을 집어 피봉을 찢고 내용을 읽는다. "음,"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편지를 도로 피봉 속에 넣고서 "글쎄," 애매한 대답이었으나 이동진의 표정은 한결 밝다. "만 원 정도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런 얘긴데, 본인이 직접 보낸 편지가 아니니까." "그래도 맥은 충분히 있는 것 아닙니까." 장인걸도 희색을 띤다. "아무리 있어도 남아돌아가는 법은 없으니까 부딪쳐볼 만한 곳은 다 부딪쳐보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아야겠지." "그럼요. 샅샅이 훑어야지요. 심정으로야 강탈도 불사, 장차는 조선 국내에도 그물을 펴야겠지요." 자못 흥분한 듯, 장인걸은 이동진의 침잠하는 마음에 불을 붙이고 싶은 심정이기는 했으나 군자금의 모금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항시 명심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어떤 형태를 이루어가는 마당에서 사실 이동진의 좌절은 큰 손실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생님." "..." "우린 밑거름인 것을, 어차피 우린 그렇습니다." 뭐라 더 말을 하고 싶지만 장인걸은 이동진의 눈물 앞에 관례적인 말을 꺼내기가 거북하다. "새삼스럽게 무슨 얘기야? 내가 고향 처자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생각하는 겐가?" 이동진은 껄껄 웃는다. 다음날 김환과 길상은 권필응의 초대를 받았다. 그 자리에 장인걸은 보이지 않았고 낯선 길상이 또래의 장연이 두 명 참석했다. "김형." 권필응이 넌지시 김환을 불렀다. "네." "이동진 선생께선 일이 바쁘셔서 주연엔 참석 못하겠다 하셨고 그분 말씀이 주연이 끝나면은 김형께서 숙소로 오시라구, 하룻밤 함께 주무시고 싶다는군요." 그런 뒤 권필응은 "김형께서는 이곳에 오신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보고 느끼신 점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소. 그리고 또 아시고 싶은 일이 있으면 사양마시고 물어보시구요." 격식을 차리는 어투다. "그렇게 하지요." 김환도 손님된 예를 차리며 대꾸하였다. "자네들 인사하게. 이분은 조선서 오신 김환 선생, 저기 김군은 자네들도 얘기는 들어 알 터이고." 하면서 권필응은 소개를 했다. 평범하게 생긴 두 장년, 몸집이 작은 편은 유씨라 했고 몸집이 큰 편은 석씨라 했다. 그들은 소박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으나 상당한 핵심 분자인 듯 별 동요가 없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시초는 조용하게 술잔이 오고갔을 뿐이었다. 권필응은 김환을 상대로 술잔을 나누었으며 두 장년은 주로 길상을 상대하여 정중하게 술을 권하곤 한다. 쌍방이 뭔지 무르익어가는 시기를 기다리는 듯, 이윽고 김환이 먼저 입을 떼었다. "지금 아라사에서 황제가 물러나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곳은 어째 조용한 것 같습니다." 예상 밖의 말을 던졌다. "네. 큰 혼란이 계속되고 있지요. 그리고 이곳이라고 조용한 것만은 아닙니다. 총동원령이 포고되고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부터 귀화한 사람들의 자제들도 전선에 나갔구요. 전쟁은 계속하여 러셔쪽이 불리했습니다. 그 영향이 이곳이라고 미치지 않을 수 없지요. 엄연한 노령이니까," "그야 그렇겠지요. 그러나 전쟁보다 내란의 영향이 보다 심각하지 않겠소?" "물론이지요. 그러나 좋은 방향이냐 나쁜 방향이냐 예측하긴 어렵소.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지요. 우리는 언제나 떠 있다는 상태, 그 상태 속에서 형체를 이루어나가야 하니까요." "지금 내란의 상태를 좀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소." "정확하고 상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세계대전이 나기 전부터 러셔 제정이 붕괴될 불씨는 심어져 있었던 게고, 전쟁이 단기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을 경우 그 명맥은 다소 연장됐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뜻대론 되지 않았으니, 게다가 몰락을 재촉한 것이 정부의 강압 수단이었습니다. 의회를 정지하고 극도에 달한 경제적 혼란 속에서 동요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에는 군대를 풀어놓고," "그러면은 수립된 임시정부는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권필응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싱긋이 웃는다. 지리산 산골에서 온 사람이 제법 알고 있구먼, 하듯이. "허약하기가 짝이 없지요. 어려운 사태로 말한다면야 전일의 유가 아니구요. 한데도 그 우둔한 사람들이 세계대전에서 발을 못 빼고 있으니 말입니다. 밀려난 보수 세력도 아직은 막강하고 진보적인 세력도 실은 복잡하기가 몇 갈래인지 군은 군대로 몇 조각이 날 게구요." "임시정부를 이끄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갖고 있소?" "역량 말인가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변호사의 경력을 가진 케렌스키라는 사람이 의회의 대의사에서 이번 임시정부에 진보 세력을 대표하여, 말하자면 보수파인 르보프와의 연립내각이지만 우선은 케렌스키를 중심 인물로 보아야겠지요. 한데 진보 세력을 업고 나온 그 사람이 과연 국민들의 신임을 전적으로 받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아요." "사람도 정부 형태도 모두 불완전하다 그 얘기군요." "네, 그렇습니다. 모두가 불완전하지요. 모두가요. 우리로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확신을 가져볼 수 없는 상태지요.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고 생산 공장은 파업에다 폭동의 연발이요, 전쟁의 전망은 어두워오고, 제정은 무너졌다 하지만 만회할 힘이 전혀 없다 할 수는 없고, 어쩌면 군사 독재 정부가 성립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혁명당 속에서도 맨셰비키니 볼셰비키니 하여 아까 말한 바대로 가닥이 많은 모양이고, 얼마 전에는 케렌스키의 정적인 레닌이라는 사람이 망명에서 돌아왔다 하고, 결국 추측컨대 내란은 앞으로 상당 기간 계속되지 않을까요?" 조용 조용, 조심스럽게 대화는 진전되어간다. 15장 화살같이 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서 어떻게 해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용정 거리에 불어오는 바람, 길모퉁이를 스쳐가고 시장 거리를 휩쓸어가고, 비 떨어지는 하늘을 보다가 급히 장독 뚜껑을 닫으면서 아낙들이 얘기를 나누는 여염집 안마당에 머물다 가고, 풍문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한때 두메가 하숙하고 있었던 집에서도 풍문에 대한 의견은 구구하였다. "참말입지 이상하잲읍매? 옥황상제 따님 같은 가물댁에다가 토란같은 아들 형제를 두고서리, 생각으 해보랑이? 환장으 해도 그렇기는 못한다이?" "그 여자가 그러니까 불나기 전엔 용정에 있었다잖아요? 재봉소에 있었다던가?" "응. 재봉소에 있었지비. 그 안깐도 얼굴으 쓸 만했답매." "첫정이라 그랬을까? 남자 쪽에서 말이오." "첫정 앙이라 뱃속서부터 정이래도 그럴 수는 없는 기야. 말으 들으니 그 가물댁 다 죽게 생깄다잲읍매?" "그건 빈말이오. 눈 하나 깜짝할 여자든가?" "말으 들으니 남자보다 담대하다 합두마네두 그런 일으 그러잲이오. 여자 맘으 매일반이라 말이. 어찌 벵이 나잴고?" "어제도 내가 봤는걸요? 멀정해서 인력거 타고 절에 가더란 말이오." "무시기, 뉘기 머래도 남으 그 마음 모른답매." 주점에선 또 약게 생긴 사내가 공연히 삐뚜름한 어조로 "길서상회 그 사람들 조선으로 간다며?" 하고 물었다. "그런가 부지." 술을 들이켜고 난 뒤 권서방의 대꾸였고 "부동산 같은 것은 거의반 처분했다던가?" "사는 집하고 곳간 뒤 있는 빈터만 남았을걸?" "그럼 장터 점포도 다 넘어갔다, 그 얘기야?" "그럼 셈이지." "그 판에 권서방은 재미 좀 못 봤어?" "손톱도 안 들어가더라." "왜." "그놈의 늙은이가 꽉 틀어쥐고서 내주어야지. 하기는 뭐, 살 사람이 없어 못 팔던 것은 아니니까.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거간 같은 것 거칠 필요도 없었지." "그놈의 늙은이, 그럼 혼자서 해먹었단 말이야?" "모르는 소리 말라고. 공노인이 그래, 구전 먹고서 그 집 일 보아주는 줄 아나?" "세 없이 방 하나 얻어들었다고 역성 되게 드네. 사내자식이." "뭐이라고? 사람 치사하게 만들지 말어. 그 사람들 관계란 옛적부터 그거 대단한 거라구. 아 조카딸 죽었을 때도 길서상회서 상여 만든 것 몰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는데 그 많은 재산을 처분하면서 한푼 이득 없이, 누가 그 말을 믿어. 부모 자식간에도 셈은 무서운 게야." "믿거나 말거나, 남의 일인데," "하긴 그래. 배아파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 그러나 기왕 말이 났으니, 그 집 남정네가 여자 얻어 달아나는 바람에 이곳을 뜨는 겐가?" "나도 모르는 일이야." "아무튼 그 사람이 용정에 없는 것만은 사실 아냐?" "그것은 사실이지." "흥, 귀신 곡할 노릇일세. 미인 마누라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 형제는 그만두더라도 그 많은 재산을 두고서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그러니 팔자지. 옛말에 일색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잖어." 여름이 한더위에 접어들자 길상이 옥이네를 따라 도망을 쳤다는 소문도 차츰 가라앉았다. 서희는 인력거를 타고 절을 향해 간다. 그새 서희는 몹시 여위었다. 눈만 커다랗고 깨끗했던 피부엔 잡티가 섞인 듯 거뭇거뭇한 기미가 쓸었다. 아이 둘이 매달리고 이것저것 정리해야 할 일이 태산같은 나날 혼자서 생각하고 싶을 때 서희는 훌쩍 집을 나서 절로 향하는 버릇이 어느덧 몸에 배고 말았다. 인력거에 앉으면, 생각은 늘 일정한 것이다. 지난 봄 하얼빈으로 해서 연해주를 거쳐 길상은 김환과 함께 돌아왔다. 그러나 김환은 서희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객줏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조선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김환을 보내놓고 길상은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환국이는 말할 것도 없고 윤국이도 아비 팔에 매달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길상은 다소 굳어진 표정으로 아이들을 대하였다. "이제는 당신께서 말씀해주셔야겠습니다." 서희는 서방님이라는 호칭 대신 당신이라 하며 따지고 들었다. "그렇게 하지요." 길상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김환이라던 그 사람 옛날의 구천임이 분명하지요?" 다시 다그치듯. "그렇소."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 얘기는 차차 하지요. 내 그렇잖아도 그럴 생각이었소." 하고는 사랑으로 내려가 온종일을 들어박혀 있던 길상이 해질 무렵 해서 올라왔다. "우리 강가 횟집에 회 먹으러 갑시다." "술집에 어떻게, 아니 됩니다." 서희는 할 얘기 땜에 그런가 보다 짐작은 했었다. "술은 곁들여 나오는 것, 그 집은 본시가 횟집이오." "하지만," "남편하고 함께 가는데 누가 뭐라겠소." 우겼다. "마침 봄도 끝나가려 하는데 달밤에 강물도 볼 겸, 지금 떠나서 거까지 가면 어두워질 게요." 서희는 연보라의 자미사 치마저고리를 입고 길상을 따라나섰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선 담배만 태울 뿐 길상은 말이 없었고 횟집의 젤 좋은 방에 안내되어 마주앉았지만 역시 침묵은 계속되었다. 방에는 램프에 불이 켜져 있었다. 길상은 담배를 붙여물고 서희를 바라본다. 강한 눈길이었다. 서희는 이같이 강한 길상의 눈을 본 일이 없다. 아니 강한 사나이의 그러한 눈길을 본 일이 없다. '나는 너를 소유했지만 넌 나를 소유하지 못할 게야.'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눈 같기도 했었다. 그 강한 눈을 서희는 강하게 받는다. 미동하지 않고 받는다. 그러자 길상의 눈에 말할 수 없는 비애의 그림자가 밀려왔고, 희미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비로소 서희는 그 눈에서 자신의 시선을 떨어뜨렸다. 서희는 싸움이라 생각했었지만 그쪽은 그것이 아니었다. 담배를 재떨이에 뭉개버리고 길상은 날라온 회접시를 서희 쪽으로 밀어주며 "집에서 해먹는 것보다 별미요. 들어보시오." 서희는 형식적으로 조금 먹어보았다. 회맛을 즐길 그런 심정이 아니다. 길상은 술을 조금씩 들었다. 집에서도 겸상해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서희는 술을 마시는 길상의 모습이 다소는 신기해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길상의 입에서 나올 말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마음의 준비를 다져두지 않을 수 없었다. 질기고 억센 삼베같은 마음, 부드러우나 역시 질긴 명주 같은 마음, 지나간 세월이 억세고 부드러운 반복으로써 서희를 놓았다 붙잡았다 하는 것이었다.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묘향산이나 구천이를. 잊어버리고 싶을 뿐 잊어지는 일은 아닌 것이다. 지나간 세월은 세월이고 또 술을 들고 있는 눈앞의 사나이는 누구냐, 이 사나이는 처자를 버리고 떠날 사나이냐, 이쪽과 저쪽 사이의 깊은 또랑은 결국 메워질 수 없단 말인가. 아집이 고개를 치켜들고 아우성을 친다. '당신은 나를 따라가야 해! 두 아이 쪽으로 와야 해요! 우릴 어떻게 떠날 수 있단 말이오!' 숨이 껄떡 넘어가기까지 울부짖었던 어린 계집아이는 아직 서희 마음속에 그 편린을 남겨놓고 있었다. '묘향산? 구천이놈! 내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고 어린 내게서 어미를 빼앗아간 놈! 남편을 배신하고 딸을 버린 부정녀!' 하는가 하면 '난 돌아가야 한다! 조준구, 홍가 계집을 잊는다면 나는, 이 최서희는 죽은 목숨이다!' 혼란과 혼란이 부딪고, 그 와중에서 서희는 필사의 헤엄질을 한다. "여보, 거 회 좀 들어보아요." "아, 아니," 하다가 서희는 "말씀하십시오." "..." "말씀하십시오." "..." "말씀하시려고 이곳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하지요." 길상은 그렇게만 해놓고 술만 마신다. 램프 불은 쉴새없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한참만에 길상은 일어섰다. "그럼 강가 달 보러 나갑시다." 서희는 먼저 횟집을 나왔다. 셈을 하고 뒤쫓아 나온 길상이더러 "마차는 없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며 서희가 말했다. "돌아가라 했소. 우리 걸어서 갑시다. 밤바람이 시원해서 좋지 않소?" 길상은 다가서며 서희의 손을 잡는다. 서희는 당황하여 손을 뽑으려 했으나 누르는 힘은 컸다. 부부간이지만 집 밖에서, 아니 내실 밖에서 살갗이 닿았던 일은 처음이다. "망칙스럽게, 이 손 놓으시오." "오늘밤엔 최참판댁 손녀 최서희가 아니오. 내 아내야. 기생하고 나 이럴 수 있다, 그런 양반님네 법도는 잊어버리시오." 모래밭을 사북사북 밟는 발소리, 강물은 일렁이고 있었다. 강물 가까이 가서 길상은 서희의 팔을 잡아끌듯하며 자기 옆에 앉힌다. "춥소?" "아닙니다." "당신 섬진강 생각이 나오? 아마 당신은 섬진강을 자세히 본 일이 없을 게요." "왜 못 보았겠습니까. 이제는 하실 말씀 들려주십시오." "김환이 그 양반 말이지요." "어째서 그자가 양반입니까." "양반, 이거 실수였구먼. 그러나 근본이 없는 김길상하곤 좀 달라서 그분의 피엔 당신이 말씀하는 양반의 피가 반은 흐르고 있소." "양반의 서자라 그 말씀이시오?" 길상은 어금니를 지그시 누르듯하다가 "그 반의 피는 당신 쪽의 피, 그러니까 당신 할머님의 아들이오. 당신의 작은아버지." "뭐라구요? 뭐라 말씀하시는 거요!" "그분의 어머님은 윤씨부인이오." "그럴 리 없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이 무슨 간교한 계략이지요?" "그러면 내가 더 자세히 설명을 하겠소. 옛날 청상이던 당신의 할머님은 백일기도를 드리기 위해 절에 가신 일이 있었소. 그곳에서 당신도 알고 있는 우관스님, 그 우관스님의 동생이신 김개주, 그렇지요. 김개주 장수에 대해서도 당신은 들어서 잘 알 거요. 그 동생이 정양차 절에 와 있다가 청상을 사모하여 겁탈을 했던 것이오. 청상의 죽을 목숨을 부지하게 한 것은 문의원과 무당 월선아지매의 어머니 공이었소. 병을 빙자하여 남모르는 깊은 암자 속에서 몸울 풀었다는 게요. 그리고 그 아이는 아비 손으로 넘어가고, 후일 최참판댁 머슴으로 변성명하여 들어온 환이란 그분은 효수당한 아버님의 불행한 생을 가문의 노예가 된 생모 탓으로 돌리고 한을 품을 게지요. 당신의 할머님에게 고통을 주려고." 길상은 말을 끊었다. 서희는 강아지처럼 웅크린 채 말이 없었다. 모래밭을 핥고는 물러가고 핥고는 물러가는 물결 소리만, 목마른 사람같이 핥고는 물러설밖에 없는 안타까운 갈증에 몸부림치듯 강물은 달빛 아래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보복을 하기 위해서... 별당의 그 여자를 유인해갔다 그 말씀이시오?" 목에 잠겨 몸부림치듯 서희는 말을 밀어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소." 서희는 절을 향해 갈 때마다 그 일을 생각한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길상은 떠났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으며 용정촌에는 풍문이 돌았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모시옷의 최서희,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상처입은 나비같이, 그래도 그는 아름다웠다. 한층 더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고뇌가 깊이 새겨진 얼굴은. 눈빛은 더욱 강렬하게 타고 있었으며 입매는 보다 빈번하게 뱅뱅 돌았다. 독경은 서희에게 일종의 치유 방법이다. 흐트러진 신경을 모아서 제자리에 놓아보는 수단인 것이다. 늦더위가 가고 수풀 속이 엉성해지기가 무섭게 길서상회댁이 이사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다시 퍼졌다. 그것은 풍문 아닌 사실이었다. 이삿짐과 이삿짐을 취급할 머슴 두 명을 데리고 공노인은 조선을 향해 떠난 것이다. "야! 정말로 뜨누마. 용정의 재물 싹 쓸어서 떠나누마." 사람들은 모두 그런 말을 한마디씩 했다. "하기느 친일파니끼 조선 가서도 부재 살잲겠슴둥?" "왜 아니라? 없는 사람이야 친일하고 싶어도 못하지. 친일하는 데도 밑천이 들지. 돈이 있어야 헌금도 하구 또 재물 지니고 살자면 친일 안 할 수도 없을 게야." "여자가 워낙이 독해 그렇지. 젊은 여자가 아들 둘 데리고 간다는 것도, 아, 글쎄 한발 두발 길인가? 아무리 돈이 있다 해도 남편 생각하면 이가 갈릴 게야." "그렁이 부재 산다고 다 제 뜻대로 되는 거느 앙이랑이. 주는 복대로 살 기야. 남으 부러바할 것도 없지비." "흥,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좋으니 부자 한번 살고 싶군. 나중에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앙이 삼수가 앞산입매? 하하핫... 서울 태생이라 할 수 없답매. 여기가 어디멘지 알고서리 하는 말입매까?" 두 사내는 소리내어 웃어젖힌다. 산수갑산엔 갈 것도 없이 이미 그곳을 넘어서 오지 않았던가. 일진을 거느리고 조선에 갔었던 공노인이 돌아왔다. 처분할 것은 모조리 처분하였고 옮겨야 할 것은 모조리 조선으로 실어내갔고 집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살풍경한 뜰에는 환국이가 윤국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서희는 서류 같은 것이 든 봉투 한 장을 꺼내놨다. "공노인." "예." "이게 집문서 곳간 뒤에 있는 땅문서요." "..." "거두어두시오." 공노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는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려줄 자손도 없는 저에게 집문서 땅문서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 연해주에 계시는 분을 위해 보관하겠습니다." 서희는 공노인을 빤히 쳐다본다. "그것은 공노인이 알아 하실 일, 내 뜻은 아니오." "예. 하오나 이 집은 일하는 분들 숙소로 삼겠습니다. 땅도 역시 그분들 소용에 따라서 쓰여질 것이고요. 그것만은 저로서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지 본의를 알아주시란 얘기는 아니겠습니다마는, 이 늙은것도 태어난 강산을 잊지 못하니까요." 그 말은 서희에 대한 마지막의 일침이었고 가족을 버리고 떠난 길상을 위한 변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희는 꿀 먹은 벙어리, 말이 없다. 공노인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서희의 말을 기다린다. "그러면 이젠 떠나는 일만 남았소." "예." "내일 모레 떠나지요." "내일, 모레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러면은 내일 염서방을 보내어 배를 얻어놓게 해야겠습니다." "그래야겠지요." "그러니까 일행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안자하고 유모가 따라가기로 작정하였소." "저하고 복산이놈하고 염서방, 어른이 여섯이구먼요." "그렇소." "여기 마차엔," "애들하고 우리가 타는 게요. 그러니 마차 한 대는 세내야겠지요." "가져가실 짐은 별로 없는 거로 아는데요." "당장에 쓰일 것이 있을 뿐이오." "예." "모든 것은 다 끝이 났소. 공노인의 수고는 잊지 못할 것이오." 서희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공노인도 만감이 치미는지 얼굴을 수그린다. "어머니?" "오냐." 환국이, 동생의 손을 잡고 들어온다. 공노인은 아이들에게 웃는 낯을 보내며 "도착하기까지 도련님들 고생하겠소." 그러나 환국은 알은 체하지 않고 "어머니?" "왜 그러느냐?" "우리 이사가는 거지요?" "그렇단다." "아버지는 왜 안 오셔요?" 웬일인지 아버지 말은 통 하지 않았던 환국이가 풀쑥 물었다. 서희가 미처 대답을 못하자 "할아버지? 아버진 왜 안 오셔요? 공할아버지도 모르세요?" 하며 얼굴을 공노인 편으로 돌린다. "왜 모릅니까. 아버님께선 볼일 보시고 오시지요." "함께 조선으로 가시는 거지요?" "그거는, 일을 다 보시면은 그러시겠지만," "환국아?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서희도 얼굴에 미소를 띠며 거들었는데 환국이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 차 있다. "참 오래됐는데 말예요. 아버진 윤국이도 보고 싶으지 않으실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보고 싶으지 않으시겠습니까. 볼일만 보시고 나면 늦더라도 곧 뒤쫓아가실 겁니다. 하하핫..." 공노인은 헛웃음을 웃고 서희는 돌처럼 굳어서 앉아 있었다. 윤국이는 그림책을 펼쳐놓고 그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호아이, 코게이, 멍멍, 야웅 하며 귀엽게 혼자 놀고 있었다. "그럼 지, 지는 가보겠습니다." 허둥지둥 도망치듯 공노인이 나가는데 "환국아? 이 봉투 할아버지 갖다드려." "네." 환국이 집문서가 든 봉투를 들고 마루로 쫓아나간다. 신발을 신는 공노인에게 "할아버지 이거," "아, 저어," 하다가 또 공연히 헛웃음을 웃으며 받아든다. 밖으로 나온 공노인은 "참말로 세상만사가 뜻대로는 안 되는구나.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야 할란고." 객줏집에는 추서방이 마루끝에 걸터앉아 공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해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깡마른 몸매 그대로, 후주레한 차림새다. "추서방 왔소?" 썩 기분이 좋지 않은 공노인 음성이었고 추서방은 애매하게 웃는다. "바쁜 모양인데?" "바빠요." "늙은네가 근력도 좋소." "늙을수록 일복이 많아야 하는 게요. 안 그러면 앉은뱅이 되기 십상이제." "노익장하니 좋긴 좋소만," "하여간 방에 들어갑시다." 추서방을 떼밀다시피 방에다 밀어놓고 "순아!" "예!" "할머니 어디 갔냐?" "장에 가셨어요." "알았다. 그는 그렇고 추서방은 무슨 일로 왔소." 마주앉으며 공노인이 묻는다. "볼일 보고 오는 길에 들렀지요. 무슨 소식이라도," "조선에 다녀왔고," "그건 들었소." "어디서?" "훈춘이 그리 먼 곳이오?" "그곳엔 모두 별고 없겠지요?" "별일이야 있겠습니까마는 가만히 앉아서 노는 사람들 아니니, 하기야 그러기 때문에 식구들도 더러 잊기야 하겠지요." "길서상회 그 댁은 모레 떠납니다." "모레요?" "예." 공노인은 쓰거운 듯 입맛을 다신다. "그 큰아들이 어찌나 영특하든지... 어머니 간장이 녹겠구만." 그 말은 들은 체 않고 추서방은 "모레라," 중얼거린다. "내 조선까지 갔다오면은 훈춘으로 가겠소. 자세한 얘기는 그때, 본인을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고." "그건 그렇게 하시오만," "그러면은 김두수놈 동태에 관해 얘기하지요. 그놈이 지금 심씨 동생을 찾아서 미친 듯 헤매고 있다는 게요. 심노인이 죽은 것은 이미 안 것 같고," "그러면 심씨 동생이 연추로 온 것은 아직 모르고 있다, 그거요?" "알면은 청진이다 원산이다 하고 헤매다니겠소? 그러니 포염에 있는 양가놈을 조심해야겠지요." "심씨 동생은 변성명하고 그곳에서도 심씨와 형제라는 것을 모르지요." "어쨌든 그놈보다 선수를 친 것은 잘한 일이고, 그 안은 누가 냈는고?" "그건 모르지요." "하여간에 좀 심한 얘긴지는 모르나 양가놈이 김두수 수족인 것만은 확실하니..." 하고 말끝을 흐리다가 공노인은 피식 웃는다. "추서방." "예." "우리 늙은것들이 이러고들 있으니 독립투사 같구먼." "공노인이 늙었지 내가 늙었소? 허 참," "마, 이렇게 되니 오래 사는 것도 과히 욕은 아니구만." "칠십이나 되거든 그 말 하시오." "아 참, 그리고 길서상회 그 사람한테 전하시오. 조선에는 유모와 안자라는 아이가 동행하게 됐다고, 염서방은 갔다가 날아 돌아오겠으나 복산이놈은 아마 그곳에 주질러앉을 게요." "그렇게 얘기하지요." 사무적으로 얘기를 끝낸 공노인은 곰방대에 담배를 넣어 붙여 물면서 추서방에게도 담배쌈지를 밀어주며 권한다. 얼마 후 방씨가 장에서 돌아왔고, 술상을 차려 들여보냈다. "추서방." "예." "우리 다 늙어가지마는," "허어어 참, 공노인이 늙었지 내가 늙었소? 공연히 동무하려고 그러네. 아직이야 몇 놈 메치는 것쯤." "그거는 호기고오, 하여간에 늙더라도 일복은 있어야 하는 게요, 소리치고 더 살아봐야 앞으로 십 년, 우리 같은 사람이 쓰이는 만큼 좋은 세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그러나 쓰이지 않았던 김훈장, 추서방도 김훈장을 알지요?" "얘기는 좀 들었지요. 돌아가신 분이라며요?" "돌아가셨지요. 꼬장꼬장한 선비요. 내가 그 양반 유서랑 유고를 고향에 있는 자손한테 전했지요. 아무튼 좋은 시절이면은 그런 양반도 더러는 쓰였을 테지만, 안 그렇소? 추서방, 이런 시절에는 우리가 쓰이는 거요. 옛말에도 배리데기 소자 노릇 한다 안 했소? 일곱째 배리데기는 내다버린 딸이지마는 서천서역국의 약물 길어다가 부모를 살렸다 하듯이 예사 공 안 든 자식이 효행하는 법이고, 우리같이 괄시받던 서민들도 제가 태어난 곳이니 어쩌겠소." "그런 말 하니 눈물 납네다." "정말로 울랑가? 이 사람이," 떠나는 날의 하늘은 쾌청하였다. 두 대의 마차는 이른 아침부터 문밖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대강의 짐도 실었고 사람만 타면 되게 돼 있었다. 방씨를 위시하여 여러 사람들이 떠나는 사람과 석별의 정을 나누려고 마당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고가 난 것이다. 아침부터 환국이의 태도가 수상쩍긴 했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는 것 같았고, 또 그의 표정은 몹시 사나웠던 것이다. 그러던 아이가 막상 떠나려 하자 보이질 않는다. 안자랑 유모가 서희 몰래 찾다가 할 수 없이 "큰도련님이 안 계시오." "뭐?" 옷을 갈아입으려던 서희가 방에서 나왔다. "환국이가 어찌 됐단 말이냐?" "글쎄 마님. 옷 갈아입히려고 아무리 찾아도 안 계세요." 안자의 얼굴빛은 파아랗고 서희의 낯빛도 달라졌다. "모두들 나가서 뒷숲을 찾아보아요." 서희는 침착하게 말했다. 식구들이 뒷숲으로 다 몰려간 뒤 심상찮은 분위기에 놀란 윤국이, 어미한테 매달리며 운다. "오냐, 오냐, 괜찮아," 서희는 아이를 안고 집안을 두루 살폈으나 아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뒷 솦속을 부르며 헤매는 사람들은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안 계셔요, 마님." 안자는 운다. "그러면 집안을 다시 찾아보자. 곳간 속, 항아리도 다 뒤져보아라." 마당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사람들도 어찌된 일이냐면서 바깥길 쪽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아이를 찾으러 나간다. 서희 얼굴이 파들파들 떤다. 그러나 역시 환국은 없었고 "이상한 일이구나, 집안에 있으면 나올 텐데, 이애가 어딜 갔지?" 서희는 하마 소리를 지르며 울 기세다. "저기, 혹 안방 다락 속에나," 하며 공노인이 말했다. 우우 하니 안방으로 몰려간다. "마님! 마님! 도련님 여기 기세요!" "안 나오시겠다 합니다! 마님." "오냐. 알았다. 내 가마." 서희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윤국일 유모에게 넘겨주고 "환국아?" 다락 안을 들여다본다. 두 무릎을 세우고 아이는 웅크리고 있었다. "환국아." 적의에 가득 찬 눈이 서희를 쏘아본다. 여태껏 환국이는 그런 눈으로 어미를 본 적이 없다. "이리 나와요." "안 나가겠어요." "어째서?" "모두 조선으로 가세요! 나는 아버지 오시면 함께 가겠어요." "뭐라구?" "전 여기 있을 테에요! 아버지 오시면 함께 간단 말입니다." "아버진 볼일 보시고 뒤따라오신다 하지 않았느냐?" "거짓말인 것 저는 알아요, 아버지만 내버려두고 가는 거 아닙니까!" 서희의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된다. '오냐! 나 당신 용서하지 않을 테요! 저 어린 것 가슴을 멍들인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테요! 결코, 결코!' "환국아." "안 간단 말입니다! 안 가요!" 무섭게 눈을 치켜뜬다. "그러면 넌 아버지하고 살겠냐? 어머니랑 윤국인 내버려두고서?" "아닙니다. 아버지랑 함께 갈 테예요." 아무리 달래어도 환국이는 꼼짝하질 않는다. 결국 서희도 목놓아 울고 말았다. 그러나 환국이는 울지 않는다. 울면은 지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마당에선 모두 숨을 죽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와 아이를 함께 달랠 생각도 못한다. "마차를 타고서, 또 강을 넘을 땐 배를 타고," 서희는 흐느껴 울며 말했다. "그 다음 또 기차도 타고 그러는 동안 윤국인 어떡허니? 그럴 땐 형님이 손을 꼭 잡아주어야지. 안 그러느냐?" 윤국이 말이 나오면서 환국의 표정이 달라진다. "아버지가 안 계실수록 넌 아버지 대신 윤국일 돌보고, 형님이 그러면 어떡하니? 안 그러냐, 윤국이가 형님을 찾아서 자꾸 울면은 어떡허지? 아, 안 그러냐?" 입을 비쭉거리는 환국이는 별안간 엉엉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울어젖힌다. "아, 아버지는 뒤따라 꼭, 오실 거야."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서희는 눈물을 쏟는다. '결코 용서 안 할 게요! 당신을 용서치 않을 게요!'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공노인이 "아무래도 시간이 늦어서 내일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아니오. 곧 출발해야 해요." 서희의 음성은 단호했다. "환국인 또 내일 그 소동을 벌일 테니까요. 도중에서 묵더라도 떠나요." 서희는 서둘렀으나 침착했다. 유모가 환국일 안고 먼저 마차에 올랐다. 다음은 서희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 마차에 올라 안아올려주는 윤국이를 받아안았고 사람들은 마차를 둘러싸고 모여왔다. 마지막에 장만한 음식이 든 찬합이며 당장에 갈아입어야 할 아이들 옷이 든 가방이며 옷보따리를 마차에 밀어넣고 안자가 올랐다. 방씨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서희는 마차 속에서 밖을 내다보며 "안녕히들 계십시오!" 말굽 소리 그리고 두 대의 마차는 출발하였다. 마차 속에서 환국이는 내내 울었다. 서희도 울었다. 마차가 역두를 지나가려 했을 때다. 그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일본 여자들, 그리고 최기남의 마누라가 마부에게 손짓하여 마차를 머물게 한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는 최서기 마누라 음성이 맨 처음 들려왔다. 서희는 윤국이를 안자에게 넘겨주고 마차에서 일단 내린다. 영사 부인을 위시하여 소위 용정촌의 유지라는 일본 여자들, 그러니까 친목회 회원이 한 사람 빠지지 않고 나와주었던 것이다. 맨 먼저 영사부인이 서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세요. 하지만 결국 가족들한테 돌아오실 겁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그리고 저희들도 조선에 가면 부인을 찾아뵙겠어요. 편지나 주십시오. 이곳에 와서 부인 같은 분을 만나 친히 지냈다는 건 영광이었어요." 다른 여자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인사말을 하였고 장교부인인 코가 길었던 여자도 전과는 달리 정중하게 "고향으로 가시니 얼마나 기쁘세요. 또 만나뵐 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인상이 남을 거예요. 당신은 참 멋진 여성이에요." 했다. 서희도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고 마차에 오르는데 아이의 선물이라면서 여러 개의 꾸러미가 마차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두 대의 마차는 빤하게 난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여자들은 손수건을 흔들고, 그리고 속력을 낸 마차는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같이 가는 것이었다. (3부 1권으로 이어집니다.) 어휘 풀이 *괄호 속의 숫자는 본문 속의 면수와 행수를 가리킴. 오시랖(15:26): (방언) 오지랖.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 얼피덩(28:30): (방언) 얼른. 척골(38:10): 훼척골립의 준말. 슬픔으로 살이 바짝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드러남. 포치(45:24): 현관. 숙로(51:30): 경험이 많고 사리에 밝은 노인. 마우재(55:28): '러시아 사람'을 얕잡던 말. 눅다(77:14): 값이 싸다. 바람(79:18): 실이나 새끼 따위의 한 발쯤 되는 길이의 단위. 난부자 든거지(89:15): 겉으로는 부자 같으나 실제 살림은 거지와 다름없는 형편. 가매(90:10): 대가를 받고 딸을 시집보내는 일. 모갯돈(112:14): 목돈. 떠리미(115:13): (방언) 떨이. 팔다 남아 다 떨어서 싸게 파는 물건. 삿자리(115:16): 갈대로 엮은 자리. 달비(115:26): (방언) 다리. 여자 머리털의 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드리는 딴머리. 긴피(122:30): (방언) 기색. 소쇄(152:5): 산뜻하고 깨끗함. 조달(180:2): 조숙. 남보다 올됨. 기명(202:23): 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그릇. 오사(204:17): 비명에 죽음. 단대목(205:13): 명절이나 큰일이 바싹 다가온 때. 찍자(215:19): (방언) 남에게 무턱대고 억지로 떼를 쓰는 것. 가물댁(217:12): (방언) 마누라. 일질에(298:25): (방언) 일하는 길에. 비단가리(299:14): (방언) 하찮은 살림살이. 식지가 움직이는(349:30): 구미가 당기는.